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변해도 나는 튀고 싶다
명로진
글머리에
"이제는 한 템포 느리게"
다운 쉬프팅(Downshifting)
기어를 한 단계 낮게 변속한다는 뜻이다. '뉴스 위크
지' 최근 호는 '다운 쉬프팅의 삶'을 소개했다. 돈벌이
나 출세에 급급하기보다는, 인간답게 살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 위해 삶의 속도를 한 단계 낮춘다는
의미이다. 미국의 많은 가장들이 다운 쉬프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수정한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언제나 다운 쉬프팅을 꿈
꾸었다. 정신없는 업무속에서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한 잔의 커피르 마시며, 한편의
시를 읽으면서 밀란 쿤테라의 말처럼 '조금은 느리게
'살아가고 싶었다.
21세기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지금 우리는 IMF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비틀거리고 있다. 모두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소비를 줄이고 긴축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나가
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이런 기회에 우리의 삶도 다운 쉬프팅해야 하
지 않을까.
실업으로 당장 먹고 살 게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삶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라고? 이렇게
항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마련
이다.
이제라도 실업의 이름을 빌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
면 어떨까. 그 동안 소홀했던 가족끼리 얼굴을 맞대
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이제 더 이상 '돈은 있어
도 시간이 없는' 시대가 아니니까. 또 분명히 2, 3년
쯤 후에 우리 다시 바빠질 것이고 여전히 돈은 있어
도 시간은 없는 시대가 돌아올 테니까.
최소 생계비를 다시 설정하자. 화려한 레스토랑의
안심 스테이크가 아닌,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
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되자. 잊혀졌던 친구들
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시간을 마련
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오랫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영
혼이나 신 혹은 가난, 그 가난 속에 핀 내핍과 검소
함, 그 검소함 속에 은은히 지켜간 사랑 같은 것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보는 것도.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고궁 돌
담길을 걷는다거나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속
삭이기만 해도 좋았던 그리 머지 않은 과거의 연애
풍경들을 되살릴 수도 있으리라. 우린 머지 않은 미
래에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독한 실업과 내핍의 시절이 모두 '전설'이 될 것
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 멀리, 더 넓게 보며 살아야
될 것 같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온, 그래서
건강까지 다 잃어버린 우리의 아버지 세대와 선배들
인40, 50대가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IMF라는 치욕
뿐이다, 그들 자신은 어떤가, 몸바쳐 살아왔지만 남은
건 '명예퇴직'과 쓸쓸한 가장의 뒷모습뿐이다.
왜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는 이렇게 됐을까. 그건
아마 철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1960년대부터 시
작된 우리 사회의 집단 히스테리적인 근대화 열풍은
과도한 업무와 과도한 주량으로 대표되는 일에 미친,
동시에 소비에 미친 중년을 양산했을 뿐이다.
그들은 오직 업 쉬프팅의 삶을 향해 달려왔다. 기
어를 올리며 과속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러다 IMF
라는 대형 사고를 당하게 됐다. 다치고 나서야 사람
들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경제 속도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할 때라는 걸.
스물일곱이 되던 해, 잘 다니던 신문사를 때려치우
고 탤런트가 됐을 때, 나는 이런 책을 쓰게 되리라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한 박자 느린, 삶의 다운 쉬프
팅을 꿈꾸었다. 경제 속도를 지키는 삶을 살고 싶었
지만 환경은 언제나 나를 과속하게 만들었다. 물론
한 번뿐인 인생에서 튀고 싶었으며 주목받고 싶기도
했다.
기자란 직업은 인생을 바쳐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
긴 하다. 글로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
도 있다.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시인과 같은 창조의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는 자부심도 갖게 만드는 직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평범한 기자로 남아 있었다
면 이런 말은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소위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직업을 과감하게 그만
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그댄 한창 호황
이었고 신문기자라고 하면 꽤나 안정된 직업이었다.
친지들, 심지어 방송국의 친한 연기자들조차 "왜 기자
하지 연예인을 하느냐"고 말한다. 연예인의 화려함 뒤
에는 말 못할 고통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연
기자가 된 지 4년 남짓, 내게도 역시 좌절이 있었고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시도조
차 해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보다는,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무모함'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세상 앞에 당당
하다. 돈을 많이 벌어서도, 유명해져서도 아니다. 누
가 뭐라 해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또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꿈꿔왔던 '한 템포 느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나만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세상에 내놓는다.
거칠고 맹랑한 언어들이라 이 어지러운 시대에 한
낱 '소음'밖에 안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세
상의 시름을 잠시 잊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98년 5월
명로진
내가 없는 데도 세상이 잘 돌아가다니!
꼭 내가 캐스팅되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엉뚱한
사람이 가 있는 것만 같다. 나와 친하던 그 많은 기
자들과 PD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잘난 척하고 신문사 나가더니......"
부장이 내게 환영한다고 말한다. 반가운 동료들의
얼굴이 보인다. "생각 잘했어. 연예인 생활 그거 불안
하잖아." "다시 잘 해보자구." 선배와 동료들은 날 반
갑게 맞아준다. 나는 다시 기자가 된 것이다. 이젠 매
일 호출기를 들여다보며 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특종 기사 빨리 넘겨." "연예인 비리나 열애 소식 같
은 거 잘 알지? 기대하겠어." 사람들은 나를 둘러싸고
웃는다. 나는 내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자판을 쳐
댄다. '이건 특종이야. 다들 깜짝 놀라겠지.' 원고를 뽑
아 데스크로 가져간다. 내 원고를 유심히 바라보던
부장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이거 어제
딴 신문에 난 거잖아!" 부장이 원고를 내 얼굴 앞으
로 던진다. 흩날리는 원고지들.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댄다. "내 그럴 줄 알었어." 나는 몸을 숙여 원
고를 줍는다. "잘난 척하고 신문사 나가더니......" 원고
를 집으려고 애쓰지만 종이들이 자꾸 달아난다. "가서
탤런트나 해, 하하하"
휴-. 꿈이었다. 이작 밖은 어둡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 아내는 곤히 자고 있다. 가만히 일어나 냉장고
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라 들이켰다. 다시 침대로 돌
아와 누었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내내 뒤척이다 마
지막으로 시계를 본 것이 6시였다. 아침에 눈을 떠보
니 이미 아내는 나가고 없었다. 된장찌개를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밥도 해놓고. 식탁 위에 만 원짜리 세
장이 놓여 있었다. 익숙한 아내의 글씨가 보인다. '오
빠, 얼마 안되지만 용돈 하세요. 더 많이 못 드려서
미안해요.' 아침을 먹고 나서 신문을 훑어보았다. 세
상은 여전히 잘도 돌아가고 있다. 깨끗이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았다. 그리고 청소를 했다. 화장실 변
기도 말끔하게 닦고 현관도 걸레질을 했다. 회사에서
하루종일 시달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또 집안 일을 하
게 하고 싶지 않다. 아직 빨래는 여유가 있다. 빨랫줄
에 걸린 속옷을 걷어 개켰다. 내일은 수건 빨래를 해
야겠다.
중풍 걸린 노년 같은 내 인생
운동화를 신고 추리닝을 입었다. 배낭엔 버너와 라
면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낸 반 병쯤 남은 소주를 넣
었다.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내려와 버리고 아파트 단
지를 벗어난 뒷산으로 올라갔다. 햇살은 따뜻하고 밝
다. 철봉과 조잡한 기구들이 놓인 뒷산의 쉼터엔 할
아버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나 같
은 젊은이는 찾아볼 수 없다. 꽤나 긴 조깅로가 있는
데 그곳에선 중풍에 걸린 할아버지 두 명이 번갈아
가며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안
가. 한참 일할 나이에. 두 분 할아버지에겐 미안한 얘
기지만, 내 청춘이 마치 중풍에 걸린 노년처럼 위태
롭게 걷고 있는 게 보였다. 껄떡 껄떡 껄떡...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걷지도 못하고 한 발 한 발 흔들리
며 가고 있는 모습이. 혼자서 철봉도 하고 발 차기도
하고 맨손체조도 하면서 땀을 뺐다. 요즘엔 헬스 클
럽에 갈 돈도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모
이는 곳에 와 있노라면 비참한 마음만 들 뿐이다. 운
동기구가 올라가는 곳을 벗어나 본격적인 등산길에
올랐다. 오늘은 방학동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골랐
다. 평일이라 등산로엔 사람이 없다. 가끔 50대 아저
씨들이 보인다. 북한산 중턱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
은 봄빛을 받아 녹색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항상
가는 곳. 송전탑이 있는 곳에서 우회전을 해서 사유
지 철조망을 지나면 작은 계곡이 나온다. 졸졸 흐르
는 물 옆으로 한 평쯤 되는 조그만 자갈밭도 있다.
땀을 식히고 담배 한 대를 붙이고 나서 버너를 켰다.
라면을 끓이면서 소주를 병째 마셨다. 카-.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마신 술이라 그랬는지 소주가 달았다.
보글보글 라면이 익었다. 후후, 불어가면서 라면을 먹
었다. 깡소주와 함께 , 취기가 금세 올라왔다. 좋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술도 좋고.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이 떠올랐다. 회사에 간 아내 생각도 났
다.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좋아하던 어머니, 아버지 얼
굴도 스쳐지 나갔다. 눈앞이 흐려졌다. 라면에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세상이 날버린 것만 같았다.
6개월째 메시지 하나 없는 호출기
집에 돌아왔다. 호출기를 들여다본다. 아무 메시지
도 없다. 벌써 6개월째다. 절망적이다. 신문기자를 때
려치우고 탤런트가 된 지 2년. 처음 1년 반 동안은
그나마 바쁘게 활동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마치 밀
려난 권력자의 초상집처럼 연락이 뚝 끊겼다. 이제
방송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가. 말할 수 없는
소외감이 나를 엄습해온다. 아침마다 신문을 볼 때
그 소외감은 더한다. 나 없이 도 세상은 잘도 돌아간
다. 여전히 신문은 잘 나가는 탤런트들은 있다. 수많
은 신인들이 나오고 꼭 내가 캐스팅되어야 할 것 같
은 자리에 엉뚱한 사람이 가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
은 나를 잊었는가. 나와 친하던 그 많은 기자들과 PD
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정말 이대로 끝인가. 버
너와 라면을 가지고 산에 가서 끓여 먹은 것이 몇 번
인지 모른다. 이제 아내에게 용돈을 받는 것도 미안
하다. 결혼할 때 정말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했다. 열여섯 평짜리 아파트와 혼수, 예
식비 모두 빚이었다. 그게 8, 9천만원 가까이 됐다.
만만치 않았다. 한 달에 백만 원씩 저금을 해도 8년
은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아내 혼
자 그 빚을 감당하려니 여윳돈도 없을 것이다. 용돈
은 고사하고 생활비도 없을 텐테..... 허울 좋은 탤런
트 생활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나마 몇 번 TV에 나
온 덕에 날 알아보는 사람도 있는데... 속으로 곪고
있어도 겉은 번지르르해야 하는 이 생활이 너무 싫
다. 사람들은 내가 탤런트가 돼서 떼돈이라도 번 줄
안다. 실제로는 스타가 되지않는 한 출연료는 옷값에
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너는 양반이다"라고 말하
는 친구들이있다."너는 집사람이라도 벌지 않는냐"는
것이다. 연극하는 친구들 중엔 정말 막막한 경우가
많다. 부부 줄 다 연극배우인 동료들은 사는 게 엉
망이란다. 그래,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지. 내가 선택
한 삶이니까.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 이렇게 스스
로를 위로했다. 경제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나는 좋
은 직장에서 무모하게 퇴직했다. 누가 밀어낸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원해서.
"CF한번 찍어보지 않겠어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짜증을 내던 당
신이 어느 날 갑자기 가는 곳마다 팬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리는 상상...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누군가
말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고.
딴따라가 뭐가 좋다고
그날이 생각난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합니다."
1994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빗고 내 방 책상에 앉아서
사표라는 것 썼다. 사실 사표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
도 몰랐다. 영화나 소설에서 읽은 글투를 흉내냈다.
그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직장'생활
에 대한 이별의 편지와도 같았다. 흰 봉투에 곱게 접
은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드라마 연습장으로 갔다.
9시 30분쯤 도착해서 기다리는 이정길, 유인촌, 이미
숙, 박상원등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이 차례로 나타났
다. 곧이어 김혜수와 다른 배우들도 모였다. 이장수
감독이 10시쯤 와서 배역과 연기자들을 소개했다. 다
들 오래 연기 활동을 한 분들이라 서로 안면이 있었
다. "아, 그리고 이번에 김준 역에 캐스팅된 명로진
씹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니, 지난번에 취재 왔던
그 친구 아니야?" 유인촌 선배가 물었다. "난 또 취재
하려고 와 있는 줄 알았지." "그럼 기자도 계속해요?"
이미숙 선배도 궁금해했다. "조만간 그만둘 겁니다."
첫 연습 때 내 대사는 일본말 "핫!" 단 한 마디였다.
연습을 끝내고 점심 때쯤 회사로 돌아왔다.
데스크(신문사 부서의 담당 부장)한테 집에 일이 있
어서 늦겠다는 전화를 미리 해두었다. 회사를 그만두
겠다는 얘기를 하자 당시 연예부 데스크이던 신상돈
부장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이없다는 눈빛이었다.
"야, 바쁘니까 빨리 기사나 써서 넘겨." 헛소리 말라
는 뜻이었다. '아마 저놈이 뭔가 힘든 일이 있거나 요
즘 내 닦달이 너무 심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지레짐
작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신 부장에게 사직
하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아무말없이 오후 늦게
까지 태업을 했다. 이런 내 거동을 살피던 신부장은
윤태섭 차장과 김동철 차장을 내게 보냈다.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김 차장이 날 다그쳤다. 가뜩이나
방송팀이 바쁜데 내가 빠지면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딴따라가 뭐가 좋다고 그래?" "그래도 한번 해보겠
습니다." "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아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표까지 내겠다는 거야? 연예P라는 데가 보
통 힘든 곳이 아닌데 말이야." 김 차장은 어떻게든 내
가 기자 생활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면 탤런트가 되려는 내가 한때의 치기에 젖은 10대쯤
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옆에서 가만히 날 지켜보던
윤 차장이 입을 열었다. "너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
구나." 날 이해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윤 차장은 "마
음이 돌아섰으면 할 수 없지. 이왕 시작하는 거 한번
멋지게 해봐라.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나는 편집국장을 만나 사직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그는 "아까운 인잰데... 하지만 본인
의 뜻이 그렇다면 어쩌겠나. 열심히 해보게"라며 아쉬
워했다. 모두 다 고마운 분들이다. 그분들은 지금까지
도 나를 아끼고 기꺼이 도와준다. '스포츠 조선'에 찾
아가면 마치 친정에 온 딸자식 대하듯 한다. 내겐 무
엇보다도 큰 재산이 아닐 수 없다. 그날 난 선배 기
자들과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퍼마시고 자정 무렵
비틀거리며 회사로 돌아왔다. 짧고도 길었던 직장 생
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부장의 책상 위에
사직서를 놓아두고 신문사를 한번 더 둘러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로부터 꼭 2년 3개월 전 나는
1백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신문사 기자가 됐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기뻐서 펑펑 울기까지 했다. 단순히 감격스러워서만
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가까이 백수로 지
내왔던 터라 이제부터는 아침에 일어나면 어딘가 나
갈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정치나 경제부 기자보다는 스포츠 신문의 기자가 되
고 싶었다. 만화와 연예계 가십, 스포츠 소식으로 가
득 찬 스포츠 신문을 대학 때부터 구독해왔던 나는
재미를 추구하는 신문사에서 일하게 된다며 내 생활
도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언론사 시험 공부를 했다. 영락없는 취업
재수생이었다. 대학교 졸업식장에서 광고 회사나 대
기업에 취직했다고 으시대는 친구나 후배들이 아니꼬
웠지만 할 수 없었다. 사실 졸업식 무렵까지도 난 구
체적으로 어느 직장에 들어가야 할지 딱 부러지게 결
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은 4학년 가을도 되
기 전에 누가 쫓아오리라고 하는 듯이, 그때가 아니
면 영영 취직이 안 되기라도 하는 듯이 대부분 취업
을 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수업을 빼먹었으며 교
수님들에게 당당하게 학점을 요구했다. 그때 난 취직
도 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취직한 복학생인양 행세했
다. 교수님은 왜 수업에 빠지는지도 묻지 않고 그저
"자네 취직했나? 열심히 하게"라고 말씀하시곤 황송
하게도 B학점을 주셨다. 한 학기를 돌이켜보니 내가
수업에 들어간 건 딱 두 번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몇
주 동안은 허송세월했다.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여
느 날과 다름없이 느지막하게 일어나 스포츠 신문 3
개를 사서 재미있게 읽고 있던 나는 불현듯 스포츠
신문에 입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영자 신
문을 구독하고 한글 맞춤법 책과 상식책을 뒤적이며
언론사 시험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첫 시험을 본 「스포츠 조선」에 운좋게 합
격했다. 이후 돌연 탤런트가 되겠다고 사표를 내기까
지 열심히 재미있게 기자 생활을 했다.
신데렐라는 있다.
어느 날 거리를 걷던 당신은 우연히 CF 촬영 현장
을 목격한다. 그곳에선 당신이 테이트 상대로 꿈꾸던
배용준이 맥주 광고를 찍고 있다.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촬영 현장을 둘러싸고 있고.
그때 갑자기 스태르 중 한명이 허겁지겁 달려와 감독
에게 말한다. "배용준과 함께 촬영하기로 했던 여배우
가 오는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CF 감독은 난
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날 따라 동원된 특수 장비가
많았던 것이다. 하룰 촬영을 못하면 천만 원 이상 손
해를 보게 된다. "이것 참 미치겠네." 한숨을 푹푹 쉬
던 감독의 눈에 당신의 얼굴이 느린 화면으로 클로즈
업된다. 이럴 수가! 당신은 감독이 그동안 그토록 애
타게 찾던 참신한 바로 그 얼굴이었다. "CF한번 찍어
보지 않겠어요?" 그는 당신에게 달콤한 제안을 던진
다. 톱스타 배용준의 상대역이라는. 당신은 얼떨결에
CF를 찍는다. 그리고 이 한 편의 공로로 일약 스타덤
대열에 오른다. 영화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이런 상상
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짜증을 내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가는 곳마다 많은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살리
는 상상...생각만해도 즐겁지 않은가! 누군가 말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고. 1994년 1월 내게 달
콤한 유혹을 던진 이장수 감독과의 만남도 마치 한
편의 시나리오처럼 이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연예부
의 KBS 담당기자였는데 해가 바뀌면서 SBS로 출입
처를 옮기게 되었다. SBS 출입기자로서 PD들과 연예
인들을 만나며 얼굴을 익히던 나는 어느 날 나는 이
장수 감독이 새 미니 시리즈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도깨비가 간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미니 시리즈에 출연하게 될 유인촌,
이미숙 선배와 이장수 감독이 새 드라마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로진 기잡니다."
"아, 그러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이 감독이 자리
를 내주였다. 이마가 넓고 동안인 그는 자그마하면서
도 단단한 체격이어서 첫인상이 장난꾸러기 아이 같
았다. "기자세요? 난 또 후배 탤런트라고." 이미숙 선
배가 먼저 농담을 던졌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런
줄 알었어." 유인촌 선배가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이
감독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모래 위의 욕망'이나 '금
잔화' 같은 드라마를 찍었던 이 감독의 명성을 난 익
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
이었다. 그의 드라마는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었고 시
청률도 높았다. 새로 만드는 드라마 역시 제목부터
특이했다. "무속에 대한 드라마라도 만드시는 겁니
까?" "다들 그렇게 묻는데 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는
'일본 문화의 한국 침투'라는, 조금의 거창한 주제를
다룬 '도깨비가 간다'의 줄거리를 약 30분 동안 열심
히 설명해주었다. 어찌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
던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특이한 내용
이군요. 이 감독 얘기가 실제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
는데요." "그래요?" "배역은 다 정해졌습니까?" "거의
다 정해졌습니다. 이정길, 유인촌, 이미숙, 박상원, 그
리고 김혜수 씨가 주연을 맡게 됩니다." "호화 캐스팅
이군요. 그런데 킬러인 김 준 역할은 누가 맡습니까?
꽤 비중 있는 역할인 것 같은데." "그게, 아직 캐스팅
이 안 됐어요." 그는 냉혹하면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는 김 준 역의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
했다. "딱히 이 사람이다. 할 만한 배우가 없어요, 그
래서 신인을 기용하려고 합니다." "신인 중에 뭐, 염
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있습니까?" "글쎄요.:" 말을
마치고 나서 이 감독은 한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봤
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로진 씨 같은 이미
지가 이 역할에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래요? 하
하, 시켜주시면 하죠." 그동안 취재를 다니며 수많은
PD들로부터 농담으로 '배우' 해도 되겠다는 말을 들
어왔던 터라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처음
엔 PD들이 진담으로 그러는 줄 알고 은근히 출연을
꿈꾸어보기도 했지만 오래되지 않아 그저 인사치레로
던지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 감독과 만나
고 난 뒤 사흘 후에 나는 김 준 역의 캐스팅이 궁금
해 다시 그를 찾아갔다. 순전히 기사를 쓰기 위해서
였다. "아, 명 기자 이리로 와서 좀 앉아요." "김 준의
배역은 정해졌습니까?" "그게 말이요......"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해 건데 아무래도 그 역은 명 기
자가 해야 될 것 같아요." "네?" 그리고 내 앞에 '도
깨비가 간다'의 시놉시스가 던져졌다. 나는 집에가서
차근차근 시놉시스를 읽어봤다. 마치 영화 '러옹'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듯한 킬러 김 준이 단번에 마음
에 들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 샤워를 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나서 책상 앞
에 앉았다. 그리고 사표를 써내려갔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고 싶어서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려대는 방문객들보다 더 무서
운 것은 졸음이다. 쇼파와 침대가 가까이 있고 아무
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눕고 싶으면 언제든지
누울 수 있다 따라서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컨트롤하
는 것이 가장 어렵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나, 자기한테 할 말 있어." "뭔데요?" "나...신문사
에 사표 낼까 봐." "........" "탤런트 하려고." "?" 그녀
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때 나는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녀는 나름대로 나와 결혼
해서 맞게 될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사표를 내다니, 게다
가 탤런트라니?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
었을 것이다. 나는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때 이미 내 마음은 전직 쪽으로 굳어져
있었다. 물론 나와 장래를 약속한 그녀의 생각은 내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을 만큼 막강했다. "갑자기 무
슨 소리에요, 절대로 안 돼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
리 결혼은 없었던걸 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조바
심이 났다. "세상 한 번 사는 건데 하고 싶은 것 하면
서 살고 싶어."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
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 일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응." "잘할 수 있어요?" "잘할 수 일을런지
는 모르겠어,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야." "........."
"........" "오빠 뜻이 그렇다면 해보세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야죠." 그녀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내
마음이 이미 굳어졌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1994년 1월에 내가 신문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우
린 아마 그해 봄에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예 생
활이 자리잡힐 때까지 우리의 결혼은 미뤄졌다. 그로
부터 2년 후에야 우린 결혼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
는 아내를 얻었으며 인생의 동지를 얻게 되었다. 아
내는 내가 전직을 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장
날카로운 조언자다. 직업이 연예인이라면 방송에 자
주 나올수록 좋다고 할 텐데 아내는 그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되도록 TV에 얼굴을 내밀지 말
라"고 조언한다. 3개월이고 4개월이고 쉬면 쉬었지
'나가서 우습게 돼버리기 수은 프로'엔 절대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기저기 '자신을 세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연예인에겐 자신만의 고유한 이미지
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최민수는 액션, 박중훈은
코미디 같은 식이다. MC를 예로 들면 이상벽 씨 는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의 이미지가 있고 임성훈 씨는
날카로우면서도 여유 있는 진행자의 모습이 떠오른
다. 나는 아직까지 나만의 이미지로 전국적으로(?) 상
품화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지적인 분위기를
내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만 4년 가까운 연예
계 생활을 하면서 1년 6개월 동안 연극에 매달린 것
이다. MC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것은 다 그런 이
유 때문이다. 덕분에 조금씩 내가 바라던 이미지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무
엇보다 아내의 힘 컸다. 그 점은 아내에게 정말 고맙
게 생각한다.
프리랜서의 경쟁 상대는 자기 자신
알다시피 연예인이란 직업은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
는 직장인과 달라 아내는 일을 하러 나가고 나는 집
을 지키는 날이 많다. 이는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은
집안일의 상당 부분이 내 몫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럴 때 내 감정은 두 갈래다. 지속적으로 출연하
는 프로가 있는 상태에서 잠시 쉬 때는 살림이 재미
있지만, 고정적으로 하는 일도 없이 하염없이 몇 달
씩 쉴 때는 전업주부들처럼 지루하고 괴로울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나는 철저히 '프로 직장인'인
아내의 입장에서 모든 걸 풀어나가려고 애쓴다. 될
수 있으면 아내가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는 '가장'의
위치에 설 수 이있도록 배려한다. 쉰다고 해서 중천
에 떴을 때까지 자는 건 아주 치명적이다. 프리랜서
의 가장 큰 적은 나태에 빠지는 자기 자신이다. 사람
은 본능적으로 게을러지고 싶은 관성이 있는데 프리
랜서는 게으르면 안 된다. 게으름은 필연적으로 몸에
살을 만들고 살은 미움을 낳는다. 그리고 미움은 감
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져온다. 살찐 사람은 사회에
서 따돌림당하고 애인한테 버림받아 스스로 피곤해질
뿐이다. 부지런해야 살도 빠진다. 집안일도 그런 관점
에서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쓴다.
나는 늦지 않게 일어나서 아내에게 아침을 차려준
다. 메뉴는 기껏해야 플레이크와 우유, 또는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정도지만. 아침 생각이 없다고 하면 사
과라도 깎아서 먹게 해준다. 그리고 나서 아내를 지
하철역까지 자동차로 태워다 준다. 집에 돌아오면 9
시. 집안 청소를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내 할 일을
한다. 원고를 쓴다든지 또는 영어 학원에 다닌다든지
하면서. 그러나 집을 지키고 있자면 신경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오전 10시쯤 되면 어김없
이 내 신경을 곤두세우는 소리가 들린다. "세에-탁,
세에-탁." 냉장고 위에 붙여놓은 아내의 메모를 본다.
"셔츠와 재킷, 바지 3개 찾아놓고 9천 원 드리면 돼
요." "딩동!" 나는 세탁소 아저씨에게 9천 원을 주고
옷을 받아 걸어놓는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린다.
"네, 안녕하세요, 저--일보에서 나왔습니다. 신문을
보시라는 게 아니라 이거 이번에 지국 인수기념으로
드리는 건데요......" 아저씨는 대뜸 전자계산기가 달린
수첩을 내민다. 이럴 때 이런 거 받으면 '쥐약'이다.
하, 이 아저씨가 내가 신문사에 다녔던 사람이라는
걸 모르시나 본데...... "신문 봅니다. 죄송합니다." 나
느 선의의(?)증정품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문을 닫는
다. 물론 전직 기지로서 언론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분들을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하는 수 없
다. 보기는 쉬워도 끊기는 어려운 게 신문 구독이니
까. 쉬는 주제에 한푼이라도 아껴야지. 겨우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영어 공부라도 할라치면 또 벨이 울린
다. "누구세요?" "통장입니다." 문을 여니 706호 아줌
마가 서 있다. "적십자 회비 천 원 내셔야 되느데요."
"네. 알겠습니다." 통장 아줌마는 아파트 주민자치회
의 주요 의결사항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받
기 위해, 또는 적십자 회비를 받기 위해, 그리고 얼마
전 주민자치회에서 결정된 재활용품 쓰레기 수거비용
을 걷기 위해 방문한다. 드디어 통장 아줌마를 보내
고 나서 내 리듬이 거의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 다시
벨이 울렸다. "진리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이
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
까?" 우리 나라엔 종교에 몸바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도 많은지. 기독교, 불교, 천리교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분들이 전도와 포교 활동에 애쓰고 있는 것 같
다.
이렇듯 집에서 무슨 일을 집중해서 한다는 건 정말
어렵다. 그러나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려대는 방문객들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졸음이다. 소파와 침대가 가까
이 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눕고 싶으
면 언제든지 누울 수 있다. 따라서 주어진 자유를 스
스로 컨트롤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 오늘 저녁은 뭘 준비하지?
혼자 점심을 먹고 디저트로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
설거지까지 깨끗이 해놓는다. 아내가 집에 돌아온 뒤
가사일에 매달리지 않도록 내 나름대로 배려하는 것
이다. 아내의 퇴근 시간은 5시 30분. 집에 돌아오면 6
시 30분이 된다. 오후 4시부터 나는 슬슬 고민에 빠
지기 시작한다. 저녁은 뭘 해서 먹을까. 오늘은 일단
김치찌개를 하고 계란말이나 만들어야겠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특별 메뉴를 준비하기도 한다. 굴요리나
카레라이스 같은. 참, 아내에게 집에 돌아로 때 청소
용 옥시크린을 사오라고 해야겠다. 지난번에 그럴듯
하게 광고하길래 다른 제품을 써봤는데 역시 화장실
청소엔 솔향기 나는 옥시크린이 최고였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처럼 아내를 직장에 보내고 살림하는, 대학
원까지 졸업한 실업자 친구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집안일을 한다 하더라도 집안 살림의
사령탑은 분명히 아내다. 청소든 빨래든 요리든 아내
가 나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 또 나는 미시
경제밖에 맡지 못하지만 아내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가정을 꾸려나간다. 아내는 언제나 내게 "집에서 청소
나 설거지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푹 쉬세요"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물론 아내는 진심으로 하
는 말이다. "오빠가 집에서 ㅅ 때는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하세요. 등산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오빠만의 시
간을 많이 가지세요. 집안일엔 제발 신경쓰지 말구요"
등등의 쪽지가 식탁 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재충전도 한계가 있다. 등산도 매일 갈 수 없는 노릇
이고 영어 학원에 가서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없다.
게다가 살림이란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지만 아
무리 해도 티가 안 나는' 일이 아닌가. 도대체 책 한
줄을 읽으려고 해도 잡다한 쓰레기들이 '나좀 치워줘
요'하듯 널부러져 있어 여간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보이면 일단 청소기부터 들어야
하는 내 성미 때문에 언제나 우리 집은 깔끔하다. 또
무턱대고 집에서 소일하기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저녁
준비를 하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놀고 있어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눈치를
보며 의무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것 결코 아니다. 집
안을은 일종의 운동인 동시에 아내도 도울 수 있고
게다가 잡생각을 떨쳐버리는 데도 효과가 있다.
"나, 오늘 또 잘렸어."
일시적 실업을 자주 겪은 나는 실업 문제의 본질이
'소외'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
다. 하지만 가난은 참을 수 있어도 '세상이 날 버렸
다'는 소외감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 연락이 끊긴 동료와 선, 후배들에
대한 배신감.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있는 산에 올라갔
을 때의 그 말할 수 없는 자괴감. 게다가 눈부신 봄
햇살이 내 어깨를 드리울 때면, 그 햇살을 먹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일시에 일어나서 생명의 합창을 할
때면, 한창 일할 나이의 내 육신이 정지된 기계처럼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진다. 그리
고, 5, 6개월의 산야는 왜 그리도 눈물겹도록 푸른지.
그 속에서 나만이 늦가을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파
묻혀 있는 것은 정말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다. 물
론 그런 소외로부터 벗어나느 길은 다시 일하는 것보
다 더 좋은 게 없다. 나는 간사하게도 일이 생기면
마치 모든 집안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행동한다. 하
루 종일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피곤하다는 핑계
로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때 아내는 군말 없이 집
안일을 한다. 마치 '당신도 일을 하게 되어서 다행이
에요'하는 것처럼
방송일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잘 나가던 드라마가
시청률이 낮다는 이유로 갑자스럽게 막을 내릴 수도
있고 대본상 죽거나 외국으로 떠나버려 브라운관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모든 프로그램이 마찬가지다. 교양
프로도 6개월마다 한 번씩 개편을 하기 때문에 길어
야 반 년 정도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젼에
나오는 사람들은 6개월에 한 번씩 홍역을 치른다. 혹
시 다음 개편에서 이 프로가 없어지지는 않을까, 프
로는 지속돼도 내가 잘리지는 않을까, PD가 바뀐다는
데 나는 괜찮을까 등등. 별의별 걱정과 불안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게 방송계의 현실이다. "슬픈
소식이야." "뭔데요?" "나, 오늘 잘렸어, 개편부터 다
른 사람 쓴대." "괜찮아요. 어디 한두 번 당하는 일인
가요, 근데 오빠만 잘린 거예요?" "다행히 우리 팀이
모두 잘렸어." 아내는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
중에서 나만 아웃된 것인지 아니면 모두 물갈이된 것
인지 묻는다. 나만 제외됐다면 그건 내게 문제가 있
는 것이고 모두 교체됐다면 편성이나 개편상의 문제
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나만 특별한 문제
가 있어서 그만두게 된 적은 없었다. 정기적인 개편
때문에, 프로그램 자체가 막을 내려서, 또한 출현진을
전원 교체하는 바람에 그만둔 적은 있었다. 물론 내
가 잘한다면 몇 년이고 지속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내 경력이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오빤 매일 정리 해고당하는
남자네." 하지만 내가 언제 '정리 해고' 당하든지 아내
는 항상 나를 존중하고 편안하게 대해준다. 집에서
쉴 때도 마치 일을 계속하는 사람처럼 대해준다. 때
문에 나는 두세 달 때로는 반 년 가까이 지속되는,
좋게 말해서 재충전의 시간, 나쁘게 말하면 실업 상
태일 때에도 쉽게 죄절하지 않고 버터나갈 수 있다.
아내는 결코 재촉하거나 조급하게 구는 법이 없다.
내게 그런 믿음직한 아내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삶이고 싶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나
만의 이력서를 쓰고 싶었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인
데 난 '튀고' 싶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이력서는 NO
초봉-신문기자(약 1천 8백만 원), 연기자(공채의 경
우 5백만 원), 연봉-신문기자(2천5백만원, 5년차), 연
기자(0원부터 수억 원), 의료보험-신문기자(있음), 연
기자(없음), 연금-신문기자(있음), 연기자(없음), 고용
안정성-신문기자(비교적 안정), 연기자(매우 불안정),
사회적 인정도-신문기자(매우 좋은 직업이라고 인정
하고 존경함), 연기자(딴따라로 부르며 천시하는 경향
있으나 청소년들은 선망함), 장점-신문기자(어깨에 힘
주고 다님, 대접하기보다 접대받는 직업), 연기자(한
번에 뜰 수 있음, 남들이 알아봄, 주목받는 삶), 단점-
신문기자(과로, 항상 바쁨), 연기자(일 없으면 그냥 백
수임)
"도대체 왜 기자를 그만두고 탤런트가 됐습니까?"
연기자가 된지 만 4년이 지났지만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묻는 질문이다. 글쎄, 왜 기자를 그만
두고 연기자가 됐을까. 왜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한
없이 불안한 자유직, 그 중에서도 오래 버티기 힘드
연예계에 뛰어들었을까? 살아오면서 몇 번 이력서를
쓴 적이 있다. 그때마다 매번 나의 이력서는 똑같았
다. 1984년 2월 배문고등학교 졸업, 1984년 3월 연세
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1986년 6월-1988년9월 군
복무, 1991년2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고 졸업. 그게
다였다. 더 이상 쓸 게 없었다. 학교 이름만 바꾸면
다른 사람의 이력서와 마찬가지였다. 나와 같은 고등
학교를 나오고 같은 시기에 군대를 다녀오고 같은 대
학에 다닌 사람의 이력서라면 내 것과 다를 게 없었
다. 누구난 쓸 수 있는 이력서가 싫었다. 이 세상에
서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력서를 쓰고 싶었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난 '튀고' 싶었다. 오규원이란
시인이 말했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고, 그
건 누구나 한 번쯤으 품게 되는 바람이다. 난 언제나
주목받는 생이고 싶었다.
