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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둥근 지붕

by Casey,Riley 2023.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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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둥근 지붕

방문 손잡이는 둥글다. 청동의 단단함이 안으로안으로 수렴되
는 그 둥근 물체에는 작은 단추가 튀어나와 있다. 잠금 혹은 열
림, 갇힘 혹은 탈출. 저 손잡이를 잡고 들어와 스스로 작은 공간
에 갇히거나 저 손잡이를 잡고 나가 넓은 세상으로 표표히 떠나
든가. 그럴 때 방문 손잡이는 온 우주처럼 보인다.
방문 손잡이에 걸려 있는 염주도 둥글다. 염주는 방문 손잡이보
다 지름이 두 배쯤 되는 원을 그리고 있다. 염주의 동그라미는 또
한 작은 동그라미들이 둥글게 늘어선 집합체다. 복숭아 열매들을
한 줄로 늘어서게 만든 힘은 어떤 손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것
이 둥근 형태가 되도록 만든 것은 복숭아 열매의 기억이었을 것
이다. 언젠가, 나무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들며 둥글게 익어가던
날들의 기억.
모든 것이 둥글다. 방문 손잡이도, 염주도, 우주도, 씨앗도, 모든
것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어머니들의 자궁도, 그 안에 웅크린
태아도, 태어나 처음 세상을 보는 아이의 눈동자도, 그 아이를 바
라보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얼굴도.
그리하여 승주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도실 염주에
서 벌레 알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 벌레 알들이 희고 포슬포
슬한 동그라미 모양을 하고 있을 때, 그저 무연히 고개를 끄덕였
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염주알들이 만나는 곳마다에는 희고 포슬
포슬한 알들이 더 크고 둥글게 부풀어오른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동심원들의 주변으로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자잘한 동그라미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승주는 방문 손잡이에 염주를 걸어
놓고 떠난 여인의 뜻을 헤아린다,

강릉-청 량리, 10:00 5호차 27번 좌석. 승주는 컴퓨터가 찍어서
내어준 얇고 넓적한 티켓을 들여다보며 개찰구를 빠져나간다. 병
아리색 종이에 검은 잉크로 찍힌 딱딱한 인쇄체 글씨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 말도, 아무 이미지도 전해 주지 않는다. 오히
려 오래 보고 있을수록 점점 더 등을 돌려 승주를 외면한다, 이제
돌아가는가, 아무 빛깔도 없는 도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리
로 돌아가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승주는 다시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에다 시선
을 둔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희뿌연 대기에 갇혀 있는 먼 산
맥의 이마도, 그보다 가까이 보이는 건물들의 얼굴도, 바로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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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에 쌓여 있는 목재들의 등허리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
지 않는다. 무엇보다 승주의 마음이 가장 그럴 것이다,
차라리 예전의 그 열차표가 더 나았다. 작고 딱딱한 열차표, 그
것을 손 안에 꼬옥 감싸쥐면 모든 것이 분명했다.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신비함과 가능성이 손바닥에서 배어나는 땀만큼이
나 서늘하게 감지되곤 했다. 개찰구에서 역무원이 찍어주는 계곡
모양의 표시는 또 얼마나 정겨웠는지. 반달을 양쪽에서 잡아당기
면 그런 모양이 될 것이다.
컴퓨터가 만들어주는 티켓에는 그런 정겨움이 없다. 언젠가, 마
그네틱이 그어진 열차표가 나오는 시대가 되면 그때는 이 병아리
색 열차표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대체로 과거
를 그리면서, 그 시절 그때를 이야기하떤서 사는 이유를 승주는
이제 알 것 같다. 모든 과거에, 모든 인간들은 현재보다 조금 더
젊었던 것이다. 조금 더 힘이 있었고, 조금 더 많은 문 앞에 서 있
었고, 조금 더 순수했다.
승주는 5호 객차에 오르면서 열차표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객실 안은 거의 비어 있다. 오전 열시의 햇살이 객석 중
앙 통로까지 깊숙이 비껴들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먼지를 풀썩풀썩 일깨운다. 승주는 좌석 옆 벽에 사각 플라
스틱 팻말로 붙어 있는 좌석번호를 확인한다. 72번 창측, 71번 내
측. 열차의 뒤쪽 출입구로 들어선 모양이다. 고속버스는 세 시간
반, 비행기는 삼십 분, 그렇게 간편한 탈것들을 두고 여덟 시간이
나 달리는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은 두 부류일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거나 시간이 많은 사람. 승주는 그 두 가지 조건에 모두 해
당된다. 시간이 많은 사람답게 승주는 천천히 걸어 좌석을 찾아간
다. 30번 창측, 29번 내측, 27번 창측, 28번 내측. 승주의 좌석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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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창측이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27번 좌
석에는 이미 한 여인이 앉아 있다.
여인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앞자리 좌석 등받이를 반대편으
로 젖혀 두 의자를 마주보게 해놓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은 자세
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듯, 아니, 처음부터
객석의 일부인 사물이었던 듯, 완강하고 움직임이 없다. 승주는
주머니에 넣었던 열차표를 꺼내 다시 한번 좌석번호를 확인한다.
틀림없이 5호차 27번 좌석이다. 승주가 옆에 서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여인은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미동이 없다.
미동이 없을 뿐 아니라 고요하기까지 하다. 물밑에 가라앉아 있거
나 계곡 깊은 곳에 누워 있는 듯, 고요하고 적막해 보인다.
승주는 잠시 망설인다. 여인에게 좌석을 제대로 앉았는지 확인
한 다음 저 창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아예 다른 곳에 가서 앉
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저 여인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승주는 여인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내려
놓는다. 바로 그 순간, 시선을 여인에게서 떼어 정면으로 향하는
순간, 그 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확연히 눈앞에 떠오른다.
여인은 잿빛 헐렁한 승복을 입고 있다. 벽에 걸어둔 것은 그냥
가방이 아니라 잿빛 바랑이고 앞좌석에 얹힌 두 발에는 잿빛 양
말이 신겨져 있다. 바닥에 함부로 놓인 신발은 검은 털신이다. 그
럼에도 여인은 어깨까지 닿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승주는 시선
을 정면으로 둔 채 고개를 갸웃한다. 여인의 독특한 외모와 옷차
림을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 모습이 의아하다
고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없다. 승주는 그만 좌석 등
받이에 상체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며, 그러나 보고 만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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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을 아래위로 스윽 훑어내리는 것을, 그 눈빛에 거부감과 경계심
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거의 비다시피한 열차 안의 그 많
은 자리를 두고 하필이면 여기 앉아 사람을 불편하게 할 일이 무
엇이냐...... 그런 눈빛이다.그러나 승주는 눈을 감고 그 모든 것
들을 외면한다. 사소한 것들
승주는 열차가 출발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 강룽을 출발한
열차는 앞으로 여덟 시간 후에 청량리역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내
방송을 들으면서도 눈을 감고 있다. 여덟 시간. 혼자 눈을 감고
여행하기에는 긴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만날 때마다 승주는 인간
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절감하곤 한다. 여덟 시간을 혼자
잠자고 일어났을 때, 그 길고 긴 시간을 하는 일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살아 있음의 자각도 없이 혼자 누워 있다가 깼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살갗에 오소소한 소름이 돋는다.
의자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 아직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객
실의 맵싸한 공기, 규칙적으로 몸을 흔드는 열차의 진동. 승주는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은 채 그런 것들을 느끼고 있다. 아니다.
그런 표면에 두드러지는 감각보다 더 깊은 곳에 감응하는, 다른
모든 감각들을 밀치며 한사코 전면으로 드러나는 어떤 기운을 느
낀다. 공기의 단면과 단면 사이에 껄끄럽게 떠 있는 불순물 같은
것, 호흡의 단층과 단층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탁한 기운 같
은 것. 어둠을 틈타 거적때기를 지고 산을 오르는 사내의 뒷모습
이기도 하고, 해가 뉘엿한 장독대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가녀린 피
리소리기도 하고, 어두운 차고에서 되울리던 텅 빈 망치소리 같기
도 한..... 승주는 온힘을 다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기억들
을 밀쳐낸다. 코끝은 쨍하게 추운데 등에서는 진땀이 돋는다.
열차가 강릉을 벗어나 십 분쯤 달린 후 승주는 눈을 뜬다.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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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창 너머에는 바다가 따라오고 있다.낮은 구릉도 짧은 굴도
모두 지나고 열차는 이제 해안선과 수평으로 달린다. 손 내밀면
바다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바다는 아직도 아쉬운
눈빛으로 방금 자신이 솟구쳐 올린 태양을 올려다보고 있다.
지난 사흘 동안 승주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바다가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대체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일러
주기를 바다는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속살거리는 것 같은데 승
주는 바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바다가
거기 있다.
그 바다를 배경으로, 바다보다 더 선명하게 옆자리 여인의 얼굴
이 눈에 들어온다. 여인도 승주처럼 고개를 왼쪽으로 한껏 틀어
바다를 보고 있다. 여인의 오른쪽 뺨과 귀, 목덜미가 자신의 존재
를 주장하듯 뚜렷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다. 사십대
초반, 혹은 오십대 중반? 여인의 얼굴에 세월의 척도인 삶의 찌꺼
기들이 묻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눈가의 가로 주름, 입가의 세
로 주름은 분명 만만치 않은 시간의 흔적이다. 얼굴 전체가 잘못
불어놓은 풍선처럼 일그러져 보이는 인상조차 분명 세월의 흔적
일 것이다. 그럼에도, 승주는 여인의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다.
승주는 비로소 마음이 불편해진다. 여인의 존재가 아니라 그 여
인에게서 뻗어나오는 어떤 힘, 주변의 사물을 무시함으로써 자신
의 권위를 세우려는 그릇된 힘이 느껴져 불편하다. 주위의 모든
사물을 한사코 밀쳐내는, 그러나 자신의 인력이 미치는 범위 밖으
로는 결코 벗어나게 하지 않는, 그런 견인력과 반발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불편함을 여덟 시간 동안이나 참아내야 하다니......
승주는 무릎에 놓인 가방 손잡이를 잡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초록
의자들이 뒤통수를 보인 채 나란히 앉아 있는 통일호 열차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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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비어 있다.
[저 바다...... 저 바다만 보면.....]
승주는 잘못 들었는가 한다. 결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붙이거
나 손을 내밀 것 같지 않았던 여인, 그 여인이 말을 하고 있다. 숭
주가 믿기지 않는 건 그 여인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떠나
려는 자신을 붙잡는구나 하는 점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
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승주는 여인이 자신을 잡는다고 느낀다.
[저 바다만 보면,나는 열반을 하고 싶어.....]
무슨 말인가. 잠깐의 진공 상태가 지나고 나서야 승주는 여인의
말뜻을 알아듣는다. 말뜻뿐 아니라 그 말 속에 깃들어 있는 깊은
어둠과 오래 된 세월의 무게까지 감지한다.저 바다...... 푸른 바
다를 향해 홀린 듯 다가서곤 하던 충동, 바닷물결을 온몸에 친친
감고 그 위에 누워 한세상을 보내고 싶은 갈망, 그렇게 세상이 끝
난다 해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빈 손의 가벼움, 승주도 그
런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아주 유심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여인도 고개
를 돌려 승주를 마주본다. 눈꼬리가 처진 둥근 눈매, 그러나 눈빛
이 날카롭다.
[왜, 내 말이 무섭니?]
승주는 고개를 젓는다. 그 정도의 말에 무서워할 만큼 만만하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다만 석연치 않을 뿐이다. 낯선 이에게 일방
적으로 떠안기는 딱 부러지는 반말과, 그 말투에 깃들어 있는 공
격성의 기미가 께름칙하다. 오래도록 구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 중년은 훨씬 넘겼을 그 여인의 나
이에도 어울리지 않는 말투다.
[아녜요,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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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속맘을 말하지 않는다. 여인은 승주를 정면으로 바라보
며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는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무얼 뜻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여인의
옆모습은 금세 조금 전의 완강한 모습이 된다. 낯선 사람의 이유
없는 시비를 받아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해. 승주는 다시 가
방 손잡이를 단단히 거머쥐고 통일호 열차 실내를 둘러본다. 저기
중간쫌,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 자리가 낫겠어. 다음 역이나 그
다음 역에서 좌석 임자가 탄다면 그때는 이 여인에게 내 좌석을
내어달라고 요구해야지.
[종이에 써봐.이름하고 생년월일,그리고 주소 전화번호......]
승주가 막 자리에서 일어설 때, 여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
며 말한다. 승주는 반쯤 폈던 무릎을 구부리며 다시 좌석에 엉덩
이를 붙인다.
[이름은 한자로, 생년월일은 음력으로]
명령하는 듯한 말투,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자의 말
투, 그러나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자의 말투. 승주는 자신이
읽어낸 사실보다 더 간절한 것을 안다. 이 여인이 나를 잡는구나.
내가 옆자리에 있어 주기를 원하는구나. 승주는 잠깐 맥을 놓고
허공을 바라본다. 여기가 분기점일 것이다. 지금 일어나면 여인과
의 관계는 끝날 테고,더 앉아 있으면 앞으로 여덟 시간 이 여인
과 동행해야 한다. 이야기들,관계들, 행위들.....
깊게 숨을 들이쉬며 승주는 가방을 열고 만년필과 수첩을 꺼낸
다. 부딪쳐 보자. 늘 관계 맺는 일을 회피해 오지 않았는가. 승주
가 읽은 책에는 그런 것을 성장기의 애정결핍이라고 풀이하고 있
다. 그러나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 없듯이, 알고 보면 성장기에
한두 가지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승주는 이름과 생년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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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크게 적은 다음 수첩 한 장을 찢어 여인에
게 건넨다.
여인은 종이를 받아 멀찌감치 들어올린다. 그러더니 옷걸이에
걸린 바랑을 끌어내려 무언가를 꺼낸다. 돋보기 안경은 아니다.
책이나 공책 같은 것도 아니다. 횐 비닐 주머니, 그 안에서는 다
시 정갈하게 접힌 횐 물수건이 나온다. 여인은 물수건 안에서 작
은 물체를 꺼낸다. 손 안에 꼬옥 감싸쥐어지는 물체, 승주가 무엇
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여인은 그것을 얼른 입 안에 밀어넣는다.
몰래 알사탕을 먹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다. 아, 승주는 짧은 한숨
을 삼킨다. 틀니다.
여인은 틀니를 입 안에 넣고도 마술을 부리는 사람처럼 시치미
를 뚝 떼는 표정이다. 승주는 예기치 못한 마술에 속아넘어간 사
람처럼, 여인이 감춘 것을 못 보았다는 듯이 멍한 눈으로 여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잘못 불어 놓은 풍선 같던 옆모습이 갑자기
반듯해져 보이는 건 선입견일 것이다.
차창 밖으로는 여전히 푸른 바다가 이어지고, 파도는 열차를 노
리는 맹수처럼 달려와 열차 발치쯤에서 횐 이빨을 드러내보인다
파도가 드러내는 횐 이빨의 무력함만큼이나 여인이 입 안에 감춰
넣은 틀니도 아무 힘이 없을 것이다. 가뭇없이 사위는 파도처럼
승주의 마음속에서도 여인에 대해 불편해하던 껄끄러움이 누그러
지고 있다. 그런 감정 변화의 함정들에 대해 잘 알면서도 온몸에
서 빠져나가는 힘을 맥없이 방치한다.
