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동안 일간지 기자로 일하며 일상에 지쳐가던 즈음 무작정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그 길은 저자를 독일로, 부탄으로, 9년간의 타향살이로 이끌었다. 저자에게 세상은 유명 관광지, 미술관, 명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름한 공동 숙소에, 시내 광장에서 열린 반대시위에, 세입자를 위한 활동을 하는 그의 이웃들에게, 낡은 극장을 운영하는 주민 노동조합에, 연필 한 자루에 행복해 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독일, 부탄, 스페인에서 만나고, 묻고, 뛰어들고, 부딪치며 취재한 세상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 Short Summary
우리는 많은 시간 여행을 꿈꾼다. 많은 이에게 여행은 일상 탈출이지만, 저자에게는 일상 추구였다. 거기는 여기와 비슷하지만 또 달랐고 그들은 나와 다르지만 또 비슷했다. 저자에게 세상은 유명 관광지, 미술관, 명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물집을 터트려주던 허름한 공동 숙소 알베르게에, 본 시내 카이저 광장에서 열린 극우단체 반대시위에, 세입자 칼레를 위해 스크럼을 짜는 그의 이웃들에게, 85 년 된 낡은 극장을 운영하는 주민 노동조합에, 연필 한 자루에 행복해 하는 초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있다. 이 책은 저자가 독일, 부탄, 스페인에서 만나고, 묻고, 뛰어들고, 부딪치며 취재한 세상과 사람 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소한 일상 문화사: 발랄한 문체와 번뜩이는 재치로 저자로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작은 문화 코드를 통해 세상을 탐색한다. 유럽 거대식물 재배자모임, 이웃의 스탠딩 파티, 독일 노부부의 소박한 금혼식, 동네 카니발, 룸메이트 구인광고, 지역 사투리 록밴드, 거리 화가, 분리수거와 빨래건조대, 아르바이트 인력회사, 공항 입국 심사대, 친구의 결혼 피로연, 독일 극우단체 페기다, 지역극장을 지키는 노동조합, 독일 난민촌 등 저자의 호기심어린 시선에 걸린 목록들이다. 독특하고 특별한 세상과 타인에 대한 탐색은 때론 자신과 자신이 살아온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그 길에서 만난 독일인과 결혼해 독일 본 국제대학원 과정에 다니며 독일 분식점에서 일하고, 스위스에서 단기 알바를 하고, 부탄 여행사에서 일하며 9년 간 별별 사람들을 만났다. 난민 콘서트, 지역 카니발, 동물보호단체, 부탄 동성애단체, 스님 전문 고등학교, 화장터, 히말라야 유목민 가족, 푸자(굿) 등을 찾아다니며 취재했다. 진짜 세계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이다. 역사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개개인의 특별한 소사인 것이다.
저자는 그런 작고 개별적이기에 소중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세상,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완벽한 타인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지, 그럼에도 이해하기를 멈출 수 없음을 가르쳐준 스승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으나 보지 못했던 인종주의, 의존하고 싶은 마음, 삶에서 회피하도록 떠밀던 불안 따위가 고스란히 표면으로 올라왔다.
삶의 굴곡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가 쓸 수 있다. 남자 하나 믿고 여기저기 떠돌다 개털 돼 돌아온 실패기로 쓸지, 내 마음에 솔직했고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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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로 쓸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험보다 태도나 해석인지 모른 다.”
▣ 차례
타인탐구생활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생존탐구생활 치열하지만 우아하게 경계탐구생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행복탐구생활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길탐구생활 떠나거나 머물거나
에필로그_ 왜냐고? 그때 내 심장이 뛰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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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생존탐구생활 치열하지만 우아하게
라디에이터는 난방기구가 아니다 부부 싸움의 계절이 다가온다. 기온이 떨어질수록 전의는 달아오른다. 지난해 겨울은 길었지만 여전히 승부는 나지 않았다. 네 살갗은 특수 재질이냐는 의심만 커져갔다. 독일인 남편과 나 사이 온도전이다.
이 집 라디에이터는 난방 기구인가. 나는 그 분류에 반대한다. 발바닥부터 감싸 안아 피를 데워주는 온돌 정도는 돼야 난방입네 할 수 있다. 집 라디에이터는 반경 5센티미터를 데우자 풀이 죽었다. 전기, 기름 먹고 힘은 어디다 쓰는 걸까. 강도를 세게 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쉭쉭거리며 통장에서 돈 빠져 나가는 소리를 서라운드로 들려준다. 추위보다 더 등골 서늘한 소리다. 스웨터 두 개씩 껴입고 요실금 라디에이터 위에 앉아 지난겨울을 났다. 집 안팎이 무슨 차이냐 푸념하면 돌아오는 답은 항상 똑같다.