연예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기사를 쓰면
관련 사진과 함께 테스크에 넘긴다. 주로 연예부 인
터뷰 기사를 썼기 때문에 인물 사진을 함께 넘겨주곤
했다. 신문사 조사부에 가면 한 번이라도 신문에 난
사람의 사진이 가나다 순으로 보관되어 있다. 대통령
부터 마담의 주인공인 국화빵 가게의 주인까지, 어느
날 열심히 사진을 찾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사진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기사를 써도 내 사진
은 실리지 않는다. 물론 내 이름석 자가 신문에 실
리지만 그건 익명과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지하철에
서 내가 쓴 기사를 읽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
게 가서 말하고 싶었다. '이거 봐요. 그 기사를 쓴 명
로진 기자라고 있죠? 그게 바로 나라구요'하고. 하지
만 기사를 읽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
가. 난 내 얼굴을 알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게 연기자
가 된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결국 나는 튀었고 지
금은 내 사진이 신문사 조사부 '마' 항목에 정리되어
있다.
현재 진행형엔 마침표가 없다
난 신문기자 출신으로 탤런트가 된 첫 번째 인물이
됐다. 신문기자를 하다 PD가 된 사람도 있고 사회자
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탤런트는 내가 처음
이다. 그게 그렇게 대단하냐고 물으면 물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방송사를 쓴다면 한 줄쯤은 이
렇게 기록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해인가 신문기
자를 하다 느닷없이 탤런트가 된 아무개가 있었다,
라고. 거창하게 역사에 남는 것까지 바라지 않더라고
최소한 기네스 북에는 오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당
신은 또 물을 테지. 그래서 성공했느냐고.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난 아직 현재 진행형이며 누구보다 활
발하게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데뷔
이후 4년 동안 2편의 미니 시리지와 2편의 연속극. 1
편의 특집극, 2부작 드라마 2개와 6편의 단막 드라마
에 주연급 또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현했다. 그리
고 4편의 교양프로 MC를 맡았고 2편의 연극을 장기
공연했다. 패널로 5-6개월씩 고정 출연한 프로그램도
꽤 된다. 단역이나 초대손님으로 나간 프로는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나름대로 방송 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럼 도대체 수입은 어떤가?
데뷔 첫해부터 내 수입을 한 번 솔직히 공개해보
자. 1994년 2천백만 원, 1995년 2천 4백만 원, 1996년
8백80만 원. 1997년 천 6백만 원. 연예인치고는 고수
입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의상비와 소위 말하는
품위 유지비 때문에 지출을 하고 보면 실제 손에 들
어오는 돈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적
자투성이였다. 더구나 매일 일정한 날에 일정한 액수
를 받는 게 아니라서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1996년
의 경우 상빈기 6개월 동안의 수입은 겨우 백50만 원
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
다. 결론적으로 데뷔 후4년 동안 수입면에서는 실패
였다. 1997년을 기준으로 동료였던 7년차 신문기자들
이 연봉 3천3백 원 수준이라고 하니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거나 최소한 그 수준은 돼야 나
의 전직이 실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한 가지 다행한 점은 올해부터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는 사실이다. 올해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의
예상 수입을 따져보면 연봉 기준으로 약 5천만 원 정
도 된다. IMF 한파로 출연료가 줄어들지 않았다면 약
8천만 원 수입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적자가 일종의 투자였다면 이제부터 거뒤들
이는 시기가 된 것이다. 더구나 남들은 다 어렵다고
하는 시기에 더 수입이 많아진다는 프리랜서로서 내
분야에서 조금은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확실히 연
예계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청신호인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나는 매일 일을 한 것도 아니고 평균
일주일에 3일 정도만 일을 했다. 나머지 시간엔 운동
을 한다든지 영어 학원에 다닌다든가 하면서 나에 대
해 투자를 했고 평일에 며칠씩 여행을 하며 직장인이
갖지 못하는 여유를 누리기도 했다. 내가 원했던 건
수입보다도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전
에 느긋하게 일어나 재즈나 클래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한가로움'이었으며,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붐비
지 않는 산을 찾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느끼는 '느림
의 미학'이었다. 직장에 다닐 땐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이제 나는 원하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나
는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부럽지 않다.
첫 번째가 못 된다면 이름이라도 붙여라!
또한 우리에겐 고정 관념이 너무 많다. 법관을 하
다 개그맨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의사를
하다 연극배우를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대기업
사장을 하다 우동 장사를 할 수도 있고 외환 딜러를
하다 산사나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
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기자를 때려치우고 탤
런트가 됐을 때는 기삿거리가 됐지만 앞으로는 이런
별난 전직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바로 IMF 때문
이다. 이젠 평생 직장이란 개념이 없어졌으므로 대량
실직과 대량 전직이 늘어날 것은 빤한 이치다. 굳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느닷없이 인생의
방향 전환을 감행하는 나 같은 엉뚱이들인 많아진다
면 어쨌든 재미있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성공과
실패는 그리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
는 뭐든 제일 먼저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당
신이 아무리 하찮게 생각할지라도 내 인생을 던져서
내린 결정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두 번째는 기
억해주지 않는다. 두 번째로 달에 착륙한 사람은 누
구인가? 두 번째로 대서양을 비행 횡단한 사람은 누
구인가? 암스트롱이나 린드버그는 기억해도 두 번째
는 기억하지 않는다. 매정하게 말하면 기억할 필요조
차 없다. 첫 번째가 아니라면 차라리 이름 붙이는 자,
네이밍하는 자가 돼라. 우리 나라의 수많은 곤충들이
국제 학회에서 일본인의 이름이 붙은학명으로 통용된
다는 사실은 이름 붙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
로 말해준다. 일제 시대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
우치 마사타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했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게 우리 곤충들
의 정식 학명이 됐다. 그는 심지어 총독부에 조선 곤
충연구실을 따로 차려놓고 우리 나라 곤충을 연구했
을 정도다. 그가 이름 붙이기 전에도 물방개는 있었
고 장수하늘소는 있었다. 또 이름 모를 수많은 벌레
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름 붙이기 전에 '이름
모를' 곤충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이름을 붙이면서 동시에 곤충들은 의미를 갖게 되었
다. 이제 우리 나라의 많은 공충들은 불명예스럽게도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리우치의 이름을 꼬리에 붙
이고 다녀야 할 운명이 된 것이다. 역사가 그칠 때까
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다.
물론 콜럼버스가 그곳을 '발견'하기 전에도 원주민은
살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만년 전에 알류산
열도를 거쳐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한 첫 번째
몽골 인종이 처음 미 대륙을 발견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이름 모를 그
몽골 인종은 유럽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미 대륙을
발견한 첫 번째 인물이란 자리를 콜럼버스에게 물려
줄 수밖에 없다. 물론 콜롬버스도 억울하게 또 다른
인물에게 기득권을 양보해야 했다. 그는 아메리고 베
스푸치다.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미 대륙은 아직도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카'라고 불린다. 콜럼버스는
미 대륙을 인도로 착각했고 그래서 그곳을 서인도라
고 이름 붙였다. 아쉽지만 콜럼버스는 자신이 이름
붙인 그곳이 아직 서인도 제도로 남아 있는 걸로 위
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배반
그러나 첫 번째도, 이름 붙이기도 아니라면 '반란'이
다. 반란이 역사를 만들었으며 성공이든 실패든 반란
은 아름답다. 반란을 꿈꾸지 않는 자는 천천히 죽음
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다. 반란을 꿈꾸지 않는자는
차라리 죽어버려라. 반란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단어
는 '배반'이다. 인기 드라마였던 '용의 눈물'의 주인공
인 태종 이방원을 보라. 그는 반란과 배반의 상징이
다. 고려를 배반하고 아버지 이성계를 배반했으며 형
제들을 배반했다. 그의 인생은 반란과 배반이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탤런
트가 된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반란이고 배반이었
다. 내가 인정된 신문사에서 기자로 성공하기를 바랐
던 사람들, 신문사의 선후배, 부모님, 친구들 드리고
애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을 난 배신했다. 미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
가는 여자 주인공 사비나의 삶을 빌어 이렇게 말한
다.
"배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
런 것이라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선생님으
로부터 들어왔다. 그런데 배반이란 무엇인가?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해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
다. 사비나는 미지를 향해 출발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비나는 언제나 배반하고 그걸 자신의 운명이라
여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반하고 부모님을 배반하
고 친구를 배반한다. 이를테면 사랑이 식으면 그녀는
애인에게 "떠나겠다"는 한 마디만을 통보한 채 옷가
지를 싸서 떠난다. 단지 약속이나 맹세 같은 것 때문
에, 관습 때문에 애인 곁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녀의
배반은 정당하다. 배반이 없으면 삶도 없다고 단언한
다. 그리고 배반은 아름답다고 믿는다. 내게 배반당한
사람들 물었다. "왜 안정된 직장을 버렸느냐?"고. 이
젠 '안정된 직장'이란 개념조차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
도 기자직이라면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부
초 같은 연예인에 비하면 기자란 직업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하지만 난 이렇게 되묻고 싶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안정된 거냐고. 삶 자체가 불안의 연속
아니냐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다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고 오늘 저녁 길을 걷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우리 나라같이 특수한(?) 상황에선 배든
비행기든 자동차든 안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다리를 건너는 것도 불안한 상황이니까.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단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미래가 이렇게 불투명한데 해보
고 싶은 일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죽는다는 것은 얼
마나 분통터지는 일인가. 당신은 시인이 되고 싶은데
당신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일한다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신은 매일 시
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복잡한 서류더미와 빠듯
한 일과에 파묻혀 생활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당
신이 품나는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성수대교를 건너
다 다리가 끊겨 한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치자. 이 얼
마나 억울한 인생인가. 당신의 영혼은 얼마나 후회하
겠는가. 실패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것 실패하는
게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난 젊으니까 한두 번 쯤 실패한다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조급해질 때 가장 추해진다.
실업의 시기는 다음 취업을 할 때까지 모모가 마음
을 추스리는 쿨 다운(Cool Down)의 기간일 수 있다.
쿨 다운을 잘해야 다음번 운동을 할 때까지 몸이 유
지된다.
셀프 메이드 맨(Self-Made Man)
한창 호황일 때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둔 나는 준
실업 상태를 여러 번 겪었다. 물론 느긋한 마음으로
여행도 하고 다른 캐스팅을 준비하면 스스로를 위로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리 조급해도 결코 나를 '세
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배우는 조급해질 때 가
장 추해한다."는 말은 나를 탤런트로 만든 이장수 감
독의 충고였다. 따라서 언제나 태연하게 지내려고 마
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갈 곳이 있던' 직장인이 프리랜서로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수입이 없었을 땐 참 막막했
다.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싫었다. 그럴 형편도
못 됐고 설사 부모님이 돈에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
해도 난 끝까지 혼자 해내고 싶었다. 대학에 입학하
고 나서 지금까지 집에 돈을 보탰으면 보탰지. 결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는 것이 내 자랑 중의
하나다. 일주일에 5일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의
집에서 아이를 가리치고. 먹고 자면서, 학비도 벌고
용돈도 벌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내 나이 또래의 그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떳떳
하게 말하곤 했다. "난 셀프 메이드 맨(Self-Made
Man)이야"라고 수입이 없었을 땐, 저금한 돈으로 '한
달에 용돈 20만 원만 쓴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버텼
다. 그땐 우리 나라가 한창 호황을 구가하던 때라, 친
구들을 만나 하루 술을 마셔도 20-30만 원이 쉽게 깨
졌다. 너도 나도 카드로 긋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 이미 지금의 경제난이 시작됐는지 모른다. 어쨌
든 당시 한 용돈 20만 원은 그야말로 내핍이었다. 다
행히 다시 드라마를 하게 돼서 그 고난의 시절은 끝
났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다는 것의 막막함. 그건 겪
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솔직히 말해 수입이 없
을 때는, 매달 27일이면 꼬박꼬박 통장에 2백여 만
원씩 입금되던 월급쟁이 시절이 그리웠다. 연말 보너
스를 탈 때면 거의 4백만 원의 목돈을 만지곤 했는
데...... 그러나 이런 막막한 시절을 거치면서 얻은 것
도 있다. 남들은 이제서야 피부로 느끼는 IMF의 혹독
함을 미리부터 단련돼버린 것이다. 이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실업-연예인이야 방송 출연 안 하면
실업 아닌가. 말이 좋아 재충전이지-이 전혀 두렵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저금을 많이 해놓은 것도 아니
고 현재 수입이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나름
대로 터득한 '기다림'의 미학과 '잡초' 철학이 날 강하
게 만들었다.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난 지금이라도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붕어빵 장사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나는 좌절시킨다는 건 너의 오산이다. 나
는 잡초처럼 살아남아서 반드시 다시 일어설 것이다"
라고 큰소리칠 수 있다. 일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기
도 하지만 재도약과 모색의 시기일 수도 있다. 그것
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일 수도 있다. 대학 때
부터 헬스 클럽에 다녔던 나는 운동을 하기 전에도
웜 업(Warm Up)을 하고 운동이 끝나면 쿨 다운
(Cool Down)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웜 업은
스트레치를 통해서 근육을 덥게 만들고 근육에게 '운
동ㅇ르 시작하겠다. 운동하기 좋은 상태로 준비하라.'
고 알리는 것이다. 그래야 본격적인 운동을 할 때 부
상을 입지 않는다. 운동이 끝나면 반드시 쿨 다운을
해서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그것 '운동이 끝났다. 다
음 운동을 할 때까지 몸을 추수려라.'하고 근육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실업의 시기는 다음 취업을 할 때
까지 몸과 마음을 추스리는 쿨 다운의 기간일 수 있
다. 쿨 다운을 잘해야 다음번 운동을 할 때까지 몸이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실업의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
냐에 따라 다시 일어서느냐, 그대로 주저앉느냐가 결
정될 수도 있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춰 취업하는 것
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빚을 얻어서라도 자신에게
재투자해서 몸값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1-2년 다시 공부한
다는 기분으로 뭔가를 배워두는 건 어떨까. 인생 재
수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재수할 때는 1년이 무척
긴 것같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성공한 재수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모두 어려울 때
자신에게 투자해둔다면, 우리 경제가 풀리게 되면 당
신은 반드시 튀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
는 "배부른 소리 마라"고 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재투자가 배부른 소리로 받아들여진다면 당신은 평생
눈높이를 낮추는 일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성공'에 배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보고 내게 투자할 여유가 있는
'시간의 부자'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들도 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사
랑한다.
나는 성공하고 싶지 않다, 왜?
그는 야망의 화신이었다. 20대에 입사한 회사에서
그 야망을 펼치기 시작해 일찍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그는 대기업의 사장이 됐으며 압구정도의 아파트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부두시설까지 온갖 건설 현장을
누볐다. 그는 오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것 외
에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
들은 그를 '신화'라고 부른다. 누구나 그에게 성공했
다고 말한다. 이명박 전 현대 건설 사장. 그의 신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그의 신화를 소재
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세계를 누비며 일했고,
'일이 곧 유일한 취미'리고 말할 정도로 일에 미친 사
나이다. 이들은 60-70년대 근대화 세대의 상징이다.
1997년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설
문조사의 내용 중에서 50%에 가까운 학생들이 우리
사회는 "나쁜 사람이 더 잘된다."고 대답했다. 그 학
생들의 눈은 정확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나쁜 사
람이 잘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치관이 전
도된 이유는 바로 근대화 세대의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근대화 세대의 모토는 한 마디로 '잘 살아
보세'였다. 전쟁을 겪고난 후 배고픔이 최대의 고통이
었던 그들에겐 고깃국에 쌀밥만이 꿈이며 희망이었
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돈을 버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근대화 세대의 최대 가치는
'돈'이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가? 이게 유일한 성
공의 척도였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돈을 벌
수 없다.' 근대화 세대들은 이 두 구지 모토를 아침마
다 외쳤다. 그래서 '빨리빨리'와 부정부패가 생겨났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휴식은 없다. 몸뚱어
리가 부서져라, 가족과 회사를 위해 일한다. 누구보다
빨리 거래처에 가야 하고 누구보다 빨리 일을 처리해
야만 한다. 때문에 차선 위반이나 끼여들기 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내 뒤에 오는 차가 손해를
보든지 말든지. 교통 체증을 유발하든지 말든지. 건물
또한 좀 부실하게 짓더라도 상관없다. 수많은 사람
과 자동차가 지나 다니는 한강 다리를 좀 부실하게
놓더라도 상관없다.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지나 다
니는 한강 다리를 좀 부실하게 놓더라도 상관없다.
공무원에게 적당히 뇌물을 주고 빨리 지어서 빨리 돈
을 받아내는 게 더 급하기 때문이다. 배든 비행기든
시간과 사람을 투자해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보다 그
저 더 많은 손님을 태워 빨리빨리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 '나쁜사람'이 되더라도 돈만 많이 벌
면 그만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아직까
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회사를 위해 몸이 부서
져라 일했던 사람들은 '명예퇴직'이니 '조기퇴직'이니
하면서 쫓겨나고 있고 근근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
람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할 뿐이다. 이렇게 근대화 세
대의 기준으로 '성공'을 말한다면 오히려 나는 성공하
고 싶지 않다. 물론 그들 덕분에 80분대 이후의 세대
들은 가난을 면하게 됐다. 오히려 풍요를 만끽하는
소비 세대가 됐다. 그러나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때문에 근대화 세대와 다
른 '성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본다. '바
쁜 사람이 잘되는' 세상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 잘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 '나쁘면서도 잘된'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연세대 김중기 교수가 제시하는 성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는 얼마나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가입
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성
공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당
신은 일단 성공했으니까요.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매
일 '에이, 이놈의 일 못해 먹겠네' '사업이나 해야지'합
니다. 그 사람의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그런
데 그는 '남자가 할 일이 없어서 초등학교 선생을
해' 하며 항상 자신의 직업에 불만입니다. 그런 그가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할 생각에서 젊은 여성과 연애
를 하게 됐습니다. 잘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 날 젊은
여성이 갑자기 헤어지가고 하더랍니다. 이유가 궁금
해진 그가 안달이 나서 물었대요. 왜 그러느냐고. 그
러자 그 여성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이도 극복할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
다, 무엇을 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고 "남자라면 자신
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하
더랍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좋습니
까?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십시오. 두 번
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가입니
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며 사는가입니다.
당신에게 두 시간의 여유를 주겠습니다. 당신 주변의
친구나 동료, 선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 큰
일이 났다.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해보십시오. 그리
고 기다려보십시오. 그때 만사를 제쳐놓고 당신에게
달려올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아니, 아무 말 없
이 그저 '무조건, 빠른 시간 안에 우리집으로 와달라'
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당신은 불러모을
수 있습니까? 가만히 따져보면 무작정 달려올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2백 명은
모을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두 시간 안에 2백 명 정
도 달려오게 할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
서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좋
아하고 또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드십시오. 그
러면 당신은 성공한 겁니다. 세 번째는 얼마나 건강
한가입니다.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눈을 감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명상이란 눈과 입을 가리고 코와 귀
를 여는 겁니다. 눈과 입은 많이 쓰면 쓸수로 피로해
지고 오해를 부릅니다. 때문에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을 쉬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잘 먹고 많이 걸어야 합니
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강하기 위해선 감동을 먹어야
합니다. 감동이 없으면 정신과 영혼이 시들기 때문입
니다. 네 번째는 얼마나 희망이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희망이 없으면 실패한 것입
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이 있는한 성공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잘될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날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일을 따라가면 돈이 생기지만 돈을 따라가면 일
이 끊긴다."
나는 이와 같은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다. 특히 첫 번째 성공 기준은 당연한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IMF라는
된서리를 맞은 우리는 한 달에 1백만 원으로도 살아
야 하고 30만 원으로도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 살고
있다. 그 전에는 도저히 한 달 수입 70만 원으로는
못 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야' 한다기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
전히 없는 사람만 서러운 세상이지만 어쨌든 적게 쓰
는 것. 아껴쓰는 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세상이 됐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
차피 최소한의 수입만으로 살아야 하니까. 따라서 문
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랑스러워하는 일을 하느
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을 억지로 하거나 시간이나 떼우기 위해 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연구하게 되고 창조력을 발휘한다. 그러다 동기 부여
가 되고 하루하루 실력을 쌓아가다보면 그 분야의 전
문가가 된다. "일을 따라가면 돈이 생기지만 돈을 따
라가면 일이 끊긴다." 우리나라의 최고 배우인 안성기
씨가 자주 하는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그 일을 좋아하게 되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 그 자
리에 그 사람이 가장 적절하다는 인식이 쌓이면서 수
입도 늘어나게 된다. 굳이 수십억 원을 모으지 않아
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이런 것이 다
원화된 사회의 좋은 점이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의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김 교수의 견해에 나는 21세기의 새로운
성공 기준을 몇 가지 보태고 싶다. 먼저 문화를 향유
하는 능력이다. 즉 뮤지컬과 영화 콘서트 등을 얼마
나 관람하고 즐기는가. 책을 어느 정도 보는가. 이는
단지 경제적 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옷을 사는
데는 수십만 원씩 쓰면서도 몇만 원짜리 연극 한 편
보면서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 사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단돈 3천 원짜리 시집을 사는 것
에도 인색한 사람들이 4천 원짜리 커피는 잘 마신다.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성공한 사람들이 아
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다. 허울만 요란할 뿐
마음은 한없이 쪼들리면서 생활할 뿐이다. 21세기엔
문화 생활을 많이 할수록 성공한 사람이다. 자주 보
는 것 못지않게 감동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
건 많이 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쥐라기 공원'이나
'베트맨' 같은 영화도 좋지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
가'나 '파고'같은 영화도 한번 보길 원하고 싶다. 비록
적은 횟수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굳이 횟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존경지수다. 얼마
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느냐가 성공의 척도
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존경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근대화의 산물인 졸부들은 사회적으로 냉대받
기 쉽다. 우리 사회가 서구 사회처럼 흔쾌하게 부자
들의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까닭은 온갖 부정부패
에 힘입어 돈을 번 부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장인을 '마에스트로'라고 부른다. 예술가든,
체육이든, 기술이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의
전문가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한 달에 평균 2백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이느 독일가구의 평균적인
수입에 비해 결코 많지 않은 수입이다. 그러나 그들
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어느 대기업 사장
이나 정치가 못지않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마에스트로야말고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자기 만족도인데 가장 중요한 성공의 척
도일 수 있다. 김중기 교수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했듯이 아무리 돈
을 많이 벌고 아무리 존경받아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
한다면 아미 인생의 실패자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학
선배는 대학 때부터 스킨 스쿠버에 미쳐 살았다. 그
선배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면 바다로 달려가는
게 일이었다. 제주도부터 사이판이나 몰디브까지 전
세계에서 스킨 스쿠버를 할 만한 곳이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응용통계학의 출신인 그는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만 스킨 스쿠버숍을 차렸다. 회원을 모
집해서 바다를 탐색하거나 장비를 파는 것이 그의 일
이다. 물론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하
지만 그는 "숫자와 싸우는 것보다 물고기와 노는 것
이 휠씬 재미있다"고 한다. 현재 그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을 좋아한다. 따라서 성
공한 사람이다. 그러면 직업을 바꾼 나는 성공했는
가? 나는 가끔 이렇게 자문해본다. 나는 감히 성공했
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평균 일주일에 사나흘만
일을 한다. 물론 더 일을 할 수도 있고 하고 싶기도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한계가 있다. MC든, 연기든 일
단 캐스팅이 되어야 하는데 더 많이 써주지(?)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시
간이 많다. 나 자신을 돌보고 내게 투자할 여유가 있
는 '시간의 부자'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살 수 없다. 게다가 나는 내 일에 만
족하고 내 일을 사랑한다. 때문에 누군가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내가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 바꿀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 존경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
면서 살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굳이 성공한 사람이
란 말을 듣기 위해 발버둥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좋
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성공은 자연히 그 결
과로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부정을 저지르면서까
지 조급하게 성공을 이루기보다 조금 늦더라도 정직
한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 나는 이런 세상
을 꿈꾼다. 내가 우리 사회의 중견이 될 때, 지금부터
10년쯤 지난 뒤에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나쁜 사람
이 잘되는' 사회가 아니길 바란다.
일상을 바꾸면 분위기도 바뀐다.
하루아침에 인생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상
을 조금만 바꾸면 인생이 바뀌고 더 나아가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아카누키'가 뭐길래
"너 누가 '아카누키' 시켜줬냐?" 좀 잘 나간다 싶은
후배에게 한 선배가 무든다. "그거야 형이죠." 후배는
대답했다. 선배는 무명이었던 후배를 먹여주고, 재워
주고, 가끔 옷도 사줬다. 그 덕에 후배는 어려운 시절
을 보내고 제법 유명세를 타게 된다. 연예계에서는
이런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걘 아카누키만 좀
하면 가능성 있겠다." "잰 아카누키가 아직 덜 됐어."
"넌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아카누키 좀 해라." '아카
누키'가 됐느냐 안 됐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연예인들
은 아카누키를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그
리고 완벽한 아카누키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그를 한
사람의 탤런트나 가수, 개그맨으로 인정해준다. 도대
체 아카누키 뭐기래 이 난리들일까. 아카누키는 일본
말인데 '아카'는 때, '누키'는 벗기란 뜻으로 이른바
'때 벗기기'란 뜻이다. 흔히 연예계에서 사람의 촌티
를 벗긴다. 세련되게 만든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처음
에 촌스러웠던 사람도 몇 번 TV에 나오다 보면 아주
세련되게 변한다. 톱스타를 불러놓고 그들의 데뷔 시
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악취미(?) 프로가 있는데 스타
들의 데뷔 시절을 보면 한결같이 존스럽다. 한 예를
들면 가수 이선희의 데뷔 때와 아카누키가 된 후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그녀는 아줌마 파마에 검은테
안경을 쓰고 새까만 얼굴로 지난 1981년 강변가요제
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촌스럽던 그녀가
순식간에 인기 가수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녀의 변해가는 모습, '아카누키'가 돼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선희뿐만 아니라 대부분 연예인들의 데뷔 시
절은 뭔가 어색하고 투박하고 모자라 보인다. 일상에
젖어 있는 모습, 촌스러움의 때를 벗지 못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아카누키가 된지 비싼 옷을 입고 헤어
스타일을 고치고 좋은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그건 겉모습보다 습관과 사고 방식의 문
제다. "너, 이제 좀 배우 같다. 얘." 데뷔작인 '도깨비
가 간다'에서 함께 공연했던 이미숙 선배가 내게 한
말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거의 2년 만에 유인촌 선배
가 주연하는 '파우스트'공연 때 우연히 남산의 국립극
장 로비에서 만났다. "그럼, 그 전엔 제가 배우같지
않았습니까?" "말이라고 하니? 배우 같아 보이는 게
쉬은 게 아니야, 연기한다고 해서 다 배우가 아니니
까." "그럼 지금은 흔히 말하는 '아카누키'가 좀 됐나
요?" "그래, 하자만 옷만 잘 입는다고 아카누키가 되
는 건 아니야. 배우는 뭔가 분위기가 있어야 돼." 사
실 그날 난 옷을 썩 잘 입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골덴스리버튼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미숙 선배의 눈엔 뭔가 달라진 것처
럼 보였나 보다. 지금까지도 그놈의
'아카누키'는 나를 괴롭힌다. 사람들이 날 찐짜 배우
로 인정할 때까지 노력을 그치지 않겠지만 도무지 아
카누키의 끝은 보이질 않
는다.
"어쩐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
연극계 선배인 이주실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다. 20
년 전 일본으로 공연을 갔는데 극장에서 일본측 스태
프와 배우들 그리고 한국 스태프와 배우들이 처음 만
나게 되었다. 그런데 누가 소개하기도 전에 일본 배
우 한 사람이 우리 나라의 스태프들을 제쳐놓고 배우
들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어떻게
배우인지 알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배우 생활을 10여 년 하다 보면 배우를 알
아보게 되지요. 아무래도 아곳까지 오신 분들은 한국
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배우 같
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 겁니다." 그 일
본 배우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 이야기를 듣
고 나니 미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친구
가 그녀를 위한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말이 생각났
다.
"마릴린과 함께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걷고 있을 때였
어요. 그녀는 화장도 않고 평범한 버버리 코트에 머
리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저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었
죠. 두 시간이 넘게 돌아 다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옆을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도 마릴린을 알아보
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아직 널 모르는
사람이 많은가 봐"라고요.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하더
군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사람들이 날 알아보게 해
볼까?" 그녀는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어요. 갑자
기 그녀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
는 것 같았고 순식간에 그녀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느
껴지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상황이 180도로 바뀌더
니, 순식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사
인 공세를 펴는 거였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저는 아
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답니다."
지난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 휴가를 갔을 때였
다. "혹시 예술 계통에 종사하지 않으십니까?" 뒤에서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호텔은 매주 토요일마다 로비 라운지에서 부부와 연
인들을 위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끝날 무
렵, 결혼한 지 3년 됐다고 부부가 우리에게 말을 걸
었다. "뒤에서 보니까 두 분이 너무 정다우셔서 부럽
더군요.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
요? 저, 혹시 미술이나 음악 하시는 분 맞죠?" 명색이
탤런트인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난감하고 어색했다.
나는 그 부부에게 "저는 연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어쩐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 레크레이션할
때 보니까 표현도 풍부하시고 분위기가 왠지 평범한
사람 같지 않더라구요." 그들은 "알아보지 못해서 미
안해요. 우리 부부가 워낙 TV를 안 봐서..."라고 말했
다. 하지만 내 기분은 썩 바쁘지 않았다. 연기를 시작
한 지 만 2년 4개월 만에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뭔가 예술할 것 같은 사람"이란 소릴 들었으므로. 그
러고 보니 결혼식 때가 생각난다. 오미희 선배, 최수
종 하희하 부부, 김서라, 이병헌, 김찬우, 궁선영 등
바쁜 스타들이 함께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극하는 친
구 중에서는 이재구와 김경환이 참석해 주었다. 연극
배우들은 회사에 다니는 내 '평범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아내는 나중에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친구들이 그러는데 사진 찍을 때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유독 이재구와 김경환이 튀더래요. 그
두 사람은 전혀 회사원 같지가 않았고 그렇다고 연예
인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나
요. 그래서 내가 그 두 사람은 연극배우들이라고 말
해줬더니 그제서야 어쩐지 뭔가 좀 다르더라, 하더라
구요." 모두 연극 경력이 8년이 넘는 그들은 내가 '덕
혜옹주'를 공연할 때 만난 친구들인데 같은 나이 또
래의 내 친구들에 비해 젊고 섹시(?)해 보였다. 회사
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살도 찌고 왠지 나이도
더 들어보였다. 하긴 회사원이 몸매나 외모로 먹고
사는 건 아니니까.
ㅅ새없이 달려가는 무한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와
같으 삶
만약에 나도 계속 직장 생활을 했다면? 밤새 술을
퍼마시고 새벽에 들어갔어도 어김없이 아침 6시 30분
에 일어나 전철에 올라타야 했다면?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저녁마다 술자
리와 과식으로 시달렸다면? 물론 그 생활이 불행했다
는 말은 아니다. 즐거웠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
상에 얽매여 정신없이 바빴으며 쉴새없이 달려가는
무한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와 같은 삶이었다. 기자
생활을 계속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쪘을
것이고(지금은 그때보다 9Kg이나 빠졌다!) 뭔가 '예
술' 하는 분위기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지쳐 있는 모
습이 었을 것이다. 기자는 기자처럼 보이고 배우는
배우처럼 보일 테니까.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방
송국 사람들이 "날카롭고 각이 진 인상에 여전히 기
자티가 난다"고 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왜 연기자가 됐나'하고 좌절
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
람도 내게서 기자보다 배우의 냄새를 맡는다. 기자를
그만두었을 때 난 내 일상만 살짝 바꾸었다. 늦게 자
고 늦게 일어났다. 절대로 몸에 피로를 남기지 않았
다. 술을 먹든 일을 하든 과로한 다음남은 충분히 잠
을 잤다. 그리고 매일 운동을 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일보다 대본이나 소설을 읽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대학로와 여의도 그리고 극장가를 오가며
연극과 영화를 보고 주로 배우들을 만나고 사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인상도 바뀌고 인생도 바뀌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감싸고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인생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
러나 일상을 조금만 바꾸면 인상이 바뀌고 더 낭가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텔레비전보다는 책을 . 비디오
보다는 영화를, 그저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
시간을 쪼개서 부지런히 연극이나 음악 공연 등을 보
기 위해 돌아다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풍족해지는
정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루에 30분씩만 시간을
내서 헬스 클럽에 다닌다든지, 그것도 어럽다면 자동
차를 이용하는 대신 걷기만 해도 얼굴은 달라진다.
스트레스가 없어지면서 몸이 그 변화를 눈치채고 그
변화는 얼굴과 외모에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그건 하
루나 이틀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년, 2년 꾸
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나타난다. 아직도
설익은 내게 "뭔가 예술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해
준 설악산의 그 부부에게 감사들 드린다. 그 말에 힘
을 얻어 나는 오늘도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자유인의
일상을 산다.
왜 우리는 큰 야망만 가져야 한는가?
왜 반드시 고속도로를 뚫고 유조선을 만드는 것만
이 젊은이들이 할 일인가?
큰일이 따로 있다?
"사람들이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젊은이 중의 하
나는 비디오 가게 주인일 게다. 오죽 할 일이 없으면
좁은 비디오 가게나 지키고 있는 것일까. 세상은 넓
고 할 일은 많다. 야망을 가져라, 큰 뜻을 품어라.
Boys Be Ambitious!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할
일'을 뭘까. 아마도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만
들고 바다를 간척해서 땅을 넓히는 일들을 말하는 것
일 게다. 아니면 자동차나 조선 사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영화 보기를 미치도록 좋
아하는 젊은이가 있다. 치자. 그에겐 비디오 가게 주
인이 가장 알맞은 직업이다. 전에 살던 동네에 비디
오 가게가 두 군에 있었다. 하나는 최고 비디오, 또
하나는 희망 비디오였는데 이름과 서비스의 내용은
달랐다. 최고 비디오는 '최고' 였지만 희망 비디오는
'희망'이 없었다. 최고 비디오가 좋은 이유는 무엇보
다도 연체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비디오의
대여 기간은 1박 2일이다. 하루 늦게 반납하면 1원의
연체료를 내야한다. 그건 두 비이오숍이 같았다. 그러
나 최고 비디오의 주인 아저씨는 내게서 연체료를 받
은 적이 없다. 하루 정도 늦는 것은 당연히 봐주고
2-3일 정도도 양해해준다. 내가 미안해서 연체료를
내려고 하면 언제나 싱글싱글 웃으며 "아이, 괜찮습니
다."라고 말한다. 한 번은 여름 휴가 때 깜박 잊고 '대
부 3'과 '베트맨'을 빌렸다가 휴가가 끝나고 나서야 돌
려준 적이 있다. 일주일 만이었다. '대부 3'은 오랴된
것이라 괜찮았지만 '베트맨'은 당시 막 출시된 것이어
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s는 미안한 마음으로 미리
연체료 7천 원을 준비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저
씨는 싱글싱글 우승며 "다움부터 일찍 갖다주세요"하
는 것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제가 오히려 미안합니
다. 이번엔 그냥 받으세요." 난 카운터 위에 연체료를
올려놓고 왔다. 그 다음부턴 꼬박꼬박 제때 반납하게
됐다. 또 다시 마안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였
다. "액션물로 하나 주세요." "또 늦게 가져올 거예
요?" "아뇨. 이번엔 일찍 반납할게요. 지난번엔 죄송
했습니다." "내일 꼭 돌려주세요" 희망 비디오 가게의
주인 아줌마는 언제나 이렇게 내데 반납을 독촉하며
비디오를 대여한다. 게다가 은근히 연체료에 대한 협
박(?)도 잊지 않는다. 또 하루라도 늦게 가져오면 "연
체료 내세요"하며 반드시 돈을 챙겼다. 물론 희망 비
디오의 주인 아줌마가 자본주의 상도의에 더 철저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하루라도 늦게 반납하면 그 비
디오를 찾는 사람이 못 보게 될 고 그만큼 그녀는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따라서 제때 반납하는 것은
비디오를 빌려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첫 번째 조건이
다. 비디오 가게는 보통 낮 12시에 문을 열고 밤 12
시까지 영업을 한다. 최고 비디오와 희망 비디오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희망 비디오에서 '드라큐라'를 빌
렸다가 1박 2일을 넘기고 다음날 가져다준 적이 있
다. 난 비디오 가게가 문 열기만을 기다려 정확히 12
시 10분에 반납했다. "연체료 천 원 내세요." "아줌마.
