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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by Casey,Riley 2020.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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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찰을 이해하는 기본 요소인 한국의 건축, 사찰, 불상, 불탑 등을 설명하고 유네 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7개 사찰을 소개한다. 저자는 한국의 사찰을 비롯한 전통건 축은 복잡하게 보이지만, 여러 형태의 부재들을 어떤 틀에 맞춰 접합하여 구조물을 완성시켜 어떤 정형화된 형태를 만드는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랑인 목조건축이라 말한 다. 
 
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 Short Summary 
 
2018년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 불교문화의 총본산인 천년 사찰 7곳(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7개 사찰이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지속성, 한국 불교의 깊은 역사성, 1000 년 이상 신앙ㆍ수도ㆍ생활 기능이 살아 있는 종합 승원으로, 세계유산 등재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하며, 개별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 관리 계획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고 적었다. 
 
한국의 사찰을 비롯한 전통건축은 기둥 위와 서까래 밑의 공포, 또 내부에 가구된 보, 도리, 서까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물론 단청, 장식 조각들도 만만치 않아 어렵게 생각되는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물은 나무와 돌, 흙 등을 주재료로 하여 이들을 적절히 가공해 사용 하되 나무를 가구식 구조로 활용한 것이라 설명한다. 아울러 7개 사찰을 통해 산사의 겉모습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찰의 기본 가치를 음미해 볼 것을 권한다. 
 
▣ 차례 
 
머리말 
 
제1부 불교의 유산 - 한국의 건축 / 사찰 / 불상 / 불탑 / 석등과 석비 / 조경 
 
제2부 한국의 산사 - 경북 영주 부석사 / 경북 안동 봉정사 / 경남 양산 통도사 / 전남 해남 대흥사 / 전남 순천 선암사 / 충남 공주 마곡사 / 충북 보은 법주사 
 
참고문헌 
 
- 2 - 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불교의 유산 
 
한국의 건축 한국 건축의 주체는 목조 가구식(架構式) 건축으로, 이는 중국ㆍ일본ㆍ한국의 공통 성격이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 등 많은 요소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건축 공간을 구성하는 기본부터 다르게 출발한다. 중국의 건축은 광대한 대륙에 기반을 두어 척도에서 장대하고 웅장한 맛을 주고, 일본의 건축은 섬나라 환경을 토대로 기계적이고 날카로운 맛을 준다. 반면 한국의 건축은 반도국으로 중용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소박한 맛을 기본으로 한다. 
 
한국 건축의 특성은 건물마다 위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마당과 마당이 서로 고저가 다른 단을 형성하며, 여기에 다시 주와 종의 관계로 기단의 고저 차이를 이룬다. 통도사처럼 거의 평지에 건축된 사찰일지라도 바닥의 위계나 건축 기단 자체로 건물의 위계를 느낄 수 있다. 한국 건축의 또 다른 특성은 비대칭성이다. 이는 공간이 형성하는 중심축과 관계있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되게 건물이 배치된 예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예로 불국사도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탑을 배치해 언뜻 좌우 대칭으로 볼 수 있으나 전체적인 배치를 생각하면 비대칭이다. 
 
한편 해외의 명승지 건축물과 한국 건축을 비교하면, 한국은 지붕면이 정면이 되고 박공면이 측면이 되므로 대형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진입 방향에서 공간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는 반면, 서양 건축에서는 박공면이 정면이 되어 신전이나 서당에 들어갈 때 상당한 공간의 깊이를 느끼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한국 건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건물과 건물, 마당이 구성하는 외부 공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물론 한국 건축의 여러 특성은 한국의 건축 재료에도 기인한다. 예로 한국 건축의 주요 부재는 육송 (陸松)인데, 육송은 건축 재료로 볼 때 결코 좋은 수종은 아니다. 장대한 부재를 얻기 어려운 것은 물론 똑바로 자라는 경우보다 구부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진이 많아 치목(治木)이 어렵고 또치목한 후에도 나무가 잘 터지고 비틀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육송이 한국 건축의 주력이 된 것은 육송 이외의 재료 공급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수들은 육송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창의적 노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단 / 초석: 기단은 건물이나 탑 등 건축물의 토대가 되도록 높이 쌓은 받침을 말한다. 기단의 역할은 건축물을 주변보다 높임으로써 태양빛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고 낙수가 튀는 것을 방지하며, 지하 에서 습기와 해충이 올라오는 것을 막아준다. 한국의 건물은 건물의 규모나 용도에 상관없이 기단 없는 건물은 없다. 한편 초석은 기단 위에 돌을 놓아 기둥을 받치며 기둥을 통해 전달받은 상부의 하중을 지반이나 기단으로 전달하는 구조물로 주춧돌, 주초석 등으로 부른다. 
 
