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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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하)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제 5 장
- 1 -
가느다란 실처럼 비가 내린다.
움직일 수도 없이, 그저 멍하게 물웅덩이에 뺨을 담그고 있던 중 갑자기 등뒤에서 바스락거리며 잡초를 헤치는 소리가 났다. 몸을 숨겨야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고개를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을 사람일까, 짐승일까, 요마일까. 어느 쪽이라고 해도 선택지가 늘 뿐, 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붙잡히건 습격당하건, 이대로 이곳에 쓰러져 있건간에 도달하는 곳은 하나인 것이다.
아득해져가는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보자, 거기에 있던 것은 마을 사람도 추격자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다. 한 마리의 기묘한 짐승이었다.
모습은 쥐와 비슷했다. 두 개의 뒷다리로 일어서서, 수염을 킁킁거리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쥐 같았다.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서있는 그 쥐가 어린아이 정도의 신장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짐승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요마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코는 멍하니 그 이상한 쥐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서 큰 녹색 잎사귀를 우산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비쳐보이는 녹색에 하얗게 빗방울이 튕겨, 그 하얀 물방울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쥐는 놀란 듯이 요코를 바라보고 있을 뿐, 특별히 수상한 기척은 없다. 쥐보다는 조금 통통했다. 갈색과 회색의 중간쯤 되는 색의 모피는 풍성했고, 만지면 굉장히 기분좋을 듯 했다. 털끝에 맺힌 물방울은 뭔가의 장식같이 보인다. 꼬리까지 털로 덮여있어, 쥐와 닮아있지만 쥐와는 다른 생물인지도 모른다.
쥐는 몇번인가 수염을 움찔거리다가, 두 발로 터벅터벅 요코를 향해 다가왔다. 회갈색의 털결이 움직였다. 작은 앞발이 요코의 어깨를 만졌다.
「괜찮아?」
요코는 격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들렸지만, 그 말을 한 것은 틀림없이 그 쥐였다.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그래? 움직일 수 없어?」
요코는 잠자코 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금 끄덕였다.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경계를 풀었다.
「어디.」
쥐는 작은, 정말로 어린아이같은 크기의 앞다리를 내밀었다.
「힘내. 조금만 가면 우리 집이 있으니까.」
아아, 요코는 탄식했다.
그것이 마침내 살았다는 데에 대한 안도인지, 실망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응?」
뻗어진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손끝이 조금 움직일 뿐이었다. 쥐가 손을 더 뻗었다. 작고 따뜻한 앞발이 요코의 차가와진 손을 잡았다.
예상외로 힘있는 손에 지탱되어, 작은 집에 닿고나서의 일은 요코는 기억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눈을 뜨고 뭔가를 본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것이 뭐였는지 기억해낼 수 있을만큼 확실하게 주위를 기억할 수 없었다.
깊은 잠과 얕은 잠을 되풀이하다가 겨우 눈을 뜨자, 요코는 볼품없는 집안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완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좁은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 아직 현기증이 도는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서, 필사적으로 기어서 침대 주변을 확인했다. 가구다운 가구는 거의 없다. 간신히 침대 머리맡에 판대기를 짜맞춘 것뿐인 책장이 있고 그 위에 개켜진 천과 검집이 없는 검, 푸른 구슬이 확실히 모두 놓여있었다.
긴장이 풀렸다. 겨우 일어나서 구슬을 목에 걸고, 검과 천을 집어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검에 천을 둘러 이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야, 요코는 자신이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의 상처도 모두 치료가 되어있다. 어깨 아래에 뭔가 축축한 것이 있어서 집어들어보자 물에 적신 천이었다. 일어났을 때 눈치채지 못한 채 떨어뜨린 것이리라. 뺨에 그것을 대자 기분이 좋아졌다. 두터운 천을 겹친 이불을 끌어올려, 구슬을 꽉 쥔 채 눈을 감는다.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살아나고나자, 이런 허접한 목숨이라도 아까운 기분이 든다.
「정신이 들었어?」
뛰어 일어나며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회갈색의 털이 난 큰 쥐가 서있었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한 손에는 쟁반같은 것을, 다른 손에는 손잡이가 달린 그릇을 들고 있었다.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처럼 살고 사람처럼 말하는 한, 짐승처럼 보여도 안심할 수 없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요코의 앞으로, 쥐는 감시의 눈길을 깨닫지 못한 듯 태평스러운 걸음걸이로 걸어온다.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그릇을 침대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열은 어때?」
작은 앞발을 뻗는다. 순간 몸을 움츠리며 요코가 피하자, 쥐는 수염을 움찔거리다 곧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천을 주워올렸다. 요코가 가슴에 꽉 안고 있는 천뭉치를 보았을텐데도 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을 그릇에 던지고, 요코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기분은 어때? 뭔가 먹을 수 있겠어?」
요코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쥐는 수염을 조금 움찔거리고는 테이블 위에서 컵을 집어들었다.
「약이다. 마실 수 있겠어?」
요코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방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요코의 생명을 위험하게 만든다. 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컵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눈앞에서 조금 마셔보인다.
「그냥 약이야. 조금 쓰지만, 마실 수 없는 수상한 물건은 아니니까. 응?」
그렇게 말하며 내민 컵을, 요코는 그래도 받지 않았다. 쥐는 곤란한 듯이 귀밑의 털을 긁었다.
「--뭐, 됐어. 어떤거라면 입에 댈 수 있겠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서는 몸이 버티지 못해. 차라면 마실 수 있을까? 산양 젖은 어때? 아니면 죽이라면 먹을 수 있겠어?」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는 요코를 보며, 쥐는 곤란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넌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어.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으면 그 사이에 했겠지. 그」
쥐는 요코가 안고 있는 천뭉치를 코 끝으로 가리켰다.
「검도 숨겨버렸을테고. 그러니까, 나를 조금만 믿어주지 않겠어?」
새까만 눈동자가 들여다보자, 요코는 겨우 끌어안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응.」
쥐는 만족한 듯이 말하며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요코도 피하지 않았다. 작은 손끝이 이마에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아직 열이 조금 있지만, 많이 내렸어. 진정하고 자고 있어. 아니면 뭔가 원하는거라도 있어?」
요코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물.」
쥐는 작은 귀를 몇번인가 움직였다.
「물인가. --잘됐다, 제대로 말할 수 있잖아. 곧 식힌 물을 가져올테니까, 일어나 있으려면 이불이라도 뒤집어쓰고 있어.」
요코가 끄덕이는 것도 보지 않고서, 쥐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짧은 털결로 뒤덮인 꼬리가 균형을 잡으려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곧 쥐가 주전자와 컵, 작은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조금 뜨거운 식힌 물이 맛있었다. 몇 컵인가를 더 마시고서, 요코는 그릇 안쪽을 훔쳐보았다. 알콜의 냄새가 났다.
「...이건, 무엇?」
「술에 절인 복숭아를 설탕물로 익힌거야. 이거라면 먹을 수 있겠지?」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쥐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쥐는 수염을 크게 움직였다. 뺨의 털이 통통하게 부풀어오르며 눈이 조금 가늘어져 웃는 듯이 보였다.
「나는 라크슌이라고 해. 너는?」
요코는 주저하다, 이름만을 말했다.
「요코.」
「요코인가. 어떻게 쓰지?」
「밝을 양(陽), 아이 자(子).」
「아이 자(子)?」
라크슌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다가 헤에,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한 이름이네. 어디에서 왔지?」
대답하지 않는 것도 곤란할 듯 해서, 요코는 주저주저하며 대답했다.
「경국(慶國).」
「경국? 경국의 어디에서?」
그 이상은 알지 못했으므로 적당히 대답했다.
「배랑(配浪).」
「그건 어디지?」
라크슌은 조금 곤혹한 듯이 요코를 바라보다가, 귀밑을 긁었다.
「뭐, 그런건 어쨌든 상관없겠지. 어쨌거나 자라. 약, 마실 수 있겠어?」
이번에는 요코가 물어보았다.
「라크슌은 어떤 글자?」
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즐거울 락(樂)에, 뛰어날 준(俊).」
- 2 -
그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서, 이 집에는 라크슌밖에 없는 듯 했다.
「꼬리만 달려있으면, 그걸로 됐다 이거군. 응?」
깊은 밤, 참대의 발치에 푸른 원숭이의 머리가 나타났다.
「어쨌건 배신할게 뻔하잖아. 틀린가?」
이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지만, 라크슌은 여기에서 자지 않는다. 그밖에 침실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자고 있는지 요코로서는 알 수 없다.
「나가는 쪽이 낫지 않겠어? 안그러면, 한순간에 숨통이 끊겨버릴 텐데. 안그래?」
요코는 대답하지 않는다. 묵묵히 듣고 있자, 푸른 원숭이는 같은 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것은 요코의 불안이다. 원숭이는 그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온다. 점점 부풀어오르는 불안을 먹기 위해서. --분명히 그런 것이리라.
슬슬 이불 위를 미끄러지며 원숭이가 머리맡까지 다가온다. 작은 머리가 옆으로 누워있는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쁜 짓을 해오기 전에 선수를 치는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 알고 있잖아?」
요코는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라크슌을 신용하는 게 아니야.」
「헤에?」
「이 상태로는, 움직일 수 없을지도 몰라. 적어도 검을 쥘 수 있게 되지 않고서는, 나가봤자 괴물의 먹이가 될 뿐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른손의 상처는 깊다. 하루 종일 구슬을 대고 있어도, 아직 악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녀석은 네가 해객이라는 걸 눈치챘는지도 모른다구? 그렇게 속편하게 널부러져 있어도 괜찮을까나. 지금이라도 병사들이 들이닥칠지도?」
「그렇다면 검으로 답할 수밖에. 병사 네, 다섯 명쯤이 닥친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있어. 그때까지는 이용하겠어.」
--여기에는 요코의 편 따위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했다. 적어도 검을 쥘 수 있게 될 때까지. 조금만 더 체력이 돌아올 때까지. 그때까지는, 안전한 침상과 먹을 것과 약이 필요한 것이다.
라크슌이 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쥐는 요코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준다. 적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질 때까지는 이 상태를 이용한다.
「밥에 독이 들어있지는 않았어? 약은 정말로 약인걸까나.」
「조심하고 있어.」
「뒤가 없다고 확언할 수 있겠어?」
푸른 원숭이는 요코의 불안을 들춰간다. 거기에 하나하나 답하는 것은, 자신에게 뭔가를 들려주는 것과 흡사했다.
「적극적으로 내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이 있었다면, 의식이 없는 동안에 뭐든 할 수 있었어. 지금 식사에 독 따위 섞지 않아도 죽일 찬스 따위 얼마든지 있었어.」
「뭔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원군이라던가 뭐라던가.」
「그렇다면,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해두겠어.」
「어쨌거나 신용을 받아놓고서, 나중에 배반할 속셈이겠지.」
「그렇다면, 라크슌의 의도가 보일 때까지는 신용하는 척 하겠어.」
원숭이는 갑자기 깔깔 웃었다.
「근성이 늘었잖아, 응?」
「......깨달은거야.」
이 세계에 요코의 편 따위는 없다는 것을.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다는 것을. 자신은 어디까지나 혼자라는 것을.
그래도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 내 편도, 살아갈 장소도 없는 목숨이니까 더더욱, 마음속 깊이 아쉬운 것이다. 이 세계의 모두가 요코의 죽음을 바란다면, 살아남아 보이겠어. 원래 있던 세계의 모두가 요코의 귀환을 바라지 않는다면, 돌아가 보이겠어.
포기하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서든 포기할 수 없어.
살아남아서, 케이키를 찾아 반드시 저쪽으로 돌아간다. 케이키가 적이건 내 편이건 관계없어. 적이라고 한다면, 위협해서라도,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게 하겠어.
「돌아가서 뭘할건데.」
「그건, 돌아가고 나서 생각할거야.」
「눈 꼭 감고 죽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어?」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는 목숨이니까, 나만이라도 아쉬워하기로 한거야.」
「--그 쥐는 배신할거야.」
요코는 원숭이를 돌아보았다.
「난 라크슌을 믿지 않으니까, 배신 따위 당할 리가 없잖아.」
훨씬 빨리 눈치챘으면 좋았을 것이다. 요코는 해객이다. 그러니까 쫓기는 것이다. 해객에게 내 편 따위는 없다. 이 세계의 어디에도 머물 곳 따위 없다. 그것만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타츠키에게도 마츠야마에게도 멍청하게 속아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좋게 신용해버리고서 배신당하는 일 따위 없었을 터였다. 신용하는 척 하면서 상대를 이용하고, 살아남기 위한 방책을 세울 수 있었을텐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한다. 그게 어디가 나쁘다는 거야. 타츠키도 마츠야마도 요코를 이용해서 푼돈을 벌려고 했다. 그렇다면, 요코가 라크슌을 이용해서 목숨을 잇는 것에 무엇이 두려울까.
「훌륭한 악당이 될 것 같군, 안그래?」
「그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중얼거리고, 요코는 손을 저었다.
「졸려. ----돌아가.」
원숭이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괴로운 것을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대로 뒤로 돌아서더니 갑자기 이불 아래로 가라앉듯이 모습을 감췄다.
그것을 지켜보다가, 요코는 조금 웃었다.
저것은 요코의,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불안까지 말해주니까 자신의 기분을 정리하는 데에 쓸모가 있다. --이용할 수 있다.
「확실히, 훌륭한 악당이 될 것 같군......」
가벼운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만은 사양이다. 두 번 다시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는 하지 않는다. 반드시, 자신을 지켜보인다.
「그러니까, 그걸로 된거야.」
산길에서 만났던 모자. 요코가 모자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 배신할만한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틈을, 라크슌에게도 주지 않는거야.
그렇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어.
왜 요코는 이런 세계에 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걸까. 왜 케이키는 요코를 주인이라고 불렀던 걸까. 적이라는 것은 어떤 적일까. 적의 목적은 무엇이며, 왜 요코를 노리는 걸까. 그 여자는--케이키와 같은 금발의, 그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요코를 덮쳤던 걸까.
--요마는 특정한 누군가를 노리거나 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요코는 습격당했던 것일까. 그 여자는 검은 개의 시체를 안았다.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여자와 한 패였던 것일까. 케이키의 주위에 요마가 있던 것처럼, 그 여자의 주위에도 요마가 있어서 그것들에게 요코를 덮치도록 했다는 걸까. 하지만, 그 여자 역시 누군가로부터 요코를 덮치도록 명령받고 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명령한 것은 누구였을까. 케이키도 역시,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고 요코에게 관여했던 것일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반드시 누군가에게 답을 들어내고 말겠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자, 길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요코는 손을 들어 자신의 손끝을 곰곰히 바라보았다.
부러지고 깨져나간 손톱은 날카로운 모양을 하고 있다. 마물의 발톱같았다.
--허해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요마나 신선뿐.
요코는 신도 신선도 아니다.
--그럼 요마인가.
허해의 절벽에서 붉은 짐승으로 변하는 꿈을 꿨었다. 그것은 정말로 꿈이었던 것일까?
이쪽으로 오기 전, 요코는 오랫동안 요마에게 습격당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짐승이 되는 꿈도, 역시 예지몽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붉게 변한 머리카락도, 푸르게 변한 눈도, 전부 짐승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하나라고 한다면? 요코는 실은 인간이 아니라, 요마였었다고 한다면.
그 생각은 굉장히 무섭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럴듯하게 생각되었다.
노성을 지르고 절규하며, 검을 휘두르고 다른 것들을 위압하는 것. 그런 행동에는 기묘한 고양감이 숨어있었다. 요코는 태어났던 세계에서 소리를 높이는 일 없이, 다른 이들에게 눈총받는 일 없이 살아왔었고 그것에 죄악감을 느껴왔었다. 그건 정말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요코 자신의 무의식이, 스스로가 요마이며 흉폭한 짐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는 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해한 짐승인 척 하려고 한 결과인게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누구나 요코를 「속을 모르겠다」고 말했던건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잠에 빠졌다.
- 3 -
그 집은 전원지대에 위치한, 아주 작고 볼품없는 건물이었다. 이쪽의 주거는 대체로 소박한 편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집이 특히 살림이 어려운 편에 든다는 것쯤은 요코도 알 수 있다.
전답의 안에 있는 집이라는 것은 보통 몇 채의 다른 집들과 집락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이 집은 보기드물게 홀로 떨어져 있었다. 산의 사면에 위치한 이 집의 주변에는 다른 집이 보이지 않는다.
쥐의 집이라고 말하자면 작은 집을 상상할 듯 하지만, 규모 자체는 작지만 지극히 평범한 건물이었다. 건물만이 아니라, 가구도 일용품도 모든 것이 인간의 사이즈에 맞춰져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라크슌, 부모님은?」
마침내 일어나서 운신할 수 있게 되고서, 요코는 라크슌을 도와 부뚜막의 커다란 남비에 물을 부으면서 물어보았다. 물통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있는 채였지만, 그 아래의 상처는 이미 대부분 막혀있었다.
부뚜막에 장작을 쌓고 있던 라크슌은 요코를 돌아보았다.
「아빠는 없어. 엄마는 나가있고.」
「여행? 꽤 기네. 멀리로?」
「아니. 가까운 마을로. 조금 일이 있어서 말야. 그저께쯤에는 돌아왔어야 했는데,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꽤나 혹사당하나봐.」
그럼, 어머니가 당장이라도 돌아올지도 모른다, 라고 요코는 마음속으로 새겨두었다.
「무슨 일 하시는데?」
「겨울에는 관청의 잡역부. 보통때는 소작농. 여름에도 저쪽에서 부르면 잡역을 하러 가.」
「그래.....」
「요코는 어디로 가던 중이었어?」
질문을 받고 요코는 조금 생각했다. 어딘가로 가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걷고있었을 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케이키라는 사람, 몰라?」
라크슌은 털에 붙은 나무조각을 털었다.
「사람을 찾는거야? 그거, 이 근처에 사는 사람?」
「어디에 사는지는 몰라.」
「안됐지만, 난 케이키라는 사람은 몰라.」
「응. --이것말고 할 일은?」
「없어. 병상에서 막 일어난 참이니까, 앉아 있어.」
말하는 대로, 요코는 노곤한 몸을 위자에 맡겼다.
작은 부엌 겸 식당의 바닥은 흙 그대로로, 놓여있는 테이블도 의자도 삐걱거리는 낡은 물건이었다.
요코가 앉아있는 옆의 의자에는 천으로 두른 검이 놓여있다. 한시라도 검을 몸에서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 요코를, 라크슌은 특별히 책망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생각에서 나온 행동인지는 알 수 없다.
「요코는 왜,」
라크슌은 윤이 나는 털로 뒤덮인 등을 보인 채, 어린아이같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남자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어?」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기에, 들켰으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은 위험하니까.」
「그런가.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흙그릇을 들고 온다. 뭔가를 달인 듯한 향기가 작은 방 안에 가득 찼다. 컵을 두 개, 테이블 위에 꺼내고서 쥐는 요코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 검은 검집이 없는거지?」
「........잃어버렸어.」
대답하면서 검집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허해를 넘어올 때 검과 검집을 떨어뜨려서는 안된다고 들었지만, 검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무너가 재난이 닥쳐오는 기색은 없다. 역시 그것은, 구슬을 잃어버려선 안된다는, 그런 의미였던 거겠지.
흐응, 하고 중얼거리며 라크슌은 의자 위로 기어올랐다. 그 동작은 어린 아이와 매우 비슷했다.
「어딘가에서 검집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모처럼의 좋은 검이 망가져.」
「....응. 그렇구나.」
관심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요코를, 라크슌은 새까만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조금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코는 배랑에서 왔다고 했었지?」
「.............응.」
「그건 경국이 아니라, 전현(木+眞縣)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거 아냐?」
그러고보니 그런 곳이었던가라고, 요코는 멍하니 생각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큰 식(蝕)이 있었다던데.」
이 말에도 요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해객이 붙잡혔다가, 도망쳤다던가.」
요코는 라크슌을 노려보았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검을 쥐고 있었다.
「무슨 얘기?」
「16, 7세의 여자로 빨간 머리. 검을 가지고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 검에는 검집이 없다. ......요코는 머리 염색하고 있었지.」
손잡이를 쥐고, 시선을 라크슌에게 집중한다. 쥐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보다 표정이 부족하다.
「관청에서 그런 연락이 왔어.」
「.........그래서.」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마. 고발할 생각이었으면 관청의 사람들이 왔을 때에 얘기했겠지. 큰 상금도 걸려있고 말야.」
요코는 천을 풀었다. 일어서서 검날을 보였다.
「뭐가 목적?」
쥐는 그저 새까만 눈으로 요코를 올려보면서, 비단실같은 수염을 움직였다.
「성질이 급한 녀석이군.」
「나를 숨긴 목적은 무엇?」
쥐는 난처한 듯한 몸짓으로 귀 아래를 긁었다.
「목적이라고 해도 말이야.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놔둘 수 없잖아. 그러니까 돌봐준거고, 한번 도와준 이상 역시 관청에 고발할 생각은 안드니까.」
그런 말에는 넘어가지 않아. 쉽게 남을 믿으면 반드시 후회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해객은 관청에 보내져. 거기에서 기다리는 건 잘해봤자 연금, 심하면 목을 베이지. 어느쪽인가 말하자면, 요코는 후자일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상한 기술을 쓴다면서? 호송하는 중간에 요마에게 습격시켜서, 그렇게 도망쳤다는 얘기던데.」
「그건 내가 시킨게 아니야.」
「그렇겠지.」
쥐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요마가 간단히 사람을 따르겠어. 요코가 부른게 아니라, 요코를 노린거겠지. 안그래?」
「........난 모르겠어.」
「그렇다고는 해도 요코는 역시 나쁜 해객인거겠지. 요마가 노릴만한 인간이니까.」
「...........그래서?」
「현청에 보내지면 십중팔구 끝이야. 도망치는 게 당연하지만,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알고 있어?」
요코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고 있을거야. 이런데를 어슬렁거리고 있던 걸 보면. --엔코쿠로 가.」
요코는 뚫어져라 라크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적어도 요코로서는 읽어낼 수 없었다.
「.......왜.」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내버려둘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웃었다.
「나라고 사형을 받는게 마땅한 악당에게 동정할 정도로 사람이 좋은건 아니야. 하지만, 해객이라는 것만으로 죽게되는 건 참을 수 없겠지.」
「나쁜 해객이잖아.」
「관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야. 해객에 좋고 나쁜 것 따위 있을까. 희귀한 것을 기분나쁘게 생각하는 것 뿐이야.」
「나쁜 해객은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미신이다.」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말투에 오히려 경계심이 생겼다. 마찬가지로 미신이라고 말한 사람이 이 나라에 있었다. 그것은 인간 여자였었지만.
「그래서? 그 엔코쿠라는 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말?」
「살 수 있지. 엔코쿠의 왕은 해객을 꺼려하지 않아. 거기에서는 해객도 다른 인간과 똑같이 생활하고 있어. 해객에 좋고 나쁜게 없다는 증거지. 그러니까, 엔코쿠에 가는게 좋을거야. --그 요란한 것 좀 치우라구.」
요코는 주저하다, 주저하다, 간신히 검을 내렸다.
「앉아. 차가 식겠어.」
요코는 겨우 의자에 앉았다. 라크슌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해객이라는 것이 들통난 이상 빨리 이곳을 나가는 것이 좋겠지만, 적어도 엔코쿠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 근처의 지리를 알겠어?」
요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크슌은 끄덕이며, 컵을 안고서 의자에서 내려왔다. 검을 쥔 채인 요코의 발치에 다가가, 흙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기는 안양현(安陽縣), 녹북(鹿北)이라는 곳이야.」
라크슌은 간단한 지도를 흙 위에 그려간다.
「여기가 허해(虛海), 전현은 여기. 배랑은 이 근처일테니까 요코는 남서쪽, 한마디로 교국(巧國)의 중앙을 향해 걷고있었다는 거야. 도망치려면 교국을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래서야 거꾸로지.」
요코는 지도를 복잡한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믿어도 좋은걸까. 지도의 어디엔가 거짓이 없는걸까. 의심하면서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것이 지금 가장 절실한 정보였다.
「서쪽이 북량현(北梁縣), 거기를 똑바로 서쪽으로 지나가면 청해(靑海)라는 내해(內海)가 나와. 청해 건너편이 안국(엔코쿠, 雁國)이다.」
라크슌의 작은 손가락이 약도와, 놀랄정도로 미려한 글자를 써내려갔다.
「우선, 북량을 향해서 가면 되는건가...」
「그래. 최종적으로는 아안(阿岸)이라는 항구로 가면 돼. 아안에서는 안국으로 가는 배가 있으니까.」
「..............배.」
배를 탈 수 있는걸까. 항구가 감시되고 있다면, 뻔히 알면서 함정으로 뛰어드는 짓이 된다.
「괜찮아.」
요코의 독백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라크슌은 웃었다.
「전현에서 교국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똑바로 북쪽으로 가서 산을 넘어 경국으로 가는게 제일 빨라. 관리들도 설마 이런 곳으로는 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고. 길을 잘못 잡은 것이 행운이었어. 수배서는 돌았지만, 붉은 머리의 젊은 여성이라고. 눈에 띄는 검만 어떻게 숨기면 그렇게 쉽게 들통나지는 않을거야.」
「.....그래.」
요코는 일어섰다.
「고마워.」
라크슌은 놀란 표정으로 요코를 올려다보았다.
「이봐. 설마 지금 나갈 생각이야?」
「서두르고 싶으니까. 신세만 지게 되어서 미안했어.」
라크슌도 일어섰다.
「기다려. 정말로 성질급한 녀석이군.」
「하지만.」
「안국으로 가려면 어떻게 할건데. 아무나 붙잡고서, 케이키라는 녀석을 찾으면서 걸어갈거야? 배를 타는 방법이라던가, 안국에서 보호를 요청하는 방법은 알고 있어?」
요코는 시선을 피했다. 목적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여행에 비해서 훨씬 앞길이 열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넘어야만할 어려움은 이렇게나 많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실제로 직면하게 될 어려움의 몇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
「일에는 준비라는 게 있는거야. 그렇게 서둘지 마. 지금 서둘러봤자, 나중에 곤란해질 뿐이야. 안그래?」
요코는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깊이에서 함정을 조심해야한다고 외치는 자신이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라크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밥이라도 먹을까. 어쨌든 체력을 붙여둬. 아안까지는 한달은 걸리니까.」
요코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체력이 완전히 돌아로 때까지. 그때까지는 라크슌의 의도도 알 수 있겠지. 그저 단순한 호의인지, 아니면 뭔가 깊은 책략이 있는 것인지. 안국에--아안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알게된 이상, 라크슌의 진의만은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4 -
「꽤나 큰 식(蝕)이었다던데?」
라크슌은 점심설겆이를 하면서 말했다.
「...........배랑의 장로도 그렇게 말했어.」
「전현의 동쪽 일대에서, 올해 보리는 전멸이라더군. 불쌍하게도.」
요코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슴속 어딘가가 지끈 아파왔다.
「요코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그런 게 아니야.」
부뚜막의 재를 쓸어내고 있던 요코의 손을 가볍게 두드린 것은, 짧은 털로 덮힌 꼬리였다.
「해객이 오니까 식이 일어나는 게 아냐. 식이 일어나니까 해객이 오는거다.」
요코는 라크슌이 시키는대로 나무상자 안에 재를 버렸다. 타다남은 나무조각을 주워서 다른 상자에 담았다.
「물어봐도 될까?」
「뭘?」
「식이란건, 뭐지?」
태풍과 비슷한 것이라고 배랑의 장로에게 들었지만,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른다.
「아아, 식을 모르는구나. 저쪽에는 식이 없나보군.」
「일식이나 월식은 있지만.」
「비슷한거야. 해나 달이 가려지는 건 아니지만. 으음, 태풍 비슷한 걸까. 태풍은 공기가 흐트러지지만 식은 기(氣)가 흐트러져.」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식으로?」
「그런 일도 있어. 그냥 태풍처럼 심한 바람이 부는 식도 있지만, 그런 식은 대단한게 아니야. 지진이 나거나 벼락이 떨어지고, 강이 역류하거나 갑자기 땅이 푹 꺼지기도 해.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한꺼번에 닥친다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아. 배랑에서는 요우치라는 호수가 넘쳐버렸다고 하던데. 이미 호수는 흔적도 없나봐.」
요코는 재를 씻어내던 손을 멈췄다.
「그렇게나 심한 재해인거야?」
「경우에 따라서이긴 하지만. 우리들은 태풍보다도 식이 무서워. 식은 뭐가 일어날지를 모르니까.」
「왜 그런 일이.」
라크슌은 진지한 얼굴로, 세심한 손놀림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서로 겹쳐져서 섞이는 것을 뜻한다고 해. 원래대로라면 별개였을 것들이 섞이니까, 재해가 생기는거지. 잘은 모르지만, 그런거라고 생각해.」
「이쪽과 저쪽......」
이 집에서 마시는 차는 녹차같은 색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혀 냄새가 다르다. 맛은 허브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저쪽이라는건 허해 너머를 말하는 거겠지. 이쪽은 이쪽이고. 이름따위 없어.」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해는 육지를 둘러싸고 있어. 허해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가도가도 끊임없이 허해가 이어져 있어서 끝이 없어. 적어도 그렇게 말해지고 있지. 별난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 그 끝을 보겠다고 배를 타는 일도 있다고 하지만, 돌아온 녀석은 없는 것 같아.」
「그럼 여기는 육지가 평평한거야?」
라크슌은 의자로 기어오르다가 놀란 표정으로 요코를 바라보았다.
「지면이 평평하지 않으면 곤란하잖아.」
기운이 빠져서 웃음이 나왔다.
「............이쪽 세계는 어떤 모양인걸까.」
라크슌은 테이블 위에 있던 호두를 손에 집어들었다.
「세계의 한가운데에는 수우산이있어.」
「수우산?」
「숭고(崇高)한 산(山)이라고 써. 정말 숭고(崇高)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어. 중악(中岳)이나 중산(中山)이라고도 하지. 그 사방에 동서남북의 산이 있어. 동악(東岳)이나 동산(東山)이라는 식으로도 부르지만, 동서남북 각각을 봉산(蓬山), 화산(華山), 곽산(雨+佳山), 항산(恒山)이라고 부르는게 보통이지. 동악은 옛날에는 태산(泰山)이라고 불렀어. 북쪽에 있는 대국(戴國)의 왕이 호를 대(代)에서 태(泰)로 바꾸고 태왕(泰王)이라고 칭하게 되면서 봉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들었어. 이 다섯 개의 산이 오산(五山)이야.」(*대(戴)와 태(泰)는 일어로 모두 발음이 '타이'입니다)
「헤에.....」
「이 오산의 주변에 황해(黃海)가 있어. 바다라고는 해도, 물이 있는 바다는 아냐. 거친 바위산과 사막, 늪지와 수해(樹海)라는 거지.」
라크슌의 손가락이 그려나가는 문자를 요코는 지켜보았다.
「본 적은 없어?」
「있을 리가 없지. 황해의 주변은 사금강산(四金剛山)이 둘러싸고 있어. 금강산 안쪽은 인간의 세계가 아냐.」
「그래......」
마치 어딘가에서 본 옛날 지도같은 지형이라고 생각했다.
「금강산의 주변에는 네 개의 내해(內海)가 있고, 팔방으로 여덟 나라가 있지. 그 둘레가 허해야. 육지에 가까운 쪽에 큰 섬이 네 개 있어. 그 네 개의 섬나라와 금강산 주위의 여덟 나라를 모두 합쳐서 십이국.」
요코는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호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꽃잎처럼도 보인다. 오산을 중심으로 꽃잎처럼 배치된 나라들.
「그 밖에는 없어?」
「없어. 그 바깥은 허해뿐이야. 그대로 세상의 끝까지 아무것도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그저, 라고 라크슌은 중얼거렸다.
