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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제4의 절차 03

by Casey,Riley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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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그레이브스는 감방 침대의 창살을 움켜쥐고 베개에 얼굴을 파
묻고 있었다. 몸 아래쪽에 가해지고 있는 엄청난 통증을 잊기 위해 현
재가 아닌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와 있다고 안간힘을 다해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화창한 날의 골든 게이트 공원. 미니와 맥시 그리고 그들의 히
피 친구들과 함께......
[헉.
......잔디밭을 뛰며.낄낄대던......
[허억.오!하느님,숨을 쉴 수 없어요.......
그는 발 아래서 느껴지던 부드러운 잔디의 감촉과 신선한 흙 냄새를
떠올려 보려고 기를 썼다.
산책로 한 모퉁이에서는 인디애나에서 왔다던 처녀 화가가 파스텔
로 누드화를 그리고 있었지......
[오! 제발, 이 자식들아!
......그녀가 그리던 누드화는 그가 기억하는 한 혐오감을 느끼지 않
고 처음으로 접한 인간의 나체였다.
'안 돼지. 안 돼. 나체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 돼! 그렇게 되면 이 고
1.:
_
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
한 쌍의 손이 그의 벗겨진 몸뚱어리에 흥건히 배어 난 땀을 슥슥 문
질러댔다. 또 다른 한 쌍의 손은 그의 머리통을 베개에다 깊숙이 눌러
박았다. 집중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다른 공상 속으로 몰입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현재의
이 고통에서 벗어나질 못해!'
그는 의과대학 신입생 시절을 떠올렸다.
시체해부 실습 시간. 다른 학생들은 하얗게 질려서 외면하거나 심하
면 구역질을 해댔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그도 그 친구들만큼
이나 그 시간이 끔찍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시체는 숨을 쉬고 있
던 인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교수는 그에게 메스를 쥐여 주었다.
그는 동기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인간의 배를 가른 학생이었다. 모든
것이 그가 '집중'이라는 기술을 터득한 덕분이었다. 그는 당장 부딪혀
오는 현실의 시련이 아무리 가혹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를 차단하고 자기 안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도 이런 끔찍한 현실을 떠나
다른 세계로 도망가려고 하고 있는 중이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한 확신도 있었다.
'자, 긴장을 풀고 숨을 들이쉬고. 긴장 풀어. 숨 내쉬고. 긴장하지
마. 숨 들이쉬고. 손아귀에 힘을 풀어. 그렇게 창살을 그러쥐지 말라
구. 긴장 풀고. 숨쉬고.'
하체를 꽉 메우고 있는 통증보다도 흔들리는 몸 때문에 현실과의 단
절이 여느때보다 힘들었다. 그는 재빨리 새로운 방향으로 공상의 나래
를 펼쳐 갔다.
금문교 멀리 떠 있는 작은 요트. 커다란 파도가 버 아랫부분을 철썩
때렸다. 배가 넘실거렸다. 또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배가 흔들거렸다.
또 다른 파도가.......
갑자기 거대한 치욕의 파도가 현실로 그에게 덮쳐 들었다.
'대체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헉, 헉 얼마나. 얼마
나 더.'
집중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몸을 꿰뚫고 있는 통증이 너무나 엄청나
서 그의 공상 속의 자아가 궤멸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강렬한 것,더 강력한 걸 생각해야 한다.'
그는 침대 창살을 더듬었다. 구부러진 못이 하나 만져졌다. 그는 한
손으로는 창살을 끌어당기고 다른 손은 손바닥을 그 못에 갖다 대고서
힘껏 밀었다. 쇠붙이가 연한 살을 뚫고 박혀 들어왔다. 번갯불에 맞은
듯 그 어마어마한 통증은 팔을 타고 올라와 뇌 속까지 후벼댔다. 순간
적으로 눈앞이 안 보였다.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오,신이여, 감사합니다.'
그 통증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현실로부터
상상력을 끌어 모을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이제 따뜻한 햇볕이라든지 즐거웠던 옛날 따위의 상상 가지고는 안
된다 분노가 힌어오를 만한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잭 매클라우드.'
그는 이미 써먹었다.
이번엔 매클라우드만큼이나 가증스러운 인간, 애브너 티투스를 사
용할 차례였다. 대법원의 복도를 검은 냅복을 입은 티투스가 걸어가고
있다.그 앞에는 자신이.......
[허억 ! 오, 제발 그만 해.
??짜
자신이 엎드려서 자비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티투스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헉! 헉! 숨을 쉴 수가 없어. 아악!
티투스가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다. 자신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
마라고 고백한다.
'긴장 풀어숨쉬고!'
자신이 손쉽게 전화 한 퉁화만 했으면
엘리 그레이브스를 구해 낼
수도 있었다는 걸 자인한다.
'그놈이 이런 엄청난 치욕을 당하도록 날 내버려뒀어. 결국 그놈 때
문에 난 지금 이 새끼들한테....... 안 돼!그 단어만은 입 밖에 꺼내선
안 돼. 그랬다간 영영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그는 얼굴을 베개 속에 꾹 눌러 박으면서 손바닥을 힘껏 밀어냈다.
못이 1센티미터 정도 더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으-윽, .. .....
티투스를 꼭 이렇게 생긴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
[무슨 소리지?
네 발로 땅을 짚고 엎드려 있던 그의 온몸엔 비지땀으로 얼룩져 번
들거리고 있었다.
[무슨 짐승 소리 같은데?
티투스에게 다가간다. '으윽.' 손에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윽.'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같군!
지금 자기를 덮치고 있는 똑같은 놈들로 하여금 티투스의 항문을 벌
리도록 지시한다. 다이너마이트를 그 속에 쑤셔 박고 점화한다.
마침내.......
[허어억 !
그 순간 실제로 그의 눈앞이 하얘졌딕
창상 속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비명
을 올리는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그를 겁탈하고 있던 놈들 가운데서
한 놈이 주먹으로 그의 뒷덜미를 내리쳐 버린 것이었다.
엘리 그레이브스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잭은 목발을 짚고 병실문을 나서서 절뚝거리며 복도를 걸어 내려갔
다. 머리는 빙빙 돌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다. 그는 윈스턴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윈스턴의 어떠니가 아들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팔꿈치를 침대에 올려놓고
양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잭은 그녀 뒤로 다가가서 아무 말 없이 그녀
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얹었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고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자기의 양손으로 그의 손을 감쌌다.
그는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뇌파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는 모니터가
붕대로 친친 감긴 그의 머리 부분에 전선줄로 연결돼 있었고, 길고 가
는 산소 튜브가 콧구멍에 접착되어 있었다. 온 얼굴은 피멍투성이였
다. 그는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사고 이후로 지금까지 의식 불명 상
태로 누워 있는 것이었다. 바셀린이 덕지덕지 발라진 그의 터진 입술
은 약간 뻘려져 있었다. 신경과 의사 얘기로는 흔수 상태가 사흘 이싱
지속되고 나면 그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생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고 했다
윈스턴 존스.......
강하고 뚝심 있는 인간......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돕더니만 이제는 혼자서 쓸쓸히 자신과 싸우고
있다. 너무나 모순되고 부당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윈스턴의 어머니
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고는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다시 복도를
절뚝거리며 내려가 몰리의 병실문 앞에 섰다.
'똑똑.'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몰리는 똑
바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꽃바구니가 병상 옆 테이블에 놓여
져 있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침대 가로 갔다. 환자복 밖으로 드러난
곳은 온통 피멍과 상처뿐이었다. 그녀는 폭발 당시 입은 심한 타박상
과 충격 때문에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목발을 테
이블 옆에 세워 놓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오! ......형편없는 모습이네요.
쉰 목소리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보려고 애썼다
[면도도 좀 하셔야겠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그녀 위로 몸을 구부려 그녀
를 포옹했다.
[깨어난 거요?
잠시 후. 잭은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지난 밤에 의식을 회복했어요.그런데 자꾸만 잠이 와요.
[아무도 이 일에 대해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더군.
[그래요.그냥 폭탄이 터졌었다고만 얘기해 주더군요.
[당신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녀는 잠시 기억을 불러모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서....... 엘리 그레이브스가 나가기를 기다리다가.......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충분히 못 해온 숙제를 꺼내 놓
은 국민학생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저...... 당신...... 정말 제 아버지가 아니죠?그렇죠?
[물론,아니지.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볼이 허물어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나 실제 상황은 더 끔찍해.
그녀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뭔데요? 말해 보세요. 잭. 대체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 죽겠어요.
다음 한 주 동안 잭은 매일 몰리와 윈스턴의 병실을 방문했다. 그런
날 밤이면 빅토리아와 아기가 매일 그를 찾아왔다.
=
[병원에선 의원님이 살아난 게 거의 기적이라고들 하더군요.
플라스키 형사가 말했다.
[그래요. 행운의 사나이지.
잭은 절뚝거리며 가죽 의자로 다가갔다. 의사 전용 휴게실이었다
면담을 위해 병원측에서 특별히 편의를 봐주었던 것이다.
[두 분 커피 생각 있으시오?저기 흘에 자판기가 있는데.
[전 생각 없습니다.
플라스키가 대답했다.
[저도요. 저흰 지금 막 점심 먹고 오는 길이거든요.
그의 파트너 '바주카 조' 윌슨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플라스키
가 잭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는 소뀌에 털썩 몸을 내려놓
고는 깁스 한 왼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플라스키와 윌슨은 의자
두 개를 끌어다가 앉았다. 플라스키는 탁자 위에 이기의 녹색 노트를
내려놓고 펼치면서 뒤적거렸다.
[읽어 보셨겠죠?
잭은 말없이 고개를 덕거렸다.
플라스키는 무릎 위에 노트를 펼쳐 놓고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희는 이번 사건과 아기인형 살인사건들
파의 연관성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아드님......
[이기 ! 이기 핏트라고 하시오.
잭이 신경질적으로 말허리를 끊었다. 플라스키는 주머니에서 매

펜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네. 이기 핏트는 확실히 그 세 사람의 희생자 모두를 알고 있었습
니다. 쉬버스와 할리 문은 윙스에서, 그리고 배니스터는 낙태 반대 시
위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누가 납치해 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죽어 갔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플라스키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일기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잭은
아무 말 없이 석고 붕대 아래 삐죽 나온 발가락들을 꼼지락거리고 있
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뭔가 짚이시는 게 없으십니까? 의원님.
......이를테면?
[저. 의원님의 약혼녀에 관해서.
잭의 입꼬리가 치켜져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당신네들은 여전히 낙태 찬성론자들의 보복 살인이라는 추리 범주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그저 여쭤 봤을 뿐인데요.
[이렇게 얘기하게 된 것이 한편으론 즐겁소. 빅토리아는 그 일과 전
혀 관련이 없소.
[확신하십니까?
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물어 보길 기다렸소,
플라스키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물어 봤다
[의원님 말씀은 그럼 아드...... 아니 이기 핏트말고 다른 범인.그러
니까 이기에게 테러를 지시한 인물이 있다는 그런 뜻입니까?
[물론이오. 생각해 보시면 다들 아실 거요, 이제 겨우 스물다섯 먹
은 애송이가 아무런 외부 도움 없이 두 개의 병원을 폭파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플라스키의 숱 많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기장만으로 보자면 그는 꽤 자신만만했던 것 같은데. 누구 마음
속에 짚이시는 인물이라도 있으십니까?
잭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엘리 그레이브스라면 어떻겠소?
[이기의 일기장 내용에 따르자면 그레이브스는 에그즈 베네딕트인
알프레드 베네딕트를 자기가 이용해 먹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그가 바로 이기 핏트인 줄은 꿈에도 몰랐구요.
[맞소. 외양으로는 그렇죠.
플라스키는 한쪽 볼을 긁으며 말했다.
[의원님 말씀에 굳이 반박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강력계에 2
년 정도 근무해 보니까 사건들이란 대개 외양과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추리 소설이라면 모르겠지만, 실재 사건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됐죠.
잭은 하릴없이 석고 붕대 한 다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참.아직 그레이브스를 찾아내지 못했소?
[그것도 오늘 의원님과 말씀을 나눌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그
보다 좀 전의 말씀을 끝맺는 게 더 먼저일 것 같습니다. 엘리 그레이브
스말고 폭탄 테러의 배후에 또 누가 있을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으시
나면......
[애브너 티투스에 관해 언급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시
?_?
[대법원장 말씀입니까? 이기 핏트가 인준 청문회에서 만나 사인을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 보다 긴밀한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하기에는 그 정도 사실로는 좀 약한 것 같습
니다
[물론 일기장만 갖고 보자면 은밀한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은
없소만 티투스라는 사람은 그 어틴애에게 날 해코지하라고 충돌질할
만한 충분한 소지를 갖고 있소.
[의원님께서 그의 대려원장 인준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
에 그렇다고 보시는 건가요?
잭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죽음과 연판이 있다고 몰아붙여서
3런 게 아닌지. 어쨌든 형사 양반 표정을 보니 영 공감할 수 없는 추
리라고 써 있군요.
플라스키는 윌슨에게 흘껏 눈길을 주었다. 윌슨은 운동화를 신은 한
쪽 발목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고 있었다. 면담 상대
방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할 때면 늘 튀어나오는 그
특유의 버릇이었다.
잭은 힘들게 탁자 위로 상체를 굽히고 볼펜을 집어 들었다.
[네. 좋습니다. 티투스 판사가 의원님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 다음
엔 뭐죠?그래서 의원님의 뒤를 캐라고 사람을 고용했다?
[고용?아니오. 이번 일은 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잖소?
='= ='거 ?1으1 ?브르 캉 1어퍼 흔따 다 민 .
것이 드러날 염려가 없다는 계산이 서 있었다면 그는 층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오.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
[바로 이렇게,그가 이번에 한 것처럼이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석고 붕대 위에다 아홉 개의
네모 칸을 그렸
다. 그리고선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이기 핏트를 만나 그에 관해 알게 되면서 그가 나를 미워하는 정신
이상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적절한 순간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그러고 나선 '꽝.' 해결된 거 아니겠소?
[혹시 일기장에서 그떻게 추론하시게 된 단서라도 발견하셨습니
까?
[그런 게 꿔 필요하겠소? 법관들의 생리를 잘 모르시오? 티투스는
특히 꼼꼼한 사람이오. 게다가 내용 연결상으로 보아 그 일기장에는
없어져 버린 페이지도 몇 장 있는 것 같던데 말이오.
그는 왼쪽 맨 위칸에 표를 그려 넣었다. 플라스키와 윌슨은 아무
런 대꾸도 없었다.
[아무래도 내 추리에 동의하기가 힘드신가 보군.
잭은 그떻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가운데 칸에다 표시를 했다.
[동의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의원님. 우린 지금
1합중국의 대법원장에 대해서 얘길 하고 있는 겁니다.
잭은 잠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상원의원들이 어떤 사람을 대법원장에 인준한다고 해서, 그 사람
이 성인이라든가 진정한 도덕가라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를
용의선상에 감히 올려놓기가 좀 뭐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만 이번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해 보면 그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결
코 배제할 수는 없을 거요.
[의원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구닥다리 사고 방식을
가진 일개 형사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추리 소설을 읽을 때처럼 마구
잡이로 아무나 용의자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제겐 중요합니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않소. 당신이 원하는 건 용의자가 범행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증거 아니던가요?
[글쎄요. 옳으신 말씀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담당한 사건입니다
제 방식에 따라 수사를 전개해야겠지요.
잭은 표를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그는 속_으로 이렇게 중얼거=1 고 나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입을
떼었다.
......지금까지 세 사람의 그 뭐지 ? 응. ' 아기인형 살인사건' 희생
자가 나온 거 맞소?내 생각으로는 네 번째 희생자가 나타날지를 지켜
보는 게 옳을 것 같소. 만일 그 일련의 범행이 낙태 지지론자들에 의해
일종의 보복으로써 저질러진 것이라면, 그자들은 이번 병원 폭파 사건
에 대한 보복 범행을 또 저지를 것 아니겠소? 반면에, 그 범행들이 마
치 낙태 지지론자들의 복수극처럼 보이게끔 꾸며 낸 자에 의해 저질러
진 것이라면 납치극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 같소.
[왜 그떻게 생각하시죠?
[왜냐면?승리를 거뒀으니까. 그들은 애브너 티투스를 대법원장 자
리에 앉혔고 빅토리아를 살해했고 나마저 이꼴로 만들어 버렸소. 엘리
그레이브스는 몸 건강히 잘 살아 있고 <붉은 장미회>는 번창 일로에
있소. 좀 전에 내가 '승리'라 그랬소?내 고쳐 말하리다. 이건 승리 정
눈길을 주다가 그것을 집어서는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그저께 밤.그레이브스를 체포했습니다.
잭은 놀랐다.
[왜요?
[이기 핏트의 아파트에 무단 침입해서 검문을 하는 경관에게 상처
를 입히고 이 노트를 흠쳐내려고 기도했습니다 모르고 계시는 것 같
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쌀리 그레이브스는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
까지 의원님의 약혼녀와 그 병원의 환자 대기실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랬다구요?
잭은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그가 병원에서 빅토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소?
[우리 경관 한 명이 그의 기도()를 진찰받게 하려고 데리고 올
라갔던 것입니다.
플라스키는 잡지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의원님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받은 상처 때문에요.
[그와 싸웠다는 애기를 듣긴 했지만 난 기억이. 사실 그 시위 행사
장에 갔었던 것조차 가물가물한 상태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고개를 들며 질문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그 시간에 티투스는 어디 있었소?
플라스키는 파트너를 쳐다보았타. 윌슨은 전척 모르겠다는 낯멎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대답해 보리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을 거요.
잭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하고는 다시 빈칸 하나에 단표를 그
려 넣었다. 그걸 쳐다보면서 플라스키가 물어 왔다.
[누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
잭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그 당시엔 나쁜 놈들이. 그러나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소.
플라스키는 귀를 기울였지만 잭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련한 형사는 신문을 그만둬야 할 때를 아는 법.
플라스키는 한 쪽 손바닥을 펴고 주먹 쥔 다른 손으로 그 손바닥을
소리 나게 치고는 말했다.
[다음에 마저 말씀을 나누기로 하죠.
두 형사는 일어섰다. 잭은 여전히 앉은 채였다.
코트를 걸치고 중절모를 쓴 플라스키가 출구를 향해 발길을 옮기려
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런데 말이죠.
그는 잭 쪽으로 돌아서며 마침 생각났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빅토리아 윈터스 양의 소지품이 분명한 것 같은 물건
을 하나 가져 왈는데요.
그리고는 코트 주떠니에서 뭔가 조그만 물건을 꺼내서 잭의 손에 쥐
어 주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잭은 그것을 오른쪽 눈 앞에 바싹 가져다 대었다.
은화였다. 아래쪽이 불에 그을려 있었다. 위쪽 면에는 수잔 . 앤터
니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 입 앞에 자가 선명히, 처음 새겨지던 그날
처럼 또렷하게 음각돼 있었다. 그의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만
일 심장 모니터와 연결이 되어 있었더라면 플라스키는 의사를 불렀을
것이었다.
[어디서 이걸?
[폭발 현장에서입니다. 벽돌 부스러기 속에 꽈묻혀 있더군요.
자꾸만 숨이 차올라 잭은 한 손으로 뒷목을 쓸어 내렸다.
플라스키는 그러라는 손짓을 해보이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형사들의 등뒤로 문이 닫히자 잭은 동전을 다시 들어올려 자세히 살
펴보았다. 빅토리아의 것이라고? 그건 맞는 말이지만 빅토리아는 실상
이 물건을 본 적도 없지 않은가!
스틱스의 집에서 포커를 치던 날 밤 그 동전은 분명히 티투스의 주
머니 속으로 들어갔었다. 그렇다면. 티투스가 이것을 이기에게 건네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서 동전을 돌려 보았다. 동전이
한 바퀴씩 돌 때마다 애브너 티투스에 대한 의흑이 짙어져 갔다. 그것
이 한 번씩 회전할 때마다 자신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동전을 손에 쥔 건 행운이다.'
이기는 일기장에 그렇게 써놓았었다. 지난 번 읽었을 땐 도무지 이
해가 가지 않던 그 내용을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제레미 하켓은 두 명의 정복을 입은 병동() 간수들 앞으로 앞장
서서 걸어 들어갔다. 간수 중 한 사람은 묵직한 열쇠 꾸러미와 서류철
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빈 횔 체어를 밀며 따라왔다.
[이렇게 서두르고 싶진 않소만 내 의뢰인의 구속 적부심 심의 시간
이 워낙에 촉박해서.
일행이 병실 앞에 이르자 간수 중 한 사람이 주먹으로 문에 노크를
하고는 문을 밀어 열었다. 죄수는 똑바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간수
는 하켓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이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
서 들고 있던 서류철에 이런저런 사항을 기록했다. 하켓은 침상으로
다가갔다
[엘리, 일어나세요. 늦겠어요.
그는 팔을 뻗어 죄수를 흔들었다.
[엘리?
이상했다. 앞으로 몸을 수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죄수는 엘리
그레이브스가 아니었다. 그레이브스의 나이쯤 됐을까? 그레이브스와
똑같은 검은 떠리칼을 한 사내가 병원 조무사 가운을 걸친 채 잠에 취
해 있었다. 침상 옆 선반에는 빈 모르핀 주사기가 놓여 있었다. 원래
그레이브스에게 투여되어야 할 모르핀이었다. 사내의 가운 깃에는 병
동의 편지봉투 하나가 클팁으로 키워져 있었다.
'제레미 하켓에게. 이 편지는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사신()임.'
봉투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켓은 그것을 떼어내 서둘러 읽어
내려갔다.
경애하는 제레미.
만일 판사가 보석 신청을 기각하는 날엔 나는 정오도 못 되어
다시 이 감방에 처박히게 될 것이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겠지만 난 모험을 할 수 없었소. 날 찾으려고 하지 마시오. 때
가 되면 내 스스로 당산 앞에 나타날 것이오. 우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소.
엘리
추신 :조무사를 다치게 하진 않았소. 그저 잠시 잠제웠을 뿐.
맨해튼 8번가에 위치한 싸구려 숙박업소. 패러다이스 호텔의 접수
대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웽한 눈을 하고, 손바닥에 반창고를 붙인
그 사내는 가짜 이름을 써놓고는 서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러진
목에는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근처에 철물점이 있소?
부자연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면도를 안 한 텁수룩한 호텔 직원은 혀로 이쑤시개를 놀리면서 대답
했다.
[한 블록 내려가서 길을 건너면 돼요.
목 보호대를 한 사내는 50달러를 헤아려서 카운터에 올려놓고 나서
핏발 선 눈으로 점원을 노려보았다. 점원은 앉아 있던 의자를 넘어뜨
리면서 벌떡 일어서서는 방 열쇠를 건네주었다
[이층입죠. 방에서는 요리를 할 수 없고 11시가 넘으면 소음을 내면
안 됩니다. 특히 주의하실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규칙을 깬다고 해서
불평을 하시면 안 된다는 것입죠. 헤헤 !
그는 사내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면서 빼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혀
를 사용해 교묘히 놀려서 입 안에 머금었다
[뭘 봐?
사내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아닙죠. 전 원래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헤헤 !
1
잭은 교회문을 나섰다.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1월이었다.그는 모자
를 쓰지 않은 머리를 숙였다. 장례식이란 원래 따지고 보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정리를 제공하는 시간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그
걸 원하지 않았다. 다만 빅토리아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
었을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좀 떨어진 곳에서 레이잴이 어떤 여자와 에기하는 것을 보았다.레
이챌의 모습이 홴지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의 상대방은 선글라스와 챙
이 좁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로비스트
흑은 정치 연회장에서 스쳤던 사람이....... 정확히는 기억해 낼 수 없
었다.
장줴식장에는 60명 남짓 되는 조문객들이 참석했었다. 그 중 몇몇은
아는 얼굴이었지만 대부분이 낯선 사람들이었다. 빅토리아의 의뢰인
들과 정부기관에 있는 친구들, 변호사, 그리고 범조계 인물들....... 아
마 신문에 난 그녀의 비보를 접했을 것이다.
그가 다가가자 진회색 정장 차림의 여인은 돌아서서 멀어졌다. 레이
챌이 잭을 반겼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고 두 사람은 함
=
께 걷기 시작했다.
[병원에 찾아가 보지 못해 미안했어요. 어때요. 좀 괜찮아요?
[괜찮진 않지만 이 정도 산책쯤은.
두 사람은 묵묵히 인도를 따라 걸었다.
[당신 뭔가 할 말 있죠? 이봐요. 잭. 장례식에서조차 솔직하지 못히
다면 언제 진심을 얘기할 수 있겠어__?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실 당신이 빅토리아의 죽음에 관해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
고 생각해 왔었소.
레이챌이 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요?빅토리아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요.
잭은 목발에 의지한 채로 몸을 돌려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추수 감사절 직후에 빅토리아가 애리조나에 갔던 것 기억합니까?
[그런데요?
[당신도 그녀와 함께 갔었나요?
[어디.애리조나에?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딘지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요. 레이. 애리조나에 있는 온천 말입니다.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게 됐죠?
그는 똑바로 서서 체중을 성한 오른쪽 다리에 실었다.
[그녀가 도착하던 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죠. 그런데 처음
응답한 목소리가 바로 당신의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소.
그녀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1=.= 쟁 빕졍리아가 추수 감사절 다음 날 온천으로 떠난 것 멎
죠?그떻죠?그러니까.금요일날?
[그래요.
[나는 그 다음 날, 토요일에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에서 애브너 티투
스를 수술했어요.
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그러니까 내가 농장으로 전화를 했을 때 당신이 전화를 받
을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애리조나에 있었다는 생각을 왜 해요?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당신이 농장에 있는 전화번
호를 애리조나로 돌려 놓아서 농장으로 전화를 걸면 온천장에서 벨이
울리도록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오.
그녀는 잠시 그를 쏘아보았다.
[잭. 아무래도 어디 볕 좋은 곳으로 며칠 휴양이나 다녀오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돌아온 뒤, 우리 저녁이나 함께하면서 모든 문제
를 차근차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해요. 어때요?
[그러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도로를 건너 교회로부터
절뚝이며 멀어져 갔다. 머릿속에 잠시 전에 나누었던 레이챌과의 대화
를 떠올리며.
'이런 ! 아무래도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 것 같군.'
길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레이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멀리 가지
는 못했으리라 생각을 하며 그는 뒤돌아서서 절뚝이는 발걸음을 제촉
했다.
다시 길을 건너 교회에 이르렀을 때 레이챌이 옆문 현관 지붕 아래
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좀 전에 보았던 진회색 차림의 여자와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여인의 머리는 숙여져 있었고 선글라스 아
래를 손수건으로 연신 쩍어대고 있었다 레이챌은 여인의 어깨를 붙들
고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위로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인을 포옹하려던 레이챌의 손짓이 실수로 모자를 건드렸고 그 바
람에 모자가 위로 비스듬히 치켜져 올라갔다. 모자를 바로 잡으려고
고개를 들던 여인의 눈이 잭을 발견했다. 그녀는 흠칫 놀란 듯하더니
울고 있는 장면을 들킨 것이, 아니 어쩌면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
실이 당흑스러운 듯, 교회 옆문을 열고는 재빨리 안으로 사라졌다. 잭
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 레이챌도 머믓거리지 않고 여인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돌아섰다
순간 마이크 하나가 그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텔레비전 여기자인
조슬린 브룩스였다.
[견디기 힘드신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매클라우드 의원
님. 폭탄 테러의 배후에 누가 도사리고 있는지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없으신지요?
'빌어먹을! 아내의 장례식 날에 텔레비전 인터뷰?'
[미안합니다. 지금은 도무지 말할 기분이 아니오.
그는 그녀를 빙 돌아 절뚝거리며 보도를 따라 쌔려갔다. 풀어헤친
코트 안으로 겨울비가 들이쳤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
었다
사실.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아무도 주위에 없고. 전화도. 친구도
없다.여자도 없다.빅토리아도...... 몰리도...... 이름도 못 지어 준
의 딸도...... 잭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뿌연 하늘 위에서 부=
부슬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작은 빗방울들처럼 우리의 삶도 =
물 되어 흐르리라.
그는 스포츠 센터의 진열장 밖에서 야영 장비를 구경하다가 유리칭
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머리칼은 떡져 있었고, 텁수룩했다. 그
리고 왼쪽 눈에 댄 검은 안대는 물에 흠뻑 젖어 아래로 쳐져 내려와 있
었다.
그는 돌아서서 목발을 짚고,일부러 물 응덩이를 골라 디뎌 가며 길
을 내려갔다. 곧 석고 붕대와 신발이 흠씬 젖었다. 차가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정직한 본능에 굴복하며 빗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너무도
기분좋았다.
우산이나 비옷 따위는 없는 게 나았다.원시적인 상태로 비를 맞고
있는 이대로가 좋았다.
그는 여행사의 문을 열고 절뚝거리며 접수계로 다가갔다. 매력적인
40대 남짓된 여자가 함박웃음을 띠면서 그를 환영했다. 그는 세인트
토마스 행 왕복 비행기표를 주문했다. 그녀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그는 좀 전에 빗속에서 맛보았던 본능적인 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즐겁고 편안한 여행 되세요.
그녀가 티켓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보았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손가락만 묵묵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행동에 당황한 듯 물어 왔다.
[뭐 다른 거 도와드릴 일이라도?
그는 정신이 든 듯 눈을 캄박였다.
[아닙니다.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가려다 멈춰 서서
티켓을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문득 결혼 반지가 끼어져 있어
야 할 허전한 왼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빅토리아는 이제 가고 없어. 영원히 떠난
정해야지.'
거야. 이제 그 사실을 인

?
짙은 초록색의 쓰레기 컨테이너는 밤 사이에 내린 눈을 하얗게 뒤집
어쓴 채 새벽이 와서 첫번째 쓰레기가 담겨질 시간을 기다리며 골목길
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컨테이너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붕대를 한 양손이 걸쳐졌다. 곧이
어서 목 보호대를 한 사내의 얼굴이 올라왔다. 마치 잠망경처럼 천천
히....... 용을 쓰고 있는 사내의 이마에는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
었다. 잠시 후 다리 한 짝이 걸쳐졌고, 조금 후. 사내의 돔뚱이 전체가
컨테이너 위로 올라왔다. 그 작업이 무척 힘들었는지. 사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쓰레기 더미 위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골목길은 조용했다.
6분쯤 지났을까.
사내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구르다시피 해서 진테이너의 구석으로 기어갔다. 그러고 나선
판자 위에 무릎을 끓고 앉아서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비닐 장판 조각. 버튼식 전화기 자판.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
었다. 조각난 나무 기둥의 파편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런 것들을 한쪽
으로 치뒀다. 이미 구멍이 나 있는 손바닥이 또다시 다칠까 염려하면
마침내 그가 찾던 것이 나타났다.
그는 손을 아래로 뻗어서 끈을 잡고는 낙하산 천 가방을 잡아 쨌다
머리와 몸통을 꼿꼿이 세우고 마치 눈먼 사람처럼 그것을 더듬거리며
만져 보다가 지퍼를 열고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서는 30센티미터 길이
의 다이너마이트 네 개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어 골목길 끝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오랜
만에, 정말 오랜만에 엘리 그레이브스는 만족감을 느꼈다.
위싱턴 검시소.
해부대 위에 몰리가 누워 있었다.두 눈은 꼭 감고 양손은 가슴에다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엘리엇 랜디는 통화를 끝내고 해부대로 다가왔
다.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다.
몰리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신을 신지 않은 양다리는 해부대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였다.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했다.
[다시 만나 정말 반갑군요.그래 기분이 어떻습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매일 오후 이맘때쯤이면 꾀곤해지곤 해요.
하지만 몇 분간이라도
이렇게 누웠다 일어나면 괜찮아져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병원에 와준 거 고마웠어요. 물론 그땐 혼수 상태라서 롤랐지만,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뛴 게 당신이 놓고 간 꽃바구니였어요.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꼴리를 의사의 눈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상처는 거의 아물었고.두통은 없어요?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랜디는 그녀가 해부대에서 내려서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신발을 신
고 절뚝거리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그가 의자
를 마련했다. 그녀는 그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일주일이 넘게 입
원해 있었지만 발에 입은 상처는 빨리 낫지 않았다.
[다시 일해 볼까요? 인형 살해. 아니. 아기인형 살인사건에 대해 뭐
새로운 거 나온 거 있어요?
랜디는 카댜터 위에 있던 의학 잡지들을 정돈하며 말했다.
[저번에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해부 결과에 대해서 얘기할 때 내가
아직 애기할 수 없는 게 있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요?
[네.
[여전히 대외비() 맞죠?
[그럼요.
랜디는 카운터 위쪽 선반에서 마닐라지 봉투를 커냇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절개된 상처와 봉합 매듭을 가까이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이건 첫번째 희생자인 멜빈 쉬버스 것이죠.
그는 두 장의 사진을 더 꺼내 선반 위에 펼쳤다.
[이건 두 번째 희생자, 할리 문 이건 세 번째인 빌리 배니스터의 것
입니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구부려 봉합 사진들을 보았다. 셋 모두 다 야구
공처럼 꿰매져 있었다.
[그런데요?
그녀는 랜디에게 눈길을 주었다. 랜디는 사진 한 장을 더 꺼내어 펼
[자 이번엔 이걸 보세요.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자궁절개 수술 부위
예요.
그러면서 랜디는 몰리에게 확대경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서 사진을 살펴보았다.
[어머나! 이것도 야구공처럼 꿰매져 있네요.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원래 이렇게 꿰매는 거라고 당신이 저번에 얘기했잖아
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난 꿰맨 모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넙니다
왼편을 보세요. 봉합이 시작되는 곳 말입니다.
그녀는 확대경을 들고 몸을 수그렸다.
[매듭이 지어져 있어__.
[매듭이 하나가 아니죠?두 개예요. 2센티미터 간격을 두고.자,
이제 다른 세 사람의 희생자들의 봉합이 시작되는 곳을 보세요.
[흐음. 역시 두 개의 매듭이 있군요. 이 세 사람을 꿰맨 사람이 역시
제노비아 데이비스도?
[한번 짐작해 보세요.
몰리는 당혹한 표정이 되어 다시 한 번 확대경을 집어 들며 혼자말
을 했다.
[누가 이랬을까?
그는 뒤에서 그녀의 어깨 너머로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낚시할 줄 압니까?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여자에게 그런 걸 물어요?당연히 하죠.
[그럼 매듭낚시 알아요?
[무슨 낚시요?
[매듭낚시요. 제물낚시의 일종인데 낚싯줄을 마치 미끼처럼 때듭지

"='.
어서 하는 낚시 말이오.
[난 대낚시를 즐겼어요.
[이 사람들을 꿰맨 사람은 본능적으로 매듭을 그렇게 짓는 노련한
제물낚시꾼인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더 없나요?검은 실크 실이라도.
[없어요.
[꿰매진 모양은 어때요?
[뭐 특이한 점은 없어요.
그녀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흑시 그들을 꿰맨 사람이 오른손을 사용했는지 왼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어요?
[글쎄요.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허공에다 대고 꿰매는 시농을 해보였다. 그가 상
상 속에서 꿰맨 봉합실이 그려낸 무늬는 시체의 머리를 향해 45도 각
이 져 있었다
것과 정반대로
그는 사진 속의 봉합실의 무늬를 살펴 보았다. 그의
각이 져 있었다.
[추측해 보자면. 아니, 아니 추측은 위험한 일이에요.
[추측해 보세요!
[왼손잡이에 의해 꿰매진 것 같아요.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랜디가 말했다.
[워싱턴에만 해도 왼손잡이가 백 만명은 넘을 거예요. 내 추측이 멎
다고 할지라도 크게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몰리는 가방 끈을 어깨에 맸다.
[우리 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기자에게 있어서 사소한 정보란
사건 주변의 가십거리는 된다. 도움이 안 될 수는 있어도 해로움을 끼
치지는 않는다'고.
그는 싸구려 호텔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명상에 빠진 수도
승처럼, 무표정한 두 눈은 정면의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엔
여러 가지 도구들과 기술 관련 서적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
치엔 2개월 전에 간행된 법조계 신문이 한 부 놓여 있었다. 신문의 상
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근면과 성실의 귀감,애브너 티투스 대법원장워 일과'
그 신문에는 노란 형광펜으로 곳곳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애브너
티투스가 입원하고 있는 종합병원의 방 두 개짜리 특실에 환한
기사에는 특히 짙게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사필 귀정().'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윗도리를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그러고
나서는 선반으로 걸어가 보드카 병을 집어 들고 마개를 열었다.
'모르핀 대신 이게 통증을 잡아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병 속에 남아 있던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
렸다.
보드카 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코트를 걸쳐 입고 선반 위에 놓아
었던 한 무더기의 26센트짜리 동전들을 호주머니에 쓸어 넣었다.
검은 스카프로 목에 댄 보호대를 가리고 8번가에 나서자 특별히 님
눈에 두드러질 것도 없는 여느 부랑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
= 주변에 경찰이 있나 없나를 은밀히 살피며 길을 걸었다. 현찰이 얼
마 없었지만 현금 자동지급기를 그냥 지나쳤다. 누군가가 매일 그의
계좌를 점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길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공중 전
화에 다다르자 그는 그가 얘기할 내용을 다시 한 번 뇌까려 보았다.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해야 한다.'
그리고는 주떠니에서 동전들을 커내 전화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수
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하나 넣고는 장거리전화 안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 난 후 교환에게서 알아낸 번호를 누르고 동전을 여러 개 집어
넣고는 기다렸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리고 비서가 응답해 왔다. 그는 이
름을 댔다. 진짜 이름을. 그래야만 지금 자기가 통화하고자 하는 사람
과 곧바로 연결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들은 비서
는 놀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드디어 그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고대하던 그 목소리.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보세요?
[매클라우드 의원입니까?
[그런데요?
[나, 엘리 그레이브스요. 혹시 모르실까 봐 하는 애긴데 여긴 밖이
오.
.
8
잭은 뉴욕 시럽병원의 정형외과 입구에 멈춰 섰다. 유리문에 비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왼쪽 다리를 동여맨 석고 붕대는
맣게 때가 타 있었고, 왼쪽 눈은 검은 안대로 가리워져 있었다. 아물
는 있지만 아직도 흔적이 뚜렷한 꿰맨 자국과 상처들이 얼굴에 가득헛
다. 예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처참한 불구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크=
신경 싱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조만간 왼쪽 눈의 시력이 회복될 것
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리라든지 다른 불편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가고 있=
다. 사실상 오늘 같은 기분이라면 외려 이 몰골이 된 것이 즐거울 수5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문 앞의 고무 깔개를 목발로 눌렀다. 자동문0
열리자 그는 절룩거리면서 환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은 마]
'스타워즈'의 우주 술집을 방불케 했다. 온갖 기괴한 모습의 외계인=
로 붐비고 있는.......
한 쪽 무릎에 철심을 박아 넣은 남자. 윗머리까지 올라오는 목 보]
대를 하고 있는 소년, 보행 보조기를 밀고 있는 여자, 흉부 압박대
차고 있는 소녀, 양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노인.
가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카닭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소파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영락없이 환자 가
운데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잭은 첫눈에 그를 알아보진 못했다. 그만
큼 그데이브스는 많이 변해 있었다. 목에 댄 보호대옹 부목, 야윈 얼
굴, 초점 없는 웽한 두 눈. 그러나 잭을 알아본 순간, 그 두 눈에 반짝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적개심. 틀림없는 엘리 그레이브스의 눈
빛이었다.
잭은 소파로 다가가서 목발을 벽에 기대 놓고는 앉으려 하다가 마치
파충류 곁에 다가서는 것처럼 비위가 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정해.'
그는 가까스로 속을 진정시키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레이브스의
옆에 앉앗다, 물론 그의 몸에 살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헤어지자구.
잭이 싸늘하게 내뱉고는 귀퉁이가 접혀진 낚시 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레이브스는 손에 쥐고 있던 스포츠 잡지를 뒤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열어서 티투스를 뭉개려 하셨지? 그러나 그 정도 증거
갖고 되겠소?당신은 티투스에 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소. 의원 나궈.
그는 잭의 호기심을 부채질하려고 잠시 말을 끊었다.
[티투스의 대법원장 임명 스토리는 처음부터 음모였소. 그자는 그
자리를 예전부터 탐내 왔었소. 물론 법관이라면 당연히 품을 만한 꿈
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강한 보수주의 색깔 때문에 클레이 대통령이
절대로 지명해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소. 적어도 엄청난 정치
적인 압력 없이는 말이오. 그래서 그자는 스틱스와 결탁을 했던 거
요.
[어떤 압력?
1
_
[글째 뭔진 모르겠지만 스틱스가 태통령이 저지른 상당한 비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았소. 그걸 터뜨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티투스를 대
려원장에 지명하도록 협박했던 거요.
잭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틱스 딕키가 대통령을 협박하고 있다?
[후후! 스틱스는 '협박'이라는 단어를 쓰기 싫어하던데. 어쨌든 대
통령의 지명을 받아 놓았지만 상원의 인준을 따내는 건 또 다른 문제
였소. 그러나 스틱스는 티투스가 무난히 인준을 얻어내리라고 생각하
고 있었소. 물론 나의 지지카지 감안한 계산이었지. 그러나 난 티투스
를 만나자마자부터 그가 싫었소.
[왜?
그레이브스는 반창고를 붙인 손바닥을 펴고 잠시 들여다보다가 디
시 주먹을 쥐었다.
[그건 내 개인 시정이오. 그런 건 집어치우고. 하여간 나는 스틱스
에게 티투스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그자를 고집힐
건 꿔 있느냐고 따져댔소.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전혀 귀담아듣질 않윌
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단 티투스와 사귀어 보면 그를 좋아할 거리
고 그랬소.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이더군 제노비아 데이비스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면 그자의 신념을 확인해 볼 수 있지 않겠느
냐고 말이오. 한편 티투스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소. 인준 =
문회 날짜는 닥쳐오고 그 사건을 어떻게 판결내려야 할지 대책이 서
않은 거요. 만일 제노비아 데이비스에게 낙태를 허락하게 되면 우
같은 반낙태 주의자들로부터 비난 이상의 것이 닥쳐을 것이고 그렇=
고 그 반대로 판결을 내리자니 민주 진보 진영으로부터 퍼부어질 집=
공세가 두려웠던 것이오. 결국 스틱스와 의논한 끝에 그 문제를 나더
거 허미1느 겁로으 내겅 ?래서 딤죠? 두세 버 우리 =
만의 밀회를 주선했소. 그 중 한 번은 뉴욕 행 비행기 속에서였는데 그
날 티투스가 해결처을 발견해 냈던 것이오.
[해결책?
그레이브스는 잡지를 뒤적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날 그자와 나는 낙태의 죄악상을 화면에 담는 데 대한 애로점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드랬소. 방송만 제대로 타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
으킬 수 있는 이슈잖소?그런데 그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임신 78개
월 된 임산부가 낙태 수술 받는 장면을 찍어 보면 어떻겠냐고. 연극으
로 말고 실제로 말이오 누가 보아도 완연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아기
가 바로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장면을 보벅 주면 굉장하지
않겠느냐고 말이오.
그레이브스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잭의 눈치를 살폈다.
[오! 맙소사!
잭은 끔찍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레이브스는 내심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자는 제노비아 데이비스에 대한 판결을 차일피일 미루었
소. 마침내 그 여자의 배가 층분히 부풀어오르게 되자. 그는 제노비이
에게 전화를 해서 그 다음 날 아침 그녀에게 낙태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귀뜀을 해주었소. 그러면서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덧붙였지. 그녀의 남편이 상소를 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판결의 효력이
정지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이후 상급버원에서 승소를 한다고 해도
너무 시간이 많이 홀러서 낙태를 할 수 없게 된다고 말이오. 그렇게 해
서 그녀를 불안에 휩싸이게 한 후. 넌지시 해결책을 제시했소. 남편이
상소하기 전에 그날 밤 중으로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기가 다
배려해 놓았다고 말이오. 따라서 다음 날 아침에 판결을 발표할 때쯤
이면 상소고 자시고 할 건더기가 었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그 여자를
꼬드긴 거요.
'이자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그래서 제노비아가 그 꼬임에 넘어갔소?
[그녀는 그날 밤 중으로 그 병원엘 갔소. 그러나 태아가 너무 커서
제왕절개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소. 그러다가 뭔가 잘못돼서 그녀와
아기가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던 것이오.
[그 수술은 누가 집도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소.비디오 테이프에는 얼굴은 전척 안 비치고 수술
을 하고 있는 장갑 킨 손과 메스만이 담겨 있소. 후후! 그 테이프를 끝
까지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럼 당신이 그 테이프를 갖고 있단 말이오?
[물론이지. 바로 그게 내가 오늘 당신을 만나자고 한 용건이오.
잭은 잡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레이브스! 나한테 뭘 바라지?
[당신이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 애브너 티투스! 당신이 그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 가서 폭로해 버리길 원하오. 그래서 탄핵당하고 온갖
수모를 뒤집어쓴 채, 대법원에서 쫓겨나선 감방에 처박히는 그자의 모
습을 보고 싶소.
[이런 ! 대체 그자가 당신한테 뭘 어쨌길래 그래?
[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건 내 사적인 일이라고.
잭은 손가락으로 잡지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티투스가 배후에 있었다는 걸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그팟 테이
프야 무용지물이지 않소.
[난, 그걸 입증할 수 있소.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테이프에 관해 말
- =_2_ =1 스밋 넌
=1 =1- 크 =승 [하틴 -거 뇨어포레 신 디]
'1요.다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잭은 잡지를 다시 펼쳤다,
[애브너 티투스와 통화하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할 게 뭐 있어?당신
이 직접 걸면 되지.
[여러 차례 그러려고 해보았소. 그런데 비서가 받고선 연결을 시켜
주지 않는 거요, 그러나 방법이 있소. 비서를 통하지 않고 그와 직접
통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냅을 알아냈단 말이오.
[뭔데?
[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설치해 놓은 개인 전화요.
잭은 잡지를 도로 덮고 후덥지근한 병원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래서 나더러 그 번호를 알아 달란 말이군?됐네.내가 무슨 수로
그의 개인 전화번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그리고 설사 알아낼 수
있다 해도 내가 왜?
[층분한 이유가 있소. 그자는 빅토리아 윈터스의 죽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그레이브스는 잭이 동요할 마지막 카드를 내놓곤 이야기의 마무리
를 어떻게 때듭지어야 할지를 고심했다 잭이 걸려 들 미끼는 역시 빅
토리아였다.
[뭐?이봐, 그레이브스! 제대로 애기해 봐!
잭은 떠리 끝이 주뻣 일어섰다
그레이브스는 콧잔등을 긁으며 얼핏 떠오른 은화를 생각했다.
[스틱스 딕키네 집에서 포커를 하던 날 밤 기억나시오? 난 그자와
함께 있었소. 사실 당신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더랬지만 말이오 그자
는 평소부터 빅토리아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니었던 것 같았소.
잭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 나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가기 전에 이미 당신도......?
[당신이 들어오자 난 주방으로 숨어 버렸소. 날 못 믿겠다면 당장이
라도 입증할 수 있소. 당신이 가고 난 뒤, 티투스가 당신한테서 땄다면
서 은화를 한 닐 보여 주더군. 수잔 . 앤터니 은화. 자가 새겨져 있

-.
그레이브스는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마구 지껄였다.
잭은 가슴에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서 은화를 꺼냈다. 그레이브스는 그것에 눈길을 주더니 깜짝 놀랐

[오, 맙소사! 바로 그거요. 어떻게 그걸?
[경찰이 폭탄 테러 현장에서 발견했다더군.
[그러니까 그게 그 아이의 손에까지.......
그레이브스는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둘러대던 말꼬리에 핵심
이 걸려든 것이었다.
티투스 이기 핏트, 애브
잭은 손가락으로 동전을 돌렸다. '애브너
너 디투스. 에그즈 베네딕트.'
[매클라우드. 날 좀 도와주슈. 이젠 당신도
버리고 싶지 않소?
나만큼이나 그자를 없애
[없애 버리다니?
그레이브스란 인간의 말투는 늘 그랬다. 너무 격하고 단도직입적이
었다. 잭은 그것 또한 몹시 싫었다. 그레이갛스가 고쳐 말했다.