기둥 / 공포: 기둥은 상부 가구의 하중을 받아 초석이나 지반에 전달하는 기능을 갖는다. 기둥의 종류는 길이에 따라 긴 것을 고주(高柱), 작은 것을 평주(平柱)라 부른다. 한옥의 지붕은 ‘ㅅ’자 모양을 가지므로 안쪽에 놓이는 기둥은 밖에 놓이는 기둥보다 길게 된다. 그래서 안쪽에는 고주가 놓이고 밖에는 평주가 놓인다. 한편 한국 건축의 기본은 기둥과 같은 수직 부재와 보나 도리와 같은 수평 부재를 적절하게 포집하는 가구 방식이다. 그런데 두 수평 부재가 그냥 만나면 연결 부위가 불안정해진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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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둥과 수평 부재 사이에 받침목을 댔는데 이것이 공포다. 공포는 한국 목조 건물의 백미라고도 볼 수 있는데, 기둥과 지붕 가구 사이에 있어 보를 통해 전달받은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해주며, 처마를 길게 뽑아 수평적인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가구(架構): 가구는 기둥 위나 공포 위에 얹어 지붕의 틀을 구성하는 부재들이다. 넓게는 기둥에서 종도리까지, 좁게는 기둥 상부에서 도리까지 집의 뼈대를 이루는 부분을 말한다. 가구는 보(樑), 도리(道 里), 대공(臺工) 등의 기본 부재로 이루어지며, 이들 구성 부재는 서로간의 맞춤이나 형태 등에서 일정 형식을 갖는다. 보는 위치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는데 대들보ㆍ중종보ㆍ퇴보(대들보보다 짧은 보)가그것이다. 한편 도리는 일반적으로 직각 방향으로 있는 횡가구재이며 가구재의 최상부에 놓이는 긴 부재로 지붕의 하중을 직접 받는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리를 종도리, 고주 위의 도리를 중도리, 그위에 놓인 도리를 중상도리, 그 아래에 놓인 도리를 중하도리라고 한다. 
 
천장(天障) / 지붕: 천장은 가구재가 노출되거나 은폐됨에 관계없이 건물 내부의 기둥 윗부분을 총칭해 부른다. 한편 지붕은 기와나 초가 등으로 이은 건물의 최상부 구조재를 말한다. 공간을 덮어 내부 공간을 형성하고 하중을 이용해 건물 자체의 안정성을 도모한다. 또 지붕에 올린 흙은 습도와 열을 조절 하며, 깊은 처마는 계절에 따른 태양광선의 실내 유입 여부를 조절하며 벽체나 창호에 빗물이 들이치는 것을 방지한다. 지붕면이 정면을 형성하면서 전체 입면의 약 1/2을 차지하므로 시각적으로 중요하며 한국 건축의 곡선미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를 담당한다. 
 