[어휴. 이 눈빛에 그득한 연민 좀 봐라]
여인은 고개를 많이 돌려 승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승
주는 여인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너,나 술 한잔 사 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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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놀라지 않는다. 아마 여인은 승주의 생년월일과 이름에
서 승주의 삶의 비밀이나 타고난 생시의 기운들을 읽었을 것이다.
승주가 술을 살 정도의 경제력은 있으며, 낯선 이의 술 요청을 거
절하지 않을 것이며, 대낮의 열차 안에서 술을 대작하는 사실에
대해 꺼려하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런 확인
위에서 술을 사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승주 또한 그
여인이 가지고 있을 이런저런 감정의 직조들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승주는 리어카를 밀고 지나가는 홍익회 판매원에게
맥주 두 병을 청한다.
[안주도 있어야지. 그거 하나 줘]
오징어포를 가리키는 여인의 손가락이 희고 가늘다. 노동에 대
한 기억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손마디. 살생과 육식을 금하는
불가의 규율은 여인의 것일 뿐이다. 승주는 돈을 치른 후 맥주병
과 오징어포를 두 손 가득 받아든다.
[한 잔 따라 봐라]
여인은 어느새 승주 앞으로 종이컵을 내밀고 있다. 덜컥덜컥,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열차의 진동을 잘 조절하며, 승주는 넘치거
나 흘리지 않게 술을 따른다. 종이컵 위에 하얀 맥주 거품이 꽃처
럼 소복하다.
[이것도 좀 먹기 좋게 찢어 놓고]
여인은 술잔을 입에 가져가기 전에 오징어포를 승주 쪽으로 건
넨다. 승주는 무릎을 직각으로 세워 수평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비닐 봉지를 펴고 오징어포를 찢어 놓는다. 여인은 맥주 두 잔 연
거푸 마시더니 세 잔째 술을 받고서야 한숨 돌리듯 종이컵을 열
차의 창턱에 올려놓는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열차를 따라 창틀
의 맥주잔이, 발치의 맥주병이, 무릎 위의 오징어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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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동해시를 지난 걸까 이제 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열차는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올망졸망한 산과 계곡을 거
느리고 달린다. 계곡 아래로 오종종하게 일구어 놓은 논밭이 붉은
맨살을 드러내며 을씨년스럽게 따라온다.
[다 허망한 거다. 중요한 건 이런 거지. 눈에 보이는 거, 만질
수 있는 거, 듣거나 맛볼 수 있는 거. 나머지는 다 헛거야]
여인은 창틀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보인다. 컵에 남아 있던 맥주
를 다 마시고 승주 앞으로 잔을 내민다. 승주는 다시 여인의 잔에
술을 채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승주는 단 하나만 보기로 한다.
승복을 입었지만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여인,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님에도 온통 틀니로 칠갑을 한 여인, 대낮의 열차 안에서 술을
마시는 여인, 앞좌석에 얹은 두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여
인...... 승주는 눈앞에 보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유추하거나 알
려고 하지 않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미궁인 삶, 벼랑에 서 있거나
캄캄한 미로를 헤쳐나가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만을
받아들인다.
[너는 뭐가 문제니?]
여인은 승주의 무릎 위에서 오징어포를 집어든다. 승주는 주르
르 달려 올라가는 오징어포의 중간을 끊으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만들어 보인다.
[저는 그냥 여행하는 길이에요]
여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승주를 돌아보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술잔을 입에서 떼어내며 다시 한번 승주를 돌아본다.
눈빛이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버려져 있다. 거짓말 마라, 그런 얼
굴이다. 낯짝에 근심이 그득한데,네 뱃속까지 훤히 보이는데.......
숭주는 고개를 돌려 여인의 시선을 피한다.
11-19
무엇이 문제인가. 아직도 마음은 두 줄 위에 다리를 걸친 채 어
느 쪽으로 옮겨 디딜까 머뭇거리고 있다. 알 수 없는 건 두 줄이
각각 어디로 이어지는가 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제 마음이다. 승주는 기차를 타기 전에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늘 그렇듯, 백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전화를 받는 듯 다급하고 숨
찬 목소리를 냈다.
[지금 올라가요]
[그래.잘 생각해 봤어?]
언제나 상대적으로 승주의 우유부단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그의
말투.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분명하게 말하기. 그래서 승주는 다
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세 번의 일출을 보았는데 그것이
매번 다르더라는 점이며, 그 일출의 태양을 등지고 새벽마다 육지
로 돌아오는 고기잡이배들의 지친 노동이며, 배 안에 잡혀 있을
생선들의 몸부림이며, 그것들이 그저 풍경처럼 보일 수 있는 상태
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며.
[올라가서 얘기해요]
승주는 늘 그렇듯이 밀고 들어오는 듯한 그의 말투 앞에서 뒷
걸음질쳤다.
[알았어. 도착하는 대로 전화해]
그는 백미터 달리기의 결승점을 막 통과하는 사람처럼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승주는 그와 똑같은 속도로 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체 그 일이 왜 결혼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가 되지?
아이야 얼마든지 다시.....] 그와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다면,그러
면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의혹을, 자신의 중압감을 한꺼
번에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의 유산에 대해서조차. 그러
나 그는 늘 앞서 달리고 승주는 그의 등뒤에서 몇걸음 걷다가 주
12-20
저앉고 만다.
 첫 아이는 석 달 만에 유산했다. 임신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피가 흐르기 시작할 때는 뒤늦은 생리인가 싶었다. 밤새도록 통증
에 시달리고 나서야 예사로운 생리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다음날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유산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아이는 조심했다. 첫 아이가 유산되었기 때문에 모든
주의와 금기를 지키며 일 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
았다. 태아는 안전하다고 했다. 팔 개월 무렵, 출산 예정일보다 일
찍 진통이 오고 이슬이 비칠 때, 승주는 그저 출산이 빨라지나보
다 싶었다. 오일 전까지도 아이는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사산이라고 했다.
[혹시,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것 아닙니까?]
퇴원할 때, 의사는 기록하고 있던 차트를 덮으며 승주에게 물었
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두꺼운 안
경 저편, 가늘고 긴 의사의 눈을 마주보고 있자니 무의식 깊은
곳, 꿈의 예후로라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떤 덩어리가 뭉텅
가슴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햇빛에 노출이 되는 순간 죽
어버리는 미세한 생물 같은 것이었다. 승주의 마음속에서 무엇인
가가 죽어나갔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그렇다면 우선 산부인과가 아니라 정신과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날 승주는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가방을 꺼내놓고 천천히 짐
을 싸기 시작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승주의 가방을 보
며 눈을 크게 떴다.
[우선 작업실에 가 있을게요, 시간과 거리를 갖고 처음부터 다
시 생각해봐야겠어요]
13-21
그는 크게 떴던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힘껏 다문 턱의 근육도 꿈틀거렸다. 한참만에,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당신, 아무래도 내게 무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두 손에 가방을 들고 밤거리로 나서며 승주는 그의 말을 되풀
이해서 들었다. 당신, 아무래도 내게 무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결혼을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승주가 읽었던 책들은 늘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
란다] 혹은 [......그리고 잘 먹고 잘살았답니다]로 끝나곤 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처럼, 결혼만 하면 모든 게 자동으로 해결되리
라 자신을 속였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진정으
로 상대를 이해하고 관계를 가꾸어나가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피나게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외면해 왔는지도 모
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죽이며 아주 많이 참아야 하고 가슴속
의 응어리들을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열차는 태백, 고한, 영월을 지난다. 산간지대를 달리는 열차는
늘 풍경을 너무 가까이 보여준다. 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싶으면
어김없이 굴이 나타나고 굴이 나타나면 매캐한 매연이 열차 안에
가득 찬다. 객실의 매연이 걷히기도 전에 다시 굴이 나타난다. 그
동안도 여인은 계속 맥주를 마시고 오징어포를 먹는다. 그제야 승
주는 어쩌면 여인이 아침식사를 걸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열차는 제천역에 멈춘다. 영동선과 중앙선, 태백선과 충북선이
만나는 제천에서는 손님이 많이 탄다. 여인이 발을 걸치고 있던
앞좌석에도 임자가 나타난다. 여인은 앞좌석을 내어주고 더듬더
듬 발동작으로 바닥의 털신을 찾아 신는다. 앞좌석 등받이가 눈앞
을 막자 공간이 반으로 줄어든다. 좁아진 공간은 열차 안이 아니
14-22
라 깊은 산 속이거나 안락한 방 안 같은 분위기다. 여인에게서 느
껴지던 불편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승주는 그런 마음의 함정에
대해서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머리카락을 몇번 쓸어넘기고 만다.
열차가 제천역을 출발하고 나서 승주는 두 병의 맥주와 귤, 삶
은 달걀을 산다. 여인은 정말 아침을 걸렀는지 귤과 달걀을 허겁
지겁 먹으며 간간이 맥주를 마신다.
[너,유곡법문 하나 들려줄까?]
유곡법문? 승주의 어리둥절해하는 낯빛을 보며 여인은 벌써 목
청을 가다듬는다. 여인이 목청을 가다듬을 때에야 승주는 비로소
유곡법문이라는 낱말에 한자어를 붙일 수 있다. 유곡법문, 곡조가
있는 법문이라는 뜻이리라. 여인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노
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
네 .....]
절에도 찬불가를 부르는 합창단이 있는 걸까. 잘 다듬어진 목소
리는 필시 체계적으로 성악을 공부했으리라 짐작되는 발성이다.
저음에서는 두툼한 힘이 느껴지고 고음에서는 매끄러우면서도 부
담없는 바이브레이션이 아름답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퍼올리는
듯한 감정이 음색 전체에 윤기를 얹는다. 승주는 가슴 근처가 간
질간질해진다.
창 밖으로는 드문드문 휜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자잘한 관목들
을 데리고 뒷걸음질치고 있다. 그 뒤를 바람이 기세 좋게 따라붙
는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는 바람 누구의 삶도
기웃거리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바람. 승주는
그 바람의 삶 끝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한갓되이 꽃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꽃잎만......]
15-23
일 절로 끝날 줄 알았던 노래는 이 절까지 이어진다.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의 손님들이 노래가 들리는 쪽을 향해 하나 둘 고
개 돌린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노파에게,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여고생에게, 검은 테 안경을 쓴 군인에게, 승주는 양해의 뜻으로
목례를 보낸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이쪽을 보는 중
년사내도 있다. 승주가 난감해하는 것과는 달리 객석은 점점 조용
해진다. 여인의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객실 전체가, 아니 객차까
지도 귀를 크게 열고 노래를 듣는 듯 적막하다. 노래가 끝나고나
자 열차 바퀴의 진동음만이 선명하게 남는다.
[술잔이 비었잖아]
노래를 마친 여인은 승주 앞으로 다시 빈 술잔을 내민다. 그때,
여인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울 때, 승주는 깨닫는다. 줄곧 가슴
언저리를 긁어대던 간지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노을 비킨 하늘을 향해 멀리까지 울려퍼지던 피리소리, 들을 때
마다 가슴 간질간질한 두려움을 일깨우던 어머니의 피리소리. 저
녁을 지을 무렵이면 어머니는 흰 사발에 숟가락을 걸쳐들고 장독
대로 가곤 했다. 부엌에서 장독대에 이르는 길 양편의 작은 텃밭
에는 고추와 파가, 그 바깥으로는 붓꽃과 봉숭아가 피어 있었다.
붓꽃은 저녁 무렵에 꽃잎을 열었다. 간장이나 된장을 뜨러 갈 때,
어머니는 늘 막 피어난 연분흥 붓꽃을 따 입에 물었다. 그러면 어
김없이 이어지던 빼애...... 피리소리.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승주
는 잠깐씩 하던 놀이를 멈췄다. 고무줄을 넘다가도 색깔집기 놀
이를 하다가도,공깃돌을 던지다가도,어머니의 피리소리에 맥을
놓았다
장독대에서 장을 푼 다음 어머니는 늘 하얀 행주로 장독을 닦
곤 했다. 아직도 깨끗하고 반들반들한 장독을 한 번도 빠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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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닦았다. 장독대 근처에서 공깃돌 놀이를 하다가 승주는 물어
본 적이 있다. 엄마, 왜 그걸 매일 닦아?
[이 독들도 숨을 쉰단다.숨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잘 닦아 주는
거야. 장독이 숨을 잘 쉬어야 그 안에 있는 간장, 된장도 잘 살 수
있거든]
[그럼,장독도 간장도 모두 살아 있어요?]
어머니는 승주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먼 산으로 눈을 돌
렸다. 휜 종이에 장을 떠가지고 돌아가는 길에는 어린 파를 따서
잎에 물었다. 빼애..... 어머니가 부는 피리소리가 먼 산까지 닿
는 것 같았다. 승주는 던져올린 공깃돌을 받지 못했다. 가늘어서
애달프고 떨림이 많아 불안한 소리. 먼 산에 닿아 가뭇없이 사라
지는 피리소리의 뒤끝처럼 어머니가 흔적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
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엄마, 하지 마]
단 한 번 승주는 어머니의 행주치마 자락을 붙들고 말했다. 그
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붓꽃 꽃잎을 입에서 빼내어 승주의 입에
물려 주었다.
[너도 해보련?]
승주는 입에 붓꽃 꽃잎을 문 채 울음을 터뜨렸다. 왜 울었을까.
언젠가는 어머니가 떠날 거라는 불안, 아무리 매달려도 결국 떠나
고 말 거라는 예감 그러면 피리소리가 사라진 텅 빈 공간에 혼자
남게 될 거라는 적막감. 일곱 살이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몰랐던 것도 있다. 그 시절, 승주는 어머니가 몸
어딘가에 소리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무엇이
든 입에 물기만 하면 소리를 낼 줄 았았다. 붓꽃 꽃잎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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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잎사귀, 버드나무 가지, 연한 보릿대, 무엇이든 어머니의
입에 닿기만 하면 소리가 되었다. 심지어는 쪽파 이파리까지. 승
주도 해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저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비릿하거나 매콤한 풀잎 맛만 남곤 했다.
이제는 승주도 안다. 소리 주머니가 실은 안으로안으로만 눌러
온 온갖 소용돌이치는 감정들, 이루지 못한 희망, 겉으로 드러내
지 못하는 원망, 그런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든 이들
의 가슴속에는 저마다 다른 크기의 소리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 말이 되지 않는 함성들, 혹은 말할 수 있
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까지, 그 모든 것이 다만 빼
애...... 피리소리가 되어 나온다는 것을 안다. 이제 승주는 붓꽃
꽃잎으로 피리소리를 낼 수 있다.
열차가 원주를 지날 때쯤 여인은 술병째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구겨진 종이컵은 귤 껍질, 달걀 껍질들과 함께 발치에서 뒹굴고
있다. 승주는 종이컵을 주워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그물망에 넣는
다. 여인은 그런 승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쯧쯧..... 혀를 찬다.
[그냥 둬라. 남의 소를 그리 열심히 세어서 뭐 하니. 단 한 마리
라도 제 소를 키워야지]
승주는 그 말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소가 있었던가.
여인의 눈 언저리가 막 울고 난 아이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다.
[고향이 어디지?]
[아까 열차가 출발했던 곳이 고향이에요]
[집은 서울이고?]