「호해의 동쪽 끝에는 이상한 섬이 있다는 얘기도 있어. 뭐, 일종의 전설이지. 그것을 봉래(蓬萊)라고 해. 다른 이름으로는 일본(日本)이라고도 부르지.」
그렇게 말하면서 라크슌이 쓴 것은 왜(倭)라는 문자였다.
「왜? 일본?」
실제로 문자를 써보이자 「왜(倭)」쪽을 가리킨다.
요코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번역되어왔다는 얘기인가.
「해객은 왜에서 온다고 하더군.」
이번에는 확실하게 '왜'로 들렸다. 요코가 말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겠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해객의 말을 들어보면 어딘가에 왜라는 나라가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 배를 타고 왜를 찾아서 떠난 녀석들도 있지만, 역시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아.」
혹시 정말로 일본이 허해의 저편에 있는 거라면, 배를 동쪽으로 향하면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수단으로는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달그림자를 통해 건너온 요코는 알고 있다.
「반대로, 금강산의 어딘가에 곤륜(崑崙)이라는 산이 있다는 전설도 있어. 거기를 중국(中國)이라고 부르지. 중국에서는 산객(山客)이 와.」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한(漢)이라는 문자를 썼다.
「산객? 그럼, 해객 말고도 이쪽으로 쓸려와버린 사람이 있는거네.」
「그렇지. 해객은 허해 기슭에, 산객은 금강산의 기슭에 도착해. 이 나라에는 산객은 많지 않지만, 어느 쪽이건간에 쫓기게 되는거지.」
「그런가.....」
「한도 왜도, 보통 사람은 오갈 수 없어. 그게 가능한건 요족(妖族)과 신선뿐이라고 하지. 단, 식이 일어나면 저쪽의 사람이 이쪽으로 휩쓸려오는 경우가 있어. 그것이 산객과 해객.」
「흐음...」
「한이나 왜에서는, 집은 금은과 보석으로 지어져 있고 나라는 풍요로와서, 농민이라도 귀족같은 생활을 한다고 해. 사람은 모두 하늘을 날아다니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어린아이라도 요마를 쓰러뜨릴 수 있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하지. 요마나 신선이 신통력을 가진 것도, 저쪽에 가서 깊은 산속의 샘물을 마셨기 때문이라던가.」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묘한 얘기이다. 원래 있던 세계에 돌아가서 남들에게 말하면 지어낸 동화로 들리겠지. 이 세계에도 동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한 세계, 라고 늘 생각해왔지만 정말로 이상한 것은 이 세계인걸까, 요코인걸까.
대답이라면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해객은 쫓기는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 5 -
「....교국에 흘러온 해객들은 모두 죽게 되는거네. 식과 해객은 뗄 수 없는거니까.」
한동안 멍하니 과거에도 수없이 있었을 해객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다, 요코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는거지. ....요코는, 직업이 뭐야?」
「학생.」
그런가, 라크슌은 왠지 감개깊은 듯이 말했다.
「해객 중에서는, 이쪽에서는 알지 못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지식을 지니고 있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 그런 인간은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아서 생활할 수 있지만 말야.」
과연. 요코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요코에게는 이 세계에 뭔가를 제공할만한 지식이 없다.
「..........왜에 돌아갈 방법은 몰라?」
요코가 묻자, 라크슌은 명약하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난 몰라. ......이건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지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아마도, 그런 방법은 없을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가 없어. 올 수 있었자면 돌아갈 방법도 반드시 있을텐데.」
요코의 말에 라크슌은 수염을 축 늘어뜨렸다. 휴우, 하며 목을 울렸다.
「사람은 허해를 건널 수 없어, 요코.」
「실제로 이렇게 건너왔잖아. 난 여기에 있는걸.」
「오는 것은 가능해도, 가는 것은 불가능해. 실제, 해객이건 산객이건 돌아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럴 리가........없어.」
돌아갈 수 없다, 라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식은? 식을 기다리면 안될까? 그럼 돌아갈 수 있잖아.」
기세좋게 뱉어낸 요코의 말에 라크슌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어디서 식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몰라. 아니, 알 수 있는 식도 있지만 사람은 저쪽으로 갈 수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요코는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케이키가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 어디에서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왜에서 고조(蠱雕)에게 쫓겨서 이쪽으로 왔어.」
「고조? 도망쳐서, 이쪽으로라고?」
「응. 케이키라는 사람이.」
「요코가 찾고있는 녀석인가?」
「응. 그 케이키가, 날 이쪽으로 데려왔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마들이 나를 노리고 있으니까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쪽으로 올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요코는 라크슌을 보았다.
「라는 것은 몸을 지켜야할 필요가 없어지면 돌아갈 수 있다는 거 아냐? 내가 어떻게든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반드시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했어.」
「말도 안돼.」
「케이키는 하늘을 나르는 짐승을 데리고 있었어. 라크슌처럼 말을 하는 짐승. 똑바로 날면 편도로 하루라고도 했어. 편도, 라는 것은 돌아갈 경우를 생각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여행에 쓰는 말이 아니야. .....틀려?」
요코가 확인하듯이 그렇게 말해도, 라크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라크슌?」
「나로서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게 큰 일이야? 내가 말한게.」
「엄청난 일인걸. 고조같은 요마가 나온다면 이쪽은 대소동이야. 근처의 마을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그것도 그 고조가 특정한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다니. 일부러 저쪽으로 말야.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봐. --그렇게 해서 케이키라는 인간이 너를 이쪽으로 데려왔다는 건가.」
「응.」
「요족도, 설령 신선이라고 해도 오고갈 수 있는 것은 자기 혼자 뿐이라고 들었어. 케이키라는 녀석이 누구건간에,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는 것 따위 들어본 적이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나로서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만은 알겠어.」
라크슌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있다가, 새까만 눈을 요코에게 향했다.
「그래서 넌, 어쩌고 싶어? 무엇보다 몸을 지키고 싶은거야, 아니면 돌아가고 싶은거야.」
「...돌아가고 싶어.」
요코가 말하자, 라크슌은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 어쨌거나 안국에 가는 편이 낫겠어.」
「응. 그리고서는?」
「관리나 주후(州候) 선에서 해결될만한 일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아. 안국에 가서, 연왕(延王)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안국의 안(雁)과 연(延)은 일어로 모두 '엔'이라고 발음됨)
요코는 멍하니 라크슌이 쓴 문자를 바라봤다.
「연왕...... 임금님?」
라크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국의 왕은 대대로 연(延)이라고 칭해.」
「하지만, 임금님이 힘을 빌려줄까?」
「모르지.」
그런, 요코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모르겠지만, 이대로 교국에 있는 것 보다는 나아. 교국의 주상에게 조력을 청하는 것 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어. 연왕은 타이카였으니까.」
「타이카?」
「태(胎), 과(果). 저쪽에서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거야. 아주 드물게 그런 경우가 있어. 원래는 이쪽 사람인데도, 실수로 저쪽에서 태어나게되는 일이.」
요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일이?」
「아아. 정말로 드물어. 라고는 해도, 그게 우연히 저쪽에서 태어나게 되는 일 자체가 드문건지,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문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흐음.」
「이쪽에는 유명한 태과가 세 명 있어. 안국 연왕, 연 타이호, 대국 태 타이호.」
「타이호?」
「왕을 보좌하는 상담역같은 거야. 최근에 태 타이호는 죽었다는 소문이지만. 태왕은 행방불명이고, 나라는 혼란해져서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어. 역시 안국을 찾아가야겠지.」
요코는 조금 망연한 채 앉아있었다. 많은 지식을 급하게 쑤셔박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갑자기 목표가 생겨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왕을 찾아간다는 것은, 재상이나 대통령을 찾아가는 것에 필적하는 일이겠지.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런 엄청난 일에 말려들어 버린건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났다.
- 6 -
바깥에 있는 판자문을 열고 모습을 보인 것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라크슌.」
이름을 불리자 쥐는 고개를 들었다.
「엄마.」
수염을 소리내며 움직였다.
「묘한 손님을 주워버렸어.」
요코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돌아온 여자는 틀림없이 인간으로 보인다. 그녀도 또한 놀란 듯이 라크슌과 요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님이라니. 너, 이 아가씨, 어떻게 된거야?」
「숲에서 주웠어. 저번에 전현에서 있었던 식 때문에 이쪽으로 쓸려왔대.」
어머나, 라고 중얼거리며 여자는 라크슌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한 표정이 얼굴을 덮었다.
요코는 몸을 긴장시켰다. 이 여자도 전현에서 도망쳐온 해객의 소문을 들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라크슌처럼 요코를 숨겨줄 것인가.
「....세상에, 힘들었겠네.」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요코를 보고 여자는 웃었다. 그리고는 라크슌을 돌아보았다.
「뭐야, 너. 그럼 부르지 그랬니. 아가씨의 간병을 네가 제대로 할 수 있었겠어?」
「제대로 했다구.」
「어땠을까나.」
웃으며, 여자는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요코에게 시선을 던졌다.
「...미안해요. 난 용무가 있어서 나가있었으니까. 라크슌은 제대로 당신을 도와주던가요?」
「아, .......네.」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나서 움직일 수 없게된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 하며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코의 곁으로 걸어왔다.
「이젠 괜찮은거야, 일어나도?」
「예. 정말로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요코는 방심하지 않고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라크슌은 괜찮다. 짐승이니까. 하지만 여자는 신용할 수 없다. 신용하는 것이 두렵다.
「그러면 더더욱, 엄마를 불렀어야지. 생각이 짧구나.」
여자가 말하자 라크슌은 불만스러운 듯이 코끝을 들었다.
「제대로 돌봤어. 몸도 완전히 좋아졌고.」
여자는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잘됐네. ...일어나있어도 힘들지 않아? 아직 쉬고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아아, 이렇게 얇은 차림으로. --라크슌, 옷을 꺼내줘.」
당황하며 라크슌이 옆방으로 달려갔다.
「차도 완전히 식어버렸잖아. 잠시만 기다려. 지금, 새로 끓여줄테니까.」
현관문을 확실하게 안쪽에서 잠그고서 터벅터벅 우물쪽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요코는 지켜보았다. 얇은 상의같은 옷을 안고 돌아온 라크슌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어머니?」
「그래. 아빠는 없어. 굉장히 예전에 돌아가셨거든.」
라크슌의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이었을까, 쥐였을까?
「진짜 어머니?」
주저주저하며 물어보자, 라크슌은 이상하게 느낀 듯 하다.
「물론 친엄마. 엄마가 날 땄으니까.」
「따?」
라크슌은 끄덕였다.
「리보크--마을(里)의 나무(木)--에서 땄어. 내가 든 열매를.」
거기까지 말하다가 라크슌은 핫하고 깨달은 듯이,
「저쪽에서는 아기가 엄마 뱃속에 생긴다는 거 정말이야?」
「.....응. 보통은 그래.」
「배에 나무열매가 생기는거야? 그럼 어떻게 따지? 배 아래에 매달리는건가?」
「딴다는거, 잘 모르겠어.」
「나무에 열린 란카를 따는거야.」
「란카?」
「알(卵)의 열매(果). 이정도 크기의.」
라크슌은 한아름정도의 크기를 표시했다.
「노란 색의 열매로, 안에 아이가 들어있어. 그게 리목(里木)의 가지에 열리면 부모가 가서 따는거야. 저쪽에서는 난과(卵果)가 안생겨?」
요코는 가볍게 이마를 눌렀다. 이건, 두려울정도로 상식밖이다.
「조금 다른 것 같아...............」
라크슌은 대답을 기다리듯이 요코를 보았다. 요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쪽에서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 생겨. 엄마가 낳는거야.」
라크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닭처럼?」
「조금 다르지만, 그런 느낌일까나.」
「어떻게 생기는건데? 뱃속에 가지가 있는거야? 뱃속에 열린 열매는 어떻게 따는거지?」
「으-음...........」
요코가 또다시 머리를 감싸쥐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자, 자. 차를 끓일테니까. 배고프지는 않고?」
라크슌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요코의 사정을 들으면서, 재빨리 찐 빵같은 과자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라크슌은 작은 손으로 큰 빵덩어리를 쥐고서 말했다.
「안국에 가보는게 좋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던 참이었어.」
어머니는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게 좋겠어.」
「그래서, 난 요코를 칸큐우까지 데려다줄게. 입을 것을 마련해줘.」
라크슌이 말하자, 어머니는 확연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너.」
「걱정할 거 없어. 잠시 갔다오는 것 뿐이니까. 뭐, 이 지방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을 배웅하는 것 뿐이야. 엄마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혼자서도 괜찮잖아?」
어머니는 잠시 라크슌을 바라보다가, 조금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조심하거라.」
「라크슌.」
요코는 말을 잘랐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수는 없어. 길이라면 들었으니까 어떻게건 될거야.」
동행자가 생기는 것은 두렵다, 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까의 지도를, 뭔가에 적어주었으면 해. 귀찮게해서 미안하지만.」
「요코. 안국에 들어가는 것까지라면 어쨌거나, 왕을 찾아가는 것은 너만으로는 무리야. 설령 길을 안다고 해도, 칸큐우까지는 세 달 이상의 거리야. 그 사이에 먹을 것은 어떻게 할건데. 잘곳은 어떻게 하고? 돈은 가지고 있어?」
요코는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갈 수 없어. 넌 이쪽의 일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잖아.」
요코는 생각에 잠겼다.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시야의 끝에 검뭉치가 들어왔다.
확실히 라크슌이 동행해주는 편이 좋다. 이 모자는 일견, 요코를 도와주려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이 진짜라고만은 한정할 수 없다. 적인지 우리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갈 곳이 알려진 이상 모르는 채로 방치해둘 수는 없다. 요코가 이곳을 나서자마자 관청에 고발해버린다면 아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함정일테니까.
데리고가면 이 여자에 대해 인질이 된다. 만에 하나 라크슌이 자신에게 있어 위험한 존재가 된다면, 검에 맡기면 끝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굉장히 한심한 생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7 -
라크슌의 집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5일 후의 일이었다.
모자는 요코의 편인 것처럼 대해주었고, 요코로서도 어쨌거나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이 모자 역시 뭔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잖아.」라는 것이 푸른 원숭이의 말이었지만, 그것은 요코 역시 잘 알고있는 것이었다.
라크슌의 어머니는 모든 여행준비를 해주었다. 타츠키의 집보다도 가난해 보이면서, 소박한 것이나마 요코가 입을 옷까지 준비해주었다. 요코에게는 큰 남자옷이었으니, 어쩌면 라크슌의 죽은 아버지의 옷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더욱 요코의 가슴속에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한 선의로 거기까지 해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라크슌은 그래도 괜찮다. 외견만이라도 인간이 아니니까. 모친쪽을 믿을 용기는 요코에게 없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거지?」
참을 수 없어 물어본 것은, 라크슌의 집을 나서고서 건물이 보이지 않게될 즈음이었다. 라크슌은 작은 앞발로 수염 끝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너, 요코 혼자서는 도저히 관궁(칸큐우, 關弓)까지 가지 못할거아냐.」
「길만 가르쳐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뭘. 관궁 구경도 나쁘지 않아. 거기는 꽤 재미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말야. 뭐든지, 저쪽 풍이라고. 왕이 저쪽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왜풍(倭風), 한풍(漢風)?」
「왜풍. 연왕은 왜에서 돌아왔어.」
「그것뿐?」
라크슌은 요코를 돌아보았다.
「요코는 그렇게 날 못믿겠어?」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등에 큰 보따리를 들쳐메고 있는 쥐는, 가슴의 털을 긁었다.
「보는대로, 난 한쥬우야.」
「...한쥬우?」
「반(半)쪽, 짐승(獸). 여기 교국의 왕은 반수를 좋아하지 않아. 해객도 싫어하지. 그 사람은 이상한 것이 싫은거야.」
요코는 가만히 끄덕였다.
「대체로, 교국에는 해객이 많지 않아. 해객은 보통 동쪽 나라에 오니까 많다고 말하자면 많은거겠지만, 실제 그 수는 별로 안돼.」
「어느 정도?」
「글세. 3년에 한 명 있을까 없을까 정도?」
「그래.....」
생각했던 것보다 수가 많다.
「해객이 흘러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경국이 제일 많지. 동쪽 끝에 있으니까. 그 다음이 안국, 교국은 그 다음이야. 교국에는 반수(半獸)도 많지 않아. 어느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나라에는 많아?」
「많아. 적어도 교국만큼 적지는 않아. 이 근처에서 반수는 나뿐이야. 주상은 나쁜 왕은 아니겠지만, 좀 싫고 좋은게 심해서. 해객의 취급도 엄격하고 반수의 대접도 차가워.」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수염을 튕겼다.
「자만은 아니지만, 난 이 근처에서 제일 머리가 좋아.」
요코는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라크슌을 바라보았다.
「영리하고 눈썰미도 뛰어나고, 마음씨도 좋아.」
요코는 조금 웃었다.
「...과연.」
「그래도 난 한사람 몫이 아니야. 언제까지나 반쪽 취급이지. 반밖에 인간이 아니니까. 이 모습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버린 거야. 하지만 이런건, 내 잘못이 아닌걸.」
요코는 조금 끄덕였다. 말하려하는 것은 막연하게 알겠지만, 그럼에도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해객 역시 그렇겠지. 그러니까, 해객이 해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그래.」
라크슌은 이번에는 큰 귀 아래의 털을 긁었다.
「죠쇼우라는 거 알아? 상상(죠쇼우, 上庠)--군(郡)의 학교야. 상상에서의 성적은 첫째였어. 선발로 뽑혀서 소학(小學)에도 추천받았어. 소학이라는 건 순주(淳州)의 학교야. 거기에 가게되면 지방관이 될 수 있어.」
「군은 현보다 위?」
「향(鄕)의 위야. 주에는 군이 몇 개 있어. 몇 개인지는 주에 따라서 틀리지만. 군은 5만호에 4향, 향은 만2천5백호에 5현.」
「......흐음.」
5만호, 라는 숫자는 감이 오지 않았다.
「원래는 상상도 갈 수 없는 거였어. 그런 것을 엄마가 필사적으로 부탁해서 넣어준거야. 성적이 좋으면 더 위에 있는 학교에 가서, 나중에 관리가 되게 되. 난 반쪽 인간이니까 논밭도 받을 수 없지만, 논밭이 없어도 제대로 살 수 있게 돼. 하지만, 소학에 반수는 들어갈 수 없어.」
「.....그렇구나.」
「엄마는 날 상상에 넣기 위해서 자기 땅도 집도 다 팔아버렸어.」
「그럼, 지금은?」
「지금은 소작이야. 근처의 부잣집에 사지(私地)에 고용되서 농사를 지어.」
「사지?」
「위에서 내려주는 땅이 공지(公地). 허가를 받고 개간한 것이 사지. 게다가 일하는 것은 엄마 뿐이고, 나는 일하지 않아.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반수는 고용해주질 않아. 쓸데없이 세금이 나오니까.」
요코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반수 중에는 곰이나 소같은 것도 있어. 그런 녀석들은 사람 이상으로 힘이 있으니까, 라고. 요는 주상이 반수를 싫어한다는 것 뿐이지만.」
「너무하네......」
「해객만큼은 아니야. 뭐, 붙잡히거나 죽거나 하는건 아니니까. 하지만 난 사람 수에 들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논밭을 받지도 못하고 직업을 가질 수도 없지. 엄마 혼자서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을 지탱하는거야. 그러니까 우리 집은 가난한거지.」
「............응.」
「난, 일을 하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목에 걸린 지갑을 가리켰다.
「이건 엄마가 날 안국의 소학에 보내기 위해 모은 돈이야. 안국에서는, 반수라도 제일 높은 학교까지 갈 수 있고,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제대로 한사람으로 인정받고, 논밭도 받을 수 있고 당당하게 호적에도 올라가. 실은 요코를 데리고 가서 부탁해보면, 안국에서 직장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어.」
역시나 순수한 선의만은 아니었던거잖아, 라는 비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의는 아닌지도 모르지만, 선의라고만도 할 수 없다.
「......과연.」
그 목소리에 명백하게 가시가 담겨있었던 거겠지. 라크슌은 멈춰섰다. 잠시동안 요코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코도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자선마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라크슌의 말도 원망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아아. 사람은 결국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니까, 배신이 있는거다. 누구건간에 남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 따위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 8 -
그 날, 저녁무렵이 되어 도착한 것은 곽락(郭洛)이라는 큰 도시였다.
전에도 이쪽 사람과 함께 여행을 했었지만, 이번의 여행은 그 때의 여행과 비하자면 훨씬 궁핍한 여행이었다. 식사는 노점에서 해결하고, 여관은 제일 싼 곳을 잡았다. 1박 50전으로 큰 방을 칸막이로 나눈 것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행비는 라크슌이 내는 것이니까, 요코로서는 불만을 말할 수 없다.
라크슌은 요코를 동생이라고 말해두었다. 인간 여자가 모친이어도 문제없는 거라면, 요코가 동생이라도 상관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고생이 없는 여행이었다. 라크슌은 도중에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해주었다.
「사대(四大), 사주(四州), 사극(四極)으로 십이국.」
「사대?」
요코는 타박타박 걸으면서 라크슌을 돌아보았다.
「그래. 경동국(慶東國), 주남국(奏南國), 범서국(範西國), 류북국(柳北國). 그다지 크거나 한건 아니지만 그렇게 불러. 사주국이 안주국(雁州國), 공주국(恭州國), 재주국(才州國), 그리고 교주국(巧州國). 사극국이 대(戴), 순(舜), 방(芳), 연(漣).」
「대극국(戴極國), 순극국(舜極國), 방극국(芳極國), 연극국(漣極國).」
「맞아. 각각에 왕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려. 교국이라면 각왕(土+高王)이지. 왕궁은 희주(喜州) 오상(傲霜)에 있고, 취황궁(翠篁宮)이라고 불러.」(*교(巧)와 각(土+高)은 모두 일어로 '코우'라고 발음됨)
「오상? 도시?」
그래, 라고 말하며 라크슌은 왼쪽에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이쪽은 토지의 기복이 심하다. 왼쪽 멀리에는 높은 구릉지대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더욱 높고 험준한 산지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 산의 훨씬 더 저편이야. 하늘까지 닿는 산이 있고, 그것이 오상산. 산 정상에 취황궁이 있고 산기슭 일대가 오상이라는 도시야.」
「헤에...」
「왕은 거기에서 국토를 다스려. 주후를 임명하고, 천하에 법률을 세우며 백성에게 국토를 나누어줘.」
「주후는 뭘 하는데?」
「주후는 각 주를 실제로 통치하게 되지. 주의 토지, 백성, 군사를 관리해. 법률을 정비하고 호적을 관리하면서 세를 징수하고, 재해에 대비해서 군대를 조성해.」
「실제로, 라는건 왕은 실제로 다스리는게 아닌거네.」
「왕은 통치의 지표를 세우는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미국같은 제도로 되어있는 걸까, 싶었다.
「왕은 법률을 제정해. 그걸 지강(地綱)이라고 부르지. 주후도 법률을 만들수는 있지만, 지강에 거스를 수는 없어. 그 지강도 선여강(旋予綱)에 어긋나게 정할 수는 없어.」
「선여......뭐라고?」
「하늘이 왕에게 내린, 이렇게 나라를 다스리라는 법도 같은거야. 이 세계를 천막이라고 하자면, 세계를 지탱하는 큰 버팀줄이지. 그러니까 천강(天綱)이라고도, 태강(太綱)이라고도 불러. 설령 왕이라고 해도 그것만은 지키지 않으면 안돼. 태강을 범하지 않는 한, 왕은 자신의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거지.」
「.....헤에. 그 태강은 누가 정하는거야? 설마 정말로 하느님이 있는건 아니겠지.」
「먼 옛날에 천제는 구주사이(九州四夷), 도합 13주를 멸하고 다섯명의 신과 12명의 인간을 남기고 모두 알로 돌려보냈대. 그 중앙에 오산을 만들고, 서왕모를 주인으로 이명하고서 오산으로 둘러싸인 한 주를 황해로 바꾸고 다섯 신을 용왕으로써 다섯 바다의 왕으로 임명했다던가.」
「신화구나.」
「그런거지. 그렇게해서, 12명의 인간은 각각 나뭇가지를 받았어. 가지에는 세 개의 열매가 달려있고, 한 마리의 뱀이 감겨있었지. 그 뱀이 몸을 풀고 하늘로 날아가자 열매들이 떨어져서 각각 토지와 나라와 옥좌를 만들었고, 가지는 변해서 붓이 되었다던가.」
요코가 알고 있는 신화들과는 상당히 다른 타입이다.
「그 뱀이 태강을, 토지는 호적을, 나라는 법을, 옥좌는 인도(仁道)--즉 재보(宰輔)를, 붓은 역사를 의미한다지.」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수염을 움직였다.
「뭐, 난 태어나기도 전의 얘기니까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과연.」
중국의 신화는 어렸을 때에 동화책으로 읽었을 터였지만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천제가 가장 높은 신?」
「글쎄, 그렇게 되는거겠지.」
「소원은 누구한테 비는데? 천제한테?」
소원, 이라며 라크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아이라면 천제한테 빌지만.」
「그밖에는? 이를테면, 풍작이라던가.」
「그게, 풍작을 바란다면 요제(堯帝)일까나. 그러고보니 요제를 모시는 녀석들도 있었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수해를 면하려면 우제(禹帝)고, 요마로부터 지켜주는 건 황제(黃帝)라던가.」
「보통은 안해?」
「안해. 농사라는건 날씨가 좋고 제대로 돌봐만 주면 풍작이 돼.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는 하늘의 기에 따른거니까. 울어도 웃어도 비가 올 때는 비가 오고, 가뭄이 들 때는 가뭄이 드는거잖아. 빌어봤자 별 수 없는걸.」
요코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홍수가 나면 모두 곤란하잖아?」
「홍수가 나지 않도록, 왕이 치수를 하잖아.」
「냉해라던가.」
「그런 때에는 기근이 들지 않도록, 왕이 곡물을 관리하니까.」
--잘 모르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요코가 알고 있는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럼, 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거나 돈이 생기게 해달라고 빌거나 하지 않아?」
요코가 말하자, 이번에는 라크슌이 놀랐다.
「그런건 본인이 얼마나 노력하는가의 문제 아냐? 빈다고 뭐가 되는데?」
「그건....그래.」
「시험같은건 공부하면 되는거고, 돈은 벌면 생겨. 대체 뭘 빈다는거야?」
글쎄, 라고 쓴웃음을 짓다가 요코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런건가.
여기에는 신에게 비는 것도 운이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해객을 팔아서 푼돈을 벌 챤스가 있으면 헛되이 흘려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중얼거린 말에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극히 차가운 것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라크슌이 요코를 올려다보고서, 낙담한 듯이 수염을 떨어뜨렸다.
스스로도 자만할 만큼, 라크슌은 박식하고 머리 회전도 빠르다. 확실히 이 정도로 영리하면서도, 단지 반수라는 것 때문에 평생 어머니의 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괴로울지도 모른다.
라크슌은 요코에 대해서나 일본에 대해서 묻고 싶어했지만, 요코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습격을 받은 것은 6일째의 일이었다.
- 9 -
그것은 저녁 무렵, 그 날의 숙박지인 오료(午寮)의 거리가 보일 즈음이었다.
길을 서두르는 여행자들로 문 앞은 혼잡했다. 요코도 그 사이에 섞여서 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문까지의 거리는 500미터 정도. 재촉하는 듯이 문 안에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북소리가 끝나면 폐문시간인 것이다.
모두가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그 중 누구인가가, 앗하는 소리를 낸 것이 시작이었다.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한사람 두사람 등 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혼잡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를 이상하게 생각한 요코가 뒤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날아오고 있는 거조의 실루엣이 선명해져 있었다.
거조. 독수리같은. 뿔이 있다. 모두 여덟마리.
「고조!」
비명을 지르며 인파가 오료의 거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코도 또한 라크슌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지만 고조가 더 빠른 것은 명약했다.
달려가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바보같은.
안에 있는 자신들만이라도 고조에게서 몸을 지키려고 하는 속셈이겠지만, 하늘을 나는 마물에게 문을 닫는 것 따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다려줘!!!」
「멈춰!」
비명이 높아진다. 요코는 눈깜짝할 사이에 라크슌을 밀쳐내고 인파에서 뛰어나왔다.
문에서 멀리 있는 것이 행운이었다. 문전에서는 자기만이라도 살려고 달려간 사람들이 앞사람을 밀치고 쓰러뜨리고 밟는 아비규환.
인파에서 조금 떨어져, 거리를 향해 달려가면서 요코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는 신에게 기원하지 않는 나라다.
요마에게 습격당해도, 신에게 기대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사람을 쓰러뜨리고서라도 달려간다. 여행자들을 버리고서 문을 닫는다.
요마에게 습격당할지 아닐지는 본인의 조심 여부에 달린 거라고 말하는 건가? 습격당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본인의 역량이라고 말하는 건가?
「....바보같아.」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너무나 무력해.
어린아기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가까이 들려와, 요코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근처를 달리던 라크슌이 요코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요코! 무리야!」
「라크슌은 마을로 가!」
날아오는 고조와의 거리는 이미 가슴털에 있는 붉은 홍반이 보일 정도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노려본 채로 라크슌에게 문을 가리키며, 검에 두른 천을 팔을 휘둘러 풀었다.
익숙한 감각이 피부를 따라 흐른다. 이미 죠유우의 감각은 요코에게 있어서 익숙해져 있어 위화감이 없었다.
여유의 웃음을 띄웠다.
--무리가 아냐.
고조따위는 손쉬운 상대이다. 수는 8마리 뿐. 요코의 검은 어떤 두터운 살이라도 꿰뚫는다. 그렇다면 적의 몸체가 클수록 노리기가 쉬워 고마울 뿐이다. 게다가 새는 활공하는 틈이 노리기 쉽다.
오랜만에 적과 만나서, 웃고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이미 상처는 깨끗이 나았고, 체력도 충분. 적에게지지 않을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 그저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소리를--해객인 요코를 사냥해야할 이들의 비명을 등뒤로 듣는 것은 기묘하도록 자랑스럽고 유쾌하다.
비린 냄새를 풍기며 급강하해오는 고조의 무리에게 검을 향했다. 몸 속에서 혈류가 끓어오르며 미쳐 날뛰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짐승이다.
--나는, 틀림없이 요마다.
그러니까, 적과 만난 것이 이렇게나 기쁜 것이다.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고조에게 있어서도 살육이었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도 살육이었다.
하강해온 한 마리, 두 마리를 베어 떨어뜨리고, 반을 죽였을 즈음에 도로는 피바다가 되어있었다.
추락하듯이 하강해오는 다섯 마리 째의 목을 베고 여섯 마리 째를 피하자, 요코를 노리고 발톱을 세우던 새는 멀리 등뒤에 있던 여행객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상승해갔다.
요코는 착실하게 살육을 계속했다.
피냄새도, 뼈와 살을 베는 감촉도 이미 옛날에 익숙해져버렸고, 사람의 시체를 보고서 마음이 흔들릴 정도의 세심함 따위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확실하게 적을 피하며 그 적을 쓰러뜨리는 것, 쏟아지는 피를 가능한 피하는 것, 요코가 마음을 쓰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일곱 마리를 쓰러뜨리고서 요코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여덟 마리 째가 내려오지 않는다. 상공을 선회하며 뭔가 망설이고 있는 듯 했다.
급속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은 녹슨 철의 색. 거기에 까맣게 요조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설령 죠유우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하늘까지는 쫓아갈 수 없다.
「--내려와.」
요코는 중얼거렸다.
여기에, 내 손톱이 닿는 곳으로 내려와.
선회하는 그림자를 노려보면서, 시선 끝으로 주변을 찾았다.