문 열자마자 가져왔는데요." "오늘 며칠이죠?" "12일
이요." "이거 언제 빌려 가셨어요?" "엊그제요." "며칠
지났죠?" "3일......" "거기 써 있죠? '대여 기간은 1박
2일입니다. 1일 연체마다 천 원의 연체료가 붙습니다'
라고." 맞는 말이었다. 난 천 원을 냈다. 하지만 마음
은 찝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따 저녁 때 갖다줄
걸.' 최고 비디오와 희망 비디오숍의 두 번째 차이는
주인들의 태도다. 최고 아저씨는 언제나 날 아는 척
한다. "요즘 연극 하신다면서요, 손님들은 많아요?"라
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날씨가 무척 덥죠?" "어제 보
니까 KBS에 나오시던데요. 그 프로 재밌드라구요"등
등. 난 기분이 좋아져서 한 개 빌릴 걸 두 개 빌린다.
하지만 희망 비디오 아줌마는 날 전혀 아는 척하지
않는다. 분명 TV에서 날 봤을 텐데...사교성이 없는
걸까. 그녀는 언제나 선생님처럼 근엄한 얼굴로 카운
터에 앉아 있을 뿐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씬 언제나
싱글거리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영화를 무척이
나 좋아한다. 때문에 해박한 영화 지식을 갖고 있다.
웬만한 영화 감독과 배우의 출연작은 줄줄이 외우고
있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SF면 SF. 모르는
게 없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보는 안목은 영화평론
가의 수중이어서 나처럼 예술영화깨나 애호하는 매니
아들은 언제나 최고 비디오를 찾는다. 그러나 희망
비디오의 아줌마의 영화에 대한 식견은 결코 최고 비
디오 아저씨를 따라가지 못한다. 둘다 30대 중반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가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반면 희
망 비디오 아줌마는 돈벌리오 가게를 하고 있다는 느
낌을 받는다. 비디오의 절대량은 희망 비디오가 더
많다. 그쪽이 최고 비디오보다 약 2평 정도 넓기 때
문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이런 단점을 손님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정확하게 추천하는 것으로 보완
한다. 게다가 최고 비디오는 대중성은 좀 떨어져도
수준 높은 작품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
다. 회망 비디오가 좀 더 넓다고 해서 손님을 위한
서비스가 더 좋은 건 아니다. 한 번은 비디오를 반납
하로 밤 12시 넘어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런 제기랄. 또 연체료 내게 생겼네.' 하지만 최고
비디오는 결코 이런 일이 없다. 반납기가 있기 때문
이다. 비디오 가게마다 반납기가 다 있는 건 아니다.
다음날 난 희망 비디오에 가서 손남의 입장에서 정중
하게 요구했다. "비디오 반납기를 설치해 달라"고. 희
망 아줌마는 "알았어요. 일단 연체료나 내세요."라며
예의 그 연체료 타령을 했다. "반납기가 없는데 어떻
게 반납을 합니까?" "그러니까 12시 이전에 오셔야죠.
저희도 잠은 자야 하지 않겠어요?" "다른 데는 반납
기가 있던데." 결국 희망 비디오 주인 아줌마는 나 말
고도 몇몇 손님의 거센 항의에 부딪쳐 결국 반납기를
설치했다. 가끔 비디오 반납기가 꽉 차는 경우도 있
다. 희망 비디오 가게앞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영락
없이 다음날 다시 갖다줘야 한다. 그것도 연체료 천
원을 덧붙여서. 물론 최고 비디오 주인 아저씨는 그
럴 때면 언제나 "반납기가 다 찼을 때는 옆 문방구에
맡겨주세요."라는 문구를 써서 붙여 놓는다. 그건 아
주 작은 일이지만 손님을 배려하는 진정한 서비스 정
신인 없으면 할 수 없다. 결론은 간단하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럼 희망 비디오를 이용하지 말고 최고 비디
오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니냐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라고. 물론 나는 최고 비디오를 더 자주 애
용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희망 비디오를 이용할
때도 있다. 그건 희망 비디오가 최고 비디오 보다 우
리 집에서 약 2백m 정도 더 가깝다는 점 때문이다.
사람의 게으름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다신 오지 말
아야지' 하면서도 가끔은 희망 비디오에 가게 된다.
그러나 최고가 희망보다 더 먼 곳에 있으면서도 이용
횟수면에선 8 : 2정도로 앞선다. 그건 최고 아저씨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과 운영의 묘 때문이다.
비디오 가게를 하나 해도 이렇게 '할 일'이 많다.
비디오 가게를 하나 해도 이렇게 '할 일'이 많다.
예전엔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저 돈벌리 삼아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막강한 영화 지식과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영화 마을'같은
비디오숍 체인을 만들고 '비디오 뱅크' '비디오 세계'
같은 무료 잡지를 만들면서 비디오숍 시장도 많이 바
뀌었다. 이제는 조그만 비디오 가게도 주먹구구식으
로 했다간 곧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휴가도 가지 않는다. 한 여름이건 추석이건
설이건 거의 1년 365일 문을 연다. "아저씬 여름 휴가
안 가세요?" 어넨가 내가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
다. "영화 보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휴가는 뭐 하러
갑니까. 전 여행 같은 것보다 비디오 보는 게 훨씬
좋거든요. 어디 다른 데라도 가 있으면 새로 출시된
비디오가 도착했는지 어떤 개봉관에 손님들이 몰리는
지 궁금해서 못 견뎌요." 오히려 휴가가 괴롭단다. 그
리고 손님이 없을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비디오를 마
음껏 보고 영화광인 손님이 dhays 대화를 나눈다. 때
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가보지 않아도 칸느 영화
제니 베니스 영화제니 하면서 화제에 올린다. 그는
취미가 곧 일이고 일이 취미이다. 이런 그에게 '비디
오 가게를 지키는 것은 꿈도 없이 좁은 공간을 지키
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꼭 큰 야망을 가져
야 하는가. 왜 반드시 고속도로를 뚫고 유조선을 만
드는 것만이 젊은이들이 할 일인가. '쥐라기 공원' 한
편이 우리 나라의 자동차 몇백만 대 판 돈을 벌어들
이지 않았는가. 문화도 막강한 경제 상품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아마 비디오숍 주인으로 성공할 것
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로 전국적인 비디
오숍 체인점을 열지도 모른다. 아마 대기업 이사 부
럽지 않게 돈도 벌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꼭 더 큰
비디오숍을 갖지 못한다고 ㅎ 대기업 이사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 해도 크게 상관 없다. 그는 일할 때 가
장 재미를 느끼는 축복받은 사람이니까.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부터 빨간 줄을 그어나간다.
18개를 지웠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다행
히 19개를 지웠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남은 나머지
하나의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해나가야 한다.
한 우물을 파면 하늘이 보인다.
대체로 천재는 세 명의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선생님은 대개 유아 시절에 만나게 되는 선생님
이다. 이를테면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피아노 학원이
나 무용학원 또는 미술학원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런 선생님들이다. 대개 음악은 7세 전후, 체육은 10세
전후, 그리고 다른 학문 분야는 15세 전후에 천재성
이 발견된다고 한다. 첫 번째 선생님들은 대개 아이
들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아이의 천재성을 발견하면, 곧 선생님은 더 이상 가
르칠게 없다는 시실을 깨닫는다. 그러면 선생님은 천
재성이 있는 아이를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
에게 맡긴다. 천재는 두 번째 선생님과 만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첫 번째 선생님보다 더 깊은 인간적인
유대를 맺게 된다. 아이는 여기서 대부분 자산의 갈
길을 결정한다. 아이는 선생님을, 선생님은 아이를 만
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둘의 만남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두 번째 선생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이에게 쏟아붓는다. 아이 역시 선생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모든 것을 수용한다.
이제 두 번째 선생님마저 아이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정도가 되면, 드디어 세 번째 선생님을 만나
게 된다. 세 번째 선생님은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혹은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마에스트로(거장)이다. 거장은 제자를 알아보고
제자는 거장을 존경하게 된다. 스승은 뛰어난 재능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제자를 만났다는 사실과
그 제자를 길러내 또 한 사람의 훌륭한 거장을 양성
한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제자 역시 당대의 대가를
만났다는 사실과 그를 모델로 삼고 노력한다면 언젠
가는 그처럼 될 수 있다는 기 대 때문에 흥분한다.
스승은 혼과 열을 다해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
의 말과 몸짓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받으려고 한
다. 제자와 선생님의 관계는 연인보다 더 밀접하게
발전한다. 서로를 보지 않으면 병이 날 정도가 된다.
때때로 그 관계는 부부 사이보다 더 깊어진다. 천재
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전
공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는 오직 바이올린만 켜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고 생가하게 된다. 가끔 수학을 잘하거나 무용을 잘
하는 친구를 볼 때, 그저 '저런 친구도 있구나'하고 생
각할 뿐, '나도 저렇게 해봤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
는다. 물론 바이올린을 좋아하면서 피아노도 치거나,
발레를 하면서 현대 무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같
은 음악이나 무영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성장하면서 관심의 영역은 좁혀진다. 음악이 좋
아서 계속 공부를 해나가지만 어느 순간 현악기든 관
악기든 피아노든 택하게 되고 덜 관심이 가는 분야는
제외된다.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것은, 피아노든, 수
학이든, 발레든, 자신과 상관없다고 단정짓는다. 다른
친구들이 바이올린 한 시간, 피아노 한 시간, 스케치
한 시간에 하루를 소비할 때 그는 하루에 6시간에서
8시간 동안 바이올린만 켜대는 것이다. 때로는 까맣
게 밤을 새우기까지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
니고 그저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
리 옆에서 말려도 이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
버린다. 결국 천재성이 발견된 이후부터 성인 되기까
지 그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 죽어라고 바이
올린만 켜게 된다. 피아노나 수학, 발레 등을 오갔던
아이들은 평범한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아
이들이 평범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동안 그는 오직 바
이올린만 알고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데 모든 시간
과 노력을 쏟는 한 사람의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이
다.
'포기'의 미학
예술이란 수없이 반복해서 익숙해진 기술이다. 가
야금의 대가였던 한 연수가는 고무신에 쌀을 담아 남
산에 올락 한 번 연주 할 때마다 쌀알 하나를 고무신
에서 꺼내 그 고무신을 다 비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연주할 때마다 쌀알 하나씩 고무신에 담아 다 채웠질
때까지 수련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을 하고서도 대가
가 되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가
야금의 대가는 오직 가야금만을 위해 살았고 가야금
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이를테면 집안 살림이나 친척
들의 경조사, 친구들과의 인간 관계 같은 것을 일찍
감치 포기해야 했다. 어느 분야에서 천재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대가가 되는 것은 사실은 그 한 가지
를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과
감히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단지 예술이
나 학문의 천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만
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세
상에는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없다. 결혼만 해도 그렇다. 한 사람
을 만나서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나 남편보다 돈이나 일 역시 덜
수중하게 여긴다고 맹세하는 행위이다. 또 옛 애인이
나 절친한 친구, 형제라 하더라도 배우자보다 우선위
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관습이다. 부모나 자식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느 부부든지 자신의 아내나 남
편보다 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 거기서부터 불
행은 시작된다. 결혼은 그만큼 이기적이다. 아이를 낳
는 것은 또 어떤가. 아이를 기르는 것은 아이가 없었
을 때 부부가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거나 2주일에 한
번씩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는 것 한 달에
한 번씩 뮤지컬을 보거나 혹은 여름 휴가 때의 해외
여행 같은 것은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가
혼자 학교에 갈 때까지 24시간 아이에게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을 것이며, 그렇게 희생하는 부모와 자식간
의 사랑을 얻겠다는 종교보다 더한 신념이 없으면 일
찌감치 아이 갖는 일은 포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다. 때대로 천재들의 성장 과정은 인생의 수많은 선
택 앞에 선 우리들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도 하
다. 어느 직업을 가질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 자신이 아는 직업(또는 직
장)을 20가지 정도 적어놓고 제외서켜 나가는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부터 빨간 줄을 그어나간다. 17
개가 지워졌다면 선택은 3개지 중의 하나로 줄어든
다. 18개를 지웠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다
행히 19개를 지웠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남은 나머지
하나의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직장에 지원서를 내는 게 좋다. 아
마도 그 마지막 리스트가 당신에게 꼭 맞는 천직일지
도 모른다.
나는 나를 세일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그 무
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얻었다.
힘내라, 프레스트 검프
한 젊은이가 릴케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
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쓴 작품인데 좀 봐주
십시오." 젊은이는 릴케에게 습작 노트를 건넸다. 릴
케는 젊은이의 노트를 흘낏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작
가가 되고 싶은가?" "네, 저는 진정으로 훌륭한 작가
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이렇게 글을 들고
다니며 보여줄 필요가 없네." "네?" "아침에 일어나
글 쓰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면 자넨 이미 작가
지." 나는 배우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직 연기하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너무 많
은 잡스러운 생각에 나 자신을 맡겨버렷다.
이동진
그는 은행에 다니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다. 학력은
고졸이다. 나이는 30대 후반, 그는 현재 평촌의 49평
형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그 아파트를 혼자 힘으로 마련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으며 소위 학벌이 좋
은 것도 아니었다.4년 전에 9천9백만 원에 분양받아
아파트가 지금은 3억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이른
바 재테크에 성공한 셈이다. 물론, 그 나이에 그보다
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도 많
다. 나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어떻게 재테크할 것인지
에 대해 말하려하는게 아니다. 그느 말하자면 '포레스
트 검프'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십수 년 동안 그는 오
직 '아파트'만 생각했다. 날 만나기만 하면 청약에 금
같은 걸 들어놓으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발이 닳도록
신도시를 돌아다녔다. 아파트 모델 하우스는 빼놓지
않고 들렀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아파트뿐이었다.
그는 작은 평수부터 시작해 점차 평수를 넓혀갔다.
그의 목표는 49평이었으며 그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순진할 정도로 하나만 생각
했다. 그 우직함에 박수를 보낸다. "일단 아파트를 꼭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쯤은 산 거나 마찬
가지다." 이것이 그의 지론이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만 생각하면 모든 생활이 그 목표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그는 49평형을 위해서 자신과 부인, 그
리고 노부모와 아들까지 식구 모도가 '아파트 장만'의
시스템 하에 움직였다고 한다. 이를테면절약 같은 것
을 통해서, 그서도 눈물나는 절약을 통해서.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 적
이 없다. 그것은 '즐거운 절약'이었다. 풍요로운 미래
를 미리 그려보는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배가 불렀고
신났다. 아파트는 그의 신앙이었으며 삶 전체를 바꿔
놓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였다. 나는 배우인가? 연기가
곧 나의 신앙이며 내 삶 전체를 바꿔놓는 거대한 이
데올로기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한눈을 파
는 개구쟁이에 불과했다. 인생은 깃털처럼 가볍게 보
였다.
"지난해 42세를 일기로 사망한 우리의 친구 마크
그룬월드가 인쇄 잉크의 혼합돼 만화로 되살아나게
됐습니다.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우리의 곁을
떠난 지 꼭 1년 만의 일입니다. 그는 평소에 부인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죽으며 유해가루를 만화 인쇄잉크
에 섞어달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의 1985
년도 유작 '스쿼드런 슈프림'의 한정판 제작을 위해
오하이오 주 켄턴의 인쇄소에서 잉크와 유골을 혼합
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만화를 사랑한 나머
지 죽어도 그 일부가 되고자 했던 고인의 뜻이 실현
되게 됐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NO 세일은 자존심
나는 배우인가?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콘크리트와
섞어 방송국을 짓는 데 쓰라거나 연극무대를 세우는
데 써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 도대체
그런 발상조차 할 수 있을까? 이미지 메이커 차영 씨
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잇다.
백화점에 가면 절대로 바겐세일을 하지 않는 고급
브랜트가 있다. 정상가격에 산 옷을 다른 사람은 세
일 기간에 절반 가격에 샀다고 치자. 정상 가격에 산
사람은 얼마나 분한 마음이 들겠는가. 돈이 아까운
것은 나중 문제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산 것에 대한
속으 기분이 들면서 신뢰할 수 없는 브랜도로 단번에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다 다시 그 브랜드의 옷을 산
다고 해도 세일 기간을 기다려서 사게될 것이다. 그
러나 세일을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브랜드
라면, 다른 브랜드에 비해 다소 비싸다는 느낌이 들
어도 NO세일을 고수해온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 때문
에 선뜻 그 옷을 사게 될 것이다. 이것이 NO세일의
자존심이다. 이처럼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세일하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누구나 한
창 시절이나 처음 사회에 진출했을 때는 나름대로 이
루고자 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결혼도
하고 생활에 발목이 묶이면서 자신을 세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자신
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역시 연예인의 경우에도 NO
세일은 고수한 사람들은 결국 정상에 우뚝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탤런트 김혜자 씨의 경우, 방송 출현료보
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쉽게 벌 수 있고 많은 연예인
들 사이에 관례가 되어 있는 그 흔한 백화점 일일판
매 한 번 하지 않고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나라
최정상의 연기자이다. 그녀의 주장은 "백화점에서 자
신을 팔게 아무것도 없도"는 것이다. 오로지 연기를
통해서만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배우인가? 나 스스로를 세일한 적이 없는가?
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처럼 자시을 바겐세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가? 그렇지 않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조금의 먼 미래에 실현될 더 큰 것을 놓친 적
이 많았다. 내 이미지를 고수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
기부다 권태를 견디기 힘들어서, 더 좋은 역에 캐스
팅될 것 같지 않은 불안감 때문에 여기저기 나를 '팔
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직 한 가지밖에 않는다면, 당신
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당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고
서라도 얻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것을 얻었다. 죽어서까지 오직 되고 싶은 그무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과 하나이다. 기금까지 자신
을 세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면, 당신은 충분히
날 비난할 자격이 있다. "넌 배우가 아니다"라고. 그
런 당신을 만난다면 무릎을 꿇고 당신처럼 살게 해달
라고 기도하겠다.
IMF는 프리랜서를 부른다.
오히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을 때 더 과감하게 새
로운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는 일에 돈과 시간을 아끼
지 않아야 발전이 있다.
반갑다, IMF야
이제 IMF이야기는 지겹다. 누구나 "IMF 때문에"라
고 말하고 만 나느 사람마다 "글세, IMF나 끝나야 뭘
하지"라고 핑계대기 일쑤다. 실제로 무섭고 엄청난 시
련이다. 누구나 극복을 말한다. 이 위기를 잘 넘기자
고 역설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IMF가 반갑기만 하
다. IMF는 위기가 아니라 신이 우리 나라에 내려준
축복일 수도 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기 때문이
다. 지난 1994년 1월 처음 탤런트를 데뷔했을 때, 나
는 88년형 프레스토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그 당시
50만 원을 주고 구입한 중고차였는데 10만km쯤 달린
치였다. 칠이 좀 벗겨져서 겉보기에는 흠이 있었지만
달리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석 달쯤 잘 몰고
다녔는데 어느 날 무술감독을 하는 친구가 "차 안 바
꿀 거냐?"라고 물었다. "멀쩡한 차를 왜 바꿔요?" "아
유, 폼생폼사라고, 저런 고물차를 요새 누구 몰고 다
녀? 그것도 언예인이 , 스타일 구겨지잖아!" "그런가
요?" "그럼. 봐, CF에라도 캐스팅이 돼서 출연료를
요구할 때 말야, 그랜저 타고 온 놈하고 티코 타고
온 놈하고 누가 더 있어 보이겠어? 그랜저 타고 온
놈이 더 있어 보일 거 아냐. 그런 놈은 '천만 원 주
쇼'해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티코 타고 온 놈이 천만
원 달라고 하면 우습게 본다니까. 그래서 개런티가
깎인다구. 요즘엔 있어 보여야 캐스팅도 잘된다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새 차를 살 돈이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저축한 돈을 찾아서 스쿠프를
뽑았다. 그리고 그 차를 아직까지 몰고 다닌다. 스쿠
프는 대학 다닐 때 내 '이상'이었다. 외모도 잘생겼고
잔 고장 없이 잘만 달린다. 그러나 새 차였음에도 불
구하고 스쿠프는 동료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소형차에 불과했다. 그들은 거의
그랜저나 포텐샤 같은 대형차를 몰고 다녔고 조금 얼
굴이 알려진 친구들은 쉽게 BMW나 벤츠 같은 고급
차를 몰고 다녔다. 연예인은 좋은 차를 타야 한다는
것. 그때 유행했던 말로 '폼생폼사' 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지방 촬영이니 뭐니 해서 기동력 있
게 움직여야 하는 연예인에게 차는 제2의 짐과 같으
니까 좀 비싸더라도 튼튼하고 안전한 차를 타야 한다
는 데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차에 대한 우
리의 인식은 아직까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야
말로 자신의 품위를 세워주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
한다. 자신의 인격과 자신에 대한 믿음, 돈으로 환산
할수 없는 인간미 같은 것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
들은 그것을 메워줄 뭔가 다른 것을 찾는다. 많은 사
람들이 그 대안으로 자동차를 택한다. 자동차를 자랑
하는 사람은 아마 자동차 말고는 자랑할 게 없는 사
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차,
좋은 집 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참아주면서도 자기
아내, 자기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 흉
을 본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오히려 사람을
사랑한다느 사실을 자랑하는 게 한낱 철덩어리나 콘
크리트에 불과한 물질에 대한 자랑보다 나은 게 아닐
까. 어제부터 사랑과 맑은 정신, 교양이 드러나는 품
격 같은 것이 광물 부품보다 더 낮은 가치를 갖게
된 것인지......
연예인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실력을 기르기도 전에
좋은 차부터 사고 본다. 데뷔한 지 한 달도 안 된, 갓
20세가 될까 말까 한 신인들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도요다'니 '사브'니 하는 외제차를 몰고 나타난다. 그
런 차들은 대개 매니저가 사준 것들이다. 매니저들은
자신들이 쏟아부은 돈이 있기 때문에 신인들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고 한다. 여기저거 아무 프로
에나 나가서 인기를 얻고 그걸 바탕으로 CF를 찍고
또 지방 공연으로 돌리고...... 최소한 차값의 몇 배는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신인일 때의
참신함은 사라지고 쉽게 싫증나는 얼굴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어늘 날인가부터 슬그머니 자취가 사라진다.
요즘 가수의 생명은 평균 3개월이다. 3개월 안에 히
트를 쳐서 돈을 벌지 않으면 곧 도태돼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돈 있는 사람이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은 없다. 돈 있는 사람은 외
제차도 타고 모피도 입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
의 정신이니까. 또 IMF가 강조하는 철저한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을 것이다. 어쨌든 IMF 때문에 ahes 사
람이 긴축에 익숙해진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겐 다행이
다. 나는 매지저도 없고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이 스
폰서를 해주는 것도 아니며 뭐든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경제적인 면도 그렇다. 내 수입과 수준에는 스
쿠프 94년형이 딱 알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축도
해야 하고 내 손으로 마련한 아파트 융자금도 갚아야
하며 또 옷도 사야 하고 여기저기 쓸 게 많다. 속으
론 곪아가는 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대형차를 타고 다
닐 여유가 없다. 그 전엔 차를 산지 1년도 되지 전에
"차 언제 바꿀 거야?"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엔
어느 누구도 차 때문에 문제를 삼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내가 쌍문동에 산
다고 하면 "쌍문동이요? 연예인들이 안 살 것 같은
동네에 사시네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은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아니면 동부이촌동이나 일산 신
도시 같은 곳에 살아야 제격이 아니냐는 것이다. 글
쎄, 쌍문동도 살기 좋은 곳인데. 무엇보다 5분만 걸어
가면 북한산이 나오는 자연 친화형 동네라는 점이 나
는 마음에 든다. 다행히 IMF이후엔 내가 사는 동네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당장 먹
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무슨 폼생폼사며 사는 동네의
수준을 놓고 따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의
관심이 체면보다 실속으로 쏠린 것은 정말 다행이다.
평생 직장에서 평생 직업의 시대로
내 생각에 IMF는 'I am Freeancer'의 시대다. 고학
력자들이 직업학교에 몰리고 있다. 실업의 시대를 맞
아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두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
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들도 있
다. 중년의 회사원이 다시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자
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진을 배운다든지
요리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제 평생
직장이란 개념은 없어졌다. 대신 평생 직입이란 개념
이 그 자리를 채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프리랜서가
많아지고 또 대우받는 세상이 됐다. 그리고 직장을
자주 옮길수록 능력 있는 사람이날 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않았다. 내친구 중에 한 놈은 지난 7년 동안 직
장을 네 번이나 옮겼다. 처음엔 철새처럼 조건이 좋
은 곳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놈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그는 '스카우터'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에 발전 가능성이 안 보이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다른 곳으로 간다. 물론 스
타우트돼가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발이 넓고 인맥이
재산인 사람이다. 이제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
까지 인원을 충원할 때 그를 찾는다고 한다. 또 다른
회사로 옮기고 싶어하는 동료나 후배들이 수시로 전
화를 해서 그의 조언을 얻곤 한다. 앞으로 이런 친구
들이 많아질 것이다. 회사를 이러저리 옮겨다니느 사
람들이 '철새'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유연하게 만
드는, 혼히 말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일조하는 존
재가 될 것이다. 이력서 한 장만으로 어떤 자리든지
앉을 수 있는 사회가 발전한 사회가 아닐까. 고시공
부 같은 어려운 관문을 한 번만 뚫으면 평생이 보장
되는 풍토는 빨리 없어져야 한다. 언론사든 대기업이
든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면접 한 번으로 스카우트되
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 앞으로는 프리랜서 출신
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역으로 부장, 과장이 프
리랜서가 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프리랜서
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자신에 대한 재투
자이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실무 경험도 저절로
쌓을 수 있고 교육도 시켜주지만 프리랜서는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재투자는 바쁠 때 하는데 아니다.
일이 없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더
자기 자신에 대해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방송이 없을 때는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한
다. 그동안 국립국악원에 다니면서 판소리를 배웠고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회화도 배웠다. 태권도와 수
영도 열심히 배웠다.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은 기본
적으로 항상 하고 있다. 내가 판소리를 배울 때는 캐
스팅이 안 돼 몇 달씩 쉬던 때였다. 그러나 목을 트
이게 히고 발성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3개월 정도 맛
보기로 배워두었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목적이 있어
서 배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1년쯤 뒤에 한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에서 MC가 필요하다며 내게 연락을 했
다. 신문의 단신에서 내가 국악원에 다니면서 판소리
를 배운다는 소식을 듣고 내 연락처를 메모해두었던
PD가 전화를 한 것이다. 결국 그 국악 프로를 진행하
지는 못했다. 갑자기 다른 프로의 해외 촬영이 잡히
면서 스케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언
젠가는 국악 프로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땐 내가
판소리를 배워두었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영어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친구
가 "느닷없이 영어는 왜 배우러 다니느냐?"고 물었다.
영어는 세계 공통어니까 잘 익혀둘 필요가 있다는 것
두말 하면 잔소리다. 언제 어디서 지금 배워든 영어
가 적절하게 쓰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세
상엔 공짜가 없으니까. IMF 시대가 되면서 프리랜서
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질 테고 IMF가 끝난 다음에도
그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IMF가 지속되든 끝나든
미래에는 지금 자신에 대해 투자를 해둔 사람만이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IMF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의식 개혁과 관계된 것이며 우리 사회의 근본
적인 변화를 뜻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건 변화를 두
려워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아이, 좀 더 예금하세요. 연예인이......"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그래도 연예인은 낫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연예인이 되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예인은 파출부
영화배우 강수연 씨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영화배우를 하면서 '강수연 갈
빗집'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우스워
요? 그래서 부업 같은 건 생각도 안 해요. 돈은 중요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지키는 데 더 중요하
죠. 영화 출연료를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1년에 서너
편씩 찍는 것도 아니구....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는
정도로 벌 뿐 그렇게 부자는 아니에요." 강수연 씨가
영화 한 편에 출연해서 받는 돈은 보통 1억 원이 넘
는다. 물론 갈빗집을 해서 성공한 연예인도 있다. 탤
런트 김종결 씨.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기업의 비리
를 합법화하는 변호사 역을 했던 연기자다. 여의도에
'신정'이란 갈빗집을 차렸는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
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음식점을 했
는데 친절과 맛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부드럽고 감칠맛 있다는 소문이 퍼져 손님이 끊이지
않다. 갈빗집을 해서 방송 출연료 수입의 몇 배나
번다는 소리도 들린다. 영화배우 박중훈 씨는 한 잡
지 인터뷰에서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
지만 사실 난 돈이 별로 없다"라고 했다. 박중훈 씨가
이정도라면 다른 연예인들은 어떻겠는가. 할 말이 없
다. 다음은 개그맨 전유성 씨의 부인이자 가수인 진
미령 씨기 쓴 책 '유성아, 뭐 먹고 싶니'에서 한 말이
다. "나 파출부예요. 미령이도 파출붑니다." 특별한 소
속 없이 오라는 프로 나가서 한탕 뛰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그 남자(전유성)는 꼭 이렇게 말한다. 그 남자
말마따라 오라는 집 없으면 24시간 실업이지만, 오라
는 집이 많으면 24시간 근무 시간인 게 우리 직업이
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 도승지로 나왔던 박진성이
라느 연기자. 매니저 일을 하는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났는데 대뜸 "전직 탤런트 박진성입니다."하고 자기
소개를 한다. 그때까지 6개월 동안 쉬고 있었으니 '현
직'이 아닌 '전직' 탤런트라는 것이다. 기발한 이름 붙
이기다. "일반ㅇ니은 하루 일당이 많아야 10만 원 꼴
인데 연예인들은 그래도 방송에 한 번 출연하면 백만
원에서 수백만 원은 벌지 않는가"라고. 하지만 내가
일리고 방송에 한 번 출연해서 수백만 원씩 받는 연
예은 없다. 1994년 모 방송국에 고정으로 출연하기로
하면서 출연료 협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담당 PD는
내게 턱없는 출연료를 제시하면서 "연예인이 방송 출
연으로 돈 법니까?"하고 말했다. '그럼 뭐 해서 먹고
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CF한 번 찍으면 몇천
만 원씩 버는데." 그러나 CF찍어서 몇천만 원씩 버는
연예인은 백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대개 방송담
당 기자들도 연예인들의 출연료에 대해 비판이다. "광
고 한 편에 3억 원, 어마어마한 액수다. 보통 사람들
로서는 꿈도 못 꾼다. 이런 잘못된 광고 출연료 관행
이 청소년들에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한
탕주의를 조장한다."
조각 만드는 데 이틀, 이틀 만에 조각 만드는 기술 익
히는데 20년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광고 한 편에 3억 원 정도 받는
연예인은 최진실 씨 정도다. 그나마 요즘은 IMF 시대라
그녀의 광고 출연료도 1억 원 정도로 줄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나라 광고계에서 최고로 통한다. 지난해
우리 나라 최고의 탤런트인 유동근 씨의 방송 수입은
2억5천만 원 정도였는데 모든 언론에서 연예인 출연
료의 거품을 빼야 한다며 난리를 떨었다. 우리 나라
최고의 바둑기사인 이창호는 10억 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고 박찬호는 한 해에 50억 원 가까운 수입
을 올린다. 그럼 기업가는 어떤가? 우리 나라 최고의
기업가가 한 해에 10억 원의 수입을 올리지 못할까?
IMF 시대를 맞아 연예인이 '마녀 사냥'의 도마 위에
오른 느낌이다. 처음에 우리 사회의 거품을 없애자는
말이 나왔을 때 마치 IMF가 연예인의 탓인양 몰아붙
인 적도 있었다. 유동근 씨나 최진실 씨 같은 연기자
들은 반짝 스타도 아니고 운이 좋아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도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관리와 노력
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노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연예인은 거품 수입이 많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린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들
에게 맞는 대우를 받는 것뿐이다. 왜 연예인의 수입
만 거품이고 운동 선수나 기업인들의 수입은 노력의
대가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조각으로 유명한 미
켈란젤로가 어느 갑부의 조각을 만들기로 했다. 단
이틀 만에 그는 조각상을 완성했다. 그러고 그는 갑
부에게 금화 만냥을 요구했다. "아니, 겨우 이틀 일하
고 금화 만 냥이라니 말이 되는 얘긴가?" 갑부가 말
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점잖게 대답했다. "조각을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렸지만 이틀 만에 조각을 만드
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지난 20년을 투자했다"고. 만
인이 보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통해 완벽한 연기
를 보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경쟁
자를 물리치고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 중요한 점은 한 달에 백만 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연예인들이 많다는 사실
이다. 그들 때문에 국민들이 그나마 잠시 시름을 덜
고 TV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부업 등을 하
면서 생활하다 단지 연기가 좋아서, 방송이 좋아서
기꺼이 출연한다. 그나마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이해하는 한 기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돈
많이 버는 연예인들 보면서 그렇게 억울하면 배우라
고" 나는 '성공'에 배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보고 내게 투자할 여유가 있는
'시간의 부자'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들도 살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 일을 사
랑한다.
나는 성공하고 싶지 않다, 왜?
그는 야망의 화신이었다. 20대에 입사한 회사에서
그 야망을 펼치기 시작해 일찍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그는 대기업의 사장이 됐으며 압구정도의 아파트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부두시설까지 온갖 건설 현장을
누볐다. 그는 오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것 외
에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
들은 그를 '신화'라고 부른다. 누구나 그에게 성공했
다고 말한다. 이명박 전 현대 건설 사장. 그의 신화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그의 신화를 소재
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세계를 누비며 일했고,
'일이 곧 유일한 취미'리고 말할 정도로 일에 미친 사
나이다. 이들은 60-70년대 근대화 세대의 상징이다.
1997년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설
문조사의 내용 중에서 50%에 가까운 학생들이 우리
사회는 "나쁜 사람이 더 잘된다."고 대답했다. 그 학
생들의 눈은 정확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나쁜 사
람이 잘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치관이 전
도된 이유는 바로 근대화 세대의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근대화 세대의 모토는 한 마디로 '잘 살아
보세'였다. 전쟁을 겪고난 후 배고픔이 최대의 고통이
었던 그들에겐 고깃국에 쌀밥만이 꿈이며 희망이었
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돈을 버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근대화 세대의 최대 가치는
'돈'이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가? 이게 유일한 성
공의 척도였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돈을 벌
수 없다.' 근대화 세대들은 이 두 구지 모토를 아침마
다 외쳤다. 그래서 '빨리빨리'와 부정부패가 생겨났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지만 휴식은 없다. 몸뚱어
리가 부서져라, 가족과 회사를 위해 일한다. 누구보다
빨리 거래처에 가야 하고 누구보다 빨리 일을 처리해
야만 한다. 때문에 차선 위반이나 끼여들기 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내 뒤에 오는 차가 손해를
보든지 말든지. 교통 체증을 유발하든지 말든지. 건물
또한 좀 부실하게 짓더라도 상관없다. 수많은 사람
과 자동차가 지나 다니는 한강 다리를 좀 부실하게
놓더라도 상관없다. 수많은 사람과 자동차가 지나 다
니는 한강 다리를 좀 부실하게 놓더라도 상관없다.
공무원에게 적당히 뇌물을 주고 빨리 지어서 빨리 돈
을 받아내는 게 더 급하기 때문이다. 배든 비행기든
시간과 사람을 투자해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보다 그
저 더 많은 손님을 태워 빨리빨리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 '나쁜사람'이 되더라도 돈만 많이 벌
면 그만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아직까
지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회사를 위해 몸이 부서
져라 일했던 사람들은 '명예퇴직'이니 '조기퇴직'이니
하면서 쫓겨나고 있고 근근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
람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할 뿐이다. 이렇게 근대화 세
대의 기준으로 '성공'을 말한다면 오히려 나는 성공하
고 싶지 않다. 물론 그들 덕분에 80분대 이후의 세대
들은 가난을 면하게 됐다. 오히려 풍요를 만끽하는
소비 세대가 됐다. 그러나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때문에 근대화 세대와 다
른 '성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본다. '바
쁜 사람이 잘되는' 세상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 잘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 '나쁘면서도 잘된'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연세대 김중기 교수가 제시하는 성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는 얼마나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가입
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성
공한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당
신은 일단 성공했으니까요. 내 친구 중 한 사람은 매
일 '에이, 이놈의 일 못해 먹겠네' '사업이나 해야지'합
니다. 그 사람의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그런
데 그는 '남자가 할 일이 없어서 초등학교 선생을
해' 하며 항상 자신의 직업에 불만입니다. 그런 그가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할 생각에서 젊은 여성과 연애
를 하게 됐습니다. 잘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 날 젊은
여성이 갑자기 헤어지가고 하더랍니다. 이유가 궁금
해진 그가 안달이 나서 물었대요. 왜 그러느냐고. 그
러자 그 여성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이도 극복할
수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
다, 무엇을 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고 "남자라면 자신
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하
더랍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좋습니
까?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십시오. 두 번
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가입니
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며 사는가입니다.
