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세기의 재판 이야기
박원순
서문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극적인 사건들이 법정을 무대를 펼쳐진다. 수많
은 비극과 희극이 법정에서 탄생되었으며,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위, 무고와 희생, 억압과
저항이 당대 법정에서 불꽃튀는 각축을 벌였다. 이보다 더 진땀나고 더 흥미진진한 드라
마가 또 있을까? 게다가 이 드라마는 가상의 연극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에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수많은 주인공들은 희생양이 되어 때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역사적인 법정 드라마는 곧잘 또 다른 역전 드라마로 인하여 새로운 평
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당대의 법정에서 죄인으로 낙인씩인 채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자들이 역사의 법정에서는 복권되기 일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류의 몽매와 무지, 악의와
복수심이 어떠한 죄악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법정에 세워 모욕하고 처형했던 자들이 오히려 역사 속에 오명을 남
겼고 그 대신 희생자들은 영웅이 되어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시대
모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법정이라는 장소와 재판이라는 절차를 통하여 수난 당함으로써
성인이 되고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정과 기소 자, 재판관, 그리고 처형되는
오히려 이들을 순교자로 만드는 무대이자 소도구였다.
소크라테스, 잔다르크, 중세의 마녀들, 토마스 모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드레퓌스, D. H.
로렌스, 페탱, 로젠버그... 역사의 희생자이자 영웅들의 면면이다. 사람들은 이 영웅들의
일생은 개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이들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재판을 받았는지는 잘 모른
다. 그러나 이들의 위대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고난의 정점인 재판과 처형
과정에서이다. 만약 이들이 법정에서 진실의 목소리를 낮추어 불의와 허위, 권력과 타협하
여 목숨을 구걸하였다면 그 대가로 목숨은 구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오늘날까지 기억하는
그 명예와 이름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신념을 지킴으로써 죽음
을 자초한 이들이 법정에 남긴 발자취는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오늘 우리가 이들의 이름
을 기억하고 그 수난을 추억하는 것은 바로 그 불굴의 용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무명의 위인들이 실제로 법정에서 용감하
게 싸우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그런 위대한 인간들의 표본일 뿐이
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웅이라 칭송 받아 마땅한 이들의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안
을 경우가 많다. 특히 고대로 올라갈수록 더욱 그렇다. 그 희소한 기록들의 마디마디를 꿰
어 얼마만큼의 이들의 진정한 삶과 그 삶의 가치에 다다를 수 있을까? 역사의 실루엣에 기
대어 삶의 궤적을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1991년에서 93년까지 영국과 미국에 머물면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한 재판 기록
과 연구서들을 접하게 되었고 자료에 빠져들수록 벅차 오르는 감동을 혼자 간직할 수 없었
다. 필자는 여러 도서관을 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언젠가는 책으로 정리해 보리라는 만용을
품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그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도 아니며 전기학자
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법정에서, 또 처형 과정에서 보여준 인간드라마에 심취한 나머지
아를 정리해 보려 한 것뿐이다. 더구나 모은 자료들마저 제대로 섭렵할 여유가 충분히 없
었다.
각 인물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필
자의 역량과 지식의 부족 탓이다.
지난 1999년 참여연대가 운영하는 '참여시민아카데미'에서 '세기의 재판'이라는 강좌를
열어 재판을 통해 본 인물 열전을 다루었던 적이 있다. 그때 여러 출판사에서 강좌의 내
용을 책으로 묶어 보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출판 제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한겨레신문사 덕에 애초의 만용이 결실을 맺
게 된 것이다. 더불어 내친 김에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인물들과 한국 근, 현대 재판
사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 인물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다시 속편으로 써 볼 생각이다.
1999년 10월
안국동에서 박원순
악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아테네법정으로 가는 타임머신
이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순교자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아테네로 떠난다. 끝없는 토론
속에 지혜를 찾던 노철학자,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 법정에 서게 된 현인을 만나러 간다. 마
치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그리하여 죽음을 오히려 철학의 완성으로 이끌어 내려한 자유인의
열변과 냉정한 논리를 들으러 아테네의 법정으로 간다. 탈출의 권고조차 물리치고 신념
을 위해 조용히 독배를 마시고 죽어간 소크라테스가 그곳에 있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당시 일흔 살이었다. 건장했던 청년시절 그는 여러 전쟁
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어느덧 머리는 은발이 되었고
그나마 대머리였으며 허리는 구부정 했다. 튀어나온 눈, 두툼한 입술, 뭉툭한 코, 그의 얼굴
은 별로 볼품이 없었다. 희랍의 고전적 미소년이나 청년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희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발을 넓게 벌린 채 걸으며, 눈은 툭 불거
져 나왔으며' 늘 맨발로 걷는다'며 만화 주인공처럼 묘사했다. 제자인 플라톤이나 크세노
폰마저 그를 희랍신화에 나오는 반인 반수의 '사타로스'나 가오리에 비유했다고 하니 알
만한 일이다. 그의 차림새는 누구나 친구나 적, 모두에게 우스갯거리였다. 맨발로 걸어다니
는 모습이나 늘 같은 외투를 입고 다니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재정 상태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물론 젊은 시절에는 꽤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아테네의 경기가 호황이었고 기원전 5세기때 한창 건
축 붐이 일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아버지는 수지맞는 장인이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
들은 아버지의 기술과 가업을 이어받는 게 당시의 풍속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제법 부자
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돈버는 일이나 가업을 이어받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
었다. 그리하여 노년은 몹시 궁핍했던 게 틀림없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서도 소크
라테스의 가난이 언급되었다. '구름'이 상연된 기원전 423년 이후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
고 처형되었던 기원전 399년까지 적어도 20~30년까지 간 그가 지독하게 가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아테네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태어난 기원전 470년,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는 희랍의 귀족정치인 참주정에
서 민주정으로 바뀌는 시기였으며, 3차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도시국
가들의 맹주가 되었다. 이후 이른바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막강한 해군력과 왕성한 무
역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아테네는 최고의 번영기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도시 아테네
는 파르테논신전을 지어 신들에게 바쳤고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튼튼한 성벽들을 세웠다.
당시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는 비극을 서술하고 있었고, 헤로도토스와 투기디테스는 역사
를 쓰고 있었으며, 프라타고라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
도 역시 철학자로서 젊은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심지어 다른 도시국가들의 지성인들도 자석
에 이끌리듯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인류역사상 이처럼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한 도시에 모여들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 문명의 광채도 스파르타와 일전을 벌인 펠로폰네스 전쟁으로 시들기 시작했
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서기 5년 전인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마침내 스파르타에게 항복
하였고 아테네에는 예속 정부가 들어섰다. 패전의 음울한 기운이 아테네의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패전의 상처를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해졌다. 새로운 집권자 아니토스의 반대파인
알카비아데스, 크리티아수를 제자로 두었던 소크라테스, 평소 권력자, 희곡작가, 시인 등
아테네의 실력자 그룹이나 지식인 노릇 깨나 하는 사람들을 여지없이 깨부수고 잇던 소크
라테스, 그가 최고의 적임자였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법정에 기소되었고 재
판이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4대 복음서
위대한 사람들의 일생이 그러하듯 소크라테스 역시 손수 남긴 기록은 하나도 없다. 평생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으며 어떤 이론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형태로
든 포착되지 않은 나날'을 살았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돌고 아무 곳에서나 강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살아 있을 때나 죽고 난 후에나 그는 어둠 속에 가려진 신비한 인물로 남
았다. 우리를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의 인생과 그의 재판과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해주는 길
은 많지 않다.
다행히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의 윤곽을 더듬게 해주는 몇 편의 글이 있다. 아이스키네스
의 '대화편' 가운데 일부가 남아 소크라테스의 성격을 서술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아리
스토파네스의 '구름'은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희극이다. 소크라테스 생존시 씌
어진 유일한 작품으로 기원전 423년에 상연되었다. 이 희극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천상
천하의 일을 탐구하는 자연철학자'이며 '약한 이론을 강한 이론으로 만드는 소피스트'이
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별로 탐탁한 묘사가 아니었다.
크세노폰도 소크라테스에 대해 여러 저작을 남겼다. 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추억' '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가 처형된 지 5년이 지나 씌어졌다.
그러나 2398년 전(기원전 399년+기원 후 1999년) 소크라테스 모습을 우리에게 가장 생
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플라톤의 저작이다. 소크라테스가 모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플라톤의 네 가지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향연'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과 죽음을 가장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2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설치된 법정에서 방청하고 있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변명' APOLOGY
재판의 전 과정을 방청한 스물 여덟 살의 젊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처형 얼마 후 그를
변호하는 연설의 일부를 정리하여 발표한 작품. 이 연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
영혼을 소중히 하고 무지의 지각 위에 서서 지혜를 구하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살피면서 사는 것에 철학적 사상의 근본이 있다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크리톤' CRITON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될 때까지 1개월 정도의 수감생활을 그리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
년시절 친구 크리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탈출을 권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중
요한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었으므로 탈출이 옳지 않다고 크리톤을
설득한다. 그가 죽음으로 설득하고자 했던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향연' SYMPOSIUM
아테네의 비극작가 아가톤의 작품이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아가톤의 집에서 향연이 벌어진다. 이 자리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알카비아데스 등
이 각자 '에로스'를 찬미하는 역설을 한다.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육체적인
사랑으로부터 정신적인 사랑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과 아름다운 본질을 탐구해 가는 깊은
철학적 진실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플라톤의 문학이 일궈놓은 불
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파이돈' PAEDON
기원전 399년, 드디어 사형판결을 받은 지 한달 후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소크라테스
는 죽었다. 이 책은 그의 죽음을 목격한 소크라테스의 젊은 친구 파이돈이 그 후 펠로폰네
소스 반도의 플레이우스라는 작은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있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
크라테스의 최후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철학적 담론을 끝내고 슬퍼하
는 친구들을 질책하며 침착하게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고금의 문학작품 중
가장 감동적인 광경의 하나로 우리의 가슴속에 남는다.
플라톤의 이 책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상세해서 오히려 의심을 사고 있다. 더구나 크
세노폰의 저작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플라톤과 다르고 일부 내용은 서로 상반되기까지 해서
어느 게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존경은 단순한 사제지간의 그
것을 넘어선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그 분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사려 깊고 올
바른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어 그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 살게 된 것을 운명
의 최고의 선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보다 마흔 살이나 어린 플라톤은
20세기의 가장 발랄한 청년기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감화를 받았고 마침내 철학으로 전향하
여 소크라테스의 참모습을 추구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생의 마지막을 비극적이지만 감동적
으로 장식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플라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그의 책 곳곳에 넘치고 있다. 그러니 플라톤의 눈과 인식과 철학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진 빚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진 빚만큼 크지는 않
다. 물론 소크라테스를 '서양 문명의 세속적 성자(secular saint)'의 확고한 자리에 앉힌 것
은 플라톤의 문학적 천재성이다. 그리고 플라톤을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소크라테스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을 드라마로 전환시킨 유일한 철학자이다. 그 수수께끼 같
은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지 않았던들 플라톤은 매 세대마다 그
토록 광범한 독자들을 끌어들인 유일한 철학자가 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또는 칸트의 철학을 문학처럼 읽지는 않는다. 고대의
전기작가 올림피도로스에 따르면 플라톤은 당초 비극작가 또는 희극작가가 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연극은 아테네의 문학천재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분야였다. 그런 그가 소크라테
스를 만나면서 극작가의 꿈을 접고 철학으로 전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의 목표를
우회한 것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다룬 4대 저작은 현재까지 위대한 비극작
품으로 살아 있다. '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마지막 이별 장면은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재판관에게 던진 마지막 말은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나 '햄릿'
의 주인공처럼 비극적 영웅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재판의 소도구
멜레토스의 고발
재판은 멜레토스의 고발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기소업무를 전담하는 공공검사가 따로
없었고 개인이 고발할 권한을 갖소 있었다. 멜레토스의 고발은 아콘 왕이 주재하는 예비절
차를 거쳐 공개재판에 회부되었다. 만약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가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예비절차에서 기각될 수 있었다. 재판은 고발장을 배심원과 방청객 앞에서 읽는 것에서 시
작되었고 이어서 고발인이 그 사건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시간이 배당되었다. 피고인의
방어와 변론을 위해서도 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그 다음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인을
불러 진실을 가린다. 최종적으로 유죄 여부를 가리는 것은 배심원들의 몫이다.
배심원들이 유죄를 선언하면 다시 심리가 진행되어 고발자는 적적한 형벌을 주장한다. 피
고인은 이에 맞서 자신에게 적절한 형벌을 제안할 기회를 갖는다. 배심원은 고발자와 피고
인 쌍방이 제안한 형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을 절충한 제3의 형벌을 선고할
수는 없다. 플라톤의 '변명'은 이 두 번의 재판절차, 즉 사실심리와 양형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배심원
배심원은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다양하게 소집되었다. 소크라테
스의 재판에는 500명의 배심원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배심원의
숫자가 501명이었는데 아테네인들에게는 몹시 기분 나쁜 숫자였다고 주장한다. 배심원들은
일반시민들 가운데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한해에 배심원들로 일할 사람들로 6000명의 후보
가 선택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정 재판을 위해 일부 시민들이 할당되었다. 배심원으로 일
한 사람은 매일 3오볼로이를 지급 받았다. 육체적으로 건장한 남자들은 다른 일을 할 경
우 더 많은 일당을 벌 수 있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런 정도의 봉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노인들만 지원하여 배심원 역할은 노인
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수단쯤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배심원에게 돈을 지급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도 대거 참여시킬 수 있었지만 다양한 세대를 참여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고발자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명의 고발자를 지목하였다.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이었
다. 멜레토스가 공식적인 고발자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멜레토스의 고발을 후원하였다.
유죄라고 판단한 배심원이 전체의 5분의 1 이하면 오히려 고발자들이 피고인을 농락한 죄
로 벌금형을 받게 되었다. 무고와 고발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이다.
대부분 고발자의 고발동기를 이해하면 사건의 진상을 훨씬 잘 파악할 수 있으나 아니토
스와 리콘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고발동기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그 해에 안도키데스라는 사람을 고발한 멜레토스의
연설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멜레토스는 당시 아테네사회에 활발하게 발언권을 행사하던
사람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소크라테스 재판에서 실질적인 고발자는 아
니토스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최고의 정계 실력자였고 소피스트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가
졌던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일반적으로 소피스트의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발될 소지는 충분하였다. 리콘은 세 사람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소크라테스
는 그가 웅변가들을 대표하여 자신을 고발했다고 말했다.
독사에 물린 고통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동시에 국가가 인정
하는 신을 대신 새로운 신을 섬겼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 라엘티우스에 따르면 아테네
의 국가기록보존소 키벨레 신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멜레토스 피토스 아들 멜레토스가 알로페체의 소프로니스코스 아들인 소크라테스를 상대
로 하여 선서한 다음 작성한 고발장과 진술서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한
신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소개한 죄를 지었다. 또한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요구되는 형벌은 사형이다.
이 고발 사실은 크세노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플라톤, 크세노폰, 디오게네스의
저작에서 일치하는 소크라테스의 범법 사실은 국가가 승인하는 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섬겼으며 청년들을 타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아테네 법전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
에 소크라테스가 범한 범죄의 근거가 되는 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먼저 국
가가 승인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혐의를 처벌할 근거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보다 수십
년 앞서 재판을 받은 저 유명한 자연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처벌 근거로 만들어진 '디오페
이터스 법률'이 있었다. 기상학적 또는 천문학적 현상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체의
기도를 무신론으로 불법화하려는 취지에서 제정된 이 법이 소크라테스의 처벌에 이용되었
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유클레이더스 집정관의 일괄사면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법령은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
는 당시 불경죄를 범한 것으로 이해된다.
새로운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과거 섬기던 신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신을 버렸
다는 것은 곧바로 새로운 신을 받아들였다는 것과 필연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고발사실은 별도의 혐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범죄혐의는 과연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을
정말 창조했는지, 아니면 전혀 신앙적인 실체가 없는 어떤 이론을 도입한 것인지 애매모호
하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변명'에서 '다이모니언'이라는 것을 소개하였다. 어릴
때부터 소크라테스에게는 어떤 행동을 하도록 만들거나 삼가도록 조언하거나 경고하는 소
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영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러나 이것이 새로운 신을 창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이서의 명령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혐의는 오히려 고발자들의 전략적 주장에 불과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아리스
토파네스의 '구름'에서처럼 오랫동안 자연철학자로 지목되었다는 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판별력이 없는 배심원들이 쉽게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힘이 곧 과거의 신을 대
체하는 것이라고 확신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고발자들이 이용한 것이다.
아테네 법에서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범죄도 구성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발자들은 이 죄목을 앞의 두 죄목과 연결하여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자
신의 불경한 신념을 가르쳐 타락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온통 사로잡았던 사실은 알카비아데스가 '독사에 물린 고통'으로 비유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자아의식과 지혜의 탐구
정신에 경도 되어 '독사의 교상'처럼 쉽게 치유되지 못하고 또한 이로부터 도망갈 수 없
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아무튼 아테네 청년 타락 혐의에 대한 법적 문제점을 떠나
그는 이미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주상모략쟈들에 의해 나쁜 평판을 들어왔기 때문에
배심원들에 제대로 해면하지 않으면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크라테스가 자
기 '변명'의 상당 부분을 이 해명에 바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델포이신전 무녀의 신탁
소크라테스는 먼저 그림자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을 향해 험담
과 비난을 퍼부어 왔던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항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소크라테스는
지자가 있는데 그는 하늘의 일을 사색하고 땅 속의 모든 일을 탐구하녀 약한 이론을 강한
이론으로 만드는 묘한 지혜를 갖고 있는 녀석'이라고 중상해 왔다. 이들이 만들어낸 허위사
실로 말미암아 소크라테스를 재판하는 배심원인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적들은 어차피 어둠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
반대 심문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그에 대하여 자신을 변명하는 것은 바로 그림자와 싸우
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은 친구 카이레폰의 쓸데없는 짓 때문이었
다. 이 친구는 델포이신전에 가서 그곳 무녀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그녀는 "세상에서 소크
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필연적으로 스
스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아테네의 모든 지식인들의 결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
다. 소크라테스는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왜 신은 그런 수수께끼를 던졌을까? 오랫동안 곰곰
이 생각한 결과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신에게 찾아
가 그 신탁이 옳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내노
라 하는 아테네와 이웃국가들의 정치인, 시인, 장인, 변론가 등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과연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시험해 보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헤라클레스의
노역'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었이었던가.
신의 명령에 의해 탐구를 계속한 결과 가장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며 반면에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이 오히려 지혜롭고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
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만이 지자이십니다. 그리고 신이 그런 신탁을 내리신 것은 인간
의 지혜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려 한 것입니다. 신은 여기에 있는 이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예로 나의 이름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즉 신은 "인
간들이여,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혜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려 한 것입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라는 자신의 철학적 사고의 형성과정과 그 실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철학의 근본이자 시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철학
과 학문, 교육의 시작이 바로 그런 의문에서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소크라
테스가 다른 철학자와 명망가들에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죽음을 자초한 사나이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신의 명령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우리 나라 사람이건 다
른 나라 사람이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를 찾아가 그의 지혜를 조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지지가 아닌 경우에는 나는 신을 도와 그에게 지자가 아님을 증
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느라 나라일이나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어 몹
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그것도 신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정말로 소크라테스는 한심한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인지 아
닌지 조사를 하고 왜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닌지 증명까지 해주었으니 그에게 면박 당한 사람
들이 그를 좋게 볼 리 만무하였다. 더구나 집안일조차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다녔다니
아테네에서 힘깨나 쓰고, 아는 체하는 사람 치고 소크라테스한테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짓궂은 물음으로 사람들을 골탕먹이곤 하던 소크라테
스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인간의 용모를 한 숲의 악령 사티로스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혼자 '지혜조사업'을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는지 그는 '동업자'들도 많이 구했
다.
게다가 몹시 한가로운 청년들, 즉 몹시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은 스스로 나를 따라다니
며 내가 사람들에게 캐묻고 따지는 것을 흥미롭게 경청하고 때로는 그들도 나를 흉내내어
사람들에게 캐묻고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뻔하였다. '그들(청년들)에 취조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나에
게 화를 내며 소크라테스는 정말 불한당이야.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단 말이야라고 말하
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가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니토스와 리콘이
나를 공격한 것도 모두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멜레토스는 시인을 대표하
여, 아니토스는 장인과 시인을 대표하여, 리콘은 변론가들을 대표하여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와 같이 아테네의 유력 인물들이 모두 소크라테스를 죽이고 싶
어했다는 사실은 그의 기이한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당연해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변론의 태도도 가관이었다. 그는 '재판관 여러분'이라고 하는
관례적인 호칭을 애써 피한 채 계속해서 '아테네 시민여러분'을 외쳐됐다. 그리고는 자기에
게 무죄 투표를 한 사람에게만 그 호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정작 자신의 유무 죄를 선택하
고 형량을 결정할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이
변론의 상대가 법정 안이 아닌 법정 밖이며, 동시대인 또는 후세의 사람들이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는 지난 5, 6공 시대 우리의 양심수들이 법정 안의
판사를 향해서가 아니라 법정 밖의 국민들, 더 나아가 역사를 향해 변론했던 일을 상기시킨
다.
변론의 태도만을 보면 그는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사람 같았
다. 만약 그가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당연히 변론의 톤을 낮추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오
히려 재판관과 배심원들의 화를 돋우고 분노를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의 나처럼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고 나에게 화를 내시
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보다 훨씬 사소한 소송사건으로 싸울 때에도 눈
물을 줄줄 흘리며 가능한 많은 동정을 얻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고 탄원했는데 나는 어쩌면 사형판결을 받게 될지 모르는데도 그런 짓을 전혀 하려
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런 태도 때문에 불쾌하고 화가 나서 유죄 쪽에 표를 던
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소원대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유죄판결을 받고 말았다. 고발자인 멜레
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고, 소크라테스는 당시 희랍의
법률에 따라 구류, 벌금, 추방, 침묵강요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줄 것을 배심원과 재판관
에게 요청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영미법에서 기소전인부절 차에서 일부를 시인하면
적은 형벌을 제안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어느 것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단지 벌금 30므나만 물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것은 형편없이 적은
액수였다. 이것도 저들을 조롱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사형이라는 형벌에 대해 조금이라도
회피할 생각이 있었다면 좀 더 중한 형벌, 좀더 많은 벌금을 제안했어야 마땅했다.
최종 선고결과는 360 대 140으로 사형시키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무죄라고 생각했
던 사람조차 일부는 사형 쪽으로 돌아선 걸 보면 최후진술과정의 변론의 오히려 역효과를
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변론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적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셈
이다. 죽기를 소원했던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소원을 성취하였다. 소크라테스
는 마지막에는 저 세상으로 가서 "저 트로이로 대군을 이끌고 갔던 아가멤논이나 오디세우
스라든가 시지프라든가 그 밖의 무수한 남녀들을 만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조사
하고 살피는 게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다. 그는 저 세상에 가서도 '지혜조사사업'을 하리
라고 밝혔던 것이다.
크리톤, 나를 내버려두게
소크라테스는 결국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갇혔다. 델로스 섬의 아폴로 신에게 보낸 제
사가 돌아올 때까지 사형집행은 연기되었다. 그 제사가 돌아올 무렵 어린 시절 친구 크리
톤의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출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권유를 단호
히 거부하며 그 이유를 차근차근 밝혔다. 두 사람의 내세운 주장의 요지를 적어본다.
크리톤 :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친구 소크라테스, 자네를 잃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세,
내가 돈을 쓰면 친구의 목숨을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친구에게 무관심한 몹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사람들은 친구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나에게 손가락질할 게 틀림없네.
소크라테스 : 어찌하여 우리다 대다수 사람들의 견해에 얽매여야 하는가. 우리가 가장 관
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일세.
크리톤 : 탈출을 돕겠다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은 돈을 요구하지 않네. 간수들도 간단히
매수할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데도 구태여 목숨
을 버리려는 건 적들이 바라는 일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걸 깨달아야 하네.
소크라테스 : 우리는 단순히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게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네. 우리가 평생토록 진지한 논의를 통해 동의했던 그 모든 것들을.
이 나이의 우리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며칠 동안에 내동댕이쳐 버려야겠는가? 더구나 지
금 우리가 당국의 승낙을 받지 않고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겠나? 그것도 절대 해를 끼쳐서는 안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지 않겠나?
크리톤 : 일단 자식을 낳으면 끝까지 기르고 가르치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자네는 그 책
임을 져버리고 있네.
소크라테스 : 자네가 진정한 친구라면 내가 어디를 가건 간에 내 아이들을 돌봐줄 걸세.
자식이나 목숨이나 또는 그 밖의 어느 것도 정의보다 소중히 여겨서는 안되네. 그래야만
저 세상에 가서도 그곳의 지배자들 앞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죽기를 소망한 몸이었다. 그는 친한 친구인 크리톤이 온갖 이유를 들
어 간절하게 탈출을 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사실 그가 탈출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그의
철학과 신념과 인격은 완전히 끝나는 일이었다. 고발사실을 모두 시인하는 셈이 되고 그것
이야말로 고발자들이 원하는 일이었다.
도망친 그를 향하여 고발자와 아테네 시민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열한 작자이며 조국을 반역
한 자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일흔 살이 넘은 그의 목숨을 잠시 연장할 수야 있었겠지만
그의 모든 철학적 명성을 하루아침에 추락시킬 일이었다. 도망자 소크라테스, 그것은 상상
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도주가 실제 이루어졌다면, 그는 인류의 선지자요, 지혜의 탐
구자요,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기록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을 터이다. 그
는 잠시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
했다. "크리톤, 신의 뜻에 따르고, 신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도록 나를 내버려두게."
소크라테스의 죽음
"크리톤, 이제 그 사람의 말에 따라야지, 약이 모두 갈아졌으면 어서 가져오라고 하게.
아직 갈아지지 않았더면 어서 갈라고 하게." 크리톤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오, 소크라테스.
해는 아직 산 위에서 빛나고 있네. 남들은 독약을 마시라고 통고를 받고도 음식을 먹고 마
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참동안 지내다가 아주 늦게서야 독약을 마시네. 서두르지 말게.
시간은 아직 있네." "크리톤, 자네가 말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일세. 그
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네. 삶에 매달리고 이미 비워진 잔을 애석해하
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네. 그러니 내가 말한 대로 해
주게." ...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아주 태연하게 즐거운 얼굴로 그 약을
마셨습니다. ... 그의 배 부분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소크라테스는 얼굴에 엎었던 것을 벗
기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최후의 말이었습니다.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
스에게 내가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네. 기억해 두었다고 꼭 갚아주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가장 완벽한 죽음, 가장 철학적인 죽음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죽었다. 흐느끼는 제자와 친구의 슬픔을 달래주며, 누구를 저주하는
말도 없이, 그렇게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그는 죽음을 오래 연습한 사람이었다. "
참으로 철학에 심취한 사람은 평생토록 오로지 죽음만을 추구하며 갈망해 온 사람이 어찌
하여 그때가 왔을 때 그가 항상 추구하고 원했던 것을 마다하겠는가." 그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 친지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그는 연습해 왔던 것을 실전에서
도 그대로 실행했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분의 말씀이나 몸가짐이
아주 행복해 보였고 참으로 두려움 없이 고귀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음'을 증언하였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추구한 것은 선과 덕이었다. 그는 사형선고 직후에 단언하였다. "어려
운 것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악에게 붙잡히지 않는 것은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악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기 때
문"이라고. "지금 나는 늙고 발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그 느린 것(죽음)에 붙잡혔지만 나를
고소한 사람들은 영리하고 발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그 빠른 것(악)에 붙잡혔다."고. 그래
서 독백처럼,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각기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그러나 어느 쪽이 좋은지는 신만이 알고 계십니다."
아쉬운 것은 너무도 평안하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마지막 운명
의 순간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안타깝게 절규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예수
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고통과 불평
과 절규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오히려 흠집을 낼 정도였다. 그래서 그를 일러 '세
속적 성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처음 소크라테스의 조상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친구이자
늙고 추한 신 실레노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탁월한 영혼의 소유자로 새
롭게 만들어지다가 언젠가부터 소크라테스는 철인의 품위가 풍기는 넓은 이마, 귀 뒤로 흘
러내리는 아름다움 머리털,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지는 탐스러움 턱수염으로 치장되었다. 얼
굴만 성자로 묘사된 게 아니었다. 인류 최고의 인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그를 성자라고
공식적으로 불렀다. 근세 이후 그는 모든 '근대적 계몽과 철학의 영도자'로, '윤리, 도덕
적 자유의 사도'로, '서구 형이상학의 아버지'로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교사'로 숭앙받았
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이 옳았음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악법도 법인가
소크라테스는 인류에게 빛과 어둠을 함께 주었다. 그 어둠이란 바로 독재자들에게 힘이
된 저 유명한 명구-'악법도 법'이라는 명제였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는 이 말 때문에 일
단 법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수많은 독재자들의 악행이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부당하게 신을 모독하고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국외탈출을 권유받았으나 비록 악법이라 해도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는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독약을 마셨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1986년도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1987년도
중학교 '도덕1'에서도 비슷한 글이 실려 있다. '법이나 규칙 중에는 불합리한 것이 있는데
그래도 법은 법이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를 거쳐 고치지 않는 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
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악법도
법'이라는 법언은 모든 법률가의 금과옥조가 되었고 모든 시민의 기본의무가 되었다. 그것
이 어떠한 내용의 법이든 간에 시민들은 그것을 준수할 의무가 있었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그 말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한국의 모든 사람들을 법실증주의자로 만들었고 그것
때문에 한국의 현대사를 지배한 독재자들은 소크라테스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내세워 진리를 가로막으려 했던 권력에 대한 저항은 끊임없이 계
속되었다. 악정으로 이름높았던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아래서 악법거부투쟁과 재판거부투
쟁을 벌였던 민주화운동가 장기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악법은 마땅히 거부하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하는 데도 법률은 지켜야 한다는 준법정신이
국민일반에게 광범위하게 주입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맹목적인 준법정신을 이용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은 법률에 의한 불법폭력통치를 자랑하는 것
입니다. ... '악법도 법'이라는 그릇된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악법에는 맞서 싸워야 하며
악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과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이 있는가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도 나타났다. 1993년 권창은 교수가 (철학연구)라는 잡지에 발표한 논문 '소크라테스
와 악법'과 강정인 교수가 쓴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라는 책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었
다.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독재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악법도 법'이라는 명제를 내세운 게
결코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하였다.
정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했을까. 적어도 '크리톤'에는 "자네는 내려진 법
의 판결이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하고, 개인에 의하여 무효화되고 철회되면서도 국가가 존립
하리라고 생각하나?"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이야말로 '악법은 법'이라
는 말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부르호의 저 유명한 '
법철학개요'는 바로 그 문장을 들어 소크라테스가 '법적 안정성을 위해 순교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변명)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할 것을
명령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
다는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에 배치되는 입장이다. 이 모순된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수많
은 학자들이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시켜주겠다는 법
정의 조건부 석방 제안을 거부한 일이나 독배를 받아들인 이유가
아테네 시민으로서 그 법에 동의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인하여 무조건 '악법도 법'
이라는 언을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이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소크라
테스는 감형과 탈출 가능성을 모두 뿌리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완
성하였고, 나아가 가장 강력한 아테네의 질서와 법에 도전한 셈이다. 강정인 교수는 소
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복권시키고 있다.
우리는 과거 독재정권의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민주화의 의지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독
재정권의 하수인으로 부역해 온 '크리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불경죄와
청소년 타락죄로 유죄선고를 하고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사후에 잘못을
뉘우친 아테네 시민에 의해 뒤늦게 명예를 되찾았듯이 박제화된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후, 우리는 부당한 법령에 복종할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한 '변명'의 소크라테스를 부활시켜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의 민주적 시민정신을 기릴 필요가 있다.
위대한 악처, 크산티페
우리가 복권시켜야 할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이다. 그녀는
후대의 재담가들에 의해 인류사상 최고의 악처로 낙인찍혀 왔다. 크산티페 악처가 유명해
진 것을 바로 '향연'에서 크세노폰이 말한 장면 때문이다. 칼리아스라는 사람이 주최한 잔
치에 초대된 소크라테스가 식사 뒤의 여흥에서 사라쿠세의 한 소녀가 열두 개의 굴렁쇠를
공중으로 던져 올리면서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소크라테스 : 여러분, 다른 많은 경우도 그렇지만 이 소녀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만
봐도 여자의 소질이 남자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비록 분별력과
힘은 떨어질지라도. 그러니 여러분 중에 부인이 있는 사람은 부인에게 깨우쳐 주고 싶은 바
를 자신 있게 가르치십시오.
안티스테네스 : 그러시다면 소크라테스, 선생께선 그걸 아시면서도 왜 크산티페를 교육시
키지 않으시고, 무릇 여인들 중에서도, 아니 제 생각으론, 이전에 살았던 여인들 그리고 앞
으로 태어날 여인 중에서도 가장 더불어 지내기 힘든 부인과 함께 지내시죠?
소크라테스 : 말을 잘 다루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순한 놈이 아니라 가장 몰기 힘든 놈을
가지려고 하오. 만일에 내가 그녀를 잘 견디어내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정말
잘 어울릴 수 있지 않겠소.
이 대화에 따르면 크산티페는 영락없는 악처이다. 갖아 다루기 힘든 여자이며 가장 함
께 지내기 힘든 여자라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를 능멸하며 호기부리기 좋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똑같다.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같이 힘든 여자를 잘 다루게 되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
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모든 유력한 사람들과 잘못 사귀었다는
사살은 아테네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그에게 유죄 및 사형판결을 내린 것만
봐도 충분히 증명된다. 자신이 까다롭고 괴팍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애처러운 부인만
천하의 악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또 '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가족이 몇 사람 있습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말처럼 나는 나무나 돌에서 태
어난 사람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가족이
있으며 더구나 아들도 세 명이 있습니다. 세 명의 아들 중 하나는 이미 청년이 되었지만
두 명은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곳에 데리고 와 여러분에게 무죄 쪽에 투표
해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 - 돈을 번다든가, 가정을 꾸려나간다
든가, 군사위원으로 활동한다든가, 민중지도자로 활동을 한다든가, 관직에 오른다든가, 정당
에 가입한다든가, 혁명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일을 쫓아다니기에는 나 스스로 너무도 정직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면 소크라테스가 무대책의 사나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그의 행동거지는 크산티페
를 희대의 악처로 만들고도 남을 지경이다. 집에 언제 돈 한푼 벌어다 준 적이 있나, 허구
한날 시장바닥에서 젊은이들과 쓸데없는 공론을 벌이지 않나, 자식은 셋이나 두고도 교육
비를 제대로 갖다주길 하나. 이 지경이니 크산티페라도 억척스럽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그
가족이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함께 살아준 것 만해도 그는 감지덕지 해야 할 일
이다.
크세노폰은 크산티페가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녀의 친정은 귀족
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귀족들의 이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결혼하여 낳
은 아들 가운데 장남이 아닌 차남이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소프로니코스의 이름을 이어받
은 것은 크산티페의 귀족적 배경 때문에 당시 관행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무위도
식으로 일관했던 소크라테스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크산티페가 친정 도움을 받지 않았
을까 추정된다.
소크라테스에 대해 또 하나의 논쟁거리가 있는데 그가 한때 미르토라는 여자와 결혼했
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크산티페와의 혼인중의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의 이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전자였다면 그는 정말 대책없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 처지에
여자를 둘이나 거느렸다면 말이다.
크산티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밖으로만 맴도는 가장을 대신해서 가계를 꾸려왔다. 소크
라테스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석재 작업장을 물려 받았다. 크산티페는 두세 명의 노예를
데리고 이를 꾸러가면서 묘비를 비롯한 석상들과 장식물들을 주문받아 납품하면서 살아갔
다. 그녀는 남편 대시 가계와 자식의 양육을 몽땅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아비 섬기고
대문 밖은 얼씬도 하지 않는 정숙한 부인은 아니었을지라도 살기 위해 몸부림친 이 여인에
게 누가 돌을 던지랴. 오히려 대책없는 남편 때문에 좌절하기는커녕 자신의 운명을 개
척한 여장부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온갖 궁핍과 고난을 이겨낸 위대한 철학자, 그러나 가장
으로서는 형편없는 남자였던 소크라테스를 위해 살다간 위대한 '악처' 크산티페를 위해 박
수를 보낸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의 재판
나자렛 예수, 법정에 서다
피고인 : 나자렛 예수
나 이 : 33세
직 업 : 무직. 전직 목수
죄 명 : 신성모독죄, 반역죄
공소사실 :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무리를 끌고 다니며 사술로 이적을 행
하여 제사장과 성전을 함부로 비난하는 등 하느님을 모독하며 동시에 '유대의 왕'으로 군
림하면서 행방자인 양 혹세무민하여 대로마 황제에 반역한 자임.
서기 33년, 유월절 축제를 하루 앞두고 신성모독과 반역죄 혐의로 체포된 나자렛 예수
가 로마총독 법정에 섰다. 그러나 로마제국 변방의 식민지 젊은이의 재판이 그리 큰 관심
거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어떠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정치적 관심도 끌지 못했다. 속세
의 권력에 눈이 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무지한 로마군대가 이 젊은이의 신성과 언동의
탁월함에 주목할 리 만무하였다. 이들에게는 예수가 턱없이 헛소리나 하고 다니는 정신이
상자나 아니면 기적을 행한다며 혹세무민하는 치안사범 정도로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
대로 두기에는 점차 그 독설이 지나쳤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다. 아무도 하찮은 한 젊은
이에 대한 재판과 처형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기억되는 사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
을 것이다. 또한 그 재판에 등장한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로마총독 빌라도 역시 자신들의
이름이 그 황당한 젊은이와 함께 무한한 세월 동안 회자될 것이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서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 사형선고에 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세 차례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빌라도가 예수의
신병을 헤로데에게 넘겼다가 다시 넘겨받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심문을 다섯 번
이나 받을 셈이 된다. 어떤 사람은 산헤드린의 공식 재판 직전에 가야바가 개별적으로
심문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모두 공식적이 재판 절차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가
운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재하는 종교의회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 총독 빌라도 앞에서
의 재판이 공식적인 재판절차라고 할 만하다.
제1막 체포 : 열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를 앞세워 대사제의 부하들이 겟세마네 동산에 머
물던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 예수의 일행 중 하나가 칼을 빼들고 그 부하 한 사람의 귀를
자르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달래며 순순히 운명의 잔을 받았다. 이때가 자정 무렵이었다.
제2막 하난의 심문 : 체포된 예수는 유대 민족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던 하난 앞으로 끌
려온다. 하난은 현직 대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자 대사장을 지낸 유대 민족의 최고실력자
다. 그는 예수에게 교리와 제자들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세상사람들에게 모두
버젓이 말해왔고 숨어서 얘기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여 "들은 사람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이 불경스러운 대답 때문에 예수는 경비병에게 뺨을 맞는다. 그러나 하난은
공식적으로 예수를 재판할 법적 귄위가 없었으므로 가야바에게 송치한다. 예수는 이미 묶인
몸이었다.
제3막 가야바의 재판 : 가야바가 주재하는 유대의 최고 종교의회이자 최고법원인 산헤드
린에서의 재판이었다. '탈무드'에 기록된 법에 따라 설치된 이 법정은 의회이면서 동시에
재판권을 행사하는 신정일치의 권력기관이다. 71명의 율법학자, 원로 등으로 구성된 이곳
에서 예수는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 혐의가 인정되면 바로 사형이었다. 증인
들은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재판장 가야바가 물었다.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예수는 "그
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받아넘겼다. 이어서 예수는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
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
다. 예수의 이 말은 당장 꼬투리를 잡혔다. 가야바는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모독했
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며 심리를 종결했다.
제4막 빌라도의 재판 : 이제 예수는 로마총독 빌라도 앞에 선다. 그곳은 바로 헤로데의
옛 궁전이었다. 유대 법정은 사형판결을 시행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로마총독이 예수에게
걸 수 있는 죄목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었다. 빌라도의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였다.
예수는 단지 그것은 너의 말"이라고 일축하였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
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왕국은 하늘 나라의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이 종교적 메
시지를 이해 못한 빌라도는 단지 예수를 '무해한 몽상가'로 단정짓고 그를 석방하려 하였
다. 유월절 축제에서 죄인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례를 그 기회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제5막 유대 민중 앞의 심판 : 유대 민중 앞에 예수가 섰다. 강도 바라바와 함께였다. 빌
라도 총독이 군중들에게 묻자 민중들은 바라바를 외쳤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
성이었다.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자연히 사면의 기회는 바라바에게로 돌아갔다.
예수의 신병은 이제 사형집행을 위해 로마군대 백부장이 지휘하는 별동대로 넘겨졌다.
위대한 변론가, 예수
예수는 홀로 섰다.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악의에 찬 재판관과 방청객 앞에서 예수는 혼자
일 뿐이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하리라던 베드로만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극악한 상황에
서도 예수의 답변은 위엄과 진실을 지키고 있었다. 묵비권을 적절히 행사하며 어려운 질문
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명쾌하게 답변했다. "네가 유대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 "그
대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가야바의 질문에 예수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말함으로
써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빌라도에게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답변은 로마제국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반역죄에 해당되지도 않았
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가 자신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부질없는 변론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나는 세상사람들에게 버젓이 말
해왔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
게 물어보아라"하고 역공을 펴기도 하였다. 예수는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무리한 주장을 내
세우지도 않았다. 최선의 변론이며 방어였다.
예수는 위대한 변론가였다. 4대 복음서에는 마흔 한 가지의 기막히게 훌륭한 비유들이
나온다. 파종과 수확, 참고 기다리는 농부, 겨자씨, 무지기, 재판관에게 가는 길, 누룩, 보
물, 자비로운 고용주, 두 아들, 감독에 임명된 종 등 보석 같은 비유를 보면 예수가 언어
의 연금술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노작
'예수의 비유'는 마흔 한 가지의 비유를 자세하게 비교분석한 뒤 그것이 하나도 어그러지
지 않고 아귀에 꼭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비유들임을 논증하였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맞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김니한 사람이며 임시변
통에 능한지 알게 해준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라는
악마의 요구에 대해 그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엎드려 절하며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등
악마의 또 다른 유혹에 대해서도 예수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이미 구약에 정통한 예수가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한
말을 인용하여 악마를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사후에 덧칠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변설은 가히 탁월하다. 그 야만적인 재판에서 예수 자신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는 있을 수 없었다. 군더더기 변론은 예수의 위대함에 오히려 손상이 될 가
능성이 많았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에는 쌍
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인하면 신성모독이요, 부정하면 사기꾼이 되었다. 어떻게 대
답하든 목숨은 이미 적의 수중에 있었다.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법원에 접수된 어떤 재심사건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났다. 예수가 체포된 지 겨우 24시간 안에 모든 재판절차는 끝이 난
것이다. 재판절차라기보다는 즉결처분에 가까웠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재판은 완전한
불법이며 무효이다. 재판은 단심으로 이루어졌고 사형선고에 대해 항소나 상고를 했을 리
도 만무하지만 정당한 재판을 받을 예수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적대적인 대중 앞에
내맡겨진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변호인 선임권인 주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권한의 고
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란다원칙'의 위배였다. 구속영장은 발부되거나 제시된 적이
없었다. 형사법의 초고 원리인 '영장주의'의 유린이었다. 증인은 미리 확보돼 있었고 그 증
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유죄를 증거하였다. 예수에게 유리한 증인과 증거를 제출할 기회조
차 주어지지 않았다. 함정을 파놓고 예정된 결론을 향해 각본에 따라 이루어진 재판이었다.
물론 예수재판의 불법성을 오늘의 관점으로만 따지기는 어렵다. 재판은 당시의 규범과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다. '죄형법정주의'는 행위 당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로 규정된 것만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당시 제대로 완비된 법도 없었으며 있었다손 치더라
도 예수와 같은 식민지 청년에게 적용될 리 만무했다. 한편 복음서에 기술된 재판조차 없
었으며 예수는 일종의 계엄상태에서 즉결처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법
이란 얼마나 조변석개하며 우습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칼릴 지브란은 '인간의 법이란
모래탑'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부서지고 또다시 쌓아질 운명에 있다.'고 노래하였다. 예수를 재판하고
처형시켰던 법은 부서지고 지금은 없다.
하지만 예수를 범죄자인 채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
많은 저작들은 예수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그 재판의 무효를 논증하였다. 법률을 배운 사
람이라면 누구나 예수재판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예수재판만큼 흥미
로운 게 없는데다 기독교도인 변호사라면 일종의 사명감까지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시 법규와 관행에 따르더라도 예수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1889년에 출간된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은 유대법정과 로마법정을 구분하여 당시 법률과 관행을 분석하면
서 예수재판의 불법성을 나열하였다. 미국 변호사 데이비드 브리드는 1948년 쓴 '예수의
재판'에서 그 재판은 열 일곱 가지의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당연
히 상급심에서 파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 출판된 '예수의 불법적 재판'이라
는 책은 그 후에 진전된 연구성과를 근거로 왜 예수의 재판이 무효인지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예수의 신원을 위해 더 행동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의
피의 대가로 막 수립된 신생국가 이스라엘 법원에 한 건의 재심 사건이 접수되었다. 피고
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는 소장이었다. 이 소장을 받아든 법원당국자들의
낭패감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예수재판의 절차에 대한 기록이 하나라도 있어야
재심을 열고 말고 할 게 아니던가. 누가 위증을 했는지, 재판부가 어떤 증거를 잘못 채택했
는지, 법률을 어떻게 잘못 적용했는지 심리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재판기록이 필수적이다.
난감한 이스라엘 최고 재판소는 고민 끝에 1967년 결론을 내렸다. 최고재판소는 나자렛
예수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로마의 계승국가인 이탈리아에서 재판
을 열어야 한다며 소송을 기각해 버렸다. 예수재판의 재심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난처
한 문제를 이탈리아에 떠넘긴 절묘한 판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탈이아에 이런 재심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법은 어차피 '이 세상의 것'이다. 법으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다투고 가리는 일은 그 어리석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다
를 바 없지 않은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주홍색 옷을 입힌 뒤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린 음 ... 그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 골고다에 이
르렀을 때 그들은 예수께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시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 예수의 머리 위에 죄목을 붙였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 있었다. ...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하며 모욕하였다. 같은 모양으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림이 이스
라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하며 조롱하였다. ... 낮 12시부터 온 땅이 어
둠에 덮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3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다. ...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주었다. ... 예수께서 다
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마태복을 26:28~27:51)
이 장면이야말로 문학 작품에 등장한 수많은 비극을 능가하는 걸작이다. 비극은 보통 영
웅의 수난과 죽음을 그린다. 거기에는 장렬하고 위엄 있는 죽음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이
부분은 가장 치욕적이고 고통스런 죽음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침을 뱉고, 모독하고, 조
롱하고, 뺨을 치고, 저주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홀로
죽어가게 한 예수의 처형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 장면에서 예수의 위대성은 더욱 빛을 발하며, 반대로 처형자에 대한 분노는 극대화된
다. 천수를 누리고 우아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예수일 수 있겠는가. 예수는 바로 그 비천한
태생과 최고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실현되고 완성된 존재이다. 가장 극악한 형벌인 십자
가형을 통한 순교야말로 후세의 경악과 숭배,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두 발과 두 팔을 십자가에 못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던 예수, 예
언된 운명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복음서에 적힌 간단한 기록을 보면 단지 그가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리라는 점만 짐작
할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
이까"라고 외쳤다. 만약 그의 외마디 절규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지 '신의 아들'일 뿐인 예
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고안된 운명의 틀 안에서 움직이
는 그를 숭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느끼는 그 고통의 무
게와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고마움을 동시에 엄청난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래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개발한 형벌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모세율법
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 십자가형은 로마 당국이 노예들에게, 특별히 죽음
의 불명예를 가중시키고 싶을 때 사용되었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는 출생만큼이나 죽
음도 가장 비천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처형도구인 십자가를 스스로 옮겨야 했다. 로마의 사형집
행관들이 그 수치스러운 나무를 직접 들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명예니 불명예니 따지
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다.
정작 십가자형의 악명은 그 고통에 있었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수많은 사형집행 형태 가운
데 십자가형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은 없었다. 못박힌 손과 발에서 흐르는 피는 오히려
치명적인 게 아니었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육체의 본질에 반대되는 '자세'에 있었다.
의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순환기에 엄청난 장애를 일으켜 머리와 심장에 무시
무시한 고통을 가한 후 결국 사지를 마비시킨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없는 그
이름 그대로 해골산 골고다 언덕에서 사지가 못박힌 채 꼼짝도 못하고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갈증. 예수는 골고다에 도착한 직후 유
대인들의 관행에 따라 주어진 포도주 한잔을 이미 거절했다. 십자가에 매달리 지 한참 후
고통의 신음소리를 듣고 누군가 신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 입가에 갖다댔다지만 그 갈증을
달랠 수 는 없었다.
십자가는 예수의 처형과정에서 핵심적인 소도구이다. 아니 예수의 일대기에서 필수불가결
한 고리이다.
그것은 마치 독배를 빼놓고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길로틴을 빼놓고 미리 앙트와
네트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어떤 죽음보다도 예수의 죽음을 보다 더
극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존재이다. 십자가는 고난과 형극, 죄악과 대속, 초월
과 세속, 그리고 부활과 희망의 상징이다. 예수 생애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십자
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라마
르틴의 말처럼 '구시대의 무덤이고 새시대의 요람'이었다.
삼차원으로 지어진 거미집
가야바 : 기원 후 36년 유월절 이전에 면직당함.
빌라도 : 예수 사후 곧 면직되었고 기원 후 36년 사망함.
하난 : 존경가 경의를 받으며 생애를 마침.
가롯 유다 : 자살했다는 주장과 배반의 대가로 예루살렘의 부근의 밭을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이 있음.
예수의 적들도 이렇게 저렇게 인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가족과 제자들은 당분
가 더 큰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산헤드린의 판결에 따라 돌에 맞아
죽었다. 설교중인 예수를 보러 어머니가 왔을 때 애써 호기를 부렸던 예수는 죽어서도 가족
에게 재앙을 남겼다.