승주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는 일은? 조각을 해요. 조각? 그
렇다면 조소야, 소조야? 승주는 웃지 않고 대답한다. 쇠붙이들을
두드리고 녹이고 다듬어요. 말하면서, 그게 내 손으로 내 소를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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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일인가 자문해 본다.
[서울에서 혼자 산다구?신랑은 어쩌구?]
승주는 여인에게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한 바 없다. 승주가 무어
라 하기도 전에 여인은 두 손을 내젓는다.
[마음 쓰지 마. 인연이 그런 걸]
인연이 그렇다니. 휘익 차창 밖을 지나는 바람이 열차 안으로
소용돌이치듯 몰려든다. 그런 운명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게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노력이란 대체 무슨 의미가 있
는가.
[그건 그렇구, 지금 혼자 산다면 오늘 밤, 네 집에서 좀 묵어가
자]
승주는 그러라고 한다. 어쩌면 여인은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승
주에게 그토록 많은 말을 시켰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승주의 얼
굴을 살피고 떠나려는 승주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기분 좋다. 너, 내 유발상좌해라]
승주는 또 무슨 말인가 한다. 아까, 유곡법문이라는 말에 간신
히 한자를 갖다붙였던 노력을 다시 해본다. 아마, 유발상좌를 뜻
하는 모양이다. 유발스님에 유발상좌. 그것도 어울린다. 싶다.
[할래, 안 할래?]
여인의 목소리가 안으로 많이 감겨든다. 승주는 고개를 끄덕인
다. 저 나이가 되면 보통 여인들은 자식이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
을 보내 주고 건강식품을 챙겨주고 주머니에 용돈을 넣어주는 아
들이나 딸이 있을 것이다. 하룻밤쯤,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얼
마든지 저 여인의 상좌 노릇을 해드릴 수 있으리라.
[좋다. 맥주 한 병 더 하고 양갱이를 사다오]
승주는 여인이 시키는 대로 한다. 여인은 맛나게 양갱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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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마신다. 흔연히 음식을 먹는 여인 곁에서 승주는 내내 가
슴께가 간지럽다. 양평을 지날 무렵, 화장실에 다녀온 여인은 의
자에 기대어 깜박깜박 졸기 시작한다.
[너,오늘 나,재워주기로 했다. .....도망가면 안돼]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여인을 바라보며 승주는 기어이 가슴이
뻑뻑해진다. 승주도 안다. 그렇게 시키는 마음 깊은 곳, 섣불리 드
러낼 수 없는 깊은 곳에 있는 제 행동의 동기에 대해. 떠난 후 소
식이 없는 어머니, 그 어머니도 어쩌면 이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
른다. 여덟 시간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낯선 이
에게 잠자리를 부탁하면서, 정처없이.
승주는 늘 그랬다.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중년 여인
을 보면 어머니도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
에 엉거주춤 서 있는 노인을 보면, 가방을 몇개씩이나 들고 지하
도를 오르는 여인을 보면, 시장거리에서 콩나물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면, 어머니도 어디선가 그렇게 애쓰고 있는 게 아
닐까 싶었다. 승주는 늘 어머니를 위해서 그 일을 했다.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 아무리 바빠도 노인에게 먼저 택시를 잡아드
리는 일, 어깨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여인의 가방을 들어주는 일.
그 일들은 모두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아주 먼 곳에라도 아주 먼
길을 돌아서라도 승주의 행위가 어머니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차가 청량리역에 도착해도 여인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
는다. 승주는 여인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다. 여인은 무
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눈길에 잠시
당혹감과 불안이 머문다. 그러나 승주를 발견하자 이내 눈동자 주
변의 긴장이 풀어진다. 낮잠에서 깬 아이가 어미를 찾아내고 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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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눈빛.
[가자, 네 집으로 가자]
여인은 잠이 덜 깬 동작으로 벽에 걸린 바랑을 떼어 어깨에 멘
다. 짐칸에서 작은 보퉁이를 내릴 때는 몸이 비틀, 흔들린다. 승주
는 여인의 보퉁이를 받아 안는다. 플랫폼에 내려서서는 한 손으로
여인의 팔을 부축한다. 청량리역 광장에 나서자 여인은 승주의 손
에서 팔을 빼더니 바랑을 열어 그 속에 든 물건을 꺼낸다. 감색
코트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차다.
[제천에 사는 어떤 보살이 준 거야]
코트를 입은 여인은 어느 모로 보아도 그저 평범한 중년여인일
뿐이다. 성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여인도 아니고 남정네
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딸도 아닌, 그런 어떤 인간. 어둠 속
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일정한 방향이 없다. 일정한 방향이 없는
바람이 더 날카롭게 온몸을 휘젓는다.
잠에서 깨면서 여인은 술기운이 달아난 얼굴이다. 택시 안에서
는 조금 전의 호기와 다변이 다 어디 갔나 싶게 조용하다. 택시에
서 내려 승주의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한 마디 말이 없다. 그러나
일단 집으로 들어서자 현관을 거쳐 곧장 안방으로 안방에서도 가
장 한가운데 자리잡고 앉는다. 승주는 줄곧 안고 온 여인의 보퉁
이와 어깨에 멘 여행가방을 내려놓고 난방장치를 튼다.
[술상 봐 오너라]
여인의 목소리는 정말 상좌 부리듯 한다. 그 동안 말이 없었던
게 혹시, 승주의 마음이 변할까봐 조바심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인다. 그런 마음 뒤에는 다시 연민이 따른다. 승주
는 우선 코트만 벗은 다음 냉장고를 열어본다. 맥주와 몇가지 인
스턴트 식품을 곁들여 상을 보아가지고 가자 여인은 방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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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실내를 둘러보고 있다. 방 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액자와
마른 꽃들과 책장의 책들, 그리고 언젠가 승주가 손가락을 망치로
찧으며 만든 청동조각. 청동의 여자는 머리 위로 두 팔을 한껏 올
려 화로를 들고 있다. 승주는 말없이 술상을 내려놓고 여인은 말
없이 술상 앞으로 다가앉는다.
[저 화분은 말라 죽겠구나.목숨 가진 것은 함부로 맡는 게 아
니고 한번 맡은 목숨은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다]
여인은 마치 버리듯 말하고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집을
비운 동안 방치된 난은 잎끝이 노랗게 변해 가고 있다. 다시 물을
주고 변한 부분을 전지 가위로 잘라내면 해결될 문제다. 승주는
건넌방으로 건너가 외출복을 갈아입는다. 마음 같아서는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깊은 잠에 빠지
고 싶다. 여행 뒤끝에는 늘,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고 긴 다리를
건너듯 그렇게 길고 깊은 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승주는 여행가
방을 대충 풀어놓고 다시 안방으로 간다. 그 사이 여인은 맥주 한
병을 거의 비우고 있다.
[너는 우연히 나를 데려왔다. 하룻밤 자비하는 마음으로 나를
재워 주겠다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게 다 인연이다. 수천 번의
전생을 거듭해 온 인연이다. 옷자락 한 번 스치는 데도 칠백 번
전생의 연이 필요한 거다. 함부로 굴지 마라]
승주는 알았다는 뜻으로 웃어보인다. 그것 말고는 승주가 할 일
이 별로 없다.
[음악 좀 틀어봐라]
승주는 여인이 시키는 대로 한다. 앰프의 파워스위치를 넣고 플
레이어에 올려져 있는 레코드에 그대로 바늘을 올려놓는다. 레코
드는 러시아 민요다. 웅장하고 느린 남성합창이 볼가강처럼 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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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흐른다
[다른 건 없니? 그런 너무 무거워서 싫다]
음악이 두 소절도 흐르지 않아 여인은 제동을 건다. 지나치게
웅장한 곡은 자칫 음울하게 들리기도 하겠지. 승주는 레코드를 뒤
져 슈베르트를 찾아낸다. 가볍고 달콤한 연가곡집. 젊은 청년이
집을 떠나는 부분, 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와 우물 근처를 지나는
대목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잘 도착했어?]
그는 여전히 백미터 달리기를 하고 난 목소리다. 그렇다고 대답
하는 승주의 머릿속이 윙 울린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음악을 틀어놨어요]
[그래, 지금 볼까? 애기 좀 하자]
승주는 그가 등을 밀고 있다고 느낀다. 다급하게 승주가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결론을 내리려 할
것이다. 그 동안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지금은 안 돼요. 집에 손님이 있어요]
[손님이라니?]
[내일 얘기해요. 내일 작업실에 나갈 거예요]
그는 [알았어, 내일 보지]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의 직절적이
고 단순 명료한 태도가 편리할 때도 있다. 사실 승주 편에서 그의
판단력, 실천력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렇지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
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싫다]
승주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재촉한
다. 아이처럼 투정이 묻어나는 말투, 그러나 눈빛은 살피듯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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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다. 승주는 슈베르트도 중단한다. 외국곡들이어서 싫어하는 걸
까? 혹은 여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클래식이어서? 이번에는 가요
를 틀어본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풍경화 같은 노랫말에 부드러운 곡조 특히 가수의 목소리가 감겨
들 듯 감미롭다.
[너는 젊은 애가 어떻게 그런 노래만 듣니? 다른 건 없니?]
승주는 여인이 원하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열
차에서 불렀던 [동심초] 같은 가곡을 원하는 걸까.
[그럼 어떤 곡을 원하세요? 듣고 싶은 걸 말씀해 보세요]
승주는 목소리에 짜증스러움의 기미가 묻어나지 않도록 애쓴
다. 여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술을 한 잔 마신다. 미간이 좁아지
며 눈썹 사이에 세로로 두 줄 주름이 모인다.
[간다, 간다 하는 노래가 있는데, 아니?]
여인은 간다, 간다라는 구절을 말할 때 어떤 멜로디를 붙인다.
느리고 끈끈한 멜로디, 회한에 찬 비통한 어조. 승주는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알아듣는다. 그 동안 승주가 틀었던 노래들보다 덜할 것
도 없이 음울하고 무거운 곡이다. 폐병으로 요절한 가수가 부른
노래, 그가 죽기 전에 취입해서 누구나 제 삶의 앞날을 조금쯤은
예견한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진저리치게 했던 노래. 승주는
레코드들 사이에서 그 판을 찾아 플레이어에 올린다.
현악기 소리를 흉내낸 전자오르간 서주가 나오기 시작하자 여
인은 고개를 숙인다. 거의 직각으로 꺾인 머리 위로 비장한 바람
처럼 들판의 풀들을 일시에 눕히는 바람처럼 음악이 휘돈다.
[간다,간다아...... 나를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서주만큼 가수의 목소리도 비장하다. 운명을 예감하는 사람들
은 저리 비장한 소리를 내는 걸까. 여인의 숙여진 고개가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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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기 시작한다. 노래의 소용돌이 속으로 완전히 빨려들어갔
거나, 음악의 리듬에 온몸을 띄우고 있는 모양새다. 완전한 함몰.
[님의 손목 꼭 붙들고 애원을 해도 님의 가슴 끌어안고 울어
도......]
노래가 세 소절쫌 지나자 어깨가 움찔움찔 흔들린다. 승주는 여
인의 좁은 어깨 위에 얹히는 무거운 노래와, 그 노래 위에 얹히는
더 무거운 그림자를 본다. 낭만적인 사람, 혹은 열정이 많은 사람.
젊음과 함께 사라진 그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한
건, 그것을 메워줄 다른 삶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나이에 맞
는 삶.
[그거 다시 한번 틀어봐라]
여인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다. 낮고 무겁고 축축하다. 술기운
탓인지, 노래에 의해 어떤 감정을 자극받은 탓인지 알 수 없다.
승주는 플레이어의 바늘을 곡의 시작 부분으로 옮겨놓는다. 서주
가 시작되자 여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가운데 있는
술상을 구석으로 옮겨 놓는다. 무슨 일을 하려나 짐작할 틈도 없
이 형광등 스위치를 내려 불을 끈다. 갑자기 어두워진 방 안, 창
밖에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에 의해 희미하게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방 한가운데 여인이 우뚝 서 있다. 승주가 어둠에 눈을 익히
기도 전에 방 안의 검은 물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검은 혼령처럼, 건들면 스러질 허깨비처럼, 여인의 팔다리가 허
공에서 너풀거린다. 음의 강약을 따라, 박자의 빠르기에 따라 여
의 동작이 커지거나 작아진다. 여인은 음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
고 몸 밑바닥까지 들어찬 음악은 저 밑에서부터 여인의 몸을 소
용돌이치게 하고...... 아주 조금씩,그러나 움찔움찔 움직이는 여
인의 춤사위는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승주는 작은 스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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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를 켜서 방 안의 어둠을 조금 밝힌다.
[울어도 울어도 뿌리치고 떠나가더라, 속절없이......]
곡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고조되어 갈수록 여인의 동작도 더욱
커진다. 그 동작을 시키는 내부의 감정도 점점 고양되고 있으리라.
어깨며 팔, 허리며 다리가 저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물에
걸린 문어라면 저렇게 사지를 비틀까, 낚시에 걸린 잉어라면 저렇
게 몸을 비틀까....... 승주는 여전히 오디오 앞에 쭈그려앉은 채로
어둠 속에서 혼령처럼 흔들리는 여인의 검은 그림자를 본다.
삼 분 사십 초짜리 음악은 금세 끝난다. 음악이 끝나도 여인은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몸 안에서 음악과 함께 끓어오른 열정이
아직도 소용돌이치고 있는 기색이다. 어둠에 적막까지 가세하자
여인의 춤동작은 차라리 기괴해 보인다. 음악이 없다 해도 여인의
춤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내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절
망, 한 번도 표출해보지 못한 울분, 몸 어딘가에 단단하게 응어리
져 있을 회한.....
승주는 다시 한번 레코드 바늘을 음악이 시작되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 얼마든지, 이런 일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
면서. 음악은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여인은 계속 춤을 준다. 몸 안
의 찌꺼기, 마음 안의 응어리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까, 다섯
번쯤 노래가 반복된 후에야 여인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음악이 끝나고 춤도 끝난 방 안은 을씨년스럽다. 한바탕 도깨비
들이 놀다 떠난 폐가처럼 괴기하다. 여인은 구석으로 밀쳐두었던
술상을 끌어다가 다시 술을 마시고 승주는 오디오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다시 불을 켤 엄두를 내지 못한다. 환한 불빛 아래서 여
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여인도 지치고 탈진한 얼굴을 드러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적막한 방 안에서 승주도 여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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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다. 방 안 깊숙한 곳까지 밀려든 가로둥 불빛만이 수런수
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을 뿐.
