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의원 스틱스 딕키의 응장한 조지타운 저택의 서재는 정치적 협
상을 나누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지금은 그 방안에
서 네 명의 사내가 포커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있었다. 신분
과 직업이 서로 다른 그들을 모여 앉아 있게 만든 것은 위싱턴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이었다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각자의 야망
을 이루려는 욕심이 계급의 구분을 흐트러뜨리는 곳, 그게 바로 워싱
턴을 다른 도시와 구분짓게 하는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축하합니다,애브너.
스틱스가 티투스에게 잔을 들어올렸다. 다른 두 사람, 엘리 그레이
브스와 게이로드 젠킨스도 건배를 했다. 티투스에 대해 품고 있는 엘
리 그레이브스의 개운치 않은 감정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걱정하고
있던 스틱스가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티투스의 대법원장 내정
을 빌미로 격식이 필요 없는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떻다. 기
실 티투스의 인준에 있어서 엘리 그레이브스가 의회 내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직 국회의 인준이 남아 있는걸요.꿔.
티투스가 손가락으로 칩을 쌓아 올리며 말했다
[상원에서야 뭐 별 문제 있겠소. 그러나 대통령이 일단 당신을 임명
해 주었을 땐 그분도 당신에게 바라는 게 있을 거요.
스틱스가 말했다.
[의원님 생각으론 그게 뭐라 생각하오?낙태 문제말고 다른 것?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게요.
스틱스가 태연히 대답했다.
[아니, 낙태 문제말고 다른 것이라뇨? 저 양반이 그 자리에 내정된
데에 그 이유말고 다른 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레이브스가 끼여들었다.
스틱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달러 걸겠소.
게이로드가 판돈을 걸었다. 그워 눈꺼풀이 처져 있었다. 티투스는
스틱스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이유로 내가 내정된 거요?
[아직 말하기에는 때가 일러요_ 우선은 여권 단체들의 움직임에쏘
주의합시다.
스틱스가 자못 위압적으로 얘기했다.
그레이브스는 마뜩찮은 표정이 됐다. 어쨌거나 스틱스는 티투스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거, 요번에 죽은 여자 말이오.어떻게 된 일이오?
[제노비아 데이비스 말이오?
[그 사건으로 저쪽에서는 당신한테 물 먹이려 할지도 몰라요. 자
난 50센트 더 걸겠소.
스틱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각자의 카드를 살펴보았다. 그리곤 베팅을
지 말지를 궁리했다. 모두들 머리 한 켠으로는 제노비아 데이비스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스틱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
에 찾아을 사람이 없었다. 포커를 치는 날 밤에는 언제나 아내를 외출
시키고 가정부도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카드를 덮어 놓고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잭 매클라우드였다, 운동화에 점퍼. 청바지 차림이었다
[잭,대체 웬일이오?
질문을 받은 잭이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오늘 목요일 밤이잖아요?그래서.......
[그건 맞소만 당신 비서 말이 여기 못 오고 뉴욕 집으로
던데?
간다고 하
그제서야 잭은 자기의 착각을 깨달았다.비서인 피어스가 스틱스 집
으로 카드 치러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무심결에 안 가겠다고 대답했
던 것이었다. 그 정도로 요즈음 그는 정신이 없었다.
[오 스틱스 내가 깜빡했어요.
스틱스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오시오. 마침 셋이서 치느라고 재미가 없던
참이었소.
'셋이서만 쳤다고?'
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틱스는 대개 예닐곱 명을,
명 정도는 늘 포커판에 초대하곤 했었다.
스틱스는 그를 거실로 안내하고는 소파를 가리켰다 못 돼도다섯
[잠깐만 앉아 있어요.내 곧 돌아오리다.
스틱스는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잭 매클라우드야. 마침 잘됐지 뭐요. 제노비아
데이비스 건에 대해
는다 죽어 버리는 바람에 스틱스가 첫 판을 먹었다. 그는 테이블 중앙
에 던져진 칩들을 모으며 잭에게 말했다.
[당신 애인 말이오. 거 참 대단한 변호삽디다.
'옛날 애인.......'
잭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옛날이라니.......'
[맞아요. 퍽 괜찮게 일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티투스를 흘껏 보았다.
티투스는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녀 의뢰인이 죽은 것 때문일 거요. 하지만 그게 어디 그
녀의 실수였소? 제노비아가 조금만 더 견뎌 줬더라면 다 잘됐을 텐데
말이오.
잭은 제노비아의 시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양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 얘기는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스틱스가 1달러를 베팅하며 잭에게 물었다.
[나도 낱낱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죽게 된 원인이 참을성
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음...... 그녀는 참을 만큼
참았었죠.
그는 자기의 카드에 눈길을 주었다.
[왜,그녀가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시오.
각자에게 석 장씩 카드를 새로 나누어 주며 티투스가 물어 왔다. 잭
은 대답하지 않고 새로 받은 카드들을 살펴보았다. 쓸모없는 ?: 쓸데
없는 2. 그리고 퀸 한 장이었다. 아까 퀸을 버리지만 않았으면 퀸,0
투 페어가 되는 셈이었다. '머리를 굴리면 이렇게 된단 말이야......'
어쨌든 원 페어로 승부를 걸어야 했다.
티투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사, 얘기지만 그돠가 승리한 제판이었소. 다만 몇 시간을 못
참아서...... 몇 시간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원하던 낙태 수술을 정상적
으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스틱스가 2달러를 베팅했다.
[범학 교과서 제1장의 원칙이 뭐던가요? '늑장부리며 행동치 않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아니던가요?
잭이 자못 언성을 높였다.
2달러에 2달러 더.
젠킨스가 4달러를 던지며 잭의 말을 받았다.
[그거 맘에 드는구만요.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무렴 옳은 말씀이고말고요.
잭은 아무 말 없이 4달러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스틱스는 카드를 다시 한 번 보고는 불 붙이지 않은 채 물고 있던 ]
거를 테이블에 놓고는 2달러를 던겼다. 모두 다 원 페어를 들고 있1
다. 젠킨스의 카드는 킹 원 페어였다. 그가 판돈을 긁어 갔다.
잭이 카드를 섞었다. 그는 테이블 맞은편의 티투스를 홀껏 보았
그도 역시 아까부터 틈틈이 잭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소이다. 느슨한 정의는 정의가 아니지요.
일 대법원에서 예전에 '로 대 웨이드( . ) 사건'을 다룰
낙태 권리를 주장하던 로의 승리를 선언함으로써 그릇된 판례를 남
는 우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 대법원이 단호하게 낙태 금
를 천명했더라면, 이런 법석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으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아기도 무사히 태어났을 것이고 그녀도 목숨
잃지 않앗을 텐데요.
잭은 섞고 난 카드를 젠킨스에게 밀었다. 젠킨스가 카드를 돌렸다.
[제노비아는 임신 상태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그녀의 목숨과 나머지
인생이 위협받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소.
잭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티투스가 내뱉었다.
그때 스틱스가 끼여들었다
[잭, 그렇게 흥분할 것까진 없잖소?내일 날이 밝거든 이 문제를 천
천히 조사해 보십시다.
[난 흥분하지 않았어요. 단 내일 저녁 뉴스에 제노비아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가게 되면 시청자들의 반응이 어떨카 궁금하군요.
티투스는 혈압약을 하나 꺼내어 입 안에 넣고 물 대신 마티니로 그
알약을 삼켰다. 스틱스가 자기 카드를 한 번 보고 나서 잭에게 멸었다.
[당신 생각으로는 제노삐아 데이비스 사건이 얼마나 큰 반향을 불
러일으킬 것 같소?
잭도 카드를 보았다.
에이스 원 페어였다. 2달러를 던졌다.
[음, 꿔라고 단정짓긴 어렵지요. 하지딴 언론 쪽에서는 판사의 늑장
판결과 그녀 죽음을 연관지을지도 모르죠.
[만일 기자들이 그걸 문제삼는다면 상황이 재밌어지겠군...
잭이 건 2달러를 보며 스틱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나저나.......
잭이 티투스에게 시선을 던지며 덧붙였다
[판시섬. 당신에겐 몇 가지 논란 거리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티투스는 잭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칩 더미를 보고는 말했다.
2달러에 5달러 더.
그가 일곱 개의 칩을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카! 세게 나오시는데.
젠킨스가 얼굴을 껑그리며 말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벌어지는 포커 게임은 단순히 돈을 따고 1
는 그런 도박판이 아니었다 돈은 단지 상징일 뿐이었다. 누가 재능=
있고 배짱이 있는지. 누가 째째하고 옹졸한지, 누가 마음이 후하고
련을 두지 않는지 등등 서로의 인간됨을 파악하는 일종의 신경전의 ]
격을 뛴 게임인 것이었다.
잭이 이번에는 젠킨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목시님 생각은 어떠십니까?국회에 자주 드나드시는 것 같던데.
젠킨스는 일곱 개의 푸른 칩을 테이블 중앙에 던지며 대답했다
[오! 의원님. 나는 여자 문제에는 전혀 문외한이올시다. 여자나 ;
치에 대한 제 견해는 이 동네에서는 먹혀 들지 않아요. 너무 기초적
준이죠. 여자에 대한 내 견해는 디모데 전서 2장 11절의 내용 그대_
입니다.
젠킨스는 카드를 나눠 주며 부드럽게 성서 구절을 을기 시작했다.
' 하쟈는 일절 순졸?칼맏로써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남자를 가르
는 것과 남자에게 군림하는 것을 허락치 아니하느니 오직 조용할지
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
아기틀 낳음으로써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두 장 바꿔야지..
그런데 말움이야, 소위 자유주의자들이라는 무신론자들이 우리들,
시 태어난 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
란 말씀이야. 우리들이 어쩌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때 말입
다. 그런 일이 생기고 나면 이 방송국 저 방송국 할 것 없이 빵빵 떠
어대지. 기독교인들은 위선자들이라고 말이오. 조금만 관심을 가지
우리를 보면 뭔가 한두 가지 정도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좋은 점
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위스키잔을 들어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그의 눈멎이 흐려졌다.
[의회 내에서 목사님과 훈팍()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
습니다.
잭이 말했다.
훈팍은 정통파 정치 행동위원회( 1
) 의 약자였다. 젠킨스는 바로 그 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올시다.
젠킨스가 말했다.
스틱스가 이빨을 갈아붙이며 그의 말을 막으려 했다,
[이봐. 게이로드.대충 해두라고.
그러나 젠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얘기들 좀 해보쇼.모두 다 그 죽은 여자에 대해 열을 내며 다투고
들 있는데 말이오. 뱃속얘 인형이 들어 있는 채로 죽어 있던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거요?그리고 사라져 버린 그자의 친구는 또.......
[그 일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그들이 당한 일과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죽음을 비교할 순 없어요. 그래선 안 돼죠. 그자
들이 저질렀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알 겁니다.
잭이 말했다.
[왜요? 그들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게요?
젠킨스가 따지듯이 물었다. 잭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
았다. 젠킨스가 말을 이었다.
[물론 병원을 폭파시킨 일을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때로는 그게 유
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뭘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란 말이오?
잭이 말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지요.
[게이로드 씨. 당신 참 재미난 양반이군요. 어떤 생명을 보호하'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인다? 모순 아니오? 예수님 자체가 모순 덩어리1
고 설교하는 기독교 목사라.......
[누가 예수님이 모순이라고 그랬소?단지 내 얘기는 예수께서 다
가신 지 2000년이라는 세월이 홀렀고 그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얘기요. 특히 낙태용 의약품이라든가 임신 중절 수술기구 같은 사악
것들이 엄청나게 생겨났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예수님 말
의 의미를 현실에 맞도록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때인 겁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은 무시해 버려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잭이 물었다.
젠킨스가 비웃듯이 말했다.
[난 신앙이 없는 자들이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성경 운운할
정말 구역질이 나요.
[내가 비신자라고 누가 그럽디까?
[이것 봐요. 의원님. 당신네 자유주의자들이 신앙심이 있으면 얼
나 있다고 그러쇼?
젠킨스는 잔을 들어 입 안에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자, 자 포커나 칩시다.
스틱스가 끼여들었다.
젠킨스는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는 계속 지껄여댔다.
[십계명도 다른 것들과 같아요.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려
오늘날의 현실에 맞도록 그 의미를 재해석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이 옳소이다.십계명을 자구()대로만 해석해서
천하려고 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요. 바로 당신네 자유주의자들이
원에 대고 바라는, 헌법 조항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판결에 임하라
는 주문이 무리듯이 말이오.
티투스가 잭을 향해 말했다.
젠킨스가 티투스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무렴요. 햐! 정말 멋진 말씀입니다.
그는 코앞으로 카드를 들어올려 부채꼴로 펼치다가 다시 엎어 놓았
다.
[진실을 말하자면 살인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신께선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신네 민주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적 생활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차 세계대전에서, 케네디
와존슨은 베트남에서. 트루먼은 히로시마에다가 얼마나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소? 그런 엄청난 학살은 제쳐 두고 낙태 반대론자들이 태아를
구하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폭파한 병원에서 고작 몇 사람 죽고 다
겼다고 그 야단들입니까?
[그게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라고 생각하시오?
잭이 물었다.
[그럼요. 하나님의 눈에는 같죠. 살인은 살인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트루먼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단 말입니
까?
[의원님은 내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난 일본 아이
들한테 원자 폭탄을 퍼부었다고 트루먼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그렇게 했을 거요. 나 같으면 어쩜 히틀러한테도
한 방 먹여 줬을 겁니다. 나는 어느 때라도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는 자
들에게 폭탄 맛을 뵈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원님. 저거 아
시오?
[꿔요? 게이로드 씨.
[의원님께서도 역시 그러실 거라는 거죠.
젠킨스는 빈 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랐다
[자, 자, 여러분. 카드나 칩시다.
스틱스가 말했다.
잭은 새로 받은 카드를 보았다. 쓸데없는 5, 쓸모없는 2. 그리고 어
이스 석 장이었다. 에이스 트리플. 그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재빠트
게 살펴보았다. 스틱스는 불 붙이지 않은 시거를 씹어 가며 열심히 1
기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티투스는 마티니잔을 들고 있었다. 1
은 티투스가 바라는 카드를 쥐었는지 기색을 살폈지만 알 수가 없=
다
[난 덮겠어__.
젠킨스가 말했다. 스틱스도 카드를 던져 버렸다. 이제 잭과 티투=
둘이 맞붙게 된 것이다. 잭은 자신의 에이스 트리플을 들척다보면]
티투스가 가지고 있을 카드패를 생각해 보았다. 스트레이트나 플러]
아니면 풀 하우스? 티투스는 무조건 베팅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
나저나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포커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
한 판의 배짱 겨루기를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잭은 손가락으로 자.
의 칩을 헤아렸다.
[다섯에다가 일곱 더.
그가 가진 전부였다.
티투스가 다시 자기 카드에 눈길을 주었다.
'너무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저자의 카드가 높은 끗수라
생각해 보지도 않고 치고 나올 텐데.....
[거기에다 하나만 더.
티투스가 말했다.
'너무 약하게 나오는 걸, 어쩌면 내가 얕보고 왕창 베팅하기를 꼬
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걸 역이용해서 내가 죽어 주기를 기다
리고 있던지. 내가 카드를 덮어 버리고 나면 손에 든 잡패를 펼쳐 보이
며 득의 양양해할지도 모른다.'
[콜만 하겠어요.
잭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더 이상 자기에게 칩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그는 티투스의 저의를 알아됐다. 1달러가 됐든
100달러가 됐든 게임을 계속하려면 잭은 티투스에게 빚을 져야 하는
것이다. 1달러의 빚이 오히려 잭에게는 수치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잭이 그에게 빚을 지게 되면 티투스는 설사 카드 게임에서 지게 될지
라도 자존심 게임에서는 승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절대로 외상
으로 베팅을 할 수는 없었다. 1달러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왼쪽 주머니를 뒤져서 수잔 . 앤터니 은화를 확인했다. 그러
고 나서 엄지손가락으로 금테두리와 금줄을 벗겨낸 다음 그것을 테이
블 중앙으로 던졌다. 티투스가 아무 말 없이 카드를 테이블에 펼쳐 놓
았다. 다섯 장 모두 같은 모양의 같은 색깔. 스페이드 플러시였다.
[멋졌습니다.
잭이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티투스가 칩들을 긁어 갔다. 잭은 수잔 . 앤터니 은화가 쓸려 가는
것을 보았다. 티투스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신
기하다는 듯 살펴보았다.
[이런 것들이 걸리지 않고 유통되고 있다니.......
[잔돈아니까 그렇겠죠.
잭이 딴전 피우뜻 말했다.
티투스가 그걸 다시 들어 보였다.
[돌려 드릴까요?
_
은화는 전등빛을 받아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티투스로부터 되돌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빚을 지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다가 이제 빅토리아와도 헤어졌으니 그건 더 이상 필요도 없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티투스는 동전을 조끼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잭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자, 저는 이제 그만 해야겠습니다.
스틱스가 그를 붙잡았다.
[이보시오. 잭. 당신 신용 좋잖소?좀 빌려 줄 테니 더 놉시다.
잭은 됐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스틱스가 계속 졸라댔다.
[셋이서 어떻게 치라고 그래요?
그때 젠킨스가 불쑥 내뱉어 버렸다.
[엘리가 있잖아요?
스틱스는 젠킨스를 향해 잡이퍽을 듯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잭은 게이로드의 말을 그레이브스에게 전화해서 그를 부
갸즈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젠킨스가 주방으로 가서 그레이브스를 데려왔다. 스틱스는 여전
불을 붙이지 않은 시거를 씹어대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
다
티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은화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거 봐라 동전에 월 새겼는데? 자로구만.
그레이브스도 그것을 건네받아 살펴보면서 말했다.
자?빅토리아 윈터스겠군.
[틀림없소.
티투스가 맞장구쳤다.
그레이브스는 동전을 쏘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빅토리아는 다루기 힘든 여자예요. 할 수 있다면 얌전하게 길들여
서 이 동전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는 동전을 돌려주려고 티투스에게 손을 뻗었다
티투스는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연방법원 판사는 손상된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법이오.당신
이 가지시오,
그레이브스는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청문회에 대해서는 매클라우드가 꿔라고 그럽디까?
[둬 별 얘긴 없었소. 잘 되길 빌어야지. 물론 최악의 사태에도 대비
하고.
스틱스가 그레이브스 쪽으로 카드를 밀며 대답했다.
'최선을 바라고 최악에 대비한다?' 햐 멋진 말씀이군요.
젠킨스가 끼여들었다.
[게이로드?
스틱스가 시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낮게불렀다
[네?
[제발, 아가리 좀 닥치라구!
몰리는 드러난 목으로 물줄기를 맞으면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샤]
기 아래 서 있었다.
기도하듯 가슴 앞에 모은 양손에 비누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몸
돌려 물줄기에 어깨를 들이대고 지난 3년 동안의 나날들을 모두 지
버리려 애쓰듯이 온몸 구석구석에 비누칠을 했다 샤워를 다 마치
나자 그녀는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이가 듬성듬성 빠진 빗으로 머리
빗었다. 그러고 나서 새 팬티를 입고 김 서린 거울을 팔로 문질러 닦
다. 그녀는 거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곤 아래 눈꺼풀을 뒤집어서
횐자위에 선 핏발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작심한 일에 대한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몰아서 밴드로 묶고는 침실로 갔다. 욕실의 불멎이 온몸을
석구석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제스는 모로 누워 잠이 들
있었다. 방안의 공기는 땀에 절은 살과 젖은 이불 때문에 퀴퀴한 냄
가 났다. 싫었다.
그녀는 침대로 올라가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서는 제스의
덩이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그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를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그의 귓전에 대고는 키스를 했다.
[두 가지....... 하나,샤워는 공짜.둘,난 지금 갈 거예요.
제스가 똑바로 몸을 돌려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한 시간 전
에 사랑에 몰입해 있었을 때도 바로 이런 자세였었다. 그러나 그때 그
녀는 옷을 다 벗은 채였고 지금처럼 우울한 낯빛도 아니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난 끝냈어요. 목욕도...... 그리고 우리 사이도.......
그데가 그의 몸 위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
잡고 잠시 그대로 있게 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가운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서 그녀의 허뻑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니 ! 팬티를 입고 있잖아.
[유희는 끝났어요.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 이래로 내려서서는 청바지를 집어
들고 가운 아래로 입기 시작했다.
니봐. 몰리 얘기 좀 해.
[얘기했잖아요. 이번엔 정말이에요.
그녀는 바지 지퍼를 올렸다. 제스는 다리를 포갠 채 그 위에 시트를
덮고 침대 중간쯤에 앉아서 몰리가 양말과 부츠를 신는 것을 지켜보았
다. 몰리는 돌아서서 가운을 떨어뜨리고 양팔에 브래지어를 끼웠다.
그녀가 브래지어의 호크를 채우려 할 때 그가 이불을 밀어내고는 그녀
에게로 다가왔다. 몰리는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호크를 채왔다. 그리고 면 스웨터를 입었다. 그녀가 돌아서
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벌거벗은 그의 알몸이 들쥐 새끼처럼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로 다시 올라가서 알몸을 이불로 감쌌다
[린다 때문이야?
그녀는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그래요. 제스. 그녀는 당신 아내예요. 그래서 우리에겐 미래가
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동안 한 짓이 잘못이라고 느켜져요.
몰리는 둘 사이의 관계를 이제는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고 느꼈디
한때는 사랑에 빠져서 앞날의 계획도 세웠었고 비록 늘 함께 있지=
못했지만 여느 연인들이 다 그러하듯 서로를 알뜰히 보살펴 주었디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한때의 불장난으로 깨끗이 끝났어야 옳1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그랬다.
불륜의 관계란 제아무리 열정적이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스스로
들해지게 돼 있는 범이다. 그건 장롱 이음새에 발라 놓은 아교처럼
젠가는 말라 비틀어져 틈을 만들고야 마는, 반드시 상처를 남겨 놓_
야 마는 사랑의 무덤인 것이다.
그녀는 벌써 여러 달 전부터 틈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 왔'
다. 그때 그녀는 웨스트버지니아를, 제스의 곁을 떠나려 했지만 =
슬픈 눈동자에 붙잡혀서 어영부영 몇 개월의 시간을 더 허비해 버
것이었다
그녀는 제스를 쳐다보며 측은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함께 있게 되면 나는 내게 중요한 것을 모조리 잃어버리
될 거예요.
[섹스 말이야?
제스의 미련한 대답에 몰리는 눈을 흘겼다.
[내 인생 말이에요. 인생 ! 인생과 섹스도 구별 못하=어요?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서 가방 속에 세면 도구들을 담아 가지고 니
다
[제스, 괴롭지만 이 순간만 지나고 나면 잘해 나갈 수도 있을 것
아요. 만나러 와줘서 기뻤어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헤어=
할 때가 왔어요.
그녀는 레인코트를 걸쳤다.
[당신 여기서 꿔 할 거야?
[나는 기자예요.당연히 취재하러 다녀야죠.
[당신 만약 아일 갖는다면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진 못할 테지?
아,미안하오.
그는 그녀가 임신할 수 없는 몸이란 걸 깜빡 잊고 말았다. 따라서 큰
실언을 한 셈이었다. 그녀의 눈가에 슬픈 및이 잠시 비치더니 이내 밝
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두르곤 마지
막으로 그를 한 번 꼭 껴안았다. 침대 테이블 위에는 그 전날 선물 가
게에서 산 작은 장식품이 하나 놓여 있었다. 눈발이 날리는 작은 국회
의사당 모형이었다.
[괜찮아질 거예요.제스 나도 그럴 거구요.
그녀는 침대에서 물러나 가방을 들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1
노인은 지펑이로 앞길을 더듬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길은
성기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이정표로 삼아 라피엣 공원의 =
도를 따라 백악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선천적 맹
그리고 앞가슴에는 '인생, 훌륭한 선택이라고 손으로 쓴 팻말이 걸=
있었다.
[신의 축복이 내리길.......
그는 손에 쥔 종이컵에 동전을 던져 준 행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속으로 욕을 해
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너덜너덜한 옷, 텁수룩한 턱수염, 이마 아래까지 푹 눌러쓴 중절]
세상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검은 안경, 그런 차림 속에서 그-
은밀하고도 안락한 느낌으로 구걸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지광이 끝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전혀 반응이 없는
체였다. 그는 종이컵을 흔들었다. 몇 넣의 동전이 서로 부딪치며 짤
거렸다.
[여보세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막대기 끝을 마치 손가락처럼 능
숙하게 움직여 나갔다
'아 이거야 금방 알 수 있지.신발이군....... 이건 발목이고.
막대기 끝이 신발 위의 바짓단을 들췄다,
[이봐요, 친구.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팔짱 킨 양손은 배 위에 올려놓고 얼굴 위로는 신문지 한 장
을덮은 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맹인은 잠자는 사내의 발치를 돌아
그 옆의 빈자리에 앉으려 했다. 손으로 벤치를 더듬던 그의 손에 원가
이상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비둘기 똥......? 자고 있던 남자의 손과 그가 입고 있던 새 바지 여
기저기에 어떤 것은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직
끈적끈적하기도 한 분비물이 떨어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잠
들어 있었길래 이 지경이 되도록까지......
맹인은 뭘 해야 할지 생각하며 잠시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누가 보고
있는 사람이 없나 살펴보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양쪽으로 돌렸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집회가 열리고 있는 공원 한 모퉁이
로 모두 몰려가 있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사내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리고는 손
가락으로 검은 안경을 콧날 아래로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사내의 얼
굴을 덮고 있던 신문지를 살짝 들췄다. 그가 맨 먼저 본 것은 사내의
벌려진 입이었다.
갈라진 입술 부어 오른 채 쑥 빼물고 있는 혀, 그리고 딱딱하게 말
라붙은 콧구멍,부릅떠진 물기 없는 두 눈......
가짜 맹인은 놀라서 굽혔던 몸을 활짝 일으켜 세웠다. 그 바람에 종
이컵 안에 들어 있던 동전들이 할리 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몰리와 닥터 랜디는 아래층 흘에 전시된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
라는 이름의 모형 우주선을 내려다보면서 우주 박물관의 이층 난간 '
에 서 있었다.
[할리 문의 죽음과 쉬버스의 죽음엔 공통점이 많아요. 할리의 직
적인 사인은 진폐성 폐렴이었고 쉬버스의 사인은 뇌일혈이었지만,
인을 제외한 나머지 상황은 거의 똑같아요. 이미 한 차례 해부가 되
고 '가지시오'란 쪽지가 들어 있는 장난감 인형이 뱃속에서 나왔고.
혈된 상태라든지 동맥이 절단된 모양이라든지, 간이 없어진 것까지
두 말이죠.
[간이 바로 열쇠군요.
몰리가 말했다.
[톡스 연구소와 마이크로 연구소에서 최선을 다해 조직 검사를
고 있어요.
말을 하면서 랜디는 서류가방을 열어서 커다란 마닐라지 봉투를
내서는 그걸 발코니 위에 올려놓았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몇 장 가져 왔어요.
[치질 사진도 들어 있나요?
?는 치질을 닳고 있진 않았어요.
[실망되는군요.
랜디는 봉투 주둥이를 여민 끈을 풀어냈다.
[할리도 쉬버스처럼 오른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어요. 그리
고 오른팔이 왼팔보다 강건했구요. 오른손잡이였다는 애기죠.
[그게 어떤 중요한 단서라도 되나요?
[아니오. 그저 사실일 뿐이죠. 그렇지만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
견했어요. 그나저나 우리가 정한 규칙은 아직 지켜지고 있는 거죠? 내
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도해서는 안 되는 거 알죠?
[그럼요.다만.......
[다만 뭐요?
[별건 아닌데요. 제 가 이번 사건에 대해 따로 정보를 수집하고
다니는 것 같아요. 물론 나만큼이야 모르고 있긴 하겠지만 말예요.
랜디는 봉투 속에서 여러 장의 컬러 사진들을 꺼냈다. 그녀가 잠시
숨을 멈췄다
[몰리 기절하면 안 돼요.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말예요.
[알았어요. 엘.
그가 그녀에게 첫번째로 보여 준 사진은 라텍스 장갑을 낀
로 벌리고 있는 인간의 입이었다.
락으
손가
[할리 문의 입이에요.
그녀는 움찔하였지만 외면하지는 않았다. 랜디가 말을 이었다
[치아 사이로 잇몸이 비어져 나온 거 보여요?
[어머,쉬버스 경우와 똑같군요.
[맞아요. 이건 바로 과생()이라는 거죠. 세포의 수가 비정상적
으로 증가하는 현상이죠. 따라서 잇몸이 비대해진 거예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아마 페니토인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간질 치료제죠.
[둘 다 간질 환자였나요?
[아뇨. 둘 다 전혀 간질 증후는 없었어요. 병력 기록에도 안 나와
구요.
[그렇다면......?
[조금 있다 얘기해 줄게요.
랜디는 그녀에게 또 다른 사진을 한 장 보여 주었다. 몰리는 그것
곁눈으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복강이군요.그떻죠?
[맞아요. 멜빈 쉬버스의 것과 똑같아요. 잘 새겨 두세요. 얼마 안
어서 복강에 대해 박사가 될 거예요. 여기 이것들 보여요? 연성유
()이라는 거예요.
그는 희뿌연 섬유질을 가리켰다.
[피자 치즈 같네요.
[재밌군요. 인턴들도 이걸 그렇게 뿔러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배
살살 고파지는데요.
그는 시진을 펄럭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두 눈을
짝이며 사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할리의 복강에도 쉬버스 것과 흡사한 유착 현상이 있었다는 '
이 드러났다 이겁니다.
[유착은 왜 생겨나죠?
[그건 복강 내벽에 부착돼 있던 어떤 물질의 잔유물이에요.
그는 다른 사진을 툭 쳤다.
[자, 여기 두 장을 더 보세요.
[복강 내부의 어떤 물질이라면 꿔죠?그 장난감 인형?
[아뇨. 인형은 아니에요. 그 물질은, 아직 뭔진 모르겠지만 그=
죽기 몇 주 전에 그들의 복강 속에 집어 넣어졌던 것입니다. 인형은 장
속에서 발견됐죠.복강이 아니라....... 자, 이걸 봐요.
검은 바탕에 그저 횐 줄이 몇 개 그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이게 뭐예요?
[할리의 복강에 있던 육아종()의 사진이에요. 그건 굴 속에
박힌 모래알이 진주가 되는 것처럼 인체 내의 상처 부위에서 생성되는
거죠 쉽게 말해서 곪은 종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아, 그래요? 그런데 내 눈엔 검은 바탕에 그저 흰 선만 보이는데
요!
[내가 해부를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음 시진을 커내 놓았다.
[이게 당신 눈에는 뭐 같아 보여요?
[작은 매듭?
[맞았어요. 봉합 매듭이죠.
[그게 왜 거기 있는 거예요?
[잘 모르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일 리는 만무하죠. 이상한
건 이 봉합실의 재료예요.
[뭔데요?
[검은 실크예요.
[검은 실크요?
[네. 두 자 정도 길이의 검은 실크요.
몰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랜디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인체를 봉합할 때는 검은 실크 실을 쓰진 않죠.보통은 녹아 없어
지는 실을 쓰죠. 검은 실크 실은 녹지가 않거든요.
[그럼 왜 그걸 사용했을까요?
[내 생라으로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요.그걸 사용한 사람은 실이
녹지 않고 남아 있길 바랐던 거죠. 배꼽 아래 복강의 내벽을 그걸 써
꿰맨 것을 보면 그가 죽었을 무렵에는 이미 그 주위에 전분당질이
성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내가 얘기했죠? 할리도 쉬버스처
1차 해부당한 상태였었다구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이 주의 깊게
적을 지워 버리지 못한 것 같아요. 검은 실크 실을 제거하는 걸 깜박
던 거죠.......
[그런 게 다른 부위에서도 발견됐나요?
랜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1차 해부 때 다른 건 제거됐을 수도 있죠.
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아래층의 관람객들이 모형 우주선의 거
한 엔진에 감탄하고 있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입을
었다.
[이 문제의 열쇠는 확실히 사라져 버린 간에 있는 것 같아요. 어
다 사용했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이식하려고 했는지 증거를 없애려
간을 제거한 것 같아요.
[몰리,복강과 간은 별로 판련이 없어요.
[관련이 있을 수도 있죠. 엘. 누군가가 특수 간장을 개발하려 히
있는지도 모르는 일 아네요?
랜디는 사진들을 챙겼다.
[어떤 목적으로?
[묘하고 이상한 경우를 위해서요. 이를테면 간이 하나 더 필요한
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누구?슈퍼맨?
[제 말을 농담처럼 들으시는 거예요?
[아니, 아니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추측을 한 거뿐이고
측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과 좀 동떨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닙니'
[당신,날 놀리고 있는 거죠?
[아니라니까 그러네.
[엘리엇 !
[정말 아니에요. 아니 내가 왜 당신을 놀리겠어요. 당신은 당신 나
름대로 직업에 층실한 것뿐인데 말예요.
몰리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좋아요. 어쨌든 그게 내 능력껏 해본 추측이었어요.
어때요?
당신 생각은
[난 가정보다는 사실을 더 중요시하죠. 이걸 보세요.
그는 몰리에게 할리와 멜빈 쉬버스의 정면과 측면 얼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뭔가 이상한 거 없어요?
'제.둘 다 죽었잖아요.
[콧구멍과 짓구멍 속에서 자라나 비어져 나온 털 좀 봐요.
[남자들은 다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60대 이후에는 그렇지만 30대에는 그렇지 않아요.
그는 쉬버스의 사진들을 뒤적거렸다.
[억기 이거 좀 봐요. 양볼 아래로 털이 자라나 있죠. 이건 구레나룻
하고는 성질이 다른 거예요.
그는 다시 할리의 사진 한 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머리카락이 앞이마까지 내려와 자라고 있잖아
요.
[흐음.......
그는 이번에는 할리의 등 윗부분을 쩍은 사진을 뽑아 들고는 목 아
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곳에는 혹 같은 형체가 솟아올라 있었다.
[이거 보이죠?이건 '버팔로 흑이라고 불리는 질병의 초기 증후예
요. 자, 이걸 또 보세요.
랜디는 이번에는 쉬버스의 등을 찍은 사진을 꺼냈다.
[쉬버스에게도 똑같은 게 보이죠? 할리의 혹보다 좀더 진전돼 있=
상태였어요.
그 다음에는 할리의 배 부분을 찍은 사진을 보였다.
[피부에 나 있는 푸르스름한 선을 봐요. 아주 특이한 거예요. 마=
피부를 한 껍질 벗겨 낸 것 같잠아요?
[대관절 이 모든 증상이 뭘 나타내고 있는 거죠?
몰리가 물었다.
[스테로이드요!
[그럼 내 말이 맞게요?누군가 슈퍼 간장을 만들고 있다고 그랬잖<
요.
[아니에요. 몰리. 단백동화{토)가 아니에요. 이것들은 프레]
니슨(댜 : 부신 피질 호르몬제)과 같은 계통의 글루코코르티=
이드( ) 예요.
[그건 어디에 쓰는 거죠?
[낭창(결핵성 피부병)이나 인체 내의 경화()치료제로 다양하
쓰이고 있죠.
[그 두 사람에게서 그런 증상이 발견됐나요?
[아니오.
[어휴, 엘리엇 ! 이제 '아니다', '없었다' 그런 얘긴 그만 하고 속
원히 털어놔 봐요.
[하하!몰리,뭘 배우는 데는 지루한 절차가 필요한 냅 아니오?
몰리가 또 곱게 눈을 홀겼다.
[스테로이드() 는 또 어디에 쓰이죠?
[이식 수술할 때요.
그 말에 몰리가 놀랐다
[어떤 이식 늘봤]
[모든 이식 수술에 다 사용됩니다. 잇몸이 늘어난 것과 털이 마구
자라난 것은 사이클로스포린( ) 을 사용했다는 증후죠. 그
리고 ,버팔로 흑'과 엷어진 피부는 스테로이드를 투여했다는 증후고
요.그두 가지 약물 모두 다른 사람의 장기나 동물의 장기를 이식받았
을 때 인체 내에서 나타나는 거부 반응을 막기 위한 억제제예요.
이식이라......, 어쩌면 누군가가 이 두 사람에게 간장을 이식시켜
서는 그것을 배얌댜다가 다시 빼내 갔는지도 모르겠군요.
[몰리 !
[당신은 내게 허튼소리를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신도 말만 빙빙
돌릴 뿐 이거다 저거다 분명히 얘길 안 해주잖아요?
[그래도 그건 너무 황당해요. 몰리. 그렇다면 그 검은 실크
떻게 설명하겠어요?
[위에 난 꿰맨 자국은 음...... 상관없을 수도 있는 일이죠. 실을 어
소한 것이든지 글쎄요.어떤 식으로 관련이.......
아주사
머가 아니라 뱃속에 난 자국이라니까요.
[뱃속에 나 있든 위에 나 있든 간에 말예요. 사소한 일에 매달리지
말고 전체를 한번 보세요. 엘리엇. 그들은 이 사람들에게 간장을 이식
했다가 온실에서 키운.멜론처럼 다 숙성되고 나자 그것을 다시 따간
거예요. 간을 떼어 내자 이 사람들은 죽었고 범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뱃속에다 플라스틱 인형을 집어 넣
은 것이죠. 그래서 마치 병원 폭파범들에 대한 보복 범행처럼 보이게
끔 말예요.
[몰리?
[네?
[그렇다면 슈퍼 간장을 만들려는 의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
오?
[오. 엘리엇. 훌륭한 질문이네요. 당신이
그 대답을 알아내기만
면 즉시 범인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몰리?
[네?
[우리 잠깐 쉬는 게 어떻겠어요? 전시물 구경도 좀 하고 말예요.
[좋아요.그런데 뭘 보고 싶으세요?
[어디 보자......, 당신의 예리한 분석력을 고려해 보건데 스페이
캡슐부터 보는 게 가장 합당할 것 같군요.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곤 수첩을 꺼내서 휘갈기듯 몇 장을 적어 나
갔다. 랜디는 난간에 팔꿈치로 기대고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당신 머리엔 창조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군요. 그;
뱃속은 어때요?점심 식사해야 되지 않겠소?
그녀는 수첩을 덮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
[좋죠.
[이탈리아 음식 어때요?
[좋아요.피자만 아니라면.......
서
나
잭은 벨을 누르고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한 손에는 샴페인을 또 다
른 손에는 노갇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엘리스 섬으로 가는
7시 30훈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여느때처럼 또 늦고 말았다. 벌
= 7시 15분이었다.
'정치 자금 모금을 위한 만찬회. 그것만 아니라면 그곳에 네가 미쳤
다고....
문이 열렸다.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문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은 몰리
였다. 그녀는 붉은 리본을 맨 머리를 약간 수그리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아 물론이지. 들어갈려고 내가 왔지. 아무렴.'
잭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잭은 빅토리아와, 몰리는 제스와 헤어지
고 난 지난 며칠 새 두 사람은 두세 번 우연히 만났었다. 따지고 보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정치가들과 기자들이 모두 다 '개판이라고
부르며 혐오스러워 하면서도 으레 참석하게 되는 워싱턴의 만찬장에
서 만났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는 맛없는 오르되브르
를 먹으면서 웃고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실연에 관해 의
견을 나누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는 갈망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는 동시에 둘 다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가슴 한 켠에서 괴로운 질문이 고개를 드는 것을 어
수 없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왜 이러지?저 사람은 이런 나를 '
떻게 생각할까? 도대체 이성에게 느끼게 되는 감정이란 왜 이렇게 _
한 걸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사람에 대한 '
릇한 느낌이 고개를 드니 말이다.'
[아름답군.
잭은 이렇게 말하며 몰리에게 꽃을 건냈다.
밖에 택시를 세워 둔 채였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만찬회에 가지 '
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곧 돌아올게요.편히 계세요.
몰리는 붉은 리본을 나풀거리며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침실로 들
갔다. 만찬 초대장에는 '검은 타이를 매거나 가능하면 조상들이 처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와 같은 복고풍 차림을 할 것이라는
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잭에게 그 얘기를 들은 몰리는 세인트 마크
레이스에 있는 구식 옷 가게에 가서 1920년대 풍의 흰 드레스를 15'
러에 구입했다. 가슴에 작은 얼룩이 있었지만 그것도 복고풍 진주
로치를 달아서 가리고 나니 오히려 한결 그럴듯해 보였다. 그녀는
고 붉은 비단끈도 사서 레이스와 함께 꼬아서는 허리에 두르고 두 .
닥의 매듭이 발 아래까지 늘어지게 모양을 냈다. 잭은 거실을 서성
리며 집안을 구경했다.
덮개가 씌워진 소파, 간이 의자 두 개, 촛대 두 개와 꽃이 담긴 주
자, 소나무 커피 탁자, 그 옆에는 칠이 벗겨진 흔들의자가 있었다.
쪽 벽 가운데는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로는 하얀색 에나멜 선반, 그
고 그 양쪽으로는 역시 흰색의 서가(홀)가 있었다.그는 샴페인
을 탁자에 올려놓고 책꽂이로 다가갔다. 값싼 소설책들, 출판된 지 오
래된 백과 사전들, 볼링 우승컵, 두 개의 스테레오 스피커 따위가 얹척
져 있었다. 그 중 유독 잭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몰리의
사진이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 윗면
에는 '성 미카엘 고아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벽난로에 불이 지펴져 있진 않았지만 방안은 따뜻했다. 몰리가 침실
에서 다시 나다났다. 그녀는 붉은 천으로 테두리를 두른 짙푸른 빛깔
의 구식 구세군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탁자에서 술병을 집어 들
고는 몰리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잭과 몰리는 맨해튼의 마천루
불빛을 감상하면서 갑판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 잔을 마
시고 난 몰리가 일어서더니 난간으로 걸어갔다. 괜지 걸음걸이가 어색
해 보였다.
[괜찮소?
잭이 따라가며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왜요?
[걸을 때 아파하는 것 같던데.
그녀는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양 발목을 모으고는 드레스를 무릎
까지 들어올렸다. 한 쪽 정강이엔 긁힌 상처가 크게 나 있었고 다른 쪽
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어쩌다 이랬소?
[지난 월요일 당신을 쫓아가다가 이렇게 됐어요.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엘리 그레이브스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모두들 한 마디라도 더 들
어 보려고 당신을 쫓아갔었죠. 그러다가 저도 넘어졌어요,
[허,그거 유감이로군.
[당신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어요. 내가 그날 당신을 따라잡았다
면 무슨 질문을 해댔을지 아마 상상도 못 하실걸요?
[당신 질문에 내가 아무리 난처한 입장이 됐을지라도 당신이 넘어
져서 피 흘리게 된 것보다는 나았을 게요. 어쨌든 상처는 어떻소?
[별거 아니에요. 어렸을 땐 딸기 따러 다니느라고 늘 이 꼴이었는데
요, 뭐.
[묄 했다고?
[놀다가 그랬다구요.
그녀는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구부려 보았다.
[가끔 좀 뻣뻣하긴 하지만....... 참, 당신 친구 이기가 절 도와줬어
요. 절 데리고 윈스턴 씨 사무실로 가서는 윈스턴 씨와 함께 상처를 소
독해 주고 붕대도 감아 줬어요.
띠기친
[네. 아주 자상한 사람이에요. 물론 한 가지, 작지만 조건을 걸더믿
구요.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대요.
[그래?그걸로 밥벌이가 될까?
[안 돼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지금 하고 있는 배달원 일을 계속
가면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알아봐 주기로 했으니까요.
잭은 이기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당신 무릎이 까진 건 내 탓이로군. 당신에게 빚을 진 셈=
오.
[방송에 내보낼 인터뷰 한 번 해주시면 빚을 청산해 드리죠.
[우린 지금 데이트하는 중이오.공과 사를 흔동해선 안 돼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알았어요. 그 얘긴 없던 걸로 하죠. 당신이 저라는 여자한테 익
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의 양볼이 허물어졌다.
[사건과 개인적 관계로 인해 취재하면서 갈등해 본 적 있소?
[없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몰리는 다른 쪽 무릎도 시험삼아 굽혀 보고는 말을 이었다.
너쨌든 지금은 마음놓으셔도 돼요. 오늘은 비번이니까요. 어제 그
사건을 충분히 취재했거든요.
[뭘 했다고?
[워싱턴 검시관 사무실에서 아기인형 살인사건에 대해 취재했어
요.
[꿔 기사가 될 만한 거라도 찾았소?
[별로였어요. 대신 다른 사건에 대해서 하나 건졌죠. 제노비아 데이
비스 건 말이에요.
그는 난간 위에 두 팔을 걸치고는 짐짓 관심이 없는 척 태연한 표정
을 지어 보였다. 내심 그녀가 거기에 대해서 좀더 얘기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뭘 찾아냈소?
기다리다 못해 그가 꿀었다.
[현재로선 얘기할 단계가 못 돼요.
그걸로 끝이었다. 잭은 등을 돌리고 서서 저 멀리 불빛이 환히 비치
고 있는 브루클린 쪽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내가 자란 곳이오.
[그리고 고교 시절, 그 베일 속에 가려진 비련의 옛 애인을 만났던
곳도 바로 저기였죠? 그레이브스의 얘기대로라면 당신의 아기를 임신
했기 때문에 죽었다던......, 그리고 또 아기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는
모른다는 그 여자 말예요.
잭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어쩌다 죽었어요?
[그레이브스의 말이 전혀 허황된 거짓말은 아니오. 일부는 사실0
었지. 제왕절개 수술을 받다가 뭔가 잘못된 모양이오. 당시 내가 들]
수 있었던 얘기는 그 정도뿐이었소. 그나저나 당신 오늘은 비번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대답 대신 그녀도 난간에 몸을 기대 왔다. 살 냄새를 맡을 수 있?
만큼 그에게 바싹 다가선 채로
[브루클린 애기 좀 해주세요.
[뭘 알고 싶소?
[그곳이 그럽나요?
[그렇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지. 부모님은 둘 다 돌아가셨=
형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시의 불빚을 바라보았다.
[아! 고향집,웨스트버지니아로 가고 싶어요.
[레스트버지니아는 브루클린보다 더 가깝지 않소?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고향의 거리란 일종의 마음의 거리이지. 추억 속에 아름답게 자
잡은 고향은 가까울 게고 그렇지 못한 고향은 그만큼 먼 것이 아
까?
......잭. 이떻게 하면 어떨까요?우리 거래를 한번 해봐요.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흐음...... 이제 뉴욕에 온 지 두 달밖에 안 된 친구가 벌써 물이
었구만. 거래를 하자니 말이오.
[당신 걸 보여 주면 저도 제 걸 보여 드릴게요.
그의 얼굴이 야릇한 미소와 함께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이 되었
다.
[내가 그런 일을 마지막으로 해본 게 열 살 때였던 것 같은걸. 그때
프레니 알츠슐러와 우리 집 다락방에서 서로의 몸을 보여 줬었지.
[어머, 제 말은 고향집 말이었어요. 우리가 태어나 자라난 곳을 서
로에게 보여 주잔 말이에요.
그때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 왔다 그녀의 결 고운 머리카락들은
마치 베일처럼 그녀의 얼굴울 감싸며 나부꼈다.
[어디 보자! 그런다고 프레니가 화내진 않겠지?
잭이 장난스럽게 그녀의 가슴 가까이 코를 들이밀며 말했다.
[빅토리아 윈터스는 어떴어요?
[이미 끝난 엑기요.당신은 어떻소?
[제스요? 저도 깨끗이 끝난 상태예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
망하느라고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뿐이에요.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머리카락을 위로 걷어 올리며 말했
다
[자, 거래하시겠어__?
그녀가 지그시 미소지어 보였다
[좋소.
엘리스 섬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호사 그 자체였다. 복고풍 의상을
입은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화려한 머리 장식에 값비싼 이브
닝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과 턱시도 차럼의 남자들로 만찬회장은 포화
상태였다.
사람들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마시고 먹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모
두 다 선 채로....... 웨이터들은 은쟁반에 샴페인, 백포도주,캐비아를
얹고 손님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고 현악 4중주단은 모차르트를 계속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 보가 덮인 식탁이 군데군데 비치돼 있었지만. 아무도 앉0.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다 선 채로 콱자지껄 떠들어대든지 아니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이나 조형물 따위를 감상하고 있었다.
연회장 한 켠에는 공들여 준비한 뷔페가 마련돼 있었다. 로스트
프, 햄, 꿀 바른 닭고기, 소스를 발라 구워 낸 연어, 레몬과 케이프 ]
각을 곁들인 값비싼 생선구이, 버터를 발라 구운 감자, 프랑스 산 완=
콩 요리, 야들야들한 야채들 따위가 쭉 진열되어 있었다. 제공되는 ]
리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 케이크, 크림 파이
고급 포도주,그녀가 듣도 보도 못했던 진기한 과일들.......
어느 파티에서 음식이 주인공이 될 수 있으랴? 그러나 몰리가 그=
거기서 보았던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그 요리들이었다. =
때 그녀의 머릿속에 픽업 트럭을 타고 돌아오던 양아버지 호머의 모=
이 떠올랐다. 트럭 뒤에는 여기저기서 구걸을 하다시피해서 기증을 =
아 온 수박과 핫도그 그리고 기름에 튀긴 옥수수빵이 실려 있었다.
동절을 맞아 미카엘 고아원에서 소풍을 가던 날이었다. 만일 양아버]
가 이런 호사한 파티장에 섞여 있는 그녀를 본다면 자신은 마치 서
에서 누드 잡지를 흠쳐보다 들킨 소년처럼 난처해질 거라고 몰리는 ]
각했다.
[이 사람들이 가난한 민주당원들 맞아요?제가
들 같은데요?
보기엔 공화당 사
[그나저나 당신 생각으로는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것
소?
잭이 물었다.
'헤스르버지니아에서는 오진 않았겠죠.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잭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볼일 좀 보고 돌아오겠소,괜찮쳤소?
[그럼요.
잭은 검은색 정장에 술잔과 가는 권련을 든 한 무리의 남자들 속으
로사라졌다.
그녀는 텅 빈 탁자와 의자들 주위에서 서성거렸다.왜 부자들은 언
제나 서서 먹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어느 더웠던 여름날 저녁. 지붕의 홈통에 덧칠을 하던 막노동
꾼 두 사람이 출출했는지 뭔가 먹을 게 없나 하고는 고아원 부엌문 앞
을 기옷거렸었다. 고아원 아이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막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배시 아줌마는 그 두 노동자를 일단 부엌으로 들어
오게 해서 페인트로 얼룩진 모자를 냇으라고 하더니 싱크대에서 손을
씻도록 했다. 그 둘은 그렇게 하고 나서 손을 말리고는 닳아 빠진 단풍
나무 조리대 한끝에 서서 그저 한 접시의 음식이나 얻어먹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러나 배시 아줌마는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서서 먹다니 그래선 안 될 일이지.