해가 지지 않은 동안에 적이 나타났으니까, 그 여자도 반드시 있을 터였다, --그, 금발의 여자. 그 금색이 어딘가에 보이지는 않는가.
근처에 있다면 붙잡을 수 있다. 지금의 요코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붙잡아서 목적을 반드시 들어낸다. 말하지 않는다면 한 팔을 잘라내서라도 들어내고 만다.
그렇게 생각해버린 자신에게 경악한다.
마치 짐승의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듯한, 이 흉폭함은 대체 무엇일까. 아니면, 피에 취해버린 것일까......
머리 위의 그림자가 갑자기 각도를 바꿨다. 내려오리라 생각하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올려다볼 틈도 없이, 새는 다시 한번 각도를 바꿔 하늘을 선회하는 태세로 돌아갔다.
「내려와!」
지금껏 그렇게 사람을 쫓아온 주제에!
요코는 검을 쳐들었다. 발치에 널부러진 고조의 시체에 검을 꽂았다.
「오지 않겠다면 동료의 시체를 잘라내겠어. 그래도 좋은가!」
마치 그 말을 이해한 듯 했다.
선회하고 있던 고조가 갑자기 낙하해온다. 화살처럼 하강해오는 날카로운 발톱을 시체에서 뽑아낸 검으로, 순식간에 검화를 뿌리며 베어내고 그대로 발을 찔렀다.
새가 기성을 지르며 날개를 퍼덕였다. 풍압을 받아 함께 떠오르려고 하는 것을 발로 버티면서, 뽑아낸 검을 다시 몸통을 향해 찔렀다. 손끝의 반응을 느끼자마자 옆으로 뛰면서 검을 빼자, 바로 조금전에 있던 장소에 선혈이 튀었다.
그 뒤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날개의 힘을 잃고 추락한 새에 2, 3번 공격을 가하고서 목을 쳐내고 숨통을 끊는다. 크게 검을 휘둘러 핏방울을 떨어냈을 때, 요코의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길에 쓰러진 것은 고조들만이 아니었다. 길에 겹겹이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죽어버린 것은 아닌 듯 했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바로 앞에 쓰러져있는 고조의 목에 검을 닦고, 그제서야 요코는 생각해냈다.
--나에게는 일행이 있었다.
「......라크슌?」
오료까지의 길을 훑어보자,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가늘게 열린 성문 틈에서 병사들이 뛰어나오는 것이 조그맣게 보였다.
자신의 발치에서 성문까지 사이를 다시 찾아보다가, 요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있는 짐승을 발견했다. 회갈색 털은 피를 머금어 검붉게 변해있었다.
「라크슌......」
달려가려다가 다시 한 번 성문을 보았다. 밖으로 뛰어나온 병사들이나 사람들이 저마다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잘은 들리지 않았다.
라크슌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라크슌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털을 적신 핏물은 근처에 쓰러져있는 고조의 것만은 아닌 듯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구슬을 쥔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달려가서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고, 심하다면 구슬의 힘이 미치는지 시험해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라크슌에게 있어서 가장 좋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구슬을 대고 있는 사이에 병사들이 닥친다. 그정도의 거리밖에 없다.
쓰러진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홀로 서있는 요코는 분명 눈에 띌 터이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고조가 요코를 노리고 있었던 것도, 그것들을 쓰러뜨린 것이 요코라는 것도 알 터 였다.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다.
검집이 없는 검이 있다. 조금만 조사해보면 머리를 물들인 것쯤 간단하게 알 수 있다. 해객이라는 것쯤은 금세 들통나겠지.
하지만, 여기에서 도망간다면.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털뭉치를 바라본다.
라크슌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요코의 일을 고발하지 않을 것인가.
검이 들어있는 작은 짐, 물들인 머리색, 남자옷, 안국에 가기 위해 아안에 가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들통나면 요코를 잡으려는 포위망은 일거에 좁혀들어 오겠지. 그렇다고 쓰러진 라크슌을 안고서 도망갈 정도의 완력은 있을 리가 없다.
라크슌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돌아가야한다.
그리고, 요코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심장이 크게 뛰었다.
--뛰어 돌아가 라크슌의 숨통을 끊는다.......
그런, 몸속에서 비명이 올랐다. 그것을 누군가가 질타한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라크슌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요코에게 살아남을 길은 없다.
돌아갈 수는 없다. 그건 뻔히 알면서 목숨을 버리는 짓이다. 라크슌을 이대로 버려두고 갈 수도 없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의 위험이 따른다. 그렇다면.
돌아가 최선의 행위를 취하고, 가능하다면 라크슌의 지갑을 가지고 온다. 그렇게하면 요코는 완전히 이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럴 시간은 있다. 그것만이라면.
활짝 열린 성문에서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달려오는 인파를 보고 반사적으로 요코는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요코는 몸을 돌렸다. 등뒤에는 가도에서 여행자들이 달려오고 있다. 그 혼잡 속에 묻혀, 요코는 그 곳을 떠났다.
- 10 -
--분명히 괜찮을거야......분명.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되뇌이며, 해가 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완전히 어두워져서 사람의 발걸음이 끊기고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달렸다. 오료에서 떨어져, 분기로를 돌아 오늘 아침 떠났던 거리에서도 오료에서도 멀어져간다.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도 요코의 발은 멈추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으면, 뭔가가 등뒤에서 쫓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을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설령 라크슌이 요코에 대해서 고발한다고 해도, 사진조차 없는 이 나라에서 자신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면 라크슌은 자신을 숨겨준 거였으니까, 벌을 두려워해서 도망간 해객에 대해서 지껄이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이면서, 요코는 발을 멈췄다.
가슴속 깊은 곳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야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게 아닐까.
라크슌은 무사한걸까. 요코의 눈에는 깊은 상처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이었을까.
돌아가야 했다, 고 마음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서, 적어도 라크슌의 안부만이라도 확인하고서 도망가야 했다.
위험하다, 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설령 돌아갔다고 해도, 요코가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구슬이 있어, 라고 누군가가 외친다.
구슬이 있어도, 그것이 라크슌의 상처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니면 라크슌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면 붙잡힌다. 붙잡히게 될 뿐, 쓸데없는 짓이다. 붙잡히면 목숨은 없다.
--그렇게나 목숨이 아까운거야?
--아깝지 않을 리가 없잖아.
--생명의 은인을 저버리고.
--정말로 은인이라고만은 확신할 수 없어.
--도와준 것만은 변하지 않아. 라크슌은 널 숨겨줬어.
--딴 마음이 있었어. 선의는 아니야. 그런 인간은 언제건 배신해.
--선의가 아닌 인간은 저버려도 된다는 거야? 정말로 그런 짓을 해도 좋은거야?
거기에 그렇게나 많은 부상자가 있고, 그 속에 자신의 지인이 있는데 그것을 저버려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사람을 돕는데 도왔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했더라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생명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잘난 소리를 이 나라에서 하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손해를 볼 뿐이야.
--잘난 소리가 아니야.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일텐데. 그런 것마저 잊어버린건가.
--이제와서 네가 인륜을 말하는거야?
이제와서, 네가.
이제와서!
「돌아가서 숨통을 끊는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요코는 펄쩍 뛰어올랐다. 길에서 조금 떨어진 풀숲에 푸른 원숭이의 머리가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나.」
「...............아......」
요코는 푸른 원숭이를 응시했다. 전신이 떨려왔다.
「숨통을 끊을 셈이었겠지, 응? 그런 네가, 이제와서 인륜을 들추는건가? 네가! 이제와서말야.」
원숭이는 미친 듯이 웃었다.
「.........틀려.」
「틀리지 않아. 넌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었잖아.」
「그런 짓, 할 생각은 없었어.」
「생각은 인가.」
「실제로 안했어.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깔깔거리며 원숭이는 웃었다.
「꽤 쓸만해졌잖아. 괜찮아. 다음엔 죽일 수 있어.」
「틀려!」
그 외침을 무시하며 푸른 원숭이는 웃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용서없이 요코의 귀에 꽂혔다.
「--난, 돌아갈래.」
「어차피 돌아가봤자 이미 죽어있어.」
「그런 거, 알 수 없어.」
「죽었다니까. 돌아가서 붙잡히고, 죽게될 뿐이야.」
「그래도 돌아갈래.」
「헤에, 돌아간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건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아가도록 해. 돌아가서 시체를 보며 울어주면 되겠지. 그렇게 하면 네가 죽이려고 생각해던 것도 모두 없던걸로 될테니까.」
깔깔거리며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은 자신이다. 천박한 자신의 목소리이다. 이것은 모두가, 자신의 진심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배신할 게 당연하잖아. 그러기 전이라서 잘된거 아냐?」
「...시끄러워.」
「지금쯤 병사들이 이쪽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쥐가 고발해서 말이야.」
「닥쳐!」
손잡이를 쥐고 검을 휘둘렀다. 풀숲을 베자 풀잎이 흩어진다.
「죽었더라면 좋을텐데. 숨통을 끊어버렸으면 완벽했을 것을. 아직 물러, 넌 말야.」
「입닥쳐!!!」
「이번엔 하는거야.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있다면,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는 거야.」
「헛소리하지마!」
소리를 내며 풀잎이 흩어졌다.
--숨통을 끊어서 어쩌겠다는거야. 저버린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마음이 무거운데, 죽이고서 어떻게 살아간다는 건가. 목숨만 붙어있으면 된다는 건가. 아무리 추악한 생물로 추락해 가더라도, 그냥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건가.
「....죽이지 않기를 잘했어.,,,,」
서두르지 않고, 마가 끼지 않은 채, 그것을 실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원숭이는 소리높여 웃었다.
「살려둬서, 고발당해도 좋은거냐. 응?」
「라크슌은 고발해도 돼!」
마침내 가슴을 막고있던 것들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라크슌은 그럴 권리가 있어. 그러니까, 날 고발해도 돼!」
「물러, 무르다구.」
왜 사람을 믿을 수 없었을까.
아무 생각도 없이 받아들인다는게 아니다. 그래도 그 쥐는 믿어도 좋았을 터였다.
「그런 무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배신당하기 쉬운 봉이 되는거다.」
「배신당해도 돼.」
「무르다구.」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정말이야? 정말로 그래도 되는거냐구. 봉으로 보일만큼 바보여도 되는걸까.」
「배신당해도 괜찮아. 배신하는 상대가 비겁해지는 것뿐, 내가 상처입는게 아니야. 배신하면서 비겁자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비겁해지는게 이기는거야. 이곳은 귀신의 나라니까. 너에겐 아무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 친절한 사람 따위, 없으니까 말야.」
「그런거, 나하곤 관계없어!」
쫓기면서 아무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니까 인간을 거부해도 좋은건가. 선의로 대해준 상대를 저버릴만한 이유가 되는걸까. 절대의 선의가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건가. 남이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잘해주지 않으면 남에게 잘해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건가.
「....그런게 아니잖아......」
요코 자신이 남을 믿는 것과 남이 요코를 배신하는 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터였다. 요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잘해주는 것과 다른 사람이 요코에게 잘해주는 것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을.
홀로, 홀로,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혼자서, 도와주는 사람도 위로해주는 사람도, 누구 하나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요코가 남을 믿지 않고 비겁하게 굴면서, 저버리고 도망치고, 심지어 남에게 해를 끼칠만한 이유가 될 리가 없는 것을.
원숭이가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웃어제낀다.
「....강해지고 싶어....」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세계도 남도 관계없다.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다.
원숭이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넌 죽는거야.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속이고 배반당하며, 넌 죽는거야.」
「죽지 않아.」
여기에서 죽는다면 어리석고 비겁한 채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런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일이다. 살 가치가 없는 목숨이라고 낙인찍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그런 도피는 용서할 수 없다.
「죽는거야. 굶고 지친 채 목을 베이고 죽는거야.」
혼신의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풀숲을 벤 검끝은 공기를 가르며 강한 반응을 받았다. 흩어지는 풀잎 사이에 원숭이의 머리가 튄다. 땅에 떨어져, 핏방울을 뿌리며 굴러갔다.
「절대로, 지지 않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뻣뻣한 소매로 얼굴을 닦고서 걸어나가는 요코의 발치에 금속성의 빛이 보였다.
요코는 한동안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핏물 속에, 원숭이의 머리가 있었어야할 장소에 그것이 있었다.
이미 옛날에 잃어버렸던 그것이.
--검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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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분전환을 위한 농담따먹기 하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십이국기 동인지 얘기입니다. 계속해서 요코를 따라다니면서 신경을 긁는 저 원숭이에 대한 얘기입니다만, 그 동인지에서는 원숭이를 죽이는 이유가 좀 달라요.(웃음) 원숭이가 계속해서 요코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속긁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미치게 하다가......마침내 꺼내서는 안될 말을 꺼내버립니다.
「너..........한달째 팬티 안 갈아입었지.」
그리고 원숭이는 죽었습니다.(묵념)
이제 가슴속 깊은 곳을 파내는 비참한 얘기는 슬슬 줄어듭니다. 바닥을 쳤으니 이제 올라가야죠. 얘기도 조금은 밝아지고, 읽는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집니다.(번역하는 마음도)
이제와서 든 생각인데, 저 사람좋고 머리좋고 성실한 라크슌 말입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요코의 비참함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다지 신경쓸 여지가 없었는데......이거 완전히, 찢어지게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여자 손목도 못 잡아본 시골 총각이, 조난당한 젊은 처녀를 구해주고서 이유없는(?) 친절을 이것저것 베풀어주는상황이더군요.(;) 저 라크슌을 그냥 '사람'으로 생각하자면 저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게 좀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남자'로 보자면 충분히 그럴만해서 웃어버렸습니다. 그런 것 있잖아요. 정말 여자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오빠' 한마디에 이거저거 도와달라 소리도 안한 일까지 신나서 해버리는 불쌍한 XY들. 아마 요코가 조금 웃어주기만이라도 했으면 엄청 기뻐했을 지도요.
일신상의 사정으로 시골에 와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지하철에서 번역을 하는게 아니라, 일하는 곳에서 낮동안에 일이 없으면 번역을 하는 셈인데요. 5장 번역을 시작한 것이 월요일 오후였으니까....흐음. 사흘동안에 90페이지 번역이군요. T_T (장하다, 김소형!) 역시, 시간이 나니까 좋군요......;;;; 그렇다고 저녁시간에까지 번역하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이해하시길.(......라면서 하고 있는 일은 아이노 2편 번역이었어, 너...;;;;)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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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하)
원작 :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번역 : siva(yshtar@hitel.net)
십이국기 시리즈는 현재 (주)조은세상 출판사와 고단샤 사이에 정식으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에 게재된 번역은 라이센스판의 번역자인 저와 출판사 사이의 협의에 의해 책의 광고 목적을 겸해 게재를 허락받은 것으로, 본 홈페이지의 번역을 무단으로 복사, 전재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적발시 법률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제 6 장
- 1 -
「저, 이정도의.」
요코는 여행자를 붙잡고 어린아이 정도의 신장을 표시했다.
「쥐 모습을 한 사람을 모르세요?」
노파는 요코를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뭐야? 반수야?」
「네. 어제, 이 문 앞에서 다쳤다고 들었는데요.」
「아아--, 고조의.」
그렇게 말하며 노파는 등뒤를 돌아보았다.
「글쎄. 어제 다친 사람들이라면, 관청에 있을거야. 관청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아침부터 몇번이고 들은 대답이었다.
날이 새는 것을 기다려서 오료의 거리로 돌아갔지만, 무서울 정도로 성문의 경계가 엄중해져서 도저히 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관청에 가보면 될거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정작 그 관청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청에는 가봤나?」
「예......없는 것 같아서.」
「그럼 뒤쪽일거야.」
노파는 그렇게 말하고서 걸어갔다. 오료의 거리 뒤쪽에는 시체가 놓여져 있다. 그것을 멀리서 보았지만 그곳 역시 경계가 엄중해서 거기에 라크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다가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큰 짐을 지고 걸어가는 노파를 바라보다가, 요코는 오료에서 나오는 다음 여행자를 붙잡았다.
「저---」
말을 건 여행자는 남녀 한 쌍으로, 남자는 발에 헝겊을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노파에게 질문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요코를, 두사람은 귀찮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제, 상처를 입었다고 들어서--」
「너.」
남자가 갑자기 요코를 가리켰다.
「너, 설마 어제의---」
끝까지 듣지 않고, 요코는 몸을 돌렸다.
「이봐. 잠깐, 기다려!」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에게 상관하지 않고, 재빨리 여행자들 사이를 뚫고 그 곳을 떠났다.
남자의 그 상처는, 아마도 어제의 것이겠지. 그리고, 남자는 요코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이렇게 도망친 것이 몇번째일까. 그 때마다 문전에 병사들의 모습이 늘고, 점점 거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오료에서 떨어져, 산으로 들어가 주의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런 짓을 하고 있어서는 언젠가 붙잡힌다. 알고는 있어도 오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소식을 물어서 어쩔건데.
라크슌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서, 요코가 어제 그를 버리고 도망간 사실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범해버린 죄로,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게다가, 무사하다는 것을 들었다고 한들 사과하기 위해 거리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들어가려 하면 병사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것은 결국 요코의 죽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쓸데없이 더러운 목숨을 아까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반면, 완전히 포기해버리기에는 뭔가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결심이 서지 않아, 오료를 떠나버릴 수가 없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며, 몇 번이고 오료의 문전으로 돌아갔다. 몇 사람인가의 여행자를 붙잡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같은 대답을 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당신.」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요코는 펄쩍 뛰며 도망가려 했다. 몸을 긴장시키며 뒤돌아보자, 자기 쪽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자가 있었다.
「--당신, 바크로우근처에서 봤던.....」
요코는 발을 멈추고, 한동안 망연하게 서있었다. 언젠가 산길에서 만났던 모자였다. 물엿 행상인 듯, 큰짐을 등에 지고 있었지만 그 짐은 지금도 모자의 등위에 있었다.
「잘됐네. 무사했었구나.」
모친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굉장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보다 훨씬 더 복잡한 표정으로 요코를 올려다보았다.
「상처는 이제 괜찮아?」
요코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때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도와주려는 손을 뿌리치고 산으로 들어갔다. 입으로는 고맙다고 했었지만, 마음속 깊이 감사하지 않았던 상대.
「정말로, 잘됐네. 그때부터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 신경이 쓰였어.」
모친은 웃었다. 이번에는 흐림없는 웃음이었다.
「교크요우, 봐. 무사했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본다. 여자아이는 아직도 복잡한 표정으로 요코를 올려다보고 있다. 요코는 조금 웃어보였다. 그리고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웃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의 근육이 굳어있어서, 조금도 웃은 것 같지 않았다.
교크요우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삐친 듯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등뒤에 숨으려고 했다. 요코는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이 모자가 그 때 물과 물엿을 주지 않았다면, 그날밤을 넘길 수 없었을지도 몰라.
이번에는 조금 더, 제대로 웃을 수 있었다.
「저번에는, 물하고 엿 고마웠어.」
여자아이는 요코과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금 웃었다. 웃어버린 자신이 이상했는지, 다시 복잡한 표정으로 돌아갔다가 조금씩 조금씩 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웃음이, 굉장히 사랑스럽고 애처로왔다.
「정말로, 고마워. 제대로 인사 못해서 미안.」
교크요우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아팠어?」
그렇게 물었다.
「응?」
「오빠, 많이 아파서 기분 안좋았어?」
「---응. 그랬어. 미안.」
「이제 안아파?」
「응. 다 나았어.」
피부가 오그라들며 흉터를 남기고 나은 상처를 보여준다. 그 상처가 너무 빨리 나아있는 것을, 과연 저 모자가 눈치챌 것인가.
교크요우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나았대,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딸을 내려다보았다.
「잘됐어. 바크로우에 갔다가 찾으러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만, 마을에 닿으니까 이미 폐문시간이었어. 근처의 병사들은 멍청이니까, 밤에는 나오려고 하지를 않아. --사람을 찾는 거야?」
요코는 끄덕였다.
「우리들도 오료에 가던 참이야. 함께 갈래?」
이것에만은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모친은 그래, 라고만 말했다.
「--자, 교크요우.여관으로 가자.」
그렇게 말하며 딸의 손을 잡고, 그녀는 요코를 보았다.
「어떤 사람이지? 반수야?」
「--라크슌이라고 해요.」
「이 근처에 있어. 잠깐 보고 올테니까.」
굉장히 가볍게 말하며, 모친은 짐을 다시 등에 졌다. 요코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자는 저녁 무렵에, 혼자서 돌아왔다. 라크슌같은 사람은, 부상자 중에도 죽은 사람 중에도 없었다, 고만 말하고 오료를 향해 돌아갔다. 그녀가 요코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 2 -
확인하고서야 결심이 섰다.
요코가 모르는 사이에 오료를 떠난 것인가. 아니면 여자가 찾지 못한 것인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도에서 오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무언가에 대한 벌일 거라고, 그렇게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것만은 할 수 없었다.
밤에 걷고 낮에는 잔다. 또다시 그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여행하는 일이 많았기에, 요코는 이 나라의 밤만을 알고 있다.
지갑은 라크슌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요코에게는 소지금이 없었다. 요마와 싸우며 지내는 밤도, 굶주린 채 풀숲에서 잠드는 아침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 목적이 있는 여행이니까 괜찮다. 아안에 가서, 안국에 건너간다. 배에 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할 것이므로 그것만은 어떻게든 생각해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탁구에서 해객 노인에게 짐을 도둑맞고서부터, 역산해보면 약 한달 이상 길을 헤매고 있었던 듯 하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구슬의 힘을 빌려봤자 그것이 한계.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여행보다도 나은 편인 것이다.
푸른 원숭이는 이제 나타나지 않는다. 검집이 돌아오고서는 검의 환상도 잦아들었다.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면서 검집과 손잡이 사이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일은 있었지만, 굳이 검을 검집에서 빼내어 환영을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묵묵히 걷는다. 오직 앞길만을 서두른다.
--한심하기는. 그렇게 목숨이 아까우냐.
걸으면서, 가슴 속에서 푸른 원숭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애초부터 요코의 불안이었으니까, 푸른 원숭이의 모습은 사라졌어도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아까워.
『은인을 저버리는 목숨이라도 말인가.』
「적어도 지금은, 내 목숨을 아까워하기로 했어. 그렇게 결정했어.」
『차라리 관청에 자수해버리고, 모든걸 깨끗이 끝내는게 어때?」
『안국에 가고 나서 생각하겠어.』
깔깔거리며, 그 웃음소리마저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엔 네 목숨이 아까운 것 뿐이잖아.』
「그래. 쫓기고 있으니까, 지금은 무엇보다도 목숨이 아까워. 쫓길 위험이 없어지고서, 내 목숨이 완전히 내 것이 되고 나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겠어. 반성도 보상도, 그때부터 생각하기로 했어.」
--그저, 살아남는 것 뿐. 지금은.
『요마를 죽이고, 남을 검으로 위협하면서 말이지.』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지금은 망설이지 않고, 어쨌거나 빨리 안국에 가는 것만을 생각할거야. 안국에 도착하면 적어도 추적자에게 검을 향할 일은 없을테니까.」
『안국에 가면, 그걸로 모든게 다 해결되는걸까?」
「그렇게는 안되겠지만. 케이키도 찾지 않으면 안되고, 돌아갈 방법 역시 찾지 않으면 안돼. 생각해야할 일은 산더미같이 있어.」
『케이키가 네 편이라고 아직까지 믿고 있는거야? 으응?」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데 말야.』
「그래도. 돌아갈거야......」
요코는 고국에서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마음에 들 수 있게. 남과 대립하는 것이 두려웠다. 질책당하는 것이 무서웠다. 이제서 돌이켜보면 뭘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던 것일까.
어쩌면 겁쟁이였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나태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코로서는 스스로의 의견을 생각하는 것보다 남이 말하는대로 하는 쪽이 더 편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잘 맞춰서 '착한 아이'를 연기하고 있는 쪽이, 스스로를 내세우며 다른이들과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편했던 것이다.
비겁하고 나태한 생활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돌아가면, 요코는 훨씬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노력할 찬스를 얻고 싶다.
--그런 것들을 조용히 생각하면서 걸었다.
비가 늘었다. 그런 계절인건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의 야숙은 힘들었으므로, 작은 마을을 찾아가 묵게 해달라고 빌어보았다.
오두막의 구석을 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대금을 청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병사를 부르는 경우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쫓겨날 뻔한 일도 있었다. 반대로 초라하나마 식사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잠자리를 빌리는 것을 배웠다.
잠자게 해주는 대신에, 다음날 그 집에서 일을 한다. 일의 종류는 가지가지였다. 농사일을 거들거나, 집의 청소, 잡역, 가축 돌보기, 가축우리의 청소. 묘를 파는 일도 있었다.
일에 따라서는 며칠이고 묵으면서 돈을 조금 받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여기저기의 마을을 따라 걸어, 트러블이 생기면 검을 써서 도망친다. 병사를 부르게 되면 한동안 어느 마을이나 경계가 삼엄해지기 때문에 주의가 가라앉을 때까지 노숙으로 견뎠다.
요마의 습격은 때때로 있었으며, 서서히 수가 늘어갔지만 적과 싸우는 것은 특별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걷고있던 길 뒤편에 요코를 뒤쫓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 것은 한달째 그런 여행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과 접촉하면 요코가 지나간 흔적이 남게 된다. 발자취를 남기게 되면서, 자신은 쫓기고 있으므로 분명 언젠가 추적당하게 될거라고 자각하고 있었기에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아안이 봉쇄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으므로, 아안에 가까워지면서는 숙소를 찾지 않았다. 길에서 떨어져서 사람 눈에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산을 따라 걸었다.
라크슌은 아안까지 한 달이 걸린다고 말했었지만, 실제로 항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두 달이 지난 뒤였다.
- 3 -
「저,」
아안의 문 앞에서 여행자를 붙잡았다.
아안의 거리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따라 위치해있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서 아안의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청해(靑海)라고 불리는 바다는 정말로 파랬다. 기슭을 향해 새하얗게 파도가 부딪쳐온다. 파랗고 투명한 바다와, 아안의 해안을 둘러싸는 듯이 뻗어있는 반도와, 그 내해에 떠있는 하얀 배의 돛. 반도 저편에는 한일자로 수평선이 보인다. 지면이 평탄하다는 것은 이상한 얘기이다.
아안의 문전에는 언제나의 가도가 교차하고 있었다. 거리는 커다랗고, 출입하는 사람도 많았다. 혼잡한 틈에 섞여서, 마음씨 좋아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만, 안국에 가는 배를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초로의 노인은 자세하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배를 타는 방법과 요금을 물었다. 안국까지의 배삯은 도중에 모은 돈으로 해결될 듯 했다.
「배는 언제 떠나지요?」
「닷새에 한 번. 지금이면 사흘은 기다려야 해.」
출항시간까지 정확하게 물었다. 여기에서 실패해 항구가 봉쇄되어 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필요한 것을 가능한 묻고서 요코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일단 아안에서 떨어져, 이틀을 산 속에서 지냈다. 배는 아침에 떠난다. 그 전날에 다시 한 번 아안의 문전에 섰다. 성문의 경계는 엄중했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안으면 안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심을 사서는 안된다. 요코는 천으로 두른 검을 보았다. 지금은 확실하게 검집이 있다. 그래도 검을 가지고 있는 여행자는 많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만은 피할 수 없다.
이것만 없으면, 그만큼 위험이 줄어든다. 한참을 생각하면서 교국에 버리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가능하다면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요코가 요마에게 쫓기고 있는 한, 이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성문의 병사라고 해도 검의 유무만으로 경계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검을 버린다고 해서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산에서 풀을 베어 검에 둘러, 짐과 함께 천으로 싸서 한눈에 봐서는 검인지 알기 힘든 보퉁이를 만들었다. 그것을 안고, 저녁 무렵에 가도로 들어와 찬스를 기다렸다.
길에 주저앉아 있자 곧,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꼬마, 왜그래?」
중년의 남자 한 명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조금 발이 아픈 것 뿐.」
남자는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안의 문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다가, 더욱 몸을 웅크리며 기다렸다. 세 번째 말을 걸어온 사람을 목표로 붙잡았다.
「왜그래?」
어린애 둘을 데리고 있는 부부였다.
「조금....기분이 안좋아져서.......」
요코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여자가 몸에 손을 받친다.
「괜찮아?」
요코는 조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이 부부의 동정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검을 여기에 버리고, 더욱 위험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긴장하자 자연스럽게 식은땀이 흘렀다.
「괜찮아? 아안은 바로 저기야. 저기까지 걸을 수 있겠어?」
요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쪽이 요코의 어깨를 부축했다.
「어디, 붙잡아. 조금만 가면 되니까. 힘내.」
예, 라고 끄덕이며 한 손을 남자의 어깨에 둘렀다. 일어설 때에 일부러 짐을 떨어뜨렸다. 주우려고 하는 요코의 손을 여자가 제지한다. 요코 대신에 짐을 주워주더니,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이거 들어라. 가벼우니까.」
짐을 넘겨들은 남매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걸을 수 있겠어? 병사들에게 부탁해볼까?」
요코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일행이 먼저 가서 여관을 잡아놨으니까요.」
「그런가.」
남자는 웃었다.
「일행이 있구나. 그거 다행이다.」
요코는 끄덕이고서, 가볍게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걸었다. 어깨를 빌려주는 남자를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문이 가까워졌다. 성문 옆에 서있는 병사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쓸려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쳤다. 시선을 느꼈지만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문을 지나쳐 조금 걸어가다가 마침내 숨을 토했다. 살짝 뒤돌아보자, 성문은 병사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없을만큼 멀어져 있었다.
--잘됐다.
가슴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요코는 남자에게 걸치고 있던 손을 떼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편해졌어요.」
「괜찮겠어? 여관까지 데려다줄까?」
「아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깊게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은 가슴속에 담아두었다.
부부는 얼굴을 마주보더니, 조심하라고 말해주었다.
이 거리에도 난민들이 모여있었다. 여관의 종업원들에게 수상히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성벽 아래의 빈터에 주저앉아 밤을 보냈다.
겨우 아침이 오고, 요코는 골목을 따라 항구로 향했다. 거리 안쪽이 바다를 향해 열려있고 거기에 조악한 판자다리가 있었으며, 한쌍의, 항구에 정박해있는 다른 작은 배들보다 커다란 범선이 묶여있었다.
「저거다.....」
뭔가 가슴에 북받쳐오는 느낌에 판자다리로 다가가다, 요코는 발을 멈췄다. 배에 타는 여행자들의 줄을 검문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되었다. 병사들은 승객의 화물을 열고 그 안을 조사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검은 버리고 싶지 않다. 그늘에 숨어 다가갔지만, 그 이상은 접근할 수 없었다. 요코는 가만히 승객과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검을 버릴까.
몸을 지킬 수단을 잃게 되지만, 이대로 교국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멀지 않은 곳의 수면을 바라보았지만 어떻게해도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것은 케이키와 관련되는 물건이다. 이것을 잃는다는 것은 케이키와의 연결고리를 반쯤 끊어버리는--나아가서는 고국과의 연결을 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지.
망설이고 망설이며, 그럼에도 결심이 서지 않았다.
요코는 항구를 둘러보았다. 검을 버리지 않고 안국으로 갈 방법은 없을까. 몇 척인가의 작은 돛단배가 정박해 있다. 그것을 탈취할 수는 없을까.
--배의 조종법 따위 몰라.
청해는 내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며칠이 걸릴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해안을 따라 걸으면 안국에 갈 수 없을까.
현기증이 돌 정도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날카로운 북소리가 울렸다.