집으로 접어드는 골목에서 승주는 버릇처럼 고개를 든다. 골목
끝에 서 있는 집 이 층 창에서는 불빛이 스며나오고 있다. 잠깐
고개를 갸웃하다가 오른쪽 어깨의 가방을 왼쪽으로 옮겨 멘다. 그
여인이 떠나면서 불을 켜놓은 모양이다. 이제는 불 켜진 창을 보
며 온정에 대한 기대를 갖거나, 불꺼진 창을 보며 새삼 쓸쓸해하
거나 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물이 그저 사물로만 보이는 상태, 그
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 왔다. 이제 창문 하나만큼은 창문
으로만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여인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쯤은 경부선이나 호남선 열차를 타
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낯선 이에게 청하여 이미 하룻밤의
잠자리를 확보했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승주가 밥과 북어국을 끓
여놓고 외출 준비를 끝낸 후에도 여인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전
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리라. 오전 열한시쫌, 열차에서 마시
기 시작한 술은 다음날 새벽 두시 가까이까지 이어졌다. 몸도 마
음도 많이 피곤해 있었을 것이다. 승주는 혼자 식사를 한 후 짧은
메모를 남겼다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합니다. 밥과 국은 레인지 위에 있으니 데
워 드세요. 냉장고를 열어 보면 다른 반찬도 있습니다. 현관문을
잠근 후 열쇠는 대문간의 우유 주머니에 넣어주세요. 그리고 이건
차비에 보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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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메모지 위에 현관 열쇠와 흰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렇게
나오면서도 마음이 무엇엔가 당겨지듯 길게 뒤로 늘어나곤 했다.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못 다한 자식의 마음, 어린 자식을 빈
집에 남겨둔 채 일을 나가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럴까. 그렇게
미진한 마음의 응어리를 궁글리며 하루를 보냈다.
지금, 불켜진 창을 올려다보니 마음속에 구르던 응어리가 가슴
근처에 딱딱하게 뭉친다. 너무 매정한 처사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집에 묵어간 손님인데 잠깰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던 건 아닐까.
[손님이 있다는 게 누구야?]
낮에, 작업실로 찾아온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물었다. 말끔한
정장차림에 잘 빗어넘긴 머리, 늘 그렇듯이 멀리서도 남성 화장품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쇳덩이며 망치, 줄, 용광로가 널린 작업실에
서 그의 복장은 생경하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누구,내가 모르는 사람이야, 당신이 모르는 사람이야?]
그는 지프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앉는다. 승주는 변두리
주택가의 빈 차고를 작업실로 얻은 후, 폐차시키는 지프차를 얻어
다 차고 한 켠에 세워두었다. 그 차는 훌륭한 의자로 간이침대로
창고로 사용된다.
[둘 다, 그냥 열차에서 만난 사람이에요]
[뭐? 오다가다 만난 사람을 집에 들였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다음에 이어질 그의 이야기는 뻔하다.
당신은 정말 문제야. 어떻게 생판 낯선 사람을 그 늦은 시간에 집
안에 끌어들일 수 있어.그렇게 현실 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차 한잔 마실래요?]
그는 무언가 더 말을 할 듯 숨을 들이쉰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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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저으며 숨을 내뿜는다. 승주는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들고 조수
석으로 올라간다. 그는 의자를 뒤로 많이 젖힌 채 등받이에 기대
어 눈을 감고 있다가 승주가 옆자리에 앉자 등을 세운다.
[그래서,그 손님은 갔어?]
[그럴 거예요. 지금쫌은, 아마 떠났을 거예요]
그가 입 가까이 들어올렸던 찻잔을 내리며 승주를 돌아본다. 눈
이 커져 있다.
[떠났을 거라니? 그럼, 떠나는 걸 보지도 않고 나왔다는 말이
야? 아니지, 집에서 잠까지 재웠다는 뜻이야?]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승주는 얼룩진 가죽 앞치마를 소리나게 탁탁 턴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어떻게 내게 잡아달라고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 있어요?
어떻게 굶주리는 사람에게서 등을 돌린 채 혼자 포식을 할 수 있
 느냐구요? 그는 할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눈앞의 계기판을
바라보고 있다. 차의 머리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표시해
주는 나침반, 해발 몇미터에 올라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고도계,
차체가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가를 일러주
는 경사계, 바깥 기온과 차 안의 온도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감
지해주는 온도계. 한때 그 기계들은 자동차의 눈이고 귀이고 피부
였을 것이다. 자동차는 이 땅의 모든 산길과 들길을 달렸을 것이
다. 그러나 이제는 무거운 고철더미가 되어 놓여 있을 뿐. 실타래
처럼, 자동차가 달렸을 길들이 승주의 머릿속으로 엉겨든다.
[그 나이에, 대체 어쩌자고 그래?]
그는 빈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한 번, 또 한 번. 승주는
위장 속의 커피가 느글느글한 기운을 솟구쳐올리는 걸 애써 참는
다. 지난 밤 어둠속에서 춤추던 여인의 모습이 환영처럼 어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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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그 나이에 맞는 삶이 없어서 그토록 헛헛한 손동작으로 춤
을 추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던 춤. 그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그는 늘 그랬다. {당신 나이에 맞게 살라구.} 청바지나 티셔츠
대신 정장 차림을 요구하고, 길가에서 떡볶이나 튀김을 먹는 대신
풀코스 양식이나 쯔끼다시가 많이 나오는 일식집을 가라고 했다.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할 것과 나이에 맞는 행동을 요구했다.
삼 년 전, 바로 이 자리에 앉아 결혼을 요청할 때도 그랬다. [언
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살 거야? 사람은 나이에 맞게 성장해야 한
다구. 누구나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지. 당신이 늘 이렇게
현실 감각이 부족하고 어수룩한 것은 그 나이에 알아야 할 세상
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청혼이었
다. 훈계하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 심지어는 승주가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을 담보로 하는 협박조의 청혼이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도 낳아야지.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겠어? 인간에
대한 통찰 없이 어떻게 훌륭한 예술을 하겠어? 나는 당신의 재능
이 지금 상태에서 영원히 답보 상태에 머물까봐 걱정이야] 그때
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아니, 지금도 그건 사랑일 것이다. 다
만 승주는 그 방법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러다 나쁜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는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내린다. 승주는 그만 찻잔을 내려
놓는다.
[그건 그렇고 우리 문제는 어떻게 결정했어?]
승주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아니다 그게 솔직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승주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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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육 개월이나 이렇게 살았어. 나 이런 엉거주춤한 상태는
싫어]
승주는 찻잔을 거두어 들고 차에서 내려서며 그의 얼굴을 외면한다.
[혹시,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등뒤에서 재빨리, 쏘는 듯한 그의 대답이 따라온다. 승주는 그
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거취를 정하라고 하니, 무슨 계
기가 있는가 싶어서요]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으며 승주는 그가 차에서 내리는 기척을
느낀다. 승주는 그가 자신에게 와주기를 바란다. 다가와 어깨를
안고 천천히 속삭여 주기를 바란다. 무슨 말이든.
[분명히 말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해. 내 인생에는 당신이 필요
하고.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야]
승주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건 흰 거고 저
건 검은 거야. 그러니 이건 옳은 거고 저건 그른 거야. 모든 게 그
렇게 분명하다면 사는 건 한결 쉬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든지,
이혼 서류를 정리하든지.
[되도록 빨리 결정해. 난 벌써 서른셋이야]
여전히 백미터 달리기 선수 같은 말투다. 작업실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가 넉타이를 매만지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는 동작도
육상선수처럼 빠르고 정확하다. 승주는 그가 그토록 나이에 집착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백미터 달리기는 기록을 재는
운동 종목이니까.
승주는 대문 귀퉁이에 매달린 우유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기대
하고 있던 열쇠는 잡히지 않는다. 몇번 주머니 속을 휘저어 보지
만 손에 닿는 건 꺼끌꺼끌한 헝겊의 감촉뿐이다. 혹 문을 잠그지
않은 채 그냥 떠나신 걸까. 아니면, 문을 잠그고 열쇠를 그냥 가
지고 가셨을까.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가며 승주는 벌써 열쇠 따
는 집이 어디 있더라 머릿속을 더듬는다. 그러나 현관 손잡이는
승주의 손이 닿자 제풀에 스스르 몸을 연다. 문을 잠그는 걸 잊으
셨구나. 현관에 들어서며 고개를 드는 순간, 승주는 멈칫 멈추어
서고 만다.
그 여인이 서 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긴 단발머
리에 승복을 입은 모습으로 현관을 바라보고 서 있다. 화사한 불
빛을 머리 위로부터 받으며 마치 환영처럼. 안 가셨구나...... 그
렇게 생각하는 마음 밑바닥에서는 의혹과 함께 환한 기운이 솟는
다. 승주는 그 환한 기운을 소중하게 어루만진다.
[왜 이제 오니?]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일갈하듯 소리친다. 여인은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고 승주는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입장이 아니지만
승주는 오히려 입가에 벙긋한 웃음이 맺힌다 늦게 귀가하는 딸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하루 종일 굶었잖아]
승주는 신발을 벗다 말고 비틀, 한다. 딸의 안위를 염려하는 어
머니의 마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시중을 기다리는 딸의 투정에 가
깝다. 어쩌면 그 두 마음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될 것이다.
[밥하고 국 해놨는데, 왜 안 드셨어요? 냉장고 열어보면 과일이
랑 빵 같은 것도......]
[난 내 손으로 밥 안 차려 먹는다.]
여인은 승주의 말허리를 자르더니 몸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간
32-40
다. 옷자락에서 찬바람이 인다.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서며 승
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깐 생각한다. 내 손으로 밥을 안 차
려 먹는다면, 그렇다면? 상좌를 부리던 습관에 대해 말하는 걸까?
아니면 가정부를 두고 살았던 젊은 시절이 있었고 언제든지 원
하는 것을 눈앞에 대령하는 부모가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부
모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아이가 저 여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걸까. 그 모든 것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승주는 문득 가슴
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오른다. 뜨거운 기운을 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쉬는데 여인이 다시 안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게 뭐니? 칼을 이렇게, 칼날이 하늘을 보도록 이렇게
꽂아두는 사람이 어디 있니? 위험하게......]
여인은 오직 그 말만을 하기 위해 나온 사람처럼 다시 몸을 돌
려 방으로 들어간다. 칼은 숟가락통에 꽂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칼날을 세우고 있다. 한번도 그걸 위험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
는데, 새삼스럽게 그게 흉기로 보인다. 칼을 빼서 도마 옆에 뉘어
놓으며 승주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슴에서 솟구치던 뜨거운 기운
이 눅어내린다.
승주는 여인에게 왜 떠나지 않으셨냐고 묻지 않기로 한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몸이 불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비가 부족했
거나 그다지 급한 볼일이 없었거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을 수도
있다. 승주는 여인을 따라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젯밤에 잠자리를
보아드린 이불이 방 한켠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밥 차려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밥이야 늘 먹는 거고, 다른 게 먹고 싶다]
여인은 이불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승주를 돌아보지도 않
고 말한다. 그 등이 꼿꼿하다. 다른거 뭐요? 승주는 다시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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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듬는다. 승주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런 투정.
[통닭 한 마리 사오너라. 맥주 몇병하고]
승주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본다. 아홉시 사십이분. 아직 통닭집
이 문을 닫았을 시간은 아니다.
[반 마리는 그냥 튀겨 달라고 하고 반 마리는 양념 통닭으로
해와]
승주는 외출복 그대로 핸드백을 어깨에 멘 그대로 돌아선다.
어머니도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문득 통닭이나 돼지갈비가 먹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낯선 고장에서 살다가 문득 고향이 보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승주도 그럴 것이다. 아주 나중에 저 여인
과 같은 나이가 되면, 문득 냉면이 먹고 싶어지고 색동옷이 입고
싶어지고 젊은 시절에 듣던 음악이 다시 한번 듣고 싶어질 것이
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승주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간다.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시키는 대로만 해라]
여인은 여전히 승주를 돌아보지 않은 채 꼿꼿한 등만 보이고
있다.
밖으로 나오니 그 사이 어둠이 더 짙어져 있다. 골목 어귀에는
가로등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저만큼 떨어져서 고개 숙인 채.
어둠속을 걸으며 승주는 불쑥 그런 생각을 한다.
중세에 태어났으면 저 여인과 나는 마녀였을 것이다. 아이를 낳
은 경험이 없는 여자, 혼자 어두운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수상한
짓을 하는 여자, 몸에 세 번째 젖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 세 번째
젖으로 남몰래 악마를 키우는 여자. 아마 사람들은 우리의 몸에
숨겨진 세 번째 젖을 찾으려 애쓸 것이고, 끝내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난 팥알만한 돋을점을 찾아내어 바로 그것이라 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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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다.
우리는 비 내리는 들판, 층층이 쌓인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했
을 것이다. 출산이 끝난 여자들과 출산을 못 한 여자들, 그리고
독신인 여자들과 함께. 죽는 순간까지도 왜 죽음을 당하는지 알지
못한 채, 단 한 가지만을 기도했을 것이다. 불길이 좀더 화사하게
타올라주기를, 한시라도 빨리 몸뚱이를 삼켜주기를. 그토록 신성
을 지키고자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그토록 일탈을 못 참아하는
관습의 이름으로 그토록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인류의 이름으
로 기도했을 것이다.
통닭과 맥주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도 승주는 그것이 이해되
지 않는다. 역사는 왜 그토록이나 독신인 여자, 어머니가 아닌 여
자,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여자에게 냉혹했는지. 마녀 사냥의 광
기로부터 몇세기나 지난 지금까지도 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암
암리에 그 전통이 남아 있는지.
여인은 승주가 나갈 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어쩌면 종
일 저런 자세로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참선을 하는 구도자의
모습이 그럴 거라고, 승주는 상을 차리면서도 자꾸만 그 등을 바
라본다. 꼿꼿한 등에서 무슨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아니,
그 등이 건네는 말을 혹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저녁 드세요]
승주는 상을 들어다 여인의 등뒤에 놓는다. 여인은 그제야 몸을
돌려 상을 마주한다. 승주는 여인 앞에 앉아 맥주병을 딴다.
[너도 한 잔 해라. 잔 하나 더 가져오고]
여인은 잔을 승주에게 내밀고 승주의 잔에 먼저 술을 따른다.
받은 술을 상에 내려놓은 다음 승주는 싱크대로 가 잔을 하나 더
가져온다. 여인은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연거푸 두 잔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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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을 묻히지 않은 통닭 한 조각을 뜯으며 유심히 승주를 건너
다본다. 자식의 앞날을 염려하는 부모의 눈빛이 그럴 것이다. 승
주는 맥주가 몹시도 단 술이라는 걸 처음 느킨다.
[술을 제법 하는구나. 어제는 못 봤는데, 저 그림, 네가 그린 거
냐?]
여인은 턱짓으로 벽을 가리킨다. 거기, 십호 크기의 아크릴화가
걸려 있다. 승주는 마치 처음 보는 것인양 그림을 유심히 본다.
아니, 그것을 처음 보는 여인의 시선이 되어 그림을 본다.
짙은 갈색으로 칠해져 화면의 삼분의 이를 채우고 있는 땅은
물을 부으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릴 정도로 경사가 져 있
다. 그 경사가 가파른 비탈 때문인지, 그저 발등만한 공간으로 돋
우어진 흙더미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위에 웅크리고 앉은 여
자는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있다. 살짝 들린 발뒤꿈치에 의해 여
자의 몸은 가까스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발뒤꿈치를 살짝 든 채, 여자는 활 시위 모양으로 몸을 한껏 웅
크리고 있다. 웅크린 여자의 몸 한가운데 감싸안기듯 피어 있는
꽃이 민들레인지 양지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자잘한 꽃잎
이 무리지어 모여 핀 노란꽃은 키가 작다. 봄의 가장 처음에, 가
장 척박한 땅에 피는 꽃은 대체로 꽃잎이 자잘한 노란 꽃이라고
한다. 민들레, 양지꽃, 씀바귀, 애기똥풀......