[내 말은 그에게 물 좀 먹이자는 거요. 대법원에서 끌어내자는
요.
[난 관심 없어.
잭은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나서 잡지를 내려놓고는 일어설 준비를
했다.
[저거 보이시나?
=? ?-태귄 고터저
그레이브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벽면에 게시판이 하나 붙
어 있었다. 거기엔 '중고 의료보조기 판매, 분실한 애완견 찾음, 카풀
원함' 따위의 공고들이 붙어 있었다.
'비디오기 팝니다.'라고 쓴 메모를 준비하시오. 그리고 그 뒷면에
티투스의 개인 전화번호를 적어 놓으시오. 앞에다간 아무 전화번호나
적어 놓고. 저 게시판 왼쪽 귀퉁이에 붙여 놓으면 내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거요.
잭은 일어서서 목발을 잡고 그레이브스에게 등을 돌렸다.
[매클라우드!
절뚝거리면서 문을 향해 두어 발자국 옮겼을 때 작은 목소리로 그레
이브스가 그를 불렀다. 잭이 멈춰 섰다.
[솔직히 난 아직도 뭐가 뭔진 잘 모르겠소. 하지만 몰리 양과의 관
계에 대한 내 발언은 사과하고 싶소. 철회하고 싶소...... 나 역시 피해
자요...... 그리고.......
잭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때가 생각난 듯했다. 그러나 곧 평
정을 되찾았다.
[살해될 당시. 윈터스 양은 임신중이었다고 들었소. 유감이오.
잭은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작자가 우리 둘 모두를 '강간'한 셈이오. 매클라우
드. 거울을 한번 보시오. 당신의 몰골을 똑바로 보라구!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잭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속이 떼스꺼웠다
딸꾹질이 나왔다. 잭은 술병을 입에다 대고 병째 들이부었다. 목구
멍이 따가워지면서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턱을 타고 술이 흘렀
다.또다시 2월을 맞았다. 2월이란 달은 잭에게는 4주가 아니었다.옛
날, 하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2월은 '8주'였다. 그러나 이번 2월은
마치 ' 8주'인 것만 같았다. 그는 선 채로 눈을 감고 손아귀의 힘을 풀
었다. 술병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잠이 든 듯 평화로워 보이는 잭의 얼굴 위로 소
리를 죽인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는
좀처럼 술을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다
워싱턴 발 뉴욕 행 비행기 안에서 애브너 티투스와 엘리 그레이브스
가 나란히 앉아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낙태 수술 장면을 화면에 담자고
모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수술대 위를 비추고 있는 무영등
() 위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 번뜩이는 메스가 점점 부풀어오
른 임산부의 복부로 다가가더니 살을 가르며 파고 뜰어가서. 미끈등한
아기집을 찢고....... 아기를......
어디선가 시끄러운 유행가가 들려 오고 있었지만 고막을 울리는 그

소리조차도 잭을 비몽사몽 상태에서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잭은 수술
대 위에 누운 여자를 보았다. 빅토리아였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간호사가 그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가제로 닦아 주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걸친 커다란 물체가 그녀 쪽으로 다가섰다. 조용하게 하
지만 악의에 찬 미소로. 그리고선 그녀 위로 몸을 숙였다 갑자기 빅토
리아의 눈이 떠지더니 잭을 바라보았다. 입을 벌리고 소리없이 절규했
다. 잭의 심장이 뛰었다. 망토를 걸친 자는 몸을 펴더니 돌아섰다. 검
은 수술모에 검은 마스크. 손에는 아기가 거꾸로 들려 있었다. 발목을
잡힌 채로 아기는 토끼처럼 버둥거렸다. 빅토리아가 누워 있던 수술대
는 어느새 관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이 천천히 미끌어지더니 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빅토리아는 떠나고 없는 것이다, 잭은 아기를 향
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이 거의 닿으려는 찰나에 망토
를 걸친 자가 아기를 멀리 내던져 버렸다. 아기의 작은 양손이 허공을
마구 할퀴었다.
-따르릉.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욕실 거울 앞이었다. 가슴은 쿵쾅
거리고 있었고 얼굴엔 무슨 영문인지 면도용 비누 거품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따르릉.
그는 이마며 눈 아래며 송글송글 맺척 있는 땀방울을 바라보았다.
맥박이 목 아래서 '퉁퉁' 울리고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아랫입술에 묻
어 있는 비누 거품이 방울을 뿜어 냈다
-따르릉.
비누 거품을 대충 흄쳐내고는 침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잭?
레이젤이었다
그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나
[안녕하세요?레이켈?
[네.그런데 당신 좀 안 좋은 것 같은데요?
[네......? 아니오.괜찮아요.낮잠 자던 중이었소.
그는 탁자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7시 콱딛.
[어머, 미안해요. 어서 더 자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괜찮아요. 어쩐 일입니까?
[지난 번 만났을 때 저녁이나 한번
같이하자고 했잖아요. 내 농장으
로 바람도 쐴 겸 나오지 그래요?
'그럼 그래야지.'
그녀의 분명한 대답이 필요한 몇 가지 질문이 있었다.
[그러죠. 언제요?
[주중에는 로마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해야 되고. 일요일 저녁이
면 어떻겠어요?
[네.좋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침침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흐릿하게 방안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행운의 물레바퀴}라는 퀴즈 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화면에는 ' ......린......대...... 거......라......' 라든 몇 글자가 퍼즐 형
식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풀어 보겠습니다.
출연자가 말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땅파르가 울리고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일말의 암시라도 얻어 보려고 그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그저 빙빙 돌아가는 물레방아뿐이었다.
잭은 마지못해 전화번호부 쪽으로 손을 뻗어 가운데 쯤을 펼쳐 열었
다.
'만일 100페이지 이내에서 번호를 찾는다면 전화를 걸리라. 그러지
못한다면 다 끝난 애기다.'
그 전화번호는 고작 다섯 장째를 넘기자 눈에 띄었다.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교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입니다.
그는 찾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댔다
'그와 연결이 되면 해볼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다 끝난 얘기다.'
교환이 전화선을 연결했다. 곧이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신원
올 물어 왔다. 그는 이름을 대주고 기다렸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 ......람과......께......사라......' 라는 글자가
비춰지고 있었고 힌트는 '영화 제목'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애브너?
[그렇소만?
[잭 매클라우드올시다.
전화기 저편에서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흑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거나 아닌지.
[아니오.깨어 있었소.
[병원에 계시다니 안됐습니다. 병원 사람들 정말 재미없지요.
[동감이오. 그나저나 약혼녀와 아기에 대한 비보() 들었어요
유감 천만이오.매클라우드.정말 훌륭한 변호사였는데.......
[네. 그렇죠. 어서 쾌차하셔서 이 비극의 배후를 철저히 규명해 내
셔야죠. 그게 바로 제가 전화 드린 이유입니다. 그 동안 속상하게 해드
린 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젠 그 따위 용렬한. 잠깐만, 애브너.
그는 잠시 멈췄다.
[오. 이런, 다른 데서 전화가 왔나 봅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
니까.애브너?
그는 보류 버튼을 눌러 놓고는 그의 허벅지를 수화기로 톡톡 치며
잠시 기다렸다.
.만일 이자가 순순히 번호를 일러준다고 해도 그걸 그레이브스에게
꼭 넘겨줄 의무는 없다. 만일 그가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 문제는 영영 묻어 버리리라.'
텔레비전 화면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자판이 활짝 열렸
다.
광파르.갈채.
잭은 보류 버튼을 해제했다.
[애브너, 미안합니다만 긴급한 전화가 와 있네요. 금방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매클라우드, 사실은 저.......
[딱 1분만 줘요.네?당신과 나눌 얘기도 아주 중요한 겁니다.
한숨소리가 들려 왔다.
[좋소.
[아참, 병원 교환을 통해서는 정말 지겹도록 연결하기가 힘들던데,
혹시 개인 전화를 개설하셨으면......?
말꼬리를 흐리고 나서 기다렸다. 긴장감 때문에 무릎이 떨려 왔다.
55_17로 거시오. 자동응답기가 나오면 이름을 대시오. 그러면
내가 받으리라.
[네.곧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물레방아가 빙빙 돌다가 500달러 칸을 아슬아슬하
게 넘어서는 '깜짝 코너' 칸에서 멈췄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찰콰.
총에 탄환을 장착한 기분이었다.
.
[자 여러분. 제퍼디 ()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그레이브스는 패러다이스 호텔의 색 바랜 붉은 담요 위에 펜치를 니
려놓고는 낡은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양귀에는 텔레비전과 연
된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잠시, 사회자의 과장된 몸짓을 덤덤하게 '
라보던 그는 무릎 앞에 펼쳐 놓은 전자제품 설명서에 눈길을 떨구=
다. 그리고는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다시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
다. 커버를 벗겨 낸 비디오기 속에는 작은 트랜지스터, 콘덴서. 진공=
따위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얇은 금속판이 있었다. 그는 전선들
한쪽으로 치우고 첫번째 다이너마이트를 금속판 뒤. 빈 공간에 조심=
럽게 집어 넣었다. 길이는 딱 맞았다. 그는 두 개의 폭약을 더 밀어 =
고 네 번째 것도 마저 집어 넣으려 했다. 공간이 부족했다. 뭐 어떠랴
세 개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애브너 티투스의 왕국을 산산조
내버리기에는 말이지.
그는 세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커내서 테이프로 그것들을 한데 묶=

그리고는 조금 전에 접착제로 붙여 놓은 적외선 감지기가 제대로 =
어 있는지 비디오기의 환기구 뒤쪽을 살폈다. 적외선 감지기는 재대]
들러붙어 있었다. 이제 비디오기는 됐고, 다음은...... 전화응답기 차례
였다. 그는 아까 오후에 길 아래 전파상에서 애브너 티투스가 사용하
고 있는 것과 똑같은 기종인 500 한 대를 사왔었다.물론 예의 법조
계신문을 통해서 얻은 정보였다
그는 몇 주 동안 탐독한 기술 서적들을 통해 익힌 상식으로 기계를
조작해 나갔다.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사용자가 녹음된
내용을 듣기 위해서 버튼 세 개를 누르면 그걸 감지한 센서는 녹음 재
생모터가 돌아가게끔 전기 에너지를 보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재생
모터 대신 적외선 발신 장치로 보내지도록 재배선하기만 하면 그만이
었다. 그렇게 되면 응답기의 발신 장치가 비디오기의 감지 장치로 적
외선을 보내게 되고 그곳으로부터 콘덴서로, 그리고 콘덴서에서 축적
된 전기 에너지가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에 충격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응답기의 비밀 번호를 뇌까렸다
3. 1.6.
그러고 나서 제조일 따위를 기입해 놓은 표딱지를 떼어 버렸다. 만
의 하나 누가 이 기계의 출처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
다. 잠시 후. 그는 벗겨 놓았던 커버를 다시 응답기에 씌우고 나사를
조였다. 이제,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해 보는 절차만이 남았
다 그는 응답기의 코드를 꼽았다. 그리고 비디오기의 전선을 전파상
에서 얻어 온 구형 카메라 전구에 연결시켰다, 그 전선은 '그날'에는
폭약의 뇌관에 연결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침대 위의 잡동사니 속을 뒤져서 쓰레기 컨테이너에서
집어 왔던 전화기 자판을 찾아내서는 그것을 응답기에 연결시켰다. 이
제 꼬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 역사상 유명한 연인들'칸의 100점을 선택할게요.
퀴즈 쇼 출연자가 말했다.
[네.좋습니다.문제 나갑니다아-
얏 이 두 연인은 각각 한 나
라의 국왕과 여왕으로서.......
그는 이어폰을 빼버렸다. 그러고 나서
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며칠 후면 다가을 실제 상황
부스 앞에 선다. 그의 개인
-'소리가 들린다.
티투스가 잠에 떨어진 한밤중. 공중전화
전화번호를 돌린다.메시지를 남기라는 '
녹음 재생 버튼을 누른다.
3. 1. 6.
그는 침대 위에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비록 연습이지만 긴장이 되
'1 -' 소=1가 들리면서 테이프71
었다. 응답기의 버튼을 눌렀다.
돌아갔다.
3. 1.6.
버튼을 다시 눌렀다. 잠시 후, 테이프가 멈췄다.
응답기에서 10센티미터 가량 떨어진 비=
제대로 조작이 되었다면
오기로 자외선이 쏘아졌을 테고,비디오기의 콘덴서는 전구를 -=
날에는 다이너마이트를 _폭발시킬 만큼 충분한 전기 에너지를 ?
서히 모아 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제대로만 된다면 폭발은 오늘 밤=
작은 섬광에 불과하겠지만 그날 밤에는 엄청난 화염이 될 것이다. '
쨌든 45분 후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이어폰을 끼: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텔레비전 화면와 눈길을 주었다.
벌써 여러 날 밤을 술로만 버티면서,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던 탓에
몸이 쑤셔 왔고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눕고 싶었다. 스르르 감겨
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 뜨며 침대 위의 잡동사니들을 바닥으로 쓸
1 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먼지가 피어 올랐다. 수없이 많은 먼지 알갱
들이 텔레비전 화면의 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그의 머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순간, 그것들이 자기를 공격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
었다.
요즈음의 그레이브스는 그만큼 예민해져 있었다.그는 손등을 털어
서 그것들을 내려앉게 하려고 했지만 먼지 알갱이들은 그의 손바람 덕
분에 오히려 더 거세게 날아올랐다. 화가 난 그레이브스는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양손을 허공에다 마구 휘저어댔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의
주먹이 목에 차고 있던 보호대를 세게 건드렸다. 엄청난 통증이 밀려
왔다. 마치, 겁탈을 당하던 그날 밤처럼 의식이 가물거릴 정도의 아픔
이었다.
그는 이를 악다물고 눈을 감았다. 이제 집중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홀러나오는 소리와 그의 머릿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숨을 쉬어...... 긴장을 풀고...... 숨을 쉬라구......,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엉겁결에 팬티에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한다. 집중하자. 엘리 집중, 집중
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있었다. 서서히 정신이 육체를 떠
나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 맨발로 걷는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첨탑,아
무도 그를 잡을 수 없는 곳. 여기서 떨어진다면...... 무섭다. 그러나 =
어지라고 떨어지라고 자꾸만 유혹을 한다. 간신히 참아 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작은 방. 어린 소년이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 =
워 있다.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게 덮인 어떤 사내가 소년 위에 서 =
다. 마치 로마 병사처럼 가슴엔 방패를 그리고 젖혀 올려진 가죽 스
트 아래로는 긴 창을 갖고 있다. 그 창으로 소년의 몸을 푹푹 찌른다
붉은 피가 소년의 허벅다리를 타고 흐른다.
'아아! 그 새끼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죽여 버릴 거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하는 불빛에 그레이브스는 집중에서 깨0
났다. 통증은 이제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제 거의 완숙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웃음소리가 들=
왔다. 어느새 프로가 바뀌어 이제는 시시한 코미디물이 방영되고 있=
다.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공중으로 퍼져 올랐던 미세한 가루들이
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퍼뜩 고개를 들어 카메라 전구가 있던 쪽을 =
펴보았다.
없었다.까맣게 그을린 놋쇠 꼭지만을 남긴 채.전구는 사라지고 8
었다. 주변은 온통 횐 유리 가루투성이였다. 그의 눈이 점점 커지며 =
가에는 번들거리는 미소가 일었다.
'오! 제대로 작동됐어!'
레이챌은 델피나 리날디 박사와 함께 길거리 카페에 앉아 산 마르코
꽝상의 자갈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하_=_의 햇멎은 광장을 에워싼 황갈색 건물들과 화단을 비춰 주고 있었
다. 그들의 앞에 놓인 붉은 포도주잔에도 잊지 않고 한 점의 햇살이 비
춰 들었다. 이곳처럼 고색 창연한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레이챌은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는 것을 느꼈다.
[여기 있어.
그녀는 리날디 박사에게 얄팍한 서류 몽치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이게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온 모든 면역 억제제의 종류 및 투약
순서를 기입한 자료야.
[레우케나스(백혈구 증가 억제제)의 투여 정량도 들어 있니?
[응.
키가 크고 지중해 사람 특유의 가무잡잡한 피부에, 우아한 실크 드
레스를 걸쳐 입은 리날디 박사는 건네받은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신이 뿜어내고 있는 관능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태도였
다. 리날디가 서류를 흩고 있는 동안 레이챌은 빵 한 조각을 포도주잔
에 떨어뜨리고 광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몇 블록 떨어진 혼잡한 길거
리에서는 작은 승용차들과 오래된 트럭들이 시끄러운 소음을 내고 있
었지만 이곳 광장의 분위기는 비교적 조용했고 공기 또한 그다지 탁하
지 않았다
안락한 교외의 풍경이었다. 2월도 하순이고 보면 관광객들의 발길
도 뜸해진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한 번 로마 사람들만의 도시가 되고
몇 안 되는 레이챌과 같은 방문객들만이 고도()의 풍광을 여유롭
게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레이챌이 로마를 찾은 까닭은 '국제 장기이식 외과의사 총회베 참
석해서 동물의 간을 인간에게 이식하는 데 있어서의 제반 사항을 논문
으로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사흘 동안은 세미나, 강연 그리고 저녁 식사로 이어지는 규칙
적인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호텔 라
운지에서 동경에서 온 명석한 여의사들 -그녀들은 고명한 레이챌
박사를 직접 만나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왔다 -과 매일 밤 토론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토론이랄 수도 없었지만. 레이챌의
이식 수술팀들과 마찬가지로 그 일본인 여의사들 역시 레이챌의 카리
스마적인 성격과 과감함 그리고 박학 다식함에 매료되어 곧 그녀의 이
야기를 경청하게끔 되었다.
사실 그들이 레이챌을 몹시 만나고 싶어했던 이유는 아직 자신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이식 분야에 있어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
의 전문가적 위상을 굳히고 있는 그녀로부터 아주 첨예한 것까지 배워
가고자 함이었다.
처음에는 약간 경계심도 일었지만 점차 그들의 의사로서의 기술적
인 통찰력과 그 진지한 자세로 인해 레이챌은 김썽을 받게 되었다. 그
래서 비록 환자들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그녀들이 물어 오는 질
문에 대해서는 하나, 혹은 여러 개씩의 실제 임상 경험에 근거해 가능
한 한 많은 설명과 정보를 일러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포도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아홉 살쯤이나 먹었을
까? 거리의 꼬마 부랑아 한 녀석이 붉은 제라늄 한 송이를 사달라고
졸랐다.
꼬마의 앞머리는 이마에 일직선으로 덮여 있었고 얼굴은 햇볕에 그
을린 채로 더러웠다.
리날디는 손등을 털어서 꼬마를 쫓아 버리곤 다시 서류를 검토하며
질문을 던졌다.
[유독성()은 어떤 것 같애?
[크게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아.
레이챌은 서류의 한 행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 06'을 쭉 써왔는데 부작용은 없었어. 하이
퍼칼레미아(고칼륨 혈증)는 18시간이면 저절로 용해되거든.
꼬마 부랑아가 돌기둥 뒤에 숨어서 얼굴만 삐죽 내밀고 그녀들을 살
펴보고 있었다. 리날디는 검토를 마치고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

[이제 고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레이챌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대답했다.
23일라에 안 남았어,
리날디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려서 무언의 건배를 했다. 두 사람이
막 잔을 비우려 할 때 시끄러운 발자국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꼬마
부랑아가 그들을 향해 죽기살기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스
쳐 지나가면서 꼬마는 바닥에 놓여 있던 레이챌의 핸드백을 낚아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만 바닥에 나윙굴고 말았다. 녀석은 제법 빨랐지
만 관찰력이 부족했다. 레이챌이 가방 끈을 청동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다리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웨이터가 꼬마의 뒷목을 잡고 번쩍 들어서는 인
도에다 내동댕이쳤다
레이챌은 웨이터에게 다가가서 괜찮으니 꼬마를 여기 있게 파두라
고 손짓해 보였다. 웨이터가 동전과 화장품 나부랭이 등이 흐트러진
가방 속의 내용물을 주워서 테이블에 올려놓는 동안 레이챌은 겁을 집
어먹은 꼬마를 테이블 앞으로 데리고 와 세워 놓고는 면 냅킨을 물에
적셔서 까진 무릎을 닦아 주었다. 상처를 닦아 주는 동안, 그녀는 서투
른 이탈리아 어로 꼬마에게 그렇게 빠르고 용감한 사람이라면 도둑 대
신 의사가 되야 한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리날디는 그런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생각났다는 듯 시계에 눈길
을 한 번 주고는 일어서서 친구의 볼에 작별 키스를 했다.
[이렇게 일찍 헤어지게 돼서 몹시 섭섭한데. 그나저나 우리 연락 좀
자주 하며 지내자.
[그래.사실 난 매일 네 생각해.
레이챌은 그떻게 말하며 리날디의 손을 꼭 잡았다.
리날디가 멀어져 갔다.
꼬마는 가만히 서 있었다. 리날디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레이챌은 꼬마를 무릎 위로 안아 올려서 그의 머리카뤄을 손빗으로 다
듬어 주었다. 영어로 몇 마디 건네 봤지만 꼬마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
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는 꼬마의 머리를 자신의 목 아래에 파묻고 가
만히 한 손으로 눌렀다. 꼬마의 눈꺼풀이 무겁게 꿈벅이더니 마침내
큰 한숨과 함께 사르르 감겼다.
그녀도 꼬마의 햇빛 그을린 냄새 나는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마치 낮잠이라도 자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손동작이
멎었다.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완전히 졸고 있는 '피에타' 조
-대기 티저
상이었다. 그때 꼬마가 눈을 반짝 떴디.
그는 레이챌의 품에서 빠져 나와 테이블에 잇던 그녀의 콤팩트를 움
키쥐고는 거리를 향해 달음질켰다. 잠깐 사로잡혀 있다가 자유를 되찾
.= 파랑새 같았다, 그녀는 꼬마가 발에 맞지 않는 운동화를 철벅거리
년서 분수대 쪽을 돌아 건물 꼬퉁이 뒤로 사라지는 것을 지그시 바라
'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부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바에
앉아 있던 어떤 사내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레이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또 다른 파랑새 한 마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1! 그녀와는 다른 나뭇가지에 둥지를 꾸미고 편히 쉬고 있을 파랑
새.빅토리아.

=뻘
6층에서 화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설비 기술자가 장비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밀고 복도로 내려섰다. 간호사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사내는 손수
레를 밀며 계속 걸어갔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의 관심을 끌었을까?'
'턱수염?
"흠쳐 입은 점퍼?'
'초조해하는 눈동자?'
'전선 무더기와 전화 자동응답기?'
'어쩌면 뻣뻣한 고개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목 보호대를 차고 =
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휴! 힘들다, 아닌게아니라 목 보호대가 있으=
좋으련만.'
그 대상이 뭐가 됐든 간호사의 호기심 서려 있는 눈동자가 그를 =
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티투스의 병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잡지를 읽으며 앉아 있=
경비원이 고개를 들고서 눈짓으로 물어 왔다.
[비디오기 교환하러 왔는뎀쇼.
사내가 어눌하게 말했다.
그의 머리는 마치 가는 대나무 가지 위에 얹어 놓은 볼링 공처럼 바
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고통에 겨워 이맛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경비원은 수첩을 집어서는 뒤적저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들
고는 장비들을 훌어보았다.
[뭘 교환하러 왔다 그랬소?
[비디오기요.
가짜 수염 아래의 살갗이 가려운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레이브스
가 대답했다. 온몸에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
글송글 맺혔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힘이 들어서 땀이 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따
라서 드러내 놓고 땀을 씻는 게 나을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고 이마를 흄치고는 가짜 수
염도 다듬었다. 경비원은 다시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일지에는 전혀 기록이 없는데.
그는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로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었다. 그레이
브스는 자꾸만 떨려 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면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초조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돼. 입술도 빨지 마! 도망가서도 안 된
다!'
경비원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레이브스는 경비원의 손이 책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다
음 순간 권총의 총구가 그를 겨누겠지 하고 상상했지만 그 대신 경비
원은 벌떡 일어섰다.
[여기서 좀 기다리시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지, 열을 받아서 그런지 퉁
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경비원이 막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병실문이 열리며 외투를 입고 모
자를 쓴 페퍼 루미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병원 밖으로 외출하
려던 참이었다.
경비원이 멈춰 섰다,
[루미스 양. 비디오기 수선에 대해 둬 들으신 말씀
[없는데요.
그레이브스는 눈썹을 치켜 뜨며 태연히 말했다.
[그래요?그럼 됐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죠. 있으십니까?
그는 수레를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때 루미스가
물어 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레이브스가 뻣뻣한 상체를 돌려 세웠다.
[새 비디오기를 가져다 달라는 전화를 받았드랬습니다. 지금 사용
하고 계신 게 망가졌다고 그러던데요?
루미스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당겼다 놓았다.
[그럼 판사님께서 직접 전화하셨나?
[루미스 양.대법원장님께 직접 여쭤 보시지
경비원이 끼여들었다.
[지금은 안 돼요.주무시고 계신다구요.
'역시 정확하구만.' 그러세요.
그레이브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법조계 신문에서 보도한 내용 그대로였다
. 3시의 낮잠. 그 역시 =
시간에 맞추어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됐습니다.그냥 가죠.뭐,
그례이브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수레를 밀었다.
헛수고 시켜서 미안해요. 허락 없이는 들여보낼 수가 없어서 그래
요.
경비원이 말했다.
[판사님은 영화를 좋아하시는데.......
루미스가 흔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잠시 시계에 눈길을 주
닌는 물어 왔다.
[얼마나 걸려요?
[금방입죠. 헌 기계 플러그를 뽑고 새 기계 플러그만 꽂으면 그뿐인
걸요.
그녀는 눈짓으로 경비원에게 물어 봤다. 경비원은 주의를 주고 나서
병실문에 부착된 커다란 손잡이를 잡았다. 그레이브스가 수레를 밀고
들어가는 동안 경비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턱이 없었기 때문에 수레에 실린 장비들이 들썩거리는 일은 없었
다 다만 기름칠을 한 고무 바퀴가 타일 바닥을 미끄러져 나가면서 내
는 작은 소음뿐이었다.
그레이브스는 침대 발치 쪽으로 수레를 밀고 갔다. 바로 지척에서
6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고단한 허파가 내는 드르렁
거리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수례를 멈추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싸구려 호텔에서 수십 번씩이나 반복했던 그 작업을.
몰리는 잔뜩 널려 있는 잡지 더미를 피해 발을 디디며 거실로 들어
섰다. 바닥은 온통 짜부라진 맥주 깡통과 소다수 캔 등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트레이닝 바지와 양말들이 바닷가로 떠밀려 온 해초들처럼 후
줄근한 채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책, 연필, 종이 쪼가
리. 팝콘 찌꺼기까지 뭐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었다.
잭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의 빛깔을 간파하고 슬쩍 능쳤다.
[음 -,청소를 좀 해야겠군.
[휴! 이건 손으로 할 일이 못 되네요. 시간 절약 하려면 화염 방사
기라도 쓰셔야겠어요.
그는 슬그머니 소다수 캔 하나를 집어 들고는 그것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칼, 셔츠 자락은 비죽
이 빠져 나와 있고.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영락없는 난파선의 선원 같은 몰골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고 서서 마치 그 온갖 쓰레기들을 이제서야 알아차렸
다는 듯이 둘러보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여긴 꼭 쓰레기
처리장 같지 않소?
몰리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왜, 브루클린의 쓰레기 처리장 말이오. 지난 늦가을 우리 둘이 손
전등을 들고 시궁쥐 사냥을 다녔던 곳, 기억 안 나오?
그녀는 대답 대신 의자에 얹힌 빈 피자 상자를 치우고 그 위에 앉았
다,
잭은 소파에 앉아서 뻣뻣한 왼쪽 다리를 옆 자리 방석 위에 걸켰다
석고 붕대는 이틀 전에 이미 떼어 낸 상태였다.
[웬일로 들렀소?
[해도, 해도 전화를 안 받잖아요. 윈스턴 문제로 당신이 어떻게 하
고 있나 걱정도 되고 해서 겸사 겸사.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얼굴에 좀 전까지 드리워져 있
던 거리감은 몰리의 정겨운 대답 덕분비 깨끗이 가셔져 있었다.
[윈스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오...... 그나저나 몰리. 당신 꽤 좋
아 보이는군, 어때?
[네. 좋아요. 다시 방송국에 나가면서 아기인형 살인사건을 계속 파
고 있어요. 물론 조만간 기삿거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손을 떼야 되겠지만 말예요.
[뭐 새로운 사실이라도?
[글쎄요.
잭이 웃었다.
[그걸 원하는 모양인데. 좋아. 대외비(.} 로 하고 속시원히 얘
기나 나눠 봅시다.
몰리는 의자에 앉은 채로 상체를 수그렸다.
[엘리엇 랜디 말이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배를 꿰맨 사람이 바로 아
기인형 희생자들을 꿰맨 사람인 것 같대요.
잭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아직 뻣뻣한 왼쪽 무릎을 구부려서 내려놓
곤 자세를 바로했다.
[무슨 얘기요?
[그 네 사람의 희생자들에게서 독특한 형태의 봉합 매듭이 공통적
으로 발견됐대요.
[어떤 매듭?
[아버() 매듭이라고 한대요. 제물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매듭이
라더군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두 다 왼손잡이에 의해서 꿰매진 것
같다고도 했어요.
잭은 몸을 들어서 소파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중국식 장기
판에 손을 뻗어서, 노란색 돌 하나를 구멍 속에 집어 넣었다.
[드디어 해내고 말았어.몰리.
[뭘. 해내요?
[사라져 버린 연결고리를 찾아냈단 말이야. 애브너 티투스라는 존
,를 단 한 방에 자빠뜨릴 수 잇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어. 어떻게. 둬가 어떻게 됐다구요?
[아버 때듭 말이야. 그것이 아기인형 회생자들과 제노비아 데이비
스를 연결해 준다. 맞아? 사실, 난 최근에 제노비아 데이비스와 티투
스를 연결시켜 주는 뭔가를 찾아냈거든. 이제 그 두 개의 고리에 모두
티투스가 연결돼 있다는 게 입증된 거란 말이야.
[잠깐. 잠깐만요. 제노비아 데이비스와 티투스 사이에 무슨 연결호
리가 있다는 거예요? 작년에 그걸 물고 늘어졌다가 톡톡히 망신만 =
해 놓고선. 기억 안 나요?
[기억나지 왜 안 나겠어. 하지만 난 그 편지 봉투말고 다른 걸 말
고 있는 거야. 새로운 줌거가 나타났다구.
그녀는 턱을 목 아래로 끌어당겼다.
[무슨 증건데요?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수술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곧 입수
네로 돼 있어,
그녀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비디오 테이프라구요?
[그래,그녀를 수술한 자가 그 현장을 녹화해 놓았다구.
[왜.왜 그랬데요?
[세상 사람들에게 7개월 된 태아의 죽음이 어떤 건지 보여 주기 위
서였다나?
=1녀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면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오오! 정말 잔인하군요, 대체 누가 그랬대요?
[티투스. 직접 수술이야 못했겠지만 그런 상황을 조성한 자가 바로
' 브너 티투스였던 거지.
[왜. 그가?
[자기를 대법원장 자리에 앉게 해준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지. 엘리
그레이브스에게 말이야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던 거야. 티투
스는 제노비아 데이비스가 임신 24주가 될 때까지 그녀의 낙태 허가
판결을 고의로 지연시켰지. 그리고 때가 되자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수술할 준비를 갖춰 준 거야. 바로 내가 그녀의 성경책 갈피 속에서 찾
았던 뽕투 위에 적힌 대로지. '병원', '자정', 그리고 그의 전화번호.
제노비아는 귀뜀받은 대로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어느 병윈인가를 찾
아갔지. 그러나 수술 도중 뭔가가 잘못돼서 그녀와 아기. 둘 다 죽게
되고 만 거야.
몰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다는 표정은 경우
에 따라서는 비웃음을 띤 표정으로 잘못 읽혀질 수도 있는 법. 그녀의
표정을 잘못 읽은 잭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당신 도저히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은데.
[그래요.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당신 애기를 들으면서 곰곰 생각
해 보니 믿을 수도 있겠어요. 당신 애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거든요.
[그래?그게 뭔데?
'여전히 대외비 맞죠?
[물론.
[엘리엇 랜디의 말에 따르자면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검시 소견으로
는 직접적인 사인이 수술중에 일어난 다량 출혈이래요. 자기네들끼린
''라고 부른대요.때때로 자궁 수술 도중에 발생한다더군요.
[오! 그것 참. 앞뒤가 척척 맞아 들어가는군.
잭은 일어서서 가볍게 절룩거리며 거실을 서성댔다
[그래 맞았어. 몰리, 난 느낄 수 있어. 마침내 그 썩을 인간한테 결
정타를 한 방 먹여 줄 수 있게 된 거야. 그리고 당신은 엄청난 기삿거
리를 잡게 된 거라구.
[비디오 테이프는 지금 어딨죠?
[엘리 그레이브스가 가지고 있어.
몰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엘리 그레이브스와 연둬이 닿아요?
[응,자주는 아니더래도.
[맙소사. 잭. 그런 인간하고 어울려서 뭘 어쩌려고 그래요? 그자는
탈옥수예요. 아니. 그건 별문제라고 쳐도
게다가 당신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구요.
새빨간 거짓말쟁이잖아요.
[나만큼이나 티투스도 미워하고 있어,
[티투스를 미워한다구요?그레이브스는 티투스의 강력한 후원자가
아니던가요?
[정치적으로야 그렇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형오하고 있
=.
[그래요?
너무나 엄청난 정보의 흥수였다. 몰리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을 가
다듬어야 했다.
[잠깐만요, 잭, 천천히, 한 번에 한 가지씩. 천천히 나가 보자구요.
대체 온갖 사람을 다 제쳐 두고 그레이브스가 유독 당신을 티투스 공
략의 동지로 삼게 된 이유가 뭘까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거든,
[꿔예요. 그게?
[티투스가 입원실에 설치한 개인 전화의 번호.내가 그에게 그걸 알
려 주면 그리로 전화를 걸어서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낙태 수술에 관
여했다는 사실을 티투스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언급하도록 유도하겠
다는 게 그레이브스의 계획이야. 물론 통화 내용은 녹음이 될 거구, 그
녹음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를 함께 묶어서 '쾅' 터뜨려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애브너 티투스는 절단나는 거지.
몰리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잭.나는.......
[왜 내 얘기가 뭐 잘못된 것 같아?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풋내기라서 그런지 나는 애브너 티투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래야 믿을 수가......,
[이봐 몰리. 좀 넓게 생각해 봐. 당신은 풋내기일지는 몰라도 이것
저것 주섬주섬 모으는 데는 선수급 아냐?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고 기삿거리에 달려들진 않아
요.
그녀는 무릎 위로 한쪽 팔꿈치를 짚고는 상체를 숙이면서 냉랭한 어
조로 말을 이었다.
[지난 번 시꺼 때 그 작자가 당신과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새빨간 중
상모략을 해댔는데도 그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나요?
[만일 그자가 티투스를 목표로 삼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않았
을 거야.
[그자는 티투스보다는 당신을 더 무너뜨리고 싶어할 텐데도요?
[그는 나와 티투스를 동시에 무너뜨리고 싶어하고 있지. 하지만 이
번 사건에서는 그렇게 안 되지. 당하는 건 티투스뿐일 테니까!
[대체 그자는 티투스에게 무슨 원한이 그떻게 깊대요?
[글쎄, 거기에 관해서는 말을 안 하려고 들어. 이건 그저 내 추측인
데, 한번 들어나 보라구. 모든 음모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지. 그 음모
에 관여한 자들이 언젠가는 사이가 벌어지게 돼 있다는 사실 말이야.
자. 몰리. 생각해 보자구. 그레이브스와 티투스 둘 다 제노비아 데이비
스의 낙태 수술에 관련이 있다면 이제 티투스는 그레이브스가 자기를
협박해 올 것이 두렵겠고. 그레이브스는 티투스가 자기를 제거하려 들
것이 두렵겠지. 그래서 그레이브스가 티투스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려
든다!
[와아! 정말 대단한 상상력이군요, 냉전은 끝났다고 들었는데 그건
구시대적인 냉전 논리 아닐까요?
[몰리. 죽느냐 죽이느냐 하는 것이 꼭 냉전에만 있는 것은 아냐. 티
투스와 엘리 그레이브스 두 사람 모두 도박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사
실을 잊으면 안 돼.
그는 뻣뻣한 왼발을 편 채로 상체를 숙여서 바닥에 윙굴고 있는 스
웨터를 집어 들고서는 그것을 주방문 쪽으로 내던졌다. 세탁기가 있는
곳이었다.
[어쨌든 그레이브스 역시 제노비아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게 틀림
없어.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을 수
가 없지.
[그자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사실들
아닌가__?
잭은 침묵을 지켰다 몰리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레이브스가 또 한 차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도 몰라
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에다가 논리적인 추론을 덧붙이면 아주
그럴듯한 각본이 나오게 되죠. 제노비아의 사인( 이 무언지 그가
얘기하던가요?
[정확히는 모르겠대.그냥 수술받다가 뭔가가 잘못돼서.......
[오....... 대단한 발견이군요. 그건 이미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던 사
실이잖아요.
몰리가 비꼬았다.
[이봐 몰리, 하여튼 그도 이 사건에 관여돼 있다니까.......
잭은 자신의 추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억지 비슷
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제노비아가 죽었을 때 그가 수술실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봐
고작 1년이었지만 의과 대학에 다녔던 경력이 있으니까 말이지.
[그거야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네요? 아, 그러
고 보니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 비디오 테이프에 수술한 사람의 얼
굴이 나타나 있대요?
[그레이브스 말로는 화면에 나타나는 건 수술 장갑 낀 손뿐이래.하
지만 누가 수술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못 돼. 중요한 건 티투스가 배
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입중해 내느냐 하는 거지.
몰리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흑시 말이죠. 티투스의 주치의가 제노비아의 수술을 집도했
을 가능성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헬 말이오? 그 여잔 아니지. 그럴 확률은 전혀 없어. 그녀에게
있어서 티투스는 적이니까.
[적이라구요기 그녀는 티투스의 신장 이식 수술을 해줬죠, 또 지난
번엔 응급 수술까지 해서 생명을 건져 줬어요. 아무튼, 레이챌은 오랫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에요.
그가 양말 한 켤레를 집어서 던지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는 몰리가
말을 계속했다.
[이식 수술 전문의가 복막염 수술을 했다,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긴 뭐가,둘 다 외과의사가 할 수 있는 수술이잖아.
[아니에요. 아무리 레이챌이 티투스의 주치의라 할지라도. 그 병원
은 종합병원이잖아요. 외과의사마다 전문 분야가 있는 법인데, 대법원
장 정도 되는 사람의 수술이라면 복막염 계통으로 명성이 있는 외과의
사가 그 수술을 맡았어야 퍼지 않겠어요? 나도 엘리엇 랜디에게 배운
게 좀 있다구요. 병원에 관해서 말이죠. 레이웰과 대법원장 사이에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요.
[그저 느낌이야, 아니면 근거 있는 소리야?
[맙소사. 꼭 엘리엇처럼 말하는군요.
[엘리엇처럼 말하는 게 좋다는 뜻이야, 아니면 싫다는 뜻이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병원에서 열겼던 레이웰 레드패스 박사의 기자회견 기억해요? 그
회견에서 레이챌이 이쑤시개 하나를 내놓았었죠. 티투스의 창자 속에
서 끄집어 낸 것이라고 하면서 말예요. 난 그날 회견장에 늦게 도착했
었어요. 늦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기자회견이 끝난 뒤였죠. 그런데 촌
단 위에 그 이쑤시개가 그대로 놓여 있더라구요. 비닐 봉지에 담긴 치
로 말이죠. 나는 그걸 가져다가 엘리엇에게 보였죠. 검사를 마치고
.1 엘리엇은 그 이쑤시개가 결코 인간의 내장에서 나왔을 리가 없다고
파더군요. 변색이 돼 있질 않더래요. 위를 거쳤으면 위산 때문에 마땅
변색이 되는데 말이죠. 그리고 쓸개즙이나, 염산도 전혀 추출되지
찮았대요.
[글쎄. 그렇게 전문적인 거야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꿔 하러 그런
꾸며 내겠어?
[그 말 한 번 잘했어요 잭. 그러니까 그녀 흔자서가 아니라 그녀와
디투스 그 둘이 뭔가 음모를 꾸민 거예요.
닝는 어질러져 있는 신문 쪼가리들을 챙기며 입을 뻤다.
[이봐 몰리. 레이챌 레드패스가 애브너 티투스와 훤가를 공모했다
고 짜맞추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라에 안 돼, 티투스에 대한 그녀와 빅
토리아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데. 그 두 사람은 그자를 침몰시키기 위
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구.
[바로 그 점에서 당신의 판단력이 흐려진 거예요. 빅토리아 때문에
말예요. 몰라요? 빅토리아가 낙태 시술 병원 폭파를 응징하기 위한 복
수극에 관여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는 형사들이 아직도 있다구
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소파에 앉아 왼쪽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하면서 말을 이었다
[만의 하나 레이챌이 어떤 음모에 관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
타난다면 어쩔 수 없이 믿겠지. 그러나 빅토리아는?
잭이 갑자기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왜요?
[빅토리아의 장례식날 일어난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 진회색 정장
을 한 어떤 여자가 레이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고 있더라구.
그러다가 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선 사라져 버렸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상해.
[아마 울고 있는 모습을 남에게 들킨 게 창피했었나 보죠. 그런데
누구였어요?그 여자 말예요.
적이 있는 여잔데 그게 어딘지
[잘 모르겠어. 틀림없이 어디선가 본
생각이 안 난단 말씀이야.
[어떻게 생겼어요?
30대 중반쯤? 모랫빛 머리칼을 검은 모자 속으로 틀어 올리고 있었
어.
[레이챌의 이식 수술 팀원 가운데 한 사람 아니에요?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너무 세련됐어. 의사라기보다는 로비스트
나 변호사 같았어. 게다가 수술팀의 의사라면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
1. 난 그 사람들을 추수 감사절 파티 때 모두 만났었단 말이야.
빈 깡통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잭은 말을 이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그 의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저녁 식탁에 얼굴
을 안 내비치긴 했어.
[어떻게 알아요?
[장작을 가지러 밖에 나왔다가, 축사(숱)에 연이어 지어진 어떤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와 음악소리를 들었어. 피브 칭
박사는 그 안에서 누가 일을 하고 있다고 그러더구만, 일 끝나면 파티
장에 나타날 거라고.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저녁 식사 시간 이후크
파티에 합류한 사람은 없었어.
[어떤 음악이었어요?
[엘비스 건데. '러브 미 텐더볐던 것 같아.
[좋은 노래죠.
잭은 빈 깡통 두 개를 더 집어서 테이블에 세워 놓은 깡통 위에다 =
아 을렸다.
[돌아오는 일요일날 레이웰과 저녁 약속을 했어, 그 자리에서 이쑤
시개에 관해 물어 봐줄까?
그녀는 잠시 딴생각하는 낯맞이 되었다.
[그래 주면 좋죠.
그녀의 눈길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필러덴드론 화분에 머물렀다
[세상에, 잭. 필러덴드론처럼 강한 덩굴식물도 다 죽이다니 정말 대
단하군요.
[왜 저렇게 시들시들한지 모르겠어. 때일 물을 주는데.
[물을 너무 많이 주니까 이떻죠.
몰리가 화풍을 들었다. 시든 이파리를 휴아 내기 위해서였디.
[버리지 마!
그녀의 동작을 오해한 잭이 나직이 그러나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녀는 화분을 제자리에 갖다 놓곤 조용히 앉아서 죽은 이파리들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것이죠?그렇죠?
그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몰리는 이파리들을 휴아 냈다.
[몰리.......
[대답할 필요 없어요. 멍청한 질문이었어요.
그믈는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며칠 간 만이라도 어디 볕좋은 곳에 다녀오지 그래요.몸도 마음도
다 지쳐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었어. 비행기표까지 샀었지. 세인트 토마스
행으로. 그러나 떠나질 못했어.
그는 깡통을 하나 더 올려놓으며 말을 계속했다
[화이트 만() 생각나?신선한 바닷가재와 차가운 아이스크림.
[나 혼자만 수영하고 당신은 줄곧 서류만 뒤적이고 있던 게 생각나
요,
그는 계속해서 깡통 탑을 쌓아 나갔다.
[지금 내가 하려는 부탁에 대해, '싫다.'라고 대답할 만한 많은 이유
를 갖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
[잭.
[하지만 나와 함께 떠나. 응? 그래 주겠어?
[아뇨. 잭 그럴 순 없어요. 진심이에요.
[친구로서 함께 가자는 거야. 내일 아침에 떠나서 월요일 밤이면 돌
아올 수 있을 거야 ]
[내일 떠나서 월요일 밤에?장례식엔 참석 안 하구요?
그는 흔들거리는 깡통 탑 위에 하나를 더 올리려다가 말고 물었다.
[무슨 장례식?
깡통 탑이 우르르 무너졌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어머, 잭. 난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윈스턴. 윈스턴이 오
늘 아침에 숨을 거뒀어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참
그는 빈 깡통을 손에 쥔 채로
담한 표정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아까 윈스턴에 대해 얘기할 때. 당신이 '믿기 어렵
다.'라고 말하길래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난 당신이 그의 혼수 상태에 관해 말하고 있는 줄 알았어.
몰리는 일어서서 잭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하릴없이
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빈 깡통
[장례식이 언제라??
[월요일 오후예요.비행기 타고 함께 갈래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뒤쪽 벽면에는
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잭과 윈스턴이 나란히 앉아 수북이 쌓여 있
선거 전단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잭의 첫
.째 선거 유세 때 찍은 사진이었다.
니젠 끝내려 해도 끝낼 수가 없는 싸움이 됐군.
그는 사진을 보며 증얼거렸다.
[몰리. 장례식때 만나기로 하지. 그 전에 결정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어.
그는 엘리 그레이브스를 생각하며 말했다
몰리는 다가와서 잭의 손을 꼭 쥐었다. 잭은 그녀를 가볍게 한 번 안
파주고는 문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잭은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뻣뻣한 다리를 끌면서 욕실로 들어
갔다. 서두른다면 뉴욕 행 마지막 비행기를 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옷을 걸친 다음 몇 가지 세면 도구만을 가
방 속에 꾸려 넣었다. 그리고 거실의 탁자로 가서 작은 종이 쪽지를 커
내 놓고 그 위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비디오기 팝니다. (202)747 -4665
엘리 그레이브스가 요구한 대로....... 그러나 그것은 애브너 티투스
의 개인 전화펀호가 아니었다. 그 번호는 바로 잭 자신의 집 전화번호
였다.
다시

[대체 뭘 망설이는 거요.매클라우드?
그레이브스의 전화 목소리는 다급했다.
[나는 티투스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다고 했지,당신 걸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내일이면 그자가 퇴원해요. 만일 오늘 밤 중으로 내가 전
화를 못 하게 되면 어쩌면 영영 기회가 안 올지도 몰라요.
[내 말은 말이야, 일단 내가 그 전화번호를 당신에게 건네주고 나면
난 어음도 안 받고 내 재산을 통째로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그러니 우리 서로 가진 것을 맞교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당신이 가진
것도 지금 내게 넘겨 달란 말이야.
[뭘?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수술 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
그 제안이 그레이브스를 놀라게 만든 것 같았다.
[티투스가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 없이는
무용지물일 텐데.
[둘러대지 말라구,그레이브스.내가 작년 11월 달에 기자회견을