제자들은 더욱 혹독하게 핍박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은 더 험난했다. 곳곳에서 순교
가 이어지자 이들은 쿠오바디스를 외치며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로마의 속주로부터
로마의 심장부로 전교해 나갔다. 그 강대한 로마제국은 아직 미래의 파괴자가 태어났다
는 사실을 개닫지 못하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로 접어드는 최고의 번영기 로마의 먼 변
방 유대 지방에서 자신과 인류의 운명을 바꿀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제
국은 계속 자신의 길을 걸었다.
성서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유대인들을 예수 죽음의 책임자로 명기하고 있다. 빌라도는 "
이 사람에게 아무런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다"고 선언하거나 "너희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신
물을 했는데도 너희의 고발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죄상도 찾지 못하였다"고 실토하였을
뿐이다. 재판의 전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런 적의를 보인 적이 없으며, 그에게 예
수는 기껏해야 '무해한 몽상가'이거나 '비현실적인 에언자'정도였다. 예수를 놓아줄 명분
만 찾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우리 율법대로 하면 그자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라며 사형을 요구하거나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총독님은 카이
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도리어 협박하기까지 했다. 저주받을 유대인이 되고 만 것이
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과연 빌라도는 선량한 총독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압
력에 굴복하여 예수를 처형했을 뿐일까. 성서의 재판기록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끝없이 제기되어 왔다. 예수는 식민지의 하찮은 신분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변변한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그런 재판은 로마인이거
나 유대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다고 읻르은 주장한다. 유대의 전통적 종
교의회 산헤드린의 재판절차도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낮에만 열릴 수 있었고 공식 집회 장
소는 사원의 영역 내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밤에 그것도 제사장의 집으로 끌고가
재판을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더구나 식민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는 골
치아픈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잔혹한 통치를 해왔는데 유독 예수에 대해서만
공정하고 자비로운 재판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에는
사법권이 없었으며 오직 로마총독 빌라도만이 사형선고의 권한이 있었다고 한다.
1961년 런던에서 출반된 폴 윈터의 '예수의 재판에 관하여'는 위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
표적인 책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코복음'의 경우 대부분 '잠언' 등 구약의 내용을 옮겨 그
예언들의 실천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사실상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도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체포조차 빌라도의 체포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게
이 사람의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폴 윈터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유대인 무책임
론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프라하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나치 독일을 피해 팔레
스타인으로 도망쳐 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어머니, 누이 동생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죽
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종전 후 영국으로 이주한 윈터는 BBC 고문 등을 역임하지만 어
느날 갑자기 공직을 샂기하고 잠적한 채 오로지 도서관에 틀어 박혀 20년 동안 밤낮으로
예수재판을 연구하였다. 이 책은 바로 결과물이다. 책으로 더욱 유명해진 윈터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인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였던, 제 2바티칸공의회 어거스틴 비 추기경의
초청을 받았지만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1969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빌라도야말로 예수처형의 유일무이한 책임자라 ㄴ 것이다. 따
지고 보면 빌라도만큼 예수 때문에 득을 본 사람도 없다. 하늘의 성좌처럼 명멸한 수많
은 로마황제, 장군, 원로원 의원과 비교할 때 한직에 불과했던 유대지역 총독 빌라도가 그렇
게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예수 때문이다. 더구나 복음서의 기록 덕에 그는 자신에게 돌
아올 화살을 유대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다. 심지어 3세기 초 라틴교회의 신부는 빌라도
가 비밀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그를 성인으로까지 숭배
했다고 한다.
수천년 동안 지속된 숱한 논쟁 속에서도 예수의 생애, 특히 그 재판과 처형과정에 관한
정답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볼드윈 스미스의 말처럼 '삼차원으로 지어진 거미
집'이며 '사실과 허구와 신앙이 함께 혼합'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부분이라도 손을 대기
만 하면 거미집 전체가 무너져 불화와 다툼의 험한 몰골을 드러내게 마련'이며, '아무리
오류가 없이 순수하며 기록된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의 생애처럼 철저한 검증을 받게 된다
면 그것은 불신앙과 신비화와 변증들이라는 흔들리는 덫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20세기
최대의 발굴이었던 1948년 사해 북쪽 '와디 쿰란'의 문서를 포함한 많은 자료들은 복음서
들의 정확성을 논증하며 예수의 시대와 그 이후 존재한 사본들의 단절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의문점이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남아있다.
19세기에만 6만여 권의 예수 전기가 출간되었다. 20세기에는 아직 자료가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수전기들이 쏟아져 나왔을 게 틀림없다. 이 모든 전기들은 각자 다른 이
야기로 사람들에게 다가와 다른 예수의 모습과 얼굴을 전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완
벽한 인물로 완성시키게 마련이다.
소크라테스, 석사 공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스스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더구
나 제자들도 모두 도망친 마당에 예수의 재판과 처형의 장면을 기록한 속기사, 연대기 작
가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 미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진정한 모습, 그 재판과 처형의 진상을 되살릴 수 있
을까.
그러나 십수 세기에 걸쳐 가장 확실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로 군림해 온 이 복음서
들의 영향력은 어느 것도 뒤따를 수 없다. 아마도 이4대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
마태오, 루가, 요한 등의 자손이 저작권을 주장했다면 이들은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호텔의 호화로운 룸에서부터 비좁은 교도소 감방 한쪽 구석에까지 도처에 모셔져
있는 성경은 도대체 얼마나 인쇄되고 배포되었는지 통계조차 낼 수 없으리라. 아무튼 예수
의 재판이야기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장차 자신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조금도 상
상하지 못했다
예수재판이 몰고 온 피바람
거대한 민심의 동요가 끊이지 않는 반항의 도시 예루살렘. 축제가 시작되고 군중이 모
여들면 이 도시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하여, 민초들의 길흉에 관하여 예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렇게 자칭 타칭 수많은 예
언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도시에 예수가 출현한 후 죽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다루었던 초강대국 로마의 식민지,
한 어줍잖은 식민지 청년의 죽음과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 때문에 또 다른 수백, 수천만 명
의 목숨이 뒤따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유대학자가 이를 가리켜 '인간
의 피로 바다를 메운 책임을 져야 하는 한 장면'이며 '비참함과 절망감이 끊이지 않는 역
사의 폭풍우'라고 언명하였던 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모든 기독교도들의 저주와 핍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예
수를 향해 돌팔매질하며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침뱉고 조롱할 때 이미 그들은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예수는 이미 유대인의 운명을 예언하였다.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 그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
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
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죽인 동족 유대인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응징과 보복의 역사는 피해가기 어려
웠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는 피 냄새가 스며들고 말았다.
예수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
에서 쫓겨나 전세계로 유랑의 길로 떠났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편견과 조롱에 시달리며
수난을 겪었다. 반유대주의는 이미 전 유럽인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19세기 프랑스 지
성사에 새로운 장을 연 드레퓌스 사건 역시 유대인데 대한
편견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역사에 럭루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차라리 행복
한 상태였다.
유대인인종말살을 기도한 히틀러는 사실상 유럽 인접국가의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심정
적인 동조를 얻고 있었다.
그 광란의 도살장에서 유대인은 얼마나 죽어나갔는지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다. 600
만이라는 설도 있고 700만이라는 설도 있다. 인간의 피, 그것도 유대인의 피가 바다를 메웠
다.
로스엔젤레스 북부에 '관용의 박물관(Museum of Tolerance)' 이 잇다. 나치 강제수용
소에 감금된 경험이 있고, 나치전범들을 찾아 전세계를 뒤지고 다녀 나치사냥꾼으로 유명
한 시몬 비센탈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인종적 편견을 버리고 상호 이해와 우호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그러나 런던 북부, 뉴욕 브롱스 지
역, 아니 웬만한 서양의 대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검은 망토에 검은 모자, 수염을 기른 유대
인들의 집단거주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여전히 히브리어를 쓰고 전통의식을 지키며
살아간다. 미국은 유대인이 지배한다고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언론, 재계 등 각 분야에서 두
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내세워 벌이는 지나친 이슬람 압박정책은 이슬람세계
의 저주를 사고 있다. 지나친 선민주의, 메시아사상, 뛰어난 두뇌와 장사술은 유대인들을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다. 히틀러의 학살로 예수 처형의 죄값을 다했다는 것일까.
최초의 양심수, 예수
유럽을 여행할 때는 로마를 제일 마지막에 보라는 말이 있다. '구원의 도시 로마.'로마
를 먼저 봐버리면 나머지 도시들은 너무 시시해져 여행할 맛이 삭 달아난다는 것이다. 실
상 유럽 어느 구석을 가도 로마제국을 만날 수 있다. 로마로 통하는 모든 도로, 그 위의 수
도교, 원형경기장, 군사주둔 시설, 목욕탕, 도시와 성곽이 잉글랜드에서부터 룩셈부르크, 스
페인까지 전 유럽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막강한 군대로 광대한 영토를 아무튼 무적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저 변방의 속주 유대지역이 유달리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로마
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110년경에 저술한 "연대기에서 딱 두 줄로 예수를 언급했다. '
악행을 많이 저질러 우리 민중이 증오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
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 당한 그리스도라는 사람에게서 연유한
다'고 썼다. 이 간단한 기록을 보면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로마인들에게 예수
는 '악행을 저질러 증오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한 불순한 종파의 우두머리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당시 로마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자들에게 강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일쑤
였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 역시 강도혐의였다. 하지만 이 경우 강도란 진짜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라기보다는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여 조세납부를 거부하는 등 유대민족
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해방투쟁운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리 로마제국과 유대 지
배세력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한 유대 민중의 반란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급기야
정치권력에 대한 타도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율법
과 비타협적신앙으로 로마 군대와 용감하게 싸워 마시다(Massda)요새에서 3년간 버텼던
젤롯당은 유대인들의 영광의 상징이었다. 이들의 민족해방운동과 예수의 인류해방운동이 제
대로 구별될 수 없는 시대였다.
예수는 분명 양심수였다. 엠네스티의 정의에 따르면 양심수는 '자신의 신념이나 사정을
어떤 폭력이나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표현한 혐의로 수인이 된 사람'이다. 예수는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맞는 양심수이다. 그는 어떤 폭력이나 무력에 호소한 적이 없었다. 신학자
들은 유대 역사에서 로마군대와 저항한 많은 세력들은 폭력적 반란의 옹호자로 몰면서 예
수를 무저항의 온건한 예언자로 돋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군대와 싸우며 민족
해방투쟁을 벌였던 사람들 역시 양심수일 가능성이 많다. 엠네스티는 당초 인종차별정책을
철저하게 고수한 백인정권에 저항하여 무력으로 전복하려 한 넬슨 만델라를 양심수로 인정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수한 논쟁 끝에 결국 그의 석방운동에 동참한 걸 보면 형식적
인 양심수 정의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고대 로마제국의 무자비한 철권통치 앞에서 양심수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어리석
은 짓일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의 안전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반대 세력에 대해 차별성을
부여한 만큼 제국의 통치는 분별력이 없었으며, 2000년의 인류의 투쟁과 헌신 끝에 마련
된 인권기준을 예수시대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차피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다.
히피가 지명 수배한 예수
예수는 2000여 년 전 그렇게 골고다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나 지구상의 3분
의 1의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다. 부활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역사의 경계'를 넘어서 '믿음'의 영역으로 옮아간 것이다. 인간에게
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볼테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위대하고 특별한 존
재이다.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비판적 입장에서 검증한 예수의
생애'를 쓴 독일의 철학자 슈트라스 역시 부활을 포함한 복음서의 여러 기적을 부인하면서
도 자신은 여전히 위대한 예수의 신봉자라고 말했다. 사실 '나자렛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
' 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 아들은 성경에서 포장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 삶 속의 예수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자들이 만
든 인조인간' '그리스도교의 먼지로 뒤덮인 석고상'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신격화된 예수
보다 비천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친 인간
예수에게 매혹된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말했듯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기
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유대교 신학자들은
예수를 '가장 유대인다운 유대인' '위대한 유대인 형제'로 본다. 계몽주의적인 휴머니스
트들은 예수를 '인간을 선하게 이끌려했던 위대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실존주의자들
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그 운명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운명과 자기 자신을 능
가하였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예수가 마지막 순간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절규한 까닭
에 나는 그를 나의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한 구원과 철저한 변혁을 위한 갈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예수는 '집
도, 가구도, 손가방도, 신분증이나 예금 통장, 보험증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욕심 없는 순회
설교자'이며 '모든 인습을 거부한 무상한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발작을 일으킨 광대이자 바보, 지하운동과 팝의 옹호자'로 예수를 이해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히피들이 발행하는 신문에 게재된 예수 수배 전단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수배자 이름 : 예수. 일명 메시아. 신의 아들.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 평화의 왕으로
불리는 그리스도를 수배함. 지하해방운동의 악명 높은 지배자임.
죄목 : 다음과 같음. 면허도 없이 의사로서, 포도주 제조업자로서, 빵 배급업자로서 활
동하고, 성정에 있는 상인들과 싸움을 벌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과격분자들, 전복자들, 매
춘부들, 거리의 부랑아들과 교제함. 믿음을 갖고 있던 인간들이 신의 자녀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함.
외모 : 전형적인 히피의 모습으로 긴 머리에 수염을 달고 야회복을 걸쳤으며 샌들을 신었
음. 슬럼가를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부자친구들도 있으며 종종 광야로 숨어들기도 함.
무덤도, 초상화도 없는 프랑스의 성녀
잔다르크의 재판
신화와 전설의 틈새
영국의 군사 주둔지이자 프랑스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루앙에서 500여 년 전 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예수의 재판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 여성이 엄중한 중
세의 성곽도시인 루앙에서 심문 받고,재판 받고 처형된 것이다. 이 여성은 그 후 문학적
논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셰익스피어, 볼테르, 미슐레, 실러, 랑, 마크 트웨인, 아나톨 프랑
스, 프랑크 해리스, 조지 버나드 쇼, 토마스 페인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세기
를 통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역동적이며 도전적인 인물로 그려놓고 있다.
잔느(잔다르크)는 어떤 여성보다도 많은 책을 낳게 하였다. 그녀의 명성은 세계적이다.
하지만 높은 명성과 엄청난 자료에도 불구하고 잔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지닌 수
수께끼로 만아 있다. 이러한 점은 진정한 잔느를 찾기 위하여 신화와 전설의 중간 틈새에
끼여들어 그녀에 관하여 쓰게 만드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잔다르크는 이미 신화와 전설이
되었다. 비상한 시기에 태어나 백척간두의 조국을 구하고 마침내 적국의 포로가 되어 학대
와 재판 끝에 비극적으로 화형을 당한 그녀의 삶과 죽음은 신화와 전설이 되고도 남을
만하다. 적국 영국과 영국에 동조한 반역적인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이
청순한 소녀를 마녀로 몰아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프랑스인들은 그러한 음모와 낙인
을 물리치고 구국의 성녀로 떠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잔느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신이 보
내준 예언자, 성녀, 우상으로 추앙하고 있는 반면 당시 영국인들과 이에 협력한 부루고뉴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그녀를 마녀로 재단하였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잔다르크의 재판에 관한 온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들 그녀는 영
원히 신화와 전설 속에 갇혀 있었을 터였다. 만숑이라는 한 평범한 공증인이 그 재판을
처음부처 끝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았던들 우리는 오늘의 잔다르크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잔느가 처형당한 지 4년 후인 1435년, 재판관 중의 한 명이었던 코르셀르와 공증
인 만숑이 날마다 기록했던 모든 재판기록과 그 당시 명사들이 보내온 서신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공식적인 재판기록이 다섯 부 만들어졌다. 만숑은 그 가운데 직접 세 부를 필사
했으며 하나는 이단심문관에게, 다른 하나는 영국 왕에게, 나머지 하나는 코숑 주교에게
증정했다. 이 다섯 개의 원본에는 세 명의 공증인, 만숑, 보아스기욤, 타칼의 공증과 재판
관들의 문장이 새겨졌다. 만숑이 가지고 있던 원본은 1455년 12월 25일에 이었던 재심재
판의 판사들에게 전해졌으며 나중에는 그 법정의 명령에 의해 파기되었다. 다른 원본 하
나는 로마에 송부되었다, 1475년 오를레앙에서 원본 하나가 발견되었으며 오늘날 파리에
세 개의 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재판기록은 잔다르크와 그녀의 재판관이 이었던 법정,
루앙성의 여러 방들, 그녀가 수갑 차고 수감돼 있던 감방, 그리고 미묘한 심문에 능한 법률
가들이 심문을 벌였던 심문실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기록은 너무도 생생하여 독자는 잔
다르크가 되기도 하고 그녀를 매섭게 심문했던 이단심문관이 되기도 한다. 또 수인이 되
어 축축한 성안 감옥 갇혔을 때의 느낌도 알게 되고, 치렁치렁한 의복을 차려입은 심문
관이 되어 잔다르크를 가혹하게 심문하는 경험도 하게 된다. 잔다르크의 전기들은 바로 이
러한 재판기록을 요약하거나 일부를 인용하면서 서로 다른 전설들을 만들어 왔다. 원본기
록과 이후의 재심기록에 나타나는 사건정황과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은 문학적 상상력이라
는 옷을 입힘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잔다르크와 그의, 시대를 더욱 풍부하게 보여준다.
미친 왕과 바람둥이 왕비
1380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6세는 사냥을 마친 뒤 무장한 시종들과 함께 뙤약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을 향해 걸어나왔다. 그때 시종 한 명이 창을 떨어뜨렸고 창은 말안장에
매달린 헬멧과 부닥치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냈다. 그 순간, 말 위에 앉아 있던 왕이 갑자
기 칼을 빼들고 "이 반역자들!"하며 소리를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너 명의 시종이 그
칼에 맞아 나동그라졌다. 미친 듯 칼을 휘두르던 왕은 잠시 후 스스로 기운이 빠져 땅바
닥에 드러누웠다. 왕은 아무 말도 못했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광기의 서막이었다. 왕
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를 놓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두 나라 내부의 권력다
툼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되
던 시기에 왕이 미쳐 버린 것이다.
왕이 통치능력을 상실하자 곧바로 왕족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
은 선왕 샤를 5세의 형제들인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오를레앙 공작 루이였다. 왕비 이자벨
라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왕비는 매혹적이기는 했지만 왕을 대신할 미덕을 갖추고 있지는
못했다. 경박하고 놀기 좋아하는 왕비는 걸핏하면 늦은 밤에 야외파티를 열었으며 미친 왕
의 뒷전에서 사랑놀이를 벌였다. 둘 사이에는 모두 열 한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아무도 미
친 왕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
파의 다툼은 서로를 암살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고, 이것을 계기로 전면적인 내전으로 치
달았다. 부루고뉴 집안을 대표하던 핍립은 왕과 그 신하들에게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언하였
다., 프랑스 왕조는 파국 직전이었다.
한편 영국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1413년, 헨리 5세의 즉위로 진열을 정비
한 영국은 2년 후 다시 전쟁을 전개하였으며,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에서 수천 명의 프랑스
기사를 몰살시켰다. 또한 왕실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차 있던 부루고뉴 공작 필립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몇 년만에 프랑스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던 루아르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
악하였다. 프랑스 절반과 수도 파리가 영국과 부루고뉴파 손에 넘어간 것이다.
부루고뉴 공작과 이자벨라 왕비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왕을 내세워 1420년 영국과 치욕적
인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영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카트린 공주와 결혼하고, 대신 샤를
6새가 죽으면 헨리 5세와 카트린 공주 사이에 난 자식이,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영국
과 프랑스의 왕위를 동시에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살아 있는 왕세자를 젖혀놓고 아직 태
어나지도 않은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프랑스의 왕세자가 된 셈이었다. 프랑스
왕권이 영국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이 모욕적인 조약은 프랑스에 떨어진 일련의 재앙 가운
데서도 최악의 것이었다. 프랑스 국가의 상징인 푸른색 바탕의 흰색 백합송이가 영국의 상
징인 사자들과 함께 분할되게 되었다.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순결한 흰 백합과 사나운 영
국의 사자들이 함께 새겨진 왕의 깃발과 창을 보고 분노하였다.
1422년, 공교롭게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몇 주 간격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물론 영국
과 부루고뉴 동맹세력은 조약에 따라 아직 요람에 누워 있는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를
영국과 프랑스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왕이 강보에 쌓인 아기인지라 그의 삼촌 베드포드 공
작이 섭정왕이 되었다. 오를레앙파에서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오를레앙파는 샤를 왕세자
를 왕으로 옹립하였고, 샤를 왕세자는 침략자 영국과 반역자 부루고뉴파에 대한 저항운
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샤를 왕세자는 함량 미달이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
할 만한 용기와 지도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미인 이자벨라 왕비의 정숙치
못한 행동으로 반대파들은 "도대체 아비가 알게 뭐냐"는 핀잔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전통
적으로 프랑스 왕은 랭스에 있는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름으로써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
았는데 당시 랭스는 영국의 수중에 있었다.
깃발을 든 어린 소녀
프랑스 왕실과 귀족은 이런 상황에서도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안락과 영감의 원천이
었던 교회 역시 부패하였다. 한 주교는 거리낌없이 당시의 교회를 이렇게 비판하였다.
아, 교회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도다. 교회가 탐욕과 방탕의 진흙 속에 뒹굴고 그 욕망이
지상에 넘치는도다.
영국이 북부지방을 점령하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하였다. 영국군은 수시로 마을
을 약탈하고 여자를 겁탈하였으며 집과 성곽을 불태웠고, 요구하는 배상금을 주지 않을 경
우 가차없이 포로들을 죽였다. 많은 영국기사들이 프랑스에서 재산을 모았고 그 전리품이
나 약탈품으로 영국에서 자신의 성곽을 지었다. 흑사병까지 돌기 시작했다. 검게 변한 시체
가 길거리마다 쌓여 늑대가 출몰, 향연을 벌였다.
사람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고 신이 프랑스를 버렸다고 생각하였다.
혼란을 틈타 비극적인 사건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망시킨
교회에 맞서면서 악마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마녀신앙은 언제나 혼란을 틈타 모
든 사회계층을 유혹하였다. 교회는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사람들의 두려움과
의구심은 오히려 마녀신앙에 대한 신념을 확산시켰다. 무고한 농부들이 약초를 쓰거나 아
픈 소를 치료하기 위하여 단지 몇 마디 주문을 외웠다고 조사를 받았다. 마녀사냥이 시작
된 것이다.
드디어 영국군은 막바지 공세를 취하였다. 1428년 가을, 영국군은 루아르 강변의 오를레앙
을 포위하였다. 오를레앙은 남부 프랑스의 관문이었다. 영국이 그토록 탐내던 비옥하고 풍
요한 땅, 그 중에서도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생산하던 광활한 포도밭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마저 점령당하면 프랑스 전체가 외국군과 반역적인 동맹군의 먹이가 되고 말일이었다.
기대이상으로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프랑스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2만여 명의
시민들 역시 절망에 휩싸여 저항의 의지를 잃고 있었다.
포위 상태가 7개월째 접어들자 영국군은 이 도시의 유일한 출구로 부루고뉴로 통하는 문까
지 봉쇄할 계획을 세웠다. 굶겨서 항복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기적이 없는 한 부루고뉴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기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1429년 5월 10일. 파리 의회의 서기 한 명이 전선으로부터 막 도착한 전황보고를 열심
히 써 내려가고 있었다. 영국군이 곧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샤를 왕세자가 있는 시농으로
진격할 것이며 프랑스가 곧 항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그가 받
아 적고 있는 내용은 그 소문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프랑스 왕실군이 오를레앙 포위를 풀
었으며 영국군은 겁에 질려 패퇴중이라는 것이었다.
서기는 그가 보고 받은 대로 '프랑스군은 깃발을 든 소녀 하나를 앞장세우고 있다'고 기록
하였다. 희한한 소식에 너무나 넋을 잃은 나머지 이 서기는 보고서 한 귀퉁이에 자신이 본
적도 없는 그 소녀를 정성껏 그려 넣었다. 한 손에 깃발을, 다른 한 손에 칼을 든 한 어린
소녀-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어설픈 스케치가 잔다르크 생전에 그려진 유일한 초상화였다.
오를레앙의 처녀, 불패의 신화를 창조하다
오를레앙 전투가 시작되기 전인 1428년 5월, 영국의 점령지역 안에 있으면서도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던 동북부 보쿨뢰르 지역의 사령관에게 한 소녀가 찾아왔다. 동레미라
는 인접한 작은 마을에서 온 열 여섯 살 난 이 소녀는 자신이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내
고 샤를 왕세자에게 왕관을 씌어드리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이 사령관은 동행한 사람들에게 "부모에게 데려가서 허튼 소리를 못하게 입을 봉하
게 하라"고 말했다. 퇴짜를 맞았지만 이 기이한 소녀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사
람들은 '한 여자가 프랑스를 파멸시킨 뒤 다시 로렌의 참나무 숲에서 한 처녀가 나타나
프랑스를 구원할 것'이라는 '아더왕 전설집'의 예언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잔다르크를
보기 위해 그녀의 집앞에 구름 떼처럼 몰려갔으며, 전의를 상실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하
늘을 높이 찌르듯 높이 올랐다. 보쿨뢰르 사령관은 다시 잔느를 만나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본 결과 오를레앙 전투의 전황을 정확히 알아 맞추는 등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소녀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녀의 소원대로 왕세자를 만나러 가도록 허용했다. 보쿨레르 사령관 역시
백성들 사이에 알고 있는 기적에 대한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잔느 일행은 적의 점령지역을 가로질러 열 하루 뒤 시농에 도착하였다. 왕세자 샤를과
측근들은 잔느의 신통력을 시험하느라 엉뚱한 사람을 왕좌에 앉혀놓았으나 잔느는 대신들
사이에 숨어 있는 왕세자를 정확히 찾아낼 예를 갖춤으로써 사라들을 압도하였다. 이단과
마녀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던 왕세자는 주교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주교위원
회는 여러 날에 걸친 심문을 통하여 그녀가 들었다는 신의 음성과 그녀가 부여받았다는
사명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잔은 천진한 태도로 잘 받아넘겼다. 다시 그녀는 사제들
과 신학자, 판관들로 구성된 푸아티에대학으로 넘겨져 3주간 심문을 받았는데 그녀는 '고
결한 만큼 품위 있고 확연하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였다.
이때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잔다르크가 처음으로 성스러운 음성을 들은 것은 열 세 살
때였다고 한다. 저녁종이 울릴 무렵, 집앞에 있는 마을교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
에 밝은 빛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후 프랑스의 위기가 깊어가면서 그 음성들은 더 자주 들
려왔고 열 여섯 살 되던 때에는 구체적으로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심문관은 "하느님
은 전능한 분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너를 보내 병력을
요구하시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잔은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전투는
프랑스의 아들들이 치르지만 승리는 그분께서 가져다주실 것입니다."하고 당당히 답변했
다. "그대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면 증표가 있을 것인즉 그 증표를 보여라"하고
요구하자 "저는 증표를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군대와 함께 오를
레앙으로 보내주신다면 그 증표를 보여드리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잔다르크는 마녀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처녀성을 검사받았으며, 그녀의 남장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심문을 받았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은 성경이 금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까다로운 심문을 거친 다음 심문관들은 왕세자에게 '의심할 바 없이 신의 사명을
부여받은 처녀'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잔다르크가 '병사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만큼 남장
을 허락'했다. 이에 따라 왕세자는 그녀를 프랑스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알랑송 공작을 참
모장으로 붙여주었다. 그녀는 일단 투르에서 갑옷과 칼, 깃발 등을 준비하였다. 비단으로
만든 저 유명한 흰 깃발에는 예수와 그 발치에 무릎을 꿇은 두 천사를 그려 넣었다.
드디어 잔다르크 일행은 수백 명의 군대로 진용을 갖춘 뒤 곧바로 오를레앙으로 출정하
였다. 그녀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오를레앙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잔다르크
일행은 불필요한 소란을 파해 볼 생각으로 밤 8시가 되어서야 성문 안으로 들어섰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도 운집해 있었다. 마침내 백마를 타고 깃발을 높이 쳐든 잔다
르크가 나타나자 오를레앙 성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를레앙에 도착하자마자 잔다르크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영국군 사령관에게 항복을 권유
하는 포고문울 보내는 것이었다. 잔다르크 일행은 응답이 없자 곧바로 공격에 들어갔다. 사
기가 충천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위 작은 요새, 생 루를 공격해 114명을 죽이고 40명을 포로
로 잡았다. 이것은 잔느가 거둔 최초의 승리이자 곧바로 이어질 대역전의 서막이었다. 잔다
르크는 그리스도 승천축일이라는 이유로 이튿날 전투를 금지시키고, 모든 병사로 하여금
고해성사를 하게 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 탈환한 주둔지에서의 약탈행위를 일체 금지시켰
다. 이제 그녀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지휘관이나 병사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오랜 전쟁에서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군에게 가장 필요한 힘, 즉 이길 수 있다는 신
념을 심어주었다.
잔다르크는 속전속결 전략으로 오를레앙 주변의 취약한 요새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속
속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 방어가 철통같은 마지막 요새 레투렐로 집결하였다. 부속 요새에
대한 포격으로 시작된 이날 공격에서 잔은 가장 먼저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목과 어깨 사
이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급조치만 한 채 다시 복귀하여
전투를 독려하였다. 쉴새없이 공격을 퍼붓던 프랑스군은 해질 무렵 마침내 저 하얀 깃발을
성벽에 꽂을 수 있었다. 대승리였다. 다음날 새벽, 사람들은 영국군이 퇴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개월간의 포위가 풀린 것이다. 5월 8일의 이 승리 이후 사람들은 잔다르크를 '
오를레앙의 처녀'라고 불렀다. 오를레앙 전투는 명백한 심리전이었다. 잔다르크의 하얀 깃
발은 패배의 늪에 빠져 있던 프랑스 병사들에게는 용기와 힘을, 느닷없이 일격을 당한 영국
군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대승리를 거둔 이후 잔다르크는 투르로 가서 왕세자를 접견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곧바로 랭스로 진군하여 대관식을 먼저 올리자고 강력히 요청하였다. 대관식을 치르기 전
에는 합법적인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측근들은 노르
망디 지방을 먼저 수복하자고 주장했고 왕도 적지 한가운데 있는 랭스로 가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리하여 잔은 자르고, 보장시 등 랭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영국군 점령지와
요새들을 공략하였다. 특히 6월 18일에는 영국군 총사령관이 주둔하고 있던 파테에서 오
를레앙 전투를 능가하고 있는 대승리를 기록했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2,000명의 병사
를 잃고 퇴각했다. 90년 이상 계속되던 이 전쟁에서 영국군이 맛본 최대의 패배였다. 불패
의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사로잡힌 성녀
파테전투를 승리로 이끈 잔은 왕세자에게 다시 한 번 랭스로 진군하자고 요청하였다. 하
지만 왕세자는 여전히 겁을 내고 있었다. 왕세자가 이처럼 우유부단했던 것은 측근들 때문
이었다. 총리대신 트레무유는 시종일관 신중론을 펴며 잔을 경계했다. 그녀는 왕실이나 귀
족들 간의 정치적 암투를 이해하고 자신하게 유리하게 그들을 끌어들이기에는 너무나 순진
한 소녀였다. 유약한 왕세자를 설득하는 데 또 열흘이 걸렸다. 1만 2,000명의 군대를 이
끌고 랭스로 출발하였다. 왕세자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 진군은 너무도 우습게 끝나버렸
다. 영국과 부루고뉴 동맹군에 충성하였던 투루아에와 샬롱 등의 대도시들이 공격을 시작
하자마자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무혈행군 끝에 7월 16일 랭스에 도착했고, 랭스 역시 단 한번의 저항도 없이
성문을 열었다. 이튿날 대주교의 집전 아래 유서 깊은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왕세자는 샤를 7새로 등극하였다. 잔느는 깃발을 든 채 제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대관식을 지켜보았다. 식이 끝난 뒤 잔느는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처음으로 '국왕 폐하'
라고 불렀다. 샤를 7세는 잔느의 공덕을 치하하기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을 위해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가난한 고향마을의 세금을 면제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때부터 프랑스 혁명 와중에 이 관례가 없어질 때까지 동레미
마을은 360년 동안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대관식이 끝난 뒤 랭스대성당은 환호와 갈
채로 무너질 듯하였다. '오를레앙의 처녀'는 바야흐로 그 영광의 절정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관식을 고비로 잔은 급격히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였
다. 전세를 뒤집어 승기를 잡은 만큼 즉시 파리로 진격하여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
다는 그녀의 전략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루고뉴파와 협상을 전쟁을 끝내려는 왕실고문들과
의 전략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곧바로 파리로 진격하자는 그녀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
구하고 왕은 대관식 이후 근 한달 간을 랭스와 파리 사이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돌며 시가
행진만을 벌였다. 오랫동안 부루고뉴파의 지배를 받아왔던 이 지역의 주민들은 샤를 7세
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러한 백성들의 환호성과 갈채가 잔에게는 파리로 빨리 입성하라는
뜻으로 들렸으나 왕은 그녀 모르게 부루고뉴 공작과의 협상에 목을 매달고 있었다. 왕은 15
일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회군을 명하였다. 파리공격계획을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셈이
었다. 잔은 이 협상이 시간을 벌어 파리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하였으나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알랑송을 비롯한 주요 사령관들도 왕의 처사에 반발하
여 귀향하고 말았다.
이제 왕의 곁에는 잔다르크밖에 없었고 그녀 곁에는 아무고 없었다. 이제 그녀는 왕실
인사들로부터 일종의 마스코트 취급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왕과 그 측근들
을 따라 다니며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협상파의 우두머리인 트레무유
는 가시눈을 하고 잔느를 대했다. 1429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왕은 루아르강 주변의
여러 성읍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왕실고문들과의 명령에 따라 잔느는 소규모 병력을 거
느리고 부루고뉴파가 점령하고 있던 생피에르르무티에르를 점령하였고 라샤리테쉬르루아
르를 포위했다. 이 성의 공격은 트레무유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성의 성주
에게 원한이 있었다. 게다가 극히 제한된 물자와 병력만을 내주어 잔다르크는 포위에 성
공하고도 도중에 탄약이 떨어져 철수해야만 했다. 트레무유의 농간에 따라 잔느는 이제 '신
이 소녀를 저버렸다'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잔느가 그토록 강력하게 경고해도 듣지 않던 왕은 휴전협정이 끝나갈 즈음에야 비로소
기만성을 깨달았다. 이듬해 부루고뉴 공작은 공공연히 국왕 세력의 도시들을 위협하기 시
작하였다. 샤를 7세가 협정을 철석같이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이 도시 저 도시
를 떠도는 동안 부루고뉴 공작은 전력을 증강해 국왕 편으로 돌아선 도시들을 다시 탈환할
준비를 마쳤고 급기야는 랭스를 치겠다고 공언하였다. 잔다르크는 부루고뉴 공작이 오랫동
안 국왕 편을 들어왔던 콩피에뉴를 공격하자 콩피에뉴를 원조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하지
만 겨우 자신의 동생과 몇 명의 시종, 무장병사만이 그녀를 따랐다. 최후의 출정이었다. 콩
피에뉴 성의 배후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프랑 지원군은 영국군 중원부대에 포위되어 도주
로가 막힌 채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국군과 부루고뉴 동맹군은 가장 무서워하던 영
적인 지도자를 드디어 사로잡았다.
영국군에게 팔려간 가련한 포로
잔다르크를 사로잡은 부대의 사령관은 장 드 뤽상부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루고뉴
공작의 지시에 따라 잔느를 베르망두아에 있는 자신의 성에 가두었다. 우습게도 그녀의 체
포소식을 듣고 안달한 쪽은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었다.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영국은 혹시라도 잔다르크가 풀려날까 봐 재빨리 손을 쓰기 시작하였
고 교회 역시 그녀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잔느는 불온하게도 신과 직접 소통했다고 주장함
으로써 교회의 위계질서를 위협한 존재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문제에 관한 한 교황조
차 무시 못할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파리대학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이단혐의자로
간주하였다. 그녀는 영국과 교회는 그녀의 신병 때문에 그다지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왕실은 잔을 구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랭스 대주교는 그녀가 체포되자 그녀를 '교만과 악의에 가득 차 어떤 조언도 듣
지 않으려 하였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트레무유는 공개적으로 즐거워하면서 '그저 시골에서
온 촌뜨기에 불과했다'고 냉소하였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샤를 7세였다. 몸값을
내놓던가 아니면 그녀가 구금된 성을 공격하여 탈출이라도 시켜야 함에도 마땅함에도 그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잔의 신병을 둘러싸고 영국과 교회 사이에 있었던 다소간의 경쟁은 피에르 코숑이라는
한 약삭빠른 주교가 나타남으로써 수습되었다. 그는 잔느가 체포된 콩피에뉴룰 관할하는
보베의 주교로서 실각한 랭스 대주교 자리를 노리고 영국의 앞잡이로 나섰다. 일찍이 프
랑스 왕권을 영국에 넘겨준 트로이에 조약을 계획한 바 있는 코숑은 이번에도 탁월한 수
완을 발휘했다. 잔느를 교회재판에 넘겨 마녀임을 입증하면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도움
으로 대관식을 치른 샤를 7세까지 도매금으로 넘길 수 있다고 영국을 설득했다.
한편 파리에서 재판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교회는 파리가 왕당파 동조자들과 너무 가까이
있어 위험하므로 영국이 오래 전부터 지배해 왔던 노르망디의 루앙 성에서 재판을 열자고
타협책을 제시하였다.
영구고가 부루고뉴 동맹군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던 파리대학은 이에 순순히 응하였다.
마침내 코숑 주교는 영국이 건네준 1만 리브르를 부르고 뉴 공작에게 지불하고 그녀를 넘
겨받았다. 왕자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몸값 협상이 마무리되자 잔느는 크
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어느 날 꽁꽁 묶인 몸으로 루앙으로 이감되었다. 체포된 지 7개월
뒤였다.
12년 동안이나 영구에 점령당했던 루앙은 파리에 버금가는 대도시로 도시 전체가 영국화
되어 '제 2의 런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잔다르크가 이감되던 당시 워릭 백작이 주둔
군 사령관이었으며 거리는 영국군인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가 영국군의 침략
을 막아내기 위해 13세기에 축성한 성에 수감되었다. 감방은 벽 두께가 자그마치 12피트였
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무거운 쇠구슬이 달린 사슬로 잔의 손발을 묶었다. 다섯 명의 경비
병이 방안에서 함께 기거하며 밤낮으로 그녀를 감시하였다. 경비병들은 그녀를 희롱하거
나 심지어 강간하려고 하였다. 잔다르크는 남장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필사적으로
그에 집착하였다. 또한 교회재판이니만큼 교회감옥으로 옮겨달라는 그녀의 정당한 요구는
묵살되었다. 몸값에서 드러나 것처럼 엄청나게 중요한 포로였음에도 대우는 일반 범죄자와
다르지 않았다. 주교는 관할 구역 안의 사건만 재판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숑이 관할
범위를 벗어난 루앙에서 재판을 주도하였다. 이름만 교회재판일 뿐 정치적 재판이었음을 말
해주는 대목이다. 그녀는 주군에게 버림받고 영국군에 팔려간 가련한 포로였던 것이다.
잔다르크 재판의 총연출자
코숑 주교는 잔다르크 재판의 총지휘자이며 연출자였다. 그는 이 재판을 '아름다운 재판'
이라고 이름 붙이고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고향마을을 비롯해 그녀가 거쳐온 모든
곳에 조사관을 파견해 증거를 수집했다. 후미진 시골마을에는 기독교 이전에 존재했던 민
간신앙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쓸 만한 시빗거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리하여 요정나무와 정화수, 약초와 노래로 사람을 치료하는 민간요법조차 마녀의 징
표로 간주되었다.
동시에 코숑 주교는 이단이라는 중죄에 걸맞는 이상을 부여하기 위해 이단심문소에 특별
재판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대심문관에게 심문을 맡기려고 했으나 대심문관은
로마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심문관 르메트르가 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날 뿐이었다. 교회 인사 중에도 잔다르크의 재판을 비
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잔다르크가 이미 오를레앙으로 가기 직전 교회의 심문을
받아 무죄가 밝혀졌다는 사실을 주요한 논거로 삼았다. 하지만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한 사
람은 코숑 주교에 의해 체포되기고 하였다. 재판이 불공정하고 일방적이며 정의를 위한 재
판이 아니라 증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3등서기관은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코숑 주교는 이런저런 골칫거리에도 불구하고 학식 있는 교회지도자들의 거대한 그룹을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거절하기가 두려워서 마지못해 참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파리대학에서 온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이밖에 나머지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호의
와 보답을 얻기 위하여 참여하였다.
60여 명이 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코숑과 르메트르는 재판관이었다. 코숑의 친구 장 데스
티베는 검찰관으로 위촉되었다. 무섭고 잔인한 그는 잔다르크를 매춘부 또는 신성모독자
라고 모욕하였다. 자백은 어떻게 얻어냈든 간에 유죄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자백을 유도하
는 모든 방법이 정당하다고 허용되었으므로, 고문, 스파이, 속임수 등을 자연스럽게 사용하
였다. 이단심문관들은 심리적 간사함으로 피고인의 영혼을 파고들었고, 미묘하고 사기성
짙은 질문을 다른 식으로 계속 반복함으로써 자백하도록 함정에 몰아넣었다. 거대한 문어
의 촉수처럼 그들은 점차 먹이에 다가가 유죄로 옭아매었다, 잔다르크의 감방 옆에는 그녀
의 말소리가 모두 들리는 스파이 구명을 낸 작은 방이 있었다. 코숑의 비열한 부하는 자
신의 부하를 그 방에 대기시킨 상태에서, 고향마을에서 온 다정한 농부로 가장하여 잔다르
크에게 동정적인 것처럼 접근하여 불리한 정보를 빼내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잔은 고립무
원이었다.
그녀는 어떤 종류의 변호인도, 자문가도 없었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이 순진무구한
시골처녀가 법률과 신학에 박학다식한 재판관, 검찰관, 자문관들이 제기하는 복잡 미묘한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조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이단재판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고 최종 판결
후에는 어떠한 항소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모든 공소장이 완성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열 아홉 살이 된 1431년 1월 중순까
지 그녀의 모든 생애가 그 공소장에 담겼다. 코숑과 그의 보좌관들은 일련의 회의를 통하
여 그 공소장을 독회하며 점검하기 시작했다. 코숑 주교가 오랜 재판 준비를 끝냈을 때 잔
다르크는 다시 그녀의 처녀성을 최종적으로 심사 받았다. 검사 결과 그녀는 여전히 '진정한
처녀'임을 판정 받았으나 그 자료는 재판에 등장하지 못했다. 어느덧 무대는 완벽하게 꾸
며졌다. 영국의 무력을 등에 업은 코숑 주교는 결과에 대해 확신하였다. 코숑이 고려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포로의 위대한 인간성이었다.
한 번에 한 사람씩만!
1431년 2월 21일 아침 8시, 루앙성강 대성당은 근엄하고 박학다식한 당대 최고의 신학자
들과 교회지도자들로 빼곡이 들어찼다. 쥐죽은 듯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정리
의 요란한 안내소리와 함께 검은 상의와 몸에 꼭 맞는 긴 양말을 신은 잔다르크가 입정하였
다. 그녀가 앉을, 등받이 없는 목재의자는 사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소에 놓여 있었다.
잔다르크가 쇠사슬에 묶인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의자에 앉자 재판부는 먼저
"성경 앞에 모든 질문에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잔다르크는 말
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당신들이 내게 무엇을 물을지 모르니까요. 아마도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묻겠지
요." 예기치 않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재판부가 큰 소리를 내지르자 그녀는 "나의 가족과
내가 집을 떠난 후 한 일에 대해서는 모든 진실을 말하겠지만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
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녀의 침착한 대꾸에 흥분한 나머
지 재판관, 심문관 등이 한꺼번에 아우성을 치자 잔은 이렇게 말했다. "점잖으신 재판관, 학
자, 영주 나으리들, 한 번에 한 분씩 질문하시지요." 완전히 기선을 제압 당한 재판부는 세
시간의 공방 끝에 결국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제외하고 그녀의 신념에 대해서만 진실을
말하겠다는 제한선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코숑은 그녀의 이름과 태어난 동네, 가족사항, 나이 등에 관해 인정신문을 했다. 이어서
그녀가 신의 계시를 받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요량으로 주
기도문을 외워 보라고 요구하였다. 올가미였다. 그는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가 틀림없
이 다 외우지 못하거나 더듬거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숑은 또 한 번 반격을 당하
고 말았다. "당신이 나의 주기도문을 들을 만큼 돈독한 기독교 신자임을 먼저 신앙고백하
라."는 대답이었다. 곤경에 빠진 코숑은 다른 두 명의 성직자로 하여금 주기도문 암송을
듣게 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하였으나 잔다르크는 질문자가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끝
까지 버텼다. 코숑은 자신이 던진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든 꼴이 되었다.
첫날의 재판이 끝나기 직전 자신이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코숑은 그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그녀가 몇 차례 다른 감옥에서 도망치려 했음을 상기시켰
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포로의 권리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영국의 포로이며 결코 도망치지
않겠다고 서약한 바도 없었으며 설사 탈출했더라도 자신의 말을 어긴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의 경비병은 더 늘어났고 그녀에게 아무도 말을 붙이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련 속에서 빛나는 영혼
재판부는 재판을 시작한 다음날부터 법정을 강당에 붙은 조그마한 회의실로 옮겼다. 이
곳에서 모두 다섯 차례의 재판이 이루어졌다. 재판 시작 때마다 재판부는 선서를 요구했고,
잔은 그때마다 이미 충분히 서약했다며 선서를 거부했다. 심문관들은 함정이 도사린 까다
로운 질문들을 쏟아냈고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때로는 이 주제 저 주제를 건너뛰며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심문의 내용은, 어릴 때 배운 기술이 있느냐의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그녀가 치른 전투, 전투중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
로는 그녀가 받았다는 계시의 내용, 계시를 받은 과정, 그리고 남장을 한 연유에 집중되었
다. 그것들이 바로 그녀가 마녀임을 밝히는 핵심고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잔느는 함정이 도사린 질문에 대해서 심문관들의 의표를 날카롭게 찔렀고 자신이
말하지 않겠다고 밝힌 질문에 대해서는 "통과" "대답하지 않겠다""재판과 무관하다"는 등
의 대답으로 받아넘겼다.
연일 너무 많은 질문을 한 탓에 심문관들이 예전에 했던 질문을 반복하기라도 하면 잔느
는 그건 언제 어느 때 다변한 문제이니 기록을 살펴보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두세 시간씩
장황한 질문을 퍼부어 그녀를 지치게 하려던 심문관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녹초가 되기 일
쑤였으며 그녀를 향해 던진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곤 하였다.
"필요에 따라 했을 뿐"이라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심문관들이 남장을 계속 트집잡자 잔는
는 옷은 아주 사소한 문제예요. 나는 어떤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남자 옷을 입으라는 충
고를 받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하느님은 옷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신경 쓰지 않아요."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푸아티에에서 이미 성직자들과 신학자들로부터 남장을 해도 좋다는 허락
을 받은 바 있으니 그때의 기록을 보라고 하였다.
한번은 심문관들이 그녀가 들었다는 음성을 걸고 넘어졌다. "음성들이 눈이 달렸더냐""감옥
에서 탈출하라고 음성들이 말하더냐""오늘 공판에서 대답할 내용을 알려주더냐"는 따위의
의미 없고 공허한 질문들이었다. 지친 잔이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답변하자 심문관들은 옳다구나 하며 이런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그
러면 그대는 지금 은총의 상태에 있는가"라고 '은총의 상태'란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질문은 대단히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
면 그것을 아는 것은 하느님밖에 모르기 때문에 신성모독이요, 그렇지 않다고 하면 자신이
죄악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게 되었다. 잔은 이 올가미를 거미줄 걷어내듯 가볍게 걷
어내는 유명한 답변을 남겼다. "내가 만일 은총의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주십사 기도드릴 것입니다." 그녀의 답변이 떨어지자 법정에는 무덤 속 같은 정적이
흘렀다. 진시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답변이었다.
잔다르크는 때때로 재판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심문관들
이 그녀가 영국에 보낸 포고문을 내보이며 철회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그녀는 벌떡 일어
나 외쳤다. "천만에! 이런 쇠사슬로 내 소망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에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여러분에게 분명히 경고하는데 앞으로 일곱 해가 다 가기 전에 무
서운 재앙이 영국을 덮칠 거요. 오를레앙이 겪었던 것보다 몇 배 더 무서운 재앙이 덮쳐
영국은 마침내 프랑스를 잃을 거요." 또한 코숑이 계시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그
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당신이나를 심판하는 판사라고 하는데 당신
이 하는 짓을 잘 생각해 보세요. 진실로 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니 앞으로 당신이 처할
위험을 잘 생각해 보시죠," 심문관들이 신의 계시를 받은 사실을 부모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전쟁터로 나간 행위를 비난하자 그녀는 단호히 답했다. "떠나도록
명한 것은 분명 하느님이셨습니다. 내게 일 백 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더라도, 내가
공주의 신분이었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떠났을 것입니다." 이어 심문관들이 깃발에 대해 꼬
치꼬치 캐물으며 그것을 마법의 깃발인 양 추궁하자 잔는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그 깃발은
무서운 고통을 견뎌냈고, 그리하여 영광을 쟁취한 깃발이었습니다." 자부심과 비애가 뒤섞
인 잔의 이 말은 후일 재판기록이 공개되었을 때 '프랑스인의 혼백이 부르짖은 외침'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비공개재판의 마지막날인 3월17일, 재판관들은 마지막 올가미를 던졌다. 그녀가 한 말고
행동은 교회가 그 잘잘못을 판정할 것인즉 이에 승복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겠다고 하면 그
녀의 소명 자체가 심판대에 올라 그 유죄를 승인하는 것이 될 터이고 아니라고 하면 영락
없이 이단 죄를 범하게 되는 질문이었다. 잔느는 자신은 교회를 사랑하며 그리스도교 신앙
을 수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할 작정이지만 자신의 소명에 입각해 한 일들은 그렇게
하도록 명한 하느님만이 심판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재판관들이 다시 교회의 결정에 승
복하겠느냐고 다그쳐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가 보기에 주님과 교회는 하나이
고 따라서 이 문제는 하나도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순한 문제를 어렵게 만들
고 있는 건 바로 당신들입니다."