웅크리고 앉은 여자가 소녀인지 처녀인지, 아니면 그것을 모두
건너뛴 중년의 여인인지 알 수 없다. 소녀라면 아주 일찍 철이 들
어버린, 제딴에는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소녀일 것이다. 처
녀라면, 다 안다고 생각해 온 세상에 직접 나가본 후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웅크린 처녀일 것이다. 중년의
여인이라면, 그 나이에도 꽃 앞에서 감탄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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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녀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어른일 것이다.
화면의 위쪽 삼분의 일을 채우고 있는 공간은 푸르다. 그 푸른
공간이 여자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인지, 경사진 언덕 너머에 있
는 바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푸른 공간을 주
름지게 하는 일렁임이 너무 역동적이다. 그렇게 소용돌이치는 하
늘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바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막하
다. 한 척의 배도 한 점의 바위도 한 마리의 물새도 보이지 않는
다. 하물며, 파도소리조차 없지 않은가.
[언제 그린 거냐?]
[결혼 전, 아니 삼 년쯤 전에요]
대답하면서도 정말 자신이 그걸 그렸는지 의혹이 인다. 무얼 그
리고자 했던 것일까. 거대한 적요, 한 번 빠져들면 헤쳐나오기 힘
든 적막에 관한 이야기였을까. 간절한 기원, 누구의 마음속에나
하나씩 깃들어 있는 애달픈 소망에 대해서였을까. 어쩌면 그저 빈
공간에 대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어떤 사람도 없는 공간, 그 속에서 절대적
으로 비어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혹은 절대적으로 비어 있
는 공간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습이거나.
여인은 다시 한번 승주를 유심히 건너다보고는 생각난 듯 닭다
리 하나를 집어 건넨다. 승주는 닭다리를 받아들고 여인이 먹고
마시는 모습을 바라본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집에 보일러를 놓아
드린 아들, 첫월급으로 부모의 속옷을 사다드린 딸, 인삼 녹용을
가득 넣어 보약을 지어드린 자식들, 그들의 마음이 이럴 것이다.
승주는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음악 좀 틀어라]
승주는 전날 플레이어에 올려놓았던 레코드를 그대로 튼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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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여인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승주는
여인이 다시 한번 춤을 추었으면 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여인은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다. 음악이 약해지는 틈으로 창 밖의 음
들이 섞여든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오토바이 소리. 노래 한 곡
이 끝날 때까지 여인은 미동이 없다. 승주는 레코드 바늘을 음악
이 시작되는 곳으로 옮겨놓는다.
[너는 종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여인의 목소리가 깊고 무겁게 울린다. 오래도록 그 질문에 짓눌
려 왔을 것이다. 여전히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승주는 여인의 마
음을 제것처럼 이해한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 다리를 걸친 채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 스스로도 그런 자신에 대해 진저리를 내는
사람의 마음을.
[종교란,허약한 인간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위
안을 얻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승주는 자신의 말이 지나치다는 걸 안다. 그래서 형식만은 되도
록 겸손하게 하려고 애쓴다. 승주는 스스로를 겸손한 무신론자라
생각한다. 절에 가면 예불을 올리고 교회에 가면 기도한다. 신이
라는 존재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오래도록 믿고 의지
해 온 대상에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믿는다. 그것이 자
기 암시에 의한 일종의 최면이라고 해도. 이 어지럽고 무모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에서는 자기 최면도 괜찮은 지팡이가 될 수 있다.
[그럼 나는?]
여인이 턱을 조금 치켜들며 술잔을 든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킨다. 그 반문이 승주의 차가운 대답에 대한 반발이거나 질책
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정말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의혹만이 오롯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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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상의 가장 앞에 선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인은 다시 말이 없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생각난 듯 튀김닭
을 한 점 집어먹는다.
[그럼 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를 깎을
까,옷을 벗을까?]
질문을 하며 여인은 고개를 돌려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 속의
여자도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저만큼 머리가 길려면 꽤 많은 시
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망설이며, 이따금 열반을
생각하며, 두 길 사이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옳지
않다. 이 세상이나 승주가 보기에 옳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여인에
게 옳지 않다. 오래 지속되는 갈등은 건 살을 내리게 한다.
[옷을 벗으세요]
승주는 놀랄 만큼 냉정하고 단호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건 계속 머뭇거리기만 하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은
사람,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이
론..... 그런 모든 불분명하고 모호한 태도 때문에 이 세상에는
오해와 혼돈이 일어났을 것이다. 비속비승의 저 여인처럼, 아직도
이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승주 자신처럼.
[왜지?]
여인은 담담한 눈빛으로 승주를 건너다본다.
[출가한 지 십수 년이 지났을 텐데 아직 이토록 갈등이 많으시
다면 스님의 종교는 앞으로도 스님에게 어떠한 대답도 마련해 두
지 못할 거예요]
아니, 실은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다.종교가 무슨 대답을 해
주겠는가. 다만 구도자가 찾아야 할 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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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했다는 건 여인의 마음속에 그것을 찾을 눈이 없었다는 뜻
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나무관세음보살...... 교만한 것]
여인은 승주를 날카롭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인다. 승주는 지
청구를 듣자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끝난 음악을 다시 틀어놓고
건넌방으로 간다. 외출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입가에서 웃음이 대롱거린다. 오래도록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모
양이다. 나이 든 사람의 지청구, 그안에 깃들어 있는 애정이 뭉클
뭉클 느껴지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나보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자 여인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승주는 낮은 신음소리
를 듣는다. 얼굴도 찡그리고 있다. 승주는 여인의 얼굴을 살피며
몸이 어디 불편한 게 아닌가 묻는다.
[아니다, 이게 인생 이지. .....술 따라라]
취기가 오르는 모양이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목소리가 감겨든
다. 여인은 옷자락을 잡아뜯는다. 옷섶을, 옷자락을, 바짓자락을.
품이 큰 옷은 막 벗어낸 허물처럼 풀석거린다.
[갈아입을 편한 옷을 드릴까요?]
[큰일날 소리. 난 이 옷을 입어야 한다]
여인은 다시 가슴 앞자락을 잡아뜯는다. 옷이 불편한지, 가슴이
답답한지 알 수 없는 동작이다.
[그 청년..... 내 암자에 나타났던 청년..... 후리후리하게 마르
고 키가 큰 청년이었다. 꼭 어디선가 본 듯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청년이 암자 앞 바위에 앉아...... 날이 저물 때까지 거기 그러고
앉아......]
밤이 깊으면 세상이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모양이다. 적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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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 추운 곳, 습기가 많은 곳. 여인의 목소리도 점점 더 낮고 축축
해진다.
[이상하지. 꼭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휴일마다 등산복 차
림을 하고 산에 오는데, 늘 같은 바위에 앉아....... 그렇게 두 계
절이 지났다]
그 청년이 혹시 혈육이었나요? 승주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
는다. 여인은 승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눈을 똑바로 바라본
다. 푸른빛, 승주는 그 눈빛에서 푸른빛을 본다.
[일체 중생은 모든 과거에 서로 부모였다]
아. 승주는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삼킨다. 여인
은 일부러 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승주의 마음속에서 움
직이는 이런저런 무늬들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너는 떠나서 살아라. 종교적인 거고 국가적인 거, 사회적인 거,
윤리적인 거, 다 떠나서 살아. 나는 집안이 원래 그러니까 할 수
없었지. 우리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는 안 그래도
되잖아]
밤과 함께 낮은 곳으로 떨어져내리며 승주는 오한을 느낀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보일러 온도 조절 스위치를 조금 높여 놓는 것뿐
이다.다 떠나서 살아라.......
[내, 노래 하나 하마]
여인의 목소리가 문득 개운해져 있다. 승주는 열차에서 들었던
노래를 기억해 낸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이 부르는 단정한
가곡 그러나 여인은 승주의 예상을 뒤집는다. [황성 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음색도 창법도 열차에서 듣던 것과는
영 다르다. 악보를 보고 박자를 맞추어 노래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서만 부르는 노래. 감정은 끈끈하고 반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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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다.
승주는 입술을 문다. 목 안쪽이 위태롭게 떨린다 싶더니 몸 안
의 물기가 눈을 향해 밀려온다. 자꾸만 숨을 삼키며 목떨림을 진
정시키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거짓말처럼 여인의 눈꼬리에서 눈
물이 흐른다. 주둥이가 좁은 주전자에서 물이 쏟아지는 듯, 가늘
고 길게. 그럼에도 여인의 노래는 음정, 박자 모두 흔들림 없이
이어진다.
승주는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휘청, 몸이 흔들려
두손으로 벽을 짚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장실에 들어가자마
자 변기에 얼굴을 박고 속엣것을 올리고 만다. 변기의 물을 내리
고 찬물로 얼굴을 씻고 그리고 거울 앞에 선다. 낯빛이 핼쑥한
여자가 승주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도 그럴지도 모른다. 저 여인처럼, 아니 지금의 승주처럼
어디선가 이렇게 울음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선목을 끌어당
기면서.
승주는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한다. 한밤에 어머니의 방에 들어
갔을 때 어머니가 버선목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던 모습. 어머니는
늘 그렇게 힘들여 버선을 신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
중이었다. 버선을 다 신은 후에도 어머니가 계속해서 버선목을 잡
아당기고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알았다. 힘껏 깨물고 있는 입술, 훙건하게 젖어 있는 눈 주변, 미
세하게 떨리고 있는 온몸. 어머니는 계속해서 버선목을 끌어당기
면서, 소리를 안으로 삼키면서, 온몸을 덜덜 떨면서, 그러고 있었
다. 그날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후 술집으로 갔을 것이다. 술
을 마시고 돌아오면 다시 어머니를 때릴 것이었다. 한참만에야 승
주를 발견한 어머니는 승주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품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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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그 떨림과 축축한 습기와 끈끈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숭
주는 두려웠다. 어머니가 피리를 불 때처럼, 어머니의 피리소리가
먼 산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걸 지켜볼 때처럼.
[어휴,관세음보살....... 거기서 뭐 하냐?똥 누냐?]
노래를 끝냈는지 여인이 안방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승주는 대
답하지 않는다. 취기가 달아나면서 으슬으슬 추위가 몰려온다. 그
런데도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는다.
승주를 품에 안고 오열한 다음날, 어머니는 승주를 데리고 미장
원에 갔다. 승주는 흰 천으로 목 아래를 가린 채 높은 의자에 앉
아 거울 저편을 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빗겨주던 허리
까지 닿던 긴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것을. 의자에서 내
려오자 어머니는 승주의 손에 빗과 머리핀을 쥐어 주었다. [네 손
으로 빗어봐라] 승주는 오른손에 빗을 쥐고 머리를 빗었다. [이제
부터는 매일 아침마다 네 손으로 머리를 빗도록 해라. 그리고 이
핀을 꽂고] 어머니는 해바라기처럼 생긴 노란 머리핀을 내밀었다.
거울 속에서는 해바라기를 머리에 얹은 아이가 퀭한 눈으로 승주
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승주의 머리카락을 털실 두 뭉치와 바
꿔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똥을 왜 그리 오래 누냐? 똥이 안 나오냐? 겸손이 없으니 똥
이 안 나오지. 지혜가 없으니 똥이 안 나오는 거야]
여인의 고함소리가 더 커져 있다. 승주는 대답 없이 거울을 바
라보고 있다. 그날,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낯선 아이가
느새 저 거울 속에 있는 여자가 되었다니.
[내 노래 들으면 똥이 나올 거다. 그래도 안 나오면 니가 업
이 많아]
여인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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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색만 고요해.....] 고음이 안정되어 있는 소리는 다시 들어도
정규 성악교육을 받은 게 분명하다. 젓가락이 상 위에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섞인다.
닷새 동안 어머니는 두 벌의 스웨터를 떴다. 간간이 승주를 불
러 세워 팔 길이를 대어보고 앞판을 맞춰보곤 했다. 그때마다 승
주는 어머니가 피리소리를 낼 때처럼 불안해했다. 가늘고 긴 털실
이 두툼하고 폭신폭신한 스웨터로 변하고 나면....... 그리고 어느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머리맡에 두 벌의 스웨터가 있었다. 그날
아침의 적막, 햇살과 공기가 온몸의 숨구멍을 일시에 틀어막는 듯
하던 그 적막을 승주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헉헉 가쁜 숨을 내
쉬며 울지도 못한 채 집 안의 모든 문들을 열어보고 다니던 아침.
[무슨 놈의 똥자루를 그렇게 길게 만들어, 여자가. 그만 자르고
나와]
일 절이 끝나고 이 절을 시작하게 전에, 여인은 마치 추임새를
넣듯 다시 승주에게 소리친다. 거울 속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띤다.
[하늘 소리 못 알아듣니? 땅 소리도 못 알아들어? 내 말은 못
알아 들을 게 없어. 똥자루 딱 잘라놓고 나와. 네가 내 말을 알아
들을 때까지 내 기다리마]
승주는 다시 한번 찬물로 얼굴을 헹군다. 여인은 승주가 운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똥자루를 딱 자르고 나오라는 말은 그만 눈물을
그치라는 말일 것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몇차례 심호흡을 하고
승주는 천천히 화장실을 나선다.
[너 이리 와. 이리 와서 나한테 수계 받아라]
수계? 승주가 엉거주춤한 태도로 바라보고만 있자 여인은 오른
손을 들어 승주에게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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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가까이 와봐]
승주는 여인이 손짓하는 쪽으로 가까이 간다. 여인은 들고 있던
오른손으로 승주의 이마에 알밤을 먹인다. 매운 손길이다.
[이게 수계다. 여자는 그렇게, 똥자루를 길게 하는 게, 아니다.
알아듣니?]
세 문장을 말하면서 다섯 번을 쉬고 그럴 때마다 승주의 머리
로 알밤을 날린다. 금세 얼얼해지는 이마를 문지르며 승주는 웃는
다. 여인도 웃는다. 휑한 방 안을 이리저리 휘젓던 웃음이 어색하
게 사그라든다. 그 뒤에 슬그머니 차오르는 고요
[넌 내가 왜 틀니를 했는지 아니?]
밤이 많이 깊은 모양이다. 이제 창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는다. 아주 먼 곳을 달리는 자동차소리가 끊일 듯 이어지곤
한다.
[이빨을 뽑고 술을 마시면 죽을 수 있다기에 치과에 갔다. 이빨
을 몽땅 뽑아달라고 했더니 의사가 겁을 먹더라. 내 이빨 내가 뽑
겠다는데 왜? 의사는 겁이 났던지 세 개를 남겨놓았어]
승주는 또 여인에게 시선이 간다. 입 양편으로 괄호처럼 패인
주름이 선명하다. 저 안에 물고 있을 틀니.
[사흘 동안 술을 마셨다. 입 안의 피를 계속 뱉어내면서, 그만
하면 죽겠다 싶었다.목숨이라는 거....... 관세음보살......]
아픔이, 연민이, 공포가...... 승주는 되도록 그런 감정들에 횝싸
이지 않도록 애쓴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런 속설을 고스란히 믿은
순진함도 치과의사가 질려 했을 고집도 죽음에 대한 그토록 집
요한 집착도, 그 일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냉소적 허무주의도
모두 믿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그 모든
행위들이 실은 삶에 대한 징그러운 애착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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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니? 이 어리석은 중생아]
여인의 몸이 비스듬히 기운다. 눈꺼풀이 거의 내려덮이고 팔다
리의 힘도 풀리고 있다. 그러나 몸이 삼십도 정도 기울어지자 튕
기듯 상체를 곧추세운다. 어디선가 세찬 죽비소리라도 들린 듯하
다. 승주도 여인을 따라 상체를 꼿꼿이 편다. 어깨며 허리께가 뻐
근하게 아파 온다.