어서 티투스를 물 먹이려 그랬던 거 기억 안 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됐
었지? 그는 무사히 대법원장에 취임했고 나만 바보가 됐었지 이젠 뭔
가확실한 걸 내 손에 직접 쥐기 전카지는 섣불리 그에 대한 행동을 삼
가하기로 했어.
[비디오 테이프만 갖고는 확실한 증거가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내
가 말했잖소? 화면에 비치는 건 임산부의 복부와 그 부위를 수술하는
의사의 손들뿐이라고 말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 환자가 제노비아 데이비스인지 아
닌지 알아볼 방법은 많다구. 굳이 얼굴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말이야.
찰 자료로도 가능하겠고 그걸로 안 되면 검시관이 있잖아. 그녀 몸
의 온갖 부위에 대한 정밀한 사진을 갖고 있다구. 당신이 티투스의 목
소러를 테이프에 녹음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구. 전화로 얼굴이 보이
나? 난 그 목소리가 확실히 티투스 본인의 것이라는 걸 확신하기 전까
지는 그걸 공개 안 할 거요.
그레이브스는 침묵을 지키다가 물어 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잭은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톡톡 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
했다.
[워싱턴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한 40닐 걸리는 곳에 갈림길이 있
어. 거기서 19번 출구로 순환 도로를 빠져 나오라구.그래서 28번 도
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가 서쪽으로 핸들을 꺾고서 덕 패들 로()
가 나타날 때까지 달려서는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서 가다 보면
첫번째 만나는 가게가 있어. 그 가게 앞에는 공중전화가 있다구. 여기
까지 알아듣겠어?
[계속해 보시오.
[내가 오늘 밤 그 근처 농장에 들를 일이 있거든.그곳으로 가는 길
에 그 가게에 잠시 차를 세우지. 한 8시 30분경쯤 될 거야. 내가 공중
전화 부스 옆 벽면에 '비디오기 팝니다'라는 전단을 붙여 놓을게.물론
뒷면에는 티투스의 개인 전화번호를 적어서 말이지. 근처 아무데나 숨
어서 내가 뭘 하나 지켜보라구. 그리고 내가 떠나고 나면 그 번호로 전
화를 걸어서 그의 목소리를 확인해 보라구. 제대로 된 전화번호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비디오 테이프는 어떻게 건네주면 좋겠소?
[비닐 봉지에 싸서 전화 부스의 천장에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으
라구 농장에서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져 갈 테니.
[그 가게에서 집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조지타운까지? 45분 내지 시간 정도? 왜, 그게 뭐
?
그리 중요한
[그럼. 45분 걸린다 칩시다. 근데 비디오 테이프는 정확시 12시 15
분에 찾아가시오. 단 1분이라도 먼저 와서는 안 되오. 알겠소?
[나를 내 집에 1시까지 못 들어가게 한다?뭐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
나?
전화선 저쪽에서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답을 꾸며
내려고 하는 듯한 의문스러운 침묵이었다
[티투스의 번호가 정말인지 확인해 볼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소.
[그 사람 것이라니까 그러네.다이얼을 돌리자마자.
[이것 봐요. 어쨌든 그건 내가 확인할 문제 아니오? 테이프를 갖겠
소. 말겠소?
[흐음. 아무래도 내가 그 테이프를 보는 것이
군.
탐탁치 않은 모양이로
[아니오, 그 반대요. 나는 당신이 그 끔찍한 것을 보기를 진정 원하
오.다만 시 이후에 말이오.
그때, 잭의 머리에 또 한 가지의 의문이 떠올랐다.
[그레이브스 이거 한 가지만 말해 줄 수 없겠나?당신은 정말 제노
비아 데이비스의 죽음과 관련이 없나?
[말했잖소.난 전척 그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티투스가 모든 상황을
만들어 냈고 난 수술이 끝난 후 비디오 테이프를 넘겨받았을 뿐이오.
[검사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못 믿을 이유가 어딨소?테이프에는 그저 적나라한 수술 장면만이
담겨 있을 뿐인데?좌우간 어쩔 테요? ?.래할 거요 말 거요?
'참 난감하군, 어쩐다?'
잭은 도박꾼의 본능을 발휘하여 순간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져 보았
다. 최악의 경우, 그레이브스가 티투스의 전화번호만 챙기고. 비디오
테이프를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겠고, 또 넘겨준다 해도 티투스의 목
소리를 뜻한 바대로 녹음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잃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본전인 것이다.
최상의 경우, 그건 정말 환상적이지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고
그 테이프의 내용이 그레이브스의 얘기대로라면, 티투스를 끝장내 버
릴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레이브스를 티투스와 엮어 버리는 것
쯤은 식은죽 먹기일 것이다. 그떻게 되면 빅토리아와 제노비아의 복수
를 할 수 있고, 몰리를 언론계의 슈퍼 스타로 만들어 줄 수도 있겠고,
티투스가 대려원에서 던진 반대표를 무효화해서 '로 대 웨이드' 판례
를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_ 배팅을 하지 않기에
는 너무나 큰 판돈이 걸린 도박인 것이다.
[좋아. 아까 얘기한 대로 티투스의 전화번호를 받아 가도록 해. 난
자정이 지난 다음에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 갈 테니.
[자정 전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 잊지 마시오. 그리고. 매클라우
디?
[왜?
[안심하시오. 내가 전화
는 끝장난 것이오.
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기만 하면, 티

덕 패들 로()를 벗어나 레이챌의 농장 진입로로 들어섰을 때의 시
솨은 8시 45분이었다. 워싱턴에 내리던 빗방울은 이곳 메릴랜드에서
는 어느새 눈송이로 바뀌어 있었다. 자갈길 양옆에 늘어선 느릅나무들
은 가지마다 무겁게 내려 쌓인 눈 때문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진입
로가 거의 끝나 가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멀리 지평선 위에서 한 차례
섬광이 번뜩였다. 번개인지 아니면 고압선이 끊어진 젓인지 그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잭은 트랙터 차고에 주차를 시키곤 차에서 내렸다: 별채 위에 설치
된 옥외 조명등이 부근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다. 눈이 소복이 땋여 가
고 있었다. 잭은 절룩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본채로 향했다. 현관
문이 열렸다. 레이헬은 격의 없는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두 팔을 벌려
그를 환영했다.
그녀는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벽난로에는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
다 그는 추수 감사절 파티를 떠올리며 거실을 둘러보고 나서 코트를
그녀에게 건냈다. 그녀는 그의 옷을 받아 걸고는 커다란 마호가니 식
탁 위에 식탁보를 깔고 촛불과 식기, 술잔 따위를 올려놓았다. 잭은 그
녀가 권학는 대로 벽난로 쪽의 가죽 의자에 앉아서 보조 의자 위에 뻣

뻣한 왼쪽 다리를 편 채로 올려놓았다.
[좋아 보여요. 잭. 지난 번에 봤었을 때는 영 형편없었는데.
그는 왼쪽 눈에 찬 안대를 만졌다. 눈은 거의 나아가고 있었지만 아
직도 멍 자국이 시퍼렇게 남아 있어서 내놓고 다니기가 좀 껄끄러웠
다.
[옛날처럼 자유롭지는 못해요. 그러나 어쩝니까? 이 정도만 해도 다
행인 줄 알아야죠.
[잭 사실은 나는 당신의 몸보다도 당신 머릿속이 더 걱정돼요. 너
무 많은 일을 당해서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잖아__?
잭은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젠 괜찮아요, 레이. 정말입니다.
레이챌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유리 술잔을 통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그립나요?
[네. 아주 많이. 당신은 어떻습니까?
[매일 그녀 생각뿐이에요,
잭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펀으로는 그녀 역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요?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삶은 행복
한 겁니다. 그런데 빅토리아는 그런 사람을 둘씩이나 가지고 있었으신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레이챌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죠.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 둘뿐이던가요? 빅토리아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지요.
그녀는 그의 측면 공격을 슬쩍 받아넘기면서 일어섰다.
[우리 이제 식사하면서 얘기해요.
레이챌은 주방에서 정갈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차려 냈고
=은 그것들을 거실에 마련한 식탁 위로 날라다 놓았다. 그리고는 촛
불을 밝히고, 두 사람의 잔에 포도주를 채운 다음 의자를 빼서 그녀가
앉는 것을 보살펴 준 다음 테이블 맞은편으로 가서 자신도 앉았다.
[빅을 위하여.
잭이 잔을 들어올리며 건배했다. 그녀는 잔 너머로 부드러운 시선을
던지며 건배에 화답했다. 순간, 그녀의 눈길 속에서 잭은 빅토리아의
눈빛을 느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요 며칠 통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남짓, 두 사람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둘은
다시 커피를 맣시며 테이블에 앉았다.
[지금까지 입 밖에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떻죠, 레이?
[음. 그게 뭘까요?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성관계?독단적인 성격?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얻어낼 수 없었다. 이제는 터뜨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바로. 애브너 티투스!
[티투스라구요?티투스에 관해서 뭘?
[당신과 티투스 사이에는 표면적인 것
는 느낌을 그 동안 가져 왔습니다.
이상의 모종의 관계가 있다
[호오.그거야 당연히 그래야 되겠죠.난 그 사람의 주치의니까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는 내심 그녀의 침착성에 감탄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테이
블 한 편에 크리스털 이쑤시개 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이쑤시개를 하
나 뽑아서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난 금요일날 기자를 만났더랬습니다. 몰리 맥코믹이라는 여기자
죠. 그녀는 당신을 만나 봤으면 하고 있더군요.
[그래요? 요즘은 언론 쪽에서 인터뷰 요청을 받은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좌우간 그 여기자가 알고 싶은 게 꿔래요?
[예전에 기자회견장에서 당신이 티투스의 창자에서 빼냈다고 했던
이쑤시개 말입니다. 그걸 연단 위에 올려놓고 그냥 나갔다면서요? 그
여기자가 문제의 이쑤시개를 손에 넣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걸 검
시관에 게 보였더니 검시관 말이 사람의 내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랍니다.
레이곌은 스푼으로 커피잔을 휘휘 젓고 나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그래서요?
?'1기에 관한 당신의 해명을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
레이켈의 차가운 눈길이 한동안 잭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난 해명할 게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도 않고요.
잭은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고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요,그럼 그 문제는 해결된 것 같군요.
[잭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은 벌써 두 번씩이나 날 음흉
음모꾼으로 몰아붙이고 있어요. 한 번은 장례식날 그리고 또 한 번은
오늘. 우리 둘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어요. 그런 측면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애기를 나눌 수 있어요. 하]
만 그런 터무니없는 비난은 정말 듣기 싫군요.
난 그저 그 이쑤시개가 정말로 리투스의 창자에서 나온 것인가를
물어 봤을 뿐,당신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오, 잭 제발 그런 말장난은 말아 줘요. 그런 식으로 복선을 깔아대
는 변호사들은 신물 나도록 많이 상대해 봤다구요. 기자회견이었어요.
텔레비전 카메라도 있었고 플래시도 펑펑 터졌죠, 난 티투스의 복막염
이 무엇 때문에 발병했는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구요. 내기
그 자리에서 꺼내 놓은 이쑤시개가 그의 몸에서 뽑아 낸 바로 그것이
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확실히 모르겠어요. 또 신경 쓰고 싶지도
않구요.
[아니, 플라스틱 봉지에 싸 넣는 수고까지 하면서 진짠지 가짠지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래이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잭 솔직히 털어놔 꽈요. 자꾸 쓸데없이 트집잡지 말고 정말로 하
고 싶은 얘기가 뭐예요? 당신이 나와 빅토리아의 관계에 대해 미심쩍
어 하고 있다는 걸 나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티투스는 왜 튀어나와요?
[그자가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죽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배후 인물
이라는 걸 증명할 수도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얘기?
[아닙니다. 이번엔 달라요. 그녀의 낙태 수술 장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있거든요.
순간, 레이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디오 테이프라구요?
[네 티투스가 제노비아 사건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테이프예요. 오늘 밤 그걸 입수하기로 돼 있어요.
[어디?어디에요?그 출처가.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의 침착한 어조가 아니었다.
[아직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걸 손에 넣게 되면 당신에게도 보여
줄게요. 레이.
잭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날 믿으세요. 반드시 당신에게 보여 줄 테니까.
[그 테이프를 보려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될 거예요.
도중에 일어나는 다량 출혈)'는 아주 끔찍한 거라구요.
잭. '(수술
[나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런데 이거 참 재밌네요. 제노비아가 로 죽었다는 신문 보도
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네요. 보도됐던 것 같은데? 만일 보도되지 않았다면 내가 그걸
어디서 들었더라. 맞아요, 어쩌면 검시관에게 들었나 봐요. 하여간 뭘
캐내고 싶어하는지는 몰라도 나와 애브너 사이에 직업적인 관계말고
다른 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게 잘못 짚은 거예요. 잭!
그녀는 의심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는 잭의 얼굴을 흘껏 보고는 다
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사람의 사상을 혐오한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거예요. 그
사람은 자궁을 갖고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있어서 위험 인물이에요.
[당신과 빅토리아가 늘 말로는 그렇게 애기해 왔었죠.
[말로는?우리가 농담하는 줄 알았나요?
[그 당시엔 진지하게 받아들였었죠. 하지만 폭발 사고가 일어난 이
후로는 그 이전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약간은 석연치 않은 구
석들이 있었음을 알게 됐어요.
' 석연치 않다'가 아니라 '의심스럽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죠. 그
떻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나와 빅토리아?
'아하! 이제 됐다. 슬슬 반격이 나오기 시작하는군.'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래요. 당신과 빅토리아,그리고 당신과 티투스.
레이챌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는 잠시 그를 외면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잭. 난 이 세상 그 누구도 정신병자로 몰고 싶지는.......
[아니, 레이챌.
[알아요.하지만,당신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잠깐.내 말 좀.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해할 수 있어요. 제아무리 의
지가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겪었던 그런 일들을 당하고 나션
온전치 못하게 될 거예요.
잭은 화가 났다
그녀의 입을 무엇으로든 틀어막고 싶었다, 사실 몹시 피곤했지만 그
런 모욕을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가 막 반격의
포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집안의 전등불이 깜박거리더니 그대로 정전
이 되었다. 하늘거리는 한 자루의 촛불만이 어둠을 밝혀 주었다.
[함박눈 때문이에요. 전선 위에 쌓인 눈이 얼어붙어서 그 무게 때문
에 전선이 내려앉아 버리곤 하죠.
레이챌은 그렇게 말하고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어머나,창 밖 좀 보세요.눈이 10센티미터는 쌓였나 봐요.
그때 전깃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시계를 들먹다보았다.
11시것분
[내일 아침엔 교통이 엄청나게 혼잡하겠는걸. 잭.아침 일찍 시내로
나가야 돼요?
[어디 보자, 내일이. 월요일이죠? 그럼 괜찮습니다.
[그래요?그럼 됐어요. 내가 주무실 방을 좀 정리하고 올게요. 그러
고 나서 우리 한 잔 더 하면서 대화를 끝맺기로 해요. 모든 걸, 완전히
말예요.
그녀는 문을 나서다가 돌아보며 덧붙였다
[참. 전깃불은 들어왔지만 미리 양초 좀 꺼내 놓으실래요. 서재의
책장 아래 서랍들을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발자국소리를 남기며 계단을 올라갔다. 잭은
양초 세 개를 찾아 커냈다. 그 중의 하나에 불을 붙여서 책장 위에 놓
인 제떨이 위에 세워 놓다가 추수 감사절날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사진들을 자연스럽게 살펴보게 되었다.
로마의 어느 분수대 앞에 레이챌과 함께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여
인. 왼쪽 어깨에 야구 방망이를 얼은 레이챌의 뒤에 모여 서 있는 소프
트볼팀. 자유의 메달.
'잠깐, 왼쪽 어깨?그럼 레이챌이 왼손잡이란 말인가.'
그는 소프트볼팀과 함께 찍은 레이챌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둘러선
여자 선수들 가운데서 낯익은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는 책상으로 가
서 램프 불멎에 사진을 자세히 비춰 보았다. 그녀였다. 빅토리아의 장
례식날 진회색 정장을 입고 있던 여인. 사진 속의 모습은 조금 젊었지
만 틀림없는 그 여자였다. 똑같은 머리 색깔, 눈동자 그리고 신중한 표
정.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났던 장소를 기억해 보려고 애썼다. 그
러나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고 책장을 다시 쭈욱
뚫어보기 시작했다. 의학 서적. 대법원 계단에서 찍은 빅토리아와 레
이챌의 사진.
책장을 훌어보던 그의 눈이 오렌지색 표지의 얇은 책자에 머물렀다.
[호박 시집]
제목이 재미나서 그저 아무 생각 없0' 그 책을 뽑아 들었다. 겉표지
룰들추자 손으로 적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육체로는 잘 알지 못하여도,
가슴으로는 영원히 사랑할 나의 꿈, 레이에게.
사인도 없는 짤막한 메모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 너무도 익숙한 필
체 바로 빅토리아가 쓴 것이었다. 잭의 양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글을 읽었다.
'육체.
"육체.
"육체,'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남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둘만의 암시적인 대화. 서로를 쳐다보던 은
밀한 눈길. 그런 동작들 하나하나가 결국....... 혐오감과 질투심이 뒤
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온천에서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서부터 두 여자는 그들만의 시간을 즐겨왔으리라. 노먼 플라
스키 형사의 말이 옳았다.
'모든 것은 결국 겉 모습대로 실체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때. 책갈피 속에 뭔가 다른 종이가 끼워져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
어왔다. 그것을 뿜았다. 두꺼운 외투를 걸친 빅토리아와 레이챌이 팔
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었다. 그들 뒤로 장작더미가 쌓여 있는 헛간이
서 있었다. 바로 레이챌 농장의 헛간이었다.
사진 아랫부분에 날짜가 찍혀져 있었다.
12. 1.
'12월 1일 ! 그날이라면 빅토리아는 온천에 있어야 하는데.'
또 한 차례의 전율이 그를 휩쓸었다. 그들은 애리조나가 아니라 이
농장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의심했던 대로 전회리 수신지를 바
꿔 놓은 것이다. 다만 농장의 전화를 애리조나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애
리조나의 전화를 농장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그가 온천
으로 전화했을 때. 레이챌이 응답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틀림없이 농
장으로 수신지를 돌려놓은 그 전화를 그뭔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집
전화니까 습관적으로 받아 들었던 것이다.
산타페로 찾아가서 빅토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피부가 전혀 햇빚
을 받지 못한 느낌을 주었던 것도 이제와 생각하니 당연했다. 젠지 잠
자리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던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때 당연했다.
'잠을 자고 가라구?여기서?레이챌 레드패스와 한 지붕 아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벗어나고 싶어진 그의 머릿속에 엘리 그레이
브스와의 약속이 퍼뜩 떠올랐다. 그는 급히 재킷을 집어 들고 일어섰
다. 코트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그냥 나가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
해서 현관을 향해 가다가 이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지금 저 위에선 레이챌이 그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중일 것
이다. 그와 빅토리아가 추수 감사절 밤을 보낸 그 방, 빅토리아와 레이
웰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그 침대......
잭은 위를 올려다보며 나직이 씹어 뱉었다.
'엿먹어라, 레이챌.'
그리고는 집을 나갔다.
옥외 조명둥을 커버렸기 때문에 밖은 암혹천지였다. 고개를 들어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부딪쳐 오는 눈발도 그의 달아오른 볼을 식히지는
02 스태리 동뒤저
'..'했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는 차에 올라탔다.시동은 쉽게 걸렸다.차
'',퀴 아래로 눈덩이가 튀어 올랐다. 차는 농장 진입로를 빠져 나와 덕
들 로()로 접어들었다.
퍼붓는 눈발 때문에 시계()가 거의 제로인 상태였다. 그는 운전
위로 바싹 몸을 굽히고 길 가운데 자연스럽게 생겨난 눈 무더기를
정표 삼아 천천히 차를 몰았다. 애로우 헤드까지는 5킬로미터 지금
=도로 달린다면 꼬분 후엔 그레이브스의 비디오 테이프를 찾을 수 있
것이다.
그가 약속대로 그곳에 가져다 놨다면.......
'잭! 멍청하고 똔존한 변호사처럼 확실한 증거를 찾을 때까지 기다
려 보자?우! 빌어먹을. 바보 같았어, 바보......
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끝없이 자책의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
터 울려 왔다.
얼마 후,퍼붓는 눈의 장막 속에서 애로우 헤드의 불빛이 보였다. 차
를 가게 앞에 갖다 대려는 순간, 불빛이 갑자기 꺼졌다. 깜박이지도 않
고 그냥 사리찌 버렸다. 가게의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네온 불빛도 꺼
져 버리고 없었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차를 세웠다
바로 몇 시간 전, 티투스의 전화번호를 써붙여 놓았던 곳이었다. 차
의 헤드라이트를 전화 부스에 맞추어 놓고 잭은 차에서 내렸다. 발목
까지 빠져 들어가는 눈밭이었다. 그는 전화 부스의 천장을 두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전화기 뒤쪽 공간도 자세히
살폈다. 역시 없었다. 빌어먹을.......
밖으로 나와 전화 부스 뒤쪽으로 돌아갔다. 전화 부스 상단의 이음
새 부분이 야간 벌어져 있었다. 그곳을 더듬던 그의 손에 돌출된 무언
가가 만져졌다. 비닐 봉지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뜯어내어 혜
, --,,
드라이트 불빛에 비추면서 봉지를 벗겨 냈다. 비디오 테이프였다. 그
것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어깨에 쌓인 눈
을 털며 발을 몇 번 구르고 나서 차에 올라탔다, 차는 28번 도로를 향
해 덕 패들 로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았다. 12시 15분 전. 한 시간 후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만
일 270번 도로에 눈이 치워지지 않은 상태라면 시간은 좀더 걸릴 것이
다. 좌우지간 늦어도 1시면.......
'1시라. 1시가 엘리에게 왜 그리 중요했을까?'
그는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던 의문을 곧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빅토리아와 레이챌의 괸계에 대해서 그토록 멍청했던 스스로에게 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었을까, 만일 자신의 멍청함을 놓고
려정에서 그 죄를 논한다면.....
'법정?'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반 바퀴를 돌고
멈춰 섰다. '법정 ! 진회색 정장 차림의 억인은 바로, 애브너 티투스 법
률 서기 페퍼 루미스.'
이제야 그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났다. 티투스의 인준 청문회
가 열리던 상원 회의실에서였다. 빅토리아는 그녀가 나타난 것이 좋지
않은 징조라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페퍼 루미스는 빅토리아 장례식에
뭣 때문에 참석했을까? 그것도 눈물을 쏟으면서...... 레이철은 그녀
를 껴안고 무얼 위로해 주려고 했던 것일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오히려 뚜렷이 떠올
랐다.
'레이챌 레드패스와 애브너 티투스' 그 두 사람은 내가 의심한 것 이
상의 어떤 복잡한 관계로 얽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차를 돌렸다. 농
장을 향해.
그는 차고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꼈다.그러고 나서 조수석 앞의트
렁크 속을 더듬어서 쓰다 만 성냥곽을 찾아 셔츠 주머니에 집어 넣고
차에서 내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촛불이나 불빛 따위를 찾으려고 두 눈
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암흑 그
자체였다. 하는 수 없이, 본채가 있을 것 같은 방향을 어림짐작으로 잡
아 발길을 옮겼다. 본채 쪽에는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레이
챌은 잠든 것 같았다.
어떻게 심문하면 레이챌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훤가 반짝하는 것이 있었다. 작고 빨간 점이었다.
닙러나 그 점은 그가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자 곧 사라졌다.
닝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빨간 불이 다시 나타났다. 확신하긴 힘
들었지만 헛간 방향인 것 같았다,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내덛었다. 불빛
은 또 사라졌다 한 걸음 물러서자 다시 또 나타났다. 제대로 각도를
잡았을 때만 눈에 띄게 되는, 문이나 덧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틀
림없었다.
'그런데, 불빛이 어떻게?정전이 된 상태가 아니었던가?'
솟구쳐 오르는 의심을 눌러 두고,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헛간의 출입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역시 그의 예상
이 맞았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눅눅한 짚단 냄새와 소똥 냄새가 짙게
풍겨 왕다. 헛간 안도 어둡기는 바깥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헛간문의
반대편 벽에서 불빛이 문 앞까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똑바로 새
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잭은 그가 딛고 서 있는 땅이 미미하게 울리고 있는 것을 느꼈
다.
'꿔지?'
그 진동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틀
림없이 발전기의 전동이었다.
'축사의 난방을 위해서? 아니면 소 젖 짜는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
아니면?'
어쨌든 발전기의 진동이 빨간 불빛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셔
츠 주머니에서 성냥곽을 꺼내 성냥 한 개비를 북 그었다. 성냥불은 흔
들리지 않고 곧게 타올랐다
그는 불빚이 새어 나오고 있는 벽.아니 추수/감사절 전날 발견했던
위장된 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성냥이 거의 손 끝까저 타들어갔
다. 그것을 흔들어 끄고 한 개비를 더 꺼내어 다시 불을 그었다. 커다
란 판자문을 당겨 열자 이중문이 나타났다. 그 철문에 귀를 가져다 대
고 안에서 나는 기척을 살폈다.
아무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손 끝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다 타들어가고 성냥을 바닥
에 던져 버리고 다시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이제 성냥곽 속에
는 단 두 개비의 성냥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손이 닿는 한, 구석구석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열쇠는 없었
다. 어떻게 할지 우두커니 서서 궁리하는 동안. 아까운 성냥만 부질없
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쩐다?'
문짝 뒤에는 뭔가 엄청난 것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본능권
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 철판에 가로막힌 채. 손

,십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그는 다 타들어간 성냥을 버리고 새로 하나를
그었다. 그러고 나서 출입문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문 가까이에 이르자 스며든 바람이 성냥불을 꺼버렸다. 그는 암흑
속을 더듬어 차고 쪽으로 걸어가서 차문을 열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차고 안의 온갖 잡동사니들이 불멎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눈
으로 그것을 훌어 나갔다. 날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쟁기며,
낫 따위의 농기구들, 부삽들. 제설기, 외바퀴 손수레 그리고 비료 살포
기....... 비료 살포기의 핸들에는 로프 한 줄이 동그랗게 말려진 채 걸
려 있었다 그는 그 앞으로 걸어가서 로프를 걷어 내어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절반쯤 찬 작은 휘발유 깡통도 집어 들었다.
깡통을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다가 잭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억 있
는 직사각형의 철판을 보았다. 그 위에는 전기를 나타내는 번개 표시
가 새겨져 있었고, 이떻게 적혀 있었다.
위험 접근 금지,고압선
일반 농장에는 전혀 쓸모가 없을 듯한 어울리지 않는 경고판이었다.
의아했지만 물론 그로서는 의문을 풀 재주가 없었다. 멜빈 쉬버스였다
면 몰라도......
그가 찾으려 했던 것이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쇠지렛대......
잭은 그것을 집어 들고 차의 헤드라이트를 꼈다. 그러고 나서 선 채로
잠시 어둠에 눈을 익숙하게 만든 다음 헛간으로 되돌아갔다. 헛간문을
들어서자, 지렛대를 한쪽 겨드랑이 아래에 끼고는 마지막 남은 성냥개
비를 그었다. 혹시나 불꽃이 꺼질세라 양손으로 바람막이를 만들고서
이중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불꽃이 사위어지기 전에 바닥에서 지
푸라기를 하나 집어 들어선 거기다 불을 붙였다.
그 다음엔 어깨에 메고 있던 로프를 재빨리 풀어 내어 문설주 속으
로 파고 들어가 있는 빗장에 걸곤 휘발유를 붓고서 불을 갖다 대었다.
로프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잭은 빗장과 문설주 틈에 지렛대를 박아
넣고는 오른쪽 발로 버티어 중심 축을 만들고서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냈다. 문설주가 조금 밀려났다.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용을 섰다. 그의 이마에 배어 난 땀이 타들어가는 로프의 불빛에 비
치어 번들거렸다. 비틀리는 쇠붙이가 내는 기분 나쁜 소음이 소들을
깨웠다. 이제 쇠빗장의 끝이 거의 보일 만큼 문설주가 우그러졌다. 밀
려날 만큼 밀려난 것이다. 로프는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잭은 지
렛대를 뽑고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오른발에 온몸의 힘을 모아 철문의 중앙을 내질렀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있으라지, 기왕에 내친 걸음이다.'
-쿵
마침내 빗장이 떨어져 나가고 문이 열렸다
빨간 불빛의 정체가 드러났다. 문 안쪽 천장에 켜져 있는 작은 비상
등이었다. 그 작은 불멎이 입구 안쪽 벽의 전기 스위치를 비춰 주고 있
었다. 잭은 첫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천장에 매달린 여러 개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서. 방안의 광경이 한눈에 뛰어들어왔다.
운동실이었다. 바벨, 실내 조겅 머신, 실내 자건거, 역기 등등.
'역기라.......'
추수 감사절 날 들었던 금속성이 잭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벽에는
역기를 드는 여러 가지 자세를 보억 주는 포스터들, 커다란 거울들 =
리고 달력이 하나 걸려 있었다. 빨간 반바지만 걸친 모델의 머리 위
11월이라고 쓰여 있고 발 아래 촘촘히 적힌 1부터 0까지의 숫자에=
하나같이 다 커다란 표로 지워져 있었다.
운동실 한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좁은 복도가
타났다. 복도 양옆으로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문 손잡이들이 운동
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및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첫번째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강한 냄새가 콧속을 후벼 팠
다. 병원 냄새였다. 그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는 안쪽 벽을 더듬
어서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1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수술대가 늘어서 있었다. 커다란 곤충의
눈 같은 무영등()들이 그 위의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방안엔
현대적 첨단 의료 기구들이 구색을 맞춰 갖추어져 있었다. 모니터와
전화기 그리고 스피커까지....... 그런데 꿩가 사악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전혀 뜻밖의 광경이었기 때문에 잭은 등골이 오싹해
졌다. 천장 중앙에는 수술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두 대의 비디오 카
메라도 설치돼 있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그 방을 나서서는 옆방의
문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문은 가볍게 열렸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첨단 시설을 갖춘 컴퓨
터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니터와 텔레미터, 할로겐 램프. 외부 컴퓨
터 연결 장치, 전자 장치 그리고 스피커에 연결된 복선 전화기 따위들
이 설치된 긴 책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잭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 선반에는 해부학, 외과학, 생화
과 관련된 기술 서적들과 서류철 및 기타 여러 가지 책자들이 꽂혀
었다. 그 증 한 켠에는 비디오 테이프가 빽빽히 줄을 지어 정리되어 =
었다.
-1 부터 -21, -1부터 -15, 자는 -1 하나 그리]
자 역시 -1 하나. 각각의 테이프에는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그는 그 테이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맹점(붙
) 현상이 나타나 그를 방해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는 본능적으로 아스피린을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물론 지니고 있
지 않았다. 뭐든 카페인이 들어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복도로 나갔다,
문을 하나 열었다. 옷장이었다.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주방이었다.
'두통부터 껀저 잡아야 한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복도의 불빛에 비춰진 주방 안쪽의 냉장고로
다가갔다.
약병들. 우유 한 통. 그러나 콜라는 없었다. 냉장고 위에는 등근 벽
시계가 걸려 있었다.
' 1시라는 게 뭐 그리 중요해?'
그레이브스에게 자신이 물었던 질문이 갑자기
의찬장을 열어 보았다, 커피도. 차도 없었다.
떠올랐다. 싱크대 위
'난 당신이 그 테이프를 보기를 정말로 원하오.그러나 1시가 지난
후에라야 하오.'
그레이브스는 그렇게 말했었지.
싱크대 아래의 찬장을 뒤져 보았다. 음료수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티투스가 전화만 받게 만들면 그는 끝장나는 거요_'
그는 선반에 둥을 기대고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점은 아
메바처럼 점점 크게 번져 왔다.
'왜?왜 그토록 1시 이후를 강조했을까?'
그자와 접촉하지 말라는 몰리의 경고. 티투스에 대한 그레이브스의
애기 -디투스가 제노비아의 낙태 수술을 배후에서 조종했다.티투
스가 이기를 부추겨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폭탄 테러를 하도록 했다.
잭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이제서야 든
것이다. 엘리 그레이브스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거짓말을 바탕으
로 허무 맹랑한 각본을 짜맞추었다는 자책감이 일었다.
'테이프, 그렇지,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지, 그걸 틀어 보면 모든 게
분명해질 것이다.'
그는 왼쪽 눈에 댄 안대를 풀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오른쪽 눈보다
맹점 현상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컴퓨터실로 절룩이며 되돌
아갔다. 그는 비디오를 텔레비전 모니터에 연결하고 테이프를 키운 다
음 스위치를 켰다.
지지지
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고속 전진 버튼을 눌렀다
챠.


화면을 메우고 있던 흑백의 작은 점들이 컬러로 바뀌었다. 재생 버
튼을 누르곤 잠시 기다렸다. 드디어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저 그림은. 로드 런너( )
타 -타.
로드 런너가 번개 같은 속도로 절벽을 타고 올라간다.코요테(이리
의 일종)가 로드 런너를 뒤쫓아 절벽 끝까지 달려간다. 허공에 멈춰 서
서 잠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가 아래를 쳐다보더니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떨어진다.
타-타-타.
그는 다시 고속 전진 버튼을 눌겄다.
챠르르르.
'제노비아 데이비스여. 모습을 보이라.'
챠르르르.
'수술대, 메스
챠르르르.
'의사, 병원.'
챠르르르,
'제발 뭐든지 나타나라.'
챠르르르.
그러나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테이프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빈 화면을 응시하면서 잭은 천천히
사태를 깨닫고 있었다.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수술 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티투스가 이기를 부추겨 그를 공격
하게 만들었다는 그레이브스의 말은 거짓이었다. 모든 것이 티투스의
개인 전화번호를 얻어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계략?'
티투스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호가 필요했을까?
그자는 왜 전화번
순간 그는 골똘한 생각에서 깨어나야 했다
화면에 뭔가가 비쳤기 때문이었다.
-걷고 있는 두 발
영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도 같이 걸어가면서 촬영한 것 같았다.
무거운 호흡소리와 깊숙이 쌓인 눈길을 걷는 발자구소리가 들렸다.
겐즈의 초점이 불빛에 맞춰졌다. 공중전화 부스를 비춰 주고 있는 불

'아니. 저곳은?'

그랬다. 바로 그 가게 앞의 공중전화였다.
영상이 흔들리며 좀더 가까이 잡혀졌다. 공중전화 부스 옆에 붙어
있는 애브너 티투스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가득 떠올랐다. 잭이 바로
몇 시간 전에 거기다 써 붙여 놓은 전화번호, 그의 필체가 또렷했다.
'도대체 어쩌려는 수작이지?'
다시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 왔다. 카메라의 불빛이 꺼지고 잠깐 어
두워졌다가 다시 화면이 밝아졌다. 자동차 속이었다. 카메라가 심하게
흔들렸다. 카메라가 조수석 쪽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카메라는 운전
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잡았다. 엘리 그레이브스였다 그는 핸들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카떼라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
고는 작은 메모 쪽지를 카메라의 렌즈에 들이댔다. 매클라우드의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그 종이였다. 윈스턴이 죽었다고 몰리가 알려
주던 그날 밤 그가 집에서 써갈긴 그 메모, 그레이브스에게 그 번호로
연락하라고 병원 게시판에 붙여 놓았던 바로 그 종이였다.
정수리에 차가운 얼음물이 부어지는 것 같았다.
화면에서 종이 쪽지가 사라지고 이번엔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비춰졌다, 전화기와 비디오기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 주위로는 전선이
꽉 들어차 있고 황갈색의 긴 막대기들이 놓여 있다.
'황갈색의 긴 막대기?'
[자, 바로 이거요. 어때 멋있지?안 그래?
그레이브스는 사진을 치우고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꼬
리를 치켜 올렸다.
[축하하오.의원 나리,우리가 해냈소.
'우리가 해내?뭘?'
'그렇다면 지금 저 비디오 테이프는......
그렇다. 그와 그레이브스가 함께 음모를 꾸떴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완벽한 각본에 잭은 휘말려 버리고 만 것이다.
비디오에 장착된 다이너마이트. 우리가 해냈다는 그레이브스의 말
티투스의 전화번호를 적은 잭 매클라우드의 필적, 누가 봐도 두 사람
은 공모자인 것이다.
'오. 맙소사. 내가 무슨 멍청한 짓을 저지른 거지?'
테이프가 멈췄다.
그때 잭의 머리를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1시. 시가 되면 티투스가 끝난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시 5분.그는 가까이에 있는 전
화기를 들었다. 불통이었다. 그때,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엽총을 든 레이챌이 문 가에 서 있었다.
[잭!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사방을 다급하게 두리번거렸다.
[잭,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죠?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전화! 전화가 필요해!
[왜요?
[애브너 디투스의 입원실에 폭약이 설치돼 있어. 1시 정각에 폭발할
거요!
그녀가 총부리를 내렸다.
[폭탄?
[엘리 그레이브스가 설치해 놓은 거요. 45딛 후면 폭발할 거요.
그는 시계를 보고 다시 외쳤다.
[아니, 43분.
레이챌은 총을 떨어뜨리고 멍한 눈길로 잭을 바라보았다.
[오, 하느님.
레이챌은 지프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잭은 조수석에 올라와 앉
았다.
[카폰을 집어요!
후진 기어를 넣으면서 그녀가 외쳤다.
눈덩이와 자갈들이 바퀴 아래서 마구 횡겨 나갔다. 전진 기어로 바
꾸려고 차를 세운 순간, 운전석 옆 창가에 유령 같은 물체가 하나 나타
났다. 레이웰은 창문을 내리고 그 물체에다 대고 외쳤다.
[계속 병원으로 전화를 해봐! 연결이 되면 티투스의 입원실에 폭탄
이 설치되어 있다고 알려 줘 !
[오! 하느님. 맙소사!
나이트가운 위에 코트를 걸쳐 입은 여인이 뇌까렸다, 잭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페퍼 루미스였다.
레이웰은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고 쏜살같이 달렸다. 거기서 덕 패
들 로()로 접어들다가 지프의 옆구리로 우편함을 들이받아서 넘어
뜨렸다. 그녀는 핸들을 교묘하게 움직여서 차의 중심을 잡고 와이퍼를
작동시킨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강하게 다시 밟았다
[전화해 봐요!
잭은 손에 쥔 카폰의 버튼을 누르고 연결이 되기를 기다렸다. 불통
이었다.
[빌어먹을! 한밤중에 이렇게 통화가 폭주하다니.
[계속해 봐요. 잭. 빈 회선이 있을 거예요.
물론 그녀는 도로 곳곳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눈이 너무
이 쌓여 있어서 영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돠파 더 있어야 28번 도]
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역시 구불볼한 =자선 도]
였다. 270번 도로로 나갈 때까지는 눈도 치워지지 않은 길을 계속 =
려야 하는 것이다.
잭은 다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역시 불통이었다.
레이챌은 저속 기어를 넣었다. 지프의 엔진이 그르렁거렸다
[어떤 폭탄이에요?
차의 소음 너머로 고함을 치면서 레이챌이 물었다.
[다이너마이트요. 비디오에 장착돼 있을 거요.
[비디오라구요? 그러면 누군가를 시켜서 코드를 빼버리면 되지 않
까요?
[글쎄. 전기가 아니더라도 배터리라든지. 어떤 동력원이 있을 것 같

소. 만일 잘못 건드리면 즉각 작동이 되도록 조작돼 있을 수도 있고.
유일한 방법은 티투스를 병실에서 피신시키는 거요.
[오. 맙소사! 보조 기구와 모니터들을 그에게서 떼어 내는 데만 해
도 꽤 시간을 잡아먹을 텐데.
지프의 바퀴가 눈길에 미끄러졌다. 레이켈은 솜씨 있게 핸들을 이리
저리 돌려서 중심을 잡고는 다시 킬로미터까지 속력을 올렸다.
[그나저나 잭! 거기에 폭탄이 설치돼 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되었어
요?
잭은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역시 불통이었다.
[그레이브스에게서 알아냈소.
[누구?그레이브스라구요?
[내가 그자에게 말려들었소.
[무슨 소리예요?
[티투스의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줘 버렸거든.
[오! 잭! 대체 무엇에 홀린 거예요?
[내가 말했잖소.티투스가 제노비아 데이비스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고.
[그는 그러지 않았어요.
[어떻게 장담할 수 있소?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누가 그랬는데?
레이챌은 속도를 줄이면서 급커브길을 돌았다.
[내가 그랬어요.
[당신이?
[계속 전화를 해봐요!
[당신이 제노비아를 죽였다고?그게 무슨 뜻이지?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지프가 뭔가에 걸려서
붕 튀어 올랐다. 도로가 말라 있었다면 땅에 닿는 순간 횡겨져 나가 차
가 뒤집어지던지 무슨 수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수북이 쌓인
눈 덕분에 땅에 닿은 왼쪽 바퀴들이 미끄러져 나가서 사고를 피할 수
가 있었다
[이봐요. 레이 ! 스스로 덛어샹려고 하지 말아. 이건 내 문제라구
당신 문제가 아니야!
[당신 문제라구요? 아니에요, 잭. 만일 그레이브스가 당신 짐작대로
행동을 해서 티투스의 병실을 날려 버린다면 내 일평생의 노력이 모두
툴거품으로 돌아간단 말예요!
[평생의 노력이라구?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레이.
그녀는 지프가 튀는 바람에 떨어져 내린 햇멎 가리개를 위로 을리며
조수석 앞의 실내 트렁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담배 좀 커내 줘요.
잭은 길고 가느다란 껀련을 하나 뽑아서 불을 붙인 후 레이웰에 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차 유리창에 대
고 훅, 뿜었다. 눈발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어썰 수 없군요. 우리가 애브너를 구하게 되든, 못 구하게 되든 이
제 당신에게 진실을 알려 줄 수밖에 없겠네요. 잭.
[무슨 진실을 말하는 거지?
[애브너에 대한 것.
[애브너에 대해 꿔요?
레이챌은 다시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했다.
[자궁외 임신에 대해 물론 알고 있겠죠? 잭?
[수정란이 자궁을 빠져 나와 나팔관 속에서 자라나는 것 말이오?
[대개는 그렇죠. 하지만 때로는 수정란이 복강까지 밀려나와서 복
부 내벽이나 대장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자라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
런 상태를 미리 알아내지 못하고 만삭이 되어서 제왕절개 수술로 무사
히 출산을 한 경우도 실제로 있고요. 몇 안 되기는 하지만 말예요.
[그거랑 티투스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게 있어요.
[무슨 미친 소리요.레이?
[태아가 그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다구요.
[태아라구?무슨 태아가?
[인간의 아기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남자잖소.
잭은 문득 터무니없는 의심이 들어서 되물었다.
[그렇다면 혹시,티투스가 남자가 아니라.......
[아네요. 물론 그는 틀림없는 남자예요. 그런데 남자가 뱃속에 아기
를 가진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꿔라구? 그렇다면 당신이 남자의 뱃속에 수정란을 심었단 말이
.?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긴 해요.
[비슷하다니?정확히 말해 봐요. 레이.
그녁는 그의 질문애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기를 흘껏 쳐다보았다
[또 해보세요!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불통이었다.
그는 티투스의 복부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알고 있습니까?
그녀는 정신나갔느냐고 힐난하는 눈초리로 그를 홀겨 보았다. 갑자
= 레이웰이라는 억자가 전혀 낯설게 느껴졌다. 완전히 정신나간 변태
샅았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돌연변이처럼 느껴졌다.
[왜. 왜. 그런 짓을 했소?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앞만 주시하며 차를 몰았다.
[나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거요?
[그런 게 아네요. 잭. 내가 얘기를 해줘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
예요. 당신도 역시 남자니까, 어서 전화나 계속해 보세요.
역시 불통이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분 전이었다.
이제 270번 국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길은 자동차의 왕래가 잦은
곳이니까 눈이 많이 녹아 있을 테고 따라서 차의 속력도 더 올릴 수 있
을 터였다.
[잠깐! 저기, 공중전화가 있어요.
잭이 창밖을 가리키면서 외쳤다. 레이웰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는 눈길 위를 찌익 미끄러지며 반 바퀴를 돌고 나서 멈췄다. 그는 차에
서 뛰어내려 전화기로 달려갔다. 그 동안 그녀는 차를 돌려 전화 부스
옆에 대었다.
잠시 후.잭은 숨을 헐떡거리며 다시 올라탔다.
[망가졌어요.
지프는 다시 출발했다. 그는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불통이
었다. 끊고 다시 눌렀다
-따르릉
드디어 신호가 울렸다.그러나 상태가 몹시 불량했다.
[조지... 횐쥔횐... 싱턴... 횐횐... 병원... 천횐퀸.......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의 고함소리가 전화선 저쪽에서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티투스의 전화번호로 해보지 그래
요?
그는 그 번호를 누르려다가 멈췄다
[잠깐. 그러면 안 될 것 같소. 어쩌면 전화벨이 폭약의 타이떠를 작
동시킬는지도 몰라.
그는 다시 병원의 교환 번호를 눌렀다. 불퉁이었다.
다시.불통.다시.불통.......
잭은 전화기 버튼과 씨름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연결이 되면 당신이 얘길 하도록 해요.
[폭탄에 대해서 말예요?미겼어요?그랬다간 경찰들이 신문하러 몰
려올 거고 병원 자체 감사도 실시될 거예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겠죠
난 티투스를 다른 의사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복야 할거구요. 난 못
요. 당신이 해요.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을 밝히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소? 그들은 내가 어디서, 어떻게. 빅, 전]
를 걸었는지 물을 테고 곧 당신에 관해 모든 걸 알게 될 텐데 말이오.
그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를 든 채로 앞 유리창에 거세게 부딪쳐 오는 눈발들을
쳐다보았다. 그 현란한 움직임에 최면이 걸린 듯 어질어질한 머릿속에
서그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을 정리했다.
[제노비아 데이비스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아직 내게 얘기해 주
지않았소.
[애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이봐요. 레이챌. 말해 봐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속시원하게
털어놓으란 말이오.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당신이 남자를 임신하게끔
만들었는지 궁금해 미치겠단 말이오.
부탁이 아니라 강압적인 요구였다. 그쎄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계
를 보았다.
17분이 남아 있었다.
[남자의 복강 속에 수정란을 심는 것은 옇자에게 그떻게 하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어요. 중요한 문제는 탈장이나 다량 출혈 없이 태아를
무사히 길러 내어, 제왕절개 수술로 꺼낼 수 있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
하는 것뿐이에요, 그런 경우 탈장이나 다량 출혈은 곧바로 생명과 직
결되죠. 그래서 자궁외 임신이 위험하다고 하는 거예요.
[태아에게는 여성 호르몬이라든지. 뭐 특별한 것. 말하자면 남성에
게는 없는 어떤 것이 절요하지 않소?
[꼭. 그렇진 않아요. 티투스에게서는 프로게스테론이라고 자궁 내
막을 보호하기 위해서 임산부에게만 분비되는 여성 호르몬을 정기적
으로 주사하고 있지만 그것도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만일을 대비
하기 위한 예방적인 조치일 뿐이에요. 태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은 충분한 혈액 공급이에요.산모()에게서든 산부{똥)에게서든
마찬가지죠. 이제 순환 도로가 보여요.
잠시 후, 그들은 메릴랜드와 워싱턴을 잇는 도로에 들어섰다. 멀리
앞서가는 자동차의 후미등이 보였다.
[이직도 나는 무슨 얘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소. 남자에게 수정란을
이식시키는 데는 분명히 기술적인 어려움이 뒤따를 텐데.
[기술적인 어려움이라구요?후훗.
그녀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어야 해요. 태반이죠. 그 속엔 산모와 아기를
연결시켜 주는 혈관들이 있어요. 바로 그래서 자연이 여성에게 자궁을
선물했던 거죠. 아기가 태어날 때 자궁 내벽이 한 꺼풀 벗겨지면서 윗
줄에 딸려 나오게 되죠. 마치 이젠 필요 없어진 모든 것이 보자기에 싸
여지는 모양으로 함께 밖으로 내보내지는 거예요. 태반도 포함해서요.
참 오묘하죠? 한 마디로 말해서 다음 번 아기를 위해서 깨끗이 아기집
을 청소하는 자연 작용이에요.
[그럼 태반이 없는 티투스는 어떡합니까?다량
?
[말해 줄게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군요. 출혈을 무슨 수로 믹
그들이 탄 지프가 왜건 한 대를 추월했다. 이제 앞에는 횐히 트인 도