잔느의 말대로 그들은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느라 재판의 기본원칙을 완전히 무시
하였다. 비공개재판기간 중 노르망디 지방의 로이에라는 저명한 법률가가 루앙에 들르며 코
숑은 조서를 보여주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첫째, 재판이 비공개로 열려 관련자들의 발언권과 행동권이 보장되고 있지 못하며,
둘째, 프랑스 왕의 명예와 직결되는 재판인대도 본인 또는 대리인을 통한 변호의 기회를
주고 있지 않고, 셋째, 혐의 사실이 피고인에게 전달되고 있지 않으며, 넷째, 피고인이 화급
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변호인의 조력 없이 혼자서 재판을 받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등이었다. 그는 소견을 밝힌 후 곧바로 프랑스 국경으로 넘어가 코숑의 보복을 피했다고 한
다. 삼문관들은 고문기계를 보여주며 위협했지만 잔느는 여전히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했
다. 재판관과 조언자들은 '지금까지 이끌어온 재판을 고문에 의해 더럽히지 않기로 결의'
하였다. 70개의 범죄 항목을 모아서 잔느에게도 보여주었으며 이를 다시 12개 항목으로
줄인 후 교회에 복종하도록 잔느를 설득하였으나 허사였다.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5월 24일, 잔느는 4개월만에 감옥에서 나와 판결이 낭독될 생투앙 교회묘지로 호송되었다.
몇 달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 감방에서 지내며 혹독한 심문에 시달린 탓에 그녀의 얼굴
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신학자가 나와 유창한 달변으로 잔다르크와 샤를 7세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잔은
"당신은 선한 그리스도 교인인 샤를 국왕을 비난할 자격이 없으며 내 언행에 잘못이 있다
면 그 책임은 오직 나에게 있다."며 그 설교를 중단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이 한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한 증거를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단혐의를
받은 피고인은 로마에 항소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이 권리를 무시했다. 참
석한 신학자와 심문관들은 당장 복종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하리라 경고하였고, 운집한
영국인 구경꾼들은 빨리 불을 붙이라며 흥분하였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진 가
운데 신학자와 심문관들이 내놓은 서류에 잔느는 서명하고 말았다. '재판관과 교회의 처분
에 따르겠다."는 내용의 서명이었다. 집단적 광기 앞에서 잔느는 결국 자신의 통제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드디어 코숑 주교는 잔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잔느는 선고 직후 사제들에게 말했다. "그럼 교회에 몸담고 있는 여러분, 이제 날 여러분
의 감옥으로 데려 가세요. 더 이상 영국인의 손아귀에 잡혀 있고 싶지 않아요." 잔느가 무
엇 때문에 이제껏 지켜온 신념을 포기하고 '신앙철회문서'에 서명했는지 알 수 있는 대
목이다. 하지만 잔느의 기대는 산산 조각나 버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갇혀 있던 방으로 다
시 잔느를 데려갔던 것이다. 5월 29일, 잔느는 다시 세속법정에 회부되어 화형이 결정되었
다. 62명의 재판관들 가운데 20명은 참석하지 않았다.
5월30일 새벽, 잔느의 처형이 임박했음을 알리기 위하여 두 명의 의사가 왔다. 잔느도
이 순간에는 예전의 그녀 모습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한탄하였다. "아, 나를 잔
인하게 대하다니, 화형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곱 번 참수 당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 가누나." 그녀에게 최후 고백과 성
체 배령이 허용되었다. 잔느는 "오늘 저녁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사제는 "당
신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지 않나요"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잔느는 "예, 하느님의 도움으로 나는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열정적으로 답변
하였다.
두터운 성벽 너머로 막 시작하려는 쇼를 구경하려는 군중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잔
느는 긴 검정 옷을 입고 사형집행인의 수레에 올려졌다. 이단, 타락자, 배교자, 우상숭배자
라고 쓰여진 뾰족한 모자가 그녀의 빡빡 깎인 머리에 씌어졌다. 80명의 무장한 영국군이
그 수레를 따랐다. 이 수레는 좁은 거리를 지나 올드 마켓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몇 개의
단이 설치되었다. 모든 관객이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에 나무 장작으로 둘러싸인 화형주가
서 있었다. 중요한 고관대작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제단에서 잔느는 기소자들의 마지막
설교를 들어야 했다. 잔느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비난했던 모든 사람을 용서하였듯이 용서
받기를 바라며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몇 주일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교회인사들조차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친구처럼 위장했던 사람들도 감정이 북받쳐 그곳을 떠났다.
잔느는 십자가를 원했고 감옥에서 화형장까지 대동했던 수도사가 나무막대 두 개를 묶어
만든 십자가를 건네주었다. 자은 몇 번이나 십자가에 입을 맞춘 뒤 꼭 껴안았다. 이 감동적
인 순간에 영국인들은 초조해졌다. 코숑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여기서 "저녁을 먹게 하려느
냐"고 힐난하였다. 잔느는 드디어 기둥에 묶였고 불이 붙여졌다. 화염이 그녀를 감싸자 불
길 속에서 "주님! 주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침묵, 그녀가 약속한 자유는 마침내
왔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후 집행관은 타는 나무를 헤집어 모든 사람들에게 검게 탄
육신을 보여주고 마녀가 도망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불은 다시 붙여졌다. 곧 그
녀의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잔다르크여, 영원한 성녀여!
그들은 잔느의 몸을 태워 재로 만들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
했다. 영국에서 잔다르크가 마녀였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셰익스피어조차 그녀
를 '나쁜 친구'로 불렀다. 하지만 점차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 잔다르크가 성녀라는 생각
이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지독한 불길에도 불구하고 잔느의 심장은 타지 않은 채 남았고,
영혼이 그녀의 육체를 떠나자 비둘기 한 마리가 연기 속에서 날아 나왔다는 말이 퍼졌다.
베드포드 공작의 프랑스 지배계획에는 큰 차질이 왔다. 그의 동맹자 부루고뉴 공작은 샤를
7세의 인기가 점차 상승하는 데 주목하고 결구 자신도 프랑스인임을 깨달았다. 1453년, 그
는 사촌 샤를 왕과 조약을 맺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였다. 그해 말 베드포드 공
작은 세상을 떠났고, 파리는 샤를 왕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샤를
7세는 권력과 권위를 장악해 나갔다.
루앙 시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자 샬르 7세는 잔다르크의 재판기록을 손에 넣었다. 그
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잔을 그 잔혹한 형벌에 처하도록 했는지 재판기록을 조사하라고 명
하였다. 신하들 역시 샤를 7세의 이미지에 좋지 못할 낙인을 찍은 그 사악한 판결을 제거
하도록 촉구했다. 이단이라고 덧칠해진 샤를의 왕권과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잔느를 우
선 무죄로 만들어야 했다.
이 조사는 중단을 거듭하며 7년 동안 지속되었다. 재판에 관여하고 여전히 루앙에 살고
있던 교회인사 몇 명이 조사를 받았다. 코숑 주교와 검찰관 데스티베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데스티베는 하수구에 빠져 죽었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잔다르크의 재판에 그토록 가혹했
던 것에 대한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재판은 샤를 왕이 이단과
주술의 도움으로 불법적으로 즉위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계획된 정치 재판이었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동시에 잔은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코숑과 영국인들은 동의하지 않은 사
람들을 협박하려는 사실을 밝혀냈다.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열심이었던 교황 역시
잔느의 재판을 재조사하는 데 동의했다. 조사의 두 번째 단계에서야 잔느가 언제나 충실한
카톨릭신자였으며 그녀의 재판관이 그녀를 처형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였음을 인정하
였다.
1455년, 그 긴 신원의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졌다. 잔느의 집안이 신원운동에 적극 나섰
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든 살의 노구를 이끌고 파리에 나타나 그녀의 딸 잔느에 대한 신
원을 청원하였다. 교황으로부터 허가가 떨어져 잔느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노틀담사원으로
인도되었다. 군중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성당으로 걸어내려 가는 늙은 시골 할머니의 모
습에 크게 감동 받았다. 그녀는 엎드려 딸의 명예회복을 간청했다. 그녀는 자신은 딸을 하
느님에 대한 경외와 교회에 대한 존경심 속에서 키웠으며, 자신의 딸 잔느는 교리에 배반
하는 어떠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가장 사악한 방법으로 화형을 당했다고 말했다.
동레메, 보쿨레르, 오를레앙 등 잔느를 알았던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잘못된 재판을
번복하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그녀의 좋은 인간성과 종교적 경건함에 대하
여 증언했다. 재판관들은 코숑 주교와 영국이 잔느에게 가했던 위협을 비난하고 폭로하는
일에 자유를 느꼈다. 코숑은 죽었고 영국은 프랑스를 떠났으므로 코숑과 의견을 같이했던
재판관과 교회지도자들이 책임을 나눠져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과 재판절차만 탓하며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기에 바빴다. 잔느의 어머
니는 딸의 재판관들이 최소한 잔느의 처형에 악역을 담당했다는 게 인정되기를 희망했으나
그들은 방면되었다. 애초의 재판이 그러했듯이 이번 조사 역시 정치적이었다. 예전의 재판
관들이 영국의 환심을 사려했듯이 이번에는 샤를 왕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드디어 1456년 7월, 잔느를 처형한 재판은 기망과 오류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판
결문은 '우리는 문제의 재판과 판결이 악의, 잘못된 고발, 거짓말, 법의 오용 등으로 오염되
었으며 모든 재판과정, 그리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는 불법이고 무효이며 과거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법적으로 무효임을 밝히고, 알리고, 규정한다'
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잔다르크는 주술과 이단혐의를 벗었다. 더불어 샤를 왕도 이단
과 접촉한 혐의를 벗게 되었다.
제삼 선고문은 잔이 화형당하였던 장소였던 루앙의 올드 마켓에서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
고 낭독되었다. 원래의 재판기록 한 부가 공개적으로, 극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녀의 이름이
깨끗해지고 선고가 무효화되자 잔을 영웅과 성인으로 여기는 '잔다르크 파'가 민중들 사이
에 번져 나갔다. 그녀는 프랑스 왕국을 구한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공식
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될 때까지는 또다시 500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20년, 잔다르
크는 도덕적인 삶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인하여 교황 베네딕트 15세에 의해 시성 되었
다. 프랑스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는 그녀를 사랑하였고 존경하였던 국민들의
정서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오! 잔이여! 그대를 기억할 무덤도 초상화도 없지만 영웅의 진정한 기념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았던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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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
토머스 모어 재판
가장 잘 나가던 영국인
1478년 출생
1492년 옥스퍼드대학교 입학(14세)
1496년 링컨법학원 입학(18세)
1500년 변호사 자격취득(22세)
1505년 하원의원 당선(27세)
1509년 왕립법학원 감독관(31세)
1510년 런던 대리집정관(32세)
1515년 플랑드르 통상사절단 대표(37세)
1517년 추밀원 의원(39세)
1521년 재무차관(42세)
1523년 하원의장(44세)
1525년 랭커스터 공작령 형평법 대법관(46세)
1529년 대법관(50세)
1532년 대법관 사임(53세)
1535년 런던 탑에서 처형(55세)
이 간단한 경력만 보아도 우리는 토머스 모어가 얼마나 잘 나가던 영국인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출중한 능력과 왕의 총애 덕에 그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는 특별한 귀족 출신도 왕족도 아니었다. 런
던의 법률가였던 아버지, 존 모어는 비교적 성공한 사람 축에 속했지만 여전히 평민이었다. 그런 출신
배경의 토머스 모어가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높은 자리를 차례로 차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 때문이었다.
영어권 국가에서 모어는 가장 위트 있는 사람, 가장 총명한 영국인으로 손꼽힌다. 일찍이 모어의 친
구이자 유럽대륙 최고의 인문학자로 이름을 날린 에라스무스는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양면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확고
하게 인식하고 상황에 맞는 말을 선택하며 그 말을 가지고 자신의 사고 수준을 표현하는 능력이 걸출한
인물'이라고 했다.
모어의 이러한 능력과 자질은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여러 기회를 통해 만들어졌다. 아들이 법
률가로 대성하기를 바랐던 존 모어는 토머스가 열 두 살 나던 해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인 존 모
턴 경의 집에 시동으로 들여보냈다. 모턴 경은 이 총명한 소년에게 곧 매료되었고 그 집을 드나들던
귀족이며 고관들에게 '이 아이는 언젠가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턴 경은
종교계에서나 정계에서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람으로 '유토피아'에 잘 드러나 있듯 모어는 그
에게서 일생의 지침이 되는 인격적 화를 받았다.
열 네 살 되던 해 모어는 모턴 경의 추천으로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있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기운을 접했다. 이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2년간 보통법을 공부한 뒤 열 여덟 살 되던 해 링컨법학원에 들어갔으며 그로부터 4년 후 변호사 자격
을 취득했다. 바로 이 때 모어는 에라스무스를 만나 절친한 우정을 나누었다. 모어는 그 밖에도 존 콜
렛, 기욤 뷔데 같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교분을 나누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어는 법학뿐만 아니
라 철학, 고전문학, 역사학 등 인문학 전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문학자로 거듭 태어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러한 지식은 '유토피아' 저술의 자산이 되었다.
모어는 스물 일곱 살 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는 헨리 7세의 가
혹한 세금 부과 안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결국 의원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플라톤이 그의 책 '
공화국'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나라 정치에 부질없는 간섭을 절대 안 한다'고 갈파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일로 모어는 의원직 사퇴로 끝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잘못 가르친 죄'로
100파운드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후 모어는 법률을 더 연구하면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고전들을 번역하는데 전념했다. 또한 파
리에서 대학제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509년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모어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 큰 기대를 걸었다. 모어는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는 사리에 얽매
이지 않는 공평무사한 행정을 펼침으로써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의 보호자'로 민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플랑드르와의 통상조약 체결,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및 한자동맹과의 협상 등을 통해 뛰
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529년, 수상 직책을 겸하던 대법관 임명은 그가 인생의 절정기에 들어
섰음을 말해주었다.
일인지하 만인지하의 자리이던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라 온 세상이 부러워하던 이 때, 그는 왜 자
리를 스스로 물러나 마침내 단두대에 올라섰을까? 왜 인생의 절정기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참혹한 죽
음의 길을 택했을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왜 그 고독한 길을 고집했을까? 심지어 부인 앨리스조
차 그 이유를 모른 채 그가 갇혀 있던 런던 탑으로 와서 그를 설득하였다.
당신이 놀랍기만 하군요. 지금까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송 받았는데, 이제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이 좁고 더러운 감방에서 쥐새끼들과 함께 갇혀 있는 걸 만족해하다니, 외국에 가면 자유를 얻을 수
도 있고 또 왕의 조정에 총애와 신임을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에요. 그 아름다운 집이며 당신 서재, 당
신 책들, 화랑, 정원, 그리고 당신의 아내인 나, 당신 자식들과 식솔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 하느
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일이 고작 여기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거란 말예요?
"내 집보다는 여기가 천국에 더 가깝지 않소?" 모어는 아내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앨리스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어는 한창 잘 나가던 당시 런던에서
멀지 않은 템스 강변에 저택을 지어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그 안에는 도서실, 미술관, 성당, 정원, 심지
어 과수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들어왔거나 보기 드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들였으며, 남이
자신의 소장품들을 완상해 주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다. 특히 새란 새는 모두 집에 사 모아 없는 종류
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족제비가 토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막기 위해 원숭이를 사들여야 했다고 한다.
이렇듯 세속적인 권력과 부와 안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토머스 모어, 총명한과 지혜를 천
하가 칭송하던 토머스 모어. 그가 단지 왕의 이혼과 결혼 문제 때문에 그 '모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눈앞에 두었다면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이해할 수 있을까?
헨리 8세의 이혼문제
1509년 헨리 8세의 등장은 새로운 영국, 새로운 유럽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그는 왕위계승 문제로 바
람잘 날 없었던 15세기의 영국 왕들과는 달리 안정된 가운데 왕위계승 수업을 받았던 유일한 사람이었
고 군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크게 기대할
정도였다. 모어 역시 헨리 8세의 즉위 무렵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캄캄한 암흑이 끝나고 새
로운 빛이 비쳐들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또 다른 어둠이 숨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헨리 8세의 통치기간은 사형수와 재판관, 타
살자와 피살자, 총신과 반역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나날들이었다. 헨리 8세가 통
치한 38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180명이 처형당했고 그 외에 암살 당하거나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미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헨리 8세와 몸을 섞고 살았던 여섯 명의 왕비 중에 세 사람
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헨리 8세의 광적인 집착은 섬나라 영국을 피
비린내로 진동하게 하였다.
1527년 어느 여름날, 모어가 랭커스터 공작령의 대법관 일을 그만두고 돌아왔을 때 헨리 8새가 그에
게 보여준 성경구절은 모어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바로 레위기 20장 21절이었다.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다. 그것은 재 형제의 부끄러운 곳을 벗긴 것이므로
그는 후손을 보지 못하리라.
이 성경구절은 새롭게 불어닥칠 폭풍우를 암시하였다. 헨리 8세는 즉위 직후 요절한 형 아서의 아내
였던 캐서린과 결혼했다. 아라곤(작금의 스페인) 왕가 출신으로 열 두 살 때 결혼한 캐서린은 아서가 워
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못해 본 상태였다. 헨리와 결혼 전 그녀는 자신이
숫처녀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캐서린 왕비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메리 공주 하나만
살아남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사산되거나 출산 직후 죽고 말았다. 그들 중 아들은 하나였는데 겨우 52
일 동안 생존했을 뿐이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은 추악한 근친상간이고 낳은 족족 아이들이
죽는 이유도 그런 죄악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헨리는 이미 마음이 떠
나 버린 캐서린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헨리 8세가 매독을 앓았기 때문에 자식들
이 사산되었다는 전기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었다. 아무튼 캐서린과의 결혼 역시 성경에 근거하여
합당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다음은 신명기 25장 5절이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은 경우에는... 시동생이 그 처를 아내로 맞아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어찌되었든 캐서린과 이혼하고 세 왕비로 떠오른 앤 불린과 결혼하는 것이 바로 '왕의 대사'였다. 하
지만 이것은 가톨릭 교회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당한 부부사이의 이혼은 철저히 금하였던 터였다.
무슨 수로 이것을 정당화시킬 것인가. 이제 '왕의 대사'는 영국의, 더 나아가 유럽 전체의 대사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헨리는 한번 결심하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왕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며
애를 태우는 앤 불린의 '사내 다루기'도 한 몫 하였다. 프랑스 왕궁에서 자란 앤으로서는 능숙한 일이
었다. 왕은 추기경이자 대법관이던 울지를 내세워 교황으로부터 이혼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신학자와 성직자들에게 엄청난 돈을 뿌리며 이혼의 정당성을 역설하는가 하면 심지어 캐
서린 왕비에게 '수도원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세속의 육체적인 관계를
청산하면 어떻겠느냐'고 좋은 말로 유인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자 캐서린 왕비는 단 한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 조건이란 헨리 8세도 함께 수도원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교황
의 허락을 얻어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륙에서의 상황도 불리하게 돌
아가고 있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19년 신성로마황제에 오른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이 없었
다. 카를 5세는 바로 캐서린 왕비의 조카였다. 조카로서 고모의 억울한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친정이 세도가 있고 부자면 시집살이가 편한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프랑
스와 스페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헨리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교황의 허가를 얻어내는데 실패한 울지의 운명은 자명하였다. 안 그래도 권력남용과 막대한 재산축
적으로 국민의 원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울지는 급기야 반역죄로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런
던을 방문하여 울지의 대접을 받았던 프랑스인들은 "클레오파트라나 칼리굴라(로마황제)가 제공한 만찬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울지는 부의 극치를 누렸다. 런던 남쪽의 아름다운 궁정, 햄프턴 궁정도 울지
의 것이었다. 그는 앤 불린을 헨리에게 붙여주어 채홍사 역할을 단단히 했지만 앤은 도리어 그의 축출
에 앞장섰다. 민비를 간택하여 고종의 왕비에 오르게 한 대원군이 결국 민비에게 축출 당한 것이나 다
를 바 없었다. 헨리는 그 햄프턴 궁정을 빼앗아 앤에게 주고 말았다. 울지의 해임 6일 만에 모어가 대
법관에 임명되었다. 1529년 10월의 일이었다. 모어는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전임자의 예를 통
해 나는 이 자리가 영광스러운 한편 위헌한 자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노고와 위험이 가득 찬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뻔히 알면서도 피바람의 진원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침묵의 무게
대법관으로서도 재직하면서도 모어는 국민들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다. 영국 역사상 모어가 재
직했던 시기만큼 송사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적은 없었다. "모아가 대법관일 때는 송사가 그쳤건
만, 모어가 또 나오면 어쩌리."하는 따위의 격언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는 '왕의 대사'에 대한 침묵
을 지키며 영국의 안정과 유럽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왕의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적극
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모어의 태도는 교황의 동의를 얻어 이혼을 하자는
온건론과 로마교황청에 반기를 들지는 강경론 사이에서 시국이 갈팡질팡하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토머스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사태는 돌변하였다. 헨리의 국부이자 모어의 강적인 크롬웰은
새로이 부상한 정치가 계급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정치가의 의무를 이렇게 말하고 싶
습니다. 정치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왕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력에 눈 먼
냉혈한이었던 이 사람은 그 후 모어뿐만 아니라 앤 왕후조차 처형하는 데 앞장서다가 스스로 사냥몰이
의 먹이가 되었다. 크롬웰은 1532년 4월 고문관 회의를 주도하며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와 성직자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지도자'라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16일 캔터베리 대주교회의는 국
왕의 동의 없이는 회의소집이나 주요결정을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영국교회는 이제 로마의 통제를
벗어나 사실상 국가의 한 조직이 되고 만 것이다. 바로 그날 모어는 건강상의 이유로 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모어는 이즈음 협심증 증세가 있긴 했지만 진짜 사직 이유가 뭔지는 헨리 8세를 포함하여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왕은 이듬해 1월 임신 중이던 앤 불린과 결혼하고 5월에는 새로 대
주교로 임명된 토머스 크랜머로 하여금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도록 하였다. 교황은 그 보
복으로 헨리를 파문시켰으나 헨리는 수장령으로 이에 맞섰다. 이제 영국의 교회는 더 이상 로마교황청
의 지시를 받지 않고 영국 국왕에 소속되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및 교황과의 결별이었다.
대법관직을 사임한 모어는 모처럼 공직에서 떠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마음에만 두고
있던 여러 저작들을 완성했다. 수입이 끊겨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가정생활은 여전히 따뜻했고 많은 친
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도 왕의 이혼과 결혼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533년 5월 거행된
앤의 왕후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평소 가까웠던 턴스턴 주교가 대관식용 예복을 사 입으라고 돈
을 보냈으나 그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그들의 요구를 하나라도 들어주면 그 다음 것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관식에 참석하면 그 다음엔 새로운 질서를 위해 강연을 하고 글쓰기를 하라고 강요당
할 것'이라고 했다. 대단한 혜안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의 권력의 요구에 '이번 한 번만'하면서 참여하지
만 세월이 지나면서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고 나중에는 결국 권력의 창녀가 되고 말았음을 역사는
실증해 주고 있다. 일제하의 수많은 조선 식민지 지식인이 그랬고 유신치하 지식인들이 그랬다. 모어는
권력의 본질과 지식인의 속성을 너무 뚜렷이 꿰뚫고 있었다.
모어는 더 이상 공인도 아니었고 그의 수중에는 아무런 권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헨리나 크롬웰은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의 침묵은 바로 왕의 이혼과 결혼,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기 때문이었다. 모어의 도덕적 무게, 그것이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다. 모어의
침묵은 '유럽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압력과 유혹이 쇄도했다. 주변 사람들을 동원해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
지 않는 것은 왕에 대한 적대행위'라는 논리로 모어를 협박하고 회유하였다. 이것이 통하지 않자 크롬
웰은 1534년 2월 마침내 정공법을 택했다. 모어를 검찰에 소환한 것이다. 소환 이유는 얼토당토않은 것
이었다. 엘리자베스 바턴이라는 여자가 '앤과 재혼한 왕이 그 죄로 말미암아 7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
라는 계시를 들었다'고 퍼뜨리고 다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사제들과 함께 반역죄로 처형당한 일이 있
었다. 그들은 모어에게 그 일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진실은 정반대였다. 모어는
신앙생활에 대해 조언을 구하러 온 그 처녀에게 그러한 말을 하고 다니지 말 것과 나라 일에 공연히
끼어 들지 말라는 충고의 편지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모어를 소환해 놓고는 그 일에 대해서
는 묻지도 않았다. 단지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모어의 대답은 단호하고 완강하였다. "국왕
과 관련한 사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에도 관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
다.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영국과 유럽 전역의 귀족, 지식인들이 헨리 8세와 크롬웰의 조치에 항의하였
다. 하지만 그들의 호소와 항의는 오히려 왕으로 하여금 모어를 굴복시켜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오랜 친구였던 노포크 공작이 '군주의 분노는 곡 죽음'이라며 모어를 설득하자 모어가 대답했다. "그
것뿐입니까, 공작? 그렇다면 공작과 나 사이에는 나는 오늘 죽고 공작은 내일 죽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
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미래에 무엇이 예비 되어 있는지 예견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런던 탑의 사계
모어는 일단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왕위계승법이 통과되었다.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불법인
만큼 그 소생인 메리 공주는 서출이고 앤 왕후와의 소생이 왕위계승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든 귀족
과 공직자들은 이 법령에 선서할 것을 명령받았고 거부할 경우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라고 위협받았다.
모어도 1534년 4월 13일 선서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모어는 서명할 수 없었다. 그 법령에는 교황의 영적
지도권을 부정하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불법인 이유를 열거하
면서 캐서린이 왕의 형수였다는 점과 왕의 결혼을 재가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 크롬웰이 보낸 사신이 모어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모어의 딸 마거릿이 문을 열다 사신은 짧게
소환장을 읽었다 "1534년 4얼 17일까지 런던 탑으로 출두할 것."
모어는 그때부터 처형당할 때까지 15개월 동안 런던 탑 감옥에서 보냈다. 런던 탑은 1066년 정복 왕
윌리엄이 런던을 지키기 위한 요새로 축조한 곳이었다. 런던 탑은 한 때 왕실의 거성으로 쓰였으나 그
후 감옥과 고문 및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악명이 높아졌다. 런던 탑에 어둡고 침침한 이미지가 드리워진
데에는 헨리 8세의 역할도 지대하였다. 이곳에서 모어뿐만 아니라 그를 잡아넣었던 앤 왕후를 포함한
여러 권신들도 함께 처형되었다. 런던 탑 안에는 감옥으로 쓰인 여러 탑들이 있었다. 지금도 탑 하나에
는 철처녀 둥 고문도구가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곳을 여행하던 런던 탑의 명물인 빨간 군복을 입
은 근위병이 안내하는 가이드투어가 있다.
이들은 런던 탑 곳곳을 다니며 누가 수감되어 있었고 어디서 처형당했는지 자세히 안내해 준다. 타임
머신을 타고 고문과 사형으로 얼룩진 역사 속으로 여행하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모어는 그 가운데 벨 탑에 수감되었다. 이 감옥의 창을 통해 그는 교황권을 옹호하다가 처형당하는
카루투지오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들을 매일 볼 수 있었다.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는 모어가 구금된
이 런던 탑 감방 문틈을 통해 보여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빠른 화면처리로 보여준
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고의 권력과 부를 누리던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물론 이 곳에서도
모어의 고집을 꺾기 위하여 온갖 시도가 행해졌다.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고관대작들이 줄지어 찾아와
친절을 보이며 마치 추밀원에서 회의하는 것처럼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
를 압박하기 위해 불시에 심문이 이루어졌고, 책 차입과 면회 금지, 엄중한 구금조치, 심지어 펜과 종이
의 압수조치가 수시로 내려졌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를 항복시키지는 못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질 나쁜 음식으로 질 나쁜 음식으로 바꾸어 급식하게 된 것을 간수가 미안해하자 모어는 "만일 내가 하
숙생활을 이러쿵저러쿵 불평하거든 나를 쫓아내시구려."하며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모어는 고통의 와중
에 기독교 지혜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시련과 위안'을 집필했다. 생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그는 마음의
문을 닫아건 채 다음 세상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 같았다.
재판 직전 모어는 머리 않아 집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리라 직감하면서 안토니오 본비시에게 마지막
이별의 편지를 썼다.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그에게 라틴어로 쓴 이 편지는 한 친구에게라기보다는 전세
계 휴머니스트들에게 보내는 작별인사 같았다. 그의 편지는 신께서 이 풍진 세상으로부터 그들 모두를
구출해 줄 것을 기원하면서 끝을 맺는다.
어떤 편지도 필요 없고, 어떤 장벽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으며, 어떤 경비병도 우리가 함께 모여 대
화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는 곳.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 그의 독생자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
원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그리고 이 어려운 계절,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당신과 나,
그리고 생명이 유한한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의 부와 그 모든 영광, 그리고 이 삶의 모든 즐거움을 함
께 나눌 것을 허용할 것입니다.
침묵의 자유를 위한 항변
수감된 다음해인 1535년 7월 1일 모어는 재판을 위해 웨스트 민스터로 이감되었다. 그곳은 모어가 대
법관으로 재직할 당신 여러 행사는 집전하였던 곳인데 어느덧 자신이 수장령에 근거하여 반역죄로 기소
되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기소장이 낭독된 뒤 오들리 대법관과 노포크 공작의 추궁이 이어졌다. 그들
은 왕의 권위를 '악의적으로' 침해했지만 지금이라도 고집스런 견해를 철회하고 참회한다면 여전히 왕
의 자비를 구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어는 대답했다. "오, 오들리 대법관. 당신의 선의
를 감사드리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에게 내가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직한 마음 그대로
의 나를 유지시켜 줄 것을 기도하고 있을 뿐이오. 당신의 기소장은 너무 장황하고 긴데다 오랜 구금과
질병, 현재의 병약함 때문에 나의 기지, 나의 기억, 나의 목소리로 충분히 답변을 못할까 봐 그것이 두
려울 뿐이오."
기소사실에 대해 차례로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첫째 혐의사실은 왕의 결혼에 저항했다는 것이었다. 모어는 단지 그의 양심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으
며 악의적으로 왕의 결혼을 반대한 사실은 없다고 부인했다.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가식적으로 그 결
혼에 동의하고 나섰다면 오히려 그것이 신하로서 불충한 태도라고 그는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소사
실은 왕위계승법이 통과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므로 소급입법금지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둘째 혐의사실이야말로 공소장의 핵심 대목이었다. 의회가 왕에게 허용한 수장으로서의 왕의 권능을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박탈하려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크롬웰 등과 만나 대화하면서 "나는 오직 하느님
에게만 충실하고 그 의지에 따라 행동할 뿐 이 문제(왕의 결혼)에 대해서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말
한 것이 그 법을 위반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모어는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이 법이든 세상 어느 법이든간에 나의 침묵을 처벌할 수는 없
다"고 반박하였다. 사실상 그는 헨리의 이혼이나 결혼에 대해 지지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반대한다는 말
을 내뱉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다시 검찰관의 반박이 이어졌다. "바로 그 침묵이 법을 위반한
명확한 증거이자 법을 중상하는 시위이다. 그 법이 옳고 정의로우며 합법적이라고 말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가 충성스럽고 진실된 신하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모어는 다시 "민사법의 격언에 따르
면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되어 있으며 자신의 침묵은 비난이라기보다는 동의를 뜻하는 것으로 추리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 이후 '사람은 누구나 생각만으로는 처벌받지 아
니한다'는 법이론이 이미 확립된 뒤였다. 모어는 침묵의 자유를 위해 항변하였다.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
과 양심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왕에 대한 중상과 폭동, 치안방해를 선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의 양심까지 문제삼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 양심과 생각을 드러내 보인 적이 추호도 없음을 확인해 두려 합니다.
사실 모어는 헨리의 이혼과 결혼, 그것을 위해 제정한 수장령과 왕위계승법, 그 결과인 로마교황청과
의 결별, 이 모든 것을 반대하였다. 검찰관의 말처럼 모어의 침묵은 그 모든 반대의 극점에 선 상징적인
시위행위였다. 일제치하 신사참배와 개명을 거부하는 행위가 바로 일제에 대한 반대 행위로 이해된 것
과 마찬가지이다. 왕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모어는 법정에서 자신의 침묵
이 반대의사로 해석될 수 없다고 따졌다.
이미 죽기를 작정한 그가 왜 헨리의 조치를 반대한다고 속시원히 외치지 않고 법률적 논쟁을 벌였던
것일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 위험한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어는 총명한 법률가였다. 그 점은 이 어리석게조차 보이는 모어의 행동을 이해하는 실마리이다. 목숨
은 목숨이고, 법은 법이었다. 그는 생명을 버리기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법률가로서 법적 논리의 옳고 그
름은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법조문 하나, 문구 하나에 매달리는 그의 모습
은 위대한 법률가의 모습이었다. 재판과정중에 등장하는 번득이는 기지, 항변에 이어지는 재항변, 공격
과 방어의 논리싸움은 큰 볼거리였다. 아직 근대적인 형사재판절차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법률 논쟁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사람들이 모어의 재판과정을 관람하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기소사실은 모어가 동료 피셔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반역을 격려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분
에 대해 모어는 '단지 오랜 친구에게 보낸 친밀한 대화의 조언일 뿐'이라며 "나는 양심을 정했고 그것
을 알렸으며 그 역시 자신의 양심을 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적은 것뿐이라고 했다. 또한
'두 개의 칼날'의 문제가 되었다. '의회법은 두 개의 칼날과 같다.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팔게 될 것이고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의 육체를 팔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모어와 피셔 두 사람의 분리심문에서 똑같이 나왔으니 두 사람이 공모한 증거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법을 지지하면 그의 영혼을 파는 것이고 반대하면 목이 달아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모
어는 그의 대답과 피셔의 대답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없으며 만일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지혜와
학문이 일치하기 때문에 생긴 것뿐이라고 일축하였다.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당대 최고의 기지꾼이며 최고의 법률가인 모어를 당해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검
찰관과 재판부는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뭔가 속시원하게 모어를 몰아붙일 증거가 나와야 했다. 이때
검찰총장 리치가 결정적인 반역의 증거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리치는 법정에서 쓰는 가발을 벗어 던
지고 스스로 증인석에 섰다. 안간힘이었다. 그는 6월 12일 옛친구로서 여전히 우정을 간직한 것으로 가
장하고 런던 탑에 있는 모어의 감방에 찾아가 서로 나눈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리치 : 만약 의회가 리처드 리치 나를 왕으로 한다는 법을 통과시킨다면 자네는 나를 왕으로 인정하
겠나?
모어 : 의회가 그랬다면 그래야겠지. 의회가 그럴 리 없겠지만. 그렇다면 말일세. 내가 이번에는 좀더
수준 높은 질문을 하겠네. 만약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법을 의회가 통과시킨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리치 : 그럴 순 없어. 그러면 내가 다른 질문을 다시 내보겠네. 우리 왕은 수장이 되었네. 자네는 왜
나조차 왕이라고 여길 거라고 하면서 우리 왕은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지?
모어 : 그건 달라. 왕은 의회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고 해임될 수도 있지만 교회의 수장은 그렇지 않
아. 그건 하느님의 문제야.
만약 리치의 말대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건 명백한 반역죄이고 법령위반이었다. 그러나 모어
는 대화의 내용을 부인했다. 그는 '내 자신의 위험보다 당신의 위증을 더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다'면
서 리치의 주장과는 다른 당시의 대화내용을 소개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대화내용은 오늘날처럼 녹
음해 놓을 수 없었다. 르위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증명하기 위하여 미국대통령의 정액마저 유전자감
식으로 밝혀내 법정에 제출되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러나 그때는 비과학적 증언만으로도 사람을
옭아맬 수 있는 시대였다. 모어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반문하였다.
"리치 총장, 내가 아는 한 당신을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만한 사람
이라고 역리 사람은 아무도 없소. 우리의 명성과 탄복이 자자하지 않았소? 그러므로 내가 그런 중대
한 문제인 왕의 절대적 권능의 대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역겨운 리치 총장 당신에게 혼자서 오랫동
안 고민해 온 내 양심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우스 웰과 팔머라는 두 사람을 증인으로 불러들였다. 두 사람은 당시 모어의
책을 가방에 싸서 밖으로 내오느라고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이쯤이면 리치
의 증언이 신빙성 있다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어차피 그 재판은 모어의 목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15분만에 배심원단은 유죄평결을 내렸다. 한 명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기 그 비겁자
들의 이름을 적어 역사에 남긴다. 물로 유죄판결을 반대하려면 바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비난
의 화살을 당기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역사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토머스 팔머 경
토머스 페르 경
조지 로벨
토머스 뷔르베지
지오프리 체임버
에드워드 스톡모어
제스퍼 리크
존 파넬
토머스 빌링턴
리처드 벨람
조지 스톡스
이상 열 한 명이었다. 이제 오들리 대법관의 차례였다. 헨리 8세 시대에 정치가들은 가장 친한 친구
들에게 가끔은 사형을 선고해야 했다. 오들 리가 할 일은 어서 빨리 이 더러운 일을 끝맺는 것이었다.
피고인에게 최후진술 기회를 주는 것조차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의 임무에 열중하던 오들리를 모
어가 제지하고 나섰다. 이제 유죄평결 후에 더 이상 다른 길은 없었다. 대법관과 재판 참석자들은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하면서 일순 침묵하였다. 모어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 순교자 스
테파노를 죽이는 데 동의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도 바울로 이야기를 꺼냈다. 모어는 재판관들에
게 그 두 사람이 '지금 하늘 나라에서 성자가 되어 있으며 거기서 영원히 친구로 있을 것'이라고 상기
시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확신하며 따라서 여러분들이 지금은 이 땅에서 재판관으로서 나를 정죄하지
만 나중에 우리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모어는 이 통렬한 풍자로 그의 재판관들을 곧바로 지옥에 보내 버린 것이다.
단두대에서 천국으로의 짧은 여행
런던 탑의 경비대장 윌리엄 킹스턴 경은 평소 모어를 흠모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모어를 호송하여
런던 탑으로 데리고 오면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모어는 할 수 있는 모든 말
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런던 탑에서는 딸 마거릿과 아들 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거릿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아버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모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
게 "마거릿, 인내해야 한다.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라. 오직 신의 뜻이란다"라고 타일렀다.
감옥에서의 마지막 날 모어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다. 모어는 자신을 채찍질하면
서 린넨수건을 수의처럼 두르고 죽음에 관해 명상했다. 왕이 그의 선고를 당초의 할복자결에서 참수형
으로 바꾸어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어는 "왕이 이제 자신의 동료 중 어는 누구에게도 그런 은전을 행
사하지 않도록 하느님에게 기도하였다"는 말을 남겼다.
모어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제 단두대로부터 천국으로의 짧은 여행만이 남아 있었다. 선고 그 다음
날인 7월 6일 이른 아침, 그의 후배이자 동료인 토머스 포프가 그날 9시 이전에 처형되어야 한다고 전
해왔다. 대법원의 젊은 관리인 포프는 모어와 잘 아는 사이였다. 학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나중에
포프는 옥스퍼드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창설하였다. 포프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게 한 것은 모어에
대한 또 하나의 친절한 배려였다. 모어는 "당신이 가져온 좋은 기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감사한다"고
말했다. 포프가 울음을 터뜨리자 모어는 그를 위로하였다.
모어는 해진 외투를 입고 수염이 막 자라난 초췌해진 얼굴로 손에는 빨간 십자가를 들고 런던 탑에서
나왔다. 모어가 처형장으로 가는 짧은 길에 한 여인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처형장에 끌
려가는 예수처럼 그 포도주를 사양했다. 처형장에 도착한 그는 단두대로 천천히 올라가 꿇어앉은 다
음 찬송가 51번을 반복해 불렀다고 한다.
"오, 하느님. 나에게 자비를 주십시오. 당신의 그 큰 자비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그리고는 단호히 일어나 참석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은 그들
을 위해 어디에서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
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그러나 하느님을 먼저 섬기는 신하로서 죽는다"고 말하였다. 이 말 한마디에 그
의 죽음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그는 결코 불충분한 적이 없었으나 단지 하느님의 계율을 어길 수
없어 죽음을 택한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사형집행관이 관례대로 꿇어앉아 용서를 빌었다. 모어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 집행관이 모어의 눈을 가리려 하자 모어는 스스로 준비해 온 린넨천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모어는 순교 과정에서 여유 있는 해학을 잃지 않았다. 마거릿의 남편이자 모어의 사위 로퍼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례를 전하고 있다. 모어는 미끄러운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
려올 때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에 임하는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
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형 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고 함께.
이리하여 런던 탑 감옥 옆에는 긴 수염이 달린 토머스 모어의 머리가 창에 꽃인 채 몇 주 동안이나
걸려 있었다. 비가 그치지 않고 줄창 내려 사람들은 이 비가 신의 눈물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왕의
노여움 때문에 아무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는 못하였다.
중세의 족쇄에 묶인 발로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다
토머스 모어도 다른 순교자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스로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얼마든
지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나 그는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모어는 그것이 자살로 비추어
질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과감히 내줄 만큼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다. 나의 주제넘음 때문에 하
느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렇지
만 만일 하느님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 주신다면, 나는 하느님이 큰 자비로 나에게 은총과 힘을 주시
리라고 믿는다."
모어의 죽음에도 초인적 영웅의 무용담도, 전투적인 투쟁도 없었다. '그가 가진 호소력은 두려움과
의심과 혼란에 휩싸여 떨고 있는 유한한 인간성'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 모두에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웅이 되었으며 바로 그런 요소 때문에 오히려 순교
자들 중에 인간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영웅이나 순교자들이 가진 단호함과 선명함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그이 이론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의 생애 가운데서도 모순되는 언동이 적지 않았다. 그의 불후의 명작 '유
토피아'에서는 바로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배어 나온다. 그리스어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의
'유토피아'는 플랑드르와의 통상협정 교섭차 파견되어 유럽의 여러 도시를 방문, 유수의 인문학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갖게 된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다. 1516년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아 루뱅에서 출간된
이 책은 유럽 인문주의자들과 고위 공직자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순식간
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풍자와 해학, 기지가 넘쳐나는 이 책은 모어가 라파엘 히슬로데이(그리스어로
헛소리라는 뜻)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제 1부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당
시 유럽현실에 대한 비판이, 제 2부에서는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덕, 종교를 소
개하였다. 모어는 여기서 라파엘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하여 그에게 왕의 고문관으로 일해 보라고 권하
지만 거절당한다.
"왕의 고문관이 되면 동료들의 꾐과 압력에 못 견뎌 부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고 못난 놈이라
고 동료들로부터 지탄받을 걸 각오하고 계속 건전하고 순진한 생가를 품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
하는 것 외에는 딴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인 정책지도로 사태를 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망상에 불과합니다."
모어 자신의 의견도 라파엘과 같았으나 그래도 최악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공직 생활은 공직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과 현실적인 참여의 변으로 이
중주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토피아}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는 영
국에서의 종교개혁 바람을 이단으로 몰아 잠재우고 수많은 신교도들을 법정과 형장에 세웠다.
모어는 고위관리로 출세하고 세속적 향락을 누리면서도 한쪽은 깊은 영성과 도덕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딸 마거릿만이 알고 있도록 한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는 좋은 관
복 안에 늘 거친 모직셔츠와 말총으로 만든 속옷을 입어 피를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로써 하느
님의 뜻을 잊지 않고, 세속의 단맛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유토피아}에서
왕이니 고문관이니 귀족이니 사제니 하는 권력자들의 부패하고 어리석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
다.
별이나 태양 그 자체를 바라보며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데도 태양이나 별빛에 비하면 희미하
기 그지없는 보석을 손에 넣고 보아야만 기쁨을 느끼는 족속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유토피아인들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지요. 질 좋은 양털로 짠 옷감이나 양복을 해 입는 것 하나만으로 자기가 남들보
다 더 귀하신 몸이라고 생각하는 얼간이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답니다. ... 쓸모
라고는 전혀 없으면서도 탐욕스럽고 악독한 인민과 겸손하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에
봉사하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국민이 누리는 행운은 서로 바뀌는 게 타당할 것입
니다.
모어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탐욕스럽고 악독한 계급'에 가까웠지만 그 마음가짐이나 처신에
있어서는 분명히 반대편에 속했다. 그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모어에게 실제로 부패와 비리혐의가 있었다면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안달했던 정적들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점은 영국 역사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며 숭
앙을 받았던 위대한 대법관이자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다른 점이었다. 베이컨은 1621년 뇌물죄로
벌금 4만 파운드와 런던 탑에서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모어의 청렴성과 도덕성을 두고 스위프트 등
여러 전지작가들은 모어를 '이 왕국(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덕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하늘
나라로 가는 대로라고 일컬어지던 수도원 생활을 거부하고 결혼을 하고 법률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스스
로에 대한 가혹함과 성찰을 통하여 양심과 영성에 집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어는 대륙의 선진적이고 대표적인 인문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새롭게 형성되고 있
던 민족국가의 형성, 종교개혁 등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 징후들을 읽어냈으면서도 하나의 통합된 기독
교 세계라고 하는 중세기적 허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근대의 문턱에서 새로운 인간
형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중세의 꿈과 이상의 족쇄에 발이 묶여 있었다. 모어
는 비록 중세의 질서였던 로마교황청을 위해 순교했으나 그 과정을 통해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근대의
핵심적인 이상과 가치를 드러낼 수 있었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과 허구, 우유부단과 불일치 때문에 우리는 모어가 무엇을 위해 죽
었는지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중세 1천년의 시대가 용틀임하며 새로운 사회로 옮아
가는 과도기 속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혼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어의 위대성은 바로 혼란의 와중
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정형화된 영웅사관 속의 붙박이 순교자였다면 그는 매력을 잃었
을 것이다. 그의 매력은 진정 자신의 모순된 인식, 불일치하는 행동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수동적이
고 온건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강인성의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모어는 갈수록 차분해지고 갈수록 용
감해진다. 마지막 재판과 처형 장면에서 모어는 양심과 신념의 수호자로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인다. 혁
명기이자 전환기였던 시대의 포로가 된 모어, 총명과 도덕을 함께 겸비한 고매한 인간 모어, 현실과 이
상 사이를 유영하며 비극적 운명을 떨쳐낼 수 없었던 모어, 그에게 우리는 동정과 감동의 박수를 보내
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행히도 모어는 섬세한 내면의 모순과 고민들의 궤적을 보여주는 거대한 자료의 창고를 우리는 가지
고 있다. 다른 위인들과는 달리 모어는 스스로 그의 영혼과 정신을 간파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영어와 라틴어로 쓴 150만 단어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과 편지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
의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일생은 수많은 전기작가들을 끌어 모았다. 우선 그의 사위였던 윌리엄 로퍼가
모어의 모든 행적을 가까이에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후대인들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물론 그가 기록
한 모어의 전기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626년에야 파리에서 출간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초상화를
남긴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하다. 한스 홀바인이라는 화가가 그린 모어의 초상화는 처형되기 20여 년
전, 인생의 황금기 때 모습이면서 궁전의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승려복을 입고 있다. '영혼
의 의도'까지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는 이 초상화에서 모어의 모습은 암갈색 머리카락에 굳게 다문
입술, 깊게 파인 볼에 도드라진 코, 고통스러운 세상을 의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쑥 들어간 눈동자를 가
진 내성적이며 통찰력 있는 지식인의 얼굴이다. 그 눈동자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살았던 시대, 그가 했
던 고민, 그가 이루었던 수난 속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
역사의 '죄와 벌'
모어를 처형한 자들은 응분의 처분을 받았다. 모어의 예언대로 영국과 유럽 대륙 전체를 진흙구덩이
속에 처박았던 극성스런 앤 왕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엘리자베스만 덩그마니 낳은 채 결혼 2
년만에 간통혐의로 구금되고 마침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랑의 열정은 짧고 고통의 시간은 길
었다. <천일의 앤>은 이 영특한 소녀의 꿈과 야망, 금세 피었다가 지고 말았던 그녀의 청춘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그나마 그녀의 딸이 다행히 엘리자베스 1세로 즉위하여 대영제국의 번영을 열었으니 천
국에서나마 기뻐할 일이었다. 헨리의 '입맛에 맞게' 국정을 농단하던 크롬웰 역시 모어가 처형된 지 5년
후인 1540년 사형에 처해졌다. 순서만 다를 뿐 이들도 결국 노포크 공작에게 모어가 말한 대로 그의 뒤
를 이은 것이다. 정의로운 통치력을 계속 잃어가던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은 어지러운 국정
에 대해 솔직한 비판을 일삼다가 결국 반역죄로 목숨을 잃
고 말았다. 윈스턴 처칠이 적절히 표현했듯이 헨리 8세는 '엄청난 사람이었지만 그의 자문관들에게는
악몽'이었던 것이다. 리치 검찰총장만이 모어 처형으로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 리치는 그 보상으로 리즈
수도원에 거대한 저택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내전 중에 찰스 1세의 반대자 입장에 섬으로써
핍박을 받았다. 헨리의 궁정은 이제 간교하고 부패한 기생충 같은 신하들의 집단 서식지가 되고 말았
다. 모어가 있었던 초기의 황금시대는 가고 공포정치만이 휩쓰는 전제왕조로 전락함으로써 헨리 8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헨리 자신도 이미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앤
마저 단두대로 보낸 후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계속되었다. 헨리의 청혼을 받은 밀라노 공작의 미망인 크
리스티나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머리가 두 개 있지 않는 한 영국왕과는 결혼할 수 없다."