이렇게 말하고서는 그들을 식당으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은 자리를
좁혀 두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몰리가 뉴욕에 왔을 때가
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이곳 사람들은 모두 걸으면서, 뛰면서, 아니면
어딘가에 기댄 채로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앉아서 먹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새 그녀도 그런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게는 되었지만 기분
이 개운치는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생각에 잠겨 있던 몰리의 둥을 살짝 건드렸다
[쭈욱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벨벳 보타이를 맨 검은 턱시도 차림의 낮선 남자였다. 그는 한 손엔
술잔을 든 채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그녀를 위아래로 흩어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가씨의 할머니께서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딨을 때 아가씨만큼 이
름다어을까요?
[글쎄요.
그녀는 할머니가 누구였을까? 그녀가 엘리스 섬을 통해 미국에 0
민을 왔을까?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었을까? 상상을 해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여태껏 자신의 핏줄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
나 오늘 밤 이곳에서 이런 사람들과 섞여 있으려니 자꾸만 자신의 =
통에 대해 궁금증이 피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투에 남부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요?
[네. 남쪽에서도 두메 산골이죠. 웨스트떠지니아예요.
[오, 그러시군요. 전 항상 이렇게만 생각해 왔죠. 웨스트버지니아
서 나오는 것 중 유일하게 쓸 만한 건 텅 빈 버스뿐이라고요.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에 몰리도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이 어떻습니까?
그는 마치 자기가 이 건물을 짓기라도 한 것처럼 한 팔을 휘둘러 '
며 물었다.
[어어? 아가씨께선 별반 감흥이 없으신 것 같아 보이네요.
[전혀요. 그저 역사의 아이러니 정도만 느켜지네요. 한때는 절박
이민자들이 디디고 있던 이 자리에서 호사스럽게 차려 입은 사람들
떠들고 마셔대고 있다니 말이에요.
[우리는 그분들의 후손 아닙니까?
남자가 말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당신은 그분들의 자식으로서 떳떳하다고 생각
세요틴
몰리가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아!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데 긍이 그런 건 따져서 뭐하겠습니
까?
사내는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몰리에게 손가락 세 개를 세워서
'아이 러브 유'라는 표시를 해보이고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그와 어울
릴 만한 무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기자라는 직업 의식이 발동한 꼴리
는 연회장 주위를 서성거리며 사람들의 얘기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들어가는 길로 당장.......
......유대인에 대해서 배울 점은 말이지.......
.... ..그 친군 마약 안 해.......
.....,그 양반은 코티손(관절염 치료제)을 복용하지
도 정정하신 모양이야.......
않으신대, 아직
연회장 한구석에 무엇인가를 에워싸고 사람들이 많이 올려 있는 것
이 몰리의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엘리스 섬을 거쳐 본토로
들어간 이민자들의 명단이 입력돼 있는 한 대의 컴퓨터였다. 기계 위
에 게시되어 있는 안내문에는 자신의 성()을 입력시키면 조상이 엘
리스 섬을 거쳐 갔나 확인해 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손에 샴페인잔을 든 사람들이 차례로 자신의 성을 입력시켰다가 스
크린에 이름이 나오면 환호성을 올렸고 또 그떻지 않게 되면 다른 성
을 입력시켜 보곤 했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가고 나서야 몰리는 기
계의 자판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양부모의 성인 '맥코믹이 철자를
차줴로 눌렀다. 그 이름이 아닌 다른 어떤 이름도 몰리는 알지 못했다
입력 키를 누르는 대신 몰리는 다른 키를 누르고 기계 곁을 떠났다 그
러고 나선 어영부영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즐접게 보내고 있소튼
느
잭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럼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표정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 정도 거짓말 실력 가지고서는 정치판에 못 끼여들겠는걸.
[멋진 파티예요.하지만 팬지 자꾸 짜증이 나요.
[알겠소. 벌써 한 시간이나 보낸 셈이니, 이제 그만 갑시다.
그들은 파티장을 떠나 보트를 타고 항구로 돌아왔다. 그리곤 택시
잡아타고 그녀의 집을 향해 웨스트사이드로 출발했다.
[즐거웠어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난 별 수 없는 촌뜨기인가 봐요
부자들이 좀더 재미난 사람이었으면 하고 계속 바랐었는데.......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그래요. 맞아. 난 늘 그 임금님의 무릎이 어떤 모양이었을까 상=
해 보곤 했었죠.
잭이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거요?
[정말 알고 싶으세요?
[그럼.
그녀는 택시 운전사 쪽으로 몸을 수그렸다
42번가 8번지로 좀 가주세요.
그리고는 잭을 쳐다보았다
[진짜 엘리스 섬의 모습을 보여 드릴게요.
택시는 그들을 항만청 앞에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은 버스 터미널_
들어가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민자들이에요. 아니면 이주민'
든지요.
녀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무슨 차이라도 있소?
[우리 방송국 앵커맨의 표현을 빌린 건데요. 뉴저지에서 오는 사람
들을 이주민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들은 잠시 대합실 안을 둘러보았다.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
는사람들, 나일론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칭얼대는 아이들, 환히 밝혀진 실내 조명이나 귀를 울리
는 안내 방송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기들.
살찐 사람, 마른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얼굴들이 지쳐 보였다. 몰리
는 그런 사람들을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러기 저 여자 좀 보세요.
몰리가 고개짓으로 어떤 여인을 가리켰다. 숱 많은 갈색 머리에 너
무나 꽉 끼어 엉덩이의 곡선이 훤히 드러나는 빨간 바지를 입은 여자
였다. 그 억자 옆에는 남핀인 듯한 사내가 서 있었다. 지저분한 금발
머리에 눈커풀을 반쯤 드리우고 도넛을 먹다가 그랬을 게 틀림없을
설탕 가루를 콧수염에 허옇게 묻힌 호리호리한 젊은 남자였다. 연두색
티셔츠 위로 마구 자란 가슴털이 비어져 나와 있었고 그의 목젖은 연
신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 구경에 구미가 당겨 잭도 대합실 속의 사람들을 일일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친 듯 보이지만 험상궂은 얼굴의 40대 남자. 릿
어진 청바지를 입은 스무 살 가량의 청년. 티셔츠 아래로 배꼽을 드러
낸 수염이 텁수룩하고 머리엔 온통 새집을 지어 놓은 나이를 알아볼
수 없는 놈꽹이, 그자의 티셔츠엔 이떻게 적혀 있었다. '섹스 교습 첫
번째 수업료는 면제' 그치는 마치 그 문구를 보고 자기에게 마음이 동
할 여자가 반드시 있을 것처럼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서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곳 항구에서라면.......
몰리가 입을 열었다.
[저런 작자일지라도 만일 내가 오늘 밤. 보트에서 바닷속으로 떨
졌더라면 그 파티에 참석했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빨리 뛰어내
서 날 구하려 했을 거예요.
[쌔가 있잖소. 우선 신발을 벗고, 바지를 벗어서 잘 개켜 두고. 코=
를 어딘가 건 후에 당신을 구하러.......
그의 익살에 그녀가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부자들과 힘있는 사람들은 라구아디아 공항이나 케네디 공항을 =
해 뉴욕에 발을 딛게 되죠. 저런 사람들은 바로 이곳을 거쳐 뉴욕으]
들어오지만 말예요.
[흠....... 이제 보니 당신 생각했던 것보다는 썩 괜찮은 정치가
걸?
[정치적인 애기 하자는 뜻은 아니에요.단지 저들이 제 관심을 끄=
것뿐이에요.
[나 역시 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소. 어쨌든 한 표 던져 줄 유권=
들이니까.
그녀는 잭의 가슴을 한 번 가볍게 밀치고는 일어서서 문을 향해 =
어갔다. 잭도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가 대합실 건너편에서 꿩?
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에 뛴 것은 바닥에 떨어=
딸랑이였다. 그는 그것을 주워서 잠자는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에?
주었다.
대합실을 빠져 나오면서 몰리가 그에게 말했다.
[좋은 일 하셨네요. 어쩌면 당신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애
요.
[글쎄.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당신에게 잘 보이=
싶어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소.
집까지 몰리를 바래다 준 잭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 택]
한 대가 덜거덕거리며 그 앞에 와서 멈추었다. 그는 뒷자리에 타고는
차문을 닫았다. 길 건너편에 세워져 있는 구형 포드 운전석에서 누군
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 아니 설사
빕가 알았다 해도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른 채 그냥 차를 타고 떠났
을 것이다.
잭이 탄 차가 시야에서 멀리 사리셔 버린 후 포드의 운전석에 앉아
있던 뿔테 안경의 사내가 다저스 야구모자를 벗더니 실내등을 켜고는
녹색 종이가 빼곡히 들어 찬 바인더를 펼치고는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판사님. 주차장 입구로 나가셔야겠어요. 법원 앞에는 기자들이
뜩 몰려와 있어요.
페퍼 루미스는 티투스에게 코트를 건네주며 그의 법복을 받아 나
옷걸이에 걸었다.
[해변 쪽 도로는 괜찮은지 알아보고 오겠어요.
그녀가 문을 향해 막 발을 떼려는 순간 티투스가 그녀를 제지시
다.
[말할 게 있어. 만일 내가 대법원장에 인준이 되면, 대려원에서
께 일했으면 하오.
페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판사님. 하지만 며칠 생각해 볼 여유를 주시면 좋겠
요.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잠깐 멈춰 서서 뒤돌아본 티
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 판시십 ! 제가 그럴 거라는 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티투스는 금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페퍼의 모습이 문 밖으로 사
졌다. 그는 가방 속에 서류 몇 가지를 챙겨 넣고는 접견실로 걸어나
비서인 데이지 깁스에게 인준 청문회 스케줄에 대해 몇 가지 일러
말이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몇 분이 지났다.
둘 대체 페퍼는 어디 있지? 그는 데이지의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그녀의 얘기를 한쪽 귀로 흘려 들으며 서류가방의 손잡이를 쥐었다 놓
았다 하고 있었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는 대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러 라았다. 그때 페퍼가 돌아와서는 그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
다. 그는 가방을 집어 들고는 중절모를 이마 아래까지 눌러썼다. 마치
그 정도면 워싱턴에서 유일한 킬로그램짜리 판사인 자신의 변장이
층분하다는 듯이.
그들이 주차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주차장 증간쯤에 세워진 그의
차가 보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앗다. 그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운 사납게도 모든 게틀
어져 버렸다.
[저기 있다
어떤 여인의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페퍼는 뒤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손
에 든 피켓을 흔들어대며 건물 모퉁이를 돌아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제노비아 데이비스를 기억하각! 두 번 다시는 안 된다! 티투스 판
사를 탄핵하라!
티투스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페퍼가 그의 손
에서 열쇠를 뻣어 들고는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정신을 되찾은 티투스
는 몰려드는 군증을 피하며 마치 덧신 신은 하마처럼 큰 몸집을 씰룩
대며 페퍼의 뒤를 쫓아갔다. 티투스의 차에 다다른 페퍼가 떨리는 손
으로 도어에 키를 꽂는 순간 난데없이 희고 노란 줄무늬가 쳐진 붉은
으
떠리띠를 한 여인이 나타나 그녀의 팔을 처서는 열쇠를 땅바닥에 떨=
었다. 페퍼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둘의 시선이 마치 서로
알고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얽혔다. 페퍼가 열쇠를 집으려고 몸을 =
히자 여자는 열쇠를 발로 차서 차 밑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페퍼는 =
시 그녀를 노려보다가 땅에 엎드려서 자동차의 소음기 아래를 들여
보았다. 키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지점까지 밀려 들어가 =
었다.
그때 티투스가 숨을 헐떡이며 뒤쫓아왔다.
[뭐 하고...... 있는 거야?헉 ! 럭 !
[열쇠요.
그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는 손을 그녀의 어깨에 대고 그녀
옆으로 밀쳐 낸 뒤 양손과 양 무릎을 땅에 대고 턱을 낮췄다. 눈알=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아스팔트에 1
착시키자 시위 군중들이 차 주위로 몰려와 티투스의 살찐 궁둥이를
밀며 차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낙태권을 인정하고 시청 제도를 폐지하라!
티투스의 한 손가락이 열쇠 고리에 닿았다. 그는 그것을 =:'기 쪽_
로 끌어당겨서 마침내 손아귀에 그러월 수가 있었다. 그가 엎드린
세로 용을 쓰는 동안 뭔가가 그의 오른쪽 엉덩이에 닿았다. 손이나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누군가가 머리핀이1
바늘로 찌른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젖혀 그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
나 수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수가 없었다. 열쇠 고리를 손에 쥔 채로 그는 차문의 손잡이를 잡고;
가까스로 두 발로 일어섰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입'
은 바싹 타들어갔으며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윽고 그가 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선 군중들 앞으로 돌아
디 여=들이 그를 향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들은 온몸으로 그
를 꼭짝못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면서도 그더러 떠나라고 요구하고 있
었다.
페퍼는 티투스의 옆에 붙어 서서 성난 군중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물러들 나요!
그녀가 악을 썼다.
머리에 띠를 두른 예의 그 여자가 맞받아 고함을 질렀다,
매신자!
디투스는 군중들 위로 고개를 빼곤 사방을 둘러보았다_
또 한 무리
= 사람들이 빌딩 저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와 마이크....... 기자들이었다.
그는 차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우려 했다. 몇 번을 실패한 끝에야 제대로 구멍에 맞출 수가 있었다.
그는 열쇠를 돌렸다. 잠금쇠가 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도어 손잡이
를 위로 제꼈다. 한 2센티미터나 열렸을까?뒤에서 밀어대는 사람
들의 힘에 밀려 차문은 다시 닫혀 버리고 말았다.
띠투스 판사님!
방송국의 보도 기자 한 사람이 마이크를 쥔 손을 어떤 여자의 어깨
너머로 뻗어 티투스의 목소리를 담으려다가 그만 그의 귀를 찔러 버리
고말았다.
[티투스 판사님! 국회의 인준을 받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카?
티투스는 돌아서서 손을 휘저어 마이크를 치워 버렸다. 그가 그 기
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동안 어떤 여자의 손이 그의 등뒤에
서부터 뻗어 나와서는 손톱이 뺨에 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왔다. 그는
그 손목을 꼭 그러잡고는 그 손의 임자를 확인해 보기 위해 몸을 돌렸
다. 페퍼였다. 잠시 동안 그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의 플래시;
여기저기서 터지자 그는 잡았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볼'
서 뭔가를 떼내어 그가 볼 수 있도록 들어올렸다. 그것은 담배꽁초!
다. 그러고 나서 페퍼는 그의 얼굴에서 아스팔트에서 묻은 흙 부스
기도 털어 냈다.
[낙태에 대한 판사닙의 입장이 대법원장 인준에 걸림돌이 된다_
생각지 않으십니까?
기자 한 사람이 구호를 외쳐대는 군중들의 소음 너머로 악을 쓰
물어 왔다.
[티투스! 티투스!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라! 법원을 떠나 사라져 '
려라!티투스! 티투스......!
티투스는 냉정을 되찾고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냈다. 자동 녹
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뺨에 묻은 담뱃재나 흙 부스러기에는
경도 쓰지 않고 연신 이마만 흠쳐대고 있었다
[티투스 판시님 !
어떤 기자가 외치면서 꿔라고 질문을 했지만 다음 말은 군중들이
쳐대는 구호소리에 묻혀 버렸다.
[교수형을 철폐하라! 낙태권을 보장하라! 티투스 ! 티투스!
티투스는 손을 들어 군중들을 제지하는 동작을 취하고서는 외켰다
[여러분 제발....... 저는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제 입장을 명백히 .
완전히 표명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기쟈들의 질문
군중들의 함성이 뒤섞였다. 그는 다시 차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
다. 이번에는 있는 힘껏 문을 당겨 간신히나마 운전석에 비집고 들
갈 수 있었다.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은 후 발을 브=1이크 페달에 얹었다
[오,주여!
시위 군중 중에서 한두 샤람이 차에 깔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차를 천천히 후진시키닿가 이내 전진 기어로 바꿔 넣고는 데모
대를 지나 효으로 나아가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시위 군중들 몇
명이차 옆으로 달려들며 손바닥으로 차체와 범퍼를 때렸다.
마침내 차는 주차장을 빠져 나와 거리로 들어섰다.
그러고 나서 몇 블록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페퍼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괜찮을 거라고 단정을 내려 버렸다. 아
까의 성난 군중들도 모두 억자들이었는데 설마 같은 여자인 페퍼를 어
떻게 하겠느냐는 자기 핀한 대로의 비겁한 단정이었다.
티투스는 잠을 자다가 갑자기 깨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슴은 쿵
쾅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으며 고열 때문에 어질어질했
다. 그는 몇 차례의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스텐드의 시
계를 집어 들었다.
2시 침분이었다 그는 시계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똑바로 눕다가
'뚝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나 앉았다. 불을 켜고 한 손으로
는 이불을 밀치고 다른 손으로는 잠옷 바지를 벗으며 통증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살펴보았다. 오른쪽 엉덩이였다 아까 뭔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던 그 부분에 공깃돌 크기의 작은 돌기가 하니
붙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만져 보면서 그것이 무얼까를 생각해 보다
가 티슈를 꺼내어 앞이마를 닦았다. 그러고 나서 불을 끄려고 손을 뻗
다가 스텐드 아래에서 체리 초콜릿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서 입
안애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불을 끄고 나서 다시 침대에 누워 열병 같은
잠애 취해 들어갔다.
한 발짝. 한 발짝씩. 저 1952년도, 시카고의 크리스마스까지, 과
로 되돌아가는 계단을 내딛으며......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벗은 발을 조심스레 내딛으며 애브너는 조
계단을 내려왔다. 이층 층계참에서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삐걱대
소리를 내고서는 그는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그리고 새장을 꼭 잡_
서는 이층 부모님의 침실에서 어떤 기척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잠시
다려 보았다. 서재에 있는 괘종시계의 종이 두 번을 울렸다. 그리곤
시 집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까치걸음으
아래층까지 내려왔다.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현관 유리창으로
어 들어온 반사된 눈및이 큰 거실로 가는 복도를 비춰 주고 있었다.
눈[] 빛으로 벽난로 옆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의 형체도 분
할 수 있었다. 그는 전기 코드를 꽂았다. 색색의 전등에 불이 들어오_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물과 포장된 선물 꾸러미들이 환히 그의 눈압
드러났다. 그는 별세계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애브너는 새장을 부_
님의 눈에 쉽게 뭘 장소에 놔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
다. 그것은 그가 오늘을 위해 여러 날에 걸쳐 공들여 만든 것이었=
철망에는 붉고 횐 페인트칠을 했고 작은 놋쇠 경첩도 문에 달아 놓
다. 새장 속에는 빗자루에서 짚을 잘라 내어 등지를 만들어 넣었고
지 속에는 마치 알처럼 보이도록 푸른 구슬도 하나 집어 넣었다. 그
부모님께 드릴 그 새장을 다른 선물 꾸러미들 앞에다 놓았다. 그러_
나서는 뒤로 물러서서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마련한 선물'
마치 군악대의 지휘자처럼 멋져 보였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
고 좋아 날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 아빠일걸! 그는 흐뭇했다. _
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작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전;
코드를 뿜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층 부모님의 침실문이 열리.
소리였다. 그는 소파 뒤에 있는 선반 아래로 몸을 숨겼다. 거기서 그는
무릎을 가슴 앞에 모으고 양팔로 정강이를 감싸 안고는 두 눈을 감
은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자국소리가 났다. 아빠였다.
그 소리는 곧장 어두운 거실로 향해 와서는 카팻을 지나 탁자 옆에
서 멈춰 섰다. 유리병 부덧치는 소리, 브랜디를 잔에 따르는 소리, 술
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 가죽 의자의 버스럭대는 소리......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또 한 사람
의 발자국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스위치의 찰콰 하는 소리. 방이 밝아
졌다. 어떠니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 케이스를 여는 소리
찰칵하는 라이터 켜는 소리, 어머니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허브, 이 문제를 갖고 얼마나 더 다튀야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신과 애브너를 버리고 떠나려는 게 아니잖소. 워싱턴은 외로운
곳이오.난 당신과 아이가 무척 보고 싶을 거야.
[오,제발, 여보! 우리는 어쩌라구요?
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가죽 의자가 걱거렸다
[날좀 믿어 줘. 헬렌. 난 그떻게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잖소?
또 한 차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애한테 잘해 주신 게 꿔 있어요......? 처음부터 당신은 애
낳는 걸 반대했잖아요.
[내가?당신은 어쨌고...... 애를 낳은 건 당신 결정 때문이었잖아.
내가 아니라구.
[내 결정이었다구요? 아니 그럼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단 말예
요?나도 원해서 애를 낳은 건 아니었잖아요.
[이보=구! 의사가 수술 준비를 다 갖춰 놨는데도 당신은 거부했잖
아?
[에반스빌의 그 작자 말이에요?그자가 의사라구요?그잔 도살업]
였다구요.그런 돌팔이한테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소리 ! 내 나름대로 그자에 대해 다 알아봤었어. 당1
이 어쩌다 아일 갖게 됐는지 한 번쯤 생각이라도 해봤더라면, 기꺼=
그 정도 위험은 감수했어야 했을 거 아냐?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이 갛딜았다.
요 '당신 정말 치사한 사람이군요.
어머니가 나직이 내뱉었다. 브랜디잔을 내려놓는 소리, 크리스털
털이에 담배꽁초를 비벼 1는 소리가 들렸다.
[휴 -,2시가 넘었군요.자러 가야겠어요.
어머니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 갔다. 브랜디잔이 탁자에 놓여지;
소리가 나고 불이 커졌다. 아버지의 발자국소리.....
이어서 이층 침실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이제 사'
은 적막에 휩싸였다. 오직 창 밖에 눈 내리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애브너는 꼼짝 않고 앉아서 자신의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
다.
'꿈이었을 거야.'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난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어. 그냥 엄마 아빠가 말다
하신 거야.횡설수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가며.......'
한 순간. 그는 스스로의 억지에 납득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_
잠시였을 뿐 부모님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되살아'
다.
'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라 도살자...... 어쩌1
임신을 했는지 생각해 봐.......'
공포의 전율이 그의 정수리부터 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그도 여.
어쉰아이들처럼 부모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던 날
=.땐 괴로운 생각에 시달렸었다,
'누. 필요 없는 아이야. 여기 있어선 안 돼. 부모님은 널 사랑하지 않
아.'
이제 그 끔찍했던 망상들이 모두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정캉이를 감싸 안고 앉은 채로 몸을 앞뒤로 흔들어 가며 울고 있었다.
몇 분 뒤, 그는 선반 아래서 기어 나와 크리스마스 트리 쪽으로 가서
는 새장을 집어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 층계참에 이르렀을 때 또
한가지의 생각이 떠올라 그만 질식할 것 같았다. 불을 밝히고 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부모님은 자기의 선물을 알아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터벅거리며 계단을 마저 올라가 깜깜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선 이
불아래로 기어들어갔다.
한동안 천장을 바라다보다가 바딕을 내려다보니 자기가 몇 날을 걸
려 공들여 만들었던 새장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왔다. 몇 분 전
까지만 해도 자부심의 상징이었던 그것이 이제는 그의 어리석고 빗나
간 가족애()를 비웃듯이 반사된 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
었다. 그는 침대에서 구르듯 빠져 나와 새장을 집어 들고는 벽을 향해
세차게 내동댕이쳤다. 그것이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가 부모님의 잠을
깨우리라....... 그건 애브너가 바라는 일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올라오시길 바랐다. 부모님이
화를 내며 무슨 짓이냐고 다그쳐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주리라, '난 이제 당신들의 더러운 비밀들을 다 알게 됐어요.'그러면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했다고 말하리라....... 용서를 비는 그들
의 애원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
리라.......
애브너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슨바
.
닥에서 뭔가 끈끈한 촉감을 느끼고는 침대 스텐드를 켰다. 손가락
길게 베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티슈를 꺼내려 손을 뻗치다가
는 티슈 상자 속에 뭔가가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상자를
어 올려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그것들이 있었다.
그의 비만한 어린 몸에는 금지됐던 독약(?) 오랫동안 주위 어른
에 의해 먹는 것이 금지되어 이제는 거의 잊어버릴 뻔했던 그가 그
게도 좋아했던 은박으로 싼 체리 초콜릿이 여섯 개나 들어 있었던
이다. 그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는 불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러고 나서는 눈물과 콧물을 훌쩍거리며 그것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
다.
하나씩...... 하나씩.......
기
나
이스트 강의 다리 위를 지나며. 잭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브루클린으로의 여행은. 몰리에게는
_녀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곶으로 떠나는 탐험 같은 것이
었다. 한편 잭은 껍질이 깨진 날계란을 굴리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할수가 없었다.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잭은 오션 거리 쪽으로 차를 돌려 플랫버쉬의
흑인 거주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이제는 무너져 내릴 듯 낡아 버린 목
조 건물들이 양쪽으로 들어선 거리 한쪽 모퉁이에 잭은 차를 세웠다
몰리가 앉은 오른편으로는 빅토리아 풍의 낡은 가옥이 한 채 있었다.
바로 그곳이 잭이 태어나 자란 곳이었다. 벽에 칠해졌었던 초록색 페
인트는 이제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기와가 먹러 장 떨어져 나간 경사
진 지붕과 11월의 듬성듬성한 잔디와 말라 버린 잡초들...... 모든 게
변한 것 같으면서도 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은 누가 여기 살고 있죠?
몰리가 물었다.
[모르겠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그러니까 12년 전에 팥아
버렸지. 어쨌든 한번 알아나 보자구.
그가 차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들은 나무로 된 현관으로 올라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회색 머리칼의 여자 얼굴이 현관 유리창 인
쪽에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그들을 살펴보더니 문을 조금 열었다.
[성가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바로 이 집에서 어린 시절
을 보냈습니다.그러니까 이 동네가 바로 제.......
[매클라우드 하원의원이신가유?
[그떻습니다만?
[자, 어서 들어오슈.
여인이 문을 열었다.
[이웃 사람들이 그러더구만요. 한때
잭은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댁이 이곳에 살았었다구요.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려]
순간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다 눈에 익었지만 첸지 =
것들 모두가 전부 작아진 것 같았다.
[저는 몰리 맥코믹이라고 합니다.
몰리가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한번 둘러보실라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서 그러슈 내 남편과 나도 몇 년 전에 조지아 옛집에 찾아갔?
적이 있었다우.그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여인은 말끝을 흐려 버리고는 자기는 부엌에 할 일이 있다며 편'
음으로 집을 구경하라고 말했다.
잭은 거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괘종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 오는
했다. 오크로 짜여진 벽난로가 옛 모습 그대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옆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낱말 퍼즐을 풀던 아버지의 환영이 보이는
같았다. 양발을 까끌까끌한 발판에 올려놓고 몰리는 아무 말 없이
집안을 번갈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쓰던 방을 보여 줄게.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참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층계 꼭대기에 이
르걱 잭은 머린 시절 버룻대로 환간의 나무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그가
방은 지금은 0대 소녀의 방이 딕잇 있었딪.소녀익 침벼꽈 잘잘
한 소지품들을 보면서 잭은 순간적으로 갈피를 못 잡았으나 잠시 후,
십던 깨끗한 침대와 자기의 지저분한 침대, 어머니가 손수 만드
신 누비이불, 천장에 달린 모형 비행기, 그리고 페넌트, 포스터. 레코
드 앨범 표지 등으로 뒤덮였던 옛날 그 방의 풍경이 그의 눈앞에 선하
게 떠올랐다. 잭은 문 옆에 달린 전등 스위치를 켰다 옛날에 그가 거
울 한 모서리에 붙여 놓았던 파이퍼 로리의 사진이 아직 붙어 있기를
기대하면서...,... 정말 기막힌 여배우였지. 그는 매일 밤 자리에 들기
전에 사진 속의 그녀 팜을 어루만지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었다.
만일 자기가 이토록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안다면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그고에게 청흔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이라는 달콤한
동상이었다.
그는 하니를 떠올렸다.그녀와 주고받았던 앞날의 계획들..-... 시골
로 내려기 결흔해서 아이들을 낳고, 갈색 눈동자에 금빛 털을 가진 순
종 리트리버도 한 마리 키우자고 했었지. 멋진 왜건을 타고 참나무 잎
이 수북이 땋인 한적한 들길을 따라 외출했다 돌아오면 화강암으로 세
운 굴뚝 위엔 저녁 연기가 파랗게 피어 오르는 그런 시골에서 행복하
게 살아 보자던 그들의 꿈. 어느 땐가 함께 보던 잡지책에 나와 있던
광고 그림이었지만 그때 그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새밌군. 그 꿈들 중 일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이들
을 낳자던 꿈.......'
잭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파이퍼 로리를 단념했던 순간을 회상해 보았다. 물론 하니에게
흘딱 빠져 버린 것이 그 원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어느 날 야구시함을 하던 중이었다.흠으로
달려오며 그는 응원단 맨 앞 줄에 서 있던 하니를 보았다. 미소를 함빡
머금은 얼굴로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널 사랑해'라고 하던 그녀.그
는 온몸이 불 붙는 듯한 욕망을 느꼈다. 그때껏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
다. 어쩌면 평생 두 번 다시 느껴 보지 못할 느낌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의 회상은 어머니에게로 옮아 갔다. 자식들에게 괜지 힘을 불어넣]
주는 듯한 딸기멎 머리....... 그 자상하던 어떠니의 미소......, 관 속=
누워 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생소했었다.
암으로 찌들어 무섭도록 튀어나와 있던 광대뼈, 매일 밤 키스를 8
주던 그 통통하던 입술은 그저 두 줄기 잿빛의 얇은 선으로 움츠러=
어 있었다.
[똑똑.
몰리였다. 그는 회상에서 깨어나 그녀의 팔을 잡았다
고들은 주인 여자가 주방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그녀와 몇 마디를 나누고는 고맙다는 인]
를 남기고 그 집을 나섰다.
잭이 마음 속에 정해 두었던 다음 목적지는 플벗버쉬 고등학교였드
그는 학교 앞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차에 탄 채로 몰리에게 고등학;
시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얘기해 주었다.
댄스 파티...... 첫번째의 주먹다짐...... 서점에서 책을 흠쳤다고 ]
학당한 친구...... 임신한 아내를 먹여 살리려고 식당에서 웨이터로 '
하던 프레디......
몰리가 하니에 대해서 물었다. 잭은 하니를 안았던 날과 그녀가
신했다고 얘기했던 날들의 기억에 대해 애기해 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죠?
잭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상점들과
교회들을 지나 로베르티니 구두 수선 가게 앞에 멈췄다. 그는 그 가게
에서 돈을 흠치게 된 까닭과 도둑질하던 그때의 행동과 심정. 그리고
그날 중으로 돈을 도로 갖다 놓았던 일 등을 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
다.로=1르티니 영감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나서도 너그러이 용서해
줬었다.
이제 잭은 서쪽을 향해 차를 몰앗다.그는 몰리에게 루보프네 집에
서 정기적으로 벌어졌던 도박판에 대해 애기하면서 그 장의사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이렇다 할 추억이 없으니 둘러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몰리는 별다른 추억이 없던 고등학교 요에서도 멈췄었는데 한번
들렀다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그는 계속 차를 몰아댈 뿐이었다
코니 아일랜드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거닐었다. 몰리는 스카프를 둘렀고 잭은 옷깃을 세웠다. 그는 프레디
앤티콜리와 로마노 식당에 관해서도 또 프레디의 돈을 세 배로 불려
주려고 애싱게 된 사정에 판해서도 애기했다. 그러나 어떻게, 어디서
그가 하니의 죽은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
다. 그 이야기는 26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입 밖으로 꺼내기에
는 너무나 처절했다.
둘은 로마노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서 파스타와
포도주를 시켜 놓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웨
이터가 번호를 적어 넣은 쪽지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가져 왔다. 그리
곤 만일 아무 번호든지 그녀가 추측한 숫자와 바구니에서 집어 낸 쪽
지의 숫자가 일치하면 저녁 식비는 식당측에서 부담한다고 몰리에게
말했다.
.
몽리는 숫자를 외치고선 바구니 속으로 손을 넣어서 쪽지 하나를 커
냈다.
'12'였다.
[야. 비슷했군.
[비슷한 것 정도로는 안 돼요.맞출 때까지 계속해야 돼요.
몰리의 말에 가슴이 괜지 벅차 올랐다. 정문을 향해 나가다가 그들
은 사람들이 아코디언, 트럼팻, 드럼 등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흘을
지나치게 됐다. 잭은 몰리의 팔을 잡고 끌어들여서는 춤을 추었다. 음
악이 끝나자 잭이 말했다.
[늘 이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갔다. 잭은 텅빈 홀에 서서 몰리에게 키
스를 했다. 키스가 끝나자 그는 몰리의 어깨 너머로 포도주 병을 앞에
놓고 손을 맞잡고 있는 노부부를 보았다. 그들은 그에게 미소를 보너
왔다.
[집에 갑시다.
몰리는 그의 옷깃을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이직 안 돼요. 우선 나는 당신이 빼먹고 들려 주지 않은 얘기를 들
어야겠어요. 당신과 하니 그리고 그 장의사 집에 얽힌 얘기 말예요.
아무렴. 언제나 기자들이란 빠진 부분을 찾아내고 그걸 채우려고 이
성는 법이지. 그러나 그는 벌써 도둑질에 대해서까지 애길 해줬는데
그녀는 뭘 더 바라고 있는 걸까?
[오늘 밤엔 안 돼.
그가 말했다.
그들은 차를 타고 맨해튼을 향해 달렸다. 마치 모든 대화거리를 =
써버린 듯이 둘 사이엔 거의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실히 효과가 있는 법이다. 이스트 강에 다다르기 직전 잭은 갑자기
꺾더니 몇 개의 골목을 구불구불 지나서는 루보프 장의사 건물
차를 세웠다. 그는 시동을 켜놓은 채, 건물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
고등학교 시절의 모든 추억들 가운데서도 죽음처럼 가장 처절했던
서린 그 건물은 그 오랜 세월 동안에도 전혀 외양이 변하지 않
것 같았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2시 0분이었다. 잭은 엔진을 꼈
그러고 나서 자신과 하니에게 얽힌 모든 애기를 몰리에게 들려주
었다.그가 알고 있는 모든 얘기를.......
들이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땐 새벽 1시 30분이었다. 잭은 저고리
를 벗고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믈리는
그에게 위스키를 한 잔 가져다 주고 자기는 포도주잔을 들고는 맨발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그의 옆자리에 기댔다. 잭은 신발을 벗고 쟤신의
발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발가
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자신의 한쪽 발을 그녀의 다리 위비 올려놓
고는 부드럽게 움직여 나갔다. 그환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 바로 그곳
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몰리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한 손을 얹고
서 가볍게 키스를 해왔다. 잭은 탁자에서 발을 내리고 양팔로 그녀를
끌어안고는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그의 능숙한 손길이 그녁의 맨다리
를 쓰다듬었다.그리고는 그녀의 허벅지로....... 그녀의 드레스를 허리
까지 말아 올리고는 그녀의 보드라운 배 위에 머울렀다가 이윽고 더
아래로 내려왔다.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그의 손가락들이
그녀의 팬티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녀가 갑자기 키스를 멈췄다.
[미안해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몰리는 그를 부드럽게 밀쳐 내고는 일어서서 치마를 다시 내리고 거
=
실에서 걸어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잭은 어리등절한 표정으로 피스타
치오가 담긴 그릇을 쳐다보고 있었다. 70년대의 젊음을 그리워하고 있
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이린
언제나 쉽지 않은 것이니까. 그는 그릇에 손을 뻗어서 피스타치오 힌
알을 집어 들고는 껍질을 까서 입 안에 던져 넣었다. 다섯 개나 그렇='
먹고 있었을까? 그는 자기 뒤쪽의 마룻바닥에서 삐거덕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몰리가 서 있었다.가운 앞자락은 풀어헤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은 그의 두 눈에 똑바로 고정5
어 있었다. 용기가 있으면 마음껏 자신의 몸을 감상해 보라는 도전=
인 눈빛이었다. 일단 그녀의 몸에 눈길을 주고 나자 잭은 도저히 거?
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몸이었다. 좁은 가슴 밖으로 터=
듯이 솟아오른 두 개의 젖무덤, 잘록한 허리, 부드럽게 굴곡을 이룬 =
살 하나 없는 아랫배, 그 아래 둔덕은 알맞게 도드라져 올라와 있었]
그 둔덕 아래에는 만지고 느낄 수는 있어도 눈으로는 다 볼 수 없는
은밀한 부분이 벨벳처럼 부드러운 수풀에 가리워져 있었다.
여태껏 그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여인처럼 자기 몸에 대해 수줍0
하지 않은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대담함이 그의 몸 속에서 =
자고 있던 사내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
서 소파 위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
으로 헤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을 향하도=
그의 머리를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입 언저리
입술을 부딪혀 왔다.
[지금은......, 안 된다고 그랬잖소엾
[그랬죠.하지만 그건 이미 지금이 아니라 그때죠.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잭은 그녀]
=. 벗겨 냈다. 몰리는 그의 아랫도리 지퍼를 내렸다. 그는 발로 차
가며 바지를 벗어 버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셔츠 속으로 들어 왔
가슴에 닿았던 손길이 배 아래로 더듬어 내려가서는 뒤로 돌아가
히프를 더듬다가 다시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상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숨결이 도발적인 근육 위에서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잭은 릿어발기듯이 셔츠를 벗어 버렸다.
소매가 훌렁 뒤집어졌다. 그는 그의 몸 아랫부분에서 그녀의 머리카락
이 마치 바람 부는 다갈색의 밀밭처럼 일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는 그녀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받쳐 일으켜 세우고는 천천히 두 사람의
몸 움직임을 맞춰 가면서 그녀의 몸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갔다.
몰리는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일제히 일어서는 느낌으로 그를 받
아들이고 있었다. 잭은 조금의 먹유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몸을 힘껏
그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으-윽.
몰리의 입가에서 뜨거운 신음소리가 번져 나왔다.두 남녀의 몸 동
작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둘은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 속에서 서
로의 몸을 거칠게 몰아댔다.
[오오오...... ,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절정에 달한 환희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헉 !
곧이어 그 역시 마지막 숨을 토해 냈다.
에그즈 베네딕트와 빌리 배니스터는 베네딕트의 녹색 포드에 앉아
서 불이 밝혀져 있지 않은 골목길을 쳐다보았다. 도로만 하나 건너면
바로 병원 건물의 후면이었다. 베네딕트가 시계를 찬 손목을 들어올려
그 위에 작은 플래시를 비추었다.
새벽 1시 5분 전.
둘은 검은 장갑을 꼈다. 베네딕트는 검은 폴라 셔츠와 검정색 땀복
차림이었고 배니스터는 짙푸른 재킷과 청바지 그리고 검은색 털모지
를 쓰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일을 도모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차림
이었다.
베네딕트가 쌍안경을 들어 그 초점을 병원 뒷문에 맞췄다.몇 초 뒤.
문 옆의 창문에서 불빛이 사라지더너 어떤 남자가 양 어깨에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하나씩 언고 그 문에서 나타났다. 남자는 쓰레기 하치장에
다가 지고 나온 통들을 던져 넣고는 붉은색 트럭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트럭은 예의 시끄러운 '툴툴꺼리는 소리를 내며 들썩거렸다
한쪽 헤드라이트는 고장난 상태였다.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두 남자는 더 이상 그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 여러 밤에 걸쳐-
다른 위치에서 관찰을 해왔기 때문에 그 트럭이 어디로 가는지 알오
1었다. 일단 샛길로 나서서는,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나라나
는 애틀랜틱 대로를 타고 사라져 버릴 터였다.
[자, 가자구.
베네딕트가 말했따 그들은 뛰어내려서 차의 뒤 트렁크를 열었다.
딕트는 접혀진 알루미늄 사다리를 꺼내어 둘러메고는 병원을 향
해 골목길을 내달았다. 낙하산 천으로 된 검은 가방을 쥔 배니스터가
그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병원 건물에 다다르자 베네딕트는 잽싸게
사다리를 펴고 처마로 기어올라가서 평평한 지봉 위로 내려섰다. 그리
고는 검은 가방을 건네받으며 한 손을 뻗쳐 배니스터를 끌어올렸다
그들은 주변의 지형 지물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23미터쯤 전면에 환
기통이 1미터 가량 되는 높이로 지봉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배니스터
는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연 후에 60센티미터 길이의 아연으로 도금
된 파이프를 꺼냈다. 베네딕트는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서 파이프 한쪽
끝에 타이머를 테이프로 붙이고는 타이머의 자판을 15분에 맞추었다
그다음 플래시를 끄고 그 파이프를 마치 포신()에 포탄을 장전하
듯이 배기통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파이프가 배기통 안으로 완
전히 미끄러져 들어가자 이번에는 파이프 한쪽 끝에 연결된 전선을 슬
슬 미끄러뜨리며 풀어 주었다. 마침내 파이프가 어딘가에 닿았는지 더
이상 전선이 딸려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그는 남은 전선을 배기통 속
에 모조리 밀어 넣고는 배니스터의 어깨를 툭 쳤다
[됐어.빠져 나가자.
지상으로 내려온 그들은 단숨에 자동차까지 달려왔다, 그리곤 앞좌
석에 앉아서 잠시 주위의 기척을 살펐다. 그들 자신의 숨소리를 빼놓
크는 사방은 모두 조용했다. 마침내 베네딕트가 차를 후진시키려는 자
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우린 해냈어 !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가자구!
털모자를 벗어 쥐고 얼굴에 범벅이 된 땀을 닦으며 배니스터가 재촉
했다. 차는 조금 뒤로 꼬리를 뻤다가 도로로 들어서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게 꿔지?
갑자기 배니스터가 외쳤다.베네딕트는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후진해 !
배니스터가 말했다. 베네딕트는 후진 기어를 넣고 처음 서 있던 곳
으로 돌아왔다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병원 뒤편 건물의 어떤 창문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어 !
배니스터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그가 떠나는 걸 너도 똑똑히 봤잖아?
베네딕트가 따지고 들었다.
[저 불은 지금 막 켜졌단 말이야.
배니스터의 애기에 베네딕트는 기어를 주차로 넣고 브레이크 페딜
에서 발을 메고는 전조등을 꼈다. 그들은 병원 건물을 주시하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어쩌면 자동으로 작동되는 전등인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여길 몇 번이나 와봤었는데? 에그즈! 지금
면 지난 번에도 봤어야 말이 되잖아.
작동되는 거
[저게 작동되기 전에 떠나서 못 봤을지도 모르잖아?
[오늘보다 더 늦은 시간에 와본 적도 있었다구.
베네딕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위가 나온 다음에는 늘 아무도 없었는데, 대체
누가 지금 이=
시간에 꿔 하러 저기 남겠어?
배니스터는 공포의 전율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
입술에 침을 적셔 가며 말했다.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한번 알아보기는 해야지.
베네딕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배니스터는 차가 움직이기를 기다
리며 뚫어져라 앞쪽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베네딕트를 향해 소리쳤다.
[뵐 기다리고 있는 거야?
베네딕트는 마지못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병원 주차장을 향해 차를
출발시켰다. 모퉁이를 하나 돌아 그 앞에 다다르자 헤드라이트를 끄고
는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차는 병원의 뒷문 맞은편으로 슬슬 길
러가서는 유턴을 해서 요부분이 거리를 향한 상태로 멈춰 섰다. 시동
은 끄지 않은 상태였다. 둘은 불이 밝혀진 창문을 열심히 들벅다보았
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배니스터가 말했다. 그는 차문을 열고는 오른발을 아스팔트 위에 내
디딨다. 베네딕트가 그의 웃도리를 낚아랬다,
[미켰어, 임마?그게 곧 폭발할 거란 말이야.
[아직 시간은 있어.
[있기는 무슨! 이제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하지만 저 안에 사람이 있다구!
[그래도 너무 늦었어! 설사 우리가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해서 나온다
고 할지라도 폭탄이 터지게 되면 나중에 그걸 어떻게 감당할래?
배니스터는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잠시 앉아 있다
가 다시 차문을 열어제치고는 오른발을 밖으로 내디딨다. 베네딕트는
여전히 그의 점퍼를 붙들고 있었다 배니스터는 결단을 내렸다.
[환기통에서 그걸 끄집어올릴 테야!
[그렇게 할 수 없어. 바보야! 내가 남은 전선까지 다 밀어 넣어 버
렸단 말야! 손이 닿지 않는다구!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봐야겠어!
배니스터는 차문 밖으로 몸을 내던지려 했다. 베네딕트는 그를
뒤로 잡아당기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뒷바퀴가 자갈돌들을
겨 냈다.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기면서 차는 거리를 향해 달려나갔다.
바람에 열려 있던 앞 문짝에 배니스터의 정강이가 세게 부딪혔다
는 오른쪽 다리의 격심한 통증으로 온몸을 오그리면서 양손으로 다
부분을 감쌌다. 차는 주차장 출구 안벽을 긁으며 내달렸다. 노란 불
이 튀겨져 피어 올랐다. 거리로 나서자 베네딕트는 왼쪽으로 핸들
꺾었다 원심력 때문에 배니스터 쪽의 앞문이 다시 열렸다가 도로 _
지판에 부딪척서는 다시 쾅 하고 닫혔다. 모퉁이를 급히 돌아선 그
의 차는 애틀랜틱 대로를 타고 무시무시한 속력을 내며 달려 나갔
부동산 사무소, 세차장 그리고 수노코 주유소를 지나치며...... 수노
주유소...... 그곳에서는 뒷문에 녹이 슬고 한쪽 헤드라이트가 고장
붉은색 트럭이 급유를 받고 있었다. 4분 후 그들은 먼 거리에서 강
폭발음을 들었다.
동트기 전 새벽 무겹, 현장은 벌써 일반인 출입 금지가 되어 있었
경찰 관계자들과 허가증을 소지한 기자들만이 병원을 분주히 들락
렸다. 뉴욕 경찰청의 강력계 형사들이 단서를 찾기 위해 건물의 파
들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이 출입금지 표지로 둘러쳐 놓
노란색 테이프 뒤에는 불시에 날벼락을 맞은 이웃 주민들이 가운과
셔츠 차림으로 시린 새벽 공기에 덜덜 떨면서 모여 있었다. 모두 다
사한 것 같았다.모두 다......? 줄리아 로드리게스를 제외한 모두 다
그녀는 남편의 청소를 도와주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편이 수노코 주유소로 차에 기름을 넣으러 간 동안 혼자 남아 병원
'1에서 샤워중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 반장은 자기 차의 앞자리에 앉아 메모지 위에
를 적어대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그녀의 남편. 로드리게스가 얼굴
양손에 파묻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한 경관이 자동차 유리
두들겼다. 반장은 차 유리를 내리고 그 경관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
을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이 주차장에서 이걸 발견했답니다.
경관은 조금 열린 차 유리창 속으로 검은 털모자를 밀어 넣으며 말
했다 반장은 그걸 받아 쥐고는 불빛 아래로 가져다가 자세히 살펴보
았다. 모자의 겉면에는 오렌지색으로 '세인트 이그나티우스 타이거스'
라고 새겨져 있었고, 안쪽에는 빌리 배니스튜의 아내, 도리스가 정성
실로 수놓은 이름이 하나 있었다.케빈....... 그들의 억섯 살바기 아
들의 이름이었다. 반장은 모자를 옆에 내려놓고는 다시 뭔가를 메모지
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형이 닭털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것처럼 어둠 저편에서
오른 아침 햇살이 잭의 닫힌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그는 똑바로 누우
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낯선 천장을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
있었다. 빅토리아와 함께가 아니었다. 이곳은 어딘가 다른 곳이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근캐7
드문드문 박인 콧잔등과 화장기가 남아 있는 눈 주위로 아무렇게나
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그광는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한=
팔꿈치를 세워 윗몸을 일으키고는 그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는 허리까지만 덮은 시트 위로 다리 하나를 내놓고 있었다. 그의 평.
시 잠버릇과 똑같았다. 그는 그 우연의 일치가 흥미로웠다. 잠시 그=
이것이 우연의 일치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흐트러지고 말았다. 시트 밖으로 드러난 몰리
한쪽 다리가 그려 내고 있는 절묘한 곡선미가 어젯밤의 기억을 불러
으키며 몸의 한쪽 부분을 달아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7시 30빌.그는 흥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늦겠군.토요일인데......
방안 공기는 차가웠다. 그는 시트를 그?의 목덜미카지 끌어올려 바
람이 들지 않도록 단정하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뒤에서
양팔로 그녁를 안으며 한쪽 유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때 그녀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살며시 그의 손을 치워 냈다. 그리곤 잠에 겨운 듯
한목소리로 말했다.
[손난로가 필요하면 당신 걸 사용하세요.
그는 빙긋 웃으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아침 식사로 뭘 즐겨 먹는다?'
[토스트와 커피요.
그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했다. 그는 절반쯤 잠들어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와 자신이 뭔가 영적으로 통하
는사람들인 것처럼 느켜졌다.
그는 바지를 찾아 입고는 맨발로 주방으로 들어가 선반 위와 작은
냉장고 안을 뒤졌다.
[커피가 떨어진 모양인데?차를 마시면 어떻겠소?
그가 침실에 대고 소리쳤으나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온 부억을 헤집고 나서야 오렌지와 계란 프라이. 약간 탄 토스트,
버터와 잼 그리고 차 한 잔을 얹은 작은 쟁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신이 멕시칸 계란 요리를 좋아했으면 좋겠소.
그는 쟁반을 든 채 침실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몰리는 돌아누워서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커피가 없더라구.그래서 차를 끓였는데 괜찮겠소?
몰리는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와, 아직도 잠에 취해 비척거리며 욕실
로 들어갔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침대 끝에 서서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어머, 이런, 커피가 없잖아요?
"칼
[이봐, 커피가 떨어지고 없더라구. 차라도 마실 거야 말 거야?
그녀는 침대를 빙 돌아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와서는 몸을 수
그려 그의 귓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차는 당신이나 마시라구요.
그는 후다닥 그녀를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쟁반에 담겨 있던 음식
들이 시트 위로 엎질러지며 뒤섞였다. 잭의 팔꿈치와 몰리의 등판은
음식물로 범벅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일
았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 .그리고 꼬분쯤 지났을까?
몰리는 버터로 찐득찐득한 손을 뻗어 수화기를 잡았다
.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숨찬 소리였다. =
화를 걸어 온 사람은 그녀의 인 팀 벤튼이었다. 잭은 그녀의 벌?
벗은 엉덩이에 붙은 계란 조각을 떼어내 그녀의 입에 밀어 넣으며 '
난을 걸었다. 그녀는 그에게 탁자 위의 연필을 가져다 달라는 시농1
급하게 해보였다.