로만이 펼쳐져 있엇다.
[레이챌 ! 정말 이러기요?난 지금 대답을 듣고 싶단 말이오!
레이챌은 담배를 끄면서 한숨과 함께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좋아요. 그럼 애기할게요. 남자의 뱃속에 수정란을 이식하는 데 =
어서 가장 큰 문제가 태반이라고 내가 말했죠? 그 문제를 해결할 방=
을 나는 오래 전부터 연구했고 실험에도 옮겨 왔어요. 수정란만을 ]
식할 게 아니라 자궁을 통째로 이식해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2
나오는 산로(]는 제외하구요.
[그게 가능한 일이오?
[물론이죠. 얼마 전 신시내티 동물원에서는 푸른 비비를 비롯한 여
=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동물들의 태아를 암소의 복강에 이식했어
요. 지금까지는 아주 정상적으로 배양시키고 있는 중이에요. 조만간
분만하게 될 거예요. 우리 팀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태아를 담고
있는 자궁들을 통째로 이식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자궁들? '들이라고 그랬어요?그럼 한 차례 이상이었단 말이오?
[그래요.눈이 많이 녹았군요.
레이켈은 속력을 올렸다
[실험 대상은 동물들이었겠지요?
[그래요. 동물들을 가지고 실험했죠, 그러나 전적으로 동물들만 실
험 대상이 된 건 아니었어요.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한동안 아무 달도 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레이켈. 그게 무슨 뜻이오.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아기인
형의 희생자들. 멜빈 쉬버스 그리고 그의 친구. 누구더라? 하먹튼, 그
리고 빌리 배니스터 그 사람들을 모두.그러니까.당신이.......
그는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더듬거리며 얘기를
하는 동안에라도 그녀가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레이켈의 차가운 눈초
리가 그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 한가한 질문이나 하고 있을 때예요?우린 지금 애브너 티투스
를 폭사로부터 구하려고 촌음을 다튀 달려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요.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레이챌 당신네들이 ]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다가
죽였단 말이오?
=
'
[결과는 그렇게 된 셈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럼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지?설마 그들이 웃으면서 죽어 가
진 않았을 = 잖아.
[동물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본 결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세
포 거부 반응이라든가. 혈액이 섞일 때 생기는 부작용 따위 말예요. 그
러나 그걸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이제 지프는 순환 도로를 벗어나 캐날 로()로 접어들었다.
[사실 그렇게 충격적일 것도 없잖아요. 잭. 모든 과학은 어느 단계
에 오르면 생체 실험을 필요로 해요. 의학이라고 예외가 될 순 없잖아
요?
그녀는 말을 끊고 고개를 잠깐 돌려서 넋이 나간 잭의 얼굴을 살펴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 의식 속에 살인자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 거예
요. 잭. 현실이 어떤 사람을 지나치게 몰아세우게 되면 스스로를 보호
하기 위해서 그 본능이 발동하게 되는 거구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구?무엇으로부터?
레이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나는 내가 한 짓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는 게 아례요. 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도 그 동안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신기원이 이룩되
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아 왔을 거예요. 이번엔 여자의 손에 의해서 그런
업적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여자가 그런 일을 한디
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서 얼떨떨한 것뿐이라구요.
지프는 이제 체인 브리지를 향해 속력을 내고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그나저나 그 이식 수술은 성공
하지 못했지.그떻죠?
[아네요. 수술은 오두 성공적이었어요. 수술 이후가 문제였지요. 부
작용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티투스의 경우에는 세포의
?1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말이죠. 물론 태아를
층분히 성숙시켜야 하고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성공적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해내야 한다는 커다란 문제점들은 아직 남아 있지만요.
그녀는 앞 유리의 모서리를 닦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티투스는 우리 실험의 제 4단계()였어요.
잭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핫다. 그녀의 외모에는 돌연변이라는
=올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징후도 없엇다. 우아한 자태, 맑은 눈망울,
숱많고 단정한 머리칼.
레이챌 레드패스라는 여자가 누구이든 그녀에 관해 몇 가지는 확실
8말할 수 있었다. -지치지 않는 강인함,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
마음만 먹으면 꿔든지 해낼 수 있는 능력 -여전히 전화선 저쪽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썩을!
[서둘러요. 잭. 시간이 거의 다 돼가고 있어요.
[지금 애쓰고 있잖소?
[그저 애만 쓰면 뭘 해요?버튼을 제대로 누르고나 있는 거예요?
[그럼!
그는 다시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당신은 매사에 침착하지 못하잖아요. 코앞에 놓여 있는 나이프도
못 찾아서 허둥대곤 했다면서요?
[이런 제기랄! 빅토리아가 나에 관해 전부 다 일러바쳤구만.
[어머, 잭. 어린 아이처럼.......
그녀는 전화기를 낚아채고는 병원의 전화번호를 다시 한 번 꼭꼭 누
른 다음 그에게 다시 건네줬다.
'''
[잭! 걱정 마세요. 빅토리아는 늘 당신 자랑만 늘어놓곤 했다구요
특히 잠자리에 관해서 말이죠. 후후.
[체! 마치 그쪽에 대해서 도가 튼 사람처럼 들리는군.
[그럼요.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남자에 관해서 많이 알고 있다
구요. 알겠어요?잭?어쨌든 당신은 틀림없이 센드() 버튼은 누르
지 않고 재발신 버튼만 눌러댔을 거예요.
[안 그랬어.
딱 잡아뻤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어쨌든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센드 버튼을 눌러 봐요.
지프의 속도가 늦춰졌다. 천천히 달리고 있는 화물 트럭이 진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뭘 해?레이?추월해.
맞은편에서는 집채만한 트레일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_=_고
었다. 레이헬이 핸들을 왼편으로 살짝 틀면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았다. 트럭을 추월하고 나자 트레일러가 지프를 깔아뭉갤 듯이 굉음
울리며 덮쳐 들었다. 엔진의 소음 너머로 경음기 소리가 고막을 찢=
다. 레이챌은 잽싸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간발의 차이로 트=
일러의 앞부분이 지프의 후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휴우.
레이챌은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잭을 한 번 흘겨보
고는 핀잔을 ]
었다.
[큰일날 뻔했잖아요. 잭! 티투스를 죽이는 데 폭탄은 뭐하러 사용
요? 그냥 차에 태워 갖고 나오면 저런 트럭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결
줄 텐데.
-따르릉.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신호음이 울렸다.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티투스 대법원장의 입원실에 폭
탄이 설치돼 있습니다.
잭은 혹시나 통화가 다시 두절되기
전에 빨리 용건을 말하려고 서둘
러댔다.
[지금 당장.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잭은 전화기를 쥔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교환에게 리투스가 6층에 입원해 있다고 말해요.
영문을 모르는 레이켈이 옆에서 채근했다
[경비 책임자. 윌킨스입니다.
남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윌킨스 씨! 누군가가 대법원장의 입원실에 폭탄을 숨겨 놓은 것 같
습니다. 내 말 믿어야 합니다. 장난 전화가 결코 아닙니다.
[전화 걸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그건 중요한 문제가 못 돼요.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대법원장을 병
실에서 피신시켜야만 한다는 겁니다.
[폭탄이 어떤 종류죠?
[다이너마이트입니다. 아마 비디오기에 장착돼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에 있게 됐죠?
[그건 잘 모르겠지만.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이봐요. 윌킨스 씨. 지금 시간이.
[잠깐이면 됩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윌킨스가 경비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말소
리가 들려 왔다
-자네는 간호사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으라고 전하
고 또 자네는 6층에 올라가서 2번 전화로 나에게 연락을 하게.
[어떤 식으로 점화가 되는지 아십니까?
[난, 세세한 건 잘 모릅니다. 폭탄이 그 방 안에 설치되어 있고 1시
정각에 폭발하도록 시간이 맞춰져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잭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호홉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는 다시 전화기를 입에다 가져다 댔다.
[일단 대법원장부터 그 방에서 피신시키고 나서 그 다음에 자세한
얘기를 나눕시다. 예?
전화기 저편의 윌킨스가 누군가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간호사실에다 얼른 통보하라고 하세요!
레이웰이 끼여들었다.
[벌써 그 조치는 취했어요, 이봐요. 윌킨스 씨, 황당한 상황이라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내 말 좀 믿어 봐요! 누군가가 이찌어찌 해서 대
법원장의 병실에 폭탄을 설치해 놓았고 그 폭탄은 지금부터 8분 후에
폭발할 거란 말입니다.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법원장은 지금 굉장히 복잡한 이런저런 의료 기구에 연결되어 있습
니다. 전화 한 통화 때문에 서두르다간 자칫 그분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하는 말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즉시 그를 방에서 피신시키지 않
는다면 위험에 빠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또다시 윌킨스는 전화에서 입을 떼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2번 전화 받아 봐.그래서 올룸 상황을 물어 보고 들은 대로 내
게 보고하라구.
[폭탄의 크기는 얼마나 껍니까?
[다이너마이트 두세 개일 겁니다.
[비디오 코드를 뽑으면 폭발할까요?
[내가 어찧게 알겠소. 그러니 티투스를 빨리 그 방에서 피신시키라
고하잖소?
[티투스의 몸에 연결된 보조기들은 마구 떼어 내도 생명에 큰 지장
이 없다고 말하세요!
레이챌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높였다.
[폭발물 처리반에는 연락하셨나요?
윌킨스가 물어 왔다.
[무슨 말이오. 지금 그럴 척유가 어디 있소. 당장 그 사람 꼼에 연결
된 보조 장치를 다 떼어 버리란 말이오. 지금 즉시 그를 데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두 사람모두 날아가 버릴 거요!
잭은 엉겁결에 두 사람이라고 내뱉어 놓고는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
는 것을 느꼈다.
[뭐라 그러셨습니까?두 사람이라고요?
[그...... 그와 함께 있는 사람.간호사 말이오.그렇지.간호사.
[간호사라뇨?
[아닙니다. 아니오. 당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오. 서둘러 대법원
장이나 피신시켜요. 어서 !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잠시 전화기 저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지지직'
하고 통화 불량 상태를 나타내는 소음이 일면서 그만 전화가 끊겨 버
리고 말았다.
지프는 눈이 녹아 있는 도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1시 2분 전.
=.'
그는 다시 병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제 지프는 화이트허스트 프리
웨이를 돌아 나와 병원까지 마지막 몇 블록을 순식간에 내달렸다. 병
원 정문 앞에 거의 다 이르러서야 레이챌은 액셀러레이터를 라은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지프는 길게 미끄러지면서 병원 정문 앞에 멎었다. 잭은
차에서 뛰
어내려 입구를 향해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드디어 잭의 손이 병원 현관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폭탄은 끝내 터지고야 말았다.
엄청난 충격 때문에 잭은 뒤로 주르르 밀려나 눈 속에 엉덩방이를
찧고 말았다. 유리 파편과 석고 보드, 벽돌 조각 따위들이 비처럼 쏟아
= 내렸다. 레이챌은 지프 옆에 서서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티투
스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 건물 6층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부분에
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잿빛 연기가 풀풀 품어져
나오고 있었다.
잭은 절룩거리며 병원 현관으로 달려들어갔다.아직 작동이 되는 듯
엘리베이터의 자판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언제 동력이 끊길지 모
르는 일이었다. 계단을 택하는 게 안전할 것 같았다. 난간을 붙잡고 한
번에 두 개씩, 계단을 뛰어올라 숨을 헐떡이며 6층의 비상문을 열었
다. 전기가 끊겼는지 비상등만이 희미하게 멎을 발하고 있는 복도에는
연기와 먼지만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 어떤 남자가 몸을 수그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티투스?...... 아닐 거야.몸집이 그에 비해 작은걸.'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갔다. 역시 아니었다. 그 남자는 땅바닥에 너
부러져 있는 경비원 복장을 한 사내를 보살피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지나쳐 티투스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짝은 경첩이 달아난 채 덜
렁덜렁 매달려 있었고 방안은 연기로 자욱했다. 화약 냄새가 진동했
다. 침대는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나 있었고 테이블도 의료 기구도 모
두 사라져 버렸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발바닥 아래 밟히는 파편뿐이
었다.
잭은 마치 점자판을 처음 짚어 보는 어린 장님처럼 양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방안을 살폈다. 금속 파편. 유리 조각 따위의 날카로운 것들
이 벽에 박혀 있었다. 뭔가 끈적끈적한 것이 느켜져서 손가락으로 찍
어 보았다. 검은 액체....... 너무 어두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분
간하기가 힘들었다. 혀 끝으로 살짝 황아 보았다. 피였다. '누구의 피
일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졌
다. 무엇인가에 베인 것 같았다.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때 문간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 보니 레이챌이 문설주를 잡고 가
쁜 숨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생사를 모르겠소.
그가 말했다.
레이챌은 전기가 들어와 있는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잭도 그녀의
뒤를 딱랐다. 복도 끝에 위치한 병실문 앞에는 너댓 명의 사람들이 기
침을 하며 응성대고 있었다. 레이챌은 그 사람들 중 한 명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수술팀에 속한 간호사였다.
[대범원장은?
레이챌이 물었다.
[안에 계십니다.
간호사가 대답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잭.
애브너 티투스는 환자복을 입고 정신이 말똥말똥한 채로 침대에 누
1 있었다. 두 명의 간호 조무사가 심장 모니터를 그의 몸에 연결하고
:!었고,간호사 한 명이 그의 정맥 속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링거 봉지
코에 꼽은 산소 호흡기에 이상이 없나를 점검하고 있었다. 레이켈
-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병상으로 다가갔다.
[많이 놀라셨죠?
그땋는 태연하게 말을 건네며 주위를 옳어보았다. 태아의 안전 여부
를 말해 줄 태아 심장 모니터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 초음파
기계를 가져다가 태아의 움직임을 검사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청진기를 집어서 그의 환자복을 헤치
곤 가슴에 갖다 대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이봐요. 닥터 레드패스.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줘야 기분이 나아
지든, 말든 할 거 아니오!
그녀는 부지런히 청진기를 움직이며 되물었다.
[좀 전에 벌어진 사태에 대해 누가 귀뜀을 안 해 드리던가요?
[아무에게서도, 아무것도 못 들었소! 횐 가운을 입은 장정들이 병실
에 들이닥쳐서는 의료 기구들을 다 떼어 버리더니 나를 들어 옮겨서
이곳에다 내동댕이쳐 버렸소. 잠시 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소. 그러
고 나선 시나리오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이 등장하고.......
레이켈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복부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태아의
기척을 살피느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티투스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지금 내 배를 가지고 뭘 하고 있는 거요? 이봐요. 의사 선생, 무슨
일인지 지금 당장 내게 말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단언하건
대 5딜 이내에 다른 의사를 부르겠소.
티투스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레이챌은
청진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쨌다.
[모두들 나가 줘요.
조무사들과 간호사가 방을 나가자 그녀는
다독거리며 말했다
티투스의 팔을 부뜨럽=1
[곧 돌아올게요.
잭은 여전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상황이 안 좋은데요. 태아의 맥박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장비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청진기로 배를 더듬는 바람에. 티투
스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아요. 그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지 않으
면 곧바로 다른 의사를 부르고 말 거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때리
며 생각에 잠겼
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그에게 사실대로 애기해 주는 수밖에 없겠어요.
[말해 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소?
[네. 그랬죠. 태아를 분만하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
쩌죠?휴우 딱 3주만 더 시간이 있다면 인큐베이터에 옮길 수 있을 만
큼은 자랄 텐데.......
[맙소사! 레이웰.정말 이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갈 작정이군요?
그녀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낙는 태아를 구하고 싶어요.
[왜,왜요?당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꼬지 말아요. 잭!
[이봐요. 레이챌 ! 이건 미친 짓이오. 태아만 생각할 게 아니라 애브
너 티투스도 생각해 봐야 되지 않겠소?나 역시 그자를 싫어하고 있지
만 이번 경우는....... 자! 티투스를 여자로 놓고 생각해 보더라도 이번
- 산모가 원치 않은 강요된 임신에 해당될 겁니다.그는 중절을 원
=요. 그떻다면 당신은 마땅히 그에게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소?
레이챌의 눈이 가늘어졌다.
[층고 고마워요, 잭.자.이제 들어가 봐야겠어요.......
잭은 돌아서는 레이웰의 팔을 잡았다
[레이챌. 당신 지금 크게 잘못하고 있는 거요. 그가 태아를 떼어 터
1길 원한다면 당신은 그를 도와줘야 하오. 막아서는 안 되는 거요.
[그 생각 변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잭?
[물론이지. 난 쉽게 신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는 평범한 진리가 적용되는 것 같군요.
잭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설마....... 설마 아기가 당신의......?
레이켈의 볼이 약간 허물어졌다.
[후훗! 내 나이에? 하긴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인생이 한
결 쉬워졌을 텐데.......
[누구의 인생 말이오?
[땅신의 인생요. 잭!
[내 인생이라구?왜...... 내 인생...... 그떻다면......?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잭 역시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
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의 머릿속에
서 마치 즉석 사진이 현상되듯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요.바로 당신의 아기예요!
1토리아는 곧바로 애리조나에 가지 않았어요...... 티투스에게 자
궁을 이식하기 위해 먼저 이곳에 왔었죠.
잭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용기를 내요. 잭. 당신이 똑바로 정신을
에게는 별이상이 없는 것 같아요.
차려야 해요. 다행히 태아
말을 마치자 레이챌은 병실로 사라졌다.
잭은 등을 벽에 기댄 채 주르르 무너져내리듯 앉아, 세운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양손은 목 뒤로 깍지를 낀 채 그대로 한동안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복도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경찰. 소방대원, 전기
기술자, 병원 관계자 그리고 기자 등등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부산스
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분주함 속에서 잭만이 멍한 채로 생각에 잠
겨 있는 것이다.오직 한 가지 생각에......
=나의 아기. 빅토리아의 아기, 우리의 아기가 아직 살아 있다.'
[잭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잭은 언뜻 생각에서 깨어났다.
몰리였다. 카메라맨도 대동하고 있었다.
[아니 몰리! 당신 여기 웬일이오?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잠깐만. 잭! 이리로
꽈들래요?
출입금지를 나타내는 노란 테이프 앞에 서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몰
트가 말했다
'레이챌이 티투스에게 한참 얘기중일 텐데
잭은 일어서서 몰리 쪽으로 걸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에요?
마이크의 접속 상태를 확인해 보며 몰리가 물었다.
[누군가가 폭탄을 설치했어.
'과연 티투스의 반응은 어떨까?'
[잠깐 인터뷰해 줄 수 있겠어요.잭?
'틀림없이 티투스는 아기를 떼려고 들 것이다.'
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이크를 고쳐 쥐었다. 카메라에 불이 들
어왔다.
[매클라우드 의원님. 오늘 밤 이곳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아시는
=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잭은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 .....저도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밝혀내
니다.
볼 작정입
잭은 '이 상황에서 인터뷰라니'하고 스스로 겸연쩍어하면서 대답했

[제가 조금 전에 만나 본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자면 누군가가 전화
로 이곳에 족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알려 준 덕분에 대법원장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데 혹시 그 제보자가 누군지 짚이시는 사람은
없으신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티투스의 병실 쪽을 쳐다보다가 그리로 발걸음을 떼려 했다.
팔을 잡아 그의 행동을 제지시키고는 몰리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의원님. 한 가지 더 여쭤 보겠습니다. 이번 사건이 낙태 지지론자
에 의해서 저질러졌다고 보시지는 않는지요?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의원님께서는 평소 의회 내에서 강력한 반()티투스 입장을 견지
해 오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법원장이 거의 살해될 뻔했다는 시
실을 아신 지금 심경이 어떠신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몰리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지금의 심경요?
'어떻게든 티투스의 낙태를 막아야 할 텐데.....
[네.지금의 심경은......?
몰리가 마이크를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글쎄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요. 아무리 적대적인 입=
에 있는 사람에게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잭은 잠시 말을 끊고 티투스의 병실 쪽을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
이렇게 덧붙였다
[미안합니다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몰리는 돌아서 걸어가는 잭의 뒷모습을 잠시 걱정스러운 눈초리
라보다가 다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정치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 신념
있어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병원에서는 도와주려 하:
있군요. 어쨌든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 '
말이 몹시 궁금하군요. 자, 지금까지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에서 몰
맥코믹이 전해 드렸습니다.
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
잭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우당탕탕 물
왔다.
흰 환자복 차림의 티투스가 뒤집어진 침대 위에 맨발로 서서 씨근덕
거리며 레이켈을 노려보고 있었다, 레이챌은 겁먹은 표정으로 그의 분
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문 닫으세요!
[무슨 일......?
[내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아?다들 썩 꺼져 버려 !
티투스의 부릅뜬 눈에 침대 머리 위 선반에 얹혀 있는 초음파 모니
터가 뛰어들어왔다. 지속적으로 삐어거리는 소리가 자신을 조롱해대
는 것만 같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모니터를 번쩍 들어서 레이챌
을 향해 집어 던졌다. 모니터는 레이웰을 살짝 벗어나 유리창 사이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티투스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모니
터에 연결된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던 것이다. 그는 마치 온몸의 꿰맨
자국을 발견한 프랑켄슈타인처럼 섬뜩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
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줄을 잡아채 버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몸에
연결된 두 개의 링거 줄과 콧구멍에 끼워진 산소 튜브까지도 모조리
거칠게 잡아 빼버렸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놓인 링거 막대도 밀어서
자빠뜨렸다.
[그만 해요!
레이웰이 외쳤다.
티투스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그녁를 쳐다보았다. 그때
간호사 한 사람이 병실문을 열고 들어오려 했다. 잭이 제빨리 문을 닫
았지만 그녀는 방안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았다. 티투스는 이제 핏발
선눈을 부릅뜨고 양 주먹을 꼭 말아 쥔 채로 레이챌을 향해 침대를 내
려섰다. 잭도 티투스의 뒷모습을 향해 두어 발자국 다가갔다 그때, 조
금 전의 그 간호사가 뭔가를 손에 들고 다시 들어오려 했다. 잭이 그녀
를 제지시키려 하자 레이챌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를 들어오게 하세요!
간호사는 벽에 등을 대고 방안을 빙 돌아서는 레이챌에게 다가가 주
사기와 진정제가 든 약병을 넘겨주었다. 티투스가 바닥에 쓰러뜨린 링
거 막대를 넘으며 다가왔다. 레이챌은 약병을 거꾸로 들고 바늘을 찔
러 넣은 다음 피스톤을 뒤로 당겨 주사기 안에 약을 빨아들이곤 그것
을 세워 들었다. 티투스와 레이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이챌은 창문에 등을 밀착시켰다. 티투스는 마치 그녀의 목을 누르려
는 것처럼 양손을 올리곤 레이챌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내딛었다.
[애브너 !
잭이 외쳤다. 티투스가 되돌아보았다. 잭은 적의가 없다는 걸 보소
주기 위해 양 손바닥을 편 채로 티투스를 향해 들어 보였다. 비 오듯
땀을 쏟고 있는 티투스의 상기된 얼굴에 얼핏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개처럼 어리등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눈을 몇 번 껌벅?
리고는 털썩 무릎을 끓으며 주저앉았다
[나 좀 도와주시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잭도 역시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 순간 몰리가 카메라맨과 함께 병실로 들어섰다. 카메라가 돌아?
고 있었다. 레이챌은 카메라의 불멎을 향해 소리쳤다.
[그걸 치우고 밖으로 나가요!
그러나 카메라는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이리처럼 방안에 펼쳐진 =
퐁경에서 렌즈를 떼지 않았다. 티투스는 잭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
요으로 고꾸라졌고 그 바람에 환자복 아래로 엉덩이가 살짝 드러났다
[저 사람들을 내보내 !
레이챌이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몸을 숙여 티=
스의 왼쪽 엉덩이에 주사기를 꼽았다. 티투스의 상체가 꼿꼿이 일어났
다. 간호사는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서 양손을 들어올렸다. 카메라맨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계속 찍어대자 이번에는 손으로 렌즈를 가렸다.
[좋아요.나갈게요.
몰리가 말했다
간호사가 그들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 티투
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레이챌은 잭 옆에 무릎을 끓
고앉아 양손으로 티투스의 머리를 받쳤다.
[괜찮을 거예요.
레이헬을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하게 말했다. 티투스의 충혈된
눈이 잠시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가 잭에게로 향했다. 티투스는 잭의
옷깃을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당겨서 그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
었다
[제발...... 나 좀 도와주시오.......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그럴 수 없어요. 애브너.
잭은 몸을 뒤로 빼며 티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티투스는
표정으로 이유를 물어 왔다.
[그...... 아이가 바로......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티투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순간, 잭의 머릿속에는 하지 말았어
할 말을 해버렸다는 자책이 일었다. 뭔가 티투스를 진정시킬 수 있는
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이미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어졌
다. 진정제와 잭의 폭탄 선언이 티투스의 혼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벌
어진 입 사이로 침을 흘리며 그의 머리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앞뒤로
흔들거렸다. 잭의 옷깃을 잡았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두 눈이 흰자위
만 남기고 뒤집어지면서 그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잭은 가죽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앉아 있었다. 피브 창 박1
가 휴게실 출입문 틈으로 고개를 삐죽 들이밀었다.
[티투스는 깊이 잠들었어.모니터를 연결할까?
[아니, 그가 맬 때까지 기다리자.
레이챌이 대답했다.
[지금 막 두 개의 심장박동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그 말을 남기고 피브의 얼굴이 사라졌다.
[잭.당신 잠 좀 자야겠어요.
레이켈이 잭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이챌이 담
를 비벼 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빅토리아에게 약속을 했었어요. 태아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
겠노라고 말이에요. 비록 그녀는 가고 없지만 그 약속은 꼭 지키고 '
거예요.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말 들었죠.잭?
[난 뭐가 뭔지 모르겠소. 솔직히 그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
차 잘 모르겠소.
이봐요 잭. 지금 몹시 힘들어한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있고 충분히
1해딸 수 있어요.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생각해서 자신을 피롭히지
.'아__.
그 말에 잭이 눈을 번쩍 떴다.
[지나치다구?아내가 될 여자가 몇몇 사람들과 모의해서 사랑의 씨
앗이 자라고 있는 자궁을 대려원장에게 이식해 버린 이 마당에 나더러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요?
[잭, 빅토리아를 오해하지 말아요. 그녀는 숨지기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이 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더랬어요. 뭔가 엄청난 일이 은밀히 진
행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긴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구태여 알려고 들지
도 않았다구요. 그러다가 아기인형 살인사건이 차례로 일어나면서 그
녀도 모든 걸 캐닫게 됐지요. 빅토리아는 내 연구를 말리려 했어요. 그
러나 나는 그만둘 수 없었죠....... 오히려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
어요.
[뭘요, 자궁을 달라고?
잭이 그녀의 말허리를 끊으며 물었다. 레이챌은 그의 상기된 얼굴을
외면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엔 혈액 검사부터 해보자고 했죠. 그녀와 티투스의 세포 조직
이 서로 어울리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사실 우리 수술팀들 중에는
디투스와 조직이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나의 부탁을
거절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결국에는 우리 계획에 동참하리라
는 것을 알고 있었죠.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었죠?
[글쎄요...... 여러 가지 여건이 그떻게 만들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
었다고 하면 대답이 될까요? 어쨌든 빅토리아는 혈액 검사에 응하게

됐고 우리는 그 혈액을 면밀히 검사했죠.......
레이챌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길게 한 번 들이쉬고는 다시 이어나
갔다.
[빅토리아와 티투스는 완벽에 가까우리만치 잘 맞았어요.
[그래서 빅토리아가 '여기 내 자궁이 있으니 갖다 쓰세요.' 그랬
소?,
[그렇지 않아요. 빅토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자궁 이식에
반대했어요. 끔찍한 범죄인 데다 대수술에 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었
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큰 이유는 바로 당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
어요. 잭.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구?
[그래요. 자궁을 줘버린다고 해도 자기 자신은 생물학적인 어머니
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당신의 경우는 좀 복잡해질 것 아니겠는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그 문제 때문에 고민하게 될까 봐
말이죠. 하니 오코너의 경우도 있었고....... 또 당신의 가족에 대한 갈
망이 얼마나 컸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잭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레이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그녀로 하여금 수술을 망설이게 한 커다란 이
유가 있었어요.
[그게 뭐였습니까?
[아기에 대한 생각이었죠. 이식 수술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만일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티투스가 사실을 알아채고는 낙태를 하겠다고
우겨대면 그땐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어요....... 생각해 보면,놀라운
일이죠. 나는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결국 지금 벌어진
사태는 빅토리아의 예상대로 된 셈이니까요.
[퍽도 감동적인 애기군요. 그래, 남편과 아기에 대해 그토록 걱정을
했다는 사람이 덜컥 자기 자궁을 내줘 버럽니까?
레이웰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꼬지 마세요. 잭. 빅토리아는 정말 당신과 아기에 대해 걱정하고
괴로워했단 말예요.
[그렇다면 왜 수술에 동의했냐 이겁니다.내 애기는!
[일련의 예기치 못한 사태만 일어나지 않았던들 빅토리아는 결코
수술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레이켈은 말을 끊고는 카운터 위에 놓인 얼음통을 열고서 차가운 얼
음물에 손을 담갔다 빼내 가지고는 앞이마에 물을 축였다.
[당신과 빅토리아 둘이서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시체를 발견하던 날
밤 기억나죠? 빅토리아는 그것이 티투스의 소행이라고 단정짓고 있었
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 티투스가 대법원장에 발탁됐다는 사실
이 일제히 도되었지_2_.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법원장 자리에 앉게 되면 제노비아 데이비스와 닫은 처지
에 있는 수십, 수백만 명의 여인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을 깨닫게 되자 빅토리아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던 거죠. 그래서 그날
밤, 그녀는 우선 아기부터 갖자고 결심을 했던 거예요. 그리고 의도대
로 임신을 하게 된 거죠....... 그날 밤 기억나세요?
[하지만 티투스는 제노비아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었잖습니까?
[그떻죠.하지만 빅토리아는 그걸 모르고 있었죠.
[왜 몰랐죠?
[내가 얘기해 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요?
레이챌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으나 이내 닫혀 버렸다. 대답을 하는
대신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자신의 변호사 찰
리 채드웍과의 약속 시간을 이미 넘겨 버렸던 것이다. 상대방이 나오
자 레이챌이 사과를 하고 다시 약속 시간을 정한 후, 전화를 끊었다.
[레이. 마저 얘기합시다. 그러니까. 임신을 한다, 나의 청혼을 거부
한다 그리고 나와 헤어진=[. . ...._ 이 모든 게 각본에 의해 미리 짜여져
있었단 말입니까?
[빅토리아는 자신이 끼여들게 된 이 계획에 관해 당신이 영원히 모
르고 넘어가길 원했던 거예요. 잘하면 임신했다는 사실마저도 당신에
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결국은 나도 알게 되었잖소?
[그렇게 됐죠. 당신은 아기를 낳자고 설득했고 결혼도 졸라댔죠. 그
래서 빅토리아의 결심이 몹시 흔들렸죠. 당신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우리 계획에서 손을 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던 거예요. 추수
감사절 날의 특집 방송만 없었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그떻게 했을 거예
요...... 클레이 대통령의 특별 담화문 덕분에 그녀는 이식 수술에 대
한 결심을 새롭게 다졌던 것이죠. 기억나세요? 대통령이 상원의 인슬
을 거치지 않고 티투스를 대려원장에 취임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
후 빅토리아가 텔레비전을 보며 했던 말 말이에요. '당신이 이겼어
였죠.아마......?
[그랬지.
[그 애기는 그저 뇌까린 말이 아니었어요. 대통령이나 애브너 티=
스에게 대고 한 말도 아니었지요. 바로 나에게 한 말이었어요.
레이챌은 말을 끊고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 잭에게 권=
다. 잭은 사양했다. 레이챌은 커피잔을 자기 앞에 내려놓고 다시 말=
이었다.
[추수 감사절 다음 날, 애리조나의 온천에 가는 대신. 빅토리아는
농장으로 날 찾아왔어요. 그날 오후, 그만 나는 온천에서 농장으로 돌
려놓은 전화를 실수로 받게 되었죠. 당신 전화 말예요. 하마터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었죠.......
레이젤은 씁쓸하게 웃고 나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어깨를 움츠
린 채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나는 일요일인 그 다음 날, 빅토리아를 병원에 입원시켰죠. 그리고
티투스에게 복막염 증상이 일어나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두 사람을
한수술실에 모아 놓고는 이식 수술을 했던 거예요.
말을 마치고 난 레이챌이 시계를 보며 덧붙였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잭은 꿔가 뭔지 깜깜한 어둠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잭?
그녀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오히려 고개를 떨구고 몸에 걸친 옷가지
를 살펴보았다. 더럽고 축축했다. 레이웰은 그를 일으켜 세워서 세면
실문 앞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샤워 좀 하세요. 그리고 이걸 입도록 하세요.
말과 함께 그에게 파란색 수술복을 건네주었다.
[페퍼 루미스는?그녀도 이번 일과 연관이 있소?
그가 신발끈을 풀며 물었다.
[네 그녀가 없었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적어도 훨
썬 힘들었겠죠. 페퍼는 수술 당일 티투스에게 '카사버텃'을 집어 넣은
체리 초콜릿을 먹게 하는 임무도 맡았었죠. 복막염과 흡사한 증상이
일어나게 하는 약이죠. 그 직전에는 티투스가 의사{) 발작을 일으
키도록 타라를 도와준 적도 있었구요.......
[타라?타라가 누굽니까?
[우리 팀의 마취 전문의예요.
[어떻게 도왔다는 말이죠?
[일단 티투스가 스스로의 건강 상태에 불안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지 않겠어요? 페퍼는 티투스를 일부러 법원 주
차장으로 데리고 나왔어요. 미리 구성해 둔 각본대로 그곳에는 한 무
리의 시위 군중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죠. 타라는 그 중 한사
람으로 위장해 있었고. 페퍼는 쥐고 있던 티투스의 자동차 키를 떨어
뜨려 차 아래로 밀어 넣었죠. 그것을 꺼내기 위해 티투스가 엎드리는
틈을 타서 타라는 그에게 모종의 약을 주사했던 거지요....... 어찌 보
면 페퍼는 우리 팀의 누구보다도 더 힘든 역할을 해냈다고 할 수도 있
어요. 철저히 정체를 감춘 채, 매일매일 디투스와 얼굴을 마주해야 했
죠. 게다가 그 끔찍한 반 낙태법 초안을 작성하는 걸 어쩔 수 없이 도
와주기까지 했으니 말이죠.
[이쑤시개는 어떻게 된 겹니까?
[후훗. 그건 당신이 만지작거렸던 농장의 식탁에 있던 바로 그 이쑤
시개통에서 나온 거죠.
[이번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 누구죠?
잭이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우리 수술팀의 팀원 일곱 명하고 페퍼 루미스 그리고 캐시 키낸,
그렇게 아흡 명이에요. 모두 다 처음부터 이 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
이에요.그러니까 년 전부터였죠.
[그나저나 레이, 나는 엘리 그레이브스와 비디오 테이프에 관해 경
찰들에게 모두 털어놓아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잭의 말에 과민 반응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왜요? 당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다구요? 당신이 한 일이라곤 누접
가에게 전화번호를 하나 가르쳐 준 것뿐인데요. 폭탄에 관해서는 꿈
몰랐던 일이었잠아요.
[그건 그렇지만, 어디 경찰쪽 사람들이 그떻게 생각하겠소? 어쨌든
니 그레이브스가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신고해야만 하겠소. 그
1친놉을 이대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게 내버려둬서는 절대 안 될 것

[하지만 그자는 탈옥수이기 때문에 굳이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경
찰이 이미 뒤를 쫓고 있잖아요.
[그떻게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오.레이.
[이봐요. 잭.......
[알았소.알았어.......
그는 손을 흔들어 레이헬의 말을 막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 문제는 일단 제쳐 두고 지금 나는 샤워 좀 해야겠소.그리고 내
아기는.......
[어머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잭, 당신은 아기가
딸인 줄 알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틀렸어요. 만일 딸이었다면 빅토
리아는 우리 계획을 포기했을 거예요.
잭의 볼이 달아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그녀가 딸의 목숨은 소중히 생각하고 아들의 목
숨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까워요. 티투스가 여자들에 대해서 어떤 감정
을 갖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의 경우. 티투스가 자신의 뱃
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기가 딸이라면
그는 그 즉시 중절을 해버릴 것이지만 아들이라면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지 않을까....... 빅토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됐소.그만 합시다.정말 교묘하게 둘러대기도 잘하는군.
레이챌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거짓이
라곤 깃들옇 있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빅토리아가 아이에 대해 얼
마나 많이 걱정을 했는지 그것만은 잊지 말아요, 잭. 빅토리아는 아기
를 위해 이름까지 지어 놓았다구요.
[꿔라고 지었죠?
[레이예요.
'레이?' 일순 그의 머릿속에는 얽혀 있던 실 타래가 한 가닥풀리며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레이챌이 변명하듯이 말했
다.
[내 생각이 아니라 빅토리아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이었어요. 잭?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에겐 전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는 탈의실의
타일 바닥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레이챌의 서가
와 [호박 시집]의 오렌지색 표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육체로는 잘 알지 못하여도.
가슴으로는 영원히 사랑할 나의 꿈,
레이에게.'
아들에게....... 그랬다. 빅토리아의 속사정은 그랬던 것이다. 몸속
에 있는 아들 그러나 곧 자기 몸에서 떠나갈 아들에게 빅토리아는 어
머니의 마-음.으로 동시집()을 읽어 주다가 갑자기 복받쳐 오른
감정을 그렇게 표현해 놓았던 것이다
자신은 그러한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채, 그것이 빅토리아와 레이켈
의 더러운 관계에 대한 확증이라고 흥분해서 설쳐댔던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무슨 생각을 그떻게 골똘히 해요?
[당신 서가에서 발견했던 동시집에 대해 생각하고 있소. 레이에게
바치는 글귀가 적혀 있는 그 책 말이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걸 빅토리아가 당신에게 주는 글이라고 오해했었소. 사실 그 이전부
터 빅토리아와 당신이.......
[알아요, 잭. 나도 당신이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 그런 쪽으로 의심
올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그것도 오래 전부터 말예
요.
[내게 말해 줬으면 좋았을걸....... 그럼 쓸데없는 오해도 하지 않았
을 것 아니오.
[밝히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죠. 사실 당신이 그런 쪽으로 의
심을 하는 바람에 우리들의 계획이 당신에게 들통나지 않았던 것 아니
겠어요?
잭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잭. 여자들은 자기들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남자들의 성적 편집증을 때때로 이용하기도 해요.
[하지만, 레이챌. 그래도 난 너무 어리석었소.
[누구라도 속아넘어갔을 거예요. 빅토리아와 나는 우리의 계획이
드러나지 않도록 언제나 수수께끼 같고 암호 같은 말만 골라 사용했
죠. 예를 들어 이식 수술은 '휴가'라고 불렀었죠. 자....... 잭 이제 기
운 내고 어서 샤워나 하세요. 우린 곧 나가 봐야 해요.
레이챌은 말을 마치고서 잭에게 수건을 건냈다.


티투스는 똑바로 드러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숨결도 편안했고 심장
도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웠다. 조금 열린 욕실문 틈으
로 한 가닥 불빛만이 새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뱃속에서 무
언가가 꿈틀거리는 바람에 티투스는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진정제의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어지러웠다. 아무거나 기억해 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의 머릿속엔 현재를 설명해 줄 만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양손으로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침대 위였다, 짙은 어둠에 ?1
려 높이를 알 수 없는 천장,심장박동 소리.....
'여기가 어디지?'
그는 양 팔꿈치로 버텨서 상체를 일으켰다. 어지럽고 불안했다. =
는 엉덩이 걸음으로 어기적어기적 침대 끝머리까지 내려가서 두 다=
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이상했다.
자기 다리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허공에 매달려 자기 맘대로 ]
툴게 흔들거리고 있는 두 개의 길쭉한 물체 같았다. 티투스는 바닥=
내려서다 그만 두 다리의 맥이 풀어지며 그대로 넘어졌다. 그는 배를
칼고 엎드린 채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혼
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는 손과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숨이 턱
에까지 받쳐 올라왈다 그는 네 발을 짚은 자세로 바닥에 패인 타일의
흠집을 바라보았다. 길고 똑바로 연결된 것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
는 몽롱한 시선을 바닥에 빼앗긴 채. 또 한참을 그떻게 있었다. 얼마
후. 다시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그 감각이 전혀 낯
설지만은 않았다. 전에 펴어 본'느낌....... 아아! 그렇지 ! 뱃속에서 무
언가가 발길질을 해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마침내 진정제의 약기운을
몰아내고 그의 기억을 되찾아 주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
병실에 들어온 레이헬......
그녀가 침대 옆에 서서...... 얘기를...... 그 얘기...... 자신이...... 아
악!하느님,하느님 맙소사......
온몸에 식은땀이 콰악 배어 나면서 속이 메스껍고 온몸이 후들거렸
다. 그는 목을 치켜 들고 배를 쥐어짜면서 몸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을
토해내 버리려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입과 코를 통해서 끈적끈적한
것이 홀러내렸다. 그는 숨을 한 번 고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구
토.경련,구토.......
마침내 탈진 상태가 된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어느새 타일 바닥에
생겨난 작은 오물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없었다. 진저리를 치
며 입가에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는 점액질의 배설물을 닦으려고 손을
올리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오물 더미 속에 얼굴을 쳐박고 말았다. 이
번에는 통증이 있었다. 뺨이 얼얼했고 코에서는 코피가 흘렀다. 그는
피와 오물을 온 얼굴에 뒤집어쓴 채로 가만히 뺨을 대고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온몸의 힘을 끌어 모아서 머리를 들었다. 열려진 욕실문 틈을
통해서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흰색 좌변기가 보였다. 여기까지만
오면 물이 있다고 유혹하고 있는 신기루 같았다, 그곳까지 기어가기
위해 네 발로 버티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그의 뜻을 따라 주지 않
았다. 잠들기 전, 침대를 뒤짚고 기계들을 때려부줬고 또 지금은 토하
느라 용을 쓴 바람에 온몸의 근육들이 죄다 풀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
는 잠시 가만히 누워 있다가 다시 힘을 모아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
나 역시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최후가 아닐까 하는 공포의 전율
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을 추스리기 위
해 나직이 뇌까렸다.
'포기하면 안 돼. 애브너.'
'힘을 모아 보자.'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체통을 찾아야 해.'
'초조해하지 말자구.'
'여기는 병원이야. 곧 누군가가 도와주러 올 게 틀림없어.'
'일으켜 세워 주고 몸을 닦아 주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병원, 의사들. 뱃속의 태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온몸의 피부가 띠
끔거리면서 다시 숨이 막혀 왔다.
'이럴 순 없어.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는 살 속에서부터 품어져 나오는 한기에 몸을 떨며 미쳐 버릴 =
만 같은 홍분 상태를 가라앉혀 보려고 애썼다. 탈출구도 목적지도
을 곳마저 없었다. 이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미로 속에 갇혀 버린 =
이다. 그의 정신과 육체를 야금야금 갊이꺽어 가면서 자라나고 있=
악마,그렇지,악마와 비슷한 존재를 뱃속에 담은 채로.....
그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구렁텅이에서 건져만 주신다면 앞으
로 당신이 명하시는 모든 일에 거역치 않고.......
순간 마치 그의 기도가 통하기나 한 듯 몸이 가벼워지면서 하늘에서
부터 자신에게 무언가가 내려 덮이는 환각이 일어났다. 두려움은 가시
고 히스테리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는 몸에 내려 덮인 천을 몽롱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수의였다.
'수의. 수의? 그렇다면 지금 이것은! 이게 바로 삶의 끝을 알리는
환영()이로구나.'
전세계 모든 냅관 가운데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미합중국의
대려원장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쓸쓸히 죽어 가야 하다니....... 한 외과
의사의 메스 아래 유린당하여 강제로 임신까지 하게 된 채로, 오물 구
덩이 속에 누워 최후를 맞다니.......
엄청난 슬픔의 파도가 그에게 몰아쳐 왔다.
'이제 곧 하늘이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가겠지.'
그는 가만히 누운 채로 죽음을 기다리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때
뭔가가 목구멍에서부터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고 단지 한 마디의 말이었다. 열 살 나던 해부터 그의 가
슴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바로 그 단어가 이제는 불신과 분노의 상처
를 밀어내며. 나지막한 속삭임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던 것이다.
[엄마.......
_
[와아!세상에....... 저것 좀 봐.
워싱턴의 채널 6 뉴스의 앵커맨, 데이브 리즈는 스튜디오의 조종실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옆에 앉아 있는
몰리와 뉴스 쇼의 , 팀 벤튼에게 연신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네 발로 엎드린 채 맨궁둥이를 드러낸 애브너 티투
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야아! 정말 굉장하군 저것 보라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바로 저게
대법원장의 엉덩이라구.
그는 정말로 흥분해 있었다.
[글쎄요. 그저 커다랗기만 할 뿐 뭐
요.
별로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데
몰리가 말했다.
레이웰이 티투스의 엉덩이에 주사를 놓은 다음,티투스가 잭에게도
움을 청하기 위해 무릎을 어은 채 상체를 세우고 양손을 벌리는 장면
에서 테이프는 끝났다. 정지 상태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팀 벤튼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월 하고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그냥 저 자체로 특종감인걸.
데이브 리즈가 여전히 흥분을 삭이지 못한 채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하잖아?
[내가 말해 주지. 팀. 미합중국의 대법원장이 살짝 돌아 버렸다. 그
래서 자유의 메달 서훈자인 외과의사가 그의 엉덩이에다 주사를 놓은
=야. 바로 미합중국의 하원위원 앞에서 말이지. 그 밖에 뭐가 더 궁금
!
[저 테이프 뒤에 숨은 애기지.
벤튼이 얼굴 표정을 굳힌 채 짧게 대답했다.
[숨은 얘기?이봐 몰리.그런 게 있으면 얘기해 주지 그래?
리즈가 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몰리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
쓱했다. 리즈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방송에 당장 내보내자구,어때?
벤튼이 회전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떻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데이브. 저긴 미합중국 대려원
장의 개인 병실이라구. 함부로 띄웠다간 사생활 침해로 걸려서 다 박
살나고 말지도 몰라.
리즈가 몰리 쪽으로 돌아 보며 말했다.
[몰리. 저 방에 들어갈 때 제지당하지 않았어?
[둬. 특별하게는.......
그때, 벤튼이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끼여들었다,
[그럼,허락받았단 말이야?
[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레드패스 박사가 카메라를 치우라고 항
의하긴 했죠. 하지만 우린 계속 찍어댔어요.
[그랬어? 그럼 대법원장은 가만히 있었단 말이지? 그 보라구. 팀.
저기는 대법원장의 시적 공간이지 그 여의사의 것은 아니잖아?
[이 사람아! 저 여의사는 대법원장의 주치의야. 그녀는 환자를 보호
할 의무와 권리를 갖고 있다구.
팀의 면박을 받고 나서 리즈는 뭔가 묘안을 찾으려는 듯 탁자에 이
마를 박고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얼마 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보라구, 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잖아. 문제가 꿔야!
프라이버시? 내가 보기엔 그건 문제될 게 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대
법원장의 불알이나 꿔 그 비슷한 걸 찍어서 공개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맨궁둥이뿐인걸?그것도 주사를 맞기 위해서 드러낸 거잖아.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스튜디오로 통하는 마이크에 대고 애기했다.
[어이 ! 제리 테이프 좀 앞으로 돌려 줄래?대법원장의 불알이 잡혔
나 안 잡혔나 보려 그러네.
그러고 나서 다시 벤튼에게 물었다
[그리고 또 뭐가 걱정돼?
[이봐. 데이브. 저 화면만 갖고는 곤란하다니까
그러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구.
[야, 정말 답답하다. 팀. 지금 이것저것 시시콜콜하게 따지면서 이
렇게 앉아만 있을 상황이 아니라구. 다른 방송국 애들이 병원에서 일
어났던 일을 전해 듣고 띄워 버릴 거라구. 그렇게 되면 우린 뒷북만 치
게 되는 꼴이 된다구, 그땐 테이프고 꿔고 다 소용없이 돼버려. 뉴스기
뭐야. 새로움 아니냐구.
벤튼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곧 돌아올게.
몰리도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뒤에서 리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어마어마한 특종이라구! 대범원장이 무릎을
을 평생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 것 같은가? 시청률을
끓고 있는 모습
생각해 보라구
이답답한 친구야!
복도로 나온 벤튼은 걸음을 멈추고 몰리를 향해 뒤돌아섰다.
[펀집실에 테이프를 넘겨주고 끄분 후에 돌아을 테니 여기서 다시
만나자구.당신 목소리가 들어가야 해.그러니 방송 준비 하='.
[너무 성급한 거 아니에요? 이 테이프는 빙산의 일각이에요. 괜히
데이브 말만 듣고 조급하게 행동했다가 진짜로 큰 걸 놓치게 될지도
몰라요.
벤튼은 주먹으로 입술을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몰리가 말
이었다
[이 테이프를 갖고 있는 건 우리뿐이에요. 팀. 날 좀 믿어 줘요. 이