핫 하고 얼굴을 들자, 소리가 나는 곳은 배의 갑판으로 그것이 출항의 신호인 듯 했다. 승선하는 여행객들의 줄도 이미 끊겨있다. 병사들은 할 일없이 서있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지금부터 달린다고 해도 병사들에게 붙잡힌다. 짐을 풀고 검을 꺼내들 시간은 없다. 화물 채로 검을 버린다고 해도, 맨손으로 배에 타는 것은 수상하게 생각되지 않을까. 낭패해버려 더욱 움직일 수 없다.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우뚝 서서, 배가 돛을 올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배에 걸려있던 판자가 치워졌다. 요코는 간신히 그늘에서 뛰어나왔다. 배가 가볍게 미끄러지며, 병사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달려나왔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요코는 망연히 배를 지켜보았다. 하얀 돛이 시야에 박혔다.
--지금이라면 바다에 뛰어들어서.
말도 안되는 생각이 머리 속에 맴돌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것만 타면 안국인데.
짐을 안은 채 눈을 크게 뜨고 배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놓쳐버린 것은 너무나 크다.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그래, 배에 늦었냐?」
굵은 목소리가 들려와, 요코는 핫 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말뚝을 박아 땅을 고정시킨 기슭쪽에 작은 배가 보였다. 네 명 정도의 남자가 갑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요코를 올려다보고 있다.
요코는 굳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다음 배는 5일 뒤밖에 없다. 그 5일이 운명을 결정하겠지.
「뛸 수 있겠어, 꼬마? 타라.」
순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선원을 바라보았다.
「서두르는거지. 안그래?」
요코는 끄덕였다. 선원은 바닷가의 말뚝에 묶인 로프 끝을 쥐고 있다.
「그걸 풀고 뛰어와. 후고우로 쫓아갈 수 있어. 태워줄테니까 일해라.」
선원이 말하자 다른 선원들이 가볍게 웃었다. 요코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발치의 말뚝에 묶인 로프를 풀고, 그것을 쥔 채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배는 아안의 북쪽에 있는 부호(후고우, 浮濠)라는 섬까지 화물을 나르는 화물선이었다. 부호는 교국의 북단, 아안에서는 만 하루가 걸리며 거기서부터 안국까지는 정박할만한 곳이 없다.
요코는 수학여행때 여객선을 타본 것 말고 배를 타본 경험이 없었다. 게다가, 범선에 타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하는 경험인 것이다.
영문을 모른 채 선원이 시키는대로 짐을 들거나 치우면서, 새앙쥐처럼 일했다. 먼 바다로 나와 배의 조타가 안정되고서는, 남비를 닦고 식사를 짓는 등 차례차례로 잡역을 시켰다. 결국엔 나이든 선원의 다리까지 주무르게 되었지만, 사정을 묻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꾸하자 말이 없는 꼬마라며 웃고 넘겨, 그 이상 묻지 않아주는 것이 고마웠다.
배는 하루 밤낮, 쉬지 않고 바다위를 달려 다음날 아침 부호의 항구에 들어섰다.
항구에는 한 발 먼저 도착한 안국행의 배가 조용히 정박해있었다. 선원들은 끝의 끝까지 요코를 잔뜩 부리다가 배를 기슭에 대지 않고 정박해있는 배 옆에 대었다. 여객선의 선원에게 말을 걸어서, 요코를 태워주도록 부탁해주었다. 여객선에서 내려준 막대기를 붙잡고 배를 옮겨타자, 작은 꾸러미를 던져주었다.
「만두다. 안에서 먹으라구.」
요코를 배에 태워준 선원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든다. 꾸러미를 안아든 요코도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요.」
「수고했다. 몸조심해.」
떠들썩하게 웃으며 닻을-그것을 내린 것은 요코였다-끌어올리는 남자들이, 요코가 교국에서 만난 최후의 사람들이었다.
- 4 -
청해라고 불리는 내해는 해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갑판에 서있으면 바닷냄새가 나는, 보통의 바다와 다를 것이 없는 바다였다. 부호를 출발한 범선은 밝은 푸른색의 바다를 건너, 똑바로 맞은편 해안의 오호(烏號)를 향해 간다. 부호에서 2박3일의 여행이었다.
최초에 보인 안국의 해안은, 교국의 해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정비된 항구와, 그 뒤에 보이는 거대한 도시. 오호의 거리는 지금까지 요코가 교국에서 보았던 어떤 도시보다도 컸다. 그 경관은 빌딩이 없는 것을 빼면 요코가 고국에서 보아온 도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갑판에 모인 여행자들의 일부는 오호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던 듯, 요코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 인상깊었다.
오호의 거리는 항구를 한 편에 두고 디귿자 모양의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리는 정면의 산을 향해 완만하게 펼쳐져, 건물에 달려있는 선명한 색의 장식이 멀리 섞여있어 침침한 장미색을 띄고 있었다. 거리의 외곽이나 군데군데에는 석조인듯한 높은 건물이 보인다.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시계탑으로, 바라보던 요코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항구 자체도, 아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정비되어 있다.
정박해있는 배의 수도 아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항구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돛대가 숲처럼 늘어서, 희고 붉은 돛들이 나부끼며 액센트를 주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괴로운 나라를 빠져나와 겨우 도달한 요코에게 이 이상 밝은 풍경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배를 내리자 거기는 소란법석이었다. 바쁘게 일하는 남자들,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건지 달려 다니는 아이들, 행상인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소리,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리듬을 이루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요코는 골목을 둘러보았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거리라는 느낌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 생기있는 표정으로, 아마도 그것은 요코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요코?」
불려질 리가 없는 호칭을 듣고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회갈색의 털이 보였다. 가는 수염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라크슌.」
쥐는 인파를 뚫고 요코의 곁으로 걸어왔다. 당황해하는 요코의 손을 작은 핑크색 손이 쥐었다.
「다행이다, 무사히 도착했구나.」
「......어떻게.」
「아안에서 배를 타면, 반드시 오호에 오게 되니까. 기다리고 있었어.」
「날?」
라크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요코의 손을 잡아끈다.
「아안에서 한동안 기다렸지만, 계속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먼저 건너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도저히 도착한 것 같지가 않잖아. 그래서 배가 올 때마다 살펴보러 오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늦어서, 어떻게 되버린건가 걱정했다구.」
쥐는 그렇게 말하며 요코를 올려다보고 웃었다.
「왜, 나를.」
라크슌은 등을 동그랗게 웅크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멍청했어. 돈을 요코에게 넘겨줬던가, 적어도 반은 가지게 했었으면 좋았을텐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큰일이었겠지. 미안해.」
「난....라크슌을 버리고 도망간 인간이라구?」
「물론 도망치길 잘 한거야. 병사한테 붙잡히면 어쩌려구. 도망치라고 하면서 지갑을 넘겨줬으면 좋았을텐데, 멍청하게 의식을 잃고 있었어.」
「......라크슌.....」
「요코가 그 뒤로 어떻게 됐을지 걱정했었어. 무사해서 다행이다.」
「난, 어쩔 수 없어서 도망친게 아냐.」
「그래?」
「응.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게 두려웠어. 누구도 믿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이곳에는 적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라크슌은 수염을 움직였다.
「난 지금도 적이야?」
요코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럼 됐어. 자, 가자.」
「난 라크슌을 배신했는데, 원망하지 않는거야?」
「요코를 바보같다고는 생각하지만, 별로 원망할 생각은 없어.」
「난, 숨통을 끊어야 할까라고도 생각했어.」
손을 끌고 걸어가던 발이 멈췄다.
「난말야, 요코.」
「..............응.」
「진실을 말하자면, 놔두고 가버린 걸 알았을 때엔 조금 화가 났어. 조금. 요코가 날 믿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까 하며 언제나 경계하고 있었는걸. 하지만 언젠가 알아줄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러니까 두고 가버렸을 때, 알아주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해서, 조금 우울했어. 하지만, 이제 알아줬다면 됐어.」
「된 게 아니잖아. 이제 나따위한테 상관하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건 내맘이야. 난 요코가 날 믿어주길 바랬어. 그러니까 믿어주면 기쁘고, 믿어주지 않으면 슬프지. 그건 내 쪽의 문제. 나를 믿어주건 믿어주지 않건, 그건 요코 맘이야. 나를 믿으면 득을 볼지도 모르지만, 손해를 볼지도 모르잖아. 그건 요코의 문제인거야.」
요코는 몸을 움츠렸다.
「라크슌은...대단해.........」
「이봐이봐, 왜 그래, 갑자기.」
「난 금방 절망했었는데. 이곳에 내 편 따위는 없다고.」
「요코.」
작은 손이 요코의 팔을 잡아당겼다.
「난 정말로, 되먹지 못했어......」
「그렇지 않아.」
「그렇다구.」
「틀려, 요코. 난 그렇게 전혀 모르는 곳으로 쓸려와서, 쫓겨다닌게 아니니까.」
요코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라크슌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라크슌은 웃었다.
「넌 굉장히 애썼어, 요코. 느낌이 좋아졌구나.」
「에?」
「배에서 내렸을 때, 바로 알았어. 뭔가 눈을 뗄 수 없었는걸.」
「--내가?」
「응. --자, 가자.」
「가자니, 어디로?」
「현정(縣正)으로. 해객이라고 서류를 내면,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주나봐. 위의 사람을 만나려면 편지를 써준다고. 요코가 한동안 오질 않아서,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렸거든. 관청에도 가봤어. 그랬더니 거기서 그렇게 말해줬어.」
「대단해.........」
뭔가 차례차례로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5 -
「생기있는 거리......」
사람의 출입도 많고, 가게에서 호객하는 소리로 한층 시끄러웠다.
「놀랐지?」
「응.」
「안국이 풍요롭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오호를 봤을때는 엄청 놀랐어.」
요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는 넓고, 거리의 규모 역시 크다. 주변을 둘러싼 성벽은 그 두께가 10미터는 될 듯 했고, 거리의 안쪽에는 성벽을 따라서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것은 가드 아래의 풍경과 비슷했다.
건물들은 3층의 목조. 천장은 높고, 어느 창에나 유리가 끼워져 있다. 군데군데에 기와나 돌을 이용한 크고 높은 건물이 있었고, 그저 중국풍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길은 돌로 포장되어 있다. 길의 양옆에는 하수구도 보인다. 공원이 있고 광장이 있다. 어느 것도 교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내가 굉장히 시골사람인 것 같아.」
요코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하자, 라크슌이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원체부터, 난 정말로 시골사람이니까.」
「성벽이 여러겹 있네.」
「응?」
요코는 라크슌에게 거리의 여기저기에 보이는 높은 벽을 가리켜 보였다.
「--아아. 정확하게는 마을의 외벽은 곽벽(郭壁), 내측의 벽은 성벽이라고 불러. 교국에는 성벽이 있는 거리는 거의 없지만서도. 하지만, 저건 곽벽이야. 거리를 계속 키워나간 흔적이 아닐까?」
「.....헤에.」
성벽의 아래나 광장에는 경국에서의 난민이 살고 있었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긴 텐트가 늘어서 있어, 그렇게 황폐한 인상은 없다. 도시에서 지급된 텐트인 것 같다는 것이 라크슌의 설명이었다.」
「여기, 주도(州都)?」
「아니. 향도(鄕都)야.」
「향이 주보다 하나 아래였던가?」
「아니. 두 개 아래. 25호의 리에서 시작해서 족(族), 당(當), 현(縣), 향(鄕), 군(郡), 주(州)로 커져. 도(都)는 5만호의 조직이지.」
「한 주는 몇 군?」
「이게 향도라는건, 군도(郡都)나 주도는 훨씬 크다는 얘기겠지.」
군이나 주는 관청의 이름으로, 군의 관청이 있는 곳을 군도, 군성(郡城)이라고 한다. 군의 5만호는 행정구역상의 얘기로, 5만호가 거기에서 산다는 말은 아닌 듯 하다. 그럼에도 리(里)보다는 족리(族里)가, 향도보다는 주도 쪽이 거리의 규모가 더 커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안국과 교국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거지?」
라크슌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상의 격이 다른거야.」
「격이 달라?」
돌아보면서 라크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연왕은 희대의 명군이라고 불리고 있으니까. 치세는 이미 5백년을 넘겼어. 겨우 50년 언저리의 고왕과는 얘기가 다르지.」
요코는 눈을 깜박였다.
「5.........5백??」
「주국(奏國)의 종왕(宗王)은 더 길어. 치세가 길면 길수록 좋은 왕이라는 거니까. 주국도 풍요로운 나라라고 해.」
「한 사람의 왕이......5백년?」
「물론 그렇지. 왕은 신이야. 인간이 아니니까. 하늘은 그 왕의 기량을 보고 나라를 맡겨. 그러니까 훌륭한 왕일수록 치세가 길지.」
「헤에에.....」
「왕이 바뀌면 아무래도 나라가 어지러워지니까, 좋은 왕을 가진 나라는 풍요로와 지지. 특히 연왕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한 수완가야. 명군이라고 하자면 종왕도 명군이지만, 주국은 안정된 편이고 안국은 활기가 있다고들 하니까.」
「확실히, 활기가 있어.」
「그렇겠지. --아아, 저기가 향이야.」
라크슌이 가리킨 건물은 기와지붕의 커다란 건물이었다. 벽이나 기둥을 장식한 무늬는 중국풍이었지만, 이것은 서양풍 건물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겠지. 내장도 외견과 마찬가지로 서양풍과 중국풍이 혼합되어 있었다.
거기를 나선 요코가 제일 먼저 말한 것은 이것이었다.
「굉장해.」
라크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교국이 해객에게 대해 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안국과 이렇게나 차이가 있을줄은 생각도 못했어.」
요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관청에서 받은 목패를 쥐어보았다. 겉에는 붉은 도장과 「경주(景州) 백군(白郡) 수양향(首陽鄕) 오호(烏號) 관허(官許)」라는 묵서, 안에는 요코의 이름을 적은 그것이 신분증명서였다.
향청에서 한 관리와 만난 요코는 이름과 고국에서의 주소나 직업 등에 대해 일련의 질문을 받다가, 놀랍게도 우편번호와 시외전화 국번까지 대답하고 이 패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요코, 에에...., 그 우편번호라고 시외국번이라는게 뭐야?」
라크슌은 그것을 물어온 관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관리도 역시 잘 모르는 듯 했다. 그는 규칙입니다, 라고만 대답하며 한 권의 책을 열었다. 옛날식으로 제본된 그 책을 옆에서 살짝 들여다보자 목판화의 문자로 숫자가 나열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관리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그 패를 건네주었다.
「우편번호라는건, 편지를 보내거나 할 때에 사용하는 주소에 붙여진 번호. 시외국번이라는 건, 전화를 걸 때에 사용하는 번호.」
「전화?」
「목소리를 멀리 전해서 직접 대화할 수 있게 하는 도구, 일까나.」
「그런게 왜에는 있는건가. 하지만, 왜 그런걸 묻는거지?」
라크슌은 수염을 움직였다.
「왜의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그런게 아닐까. 틀림없이 해객인지 아닌지 확인한거야. 그렇지 않다면, 가짜 해객이 늘지도 모르잖아.」
요코는 웃으며 패를 가리켜보였다.
「그건, 그렇네.」
이 패는 요코의 신분을 증명해주지만 3년밖에 쓸 수 없다. 3년 사이에 앞으로의 생활을 결정하고, 정식으로 호적을 취득할 장소를 결정하지 않으며 안도는 듯 하다.
그 대신에 보호받는 3년 동안은 공공의 학교나 병원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것뿐이 아니라, 이쪽에서는 계신(界身)이라고 부르는 은행에 가지고 가면 일정액의 생활비까지 주는 듯 하다.
「굉장한 나라네.」
「정말.」
교국이 얼마나 가난하고, 안국이 얼마나 부유한가. 그것 이외에도 이 패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연왕은 절대로 어려운 상대는 아니리라. 연왕에게 조력을 청하자고 라크슌은 말했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지 어떨지는 의문이었다. 지금도 의문인 것만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말도 해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거절당하거나 처벌받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 6 -
라크슌이 말했던 것처럼 거리에는 짐승이 많이 섞여있었다. 혼잡한 속에 두발로 서서 걷는 짐승들이 섞여있는 모습은 어딘가 웃음이 나온다. 그중에는 인간처럼 옷을 입고 있는 짐승마저 있어, 더욱 웃음이 나왔다.
라크슌은 요코를 기다리면서, 항구에서 일하고 있던 듯 했다. 입항한 배의 손질을 돕는 일이었던 듯 하지만, 그것을 매우 기쁜 듯이 얘기해주었다.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를, 라크슌은 요코와 만나자마자 그만두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오호에 있어도 된다고 말하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일하고 싶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니까 상관없다고 한다.
배가 들어온 다음날에는 오호를 떠나 관궁을 향해 출발했다. 요코에게는 고액은 아니지만 절대로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 있었으므로, 여유있는 여행이 되었다. 낮동안에는 도로를 걷고, 밤에는 도시에 들어가 여관을 잡는다. 안국의 도시는 어디나 컸고, 같은 요금의 여관이라고 해도 설비가 교국과는 전혀 달랐다. 저녁 무렵에는 도시에 들어가 여관을 잡고 밤의 도시를 구경한다. 특히 라크슌은 상점가를 구경하는 것이 좋은 듯 했다.
평온한 여행이었다. 이미 요코를 쫓는 자들은 없다. 병사의 모습을 볼 때마다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밤에 도시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기에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밤길을 걸어도 요마와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는 듯 했다.
그런 여행 가운데, 요코가 목욕을 하는 사이에 산책을 하던 라크슌이 해객의 소문을 듣고 온 것은 오호를 떠나고 11일째, 관궁까지 약 1/3 정도의 거리를 지났을 때였다.
이미 안국에 있으니까 조금은 화사한 차림을 해도 좋을텐데, 라고 라크슌은 말했지만 요코는 변함없이 남자옷-포(袍)라고 부르는 듯 했다-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쪽이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일단 익숙해지자 길이가 긴 여자옷은 입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소년으로 생각되어지곤 해서, 안국의 여관에는 목욕탕이 있었지만 들어가기가 껄끄러웠다. 공동 사우나 같은 목욕탕인 듯 하지만, 방에서 더운물로 몸을 씻는걸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여비는 충분했으므로 여관은 제대로 된 방을 잡았다. 그럼에도 뭔가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한 방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욕을 할 때마다 방에서 쫓겨나게 되는 라크슌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큰 대야에서 더운물로 머리를 감았다. 이쪽으로 휩쓸려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타츠키가 머리를 물들여주고서도 꽤나 시간이 지났다. 머리도 상당히 길어있다. 타츠키가 정원의 풀뿌리를 이용해서 물을 들여준 것을, 대강 비슷해보이는 풀을 찾아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물들여봤지만 풀의 종류나 염색하는 방법이 달랐는지 나중에 물들인 부분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색이 옅어져버렸다. 지금은 원래의 붉은 색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런 기묘한 머리색에도 이미 익숙해졌다. 변함없이 거울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와서야 이쪽에 적응해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때에 라크슌이 돌아와 해객의 소문을 들려준 것이다.
「이 근처의 방릉(芳陵)이라는 향성에 해객이 있다나봐.」
요코는 일순 눈을 들었다가, 곧 고개를 수그렸다.
「........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만난 뒤 동포에게 낙담하게 되는 것이 더 괴롭다.
「헤키라크진(壁落人)이라는 사람인가봐.」
「헤키, 라크진?」
「응. 상상의 선생님이라는 것 같던데.」
그럼 그 노인은 아닌 것이다. 잘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노인일 리가 없는데도, 그 사실은 요코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만나러 갈거지?」
라크슌은 아무런 의심없는 눈으로 요코를 본다.
「가보는 쪽이 좋겠지.」
「길거야?」
「응......」
다음날, 관궁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 방릉으로 향했다.
헤키라는 사람은 학교의 한 건물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가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라크슌은 말했다. 미리 편지를 보내서, 정식 수속을 밟아 면회를 요청했다.
라크진에게서의 대답이 여관에 도착한 것은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답장을 들고온 심부름꾼을 따라 학교로 갔다.
방릉의 학교는 성벽 안쪽에 있는 전형적인 중국풍의 건물로 넓은 정원을 동반한, 학교라기보다는 부잣집같은 느낌이었다.
정자같은 작은 건물로 인도받아 조금 기다리자, 거기에 라크진이 모습을 나타냈다.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헤키입니다.」
그의 연령은 잘 알 수 없다. 30에서 50 사이라고는 생각되지만, 젊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나이들게도 보였다. 주름이 없이 팽팽한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띄우고 있다. 그 마츠야마 세이조라는 노인과는 꽤나 분위기가 달랐다.
「편지를 주신 것은?」
라크슌이 대답했다.
「내가......아니, 저입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라크진은 부드럽게 웃었다.
「부디,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하아.....」
가볍게 귀밑을 긁고서, 라크슌은 요코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은, 해객입니다.」
라크슌의 말에, 그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아아, 과연. 하지만 이분은 해객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요코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그는 미소지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저런 머리색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아.....」
묻는 듯한 눈빛에, 요코는 사정을 설명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에 오자 이런 모습이 되어있던 것을. 머리색만이 아니라, 얼굴이나 몸, 목소리마저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얘기가 끝나자 라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태과(胎果)로군요.」
「제가? 태과?」
요코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식에 의해서, 저쪽과 이쪽이 섞이게 되지요. 사람이 오고, 란과가 갑니다.」
「잘 모르겠어요.」
「식에 휩쓸려서, 사람이 이쪽으로 오게 됩니다. 그것과 반대로, 란과가 저쪽으로 흘러가는 일도 있습니다. 란과는 태아같은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어머니의 뱃속으로 흘러가지요. 그렇게해서 태어난 사람을 태과라고 부릅니다.」
「제가...그렇다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과는 본래 이쪽의 생물입니다. 지금 보이는 그 모습이 당신이 본래 천제에게서 부여받은 모습이지요.」
「하지만, 저쪽에 있을 때에는......」
「그 모습으로 왜에 태어나게 되면 큰 소란이 나겠지요. 당신은 양친을 닮았을 겁니다.」
「예. 친할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들었어요.」
「그것은 말하자면, 껍질같은 것입니다. 저쪽에서 태어나도 지장이 없도록, 태내에서 씌워진 껍질 같은 것. 태과는 그런 식으로 모습이 변한다고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코에게 있어서 바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애초부터 이방인이었다는 말을 듣고, 깨끗하게 납득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그저, 역시나, 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은 저쪽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쪽에는 있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뭔가 굉장히 위로가 되었다. 위로받는 것과 동시에, 한없이 슬펐다.
- 7 -
요코는 한동안 멍하게 자신과 세계에 대해 생각하다가, 갑자기 라크진을 보았다.
「선생님도 태과인가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저 해객일 뿐입니다. 고향은 시즈오카지요. 동경대에 갔었습니다. 이쪽에 온 것은 21세 때였습니다. 야스다 강당에서 나오려고, 책상 밑을 기어가다보니 이쪽이었지요.」
「야스다...?」
「아아, 모르시는군요. 큰 소동이었습니다만, 역사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는지도.」
「저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저도 그렇습니다. 쇼와14년 1월 17일이었지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1939년)
「.....제가 태어나기 전 일이에요.」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그렇게 지났습니까. 전 오랫동안 이쪽에 있었군요.」
「그 때부터 계속 여기에?」
「그렇습니다. 도착한 것은 경국이었지요. 경국에서 안국을 전전하며, 여기에 정착한 것이 6년전입니다. 여기에서는 처세.......생활과학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무엇을 듣고 싶으십니까?」
요코는 곧바로 질문 한가지를 던졌다.
「돌아갈 방법은 있을까요?」
라크진은 조금 간격을 두고, 낮게 말했다.
「......사람은 허해를 건널 수가 없습니다. 이쪽과 저쪽은 일방통행의 길밖에 없지요. 올 뿐입니다. 갈 수는 없습니다.」
요코는 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한가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뭐든지.」
「전, 이곳 말을 알아요.」
라크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 애초부터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었어요. 계속 일본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특수한 단어 뿐이에요. 그것이, 교국에서 해객 할아버지와 만나서, 처음으로 이곳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말이 쓰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라크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요코의 얼굴을 본다.
「...당신은 사람이 아닌 듯 하군요.」
역시, 라고 생각했다.
「저는 이쪽에 왔을 때, 말을 알 수 없어 고생했습니다. 아마도 중국어계통의 언어라는 것은 알겠지만, 제가 알고 있던 초보적인 중국어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고 필담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한문은 통했으니까. 그 한문도 꽤나 이상한 것으로, 최초 1년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온 누구나 그렇습니다. 태과도 예외는 아니지요. 저는 해객의 연구를 하고 있지만, 과거에 해객으로서 언어에 어려움이 없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은 단순한 해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코는 자신의 팔을 살짝 끌어안았다. 라크진은 말을 이었다.
「언어로 곤란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요족이나 신선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한번도 말 때문에 불편을 겪지 않았다면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요족인가, 신선인가, 그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족......에도 태과가 있나요?」
라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웃음을 띄운 채였다.
「들은 적은 없지만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에게는 해결책이 남아있습니다.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요코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인가요.」
「예. 요족이건 신선이건, 허해를 건너는 것이 가능하니까요. 저는 허해를 건널 수 없습니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지요.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연왕에게 청해보십시오.」
「왕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노력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요코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런가, 역시 난 인간이 아니었던건가......」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자, 라크슌이 제지하는 소리를 냈다.
「요코.」
요코는 소매를 걷어 오른손을 가리켰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손바닥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쪽에 와서 요마에게 당한 상처죠. 완전히 꿰뚫려서, 굉장히 깊은 상처였는데도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라크슌은 요코가 내민 손바닥을 발돋움을 하고 들여다보고는 수염을 움직거렸다. 그것은 라크슌이 치료해준 상처였다. 얼마나 깊은 상처였는지는, 라크슌이 증인이 될 수 있겠지.
「이것 말고도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것도 이미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어요. 상처 자체도 요마에게 습격당한 것치고는 너무 가벼웠어요. 물렸는데도 이빨흔적밖에 남지 않았다던가. 뭔가 굉장히 상처를 입지 않는 체질이 된 것처럼.」
요코는 웃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요족이었기 때문이군요. 그게 저를 노리고 요마들이 덤벼오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거겠네요.」
「요마가 노려?」
라크진은 눈썹을 좁혔다. 대답한 것은 라크슌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바보같은.」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만, 들어보면 요코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요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도 실제로 고조에게 습격당할 때 같이 있었습니다.」
라크진은 가볍게 이마를 눌렀다.
「최근 교국에 요마가 출현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그것이 그녀 때문이라고?」
라크슌이 주저하듯이 요코를 바라보자,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슌의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쪽에 온 것도, 애초에 고조에게 쫓겨서 도망쳐온거였으니까요.」
「고조에게 쫓겨서 도망쳐왔다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예. 케이키라는 사람이......그도 분명 요마였던 것 같지만, 그 사람이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쪽으로 올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래서 저를 이쪽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지금?」
「모르겠습니다. 이쪽으로 막 왔을 때 요마가 매복하고 있어서, 그 때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고, 어쩌면 이미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크진은 오랫동안 이마에 손을 대고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라크슌에게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요마라고 하는 것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무리지어 사람을 사냥하는 일은 있어도, 특정한 누군가를 노려서 행동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일부러 허해를 건너서, 그것도 당신을 노려서라니. 그런 짓을 하는 생물이 아닙니다. 호랑이가 그런 짓을 하지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호랑이를 길들여서 이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요마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일입니다, 요코상.」
「......그렇습니까?」
「요마측에 무언가 변화라던가 사정이 있어서 당신을 노렸다고 하건, 혹은 누군가가 요마를 조종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하건, 어느 쪽이건 이 일을 방치해두면 최악의 경우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크진은 요코를 보았다.
「혹시 당신이 요족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얘기가 간단합니다만. 요족끼리 동족분쟁을 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요족은 굶주리면 서로 먹기까지 하는 생물입니다. 하지만...」
「요코는 어떻게 봐도 요마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라크슌이 말하자 라크진도 끄덕였다.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요마는 있지만, 이렇게나 완벽하게 변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것도, 본인에게 요마의 자각이 없다는 것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요코가 쓴웃음을 짓자 라크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아닙니다. 요마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라크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을 만나십시오. 제가 관리에게 보고해도 되지만, 그보다는 직접 관궁에 가는 쪽이 얘기가 빠릅니다. 곧바로 현영궁(玄英宮)을 찾아가서, 지금의 얘기를 하십시오. 당신은 이 사건의 열쇠입니다. 분명 왕은 만나주실 겁니다.」
요코도 일어섰다.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지금 바로 나가면 저녁무렵에는 다음 마을에 닿을 수 있습니다. 짐은 숙소에?」
「아니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성문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라크진은 성문까지의 길을 함께 걸어서 배웅해주었다.
「미력하지만 저도 편지를 써두겠습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때까지는 운신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이 정리되면 분명히 왕이 돌려보내 주실겁니다.」
요코는 라크진을 보았다.
「당신은?」
「네?」
「선생님은 돌아가고 싶다고, 임금님에게 청해보지 않으십니까?」
요코가 묻자 라크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왕과 만날 수 있을만한 신분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개 해객이 만날 수 있을만큼 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지요.」
「하지만.」
「아니......정말로 청원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그럴만큼의 흥미가 없었습니다.」
「흥미가 없어요?」
「저는 시대에 지쳐있었으니까, 신천지에 온 것이 기뻤습니다. 저는 고국에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왕을 만나면 돌아가게 될,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이쪽에 적응한 뒤였고 돌아가는 것 따위는 이미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저는.......돌아가고 싶어요.」
요코는 중얼거렸다. 돌아가고 싶다, 고 말한 순간 굉장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무사히 왕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적어도 문까지, 일본의 얘기라도 할까요?」
「필요없습니다.」
라크진은 웃었다.
「그곳은 제가 혁명에 실패하고 도망쳐온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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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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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장은 80여 페이지. 이번 장은 50여 페이지. 분량이 훨씬 줄어든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빨라졌군요, 저. T_T 이제 2권도 반 남았습니다. 역시 이것은 시간의 문제인가......;;;;;
요코의 고생길은 대부분 닫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요코의 신상에 걸려있던 미스테리들의 해결이지요. 그리고,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저의 러브리 안주종의 등장입니다!!! 경주종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안주종이 역시 좋아요. 그 티격태격 깡패 왕&기린 세트의 만담은 언제 보아도 즐겁습니다.
저 야스다 학당의 사건에 대해서. 인터넷을 조금 찾아봤지만 역시나 어렵군요. 「학원분쟁, 야스다강당 함락」이라는 제목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참고로 야스다 강당은 동경대학교의 강당으로 동대의 상징적인 존재라는군요. 1939년이 2차대전이 시작된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자면, 자유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동대생 일부가 학교 강당에 모여 바리케이트를 쌓고 농성.....정도로 생각됩니다. 12일 뒤인 1월 29일에 동대 교수들의 집단휴직사태가 있었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신성한 학내에서 학생들의 피를 봤으려니...싶은 대목입니다. 그러나, 폭탄을 피해서 바다에 빠졌다가 쓸려왔다는 얘기는 이해가 가지만, 책상 밑에서 이쪽으로....?;;;;; 몇 번을 다시 봐도 문맥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7장
.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하)
원작 :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번역 : siva(yshtar@hitel.net)
십이국기 시리즈는 현재 (주)조은세상 출판사와 고단샤 사이에 정식으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에 게재된 번역은 라이센스판의 번역자인 저와 출판사 사이의 협의에 의해 책의 광고 목적을 겸해 게재를 허락받은 것으로, 본 홈페이지의 번역을 무단으로 복사, 전재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적발시 법률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제 7 장
- 1 -
거의 달리다시피 가도를 걸어, 문이 닫힐락말락할 시간에 다음 거리에 뛰어들어갔다. 다음날은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거리를 나섰다. 요코에게는 지금 한가지, 일의 중대함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라크진이나 라크슌이 안색을 바꾸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일이리라는 것 정도는 납득하고 있었다.
「정말로 안왕과 만날 수 있을까.」
걸으면서 물어보자, 라크슌은 수염을 움직였다.