[어젯밤 산부인과 병원이 누군가에 의해 폭파됐대요.
그녀는 잭에게 작은 소리로 그렇게 말해 주고는 날짜 지난 신문
귀퉁이 여백에다가 뭔가를 받아 적었다. 그러면서 토스트 몬 입을
어물고는 손에 묻어 있던 버터를 혀로 닳았다.
[세상 모든 일이 버터와 섹스로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송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그녀가 잭에게 웃으며 속삭였다. 잭은 토=
트를 한 조각 입에 넣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리모콘]
로 텔레비전을 켜고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만화 영화, 과=
광고, 장난감 광고....... 그러다가 볼 만한 프로를 찾아냈다. 금주=
'미식 축구 하이라이트'였다. 몰리는 텔레비전을 힐끔거리면서 와
통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카메라 기자도 같이 가는 거죠?기왕이면 알프레드와 같이 가면 좋
겠는데.......
...... 게임 종료 2분을 남기고 오하이오팀이 극적인 동점을 이루어
냈습니다.
화면 속의 해설자는 짐짓 열을 올리고 있었다
[좋아요.병원 위치가 어디쯤 되죠?
그녀는 병원의 주소를 받아 적고는 텔레비전을 지켜보았다.
......정말 기막힌 트릭이었습니다. 상대 팀은 꼼짝못하고
말았죠.
당하고
[잠깐만 기다려 줘요.팀 ]
몰리는 송화기를 귀에서 떼어 내고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
기 시작했다.
..... .수비수들의 시야를 흐트러뜨리곤 그들의 머리 위로 자기편 공
격수에게 절묘한 패스를 해서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것입찍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송화기를 귀에
다 대었다.
[팀. 가능한 한 빨리 현장으로 갈게요. 참. 이기 핏트 좀 불러 주시
겠어요? ......네. 맞아요. 그 수습 사원요. 현장 실습할 절호의 기회라
고 일러주세요.
그녀는 전화기를 어깨에 얹은 채 턱으로 누르고는 스위치를 눌러 전
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전화번호 수첩을 뒤져서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
그녀는 자동응답기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엘리엇. 나 몰리예요. 인정하기 싫지만 당신이 옳았어요. 그 사라
진 간들에 관해서 말예요. 사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범인들
이 간을 빼내어 버린 게 틀림없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실제로
행했던 수술을 은폐하기 위해서겠죠. 그나저나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연락 주세요.
몰리는 전화를 끊었다. 엘리엇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간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그를 배신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좀 나가 봐야겠어요.
1녀가 잭에게 말했다.
잭은 어질러진 그릇들을 쟁반 위에 챙겨 담고는 주방으로 가져 갔
. 그 동안 그녀는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서 바닥에다 팽개쳤다.
[전 신참치고는 운이 좋은 모양이에요. 두 건의 살인사건을 맡았고.
엘리 그레이브스의 기자회견에다 이번 사건까지 취재하게 됐으니 말
예요.
그녀는 주방 쪽에 대고 외치고는 욕실로 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멈춰 섰다
[이봐요. 잭. 이 일련의 사건들이 혹시 서로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이
닐까요?
코트를 걸친 몰리가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서는 그가 앉은 소피
옆에다 내려놓았다.
[섹스말고 당신의 관심을 끌 게 뭐가 있을지 한번 찾아보세요.
[아마 없을걸?
[오 서둘러야겠어요. 나가실 때 문을 꼭 닫아 주시면 돼요.
그녀가 작별 키스를 하려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동작을 멈추고는 물었다.
[꿔가 잘못됐나요?
[아니, 아무 일도 없소.
[아니에요. 날 속일 순 없어요, 뭔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어요.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늘상 그렇게 통찰력이 예리한가?
그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솔직하게 자신의 가슴 속을 털
놓았다.
[사실, 우리 둘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고 있었어.
[어머, 잭. 우리가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하세요?
[년이 어디 작은 차이요?
그녀가 앞으로 몸을 숙였다.
[당신 이제 보니 순 구식이군요.
그녀는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살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비록 당신이 우리 아버지라고 해도 될 만꼼 나이는 먹었지만 난 아
무떻지도 않아요.
잭은 그녀의 치마 속으로 한 손을 밀어 넣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자
기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진짜?
그가 몰리의 작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젼는 그로부터 몸을 빼며 살깍 웃어 보이곤 문 밖으로 서둘러 나
갓다.
잭은 넥타이를 매면서 신문의 수도껀란을 보았다. 그의 지역구에 무
슨 사건이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별다른 뉴스가 없었다. 그는 이
리저리 신문을 뒤적여 보았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머릿기사가 하나
있었다.
그는 그 기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니.
아기인형 살인사건,경찰은 여전히 미로를 헤매고 있는 중.
경찰은 여전히 쉬버스의 뱃속에 있던 아기인형 속에서 발견된
연필을 중심으로 수사를 펼치고 있다. 노먼 플라스키 반장은 이렇
게 말했다. '연필의 출처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누가 그 인형의
뱃속에 연필을 집어 넣었는지에 대한 단서는 되지 않습니다.'
리고 그는 연필의 출처를 밝히기를 거절했다.
잭은 신문을 내려놓고 아까 몰리의 질문을 되새겨 보았다
'그 사건들 모두가 서로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요?'
기그
나
[안녕하십니짜?브로디 씨.
[예?누구슈?
2년 전 플랫버쉬 고등학교에 다니셨던 바로 그 앵거스 브로디 씨
본인이십니까?
[그렇소만 댁은 누구쇼?
[저는 이그나티우스 핏트라고 합니다. 뉴욕의 '채널 6' 방송국 기자
입니다. 잭 매클라우드 의원에 관해 취재를 하고 있는 중인데요. 흑시
고등학교 시절에 그분과 알고 지내셨는지요?
[그 작자 고교 시절엔 의웠도 뭣도 아니었소.뭘 알고 싶은 거요?
[브로디 선생님께 몇 가지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전화드린 겁니다.
크게 폐가 안 된다면 전화상으로 간략히 대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몰리가 침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며 잭은 그녀의 거실 서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책등을 쭈욱 만져 나가다가 종이 표지의 [두 5
시 이야기]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책을 뽑아
펼쳐 들었다.
......그것은 최상의 시대였으며 동시에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으며 또 0
무것도 없었다.......
그는 책장을 덮었다. 그 따위 진부한 표현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
도 머릿속에는 책의 내용을 인용한 표현이 떠올랐다.
'내 앞에는 몰리가 있고 뒤에는 빅토리아가 있다.'
그는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 넣었다. '요에 몰리가 있다? 그럴 수5
있지.빅토리아가 뒤에 있다......? 아니야.아직은.......'
그는 소파에 앉아서 잠시 자신의 인생 속에 들어온 두 여인과 자=
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빅토리아와 헤어진 후 채 2주도 지나지 =
은 마당에 어느새 새로운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아니 적어3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변화는 이미 오고 있었다. 작고 ]
소한 일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몰리와 함께 있을 땐 신=
가지런히 정리했고 용변을 본 후엔 변기 시트도 꼭 네려놓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내 사랑이라고 불렀다. 그것도 역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일 수가 있
었다.왜냐하면 이름을 불러대다간 자칫 '빅토리아'라는 이름이 불쑥
어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떻게 되면 몰리의 기분이 엉망진
창이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유에선지 잘 모르겠지만
=자들은 남자들이 자신을 어느 다른 여자의 대용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특히 잠자궈에서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잭은 몰리를 결코 빅토리아의 대용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
나 오래된 습관이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다행히도 몰리는 그
모든 걸 진심으로 이해해 주었다. 오히려 몰리가 미리 잭에게 이런 부
탁을 해왔었다. 만일 혹시라도 잭을 제스라고 부른다면 이해하고 용서
해 달라는. 사실 그녀는 그들의 첫째날 밤 그를 제스라고 무심결에 불
렀었다, 잭은 그때 잠자리에서 누군가의 대용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를 몸소 체험했었다. 그는 시계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커피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지구본을 핑그르 돌려 보았다. 그 위에 그
려진 대륙들이 돌고 돌았다.
아메리카. 아시아,유럽, 아메리카.....
관계가 깨어진 뒤에야 그 관계를 이루고 있던 기본 구조가 드러나는
법이다
빅토리아의 앙상한 갈비뼈처럼.......
그는 그리웠다. 그녀의 머리카락들, 그녀의 목, 그녀가 바르던 손톰
광택제의 냄새, 은근히 섹스를 유도하기 위해 그녁가 켜놓았던 촛불
방안에 널린 범률 서류들, 세월이 흘러 노랗게 변색이 됐어도 그녀가
간직하길 주장하던 신문철들,반쯤 풀다 만 낱말 퍼즐......
사실 그런 추억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 모
든 것을 한 번에 뭉뚱그려 가지고 있던 여인, 빅토리아! 빅토리아?
못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그녀에게서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있엇다. =
녀의 우울. 세상과의 단절, 그녀의 고민에 대한 침묵, 그의 걱정 어=
질문에 대한 냉랭한 거부, 그녀의 고된 일과 둥등.
그녀의 직업과 그것에 대한 그녀의 집념이 두 사람의 관계에 어
정도 장애물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 관계를 파경에 이]
도록까지 만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게 무엇인지 그녀가 입을 떼=
않았던 것이 못내 속이 상했었다 잭은 흔자 생각으로 그것이 무엇
지 짐작해 보려고 애썼다. 결흔에 대한 거부감일까? 아니면, 아니
쩌면 레이챌 레드패스와 연관된 오종의 사건일지도 몰랐다. 아직 확=
할 수는 없지딴 그는 늘 레이켈과 빅토리아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
고 있었다. 그러나 증거가 없는 의심만 가지고 무언가에 대한 결론]
내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 둘의 관계에 =
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게 최선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
10대의 혈기 왕성한 소년이 섹스에 대한 공상을 떨쳐 버리려는 것처
무모한 시도였다. 어쨌든 레이챌에 생각이 미칠 때면 그는 언제나 =
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별은 그에게 자신과 빅토리아에 관한 또 하나의 교훈을 주었다
그는 그들 둘이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그들이 헤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몰리
함께 있으면 그러한 느낌이 더욱 강렬해졌다.몰리는 매일 들려 오=
진부한 노랫가락 너머로 흘러 나오는 새로운 곡조의 음악 소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처음엔 옛날 노래에 대한 익숙항 때문에 새 노래에 다
해서 거부감도 생기겠지만 점차 새 노래가 가진 신선함이 두드러지면
서 결국은 옛 노래를 버리고 새 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잭은 느끼고 있었
그는 지금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들어갓면서 옛날 여자와의 사랑
굴레 속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이었다. 빅토리아에게서부터 자유롭
떠났지만 아직 완전히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고, 믈리에게 끌리
있지만 아직 완전히 합쳐진 것도 아니었다. 진저리가 났다.
'내가 지금 포커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미끼 낚시질을 하고
건가? 잠시 동안만이라도 결흔과 아이를 잊어버리고 특히 여자,
생각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몰두할 수는 없는 걸까?'
[뭘 그떻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몰리가 소파 앞에 나와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담갈색 실크 블
라우스에 가죽 재킷, 검정 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로 감싸여 있었다.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홀러내리게 한 머리칼에
다 얼굴 가득 고혹적인 미소까지.,...,. 사슴을 닮은 두 눈동자는 또 얼
마나 유흑적인지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잭은 일어서서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하며 향긋한 체취를 한껏 들이켰
다
[당신 아주 멋져.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지?
[차 속에서 말씀드릴게요.
잭은 몰리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서면서 속으로 뇌카렸다
'내가 아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은 간곳엉
고 가슴 속에는 부드러운 느낌, 행복하고 뿌듯한 감정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최상의 시기이며 최악의 시기였다......
페퍼 루미스는 그녀의 길고 날씬한 다리를 벌리고는 애브너 티투스
의 몸통을 타고 앉아 그녀의 입을 그의 입에다 갖다 대었다. 그녀는 세
게 숨을 내뿜었지만 그의 폐에 가득 불어넣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
을 들이마시기 위해 입을 떼었다가 다시 한 번 티투스의 입 속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귀를 대보았다. 그러나 그가 점심
때 바리스터 클럽에서 먹었던 파스타 요리에서 풍겨 나오는 마늘 냄새
말고는 아무런 삶의 기척도 없었다.
[숨을 쉬세요!
그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숨을 다시 한 번 들이쉬었다.
[제발,판사님.죽으면 안 돼요.숨 좀 쉬어 봐요!
그녀가 또 한 차례 티투스의 입 속으로 숨을 불어넣고 있을 때 데이
지가 두 사람의 응급처치 요원을 데리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
들은 알루미늄 들것에다가 응급처치 기구, 약상자와 산소통 따위를 .=
고 있었다.
그들은 즉시 익숙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보세요.제 얘기 들팁니까?
한 남자가 티투스의 어깨를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다른사내가 데이지와 페퍼에게 물었다.
쩌다 이렇게 됐지요?
[갑자기 격심한 복통을 일으켰어요. 일어섰다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가쁘게 몰아쉬더니 그만.......
페퍼가 대답했다.
[그분은 콩팥이 하나뿐이에요. 그리고 점심을 늘 너무 과하게 드세
데이지가 말했다.
첫번째 사내가 티투스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댔다,
[숨을 쉬는데요?외려 숨을 너무 많이 불어넣었어요.
그는 손가락을 펴서 티투스의 턱 아래 경동맥에 대어 보았다.
[맥도 뛰고 있는걸?
그가 자기 파트너에게 말했다.
그들은 럭비공 모양의 구급 산소 백을 티투스의 얼굴에 씌우곤 그를
들것에 실은 채로 구급차에 태워 종합병원으로 내달았다.
티투스는 코에 산소 호스를 꼽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페퍼는 그의
침대 발치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그때 레이챌과 피브 창 박사 그리고
간호사 한 사람이 병실로 들어섰다. 페퍼는 창 박사와 악수를 하고 나
서는 레이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레이챌은 짐짓 딴청을 피우면
서그 손을 맞잡지 않았다.
창 박사와 함께 티투스의 상태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누고 나서 레
이챌은 페퍼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병실을 나가 버렸다.
[대단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군요.
페퍼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플로겐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였어요.의사가 아니라요.
?호사는 그렇게 핀잔을 주곤 창 박사의 뒤를 따라 병실을 나갔다.
페퍼는 판사에게로 다가가서 이불을 끌어올려 목까지 덮어 주고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애브너, 당신은 지금 죽어서는 안 돼.
그녀는 티투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이
게 덧붙였다
[당신에겐 기막힌 앞날이 펼쳐져 있단 말이야.
녁 식사를 위해 외출하려던 잭 매클라우드는 현관 앞에서 몰리를
풍' 세웠다
[꿔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소. 당신 지금 팬티 입고 있소?
그녀의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네?너무 사적인 질문이군요.
[정말 알고 싶어 물어 본 거요.
[네, 입었죠. 물론.
[벗어 버리지.
그녀는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 둘은 집을 나섰다.
파묄의 남은 보름 동안을 두 사람은 뉴욕을 열애의 무대로 바꾸려는
듯매일 밤 그 도시의 이꼿저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잭은 매일 저녁 워
싱턴에서 뉴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고 몰리는 뉴욕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취재 일정을 잡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그녀는 그때껏
말로만 들어 왔던 뉴욕의 명소들을 다 보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그
들은 뉴욕 토박이들이 잘 찾지 않는 그런 장소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
게 됐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라디오 시티 뮤직
흘,시내 순환 전차......
그들의 밤 나들이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하룻밤은 _
미디 클럽에서의 웃음, 또 하룻밤은 로운스타 카페에서의 춤, 또 하
밤은 카알라 식 극장에서의 바비 비트 쇼....... 어느 날 밤엔 길거리'
서 들려 오는 노랫가락이 너무도 좋아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레코
월드로 달려가 그 노래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구하기도 했다. 또
느 날 밤엔 윈스턴과 그의 새 여자 친구, 이렇게 넷이서 어울려 즐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잠을 잊어버린 사람들 같았다
일 섹스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침대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
다. 두 사람은 이 세상에 오로지 자기 둘만 있다는 듯이 사랑하며 .
모든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하면서도 서로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쳐'
볼 뿐, 바로 옆에서 웨이터가 접시를 떨어뜨려도 눈 한 번 깜빡이지 '
았다.
잭은 그녀를 '나의 땅콩'이라고 불렀고 몰리는 그를 '달콤한 케이=
라고 불렀다. 주변에 사람이 있건 없건 스스럼없이 서로를 그렇게
러댔다.
그들은 서로의 사소한 공통점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둘다뜨
운 훈제 샌드위치를 좋아한다든지. 혹은 치약은 가운데서부터 짜서
다든지 따위의 공통점을 흐믓해하며 서로를 더욱 가까이 느끼는 계
로 삼았고 그들의 상이점. 이를테면 생일을 잊어버린다든가, 코골
그리고 어쩌면 아이를 갖는다는 관점에 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겨 버렸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틈만 나면 서로의 몸을 애무했다.엘리베이
안에서의 포옹,식당 안에서의 키스, 영화관에서의 애무....... 한 번
어느 의상실 드레싱 룸 속에 둘이 몰래 숨어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
은 그 좁은 공간에서 15분을 보내고 냐왔다.몰리는 양 허벅지 안쪽
났고, 잭은 목 근육이 뻐근했었다. 그 후로 둘은 언제나 여벌로
한 장씩을 더 가지고 다녔다. 한 번은 인적이 뜸한 어떤 창고
물 뒤쪽에서 몰리가 잭의 레인코트 속으로 양 다리를 집어 넣고 사
한 적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몰리는 허벅지까지 오는 스타
로는 아무런 속옷도 입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아무데서나 사랑 행
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을 치르고 난 후엔 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했다. 어떤 계획도 의논도 앞날에 대한 설계
도 없었다. 마치 섹스의 첫맛을 알게 된 철없는 청소년들처럼 그들은
거리낌없이 서로의 육체만을 탐닉했다. 그들은 행위가 격렬하면 할수
록, 행위 장소가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쉬운 위험한 장소이면 그럴수
록 더욱더 흥분을 느끼며 행위에 몰입했다.
어느 날 새벽엔가 그들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운전석과 승객 좌석이
분리된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택시에 타자마자 둘은 곧바로 행위에 들
1갔다.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차체의 요동이 그들에게는
그 전에는 맛보지 못한 극도의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 택시의 어
느 바퀴인가가 아스팔트 위에 튀어나온 커다란 맨홀 뚜껑을 밟는 바람
에 입을 벌린 채 키스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의 앞 이빨이 맞부딪치기도
했다 몰리는 괜찮았지만 잭의 이빨 하나가 반달 모양으로 부러져 버
렸다. 그러나 잭은 몰리의 허리를 감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후 그의 이빨을 살펴보며 걱정하는 몰리를 잭은 별거 아니라고 안심
시켰다. 화요일 아침, 잭은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몰
=를 만나 깨끗이 치료된 이빨을 보여 주었다, 간신히 마음을 놓은 몰
리가 앞으로는 좀더 주의하자고 말했다. 잭은 그럴 수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비록 그 자신도 사랑 행위를 하기에는 식탁이나, 침대처럼 평
평한 곳이 더 낫겠다는 생각은 하게 되었지만......
서서히 그들은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하고, 집안에서 함케 윙구는
시간이 많아졌다. 몰리의 침실은 완전히 쓰레기 하치장처럼 변해 갔
다. 평소, 그녀는 정리 정돈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잭과 함께 있게 되면
너무도 격렬하고 빈번한 섹스 행위 때문에 청소 따위의 허드렛일은 할
짬도, 기운도 없었다
언제나 아침이면 전날 밤 격렬했던 몸싸움의 흔적이 파편처럼 널려
져 있었다. 단추가 떨어진 블라우스, 마구 풀어헤쳐진 넥타이, 브래지
어,셔츠....... 바닥에는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하이힐 구두 한 짝, 팜나
무 잎사귀에는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이 뒤집혀진 채 걸려 있기도 했
다. 침대 옆 탁자 위엔 오렌지 주스로 얼룩진 책, 고장난 시계 따위로
어지럽혀져 있곤 했다.
자동 전화 응답기 위에는 전날 밤 둘만의 파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개의 잔, 빈 술병, 채 따지 않은 맥주병...... 탁자 아래에는 음식 찌
꺼기가 말라붙은 그릇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샤워실에는 멜론 컵
질이 바닥에 널려 있고 침대 밑에는 쥐어짠 인스턴트 캐비아 튜브들이
밀어 넣어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음악 테이프가 스테레오 위에 어지
러이 쌓여 있고 텔레비전 위에는 여백마다 노랫가사를 적어 놓은 종이
조각들이 얹혀져 있었다. 수건들은 마구 구겨진 채로 방 한구석에 옇
여 있고 그 위에 목욕 가운이 아무렇게 내던져져 있었다.세면대 옆
는 크리스털 재떨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세워진 채 광란의 밤을
밝혀 주던 양초는 모두 다 녹아 버리고 오직 심지와 두터운 촛농만
말라붙어 있었다.
에그즈 베네딕트는 그의 녹색 포드 운전석에 도사리고 앉아서 도1
의 소음을 자장가 삼아 눈을 지긋이 감고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
모자를 이마 아래까지 깊숙이 눌러쓰고는 팔짱을 낀 채 가벼운 잠 =
으로 기분좋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몰리의 집에서 팔짱을 킨 그
녀와 잭의 모습이 나타나더니 보도로 내려와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
들었다. 퍼뜩 잠에서 깨어난 그는 카메라를 집어 올리고 두 사람이 택
시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그들을 태운 택시가 사라져 가는 장면을
여러 컷 찍었다. 그러고 나서 차에 시동을 걸어 택시를 뒤쫓아갔다. 택
8번가 동쪽으로 방향을 잡더니 곧 혼잡한 교통 속에 묻혀 속도
가 느려졌다. 베네딕트는 택시와 차 몇 대를 사이에 두고 끈질기게 뒤
를 쫓아갔다. 그는 라디오를 켰다. 곧 그가 기다리던 뉴스가 흘러 나왔
다.
[오늘 경찰은 퀸즈에서 낙태 시술 병원을 폭파한 용의자를 체포했
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슬리 페이지 기자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블륨을 높였다.
[폭파 사건에 연루된 용의자가 오늘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경찰
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용의자는 빌리 배니스터라는 실직한 목수입니다.
그는 오늘 아침 10시 30분 호지스 가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검거되었습
니다. 그에게는 병원 관리 인의 아내 줄리아 로드리게스를 살해한 혐의
로 2급 살인죄가 적용되었습니다. 경찰은 옇죄를 추궁하는 한편 그의
공범자를 찾는 데 수사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라디오를 끄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턱수염을 긁었다.
패출리향이 확 풍겨져 나왔다. 택시는 파크 애비뉴에서 우회전하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베네딕트는 38번가의 소화전 앞에다 차를 세우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택시에서 내린 몰리와 잭은 길을 건너서 넓은 광
장을 가로질러서는 어떤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떼네딕트는 엔진을 끄
고 차에서 내려 달리는 차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파크 애비뉴를 건너
그들의 뒤를 쫓아 달렸다. 빌딩 문에 들어서자 그는 자기의 사냥감들
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승강기 앞으로 가서
.
벽면에 붙은 자판에 불이 켜지는 것을 주시했다. 엘리베이터는 6, 7,
14층에 멎었다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베네딕트는 건물의 안내판으
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첫번째 멎었던 6층에 파크 애비뉴 산부인
과라고 적척 있었다. 더 볼 필요또 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사방을 살폈다. 산부인과는
복도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출입문에는 눈 높이 정도에 창문이 하
나 있었다. 그는 그 앞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잭과 몰리가
데스크 뒤에 앉아 있는 접수계원과 얘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
다. 몰리는 마치 인터뷰를 준비하는 것처럼 노트를 펴들고 있었다. 베
네딕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작업복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
고는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로 셔터를 몇 번 눌렀다. 그 다음 홀로 발
길을 돌려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15분쯤 뒤에 잭과 몰리
는 병원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수첩 속에 뭔가를 적어 넣었다. 둘 모두 카메라를 보지도 셔터
의 찰콰 하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자기 차의 운전석에 앉아 에그즈 베네딕트는 모자와 안경을 벗고 얼
굴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 나서 가방을 열고 예의 고리 달린 노트를 커
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노트를 넘겨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깨
끗한 페이지가 나오자 그것을 펼친 채로 무릎 위에 놓고는 '잭 매클라
우드 의원 19구역'이라고 옆면에 새겨진 푸른색 연필을 커내 쥐었다.
그는 녹색 종이 한 면을 빽빽하게 글씨로 채워 넣었다.
늘상 그렇듯이 1월 하순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하루는 맑고 쾌청
하다가 그 다음 날엔 춥고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 이어졌다. 선거가 없
는 해였기 때문에 잭에게는 어느 정도 시간상의 여유가 있는 데다가
역시 변덕스러운 날씨에 진저리가 나 있었기 때문에 둘은 연일
비치고 있을 남쪽으로의 여행을 결심했다. 잭은 지구당 사무실
대충 정리해 놓고 세인트 토마스 행 비행기표를 두 장 샀다
사흘 후. 그들이 탄 전세 요트는 바람을 돛에 가득 받고서 조스트 반
크를 향해 카리브의 짙푸른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화이트 만{)에 잠시 정박을 했다. 그곳에서 오렌지 주스에
절인 멜론을 먹으면서 카리브 해의 햇빛을 흠센 즐길 수 있었다.
여행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토르톨라의 로드타운에 닻을 내렸고 두
사람은 양철북 두드리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해변을 걸으며 섬
고유의 전통 음식을 먹고 춤도 추었다. 저녁이 되어서는 대나무 탁자
에 앉아 딸기 다이커리를 마시며 마치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일몰을 보며 감탄했다. 사실 그러한 장관은 본 적이 없었기도
했다 두 사람은 보름 넘게 함께 보냈지만 조금도 서로에게 싫증이 나
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란 조만간 시험을 받게 되는 법이었다.
잭이 요트를 세내어 단둘만의 여행을 제안한 것도 그 둘의 사랑을 시
험해 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배 위에서 단둘이만 며칠을 보내는 것만큼 좋은 건 없어, 둘 사이
의 관계를 정럽해 보는 데 있어서 말이지. 만일 그 시험을 견뎌 낼 수
있다면 우리 두 사람은 앞으로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는 빅토리아와의 경험을 생각하며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비좁은 선실에서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도 힘들어. 또
언제나 머리 위에는 돛을 올리고 목적지를 정해 산호초 지대를 항해해
야 해. 그리고 밤이 와도 이슬을 피할 곳이라곤 없고, 비가 오면 하갑
판에 앉아 멀미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가며 새어 들어오는 빗물을
맞으면서 카드 게임이나 할 수밖에 없는 거야.......
몰리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자기 앞에 놓인 다이커리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 지금까진 어떴어요?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서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다이커리잔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가락은 시원한 느낌을 주
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서 그 섬세함에 감탄하다가 그녀의
가운뎃손가락 끝이 유난히도 하얀 걸 발견했다.
[동상이었어요. 어느 날 내 벙어리장갑을 잊어버렸지 둬예요. 추워
지면 하얗게 변해요. 차가운 얼음물잔만 잠깐 잡았다 놔도 이렇게 되
는걸요.
[어떻게 하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오지?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따뜻한 곳에 넣으면요.
잭은 그녀의 말에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입을 벌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물을 머금듯이 조심스럽게 입
로 물어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속으로 그녀가 손가락을 빼어 버리
거니 하고 있었는데 웬걸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자기가 먼저 =
가락을 빼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 도전적인 눈빛을 한 채였디
전형적인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 웨이터가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응급 처치중일세.
잭은 잇새로 그녀의 손가락을 문 채 말했다.
웨이터가 두 장의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놓고는 씨익 웃었다. 마=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당신의 응급 처치라면 그녀의 응급 처치는 어떤 건지 보고
군요.'
몰리가 손을 뺏다.
니거 한 대 가져다 주겠소?
잭이 웨이터에게 부탁했다
몰리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그?는 시거를 싫어했다
[오늘 밤 키스는 다 한 줄 아세요.잭.
웨이터가 여러 종류의 시거를 담은 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잭
은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하나를 골라 집어 들었다. 웨이터가 가고 나
자그는 시거 몸통에 끼워져 있던 붉고 금빛이 도는 시거 밴드를 뽑이
마치 시거에 불을 붙이려는 듯이
. .....아직 식사 전이잖아요.
그녀가 눈을 홀겼다.
잭은 시거에서 빼낸 시거 밴드를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꼭맞았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다시 그녀의 검지에 끼워 주었다. 역시
꼭맞았다. 그는 지나가던 도어 맨을 불러 세워서는 시거를 줘버렸다
그가 다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가 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부
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삶은 바닷가재와 자라 수프 그리고 시
원한 크림을 끼얹은 옥수수를 배불리 먹고는 2시가 다 되어 식당이 문
을 닫을 때까지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바닷가를 거닐다가
달빛이 비치는 항구를 가로질러 작은 보트를 저어 그들의 배로 돌아왔
다. 잠시 후 선실에 누워 잭은 전등 스위치를 끄려고 손을 뻗다가 카운
터 위에 놓인 그의 푸른색 사무용 연필 하나를 보았다.'매클라우드파
는 글자가 횐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갑자기 그 동
안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모든 골칫거리들이 떨어져 나가 버린 듯힌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멜빈 쉬버스도 엘리 그레이브스도...... 사라
졌다. 워싱턴 정가의 위선자들도 없고, 빅토리아...... 빅토리아마저도
없었다.
그는 불을 끄고 꼴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선실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항구의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몸매는 카리브의 밤과 함께 검은
파도처럼 너울졌다. 그는 깊은 잠에 빠진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그 말이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좀체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교 시절 이후로는 거의,하니 오코너말고는......
동부 시러큐스의 블루훼일 식당, 창가에 서 있던 하니의 모습이 손
에 잡힐 듯 떠올라 왔다. 김 서린 유리창에 하트를 그리며 입술 모양만
으로 소리없이 '널 사랑해.' 하던 그 모습이....
온가슴으로 밀려오던 그 침묵의 단어들.....
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지금 잠들어 있는 이 여인에게 그 말을 했을
까? 그의 머릿속에 하니의 영상이 너울대면서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
도 할 수 없었다
제법 쌀쌀한 한낮이었다. 흰 바탕에 파란 줄이 간 뉴욕 시 교정국의
죄수 호송차가 그랜드 센트럴 공원 도로로 향하는 디트마르 거리를 꺾
지고 있었다. 차 안의 운전사는 옆에 앉은 동료가 결혼 생활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등 손가락으로 운전대만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뒷자리에는 죄수복 차림의 빌리 배니스터가 수갑
을 차고 발목까지 결박당한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퀸즈 형사 법원에 보석 심사를 받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그의
변호사인 제레미 하켓이 그날 아침에 전화로 붉은 장미회}가 보석금
을 내줄 것이라고 전해 왔었다. 감방에서 보낸 며칠은 생각하기도 싫
은 악몽이었다. 온갖 범죄자들이 내뱉는 살벌한 욕지거리. 그들의 땀
냄새.동성연애에다 밤이면 들려 오는 수상쩍은 교성.......
패일같이 아내와 아들이 면회를 와준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한
편으론 창살 속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다. 보석으로 풀려 나가게 되면 자유롭게 만나게 되리라..
공원을 빠져 나온 호송차는 퀸즈 대로로 가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 2차선 도로의 왼편엔 나무들이 빽빽히 열을 지어 심겨져 있었고 오
른편으로는 작은 주택들과 유대 교회당 그리고 붉은 벽돌로 지은 아파
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길 가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도로 위를 호송
차는 미끄러지듯이 달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방에 멈춰 서 있는 차
한 대가 호송차 운전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밤색 밴이었다. 브레
이크등이 빨갛게 들어와 있었다. 호송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옆으로 돌아가자구.
옆좌석의 동료가 말했다. 그런데 마치 그 말을 듣기나 했다는 듯이
밤색 밴이 방향을 틀어 길을 가로막았다. 호송차의 운전사는 차를 세
울 수밖에 없었다. 화가 치민 그가 채 무슨 행동을 하기도 전에 밤색
밴의 뒷문이 열렸다.
전투용 부츠를 신고 나일론 스타킹을 얼굴에 뒤집어쓴 세 명의 괴헌
이 우지 기관단총을 든 채 밤색 밴으로부터 뛰쳐나와 호송차를 향
달려왔다. 그들은 차문을 열어제치고는 모두 내리라는 시농을 했다
그때 뒤이어 따라오던 트럭 한 대가 호송차 뒤로 와서 멈추었다.화
운전사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괴한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서 차를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어느새 플리머=
한 대가 뒤를 막아서서는 영문도 모른 채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도로에는 여러 대의 차량이 줄지어 서 있게 되었다. 호=
교도관들은 손을 목 뒤로 깍지를 낀 채 아스팔트 위에 머리를 박고 =
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두 명의 납치범들이 호송차 뒷문으로 =
리 배니스터를 내리게 하고 있었다.
[눈 감아!
납치범 중 한 명이 호송인들에게 고함을 질러댔고 그들은 시키는
로 고분고분 눈을 감았다. 그자가 교도관들을 감시하고 있는 동안
른 두 명이 배니스터를 밤색 밴으로 데려갔다. 잠시 후 밤색 밴이 요
한 엔진 소리를 내며 후진하더니 남아 있던 동료를 태우고는 뒷문=
닫히기도 전에 퀸즈 거리로 쏜살처럼 달려갔다. 그리고는 혼잡한
행렬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교도관들은 땅에 머리를 박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붉은 벽돌의 아파트 창문 하나
열리더니 어떤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남자는 양손을 입 앞에
_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일어나도 돼요!
밤색 밴의 화물칸에는 두 명의 납치범들이 얼굴을 가린 스타킹을 여
전히 쓴 채로 묵묵히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배니스터는 그 두 남자
차 바닥에 플라스틱 끈으로 손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당신네들은 도대체 누구요?
그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앗다. 배니스터는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며 마치 알아봤다는 듯이 그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에그즈?너냐?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트럭이 롱아일랜드 고속도로로 방향을 틀자 배니스터의 몸이 한쪽
으로 쏠렸다. 그러자 납치범 중 한 명이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총 개
머리판을 배니스터의 괄 밑에다 받쳐 주었다.
[고맙소.
다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배니스터는 말했다. 그의 불안한 미소가 곧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뀌며 묶인 두 손을 배에다 갖다 댔다
[누구 진통제 가진 사람 없어요?배가 몹시 아파요.
[한번 알아보겠소.
배니스터는 그 말에 불안감을 다소나마 덜 수 있엇디.
나무마다 온통 단풍물이 든 ?월 하순의 토요일이었다. 잭은 폰티악
한 대를 세내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리치 힐까지는 어림잡아 850킬
로미터 가량 되었다. 지체 없이 출발한다면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서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교대로 운전을 하며 중간중간 차를
세워 기름도 넣고 식사도 하고 피로를 풀기 위해 잠깐씩 걷기도 했다.
오후 늦게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잭이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 밤 같이 잘 수 있을까?
잭이 물었다.
[글쎄요. 부모님이 그런 면에 엄격하시진 않아요. 하지만 애들이 있
어서....... 아마 따로 자야 될걸요.왜,허전해서요?
[아니, 전혀. 당신이 어디서 자는지만 알면 태. 난 자면서 돌아다니
는 습관이 있잖아. 알지?
몰리는 '어휴, 이런 색골, 못 말려!'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몰리의 마음을 읽은 듯 잭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안 돼. 난 당신 없인 못 자겠어. 날 소파에서 자게 할 순 없을걸.
대로 말이야.
[아마 내 기억으로는 당신을 소파에 눕힌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로 어렵지도 않던데요. 뭐.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면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의 피가 끓어
. 다음 순간 갑자기 그가 핸들을 꺾었다 몰리는 그 바람에 하마
머리를 차 앞유리에 찧을 뻔했다. 차는 4도 회전을 해서 길가의
작은 공터 위에 멈춰 섰다.
잭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당신 미쳤군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도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갑자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에 걸친 것들을 벗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발, 그의 신발, 그
녀의 스웨터, 그의 재킷.......
그때 잭의 머릿속에 언뜻 한 가지 불안이 떠올랐다.
'만일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이거 국회의원 체면이
걸?'
말이 아니겠는
그러나 그 불안은 당면한 걱정거리로 인해 사라졌다. 걱정거리란 다
름아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인 커다란 사물함이었다. 빌어먹을
자동차......
[잠깐! 어떻게 하죠?
몰리도 그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뒤로 가서 해.
노련한 정치가란 언제나 해결책을 찾아내는 법이었다.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그녁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몰리가 먼저
[다들 고등학교 때 이미 이 짓을 해보는데 나만 못 해봤었죠.사실
언젠가 한 번은 꼭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잭도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잠시 후 차 안은 뜨거운 숨결이 만들어 낸 뿌연 안개로 지나가던 트
럭 운전사들은 물론 기울어 가던 저녁 해조차도 차 안을 들여다볼 수
가 없었다.
7시 3즈분이었다
그들이 리치 힐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리치 힐은
한때는 풍요로웠던 탄광촌이었다. 리치 힐이라는 마을 이름도 퐁부히
매장돼 있던 석탄 광맥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석탄이 고길
되고 나자 이제는 가난에 찌들 대로 찌든 황량한 폐광촌이 되고 말있
다. 생존만이 절체 절명의 과제인 빈곤과 절망의 땅이 되어 버린 것이
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히 삭막하고 악착스럽게 변해 갔지만 다른 힌
편으로는 너나없이 모두 다 가난하다는 사실이 그들을 서로에게 너그
러워지게 만들었다. 배고픈 동네 아이들이 옥수수 서리를 하는 것을
호되게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고 마을 공판장에서는 스커트는 1달러
블라우스는 단돈 25센트면 살 수 있었다.그것도 외상으로.
그 마을의 침례교 목사들은 지옥불과 하늘의 저주에 관한 설교를 히
면서 통조림이나 절인 순무를 나누어 주는 자선도 베풀었다. 어쨌든
그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애초 그들을 이 땅으로 오게 만든 딱딱하고
새까만 석탄과도 같았다. 이러한 삶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힌
편 근검 절약하며 묵묵히 그리고 따뜻함을 가지고 살게 했다.
호머와 배시 맥코믹 부부는 이곳의 다른 이웃들과 조금도 다를 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호머는 세금 내기를 지긋지긋해하는 전통
적인 미국인이었다. 비록 베를린 상공을 -17을 타고 비햅한 적도
있는 예비역 공군 상사였지만 리치 힐을 벗어나면 교통 안내 지도조치
제대로 읽지 꼿하는 촌사람이었다. 그는 영화 관람이나 여름철 휴가
따위엔 관심이 없었고 값비싼 포도주를 곁들인 근사한 저녁 식사도 그
와는 거리가 먼 애기였다.
배시는 호머에게는 이상적인 반려자였다. 잡다한 집안일에는 소질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단점에 대해서는 아량을 보이는 후덕함을 갖
그런 부인이었다. 특히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관심은 지극
몰리와 잭이 도착했을 때. 호머와 배시는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 주
몰리는 차에서 뛰어나와 그들을 안고 키스했고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난쟁이들처럼 그녀를 둘러싸며 선물 타령을 해댔다. 어디에
허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봉 장면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잭은 배시에게 브루클린에서부터 가져 온 선물
주었고 그들은 거실로 안내되었다. 거실은 나무 판자로 꾸며져 있
었고 구석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노크를 하고 허락을 받기 전에는 아
'1들이 절대로 들어을 수 없는 엄격한 규칙이 오랫동안 꾸준히 지켜져
온 곳이었다.
호머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는 커꾀잔에 버본 위스키 한 잔을 따른
다음 안락의자에 함께 앉았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잭에게 초점이 맞춰
졌다. 잭의 고향, 의회, 워싱턴. 경제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쏟아
졌다
잭은 질문에 공손하고 상세히 대답했고 몰리는 그런 그가 몹시 자랑
스럽기까지 했다. 잭이 몰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묻자, 배시는 그들이
그녀를 양녀로 삼게 된 내력에 대해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툴럽이 우리를 맺어 주었다고 할 수 있지. 몰리가 툴럽을 너무 좋
아했거든.
배시는 고아원의 굵은 참나무 대문 안뜰에 피어 있던 툴럽을 떠올리
며 말했다.
[비만 오면 옷을 흘딱 벗어 대=1는 습관 때문에 혼도 많이 났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엄마, 전 그때 겨우 세 살이었어요.
맨발로 쪼그리고 앉아 있던 몰리가 말했다.
[하여간 툴럽은 몰리의 아주 특별한 친구였지. 모든 고아원 아이들
에게는 나를 '배시 아줌마'라고 부르도록 시켰지만 몰리는 계속 나=
'엄마'라고 불렀어. 나는 몰리를 딸처럼 사랑했지만 언젠가는 홀륭
양부모를 만나서 고아원을 떠나기를 원했었어.
[그러다가 이 아이가 다섯 살 나던 해 어느 날. 글쎄 초콜릿을 찾=
다고 싱크대 선반에 올라갔지 뭐야 그랬다가 그만...... 와장창 소
에 놀라 쫓아가 보니 부억 바닥은 온갖 양념들로 범벅이 되어 있고
는 손가락을 깨진 병에 깊숙이 베었더라구.
[바로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변기 뚜껑 위에 세워 놓고 상처를 소=
하고 있는데 '엄마, 미안해요.'인지 뭐. 그 비슷한 말을 했을 거야. =
순간 가슴에 쩡하니 뭔가 와닿는 거야. 그래서 내가 꿔라고 얘기하=
던 차에 얘가 고개를 들더니 하는 말이 엄마. 엄마는 툴컵만큼이
예뻐요.' 하는 거야.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렸지. '그=
이 아이는 내 자식으로 키우자.'그렇게 된 거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요.
몰리는 다소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잭은 몰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어했다. 나무를 기어오르]
싸움질하던 얘기, 할대 타율의 야구 솜씨 등. 말괄량이 어린 시절
관한 많은 얘기들이 이어졌다. 멀쩡한 애들을 눕혀 놓고 강제로 입 =
에다 체온계를 꽂아 넣던 의사 몰리, 고아원 소식지를 만들어 여러 ]
미난 기삿거리를 제공하던 기자 몰리....
잭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거실 바깥에서 곽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표로 뽑힌 듯
한 소년이 떼밀려서 안으로 들어왔다. 꼬마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
" 거실문에 대고 노크를 했다. 그 커다란 눈이 쓰고 있는 안경 때
더욱 커보였다.
[몰리 누나. 사과밭에 가서 놀자.......
그는 뼈다귀가 던져지길 기다리는 개처럼 몰리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다!
몰리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따라 뒤뜰로 뛰어나갔
다. 잭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뜰로 갔다. 믈리와 아이들이 사과를 따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평화스럽고 유쾌한 정경이었다. 잭은 한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려서 사과를 따게 해주었다. 이윽고 아이들은 사과를 하
나씩 들고 자랑스러운 듯 즐거워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몰리가 빨
줄을 거는 긴 작대기 끝을 사과나무 가지 꼭대기에 매달린 사과에
대며 말했다.
[만약 이 사과를 받는다면.......
그녀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작대기로 사과 꼭지를 꺾었
다. 주먹만한 붉은 사과가 나뭇잎 사이로 떨어져 내려왈다. 잭은 두 손
을 오므려 그것을 받았다. 그는 사과를 높이 들어올리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제법인데요. 도시 소년치고는.......
[자, 받았어. 이제 뭘 해줄 거지?
그녀는 사과를 받아서 앞가슴에다 문지르고는 그의 입에 마구 들이
밀었다.
[뭘 해주긴요. 이렇게 먹여 주지요.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늦은 밤까지 부엌에
서 노닥거렸다. 배시는 부엌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내일 모두 교회
가 가야 하니까 9시까지는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고는 잘 자라는 저녁
인사를 했다. 그리고 프레디가 쓰던 방에 잭의 잠자리를 준비해 놓
다고 딸 가진 엄마의 단속도 잊지 않았다. 몰리는 다리를 꼬고 팔컹을
낀 채 단풍나무로 짠 부엌 카운터에 등을 기댔다.
[프레디의 방에서 내 방까지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혹시 =
뚱한 생각하고 있다면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 벽난로 선반에 있
엽총이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자면서도 걸어다니는 사람이야.
[잘 자요,
몰리는 자러 가려는 듯 그를 지나치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사를 하고는 부억을 나섰다.
다음 날 그러니까 일요일 오후에 호머와 잭은 5마일 떨어져 있=
블랙리즈 카운티 상가에 있는 볼링장으로 갔다. 그들은 배시와 몰리=
게도 같이 갈 것을 권했지만 몰리는 자기가 가장 예뻐하는 0살짜=
폴리와 풋볼 경기를 보기 위해 집에 남아 있었다.
몰리는 폴리가 한창 재미있게 경기에 빠져 있을 때 살짝 방을 빠=
나와서 거실의 난롯가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배시에게 갔다
[괜찮은 남자 같던데....... 심각한 사이냐?
배시는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차분하게 물었다.
[심각할 정도로 재미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볼 땐 그래도 서로 퍽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 사람이 아이3
원하는 것 같더냐?
[그럼요.
[그 사람이 네가 아이를 못 갖는 몸이라는 거 알고 있니?
[네.
[실망하더냐?
[아뇨.전혀....... 제 말은 아직 그런 단계카진 아니라는 말예요.
[곧 이르게 될걸.
몰리는 사과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물고는 배시가 몹시 싫어하는
줄알면서끄 와삭와삯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으며 물었다.
[제 친부모에 대헤 아시는 대로 애기 좀 해주세요.
배시는 못 들은 척 뜨개질만 했다
[그 애기 하기 짜증나시나 보죠?
[짜증날 게 꿔 있니, 하지만 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얘기
해 주지 않았니?
사실 배시는 몰리에게 그녀의 과거에 대해 여러 번 얘기헤 주었다
몰리는 양어머니의 애기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과거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생각은 적어도 2년간은 변함이 없었
다.
[다시 한 번 해주실 수 없어요? 기억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요.
배시는 그제서야 뜨개질을 멈추고 말했다.
[그때 넌 두 살이었어. 헬렌 수녀님이 너를 데리고 왔을 때 네가 입
고 있던 옷이 기억이 나는구나.
[근데 수녀님이 저를 어디서 발견했다고 하셨지요?
[전에도 말했었잖니. 어떤 남자가 너를 성당으로 데려왔다는 거.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 말씀이죠.
[이름이야 왜 었었겠냐마는 밝히지 않았겠지. 수녀님 말씀이 그 님
자가 너를 당신 품에 안겨 주고는 말없이 걸어 나갔다고 하셨어.
모두가 전에 여러 번 들었던 얘기였지만 혹시 어떤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수녀님은 혹시 그 남자가 누군지 또는 내가 누군지에 대해 물어 보
지 않앗대요?
배시는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른단다. 더 이상은, 정말이야.
[엄마. 그 수녀님이 정말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대요? 어떻게 아무
것도 물어 본 게 없단 말예요?
배시는 아예 뜨개 바늘과 실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몰리를 똑바로 =
다보았다. 그 순간 몰리는 부질없는 자신의 행동이 공연히 어머니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거실을
서성대며 생각에 잠겼다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의자에 앉아 팔걸
커버의 실밥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배시는 잠시 거실을
갔다가 돌아와 몰리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녀
손에는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누더기 같은 작은 누비이불이 들
있었다.
[이게 전부야.
몰리는 얼른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이것저것 헝겊 조각을 이
서 만든 애기 이불이었다. 배시는 애들을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거
을 나갔다. 몰리는 자신이 이 조그만 이불에 쌓일 정도로 작았던 때?
1
딨딨아근 니레 신시해아떠 즈드흘 우웅 뀌도 르서외로 떼요 소식들
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이불을 반으로 접었다
마치 전사한 군인의 관을 덮을 성조기를 접듯이 진지하고 경건하게.
그 순간 그녀의 떨리는 손에 바늘땀이 느슨하게 풀어진 이불의 끝1
분이 잡혔다. 몰리는 그 부분을 살펴보았다. 뭔가 글자가 찍혀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램프 아래로 가져다가 =
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글자들은 희미했지만 똑똑히
을 수 있었다. '오난다가 밀가루 제분소 뜨. 시러큐스.'
친어머니가 새겨 놓은 것일까? 그녀는 속에서 꿈틀거리는 뭔가=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이 꽝 닫히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글자?
보이지 않도록 이불을 다시 접었다
[꿔 하고 있었냐?
호머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잭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냥....... 엄마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놀랍게도 자신이 말한 '엄마'라는 단어가 예전 같지 않게 약간 어색
했다. 호머와 잭은 서로의 볼링 실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 옆에서 볼
링을 치던 스판 바지를 입은 여자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라쿠
엘 웰치를 닮은 그 여자가 자기들에게 볼링을 가르쳐 달라고 했대나
어쨌대나. 몰리는 평상시 같았으면 그런 허풍에 맞장구를 쳐주었겠지
만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몰리는 남은 오후를 지루하게 보냈
다. 잭과 몰리는 다음 날 출발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잭은 몰리가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말햇
다.
[괜찮아?
[팬찮아요.
그녀는 짜증이 난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당신 가족들이 맘에 들어. 노년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
애.
[그분들은 나를 길러 주셨고 나 또한 그분들처럼 되겠지요.
몰리가 쏘아붙이듯이 말폈다.
[동감이야.
그는 조금 어리등절해하며 복도를 걸어가다가 문앞에 놓여져 있는
틀럽 화분을 보면서 말했다.
[고아원이 이 정도라면 누구도 나가고 싶지 않겠는걸?
[그럼 여기서 살지 그래요?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빚이 다소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러고 나서
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굿나잇 키스를 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릭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 친부모님에 대한 생각 때문이겠지.
이해할 수 있어.
잭은 빅토리아의 욕실 세면대 요에 서서 아스피린 병을 찾기 위해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그는 오후에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에 올라와 의사당으로 가는 길에 잠깐 이곳에 들른 참이었다. 6시에
열릴 예정인 '지도자 연합' 쪽 사람들과의 회의에 괼요한 자료를 가져
가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우편물도 점검해 보고 만일 있다면 셔츠라도
갈아입을 겸 해서였다.
비록 빅토리아가 볼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안하게 들르라고 했지
만 어쩐지 더 이상 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그놈의 편
두퉁을 잠재우기 위해 아스피린이 필요했다. 드디어 비누와 치약이 들
찬 서랍 한 귀통이에서 박스에 들어 있는 아스피린 통을 발견했다.
그는 아스피린 통을 꺼내고 박스를 휴지통에 던졌다 그러나 박스는
휴지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떨어졌다. 휴지통 주변에는 다른
쓰레기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빅토리아는 남이 어지르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깔끔 떠는 성미였지
만 정작 자신은 청소에 무신경한 편이었다. 특히 쓰레기를 치우는 일
따위는 전통적으로 여성에게만 부과된 작업이라는 생라이 든다며 혐
오스러워하기까지 했었다.