거 완전히 에미상()감이라구요. 자신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이건 모험이야. 이대로 시간을 끌게 되면.......
[딱 하루만 줘요.네?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그리고 이떻게 덧붙였다.
[길어도 이틀이면 충분해요.
벤튼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체념이엇
다.
[빌어먹을! 하여튼 반드시 뭔가를 찾아내야 돼.몰리.
[유괴 건에 대해서 말해 봐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찰리 채드웍이 양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
했다.
밤색 구두와 무늬가 들어 있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책상에는 위스
키가 한 잔 가득 놓여 있었다. 10대 시절부터 예순 살이란 나이를 먹도
록 절친한 벗으로 지내 온 술이었다. 술에 취해 있던 아니던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워싱턴 근방에선 최고의 변
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을 폭파해서 인명을 살상한 범죄자들 가운데서 실
험 대상이 될 사람을 고르기로 미리 계획을 짜놨더랬어요.
레이켈이 대답했다.
[그걸로 당신의 범죄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을 텐
데......?
[물론 알고 있었죠.
[아기인형은 어떻게 된 거요?
[페퍼 루미스 아시죠?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인 캐시 키낸, 그 두 사
람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앞으로 병원 폭파를 계획하고 있는 자들에
게 경종을 울려 주자고 제안했죠.
[당신은......?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들을 어디 조용한 곳에 묻어 주고 장례식도
치뤄 주고 싶었죠. 그러나 페퍼와 캐시가 워낙 겅쉭하게 주장하는 바
람에.......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됐던 것 같아요.
[결파적으로는 잘됐다?
[네. 그 이후로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병원 폭파사건은 단 한 차례
밖에 없었으니까요.
채드웍은 책상에서 발을 내리며 물었다.
[죽은 시체들을 또다시 해부한 까닭은 뭐죠?
[우선 왜 실험이 실패했는가를 확인해 봐야 했어요,물론 우리의 실
험 목적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죠. 혈액을 모두 제거한 것은 검시판
들이 사인이 다량 출혈() 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자궁으로 혈관이 연결돼 있었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장골()의 동맥을 절단한 겁니다. 그리고 이식 수술을 하느라고 절
개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해 내가 직접 상처 위에 그대로 메스 자국을
내면서 해부를 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들의 간을 제거했죠.
[간은 왜......?
[간에는 우리가 그들에게 투여했던 화학물들이 집적되어 있었죠.
아울러 사람들로 하여금 사라져 버린 간의 행방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
려는 의도도 있었구요.
[부러진 연필이 뜻하는 건 윌니까?
[그건?그건 단순한 사고였어요. 타라가 '이것을 가지시오'라고 쓴
쪽지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인형의 배에 뚫기 위해 우연히 집어 든 것
이 매클라우드 의원의 연필이었던 거죠. 우리도 방송을 보고 나서야
부러진 연필 조각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빅토리아 윈터스도 처음부터 계획에 참여했나요?
[아니에요. 빅토리아가 동참한 것은 자궁을 티투스에게 제공하면서
부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때까지도 빅토리아는 페퍼 루미스가 계획
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어요.
채드웍은 위스키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아침 6시.시간에 비해선 많이 마시고 있는 셈이었다
[당신이 제노비아 데이비스를 죽였다는 건 또 무슨 얘깁니까?
레이챌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천장을 보면서 변호사의 질문에 대=
했다.
[빅토리아와 나는 제노비아가 낙태 수술을 결심하도록 온갖 애=
다 써서 그녀를 설득하려 했죠. 그러나 그녀는 법원의 허가 판결 없
는 그러지 못하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피웠어요. 티투스는 한껏 늑장=
부렸고 그럴수록 빅토리아는 초조함을 더해 갔죠.
그녀는 젖혔던 고개를 바로 세우고 변호사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
다.
[그 당시,우리는 할리 문을 납치해다 놓고 그에게 이식할 만한.
로 어울리는 세포 조직을 가진 여자의 수태된 자궁을 물색하고 있=
중이었어요. 그리고 제노비아는 강간범의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고 =
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 아이를 떼어 버리]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죠.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아기를 갖고 싶어=
지도 않았어요. 따라서 그녀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는 것이 곧 우리 1
제의 해결책이란 걸 알게 됐죠. 또한 그녀의 자궁을 들어 내서 할리 1
에게 이식하면 아기도 살리게 되고 몸서리쳐지는 임신도 끝낼 수 있;
된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러나 단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었어요.
[그게 뭐였습니까?
[그녀는 법원의 명령을 위반하면서까지 수술을 받을 순 없다고 버
텄어요. 한편, 티투스는 현행법상 제노비아에게 낙태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죠. 물론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게 된 것
은 페퍼였고요. 페퍼는 그 사실을 판결일로부터 이틀 전에 제노비아에
게 전화를 걸어서 그 소식을 알려 주었던 거고요. 제노비아는 페퍼와
= 통화 내용을 편지 봉투에다가 짧게 메모해 두곤 그걸 성격책 갈피
에 끼워 넣었던 거예요. 전화번호도 함께 적어서 말이죠. 그건 우리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었죠.
[당신이 직접 수술을 집도했나요?
[네....... 할리 문의 졍과는 좋았지만 불행히도 제노비아는 그떻지
못했어요.
[무슨 문제점이......?
[혈액이 응고되지 않아서 다량 출혈이 일어났어요. 라는 거죠.
아주 드문 경운데 제노비아가 바로 그 케이스였던 거예요. 모두 비디
.=_ 테이프에 담아 놓았어요.
[그 수술 장면을 녹화했다구요?
[그 수술만이 아니라 오든 실험을 죄다 녹화해 두었어요.
그녀는 담배 연기를 뿜어 내며 말을 계속했다.
[잭이 자기 수중에 제노비아의 수술 장면을 녹화한 테이프가 있다
고 말했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랐더랬어요. 어떻게 그가 그걸 입수할
수 있었을지 이해가 가질 않았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더
라구요. 그는 누군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던 거죠.
[잠깐만 레이챌, 한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제노비아 데이비스가
수술에 합의했고 그 수술 도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숨졌다면 당신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법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하지만 그건 명백히 내 잘
못이었어요. 내가 메스를 잘못 놀렸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테이프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식 수술을 받기 23일 전쯤에 빅토리아가 법
원의 허가가 떨어졌다고 제노비아를 속여서 캐시의 병원으로 데려왔
었어요. 그러나 나는 제노비아의 태아를 그렇게 잃고 싶진 않았었죠.
그래서 페퍼를 시켜서 병원에 전화를 하게 했어요. '법원의 명령을 어
겨선 안 된다'고 협박성 통보를 하게 했던 거죠. 만일 내가 그런 술수
를 쓰지 않았더라면 제노비아는 그날 안전하게 낙태 수술을 받았을 테
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고 있을 거예요.
레이챌이 담배를 부벼꼈다.
[그랬었군요.......
채드웍은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쓸쓸한 눈길로 허공의 한 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몸을 앞
으로 수그리며 그가 미루고 미뤄 왔던 질문을 던졌다
[레이웰 박사 왜......?
그녀는 잠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다시 드러난 그녀오
양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바로 그 질문을 듣기 위해,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 왔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답을 요구받고 나니 입이 =
어지질 않았다.
....,.조만간 법정에 서야 할 날이 오겠죠. 그때가 되면 모든 걸
명할게요. 찰리.
레이챌은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고 나서 채드웍에게 제안했다.
[함께 테이프 보시겠어요?
변호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보지 않겠어요. 레이챌. 그걸 지금 보게 되면 당신의 변호를
을 마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게다가 이건 비밀
데난 '피'라는 단어만 들어도 기절할 정도로 심장이 약해 놔서 그걸
참고 지켜볼 수 없을 겁니다.
레이웰이 일어섰다.
[그래요?문 밖에 있는 사람은 그걸 견뎌 낼 수 있을는지 알아보러
야겠네요.그럼 이만......
말을 마친 그녀는 때기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그곳에
는아카부터 한 남자가 초조해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이었다.
비디오기의 버튼을 누르고 나서 레이켈이 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테이프에는 수술 준비 과정은 담겨 있지 않아요. 그 과정은 너
무 복잡하고 또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
[이를테면......?
[우선, 장기 기증자와 수혜자, 두 사람의 세포 조직이 얼마만큼 일
치하고 있는가를 정밀히 검사해야 해요,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조직을
가지고 있다면 이식 수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죠. 양쪽의 조직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는 경우라도 조심해야 할 게 있어요. 수혜자의 면
역 체계가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거든요.
[그래서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는군요.
[그래요. 그러나 그것은 바이올린 줄을 고르는 것과는 달라요. 극도
의 섬세함을 요하는 작업이죠. 면역 체계를 지나치게 억제하게 되=
당연히 외부의 질병에 대한 수혜자의 저항력이 약화되니까 말이죠.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미지근해진 콜라를 몇 모금 마시고서 말들
이었다.
[각각의 환자에게 적합한 면역 억제제와 그 용량을 세심하게 조
해야만 하죠. 멜빈 쉬버스의 경우엔 억제제가 너무 약했어요. 그래1
이식받은 자궁을 면역 체계가 거부해 버리는 바람에 유산이 되고 말았
죠. 농장의 수술실에서 일어난 일이었어요. 그때 난 병원 강당에서 강
=중이었구요. 우리 팀의 젊은 의사 한 사람이 그의 몸을 열고 출혈을
막으려 했어요. 병원 연구실에선 피브 창 박사가 텔레미터로 전송된
자료를 근거로 삼아 스피커 폰으로 지원을 했죠. 하지만 너무 늦었어
요.
[할리 문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사람의 경우에는 정 반대였죠.멜빈 쉬버스를 잃어버린 경험 때
문에 이번엔 또 지나치게 많은 용량을 투여한 거예요. 그래서 진폐성
폐렴균이 그를 덮쳤죠. 결국 그걸로 죽고 말았어요. 불행하게도 제노
비아 데이비스의 태아도 그와 함께 죽게 되었구요.
[제노비아의 태아라구요?
'성급하기는......
례이챌은 뭐라고 한 마디 톡 쏘아 주고 싶었지만
말을 이었다.
지그시 눌러 참고
[그래요. 그건 이따가 설명할게요....... 세 번째는 당신도 잘 알다시
피 빌리 배니스터였죠. 앞선 두 차례의 실패 때문에 우리는 자연, 억제
제의 용량을 정확하게 조절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죠. 그러나
보다 정밀한 조직 검사를 하기 위해 그의 배를 열었을 때는 이미 번질
대로 번진 암세포들을 발견하게 됐죠. 결국, 손도 꼿 써보고 배니스터
를 잃고 말았어요. 그러고 난 뒤 네 번째의 수술, 다시 말해서 빅토리
아와 티투스의 이식 수술을 하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두 사
람의 조직은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울렸으니까요.
[그나저나 억제제에는 어떤 어떤 성분들이 들어 있습니까?
[스테로이드 6. 항암제, 항생제 그리고 류케나스가 들어 있
어요. 류케나스는 비비의 신장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거듭하는
동안 우리가 개발해 낸 합성제예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독한 약품으로 가득 찬 자
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약들이 태아에게 해로운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 동안 신장이나 간 이식 수술을 받은 임산부의
수가 제법 되거든요. 적어도 태아에게는 이상이 없다닝 것이 어느 정
도 밝혀진 상태예요. 쉬버스와 할리 문의 경우에는 억제제의 여러 성
분들을 용량에 맞게 배합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쉬버스에게 자궁을 떼어 준 여자는 누구였습니카?
레이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캐시 키낸이었어요,
그때 비디오기에 연결된 화면이 밝아졌다. 잭의 눈이 자연 그리로
향했으나 카메라가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첫눈에 알아볼 수가 없었
다. 가운데에 넓은 구멍을 낸 볕은 푸른색의 천이 텐트처럼 쳐져 있고
그 밑에 주름잡힌 누르스름한 물체......: 카떼라가 점차 아래로 내려갔
다. 드디어 그의 눈에 익은 것이 화면에 나타났다. 배꼽이었다
.... ..누구의. ..... ?
레이켈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빅토리아예요. ......잭,괜찮아요?
잭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저건 빅토리아일 수가 없다 =
의 머릿속엔 언젠가 바닷가에서 보았던 그쉭의 몸매가 떠올랏다. 비
니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볕에 그을린 갈색의 홀쭉한 아랫배
가졌던 빅토리아의 모습....... 지금 화면에 비춰지고 있는 것은 그 =
토리아가 아니었다. 수의를 입은 채, 미라가 되어서 어느 원시 부족=
신에게 바쳐지고 있는 인신 제물 같았다. 빅토리아가 저런 모습이어]
는 안 된다.
[뒤에 의자가 있어요. 좀 앉지 그래요. 잭.
[빅토리아의 피부가 어떻게 된 거요?
그는 조용히 물었다.
[아 저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독약으로 닦아 내고 투명한 비
닐을 접착시켰기 때문에 저렇게 보이는 것뿐이죠 공기 중의 박테리아
가 상처 부위를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예요.
레이웰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꼭 저떻게까지 해야만 했을까라는 생
각에 한편으로는 빅토리아가 야속하기도 하고, 또 한편 측은하기도 했
다. 화면 속에서는 빅토리아의 복부 위에서 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라
텍스 장갑을 킨 두 손이 비춰지고 있었다.
[저건 내 손이에요.
레이챌이 설명했다.
그때 화면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시작해도 될까?
-네.
[저 목소린 우리 팀의 마취 의사인 타라예요.
레이챌의 손에 메스가 건네졌다. 메스는 빅토리아의 배꼽 아래에서
약간 비낀 왼쪽으로 약 2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골반뼈 쪽으로
쭈욱 그어져 내려갔다. 피부가 양쪽으끄 갈라졌다. 잭은 숨을 크게 들
이마셨다. 다른 손들이 절개 부위에서 스며 나오는 피를 거즈로 연신
찍어대고 있었다. 레이챌의 손이 사용한 메스를 다른 손에게 건네주곤
새것을 건네받았다. 감염을 막기 위한 철저한 예방 조치였다. 새 메스
날이 절개된 틈에 가서 박히더니 1.5센티미터쯤 되는 노란 지방층을
단숨에 갈라 버렸다. 잭은 여전히 서 있었다. 레이켈은 그의 얼굴을 살
펴보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잭?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고 두 사람은 다시 화면을 지켜보았
다. 메스가 한 차례 더 움직이자 얇은 은빛 막이 드러낫다. 핀셋 두 개
가 그리로 다가가더니 그것을 집어서 위로 당겼다. 그리고는 다시 메
스가 그 막을 갈랐다. 마치 쇠고기 같은 한 쌍의 붉은 근육이 좁은 협
곡의 양쪽 벽처럼 뱃속 깊숙이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웰의 손가락들이 그 근육들을 헤집고 들어가 양쪽 바깥으로 밀어
낸 다음 오므라들지 않도록 두 개의 금속 기구로 각각을 고정시켜 놓
았다. 끔찍했다. 잭은 몸이 자꾸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외과 수술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절
개술이에요.
레이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화면에는 다시 얇은 지방층
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스가 등장하지 않았다. 레이챌의 손
가락이 마치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듯 그것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자 복강을 덮고 있던 얇은 막이 드러났다.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강하고 탄력이 있엇다. 다시 한 번 두 개의 핀셋이 등장해서 그 막을
집어 올렸고, 메스가 거기에 열쇠 구멍처럼 작은 홈을 내자 이번에는
가위가 나타나서 그 구멍을 절개했다.
잭은 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레이웰의 손가락들이 열려진 복강
속에 담긴 내장들을 점검해 나갔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확인
되자 그 손가락들이 거즈를 건네받아서 그것으로 내장을 감싸고는 조
심스럽게 한 켠으로 몰았다. 골반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속에 어지
럽게 얽척 있는 혈관들을 조심스럽게 밀어내자 드디어 목표물이 나타
났다.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핑크빛의 자궁, 생명의 신성한 요람..
잭은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것은 그가 상상하
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테니스공 정도의 크기인 것 같았다. 자궁 주
위에는 거미줄 모양의 힘줄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윗부분
양쪽에 두 개의 가느다란 손잡이 꼬양의 살점이 붙어 있었다. 나팔관
이었다. 두 개의 나팔관 끝에는 아몬드처럼 생긴 난소를 매달고 있는
손가락 모양의 조직이 각각 달려 있었다.
[자궁은 골반에 완전히 붙어 있는 기관은 아네요. 세 쌍의 힘줄이
양쪽에서 팽팽히 잡아당겨 주기 때문에 골반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
죠. 그리크 그 힘줄들에 연결된 조직들이 질구가 끝나는 곳에 있는 자
궁 경부를 둘러싸고 있죠. 이제 우리가 하려는 것은 그것들을 모두 절
단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어이 분리티게 되는 거죠.
레이젤이 설명했다.
[티투스는......?
[곧 나올 거예요.우선 자궁으로부터 난소를 제거할 거예요.
[난소가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네. 없어도 되죠. 자궁에 난소가 필요한 까닭은 임신 초기 2주 동
안 필요한 라는 호르몬이 바로 난소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는 약물을 통해서 충분히 인공적으로 투입할 수 있거든
요.
[그럼 2주 후에는 어떻게......?
[그때가 되면 태반이 그 기능을 떠맡아서 자궁 내부에서 호르몬이
생성되게 되죠.
난소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왼쪽 그리고 오른쪽....... 그 다음에는
한 쌍의 힘줄이 그리고 또 한 쌍이 잘려 나갔다. 고 다음에 비춰진 것
은 자궁의 측면을 에워싸고 있는 거미줄 같은 조직이었다. 그것을 들
추자 여러 가닥의 동맥과 정맥이 나다났다
[자궁에는 양쪽으로 모두 혈관이 통해 있어요. 하지만 양쪽의 혈관
들은 중복된 기능을 하고 있죠. 자연이 베푼 보너스라고나 할까요. 어
쨌든 그 덕분에 자궁으로 통하는 혈액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도 이
식 수술을 할 수 있는 거죠. 이번 경우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빅
토리아의 자궁과 통하는 두 개의 혈관 가운데서 하나는 그녀에게 연결
된 상태대로 그대로 놓아두고 다른 하나를 절단해서 티투스의 혈관들
에 연결시키는 거예요. 안전하게 연결이 된 다음엔 빅토리아와 연결된
혈관을 잘라 버리면 그만인 거죠.
화면 속의 수술 가위는 요도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거미줄
같은 조직을 왼쪽으로부터 잘라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쪽 혈관이
드러났다, 그것들은 원래는 가는 고무나무 줄기만한 굵기이지만 지금
은 임신으로 인해 혈액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에 고무 호스만큼 굵어져
있었다. 레이웰의 손이 그 혈관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집어 올려서
절단한 후. 출혈을 막기 위해 묶었다.
[저 혈관들이 티투스에게 연결될 것들이에요.
레이챌이 설명했다. 다시 화면에서는 자궁 오른쪽에 붙어 있던 거미
줄 조직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혈관들은 절단되지 않고 빅토
리아에게 연결된 상태였다. 조금 전 레이웰의 설명대로였다. 그러고
나서 자궁을 버텨 주고 있는 세 쌍의 힘줄 가운데 마지막 남아 있는 한
쌍의 힘줄이 잘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자궁 경부와 질구를 감싸고 있
던 조직들이 잘려 나갔다. 이제 빅토리아와 그녀의 자궁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은 자궁 오른편의 혈관뿐이었다.
잭은 양 손바닥을 펴서 얼굴을 문질렀다.
[수술이 좀 쉬워 보이는데요?
[글쎄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노련한 외과의사라면
거하는 데 텐딛 정도밖에 걸리지 않죠.
자궁을 제
20분이라구? 그렇다면 자궁을 떼어 내는 수술은 태아를 포기하는
경우에나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래요.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태아의 뇌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죠.
[그럼 태아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절대의 시간은 얼마나 됩
[적어도 23분은 넘기지 말아야죠.
[하지만 23분 내에 이식 수술을 해내기란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 면 당신이 어떻게......?
[그래요. 그떻게 짧은 시간 동안은 그러한 수술을 해낼 수가 없어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수술은 자궁과 모체를 일단 한쌍의
혈관으로 열결시켜 놓고 시행하는 수술이라서 자궁을 완전히 들어내
는 수술과는 성격이 달라요. 자연, 절대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고 봐야
겠죠. 지켜보면 알게 될 거예요. 잭.
그녀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모습 뒤쪽으로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티투스가 보여요?복부가
절개된 채 복강과 사타구니가 드러나 있죠?
[사타구니? 사타구니는 왜......?
[자궁에는 층분한 혈액이 공급되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웬만한 혈
관 가지고는 안 돼죠. 그런데 문제는 티투스가 그 전에 신장 이식 수술
을 받았다는 데 있었죠. 당신도 그건 알고 있죠? 복강 속에 있는 쓸 만
한 대동맥과 정맥은 이미 이식한 신장에 연결해 버렸기 때문에 차선책
으로 사타구니 안쪽, 대퇴부의 혈관들을 사용하기로 한 거예요. 피브
창 박사가 이미 그 부위의 동맥과 정맥을 절단해서 각각 기다란 인공
혈관을 박아 넣고는 그 주둥이를 봉합해 놓은 상태죠. 잠시 후엔 그 인
공 혈관들과 빅토리아의 자궁에서 절단된 혈관과의 연결, 봉합 장면이
나올 거예요. 그렇게 티면 빅토리아와 티투스의 혈액이 한데 섞인 채
로 두 사람의 몸을 순환하게 되는 거죠.
잭은 그 놀라운 설명에 감탄을 금치 못한 채, 화면에 눈길을 주었다.
빅토리아의 배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레이챌의 양손이 화면에서 사
라졌다가 잠시 후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투명한 인공 혈관 한가
닥을 쥐고는 다시 나타났다. 티투스의 대퇴부 대동맥와 연결이 되어
있는 그 인공 혈관의 주둥이는 봉합되어 있었다.
[저 인공 혈관은 속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식염수가 가득 들어차 있는 상태예요. 자궁에 공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치명적일 수도 있거든요.
화면 속의 레이챌의 손이 인공 혈관을 내려놓더니 빅토리아의 복강
속을 헤집어 아까 절단해 놓았던 자궁 동맥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서
는 손가락으로 그것의 주둥이를 꾹 눌러 쥐곤 다른 손으로 혈관의 봉
합실을 풀었다. 이제 자궁 동맥이 다시 열렸다, 레이챌은 응고되는 것
을 막기 위해 혈관의 주둥이에 혈액을 발라 보호막을 만들고는 그 속
으로 조심스럽게, 마치 배관공이 파이프를 연결하는 것처럼, 플라스틱
인공 혈관의 끝부분을 삽입했다. 그러고 나서는 재빨리 연결 부분을
봉합실로 단단히 감았다. 이제 빅토리아와 티투스가 하나의 혈관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엔 티투스의 대퇴부 정맥과 빅토리아의 자궁 정맥을 잇는 징
면이었다 동맥을 연결할 때와 똑같았다.
[이제 준비가 끝난 거예요.
[저런 경우에 제대로 혈액이 순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냉각 요법을 사용해요.
[어떤 겁니까?
[태아의 맥박이 멈출 때까지 차가운 냉각수로 자궁을 냉각시킨 뒤
자궁을 들어내서 다른 조치를 취할 동안 그것을 얼음통에 담궈서 저]
을 유지시키는 거예요.
[심장이 멈추면 태아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 범,
시 심장이 뛰게 되
[그렇지 않아요. 대개는 자궁이 따듯해지면 다
죠.
그는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의 의심에 쫴기라도 박듯 레이켈이 덧붙였다.
[주로 심장 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신생아들에게
요.
[그떻다면 자궁 속의 태아에게도 냉각 요법이
떻게 알아낸 겁니까?
사용하는 방려이지
가능하는 사실은 어
레이챌은 대답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연기와 함께 대답
을 뿜어냈다
[할리 문에게 이미 한 차례 실험을 해보고 얻어낸 소득이었어요.
순간 잭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킬 박사를 마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외과 전문의로서의 의술에 경
외심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엄청난 집착에 공포심을 느끼
면서 그는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겼다
레이랠의 두 손이 빅토리아와 티투스를 잇는 두 개의 혈관을 묶은
봉합실을 재빨리 풀어냈다. 빅토리아의 혈액이 투명한 식염수 속으로
섞여 들어가면서 붉은 색깔이 핑크빛으로 엷어졌다. 그 광경에 잭은
목이 메어 왔다
[자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에요.
레이챌이 잭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혈액이 돌기 시작하죠.
핑고빛을 띄던 인공 혈관이 흑적색으로 바뀌었다. 티투스의 혈액이
빅토리아의 자궁 속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레이웰의 두 손은
빅토리아와 그녀의 아기를 이어 주는 마지막 연결고리 즉, 그녀의 자
궁과 육체를 잇고 있던 혈관들을 재빨리 누르곤 잘라 다시 봉합했다
[자. 이제 다 된 거예요. 태아는 이제 빅토리아로부터 분리된 거예
요. 이제 아기는 티투스에게 속하게 된 거죠.
이제, 레이챌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자궁 아래로 파고 들어가더니
손바닥으로 태아를 퍼올려서 빅토리아의 몸에서 완전히 들어냈다.
꿈이 생각났다.
먼 바다로 하염없이 떠내려가던 아기.......
잭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헬은 비디
오기로 걸어가서 테이프를 꺼내고 두 번째 테이프를 집어 넣은 후 뒤
로 물러섰다
회잰이 켜지자 엄청나게 커다란 복부가 화면을 다시 가득 메웠다.
기구에 의해 절개 부위가 벌려져 있는 그 배의 위쪽에는 몇 년은 된 듯
한 수술 자국이 나 있었다.
티투스의 배였다. 스피커에서는 레이챌과 동료들이 의학 용어를 1
용하면서 짤막하게 대화하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인공 혈관으
로 티투스의 혈관과 연결이 된 빅토리아의 자궁을 감싼 레이웰의 =
손이 등장했다. 다른 손들이 티투스의 내장이 움직이지 않도록 거즈
이곳저곳에 쑤셔 넣고 나자, 그녀의 손이 자궁을 티투스의 복강 안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레이헬이 설명했다.
레이챌의 손이 2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두 개의 가느다란 전선을 ?
지고 다시 나타났다. 전선의 한쪽 끝에는 아주 작은 전기 코드가 붙=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작은 바늘이 달려 있었다
[저것들은 윌니까?
[전극이에요.
순간 화면을 보고 있던 잭의 몸이 움찔했다.
레이웰의 손이 전선 끝에 매달린 바늘들을 자궁 근육 속으로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절개 부위를 따라 피부 밖으로 비죽이 고개
를 내민 전선들을 티투스의 배 위에 안전 테이프로 접착시켰다.
[태아의 맥박을 살피기 위해 저것들을 심어 놓은 거예요.
[저것들에 관해서 티투스가 의심을 품지 않던가요?
[처음 열홀 동안은 붕대 속에 가려져 있었으니까 아무 문제가 없었
고 붕대를 푼 다음엔 내장의 상태를 살피기 위한 장치라고 속였죠. 그
는 그대로 믿었구요. 거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태였어요. 태
아의 심장박동도 아주 규칙적이고 우렁찼으니까요. 이제 자궁을 복강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일만 남았어요, 물론 남자의 골반에는 여성만
이 갖고 있는 힘줄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만들어 내야 했어
요.
화면에 다시 나다난 레이챌의 손이 티투스의 골반뼈를 덮고 있는 얇
은근육과 빅토리아의 자궁의 아랫부분을 실로 꿰매어 접합시켰다.
[빅토리아의 뱃속에 있었을 때와 최대한 비슷한 위치에 자궁을 고
정시켜야 해요, 지금은 아랫부분에 고정시킨 것이고 잠시 후에는 복강
내벽에 자궁을 접합시키는 장면이 나올 거예요.
[태아가 자라면서 자궁이 커져 갈 텐데 그걸 지탱할 만한 공간이 있
습니까?
[충분하죠. 보통 남자들의 복강은 24인치 몸매를 가진 여자의 복강
보다 더 텨어요.
화면 속에는 레이챌의 손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까만 실크 실을 사용해서 자긍과 복강의 내벽을 봉합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설는 전문적인 재봉사처럼 바늘을 놀려서 모두 네 군데를 연
결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잭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내 아기가 적의 뱃속에 담겨졌다.'
이제 그녀의 손은 티투스의 배를 가른 절개 부위를 빠르게 봉합하기
시작했다.
의학에 대한 무지와 사건 전반에 대한 갈등과 레이챌에 대한 의심.
그 동안 잭이 품고 있던 그 모든 것들도 역시 함께 마무리되어지고 있
었다,
수술은 끝이 났다.
화면에는 비록 흉칙한 봉합 자국은 남았지만 그런대로 인칸의 꽤라
고 불러 줄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모든 수술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마치 빅토리아의 출산을 옆에서 도와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면서 그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부담감도 조금 줄어들었

레이챌이 비디오의 전원을 꼈다.
[이제 수술은 끝났어요. 남은 일은 유심히 경과를 지켜보는 일뿐이
죠.
[무엇 때문에요?
[거부 반응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첫번째 2주일이 가장 위험=
시기예요. 그러나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긴다 하더라도 거부 반응은 =
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든요.
시간과 다튀야 했던 레이켈의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잠시 경외심=
일었다. 레이잴은 비디오기에서 테이프를 꺼내며 물었다.
[층분히 봤어요?
......네.
[그럼 됐어요. 내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아마 당신은 두 번 .
시 이것들을 볼 기회가 없을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두 개의 테이프를 책상서랍에 밀어 넣었다.
레이챌은 병실문을 열고 들어섰다.
대낮인데도 방안은 어두웠다. 블라인드가 창마다 드리워져 있었다.
그 틈을 뚫고 들어온 몇 점의 햇살이 병상과 그 옆 의자 등받이에 횐
무늬를 수놓고 있을 뿐이었다. 레이헬은 잠시 문 앞에 서서 어둠에 눈
을 익혔다. 그녀는 웬만해서는 입지 않는 의사 가운을 풀까지 먹여서
다려 입고 있었고 깔끔하게 매만진 붉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목 둘
레에는 청진기를 걸고 있었다. 마치 미합중국의 대법원장처럼 위풍당
당하고 오만한 모습이었다. 사실은 바로 그렇게 보이도록 그녀가 공을
들여 연출한 외양이었다, 그래야만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가의 의자로 다가갔다. 티투스는 똑바로 누운 채 시트를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있었다. 한쪽 팔뚝을 눈 위에 올려놓아서 얼굴
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챌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아 올리고는 등받
이에 몸을 기댔다. 한참을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그
녀가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티투스로부터는 아무런
반웅도 없었다. 그녀는 상체를 구부리며 말
을 이었다. 그러는 바람에 의자가 삐그덕거렸다.
[자, 지금부터 맥박을 재겠어요. 아시겠죠?
말을 마치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투스가 그녀의 손목을 핵 낚아채며 비틀어 꺾었다. 그녀의 얼굴이 ]
통으로 찌푸려졌다. 티투스의 이빨 사이에서 쇳소리가 섞인 낮은 저=
이 새어 나왔다.
[날 건드리지 마! 쌔 허락 없인 절대로 내 몸에
손대지 말라구.
경고를 무시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의 손목에 한 번 더 세게 힘을 가한 =애
그녀를 놓아주었다. 레이챌은 몸을 떨면서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
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까진 제법 시간이 홀러야 했다.
[애브너, 당신과 상의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 의사로서 말예요.
[의사? 의사 좋아하시네. 너 따위가 의사야?넌 메스를 든 강간범=
라구!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얼굴을 가린 팔뚝을 내렸지만 여전히 그녀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너 같은 인간과 의논 따위는 안 해! 단 이것만 애기해 줘. 이 끔=
한 것을 내 몸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폐어 내 줄 건지?
티투스가 그녀를 돌아보았고 마침내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 위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오른쪽 ;
밑에 새로 생긴 상처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난 이 혐오스러운 것을 내 몸에서 떨궈 '
리고 싶단 말이야. 지금 당장!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악을 써댔다. 레이웰이 그를 노려보
다. 그녀의 두 눈에도 분노의 화염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난 그럴 수 없어요.

왜. 왜 못 해?
[지금 태아를 떼어 낸다는 것은 태아에겐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
_.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적어도 3주는 더 있어야 태아를 살릴 수
=꺼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넌 미쳤어.
[당신 기분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요.
[헛소리 마! 네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아?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맞고함을 쳤다.
[난 당신 기분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차신의 기분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구요.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해 콧김이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이것이 내 몸 속에 있는 한 나는 끝없이 강간당하고 있는 거라구.
이 병실에 혼자 있는 순간에도 말이야. 네가 나한테 한 짓 때문에 냐는
견뎌 내기 힘든 굴욕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다구. 만일 이런 참상이
사람들 앞에 공개된다면...... 오, 하느님...... 차라리 날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죽여 줘.
[당신은 죽지 않아요. 나와 아기에게 필요한 것은 낀작 21일뿐이에
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요. 당신은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러나 그렇게 당했던 수백만
의 여성들을 생각해 봐요. 당신의 려적 가치관 때문에 고통당했던 그
녀들을....... 아기는 엄연히 당신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구요. 당신이
이토록 당당하게 뱃속에 든 태아를 죽여 버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거
예요?
[태아는 벌써 죽었을 거야.
[죽지 않았어요. 엄마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건
강하게 자라고 있다구요.
[오!하느님......
그가 다시 눈두덩을 팔뚝으로 가렸다.
[이봐 의사 선생. 당신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모르는 거
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당신과 소위 그 아기의 엄마라는 사
람이 공모해 태아를 그녀의 몸 속에서 떼어 낸 순간 아기는 이미 죽은
거야. 그리고....... 의사라는 당신의 직업과 법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
이라도 남아 있다면 당신은 이럴 수 없어.......
[내 앞에서 함부로 '법. 법' 하지 말아요.
레이챌이 티투스에게 다가가서는 위압적인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았
다. 티투스는 움찔했다.
[이 방에서는 내가 곧 법이에요. 당신이 법정에서 여자들을 재판했
듯이 이 방에선 내가 당신을 재판합니다. 알겠어요, 대법원장님? 당신
은 요구할 권리도 선택할 권리도 없어요. 당신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일
에 대해서는 나만이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구요. 아기를 떼어 낱
것인지 말 것인지도 내가 결정한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당신을 죽일지 살릴지까지도 내가 결정해요.알아듣겠어요?
한결 격앙된 그녀의 어조에는 극도의 분노가 깃들여 있었다. 그=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신세가 베이루트의 어=
지하실에 감금된 인질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 그는 침착하자]
자신에게 뇌까렸다. 어떻게 해서든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내게는 언제쯤 말해 줄 작정이었소?
그의 어조가 한풀 꺾여 있었다.
1끼웰이 의자에 다시 앉으며 대답했다.
아기가 생존 능력을 갖추게 되면 그때 가서 모든 걸 밝힐 계획이었
. 당신을 데리고 내 농장으로 가서 낚시나 하면서 말이죠. 제왕절
수술. 회복을 위한 휴양. 그리고 아기를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 발육
=야 되는 일 둥등 모든 일을 그 농장에서 하려고 했어요,물론 아무
모르게 말이죠,
[그러고 나선?나에게 협박이라도 해댈 참이었소?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담 의학계의 신기왼을 세왔다고 표창장을 받고 싶었던 게요?
떻소?
[나는 이미 온갖 명예를 다 누려 본 사람이에요.
[공개도 하지 않겠다. 협박도 하지 않겠다. 명예는 더욱 아니다.
러면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요?
[바로 당신, 애브너 티투스라는 인간이 목표였어요. 당신의 인간성
과사고 방식 당신이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던 여성들의 눈물, 그런모
든 것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고 싶었어요. 당신이 절대적인 약자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방식을 그대로 본 따서 말이
죠.
티투스는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레이웰이 말을 이어나갔다.
[예상보다 몇 주 앞서서 모든 게 드러나고 말았지만 아직도 계획대
로 실행할 수는 있어요. 당신이 협조만 해준다면 말이죠.
[이봐요. 레이챌. 당신은 날 잘못 봤소. 난 여자도 아니고 게다가 이
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구. 만일 당신이 24시간 내
에 내 뱃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이 요사한 것을 떼어 내지 않는다면
난 다른 의사의 도움을 요청하겠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잰 나도 알
바가 아니야. 폭로할 테면 하라구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고 대법원장
자리에서 쫓겨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걸 없애 버리고 말겠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이지. 알겠소?
[물론 잘 알고 있죠.
그녀의 어조는 싸늘했다.
[어쩔 수 없이 뒷골목의 돌팔이 낙태 시술자에게 생명을 맡긴 여성
들의 심정도 지금 당신과 똑같았을 테니까...... 자.이제 내 말을 좀 들
어 봐요. 대법원장님.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안전하게 그리고 비밀리
에 이번 일을 해결할 의사는 없어요. 그 점은 당신도 동의할 거예요.
당신이 3주만 더 참고 견뎌 내주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거예요. 제왕
절개 수술, 자궁제거 수술,그리고 당신의 비밀, ......어쩌면 아기도 무
사히 살아 남을 수도 있겠구요. 그러나 당신이 다른 외괴팁에게 도움
을 청한다면 당신의 목숨이 위협받게 될는지도 모르고. 또 이번 사건
이 공개될 위험성도 높아지게 돼요.
[누가 공개할까?당신이?아니면 그들이?
그녀는 티투스가 자신의 위협에 슬슬 말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양쪽에서 모두.
[이봐, 의사 선생. 만일 이번 일이 폭로되고 나면 당신 일당들은 모
조리 남은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거요? 내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소.
[후훗! 애브너, 그걸 협박이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난 처음부터 모
든 것이 언젠가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는 걸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을 거의 이뤄 놓은 상태예요.
이제 남은 것이라곤 태아의 목숨을 살리는 일뿐이에요. 그 문제에 대
해 당신의 평소 신념으로 미루어 볼 때,난 당신이 태아의 생명을 ]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와보니 틀린
각이었지만.
티투스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옜다.
[의사 선생. 나 또한 그 동안 당신이 지녀 온 신념으로 미뤄 볼 때
당신이 나로 하여금 낙태를 하도록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었소. 역시
지금에 와서 보니 잘못 생각한 것이지만 말이오.......
[두 사람이라 그랬다구요?
[그렇습니다. 그 전화 제보자는
분명 두 사람이라 그랬어요. 만일
빨리 티투스를 피신시키지 않으면 두 사람 다 날아가 버릴 거라고 말
입니다.
몰리는 병원의 경비대장을 응시하면서 그의 증언 내용을 속으로 곱
씹어 보았다. 경비대장은 전화 제보자가 티투스 말고 다른 한 사람은
간호사라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엉겁결에 둘러댄 것 같다고 했다. 그녀
는 수첩을 펼쳐서 몇 글자 적어 놓고는 잠시 벗어 놓았던 신발에 발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경비대장에게 감사의 말을 건넨 다음
환자 대기실로 걸어 내려왔다. 눈에 뛴 빈 의자에 걸터앉아서 한 쪽 신
발을 벗고선 발가락을 문질러댔다
'두 사람이라......?'
[티투스가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걸까요?
레이웰이 물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진심일 겁니다. 난 티투스와 포커를 쳐봐
서 잘 알아요. 그는 무작정 베팅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는
신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옥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면 마음이 달라져서 항복을 하고
아를 떼내 줄 거라고 믿고 있을 겁니다 ]
[혹시 다른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고 비밀 보장을 받으려고 하는 건
실까요?
[글쎄요. 그떻게 하진 않을 것 같아요. 너무 위험하죠. 말이란 새어
가게 돼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봤자 크게 난처할 건 없다고 마음
을 다져 먹었을까요? ......그떻게 되면 우리의 계획은 끝장인데......
그가 그걸 두려워하고 있어야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밀고 나갈 수
있을 텐데 말예요.
[사건의 공개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임신한 남자에 대
한 농담들이 유행어로 생겨나고 방송국마다 한동안은 온통 그 소재만
파고들 텐데....... 그래도 만일 그가 그런 마음을 먹고 있다면....... 이
건 어떻겠습니까, 레이? '코스텔로' 사건 가지고 물고늘어지는 방법
말입니다. 자신은 낙태를 하려 들면서 '로 대 웨이드' 사건을 뒤집는
판례를 만들 수는 없지 않잖습니까?
[그는 자기 뱃속의 태아를 떼어 내는 것을 낙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잭.
[그래요? 그러면 공개 토론회를 열어서 그것이 낙태인지 아닌지 따
져 보자고 합시다.
[아데요. 잭.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잖아요? 만일 신이 남자도 임신
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면 남자들에게도 자긍을 만들어 주었겠죠.
[레이켈, 이건 어떻겠습니까? 신은 티투스에게 새로운 신장을 주었
고 이번에도 똑같은 의사를 통해서 아기를 내려 주셨다.......
[그가 그런 환상적인 논리를 납득하려 들까요?
[어려운 난관이기는 한데....... 만일 사건이 공개됐을 때의 엄청난
결과들에 대해 겁을 집어먹게만 만들면 반드시 3주 정도는 더 참고 기
다릴 거라는 건 확실한데.......
[그럴지도 모르죠.하지만 어떻게 겁을 집어먹도록 만들죠?
그녀는 티슈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최대한 지연 작전을 펴면서 천천히 죄어 가기로 하는 게좋
겠어요.
[그래요 레이. 바로 그게 제노비아 데이비스에게 그가 했던 짓이니
까 말입니다.
데이지 깁스는 코트를 벗어서 옷장에 걸었다.
빗으로 몇 차례 머리카락을 다듬은 후, 그녀는 침대 쪽으로 향히쳐
다가 멈춰 섰다. 그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만큼 티투스의
외모가 변해 있었던 것이다.
메말라서 쩍쩍 금이 간 입술, 주름이 깊이 패인 이마, 어두운 그늘이
자리잡은 눈가.......
[어머나! 대법원장님. 많이 불편해 보이세요.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난관을 뚫고 나
갈 방법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가 편찮으세요?신장이 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럼 심장이?
[아니야.
데이지는 침대 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아하, 이제 알겠어요.몰래 마티니 드셨죠?
[아니야. 아니야. 멋대로 생각하지 말라구 난 괜창아. 단지 휴식이
좀필요할 뿐이라구.
[돌아오는 월요일에 '코스텔로'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심리 스
케줄이 잡혀져 있는데....... 연기할까요?
[아니. 절대로! 내일 수술받기로 돼 있어. 하지만 닷새 후면 퇴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복될 거야. 그나저나 페퍼는 어디 있나?
[무슨 수술을 받게 되시는 거예요?
[나도 잘 몰라.
'빌어먹을, 난 실험 대상이 되어 있어. 데이지.'
[페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마 이리로 오고 있을 거예요.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고는 마치 하늘에 호소하듯 천장
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이불을 그의 목까지 덮어 주고는 이불 위에
올긴 주름을 폈다.
그녀는 대법원장을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그의 모습
을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고 정신이 팔려 멍한 상
태에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엄마 같은 손길로 그
의 이마에 덮인 떠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그
녀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소년처럼 그는 평화롭게 잠에 빠져 들어갔다
[대법원장님?
부드럽게 흔드는 손길에 티투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데이지였다
[페퍼가 도착했습니다.
페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트를 입고 검은 장갑을 킨 채 체리 초콜릿 상자와 비디오 테이프
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카사블랑카}였다. 그는 데이지를 향
해 입을 열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주겠어?
데이지의 등뒤로 문이 닫혔다.
[페퍼, 앉게.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페퍼는 그의 얘기를 듣지 못한 듯 그냥 서 있었다. 코트도 장갑도 벗
지 않은 채였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을 100퍼센트 믿어 줘야 해. 그리고 절대
비밀도 지켜 줘야 하구.
그녀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어젯밤. 나는 내가 엄청난 음모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
어, 자네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티투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말로 옮기기엔....... 사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힘들
어.
[무슨 말인데요?
[난 지금......,
[어서요.애브너.무슨 말씀인지 속시원하게 말해 보세요.
......난 지금 아기를 갖고 있어.
티투스의 눈길이 페퍼의 얼굴에 고정됐다. 그녀의 표정에선 한 =
놀라움의 빛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애기 들은 거야? 내 뱃속에 살아 있는 태아가 들어 있단 말
야.
그녀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오, 이런 세상에 ! 페퍼 ! 내 말 못 알아듣겠어? ......우선 앉기부
해보=.
=앉지 못하겠는데요.
그는 얼굴 가득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못 앉겠다니?왜?난 지금 당신 도움이 필요하다구.
[도와드리지 못하겠는데요.
그드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티투스는 입을 벌린 채 그녀의 얼굘을
바라보았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엇고 캄박이지 않는 눈동자엔 결
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처음엔 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페퍼
가 자기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오! 하느님 맙소사....... 여기서 썩 커져 버려 !
그는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페퍼의 뺨도 붉게 상기되었다. 그녀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문을
향해 돌아섰다.
[잠깐만.......
그녀가 멈춰 섰다.
[왜?왜 그런 짓을 했지,페퍼?
그녀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
녀도 알고 있엇고 또 할 말도 준비해 놓았었지만 막상 얘기를 하려니
무척 망설여졌다.
[제노비아 데이비스 때문인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녀의 정박아 딸 때문이에요.
마치 엄청난 태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양 그녀는 온몸을 달달 떨
며 말을 계속했다.
......남은 사람들....... 당신에게 실컷 희롱당하다가 끝내 숨지고
만 어머니들이 남겨 놓은 자식들 때문이에요. 그렇게 남겨진 자식들의
심정이 어떨지 한 번 생각이나 해보셨어요? 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
어요. 바로 나도 당사자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요.
[난 제노비아 데이비스와 그녀의 딸에게 결코 위해를 가한 적이 없
어. 당신도 잘 알고 있잠아.
[거짓말!
페퍼가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서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그 불쌍한 여자를 겁주어서 죽음에 이르도록 했어요. 왜.
사실을 외면하는 거예요.왜?
페퍼는 장갑을 벗고서 떨리는 손등으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흄쳤다. 잠시 후, 다시 냉정을 찾고 나서 페퍼가 말을 이었다
[우린 암소기 아네요.판사님! 우린 인간이라구요.
디투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지중지 길렀지만 빗나가 버린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슬픈 눈길
이었다. 그러고 나서 마치 세상살이에 지친 노인이 귓가에 응웅거리는
파리를 쫓아 버리듯 손등을 털어서 그녀를 내보냈다.
쯔끽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잭틴
......글쎄...... 나도, 잘.......
[말하지 않겠다 이거죠?
전화선 저편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몰리의 귀에 들어왔다. 잭이 사
실 안의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았다.
[몰리, 내 말 잘 들어. 당신이 이번 일을 끝까지 캐내려고 한다면 불