「글쎄. 나도 왕에게 청원을 해본 적은 없으니까 몰라. 갑자기 왕과 만나려고 해도 무리겠지.」
「그럼?」
「관궁에 가면 향(鄕)도 현(縣)도 있지만--우선은 타이호에게 청원을 해볼까.」
「타이호?」
라크슌은 끄덕이면서 손가락으로 공중에 글자를 썼다.
「태보(타이호, 台輔). 재보(宰輔)를 그렇게도 불러. 일종의 존칭일까나. 관궁이 있는 것은 정주(靖州), 정주의 주후는 타이호니까.」
요코는 가만히 그 문자가 써내려진 곳을 바라보았다.
「....들은 적이 있어.」
어디에선가, 타이호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거야, 있었겠지.」
「아냐. 아마도, 저쪽에서.」
꽤나 오래전에 들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타이호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생각해냈다.
「아아, 그런가. 케이키가 그렇게 불렸었어.」
라크슌은 새까만 눈을 깜짝 놀라서 떴다.
「타이호? 케이키?」
「응. 나를 이쪽으로 데려온 사람. 이 검을 주고........」
요코는 조금 웃었다.
「나의 부하라나봐. 내가 주인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런것치고는, 태도는 꽤나 거만했지만.」
「......잠깐만 기다려.」
라크슌이 당황하며 손을 올렸다. 꼬리까지 요코를 멈춰 세우려는 듯이 올라갔다.
「케이키, 라고? 그녀석이 타이호라고 불렸단 말야?」
「응, 혹시 알아?」
요코가 묻자 라크슌은 무서운 기세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도 고민스러운지 털을 두세번 상하로 부풀렸다.
「요코가 케이키의 주인.....」
정말로 오래전의 일이다. 요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앨범을 넘기듯이 여러 가지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요코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문득 숨을 내쉬며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라크슌이 두세걸음 떨어진 곳에서 요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꽤나 당황하는 듯이 보였다.
「왜그래?」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코를 올려다본 채로 라크슌은 중얼거렸다.
「케이키라는 사람이 타이호라고 불리고 있었다면, 그녀석은 케이타이호야......」
「그게?」
망연한 듯이 보이는 라크슌의 상태가 이상했다.
「케이키가 케이타이호면, 그게 뭔가 이상한거라도?」
라크슌은 길가에 주저앉아서 요코에게 손짓했다. 곁에 앉는 요코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키가 뭔가...? 그 사람은 뭐지?」
「.........이건 큰일이야, 요코.」
「잘 모르겠어.」
「천천히 설명할께. 진정하고 들어.」
천천히 불안이 생긴다.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라크슌을 바라보았다.
「타이호, 라는 얘기를 훨씬 일찍 해줬으면 놀랄 정도로 일이 간단해졌을 텐데. 아마도 요코는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거야.」
「라크슌, 잘 모르겟어.」
「타이호라고 불리는 것은 재보(宰輔)뿐이야. 게다가 그녀석의 이름은 케이키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건 케이타이호야. 그것밖에 없어.」
「응. 그런데?」
라크슌은 수염을 움직였다. 작은 앞발을 뻗어 요코의 손을 만지려고 하다가, 주저하는 듯이 그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면, 그녀석은 인간이 아니야. 요마도 아냐. .......기린이다.」
「기린?」
「기린(麒麟). 기린은 최고위의 영수야. 보통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 타이호는 인간이 아냐. 반드시 기린이라고 정해져 있어. 케이키는 경기(케이키, 景騏)라고 쓰지. 이름이 아니라 호(號)야. 경동국(慶東國)의 기린을 뜻해.」
「응....」
「경국은 청해의 동쪽, 안국과 교국 사이에 있어. 기후가 온난한 좋은 나라지.」
「지금은 나라가 어지러워져 있다면서?」
라크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왕이 서거하고서, 새 왕이 서지 않았어. 왕은 요마를 다스리고 괴이를 진정시키며, 천재지변에서 나라를 지켜. 그러니까, 왕이 없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져.」
「.....응.」
「케이키가 너를 주인이라고 했다면, 넌 경왕(景王)이야.」
「에?」
「경동국왕, 경(景).」
요코는 한동안 눈을 크게 뜬 채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얘기에 제대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
「넌.....경국의 새로운 왕이야.」
「기다려. 난......평범한 여고생이었다구? 확실히 태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냐.」
「왕이라고 하는 것은 옥좌에 앉을 때까지는 단순한 인간이야. 왕은 혈통으로 결정되지 않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본인의 성격도 외모도 아무런 관계가 없어. 그저, 기린이 골랐는가 아닌가, 그것뿐이야.」
「하지만........!」
라크슌은 고개를 저었다.
「기린은 왕을 골라. 케이키가 고른 것이 너라면, 경왕은 너야. 기린은 어떤 인간에게도 따르지 않아. 기린에게 주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왕뿐이야.」
「그런 바보같은....」
「하늘은 인간에게 가지를 건네줬어. 세 개의 열매는 토지와 국가와 옥좌를 나타내지. 토지는 지적과 호적을 말하고. 나라는 율법을 뜻해. 그리고 옥좌는 왕의 덕목인 인도(仁道)--즉 기린을 의미해.」
말하면서, 다시금 라크슌은 생각에 잠겼다.
「요코가 사람과도, 단순한 태과와도 다른 이유를 알겠어. ....케이키와 계약을 맺었겠지.」
「뭐?」
「계약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왕은 신이지 사람이 아냐. 기린과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왕은 인간이 아니게 돼.」
요코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동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허락한다, 라는 한마디를 떠올렸다.
「케이키가 뭔가를 말하고, 허락한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그래, 그 때 케이키가 묘한 짓을 하고, 그 뒤에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뭔가가 자신 속에서 뛰텨나가는 듯한 그 느낌. 그 직후에, 직원시의 유리창이 깨지고 많은 교사들이 상처를 입는 중에서 요코만이 상처가 없었다.
「묘한 일?」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어. ...라고 할까, 내 발에 이마를 대고....」
「그거다.」
라크슌은 단언했다.
「기린은 자존심높은 생물이야. 왕 이외의 인간은 따르지 않고, 절대로 왕 이외의 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
「하지만.....」
「자세한 것은, 나한테 물어도 몰라. 연왕에게 물어봐. 나는 일개 반수일 뿐이니까. 신의 세계의 일은 잘 몰라.」
딱딱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라크슌은 요코를 올려다 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구염을 축 늘어뜨렸다.
「요코는 먼 사람이었구나......」
「난..」
「정말은, 나 따위가 말을 걸 수 있을만한 분이 아니야. 요코라고 막 부르는 것도 이제 안되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그렇게 되면, 한시라도 빨리 연왕과 만나는게 좋아. 관궁으로 향하는 것보다도 가장 가까운 관청에 가는 편이 빠르겠어. 일은 국가의 중대사니까.」
등을 보이며 말하고, 다시 한번 요코를 돌아보았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시리라 생각하지만, 여기부터라면 관궁으로 향하는 것보다도 관청에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빠릅니다. 연왕의 허가가 있을 때까지 여관에서 머물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만, 모쪼록 용서해주시길.」
깊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슬퍼졌다.
「난, 나야.」
「그럴수는 없습니다.」
「난.」
심하게 흥분해서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일 뿐이야. 단 한번이라도 내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어. 왕이건 해객이건, 그런건 나 자신과는 관계없어. 내가, 라크슌과 여기까지 걸어온거야.」
라크슌은 그저 몸을 움츠리고 있다. 동그란 등이, 지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어디가 다르다는 거야. 뭐가 달라졌다는 거야. 난 라크슌이 친구라고 생각했어. 친구에서 표변하게 되는 지위가 왕이라는 거라면, 그런 것, 난 필요없어.」
작은 친구의 대답은 없었다.
「그런건 차별이잖아. 라크슌은 나를 해객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았어. 그런데 왕이라고 해서 차별하는거야?!」
「....요코.」
「내가 멀어진게 아냐. 라크슌의 마음이 멀어진거야. 나와 라크슌의 사이에는 단 두 걸음 거리 뿐이잖아.」
요코는 자신의 발치에서 라크슌의 발치까지의, 짧은 간격을 가리켰다.
라크슌은 요코를 올려다 보았다. 앞발이 목적없이 가슴팍 근처의 털을 쓰다듬다가, 비단실같은 수염을 움직였다.
「라크슌, 안그래?」
「.........나한테는 세 걸음이야.」
요코는 미소지었다.
「그거 미안.」
라크슌의 앞발이 뻗어와 요코의 손을 건드렸다.
「미안.」
「아니. 이쪽이야말로 미안해. 이상한 일에 말려들게 해서.」
요코는 쫓기고 있다. 라크슌이 왕이라고 말한다면, 정말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쫓기는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크슌은 새까만 눈으로 웃었다.
「내가 안국에 온 것은 날 위해서야. 그러니까 요코가 신경쓸 것 없어.」
「난 라크슌에게 계속해서 폐를 끼쳤어.」
「폐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따라오지도 않았어. 싫었으면 집으로 돌아갔을거야.」
「......상처까지 입게 하고.」
「일이 복잡하고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어. 그래도, 따라온 것은 날 위해서 걸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야.」
「사람이 좋구나, 라크슌은.」
「그럴지도. 그렇다고 해도 요코를 내버려두고 안전하게 있는 것보다는 요코와 함께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이 내게 있어서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설마, 이렇게나 위험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텐데?」
「그렇다면, 내 예상이 물렀던거야. 그건 나 때문이지 요코 때문이 아냐.」
그 이상 말을 찾을 수 없어 요코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을 쥐고서, 말할 수 없이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해객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추격해오는 요마들이, 요코가 나온 뒤 라크슌의 집을 습격하지는 않았을까. 집을나설 때 그가 어머니에게 말한 「엄마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혼자서도 괜찮잖아?」라는 말은 은연중에 추격자나 그 밖의 어려움이 그녀를 덮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요코는 팔을 뻗었다. 푹신푹신한 모피를 끌어안았다. 와와왁, 하는 기성을 올리는 라크슌을 무시하며 회갈색의 모피에 얼굴을 묻었다. 상상하던 대로, 굉장히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정말로 말려들게 해서 미안. 고마워.」
「요코오--.」
낭패한듯한 요코를 놓아주었다.
「미안. 조금......감동했어.」
「괜찮지만.」
라크슌은 어색한 듯이 털을 양손으로 쓰다듬었다.
「너, 조금 더 처신을 잘하는게 좋겠어.」
「에?」
그렇게 묻자 라크슌은 수염을 늘어뜨렸다.
「아니면, 좀 더 이쪽의 일들을 공부해둬. 응?」
곤란한 듯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요코는 석연치 않은 채 끄덕였다.
「응.」
- 2 -
라크슌은 다음 거리에 들어가자마자 여관을 잡았다. 그 여관에서 문서를 쓰더니, 정말로 관청으로 달려갔다.
제출한 그 문서가 받아들여지면 여관으로 뭔가 응답이 있을 거라고, 라크슌은 말했다. 요코로서는 일의 중대함이 잘 이해되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자신이 왕이라는 자각 따위는 오히려 더욱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라크슌의 행동을 방해할 생각도 없어,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있었다.
「어느 정도 걸릴까?」
「글쎄. 어쨌거나 사정을 써서 재보에게 접견을 청했지만, 얼마나 걸려야 재보의 손에 닿을까. 이것만은 경험이 없으니까 모르겠어.」
「관리를 붙잡고 부탁해볼 수는 없어?」
요코가 묻자 라크슌은 웃었다.
「그런 짓 해봤자 쫓겨날 게 뻔해.」
「혹시라도, 무시당한다면?」
「불러줄 때까지, 끈기있게 서신을 제출하러 가야지.」
「정말 그런 귀찮은 짓을 할거야?」
「그 밖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꽤나 힘들겠구나.」
「상대가 너무 높아. 어쩔 수 없지.」
「흐음.」
자신이 그 큰 일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관청--여기에 있는 것은 당(當)의 관청이었다--을 나서자, 라크슌이 여관 쪽이 아닌 광장쪽을 가리켰다.
「뭔데?」
「좋은 것을 보여줄께. 요코에게는 분명히 신기할 거라고 생각해.」
관청은 거리의 안쪽에 있는 광장을 마주하고 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라크슌의 뒤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가자, 라크슌은 바로 정면에 있는 하얀 건물로 향했다. 하얀 석조의 벽에는 금과 선명한 색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었다. 지붕 기와의 푸른 유약이 아름다웠다. 거리의 이름은 용창(容昌), 건물의 문에는 용창사(容昌祠)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거리에는 반드시 있던, 거리의 중심에 지어져있는 시설이었다.
「여기?」
「여기야.」
「사당(祠)이라고 써있다는 건 신을 모시는 곳이겠구나. ---천제?」
「보면 알아.」
라크슌은 싱긋 웃고서 문을 들어섰다. 문에는 병사가 서있고, 라크슌이 견학을 하고 싶다고 용건을 말하자 신분증명서의 제시를 요구했다.
문을 들어서자 좁은 정원이 있고, 더 안쪽에 큰 건물이 있었다. 섬세한 세공으로 장식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안쪽으로 향하는 사이에 거실같은 큰 방이 있었다.
건물 안은 고요한 공기로 충만해 있었다. 안으로 향하는 넓은 거실의 정면 벽에는 큰 창문처럼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그 저편에는 내원이 보였다.
창의 사방을 둘러싸듯이 제단같은 것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수많은 꽃과 촛불, 제물이 놓여있었다. 4, 5명의 남녀가 창을 향해서 열심히 뭔가를 빌고 있다.
제단의 중앙에는 소원을 비는 대상이 있을 터. 그런데도, 거기에 있는 것은 창 뿐이다. 아니면 창에서 보이는 무언가일까. 창에서는 내원과, 내원의 중앙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보였다.
「저것은..........」
라크슌은 가볍게 제단 쪽을 향해 손으로 신호를 하고, 바로 요코의 손을 오른쪽으로 끌었다. 제단이 잇는 정면의 벽의 좌우에 더 안쪽으로 향하는 복도가 있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하얀 자갈을 깔아놓은 내원이 보인다.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서 요코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얀 나무였다. 요코가 산 속을 방랑하고 있을 때마다 휴식을 구했던, 그 이상한 나무. 산에서 본 것보다 훨씬 크지만, 높이는 다르지 않다. 가지를 펼친 직경이 20미터 정도, 가장 높은 가지가 2미터 전후로 가장 낮은 가지는 땅이 쓸릴 정도. 하얀 가지뿐으로 잎사귀도 꽃도 없이, 군데군데에 리본같은 가는 밧줄이 매달려 있고 거기에는 노란색의 나무열매가 몇 개 열려있었다. 산에서 본 나무열매는 작았지만, 여기에 있는 열매는 한아름 정도 되는 것도 있었다.
「라크슌, 이건.........」
「이게 리목이야.」
「리목? 그 난과가 열린다는?」
「그래. 저 노란 열매 안에 아기가 들어있어.」
「헤에.....」
요코는 망연한 채로 그 나무를 지켜보았다. 당연히 고국에선 본 적이 없었다.
「요코가 저렇게 생겼을 때에 식이 일어나서 왜로 쓸려간거야.」
「뭔가 거짓말같아......」
가지도 나무열매도, 금속같은 광택이 있다.
「아기를 바라는 부부는 함께 사당에 찾아가. 제물을 바치고, 아이를 내려주기를 빌면서 가지에 끈을 묶는거야. 천제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끈을 묶은 가지에 열매가 열려. 열매는 10달 동안 숙성해서, 부모가 따러 가면 떨어져. 딴 난과를 하룻밤 놔두면 열매가 갈라지면서 아이가 태어나는 거야.」
「그럼, 열매가 멋대로 생기는 게 아니겠네. 양친이 바래야 생기는 거야?」
「그렇지. 아무리 바래도 생기지 않는 부모도 있고, 바로 열매를 받는 부부도 있어. 하늘이 부모의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보고 결정하는 거니까.」
「나도 그런거야? 내 가지에 띠를 묶어준 부모님이 있었던 거야?」
「그래. 란과를 잃고서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을거야.」
「그 분들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
「글쎄. 달력을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요코가 쓸려간 시기를 역산해서, 그때쯤에 식이 일어난 장소를 찾아서 쓸려간 난과의 수를 조사하고--- 하지만 어려울거야.」
「그렇구나.」
찾을 수 있는 거라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의 탄생을 기원해준 사람이 이쪽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겨우 요코의 존재를 납득시켰다. 요코는 본래라면 이쪽에 태어났어야 했던 것이다. 허해에 둘러싸인, 이 세계의 어딘가에서.
「아기는 부모와 닮은걸까나.」
「아기가 부모와 닮아? 왜?」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이 질문을 해오자 요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 모습을 한 여자의 아기가 쥐일 정도이다. 아이와 부모의 사이에는 아무런 유전적 연관도 없는 것이겠지.
「저쪽에서는, 부모와 자식은 닮는거야.」
「헤에, 이상하네. 뭔가, 그거 기분나쁘지 않아?」
「기분나빠? 왜?」
「같은 집 안에 똑같이 생긴 녀석이 있으면 기분나쁘지 않을까나.」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요코가 보고 있는 눈앞에서, 젊은 남녀가 내원에 들어갔다. 뭔가를 상담하고 있는 것일까, 가지를 가리키며 귓속말을 속삭이며, 한동안 망설이다가 고른 가지에 예쁜 끈을 묶었다.
「저 끈은 반드시 부부가 스스로 문양을 수놓게 돼.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서 축복의 문양을 골라서, 도안을 짜서 자수를 놓지.」
「...........응.」
그것은, 굉장히 따스한 풍습으로 느껴졌다.
「나, 산 속에서도 이런 나무를 봤어.....」
라크슌이 요코를 돌아보았다.
「야목(野木)인가.」
「야목이라고 하는거야, 그거? 거기에도 열매가 열려있었어.」
「야목에는 두 가지가 있어. 풀이나 나무가 열리는 것과, 짐승이 열리는 것.」
요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라크슌을 돌아보았다
「풀이나 나무도, 동물도 나무에 열려?」
라크슌이 끄덕였다.
「당연하잖아. 나무에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태어나는데.」
「.........에에.....그게...」
아기가 나무에 열리는 거라면, 확실히 동물도 식물도 나무에 열리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축은 리목에 열려. 주인이 여기에 오는거야. 가축을 비는 특별한 날이나 방법이 있긴 하지만. 풀이나 나무나 산의 동물들은 멋대로 생겨. 멋대로 익어서, 풀이나 나무라면 씨앗이, 새라면 병아리가 짐승이라면 새끼가 태어나.」
「씨앗은 어쨌거나, 병아리나 어린 짐승은 위험하지 않아? 병아리 따위, 곧 다른 짐승한테 잡아먹혀 버릴텐데.」
「부모가 데리러 오는 짐승도 있기는 하지만. 그밖에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나무 아래에서 살아. 그러니까 나무에는 다른 짐승은 접근할 수 없게 되어있어. 서로 적인 짐승끼리는 같은 시기에 태어나지 않기도 하고, 아무리 흉폭한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나무 아래에 있는 한은 싸우지 않아. 그래서, 저녁 무렵에 거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서 야목을 찾아. 야목의 아래는 안전하니까.」
「......과연.」
「반대로, 아무리 위험한 짐승의 새끼라고 하더라도 나무가 보이는 장소에서는 붙잡거나 죽이면 안돼.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이니까.」
「그랬던거구나...... 그럼,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게 아니구나.」
라크슌은 굉장히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아기가 들어있으면 못 먹잖아.」
요코는 조금 웃었다.
「........응. 확실히 그건 그럴지도.」
「뭔가, 요코 얘기를 듣고 있으면 저쪽은 기분나쁜 곳 같아.」
「그럴지도. --요마는? 역시 요마가 열리는 나무도 있어?」
「있겠지, 당연히. 그게 요마가 열리는 나무를 본 사람은 없지만 말야. 어딘가에 요마의 소굴이 있다는 얘기도 있으니까, 분명 거기에 있는 거겠지.」
「헤에...」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너무나도 부끄러운 질문이라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유곽이 있는 것 보면,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
「왜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데려와줘서 고마워. 왠지 기뻐.」
요코가 웃자 라크슌 역시 활짝 웃었다.
「그거 잘됐군.」
내원에 있는 젊은 부부는 아직도 가지를 향해 손을 모으고 있었다.
- 3 -
라크슌은 제대로 된 여관을 잡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요코는 그런 낭비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절대로 경왕을 그런 싸구려 여관에 묵게할 수는 없어.」
「내가 경왕이라는 건, 라크슌이 혼자 말하고 있는 것 뿐이잖아. 라크슌은 친구니까 일단 말하는 것은 믿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닌걸.」
「확실하게 밝혀지면?」
「그래도 관계없어.」
「.....이봐, 요코.」
「내가 갖고 있는 여비로는 이정도 여관이 딱 맞아. 관청에서 불러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비싼 여관에 묵었다가 시간이 오래 걸리면 여관비도 못내게 되잖아.」
「넌 경왕이니까, 그렇게 될 리가 없어. 애초에 왕에게 여관비를 받으려는 주인이 어디 있겠어.」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가 좋아. 묵고서 여관비도 안내는건 정당하지 않잖아. 처음부터 그런걸 목적으로 하는건 싫어.」
그런 말다툼 끝에 잡은 여관은, 격으로 말하자면 하(下)중 상(上)이었다. 다다미 네 장 정도의 작은 방이었지만, 제대로 침대가 두 개 있다. 내원을 향해 창이 하나 있고, 창문 아래에는 테이블까지 갖춰져 있다. 그런 방에 요코 자신의 돈으로 묵을 수 있는 것이니, 요코에게 있어 이 이상의 사치는 없다.
사당에서 돌아오자 이미 저녁때로, 어쨌거나 방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때까지 입고 있던 옷을 빨았다. 매일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것이니, 정말로 이 이상의 사치는 없었다.
식당에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라크슌과 식사를 먹었다. 일어선 채로 노점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 역시 대단한 사치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차를 마시고, 슬슬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을 때였다.
--여관의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심상치 않은 비명에 요코는 재빨리 검을 쥔다. 잠시도 검을 곁에서 떼지 않는 버릇만은 몸에 스며버려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손잡이를 쥐고 바깥으로 뛰어나가자 골목의 저편이 소란스러웠다. 멀리 보이는 귀퉁이에서 갈을 가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앞뒤를 다퉈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요코.」
「설마 여기까지.」
왠지 요마가 안국에까지 쫓아오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확실한 근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애초에 안국에는 요마가 적다. 밤에는 여관을 잡고 낮에만 걷는 여행이니 요마와 만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요코의 적은 밤에 산속에서 만나는 요마뿐이 아니었을 터였다. 어쩌면 오늘까지 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라크슌은 여관 안에 있어.」
「하지만, 요코.」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의 색은 요코에게도 기억이 있다. 최대급의 비명. 그것은 목숨이 위험에 달린 자가 내는 비명이었다. 비명에 섞여 어린아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반드시 요마의 목소리라고, 요코는 배워왔다.
손에 잡은 검을 빼들고, 검집을 라크슌에게 내밀었다.
「라크슌, 물러나있어. 제발.」
대답없이, 그저 곁에 있던 라크슌의 기척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한꺼번에 인파가 몰려닥치며, 요코는 그 저편에 작은 산같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호랑이같다. 바후쿠, 라고 누군가가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요코는 쥐고있는 검 끝을 내린 채로 가볍게 몸을 굳힌다. 검날이 좌우의 가게의 조명을 받아 빛났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놀란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호랑이. 그 등뒤에 소와 닮은 생물이 보였다.
「두 마리.........」
조금 몸이 긴장했다. 오랜만의 감각에 공포보다도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길가를 도망가는 사람들이 좌우의 가게로 뛰어들어가면서, 적과의 간격이 생겼다. 가볍게 달리며 기세를 타고 검을 휘둘렀다.
최초는 호랑이였다. 도약하듯이 날아오는 거대한 몸체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검 끝을 거대한 머리의 뒤쪽에 꽂았다. 검을 뽑자마자 자세를 추스리며 다시금 돌격해오는 푸른 소에게 휘둘렀다.
몸이 크기 때문에 숨통을 끊는 것은 시간이 걸렸지만, 수가 적기 때문에 힘들 것은 없다. 여유있게 두 마리를 상대하고 있는 참에 갑자기 라크슌의 목소리가 울렸다.
「요코, 킨겐!」
곧바로 고개를 들어보자 큰 닭같은 새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열에서 열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찌르지 마, 독이 있어!」
라크슌에게 듣고 요코는 가볍게 혀를 찼다. 작고 빠르고 수가 많다. 귀찮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새의 꼬리는 예리한 칼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두 마리를 베어 떨어뜨리고, 호랑이의 숨통을 끊었다.
발의 움직임을 방해받지 않도록, 시체의 곁을 뛰어 지나가 여관을 등지고 발디딜 곳을 찾았다. 칼을 두 번 맞은 푸른 소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발치의 돌바닥은 요마의 피로 미끄러지기 쉽다.
좁고 조명이 어두운 골목, 게다가 아직 무리를 지어 날고 있는 새. 좌우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어설프게 조명이 있으니까, 오히려 어두운 쪽이 더 어둡게 보였다. 새는 정신을 차려보면 가까이에 있다. 암흑에서 튀어나오는 듯이 나타났다.
머리로 돌진해오는 푸른 소를 피하고, 또 한 마리의 새를 떨어뜨렸을 때 녹슨 금속이 삐걱거리는 듯한 기성이 무수하게 날뛰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들려왔다.
「아직도 있었나............」
등에 땀이 흐른다.
새에게 정신을 빼앗겨 바로 숨통을 끊지 못했던 푸른 소는, 귀찮은 상대로 변해 있었다. 골목 입구에서 흘러들어오는 원숭이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에 일순 정신을 빼았겼다.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눈앞에 새의 예리한 꼬리가 있었다. 피할 수밖에 없어 몸을 피하고, 균형을 잃은 틈에 다음 녀석이 날아들었다. 그 꼬리는 똑바로 요코의 눈을 노리고 있었다.
이것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독. 어느 정도의 독일까.
--그것보다 눈인가.
--보이지 않아서는, 싸울 수 없어.
--팔로 감싸보려고 해도 이미 늦었어.
한순간에 드는 생각. 정말로 눈 깜빡일 틈도 없었다.
--안돼, 찔린다!
눈을 감으려고 한 순간, 돌연 날아들어오던 새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옆에서 새를 떨어뜨린 것이다.
그것이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다시금 덮쳐오는 새를 베어내며, 돌진해오는 푸른 소를 피했다. 피해낸 그 소의 후두부를 누군가가 확실한 솜씨로 꿰뚫었다. 너무나도 확실한 솜씨에 정신이 팔린 요코에게 달려들어오는 새를 그 누군가가 뽑아낸 검으로 쳐낸다.
요코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남자였다.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마.」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최후의 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베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덤벼들어오는 원숭이를 쳐내듯이 베어내고, 그 뒤에서 덤벼오는 다음 녀석을 검으로 뚫고서, 요코는 재빨리 전투에 몰두해갔다.
남자의 솜씨는 요코보다도 몇 단계 위로, 게다가 완력의 차원이 달랐다. 무리의 수는 많았지만, 골목이 시체로 덮여 조용해질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 4
「솜씨가 좋군.」
핏방울을 떨어내고 검을 거두고서, 남자가 말했다. 조금도 숨이 흐트러져 있지 않다. 체구는 크지만 거한(巨漢)이라는 인상은 없었다. 당당한 대장부라는 것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요코는 어깨로 숨을 쉬면서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이런걸 묻는 것은 무례한지도 모르지만--괜찮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말할 체력도 떨어졌어?」
「......정말로, 감사했, 습니다.」
「감사를 말할 정도의 일은 아니지만.」
「도와주셨으니까.」
「요마가 어슬렁거려서는 곤란하니까. 그다지 너를 도우려고만 한 것은 아니야.」
할 말을 찾고 있자, 등 뒤에서 상의를 잡아왔다.
「요코, 괜찮아?」
라크슌이엇다. 발치의 사체를 기분나쁜 듯이 쳐다보았다. 라크슌에게서 검집을 받아들고 핏방울을 털어내고 검을 거두었다.
「괜찮아. 라크슌이야말로 상처는 없어?」
「난 괜찮아. --그 사람은?」
글쎄, 라며 요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으로, 요코의 등뒤에 있는 여관에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이 여관에 묵고 있는건가.」
「--예에.」
그런가, 라고 중얼거리더니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몰려드는군. 너, 술은 마실 수 있어?」
「아뇨.....」
「넌?」
남자는 라크슌을 보았다. 라크슌은 곤혹한 듯이 수염을 흔들며 끄덕였다.
「그럼, 어울려주게. 관리들 대하는 건 귀찮아.」
말하자마자 등을 돌리고는 걸어나간다. 요코는 라크슌과 얼굴을 마주보고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모여드는 사람 틈을 헤집고 길을 걸어갔다. 특별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휙휙 주변에 시선을 향하면서 골목을 걷다가, 마음에 든 듯 한 여관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내부 장식의 큰 가게였다. 뒤를 따라 들어간 요코와 라크슌에게는 눈도 돌이지 않고, 남자는 여관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것을 보면서, 요코는 라크슌을 돌아보았다.
「....어쩌지?」
「어쩌자니, 여기까지 와서.」
「그런게 아니라. 난 그 사람과 얘기해보고 싶어. 라크슌은 여관에 돌아가 있을래? 조금 주의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상관없어, 가자.」
돌계단을 올라 문으로 들어서는 라크슌의 뒤를 요코도 따랐다. 가게 안에서는 그 남자가 점원과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코들을 확인하고서, 가볍게 웃으며 계단을 올라간다.
점원이 남자에게 안내한 것은 3층의 방이었다. 방이 두 개 이어지고, 내원으로 향한 베란다가 있다. 방은 넓고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놓여있는 가구까지도 사치스럽기 그지없어, 요코는 위축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껏 요코가 들어가봤던 어떤 여관의 방보다도 몇 배는 고급인 가게였다.
남자는 점원에게 술상을 주문하자마자 소파 풍의 의자에 앉았다. 이런 격식잇는 가게에 익숙한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무수히 밝혀진 촛불 덕에 밝은 방안에서 보자, 입고있는 것도 꽤나 비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입구에 못박힌 듯이 서있는 요코에게 남자는 웃어보였다.
「앉지 그래?」
「......실례합니다.」
요코는 라크슌과 얼굴을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앉았다.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그런 모습을 희미하게 웃으며 보고 있을 뿐, 별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곤란해하며 방안을 둘러보고 있자, 점원이 술상을 차려 날라왔다.
「나으리, 그밖에 필요하신 것은.」
물어보는 점원에게 손을 흔들어 물러나게 했다. 점원이 방을 나설 때 방문을 잠그도록 명했다.
「마셔볼까?」
요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크슌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어쨌거나 대화를 하려고 하는 요코를 남자가 가로막았다.
「훌륭한 검을 가지고 있군.」
요코의 오른손에 시선을 향하고서는 남자가 손을 뻗었다. 왠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을 느끼고서, 요코는 검을 건넸다. 남자는 가볍게 손잡이를 쥐고서 빼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빠져나왔다.
그런, 하고 목소리를 낸 요코에게는 상관하지 않은 채, 남자는 검집과 검을 자세히 보았다.
「--검집이 죽어있군.」
「검집이, 죽어?」
「이상한 환상을 보지 않았나.」
그 질문에 요코는 눈썹을 좁혔다.
「.........무슨.」
긴장한 요코에게 웃어보이며, 남자는 검신을 검집에 거두었다. 정중한 손놀림으로 요코에게 검을 내밀었다. 요코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볍게 손잡이를 쥐었다.