='?-"
뚝
새
잭은 병 주둥이를 막고 있는 솜을 빼내 그것도 역시 휴지통을 겨냥
하고 던졌다. 또 빗나갔다. 이제 '형편없이' 욕실을 어질러 버린 셈이
됐다. 그는 아스피린 네 알을 물과 함께 삼키고는 쓰레기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아스피린 상자. 솜뭉치, 마분지 포장곽, 마스카라 묻은 크리
넥스...... '마분지 포장곽'......?
그는 쓰레기통을 뒤져서 좀전에는 정신없이 주워 넣었던 종이곽을
찾아 꺼내 들었다. 연보라색 포장곽은 한쪽 귀퉁이가 뜯겨져 나가 있
었다. 그 찢겨져 나간 부분 바로 옆에 라는 이니설이 인쇄되어 있
었다. '...... ...... ...... 찢겨져 나간 부분의 철자가 꿔였을
까?'
뻥...... 빠앙......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밖에 대기
시켜 놓은 택시의 경적소리가
깨웠다 잭은 시계를 보았다. 시 3힌이었다. 꾸물거=1 고 있을 시간
이 없었다.
그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서 챙겨 온 우편물들을 뜯어 보았다. 그='
면서 쓸데없는 것들은 꾸겨서 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 무심결
그 마분지 포장곽에 새겨겨 있던 철자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 ....... .......'
'그렇다! 앞에 찢겨져 나간 부분에 새겨져 있던 철자는 즈였들
것이다.
"...... 조기 임신 테스트!
그때 택시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공중전화 부스가 그의 눈
띄었다.
'곧 돌아오겠소.'
잭은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달려가서 동전을 넣고는 급하게 번호=
빅토리아 사무실 번호를.
[브렌다?나 잭이오. 빅토리아 있소?
쇼.안 계신데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아직 병원에 계실걸요.
[병원?
[국회 병원 산부인과_..
[거긴 꿔하러 갔소?
[글쎄요.......
[언제쯤 돌아온다고 합디까?
[오늘은 오후 내내 그곳에 계실 거라 그랬어요.
'오후 내내라고?잠깐 들를 수야 있겠지만 무얼 하기에 오후 내내?'
[고맙소,브렌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가 병원문을 들어섯을 때, 정상근무 시간은 끝나서 접수 창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원장. 캐시 키낸의 사무실로 가보았지만 거기엔 아
무도 없었다. 문을 닫고 병동으로 통하는 복도를 따라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마침 얼굴이 익은 직원 한 사람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매클라우드 의원님 아니세요?
[빅토리아 어디 있소?
잭은 복도 끝에 있는 첫번째 병실문을 노크하면서 동시에
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어제쳤
[의원님. 왜 이러시는 거죠? 이곳은 병원이고 나름대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데.......
[빅토리아가 어느 방에 있냐고 묻는데 웬 잔소리가 그리 많소?
[의원님 !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그 다음 병실문을 열어제겼다. 갈색 머리카락
이 보였다. 빅토리아였다. 그녀는 몸통 부분을 가리깨로 가린 채 시술
대 위에 누워 있었다. 빅토리아와 그녀를 진찰하고 있던 캐시 키낸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잭. 여기는 웬일이에요?
빅토리아가 놀라며 물었다.
[벌써 끝내 버렸나?
[끝내긴 뭘 끝내요?
빅토리아가 되물었다.
캐시 키낸은 들고 있던 검사경을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내려놓으며
비난조로 말했다.
[잭. 이건 너무 심한 것 같군요.
하지만 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팔꿈치로 몸을 받
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캐시.조금만 쉬었다 하죠.
캐시는 라텍스 장갑을 벗어 휴지통에 던져 넣고는 사무실에 가 있겠
다는 말을 남기고는 불쾌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가 버렸다. 빅토리아는
시술대 끝 쪽에 일어나 앉아 문옆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자신의 핸드백
을 가리켰다. 잭은 핸드백을 건네주고는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앉
았다, 빅토리아는 가방을 뒤져서 찾아낸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커내 불을 붙인 후 천장을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화장실 청소하다가.
[잠깐 생각 좀 해요.
빅토리아는 초조한 듯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
[우리 잠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구.
그는 그녀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고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앗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 빅토리아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몰랐어야만 했는데...... 아이.짜증나.
러...... 당신 좀 전에 중절수술 받은 거 아니지?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임신중인 거지?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자던 날 그때 아일 갖게 됐어요.
잭은 자세를 편안하게 고쳐 앉았다. 갑자기 물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져서 무엇부터 물어 봐야 할지 몰랐다.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지?
[잭! 이제 임신 1개월째예요.
그녀는 초조한 듯 담배를 빨아댔다.
[임신중에는 담배 안 피워야 되는 거 아냐?
[몇 주만에 처음 피우는 담배예요.너무 독해서 가슴이 다 아파요.
그덫는 담뱃재를 종이컵에 털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생각했어요. 결혼. 아버지가 되는 것. 모두 다
당신에겐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 잘 알아요. 하지만 이런 문제
로 당신이 신경 쓰고 책임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잭은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온 자신의 발목을 문질러대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금 내가 왜 여기 와서 누워 있을까요?내 대답을 몰라서 묻
는 거예요?
잭은 한쪽 눈썹을 치켜 뜨며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그 동안 피임약을 안 먹은 거야?
[그래요.
[왜?
그녀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필시 대답을 꾸며 내려는 듯
했다.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8월에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 제 주치의가 말하더군요. 너무 오랫동
안 피임약을 복용해서 부작용이 우려된다면서 페서리를 하라고 하=
군요.
그녀는 담배 연기 사이로 그를 흘껏 쳐다보면서 계속랐다.
[만일 당신이 내 서랍을 샅샅이 뒤졌더라면 아마 그것도 봤을 거=
요.
[근데 왜 그걸 사용하지 않았지?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날 밤 기억 안 나요?
갑자기 그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 참. 똑똑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섹스 문제는 =
것 같군. 그래서 수술은 언제 하기로 했어?
'찬가지=
[내일 아침요.
[그떻게 빨리 해치워야만 되는 거야?
[꼭 그렇진 않지만....... 근데 왜요?
그가 일어섰다.
[제발 부탁인데. 수술을 연기하도록 해. 일단 우리가 이 문제에 =
해 충분히 상의해야 된다고 생각지 않아?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컵에다 던져
말했다.
넣으며 내뱉듯
[글쎄.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물론 당신이 결정할 일이라는 건 잘 알아. 하지만 난 단지 조금 1
?각하자는 것뿐이야,
떠 이상 이야기할 게 꿔 있어요? 난 벌써 마흔이 넘은 노처녀고 엄
되는 것엔 관심없어요. 아직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구요.
[당신 생각해 봐. 그 동안 우리가 엄마 아빠가 될 기회가 얼마나 많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오! 제발 그만 해요!'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알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담배 한 개비를 커내 잠시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가는 무슨 생
각을 했는지 옆에다 내려놓았다. 잭은 다시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저 여자를 설득해야 하나.......' 갑자기 그가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 어쩌면 당신이 옳을지도 몰라. 여태껏 나는 아기를 갖고 싶
다는 생각만 했지 키우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애. 지금 생각해
보니 난 아기를 제대로 키울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 같아.
그는 짐짓 침울한 표정카지 지어 보였다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가 될 거예요.
'어럽쇼?'
[당신도 알 거야. 내가 감히 전적으로 당신이 선택해야 할 권리에
대해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딴 이 문제는 달라.
[물론 다르죠.당신한테는 큰 모험일 수도 있겠고 또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걸려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똑바로 쳐다보며 야멸차게 내뱉었다.
잭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더 이상 얘기가 안 되겠군.
그는 물러설수록 그녁가 더욱 공격적이 되는 것 같아 속에서 화기
치밀었다. 그녀가 말했다.
신 새 여자 생겼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젊은 기자라면서요?
. "'.
[사랑하나요?
그 질문에 잭은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한커번에 떠올랐다. 그렇다. 그는 몰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 그렇게 대답해 버린다면....... 안 된다.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
이 결단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든, 아니든 지금 이 문제와 결부시켜선
안 돼...... 당신은 어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잭은 몹시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히편
서 물었다.
[사랑하고 있냐구요?그래요.전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해 오고
는 연인이 있죠.
그의 머릿속에 레이챌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러나 빅토리아는 자
의 서류가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직업이죠.
그녀는 옆에 놓아 두었던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
대신 잠시 쥐고 있다걔 담뱃갑 속에 넣어 버렸다. 그리곤 계피껌을 ?
냈다.
[당신 얘기 생각해 볼게요.하지만 강요하진 말아요.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들어 보는 순순한 말투였다 그녀의 =
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좋은 징조였다. 이런 때 그녀=
다그쳐서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가 있었다. 빅토리아의 성격을 훤
알고 있는 잭은 이만 방을 빠져 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느꼈다. 그=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근데 아들이야?딸이야?
[아직 몰라요.
[하지만 엄마로서 예감 같은 거 없어?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햇다,
[잗이 알아맞혀 보라면 여자 앤 것 같기도 해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그 예민한 영감을 감안해 볼 때, 나도 딸에다가 걸겠어.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잭은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자 앤 것 같아요.'라고?수술을 받을 생각을 굳히고 있다면 절대
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더욱 흐뭇하게 만든 것은
껌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도로 집어 넣고 계피껌을 꺼냈었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으랴! 병원을 나서며 택시를 기다
=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는 묘한 감동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는 그냥 여자 애가 아니다. 바로 나, 나의 딸인 것이다.'
진찰실에서 빅토리아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기를 낳기를 원해요.
[그럼 그럴 줄 몰랐니?얘기를 하지 말았어야지.
[아이 참. 레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구요. 내가 누워 있는 명실
에 다짜고짜 밀고 들어왔단 말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아마 어쩔 수 없었겠지.
[솔직히 이떻게 퍼고 나니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홀가분하기
도 하고......
[난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 '휴가' 계획에 차질이 생겨선 안 돼.
빅토리아는 한숨을 쉬며 간곡하게 말했다.
[제발, 레이켈.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휴가'라는 말 쓰지 말고 사
실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면 안 티겠어요?'휴가', '휴가'...... 이젠 지겹
다구요.
[아, 알았어. 지금 네 심정 잘 알아. 예민해진 것도....... 내가다 이
해하지.
빅토리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_ 그놈의 '휴가' 가기로 마음이 잡히면 곧바로 연락할게
요.
[이왕 갈 거면 빨리 가도록 해. 난 다 준비돼 있어. 네 결심만 남은
거야. 그리고 이것만은 알아줘. 빅. 네가 '휴가'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널 사랑해.
[알고 있어요.
.
.
그는 욕실 거울 앞에 서서 껌 제거용 용액에 흠뻑 적신 솜뭉치를 한
쪽 구레나룻에 갖다 대고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다른 손으로
털을 잡크는 바깥 쪽으로 잡아당겼다. 얼굴이 찡그러졌다. 가짜 구레
나릇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계속해서 가짜 수염들을 차례로 떼어 냈
다.양볼,턱,목.......
그는 그렇게 떼어 낸 가짜 수염들을 변기 위에 올려놓은 검정색 낙
하산 천 가방 속에 던져 넣고 패출리 기름을 손에 부어서 그것으로 얼
굴에 남아 있는 접착제 자국을 말끔히 닦아 내었다. 그러고 나서 세수
를하고 남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았다.
그 다음, 몸을 숙여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말끔했다
에그즈 베네딕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원래의 그만 남
아 있을 뿐이었다
잭은 한 손에 셀로판 종이로 싼 꽃을 든 채 초인종을 누르곤 몰리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자
신0
처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빅토리아 몰리 아기그리고
바
.....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했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
할 때가 된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무너져 버릴 몰리의 표
눈에 선했다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이 열렸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몰리의 얼굴이 서 있었다. 스
씽
정
웨이드 가죽 치마에 검정 스타킹, 위에는 그의 흰 와이셔츠를 소매를
걷어 헐렁하게 걸쳐 입고 있었다 다갈색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맑
은 두 눈엔 반가움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
운 모습이었다. 차라리 밉기라도 했다면....... 둘은 가벼운 키스를 나
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 웬 꽃이에요?오늘 무슨 날이에요?
그녀는 그가 가지고 온 꽃을 잎사귀 무늬가 금박으로 수놓아진 천으
로 덮여 있는 식탁 위에 풀어놓았다. 식탁 위에는 흰색, 푸른색 그릇들
과 냅킨.은촛대 등이 놓여 있었다 방은 촛불의 누런 후광과 은은
기타 음악. 닭고기 구이 냄새, 통나무가 타면서 내는 탁탁거리는 소
넣
가득 차 있었다. 너무도 안락한 분위기였다 그를 위해 이 모든
마련하며 즐거워했을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잭은 준비해 온 이야
차마 커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노룻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를 접시에 담고 있을 버 잭은 포
도주 한 병을 따서 잔에 따르곤 벽난로 안에서 타고 있는 통나무들을
지었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면서 시덥잖은 농담을 하며
=지옷음을 짓는 동안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
그는 그녀가 의자에 앉는 것을 거들고 자기도 의자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유리잔을 들었다 그도 역시 잔을 들었다. 그녀
는그들의 행복을 위해 건배를 했다.
[자.......
그녀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당신도 한마디 하셔야죠?
[아...... 해야지.
그는 건성으로 건배했다. 미래를 위한 건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오늘 밤 좀 이상해요.딴생각하고 있죠.
[응?
그는 무릎 위에 펼쳤던 냅킨을 식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할 말이 있어. 우리 둘에 관해서.
그랗는 몹시 당혹해하며 물었다.
[뭔데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몰리의 얼굴이 온통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뒤덮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꿔가 누구 잘못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턱을 손에 괴었다.
[결국은 나이 차이인 것 같애.
[나이 차?
[세월이 흐르면 당신은 담요를 내 무릎 위에 덮고 따사로운 햇볕을
쬐게 해주기 위해 공원으로 데리고 다닐 것이고, 턱에 묻어 있는 침도
닦아 주겠지.......
[대체 무슨 얘기예요. 잭? 세월은 무슨 세월? 우린 이번 주말 계획
조차 세우지 않았잖아요.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이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
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만일, 우리 관계를 끝내고 싶으면 그냥 쉽게 얘기하세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진 않아.하지만 나도 어썰 수가 없어.
[왜요?
[상황이.......
[무슨 상황?
그는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관계가 수습되기 힘든 지경으로 발전했어.
[누구와의 관계죠?
[빅토리아. ......
[빅토리아?그녀가 뭘 어쨌게요?
[임신했어.
몰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두 눈은 차라리 듣지 말 것을
후회의 빛을 띠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고개가 푹 꺾여졌다,
떨리는 손가락이 하릴없이 술잔의 가장자리를 맴돌고만 있었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내렸다
[당신에게 꽃을 받을 때 어쩐지 이상했어요.
잭은 몰리의 갈색 벽돌 계단을 내려와 줄줄이 서 있는 쓰레기 뚜껑
들을 두드리며 길모퉁이를 돌아섰다. 바퀴벌레든 들쥐든 어떤 해로운
것에게든지 겁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 자신이 더러운 벌레처럼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몰리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는 빅
토리아와 헤어지던 날 밤 실수로 임신이 되었다고 말했다. 몰리는 당
신 같은 사람들이 그런 일에서 실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
했다. 그는 그날따라 이상한 일이 하도 많아서 혼란스러웠노라고 말했
다. 제노비아의 죽음. 티투스의 대법원장 임명, 그의 청흔 등등.
그러자 몰리는 그 임신이 실수였다면 왜 빅토리아가 낙태 수술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빅토리아는 낙태를 원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즉시 그렇게 말해 버린 것을 후회했다. 이젠 낙태를 원하지 않은
런 자신이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설명
해야 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난 그녀가 갑자기 당당해졌다.
그녀 자신이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면서 사
랑을 위해서라면 -그것도 이젠 믿을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이
기심 정도는 충분히 버릴 수 있다고 운운한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 만
큼 비열하고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몰리
도 아무 말이 없었다.
잭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둘이 함께했던 시간들이
허망한 꿈이었다고 한숨을 토했다. 그는 그 시간들이 그에게는 순간순
잔 소중했노라고 말했다. 몰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내뱉았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섹스 행각을 벌이던 그 순간만이 진실됐던 시간이
었을지도 모른다고. 잭은 그녀에게 마음에 없는 소리는 그만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몰리는 진심이라고 우겨댔다_ 그런 그녀의 억지를 보
면서 그는 가슴이 저며 왔다.
몰리는 이미 돌아선 그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헤
어지는 마당에 피차 정직해 보자고 말했다. 잭은 자신도 자기 감정에
정직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떻게 된 것이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고마워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어색한 침묵의 시간들이 흘렀다. 테이블 위에서부터 현관
문까지의 거리가 잭에게는 마치 사하라 사막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마
침내 그는 용기를 내어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렀다
한 손으로 문 손잡이를 쥐고서 잭은 아침에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몰리는 그럴 필요 없다고, 전화할 일이 있으면 자기가 하겠다고 말했
다 그가 막 문을 여는 순간, 그녀가 그를 저지시켰다.
[잠깐만요. 떠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순 없군요.
그가 뒤돌아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니 평생 동안 그에게 전화할 마음이 전혀
없으니 그도 그래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혹시 일말의 미련이나마 님
아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결연했다.
그는 묵묵히 돌아섰다. 완전히 끝난 것이다.
[난 전척 모르겠는데요. 누가. 왜, 배니스터를 납치하고 병원을 폭
끼려 하죠?
엘리 그레이브스는 괜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책상 건너편에 있
뉴욕 경찰청의 노먼 플라스키 형사와 '바주카조' 윌슨에게 말했다.
윌슨은 워싱턴에서 파견되어 그날 도착했고 플라스키는 강력계에서만
"' 잔뼈가 굵은 베데랑으로 윌슨보다는 한참 고참이었다.
그는 별명이 없는 몇 안 되는 형사들 중 하나였지만 때때로 '고르
비로 통했다. 땅딸막한 체격, 진지하면서도 온화한 얼굴. 이마 위에
점....... 그는 가끔은 그 점이 창피했지만 그 별명이 싫지는 않았다.고
르바초프의 양복만 빌려 입었으면 더 많이 닮아 보였을 것이다. 오늘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갈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반면에 윌슨은 형사에겐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 화려한 색상의 넥타이
에 청바지, 스포츠 점퍼를 입고 있었다.
[용의선상에 있는 혐의자는 있습니까?
그래이브스가 형사들에게 물었다.
플라스키는 그의 노트를 다 읽곤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배니스터가 진술한 바에 따르자면 주범은 베네딕트라는 이름을 가
심
'
졌습니다. 에그즈라는 별명으로 불린답니다. {붉은 장미회>가 주최한
옥외 시위 때 만났다고 하던데......, 뭔가 집히는 게 없으십니까?
[글쎄요....... 저로서는.......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플라스키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여기 근처에 어디 새로운 사무실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낡은 건물
을 폭파시켰다고 들었는데요.
[예. 사실입니다.
[그것과 연관해서 혹시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레이브스는 고개를 저었다.
[병원 폭파사건과 그 일이 연관이 있단 말씀입니까?
[전 그저 제 직감을 얘기하는 겁니다.
플라스키가 말했다.
[병원 폭파에 사용되었던 다이너마이트가 당신이 거래하는 건축
사 것과 동일한 종류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래요?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러면 건축업자와 얘길 해보시죠.
[벌써 만나 봤소. 그분 얘기로는 당신이 몇 주 전에 그에게 철거 =
문가 한 명을 보냈다고 하던데요.
그레이브스는 책상 밑의 파일 서랍을 열고 종이들 사이를 뒤져서 =
거 전문가들을 모집하기 위해 만들었던 광고지를 찾아서 그껏을 형]
에게 건네주었다.
[고용인들을 찾기 위해 광고를 냈는데 제가 그 중 한 명을 리만 ]
사 쪽에 추천을 하긴 했어요. 맞아요. 지금 생각이 나는군요.
[그의 주소와 이름을 기록해 둔 게 있습니까?
[아뇨. 하지만 리만 측엔 혹시 있을지도 모르죠.
[그쪽 파일에는 베네딕트라는 이름은 없었는데.......
윌슨이 불쑥 말을 뱉어 버렸다. 플라스키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쏘
았다. 윌슨은 껌을 씹고 있던 턱놀림을 멈추었다.
[그 사람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플라스키가 연필을 노트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 없는데요.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그레이브스 씨.
플라스키는 노트를 덮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두 형사는 일어나서 그
레이브스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떠났다
[어떻게 생가해?
그레이브스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골치 아파 죽겠군. 범행에 사용된 그 문제의 다이
마이트가 우리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회사 제품일 수는 있겠지. 하
지만 남아 있는 재고도 체크해 봤지만 깨끗해.
리만이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데 말이야.내가 보냈던 사람을 고용했나?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럼.
[경찰에게 그의 이름을 가르쳐 렀나?
[물론.
[이름이 뭐였는데?
[떼네딕트였어.모두 그를 에그즈라고 불렀지.
그레이브스는 자신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리만
계속 말을 이었다.
[베네딕트는 경찰이 체포했던 배니스터라는 자를 고용했던 것 같
애. 사무실에 배니스터에 관한 직뭔 기록카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작 베네딕트의 것은 없었어.
[어떻게 된 거지?
[전혀 모르겠어. 인사과 사람들도 아무도 에그즈나 베네딕트라는
사람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그가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는지도 몰라.
[형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더라구.
그레이브스는 공사 진행 과정에 대해 묻고 이런저런 잡담을 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그는 1달러짜리 동전을 연필꽂이에서 꺼내 책상 위에
세워서 돌렸다. 동전은 곧 상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흐릿하게니
마 완전한 원형을 이루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에그즈 베네딕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가명을 사용한 것이다. 역시 스틱스가 옳았다. 알맞은
인물을 골라 적절하게 이용하고서 사라져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빙빙 돌고 있던 동전은 책상 위에서 '대그락' 소리를 내며 멈추=
다. 그는 그걸 집어서 다시 돌렸다 그리고 동전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
정시킨 채 에그즈가 묶억 있는 화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화살은 흘
에서 뒤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이어 시위를 떠난다. 획 회실흔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다가 잭 매클라우드가 먹이를 쪼아먹는 닭처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지평선을 향해 방향을 바꾼다.
'잭. 너는 네 머리 위에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소리없는 죽음을 느?
지도 못하고 있겠지.'
[팬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어디
때문에 고생스러운가요?
불편한 것 같은데요? 아직도 봉동
[예.하지만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이어야 말이죠.
[그럼 왜 그러죠?
[난 아직도 당신네들이 누구인지도,또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도 모르고 있소.
[여기를 누르면 아픈가요?
[앗! 그래요. 아파요.
[거기가 아픈 지 얼마나 됐죠?
[지난 주부터. 점점 더 심해지는 것 잗소.
[위장약을 먹어도요?
[그래요.근데 이봐요.아내와 아들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죠?
[며찰 후면 알게 될 거예요.
[왜요?며칠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요?
[잠이나 좀 자둬요.때가 오면 알게 될 거예요.
.......
배니스터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이 탄 택시는 공항을 빠져 나와 도심을 향했다.
[무슨 일인지 이젠 가르쳐 줘야죠.
빅토리아가 말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잭이 말했다.
[어디에 도착하면?
[곧 알게 될 거야.
힙분 후 택시는 시청 앞에 섰고 둘은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다.
잭은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자신을 알아보는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건
네기도 하고 손도 흔들어 가며 빅토리아를 천장이 높은 커다란 흘로
1디고 갔다.
[여기서 기다려.
그가 나무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당신이 그렇게 머리 올린 게 보기 좋아.
잭은 한 걸음 내딛다가 몸을 돌리고 말햇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 내려가서는 사무실로 갔다. 창구 안에 있던 직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커다란 봉투를 내밀었다. 잭은 그걸 집은 후
쫑
고맙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고 빅토리아가 있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옆에 암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아기 문제에 대한 당신의 결정을 듣고 싶군.
[그것 때문에 뉴욕까지 왔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이제 확답을 해줘.
[나,그 동안 고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나, 아길....... 낳을래요.
잭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 잡힐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
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 둬야 할 게 있어요. 의사 얘기가 내 나이엔 유
산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하더군요.
[걱정 마. 잘될 거야.
[그나저나 여긴 왜 왔죠?
[결혼!
그는 봉투에서 혼인 증명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볐다.서류 밑에 =
의 서명이 되어 있었고 그 옆에 빨간색으로 체크 표시가 되어 있는
서명란이 있었다. 그녀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는 공간이었다.
[꿔라고 당신이 얘기하기 전에 내가 몇 가지를 미리 얘기해 줘야
것 같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쩌구 하는 결흔 서약 따위는 없을 ?
야. 단지 '난 이제 당신을 아내로. 또 남편으로 선언합니다.'라는 말
1
""".
그녀는 눈을 감았다.
[휴 ,내가 당신에게 너무 심했었나요?
[심한 게 뭐야. 지독했지. 하하하. 또 한 가지 말해 줄 게 있는데 =
호사를 시켜서 우리 이혼 서류도 미리 준비해 놨지. 이혼 합의서. 아?
대한 공동 양육권. 꿔 그런 것들이지. 당신이 언제든 이혼을 원할
빈칸에 시신만 하면 돼. 난 이미 다 시신해 놨거든. 그나저나 여기
빨리 나가고 싶으면 여기 흔인 증명서에 사인하고 복도 아래 창구
제출하면 돼,
그는 그녀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무릎 위에 놓고
잣자리를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또 한 가지, 난 지금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와는 상관없이 당신,
! 토리아 윈터스에게 청흔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물론 아기와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지만 난 당신이 임신하기 전부터 결혼을 간절히
원했었어. 지나간 얘기 같지만 말이야.
그녁의 얼굴이 추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 순간 그에게
도 그녀와의 추억이 한 장면 떠올갔다.
그녁를 위해 목욕 준비를 해주던 날, 뜨거운 목욕 물에 향수를 풀고
한 켠에 커다란 터키 다월을 차곡차곡 접어 놓고 욕조를 빙 둘러 촛불
을 밝혀 놓았다. 그러고 나서 한 잔의 샴페인과 그녀의 꼼을 닦아 줄
스펀지를 욕조 곁에 준비해 놓곤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욕실로 데려
갔었지. 그때 그녀가 꿔랬더라? '당신 노련한 것 보니카 전에도 이런
=많이 해봤죠?'였던가......
그는 벌떡 일어나서 빅토리아의 허리에 팔을 뚜르고 접수 창구로 걸
어갔다. 마침 창구에는 다른 커플들이 접수 절차를 밟고 있었다,
[잭. 이건 아무래도 좀....... 난 지금 꿔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구
요. 정말 혼란스러워요.
그녀는 손가방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하다 다시 쑤셔 넣었다.
[여기선 담배도 못 피는데......, 지금 초조하단 말예요.
[나도 긴장되고 초조해.
그녀는 한쪽 팔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 어느새 그들의 차례가 되었
다. 창구 속의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라구요.
빅토리아가 말했다
[결흔할 거야, 말 거야?
잭이 물었다. 그녀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자기 뒤로 세 쌍의 커플
들이 줄을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때문에 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자 그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이흔 서류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렸다.
[재촉하고 싶진 않지만 과감하게 모험을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겠습니까?
창구 직원이 끼여들었다.
잭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가슴이 터지도록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결혼하겠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결혼하겠어요.'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얼마나?
그녀가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월 첫주까지.
[두 달이나 남았는데?왜 지금은 안 되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뭔데?
[다 알게 될 거예요.
그는 그녁의 팔을 붙잡고 창구 앞에서 물러 나왔다.
[제발. 빅. 뭔데 그래?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니것 좀 보라구.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을 말이 아니라면
못할 것도 없잖아?
말
지
금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어쩌면.......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은 정말 골치 아픈 여자야.
그녀도 아무 말 없이 그를 꼭 안았다.
[그럼 우리 1월 첫주에 결혼하기로 약속하자구
기 전에 말이야.
의회 회기가 시작되
그녀의 어깨 너머로 잭은 창구 직원에게 말했다.
[다시 오겠소.
[네. 저도 다 들었습니다. 두 달 후에 뵙죠, 아참!
인 ?,1 아시죠?
새해 첫날은 휴무
거대하고 유서 깊은 상원 코쿠스 회의실, 이곳은 타이타닉, 진주만,
맥카시 부대, 베트남 전쟁, 워터 게이트 그리고 이란 콘트라 스캔들 등
의 청문회가 열린 곳이기도 했다. 지금 이곳엔 다시 압력 단체, 텔레비
전 스태프들과 언론인들, 의회 직원들, 법률 사무원들 그리고 일반 방
청객들까지 모여 있다
애브너 티투스와 그의 가족은 그곳에 없었다. 왜냐면 티투스는 그날
게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에겐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는 녹색 펠트 천으로 싸인 선서문이 놓여 있는 증인석에 앉
늦
아 있었다. 잭은 방청석 두 번재 줄에 앉아 있었다. 잭에게 살짝 웃어
보이곤 그녀는 법정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와 보
도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매일 밤 저녁 뉴스 시간에 자주 보았던 사림
들이었다, 몰리 맥코믹은 자신의 카메라맨과 그의 조수인 이기 핏트
사이에 서 있었다. 빅토리아는 호기심 때문에 몰리의 얼굴을 한동인
바라보다가 자존심이 상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티투스 대법원장 인준에 반대하는 증인들의 증언이 거의 끝니
가고 있었다. 여권옹호 단체의 증언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여권옹호
단체측의 증인은 낙태에 관한 사안들을 티투스 인준 반대에 주요 이수
들고 나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 연합의 전략이었다. 티투스
아킬레스 건을 최후에 공격함으로써 티투스가 미처 답변을 준비하
못한 채 나가떨어지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지도자 연합'은 첫번쌔 증인으로 빅토리아를 내세웠다 그녀의 달
?' 짐념 그리고 멋진 외모가 한몫 하기를 기대하면서....
상원 법사뷔원회 위원장 스틱스 딕키가 마이크를 톡톡 치고는 우렁
찬목소리로 말했따.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방청객들은 곧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빅토리아의 증언이 시작되
었다
[존경하는 의장님.......
그녀는 자신이 증언할 내용이 담긴 세 쪽짜리 원고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만일 의회에서 티투스 판사의 대려원장 지명이 인준된
다면 이 나라 여성들의 건강과 나아가 생존에 커다란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사생아들을 양산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도자 연합'은 그의 대법관 임명을 위원회가 거부해 주시기를
촉구합니다.
그녀는 읽어 내려가던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마이크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존경하는 의장님. 이 위원회가 디투스 판사님의 대법원장 임명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딕키는 불안한 눈초리로 그녁를 쳐다
보았고 법정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몇 달 전에 저는 이곳 워싱턴에 거주하고 있는 제노비아 데이비스
라는 한 여인의 소송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티투
스 판사가 비인간적이고도 비양심적으로 낙태 허가 판결을 지연시킴
으로 해서 부득이 돌팔이 의사의 손에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었습니
다. 저는 이 죽음에 대해 티투스 씨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청문회장은 방청객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로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플
래시가 펑펑 터지며 텔레비전 카메라와 보도 기자들은 갑자기 저녁 뉴
스 톱기사라도 찾은 듯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스틱스 딕키는 얼굴은 붉어졌지만 침착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는 파일을 열고 몇 장의 신문 스크랩과 메모지를 꺼냈다. 물
론 그는 빅토리아의 증언 내용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는 않았다
[아주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하셨군요. 윈터스 양. 그러나 제가 알기
로는 이런 종류의 증거 없는 비난에 대해 단지 증인 한 사람뿐만이 아
니라 낙태를 찬성하는 운동 단체의 윤리와 신용 그리고 그 동기에 대
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첫마디가 그가 앞으로 주장할 내용을 짐작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단지 티투스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가 쏜 어뢰의 빙
향을 되돌려서 빅토리아와 그녀의 여권옹호 단체 모두를 침몰시키고
자 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윈터스 양. 데이비스 부인의 죽음을 티투스 씨가 방조했다는 말씀
이신데 과연 티투스 씨가 사전에 그 죽음을 예견할 수 있었다는 증?
가 있습니까?
[의장님. 한 남자가 술에 취해서 펜실베이니아 거리를 시속 160=
로미터의 속도로 운전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칠 것0
핑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치지 않으려고 조심할지
모릅니화. 하지만 그 사람은 누군가를 치기가 쉽다는 사실을 알아
합니다. 티투스 판사의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강간 사건에 대
알고 있었습니다. 데이비스 부인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알
있었고, 그녀에게 낙태할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가 허
전에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
그는 그고의 생사 여부를 손에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펜실베
솨 거리를 술에 취해 운전하는 사람처럼 무모했습니다. 그녀의 죽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입니다 의회는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
게 대법원이라는 자동차의 운전대를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방청석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주 감동적이군요. 윈터스 양. 하지만 모든 소송 관계자들의 허술
함과 여러 가지 특수성에 대해서 재판관이 무제한으로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 설마 당신은 지금, 그가 맡은 소송 사건들과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드는 시간에 대해서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
겠지요?그렇죠?
스틱스가 반격을 해왔다.
[의장님.저는.......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데이비스 부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티투스 판사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겠습
니까?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는 티투스 판사
자신이 설명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카?
[제가 무엇을요?
[그녀가 죽을지도 코른다는 사실 말이오.
[저는 그녀가 무엇인가 극단적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
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를 도와주지 못했나요'.
빅토리아는 앉은 채로 자세를 꼿꼿이 했다.
[저는 그녀의 변호인으로서 그녀가 이 시련을 안전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내 권한 안에서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의원님. 불행하게도
그녀는 법원의 낙태 허가 지연이라는 비인도적인 처사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인지 저에게 말할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으켜 저
는 그녀와 같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티투스 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그녀의 극단적인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취한 법률가로서의 조치는 어떤 성질의 것이었
습니까?
[저는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조치는 성공을 했군요.그렇죠?
[네. 그렇습니다만 판결이 너무 늦었습니다.
[언론에 따르면 불과 몇 시간의 차이였더군요.
스틱스는 신문 스크랩을 들어올렸다.
[윈터스 양. 만일 그 마지막 몇 시간 동안 그녀의 불안정한 상태를
걱정했다면 그녀 옆에 조금 더 있어 주거나 어떤 방려으로든 그녀를
보호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빅토리아는 몹시 상기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원님. 저는 그녀가 죽은 이후로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해 왔고 아마도 앞으로 오랫동안 그 문제를 생각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윈터스 양. 당신은 제 질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노력은 전적으로 합리적이었고 심지어 영응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
비극이 발생했죠. 그러나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윈터스
그리고 이것이 당신 잘못이 아니라면 티투스 판사의 잘못도 아닌
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의원은 이제 그만 발언권을 넘기겠습니까?
스튜어트 의원이 물었다.
스틱스는 자신이 한참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신문을 마치게 되는
만족스럽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몬태나 의원 발언하세요.
스튜어트 분 의원은 티투스 인준 반대의 입장이었다.
그는 빅토리아의 증언을 옹호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연
설은 피상적인 문구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의 인준 반대 입장의 저의
가 다분히 정치적인 데 있었던 까닭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는 여성들의 표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됐건 그의 발언 이후,
;문회장은 마치 의원들의 말솜씨 대회를 방불케 했다. 서로 경쟁하다
시피,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해 가며 연극처럼 진행되는 그러한 과장
된 열기 속에서 진실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스틱스는 의사봉을 들고 시계를 보았다.
[본 회의는 3시까지 휴정합니다.
빅토리아를 제외한 몽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녀는 아직도 손바닥
을 탁자에 놓은 채 의자 뒤로 기댔다. 친구와 기자들이 그녀 주위를 둘
러싸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써 잭파 눈이 마주쳤다.
잭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애브너 티투스가 미국의
다음 대법원장이 되어 합법적으로 낙태를 근절시키려 하고 있었다. 잭
이 회의실을 막 나서려고 할 때 스틱스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나는 제노비아 데이비스에 대한 당신 여자 친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그녀가 이 정도로만 하고 끝내 준다면 우리 관계도 더
이상 어색해지지 않을 텐데.......
스틱스가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들으면 그것은 분명한 정치적 협박
이었다
[스틱스. 그것은 나한테 얘기할 게 아니라 그녀에게 직접 애기하셔
할 것 같군요.
[나는 당신이 여자 친구에 대해 무언가 해줄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말하자면, 바지만 입지 말고 치마도 가끔씩은 입으라고
말이야.
[의원님 나도 당신의 부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도 매우 주장이
뚜렷하더군요.
[그래. 내 아내도 그렇지....... 잭, 당신에게는 창창한 앞날이 있소
정치가로서 말이지. 어쩌면 아주 높은, 높은 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오. 아울러 당신이 민주당
진보주의자들의 대표 주자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려 든다는 것은 너무나 멍청한 일 아니오?
[글쎄요.전투의 결과는 두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티투스의 인준은 거의 확정됐소. 당신들은 지금 바위에다 계란 치
기를 하고 있는 거요.
잠시 스틱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가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돌
아섰다.
잭은 빅토리아와 나란히 사무실을 향해서 걸었다.
[스틱스가 나를 곤경에 빠뜨렸어요. 오후 회의에서 내가 어떤 식으
로 반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니 무슨 말이에요?
[나라면 참석하지 않겠어.그냥 내버려두라는 거야.
이제 와서 어떻게......?
는사무실 앞에 멈추더니 그?를 마주보았다.
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이 싸움의 대상이 다름아닌 티투스리
것을 잊지 마. 당신은 이쯤 해두고 다른 사람들이 티투스를 괴롭히
놔두란 말이야.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난 포기할 수 없어요.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올려 주고 팔을 잡아당
1는 출입구 쪽으로 데리고 갔다.
[난 우리 둘 중 누구도 무모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그녀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당신은 손 떼세요 이건 순전히 나,
요.
즉 우리 여성들의 싸움이에
그는 그들 사이로 어떤 장막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장막은
일단 드리워지고 나면 모든 남자를 모든 여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성의
한치라는 장막이었다. 사실상 그녀가 옳았다 그는 흥미 있는 싸움을
좋아했지만 그걸 찾기 위해 여성 외인부대에 참여할 필요까진 없었다
이건 여성들의 혁명이었다. 그들 둘 다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돠는
진심으로 잭의 부담을 덜어 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잭은 자
꾸만 자신이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떠니려고 돌아섰지만 그가 그녀를 붙들었다
[빅!
[왜요?
[제노비아를 발견한 날, 그날 이전에 그녁의 아파트에 갔었어?
[아니,왜요?
[당신과 레이챌 두 사람 모두 제노비아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
이지?
[그날 밤 낙태 병원에 가라고 부추기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
그녀는 잠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맨 처음 그녀가 낙태를 허가받았다는 것을 안 것은 레이챌이 레스
토랑으로 전화를 했을 때예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당신은 제노비아의 죽음과 낙태
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말이지?
[물론이죠.
[그럼 됐어.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잭은 책상 앞에 서서 전화번호를 뒤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제노비아의 성경책 속에서 발견했던 봉투를 꺼냈다. 벤
제이콤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생각해?
잭이 물었다
제이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인준을 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위원회는 월요일까지 심사를 마치고 화요일에 투표하고 의회가 추수
감사절 전에 산회할 수 있도록 수요일까지는 임명 절차를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
[티투스의 증언은 어떻게 됐어?
법
기다리고 있
재개되기를
미네소타 출신의 민주당 의원인 필럽 상원의원은 청문회에서 티투
스가 넘어야 할 최대의 난관이었다. 필럽 의원은 상원 내에 막강한 영
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나아가 워낙에 능수 능란한 카메라 연기자였기
때문에 그의 몸짓 한 번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전국의 안방이 들썩거
리게 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단상에서 티투스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는 티
투스가 증인이고 자기가 판사라는 점을 확실히 하면서 도도한 목소리
로 의례적인 환영 인사를 했다
티투스는 서류가방을 옆에 낀 채 큰 횔 체어에 혼자 앉아 있었다. 페
퍼 루미스는 그 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귀에 대고 소곤거릴 수 있는
변호사도 없었고 고문도 없었다. 그가 움직이거나 실룩거릴 때마다 주
위에서 찰콰거리는 불멎과 카메라만이 있을 뿐이었다. 잭은 성미가 조
급한 티투스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마의 땀을 견딜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회의실 뒤에서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니나다를까, 티투스는 휠 체어 뒤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
고 그의 창백하고 하얀 얼굴 위로 수건을 가져 갔다. 그 모습을 향해
수없이 많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그를 보면서 잭은 기쁨과 연
='?
동시에 느꼈다. 실제로 이마를 닦는 일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었
그러나 청문회장에서의 그런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방영될 때는
반응이 다른 것이다. 시청자들의 눈에는 아주 초조해하는 모습으
비춰질 것이다.그리고 신문의 제1면에 그런 사진이 찍혀 나온다면
영락없는 궁색한 범법자의 자세로 인식될 것이다.
필럽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
[만일 여성의 자유 낙태권이 완전히 철좨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
합니까?
티투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니 땅의 법을 지켜야죠.
[그떻게 되면 원하지 않고,사랑받지 못하고. 돌보아지지 않는 어린
을 양산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모든 어린이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사랑받고,돌보아집니다.
[그래요?당신과 저는 다른 신문을 읽고 있나 보군요.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라고 했잖습니까?의원님.
필럽이 연필을 뜰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어요. 안 그래요?판사님?오늘날 우리는 어머
도 스스로 뭔하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죠. 그러나 어머니들의. 아니 여자들의 자유로운 삶 때문
에 태아의 행복할 권리가 말살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뒷골
목에서 행헤지는 낙태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그것이 2차 세계대전 이
후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전부는 아닙니다. 합법적인 낙태권 없이는 여성들이
롭다고 하는 데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티투스가 말했다. 아직도 위태
[역사를 통해 보자면 인류는 그보다 더한 것으로부터 위협을 받이
가며 위태로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마약, 전쟁 따위 말이죠. 그런 것들
이 법으로 금했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았잖습니까?
필럽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판사님. 당신은 현명한 분입니다. 정말로 수정란을 유산시키는 =
이 살아 있는 사람을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보십니까?
[예.
[그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이라도 없다고 보십니까?
[중요한 차이점은 없습니다.
필컵은 그의 노트를 뒤적거렸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판사님. 약간 별난 질문인지도 모르지만 낙
태 문제에 대해 귀하가 그토록 확고한 입장을 갖도록 만든 요인이
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티투스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어렸을 때 말입니까?
[아뇨.어린 시절이든 성인이 되어서든.......
티투스는 손톱 끝을 서로 마주 대고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단 한 가지 사건도...... 없습니다. 의원님. 다만 제가 기억할 수 =
는 것은 인간의 생명은 존귀하고 유아들을 보호하는 것은 제가 배
기본 가치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심지어는 거리에1.
조차도.......
[그리고 가정에서?
[예.그리고 기정에서요.
그는 젖은 수건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가정의 중요성을 무시하려고 열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요.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습니다. 판사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볼
근친상간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혹시 여성들의 낙태가 정딩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보시는지요? 또. 있다면 어떤 경우인지
째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제가 강간이나 근친상간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침묵하는 것이
견해에 대한 동의로서 해석되지 않길 바람니다.
[잠시만요. 당신은 그러면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낙태를
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저는 이 시간에는 그러한 논점들에 대해 달을 하지 않는 편이 차라
낫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임신을 강요할 수 있나요?
[의월님. 저는 임신을 강요하지도 강요 안 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판사님. 좌우지간 놀랍군요.
티투스는 손을 포개어 앞에 놓았다.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입을 열
었다.
[흑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몇몇 공신력 있는 조사 자료에 의하면 강
간이나 근친상간으로부터 입은 대부분의 육체적, 정신적 손상은 임신
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즉, 피해를 입고 나서 임신이 된
다는 당연한 뭔리죠.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결한 태아의 목숨이
임신에서 오는 약간의 불편함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무게를
저울질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불편이라고요? 강간범의 아기를 가진 여자가 임신으로 인해서 약
간의 불편함을 겪는다 이 말씀입니까?지금?
[팬한 단어 하나 가지고 꼬투리 잡지 마세요.나는 단지.......
[그리고 귀하의 조사 자료들은 대체 어떤 것들이죠?흑시 '임마뉴
엘 부인'아닙니까?
방청석 여기저기서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티투스는 태연한 미소를 지은 채 방청석이 다시 조용해지기를 기다
렸다.
[자. 이제 의원님의 근본적인 질의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법
관들은 '절대로 아니다'라는 절대부정어를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 있습
니다만 저로서는 낙태 문제에 관한 한 여하한 경우에도 낙태가 허용될
수 없다라는 제 입장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물론 단 한 가지 예외가 있
긴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낙태가 헌려에 비추어 정당한 권리라는 대법원의 판결입니다.
[하지만 판사님.그 판결은 지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따라서 나는 그 판결을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끼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올시다.
[당신 견해의 타당성에는 의심이 갑니다만 그 솔직한 답변에 감명
받았습니다.
[의원님. 이것은 감명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입니다. 누군가
가 자궁에 있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안 한다면 누
가 하겠습니까? '로 대 웨이드( . )' 판례 이후로 정상적이
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2.300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나
기도 전에 죽어 갔습니다. 그들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몇 명이었는지
또는 에이즈 치료법을 발견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누가 알겠습
니까? 국회의원이 몇 명일지, 또는 대법원의 재판관이 몇 명이나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비록 그들이 횡범한 시민이었다 해도 야구 선수들,
걸 스카우트, 공장 노동자들, 주부들...... 등등 그들은 살아갈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 이디 아민. 아틸라 헌?
필팁이 그의 말을 제지하고 비꼬아댔다.
[사랑의 부재와 빈곤 그리고 학대로 가득 찬 어린 시절로 인해 폭력
빠지게 되는 살인자들과 일반 범죄자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당신
이런자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모양이군요.
[전 .그건-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티투스가 더듬거렸다.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그때 스틱스 딕키가 끼여들었다.
[자. 필럽 의원.제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면서 질의권을 어느 공화당 상원의원에게로
넘겨 버렸다.
[의사 진행 속도를 좀 빨리 해야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청문회를 끝
내고 수요일엔 투표를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 고향집에 가
서추수 감사절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겠지요.
[이기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기구를 챙겨 넣으면서 몰리의 카메라맨인 알프레드가 말했다. 믈리
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기가 회의실 앞쪽에서 횔 체어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애브너 티투스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티투스차 이기는 잠시 대화를 나
누었다. 그후 이기는 윗호주머니를 뒤져 연필을 하나 찾아내고는 그것
을 티투스에게 건네주었다. 티투스는 종이 쪽지에 무엇인가를 적어서
는 이기에 게 연필과 함께 건네주었다. 이기는 미소를 지으며 티투스와
악수하고 나서는 기자들이 몰려오자 물러났다.
이기는 몰리와 알프레드 쪽으로 걸어오면서 그 종이 쪽지를 코트 주
머니에 쑤석 넣었다,
[무슨 일이야?
몰리가 물었다.
[그의 사인을 하나 받았어요.
이기는 그렇게 말하고 알프레드의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잭은 사무실로 돌아와서 책상 앞에 서서 그의 보좌관들, 벤 제이콤
스와 조지아 브리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지아 브리머는 그의
언론 보좌관이었다.
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끝났어. 공화당 치들이 미리 약을 다 써놓은 것 같군.
[적어도 20표 차 이상으로 인준이 가결될 것 같습니다.
제이콤스가 침울하게 말했다.
잭은 책상에서 고무줄을 하나 집어 들고 말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뭔지 알고들 있나? 우리는 작은 걸
해야 할 때 큰 걸 하는 실수를 범했어.
보좌관들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목표를 잘못 잡았다는 이야기야. 티투스의 임명을 저지하려고 할
게 아니라 '로 대 웨이드'판례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막아야 해.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어차피 티투스의 인준 통과가 기정 사실이라
면 지연 작전을 써보는 거 말이야. 지금 대법원에 '코스텔로' 사건이
계류중인 건 다들 알고 있지?그걸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12월 14일까지 그가 취임 선서를 하지 못한다
면 비록 대법원장에 임명된다 할지라도 그는 그 사건에 참여할 수 있
는 기회가 없어져.
[나머지 대법관들은 어떻게 하구요?
조지아가 물었다
[그게 바로 요점이야.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은 8명이야. 그 중
'은 우리 쪽이고 나머지 4명은 저쪽이지. 따라서 티두스가 그 표결
참여할 수 없게만 된다면 대댑원은 4대 4로 나누어지게 되지.그건
이 폐기퍼지 않는다는 걸 의미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역전시킬
수있는 또 다른 사건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아마 적어도 년은 기다려
야 할 거야. 그 1년 동안에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보수파 대냅관
이 그만두거나 죽을 경우 대통령이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낙태
지지론 입장의 법관을 그 후임으로 지명할 수도 있고 또 중도 보수파
인 한델만 대법관이 낙태 지지론자로 돌아서는 경우도 생길 수 있잖
아?
[하지만 티투스의 인준을 어떻게 지연시키지요?
조지아가 물었다
잭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내일 모레면 추수 감사절이야, 너도나도 죄다 집에 가고 싶을 거
아냐? 스틱스는 바로 그걸 이용해서 이 일을 후딱 해치우려는 속셈이
야. 만일 훌륭한 장애물을 하나 만들어 놓는다면 표결에 들어가지 꼿
하고 산회(}했다가 내년 월 말에나 다시 꼬이게 될 거야. 그 동
안 대려원은 티투스 없이 판례를 결정해야 돼. 그떻게 되면 아까 말한
대로 우리쪽의 소원대로 퍼는 거지.
[그럴 만한 장애물이 있을까요?
제이콤스가 물었다.
잭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3시였다.
[조지아.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소집하게. 이번 청문회를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을 죄다 불러모으도록 하게.
[꿔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잭은 가운데 책상 서랍을 열고 그가 제노비아의
견했던 봉투를 꺼냈다.
[바로 이거야. 성경책 갈피에서 발
잭 매클라우드는 카메라 앞에 섯다. 그는 제일 나중에 도착한 방송
국 음향 담당자가 마이크를 설치하고 취재 가방 속에 있는 코드에 연
결시키는 것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기다렷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자
그는 입을 열었따.
[신사 숙녀 여러분. 유감스럽게도 저는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죽음
에 애브너 티투스 판사가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카메라가 자동으로 되감기는 소리와 연필이 바쁘게 굴러가는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지난 번 청문회 때 여러분은 데이비스 부인이 티투스 판사의 낙태
허가를 기다러다 죽었다는 사실은 이미 들으셨습니다. 아울러 티투스
판사가 고의적으로 판결을 지연시켜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돌팔이 시
술자에게 몸을 맡겼고, 그리하여 비참한 죽음을 맞게 퍼었다는 사실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말씀드리려는 사실에 대
해서는 아마 들어 보시지 못하셨을 겁니다.