반대로 순교자 모어는 희생의 대가를 조금씩 보상받기 시작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886년 모어
에게 시복하였다가 그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1935년 그를 순교자로 선언하였다. 긴
세월이 걸렸지만 모어의 죽음은 결국 성자로서 면류관을 쓰게 된 것이다. 그의 죽음의 대가는 단지 자
신의 구원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모어가 죽은 뒤 70년 후 국왕 제임스 1세는 법원이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교회의 관할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재판관들은 왕의 대리인인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법원이 다루고 있던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간섭하려 들었다. 그러나 법원은 '왕은 만인
위에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법 아래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 말은 모어의 지론에 근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하버드 법대 입구에 다음과 같은 라틴어로 아래 새겨져 법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들
이 영원한 금언으로 삼고 있다.
Rex non debt esse sub homine sed sub deo et lege
(The King is under no man but under God and law)
그로부터 다시 50여 년이 흐른 1649년, 찰스 1세가 전통법과 국가의 자유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혐의
로 모어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찰스 1세는 자신이 법 위에 있
다고 주장하였으나 목숨을 잃은 것은 자신이었다. 당시 하원은 '국민이야말로 모든 정당한 권력의 원천
'이라고 선언하고 그를 결국 처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절대군주제의 피비린내를 씻어낸 후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이때부터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지적한 대로 '우리의 위대한 민주적 제도는 사람들의 죽음에 기초'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 당하기 직전 한 연설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다.
수소폭탄도 유도미사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자 하는 영원한 욕망이다"라
고 말했다. 토머스 모어 역시 가와 같은 인류의 영원한 욕망에 따라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국가의
권력은 모어를 시련에 들게 하였으나 모어는 죽음으로 대답하였다. 자신의 목을 걸고 '최악'의 길을 막
으려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자신의 양심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녀의 엉덩이에는 점이 있다.
마녀재판 : 화형 당한 100만 중세 여성의 운명
자연재해보다 무서운 재앙
이 재판의 주인공은 위대한 영웅도, 신념에 찬 한 의인도 아니다. 한 시대의 몽매와 편견, 권위와 폭
압의 질서가 빚은 가장 비극적인 군상, 바로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라는 올가미를 쓴 채 몽매하고 우둔한 법정에 섰고, 마침내 화형장의 불길 속
으로 사라졌다. 어떤 학자는 독일에서만 수십만 명의 여성이 마녀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빈 해리스는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마녀 또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기술한다. 심지
어 전 유럽에서 희생된 사람이 10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는 얘기다.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었다. 도대체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 불법적인 악마연회에 참석한 죄
- 악마의 꽁무니에 입맞춘 죄
-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를 지닌 남성 악마 '인큐비(Incubi)'와 성교한 죄
- 여성 악마인 '서큐비(Succubi)'와 성교한 죄
이 황당한 죄목은 점차 생활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으로 확대되어갔다.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선명한 현실적인 영역으로 옮아간 것이다.
- 이웃의 암소를 죽인 죄
- 우박을 불러온 죄
- 농작물을 망친 죄
-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은 죄
지금 현재 이러한 항목을 범죄로 인정하는 나라는 아무 데도 없다. 또한 마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들의 악행에 대해서도 믿는 사람은 없어졌다. 스카라는 학자는 '오늘날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지 않는 것만큼 확고하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는 사
람이 과거에 없었던 것처럼 중세인들은 마녀의 존재와 그 위험성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더라도 불과 2~3세기 동안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인간에 의해 죽음을 당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광기 어린 집단학살을 살펴보면 인간이 과연 이성적 존재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집단학살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수 있다. 한 명의 마녀가 고문을 못
견뎌 또 다른 몇 명의 마녀를 실토하는 방식으로 수만, 수십만 명의 마녀가 기하급수적으로 탄생된 것
이다.
이 사건은 후에 서독 영토가 된 로텐부르크에서 1601년에 일어낫던 일이다. 방랑 여인 두 사람이 고
문에 못 이겨 자기들이 마녀라고 자백했다. 악마의 연회에서 본 사람을 대라는 협박에 그들은 빵 제조
업자의 아내 엘제 그빈너의 이름을 얘기했다. 엘제는 1601년 10월 31일, 수사관들 앞에 끌려갔지만 마법
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수사관들로부터 불필요한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
냐는 협박을 받았지만, 그녀는 계속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들은 그녀의 두 손을 밧줄로 묶어 공중
에 매달았다. 스트라페이라는 이 고문은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매달았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는 것이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고백을 할 테니 내려놔 달라고 애걸했다. 땅에 내려놓자
그녀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으나 의식을 잃을
때까지 자백하지 않았다. ... 그 사이 수사관들은 엘제의 딸 아가테를 잡아왔다. 그들은 아가테를 감방
에 처넣고 자신과 어머니가 마녀이며 빵 값을 올리기 위해 농작물을 망쳤다는 자백을 할 때까지 매질
을 했다. ... 종국에 가서 엘제는 악마 애인의 두 날개를 타고 악마연회에 참석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
자 수사관들은 그 연회에서 얼굴을 본 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다. 엘제는 두 사람 - 스피이쓰 부
인과 붸이쓰 부인의 이름을 댔다. ... 엘제 그빈너는 1601년 12월 21일에 화형당했다.
광란의 마녀재판
마녀재판은 1420~30년경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 알프스 일대, 도피네 지방, 그리고 쥐라 산맥 일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보두아인들이 정착한 지역이었다. 이들이 신봉하였던 보두아교는 12세
기에 리옹의 상인이던 피에르 발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청빈을 계율 삼아 성서 중심의 엄격한 그리스도
교를 실천하고 설파하는 종파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들은 이단으로 지목되어 알프스의 험한 계곡지
대로 도피해야 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였다. 연대기 편자들은 아라스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보두아 신자들이 자백한 마법의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와 주술적 요소가 결합된 보두아교의 내세를 믿었고 마녀집회에 갈 때에는 특수하
게 제조된 고약을 온몸에 바르고 다리 사이에 가는 막대기를 끼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
먼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아라스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숲에서 정기적으로 벌어지던 마녀집회
에서는 악마가 숫염소, 원숭이, 개, 도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참석자들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주
술을 암송하며 악마를 경배했다. 집회를 갖는 동안 그들은 가톨릭 교의를 저버리고 하느님과 삼위일체,
성모 마리아를 조롱했으며 십자가를 짓밟고 예수의 수난상에 침을 뱉었다. 집회는 두꺼비들에게 성찬
의식을 행하는 저주로 끝났고 두꺼비들은 이어 먼지로 변하여 불길한 악의 가루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렇게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람과 동물을 죽음으로 이끌었으며 폭풍우를 일으키고 전염병을 만연케
했다.
13세기 이후 유럽 각지에서 여러 이교도가 고개를 들었다. 원시 기독교의 건강한 부분을 계승하자며
종교지도자를 공격했던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역시 이단으로 몰렸다. 교회 내부에서도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교회의 부패로 기존의 교리와 교회의 지도력을 벗어나려는 무리가 수없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관용정책을 강경책으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이단을 탄압할 방법을 찾았는데 그중 마녀재판이
가장 유효적절했던 것이다.
원래 마녀는 중세 마녀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녀라기보다는 주술을
행하는 여자를 말하는 정도였다. '와이즈 우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신비한 직관으로 의학지식을 가지
고 병자를 고치기도 했으며 여성의 다산을 돕거나 또는 반대로 낙태시키는 일'을 하였다. 일상생활의 필
요성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들은 전염병이 돌거나 자신들이 도와주던 환자나 태아가
죽으면 마녀로 낙인찍혔다. 그들의 의학지식이 마녀로 몰리는 덫이 된 것이다. 14세기를 대표하는 이단
심문관 베르나르 키는 부부의 불화를 초래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병을 고치는 자를 주의하라고 촉구하
였다. 1627년 독일 쾰른에서 24명이 마녀로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 7명이 산파였다.
가톨릭의 이단박해는 1233년 이단심문소의 출발로 본격화되었다. '신의 개'라고 불리는 이단심문소
는 그후 가혹한 고문과 심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교황은 마녀를 최악의 이단으로 처벌하도록 이단심문
관에게 허가하는 한편 많은 신학자, 악마학자들로 하여금 마녀에 대한 공통의 특징, 그 식별방법 등을
연구하게 하였다. 마녀의 본질을 논하는 허다한 서적이 간행되고, 저명한 법률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파
는 계약의 성질을 연구하였다. 특히 1484년 12월 5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칙서는 마녀의 존재를
공인하고 그들을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문서였다.
최근 우리들 귀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마인츠, 퀼른, 잘츠부르크, 브레멘 등 북
부 독일 지역 교구들에서 다른 지방이나 도시에서와 마찬가지고 남녀 할 것 없이 자신의 구원을 망각하
고, 가톨릭신앙으로부터 벗어나 마녀에게 의탁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술과 마력,
푸닥거리나 미신적인 언동 따위로 여인들의 자손과 어린 짐승들이, 땅의 기운과 포도밭의 열매들, 과실
들이 쇠잔해지고 사멸해가고 있습니다.
이 칙서는 그후 마녀사냥의 헌장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마녀의 존재와 악행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
는 자명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2년 후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된 [마녀망치]는 선풍적인 인기
를 끌며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슈프랑거가 저술하였다. 엥스티토리스는 도
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가 보두아교인과 후스 계열의 종파를 비롯한 이단자들을 추적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고, 슈프랑거는 쾰른 대학 신학부 교수로 명성이 자자한 학자였다. 이 책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마녀가 된다는 수많은 학설을 총망라하였고, 마법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녀를 발견하고
추적하는 방법을 설명하였으며 나아가 마녀가 실재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연구하였다.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이 책은 더욱 확산되어 마녀사냥의 지침으로 사용되었다. 1869년까지 29판이 출간될 정도로 베스
트셀러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마녀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형법은 마녀를 엄벌에 처하도
록 하였다. 마녀를 적발, 추궁하는 것은 관리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에게도 신앙수호차원의 의무사항이
었다. 전례 없던 마녀 박해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 유럽에 번져나간 마녀재판이
극점에 다다른 것은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말 사이였다. 마녀를 처단한 사례를 기록에서 찾아보자.
.1582년 바이에른에 있는 어떤 백작의 한 작은 영지에서 한 명의 마녀가 체포되었다. 이어 연속으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당하였다.
.1587년 도릴 지방의 200여 촌락에서 1587년부터 7년 간 368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당하였다.
.1590년 남독일의 한 소도시 시의회는 거리를 나돌아다니는 마녀를 철저히 일소하도록 결의하였다. 이
후 3년 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당하였다.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년부터 1676년까지 197명의 마녀가 이 도
시에서 화형당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에서 1564년부터 1748년까지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나소누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4년 간 255명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부리튕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
후 3년 간 114명이 처형되었으며, 제롯부르크에서는 1679년 한 해에 97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튀링겐 숲에 인접한 게오르겐탈이라는 인구 4,000명의 작은 도시에서 1652년에서부터 1700년 사이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되었다.
.반베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년부터 1631년 사이에 화형당한 마녀가 900명이 이르렀다. 1627년부터 4
년 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당한 157명의 희생자 중에는 시의회 의원, 고급관리들의 부인, 그 지방의 처
녀, 8세, 9세, 12세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 간 799명의 마녀를 화형시켰는데 그는 일생동안 1,000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니콜라스 레미라는 사람도 재직 15년 간 화형시킨 마녀가 900명에 달했다.
마녀 판별법
이렇게 수십만 명의 마녀 희생자들이 생겨난 데는 바로 중세유럽의 무자비한 사법절차와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단지 풍문만으로도 마녀는 체포될 수 있었다. 누가 마녀라는 소문이 나면 즉각 이웃들에 대
한 조사가 실시되고 강압적인 심문이나 유도 심문을 통해 얻어낸 증언에 의해 곧바로 마녀가 되었던
것이다. 사소한 의심만 가지고도 수사착수의 단서가 되기에 족하였다. 온갖 질병과 사고, 태풍과 흉년,
사산한 아이, 언쟁과정에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십자가 한쪽이 개어진 묵주를 가지고 다니는 행동
등이 모두 의심거리가 되었다. 이미 마녀로 소추 받은 자기 심문과정에서 누군가를 지목하면 그 사람
도 마녀로 체포되었다. 마녀로 처형된 어린아이들은 대개 그들의 어머니가 마녀였기 때문이었다. 심지
어 증거능력이 없는 미성년 아동들의 증언에 따라 마녀로 소추되곤 하였다.
마녀로 고발되거나 체포된 자가 실제 마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데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가장
흔한 방법이 물에 의한 실험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져
보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위에 떠오르면 악마와 교접한 근거가 되었고 빠져 죽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
주되었다. 결백이 증명되더라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마녀용의자의 몸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시험도 마녀판별법의 하나였다. 마녀는 몸이 가볍다는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저울시험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한 소도시에서는 마녀의 몸무게를 25킬로그램으로 규
정했다. 1782년 헝가리 어느 지방에서 이러한 저울시험을 통해 13명의 마녀를 산채로 불에 던졌다는
기록도 있다. 형리들이 저울눈이나 추의 무게를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밖에 악마의 표징을 찾는 방법이 있었다. 몸의 어딘가에 악마의 표징이 있으리란 믿음에서 몸의
털을 모두 깎아낸 다음 바늘이나 칼로 찔러 보는 방법이었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부위가 나온다면 그
곳이 바로 악마의 표징이었다. 사마귀, 반점, 부스럼, 혹 심지어 기미와 주근깨조차 악마의 낙인으로 간
주되었다. 그런 낙인이 없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었다. '악마는 의심스런 계약자에 대해서는 자기 눈
만으로 표시해두기 때문'에 표식이 없는 마녀도 있을 수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601년 일흔 살의
과부 드 뤼는 자신이 마녀라는 소문과 평판 때문에 스스로 당국에 출두하여 잘못된 소문임을 밝혀달라
고 요구하였다. 마녀를 274명이나 찾아냈다는 이단심문관은 이 과부의 몸에서 모든 털을 제거하고 긴바
늘을 이용하여 온 몸을 찔러 보는 실험을 실시했다. 악마가 이 노파와 맺은 계약을 증명할 속셈으로
노파의 몸에 남겨놓았을 흔적을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결국 왼쪽 어깨 위에 있는 다섯 개의 점을 발견
하고 이들은 이 과부가 마녀임을 증명해 냈다. 그녀는 목졸려 살해된 뒤 화형당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 역시 마녀의 증거가 되곤 하였다. 한 심문관이 프뤼동이라는 마녀 용의자에
게 처참한 고문을 가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자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울어 더 이
상 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구 두들겨 팼답니다"라고 대답했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거나
긴장하는 경우 눈물샘이 고갈될 수 있다고 오늘날 여러 의학논문들은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악마와 맺은 중요한 계약이라고 간주되었다. 악마와 마녀는 계약서
를 작성하면서 악마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한다. 말하자면 마녀의 신통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부여받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방법은 보통 육체적 교섭을 통하여 가능하다. 악마는 남성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육체적 관계를 통하여 그 악마성이 여성인 마녀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악마는 보통
멋있는 신사, 기사, 상인, 사냥꾼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 궁핍한 처지에 있는 여성에게 접근하여 이들에
게 도움을 주거나 감언으로 유혹한다.
마녀 용의자가 수사과정에서 밤중에 집에 있지 않았거나 행선지를 대지 못하는 경우 마녀회의에 참석
한 근거가 되었다. 체포될 당시 지나치게 놀라는 모습이 마녀의 징표로 여겨지는가 하면 지나치게 차
분한 것도 마녀의 습성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당국의 의심에 걸려든 사람은 어떤 경우에든 마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러한 수사와 재판절차조차 거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
고 있던 1644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 한 목동이 나타나 마녀를 알아볼 수 있는 투시력이 있다고 자
처하며 돌아다녔다. 물론 그가 지목한 사람들은 마녀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670년 베아른에서
는 열 여섯 살 난 어린 도제가 마녀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고 자백하였다. 이에 따라 이단심문관
은 그로 하여금 그 지방에 우글거린다는 마녀들을 찾아내라며 주변 마을을 순회하게 하였다. 그에게
지목 당한 사람은 6,21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마녀를 판가름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교황사절은 마녀판별에 고민하는 재판관들을 향해 "한 사람
도 남김없이 죽여라. 신이 분별해 주실테지"라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이단심문관들은 이 독려에 충실히
따랐다.
마거릿, 그대는 자유의사로 작성된 자백서를 추인하겠는가
당시 유럽 여러 나라는 이른바 규문주의 소송절차를 채택하였다. 판사와 검사가 구분되어 있지 않았
기 때문에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이 수사, 기소를 맡고 재판까지 맡았으니 공정한 재판이 열리기 어려
웠다. 마거릿이라는 여인이 중세의 법정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 점이 보다 분명히 보일 것이
다.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자백하였을 때 수사관은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백한 것을
부인할 의사가 있으면 지금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도움을 주겠다. 만약 당신이 법정에서 그 사실
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다시 내 손아귀로 돌아와 이제까지보다 더 지독한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돌에 눈물이 흐르도록 할 수 있다." ... 마거릿이 법정에 끌려갔을 때 그녀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
고 손에는 포승이 묶여 피가 배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간수와 자신을 고문한 그 수사관이
서 있고 그 뒤에는 경비대가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자백서가 낭독되면, 수사관은 이렇게 물었다. "마거
릿, 그대는 자유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자백서를 추인하겠는가?"
더구나 이 소송법 아래에서는 고문이 합법적이었다. 마녀는 바로 이 고문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고문
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어떤 마녀 용의자도 처음부터 스스로 마녀라고
자백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행해진 고문은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만든 기상천외한 것
으로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건강한 남자조차 견디기 여러분 고문을 연약한 여자에게 행하
였으니 100퍼센트 자백을 받아내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찍이 성아우구스티누스는 '고문에 의해
죄인으로부터 참된 자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보 같은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384년 로마의 교회
회의에서는 공식적으로 고문이 금지되었다. 고문을 금지한 기독교가 고문을 부활시킨 장본인이 되었으
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두 발을 결박당하고 벽에 고정된 고리에 손목이 묶인 채 형틀에 눕혀진 용의자는 일단 9리터 남짓 되
는 물을 삼켜야 했다. 이렇게 해도 자백하지 않을 경우 또 한번 같은 양의 물을 입 속에 들이부었다. 바
로 물 고문이다. '가장 탁월한 기술'로 알려진 손톱 밑 바늘로 찌르기, 밧줄과 쐐기를 이용하여 두 다
리 비틀기, 불로 발바닥 굽기 등도 주된 고문 방법이었다. 고문은 세 번 허용되었으나 고문과 고문 사
이 잠깐 동안 휴식시간을 주는 게 보통이었다. 이것은 마녀의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이어질 고문에
대한 공포심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고문실은 고문기구가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설치되었고, 고문
에 못 이겨 터져 나오는 신음과 절규가 옆방에서도 들리도록 설계되었다. 누구도 자백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단심문관은 용의자가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후 추가로 다른 마녀의 이름을 대면 이
를 토대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한편 마녀를 양산하는 데 앞장섰던 이단심문관들이나 형리들은 부와 명예, 지위를 보장받았다. 이들은
교묘한 고문과 심문 기술을 발전시켰고 법정에서 유죄를 확보하기 위해 능란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훌륭한 기술자였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고문전문가 중 한 사람은 1578년부터 1617년까지 뉘른
베르크에서 심문관으로 근무한 프란츠 슈미트이다. 그가 남긴 일기장을 보면 361명의 마녀 처형과 345
명의 죄수에 대한 고문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나마 그의 재임 기간 중 몇 해 동안 행한 것
일 뿐이었다. 그는 퇴직할 때 국가로부터 엄청난 연금을 받았고 1634년에 죽었다. 슈미트의 일기를 보
면 새디즘이나 잔학성이 엿보이는 부분은 없었고, 단지 매우 능률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 성실한
직공으로서의 면모만 드러나 보였다. 이단심문관으로 명성을 날린 스페인의 이단심문소장은 재직 18년
동안 10만 220명을 화형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녀의 망치'를 쓴 슈프랑거는 다음과 같은 수 많
은 심문기술과 요령을 그 책에 담았다. '마녀의 존재를 믿는냐 안 믿느냐를 마녀용의자에게 물어라. 믿
지 않는다고 답변하면 그것은 이단의 설이므로 즉각 처형할 수 있는 값어치가 있다. 믿는다고 대답하면
자신이 마녀가 아니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묻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가하라.' 슈프랑거의
추궁을 벗어난 마녀는 한 명도 없다고 알려졌다.
화형 비용까지 물어야 했던 마녀
가톨릭이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그 당시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
다. 마녀는 바로 신의 적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자였다.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받았
지만 차츰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화형, 참수형, 교수형 등의 엄벌을 받았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
스, 핀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 가혹한 고문과
엄격한 절차를 무사 통과하여 살아난 경우가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형 방법은 화형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산채로 태우기도 하고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시
체를 태우기도 하였다. 교회가 이단자나 마녀를 주로 화형에 처한 이유는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자
들은 포도나무가지처럼 던져버리고 말리라.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라. 그리고 태워버려라'는
요한복음 15장 6절 때문이었다. 이단자나 마녀는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자'였던 것이다. 또한 행
여라도 마녀가 마귀의 힘으로 되살아나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단심문관
들과 재판관들은 마녀가 완전히 재로 변한 것을 보고서야 잠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나마 재판관이 베풀
었던 자비라면 어린아이들은 화형 외에 참수형을 집행한 것 정도였다.
교회는 대체로 한달 전에 화형을 공고했다. 고문 때문에 이미 죽은목숨이나 다름없는 죄인들은 그
한달 동안 토굴이나 지하감옥에서 썩은 빵을 먹으며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했다. 어둡고 습한 감
옥 안에서 쥐와 함께 살아야만 했다. 화형식은 일종의 축제처럼 치러졌다. 깃발과 꽃다발이 건물을 장식
하고 베란다에는 양탄자가 깔렸다. 화형식은 도시 중앙에 있는 광장에서 거해되었다. 화형대와 가까운
거리에는 재판관석과 함께 영주나 주교 같은 귀빈을 위한 관람석이 특별히 준비되었고 심지어 그들을
위한 화장실까지 설치되었다.
화형식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먼저 화형식 날 동이 터 오면 교회는 화형식을 알리는 종을 울리
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날 아침 마녀들은 머리를 깎고 깨끗한 흰옷을 갈아입고 포도주까지 곁들인
최후의 만찬을 든 다음 형장으로 끌려간다. 마녀가 나타나면 구경꾼들은 큰소리로 욕설과 저주를 퍼붓
는다. 마녀가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 재판장의 설교와 미사가 이어진다. 미사 뒤에 드디어 죄목이 열거되
고 선고가 이루어지는데 일정한 격식을 갖춘 선고문은 성경구절이나 교부철학을 장황하게 인용한 것이
어서 낭독에만 몇 시간씩 걸렸다. 이런 의식이 모두 끝나면 성직자와 형리가 마녀를 화형대로 끌고 간
다. 화형대에 몸을 묶기 전 성직자는 마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며 회개할 것을 권고한다. 마녀는 입
에 재갈이 물려 있기 때문에 성직자의 권고에 대해 몸짓으로밖에 답할 수 없다. 마침내 사형집행인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마녀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심지어 고문과 화형 비용까지 마녀가 부담하게 하였다. 마녀로 낙인
찍힌 희생자는 자신의 처형 비용까지 부담한 셈이다. 1617년 독일의 한 마녀재판기록을 보면 고문에
든 비용을 다음과 같이 마녀 가족에게 청구하였다.
끌어올리기 14번, 기둥에 묶기 2번, 채찍으로 때리기 4번, 회전의자 사용 4번, 유황, 역청, 알코올로
지지기 각각 2번, 28번의 심문비용을 합해 모두 8플로렌스 굴덴 40클로네, 관절 뽑기, 태우기, 청소하기,
훈향료 등이 4플로렌스 굴덴, 형리와 그 보조자들의 숙박료와 식비 20플로렌스 굴덴
1631년의 한 문건은 화형 비용의 내역을 이렇게 열거하고 있다.
교수대에 오르는 사다리 사용료, 교수대에 묶는 끈과 안대 사용료, 화형에 쓰이는 장작비, 재를 강물
에 뿌려 주는 비용, 공동묘지로 사환을 안내하는 비용, 마녀 화형료
이렇게 몰수된 재산을 사복을 채우는 데 쓰였다. 심지어 일부 영주나 재판관, 형리들은 마녀재판을
치부의 방법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적지 않은 지방에서 재판관과 형리의 급료를 마녀 머리 수를 기준
으로 지불하였다. 이단자들의 재산을 압류하던 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단
심문관들이 마녀사냥에 광분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지어 마법의 주술을 걸기
위해서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발을 사용하는 것이 즉효라는 세간의 믿음 때문에 그 이빨은 상품
가치가 있었다. 이것을 묘사한 고야의 그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녀재판의 실태를 비판한 당신의 한
문건에서 말했듯이 '신이 지배하던 시대에 신성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시대'였다.
중세 민중을 오도한 마녀사냥
많은 역사학자들이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에 대해 16~17세기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미신의 소산이라고
평가하면서 마녀사냥꾼이나 이단심문관들의 잔혹성에 대한 도덕적인 분노를 서술해 왔다. 레키, 한센,
레아 등의 한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이성주의적 학자들의 견해에 그대로 동조하
는 학자는 없다. 마녀재판에 대해 사회학 또는 인류학 같은, 다른 영역에서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훨씬
폭넓고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마녀들의 신분과 지위, 소상한 재판절차와 심문내용을
담은 재판기록과 관련 문서가 연구, 분석되면서 마녀재판을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새
로운 연구와 자료는 마녀재판을 기소자들의 광기와 악행만으로 설명하려는 단순논리를 제거하는데 도움
이 되었다. 도대체 그 많은 무고한 마녀들이 왜 생겨났나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녀사냥 제도에 주된 결과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영주나 교황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마녀나 악마의 희생물이라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신네 암소가 낙태했다지? 당신
네 밭의 귀리는 잘 크지 않는다면서? 당신네 포도가 시어졌다면서? 당신의 자식이 죽었다면서?
당신네 울타리를 부수고 빚에 쪼달리게 하고 당신의 농토를 탐내는 자는 바로 당신의 이웃... 마녀
로 변한 당신의 이웃이다... 교회와 국가는 가공할 적들을 격퇴하자는 힘찬 캠페인을 시작했다.... 결국
마녀재판이 지닌 실제적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국가와 교회로부
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들에게 전가시켰다는 데에 있다. 고통 당하고 소외되고 헐벗은 대
중은 부패한 성직자나 탐욕스러운 귀족을 저주하는 대신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가 된 마녀들은 주로 가난한 집안의 어린 소녀나 중노년층 여성이었다. 한 통계자
료는 처형된 사람의 77.7%가 젊은 여성이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 남편과 사별
한 여자, 나이 많은 과부가 가장 손쉬운 표적이었다. 이들은 처형에도 뒤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
으로 여성은 연약한 육체와 낮은 신분 때문에 이단심문소의 공격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신학
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악마에게 유혹 당하기 쉽다고 주장하였다. 중세신학은 이처럼 여성에 대해 극
단적 편견과 적의를 가졌다. 여성인 마녀는 남성들이 저지르는 강도, 살인 같은 범죄가 아니라 해로운
저주를 하는 상징적인 범죄를 저지른다고 간주되었다.
결국 가난하고 무력한 부녀자들에 불과했던 마녀들은 교회와 국가, 성직자와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
과 도덕적 타락에 대해 전가된 책임을 지고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직
자와 귀족들은 오히려 '간파해내기 힘든 적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해 주는 위대한 보호자'로 변신하였다.
어리석은 농민들은 위정자의 실정, 풍수해와 경제적인 궁핍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이웃에게 전가하는
데 급급한 꼴이었다. 위정자와 법집행자에 의해 가공된 마녀의 존재는 대중에게 마녀에 대한 공포와 증
오감을 심어주었고, 나아가 마녀의 고발과 처형에 앞장서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마녀소동은 '빈자와 무
산자들의 가동능력을 박탈하고, 서로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조장시키고, 서로 의심하게 하고, 이웃끼리
싸우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공포에 물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었
다.'
마녀사냥은 유럽에서 제3시대에 대한 예언과 메시아운동의 들끓기 시작할 무렵인 인노켄티우스 8세
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은 종교개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메시아적
사회운동과 마법소동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이 수수께끼는 푸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마녀재판은 메시아적 사회운동의 기세를 꺾고 가톨릭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반 민중 속에 뿌리 박힌 마녀사상과 마녀재판은 기본적으로 지배자들의 교묘한 정치적 의도
를 숨기고 있었다.
이성의 빛에 밀려난 마녀재판
수세기에 걸쳐 피의 광란을 연출하였던 마녀재판과 18세기 들어서면서 점차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였
다.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확산된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적 정신이 미혹과 무지 속에서 곰팡이처럼
생존할 수 있었던 마법과 마녀 현상을 걷어낸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의 도그마와 권위 아래 가능하였
던 마녀신앙은 이제 막 해방되기 시작한 이성의 햇빛을 받으며 그 위력을 잃어 마침내 미신의 지위로
밀려났다. 볼테르는 자신이 집필한 철학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귀신들린 자도, 마술사도, 점술사도, 정령도 존재하지 않는
다. 100년 전에는 무엇을 근거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을까. 귀족들은 모두 성채에 갇혀 지냈고, 겨
울밤은 길었다. 이 귀중한 놀이감이 없었다면 모두 권태로워 죽었으리라. ... 마을마다 마법사나 마녀가
살았고 군주들은 자신들을 위한 점성술사를 거느렸다. 여인들이 제각기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귀신들
린 자들은 들판을 질주했다. 악마가 넘보았던 것은 바로 이들, 혹은 이들이 넘보았던 것은 바로 악마였
다.
하지만 귀신들린 시대가 저절로 가지는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마녀재판의 허구성을 밝히고 용감하게
비판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마녀재판의 극성을 부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의 법률가 아그리
파폰 네테스하임, 예수회 신부이자 신학교수였던 프리드리히 후안 슈페, 법학교수 크리스티안 토마지우
스 등은 마녀사냥의 광풍의 한복판에서 한줄기 인간 이성의 빛을 비춘 '인류문명의 오래 기억해야 할
인물'이었다. 특히 슈페가 1631년 펴낸 [형사범죄에 관한 신중함과 마녀재판에 대하여]는 큰 반향을 불
러일으켰다. 세속법정에서 지나치게 잔혹한 마녀재판을 견제하기 위하여 1657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게 마법재판에서 최대한 신중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1671년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 자크 신부가 마법
의 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최초의 본격적 개설서, '마술가와 마법사에 대한 지적 경계와 무지의 맹신'을
을 출판하여 마녀재판의 종언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1701년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는 '마법의
죄'를 간행하여 마녀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종래의
학설을 집대성하였다.
이렇게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라는 올가미를 씌워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마녀사냥은 자취를 감
추었다, 독일의 경우 1749년에 뷔르츠부르크에서 1건, 1751년 아니팅겐에서 1건, 1775년 켐프턴에서 1건
의 마녀재판이 기록돼 있고 그 7년 후인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라는 지방에서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끝으로 유럽대륙에서 마녀재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인
류의 역사재판에서 마녀재판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말았을까?
신세계 미국의 마녀재판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17세기 식민지 미국의 삶은 보기 좋았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곤궁하였
지만 셋집에 사는 영국의 도시인이나 농노나 다름없는 농민의 삶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숲에는 매
일 새로운 통나무집이 들어섰고 바다와 땅의 경계는 내륙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땅은 풍부하였고 비옥
하였다. 구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신세계에 대한 부푼 꿈과 자유에의 소망을 안고 빈곤과 핍박의 받은 유럽인으로부터 대서양
의 긴 항해를 끝내고 닿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진정 희망뿐이었을까. 이들을 괴롭힌 것은 인디
언과의 전쟁, 자연의 재해와 위력만이 아니었다. 자유를 찾아 나선 이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침해한 것
은 바로 이웃이었다. 이웃을 마녀로 몰아 소동을 일으키는 그 무시무시한 마녀재판의 광풍이 신세계를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따지고 보면 광대무변의 신대륙에서의 개척자 생활은 모두 미신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럽대륙에서 막 싹트기 시작한 과학적 사고가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
간이 필요하였다. 마녀소동은 초기 정착지인 매사추세츠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살렘 마녀재판의 히스테
리는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살렘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그에
관련하여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의 기소와 재판에서 연출되었다.
이 동네의 목사 새뮤얼 페리스는 자신의 아픈 두 딸을 동네 의사에게 보였고 중세적 사고에 젖어 있
던 그 의사는 병의 특별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자 사탄의 악령이 깃들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아이들
은 실어증에 걸리고 경련을 일으키거나 혼자 중얼거리는 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
람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한동안 아무런 대답을 않던 이들은 나중에 티투바와 사라 굿, 사라 오스본
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이들에게 구석영장이 발부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상 증세를 보인
아이들의 입에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마녀소동은 이웃마을로 확산되어 안도버 마을에서만
50명 이사이 기소되었다.
심문 도중 치안판사는 여러 종류의 증거를 채택했는데 가장 중요한 증거는 피의자들의 자백이었다.
미신적 속성, 특히 육체적 특징이 마녀의 흔적을 증거하였다. 그 피의자의 특이한 신체적 특징이 마녀의
징표로 간주되었다. 상해, 질병, 재산상의 손실 등이 악마적 힘을 가진 마녀라고 단정할 믿을 만한 증거
라고 보았다. 브리제 비숍이 처음 교수형을 당한 이래 순식간에 수십 명이 처형되었다. 살렘 지역에서
의 마녀재판은 24명이 처형되었고, 200명이 이상이 구금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하버드 대학의 졸업생들이 이 재판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녀재판을 한 10명의 재판관 가운
데 3명, 재판을 받은 마녀, 그 재판에 문제가 있다고 석방운동을 벌인 사람, 마녀가 탈옥하는데 도운
사람이 모두 하버드 대학 출신이었다. 지금도 하버드 대학이 위치한 보스턴에는 이들이 살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하버드마녀재판순례코스'가 관광상품으로 개발돼 있다.
1692년 9월 22일 집행된 처형을 마지막으로 살렘에서의 마녀소동은 진정국면에 들어섰다. 특히 이 마
녀재판이 오판이었음을 지적하는 견해가 늘어났다. 여론이 확산되자 법원과 교회는 그 당시 행해진 불
의에 대해 사죄하는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고, 1696년에는 그 재판에 관여한 12명의 배심원이 참회 성
명에 서명하였다. 그 다음 해 1월 14일 오판을 자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1711년, 생존자들이 재기한 재
심이 인정되었고 유족들이 요청한 배상액 전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에서 마녀로 처형당한 사람은 모두 36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24명이 살렘에서, 그것도 1692년
한 해에 처형되었다. 1692년 이전에도 영국 이주민의 초기 정착지였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개별적으
로 마녀 재판을 받았던 사건들이 있었다. 1658년, 1662년, 1665년에 각각 마녀재판이 있었다. 1688년 보
스턴의 존 굿윈이라는 아이가 몹시 아팠는데 그 집안 하녀의 어머니 글로버가 마녀로 기소되어 처형되
었다. 띄엄띄엄 있었던 이러한 마녀재판의 광기가 살렘 마을에서 집중적으로 폭발된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은 미국 학자들의 끝없는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대상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당
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가면서 생겨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의심의 기후를 조장하였고 마
침내 라이벌 집단을 마녀로 고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살렘 지역이 조선과 항해의 요지로 개발되
면서 아직도 농경지역으로 남아 있던 곳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소녀들의 격앙된 감정이 어른들
에 의해 과장되었고 이 지역에서 생산된 버섯이 신체적 경련과 장에를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서양 양안을 지배하고 있던 영어 사용 민족이 모두 마녀의 존재를 부정
하였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마녀 희생자는 1722년 옆집 돼지와 양에게 저주의 발을 던졌다는 이유로 화
형 당한 스코틀랜드의 도노크였다. 1736년 영국법상 마녀기소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식빈지 법이 자동적
으로 이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1768년 로드아일랜드 주에서는 기소된 마녀에게 교수형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18세기까지 마녀재판이 지속된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미국에서는 비교적 빨리 마녀
소동이 종료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녀재판은 역사 속으로 묻혔고 초자연적 세계는 단지 호기심의
대상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미국이 독립국가로 탄생하면서 식민지 시대의 마녀 재판은 과거의 잊혀진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마녀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15세기에서부터 18세기까지 3세기동안 벌어진 광란의 마녀재판만큼 공포로 가득 찬 인간역사는 없다.
레아는 마녀재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서양의 마녀재판은 인류사의 가장 끔찍한 한 부분을 장
식하였다.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된 그 마녀들은 모두 무죄였다. 수사와 기소, 재판과 판결 자체가 명
백한 오류였고 범죄행위였다. 고문과 자백의 강요로 빚어진 이 비극적인 참사는 인류의 미망과 무지, 악
속에서 핀 독버섯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증세의 마녀재판과 미국 초기 이민사회에서 벌어진 마녀재판을 특정한 지역, 특
정한 시대에 벌어진 특수한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마녀재판은 규모와 잔인성, 기간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모든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현상이며 동시에 모둔 사회가 저지를 수 있는 보편
성을 지닌다. 살렘 재판을 분석하여 '17세게 뉴잉글랜드 지방에서의 마녀재판'이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홀은 '그 재판 문서들은 보통사람들의 삶 속으로 통하는 기막힌 창문을 만들어주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한 시대의 산물로 특징 지우려 하지만 살렘은 비상한 사건이 아니다'라고 설파하였다. 우리는 반유대인
편견 속에서 한 무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몰아 종신형을 선고했던 드레퓌스 사건, 전세계를 파시즘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와 일본의 파시즘, 미국의 1950년대를 사상적 황폐로 몰아
감 매카시즘에서도 마녀재판과 같은 똑같은 광기를 엿본다. 가장 촉망받던 법조인으로서 매카시즘의
공격을 받아 소련과 내통한 간첩혐의로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었던 알지에 히스를 다룬 영화, <
알지에 히스 재판>의 해설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반공이라는 대의에 편승한 조작극은 그 시대의 광기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그
광기의 시대를 심판한다. 30년이 지난 오늘, 매카시즘의 과오는 새삼스럽게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 셈이
다.
소련이 붕괴된 직후인 1993년 비밀경찰의 문서보관소에 있던 보든 자료는 알지에 히스가 소련과 아무
런 관련이 없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그의 인터뷰가 미국의 주요 언론에 실렸다. 마녀사냥이 보여준 광기는 바로 이 땅에서도 지난 분
단 반세기를 통해 그대로 연출되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신앙화와 그 법적 장치로써의 반공법
과 국가 보안법의 남용은 이 땅을 빨갱이사냥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공정한 재판 절차는 실종되었으며,
고문에 의한 사건은 조작되었고, 자백을 중시하는 재판이 난무하였다. 불고지죄라는 갈고리로 동료와
친지들을 쓸어모아 대형사건을 만들었으며 기술사로서의 고문수사관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사상재판, 하
층계층의 피해자, 중형선고, 고발, 위증, 방관하는 이웃-이 모든 것이 마녀재판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역시 분단시대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었다. 국가안보라는
도그마는 마치 중세 가톨릭의 권위처럼 그 어떤 국민의 희생이나 기본권 제한의 명분으로 쓰였던 것이
다. 국가보안법의 남용이 극에 달했던 1986년 <말>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현직 국회 의원과 수천 명의 노동자, 학생, 시민들을 구속으로 몰고 긴 이른바 국사논쟁이니 좌경용
공이니 하는 말이 횡행하고 있는 것도 이 길고 어두운 역사를 지닌 빨갱이 귀신을 다시 불러내어 그
주술적 위력을 이용해 보려는 세력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면 틀린 말일까?... 오로지 권력에만 눈 뒤
집힌 자들이 대다수 민중들이 갈구해 마지않는 본질을 호도하고 지엽말단의 지구 몇 개, 몇 마디 구호
를 침소봉대, 왜곡 과장하여 주술로 삼고 불러들인 저 어두운 시대의 망령이 초래할 참화를 이 시대의
민중들은 또다시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어떤 맹세문
피렌체 출신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일흔 살의 나이로 법정에 직접 출두
하여 이단의 망언을 엄단하는 종교재판관이신 여러 추기경 앞에 무릎을 꿇는 바입니다. 성서에 손을 얹
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성스러운 가톨릭 교회와 교황께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언제니 믿어왔
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앞으로도 그것을 믿을 것입니다. 나는 성무청으로부터 잘못
된 견해, 즉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인다는 나의 견
해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잘못된 학설을 주장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옹호해서도
안되고, 말로나 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학설은 성
서에 위배된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이단으로 선고받은 이 학설을 위해
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매우 강력하게 이단의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믿었다는 의혹을 바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 추기경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신앙심 깊은 기독교들 앞에서 내가 받게 된 무거운 의혹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명료한
정신으로 일체의 거짓 없이 오류와 이단적인 생각들을 철회하고 저주하는 바이며, 나아가 성스런 교회
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체의 온건한 오류, 이단적 생각이나 종파에 대해서도 저주하는 바입니다. 앞으
로도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어떤 거도 말로나 그로써 발표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또한 이단
자 또는 이단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알게 될 경우에는 그 사람을 성무청이나 내 거주지의 종교재판관
또는 교회 관청에 알리겠습니다... 나는 또한 성무청이 내게 부과한 어떤 보속이라도 정확하게 따르기
로 맹세하는 바입니다. 내가 자신의 약속이나 맹세의 어떤 것이라도-하느님께서 지켜주소서-위반하게
될 경우 어떠한 형벌과 징계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느님과 내가 손을 얹고 있는 하느님의 복음서가
나를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상술한 바와 같이 철회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것
이 참되다는 증거로 이 철회 맹세의 문서에 친필로 서명하고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미네르바 수도원
에서 한 자도 틀림없이 낭독하였습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철회 맹세를 하고 친필로 서명하는 바
입니다.
1633년 6월 22일
로마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그래도 역시 지구는 움직인다
선서를 마치고 나오면서 갈릴레이는 땅을 내려보면서 "그래도 역시 지구는 움직인다"라고 중얼거렸
다고 한다. 과학사에서 널리 인용되는 이 구절이 유명해진 것은 1757년 발행된 어떤 책에 갈릴레이의
초상과 함께 적혀 있는 다음의 문구 때문이다.
이것은 지구가 움직인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소에 갇혀 고문을 당한 갈릴레이의 초상이다. 그는
방면된 순간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발을 내딛고 명상적인 기분으로 "그래도 역시 그것
은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것이란 바로 지구를 말한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정말 그 엄중한 종교재판을 받고 나오자마자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호사가들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재미
있는 논쟁 중의 하나로 키워온 것이다. 당시 병든 몸으로 젊은이들도 감당하기 힘든 고문의 위협과 고
통을 겪고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갈릴레이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있었을까 의문스럽다. 더구나
그런 말을 재판관들이 들었다면 또다시 가혹한 형벌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았고, 갈릴레이는 이미 본격
적인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신의 지동설을 철회한 상태였다.
당시 갈릴레이의 그 말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가리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러나
1911년 발견된 갈릴레이의 초상화는 새로운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 초상화를 액자에서 떼고 나
니 가려져 있던 여백 부분에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몇 개의 그림이 나왔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지구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림 바로 옆에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림
은 갈릴레오가 판결을 받고 나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이 에스파냐 화가에게 부탁해서 1646년경 그린 그
림으로 알려졌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날 갈릴레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그의 친구들이 듣고 집
주인이나 화가에게 알렸을 가능성도 있다.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 브루노의 독설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재판을 받고 나오던 갈릴레이가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큰 이유는 그가 재판
에 승복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 모든 결과가 말해주는 현실을
그는 결코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법정에 참석했던 사람들과 재판관조차 지구는 움직이지 않
으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언제나 믿어 왔고, 지금도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믿을 것
'이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든 참석자들이 그 선서가 거짓 맹세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갈릴
레이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주장을 말과 글로 공표하였다. 일부 추기경과 부호들이 후원자로 자처하
고 있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갈릴레이가 허튼 소리를 했다가 금방 철회할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운 일
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수많은 삶들이 정작 움직이는 쪽은 태양이 아니라 바로 지구라는 지
동설을 주장해 왔고 그 때문에 화를 입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단적인 견해였던 지동설은 그러한 탄압
때문에 오히려 널리 유포된 셈이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갈릴레이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사람이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은 때로부터
33년 전인 1600년, 브루노는 같은 장소에서 무릎을 꿇고 사형을 선고받고 화형을 당했다. 브루노는 서양
철학사의 가장 논쟁적인 사람의 하나로 종교적 이단자, 르네상스의 시인, 철학적 과학자, 점성술사 등
의 복합적 이미지를 가진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원래 브루노는 열 네 살 때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
어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소속된 '도미니크회'는 이미 신앙의 엄격한 수호자, 이단의
맹렬한 공격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불타는 횃불을 입에 물고 있는 개의 얼굴이 그려진 수도원의 깃발이
그 수도원의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몹시 학구적이었던 그는 수도원에 있던 수만 권의 장서를 섭렵
해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연구했지만 자신의 의문이 시원하게 풀리지는 못했다. 브루노는
나폴리를 출입하면서 여러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지동설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마침내 코페르니쿠스의 유명한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손에 넣었
다. 이 책은 브루노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브루노는 더 이상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그는 불경스러운 언동으로 모두 130번이나 교회의 규율을 어긴 것으로 보고되었다.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진 브루노는 그곳을 떠나 스위스의 제네바, 프랑스의 툴루즈와 파리, 영국의
옥스퍼드,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전역을 떠돌며 기존의 학설과는 상반된 이론을
주장하고 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곳마다 지성계는 논쟁에 휘말렸다.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의심해 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들이다. 천구는 공간적으
로나 시간적으로나 무한한 우주이며 항성은 우리의 행성계와 비슷한 행성계의 태양이며 중심'이라고 브
루노는 거침없이 외쳤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와 그들의 신앙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으며 조롱 섞인
공격이었다. 뒷날 브루노의 주장은 '무한한 우주와 무한한 세계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브루노의 독설은 기득권 세력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브루노는 베니스 귀족의 초청으로 귀국
선에 올랐다. 하지만 그 초청은 도미니크회의 사주에 의한 미끼였다. 전 유럽에서 로마교회에 이단의 회
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그를 가만둘 리 없었던 것이다. 브루노의 독설은 이제 보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
었다. 꼼짝없이 베니스의 감옥에 갇히게 된 그는 그후 로마의 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6년 간
감금되었다. 그러나 브루노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신념을 철회하라는 재판정의 요구에 대해 '
내가 철회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면서 판결을 선고하는 재판관들에게 '당신들은 이 판결을 받아들
이는 나보다 더 큰 두려움에 싸여 나에 대한판결을 내리고 있을 것'이라며 서슴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1600년 2월 17일, 마침 내 수십만 명이 운집한 로마 캄포디피오리에서 교황을 비롯한 50여 명의 추기경
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의 화형식 열렸다.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 쇠사슬로 기둥에 묶인 브루노는 "
우주는 무한하며 무한한 수의 세계가 있다"는 외침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마저도 법정을 피해갈 수 없다
브루노의 죽음과 갈릴레이의 굴욕이 있기 훨씬 전 이미 지동설을 증명한 한 학자가 있었다. 어쩌면
지동설에 관하여 쓴 이 학자의 한 권의 책이 같은 처지의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사람의 삶을 인도했는
지도 모르겠다. 폴란드의 철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
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부동의 진리였던 지구 중심설을 부정하게 만들었으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의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고난을 겪은 다음의 일이었다. "코페르니
쿠스적 전환'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천문학계에서 그가 태양을 멈춰 세웠고 지구를 움직였다고 칭송 받는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
일 당시 폴란드령이던 토루인에서 부유한 상인의 네 자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시자 그는 외삼촌 르차스 바첸로데에게 입양되어 신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크라쿠프 대학에
진학한 그는 그것에서 수학과 천문학에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고, 1496년부터 1506년까지는 이탈리
아의 여러 대학에서 교회법과 수학, 천문학의 대가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1501년
부터 5년 동안 파도바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갈릴레이가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
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간을 초월하여 이 유서 깊은 대학도시에서 맺어진 것이다. 코페르니쿠
스는 희랍어, 수학,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인문학자일뿐만 아니라 법학자이자 의사가 되어 폴란드로 돌
아왔다. 그는 고향의 교회에서 신부로, 또 의사로 일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1509년
에는 7세기경 비잔틴 역사서가 쓴 '유명인들의 가공 서한집'을 번역하였다. 그의 대학 친구는 이 책의
서문을 통해 그를 '달의 진행, 쌍성의 변화, 그리고 행성을 포함한 온 우주의 변화를 탐구하는 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이 우주를 관측하며 자신의 학설을 다듬어 나갔지만 자신
의 이론을 출판하는 일만은 피하였다. 1524년에 출판된 '베르너에 반대하는 편지'에서 그는 분점의 세
차운동에 대해 근거 없이 주장된 종래의 변차에 대한 학설을 뒤엎을 만한 내용만 담았을 뿐 새로운 학
설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1530년이 되어서야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태양중심설의 초보적인 개념을 발
표했다. 이것은 곧바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로마에서는 요한 빈드마스타트가 이 새로운 학설에
대해 강의를 했고 추기경 쉰베르크는 그에게 이 주재에 대한 견해를 완전히 표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온전한 이론은 죽음에 임박해소야 출판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는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핍박과 형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었던 사실에 관해 입다물어야 했던 상황도 따지고 보면 견딜 수 없는 형벌이었을 것이다. 죽는 순간
까지 망설이고 망설였던 책,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교황님, 저는 친구의 회전에 관한 저의 책에서 몇 가지 운동의 원인이 지구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는
데 이를 읽은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저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를 글을 통해 드러내
야 할지 아니면 피타고라스 학파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예에서와 같이 말로써 친척과 친구들에게만
전수해야 할지 오랫동안 대단히 고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들은 저의 오랜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
하고 저로 하여금 뜻을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제 연구가 수학에 진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의 공동이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출판되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구의 한 구석까지도
교황님께서는 예와 학문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중상모략에는 약이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교황의 판단이라는 권위로 비방자들의 모략에서 저를 보호해 주실 수 있을 것입
니다... 수학은 수학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저의 수고는 지금 교황님이 통치하시는
공화국의 번영에 기여할 것입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얼마나 자신의 발견과 그 결과물인 지서의 출가에 주저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다. 자신의 이론이 곧바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터이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코
페르니쿠스는 결국 죽음이 임박해서야 30년 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진리를 담은 이 저작
의 출판을 허락했다.