[너는 지금 내가 불쌍해 보여서 옷을 벗으라고 말하는 모양이
다만,나는 안 벗는다.내가 어떻게 중이 됐는데......]
말을 마친 후 여인은 기어이 쓰러지듯 모로 몸을 뉜다. 어떻게
중이 됐는데....... 여인의 얇은 어깨,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바라보며 승주는 그 말뜻을 생각한다. 무슨 뜻일까. 얼마나 어렵
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흑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
로....... 대체 어떤 마음으로 중이 되었다는 것일까. 어쩌면 그 모
든 마음들이 다 섞여 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희생을 치렀
지만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무세요?]
승주는 숨결을 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여인의 좁은 어깨
를 가만히 흔든다.
[아니다, 와선중이다]
여인은 몸을 움찔하더니 조금도 잠 기운이 묻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나 셋을 셀 시간도 지나지 않아 쌔액쌔액 잠에 빠
진 숨소리를 낸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흘려보낸다 해도 인생
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십, 혹은 오십이 되어도 뜨거운
열망, 응어리진 욕망, 부질없는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결코 도통하거나 달관하지 못할 것이다. 긴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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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흩뜨리고 잠든 여인의 후줄근한 승복, 미간에 모인 두 줄 세로
주름 모로 누운 몸에서 느껴지는 얇은 부피감, 한 손으로도 간단
히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중량감, 그것들을 보며 승주
는 깨닫는다. 삶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편 언덕에 있는 것이 아
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긴 머리에 승복을 입고 혹
은 삭발의 머리에 색동옷을 입고.
승주는 담요를 가져다 여인의 어깨를 덮어준다. 그 옆에 여인과
비슷한 자세로 누워 여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본다. 어린 시절, 어
머니의 장독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느낌이 되살아난다. 된장과
고추장 옆에, 간장과 막장 사이에 몸을 꼭 붙이고 앉아 있던 날
들. 오래도록 발효되고 있는 그것들처럼 안에서 무엇인가가 삭아
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살아 있어. 간장과 된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간장독과 된장독이 숨을 쉬는 것처럼, 나도 숨을 쉬고 있
어...... 생각하며 승주는 잠속으로 빠져든다.그러면서 본다.
사내는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몇번이나 뒤돌아보며 마을을
벗어난다. 그가 몸을 돌릴 때마다 등에 얹힌 지게가 너풀너풀 허
공에서 흔들린다. 어둠속에 낮게 엎드린 마을은 잠들어 있다. 이제
막 깊은 잠에 빠져든 건지, 깊은 잠을 거의 건넌 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방은 완전히 어둡고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어둠속에서도 사내는 익숙하게 길을 잡는다. 마을 어귀에서 신
작로로 나가는 길을 버리고 산으로 접어들면서 사내는 마지막으
로 한 번 더 마을을 돌아본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
누가 보았다 해도 이쪽의 얼굴이나 등짐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산길로 접어든 사내는 얼마 가지 않아 산길도 버리고 이번에는
숲으로 들어선다. 숲으로 들어서자 걸음이 느려진다. 눈앞을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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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잔가지들을 치우며, 푹푹 빠지는 발 밑을 경계하며 자꾸만
홀러내리는 지게를 추스르며 사내는 힘들여 걸음을 옮긴다. 사내
의 기척에 놀란 산새가 잠결에 푸르르 날아오르고 나뭇가지 위의
청설모는 눈을 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가지로 옮아간다.
사내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앞으
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한참 지나자 작은 공
터가 나온다. 누군가 일부러 다듬어 놓기라도 한 듯 둥근 평지에
오래 된 낙엽이 깔려 반들거린다. 사내는 그곳에 멈춰 다시 사방
을 둘러보고 조심스레 지게를 내려놓는다. 지게에 가로로 걸쳐놓
은 삽을 꺼내들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하늘이 푸르다. 어둠
속에서도 하늘빛이 그토록 푸르다는 걸 사내는 처음으로 본 듯
오래도록 하늘을 보고 있다. 넋을 놓은 채. 어쩌면 사내는 속맘으
로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존재가 있다면 이 일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하늘
은 푸른 눈을 한 채 고요하고 산은 말이 없다. 이따금 오래된 삭
정이가 제풀에 부러져 내리는 소리가 들릴 뿐.
사내는 다시 정신을 수습한 듯 삽을 움켜쥔다. 사내가 공터의 북
쪽 나무 밑을 파기 시작할 때 어디선가 길게 부엉이가 운다. 사내
는 맨 위의 낙엽을 걷어내고 그 밑의 검은 부엽토를 걷어내고 그
아래 붉은 흙이 나오자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한다. 오른발로 삽
등을 찍어누르고 두 손으로 삽을 들어올리고. 사내의 이마에서는
머리카락이 너풀거리고 그 밑으로 굵은 땀방울이 떨어져내린다.
방석만한 넓이의 땅이 무릎 깊이만큼 파지자 사내는 삽질을 멈
준다. 그러나 쉬거나 망설이지 않고 삽을 붉은 흙더미에 꽂아둔 채
지게가 있는 쪽으로 간다. 둘둘 말린 거적때기를 안고 구덩이로 돌
아와 그것을 안은 채 잠시 구덩이 안을 들여다본다. 구덩이 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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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둡고 추워 보인다. 사내가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구덩이는 점점 더 크게 입을 벌린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입을
벌린다. 사내는 멈칫 뒷걸음치며 안고 있던 거적때기를 구덩이 속
으로 밀어넣는다. 몸에 달라붙는 나쁜 기운을 떨치기라도 하듯.
사내는 삽을 들고 허접지겁 흙을 덮기 시작한다. 나쁜 기운을
누르듯, 목숨을 위협하는 생명체와 대결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
구덩이를 메운다. 마지막으로 검은 부엽토를 덮고 마른 낙엽까지
덮는다. 구덩이도 거적때기도 흔적이 없다.
사내는 다시 삽을 지게에 올리고 지게를 등에 메고 올라온 길
을 되짚어 내려간다. 올라올 때보다 내려가는 걸음이 더 헛헛하
다. 얼마가지 않아 사내는 지게를 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다. 아까보다 더 많은 산새들이 날아오르고 더 많은 바람이 밀려
와 파도소리를 낸다. 으허...... 으허...... 산새소리, 바람소리에 낯
선 소리가 섞여든다 두 다리를 뻗은 채, 두 손을 놓은 채, 그렇게
주질러앉은 사내가 소리를 내고 있다. 으흐흐흐...... 심장이 찢겨
너풀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어떤 생물이
내는 소리 같기도 하다. 깊은 구덩이 속에서 퍼올리는 소리 같기
도 하고 여러 세기를 휘돌아 아주 멀리서 오는 소리 같기도 하
다. 문득 산이 고요해진다. 산새들도, 수풀도, 바람도, 숨을 죽인
채 사내의 소리를 듣고 있다.
으허...... 으흐흐흐......
승주는 사내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몸을 뒤척인다. 저 필름을 평
소에는 어디에 보관하는 걸까. 꿈에서도 승주는 그 꿈이 궁금하
다. 대체 기억의 어느 창고에 보관되어 있기에 이토록 자주 되풀
이되는가. 승주는 그 꿈의 뒤끝에 늘 사내처럼 으허.....으허....
그런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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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발버둥친다. 이제 그만 그 꿈에서 놓여나고 싶다. 심장
이 오그라붙고 온몸의 세포가 오소소 긴장하는 꿈, 아무런 암시도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 주지 않는 꿈.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
뒤척이는 승주의 이마에 어떤 물체가 닿는다. 물체는 이마를 짚
고 있다가 가만히 땀을 닦아낸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
는다. 다만 어떤 손길만이 느껴질 뿐이다. 이마를 짚어보고 가슴
까지 이불을 여며주고 이불 위에서 가슴을 토닥여주는 손. 손길
은 심장의 박동과 같은 속도로 가슴을 토닥인다. 아직 세상에 태
어나기 전에 어둠속에 웅크리고 들었던 소리, 승주는 태아처럼 몸
을 구부린 채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을 들으며 다시 잠든
다. 잠들면서 생각한다. 이상하다. 꿈이 평소보다 더 길어졌어. 이
손길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적당한 수준을 알아 균형을 잘 잡으며 살까.
시작할 때와 끝낼 때, 도움을 줄 때와 그것을 거둬들일 때, 타인
을 비난할 때와 자신을 비난할 때, 어떻게 그 때들을 적절히 알아
낼까. 승주는 골목 입구로 들어서며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멀어 보인다고 느낀다. 아주 먼 길을 여행한 사람처럼 걸
음이 무겁다.
왜 거절하지 못하는가. 이젠 그만 가주세요. 승주는 그 말을 하
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지쳐 있다. 차라리 소비자 보호원에 불량
품을 신고하고, 마을 앞에서 확성기를 트는 공공기관에 항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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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가로등을 더 밝혀달라고 구청에 진정하는 일이라면 잘 할
수 있다. 조목조목 따지며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불편한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여인에게는
안 되는가. 하나는 공적인 일이고 하나는 사적인 일이어서? 하나
는 시민의식을 발휘하는 거지만 하나는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거
여서? 하나는 불특정 개인인 단체를 향해서이고 하나는 특정한
개인을 향해서이기 때문에? 불특정 개인은 상처받을 일이 없지만
특정한 개인은 상처받기 쉬우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승주
는 늘 더 나아가지 못한다. 도움을 줄 때와 거둬들일 때를 판단하
지 못하고 자신을 비난할 때와 타인을 비난할 때를 분간하지 못
하듯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승주는
지레 움츠리는 자신을 안다.
왜 거절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왜 끝
까지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조금 더 지속적인 인내와
사랑으로 여인을 대할 수는 없는가. 그 여인이 정말 어머니라면?
그런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진다.
오늘이 꼭 열흘째다. 그 여인이 승주의 집에서 묵기 시작한 날
로부터. 승주는 어떻게 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여인이 장기체류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짐작할 수 있다.
그날 아침부터였을 것이다. 꿈 속에 크고 투박한 손이 나타나 어
깨를 덮어주고 가슴을 토닥여 주던 밤, 그 다음 아침부터였다.
잠에서 깨었을 때, 승주는 꿈에서처럼 담요를 덮고 있지는 않았
다. 그러나 잠깨기 전까지도 내내 포근한 양털 이불에 감싸여 있
는 듯한 따스함을 느꼈고 무엇보다 많이 평화로웠다. 여인도 담요
를 덮고 있지는 않았다. 전날 승주가 여인에게 덮어 주었던 담요
는 승주와 여인의 중간쯤에서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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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는 꿈에서 느꼈던 손의 평화로움을 되새기며 흩어진 술상
을 치우고 아침을 지었다. 그 손이 꼭 여인의 손이 아니었다고 한
들 어떻겠는가. 증요한 것은 지금 가슴에서 막 피돌기가 시작되었
다는 것이고 그 피돌기의 힘으로 현실의 모든 문제를 잘 헤쳐나
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제 여인이 떠나고
나면 집과 작업실을 정리하고 그와의 문제도 어떻게든 결론을 내
리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리라. 무엇이든간에.
승주는 상을 다 차린 다음 여인을 깨웠다. 여인은 몇차례 짜증
을 내더니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전날의 흥분이나 격정은 다
가라앉아 차분하고 서늘한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승주가 아침상
을 차려가지고 가자 여인은 승주의 얼굴과 밥상을 번갈아 바라보
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다고 지금은 짐작한다. 여인의 체류가 길어지
게 된 것이. 여인도 다 알았을 것이다. 승주가 여인의 존재를 크
고 따뜻한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승주가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그 두 가지 사실이 혹시 인과관계를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승주의 변화가 여인의 장기체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게
아닐까. 아니, 처음부터 여인은 승주에게서 그런 걸 원했던 게 아
닐까.
승주는 자신의 창문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춘다. 그런 생각은
너무 쓸쓸하다. 인간과 인간 관계, 아무런 이해관계도 계약관계도
아닌 인간의 관계조차 그런 자잘한 손익계산에 의해 이루어진다
면 너무 각박하다. 승주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귀가를 서두르는
젊은 가장이 승주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이제는 창이 창으로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혼돈, 혹은 미궁으로 보인다. 천천히 걸음
을 옮겨놓으며 승주는 이 혼돈이 고스란히 그 여인에게서만 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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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인가 짚어본다.
열흘 동안, 승주는 아침마다 여인의 식사를 챙기고 저녁마다 여
인의 술상을 보았다. 여인의 술주정을 참아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술을 놓고 여인과 실랑이하는 일이다. [술 가져오너라] 처음
에는 승주도 술을 조금만 드시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인은 목소
리를 높여 소리쳤다. [가져오라면 가져와! 이건 명령이야!]
여인은 술이 막 취하기 시작하는 때는 노래를 부른다. 레퍼토리
는 끝이 없어 나중에는 중국어 노래, 일본어 노래, 영어 노래까지
부른다. 승주는 그저, 일제시대에 태어나 만주를 떠돌고 신식 여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인텔리 신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
며 여인의 노래를 듣는다.
어느 정도 취했을 때는 춤을 춘다. 첫날 밤 승주의 등골을 서늘
하게 했던 춤, 그 춤을 반복한다. 때로 승주에게 같이 추자고 한
다. 억지로 승주를 일으켜세울 때의 완력은 맨정신으로는 당할 수
가 없다. 여인은 승주의 어깨를 끌어안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승주는 배에 와닿는 여인의 배를 느끼며 몸을 움츠리고 서 있는
다. [시시한 것, 춤도 제대로 못 추고] 여인이 승주의 어깨를 밀어
낼 때까지.
춤을 추지 못할 만큼 술이 취하면 여인은 힝설수설 이야기를
풀어낸다.
[네가 보는 건 다 바깥이다. 넌 한 번이라도 너의 내부를 들여
다본 적이 있니? 너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니?]
'난 간다. 북쪽으로 갈란다. 장영실, 그 사람 찾아 난 간다. 여기
서 의정부 가는 길이 어디냐? 상계동이나 수유리가 어디냐?]
[어디 아프니? 아픈 거, 그거 괜찮은 거다. 아프다는 걸 알 때는
아직 병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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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심오한 뜻이 있는 말들로 들렸던 그 말들도 이제 더
는 승주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저 귓등으로 흘리며 앉아 있
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쓰러져 잠들기 직전에는 늘 다음날 해장국을 주문
한다. [얼큰한 고추장 찌개를 끓여라. 돼지고기 듬뿍 넣고] 혹은
[담백한 무국을 끓여라. 무를 참기름에 살짝 볶아서]
승주는 나흘째 되는 날부터 여인의 알코올 중독을 의심하기 시
작했다. 저녁에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활력이 넘치고 호기롭
다.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목소리도 탄력 있고 언변도 매끄럽
다. 그러나 아침에 술에서 깨어날 때면 제풀에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처럼 초라하고 시들한 모습이다. 말이 없고 은밀히 승주의 눈
치를 살피는 기색이다. 승주는 그 변화가 다만 취중과 맨정신의
차이, 해의 기운과 달의 기운의 차이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그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처음
에 승주를 감동시켰던 춤, 긴장시켰던 노래와 눈물, 고개를 주억
이게 했던 말들이 그저 범상한 일상이 되었다. 아니 범상한 일상
이 아니라 일상보다 못한 술버릇처럼 보일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짐작했을 그때가 여인에게
떠나달라고 말해야 하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주는 다르
게 생각했다. 혈육이란 바로 이럴 것이라고. 지긋지긋하지만 떨칠
수 없고 진절머리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런 관계일 거라고. 그
러므로 승주는 인정한다.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여인을 잡
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칼날을 위로 보게 꽂으면 안 된
다는 것, 목숨 가진 것은 함부로 다루는 게 아니라는 것, 여자는
똥자루가 짧아야 한다는 것, 그런저런 잔소리들을 기꺼운 마음으
로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기꺼움의 밑바닥에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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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삶의 온기이며 지혜라 여기고 있었
다는 사실을.