텔레비전 카떼라 돌아가는 소리와 플래시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잭은 편지 봉투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것은 데이비스 부인이 죽은 날 밤,제가 그녀의 성경책에서 발견
한 봉투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위에 손으로 쓴 단어 세 개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절당함.병원.야간 그리고 전화번호 하
나, 그 번호로 전화를 걸면 여러분들은 그것이 애브너 티투스 판사 사
무실에서 울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법
률 서기 책상에서.......
그는 기자들이 메모할 수 있게 잠시 말을 끊었다.
[발표를 앞두고 엄청난 고민과 갈등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증거
가 티투스 판사가 이 여인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뒷
받침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티투스 판사가 단지 데이비스
부인의 낙태 허가를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데이비스 부인의 낙태 의사는 여기 적혀 있는 세 단어로도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죽기 전에 티투스 판사
나 아니면 그의 직원과, 아니면 판결 여부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그
누군가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피고와 재판 담당자
사이의 그러한 비밀스런 접촉은 일반적인 피고와 재판관 관계에선 있
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의흑을 품지 않을 수 없
습니다. 자, 이제 몇 개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티투스 판사 이외에 누
가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승소 판결을 알려 주었을까요? 이 사건에 은
밀히 관여하고 있는 누군가가 왜 데이비스 부인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 주었을까요? 왜 또 그녀에게 산부인과로 가라고 했을까요? 그것
도 그렇게 밤 늦은 시간에? 데이비스 부인은 이미 의회 부속 산부인과
를 지정 병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자정에는 열지 않
습니다.그녀는 어떤 병원으로 가도록 지시받았을까요?왜요?
그는 기자들을 한번 쭉 흩어보았다.
[이 증거는 저와 여러분이 티투스 판사와 그 재판부에 대해서 의흑
을 제기하고도 남습니다. 그 속에 숨은 음모나 또 실제로 무슨 일이 저
졌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 봉투 하나
전부입니다. 티투스 판사는 이 나라 대법원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전에 이 의혹에 대해 명백하게 밝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확
게 해둘 것은 그의 해명이 미흡하거나 거짓일 경우에는 상원은 그
인준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자,이제 질문하실 게 있으시면.......
기자회견실은 수많은 질문들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잭은 기자 가운데 한 명을 지적했다.
[매클라우드 의원닙. 그러니까 티투스 판사가 데이비스 부인을 살
해했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 사실에 대해 세밀히 조사해 봐야 된다고 한 겁니다
[무엇에 대해 세밀히 조사해야 한다는 겁니까?
[저는 의혹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다른 기자가 질문헤 왔다.
[티투스 판사는 지명도 있는 공무원입니다. 데이비스 부인이 그 전
화번호를 전화번호부에서 알아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번호는 전화번호부에는 나와 있지 않는 번호입니다.티투스 판
개인용 전화선입니다.
[낙태에 반대한 티투스 판사의 단호한 견해로 볼 때,그가 데이비스
부인을 낙태 시술 병원으로 보냈다는 사실은 잘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래서 이 의흑들을 의회에서 세밀히 조사해 보자는 겹니다. 자기
가 허가 판결을 내리자마자 데이비스 부인이 자유롭게 중절 수술을 받
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티투스 판사가 그녀가 다
니는 병원말고 다른 병원을 권했을지 저로서도 의문입니다, 아직까지
는 그녀가 어느 병원. 흑은 어느 돌팔이에게서 수술을 받다 죽게 되었
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순식간에 회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의원님. 왜 상원이 막 투표를 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야 이 사
을 공개하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히 저는 이 사실을 공개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다만 위원
회가 그의 경력에 근거하여 임명을 거부하길 원했죠.
[그 봉투를 경찰에게 넘겼어야 옳지 않습니까?
[제가 데이비스 부인을 발견했던 당일에는 이 증거와 티투스 판사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갔죠?
누군가가 물었다. 소란 속에서 튀어나온 큰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답변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한 방송
국 여기자가 그녀의 카메라맨과 함께 취재진들 틈에서 빠져 나와 복도
쪽에서 밤 뉴스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카메라
불빛은 커져 있었다. 아마 배터리가 나간 모양이었다.
잭은 한두 가지 질문에 답변을 더한 후, 취재진의 숲을 뚫고 사무실
로 향했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그는 뿔테 안경
을 끼고 다저스 야구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방 뒤쪽에 서서 바인더 안
의 노트에 뭔가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다가가자 그
남자는 적고 있던 노트를 덮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였더라? 그러나 잭은 그런 생각에 빠질 만
큼 한가롭지 못했다.
그때 그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눈빛을 느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몰리였다. 그녀는 앞으로 모은 두 손에 노트를 쥐고 그를 쳐다
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조금이라도 친밀한 멎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동정심, 용서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곧장 사무실로
제이콤스가 잭의 책상 모서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잭
의자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리곤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 있으세요. 의원님?
=가 물었다.
'무슨 자신? 몰리? 빅토리아? 아니면 나의 사생환에?'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었다. 잭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그는 책상 위에 있는 고무줄을 집어 손가락 사이에 걸어 당겼다가
놓으면서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몰리는 비행기표 영수증을 가방 안에 쑤셔 넣고는 자세를 고쳐 편히
앉았다.
[이기는 어디 있지?
그녀는 옆자리에 있는 알프레드에게 물었다.
[아침 일찍 갔어. 이삿짐 센터에서 오늘 그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해
서.......
이륙한 지 얼마 후에 기류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가 요동
을 쳤지만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았다. 아침에 기자회견장에서 잭을 봤
을 때 벌써 속이 한 번 뒤집어졌기 때문이었다.
맬
스틱스 딕키는 책상 앞에 서서 손에 전화기를 들고 상원의 공화당
원내총무와 통화하고 있었다. 엘리 그레이브스는 사무실 안을 서성거
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스틱스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번 매클라우드 기자회견, 크게 걱정할 것 없어요....... 뭐 별일
있겠어? 하지만 만약 의회 회기가 끝나기 전에 티투스 인준 안컨이 표
결에 붙여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아무래도....... 맞아요. 잭 그놈이
무슨 꿍꿍이속이든 상관없어요. 평생 동안 일관되게 낙태를 반대해 온
판사가 한 여자의 낙태를 비밀리에 허용했다고 언론에다 떠들고 다녀?
증거랍시고 고작 휘갈겨 쓴 아무 의미 없는 단어 몇 개라니...... 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놈과 언론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일을 망
칠지도 몰라요....... 그래.그래,알았어요.
방안을 왔다갔다하던 그레이브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꿔라고 하세요?
[저녁 뉴스 때 언론의 반응을 두고 보자더군.
[매클라우드! 망할 놈! 망할 놈의 자식 !
[진정해.
스틱스가 말했다.
[가만두지 않겠어.그놈을 아주 요절을 내버려야지.
[침착해. 우리 아버지 말씀이 '분노에 찬 인간은 바보'라고 하셨
.
[빌어먹을 영감쟁이 !
딕키의 뺨이 붉어졌다.
[그렇게 흥분하다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야.
[두고 보자! 잭! 난 한다면 해!
스틱스는 문 쪽으로 가서 잘 닫혀 있나 확인해 보고 되돌아왔다.
[진정하고 냉철하게 사태를 판단해야 해.
어
= 이브스는 아무 대꾸 없이 씨근덕거리며 다시 책상 쪽으로 걸어
달 전에 우리가 거실에서 한 얘기 생각나틴
[기억하구 말구요.근데 왜요?
[입 닥치고 들어 봐!
스틱스의 고함소리에 그레이브스는 그제서야 조용해졌다. 스틱스는
신이 말하려는 것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얘기했다.
[잘들어. 엘리. 난 잭에 대한 우리의 적개심이나 분노가 누구를 위
것인지, 그게 진심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자넨 말이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흥분만 하다가는 반
드시 무리를 범하게 된다구. 알겠나?
그레이브스가 조금 진정이 된 옥소리로 대답했다
[난 내 나름대로 이 상황과 또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어요
내게 설교하려고 하지 마세요.이미 화살은 하늘로 쏘아졌고......
스틱스는 손을 저어 그레이브스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그는 아
랑곳하지 않고 계속 애기했다.
[그리고, 그 화살, 쏘아 올린 지 너무 오래돼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언제 떨어질지는 나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지.
스틱스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과격하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뻗힌 이 야만인이 무슨 공작을 꾸미고 있는지 감지할 수가
없었다,
[내겐 화살이 하나 더 있어요. 이제 그걸 쏠 때가 됐어요. 비장의카
드예요.
어금니를 꽉 깨문 듯 그레이브스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의원님은 모를 거예요. 잭 그놈이 얼마나 추악한 놈인지 만약 내가
그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공개했더라면 오늘 기자회견장에는 낯짝
도 못 내밀었을걸요.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가서 손잡이를 잡고 돌아보며 말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요.
스틱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자넨 자네 식대로 해. 난 내 방식대로 할 테니. 단 조심하게.
그레이브스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아까 아버님에 대해 함부로 지껄인 것.......
[괜찮아.
스틱스는 다 잊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레이브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
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아버지란 존재는 제게 그리 달갑지 않거든요.
그러고 나서 그는 방을 나갔다.
스틱스는 책상 쪽으로 와서 뒤에 있는 책장을 흩어보면서 '미국 헌
법이라고 주석이 달린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들었다. 잠시 책에 눈길
을 주고 있던 그의 입에서 '하나 있지....... '라는 혼자소리가 새어 나
왔다.
[그렇지 !그 고양이 같은 놈의 가죽을 벗길 방법이 하나 있어.
그는 내부 통화 장치 버튼을 눌렀다.
[백악관 연결해 줘.
[백악관에 누구요?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대통령 말이야, 대통령 !
빌리 배니스터는 하얀 시트 한 장을 덮고 복부에는 노란색 수술용
칠해진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라텍스 장갑을 킨 손 하
그의 배 위에 카만 선 하나를 긋고 나더니 뒤이어 그 선을 따라
카로운 메스가 소리없이 살가죽을 갈랐다.
곧이어 장갑을 낀 손가락들이 절개된 뱃살을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그러자 복강을 덮고 있는 은색의 얇은 막이 나타났다. 다시 메스가 천
천히 움직이더니 그 얇은 막 위에 조그만 구멍을 냈다. 이제 복강으로
수술 기구들이 들어갈 수 있는 롱로가 생긴 셈이었다. 번뜩이는 수술
용 가위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은색 막을 싹둑싹둑 잘랐다. 손가
락들이 주변의 힘줄과 핏줄을 정리한 뒤 절개된 부분을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세상에, 이것 좀 봐.
.......
[이건 완전히 유채꽃밭이야.
[이제서야 복통이 그떻게 심했던 이유를 알쳤군.전체로 번졌어.
[시시각각으로 진행되고 잇는 것 같은데.......
.......
.,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
[기껏해야 며칠 정도.......
.......
[췌장 좀 봐.
.......
[그냥 닫아 버릴까?
.......
[세상에, 오, 맙소사.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숨을 쉬고 버텄을까
암세포가 이렇게 진전되고 나면 모르핀 가지고도 통증을 잡아 줄
없었을 텐데 말이야.
......휴 우.
[누구,내 이마 좀 닦아 줘.
[괜찮아?
[물론,
.......
[계속하자구.
[정말야?
[왜 더 좋은 생각 있어? 이 사람을 죽이려고 이러는 건 아니잖이
피하 주사 준비해 줘.
[계획에 차질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야.
[상관없어. 굳이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린 앞서 실패한 경
들을 통해서 필요한 지식들을 얻었잖아?
.......
[이런...... 곧,숨이 곧 끊길 것 같아.
.......
.......
[숩이 끊어졌어.
=. 이 줬쌍한 영흐흠.""'.
=,, 이제 닫아야지.
[내간 할고.
...... .
[그것 좀 집어 줘.
[꿔?
[인형. 말이야.
쟈기 있초 것
]
[실례합니다. 그레이브스 씨한테 온 소포가 있는데 그의 서명이 필
요해요.
뿔테 안경에 다저스팀 야구 모자를 눌러쓴
젊은이가 퀸즈의 {붉은
장미회} 본부의 접수처 앞에 서 있었다.
[복도 끝 방이 회장님 집무실이에요.
접수계원이 말했다.
턱수염을 기른 그 배달부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서 사무실 앞에 섰
다. 마침 방문이 열려 있었다. 사무실 문 앞의 비서 자리는 비어 있었
다. 컴퓨터 화면은 켜진 채였고 잡다한 서류가 널려 있는 책상 위로
방송의 음악소리가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배달부는 초조한 손놀림으로 점퍼의 지퍼를 밑으로 내리고 품안에
끼어 있던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 봉투 위에는 '그레이브스 씨에게,
비밀 서류'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는 봉투를 비서의 책상 위에 내려놓
으려다가 의자 뒤로 사무실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문 앞으로 가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책상 앞으로 다
가가 봉투를 책상의 중앙에 반듯이 놓았다. 그는 손을 거두어 들이다
실수로 연필꽂이를 건드렸다. 반짝이는 은화 한 닐이 책상 위로 떨
그는 그것을 집어서 앞뒤로 자세히 살피보았다. 수잔 . 앤터
1달러짜리 은화였다
그때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동전을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돌아섰다. 문 앞에는
'브스의 비서가 서 있었다. 어지간히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오셨죠?
[그레이브스 씨에게 드릴 서류를 가져 왔는데요.
그는 손을 점퍼에서 커내 그레이브스의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봉투를
집어서 그것을 비서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 옆을 지나 문을 향
해 걸어갔다.
[서명해 드릴까요?
그가 방을 막 나서려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됐습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주머니 속의 은화를 꼭 쥐면서 말했다.
엘리 그레이브스는 퀸즈 사무실 바닥에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그는 워싱턴이라는 도시 자체가 도무지 맘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 출장에서처럼 잭 매클라우드 같은 인간을 만나 티격태
격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온 날이면 마치 지옥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
다. 그런 그에게 전달된 마닐라지 서류 봉투는 청량제와도 같았다
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코트를 입은 채 책상에 앉
았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개붕하곤 녹색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다소 흥분된 눈빛으
로 한 글자 한 글자 신경을 써가며 읽어 내려갔다. 마치 그 여섯 페이
지의 서류 내용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럴 수가!
다섯 번째 페이지를 읽고 나서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
속에서 노란 형광펜을 꺼내 쥐고는 그 페이지를 다시 한 번 읽으며
요한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 다음 페이지에는 넉 장의 컬러 사진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그는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고개]
들어 정면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책상 맨 밑 서랍을 열고 고리가 달린 바인더를 꺼
녹색 서류들을 끼운 후 다시 덮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고 비서를 불
다.
[서류 봉투 말이야.소인이 없는데 어디서 왔지?
[정오쯤 배달부가 가져 왔는데요.
그레이브스의 심장이 뛰었다.
[제레미 좀 불러 주겠나?
그는 전화를 끊고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투서를 허
오고 있는 자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번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매클라우드를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이=
다
제레미 하켓은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급하게 달려
왔다.
[낙태 반대 시위를 한 차례 더 구성해 봐.
[네?
[아주 대규모로 벌려야 해. 티투스를 지지한다는 메시지로 인식되
게끔 말이야. 상원의원들께.
[티투스에 대해 생각을 바꼈나 보죠?
[아니,감정은 중요하지 않아.그는 아주 좋은 미끼라구.
[뭘 위해서요?
[낙태를 지지하는 미친놈들을 잠기 위해서.
하켓은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대회에 낙대 지지자들이 올 것 같아요?
[모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특히 매클라우드 의원,
하켓은 그레이브스의 책상에 기대어 앉아 그의 얼굴에 나타난 화난
" 을보았다.그러고 나서 빈 서류 봉투를 보았다
' 녹색 노트'로부터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왔군요.
그레이브스는 우편물을 마구 뒤섞었다.
하켓은 초조한 듯 타는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매클라우드에 대해 뭐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줄곧 보내 왔던 정보, 그리고 새로운 사실, 다시 말해 이
농을 요절낼 수 있는 엄청난 것.
하켓은 낼떡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이 '녹색 노트'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요.그가 일을 꾸며
내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이 사람은 진짜야.제레미.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자넨 집회 허가와 경찰 문제만 맡아서 처리해. 다른 건 모두 내게
맡기고.
그레이브스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일었다.
.
.
몰리는 커다란 쓰레기 봉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놀라운 일
었다. 고작 7주간의 동거 생활에 이렇게 많은 쓰레기를 남길 수 있
니....... 그녀는 물건들을 쓸어 담기 전에 그것들을 하나씩 자세히
펴보았다.
제일 먼저 모양이 일그러진 그의 칫솔을 집었다.일그러진 모양0
묘하게도 그녀의 것과 똑같았다. 텔레비전 앞에 서서 이를 닦던 그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그녀는 그의 칫솔을 쓰레기 봉지 속에 던져 =
었다. 다음에는 치약 튜브를 집어 들고 힘껏 짜냈다. 치약을 죄다 짜
리려고 했지만 힘에 부쳤다. 대충 짜내고 튜브를 봉지 속에 떨구었다
그러고 나선 변기에 앉아서 신발을 벗었다. 머릿속이 갑자기 흔란스
웠다. 잭의 모습과 빅토리아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그녀의 머리를 =
눌러 왔다.
그녀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방송국에 들러 워싱턴에서 찍어 온 =
의 기자회견 녹화 테이프를 편집했었다. 저녁에 방영될 뉴스를 위해]
였다. 화면 속에 나타난 잭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테0
프가 다 돌아가고 스크린이 하얗게 비워져 버린 후에야 마음이 조=
' ="?다. 사람의 인생도 편집할 수 있다면 잭과 보냈던 시간들을
잘라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변기에서 일어나 물건들을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잭이 사
용한 플라스틱 면도기....... 다리털 밀기에 좋은데....... 그냥 가질까!
머리 빗 하나, 녹이 슨 면도용 고림통, 딜루밍데일 백화점에서 공짜로
얻은 남성용 향수 샘플,덴탈 프라스가 들어 있는 플라스틱 용기.......
그녁는 면소용 크림통을 집어 들고서 흔들어 보았다. 거의 비어 있었
다. 폭탄을 투하하듯 그것을 쓰레기 봉지 속에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
서 향수병을 던져 넣으려고 집었다가 뚜껑을 열고 코를 가져다 댔다.
버진 고르다 해변의 아름답던 정경이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흰 쿠션
들은 달빛을 받아 빛나고 담요 대신 큰 타월을 이불삼아......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서 요트는 가볍게 흔들리고...... 그만 그만, 몰리는 고
개를 휘휘 젓고 나서 쓰레기 봉지를 들이대고는 선반 위에 있던 그의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러고 나선 쓰레기 봉지를 든 채로 침실로 가서 서랍장에 다가갔
다.그리곤 한때는 그의 소유였던 서랍장을 열었다. '산타페'라고 쓰여
진 너덜너덜한 푸른색 셔츠가 맨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노는 그것을 아
무떻게나 뭉퉁거려서 봉지 속에 집어 넣었다. 그 뒤를 이어 낡은 양말
한 켤레가 봉지 속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엔 곰광이가 핀 운동화 한 켤
레. 그챠는 마치 죽은 쥐를 들어올리는 것처럼 코를 쩡그리면서 운동
화의 끈을 잡고 집어 올려서는 봉지 속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또 남아
있는 게 없는지 서랍 속을 흩어보았다. 의사록() 한 권, 정치자
금 모금을 위한 어떤 만찬회에서 했던 그의 연설문 초고 한 부. 사창도
두어 개 들어 있었다.
몰리는 그것도 봉지 속에 집어 넣었다. 이제 서랍 안에 남은 것이라
?
곤 새 와이셔츠에 끼우는 마분지 쪼가리뿐이었다. 그것을 집어 든 순
간 그 아래 가려져 있던 물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잭의 아버지 면
도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고서 접혀져 있던 면도날을 천천히
펴보았다. 파르스름하게 선 날이 섬뜩하게 아름다웠다. 상아로 된 손
잡이에는 항구의 풍경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건 차마 버릴 수가 없었
다. 그에게 돌려줘야 할 그의 가보인 것이었다. 몰리는 그의 서랍을 닫
고 맨 윗 서랍을 열어서는 그 물건을 던져 넣었다.
이제 그의 물건들은 정리가 끝난 셈이었다. 그녀는 서랍을 닫으려다
가 자기 물건들 가운데 그와의 추억을 연상시키는 것들도 역시 버려야
만 마음이 개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랍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 손 끝에 뭔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무지개빛 나는 전복
껍데기, 시나몬의 모래사장에서 주워 온 것이었다. 시나몬 해변......
토플리스 차림으로 그만 낮잠이 들었던 그 바닷가. 그가 커다란 밀짚
모자로 따가운 햇살을 가려 주었던 그 추억을 간직한 조개껍질 그러
나 그것 역시 쓰레기 봉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음엔 토르톨라에서 가져 온 시거 밴드, 그의 새끼손가락과 그녀의
검지에 꼭 맞았던....... 그는 그것을 '찌익'찢어서 봉지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리고는 잃어버린 줄 알고 있었던 손톱가위, 참! 이건 그와
아무 상관 없지. 그 다음엔 안경다리에 ' '라고 쓰여진 플라
스틱 선글라스를 발견했다. 잠시 갈등이 일었다.
'그걸 버려 !
"바보 같긴...... 쓸모 있는 걸 왜 버려!'
'쓸모 있긴. 백 년이 지날지라도 저런 건 쓰지 말아야지.'
'속이려 들지 마. 벌써 쓴 적이 있잖아.'
'그러나 그건 그때구 지금은 그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려야 할 때잖
아.'
하지만.......'
버려!'
선글라스는 봉지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몰리는 서랍 속에서 옷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실크 캐미솔 밑
'일레븐스 스트리트' 식당의 성냥곽을 발견했다. 그 메모란에는
런의 시(} 한 구절이 적척 있었다. 예전에 잭이 그고에게 적어
던.......
여인은 밤과 같은 아름다움 속을 걷도다
구름 없는 땅과 별들로 가득 찬 하늘....
시 구절은 단박에 그녀의 가슴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번 읽었다. 그날 저녁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또다시 읽었다. 사
랑과 애정의 나날들을 회상하면서....... 차마 그것만은 버릴 수가 없었
다. 그러다 퍼뜩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앞서 누군가에게 같은 시행
을 써주지 않았을까?빅토리아 같은 사람에게......
몰리는 성냥곽을 쥔 손을 쓰레기 봉지 위로 들어을린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너무도 아름다운 시였다. 그것도 잊을
수 없는 밤에 쓰여진....... 그러나......
그녀는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과거의 추억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
그녀는 마지막으로 서랍 속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찢어진
극장표 두 장, 엘리오 레스토랑에서 쓴 신용 카드 영수증,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파란색 연필....... 그 모두를 봉지에 던져 넣었다,
'휴-.이제 끝났나?'
그러나 들쑤셔진 속옷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한구석에 놓척 있
던 브래지어 끈에 무언가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들어올려 보
니 까만 보석 추가 달린 실 귀고리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로부터
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그것을 들어올리곤
길게 매달려 있는 보석이 앞뒤로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것을 달았을 때의 일이 떠오르자 흔자서도 못내 수치스
러웠다.
그녀는 그것을 한 손에 쥐고는 나머지 짝을 찾기 위해 다른 손으로
다시 서랍 속을 뒤졌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손에
쥐고 있는 것만 봉지 속에 던져 넣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잘 있었어요?
엘리엇 랜디였다.
[예.
대답하는 그녀의 눈에는 잭과의 밤을 매일 밝혀 주던 타다 만 커다
란 양초가 언뜻 보였다.
[오랫동안 못 만났군요. 혹시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촛불의 까맣게 탄 심지를 만지며 대답했다. 부드럽게 건드렸
을 뿐인데도 그것은 부서져 버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선 아니고, 당신에게서 하도 연락이 없길래 그
냥....... 그나저나 나 지금 뉴욕에 와 있어요. 전국 법의학회 정기총회
참석차 말이죠. 너무 늦은 시간이란 건 알지만 흑시 저녁 드셨나 해서
전화한 겁니다.
[엘리엇. 고맙지만 안 되겠네요. 지금 워싱턴에서 막 돌아와 집인
청소를 하고 있던 중이거든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에 묻은 심지 부스러기들을 봉지에 털었
[아! 그랬군요.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면 '웨스트베리'로 내게 전
화주세요, 오늘 밤은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참 내일 저녁은 어떻게
보낼 겁니까?
그녀는 양초를 봉지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추수 감사절이네요?아직 어떻게 보낼지 생각
안 해봤는데...... 당신은요.엘리엇?
[나도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밤 잠깐 만나서 같
이 그 문제를 얘기해 봤으면 했는데.......
[미안하지만 쓰레기(?)를 마저 찾아내서 버려야 해요. 하지만 혹시
배가 고파지면 당신에게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몰리는 아기인형 살인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
라도 발견했는지를 깜박 잊고 물어 보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몰리는
요즈음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청소(?)를 다 마치고 나면 좀 개운해
질 것 같은 마음에 방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 뮤지컬
꽹플릿이 한 부 있었다. 어느 날 밤엔가 잭과 함께 브로드웨이에서 뮤
지컬을 본 후 집으로 가져 왔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봉지 속에 구
겨 넣었다.그 다음엔...... 없었다.그것이 마지막이었다.방은 이제 깨
끗이 치워진 셈이었다. 감정적으로도 정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녁
의 삶은 다시 한 번 그녁 자신의 것이 되었다. 다른 누구와도 얽척 있
지 않은 오로지 그녀 자신만의 삶.
그녀는 쓰레기 봉지의 주둥이를 말아서 여미고는 그것을 끈으로 묶
어서 수위가 수거해 가도록 현관 앞 복도에 내다 놓앗다. 집 안으로 다
시 들어온 그녀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아이스 박스 속에서 아까 찾아내지 꼿했던 귀고리 한 쪽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얼음을 녹이던 그날 밤이....... 그녀는
양손으로 꽁꽁 언 얼음 조각들을 헤쳐서 그 귀고리를 찾아냈다, 그=
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들고 흔들리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
러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창피하고 자책스럽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굳은 결심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복도
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는 쓰레기 봉지의 묶은 끈을 다시 풀고는 그 속
을 뒤지기 시작했다. 잡동사니 속을 절반쯤 파고 들어가자 귀고리 한
쪽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무시해 버리곤 계속해서 잡동
사니 속을 헤집어 나갔다. 드디어 그녀는 뭔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몰리는 작은 성냥곽을 커내 들고는 그것이 마치 화이트 데이에 받은
카드인 것처럼 애정 어린 눈길로 바이런의 시구를 읽었다. 그녀는 그
것을 소중히 티셔츠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그때까지 한 손에 쥐고
있던 남은 한쪽 귀고리를 봉지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서 봉지의
주등이를 다시 묶고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침실로 돌아오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리고 느닷없이 배가 고파졌다. 그녀는 전화기를 들
고 웨스트베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잭은 침대 옆 탁자에 저녁상을 차렸다. 정어리 통조림, 오이 절임 한
접시. 음료수 캔 하나가 전부였다. 빅토리아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빅토리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비록 절반은 그의
소유였고 단지 두 달 정도 집을 떠나 있었을 뿐인데도 괜지 서먹서먹
했다. 자책감 때문이리라....... 몰리는 이직 그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몰리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벌써 잊혀졌을 것이라고 생
각하면서도 그는 아직 몰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트 밑에서 베개를 꺼내 그것으로 가슴을 괴고는 배를 깔고
걱 누웠다.
'네 스스로 택한 길이다, 잭.'
자신이 물개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잭은 정어리 한 마리를 통째로
안으로 밀어 넣고는 그걸 우적거리면서 작은 책자를 펼쳤다. 그 책
은 출산 과정에서 남편이 임산부에게 해줄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설명
주고 있었다. 그 책을 읽어 가며 잭은 가슴이 아릿해지면서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다. 그때가 되면 물론 빅토리아를 위해 자신도 그녀
곁에 있어 줄 것이다. 그러나 파연 그것이 얼마만한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여자 흔자 견뎌 내야 할 순간이 있다면 바로 출
산일 것이다.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11시 뉴스는 이미 했을
시간이었다. 그는 리모콘을 찾아서 텔레비전을 켜고는 자신의 기자회
견 내용을 보도하는 채널을 뒤졌다. 채널 6 뉴스였다. 몰리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이곳 워싱턴에서는 이례적인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잭 매클라우드 하원의원이 자청한 기자회견이었숩니다 그는 불가사
의한 낙태 수술을 받고 죽은 여자의 침실에서 자신이 발견했다는 편지
봉투를 공개하며 그것이 애브너 티투스 판사가 그녀의 죽음에 판여돼
있다는 증거라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잭이 화면 속의 그녀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전
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잭!
빅토리아였다.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였다.
[잭 ! 빌리 배니스터를 찾았어요!
[무슨 소리야?
[내가 빌리 배니스터를 발견했다니까요! 죽어 있었어요!
[잠깐, 잠깐만 빅토리아, 천천히 말해 봐 어떻게 됐다구?
그녀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일 끝내고 의회 부속 병원으로 갔었어요. 레이챌과 캐시를 만나 할
얘기가 있었거든요. 캐시의 사무실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누가 문을
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레이챌은 정문 쪽으로 나가고
캐시는 후문으로 갔거든요?난 아무것도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그냥 앉
아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둘 다 돌아오지 않잖아요. 그래서 무슨 일
인지 나가 봤어요. 실험실 문이 열려 있길래 안을 들여다봤더니, 글쎄
오! 하느님, 시술대 위에 시체 한 구가 똑바로 눕혀져 있고 캐시가 그
걸 멍하니 보고 있는 거예요.
[잠깐!시체라구?
여전히 떨고 있는 목소리로 빅토리아가 말했다.
[배니스터, 배니스터의 시체였어요. 벌거벗겨진 채로......
. 배 한가
운데에 커다랗게 일직선으로 베인 상처가 나 있었어요.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내 곧바로 갈 테니.......
[아니에요. 오지 마세요. 문소리를 낸 사람은 알고 보니 병원 경비
원이었어요. 경찰을 불렀으니까 곧 올 거예요. 난 지금 집에 가고 싶어
그녀는 심호흡을 하느라고 말을 잠시 끊었다.
[잭,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모르겠어...... 레이챌은 뭐래?
[또 다른 아기인형 살인사건 같대요. 그런데 내 말은 왜 그 시체가
이곳에 있냔 말이에요.
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누가 계획적으로 그런 것 같아.
느 사람이
캔사말고
포도주병들을 뒷좌석에 실어 놓고 잭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얼
안 있어 빅토리아가 현관문을 나와 앞좌석에 올라탔다.
[레이챌 전화였어요.
그녀는 차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녀가 옳았어요. 요번에도 아기인형이 나왔대요.
[어떻게 알았대?
[배니스터의 시체를 해부한 검시관과 오늘 아침에 통화했대나
요.
[그 친구는 추수 감사절 아침에도 근무하나 보지?
그런가 보죠.뭐.
잭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것저것 다 잊고 마음껏 즐기자구.
[좋아요.
빅토리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들이 탄 차가 덕 패들 로()에서 레이챌의 농장으로 이어지는
느릅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긴 도로로 꺾어져 들어섰을 때
' _2_후 1시 괘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잭은 레이렐을 좋아하고 싶었다. 명랑한 성격에 늘씬한 외모,
생명을 구하고자 열심히 일하는 의사인 데다 무엇보다도 빅토
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가! 그러나 어쩐지 레이헬이라는 여자는
그에게는 개운치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매년 레이챌이 주최하는
추수 감사절 파티는 정말 그럴듯한 행사였다. 보고 싶던 사람들과 맛
난음식들이 가득한....... 그는 금년에도 실컷 즐길 요량이었다.
레이잴의 농장은 메릴랜드 주의 풍광() 좋은 구릉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장기 이식실험에 전념하던 베데스터 국립 보건연구
시절. 그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레이헬이 주변의 땅을 매입해서
원 주택으로 가꾸어 온 것이 지금의 이 농장이 된 것이었다
그녁는 탁 트인 공간과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프라이버시 때
문에 그곳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산책과 사색 그리고 낚시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레이웰은 그곳에서 많은 동물들을 길렀다. 커다란 라브라도 개 두
마리, 집안에서만 돌아다니는 고양이 그리고 젖소와 말, 닭....... 농장
의 연못에는 오리도 자연 방사()하고 있었다. 결코 상업적인 목적
이 아니었다. 농장의 어떤 동물도 팔려 가거나 도살되는 려이 없었다
그녀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실험 대상이 되었
다가 죽어 간 동물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서 그런다고 수군거렸
고 친한 친구들은 그곳이 곧 동물들의 양로원이라고 칭찬을 해댔지만
그녀는 어느쪽 의견에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크게 반원형을 그리고 있는 자갈로 덮인 진입로로 차가 접어들자,
농장의 전체적 구조가 한 눈에 들어왔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
들어 주고 겨울에는 조각품 닫은 정경을 빚어 내는 아름드리 참나무들
이 에워싸고 있는 본채는 아담한 석조 건물이었다. 그 본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엔 현대적인 낙농 시설을 갖추고 있는 붉은 칠을 한목
조 축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축사 뒤로는, 관목과 수풀에 가려져 언뜻 눈에 띄지는 않
지만 벽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건물 뒤에는 쇠사
슬과 작은 나무들로 둘러쳐진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안에 설치해
놓은 몇 가지 조악한 운동 기구로 미루어 볼 때 날씨가 따뜻할 때면 갇
혀 있던 실험용 영장류를 위한 운동 공간인 듯싶었다.
축사 옆에는 농기구. 트랙터 그리고 레이챌이 출퇴근할 때 타고 디
니는 지프를 넣어 두는 헛간이 있었다.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그 건=1
편에는 수수한 목조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때는 농장의 노동자들
이 기숙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손님들의 숙소로 개조된 건물이었다.
잭은 먼저 온 손님들의 자동차 옆에 빈자리를 찾아 주차시키고는 뒷좌
석에 실은 포도주병들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들은 누구의 집을 방문하든지 간에 음식을 마련해 가는 법이 없었
다. 잭으로 말하자면 요리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었고 빅토리아는
부러 요리 따위의 일은 하려 들지 않았다.
쌀쌀한 날씨였다.
그들은 추위에 떨면서 부억문을 통해 본채로 들어섰다. 진심 어린
환영의 포옹과 키스가 한동안 계속됐다.
[코트들 벗어요.
[야!냄새 좋은걸.
[아직 집어먹지 말아요.
[잭 하여튼 당신은 부엌에선 아무 도움도 안 된다니까.
잠시 후 잭은 굴 요리 한 접시를 들고 주방을 빠져 나와 서재로 내
뻤다.빅토리아의 법률 사무소 부소장인 실비아 킹스턴 브라운은 18인
식기를 식탁 위에 꼼꼼히 진열하고 있었고 그 동안 그?의 남편
엄청나게 넓은 식당의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캐시 키낸은 15킬로
끽 커다란 칠면조 고기에 양념을 발라 가며 구우면서 피브 창
"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파티에는 레이챌의 이식 수술팀 멤버 일곱 명이 모두 참석해 있었
그곳에는 윈스턴도 와 있었다. 그는 호두나무 판자로 벽을 댄 거실
? 소파에 앉아서 연신 땅콩을 입에 던져 넣으며 미식축구 경기에 정
.이 팔려 있었다, 잭과 빅토리아가 처음 만났던 년 전 이래로 윈스
턴 역시 레이웰의 추수 감사절 파티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가 자청해
서 뉴욕을 떠나는 경우는 1년에 단 두 차례뿐이었다. 그 중 한 낸은
월에 시카고에서 열리는 재즈 캠프였고 나머지 한 번이 바로 레이챌의
추수 감사절 파티였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서 주방에서 북적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더니 마침내 레이챌과 빅토리아만이 남게 되었다. 레이챌은 샐러
드를 만들기 위해 사과를 깎고 있었고 빅토리아는 접시 위에 야채를
보기 좋게 둘러놓고 있었다.
[그래 어때?
레이챌이 물었다.
[어떻다니 뭐가요?
[잭과 다시 합친 거 말이야. 소꼽장난이라 그래야 되나 아니면 결혼
식 전의 밀월이라 그래야 되나.
[솔직히 말하자면,좋아요.
능란한 외과의사의 손이라서 그런 건가? 레이챌은 한 번도 끊기지
도 않고 사과 껍질을 길게 깎아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사과에 눈을 고
정시킨 채로 빅토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거기에 대해 말할 때도, 장소도 아니잖아요?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빅토리아가 말했다
[지난 몇 주 동안 넌 내내 그 얘기만 해댔어.지금은 아니다....... 이
곳에선 안 된다.......
[레이. 난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오,하느님 맙소사!
레이켈은 사과를 선반에 내려놓고 과도를 사과 속에 푹 내리찔렀다.
[그렇게 낙심하지 말아요. 우리 일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
요.
[네가 잭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 버린다면 왜 상관이 없겠
어?
레이챌은 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쇠고기 수프를 국자로 저었다.
그것은 부엌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만큼이나 무겁게 걸쭉해져 있었다
[아직도 그걸 시도할 마음은 있는 거야?
[그럼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난 네가 그걸 할 마음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어. 만일 네가 그 얘
길 한다면 잭이 뭐라고 그럴 것 같애?'좋아. 좋아. 그렇게 하라구.'그
럴 것 같니?
[글쎄요.그럴 수도 있을 것 갈......
[이봐. 빅. 그는 남자야. 만일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반대하고 나설 거야. 다른 걸 다 떠나서 남
자로서의 이익과 권익을 보호하려 들 거라구 그걸 모르겠니?
[그 정도쯤은 각오하고 있어요.
레이챌은 껍질을 깎지 않은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서 과도로 그것을
둥글게 모양을 내며 도려내기 시작했다.
뱀
,
끽! 일단 그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좀 기다려 보자구. 만밀
'' 제대로 안 풀리면 그때 가선 모든 게 그냥 원상태로 돌아을 게 아
?잭은 꿈에도 모를 거구 말이야.
[레이. 하지만 일이 제대로 풀리게 되면? 그도 곧 샤실을 알게 될
댜. 그땐 어떻게 할려구?
빅토리아는 접시의 빈 자리에 올리브 조각을 끼워 넣으면서 말을 이
었다.
[요행만 바랄 순 없어요, 잭이 느끼게 될 엄청난 배신감을 생각한다
면....... 순리대로 하자면 설사 그가 나와 결혼하지 않게 될지라도 그
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는 거 아네요?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걱나서 차기가 담은 야채 접시를 바라보았
다. 레이챌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휴 -우. 빅. 넌 지금 기로에 서 있어. 그러면서 그릇된 길로 걸
음을 내디디려 하는 거야.
[레이.난 내가 옳따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아오던 네가 자랑스러
웠었는데....... 다시 한 번 얘기할게.빅 !네 자신의 삶을 =1속 살아 나
가 줘. 그의 삶말구 네 꼼은 네 것이란 말이야.
[알아요.하지만 이제 내 몸의 일부분은 그의 것이기도 해요.
레이챌은 깍뚝썰기로 사과를 잘라댔다.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내 귀를 믿을 수 없구나.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걸 어떡해요?내가 하려고 하는 일은 전적으
로 내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잭도 그 문제에 관여할, 아니,
적어도 그 문제를 알 권리를 갖고 있다는 걸 당신도 인정해야 해요.
레이챌의 입에서 다시 깊은 한숨이 새어 나팠다.
그녀는 잘게 썬 사과 조각들을 큰 그릇에 쓸어 담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러고 싶다면 그와 결흔해. 하지만 섣불리 그 문제에 대
해 털어놓아 그를 괴롭히진 말아. 너와 잭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애기야. 그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너 자신만이 갖고 있어. 만일 네가
그 일을 발설해 버린다면 그 동안 우리가 쏟았던 모든 노력은 물거품
이 되고 말 거야. 그러니 결흔하기 전까지라도 그에게 애기하지 말고
참아 줘. 그나저나 흑시 알아? 그런 얘기를 듣고 나선 질겁을 하고 달
아날지도 모르는 일 아냐?
[그럴 일은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지?
빅토리아는 레이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요즘도 가끔 남자랑 잠자릴 같이하나요?
레이헬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잭은 나를 사랑해요. 진심으로 결혼하길 원하고 있다구요. 지난 며
칠 동안 그는 행복해서 휘파람을 불고 다닌단 말예요.
[휘파람?일곱 난쟁이들처럼?
빅토리아는 레이챌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날 놀리고 싶으면 맘껏 놀려요. 레이. 하지만 잭을 비웃진 말아요
문제는 그가 아니라 나예요. 나.
레이챌은 샐러드를 뒤섞던 나무 수저를 선반에 내려놓았다.
[알아. 알아.그를 갖고 농담한 거 정말 미안해....... 사실 요즈음 나
도 신경이 꽤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애. 너도 느끼지? 어쨌든 단 한 가지
만은 진심이야. 널 사랑해.네가 이 일에서 손을 예고 싶다면......, 그
런 경우가 생긴다면 물론 실망이야 크겠지만 난 이해할 수 있어. 빅.
[레이, 난 이 일에서 결코 발빼지 않을 거예요. 돌이켜보면 난 아주
오래 전부터, 말하자면 당신한테서 그 제안을 받기 이전부터 우리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을 꿈꿔 왔는지도 몰라요. 다만 막상 실천에 옮
=까 머뭇거려지는 것뿐예요.
레이챌은 두 팔을 뻗어서 빅토리아를 품에 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이해해 빅. 정말이야. 불안할 거야.
그때 식당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잭이 안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아.내가 두 분께 방해가 됐나요?
두 여자는 포옹을 풀었다.
[레이챌이 내겐 지금 휴가가 필요하대요.
눈물 어린 눈을 가볍게 손등으로 누르며 빅토리아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권하던 게 바로 그거 아니었어? 몇 달을 두고 얘기
해왈잖아.
그떻게 말하는 잭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배우자나 연인의 입에서 나오
는 충고란 지겹고 다른 사람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내뱉는 조언은 진
지하고 객관적인가 보다. 누구나 조건 없는 사랑을 원하지만 일단 그
런 사랑이 주어지면 그것은 조건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리라....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양손으로 그녀의 수그러진 머리를 받쳐 을
렸다.
[당신 괜참아?
빅토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억지로 미소를 띠어 보였다.
잭은 그삭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어?
[잘 모르겠어요. 그저 따사로운 햇볕이 늘 비치는 곳이라면 아무데
나 좋아요. 당신 저랑 같이 갈래요?
냄비 집게를 쥐고 있던 레이챌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한 탓에
손둥의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지금 당장은 안 돼. 나중에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야.
잭은 그렇게 대답했다
레이챌은 다 익었나 보려고 오븐 문을 열고 냄비 집게로 칠면조기
담긴 쟁반을 꺼냈다. 그녀리 몸놀림이 눈에 띄게 경쾌했다.
[르네 온천이 어떨까? 건강식, 애리조나의 맑은 공기, 뱃속의 아기
를 위한 적당한 운동 게다가 하루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완전 자유야.
거기엔 공중 전화도 없어.
그녀는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소녀처럼 조잘댔다
그때 또다시 문이 열렸다. 실비아였다. 검정색 폴라에 금 거고리를
하고 있었다. 조금 솟아오른 듯한 광대뼈가 오히려 그리스 조각 갇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겨 주는 외모였다. 그녀는 식기를 다 차렸디
는 것을 알려 주기 위헤 들어온 것이었다. 잭은 식당으로 나갔다. 벽난
로의 불기운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는 헛간 옆에 장작더미가 쌓여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곤 코트도 걸
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 장작더미까지 20미터를 뛰어갔다. 거기서
큼직한 나무토막 네 개를 양팔 위에 올리고 본채를 향해 돌아서려는
순간, '탕 -'하는 금속과 금속이 맞부덧치는 소리가 그의 귀를 때
렸다.
분명 헛간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는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헛간문 앞
으로 걸어가서 발로 문을 밀어 열곤 안으로 들어갔다.
젖소들이 차가운 공기 속에 흰 입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는 소리
가 들려 나왔음직한 곳을 찾기 위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젖소들이
서 있는 짚으로 덮인 외양간, 우유 짜내는 기계, 파이프, 우유통 등이
말끔하게 치워진 바닥 위에 늘어서 있었다. 그런 소리를 낼 만한 것은
전혀 눈에 띄질 않았다. 그는 나가려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탕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는 어
' 난 소리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유 짜는 기계 뒤편이었다.
그 기계 뒤쪽으포는 그저 흰 벽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평범한 벽이 아니었다. 벽의 색깔과 똑같은 흰
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분간하기 힘든, 나무로 된 커
다란 판자 문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 문엔 흰색으로 칠해진 손잡이
도 달려 있었다
'래 이렇게 해놓았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추웠다. 본채의 따뜻한 벽난로 불이 그리워졌
다. 그는 잠시 어쩔까 망설였다. 젖소 한 마리가 커다란 눈을 꿈벅이며
씹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그더러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 같았다. '에
라,모르겠다.'그는 장작을 바닥에 네려놓았다.
문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당겨 보았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가볍게 열렸다. 그러자 그 안에 나타난 것은
.... 또 하나의 문이었다. 여러 겸의 강철로 도금된 커다란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헛간의 출구를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그것도 벽으로 위장한 나무
문으로 가려서?'
평범한 출구일 리가 없었다. 그때 그의 떠릿속을 한 가지 생각이 스
쳐 지나갔다
'그렇지 ! 헛간 뒤로 단충짜리 벽돌 건물이 있었지. 아마 이문은그
곳으로 통하는 입구일 게다.'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꿈쩍도 안 했다. 귀를 가져다 대보았다, 라디
오에서 나는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러브 미 텐더}였다.
또 '탕'하는 소리....... 탕- 탕 -.
이번에는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그러다가 다시 또 아무 소리도 들
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강철 문에 귀를 밀착시켰다
[잭!
깜짝 놀라 돌아보니 피브 창 박사가 등뒤에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나무라듯 물어 왔다. 그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장작 좀 가지러 나왔어요. 그러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길래
그녀는 판자 문을 밀어서 닫고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안에서 일들을 하고 있어요.
'추수 감사절 저녁에?'
[오늘 같은 날엔 일꾼들도 좀 쉬고 즐겨야 되지 않을까요?
[일이 끝나는 대로 파티장으로 올 거예요.
그녀는 통나무 두 개를 주워서 그의 팔에 들려 주며 말했다
그는 나머지 두 개의 통나무를 마저 주워 들고는 헛간을 나왔다. 피
브 창이 그의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 그는 일부러 통나무 한 개를 땅바
닥에 떨어뜨렸다. 그걸 줍는 척하면서 헛간 뒤의 벽돌 건물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 건물엔 창문이라고는 없었고 단지 지붕 위에 돌출된
유리로 된 채광창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추위에 떨면서 서둘
러서 본채로 들어갔다
버지니아 햄. 향미료와 꿀을 발라 구운 칠면조 고기, 완두콩, 녹색
콩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감자 요리. 설탕과 계핏가루를 발라 구워 낸
고구마 월도르프 샐러드. 버터밀크 비스킷....... 전형적인 레이챌의
추수 감사절 파티의 저녁 식탁이었다. 빅토리아의 주창()으로 참
석자 모두가 레이챌을 위한 건배를 했다.
그러고 나자 레이켈이 다시 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
잭이 어제 해낸 일에 대해 건배합시다, 애브너 티투스의 인준을 막
것에 대해 우리 모두 감사해야 합니다.
위한 건배가 끝나고 나서 실비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잭에게 물
[정말로 티투스가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
[그의 전화번호가 봉투에 적혀 있잖아요. 윈스턴 자네 생각은 어
잭이 윈스턴에게 눈길을 주었다.
음 - 굳이 내 생각을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애. 사
실나 역시 그자를 싫어하지만 이번 사건만꼼은 그가 관억했다고 보기
가 힘들어.
[아무래도 표결에 붙여야겠는데요.
실비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제밌겠는데요?남자들과 여자들이 편이 갈라지나 봐야겠네.
빅토리아도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거 봐.빅.여긴 납자들 슷자가 더 많다구,
잭이 말했다.
[잭.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해요. 그 문제가 어디 남녀 구분지어서
싸움할 일이에요?
레이챌이 휩랜베리 한 스푼을 자기 접시에 덜어내면서 신경질적으
로 쏘아붙였다.
[누가 꿔래요? 그냥 말이 나왈으니까 한 말이지. 자 스터핑 드시겠
소. 레이챌?
잭은 머쓱해진 기분을 달랠 겸. 방 분위기도 바꿀 겸 레이챌에=1 스
터핑이 들어 있는 은그릇을 건네주었다,
후식으로는 호박과자. 바닐라 아이스크림, 구운 사과 파이, 딸기 등
이 나왔다. 모두 다 맘에 드는 것을 하나씩 집어먹고는 식사를 끝냈다.
남자들은 상 치우는 것을 대충 도와주고 나서,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것처럼 여자들이 있는 주방을 떠나 서재로 몰려갔다. 라이온스팀 대
카우보이팀의 후반전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일련의 과정이 잭으로 하여금 중학교 신입생이 되던 해, 첫번째
댄스 파티를 생각나게 했다. 파티가 열렸던 체육관의 한쪽 벽에는 여
자 애들이 맞은편 벽에는 남자 애들이 쭈뻣대며 따로따로 몰려 서 있
었다. 파티를 주선해 준 자모회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물론 그날 밤 이후론 어머니들의
도움 없이 서로들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내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억괴
미식 축구로 상징될 수 있는 성적인 차이란 결국 인간 집단에서는 사
라질래야 사라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잭은 소화를 시키려고 서재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아무 생리
없이 서가를 훌어보았다. 두꺼운 의학 서적들, 소설류, 낚시 교본들,
사진들, 여러 가지 기념품들이 그득 차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사진이
유독 그의 눈길을 끌었다
여성 소프트볼 팀의 커다란 사진 한 장. 레이헬은 왼쪽 어깨에 방밍
이를 얹고 흠 플레이트에 서 있고 그녀 뒤에 있는 여자는 앉아서 포수
미트를 끼고 있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운동 셔츠와 운동화 차림에 모
두 선글라스를 낀 채로 그 뒤에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사진 위쪽='
는 ' ( 미 국딥 위생연구소 신장 파괴자들)'라고 선
여 있었고 아래쪽에는 선수들 각자의 사인과 '레이챌의 건승을 빌며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옆의 사진, 그 속에서 레이챌은 유럽 어딘가의 분수대에 앉아 있=
다. 파리? 아니. 로마 같았다. 레이챌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는 날
균형 잡힌 전형적인 미인형이었다. 40대 중반에서 후반쯤?지중
여인들 특유의 가무잡잡하고 탄력 있는 피부, 세련된 미소. 날씬한
그리고 윤이 나는 짙은 갈색머리......, 그는 날짜가 혹시 찍혀 있나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액자 옆에는 레이챌이 수여받은 '자유의 메달이 역시 액자에 넣
진열되어 있었다. 그 액자 속에는 영부인이 악수를 하면서 레이
메달을 증정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도 함께 끼워 넣어져 있엇
다. 그 사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경을 보내며, 매기 클레이.'