“뭘 좀 많이 입어.” 집에서 장갑도 껴야 하나.
그중 가장 추운 곳은 침실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난방기구 켜는 법이 없다. 침실 문을 열면 냉기가 덮쳐 잠을 추방한다. 뜨끈한 방바닥에 근육이 노글노글해져야 그 사이로 잠이 스며드는데 이건 정신이 번쩍 나 수능 수학을 펼쳐 들어야 할 판이다. 나는 근육과 정신 모두 각성 상태인데 옆에서 두꺼운 담요 위로 얌체같이 코만 내밀고 동면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이불을 확 들춰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의 주장은 그렇다. 두꺼운 이불이 있는데 왜 연료를 낭비하는가. 난방 틀면 공기가 탁해져 건강에더 안 좋다. 여기선 다 이렇게 잔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그렇게 춥지 않으며 네가 너무 곱게 자라 피부가 공주병이다.
냉기로 척추 디스크끼리 밀착할 것 같은 어느 날 밤, 그의 주장을 박살내기 위한 증거 수집에 나섰다.
온도를 쟀다. 얼마나 비인간적인 냉골에서 자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이럴 리 없는데 16도 정도다.
내 세포는 시베리아 유배 중인 것 같은데 실제 온도는 봄날의 비웃음을 날렸다.
둘째, 네가 이상하다는 확증을 뒷받침해줄 이웃의 증언을 들어봤다. 아래층 발레리, 겨울에 난방은커녕 창문도 좀 열고 잔단다. 지난 3월 아직 찬바람이 암팡진데 앙겔라는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기가 잠드니 얼굴만 빼고 담요로 똘똘 싸 바구니에 담고 베란다에 내놓았다. 그래야 더 잘 잔단다.
어디나 통하는 다용도 카드는 아직 남았다. ‘나는 너랑 다르다’다. 네가 어떻게 살았든 내 살갗은 전기 장판에 길들여진 앙투아네트다, 네 방식을 나한테 강요 마라. 결국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는 날, 자러 가기 직전 10여 분 동안만 강도 1로 라디에이터 켜기 협상에 성공했다. 그날 평화로운 밤이 지나고 지구전이 시작됐다. 몰래 켜면 몰래 끄고 켜면 끄고…….
한쪽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놨다. 냉기에 화들짝 깬 다음 날이면, 나는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멸치로 국물을 우려냈다. 거기에 마늘까지 다지면 복수극에 쓸 재료가 완성된다. 부엌은 이미 냄새가 정복 했다. 코를 쥐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통쾌해하는 일만 남았다. 나와 마디마디 다른 이 남자를 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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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수 있는 방법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널렸다. 올 겨울엔 엄마에게 멸치를 더 보내 달라 해야 할 것같다.
김밥이 터지기 전에 주인 속이 먼저 터졌다 임금 줄까 안 줄까? 독일 한국 분식집의 ‘인턴’ 마지막 날인 나흘째, 주인아줌마의 입은 오리무중 닫혀 있다. 정식으로 일하게 되면 시간당 7유로를 약속했는데 테스트 기간엔 얼마 줄지 어물쩍 서로 합의가 없었던 터다. 독일 거주 한인 카페에 가끔 올라오는 한국 식당 성토기도 내 불안에 한몫했다. 팁을 떼먹거나 임금이 짠 곳이 많단다.
이 예민한 것들. 안에 아보카도와 오이, 게맛살을 품은 캘리포니아롤은 닿는 손끝이 거칠다 싶으면 그새 자폭해버렸다. 낯을 가리는지 내 손 끝에만 그리 까탈을 부렸다. 아줌마가 썰 때는 10년 키운 애완 견처럼 그렇게 척척 들러붙더니 내가 주무르려 들면 아보카도를 게워냈다. 하나 썰 때마다 긴장해서 벌벌 떠니, 캘리포니아롤의 뱃가죽이 터지기 전에 주인아줌마의 속이 먼저 터질 지경이었다.
이것들이 만약 인간이었다면 이것은 인해전술이었다. 채 썰 무와 당근이 그랬다. 강판 칼은 어찌나 호전적인지 무든 손가락이든 닥치는 대로 갈아버리겠다는 듯 번득였다. 당근 다섯 개째에서 피를 좀 보고 말았다. 피는 왜 붉은가. 그리도 선명하게 내 어수룩한 실력을 주인아줌마에게 일러바쳤다.