당신에게 두 시간의 여유를 주겠습니다. 당신 주변의
친구나 동료, 선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에 큰
일이 났다.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해보십시오. 그리
고 기다려보십시오. 그때 만사를 제쳐놓고 당신에게
달려올 사람은 몇 명이나 됩니까? 아니, 아무 말 없
이 그저 '무조건, 빠른 시간 안에 우리집으로 와달라'
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당신은 불러모을
수 있습니까? 가만히 따져보면 무작정 달려올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감히 2백 명은
모을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두 시간 안에 2백 명 정
도 달려오게 할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
서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좋
아하고 또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드십시오. 그
러면 당신은 성공한 겁니다. 세 번째는 얼마나 건강
한가입니다.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눈을 감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명상이란 눈과 입을 가리고 코와 귀
를 여는 겁니다. 눈과 입은 많이 쓰면 쓸수로 피로해
지고 오해를 부릅니다. 때문에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을 쉬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잘 먹고 많이 걸어야 합니
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강하기 위해선 감동을 먹어야
합니다. 감동이 없으면 정신과 영혼이 시들기 때문입
니다. 네 번째는 얼마나 희망이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희망이 없으면 실패한 것입
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이 있는한 성공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잘될 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그날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일을 따라가면 돈이 생기지만 돈을 따라가면 일
이 끊긴다."
나는 이와 같은 김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다. 특히 첫 번째 성공 기준은 당연한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IMF라는
된서리를 맞은 우리는 한 달에 1백만 원으로도 살아
야 하고 30만 원으로도 살아야만 하는 세상이 살고
있다. 그 전에는 도저히 한 달 수입 70만 원으로는
못 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야' 한다기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여
전히 없는 사람만 서러운 세상이지만 어쨌든 적게 쓰
는 것. 아껴쓰는 것이 미덕이고 당연한 세상이 됐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
차피 최소한의 수입만으로 살아야 하니까. 따라서 문
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랑스러워하는 일을 하느
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을 억지로 하거나 시간이나 떼우기 위해 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연구하게 되고 창조력을 발휘한다. 그러다 동기 부여
가 되고 하루하루 실력을 쌓아가다보면 그 분야의 전
문가가 된다. "일을 따라가면 돈이 생기지만 돈을 따
라가면 일이 끊긴다." 우리나라의 최고 배우인 안성기
씨가 자주 하는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그 일을 좋아하게 되면 돈은 자연히 따라온다. 그 자
리에 그 사람이 가장 적절하다는 인식이 쌓이면서 수
입도 늘어나게 된다. 굳이 수십억 원을 모으지 않아
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이런 것이 다
원화된 사회의 좋은 점이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의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김 교수의 견해에 나는 21세기의 새로운
성공 기준을 몇 가지 보태고 싶다. 먼저 문화를 향유
하는 능력이다. 즉 뮤지컬과 영화 콘서트 등을 얼마
나 관람하고 즐기는가. 책을 어느 정도 보는가. 이는
단지 경제적 여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옷을 사는
데는 수십만 원씩 쓰면서도 몇만 원짜리 연극 한 편
보면서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 사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단돈 3천 원짜리 시집을 사는 것
에도 인색한 사람들이 4천 원짜리 커피는 잘 마신다.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성공한 사람들이 아
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다. 허울만 요란할 뿐
마음은 한없이 쪼들리면서 생활할 뿐이다. 21세기엔
문화 생활을 많이 할수록 성공한 사람이다. 자주 보
는 것 못지않게 감동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
건 많이 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쥐라기 공원'이나
'베트맨' 같은 영화도 좋지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
가'나 '파고'같은 영화도 한번 보길 원하고 싶다. 비록
적은 횟수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굳이 횟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존경지수다. 얼마
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느냐가 성공의 척도
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존경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근대화의 산물인 졸부들은 사회적으로 냉대받
기 쉽다. 우리 사회가 서구 사회처럼 흔쾌하게 부자
들의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까닭은 온갖 부정부패
에 힘입어 돈을 번 부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장인을 '마에스트로'라고 부른다. 예술가든,
체육이든, 기술이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의
전문가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한 달에 평균 2백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 이느 독일가구의 평균적인
수입에 비해 결코 많지 않은 수입이다. 그러나 그들
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어느 대기업 사장
이나 정치가 못지않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
마에스트로야말고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자기 만족도인데 가장 중요한 성공의 척
도일 수 있다. 김중기 교수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했듯이 아무리 돈
을 많이 벌고 아무리 존경받아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
한다면 아미 인생의 실패자이다. 내가 아는 한 대학
선배는 대학 때부터 스킨 스쿠버에 미쳐 살았다. 그
선배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면 바다로 달려가는
게 일이었다. 제주도부터 사이판이나 몰디브까지 전
세계에서 스킨 스쿠버를 할 만한 곳이면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응용통계학의 출신인 그는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만 스킨 스쿠버숍을 차렸다. 회원을 모
집해서 바다를 탐색하거나 장비를 파는 것이 그의 일
이다. 물론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하
지만 그는 "숫자와 싸우는 것보다 물고기와 노는 것
이 휠씬 재미있다"고 한다. 현재 그는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의 일을 좋아한다. 따라서 성
공한 사람이다. 그러면 직업을 바꾼 나는 성공했는
가? 나는 가끔 이렇게 자문해본다. 나는 감히 성공했
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평균 일주일에 사나흘만
일을 한다. 물론 더 일을 할 수도 있고 하고 싶기도
하지만 직업의 특성상 한계가 있다. MC든, 연기든 일
단 캐스팅이 되어야 하는데 더 많이 써주지(?)않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시
간이 많다. 나 자신을 돌보고 내게 투자할 여유가 있
는 '시간의 부자'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은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살 수 없다. 게다가 나는 내 일에 만
족하고 내 일을 사랑한다. 때문에 누군가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내가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 바꿀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 존경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
면서 살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굳이 성공한 사람이
란 말을 듣기 위해 발버둥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좋
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성공은 자연히 그 결
과로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부정을 저지르면서까
지 조급하게 성공을 이루기보다 조금 늦더라도 정직
한 길을 가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 나는 이런 세상
을 꿈꾼다. 내가 우리 사회의 중견이 될 때, 지금부터
10년쯤 지난 뒤에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나쁜 사람
이 잘되는' 사회가 아니길 바란다.
일상을 바꾸면 분위기도 바뀐다.
하루아침에 인생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상
을 조금만 바꾸면 인생이 바뀌고 더 나아가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아카누키'가 뭐길래
"너 누가 '아카누키' 시켜줬냐?" 좀 잘 나간다 싶은
후배에게 한 선배가 무든다. "그거야 형이죠." 후배는
대답했다. 선배는 무명이었던 후배를 먹여주고, 재워
주고, 가끔 옷도 사줬다. 그 덕에 후배는 어려운 시절
을 보내고 제법 유명세를 타게 된다. 연예계에서는
이런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걘 아카누키만 좀
하면 가능성 있겠다." "잰 아카누키가 아직 덜 됐어."
"넌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아카누키 좀 해라." '아카
누키'가 됐느냐 안 됐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연예인들
은 아카누키를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그
리고 완벽한 아카누키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그를 한
사람의 탤런트나 가수, 개그맨으로 인정해준다. 도대
체 아카누키 뭐기래 이 난리들일까. 아카누키는 일본
말인데 '아카'는 때, '누키'는 벗기란 뜻으로 이른바
'때 벗기기'란 뜻이다. 흔히 연예계에서 사람의 촌티
를 벗긴다. 세련되게 만든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처음
에 촌스러웠던 사람도 몇 번 TV에 나오다 보면 아주
세련되게 변한다. 톱스타를 불러놓고 그들의 데뷔 시
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악취미(?) 프로가 있는데 스타
들의 데뷔 시절을 보면 한결같이 존스럽다. 한 예를
들면 가수 이선희의 데뷔 때와 아카누키가 된 후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그녀는 아줌마 파마에 검은테
안경을 쓰고 새까만 얼굴로 지난 1981년 강변가요제
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촌스럽던 그녀가
순식간에 인기 가수가 된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녀의 변해가는 모습, '아카누키'가 돼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선희뿐만 아니라 대부분 연예인들의 데뷔 시
절은 뭔가 어색하고 투박하고 모자라 보인다. 일상에
젖어 있는 모습, 촌스러움의 때를 벗지 못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아카누키가 된지 비싼 옷을 입고 헤어
스타일을 고치고 좋은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그건 겉모습보다 습관과 사고 방식의 문
제다. "너, 이제 좀 배우 같다. 얘." 데뷔작인 '도깨비
가 간다'에서 함께 공연했던 이미숙 선배가 내게 한
말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거의 2년 만에 유인촌 선배
가 주연하는 '파우스트'공연 때 우연히 남산의 국립극
장 로비에서 만났다. "그럼, 그 전엔 제가 배우같지
않았습니까?" "말이라고 하니? 배우 같아 보이는 게
쉬은 게 아니야, 연기한다고 해서 다 배우가 아니니
까." "그럼 지금은 흔히 말하는 '아카누키'가 좀 됐나
요?" "그래, 하자만 옷만 잘 입는다고 아카누키가 되
는 건 아니야. 배우는 뭔가 분위기가 있어야 돼." 사
실 그날 난 옷을 썩 잘 입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골덴스리버튼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미숙 선배의 눈엔 뭔가 달라진 것처
럼 보였나 보다. 지금까지도 그놈의
'아카누키'는 나를 괴롭힌다. 사람들이 날 찐짜 배우
로 인정할 때까지 노력을 그치지 않겠지만 도무지 아
카누키의 끝은 보이질 않
는다.
"어쩐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
연극계 선배인 이주실 선생님에게 들은 말이다. 20
년 전 일본으로 공연을 갔는데 극장에서 일본측 스태
프와 배우들 그리고 한국 스태프와 배우들이 처음 만
나게 되었다. 그런데 누가 소개하기도 전에 일본 배
우 한 사람이 우리 나라의 스태프들을 제쳐놓고 배우
들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어떻게
배우인지 알았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배우 생활을 10여 년 하다 보면 배우를 알
아보게 되지요. 아무래도 아곳까지 오신 분들은 한국
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배우 같
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한 겁니다." 그 일
본 배우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 이야기를 듣
고 나니 미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친구
가 그녀를 위한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말이 생각났
다.
"마릴린과 함께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걷고 있을 때였
어요. 그녀는 화장도 않고 평범한 버버리 코트에 머
리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저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었
죠. 두 시간이 넘게 돌아 다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옆을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도 마릴린을 알아보
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아직 널 모르는
사람이 많은가 봐"라고요.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하더
군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사람들이 날 알아보게 해
볼까?" 그녀는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어요. 갑자
기 그녀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몸 속
깊은 곳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
는 것 같았고 순식간에 그녀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느
껴지더군요. 그러더니 갑자기 상황이 180도로 바뀌더
니, 순식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사
인 공세를 펴는 거였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저는 아
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답니다."
지난해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 휴가를 갔을 때였
다. "혹시 예술 계통에 종사하지 않으십니까?" 뒤에서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호텔은 매주 토요일마다 로비 라운지에서 부부와 연
인들을 위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끝날 무
렵, 결혼한 지 3년 됐다고 부부가 우리에게 말을 걸
었다. "뒤에서 보니까 두 분이 너무 정다우셔서 부럽
더군요.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
요? 저, 혹시 미술이나 음악 하시는 분 맞죠?" 명색이
탤런트인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난감하고 어색했다.
나는 그 부부에게 "저는 연기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어쩐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 레크레이션할
때 보니까 표현도 풍부하시고 분위기가 왠지 평범한
사람 같지 않더라구요." 그들은 "알아보지 못해서 미
안해요. 우리 부부가 워낙 TV를 안 봐서..."라고 말했
다. 하지만 내 기분은 썩 바쁘지 않았다. 연기를 시작
한 지 만 2년 4개월 만에 나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뭔가 예술할 것 같은 사람"이란 소릴 들었으므로. 그
러고 보니 결혼식 때가 생각난다. 오미희 선배, 최수
종 하희하 부부, 김서라, 이병헌, 김찬우, 궁선영 등
바쁜 스타들이 함께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극하는 친
구 중에서는 이재구와 김경환이 참석해 주었다. 연극
배우들은 회사에 다니는 내 '평범한'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아내는 나중에 이런 얘기를 했다.
"내 친구들이 그러는데 사진 찍을 때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유독 이재구와 김경환이 튀더래요. 그
두 사람은 전혀 회사원 같지가 않았고 그렇다고 연예
인도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나
요. 그래서 내가 그 두 사람은 연극배우들이라고 말
해줬더니 그제서야 어쩐지 뭔가 좀 다르더라, 하더라
구요." 모두 연극 경력이 8년이 넘는 그들은 내가 '덕
혜옹주'를 공연할 때 만난 친구들인데 같은 나이 또
래의 내 친구들에 비해 젊고 섹시(?)해 보였다. 회사
에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살도 찌고 왠지 나이도
더 들어보였다. 하긴 회사원이 몸매나 외모로 먹고
사는 건 아니니까.
ㅅ새없이 달려가는 무한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와
같으 삶
만약에 나도 계속 직장 생활을 했다면? 밤새 술을
퍼마시고 새벽에 들어갔어도 어김없이 아침 6시 30분
에 일어나 전철에 올라타야 했다면? 매일 스트레스를
받으며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저녁마다 술자
리와 과식으로 시달렸다면? 물론 그 생활이 불행했다
는 말은 아니다. 즐거웠고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
상에 얽매여 정신없이 바빴으며 쉴새없이 달려가는
무한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와 같은 삶이었다. 기자
생활을 계속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쪘을
것이고(지금은 그때보다 9Kg이나 빠졌다!) 뭔가 '예
술' 하는 분위기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지쳐 있는 모
습이 었을 것이다. 기자는 기자처럼 보이고 배우는
배우처럼 보일 테니까.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방
송국 사람들이 "날카롭고 각이 진 인상에 여전히 기
자티가 난다"고 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모른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왜 연기자가 됐나'하고 좌절
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
람도 내게서 기자보다 배우의 냄새를 맡는다. 기자를
그만두었을 때 난 내 일상만 살짝 바꾸었다. 늦게 자
고 늦게 일어났다. 절대로 몸에 피로를 남기지 않았
다. 술을 먹든 일을 하든 과로한 다음남은 충분히 잠
을 잤다. 그리고 매일 운동을 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일보다 대본이나 소설을 읽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대학로와 여의도 그리고 극장가를 오가며
연극과 영화를 보고 주로 배우들을 만나고 사귀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인상도 바뀌고 인생도 바뀌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감싸고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인생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
러나 일상을 조금만 바꾸면 인상이 바뀌고 더 낭가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텔레비전보다는 책을 . 비디오
보다는 영화를, 그저 하릴없이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
시간을 쪼개서 부지런히 연극이나 음악 공연 등을 보
기 위해 돌아다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풍족해지는
정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루에 30분씩만 시간을
내서 헬스 클럽에 다닌다든지, 그것도 어럽다면 자동
차를 이용하는 대신 걷기만 해도 얼굴은 달라진다.
스트레스가 없어지면서 몸이 그 변화를 눈치채고 그
변화는 얼굴과 외모에 나타나게 된다. 물론 그건 하
루나 이틀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년, 2년 꾸
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나타난다. 아직도
설익은 내게 "뭔가 예술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해
준 설악산의 그 부부에게 감사들 드린다. 그 말에 힘
을 얻어 나는 오늘도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자유인의
일상을 산다.
왜 우리는 큰 야망만 가져야 한는가?
왜 반드시 고속도로를 뚫고 유조선을 만드는 것만
이 젊은이들이 할 일인가?
큰일이 따로 있다?
"사람들이 가장 한심하게 생각하는 젊은이 중의 하
나는 비디오 가게 주인일 게다. 오죽 할 일이 없으면
좁은 비디오 가게나 지키고 있는 것일까. 세상은 넓
고 할 일은 많다. 야망을 가져라, 큰 뜻을 품어라.
Boys Be Ambitious!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할
일'을 뭘까. 아마도 사막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만
들고 바다를 간척해서 땅을 넓히는 일들을 말하는 것
일 게다. 아니면 자동차나 조선 사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영화 보기를 미치도록 좋
아하는 젊은이가 있다. 치자. 그에겐 비디오 가게 주
인이 가장 알맞은 직업이다. 전에 살던 동네에 비디
오 가게가 두 군에 있었다. 하나는 최고 비디오, 또
하나는 희망 비디오였는데 이름과 서비스의 내용은
달랐다. 최고 비디오는 '최고' 였지만 희망 비디오는
'희망'이 없었다. 최고 비디오가 좋은 이유는 무엇보
다도 연체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비디오의
대여 기간은 1박 2일이다. 하루 늦게 반납하면 1원의
연체료를 내야한다. 그건 두 비이오숍이 같았다. 그러
나 최고 비디오의 주인 아저씨는 내게서 연체료를 받
은 적이 없다. 하루 정도 늦는 것은 당연히 봐주고
2-3일 정도도 양해해준다. 내가 미안해서 연체료를
내려고 하면 언제나 싱글싱글 웃으며 "아이, 괜찮습니
다."라고 말한다. 한 번은 여름 휴가 때 깜박 잊고 '대
부 3'과 '베트맨'을 빌렸다가 휴가가 끝나고 나서야 돌
려준 적이 있다. 일주일 만이었다. '대부 3'은 오랴된
것이라 괜찮았지만 '베트맨'은 당시 막 출시된 것이어
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s는 미안한 마음으로 미리
연체료 7천 원을 준비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저
씨는 싱글싱글 우승며 "다움부터 일찍 갖다주세요"하
는 것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제가 오히려 미안합니
다. 이번엔 그냥 받으세요." 난 카운터 위에 연체료를
올려놓고 왔다. 그 다음부턴 꼬박꼬박 제때 반납하게
됐다. 또 다시 마안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였
다. "액션물로 하나 주세요." "또 늦게 가져올 거예
요?" "아뇨. 이번엔 일찍 반납할게요. 지난번엔 죄송
했습니다." "내일 꼭 돌려주세요" 희망 비디오 가게의
주인 아줌마는 언제나 이렇게 내데 반납을 독촉하며
비디오를 대여한다. 게다가 은근히 연체료에 대한 협
박(?)도 잊지 않는다. 또 하루라도 늦게 가져오면 "연
체료 내세요"하며 반드시 돈을 챙겼다. 물론 희망 비
디오의 주인 아줌마가 자본주의 상도의에 더 철저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하루라도 늦게 반납하면 그 비
디오를 찾는 사람이 못 보게 될 고 그만큼 그녀는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따라서 제때 반납하는 것은
비디오를 빌려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첫 번째 조건이
다. 비디오 가게는 보통 낮 12시에 문을 열고 밤 12
시까지 영업을 한다. 최고 비디오와 희망 비디오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희망 비디오에서 '드라큐라'를 빌
렸다가 1박 2일을 넘기고 다음날 가져다준 적이 있
다. 난 비디오 가게가 문 열기만을 기다려 정확히 12
시 10분에 반납했다. "연체료 천 원 내세요." "아줌마.
문 열자마자 가져왔는데요." "오늘 며칠이죠?" "12일
이요." "이거 언제 빌려 가셨어요?" "엊그제요." "며칠
지났죠?" "3일......" "거기 써 있죠? '대여 기간은 1박
2일입니다. 1일 연체마다 천 원의 연체료가 붙습니다'
라고." 맞는 말이었다. 난 천 원을 냈다. 하지만 마음
은 찝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따 저녁 때 갖다줄
걸.' 최고 비디오와 희망 비디오숍의 두 번째 차이는
주인들의 태도다. 최고 아저씨는 언제나 날 아는 척
한다. "요즘 연극 하신다면서요, 손님들은 많아요?"라
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날씨가 무척 덥죠?" "어제 보
니까 KBS에 나오시던데요. 그 프로 재밌드라구요"등
등. 난 기분이 좋아져서 한 개 빌릴 걸 두 개 빌린다.
하지만 희망 비디오 아줌마는 날 전혀 아는 척하지
않는다. 분명 TV에서 날 봤을 텐데...사교성이 없는
걸까. 그녀는 언제나 선생님처럼 근엄한 얼굴로 카운
터에 앉아 있을 뿐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씬 언제나
싱글거리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영화를 무척이
나 좋아한다. 때문에 해박한 영화 지식을 갖고 있다.
웬만한 영화 감독과 배우의 출연작은 줄줄이 외우고
있다.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SF면 SF. 모르는
게 없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보는 안목은 영화평론
가의 수중이어서 나처럼 예술영화깨나 애호하는 매니
아들은 언제나 최고 비디오를 찾는다. 그러나 희망
비디오의 아줌마의 영화에 대한 식견은 결코 최고 비
디오 아저씨를 따라가지 못한다. 둘다 30대 중반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가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반면 희
망 비디오 아줌마는 돈벌리오 가게를 하고 있다는 느
낌을 받는다. 비디오의 절대량은 희망 비디오가 더
많다. 그쪽이 최고 비디오보다 약 2평 정도 넓기 때
문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이런 단점을 손님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정확하게 추천하는 것으로 보완
한다. 게다가 최고 비디오는 대중성은 좀 떨어져도
수준 높은 작품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
다. 회망 비디오가 좀 더 넓다고 해서 손님을 위한
서비스가 더 좋은 건 아니다. 한 번은 비디오를 반납
하로 밤 12시 넘어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런 제기랄. 또 연체료 내게 생겼네.' 하지만 최고
비디오는 결코 이런 일이 없다. 반납기가 있기 때문
이다. 비디오 가게마다 반납기가 다 있는 건 아니다.
다음날 난 희망 비디오에 가서 손남의 입장에서 정중
하게 요구했다. "비디오 반납기를 설치해 달라"고. 희
망 아줌마는 "알았어요. 일단 연체료나 내세요."라며
예의 그 연체료 타령을 했다. "반납기가 없는데 어떻
게 반납을 합니까?" "그러니까 12시 이전에 오셔야죠.
저희도 잠은 자야 하지 않겠어요?" "다른 데는 반납
기가 있던데." 결국 희망 비디오 주인 아줌마는 나 말
고도 몇몇 손님의 거센 항의에 부딪쳐 결국 반납기를
설치했다. 가끔 비디오 반납기가 꽉 차는 경우도 있
다. 희망 비디오 가게앞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영락
없이 다음날 다시 갖다줘야 한다. 그것도 연체료 천
원을 덧붙여서. 물론 최고 비디오 주인 아저씨는 그
럴 때면 언제나 "반납기가 다 찼을 때는 옆 문방구에
맡겨주세요."라는 문구를 써서 붙여 놓는다. 그건 아
주 작은 일이지만 손님을 배려하는 진정한 서비스 정
신인 없으면 할 수 없다. 결론은 간단하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럼 희망 비디오를 이용하지 말고 최고 비디
오를 이용하면 될 것 아니냐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 원리라고. 물론 나는 최고 비디오를 더 자주 애
용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희망 비디오를 이용할
때도 있다. 그건 희망 비디오가 최고 비디오 보다 우
리 집에서 약 2백m 정도 더 가깝다는 점 때문이다.
사람의 게으름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다신 오지 말
아야지' 하면서도 가끔은 희망 비디오에 가게 된다.
그러나 최고가 희망보다 더 먼 곳에 있으면서도 이용
횟수면에선 8 : 2정도로 앞선다. 그건 최고 아저씨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과 운영의 묘 때문이다.
비디오 가게를 하나 해도 이렇게 '할 일'이 많다.
비디오 가게를 하나 해도 이렇게 '할 일'이 많다.
예전엔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그저 돈벌리 삼아
비디오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막강한 영화 지식과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영화 마을'같은
비디오숍 체인을 만들고 '비디오 뱅크' '비디오 세계'
같은 무료 잡지를 만들면서 비디오숍 시장도 많이 바
뀌었다. 이제는 조그만 비디오 가게도 주먹구구식으
로 했다간 곧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휴가도 가지 않는다. 한 여름이건 추석이건
설이건 거의 1년 365일 문을 연다. "아저씬 여름 휴가
안 가세요?" 어넨가 내가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
다. "영화 보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휴가는 뭐 하러
갑니까. 전 여행 같은 것보다 비디오 보는 게 훨씬
좋거든요. 어디 다른 데라도 가 있으면 새로 출시된
비디오가 도착했는지 어떤 개봉관에 손님들이 몰리는
지 궁금해서 못 견뎌요." 오히려 휴가가 괴롭단다. 그
리고 손님이 없을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비디오를 마
음껏 보고 영화광인 손님이 dhays 대화를 나눈다. 때
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가보지 않아도 칸느 영화
제니 베니스 영화제니 하면서 화제에 올린다. 그는
취미가 곧 일이고 일이 취미이다. 이런 그에게 '비디
오 가게를 지키는 것은 꿈도 없이 좁은 공간을 지키
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꼭 큰 야망을 가져
야 하는가. 왜 반드시 고속도로를 뚫고 유조선을 만
드는 것만이 젊은이들이 할 일인가. '쥐라기 공원' 한
편이 우리 나라의 자동차 몇백만 대 판 돈을 벌어들
이지 않았는가. 문화도 막강한 경제 상품이다. 최고
비디오 아저씨는 아마 비디오숍 주인으로 성공할 것
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로 전국적인 비디
오숍 체인점을 열지도 모른다. 아마 대기업 이사 부
럽지 않게 돈도 벌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꼭 더 큰
비디오숍을 갖지 못한다고 ㅎ 대기업 이사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 해도 크게 상관 없다. 그는 일할 때 가
장 재미를 느끼는 축복받은 사람이니까.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부터 빨간 줄을 그어나간다.
18개를 지웠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다행
히 19개를 지웠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남은 나머지
하나의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해나가야 한다.
한 우물을 파면 하늘이 보인다.
대체로 천재는 세 명의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선생님은 대개 유아 시절에 만나게 되는 선생님
이다. 이를테면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피아노 학원이
나 무용학원 또는 미술학원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런 선생님들이다. 대개 음악은 7세 전후, 체육은 10세
전후, 그리고 다른 학문 분야는 15세 전후에 천재성
이 발견된다고 한다. 첫 번째 선생님들은 대개 아이
들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리고
아이의 천재성을 발견하면, 곧 선생님은 더 이상 가
르칠게 없다는 시실을 깨닫는다. 그러면 선생님은 천
재성이 있는 아이를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
에게 맡긴다. 천재는 두 번째 선생님과 만나게 되고
이 두 사람은 첫 번째 선생님보다 더 깊은 인간적인
유대를 맺게 된다. 아이는 여기서 대부분 자산의 갈
길을 결정한다. 아이는 선생님을, 선생님은 아이를 만
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둘의 만남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두 번째 선생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이에게 쏟아붓는다. 아이 역시 선생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모든 것을 수용한다.
이제 두 번째 선생님마저 아이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정도가 되면, 드디어 세 번째 선생님을 만나
게 된다. 세 번째 선생님은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거나 혹은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마에스트로(거장)이다. 거장은 제자를 알아보고
제자는 거장을 존경하게 된다. 스승은 뛰어난 재능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제자를 만났다는 사실과
그 제자를 길러내 또 한 사람의 훌륭한 거장을 양성
한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제자 역시 당대의 대가를
만났다는 사실과 그를 모델로 삼고 노력한다면 언젠
가는 그처럼 될 수 있다는 기 대 때문에 흥분한다.
스승은 혼과 열을 다해 제자를 가르치고 제자는 스승
의 말과 몸짓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받으려고 한
다. 제자와 선생님의 관계는 연인보다 더 밀접하게
발전한다. 서로를 보지 않으면 병이 날 정도가 된다.
때때로 그 관계는 부부 사이보다 더 깊어진다. 천재
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전
공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는 오직 바이올린만 켜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고 생가하게 된다. 가끔 수학을 잘하거나 무용을 잘
하는 친구를 볼 때, 그저 '저런 친구도 있구나'하고 생
각할 뿐, '나도 저렇게 해봤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
는다. 물론 바이올린을 좋아하면서 피아노도 치거나,
발레를 하면서 현대 무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같
은 음악이나 무영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성장하면서 관심의 영역은 좁혀진다. 음악이 좋
아서 계속 공부를 해나가지만 어느 순간 현악기든 관
악기든 피아노든 택하게 되고 덜 관심이 가는 분야는
제외된다. 바이올린이 아닌 다른 것은, 피아노든, 수
학이든, 발레든, 자신과 상관없다고 단정짓는다. 다른
친구들이 바이올린 한 시간, 피아노 한 시간, 스케치
한 시간에 하루를 소비할 때 그는 하루에 6시간에서
8시간 동안 바이올린만 켜대는 것이다. 때로는 까맣
게 밤을 새우기까지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
니고 그저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
리 옆에서 말려도 이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
버린다. 결국 천재성이 발견된 이후부터 성인 되기까
지 그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 죽어라고 바이
올린만 켜게 된다. 피아노나 수학, 발레 등을 오갔던
아이들은 평범한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아
이들이 평범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동안 그는 오직 바
이올린만 알고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데 모든 시간
과 노력을 쏟는 한 사람의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이
다.
'포기'의 미학
예술이란 수없이 반복해서 익숙해진 기술이다. 가
야금의 대가였던 한 연수가는 고무신에 쌀을 담아 남
산에 올락 한 번 연주 할 때마다 쌀알 하나를 고무신
에서 꺼내 그 고무신을 다 비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연주할 때마다 쌀알 하나씩 고무신에 담아 다 채웠질
때까지 수련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을 하고서도 대가
가 되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가
야금의 대가는 오직 가야금만을 위해 살았고 가야금
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이를테면 집안 살림이나 친척
들의 경조사, 친구들과의 인간 관계 같은 것을 일찍
감치 포기해야 했다. 어느 분야에서 천재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 대가가 되는 것은 사실은 그 한 가지
를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을 과
감히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칙은 단지 예술이
나 학문의 천재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만
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세
상에는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없다. 결혼만 해도 그렇다. 한 사람
을 만나서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나 남편보다 돈이나 일 역시 덜
수중하게 여긴다고 맹세하는 행위이다. 또 옛 애인이
나 절친한 친구, 형제라 하더라도 배우자보다 우선위
에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관습이다. 부모나 자식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어느 부부든지 자신의 아내나 남
편보다 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한다면 거기서부터 불
행은 시작된다. 결혼은 그만큼 이기적이다. 아이를 낳
는 것은 또 어떤가. 아이를 기르는 것은 아이가 없었
을 때 부부가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거나 2주일에 한
번씩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는 것 한 달에
한 번씩 뮤지컬을 보거나 혹은 여름 휴가 때의 해외
여행 같은 것은 그만두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가
혼자 학교에 갈 때까지 24시간 아이에게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을 것이며, 그렇게 희생하는 부모와 자식간
의 사랑을 얻겠다는 종교보다 더한 신념이 없으면 일
찌감치 아이 갖는 일은 포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다. 때대로 천재들의 성장 과정은 인생의 수많은 선
택 앞에 선 우리들에게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도 하
다. 어느 직업을 가질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 자신이 아는 직업(또는 직
장)을 20가지 정도 적어놓고 제외서켜 나가는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부터 빨간 줄을 그어나간다. 17
개가 지워졌다면 선택은 3개지 중의 하나로 줄어든
다. 18개를 지웠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다
행히 19개를 지웠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남은 나머지
하나의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노력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재빨리 그 직장에 지원서를 내는 게 좋다. 아
마도 그 마지막 리스트가 당신에게 꼭 맞는 천직일지
도 모른다.
나는 나를 세일하지 않는다.
당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그 무
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얻었다.
힘내라, 프레스트 검프
한 젊은이가 릴케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
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쓴 작품인데 좀 봐주
십시오." 젊은이는 릴케에게 습작 노트를 건넸다. 릴
케는 젊은이의 노트를 흘낏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작
가가 되고 싶은가?" "네, 저는 진정으로 훌륭한 작가
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이렇게 글을 들고
다니며 보여줄 필요가 없네." "네?" "아침에 일어나
글 쓰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면 자넨 이미 작가
지." 나는 배우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오직 연기하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너무 많
은 잡스러운 생각에 나 자신을 맡겨버렷다.
이동진
그는 은행에 다니는 내 고등학교 선배이다. 학력은
고졸이다. 나이는 30대 후반, 그는 현재 평촌의 49평
형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그 아파트를 혼자 힘으로 마련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으며 소위 학벌이 좋
은 것도 아니었다.4년 전에 9천9백만 원에 분양받아
아파트가 지금은 3억 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이른
바 재테크에 성공한 셈이다. 물론, 그 나이에 그보다
더 성공한 사람도 있고 좋은 집에서 사는 사람도 많
다. 나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어떻게 재테크할 것인지
에 대해 말하려하는게 아니다. 그느 말하자면 '포레스
트 검프'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십수 년 동안 그는 오
직 '아파트'만 생각했다. 날 만나기만 하면 청약에 금
같은 걸 들어놓으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발이 닳도록
신도시를 돌아다녔다. 아파트 모델 하우스는 빼놓지
않고 들렀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아파트뿐이었다.
그는 작은 평수부터 시작해 점차 평수를 넓혀갔다.
그의 목표는 49평이었으며 그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순진할 정도로 하나만 생각
했다. 그 우직함에 박수를 보낸다. "일단 아파트를 꼭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쯤은 산 거나 마찬
가지다." 이것이 그의 지론이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
만 생각하면 모든 생활이 그 목표를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그는 49평형을 위해서 자신과 부인, 그
리고 노부모와 아들까지 식구 모도가 '아파트 장만'의
시스템 하에 움직였다고 한다. 이를테면절약 같은 것
을 통해서, 그서도 눈물나는 절약을 통해서.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 적
이 없다. 그것은 '즐거운 절약'이었다. 풍요로운 미래
를 미리 그려보는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배가 불렀고
신났다. 아파트는 그의 신앙이었으며 삶 전체를 바꿔
놓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였다. 나는 배우인가? 연기가
곧 나의 신앙이며 내 삶 전체를 바꿔놓는 거대한 이
데올로기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한눈을 파
는 개구쟁이에 불과했다. 인생은 깃털처럼 가볍게 보
였다.
"지난해 42세를 일기로 사망한 우리의 친구 마크
그룬월드가 인쇄 잉크의 혼합돼 만화로 되살아나게
됐습니다.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우리의 곁을
떠난 지 꼭 1년 만의 일입니다. 그는 평소에 부인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죽으며 유해가루를 만화 인쇄잉크
에 섞어달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의 1985
년도 유작 '스쿼드런 슈프림'의 한정판 제작을 위해
오하이오 주 켄턴의 인쇄소에서 잉크와 유골을 혼합
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만화를 사랑한 나머
지 죽어도 그 일부가 되고자 했던 고인의 뜻이 실현
되게 됐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NO 세일은 자존심
나는 배우인가?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콘크리트와
섞어 방송국을 짓는 데 쓰라거나 연극무대를 세우는
데 써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니, 도대체
그런 발상조차 할 수 있을까? 이미지 메이커 차영 씨
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잇다.
백화점에 가면 절대로 바겐세일을 하지 않는 고급
브랜트가 있다. 정상가격에 산 옷을 다른 사람은 세
일 기간에 절반 가격에 샀다고 치자. 정상 가격에 산
사람은 얼마나 분한 마음이 들겠는가. 돈이 아까운
것은 나중 문제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산 것에 대한
속으 기분이 들면서 신뢰할 수 없는 브랜도로 단번에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다 다시 그 브랜드의 옷을 산
다고 해도 세일 기간을 기다려서 사게될 것이다. 그
러나 세일을 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브랜드
라면, 다른 브랜드에 비해 다소 비싸다는 느낌이 들
어도 NO세일을 고수해온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 때문
에 선뜻 그 옷을 사게 될 것이다. 이것이 NO세일의
자존심이다. 이처럼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세일하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누구나 한
창 시절이나 처음 사회에 진출했을 때는 나름대로 이
루고자 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결혼도
하고 생활에 발목이 묶이면서 자신을 세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자신
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역시 연예인의 경우에도 NO
세일은 고수한 사람들은 결국 정상에 우뚝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탤런트 김혜자 씨의 경우, 방송 출현료보
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쉽게 벌 수 있고 많은 연예인
들 사이에 관례가 되어 있는 그 흔한 백화점 일일판
매 한 번 하지 않고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나라
최정상의 연기자이다. 그녀의 주장은 "백화점에서 자
신을 팔게 아무것도 없도"는 것이다. 오로지 연기를
통해서만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배우인가? 나 스스로를 세일한 적이 없는가?