사찰 한국은 약 70퍼센트가 산이고 그 산에는 대부분 사찰이 있다. 사찰이라는 말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로 상가아라마인데, 이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긴 한자말이 승가람마이며, 승가람마를 줄여서 ‘가람’이라 한다. 상가아라마는 무리 또는 모임이라는 뜻을 지닌 ‘상가’와 정원 또는 담장을 두른 집이라는 뜻의 ‘아라마’가 복합된 말이다. 이 말을 번역해 중원ㆍ승단ㆍ승원이라 하는데, 모두 수행자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곳, 즉 ‘절’을 뜻한다. 사찰에는 부처를 봉안한 여러 불전에서부터 강의를 위한 건물, 참선하는 건물, 승려들이 거주하는 건물은 물론 식당, 부엌, 종루, 고루에 이르기까지 쓰임새에 따라 분리되어 건설된다. 그런데 많은 사찰을 방문하다 보면 각 건물들이 유사한데도 건물의 현판을 보면 다른 이름을 갖고 있어 헷갈리기 마련이다. 이는 사찰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일주문 / 중문: 사찰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당간지주(幢竿支柱)에서 시작된다. 당간지주는 2개의 돌기둥과 철로 된 긴 통으로 되어 있는데, 이 철통(당간)을 기둥 사이에 넣어서 깃대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부처의 나라는 일주문부터 시작된다. ‘일주’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일심’을 상징한다고 설명된다. 불교에서는 이 우주가 가장 깊은 속마음인 일심에서 비롯되었 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을 지나면 이제 속세와는 이별이라는 뜻도 된다. 그러나 아직 부처의 세계에 온 것은 아니고 중간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형 사찰에서는 보통 일주문부터 본전에 도달하기까지 개울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부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과 다름없다. 한편 사찰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 걸으면 문이 하나 더 나온다. 이는 천왕문으로 이 문 안에는 험상궂게 생긴 4명의 장수가 있다. 이들은 사천왕으로 원래는 힌두교의 신이었는데, 불교가 갖고 와서 불교를 수호하는 ‘보디가 드’로 만든 것이다. 
 
대웅전: 일주문과 중문을 지나면 각 사찰의 보궁으로 들어가는데, 보궁의 이름은 어느 부처를 모시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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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웅전(大雄殿)은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힌 위대한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가람의 중심 건물이다.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사찰 본당의 대명사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를 대웅세존이라 부르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석가단독불을 봉안하기도 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三世佛)을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삼세불에 각각 보현(普賢), 대세지 (大勢至), 관음(觀音), 문수(文殊)를 협시해 총 7구의 불상을 봉안하기도 하며, 이 경우에 대웅보전이라 한다. 수덕사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품이 남아 있다. 
 
극락전: 대웅전과 더불어 조선시대 2대 불전으로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극락전(極樂殿)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안치하고 있는 법당으로,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 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인데, 무량한 지혜와 무량한 덕, 무량한 수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불’로 표현되어 무량수전으로도 불린다. ‘나무아미타불’은 무한한 생명과 지혜로 부처에 귀의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구호다. 
 
미륵전 / 관음전: 미륵전은 사찰에서 미륵불을 주불로 봉안한 법당이다. 석가가 열반한 뒤 56억 7,000 만 년이 지나면 말세가 되는데, 도솔천의 미륵보살이던 분이 사바세계 용화수 아래 내려와 성도하고 미륵불이 된다. 그는 석가가 다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제도한다. 한편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마음속에 새겨서 섬기면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불상 삼국시대 불상은 대체로 동과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금동불(金銅佛)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 하는 광배에 부처와 보살을 함께 모신 ‘일광삼존(一光三尊)’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초창기 불상은 좁은 공간에 모실 불ㆍ보살을 함께 조성했기 때문으로 남북조 시대의 불상을 차용했다. 그러나 이들 불상은 한국 지역에 맞는 불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데, 6세기 중반 신라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 불상 양식이 신라에 전파되면서 점차 풍만한 모습으로 바뀐다. 불상의 머리 모습은 꼬불꼬불한 머리카락(나발)보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상투 모양(육계)이 훨씬 커지고 눈꺼풀이 두툼해지며 볼에 살이 붙으면서 입술 주변이 들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띤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육계가 작아지고 눈썹과 코를 잇는 선이 뚜렷해지며 입가에 미소가 점차 사라진다. 불상의 얼굴 또한 깊은 사색에 빠진 근엄한 얼굴로 변하는데, 이는 신라 불교의 철학과 사상이 심오하게 발전해가는 시대상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불상은 깨달은 사람, 즉 각자(覺者)로서 격을 갖추고 있는 부처를 형상화한 것인데, 한국의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또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과 53불 1,000불상이 만들어진다. 
 