접시는 때로 위로를 준다. 점심시간은 12시 30분부터 1시 30분, 주인아줌마와 조수인 나, 주문받는 청년은 비빔밥에 들어갈 계란을 부치면서 만두를 찌고 김밥을 말다가 불고기를 볶아대야 하는데 나는 덤으로 아줌마의 속도 볶는다. 손님 대부분이 독일인인데 우중충한 날의 라면 맛은 또 어찌 알았는지 하늘이 궁상을 떨면 가스레인지 위 라면 냄비가 불이 난다. 그렇게 가게 안 테이블 다섯 개 사이로 정신을 빼놨다가 개수대 앞에 서면 그 안에 잠수하고 있는 접시들이 입 무거운 친구 같을 때가 있다. 비빔밥처럼 손님이 채식주의자인지에 따라 고기를 넣고 빼야 하는 집중력을 요구하지도 않는 접시들은 닦아주기만 하면 말이 없다. 그것도 처음 몇 개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말 없는 접시는 눈송이와도 같다. 한 송이씩 내릴 땐 포근한데 떼로 내리면 집 천장을 무너뜨리듯 내 어깨를 무너뜨린다.
이렇게 나흘, 하루 세 시간씩 캘리포니아롤 비위 맞추고 접시에 뒤통수 맞다 보니 임금이 간절해졌다.
단 몇 유로라도 만지고 싶었다. 간절함 중에 돈이 90이라면 나머지 10은 거창하게도 다른 이유 때문 이었다. 나라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세상의 어떤 예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 못한다면 사는 게너무 두려워질 것 같았다.
마음이 다칠까봐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안 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달라 했을 때 그 어색한 상황은 어떻게 무마해야 할까, 그러다 이 알바마저 잘리는 건 아닐까. 마지막 날 최대한 천천히 앞치마를 벗었다.
주인아줌마는 한국 무 한 덩이를 들고 있었다. 길쭉한 독일 무 같이 맹탕이 아닌, 알싸한 진짜 한국 무다. 비닐봉지를 받아 드는데 주인아줌마가 40유로를 쥐여 줬다. 주인, 청년, 내 몫으로 3등분한 팁도 동전으로 줬다. 밥 먹고 가라며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라고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내에 4층 높이 크리스마스트리가 섰다. 나는 무 한 덩이와 40유로를 세상이 살만하다는 증거품인 양 품고 그 곁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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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탐구생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나라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같은 과에 20개국 출신 29명이 모여 있으니, 하루걸러 한 번씩 싸움이 났다. 그날 저녁 이란계 독일인 무함마드와 낄낄거릴 때만 해도 장난이 몰고 올 욕설 태풍을 까맣게 몰랐다. 모두 같이 간 뮌헨 여행 마지막 밤, 그냥 자기 서운해 악질 장난을 꾸밀 때는 즐겁기만 했다.
장난은 일곱 살 눈높이에 맞아야 제 맛이다. 새벽 2시께 프런트 데스크인 척 학생들 방으로 전화해 교수가 세미나 일로 급하게 부르니 304호로 당장 가보라고 협박하고, 304호에서 ‘왁’ 놀라게 하자고 작당했다. 무함마드는 존경스러웠다. 코만 막았는데 목소리가 바로 프런트 데스크다. 강철 심장 인도네 시아 두 친구만 교수건 뭐건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응할 수 없다며 계속 자버렸고 나머지는 슬리퍼만 발에 낀 채 헐레벌떡 희생양이 됐다. 방글라데시인 압둘은 긴 천을 두른 전통복을 입고 왔다. 다들 떼굴떼굴 굴렀다. 잠이 덜 깬 몽골 친구는 우릴 보고도 사태 파악을 못 한 채, 교수 방이 어디냐 물었다.
나만 당할쏘냐. 한 명씩 희생자가 늘어가며 304호는 몸만 늙은 국제 어린이 조직의 은밀한 아지트가 되어갔다.
우크라이나 친구 아나도 골려줄까, 투표가 붙었다. 성질이 활화산이니 잘못했다간 우리 모두 유황불에 데는 수가 있다. 역시 ‘너도 당해라’가 승리했다. 무함마드는 한술 더 떠 아나에게 사진을 찍으니 셔츠 까지 다려 입고 오라고 했다. 아나는 잠결에 셔츠를 다리다 문득 깨닫고 결심했다. ‘이것들, 요절을 낸다.’ 먼저 진짜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해 한밤의 홍두깨질을 해버렸다. 그 밤 데스크 청년은 주리를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알았는지 내 페이스북 메시지함은 아나가 보낸 욕설로 배가 터져버렸다. 정화해 말하자면 ‘너 때문에 밤잠 다 설쳤고 네가 무슨 권리로 날 웃음거리로 만들려 하느냐’는 거였다.