1524년 말 코페르니쿠스는 중풍으로 전신마비상태가 되었고, 그 이듬해인 1543년 5월 24일 '천체와 회전
에 관하여'의 견본 책이 나왔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없었다. 바로 책이 나온 그날 오
후, 코페르니쿠스는 숨을 거두어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 묻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죽음마저도 법정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가 서야 할 법정에 그의 책이 대
신 서게 된 것이다. 서문에 나타나 교황에 대한 겸손과 존경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결국 근
대과학에 저항하는 종교권력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소리 소문 없이 지하에서
번져나가 르네상스 시대 선각자들의 필독서 또는 소장도서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그들에게
새로운 천문학, 새로운 사상, 세로운 세기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책의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두려움을 느낀 교회당국은 책이 나온 지 73년이 지난 뒤 이 책에 금서라는 딱지를 붙여 완전히
유통을 금지시켜버렸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인간의 이성마저 가두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문학에 눈을 돌린 갈릴레이
1546년 2월 15일은 인류 역사상 기념할 날이었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바로 3일 전 숨을 거
두었으며 이탈리아 피사에서는 갈릴레이가, 영구 스트랫퍼드에서는 셰익스피어가 탄생하였다. 1642년 피
렌체 근교 아르체트리에서 연금상태로 갈릴레이가 죽은 그 다음 해 영국에서는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
다. 이 간단한 연대기 기술만으로도 서양문학의 용틀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로
부터 근대자연과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갈릴레이의 고향 피사는 이탈리아의 고도중의 하나이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요새성벽과 대성당, 세례
당, 사탑의 역사적 건축물들은 갈릴레이의 실험장소였으며 연구를 촉발시키는 계기로서 숱한 추억을 떠
오르게 한다. 그는 피사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살다가 청년시절 다시 돌아와 피사대학에서 4년을 보냈
으며 스물 다섯의 나이로 대학 강단에 섰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음악과 수학을 애호한 상인이었다. 그는 영리한 갈
릴레이가 의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의학보다 천문학과 수학에 취미와 재능을 보였
다. 피사대학 학창시절에 그는 저 유명한 '진자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는 어느 날 미사를 드리러 다
니던 피사의 성당에서 천자의 샹들리에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가만히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고 있자
니 그 진폭은 점차 줄어들지만 자신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재어보니 등이 한 번 저쪽으로 갔다가 돌아오
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어제나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흔들리는
진자를 통해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아들의 비상한 재능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들의 직업 선택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교
수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대학졸업 후에도 몇 년을 더 기다려서야 겨우 1589년 피사대학의 교수로 부
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갈릴레이는 역학의 근본적 문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운동에 대하여'라
는 논문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낙하 도중 가속도가 붙는 현상이라든가 경사면에서 일어나는 근
본법칙 등이 탐구의 주제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당시 갈릴레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피사 사
탑에서의 낙하 실험이었다. 물리학 자리에서 부동의 자리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를 높은 곳에
서 떨어뜨리면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보다 훨씬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한쪽 무게가 다른 쪽 무게의
100배이면 100배 빨리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 말에 의문을 품고 직접 높은 곳
에서 무거운 공과 낮은 공을 떨어뜨려 시험을 해보려 했다. 그 실험이 바로 피사의 사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피사의 사탑은 피사 대사원의 종루로 12세기에 착공되었는데 높이가 무려 180피트나 되는 건물
이다. 피사의 탑은 위험해 보일 정도로 기울어져 있어 꼭대기 부분은 연직선으로부터 14피트나 밖으로
나와 있다고 한다. 1598년 어느 날, 드디어 갈릴레이는 사탑의 긴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7층 화랑에서
100파운드의 공과 1파운드의 공을 똑같이 떨어뜨렸다. 수백 년 동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아리스토텔
레스의 이론을 믿어 왔던 수백 명의 교수와 학생들은 이 신기한 실험을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이들
은 두 공이 동시에 땅에 떨어지는 단 한번의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피사 대학 시절의 갈릴레이는 재정적으로 궁핍하였다. 더구나 학교당국과도 불화가 있었다. 그는 '제
복을 비난함'이라는 시를 통해 일상 생활 중에도 교수들에게 근무복인 제복을 입게 한 대학규정을 비
난하였다. 제복 뒤에 숨겨진 거짓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1592년 베네치아공화국
에 속하는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파도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배경 도시
였다. 셰익스피어는 파도바를 '예술의 온상'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도 1222년 설립된 파도바 대학은
파도바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파도바에서 보낸 18년을 '내 일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라
고 회고하였다. 사적인 생활에서나 연구 생활에서나 파도바 시절은 가장 진보의 시기였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학의 강의기록부에는 갈릴레이의 강의가 기록돼 있다.
1593~1594 천구와 유클리드
1594~1595 프톨레마이오스와 알마게스트
1597~1598 유클리드와 아리스토텔레스 역학
1599~1600 천구와 유클리드
1603~1604 천구와 유클리드
1604~1605 행성론
그 당시 저술한 갈릴레이의 논문 [천구론]을 보면 그가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세계관은 망원경의 발견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진전된다.
망원경은 안경 유리를 연마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그들은 작업과정 중에 우연히 확대경
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갈릴레이는 이 소식을 듣고 망원경 제작에 착수, 마침내 인간의 맨눈으로는 미치
지 못하는 먼 곳을 볼 수 있는 신기한 대롱을 발견하게 되었다. 1609년 8월 21일, 베네치아공화국 원로
들은 성마르코 종 탑 위에서 그 대롱을 통해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바라보고 기절초풍하였다. 맨눈으로
는 보이지 않던 배들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그 망원경을 원로원에 선물하면서 다
음과 같이 자화자찬하는 편지를 동봉하였다.
이 기구를 토해 얻을 수 있는 사물의 효과는 육지나 바다에서 감행하는 모든 작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는 맨눈으로 볼 때마다 두 시간 앞서 적의 배와 돛을 알
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선의 숫자와 종류를 구분해 내면 우리는 그 세력을 판단하여 추격해 전투
를 벌일 것인지 도주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안전거리에
서 적의 진영과 보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있고, 확 트인 들판에서도 상대방의 모든 움직임과 준비를
미리 보고 일일이 식별할 수 있으므로 우리편에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의 공적을 높이 산 베네치아공화국 의회는 바로 그 다음날로 6년 기간인 그의 수학 정교수
직위를 종신직으로 연장하고, 동시에 연봉을 종전의 두 배인 금화 1천 굴덴으로 높였다. 망원경의 발견
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비단 이러한 신분보장만이 아니었다. 망원경은 그의 학문세계를 한 단계 넓혀
주었다. 갈릴레이는 스스로 만든 망원경을 들고 달, 태양과, 행성과 항성을 관찰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하였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그에게는 지금까지 천문학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망원
경을 통해 본 우주는 그를 가장 선진적인 천문학자로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미처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알렸다. 분화구, 산, 울퉁불퉁한 달의 표면, 은하수가
별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태양의 반점, 목성의 위성들, 금성의 밝기 변화 등은 모두 그의 관찰에 의
해 새로 발견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관찰결과는 '별들의
소식'이라는 작은 책자로 묶여져 나왔다. 이 책을 통하여 감각을 통한 천체의 지각 가능성이 검증되었
고, 천체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서술하여 천체를 그들 상호간의 위치와 관계 속에서 수학적으로 파악하
고자 하는 근대 천문학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인간은 해와 달, 별을 바라보면
서 그것들을 잔지 신들의 거처로만 인식해 왔다. 갈릴레이의 {별들의 소식}을 통해서 비로소 우주는 영
적 영역에서 관찰과 측정을 통한 인간의 인식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환희
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자연적인 능력으로 여태껏 지각해왔던 수많은 항성 외에도 지금까지는 한번도 관찰된 적이 없
고 과거에 알려진 것보다 열 배나 더 많은 별들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다. 달 표면을 가까이 관찰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즐거운 장관이다. 관찰 과정에서 나는 감각에 의
한 확실성에 근거하여 달 표면이 부드럽고 매끈하지 않고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
며, 지구의 표면처럼 달 또한 엄청나게 부풀어오르고, 깊게 파이고, 그리고 수많은 굴곡들로 뒤덮여 있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놀라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 중 누구도 알지 못
했으며 이제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네 개의 행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며칠 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어서 내가 고안한 망원경의 도움 덕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지구가 스스로 자전하고 동시에 태양을 향
해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리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성경은 이렇게 너무도 명백히
기록해 두고 있지 않던가.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곤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여호수아 10장 12~13절)
차라리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금지시켜라
갈릴레이의 새로운 발견이 이제 그에게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갈릴레이는 로마에 비해 훨씬 독립적인 베네치아공화국의 파도바를 떠나게 되었다. 피사 대학의
수학 주임 교수 겸 피렌체 대공의 수학자 및 철학자로 임명된 것이다. 로마의 영향력이 훨씬 강한 이
지역에서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과 탐구를 계속한 결과 더욱 위험한 주장들을 펼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황청과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점차 지동설이 확산되어 감에 따라 지동설과 지동설의 근거
가 되는 이론에 대한 반대 이론 역시 강해졌다. 이들은 태양의 반점은 태양 표면을 지나가는 구름이며,
목성의 주위를 도는 위성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고대학자들이 쓴 저서에 그런 것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순진한 과학자에 불과한 갈릴레이는 그 실험의 객관적인 결과를 교황청에 잘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
으리라 믿었다. 1611년 로마를 방문한 갈릴레이는 교환 바오로 5세를 비롯하여 여러 추기경과 고관, 영
주들에게 자신의 관측내용과 결과를 열렬히 설명하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던
과학자 갈릴레이에게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겉에서 지켜보고 있던 친구이자 파도바의 사제였던 파
울로는 갈릴레이에게 경고의 서한을 보냈다. "견해를 공공연히 밝히기 전에 잘 생각해 보게. 자네는 인
간의 견해와 이해력에 거슬리는 것을 옹호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아도 달과 네 개의 위성 등을 관찰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명성을 얻지 않았나."
실제로 브루노의 처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벨라르미네 추기경은 이미 갈릴레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
찰하고 있었다. 종교재판의 결정권을 가진 이 사람은 로마대학에 갈릴레이의 견해에 대한 소견서를 요
청하였다. 물론 이 대학의 천문학자들은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 행서의 관찰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중요한 관찰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다시 타오
를 불꽃을 준비하며 숨죽이며 있을 뿐이었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아리스토텔레스파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서
지식을 얻는 그들은 얼음이 물보다 더 무겁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는 얼음은 물위에 떠 있으며 그것이 녹으면 오히려 공간을 적게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갈
릴레이는 이 한심한 대상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무지 때문에 뱀이 발 없이도 잘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다 해서 뱀이 움직이
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이미 수없이 행한 관측을 통해 우주의 별과 해와 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갈릴레이는 점
점 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자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공개적으로 어떻게 해서 코페르니쿠스가 옳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른지를 밝혔다. 뿐만 아니
라 자연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자연과학의 토론에 성서가 끼여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
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갈릴레이는 적대적인 사람들의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1612년 니콜로 로라니
가 설교단상에서 갈릴레이를 공격하였고 곧이어 이들에 의해 갈릴레이는 로마 종교재판의 추기경에게
밀고 당하였다. 적들의 도전이 점점 숨통을 조여오자 적들처럼 설교대를 이용할 수 없었던 갈릴레이는
서한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피렌체 대공의 어머니
크리스티네를 수신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설과 신
념이 올바로 세상에 전달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자신의
서두를 시작하였고, 뒤이어 굽힐 수 없는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였다.
저는 성서와 신학자들과 공의회를 최고의 권위로 여겨 존경하오며, 성스러운 교회의 규정에 맞추어
타당하게 만든 일에 맞서려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는 바입니다... (그
러나) 천문학자더러 그의 관찰과 증명이 잘못되었고 궤변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한 관찰과 증명에 대항
하여 자신을 보호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것은 천문학자들더러 그들이 보는 것을 보지 말고, 그들이 파악한 것을 파악하지 말고, 그들에게 분명하
게 드러난 것의 반대를 찾아내라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견과 학설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개개인의 입을 닫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결정을 실천에 옮기려면
코페르니쿠스의 책과 또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다른 저자들의 글을 금지시켜야 할뿐더러 천문학 자체
를 금지시켜야 하며 나아가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금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곧 '불가능한 것을 행하라는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또한 그가 불가능하리라고 생
각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책과 그 주장을 따르는 다른 글'이 금지되고야 말았다. 1616년 2월 로마로 소환
된 갈릴레이는 예의 그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주도하는 성무청의 재판을 받았다. 2월 19일부터 3월 3일
까지 벌어진 재판의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었으며 천문학은 금지되었다.
2월 19일: 교황의 명령에 따라 11명의 신학자들이 소환되어 지동설의 타당성을 검토하였다.
2월 23일: 이 신학자들의 회의결과 만장일치로 지동설이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부조리한 것이며 이단
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월 25일: 벨라르미네 추기경은 갈릴레이를 소환하여 이러한 결과에 알맞게 처신하라고 경고했다.
2월 26일: 갈릴레이는 벨라르미네 추기경 궁에 출두하여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고 성무청의 지시에 복
종하겠노라고 선언했다.
3월 3일: 벨라르미네는 로마 종교재판의 교황청회의에서 갈릴레이의 굴복을 보고했다.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반대하는 교령이 낭독되고 그 발간이 지시되었다.
3월 5일: 교령이 발간되었다. 금서목록 담당이 서명한 금서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체의 회전에 관
하여'가 명기되었다. '어떤 계급, 어떤 직함의 사람이든 성트리엔느 공의회와 금서목록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위에 언급한 책을 인쇄하거나 인쇄시켜서는 안되며 그것을 어떻게든 보존하거나 읽어서는 안 된
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갈릴레이 사건의 제2막, '대화'
이렇게 해서 갈릴레이 사건의 제 1막은 끝이 났다. 그의 적들은 승리했고 그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갈
릴레이는 두뇌와 심장이 제거 당한 채 피렌체로 돌아왔다. 물론 목숨만이라도 건졌으니 천만 다행이었
다. 교회는 이탈리아 최고의 과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갈릴레이의 항복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이 비탄의 세월 동안 갈릴레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1618년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대공은 갈
릴레이에게 태양의 흑점에 관한 논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고 갈릴레이는 논문과 함께 서신에서 이렇
게 말하였다.
전하께 전해드리는 이 문서는 지동설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동설과 연관시켜 발전시
킨 물리학적 근거들 중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 글을 하나의 문학작품이나 아
니면 꿈이라고 여기시기를 권합니다. 시인들은 얼마나 자주 자기들의 환상에 매달리는지요? 저 또한
자신의 꿈에 대해 여전히 마음이 약하답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자신을 마치 시인이나 몽상가처럼 묘
사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신념에 매달리고 있는 갈릴레이를 만나게 된다. 과학적 논문으로써의 성격을
거세당한 상태로라도 자신의 이론을 유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1623년 우르바누스 8세가 새로
이 교황으로 취임하였다. 그를 오래 전부터 친구로 알고 지냈던 갈릴레이는 드디어 지신의 친구가 지상
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직위를 이어받았다고 기뻐하였다. 갈릴레이의 후원자들이 교황의 시종관,
비서의 자리를 옮겨갔다. 갈릴레이는 드디어 상황이 유리해졌으니 지구의 자전과 공정의 이론에 대해
교회의 인정을 받을 때라는 확신을 가졌다. 1624년 그는 드디어 생애 네 번째로 로마로 향해 길을 떠
났다. 수많은 로마명사로부터 영접을 받았으며 교황은 두 달 사이에 여섯 번이나 알현을 허락했다. 금화
를 포함한 귀중한 선물과 축복의 말을 들으며 갈릴레이는 교황에게서 물러나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러
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예수회를 비롯한 적대자들을 긴장시키고 반대세력을 규합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제 갈릴레이는 필생의 대작이자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될 저작에 몰두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
스 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의 대체계에 관한 대화}(약칭 {대화})라는 긴 이름의 이 저작에서 그는 자신
이 관찰하고 연구해 온 지구 자전과 공전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정리하였다. {대화}는 세 명의 남자들이
나흘 동안 연속적으로 전개하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살바티, 사그레도, 심플라치오 세 사람의
등장인물 중에서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살바티가 바로 갈릴레이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
이름에는 자신의 유능한 제자로 스페인 여행 도중 사망한 필리포 사바티에 대한 안타까움이 투영돼 있
다.
두 번째 등장인물 사그레도는 갈릴레이의 좋은 친구 조반니 사그레도의 이름을 빌었는데 정밀한 질문
과 문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으로 성공적인 대화에 기여한다. 실제 사그레도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
으로 활동하다가 1620년 사망한 인물로 파도바를 떠나는 갈릴레이를 근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고 예수
회의 견제를 경고했던 사람이다. 갈릴레이는 '냉혹한 죽음이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저 두 명의 빛나는
인물을 한참 나이에 빼앗아 가고 난 지금, 나는 그들을 이 책의 대화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내 취약한
힘이 미치는 한 이 책 속에서 그들의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했음을 밝혔다.
한편 심플리치오는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 이름 자체에서 "단순한 사람' '멍청한 사
람'이라는 의미가 드러난다. 갈릴레이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이 심플리치오라는 사람을 통하여 정신적
인 편견과 우둔함, 편협하고 우스꽝스런 인물로 표현된 것에 더욱 분노하였다. 갈릴레이는 이 책을 통하
여 두 이론을 균형 있게 소개하려는 듯한 형식을 취했지만 실상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논증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대화'의 원고는 1629년 말경에 시작하여 1630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교회감독청
으로부터 출판허가를 받아내기 위한 투쟁은 거의 2년이나 걸렸다. 이제 예순 여섯 살이 된 갈릴레이
는 출판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다섯 번째 로마여행에 나섰다. 갈릴레이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를 만나
책의 출판허가를 요청하였고 교황은 일부를 수정하라는 몇 가지 제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책 전체의 발
행을 인정했기 때문에 갈릴레이는 만족한 상태로 돌아왔다. 교황의 권고대로 그는 심플리치오를 통해
진부한 종교적 연설을 추가하였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살바티를 내세워 자신의 견해를 결론으로 삼았다.
심플리치오: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힘과 지혜의 힘으로, 그리고 물(썰물과 밀물)이라는 원소의 힘으로
우리가 관찰하는 교차운동을, 바대라는 거대한 대야를 움직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알려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힘과 지혜를 인간의 변덕 한계 안에 한정짓고 제한하려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무모함입니다.
살바티: 우리에게 우주의 구조를 탐색하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하느님 손길로 이루어진 작업을 정말
로 완벽하게 탐색하는 것을 거부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도 그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허
락하고 바라시는 대로 정신의 활동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식하고, 그 전지전능하심의 무한한
깊이를 들여다볼 능력이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그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더욱 큰 경탄이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합시다.
물론 갈릴레이에게 지구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하지
만 원고의 개정작업과 갈릴레이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몰아치는 적대적인 회오리바람을 멈추
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출판을 강행했다. 이리하여 피렌체의 출판업자에 의해 1632년 2월
'우주의 대체계에 관한 대화'가 출판되었다. 갈릴레이의 친구들과 전문가들은 {대화}의 출판에 적극적으
로 열광하였다. 감옥에서 석방되어 나온 캄파넬라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별들, 새로운 체계에 대해 새
로 밝혀진 이 진실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라고 극찬하였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며 법철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는 "이 책은 감추어진 사실들에 대한 해명을 너무나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어 우리 세
기의 어떤 작품도 여기에 견줄 수 없다"고 말했다. 1632년 봄 중부 이탈리아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이 책
은 신속하게 배포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대한 사실은 로마에서 그 판본이 입수되자마자 갈릴
레이의 적들과 성무청 당국자들이 한자 한자 그 내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회 사제
들은 이 책이 '루터와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것은 '명백히 1616
년의 교령의 위반이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성서해석을 감행한 이단행위'였다. 1632년 8월 갈
릴레이와 출판업자에게 그 책을 더 이상 유포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대화'가 세상에 빛을 본 지 단지 6개월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호의적이었던 교황도 갈릴레이의 적들에
게 포위되고 세뇌되었다. 갈릴레이의 친구들이 도처에 있기는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나서서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보호하기 어렵게 되었다. 고립무원이었다.
죄수복을 입은 갈릴레이
1632년 10월 교황은 갈릴레이의 로마 종교재판정 출두를 직접 명령하였다. 갈릴레이가 일흔 살 때의
일이었다. 병상에 자주 누워지냈던 그에게 로마여행은 힘겨운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재판정 출두가 한
달 간 연기되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재판정 출두명령이 또다시 떨어졌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저항
할 수도 없게 되자 갈릴레이는 1633년 1월 20일 한겨울 힘겨운 여행길에 나섰다. 페스트가 번진 중부
이탈리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로마로 향했다. 갈릴레이는 페스트의 로마 전염을 막기 위해 교외지역에
격리되었다가 2월 13일에서야 비로소 로마에 들어섰다. 갈릴레이는 도착한 바로 그 다음날 성무청 조사
관에게 출두신고를 했다. 로마에 주재한 피렌체 대사의 집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그곳을
떠나서는 안되며 그 집안 식구들 외에는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명령을 동시에 받았다. 이때부터 6월까
지 계속된 길고 지루한 심문과 재판과정은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였다.
4월12일 최초의 심문이 있었다. 심문이 끝난 뒤 그는 종교재판정에 수감되었다. 그에 대한 혐의는
1616년 3월 교령의 위반이었다. 4월17일 {대화}를 일고 검토한 세 명의 신학자들이 이 책이 교령을 위반
했음을 선언했다. 이들은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의 추종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4월 30일 2차
심문이 이루어졌다. 이 심문에서 갈릴레이는 자신의 의도에 반해서 일반인들이 오해하기 쉽게 표현한
부분들이 많음을 인정하고
'대화'에 그런 오해를 불식할 이틀 분의 대화를 덧붙이겠다고 제안하였다. 5월 10일의 세 번째 심문에서
갈릴레이는 서면으로 변명서를 작성해서 제출하였다. 6월 16일에서의 심문에서는 교황이 직접 참석하였
다. 6월 16일의 마지막 심문에는 금지된 학설을 지금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교령이 내려지기 전 마음이 흔들려 두 개의 학설, 즉 코페르니쿠스와 프톨
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다같이 옳다고 여긴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둘 중의 하나만이 자연상태에서 올바
른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 상부의 학자들이 교령을 내린 뒤로 내 마음에서 모든 의심이 사
라지고 나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움직인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무조건 참이라고 여기게 되었
으며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갈릴레이는 1616년 이후 지난 16년 동안 지동설을 지지하는 수많은 저작을 공개
적으로 출판해 왔다. 그러나 이 뻔뻔스런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의 목숨은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622년 6월 22일, 어김없이 태양이 떠올랐다. 갈릴레이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법정은 '미네르
바 동산'의 도미니크회 성모 마리아 수도원 홀이었다. 브루노가 33년 전 화형 판결을 받은 바로 그곳이
었다. 추기경들과 종교재판 관리들이 모두 성복을 입고 법정에 나타나 정좌하였다. 갈릴레이는 죄수복
을 입은 채 그 앞에 끌려 나왔다. 그는 선 채로 판결을 들어야 했다. 판결은 갈릴레이에게 코페르니쿠
스 학설을 '진실이라고 여기지도 말고 옹호하지도 말며 어떤 방법으로도 가르치지 말 것을 명령'한 지
난 1616년 사건에 대한 상세한 회고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서 '대화'의 내용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졌고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그대는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태양이 동에서 서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 대신 지구가 움직이고 지구
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나아가 성서에 위배되었다고 밝혀진 의견
을 믿을 만한 것이며 옹호해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이런 범죄자에 대해 교
회 법이 정한 유죄판결과 형벌이 그대에게 내려지게 되었다. 그대가 무엇보다도 순수한 심정으로 거짓
없이 우리 앞에서 철회 맹세를 하고 지나간 모든 이단과 오류를 우리가 지시하는 방식대로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대를 석방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대의 무거운 잘못과 해로운 실수가 어느 정도는 응징되고, 그
대가 앞으로 좀더 조심스러워지도록, 그리고 비슷한 범죄를 생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단호한 일
침이 되도록 우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대를
이 성무청에 감금하기로 판결한다. 참회의 뜻으로 앞으로 3년간 매주 한 번씩 일곱 개의 참회 시편을
외우도록 하라. 우리는 앞으로도 그대에게 확정된 형벌과 참회를 변경하거나 완화시킬 권리를 갖는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일단 사형은 면했으며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갈
릴레이는 브루노와는 달랐다. 그는 도망친 도미니크회 수도사가 아니었고 그처럼 과격하지도 않았다. 교
회 내부에 수많은 친구를 가진 그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그 이전 수세기에 값할 만큼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대화} 역시 교황을 포함하여 여러
공직자들이 읽어보고 검토하고 조언하고 허가하였던 것이다. 판결문에 기록된 열 명의 추기경 가운데
세 명의 서명이 빠졌다. 판결이 만장일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수회 신부들마저 자신들의 망
원경으로 갈릴레이가 발견했던 그 진실을 확인해가고 있었다. 권력의 오만과 권위가 진실을 가리기 위
하여 갈릴레이를 벌하려 하였으나 그 수위는 이미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문의 자유가 구속되
고 세상에 진실을 알릴 권리를 빼앗길 갈릴레이에게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의미가 있었
을까.
억압, 죽음 그리고 복권
갈릴레이는 서두에 거론한 철회 맹세문을 쓰고 풀려났다. 6월 23일 교황은 종교재판소 감옥에서 로
마의 토스카나 대공저택으로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가택연금이었다. 다시 6월 30일 갈릴레
이에게 로마를 떠나 자신의 집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였다. 갈릴레이는 여행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죽는 날까지 그 열망을 이룰 수 없었다.
그 사이 갈릴레이에 대한 판결문과 그의 철회 맹세문이 이탈리아 전역에 뿌려졌다. 교회 당국은 지
동설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는데 이 유명한 학자의 반성문이 유용하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피렌체의
종교재판관들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학자들을 모아 이 문서를 낭독하는 행사까지 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과학적 신념과 저작을 철회하고 굴욕을 강요당한 갈릴레이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
다. 가족과 친구들은 무사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갈릴레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갈릴레이
자신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수녀가 된 갈릴레이의 딸 마리아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
해 보낸 이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상심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의 이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책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의 세계에서도, 우리 조국에서도 그런 일은 이어나지 않아요. 제게 이런 생각이 드는 걸요. 한동안 아
버지의 이름과 명성이 어둠에 덮이기는 하겠지만 뒷날에는 더 큰 광채를 얻게 될 것이라고요. 예언자
는 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잖아요? 그러나 이곳에서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사랑과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얼마 후 딸은 아버지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불행은 언제
나 한꺼번에 오는 법이다. 슬픔과 고독 속에서 갈릴레이는 심각한 류머티즘과 습관성 불면증으로 시달
렸다. 시력이 나빠지더니 드디어 1637년경에는 거의 운이 멀어버렸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도 그의 학
자로서의 탐구 의지는 꺽지 못했다. 그의 금지된 책은 갈릴레이의 부탁으로 여러 경로를 거쳐 네덜란
드의 엘제비르 출판사에 서 발행되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원저자가 모르는 가운데 인쇄되었노라고 밝
힘으로써 종교재판소 당국을 속여 갈릴레이를 보호해 주었다. 1635년에는 유럽 전 지역에서 라틴어로
된 이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갈릴레이의 승리를 예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고무되어 갈릴레이는 다시 필생의 저작을 준비할 힘을 얻었다. {두 개의 새로운 학문에
관한 담화와 수학적 증명}{({담화}라고 약칭한다)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학에 관
하여 논하고 있다. 그야말로 현대 물리학과 자연과학의 주춧돌을 놓은 명저였다. 이 책의 원고는 파도바
대학 제자였으며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노아유 백작에게 증정되어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도록 하
였다. 갈릴레이가 가택연금 당했던 때에도 많은 명사들이 이 불우한 과학자를 만나러 전세계에서 몰려
들었다. 영국의 밀턴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종교재판의 수인 갈릴
레이를 만났을 때 나는 지적 자유를 성무청에 유린당한 도시 피렌체를 보았다'고 썼다. 갈릴레이의 최
후의 발견은 달의 칭동 현상이었다. 달이 지구를 향해 언제나 한 방향만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달의 가장자리는 주기적으로 악간씩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1641년 그는 리체티와 최후의
학문적인 논쟁을 벌였다. 태양으로부터 직접 빛을 받지 않은 빛을 반사하여 잿빛으로 보이는 달빛을
놓고 리체티는 인광을 내는 볼로냐산의 돌과 비슷하다고 주장하였다. 갈릴레이는 이 그림자 빛은 태양
빛을 반사하는 지구의 빛을 재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그의 주장이 옳았다.
어느덧 죽음의 그림자가 갈릴레이에게 짙게 드리워졌다. 가족, 제자들과 더불어 종교재판관 관리들이
그 임종을 지켰다. 1642년 1월 8일이었다. 다음날 그의 시신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의 탑 재단에
묻혔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그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적들은 여전히 갈릴레이의 명성과 영향력을
축소하려 하였다. 교황은 그의 묘비를 성당의 본체에 잇는 미켈란젤로의 유해와 가까운 곳에 두지 못
하도록 하였다. 성무청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그 이상의 기념비를 세워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유해를 가족 묘지에 묻어달라는 갈릴레이의 유언은 무시되었다. 1736년이 되어서야 비로
소 그 유해는 교회의 본체 건물에 설립된 영묘로 이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757년까지 지동설을 주장하
는 모든 책들은 금서목록에 그대로 있었다. 케플러,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의 책들은 1835년에서야 비
로소 금서목록에서 풀려 나왔다. 1829년 코페르니쿠스 제막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천문학자에게 경
의를 표하기 위해 운집했지만 교회의 신부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비엔나의 추기경 쾨니히는 로마교황청에 특별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바로 갈릴레이의
명예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가 일월과 같
이 빛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교황청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측은한 고집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20여 년이 흐른 1984년에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판결은 잘못되었
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갈릴레이의 죄를 사면하였다. 갈릴레이의 죄, 그가 상징한 근대 정신의 사면
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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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 재판
졸라의 고발장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이
엄숙한 순간, 이 법정 앞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당신들과 배심원 여러분 앞에서, 프랑스
앞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나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의 작가 생활 40년과 필생의 작업으
로 획득한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언합니다. 내가 얻은 것, 내가 이룩
한 명성, 또한 프랑스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나의 공적, 이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
스가 결백함을 맹세합니다. 만일 드레퓌스가 결백하지 않다면, 신이여! 이 모든 것이 파멸
하고 나의 모든 작품이 잊혀지도록 하소서! 드레퓌스는 결백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은 행복하다. 이토록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죄업이 갇힌 한 수인을 위해, 그 결백을 위해 자신의 모든 명성을 걸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은 정년 행복한 일이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명예, 명성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
한 일인가? 전 생애를 바쳐 쌓은 명예와 명성이 마치 이 한 사건을 위하여, 이 한 사람을
위하여 존재했던 것처럼 말했던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에밀 졸라, 인생의 절정기에 서 있던 작가. 문학이라는 봉우리의 정상에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 전 세계 문명국에서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소설들. 그 모든 것을 던져
한 인간의 무고함을 온몸으로 증거 하고자 했던 사람.
그는 과학적 사고로 종교적 편견과 미신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
다. 그런데 유럽 최고의 문명국 프랑스에서 그 편견이 가장 저열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작가로서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던 졸라의 관심은 점
차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신하게 되면서 희생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에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적 업적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한 위대한 신념의 행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것
이었다. 허위고발자, 거짓증언자들이 칭송되고 진실의 기수들이 악당처럼 취급받는 시저에
이르자 그는 단호한 신념의 순교자만이 그 사회를 뒤덮고 있는 그 광기를 깨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펜을 들고 하루 밤 하루 낮 또 그 다음날 밤 동안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
는 탄원서를 줄기차게 써 내려갔다.
1898년 1월 13일, 이렇게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탄생되었다. 대통령 펠릭스 포
르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논설은 거대한 폭풍우가 되어 프랑스 전체를 진동시켰
다. <오로르>(새벽이라는 뜻)라는 이 별 볼 일 없는 잡지는 바로 이 글을 실은 것만으로
30만 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 온 국민이 졸라를 이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고발한다'는
전 세계에, 영원히 졸라의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니는 표어가 되었다. 진실을 위한 용기와 작
가의 위대성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그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
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
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네 알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가장 먼 곳까지 재앙을 미
치게 할 지뢰를 매설했는지 아닌지를...
졸라의 이 글 하나로 이미 모든 진실은 선언되었다. 이 글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모든 허
위를 날려보내 버렸다. 이 글이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힘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졸라의 고발장을 환영하는 3만 통의 편지와 전보가 쏟아져 나왔다. 3만 통의 서한
에는 한결같이 프랑스에서의 이성의 퇴조를 비판하는 분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 비분
강개는 역설적으로 졸라의 존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졸라의 존재와 그의 웅변은 대
혁명의 나라를 그리 성급하게 포기할 수 없음을 전 세계에 환기시켰다. 마크 트웨인은 <뉴
욕헤럴드>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
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바로 유대인이었군!
에밀 졸라가 그토록 변호하고자 했던 행복한(?) 사나이 드레퓌스는 누구인가? 드레퓌스
는 1859년 알자스지방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유대계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의 전쟁 대문에 드레퓌스 가족들도 고초를 겪었으나 이들은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레퓌스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1878년 파리공과대학을
졸업한 드레퓌스는 1880년 소위로 임관 받고 퐁텐블로에 있는 포병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
후 그는 포병중위로 진급, 망슈에 있는 한 포병연대에 소속되었다. 1889년에는 대위가 되었
고 부르주에 있는 폭약전문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1890년 루시라는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 아들 피엘이, 다시 1893년에는 딸 잔느가 태어났다. 그 사이에 그는 대학원 과정인
전술학교에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융통성 없고 소박한 드레퓌스는 동료
들 사 이에 인기는 별로 없었지만 우수한 성적 때문에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참모본
분에 수습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행운이 일생일대의 화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 군에 처참한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인들은 그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
양을 찾느라 안달이 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반역행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
는데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이 브
뤼셀, 스트라스부르, 스위스 등지에 산재한 독일 스파이망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
스 참모본부 상데르 대령 휘하의 방첩부대가 눈치챈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보가 독일로 유
출되고 있음은 여러 경로로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 방첩부대는 마침내 한 정보원을 독일대사관 건물 내로 침투시켜 직접 슈바르츠코펜
의 우편함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건을 빼내오게 하였다. 물론 이것은 곧바로 상데르 대령
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귀하가 부탁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 드리
는 바입니다.
1. 120mm포의 수압식 제동기와 그 작동방식에 대한 정보 2. 지원부대에 대한 정보 3. 포병
편제 변경에 대한 정보 4.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정보 5. 야전포병부대 임시 포격편람. 이 마
지막 서류는 특히 빼내기가 곤란합니다. 나는 이 서류를 단 며칠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국방성에서 한정 부수만을 발간해서 각 부대에 그 보관책임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 사본을
가진 장교는 작전이 끝나면 그것을 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는 필요한 부
분을 메모하신 뒤 그것을 내게 되돌려주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그것을 부대에 반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모두 복사해서 보내도 좋다면 별문제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곧 작전을 수행하러 떠납니다. 무뢰한 D 이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은 분명히 프랑스 참모본
부 내부의 첩자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 조직과 활동에 대해 그렇게 소장한 정
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프랑스 방첩부대를 괴롭혀 온 유령은 바로 그 명세서의
끝 부분에 서명된 '무뢰한 D'였다. 그렇다면 'D'라는 이름의 프랑스 장교임이 틀림없다.
방첩 부대원들은 숨쉴 사이도 없이 수습참모의 기록 카드철을 꺼내왔다. 그들은 D자를 쭉
훑어내려 가다가 'DREFUS'라는 이름에 시선을 멈추었다. 마침내 범인을 찾아냈다
는 탄성이 일었다. 곧이어 "바로 유대인이었군!"하는 소리가 터져 올랐다. 상데르 대령은 왜
자신이 진작 드레퓌스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의아해했다. 이들은 드레퓌스의 서류철을 가져
다가 문제의 명세서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필적을 비교해 본 것이다. 물론 비슷하다고 판단했
다. 다만 자신들이 수집한 단 한 가지 들어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명세서를 쓴 사람은 자
신이 '곧 작전에 나간다'고 밝혔다. 그런데 수습참모들은 이미 5월경에 그해에는 작전에 참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바 있었다. 드레퓌스는 그 무렵 파리를 떠난 적이 없었
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운명은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첫 재판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드레퓌스를 체포하는 일뿐이었다. 뒤파티 소령이 드레퓌스의 체포
명령을 하달 받았다. 그는 드레퓌스를 별 사고 없이 체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한 장
의 명령서가 드레퓌스에게 날아들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참모총장실에서 실시되는 참모본
부 수습참모 면담에 출두하라." 출두시간은 10월 15일 오전 9시. 복장은 사복차림이었다. 드
레퓌스는 당연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출두하였다. 뒤파티 소령은 드레퓌스에게
참모총장이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편지를 대필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손가락
을 다쳐 펜을 쥘 수 없다는 핑계를 덧붙였다. 드레퓌스는 창가에 있는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았고 뒤파티는 편지의 내용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에는 무제의 명세서에 나오는 구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드레퓌스의 표정이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불한당은 신경이 몹시 무딘 모양이군.'하고 뒤파티는
생각했다. 뒤파티는 조금 있다가 편지 쓰기를 중단시킨 후 이렇게 외쳤다. "법률에 위해 나
는 귀관을 체포한다. 귀관은 반역 혐의를 받고 있다."
재판은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의 궁전을 개
조한 군사법정은 건물 분위기조차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노란 가스등이 어렴풋이 법정
안을 밝혀 주고 있을 뿐이었다. 두툼한 돌 벽에 난 조그만 창문 틈으로 형무소 마당이 바라
보였다. 일곱 명의 장교가 군법 회의의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들 중 모렐 대령이 재판장이었
다. 재판장의 명령에 따라 드레퓌스 대위는 딱딱한 걸음걸이로 법정에 들어섰다. 머리숱이
적고 안경을 썼으며 날카로운 코 밑 수염이 길게 나 있었다.
그는 참모본부 장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재판은 공개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
었다. 드레퓌스의 변호인 데망즈는 유죄의 증거로 내세운 서류가 명세서 하나뿐이며 그것마
저도 그를 유죄로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반 신문
들은 이미 드레퓌스를 반역의 화신으로,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도하였기 때문에 공
개재판을 통하여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언론은 이미 반역죄에 대해 사
형제도를 부활시키자는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반역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률이 폐지되어
드레퓌스가 길로틴을 면하길 워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데망즈의
요구는 단호히 거부되었다. 대문짝만하게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신문들은 그가 유죄라고 단
정하고 그에 따른 대중의 분노로 지면을 메웠다. 재판의 진실은 이제 밀실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는 진술 순서가 되자 차근차근 진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명세서에 나열된 몇 가
지 정보를 자신도 통보 받은 사실이 있노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은 120mm포와 그 지
원부대에 관한 정보,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원정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며 '나는
작정에 나간다'는 말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와 평안을 마다하고 군대를 택한 자신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완강히
거부하고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자신이, 또한 이제 겨우 군인으로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자신이 왜 반역행위를 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드레퓌스의 진술은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국방성에서 나온 참관인이
재판이 무죄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사건이 순리대로 해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드레퓌스의 동료 장교들
이 증언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오래 전부터 드레퓌스를 의심해 왔다고 증언하였다.
친하게 지냈던 동료조차 불리한 증언을 하는걸 보고 드레퓌스는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려
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 치를 떨었다. 이번에는 필적전문가들이 증언하였다.
베르티옹이라는 필적전문가는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 다르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명세서를 쓸 때 남의 필적으로 가장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웠
다. 게다가 극도로 전문적인 용어를 쓰는 바람에 재판부와 방청객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
였다. 정보국의 앙리 소령은 증인으로 나서 '인격을 의심할 수 없는 한 신사가 지난 3월경
에 국방성에 반역자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경고해 주었다'면서 바로 그 반역자가 드
레퓌스라고 단언하였다. 드레퓌스와 변호인은 경고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였
다. 프랑스 형법 제 101조에는 '피고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과 대면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앙리는 '장교의 머릿속에는 결코 발설해서는 안될 비밀이
들어 있는 법'이라며 넘어가려 하였다. 재판장이 끼여들었다. "귀관이 그 사람 이름을 대야
할 의무는 없소. 다만 귀관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이 반역자가 드레퓌스라고 말했다는 것
을 증언하면 충분하오." 앙리 소령은 십자가에 손을 대고 법정 안을 뒤흔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십자가에 걸고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재판이 시작된 지 나흘만에
심리는 종결되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논의하려고 퇴정하려 할 때 뒤파티 소령이 재판관
을 향해 다가갔다. 곧이어 봉투가 전해졌다.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 작은 봉투에는
이런 내용의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판결을 심의하는 동안 작은 봉투 안에 든 내용을 재
판관들에게 읽어준 다음에는 다시 봉인해서 그 봉투를 전한 장교에게 되돌려 달라'는 내
용이었다. 지나 1980년 '김재규 재판'에서도 있었다는 이 '메모재판'이 드레퓌스 재판에서
도 그대로 연출된 것이다. 한 시간 후 그들은 논고와 최후변론을 듣기 위해 다시 개정을
선언했다. 데망즈는 세 시간 동안 변론하면서 명세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그것이
검찰 측이 내놓은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검사의 논고는 간단했다. 재판관들에게 확대
경을 들고 직접 그 명세서를 조사해 보라고 요구했다. 그 다음에 드레퓌스가 일어섰다. "나
는 무죄입니다." 그는 이 한마디만 했다. 재판장들이 퇴장했고 드레퓌스도 호송되어 나갔
다. 판결문을 낭독할 때 피고인의 출석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이 허락된 몇몇
일반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지켰다. 모렐 대령이 판결문을 낭독하였다. 전원일치였다. "반역
죄를 인정해서 드레퓌스를 군으로부터 불명예 제대시키며 아울러 프랑스로부터 추방, 종신
유폐형에 처한다." 노변호사 데망즈는 이 순간 통곡했다.
악마도로 유배되다
드레퓌스에게 판결 내용이 전해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다시 호송되어
텅 빈 법정 안으로 인도되었다. 경비병이 홀로 "받들어 총!"을 외쳤다. 서기가 촛불에 의지
해 판결문을 읽었다. 드레퓌스는 부동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 난 다음 그는 절도 있
게 '뒤로 돌아' 자기 감방으로 돌아왔다. 감장에 홀로 남게 된 드레퓌스는 벽을 향해 달려가
머리를 처박았다. 두개골을 부숴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형무소 책임자가 달려와 '자살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확인해 주는 행위이며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
는 일'이라고 설득했다. 얼마 후 그의 아내 루시가 찾아와 앞으로 무죄가 밝혀질 날이 반드
시 오리라며 그를 위로했다.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참모본부와 정보국은 드레퓌스를 함정으로 몰아
넣기 위한 증거를 계속 찾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드레퓌스에게 유형생활 동안 좀더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줄 테니 '부주의로 그런 반역행위를 했다'고 시인하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그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본인이 원하는 단 한 가지 특전은 반역자에 대한
수사를 계속해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드레퓌스가 두려워
한 일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벌어지는 불명예 퇴역식이었다. 그는 1월 5일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일 나는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가장 큰 시련을 견뎌내야 할
것이오.'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샹드마르스의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드레퓌스의 불
명예 퇴역식이 거행되었다.
두 줄로 늘어선 경비병들은 퇴역식이 거행되는 동안 연병장 주위의 철책을 둘러싸고 있어
야 했다. 퇴역식은 마치 형의 집행처럼 형식을 갖춰 진행되었다. 파리에 주둔한 각 연대에서
일개 부대씩을 대표로 퇴역식에 파견하였다. 트럼펫이 울리고 구령이 떨어지자 조그만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문에서 공화국 근위대의 몸집 좋은 상사 한 명이 결어 나왔다. 칼을 빼든
네 명의 병사가 그 뒤를 따랐고 그 중간에 드레퓌스 대위가 끼여 있었다. 그들은 그 의식의
주제자안 다라 장군 앞에 멈춰 섰다. 장군은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귀관은 무기를 들 자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귀관의 지위를 박탈
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모여 있던 군중들로부터 포효하는 듯한 함성이 일었다. "유대
인 죽여라!" 거구의 상사가 드레퓌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드레퓌스 대위의 어깨에서 견장을
뜯어내고 바지에서 참모본부의 장교임을 상징하는 붉은 줄을 죽죽 걷어냈다. 그리고는 드
레퓌스가 차고 있던 칼을 두 동강으로 부러뜨려버렸다. 그는 동강난 칼을 땅 위에 내동댕
이쳤다. 드레퓌스는 연병장에 늘어선 병사들 앞을 지나가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시찰 나온
참모장교처럼 꼿꼿하고 정확하게 걸어나왔다. 이 참혹한 날을 견딘 그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정에 이런 불행과 불명예를 던져 넣었을까?... 그러나 내 용
기는 아직 꺾이지 않고 있소. 나는 장래를 생각하면서 힘을 돋우곤 하오.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의지는 강력한 지렛대라오. 나는 항상 명예와 정의를 지켜왔으며 의무를 다른 무엇보다도
앞세워 왔다는 것을 당신도 알거요...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무죄를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쉬지 않고 매일 나는 무죄임을 외치
겠소...
하지만 사실 이것은 허세였다. 아내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늠름한 모습을 보인 것뿐이
었다. 나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너지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누님, 매부, 보십시오. 나는 슬픔으로 심신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이런
불운을 당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힘과 용기가 나를 저버린다
면... 내 아내를 돌봐주십시오. 그녀는 훌륭한 여지입니다. 그녀의 영웅적인 용기는 찬양할
만합니다. 그녀를 친구로 삼아주십시오.
누님, 나는 항상 누님이 알고 있는 옛날의 나입니다. 선량하고 용감하고 정직합니다. 그러
나 운명이 나를 덮쳐 이와 같은 처지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참는 데는 내가 용감하다는 것을 누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러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것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시작일 뿐이었다. 1895년 2월 21일, 드레퓌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
작스레 성나자렛호에 태워져 기아나의 적도 해안으로 가는 항해 길에 올랐다. 바로 악마도
행이었다. 드레퓌스는 긴 항해 동안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마침내 악마도에 도착하였다. 정
식명칭이 살뤼제도인 이 섬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유형장소로도 쓰지 않던 곳으로
한때는 나환자들이 격리 수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조차 다른 곳으로 옮겨갔
다. "나는 군인의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순교자의 영혼은 갖고 있지 못한 듯하오." 드레퓌
스는 이곳에서 부인 루시에게 당시의 고통을 호소하였다.
제2라운드, 무죄 방면된 진짜 간첩
세상은 완전히 드레퓌스를 잊은 채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그 사이 군 내부에도 큰 변
화가 있었다.
정보국 방첩 책임자 상데를 대령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피카르 중령이 들어섰다. 피카르는
국방성의 참관인으로 드레퓌스 재판에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증거를 깊이 있게 검토
해 보지는 않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진실은 엉뚱한 일에
서 예기치 않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자가 참모본
부 배속을 신청하였다. 그의 신청서가 피카르 중령의 책상 위에 전달되었다. 필적이 낯설지
않았다. 피카르 중령은 곧장 금고로 달려가 명세서를 꺼낸 다음 그 필적을 에스테라지의
배속신청서와 대조해 보았다. 그는 즉시 필적전문가 베르티옹을 불렀다. 그는 명세서를 자
세히 검토한 다음에는 에스테라지의 신청서를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필적전문가는 '이
사람이 바로 명세서를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신속히 상부에 보고되었으나 '
이미 드레퓌스 사건은 종결되었다'는 답변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된
간부들이 진실을 알게 된 피카르 중령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만약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면
사건의 조작에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의 정치적 생명도 끝날 일이었다. 피카르는 아프
리카로 전출되었고 거기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뭔가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쓰기 시작하였다.
아래 서명한 전 국방성 정보국 방첩책임자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자신의 명예를 걸
고 다음의 사실을 밝히는 바입니다. 일부 인사들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
사실은 반드시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편지는 계속해서 명세서를 쓴 진짜 범인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
이 끝을 맺었다, 1. 에스테라지는 독일의 첩자입니다.
2. 드레퓌스가 했다고 알려진 행위는 에스테라지가 한 것입니다.
3. 드레퓌스 사건은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선입관으로 법을 무시한 채 매우 경솔하게 처리
되었습니다.
피카르는 이 편지의 수신인을 프랑스 대통령으로 했지만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레블르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다음 자기가 죽을 경우 그 편지
를 대통령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레블르와는 그 후 이 문제를 알자스 출신 상원의
원 케스트네르와 상의하였다. 그 문서를 신뢰한 케스트네르는 점차 유력 인사들에게 이 사
실을 알리고 다녔다. 한편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눈물겨운 구명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젊은
작가 베르나르 라자르를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실기를 쓰게 하여 이를 유명인사들에게 일
일이 송부하였다. 또한 <르마텡>지는 '이것이 바로 증거다'라는 제목 하에 문제의 그 명세
서를 실었다. 프랑스 최대 일간지였던 이 신문은 바로 그 명세서를 감정한 필적전문가로부
터 입수하여 최초로 이 문서를 대중에게 공개했던 것이다. 거래관계를 통해 에스테라지를
잘 아는 카스트로는 사람이 그 신문기사를 보고 그 명세서가 바로 에스테라지의 필적이 틀
림없다고 드레퓌스 가족에게 알렸고, 증거로 자신에게 보낸 에스테라지의 편지를 제시했다.