불탑 탑은 한마디로 ‘붓다의 무덤’이라 볼 수 있다. 탑이란 명칭은 원래 고대 인도어인 스투파(stupa)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스투파는 본래 ‘쌓아올린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죽은 사람을 화장한 뒤 유골을 묻고 그 위에 흙이나 벽돌을 쌓은 돔 형태의 무덤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탑의 원래 의미는 ‘유골을 매장한 인도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부처의 무덤이나 일반 인도의 무덤이나 모두 똑같은 스투파다. 한편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자 부처의 스투파가 중국에서 솔도파, 스도파, 탑파 등으로 발음되어 한자로 표기되다가 마침내 줄여서 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탑을 파고다라고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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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데, 이 용어는 포르투갈어 ‘빠고데(pagode)’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진다. 
 
탑의 배치와 장엄: 사찰 안의 탑은 사찰의 여러 건물과 어우러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때 탑과 건물이 어떤 관계로 배치되어 있는지를 ‘가람 배치’라고 한다. 예를 들면 탑과 금당의 관계에 따라 1탑 3금당ㆍ1탑 1금당ㆍ쌍탑식 등으로 분류한다. 1탑 3금당식 가람 배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주로 고구려에서 그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탑을 한가운데 두고 북쪽에 1개, 동ㆍ서에 1개씩 금당이 있어 금당이 탑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다. 1탑 1금당식 가람 배치는 남ㆍ북축 선상에 탑과 금당을 1개씩 두는 형태와 동ㆍ서로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가 있다. 백제시대의 탑은 남북축 선상에 탑과 금당을 두는 형태로 군수리사지,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이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탑식 가람 배치는 통일신라시대 사천왕사지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망덕사지ㆍ보문사지 등에서는 목탑, 감은사지ㆍ천군동사지ㆍ불국사 등에서는 석탑으로 나타난다.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이런 쌍탑식 가람 배치가 기본이 된다. 
 
한편 탑과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 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탑은 다음 2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륜(相輪)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리의 봉안이 석가의 무덤임을 알리는 실질적인 내용이라면, 상륜은 인도 스투파를 축소시킨 상징적인 형식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탑에는 상륜이 있다. 목탑이나 전탑에서는 주로 금속으로 만들었고 석탑은 돌로 저마다의 형태를 조각해 올려놓았다. 물론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건립되는 모든 탑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가 없어 후대에는 다른 승려들의 사리나 불경, 작은 금동불 등 공경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탑 안에 모셨다. 그래서 사찰에 들어가면 부처를 모신 법당 안에 있는 탑에 합장해 예배하거나 탑돌이를 하며 기원하는 것이다. 
 
한국의 산사 
 
경북 영주 부석사 한국의 자랑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첫 번째 답사로 부석사를 선정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수많은 사찰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역사와 자랑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건축학자들은 부석사가 불국사와 함께 한국 사원 건축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불국사가 인공미의 극치라면 부석사는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불국사의 전면 석축이 목구조 형식을 본떠 쌓은 것이라면, 부석사의 석축은 생긴 대로 아래에서 위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것이다. 사람이 쌓았지만 불국사처럼 인공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 두고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사찰이 많이 들어섰지만, 태백산 줄기를 이어받은 봉황산 자락에 화엄세계를 펼치려고 의상대사가 세운 부석사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예술 면에서 으뜸을 자랑한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부석사는 규모와 위엄이 더해져 배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사세를 유지했다. 성종 24년 (1493)에는 조사당을 단청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1555년에 소실된 안양루를 20년 뒤인 1576년에는 중건하는가 하면, 범종각도 1746년 불탔을 때에 곧바로 다시 건축했다. 그만큼 부석사가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ㆍ수리하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고 했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부문, 천왕문, 승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초에는 유물각을 개수해 유물전시각으로 꾸몄다. 
 