너한테만 장난친 거 아니다, 미안하다, 여러 번 사과해도 다 반사했다. 욕설의 강도가 표도르 발차기 급이다. 그때쯤 내 맘속에서도 분노가 몰아쳤다. 진짜 황당한 건 아나보다 내 뇌였다. 내 이성은 장식 인가 보다. 이성은 점잖게 말한다. ‘아나는 네가 아는 단 한 명의 우크라이나인인데 그와 일이 틀어졌 다고 우크라이나 전체에 꼬리표 붙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한국 다 뒤져도 너랑 똑같은 사람 없지 않느냐.’ 지당하다. 그런데 무력하다.
월급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는 눈부신 속도로 편견은 자란다. 자라, 솥뚜껑, 압력밥솥 안 가리고 막 번진다. 편견은 날쌔다. 이성이 엉거주춤 일어설 때쯤이면 벌써 상황 종료되기 일쑤다. 하루 전 산 옷 바꾸러 갔는데 사장이 우크라이나 억양으로 안 된다 하면 ‘하여간 이 사람들은 다 공격적이고 불친절하 지’ 이렇게 마음이 돌아간다. 처음 만난 사람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하면 난데없이 경계 태세다. 어이없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옆에 있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내 마음속에서 한 꾸러미에 담기기도 했다.
친구는 내 고민을 듣다 ‘너 이러다 인종주의자 되겠다’고 꼬집었다.
나는 대체로 선량하고 편견에 쉽게 휩쓸릴 만큼 그리 미련하지는 않다 믿었건만, 나는 그렇게 내 뒤통 수를 후려쳤다. 나와 내가 혐오하는 인간 사이의 차이라는 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깜짝할 새넘나들 두께일 뿐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내 마음이 그리 움직이는 걸 무능하게 쳐다볼 때면 묻게 된다. 나라는 너는 대체 누구냐.
행복탐구생활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팀푸의 낮과 밤 사이 부탄에서 첫 토요일, 아침 8시부터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팀푸 시내 중심 광장인 시계탑 주변으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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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식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손에 책 한 권씩을 들었다. 다 영어책이다. 선생님들의 구호 소리가 마이크로 울렸다. 아이들 500여 명이 정렬해 자리를 잡자 4대 국왕의 환갑 맞이 책 읽기 행사가 시작됐다.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고 쓰는 사람이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키라를 입은 열 살소녀가 똑 부러진 영어로 대표 연설을 했다. 이어 20여 분 동안 다 같이 침묵 속에 책을 읽었다.
개들마저 조용한 와중에 열한 살 소년 페마는 근질근질한가보다. 두루마기 형태의 고에 긴 양말을 신은 그는 라면땅을 닮은 과자를 살짝 꺼내 부숴 먹었다. 인도 과자인데 양파오일을 뿌려 먹는 것만 빼면 내가 한국에서 중독됐던 바로 그 맛이다. 사진 찍어도 되냐니까 갑자기 책을 펼쳐 들고 읽는 포즈를 취했다.
페마보다 세 살 많은 초뎀은 정신연령으로 보면 누나라기보다는 이모다. 단짝 친구인 칼둥과 우산을 나눠 썼다. 햇살이 쨍했다. 둘이 들고 있는 영어책 두께는 300쪽은 족히 넘어 보인다. 칼둥은 수줍어 하고 초뎀은 카리스마가 있다. 문장 마지막까지 힘주어 읽는다. 엄마뻘인 내가 주눅이 들었다. 나보다 영어가 유창하다. 그 친구들은 부탄 공식 언어인 종카어보다 영어로 읽고 쓰는 게 더 편하단다. 쐐기 형태의 종카 문자는 어찌나 복잡한지 부탄 사람들한테도 단어마다 지뢰밭이다. 모험소설을 좋아한다는 초뎀은 일본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부탄 전통이 자랑스러워요. 외국인들이 다 그래요.
오염되지 않고 특별하다고요. 그래도 세상이 변하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해요. 팀푸를 현대적인 도시로 만들고 싶어요.” 친구 칼둥은 나중에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더니 까르륵 웃었다. 무대엔 초록색, 파란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서 있고 곰으로 분장한 소년이 그 사이를 정처 없이 오락가락했다. 초뎀은 사는 동네 이름과 부모님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줬다.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종카 랭귀지 스쿨’은 산 중턱에 난데없이 서 있었다. 택시 운전사는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 올라가며 추가 요금을 불렀다. 외국인인 내가 다짜고짜 종카어를 배우겠다니까 학교 안내실 직원이 난감해했다.