진실은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귀에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그 가족들은 카스트로의 증언과
증거물을 토대로 정식으로 에스테라지를 진짜 첩자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반동과 허위의 먹구름은 좀 채 잦아들 줄 모르고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프랑스
언론들은 일제히 에스테라지를 편들면서 드레퓌스와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에코 드 파
리>라는 신문은 '예수를 유다로 대우하는 것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자기 파멸에의 길'이라
고 논평했다. 진실이 알려질게 다치게 될 침모본부의 여러 지휘관들은 연일 조작한 증거
들을 흘렸고 언론들은 확인도 없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여론은 완전히 이들의 손아귀에 있
었다. 이런 와중에 재판부는 에스테라지의 무죄를 선고하고 말았다. 동시에 진술을 고발한
피카르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또 한 번 정의와 불의가 제자리를 바꾸어 앉은 것이다. 제
2라운드 역시 악의 편이 승리했다. 에스테라지의 무죄 석방과 피카르의 체포 소식은 곧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프랑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리스본에서 살로니카, 모스크
바까지 전 유럽이 애도했다.
제3라운드, 졸라의 재판
드레퓌스는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
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
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 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
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나라
란 땅과 바위와 하천, 삼림, 전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마음을 한데 묶고
사람들의 행동을 알리며 문명세계에 영향력을 좌우하는 이념으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억압, 승자와 패자의 모든 상태에서 근대 프랑스는 전 인류를 위한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뚜렷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정의가 이제 의미 없는 빈말이
되어 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 때, 관용
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 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
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
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 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
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 후 클레망소는 드레퓌스 사건에 관하여 약 800평의 글을 썼다. 매일 매일 그는 굽힐
수 없는 논리로 <오로르>지에 드레퓌스를 변호하는 힘찬 글을 썼다. 그에게는 불법성 자
체가 불의의 한 형태였다.
법만이 정의를 보장해 주는 안전판이었다. 국가이익을 위해 군부의 위신을 보호해야 한다
는 정적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가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국가이익-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관해 말하지 말라. 자의
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는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
작하면 끝이 없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차이를 허용치 않고 차이를 감내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될 게 분명하다. 새시대의 동이 터 올 때, 대혁명이 보인 첫 행동은
국가이익의 저 거대한 요새, 바스티유룰 쳐부수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회당 당수로 탁월한 웅변가였던 장 조레스 역시 케스트네르의 이야기를 듣고 드
레퓌스의 결백을 믿게 된 사람이었다. 당시 하원위원이었던 그는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운명
적으로 지배계층의 일원에서 탈락되어 인간적 고통의 상징이 된 드레퓌스에 대한 동정심을
일깨우려 하였다. 파스퇴르 연구소의 에밀 뒤클로 소장은 인간사에서 정의가 승리하도록 결
연하게 투쟁하라는 볼테르의 말을 추종하는 사람이었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이서의 대의에
무심하지 않았으며 광신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전직 법무장관은 드레퓌스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사용했다. 이렇게 합류한 지식인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한 줌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
직하고 용기 있는 사회 명사들이었다. 온갖 모욕과 협박을 헤쳐나가며 드레퓌스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게된 이들에게 에스테라지의 석방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드레퓌스의 재심과
복권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이때 바로 폭풍우처럼 밀어닥친 것이 바로 졸라
의 글, [나는 고발한다]였다. 그는 치열한 정신과 호쾌한 문장으로 단숨에 모든 허위의 장
막을 걷어내는 듯했다. 그의 긴 편지는 관련자들에 대한 준열한 고발로 끝난다.
나는 뒤파티 중령을 고발합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법적 과오의 악마 같은 중개인이었
음을, 또한 지난 3년 간 가장 부조리하고 역겨운 음모와 자기가 저지른 사악한 행위를 계
속해서 은폐하였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메르시에 장군을 고발합니다. 필경은 심약한 탓으로, 사상 최대의 죄악에 그가 공모
자로 끼여들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비오 장군을 고발합니다. 그가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서도 정치적 동기 및 참모본부의 체면을 구하고자 그것을 은폐하였으며 파렴치죄와 정의모
독 죄를 자진해서 저질렀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펠리의 장군과 라보리 소령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약한 것은 심문을 자행했음을, 즉
극악무도하게 불공정한 심문, 어리석도록 뻔뻔스러운 저 불만의 기념비를 우리에게 제공한
그들의 보고서를 고발합니다.
나는 벨롬, 베르나르 및 쿠아르 3인의 필적전문가를 고발합니다. 의학적 검진에 의해 극
들의 시력과 판단력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그들은 거짓이며 가짜인 보
고서를 작성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국방성을 고발합니다. 여론을 오도하고 죄악을 은폐할 목적에서 특히 <에코 드 파
리>와 <레클레르>를 위시한 심문들이 저열한 캠페인을 주도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첫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피고인에게 그 증거를 비밀로 가린 채
유죄판결을 내려 인권을 침해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또 두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피고인에게 죄가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를 무죄 석방하는 법적 죄악을 저지른 것
을, 그리고 이 불법성을 명령에 의해 은폐한 갓을 고발합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 왔고 행복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내가 법정으로 끌려간
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하겠습니다. 다만 청천 백일 하에서 나를 심문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응은 차라리 폭약 같은 것이었다. 낭트, 보르도, 툴루즈, 몽펠
리에, 오를레앙에서 대규모 군중이 유대인 상점을 약탈했고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졸라의 기사가 공개리에 불태워졌으며 졸라의 초상을 목매달았다. 파리의 군중은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고 소리쳤다.
대규모 항의집회가 열렸고 유혈 충동을 빚었다. 한 달 이상 전국그이 도시들이 소요에 휩싸
였다. 동시에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의 대학들에서는 정의를 위한 졸라의 입장을 찬양
하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 내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졸라에 바치는 찬사에 그들의 이름을 서명했다.
문제는 내각이었다. 졸라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졌다. 그는 메
르시에와 비오, 두 국방상을 최악의 범죄 공모자로 비난했고, 펠리와 장군을 악당처럼 처신
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모두가 졸라의 엄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만약 졸라를 중상모략 죄로 고소한다면 그에게
진실을 밝힐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드레퓌스 사건과 에스테라지 사건
의 재심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민간재판이다. 군사법정과는 달리 내각 마
음대로 도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각은 [나는 고발한다]중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비밀을 드러
낼 직접적인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정부의 체면을 새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냈다. 바로
그 구절 가운데서 '군법회의가 명령에 의해 행동하면서' 에스테라지를 무죄 석방했다는 부
분만을 중상 죄로 고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피고인 석에 선 사람은 에밀 졸라였다. 열 두 명의 배심원이
소환되었다.
파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군부 최고위 장성들과 과학, 문학계 대가들이 펼치는 이
진귀한 논쟁을 지켜보았다. 피고인측과 검사 측을 지지하는 각각의 증인들은 15일 동안 엄
청난 논쟁을 토해냈다. 검사는 졸라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고
단언하였다. 졸라의 변호사 라보리는 조용하게 이성에 호소하면서 졸라의 무죄를 주장하였
다. 특히 같이 기소된 <오로르>지의 변호를 맡은 클레망소는 배심원들을 향해 이렇게 외
쳤다.
판결의 날에 시민들은 우리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배심원 여러분, 저쪽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저 그림에서 여러분들은 바로 유죄사건을 보
고 있습니다. 그림이 재판장 등뒤에 걸려 있는 것은 재판장이 그림을 보고 당황해 하지 않
도록 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저 그림을 재판관들 앞에 걸어야 합니다. 재판관들이 판
결을 내릴 때 우리의 문명이 인류가 수치로 여기는 오판의 본보기를 저 그림에도 보도록 해
야 합니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의 임무는 우리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판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앞에 출두했지만, 여러분을 역사 앞에 출두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변론도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군중들이
법정 건물까지 쳐들어와 연일 시위를 벌였고 졸라를 위협하였다. 졸라는 숱한 봉변과 협박
을 당하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은 끝나고 배심원은 평결을 내렸다. 8대 4로 유죄판
결이 내려졌다. 졸라는 징역 1년, <로고르>의 발행인은 4개월, 그리고 각각 벌금 3,000프랑
이 선고되었다.
제4라운드, 또 한번 배반한 재심
그 동안 새 인물이 국방상에 올랐다. 그는 잡음이 많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새롭게 조
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여러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
혀진 것이다. 심지어 원래 편지에 다른 사본을 붙여 색깔만으로도 알아볼 정도로 조작방법
이 거칠었다. 결국 이 일을 꾸민 알리 중령이 구속되었다. 그는 자신이 구금된 요새에서
자살함으로써 지금껏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어 왔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허위보고서 작성으로 인해 졸라에 의해 고발
당했던 펠리 외 장군은 부하들에게 기만을 당하여 배심원을 오도했던 사실을 참회하면서
국방상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에스테라지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프랑스를 떠나 영국
으로 도망친 후였다. 이쯤 되자 재심은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참모본부의 음
모가 드러났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는 사람이 훨씬 늘어났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파리고등법원에 제출되었다. 또다시 긴 논쟁이 법
정 안팎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드디어 고등법원 3부 46명의 판사들이 자신들에게 제출된 탄
원서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붉은 법복을 입고 자리에 않았다. 프랑스와 문명세계는 5
년을 끌어온 악몽을 걷어낼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결을 읽는 판사가 입을 열었다. "본
인은 모든 증거를 검토한 후 그 명세서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에 위해 씌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나흘 후 재판부는 1894년 12월 22일의 선고는 무효라고 선언하고
드레퓌스에게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도록 명령했다. 그 이틀 후 악마도에 수용되어 있
는 드레퓌스의 감방에 형무 소장이 나타나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읽어 주었다. "고등
법원의 판결에 따라 드레퓌스 대위는 유형자 규정을 받지 않고 다시 군복을 입도록 허용되
었다. 드레퓌스는 형법상의 구속에서 해제된다. 드레퓌스를 프랑스에다 실어다 줄 순양함 스
펙스 호가 오는 출항한다." 드레퓌스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한 장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이다. 드레퓌스를 실은 스펙스 호가 프랑스를 향하고 있는 동안 법무상은 드레퓌스 사건의
유죄판결을 강요했던 국방상 메르시에 장군을 기소하자는 동의 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생명의 위협과 협박을 견디지 못해 영국으로 망명했던 졸라도 영국에서 11개월의 망명생활
을 끝내고 귀국했다. 최초 조작 사실을 알렸던 피카르도 324일의 감옥생활 끝에 석방되었
다.
다시 재심이 열렸다. 렌느의 법정에 나타난 드레퓌스는 서른 아홉 살의 나이였는데 이
미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지난 5년 동안 국내외적 관심과 논쟁의 초점이었
던 그는 냉정하기만 했다.
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에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의 드레퓌스는 무미건조한 어조
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조국과 군을 향해 죄가 없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싶을 따름
입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이어갈 나의 이름에게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5년 동안 몸서
리치는 고통을 참아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정직성과 정의감에 비추어 나의 그러한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이번에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5
대 2로 드레퓌스에게 대역죄를 범했다는 평결이 나온 것이다. 다만 정상을 참작하여 10년으
로 감형한다고 선고하였다. 온 세계가 이 판결소식에 분노했다. 전세계 프랑스 대사관과 영
사관에는 항의데모들이 들이닥쳤고 미네아폴리스에서는 프랑스 국기가 불태워졌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만국 박람회를 보이콧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12년만의 승리
빗발치는 항의에 힘입어 1899년 9월 10일 드레퓌스는 특사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00
년 12월에는 다시 사면령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다시 4년 후 국방상은 드레퓌스의 재심청
구에 따라 그가 조사한 새로운 증거를 첨부하여 1904년 3월 최고재판소에 제출했다. 이번
재판에서는 심리 미진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증인심문을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또
한 차례의 행진-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증인심문과 증거조사의 행렬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5년 전의 렌 재판, 그보다 2년 먼저 있었던 졸라의 재판, 에스테라지 재판, 그리고 1894년의
첫 재판, 이 모든 재판의 증인심문이 다시 진행되었다. 괴괴하고 목소리에 녹이 슨 증인들
이 차례로 등장했다.
1906년 7월 12일, 선고공판이 열렸다, 이제 법정에는 더 이상 군중이 몰려들지 않았다. 드
레퓌스 가족과 지지자 몇 사람, 법률적 관심을 가졌던 변호사 몇 사람만 나왔을 뿐이었다.
드디어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판결을 오판이라고 파기했다.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할 어떤 증거도 없으므로 재심의 여지도 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유죄판결이 무
효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이러한 최고재판소의 판결내용을 파리와 렌에 게시하고 관보 및
드레퓌스가 지정한 50개 신문에 공고하되 그 비용은 재무성이 부담한다고 명령하였다. 정
부는 지체없이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복권 절차를 밟았다. 정부는 드레퓌스를 소령으로 승진
시키고 '레제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로 하는 동의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기보다는 은퇴를 택했다. 피카르는 준장으로 승진, 복직되었다.
최후
레제옹도뇌르 훈장 심사위원회는 ';비견할 데 없이 가혹한 희생을 치른 군인에게 적합한
보상으로 드레퓌스에게 훈장을 수여키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드레퓌스는 악마도
에서 썼던 일기를 출판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골이 팡테옹에 이장되는 행사에 참석했다가 반 유대계 신문기자가 쏜 총격에 경상을 입기
도 하였다. 이 저격사건을 들은 세계적인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는 '당신은 또 고통을 또
당하셨고, 우리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의 고통도 울음도 없을 것입니
다. 주위를 보십시오. 멀리 가까이, 모두가 당신편이며 당신을 위해 비겁함과 거짓과 망각
과 싸우려는 사람들뿐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저 사라 베른하르트입니다'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1914년 드레퓌스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소집되어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 그중 하나가 베르됭 전투였다. 1918년 9월에는 중령으로 승진한 다음 다시
제대하였다. 드레퓌스는 그후 오랫동안 병마와 씨름하다 1935년 7월 11일 그 파란만장한 생
을 조용히 끝냈다.
졸라는 {진실}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졸라가 생애 최고 걸작으로 기획한 것
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의미와 구성에 있어 현실이 소설가의 상상을 능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2년 가을 졸라는 방에 피워 둔 난로 가스에 중독 되어 숨졌다. 완전한 승리를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클레망소는 이렇게 졸라를 기렸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 반항하며 그에게
거부할 것을 거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고 오도된 대중
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열렬히 드레퓌스를 옹호하고 그 무죄를 주장했던 조르
주 클레망소는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패색이 짙어갈 무
렵 프랑스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여전히 투지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나는 파리의
앞에서 싸우겠다. 나는 파리의 뒤에서도 싸우겠다. 파리가 함락되면 나는 루아르에서 싸울
것이고 가론에서 싸울 것이며 최후의 경우에는 피레네 산중에서라도 싸울 것이다.
혹시 피레네에서라도 쫓겨나면 우리는 바다에서라도 싸워야 한다.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염
원은 깎이는 법이 없을 것이다." 클레망소는 마침내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그 전쟁
을 승리로 이끌었다.
피카르 장군은 군대에 복귀하여 진급을 거듭, 1908년 클레망소 내각의 국방상이 되었다.
군부의 개혁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안았던 그는 1914년 낙마사고를 당해 사망하였다. 조레
스는 피카르의 죽음에 붙여 이렇게 썼다. "운명의 착오라든가 인생항로의 옳고 그름이 무
슨 상관이겠는가. 인생의 의미를 주는 것은 찬란하고 열렬한 몇 시간으로 족한 것을..."
폰 슈바르츠코펜, 독일 무관으로서 첩자 에스테라지의 파트너였던 그는 좀처럼 입을 열
지 않았다고 한다. 장군으로 승진한 후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죽음이 임박해 오던 1917년에
서야 그는 혼미상태에 빠져 프랑스어로 부인에게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음을 고백했다고 한
다. 1930년 6월1일 드레퓌스는 폰 슈바르츠코펜 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 죽는 남편 보병사령관 막스 폰 슈바르츠프코펜 장군의 일기책을 별도의 봉투
에 넣어 보내드립니다. 이 일기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편집 출판한 것
입니다. 남편은 당신을 희생의 재물로 만든 그 괴상한 재판에 늘 유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명백히 서술되어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그분은 재판에 나
서 증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은폐된 진실 뒤에서 활개쳤던 에스테라지. 런던으로 도주한 그는 런던 빈민굴에서 구차
한 말년을 보냈다. 너절한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자고 밤이면 나와 산보에 나서던 그
는 1923년에 죽었다.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었다.
100년 후
지난 1998년 1월 12일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 제9의 한 허름한 주택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나는 고발한다]를 썼던 에밀 졸라의 저택 앞에서 그 글의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팻말
부착식을 거행한 것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장 조레스가 '19세기 최대의 혁명적
행동'이라고 극찬한 이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에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하였다고 큰 화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이어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에밀 졸라의 그 글의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의 진본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 전문이 <르몽드>를 비롯한 몇몇 매체
에 다시 실렸고, 또 다른 신문은 '20세기말의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제목 하에 또 다른
현안사건에 대해 나딘 고디머, 로버트 윌슨 등 명사들을 동원하여 신판 [나는 고발한다]를
연재했다. 텔레비전 방송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토론회를 몇 주 동안 계속
내보냈다.
'사회와 정치에 글이나 행동하는 식자'라는 프랑스적 의미의 '지식인'은 1763년 볼테르
의 '관용론'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볼테르는 지식인이라는 말이 태어나기 전의 지
식인이었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고 그 말이 대중화한
것은 바로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를 비롯해 드레퓌스 대위의 무
죄를 주장한 학자, 작가, 예술가, 기자, 교사들에 대해 반 드레퓌스파는 '앵텔렉튀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지식인이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무책
임한 선동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뜻이었지만 그 후 바로 이러한 지식인들이
프랑스 사회와 역사의 중심부에 서게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수없이 태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바로 이러한 지식인의 앙가주망(현실참여)에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지식인의 세기'는 프랑스 지식인의 참여와
저항,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청년 레옹 블룸, 모리스 바레스에서부터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몽티,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의 군상,
역할, 활동 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지난 100년간을 '지식인의 세기'라
고 결론 내리고 있다. 새벽 별처럼 빛나는 지식인들의 첫 번째 자리에 졸라가 있고 드레
퓌스 사건이 있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법정에 선 반역자
"피고인 기립하시오"
거대한 오크 테이블 뒤에서 프랑스군의 카키색 군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새 사람의 판
사 앞에 일어섰다. 그의 뒤로는 프랑스 고등법원 대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근엄한 할아버지 얼굴을 한 필리페 페탱은 프랑스 국민들이 지난 나치 점령 기간 4
년 동안 포스터, 동상, 우표 등을 통해 수없이 보아온 얼굴이었다. 성필리페의 흉상은 프랑
스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핑크 빛 피부는 늘어져 있고 밝은 푸른색
눈에는 피로의 기색이 완연하였다. 다만 백발과 턱수염만은 그대로였다. 패배한 프랑스의 구
원자, '베르됭의 승리자 원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암울했던 지난 4년 동
안 충성과 애정을 바쳤고, 그를 보기 위하여 수많은 도시의 거리를 메웠으며 '원수, 여기 오
셨네'라고 열렬히 노래불렀다. 그런 그를 피고인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니 참으로 이상
한 기분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약간은 슬프게 만들었다. 그가 방청객이 꽉
들어찬 법정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일어섰고 모두 당황해했다. 여전히 프랑스의 원수였다.
재판장 몽기보는 회한이나, 슬픔, 동정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붉은 족제비의 휘황찬란한
법복을 입고, 약간 뾰족한 수염을 기르고, 키가 인상적으로 큰 그는 이 법정 안에 감도는
고뇌에도 불구하고 사무적으로 정상적인 재판을 할 결심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름 , 성, 나이, 직업을 대시오."
"필리페 페탱, 프랑스의 원수요."
프랑스의 온 국민들이 라디오를 통해 수없이 들었던 그 목소리,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배
했을 때 모든 국민들에게 '협력의 명예스러운 길로' 자신을 따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였다.
그는 필리페에 힘주어 말했다. 배심원들에게 또 다른 필리페, 즉 새로운 권력자 필리페 드골
을 연상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노인은 파리의 한복판 시테 섬에 있는 이 숨막히
는 법정으로부터 엘리제궁에 있는 드골에게 미묘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당
신은 나를 재판하고 비난하고 총살까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한때는 당신들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의 종
전, 프랑스의 해방과 더불어 가장 큰 정치적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나치 점령 4년 동안 비
시정권을 이끌었던 베르됭의 영웅, 페탱 원수에 대한 재판이 그것이다.
비극의 사생아, 비시정부
1938년 루드비히 베크 독일 합참의장은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런 프랑스 군대가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지 6주만에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독일군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지노선을 통과하여 단 몇 주만에 피레네
산멱까지 점령하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석권한 독일은 이미 5월 15일 전선을 돌파하였
고 한걸음에 파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독일은 영불 해협의 북서쪽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
과 영국군을 함께 패퇴시켰다. 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영국군 34만 명이 프랑스를 빠져나
갔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대 프랑스 선전 포고를 했고 프랑스 정부는 루아르강 하류
로 철수하였다.
마침내 6월 14일 밀물처럼 밀려든 히틀러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개선문과 샹젤리
제 거리를 행진하였다. 자유, 평등, 박애의 위대한 프랑스 정신을 담고 있는 이 상징적인
장소를 히틀러가 유린하자 자유세계는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혔다. 전세는 더욱 밀려 보르
도까지 쫓겨온 프랑스 내각은 항복과 항전의 기로에 섰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기
대하기 어려웠다. 레이노 수상은 혼란이 극도로 고조되고 주요전력과 북부 공업 지대를 상
실한 데다가 이미 전의를 사실한 상태에서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겨 항전할 것을 제안하
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운명을 강조하고 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의미였지만 이미
늦은 제안이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프랑스 영토를 모두 잃은 다음에 불영
연합이 무슨 소용 있겠느냐는 회의가 프랑스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지배적이었다.
휴전파와 항전파가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던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페텡 원수가 취임하였다. 페탱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
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베르됭 전투의 영웅으
로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페탱 원수는 원래 스페인대사로 나가 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았던 것이다. "페탱, 가지 마시오. 나이 핑계를
대시오. 당신은 베르됭의 승리자였소. 당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패배한 전쟁에 빌려주지
마시오." 스페인의 총독 프랑코는 페탱의 귀국을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페탱은 프랑
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히 몰락하느니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개
낫다는 생각으로 수상을 맡았다. 당시 그는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
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도 똑같은 운명에 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정부가 휴전하지 않으면 프랑스 군대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공포에 빠질 것이다.
프랑스 본토를 포기하는 것은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꼴이 되고 만
다. 프랑스의 영혼은 프랑스에 남아야만 지켜낼 수 있고 연합군 대포와 함께 재정복한다고
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의 페탱에게는 '일단 프랑스를 떠나면 다
시는 프랑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신념이었다.
휴전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 페탱은 수상으로 지명 받은 지 몇 시간만에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독일은 앞으로 남은 영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영국을 고립시키고 프
랑스 함대와 식민지를 중립화시키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항복조건보다
는 프랑스 정부의 주권 존속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점령을 실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이
렇게 하여 6월 22일 독일대표단과 프랑스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페탱은 6월 25
일자 대국민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휴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여러 가지
엄혹한 조건이 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예는 지켜졌다. 누구도 우리의 비행기와 함대를 사
용할 수 없다. 우리는 본국과 식민지에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육해군 부대를 보유하
고 있다. 정부는 의연히 자유롭다. 프랑스는 프랑스인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프랑스인을 통치할 프랑스인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시정부였다. 프랑스 휴양도시 남
부의 비시를 전시 수도로 정한 비시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의원과
내각의 관료들은 혼비백산하였지만 3분의 2정도가 비시에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권력을 공화국 정부에 부여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제정된 헌
법은 국가 주석의 권한을 루이 16세 때보다 더 강력하게 규정하였다. 1940년 7월 10일, 페
탱은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였고 이로써 비시정권이 수립되었다. 그에 앞서 열 두 명의 각
료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였고 지방의 지사를 임명하였다. 비시정부 수립에 가장 중요
한 역할을 했던 라발은 부주석이 되었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비시정권의 합법성에 대해 당초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비록 독일
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였지만 정권의 성립이 무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형
식 논리적으로 보면 비시정권은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 정부였다. 그
러나 런던에 망명한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비시정권을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제3
공화국은 존속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드골의 선언은 1940년 6월 18일 페탱 원수의 독일
과의 휴전협정 직후 영국으로부터 방송된 '라디오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드골의 선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째, 페팅 정부는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목표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상실했
다. 왜냐하면 프랑스 대혁명 때의 1793년 헌법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영토를 점
령한 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 페탱 정부는 휴정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을 노예
상태로 전락 시켰으므로 불법적인 정부이다. 페탱 정부가 휴정 협정에 서명한 것은 민족이
익을 배반한 것이며 '자유 프랑스' 만이 민족이익의 성실한 수호자로 남아 자동적으로 정
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했다는 게 드골의 법률해석이다.
셋째, 드골은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이 협정 제10호는 프
랑스 국민에게 나치독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드골
은 휴전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점령지역 내 저항
운동을 조직했고, 나치 협력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비시정부는 법률적인 차원에 앞서 진정한 프랑스 국민의 정부일 수 없었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는 드골의 선언은 철학적 차원에서, 또한 도덕적 견지에
서 비시정부를 난도질한 것이었다.
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파시스트정권이었다. 헌법이 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정한 일
련의 탄압적 법률을 통해 프랑스대혁명 이후 확립한 '인간의 권리들을 폐기하였고, 노동조
합연맹 등 거추장스런 모든 조직을 해체하였다. 나아가 제3공화국의 요인들을 체포, 재판하
였으며 49명의 지사를 포함한 고급관료 2,800명을 숙청하였다.
더구나 휴전협정은 그 사생아인 비시정부를 괴뢰정권으로 만들어버렸다. 휴전협정을 살펴
보면 일방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투재개를 금지시킬 것을 약속했을 뿐 독
일이 무력행위를 중단한다는 조항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 포로를 강
화시까지 억류해 둘 수 있다는 것, 프랑스 군대 병력 수를 10만 명으로 제한할 것, 군수품을
인계할 것, 공군의 무장을 해제할 것 등의 내용이 휴전협정에 포함돼 있었다. 이 규정에
따라 150만 명의 프랑스군 포로가 즉시 인질이 되었고 군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0만 명이
란 조건도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프랑스 제1연대 사병 3,000명만 남았다.
한때 병력이 300만 명에 달하는 등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군대는 이렇게 초라한 몰
골로 변하고 말았다. 나아가 프랑스 정부는 매일 9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점령군 유지
비를 부담해야 했다.
이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 북부는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을 받게 되었고, 남부프랑스는
비시정권 통치지역으로 분리되었다. 북부 점령지대는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가장 풍요
로운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점령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독일은 파리의 마지
에스티 호텔을 본부로 하여 카이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 총사령관은 군대의
안전뿐 아니라 치안, 경제, 언론까지 장악하였다.
한편 남부의 자유지대는 비시정부의 통치지역으로 위임되었다. 그러나 독일측 감시위원회
가 설치되어 자유지대의 관보 검열, 중요공무원 임명허가를 요구하였다. 1942년 11월 이후에
는 그나마의 자유도 사라져 직접 점령지역과 자유지대 사이의 구별이 사실상 없어졌다. 알
자스로렌 지방은 독일에 합병되었다.
막대한 점령비용의 부과는 합법적인 약탈에 다름 아니었다. 비시정부는 일정한 독립성을 유
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페탱 원수의 명성을 이용한 실질적 점령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
페탱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몽기보 재판장이 다음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페탱의 수석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1875
년 프랑스헌법에 따르면 오직 상원만이 국가원수를 반역혐의로 재판할 수 있으므로 이 법
정은 페탱을 재판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원은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배심
원 구성이 불공정하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24명의 배심원 중 12명이 레지스탕스 출신이고
나머지 12명이 전직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페탱과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로서 공
정하게 심판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페탱의 변호인단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배심원
을 축출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을 소란에 빠뜨린 것은 세 번째 주장이었다. 3명의 재판관과 검사인 검찰총장
이 비시정권 치하에서 페탱에게 충성서약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
총장 모네가 벌떡 일어나 큰 코를 벌렁거리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 들었다. 1941년 9월
자신은 18개월 이상 퇴직해 있었기 때문에 페탱에게 충성서약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충성서약을 했을까? 아마도 나는 주저 없이 '아마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공직자들은 상사에 의해 그 서약을 강요받았고, 강요한 당사자는 바로 외국군대이다. 외국
군대의 통제하에 이루어진 서약은 아무런 효력과 가치가 없다."
변호인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검찰총장은 '여기는 공공집회 장소가 아니다'고 소리
치며 경위를 부르려 하였다. 소란이 진정된 후 검찰총장은 1940년 10월 당시 의회가 페탱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바가 없이 때문에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
므로 상원만이 재판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은 기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퇴정하였다가
30분만에 등정한 재판부는 고등법원이 페탱 원수를 재판할 수 없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반
박하였다. 첫 샅바싸움은 검찰의 승리였다. 하지만 길고 긴 논쟁의 서막일 뿐이었다.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
서기가 기소장을 낭독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전쟁 전에 반 공화국 세력에게 빌려준 사실,
정부형태를 바꾸거나 파괴할 목적으로 공직에 취임한 사실, 공모자들과 함께 적국 나치독일
에 협력하여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해친 사실,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를 지원할 목적으로
적국 또는 그 요원과 접촉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사실 등이 주요 죄목이었다. 이어서 정리가
증인 명단을 낭독하였고, 호명된 증인들은 방청석에 나와 피고인 뒤편에 나란히 앉았다. 이
때 변호인은 피고인이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재판장의 허락에 따라 페탱은 위엄
있는 자세로 꼿꼿이 선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대여섯 장의 종이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
다.
의회 대표들을 통해 1940년 7월 10일 나에게 전권을 준 것은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내
가 해명해야 할 대상도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재판부는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후 이 법정에서 어떤 진술도 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어떤 진
술도 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봉사하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했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1918
년의 승리를 장식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그날, 다시 프랑스는 나에게 의지해
왔다. 나는 아무 것도 요구한 적이 없고 바란 것도 없었다. 자만 프랑스 국민이 나에게 간
청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그러한 조건 아래서 통치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매일 비수가 목구멍을 겨눈 상태에서 나는 적의 요구와 싸워야 했다. 검찰은 단지 나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역사는 내가 여러분을 보호했음을 말해줄 것이다.....드골 장
군이 우리의 국경 밖에서 투쟁하였다면 나는 안에서 프랑스를 보존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그러므로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했
다는 죄로 구속되거나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다.
그는 조금도 주자하지 않고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다. 나치와의 휴전은 '필요한 행동이자
구원의 행동'이었고 '군사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협상했던 것'이었다. '휴전은 프랑스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자유롭게 하고 프랑스 제국이 안전하게 남도록 하였다. 의회
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주었고, 바티칸에서 소련에 이르기까지 무든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
았다. 이 권력은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로 사용되었다. 국민들을 위해, 점령된 나라의
국가원수로 남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희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점령은 나로 하여금
내 의지를 거슬러 일정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하였지만 프랑스의 존립을 위해 필수적인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폐허와 무덤을 해방시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
는가?" 이렇게 그는 반문하였다. "나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프랑스에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을 주었다. 만약 비난하려거든 나를 그 비난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
는 말하려 한다. 당신과 온 세계에,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
는 신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페탱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법정 안에는 완벽한 침묵이 흘렀다.
단호한 어조의 짧은 연설이 청중을 압도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뇌가 일었고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확신이 흔들렸다. 과연 그의 말이 옳은 것일까?
방패론의 허구
나는 4년 이상 매일같이 프랑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였다. 충성스럽게, 그리고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나는 하나의 목표만을 가졌다. 바로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나는 방패라도 되려고 하였다.
1944년 8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향한 페탱의 대 국민성명의 일부 내용이다.
페탱은 법정에 서기전부터 '방패론'을 극구 주장해 왔다. 드골이 나라 밖에서 프랑스의 칼
을 들었다면 자신은 안에서 프랑스 국민을 위해 프랑스의 방패를 들었다는 것이다. 정복자
인 나치 독일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자신이 방패가 된 덕에 프랑스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
익을 줄 수 있었다는 게 방패론의 요지였다. 과연 비시정부는 나치독일의 전면적인 점령으
로부터 프랑스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었을까? 페탱은 프랑스의 폴란드화를 막았던 것일
까?
독일 점령군은 프랑스를 착취하고 징발하였다. 엄청난 수의 선박을 압류하였으며, 철도
재고의 3분의 1을 장악하였고, 모든 가솔린 재고와 군용을 위한 식품을 징발하였다. 프랑스
산업에 필요한 원료는 독일로부터 공급받는 구조로 바뀌었고, 생산 가동률은 50%에서 점점
더 떨어져갔다. 프랑스는 거의 완전한 농업국가로 전락할 지경이었다.
전쟁 전 프랑스는 가장 앞선 농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점령 당시 국민의 일일 칼로리
섭취 량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을 포함한 국가들 중에서도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최
악의 상황이었다. 독일 본토와 점령군에 대한 식품공급량은 폴란드보다 많았다. 영토의 관
점에서 보더라도 비시정부가 나치독일과의 협력 관계로 특별히 이득을 본 게 없었다. 알
자스로렌 지방은 독일에 병합되었고 두 개의 북서 해협 해안 도시가 브뤼셀에 있는 독일
군정의 관할 아래 놓였다.
또한 강제노동이나 유대인 문제에서도 비시정부는 별반 방패가 되어주지 못하였다. 라발
은 전후 80%의 벨기에 노동자가 강제노동에 종사하였지만 프랑스는 단지 16%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의 유대인 92%가 처형, 이송되었지만 프랑스 유대인은
95%가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시정권은 프랑스에 할당된 강제노동자의 숫자를 채우
는 데 광분하였고, 실제로 1943년 11월 현재 러시아나 폴란드보다 더 많은 약 130만 명의
프랑스 남자가 독일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강제노동소행의 경우에는 비시정
부가 직접 그 일을 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더구나 비시정부 하에서 13만 5,00명이 구속되었고, 7만 명이 강제 수용 당했으며, 3만
5,000명의 공무원이 해직되었다. 게다가 갖가지 입법이 이루어져 6만여 명의 조직원이 조사
받았고, 6,000여 명이 고문당했으며, 549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비시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의 방패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향한 총칼이 되었다.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과 탄압의 공포로 몰아넣은 민병대의 존재가 사실을 증명한다. 1941년 봄에
창설된 민병대는 준 군사 조직으로 경찰과는 별도로 공산당원과 레지스탕스를 학살하고 탄
압하는데 이용되었다. 나치의 'SS' 'SD'로부터 훈련받고 무장한 이들은 결국 나치의 점령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비시정부의 방패이론은 설 땅이 없어진다. 독일 당국은 점령군으로서 프
랑스에 많은 것을 요구하였고, 비시정부는 그 요구를 하나하나 들어주고 말았다. 독일이 인
질로 잡았다가 총살한 프랑스인이 수천 명을 넘어 섰다. 1942년 11월, 독일군은 프랑스의 자
유지역을 유린하였다. 곧이어 해군함대가 있는 툴룽이 점령되었다.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이
었으나 저항할 힘을 잃은 뒤였다. 비시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처단하여 프랑스와 국민의 이
익을 수호한 것보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정책을 프랑스 정부의 이름으로 합법화시켜주는 역
할을 수행한 것이다.
진정한 방패
진정한 방패는 딴 곳에 있었다. 페탱 스스로 프랑스의 창으로 지목한 드골은 국방차관보
로 전쟁을 지휘하던 중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하던 페탱이 수상으로 취임하자 바로 그 다음
날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할 아무런 권위도 없는 '외로운 모
험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패배주의에 빠진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크게 실망한 영국 수상
은 드골을 환영하였다. 드골은 처칠의 협조 하에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독
일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영광스런 군인의 이 불쌍한 그림자가 노령의 허영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조국을 팔았다'고 페탱을 비난하였다. 이미 프랑스가 연합국 명단에서
누락되고 있던 상황에서 드골의 존재와 그의 선무 방송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드
골은 대독협상을 추진 중이던 프랑스 지도자들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1940년 7월
5일 항명죄로 비시정부에 의해 궐석 사형선고를 받았다. 페탱은 그를 '내 가슴속에 키운
독사'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드골은 점차 휴전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지도가, 정복되지
않은 프랑스의 유일한 대표가 되기에 이르렀다.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영국정부와
민간차원의 성원이 줄을 이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으로부
터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와 식민지가 그 통치하에 들어왔다. 1944년, 드
디어 지리한 망명의 계절이 끝나고 드골은 해방의 영웅이 되어 고국의 땅을 밟았다.
또 다른 방패는 레지스탕스였다. 담벼락에 나치 독일을 비난하는 낙서와 슬로건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레지스탕스 활동은 점차 사보타지, 암살로 발전하여 마침내 나치 점령군
과의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레지스탕스는 1942년 시작된 비시정부
의 강제동원체제로 크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 행 기차를 타거나 레지스탕스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더구나 민병대가 레지스탕스와 민간인들을 아무 사법절차도 없이 마구 처형하는 잔학성을
보이자 레지스탕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사람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수였다. 이들은 활동과정에서 1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희생이 컸지만 독일점령군과 비시정부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
했다. 자신의 허구적인 논리 앞에 스스로 함몰된 비시정부와 페탱이 그 죄과를 치르는 순
간 이들은 오랜 분투 끝에 얻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인간 군상의 오묘한 인연들
페탱의 재판은 피고인뿐만 아니라 소환되어 나온 화려한 증인들의 면모에서도 역사적이었
다. 전직 수상들, 의회 지도자들, 부르봉 왕가의 황태자, 노조 지도자 등을 포함해 63명이나
되는 주요 인사들이 증인으로 불려나왔다. 어떤 이들은 페탱을 비나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옹
호했다. 선과 악은 종종 그 경계가 너무나 희미하였다. 페탱을 비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프랑스의 영혼'을 지킨 애국자는 아니었으며. 동시에 페탱을 옹호한 사람들이라고 모
두 '일신의 안락'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는 아니었다.
재판이 시작된 1945년 7월 23일부터 재판이 끝난 그 해 8월 6일까지 파리 특별고등법원의
대법정은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들이 빚어내는 오묘한 인간학을 연출한 화려한 무대
였다.
제3공화국의 수상이었던 폴 레노는 '페탱이 권력에 절정에 있을 때 나는 그를 경멸하였
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를 동정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경건하고 나직한 어조로 페탱
이 자신을 적에게 넘겼지만 자신은 개인적 원한에 연연하지 않겠다면서 페탱에게로 권력이
넘어가던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증언했다. 변호인들은 그가 사임 직후 페탱으로부터 미
국대사 자리를 제의 받고 수락했던 사실을 들어 그의 진실성에 상처를 입혔다.
아무런 주관 없이 온갖 정파에게 이리저리 끄려 다니기만 해서 '제3공화국 통곡의 벽'
이라고 불렸던 전임 대통령은 페탱이 그를 일개 하인 자르듯 잘랐음에도 페탱을 위해 눈물
을 흘렸다. 그는 1919년 7월 베르됭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탱이 전 유럽인들의 찬탄과 환호
속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행진을 벌일 때를 회상하며 한탄하였다. "그토록 높이 올랐
다가 이토록 낮은 곳으로 떨어지다니! 대체 어떤 악한 열정이 그의 무인 정신을 더럽혔던
말인가!"
호시절, 그토록 페탱을 찬양하며 그의 눈 도장을 받으려 애쓰던 제3공화국의 고위 관료
들은 대부분 휴전협정을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라고 비난하였으며, 자신들은 페탱과 라발
에게 속아 동의한 것뿐이라고 발뺌하였다. 하지만 변호인들이 그에게 과거에 했던 아첨성
발언이나 자리 얻기 운동을 한 사실을 되묻는 바람에 그들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
시정부의 각료들과 장성들, 고위관료들은 대부분 조심스럽게 페탱을 옹호하면서 어찌 '베르
됭의 영웅'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며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물론 그 중
에는 페탱에 대한 충성심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베르나르 세르그니
장국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증인 석을 떠나며 재판부에 페탱과 악수를 나누게 해달라
고 고집했다. 워낙 많은 증인들이 자기 변명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그의 변함없는 태도는 오
히려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고통에 빠뜨린 박해자' 페탱을 대하는 데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인 사람은 한때
페탱의 부관이었던 라코 소령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페탱의 참모로 복무
하던 중 달라디에에 의해 해임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정장에 나가 부상을
입고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병동에서 탈출한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비시정부는 독방에 갇힌 그를 게슈타포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그는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게슈타포의 지하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뒤 구
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페탱과 독일군과의 관계를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나타났을 때 그는 마치 유령의 모습과
흡사했다.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였고 두 다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마
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며 증언을 끝냈다. "나는 페탱 원수에게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 그
는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나를 사지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백살이
다 되어 가는 한 노인에게 떠넘기는 것을 보니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페탱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증인 석에 앉은 사람들 중에 최고의 악인으로 꼽히는 사람은 피에르 라발이었다. 그는 비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상의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정치
에 입문하였으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태어나 사람'이라는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절충하
고 타협하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탁월한 수완'으로 파시스트가 되었다. 그는 '승리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해 좋다'는 신념을 가졌고 달변과 술수로 비시정부 출범에 결정
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비시정부의 수상에 오른 후 나중에는 페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결과야 어찌되었건 프랑스의 방패가 되려 했다는 페탱의 선의만큼은
별로 의심치 않았으나 라발에 대해서는 그 반대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반역을 한 '반역의
사도'였으며 '우리들의 원수'를 그릇된 길로 몰아넣은 '악의 화신'이었다. 프랑스 국민들
은 페탱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비난과 저주를 그에게 퍼부었다. 라발은 예의 그 유창한
언변으로 자신의 부역행위를 '공화국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휴전협정 당시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독일이 이길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겠느냐'는 게 항
변의 요지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 침공 1주년 기념일에 한 저 악명 높은 라디오 연설-'나
는 독일의 승리를 기원한다. 왜냐하면 독일이 승리하지 않으면 공산주의가 내일 당장 전
유럽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했다-에 대해서도 '독일과 대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그래야만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고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언행을 했다가는 그들의 요구가 더 가혹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라발의 주장도 페탱의 방패이론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의 선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발은 페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해부하기에는 너무나 따스한 시체
페탱 재판 서두에서 벌어졌던 판사와 검사의 전력 시비에서 보았듯이 부역자 처벌 문제
는 프랑스 국민 모두가 치러야 할 홍역이었다. 목숨걸고 저항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는 비시정부 4년 치하에서 살아온 모든 국민이 어떤 의미에서는 부역자였다. 그러나 부역에
도 여러 질이 있었다. 나치의 이념을 지지하는 적극적 무역자가 있었는가 하면 생존을 위하
여 불가피하게 협력한 소극적 부역자가 있었다. 이 경우에도 경제적 이익의 추구, 신분 상
승, 개인적 원한의 앙갚음 등 동기는 여러 가지였다. 부역자들의 중심지, 파리에는 부역을
열심히 선동하는 언론이 있었는가 하면 나치독일에 적극적인 파시스트 정당들의 본부가 있
었다. 독일 점령하의 유럽에서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받기 위해 프랑스 기업가들의
경제적 부역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다수의 유명한 문인, 영화, 연극인들의 부역은 대중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합국에 의한 해방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비시정부와 그 협력자에게는 부역
자'라는 이름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병과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들은 머리
를 깎이고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진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나는 독일병과 잤습니다'라는 플
래카드를 달고 파리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처단이
불길처럼 일었다. 제대로 사법절차조차 갖추지 않은 채 즉결 처형이 이루어져 처형된 사
람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후 부역자 처리를
위한 전담재판소가 열렸으며 법률적 근거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에 재한 재판 결과 7,037명
이 사형 선고를 받아 그 가운데 1,500명이 집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1만 1,343명에 이르는
부역자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과거 비시정부에 몸담았던 정계인사, 외교관, 교육계,
군부인사들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비시정부와 나치독일의 점령정책을 뒷받침한 언론은 대중의 여론을 오도하는 데 결정적으
로 기여했기 때문에 철저히 청산되었다. <르피가로><라 크로와><르 탕>, 3개지를 제외하
고는 모두 폐간되었고, 나치독일을 찬양하는 등의 논설을 쓰거나 기사를 쓴 언론인들은 총
살당했다. 나치독일과의 교역으로 이득을 취한 기업가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재계에서
1,500여 명의 중요한 경영인들이 추방되었고 그 기업이 몰수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회사 르노는 독일에 비행기와 탱크를 제작해 주었다는 이유로 국유화되었고 사장은
재판 중 옥사하였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부역자 청산의 방법은 이른바 '공민권박탈제도'였다. 나치독일에 협력
한 사람들에 대해 일정기간 공민권을 박탈함으로서 부역자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 형을 받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정부
와 국영기업체 등 공직 진출 금지, 민간기업, 은행, 신문과 방송기관 등에서의 간부직 제외,
노동조합과 변호사 등 사법관련직업, 교육기관 및 언론관련 공공기관 진출 금지, 무기소지
금지조치 등을 받게 되었다. 다른 형과 병과하여 또는 독립적으로 부과할 수 있었다. 그 대
상자는 비시정부 종사자, 유대인 탄압기관 종사자, 민병대와 같은 탄압단체의 구성원, 나치
를 지지하는 집회, 시위를 조직한자, 나치에 유리한 글을 발표한 자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렇게 하여 공민권이 박탈당한 사람은 9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독일대사 오토
아베츠의 부인에게 꽃을 보낸 사람, 장의사 직원으로서 암살된 부역자의 관 앞에 나치식
인사를 한사람, 라발의 운전기사로 일했던 사람 등도 포함되었다.
이토록 엄정하게 진행되던 부역자청산작업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열기가 수그러들었
다. 국민들은 전쟁 직후 수년에 걸쳐 계속된 논쟁과 보복성 행위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레
지스탕스 활동으로 국민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절대 다수파가 되었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분열과 암투에 몰두하였다.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던 우익세력이 점차 정계에 진
출하기 시작하였다. 부역자 처리과정에서 인권침해로 말미암아 비난도 적지 않았고, 많은 부
역자들이 해외도피, 잠적, 허위 사망처리, 공적조작 등의 방법으로 정의를 피하기도 했다. 부
역자 처리를 둘러싼 논쟁은 전후 프랑스 사회를 끝없이 갈등과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나치점령기의 유산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처단에 대해 강온의 대립이 이어졌다. 특히 카뮈
와 모리악 사이의 논쟁은 유명하다. <콩바>지에 기고하던 카뮈는 '인간적 정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르 피가로>지에서 모리악은 "일탈한 작가들에 대한용서'를 제창하였다. 그러한
논쟁은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되었다. 비시정부 연구가인 앙리 루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
1970년대 후반, 나는 비시정부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무식하게도 나는 메스
를 들어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체는 아직도 따스하였다.
해부학자가 부검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다
루는 데 적합한 의사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논쟁애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부역자 처리 문제에서 보여주었던 단호함은 우리의
귀감이 될 만하다.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역
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클라우스 바르비' '폴 투비에르' '
모리스 파퐁'사건 등 최근까지도 공소시효를 배제한 채 나치 부역자에 대한 재판을 계속해
왔다.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우리로서는 부러움과 함께 느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죽어서도 영원한 화두
8월 11일, 검사의 구형이 있었다. 모네 검사는 페탱의 반역행위의 동기는 순전히 권력을
위한 허영, 권위주의적 본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방송연설, 서명, 히틀러에 대한 축하전문
또는 영국 왕에 대한 항의서한 등이 반역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모네는 독일에 대한 페탱의
우호는 쇼였으며, 연합국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묻고 페탱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설사 도움을 주었더라도 효과가 없었다면서 그 '이중의 게임'은 허구라고 자
답하였다. 페탱의 욕망은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 같은 모델을 따라 프랑스에 권
위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고 공박하였다. 그는 이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군을, 그
것도 독일군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반역이었다고 결론 내리면서 사형을 구형하였다.
페이앵 변호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호소함 하는 것으로 변론을 시작하였다. '죽
음이 코앞에 와 있는 아흔이 넘은 늙은 노인을 끌어내 사형을 선고하여 하고 있다'고 말
문을 꺼낸 변호사는 그들의 과거의 '영웅'이 얼마나 늙었는지 설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
다. 그는 페탱의 정신이 온전했던 시간은 오전 몇 시간뿐이었고, 따라서 비시정부의 관리들
은 오후나 저녁에 결제를 받기 위해 안달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탱과 방청객들이
관심을 갖고 기다린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변론을 주관한 젊은 변호사 이소로니의 변론이었
다. 그의 변론은 페탱이 도덕적 양보를 감수하고라도 프랑스를 위해 물질적 이익을 확보
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적, 독일은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양보는 불가피했다고 강조하였다. 페탱 역시 끓어오르는 모욕감을 참아내며 제2의 폴란
드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군사적 점령 하에 있었던 다른 나라보다 덜
고생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소로니는 마지막으로 평화와 안정이 전 세계에 깃들고 전쟁의 소란이 사라지고 있는 이
때 프랑스의 성스러운 땅에서 더 이상 피 흘리지 말자고 간청하였다.
1944년 8월 15일, 날이 밝았다. 드디어 배심원들은 장장 일곱 시간에 걸친 토론을 시작하
였다. 이들은 결국 14대 13으로 사형 판결을 내렸고 이어서 재판장 몽기보가 판결을 선고하
였다. 재판장은 페탱에 대한 모든 기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사형과 더불어 모든 재산
의 몰수를 선고하였다. 다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사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틀 뒤 드골은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선고 직후 페탱은 파리를 떠나 피레네산맥
에 가까운 요새로 이송되었다. 다시 3개월 후 브레타뉴 남쪽 해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으
로 옮겨졌다. 재심은 법무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사회당의 오리올이 프랑스의 새 대통령이 되었을 때 페탱의 변호사들은 그를 방문하여 선
처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냉정하게 거절하였고 여론이 페탱에 대해 동정적이고
선처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미 야당이 된 드골은 페탱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제 노인이 된 그가 잔디를 밟지 못한 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
다. 변호사는 교황 피우스 12세에게도 탄원하였지만 전쟁 중에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침묵하고 협력했던 탓에 공격을 받는 교황청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는 어려웠다.