행한 사태가 일어날 거야.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상황이 야
기될 거라구. 내 말을 믿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데요?
[말할 수가 없어.몰리.
[난 기자예요. 잭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 일에서 손뗄 수는
언다구요. 당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폭탄이
터지자마자 병원에 달려온 것도 그렇고, 대법원장이 당신들에게 길길
이 날뛴 것도 그떻고, 다 무슨 까닭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구요.
......몰리.정말 말할 수 없어.날 좀 믿고 이해해 줘.
[전화 제보자는 티투스를 빨리 피신시키지 않으면 두 사람이 날아
가 버릴 거라고 경고했다는데 티투스말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구였어요?
티투스의 병실에 또 누가 함께 있었죠?
[제발. 몰리!
[하지만, 잭. 난 지금 곤경에 빠져 있다구요.
[나도 그래.
[아하! 그러니까 이번 일 때문에 당신이 뭔가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다?그렇다면 당신도 연관된 일이군요?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그러나 몰리는 막무가내였다.
[잭, 무슨 일이에요? 스캔들에 빠졌어요? 당신이 그토록 자신 있게
얘기하던 티투스와 낚시 매듭,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는 어떻게 된 거
죠?그리고 레이챌은 그 이쑤시개에 대해서 꿔라고 얘기하던가요?
잭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나서 애기해요. 난 당신 표정을 읽을 줄 아니까 날 속이진 못할
거예요.
[제발, 몰리. 며칠만 그냥 내버려둬. 응?
[아니에요. 잭. 틀림없이 무슨 깊은 사연이 있어요. 난 그걸 꼭 밝혀
내고 말 거예요. 당신에 관한 추문이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 이건 진심
이에요.
전화를 끊고 나서 잭은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현기증이 일어났다. 두 손으로 얼굴을 여러 번 문질러댔다. 그러
고 나서 몸을 앞으로 숙여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열었다. 그 속의 잡동사
니들을 헤집고 멕시코의 어느 호텔 카페에서 그와 함께 앉아 있는 빅
토리아의 모습을 찍은 얼룩진 사진을 찾아냈다. 그는 사진을 코앞에
세워 들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고작 년 된 켜진이지민
년도 더 된 것 같았다.갑자기 빅토리아란 여자가 낯설게 느켜졌다.
임신은 사고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기를 갖기 위해 일부러 피임약을
밍시 냔갔나. 외 부꾹멍권에야 즈가 프너클 팟마멀닌 굼, 프너슨 ?춘
수술을 받기 위해 거기 잇었던 게 아니었다. 이식 수술을 앞두고 조
=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에겐 즉석에서 거짓
=답을 꾸며 냈다, 낙태를 연기하겠노라고, 수술을 안 하는 방향도 한
번 생각해 보겠노라고.......
'빌어먹을!'
산타페에서 느꼈던 이상한 점들도 이제서야 이해가 됐다. 수술 직후
였으니 당연히 병약해 보였고 티투스에 관해서도 초연한 태도를 보였
던 것이다. 배에 난 수술 자국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불도 꺼버렸고 시트
도 함부로 들추지 못하게 하고는 그의 적극적인 애무도 거부했던 것이
다. 그리고 뱃속에 아기가 없으니 낙태의 우려도 없이 마음대로 돌아
다녔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방이 마치 전복되려는 배처럼 한 쪽으로 천천히 기우는 것을
느꼈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단 한 가지 생각만은 또렷하게 떠올랐
다.
'아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기만은 살려야 한다.'
그는 사진을 책상 위에 떨어뜨렸다.
빅토리아는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영원한 적대 관계로 생각했지
만 그녀와 잭은 서로 사랑했었다. 둘은 가끔씩 층돌하기는 했지만 서
로의 차이점을 원만히 해결하며 지내 왔었다. 마치 협곡 위를 날으는
두 마리의 새처럼.......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에게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고 떠난 셈이었
다.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시 한 번 사진에 눈길을 주었다. 멕시코
바자의 호텔에 도착하던 날, 두 사람은 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잇어버
리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시계를 모두 치워 버렸었다. 낮이면 태양 아
래서 조개껍질을 주우며 해변을 거닐었고 밤에는 이름 모를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멕시코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았다.
그녀의 눈동자 크기를 재보기도 하고, 온몸의 땀구멍을 세어 보다가
엉덩이에 나 있는 살이 튼 자국을 처음으로 발견하곤 신기해하기도 했
다. 입맞춤으로 날이 새고 입맞춤으로 해가 지는 꿀처럼 달콤했던 낮
과 밤이었다.
마지막 날 밤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그날 밤 두 사람은 차를 한 대 세내어 타고 티주아나로 가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찐 염소고기와 신선한 야채, 차가운 생맥주로 포식
을 하고 나서 마을 뒷골목을 산책했다. 그러다가 홀러나오는 음악소리
에 이끌려서 작은 술집 안으로 들어선 것은 거의 자정이 다 돼서였다.
홀은 사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모두의 광기 어린 시선이 무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작은 무대 위에는 검은 머리에 황갈색의 나긋나
긋한 몸매를 가진.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벌거벗은 여자가 당나귀 한
마리와 한데 어우려져 있었다. 하이힐 하나만 달랑 신고 있을 뿐 온몸
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는 두 다리를 벌린 채 손에 든 채찍
으로 당나귀를 찰싹찰싹 때렸다.
흘 안은 광란에 휩싸였다. 웃음소리, 휘파람소리, 맥주잔이 깨어지
는 소리.......
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빅토리아의 팔을 잡아 끌고 나가려 했
다 그러나 그녀는 무대 위의 억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계속 안
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동물과 행위를 끝마친 여자가 사내들이 모여 있는 무대 가징
자리로 걸어나왔다. 그들은 손에 쥔 페소와 달러를 흔들면서 괴성을
질러댔다.여자가 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그는 번들거리는 ]
음을 흘리며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여자는 그의 손에서 돈을 낚아챈
뒤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흘 안은
다시 한 번 광란에 휩싸였다.
잠시 후 사내를 밀쳐낸 여자는 무대 옆으로 급히 사라졌다.
빅토리아는 잭이 만류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여자를 뒤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잭은 가슴이 철렁 내
려앉는 것을 느꼈다. 빅토리아가 여자의 손목을 잡아 끌고 무대에 나
와 서 있었다. 음악도 꺼진 흘 안은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날 좀 구해 줘요. 누구 날 좀 구해 달라니까! 이봐. 이 손 놓지못
?
여자가 악을 써댔다.
[당신들이 이 여자에게 한 대로 당신들 엄마에게 해봐! 그 짓거리를

그대로 당신들 누이에게 해보라구! 내 말 알아듣겠어? 당신들이 이 여
자에게 한 짓거리를 그대로 당신들 딸에게 해보란 말이야!
흘 안의 사내들은 매우 어리등절해하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빅토리
아가 또박또박 외쳐댔다.
[당신들이 이 여자에게 한 대로 어디 나에게도 한번 해보시지!
'하느님 맙소사! 나에게 해보라구?'
잭은 정신이 아뜩해졌다.
처음엔 사내들 가운데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의 위
세가 그들을 질리게 만들었겠거니 하고 한시름 놓으려는데, 한 놈팽이
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뒤를 이어 또 한 놈. ......또...... 순식
간에 그 썩을 놈들이 모두 무대를 향해 움직였다.
잭은 급히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빅토리아를 끌어내렸다. 정신없이
문을 향해 헤쳐 나가는 그의 머리 주위로 술병들이 날아왔다. 문짝을
부수듯 열어제치고 라으로 나와서야 잭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 뭔가 뜨
듯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증은 없었다. 다만
불 밝척진 거리가 온통 붉게만 보일 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
다. 빅토리아의 눈물 젖은 눈이 차가운 멎을 쏘아 내던 것을 잭은 지금
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마의 상처에 대고 있던 손수건
을 건네줬지만 그녀는 받질 않았다. 한 시간쯤 흐른 뒤, 그녀가 조용히
입을 뻤다. 감정이라곤 조금도 배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 모든 게 바뀌려면 천 년은 걸릴 거야.'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잭은 기억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집어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줘야겠어요, 잭.
예상했던 대로 레이챌이었다. 들었다.
[왜요?무슨 일입니까?
[티투스 말예요. 그가 행동을 개시했어요.
잭이 6층에 있는 레이챌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레이챌은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문을 닫으라는 손짓을 해
보이곤 말문을 열었다.
변호사를 구했다구요. 그
전문가예요. 그리고 입도
[애브너가 행동으로 나오기 시작했어요.
변호사는 의뢰인의 낙태권을 따내 주는 데
무겁구요.
[누굽니까?그게.......
[빅토리아의 파트너.실비아 킹스턴 브라운이에요
잭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티투스가 묘수(}를 부린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그는 제랄드 벤슨 박사에게 전화를 해서 아침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제랄드 벤슨?
[세계적인 산부인과 전문의예요. 그는 여자 외과의사들, 특히 나를
병적으로 싫어하고 있어요. 아주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죠. 하지만 임
상에서는 훌륭한 외과의사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티투스는 아
직 그에게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얘기하진 않았어요. 만일 내가 9시
전에 수술을 해준다면 그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고 만일 수술을 해주지
않는다면 벤슨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어요.
[당신이 모든 걸 폭로할 거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내가 감히 폭로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설사
모든 게 공개되어서 어떤 끔찍한 결과가 닥쳐올지라도 주간을 더 임
신 상태로 있는 것보다는 더 나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잭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연필을 한 자루 집어 들었다. 레이챌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엇다.
[그는 필시적이에요. 잭. 우리가 걱정하던 사태가 현실로 일어난디
면.......
잭이 그녀의 말허리를 끊으며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레이챌. 태아의 고기가 얼마나 됩니까?
[지금 현재 말예요?
[네.
[한 20센티미터쯤? 자궁까지 포함하면 대층 작은 수박만할 거예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해답을 얻었어요. 아직 태아가 인큐베이터 속에 옮겨질 만큼 숙성
하지 못한 상태라면 티투스의 몸에서 커내어 충분히 자랄 때까지 다른
장소에서 보호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장소라니요?어디요?
[내 뱃속 말입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잭은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
축히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튼튼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태아의 생물학적인 아버지잖습니
까? 어떤 복잡한 문제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의 면역 체계는 절대
태아를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안 그렇소?
닙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 한 손으로 배를 만지면서 말을 이
었다.
[작은 수박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겁니다.
그녁는 손을 그에게로 뻗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잭, 이리 좀 와보세요.
'복부를 검사해 보려고.......'
잭은 지레 짐작하고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레이챌은 배를
만지는 대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럴 수가 없어요. 당신과 태아는 혈액형이 틀려요. 당신은 형이
고 태아닌 형이죠.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이식 수술을 하기에 앞서서 태아의 유전 형질을 검사하죠. 이전에
콜레스테를 수치를 측정해야 한다면서 캐시 키낸이 당신의 혈액을 채
취했던 것 기억나요? 그 혈액은 농장의 연구실로 보내졌었어요......,
미안해요, 잭.
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져서 뒷걸음질로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레이챌이 일어서서 그에게로 걸어왔다.
[하지만, 당신의 제안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후우. 당신이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요.
레이챌은 손을 아래로 뺍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잭은 그 손길에
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다시 자기 의자로 되돌아가
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기를 구할 수 있는 방범이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라면,난 사건의
전모를 공개하고 기커이 법정에 서겠어요. 물론 그가 사건이 공개되는
것에 겁을 집어먹는다면 애기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예요.
잭은 깍지낀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다른 의사를 불러 놓은 걸로 보아서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인데....... 어쨌든 분명히 해결책이 있긴 있을
텐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할 뿐입니
다.
레이챌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나의 약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가 저
렇게 강하게 나오는 걸 거예요. 대체 내가 어디서 싸움의 첫번째 규칙
을 어겼을까......?
[첫번째 규칙이라는 건 또 뭘니까?
' 상대방에게 너의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말라!'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간호사 복장을 한 미모의 여자가 서류로 가득 찬 선반 앞에 서서 손
등으로 눈을 비벼 가며 끈질기게 뭔가를 찾고 있었다. 찾고자 하는 것
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은 듯.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선반의 나무판자
를 록톡 두드리다가 다음 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도 역시 환자
들의 진료 기록 파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역시 저 서류들에도
의사들이 자기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놓았겠
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접고 있던 손바닥을 폈다.손바닥 위
에는 펜 글씨로 환자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적을 필요가 없었다.외우고 있는 상태였다
주디 스미스?
이름을 가명으로 적어 놓은 것은 고위직 인사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서 흔히 있는 일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주디 스미스는 누
구지?
엄연히 남자인 대법원장을 여자의 이름으로 위장시킨 것은 단순한
신변 보호의 차원을 넘어서 뭔가 음모의 냄새가 나는 것이다.
96114.
고무인으로 넘버가 찍척 있는 파일이 마침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파일을 재빨리 뽑아 들었다. 그러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있던 핑크멎
병원 사무용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그것을 집어 파일
을 뽑아 낸 자리에 밀어 넣었다. 마음 속엔 어서 빨리 파일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만 가득 차 있어서 그걸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드디
어 파일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주디 스미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상단에 짧은 메모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횐자의 병력 사항에 관한 모든 기록은 주치의인 레이웰 레드패스
박사에게로 이첩되었음.
실망감으로 그녀의 어깨가 푹 쳐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가야 했다. 그녀는 시계에 흘껏 눈길을 주고는 '주디 스
미스리 파일을 아카 밀어 넣었던 핑크빚 용지 위에 끼워 넣었다. 그러
다가 서류들의 무게에 눌려 그 종이 한 귀퉁이가 접혀져 있는 것을 보
고는 그것을 빼내서 손으로 구겨진 부분을 눌러 폈다. 그 순간 종이 위
에 거꾸로 적힌 두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실험 보고서
그녀는 용지를 바로 돌렸다. 주디 스미스라고 인쇄되어 있는 환지
성명란 아래에 알아볼 수 없는 약어()로 표기된 의료 용어들이 역
시 인쇄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이 용지 위에서 유일하게 손으로 쓰여
진듯한 글씨에 머물렀다.
-11 ..(면역억제제 단위)
있었다.
그 옆에는 라는 약어가 인쇄되어
[안녕하세요?
그때 등뒤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건네
험실 가운을 입고 있는 30대 중반의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향해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왔다.흠칫 놀라 돌아보니 실
.....서]. 안녕하세요?
그녀는 그가 눈치채지 못했기만을
끼워 넣었다.
바라며 핑크멎 용지를 제자리에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이제 다 끝낫는걸요.
[처음 본 얼굴인데....... 새로 왔나요?
[사실은.오늘이 첫출근이에요.
그쟈는 짐짓 서류철들을 매만져 보고 나선
다. 그러다가 괜지 기분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주시하고 있던 남자의 눈길과 마주쳤다.
'저 눈빛은 의심의 눈빛일까? 아니면 그렇고 문을 향해 발길을 돌렸
?. . .. ..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분간할 수 없었지만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사실,도움이 좀 필요하긴 한데.......
그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유혹의 눈초리일
[말씀만 하십시오.
는 무엇의 약자이죠?
? 그건 닌 의 약자입니다.
[의약품이겠지요?
[아뇨.호르몬이에요.
남자가 그효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 남자가 의심을 품고 있나 봐.'
[그렇군요.그런데 무슨 작용을 하는 호르몬인가요?
[여러 가지 일을 하죠.
남자가 더욱 가카이 다가왔다.
[이를테면......?
의 주된 작용은 다른
호르몬들을 차단해서 프로게스테론의
원활한 흐름을 도와주는 거죠.
순간 그녀는 남자의 눈에서 수컷을 볼 수 있었다.
'오,하느님.감사합니다.'
[왜 그런 작용이 필요한 거죠?
[자궁을 위해서입니다.
[자궁이라구요?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의 표정을 오해한 남자는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서며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엿다.
[여성들의 고유한 기관 중의 하나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자궁이 뭔지는 알아요. 어쨌든 고마워요. 참. 이건 단순한 호
기심 때문에 여쭤 보는 건데요. 가 다른 용도로도 사용이 되소
요?음....... 이를테면 남자에게......?
남자는 어느 틈에 그녀에게 바싹 다가와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
다.
[물론. 단 임신한 남자에게서만 말입니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정말 신참이로군요.
[숙녀에게 지나치게 파고들려고 하면 못써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남자가 본격적인 강의(?)로 들어가기 전에
문을 열고 방을 빠져 나왔다.
병원의 현관문을 나서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커냈다. 수첩 표
지에는 '-'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수첩에다 무언가를
노트해 가면서 그녀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아
서서 건널목 앞에 이르렀다. 이윽고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자 그녀
는 간호사용 운동화를 양손에 벗어 쥐고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맨발
의 상태로 자동차까지 달음질쳤다.
집을 나선 잭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운전사에게 레스토
랑의 이름을 말해 주고 나서 시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전날 밤, 레
이챌의 농장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로 처음으로 시장기를 느꼈
다. 택시는 곧 흔잡한 거리 속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한편 그의 집 빈
거실에서는 전화벨이 울려대고 있었다.
-.
[잭 몰리예요. 거기 있어요? 그러면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네?
.....잭 어디 있어요?지금 월요일 밤이에요.난 지금 워싱턴의 방송국
에 있구요. 당신과 급히 나눌 얘기가 있다구요....... 아이, 속상해. 할
수 없지 꿔. 자, 내용만 간단히 말할게요. 애브너 티투스에게 무슨 일
이 있는지 알아냈어요. 이제 당신과 얘길 해봐야겠어요.
테이프가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잭. 난 지금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다구요, 실험 보고서를 보았어
요. 거기엔 티투스가 지금.......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오! 안 돼지. 안 돼. 그걸 자동응답기에다 대고 말할 순 없군요. 당
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예요, 난 티투스의 현재 '상태베
관해 알아냈다구요. 당신이 그 일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지
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적
어도 피할 수 있다면요. 물론 전체 스토리를 묻어 버릴 수는 없.......
어머나, 잭 지금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너무 흥분돼서 그만, 어
쨌든 이만 끊어야겠어요. 지금 편집중이거든요. 55-6987로 연락 주세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 중의 하나였다. 잭은 남들의 눈에
가장 쉽게 렬 만한 중앙 쪽 테잇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워싱
턴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를 충실히 따른 행동이었다.
'미합중국의 국고에서 돈을 빼낼 모의를 하려면 탁 트인 대중 식당
에서 하라, 그러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승강기 문이 닫히고 나서
엘리베이터 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으면 그떻게 하라, 그러나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인사를 건넨 그 순간부터 추문에 휩싸이게 된디
는 것을!'
잭은 오늘의 만남을 비밀스럽게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드디어 잭
기다리던 손님이 나타났다. 주름진 얼굴에 앞머리가 절반쯤 벗겨져 ]
라간 그 남자는 허름한 가죽 서류가방에서 노란 서류철을 꺼내어 테
블 위에 올려놓앗다.
그러고 나서 호사스런 실내를 둘러보았다.
감탄한 표정이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살맛이 나겠는데요.
말을 마친 제레미 하켓은 잭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디.
-.
[레이챌 박사님? -의 몰리 맥코믹입니다 어젯밤 대려
월장의 병실을 카메라에 담았던 기자죠. 사실은 제가 대법원장의......
음...... '상태'! 네, ' 상태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지금 곧바로
기사를 작성해야겠지만 그 전에 박사님께서 혹시 ?,1 기에 관해서 언급
하실 내용이 없으신가 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새벽 3시에 이렇게 전
화드린 겁니다. 이 메시지를 들으시는 즉시 제게 꼭 전화 주세요.
555-6987애으로요. 전 지금 워싱턴에 있습니다.
삐 -.
- 방송국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병
원의 현관 데스크에서는 레이챌이 경비원에게 신분증을 보여 주며 출
근 카드에 서명을 했다.
시계는 오전 3시 5분을 가리키코 있었다.
[박사님.오늘은 굉장히 일찍 출근하셨는탭쇼.
[그래요. 지미, 그럴 일이 있어서요. 휴우. 오늘은 굉장히 긴 하루가
될 것 같은데요.

프므
[애브너 티투스와 나는 지금 서로에게 치명상을 안겨 줄 수 있는 무
기를 하나씩 들고 치열한 신경전에 돌입해 있는 셈이야. 내 무기는 임
신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것이고 그의 무기는 내 아이를 중절해 버리겠
다는 젓이지.
몰리에게 맥주를 한 잔 따라 주고 자신은 새로 한
잭은 말을 하면서
캔을 따 들었다. 두 사람은 조지타운의 잭의 집. 주방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새벽 시 온.
여느때 같았으면 절인 정어리 통조림 생각이 간절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특종을 건져 낸 걸 축하해....... 하하!웨스트버지니아 리치
힐 출신의 촌뜨기 애송이가 드디어 대기자로 성장할 도약의 발판을 미
련한 셈이군.
그녀는 그만 하라는 미소를 보냈다.
[이제 당신이 티투스의 임신 사실을 터뜨리고 나면 내가 쥐고 있=
유일한 무기는 날아가 버리게 되겠지. 그러면 그 즉시 그자는 아기
떼어내 버리고 말이야.


[내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나 해도 될카요?
[해봐.
[만일 이번 같은 기삿거리를 그냥 덮어 버린다면 내가 올바로 된 기
자일까요?
[맙소사. 몰리. 그럼 훌륭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마
구짓밟고 일어서 보겠다는 말이야?
[음....... 그렇게 생각햐는군요.......
그녀는 팔을 뻗어 빅토리아가 키우던 필러덴드론 잎사귀를 쓰다듬
었다.
[미안해요. 잭. 어쩔 수가 없어요. 워싱턴의 모든 보도 기관들이 티
투스의 임신 사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라구요. 그렇게 되면 사건
은사건대로 공개되는 거고 나는 특종을 놓치고 마는 거예요.
잭은 맥주 캔을 거꾸로 기울이며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해줄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제차 헌법 수
정조항으로 당신을 감짜 주고 뽀뽀를 해줄까?
[비꼬지 마세요. 잭. 날 이해해 줄 수 없나요? 이건 내 직업이에요.
[그건 현실주의자들이 늘상하는 얘기지.
몰리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하는군요. 잭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다시
없는 기회라구요.
그녀는 식탁 아래를 발로 더듬어 신발을 신었다.
[몰리, 한 가지만 솔직히 말해 줘. 당신이 이번 일을 터뜨리려 하는
건 일 때문이야, 아니면 우리 둘의 관계 때문이야?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우리가 헤어진 건 이 아이 때문이었어. 기억하고 있겠지?
몰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따져 물었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희생시켜서 당신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고 생각하나요?
[고의적으로야 그럴 리는 없겠지.......
잭은 빈 맥주 깡통을 손 안에서 우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잠재 의식 속에서는 그럴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나 역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생각도 없이 어리석은 짓을 한 적이 있어. 아주
최근에 말이야.
'엘리 그레이브스와 대냅원장의 전화번호......
그는 맥주 캔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래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럼 나도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
2_. 당신이 나를 떠난 건 빅토리아 때문인가요?아니면 아기 때문인가
요?
3건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가.......
순간 고의 떠릿속에 이식 수술 장면이 떠올랐다. 모체와 태아를 분
리시키는...,... 그래서 그는 엉겹결에 이렇게 말해 버렸다.
[참. 현대 의학의 기적들을 깜박 잊었군.
뜬금 없는 그의 얘기에 몰리가 따지고 들었다.
[이봐요. 잭. 무슨 소리예요?묻는 말에나 대답해요.
[나와 빅토리아의 관계는 내가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 이전에
이미 끝난 상태였어. 그건 당신도 잘 알잖아. 내가 그녀에게로 되돌이
간 것은 그녀가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었지. 당신이 그랬더라도 마찬기
지였을 거야.
[맞아요.당신에게 아기를 낳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5
그랬겠죠.
자존심이 상한 몰리가 정색을 하고 쏘았다.
[꼴리.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인가?
잭도 슬슬 기분이 상해 가고 있었다
몰리는 자기가 좀 지나쳤다는 생각에 낯빛을 부드럽게 고쳤다. 그녀
는 그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분노에 몸을 맡겨 행동할 만큼 우둔한 억
자는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를 자꾸 들추어내는 것은, 가만 내떠려두
면 저절르 아물 것을 결국 덧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몰리는 잭 옆에 서서 마치 달의 인력에 이끌리는 조수
()처럼 불가항력적이고도 자연스럽게.그리고 대책 없이 위험하게
자신이 이 남자에게 끝없이 끌어당겨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 손을 잭의 목등에 얹고 부드럽게 애무했다.
[잭 당신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아요. 당신이 다른 방려을 제시해 준
다면 그걸 따를게요.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라끄 요구하진 말아 줘요
네?
[그래, 당신이 옳아. 내가 무리였어.
그는 앉은 채로 양손을 그녀의 허리에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난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그 길
밖에 없저어.
몰리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노트를 커내. 몰리....... 이번 사건을 얼마 동안만 덮어 준다면 그
정도 비중 있는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지.
[무슨 이야기죠?
[당신이 결말을 지어 보려고 오랫동안 애쓰던 이야기.......
프프
그곳은 마치 영화를 찍는 촬영장 같았다. 전문의 두 사람과 수
련의 두 사람, 또 간호사 두 사람 그리고 마취과 의사 한 사람 해서 모
두 일곱 명이 우주복처럼 아래위가 붙은 수술복 차림에 장화를 신고
장갑을 낀 채로 우주선의 장치들만큼이나 복잡한 의료 기구들 사이에
서 분주히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빛을 발산하고 있는 기계들. 디지털 표지판들과 뻑뻑거리는 모니터
들, 산소 호흡기와 줄줄이 늘어선 링거 막대....... 수술팀은 마치 지구
를 떠나 외계로 나간 우주인들처럼 수술실 밖의 일에는 일체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장비들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
다. 드디어 레이챌이 간호사 한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분 후면 수술 준비가 완료되니 조무사들에게 환자 대기시키라고
알려 줘.
애브너 티투스는 그의 병실에서 수술에 대한 긴장과 불안을 느끼며
이동 침대에 누운 채로 기다리고 잇었다. 그는 진정제의 약기운 때문
에 의식이 몽롱한 상태였다. 잠시 후, 조무사 한사람이 들어와서는 산
소가 제대로 유입되고 있는지, 모니터에 연결된 전선들은 올바로 떼어
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수술실로 이동 칭대를 몰고 갈 준비를
했다. 조무사는 대법원장에게 짧은 거리이니 긴장을 푸시라고 친절하
게 애기를 건넨 다음 문을 향해 침대를 밀었다.
한편 수술실에선 레이켈의 최종 점검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중이었
다.
[타라?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를 쓴 마취의사, 타라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이제 몇 분 후면 타라는 마취제와 질소
화합물로 채운 로켓에 티투스를 눕히곤 멀고 먼 외계의 암흑 속으로
그를 쏘아 보낼 것이다. 그떻게 되면 그 역시 수술팀들처럼 바깥 세상
과는 관련없는 다른 세계 속에 잠시 머물게 될 것이다. 바깥 세상의 모
든 재난과 갈등과 모순을 넘어......
아침 7시 뉴스였다.
. .....몰리 맥코믹이 워싱턴으로부터 독점 기사를 생방송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여자 아나운서가 말했다
곧이어 발갛게 얼은 코에 마이크 주위로 흰 입김을 뿜어대는 몰리가
라면에 등장했다
[오늘 새벽 공신력 있는 제보자와의 전격적인 독점 인터뷰를 통해
저희 -는 뉴욕과 워싱턴 지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
던 아기인형 살인사건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제보자
의 애기에 따르자면 뱃속에 아기인형이 들어 있는 채 시체로 발견됐던
희생자들은 각각이 납치되어 엽기적인 의학 실험의 실험 대상으로 사
용된 후 유기되었다고 합니다. 그 실험은 태아를 그들의 뱃속으로 이
식하는 것이었다고 제보쟤는 알려 왔습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태아
말입니다. 세 명의 희생자 가운데 두 사람. 멜빈 쉬버스와 할리 문은
비록 일시적이긴 했었지만 최초로 임신을 한 남자.......
예의 조무사가 티투스를 실은 이동 침대를 밀고 나오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조무사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함께 수술실을
향하여 침대를 밀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 소식 들었어?
왼쪽 편에서 이동 침대를 밀고 가던 조무사가 물었다.
[아니,꿔 특별한 거 있어?
오른편에 있던 조무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남자를 임신하게 만들었대.
그 말은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티투스의 몽롱한 의식 속을 꿰뚫었
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이 사람이 아침부터 실없는 농담을.......
[농담 아니야.텔레비전에 나왔다니까. ?시 뉴스에.......
이동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티투스는 팔꿈치로 버티면서 상체
를 일으켜 보려고 버등거겼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몽롱한 시야에는 상
하좌우로 흔들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여러 명의 레이챌이 뛰어 들어
왔다.
[사람들이...... 알고...... 있대.
그의 입에서 발음이 불분명한 말이 튀어나왔다.
[뭘 안다구요?
[그게.뉴스에.......
티투스의 말은 제대로 이어지질 못했다. 레이웰은 조무사들을 바라
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죠?
그러나 그들은 어깨만 들었다 놓을 뿐이었다. 티투스는 자꾸만 감기
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복잡한 기계들과 우주복을 입은 사람
들을 둘러보았다.
[당신들......누구야?......나......에게. .... .무슨......짓을......하려..
...고......하는......거지?
그는 붉어진 얼굴로 사지를 버둥거리며 도망가 보려고 애썼다_ 그러
자 레이웰과 두 조무사들이 그런 그를 잡아서는 수술대 위에 내려놓았
다.
[마스크 씌워
조무사들 앞에서 비밀을 죄다 털어놓기 전에 어서 침묵시켜야 했다.
타라가 가스 밸브를 열고 그의 코와 입을 마스크로 덮었다. 티투스
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악을 썼다.
......멈춰...... !
그러나 그의 목소리 역시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에 의해 덮여 버렸
다. 다라는 가스의 양을 증가시키고 나서 마스크를 조였다. 몇 초 후
그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순간 레이켈이 갑자기 수술 마스
크를 벗어 버렸다. 그리고 티투스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팀원들과
조무사들은 침묵을 지킨 채 둘러서 있었따. 마침내 그녀의 입이 떨1
졌다.
[모두 보았다시피 환자가 수술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의료려과
병원 규칙에 의해 이 수술은 무산된 겁니다.
'아기인형 살인사건'의 희생자들 임신.
뉴욕 포스트 1면.헤드라인}
우와! 과연 남성들에게 폐경기가 있을카요, 없을까요?
아무리 나이를 떡어도 임신할 수 있는 귀여운 남성들에게 들려 드럽
니다.이어지는 곡은.......
{음악방송의 여성 }
나로서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이란 청교도들
의 식민 시절 이래로 성()에 관해선 무지해 왔으니까요.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임신한 남성에 대한 호칭 문제입니다.
<출판인, 엘렌 굿맨}
'.... ..그 동안 유전공학과 태아 세포조직 연구 등 다른 몇 가지 의학
실험에 대해서 비난을 해왔던 카톨릭 교회는 보수적인 전통대로 이번

실험에 대해서도 범죄적인 행위로써 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를 정면으
로 위배했다는 점을 들어 강력한 비난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인 가운데....... 한편, 익명을 요구하는 어떤 고위 성직자의 제
보에 따르면 최근에 받은 간 이식 수술의 경과가 아주 좋기 때문에 교
황은 다음 주.......'
(바티칸 발()어느 외신기자}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인접 분야에 있어서 의학적인 정보를 활용
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엑스레이라든지, 실
리콘을 사용한 유방 확대 시술이라든지. 체중 감소제 등....... 따라서
희생자들의 시체를 철저히 검시하여 여성 호르몬의 과다 투여와 제왕
절개 수술 등을 포항한 이번 실험의 의학적 기술과 인체에 미치는 영
향을 충분히 살펴본 후에.......'
<모 일간지에 실린 개업의의 투고 중에서>
[그런데 마이클, 여긴 웬일로 다 들르셨습니까?
골수 보수주의자 대법관, 에드먼드 리틀 3세는 집무실의 가죽 의자
에 앉아 마이즐 켈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브너 티투스 말이오. 병원에 입원한 지 꽤 오래됐잖소. 연락도
안 되고.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고 하던데....... 아
마 지병 때문에.......
[마이클,용건만 간략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코스텔로 사건을 최종 표결에 붙이기 전에 애브너를 그 사건 심리
에서 손떼게 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하시군요.마이클.
[내가 그 문제를 신중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이떻게 당신을 찾아
오지도 않았을 거요.
리틀은 자세를 고쳐 앉고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너무 얄팍한 계산을 하셨습니다, 그려. 코스
텔로 사건에서 애브너가 제외된다면 표결은 4 : 4로 나펼 테고, 그렇게
되면 로의 승리를 선언했던 '로 대 웨이드'판례가 유지되는 거와 마찬
가지지요. 그것은 곧 미합중국 내에서 낙태의 권리가 다시 한 번 헌법
에 기초하여 보장됨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이클, 당신은 진정 그
런 비열한 방법에 의해서 이 땅의 입헌적 정의가 결정되기를 바라시고
있는 겁니까?
[절대로 그떻지 않소. 그러나 심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대법원징
에 의해서 입헌적 정의가 결정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잖소?
[이보시오. 마이클! 설사 그의 머리가 돌아 버렸다고 할지라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티투스는 이미 그 사건을 충분히 숙지
했고 예비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잖습니까? 게다가 다수의 의견에 관
한초안카지 이미 작성했다구요.
[그떻지 않아요. 그의 비서의 말에 따르자면 아직 완결시키진 못했
다더군요.
[기가 막히는군요! 마이클, 정말 이렇게 나오실 수 있는 겁니까?
[내 말 좀 들어 봐요. 에드먼드! '포트니' 사건을 심리할 당시 프레
드 빈슨은 그의 의견을 서류상으로 정리해서 제출했었소.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죽고 말았지 그때 대법원이 내린 결정이 꿔였소? 의사 표시
를 엄연히 하긴 했지만 표결에 참여하지 못했음을 들어 그를 실격시키
지 않았소?또 있소. '멘덴할'사건에서의 포타스 말이오. 그는 대법원
의 판례가 공표되기 직전에 사심했었지, 이미 표결카지 다 끝마친 상
태였는데도 대법원은 그의 표를 무효화시켰잖소.
[어쨌든 난 불쾌합니다. 마이클. 이건 순전히 정치적인 술수예요.
[그떻지 않아요, 누구나 다 아는 사실 가지고 내가 왜 술수를 쓰려
하겠소? 대려원장을 실격시키려면 다섯 표가 필요하지 않소? 내가 모
을 수 있는 표는 내 것까지 포함해서 네 표뿐이오. 당신쪽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애브너의 심신 상태에 결격 사유가 될 만한 이상이 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한 우리의 대법원장은 그대로 유임되는 거요.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당신이 갖고 있소. 에드. 내가 아니라 말이오.
[내가 어느 쪽에 표를 던질 줄 잘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
까?
[나는 솔직히 당신이 어떻게 투표할지 모르고 있소.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로 나의 투표의 향방을 함부로 단정짓지는 마시오. 이건 절대
로 술수가 아니오, 난 우선 애브너의 실제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아보기를 원하오. 어쨌든 당신과 나의 신념이 아무리 상반된다 할지
라도 나는 당신이 나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주길 바라겠소.
에드먼드는 다시 파이프에 불을 당겼다,
[이렇게 해봅시다. 에드. 당신과 나. 둘이서 오늘밤 병원으로 티투
스를 찾아가 그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 보고 의사의 소견도 들어 봅시
다. 만약 내가 들었던 바와는 달리 그가 괜찮은 상태라면 나는 제안을
철회하겠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내일 아침에 그의 실격 여
부를 묻는 투표를 위해 대법관들을 소집하겠소.
리틀은 의자에 앉은 채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려해 보겠습니다.
짤막하게 응답했다
레이챌은 문을 닫고 병상으로 다가갔다
티투스는 똑바로 누워서 졸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고는 그
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새 몰라보게 변해 버린 그의 모습 때문
이었다. 엄청났던 몸집은 식욕 부진으로 인해 줄어들어 있었고 윤기
없는 얼굴엔 새로 생긴 주름살들이 깊게 패여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티투스가 눈을 떴다.
[잠깐 들렀어요.곧 나갈 거예요.
레이챌은 티투스의 신경을 미리 견제해 놓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뉴스와 난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알려 주고
렀을 뿐이에_2_.
싶어서 들
[당신이 정보를 누설시키지 않았다는 뜻이오?그 세 사람이 어떻게
임신을 하고 죽었는지는 이미 피브 창 박사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 그
진위를 아직 확인할 순 없지만 말이오.
[애브너.......
티투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소. 자백이 됐든,부인이 됐든.
레이웰은 침상 옆의 의자에 걸터앉아서 조용히 입을 뻤다.
[애브너, 비록 기자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지
만 당신은 안전할 수도 있어요. 3주만.앞으로 딱 3주만 농장으로 가서
수술 전까지 낚시나 하면서 좀 쉬어 보도록 하세요.
[싫다면? 물론 당신은 나의 임신 사실을 폭로해 버리겠지. 휴우, 그
러구료.......
티투스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일어서서 그의 손목을 잡아 들고 맥박을 재었다. 빠른 박동
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의 임신을 지속시키려 하고 있고 그는 임신을 끝내려고 한
다. 평소 가슴 깊숙이 신봉하던 각자의 신념과는 정반대티는 고집의
싸움 그러나 지금 같은 평행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어
차피 이번 싸움에 무승부란 없다. 둘 중 한 사람의 고집은 반드시 꺾이
고야 말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차라리,지는 게 어떨까......
만약 내가 고집을 럽는다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낙태권에 대한 나의 신념은 끝까지 지킨 셈이 된다. 그
래, 차라리 티투스에게 그의 신념을 저버리도록 하게 만들자. 레이헬
은 결심을 하고도 한동안은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녁의 입에서 체념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브너 당신이 이겼어요....... 다른 의사는 부를 필요 없어요. 내
일 아침 7시로 수술 시간을 잡아 놓겠어요.



데이지는 티투스의 수염을 깨끗이 밀어 주고 나서 수건에다 따뜻한
물을 적셔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곤 베개 위에 언힌 그의 머리
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돌려놓고는 짐짓 호들갑스럽게 말을 건냈다.
[어머 이제 좀 나아 보이네요. 리틀 판사님과 켈리 판사님이 병문
안 오신다고 그러셨는데 초췌한 모습을 보이면 그분들이 얼마나 놀라
실까요.
그 말에 티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병문안?그들이 여길 따녀가려는 것은 건강상의 문제를 꼬투리삼
아 날 ,코스텔로'사건에서 손폐게 하려는 켈리의 얄팍한 속셈일 뿐이
야. 데이지.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 들지 마세요. 만일 켈리 판시님이
그런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리틀 판사닙은 왜 데려오겠어요?
딴은 그떻기도 하겠다 싶어 티투스는 텔레비전 쪽으로 겸연쩍은 눈
길을 돌렸다.
마침 시사평론 시간이었다.
, .....오늘 아침 보도되었던 임신한 남자들에 관한 뉴스는 각계각층
으로부터 가지각색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숭고한 업적이라는
찬사에서부터 미친 짓이라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아무튼 이 나라
전역이 온통 그 이야기로 벌집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럽습니다. 뉴욕에
있는 어느 기획 광고 대행사에서는 벌써 이 이야기를 토대로 몇 가지
""".
티투스는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데이지.나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데이지는 쓰고 난 물을 욕실에 버리고 돌아와 방을 나갈 준비를 했
다.
[나가기 전에 <몰타 섬의 매}좀 틀어 줘.
그녀는 침대 옆 사물함으로 가서 비디오 테이프을 하나 꺼냈다. 곧
이어 화면에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의 로고가 나타나더니 아프리카 대
륙의 지도가 보억지며 스피커에서는 '라 마르세예즈(.국가) '가 감미
롭게 흘러나왔다.
[저건 <카사블랑카}잖아.
[하지만 이 영화가 판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거잖아요.시드니 그
린스트리트의 연기를 보고 싶어서 그러신 것 아니에요?
[시드니는 {몰타 섬의 매}에서도 등장한다구.
그래도 데이지가 떠뭇거리자 티투스는 손을 들어서 데이프을 뽑아
내라는 시농을 해보였다. 데이지는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하고는 그를
향해서 돌아섰다.
[꿔 더 시키실 일 없으신가요?
[실비아 브라운에게 전화해서 매클라우드가 병원에 손을 쓰지는 않
나 유심히 살펴보라고 에기해 줘. 그렇게만 말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거야.
데이지가 떠나고 난 병실에 홀로 남은 티투스는 갑자기 불안이 엄습
해 오는 것을 느끼며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매클라우
드가 법에 호소한다면 지방법원에서 자신의 낙태 금지명령이 내려질
까...... 그러나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건의 전모가 드
러난다는 데에 있었다. 매클라우드가 소송을 걸지 못하도록 제지할 수
있는 방안은....... 레이챌의 경우라면 그녀 스스로가 법범자이므로 어
떤 식으로든 협박을 가할 수 있겠지만 매클라우드를 협박할 수 있는
방려은 없었다
'여하튼 그건 그렇다 치고. 매클라우드가 심에서 0(일시적낙태
금지명령)를 따내지 못해...... 만일 항소를 한다면......? 만일 재판부가
최악의 상태로 구성된다면, 다시 말해 자신의 고속 승진을 배아파하는
판사라든지 아니면 과거 그에게 크게 당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는
판사들이 소송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제판부는 쓸데없는
법조문을 들춰 가며 고의적으로 판결을 지연시킬 것이다.'
그건 그 자신이 제노비아 데이비스 사건에서 사용한 방법이었기 때
문에 대처할 방안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맙소사 그렇게 되면 레이챌 측에서는 손 한 번 까딱하지 않고 태아
가 충분히 숙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 된다.' 그는 목구멍
으로 치받쳐 올라오는 분기를 삭이기 위해 몸을 뒤척거렸다.
'빌어먹을!낙태 지지론자들은 그 꼴을 보고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만 흐르게 되자 그의 체내에선 아드레날린이
위험 수위를 넘어 계속 분비되고 있엇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티투스
의 머릿속엔 불리한 상황들에 대한 생각과 그에 대응하는 자기중심적
인 편협된 결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만일 심에서 판결이 지연된다면 그래서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인
코스텔로 사건에 자신이 반대표를 던지고 승리를 거둬서 절대적 낙태
금지가 판례가 되고 난 후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티투스 본인은 자신의 상태를 임신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
고 또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을 제거학는 수술이 낙태라고 생각지도 않
았지만 그것도 역시 낙태의 일종이라고 1심 판사가 결론을 내려 버린
다면 ....?
순간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켜져서 그는 몸을 움찔했
다.
......그렇게 퍼면 난 온 나라 안의 풍자 만화 주인공이 될 것이다
아니야 그 모든 게 무슨 문제가 되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는 반드
시 내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 테다.'그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또다시 불안한 생각...... '만일 1심에서 판사가 낙태
금지 판결을 내린다면 레이챌이 약속대로 수술을 해줄까? 아니면 벤슨
박사나 다른 의사들이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도 수술을 해줄까?'
'그럴 리는 없었다. 설사 그런 의사를 찾아내서 수술을 성공리에 끝
마쳤다고 하자. 그 다음엔? 범원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법정의 피고인석
에 앉아 있는 미합중국의 대법원장이라니? 오! 하느님. 절 구해 주소
서. 그러한 모옥은 견뎌 낼 수 없나이다.'
어쩌면 상원 청문회도 개최될지 모른다. 스틱스 딕키가 그를 두둔하
고 나서 줄지도...... 아니지.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질 게 없지. 오히려
악화될지도 모른다. 상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낙태 반대론자가 낙태
를 옹호한다? 그렇게 되면 스틱스 딕키도 정치적 지지 기반을 잃고 낙
향해야 하게 되는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침착하자, 침착해. 속으로 수없이
뇌까렸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망할 놈의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잭 매클라우드! 낙태권의 보장을 정치 활동의 목표 가운데 하
나로 삼고 있다는 놈들이 낙태를 하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핍박할 수
있단 말인가?
하이에나 같은 놈들! 위선자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여 있던 눈물이 양볼을 타고 홀러
내렸다. 베개에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불안 대신 과대 망상증이 서서
히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너희 자유주의자 놈들은 나에게 어떠한 위
해도 가하지 못할 것이다. 이 변절자들아!
그는 땀을 뻘뻘 홀리며 체리 초콜릿 상자를 열고 비어 있는 포장지
속을 헤집어서 한 알을 찾아내고는 천천히 씹어 삼켰다. 부드러운 체
리잼이 그의 예민해져 있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애브너, 네가 지닌 힘을 생각해 봐 왜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
하고 있는가?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설치고 날뛰어 봤자 네가 가진 마
지막 한 장의 카드만 제시하면 놈들을 끽소리 못하게 만들 수 있지 않
겠어? 임신? 웃기지 말라 그래. 미합중국 판사들 열 명 중 아홉 명은
너와 같은 카드를 가지고 있어. 너는, 너는 바로 남자야!'
11


[엘리. 자수해요.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전화기를 움켜쥔 제레미 하켓의 손바닥에서
[엘리?내 말 듣고 있어요?
한동안 응답이 없던 전화선 저쪽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엘리 그레이브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그의 호흡이 불규칙한 것으로 미루어
것이 틀림없었다.
볼 때 무척 힘들어하고 있는
[나에 게 기회를 줘봐요. 엘리, 최선을 다해서 사태를 수습해 볼 테
니까 말이에요.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홀렀다.
. .....내가......그랬어. 내가.......
다시 들려 온 그레이브스의 목소리엔 울음이 배어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요. 와 뉴욕 경찰청에 모두 수배령이
어요.조만간 그들이 당신을 찾아내고 말 거예요.
[나는...... 돌아갈...... 수가...... 없어.......
그레이브스는 이제 흐느끼고 있었다.
내려져 있
[지금 어디에요? 엘리. 일단 만나서 대책을 세워 보자구요.
그때 통화 시간이 다 되었으며 연장하고 싶으면 25센트짜리 동전을
더 넣으라는 전화회사의 녹음 방송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 왔다. 가뜩
이나 조마조마한 하켓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가르쳐 줘요.엘리.
하켓은 재빨리 말햇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엘리?
동전이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나는 당신의 변호사예요.그리고 당신이.......
[난 알아.
그레이브스의 목소리가 하켓의 말허리를 끊었다. 울음은 이제 그쳐
있었다. 절제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안다구요?
[이 상황에서 내가 무얼.해야 할지, 난 알아.
[그게 꿔죠?
[모든 걸 다 잃어버리고 나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돼.
[엘리.......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지.
하켓은 초조해졌다.
그는 만일 그레이브스를 지금 설득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그의 모습
을 보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레이브스가 떨어져 나가
지 못하도록 붙잡아 맬 올가미가 필요했다.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안다구 그랬어요?그러면 먼저 이것부터 생
각해 봅시다. 엘리 애초에 왜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됐죠?돈 때문도,
권력 때문도 아니잘아요?
_.,,. 1.
전화선 저쪽에선 아무런 응답도 없었지만 하켓은 그레이브스가 자
기 에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어쩌면 올가미에 걸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켓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엘리. 당신의 사명은 끝
나지 않았다구요.
여전히 아무 응답도 없었다.
[내 말 맞지 않아요?
[당신 죄 때문이야.
[예?내 죄 때문이라구요?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었어.
난데없는 대답이 하켓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냉
정을 되찾고 간절히 에기했다.
[엘리. 내 말 잘 들어요. 당신은 지금 몸이 좋지 않아요. 당신은 도
움이 필요하다구요.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줘요, 엘리 !
간간이 숨소리만이 들려 올 뿐 또다시 침묵이 홀렀다.
하켓은 온 신경을 전화기에 닿은 귀에 집중시킨 채 뭐든
얘기가 들
려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가지 더 있어.
마침내 그레이브스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래요?그게 뭔데요?
[내가 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어.
[그게 윌니까?엘리?뭘 해야 하는지 말해 줘요.
[신은 내가 그것을 하기를 원하셔.
[신께서 당신이 뭘 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엘리? 엘리? 대체
신께서......,
-찰콰
화장을 끝마친 레이챌은 앉은 채로 회전의자를 뒤로 밀어 거울에서
떨어져서는 화장품이 묻지 않도록 웃옷의 칼라 위에 덧대 놓았던 휴지
를 떼내어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방송국 분장실 안이었다, 레이챌의
분장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페퍼는 얼굴 가득 걱정스런 빛을 띤 채
입을 열었다.
[정말 방송에 나갈 생각이에요? 아직 늦지 않았돼요. 취소하고 돌아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누군가가 이번 사건의 과학성을 변호해야만 해. 그러려면 내가 나
서야지. 다른 누굴 내보내겠어?
[그떻지만 바로 그게 문제예요. 방송에서 당신이 이것저것 많이 알
고 있는 듯 비춰지면 누구나 당신을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
목하게 될 거란 말예요.
[조심할게.
레이웰은 거울 쪽으로 몸을 구부리고서는 머리를 묶었다
[피브가 조금 전에 전화해서 병원의 상황을 전해 줬어요.
[그래? 뭐래?
[티투스가 켈리와 리틀의 면회 요청을 거절했대요.
[왜 그랬대?
[그를 '코스텔로'사건에서 손떼게 하려는 졸렬한 수작이라고 화를
내면서 데이지더러 그들을 병실에 들이지 못하게 했다나 봐요. 어찌된
영문일까요?
[켈리가 티투스의 건강 문제를 들어서 그를 실격시키자는 제안을
했을 거고 또 거기에 대한 표결을 할 거라는 뜻이지. 꿔. 하지만 켈리
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을 거야. 그나저나 티투스가 그 메시지를 봤
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요, <카사블랑카}는 관두고 <몰타 섬의 매}
를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나봐요.
[망할 것! 내가 잘못 골랐군. 틀림없이 {카사블랑카>를 보겠다고
할줄 알았는데.......
레이챌은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 속으로 던
져 넣고 말을 이엇다.
[하기사 그가 그것을 보았다고 해도 그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애초에 썩 훌륭한 계획은 아니었던 거야. 어쨌든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 고마워. 페퍼.
[내가 한 일이라곤 고작 그를 찾아가서 테이프를 놓고 나온 것뿐인
걸요.꿔.
페퍼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데이지가 힘들었어요. 그걸 어떻게든 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쓴 모
양이던데요.