부석사 가람 배치: 부석사의 공간은 크게 아래에서 일주문 공간, 천왕문 공간, 안양루 공간, 무량수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지고, 무량수전 뒤쪽으로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는데,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 
 
- 6 - 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다 하여 더욱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곧바로 오르면 보물 제255호인 당간지주가 보인다. 높이 4.28미터의 두 지주가 1미터 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는데, 마주 대하는 내측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며 바깥 면의 양쪽 모서리의 모를 약간 죽였다. 양 지주의 꼭대기에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졌는데, 1단의 굴곡을 두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한 곳에만 간구(杆溝)를 마련해 장치했던 것인데,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간구를 파서 간을 끼우게 되어 있다. 양 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는 원형으로 된 대석(臺石)이 있어서 간대(杆臺)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간대는 1 석으로 되었다. 아래쪽 간(기둥)받침에는 지름 30센티미터가 되게 둥근 구멍을 파 간을 받게 했으며, 그 주변에 깔끔하게 연꽃무늬를 조각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단조로움을 메웠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천왕문이 보이는데, 천왕문 양쪽으로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지만 겁을 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면서도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980년에 건설된 천왕문과 사천왕은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면 성벽 같은 석축 계단이 가로막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쌓은 아름다운 자연 석축이다. 그 위로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석벽이 가파르고 높아 중간에 석단을 만들어 가파름을 보완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눈은 예리하다. 
 
이 돌계단에 건축가의 심미안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아래쪽 석단 오르는 계단의 길이가 윗 석단의 계단 길이보다 1미터는 적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계단의 폭이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원근법 때문에 멀리 보이는 사물이 소실점을 향해 줄어드는 착시 현상을 차용한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단아한 3층 석탑 한 쌍이 길 양쪽에 서 있다. 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으로 미루어볼 때 9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부석사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고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사찰터에서 1958년에 옮겨온 것이다. 3층쌍탑의 서탑 뒤편으로 나란히 있는 불상 3개는 1994년에 인근 북지 1리에서 모셔다놓은 것이다. 
 
마지막 돌계단을 딛고 석축 위로 서면 전면으로 종루와 요사가 눈에 가득 들어오며, 우측으로 1996년초에 준공된 유물전시각이 있다. 계속 나아가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누하진입(樓下進入), 즉누각 밑으로 빠져나오면서 오른쪽으로 안양루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보다 먼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낮은 돌기둥 두 쌍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괘불지주로, 큰 행사가 있을 때 내거는 괘불을 붙들어맬 장대를 양쪽에서 버텨주는 기둥 보조돌이다. 그 서쪽에 있는 단정한 집이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 암인데, 본래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정면을 바라보면 다시 엄청난 대석단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건물이 비교적 규모가 작다고 투덜대지만 부석사의 석축을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간다. 부석사의 석축은 바위 모양 그대로 커다란 돌을 우람하게 쌓아놓았는데, 부석사에서 큰 돌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찰을 건립할 때 공을 많이 들인 것은 물론 건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무량수전보다 약 200년 후에 건설된 대석단 위에 있는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으로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이 되는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팔작누각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바라보면 단층이지만 종루에서 올려다보면 석축에 몸을 기대어 다리기둥을 세워 지은 2층집이다. 
 
계단을 두 단 오르면 아름다운 통일신라 석등과 화사석 너머로 ‘무량수전’ 현판이 보이고 비로소 부석 사의 진면목인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선다. 이 안양루 축은 이제까지의 남서향이었던 축과는 비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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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을 향하고 있다. 이런 방향 전환으로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수직의 권위는 한껏 살리고 있다. 누각 밑으로 빠지면서 자태가 매우 단정한 석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량수전 앞에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량수전 왼쪽 뒤로 큰 바윗돌이 얹혀 있는 부석이 있고, 오른쪽 뒤편으로는 1칸짜리 집이 있는데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선묘(善妙)를 모신 선묘각이다. 
 
부석을 돌아 아래쪽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그 옆의 요사체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 쓰이는 삼보전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오른쪽 둔덕에 3층 석탑이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갈래길이 나온다. 여기서 동쪽인 오른쪽 길로 가면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이 나오며, 서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온다. 서쪽에 자리한 자인당 안에는 석불상 3분이 모셔져 있다. 대좌와 광배가 완전한 양쪽 2분은 보물 제220호로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인데, 이런 모습은 대체로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화엄사상에 충실한 부석사: 봉정사의 극락전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명예는 빼앗겼지만, 무량수전은 규모도 크고 한국 주심포계의 전형적인데다 완성된 구조라는 데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다. 참고로 기둥 앞쪽으로 외목도리를 내 11량으로 된 팔작지붕이며, 정면 5칸 건물은 가운데 3칸이 넓고 양 끝 2칸이 좁으며 전체 비례는 황금비에 기준한다. 
 