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처럼 자시을 바겐세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는가? 그렇지 않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조금의 먼 미래에 실현될 더 큰 것을 놓친 적
이 많았다. 내 이미지를 고수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
기부다 권태를 견디기 힘들어서, 더 좋은 역에 캐스
팅될 것 같지 않은 불안감 때문에 여기저기 나를 '팔
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직 한 가지밖에 않는다면, 당신
은 이미 성공한 것이다. 당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고
서라도 얻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것을 얻었다. 죽어서까지 오직 되고 싶은 그무엇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과 하나이다. 기금까지 자신
을 세일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면, 당신은 충분히
날 비난할 자격이 있다. "넌 배우가 아니다"라고. 그
런 당신을 만난다면 무릎을 꿇고 당신처럼 살게 해달
라고 기도하겠다.
IMF는 프리랜서를 부른다.
오히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을 때 더 과감하게 새
로운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는 일에 돈과 시간을 아끼
지 않아야 발전이 있다.
반갑다, IMF야
이제 IMF이야기는 지겹다. 누구나 "IMF 때문에"라
고 말하고 만 나느 사람마다 "글세, IMF나 끝나야 뭘
하지"라고 핑계대기 일쑤다. 실제로 무섭고 엄청난 시
련이다. 누구나 극복을 말한다. 이 위기를 잘 넘기자
고 역설한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IMF가 반갑기만 하
다. IMF는 위기가 아니라 신이 우리 나라에 내려준
축복일 수도 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기 때문이
다. 지난 1994년 1월 처음 탤런트를 데뷔했을 때, 나
는 88년형 프레스토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그 당시
50만 원을 주고 구입한 중고차였는데 10만km쯤 달린
치였다. 칠이 좀 벗겨져서 겉보기에는 흠이 있었지만
달리는 데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석 달쯤 잘 몰고
다녔는데 어느 날 무술감독을 하는 친구가 "차 안 바
꿀 거냐?"라고 물었다. "멀쩡한 차를 왜 바꿔요?" "아
유, 폼생폼사라고, 저런 고물차를 요새 누구 몰고 다
녀? 그것도 언예인이 , 스타일 구겨지잖아!" "그런가
요?" "그럼. 봐, CF에라도 캐스팅이 돼서 출연료를
요구할 때 말야, 그랜저 타고 온 놈하고 티코 타고
온 놈하고 누가 더 있어 보이겠어? 그랜저 타고 온
놈이 더 있어 보일 거 아냐. 그런 놈은 '천만 원 주
쇼'해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티코 타고 온 놈이 천만
원 달라고 하면 우습게 본다니까. 그래서 개런티가
깎인다구. 요즘엔 있어 보여야 캐스팅도 잘된다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새 차를 살 돈이
없었다. 두 달 뒤에야 저축한 돈을 찾아서 스쿠프를
뽑았다. 그리고 그 차를 아직까지 몰고 다닌다. 스쿠
프는 대학 다닐 때 내 '이상'이었다. 외모도 잘생겼고
잔 고장 없이 잘만 달린다. 그러나 새 차였음에도 불
구하고 스쿠프는 동료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소형차에 불과했다. 그들은 거의
그랜저나 포텐샤 같은 대형차를 몰고 다녔고 조금 얼
굴이 알려진 친구들은 쉽게 BMW나 벤츠 같은 고급
차를 몰고 다녔다. 연예인은 좋은 차를 타야 한다는
것. 그때 유행했던 말로 '폼생폼사' 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지방 촬영이니 뭐니 해서 기동력 있
게 움직여야 하는 연예인에게 차는 제2의 짐과 같으
니까 좀 비싸더라도 튼튼하고 안전한 차를 타야 한다
는 데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차에 대한 우
리의 인식은 아직까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야
말로 자신의 품위를 세워주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
한다. 자신의 인격과 자신에 대한 믿음, 돈으로 환산
할수 없는 인간미 같은 것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
들은 그것을 메워줄 뭔가 다른 것을 찾는다. 많은 사
람들이 그 대안으로 자동차를 택한다. 자동차를 자랑
하는 사람은 아마 자동차 말고는 자랑할 게 없는 사
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차,
좋은 집 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참아주면서도 자기
아내, 자기 자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 흉
을 본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오히려 사람을
사랑한다느 사실을 자랑하는 게 한낱 철덩어리나 콘
크리트에 불과한 물질에 대한 자랑보다 나은 게 아닐
까. 어제부터 사랑과 맑은 정신, 교양이 드러나는 품
격 같은 것이 광물 부품보다 더 낮은 가치를 갖게
된 것인지......
연예인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실력을 기르기도 전에
좋은 차부터 사고 본다. 데뷔한 지 한 달도 안 된, 갓
20세가 될까 말까 한 신인들이 어디서 돈이 났는지
'도요다'니 '사브'니 하는 외제차를 몰고 나타난다. 그
런 차들은 대개 매니저가 사준 것들이다. 매니저들은
자신들이 쏟아부은 돈이 있기 때문에 신인들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고 한다. 여기저거 아무 프로
에나 나가서 인기를 얻고 그걸 바탕으로 CF를 찍고
또 지방 공연으로 돌리고...... 최소한 차값의 몇 배는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신인일 때의
참신함은 사라지고 쉽게 싫증나는 얼굴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어늘 날인가부터 슬그머니 자취가 사라진다.
요즘 가수의 생명은 평균 3개월이다. 3개월 안에 히
트를 쳐서 돈을 벌지 않으면 곧 도태돼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돈 있는 사람이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은 없다. 돈 있는 사람은 외
제차도 타고 모피도 입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
의 정신이니까. 또 IMF가 강조하는 철저한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을 것이다. 어쨌든 IMF 때문에 ahes 사
람이 긴축에 익숙해진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겐 다행이
다. 나는 매지저도 없고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이 스
폰서를 해주는 것도 아니며 뭐든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경제적인 면도 그렇다. 내 수입과 수준에는 스
쿠프 94년형이 딱 알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축도
해야 하고 내 손으로 마련한 아파트 융자금도 갚아야
하며 또 옷도 사야 하고 여기저기 쓸 게 많다. 속으
론 곪아가는 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대형차를 타고 다
닐 여유가 없다. 그 전엔 차를 산지 1년도 되지 전에
"차 언제 바꿀 거야?"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엔
어느 누구도 차 때문에 문제를 삼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내가 쌍문동에 산
다고 하면 "쌍문동이요? 연예인들이 안 살 것 같은
동네에 사시네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은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아니면 동부이촌동이나 일산 신
도시 같은 곳에 살아야 제격이 아니냐는 것이다. 글
쎄, 쌍문동도 살기 좋은 곳인데. 무엇보다 5분만 걸어
가면 북한산이 나오는 자연 친화형 동네라는 점이 나
는 마음에 든다. 다행히 IMF이후엔 내가 사는 동네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당장 먹
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무슨 폼생폼사며 사는 동네의
수준을 놓고 따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의
관심이 체면보다 실속으로 쏠린 것은 정말 다행이다.
평생 직장에서 평생 직업의 시대로
내 생각에 IMF는 'I am Freeancer'의 시대다. 고학
력자들이 직업학교에 몰리고 있다. 실업의 시대를 맞
아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두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
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들도 있
다. 중년의 회사원이 다시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자
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사진을 배운다든지
요리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제 평생
직장이란 개념은 없어졌다. 대신 평생 직입이란 개념
이 그 자리를 채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프리랜서가
많아지고 또 대우받는 세상이 됐다. 그리고 직장을
자주 옮길수록 능력 있는 사람이날 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않았다. 내친구 중에 한 놈은 지난 7년 동안 직
장을 네 번이나 옮겼다. 처음엔 철새처럼 조건이 좋
은 곳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놈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그는 '스카우터'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에 발전 가능성이 안 보이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다른 곳으로 간다. 물론 스
타우트돼가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발이 넓고 인맥이
재산인 사람이다. 이제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
까지 인원을 충원할 때 그를 찾는다고 한다. 또 다른
회사로 옮기고 싶어하는 동료나 후배들이 수시로 전
화를 해서 그의 조언을 얻곤 한다. 앞으로 이런 친구
들이 많아질 것이다. 회사를 이러저리 옮겨다니느 사
람들이 '철새'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유연하게 만
드는, 혼히 말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에 일조하는 존
재가 될 것이다. 이력서 한 장만으로 어떤 자리든지
앉을 수 있는 사회가 발전한 사회가 아닐까. 고시공
부 같은 어려운 관문을 한 번만 뚫으면 평생이 보장
되는 풍토는 빨리 없어져야 한다. 언론사든 대기업이
든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면접 한 번으로 스카우트되
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한다. 앞으로는 프리랜서 출신
이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역으로 부장, 과장이 프
리랜서가 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프리랜서
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자신에 대한 재투
자이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실무 경험도 저절로
쌓을 수 있고 교육도 시켜주지만 프리랜서는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재투자는 바쁠 때 하는데 아니다.
일이 없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더
자기 자신에 대해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는 방송이 없을 때는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한
다. 그동안 국립국악원에 다니면서 판소리를 배웠고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회화도 배웠다. 태권도와 수
영도 열심히 배웠다.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은 기본
적으로 항상 하고 있다. 내가 판소리를 배울 때는 캐
스팅이 안 돼 몇 달씩 쉬던 때였다. 그러나 목을 트
이게 히고 발성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3개월 정도 맛
보기로 배워두었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목적이 있어
서 배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1년쯤 뒤에 한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에서 MC가 필요하다며 내게 연락을 했
다. 신문의 단신에서 내가 국악원에 다니면서 판소리
를 배운다는 소식을 듣고 내 연락처를 메모해두었던
PD가 전화를 한 것이다. 결국 그 국악 프로를 진행하
지는 못했다. 갑자기 다른 프로의 해외 촬영이 잡히
면서 스케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언
젠가는 국악 프로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땐 내가
판소리를 배워두었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영어 학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친구
가 "느닷없이 영어는 왜 배우러 다니느냐?"고 물었다.
영어는 세계 공통어니까 잘 익혀둘 필요가 있다는 것
두말 하면 잔소리다. 언제 어디서 지금 배워든 영어
가 적절하게 쓰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세
상엔 공짜가 없으니까. IMF 시대가 되면서 프리랜서
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질 테고 IMF가 끝난 다음에도
그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IMF가 지속되든 끝나든
미래에는 지금 자신에 대해 투자를 해둔 사람만이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IMF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의식 개혁과 관계된 것이며 우리 사회의 근본
적인 변화를 뜻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건 변화를 두
려워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아이, 좀 더 예금하세요. 연예인이......"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그래도 연예인은 낫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연예인이 되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예인은 파출부
영화배우 강수연 씨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가 영화배우를 하면서 '강수연 갈
빗집' 같은 걸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우스워
요? 그래서 부업 같은 건 생각도 안 해요. 돈은 중요
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를 지키는 데 더 중요하
죠. 영화 출연료를 많이 받는다고 하지만 1년에 서너
편씩 찍는 것도 아니구....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는
정도로 벌 뿐 그렇게 부자는 아니에요." 강수연 씨가
영화 한 편에 출연해서 받는 돈은 보통 1억 원이 넘
는다. 물론 갈빗집을 해서 성공한 연예인도 있다. 탤
런트 김종결 씨.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기업의 비리
를 합법화하는 변호사 역을 했던 연기자다. 여의도에
'신정'이란 갈빗집을 차렸는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
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음식점을 했
는데 친절과 맛으로 승부를 걸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부드럽고 감칠맛 있다는 소문이 퍼져 손님이 끊이지
않다. 갈빗집을 해서 방송 출연료 수입의 몇 배나
번다는 소리도 들린다. 영화배우 박중훈 씨는 한 잡
지 인터뷰에서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
지만 사실 난 돈이 별로 없다"라고 했다. 박중훈 씨가
이정도라면 다른 연예인들은 어떻겠는가. 할 말이 없
다. 다음은 개그맨 전유성 씨의 부인이자 가수인 진
미령 씨기 쓴 책 '유성아, 뭐 먹고 싶니'에서 한 말이
다. "나 파출부예요. 미령이도 파출붑니다." 특별한 소
속 없이 오라는 프로 나가서 한탕 뛰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그 남자(전유성)는 꼭 이렇게 말한다. 그 남자
말마따라 오라는 집 없으면 24시간 실업이지만, 오라
는 집이 많으면 24시간 근무 시간인 게 우리 직업이
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 도승지로 나왔던 박진성이
라느 연기자. 매니저 일을 하는 후배의 결혼식에서
만났는데 대뜸 "전직 탤런트 박진성입니다."하고 자기
소개를 한다. 그때까지 6개월 동안 쉬고 있었으니 '현
직'이 아닌 '전직' 탤런트라는 것이다. 기발한 이름 붙
이기다. "일반ㅇ니은 하루 일당이 많아야 10만 원 꼴
인데 연예인들은 그래도 방송에 한 번 출연하면 백만
원에서 수백만 원은 벌지 않는가"라고. 하지만 내가
일리고 방송에 한 번 출연해서 수백만 원씩 받는 연
예은 없다. 1994년 모 방송국에 고정으로 출연하기로
하면서 출연료 협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담당 PD는
내게 턱없는 출연료를 제시하면서 "연예인이 방송 출
연으로 돈 법니까?"하고 말했다. '그럼 뭐 해서 먹고
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CF한 번 찍으면 몇천
만 원씩 버는데." 그러나 CF찍어서 몇천만 원씩 버는
연예인은 백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대개 방송담
당 기자들도 연예인들의 출연료에 대해 비판이다. "광
고 한 편에 3억 원, 어마어마한 액수다. 보통 사람들
로서는 꿈도 못 꾼다. 이런 잘못된 광고 출연료 관행
이 청소년들에게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한
탕주의를 조장한다."
조각 만드는 데 이틀, 이틀 만에 조각 만드는 기술 익
히는데 20년
그러나 '진실'을 말하면 광고 한 편에 3억 원 정도 받는
연예인은 최진실 씨 정도다. 그나마 요즘은 IMF 시대라
그녀의 광고 출연료도 1억 원 정도로 줄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나라 광고계에서 최고로 통한다. 지난해
우리 나라 최고의 탤런트인 유동근 씨의 방송 수입은
2억5천만 원 정도였는데 모든 언론에서 연예인 출연
료의 거품을 빼야 한다며 난리를 떨었다. 우리 나라
최고의 바둑기사인 이창호는 10억 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고 박찬호는 한 해에 50억 원 가까운 수입
을 올린다. 그럼 기업가는 어떤가? 우리 나라 최고의
기업가가 한 해에 10억 원의 수입을 올리지 못할까?
IMF 시대를 맞아 연예인이 '마녀 사냥'의 도마 위에
오른 느낌이다. 처음에 우리 사회의 거품을 없애자는
말이 나왔을 때 마치 IMF가 연예인의 탓인양 몰아붙
인 적도 있었다. 유동근 씨나 최진실 씨 같은 연기자
들은 반짝 스타도 아니고 운이 좋아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도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관리와 노력
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노고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연예인은 거품 수입이 많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린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들
에게 맞는 대우를 받는 것뿐이다. 왜 연예인의 수입
만 거품이고 운동 선수나 기업인들의 수입은 노력의
대가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조각으로 유명한 미
켈란젤로가 어느 갑부의 조각을 만들기로 했다. 단
이틀 만에 그는 조각상을 완성했다. 그러고 그는 갑
부에게 금화 만냥을 요구했다. "아니, 겨우 이틀 일하
고 금화 만 냥이라니 말이 되는 얘긴가?" 갑부가 말
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점잖게 대답했다. "조각을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렸지만 이틀 만에 조각을 만드
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지난 20년을 투자했다"고. 만
인이 보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통해 완벽한 연기
를 보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경쟁
자를 물리치고 최고의 위치에 오르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 중요한 점은 한 달에 백만 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연예인들이 많다는 사실
이다. 그들 때문에 국민들이 그나마 잠시 시름을 덜
고 TV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부업 등을 하
면서 생활하다 단지 연기가 좋아서, 방송이 좋아서
기꺼이 출연한다. 그나마 자유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이해하는 한 기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돈
많이 버는 연예인들 보면서 그렇게 억울하면 배우라
고"고.
"연예인도 택시 타나요?"
급하게 여의도에 갈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날 알아보았다. "아니, 연예인도 택시 타
요?" "지하철도 타는 걸요?" "그래요?" 아파트 모델 하우
스에 갔다. 24평형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리고 융자금액
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파트 건설회사 담당 직원은 내게
되묻는다. "32평형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돼야 내
집이란 생각이 들죠." "24평형보다 얼만 비쌉니까?" "4천
만 원밖에 차이가 안 나요." "네?" "돈 잘 버시면서 뭘 그
러십니까? 허허, 연예인이......" 연예인은 3만 월도 저금 못
하나? 시장에 참외를 사러 갔다. 3천 원어치를 샀더니 아
줌마가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한 만 원어치 사. 연예인
이......"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그래도 연예인은 낫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연예인이 되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연예인을 가까이
에서 보고 대하는 방송 관계자들까지도 가끔 그렇게 오해
한다. 연예인은 명예를 얻는 대신 익명성을 포기한 사람들
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는 데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게 연예인이다. 물론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하는 무명 연
예인들이 훨씬 많다. 때로는 익명성이 그리워 아무도 자신
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때
연예인들은 자유를 느낀다. 가까이는 일본이나, 홍콩, 멀리
는 유럽까지. 그러나 그런 기회를 갖는 연예인 역시 흔하
지 않다. 연예인은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그를 주시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부자연스럽
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엔터테이너의 세상이다. 어느
누구도 텔레비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본인이 원하
든 원하지 않든, 교수든, 판사든, 시인이든, 대통령이든,
TV라는 매체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심지어 홀로 사랑만
을 실천하고자 했던 테레서 수녀마저도 텔레비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다. TV는 이 시대 최고의 권력이
다. 연예인은 텔레비전이라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미래의
대통령이다. 그리고 막강한 힘과 돈이 따라다닌다. 따라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
장과 지하철역, 광장을 맘껏 돌아다니는 자유를 포기하더
라도.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왔던 김호진이란 연기자, 아
직도 구식 모토롤라 핸드폰을 갖고 다니다. 그것도 아날로
그 방식이다. "야, 아직도 아날로그 쓰냐? 그것도 연예인
이......" "형, 형까지!" 그 형은 바로 나였다.
"배워서 하며 안 될까요?"
연예인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을 어디 위해선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깡'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난 연예인이 될 거예요" 교육 방송의 '미디어가 보
인다.' 녹화 현장에 한 고등학새이 찾아와 다짜고짜
"어떻게 하면 탤런트가 되느냐"고 묻는다. 난 그 녀석
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여드름투성
이네 눈이 찢어진, 정말 못생긴 녀석이었다. "너 스스
로 잘생겼다고 생각하니?" "아뇨." "너 연기 잘해?"
"아뇨" 난 딱 잘라서 말했다. "미안해 얘기자만 넌 가
능성 없어, 포기해." "그래도 난 할 거예요." 맹랑한
놈. 하긴 네가 뭘 해.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꿈은 심
하게 말하면 성실하게(?)살아가는 나 같은 연예인에
대한 모욕이다. 또 이런 맹랑한 생각은 많은 청소년
들에게 헛된 꿈을 부추긴다. 해마다 탤런트, 개그맨
시험은 1백 대 1이 넘는 경쟁을 보인다. 미스 코리아
의 꿈을 안고 많은 처녀들이 가슴을 졸인다. 미스 코
리아로 선발된 사람들의 꿈은 대부분 탤런트나 MC
다. 방송국, 합창단, 무용단도 마찬가지고 엑스트라
자리 하나 놓고도 경쟁이 붙는ㄷ. 요즘은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직업 1위가 연예인이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도대체 왜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유
는 간단하다. 돈과 명예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
은 돈을 벌 수 있고 어딜 가든 자신을 알아본다. TV
의 시대엔 TV스타가 '왕'이다. 정말 짧은 시간에 남
들이 평생 모아도 만질까 말까 한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또 대통령 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그
러나 왕이 되는 연예인은 1백 명 중의 하나나 둘이라
는 사실을 쉽게 있는다. 먼저 연예인이 되려면 잘생
겼거나 예뻐야 한다. 개그맨이 뒤기 위해서라면 모르
겠지만 가수나 탤런트는 일단 멋있고 봐야 한다. 개
그맨도 독톡하게 생겨야지 평범한 외모로는 주목받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성공한 연예인들이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
다. 그건 청소년들에게 헛된 꿈을 안고 실아가도록
만드는 잘못된 지침일 수도 있다. 확실히 연예인은
우선 외모로 튀는게 유리하다. 물론 평범한 외로모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연예인도 많다. 최불암, 감혜자,
안성기 같은 연기자들의 경우 전형적인 미남미녀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연기의 달인이다.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를 한다. 따라서 연예인이 되려면, 외모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타고난 끼와 재질이 있어야 한다.
가수가 되려는 사람은 뛰어난 가창력이, 개그맨이 되
려는 사람은 남을 웃기는 재주가, 탤런트가 되려는
사람은 끼가, MC가 되려는 사람은 편안한 목소리를
일단 타고나야 한다. 두 번째,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야 한다. 먹고 살 걱정에 매달리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그건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에게
는 치명적이다. 연예인으로 성공하려면 많은 돈을 들
여서 능력있는 매니저를 찾아 자기 자신을 포장하고
가꾸면 된다. 그게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다. 멋있지
도 않고 돈도 없고 끼도 없는 사람이 연예인으로 성
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멋과 돈과 끼는 기본
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연예인의 꿈을 품은 많은 사
람들이 실망할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
리가 흔히 말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은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연예인은 끊임없이 기다릴 줄 아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어렵고 고된 과정이며 최
고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캐스팅을 기다리고, 캐스팅
이 되면 연습을 기다리고, 녹화를 마치면 방송을 기
다리고, 방송이 나가면 반응을 기다리고, 그리고 또
다시 캐스팅을 기다린다. 많은 연예인들이 기다리질
못해서 망가진다. 가끔 방송을 보면서 난 "어?" 할 때
가 많다.
'저 사람은 저기 나올 사람이 아닌데......'
한때 톱스타였던 사람이 자기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
는 방송을 할 때, 조금 인기 있다고 여기저기 마구
잡이로 나올 때, 난 슬퍼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내 방송에서 사라진다.
방송의 속성은 아주 무섭다. 자주 나오면 시청자들
이 "식상하다"고, 몇 달 안 나오면 "한 물 갔다"고 관
심을 돌린다.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무작정 캐스팅
되기만을 바라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자신에게
딱 맞는 프로라고 생각될 때는 어떻게 해서든 따낼
줄 아는 적극성도 포함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젓가락을 입에 물고 굶어 죽을지
언정 절대로 자신을 팔아선 안 된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건 어렵다.
하루에 천 원 정도로 1년 정도 버틸 수 있는가?
내가 아는 연극배우 한 사람은 결혼하고 몇 해 동안
김치와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생활을 했
다. 자신도 부인도 대학까지 나왔는데 오직 연극에
대한 열정만으로 가난을 버텼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산에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고 한다. 소일거리를 위해
서가 아니라 먹을 게 없어서. 일거리가 없나 알아보
기 위해 대학로로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딱
천 원을 줬다고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술을 얻어
먹고 담배도 빌려서 피웠다. 자판기 커피를 두 잔이
라도 마시는 날이면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등 점점 부각되더
니 요즘은 어려운 연극판에서도 잘 나가는 연기자로
성공했다. 드디어 '뜬'것이다. 그는 몇 해 동안이나 참
고 기다렸다. 중간에 버스 운전도 해보고 세일즈도
했지만 이내 때려치우고 대학로로 달려가곤 했던 그
였다. 그런 끈기 정열 없이는 연기자, 넓게 말하면 연
예인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또 한 가지,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부
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늘 투자해야 한다. 방송은
언제 어떤 걸 요구할지 모른다. 몇 해 전 수영선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찍었을 때 주연급 연기자가 수영
을 못해서 캐스팅에서 제외됐다는 얘길 들었다.
"수영을 할 줄 아느냐?" 고 했을 때 바로 "네"라고
대답해야지 "배워서 하면 안될까요?"라고 한다면 이
미 당신의 이름 위엔 붉은 줄이 그어진다. 탤런트의
어원은 '재능, 재주'란 뜻이다. 그야말로 못하는 게 없
어야 한다. 승마, 골프, 태권도, 노래, 무용, 국악, 영어
회화 등등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다. 운동을 통한
몸매 가꾸기는 하루의 일과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외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성형수술도 해
야 한다. 쌍커풀도 만들고 치아도 교정하고 심지어는
털도 깎아야 한다. 이런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면 '전원주 스타일'의 연기파로 남을 각오를 해야 한
다.
그 정도 인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20년 정도는 기다
려야 할 것이다. 그것도 온갖 조연을 거치면서 연기
의 수준이 정상급에 이르러야 가능한 얘기다. 준비와
투자는 여유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다. 언제나, 늘 하는 것이다. 바쁘든, 한가하든, 돈이
있든, 없든, 항상 해야 한다. 물론 그건 탤런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자신에게 투자한 사람만이 이 고통이 끝났을
때 살아남을 것이다.
연예인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선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한
다. 그것은 시간일 수도 있고 체력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모든 것
을 바쳐서라도 꼭 하고 싶어한다면 난 "연예인에 도
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쉽게 말하기 전에 일단 하루에 천 원으로 1
년 정도 버틸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살'은 미움을 낳고 미움은 슬픔을 낳는다.
나느 얼굴과 몸매에 신경을 써야만 먹고 살 수 있
다. 내 몸이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는 건 생각처럼 쉬은 일이 아니
다. 아,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
아, 참을 수 없는 식욕의 무거움이여
현희는 연극배우 초년생이다. 그녀는 항상 식사 때
가 되면 슬쩍 자리를 피한다. 다른 사람들이 "오늘 저
녁은 뭘 먹을까?" 하며 고민하는 동안 현희는 그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 듯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오는 사이 그녀는 편의점에 다녀온다.
우리가 이를 쑤시며 커피를 마실 즈음, 그녀는 자신
만의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치토스', '양파링', '포테
이토 칩'...... 이런 것들이 그녀의 식사 메뉴다. "왜 밥
을 안 먹고 과자를 먹지?" 어느 날 그녀에게 물었다.
"밥맛이 없어서요."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우린 여
름 내내 공연을 했으므로 그녀가 더위를 먹었거나 정
말 밥맛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근 한 달
이 넘도록 식사 때마다 과자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 착 달라붙는 스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온 그녀를 보고 우리들은 감탄했다. 그녀의 몸매는
훌륭했다. 질투가 많은 동료 여배우들조차 "예술 작품
이다.", "섹시 스타 이승희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
았다. 그 이후로 우리들 사이에선 은근히 식사 대용
으로 과자를 먹는 유행이 번지기 시작했다. 현희의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은 과자 다이어트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마
저 군살빼기에 돌입했다. 물론 대부분 허기를 참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이어트에
대해선 편집증에 걸릴 만큼 신경을 썼다. 그러나 현
희는 여전회 과자 한 봉지로 한 끼를 때웠다. 그녀와
공연하는 다섯 달 동안 그녀가 밥을 먹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배우가 분장실에 오
더니 말했다. "어제 현희랑 늦게까지 술을 마셨어. 걔
는 술도 안 마시고 안주도 안 먹대. 그리고 우리 집
에 같이 갔는데 라면 끓여 먹자고 했더니 그냥 자자
는 거야, 그러다 새벽에 자꾸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갈래 일어나 봤더니 글쎄 현희가 전기밥솥을 통째
로 끌아안고 라면에 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고 있지
않겠어? 내참, 기가 막혀서." 그날 현희는 우리에게
고백했다. 사실 자신은 폭식주의자라고. 하루 종일 밥
을 굶고 잘 참다가 자정 무렵에는 결국 허기를 참기
못하고 밥을 두세 그릇식 먹는다고. 그리고 자신이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은 과자를 먹는데 있는 게 아니
라 순전히 지속적인 운동 때문인데 하루에 수영 1시
간, 에어로빅 1시간 이렇게 2시간 동안 땀을 흠뻑 흘
린다고.
회교 국가에선 이슬람력으로 9월이 되면 한 달 동
안 '라마단'이리는 금식 기간을 갖는다. 이때 회교도
들은 한 달 내내 굶는다. 단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낮에는 물 한 방울 먹지 않지만 일단 해가 지면 배가
터지도록 먹는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해질녘이 되
면 거리가 텅빈다. 집에 일찍 돌아 온 식구들은 식탁
에 둘러앉아 음식을 잘 차려놓고 창문 밖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리고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허겁지겁 먹어대가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다른 때보다 식료품이 더 많이 팔린다
는 사실이다. 하루에 세 끼씩 규칙적으로 먹을 때보
다 금식 기간에 오히려 더 많이 먹는 것이다. 그만큼
허기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연기자가 되
고 나서 난 무턱대고 먹을 수 없었다. 운동을 일주일
만 하지 않아도 얼굴이 붓고 배가 나왔다. 직장 생활
을 할 때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밤참도 즐겼기 때
문에 입사 2년째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보다 무려
8kg이나 불어 있었다. 애초부터 통통한 이미지였다면
모를까, 처음엔 샤프했는데 점점 살이 찐다면 대외적
인 이미지 관리상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데뷔작인 '도
깨비가 간다'에서 나의 양아버지 역을 맡았던 이정
길 선배는 내개 이렇게 충고했다. "얼굴에 살이 붙지
않게 조심해라. 너 같은 이미지의 배우가 얼굴에 살
이 붙으면 사람들은 너를 보고 태만해졌다고 할 거
야. 그때는 배우로서 끝이다." 충격적인 충고였다. 스
스로도 체중 유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다이어트는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됐다.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면 살이 찌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다.
사업을 한다거나 직장생활을 한다면 배가 나온들 무
슨 상관이랴. 얼굴에 살이 붙어도 먹고 살 수 있지만
난 그렇게 못하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젊음을 유지
해야 하고 내 얼굴과 몸매에 신경을 써야만 먹고 살
수 있다. 내 몸이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포식하는 날의 즐거움
나는 모친 쪽의 유전자 덕분에 하루에 세 끼를 꼬
박꼬박 먹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천성적으로 살이 찌
는 체질이다. 때문에 다이어트는 내게 생활 습관이
됐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든 그 음식의 칼로리와
지방 함유량을 먼저 생각한다. 맛을 느끼기도 전에.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서 하나의 즐거움인데...... 하루 중 두 끼는 보통으로
먹고 한 끼는 간단한 음식을 먹는다. 미숫가루나 요
구르트, 호박죽 같은 것 중에서 한 가지를 먹는다. 그
리고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보통 4km정도 조깅을 필
수로 하고 그 외에 웨이트 트레이닝과 수영, 미친 듯
이 산 뛰어다니기, 손목과 발목을 풀며 몸흔들기, 음
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추기 같은 것도 좋아한다. 특
히 나이트 클럽에 갔을 때 난 죽기 살기로 춤을 춘
다. 얌전하게 혹은 멋있게 추는 춤은 나와 거리가 멀
다. 땀으로 온몸이 푹 젖을 정도로 쉴새없이 춤춘다.
숨이 헉헉 차올라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까
지. 놀면서 동시에 운동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굶는다는 건 사실 다이어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
다. 효과를 떠나서 굶는다는 것은 꿈찍한 것이다. 칼
로리를 따져가며 먹는다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다.
배부르게 먹지 말고 마지막 한 숟가락을 아끼면 된
다. 그리고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서도, 과식과 과음
이 체중 유지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에 항상 식이요법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먹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래서 일주일에 하루 저녁 한 끼는 마음대로 먹는 날
로 정한다. 이날은 먹고 싶은 걸 원없이 먹는다. 치킨
이든 햄버거든 또는 돼지갈비든. 이렇게 일주일에 하
루 정도 포식하는 날을 정해놓으면 그날이 기다려지
기까지 한다. 내가 오늘 저녁 피자를 먹고 싶다면?
일단 피자 대신 치즈와 양상추를 넣은 샌드위치로 만
족한다. 그리고 '포식하는 날', 가까운 피자집으로 간
다. 레귤러 피자를 시킨다. 그리고 트림을 꺽꺽해가면
일심히 피자를 먹어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
는 대체 식품으로 만족하거나 철저히 양을 조절해가
며 식사를 한다. 저녁 8시 이후엔 먹지 않는다든지
한 공기 이상의 밥은 이상의 밥은 참는다든지 하는
일반적인 규칙도 물론 적용된다. 그러나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아,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토요일. 포식하는 날이다! 이
제 그만 피자집으로 가야겠다.
낯선 세상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
사랑을 조금씩 죽이는 것은 일상적인 모든 것이며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권태다.
권태와 식상함이여, 가라
한평생 낯선 이방인처럼 살아가길 바란다. 미술계
가 내게 낯선 환경이 되길 바라며, 미술계에 내 작업
이 낯선 것이 되길 바라며, 미술계가 나를 낯설게 여
기길 바라다. 나도, 미술계도 서로를 낯설게 여기길
바란다. 한 여성잡지에서 마련한 송년 모임에서 전위
예술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이윰'이라는 독특한 이
름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그가 준 명함에 위의 멋진
문구가 씌어 있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
곤 소설도 쓰고 설치미술도 하는 '토털 아티스트'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사만 하고 그냥 서로의 볼일을
봤을 뿐이다. 집에 와서 자세하게 그녀의 명함을 살
펴보고 참 괜찮은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예술
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식상함'이다. 사
랑을 조금씩 죽이는 것은 일상적인 모든 것이며 죽음
보다 더 두려운 것은 권태다. 이 권태를 극복하는 길
은 '낯섦'밖에 없다. 프레디라는 오래된 필리핀 친구
가 있다. 필리핀에서 최고의 명문대학인 필리핀 대학
을 나와 삼성물산에 다녔다. 그가 말하기를 필리핀에
서는 눈이 작은 사람이 미인이란다.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지 지배를 받아 혼혈이 많
다. 살갗은 가무잡잡하지만 눈은 동그랗고 큰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처럼 '단
추구멍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미남미녀 소리를
듣는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게 낯설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
일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남자들이 반하는 동양
여자들은 대부분 눈이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전형적인 몽골인이다. 우디 알렌의 애인이었던 미아
패로의 수양딸로 자라다가 우디의 연인이 된 순이를
보자. 우리의 눈에는 뛰어난 미인도 아니고 글래머도
아니다. 정말 아름 그대로 옆집 '순이'처럼 생겼다. 우
리가 보기엔 평범하지만 우디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
양이다. 당나라 때의 미인도를 보면 거의 얼굴이 보
름달처럼 통통한 여자들 투성이다. 요즘과 같은 시대
라면 다이어트 때문에 골치깨나 아플 푸짐한 체격과
얼굴형을 갖춘 여자들이 미인 취급을 받았다. 춘추전
국시대의 수나라를 거치면서 수많은 전쟁과 기근에
시달렸던 사람들은 굶는 게 일상 생활이었다. 나무뿌
리로 연명하고 심지어는 어린 자식까지 잡아먹는 풍
속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뼈만 앙상한 몰골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겨웠을 게다. 따라서 비만은
풍요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마른 것이 익숙했던
그들에게 살찐 것은 미 그 자체였다. 팝스타 마돈나
는 '낯설게 하기'로 자신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
다. 그는 팬들이 놀랄 정도로 스스로를 낯설게 만든
다. 동성애와 양성애, 숱한 남성 편력에 이르는 성생
활, 매스컴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 행동과 말, 헤어
스타일과 외모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주제를 바꿔 출
시하는 새 앨범들. 누군가는 그녀를 혐오하고 누군가
는 그녀를 사랑한다. 창녀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미
군 부대에서 군 복무하던 80년대 말, 같은 방을 쓰는
미군 병사는 말했다. "마돈나와 하룻밤을 잘 수 있다
면 6개월 동안 매독에 걸려도 좋다"고. 어쨌든 그녀는
주목받는 삶을 산다. 주목받기 위해선 낯설어야 한다.