여기는 어학원이 아니라 한국으로 치자면 외국어고등학교쯤 되는 곳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직원이 ‘칠립’ 폭탄을 교장선생님에게 넘겼다. 설립자인 타시다. 배우 백일섭을 닮았다.
부탄에선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수업은 영어로 한다. 종카어로 가르치는 수업은 두 과목, 종카와 문학뿐이다. 종카어가 공식 언어이지만 네팔어, 샤르촙어까지 대표 언어만 세 가지다. 11, 12학년이 되면 학과정이 예술, 과학, 경제로 나뉜다. 앞으로 전공하고 싶은 분야를 대충 정하는 거다. 국립학 교는 전 과정이 무료인데 사립학교는 1년에 약 55~85만 원을 내야 한다. 종카 랭귀지 스쿨은 부탄에서 유일하게 종카어에 방점을 둔 사립학교다. “언어를 잃는 건 우리 문화를 잃는 거예요. 종카어는 불교사상에 맞닿아 있는 언어라고요.”
타시는 3년 전 사비를 털어 학교를 세웠는데 입학생 수가 2014년 273명에서 1년 만에 120명으로 반토막 났다. 내년엔 더 줄까봐 속이 탄다. “돈 있는 집 부모들은 자식들한테 경제나 공학을 가르치고 싶어 하죠. 종카어는 ‘라스트 초이스’인 것 같아요.”
타시의 또 다른 걱정은 딸 넷이 한국 드라마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거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귓등 으로도 안 듣는단다. 나는 말 안 듣는 거야말로 진정한 딸들이란 증거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딸들이 공부를 잘 한다며 은근히 자랑했다. 큰딸은 국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나머지 셋은 다른 사립학 교에 다닌단다. 왜 이 학교에 안 보냈냐고 물으니 타시가 당황했다. “하하, 좋은 질문이에요.” 부탄 백일섭 씨의 볼이 붉다. “저도 아버지잖아요. 이 학교 나와 딸들에게 좋은 미래가 열릴까 걱정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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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시는 부처님상이 모셔진 학교 제단 사진 촬영도 허락해줬다. 음악실에선 기타를 닮은 전통 악기의 현도 몇 가닥 튕겼다. 멋지다니까 “치는 척만 해본 거”라며 쑥스러워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이 이어지는데 막 점심시간이 됐다. 책상을 붙여 둘러앉은 학생들은 보온도시락 통을 꺼냈다. 운동장 농구 골대 옆에 앉은 여학생 두 명은 니컬러스 스파크스의 《러브 스토리》를 읽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난리다. “<드림하이>를 좋아한다”며 한국인들은 다 그리 예쁘고 피부가 곱냐고 하기에 날 보라고 답해줬다.
낮의 팀푸 거리를 거닐면 족히 반 이상은 전통복 차림이다. 직장이나 학교 등에선 전통복이 필수다.
특히 행정기관이자 종교기관인 ‘종’에 갈 때는 키라와 고 위에 숄 형태인 라추도 걸쳐야 한다. 네마는 “키라를 입으면 우아해지는 느낌이 든다”며 “특히 긴 치마라 신발을 아무거나 신어도 되는 게 편하다” 고 했다. 오후 5시, 퇴근 러시아워가 끝난 뒤 밤의 팀푸는 옷을 갈아입는다. 명동 거리에 데려다놔도 어색하지 않을 멋쟁이들이 술집으로 향한다. 부탄 남자 킹가는 우스개처럼 말했다. “나는 오전 9 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부탄 사람인가 봐.” 전통복 입은 모습만 봤던 킹가가 가죽점퍼와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좀 외롭고 싶다 팀푸에선 물건보다 사람 만나기가 쉬웠다. 여섯 달 동안 전신거울을 못 샀다. 이 낯선 땅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이래저래 안면이 팝콘 터지듯 터지는 곳이다. 인구 8만 명 정도인 이 수도 주민들은 한두 다리 걸치면 다 아는 사이인가보다.
영혼의 창자를 꺼내 보이는 사이와 ‘밥 먹었냐?’ 따위의 인사 정도 하는 얕은 일상의 관계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외로움계의 고수인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하지만 일단 배가 불러야 반찬 투정 하는 거다. 외롭지 않으려면,인간과 접촉하는 일정 면적이 확보돼야 한다. 거기엔 동네 가게 주인, 옆집 애들과 그 개들도 포함된다.
팀푸에선 그 면적을 확보하는 게 거울 사는 것보다 쉽다. 집 앞 골목에 여덟 살짜리 동네 꼬마가 머리에 꽃을 꽂고 앉아 있다. “거기서 뭐 해?” “꽃하고 얘기해요.” “왜 꽃하고 놀아?” “친구가 없어요.” 순뻥이란 건 이튿날 밝혀졌다. 누가 우리 집 문을 두드리기에 열어봤더니 어제 꽃을 꽂고 있던 소녀다.