무량수전에는 눈여겨볼 수법이 많다.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것들이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수법들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 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모서리기둥을 중앙보다 높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 작용이다. 안허리곡은 귀부분의 처마 끝을 튀어나오게 해서 위나 옆에서 무량수전을 보았을 때 처마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도록 한다. 
 
안쏠림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둥 위쪽을 건물 안쪽으로 경사지게 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기둥과 처마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벽면도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 벽면의 가운데가 은근히 휘어져 있다. 나무와 흙만으로 지은 집의 이런 교묘한 배려로 인해 우리는 육중하면서도 넓은 무량수전의 지붕이 활짝 펼친 새의 날개처럼 열려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한옛사람들의 배려가 궁극적으로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으로 조화롭게 피어난다. 
 
그리고 무량수전은 한국 전통 건축에서 빛을 이용한 차경 기법(효율적인 공간 배치를 통해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끌어들이는 기법) 개념을 잘 보여주는 예다. 특히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집으로, 이 무량수전의 포작은 간결하면서도 공들여 가구를 짜나간 고려시대의 장인 정신을 맛볼 수 있는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로 손꼽힌다. 참고로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무량수전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단도 예사롭지 않다. 면석과 기둥석, 갑석이 갖춰진 모양이 석탑의 기단부 구조와도 같다.
이는 석탑이 목조건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한편 무량수전 등이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어 기본 나무의 수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답은 한국 동네 어귀에 어김없이 서 있는 정자나무인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1,000년을 거든히 넘겨 마을의 역사를 다 꿰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느티나무는 다른 나무가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 나무 문화는 흔히 소나무 문화로 알려지지만, 그것은 조선 이후의 이야기다. 느티나무 목재는 기둥으로 사용할 수 있고, 또 땅 속에 묻히는 관재로 쓰기도 한다. 이외에 모양새를 따지는 가구, 생활도구 등 어떤 용도로 쓰든지 느티나무를 감히 넘볼 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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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데, 특히 건축 재료로 느티나무 사용은 발군이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해인사와 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법보전과 수다라장, 무위사 극락전, 화엄사 대웅전 등의 나무 기둥의 전부 혹은 일부가 느티나무다. 
 
충북 보은 법주사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군에 걸쳐 있지만, 흔히 보은의 속리산으로 불린다. 법주사가 대부분 보은 땅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산 속에 있으면서도 평탄하고 넓은 터전에 골라 앉은 법주사는 수많은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 등을 지녀 보은의 얼굴 구실을 한다. 
 
문화재의 보고: 보은군 안에 있는 지정문화재의 절반 이상이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 일대에 있는데, 그중에서 국보 3점은 모두 법주사에 있다. 국보나 보물로 인해 법주사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이 지만, 법주사가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온 것은 입구의 숲길도 한몫을 한다. 참나무와 소나무, 전나무가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있는 이 숲은 길이가 무려 오 리(약 2킬로미터)쯤된다고 하여 ‘오리숲’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초여름의 신록과 가을의 단풍 등 철 따라 그림을 달리 하는데 물고기들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계곡물은 덤이다. 
 
법주사에는 18세기와 20세기 초에 그린 〈법주사도(法住寺圖)〉 2점이 전해져 조선 후기의 가람 배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림에는 수정봉 밑, 지금의 청동미륵대불 근처에 2층의 용화전이 있었고, 팔상전과 용화전을 잇는 축과 직교해 역시 중층의 대웅보전이 있다. 또한 대웅보전은 이름과는 달리 비로자 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법주사는 원래 미륵도량이었으나, 고려 때인가 화엄신앙을 습합(習合)해대적광전이 또 하나의 법당으로 지어졌고, 용화전이 소실된 후에는 주불전으로 역할이 격상되었다. 
 