「어떻게 된거죠?」
「말 그대로의 의미네만.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건가.」
「어떤 물건이라니.」
남자는 멋대로 물병같은 유리그릇에서 액체를 잔에 따랐다. 조금도 군더더기없는 동작이었다.
「그것은 수우도(水愚刀)라고 하지. 물(水)로써 검을 이루고, 원숭이(愚)로써 검집을 이루어, 수우도라고 하는거야. 검으로써도 걸물이지만, 그 이외의 힘도 가지고 있어. 검날이 인광을 뿌리며 수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환상을 보여준다고 하더군. 마음대로 조종하는 방법을 익히면 과거미래, 천리 저편이라도 비춰주지. 하지만 정신을 놓치면 헛된 환상을 보여줘. 그래서 검집으로 봉인하는 것이지만.」(*원숭이 우자가 없어서...어리석을 愚에서 마음 心을 뺀 글자입니다;;)
가볍게 잔을 기울이면서 요코를 보았다.
「검집은 변해서 원숭이로 나타난다고 하더군. 원숭이는 사람의 마음속을 읽지만, 이것 역시 정신을 놓치면 주인의 마음을 읽고 혼란시켜. 그래서 검으로 봉인한다고 들었다. 경국 비장의 보물이지.」
요코는 무심결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검집은 죽어있어. 검집의 봉인을 잃고서야, 분명히 환상이 날뛰었겠지.」
「.....당신은.」
「당에 서신을 제출했었지. --용건을 듣겠다.」
「설마, 연 타이호이십니까?」
남자는 성격나빠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타이호는 없어. 용건이라면 내가 듣지.」
요코는 낙담한 표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역시 타이호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건이라면 서신에 썼습니다.」
「써있었지. 경왕이라던가.」
「저는 해객입니다. 이쪽의 일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요코는 라크슌을 보았다.
「이 라크슌이, 저를 경왕이라고.」
「어쨌거나 그런 듯 하군.」
남자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시는 건가요?」
「믿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수우도는 경국의 비보, 애초에 강대한 마력을 지닌 요마를 죽이는 대신 봉인해서 검과 검집으로 바꾸어 지배하에 눌러둔 것이 보물 취급 받는 물건이야. 게다가 정당한 소유자밖에 쓸 수 없지. 즉, 경왕이 아니고서는. 봉인한 것이 몇 대인가 위의 경왕이었으니까 그렇게 된거지.」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봉인하는 데에다, 원래라면 주인밖에 뽑을 수 없어. 지금은 검집이 죽어있으니까 나도 뽑을 수 있는 거지만. 설령 검을 빼어들었다고 해도 지푸라기 하나도 벨 수 없어. 하물며 환상을 끌어내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요코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 정체가 뭐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이렇게나 경국의 사정에 대해 밝다는 것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힐 생각은 없는가?」
「나카지마, 요코입니다.」
남자는 시선을 라크슌에게 향했다.
「그럼 서신을 제출한 쵸우세이(張淸)라는 것은 자네인가.」
예, 라고 대답하며 라크슌이 당황해서 자세를 바로했다.
「자(字)는?」
「라크슌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요코가 노려보았지만, 남자를 위압할 수는 없었다.
「난 코마츠 나오타카(小松尙陸)라고 하네.」
완전히 제멋대로인 자세로 대답한 남자를, 요코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해객?」
「태과다. 쇼류라는 음으로 읽는 사람이 많아. 많다고는 해도 몇 없지만.」
「.......그래서?」
「그래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죠? 타이호의 호위라던가.」
아아, 하며 남자는 웃었다.
「칭호로 하자면 난 연왕이다. 안주국왕(雁州國王), 연(延).」
- 5 -
요코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라크슌 역시 수염도 꼬리도 세운 채 경직되어 버렸다.
뚫어져라 바라보자, 저쪽은 웃었다. 그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연왕?」
「그렇네만. 타이호가 외출중이라 미안하지만, 나라도 도움이 되겠지 싶어서 왔다. 타이호가 아니면 안되겠나?」
아니요, 라고 말을 꺼내고서는 그 뒤의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는 가볍게 웃고서, 잔 안에 손가락을 담그었다.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하지. 1년전, 경국의 경여왕이 붕어하셨다. 여왕(予王)이라 하지. 이건 알고 있는가.」
「아니요.」
요코의 대답에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죠카크(舒覺)가 진짜 이름이야. 그 누이동생인 죠에이(舒榮)라는 여자가 있지. 이 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멋대로 경왕을 칭했다.」
「멋대로........?」
「왕에게는 기린이 필요해. 왕은 기린이 고르지. 들었었나?」
「예.」
「여왕은 기린을 남겼다. 그것이 케이키(景騏)지. 케이키에 대해서는?」
「한 번 만났습니다. 그가 저를 이쪽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연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이 죽고, 경국의 옥좌는 공석이 되었다. 바로 케이키는 왕의 선정에 들어갔지. 경국에서 경왕 등극의 소식이 온 것은 여왕이 붕어한지 두 달 뒤의 일이었지. .....하지만, 이것은 기오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기오우.」
고개를 끄덕이며 연은 술에 적신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위왕(僞王)」이라고 썼다.
「왕은 기린이 고르는 것이다. 기린의 선정 없이 왕을 칭하면 위왕, 가짜왕이라 불리게 되지. 왕의 등극에는 그에 동반하는 여러 가지 길조가 따르지. 하지만 죠에이에게는 그것이 없었어. 그러기는커녕, 나라에 요마가 어슬렁거리고 병충해가 일어났다. 어떻게 생각해도 왕이라고는 볼 수 없어.」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려는 요코를 연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래서 위왕일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조사해보니 경왕을 칭한 것은 여왕의 여동생으로 죠에이라는 여자. 여왕의 동생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여자다. 왕궁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나라를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지. 큰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잘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요코는 어쨌거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가, 주후의 성에 진을 치고 그곳에서 경왕 즉위의 소식을 흘렸다. 국민에게는 진위를 판별할 방법이 없어. 그렇다고 하면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 그대로 믿었겠지. 게다가 죠에이는 제후가 공모해서 성을 봉쇄하고 왕인 자신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말을 퍼뜨렸다. 국민은 그 말을 믿고 제후를 책망했지. 죠에이가 일어서 간신과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관리를 임명하고 병사를 모집하자 지원자가 쇄도했다.」
그렇게 말하며 연은 조금 떫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여왕의 즉위 전 기간이 길고, 재위는 짧았어. 나라는 혼란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로, 제후에 대한 백성의 원망이 깊지. 아홉 주에서, 이미 세 개 주가 위왕군에 함락되었다.」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있었어. 하지만 기린이 없냐고 말하면, 케이키를 제후들이 숨겼다고 주장하지. 그러다가 갑자기 케이키를 내놓은 것이다. 적중에 붙잡혀있던 케이키를 구출해냈다고 말하면서, 동물 모습의 기린을 내놓았으니 의심하기가 힘들어져. 그것으로 남은 여섯 주 중, 반수인 세 주가 위왕측으로 넘어갔다.」
「케이키를 내놓았다...... 그럼, 케이키는.」
「붙잡힌 거겠지.」
요코를 찾으러 올 수 없었던 이유였다. 최악의 사태는 아니지만, 최악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났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럼, 그 죠에이라는 여자가 요코에게 자객을 보낸거로군요.」
라크슌이 말하자,
「그것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요마가 사람을 덮치는 것.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특정한 누군가를 쫓아 습격한다는 것은 있을 리가 없어. 시레이라면 별개지만.」
「시레이?」
「왕은 비보의 주력을 사용하고, 기린은 사령(시레이, 使令)을 사용한다. 요마를 부려 누군가를 습격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기린밖에 있을 수 없어.」
그렇다면 케이키의 주변에 있던 요마는 케이키의 사령인 것이다, 라고 요코는 납득했지만 라크슌은 크게 낭패한 듯 했다.
「설마!」
연은 무겁게 끄덕였다.
「있을 리가 없는 일이지만,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어. 경왕을 습격한 것은 기린의 사령, 사령에 의해 소집된 산야의 요마겠지.」
「그런..........그럼.」
「잘 생각해보면, 죠에이에게 군대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연줄이나 재력이 있을 리가 없어. 배후에 누군가가 대량의 군자금을 흘려주고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거기에 사령이 나왔다고 하면, 그 뒤에 있는 것은 어딘가의 왕.」
요코는 연과 라크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
연이 답했다.
「기린이 어떤 생물인지 알고 있나?」
「영수로, 왕을 고르는.....」
「그대로야. 기린은 요마이면서 요마가 아니야. 오히려 신에 가깝지. 본성은 짐승이지만, 평상시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인자하고 자비깊은 생물이다. 오만불손하지만, 싸움을 싫어하지. 특히 피를 두려워해서, 피에 부정을 타서 병드는 일마저 있어. 절대로 검을 쥐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몸을 지키기 위해 사령을 부리지. 사령은 요마, 기린과 계약을 맺고 종이 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사람을 습격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것은 기린의 본성에 위배되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라는거지. 왕은 기린의 주인이야. 기린은 절대로 왕에게 거스를 수 없어. 기린은 절대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생물이지만, 왕이 명령한다면 얘기가 달라져. 사령이 너를 덮쳤다는 것은 왕이 기린에게 그것을 명령했다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죠에이라는 사람이 기린을 기르고 있었다던가 하는건?」
「불가능해. 기린은 한 나라에 하나 뿐이다. 왕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거나, 왕을 찾고 있거나, 그 외에는 없어.」
그러면, 정말로 어딘가의 국왕이 요코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코는 기억을 떠올렸다.
산길에서 만났던, 그 여자.
요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 요마가 그녀의 사령이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앵무새에게 요코를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울면서도 거부하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혹시 그 앵무새가 왕이고 그 여자가 기린이었다면, 모든 얘기가 앞뒤가 들어맞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디의.」
--대체 어느 나라의 왕이.
연은 의외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곧 대답이 나온다.」
「하지만.」
「경왕이 우리 손에 있는 한, 이제는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어. 문제는 케이키지만, 그는 기린이다. 그렇게 쉽게 살해당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면, 곧 경왕 암살을 명한 왕이 밝혀지겠지. 하늘이 두고볼 리가 없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놔두면 돼. 나라가 기울어가면, 누가 명령했는지 알 수 있어.」
단지, 라고 연은 말하며 크게 웃었다.
「경국에 케이키가 붙잡혀 있어. 그것만은 어떻게해서든 구출하지 않으면 안돼. 그것을 위해서도 몸을 지키기 위해서도, 경왕은 안전한 곳으로 와줄 필요가 있어. 출발할 수 있겠나.」
「지금 바로, 인가요.」
「가능한 한 즉시. 여관에 짐이 있다면, 가지러 갈 여유는 있어. 내 거처로 와주길 바라네.」
요코는 라크슌을 보았다. 라크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게 낫겠어, 요코. 그게 제일 안전할테니까.」
「하지만.」
「나는 신경쓰지마. 가.」
라크슌의 말에 연은 소리높여 웃었다.
「손님이 하나쯤 는다고 해서 곤란할 것은 없네. 어쨌거나 낡기는 했지만 방만은 썩어나도록 있으니까.」
「마, 말도 안됩니다.」
「예의없는 것들 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오도록 하게. 경왕도 그러는 쪽이 편하겠지.」
거처라는 것은 관궁에 있는 현영궁을 말하는 거겠지. 왕궁을 어딘가의 낡은 집처럼 말하는 연에게 내심 질려하면서, 요코는 라크슌을 보았다.
「가자. 나만 가는 건 왠지 불안해.」
라크슌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6 -
연은 거리의 구석에 가서, 높게 휘파람을 불었다.
관궁까지는 걸어서 한 달 정도 걸린다. 게다가 밤에는 거리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대체 어떻게 해서 거리를 빠져나가 관궁에 갈 생각인걸까, 라고 요코가 생각하고 있을 때, 휘파람에 답하듯이 곽벽의 위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희미하게 빛나는 듯이 보이는 호랑이 두 마리. 털은 검은 줄무늬에 광선의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흰색, 진주에 비할 수 있을만큼 옅지는 않지만 유막만큼 짙지도 않다. 검은 오팔같은 눈이 인상적으로, 멋진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최초에 허해를 넘어오던 밤처럼, 그 호랑이에 타고 반달이 떠있는 밤하늘을 달려 요코들은 관궁으로 향했다.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던가. 효우키라고 불린 케이키의 사령에 타고 바다를 향했던 것은 아직 추울 무렵. 그 때의 요코는 무엇 하나 알지 못했다. 케이키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지금, 계절은 여름. 밤공기에도 열기가 스며있어, 호랑이의 주위에 바람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하늘을 달리는 짐승의 발 아래에는, 허해를 건너던 밤과 마찬가지로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안국의 밤은 밝다. 리(里)와 로(盧)가, 작은 성단을 이루어 마치 허해같았다.
「요코, 저게 관궁이야.」
등을 붙잡고 있던 라크슌이, 작은 앞발로 전방을 가리킨 것은 호랑이를 타고서 두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라크슌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의 불빛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깊은 암흑만이 있었다. 어디에, 라고 반문하려다가 요코는 자신이 봐야할 것을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크슌은 어둠 속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
반달의 빛을 받은 하계는 짙은 바다색, 숲의 윤곽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치 파도같이 보인다. 그리고, 점점이 보이는 무수한 등불. --그 야경을 새까맣게 가리고 있는 거대한 구멍.
아니, 구멍이 아니다. 반월을 등에 져, 그것은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야경에 뚫린 구멍처럼 보이지만 구멍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융기된--.
「.................산.」
--이런 산이 있다는거야?
마을이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서, 그것은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높다.
--하늘에 닿는 산, 이라고 라크슌이 말했었지.
하지만 설마, 정말로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산이리라고는.
일순, 자신이 무서울 정도로 작은 생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뚝 서서, 천지를 꿰뚫는 기둥처럼 서있는 그 산. 완만한 산지의 사이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오른 모습은, 길이가 다른 붓을 한다발로 묶어놓은 듯이 보인다. 날카롭고 험준한 산정은 대부분이 구름으로 뒤덮여 그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림자가 진 바윗면이. --마치 거대한 벽같았다.
「......저게, 관궁? 저 산이?」
발 아래와 산까지를 비교해보면, 아직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잇다. 그런데도, 저 거대함은.
「그래. 저게 관궁산. 왕궁이 있는 산은 어느 나라건 저런 식이야. 저 산의 정상에 현영궁이 있지.」
희미하게 달빛을 받은 벼랑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빛난다. 그것은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로왔다. 성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정상은 구름에 덮여 확실히 보이지 않는다. 산기슭에 한, 두 개 빛이 보였다.
「저 빛이 관궁이야.」
수도라면 오호보다 큰 도시겠지. 그것이 빛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것이다.
한동안 요코는 망연한 채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워 보이는데, 하늘을 나르는 짐승의 발로도 관궁은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가까워지지 않는다. 이윽고 그 산이 다가와,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산 전체를 시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윗쪽을 보아도 완전히 정상을 볼 수 없게 되고서야 겨우 관궁의 거리의 윤곽이 보였다.
관궁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산의 산기슭에 솟아오른 완만한 구릉지대에 호를 그리며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나 큰산이 배후에 있으면, 밤은 무서울 정도로 길겠지.
그렇게 라크슌에게 물어보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교국의 오상에 가본 적이 있지만, 그런 느낌이었어. 오상은 산의 동쪽에 있으니까, 황혼이 굉장히 길지.」
「....그런가.」
상공에서 보니, 관궁은 거대한 도시였다. 발 아래 가득 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시야를 가득 채운 절벽. 수직으로 날카로운 산이 몇 겹이고 겹쳐져서 이뤄진 암벽은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그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앞서가던 연이 산의 높은 중턱, 단애에 튀어나온 공터에 내려섰다.
공터의 넓이는 작은 체육관 정도의 면적으로, 큰 바위덩어리를 평탄하게 깎아놓은 듯이 보였다. 연을 따라서 요코들을 태운 호랑이가 공터에 내렸다. 먼저 내려서 서있던 연이 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안떨어지고 도착했군.」
미동도 없고 바람을 가르는 느낌마저 없는 짐승의 등에서 어떻게 하면 떨어지는걸까, 라고 생각하자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연은 웃었다.
「너무 높아서 눈이 핑 돌아버리거나, 너무 편하다보니 졸아버리는 녀석들이 있으니까.」
과연,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공터의 하얀 돌은 평탄하게 깎여있었고, 미끄럼을 막기 위한 것인지 깊게 세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공터의 주위에는 난간마저 없어 가장자리에 다가가볼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지상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높은지, 요코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공터에 이어진 절벽에는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연은 발을 돌려 그 문을 향한다. 문에 닿기 전에,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전체가 키의 두 배는 될법한 흰 돌 하나로 만들어진 듯, 굉장히 무거워보이는 문을 연 것은 두 명의 병사였다. 정말로 병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두터운 가죽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병사려니 생각한 것 뿐이다.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은 요코들을 돌아보았다. 스스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들어오라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요코와 라크슌이 문을 지나치자, 두 명의 병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공터에서 쉬고 잇는 두 마리의 호랑이에게 다가간다. 어쩌면 말처럼 지금부터 물과 먹이를 주고, 빗질이라도 해주는건지도 모른다.
「--왜그래? 이쪽이다.」
연은 요코를 보았다. 서둘러서 연의 뒤를 따라가자, 안은 넓은 복도였다.
위쪽에 샹데리아 같은 등불이 밝혀져 있어 낮처럼 밝다. 라크슌이 놀란것처럼 수염을 움직거리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나 진귀한 것인듯 했다.
길지 않은 복도를 빠져나가자 조금 넓은 방으로, 거기에서 터널같은 아치를 지나 하얀 돌계단을 위로 올라갔다. 라크슌이 그 계단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수염을 떨군다. 먼저 계단을 디딘 연이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걱정하지 마.」
「아니요.」
라크슌은 조금 굳어있었다. 그 기분은 요코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이봐, 요코.」
소곤거리며 라크슌이 말을 걸었다.
「역시 이걸 올라가는걸까.」
「그런 거 같은데.」
대답하면서, 요코도 질려하고 있었다. 착륙한 공터는 산에서도 꽤나 높은 곳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상까지는 초고층빌딩에 필적하는 높이가 남아있다. 그 거리를 올라간다고 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고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만을 말할 수 없어, 요코는 말없이 계단에 발을 올렸다. 이유없이 라크슌의 손을 끌었다. 한단 한단은 낮지만 계단 자체는 엄청나게 길다. 연의 뒤를 따라 거기에 오르자, 오르는 순간 어느 큰 공간에서 90도로 방향이 바뀌어 한 단을 더 오르자 작은 방으로 나왔다. 방 안에는 훌륭한 조각을 새긴 목제의 문이 있다.
두터운 문에 생생하게 새겨진 부조로 장식된, 그 문을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짙은 바다냄새가 났다.
「...........아.」
무심결에 요코는 소리를 내었다. 문 앞은 넓은 테라스, 그리고 그곳은 이미 구름 위였다.
어떤 수수께끼인지는 모르지만, 겨우 그만큼의 계단을 오른 것으로, 이미 그 높이를 올라와버린 듯 했다. 하얀 돌로 바닥을 깔고, 마찬가지로 하얀 돌로 난간을 세운 테라스의 아래에 하얀 구름의 파도가 치고 있다.
--아니, 정말로 하얀 파도가 치고 있었기에 요코는 두눈을 크게 떴다.
「라크슌, 바다가 있어......!」
그대로 말을 뱉으며 난간으로 다가갔다. 절벽에 뻗어나온 테라스의 발치에 파도가 높게 부딪쳐오고 있다. 둘러보니 그곳은 바다 위, 바다냄새가 나는 이유였다.
「있지. 하늘 위잖아.」
라크슌의 말에 요코는 돌아보았다.
「하늘 위에 바다가 있어?」
「바다가 없으면 운해라고 부를 리가 없잖아?」
바다 위에는 짙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둘러보는 한 모두가 어두운 바다, 테라스의 아래에까지 부딪쳐오는 파도. 난간에서 몸을 내밀며 들여다본 바다 속에는 빛이 보였다. 마치 허해 같았지만, 그 빛이 먼 아래쪽에 있는 관궁의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해...... 어떻게 물이 떨어지지 않는걸까.」
「운해의 물이 떨어지면 모두 곤란해질 거 아냐.」
큭큭 웃은 것은 연이었다.
「마음에 든다면, 경왕에게는 전망대가 있는 방을 준비해주지.」
「저.....」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요코는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 경왕이라는 거, 그만해주시면 안될까요.」
연은 재미있는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왜?」
「그냥..........저 같지가 않아서.」
그렇게 말하자 연이 가볍게 웃었다.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퍼뜩 하늘을 올려본다. 시선을 따라가보자 하얗고 날카로운 빛이 흘러오는 것이 보였다.
「타이호가 돌아왔군. --그럼, 요코.」
그렇게 말하며 연은 등을 돌렸다. 전망대의 좌측에 위로 올라가는 짧은 계단이 있었다. 앞서가는 남자를 따라 발을 올리고서, 거기서 요코는 망연하게 전방을 올려다 보았다.
중앙에 험준한 산이 놓여있는 섬같은 지형의,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단애에 무수히 많은 건물이 서 있었다. 수묵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산에는 기암이 늘어서 있고, 암벽에는 수목이 가지를 늘어뜨리며, 가느다란 폭포가 몇 개고 있었다.
그 산의 절벽에, 어떤 것은 탑을 이루고, 어떤 것은 누각을 이루며, 그런 건물들이 종횡으로 복도로 이어져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다.
마치 산에 생겨난 거대한 성같은, 그것이 안국의 중심, 연왕의 거처인 현영궁이었다.
- 7 -
건물에 들어가자 남녀의 심부름꾼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요코들은, 연과 떨어져 안에 위치한 방으로 끌려가 버렸다.
「저........」
「에에, 저기.」
낭패한 요코와 라크슌에게 여관(女官)이 무표정한 얼굴을 돌렸다.
「이쪽에, 갈아입으실 것을. 곧 더운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더러운 차림으로 궁내를 어슬렁거리지마, 라는 뜻인 듯 했다. 곤혹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운반되어온 큰 물통에서 몸을 씻었다. 라크슌과 교대로 칸막이의 뒤에서 더운물로 몸을 씻고 다음 방으로 가자, 넓은 방의 큰 테이블 위에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걸 입는건가.......」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집어올린 화려한 옷을 라크슌이 살펴본다.
「이거, 남자옷인걸. 요코가 남자라고 생각한걸까. 여자라는걸 알고서 연왕이 시킨 거라면 눈치가 빠른 분이군.」
「라크슌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요코가 말하자 라크슌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와서 소용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귀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차림으로는 실례겠지.」
그야, 굳이 말하자면 맨몸이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옷을 건네주었다. 거리에서 마주쳤던 짐승의 옷이 떠올랐다. 옷을 입은 짐승의 수는 적었다. 라크슌은 싫은 듯 했지만,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꼬리를 질질 끌고서 칸막이의 뒤로 들어가는 라크슌을 전송하고서, 요코도 준비된 것으로 갈아입었다. 넓고 부드러운 얇은 천으로 된 바지, 얇은 블라우스같은 얇은 상의, 선명한 문양으로 짜여진 긴 겉옷이 한 세트였다.
소재는 전부 비단인 듯, 부드러운 촉감이 조악한 옷에 익숙해진 피부를 간지럽혔다. 자수가 놓여진 허리띠를 맸을 때, 문을 열고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옷은 다 갈아입으셨습니까.」
「저는. .......일행은,」
조금 뒤에, 라고 말하려는 순간 칸막이가 움직였다.
「괜찮아. 끝났어.」
대답하는 목소리가 낮았다. 요코는 놀라 굳어버렸다. 칸막이의 뒤에서 나타난 모습을 보고는 한참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왜그래.」
「.....라크슌......이구나.」
「그래.」
끄덕이고서, 그는 활짝 웃었다.
「아아, 이 모습은 처음이었던가. 난 틀림없이 라크슌이야.」
요코는 머리를 감싸안았다. 이전 라크슌을 끌어안았을 때, 처신을 잘하라고 말한 이유를 이제서야 이해했다.
「여기가, 상식을 초월하는 곳이라는 걸 까먹고 있었어.」
「그런 것 같아.」
그는 웃었다. 나이는 약 스무살을 넘긴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였다. 몸집은 어느 쪽인가 말하자면 마른 편이었지만, 매우 건강해보이는 신체의 젊은 남자. 「장정」이라는 것은 그러고보니 성인 남자를 의미했다.
「그냥 짐승이라면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반수라고 말했을텐데.」
「....확실히.」
얼굴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은 이걸 위한 말이리라. 반수다, 장정이다 라고 몇 번이나 들었으면서도 상관하지 않고. 끌어안은 것 뿐 아니라, 여관도 한 방이었다. 한참 전에는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적도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요코는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맹한 구석이 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왜 평소에는 인간 모습이 아닌거야?」
무심결에 원망을 담아 말하자, 라크슌이 한숨을 쉬었다.
「이쪽보다 저쪽이 편하다구.」
그렇게 말하며 라크슌은 붉은 옷을 걸친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러고 있으면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려. 게다가 정말로 격식에 맞춰서 차려입기라도 하는 날이면.....」
중얼거리는 말이 정말로 한심하게 들려, 요코는 가볍게 웃었다.
노인이 인도하는 대로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겨우 요코들은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바다냄새가 나는 것은 프랑스풍의 창문이 열려있기 때문이엇다. 바다에 면한 테라스에 있던 연이 돌아보았다, 그 역시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고 있었지만, 요코들이 입고 있는 포(袍)와 큰 차이가 없다. 요코들의 옷이 너무나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연의 옷이 소박한 것이리라. 꽤나 격식을 차리지 않는 성격인 듯 했다.
연은 방으로 들어서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옷은 갈아입었군. 여기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는 것을 좋아해서 말야. 귀찮지만 얌전히 시키는대로 안하면 골치아파져. 미안하네.」
연이 너무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입이 웃고있는 것을 보고 요코는 웃고 지나갔다.
「라크슌, 그런 것 벗어버려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자 라크슌--인 젊은이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타이호는.」
「이미 도착했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바람이 불어 방안에 바다냄새가 가득찼다.
「왔군.」
문의 안쪽에는 반드시 칸막이가 있다. 그 뒤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금발의 12, 3세 소년이었다.
「어땠어?」
「역시나 왕궁까지는 올라가지 못한 것 같아. ..........헤에, 놀랐는데. 손님인가.」
「내 손님이 아냐. 네 손님이다.」
「나? 모르는 얼굴인데.」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요코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래서? 당신, 누구야.」
「그렇게 천박하게 말하는 것 좀 그만둬.」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말 알아?」
「너, 후회할걸.」
「헤에. 너 드디어 장가가기로 했구나.」
「농담 아냐.」
「.....그럼, 너네 엄마냐?」
「넌 내 마누라나 엄마가 아니면 예의차릴 생각이 안들어?」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서, 연은 어리둥절해하는 요코를 돌아보았다.
「예의라는 걸 모르는 놈이라 미안하네. 이게 엔키(延騏)다. 로쿠타, 이쪽은 경여왕이시다.」
「켁.」
한 마디를 뱉자마자 뒤로 펄떡 뛰어서서, 소년은 요코를 올려다보았다. 참을 수가 없어 요코는 크게 웃어버렸다. 소리내어 웃어본 것은 허해를 건너오고서는 처음인지도 모른다.
「미리 좀 말해. 정말, 성격 더럽네.」
「너한테 듣고싶지 않아. 그 옆이 라크슌도노.」
가볍게 웃고서 연은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경국의 상태는?」
소년의 얼굴도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키주가 함락된 모양이야.」
기주(紀州), 라고 라크슌이 한자로 써주었다. 멋대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에, 필담은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말하는 것뿐이라면 번역에 맡겨둬도 문제가 없지만, 그래서는 글자를 읽을 수가 없게 된다.
「이걸로 남은 것은 북의 맥주(麥州) 뿐이야. 죠에이는 변함없이 정주(征州)에 있고. 군대는 더 늘어서, 저래서는 국왕군으로 상대가 안되겠어.」
왕사(王師)라고 라크슌이 썼다. 「국왕군」인 거겠지.
「이미 위왕군이 맥주로 향하고 있어. 맥후(麥候)의 군대가 3천, 도저히 저항할 수 없겠지. 아마 시간문제일거야.」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앉다, 거기에 있던 나무열매를 깨물었다.
「--그래서, 어디서 경왕을 발견한거야?」
연이 요약해서 사정을 설명했다. 엔키는 말없이 귀를 기울이다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것. 기린에게 사람을 습격시키다니.」
「흑막은 놔둬도 문제가 없겠지. 단지, 케이키만은 되찾지 않으면 안돼.」
엔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는 쪽이 좋아. 경왕이 이쪽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살해당할거야.」
「저,」
요코는 말을 끊었다.
「전 잘 이해가 안가는데요.」
연은 한쪽 눈썹을 올려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쪽으로 끌려왔습니다. 연왕이 저를 경왕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고, 어딘가의 왕이 저를 노린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경왕 따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경왕이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연락을 취한 게 아니에요. 요마에게 쫓기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교국의 병사들에게 쫓기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왜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싶어서 연왕에게 조력을 구하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연과 엔키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금,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연 것은 연이었다.
「요코, 조금 생각해주지 않겠나.」
「저는.」
「앉도록 하시게. 그대에게는 긴 얘기를 들려줘야 할테니.」
- 8 -
무엇부터 얘기해야 좋을까, 라며 연은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있고, 나라가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필요해지지. 그렇겠지?」
「예.」
「이쪽에서는 왕을 두지. 국주(國主)는 정치를 행한다. 정치를 행하는 것은 국주지만, 그 다스림이 반드시 백성의 바람을 이루어 준다고는 할 수 없어. 오히려 권리는 사람을 멋대로 행동하게 만들지. 대개 국주라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야. 국주만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어. 국주는 권리를 쥔 순간부터 백성이 아니게 돼. 백성의 기분을 알 수 없게 되지.」
「연왕은 희대의 명군이라고 들었습니다.」
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게 아니야. 서두르지 마. --국주는 백성을 괴롭히지. 백성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 한가지의 형태가 민주주의라던가 하는 거겠지.」
말을 꺼낸 것은 엔키였다.
「백성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왕을 고르고, 그에 적합하지 않을 때는 그만두게 하는.」
「그렇군요.」
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는 다른 방법이 행해지고 있어. 국주가 백성을 괴롭힌다고 하면, 백성을 괴롭히지 않을 사람에게 국주를 시키면 되지. 그래서 있는 것이 기린이다.」
「기린이 백성을 대신해서 왕을 고르는........?」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겠지. 여기에서는 천의(天意)--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있다. 천제가 어딘가엔가 계시고, 땅을 만들고 나라를 만들며 세상의 도리를 정했다고 해. 기린은 천의에 의해 왕을 고른다. 천명이 내린, 그것이 왕이다.」
「천명......」
「왕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하며 안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지. 그것이 가능한 자를 기린이 고르는거야. 선택받은 자가 옥좌에 오르고, 하늘은 기린을 통해 명군을 옥좌에 앉게 한다는 얘기다. 나를 명군 따위로 부르는 녀석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왕은 누구나 명군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어.」
요코로서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게다가, 왜에도 한에도 명군이라고 부를만한 자는 얼마든지 있었지. 그럼에도 모든 나라가 평화로와지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요코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도, 뭔가의 계기로 길을 잘못드는 일이 있겠지요.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어떠한 명군이라도 언젠가는 죽으니까요. 죽은 뒤를 잇는 사람이 명군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가 아닐까요.」
「바로 그렇다. 그러면, 명군이 죽지 않도록, 그 사람을 신으로 만들면 되겠지. 그렇게 하면 문제의 반은 해결돼. 설령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에게 옥좌를 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린에게 고르도록 하면 되겠지. 길을 잘못드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면 된다. 안그런가?」
「그거야.....그렇지만.」
무엇에 대한 것일까,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이 안주국을 다스리고 있어. 나를 왕으로 고른 것은 엔키다. 누가 얼마나 바라던, 얼마나 노력하건 간에, 기린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왕은 될 수 없어. 기린은 왕을 직감으로 고르지.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한거야. 또는,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것과도. 난 태과다. 이쪽에서 자란 인간이 아냐. 그런 나나 너처럼 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자라고 하더라도, 기린이 선택했으면 그것이 왕이다. 천명은 내려졌어. 이것을 바꿀 수는 없어.」
「저도......? 돌아갈 수 없는 건가요?」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도 좋겠지. 그렇더라도 네가 경동국의 왕이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
요코는 몸을 움츠렸다.