낯설지 않은 것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
녀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 낯설다고
여기는 것에 과감하게 자신의 몸을 던지는데 있다.
저 유명한 장 폴 고티에의 원뿔형 브래지어를 처음
착용하고 무대에 선 것도 그녀가 아니던가. 그것은
낯설음의 극치였다. 그녀는 낯익음을 거부하고 용기
있게 낯선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다. 인류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남녀간에 성적인 신비
감이 지속되는 기간은 길어야 3개월뿐이라고 한다.
신비감은 낯설음과 다르지 않다. 낯설음이 낯익음으
로 변하면서 신비감은 깨진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그에게 더 이상 신비한 존재가 아니란 말인가?' 그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성적인
신비감을 넘어서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지속시키는
길은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낯설게 되는 것뿐이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그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낯설게
보일 수 있을까? 그건 아마 영원한 숙제일 것 같다.
결혼보다 동거가 좋은 7가지 이유
지금 이 순간 동거 중인 커플들이여, 축복 있으라.
우리 사회에서 동거가 쉬쉬하며 감춰야 할 대단한 비
밀이 아닌 삶의 한 형태로 전락(?)할 날만 기다리고
있나니.
난 명절이 싫다
"피곤해."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이내 곯아떨어져서
코를 곤다. 언제나 명절 때면 아내에게 미안하다. 올
설에도 꼬박 3일 동안 아내는 손목이 부를 정도로 일
을 했다. 지난 추석 때의 일이다. 우리 식구끼리 신나
게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누나의 매형, 나와 동생,
부모님과 오랜만에 찾아온 이모내 식구들까지. 그런
데 한참 웃고 떠들다 보니 아내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찾아봤더니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
다. "뭐 해? 들어가서 같이 놀지."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머슥해져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내에게 다가갔
다. "자기야, 이따가 해, 내가 도와줄......"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래?" "........" "왜
그러냐니가?" "아무것두 아냐." "좀 쉬어. 식구들 놀
때 같이 놀구." "10분이라도 쉴 시간이 있는 줄 알
아?" "에이, 누난 좀 도와주지 않구선." "일 때문이
아냐. 나만 소외당하는 느낌이라구." 안방에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박수까지 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야, 커피 아직 안 됐냐?" 어머니가 문을 빼꼼히
열고 물었다. 하지만 동거할 때는 명절이 되면, 아내
는 아내의 집으로, 나는 내 집으로 갔다.
"도대체 애는 언제 가질 거니?"
"도대체 애는 언제 가질 거니?" 어머니가 독촉하신
다. "병원에리도 가보지 그러냐?" "병원엔 왜요?" "임
심이 그렇게 안 되고 있으니 검사라도 받아봐야지."
"무슨 검사르 받아요? 둘 다 아무 이상 없어요." 처갓
집에서도 은근히 아이를 기다리는 눈치다. "자네 직무
유기 하는 거 아닌가?" "네?" "애가 빨리 들어서려면
그저 남자가 열심히 노력해야 돼." 장인의 말씀에 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력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데......' 난 우리가 아이를 갖지 않으려고 피임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이나 처
갓집에서 이 사실을 알면 어마어마한 훈계들이 퍼부
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지라는 독촉은
아예 어른들의 레퍼토리가 되어버렸다. 결혼한 지 2
년이 넘도록 임신 소식이 없으니 당연하다. 아이를
낳으라는 말은 단지 부모님만 하는 게 아니다. 아는
사람마다 아이를 낳으라고 성화다. 심지어는 비디오
가게에서 만난 옆집의 진수 엄마까지 아내에게 아는
체를 한다. "아유, 새댁, 빨리 낳아서 기르는 게 최고
야, 나두 둘 낳았지만 내가 새댁이라면 셋은 낳겠어."
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여기저기서 빨리 아이를 가지
라고 채근에 시달린다. 마치 빚이라도 요구하듯이, 아
내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결혼한 선배들은 아내에게
어서 임신해서 출산하라고 충고한다. "젊을 때 낳아서
기르는 게 좋다"고. 옳은 말씀들이다. 그러나 누가 아
이를 기를 것인가. 누가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
저귀를 갈아채울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아니고, 아내
의 부모님도 아니다. 아내의 회사 사람들이나 옆집
진수 엄나는 더욱더 아니다. 그건 나와 아내의 몫이
다. 따라서 아이를 기질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제 낳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나와 아내의 선댁이
다. 제발, 대신 길러줄 거 아니면 우릴 좀 가만 놔뒀
으면 좋겠다. 그것 때문에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
았으면 좋겠다. 다르릉-. "여보세요." "엄마다." "너,
최 권사님 일지?" "네, 왜요?" "그집 며느리가 몇 년
째 애를 못 가졌잖니. 근대--한의원에서 약 지어 먹
고 나서 임신했다더라. 너 내일 새애기랑 엄마한데
들러라. 한의원에 가서 약 한 첩 짓게." "........"
결혼하는데 웬 돈이 그렇게 필요한 걸까?
"2백20리터...냉장고가 좀 작지 않을까?" "글세, 잘
모르겠는데...... " "나중에 돈 벌면 큰 거 사지 뭐." 그
렇게 말하면서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웬만해서 한숨
을 쉬지 않는 그녀였다. "컬러 털레비전은 21인치에
비디오 겸용 대우 임팩트탑으로 하고 침대, 화장대,
옷장은 원목으로 했으면 좋겠어. 가스렌지는 불 두
개 나오는 거면 됐구. 오디오는 인켈로 할까......" 우리
는 결혼하면서 3천만 원의 빚을 안게 됐다. 이미 사
놓은 16평형 아파트 융자금 4천만 원은 별도로 하고.
결혼식 비용만 천5백만 원이 들었고 나머지는 혼수
비용으로 천5백만 원이 더 들어갔다. 함께 살다 결혼
을 했으므로 패물이나 예단은 일절 생략했다. 35만원
을 주고 둘이 함께 다이어반지 반 캐럿짜리를 사서
꼈을 뿐이다. 오디오와 TV, 침대, 식탁 같은 혼수도
처음엔 다 새 것으로 장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웬만한 가구는 다 동거할 때 쓰던 걸 그대로 썼다.
도대체 어디에 돈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우린 아낀
다고 아꼈는데. 남들은 다 한다는 야외촬영도 하지
않았다.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 야외촬영이란 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혼식 장면만 찍
으면 되지 무슨 야외촬영을 따로 하는가. 남들 다 하
니까 하는 건 싫었다. 사진사들이 만들어 놓은 룰에
신혼 부부들이 따라가는 꼴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3
분의 2가 빚이었는데 집값과 결혼식 비용, 혼수를 합
쳐 결국 1억 가까운 돈이 결혼하는데 쓰였다. 그리
고 결혼한 후에 우린 빚을 갚느라 늘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됐다. 원금과 이자를 제하고 나면 우리의 생활
은 언제나 적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가 동거할 때, 빚은 둘이 합쳐
신용카드 비용 70만 원이 전부였다.
달콤쌉쌀한 히든 카드
새벽 5시였다. 내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방배동의 포장마차에서 4차를
끝낸 후 총알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아내는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휴가였고 그녀는 회사
에 출근을 했다. 그날 아내는 내게 복수라도 하듯 새
벽 2시 30분에 돌아왔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나
처럼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지 옛 애인을 만나고 돌아
왔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취조는
금물이었다. 동거의 제1원칙은 '언제나 서로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린 별 문제가 없
었다. 그저 아무 일 없는 듯 2-3일이 지나면 또 헤헤
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기본적으로 각자의 사생활은
보장되었다. 난 총각의 장점과 기혼남의 안정을 동시
에 추구할 수 있었고 아내 역시 어딜 가든 아직은 공
식적인 처녀였다. 밖에선 얼마든지 우아한 싱글이었
다.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에는 서로에게 충실했던
화려한 더블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아니 이유로
새벽 5시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결혼 생활의 포기를
전제로 한다. "너, 정말 이러면 나 집 나간다."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맘대로 해. 내 호적 아직도 깨끗하
니까." 도대체 그녀나 나나 입만 다물면 우리가 동거
했다는 사실을 누가 알 것인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었다. 동거를 하면서 그건 서로 묵인된 사항이었다.
가끔씩 사소한 일로 싸우다가도 우린 '헤어지자'고 했
다.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자
고 위협하는 것은 동거하는 우리들이 애용하는 히든
카드 였다. 동거를 시작한 첫해, 우린 해운대로 여름
휴가를 갔다. 난 일부러 웨스틴 비치 호텔의 해변이
근사하게 보이는 방을 예약해놓았다. 레스토랑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하고 와인을 한 잔씩 하면서 난 그
녀에게 말했다. "이 호텔 멋있지?" "응." "방두 좋지?"
"응" "네가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여기 오게 해줄게."
"?""나,너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 ".................." "우
리, 결혼하자." 더 낭만적인 구혼을 원했던 걸까? (내
가 생각해도 참 시시한 프로포즈였다) 그녀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로 내 말을 막았다. 난 자존
심이 상했다.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고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믿고 있었지만, 내 청혼을 거절
한 그녀와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
아와서도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다. 같이 살다 보니
그녀가 더 좋아져서 동거의 자유로움을 잊고 무조건
결혼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휴가를 다녀온 다음날 그
녀는 조용히 말했다."잠시 떨어져 있자"고.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린 3일 동안 떨어져 있었다. 지금
은 함부로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건 끝을
뜻한다. 동거할 때처럼 "집 나간다"고 위협했다가 금
세 잊어버리는 장난이 아니다. 끝은 곧 이혼이고 복
잡한 과정을 거치는 걸 의미한다. 그릇 하나까지도
다시 나누어야 하는 치사한 과정을 감내해야 하는 걸
의미한다.
'집' 보다는 인생과 예술이 먼저였는데......
이젠 이 집에 싫증이 났다. 방 하나에 거실 하나.
그리고 주방과 화장실. 전용 면적 112평. 언제부턴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서울을 벗어나더라도 점
넓은 아파트로 옮기기로 했다. 3년 정도 살다보니 너
무 좁았다. 제발 옆으로 긴 집이 아닌 네모난 집에
살아봤으면. 주말이면 모델하우스를 보러 다니는게
일이 됐다. 그런데 우리의 목표는 계단식 24평형이었
다. 내 직업상 옷방이 꼭 필요하므로 방 3개 짜리에
베란다가 넓은 아파트면 좋았다. 우린 이리저리 머리
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가진 아파트를 팔고 돈을
조금 더 보태면 수도권의 미분양 아파트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빚을 져야 했다. 그래도 우린 계획을 세웠
다. 카드 대출을 받고 아내의 회사에서 집을 답보로
융자를 얻어 그 이자가 싸서 은행의 비싼 중도금 융
자를 되갚고 잔금은 지금 아파트를 팔아서 내고 거기
서 남는 건 다시 대출을 갚고............. 어찌어찌 마련하
면 2년 후엔 네모난 집에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
을 보러 다니면서 우린 집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하
지만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건 즐겁지만 당장 20평
형으로 진입하는 것만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
이다. 우리는 동거할 대 같이 회사에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2천5백만 원짜리 전세에 살았다. 그땐
집에 대한 소유욕도 없었으며 꼭 내집을 마련해야겠
다는 생각도 없었다. 남의 이름으로 된 집이었지만
별 걱정 없이 잘만 살았다. 대신 집 걱정을 하는 시
간에 우린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지금은 '내 집'에
살고 있지만 그때보다 몇 배나 더 집문제로 걱정한
다. 내돈은 내돈이고 그녀의 돈은 그녀의 돈이다. 각
자 벌어서 각자 쓸수 있다. 공동의 비용은 나누어 쓴
다. 식료품 구입은 그녀가. 세금은 재가, 잡비는 그녀
가, 문화생활비는 내가 내는, 이런 식이다. 밖에서 외
식을 할 때는 그녀가 낼 때고 있고 내가 낼 때도 있
다. 인도에서는 돈이 없어도 자유로울 수 있지만 자
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없으면 거지밖에 안 된다. 경
제력은 자유를 밑받침한다.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부
모에게 돈을 타 쓰는 신세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
다. 각자 벌어서 각자 쓰는 이 습관은 결혼 후 지금
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그 전과 다른 점은 결혼 후엔
여러 가지 계획 때문에 저축에 많은 비용이 들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외식이나 레저의 횟수도 많이 줄었다.
영화 대신 비디오 시청이 늘어났고 시를 읽는 대신
아파트 분양 공고를 살피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동
거할 때 우린 언제나 자유로웠다. 몸도, 마음도, 하늘
을 나는 새처럼 아무 구속이 없었다. 소유욕이나 권
태도, 걱정도, 근심도 없었으며 언제나 긴장하고 늘
애인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아파트 평수보단 영화의
시가 토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동거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유로움' 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현실적인 고민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동거 시절을 떠올린다. 그럴 때면 세파의 안개가 걷
히고 홀연 자유로워진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만난 한 카메라맨과 집 얘기를 하다가 "누구와 사느
냐"고 물어봤다. 그는 "여자 친구와 동거 중" 이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당신들은 그렇게 동
거한다는 걸 밝여도 되는가?"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동거한다는 걸 말하는 게 좀 부끄
럽지 않은가?" "왜 부끄러운가? 내가 동거한다고 해
서 내 친구나 직장 동료들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가
는 것도 아닌데. 그들이 혼자 살든 동거를 하든 난
상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내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그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떳떳하게 자신의 동거 사실을 밝혔다. 그곳에
서 동거는 수많은 삶의 형태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
금 이 순간 동거 중인 수많은 커플들이여, 축복 있으
라. 나는 그대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동거가 쉬쉬
하며 감춰야 할 대단한 비밀이 아닌 단지 하나의 삶
의 형태로 전략(?)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나니.
21세기엔 요리할 줄 아는 남자가 행복하다.
혹시 살림하는 남자가 있다면 절대로 실망하지 말
길 바란다. 살림하는 재미도, 사회에서 일하는 만큼
크다.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는 일은 결코 시시한
일이 아니다.
부엌에 들아가면 '고추'가 떨어진다?
대학 4학년 때 '후지타'라는 일본인 북디자이너를
알게 됐다. 40대 초반인 그는 콧수염을 길렀는데 플
레이보이였다. 그러나 결코 미남은 아니었다. 그저 성
격 좋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
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요리를 잘하기 때문"이
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독신 남자가 여자에게 잘
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성이 깃든 요리를 내놓는
것.' 이것이 그의 지론이다.
1990년 겨울이었던가, 친구들과 함께 그의 집에 놀
러갔다. 홍합요리를 내놓았는데 그 맛이 특급 호텔의
프랑스 요리 수준이었다. 오믈렛에 홍합을 익혀서 얹
은 요리는 일단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주홍빛 홍합이
노란 계란과 어울려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와인을 내
놓았고 1950년대 팝송인 'Love letters on the sand'를
틀어놓았다. 그리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는 멋진 남자였다. 이런 기막힌 요리 솜씨는 그의
모자라는 외모를 채우고도 남았다.
그후 나도 요리를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요리를
해보면서 요리가 철저히 상상력의 산물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머리가 좋은 여자는 요리도 잘한다. 상상
력과 창의력이 부족한 여자에겐 요리가 어렵다. 요리
의 묘미는 요리책에 적힌 대로 잘 따라서 하는 데 있
는 게 아니다. 주어진 재료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최
대한 발휘해서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창조해내는 게
요리의 본질이다.
내 특기는 굴요리다. 굴은 영어로 R자가 들어가는
계절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게 정설이다. 즉 9개월에
서 다음해 4월까지다(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 January, March, April). 그러므로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굴을 먹지 않는 게 좋다. 굴요리
중에서 내가 자신있게 내세우는 것은 굴오믈렛, 굴김
밥. 베이컨 굴말이, 표고버섯 굴찜 등이다. 이 중에서
내 창작 요리인 표고버섯 굴찜을 소개해보겠다. 이
요리는 모양이 예쁘고 맛이 좋아 연인이나 남편(또는
아내)에게 내놓으면 점수를 크게 딸 수 있는 사랑의
요리다.
우선 굴찜 다섯 개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살펴보
자. 굴과 홍합 약간, 굴은 양식굴 약 3천 원어치면 2
인분으로 적당하다. 그리고 표고버섯 다섯 개. 양파
두 쪽. 버터 2 티스푼. 와인 반 잔. 마늘 다섯 쪽.
1. 표고버섯을 끓는 물에 살짝 익힌다. 2. 익힌 표
고버섯을 꺼내 깨끗한 수건으로 물을 짠 후 접시처럼
엎어 놓는다. 3. 마늘 한 쪽을 으깨 표고버섯 위에 얹
는다. 4. 생굴 서너 개를 표고버섯 위에 놓고 가운데
에 홍합을 얹는다. 5. 굴 둘레를 반원 모양의 양파(또
는 피망)서너 개로 둘러 둥근 모양을 만든다. 6. 와인
1 티스푼을 전체에 뿌리고 홍합 위에 버터 3분의 1티
스푼을 얹어 놓는다. 7. 오븐에 넣어 약 5분 간 익힌
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 요
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을 때이다. 어떻게
나를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
을 수 있을까? 또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끔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굴요리를 접시에 근사하게 담아 준비
해놓고 있으면 아내는 집에 돌아와 어린아이처럼 좋
아하며 맛있게 먹는다. 그때 난 행복하다. 아직도 "요
리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많다.
그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둔 요즘에도 부엌에 들어가
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여긴다면 시대 착오
적이다.
살림하는 남자들, 파이팅!
지금은 요리하는 것이 즐거운 남자가 행복한 세상
이다. 고학력 실업자가 많아지면서 아내는 직장에 다
니고 남편은 살림을 하는 가정도 늘어났다. 혹시 살
림하는 남자가 있다면 절대로 실망하지 말길 바란다.
살림하는 재미도 사회에서 일하는 것만큼 크다. 또
청소하고 요리하고 빨래하는 일은 결코 시시한 일이
아니다. 그건 경제의 가장 작은 단위이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단위인 가정을 경영하는 일이다. 요리는 즐
겁고 청소는 상쾌하고 빨래는 기분을 좋게 한다. 살
림은 집을 살려나간다는 뜻인데 그건 흥겨운 작업이
다. 지저분한 48평보다 깔끔한 16평이 더 낫다.
그러나 맛있는 요리도, 집안을 꾸미는 것도 동기
부여가 없으면 한낱 단순 노동의 반복에 불과하다.
정성들여 요리를 내놓아도 상대방이 시큰둥하게 먹는
다면? 당신의 정신과 영혼을 떠받치는 육체의 밑거름
이 되는 소중한 양식을 신과 그 음식을 만든 사람에
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지 않고 그저 배고픔을 채우
는 수단으로 겨긴다면? 딸흘리며 깨끗하게 단장한 집
에 들어서면서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당신과 당신
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을 마련
해준 신과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 없이
그곳을 들고 난다면? 신경써서 때를 없애고 곱게 다
린 옷을 단지 퇴화한 가죽 정도쯤으로 여긴다면? 당
신의 호흡을 고르게 하고 피를 돌게 하는 의복을 준
비해 주는 사람에 대한 애틋함 없이 그것을 입고 벗
는다면? 대체로 살림하는 사람을 신나게 하는 가장
큰 동기는 밖에서 일하는 삶의 사람의 관심과 칭찬이
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딩크족으로 살아가는 이유
나는 아내가 아줌마에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
는다. "애 낳고 보면 살도 찌고 퍼지고 뭐 그런 거지"
라거나 "내 낳고 집안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라고 변명하는 것을 듣고 싶지도 않다.
사랑하니까 규칙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건강한 아
이를 낳는 것은 신의 축복이다. 그러나 난 아이를 갖
고 싶지 않다. 우리 부부는 소위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e)이다. 둘이 같이 벌되 아이
는 없다는 뜻인데 요즘엔 싱크족(SINK, Single
Income No Kids)도 있다고 들었다. 남편(혹은 아내)
혼자 벌지만 아이는 없는.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 걸
까? 단지 종족 보존을 위해서? 사랑의 결실로? 가족
구성원을 채우기 위해서? 어느 질문에도 선뜻 "그렇
다"고 대답할 말을 나는 찾지 못한다. 일단 '무작정
아이를 낳는 것'에 반대한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은 전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즉 한 사람의 건강한
어머니가 24시간 아이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의미
한다. 게다가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기란
힘겹다. 우선 절대적으로 보조한 탁아시설 때문에라
도 그렇다.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는 늘어만 가는데
어째서 탁아 정책은 제자리 걸음인지. 언제쯤이면 일
하는 여성이 회사 내에 있는 탁아 시설에 아이를 맡
기고 마음놓고 일할 수 있게 될런지...출근할 때 맡기
고 퇴근할 때 데려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낮에 아파
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아이를 데리고 나온 할머
니들이 보인다. 아이와 함께 나온 엄마의 숫자만큼은
될 것 같다. 맞벌이 하는 며느리나 딸을 위해서 우리
의 어머니들이 이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젊어서는 자식을 기르느라, 또 늙어서는 그 자식의
자식을 돌보느라고. 최소한 의사 소통이 될 때까지는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을 사람이 필요하다. 때문에 맞
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엔 아이를 봐주는 사람도 많
다. 하지만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한 달에 보통
70-80만 원 정도 든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아이만
봐줄 뿐이고 청소나 빨래 같은 다른 일은 하지 않는
다. 게다가 우유값과 기저귀값을 합치면 아이 한 명
에 한 달에 최소한 백만원의 비용은 우습게 깨진다.
그런 경제적 부담도 당장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큰 이
유가 된다. 어른들은 "너희들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도
아이를 길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 못
먹고 못 살았다. 따라서 최소한 어머니는 언제든지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생기는 대로 낳아서 기르는 시대가 아니라 낳아서 제
대로 기르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비용이나 어려워진
경제 사정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 것. 또는 아이
갖기를 유보하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된다. 어쨌든
비용 때문에라도 많은 엄마들이 친정 또는 시집에 아
이를 맡긴다. 할머니들도 고생이자만 엄마들도 힘들
긴 마찬가지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은 하루 종일
밖에서 남자들과 똑같이 일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본다.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가 봐주는 경우는 좀
낫지만 다른 사람이 아이를 돌보면 그 아이를 다시
맡게 되고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까지 해야 한다.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 슈퍼우먼이 아니고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 시집살이를 해온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직
여자가 직장에 다니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모른
다. 맞벌이를 해도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
각한다. 지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정말 손 하나 까
딱하기 싫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너무
오랫동안 살림만 해온 어머니들의 한계다. 그 한계를
깨기 위해선 남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 생활을 똑같이 하므로 집안일도 꼭같이 해야 한
다. 힘이 더 드는 청소는 남자가 도맡아 한다든지 하
는 규칙이 필요하다. "사랑하니까 규칙 같은 것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남자가 유리할 때 써먹는 공갈에
불과하다. 신혼 초의 달콤한 시절을 제외하곤 결국
집안을 언제나 여자의 몫이 되게 마련이니까. 명심하
라. 사랑이 깨지는 건 인생관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쌓인 빨래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 때문이다.
이이를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녀가 똑같이 맡아
서 해내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아예 낳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계산이 그렇게 많으냐? 일단
낳으면 다 기르게 돼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난 그게
싫다. 일단 낳고 보자는 생각. 어떻게든 기르겠지. 하
는 안일함. 그 무계획성이 남편을 피곤하게 하고 아
내를 병들게 하며 게이트볼이나 치며 노후를 즐겨야
할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들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있
는 것이다. 아이를 돌본다는 건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가끔 조카를 봐준
적이 있는데 보통 한 시간이 내게는 한계다. "자기 자
식이 아니니까"라고 말하겠지만 내 아이라면 더 신경
쓰면 썼지 덜 신경쓰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힘
들 것이다. 물론 단지 힘들고 귀찮아서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은 나와 아내 두 사람만으로 충분하다. 우선
우리는 조용한 생활을 원한다. 아파트를 구할 때 가
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얼마
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이다. 우린 아이를 기르는데
쓰는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 쓰고 싶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는 것. 그만
큼 우린 여유롭고 싶다. 충분히 잠자고,사랑하고,느끼
고 싶다.아이를 낳아서 그른다는 건 세상의 그 무엇
보다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린
그것 말고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더 많다.
여전히 '아내'를 '처녀'로 남겨두고 싶다
이런 내게 "이기적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
나 누가 누구에대해 이기적이란 말인가? 우리가 아이
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도대체 누구에게 해를 끼치
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아이를 갖게 되면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불
편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 우
린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단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
은 우리의 아이에 대해 이기적일 뿐이다. 그러나 있
지도 않은 존재에 대해서 이기적일 수 있는가? 그건
어불성설이다. 아이가 없어도 우린 심심하지 않으며
아이가 없어도 우린 사랑할 대상이 많다. 또 서로에
게 충실하고 만족하고 있다. 굳이 사랑의 결실인 또
다른 인격체가 없어도 서로의 발전이 우리 사랑의 결
실이라고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내 아내 때
문이다. 나는 내 아내가 싱글이 아니라는 것이 불만
이다. 나는 그녀를 언제나 처녀인 채로 남겨두고 싶
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다. 누군가의
아내라는 것. 그것은 싱글일때의 모든 매력을 반 이
상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이미 그녀는 처녀 때의 매력을 50% 쯤은 손
해를 봤다. 자유의 바람은 이미 그녀의 이마를 떠났
고 남자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도 그녀의 눈에서 지워
졌다. 다른 남자의 환심을 사는 향기와 분위기는 이
미 그녀의 남편이 선점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아 있
지 않다 .그녀가 아무리 싱글인 척해도 어느 한 부분,
걸음걸이나 손짓,말투등에서 기혼자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더 이상 처녀 시절의 몽환적 센스는 사라지고
결혼한 여자의 티가 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 아내는 아직 MBB(Married But no Baby)다. 결혼
은 했지만 아이는 없는 여자다. MBB와
MWB(Married With Baby)의 차이는 처녀와 결혼한
여자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MWB, 즉 결혼하고 아이
까지 가진 여자의 머리는 더 복잡해진다. 직업까지
가진 여성이라며 일과 집인일, 남편에 이어 육아에
지치게 된다. 일상의 피곤은 그녀를 더욱 늙어 보이
게 한다. 세상의 수많은 MWB들의 노화에는 종족
보존에 열을 올린 그들의 남편과 아들을 바라는 무지
막지한 시부모들, 슈퍼우먼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아이가 없는 지금도
내 아내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가끔 힘들어
한다. 내가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부족하다. 내가 왕자
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 생활은 그녀를
팍팍한 현실 속에 가두고 때때로 몇 푼의 돈 때문에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더 이상 그녀가 아줌
마에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애 낳고 보면
살도 찌고 퍼지고 뭐 그런 거지"라거나 "애 낳고 집
안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라고 변명하는 것을
듣고 싶지도 않다. 비록 더 이상 처녀는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선 언제나 내 아내가 싱글이길 바란다. 그
러려면 내 아내는 아이를 가져선 안 된다. 아마도 아
직은 그녀에 대한 성적인 끌림이 내 부성에의 발아를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쎄, 살아가면서 내 생각이
변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느닷없이 아내가 직장을 그
만두고 아이를 낳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진지
하게 결단을 내리겠다. 생활의 모든 시스템을 육아를
위해 바꾸겠다는. 영화와 음악과 여가를 포기하고 오
직 새록새록 커가는 아이에 모든 보람을 걸겠다는.
많이 포기하는 것만큼 많이 얻을 테니까. 그런 각오
없이 아이를 갖지는 않겠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랄 수 있는 준비가 될 때 까지는 현재
의 생활을 유지하겠다 또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나
서 기르는 재미에 묻혀 왜 진작 아이를 낳지 않았나,
하며 후회할지도.
지루한 연애는 미친 말보다 위험하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은 그녀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권태'가 가장 큰 적이었다. 우린 너무 안일했
다. 그게 잘못이었다. 세월이 흐르듯이 사랑도 함께
흘러가겠거니, 생각했다.
자유 연애의 바다에 빠져버려라
과천 승마장에서 말을 탄 적이 있다. 생각보다 말
등은 높았다. 나는 중심을 잃고 떨어지면 큰부상을
당할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때 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말은 대체로 순하다. 그러나 말과 먼저 친한 척해야
한다.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말은 경계
한다. 항상 말의 시야 즉 말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말잔등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하다. 말 뒤에서 다가갔
다간 뒷발에 채이기 쉽tq다. 그러다 말에 채이면 말에
서 떨어지는 것보다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 미친 말
의 뒷발에 채여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탄 말은 양처럼 순했다.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말잔등 위에서 '미친 말보다 더 위험한 건 지루하 연
애'라는 생각을 했다.
사건과 아무런 갈등이 없는 연애, 그건 일상만큼이
나 지루하고 심심하다. 그녀를 만난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녀는 전형적인 서울내기
였다.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할
때까지 수년가 우리는 연애를 했다. 서울내기는 깍쟁
이었으나 순수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정확한 표준
말을 구사했고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 적 없었다. 그
녀는 다른 서울내기들과 달리 도무지 한눈을 팔 줄
몰랐다. 나를 사귀면서 단 한번 도 다른 남자와 차를
마시거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를 만난지
3년쯤 지난 후였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말해다.
"나, 자기한테 고백할 거 있어." "뭔데?" "실은 자기
처음 만나고 한 두 달쯤 후에......" "미티에 나갔었어."
"그래서?" "별일 없었어. 예의상 한 번 더 만났구 그
게 다야." "그런데"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난 쭉 마음에 걸렸거든."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그
후엔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결 코 한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아, 20세기의 성춘향이여, 페넬로페여!
"그래서 그게 도대체 어쨌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
만 그녀의 동그란 눈이 맑게 빛나고 있어서 차마 그
러질 못했다. 이렇게 서울내기는 오직 나뿐이었으며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다. 그 덕분에 우리의 연애는 조
용히 진행됐다. 그녀에게 시비를 걸거나 데이트를 신
청하는 남자들은 드물었다. 그녀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 서라기보다 오직 나만을 향한 그녀의 굳은 지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그런 연애가 내심 싫증이 났
다. 대학 4년,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을 고스란
히 그녀에게 갖다바치기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내가 제대한 후에, 그년는 취직을 했고 내
가 복학생이 됐을 때, 난 자유로웠다. 머리를 제법 기
르고 캠퍼스에 들어선 순간, 봄바람은 상큼했고 햇빛
은 신선했다. 어디선가 날 부르는 인연의 유혹이 들
려오는 듯했다. 오, 이 들뜬 마음이여, 나는 새로은
만남을 준비하고 있노라. 그리고 3년 연하의 후배 여
학생들과 한 반에서 공부하며 행복해했다. 서울내기
는 다 또한 자신처럼 원칙주의자이길 바랐겠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난 수시로 원칙을 무시하거나 바꾸었
으며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인간
관계는 점점 다각화됐다. 연애의 다양함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맘껏 누리던 나는 차라리 이게 낫다 싶었
다. 자유 연애. 한 사람에게 얽매이느니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면서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가자. 얼마나
멋있는가. 그러나 다른 관계는 쉽게 정리하고 회복할
수 있었지만 서울내기만은 아니다 싶었다. 그러던 어
느 날, 이제 그녀와 끝을 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힘겹고 지루한 숙고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결단을
내렸을 때,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그녀를 만났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그녀는 예의
그 동그렇고 맑은 눈을 굴리며 나를 쳐다봤다. 뭐 그
리 심각한 이야기를 하겠는가, 하는 표정으로 이어
내 얼굴이 뭔가 폭탄선언이라도 하려는 듯이 굳어지
자 그녀도 긴장하는 듯했다. ".........." ".........." 어렵고
막막한 시간이여, 빨리 가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입
을 열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나의 갑작스런
이 말에 서울내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왜냐고 물었다. 자신이 매력이 없어졌는지, 아니면 다
른 여자가 생긴건지, 도대체 왜? 서울내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우리의 연
애는 언제나 평온했으며 순탄했다. 순풍에 돛단 듯이
세상의 파도를 헤치고 나갔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며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다. 그리고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곧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될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없듯 나 역시 다른 여자를 만난 적
이 없어야 했으며, 그녀가 그렇듯이 우리의 앞날은
장밋빛이라고 나 또한 믿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그
녀의 생각엔 그래야 했다.
Let it be
그러나 이변은 언제든지 일어난다. 나는 영화배우
들을 흉내내서 "사랑하니까 헤어지자"는 유치한 변명
을 했다. 결혼 같은 건 생활이니까, 일상으로 흐를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사랑은 퇴ㅅ된다.
우리가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을 때 이쯤에서 그만
만나자. 나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내 배신을 정
당화하려고 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서럽게 울어댔다.
그녀가 충혈된 눈을 들었을 때, 느닷없이 한 장면이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의정부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
을 때였다. 그녀가 면회를 왔다. 우리는 가까운 송추
로 놀러갔다. 냇가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어슬렁거리
기도 하다가 해질녘에 저녁을 먹으러 한 식당에 들어
갔다. "뭐 먹을까?" "아무거나 먹지, 뭐." "그래, 아무
거나." 그리고 난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송추에서
부대로 돌아갈 직행버스 차비밖에 없었다. "근데, 너
돈 있니?" "응, 있을 거야." 그녀는 자기 가방을 뒤졌
다. 딱 2천8백 원이 나왔다. 그녀의 차비 천5백 원을
빼면 천3백 원이 남았다. 메뉴를 봤다. '라면 천3백
원.' 그게 가장 쌌다. 난 난감했지만 곧 결정을 내렸
다. "아줌마, 여기 라면 하나만 주세요." "하나만?"
"네, 하나만요. 근데 젓가락은 두 개 주세요." 우린 낄
낄거리며 주문을 했다. 라면이 나왔을 때, 우린 그걸
가운데 놓고 즐겁게 웃고 떠들며 나눠먹었다. 왜 사
랑할 땐 가난했던 경험조차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막
상 헤어지려고 하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기억이 떠오
르는지. 난 얼른 그녀를 위로하며 장난쳐본 것이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젠장, 그녀는 금방 새새거리
며 내게 안겼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우리의 연애는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은 엎질러진 물
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그저 그렇게, '너무 오래된 연
인들'의 모든 형태를 반복하면서 유지돼갔다. 사실 그
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정이 붙어서 나도 습관적으로
거기에 길들여졌다. 습관은 막강한 자유 연애주의도
물리쳤다. 그리고 저력 있게 지루한 연애를 진행시켰
다.
그러나 결국 지루한 연애는 끝나고 말았다. 내가 다
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서울내기와의 관계는 완전
히 청산됐지만 사실 '권태'가 나와 서울내기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녀와 내가 헤어지게
된 것은 물론 그녀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우린
너무 안일했다. 그게 잘못이었다. 그저 세월이 흐르듯
이 사랑도 함께 흘러가겠거니, 생각했다. 연애를 재미
있게 만든다거나, 사랑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비전
을 갖지도 못했다. 우린 너무 나태했다. 연애에 권태
가 끼여들어도 그냥 두고 봤다. 하긴 뭘 어쩌겠는가.
렛잇비(Let it be)인 것을 . 그녀를 배신하면서 돌아섰
지만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
다. 그녀 역시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
웠을 것이다. 아마 차라리 미친 말의 뒷굽에 차이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들썩이세요" "네?" "말이 뛸 때 출렁이듯이 엉덩
이를 함께 들썩이세요." 승마 교관이 말했다. "그러면
충격이 훨씬 덜 하지요.
그리고 회전할 때 몸을 낮추세요. 지난번엔 말에서
떨어진 사람도 있어요." " 차라리 말에서 떨어지는 게
낫죠." 내가 말했다. " 뭐라구요?" 교관은 무슨 뚱딴
지 같은 소리냐며 날 쳐다봤다.