법주사를 들어가면 놀라운 것이 보이는데, 1990년에 건립된 후 2002년 개금(改金)한 청동미륵대불이다. 미륵대불은 기단까지 합친 높이가 33미터나 되는데, 기단 아래에는 지하석실 법당(용화전)을 두었다. 이 불상이 건설되기에는 미륵불에 대한 유래가 있다. 법상종 사찰에서는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래 법주사에는 미륵장륙상을 봉안한 용화전이 주불전이었다. 이 미륵장륙상은 정유재란 때 사라지고 이후 중창하면서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지어 용화보전(산호전)에 봉안했다. 
 
이 미륵삼존상을 187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만들려고 헐어갔다. 그후 1939년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이 당시 일제 강점기 때 독립에 대한 염원을 살려 시멘트로 대불을 제작했다. 그러나 시멘트로 만들었으므로 여러 부분 박락이 되는 등 훼손이 되어 1990년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 청동대불로 조성했는데, 이때 사용된 청동만 116톤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 용접 부위에 부식이 진행되어 2002년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완료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때 순금 총 80킬로그램으로 연면적 900제곱미터에 달하는 겉부분에는 3미크론(0.003㎜) 두께의 금박을 입혔으며 섭씨 80도에서 -30도까지 견딜 수 있는 건식 전기도금공법을 통해 광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도금했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8미터의 기단부 안에는 용화전이 있는데,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중앙에 미륵반 가사유상을 모시고, 그 둘레에 전시 공간을 만들어 성보와 상당수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법주사 들어가기: 법주사로 들어가는 천왕문은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되어 여러 차례 중수된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다른 사찰의 것보다 규모가 매우 크며 정면 5칸 측면 2칸인데, 가운데 3칸에 판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쓰고 양쪽 끝의 1칸씩에는 작은 판창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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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앞 동쪽에 솟을삼문이 달린 담장을 두른 자그마한 건물은 선희궁 원당(願堂)인데, 담장과 솟을삼문을 갖춘 것은 사당 등에 흔히 쓰이는 유교적 건축 형식으로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건물이다. 선희궁은 조선 영조 41년(1765)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원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므로 이 일곽은 전형적인 사당 건축의 모습을 가진, 불교 가람 안에서는 이색적인 영역이다. 또한 기단과 주춧돌이 반듯하고 말끔히 다듬어져 있고, 둥근 돌과 구운 점토로 무늬를 넣어 민화풍으로 장식한 담장이 눈길을 끈다. 
 
금강문 서쪽 단 위에 있는 능인전 역시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건물이다. ‘능인(能人)’이란 모든 중생을 교화해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능인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16나한상을 모셔 영산전이나 나한전 구실을 하고 있다. 본래는 뒤쪽의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팔상전: 한국 건축물의 특징은 변이가 많다는 것이지만, 법주사 팔상전처럼 특이한 경우는 별로 없다.
팔상전은 건축물로 보이지만, 국보로 지정된 유일한 5층 목조탑이기 때문이다. 물론 팔상전이 온전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주사 초창기에 세워진 건물이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후 선조 38 년(1605)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사명대사가 복원 공사를 지휘해 완공했다고 한다. 팔상전 자체는 1968년 해체할 당시 많은 것이 알려졌다. 우선 기본적으로 다포계를 기본으로 하나 각 측마다 그 수법이 달라 여러 시기의 중수 공사 때마다 정확한 고증 없이 경비 절감을 위해 용도가 폐기된 건물들을 뜯어다 손쉬운 방법으로 적당히 결구한 점이 보인다. 
 
이 말은 한국 목조탑이 원래 팔상전과 같은 형태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목조탑도 기본적으로 석탑이나 일본의 목조탑처럼 더욱 고준한 느낌의 건물이었으므로 팔상전이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 다는 것이다. 즉, 중건 시 옛 목조탑의 가구법을 망각했으므로 중층 건물의 가구법을 차용, 5층 건물로 건립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각층 비례의 체감률을 급격하게 축소한 것이 안정감을 주기는 하지만 한국의 균제감 있는 건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학자들은 팔상전의 가치는 그 법식이나 기법에 있지 않고 목조건축으로는 5층이라는 높이와 규모, 유형적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전통적인 목탑 형식은 쌍봉사 대웅전(1984년 4월 소실된 후 재건)의 비례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한다. 
 