「기린은 자신이 고른 왕과 계약을 맺는다. 절대로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명령에 따른다는 서약이다. 왕이 옥좌에 앉은 뒤에는, 왕의 곁에서 재상의 임무를 맡지.」
「엔키도? 재상이야?」
요코가 테이블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엔키를 보자 연은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보여도 말이지. 하필 엔키를 본 뒤라 실감이 안나겠지만, 기린은 본래 자비의 생물이야. 기린은 정의와 자비로 이루어져 있지.」
엔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주인은 웃으면서,
「타이호가 진언하는 것은, 정의와 자비에 의한 말 뿐이지. 하지만, 정의와 자비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엔키가 말리는 하는 것을 무시하고 무자비한 짓을 할 경우도 있다. 나라의 정의를 위해서는 그만둘 수 없는 거지. 엔키가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나라가 멸망하고 말아.」
「......그런....건가요?」
「예를 들자면 여기에 죄인이 있다. 돈을 목적으로 살생을 저지른 죄인이다. 죄인에게는 굶주린 처자가 있다고 치자. 그러면 엔키는 용서하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죄인을 봐줘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불쌍하게는 생각하지만 죄인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
「........예.」
「혹시 내가 만약에 죄인을 죽이라고 엔키에게 명했다고 치자. 기린은 그것이 불가능한 생물이지만, 결국 녀석은 불평을 하면서도 죄인을 죽이고 오겠지. 기린은 왕의 말에 절대로 복종하니까. 절대로, 야. 기린은 왕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어. 설령 죽으라는 명령이라도, 정말 명한다면 거스를 수 없어.」
「그럼 왕으로 고를 때에만 이용하고, 그 뒤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가요?」
「그게 바로 어려운 점이지. 정의와 자비는 하늘의 의지야. 하늘은 정의와 자비에 의해 나라를 다스릴 것을 바라지.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기린일거야. 하지만, 정의와 자비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 바르지 않고, 무자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지. 단, 그것이 도를 넘으면 천명을 잃는다.」
요코는 가만히 연을 바라보았다.
「나라를 위해서 무자비한 짓을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왕의 자격을 잃게 된다. 어차피 왕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옥좌를 빌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왕이 도를 잃고 천명에서 벗어나면 기린이 앓게 된다. 그 병을 『실도(失道)』라고 불러.」
연이 공중에 쓴 문자를 요코는 마음 속에 새겨넣었다.
「왕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기린이 앓게 되는 병이다. 왕이 뉘우치지 않는 한, 기린의 병은 낫지 않아. 하지만 문제는 마음가짐이라서, 바꾸자고 해서 바꿔지는 것이 아냐. 기린이 『실도(失道)』에 걸려, 왕이 다시 정도를 되찾은 예는 적어.」
「낫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요?」
「그대로 지속된다면 죽게 되지. 그렇게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어.」
「.......죽는.」
「사람의 목숨은 짧아. 왕이 죽지 않고 나이를 먹지도 않는 것은, 신적(神籍)에 들어있기 때문이지. 왕은 신이야. 그러니까 죽지 않는거다. 왕을 신으로 만든 것은 기린이지. 그러니까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어.」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을 낫게하는 방법은 왕이 마음가짐을 고치는 것 외에 또 하나가 있지.」
「그것은?」
「그것은, 기린을 놔주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왕이 스스로 죽으면 되지. 왕이 죽어도 기린은 죽지 않아.」
「그러면, 기린은 살아나나요?」
「그렇지. ...........케이키가 그랬어.」
그렇게 말하며 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경국의 선왕은 여왕(予王)이라는 여왕이었지. 왕이라고는 해도 본성은 인간, 자질은 어쨌거나 절대로 길을 벗어나지 않을 수는 없어. 여왕은 케이키를 사랑해버렸다. 케이키의 곁에 여자를 가까이 두지 않았어. 궁 내의 여관들을 질투했지. 결국엔 도를 넘어버려, 성에서 여자를 추방하고, 나라에서 여자를 추방하려고 했다. 케이키가 그를 감싸면 더욱 도가 심해져서, 나라에 남아있는 여자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에 케이키가 병들게 되었다.」
「그래서.....?」
「여왕이 도를 잃은 것은 케이키를 사랑해서였지. 케이키를 죽게 해서야 기쁠 리가 없는 거야. 적어도 그만큼 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거겠지. 여왕은 봉산에 올랐다. 산에 올라 퇴위를 요청했어. 하늘은 그것을 허락했고, 케이키는 여왕에게서 해방되었다. 그렇게 된 거지.」
「그 사람은.....?」
「왕이 된다는 것은 죽어서 신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니까. 왕이 아니게 되어버리면 살 수 없어.」
그래서, 경국의 선왕은 그렇게 죽은 것이다.
「너는 곧 케이키에 의해 왕으로 뽑혔다. 옥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봉산에 올라 천칙을 받지 않으면 안되지만, 계약을 맺은 이상 옥좌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어. 천명은 내려졌다. 네가 경왕이야. 이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어. ......알겠나.」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에게는 나라를 다스릴 의무가 있어. 네가 나라를 버리고 왜로 돌아가는 것은 자유지만, 왕을 잃은 나라는 황폐해져. 나라가 황폐해지면 틀림없이 하늘은 너를 버리겠지.」
「그러면, 케이키가 실도에 걸려. 그렇게되면 저도 죽는다는 말이군요.」
「아마도. 단,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것만이 아냐. 문제는 경국의 백성인거다. 왕은 통치하는 것만이 아냐. 재해를 진정시키고 요마를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거다. 요마가 출몰하고, 태풍이 닥치며 가뭄이 들고 수해가 일어난다. 인심은 거칠어지고 국토는 황폐해져 백성은 고통받게 되겠지.」
「나라가 멸망한다는..........?」
「그래. 케이키는 한동안 여왕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옥좌가 비어있었지. 그 사이에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의 생활은 피폐해져 있었어. 겨우 왕을 발견해서 옥좌는 채웠지만, 그 치세가 6년밖에 되지 않았어. 그것도 마지막 몇 년은 실도로 나라의 안녕을 잃고 있었지. 거기다 또 이런 소란이다. 안국이나 교국에 가까운 자들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왔지만, 경국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백성들이 남아있어.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요마와 재해에 의해 고통받고 있겠지.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야.」
「한시라도 빨리 정당한 왕이 옥좌에 오르는 것....?」
「바로 그렇다.」
요코는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무리입니다.」
「왜지? 너는 분명히 왕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설마.......」
「너는 너 자신의 왕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알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 자에게 왕의 책임을 설파해봤자 헛될 뿐인데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전........안됩니다.」
「하지만.」
「쇼류.」
엔키가 제지했다.
「억지로 강요하지마. 경왕이 경국을 어떻게 할지는, 왕의 자유다.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각오만 있다면, 멋대로 해도 된다고.」
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이지. --하지만, 이것만은 경왕에게 부탁하네. 경국의 백성을 가능한 한 도와주려 마음쓰고 있지만, 안의 국고도 무한정한게 아냐. 그대의 나라를 도와주고 싶네.」
「......생각하게 해주세요.」
요코는 몸을 움츠렸다. 지금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실례지만.」
입을 연 것은 라크슌이었다.
「요코를 노렸던 왕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연은 엔키를 보자, 엔키는 시선을 피했다.
「.....누구라고 생각하나.」
「왠지.....전 각왕(土+高王)이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듭니다.」
요코는 라크슌을 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이는 요코가 알고 있는 성격좋은 쥐와 연결시킬 수 없었다.
「왜?」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코는 산을 헤메면서 너덜너덜해졌었지. 습격해온 요마 전부가 기린의 사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고는 해도 산에 사는 요마가 그렇게나 많을 수 있는걸까. 반쯤이 사령이라고 해도 너무 많아. 난 교국이 기울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견딜수가 없어.」
라크슌이 말하자,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실은 교국에서 안으로 도망쳐온 해객을 넘겨달라고 각왕에게서 강한 요청이 있었네. 교국은 그런 나라니까, 도망나온 해객은 이전에도 없지 않았지.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이상하게 생각하고 엔키에게 조사시키자, 어쨌거나 죠에이에게 돈을 보내는 것은 교국의 누군가인 듯 하고, 게다가 교국은 황폐해지고 있는 상태. 그래서 결국 각왕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차에 어제 코우린(土+高麟)이 실도에 걸렸다는 소식이 왔다.」
「코우린, 실도.」
라크슌은 중얼거렸다.
젊고 활달한 얼굴에 씁쓸한 것이 스쳐갔다.
「.......그럼, 교국은 끝이구나....」
「어떻게 할 수 없는걸까요.」
요코가 말하자 세 사람은 어두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답한 것은 역시나 연이었다.
「각왕에게 지인으로서 충고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당사자인 각왕이 면회에 응하지 않아. 설령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각왕이 스스로의 잘못을 자각하지 않으면 어떻게도 할 수 없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자면, 정당한 경왕이 천명을 받고 빈 옥좌를 채우는 거다. 뭘 생각하고 각왕이 경국에 간섭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괴뢰의 왕을 세우고 경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걸로 헛된 야망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을 그만둘지도 모르지.」
말 이외의 뜻을 담은 시선을 향해오자 요코는 몸을 움츠렸다.
「.....시간을 주세요.」
←
↑
→
....저 스스로도 번역의 속도에 놀라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정말로 이번 주말 쯤에는 달그림자 하권이 끝날지도. 여전히 하고싶은 일에 비해서 시간은 부족합니다만..그래도 좀 여유는 있군요, 확실히.
드디어 저의 러브 안왕님이 나오셨습니다!!! 저, 안주종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분들이 나와주면 즐겁달까요. 경주종이 참으로 바른 생활 어린이들의 모임이라면 안주종은 날나리 그 자체입니다. 빨리 동의 해신편을 번역하고 싶군요...;;;; 아, 하지만 가장 번역의 가치를 느끼는 것은 요코가 메인으로 나오는 편들입니다. 가장 십이국기스럽다, 라는 느낌이었어요. 특히 요코 즉위 후의 얘기를 읽다보면 제가 십이국기의 설정에 대해서 '안이해. =_='라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에 대해 통렬하게 집어놓았습니다. 오노 후유미의 무서운 점이죠.
먼 옛날에 나왔던 달그림자 편의 라이센스판에서는.......저 엔키가 쇼류사마에게, 존/댓/말/을 쓴다더군요. 그러니까," 왜, 너네 엄마야?"라는 말이" 아니 그러면, 주인님의 어머님 되십니까?"라는 식이라고.....;;;;;;;;;; 그것도 나름대로 엽기기는 한데.(笑)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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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하)
원작 :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번역 : siva(yshtar@hitel.net)
십이국기 시리즈는 현재 (주)조은세상 출판사와 고단샤 사이에 정식으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어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에 게재된 번역은 라이센스판의 번역자인 저와 출판사 사이의 협의에 의해 책의 광고 목적을 겸해 게재를 허락받은 것으로, 본 홈페이지의 번역을 무단으로 복사, 전재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적발시 법률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제 8 장
- 1 -
요코에게 주어진 방은, 천장이 높고 호사스러운 방이었다. 내부 장식은 물론, 가구에서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이나 컵에 이르기까지,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방은 넓고, 큰 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다. 꽃이 피어있고 향이 피워져, 교국 변경에 사는 농부라면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소박한 여행에 익숙해진 요코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다. 방으로 물러나 혼자가 되고서, 조금 생각을 해보았지만 푹신푹신한 비단의자에는 앉기가 껄끄럽고, 옻칠에 칠기가 새겨진 테이블은 손대면 그대로 손자국이 남아 턱을 괴고 있기도 꺼려졌다.
방을 돌아보자 한쪽에 다다미 네 장 정도 크기의 작은 방이 보였다. 거기라면 진정할 수 있을까 싶어 다가가다가, 요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작은 문은 꽉 닫혀 있었다. 안은 한 발 들어서자 높아지면서, 거기에는 비단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그 커텐도 반쯤 열려있고, 평상 위에는 금은으로 수놓아진 비단이불이 깔려잇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다미 네 장 반 크기의 이 평상이 침대라고 한다면, 이건 질나쁜 농담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 누워도, 뭔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하물며 잠잘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갈 곳 없이 요코는 창문을 열었다. 프랑스풍의 창문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뚫려있다. 기하학적인 문양의 창틀에는 색유리가 끼워져 있고, 창문 밖은 넓은 전망대였다.
연이 말했던대로, 요코에게 바다에 면한 테라스가 있는 방을 주었던 것이다.
창을 열자 바다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방안에 피워진 향냄새보다 훨씬 좋다. 요코는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바닥에 하얀 돌이 깔린 테라스는 건물의 주위를 에워싸는, 작은 정원 정도의 넓이였다.
요코는 테라스를 걸어,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운해를 바라보았다. 달은 저물어 천상의 바다에 잠겨가고 있다.
가만히 발 아래의 바위에 파도가 치는 것을 보고 있자, 등뒤에서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자 회갈색의 털이 난 생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산보?」
말을 걸자, 라크슌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잠이 안와?」
「응. 라크슌도?」
「저런 방에서 잠이 오겠어. 여관에 남았으면 좋았을걸, 굉장히 후회하고 있다구.」
「동감.」
요코가 말하자, 쥐는 소리내어 웃었다.
「네가 그런 소릴 하면 어쩌자고. 요코에게도 이런 왕궁이 있다구.」
라크슌이 말하자 요코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역시, 있겠구나.」
라크슌은 곁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요코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내려보았다.
「경국의 왕궁은 영주(瑛州). 효천(曉天)에 있어. 금파궁(金波宮)이라고 하지.」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에, 요코는 건성으로 대꾸를 했다. 라크슌은 잠시동안 침묵했다.
「--저어, 요코.」
「응....」
「케이키는 죠에이라는 위왕에게 붙잡혀 있는거지?」
「그런가봐.」
「혹시라도 각왕이 절대로 요코를 옥좌에 앉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한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어.」
「기린을 죽이는 것, 이겠지.」
「그래. 케이키가 죽으면 너도 죽어. 봉산에 올라 천칙(天勅)을 받은건 아니니까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될거야.」
「그렇게 생각해. 케이키와 계약을 맺어버렸기 때문에, 난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상처입기 어렵게 된 것도 그것때문이고, 언어를 이해한 것도, 검을 쓸 수 있는 것도, 애초에 허해를 함께 건너온 것도, 전부 그것때문이겠지.」
「아마도. 케이키는 적의 손안에 있어.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듣고 싶지 않아.」
요코는 말을 막았다.
「요코.」
「틀려. 억지를 부리겠다는 게 아니야. 왕이 어떤 존재인지, 기린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어. 그러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던가, 그런 이유로 결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자포자기로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주길 바래.」
요코는 미소지었다.
「난 이쪽에 와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어. 어떻게건 살아남았지만, 그건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해. 이쪽에 왔을 때에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의 목숨이니까, 그렇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않아. 적어도, 그렇게 아쉬워하고 싶지는 않아.」
라크슌은 큐우, 하고 목을 울렸다.
「그러니까 목숨이 아까와서 경솔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 모두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모두의 바램에 맞춰서 내 삶을 결정해 버린다면, 난 그 책임을 질 수 없게 돼. 그러니까, 제대로 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해.」
라크슌의 새까만 눈이 요코를 올려보았다.
「난, 요코가 왜 그렇게 망설이는지 이해 못하겠어.」
「난 할 수 없어.」
「왜?」
「난, 내가 얼마나 추악한 생물인지 알고 있어. 왕의 그릇이 아니야.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 아니야.」
「그런게,」
「라크슌이 반수라고 한다면, 나도 반수야. 겉모습은 인간과 같아도, 속은 짐승에 지나지 않아.」
「요코........」
요코는 전망대의 난간을 잡았다. 화사한 돌의 촉감이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답다. 눈 아래에는 투명한 물, 그것을 통해 보이는 관궁의 조명은 야광충 같았다. 파도가 천천히 부딪치면서 조용한 소리를 내고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경관이었지만, 자신은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 효천이라는 도시에 있다는 금파궁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성일까. 거기에 서있는 자신을 생각해보면 위축된다기보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라크슌이 한숨을 짓는다.
「왕은 기린에게 뽑힐 때까지 평범한 인간이야.」
「난 기린에게 선택되었어도, 그런 인간으로밖에 있을 수 없었어. 훔치려 하고, 위협하려 하면서,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 남을 위협했어. 사람을 의심하고, 목숨을 아까워하며 라크슌을 버리고 버리고, 죽이려고까지 했어.」
「연왕은 너라면 할 수 있다고 하잖아.」
「연왕은 내가 얼마나 추악하게 살아왔는지 알지 못해.」
「너라면 할 수 있어. 숨통이 끊길 뻔했던 내가 말하는 거니까 틀림없어.」
요코는 라크슌을 내려다 보았다. 요코의 명치 정도밖에 오지 않는 쥐는, 옷가지 사이에서 고개를 빼들고 계속 하늘 위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로선, 할 수 없어..........」
운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말에는 대답이 없다. 작은 손이 요코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고, 그에 돌아보았을 때에 라크슌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라크슌.」
「나라도 망설일테니까, 망설이는걸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아. 잘 생각해봐.」
쥐는 등을 향한 채 멀어지면서 손을 들었다.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는 그림자를 요코는 지켜보았다.
「.....라크슌도, 모든걸 알고있는 건 아니야.」
낮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코의 독백이 아니었다. 튕겨지듯이 얼굴을 들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당신은 계속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죠유우.......?」
--옥좌를 선택하십시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요코로서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말을 걸어온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 내용때문이기도 했다.
--감히 주인의 명을 어겼습니다. 용서를.
주명(主命), 이라는 말에 언젠가 케이키가 뱉었던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오늘까지 단 한번도 회화에 응해주지 않앗던 것인가.
--괴물이라 부르며, 떼어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 때문인 것이므로, 이것은 요코의 과오였다.
「난 정말로 어리석었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이미 대답은 없었다.
- 2 -
다음날, 여관에게 인도되어 식사 장소로 안내된 요코는, 물어오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가로저어 답했다. 요늘은 쥐인 채인 라크슌은 그저 몸을 움츠린 채 수염을 움직였다. 연도 엔키도 가볍게 낙담한 표정을 보였다.
「너의 나라와 국민의 일이다. 좋을대로 해.」
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건간에 케이키만은 데리러 가주길 바라네. 왕이 옥좌를 버린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재보(宰輔)만이라도 나라를 위해 남겨두길 바라네. --어떤가?」
「아직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니고, 케이키를 되찾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힘으로라도 돌려 받을 수밖에 없겠지. 케이키는 정주(征州)에 있다는 듯 해. 위왕군의 한가운데이니까.」
「케이키를 돠찾는 것이 가능하다면, 저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냥 궁금한 것 뿐이지만.」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은 식을 일으킬 수 있어. 넌 허해를 건널 수 있는 몸이니까, 어려울 것 없지. 혹시라도 네가 뭐가 어떻게 되건 돌아가고 싶다면, 케이키가 안된다고 해도 엔키에게 돌려보내 주도록 약속하겠다.」
공평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왕이 되지 않겠다면 돌려보내주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가능할텐데.
「난 싫어. 그렇게 되면 제대로 케이키를 설득해 달라구.」
엔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연은 소년을 노려보았다.
「로쿠타.」
「모르는 것 같지만, 알아두길 바래. 식이 일어나면 재해가 생겨. 기린만이라면 조금 바람이 부는 정도이지만, 왕이 함께가 된다면 대재해가 돼. 저쪽 역시 피해가 생길테니까.」
「왜에도?」
「그래. 이쪽과 저쪽은 본래 섞여서는 안되는 거니까. 당신이 이쪽으로 올 때의 식으로 교국에 꽤나 큰 피해가 있었던 것 같지만, 왕이 허해를 건넌 것치고는 큰 일은 안난 셈이야. 다음번도 그러리라고는 한정할 수 없어. 난 그런 일에 손을 빌려주는건 싫으니까.」
「혹시 돌아가게 되더라도 엔키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할게.」
「모쪼록, 부탁한다구.」
쓴웃음을 짓고 끄덕이자, 이번엔 연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요코. 저쪽에 돌아간다고 해서 안전해지는건 아냐.」
「--알고 있습니다.」
각왕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저쪽에도 요마가 쫓아오겠지. 돌아갈 때에는 재해를 일으키고, 돌아가면 요마의 습격으로 말려드는 사람이 분명히 생긴다. 요코는 재앙의 씨앗이다. 저쪽에 있어서도 이쪽에 있어서도, 요코의 귀국은 무리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알고 있어도 결심은 서지 않았다.
「제가 저쪽에 돌아가기 전에 각왕을 쓰러뜨린다는 방법은?」
「그건 불가능해. 적어도 나는 협력하지 않겠다.」
「불가능한가요?」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은 기억해둬. 왕은 절대로 범해서는 안되는 세가지 죄가 있어. 한가지는 천명에 거스르며 인도에서 벗어나는 것. 또 하나는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그리고 최후의 하나가, 설령 내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타국을 침입하는 것.」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들은? 경국에 케이키를 되찾으러 간다는 것은요?」
「경여왕이 선두에 선다고 하면, 친정(親征)이니까. 우리는 경왕의 청원에 따라 조력하는 것뿐.」
「과연.」
연은 크게 웃었다.
「케이키 탈취를 위해 우리 안국의 왕사를 빌려드려도 좋습니다만, 어떻겠습니까.」
요코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실망시켜드리는 말만 계속 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엔키는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쇼류는 태과인 왕이 늘어주기를 바라는거야. 마음쓸만한 일이 아니야. 어쨌거나, 지금까지 혼자뿐이니까.」
「지금 현재, 혼자?」
「지금 현재 혼자지. 과거에 몇 사람쯤 있었던 것 같지만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
「엔키도 태과라면서?」
「그래, 나와 쇼류와 타이키(戴騏). 요코까지 하면 네 명째구나.」
「타이키. 라는 건 대국(戴國)의 기린?」
「응. 대극국(戴極國)의 어린 기린.」
「어린, 이라는건.」
「성수(成獸)가 아니었어.」
「엔키는?」
「난 성수라구. 기린은 성수가 되면 외견의 성장이 멈춰.」
「라는 것은, 엔키 쪽이 케이키보다도 빨리 성장한건가?」
「그런 말이지.」
뭔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타이키는 성수가 아니었어?」
「그래.」
「과거형?」
요코가 묻자, 엔키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연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타이키는 죽었어. 적어도 죽었다고 말해지고 있어. 지금 대국은 내란이 한창이야. 타이키도 태왕(泰王)도 행방을 알지 못해.」
요코는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구나, 이쪽도.」
「사람이 사는 곳은 원래 복잡해. 그런거지. --이름이 다카사토(高里)...라고 했었지. 나이는 당신하고 비슷한 정도야.」
「남자?」
「기(騏)라는건 수컷을 뜻하는 거지. 멋진 흑기린이었어.」
「흑기린?」
「기린을 본 적이 있어?」
「사람 모습이라면.」
「털빛은 자황(雌黃), 등은 오색, 갈기는 금색이 보통이야.」
「엔키의 머리처럼?」
「응. 어쨌거나 이건 머리카락이 아냐. 갈기다.」
그랬던건가.
「타이키는 흑색이었지. 잘 연마된 강철의 색을 하고 있었어. 털빛은 칠흑, 등이 은색, ...이라고 할까, 굉장히 이상한 느낌의 오색이었어.」
「귀한거야?」
「귀하지. 역사상으로도 흑기린은 굉장히 적어. 적기린이라는 것도, 백기린이라는 것도 있다는 듯 하지만 난 본 적이 없어.」
「헤에....」
「타이키가 죽었다고 한다면, 태왕도 살아있지 않겠지. 그렇다면 봉산에 태과(泰果)--타이키의 열매가 열려야 할테지만, 그런 기색이 없어.」
「태과?」
「기린이 열리는 나무는 봉산에 있어. 기린이 죽으면, 동시에 다음 기린이 든 열매가 열려. 타이키가 죽었다면 다음 타이키가 말이지. 암컷이라면 타이린(泰麟). 이것을 호로 칭해서 태과라고 불러. --하지만, 아직 봉산에는 태과가 없어. 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거겠지만.」
「기린에게는 친척이 없는거야?」
「없지. 태과(胎果)라면 몰라도, 그러니까 기린에게는 이름이 없어. 호뿐이지.」
「케이키도?」
엔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왠지 슬픈 일로 느껴졌다. 요코의 사고를 읽기라도 한 듯이, 엔키는 일부러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린이라는 것은 불쌍한 생물이야. 왕을 위해서 태어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어. 이름마저 없이, 왕을 선택하면 죽도록 일하게 되지. 그러다가, 죽을 때에는 왕 때문에 죽는거니까. 그런데다, 무덤도 없다는건.」
엔키가 찌릿 연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의 주인은 모르는 척 했다. 엔키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묘가 없어?」
요코가 반문하자, 엔키는 앗차, 싶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묘를 만들어주지 않는거야?」
연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묘가 없는건 아니야. 왕과 함께 합장하게 되지. 하지만 시체는 없어.」
「......왜.」
불가사의한 생물이니까 사체를 남기지 않는걸까.
「그만둬.」
「숨길 것도 없잖아. --기린은 요마를 종으로 부리지. 요마와 계약을 맺는거야. 계약을 맺은 요마는 기린에게 복종하며 사역되지. 그 대신에 기린이 죽은 뒤에는, 그 사체를 먹을 수 있다.」
요코는 눈을 올린 채 연을 보고, 다시 엔키를 보았다. 엔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거야. 맛있나보지, 기린은. 뭐, 죽은 다음이니까 어떻든 상관없지만.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면, 케이키를 소중하게 대해줘. 녀석을 실망시키지 말아줘.」
요코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문득,
「각왕은 코우린을 실망시키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걸까......」
글쎄, 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각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
엔키도 또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나라에 간섭하면 천명을 잃게되는 것만은 확실해. 그것을 알면서도, 각왕은 바보같은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걸까.」
「바보같은 짓을 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끝끝내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지. 괴로울수록 더욱 어리석어진다는 거야.」
요코는 순간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
「두려운가?」
「응. 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연이 가볍게 웃었다.
「기린은 왕에게 등돌리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무슨 짓을 시켜도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따른다는 건 아냐. 자신이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는거다. 그러면 너의 반쪽이 도와줄거야.」
「.........반쪽?」
「너의 기린.」
요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보았다.
거기에는 한 자루의 검이 놓여있었다.
--수우도는 과거미래, 천리 저편의 일도 비춘다.
연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수우도를 지배할 수 있다면, 각왕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도 있는게 아닐까?
- 3 -
나라에는 군대가 두 종류 있다. 한가지는 주후(州候)에게 맡겨져 각지에 배속된 주후군, 또 하나는 왕이 직접 장악하는 왕사.
경국 정주의 주도인 유룡(維龍)까지 기병이 도달하는 데에는 한 달이 걸린다. 케이키 구출을 생각하자면 한 달은 불안하다. 그래서, 특별히 천마 등을 사용해 하늘을 날 수 있는 자들을 모아 120기의 정예부대를 만들어 이것으로 유룡을 급습하기로 했다.
연도 엔키도, 그 준비로 나가서는 점심때도 저녁때도 돌아오지 않았다.
요코는 몸둘바를 모르는 라크슌을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검을 테이블 위에 두고 그 앞에 앉았다.
요코는 검의 주인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왕이라는 사실에 주저가 된다. 어려울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고민하고 있느니 해볼 가치는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의식적으로 환상을 끌어내는 방법 따위 알지 못하지만, 분명 어렵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요코는 이쪽으로 오기 전, 오랫동안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꿈을 꾸었지만, 그 얘기를 연에게 했더니 그것은 이 검이 보여준 환상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검은 적의 습격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주인인 요코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던 것일 거라면서.
하지만 그 때의 요코는, 아직 케이키를 만나기 전이었고 계약도 맺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검은 요코가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천명이 먼저인가, 선정(選定)이 먼저인가.
요코는 연에게 그렇게 물었다.
요코는 천명을 지고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케이키의 선택에 의해 왕좌를 등에 지게 되는 것인가.
몰라, 라고 말한 것은 엔키 자신이었다.
「나도, 왜 이런 녀석을 고른건지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어. 단지, 이유없이 그저 이녀석이구나 라고 생각했어.」
왕을 고르는 것은, 기린의 본능일거라고 엔키는 말했다.
어떻다고 하건, 요코에게 있어서 검과 의지를 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코는 조명을 끈 방 안에서 검을 뽑고, 검날을 바라보았다.
--각왕을.
검은 지금까지 계속 고국의 환상만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요코가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왕의 진의를 알고싶어.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기에, 어리석은 왕에 대해 알아두고 싶다.
검날이 옅은 인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빛 속에 희미한 그림자가 떠오른다. 물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것이 형태를 이루는 것을 기다린다.
하얀 벽이 보였다. 유리가 끼워진 창과, 거기에서 보이는 마당. 그 마당은 기억에 있다. 요코의 집의 마당이었다.
--틀려. 이게 아니야.
강하게 생각하자 환상이 사라졌다. 눈앞에 빛을 잃은 검날이 보이고, 요코는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에 될 리가 없어.」
입으로 되뇌이면서, 다시 한 번 검날을 들여다보았다. 하룻밤에 몇 번이고 환상을 본 적은 없었지만, 생각외로 간단하게 검날이 다시금 빛을 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례로 보이는 것은 역시 요코의 집의 마당으로, 가벼운 낙담을 숨길 수 없었다. 의식을 환상에 집중하면서,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수면을 어지럽히는 듯이 환상이 흔들렸다.
잠시후 보인 것은 요코의 방이었다.
--틀려.
그 다음은 학교.
--틀려.
몇 번이고 시험해봐도 보이는 것은 저쪽 세계뿐이었다. 집을, 학교를, 친구네 집의 풍경까지 보여주면서, 검은 이쪽 세계를 비추지 않는다.
마치 검집같다. 검집의 푸른 원숭이처럼 다루기 어렵다.
동시에 이것은 고국에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요코의 탓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다.
끈기있게 되풀이하며, 요코는 겨우 환상 속에서 이쪽의 거리를 발견했다.
됐다, 고 기뻐할 틈도 없이 그것은 어딘가의 거리의 문전으로, 거기에 수많은 인간이 쓰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으로 향하는 가도는 피가 스며 질퍽거린다. 쓰러져있는 사람들과,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 그 가운데 서서 어두운 눈빛을 짓고있는 소년.
--아니, 요코 자신.
「......그만둬!」
당황하며 환상을 흐트러뜨렸다.
저것은 오료다. 저기에서 요코는 라크슌을 버렸다.
자신의 일이지만 아연해했다. 저렇게나 음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요코는 검을 내던졌다. 마치 검을 두려워하는 듯한 자신의 행동을 깨닫자,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잖아.
푸른 원숭이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겠지.
그것은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다. 눈을 피할 자격은 없다. 오히려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리석은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면, 분명 끝없이 어리석어질 것이다.
다시금 손잡이를 쥐었다. 숨을 고르고 검날을 들여다본다. 곧 눈앞에 오료의 문전이 보였다.