사랑은 처녀막보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그는 여자의 화려한 남성 편력에 대해 '다시' 언급하
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알 수 없는것에 이끌릴 뿐
여자는 33명, 남자는 겨우 9명
결혼하기 전에 33명의 남자와 섹스한 여자. 그리고 9
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 이 두 사람의 사
랑. 내가 라파르망(L' apartment)과 함께 최고의 영화
로 꼽는 영화 '네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내
용이다. 앤디 맥도웰(캐리)과 휴 그랜트(찰스)가 그
주인공이다. 두 남녀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
난다. 처음 만난 순간 그들은 별 생각 없이 하룻밤을
보낸다. 말하자면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
였다. 그후 그들은 친구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다
시 만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무 생각 없이 함께
보냈던 첫 만남의 하룻밤이 단순한 사랑놀음이 아니
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건 그들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영화 중간쯤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카페
에 캐리와 찰스가 앉아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
을 감추고 선뜻 프로포즈할 용기도 내지 못하면서 엉
뚱하게 서로의 섹스 라이프를 이야기한다. 환한 대낮
에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장소에서. 남자인 찰스에
비해 캐리가 훨씬 더 풍부한 성경험이 있었다. 캐리
는 33명의 남자를 거쳤고 찰스는 겨우(?)9명의 여자
를 경험했을 뿐이었다. 캐리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성경험을 이야기한다. "첫번째는 잊을 수 없고두 번째
는 등에 털이 났고... 여섯 번째는 생일날 부모님 방
에서 했고 아홉 번째는 별로였고 열 번째는 꿈 같았
고......"
우리 시각으로 보면 그녀는 한 마디로 '걸레' 같은 여
자였다. 심지어 " 스물여덟 번째는 스펜서였는데 스물
아홉 번째는 스펜서의 아빠였다"고 말할 정도다. 영화
속에서도 그녀를 아는 여자들은 그녀를 걸레라고 흉
봤다. 영어로 그걸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어
쨌든 자막엔 그렇게 나왔다. 그에 비하면 찰스는 신
사였다. 물론 9명의 여자를 경험하긴 했지만. 얼마 전
해외 토픽을 보니 결혼하기까지 미국 성인 남자의 평
균적인 섹스 파트너는 9명이리고 한다. 영화의 무대
는 영국이긴 하지만 어쨌든 찰스는 평균적인 섹스 경
험을 한 서양 남자다. 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의 섹스 경험을 담담하게 듣는다. 그리고 아무 일 없
었다는 듯 자신의 섹스 경험을 털어놓는다. 물론 그
런 고백을 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아무리 개방적
이라 해도 30년 가까이 '순결 콤플렉스'에 젖어 살아
왔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한국 남자니까!).그건 아
마 견디기 힘든 경험일 것이다. 나 역시 "뭐 이런 걸
레가 다 있지?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했군" 하면서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찰스의 태
도는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과 전혀 달랐다. 그는 자
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그 숱한 성 경험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찰스 당신은 서른 두번째였는데
아주 근사했다"는 캐리의 말을 듣고 안심하기까지 한
다. 한술 더 떠서 "나는 같이 잔 사람이 겨우 아홉 명
밖에 안 되는데 당신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 하고
어설픈 프로포즈를 하기까지 한다. 영화를 볼 때 이
대목에서 옆에 앉은 어떤 남자는 "미친 놈" 하고 낮
은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보통 한국 남자
다. 우리들은 '남자에게 순결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 생각을 뿌리 깊게 갖고 자라왔다. 이건 우리
자신의 잘못이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 세대들의 잘못
이기도 하다. 자신은 아무리 성경험이 많아도 신부만
은 '버진(Vergin)'이기를 바라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
나라 남자들에게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 때문에 처
녀막 재생수술이라는 해괴한 수술도 성행한다고 한
다. 그렇게 해서라도 결혼하겠다는 여자들이 딱하다.
게다가 아직도 첫날밤의 침대 시트를 보고 여성의 처
녀성 유무를 확인하려는 남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더
기가 막히다. 1996년 어느 신문에 우리 나라 대학생
들의 성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기사가 실렸다. 여대
생들의 63%가 "사랑하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남학생들은 55%였다. 예상과 달리 혼전 성관
계에 대한 오히려 여학생들이 더 개방적이었다. 이
기사는 10년 저느이 조사와 비교하면서 그때보다 대
학생들이 남녀 모두 혼전 성관계에 대해 훨씬 더 자
유롭게 생각한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사랑하지 않아
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여
학생의 8%만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 반면 남학
생의 3분의 1가량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조
사는 이제 우리 사회도 성에 대한 관념이 많이 서구
화됐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이제는 더 이상 순결에
대한 정조대식 관념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설
교나 훈계로 순결이 지켜지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수많은 미디어와 문화 매체를 통해 '더 이상 성은 비
밀이 아니다. 성은 아름답고 흥분되는 것이다'라는 이
데올로기가 무차별적으로 주입되고 있다. 이제 순결
을 잃는 것은 다시 만들 수 있는 신용카드 든 지갑을
잃었을 때의 타격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역설적으로 말하면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
켰다는 것은 그만큼 성적 매력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
석될 수 있다.
사랑은 숫자 놀음은 아니다.
시실 서른세 번인가 아홉 번인가를 따지는 것부터
가 우스운 일이다. 사랑이란 숫자 같은 것과 비교할
정도로 한심한 건 아닐 것이다. 만약 캐리의 고백을
찰스가 '난 겨우 9명인데 이 여자는 33명이나 경험을
했다. 나보다 24명이나 많은 숫지이며 무려 3.67배가
된다. 난 그녀에 대해 27.3%밖에 안 되는데...' 등등의
시시콜콜한 계산을 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이미 사랑
과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그녀가
좋았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그녀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가 다른 여자
와 결혼하는 결혼식날까지. 그래서 결혼식날 주례 앞
에서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 결혼은 파경을 맞는
다. 캐리가 바로 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때문에 찰
스는 결혼식을 깨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찾는다. 몰
론 찰스도 그녀가 자신보다 성경험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썩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대했다. 누구든지 혼전 성경험이 화려한 여자
와 결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가 영국 남
자든 미국 만자든 간에. 찰스의 가장 좋은 점은 결코
여자의 화려한 남성 편력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
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그여의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릴 뿐이
다. 찰스라고 캐리의 풍부한 혼전 성경험이 좋았을
까? 그라고 해서 남들이 '걸레'라고 부르는 그녀의 색
기가 좋았을까? 그가 영국 신사였기 때문에 절대로
여자의 과거에 개의치 않았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아주 조금은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역이 마
음에 걸렸을 것이다. 또 잠시 동안은 그녀를 '걸레'라
고 속으로 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것에 신경스는 모습을 1만 분의 1이라도 내색한다면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크나큰 결레를 저지
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여자가
자신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많은 남자와 잤는지 따위
는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것은 아
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과 결혼해서 평생 후회했을 테
니까.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 나오는 남자 중에서 가장 관
대한 남자가 요셉이라고 한 적이 있다. 바로 예수의
아버지다 .그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마리아
는 동정녀, 즉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았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수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마리아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었던 것
이다. 이 말을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 때문에 예수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
다. 설령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임신하게 했다 할지라
도, 어쨌든 요셉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를 받아들였다. 아마 그는 마리아를 무척이나
사랑했나보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무런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마리아가 정말 신의 아들을
임신했다고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도 지금처럼 처녀가 아이를 밴 가선은 두고두고 사람
들의 입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아마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셉의 신앙심이 얼
마나 돈독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임신한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그 용기와 관대함은 대단하다. 그것
도 자신의 아들도 아닌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를, 그때 그는 그 아들이 예수가 될지, 석가가 된지,
아니면 거리의 걸인이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관대함 하나만으로도 2천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그
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사랑은
처녀막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다'고.
'재테크'보다 '사랑 테크'가 먼저다
운전 면허를 따기 위해 얼마간 고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도 사랑을 위해 뭔가 투자하겠다는 계획은 세우
지 않는다. 사랑은 운전 면허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삶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바빠 죽겠는데 웬 사랑 타령?
아마도 대부분 새해 계획을 세울 때마다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살을 5kg 뺀다. 영어 회화를 마스터한다. (영업)실적
을 30% 향상시킨다. 한 달에 두 권 이상의 책을 읽는
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원이 돈다. 돈을 많이 번다.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면 우리는 거창한 계획
들을 세운다. 며칠도 못 가서 포기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구준하게 실천해가는것도 있다. 일에 대한 것,
성적이나 실적에 대한 것, 체중 감량에 대한 것, 금주
나 금연에 대한 것, 운전 면허를 딴다든지 하는 등등.
하지만 '사랑'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드물다.
올해는 어떤 사랑을 할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없
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 말
이다. 새해를 시작할 때 사랑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그 한 해는 실패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보다 두 배나
더 업무 실적을 올렸다 한들, 지난해보다 세 배나 더
돈을 벌었다 한들, 다섯 배나 더 주변의 인정을 받는
다 한들, 사랑에 대한 성취가 '제로'라면 도대체 한 해
동안의 시간은 뭐란 말인가. "바빠 죽겠는데 무슨 사
랑 타령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 당신은 무
척 바쁘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밤 12시가 될 때까
지 일에 치여 산다. 사람들을 만고 보고서를 작성하
고 이곳저곳 거래처에 들르고 술을 마시고....... 당신은
지칠 다로 지쳐 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렇게 바쁜 것인가? 무엇을 위해 밤을 새우고 끼니를
거르고 새벽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차에 시동을 거는
가? 무엇 때문에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고 모르는 사
람 앞에서 거짓 미소를 짓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당신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을 위해? 그렇
다면 당신은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 동물이
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의 행복으로 완전히 행
복해지지 못하는 피조물이다.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
람이 있다면, 당신의 새해 계획 속에 그 또는 그녀의
이름은 몇 번째로 나오는가? 그 대상은 당신만을 바
라보고 산 홀어머니일 수도 있고 어머니와 사별하고
퇴직한 아버지일 수도 있다. 또는 당신과 일생을 함
께할 소중한 반려자, 또는 그저 애인이라고만 지칭되
는 당신만의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음 한 해
동안 당신을 그(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행동을 해야 그(그녀)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
는지, 어떤 말이 그(그녀)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지 생
각해야 한다. 그의 생일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서부터
몇 번째주 일요일에 그(그녀)와 외식을 하고 그(그녀)
에게 약속했지만 내가 지키지 못했던 것, 그래서 올
해엔 꼭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가 한 말 중에 그(그녀)에게 상처를
저었던 것, 그래서 올해엔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그(그녀)으ㅟ 콤플렉스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
다. 그(그녀)의 발전에 내 사랑은 얼마니 도움이 됐는
지에 대한 반추, 사소한 오해와 부족한 인내심 때문
에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사랑을 우습게 만들었는지
에 대한 반성, 그리고 단순한 소유욕을 내세워 다른
사람과 그의 조화를 방해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
등등.
'사랑'에 얼마쯤 투자하고 있습니까?
이런 게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저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빠져 있는' 무의미한 시
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소비적 공유'
를 사랑으로 착각한다. 함께 쇼핑하고, 함께 영화를
보고, 스키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잠을 자고, 섹스를
하고........ 이런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착각한다. 물론
함께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함
께하는'시간보다 '함께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사랑을 위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그녀)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당신
자신을 되돌아보았는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닌가. 타인에 대한 사랑에 앞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잊고 있지는 않는가. 무한한 재능이 있
는 당신 앞에 많은 기회가 펼쳐져 있는데 이상에 '빠
져'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당신
이 충만되고 성실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편집증적
노이로제 상태라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
다. 우리는 흔히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고 말한다. 열
병을 앓게 도면 일할 수가 없다. 사랑 때문에 그( 또
는 그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데 그 사랑을 성공
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자신과 타인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며 그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확장시켜하는 과정이다. 물론 당신은 이
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실패였다. 생각없이, 계획없이 사랑엔
정열이 필요하지만 그만큼의 지혜도 요구된다. 무지
한 열정은 맹목일 뿐이며 그건 대부분 파멸을 부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랑이 계산된 행위
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
는 '영원한 사랑'을 위해 가금은 한 걸음 비켜서서 서
로를 객관화시켜 보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일이다. 그러나 '던질 것'이 많지
않으며 사랑의 생명도 짧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
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사랑을 위한 재투자를 의미하며 일생 동안 진
행되는 끊임없는 과정이어야 한다. 테니스를 배우기
위해 몇 달씩 고생하고 운전 면허를 따기 위해 1년쯤
고생할 각오를 하는 사람도 사랑을 위해 뭔가 투자하
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사랑은 테니스나 운전
면허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삶의 요소임에
도 불구하고. 동물은 먹이만 먹으면 되지만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육체의 에너지는 양식에서
나오지만 영혼의 에너지는 사랑에서 나온다. 그렇다
고 해서 사랑이 결코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랑
하며,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면 병도 달아나고
육체도 건강해진다. 그것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
된 사실이다. 몇 년 전 엔돌핀 선풍을 일으켰던 재미
의학자 이상구 박사의 이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육식을 하지 말고 채식을 하라는 것은 형식이었으며
그 내용은 '사랑을 먹고 살라'는 것이었다. 지금 당신
의 계획에 당신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육신을 건강하
게 하는 '사랑'에 대한 계획을 포함시키는 것은 어떨
까?
삶의 디테일이 행복을 만든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짜증나고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
낄 때는 가치관이나 사상이 달라서가 아니라 싱크대
에 쌓여 있는 그릇들과 널려진 빨랫감, 지저분한 방
때문이다.
난 '여우'가 좋다.
그가 당신에게 "착하다"고 말했다면 조심하라. 그건
당신이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녀가 당신에게 착하다고 말했다면 그건 당신이 멋
있지도 샤프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여자. 개성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렇다
고 날카로운 면도 없는 남자. 모든 일에 두리뭉실 처
리하는 사람. 참 하기 해도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우
는 지혜는 발휘하지 못하는 아내. 과장이나 부장은
돼도 상무나 이사는 못 될 남편. '착하다'는 말의 진
짜 뜻은 이런 것이 아닐까. 착한 여자라는 건 성적인
매력도 별로 없고 미련하고 아둔하며 그저 남자 말이
나 잘 듣는 '노예 같은' 여자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난
결혼을 앞둔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여자
어때?" 친구의 결혼 상대가 어떤지를 묻는 것이다. 그
러면 친구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응, 그냥 착
해." 난 이런 대답에 신물이 난다. "얼굴이 계란형인
미인이다"라든가 "좀 깐깐하긴 하지만 그게 매력이
야" 라든가 "생긴 건 그저 그런데 요리솜씨 하나는
일품이야"라는 식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아니면
이런 건 어떨가. "그녀에겐 묘한 분위이기 있어." "가
야금을 전공했는데 내가 소주를 마실 때 옆에서 연주
해주겠대." "대단한 이야기꾼이야. 직접 영화를 보는
것보다 그 친구 얘기를 듣는게 더 재미있어." "지독한
구두쇠야. 실림 하나는 야무기게 할 거 같아." "나보
다 수입이 더 좋아." "아무리 봐도 꽃 같아." 어떤 것
이든 좋으리라. 도대체 빛나는 20대 시절에얼마나 특
징이 없으면 "그냥 착해"라고 말할까. "여우하곤 살아
도 곰하곤 같이 못산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곰 같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것
은 삶의 자잘한 재미라고 할 수 있는 온갖 일상사를
포기하는 걸 뜻한다. 사실 자질구레하고 하찮아 보이
는 것이 우리네 삶의 행복이다. 질투와 바람기(그저
끼로 그치는!), 눈치와 자상함, 거짓말과 들통, 상처와
위로, 부부 싸움과 화해, 아양과 삐침, 애교와 표독,
선물과 봉사 같은 것들이얽혀서 삶의 그래프를 그려
나간다. 세계관이 달라서 싸우는 부부가 있을까? 인
생관이 맞지 않아서 갈등하는 부부가 있을까? 물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함께 살 집의 벽지를 고르다
가 싸우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나는 삶의 자잘한
일상사가 전체 삶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부부가 살
아가면서 짜증나고 힘들고 불행하다고 느낄 때는 가
치관이나 사상이 달라서가 아니라 싱크대에 쌓여 있
는 그릇들과 빨랫감, 그리고 지저분한 방 때문일 때
가 더 많다.
'착한 여자'라는 타이틀은 집어던져라
이제부터는 그가 당신에게 착하다고 말한다면 화를
내라. 그리고 말하라. "난 당신이 생각하듯 그렇게 착
한 여자가 아니야. 난 못됐어.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
해. 당신이 한눈을 판다거나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
고 우습게 여기는 듯한 행동을 한다면 절대로 용서
못해, 단, 단신이 날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사랑해 준
다면 나 역시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처럼 다소고한
여자로 남아 있겠어. 그러나 내 속엔 언제나 못된 여
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살을 잊지 말길 바래." 그
러면 그는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는 대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가장 허술하게
대할 때가 많다. 아내가 남편에게 ,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고 오래된 애인에 대해서. 가장 사랑해야 할 사
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인데 우린 너무 자주
잊는다. 그렇게 된 이유는 서로를 잘 알게 되면서 서
로에게 허점을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친구 사이
든 부부 사이든 그 관계는 공격과 방어, 그리고 트릭
과 해법으로 이루어진 코스와 같다. 말하자면 다양한
작전이 필요한 생존 게임이다. 대충대충 지내고 관계
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d이다. 방심하
다간 결국 실연을 당하거나 이혼 당하기 쉽다. 가끔
은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곰보다 트릭
에 능한 여우가 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트릭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메타포에
가깝다. 메타포란 A를 A라고 말하지 않고 B나 C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착한' 여자는 메
타포가 없다.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
한다. 또 다른 사람의 메타포를 해석할 줄도 모른다.
메타포에 능해야 삶이 재미있어지는 데 말이다. 메
타포에 약하면 삶이 무미건조해진다. 누군가 당신에
게 "얼굴이 부었네"라고 한다면 그건 "당장 운동을
시작하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또 당신에게 "통통해
졌네"라고 말한다면 "너 돼지구나"라는 뜻이다. "살이
좀 붙었구나"는 말은 실은 "너무 게을러 보인다."라는
의미 일 수도 있다 "일요일엔 뭐 해요?"란 말은 "나
와 데이트할 수 있을까요?"라는 뜻이지, 당신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도 대단
한 메타포이다. 이를테면 옷을 새로 샀다는가 해어
스타일을 바꾸고 온 다음날, 자신은 멋을 부리고 나
왔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
을 때 그 침묵은 당신에게 무관심하다는 표현이다.
당신이 그녀에게 프로포즈했을 때, 그녀의 침묵은 '예
스'일 수도 있고 '노'일 수도 있다. 실로 침묵은 다양
한 의미를 갖는 메타포다. 이처럼 침묵을 잘 활용하
면 어떤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정
치학 이론 중에 '당근과 채찍'이란 것이 있다. 사람이
당나귀 다룰 때 달콤한 당근을 주면서 살살 꼬시기도
하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무섭게 다루기도 한 듯이.
지도자가 대중을 다스릴 때나 점령국이 식민지를 통
차 할 때 부드러운 유화 정책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강력한 공권으로 억압할 때도 있다는 뜻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때론 채찍으로 때리고 때론 당근으로 얼
러야 한다. 착한 여자라는 타이틀은 집어던져라. 똑똑
한 여자, 함부로 넘볼수 없는 여자가 돼라. 그리고 무
엇보다 메타포의 여왕이 돼라.
'평등'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평민의 삶을 꿈꾸느리 차라리 공주 노이로제
에 걸려 질시받는 삶을 택하겠다. 다이애나의 위대함
은 권위에 도전한 자유 정신과 자신의 지휘를 최대한
이용한 자전이다. 이런 자유 정신과 사랑을 잃지 않
는 한 공주병은 위대하다.
받을 만큼만 사랑받는다.
여자는 자신이 받을 만큼의 사랑만을 받는다. 아름
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사랑받는다. 물론 여기서 아
름답다는 것은 겉모습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97년
한 해에 우린 아름다운 여성 둘을 잃었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과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는 영국 d왕
실의 권위에 대항해 당당히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왕실이나 영국의 이익과 상관없이 평화와 자선
을 위한 사업을 추진해나갔다. 그녀가 참여한 행사
중에서 영국의 집권당과 왕실의 정책에 반대되는 것
도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서민들은 우리의 상상 이
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추도 기간 중 버킹엄 궁전
앞에서 그녀를 애도하는 수만은 송이의 꽃이 쌓였다.
테레사 수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말로 하는 사랑이
아닌 온몸으로 부대끼며 실천하는 사랑을 했다. 인도
뿐만 아니라 세계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
녀가 베푼 사랑만큼 세상은 그녀를 사랑했다. 우린
그런 여성들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왕관만 없을 뿐
여왕의 대우를 해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여성들이다.
어느 시대나 여왕의 대우를 받는 여자가 잇고 노예의
대우를 받는 여자가 있다. 나는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여왕의 대우를 받을 여자가 있고,
귀족의 대우를 받을 여자가 있으며, 평민이나 노예의
대우를 받을 여자가 있다. 그러면 어떤 여자가 여왕
의 대우를 받을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까지는 아니더
라도 적어도 자기 주변의 몇몇 사람들, 아니면 최소
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무엇보다 여왕이
되기 위해선 패션을 엄두에 두어야 한다. 패션의 출
발은 관찰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파악하는 것. 이
게 패션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거리를 걸으며 다른
사람들을 분여겨보는 것. 이건 패션의 두 번째 걸음
이다. 당신의 모습은 어떤가? 당신과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현재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다면 당장 헤어
스타일부터 고치자.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얼굴
전체를 성형하는 것과 맞먹는 효과가 있다. 긴 머리
라면 과감하게 숏커트를 해보라. 생머리면 퍼머로, 퍼
머라면 스트레이트로 자신의 스타일을 바꿔보는 건
어떻까? 머리를 자르기 싫다면? 변신이 두렵다면 차
라리 지금 그 자리엣 칼을 물고 죽는 게 낫다. 감각
이 없는 여자는 예뻐질래야 예뻐질 수가 없다. 감각
이 없다는 것은 무딘 것이다. 세심한 관찰은 나의 모
자람과 뛰어남, 상대방의 결점과 장점, 그리고 시대의
관통하는 유행의 흐름을 깨닫게 해준다. 그걸 자신의
개성에 맞게 적용하고 창조하는 게 패션의 본질이다.
유행에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유행을 무시하라. 20년
전 어머니가 입던 코트를 꺼내 과감하게 걸쳐보자.
남들이 다체크 롱스커트를 입는다고 해서 당신도 따
라 한다면 평민 수준밖에 안 된다. 그땐 미니 스커트
를 입어라. 남들이 다 미니를 입는다면? 그러면 당신
은 다리에 딱 붙는 가죽바지를 입는다. 친구들이 매
니시(Manish)로 나가면 당신은 여성다움을 강조하고
그들이 훌훌 벗어던지면 당신은 온몸을 감싸라. 그런
지 룩(Grunge Look)엔 정장으로, 노출엔 시스루(See
Through)로, 밍크 코트엔 누드로! 이첨럼 패션의 모
토는 반항과 개성이다.
여왕과 노예는 종이 한 장 차이
그리고 여왕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말을 아껴아 한
다. 지금 당신이 하루 동안에 하는 말을 3분의 1만
줄여도 당신은 지금보다 3벼 정도 더 신비롭고 사랑
스러운 여자가 된다. 말이 많은 여자는 결코 여왕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술을 많이 마시면 알코올 중독
이라고 하고 일밖에 모르면 일벌레라고 한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벌레'다. 남자든 여자든 의외로
수다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여왕의 언어는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그윽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 한다. 또 말을 할 때 톤이 높은 여자는 아무
리 말을 아껴도 여왕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프리 섹
스와 언어 남용의 시대에 여왕이 조심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바로 음담패설이다. 성희롱 때문에 남자들이
함부로 여자에게 농담을 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
지만 때때로 음담패설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
는 것도 사실이다. 음담패설을 들을 때, 또는 직접 자
신이 하게 될 때 여왕은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왕은 결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음담패설
을 해선 안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해도 된다. 또 그가 음담패설을 했을 때
는 마음껏 웃어주는 것이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
닌 다른 사람이 음담패설을 했을 때 당신의 반응은
매우 종요하다. 그건 당신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장치
일 수도 있다. 음담패설을 듣고나서 당신이 전혀 모
르는 척 뚱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당신이 '형광등'이거
나 내숭 떤다고 생가하고, 깔깔 웃으며 당신에게 교
양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리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한 음담패설에 대해 그저 어이 없다는
듯 미소 짓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당신
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끔 음담패설을해도 좋다.
그건 그에게 당신도 야할 때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너무 야한 음담패설을 여왕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어느 것이 여왕이 할 수 있는 음담패설
이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일까? 한 예를 들어보
자. 한 남자가 있었다. 백화점에 팬티를 사러 갔다.
그는 엉덩이에 토끼 2마리가 그려져 있는 예쁜 팬티
를 샀다. 그날 밤 그는 그 팬티르 입고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토끼들이 팬티 앞쪽에 왕 있었
다. 왜일까? 정답: 한 마리는 당근ㅇ르 먹고 다른 한
마리는 풀을 먹으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백화점에
팬티를 사러 갔다. 그는 엉덩이에 토끼 3마리가 그려
져 있는 예쁜 팬티를 샀다. 그날 밤 그는 그 팬티를
입고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토끼들이 팬티
앞쪽에 와 있었다. 왜일까? 정답: 한 마리는 당근을
먹고 한 마리는 풀을 뜯어먹고 나머지 한 마리는 요
플레를 먹으려고.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예술과 외설
의 차이와 같다. 그리고 여왕은 다른 사람에 대한 말
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술안주로 제일 씹
는 것이 상사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도 마찬가
지다. 여자 상사든 남자 상사든 상관하지 않는다. 오
징어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ㅇ사람 씹기'다. 주로
험담이 많고 칭찬이 거의 없다. 그러나 여왕은 결코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
는데 어떻게 윗사람을 욕하겠는가. 스스로 여왕이라
고 생각해보라. 험담할 일이 없어진다. 얄미운 상사가
자시의 '아랫것'이라고 생각해버려라. '나보다 인격 수
양도 덜고 성숙도 덜 됐으니 미운 짓 할 수도 잇지.
뭐.' 이렇게 생각하라. 또한 취미가 고상한 것은 여왕
의 필수 조선이다. 음악과 영화, 연극, 스포츠 같은
취미 생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주의 빌보드 챠트 1위 곡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른다면 당신은 벌써 뒤처져 있는 것이다.
팝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공통 언어다. 팝에 대한 지
속적인 관심은 그러지 패션과 힙합 문화. X세대에 대
한 이해를 넓혀준다. 소피커에서 최신 가요가 흘러나
오면 누구의 무슨 노래인가 하는 덩도는 알아야 한
다. Ejh한 클래식애 대한 이해도 반드시 갖추어야 한
다. 우연히 라이오에서 흘러나오는바흐의 무반주 첼
로 조곡을 들 들었을 때 사람의 가슴을 dfj마나 저미
게 하는지 알아야 하고, 판소리 '심청가'중에서 심봉사
와 심황후가 상봉하는 장면을 들을 땜녀 자신도 모르
게 한 줄기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영
화 보기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를 선책할
때마다 우리가 철저히 할리우드 영화 시스템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시살을 느끼지 않는지. 때로는 한국
영화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는
않는지, 때로는 한국 영화와 유럽 영화에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가 많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경마나 카드 같은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경마는
도박이라기보다 고급 레저로 인색해야 한다. 우리는
하루 세 끼의 밥을 꼬박꼬박 먹는다. 우리의 위장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하루에 7시간 동안 꼬박 눈을
감고 눕는다. 우리의 잠을 채우기 위해서. 또 우리는
일주일에 평균 1회 내지 7회의 섹스를 한다. 우리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문화를 굶으면 정신 마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달에 평균 몇 번이나 공연장을
찾는가? 우리의 정신을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먹고,
마시고, 자고, 섹스하는 것에는 인색하지 않은 사람도
문화 생활엔 인색하다. 두 끼 정도 내리 굶었다고 하
자. 무척 배가 고플 것이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자. 매우 졸릴 것이다. 이번에는 한 달 내내 영화
한편 보지 않았다고 하자. 문화적 욕구도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것이다. 주기적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은 엄청난 허기를 느낀다. 돈이나 외모보
다 문화를 느끼고 누릴 줄 아는 감수성이 더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밥을 굶으면 살이 빠지듯이 문화를
굶으면 정신의 살이 마르게 된다. 목욕을 제대로 하
지 않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듯이 문화를 거르면 우리
의 말과 정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먹
고 살기 바빠서 '문화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는 통하
지 않느다. 목욕하듯이 정기적으로 공연장을 찾아 우
리의 정신을 샤워하자. 한편 여왕은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운동과 몸매는 피부를 젊게 유지시켜준다.
조깅을 한 번 하는 것이 좋은 화장품 열 번 쓰는 것
보다 훨씬 낫다. 조깅을 하면서 땀을 흘리면 피부의
노폐물이 함께 흘러나온다. 스포츠는 스트레스를 떨
쳐버리고 항상 생기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항상 아름다운 모습만 비춰
주는 모 중년 여배우가 화장을 하지 않은 채 분장실
에 왔다. 그 순간 나는 놀라 기절할 뻔했다. 심하게
말해 그녀의 얼굴이 '썩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
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그녀는 망가진 얼굴을
분장으로 가려왔던 것이다. 얼굴이 썩는 이유는 어려
가지다. 나이와 병, 과로, 아이 기르기, 흡연 같은 육
체적인 이유와 실연, 삼각 관계, 열등감, 시집살이, 애
정 결핍 같은 정신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런 경우 운
동을 하면서 죽은 얼굴과 몸매를 살리는 것은 어떨
까? 수영이나 조깅, 에어로빅, 줄넘기, 사이클링과 같
은 유산소 운동은 체중 감량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
다. 아니면 집에서 댄스 음악을 크게 틀언 놓고 한
시간 정도 맘껏 춤을 추는 것도 좋다. 물론 요점은
땀을 '흠뻑' 흘리는 것이다. 헬스 클럽을 찾아 체계적
인 보디빌딩을 하는 것도 괜찮다. 스키나 볼링, 골프,
테니스 같은 운동도 페슨을 받아두면 좋고 스카이 다
이빙, 스킨 수쿠버, 수상 스키. 패러글라이딩, 암벽
등반 같은 모험적인 스포츠를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
각한다. 또한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닌 '보는 스포츠'
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다. 축구나 프로야구, 복싱.
NBA 농구 중에서 분명 당신의 애인이 흥미를 갖고
있는 스포츠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의 룰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스포츠는 가장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소재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모르는 사람과 금세 친해질 수 있으며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가 화재가 될 때 당신이 소외당하지 않도록 해
준다. 우리는 흔히 '공주병' '왕자병'이란 말을 경멸하
듯 말한다. 당신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을 평민이라고 생각하는가? 공
주병이 왜 나쁜가? 나는 평민의 삶을 꿈꾸느니 차라
리 공주 노이로제에 걸려 질시받는 삶을 택하겠다.
다이애나의 위대함은 스캔들과 화려함 때문이 아니
다. 권위에 도전한 자유 정신과 자신의 지위를 최대
한 이용한 자선 때문이다. 이런 자유 정신과 사랑을
잃지 않는 한 공주병은 위대하다.
당신의 향기는 어떤 빛깔입니까?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싶다면 당신만의
향기로 그를 매혹시키는 것은 어떨까? 헤어지든, 만
남이 지속되든, 그는 오래도록 당신의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오늘 밤엔 향수를 쓸까요?
여자에겐 향기가 있어야 한다. 향수 냄새든 비누
냄새든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지녀야 한다. 같은
향수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향기가 다르다. 향수가
사람의 몸에서 분비되는 체약이나 담과 섞여 그만의
냄새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땀이 적거나 채취가 거
의 없는 사람은 향수 고유의 향기가 더 강하게 지속
되는 반면, 체취가 강한 사람은 그 체취와 향수 냄새
가 섞여 그만의 오묘한 향기로 변한다. 사랑을 하는
데도 냄새는 참 중요하다. 여자는 귀로 사랑을 시작
하고 남자는 눈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속삭이는 밀어에 약하고 남자는 여자
의 아름다운 외모에 넘어간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밀어나 외모보다 사람의 본능을 더 자극하는 것은 후
각이다. 후각은 청각보다 원초적이가 때문이다. 인간
은 냄새를 맡으면서 사랑을 시작했다. 4만 년 전 석
기시대 원시인들의 생존 방식을 그린 영화 장 자크
감독의 '불을 찾아서'를 보면 이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밤중 한 무리의 원시인이 불가에 앉아 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가까운 곳에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누워 있다. 남자
가 그녀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갑자기
흥분하다. 둘은 곧 사랑의 행위를 시작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향수가 발달했을 리 없고 샤워도 제대로 하
지 않았을 것이다. 땀과 체액으로 얼룩진 남새만으로
그들은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의 인간은 동물
에 가까웠다. 한 번 불을 꺼뜨리면 다시 천둥이 치거
나 산불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다른 부족이 쳐
들어오면 수십 명이 그냥 죽어버렸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서로 잡아 먹기도 했다. 멋을 낸다거나 하는
개념가 거리가 먼 사회였지만 지금처럼 남성은 여성
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끌렸다.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남성은 아름다운 여성을, 여성은 힘 있는 남성을 선
호했다. 또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면 실명한 퇴역 장교인 주인공은 오직 냄새로 여자
를 구분한다. 만나는 여자마다 어떤 향수를 쓰는지
알아맞춘다. 심지어 삼푸 냄새까지 구별해낼 정도다.
여자들은 자신에게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관심을 갖
는 이 남자에게 묘한 호감을 느낀다. 중세 시대의 서
양에서는 육체적인 것을 죄악시했다. 중세의 문화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고
대소변을 보는 것 같은 생리적인 현상까지 부끄러워
했다.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씻지도 않았고 변변한
화장실 시설도없었다. 그 넓은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
실이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히 몸에서 나는 냄
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가 발달 할 수밖에 없었다. 특
히 프랑스에선 물이 좋지 않아 세수할 때 화장수를
썼다. 그것이 지금까지 '오드 투왈렛(Eau de toilette)'
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 여행
을 하기 위해 런던에 갈 때였다. 영궁 항공의 아름다
운 스튜어디스가 무려 15시간 동안이나 친절하게 내
시중을 들어주었다. 내 좌석은 비즈니스 클래스였는
데 다른 승객들은 대부분 중년 실업가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은 대부분 '아줌마' 들
이었다. 그 중 젊고 상냥한 미녀 스튜어디스 한 명
있었다. 그녀는 내게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통로를
오갈 때마다 "뭐 필요한 게 없느냐, 주스 좀 마시겠느
냐,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술을 한잔 하고 싶
어 와인을 주문했을 때 그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
는데 뭘로 할 거야"고 물었다. 물론 그녀가 내 앞에
내놓은 와인 중에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다. 나는 웃
으며 "달콤한 것"으로 달라고 했다. 그녀는 흰 포도주
를 한잔 따라주었느데 쌉쌀하면서도 끝맛이 달았다.
나는 "고맙다. 정말 달콤하다"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더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불러달라"고 말하며 웃
었다. 어느 스튜어디스든지 이 정도는 친절하다. 중요
한 건 그녀가 내 곁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코끝을 찌
르는 상큼한 향기가 났다는 점이다. 뭔가 이국적이면
서 자극적인 향기. 처음 맡아보는 향수였다. 한국에선
도통 맡아보지 못한 묘한 냄새였다. 비행기가 영국에
착륙할 즈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뭐 줌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향
수 냄새가 참 좋네요...여자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하
는데 향수 이름 좀 알려줄 수 있을니까?" "듄(Dune)
이라고 크리스찬 디오르에서 나온 브랜드예요." 마침
한국을 출발하기 얼마 전 외국 잡지에서 이 신상품
향수의 유럽 판매 개시를 기념해 크리스찬 디오르가
자신의 개인 성에서 패션쇼을 열었다는 기사를 본 기
억이 났다. 나는 런던에 내려 얼른 향수부터 샀다.
사람은 가도 향수는 남는다.