바닥 한가운데에 심초석(心礎石)이 있고 그 위에 꼭대기까지 닿는 심주(心柱)를 세웠으며, 그 둘레에 4 층까지 닿는 4개의 하늘기둥(四天柱)을 세웠고 다시 그 둘레에 3층까지 닿는 높은 기둥(隅高柱) 12개를 세웠다. 그 후 1층의 바깥기둥(邊柱)과 높은 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2층의 바깥기둥을 세웠고 3층은 높은 기둥을 있는 그대로 바깥기둥으로 삼았으며 높은 기둥과 하늘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4층 변주를 세웠다. 또 기둥들 사이를 사각으로 다듬은 보로 연결해 튼튼하게 했다. 이와 같은 짜임은 목탑을 만드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인식하며 3층 법당인 금산사 미륵전에서도 같은 방식을 채택했다. 
 
참고로 팔상전은 1968년에서 1969년 사이에 완전 해체 수리를 거쳤다. 이때 심초석에 마련된 사리공 
 
(舍利孔)에서 대리석 함에 든 조그만 은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공의 네 벽과 위쪽을 덮은 동판 5 
 
장에는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대리석 함을 싼 비단보자기에도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 이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웅보전: 한국 3대 불전 가운데 하나로 설명되는 대웅보전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다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래 층이 정면 7칸 측면 4칸인 2층 건물로,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높이가 19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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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에 이르는 큰 불전이며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위층이 한 통으로 트여 있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댓돌을 한 단 돌리고 그 위에 건물을 앉혔다. 기단 한가운데 널찍한 계단을 마련했는데, 좌우에 둥근 소맷돌을 세웠고 가운데에 넓적한 돌 3장을 나란히 하여 계단을 좌우로 나누 었다. 부처를 연에 태워 모시거나 할 때 그 위로 연이 지나가도록 한 답도(踏道)로 이해된다. 소맷돌 바깥쪽에는 연잎과 연꽃이 새겨졌고 소맷돌 위쪽에는 돌원숭이가 한 마리씩 앉았다. 
 
건물 구조는 안쪽에 높은 기둥을 두 줄로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고 있다. 또안쪽 네 귀퉁이에 따로 높은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이 위층에서는 네 귀의 기둥이 된다. 대웅보전은 높이가 높으므로 높은 기둥을 세우기 위해, 어칸 둘레의 협칸이 바깥의 퇴칸보다 넓은 보통 건물과 달리 협칸보다 퇴간을 넓게 만들었다. 또 다른 특징은 아래위층의 공포가 다르다는 점이다. 아래층은 내외 2출목인데 위층은 내외3출목으로 공포가 한 단 더 높다. 이는 아래층은 기둥이 높기 때문에 처마를 낮춰 허전함을 피하고 위층은 기둥이 아주 짧아 처마를 높여 답답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공포의 모양도 하층은 직선으로 뻗었지만 상층은 곡선으로 들어 올렸다. 1976년 해체해 중수하기 전에는 서까래만 있는 홑처마였는데, 원래 부연이 있는 겹처마였음이 밝혀져 겹처마로 변경했다. 
 
쌍사자석등: 쌍사자석등은 높이 3.3미터로 신라 석등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팔각석등에서 팔각기 둥이 들어갈 부분을 사자 2마리로 바꾸어 놓았다.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된다. 석등은 여러 가지의 재앙(불교에서의 8난)을 예방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삼국시대 이래 많은 석조 유물에 사자를 이용했는데, 현존하는 석탑ㆍ석등에서 법주사 석등이 가장 뛰어난 수법을 보인다. 
 
철확: 신라 성덕왕 18년(720)에 조성되어다고 전해지는 보물 제1413호인 철확은 큰 사발(大鉢) 형상을한 보은 철제솥으로 높이 1.2미터, 지름 2.7미터, 둘레 10.8미터, 두께 10~3센티미터의 거대한 크기다.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했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센티미터이며 무게는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 연대ㆍ제작자ㆍ제조 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 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수 있는 부피를 지녀 3,000여 명의 승려가 운집해 있을 당시 장솥 혹은 밥솥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금강문 가까이 보호각 안에 있지만, 원래는 조사각 뒤쪽 석옹(돌도가니)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약 
 
30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 11 - 아름답고 신비한 산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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