1950년 5월, 변호인들은 다시 정부문서보관소, 회고록, 증언 등에 기초하여 고등법원에 재
심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페탱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섬 안에서 좀 더 여건이 좋은
저택으로 옮기는 게 허용되었고 의료진도 보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아흔 다섯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51년 7월 23일이었다. 육지와의 전화가 차단되고 경찰이
그 저택 앞에 포진한 채 베르됭의 재향군인조차 참배가 불허되었다. 그 이틀 후 장례식에는
몇몇 장군과 비시정부의 각료 등이 참석하였고 베르됭의 장교와 병사들이 운구하였다. 이
섬과 가장 가까운 루손의 주교 루이 카조는 망자가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지금은 휴전을 해야 할 자리라고 추도하였다. 그러나 그 휴전이 쉽지 않았음은 그 후의 역
사, 프랑스 국민 내부에 파인 분열의 상처가 보여주었다. 지금도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은
그의 묘지에서 흰 대리석 한 가운데 십자가와 '필리페 페탱, 프랑스의 원수'라고 쓴 묘비명
을 발견할 수 있다.
페탱은 사후에도 끝없는 논쟁의 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사후에 페탱주의의 부활이 시도
되었다. 1951년 11월 '페탱 원수를 추억하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와 함께 페탱의 시신
을 베르됭의 순국용사들이 묻힌 두오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1954년에는
연인원 7만 명의 서명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재향군인회의' 이름으로 시신 이전을 요구
하는 진정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 드골은 '국가적 통일의 기념물이 논쟁에 의해 시달림을
받아서는 안되며 군인묘지의 오랜 전통은 명예롭게 죽은 전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하면
서 요청을 거부하였다. 페탱주의자들은 그 이후에도 끝없이 묘지 이전을 주장하였고 레지스
탕스들은 그에 반대하였다. 1973년 극우적인 그룹이 페탱의 시신을 파 베르됭으로 옮기던
도중에 경찰에 의해 체포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집요한 노력은 페탱을 1940년의 치욕으
로부터 1919년의 영광으로 옮기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페탱의 이름이 들먹여질 때마다 좌
우 양 진영의 폭력이 분출되곤 하였다. 그의 시신과 그의 이름, 그의 일생은 이미 공화파와
극우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페탱은 이처럼 프랑스 현대사에 영욕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
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전쟁
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무죄를 선고한 모의재판
1953년 6월 19일 8시,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싱싱 교도소에서 사형 당하였다. 그의 아내
에셀 역시 몇 분 후 로젠버그가 낮았던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다. 2년 전인 1951년, 뉴욕
연방대 배심에 의해 기소되어 불붙기 시작한 논쟁은 로젠버그 부부가 처형당하면서 미국 역
사상 가장 열띤 법률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범죄는 원자폭탄에 관련된 국가기밀
을 소련에 전달하려 공모한 사실이었다. 그들의 처형 후 40년, 또 다른 뉴욕 배심은 정말 줄
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가 가장 민감한 군사기밀을 적국에 넘김으로써 조국을 배신하는 고
모를 하였는지 결정하게 된다. 배심원들의 토론과 결정이 유선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가운
데 이루어진 이 재판은 이 나라 최고 수준의 변호사들이 증거제시 능력이 얼마만큼 발전하
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세기의 간첩 재판'으로의 초대
패널리스트 마빈 아스펜, 시카고
게리 나프텔리스, 뉴욕
해리 리저너, 휴스턴
톰 설리번, 시카고
안드레아 조프, 시카고
마치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의 광고 문구와 다를 바 없는 이 안내문은 1993년 8월 5일부
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미국변호사협회 연례 총회장 곳곳에 나붙었다. 그러나 같은 장
소에 포스터가 붙은 <미스 사이공>이나 <팬텀 오브 오페라> 같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할
인티켓 판매대에 늘어선 줄만큼 인기는 없었다. 총회에 참석했던 수천 명의 변호사들은 그
안내문 앞을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다. 40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살벌했던
상황과 논쟁은 이미 옛 일이 되고 말았다.
1993년 8월 9일. 안내문대로 과연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18층 스타라이프루프에
는 임시 가설 법정이 개설되었다. 미국변호사협회의 연례총회의 한 행사로 기획된 이 모의
재판은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 4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법정은 전혀
모의재판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꾸며졌다. 판사는 현직 판사가 맡았고 배심원
들 역시 뉴욕 시민 중에 통상의 배심원 선출 절차대로 임의로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이미
처형된 로젠버그 부부 대신 다른 두 사람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던 것만 40년 전과 달랐
다.
오후 두 시에 개막된 이 재판은 통상의 재판대로 판사의 배심원에 대한 주의사항 고지로
부터 시작되었다. 각종 증언과 증거가 제시되었고,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이 그대로 연출되
었다. 원자폭탄 제조기법에 관한 메모가 신빙서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진짜보다도 훨씬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배심원들이 판결을 배심원 방으로 퇴장하였다. 배심
원들의 긴 토론과정이 모두 외부 사람들에게 중개되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화장실에 갈
짬도 못 낼만큼 긴장감 속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드디어 배심원들이 법정
에 나타났다. 배심원 대표가 무죄라고 말하는 순간 탄성이 일었다. 이로써 모의재판이었을망
정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이 예언했던 대로 역사상 무죄를 선고받고 명에를 회복했다.
밀고와 모반과 반역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나치독일에 대한 소련의 영웅적인 저항
은 서방국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의 동맹은
무너져버렸다. 점차 세계곳곳에서 냉전의 깊은 갈등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1932년 루스
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계속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미국의 보수파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FBI책임자였던, 악명 높은 에드거 후버는 '적색 파
시즘이 노동조합, 신문, 출판, 라디오, 영화, 교회, 학교, 정부 등 각계각층에서 가장 강력
한 세력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1946년 선서 직전 공화당은 {미국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침투: 그 본질과 대응방안}이라
는 팜플렛을 68만 3,000부나 미국전역에 뿌렸다, 1947년 1월에는 {정부 내 공산주의자들: 진
실과 대안}이라는 57페이지 짜리 책자가 발행되어 뉴딜 정책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확산의
근거가 되도 있다고 공세를 퍼부었다. 이 책자들은 아무 증거고 제시하지 않은 채 이렇게
확정적으로 말하였다.
다음의 세 가지 점은 다툴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거가 명백하다. 첫째, 국내 공산주의자
들은 소련에 대해 유일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세력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
해 정부 내 직책을 악용하고 있다. 둘째, 공산주의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우리 나라의 복지
와 안보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부 직책을 확보하였다... 셋째, 우리 정부가 이러
한 문제를 대처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안이하다.
민주당도 점증하는 공산주의 반대운동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
었다. 민주당은 공산주의자들의 정부 내 침투에 자신들은 책임이 없으며, 뉴딜 자유주의가
미국 내 '적색 파시즘'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 1947년 7월 루
스벨트 시절의 전 소련대사 빌리트가 하원 반미활동위원회에 나와 소련이 미국 수준의 원폭
을 가지게 되면 곧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노동장관 루이스 슈얼렉벡은 공
산당을 불법화하자고 제안하였고 검찰총장은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장, 사무실, 개인기
업, 거리 곳곳에 있으며 이들을 사회를 파멸시킬 만한 병균을 소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
다. 지금까지 이러한 주장을 일소에 붙였던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모든 연방 공무원들의
신원조사와 불순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의 파면을 규정하는 연방충성심사프로그램을 작성하
기에 이르렀다. 공산당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조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사실만으로 반
역의 증거가 되어 파면 당했다.
에드거 후버는 1947년 5월 미국공산당원의 숫자가 총 7만 4,000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했
다. 그는 미국인 1,814명 중 1명은 공산당원인 셈이라고 주장하면서 1917년 볼셰비키 숫자가
러시아 국민 2,771명 중 1명 꼴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국민들을 겁주었다. 하원의 반미위원회
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과 간첩행위에 대해 조사를 개시하였다. 1947년 11월 7일, 존 로지
검찰 총장보가 수십 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검거하였다고 발표했을 때 놀라는 사람은 거
의 없었다. 1948년은 미국 역사상 공산당에게는 가장 심각한 탄압의 해였으며, 실제로 미국
공산당은 현실적인 세력으로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13명의 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스미스 법 위반으로 기소되
었다. 이 법은 '미국정부를 무력 또는 폭력으로 전복하거나 파괴할 의무, 필요성, 바람직함,
우선 순위 등을 악의적으로 선전, 권고, 교육시키는 일체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
1940년 제정된 이 법은 이미 두 차례 적용된 적이 있었다. 한번은 '사회주의 노동당 사건'
이었고 또 하나는 33명의 나치 동조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미국 공산당은 정부
의 조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그 수난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기소 직후에 미국의 신문, 방송, 잡지들은 직업적인 밀고자가 된
전직 공산당 간부들의 폭로를 보도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들 밀고자 가운데 엘리자베
스 벤틀리, 루이스 부덴츠, 휘태커 체임버스가 있었다. 이들은 간첩단, 간첩행위, 성공적인
연방정부 침투 등 극적인 스토리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려 하였다. 1948년 8월 체임버
스가 전형적인 뉴딜 주의자이며 전 연방공무원이었던 알지에 히스를 간첩혐의로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어떤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동조자, 소련을 위한 간첩행위자로 낙인찍힐 가
능성을 피해갈 수 없었다. 체임버스는 당시 매우 영향력 있는 책이었던 {증인}을 통하여
밀고자는 애국자이며 예언자, 그리고 도덕적 영웅이라고 주장하였다. 밀고와 모반과 반역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나라 전채가 온통 히스테리와 파라노이아 상태였다.
원자폭탄 간첩을 찾아라
1949년 9월 초순, 한 보고서가 에드거 후버 국장의 책상 위로 날아들었다. 원자폭탄의 기
밀이 외국으로 유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달 하순,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최근 몇 주전
에 소련에서 원폭실험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발표했다. 후버가 접수한 보고서는
방사능 낙진을 검사하여 알게 된 소련 핵실험에 대한 정보였다.
대통령의 공식 발표가 있기 무섭게 의회와 언론은 소련의 핵 폭탄 실험 성공은 누군가의
간첩행위 때문에 가능했다고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칼 문트, 스타일 브리지 상원의원, 해롤
드 벨드, 리처드 닉슨 하원 등이 바로 여론을 선동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현재 소
련의 과학과 산업으로는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원폭을 개발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
었다. 이들은 소련이 원폭을 보유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미국 내 누군가의 간첩행위
에 대해 가능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FBI의 수뇌부도 꼭 같은 결론을 내렸다. {FB
I 이야기}라는 책을 쓴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은 후버가 더 이상 원폭은 더 이상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은 그 보고서를 읽었을 때 충격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고 말했
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후버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인터콤 전화를 찾았다. 그리고 즉각 주요 간부들에게 여러 명
령을 내렸다.
곧 FBI의 방대한 기구가 시동을 걸었다. 본질적으로 후버의 명령은 다름과 같은 것이었
다. 원폭기밀이 도난 당했다. 도독을 찾아라!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50년 2월 초,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에서 구속되었다.
그는 영국 국적의 과학자로서 원폭 개발 팀에 합류해 알게 된 기밀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를
받았다. 재판 과정 중에 제출된 자료라고는 그의 자백뿐이었다. 정부측 증인 역시 그를 조
사해 자백을 받았다는 내용을 증언한 영국 정보부 요원뿐이었다. 푹스의 자백 내용과 사건
관련 서류들조차 오랫동안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누구의 접근도 금지되었다. 동료들은 푹스
가 신경과민 증세를 앓고 있었고 그의 자백은 바로 그러한 증세로부터 유발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후버는 푹스가 미국 체류시 한 미국인 소련 첩자와 접촉하였는데 그 첩자인 과학자의 이
름은 모른다고 공표 하였다. 물론 후버는 이 익명의 미국인 공범을 반드시 체포할 것을 결
정하였다. 푹스가 묘사한 모호한 인적 사항 때문에 후버의 목표는 실제로 이룰 수 없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4개월 후, 소련 원폭실험 8개월 후, FBI는 푹스의 밀사였다고 자백
한 해리 골드를 기적적으로 체포, 언론에 발표하였다. 몇 년 동안의 수소문 끝에 소련을 위
해 원폭 간첩으로 활동한 미국인이 잡힌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후버의 FBI에게는 커다
란 승리였다. 그러나 FBI가 어떻게 골드를 찾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비밀에 쌓여 있었다.
푹스가 제공하였다는 정보는 사실상 골드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FBI는 1950년 5월 15일 필라델피아에서 골드를 체포하였을 때 그가 대단히 협
조적이었다고 말했다. 아직 어떠한 혐의도 공식화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18시간 동안 변호인
의 조력 없이 조사를 받았다. 또한 자신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는 것도, 영장 없이 자신의 집
을 수색하는 것도 모두 동의하였다.
그해 5월 22일, FBI요원들이 골드의 집을 수색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FBI는 책장
뒤에서 뉴멕시코 산타페의 거리를 발견하였다. 후버의 말에 따르면, 이 지도는 골드로 하여
금 푹스와 접촉한 인물이라는 자백을 신속하게 받아내게 했다고 한다. 너무도 이상한 일이
었지만 여전히 변호사 없이 그 모든 자백을 했고, 자신의 구속상태에 동의하였으며, 바로
그날 자백문서에 서명했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그 문서에 그렇게 완벽하게 자백하고 항
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쉽게 성공을 거머쥔 FBI는 골드 한 사람의 구속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
은 산타페와 가까운 로스앨러모스의 원폭제조공장으로 관심을 옮겼다. 이곳은 미국이 원폭
개발을 위해 선정한 제조공장 부지로 이른바 원폭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지
였다. 이 프로젝트의 갖가지 기록과 그곳에서 일한 요원 신상 파일을 샅샅이 뒤졌으며 특별
한 단서를 찾기 위해 수백 명과 인터뷰했다. 이러한 수사망에 걸려들어 조사를 받은 사람
이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였다. 1950년 2월 초 FBI요원들은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우라늄
견본을 훔쳤는지 물었다. 당시 원폭제조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기념품으로 우라늄 견본
을 가지고 나오곤 하였다. 그린글래스 부부는 그 당장 어떠한 법적 조치도 받지 않았지만
1950년 5월경에는 자신들이 FBI의 감시 하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
한 군인과 민간인들이 일종의 기념품으로 소량의 우라늄을 소유하는 일은 당시에는 흔한 일
이었다. 그런데 하사관으로 그 프로젝트에 동원되어 복무한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에 대해 특
별히 수사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린글래스가 자신의 누이와 처남 등
과 함께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의 회원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골드는 산타페에서 푹스와 접촉할 당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한 군인이 소련 첩자
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FBI에 진술하였다. 그는 점차 그 군인이 문서까지 전
달했다고 진술했는데 처음에는 그 문서내용이 별 가치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굉장히 중
요한 것이었다고 진술을 바꾸었다. 해리 골드는 그 지역의 지도와 영화 등을 보면서 기억
을 되살린 결과 그 군인이 데이비드 그린글래스가 틀림없다고 확인하였다. 만약 데이비드
가 완강히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면 로젠버그 사건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어리석
은 허풍쟁이는 집요한 수사관들의 압력과 요구, 설득에 밀려 바로 자신의 매부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945년 로젠버그가 공산당원이었던 사실 때문
에 정부 부서로부터 해직된 사실은 이 모든 혐의를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버렸다.
궁색한 FBI, FBI의 증언훈련
1950년 6월 16일 아침,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몇 명의 FBI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6
시간 동안의 심문이 진행되었다. 심문과정에서 로젠버그는 처남 데이비드 그린글랜스가 자
신의 혐의를 자백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는 줄리어스가 사주하였다는 자백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가 정부에 협조하기로 한 뒤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간첩혐의는 물론 우라늄 절취혐의마저 면책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
에서였다. 이 자백과 당국에 대한 협조는 그의 부인 루스 그린글래스가 오히려 더 적극적
이었다. 그들은 함께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지목했고 그것만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
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이제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전채 스파이망의 대부가 되었다. 하지만 수사 당국은 줄리어
스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더 높은 지위의 공산주의자를 지목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
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법정에서 위대한 한 편의 드라마를 펼쳐 보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
만 줄리어스는 수사 당국의 의도에 발맞춰 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FBI의 위압과 권유에
쉽게 무릎을 꿇은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그는 체포된 뒤에도 FBI의 주장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아이들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허황된 스토리에 불과하다고 단정하였다. FB
I로서는 더 이상의 여지가 없었다. 즐리어스 로젠버그를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받도록 하는
길뿐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요원들이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자신들을 위해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방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찾아낸 것은 사소한 것뿐
이었다. 심지어 로젠버그 체포 당시 수색한 집안에서도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체포
이후 몇 주 동안 로젠버그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참담한 실패
로 끝나고 말았다. 단파 라디오, 마이크로필름 기구, 소형 카메라, 도난 문서, 암호 책자, 허
위 여권, 은닉자금 등 간첩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막막해진 FBI는 최후 수단으로 줄리어스 아내 에셀을 체포하였다. 아내의 구속을 압
력 수단으로 삼아 줄리어스의 자백을 얻어 버려는 무리한 기도였다. 에셀의 혐의는 남편
줄리어스가 동생 데이비드의 부인 루스로 하여금 간첩행위에 가담하도록 권고하였을 때 옆
에서 거들었다는 것이었다. FBI측은 에셀보다 동생 데이비드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
린 친정 식구들을 보내 밖은 남은 아이들 격정을 해야할 것 아니냐면서 자백을 권유하였다.
기소 전 준비절차에서 정부측은 그녀가 자백만 하면 선처해 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서른 네 살의 가정주부에 불과한 그녀를 구속하여 공개적으로 원폭간첩으로 규정하면서도
검찰은 해리 골드의 협력조차 얻지 못하였다. 그녀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그녀의 동생과
시누이의 박약한 진술뿐이었다. 검찰은 그 외에 로젠버그의 가정부의 증언을 확보하긴 하
였다. 그 가정부는 에셀이 뉴욕시 시장선거에서 공산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서명을 하도록
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증언이 에셀 로젠버그를 기소하여 결국 죽음으로 내몬 유일한
증거였다.
에셀의 구속은 오히려 줄리어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뿐이었다. 정부가 드디어 마녀사냥을
시작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줄리어스의 저항의지를 더욱 굳게 만들었던 것이다. FB
I의 희망은 에셀 구속이 줄리어스 자백의 지렛대가 되어주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장애물이
되고 만 것이다. 상황이 더욱 어렵게 되자 FBI는 멕시코 시티로 도주한 줄리어스의 동
창 모튼 소벌을 줄리어스 로젠버그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해주리라 기대하고 납치해 왔다.
과거 공산당원이었거나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지하로 숨거나 외국으로 도주하
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벌은 멕시코로 떠난 것이었다.
소벌은 로젠버그의 간첩혐의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였고 수사기관은 그를 정부측 증인으
로 세울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도 피고인으로 기소되었다. 그린글래스 부부
의 증언에 부합하거나 로젠버그의 사기를 꺾을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실패하자 해리 골드와
그린글래스 부부의 증언은 훨씬 중요해졌다. FBI는 이들의 진술 내용을 보강하는 한편
증언훈련을 하는 등 면밀한 계획을 짜서 재판을 준비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를 영웅으로 만든 블로흐 변호사
1951년 3월 6일 오전 10시 30분, 폴리 스퀘어에 위치한 뉴욕시 연방법원에서는 서기가 엄
숙하게 사건을 호명하였다. "미국정부 대 줄리어스 로젠버그, 에셀 로젠버그 및 모튼 소벌."
어빙 세이폴 검사는 "검사는 이 사건에 관한 재판준비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변호인단
역시 "피고인들 역시 재판진행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최초의 원폭간첩에 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위엄스럽게 장식한 법정 안에는 센세이셔널한 세기의 재판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과 방
청객들로 온통 만원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이 '드라마틱한 세기의 재판'에서 마침내 '빨
갱이'들이 어떻게 '원폭 기밀을 훔쳤는지 자세하게 알게될 것'이라고 썼다. 로버트 오펜하이
머나 헤롤드 유리 같은 이류 과학자들이 정부측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었다. 전향한 공산당
지도자이며 전문 밀고꾼으로 이미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벤틀리도 소환된다고 하였다. '담당
검사는 일급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국 최고의 법적 사냥꾼으로 정평이 난 어빙 세이폴'이
라고 <타임지>는 묘사하였다. 세이폴은 알지에 히스와 공산당 지도자들을 스미스 법에 의
해 기소함으로써 반공산주의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검사 못지 않게 판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카우프만 판사는 법무성의 검찰 총장보를 지낸 연방법원의 최연소 판사였
다. 피고인에게 별로 유리할 게 없는 일이었다. 검찰 요직을 거쳐 이미 권력의 맛을 본 판
사가 공정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 길고 고통스런 재판 과정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영웅으로 만든 숨은 영웅은 바로 엠마
누엘 블로흐 변호사였다. 자신의 고객으로부터 선임료 조차 못 받으면서도 그는 누구나 꺼
리는 일에 나섰다. 그는 아버지 알렉산더 블로흐 변호사와 함께 고객의 고락을 함께 하며
변호사업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상태에서 로젠버그 부부 변론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한 전기작가는 '블로흐의 손은 적대적인 상대에 대한 분노로 충전되었고, 그의 얼굴은 고
객을 위한 깊은 인간성과 애정으로 붉게 타올랐다'고 썼다. 블로흐 변호사는 변혼 이외에
도 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을 돌보았고 거의 매일 교도소로 데리고 가 부모를 면담시켰다.
비극적인 운명에 놓여 있는 부모와 자식을 상면시키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는 로젠버그 부부의 사면을 위해 동분서주하였고 재판직전에 따라 일희일비하였다. 모
든 것을 소진한 그는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한 한달 후 쉰 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
다. 블로흐는 이 사건을 통하여 변호사의 고귀한 상징이 되었고 고전적 변호사의 역할을 수
행한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검사 세이폴은 교묘하게 선택된 언어로 먼저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모든 증거는 이제 로젠버그 부부와 소벌의 충성과 헌신이 조국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
로 공산주의, 나라 안과 밖의 공산주의에 대해서 바쳐졌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에게 단지 합리적인 의심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심도 넘어서서 세 명의 피고인이 자신의 조
국과 국민을 향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음을 증명해 볼 것입니다.
로젠버그 부부는 검사의 공격에 날카로운 공격에 대해서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법정 정리가 소리 높여 검찰측 증인 102명의 명단을 낭독했을 때 이들은 깊은 배신
감과 고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명단 속에는 자신들의 친척과 오랜 친구, 이웃,
직장 동료, 심지어는 가정 주부까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엄청나 규모의 증인 수는 순전히
검찰측의 심리작전이었다. 피고인과 검찰측에게 겁을 주어 자백하지 않으면 중형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전략이었다. 그 많은 증인들이 어차피 모두 소환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이를 죽음으로 이끈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3월 9일 오후 2시 30분, 마침내 데이비드 그린글래스가 증언대에 섰다. 평정을 유지하려
는 에셀의 태도는 이 상황에서 심각하게 흔들려 보였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돌보아왔던 막내 동생으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는 좌익운동에 관여하도록 격려했고 어른
이 되었을 때는 친구처럼 지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과 남편을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는
범죄 혐의를 증언하기 위해 검찰측 증인으로 선서하고 나선 것이다.
에셀은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자신의 동생으로부터 결코 눈을 떼지 않고 똑바
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생이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반하여 데이비드는
검사에게만 눈을 고정시켰다. 이미 그는 누이의 응시를 피하기 위해 어디에 눈길을 두어야
할지 검사로부터 코치를 받은 다음이었다.
그러나 눈싸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수개월 간 훈련받고 연습한 데이비드는 거침
없이 누이와 매부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본주의보다 러시아 사
회주의를 더 선호하였으며 자신이 로스앨러모스에서 간첩행위를 하도록 자신의 처에게 요
구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 증언을 들으면서 에셀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창백해졌다.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는 자신의 누이 에셀이 자신이 써준 메모를 러시아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타이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3일에 걸쳐 데이비드의 증언이 끝나자 그의 처 루스
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는 더욱 확고히 그리고 자신 있게 자신의 시누이 부부의 범죄를
입증해 나갔다.
에셀의 친정 가족들은 처음보다는 에셀보다는 데이비드 편에 서 있었다. 에셀과 줄리어
스를 사지에 몰아넣고라도 데이비드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 모든 친정 가족들의 일치된 입장
이었다. 물론 데이비드는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처음 에셀이 구속되기 전 FBI요
원이 데이비드를 심문한 조서의 일부이다.
문: 데이비드가 줄리어스에게 정보를 줄 때 에셀도 참석한 적이 있었나? 답: 결코 그런
적이 없다.
문: 에셀이 당신에게 그런 사실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나? 답: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이다.
이렇게 단호하게 누이의 관여 사실을 거부하던 그는 자신의 처 루스와 다른 가족들의 회
유에 결국 넘어가고 만 것이다. 자신이 살길은 누이와 매부의 간첩 사실을 정부측을 위해
진술해 주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셀의 친정 식구들은 그녀에게
하루빨리 자백하고 선처를 구하라고 권유하였다. 에셀의 구속으로 외손자 마이클과 로버트
를 떠맡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학대하였다.
오빠 샘 역시 결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샘은 그녀를 교도소로 방문하여 회유공작을 벌였
다. 실제로 샘은 FBI의 요구대로 누이동생에게 아이들을 내세워 회유하는 편지를 써보냈
다.
사랑하는 누이동생에게.
오늘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무론 로버트와 마이클도 보았지. 나는 마이클에게 내가 너에
게 말한 대로 말했다. 그랬더니 마이클의 첫말은 엄마는 무고해, 엄마는 나쁜 짓은 아무 것
도 안 했어라고 하더구나.
자, 너는 이 불쌍한 아이에게 신념을 깊이도 심었더구나. 아이를 그렇게 무섭게 키우다니
넌 양심도 없는 것이냐... 제발 그 이데올로기란 것을 포기해라. 그리고 이 지상으로 내려
와, 언젠가는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어미가 도리 기회를 놓쳐서는 안돼.
특히 에셀의 어머니 테시야말로 딸의 비극은 털끝만큼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F
BI요원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전폭적으로 협조하였다. 딸을 면회할 때마다 "데이비드와 루
스를 본받아라"고 에셀에게 소리치곤 하였다. 그녀는 에셀에게 "너는 더러운 공산주의야"라
고 소리쳤다고 자랑스럽게 FBI요원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녀는 에셀에게 남
편과 이혼하라고 설득하여 더 이상 에셀을 면회할 수 없게 되었다.
데이비드와 루스 부부의 협조와 증언이야말로 로젠버그 부부의 기소에 가장 유일하고 확
실한 기초였다. 데이비드와 루소는 정부와 협력하면서 줄리어스 로젠버그를 간첩으로 몰
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사건들을 기억해내는 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반공산당
잡지인 <주이쉬 데일리 포워드(Jewish Daily Forward)>라는 잡지와 루
스와의 인터뷰에 기초하여 그린글래스-로젠버그 사건에 관한 기사를 연재하였다. 루스는
아주 비싼 맨해튼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에 응하였다.
'루스 그린글래스 부인은 어떻게 남편이 처남에게 이용당하였는가를 말한다' '나의 남편
은 이용당했다. 그러나 반역자는 아니다라고 루스 그린글래스는 말한다'는 제목의 기사 덕
에 그녀는 삽시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데이비드와 루스는 정부에 완벽하게 협조한 대가
로 루스의 기소면제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일생을 통하여 실제로 받은 적
이 없는, 또한 상상할 수 없었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뉴욕 빈곤층을 넘어설 수 없음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으로부터 오래되어 소외되어 왔던 이 두 부부는 이제서야 뭔가 완전한 미국
인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부담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밀고자
원칙'에 따라 좌우되는 새로운 도덕성에 죄의식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법원은 당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미 간첩죄로 기소된 해리 골드의 증언, 로젠버그 부부의 멕시코 탈출기도 사실에 관한
주치의의 증언, 미국 공산당의 악랄성에 대한 전 공산당 간부 엘리자베스 벤틀리의 증언이
잇따랐다. 뒤이어 줄리어스와 에셀이 증언대에 섰다. 그러나 앞선 증인들의 반박하기에는 너
무나 벅찬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당당하게 그 적대적인 법정에서 자신의 체면과 자존
심을 지켰다.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소벌과 그의 부인은 차례로 에셀에 관하여 다음과 같
이 회고하였다.
그녀에 대한 반대 심문은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마치 그리스 비
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증언석에 섰을 때 무서울 정도로 곤욕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다. 검사는 구역질나는 모든 방법으로 그녀를 자극하거나 초
조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그녀는 침착하게 사고하였다. 오히려 온몸과 마음이
마비되는 게 쉬었을 것이다... 똑같은 질문이 계속 반복되었을 때 그녀는 그 질문을 또 숙
고하고 어느 쪽으로 그녀가 유도 당하고 있는지 알려고 노력하면서 또다시 그 질문에 대답
하곤 하였다.
이제 그 모든 소란스러웠던 증인절차가 끝났다. 먼저 재판부와 검사 배심원을 향해 인사
를 한 변호사 블로흐는 최후변론에 들어가 데이비드와 루스가 FBI를 바보로 만들고 이제
배심원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하나의 사실은 자신의 혈육, 자신의 누이를 유죄로 모는 증
언을 하는 사람은 어는 문명에나 존재하는 규범을 어기는, 지극히 혐오스럽고 메스껍기 짜
기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내가 본 가운데 가장 하등동물 중의 하등동물입니다...
또한 만약 루스가 악의 화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악의 화신인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제 그녀가 FBI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녀가 여러분을 바보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이폴 검사는 이에 대해 누가 진정 배심원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지 반문하면서 공세의
고삐를 당겼다.
이 법정에서 누군가를 바보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
억할 것입니다. 그녀가 해리 골드를 알았는지, 그녀가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의 로스앨러모스
에서의 일에 관하여 물어본 적이 있는지, 그녀가 원자폭탄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는지 질문
할 때마다 그녀는 자기부죄라는 이유만으로 답변을 회피하면서 공허한 답변, 거부만 했습
니다... 이 사건의 이슈는 어떠한 가족적인 처지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신의를 파
괴하는 것은 단지 그 누이와 매부가 미국 군인을 소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
는 더러운 거래에 끌어들인 행위 그 자체입니다. 그린글래스 부부와 로젠버그 부부의 차이
가 뭡니까? 그린글래스 부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한편 로젠버그 부부는 거짓말로 그들의
죄를 키운 것입니다... 여기서 기소된 죄는 미국을 향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것입니
다... 미국의 법정에 선 어떠한 피고인도 이들보다 동정을 덜 받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공격과 방어가 모두 끝나자 공은 배심원으로 넘어갔다. 오후 4시. 배심원들은 평결을 위
해 법정에서 물러났다. 무려 7시간이 지난 밤 11시 다시 피고인들이 불려나왔다. 그러나 평
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카우프만 판사는 한 배심원이 '피고인 중 한 명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하는데 그 피고인의 심정을 알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고 발표하였다. 사람들
은 그 관용의 대상이 에셀임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러나 판사는 형량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
으로 판사이며 배심원은 단지 유, 무죄만 정하면 된다는 사실을 고지하였다. 이로써 배심원
들은 되돌아갔다. 다시 밤 12시 22분이 되어 법정으로 복귀했다. 이들은 자신들은 피고인 두
명에 대해서는 평결을 마쳤지만 한 사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어 일단 그날은 호
텔로 돌아가 쉴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말했다.
결국 배심원들은 호텔로 인도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잠을 전혀 자지 못한 채 피고인들은
법정으로 돌아왔다. 오전 11시 1분 법정 서기가 물었다. 배심원 대표는 세 사람 모두에게 유
죄로 평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제 판사의 선고만이 남았다. 4월 5일, 드디어 운명의 시
간이 왔다. 카우프만 판사는 세 명의 피고인을 불러 세운 채 선고를 시작했다.
모든 증거를 통하여 보건대,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이 공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인, 에셀 로젠버그 부인 역시 남편이 이념을 좇는 것을 막기는커녕, 오히
려 그 이념을 지원하고 격려하였다. 그녀는 남편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더 많고 그녀의
동생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성숙한 여성이다. 그녀는 이 범죄에서 완전한 동반자였다... 참
으로 피고인 줄리어스 및 에셀 로젠버그는 그들의 이념에 대한 헌신을 자신의 개인적 안녕
위에 두었고 그들의 아이들을 희생시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념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삶, 더 나아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훨씬 능가하였다... 법원은
당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무가치한 증거, 상식 이하의 증언
이 판결에 대해서는 이미 항소 법원, 대법원에서 오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뿐만 아
니라 사후에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한 정밀한 연구는 재판과정에 제출된 증거 일부가 조작되
거나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저술가 월터와 편집인 출신의 슈나이어는
{심리에의 초대-로젠버그 원폭간첩의 재개}라는 책에서 법정에 제출된 증거가 조작되었으
며, 그 사건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사건내용이 아니더라도 적어
도 그 젊은 부부를 사형에 처한 것은 부당했다는 점에 대해 어렵지 않게 동의가 이루어졌
다.
나는 당신들의 범죄가 훨씬 중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고의적 살인은 당신들이 범한 죄
에 비하면 그 정도가 경미하다고 할 수 있다. 살인 범죄에서 범인은 단지 그 자신의 피해
자만 죽인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이 예측한 것보다 몇 년 앞서 러시아인들
의 손에 원폭을 쥐어준 당신들의 행동은 이미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5만 명을
넘는 사상자를 낳았다. 또한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당신들의 배신의 대가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참으로 당신들의 배신은 우리레게 불리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게
틀림없다.
카우프만 박사는 로젠버그 부부와 공범들의 진상을 이렇게 엄중히 물었다. 이들이 넘겨
준 기밀로 소련이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그것 때문에 수백만의 사상자를 낼 것이라고 단언하
였다. 과연 그럴까? 로젠버그 부부를 사형에 이르게 한 국가기밀 자체가 보호될 만한 가치
가 있었을까? 그린글래스가 로스앨러모스의 기계실에서 일하면서 본 폭파렌즈의 스케치가
과연 원폭기밀의 핵심이었을까? 문제는 이들은 단지 기술자였을 뿐 학자가 아니었다는 점
이다. 그린글래스나 존 데리는 단지 군인으로서 원폭제조의 거대한 공정의 미세한 일부에
참여하였거나 목격한 것일 뿐 엄청난 원폭의 복잡한 기밀과 고도의 과학적 구조를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한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그린글래스의 스케
치와 증언은 상식 이하라고 단언하였다. 공법이었던 소벌의 재심을 위해 로젠버그 처형 14
년 후 제출된 증거들에는 당대의 최고 과학자들인 모리슨, 린제이, 유리등의 선서진술서가
들어 있었다. 모리슨은 로스앨러모스에서 계속 일하면서 원폭제조를 담당한 유명한 물리학
자였고, 린제이 역시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하기도 하고 티니안 섬에 있는 원폭 제조팀에서
일한 과학자였으며, 유리는 노벨상 수상자로서 원폭의 재료들을 준비하는 일을 담당한 과학
자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원폭에 관한 그린글래스의 전체 증언은 혼란스럽고 부정확하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모두 틀렸다.
그는 원폭의 설계와 건설 지식을 가질 만한 과학적 바탕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프로젝트
의 기술적 분야와 연계되어 일한 적도 없다. 진실로 데리 소령이 증언한 대로 자신이 로
스앨러모스에서 개발 중인 원폭을 여러 번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게 틀림없다면, 그는 분명
히 '그 스케치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했었다. 그 그림은 완전히 엉터리였고
어떤 원폭제조에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모리슨)
원폭제조를 묘사하기 위해 전달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정보는 러시아인들이 원폭을 개발
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불완전하고 모호하고 심지어
부정확한 것이다. 그린글래스가 전해준 정보의 기술적 가치에 관하여 로젠버그 부부의 판결
에서 내린 카우프만 박사의 진술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것은 현대 과학기술의 본질에 관
한 오해이며 비극적 결과를 낳은 오해이기도 하다.
(린제이)
문제는 왜 이러한 훌륭한 증언들이 당시 로젠버그의 법정에는 제출되지 않았을까. 원폭제
조에 관여한 과학자들을 불러 왜 그린글래스의 스케치에 대해 따져 묻고 그 가치의 비현실
성에 대해 논박하지 않았을까. 블로흐 변호사는 감히 이 과학자들이 협력해 주리라고 상상
도 하지 못한 게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그로써는 고립무원의 경지에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증인심문에 열중하기에도 바빴을 것이다.
한편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원폭기밀을 전달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라는 게 그 후의 연구결과로 증명되었다. 소련물리화학연구소의 세메노프는 이
미 1940년대 원폭 연구를 상당한 정도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1956년 연쇄핵반응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시카고에서 페르미가 1942년 12월 핵 연쇄반응에 성공하기 이전에
또 다른 소련 과학자 페트로작이 동종의 실험을 성공했다고 알려졌다. 1945년 11월 소련 외
상 몰로토프는 이미 원자폭탄을 곧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
어 볼 때 미국만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볼 때 로젠버그 부부가 설사 소련에 기밀을 전달했다 하더라도 사형에 처해질 정도
로 중한 범죄는 아니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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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패배
로젠버그 부부는 유죄 판결 후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들은 아직 항소심
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형수만이 산다는 '죽음의 집'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형판결을 받
은 죄수는 다른 죄수들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이
들로 하여금 자백을 받아보겠다는 정부의 의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951년 4월 11일, 에셀이 먼저 도착한 싱싱 교도소는 자동소총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요새였다. 수많은 금속 문들을 지나 다시 교도소 차를 타고 '죽음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다른 교도소 건물과는 반 마일이나 떨어진 '저주의 감방'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일단 '감옥
속의 감옥'으로 들어선 이상 이제 그녀는 철제문 바깥으로 다시는 걸어나올 수 없었다. 에
셀은 그곳의 유일한 여성 사형수였다. 감방 바깥에 앉아 있는 여성교도관 외에는 완전히 하
루 24시간을 혼자서 벽만 보고 지내야 했다. 감방 안은 몇 가지 붙박이 가구 외에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자신의 옷가지와 잡동사니들은 이감되면서 가족들에게 보내졌다. 이제 그녀는
온전히 자신과 홀로 대면해야 했다.
물론 변호인은 그녀를 여성교도소로 이감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얼마
후 줄리어스마저 싱싱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사형수 부부를 수감한 선례가 없었던 탓인지
어떻게 분리시켜 놓아야 할지 당국도 고민이었다. 결국 30피트 떨어진 옆방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육중한 콘크리트 벽, 금속 문들이 가까운 거리를 천리만리 먼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로젠버그 부부의 간격을 좁힐 기회는 항소심 판결로 더욱 멀어졌다. 1952년 2월 25일, 미
국연방항소심은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 부부의 유죄를 다시 확정했던 것이다. 미국의 유
명한 자유주의자이며 존경받는 법관 중의 한 사람이던 프랑크가 그 판결문을 썼다. 데이비
드와 루스 그린글래스의 증언이 신뢰할 수 없다는 블로흐 변호사의 주장에 대해 프랑크 판
사는 '그린글래스 부부의 증언이 신뢰할 수 없다면 이 사건 기소는 유지될 수 없다'는 점
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배심원에 의한 재판인 이상 이 법정은 증인의 신빙성이나 증언의
신뢰성을 따질 수 없게 되어 있다. 특히 연방사법절차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배심원의 영역
이다'라고 항소기각 이유를 밝혔다.
이것은 블로흐 변호사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와 조수는 지난 9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소이유를 쓰는 데 몰두해 왔다. 그들은 재판에서 잘못된 점 25가지를 지적하고 카우
프만 판사의 구체적 편견 210가지를 규명하였다. 더구나 사형제도 반대자로 알려진 프랑크
판사가 재판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우호적인 판결이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이제 대법원
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1952년 10월 10일, 사법절차상 그들의 생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기
회,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이날 줄리어스와 에셀은 그들의 변호인을 통해 간단
한 서신을 보냈다.
대법원에 대한 상고 결과가 어떡하든, 우리는 대외적으로 전쟁을 야기하고 국내적으로 경
찰국가를 세우려는 음모에 반대한다. 허구의 간첩사실을 기소하여 사형으로 침묵시키려는
정치적 조작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꺾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는 아직 젊을 뿐만 아니라 성취하는 긴 삶을 원한다. 그러나 민주적 가치를 희생해가며 우
리의 생명을 꼭 사야만 한다면 우리들의 계승자인 아이들에게 남겨줄 어떠한 유산이나 미래
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을 미국 국민들이 공유할 것이라고 믿으며 이들이야말로 무고
한 미국 시민을 죽음으로부터 모는 이 음모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대법원은 상고마저 기각함으로써 로젠버그 부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국민밖
에 없음을 증명하였다. 블로흐 변호사가 대법원 결정에 즉각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11월 17
일 대법원은 재심리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카우프만 박사는 이들의 처형일자를 1953년 1월
12일로 지정하였다. 전기의자 위에 놓여 있는 시한폭탄 같은 시계초침소리는 시시각각으로
로젠버그 부부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었다.
즐리어스는 자신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에셀은 버나드 쇼의 '성녀 잔다르크'를 읽기
시작했다. 이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순교자로서의 삶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줄리어스는 자신과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국 국민이 알기를 원하였
다. 그는 그들의 고난이 파시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사회에서 영감과 희망, 용기와
존엄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글쓰기만이 자신들의
상황과 용기, 신념, 그리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드러내 줄 수 있었다. 에셀 역시 자신
의 삶을 잔다르크의 삶에 견주어 인지하였다. 블로흐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버나
드 쇼의 글을 곳곳에서 인용하면서 루앙에서의 오판과 마녀재판의 오류를 자신의 재판을 이
끈 미국 사법절차에서 발견하려 하였다.
한편 블로흐 변호사는 다시 카우프만 판사에게 '일단 로젠버그 부부의 육신이 사라지면
이 세상의 누구도 이들과 이들의 아이들도 미국의 사법정의에 행해진 잘못을 지정할 수 없
다'면서 감형을 요구했다. 카우프만 판사는 판결 결정은 거부하면서도 일단 처형일자를 연
기했고 블로흐 변호사는 백악관에 사면 탄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 2월 11
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들 부부의 탄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각하였다.
유죄가 인정되고 판결이 선고된 이들의 범죄의 성격은 다른 시민의 목숨을 빼앗은 일반적
인 범죄보다 훨씬 위험하다. 그들의 범죄는 모든 국민에 대해 교묘한 배신이며 무고한 수천
명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행동은 자유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싸
우고 있고 죽어가고 있는 그 자유의 이념을 배반했던 것이다.
<타임>지는 이제 물리어스와 에셀의 운명은 소생의 기미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고 썼다.
남은 기회는 오로지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자백하거나 다른
공범을 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는 죽음으로써 그 요구에 굴복하기를 거부하
였다.
로젠버그 부부 구명 전국위원회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른 지금 의지할 데라고는 여론뿐이었다. 여론의 힘으로 대통령을 움
직여 사형 집행을 저지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이전부터 블로흐 변호
사는 로젠버그 부부의 사건을 다뤄줄 잡지를 물색해 왔으나 이에 호응하는 것은 없었다. 일
반 잡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공산당 기관지인 <데일리 워커>같은 잡지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내셔널 가디안>지는 이 사건의 기소와 선고가 정치적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블로흐 변호사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자유주의를 광범한 구독자로 확보되고
있던 이 신문은 드디어 1951년 8월 15일 1면에 '로젠버그 기소-냉전 미국의 드레퓌스 사건
인가'라는 제복의 헤드라인을 달기 시작하였다. 편집자는 이 기사에서 용감하게도 '로젠버그
부부가 완전히 무죄하고 확신한다'며 이들의 구명을 위해 캠페인을 벌리겠다고 공언하였
다.
전체 사건기록을 정독한 이 언론사는 8월 22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로젠버그 사건은 미국의 모든 법률적 기준에 따라 무죄를 받을 만한 합리적인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미국헌법 조항을 희생시키고라도 반대자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미국정부에 의
해 희생양이 필요한 때 로젠버그 부부는 전면적인 정치적 조작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와 사형선고는 시민권과 비인도적 처벌에 대한 헌
법적 안전장치와 상충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술적으로 그 선고가 합법적 범주 안에서 이
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야만적이라고 할 정도로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이 부부는 처
음부터 그들이 기소된 범죄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간첩 사실에 대해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백한 간첩일 뿐이며 이들의 증
언은 박약하고 훈련된 것이며 전적으로 문서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것이다.
같은 해 10월, 줄리어스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대중적 항의가 마침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젊은 뉴욕 부부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가디언>지는 에셀과 줄리어스가
싱싱 교도소로 옮아간 후 서로 써보낸 편지 두 통을 공개했다. 이와 함께 신문은 윌리엄 루
벤을 임시위원장으로 하는 '로젠버그 부부 구명 전국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이 위원회는 지지와 지원의 손길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작가이고 단어를 쉽게 쓸 수 있지만 에셀과 로젠버그 부부의 불굴의 정신과 순결함
에 대한 나의 존경을 표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 역시 나타
낼 길이 없다. 다만 잔인하게 거부된 부모의 작은사랑이라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알려 달라.
-20불과 함께 뉴욕 시의 한 시민이 보낸 편지
아내와 나는 로젠버그 부부의 아이들을 내 집으로 데려가 계속 그들을 돌보겠다.
-수표를 보내온 뉴저지의 한 의사
로젠버그에게 제발 이 사실만 안다면 나처럼 행동할 수만 명이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세요.
-10불과 함께 시카고의 직장인이 보낸 편지
줄리어스와 에셀이 자유로울 때까지 우리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은 자유로
운 몸이 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진실과 정의, 겸손과 열정, 이해와 희생, 자유와 동
지에 대한 빛나는 등불로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다.
-5불과 함께 보내온 뉴욕 브롱스의 한 학생 편지
<가디언>지는 블로흐 변호사에게 그 지면에 실을 에셀의 편지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11월 7일자 <가디언>지는 에셀의 편지를 실었다. 자신에게 보내온 격려에 대한 답신이었다.
갑자기 어둡고 가련했던 나의 주위에 빛이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새로운 형제 자매들
로부터의 지지의 표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나는 내 아이들에 대해 사랑과
지원을 제안하고,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찬사를 보내주신 그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으로
할 말을 잊습니다. 아무리 운명이 잔혹한 머리를 나에게 내밀더라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
인한 전쟁이 중단되도록 내 자신을 곧추세울 것을 겸허히 다짐합니다. 결코 자신의 신념과
내 남편과 나에게 보내 주신 가디언 독자들의 신뢰를 싼값에 팔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셀의 글 솜씨를 본 구명위원회는 '죽음의 집으로부터 한 어머니가 쓰다'라는 제목으
로 연재를 시작했다. 물론 이 감동적인 글로 말미암아 구명위원회의 활동은 점차 활성화되
었다.
활동기금과 아이들에 대한 지원금이 몰려들었다. 그 물결은 점차 미국 바깥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버섯구름처럼 폭발한 처형반대운동
이젠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에 반대하는 대중적 항의가 전 세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처형
반대운동이 극점에 이르렀다. 마치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처럼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에 대한
반대운동은 전 세계를 뒤덮었다. 교황 피우스 7세, 프랑스의 오리올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유리 교수, 아인슈타인 박사 등 세계 명사들이 반대행렬에 가담하였다.
전세계 미국대사관에서 받은 사면 요구 서한이 1만 251통에 달했다. 바로 그 시간 피켓을
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백악관 앞과 재무성 빌딩 앞을 행진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대통령에
게 전달해 달라고 백악관 경비병에게 전달했다. 뉴욕에서는 로젠버그 구명위원회 주최로
1만 5,000명의 시위대가 모여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는 줄리어스의 어머니인 소피 로젠버
그와 유명한 여배우 카렌 몰리, 그리고 이들의 처형이 전세계적으로 미국을 치욕스럽게 만
들 것'이라고 주장한 그로스 교수가 소개되었다. 밤낮없이 사형판결의 잔인성을 규탄하는
소리가 거리에 넘쳤다. 수십 개의 미국 도시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초인종을 눌러 주부들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전국에서 보낸 편지
와 전보가 백악관에 날아들었다. 워싱턴으로 가는 특별 사면열차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들
부부의 사면을 요구하는 15분 짜리 라디오광고방송이 처형 예정일 3일 전에 여덟 차례 이루
어질 계획이었다.
외국에서의 소란은 더욱 극성스러웠다. 진보파 뿐만 아니라 보수파에서까지 밀려드는 반
대의 물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거세어졌다. 파리는 처형 반대 여론으로 들끓었다.
공산당 신문 <류마니테>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나 전보를 보내자는 파블로 피카소
의 항변을 실었다. <피가로>는 '공산당에게 순교자를 주지 말자'면서 역시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을 반대하는 전면기사를 내보냈다. 2,000명의 프랑스 공산당원들이 벨로드롬 디베르에
모여 미국을 반 유대주의로 규정했다. 노벨상 작가 프랑소와 모리악이 사면을 요구하는 진
정서에 서명했다. <르몽드>는 '로젠버그 처형은 미국과 유럽 연합에 심각한 패퇴이며 그
들의 적에게 승리를 자져다줄 것'이라며 우려하였다. 파리대주교는 아이젠하워에게 재심판
이나 사면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거의 매일 수백 명의 대표들이 미국대사관을 방문
하였다.
어떤 집회에서는 성난 군중이 경찰과 충돌하여 17세 소년이 크게 다치고 877명이 체포되기
도 하였다. 노틀담 성당은 특별기도 시간을 선포했다. 아이젠하워의 저 유명한 치열을 드러
내는 대형 걸개그림이 등장했다. 그 이빨 하나 하나가 전기의자로 묘사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던 영국의 거리에는
로젠버그 처형반대 시위가 휩쓸어 축제의 분위기를 폭도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수천
명이 '미국 살인자들'이라고 외치며 행진하였다.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
쟁이 일었다. 노동당 스티븐 데이비스 의원은 임박한 처형을 비판하며 미국대사관의 폐쇄를
요구하였다. 에틀리 노동당수는 당원들의 요구를 달래기에 급급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대관식 축하행사는 '로젠버그 구명 주간'으로 변해버렸다.