땟국이 흐르는 애들 다섯 명을 줄줄이 데려왔다. 주소 도 안 가르쳐줬는데……. 정신이 혼미했다. 어떤 애는 갑자기 자기 공책을 보여주며 몇 점 맞았는지 자랑하고, 다른 애는 만지지 말라는데도 태블릿PC 를 탐하고, 다른 애들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허리케인 애들은 저녁밥 먹을 때가 되자 다시 꽃소녀들로 돌아가 얌전히 흩어졌다. 그 다음 날 집에 돌아오니 현관문 밑으로 그림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팔다리로 보이는 선 네 개에 머리로 보이는 동그라미 하나다. 그 아래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안티
(이모, 고모, 또는 아줌마).’ 그 추상화는 나였다.
그렇게 오다가다 만난다. 한번은 길을 잃어 무작정 걷다가 한 손으로 연신 기도바퀴를 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났다. 신발은 슬리퍼였고 발톱은 새까맸다. 한 할아버지는 종카어로 연신 말을 걸더니 손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악수하니까 할아버지가 웃었다. 기겁했다. 이가 시뻘겋다. 부탄 사람들이 많이 씹는 ‘도마’ 빛깔이다. 이어 할머니들이 일렬로 걸어오기에 사진기를 들이대니까 맨 앞 할머니가 포즈를 잡고 서버려 연쇄 추돌이 일어났다. 맨 앞줄 할머니가 가까이 오라더니 내 손에 물컹한 걸 쥐어 준다. 오이, 바나나 조각인데 누가 양말 속에 넣고 백두대간 종주를 한 것 같은 몰골이다. 도저히 못먹겠다. 할머니가 가자마자 버렸다. 나중에 부탄 친구에게 물어보니 절에서 축복받은 공양물일 거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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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푸 토박이들은 11월께 ‘초쿠’라는 명절을 지낸다. 한국 추석 비슷한데 이웃들까지 싹 불러 하루 종일뭘 자꾸 먹이는 행사다. 탄딘이 초대한 그 잔치, 가기 싫었다. 부탄 음식 공포증 때문이다. 부탄 전통식 3층짜리 집에 들어서니 1층은 이미 이웃들에 점령당한 뒤였다. 애들만 최소 10명이다. 그 위층엔 가족들이 모였다. 3층에선 스님들이 하루 종일 불경을 읊어댔다. 부탄 치즈와 고추를 넣고 끓인 에마다치, 돼지고기 요리 팍샤 등이 차려졌다. 팍샤의 포인트는 고기가 아니라 비계다. 비계가 많을수록 손님을 제대로 대접한다고 여긴다. 제발 대충 대접해줬으면 좋겠는데, 비계가 실하다. 최대한 조금, 최대한 게걸스럽게 먹는 척하기가 내 목표다. 겨우 한 접시 끝내고 도망가려다 붙들렸다. 특별식이 남았단다.
단팥으로 만든 ‘뒴’인데 단팥만 들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마른 치즈가 한 움큼이다. 초쿠에 초대받은 이웃들은 아침, 점심, 저녁 다 그 집에서 끝장 본다. 초대했는데 안 가는 것도 실례다. 단팥만 골라 깨작거리다 도망가려니까 또 ‘이리 가면 아니 되오’ 하고 붙든다. 한국 소주와 비슷한 아라가 나왔다. 소주 맛이기만 하면 좋을 텐데 거기에 대체 왜 계란을 푼 걸까? 붙들려 있다 보니 탄딘의 사돈의 팔촌까지 아는 사이가 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안젤리는 부탄이라면 환장한다. 두 번이나 왔다. “나는 여기서 덜 외로운 것같아.” 아플 때 집주인이 챙겨준 밥, 가끔 지나가며 이야기 나누는 단골 기념품 가게 주인과 동네 사람들 때문이다. 어떤 얇은 막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란다.
사람뿐 아니라 길거리 개들과도 안면을 튼다. 팀푸살이 몇 달이 되자 저 절 앞에 가면 자동차 지나갈 때마다 혼자 뺑글뺑글 도는 검은 개가 있고, 저 골목 들어서면 누렁이가 샛길 앞에서 수금하듯 졸고 있다는 걸 훤히 알겠다. 개들도 나를 안다. 밤이 오면 어김없이 동네 개들이 짖어대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이제 대충 저건 브라우닌데, 저건 렉시 소린데, 이건 못 듣던 개 소리인데 하게 된다.