므흐
[밤의 초대석 '나이트 라인'!
시그널 뮤직이 울리고 짧은 광고가 나온 뒤, 이어서 진행자 테드 코
펠이 나타났다.
[시인들은 이것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가능한 얘기였고, 코미디언들은 이것을 소재로 농담을 해왔습니다. 그
러나 실제로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
니다. 지금, 날씨 애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지금 남성의 임신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진행자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태아를 뱃속에 지니게 된 세 명
의 남자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들 세 남자는 모두 '낙태시술병
원 폭파사건'에 관계된 사람들로 태아가 담긴 자궁을 이식하는 소름
끼치는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 두 명에게는
살아 있는 태아가 담긴 자어이 이식되었다고도 합니다.
'이식'에 강하게 힘주어 말한 진행자 테드의 양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졌다.
[오늘 밤 우리는 레이챌 레드패스 박사를 모시고 바로 이것. 남성
임신이라는 주제를 탐험해 보려고 합니다. 레이챌 박사는 신장 이식
수술의 권위자이자, 작가이며 연구자로서 민간인이 받는 최고의 훈장
인 '자유 훈장'을 받은 바 있습니다.또한 오늘의 주제를 함께 나누기
위해 보스턴 의과대학의 허먼 레오나드 박사도 모셨습니다. 허먼 박사
는 생명 윤리학을 위한 앙드레 스타빈스키 협회의 회장이며 유전공학
이나 의학 실험의 경향을 비판하는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습니
다.
사회자는 방청객들에게 눈길을 한번 주곤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레이챌 박사님과 얘길 나눠 보기로 하겠습니다. 박사
님. 누가. 왜 이 남자들을 납치해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에 앞서 과연
남성들에게 임신시키는 것이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부터 좀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
[이론적으로 그건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자궁외 임신이라는 것이
항상 있어 오지 않았습니까? 자얼외 임신으로 태어난 아기들의 기록도
있구요.
[하지만 자궁외 임신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
지 않습니까.
[위험합니다. 정상적인 임신에서는 출산시 아기가 자궁에서 분리되
죠. 그런데 자궁 밖에서 임신한 경우라면, 그래서 아기의 태반이 가령
내장벽과 같은 다른 곳에 정착되어 있다면 그것을 분리해 낼 때 대량
출혈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산모가 출혈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합니까.
[그떻습니다. 그런데 임신 상태의 자궁이 그대로 옮겨진 경우라면,
이번 사건이 그런 경우일 것이라는 추측 보도를 들어서 드리는 말입니
다만. 그렇다면 태반 출혈이 거의 정상인 경우와 같게 됩니다.
레이챌 박사는 잠시 멈추었다가 스스로를 검열하는 듯한 태도로 말
을 이었다.
[저 자신도 직접 수컷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했죠?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죠.제왕절개로 꺼냈습니다.
[코펠 씨.잠깐만요.
허먼 레오나드 박사가 끼여들었다.
[네. 허먼 박사섬.
[양해하신다면 잠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순수한
기술적 관점에서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도 의심하지 않는 바
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 볼 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그런 실험
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또 저의 생각입니
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항은 자신들의 의
지와는 무관하게 납치되어 임신하게 된 남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
은 실험용 돼지로 취급되었습니다. 도대체 목적이 뭘까요? 또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성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궁을 갖도록 되어 있는 자
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남성 임신을 운운해야 한단 말입니까?
[레이헬 박사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코펠이 시선을 레이챌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글쎄요. 전 몇 가지 목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만 먼저 남성 임신
이라는 것이 허떤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여성 임신과 거
리가 먼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심지어 몇 가지 장점
도 있다고 저는 봅니다. 예를 들면 '복강의 졍균 크기는 남성이 더 크
다.'뭐 이런 것들이지요.
[터무니없는 소리요. 어떤 남성이 기꺼이 자원했다 하더라도 수술
의 위험성은 또 어떻게 무시합니까? 최소한 두 번, 처음엔 자궁 이식
수술,나중엔 분만 수술,이떻게 두 번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는 것이죠. 그것만 제외하면 남성 임신
이나 여성 임신.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 그것만 제외하면이란 표현은 마치 2차 세계대전 없이
를 논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리는군요.
1940년대
[허먼 박시십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되는데요. 레이챌 박사님?
사회자인 코펠이 허먼 박사를 거들었다
[그 지적이 옳긴 합니다만 그것이 결정적인 사항은 아닙니다. 의학
적인 진보라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수반해 왔으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허먼 박사가 잘라 말했다
[도대체 뭐가 '진보'라는 겁니까? 남성이 임신을 해서 뭐가 더 나아
진다는 거죠? 의학의 기본 원칙은 생명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
태롭게 만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코펠이 레이챌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박시닙.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실
험을 행한 동기에 대해 알아 봐야겠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했었다고 생각하십니카?
[글쎄요.누가 했는지는 전혀 추측이 안 됩니다만 이번 행위가 우리
의 가치관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 가지 주제
에 대해서는요.
[그게 꿔죠.
코펠이 물었다.
[낙태입니다. 60년대 플로린스 케네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만일 남성이 임신할 수 있다면 낙태는 신성시될 것이다.'라구요.다소
과장된 것이지만, 요점을 지적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괌성도
임신할 수 있다는 증거가 나왔으니 남성들도 자문할 일이 생긴 것입니
다. 즉, 우리도 임신 안 할 권리. 즉 낙태할 권리를 보호받을 법이 있어
야 하지 않을까?'라구 말예요.
[하지만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을카요.
코펠이 되받아 물었다.
[가정입니다만 남자들이 선택에 의해서만 임신하게 된다면 여자들
도 원하지 않은 임신은 낙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고 보는 것이
어떨는지요?이를테면 강간이나 근친상간 또는 부주의에 의한.......
[솔직히 말해서.
허먼 박사가 끼여들었다.
[코펠 씨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코펠 씨는 지금 '남자들이 선
택에 의해서만 임신을 하게 된다면이라고 가정했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처럼 그 불쌍한 희생자들을 납치해서 임신시킨 그런 사악한 조직
들이 또 없으리란 려이 어딨습니까? 제가 그 희생물이 될지 누가 알겠
느냐구요.
[레이챌 박사님은요.
코펠이 레이챌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런 젓 가지고 잠 못 자며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허먼 박
[뭘 가지고 그떻게 확신하나요.
허먼 박사가 레이웰에게 직접 물었다.
[확신하는 게 아니라 전 단지 그렇게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일 필
요까지 없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누가 히스테리컬해요.
[자,자....... 진정들 하시길 바랍니다.
코펠이 말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허먼 박사의 중얼거림이었다.
[잠시, 광고 나가고 다시 이어지겠습니다.
군펠의 멘트에 이어 화면은 음료 광고로 바뀌었다.
노먼 플라스키 형사는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워싱턴을 불렀다.
[윌슨인가?나 노먼인데 '나이트 라인'보았나.
[네.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이챌 박사가 남자 몸 안에 아기를 넣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자유 훈장'까지 받은 의사가 살인까지 저질렀을까요.
[이 직업에 몸 담은 지 2년이야.나를 믿으라구.설마는 없어.
[그럼 한번 캐볼까요.
윌슨이 물었다
[내일 아침 9시 찌분 사무실로 갈게.자료를 검토하고 뭘 해야 할지
한번 구상해 보자구, 헛다리짚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될 거야.
[만일 그녀가 범인이라면요.
노먼은 잡지책을 덮었다.
[큰 거 한 건 올리는 거지.
오락 프로그램의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이 손에 목록을 든 채 카
메라를 향해 씩 웃고는 말했다.
[워싱턴에서 신장 이식 수술을 받길 원하지 않은 열 가지 이유는?
먼저 열 번째.......
드럼 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신장 대신에 여자 친구의 사생아를 배고 끝장날지도 모르
니까.다음 아홉 번째......,
레이챌과 페퍼는 코네티컷 거리에 있는 방송사의 '나이트 라
인 스튜디오에서 나와 이면 도로에 주차해 놓은 페퍼의 차 쪽으로 걸
어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편
이었다. 파란 스키 파카에 청바지를 입고 까만 니트 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행인들 틈에 끼어 레이웰과 페퍼의 뒤를 밞고 있었다.
[박사님이 첫마디를 채 마치자마자 스튜디오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어요. 여자들은 지지 의사를 보내 왔고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반
대하는 입장이에요.
도로로 꺾어 들었다. 파카를 입은
그들은 코네티컷 거리에서 이면
남자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전보와 팩스 내용들도 흥미로운 게 많았어요.
페퍼가 계속 말을 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미국 성전환자 협회'에서는 박사섬이 다음 주에 있을 자
기네들의 연례 정기 모임에 참석해저 연설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을 보
내 왔어요. 더욱이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식 수술에 응하겠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스물여덟 명이나 나섰다고 했어요.
[대단하군.공장 차려도 되겠네.
[또 '자궁의 힘이라는 한 여성 단체는 내일 피켓을 들고 항의 시위
를 벌인답니다.
[뭘 항의해.
[자기들로부터 출산이라는 고유의 힘을 강탈해 가는 것에 항의한다
는 거예요,출산은 여성만이 가진 유일한 진짜 힘이라나 뭐라나.......
[음....... 그 점을 몰랐군.
파카 차림의 미행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
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박사님 생명을 노리겠다는 협박 전화도
많이 있었어요.
[놀랄 일도 아니지.
그들은 차에 도착했다. 페퍼는 자동차 키를 찾기
었고 레이챌은 생라에 잠겨 서 있었다
위해 핸드백을 열
[한마디로 다 엉망이 돼가고 있군.안 그래?
레이챌이 입을 열었다.
[커따란 농담거리로 응수하는 것 아니면 상상을 초월한 협박으로
반응하는 것뿐이니......,
파카를 입은 남자가 겨우 몇 미터 앞까지 가까이 다가왔지만 두 여
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 박사님이 항상 그러셨잖아요.
어둠 속에서 키를 찾느라 눈쌀을 찌푸리며 페퍼가 말했다
[아니. 이놈의 키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레이젤이 발자국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라 멈췄다. 그
남자가 손이 닿을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레이켈 박사님이십니까.
남자가 물었다
페퍼가 핸드백으로부터 고개를 들었다. 그 정체불명의 인물은 여전
히 오른손을 파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눈의 초점을 모았다. 무슨 임
무를 띠고 있는 기색이었다.
[그런데요.
레이웰이 대답했다.
[이걸 받으시오.
남자는 손을 주머니로부터 뽑아 레이챌 앞으로 내밀었다. 레이챌은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레이웰의 시선이 남자의 손에 가서 멈추
자 거기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녁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
았다. 남자는 두말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페퍼는 눈을 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체에 몸을 기대었다. 잠
시 후 페퍼가 차문을 열었고 둘은 차에 탔다. 레이켈은 차 안에 앉아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반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펼쳤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맨 위의 고딕체 글씨였다. 그녀는 중요 단어
들을 대충 훌어보았다.
소환장
'귀하의 출두를 명령합니다.
이름없는 남자 아기 1세 대 이름없는 남자 아기 2세.
오전 6시에 비상 소송 심리.'
오전 6시라면 앞으로 5시간 찌분 후였고, 그녀가 티투스를 수술하
기로 한 시간으로부터 1시간 전이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가 다루어야 할 청원 내용이 본인의 판
사 생활 12년 동안 겪은 그 어느 사건보다 더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것
임을 우선 여러분에게 햐히고 싶습니다.
워싱턴의 지방법원 판사인 프란시스 맥카시 판사는 사건 기록부 위
에 팔꿈치를 댄 채 몸을 앞으로 기대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침 6시였다.
맥카시 판사의 서재에는 '이름없는 남자 아기 1세 대 이름없는 남자
아기 2세'사건의 소송 관계자들이 긴급 청문회를 위해 모두 모여 있었
다. 맥카시 판사는 현재 지방법원의 신럽() 판사 제도의 순번에
걸려서 낮이건 밤이건 언제라도 청원을 듣고 결정을 내려 줘야 할 의
무가 있었다. 그래서 신럽 판사 차례가 오는 것을 좋아할 판사는 아무
도 없었고 특히 이번처럼 억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경우는 더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판사의 자택에서 청문회를 여는 것이 법원 조례
상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시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집이
맥카시 판사에게는 펀했다. 그러나 그것은 맥카시 판사가 고려해야 할
2차적인 일이었다. 이번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 엄수'였다.애브
너 티투스가 자신의 개인적 친구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알려지는 것은 임신 그 자체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처럼 느켜
졌던 것이다.
맥카시는 오늘 아침에 국가 기밀사건 담당인 법원 속기사를 불렀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속기사였다. 그는 속기사에 게 심리 과정
의 사본을 하나만 만들끄 그젓을 속기 노트와 함께 자기에게 제출해
줄 것을 지시해 두었다. 맥카시는 그것을 사무실 금크에 보관할 생각
이었다 외국 대사관 도청 사건, 일급 비밀 정보 등등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될 사건 자료들을 보관하는 금고에....
맥카시 판사는 티투스의 낙태를 막기 위해, 잭 매클라우드 의원이
제출한 0(일시적 낙태 금지명령) 청원서를 심리하기 위해 불러모은
모두의 얼굴을 확인한 후 다시 한 번 비공개적으로 엄중한 경고의 말
을 했다. 만일 그들 중 누구라도 이 내용을 언론에 홀릴 땐 남은 여생
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거라고....... 없는 죄도 만들어서 감옥에 넣을
거라고.......
[하켓 변호사!
그가 말했다
[먼저 당신이 참석한 이유를 말해 주시오.
하얀 셔츠와 빨간 타이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진주빛 양복 안에
받쳐입은 하켓 변호사는 그 방으로 옮겨진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목청
을 가다듬었다. 왼손에는 노란 수첩을 든 채 오른손으로 벗겨진 떠리
위의 가는 머리카둬을 빗어 넘기며 그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판사님. 먼저 판사님께서 이 사건을 맡아
주신 데 대해 감시피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이번 청원이 생사를 가름
하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면 이떻게 불편한 시간에 심리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두고 싶습니다.
하켓 옆에 앉아 있는 잭은, 마치 길 잃은 운전사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할 만도 했다. 낙태 지지 법률안 기초자인 그가 붉은 장
미회>의 법률 고문이자 빅토리아를 파괴시키는 데 일조했고 또 지금
도 잭을 파멸시키기를 원하는 엘리 그레이브스의 예전 변호사인 제레
미 하켓의 도움을 요청하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었으칙....... 그것도
뉴욕의 가장 강력한 낙태 반대주의 변호사인 제레미 하켓의 도움으로
티투스의 낙태를 막기 위해......
잭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임자로 선택한 제레미 하켓은 또 주
도적인 낙태 지지주의 의사인 레이켈 레드패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
번 청원 소송을 승리로 이끌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레이챌 역시 잭의 아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위험도 감수한 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또한 레이챌은 절친한 친구인 실비아 브라운
변호사와의 한판 승부도 예상하고 있었다. 실비아는 만일 그래야만 한
다면 레이챌이 유죄임을 증명할 증언을 이끌어 내어 그녀를 감옥에 보
낼 수도 있는 유능하고도 정직한 변호사였다. 그런데 낙태 지지론자인
실비아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이 자리에 섰단 말인가?
대법원장 애브너 티투스는 실비아가 가장 혐오하는 남자들 중의 하
나였고 낙태 재판에서는 최대의 적대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실비아
의 도움으로 잭의 혈육이 가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
책상머리에 앉은 맥카시 판사는 미시시피 동부 지역에서 가장 엄격
한 낙태 반대주의 판사셨다. 잭은 몇 년 동안 그와 싸워 이기기를 원했
지만 이제는 이 방 안에서 맥카시의 신념이 승리를 거두기를 기도하고
있.
하켓이 청원 설명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 .....따라서 존경하는 판사님. 바로 이 점에서 생명 그 자체가 문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잠자고 있는 태아. 그 불쌍한
생명체가 그의 순수하고 신성한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판사닙의 결정
과.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보호하라'는 법의 목적이 지
켜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잭은 하켓이 언제나 그의 논리를 신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다는 것을 새삼 알아채고는 좋은 느낌을 받았다. 잭이 얻을 수 있는 모
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라운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녀는 의자 옆으로 한 걸음 비켜 나와
똑바로 몸을 세웠다. 고상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회색 옷차림에 짧
은 머리칼이 그녀의 자연스러운 권위에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판사는 얼굴을 껑그린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존경하는 판사님.
실비아가 입을 열고는 속기 기계의 찰칵거리는 소리가 멈추길 기다
렸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저는 지금 장소를 잘못 찾아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낍이 듭니
다, 그 어떤 것도 법의 권위를 줄일 수 없기에 저는 먼저 우리가 미국
의 헌법과 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천국
의 법 질서에 대해 논학는 =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
은 단 한 가지 의문입니다. 애브너 티투스 대법원장은 과연 이 임신을
종결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조건 없는 공정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대답은 물론 '예빕니다. 실상 저는 왜 이런 자리까지 굳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의문이 갑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맥카시 판사는 앉은 자세를 움직여 하켓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켓 변호사. 청원 심리에 앞서 심각한 범죄 행위가 이 소송 사건
의 이면에 깔려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궈
에서 그것을 밝힐 수는 없지만 확실히 한 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야겠습
니다. 당신의 의뢰인이 이 범죄 행위에 관련된 바가 없다는 것이 분명
합니까?
[존경하는 판사님. 매클라우드 의원은 대려원장에게 태아를 이식한
것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실로 제 의뢰인은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없는 셈이군요. 당신의 청뭔서는 마치 최초의 남
성 임신이 두 번째 '성령 잉태'처럼 써 있던데요?
하켓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과 나는 오랫동안 '로 대 웨이드'판례의 반대론자였습니다
자, 남성 임신이라는 독특한 사실은 일단 제쳐 두고 이번 소송이 당신
이 맡았던 다른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해 보시겠습니
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로 대 웨이드' 판례는 태아가 자생력을 갖기
전까지는 낙태시킬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자생력을 갖추어야만 법의
보호핀 안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그 시점을 임신 24주로 정
했습니다. 그러나 그 24주라는 것은 경험과 관례를 바탕으로 한 융통
성 있는 시한이지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철칙은 아니라는 점도 밝혔
습니다. 따라서 티투스 대법원장에게 이식된 태아가 아직 24주가 안
되었다 하더라도 만일 그 아이가 자생력이 있다면 법률적 보호 한계가
재조정되어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말은 변호인이 그 태아의 자생 능력을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디
-1 =머저
는 의미입니카?
[그렇습니다.판사넘.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시오?
[그 분야에 관해 세계적인 권위자 한 분을 모셨습니다.
레이챌은 그녀의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속기사가 자신에게 선서
를 외우게 했을 때 그녀가 행하려는 증언의 달콤하고도 쓰라린 본질이
갑자기 종착역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문화나 관습, 법률이나 의학, 종교라는 것들을 공
중 폭파시켜 깨끗하고 순수한 산소로 만들어 사람들을 영원히 변화시
킬 순간을 꿈꾸어 왔었다
다만 그녀는 그런 일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팝은 법정일 수도 있고, 뉴잉글랜드의 의학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그것은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일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자신의 프로
젝트를 평가할 때마다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항상 완전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를 생각했었다. 그 중간 단계인 억성들만이
사는 '여인국()' 따위는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성공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생각이 떠올랐다
실패의 갈림길에 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챌은 오른손을 든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위험에 처
해 있었다.
-그녀의 일 그녀의 자유.태아의 생명,빅토리아의 희생.수정
란이라는 독재로부터의 여성 해방 등등......
여러 가지 아이러니컬한 상황 앞에서 태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
지만 지금 레이챌이 마주하고 있는 인물들은 레이챌의 뇌리에 깊은 인
상을 남기고 있었다. 구원자로 나선 하켓. 동조자인 잭. 적이 되어 버
린 실비아, 이들 앞에서 또한 스스로를 배신하는 낙태반대 지지 증언
을 하려는 참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유일한 플
러스 요인은 결코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항이었다. 즉, 지금 태아
의 운명을 결정하는 판사가 고집 세고 완고한 낙태 반대론자라는 사실
이 바로 그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좋은 소식이라면 실비아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실비아는 충분히 레이챌을 기소할
수 있는 여자였다.
. .....그러겠습니다.
레이챌은 선서하던 손을 내렸다.
하켓은 레이챌이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그때처럼 손가락 사이에 흔
들거리는 노란 연필을 가지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때, '데이비스 대
데이비스' 청문회 때, 그녀는 경솔하게 그의 남성적 우월감을 공격했
었고 둘은 서로 공방전을 벌였었다. 그날의 논쟁은 하켓의 승리였다.
그래서 제노비아의 낙태는 금지되었고. 빅토리아는 지금 여기서 그 생
명이 문제가 되고 있는 태아를 임신하게 될 만큼 화가 나게 된 것이었
다.
그녀는 그가 다시 이기길 기도했다.
[레이챌 박사님.
그가 물었다.
[당신의 전문적인 견해로 볼 때 '로 대 웨이드' 사건과 그 판례의 의
미 안에서 티투스 대법원장의 몸 안에 이식된 태아는 법의 보호를 받
을 수 있을 만큼 자생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떻습니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하길 요구하지 않고 하켓은 단순한 결론을 이
끌어 내는 방법을 택해 그녀의 잘 알려진 명성. 귀찮은 시간대, 소송
절차의 비공식성 따위가 유리하게 작용해 주길 원했다. 만일 그녀의
친구인 실비아가 반대 신문에서 그녀를 물고늘어지지만 않는다면 레
이챌은 적어도 그의 범죄적 비행을 자백하즈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실비아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레이챌 박사님. 저도 역시 간단히 하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
시면 복잡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복잡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은 만일 그녀가 해야만 한
다면 밀어붙일 수도 있다는 분병한 경고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뜻이 새겨지도록 하기 위한 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들 둘
은 그 전에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인은 '로 대 웨이드'사건을 잘 알고 있죠?
[네.
[그리고 '손버그 대 코발리스'소송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태아식
생존 능력은 24주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하셨죠?
[네.
[그럼 이러한 추정은 논란의 여지가 없고,임신 24주까지 낙태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이
나 요구 사항도 당신이 알고 있는 한 없다고 증언한 이전의 많은 사례
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전의 많은 사례에서는 그게 옳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청원자의 변호인이 태아가 겨우 21주 전에 임신되
었다고 언급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터1.
실비아는 왜 이번 태아의 경우엔 다르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레
이켈이 기다리고 있는 질문에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레이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이미 임신 날짜를 납득시켰다고 믿었고.
자신이 대답을 모르면서 반대편 증언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만일 피할 수만 있다면 레이웰을 파멸시키
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자리에 앉았다.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레이챌은 놀랐다.
[판사님.
레이웰은 판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판사님의 결정에 꼭 필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실비아가 말했다.
레이챌은 하켓에게 다음 단계를 진행하라고 눈짓했다. 비록 그것 때
문에 그녀가 위태로워질지라도......
[판사님.
제레미 하켓이 말했다.
[이것은 배심원들의 공판이 아닙니다. '해리스 대 넬슨' 판례 이래
판사는 진실을 알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맥카시 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레이챌을 돌아보았다.
[말해 보시오.
하켓의 시선이 레이켈에게 다가와 꽂혔다
[당신의 전문적인 견해로 볼 때 왜 애브너 티투스의 몸 안에 존재하
는 태아가 이 시점에서 자생력이 있다는 건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임신 후 22주에 태어난 태아는 제대로 된 환경만 갖춰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드문 일
이긴 합니다. 또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만한 특별한 환경이 없
는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특별한 환경만
존재한다면 생존 능력은 생길 수 잇다는 애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환경 조건을 말하는 거죠?
[그 태아는 특별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개인적 견해로 티투스 대법
원장에게 이식된 태아의 나이는 24주 된 태아와 시간적으로는 동등하
다고 봅니다.
[이의 있습니다.
실비아가 끼여들었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정합니다.
판사는 하켓을 쳐다보았다.
하켓의 머릿속에는 교수대에 선 레이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일 그
녀가 태아의 '특별한 환경.조건'을 설명한다면 그녀는 이식 수술 괴정
에서의 범죄를 폭로해야 하고 그것은 스스로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었다. 예전엔 그것을 바라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켓은 마치 그녀가 대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부드럽게 물어
봤다.
[레이챌 박사님. 당신은 어떤 실제적 근거를 당신의 의견에 덧붙이
고 싶습니까?
레이챌은 똑바로 앉았다,
[나는 나의 환자인 애브너 티투스의 복강에 이 태아를 임신시킨 것
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그만 하시오.
판사가손을 들며 말했다. 방안은 조용해졌다.
[당신은 지금 위험한 선을 넘으려 하고 있소. 박사. 당신은 자신에
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네.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한 증언 내용이 당신에계 불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는 것도 알고 있소?
[네.
[좋소.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경고해야겠
소. 만일 내가 증인으로부터 범죄 혐의가 있을 만한 증언을 듣게 되면
난 그 문제를 기소하기 위해 경찰에 연락할 것이오. 알겠소?
[네. 판사님.
그 경고는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불길했고 잠시 그녀를 흔들리게 했
다.
하켓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그녀에게 계속하기를 원하느냐고 묻
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질문하십시오. 변호시닙,
하켓은 입술을 할았다.
[태아가 자생려을 갖게 된 환경 조건들과 아울러 관련된 모든 서실
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그때 잭이 일어섰다.
[판시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이 문제의 청원자로서 증인이 증언
하기 이전에 변호인과 의논하고 싶습니다.
판사가 손을 하켓 쪽으로 내밀며 허락했다.
잭은 제레미 하켓과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다 잠시 후엔 실비
아와 함께 의논할 것을 요청했다. 잠시 후 그와 실비아는 제자리에 돌
아가 앉았고 하켓은 일어서서 판사에게 말했다.
[판사님, 법원이 허락한다면 제 의뢰인은
합니다.
그의 청원을 철회하고자
판사는 레이챌만큼이나 놀란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레이웰은 설명을 원하는 눈초리로 잭을 보았지만 그는 코트를
라고 바빴다.
[실비아.즉시 전화해 주시오.
잭이 실비아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즉시 전화하겠어요. 입느
레이챌이 잭에게 물었다.
[무슨 전화?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갈 곳이 한 곳밖에 더 있습니까?
.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잭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까지 동원했던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써서 티투스로 하여금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런 일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것이 평소 자신의 신념이나 양심
에 비추어 커림칙하기도 했지만 이젠 외길이었다. 사실 문제는 양심이
나 신념이 아니라 뾰족한 수단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
다.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서도 잭은 머
리를 쥐어땄다. 더 이상 폭로 따위의 협박은 먹혀 들어가지도 않을 것
이고 사실 새삼스레 폭로할 내용도 없었다. 제노비아 데이비스라는 카
드는 이미 사용해 보았고 결과도 시원창았다
'티투스의 어두운 면을 들춰낼 수 있다면....... 뇌물 수수나 월권 행
위......?'
그러나 그것도 방향이 틀린 생각이었다.
티투스는 공직자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청렴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바로는 그랬다.
설사 그에게 이중적인 면이 있다 하더라도, 뒤를 캐고 다닐 만한 시
간적인 여유가 잭에게는 없었다. 그가 마티니와 포커를 즐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잭은 티투스의 사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한 상태였
다. 그는 병실문 앞에 서서 경비원에게 신분을 밝히고 조용히 기다렸
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투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무기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경비원이 문을 열었다.
그는 빗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후 타이를 고쳐 매고 들어갈 준비를
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가닌 생각이 있었다.
'그래! 무기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강력한 무기일
맨손으로 싸우는 편이 차라리 유리할지도 모른다.'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병실로 들어섰을 때, 티투스는 베개 두 개를 겹쳐 베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가의 그늘과 얼굴의 주름이 그를 더욱 초췌하게 보이
게끔 했다. 잭은 침대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여러 가지로 힘드실 텐데 이렇게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딱딱한 어조였지만 예전처럼 공격성을 띠고 있지는 않은 목소리로
잭이 먼저 인사를 건썼다.
[솔직히 난 당신을 딴나고 안 만나고 할 선택권이 없었잖소.당신이
청원을 철회한 것에 대한 대가로 내 변호사에 의해 주선된 만남인 걸
로 알고 있소. 어쨌든 청원을 철회해 준 건 고맙소.
티투스의 목소리는 약간 경멸조였다.
잭은 티투스가 눈부셔 하는 것을 보고 램프를 돌려놓고 곧바로 본론
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티투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
역시 비꼬는 어조였다.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홀껏 보고는 말을 이었
다.
[난 잠시 후 수술받을 사람이오.괜참다면 좀 쉬고 싶은데.......
3주.내 부탁은 그것뿐입니다.
[부탁? 당신이? 당신은 지금 부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오. 협박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결코 그런 협박 따위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말이오.
잭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난 아기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습니다. 폭로? 그
건 포기했숩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
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말입니다. 그건 애브너 당신의 관용을 구하는
일입니다.
티투스는 탁자에서 티슈를 가져다가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는 그것
을 반듯이 접어서는 램프 옆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잭.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나의 아기를 갖
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는 어느새 피고에게서 정직한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판
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당신처럼 낙태 쪽을 선택했을 겁니다.
[지금은?
[만일 지금 내가 아이를 원하는 만큼 당신도 아이를 원한다면 난 당
신에게 3주라는 시간을 줄 겁니다.
티투스가 자세를 고쳐 누우며 신랄하게 공격해 들어왈다,
[너무 늦었소. 잭. 날 낙태 못 하도록 별별 수단을 다 써놓고선 이=
와서......틴
[그건 내 잘못이지,아기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참 감동적인 부성애로구만요. 다른 아기들의 목숨은 헌신짝처럼
취급하던 사람이.......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당신은 태아를 없애려는
법률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잖소?
[너무 지나치시군요. 태아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당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여성들의 낙태에 대한 의지를 법적
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내 아들의 목숨을 포
기하는 행위일지라도 나는 지금 당슨의 낙태 의지를 인정하고 있습니
다.
말을 마친 잭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이제 무슨 얘기를 더 드리면 흡족하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서요? 됐소. 그만 하시오. 아. 내가 한 마
디만 더 하리다. 이보시오. 잭. 세상에 이떻게 부당한 일이 어디 있소!
낙태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도 갖고 있지 않던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
게 나에게 이런 원치 않은 임신 상태를 강요할 수 있는 거요?
[난 지난 여러 해 동안 원치 않은 임신이라는 짐을 여성들로부터 덜
어 주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번 경우를 원치 않은 임
신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당신의 짐도 역시 덜어
드려야죠. 날 믿으십시오. 애브너. 그렇게 하겠습니다.
티투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결국 티투스가 승리한 것이다. 그들 둘 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잭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함니다.
그는 램프를 원래 위치대로 돌려놓고 나가려다가 탁자 위에 카사
블랑카}라고 씌여진 테이프를 보았다. 잭은 테이프을 집어 들며 나직
이 혼자 뇌까렸다.
[이게 바로 그 테이프일까.......
[무슨 테이프......?
잭은 테이프를 뒤집어 보고 난 뒤 티투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레이챌과 그의 동료들은 이번 일에 필사적이었습니다. 마치 선천
적인 낙태 반대 주의자들처럼 처신들을 했어요.
그는 테이프를 내려놓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매클라우드?
그가 막 문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티투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잭은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미안하오.
잭은 그 말이 아기 문제에 관해서가 아닌 다른 문제들, 이를테면 그
들간의 거듭된 반목, 빅토리아의 죽음, 잭의 하소연 등에 관한 사과이
기를 원했다. 그러나 결국 티투스는 아기의 중절에 관한 유감을 표시
한 것에 불과했다.
잭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티투스는 재생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스크린이 떨리고 독일 국적의 비행기에서 나치스 장교가 내리더니
클라우드 레인즈와 함께 활주로를 따라 걸었다.
[나는 이미 이 카페와 릭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소.
장교가 말했다.
다음 순간,갑자기 스크린이 하땋게 지워지더니 인공 위성에서 찍은
지구의 어느 부분처럼 보이는 그림이 나타났다. 그는 스크린 밑부분에
나타난 둥그스름한 형체를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공일까?'
아니었다.
' ......그떻다면...... 무엇일까?머리......?'
그의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그는 소노그
램(초음파 진단 기록)을 보고 있는 것었다. 아기 ! 희미해 보이던 형
체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손.발.몸통.랫줄''--. /
그 그림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았.
그것은 그냥 아기가 아니었다. 뱃속의 태아였다.
그는 눈을 감고 모니터를 끄기 위해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버튼 위에 올려놓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 계속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화면 속의 태아는 평화롭게 잠이 든 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바로 저것이 내 뱃속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몸서리가 쳐
졌고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공포나 토해 버리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었다.
캅자기 소노그램 안의 아기가 마치 퐁선 안의 개구리처럼 자궁벽을
발로 말면서 움직였다. 티투스는 리모콘을 내려놓고 비디오 테이프가
계속 돌아가=1 내버려두었다.
잠시 후에.삐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서 태아의 모습은 사
라지고 샘이 치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시드니 그린스트리트가 하얀 옷
에 모자를 쓴 차림으로 바에 서서 험프리 보가트차 함께 대화를 나누
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당신이 샘의 대가로 원하는 게 둬요?
그건스트리트가 물었다
[나는사람을 사거나 팔지 않소.
보가트가 대답했다.
._
티투스는 영화를 보며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썼다.
시드니 그린스트리트의 극적인 도주 장면은 언제나 그를 무아지경
에 빠지게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감정이, 아니 이
성마저도 자꾸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텔데비전을 끄고 눈을 감았다.
흔란스럽고 피곤했다. 그는 이 며칠 동안 닫아 두었던 빗장을 열 수 밖
에 없었다. 풀려 난 그의 기억이 그 옛날 크리스마스 밤으로 줄달음쳐
갔다.
.
.
[어서 ! 어서 그걸 죽이라니까!
어린 소년이 망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
다.
길가에 세워 둔 아버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온통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여린
심장으로는 도저히 참아 내기 힘든 번민에 휩싸여 있었다. 벌리고 선
다리 사이에는 예쁜 줄무늬의 고양이 한 마리가 겁에 질린 듯 크게 뜬
두 눈을 묘하게 빛내면서 쓰러져 있었다
그 짐승의 입에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할 수 없어_.
소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해야만 해!
아버지가 다시 호통을 쳤다
[고통스러워하는 저 고양이를 봐!
소년은 고양이에게서 눈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못하겠어요.아빠가 하세요
[누가 죽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사태를 제대로 파악해서 올
바른 결정을 내렸을 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야.
작은 불빛이 두 점, 멀리 도로가 꺾어지는 지점에 나타났다. 소년은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울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을 기다리
고 있었다, 두 개의 불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파. 그르렁대는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어서. 더 이상 고양이를 고통스럽게 하지 마.
[못하겠어요.아빠!
[만일 네가 지금 하지 않으면, 저 트럭이 고양이를 치게 될 거야!
소년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요.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바보 닫은 소리하지 마! 어서 고양이의
고통을 덜어 주고 길에서
치워 내 !
아버지가 소리쳤다
육중한 트럭 바퀴가 굴러 오고 있었다
[난 못해요!
소년은 애걸하듯 아써지를 쳐다보았다.
[아빠가 하시면 되잖아요?
[어서 해 ! 지금 넌 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구!
소년은 망치를 든 채,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트럭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고양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빠-앙,-앙
트럭의 경적이 울렸다.
[애브너 !
아버지가 소리쳤다.
빠-앙
급제동을 거는 소리.
[애브너 !
소년은 순간 망치를 든 손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보았다.
퍽 -
고양이의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애브너가 바닥에 무너
지듯 주저앉으며 고양이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아버지가 팔을 뻗어 그
의 몸을 길밖으로 밀쳐냈다. 간발의 차이였다. 트럭의 바퀴가 애브너
의 작은 몸뚱이를 스칠 듯 가까이에서 지나갔다
경적이 울려대고 고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애브너는 고양이를
품에 꼭 안은 채로 길 옆 도랑에 엎드려 있었다. 멈출 듯하던 트럭이
다시 속력을 올리며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허겁지겁 둑 아래로 내려
왔다. 아버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애브너는 앉은 걸음으로 뒤로 물러
나면서 울부짖었다.
[아빠 미워요.
고양이의 시체를 여전히 껴안은 채 애브너는 벌떡 일어나 도랑 옆으
로 펼쳐진 옥수수밭을 향해 뒷걸음쳤다.
[난 아빠를 증오해요!
[애브너.......
소년은 손가락으로 아버지를 가리키며 악을 써댔다.
[난 아빠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어요....... 옛날에 아빠가 나한테 무
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다 알고 있다구요.
소년은 악을 쓰며 울어댔다.


레이챌은 펜을 들고, 출근부에 서명했다
[오늘도 일찍 나오셨군요?박시섬.
경비원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녀는 시계를 봤다.오전 6시 5분이었다
[박사님이나 대법원장님이나 오늘은 중요한 일이
오늘 아침 병원이 완전히 북새통입니다.
있으신가 보죠?
지나가는 말투로 경비원이 말했다.
순간.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대법원장요?
[예 대법원장님 말입죠.
[대법원장이 어떻게 했길래요?
[조금 전에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대법원장님을 모시고는 다시 우르
르 몰려 나가던데요?
[애브너 티투스가 병원을 떠났단 말이에요?
[예. 방금 전에요.
[어디로 가던가요?
[허 -,그걸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하지만 대려원
장님은 몹시 편찮아 보이던댑쇼?
그녀는 경비실의 전화를 집어 들고 버튼을 급히 눌러댔다. 잠시 후,
자동응답기의 신호음이 들려 왔다.
[잭, 나 레이챌이에요. 즉시 전화 부탁해요. 비둘기가 새장을 떠났
어요.
그녀는 전화기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사무실을 향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대법원의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횔 체어를 탄 티투스의 거대한 몸집
이 나타났다, 찌푸린 얼굴 위로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데이지는
이미 여덟 명의 대법관들이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 쪽으로 횔 체어를
밀고 가서는 티투스에게 봉투를 하나 건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육체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나의 상태에 대해 표결할 예정이었다는 걸 알고 있소.
티투스의 어조는 신랄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이클 켈리 대법관에 대한 분
노를 잠시 접어 두고 그의 이념적 동지들의 얼굴을 차례로 쏘아보았
다. 잠시 후, 그는 그의 굳었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하기사 내가 너무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으니 여러분들만을 탓할
일도 못 되는군요.
그의 추종자인 에드먼드 리틀 판사가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젯밤 마이클과 함께 병원에 갔었습니다만 면회 금지라고
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티투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들이 병실에 들어와 자신의 기막힌
상황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 즉 태아 맥박 감지기를 발견하거나 생
각 없이 내뱉는 의료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게 됐더라면......
켈리 판사가 말을 받았다.
[대법원장님. 이제 집무하실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을 발표하
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하신 거라면 우리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
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틀 판사가 맞장구를 켰다. 티투스가 좌중을 둘러보자 모두가 고개
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명했다. 그는 봉투를 열고, '코스텔로'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히 적은 서류를 꺼냈다.
[유감스럽게도 난 지금 당장은 괜찮은 상태가 아닙니다. 다만 내 결
격 사유에 대한 투표를 굳이 실시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앉은 이상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한동안 대법관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느라고 했는데도 얘기가 술술 쭐려 나가질 않았
다.
[어젯밤. 나는 우연히 21주 된 태아의 소노그램을 보게 되었습니
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위의 물컵을 자기 앞으로 조용히 끌어당
겼다.
[여러분이 보신다면 흑시 어떻게 느끼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
는 그것을 보면서 평소 생명의 신성함에 대해 내 자신이 견지해 오던
신념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잔을 들어올려서 그 투명한 물을 쳐다보며 티투스는 말을 이어나갔
다.
[만일 내가 임신한 여자로서 그것을 보았다면 신 또는 헌법을 따지
기에 앞서 그런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일 것이라는 결
론도 내리게 되었습니다.
땀방울이 그의 이마에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물컵을 내려놓고 조
끼 주머니에서 조그만 종이 케이스를 꺼내 그 속에서 물수건을 뽑아
얼굴을 닦았다.
대법관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며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 무거운 분위기를 누그러뜨
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대법관들의 눈동자들은 냉흑하게 즉각적인
답변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의 문제점을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는 부드럽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속
이 울렁거렸다. 그는 대법관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소화불량인 것처럼
헛트림을 하며 말아 쥔 손을 입 요으로 가져다 대었다.
=근눠 _
문제점이갇 다름아닌.......
그는 또다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역질을 참느라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잔을 들어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리틀 대법관이 걱정스런 낯빛으로 물어 왔다.
[애브너.괜찮으시겠습니카?
티투스는 잔을 내려놓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병원 음식이란.......
그러고 나서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호흡을 조절했다. 이윽고
메스껍던 기운이 가라앉자 다시 입을 떼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내 자신은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결코
임신중절에 반대할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저 자신과 다른 결정을내릴
수도 있겠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법관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아직 그의 얘기의 진
의를 깨닫고 있지는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티투스는 그들의 시선을 그에게 옭아매 둔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
무리했다.
[나는 '코스텔로' 사건에 대한 그간의 나의 의사 표시를 모두 철회
하고 '로 대 웨이드' 판례에 찬성표를 던진 켈리 판사의 의견에 찬성하
겠습니다. 따라서 켈리 대법관측이 다수 의견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바
입니다.
대법관 리틀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낮은 소리로 뇌까렸
다.
[오! 하느님. 저 사람이 진정 제정신이란 말입니까?
[내 정신은 말짱하네.리를.
티투스가 필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잃을 것은 많고 얻은 것은 없었다. 순간 그는 엄청난 상실감에 휩싸
였다. 그러나 한편 그 속에는 한 점의 안도감도 깃들여 있었다. 마치
적에게 항복함으로써 자신의 군대를 구해 내야 하는 패장( ) 의 씁
쓸하지만 홀가분한 피로감 같은.......
갑자기 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얼
굴에 핏기가 가시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나는 어디 휴양 좀 다녀올까 합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떻게 얘기하고는 문을 향해 횔 체어를 돌려
세웠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좌중을 훌어보고는 조용히 입을 뻤다.
[내 주치의의 농장에서 몇 주 쉴 예정입니다.그러나 걱정들일랑 하
'
지 마세요. 꼭 돌아을 겁니다.
가장 연장자인 데다가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켈리 대
법관이 벌떡 일어서서는 문으로 다가와 양손으로 활짝 문을 열어제쳐
주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데이지는 층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티투스가 횔
체어를 굴리며 나오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수행원 한 사
람이 달려와서 칠 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빨간 카멧이 깔려 있는 복도
로 밀고 내려갔다. 횔 체어가 경비실에 다다랐을 즈음. 레이웰과 잭이
회의실 문 쪽을 향해 숨을 몰아섞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이 보였다. 세 사람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멈춰 선 채 한동안을 그
대로 있었다. 잭이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 하자 티투스는 손을 들어 그
를 제지시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연설을 하려거들랑 유전자들 앞에 가서 하시오. 잭.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입을 틀어막고는 수행원에게 전진하라는 수
신호를 보냈다. 횔 체어가 움직이자 티투스는 입을 막은 수건을 내리
고는 고개를 돌려서 어깨 너떠로 짤막하게 한 마디 던졌다.
[당신들에게 21일간의 기한을 주겠소,
레이챌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잭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횔 체어 뒤를
쫓아갔다. 잭은 멀어져 가는 횔 체어 바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헝클
어진 머럿속을 정리하느라 한참을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에 묻혀 복도의 귀퉁이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앰불
런스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잭은 접견실을 통과하면서 손을 들어 의례적인 인사를 던진 후 시무
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자마자 인터폰이 울렸다. 비서인 피어스였
다. '우편물은 천천히 검토하시고 전화는 차단하겠으며 10시로 약속된
모임은 참석 못한다는 통보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밖에서 무슨 일
이 있었던지에 관해서는 잭의 눈빛만 라도 그의 심경을 헤아려 줄 줄
아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비서였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일들을 정리해 보았다
'엘리 그레이브스...... '
'그놈이 살아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한 나는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놈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몰린 채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놈을 찾아내는 게 현재로선 가장 시급한 일이다,'
순간 경찰이 그레이브스를 잡는 데 협조해 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
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만일 경찰에 그레이브스의 폭파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오든 것을 말한다면 과연 경찰이 자신의 무판
함을 믿어 줄지도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신문에 노출시키지 않고 이 문제
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3주 동안만이라도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레이챌을 보호해 줄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애브너 티투스의 상태 즉
임신 사실을 영원히 묻어 둘 수는 없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만 하고 그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레이웰이 아이를 무사히 받아낼 때까지 앞으로 주 동안
은 레이챌에게서 들은 사건의 전모를 경찰에게 털어놓아선 안 되는 것
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한편 이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날에는 추악하고 치명적인 정치 스캔
들이 될 것이다. 이 난관을 슬기롭게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입을 다물
고 경찰로 하여금 스스로 그레이브스를 잡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는 터져 버릴 듯 복잡했다. 그는 책상 위의
얼룩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빅토리아를 보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저울질해 보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다이얼
을 돌렸다.
[플라스키 형사 부탁합니다. 잭 매클라우드 의원이라고 전해 주시
오.
[어서 이리로 손을 뻗으라구!
'누구지,저 목소리는?'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스프링 보드 위에 선 다이빙 선수처
럼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자형 골조 구조물 위에서 아슬아슬하
게 균형을 잡으며 서 있었다. 그곳에서 20미터 아래는 콘크리트 바딕
이었다. 사내의 머리 위로 1미터쯤 되는 높이에서는 안전모를 눌러쓴
체크 무늬 셔츠의 현장 노무자 한 명이 철골 위에 깔린 나무판자 위에
엎드려서 그 사내를 향해 팔을 한껏 내리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벌
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뒤로는
한 무리의 건설 노무자들이 하나닫이 눈을 부릅뜨고 안타까워하고 있
었다.
사내는 구조자의 손길을 피해 자형 골조 워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
섰다.
[이봐, 어서 앞으로 걸어나와서 내 손을 잡으라구.
사내는 안타깝게 외치는 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 오지 않은 듯 한가
로워 보였다. 사실 뉴욕에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푸른
하늘....... 노잘 태양....... 지상의 온갖 소음과 쓰레기 따위들은 들리
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새들과 인간의 영흔과 햇빛이 천국처럼 어우러
지고 있었다. 섹스차 폭력에 의해 얼룩지지도 않고 감옥과 범죄자들에
의해 시달리지도 않으며 인간들의 탐욕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사내가 현실과 환상 속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구조자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노무자가 밧줄을 가져 와서 구조자의 허리에 한쪽 끝을 묶고
다른 한쪽 끝은 돌출된 원형 쇠기등에 단단히 잡아맸다. 이제 빌딩숲
위로 성큼 올라선 태양은 사내의 눈을 따갑게 쏘아댔다.
사내는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섯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허
공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태양을 똑바로 쏘아
보았다. 햇빛에 눈이 멀어 버리기 직전 그는 보았다. 불꽃이 에워싸고
있는 태양의 표면을! 하얀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완벽한 원형이었
다.
......그것이 그를 오라고 했다.
'오너라.아들아.내 품으로.....
구조자는 서핑 보트를 타고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가는 사람처럼 배
밑에 널빤지를 댄 채 최대한으로 양손을 뻗어 사내를 잡아 보려고 허
우적거렸다. 사내는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잠시나마 망막에 맺혀 있던
태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구조자의 몸이 널빤
지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허공으로 밀려나왔다.
[손을 뻗어! 이 친구야.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으라구!
사내의 귓속으로 안타까운 외침이 파고 들어왔지만 그의 마음은 이
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의 영혼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구조자의
한껏 뻗은 손이 사내의 머리 가까이에까지 이르렀다.
사내의 영혼은 자유로운 비상을 계속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구조자는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는 노무자들에게 그의 몸을 허공으
로 조금만 더 내밀어 달라고 외쳐댔다
[조금만 더, 그래 이제 거의 다 됐어.
'저 목소리?'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바로 코효에 손가락을 활짝 편 구조자의 손
이 다가와 있었다.
'난 저 목소리를 알지.'
'저건 생명을 구하려는 신의 목소리야.'
'나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다.'
세례를 받으려는 침례교인처럼 사내는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그러
고 나서 머리를 천천히 뒤로 기울였다, 순간 구조자는 팔의 힘줄을 최
대한으로 늘어뜨려 사내의 얼굴을 잡아쳤다. 그러나 그는 허공만을 할
퀴고 말았다 사내는 자형 골조의 제일 끝 부분에 서 있었다. 다른 사
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발판이라도 있는 듯 그는 우아하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깨끗하게 순화된 공기 속으로.......
그레이브스는 양팔을 활짝 편 채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윌슨 형사시죠?
[그런데요?
[저는 짐 판이라고 합니다. 콜럼비아 지방법원에서 일하고 있죠. 아
기인형 살인사건 수사를 담당하고 있죠?
[네.
[오늘 아침 우리 보스가 당신에게 전해 주라는 메시지가....... 메시
지가....... 가만있자.그게 어디 있더라.음....... 어디로 갔지.......
윌슨은 전화선 저편에서 들려 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기
다리고 있었다.
[이게 정말 어디로 갔지? 아. 미치겠구만. 언제 하루 날 잡아서 청
소라도 좀 해야지.이것저것 마구 섞여서.......
[대체 둬에 대한 메시지입니까?
윌슨은 한편으로는 사내의 호들갑이 재미도 났고, 또 한편으로는 짜
증도 일었다.
[맥카시 판사님의 전갈인데요....... 빨리 좀 나와라....... 즉시 봉투
에 넣어 버렸기 때문에 확인을 안 해봐서...... 어디 있지......? 판시닙
이 이식 수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며 이름을
말씀하셨는데. ......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카?
[네? 아뇨. 오! 정말....... 어 ! 여기 있네. 찾았어요! 찾았어. 제가
읽을 게요. '윌슨 형사에게 레이챌 레드패스를 만나 보라고 전할 것
아기인형 살인사건과 관련된 이식 수술 건' 끝. 이상입니다.
[레드패스 박사라....... 전화 감사합니다.
윌슨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채드웍 씨?
[그렇소만?
[뉴욕 경찰청의 노먼 플라스키 형시십니다.
[아. 이제 목소리가 기억나는군요.무슨 일로 전화하셨나?
[당신 의뢰인에 관한 일입니다. 그썹와 몇 가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요.되도록 빨리.......
[되도록 빨리라면......?
[내일이라도.
채드웍은 손녀딸에게서 선물받은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지난 번에 말했던 대로 레드패스 박사는 지금 이곳에 없소. 3주 후
에나 돌아을 거요.
[그녀의 소재지만 알려 주시면 우리가 찾아가=습니다. 따뜻한 곳
이라면 좋겠네요.
[미안하오.알려 줄 수가 없어요.
[채드웍 씨. 협조해 주십시오. 자꾸 이렇게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면
영장을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곤란하게 만들다니?나는 오히려 당신이 쓸데없이 영장을 끊는 수
고를 덜어 주려고 하는 사람이라오. 설사 영장이 떨어진다고 해도, 아
니,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충고
할 거니카요.
[그녀가 결백하다면 그럴 필요까지 있을카요?
채드웍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전화선 저편의 플라스키는 끈질기
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플라스키 형사.딱 3주만 여유를 주시오.그 동안만 레이웰을 가만
히 네버려 둬 둔다면 그때 가서 내가 꼭 당신에게 도움을 드리리다.
즈십

[저기 있군.
[맞아.
[준비됐어?
[그럼. 기다리고 있다구.
......
[오귀여운 악마같으니 미끌미끌하기도 해라.