그 위에 있는 선반에 빅토리아가 나파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는 그
액자를 들어서 눈 가까이 가져다 댔다. 빅토리아와 데이챌이 대법원
계단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빅토리아가 첫뻔째로 대법원에
서 재판을 맡은 날을 기념하는 사진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승소한 것처럼. 그리고 사진을 찍은 당시에는 몰랐겠지
만 빅토리아는 실제로 그 사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가장 인상
깊게 느킨 것은 비록 사진이었지만 그 속의 빅토리아의 얼굴에서 발산
되고 있는 자신감파 여유로움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표정
이었다.
그는 사진을 다시 올려놓고 커다란 가죽 의자로 어슬렁거리며 가서
는 벌렁 드러누워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었다, 화면 속에서는 커다란
몸뚱어리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마주보고 줄을 선 후 잠시 있다가 격렬
하게 몸을 부딪혀 갔다. 아나운서의 짐짓 열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 왔
다
[오늘은 정말 풋볼 게임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군요......
잘 달리는군요....... 멋진 패스였습니다만 아깝군요....... 자, 채널을
돌리지 말고 기다리새요.잠시 전해 드리는 말씀.......
벽난로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와 방안의 무거운 공기가 그의 눈꺼풀
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치 아직도 더부룩한 채로 꺼지지 않은 그의 배
처럼....
곧 그는 편안하고 안락한 잠에 빠져 들어갔다. 추수 감사절 저녁의
단조로운 포만감 속에서.
[잭 !
그를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빅토리아였다
[깨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데 국민 성명을 발표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껌벅거렸다. 거실에는 그와 빅토리아
그리고 레이켈 세 사람뿐이었다. 미합중국 대통령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코스텔로'사건에 관한 본인의 우려 때문만이 아니라,대법원
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할 다른 모든 사건들에 대하먹 그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에서입니다 본인은 상원의 지도층 의웠들과 이미
충분히 숙의를 거친 후, 헌법 제 2조에 따라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에
의거하여 애브너 티투스 환사를 오늘부로 미합중국 대법원장에 임명
하는 바입니다. 애브너 티투스 신임 대법원장은 내일 아침 취임 선서
를 하고 정식 집무로 들어갈 것입니다.......
잭은 빅토리아를 쳐다보았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레이챌도 마찬
가지였다. 대통령은 발표문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물론 의회 휴회 기간중의 다른 모든 임명파 마찬가지로 이번 대법
원장 임명건 역시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남아 있습니
다. 물론 본인은 1월에 의회가 개원하게 되면 인준을 받을 것을 확신
하고 있지만 만일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에는 헌벙에 정한 바에 따
티투스 대법원장은 퇴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즉, 내일
1월까지 그가 판여했던 모든 사건들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지?
레이캘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마저 들어 봅시다.
잭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시켰다.
[청문회 막바지에 가서 티투스 려관에 대한 몇 가지 근거 없고 품위
없는 의문점들이 제기된 것을 본인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
이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께 단언하는 바. 그러한 명예롭지 못한
시도는 티투스 려관의 대법원장 임명 일자를 '코스텔로' 사건이 심리
된 후로 지연시켜서 그 사건에 대한 판결에 그가 참여할 기회를 박탈
시키자는 악의적인 음모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서 상
원의 일부 의원들과 언론계, 그리고 , 심지어 백악관의 법률 담당
고문 변호사까지 그에게 제기된 혐의점들의 진위를 철저히 조사했는
바, 그 모든 것은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
는 재직시, 티투스 법관챠럼 능력과 청렴을 겸비한 국민의 공복()
을 악의적인 음모와 시시한 혐의점 몇 가지를 근거로 물러서게 한 분
이 사실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본인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재직
하는 동안은 결단코 그러한 오류의 전철을 밟는 일이 없을 것임을 국
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입니다.
빅토리아는 멍한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이챌이
그녀 뒤로 다가가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빅토리아의 입에서
텐지 공허하게 울리는 두 마디의 말이 새어 나왔다.
[당신이 이겼어.
잭은 그녀가 누구에게 대고 그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통령
인지,티투스인지,아니면 레이헬인.지.......
그가 빅토리아에게 짐짓 힘을 주어 말했다.
[아직 티투스가 승리한 건 아니야. 못 들었어? 아직도 1월의 상원
인준이 남아 있다구.
빅토리아는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눈앞의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
었다.
[빅?
=가 불렀다.
1녀는 일어서서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그의 옆을 그냥 지나쳐 가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걸
음을 멈추고 그의 손을 꼬옥 마주잡고는 다른 손으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언키 어려운 눈빛이었다.
[왜 그래?당신?
그가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선
방을 나가 버렸다. 잭은 이해를 구하려는 눈빛으로 레이챌을 쳐다보면
서 빅토리아를 따라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레이챌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몇
마디 짤막하게 대답하곤 수화기를 잭에게 건냈다. ' 하필이면...... '그
는 약간 짜증이 났지만 전화기를 받아서 귀에 가져다 댔다.
[텔레비전 보셨습니까?믿어지세요?
그의 보좌관 벤 제이콤스였다
[아니. 믿어지지 않아. 정말 한 방 제대로 맞았는걸.
[다른 선에 홀 교수님이 나와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이콤스가 다른 전화기에 대고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
이웰은 잭과 눈이 마주치자 '나 나가 줄까?' 하는 몸짓을 해보였다.그
는 머리를 저었다.
[흘 교수님 말씀이 전례가 있는 힙썹적인 조치랍니다. 이런 식의 대
일장 임명이 역사상 다섯 차례 행해겼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번씩이나 했었다는데요. 얼 워런, 윌리엄 브레난 그리고 파터 스튜
이 세 사람을 벼락치기로 임명했녔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잭은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니까 위헌 소송을 걸어 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나저나 대통령
의원님과 의원님의 기자회견을 빗대어서 비난한 걸 어떻게 생각하
[엿먹으라 그래!
[전 도무지 이헤가 되지 않습니다. 왜 클레이 대통령 같은 온건론자
가 티투스 같은 골수 보수주의자 때문에 자청해서 궁지에 빠지려는 걸
까요?
[글쎄. 그게 바로 의문이야....... 누군가 그의 목 밑에 총부리를 들
이대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게 누굴까?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흘 교수님 말씀이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물론 티투스
는 2월 4일날 '코스텔로' 사건이 대법원 심리에 상정되자마자 예비
투표에서 대법원장 자격으로 반대표를 던지겠지만 그 사건에 대한 최
종 표결은 나중에. 아무리 빨라도 내년 봄에나 있을 거랍니다. 따라서
내년 1월에 상원이 개원하게 되고 상원 투표에서 인준이 부결퍼면 티
투스는 결국 '코스텔로'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거죠.
[흐음 그것 참 복음처럼 들리는구만. 좋았어. 아침에 다시 얘기하
.?. 추수 감사절 잘 보내시게.
그는 전화를 끊고 레이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책상 의자에 앉아서
안경을 벗어 쥐고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이 친구 어딨죠?
잭은 천장을 향해 양잘을 쭉 뻗어 ''자 모양을 만들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위층 침실에 있겠지.
그렇게 대답해 주고 나서 레이챌은 책상 위 컴퓨터 화면을 향해 의
자를 돌려 앉았다. 그는 몸을 푸는 권투 선수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려
대며 물었다.
[계단 꼭대기에서 왼쪽으로, 맞죠?
[그래요. 날 찾으면 여기 있다고 해줘요.
빅토리아는 커다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잭은 그
녀 옆,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모로 누워 베개에 머리를 눕힌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자가 대법원장이 되고 나면 앞으로 일어날 사태가 걱정돼요.
잭은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고 낮은 목소
리로 그녀를 달랬다.
[자, 자, 빅토리아. 이번 일에 너무 그렇게 마음 상해하지 마 대법
원장이라고 해봤자 한 표밖에 더 가져?
그녀는 몸을 똑바로 고쳐 누이닌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당신한테 가장 반한 점이 뭔지 알아요?그건요......, 당신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승산이 없을 때조차도 말예요.
[승산이 없긴? 정치판이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거야. 뇌수술 같
은 게 아니라구.
그녀는 말없이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며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
었다.
[아하! 최근에 당신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게 바로 티투스에 관한문
군. 그렇지?
그녀는 그의 볼에서 손을 뻤다. 그리고 맑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
말했다.
[난 괜찮아요. 정말. 사실상 어떻게 보자면, 안심돼요.
'안심이 된다......?'
[좋아. 그래 이제 잠 좀 주무시죠. 여왕 마마.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움켜쥐고 머리칼이 나 있는 선
을 따라서 엄지손가뒤으로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천천
히 눈 주위를, 그리고 관자놀이를, 광대뼈와 코 양 옆부분을, 그=1고
입 주변과 목을......
그가 마사지를 끝냈을 즈음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고 쑴결은 고르고
편안해졌다.
이제 막 꿈나라에 한 발을 내딘은 상태였다.
그는 몸을 굽히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일어나서
불을 꺼주고는 방을 나갔다.
잭은 아직 따지 않은 맥주 캔을 손에 들고 레이챌의 서재 입구에 섰
다. 그녀가 타이핑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빅은 좀 어때요?
[마음이 놓인다던데요.
그는 맥주 캔의 알루미늄 고리에 손가락을 끼며 대답했다.
[그런데 레이챌.뭐에 대해서 마음이 놓인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난 몇 달 동안 병적일 만큼 과핀한 상태였었는데......,
그는 공기 속으로 뿌연 포말을 뿌리면서 캔 뚜껑을 땄다. 레이챌은
자판의 저장키를 친 뒤 안경을 벗고 입구 쪽을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
다.
[글쎄요.임신하게 돼서 마음이 놓인다는 뜻인가?
그는 약간 화가 치밀었다. 임신에 대해서 빅토리아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자기가 알긴 뭘 안단 말인가? 그는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갔
다
[그게 아니에요. 임신하기 전서부터 무언가에 대해서 대단히 펴정
하고 있었다구요.
[그녀처럼 일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요. 잭.
누구라도 과민해지는 법이잖아
'음 . 그녀도 내가 물을 때마다 늘 그 정도로 얼버무리려고 하
던데......
그는 맥주를 흘짝거리면서 서가 앞으로 걸어가서
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연필꽂이 안에 있는 여러
을 하릴없이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소프트볼 트로피
-매직펜.노란색 연필.파란색 연필 가지 펜과 연필들
'파란색 연필?'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옆면에는 흰 글씨로
겨져 있었다
자기의 이름이 새
[이놈의 연필은 정말 터무니없는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단 말이
야.......
[꿔가요. 연필이 연필꽂이에서 나온 게 꿔가 이상해요?
그는 맥주 캔을 선반에 올려놓고 그 연필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그 뉴스 혹시 들었습니까?멜빈 쉬버스의 뱃속에서 나온 아기인형
속에 부러진 연필 조각이 하나 들어 있었다는 뉴스 말입니다.
[그런데요?
[경찰에선 그게 내 연필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
지 않았죠.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그떻게 중요한 일이에요?
[글쎄요.당신 생각은 어때요?
그굴는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우연히 당신 연필을 가지고 있던 어떤 자가 또 우연히 쉬버스를 그
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정도 아니에요?
잭은 미소를 띠었다.
[우연이라....... 우연이 아니라면 어떨까요?누군가 고의적으로 날
궁지에 빠뜨리려고 한 짓 같지 않습니까?
[이것 봐요. 잭. 당신 이름이 찍힌 연필은 미국 동부 지역에 쫙 널려
있어요. 빅토리아가 써대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요.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연필또 아마 빅토리아가 여기 왔다가 깜박 잊고는 그냥 두
고 간 것일 거예요.
[호오!빅토리아가 여길 그렇게 자주 다녀갔습니까?
그녀는 정색을 하고 그를 쏘아보았다.
[잭. 당신은 지금 헛다리짚고 있어요. 날 믿어요.
'헛다리짚고 있다구?'
그는 한 번 더 손가락으로 그것을 돌려 보고는 다시 연필꽂이에 꽂
았다.
'침착해야 한다. 증거가 있어야 해. 아직까지는 아무런 증거도 없잖
아.'
그는 코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래요. 아마 당신 말이 맞겠죠. 아무래도 나도 휴가가 횔요한 것
같습니다.
그는 맥주 캔을 집어서 남은 술을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는 캔을
구겨 버겼다. 그리고 그녀의 책상 앞에 기대서 컴퓨터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따. 컴퓨터 화면에서 나온 빛이 그의 얼굴을 밑에서부터 비추
고 있었다.
[레이챌. 한 가지만 대답해 줄래요? 당신 생각엔 누가 아기인형 살
인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습니까?
1녀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만 지금카지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일종의 복수극이라는 것이 적절한 추측이 아니겠어요?
[그래요?어쨌든 전화나 한두 통 써야겠습니다.
그는 거실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까 말이오. 당신이 빅토리아 어깨에 손을 짚었을 때,빅토리아가
'당신이 이겼어.'그러던데 그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까?
레이챌이 잠시 동안 그를 천천히 뜯어 보았다.
[글쎄요.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중 아니었어요?그러니까 대
통령에게 뇌까린 말이었겠죠. 아니면 티투스에게 뇌까린 말이었거나
요. 안 그래요튼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이웰이 그렇게 말한 이상. 이제는 본격적으로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돌아서려는데 레이챌이 그를 닐러 세웠다.
[잭?빅토리아는 휴가가 꼭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그는 발길을 전화기가 있는 주방 쪽으로 돌렸다.
첩 _
잭은 가방들을 들어올려 택시의 트렁크 안에 넣곤 뚜껑을 닫고나서
집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왔다, 추수 감사절 다음 날이었다. 추운 날씨
였지만 그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빅토리아가 코트를 다 입고 나자 그
는 자신의 서류가방을 열고 아나이스 닌의 소설. 헨리와 준] 한 권을
꺼냈다.
[골치 아픈 서류일랑은 아예 뒤적거리지도 말고 이 책이나 읽도록
해.
그는 책을 빅토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빅토리아가 겉표지를 넘겼다,
거기엔 이렇게 적척 있었다.
인생이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가장 큰 까닭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오.
당신과 아기는 나의 것이오.
-사랑하는 잭.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그를 와락 껴
안으며 물었다.
[내가 이 책 안 읽은 줄 어떻게 알았어요?
[전에 한 번 당신이 말한 적 있었어.그의 또 다른 작품 [텔타 오브
비너스]와 비교해서 말이야. 난 그런 거 잘 안 잊어버리잖아.
그는 그녀의 귓볼에 입을 맞춰 주고는 말을 이었다
[몸 조심해.당신과 우리 꼬마친구는 휴식이 필요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 꼬마친구는 푹 쉬게 할 거예요.
그는 다시 그녀를 켜안으며 말했닥.
[거봐 내 뭐랬어?당신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그랬잖아.
그의 말에 그녀가 몸올 뒤로 뻤다. 얼굴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져 있
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아뇨.
그녀가 얼굴을 밝게 펴면서 대답했다 그들은 택시가 있는 곳까지
서로의 어깨에 팔을 언고는 걸어갔다. 택시에 타자 빅토리아는 창문을
내리고 잭을 바라보았다.
[온천 호텔의 교환실에서 외부 전화를 연결해 주는 시간이 한 시간
뿐이라는 거 알죠?이곳 시간으로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예요. 내 방
에 개인용 전화를 설치해 달라고 했어요. 내가 전화해서 번호 가르쳐
줄게요.
벤 제이룹스가 잭의 집무실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노먼 플라스키 형사가 와 있는데요.
잭은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시계 바늘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쁜 하루였다. 물론 의회는 휴회중이었지만. 그의 기자회견 덕분에
그는 티투스 인준 반대 세력의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점심마
,
저도 건너뛰어 버렸다
[안으로 들여보내.
집무실 안으포 들어온 플라스키는 잭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책상 건
너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구겨진 베옷을 입고 있는 허름한 그르바
초프였다. 잭이 말문을 열었다.
[뉴욕 분이 워싱턴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군
요.
[전 기념비들을 좋아합니다....... 티투스
저 야단들인가요?
임명 건 때문에 사람들이
가리켰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요즘엔 그것뿐이죠.
잭이 대답했다.
[전 그것말고 다른 것에 관심이 좀 있습니다.
의원님. 최근에 일어
난 세 번째 아기인형 살인사건 말씀입니다.
[왜 그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플라스키는 놀란 듯이 보였다.
[그떻다면 의원님 말씀은 배니스터의 죽음이
관이 있다는......?
티투스 대법원장파 연
잭은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단순한 추측일 뿐이오.
[계속 추측해 보시지요.
잭은 등을 의자에 파묻었다
[우선 이번 사건은 너무도
기이한 우연두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봅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햇고 그러고 나서
의해 빌리 패니스터의 시체가 발견됐단
시다. 나는 애브너 티투스를
이틀 뒤 우연히 내 약혼녀에
말이오. 더구나 내 약흔녀는
우연히도 티투스의 대법원장 임명에 반대
지금 내가 약간의 편집 증
사건은 지나칠 정도.로 냄
하는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잖소?
세를 띠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만 이번
새가 나지 않소?
[그런 냄새를 쫓아다니다 보면 지나칠 정도로 추측만 하게 되죠.
유
감스럽게도 이번 사건을 담당한 지방 검사는 추측보다는 증거를 요구
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트를 펼치며 미리 잭의 양해를 구했다
[잭.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참겠습니까?
[어디 쏴보시오.
[경찰에게는 쏘라는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빅토리아 윈터스 양이 배니스터를 발견하던
의회 부속 병원에 계셨었나요? 니다.
날 밤, 의원님께서도
[아뇨.난 거기 없었소.
[그 전에는 그곳에 가보신 적이
[물론이오.
[방문차 말씀입니까?
[그렇소. 나는 그 사람들 일에 있으셨던가요?
키낸과 친분도 있고....... 그리고
이 있었소.
관심이 많아요. 게다가 원장인 캐시
한 달 전쯤에 그곳에서 피를 뽑은 적
무 생각 없이 그렇게 덧붙
그는 형사가 메모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였다. 플라스키가 고개를 들었다.
[낙태 시술 병왼의 환자였단 말씀입니까?
[아니오. 콜레스테를 수치를 재기 위한 것]
려한 일이었소.
1었소. 캐시가 특별히 배
=쓸데없는 걸 뭐하러 말하나?잭, 이 멍청아.'
그는 그떻게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다.
형사는 고개를 숙이고 노트에 다시 메모를 했다.
[아기인형 살인사건에 티투스 대법원장이 연관되어 있다는 심증을
'1 게 된 데는 그 밖의 다른 이유라도......?
[내 생각으로는 분명히 연관이 있소. 문제는 정말 우연이냐, 아니면
윽 가장한 음모냐 이거요.
플라스키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티투스는 딕키 상원의원의 포커 친구요, 그 딕키를 재정적으로 지
원해 주고 있는 강력한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 엘리 그레이브스거든?
그런데 그자와 난 썩 친하지 못한 사이란 말씀이오.
그레이브스 씨가
[그렇다면 의원님을 곤갈하게 만들기 위해 엘리
무슨 일이건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잭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세 명의 낙태 시술 병원 폭파범의 죽음과 의원님을
음모도 꾸밀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죠?
결부시키려는
[그레이브스는 그 정도로 양이 안 찰 거요.
잭은 형사리 메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자는 추문을 퍼뜨려서 날 매장시키려 할 리요.
[스캔들이 있으신가요?
[없소......, 하지만......
'하지만은 왜 덧붙였나, 이 얼간아!'
잭은 금방 후회했다. 플라스키 역시 그걸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뭘니까?
'젠장! 에라. 모르겠다. 내친걸음이다,'
[내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땐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일이 있었소
[그래서요?
[그래서라니요?
잭이 되물었다.
[그게 추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잭은 플라스키의 놀란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보시오. 형사 양반. 강력계 형사가 스캔들이라고 여기는 것]
신문이 스캔들이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오. 특히 정치가
관해서는 더욱 그런 것이오.
[언론에 보도되었습니까?
[그렇소.그리고 아직도 내 뒤를 캐고 있는 자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것에 대해서요?
1 질문에 잭은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은 좀더 깊은 사연이 있소.
그는 플라스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여자는 죽었소.
[정말 안됐습니다만 어떻게 그게 의원님 잘못일 수 있죠?
[엘리 그레이브스의 시각으로 보자면 간단한 논리 아니겠소. 불징
난에 따른 임신은 낙태로 이어지고 낙태는 죽음을 불러온다.......
[그럼 낙태 수술을 받다가.......
[아니오.내 여자 친구는 임신 8개월이 됐을 때 제왕절개 수술을 받
던 도중 죽었소.그레이브스는 그것도 내탓이라고 하긴 하지만.......
[아기도 죽었습니까?
[그랬다고 들었소.
플라스키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기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계신 것은 아니군요?
-
잭은 두 다리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확실하진 않소. 그나저나 엘리 그레이브스는 내가 애브너 티
스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나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소. 그가 무슨 짓
하려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는 나의 학창 시절의 비극적인 사
빗데어 뭔가 끔찍하고 더러운 추문이 있을 것처럼 퍼뜨리고 있
[그게 뭔지 짚이시는 게 없으십니까?
[없소. 하지만 그 작자는 다혈질 광신자요. 전에도 나에게 협박을
했었소. 하지만 나 역시 가만있지 않을 거요. 나의 과거에 대해 거짓말
을 해댄다든지 나를 아기인형 살인사건과 연루시킨다든지 하면 그땐
정말.......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의 푸른색 연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자는 어떻게 해서 이 연필 조각이 멜빈 쉬버스의 뱃속에 들어가
있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거요.
[그레이브스가 의원님의 개인적인 지난 일을 들추어내서 정치적으
로 의원님께 불리하게 사용하려 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의원님
에게 누명을 허우려고 사람들을 죽인다라는 추측은 좀 지나치다고 생
각지 않으십니까?특히 죽은 자들이 모두 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 동지
였다고 할 수 있는 터에 말이죠.
그갰다. 그런 식으로 분석을 하게 되면 그의 추측은 꼼짝없이 억측
이 되고야 만다. 잭은 자기의 입장을 좀더 강하게 대변해야겠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자가 낙태 시술 병원에 대해 사람들에게 꿔라고 선동하는지 들
어 본 적 있소?
[들싶 옇습끽닿. 본인 스스로는 폭력에 반대한다고 그러던데요?
[그거야 마피아들도 그렇씩 짤논장 앙소틴
[자, 그러면 내가 의원님의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엘리 그레이
브스가 쉬버스나 배니스터 같은 자들을 고용해서 병원을 폭파하도록
시킨 뒤 그들을 제거해 버렸단 말씀이신지요?
[크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소. 만일 그들이 없어지고 나면 병원 폭
파의 배후가 드러나지 않아서 좋고 게다가 나까지 거기다 연루를 시키
게 된다면 일석 이조가 아니겠소?
잭은 형사가 이미 메모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렸
다. 플라스키는 이마의 점을 문질러대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애브너 티투스와 엘리 그레이브스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글쎄요.그 점에 대해서라면 딕키 상원의원에게 물어 보는 것이 가
장 손쉬울 거요, 그리고 엘리 그레이브스가 그 병원 폭파범들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기 핏트라는 청년에게 물어 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멜빈 쉬버스와 할리 문, 둘 모두와 함께 지내
본 적이 있는 친구요. 아마 아실 거요. ' 윙스'라고 불리우는 43번가의
선술집 말이오.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심부름 센터에서 일하고 있소.상호가 ,에이스떱지 아마?
그는 전화기를 들어서 뉴욕의 전화번호 안내에다가 물어 본 후 알아
낸 전화번호를 눌렀다. 플라스키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액자에 키
워 놓은 편지들, 서류 더미들, 선거 유세 때의 기념품들, 저명 인사와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들 따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잭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 에이스 심부름 센터입니다.
소란한 잡음과 함께 누군가를 부르던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기 핏트 있어요? 어떤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기
[그럼 먼저 전화하고 오라고 그러세요.
[집에서 만나는 게 더 낫겠나?
[아뇨!
재빠른 부정의 답변이 들려 왔다.
[제 말은....... 가게에서 경찰과 얘기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가 용의자나 범인은 아니니까요.그렇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플라스키 형사는 자네 이름도 몰랐다네.
이기?
[예?
잭은 몰리에 관해 물어 보려고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고마워.
그는 그떻게 말해 버리고 전화를 끊었다,
플라스키는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장(릇) 5.1미터, 마호가니 갑판, 오픈된 조타실, 둥그런 하.
판.아주 빠르겠는데.......
잭이 일어서면서 물었다.
[요트 경기 하시나 보군?
[평생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
[수영을 할 줄 모르거든요.
잭은 책상 끝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배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읽었습니다.
그는 삐뚤어진 액자를 바로잡아 주고 나서 잭 쪽으로
이었다.
걸어오며 말들
[퇴직하고 나면 난 구명조끼를 입고 배를 하나 사서 아주 멋지고
화로운 섬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항해를 할 겁니다. 순하고 착한 원주
딘이 있는 그런 섬 말예요.
[부인과 함께요?
[아뇨.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오! 실례했소.
형사는 노트를 덮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5년 전, 4월에요.
그는 무언가 다른 생각에 잠긴 채 노트를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
다 그는 작별의 악수를 청해 왔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의원님.
악수를 하면서 그는 잭을 자기 쪽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
렇게 말했다.
[당분간은 티투스와 그레이브스에 대한 의원님의....... 음....... 이
론! 이론들은 저만 알고 있을 생각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들의 행동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좋도록 하시오.
[제 입장 때문이 아니라 의원님 입장을 생각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의원님이 티투스에 대해서, 현재로선, 터무니없는 추측만을 근거로 비
난을 해댔다는 사실이 언론 쪽에 새게 되면 티투스의 입장이 그만큼
더 편해질 것 아니겠습니까?이제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추측을 비밀로 지켜 주자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는 형사와 만났
던 것이 내게는 즐거웠소.
플라스키를 사무실 밖까지 배응하고 다시 들어오는 잭에게 피어스
가 전화 메모지를 한 장 들고 다가왔다.
[윈터스 양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온천의 숙소 전화번호를 남겨 놓
으셨어요. 만일 전화해서 없으면 저녁 먹으러 나간 것이니까, 나중에
전화하라고 하시더군요.
잭은 집무실로 들어와서 문을 닫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때 벤 제
이콤스가 옆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늦겠는데요. 의원님.
그는 잭에게 '지도자 연합'과의 회합에 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상
기시켰다
[잠깐만 있다 가자구.
잭이 메모지에 적힌 번호대로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신호가 갔다. 제이콤스가 방을 나갔다 잭은 수화기를 턱 아래에 핀
채 6시 반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채널을 뒤졌다. 송화기를 통해
서 계속 신호가 울리고 있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전화기를 막 귀
에서 떼려는 순간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그는 당황했다. 빅토리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낯익은 목소
리....... 레이챌의 목소리 같았다.
[레이헬?
전화선 저쪽 편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그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빅토리
아였다.
[여행은 어뻤소?
[빅, 아무래도 이만 끊어야겠어. 나중에 전화할게.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걸음을 멈췄다.
[벤. 잠깐만!
문을 닫고 나서, 잭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전화번호 수첩을 뒤
져서 레이챌의 메릴랜드 농장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자신의 편집 증세를 한심해하면서도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 닫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전화기를 귀에 대고 기다렸다
'여보세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레이젤이었다.
그는 자신의 터무니없는 의심을 자책하면서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나마 안심했다.단지 '잠시'동안만.......
페퍼 루미스는 한 무더기의 서류와 체리 초콜릿 한 상자를 들고 애
브너 티투스의 병실에 들어섰다. 티투스는 짜증을 네고 있었다. 편안
하게 쉬어야 할 추수 감사절 연휴의 토요일이었건만 그는 건강 진단을
받기 위해서 병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턱이 없었
다
레이챌은 혼히 있는 과민 반응이라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로서는
자기는 신장 쪽에 문제가 있는데 왜 자꾸 아랫배 쪽이 이상하게 거북
한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레이켈은 세계 수준의 외과의사였고 신
장을 성공적으로 이식시켜 줌으로써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긴 했었지만,
의술만은 00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현
재 상태와 지난 병력에 대해 그녀만큼 잘 알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그는 병상에 앉아서 '인준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라는 제목이 붙은
법무성의 지침서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0페이지나 되는 분량이었지
만 결국 단 한문장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었다.
'청문회 전에는 입을 다물고, 청문회 중에는 아무 말도 말 것이며,
청문회 후에도 침묵을 지켜라.'
페퍼가 코트를 벗으면서 그에게 인준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라고 말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꿍꿍대면서 서류를 읽어 나갔다
크게 아프지 않은 평범한 환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의 침대 위에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묵은 잡지,뚜껑이 달아
난 매직펜,두 개의 리모콘 -하나는 텔레비전용이었고 다른 하나
는 비디오용이었다 그리고 크리넥스 한 통.....
침대 곁에는 선반이 벽으로부터 당겨져 나와 있었고 그 위에는 그의
개인 전화, 텔레비전과 비디오 그리고 법률 서적들이 여러 권 얹혀 있
었다. 비디오에서는 음이 소거된 채, 몰타 섬의 매}가 돌아가고 있었
다.
티투스는 자기가 험프리 보가트의 팬이라고 늘 떠벌렸지만, 그가 정
말로 좋아하는 배우는 시드니 그린스트리트였다. 페퍼 루미스는 그의
주의를 그녀에게 돌리기 위해서 들고 있던 서류로 가득 찬 봉투 하나
를 침대 위에 '쿵'하고 내려놓았다. 그는 마치 그제서야 그녀가 와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한 표정을 하곤 안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
았다.
[그 서류는 그만 내려놓으시고, 제 메모들이나 한번 검토해 보세요
판사님. 특히 이거요. '코스텔로' 사건에 관한 판시섬의 의견을 제가
정리해 놓은 개요입니다.
그녀는 타이핑된 종이 몇 장을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 사건은
아직 심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보고서는 공개되었고 그도 이미 그것
을 읽어 보았었다. 그는 건네받은 서류의 첫장을 넘기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체리 초콜릿 상자를 열고서 그 중 하나를 골라서 집어
들고는 어찌 보면 장난스럽게 그러나 사실은 무례하게 흔들어댔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 입 안에 집어 넣었다. 그 순간 페퍼의 입꼬리
가 비웃음인지 아니면 만족인지 까닭 모르게 치켜져 올라가는 것을 그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병실 안
서성거리면서 시계를 보다가, 선반 위의 비디오 테이프 더미를 정
리하기도 하고 또 체리 초콜릿 상자 속을 헤집어 보기도 하면서 초조
한 표정으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물병에 새 물을 받아 가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그녁의 메모
를 다 읽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이미 '코스텔로'사건에 대해 마음을 굳히고 있어. 페퍼.
[알고 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판시님 의견이 결국 다수의 의견이
될 것입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론 그떻게 되겠지. 그나저나 우선 여기서 나가야겠어. 레이챌 레
드패스 좀 불러 주겠소?난 멀쩡하다구.
[스스로 느끼시는 기분 갖고 맘대로 행동하실 때가 아니에요.중요
한 건 병원측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아직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
예요. 복막염은 한 순간에 왔다가 갈 수도 있다구요. 또 발병하면 어쩌
시려구요?
[오! 이런. 레이챌이 나에게 투여한 모든 약물들을 생각해 보면, 난
감기조차도 걸릴 수 없을걸?
페퍼는 전화기를 들고 치프 레지던트에게 판시님께서 의사를 만나
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레지던트는 레드패스가 신장 이식 수술을 준비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방해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티투스는 몹시
화가 났다. 페퍼는 그를 진정시키고 또 다른 메모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나서 현재 티투스가 주재하는 재판에 계류중인 사건들에 대하
여 그녀 나름대로의 분석을 그에게 브리핑했다. 티투스는 워낙에 그녀
의 능력을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가끔씩
주억거리며 듣고만 있었다.
30분 가량 시간이 홀렀다
티투스는 페퍼에게 다시 레이챌을 호출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체리 초콜릿을 집으려고 손을 뻗다가 자신의 손마디가 순간 뻣뻣해져
옴을 느꼈다. .
[으윽.......
그만 그의 몸이 뻣뻣해져 버렸다. 그의 얼굴은 마치 트림을 하려고
하다가 제대로 안 된 것처럼 멍하게 굳어져 있었다.
[판사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페퍼는 간호사 호
출 버튼을 미친 듯이 두들겨대다가 간호사실을 향해 병실문을 뛰쳐나
갔다.
[마비가 왔어요!
사람들이 신속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간호사 두 명이 병실로 뛰어
들어와서 그의 병상에 모니터와 산소 호흡기를 설치했다. 레지던트 하
나는 그의 용태를 살폈다.맥박,동공,호흡,복통....... 병원 조무사들
이 침대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닥터 레드패스를 !
복또를 통과하는 침대 옆을 따라 뛰면서 페퍼가 외쳤다.
레이챌이 수술용 가운에 라텍스 장감을 끼고 옥 아래 푸른 마스크를
매단 채 나타나자 그들은 침대를 수술실 문 앞에 세웠다
[닥터 레드패스! 대법원장이십니다.
페퍼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도 알아요.
레이챌은 장갑을 벗으면서 침착하게 말하고 나서 침대로 다가가 허
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죠?애브너.
......내 배가.......
그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고통에 겨운 듯 껑그린 눈 주위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레이챌은 피브 창을 수술실 밖으로 불러냈다.
[모두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멈추라고 하세요. 디투스부터 봐야겠
어요.
피브 창은 수술실로 되돌아갔고 그 뒤를 조무사들이 티투스가 웅크
리고 있는 침대를 끌고 따라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페퍼가 물었다.
[당신은 이만 가봐도 좋아요.
레이챌은 짧고 나직하게 말하곤 자신도 수술실 문 안으로 사라졌다
레이챌은 기자회견실의 강단에 서서 수술모를 벗으며 고개를 흔들
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버법원장은 아직 의식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건강하고 편안하게 수
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좋은 소식은 우리갛 맣침대 그분익 복
통의 진범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손을 올려서 작은 나무 조각을 들어 보였다. 또다시 사방에
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쑤시개였어요. 이것이 그분의 대장벽을 뚫어
급성 복막염을 일
으켰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쑤시개가 그 안에 들어갔을까요?
기자 한 사람이 질문했다.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티니를 마시던 도중에 올리브를 먹
다 함께 넘어간 것이 아닌가 해요. 그분은 뭔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
으면 뱉지 않고 그냥 꿀꺽 넘겨 따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녀의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던 기자들 속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
가 새어 나왔다.
레이챌은 말을 이었다.
[이쑤시개 정도가 아니라 더한 것이 나온 적도 여러 번 보아 왔습니
다.
'코스텔로'사건 심리 전에 재집무할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합병증만 없다면 가능합니다.
[엑스레이를 찍지 않았습니까? 만일 찍었다면
왜 사전에 이쑤시개
를 보지 못했습니까?
[식물성 물질은 엑스레이에 찍혀 나오지 않습니다.
[박시십은 전문 분야가 신장 이식인데 어떻게 대장까지 살펴보시게
됐습니까?
[난 외과의사예요. 조금 우매한 질문이지만 답변해 드리죠. 처음엔
당연히 신장 쪽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지요. 그분은 신장이 한 쪽밖에
없어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죠. 내 손으로 직접 이식해 넣은
것이니까요. 어쨌든 진단 결과 문제는 신장 쪽이 아니었습니다. 자연
히 전체적으로 세밀히 살펴보게 된 것이죠.
[수술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 같은데요?
그녀와 낯이 익은 기자였다
레이챌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속도보다는 정확함을 좋아하던데요.
고 우리가 그분의 온몸을 전체적으로 재진단해야 했던 것을
면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볼 수 없죠.
[레드패스 박사섬 ! 박시십의 정치적 견해는 대법원장의 존. 그리
반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박사께서 그의 수술을 집도해서 고려해보
견해와 상
그의생명
매
을 구해냈다는 것이 약간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기자가 질문쌘다.
[나는 의사입니다.그 아이러니는 기자인 귀하께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내뱉고 나서 그녀는 시계에 눈길을 주엇다.
[자.실례항니다만 돌봐야 할 환자가 있습니다.
레인코트 앞자락을 풀어헤치고 긴 머리를 너풀거리면서 몰리가 기
자회견장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을 때, 이미 회견실은 비어 있었다.
어느 굼뜬 카메라 기자 한 사람만이 그의 장비를 챙기며 남아 있었다
[꿔 중요한 내용 있었어요?
[어디 계셨드랬수?아가써.
[갈이 막혀서요.무슨 내용이었어요?
[대법원장 창자 속에서 이쑤시개가 나왔답니다.
[뭐가 나왔다구요?
[왜. 있잖소. 마티니 마실 때 올리브에 꽂는 이쑤시개 말이오.
그는 장비를 꾸려 넣은 상자의 자물쇠를 잠그곤 그것을 어깨 위에
언었다, 그러다가 마이크를 연단 위에 캄박 잊고 놔둔 채 왔다는 것을
생각해 내곤 그리로 가서 그젓을 집었다. 그때 작은 비닐 봉지가 그의
눈에 띄었다.
문제의 이쑤시개가 들어 있는 봉지였다
[이거네요.
카메라맨과 취재 기자의 차이점이 그런 것일까?
어쩌면 엄청나게 증요한 물건일 수도 있는 그것을 그 남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몰리에게 건네주었다. 몰리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차내듯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이쑤시개를 코 끝에 들이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잭은 앨부커크에서부터 산타페에 이르는 길을 평균 시속 150킬로미
터의 속도로 내달렸다. 산타페에는 민간 항공기를 위한 공항이 없었기
때문에, 먼 거리였지만 자동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밤늦은 시간
이라 25번 국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빅토리아의 얼
굴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잭으로 하여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또 밟게 만들었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렌터카 회사에서 받은 지도를 보면서
빅토리아
가 묵고 있는 콘도미니엄까지 차를 몰고 갔다. 차고에 차를 주차시킨
다음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 한 번에 두 계단씩.
온천에서의 휴양이 빅토리아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번에는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마구 두드렸다. 얼마 후, 마침내 문이 열렸다.
빅토리아가 거기 서 있었다. 그러나 3주 전, 워싱턴에서 작별 키스를
하고 헤어졌던 그 빅토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날프리만치 야위어
져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눈 주위는 움푹 꺼져 들어가 잿빛 그림자
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떠오
른 미소는 그가 오랫동안, 그러니까 여러 달 동안 볼 수 없었던 그런
=였다. 판사의 판단력을 흩뜨려 놓고, 우리편 증인에게는 위안이
되며, 상대편 증인을 방심케 만들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피를 달
아오르게 만들었던 그런 고흑적인 미소엿다.
잭은 휴양이 그였에게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서 마음이 놓
였다. 빅토리아가 양팔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얼싸안아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뒷발로 문을 닫았다. 그는 온천에서의 생활에 대해
물었다.
[지금 그렇게 지리한 얘기 듣겠어요?
[아기는?
[잘 있어요,
그는 옷을 홀라당 벗고는 서둘러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열려
진 문을 통해 외쳤다.
[들어와!
[방금 샤워했는걸요?
[제기랄.누가 목욕하고 싶댔나?
그는 대충 물을 끼얹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욕실을 나와 침대
로 다가갔다. 빅토리아는 이미 이불 속에 파묻혀 조그만 머리만 베개
위에 내놓고 얼굴 위로 잡지책을 펴들고서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젖은 머리칼을 이마 뒤로 빗어 넘겼다.
[티투스에 관해서 왜 묻지 않아?
그의 질문에 그녁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잡지만 뒤적였다.
[뭐 별로. 이젠 크게 관심없어요. 내가 이러니까 당신 좋죠?
그는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비록 온천물이 그녀의 퍼부엔 잘 맞지
않았을지라도, 정신 상태에는 좋은 영향을 가져다 준 게 틀림없었다.
[그자는 여전히 제노비아 데이비스에게 전화 연락을 한 적이 없다
고 잡아떼고 있지. 그러나 상원 조시침파 언론은 그녀를 죽게 만든
원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고, 도 티투스의 과거를 배
조사 겸 해서 수사를 하고 있어. 또한 '지도자 연합' 측에선 연일 항=
대회를 개최하고, 격문을 날리는 등. 상원이 개회되기 전에 티투스0
게 치명타를 날려 보려고 하고 있여. 그 정도야.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흔자서 지껄여대곤 수건을 바닥으로 아무=
게나 던졌다. 그가 침대 속으로 들어가려고 이불 귀퉁이를 잡고 젖
려 하자 순간, 넥토리아가 이불을 위로 잡아 끌면서 말했다
[조심해 줘요.
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추워서 그래요.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 한 귀퉁이를 들고는 그 밑으로 기어들어갔디
그녀는 머리맡으로 손을 뻗어 스텐드 불을 꼈다.
이상했다. 한밤중에 깨어났다가 갑자기 일을 벌릴 때를 제외하고는
그들은 언제나 불을 밝혀 놓고 사랑 행위를 해왔었다.
'신경 쓰지 말자.'
그는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
기 시작했다. 우선 입술을 그녀의 귀에 닿을 듯 가까이 대곤 달콤하고
도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사랑해.보고 싶었어.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온몸의 피부가 팽팽해졌다.
두 눈이 사르르 감기면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몸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기 싫었다. 잭은 그노
의 입술과 귀에 키스를 했다. 그리곤 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턱으로, 그 다음엔 가녀린 목으로, 그리곤 그녀의 양 가슴 사이 오목한
계곡으로, 그리곤 그 아래. 그때 갑자기 그?가 그의 행동을 제지시켰
다
그녀는 그녀의 윗배에 얹혀 있던 그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부여쥐
고는 위로 잡아당기면서 속삭였다.
[올라와요.나 하고 싶어요.
그는 어리등절해져서 물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잖아?
그는 위로 올라가면서 물었다.
[그렇게 말고 이떻게 말예요.
그녀는 그를 부둥켜안은 채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이젠 그녀가 위
였다. 그녀는 몸을 숙인 채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임신이 여자를 이렇게 수줍게 만드는가.'
잭은 계속 의구심이 일었지만, 결국 그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그녁의 입술이 점점 그의 몸통 아래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리를 옆으로 돌려 시계를 보았다.
1시 정각.
잭은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 나와 가운을 걸치고 베란다로 나왔다
멀리, 로스앨러모스 거리의 불빛이 낮게 깔린 구름들을 노랗게 물들
이고 있었다.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솔향기가 났다. 베란다의 나무
난간에 솔방울이 하나 얹혀 있었다. 그는 그걸 집어 들고서 먼 도시의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작은 씨알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내 인생에 점점이 박혀 들어온 것은? -애브너 티투스,대려원,
청문회,로비스트...... 그리고 정치.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솔방울을 멀리 내던졌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쓰레기들을 거기에 실어서.
매서운 밤 바람 때문에 온 얼굴이 얼얼해 왔다. 그는 침실로 들어?
서 유리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그들의 늦잠을 방해하지 ]
하도록 커튼을 잘 여며서는 낮게 드리윗다. 빅토리아는 여전히 잠
취한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녀의 등=
로 몸을 밀착시키며 그녀의 몸을 살며시 안았다. 그리고 장거리 운=
의 피로가 단잠을 불러와 주기를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생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고대 로마제국의 콜로세움에 필적할 만
한 곳은 요즈음 세계에서 몇 군데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미합중국
대법원의 회의실이 그 중 하나였다
대법관들은 회의실 앞 복도에 모여 서서 태평하게 한담을 나누고 있
었다, 날씨와 아침 뉴스 따위가 그 주제였다. 그러나 태평함과 냉철함
을 흔동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회의실 주변의 평안하고 우호적인 분
위기 이면에는 매서운 칼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지난 한 주 동안 토론했던 사안들에 대한 찬, 반표
결이 붙여지는 날이었다. 과거, 로마제국의 황제들처럼 그들이 가진
권력의 힘에 익숙해져 있는 대려관들은 그토록 증대사를 목전에 두고
써도 짐짓 한가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죽느냐, 사느냐, 찬성이냐, 반
대냐, 하는 가부()의 신호를 보낼 엄지손가락을 은밀하고도 유연
하게 풀고 있는 셈이었다.
대댑원 회의실은 그 역사적인 중요성에 걸맞도록 웅장하고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대법원장 부속실에 면해 있는 한쪽 공간은 가죽 의자
들과 소파를 비치해 놓고 거실로 샤용되고 있었다 그 맞은편이 회의
공간이었다. 녹색의 커버로 덫인 참나무 재질의 커다란 직사라형 탁
자. 그리고 그 주위에 둘러놓은 아흡 개의 가죽 의자. 바로 이곳이 미
합중국의 가장 중요한 판례가 잉태되는 숭고한 장소였다.
회의실 바닥엔 발목까지 파묻히는 카팻이 깔려 있었고, 천장 한가운
데에는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방에 비해 크기가
작았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면의 방을 빙 둘러 테이블과 서가. 회화
액자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나머지 한 벽은 통째로 유리로 되어 있었는
데, 그 방탄 유리벽은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었다.
'도 대 코스텔로.'
이틀 전에 논의된 사항이었다.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이 사안이 오늘 아침 예비 투표에 붙
여지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판례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
자면 이러했다. 찬, 반 형태로 이루어지는 예비 표결이 끝나고 나면,
대개 두 개의 초안이 작성된다. 하나는 승리한 쪽의 대법관에 의해 의
당 쓰여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패배한 쪽에서 불만이 있을 때 _
거의 그래왔지만 -쓰억지는 것이다.그리하여 이후 몇 개월 동안
그 두 개의 초안은 대법관들 각자에 의해 충분히 숙고된다. 그러고 나
서 최종 표결에 붙여진 후 그 표결의 결과가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서
세상에 공표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합리적이고 신중을 기한 제도였다. 그러나 깊숙이 따
지고 들어가면 결국 그 제도 역시 로마제국식의 단도직입적인 판결로
요약될 수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세우느냐,뒤집느냐?'
어쨌든 '코스텔로' 사건 역시 그와 같은 전례에 따라 처리될 것이
다. 최종 표결이 내년 5, 6월경에나 이루어지게 될 것이므로 예비 투표
결과가 크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예비 투표
의 결과가 최종 투표에서 뒤집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어 온 것
사실이었따. 그러나 '코스텔로' 사건의 경우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
고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워낙에 중대한 사안이다 보니 대법관
각자가 오랫동안 숙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였고, 그에 따라
''' 날 오늘 아침의 예비 투표의 결과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최종 투
그대로 이어질 것이 틀림없었다.
애브너 티투스는 횔 체어에 앉아 회의 탁자 상석에 자리를 잡았고
탁자 양 옆으로 일곱 명의 대법관이 좌정했다, 티투스의 맞은편. 수석
대법관의 자리에는 마이클 켈리 판사가 앉아 있었다. 자유주의자이며,
낙태 지지론자인 그 78세의 노법관의 신념은 애브너 티투스와는 양극
을 이루고 있었다.
투표 절차 규정에 따르자면 재임 연한이 가장 짧은 대법관부터 표결
에 들어가서 대법원장이 맨 나중에 투표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표결에 들어가기 전. 대법관 각자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
는 관행이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업무를 과중시키고 대법관들간
에 물의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는 관점에서 거의 의견 발표 없이
곧바로 표결에 들어갔다.
오늘도 여섯 명의 대법관이 아무런 발언 없이 찬, 반의 의사 표시만
으로 투죠를 마쳤다. 줄리어스 프랑코니아, 콘스탄자 카스트로 그리고
워런 한델만 대법관은 반대표를 던졌다. 그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엎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캐더린 램, 매튜 포베스 그리고 대법원의 유일한 흑인 판사인 폴 헤
리스 대법관은 찬성표를 던졌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존속시키겠다
는 표시였다. 지금까지는 예상대로였다. 찬성 코틴, 반대 3표. 어머니와
태아의 권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과
수정란.
일곱 번째 투표에 나선 대법관은 에드먼드 버크 리틀 3세였다. 전직
예일 법대 교수 출신인 그는 신 보수주워의 기수였다. 이제 반대 4=
찬성 3표. 저울이 태아 쪽으로 기울어졌나.
이제 켈리 대법관의 차례였다.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
당당한 풍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매사추세츠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
이었던 그는 독럽전쟁 당시에 태어났다면, 최일선의 소총수 자리라]
마다하지 않았을 용감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오늘 아침 장렬
무명 용사의 역할을 떠맡아 볼 요량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나이니=
큼 예전처럼 신랄하고 감동적인 사자후(=[ )를 발할 수는 없었?
만, 아직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 보리라 결심8
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는 탁자 위의 한 점에 두 눈을 고정시키고 상체를 요으로 기울=
다. 다른 참석자들의 주의가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비로소 고개를 들=
다
[나는 흑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법원이 인종 차댈에 근거한 노예
제도를 묵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니
는 임신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댑원이 성차별에 근거한 노예
제도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믿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양손을 탁자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는 다시 계
속 이어나갔다.
[우리는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관한 수없이 많은 논쟁에 귀기울
여 왔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만 얻을 수 있다면 마치 모든 문제점들이
풀리기라도 할 듯이 말입니다. 글쎄요. 유감스럽게도 내 생각엔 그렇
지 않을 것 같군요. 나는 인간의 생명은 인지능력()과 그 기원
을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 수정되지 않은 난자와 시정되
지 않은 정자가 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역시 수긍을 하
는 바입니다. 또한 임신한 여성의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다른 짐승이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보수파 친구들의 지적에도 역시 동의를 하고 있
습니다. 나는 그들의 예리한 통찰력을 존중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그러
한 논쟁이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당면해 있는 문제들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가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
다. 태어나는 아기들이야 두말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귀엽습니다. 그
러나 문제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출산의 전제를 '자
연의 순리'로 놓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이 과연 우리에
게 늘 너그러웠습니까? 전염병, 태풍, 지진 따위의 자연 재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판사로서 우리는 그 틈을 노리고 저질러진 범
죄에 대해 가차없는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까? 유죄라고 판결이 나게
되면 신께서 주신 생명을 사형에 처해 버릴 수 있는 권한까지 몇몇 주
에서는 허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사에 관한 결정들을 내리
고 있고 또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렵게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대법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인 것입니다. 그
러나 일종의 자연 재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성의 원치 않은 임신이란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되어 버
럽니다. 우리의 권한과 지혜를 포기해 버리고 자연 또는 운명에 따르
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아무런 행동도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 진심
으로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왜 그렇게 되야 합니까?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까?다른 모든 경우에서는 단호하고도 명예로운 판결을 내
리려고 애쓰던 우리가 왜 이 문제에서만은 그리 머뭇거리고 있단 말입
습 니카?