따지자면 서울 살 때는 인간과의 접촉 면적이 엄청 넓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인간’으로 느꼈는지는잘 모르겠다. 마트 아줌마를 계산기로, 화장품 가게 호객 알바생을 소음으로, 경비 아저씨는 문에 붙은 비밀번호로만 여겼던 것 같다. 모든 게 너무 컸고 너무 많고 너무 바빴다.
팀푸는 서울에 비하면 동네 한 귀퉁이만 할까. 그런데 90년대 후반부터 부탄이 매년 7, 8퍼센트씩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도시와 시골의 격차는 점점 벌어진다. 청년들은 대개 ‘팀푸로, 팀푸로’다. 남쪽 푼촐링에서 팀푸로 와 직장에 다니는 체왕은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단다.
부탄의 국민총행복 지수는 생활 수준, 교육, 건강, 문화적 다양성, 공동체 활력, 심리적 웰빙, 시간 사용, 생태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등 아홉 영역을 측정한다. 그 결과에 따라 정부는 “아직 행복하지 않은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 정책을 수정한다. 2015년 국민총행복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부탄 사람들의 전체적인 행복 지수는 5년 전 0.743에서 0.756으로 늘었다. 빠른 성장에 물질적 만족도가 높아진 게 한몫했다. 그런데 커뮤니티 소속감은 떨어졌다. “소속감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는 72.48에서 65.75퍼센트로, “이웃을 믿는다”는 응답은 85.3에 서 61.6퍼센트로 내려앉았다. 도시의 체온이 떨어지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추워질 텐데, 그런 한기는 비싼 거위털 파카로도 막을 수 없다.
에필로그
왜냐고? 그때 내 심장이 뛰었으니까 “네 눈에 눈물이 고일 때, 주위를 둘러봐도 친구가 없을 때, 험한 강 위 다리처럼, 내가 다리가 돼줄 게.” 2018년 11월, 버스가 자유로로 진입할 즈음 라디오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나왔다. 창밖으로 후미등이 늘어섰다. 혼자였다. 2009년 6월, 산티아고 순례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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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서도 이 노래가 흘렀다. 땀에 절어 들어가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때였다. 순례자면 공짜로 떼 지어 잘 수 있던 그 방, 침낭 속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폴더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널 좋아한다고 내가 말했던가?” 서른네 살이 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문자로 보내고 난 직후였다. 길에서 만난 독일인에게, 알지도 못하면서.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된 2009년은 허리 통증으로 시작됐다. 사실 아픈 건 허리가 아니었다. 자괴감, 열등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회사 근처 원룸으로 퇴근하면 새벽 3, 4시까지 멍하게 텔레비전을 봤다.
올림픽 마라톤 완주까지 넋 놓고 봤다. 신경정신과에 갔더니 진단서를 끊어줬다. “1년 하실래요? 6개월 하실래요?” 그렇게 휴직을 얻었다. 우연히 서점에서 본 산티아고 책을 들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왕복 비행기표처럼 삶도 내가 예상하고 계획할 수 있다고 오만을 부렸던 거같다. 9년에 걸친 여행의 시작이었다.
가진 거라곤 8킬로그램 배낭과 물집, 할 일이라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것밖에 없던 그 순례길에서 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중요한 건 지금, 여기뿐이었다. 17킬로미터 밀밭만 펼쳐진 길을 터덜터덜 걷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어떤 존재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사랑받는 느낌이 들었다. 물집 잡힌 발로 걷고, 숨 쉬고, 땀에 전 팔뚝 위로 바람이 스치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면 누군가 지나가다 말을 걸어주는 그런 것들이 증거였다. 거기엔 같이 걷지만 다시 만날지 몰라 되레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진 것도, 고통도 비슷했다. 평등하고 느슨한, 움직이는 공동 체다. 이스라엘 여자 아디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람이 완벽해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나봐?”
그날 밤,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 심장이 뛰었으니까.
마흔네 살 독일인은 답을 보냈다. 그 밤에 온 문자를 따라 독일, 부탄까지 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3년 뒤, 알지도 못했던 그 타인, 앞으로도 알 수 없을 타인과 결혼했다. 독일 가족들은 따뜻했다.
세입자를 함부로 쫓아내지 못하도록 법으로 보호하고 있기에 한 마을에 오래 함께 산 이웃들이 있었다.
한 빌라, 아홉 가구 가운데 결혼으로 맺어진 ‘정상가족’은 두 가구뿐이었는데 이웃이 가족보다 더 붙어 다녔다. 외로웠냐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역이었다. 이곳에는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은, 경계에 선 듯한 아슬아슬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어느 부활절, 식탁에는 삶은 계란이며, 토끼 모양 초콜릿 따위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4월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왔다. 독일 가족이 다 모였다. 내가 잡채를 만들었는데 면발이 우동이 됐다. 항상 친절한 시동생이 물었다. “이 면발은 뭐로 만든 거야?” 핸드폰에서 찾아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동생이 말했다. “독일에서는 함께 식사할 때 그렇게 마음대로 자리 뜨는 거 아니야.” 나는 다시 앉았다.