환상 속의 요코는 정말로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폐한 기척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요코는 그 눈으로 라크슌을 보고 있었다.
(돌아가서 숨통을 끊어야할지 망설이고 있어......)
오료의 거리에서 사람이 달려나오고, 환상 속의 요코는 당황해서 그 자리를 도망쳤다. 도망치는 뒷모습이 흔들리며, 이번에는 산길이 나타났다. 요코는 가만히 자신이 친절한 모녀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타츠키가 있고, 해객의 노인이 있다. 요코를 호송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남자들의 가족이 울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해객 때문에, 라고 원망하는 목소리를 요코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서의 거리가 요마에게 습격당한 뒤의 참상이 비춰졌다. 오료의 거리에서, 광장에 눕혀진 시체의 열을 보았다. 어딘가의 거리의 외벽 아래에 움츠리고 있는 경국의 난민들의 모습도 보인다.
요코는 그런 환상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면서, 환상을 거부하면 오히려 더 날뛴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히 받아들이면서 보고 있으면, 환상은 요코가 바라는 것에 가까워져 간다.
왕궁이 보였다. 거기에는 몹시 여윈 여자가 있다.
「효천에 여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론을 제기하려 한 것은 케이키로, 그 여자가 죽은 선제 여왕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칙명을 거부하고 남은 것은 죄인, 죄인을 처벌하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있습니까?」
말을 내뱉은 여왕의 두 눈만이 생기를 뿜고 있었다.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비쩍 마른 뺨에서도 근육의 움직임이 보이는 목에서도 병약한 느낌을 숨길 수 없다. 그녀의 고통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렇게나 말라버릴 정도로 그녀는 괴로웠던 것이다. 괴롭고 괴로워,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폐해진 경국이 보였다. 교국도 가난했지만, 경국의 가난함은 교국보다 더욱 심했다. 요마에게 습격당한 리(里)가 보이고, 전란으로 불탄 로(盧)가 보였다. 메뚜기나 쥐에게 덥쳐져 황무지가 된 밭, 범람한 강에서 넘친 물로 인해 가라앉은 밭에는 수없이 시체가 떠있었다.
--왕을 잃은 것만으로, 이렇게나 나라가 황폐해지는걸까.
몇 번이고 들었던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실감을 가지고 되살아났다. 고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현실감이 없는 얘기이지만, 여기에서 그렇게나 말해지는 이유를 알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어딘가의 산길이었다.
- 4 -
길에 있던 것은 두 사람으로, 한쪽은 사신처럼 어두운 색의 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른 한 쪽은 금발이었다. 주위에는 몇 마리의 짐승이 보인다.
「용서를.」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감싼 것은 금발 쪽으로, 그것은 언젠가 산길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역시, 이것이 코우린.......)
「그것은, 물론 짐에게 말하는 것이겠지.」
사신같은 인물이 머리에 뒤집어쓴 천을 떨어뜨렸다. 나타난 것은 늙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주름은 깊지만, 신체가 커서 노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 어깨에는 선명한 색의 앵무새가 앉아있었다.
「힘없는 계집애다. 죽여버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산에서 헤메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하지만, 이미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오산이었군.」
남자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이 심하게 탈락된 듯한 목소리였다.
「뭐, 좋다. 곧 산에서 객사하거나, 마을에 끌려가 붙잡히겠지. 어느 쪽이건 간에, 타이호.」
「예.」
「이 다음에는 이정도로는 곤란해. 짐을 위해서, 어떻게건 그 계집애를 죽여주게.」
남자가 말하는 「그 계집애」는, 아마도 요코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면, 이 남자는.
(.......각왕........)
「하지만, 마음약해 보이는 계집애로군. 어차피 큰 왕이 될 기량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일부러 봉래까지 나가서, 저런 주인밖에 못찾아온건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무표정하게 돌아본 것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외견은 사슴과 비슷했지만, 뿔은 이마에 하나 뿐. 굳이 말하자면 일각수와 비슷한지도 모른다. 갈기는 짙은 금색, 털결은 옅은 황색, 등에는 사슴처럼 무늬가 있고, 그것이 이상한 색으로 옅게 빛나고 있었다.
「꽤나 주인 운이 없어보이는군. 안그런가, 경 타이호.」
(경 타이호......라는 것은, 저것이 케이키....)
저것이 기린이라는 생물인 것인가.
이것은 배랑에서 호송되던 도중, 산속에서의 풍경이리라. 그렇다면 요코가 케이키라고 생각했던 것은 코우린, 죠유우가 케이키인 짐승을 보고 「타이호」라고 불렀던 것이다.
「꼬마계집애라고 생각하신다면, 놔두면 좋으실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것은 코우린이었다.
「교의 백성이 둘, 죽었습니다. 제발, 이런 일은 그만해 주십시오.」
눈물을 글썽거리며 각왕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언젠가 산길에서 보았던 표정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어있다.」
그에 대한 주인의 말은 전혀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늘은 용서하시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교는 응보를 받게 됩니다. 주상이라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이미 응보를 받을만한 짓은 저질렀다. 이제와서 말해도 소용없어. 짐의 명운은 다했다. 교는 가라앉겠지. 그렇다면 경도 함께 가라앉게 해주겠어. 반드시 경왕을 동행시키고 말겠다.」
「그렇게나 태과가 미우십니까.」
각왕은 가볍게 웃는다.
「밉지는 않지만, 싫은 것은 사실이야. 저쪽에서는 아기가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다더군. 일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요.」
「더럽다고 생각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짐은 그렇게 생각하네. 여자 뱃속에서 태어난 이상, 태과는 이미 이쪽의 인간이 아니야. 이쪽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을.」
「하늘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태과인 왕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늘의 의지에 등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더러운 일입니다.」
각왕은 소리없이 웃었다.
「짐과 그대는 마음이 맞지 않는 듯 하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의 주인은 짐이다. 짐의 명에 따르게. 그 계집애를 쫓아서 반드시 죽여. 살려서 교에서 도망치게 해서는 안돼. --그렇군, 경과의 국경에 왕사를 배치해야겠어. 분명 계집애는 경으로 돌아가려 할테지.」
「더러운 꼬마 계집애 따위, 내버려두시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어린 계집이라 말하며, 대단한 기량은 아니라고 말하며, 왜 죽여서라도 옥좌에 오르지 못하게 하시는지요.」
「교의 주위에 태과인 왕은 필요없어.」
냉담한 말을 듣고 코우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경 타이호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케이키는 죠에이에게 주겠다. 기린이 있으면 제후도 이론(異論)은 없겠지.」
「당장은 그것으로 무마하더라도, 분명히 곧 수상하게 여겨질 겁니다. 뿔을 봉해져 경 타이호는 사람의 형태가 될 수 없습니다. 말하는 것마저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재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그만해 주십시오. 하늘이 이런 잘못을 용서할 리가 없습니다.」
「용서해달라고도 안해.」
「훌륭하신 각오입니다만, 주상은 백성을 잊고 계십니다.」
「교의 백성은 운이 없었어. 짐이 죽으면, 그 다음에는 현명한 왕이 설지도 모르지. 그쪽이 장기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한건지도 몰라.」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코우린은 다시 얼굴을 덮었다.
「짐은 왕의 그릇이 아니었던 거겠지.」
각왕은 담담하게 말한다.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는,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도 하늘도 왕을 잘못 택한거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게야. 짐의 재위는 50년으로 끝난다. 안이 오백년, 주가 육백년 근처야. 안과 주에 비하자면 정말로 짧은 치세지만, 짐에게는 그게 한계야.」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고치시면, 더 길어지실 겁니다.」
「이미 늦었어, 타이호.」
코우린은 몸을 깊이 움츠렸다.
「짐은 이 큰 책무에 눌려버린 거다. 지방 관리로 끝났어야 했을 짐이 지나친 행운을 얻게 되었지만, 짐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기량이 없었어. 겨우 오십년밖에 버틸 수 없었던거다.」
「겨우 따위로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단명의 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있지. 예를 들자면 여왕이다. 여왕만이 아니라 경은 언제나 파란이 끊이지 않는 나라, 교보다 나라도 몇 배나 가난하지. 생각없는 백성들은 안이나 주와 비교해서 교는 가난하다 따위 말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있는 자라면 경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안국이나 주국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풍요로왔던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짐도 가능한 한 노력했다. 하지만 짐이 나아가는 만큼 연도 종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 누구나 언제까지고 말하겠지, 교는 안보다도 주보다도 가난하다고. 다시 말하자면 짐은 연이나 종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지.」
「절대로, 그런 것이.」
「연이나 종에게 이제와서 겨뤄보겠다고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경은 별개야. 경은 교보다도 가난하다. 그러나 신왕이 오르고 교보다도 풍요로운 나라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겠나. 교만이 가난한 채로, 짐만이 어리석은 왕으로 불리게 되면.」
「그래서 천명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
각왕은 코우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왜는 풍요로운 나라, 그것은 해객의 얘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어. 그리고 왜에서 돌아온 연의 나라 또한 풍요롭지. 태과는 짐처럼 이쪽에서 태어난 자들과 틀려. 그 태과인 연의 나라가 저렇게나 풍요로운데, 어떻게 경왕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 태과는 뭔가 나라를 다스리는 비결이라도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짐만이.」
「그 무슨 어리석은 말씀을 하십니까.」
각왕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이제와서 돌아갈 길은 없어. 이제와서 물러나봤자 교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교는 망하고, 짐은 죽는다. 그렇다면 경의 태과에게도 동행하도록 해주지.」
--바보같은.
「무슨, 어리석은!」
무심코 목소리를 높이자, 환상이 끊어졌다.
요코는 힘없이 검을 내렸다.
「.....바보같은 짓을.」
자신만이 뒤쳐지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자기가 주변에 맞춰가는 것보다는 주변을 끌어내리는 것이 쉬우니까. 흔히 있는 일이다. 정말, 흔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주인이 국민의 고통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어리석은 일 때문에 범해서는 안될 죄를 범했다는 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려들어 목숨을 잃었던가. 하지만 교국이 망하게 되면, 피해는 지금까지에 비할 것이 아니겠지.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지. 괴로울수록 더욱 어리석어진다는 거야.
엔키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안국과 주국 사이에 비교당하며. 연왕과 종왕을 의식하면서. 간신히 오십년이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긴 세월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요코가 언제 발들이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길이다. 안국과 주국에 비교당하는 것은 경국도 마찬가지. 각왕과 같은 것을 요코가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서워.」
요코는 중얼거렸다.
「정말 무서워.............」
- 5 -
밤바람을 마시며 테라스로 나가자,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라크슌.」
말을 걸려하자 운해를 보고 있던 쥐가 돌아섰다. 가볍게 꼬리를 들어올린다.
「또 잠이 안 와?」
「여러가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생각할 것?」
라크슌은 크게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요코의 마음이 바뀔까, 하고.」
요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라크슌의 곁에 섰다. 난간에 기대어 운해를 내려다 보았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왜, 날 왕으로 만들고 싶어?」
「왕으로 만들고 싶다는게 아니야. 요코는 왕이니까. 이미 기린에게 선택되었으니까. 그런데도 옥좌를 버리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까 말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야. 왕이 나라를 버리면, 백성도 왕도 불행하게 돼.」
「내가 왕이 되면, 더 불행해질지도 몰라.」
「그런 일은 없어.」
「왜?」
「요코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가.」
「.......못해.」
「할 수 있어.」
짧게 말하고서 라크슌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제와서 그렇게 비굴해지는거야.」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니까.」
요코는 가만히 부딪혀오는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나 하나의 문제라면 해보겠어. 혼자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실패해도 내가 죽는 것 뿐이라면 괜찮아. 하지만, 그런게 아니잖아.」
「경국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어.」
「응.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라로 말이지. 내가 그것을 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기린에게 선택된 이상, 누구나 명군의 자질이 있다고 연왕이 말했잖아.」
「정말로 그렇다면, 왜 경국은 황폐해졌지? 왜 교국은 황폐해지는거야? 설령 자질이 있다고 해도, 자질을 살려가는 일이 어렵기 때문인게 아닐까.」
「요코라면 괜찮아.」
「근거없는 자신을 교만이라고 말하는거야.」
큐우, 하고 소리를 내며 라크슌은 몸을 움츠렸다.
「비굴해진게 아니야. 근거없는 불신이라면 비굴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불신은 근거없는게 아니야. 난 이쪽에서 수많은 것을 배웠어. 가장 큰 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가 바보라는 거야.」
「요코.」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만족하고 있는게 아냐. 난 정말로 어리석었어. 그런 자신을 알면서, 이제 겨우 어리석지 않은 자신을 찾아가려고 하고 있어. 이제부터인거야, 라크슌. 이제부터 조금씩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증명이 기린에게 선택되어 왕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목표로 해보는 것도 좋을지 몰라. 하지만, 그건 지금이 아냐. 훨씬 더 나중에, 적어도 조금은 어리석지 않은 인간이 되고 나서의 얘기야.」
그런가, 라고 중얼거리며 라크슌은 난간을 떠났다. 타박타박 넓은 전망대를 걸었다.
「요코는 무서운거구나.」
「무서워.」
「큰 책임이 어깨에 짊어져서, 움츠리고 있어.」
「.........응.」
「빨리 케이키를 되찾으러 가, 요코.」
요코가 돌아보자, 라크슌은 혼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서있었다.
「너 혼자서 하는게 아니야. 기린이 뭘 위해서 있는건데. 하늘이 기린을 왕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왜지? 넌 스스로를 추하다고 해. 모자르다고 하지. 스스로 말하는 거라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말야, 케이키가 너를 선택한 이상, 케이키에게는 너의 추함이나 모자라는 점이 필요한거야.」
「그런.」
「채우면 좋아질거야. 너만으로도 부족하고, 케이키만으로도 부족해. 그러니까 왕과 기린, 두 개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게 아닐까. 기린도 말하자면 반수야. 반수인 요코와 반수인 기린, 그러면 딱 좋겠지. 분명 연왕과 엔키도 그런거라고 생각해.」
요코는 몸을 움츠렸다.
「왕이 된다면 기뻐서 날뛰는 인간도 있겠지. 백성의 일을 생각하고 두려워할 수 있는 분별이 있는만큼이라도, 너에게는 옥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거야.」
「그런게 아냐.」
「케이키를 믿어.」
「하지만.」
「좀 더 자신을 믿으라구. 5년 뒤에 왕의 그릇이 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왕이어도 좋은게 아닐까? 여기서 주저앉을 필요가 어디 있지?」
「하지만.......」
「케이키는 이미 널 왕으로 골랐다구. 지금 이 지상에 요코 이상으로 경왕에 어울리는 인간은 없어. 천의는 민의다. 지금 이 지상에서 요코 이상으로 경국의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왕은 없는거야. 좀 더 자신있게 받아들이면 어때? 경국의 백성은 너의 것이다. 네가 경국의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 되고 싶다면, 옥좌에 올라서 제대로 된 왕이 돼.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인간도 될 수 없어. 왕의 책임은 확실히 무거워. 괜찮잖아. 무거운 책임으로 닦여지면, 더 빨리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어.」
「되지 못하면?」
「될 마음만 있다면, 싫어도 되게 되어있어. 기린과 백성이 너의 스승이니까. 그만큼 많은 교사가 있으면, 바보인 채로 남아있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요코는 오랫동안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임금님이 되면 돌아갈 수 없겠지.」
「돌아가고 싶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쪽이 그렇게나 좋은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이쪽도 예전만큼 싫지는 않아.」
「응.」
「하지만, 이쪽에 오고서 계속,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했어.」
「.....그건, 알 수 있어.」
「부모님이 계셔. 집이 있고 친구가 있어. 솔직히 절대로 좋은 부모님에 좋은 친구들이었냐고 묻는다면 곤란하겠지만, 그건 그 사람들만의 책임이 아냐. 난 모자라는 인간이었고, 그러니까 그런 정도의 인간관계밖에 만들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돌아간다면, 저 제대로 해보고 싶어. 전부 하나부터 다시 시작해서, 내가 태어난 세계에서 내가 살아갈 장소를 만들고 싶어. 어리석었던 자신이 정말로 분하니까, 저기에서 제대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
난간을 꽉 쥔 손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설사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저기는 이미 내가 있을 세계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역시 그리운걸. 난, 작별인사도 못하고 왔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가 있어서 제대로 헤어질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나 괴롭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로.」
「....그렇구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돌아가고 싶다고, 절대로 돌아가겠다고, 그것만으로 견뎌왔던 것을 포기해버리는 건 너무나 힘들어.......」
「응.」
「지금 돌아간다면 분명히 후회할거라고 생각하지만, 돌아가지 않더라도 분명히 후회할거라고 생각해. 어느 쪽에 있더라도 분명 다른 쪽이 그리울거야. 양쪽 다 포기할 수 없지만 한 쪽밖에 선택할 수 없어.」
가만히 따뜻한 것이 뺨에 닿아왔다. 그것이 뺨에 흐르는 것을 닦아준다.
「......라크슌.」
「돌아보지 마. 지금 좀 곤란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눈물도 흘러넘쳤다.
「웃지마. 어쩔 수 없잖아. 쥐인 채로는 손이 닿지를 않으니까.」
「..........응.」
「저기말야, 요코. 어느 쪽을 골라야할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이 꼭 필요한 쪽을 고르는거야. 그런 경우에는 어느 쪽을 골라도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돼.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가벼운 쪽이 낫겠지.」
「응.」
「필요한 쪽을 선택하면, 해야할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후회가 가벼워져.」
「응.....」
뺨을 가볍게 두드려주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나는 요코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갈지 보고 싶어.」
「..........응. 고마워.......」
- 6 -
유룡 습격 당일, 요코가 기마(騎馬)로 빌린 것은 길량(吉量)이라는 생물이었다. 길량은 하얀 줄무늬가 잇는 붉은 갈기의 말로, 금색의 눈이 아름다웠다. 타는 방법은 죠유우가 알고 있다.
「요코는 관궁에 있어도 돼.」
연은 그렇게 말했지만 요코는 끄덕이지 않았다. 유룡을 지키는 병사는 6천 근처, 한 명이라도 많은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게다가 케이키에 관련된 일, 나아가서는 경국의 일이니 요코가 숨어있는 것이 괜찮을 리가 없다.
오백년 이상의 긴 시간동안 한 나라를 지탱해온 연왕과 엔키를 향해,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용기가 필요했다. 이쪽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구조도 정치가 돌아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 왕을 이름할 기량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어쨌거나 앞만 보고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싸워야 하니까 싸운다. 어쨌거나 거기에 걸 수밖에 없으니까, 현영궁에 숨어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코 말고도 또 하나 숨어있는 것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다. 라크슌이었다. 라크슌에게는 관궁에 남아있도록 강하게 말했지만, 그는 승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와, 라는 엔키의 말에 그 역시 따라오게 되었다. 기린은 피를 기피하기 때문에, 전장에는 데려갈 수 없다. 그는 라크슌과 함께 경국 각지에서 위왕군에 가담한 주후를 설득하기 위해 경국으로 향했다.
백이십의 짐승이 운해 위를 달린다. 위왕군은 2만여. 그중 5천이 정주에 집결해 있다. 애초부터 백이십기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연은 말했다.
「목적은 케이키의 구출 뿐이다. 케이키만 탈환할 수 있다면 어쨌거나 시간을 벌 수 있어. 게다가, 위왕군의 녀석들에게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있는 것이 위왕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주후 중 세 명만 눈을 떠준다면, 일거에 형세는 역전된다.」
케이키를 되찾는 것은 그 첫발에 지나지 않는다.
「백이십기로 승산이 있을까?」
요코가 묻자, 연은 웃었다.
「일단, 일당천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당십 정도의 자들을 모았다. 게다가 운해 위는 수비가 적어. 하늘 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 수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놈들은 아직 경왕이 우리측에 있다는 것을 모를거야. 그것을 모르게 하도록, 일부러 내가 맞으러 간거니까.」
그래서 연이 혼자서 용창까지 맞으러 왔었던 건가.
「뭐, 경왕이 어떤 인물인지 흥미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죠에이도 설마 안이 나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겨우 백이십기라고는 해도, 운해에서 공격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할걸. --뒤는 경왕이 하기 나름이야.」
「--제가?」
「네가 위왕군을 제압할 수 있으면, 얘기는 더 빨라져. 위왕을 위해 싸우는 백성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 네가 틀림없이 왕이라고 알게 되면, 병사들이 스스로 케이키를 내놓겠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고 요코는 한숨을 쉬었다.
「망설이지마. 네가 왕이다. 그것을 잊지마. 왕따위야 튼튼한 종같은 거지만, 그것을 백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 자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듯한 얼굴을 해야해.」
「어떻게 해야, 그런 기분이 되는건지.」
요코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있으면 가능하겠지만, 자신이 없는 것 같군.」
「그런 것...」
연은 웃었다.
「기린이 골랐으니까, 불만 있으면 기린한테 말해, 라고 생각하면 돼.」
요코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을 돌아보았다.
「그게 명군이 되는 비결?」
「그럴거야, 분명. 적어도 난 그걸로 해왔으니까. 불만이 있으면 엔키한테 말해. 그래도 불만이면 자기가 알아서 해, 라고.」
「.......과연. 기억해두죠.」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본 경국은, 검의 환상 이상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운해의 투명한 물을 통해 보아도 황폐의 정도는 알 수 있다. 곧 밭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였지만, 경작을 포기한 듯이 방치되어있는 땅들이 많았다. 로(盧)도 리(里)도 죽어버린 듯이 고요하고,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불타버려, 새까맣게 변한 화재의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도 있었다.
교국을 가난하다고 생각했지만, 경국의 참상은 그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성벽 아래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난민들의 모습이 겹쳐와 가슴이 아팠다. 분명 모두 집에 돌아가고 싶겠지. 잠잘 집이 없는 괴로움은 몸에 스미도록 잘 알고 있다.
운해 너머로, 눈 아래의 지상을 보며 비행하기는 반나절, 요코들은 정주의 주도(州都) 유룡에 도착했다. 유룡도 또한 운해 위까지 뻗어있는 높은 산이었다. 정상에 있는 건물이 주후의 성, 이 성의 어디엔가 케이키가 있을 것이다.
먼눈으로 주성이 보였을 때, 새가 날아오르듯이 성에서 검은 그림자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성을 지키는 공행기병(空行騎兵)의 집단이리라.
싸운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을 벤 일만은 없었지만, 그것은 사람의 죽음을 마음에 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가겠다고 말한 순간에 각오는 섰다. 대의를 위해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본다는 것이 아니다. 벤 상대와 그 수는 반드시 잊지 않고 기억해 둔다. 그것이 요코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라고, 그렇게 납득하고 있었다.
「괜찮은가?」
연이 물어와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지 마. 모처럼 할 마음이 되어준 경왕을 여기에서 잃으면, 눈도 못감을테니까.」
「그렇게 간단히 죽지는 않을 것 같네요. 전 악운이 강하니까.」
요코가 대답하자 연은 의아해하다가, 눈빛으로 웃어보였다.
접근해오는 기병을 향해 요코는 검을 뽑았다. 길량은 주저없이 하늘을 달린다. 성에서 날아온 기병들을 향해 요코는 돌진했다.
- 7 -
--성 안 깊숙히, 두터운 포위망 안의 그 방에 붙잡혀 있던 것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케이키.」
이것이, 기린인 것인가.
자황색 털의 일각수. 사슴치고 가는 다리에는 쇠로 된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기린은 짙은 눈으로 요코를 본다. 곁으로 다가가자 조금 둥근 형태의 코끝을 요코의 팔에 대었다.
「......케이키?」
말을 걸자 똑바른 시선으로 요코를 올려다본다. 네 다리를 꺾고 요코의 발치에 엎드렸다.
몸을 굽혀 손을 뻗어도 피하지 않는다. 금색의 갈기를 쓰다듬자 눈을 감았다.
--이것이 나의 반신인가.
요코를 이 운명으로 끌어들인, 저쪽에서는 전설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짐승.
「계속 찾았어.」
요코가 말하자, 기린은 요코의 무릎에 아래턱을 대었다. 몇 번이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다시 한 번 갈기를 쓰다듬자, 발치에서 딱딱한 소리가 났다. 짐승을 묶고 있는 족쇄가 낸 소리였다.
「기다려. 지금 풀어줄께.」
요코는 일어서서, 족쇄를 살폈다. 검 끝을 족쇄에 대고 찔러서 끊어내었다. 기린은 일어섰다. 체중을 느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요코의 팔에 머리를 비벼왔다. 정확히는, 그 뿔을.
「.....왜 그래?」
뽈을 들여다보고서, 요코는 거기에 묘한 문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손바닥정도 길이의 문양에 적갈색의 문자. 그것은 말라붙은 피와 굉장히 비슷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기린은 계속해서 뿔을 문질러댔다. 그 초조한 듯한 몸짓에서 요코는 이상을 느꼈다. 반수인 라크슌이 말한다. 요마마저도 말할 수 있는 이 땅에서, 최고위의 영수로 불리우는 기린이 말할 수 없을 리가 없을텐데?
그러고보니 검의 환상 속에서 「뿔을 봉한 것으로 인간의 모습이 될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가볍게 뿔을 쓰다듬자, 기린은 얌전히 하는대로 있었다. 옷소매로 세게 문질러보자 조금 흐려졌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세밀한 문자가 뿔에 새겨져 있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처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요코는 구슬을 품안에서 꺼냈다. 가만히 대면서 문지르자 명약하게 옅어졌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매우 옅어졌을 때, 갑자기 팔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케이키?」
기린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요코를 올려보았다.
「정말로. 고생을 끼쳐드리게 되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요코는 웃었다. 조금도 변함없는 말투가 기뻤다.
「혼자이십니까?」
「연왕의 조력을 얻었다. 안국의 왕사가 밖에서 위왕군을 상대하고 있어.」
「과연.」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키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효우키, 쥬우사크.」
벽에서 미끄러져 나오듯이, 두 마리의 짐승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기 있습니다.」
「가서 연왕을 도와드리도록.」
깊게 절하고, 두 마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사했었구나.」
「물론.」
기린은 고개를 끄적여 보였다. 정말로 변함없는 말투가 왠지 듣기 기뻤다.
「뿔을 봉해지면, 사령도 봉해지는거야?」
기린은 곤란한 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많이 공부하셨군요. .......그렇습니다. 수고를 끼쳐드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죠유우는 봉해지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는 영향이 없어. 카이코나 한쿄는?」
「여기에 있습니다. 불러낼까요.」
「아니. 모두 무사하다면 됐어. 나중에 천천히 만날 수 있을테니까.」
「예.」
「아아, 그렇지. 부탁이 있는데.」
「무엇이건.」
「죠유우에게 내렸던 명령을 취소해줘. 아직 몸에서 떨어지면 곤란하지만.」
기린은 요코를 바라보며 두, 세 번 눈을 깜박였다.
「굉장히 변하셨군요.」
「응. 케이키에게도 감사하고 있어. 힌만(賓滿)을 붙여주어서. 죠유우덕분에 정말로 도움을 받았어. 감사도 하고싶고, 묻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묻고 싶은 것?」
「응. 죠유우의 이름은 어떻게 쓰지?」
짐승은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럴까나. 하지만 계속 진짜 이름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어.」
요코가 그렇게 말할 때, 갑자기 스르륵 하는 감촉이 들었다.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며 공중에 글자를 쓴다.
--죠유우(穴祐).
요코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죠유우.」
--사령은 기린에게 봉사하고, 나아가서는 왕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들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요코는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런 요코를 바라보고 있던 기린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말로 변하셨습니다.」
「응. 많은 것을 배웠어.」
「솔직히 말씀드려서, 두 번 다시 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야. ---사람 모습으로는 될 수 없어?」
「벗은 몸으로 감히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당황하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져, 요코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럼 입을 것을 조달해서, 어쨌거나 돌아가자. 금파궁에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한동안 현영궁에 식객 신세지만.」
요코가 웃자 기린 역시 또다시 눈을 깜박이고는, 몸을 굽혔다. 몸을 움직이자 등이 이상한 광택을 뿜었다.
「천명으로써 주상을 맞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 뿔을 요코의 발에 대었다.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소명에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드립니다.」
요코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허락한다.」
이것은 요코에게 있어서, 이야기의 시작인 것이다.
여청(予靑) 6년, 봄, 재보 케이키 실도로 병이 깊어, 효천에 큰 불과 역병이 연잇다. 정치는 절도를 잃고 간신이 날뛰며, 백성은 하늘이 경을 버린다 탄식하다.
5월, 주상이 봉산에 올라 퇴위를 허락받다. 주상, 봉산에 붕어, 천릉에 장하다. 경왕 즉위 6년, 시호를 여왕으로 봉하다.
7년 7월, 경주경왕 요우시(陽子) 즉위.
경왕 요우시, 성은 츄우토(中嶋), 호는 세키시(赤子), 그 출생이 태과이다. 7년 1월 봉래국에서 돌아와, 7월말, 난을 평정하고, 안국 연왕 쇼류에 청하여 위왕 죠에이를 멸하다.
8월, 봉산에 올라 천칙을 받다. 신적에 들어 경왕을 칭하다. 효천에 여왕을 모시고, 육관제후를 새로이 명하고 정치를 바로잡으며, 연호를 적락(赤樂)으로 제정하고, 적왕조(赤王朝)를 열다.
『경사적서(景史赤書)』
2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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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편, 마침내 끝났습니다. 길었군요.....생각해보면. 이 다음으로는 뭘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순서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습니다. 이 다음부터 번역할 것은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편입니다.
가능하다면, 국내에 라이센스로 출판된 '마성의 아이'를 다음 권 이전에 읽어두시길 권하고 싶네요. 한겨레출판사라고 합니다. 꼭 살 것은 없고, 어디 도서관에서라도요.
그럼, 다음권 시작을 기대해주세요.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下) 후기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하)
원작 :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후기
최초에 「환타지를 써주세요」라고 들었을 때, 왠지 즐겁겠는걸~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쓰기 시작하고는, 실은 「환타지」가 어떤 것인지 젼혀 모르고 있던 자신을 깨달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저는 환타지를 거의 읽은 적이 없습니다. 읽었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루이스의 「나르니아국 이야기」와 제라즈니의 「앰버 시리즈」뿐이더군요.
곤혹해하며 사전을 찾아보자, 어느 사전에도 「꿈같은 환상의 이야기」라고, 마치 「환상소설=환타지소설」인 듯이 써있었습니다. 하지만, 「환타지」라고 할 때에 환상소설을 떠올리는 것은 조금 틀린 느낌이 듭니다.
결국, 뭔지도 잘 모르면서 고개를 돌려보다가 「이방(異邦), 혹은 이방인(異邦人)의 이야기」라고 멋대로 결론지어 버렸습니다.
「방(邦)」이라고 하면 에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방」이라고 말하자면 멀리 중국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방인 중국의 이야기를 써보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재의 중국이 아닙니다. 산해경(山海經)의 세계, 위서(緯書)와 도교의 세계입니다. 악귀와 정령과 신선의 세계입니다. 「서유기」나 「수호전」, 「봉신연의」에서 표현되는 중국입니다.
다른 세계의 얘기를 쓰면 자료도 필요없으니 분명 편할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결국 산처럼 많은 자료를 쌓아올리게 되어 버렸습니다.
실은, 이것은 1년 전의 얘기입니다.
다른 회사의 얘기를 꺼내 죄송하지만, 작년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류의 판타지를 썼습니다. 그것은 현실에 섞여들어온 이방인의 얘기로, 이번엔 이계에 말려들어버린 현실의 인간의 얘기를 썼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얘기는 작년에 쓴 이야기의 속편이면서, 본편이기도 합니다.
행복하게도 전번의 얘기와 마찬가지로, 야마다 아키히로상에게 일러스트를 부탁드릴 수 있었습니다. 후기를 사적인 용도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만은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야마다상,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주신(상권의 어두운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독자 여러분께는, 특히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이라도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행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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