그는 양손을 펴서 약간 들고는 계속 연설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낙태라는 것은 종교적으로든 인간적
으로든 무시무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나 무
시무시해서 선례와 유추를 통해서 얻어야 할 당연한 위안조차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만큼 더 낙태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오히려 낙태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 다 갈광질땅하며
공포에 숨죽이고 있을 때 임신한 여인, 당사자로 하여금 생사의 결정
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주자는 것이 바로 낙태권이 의도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낙태권은 임신이 여성과 가족의 삶을 위협한다든
지 또는 더 나아가 태아의 미래의 삶이 곤궁하고 비참한 것이 될 것이
라든지 따위를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
가 다름아닌 태아의 어머니,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
는 것입니다.
그는 잔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혜가 부족하며 또 그
럴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좋습니다. 어쩌
면 이 판결에 우리말고 다른 어떤 존재가 영향을 끼쳐 주기를 기대히
는 일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운명, 자연, 종교, 가족.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어머니의 영향력을 제외시킬 수가 있겠
습니까? 어떻게 이 복잡하고 미묘한 판결로부터 어머니를 떼어 버리고
국가 전체의 판결을 내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여기 모인 우
리 아홉 사람이 그 국가 전체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
러 보수파 동료 법관들께서 너무나도 스스로 홉족해하시는 짓 같아 안
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탁자에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만일 내가 본의 아니게 임신을 지속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참을 수
없을 겁니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디
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원해서 한 임신이 아니었더
다도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아
이를 출산해서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려고 낙래권을 포기하는 것도 상
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를 기르겠다고 결젼하는 것도 그렇습니
다. 이럴까, 저럴까, 여러 번씩 마응을 바꿔 먹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
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시켜 주는 가장 커다란 특징인 인간의 판단능력을 사용하는 행위인 것
입니다. 그러한 행위들이 인간의 인지력에 기초한 것일진대. 낙태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행위라는 것이 내가 믿고 있는
바입니다.
그는 상체를 의자에서 꼿꼿하게 세우며 덧붙였다.
[개인적인 얘기입니다만 만일 내가 내 의지에 반하여 임신을 지속
하도록 강요받는 여자의 입장이라면 난 굴복하지 않고 무기를 들 것입
니다.
[오! 이런 마이클
티투스가 제지시키려고 끼여들었다
그러나 켈리는 반발했다.
[아니오! 정말 그랬을 거요. 조지 왕의 군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
었던 저 독럽 정신과 일치하는 정신 자세로 전투에 임했을 거요. 종교
의 자유, 인신 보호 영장, 언론의 자유, 청원권 등은 여성이 국가가 강
요한 임신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만큼이나 근본적인 권리인 것입니
다. 내 견해로는 여성에게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
를 빼앗는다는 것은 대법원 역사상 '드레드 스코트' 판례를 통해 노예
제도를 승인해 버린 것만큼이나 엄청난 실수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의 연설이 끝났다. 이제 의사 표현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찬성입니다. 반대표를 던진 네 분 대법관들 가운데서 한 분이
라도 의사를 번복해 주실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따.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4대 4.
모두의 눈길이 애브너 티투스 대법원장을 향했다
[자, 이제 나만 남았군요.
대법관들은 저마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취임 선서 내용이 생각나는군요. 미합중국의 헌법을 받들고 수호
하겠다는....... 내 생각으로는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야 말로 그
선서에 가장 충실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로크와 루소의 사상에서부터
오늘 아침 신문 사설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보다 더 중요한 법관의 임
무를 찾아블 수는 없을 것입니다.그렇다면 문제는 헌법 제14수정 조
항이 언급하고 있는 '생명'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 내는 것입니다.
우리 대법관들이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시피 헌법은 무()에
서 나온 갑작스런 창작물이 아닙니다 헌법은 미국 국민이 공유한 경
험과 초안을 작성한 분들의 사상을 이해함으로써 계속해서 수정되어
내려오고 있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입니다. 많은 존경할 만한 헌려 해
설서를 참고해 볼 때, 헌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명'이란 단어는 태
아를 포함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태어난 순간부터
가 아니라 임신이 시작된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의 태아를 의미하고 있
습니다.
그는 두 손을 깍지끼며 상체를 앞으로 약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성이 자신의 자궁 속에 깃든 생명체를 없애 버릴 수 있는
자유롭고 처벌받지 않은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는 주장에 귀기울여 왔
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에는 어머니의 이익과 태아에 대한 형평성
을 고려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진 근거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슘니다. 어쨌든 여성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고 아이
가 태어날 수만 있다면 까닭 없이 태아를 죽여야겠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인구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되는 것은 어머니가 원하
지 않았던 생명이 어머니에게 떠맡겨지는 부담입니다. 과연 그 부담을
없애기 위애 태아를 죽이는 것이 헌법에 비추어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을까요?
티투스는 마이클 켈리가 앉아 있는 수석 대법관 자리를 흘껏 쳐다
보고는 말을 이었다.
[마이클, 당신의 감동적인 연설은 진심으로 잘 들었습니다. 나 역시
이 주제에 관해서 여러 해 동안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만일 내가 당신
의 편이었다면 보다 설득력 있을. 몇 가지 논거를 더 제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느것 하나라도, 아니 그 모든 것을 다 합쳤다 하
더라도 태아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
니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이제 갓 오체에 깃든 어린 태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더 여리며
따라서 그만큼 대법원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마땅한 것이 있는지 정치적
이 됐든. 아니면 철학적이든 아니면 종교적으로든 다른 사람들이 납득
할 수 있게끔 설명을 해주실 분 계십니까?
그는 잠시 기다리고 나서 다시 횔 체어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으시군요. 그렇다면 고통스럽고 원하지 않은 임
신이라 할지라도 죄없는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부담을 덜 수는 없
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 셈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팔을 뻗어 앞에 놓인 물잔을 잡았다.
켈리가 그 순간을 틈타 끼먹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애브너. 당신은 지금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에서조차도 낙태를 금지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카? 또는 어
머니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일지라도?
[그런 상황들이 지금 제시되고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마이클.
[나도 압니다. 그러나 이 방에 있는 분들, 모두 비밀을 지킬 것이라
는 것을 믿고 물어 보는 겁니다.
티투스는 물잔을 앞으로 밀어내고 손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었다.
[강간과 근친상간은 가장 부도덕한 위려 행위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 일이 발생하고 난 후에 임신된 죄없는 태아를 죽이는 것은 그 범죄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애꿎은 보복 행위입니다. 사실상 그 범죄보
다 더 나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바보스럽기도 한 짓이죠. 님성
강간자들에게 양심적 또는 실제적인 책임을 덜어 주게 되는 결과가 되
기도 하니까요.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할 수도 있지 않겠
느냐는 마이클 당신의 지적에는 한편 공감이 가는 바도 없지 않습니
다만 그 대상이 생명입니다. 생명 그것도 죄없는 생명. 그런 목숨들을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헌법의 취
지에서 더욱 벗어나 버릴 것 같습니다. 꿔랄까요. 평등의 개념까지 저
버린 판결이라는 비난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임신이 된 피해자에게 동정과 치료를 베풀고, 어머니와 아이에게는 국
가에서 보조를 해주며, 적극적인 입양 계획 실시와 구호 시설의 확충,
종교적인 도움 등등을 다 베풀어야겠죠. 그렇습니다. 그러나 낙태? 그
것만은 안 됩니다. 임신 상태를 벗어나고 싶은 강간 피해자들의 충동
이 다분히 정상쩍이고 또 이해될 만한 것이지만 단순히 그 정도의 부
담이 죄없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말 야만적이군요.
켈리가 불쑥 내뱉었다.
티투스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눈썹이 치켜져 올라갔다.
[마이클 역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야만인들은 여성들의 자궁에
깃든 생명을 존중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말씀을 찬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냥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모욕할 뜻은 맹세
코 없었어요.
켈리가 해명했다.
[네. 그러셨겠지요. 확실히 이 주제에 관해서는 우리들 각자의 견해
에 개인적인 요인들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는 이마에 배어 난 땀을 닦지 않고 내버려둔 채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진정 원해서 나는 태어났노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이 방안에 몇이나 있을까요?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나.자신.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렇게 말할 확신이 없습니다.
그가 흐트러진 서류를 챙기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
다.
[나는 '코스텔로'에 반대표를 던지는 바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
=1는 폐기되어야 합니다.그리고 초안 작성은 내가 직접 하겠습니다.
0
[뭘 찾으세요?
향수 가게 여점원이 그에게 물었지만, 그레이브스는 아무 대답도 하
지 않았다. 여점원은 참을성 있게 그의 행동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오
늘만도 벌써 스무 번째 듣는 캐럴 {눈사람 프로스티}의 노랫가락이
그녀를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었는 데도 말이다.
그레이브스는 사무실에 가져다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 장식품
과 꼬마전구들이 들어 있는 쇼핑 백을 내려놓았다. 그는 비서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고 향수 가게에 들른 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진열대 위, 나무곽에 끼워져 있는 작은 유리병에
손을 뻗었다. '재스민 나이트'였다.
'이걸로 결정할까?' 하다가 그는 조금 더 골라 보기로 했다.
그는 '패출리 오일이라고 쓰여진 유리병을 집었다. 코르크 마개를
뽑고 코에 들이댔다.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
들이 질질 새어 나오는 하수도 파이프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았다.
패출리 냄새가 진동을 하던 그 침침하고 무너질 듯했던 방. 그는 고개
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패출리 냄새가 기분좋은 일을 생각나게도 했다.
그 풋내기. 턱수염을 기르고, 뿔테 안경에 다저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젊은 친구. 플라스키 형사가 에그즈 베네딕트라고 부르던 그자, 쏘아
올려진 나의 화살.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애틀랜틱 불르바르 낙태 시술 병원을 폭파
해 버린 후, 도무지 그의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 죽었을까? 아니면 손
에 다이너마이트를 쥐고 또 다른 병원에 몰래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패출리로 하시죠. 손님들께 제일 많이 권해 드리는 겁니다. 정말
은은하죠.
고는 계속 생각에 골몰하고
여점원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들으면서
있었다
'어쨌든 화살은 아직 공중에 떠 있어.'
그는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재스민 나이트로 주시오!
마개를 다시 끼운 패출리 오일병을 선반 위에 다시
가 말했다.
올려놓으면서 그
여점원이 포장을 하는 동안 그레이브스는 가게 안에 장식된 대형 지
왕이 사탕에 놀라워하면서 <고요한 밤}이 울려 퍼지고 있는 가게 안
을 둘러보았다.
잭과 빅토리아는 산타페 중앙 광장을 산책하고 있었다.드문드문 늘
어선 녹색 기등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경쾌한 리듬의 캐럴. 페리즈
나비다드>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좌판 상인들이 빼곡
히 들어앉은 지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은색. 청록색의 팔찌. 귀고리와
값싼 보석들,나바호 족의 담요와 온갖조화()들 그리고 프리토스
라는 작은 장식초가 있었다.
잭은 가운데에 반질반질한 붉은 돌이 박힌 은반지를 하나 발견하고
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순간 빅토리아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다시 인디언 장인()에게 건네주곤 발
길을 옮겼다.
얼마 후,그녀가 서점에서 사과 주스를 마시며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는 틈을 타서 살짝 잭은 빠져 나와. 좌판 시장으로 돌아가서는 그녀
를 위해 그 반지를 샀다. 그런 식의 여행이었다. 타오스에서는 스키 타
는 사람들도 지켜보고 눈이 군데군데 하얗게 덮여 있는 황무지에서는
산책도 했다 잭은 행여나 유산이 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을 냈지만.
빅토리아는 전혀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은 화랑가를
돌아다녔고. 인디언들의 호피춤도 지켜보았으며 마가리타를 마시다가
낮잠도 잤다. 그리곤 독서도 하고 영화관도 다녔고,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곤 뒷골목을 차로도 돌아다녔다
빅토리아는 의뢰인들에 대한 연민과 티투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
른 모든 성가신 일들에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 듯이 보였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잭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좋았다.
사실상, 그들 둘 다 너무나 편안했고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서 결혼식을 올려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더니 원래 계획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다. 1월 6일에. 그때
라야 친구들도 불러올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혼쾌히 그러자고 했고. 그
녀는 새삼스레 고마워했다. 그들은 새해 연휴까지 휴가를 연장했다.
금요일 아침 산타페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제노비아 데이비스의 아파트에 걸려 온 전화 송.
의 사무실이라는 사실을 전화국에서 밝혀냈습니다.
신 장소가 티투스
워싱턴의 벤 제이콤스였다
그는 잭의 휴가 동안, 일과가 되어 버린 전화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몇 시경이었다고 그러던가?
[저녁 8시 15분이었답니다.
[그날 밤의 방문객 서명 일지를 확인해 보았나?
[예.그 시간 즈음엔 아무도 방문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비원들은 어때?누군가 이상한 사람 들어오는 거 못 봤다던가?
[예.그리고 티투스는 퇴근 전이었답니다.
[올가미가 점점 조여 들고 있구만. 벤. 머지않아 그치가 매달리게
생겼는걸.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참, 토요일 아침 그레이브스의 시위에
대항할 시민 운동을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 사람들 모두에게 연
락을 취해 놓았습니다. 윈스턴 씨와 지구당 사무실에서도 계속 더 많
은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중이고요. 거기 꼭 참가하실 마음입니
까?
[물론이지.내 지역구 아닌가!
붉은 장미회}는 이번 시위를 잭의 선거구 네에 있는 동일 업종으
로 가장 규모가 큰 낙태 시술 병원인 ....(
' ) 앞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멧월, 병원 원장과 면담을 원하는 몰리를 데리고 방문한 적이 있
었던 바로 그 병원이었다.
[이보게 벤. 엘리가 내 구역에 나타나면 나도 반드시 나타나야 된
다는 거 잊엇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으론 이번엔 그냥 산타페에 머물
러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잭은 웃었다.
[걱정 말게. 벤. 설마 저번 같기야 하려구. 시위대 규모가 예상하고
있는 절반만 되도 그자가 날 어몇게 알아보겠나? 빅토리아파 나는 어
.
차피 토요일엔 올라가야 돼. 그날 밤 우린 결혼한다구, 기억해?
'참 의원님도. 하필이면 <붉은 장미회}시위 대회날 결혼식을 올
실 건 또 뭐 있습니까?
[하하. 염려 말게나. 까짓 그 정도 시위는 우리 결흔식에 비하면
사도 아니야. 하하.
피브 창 박사는 연구실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중문이 나
타났다. 그 문의 견고해 보이는 열쇠 구멍 속으로 날카로운 뎔피를 넣
고 돌리자 무겁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그 병의 겉면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레이챌에게 건네주었다.
데이챌은 그 병의 마개에 주삿바늘을 꽂고 20시시 () 정도를 조심
스럽게 주사기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끄는 병을 피브에게 돌려주고 난
후, 주사기에서 바늘을 돌려서 빼내곤 그 지리에 캡을 씌웠다. 그리곤
그 주사기를 횐 가운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추수 감사절 연휴 주말에 수술을 받은 뒤, 4주가 흐르는 동안 티두
스는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이헬은 아직도 지켜봐야 할 문
제점이 남아 있다며 그를 병원에 붙들어 놓고 있었다
물론 지난 며칠 간은 휴가{?}를 주긴 했었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그만 퇴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레이
챌이 병실에 들어갔을 때. 티투스는 안경을 킨 채로 무언가 서류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세요?
그녀는 받침목에 매달려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링거 봉지를 점검
며 가볍게 말을 건냈다. 그는 안경을 벗고서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대=
있었다.
그녀는 의사이고 자기는 환자라는 어떻게 보면 열등한 처지를 침=
을 이용해서 좀 만회해 보자는 그다운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좋소. 이제 곧 퇴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맥박을 꼈다.
[메슥거리는 건 좀 어때요?
[정오쯤 되면 대개 없어지곤 하오.
[통증은 있나요?
[없소.실밥을 뺀 후로는.
[뭐 다른 불편한 곳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때때로 창자 속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것 같기는 한데. 꿔 별거겠
소?
[어떤 느낌이신데요?
[배고플 때 그러는 것처럼,뭐랄까 꾸르륵거리기도 하고.
[맞아요. 배가 고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 거예요. 그나저나
식사는 좀 하시나요?
그는 우습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밥 잘 먹느냐고요? 하하! 없어서 못 먹고 있
소이다.
레이챌은 조용히 서서 차트에 몇 가지를 기록해 넣었다.
[아주 심한 복막염이셨어요. 대법원장님.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진 환
자는 많이 봤어도, 이쑤시개 때문베 그떻게 된 환자는 또 처음이에
요.
티투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것 때문에 주위에서 놀림깨나 받았소. 그런데 언제 그걸 삼켜 버
렸는지 기억이 나야 말이지. 나 원, 참. 그나저나 데이지와 페퍼에게
이젠 저쑤시개를 사용하지 말라 그래야겠소.
[그 사람들이 칵테일을 만들어 주죠?
티투스는 눈을 감았다.
[어이구! 시작일세. 또 한 차례 잔소리구만.
[또 한 차례라니요?그럼 처음 잔소리는 누가 하던가요?
그의 한 쪽 볼이 허물어졌다,
[레이챌 박사.내게 관해서 박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글쎄요.더 많은 걸 알긴 알아야 하겠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절반쯤 남은 체리 초콜릿 상자를 집어
들며 다시 계속했다.
[이건 꿔죠?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자세를 힘들여 바꾸고 나서 말했다.
[내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당슨을 계속 내 주치의로 놔두지 않을 텐
데.
[그래요. 만일 당신이 영리한 분이라면, 날 당신 병실 가까이 오지
도 못하게 할 거예요.
[왜,내가 마시는 물에 독약이라도 풀 거란 말이오?
레이챌은 체리 초콜릿 상자를 내려놓고 나서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
다
[애브너,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다면 '코스텔로'
사건에 참여하기 전에 했지 왜 이제서야 하겠어요? 그 사건에 관여하
실 수 있도록 잠시 퇴원도 시켜 드렸다는 걸 잊으신 모양이네요. 내가
진심으로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판시닙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
이란 말이에요.
[오호, 그래요? 그렇담 한번 그렇게 해보시구려. 안 그래도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몇 있던데 말이오.
[대법원에야 없겠죠.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판사님은 언제나 원하
기만 하면 다섯 표는 얻을 수 있다고 그러던데요?
[투표라는 것은 결코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라오.
'코스텔로'사건에서도요?
티투스는 우습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봐요, 박사. 낚시를 하려거든 미끼나 제대로 끼우고 하시오. 그
렇게 서툴러서야 뭘 알아낼 수 있겠소? 현재 계류중인 사건에 대해서
는 발설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자. 그나저나 언제쯤이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겠소?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인데 말이오.
[별문제만 발견되지 않으면 내일 나가실 수 있어요. 그러나 2주에
한 번씩 검진받으러 오시는 것하고 한 달에 하룻방은 병원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영양사와 면담
이 있을 겁니다.
[내 박사께 단단히 일러두겠는데. 내게서 마티니를 마시는 즐거움
을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거요.
[애브너 !
어린애처럼 보채지 말라는 투로 레이챌이 쏘아보았다.
[초콜릿도?
[그것도 안 돼요. 그리고 절대 금연이에요.
그는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사람들이 엄마처럼 굴려고 들 때가 제일 싫소.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고 나서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읽기 시작했
다.
레이챌은 링거 뻐팀목으로 다가가서 튜브를 만지작거렸다.
두 눈은 티투스에게 고정시킨 채였다.
그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재빨리 가운 주머
니에서 주사기를 꺼낸 후 캡을 열곤 티투스의 팔에 연결된, 링거 봉지
의 포트에 찔러넣곤 그 내용물을 주입했다
그녀가 엄지로 피스톤을 밀어내고 있을 때, 그의 머리가 그녁를 향
했다.
[레이챌 박사!
[네?
티투스는 고개를 들다 말고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때 수술하지 않았다면 난 살지 못했을 거라고들 하더군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그의 침대 가로 다가갔다.
[이곳에서는 저 아니고도 훌륭한 외과의사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
중 어느 누구라도 당신을 구할 수 있었을 거예요. 미국의 데법원장을
수술중에 죽게 했다는 불명예는 의사의 이력서에 적을 단대 내용이 못
되니까요.
그는 서류를 뒤적거리느라고,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채 말했다,
[어쨌든, 난 당신에게 제데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적이 없는 것 같
서 좀 미안하오.
[그러실 것 없어요. 나중에 우리 둘 중 누가 생명과 법률에 더 많은
기여를 했는가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거예요.
뜨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이어야 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순간, 잭
은 의식 속에서 위험을 예고하는 신호들을 느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응시한 채.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죄어 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였다. 빅토
리아는 모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가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창가로 걸어간 그는 창문을 조금 열고서 그 틈새로 상체를 내밀었
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에 맞부딪쳐 왔다. 그는 콧구
멍을 한껏 부풀리곤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24시간 피자점의 음식 냄
새, 자동차들의 매연. 뉴욕의 전형적인 아침 공기였다. 그러나 그 속에
서도 희미하나마 태양 빛을 받은 산소가 발산해 내는 오존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 오존! 이 도시의 다른 모든 냄새들을 어둠과 절망이라고 한다
면 이 오존의 냄새는 희망일 것이다.'
오늘. 이 회색빛 도시의 먼 하늘에서는 불똥이 하나 날아오르고 있
는 것만 같았다.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러나 움직이고 있었
다. 바로 그를 향해서. 그는 희미하지만 분명히 닥쳐오는 그 위험을 감
'
지하고 있었다
'조심해라. 잭! 오늘 고게 당할지도 몰라.'
택시는 그랜드 센트럴 역() 뒤편의 코너를 돌아 파크 애비뉴에서
멈춰 섰다. 이미 그 대로()엔 자동차들이 빽빽히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건물 앞 광장은 이미 인파로 넘쳐서 시위 군중들은 길거리카
지 점거하고 있었다. 단순한 시위의 정도를 넘어선 흥분의 도가니였
다.
도시의 회색및 시멘트 벽에 부덫혀 높아만 가는 목소리들 구호를
외쳐대며 혼드는 손장단에 맞추어 위아래로 춤을 추는 피켓의 물결들,
그 사이사이를 경찰마( .똑)들이 꼬리를 흔들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그 아수라장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단순한 구
경꾼이라기보다는 시위 참가자들로 보였다.
잭이 택시 요금을 지불할 동안 빅토리아는 택시에서 쥐어내려 시위
군중들의 무리 쪽으로 잔걸음으로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차례의 소동이 지나간 뒤였다
다섯 명의 낙태 반대 시위자들이 .줴.. 낙태 시술 병원이 입주해
있는 그 건물의 정문에 쇠사슬로 자신들의 몸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그들을 간신히 떼어놓고 난 후. 시위대 간의 충돌을 막기 위
해, 즈자 모양의 바리케이드를 건물 정문 앞까지 두 줄로 설치해 놓고
는 낙태 찬, 반 시위대, 각각을 그 양편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부터 건물 입구까지 일직선의 비무장 지대가
형성티어 있는 셈이었다.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낙태 반대 시위대들
은 건물 왼편에 목재 강단을 설치해 놓았다 엘리 그데이브스는 그 위
에서 그의 연설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초조하면서도 결연한
빛을 띤 그의 눈길이 군중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의 양 옆으로는
게이로드 목사와 존 트레이시 주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족히 000=
은 됨직한 시위 군중들이 그들 앞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손=
피켓을 들고 옷깃에는 붉은 장미를 꽂은 채, 스피커를 통해서 '웅응
울려 나오는 스틱스 딕키 상원의원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 도 대 코스텔로'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 아직 태어나지
않은 깨끗한 영흔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느냐 없노냐 햐는 문제가
걸린 중대한 사건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간절한 당부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그 여리디 여린 영흔들을 위하여 하느님케 올리는 기도의
말씀 속에 미합중국 대법원에서 그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달라는 기원
도 함께 넣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하느님께 기원합시다!
대려관들 모두에게 이 나라의 헌법은 주님의 법에 기초하여 이루어졌
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역사를 베푸소서! 그리고 저 반대편의 죄 모르
는 인간들의 불쌍한 영혼에게도,
잭은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정치가라 할지라도 인간이 저렇게 뻔뻔
스러울 수가, 그자는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강이었다. 그와 빅
토리아는 '비무장 지대'를 건너서 낙태 찬성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셀
리 페더스가 있는 곳까지 군중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상대적으로 소수
인 그들은 셀리가 메가폰의 스위치를 올리고 구호를 선창하기를 조용
히 기다리고 있었다. 잭의 오른편에는 윈스턴 존스가 바리케이드에 기
댄 채 서 있었고 왼편으로는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그리고 그 옆에는
이기 핏트가.그리고 그 옆에는 몰리 맥코믹이......
그녀의 모습을 이런 장소에서 본다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데도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카메라맨에게 뭔가를 말하
려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다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잭을 발견했다.
그는 소리없이 ' 안녕?'하며 입 모양을 지어 보이고선 그녀를 응시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녁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역시 입 모양으
섭힙
로만 '안녕?' 하고 답해 왔다. 헤어진 이래 처음으로 주고받는 대화였
다.
바리케이드 건너편에서는 스틱스 딕키의 연설을 이어받은 그레이브
스가 이미 마이크 앞에 나와 서 있었다.
. .....바로 그것이 다음 주에. 상원이 애브너 티투스 판사를 미합중
국 대법원장으로 인준해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입니다.
연단 앞에 있는 시위대 속에서는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금. 태아 살인자들이 우리의 새 대벙원장을 왜 반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저들은 그분이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그 이
유 하나 때문에 그를 대법원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입니다. 헌법
이 태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그분의 믿음이 저들은 미운 것입니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짚어엎어 버림으로써 태아 살인을 종식시키
겠다는 그분의 신념이 저들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정의는
승리하는 법, 마침내 온 미국이 그분을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어떻게 했지요?
시위대 중 한 사람이 입 앞에 양손을 모으고 외쳤다,
[거짓말했어요!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떤 불쌍한 여자와 그 아기의 죽
음에 그분이. 그토록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의 애브너 티투스가 연관되
어 있다고 거짓 음모를 꾸였습니다.
그 앞에 모인 군중들이 일제히 '말도 안 돼'라고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우리에겐 이 더러운 올가미가 새빨
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밝혀 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 거짓말의 출처를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의 청증들이 미친 듯이 갈채를 보냈다
[와-.와-.
[네. 그렇습니다. 잭 매클라우드 하원의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정치 행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확신이 안 서신다면 그의 구역
질 나는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잭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다시 저 자식의 입에서 예전. 자기 사무실 앞 길거리에서 떠들어댔던
그 터무니없는 비방이 또 한 번 되풀이되어 나오겠거니 생각하고 있었
다.
그레이브스는 계속 외쳐대고 있었다.
[지금 몇몇 의원들은 그자의 새빨간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
고 대법원장의 인준에 관하여 어떤 표를 던질까 고심하고 있겠습니다
만, 매클라우드란 작자의 정체를 알고 나면 그자를 믿었던 것을 곧 후
회하고 말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자는 고등학교 시절
여자 친구를 꾀어 육체를 범하고, 임신을 시킨 뒤 그것도 모자라 그 뱃
속의 어린것을 죽이라고 종용한 악랄한 강간자입니다!
잭의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졌다. 빅토리아가 손을 내밀어 부드럽
게 그의 팔을 잡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감사하나이다! 디행히도 그의 잔악한 시도는 실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레이브스는 녹색 노트와 사진이 끼워진 바인더를 활짝 펼쳐 들며
말을 이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달갑지 않게도 적
어도 그의 딸만은 무사히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의,그의 뭐?'
잭의 주먹이 스르르 벌어지며 뒤이어 입도 멍청히 벌어졌다.
[그렇습니다. 딸이 태어났고 그 딸은 애비한테 버림받은 채 25년
싶
동안을 고아로 살야왔습니다.
잭은 바로 귀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딸을 찾아냈고, 자신의 딸을 찾아낸 뒤.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사방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그레이브스는 득의 양양한 미
소를 띠었다.
[여러분들을 탓할 순 없죠. 상상하기도 힘든 그 일을 어떻게 입 밖
에 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바인더 속의 노트 한 페이지를 더 넘겨 혼자서 소리없이 읽어
내려갔다, 물론 최대의 효과를 노린 연기였다. 군중들과 잭은 그의 입
에서 떨어질 다음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말로 못할 추악한 일이지만 저는 제 입을 더럽혀 가면서도 진
실을 밝혀야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자의 간악한 올가미
에 걸린 티투스 대법원장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 자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트를 한 페이지 넘기고 나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자와 그자의 딸, 올. 리. 맥. 코. 믹과의 관계에 얽힌 진실을
말입니다.
잭은 몰리를 쳐다보았다
몰리는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그레이브스를 쳐다보고 있다가,
잭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양순이 벌어진 입을 막았다.
[그자가 훌륭한 아버지였냐고요?
잭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케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그떻지 않습니다.그자가 자신의 친딸에게 한 짓은.
그는 또 말을 끊고, 고개를 아래로 푹 꺾고는, 그 상태대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어떻게 말해야 옳겠습니까? 그냥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겠죠?
잭은 바리케이드 하나를 뛰어넘고, '비무장 지대'를 가로질러, 그
이브스와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푸른 선을 향해 달려=
다. 경관 한 사람이 그의 뒤를 쫓아갔지만, 잭은 '비무장 지대' 저편=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낙태 반대 군중들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0
기 핏트는 잠시 몸을 떨며 서 있다가,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역시 그
이브스를 향해 달렸다. 윈스턴도 바리케이드를 훌썩 뛰어넘고는 그=
뒤를 쫓아갔다. 고깨를 저으면서 가만히 서 있던 몰리도 바리케이=
아래를 통과해서는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그레이브스는 자기를 향;
오고 있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 채. 노트에서 눈을 들고 다시 군중=
을 굽어보며 외쳤다.
[그는 바로 근친상간이라는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잭은 피켓을 들고 있는 시위자들을 밀어 제치고 연단을 향해 계=
헤엄치듯 나아가고 있었다. 낙태 찬성 시위자들 몇 명이 '비무장 지대
를 건너 그를 따라갔다.
[그 정도로는 부족했는지,그는 그녀를 임신시켰습니다.
그레이브스가 목청을 한층 더 높이며 외쳤다. 연단 앞으로 갈수=
군중들의 밀도는 조밀해졌다. 그만큼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기가 힘들
었지만, 잭은 계속 허우적대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 정도로도 죄가 모자라서, 그는 강제로 아기를 낙태시켰습니다
바로 여기서요!
그레이브스는 몸을 반쯤 돌려, 그의
가리키며 외쳤다.
뒤에 있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바로 이곳, .... 낙태 시술 병원에서 말입니다!
그는 바인더를 덮고는 마치. 그것이 십계명이라도 되는 듯이 높이
들어올렸다.
[지금 제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상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증언해 줄 목격
자도 있습니다,
드디어 잭은 맨 앞줄의 시위 대열을 뚫고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레이브스는 그제서야 그를 보았다. 그는 바인더를 떨어뜨리고 마이
크에서 물러서다가 주교의 발에 걸려 그만 넘어졌다. 잭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슨을 뻗어 그의 목을 잡았다. 경관 한 사람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왔고. 잭을 쫓아왔던 낙태 지지자들이 쫓아 올라가서 그들과
맞서 싸웠다. 연단 위는 한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누가 누구고,
둬가 뭔지 모르는 채로, 사람들은 서로 치고 받고 할퀴며 나등그러졌
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잭은 그레이브스만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레이
브스는 목을 죄고 있는 잭의 손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자기도 잭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된
채, 단상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구르고 있었다. 잭은 숨이 막혀 왔다.
허파가 다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의식이 가물거리며 꺼져 가려고 힐
때 목을 쥐고 있던 그레이브스의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그도 지친 것
이다. 잭은 신선한 공기를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그레이브스의 목을
더욱 조여 갔다.
이제 주위의 모든 일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지금 눈앞에 있는 이악
당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레이브스의 몸에샤 힘이 빠져 나
가고 있었다.이제 조금만......
그 순간 '태아의 목숨을 구하자'라고 적힌 피켓을 든 한 사내가 피켓
자루를 수직으로 세워서는 곧장 잭의 얼굴을 향해 쩍어 버렸다,
[아악!
잭은 그레이브스의 목을 죄고 있던 손을 풀고 양손바닥으로 얼굴.
감쌌다. 그는 무릎과 팔꿈치를 오그려서 온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
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왔다 왼쪽 눈에서 끈끈하고 뜨듯한 액체가 깨;
달걀의 횐자처럼 질질 흘러 나왔다.
윈스턴은 연단 위로 뛰어 올라와서 피껫을 든 그 사내를 향해 돌;
했다 그는 한쪽 어깨로 그자의 윗배를 떠메어서 단상 아래의 시멘]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서지는 소
가 났다. 단상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은 악을 써대면서 계
둬섞여 싸웠다. 그러나 잭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헐떡
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태아처럼 몸을 응크리고, 양손뜨
얼굴을 감싼 채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이 아'
끝나지 않았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이제 곧 누군가가 내 손을 뜯어 내고,오른쪽 눈에 빨갛게 달구어
부젓가락을 찔러 넣을 것이다.'
'왼쪽 눈은 벌써 틀렸어. 오른쪽을 보호해!'
그는 몸을 더욱더 동그랗게 말았다.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손등
와 닿았다. 그는 번갯불을 맞은 듯한, 경악 속에서 양손을 얼굴에, =
히 오른쪽 눈에 꼭 밀착시켰다. 그 순간, 그 손의 주인인 듯한 목소=
가들렸다
[오! 하느님, 누구 좀 도와주세요!
몰리였다. 그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내던져서 그의 동그
게 말린 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그의 목 아래로 개울을 이루며 흘러
리는 핏물에 볼을 대고는 입을 그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단상의 난투극은 거의 끝나 있었다. 많은 경찰관들이 단상 =
포 올라와서 양 패거리들을 따로 떼어놓았다. 그레이브스는 한 쪽 무
릎을 끓은 채, 목을 잡고 랙책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스틱스
딕키, 트레이시 주교. 게이로드 목사의 모습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
지 않았다. 빅토리아와 이기가 잭 곁으로 다가와서 무릎을 끓고 앉았
다.
빅토리아가 어떤 경관에게 소리를 쳤다.
[의사를!
[안으로 데리고 갑시다.
경관이 건물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관과 이기는 잭의 상체를 받쳐들고, 몰리와 빅토리아는 그의 다리
를 한 짝씩 들고는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곧이어 윈스턴이 쫓아와서
몰리와 빅토리아를 대신해 그의 양다리를 들었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경관이 정문을 열어 그들을 들여보내고 나서는, 다시 잠갔다. 마침 엘
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의사가 황급히 달려와서 그를 바닥에 내려놓으
라고 지시했다.
[자, 해치지 않을게요. 안심하세코.
의사가 그의 옆에 무릎을 헤고 앉아서 말했다. 그리고서
로부터 손을 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잭의 얼굴
[자,난 의사예요. 어디 좀 봅시다.
하지만 잭은 얼굴을 감싼 손을 한사코 풀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가
그 시도를 포기하고는 말했다.
[진료실로 옮깁시다.
그들은 잭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다 눕혔다
빅토리아는 급히 6층 버튼을 눌러댔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
렸다. 간호사 한 사람이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사실, 그 간호사와 의
사는 낙태 반대 시위대에 대한 일종의 항거로써 병원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지 사실상 환자를 맞을 준비는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문을 열고 난 간호사는 횔 체어를 잭의 몸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 한 무리의 사람들은 환자 대기실을 가로질러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불을 켜고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
[환자를 진찰대 위에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덩치 큰 양반 당신 도
움이 필요해요. 이 사람의 손부터 떼놓고 봅시다. 간호사! 안정제 5시
시 투여하고. 자, 다른 분들은 모두 나가 계세요.
이기가 맨 앞에, 그리고 그 다음에 몰리가 나왔다. 그녀는 잠시 문
앞에 멈춰 서서 빅토리아가 머리를 잭의 귓전에 갖다 대고 뭔가를 속
삭이는 것을 보았다. 이기는 꽤 흥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기실을
이리저리 서성대며 재킷 지퍼 끝에 1 쭉 나온 금속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진정시켜 보려고 그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그는 진저리를 치며 피해 버렸다.
[괜찮을 거예요.
그의 지나친 반응에 놀라면서도 몰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기
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진료실로 통하는 복도의 문이 열리며 빅토리아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핸드백을 뒤져서 담배 한 개
비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인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몸을 의자 뒤
로 젖혔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엘리 그레이브스를 부
축한 경관이 걸어나왔다.
[난 괜찮소!
그레이브스는 비틀거리면서 거칠게 말했다. 경관은 그를 빅토리아
맞은편 의자로 데려가서 앉혔다. 그레이브스는 연신 앞 목을 주물러
대고 있었다.
. ,뱁
[의사에게 이 사람 좀 봐달라고 해주십시오. 그리고 어쩌면 한 두
사람 더 데려올지 모르니 준비 좀 해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경관은 빅토리아에게 그렇게 당부하고 병원을 나가 버렸다.
몰리는 그레이브스의 모습을 보자 온몸의 피가 끓어올라 도무지 그
와 한 방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빅토리아와 이기 그리고 엘리
그레이브스를 대기실에 남겨둔 채 진료실로 이어지는 문을 밀고 들어
가 버렸다.
빅토리아는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였다가,천장을 향해 내뿜
었다. 담배를 부벼1려고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눈에 가만히 앉아서
계속 목을 주물러대고 있는 그레이브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기는 계
속해서 대기실 안을 빙빙 돌면서 서성대고 있었다.
좀 이상했다. 대기실 벽에 빙 둘러 비치해 놓은 의자를 툭툭 차면서
재킷의 지퍼를 윗배 어림까지 내렸다 올렸다 하는 동작을 계속 해댔
다. 입술을 연신 들썩거리는 것이 뭔가 혼자 쉴세없이 지컬여대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레이브스는 이기가 처음 자기 앞을 지나칠 때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두 번째로 이기가 자기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의 몸이 움찔하더니 굳어 버린 듯, 잠시 그대로 멈춰 섰다. 바람에 실
려 오고 있는 코에 익은 그 냄새와 이기의 열려진 재킷 사이로 살짝 내
비친 검은 물체를 본 것이었다. 그레이브스의 눈이 커지면서 입이 벌
어졌다. 추락 직전의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의 표정이 아마 그럴 것
이다. 다음 순간 그는 의자에서 횡기듯 튀어 올라, 이기의 등뒤로 덤벼
들었다. 한 팔은 그의 가슴에 감고, 다른 팔로는 목을 조였다. 이기의
양발이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채 버등댔다. 눈이 뤼어나올 듯 부풀어오
삘 르면서 혀를 빼물곤 손톱으로 그레이브스의 팔을 마구 할퀴었다.
[왜 그러는 거야! 미쳤어?
빅토리아가 그레이브스를 향해 다가가면서 외쳤다. 그레이브스는
벽 쪽으로 이기를 밀어붙이면서 헐떡거렸다
[바로. 바로 네놈이었어.
그는 가슴을 감고 있던 손을 풀어서 이기의 재킷 속으로 밀어 넣고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더듬어댔다. 그때, 이기가 벽을 발판삼아, 두 발
로 밀어냈다. 한데 엉킨 그들의 몸이 빅토리아 쪽으로 주르르 밀려왔
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레이브스의 목을 양팔로 휘감았다. 어디에서
솟아오르는지 자신도 놀랄 만큼 엄청난 힘으로 _그의 목을 조여대며 외
쳤다
[놓아줘!
그녀로서는 그레이브스가 이기로부터 무엇을 빼앗으려고 하는지 전
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악한이 겁에 질린 어런 아이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갤 놓아주란 말이야!
그래도 그레이브스는 이기를 놓지 않았다. 아니. 놓아줄 수가 없었
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놈이 얼마나 끔찍한 악당인지, 그의 재킷 속에
감춰진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 모......두 죽......야!
[뭐라고?
[우......릴모 .... 주...죽...일 거...... 말......야!
그러나 가뜩이나 흥분하고 있는 빅토리아의 귀에 그 분명치 않은 소
리가 제대로 들려 을 리 만무했다.
그는 숨통이 조여서 제대로 발음을 할 수 없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악을 써댔다.
[패...추울...리 오...일 ! 패출리 ! 다이너마.......
그 소리를 혹시 빅토리아가 제대로 알아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
무런 의미도 전해 주지 못했다. 그?는 이미 진하게 풍겨 나오는 패출
리 오일의 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놔!
그레이브스가 침을 튀기며 외쳤다.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신 먼저 놔!
그녀는 그레이브스의 목을 쥔 채로 문쪽을 향해 밀어붙이기 시작했
다. 마치 저질 코미디의 3인 쇼처럼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된 채, 허우적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문에 다다르게 되었을 즈음, 빅토리
아는 그레이브스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트
는 그의 목을 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침내 그가 이기를 풀어 주었다. 이기는 깩책거리면서 바닥에 너부
러졌다. 빅토리아는 남은 힘을 다쩌, 그레이브스를 문 밖으로 밀어네
고선 문을 꽝 닫고.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유리창을 동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책렉거리면서 기다시피 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기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끓은 채, 목을 주무르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탈진
했다. 손끝까지 파르르 떨려 왔다. 그녀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다리는 앞으로 뻗고 뒤로 기울인 상체를 양괄로 버틴 자세
였다.
숨은 계속 턱까지 치받혀 오고,머릿속은 온통 흔란의 도가니였다
잠시 후. 이기가 몸을 질질 끌며 그녀 앞으로 다가와서 그녀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앉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이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재킷의 지퍼가 열려져 있었다.
[당신.......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재킷 안에 드러난 그의 가슴께에는 조
비슷한 것이 끈으로 매어져 있었다. 옷도 아닌 이상한 천 쪼가리 =러
는 30센티미터 길이의 황갈색 막대 같은 것이 수직으로 촘촘히 끼
넣어져 있었다.그리고 그 막대 꼭대기에 이어진 녹색과 빨간색 전
들은 이기의 바지 벨트에 매달려 있는 이상하게 생긴 전자 장치에 젼
결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이기가 머리를 쳐들고 그
녀의 눈을 응시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이었다.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
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게 꿔예요?
그녀는 짐짓 모르는 채. 시침을 떼고 물었다.
""".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당신,누구지?
마치 그런 질문을 들은 젓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 당혹해하는 표정
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럴만도 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둔 대답, 이제는 그 자신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가 두려운 이름이
었다. 그는 또 거짓말을 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물으십니까?사람들은 나를 이기라고 부르죠.
간흑 에그즈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구요.
[에그즈?
그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당흑한 표정에 잠시 즐거운 듯했다.
[그럼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그녀는 나직이 물어 봤다.
[어떻게도 부르지 마세요.
그녀는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말을 계속하라는 무언의 종용이었
다.
[난 존재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떻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존재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요.
그녀는 간절히 타일렀다.
그는 '시답지 않은 소리'라고 넘겨 버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머리는 재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계속 말을 시켜야 돼 ! 누군가가 올 때까지 계속!'
[정달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래요.당신은 정말 누구죠?
[선교사!
[선교사? 무슨 선교사예요?
빅토리아는 될 수 있는 한 그가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
기를 바라며 짐짓 관심이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실망스럽
게도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냥 흔자서 일하는 선교삽니다.
이기는 그녀가 이해했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시침을 떼고 아
무것도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그가 그 자신과
그녀를 건물 밖으로 날려 버리기에 층분한 폭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색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녀는 자신에게 내심 다
짐했다.
[설명 좀 해봐요.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낄낄거렸다.
[오늘 나 멋지게 해냈죠?안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녁는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는 웃음을 실실 흘리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들, 그레이브스와 매클라우드.그 두 사람이 내 속임수에 넘어간
것 말이에요. 허헛 ! 둘 다 꼭두각시처럼.
빅토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는 머리를
효으로 내밀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짓누르며 카팻의 더럽게 얼룩진 부분을 가만가만 쥐어뜯었다
그가 입을 떼었다.
[이제 의원 나리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뭘 하려고요?
[그에게 전해 줄 메시지가 있어요.
[어떤 건데요?
[개인적인 겁니다.
[나한테 애기하세요. 그럼 네가 나중에 그에게 전해 줄게요.
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메시지를 받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이 되는가를 라야 합니다.
그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려 했다. 그녀는 상체를 내밀면서
말했다.
[우린 오늘 결혼해요.
그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결혼이라구요?왜요?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끗했다.
[우린 저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못 믿겠다는 듯이 양 입술 언저리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래요? 틀렸어요. 흑 당신은 그자를 사랑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잔 아니에요.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란 말예요.
이기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말려
야만 했다.
넙
써
[난 임신했어__ !
그가 다시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애 아버집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엿다
[좋습니다.그렇다면 같이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죠.
그가 진료실로 통하는 문 쪽을 향해 몸을 세우려는 순간, 그녀는 그
의 등뒤로 덮쳐서 그를 자빠뜨렸다. 이기는 일어서서 그녀를 떨어냈지
만, 그녀는 악착같이 그의 재킷을 부여잡고 늘어져서는 그를 그녀 위
로 당겨 쓰러뜨렸다. 그는 버둥거리면서 진료실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
했다. 그녀는 그의 둥으로 훌쩍 올라타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기
며 악을 썼다.
[그만둬! 그만두란 말이야!
그는 일어서서 그녀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
져 있었다.
-디디딩.
그때 그녀의 귀에 엘리베이터가 멎는 소리가 들려 왔다. 드디어 누
군가 오고 있었다. 이기 또한 그 소리를 듣고는 멈칫했다.
잠시 후, 그는 빅토리아의 손에 잡힌 채로 그만 축 늘어져 버렸다,
저항이 사라지자 그녀는 그를 안은 채로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둘 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마나 그떻게 있었을까? 무엇인가 타
는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눈이 부릅떠졌다. 그녁는 그를 밀어내어 똑바로 눕혔다. 그리곤 잽
싸게 그 위에 타고 앉아 그의 양손을 가슴에서부터 잡아떼어서는 팔목
을 머리 위의 바닥에 대고 눌렀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그의 몸이 그녀의 동작에 맞추어 순순히 움직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
나 그의 오른손을 보고 나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손가락에
는 금속 고리가 하나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화약 뇌관의 안전핀이.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저 두 개의 구멍이었다.=
혼이 이미 떠나가 버린 사람의 눈. 전선을 따라 타들어가는 불꽃의
기에 질식할 것만 같으면서도 그녀의 두뇌는 빛의 속도로 회전하고 =
었다.
이 상황에 정확히 어울릴 만한 단어,그녀의 쓰라린 기억 저편에
혀져 있던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폭약이 폭발하기 직전 그
는 그 단어를 찾아냈다
폭발은 건물을 휘청이게 하면서 뉴욕이라는 협곡을 이루고 있는 초
고층 빌딩 사이로 우레와 같은 폭음을 퍼뜨렸다.
시멘트 덩어리들이 우르르 거리로 떨어져 내리고, 그것들은 다시 질
게 부서지며 다시 튀어 올탔다. 마침내 진동과 소음이 가시고 나자 벽
돌과 널빤지 조각 그리고 사람의 살점이 피에 뒤섞이어 붉으스레한 먼
지 조각들이 자욱하게 빌딩 주변에서 피어 올랐다. 마치 중서부 시골
마을의 외딴 농장에 이는 한 여름의 흙먼지 같았다.
사이렌 소리가 귀청을 울리면서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들이 사방에
서 모여들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구경꾼들은 혼란과 파괴가 보여 주
는 처절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조용히 서서, 어떤 이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또 어떤 이
들은 낮은 목소리로 자기들이 보고 있는 장면의 뒷 그림을 그려 가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어떤 남자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구경꾼들을 헤치며 나
오다가 역시 빠져 나가려 하던 스웨터를 입은 다른 남자와 우연히 부
딪혔다. 두 사람은 함께 현장에서부터 멀어져 가면서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주일을 앞두고 저따위 일을 저질러야 되겠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세상이 험해서 원.......
그
십
상원 의장석에 앉아 있던 미합중국 부통령이 최종 개표 결과를 낭독
했다.
[인준 찬성 6꼬머, 반대 팠표! 애브너 야스퍼 티투스 판사가 미합중
국 제17대 대법원장으로 인준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때. 갑자기 방청석에 있던 붉은 머리띠를 두른
한 여인이 고함을
질렀다.
[낙태의 자유를 보장하라!
두 명의 국회 공안원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부통령은 의사봉을 집
어 들고 탁자에 놓인 커다란 나무판을 내리켰다. 그 소리가 의사당 안
에 울려 퍼졌다.
애브너 티투스는 그의 집무실에서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흡족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대통령 각하! 각하의 신임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가 통화를 끝내자 책상 주위에 몰려 있던 비서진들이 박수 갈채를
터뜨렸다. 페퍼 루미스는 활짝 웃으면서, 체리 초콜릿을 뜯어서 티투
스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자꾸만 벌어
지려는 입을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28= 스태리 구터저
직무실 옆에 딸린 서재에 앉아서 대통령은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고
비서실장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지금 막 티투스와 통화를 끝냈소. 언론에서 물어 오면 그냥 의례적
인 축하 전화였다고 하고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네. 각하.
대통령은 전화기를 꽝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병원 폭파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잇는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을 주었다.
'대체 저 미친 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나는 또 이게 뭐
람. 그 미친놈들의 우두머리를 대려원장으로 임명하다니. 괘썹한 바바
라! 이제 네 몫을 얻었으니 만족스럽냐?네 소원대로 저 160킬로그램
짜리 돼지를 대법원장에 임명했으니. 이제 협박은 끝났겠지? 너는 언
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 빌어먹을 딕키 놈을 나에게 보내겠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가져 가지는 못해. 나쁜 것 같으니라구! 대롱령의
군기록 절도. 좋다. 언젠가는 이 빚을 갚아 주고야 말리라.'
그는 다시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낙태 시술 병원에 대한 테러를 지탄하는 강건한 대 국민 성명서를
발표해야겠소.
[이미 초안을 작성중입니다. 각하.
[좋소.그리고 영부인에게 장미 스물네 송이를 보내 주구려.
[카드에는 뭐라고 적을까요?
[음.음 -.그냥 내가 보내더라고만 하시오.
[어떤 색이 좋으시겠습니까?
[아무 색으로나. 단, 붉은색은 안 돼!
가
갸기
나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레이브스는 ]. 리만 폭파회사의 =
꺼진 인사과 사무실에 선 채로 도둑처럼 땀을 흘리며, 손전등의 불흑
을 의지해 서류함 속에서 '' 자열의 서류들을 파헤집고 있었다.