이 사소한 기억에는 여전히 옅은 모멸감이 배어 있다. 보호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적응은 외국인인 내 몫이었다. 내가 선 자리가 불안해서, 내가 누구인지 잡히지 않아 쉽게 상처받 았다. 그 모든 호의, 재벌도 한국에선 못 누리겠다 싶은 공원과 라인강을 누리면서도 시시때때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서 있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도 함께 다리 후들거리며 기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경계에 선 외국인 29명. 독일 방송사 도이치벨레와 본 대학이 함께 마련한 대학원 과정은 학구열 따위는 상관없이 국적으로 학생을 뽑았던 것같다. 파키스탄, 이란, 요르단, 인도네시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24개 나라에서 모였다. 지독히 오해하고 미워하고, 함께 먹고, 웃었다. 우리는 달랐고, 또 비슷했다. 이리저리 눈치 보기 바쁜 내게 이란 친구 쇼라는 말했다. “네 기준에만 맞으면 되지,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기준에 맞춰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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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독일어가 좀 들리나 할 즈음에 두 번째 이방인 생활이 시작됐다. 부탄항공 드루크에어 창문으로 히말라야 산맥들이 보였다. 아르바이트 하나 하려 해도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하는 독일에서 보험 따위 들지 않고 운전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부탄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곳으로 남편이 발령 받자, 나도 당연하다는 듯 짐을 쌌다.
말만 안 하면 내가 부탄 사람인줄 아니 독일보다 마음의 이물감은 덜 했다. 초코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려면 팀푸 시내를 한참 뒤져야 하니, ‘기름기’ 밴 몸이 느끼는 이물감은 독일에서보다 더했다. 국민 총생산보다는 국민총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나라, 1인당 국민총생산이 한국의 10분의 1수준이 지만, 의료와 교육이 공짜인 나라다. 개에게 물리면 멋쩍게 웃으며 “개는 행복했겠지 뭐”라고 말하는 청년, 아는 사람이건 아니건 절에서 축복받은 음식을 나눠 주는 할머니, 파리 한 마리도 살생하지 않으려 하지만 남이 죽인 고기라면 환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병원은 무료지만 그 병원을 찾기 힘들고, 학교도 공짜지만 학교 건물은 무너져가는 곳, 과거와 미래, 변화와 안주가 섞여 들어간 공간이었다. 그곳을 잠깐 방문한 외국인들은 부탄이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 남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아이패드를 열망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울퉁불퉁 프리스타일 포장길을 시속 30킬로미터로 달리는 포르셰도 등장했다.
2016년 4월, 미세먼지가 숨통을 틀어막는 한국에 나는 다시 불시착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온 딸에게 주려고 낙지를 샀다. 어머니가 낙지를 손질하는 사이,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희뿌연 거리를 걷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머니 신발을 신고 있었다. 2009년 산티아고 순례길, 그 밤에 나눈 문자 메시지에서 시작했던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사랑과 시련은 느닷없이 왔다 갔다. 삶의 굴곡은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가 쓸수 있다. 남자 하나 믿고 여기저기 떠돌다 개털 돼 돌아온 실패기로 쓸지, 내 마음에 솔직했고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로 쓸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험보다 태도와 해석인지 모른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썼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죽음의 수용소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독일, 부탄까지 걸으며 나는 무엇이 달라졌나. 아디, 쇼라, 임란, 베른트, 크리스 텔…… 이국의 이름들, 그 완벽한 타인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지 그럼에도 이해하기를 멈출 수 없음을 가르쳐준 스승들이었다. 그들을 만나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으나 보지 못했던 인종주의, 의존하고 싶은 마음, 삶에서 회피하도록 떠밀던 불안 따위가 고스란히 표면으로 올라왔다. 내 ‘꼬라지’가 그랬다. 그 꼬라지의 내가 한 어른으로 서지 못한다면, 타인을 사랑하 다는 건 거짓말이다. “라이크 어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그 ‘다리’는 타인이 아니라 내 두 다리여야 했다. 밀밭, 라인강, 히말라야, 따뜻했던 순간들은 지나갔다.
서울 자유로 한 버스 안에서 나는 혼자였다. 그렇지만, 그 순간들은 여전히 거기 있고 또 쌓인다. 내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내가 건져 올린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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