그 동안에도 그는 하루에 한 차례씩 전화를 걸어 여인의 안부
를 물었다. 승주의 거취가 아니라 여인의 거취를.
[아직도 안 갔어?]
승주는 그렇다는 대답 이외에는 늘 할 말이 없다. 한숨 돌릴 틈
도 없이 그는 밀어붙이곤 한다.
[그 사람이 당신 부모야, 친척이야? 왜 그런 의무를 떠맡는 거
야? 안 되겠어. 내가 가서 해결해야겠어]
[이건 내 문제예요. 내가 해결할 내 문제라구요]
수화기를 힘주어 잡으며 반발할 때, 그때마다 승주는 깨닫는다.
내가 아직도 그 여인을 옹호하고 있구나. 그 여인을 세상으로부
터, 세상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하는구나.
[내 문제이기도 해. 당신이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나도 거취를
정할 거 아냐]
거취를 정하다니. 승주는 그 말이 주는 거래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이거 팔 겁니까, 아닙니까. 비매품이라면 차선의 다른 물건
이라도 구입해야 하니 빨리 결정하세요] 상인에게 흥정하는 말투
다. 그럴 때마다 차라리 여인이 더 가깝게 여겨진다.
일 주일쫌 지나자 그는 인내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평소보다 더 크고 더 빠른 목소리로 이야
기했다.
[이건 당신의 결함이야. 당신에게는 분명히 정신적 정서적 결
함이 있어]
승주는 심장에서 시작된 자잘한 떨림이 파도처럼 손끝 발끝으
로 밀려가는 것을 느꼈다. 수화기를 잡지 않은 손으로 팔을 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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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있어야 했다.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고 해서 다 당신처
럼 행동하는 건 아니야. 어머니 없이 자란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엉뚱한 사람을 어머니로 모시고 싶어하는 건 아니라구]
승주는 쥐고 있던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승주가 놀랐던 것
은 그가 그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이 아니다. 누구의 눈에나 승주
의 문제는 어머니 부재, 어린 시절의 애정결핍에 원인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승주는 그렇게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설명
할 수 없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나미브 사막에는
해뜨기 전부터 주둥이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를 들어을린 자세로
한나절을 꼼짝 않고 있는 생물이 있다. 그 생물은 바다에서 밀려
오는 새벽 안개가 몸에 닿아 수분이 되고, 그 물기가 몸을 타고
미끄러져 주둥이에 모일 때까지 한나절을 그렇게 꼼짝없이 서 있
기만 한다. 주둥이에 작은 비누방울만한 물방울이 모이면 그걸 훌
쩍 들이마시기 위해. 그는 모를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
해 인생의 반을 부동자세로 지내야 하는 생물도 있다는 것을, 늘
그 만큼의 물밖에 얻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생물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오늘, 승주는 그에게 전화했다. [만나서 얘기해요. 어떻
게든 결단을 내려야겠어요. 방법을 의논하고 싶어요] 그는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재빨리 작업실에 도착했다. 승주는 그의
순발력이 그의 사랑의 척도라고 믿을 뻔했다.
[당신 말대로 내게 결함이 있는 게 분명해요. 왜 끝까지 그 여
인을 사랑과 인내로 대하지 못할까요. 아무래도 내겐 사랑이 부족
한 모양이에요. 당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덧붙인다. 그 여인에 대한 거부감, 그것을 참아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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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들 때문에 지치고 있다고 밥상을 차리거나 설거지하는 소리
가 평소보다 서너 배쯤 커져 있다고 어제저녁에는 결국 유리그릇
을 하나 깨뜨렸고 오늘 아침에는 싱크대에서 미끄러져내린 칼에
발등을 찍혔다고. 피 흐르는 발등을 감싸쥐고 앉아 내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헛헛하게 웃는다. 다시 승주를 바라보고는 더 크게 웃는다 승주
는 그의 웃음을 감수하기로 한다.
[사랑이 부족한 것 말고도 또 다른 장애가 있어요.왜 거절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까요? 그 여인이 상처받을 생각을 하면 차라리
내가 힘들고 말지, 그런 마음이 생겨요. 그것도 일종의 결함일 거
예요]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낸다. 천천히 담배를 물고 천천
히 라이터를 켜고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백미터 달리기 선
수답지 않은 행동이다.
[이리 와. 진정으로 도움을 원한다면 내 말 잘 들어]
그는 지프차 뒷좌석에 올라타 승주에게 맞은편 자리를 가리킨
다. 승주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한다.
[당신의 문제는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거절하지 못한다는 게 아
니야. 끝까지 그 여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구. 알겠어?]
승주는 고개를 젓는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그는 깊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다시 뱉는다. 좁은 차 안이 담배연기로 가득
해진다.
[당신의 문제는 그 사건의 처음에 있는 거야.보통의 상식을 가
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열차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여자를 불쑥 집
으로 데려오지 않아. 술상을 차려오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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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틀쯤 지난 다음에는 떠나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할 거야. 무
슨 말인지 알겠어?]
그는 힘주어 또박또박 말한다 그의 무릎이 승주의 무릎에 닿을
때마다 승주는 그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일만 하지. 당신이 잡아주지 않아도 길가
에 서 있는 노인은 택시를 잡을 수 있고 당신이 들어주지 않아도
보따리를 든 여인은 자신이 들 수 있는 만큼만 보따리를 들고 나
온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택시를 잡는 노인은 택시를 잡을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외출을 시작한 거라구]
그렇겠지.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냥 지나치는가 승주는 이야
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반발한다. 그
게 왜 문제인가.
[그래도 추운 날이었어요. 비가 오고 있었구요]
[바로 그런 마음이 당신의 문제야. 추운 날이었다면 노인은 외
출하기 전에 분명 속옷을 껴입고 옷차림을 든든하게 했을 거야.
당신은 왜 세상 모든 구멍난 지붕들을 당신이 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바로 그게 당신의 결함이야. 알아들어?]
승주는 알아들을 수 없다. 결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기
질, 그저 성격의 한 부분이라 믿었던 것이 결함이라니. 그럼에도
승주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결함이라면 아마 영영 고칠 수 없
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들은 게 아니야. 그게 왜 결함인지
납득하지 못하지. 당신의 그런 성격이 타인을 의존적으로 만들고
결국 자신을 괴롭히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야. 적절한 선,
적절한 시기에 그런 감정을 통제할 줄 모르기 때문에 결함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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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승주는 결국 그의 말에 승복했다. 적절한 선, 적절한 통제력, 승
주에겐 그게 없었다는 것을. 승주가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그는
잠시 틈을 두었다 덧붙인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야. 두 번의 유산 역시
당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거지. 당신이 일부러 지붕에 구멍을 낸
게 아니듯 당신 혼자 그 지붕을 수선해야 하는 것도 아니야]
골목을 걸으면서 승주는 한 가지만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어떻
게 적절한 선을 찾아내는가. 들어주어야 하는 가방과 그냥 지나쳐
야 하는 가방, 택시를 잡아드려야 하는 노인과 그냥 지나쳐야 하
는 노인, 수선을 해야 할 지붕의 구멍과 그저 못 본 체 넘어가야
하는 구멍, 그것들을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그런 것도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건지.
그러면서도 승주는 집 앞 상점에서 맥주와 오징어포를 산다. 여
인은 분명 술을 내놓으라 소리지를 테고 승주는 여인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대문을 열면서도 계단을 오르면서도 승주는 다시
한번 자신의 결함을 분명하게 느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
렇게 미리 술을 사들고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술을 사러
나오는 일이 있더라도 한 번쯤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여인과 마
주 고함을 지를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승주는 손에 든 맥
주를 버리지 못한다.
오늘은 얘기하자. 함께 술을 마시며, 그만 떠나 달라고. 여인의
눈을 마주보며 정당하게 요구하자.
승주는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연다. 한눈에 들어오는 실내는
무언가 달라져 있다. 싱크대도, 안방도, 안방에서 걸어나오는 여인
도 모두 그대로인데 무언가 달라져 보인다. 무얼까 생각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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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린다. 여인의 옷차림이 달라져 있다. 승복 대신 병아리색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다.
[네 옷 좀 입었다. 내 옷 빠느라고]
여인은 티셔츠 앞자락을 들어보인다. 아니 옷차림만이 아니다.
표정도 목소리도 달라져 있다. 고집스럽고 괴팍했던 분위기가 사
라지고 그 뒤에 있던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나타난 것 같다.
[객손이 빨래할 때는, 떠난다는 뜻이다]
승주는 문간에 멈추어선다. 그러고 보니 빨래걸이에 여인의 옷
들이 널려 있다. 양말, 바랑까지. 허깨비처럼 그것들이 펄럭펄럭
움직인다.
알 수 없다. 승주는 왜 갑자기 죄책감이 이는지 알 수 없다. 오
늘,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리라 다짐한 마음을 고스란히 들킨 것
같다. 이렇게 결국은 떠날 사람을 그 사이를 못 참아 혼자 난리를
쳤는가 싶다. 이런 마음에 대해서도 그는 지적할까. 그것도 너의
결함이라고. 승주는 들고 온 맥주를 엉거주춤 내려놓는다. 맥주병
을 보면서도 여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알코을 중독을 의심
했던 사실까지 죄스러워진다.
[너 오면 보고 가려고 기다렸다. 이제 떠나마]
말을 마친 후 여인은 빨래 건조대에 널어 두었던 바랑을 걷는
다. 승주는 그 바랑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구석구석, 솔기가 접히
는 부분까지 잘 말랐는지. 만약 조금이라도 덜 마른 곳이 있다면
그것을 내보이며, 이게 마르거든 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
진다.
여인은 바랑의 모양을 가지런히 하더니 한켠에 쌓아두었던 물
건을 그 안에 담는다. 비닐봉지에 든 물수건, 검은색 빗, 염주 하
나, 한지 가장자리가 나달거리는 얇은 책, 그리고 바랑과 같은 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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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 승주는 그것들의 부피가 너무 작아 가
슴이 홀쭉해진다. 그토록 힘들어했으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 허전함은 무얼까.
[어디로 가실 거예요?]
[그건 알아서 뭐 하니. 바람도 비도 가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
[날이 저물었어요.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떠나세요]
여인은 대답 없이 빨래 건조대의 승복을 걷어 꼼꼼히 주름을
펴고 솔기를 매만진다. 입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두 겹 옷의
안쪽이 많이 기워져 있다. 무언가, 가슴 근처에서 간질간질한 기
운이 올라온다.
[지금 나가면 차도 없을 거예요. 곧 고속버스도 다 끊길 텐데]
여인이 떠나기를 바랐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이렇게 한
밤에 이렇게 훙두깨처럼, 이렇게 마음을 서늘하게 하면서는 아니
다. 승주는 여인 곁에 서서 줄곧 여인의 손길을 지켜보고만 있다.
[미안해하지 마라. 네가 내게 미안해할 게 뭐 있니. 내가 네 집
에서 열흘 묵었다. 그것만 기억해]
[그럼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금방 상 차려드릴게요]
무얼까. 승주는 목에서 뜨거운 기운이 넘어온다.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마음에 남은 이 찌꺼기를 또 어떻게 혼자 삼키는가.
그러나 여인은 옷을 갈아입을 참인 듯 짐을 모두 꾸려들고 안방
으로 들어간다. 승주는 마루에 멍하니 서 있는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승주는 또 버릇처럼 어머니를 떠올린
다. 일시적인 갈등과 그것의 극복, 또 다른 갈등과 또 다른 극
복...... 그러다가 문득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났을지도 모른다.승
주가 잠든 어느날 밤에 그리고 그로부터 또 팔 년 후에.
승주는 그런 걸 배운 일이 있다. 중학교 삼학년 때, 얼굴이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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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손가락이 긴 도덕 선생님은 아가페라는 단어 뒤에 콜론을 찍
고 이렇게 썼다. 절대자에 대한 사랑. 흑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
하는 사랑. 그 도덕 시간에는 유난히 창으로 빛이 많이 쏟아져 들
어왔다. 빛은 청록색 칠판 위에 반사되어 칠판의 글씨가 희끗희끗
하게 보이다 말았다 했다. 칠판의 설명을 공책에 옮겨 적으며 승
주는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도덕선생님은 커튼을 내려 빛
을 막아주며 승주를 바라보았고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승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승주는 아가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혹은 모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빛이 많이
쏟아져 들어오던 중학교 시절 5교시 도덕시간을 기억한다.
아니다. 그 5교시를 기억하는 것은, 그날 하교 이후의 일을 기
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햇빛이 많이 쏟아지는 운동장을 지날 때까
지 승주는 아가페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햇빛 속에서 궁글리면 달
콤한 과자 냄새가 날 것도 같고 먼 나라의 바람 향기가 묻어날
것도 같은 말. 교문 가까이 와서야 길 건너 가로수 밑에 서 있는
여인을 보았다.
이제는 한복을 입고 있지 않은 어머니, 이제는 머리를 위로 올
려 쪽찌지 않은 어머니, 이제는 피리소리를 내지 않는 어머니. 승
주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렇게 승주의
하교길에 서 있곤 했다. 승주의 옷차림을 살펴보고, 공부 열심히
하는지를 묻고, 떨리는 손길로 볼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옷가지
나 동화책 용돈을 안겨주고 떠났다. 어머니가 승주에게 다가왔다.
빵집에 들어가서도 승주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때는 사춘기였다. 모든일에 대해, 모든 사물에 대해, 모든 사람
에 대해 무차별로 반항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던 때였다.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그런데 널 보니, 말하지 않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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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을 것 같구나]
그제야 승주는 눈을 똑바로 뜨고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란 없어요.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모든 잘못은 내게 있었다]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는 먼 곳에 있었다. 외항선을 타고 나
가 일 년에 한두 차례 집에 들를 뿐이었다. 할머니는 이따금 아버
지가 보낸 소포를 받을 때마다 [이 불효 막급한......]이라 중얼거
렸다. 승주는 그런 말을 어머니에게 하지 않았다.
[이런 얘기, 네가 더 큰 다음에 하려 했는데..... 하지만 다시는
너와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빵집, 햇빛을 받는 빵들이 둥글게 둥글
게 부풀어오르는 것 같은 환각 속에서 승주는 어머니의 말을 들
었다. 낮은 목소리, 붓꽃 피리 소리처럼 아주 멀리 퍼져나가는 듯
한 목소리.