그는 폭파 사건 이후로 자신이 그 녹색 노트 주인인 베네딕트에=
능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로 쏜 화살'이 자신에게 떨어진 =
이다.
바니섹, 바니스터, 벤튼. 보트닉......
베네딕트는 없었다. 이기 핏트도 없었고, 아무개 핏. 이그나티우스
아무개, 에그즈 어쩌구도 없었다. 빌어먹을. 그는 손전등을 꺼버렸다.
우라질.......
녹색 노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경찰이 찾아내기 전에 베네딕트의
자신은 죽은목숨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랍을 두드리
며 잠시 서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그레이브스는 이미 한 시간째, 에그즈 베네딕트의 거처에 대한 바늘
끝만한 단서라도 찾아내기 위해 인사기록 카드들을 뒤져대고 있는 중
이었다.
입사 지원서, 한 조각의 메모, 그 어느 것이라도 나오길 바랐다. 그
러나 지금까지는 헛수고였다.
'침착해야 한다.그놈이 어떤 가명을 사용했을지 생라해 보자.'
그는 다시 손전등을 켜고, ''자 서류철들을 재검토해 보았다.에그
즈하고 비슷한 이름, 이를테면. 에그버트라든지 에글레스톤 아니면
에그먼트 따위를 찾아보았으나 그러한 이름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서랍문을 소리 나게 단아 버렸다. 그러고 나선 그 소리에 토끼
새끼처럼 화들짝 놀랐다. 혹시 누가 그 소리를 듣지나 않았나 해서였
다. 그는 잠시 숨을 죽이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들려 오는 것이라곤
늘 그렇듯 밤의 소음뿐이었다, 거리를 지나는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에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그 정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갈 수는 없
었다.
'생각해 보자.놈의 생각대로 한번 되씹어 보자.'
그러나 그것도 문제였다. 그는 베네딕트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는 일부러 정체를 파악하지 않은 채로 놈을 하늘로 쏘아
올렸던 것이다. 이름이나 경력도 몰랐다. 혹시라도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가 될까 봐서 그랬던 것이 이제는 도리어 화근이 되고 있
었다.
그는 목덜미를 세게 문질러대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생각해 보자. 반드시 놈과 연결시켜 줄 단서가 있을 것이다.'
그는 베네딕트와 처음 만났던 때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폭파 기술자로 놈을 리만 회사에 추천하던 그날, 그 기억은 별다른
도움이 될 게 없었다. 그는 그 이전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경찰에게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던 시위대들의 변호사와 만났던 그날.
'그 변호사 이름이 뭐였더라?'
그날 자신아 수표 한 장을 끊어서 그자들을 보석시켰었다
닌 아놀드 제임스, 그래, 그자다!'
어쩌면 그자는 베네딕트의 실명()과 주소지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알고 있어야만 했다. 베네딕트가 그의 의뢰인이었으니까.=
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베네딕트가 수감됐던 이유가 바로 자기의 실=
을 밝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아니지. 경찰에게=
몰라도 자기 변호사에게는 이름을 밝혔을 거야. 맞아.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할 수 =
을 것인가?
변호사 사무실에도 또 몰래 숨어 들어가야 된단 말인가?그는 서=
함에 등을 기대고 이제는 자신의 목을 동아줄에 스스로 매감게 된
수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베네딕트를 보석시킨 일. 그에게 3
업을 알선한 일.그자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폭파 현장에 파견=
도록 주선한 일. 사실 그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범죄의 냄새?'
나지 않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 녹상
노트 뭉치만 없다면. 그와 베네딕트가 함께 음모를 꾸였다는 것을
증해 줄 그 녹색 노트 몽치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한다면 말이다
시위 집회를 열던 날. 카메라 앞에서 그 녹색 노트를 꺼내 들고 휘두
르지만 않았어도....... 그걸 증거랍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정통한 정보
원을 통하여 입수한 것이라 외쳐댔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그와 베네딕트가 파트너라고 생각할 것이다.
영리한 궁수, 엘리 그레이브스! 가장 적합한 화살을 골라 위로 쏘아
올리고 전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망
할 놈의 화살에 의해 줄곧 이용만 당해 왔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탄
식이 새어 나왔다.
'오! 마리아시여 !'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정신차려야 한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자구. 차근차근 일
을 풀어 나가야 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그려 보았다
작은 취조실에서 형사에게 이야기를 한다. 음모를 부인한다. 녹색
편지를 보냈던 자가 바로 에그즈 베네딕트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고 말한다. 그 종이 조각에 어떻게 쓰여 있건 간에 자신은 베네딕트가
다이너마이트를 흠쳐서 병원 두 개를 폭파시키리라고는 꿈에도 모르
고 있었다고 말한다. 형사들이 서로를 쳐다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
[병원에 들어가서 폭탄을 설치할 수 있게끔 매클라우드 의뭔을 파
이프로 내리치도록 지시했지요?
[아니. 아닙니다. 그저 베네딕트 혼자 한 짓입니다.
[병원이 폭파되기 직전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이 우연입니까?
[그럼요. 그럼요. 하늘이 도왔죠.
[여러 면에서 당신보다 훨씬 왜소한 여자가 당신을 문 밖으로 떠밀
어 내고 자신은 죽음을 맞았단 말이죠?
[그떻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상태여서 힘이 없었어요.
[평소 매클라우드 의원과 빅토리아에게 유감이 많았었죠?
[그래요. 그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
았어요. 그 사건은 정말 우연입니다.
[군중들에게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설교한
것이 광신도들로 하여금 폭탄 테러를 하도록 유발시킨 게 아니었냐
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오! 마리아시여 !'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정신차려야 한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자구. 차근차근 일
을 풀어 나가야 해.'
그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그려 보았다
좌은 취조실에서 형사에게 이야기를 한다. 음모를 부인한다. 녹색
편지를 보냈던 자가 바로 에그즈 베네딕트였다는 샤실을 전혀 몰랐다
고 말한다. 그 종이 조각에 어떻게 쓰억 있건 간에 자신은 베네딕트가
다이너마이트를 흄쳐서 병원 두 개를 폭파시키리라고는 꿈에도 모르
고 있었다고 말한다. 형사들이 서로를 쳐다보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다.
[병원에 들어가서 폭탄을 설치할 수 있게끔 메클라우드 의원을 파
이프로 내리치도록 지시했지요?
[아니, 아닙니다. 그저 베네딕트 혼자 한 짓입니다.
[병원이 폭파되기 직전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이 우연입니까?
[그럼요. 그럼요. 하늘이 도왔죠.
[옇러 면에서 당신보다 훨씬 왜소한 여자가 당신을 문 다으로 떠밀
어 내고 자신은 죽음을 맞았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상태여서 힘이 없었어요.
[평소 매클라우드 의원과 빅토리아에게 유감이 많았었죠?
[그래요. 그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
았어요. 그 사건은 정말 우연입니다.
[군중들에게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설교한
것이 광신도들로 하여금 폭탄 테러를 하도록 유발시킨 게 아니었냐
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빌어먹을! 아무래도 방법은 단 한 가지, 경찰이 발견하기 전에 녹
노트를 찾아내어 없애 버리는 길뿐이었다. 그러지 못하게 된다면 바=
세상과는 작별인 것이다.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의 끔찍했
디린 시절을 상기시켰다. 양볼이 달아 올랐다.
'스틱스 딕키 ! 이 죽일놈! 뭐, 어째? 위로 쏜 화살? 엿이나 먹으리
그래라. 네놈이 가르쳐 준 규칙대로 게임을 했는데 지금 내 머리통'
는 그 화살이 박혀 있단 말이다.'
아!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었을카? 왜, 왜?
'잭 매클라우드. 그래 모든 것은 그놈 때문이야. 매클라우드! 이번
일만 잘 수습되고 나면 네놈을 보기 좋게 나자빠뜨릴 테니 어디 두고
보자!'
그레이브스는 다시 첫번째 서랍을 열었다. 손전등을 입에 물고 파일
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서류들은 여러 해 동안 쌓여 온 것이었
다. 에그즈 베네딕트에 관한 기록도 틀림없이 이 안 어딘가에 있을 터
였다. 그는 단서를 찾고자 했다. 비슷한 음운의 이름, 사진. 녹색 종이
....... 뭐든지 놈과 연관이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그러나 또 한 차례
헛수고만 한 셈이었다.
그는 다시 맨 아랫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빼곡히 들어 찬 파일들의
중간쯤부터 뒤져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니
엘리, 뎀식, 도널드, 도어. 그는 한 무더기의 파일을 서랍에서 집어 을
려서 사무실 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이제 꼼짝없이 철창 신세군.'
그는 손전등의 불빛을 손목시계에 가져다 댔다.
111 30..
어금니를 하도 세게 물어서 관자놀이께가 다 아파 왔다. 이젠 도리
가 없었다, 파일들이나 다시 정리해 놓는 수밖에.
그는 무릎을 끓고 흐트러진 파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원
래대로 철자순으로 정리하던 그의 눈에. 순간 뛰어들어오는 것이 있었
다. 연필로 쓴 글씨였다 아주 작은 필체였다 녹색 투서의 글씨체와
흡사한,
그는 그 파일을 조심스럽게 집어서 서류함 위에 올려놓고 손전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파일의 겉장을 열자. 나타난 것은 입사 지원 서류였
다
비.제이.도어(. . ) 라는 이름이 상단에 적혀 있었다.
비. 제이.도어?
그는 두 개의 이름, 에그즈 베네딕트와 비. 제이. 도어가 가질 수 있
는 모든 연관성을 생각하려고 머리를 쥐어 땄다.
베이비 존 도어?베이비 존 도.-이름없는 남자 아기!
그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손전등의 불빛을 서류에 바싹 갖다 대고
필체를 감정해 보았다. 도어가 됐든, 도가 됐든 이름은 상관없었다. 그
필체는 녹색 투서의 그것과 일치했다. 그의 눈이 주소란에 떠물렀다.
맨해튼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 6번지 아파트 조호.
그는 그것을 몇 번 입 속으로 중얼거려서 완전히 암기한 다음, 다른
파일들과 함께 서랍 속에 원래대로 챙겨 넣었다. 그리곤 손전등을 끄
고 잠시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었
다. 오로지 짙게 드리운 어둠만이 그득할 뿐이었다.
[아파트 2호라.
그는 낮은 소리로 뇌까렸다.
후스...... 푸슈...... 꾸럭꾸럭.......
후스...... 푸슈...... 꾸럭꾸럭.......
잠수부는 물안경 너머로 바닷속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코앞에1-
유유히 헤엄치고 있던 꼬치 고기 한 마리가 작별 인사라도 하는 양 조
리 지느러미를 몇 번 흔들고는 먼 바닷속으로 사라져 갔다. 산소 호흡
기의 단조롭고 규칙적인 소리가 그를 최면 상태로 빠뜨려 가는 것 겉
았다
후스...... 푸슈...... 꾸럭꾸럭.......
미끌미끌한 물고기 한 마리가 헤엄쳐 왔다. 그러더니 이빨을 드러내
면서 마치 개처럼 웃었다. 잠수부는 팔다리를 움직여 물을 밀어내면서
그 물고기가 뭘 보고 그러는지 알아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
았다.
여자가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표은 곳에......
양팔은 벌려져 있었고, 아래로 향한 얼굴에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뜨
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풍선처럼 바다 위를 향해 등실둥실 떠올
라가고 있었다. 입술이 약간 벌어져 있었지만, 그 입가에는 공기 방울
이 새어 나오고 있지 않았다. 잠수부는 그녀가 누군지 처음엔 알아보
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슴이 꽉 메어 오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무척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는 여인.......
그는 물갈퀴를 신은 발로 물을 차면서 그녀를 향해 몸을 솟구겼다.
산소 호흡기를 입에서 떼내어 그걸 그녁에게로 뻗으며....... 그러나 닿
질 않았다. 그는 고함을 질러 봤지만. 입 안에선 공기 방울만 새어 나
올 뿐이었다. 그는 계속 그리를 향해 솟구쳐 을랐지만, 그얀는 계속 둥
둥 떠올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었었다.
마침내 지치고, 숨이 막힌 그는 다시 산소 호흡기를 입 안에 물었다.
그러나 산소를 마실 수가 없었다.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한 질식감 속에서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빅토리아였다.
빅토리아가 태양이 비치는 바다 표면을 향해 떠올라 가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물보다 무거운 공포가 그를 에북쌌다.
잭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마구 휘저어댔다. 아직 채 깨지 않
은 꿈 속에서 산소를 찾아 헐떡거리고 있었다. 눈앞은 암흑이었다. 얼
굴을 친친 동여맨 붕대 때문이었다. 입에는 마치 잠수무용 스노클처럼
플라스틱 산소 튜브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주변을 더듬어
보았다 면이불이 만져졌다. 침대였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아 끌고선 자
기의 가슴에 가져다대었다, 여자의 가슴이었다.
[빅토리아,당신이오?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직하면서도 화난 듯이 말을 하고 있었
다.
[산소 호흡기 작동이 제대로 안 된 게 벌써 두 번째잖아, 응급실 기
.
게 기술자를 빨리 데려오리?.
그의 양손이 다시 그의 가슴 앞으로 모아졌다.
그리고 금속성의 단조로운 소음이 다시 들려 왔다. 산소가 공급되는
소리, 그가 물밑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다시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왔다.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
다
,.....브이,당신이오?당신 괜찮은 거야?
그 손길은 마치 그렇다고. 모든 게 괜찮다고, 대답하는 듯했다. 그제
서야 눈앞이 빙글빙글 돌면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 왔다. 왼쪽 어
깨, 왼쪽 팔, 다리...... 너무도 엄청난 아픔이어서 엉덩이에 꽂히는 주
삿바늘은 따갑다는 느낌조차 주지 못했다. 그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모
아서 기억해 보려고 애썼다.
시위 군중, 건물,엘리베이터...'.. 눈,왼쪽 눈......
처음엔 하나하나의 단상들만 떠오르더니 갑자기 기억이 환해졌다.
그러나 규칙적인 산소 호흡기의 소리가 더 이상의 기억을 방해했다.
그 소리가 그를 깊고깊은 잠의 늪 속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
후스...... 푸슈..... 꾸럭꾸럭...... 후스...... 푸슈.......
엘리 그레이브스는 온갖 낙서로 뒤범벅이 된 아파트 복도에 서서 방
번호를 확인했다.
'2'
녹이 슬어 있었지만 또렷이 블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
나서, 신용카드를 꺼내 자물쇠 옆 틈으로 밀어 넣고는 가볍게 쳐올렸
다. 제발 자물쇠가 스프링 식(}이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자물쇠는
열리지 않았다. 그는 숨을 한번 깊숙이 들이 마셨다.
'천천히 하자. 고등학교 때처럼. 그땐 이 정도는 쉽게 해냈잖아.'
그는 손에 낀 라텍스 장갑을 고쳐 끼고서 다시 시도해 보았다. 신용
카드가 무언가에 닿았다. 좌우로 조심스럽게 카드를 움직였다. 그러
자물쇠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찰칵.
손잡이를 돌렸다,문이 열렸다.앞이마에 송글송글 배어 나온 땀방
울을 닦으며 집 안으로 들어서서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만
히 서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길거리에서는 쓰레기 수
거차가 덜덜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전기 스위치를 찾으려고 벽
을 더듬다가 잠시 멈칫했다.
'불이 켜져 있으면...... '
1러나 불이 있어야 뭘 찾든 말든 할 거 아닌가?그는 위험을 무릅
써 보기로 했다.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등그런 테이블에 걸쳐져 있던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면서 방안이 밝아졌다.
일인용 침대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한쪽은 주방 시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통하는 다른 쪽 구석의 좁은 통로에 자전거
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방안은 정말 지저분했다. 설사 자기가 더 어질
러 놓는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형편없이 더러웠다.
는 문 옆에 세워진 쓰레기 봉투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갔싼 소설책들, 종이컵들, 추리 소설들, 비어 있는 화분,
자전거 장갑 한 짝...... 그런데 녹색 노트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서두르지 말자. 찬찬히 생각해 브자.'
그는 침대와 주방 사이에 놓여진 둥근 테이블로 걸어갔다. 편지 봉
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그 위에 쓰여진 주소의 필체는 바로 그의 것
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
다. 더러운 접시, 뚜껑이 열린 캔 스파게티, 바닥에 앙금이 눌어붙은
술잔 하나, 시리얼 접시, 옥수수 통조림, 종이 조각들, 잡지, 신문 오려
낸 것들. 가위. 다저스팀의 야구 모자. 뿔테 안경, 펜치, 전깃줄, 진공
관, 스크루드라이버, 테이프. 외파용 메스처럼 날카로운 칼.
그는 부엌으로 걸어가서 잽싸게 살펴 나가기 시작했다. 서람과 찬장
을 뒤지고, 칼도마 밑도 살펴보고. 한 귀퉁이가 부서져 나간 대바구니
속도 헤집어 보았다. 개수대 아래도 들여다보고 시든 셀러리 몇 줄기
만 들어 있는 작은 냉장고도 열어 보았다. 그러나 녹색 노트 뭉치는 나
타나지 않았다.
'천천히 하자구. 시간은 충분해.'
그는 침대로 가서 퀴퀴한 이불과 담요를 걷어 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매트를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 포르노 잡지가 한 권 있었다. 그
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것을 집어 들고 툭툭 털어 보았다. 아무것도
떨어지는 게 없었다. 그는 잡지를 던져 버리고 매트를 떨구었다 주위
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안락의자로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청
바지와 자전거 모자를 쓸어내 버리고 쿠션을 들어올렸다. 녹슨 동전
하나와 땅콩 컵질뿐. 예의 녹색 노트는 없었다. 쿠션을 내려놓았다. 얼
괼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음엔 서랍장 앞으로 갔다. 그 위에는 철물점 영수증, 빈 피자 상
자, 에이스 심부름 센터의 서류 둥치. 그리고 액자가 하나 있었다. 사
진 속에는 어린 소년이 딱딱한 표정의 통통한 여자와 역시 근엄한 표
정을 짓고 있는 키 큰 남자 사이에 서 있었다.
' 1979년도라. 이 소년이 그 녀석인가?'
맨 윗서랍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자책감이 몰려 왔다. 제레미 하켓이
투서를 믿지 말라고 했는데....... 그 안에는 열쇠 꾸러미, 고장난 미키
마우스 시계 따위의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벨벳으로 싼 작은 상자
곽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심장 모양으로 다듬어 놓은 붉은 돌이 들
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만져 보고는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며.
'마지막 것만 빼고는 모두 다 완벽한 진실이었잖아. 젠장. 하나같이
정확하고 믿을 만했으니. 마지막 투서도 믿을 수밖에.'
그는 첫번째 서랍을 밀어 닫고 다른 것들을 살펴보았다. 술병, 음식
물 포장지, 모조 다이너마이트. 그러나 녹색 노트는 없었다. 서랍장 아
래를 살펴보았다. 더러운 깔판에 뺨까지 비벼대며 그러나, 아무런 소
득도 없었다. 그래도 방안을 완전히 조사해 보기 전에는 나갈 수가 없
었다. 설사 무단 침입으로 붙들려서 교도소에 처넣어진다 할지라도.
교도소......
양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잽싸게 일어나서 자전거가 세워=
좁은 복도를 지나 옥실로 향하던 그의 눈에 옷장이 띄었다. 문을 열
다. 퀴퀴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는 줄을 잡아당겼다. 옷장에 설치=
알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더러운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그는 옷장벽에 기대어져 있던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그 옷가지들을
집기 시작했다. 티셔츠 하나만 남기고 다른 것들은 모두 옷장 구석=
로 치웠다. 티셔츠를 빗자루 끝으로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없었다. 장갑 낀 손으로 부드러운
나무판을 쓸어 보았다. 역시 없었다.
장갑을 벗고 맨 손바닥으로 차근차근 더
듬어 보았다. 그때 뭔가 걸
리는 것이 있었다 못대가리였다. 판자를 쳐보니 '통통' 울리는 소리기
났다. 그러고 보니 방바닥과 옷장 바닥 사이가 한 뻗 가량이 되었다.
못은 옷장 바닥과 거의 평평하게 박혀 있었다. 손톱을 못대가리 밑에
밀어 넣고 그것을 위로 약간 들뜨게 만들고 나서 손가락으로 잠아 뽑
았다. 그러고 나서 옷가지들을 뭉뚱그려서 라으로 집어 던진 후 판자
를 들어올려 옷장벽에 기대어 세웠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그것이 있었다.녹색 노트 -고리가 세 개 달린 바인더에
녹색 노트가 끼워진 -그것을 집어 올려 전구에 들이대고 표지를 열
었다. 그의 작은 철체가 촘촘히 적혀 있고 군데군데 신문 스크랩 사람
들과 건물들의 사진 따위가 붙어 있었다.
[오.하느님.감사합니다.
그는 즉시 노트를 꼼꼼히 흩어보고 싶었지만 불빛이 너무 흐린 데다
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무단 침입한 강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숙
소로 돌아가서 여유를 갖고 읽어 보는 게 옳을 것 같았다. 뭔가 더 있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옷장 바닥을 한 번 더 조사해 보았다. 실
제로 뭔가가 더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검은 낙하산 천 가방을 발견해
서 끄집어냈따. 그걸 방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첫번째 눈에 뛴 것은 길고 둥그런 막대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
다. 처음엔 모조 다이너마이트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진짜 다이너마이트였다. 손에 그것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입 안
이 바.싹 메말라 왔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조심조심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방 속에는 세
개가 더 있었다. 그리고 네 개의 뇌관과 가짜 수염 그리고 접착제 따위
가 들어 있었다.
-쿵.
그때 아래층에서 문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나무 계단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숨을 멈추고 그 발자국이 그냥 지나쳐 가기만
을 기다렸다. 발자국소리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그는 물건들을 도로
가방 안에 쑤셔 넣고 일어섰다. 복도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발자
국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장갑과 녹색 노트를
챙기고는 욕실로 향했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서 불을 끈 채로 문을 조금
열어 놓고는 기다렸다. 낮게 두런거리는 목소리, 열쇠가 짤랑이는 소
리,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변기 위쪽에 난 창문으로 도시의 불빛이 새
어 들어오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거기, 누구 있소?
남자 목소리였다. 그레이브스는 머리통을 창살 틈으로 내밀었다. 2
층 높이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었다.
[아무튼 불이 켜져 있다는 신고는 사실이었구만.누구 안에 있소?
그레이브스는 입술을 빨아 가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했다. 우
선 소리 안 나게 욕실문을 닫은 다음 일부러 소리 나게 변기 시트를 내
리고 라텍스 장갑을 변기에 버리고선 물을 내렸다. 그리고 창문 밖으
로 검은 낙하산 천 가방을 떨구었다. 그것은 쓰레기통의 한 구석에 떨
어졌다.
.그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서 녹색 노트를 든 채로 욕실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거실로 나오다가 그는 짐짓 깜짝 놀란 듯한 얼굴 표정을
짓고는 덤춰 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수위와 젊은 경관이 서 있었다.
[누구요?
경관이 물었다.
[에그즈의 친구요.
[에그즈라니?여긴 에그즈라는 사람 없는데.
수위가 말했다.
[손 들어!
권총집의 호크를 끌르면서 경관이 말했다
[나는 그의 친구.......
[손 들어!
그레이브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보쇼. 내 설명 좀 들어.......
[손 들라니까!
그레이브스는 의자 위에 녹색 노트를 올려 놓고 양손을 들었다. 경
관은 그의 가슴부터 무릎까지 손으로 더듬어 가며 수색을 했다.
'침착하자. 말만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분증?
경관이 요구했다.
'이름을 대고 나면 그땐 끝이다.'
그레이브스는 마치 지갑을 빼내려는 듯이 손을 뒷주머니에 가져디
대고서는 거기서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고 나선 번개처럼 앞
으로 내뻗었다. 주먹은 경관의 왼쪽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경관
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레이브스와 수위는 경관의 움직이지 않는 몸
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레이브스의 눈과 눈길이 마주치자 수위는 겁
을 집어먹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레이브스는 침으로 입술을 적
시면서 앞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 나서 노트를 집어 들곤 목제 계단
을 급히 내려와 인도로 향했다. 아파트 앞에는 순찰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그레이브스의 몸은 막 차에서 내리던 경관의 품안으로 고스란
히 빨려 들어갔다.
7
잭은 잠에서 깨어났다. 오른쪽 눈앞은 온통 하얀색뿐이었고 왼쪽 눈
앞은 캄캄한 암흑이었다.
[누구 없어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왼손은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양쪽 눈에 댄 거즈가 만져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안대의 아
래쪽을 살짝 들어올렸다 희미하게나마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볼 수는 있구나 '
흑시나 해서 긴장해 있던 뒷목 근육이 풀어지며 다시 머리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는 침대가를 따라 손을 더듬어서 간호사의 호출 버튼
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을 눌렀다. 세게.
간호원을 부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를. 아내?
빅토리아와 결흔식을 올렸던가?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어났던 상황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모았다. 시위 그리고
엄청난 통증,빅토리아가 옆에 있었고.......
동안 그는
왼쪽 눈의
그리고는 더 이상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
잭은 잠에서 깨어났다. 오른쪽 눈앞은 온통 하얀색뿐이었고 왼쪽 눈
앞은 캄캄한 암흑이었다.
[누구 없어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왼손은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양쪽 눈에 댄 거즈가 만져졌다.그는 손가락으로 안대의 아
래쪽을 살짝 들어올렸다. 희미하게나마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볼 수는 있구나.'
흑시나 해서 긴장해 있던 뒷목 근육이 풀어지며 다시 머리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는 침대가를 따라 손을 더듬어서 간호사의 호출 버튼
을 찾아냈다. 그는 그것을 눌렀다. 세게.
간호원을 부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를. 아내?
빅토리아와 결혼식을 올렸던가?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일어났던 상황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모았다. 시위 그리고 왼쪽 눈의
엄청난 통증,빅토리아가 옆에 있었고......
그리고는 더 이상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
퍼서서 침대 가로 다가왔다.
[깨어나셨군요.
남자 목소리였다,
그의 손이 잭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맥박을 재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딥니까?
[뉴욕 병원입니다.
의사는 잡았던 손목을 놓았다. 펜으로 차트 위애 끄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 사흘 동안 푹 주무셨어요.
조심스러운 손길이 얼굴에 느껴지더니 잭의 오른 눈을 감싼 안대가
벗겨졌다. 잭은 손전등의 횐색 불빛을 보았다 다음 순간, 불이 커지고
다시 침침해졌다
[몇 시나 됐습니까?
[새벽 시입니다.이거 보이십니까?
의사가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둘이오. 비. 빅토리아는 어디 있죠?
의사는 능숙한 솜씨로 다시 눈 위에 안대를 덮고 광대뼈에다 반창고
를 눌러 붙였다.
[저는 레지던트입니다, 의원님, 스타인 박시닙이 주치의십니다.
'무슨 대답이 그래?'
[무슨 일이 있었소?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두부()에 파편 조각이 박혀 있었고 신체 왼쪽 편에 상당히 심
한 타박상을 입으셨습니다. 왼쪽 다리도 부러졌구요.
[왜 그런 일이?
[폭탄이었습니다.
'폭탄이라구?'
[무슨 폭탄?
[파크 애비뉴의 산부인과에서 터진 폭탄이죠. 지금 어디가
편하십니까?
제일
[왼쪽이오.무슨 병원이라구요? 빅토리아는 어디 있소?
[아직 그렇게 신경 쓰시면 안 됩니다.
'이거 감이 안 좋군.'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의사가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고 철제
약품 쟁반 위에 유리와
플라스틱 도구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팔뚝 주위가 따끔했다. 정맥 주사였다
몸의 혈관 속에 모르핀이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잭은 온
[또 누가 다쳤소?
[의원님을 병뭔으로 옮겨 주셨던 분, 윈스턴
존스 씨요. 굉장히 위
독합니다. 아직도 의식 불명 상태입니다.
잭은 모르핀의 약효가 번져 가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사람은?
발음이 불분명한 질문이었다
[어떤 여기자.
[몰리?
갑자기 '근친상간'이라는 단어가 그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여기자는 심한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의원님의 눈 상처를 치료
해 주던 의사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서. 조금 전에 숨을 거두었습니
다. 함께 있던 간호사는 핀셋 두 개가 후두를 관통해 버렸습니다. 그러
나 그녀는 회복될 겁니다. 목소리는 영영 잃어버리게 됐지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의원님.제 말 들럽니까?
'빅토리아는?빅토리아는?'
잭은 가만히 누워서 이제 닥쳐을 끔찍한 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
해 보려 하고 있었다, 당황한 의사가 맥박을 재보려고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오히려 잭의 손이 의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해 주시오.빅토리아는...... 어떻게 됐소?
의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떼었다
[의원님, 유감스저운 말씀이지만 그 억자분은 폭발 현장에서 즉사
하셨습니다.
끝내 불안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잭은 목이 메인 채 물었다
[아기도......?
그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귀로 듣고 싶었다.
[네,그런 것 같습니다.
의사의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슬픔과 모르핀의 약기운은 서로 상승 작용을 해서 그를 현실이 아닌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옮겨다 놓았다. 브루클린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이스트 강변에 솟아 오른 커다란 화물 창고의 지붕. 작렬하는 태
양. 생선 비린내를 머금은 공기. 유람선을 타고 유쾌히 지껄이고 있는
관광객들. 그는 자신이 높이 솟은 교량의 난간 위에서 몸을 날리고 있
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혼수 상태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레이브스는 경찰서의 책상 앞에 앉아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갑
을 찬 채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행여 누가 들을세
라 송화기를 등글게 감싸 쥐고 있었다. 마피 주변의 경찰들이나 혹은
줄줄이 붙잡혀 온 뚜쟁이며 창녀들이 자기의 전화 내용을 등으면 안
된다는 듯한 자세였다.
[그가 뭐랍니까?
[말도 못 꺼내게 하더라구.
전화선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스틱스 딕키였다. 그레이브스
는 못 믿겠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 그자가....... 설마. 혹시, 제 얘길 꺼내지도 않으신 건 아닙니
까?
[내가 전화 건 용건을 한참 말하고 있는데 그가 내 말허리를 끊더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하더라니까.
[이런 썩을 인간!
[이보게, 엘리 ! 미합중국의 대법원장을 한밤중에 깨워 일으켜서 뉴
욕에 있는 어떤 사람을 보석으로 석방시켜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 자체
가 좀 문제 있는 처사였지.안 그런가 ?
이런 우라질. 당신은 그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군요. 그렇죠?
[엘리 !
[아니. 한밤중이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날 위한 당신의 부탁
인데 그걸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그가? 내가 아니었다면 대법원장
자리를 감히 어떻게 넘볼 수 있었게요?
[그건 좀 지나친 과장이군. 엘리.
[관두쇼! 어쨌든 그는 내게 빚을 졌어요. 안 그래요?
딕키가 전화기에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좌우지간 자네가 쳤다는 그 경혀 말인데 상태가 어떻다던가?
그레이브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아직도 혼수 상태답니다.
[저런. 이보게. 엘리. 전화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
네. 변호사를 부르게. 제레미 하켓은 지금 어디 있나?
[출장중입니다. 좌우지간 내 말 잘 새겨들어요. 스틱스. 티투스에게
다시 전화해서 당직 경사에게 전화 좀 넣어 달라고 하세요. 대법원장
이 신원보증만 서주면 난 진술서나 한 장 써주고 일단은 석방될 수 있
을 거갈 말입니다.
[엘리.
[아니. 아니. 내 말이나 마저 들어요. 만일 티투스가 그 손쉬운 전화
한 통화를 안 해줘서 내가 잠시라도 더 철창 속에서 보내게 된다면 반
드시 그 대가를 치루게 해줄 겁니다 날 적으로 만들고 싶답니까? 어
디 한번 해보라 그러세요!
그때 옆에 있던 경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시간 됐소.
그리고는 전화기를 잡았다. 경사가 끌어 가는 전화기에다 대고 그레
이브스는 악을 썼다.
그에게 다시 전화해요! 나에게 갚을 빚이 있지 않랗고 꼭 전해 =
시오 !
경사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그레이브스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그는
팔목을 문지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혹시 그를 구해 줄 만한 힘을 ?
진 아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허망한 바람에서였
다.
[벨트와 넥타이 풀러 놓으시오.
경사가 무덤덤하게 말하면서 커다란 마닐라지 봉투의 주등이를 벌
렸다.
그레이브스는 그 속에 소지품들을 하나씩 떨구었다. 지갑,동전들
수첩. 그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어 보려고 느릿느릿 넥타이를 풀
어서 그것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내 변호사가 곧 이리 올 거요.
[호오, 그거 반가운 소리구만. 어쨌든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
가 편안히 모시지.
경사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그는 발끈해서 내뱉었다.
[핀안히?난 칫솔도 안 가지고 있단 말이오!
그때 어딘가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 망토에 부츠를 신은 채 취조를 받고 있던 덩치 큰 사내
가 있었다. 그자는 자욱하게 뿜어 올린 담배 연기 뒤에서 그레이브스
를 보고 있었다. 게슴츠레한 눈빛이었다.
[얼간씨 ! 지금 칫솔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지금부터 자네가
가야 할 곳에서 필요한 건 긴 작대기라구. 그 귀엽고 작은 궁등이를 그
곳의 짐승들로부터 지키려면 말이지. 히히헛.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끔찍했다, 머리 왼쪽에
는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고 왼쪽 눈과 귀 그리고 이마 절반이 비스듬
하게 봉대로 덮여 있었다. 양볼과 목에는 피멍과 꿰매고 긁힌 자국투
성이였다 모든 관절이 욱신거렸고 온몸의 근육이 성한 곳 하나 없었
다. 발바닥까지 멍이 든 지경이었다. 잭은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왼쪽
눈이 자꾸 아려 와서 욕실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고 선 채. 호흡을 가다
듬으며 등줄기에 배어 난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비교적 말짱한 오른편
얼궁 때문에 왼쪽 얼굴이 더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오페라의 유령'처
려. 폭발의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찢겨진 육신도. 끔찍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벽을 짚고, 의지를 짚어 가며 조금씩 발을 례서 침대로 돌아왔다. 침
대 발치 쪽에는 녹색 노트가 놓억 있었다. 간호사는 노먼 플라스키 형
사가 놓고 간 것이라고 했다. 그가 혼수 상태인 듯한 깊은 수면에 푹
빠져 있던 오늘 아침, 노먼은 그 서류를 잭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고 갔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들러 그 내용에 관해 얘기를 나
눌 수 있도록.......
그는 힘들어하며 간신히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모르핀의 약효가
라지고 있었다. 잭은 똑바로 누워 잠시 숨을 돌린 후, 오른쪽 무릎
세우고 녹색 노트를 끌어서 거기에 받쳤다. 표지를 열자. 복사를 뜬
묶음의 일기 비슷한 기록이 있었다
'이게 뭘까?엘리 그레이브스의 자필 기록인가?'
첫 페이지 제일 상단엔 손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에게는 진실됨이란 없나니,그는 모든 거짓의 아버지이니라
요한복음 8:44
잭은 의아했다.
'그란 누굴 가리키는 걸까?'
너무 휘갈겨 쓴 데다가 글의 구성까지 형편없어서 처음엔 그 일기를
읽어 내려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용은 잭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
다. 신문과 잡지에 난 자신의 기사들이 군데군데 오려 붙여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의 여백에 잭의 10대 시절을 알 단한 사람들과의 면담내용
이 쓰여져 있떴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분노,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시절에 대
한 깊은 비탄,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왜곡된 갈망 따위가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었다. 그는 점점 몰입해 갔다 그레이브스가 그런 삶을 살았
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필로 또는 펜으로 아무 종이 위에나 닥치는 대로 갈겨 써놓은 일
기의 내용 모두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잭 매클라우드에 대한 분노
와 저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레이브스가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까지? 이건 상식을 넘어서
고 있었다
는 의아해하면서 계속 읽어 나갔다. 첫 페이지는 청년 시절에 대
한 내용이었다. 공병으로 군대에 다녀 왔다? 이건 좀 재밌군. 그도 나
름대로 그레이브스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력이 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더구나 군대에서 '에그즈'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
고 그 별명을 몹시 싫어했다는 내용을 읽고 나서는 조금 이상한 느낌
이 들었다
'에그즈? 엘리 그레이브스의 별명이 에그즈라?'
그는 의혹을 잠시 눌러 두고 계속헤서 읽어 내려갔다.
-뉴욕에 도착해서 첫번째로 수용됐던 고아원에서 알게 되었던 어
떤 친구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기로 했다. 그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
핏트.
'이그나티우스 핏트?그떻다면. 이건 이기 핏트의 일기란 말인가?'
그는 뒷장을 넘겼다 잭에 대한 보도를 한 신문 기사가 더 많이 붙여
져 있었다. 그 스크랩 사이에 꼼꼼히 적어 놓은 내용은 이러했다.
-친부모를 알게 된 것은 열 번째로 옮긴 이스트 시러큐스에 있는
어느 고아원에서였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나던 해였다.
잭의 싱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계속됐다,
-어머니는 날 낳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나의 존재에 전혀 관
심이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날 버렸고 한 번도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마치 없어져야 할 쓰레기쯤으로 취급한 것이다.
잭은 고통에 얼굘을 찌푸리면서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태아를 죽이는 것이 하니익 덕목()이라고 하고 있다.
죄없는 아이들을 합려적으로 살해하기 위해서 법률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 참회하기는커녕 끝없는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의문의 억지가 없었다
-
'이기? 하니가 낳은 아기가 바로 이기 핏트였단 말인가? 그럼, 이=
핏트가 나의 아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의 어두운 세상이 빙빙 돌았다.
'이기 핏트. 내 아들....... 빅토리아와 아기를 죽인 자. 아버지가 =
신을 내버렸다고? 아. 그 녀석은 끔찍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도대=
이 무슨 운명의 굴레란 말인가?'
잭은 눈을 감은 채로 지난 25년간을 떠올렸다. 혹시나 아기가 살이
남아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지는 않나,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보살폈으
면 하니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걱정과 막막한 그리움괴
죄책감 속에서 살아온 나날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는 잠시 드러누워 있다가 눈을 뜨고 다음 장을 넘겼다.
자신의 시껑 (?)에 착수하게 된 동기. 아버지의 뒤를 추적해서 뉴욕
에 오게 된 일, 한편으론 배달부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론 폭파회사의
노무자가 되어 일인 이역을 해낸 것,-턱수염을 기른 에그즈와 맨
질맨질한 턱의 이기 핏트 -사람들이 손쉽게 속아넘어가는 것에 대
해 우쭐해하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오래된 신문철을 뒤져서 매클라우
드의 지원으로 윈스턴 존스가 '윙스'라는 곳을 차렸다는 조그만 가십
기사를 찾아낸 일, 그래서 그곳에다 숙소를 정하고 배달부로 취직을
부탁하는 등 윈스턴과 친해지면서 최종 목표인 매클라우드에게 접근
을 하게 된 일 등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아버지와 엘리 그레이브스가 앙숙이라는 점을 역이용해서 멋들어지
게 복수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한 대목도 있었다
<붉은 장미회}의 집회에 참석해야겠다는 메모
느낀 호감도 이렇게 적어 놓고 있었다
곁에는 그들에 대해
-나는 그들이 좋다.그들은 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
갇은 사람들을 구해 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 그레이브스에게 잭 매클라우드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
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어느 날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후 경찰
에는 그저 '이름없는 남자 아기'라고만 신원을 밝힌 일. 아놀드 제임
스라는 변호사가 보석으로 석방시켜 주고는 {붉은 장미회}에서 폭파
전문가를 모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고 씌여 있었다. 군대
에서의 경력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 자신을 그레이브스에게 소게한 방
댑, 리만 폭파회사에 일자리를 얻게 된 경위도 적혀 있었다 특히 그레
이브스가 자신을 기자회견장에 초대한 일과 '기회' 운운했던 점에 대
해 기분 좋아했던 것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러면서 매클라우드 의원을 공격하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엘리
그레이브스의 단순함을 비웃는 한편. 다른 사람을 멋지게 속여 넘겨
버린 자신의 재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페이지의 끝에는 이렇게 적 땋
혀있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어느새 새벽인데도.흥분한 탓일
게다. 이제 상황은 내 뜻대로 조성되고 있다. 만전을 기헤 계획을 꼭 뜸
성공시켜야 한다.
잭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윈스턴의 도움으로 배달부 자리를 얻게 되었고 그 덕분에 엄마의 가
장 친한 친구였던 지니 앤더스 같은 사람을 찾아내게 된 일, 그래서 하
니가 시러큐스로 거처를 옮기게 된 까닭과 잭이 하니를 해리스버그로
보내서 낙태시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려고 도둑질을 하게 된 일 등을
지니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앵거스 브로디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아버지의 포커 친구였던 앵거스 브로디를 찾아내게 된 것은 정
'.'!' 나행한 일이다.브로디는 내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는 아버지의 잔인한 성격에 관해 말해 주었다. 어느 날 밤 장의사집
서 아버지는 미쳐 날뛰었다고 했다.브로디가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을 뽑아서 브로디의 목에 들이대고 거기서 빠져 나갔다고 했다. 그는
엄마의 시체를 강간하고 난 뒤 벌거벗겨진 그 몸뚱이를 장의사 테이블
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도망갔다고 한다. 후! 대체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브로디의 말에 의하면 그날 밤 같이 있었던 다른 두
사람의 증인을 댈 수도 있다고 했다. 굳이 그들을 만날 필요가 있을
까?브로디의 말은 00퍼센트 진실일 것이다. 내 아버지란 사람은 층
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다
잭은 눈을 감아 버렸다.
간호사가 음식 쟁반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선반을 끌어당겨서 그의
무릎 위에 식탁을 차려 주었다. 음식 냄새를 맡자 속이 메스커워져서
선반을 밀어 제치고 다시 일기장에 눈길을 주었다. 그레이브스의 거리
기자회견이 열리던 날에 대한 메모였다.
-윈스턴이 윙스에 들려 보라고 했다. 매클라우드가 쉬버스라 할
리 문에 대해 질문할 게 있어서라고 했다. 아! 신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 표적이 스스로 화살에 다가오는 꼴이 아닌가!
초조하기는 했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다. 싫었지만 그와 악수도
했다 아버지와 몸이 닿은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인 것 같아 보여서 좀
놀랐다. 사실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 것 같아서 흔란스러웠다. 속이
메슥거렸다. 묻는 말에 대충 대답을 하고는 방을 나와서 화장실로 갔
다. 실컷 토했다. 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와서는 엘
리 그레이브스의 기자회견장에 그들과 함께 갔다.
걸어가는 동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하고 부르며
그를 껴안고 싶었다. 내가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그의 죄를 용서한다
고 말하고 싶었다. 강렬한 층동이었다. 옛날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
을 때처럼. 그때는 우레와 같은 폭포소리에 넋이 나가서 난간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었지. 그러나 정신을 차렸다.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
다.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악마는 빛의 천사로 위장하느니. 악마는
다른 어떤 야수보다 더 교활하니라 '그렇다. 악마는 소박하고 선한 사
람으로 변장한다. 속아넘어가면 안 된다 군중들 무리에 도착할 때쯤
엔 다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정말 무서운
유혹이었다
그는 나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다. 그는 나 또한 죽이려 했다. 그는
죄없는 생명들을 죽이고 있다. 만일 그대로 놔둔다면 수백만 명의 아
기들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려률을 제정할 것이다. 정의의 이
름으로, 모든 거룩한 것들의 이름으로, 생명 그 자체의 숭고함을 지키
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를 막을 신성한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잭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한 장을 또 넘겼다
-엘리 그레이브스는 멋지게 해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의 죄악
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내가 보낸 녹색 투서들의 내용을 그대로 을어
댄 것에 불과했지만.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일은 기자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해댄 것이다 '아기는 어디 있나요? "아기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났나요?' 하하! 그 아기가 바로 곁에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아래에는 몰리 맥코믹에 관한 내용이 적척 있었다
기자들을 따라 뛰다가 어여쁜 여기자를 발견했고 그녀가 넘어져 다
치자 윙스로 데려가 응급 처치를 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를 알게
된 것이 또 한 차례의 행운의 손짓이며 그 까닭은 방송국 일자리 때문
이라는 것등등
-몰리가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다.메스껍지만 잘된 일이다 녹색
투서에 적을 거리가 생겼으니. 파크 애비뉴 산부인과에 둘이 같이 빙
'
뮤한 사진을 찍었다.근친상간의 증거 자료를 확보한 셈이다.멍청
그레이브스는 그것마저 액면 그대로 믿고 결정적인 순간에 만인 앞
폭로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를 편안하게 제거하는 것 정도는
그의 죄에 비하면 너무 약하다.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없도록. 그의 흔
구들인 태아 살인자들까지도 치를 떨도록 철저하게 망가뜨려야 한다.
엄습해 오는 고통 때문에 잭은 심장의 근육이 오그라 붙는 것을 느
꼈다, 이기는 시러큐스에 사는 하니의 이모 할머니를 찾아갔던 겆도
기록해 놓았다.
-그 할머니는 망령이 들었다.그래도 가끔씩은 제정신을 찾을 때
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을 엘리 그레이브스라고 소개했다. 할
머니가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든 아니면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오든
엘리 그레이브스가 그녀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어떻게든 알려지기를
빈다. 그러면 아버지의 편집증이 발동해서 그레이브스에 대한 오해의
골이 더욱 깊어지겠지. 나는 그 둘을 더더욱 쉽게 다룰 수 있게 되고
말이야. 일곱 번째 고아원이었던 '맥피 아줌마의 어린이집'에서 가지
고 놀던 꼭두각시 인형들처럼. 후후.
그 아래로 빌리 배니스터와 애틀랜틱 불바드 산부인과를 폭파시켰
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니스터는 어리석었어. 모자를 빠뜨릴 게 뭐람. 수위의 아내.
그녀에게는 정말 죄송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신의 뜻대로 행한 것
뿐인데. 그리고 그 병원을 폭파해 버림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많은 아
기들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희생쯤이야. 어쨌든 오믈렛을 만들려면
계란을 깨야 하니카.
잭은 한숨을 내쉬고 뒷장을 넘겼다
-애브너 티투스를 만나서 그의 사인을 받았다.
'애브너 티투스?이기가 티투스와 접촉했단 말인가?'
그는 애브너와 이기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더 있는지 재빨리
그 페이지를 훌어 보았다.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내용 전개상으로
누락된 페이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결국 비밀에 부쳐진
것이다
-어쨌든 동전을 손에 쥔 건 행운이다.
이기는 그렇게 써놓고 있었다. 무슨 뜻일카?
잭은 잠시 일기장을 덮고 상념에 잠겼다. 이성은 핑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감정은 달랐다. 죄책감이 그를 휩쌌다. 그러는 한편, 비록 미
움에 근거하긴 했지만 자신의 목적에 대한 이기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
탄하는 마음도 일었다.
목이 메어 왔다. 그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두어 페이지는
폭탄 테러 전날 밤에 씌여진 것 같았다, 내용에 따르면 그 동안의 며칠
은 이기의 평생에 가장 흡족한 나날들이었다 계획을 짜고, 상황을 구
성하고 민첩하고 효과적으로 시위날에 대비하고 있었다. 엘리 그레이
브스를 쟤신이 쳐놓은 거미줄로 유인하면서 느끼는 쾌감도 기록해 놓
고 있었다.
-그 동안의 투서로 충분히 그레이브스의 신용은 얻어 놓았다.잭
과 몰리에 관한 마지막 투서도 그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거짓알도 진실로 들
리는 냅이니까.
끝으로 이기가 아버지, 잭 매클라우드에게 느끼는 감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었다.
-그가 허우적거리며 고통받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유쾌하다.그
는 내일 결정타를 얻어맞고 평형을 잃고 비척거리다가 뭐가 뭔지 모르
는 채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내일 나는 그에게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다이너마이트를 채운 조끼
듬 벗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선 타이머를 작동시켜 놓고 빠져 나크
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 만한 시간과 장소적 여건이 닺=
않게 되면. 그때는 별 수 없다. 조끼를 입은 채로 전선에 점화할 것
다. 어찌됐든 실패란 있을 수 없다. 그 대가가 무엇이 될지라도, 내 상
명일지라도. 나는 그 일을 꼭 성사시키고 말리라.
잭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 뒤에는 복사한 서류가 한 장 붙여
져 있었다.
출생증명서
197면 썸 1낍.
사내 아이 출생.
모 :메리 오코너 스미스
부
그는 빈칸을 응시했다.자기 이름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곳이었다.
아버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그 종이를 어루만졌다. 마치 그
것이 아기라도 되는 양.
서류에는 여러 겹으로 접어져 있던 표시가 또렷했다. 접혀진 자국이
있는 곳은 까맣게 때가 타 있었다. 그는 하섬없이 그것을 어루만지다
가 문득 인지에 찍혀 있는 소인을 살펴보았다.
'1 982년 11월 1 4일.'
아들은 열두살 나던 그 어린 시절부터 자기의 출생 증명서를 접어서
지라 속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그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기 위해
앞장을 넘겼다. 쓸쓸했던 지난 시절과 맥피 아줌마에 대한 내용이 적
혀 있었다_ 맥퍼 아줌마는 그를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을 해댄 모양이
다.
'너는 쓸모없어. 쓸모없는 놈이야!'
그 말파 함께 언제나 그의 양귀를 손바닥으로 강타해서 고막이 멍멍
하게 만든 다음 그녀는 그를 지하실 계단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궈 버
리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난 어두운 지하실의 비밀 장소로 가곤했다,그곳은 폐
품이 된 석탄 난로 뒤쪽 구석이었다. 나는 그곳에 꼭두각시 인형들을
감춰 놓고 있었다. 그곳만이 내가 평생,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은 유일
한 장소였다. 비록 얻어맞은 귀가 얼얼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
크, 너무 깜깜해서 무섭기도 했지만 꼭두각시들이 내 머릿속에서 이야
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들은 내가 원하는
말만 해주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 주었다.
맥피 아줌마에게 가서 달콤하게 키스를 한다. 그리고는 그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서 지하실문 앞까지 데려와서는 갑=',기 그녀의 엉
덩이를 걷어차 시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만든다. 그러고 나선 그노
위에 올라타서 그들의 작은 주먹으로 마구 후려갈긴다. 마음껏 두들겨
팬 뒤엔 그녀의 머리통에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탕!'
그러면 그퉁는 죽, 는. 다
내일. 내가 터뜨릴 폭탄은 꼭 아버지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잭은 일기장을 덮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눈물이 양볼을 타고 흘렀다.
너무너무 가슴이 아렸다. 그는 아침이 될 때까지 무덤처럼 어둡고
로운 적막 속에 그 자신을 묻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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