이탈리아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함께 구명 대열에 합류하였다. 바티칸라디오는 전세계 가
톨릭의 사면대열 동참을 호소하였다. 교황 피우스 7세는 사면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아이젠
하워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거의 모든 비 공산당 계열 신문들도 사형에 반대하였다. 수천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로마에서, 밀라노에서, 제노바에서 열렸다. 미국 대사관의 외곽은
시위군중들로 가득 찼고 클레어 루스 미국대사는 사면요구로 미국대사관이 포위되었다고 말
했다. 노동 총 연합은 15분간의 스트라이크를 벌여 이탈리아 전역을 마비시켰다.
두 개의 독일은 로젠버그 문제에 한해서는 통일 점을 찾았다. 동독에서는 게하르트 아이
즐러가 한 집회에서 로젠버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츠바이크가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는 편지,
브레히트가 헤밍웨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대중들을 선동하였다. 동베를린에서는 <신
의 왕국에서>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려 미국 사법정의의 야만성을 공격하였다. 코펜하겐의
세계여성총회는 아이젠하워에게 사형집행을 연기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멜버른에서도
미국 영사관 밖은 늘 피켓을 든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더블린에서는 화염병이 미국 공보원
에 날라들었다. 텔아비브, 브뤼셀, 오타와, 바르샤바, 모스크바, 키예프, 비엔나, 멕시코, 과테
말라 등 곳곳에서 로젠버그의 석방을 탄원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사영집행이 조금만 더 지
연된다면 기존의 청원 기각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압력을 미국 대통령이 견뎌낼 재간이
없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위대한 러브스토리
로젠버그 재판의 극적 요소는 세기의 스파이 재판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한 편의 위대
한 러브스토리라는 면에서도 부각된다. 줄리어스와 에셀의 사랑은 죽음을 기다리고, 죽음을
나누면서 더욱 깊어갔다. 그들은 형 집행 40분전에 만남이 허용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뿌
연 유리창과 그물 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가락을 안타깝게 내밀었으며, 결코 닿을 수
없는 키스를 수없이 나누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였다.
그저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던 에셀을 감옥 속에서 견디게 했던 힘은 바로 남편 줄리어스
에 대한 사랑이었다. 에셀은 친정 가족으로부터 배신과 저주를 당할 때마다 남편의 사랑으
로 위안을 삼았고, 힘을 얻었다. 에셀은 무식하고 고루하며 비열하고 잔인한 가족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던 1936년 겨울, 줄리어스를 만나 사랑에 빠져 구원받았다.
에셀은 흔들림 없이 남편을 이상적인 존재로 믿어주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기
억이 남편과 아이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느껴야 했던 에셀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정부의 압
력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참고 견디겠다는 그의 결의가 에셀에게도 결사적인 전의를 다지게
해주었다. 에셀이 처음 수감되었던 여성교도소의 동료 수감자들은 '에셀이 줄리어스에 대
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증내는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녀와 함께 감옥에서 지냈던 어떤
여성은 '나는 어떠한 남자도 그녀가 줄리를 생각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기억했다.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물론 많지 않았다. 특히 법정을 오가면서 같은 차량을
이용할 때야말로 가장 소중한 밀애의 기회였다. 대형 감옥 버스는 연방교도소에서 남자 죄
수들을 태운 후 여성죄수들을 태우기 위해 여성교도소에 들러 폴리 스퀘어 연방법원으로 가
곤 하였다. 한 죄수는 나중에 이렇게 증언하였다.
줄리는 한결같이 자기가 잡은 꼭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바로 여자와 남자를 분
리하는 경계선 바로 옆자리였다. 그물코가 큰 철망이 사이에 있었다. 언젠가 여자 죄수들이
모두 탄 뒤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켠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줄리와 에
셀이 철망을 사이에 두고 그 어두움 속에서 서로 키스를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성냥을 곧
바로 꺼버렸다.
법률적인 수단이 모두 난과에 부딪히고 사형이라는 결말을 향해 가는 동안 줄리어스는 끊
임없이 에셀을 격려라고 고무하는 편지를 써보냈다. 에셀에게 독서와 노래연습, 명상과 심리
치료에 몰두하면서 우울과 공포를 극복할 것을 독려하였다. 특히 그녀의 글쓰기를 칭찬하면
서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그로 쏟아 부을 것을 권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글
쓰기로 선생님의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던 에셀의 수많은 글은 이렇게 하여 세상에 빛을 보
게 되었다. 그녀의 글은 이 세기의 재판을 한 편의 러브스토리로 승화시켰다.
예정된 결론
어두운 동굴 속으로 한줄기 빛이 비껴들 듯 잠깐 희망의 빛이 서렸다. 1953년 6월 17일
대법관 윌리엄 더글라스는 원심판결이 1946년의 원자력법을 적용하지 않고 그 법률에 의해
대체된 1917년 일반 간첩 법을 적용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단독으로 사형집행연기를 허가
했던 것이다. 1946년 법에 따르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은 단지 배심원의 권고 하에서만 선
고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새로운 법이 적용 가능한 것이라면 연방지방법원은 사형
을 선고할 권한이 없게 되므로 그 적용 가능성을 지방법원에서 심리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로젠버그 부부와 그의 변호인은 최초로 승리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검찰총장의 요청에 따
라 대법원장은 바로 그 다음날 사형집행 연기를 거부한 결정이 적법한지의 여부를 판결하기
위해 특별재판을 연다고 발표하였다. 이미 예정된 결론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음
울한 뉴스는 바로 그날 저녁으로 집행 시간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침 소리
가 14시간 후에 폭발 예정인 시한폭탄의 초침소리처럼 불길하게 울렸다.
대법원장은 6대 3으로 더글라스 판사의 연기요청을 기각했다고 발표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시 두 번째 사면요청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유대
인의 안식일에 처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브라우넬 검찰총장은 당초 예정되었던 11시 집행
시간을 바로 그날 밤 8시로 변경하도록 지시하였다.
싱싱 교도소 바깥에는 뉴욕주 주둔군인들이 교도소 경비병과 지역경찰과 함께 만약 있을
지도 모를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집결했다. 교도소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쳤
고 통행증을 가진 사람들만 통과시켰다. 교도소 담 안에는 30명이 넘는 기자들이 방문자 안
내소에서 '죽음의 집'에서 들여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이미 죽음을 앞두고 줄리어스와 에셀은 공동 서명한 편지에서나 마이클과 로버트
두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무죄였음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에셀은 자신
이 몸에 지지고 있는 두 가지 보석을 아이들에게 전해달라는 추신을 남겼다. 에나멜이 칠해
진 목걸이 하나와 금으로 된 팔찌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오후와 그날 초저녁까지 함께 지내
도록 허용 받았고 이어 오후 7시 20분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다.
줄리어스느 감방으로 돌아가 머리와 다리의 털을 깨끗이 면도하였다. 전극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전선을 감기 위해 바지 끝을 잘랐다. 유대인 랍비가 와서 그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그 랍비는 잠언 23장 '주는 나의 목자이시니'를 암송하였고, 곧이어 두 명의 교도
관에 이끌려 천천히 전기 의자실로 들어섰다. 8시 6분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사망이 선언되
었다.
에셀 역시 똑같은 준비과정을 거친 후 두 교도관의 안내로 처형장으로 향했다. 짙은 녹색
옷을 입은 에셀은 전기 의자실로 들어가는 순간 연밥법원 집행관, 교도소장, 의사 등 낯선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호송해 온 여성교도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크나무로
된 의자에 올랐다. 8시 11분 에셀은 세 번의 전기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검시 의사들은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았다. 두 번의 충격을 가한 후에야 눈을 감았다. 8시 16분, 에
셀 로젠버그 사망이 선언되었다.
죽음으로 탄생한 로젠버그 신화
그들의 장례식은 또 한번 정치적 열변과 논쟁에 둘러싸였다. 310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뉴욕 브루클린 처치 애비뉴 9701번지 모리스 장례식 예배당에는 3,000명의 추도행렬이 몰려
들었다. 법정에서 보여주듯이 장례식장에서도 가족은 분열된 모습 그대로였다. 줄리어스의
어머니와 두 누이는 참석하였으나 그린글래스 집안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에셀의 죽음에조차 애도를 표하기를 거절했다. 아들 마이클과 로버트도 나타나지 않
았다.
'로젠버그 구명전국위원회' 위원장은 연사들을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위원회를 '미국의
단면을 대표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엠마누엘 블로흐가 첫 연사로 나왔다. 그의 분노는 줄어
들지 않았으나 연설은 엄숙하였다.
다른 모든 세계가 알고 있듯, 미국은 이제 민간인의 옷을 입은 군사 독재의 바퀴 아래 살
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로
된 심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돌같이 딱딱한 심장, 굳어 버린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들은 바로 살인자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나는 로젠버그 부부의 주검을 대통령 아이젠하워, 브라우넬, 그리고 에드거 후버의 문전에
놓습니다. 그들은 그 부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전기 의자의 스위치를 직접 누르진 않았지만
분명히 스위치를 누른 사람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미국의 전통이 아닙니다. 이국
의 정의도 아닙니다. 미국의 페어플레이도 아닙니다. 로젠버그 부부를 죽인 것은 바로 나치
즘입니다. 오늘의 교훈을 우리가 잊는다면, 우리는 비굴해지고 무릎꿇고 살게 되며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광기, 비이성, 야만과 살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몇 사람의 연설이 이어졌다. 곧 영결식이 끝나고 예배당 밖에서는 200여 명의 경찰이 지
키고 있었지만 충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3대의 전세 버스와 300대의 승용차가 롱아일랜
드 부근에 위치한 웰우드 공동묘지로 가는 영구차의 뒤를 따랐다. 그곳에 서른 일곱 살의
에셀과 서른 다섯 살의 줄리어스가 묻혔다. 로젠버그 신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외설인가 명작인가
D. H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재판
우리가 매일 하는 것
1928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출판사에서 어렵게 한 권의 책이 나왔다. 인쇄는 가족
들이 운영하는 작은 인쇄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인쇄소는 이 책의 반을 조판할 정도의 활자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먼저 반을 짜서 1,000부를 인쇄한 다음 다시 해판하여 나머지 반을
조판하는 식으로 인쇄를 마쳤다.
게다가 식자공 중에서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자가 많았다. 식자공
들이 영어를 몰랐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들이 인쇄하고 있는 책 때문에 얼굴을 붉히
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인쇄하고 있는 그 책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소설, 아니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될 소설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
을 터이다. 더구나 다른 게 아닌 외설 출판물이냐 아니냐는 논쟁으로 이어지리라고는 더욱
더 몰랐을 것이다. 어떤 신문사는 식자공들이 로렌스에게 속아서 인쇄를 맡았을 거라는 주
장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로렌스는 이런 주장을 일소에 붙였다.
속이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 조판공은 흰 콧수염을 기른 사내인데, 그때 마침 두 번
째 아내를 맞아들였을 때였다. 그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내가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영어 책에는 이런 저런 말이 씌어 있고, 어떤 종류의 것이 묘사되어 있소. 그런 일이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좋소." 그러나 그는 "어떤 내용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는
과연 피렌체 사람다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겨우 그런 말인가요? 그건
우리가 매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 '매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매일 하면서도 그것이 문자로 되어, 소설로 출판된
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책이 바로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었
다. 이탈리아 한 인쇄소의 조판공에게는 '매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을 다룬 이 소설이 전
세계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인생의 종착역을 코앞에 둔 로렌스는 이 일로 더욱 유명
한 문학계의 명사가 되고 말았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영국과 미국의 세관 당국은 이을 몰수해 버렸다. 로렌스의 사후 30년
동안 판매금지는 지속되었다.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전기 작가나 문학 비평가들은 어떤 방
법으로도 삭제되지 않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구입해야 했다. 파리에서 이 책을 구입해
가던 영국의 연구자들은 도버에서 세관에 입수될까 봐 가방 밑바닥에 꽁꽁 숨겨야만 했다.
이 소설책 하나가 마치 무시무시한 폭발물이나 전염 병균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버림받은 작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공공연히 구해 볼 수 있었다. 영
국에서도 이미 가질 만한 사람은 다 가졌는데도 당국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눈 가리고 아
웅'이 따로 없었다. 발 없는 소문이 하루 밤새 천리를 가고, 땅 속에 묻은 진실은 당나귀 귀
를 가진 임금님 귀에 들어가게 마련이다. 해적판이 출몰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에게 기울였던 애정에 비하면 로렌스는 참으로 학대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셰익스피어가 국민 작가로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면 로렌스는 완전히 외설 작가 전
도로 인식되었다. '버림받은 작가'였던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원본은 물론 '외설
적 부분'을 삭제한 수정판까지도 검찰이나 치안 판사로부터 오랫동안 '형편없는 쓰레기' 취
급을 당했다. 한동안 그의 작품들은 소각 대상으로 지목되어 당국에 압수되는 대로 불구
덩이에 내던져졌다.
영국에서의 외설물 단속과 금압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사전 검열이 모든 문
제를 해결하였다. 검열관은 법관과는 달리 자신의 결정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할 필요도, 자신
의 권한을 행사하는 원칙을 발전시킬 필요도 없었다. 인쇄는 탄생의 순간부터 종교와 국왕
의 통제에 직면하였다. 17세기 영국에는 국왕과 의회가 교대로 무엇이 출판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였다. 인쇄는 허가된 특권이었다. 공식적 허가 없이는 어떤 책도 낼 수 없었다. 17세
기말에야 이러한 출판 허가제가 영국에서 사라졌다. 그 허가제가 끝나면서 영국 법정은 외
설 서적을 발행하는 것은 보통법 상의 범죄라는 결정을 내렸다. 성문법 상의 법전에 범죄로
규정되어 있지 않아도 이미 법원이 관습과 전통에 의해 범죄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영국 땅에서 외설물은 박멸되었다.
사실 영국만큼 보수적인 동네는 없다. 영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뼈저리게 느낄 정도이다.
런던의 텔레비전은 너무 심심하다. 파리나 코펜하겐, 제네바 등 대부분의 유럽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포르노적인 프로그램은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보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적나라한 장
면은 무조건 가위질 당한다. 1959년, 영국은 윤락 단속법을 만들어 창녀촌을 완전히 없애 버
렸다. 웬만한 나라에 다 있는 창녀촌이 영국에는 없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유혹하는 일조차
범죄 행위다. 완전히 도덕 군자만 사는 나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나라에서 '채털리 부
인의 사랑'이 합법적으로 통용될 리가 없었다. 로렌스가 영국에 대해 이렇게 절망하는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들에게 성은 바로 단 하나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말초적, 개인적, 파괴적인 하
얀 성이다. 나는 이와 같은 성으로부터 영국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
에 성이 없는 영국의 갱생 역시 희망할 수 없다. 성을 상실한 영국에 희망을 느낄 수 없
다. 영국이 갱생되어야 한다면 새로운 피의 접촉, 새로운 결혼일 것이다.
성을 대하는 영국인들의 법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영국사람들은 이탈리아
식자공이 말하는 '우리들이 매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일까? 지난 1991년 10월 3일 영
국의 검찰총장 앨런 그린이 갑작스런 사임을 발표하였다. 그 전날 밤 '길거리의 여자'와 접
촉하다가 경찰의 검문에 걸렸던 것이다. 공식적이 창녀촌이 없어진 영국에서는 킹스 크로
스를 비롯한 몇몇 거리에서 창녀들이 어슬렁거린다. 마음 있는 신사는 그곳에 차를 댄 다
음 여자를 태워 어디론가 가서 재미를 본 다음 다시 데려다 주는 것이 윤락의 풍속도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린 총장은 그 거리에 몇 번 출몰하였다가 경찰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
다. 이 때문에 영국의 법 집행과 정의수호의 상징이었던 검찰총장이 파멸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도대체 그 내용이 얼마나 음란하고 외설적이었길래 그렇게 당국은 야단법석을 떨며 압수
와 몰수에 나섰을까? 그토록 노골적으로 성도덕을 파괴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던 것일
까?
누구에게나 그런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로렌스의 대부분의 작품은 성행위 묘사에 대한 많은 부분을 할애했을 뿐만 아니라 그전의
어떤 책보다도 자세하게 다루었던 게 사실이다. 더구나 어떤 소설에서도 보기 어려운 성적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특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당시까지는 '금지된 행동을 금지된 정
밀함'으로, 그리고 그것을 금지된 언어로 묘사했던 것'이다.
누구나 고교시절쯤에 읽어보았으리라 짐작되는 '채털리 사랑'의 줄거리는 이렇다. 영국의
준 남자 채털리가 후계자 클리포드와 그의 부인 코니(콘스탄스의 애칭)의 정상적인 부부생
활은 너무나 짧았다. 1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클리포드가 부상으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성
불구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채털리 집안의 영지로 돌아와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질서와 품위, 규격화된 인습을 존중하는 클리포드는 작가로서의 웬만큼의 명성도
얻는다. 이들 부부는 지식인 친구들을 저택으로 불러들여 고상한 담론을 주고받는데 만족
했고, 코니는 늘 그들을 상냥하게 접대하는 안주인이었다. 그러나 점차 그녀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어느 날 산지기 멜로즈의 나체 목욕 장면을 보고 그녀는 '몸의 한가운
데를 꿰뚫린 듯한' 충격을 받는다.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고독하게 살고 잇는 인간의 완전
하고 하얀 외로운 육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것이다. 저택의 안주인과 고용인이라
는 계급적 차이 때문에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겪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몇 번의 만남 끝
에 사랑에 빠진다. 숲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날의 야외정사에서 처음으로 절정을 맛본다.
어쩔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갑자기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상야릇한 떨림이 그녀
몸 안에서 물결치듯 했다. 마치 보들보들한 깃털처럼, 피어오를 듯한 불꽃이 너울거리며
포개지듯 정묘하고도 아름다운 광채의 초점으로 줄달음쳐 그녀의 녹아버린 내부를 다시
녹이면서 물결쳐 갔다. 마치 종소리가 잔물결 같은 소리를 잇달아 일으켜 절정에 달하는
것과 같았다.
폭발하는 성적 욕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에는 둘이서 발가벗
고 숲 속을 뛰어다니다 빗속에서 정사를 벌이기도 한다. 그것은 음지에서 양지로 뛰쳐나온
해방, 신이 인간에게 내린 은총을 받아들이는 향연이기도 하였다. 코니가 멜로즈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세속적인 난관에 부닥친다. 클리포드는 이혼요구를 거부하면서
둘을 격렬히 비난한다. 소설은 다른 시골의 농장에서 일하게 된 멜로즈가 남편을 떠나 스
코틀랜드로 가 있는 코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둘의 앞날을 기약하
는 편지의 끝 구절은 이렇다. "'존 토머스'(남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는 약간 고개를 수
그린 모습으로, 그러나 희망에 차서 '제인 부인'(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에게 편히 주
무십시오라고 인사하고 있소."
사실 음란한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저속한 구석도 있을 것이다. 저속한 구석
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피가 솟구칠 일이기도 하다. 불구가 된 불
쌍한 남편 클리포드를 버리고 하인과 바람이 나 도망간 나쁜 여자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런 그녀를 옹호한다면 바로 간통을 옹호하는 길일 수도 있고, 결혼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이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간통문제는 로렌스 이전, 19세기의 위대한 작가들인
스탕달, 플로베르, 발작, 졸라 등의 걸작품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왔다. 특히 1890
년에 출판된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는 심각한 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게다가 로
렌스는 결혼 제도 자체를 거부하고 있지 않다. 그가 얼마나 결혼 제도를 옹호하는지는 그
의 여러 서한과 저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한 제도로써의 결혼이 아니라 건강하고
살아 있는 부부의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결혼제도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음란하고 비천한 용어들이었다. 이른바 저 유명한 '네 자리 단어'가 문제였다. "F
UCK''SHIT'따위의 상스러운 말을, 그것도 수십 번씩 어떻게 소설이 그토록 자주
등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게 당시 도덕군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의 진정한 애정욕구를 잠재우고 있
던 여성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남성과 만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각성에 이르게 된다는 스
토리는 참으로 진부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구태의연할 뿐이다. 싱겁고 유치하기조차 하다.
코니가 특별히 음란한 것도, 소설의 전체 주제가 반드시 비도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로렌스는 자신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묘사하고자 한 '성적행위의 의미'를 이렇게
설 명했다.
두 줄기의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만나고 이 두 줄기 강은 메소포타미아 땅을
둘러싼다. 그리고 이 땅 위에는 극락이나 에덴동산 같은 게 잇고 여기서 인간이 태어난다.
이것이 성적행위의 의미이다. 이것이 결혼이다. 이 두 줄기 강의 흐름, 이것이 참된 결혼이
다. 이것 이외의 결혼이란 없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두 줄기 피의
강, 이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구별된 두 줄기의 영원한 흐름이다.
그 두 줄기는 접촉하고 교류하고 서로를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결혼한
남녀의 피의 단일성은 인간성에 관한 한 우주를 완성한다. 태양의 흐름과 별의 흐름을 완
성시킨다.
부활의 언어, 소생의 리듬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품경향은 바로 로렌스의 문학관,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빅토리아 왕조 영국 부르주아 계층의 점잖은 체면의식과 사교적인 교양이 인
간의 자연스러운 본능 발현을 억압했다고 보았다.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무엇보다도 존중
하려고 했던 그는 이른바 문화적 품위유지라는 미명 아래 본능적 생명력을 억압하는 것을
곧 문명의 비인간화 현상이라고 해석하였고, 제도 교육과 관습적인 교양에 의해 생명력 파
괴를 강요당하지 않는 하층민들의 생활 속에서 더욱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하였다. 성적 욕
구와 그 충족은 바로 이들 서민들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로렌스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형상화하려 한 주제이다.
작품의 전반부에는 지성적이며 치밀한 클리포드와 매력적이지만 얼굴에 우수가 감도는 코
니의 생활이 사교적인 분위기에 싸여 전개되다가 채털리 부인이 멜로즈를 만나는 중반에
와서는 전반부와 정반대로 빠르고 야성적인 분위기와 문맥으로 반전된다. 그것은 '부활의
언어이며 소생의 리듬'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소설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음란서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희망을 맛보게 해주는 용기에
가득 찬 아름다운 고전문학 작품으로 손꼽는다.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로렌스 또한 자신의 개인적 삶과 경험을 토대로 작품세계를 완성하
였다. 부모와의 관계, 아내 프리다와의 사랑,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이루어진 영국사
회의 변화상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다.
로렌스는 1885년 영국 노팅엄에 있는 작은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스무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원래 전통적인 농경마을이었으나 영국의 산업화 과
정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탄광이 개발되면서 '뒤얽힌 철도, 너무 우람해서 벽밖에 보이지
않는 주물공장, 시커먼 벽돌공장, 검은 슬레이트 지붕, 석탄재로 새까매진 진흙, 검게 질척
거리는 거리'가 전원적인 풍경을 밀어냈고, 그곳에 형성된 광산촌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
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는 '새로운 잉글랜드'는 인간에게서 생생
한 직감력,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류를 빼앗아 가는 대신
기계적인 외침과 무시무시한 의지의 힘만을 남겨놓았다고 생각하였다.
현대 기계문명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로렌스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또 다른 모티브는 정
신과 육체, 지성과 원시적 생명력 사이의 갈등이다. 로렌스의 아버지는 하층계급 출신의
광부로 술을 좋아하고 성정이 거칠었으나 어머니는 교사 출신으로 이지적이고 청교도적인
취향의 여자였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인 로렌스를 유난히 편애
하였고 그 때문에 로렌스는 어머니와 일반적인 모자 사이 이상의 특별한 애정을 나누었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이러한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의 갈등이 로렌스의 문학세계에 큰 영
향을 미쳤다고 분석하였다. 실제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비롯하여 {무지개}{아들과 연
인} 등 그의 모든 소설에는 예외 없이 상층계급 출신의 여자와 하층계급 출신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스물 다섯 살 되던 해 맞게 되는 어머니의 죽음이 정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였
다면 아내 프리다와의 결혼은 생명주의로 일컬어지는 자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정립해
나간 계기가 되었다. 로렌스는 스물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충격과 폐렴
때문에 대학 졸업 때부터 근무했던 런던 근교의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는데 이때 대
학시절 은사의 부인인 프리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섯 살 연상이었던 프리다는 독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시 남편과 세 아이를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가 몰고
온 복잡한 문제 때문에 독일과 이탈리아를 헤매 다니다 프리다의 이혼이 매듭지어진 2년
뒤에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아들과 연인}{무지개} 등 그의 대표작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특히 문학적 완성도가 높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무지개}에는 로
렌스의 생명주의사상이 거의 완성된 형태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비도덕적이고
외설적이다'라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로렌스에게는 '외설작가'라는 딱지
가 붙었고 출판사들이 작품을 받아주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큰 고통을 겪었다.
미국 체신부의 탄압
이 책의 합법적인 출판을 위한 피나는 투쟁은 1959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해 뉴욕의
그로브 출판사는 로렌스의 미망인 프라다의 허락을 얻어 전혀 삭제되지 않은 원판을 출판
하고 이것을 '리더스 서브스크립션'이라는 북 클럽을 통해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이 책에는
미국 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던 문학자였던 맥러쉬와 캘리포니아 대학 영문학 교수이자
가장 유명한 로렌스 연구자였던 셰러의 서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곧바로 경찰과 우체국의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싸움은 우체국이 이 책의
배포를 금지한 데 대한 이의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체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30년 전
에 배포 금지된 책에 대해서 아무런 해제조치 없이 배포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그 책에
대한 압수 통보를 받자마자 이의를 제기하였다.
책의 유통이 중단되면 그 손해는 회복할 길이 전혀 없다. 중단 기간이 길면 길수록 손해
또한 비례하여 커진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원칙이 깨지는 때도 있다. 출판업자가 판매
금지조치를 환영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역설의 신화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판금조치로
오히려 유명세를 타게 되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은 그 책을 읽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인간
은 무엇이든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금기에 대한 도전의 욕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브 출판사의 경우에는 달랐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새로운 작품이 아니었
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해적판이 돌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저작권은 보호되기 어려
웠고, 다른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해적판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재판을 열
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밀려 재판은 체신부에 압수된 지 보름만인 1959년 5월 14일 처
음 열렸다.
변호인들은 판금조치의 잠정적인 해제부터 주장하고 나섰다. 최종적으로 우체국의 처분이
잘못되었다는 게 인정된다면 그 판금조치는 출판업자에게 심대한 손실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 편 이에 맞서 외설적인 작품으로 판단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광범위하게 유
포되어 더 이상 손해가 커질 게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당시 우편을 통하여 외설물을
배포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이른바 '콤스톡 법'(Comstock Act)의
헌법 위반 여부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출판할 권리를 적극
적으로 주장하고 반 외설 법령의 범위를 줄이는 일이었다. 우체국의 권한을 박탈하는 이상
으로 행정부의 검열권한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이 필요하였다. 우체국은 배포 금지할 권한
이 없다는 판결로 승리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출판행위는 불법으로 남을 일이었다. 그 대신
{채털리 부인의 사랑} 출판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
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점점 싸움은 본질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증인1: 말콤 코울리(전국 문학예술협회장)
문: 단신은 로렌스의 문학작품을 읽어 보았나요?
답: 예.
문: 그가 영문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말해 줄 수 있나요? 답: 간단히 말해서 그는
조셉 콘라드 이후로 가장 중요한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 문학비평가와 문학사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평가에 동의합니까? 답: 800여 권의 책
이 D.H.로렌스에 관해 저술되었다는 점을 보면 동의한다고 생각합 니다.
문: 로렌스의 작품에서 어떤 일관된 사회적, 도덕적 철학을 구별해 낼 수 있나요? 답: 한
마디로 '자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기계적인 시대의 인공적인 조건 때문에 우리의 사
고는 육체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다고 판단하고 자연적인 인간의 존재로 회귀하는 것이
필연적인 해결책이라고 로렌스는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 이러한 철학이 이 재판의 대상인 책에도 표현되어 있나요? 답: 매우 강하게 표현되
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소설입니다. 그가 전에도 말했던 바를 이 책 속에서 정리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 이 책에 나오는 성적 표현이 그러한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나요? 답: 예. 전적으
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핵심이자 심장입니다. 결혼생활에서의 성적 만족을 주
장하려 한 것입니다. 도처에서 성적 행동의 묘사가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문: 당국은 이 책에 쓰인 특정 언어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그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비
본질적인 언어가 이 책에 있습니까?
답: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언어는 없습니다. 로렌스는 서문에 썼듯이, 그 책을 세
번 썼습니다. 첫 번째 판은 여기서 출판된 바 있는데 일기와 기록에 의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처음에는 충분히 표현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이고 도덕적
인 목적을 위해 이러한 단어들을 세 번째 판의 원고 초고속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문: 몇 년 동안이나 영문학, 특히 소설을 전공해 왔습니까? 답: 40년입니다.
문: 그 기간 동안 성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어떤 변화를 목격했나요? 답: 두 가지로 나
눠서 답변하겠습니다. 첫째는 문학과 잡지 등에서 표현하고 있는 도덕의 기준에 관한 것이
고 둘째는 거기에서 사용되는 언어 그 자체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모 두 심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주부 홈 저널> 그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문제될 부
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상담자가 결혼문제에 대해 고객에게 1주일에 5일 간 상담하는 내용
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과 억압과 변태에 관한 우려들 에 다름 아닙니다.
결혼상태에서의 만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엄청나게 일반화한 것입니 다.
문: '엄청나게 일반화되었다'고 말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일반화되었습니다. 아니 거의 보편화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놀랍게도 나
는 <주부 홈 저널>에 나오는 기사에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번째 언어의 관점에서 보
면 1차 세계대전까지 남자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쓰이는 언어로 쓰여지던 육체적 기능에 관
한 앵글로-색슨 단어들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인류학자들이 남태평양 부족들에게도 비
슷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은 흡연실, 술집, 이발소 등에서 쓰였습니
다. 비천한 여자가 아니면 여자들은 그러한 단어들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여자들도 점차 남자들의 전용장소였던 흡연실, 술빚, 이발소 출입을 요
구하였고 심지어는 남자들의 신성한 언어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설에서 하나둘씩
그러한 용어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문학사 전공자들은 1929년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
거라}에 최초로 나타났다. 1931년에 {율리시스}의 처음 나타났다는 식으로 이러한 '네 자
리 언어'의 운명을 추적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단어 주에
다른 존경할 만한 작품에 나오지 않는 단어는 없습니다. 남자들의 비밀스런 단어는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증인 2: 카진(문학사 전공학자)
<출판사측 변호인 심문>
문: 카진 씨, 당신은 문학과 대중의 관계에 관하여 연구하면서 우리 문화 일반에서 외설적
관심에서 성적 관심으로 관심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나요? 답: 예. 그렇
습니다. 나는 출판사의 편집인으로, 현대문학의 비평가로, 그리고 대학의 교수 로 그러한 사
실을 분명히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변호인이 법정에 가져온 <라이프><룩><새터데이><이브닝 포스트> 등 당시 유
행하던 잡지들을 제시하고 질문하려 하다. 이 잡지들에는 보통 인간에게 성적 호기심을 자
극할 만한 사진을 포함하고 있었다)
문: <라이프> 104페이지를 보아주십시오.
(이 때 이 잡지의 내용에 관한 어떠한 질문도 반대한다는 우체국측 변호인의 반 대 때문
에 재판이 중단된다.)
문: 카진 씨, 이 책에서 로렌스의 목적과 의도라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
는지요?
답: 내 의견으로는 로렌스는 평생 동안 산업화되고 기계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헌신을 한, 자연스런 종교적 작가였다고 봅니다.
<우체국측 변호인의 반대심문>
문: 여주인공 코니가 몰염치했다고 생각하나요?
답: 나는 그녀 스스로 놀랄 만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 그녀가 몰염치하다고 생각하나요?
답: 298페이지를 보죠. '짧은 여름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과거 같았더
라면) 여자가 (그런 상황에서) 수치심으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 대신 수치스러움이 죽어버렸다.' 이 부분은 그녀가 음란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생각
하는데?
답: 변호사 님! 당신이 몰염치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자신의 도덕적 태도의 창조물로
서 매우 쉽게 사라집니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 특히 소녀에게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 성장
입니다. 로렌스가 이미 말한 것처럼 몰염치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문: 그녀가 여기서 말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로렌스가 말하는 것은 그녀가 억압과 금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증인 3: 로셋(출판업자)
문: 이 책을 출판한 의도는?
답: 간략히 말해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위대한 책이고 영어권들의 위대한 문학적 자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시장의 출판업자로서 나는 좋은 책을 출판하여 자극적이고 도전
적이고 그리고 수익성 있는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이 책과 우리가 출판한 모든 책을
지지합니다. 처음 이 책을 출판한 업자는 법률적인 책임의 위험부담을 지길 두려워했을 겁
니다. 이 책은 아직 이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적이 없습니다. 로렌스는 죽었고 이
책은 역사의 역류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은 최근에는 암시장에서도 구해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영어 또는 다른 언어로 공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침수이론
열띤 변론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배포금지 결정은 해제되지 않았다. 체신부의 최종적인 결
정은 다음과 같았다.
현대 공동체의 기준으로 이 책은 우편으로 배포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이 책은 성적
행동의 묘사로 충만해 있다. 이러한 묘사는 더럽고 공격적이며 저급한 단어와 용어를 동원
한 것이다. 어떠한 문학적 장점도 이러한 외설적이고 음란한 문장과 단어를 넘어서지 못한
다.
결국 공은 연방지방법원으로 넘어갔다. 종래의 외설서적 재판에서 중요한 열쇠는 '정욕'이
었다. 즉 정욕을 일으키게 하는 경향을 가진 글이나 책이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그 기준
은 평균적인 사람, 또는 현대사회라는 것에 맞추어졌다. 이 애매 모호한 기준에 의하여 수
많은 책들에 대한 판금이 합법화되었다. 미국 대법원 역시 이른바 '로스 사건'에서 그러한
기준에 따라 반 외설 법들이 합헌이라고 판결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흘러간다. 세상은 변하는데 판결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대
법원의 판결과 다르게 판결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담당 판사 브리안은 명쾌하게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였다. '욕정을 일으키는 경향성'이라는 막연한 기준에서 '성에 대한
부끄럽고 병적인 관심'이라는 제한적인 해석 기준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침수(su
bmerge)이론'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즉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성적 표현이 그 책
의 나머지 부분을 침수시킬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에 외설적이지 않다고 판결한 것
이다. 그 해 7월 1일 선고된 판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훌륭한 묘사와 아름다운 문장으로 충만해 잇다. 그것의 문학적 특색은 특출 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충만해 있다. 완벽하고 솔직하고 리얼리즘에 기초하여 굉장히 자세하게
성행위를 묘사하는 문장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네 자리(욕설의 지칭)의 앵글로색슨 단어
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장과 언어는 의문의 여지없이 예민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구성과 인물의 전개에 관련이 잇는 것이다. 예외적
인 한두 개의 언어 외에는 모두 그 인물과 상황과 주제와 일치한다. 설사 이러한 문장과
언어들이 개별적으로 보면 수치스럽고 음란하고 색정적인 정욕을 불러일으킬 가능서이 있
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충분히 통합적일 뿐만 아니라 주제와 구성, 목적 그리고 효과는
음란성이나 음란한 목적에 호소되지 않는다. 그 무장도, 그 언어도 비록 개별적으로 보면
외설적이라고 간주되거나 판단될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외설로 만들 수 있도록
지배적인 주제를 침수시키지 않고 있다.
정부측에서는 그후 판결에 대해 항소하였으나 브라이언 판사의 견해는 그대로 유지되었
다. 항소심 재판부는 재판장 이하 전원일치로 그 판결을 지지하였다. 이 판결을 통하여 성
표현에 대한 오랜 금지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였음을 선언하였다. 1960년 6월 2일, 대법원
에 상고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발표로 적어도 미국에서 만이라도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오랜 수난은 끝이 났다.
두 해가 넘는 재판기간 동안 언론은 대체로 출판사 편을 들었다. 심지어 종교잡지인 <리
빙 처치>조차 이 책은 단순히 성인소설에 불과하며 그 검열은 부당하다는 논조를 폈다.
미국은 아직 국제저작권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로렌스의 유족과 그 허락
을 받은 그로브 출판사는 저작권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승소와 더불어 무삭제 해적판이 창
궐하였다. 출판사 측은 재판에서 승소한 책의 페이퍼 백을 발간함으로써 합법적인 이익을
수호하려하였으나 생각보다는 큰 이익을 얻지는 못하였다.
영국법정에 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미국에서의 승리는 로렌스의 모국 영국으로 확대되어야만 했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한
해 전에 통과된 '1959년의 외설출판금지법'의 개정을 검토하는 데다가 미국에서 승소가 확
정되자 펭귄출판사는 영국에서도 미국처럼 밀어붙여 볼 자신이 생겼다. 펭귄출판사의 사장
알렌 레인은 미국변호사로부터 전체 사건의 기록을 복사한 다음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드디어 미 삭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나오자마자 예상된 상황이 즉시 벌어졌다. 검차총
장은 기소를 결정하였고 약속했던 인쇄소 역시 추가 인쇄를 못하겠다고 나자빠졌다. 1960
년 8월 19일 런던 경시청은 소환장을 정식으로 발부하였다. 9월 8일 치안판사 앞으로 사건
은 이송되었고 배심원이 선출되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찰관 멜빈 그린피스 존스는 모
두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책을 읽을 때 아무리 잘 봐 준다 하더라도 읽는 사람에게 욕정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
다. 뿐만 아니라 난교를 부채질하고 관능을 미덕으로 추앙케 할 것이다. 또한 사상과 언어
의 조악함과 야비함을 고무하고 선도할 것이다. 아마도 20만 부나 인쇄되어 배포될 이 책
은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타락시킬 것이다.
검찰관은 전체 구성을 요약하면서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이 열두 군데나 되는데
그것은 단지 시간과 장소를 약간씩 달리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묘사의 핵
심은 언제나 쾌락과 만족과 관능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한 에피소드와 그 다음 에
피소드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네 자리 문자'(지독한 욕설) 단어가 수십 번씩, 많게는 30
회나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변호사는 배심원들이 책 전체를 보기 전에 특정 문장으로 편견을 갖게 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판사는 검사의 정식 증거제출 및 변호인 모두 진술 중에는 특정 문장을 읽어
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검찰관의 특정문장 낭독을 금지하였다. 모두진술에서 제럴드
가디너 변호사는 정말 이 책이 독자를 타락시키고 있는지는 전체를 읽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저자인 로렌스가 결혼제도의 강력한 지지자이며 난교를 증오한다고 말했
다. 영국문학에서 로렌스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 금세기의 위대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부정
할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육체적 결합에 대한 묘사는 로렌스가 말하려고 했던 것의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600년 동안 구전되어 온 단어를 사용한 게 문제라면 그 단어들이
생겨난 시대를 수치스런 시대로 단정해야 하는지를 반문하였다.
배심원들이 책을 읽어야 할 시간이 되자 그것을 어디서 읽을 것이냐가 논쟁거리로 등장하
였다. 변호인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들어 집으로 가져가서 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
째, 배심원들은 딱딱한 나무의자로 되어 있어 편안하지 못하다. 둘째, 열 두 명의 남녀가
둥근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어야 하는 게 부자연스럽다. 셋째, 만이 보는 앞에서 책을 읽
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넷째, 책을 읽는 속도가 각기 다르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집으로 책을 가져가서 읽으면 주의가 분산되므로 법정
에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재판은 10월 27일까지 연기되었고 그 사이 배심
원들은 그 책을 읽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법정에서 매일 만났다.
다시 재판은 재개되었고, 증인심문단계로 들어갔다.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만 해도 서른 아
홉 명이나 되었다. '외설출판금지법'이 출판을 허용하는 조건으로써 요구하고 있는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다른 기타 장점'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검찰은 그 증인 중에 유일하게 울
위치 주교의 증언은 그 법에 윤리적 특징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판
사는 위 조항 안에 윤리적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문학적 특징과 관련하여
<가디언>지의 편집인이 증인으로 등장하였다. 이 증인들은 공식적으로 그 책의 여러 특징
을 설명하면서 때로는 그 책이 외설적이라는 검찰관의 주장을 논박하는 데까지 나아가곤
하였다. 이에 비하여 검찰은 단 한 명의 증인도 채택하지 않았다. 검찰관 측은 그 책에
반대할 태세가 되어 있고 변호인 측이 내세운 증인만큼 유명세를 갖춘 데다가 그 책에 반
대 입장을 가진 증인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바인 판사는 '외설출판금지법'을 설명하면서 배심원들에게 마지막 주의사항을 주지시켰다.
검찰은 그 책이 외설적이라는 주장을 한 것에 관하여 모든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 유죄의
증명을 하였는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무죄이고 만약 그것이 외
설적이라면 소설로서의 장점이 외설적인 것을 압도하여 출판이 공공 선에 부합하는지 검
토하라는 것이었다. 배심원들이 검토해야 할 증거는 바로 책의 그 내용 그 자체였다.
11월 2일, 세 시간의 휴식 끝에 배심원들이 법정에 들어섰다. 무죄, 배심원 대표가 나지
막이 낭독한 결론이었다. 순간 박수소리가 방청석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이 사건의
결과에 관하여 또 다른 논쟁이 벌어졌다. 언론의 독자투고란에 찬반 양론이 답지하였다.
대부분의 다른 언론과 달리 <더 타임스>는 판결에 반대하였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변호인
측의 증인으로 나섰던 울위치 주교가 증언대에 나섬으로써 크리스찬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오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하였다. 울위치는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옵저
버>와 <처치 타임스>에 게재하여 해명하였다.
도서관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공공도서관은 다른 책처럼 전시해 두겠다고 하였
고, 어떤 도서관에서는 공개 서고에는 두지 않고 요청에 따라 대출하겠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도서관에서는 아예 구입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로렌스의 양녀는 '마치 창문이
열려 시원한 공기가 전 영국에 불어오는 것 같다'고 판결소감을 밝히면서 미국에 돌아오면
서 압수 당한 책들을 다시 반환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책도 피를 흘린다
로렌스가 싸워야 했던 것은 단순히 당국의 출판금지와 검열만이 아니었다. {채털리 부인
의 사랑} 해적판이 순식간에 전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국의 출판금지 때
문에 로렌스가 합법적으로 책을 내지 못하는 사이 해적 출판업자들은 오히려 수지를 맞추
고 있었던 셈이다. 로렌스는 해적출판의 피해를 이렇게 밝혔다.
미국에서는 해적판이 출현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뉴욕에서는 원본이 피렌체
에서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돼 이미 최초의 해적판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 것은 원
본을 가지고 만들어낸 복사판으로 서점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마치 원본의 초판인 것처럼 판매하였다... 이러한 비열한 행위를 흉내내는 사람은 차츰 늘
어갔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에서는 이와는 다른 사진판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오렌지
색의 크로스 장정에 녹색 라벨이 붙은 불결한 느낌을 주는 책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잉크가
번진 듯한 복사판으로, 나의 가짜 서명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해적판의 출판업자가 자
기의 어린 아들에게라도 시킨 모양이다.
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상}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해적판의 종류의 숫자도 늘어났다.
로렌스 자신이 파악한 것만 해도 미국에 세 종류, 유럽에 한 종류가 있었다. 해적판의 판
매에 대해서 뉴욕의 한 서점 주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지 로렌스에게 약간의 돈을 보
내왔다. 그는 그 돈이 자신의 서점에서 판매한 책의 10%의 인세라고 밝히면서 '이런 돈이
불통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사죄하였
다. '한 방울의 물'치고는 목돈이었기 때문에 로렌스는 해적출판업자들이 얼마나 큰 돈벌이
를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유럽의 해적 출판업자는 로렌스에게 대담하게 제안
까지 했다. 이제까지 팔린 부수와 앞으로 팔릴 예정 부수에 대해 인세를 지불하겠으니 그
대신 자신들의 해적판을 인가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로렌스는 고민하였다. 그러나 자존심
문제였다. 그는 이때의 고민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유다는 언제나 키스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나도 그에게 키스를 돌려주어야 한다." 물론 거절한 것이다.
그 대신 로렌스 자신도 원판을 사진 제판한 소형 본을 출판하고자 마음먹었다. 해적판이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에 대처하기 위하여 1929년 프랑스에 염가의 보급판을 발행한 거이
다. 그러나 60프랑의 이 책으로도 여전히 해적판의 기세를 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영국
출판업자들은 그에게 삭제 판을 만들도록 권하였다. 틀림없이 굉장히 팔릴 거라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 훌륭한 소설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영국 안에서도 합
법적으로 팔 수 있는 길을 열어보겠다는 출판업자들의 계산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권유에
따라 삭제판 출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로렌스는 이 삭제판 발행에 대해 곧 후회하게 되
었다. 그는 이렇게 피를 토하듯 말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코를 잘라 버리는 편이 나았
을 것이다. 책도 피를 흘리는 법이다.
외설, 그 끝없는 전쟁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그후에도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끝없이 수난 당했다. 이번에
는 미국 뉴욕주에서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문제되었다. 뉴
욕주 교육부가 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거부한 것이다. 이 영화가 간통을 바람직한 것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미국 대법원은 이
영화에서의 간통이 '일정한 상황에서만' 적절한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에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안에 포함되어 상영허가거부조치는 위법 하다는 결론
을 내렸다.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와 일본에서도 법정에 섰다. 오야마 출판사의 오야먀 히사지로 사
장의 의뢰로 이토 세이는 {채털리 부인의 사상}을 번역하였다. 오야마는 성적 묘사가 있는
것을 알면서 이 책을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판하여 상당한 부수를 판매하였다.
이 책의 번역, 출판이 형법 제175조에서 규정하는 외설문서 반포 판매 죄에 해당하므로 오
야마가 기소되었고, 이토도 공범으로 함께 기소되었다. 동경지방재판소에서는 공판을 서른
여섯 차례나 열었고, 그 과정에서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의 수많은 저명한 증인 요청을 받아
들여 심문을 벌였다. 결론은 오야마는 벌금 25만원, 이토는 무죄였다. '외설 문서는 공고
의 복지에 반하므로 그 출판은 기본적 인권의 행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결
국 쇼와 32년 3월의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도 그 결론을 지지하였다. 일본 독자가 일본어
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1993년 12월 11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소더비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경매에 붙였
다는 기사를 실었다. 물론 그 책은 펭귄출판사가 그 동안 찍어낸 100만 권 중의 한 권이었
지만 나머지 99만9천9백99권과는 다른 특별한 책이었다. 재판 당시 검찰관은 바인 판사에
게 이렇게 반문하였다. "판사님은 이 책을 부인이나 아랫사람에게 읽도록 권하시겠습니까?
물론 바인 판사는 웃고 말았지만 실제로는 부인에게 그걸 읽혔을 뿐만 아니라 도움까지
받았다. 바인 부인은 책을 읽으면서 남편을 위해 논란이 될 만한 부분에 밑줄을 그어주었
고 판사는 재판 중에 그 '주석서'를 참조했다. 소더비 경매회사는 바로 그 책을 2,000파운
드 가량의 값에 경매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토록 영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음
란외설물'이 어느새 '역사적 기념물'이 된 것이다. 재판 당시 판결을 비난했던 <더 타임스
>가 그 기사를 실었으니 세상은 돌고 풍속은 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역사를 보면 압수 당하고 불살라진 책은 바로 비단 문서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문자로 무
엇인가를 표현한 이레 수많은 나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불살라
졌다. 저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권력자에 의한 책의 탄압은 당연한 공식으로 등
장하였다.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검열정책은 서로가 말과 글을 장악하기 위한 필연적인 전
쟁이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외설물과 그 옹호자들은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책
들과 달리 일반인의 동정을 별로 받지 못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진 미국에서조차 외설물에 대한 규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
랑}을 비롯하여 {율리시스}{북회귀선}같은 명작들이 계속 외설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이 땅에서도 수많은 책들이 피 흘려 왔다. '국가보안'을 이유로 수난을 면할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출판된 마르크스의 {자본론}조차 10여 년 전까지는 판금서적이었다. 음란물
에 대한 단속은 더욱 심각하였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위를 보고 누워 있는 천연색 여자
나 체 사진은 비록 명화집에 실려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성냥갑 속에 넣어서 판매할 목
적 이라면 음화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그러나 소설{반노} 사건에서 대법원
은 '남녀간의 성교장면을 다소 실감나게 반복하여 묘사한 대목이 있기는 하나... 그 전체
적인 내용이 피고인의 변소와 같이 인간에 내재하는 향락적인 성욕에 반항함으로써 결국
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이끌어 매듭 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음 란한 작품이라 할 수 없다'고 판결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음란 여부에 대한 판단이 지
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에 대한 두 교수의 감정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문화의 하수도에 머물러야 할 법적 폐기물'이라고 평가한 교수와
'성에 대 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깨뜨리려는 노작'이라고 평가한 교수가 있었다.
사실 오늘날 범람하는 외설물들을 보면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오히려 청순하
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오직 성적 만족만을 위한 온갖 변태적인 음란물들은 욕정은커녕 역
겨움만 자아내기 일쑤다. 그렇다고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쓰레기를 완전히 냉소해낸다는 가
망 없는 전쟁이 과연 바람직할까? 오히려 이 사회가 영원히 도덕적인 이상향이 될 수 없
다면 출구를 내주는 게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성인영화관을 설치하자는 주장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발행하는 포
르노잡지 <허슬러>를 지키기 위해 보수주의자들의 총탄세례까지 받으면서 당당하게 표현
의 자유를 요구한 래리 플린트는 이렇게 항변하였다.
제 잡지가 비도덕적이라구요? 그러면 전쟁은 어떻습니까? 원자폭탄은 어떻습니까? 합법
적 살인과 포르노 중에 어느 것이 더 비도덕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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