[됐어 ! 나왔다구 뭣줄을 잘라. 피브 !
간호사가 인큐베이터 속으로 아기를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타라는
그 옆에 붙어 서서 손에 쥔 산소 호스로 바둥거리는 아기의 몸뚱이에
산소를 뿌려 주고 있었다. 아기가 새로운 집으로 안전하게 옮겨지자
수술팀 중 한 사람이 붕산에 적신 거즈로 그 작은 몸뚱이를 깨끗이 닦
아 주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이 인큐베이터로 들어가는 산소 튜브를 다시 한번
점검한 후, 아기의 발등 혈관에 바늘을 꼽곤 포도당, 아미노산. 비타
민, 무기질 등을 공급하는 링거를 연결시켰다.
아기와 연결된 센서 모니터에는 빨간 선 혹은 명멸하는 녹색 막대로
아기의 심장박동과 호흡 및 체온 등이 나타나면서 살아 숨쉬는 생명이
실재해 있음을 조용히 보여 주고 있었다.
30센티미터 높이의 인큐베이터 상단에는 램프가 밝혀져 있었고 바
로 그 아래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랩이 차양처럼 설치되어 램프에서 발
산되는 열이 아기에게 직접 닿지 않도록 차단하고 있었다.
각종 튜브. 초음파 모니터, 산소 호흡기. 자동 온도조절 밸브, 기타
조절 장치 모니터 등등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기계 설비들이 설치된 그 조그만 방안에는 그러한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어린 목숨이 가날픈 숨을 내쉬며 누워 있었다.
수술대 위에서는 레이챌과 피브가 티투스의 복강에서 자궁 제거 수
술을 마무리지어 가고 있었다.
[아기의 몸무게가 얼마나 될까?
속이 비어 버린 자궁과 복강벽을 이어 주고 있던 두 개의 봉합을 잘
라 내며 피브가 물었다.
[한 500그범쯤?
레이챌이 대답했다.
[태반과 자궁 무게까지 합하면 5킬로그램 정도 나간다 그랬지?
[글쎄. 그거야. 어떤 식으로 무게를 측정하느냐에 달린 것 아니겠
어?
레이챌이 티투스의 뱃속에서 자궁을 들어냈다. 이제
합만 남기고 중요한 수술은 모두 끝마친 것이다.
절개 부위의 봉
레이챌은 좀 전의 자기 애기에 어리둥절해하는 피브를 위해 이렇=
덧붙였다.
[보통의 저울로 잰다면 그만큼 나갔겠지.하지만 애브너의 마음 =
저울로 잰다면 톤도 더 나갔을걸?
잭은 몰리를 방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그곳에 있는 작고 투명한 요람 위에는 아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작은 생명이 발가벗은 채, 양팔을 위로 들어올린 자세로 천장을 향해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오! 세상에...... ! 어쩌면.......
그녀는 감격한 듯 나직이 을조렸다.
그녀는 아기가 뱉까 봐 까치걸음으로 다가가서는 투명한 플라스틱
랩을 통해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요.잭.어쩜 이렇게 조그마할 수가.......
[무사히 살아 남을 가능성은 톱퍼센트 정도래.그러나 지금 이 친군
하루하루 잘 견뎌 주고 있어. 따라서 가능성도 높아 가고 있지.
[에미상은 날려 버렸을지 몰라도 제대로 일을 처리한 것 같아서 너
무 기뻐요.
몰리는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아직 이름을 짓지 않았죠?
[아니. 그는 벌써 이름을 가지고 있어. '레이'지.
[레이먼드요?
몰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니.그냥 데이.
두 사람은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부모처럼 아기를 살펴보며 한참을
더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아기방을 떠나 헛간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복도를 걸어나갔다.
[아까 만났을 때부터 물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어디서 그렇
게 멋지게 태웠어?
' =
[열흘 동안 바하마에 다녀완어요.
몇 발자국 앞서 걸으며 몰리가 덧붙였다.
[엘리엇 랜디와 함께요.
그는 이중문을 열고 젖소들을 지나 헛간 출입문 쪽으로 몰리를 인도
하며 물었다.
[심각한 사이야? 아니면 그냥 재미야?
[음 -.둘 다예요.낮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어요.밤에는 거의 밖
에 나가질 않았구요.
[그래?그거 안됐군. 그럼 햇불을 켜고 림보{1)
겠네.
댄스도 못 춰봤
[한 번도 못 췄어요.
그떻게 대답해 놓고 몰리는 헛간문을 나서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덧
붙였다.
[엘리엇이 나더러 결혼하재요.
잭은 그녀를 쫓아서 차고를 향해 걸어갔다 바깥 공기는 무척 향기
로웠다.간밤에 내린 비에 촉촉한 흙,새로 돋은 풀잎과 수선화.......
봄,봄이었다.
하늘에는 한 무리의 야생 오리가 자 대형을 이루고 북쪽으로 날아
.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멈춰 서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었다
[그래서,어떻게 할 생각이지?
[오늘 밤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그에게 대답해 줄 거예요.
자갈길을 몇 걸음 걷던 그녀가 다시 입을 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거예요.
[난 알아.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못 지키겠다고 해. 왜냐고

묻거든 당신의 청혼에 대해 답변을 의논하기 위해 어떤 절친한 친구와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라구.
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그녀가 세워 둔 차 앞까지 이르렀다.
[그에게 말하라구.그 친구는 아주 객관적인 사람인 데다 오로지 당
신에게 득이 되는 일만 생각하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웃지 않았디
[당신의 진심을 알고 있는 친구라고.......
[잭......?
[그리고 이제서야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친구라고 말해 줘.
잭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몰
리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그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가야겠어요.
잭은 운전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몰리가 차에 타려는
순간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기를 살씰 수 있는'기회를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티투스도
사실을 알게 되면 고마워할 거야.
몰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동작을 잭은 자기 좋을 대로 해
석하고서 키스를 했다. 그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은 깊고도 충
분히 그리고 그녀가 그를 밀쳐 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그러고 나서 그녀의 얼굴을 그의 가슴에 가져다 묻고는 머리 항너를
한껏 들이마셨다. 몰리는 저항하지 않았고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있
었다.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토해 내면서 몰리는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시동을 걸었다. 잭은 유리창을 통해 그녀를 들
여다보았다. 그녁는 기어를 넣는 대신 카폰을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
화를 했다.
그녀의 얼굴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던 탓에 잭은 그녀의 입술 모양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떤가 퉁화를 끝내고 창문을 내렸다.
[엘리엇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하루를 연기했어요.
그는 웃었다. 그러나 그어는 웃지 않았다.
[뭐가 잘못됐소?
기녁는 운전대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엘리엇 말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나는 언제나 자기 사람이
래요. 휴우! 남자들이란...... 휴, 당신이 했던 말파 단어 하나 틀리지
않아요.
몰리는 고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단. 당신보다는 더 근사한 발음이었어요.
잭은 침을 삼켰다. 얼굴엔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자.그럼 저녁 때 어디서 만날까요?
저음으로 툭 내뱉은 그녀의 질문이 그의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그는 차체에 몸을 기댔다
'랜디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신경을 써서 식당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신경을 써야 한다.어디가 좋을카.......'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 그의 머릿속 한 켠에서는 그가 몰리에게 푹
빠져 버리게 되었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줄 무늬 식탁보,
톱밥이 깔건 바닥, 주크박스에다 듣고 싶은 노래를 틀어 놓고는 느리
게 춤을 추며 테이블로 돌아오던 몰리,고흑적인 미소와 함께 '아이 러
브 유......'를 입모양으로 그리던 그 유혹의 입술이 머물던 곳,......
어린 시절 느꼈던 감동 그대로, 그날도 소리없는 그 세 단어는 그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다.
[보드카와 생굴 먹어 본 지 오래됐지.몰리?
레이웰은 서재의 벽난로 앞에 앉아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서둘러야 해.그들이 곧 들이닥칠 거라구,
그녀는 이글거리는 화염 속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던져 넣으며
내뱉었다.
'-3'
티투스 편이었다.
레이챌이 그 다음에 집어 든 테이프는 -20. 멜빈 쉬버스 20편이
었다. 그녀는 그것을 벽난로에 던져 넣는 대신 피브에게 건네주었다
피브는 그것을 커다란 종이 상자에 집어 넣었다. 그 속에는 이미 그 동
안 그들이 실험했던 모든 과정이 녹화된 테이프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테이프들에는 말고도 , , 등의 알파벳과 일련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할리 툰,.빌리 배니스터,:제노비아 데이비스
지금 레이웰과 피브는 티투스의 수술에 대한 증거만을 없애고 있는
중이엇다.
한편 또 다른 종이 상자에는 그 동안의 실험 과정 전반에 걸친 보고
서와 메모, 일지, 검사 자료 등등의 서류들이 이미 빼곡히 들어차 있었
다. 물론 티투스의 이식 수술에 대한 기록은 이미 벽난로 속에서 한 줌
의 재로 변해 있었다.
[델피나로부터는 무슨 소식 있었어?
피브가 서류 상자 속에 한 무더기의 사진을 집어 넣으며 물었다.
[아니. 그리고 효으로도 소식이 없을 거야. 지난 번 로마에서 만났
을 때 앞으로는 서로 연락하지 않기로 약속했어. 다 그녀의 안전을 위
해서지.
레이헬은 벽난로 속에서 타고 있는 것들을 들쑤시며 되물었다.
[태울 게 더 있어?
[음....... 티투스의 기록은 이제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테이
프도...... 없어.
피브는 대답을 마치고 두 개의 상자를 테이프로 봉하고 나서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레이헬은 간이 의자에 앉아 타고 있는 기록들
을 계속 들쑤셔 대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의 화학 성분이 타들어 가
며 파란 불꽃과 초록색 불꽃을 마구 뿜어대고 있었다.
그때, 문 앞에서 차의 시동이 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작아지는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의 얼굴은 사위어 가는 불꽃의 흔들림 속에서 밝게 멎나고 있었다, 레
이켈은 장작개비 한 개를 더 던져 넣고 벽난로의 안전문을 닫았다.
피브는 팔을 벌려 레이챌을 껴안았다.
초인종이 울렸다.
피브가 현관으로 나갔다 그 동안 레이챌은 코트를 입고 옷가방을
챙겼다
잠시 후, 찰리 채드웍이 거실로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플라스키 =
사도 들어섰다.
[모든 게 다 여기 있어요.
레이챌이 형사를 향해 말했다.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박사님.
형사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그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찰리에게 얘기
들으셨죠? 주 후에는 모든 걸 다 털어놓겠다는 거 말예요. 당신이 원
하는 대로 실험에 관한 모든 자묘를 제공하겠어요.
레이웰은 뒤로 돌아서서 피브의 볼에 키스를 하곤 마지막 포옹을 했
다. 레이챌의 포옹하는 손길이 피브의 스커트 옆 자락에서 잠시 떠물
렀다. 그러고 나서 형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수갑을 채울 건가요?
[아닙니다. 박시닙.
플라스키는 첫번째 상자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피브는 현관문을 닫고 불이 다 꺼졌는지를 확인하려고 서재로 돌아
왔다. 그녀가 벽난로 앞으로 몸을 수그리자 뭔가 둔탁한 게 스커트 옆
자락에서 느껴졌다. 레이챌의 손길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녀는
몸을 바로 펴고 헐거운 스커트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보았다
비디오 테이프였다.
티투스가 아이를 낳는 장면이 기록돼 있는 마이크로 소프트 테이프
였다.
'보관하고 있어.'
영부인은 더블 베드로 올라가 베개를 여러 개 포개곤 상체를 기대었
다.보잉 747의 엔진 소리가 새삼스럽게 크게 들려 왔다.오존층에 뚫
린 구멍이 더 넓어지리라.......
그는 살며시 신발을 벗고 창쪽을 바라보았다. 은빛 날개 끝에 커
다란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마치 미 공군 1호기가 천국의 궤도에 진
입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잠시 창 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손에 든 책을 펼쳤다. 앞
칸의 회의실과 연결된 문을 밀고 대통령이 침실로 들어섰다. 그는 카
만 타이를 풀어서 부드러운 가죽 의자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아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에서는 홀가분한 듯한 한
숨이 새어 나왔다.
[당신 만족스러운 표정이네요.뭐 좋은 일 있으세요?
[내가 마침내 쇼 같은 게임에서 스틱스 딕키를 이겼어.
[카드패를 여러 개씩 갖고 했어요?
[여보, 카드 게임 얘기를 하는 게 아냐.
영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을 쳐다보았다. 대통령은 꾼을 풀지 않은 ]
발을 털어 구두를 벗고는 아내 옆에 누워 양말 신은 발가락으로 그1
??? -===1 푸티저
의 발목을 슬슬 문질러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자는 나한테 빌붙어 먹고 살았지. 오늘밤 난
그자-를 깨끗이 털어 버렸어. 이제 나에게서 떨어지라고 말이야. 하기
사 그 동안 그는 충분히 나를 우려먹었지. 갖고 싶은 건 다 가져 갔
어.
[우습군요. 과연 그걸 그가 가졌을까요? 나는 줄곧 스틱스 딕키는
고작 누군가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영부인은 책장을 넘기면서 말했다.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
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가 가져 갔다는 것 말예요. 티투스의 대법원장 임명이죠?
대통령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고.
[그러면 당신이 게임을 이겼다는 애기는?
대통령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내의 명석한 머리와 예리한
판단력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가 결코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떠도는 소문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전임 대통령, 스톤의 '지빠귀'라는 암호로 불리는 도난당
한 서류를 입수했고 선서하에 그 사실을 부인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들이 남편을 협박해서 얻어낸 대가가 애
브너 티투스의 대법원장 임명이라는 것도.
만일 대통령이 그녀의 조언을 원했다면 영부인은 절대로 협박에 굴
복하지 말라고 층고했을 것이다. 한 번 굴복하고 나면 영원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일반적
인 협박의 경우라면 그녁의 생각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일
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대통령 정도의 수준에 있어서 정치란 마피아들의
협상과 비슷했다.
일단 대가가 지불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실은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
었다. 그도 노련한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가 미합중국 대통령직에 계
속 머무르길 원한다면 또 재임중에 뭔가 국가를 위해 훌륭한 업적을
이루길 원한다면 더 이상의 협박은 받아들억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
고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통령은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
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백악관이라는 곳은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
어서는 훌륭한 보금자리가 못 되었다. 대통령은 가끔씩 단독으로 아무
도움 없이 일을 처리해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는 계속 아내에
게는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여보, 난 당신이 쓸데없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당신에게 해로운 결
과가 빚어지는 걸 원치 않소.
[당신이 어련하시겠어요.
그녀는 짧게 내뱉고는 책으로 눈길을 주었다. 두어 쪽을 더 읽고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나저나 이번 코스텔로 사건에서 대법원장이 찬성표를 던진 것에
대한 스틱스의 반응은 어뻤어요?
[흔이 나갈 정도로 놀랐지,뭐.
[하기사 누군들 안 그랬겠어요?
[나! 난 사실 놀라지 않았다구.
그녀는 읽던 부분에 손가락을 끼운 채 책을 덮었다,
[어머, 이이 좀 봐?티투스가 그렇게 투표할 줄 꿈에도 몰라 놓고선
이제 와서 이러시네?당신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구요.
[당신 말이 맞아. 운이 좋다는 얘기 말이야. 하지만 놀라진 않았어.
정말이라구.
대통령은 엄지발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말을 이엇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대법원장이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안 돼지. 대법원과 관련해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법원장을 임
명하는 것뿐이야.능력 있고 인간적이며 창녀 따위는.......
대통령은 아차 싶어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영부인의 인상이
찌푸러져 있었다.
[음......, 그러니까 내 말은 말야. 여자들과의 추문이 없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거지.......
대통령은 진땀을 홀리며 자신의 실언을 무마했다. 영부인은 책을 내
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이리 오세요.
그녀는 남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끌어다 놓고는 부드럽게 쓰다
듬었다
[다음 주쯤 레이챌 레드패스 박사를 한 번 만나 볼까 해요.
[왜? 뭣 하러?
대통령은 눈을 감은 채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자유의 메달'수여식 이래로 사적으로 한번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
하고 있었어요. 같은 여자로서 그녀에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도 있구
요. 왜, 제가 그녀를 만나는 게 싫으세요?
[아냐. 전혀 괜찮다구. 그녀한테 물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는 한 난 꿔든지 해줄 수 있다구.
[난 당신을 사랑해요.......
대통령의 떠리를 싱다듬던 영부인의 손길이 멈췄다.
[존,당신은 제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아세요?
대통령은 눈을 뜨고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겠지?
[그럼요.
대롱령은 다시 눈을 감았디.
[난 당신이 왜 나를 사랑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영부인은 상체를 뒤로 기대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그래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애브너 티투스는 에드먼드 대법관과
닥뜨렸따.
[애브너 ! 다시 돌아오게 되셔서 정말 기뽑니다. 기분은 어떠세요?
맞 [좋아요.에드. 아주 가뿐해.
티투스는 신문을 쥐고 있던 에드먼드의 한 쪽 손을 흘껏 쳐다보고는
의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늦었어 그 동안 밀린 얘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구.
[오늘 점심이나 같이하시죠.
에드먼드는 디투스와 나란히 걸어가며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펴서
는 일면의 머릿기사를 가리켰다.
자유의 메달 서훈자.'아기인형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되다'
[이런 미친 의사가 당신의 신장 이식 수술을 집도했다니....... 끔찍
하지 않으십니까?
티투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한테 무슨 수술이든지 할 수 있었
겠지.
[휴! 난 그녀가 그 남자들에게 한 짓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이떻게 건강을 되찾으신 것 정말 축하드럽니다.
[내가 건강해 보이나?
[그럼요. 살도 좀 빠지신 것 같은데요.
티투스는 그의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에드먼드와 거리가 멀어지자 그는 나직이 뇌카렸다
[아무렴.단 하루 만에 5킬로그램이 빠졌지.
므즈
[아프리카 평원에서는 달 밝은 밤이면 원숭이들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달을 잡아 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
다.
재판 마지막 날이었다.
레이챌은 배심원석 앞에 서서 자신의 최후 변론을 그렇게 시작했다
숱이 많은 붉은 머리는 스프레이나 무스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마치 그녀의 심경처럼 차분히 손질돼 있었다.
그녀는 실크 블라우스 위에 단순한 검정 재킷을 받쳐입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더할 나위 없는 적합한 옷차림이었다. 수수하면서도
물리지 않은 복장. 옷으로 위장하려는 심경의 변화가 전혀 없는 그런
차림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그녀의 외모에서 풍겨 나오고 있는 것은
그 어떠한 가식도 없는 순수한 여성 본연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남성과 억성 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기 위
해 먼 길을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우리가 어디쯤
와 있나를 스스로 생각해 볼 때 현재. 우리의 모습은 아까 말한 나뭇가
지 위에 올라앉은 원숭이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
다.
레이챌은 난간을 잡았다.
[배심원 여러분, 저는 남성과 여성의 평둠한 삶을 위해 이 모든 일
을 행했습니다.
재판은 파격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물론. 찰리 채드웍의 조언을 받
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직접 자신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그녀는 우선
검찰측과 협의를 했었다 시일을 끌지 않고 즉각적으로 재판을 열어
준다면 비디오 테이프와 수술 기록 등 모든 물증을 검찰측에 넘겨줄
뿐만 아니라 번거롭고 지리한 수사 과정을 생략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진술을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검찰측에서는 즉각적으로 그녀
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한편 만일을 대비해 가능한 한 많은 남성을 배
심원에 선임하려고 계략을 팠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심 배심원 선임에 대해 틀림없이 레이챌이 반발
하고 나서리라 생각했엇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레이켈은 배심원석
이 전원 남성으로 채워지도록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 나가자 오히려 검찰측에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고
인석에 선 레이웰은 검찰측의 신문에 모든 것을 순순히 답변했다.
쉬버스. 할리 문. 배니스터를 납치한 방법과 수술 과정 그리고 그들
이 죽게 된 경위 등둥을 그노는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진술했다.
그녀의 진술이 너무도 적나라했기 때문에, 검사는 신문을 끝마치면
서 배심원단에게 진실된 그녁의 진술에 의혹을 갖지 말아 달라는 해괴
한 당부까지 하기도 했다. 이제 검찰측의 신문이 모두 끝나고 레이챌
의 최후 변론 차례가 온 것이었다.
그녀는 검찰측에서 피해 버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는 참이었다
그것은 또한 배심원단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얘기일 것이다.
왜? 왜. 이 모든 범죄를 그녀의 손으로 저질렀는가? 이 세상 누구에
게도 그녀의 변호사에게조차도 아직까지 얘기해 본 적이 없는 그 답
변을.......
[물론 저는 억러분들이 제판의 서두에서부터 궁금해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왜, 이런 실험을 하게 됐느냐?
바로 그것이죠?
그녀는 낡은 나무 난간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순간 그녀의 머
릿속에는 아스라한 옛기억이 떠올랐다 여섯 살바기 소녀...... 부드럽
고 시원한 엄마의 겨드랑이. 그곳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안락한 곳이
었다. 배심원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모아지면서 호기심으로 반짝거
리고 있었다
[왜냐고요?
레이챌은 마치 그들이 자신에게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인 양 그들
의 마음 속을 헤아려 가며 배심원석을 향해 우아하게 발걸음을 옮겼
다. 배심원석 앞에 이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양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꼿꼿이 섰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자로서도, 정신 이상자로서
도 범죄자로서도 아닌 단지 여러분들처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레이챌은 발걸음을 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배심원단이 모두 남자분으로 선임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이번 재판의 성격상 오로지 남성들에 의해서만 대답이 주
어질 수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이챌은 배심원석에 나란히 앉은 여러 남성들의 눈빛을 유심히 바
라본 후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질문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의지에 반하뎌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어쩌시겠습니까? 당신이 원하지 않은 누군가의 아기를 갖게 되었다
면? 당신의 자유 의지는 아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 데도 주위의 압력에
의해 임신을 강요당한다면?바로 당신 자신의 문제인데도 당신에게 전
혀 결정권이 없다면? 당신의 육체가 누군가 다른 존재, 이를테면 남
편, 아버지. 강간범, 태아, 국가, 법정, 교회 등등의 소유이고 결코 당
신은 당신의 몸을 당신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상태라면 여러분은 어
쩌시겠습니까?
레이챌은 배심원석의 난간을 움켜쥐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여러분 모두가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제가 드
린 질문에 대해 해답을 고심하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미 남
자인 여러분들이 자신의 몸을 속박하려드는 외부의 압력에 어떻게 대
처해 왔는지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럽
전쟁에서부터 남북전쟁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그 모든 투쟁이 따지고
보면 여러분의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외부의 압력에 대한 항거가
아니었겠습니까?
레이챌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많은 남성 빼심원들의 눈빛을 의식
하며 좀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자유, 즉 신체의 자유가 위협을 받게 됐을 때, 여러
분이 어떤 행동으로 맞설지는 너무도 뻔하지 않습니카? 자, 여기서 여
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려 보기로 하죠.
레이켈은 난간을 잡은 손을 풀며 몸을 약간 비켜 섰다
[남자들은 살인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저지른다고 말하는 사람
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남자의 속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겁니다.
남자란 모두 정복욕에 사로잡힌 약탈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남자에 대해 한참 모르고 있는 사람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자신을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남자들이 소수를 희생시킴으로써 다수를 구해 내고 아
울러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씩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이 역설적
이지만 진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켜 다른 사람들을 구해 내려고 시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
다. 어쨌든 남자들이 그떻게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종
종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용맹이나 명예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서 찬양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어떻습니카?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한다면? 그건 바로 별난 행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연스럽
지 못하고 때로는 공포스러운 행동이 되고 마는 거죠.
레이챌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겐 이모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남자들이 가발을 썼는지
안 썼는지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것을 늘 자랑하고 계셨죠. 머리카락의
색깔이라든가 가리마를 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러나 그분은 가발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하지는 못하셨습
니다.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을 보는 시각이 바로 그런 거죠. 그저 존재
할 뿐, 여자들의 삶의 질이나 가치관 따위는 남자들의 관심 밖의 사항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눈을 뜨고 여자들의 실체를 직
시해 주십시오. 우리는 여러분, 남성들과 볕개의 종족이 아닙니다. 바
로 여러분들과 같은 인간인 것입니다. 저희 여성들도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피치 못하게 모종의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저를 심찬대 위에
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
그녀는 배심원들의 얼굴을 쭉 흩어보고 나서 증인석으로 되돌아가
연단 앞에 섰다.
[물론 정의의 실현도 법의 테두리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
회라는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제
동료들의 행위에 의해서 여성들의 삶의 질이 향상될지라도 또 우리가
희생시킨 세 사람의 목숨에 의해서 많은 생명들이 구원받게 될지라도,
우리들이 저지른 짓이 법에 의해서 묵인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그 실
험을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이 전시 상황이
었기 때문에 인명을 살상해도 사면받을 수 있는 전쟁터의 군인이 아니
며, 또한 우리의 실험이 사막에서의 핵 실험처럼 용인될 수 있는 성질
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가 저지른 일
에 대해 필요하다면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연단에서 다시 걸어나왔다.
[이제 유, 무죄를 논하기에 앞서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를 바라
는 바입니다. 이 재판에서 실로 중요한 한 가지 질문, 바로 만일에 여
러분들이 여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켈은 배심원석을 향해 걸어가며 계속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배심원 여러분들이 저에게 답변을 바라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재판 첫날부터 저는 여러
분의 얼굴에 떠오르는 궁금증을 보아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왜, 이 모든 실험을? 제가 직접 해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떻
지 않으십니까?
레이켈은 낡은 난간을 손 끝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아스라한 옛
날의 추억이 다시 가슴 속에 밀려왔다. 여섯 살바기 소녀, 엄마의 겨드
랑이 아래, 보드랍고 시원했던 그 부분을 어루만지던 어린 소녀......
레이챌이 회상에 잠겨 있는
짧은 동안에도
배심원들의
눈길은 = 녀
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왜?왜, 제가 그
런 일을 했을까요..-..?
[저는 미친 사내들에게 강간을 당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월경중에
신성한 예배당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욕을 얻어먹거나 저주받지도 않
았습니다. 죽은 남편을 태우는 장작더미 속에 산 채로 던져진 적도 없
었고, 고추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양쯔 강 흙탕물 속에 수장된 적
도 없습니다. 율법의 상자를 만졌다고 돌에 맞아 죽지도 않았고, 남편
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잠자궈를 같이했다고 해서 목 졸려 죽지도 않았
습니다. 포주에게 죽도록 얻어맞지도 않았고 좁은 골방에 갇힌 채 몸
을 팔아야 하지도 않았습니다, 광분한 남편의 채쩍질 아래 온몸이 툭
툭 불거져 터져 버리지도, 전기톱에 의해 손발이 잘려 나가지도, 면도
날로 유두가 도려내지지도 않았습니다. 또 남편에게서 옮은 매독균 때
문에 눈이 멀지도 않았습니다. 친척 남자들에게 강제로 추행당해 본
적도 없습니다.
마녀 재판을 받아 보지도. 그래서 화형당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자
위 행위를 했다고 죽도록 얻어맞거나 수녀원에 감금되어진 적도 없습
니다. 처녀막이 열려서 물에 잠기는지 알아보려고 연못에 내던져진 적
도 없었고, 혼전 관계를 가졌다고 칼날 아래 목이 달아난 적도 없습니
다. 첩을 만들지 않으려고 딸아이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고. 매춘을 위
빽'
해 각성제를 복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철로 된 정조대를 차고 있느라 온 허벅지에 허물이 벗겨진 적도 없
고. 간통한 혐의를 받고 고문 끝에 살해당한 적도 없습니다. 미혼오가
된 적도 없었고. 아이의 양육권을 생부()에게 양도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아 본 적도 없습니다
창문 없는 감방 벽에 생리혈로 마지막 유언을 써갈기고 숨져 간 적
도 없었고, 콩 밭에 쭈그리고 앉아 아기를 낳아야 하지도 않았습니다.
처녀를 죽일 수 없다는 코란의 율법 때문에 강간당한 후 처형되지도
않았고. 족장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고 혀가 잘린 적도 없습니다.
80 먹은 남자에게 팔려 간 아흡 살바기 네팔 소녀도 아니었고 평생
수절을 하며 살아야 하는 합르의 과부도 아니었습니다. 지참금 때문에
재혼을 노린 남편이 불태워 죽인 인도의 여인도. 일본 관광객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태국의 창녀도, 신혼 초야에 피를 홀리지 않았다고 교
살된 아랍의 처녀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내지 못드는 세금을 내 몸으로 지불해야 하지도 않았고,
할아버지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허벅다리 살을 도려내지도 않았
습니다. 주인의 가죽신을 부드럽게 하려고 학루 종일 이빨로 씹어 내
야 하지도 않았고. 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남편에게 끝없이 입으로 봉
사해야 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과 대학의 입학을 거부당해 본 적도 없
었고 학교내 서클 가입을 제지당해 본 적도 없습니다. 공직에 오를 권
리를 박탈당해 본 적도 없습니다.
레이챌은 장황한 자신의 변론을 묵묵히 들어 주고 있는 재판정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의 경의를 표하면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
어나갔다.
[제가 이번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까닭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유독 어느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까
지 열거한 이유들, 그 모두가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
입니다. 제가 직접 당해 본 일들은 아니었습니다만 언젠가 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제가 말씀드린 모든 핍
박과 형극의 원인이 된 한 가지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그 죄목은 바로...... 여자,저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다는 원죄
입니다. ......제 나이 여섯 살 되던 해,무허가 낙태 시술업소의 더러운
탁자 위에서 엄마가 죽어 가는 것을 제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바로 그때가 제 인생의 행로를 바꾸어 버린 순간이었습니
다.


[배심원 여러분!평결이 났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그떻습니다. 재판장님.
수석 배심원이 일어섰다.
그는 콧등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고쳐 쓰고는 종이 한 장을
펼쳐 들었다.
[멜빈 쉬버스의 '일급 살인'에
대한 평결이 어떻게 났습니까?
관한 검찰측의 첫번째 기소 사항에
[무죄입니다.
방청석에서 박수 갈채가 일었다.
판사가 정숙을 요구하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할리 문의 '일급 살인'에 관한 검찰측의 두 번째 기소 사항......?
[무죄.......
수석 배심원의 답변 끝떠리는 다시 박수 갈채가 묻어 나왔다. 판시
의 의사봉이 다시 한 번 정숙을 요구했다.
[빌리 배니스터의 '일급 살인'에 관한..,...?
[무죄입니다.
-'범죄 집단 결성에 관한 혐의'_ '무죄.=
-'납치 및 범죄 교사()에 관한 혐의'_ 무죄.,
-'무기(메스)를 사용한 폭력 행위에 관한 혐의_ ,무죄.
-'시체 손괴 및 유기에 관한 혐의'_ '무죄.
마지막 세 항목을 남겨 놓을 때까지 수석 배심원은 검찰측의 모든
기소 조항을 하나하나 깨뜨려 나갔다.
..-..다음, 검찰측의 스물여섯 번째 기소 조항, 빌리 배니스터의 미
필적 고의(쯔 )에 의한 살인 혐의에 대한 평결은 어떻게 나셨
습니까?
[무죄입니다.
배니스터의 몸에 이미 암 세포가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배심원단으로 하여금 그러한 평결에 이르게 한 것 같았다.
[다음 스물일곱 번째 기소 조항, 미필적 고의에 의한 멜빈 쉬버스의
살인 혐의에 대한 평결은......?
[유죄입니다.
방청석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다음 스물여덟 번째 기소 조항,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할리 문의 살
인 혐의,.....?
[유죄입니다.
재판정 안은 물울 끼얹은 듯 조용했다.
확실히 일급 살인보다는 가벼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레이챌 레드패
스 박사는 적어도 7년 내지 10년은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레이챌은 배심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위로 끄덕이고 있었다.

'
보도진과 방청객들이 뒷문으로 빠져 나간 재판정은 을씨년스러웠다
잭은 복도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괜찮아요?
그는 교도관들에 의해 수갑이 채워올고 있는 레이챌을 바라보며 물
었다,
[그럼요.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그 동안 부족했던 이론 공부를 해야
겠어요.여성들을 위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죠.......
그녀는 수갑을 찬 손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벗겨 냈다,
가는 금줄에는 크리스털 장식이 되어 있는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목걸이를 잭의 손바닥에 쥐어 주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잭!
교도관이 그녀의 팥을 부여잡고 재판정의 앞문으로 그녀를 끌고 나
갔다
그렇게 레이웰은 떠나갔다.

므 프
레인코트의 깃을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잭은 센트럴 파크의 산책로
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신문에 났던 엘리 그레이브스의 죽음
이 떠올랐다. 숙적으로만 생각되던 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면
한 귀퉁이를 차지한 그의 자리는 괜지 왜소하게 보였고 오랜 과거의
철 지난 벽보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적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나뭇잎이 빗방울에 점점 푸르러져 가고 있었다. 안대는 벗어 버린
지 오래였고 왼쪽 다리의 절룩거림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주말이라 의회는 휴원 상태였지만 할 일은 많았다
우선 매일 아침마다 그랬듯이 의회 병원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만나
보고, 그 다음엔 선거 운동원들과 아침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그는 길 건너편 보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혹여 정치 집회일까 싶어, 가던 길을 벗어나
철망으로 된 공원 담장으로 다가갔다. 한 50명쯤 될까?피켓을 든 사
람들이 가랑비를 맞으며 낙태 시술 병원 앞애서 원을 그리며 돌고 있
었다. 담장 기둥을 붙잡고 시위 군중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평범하
고 단순해 보였다.
시위대 무리에서 여자 하나
시들해진 그가 막상 돌아서려고 할 때,
가 피켓을 든 채 빠져 나왔다. 그녀는 행길을 건너서 곧바로 잭이 서
있는 담장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인도 위에 놓인 돌 벤치 위에 앉았다
여인은 '살인을 중지하라!'라고 쓴 피켓을 옆자리에 세워 두곤 품에
끼고 있던 성경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피곤하십니까?
잭이 철망 사이로 넌지시 물었다.
그제서야 잭의 존재를 알아차린 여인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조금....... 선생님도 동참하시지 그러세요?
[그럴 순 없을 것 같군요...... 난 사실 반대편이거든요.
그를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에 돌연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저,혹시...... 매클라우드 의원님 아니세요?
[그렇습니다만.......
여인은 일어서서 담장 앞으로 다가왔다. 성경책을 가슴에 꼭 껴안은
상태였다.
......그때, 병원 폭발로 심하게 다치셨었죠
[그랬었죠.
[정말 끔찍한 일이었어요.
여인은 잭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이젠.다 나으신 건가요?
[네.보시다시피.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어색하게 살펴보았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게 되면 사실을 고백하려고 했었어요.
[무슨......?
[당신의 눈을 찌른 그 남자를 알고 있거든요.
[그래요?그가 누구요?
......친구예요.
[그는 어떻게 됐소?
[두개골에 금이 가고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졌었어요. 하지만 지금
은 괜참아요.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그 사람을 고소할 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소. 댁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를 고소해야 할까
요?
[오! 하느님. 이놈의 입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사람은 아이가 다섯이나 있어요. 게다가 다친 이후로는 계속 실직 상
태예요.그리고.......
잭이 손을 들어 여자의 말허리를 끊었다.
[진정하세요, 아주머니. 난 아무도 고소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안색이 진정되는 것을 보며 잭이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굽니까?
[사실......, 제 남편이에요.
순간적으로나마 두 사람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여자가 품에 끼고 있던 성경책이 불현듯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다.
잠들기 전이면 아버지는 안락의자에 앉아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삼손과 데릴라,다윗과 골리앗,말구유 속의 아이.......
[저....... 성경책을 거꾸로 들고 있습니다.아주머니.
잭은 아버지의 성경책에서 그녀의 것으로 옮겨 왔다. '그렇구나' 하
는 표정이 여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여인은 성경책을 바로 쥐고
는 그를 향해 뭔가를 말하려다가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
다.
[곧 비가 그치겠죠?
그때 길 건너편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보고 외겼
다.
[이봐! 엘리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어서 이리 오라구!
그녀는 돌 벤치로 걸어가 믹켓을 주워 들었다.
행길을 건너가면서 먹인은 잭을 한 번 돌아다보고는 다시 시위 군중
의 무리 속으로 파묻혔다.
잭은 다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어린이 놀이터가 보였다. 시소 앞
에 이르자 잭은 두 손으로 시소의 무게를 조절하여 수평 상태를 유지
시켰다.
아들은 숀주째 버텨 주고 있었다.이제 살아날 확률이 아주 높아진
것이다 아기는 현재, 행운의 주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비가 멈췄다.잭 역시 멈춰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주 전 레이챌의 농장에서 맡았던 비에
젖은 풀향기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몰리....... 몰리가 보고 싶었다.
이번 토요일 밤에는 몰리와 뭘 하며 보낼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몰리에게 향하는 마음은 ]동 어썰 수가 었었다.
잭은 주머니를 뒤져서 레이웰에게 받은 크리스털 반지를 꺼냈다. 행
운을 기원하며 그는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어 보았다 부드럽게 들어
갔다.토르톨라에서 끼어 보았던 시거 밴드처럼.......
레이웰은 사물함에서 깨끗한 편지 봉투 한 장을 커냈다. 교도관이
좁은 복도로 통하는 문을 나서며 짧게 외쳤다.
분 후 소등!
방안에 있던 수감자들은 하던 일을 서둘러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이
챌은 봉투 속에 가로로 한 번 접힌 편지를 집어 넣었다. 수신인은 피브
창이었다. 창 박사 역시 다른 공범자들처럼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어 다른 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레이챌은 편지 봉투를 다시 사물함 위에 올려놓으며 선반 위에 놓여
있던 신문에 눈길을 주었다.
영역판 이탈리아 신문이었다.
마이크를 들이 댄 기자들에게 둘러 싸인 채 인터뷰를 하고 있는 여
자의 사진. 그 아래 깨알같이 적힌 기사....... 레이웰은 그 사진 속의
여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칸티니 대주교 응급 수슬-집도익,델피나 리날디'
칸티니 대주교는 2년 전에 받았던 비장 이식 수술로 인해 발병
한 듯한 복막염을 치료하기 위해 응급 수술을 받았다. 그의 수술
을 집도한 델피나 리날디 박사는 수술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음
과 같이 밝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다만 면회 금지 상태로 모처에서 몇 주
간 경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몇 달 후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다.'
비록 선명치 않은 인쇄 상태였지만 사진 속의 델피나가 '성공했어
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레이헬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가볍게 톡톡 때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기지개를 한 번 쭉 펴며 일어섰다, 이곳에 들어
온 몇 주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단지 단 한 가지의 문제만을 제외고하고는.......
'내일 찾아을 방문객들을....... 그들을 만난다면......? 동경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온 두 사람, 그녀가 로마에서 만났던 그 두
명의 일본 먹의사들.......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 연구 성과에 대
한 정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웰은 불을 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마음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 가리워
진 그녀의 마음 속을.
<끝}
이 작품은 메디컬 스릴러이다.
작가는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한 여의사의 도전이라는 표면
적인 구도를 설정하고. 나아가 역사적으로 성적 침해를 당해 왔던 많
은 여성들의 굴곡진 삶을 조명함으로써 스릴러라는 장치에 여성학적
인 견지를 부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대개의 경우 메디컬 스릴러의 소재는 '의학'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라든지 엽기적이고도
충격적인 장면이 소설의 주도적인 장치로 쓰였다. 즉 로빈 쿡의 소설
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스텐리 포틴저가 다루고 있고 그가 정
면 승부를 걸고자 하는 것은 의학적이기보다는 '인권' 문제에 가깝다.
그는 불합리와 부조리화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역사적인 견지에서 생
각했고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메디컬 스릴러'라는
분야를 따온 것이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울한 잿빚이다.
거대 도시 워싱턴 하늘의 스모그와 음울한 과거를 지닌 주인공 그리
고 그 주변의 인물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인믈들을 통해 우리 사
회가 안고 있는 성적()블평등성을 날카롭게 해부해 들어간 것이다.
3
닥터 레이챌, 그녀는 장기 이식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음울한 과거
의 기억을 지닌 미모의 여자 외과의사이다. 그런 그녀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는 반사회적인 음모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워싱턴 외곽에
서는 한 남자의 변사체에서 '아기인형'이 튀어나오는 살인사건이 발생
한다. 수사는 미궁 속을 헤매고, 미 대법원의 청문회장에는 낙태권을
놓고 '로 대 웨이드' 관례를 지키려는 쪽과 철폐시키려는 쪽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암울했던 유년의 기억을 지닌 미 하원의원 잭 매
클라우드, 유능한 여기자 몰리 맥코믹.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인권 변
호사 빅토리아....... 이들이 각기 보여 주는 자신들의 삶과 정열적인
사랑은 이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며 나아가 신념
을 일구고 지키는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과 함께 곪아 잇는 우리 시대의 악습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할 것이다.
끝으로 악필 원고를 타이핑하느라 무진 애를 써준 백수미 양에게 고
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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