외할아버지는 언청이였다고 한다. 그 결함은 격세유전이어서,
어머니 대에는 모두 정상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가 낳은 아
이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첫 출산을 했을 때, 출산의 고통에서 한
숨 돌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핏덩어리를 거적에 말아가지고 산으
로 올라갔다. 미역국을 먹으면서, 어머니는 아이를 어쨌느냐고 물
어보지도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가 사산을 했다고 믿었다.
붓꽃이 화득화득 피어나는 한여름이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을 때는 부부가 함께 먼 곳으로 갔다. 마을에
서 멀리 떨어진 곳에 움막을 짓고, 거적때기 위에서 출산을 했다
두 번째 아이도 얼마든지 첫번째 아이처럼 할 수 있다는 공범
의식을 나누어 안은 채. 언청이였던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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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는 그 고통과 그 불편, 그 눈물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아이를 산에 묻은 다음부터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타하
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릴 권리가 있는 사람 같아서,
어머니는 맞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주 역시 움
막 속 거적때기 위에서 태어났다. 다행이 승주는 정상이었지만 그
렇다고 아버지의 손버릇이 고쳐진 건 아니었다. 공범자들이 대체
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상대가 잊고 싶은 죄의식
을 자꾸만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분노와
구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죄의식을 견디지 못했을 뿐
이라고. 아버지는 아이를 어디에 묻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넌 이것만 알아둬라. 격세유전이라니까 네 자식 중에는 그런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네 손주 대에는 혹 나올지 모르지
만, 그건 또 여성 염색체를 통해서만 유전된다니까 딸을 낳지 않
으면 될 거다. 아들 하나만, 요즈음은 다들 하나만 낳지 않니, 아
들 하나만 낳아서 키우면 괜찮을 거야]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승주도 담담한 마음으로 그 얘기를
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 물처럼. 그러나
그 물이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이 홀렀던 걸까. 아무 이유 없이 두
번이나 태아가 죽어버릴 정도로. [혹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것
아닙니까?] [당신, 내게 무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그들이 옳았다.
그때 승주는 오히려 다른 데 더 마음이 쓰였다. 다시는 너와 얘
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말.
[어디로 가세요?]
승주는 그제야 어머니께 질문했다. 어머니는 식탁 너머로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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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 승주의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매만졌다. 눈앞에서 손길이 미
세하게 떨렸다.
[아주 멀리]
[멀리 어디......?]
[가서 편지하마]
어머니가 편지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승주는 편지를
받은 일이 없다. 어머니가 정말 먼 나라로 떠났는지, 아니면 이
땅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도 저도 아니고, 이 세상의 지붕 밑 어
디에도 없는 건지. 그날 이후 승주는 어머니에 대해 들은 얘기가
없다. 다만 마음속에서만 어머니의 이미지를 키워나갔다.
붓꽃 꽃잎으로 피리를 불던 어머니, 아침마다 머리를 쫑쫑 땋아
주던 어머니, 끼니때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주던 어머니, 열이 오
르는 이마를 짚으며 머리맡에서 밤을 새우던 어머니, 온몸에 열꽃
이 핀 승주를 업고 매일 십릿길의 병원을 오가던 어머니...... 승
주도 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승주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들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몇가지 전형화된 어머니들이 있다. 솔로몬 왕 앞에서 자식의 팔을
놓아버리는 여인, 아들의 신발을 품안에 넣어 데워주는 여인, 어
둠속에서 자식의 붓글씨를 쓰는 동안 떡을 썰었다는 여인, 그런
여인들이 있다. 변함없이 칭송되고 미화되면서 세월의 망각의 힘
을 이겨낸 어머니들이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는 노점상을 하여
아들을 고시에 합격시킨 어머니, 거리에 버려져서도 끝내 자식 이
름과 주소를 대지 않는 어머니, 땅을 팔고 집을 팔아 끊임없이 자
식의  사업자금을 대다가 종내는 빈털터리가 되어 혹처럼 대접받
는 어머니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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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머니는 늘 크고 따뜻하고, 자식이 원하는 것을 요술처럼
만들어내고,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가. 왜 모
든 이들이 어머니가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가. 승주는
의심한다. 그런 믿음 뒤에는 무언가 거대한 계략, 인류가 다 함께
공모해 온 음모나 술수가 있지 않을까. 저 마녀 사냥의 광기처럼.
노점상을 하는 어머니를 둔 아들은 고시공부를 할 게 아니라
어머니의 노점일을 도왔어야 한다. 자식에 의해 유기된 어머니는
자식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도록 해야 한다. 자식의 집에 더부
살이하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준 돈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
러나 그런 어머니는 없다. 아니, 이 세상은 그런 어머니를 용납하
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질 것이다.
그 돌팔매와 손가락질을 피해 자신을 죽이며, 어머니들은 어머니
라는 이름에 더 큰 책임과 의무, 희생과 인내를 부하했을 것이다.
스스로의 손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안방 문을 열고 나오는 여인은 다시 낯선 모습이다. 열차 안에
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드러나는 눈빛을
하고 있다. 승주는 여인이 나온 안방으로 들어가 청동 조각품을
집어든다.
[이거 하나 가져가세요.그냥 드리고 싶어서......]
손을 머리 위로 뻗은 채 화로를 들고 있는 여자. 힘차게 두 손
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고단한 자세
때문에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여자. 여인은 승주가 내미는 청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린다.
[네 마음만 받으마]
승주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가. 청동조각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흰 봉투를 챙겨 그 안에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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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지폐를 담는다. 여인은 벌써 현관문을 나서고 있다. 승주는
봉투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여인을 따라나간다.
다시 어머니를 만난다면,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승주는 어
머니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인류의 기억을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오르면 다른 어머니도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반드시 사랑과 희
생의 대명사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원시 시대에는 먹이를 놓고 새끼와 다투던 암컷이 있었을 것이
다. 그리스에는 단지 여아라는 이유만으로 영아를 유기하던 어머
니가 있었다고 한다. 문란한 사랑 뒤에 낳은 사생아를 죽이는 어
머니, 유모의 젖에 아이를 맡기는 귀부인, 일곱 살짜리 아들을 일
터로 내모는 어머니들도 있었다. 오래 된 옛 이야기에는 자식을
잡아먹는 어머니, 자식을 혹사하고 팔아넘기는 어머니도 나온다
그런 구전들을 동화라는 장르로 정리할 때 그림 형제는 나쁜 어
머니역을 모두 계모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림 동화 이후 계모는
이유 없는 멸시의 대상이 되고 어머니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 인
내와 희생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다시 어머니를 만난다면 승주는 말하고 싶다. 어머니가 느끼는
죄의식에는 바로 그런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모성이란 인류가 공
모하여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것을, 모든 환상은 쉽게 손닿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 서로 비추고 있는 가로등 사이를 승주는 여인과
나란히 걷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양 방향으로 두 개씩 뻗어 있
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림자가 일렁일렁 이동한다. 어머니를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 승주는 그걸 여인에게 한다.
[그때,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옷을 벗기보다는 머리를 깎으시
는 게 낫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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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묵묵히 걷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골목을 다 벗어날 때
까지. 차가 지나가는 큰길에 다다르자 여인은 걸음을 멈춘다.
[내 그 동안 다 지켜봤다.너는 내가 술 먹고 주정이나 하는 줄
알았겠지만 난 다 봤다. 남의 소나 세는 일은 이제 그만 해라. 한
마리라도 네 소를 키워야지. 쓸데없는 것들 다 집어던지고]
승주는 이 부끄러움이 무언가 짚어본다. 부끄러움보다 더 깊은
곳에서 솟구쳐오르는 뜨거운 회오리의 정체는. 승주는 봉투를 여
인 몰래 여인의 승복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내 걱정은 마라. 해남에 토굴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들어가서
한 철 공부를 해볼까 한다]
[택시 잡아드릴게요]
여인은 승주를 보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승주의 등뒤 길 저편
을 보고 있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텅 빈 거리에는 횅한 바람
만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만 둬라. 난 이리로 가겠다]
여인은 바라보던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돌아서는
여인의 뒷모습이 어둠속에서 일렁인다. 옷자락이 끊임없이 바람
에 날리며 파도처럼 흔들린다. 저 바다, 저 바다만 보면....... 처음,
그렇게 말했던 여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린다. 푸른 바다를 향
해 홀린 듯 다가서는 충동, 바닷물결을 온몸에 친친 감고 그 위에
누워 한세상 보내고 싶은 갈망 그렇게 세상이 끝난다 해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빈 손의 가벼움.
승주는 오래도록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는다. 그 모습이
어둠속에서 멀어지다가, 형체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나중에는 어둠
과 똑같은 빛깔로 어둠속에 스며들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승주는 휘파람을 불어 본다 어머니가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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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붓꽃 피리 같은, 여인이 불렀던 동심초 같은, 그런 소리를
내어 본다. 가슴속에 출렁이던 진득한 액체가 맑은 기운이 되어
날아오르는 것 같다. 소리는 아무도 없는 집, 그 빈 창턱에 잠시
머물다가 세상의 둥근 지붕을 향해 날아오른다.
집으로 돌아와 등뒤로 현관문을 닫을 때, 승주는 손에 딱딱한
것이 만져지는 것을 느낀다. 현관문 손잡이에 염주가 걸려 있다.
무슨 뜻일까. 승주는 염주를 벗겨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작은
야생 복숭아 열매로 만들어진 염주는 스물두 개의 열매마다 반들
반들 손때가 묻어 있다. 그것을 다시 안방문 손잡이에 걸며 승주
는 오래도록 그 둥근 형태를 바라본다. 복숭아 열매들을 둥글게
엮은 것은 어떤 손의 염원이었을까. 저 염주를 방문에 걸어두고
간 여인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햇살이 승주의 왼쪽 어깨로 기어오른다. 조금 벌어진 커튼 틈새
로 햇살은 긴 손처럼 스며들어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온기가 느
껴지기도 전에 섬뜩한 기운이 어깨에서 시작되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승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햇살을 피해 몸을 튼
다. 두 팔과 다리를 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목도 한껏 꺾어
가슴 쪽에 묻는다.
승주는 그 진저리의 정체가, 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의 본질이 무
엇인지 안다. 늘 그런 온기에 속아 왔다. 아니, 속는 줄 알면서도
쏟아지는 그 따뜻함 속으로 한사코 걸어들어갔다. 그 따뜻함 속에
넋을 놓은 채 영영 잠들어도 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햇살에는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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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있는 게 아니다. 눈을 시리게 만드는 빛이 있고 온몸을 메
마르게 하는 제습력이 있고 주근깨를 돋게 하는 자외선이 있다.
허공에서 꼬물거리는 먼지 입자를 한순간에 드러내는 적나라함까
지. 승주는 모로 누운 자세에서 오른손을 들어 왼쪽 어깨를 쓰다
듬는다.
한숨 돌리기도 전에 햇빛이 다시 승주를 따라와 어깨에 내려앉
는다. 승주는 또다시 햇빛을 피해 달아난다. 모로 누운 상태에서
몸을 궁글려, 꿈틀꿈틀 굼벵이처럼 이동한다. 굼벵이처럼,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햇빛의 속도를 피해 달아날 수 없다. 관절마다, 세
포의 구멍마다 땀이 맺힌다. 햇빛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승주는
더 절망적이 된다. 햇빛 속에서 온몸이 바삭바삭 말라간다. 이렇
게 온몸의 수분을 빼앗기고 나면 마지막에 하얗게 부서져내리는
가루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승주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다. 몸에서
힘을 빼니 팔도 다리도 제풀에 풀어진다. 허공을 향해 배를 내보
인 채, 사지를 사방으로 뻗은 자세로 누워 생각한다. 사랑도 그럴
것이라고. 온기와 평화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시린 눈에서 눈물
이 흐르게 하고, 고단한 피부를 꺼칠하게 하고, 감정의 숨기고 싶
은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하얀 가루로
부서져내리는 순간에야 그걸 깨닫다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
찍 알았더라면....... 승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뜻밖에도
손바닥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난다. 수분이 있었다니 승주는 놀라
듯 몸을 일으킨다. 몸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움직여준다.
승주는 고개를 들어 창을 본다. 어디서 햇빛이 들어왔던 걸까.
완벽하게 어두운 창이 오히려 실내의 형광등을 반사하고 있다.
천천히 손을 들어 팔이며 얼굴을 쓸어내리면서야 승주는 꿈을 꾸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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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깨닫는다. 무슨 꿈이었을까. 왜 햇빛을 피해 그토록 달아났
을까. 꿈 속에서 어떻게 햇빛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인 생각을 펼
칠 수 있었을까. 찬찬히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손은 아직도 현실과 혼몽 사이에 엉거주줌
걸쳐져 힘이 없다.
[거기 정승주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다. 사무적인 딱딱함에 얼마간의 짜증까지 배
어난다. 승주는 수화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며 본인이라
고 대답한다.
[여기는 수유 경찰서입니다. 승복을 입은 오십대 여인이 있는
데, 그 사람 소지품에서 정승주 씨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메모
지가 나와서 연락드리는 겁니다]
승주는 얼굴을 쓸던 손길을 멈춘다. 반사적으로 올려다본 시계
는 열두시 사십분을 가리키고 있다. 승복을 입은 오십대의 여인,
사흘 전에 이 집에서 떠난 여인.
[그런 사람을 아십니까?]
승주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급하게 덧붙인다. 그분에
게 무슨 사고가 생겼나요?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아닙니다. 술집에서 돈 없이 술을 마셨답니다. 술집 주인은 시
주하는 셈치고 그냥 보내려 했는데 기물 파손에 영업 방해까지
더해져서....... 지금은 잠들어 있습니다.와서 배상하고 모시고 가
겠습니까?]
딱딱 부러지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주는 방문 손잡
이에 걸린 염주를 보고 있다. 그 안에 온 우주를 품어 안고 있는
듯 둥근 염주, 희고 포슬포슬한 벌레 알들이 더 많은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는 염주 저 벌레 알들이 과연 부화해 수 있을까 무득문
득 궁금해지곤 했다.
승주는 황급히 코트를 껴입고 현관을 나선다. 자정이 넘은 밤거
리는 섬뜩하고 고요하다. 택시를 기다리면서야 승주는 그 섬뜩한
느낌이 맨발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늘에는 별들이 얇은 쇠
조각처럼 매달려 찰강찰강 소리를 내고 있다. 금방 머리 위로 쏟
아져 내린다 해도 그 밑에서 오래 서 있고 싶은 별빛이다. 멀어서
희미한 빛.
사실 승주는 내내 그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리고, 먼 곳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는다. 전화
기 저편에서는 사무적인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뉴질랜드
한국 영사관입니다. 한 여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습니
다. 오십대 중반의 검은 머리, 엄지와 검지 사이에 팥알만한 돋을
점이 있습니다. 그녀의 한복 저고리 섶에서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혹 그런 사람을 아십니까? 그런
전화를 받고 달려나가다 보면 섬뜩한 맨발일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맨발의 서늘함이 가슴까지 밀려들곤 했다.
승주는 어둠속에서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한껏 팔을 들어올
린다.
택시는 우회전 깜박이를 켜며 서서히 속도를 늦추어 승주 앞에
멈주어 선다.그때 어둠속에서 홀로 불 밝힌 택시가 멈추어 서고,
그 불빛을 향해 손을 내밀듯 문을 열 때, 그때 승주는 깨닫는다.
실은 한밤에 울리는 전화를 두려워한 게 아님을, 오래도록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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