그 이후로 듄의 향기만 맡으면 금발의 파란 눈을
한 영국 아가씨가 떠오른다. 그 향수를 쓰는 여자는
왠지 세련됐을 것 같은 착각도 들고. 물론 비행기 안
에서 만난 영국 미녀에 대해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이름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잊어버렸고, 얼굴 모습은 템즈 강을 관광하면서
물 속에 빠뜨려버렸으며, 상냥한 음성은 돌아오는 비
행기 안에서 다른 스튜어디스의 목소리와 겹쳐버렸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향기는 아직도 살아
있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한동안 나는 엘리베이터
처럼 갇힌 공간에서 듄의 향기가 나면 한 번 더 향기
가 나는 곳을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그곳엔
영국 미인은 없었지만 그녀만큼 아리따운 여인이 가
지런히 빗은 머리를 찰랑이며 서 있었다. 향기의 생
명이란 얼마나 긴 것인가. 고막과 망막에 머물렀던
잔상이 모두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코속의 후각세포
어딘가에 끈질기게 남아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더듬
고 있으니 말이다. 여자는 자신만의 향기를 가져야
한다. 향기가 없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먼저 자신에
게 맞는 향수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관능적인 '뷰
티풀'처럼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괜찮다. 요즘 나온
향수 중에느 sal국 디자이너 토미 힐피거가 만든 '토
미걸'을 권하고 싶다. 신선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풍기
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싶다면
당신만의 향기로 그를 매혹시키는 것은 어떨까. 헤어
지든, 만남이 지속되든 그는 오래도록 당신의 향기를
기억할 것이다.
인생의 항로는 한 가지 길밖에 없는 것일까?
21세기엔 21세기에 걸맞는 출세가 있다. 판, 검사
말고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다.
'ㅂ'자도 모르고 법대 가서 망친 인생
요즘도 가끔 공부를 하러 연세 대학교를 간다. 그
곳에 가면 다시 대학생이 된 듯한 느낌이다. 아, 언제
나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캠퍼스의 그 자유로운 공기
여! 내가 대ㅎ생이었던 시절은 벌써 10년 전이다. 그
사이 학교는 여기 저기 새 건물이 들어서서 많이 변
했지만 여전히 젊음은 발랄하고 분위기는 신선하다.
연세 대학교를 좌우를 좌우로 나누는 큰 길 '백양로'
엔 각종 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여전히 신선하게
휘날린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느낌을 주는 플래카드
도 있다. '축--동문 사법고시 합격' '아무개 외무고시
합격' '---행정고시 합격'같은 것들이다. 언제부터 대
학에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짐
작하건대 이런 풍습은 일자리가 거의 없었던 해방 전
후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땐 그저 사법고시 같
은 것에 떡 하니 합격해서 판, 검사가 되거나 아니면
의사가 되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분들이 판, 검사나 의사를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여기고 있기는 하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볼거리
를 앓았을 때 어머니와 동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
은 적이 있다. 치료비가 얼마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와서 어머니가 이웃 아주머니에게 "의사들은 다
도둑놈"이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70
년대 초반이었다. 물론 지금은 안 그렇다(?). 그 당시
만 해도 의사가 극히 드물었으며 출세와 돈이 보장되
는 직업이었다. 하물며 50-60년대는 어땠겠는가. 판사
가 한 사람 나오면 온 군전체가 떠들썩했을 것이다.
사시합격이란 조선 시대의 과거급제에 해당하는 것이
었을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마을 입구나 하루에 두
번 기차가 지나 다니는 역에 커다랗게 써붙였을 것이
다. '우리 마을 경사 났네. 사시 합격---' '사법고시
합격생 배출, 고장의 자랑 ---'등등. 어려서부터 '출
세, 출세' '판사, 판사' 이런 말만 듣고 자라다 대학에
와서도 고시 공부만 하다가 합격했으니 본인은 오죽
자랑스럽겠는가. 또 주위의 친구들은 오죽 좋아하겠
는가. 그래서 사시 합격생이 나오면 동문의 자랑거리
가 되고 나아가 대학의 자랑거리가 됐을 것이다. 우
리 나라의 고등학교 3학년 중에서 정말 자기가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하는 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우리
나라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에서 과연 자신이 대학
에서 뭘 전공하고 싶은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상아야 하고 무얼 배워야 할 것인지 똑부러지게 일고
있는 학생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저 부모들은 자
식이 좀 똑똑하다 싶으면 무조건 법대에 진학시켰고
아이들은 법대에 가면 무조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에만 가면 무조건 판, 검사가 되
는 줄 알았다. 내 친구 중에는 서울대 법대에 가서
인생 망친 눔이 여럿 있다. 법의 'ㅂ'자도 모르고 법
대에 갔다가.
박세리가 대학에서 골프 배웠나요?
최근까지도 대학 입시의 수석 합격자는 거의 대부
분 서울대 법대를 지망했으며 그가 법대가 아닌 다른
학과, 이를테면 국문학과나 혹은 신문방송학과 같은
곳이라도 가겠다고 하면 금방 뉴스가 돼버린다. 물론
사시에 합격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법관이 될
사람이 될 사람은 법관이 돼야지 그가 시인이 될 수
는 없을 테니까. 또 그게 쉽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예전보다 합격생을 많이 뽑는 건 사실이다.
요즘엔 한 해에 거의 5백 명 내지 6백 명 정도 합격
시키는 것 같다. 경쟁률로만 따지면 사법고시 합격생
보다 미스코리아 되는 게 더 어렵다. 미스코리아 선
발대회에서 최종 등수 안에 드는 사람은 8명밖에 안
된다. 본인이 그렇게 법을 좋아하고, 판사든 검사든
변호사든 정말 원해서 되고 싶다면 그게 뭐 무슨 자
랑거리인가. 자신의 인생, 자신이 선택하는 게 그게
무슨 그리 큰 감투인가 말이다. 내가 출세한 사람들
질시하고 있다고? 천만에, 지금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기다. 21세기엔 21세기에 걸맞는 출세가 있다.
판, 검사 말고도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왜 고시 합격만 동문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우리에겐 왜 이런 플래카드가 보이지 않는
가. 가령 '축 최진실 동문 MBC탤런트 합격' '박마리
아 컴퓨터 프로그래머 자격증 취득' '이창호 동문 프
로 바둑기사 되다' '박찬호 동문 메이저 리그 진출'
'박세리 동문 프로 골퍼 자격 획득' 등등.
포르노를 살리면 경제도 산다
열린 마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이
문화를 일으키는 길이고 또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이
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카투사(KATUSA)로 의정부 미군 부대에 복무하던
시절,함께 방을 쓴 미군은 포르노광이었다. 그는 근무
가 끝나기 무섭게 방에 틀어박혀서 포르노 비디오 테
이프를 봤다. 처음 그 포르노 비디오를 봤을 때, 충격
그 자체였다. 실로 기기묘묘한 섹스의 세계가 내 앞
에 펼쳐졌다. 남녀 일 대의 섹스는 시시할 정도였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혹은 여자 둘에 남자 하나는 예
사였고 십여 명 이상이 등장하는 그룹섹스, 오렐섹스,
애널섹스(anal sex)등등 갖가지 체위가 난무했다. 관
계를 갖는 사람도 갖가지다. 혼자 집을 지키는 여인
과 수도를 고치러 온 배관공의 섹스 행각 정도는 아
주 고전적인 테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고장이 나
서 쩔쩔매는 여대생과 그걸 보고 자동차를 고쳐 주던
중년 신사가 다음 장면에선 자동차 보닛 위에서 서로
의 몸을 애무한다. 동생의 친구, 친구의 애인, 형수
또는 제수와 관계를 갖는 것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심
지어 영화 '데미지' 에서처럼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
계를 갖는 것도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포르노 영화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나마 일정한 줄거리를 갖고 나름
대로 구성도 있어서 섹스 장면을 빼더라도 웬만한 영
화 한 편을 보는 듯한 것도 있었고 처음부터 눈이 마
주치자마자 무작정 벗고 관계를 갖는 종류도 있었다.
함께 방을 쓴 미군이 포르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
다고 그가 미치광이는 아니었다. 그저 성실하고 평범
한 한 사람의 군인이었다. 그의 취미 또한 포르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주말이면 플라스틱 모형 비행
기와 군함 같은 걸 만드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어
쨌든 나는 그 덕분에 포르노는 원없이 봤다. 그런데
결코 싫증날 것 같지 않던 포르노는 어느 순간엔가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두어 달 가까이 하루 걸러 한
번씩, 보통 한 시간짜리인 예술작품(?)을 감상하다 보
니 나중엔 지쳐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겨워지기
까지 했다. 처음 포르노의 환상적인 그리고 퇴폐적인
세계에 발을 들어놨을 때,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웠다. 한 번 포르노를 보고
나면 그 주에 교회에 가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기
도를 해야 했다. 내 영혼이 더러워지고 정신까지 병
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중엔 부끄러움도 없어
지고 그저 만성이 됐다. 그건 내가 포르노에 세뇌당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
문이다. 나는 16세가 아닌 성인이었다. 성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다. 또 그것이 다른 누
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지탄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나 나와 함께 방을 썼던 그 미군이나
질리도록 포르노를 보았지만 두 사람이 이상한 놈(?)
이 된 건 아니다. 지금까지 성폭행을 한 적도 성범죄
를 저지른 적도 없다. 그리고 포르노를 무조건 못 보
게 막는다고 해서 안 보는 것도 아니다. 이는 비단
포르노뿐만 아니다. 문화를 막아서 제대로 되는 건
없다. 성인인 이상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게 해야 한
다. 성인인 이상 그가 즐기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이
등산이든 음악 감상이든 포르노든 즐길수 있도록 해
야 한다. 도대체 내 취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관여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누구
도 다른 사람의 취미를 강요할 수는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취미에 관여하지 않듯이 다른 사람도 내 취미
에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머 씨 이야기'의 주
인공처럼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뒀으면' 좋겠다.
섹스가 전쟁보다 부도덕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실정은 어떤가. 우리 나라는
남과 다른 건 일단 배척하고 본다. 조그만 튀어도 싫
어한다. 머리 색깔이 원래 여러 가지인 서양에선 염
색이란 개념이 문제가 안 되지만 우리 나라에선 머리
카락은 무조건 검어야 한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울
때나 IMF위기 같은 게 닥치면 우린 모두 검은머리로
돌아가야 한다. 노랑머리나 빨강머리로 물들였단간
비난받기 일쑤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 됐는지. 요즘은
갖가지 색으로 염색했던 연예인들이 IMF 때문에 모
두 검은 머리로 돌아가고 있다. 유형무형의 압박(?)
때문에 염색을 지웠다는 사람도 있다. "지금이 어느
땐데 노랑머리냐"는 것이다. 젠장, IMF가 무슨 공산
독재인가. 숨막히는 세상, 어려운 때일수록 빨강머리,
노랑머리가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세상 사
는 거라도 재미있어야 이 위기를 넘기는 데 힘이 덜
들 것 아닌가. 윗분들이 아랫것들 단속하려고 그러는
건지 너무 지나치다. 어떨 땐 답답할 지경이다. 마치
70년대 장박족 단속하던 시절 같다. 아무리 경제 수
준이 70-80년대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이미 자유의
바람을 맛본 시민 의식은 2천 연대를 향해 가고 있는
데 어디에다 대고 가위를 들이미는 것인지. 또 우리
나라에선 조금 야하다 싶으면 일단 욕부터 듣는다.
한 마디로 포르노의 불모지이다. 그 흔한 '플레이 보
이'지 한국판도 없는 실정이다. 포르노를 내세우는 작
가들은 일단 감옥에 갈 각오부터 해야한다. 참으로
문화 후진국이 따로 없다. 포르노를 살리자. 그래야
경제도 산다. 포르노가 가져오는 산업과 경제적 효과
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포르노 출
판을 허용했다. 치자. 그 분야에 엄청난 인력이 필요
할 것 이다. 포르노 사진모델, 사진작가, 출판업자, 출
판사 직원, 출판물 판매 유통망에 근무하게 될 수많
은 사람들 등등. 또 포르노 영화를 허용해보라. 영화
하나 만들려면 많은 인원이 동원돼야 한다. 아무리
간단하게 만들어도 배우, 감독, 작가, 조감독, 카메라
보조, 조명 감독, 조명 기사, 오디오 감독, 분장, 미용
사, 코디네이터, 스틸 사진작가, 섭외요원, 진행요원,
음악 담당, 편집자 등 최소한 20여 명은 필요하다. 그
뿐인가. 캐릭터 상품, 성 관련 상품 등이 잇달아 생산
될 것이고 생산과 유통, 판매 등과 관련된 많은 일자
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새로은 고용 창출 효과가 있
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포르노 산업을 보라. 한 해
에 수조 엔,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 심지어
수출까지 한다. 그런 걸로 수출까지 해야 하느냐고?
도대체 무기를 파는 것과 포르노를 파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가? 그건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무기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
이지만 포르노는 동물적이나마 적어도 사랑을 전제로
한 상품이다. 영화 '래리 플린트'를 보면 놀라운 사실
을 알게 된다. 아무리 저질이라 떠들어대도, 젊은 남
녀가 엉켜 서로를 애무하는 모습은 전쟁터에서 굶어
죽으며 울부짖는 아이들이나 시체들보다 백 배 더 아
름답다. 유명한 포르노 잡지를 보면, 포르노 배우들의
신상명세서가 나온다. 특기가 뭐고 혈액형이 뭐고 형
제는 몇이고...취미도 아주 다양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베토벤을 듣고 오페라
감상을 하며 사이클과 수영을 즐긴다. 즉, 둔은 저급
문화를 통해서 벌어들인다 해도 소비는 상위 문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페라 가수나 교향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해서 언제나 고급 문화만 즐기는 건 아니
다. 그들도 포르노를 보면서 포르노 배우와 섹스하는
것을 꿈꿀 수도 있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다면
문화란 그런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
래로 섞이는 행위다. 포르노가 저질이고 하위 문화라
해도 엄연히 하나의 문화다. 문화는 21세기 최고의
경제 상품이다. 아니, 문화는 경제 앞에 놓이는 개념
이다. 경제가 문화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문화가 경
제를 결정짓는다. 그러나 무조건 포르노를 장려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절실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 마음, 진정한 자유를 보장
하고 존중하는 것이 문화를 일으키는 길이고 또 경제
를 발전시키는 길이다.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근
본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포르노 잡지 몇 권 만들고
포르노 영화 몇 편 상영된다고 해서 우리민족의 유구
한 5천 년 문화가 하루아침에 서양의 저질 문화에 물
드는게 아니다. 우리 국민이 그렇게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정부에서 포르노를 허
용하지 않는 것은 관료들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기 때
문이다. 언제나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사춘기 청소년
기에 머물러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사전심의제
가 철폐되기 전, 국내 최고의 영화 제작자 중 한 사
람은 사석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전심의를 폐지
하면 우리 나라의 영화산업은 다 망한다. 벗는 영화
나 마구 찍어대고 상영해댈텐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
이 전부 다 그리고 몰릴 것 아닌가. 그나마 좋은 영
화 만들려는 감독과 제작자는 다 굶어죽는다. 아직까
지는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 심의를 해서 보여줘야 한
다." 그 제작자 역시 관료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
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우리에게 "성실은 결코 천재
성을 따라가지 못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범인인 살리에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모차르트의 신
이 내린 천재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 당시 사람들
은 두 사람 다 훌륭한 음악가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
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야말로 후세에 길이 남을 천
재적인 예술가이며 그의 음악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 비해 자신의 음악은 할잘것없는 쓰레기
에 불과하다는 것을. 천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
까? 그것은 부자유보다 자유로움에서, 막음보다는 풀
림에서,딱딱함보다는 부드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천재성이란 말을 창의력이란 말로 바꿔도 역시 마찬
가지일 것이다. 포르노를 살려서 문화를 살리자. 그리
고 더불어 경제를 살리자. 생각해보라. 21세기가 2년
여 남았다. 21세기엔 이런 논의조차 우습게 될 것이
다. 글의 내용이 조금 음란했다고 해서 소설가를 잡
아 가둔 나라의 국민들은 원시 종족처럼 취급받을지
도 모른다. 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란 말도 있지 않
은가.
콩 심은 데 '팥' 나고 팥 심은 데 '콩' 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판사 자식이 판사 되고 의사 자식이 의사 되는 거
야. 빽 없고 돈 없는 놈들만 죽어라고 고생하는 거
야."
미국은 있다
정치인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표를 더 얻을 수 있을까'하고.
대답은 간단하다. '잘하면 된다.' 지난해와 올해 우리
의 스트레스를 날려준 일등 공신 박찬호를 보라. 잘
한다. 잘 던지고 잘 쳐댄다. 태도나 생각도 건강하고
겸손하다. 연수입이 50억 가까이 되면 게다가 미남
이다. 무엇보다 그는 젊고 싱싱하다. 남자인 나도 그
가 멋있어 보이는데 여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그는 실로 단군
이래 우리나라의 최고 스타다.
사실 박찬호는 '공은 무척 빠르지만 컨트롤이 엉망인'
선수였다. 그는 공주 고등학교 시절 미국 로스앤젤레
스에서 벌어진 한·미·일 3개국 친선 고교대회에 출
전하면서 다저스(Dagers)구단 관계자들의 눈에 띄게
된다.
1993년 7월, 한양대 2학년 때 미국 버팔로에서 열린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2승 1세이브를 올렸고 드
디어 1993년 12월 미국으로 날아가서 다저스 멤버가
됐다.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살 맛이 난다. 그러
나 한편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미국으로 가기 전까
지 우리 나라에서 그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우리 나라에도 8개나 되는 프로야구 구단이 있고 수
만은 프로야구 관계자들이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미국에 빼앗겼다. 결과
적으로 그에게 잘된 일이다. 한국에서 최고의 투수가
된는 것도 좋지만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10승만 올려
도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때문이다. 도박에 가까운
투자를 하는 모험심도 적다. 게다가 지금의 박찬호는
미국 야구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능력은 있지만 메이저 리그
의 선발투수가 되는 노하우는 미국 야구가 가르쳤다.
왜 우리에겐 가능성을 발견하는 안목과 그것을 키워
주는 능력이 부족할까?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
렇다. 작은 성과에 쉽게 안주해버리기 때문이다. 정복
근 작 한태숙 연출의 '얼굴 뒤의 얼굴'이란 연극을 보
면 이런 장면이 있다. 학벌이 보잘 것 없는 한 중년
남자가 대기업 간부의 위치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하다. 자신이 믿을 것은 실력밖에 없지만
연줄도 배경도 없는 그는 실력이 커다란 밑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보다 업무처리 능력이 모자
란 동료가 단지 사주의 친척이란 이유 때문에 그를
제치고 승진한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언제 명예퇴직이
란 이름으로 회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그는 절규하
듯 이렇게 외친다. "이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아? 한 번 자기가 쌓아놓은 기득권을 쉽게 내놓을
놈이 어디 있어? 판사 자식이 판사 되고 의사 자식이
의사 되는 거야. 빽 없고 돈 없는 놈들만 죽어라고
고생하는 거지. 겨우 그들이 먹다버린 빵부스러기라
도 얻어 위해서." 판사 자식이 판사 되고 의사 자식이
의사 된다. 무서운 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꽉 막
힌 하수도 같다. 도무지 새로은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대주의에 푹 절어 있
어서 그런지 그저 미국 거라면 사족을 못쓴다. 이승
희의 경우를 보라. 우리 나라에서 어디 누드 모델이
그렇게 활개치고 다니던가. 왜 '플레이 보이'지 인터
넷 페이지에 한 번 올랐다는 사실이 그렇게 화제가
되는가. 그녀는 몇칠 동안의 방문으로 수억원의 돈을
벌어갔다. 미국에서라면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할 거
금이다. 우리 나라의 누드 모델은 포르노 배우 취급
하면서 미국에서 좀 떴다니까 너도 나도 그녀를 신주
단지 모시듯 했다. 꼴불견이다. 물론 나도 이승희를
좋아한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좋아하고 직업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프로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내
가 화가 나는 것은 우리 나라엔 왜 아름다움을 그 자
체로 평가하는 풍토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진 사람에 대
한 평가가 왜 그리도 야박한가! 우라 나라도 '플레이
보이'지를 발행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조금 경관이
좋다 싶으면 러브 호텔이 들어서고 사창가뿐만 아니
라 도시 구석구석에 언제든지 매춘을 할 수 있는 수
많은 포르노성 기능의 업소들이 창월하고 있는데 '플
레이 보이'같은 출판물의 발행은 막는가? 왜 작가들
이 조금 야하다 싶은 소설을 쓰면 무조건 잡아다 감
옥에 가뒤놓고 보는가? 가능성을 발견하는 안목이 뒤
떨어지는 까닭은 이렇게 '막고 금지하는' 시스템에 익
숙하기 때문이다. '판사 자식이 판사 되고 의사 자식
이 의사 되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벌거벗고
날뛰는 새로운 조류'를 막을 필요가 있다. '플레 보이'
지가 발행되지 못하고 소설가들을 잡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 아닐까.
전파상 아들은 전파상 주인이 돼야 한다?
박찬호의 아버지는 고향 공주에서 전파상을 했다.
그가 10승을 올렸을 때 '전파상 아들이 세계적인 스
타가 됐다'는 말이 신문이건 방송이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래, 놀랄 일이기도 하겠지. 판사 아들이
판사 되고 의사 아들이 의시 되는 세상에서 전파상아
들이 세계적인 스타가 됐으니. '판사 다음에 또 판사.
의사 다음에 또 의사'라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는 사
람들에겐 전파상 아들은 당연히 전파상이 되어야 했
겠지. 세계적인 스타는 세계적 스타의 아들이 되어야
했을 것이고. 도대체 그의 아버지가 뭘 하든 그게 무
슨 상관이란 말인가. 전파상이면 어떻고 야채상이면
어떻단 말인가. 박찬호의 기사가 어버지 얘기로 시작
된 것은 은근히 '전파상'에 대한 경시도 깔려 있는 음
흉한 직업 차별주의의 발상이 아닌가! 우리들이 얼마
나 '판사-판사, 의사-의사' 시스템에 익숙한가는 연예
인을 다룬 기사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어
떤 탤런트는 모 그룹사 사장의 아들이다"라든가 "가
수---, 알고 보니 국회의원 딸" "영화배우 모모 아버
지 장관"등등. 이는 박찬호와 반대되는 경우인데 사장
아들이 왜 사장이 안 되고 탤런트가 됐느냐, 이런 고
정 관념이 짙게 깔려 있다. 거기엔 아버지들은 잘나
가는데 넌 왜 딴따라냐, 하는 연예인을 경시하는 경
향도 깔려 있다. 신한국당(현재의 한나라당) 대선 후
보로 나섰던 이수성 씨의 아들이 중국집을 한다고 해
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박수를 보냈다. 그 아
들은 아버지의 빽이나 배경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집은 자장면만 잘 만들면 되지 아버지가
국무총리라고 해서, 집권당의 대권 후보라고 해서 손
님이 많은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달
리 생각했다. '왜 좀 더 좋은 일을 하지'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심 때만 되면 자짱면을 먹는다.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 눈이 무슨 소용인
가. 박찬호가 위대한 것은 누구나 꿈꾸는 신분 상승
을 그가 실현했기 때문이다. 전파상 아들은 기껏해야
전파상 주인밖에 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직격탄을 퍼부었고 많은 전파상 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식은 자식
이다. 전파상 아들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고 장관의
딸이 가수가 됐다는 기사가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
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지금, 10대의 성은 통신 두절 중
청소년들이 성을 떳떳하게 '즐기도록' 길을 열어주
자는 것이 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최
소한의 책임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덜 익은 그들만의 몸짓
덜 자란 살들이 서로의 살을 섞는다. 빨간 머플러
를 두르고. 미처 영글지 못한 가슴과 책 익지 않은
풋석류가 보인다. 어린 그들은 자신들의 섹스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했다. 이른바 '빨간 마후라' 비디오 사
건이다. 도대체 그들은 우리에게 뭘 보여주고 싶었을
까? 15세의 그녀가 화장실로 간다. 친구들은 단지 왜
요즘 살이 붙었는냐고. 뚱뚱해서 보기 싫다고 말을
건넬 뿐이다. 아버지는 얼굴을 본지도 오래 됐고 어
머니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세파에 찌든 그들. 우
리의 부모들은 다 그렇다. 너무 돈이 많아 쓰는데 정
신이 없거나, 너무 돈이 없어 버는 데 정신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녀의 부모도 그랬다. 아버지는 일
용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파출부였다. 얼굴이 새하얘
지면서 그녀는 아랫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왜
요즘 이렇게 배가 나오는 걸까? 스스로도 부끄럽웠
다. 설사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그녀는
배에 힘을 주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있더니 뭔
가가 쑥 빠져나왔다. 아이였다. 양수를 뒤집어쓴, 탯
줄을 달고 자신의 몸 속에서 떨어져 나온. 그녀는 아
이가 '에이리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혼절한다.
청소년들의 무지와 어른들의 무관심이 빨간 마후라와
10대 미혼모를 만든다. 그러나 '빨간 마후라'보다 더
무섭고 10대의 섹스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
은 기성 세대가 가진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실하게
된다. 만 11세. 초등학교 6학년때 그는 비로 재생산
기능을 갖게 된다. 처음으로 몽정을 한 것이다. 생물
학적으로 그는 떳떳한 남자다. 그 이후 만 20세가 돼
첫섹스를 할 때까지 9년 동안, 미처 출발선에 서보지
도 못한 채 변기의 물 속으로 사라질 운명을 타고난
수많은 정자들을 배출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에
그가 더 만족스럽고 훌륭한 성을 갖게 된건 아니다.
10대 때 그는 성실했고 모범적이었다. 우등생이었으
며 언제나 주위의 기대를 모으는 학생이었다. 물론
여자 친구도 있었고 적당한 취미도 있었다. 집안 형
편은 어려웠지만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
부했다. 물론 가끔 자위를 하긴 했다. 그러나 술에 취
하지 않았으며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다. 열심히 교회
를 다녔고 언제나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에
다니게 됐다. 그때부터 돈을 주고 여자를 사는 방법
을 알게 됐으며 술에 취해 거리를 방황하고 담배맛을
알게 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작을 성취를 이루는 몇
가지 테크닉을 익혔으며 더 큰 부정이 있으므로, 자
신이 저지르는 작은 부정은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하
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울의 한 변두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돈을 주고 어린 소녀와 섹스를 한
다. 혹시 그의 마음 한구석엔 잃어버린 자신의 10대
를 그렇게 해서라도 찾아보려는 미련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10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대개
순수한 10대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건 언제나
'20대 이후들'이다. 20대 이후의 삶은 10대보다 더 위
험하다. 더 부도덕하고 더욱 타락해 있다. 그들의 왜
곡된 삶의 10대만큼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경제력이 있으며 그것이 이 사회를 그럭저럭 굴러가
게 하기 때문이다. 기성 세대가 10대보다 훨씬 경악
스러운 악의 구렁텅이에서 아무리 몸을 굴려도 '성인'
이란 이름으로, 만 20세 이후들에게 빌붙어 사는 자
기 또래의 삐끼가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음을 본
다. 20대 이후들에세 유린당한 10대는 스스로를 포기
한 채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음을 본다. 순간, 그들
은 무언가 남기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포르노든 한때의 장난이든 아니면 복사를 해서 팔아
먹을 생각이었든 그들은 말초적인 창작 행위를 실현
한다. 덜 익은 그들만의 몸짓으로. 20대 이후들에게
유린당한 한 소녀는 화장실에서 태아를 받아낸다. 그
아이의 아빠가 누구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출산의
순간, 놀랬을 그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저 몸
이 좀 불었다고 생각했었단다. 변을 보는 줄 알았었
단다. 불쌍한 무지몽매의 산고여!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제 콘돔을 주어야 한다. 건강에 해가 없고 정확한
효과가 있는 피임약도 나눠주어야 한다. 그리고 콘돔
과 피임약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 가르쳐주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 재생산 능력을 가진 남녀에게 성은 피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니다. 오히
려 조선 시대의 10대는 행복했다. 성욕 해소에 있어
서 만큼은. 그들은 10대에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여성의 성적 억압이란 문제는 제쳐두고. 피할
수 없는 성을 건전한 취미 생활과 스포츠 같은 것만
으로 해결 할 수는 없다. 무조건 공부와 건전한 취미
만을 외친다고 되는 건 아니다. 순결? 글건 결혼할
때까지 변비 상태로 있다가 결혼식 첫날밤에 한꺼번
에 배설하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성은 성스러운 면
이 있는 동시에 욕망 해소와 본능이라는 측면도 있
다. 무조건 참고 지키는 것만이 최선이가? 공등학생
정도 되면 그들 나름대로 성을 다룰 줄 알게 된다.
어떤 방법으로든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
다고 해서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장려하자고 하는 것
이 아니다. 장려한다고 해서 많이 하고 막는다고 해
서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기롭게 대
처할 필요가 있다. 왜 그들에게 공부와 취미에 대해
선 모든 정보를 제공하면서 성문제에 대해선 통신 불
능의 상태로 놔두는 건지. 그들의 성을 떳떳하게 '즐
기도록'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 아니라, 억제할 수 었
는 부분에 대해선 최소한의 책임과 준비를 하면서 대
처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어쩌면 대학입시 정책
만큼이나 중요할 수도 있는 교육적 선택에 대해 이땅
의 기성 세대들에게 묻는다. 그들에게 콘돔을 줄것인
가? 아니면 화장실에 아이를 받아내게 할 것인가?
사랑이 사라지면 남는 사람이 되지 말고 떠나는
사람이 돼라
"더 어려운 수학이 왜 필요합니까? 셈할 능력만 있
으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데 결국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 아닙니까?
우문현답
1.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에게 어떤 기
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왜 예술가가 되셨습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싫었거든." 그러자 다른 기
자가 물었다.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술은
고도의 사기야. 말하자면 난 사기꾼인 셈이지." 이번
엔 또 다른 기자가 물었다. "그럼 왜 사기꾼 노릇을
하십니까?" "사기를 쳐도 욕 안 먹잖아." 또 다른 기
자가 물었다. "하도 많은 예술 중에 왜 비디오 아트를
하십니까?" "돈 잘 벌잖아. 하하하!" 우리는 백남준
씨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얼마나 세계적
일까? 1995년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지에서 그를 세
계 5위권의 미술가로 평가한 바 있다. 이 잡지는 매
년 인지도와 작품 가격, 평론가들의 심사와 작가의
활동, 영향력 등을 종합해서 순위를 매긴다. 2. 파키
스탄의 장수마을 훈자. 60세까지도 청년 취급을 받고
80게가 돼야 비로소 어른 대접을 해주며 1백 세가 넘
는 노인들도 흔하다는 곳이다. 민간요법으로 의사 노
릇을 하는 노인만 있던 이곳에 20년 전 처음으로 정
부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를 파견했다. 의사가
재직했던 18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망자만 있었다.
비로 그 의사였다. 병원엔 20개 정도의 침대가 있다.
거의 비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훈자가 외부
세계에 알려지면서 희귀한(?) 병들이 생겨났다. 위장
병, 스트레스성 설사, 두통 등등. 이런 병들이 생긴
건 콜라라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 관광객들이 많아
지고 훈자가 문명화되면서 병원의 환자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복통이아 찰과상으로 병원을 찾
는다. 물론 아직도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병원 신세
를 지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장수의 비결은 간단하다.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맑은
물을 마시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과식하지 않는다.
욕심없이, 주어진 만큼 만족하며 산다.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훈자의 유일한 c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다.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십니까?" "더하기, 빼기, 곱하
기, 나누기, 그리고도덕 생활 같은 걸 가르칩니다."
"더 어려운 수학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더 어려운
수학이 왜 필요합니까? 셈할 능력만 있으며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데, 행복은 결국 자기 마음속에 있
는 거 아닙니까.?" 3. 동물보호를 주제로 한 만화 스
필버그의 '쥐라기 공원'의패러디. 공룡 랩토스가 사람
들에게 쫓긴다. 마취종과 장갑차를 몰고온 사람들은
랩토스에게 총을 겨눈 채 외친다. "이 못된 공룡. 지
구를 떠나라. 이곳의 주인은 우리다." 랩토스가 항변
한다. "당신의 조상이 처음 이곳에 두 발로 선 것이
언제인가?" "2백만 년 전이다." "우리 조상들은 당신
들의 조사이 처음 나타나기 전인 1억3천만 년 동안
이곳의 주인이었다. 아직도 우리의 후손인 파충류들
은 곳곳에 살아남아 있다. 당신들의 옷과 벨트, 식사
를 위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
면서. 당신은 겨우 2백만 년의 시간만으로 지구의 주
인이라고 말하는가!" 4.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현자를 찾아와
서 하소연했다. 현자는 이렇게 답했다. "사랑이 그대
를 부르면 그에게 가라. 비록 그 길이 험할지라도 사
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안으면 거기에 안겨라. 비록
그 날개가 비수를 감추고 있을지라도. 그 비수가 그
대의 살갗을 파고 들어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
길지라도. 사람은 가벼워 그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날
아가버리고 훗날 깊은 흉터로 남을 추억을 자랑할 수
도 없으리니. 사랑이 주는 고통은 감미롭고 사랑의
혼돈은 오히려 영혼의 질서가 되나니. 사랑에 굶주린
자는 그 영혼이 풍요롭고 사랑에 목말라 하는 자는
그 영혼에 오아시스가 끊아지 않으리라. 지금 사랑이
그대에게 주는 눈물은 하늘의 진주이며 사랑이 그대
에게 주는 한숨은 천사의 숨결임을 알라. 그러므로
사랑이 그대를 부르면 그에게 가라. 비록 그 끝이 어
둡고 두려워 보일지라도." 얼마 후 젊은이가 다시 현
자를 찾아왔다. "사랑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현자는 대답했다. "사랑이 떠나면
그를 보내라. 비록 헛된 기대가 그대를 잡을지라도.
사랑의 얼굴은 신의 형상으로 빛나지만 뒷모습은 거
울이어서 언제나 초라하다. 거기엔 아름다운 시간이
아닌 남겨진 자의 모습만 비춰질 뿐. 그러므로 사랑
이 사라지면 남는 사람이 되지 말고 떠나는 사람이
돼라. 슬픔과 회한은 남는자의 몫이다. 웃으며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 진저 사랑은 스스로 자라는 것이
어서 멈추지 않으니 사랑과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리. 그대의 몸짓과 사랑의 날개짓이 언제까지나 조
화 될수 없는 것. 사랑은 그대의 호흡이 바뀔 때마다
떠날 준비를 한다. 사랑이 떠났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더 큰 사랑을 주시려는 신의 뜻이 있으리니!"
우리에게도 '래리 플린트'가 필요하다
"포르노광인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고 표현할
권리가 있다. 당신들이 마음껏 나를 욕할 자유가 있
듯이."
"나는 통일 싫다. 왜냐하면......"
나는 통일이 싫다. 왜 꼭 통일 되어야 하는가? 왜
통일이 우리민족의 지상 과제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
아도 신경쓸 일이 많은데 왜 내가 통일까지 고민해야
하는가? 우선 통일을 이루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것
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돈이. 통일이 된 이후에도 마
찬가지다.
결국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이다. 어느 국제적인
조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독일이 통일된 다음 서독
사람 네명이 동독 사람 한명ㅇ르 먹여 살린다고 한
다. 우리 나라의 경우 남한 사람 두명이 북한 사람한
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즉 통일이 되면 나와 내아내가 북한 사람 한 명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 내 형재와 부모를 위해 쓰는
돈도 아끼는 판국에 생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북한
주민을 위해 내 돈을 쓰기는 싫다. 때론 차사해지기
까지 하면서,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건 돼지들 틈바구
니 속에서 내 인간성을 훼손시키면서까지 번 돈이 아
닌가. 아깝다.
북한 주민들은 모두 무지몽매하고 바보며 노예에 불
과하고 오직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그 주위의 몇
몇 사람들만이 작당해거 1인 독재가 됐고 경제가 엉
망이 되었나?글쎄다 북한 주민들을 너무 무시하는 생
각은 아닌지...... 오늘잘 북한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어느 한사람의 잘못만은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결국 오
늘날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책
임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이 대거 남한으로 넘
어와서 취업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한 사
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고, 행여 북한의 뛰어난
방성인이나 배우들이 내자리까지 넘볼지도 모른다.
또 북한 주민들은 저렴한 임금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은 극심한 불황과 실업
사태가 지속된다면 3D업종을 놓고 남한 사람과 북
한 주민 간에 일자리 뺏기 경쟁이 벌어질지도 모른
다. 어쨌든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더욱
혼란해질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꼭 통일이 돼햐 할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삼국시대도 천 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 이
후 3국을 통일한 산라가 있었지만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 2국 시대였던 것이다. 그후 후삼국이 정립해
있다가 고려가 들어섰지만 북쪽과 만주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
민국으로 이어진다.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분열된 지 겨우 50년이다.
5천 년 역사에서 보면 50년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니
다. 한 백 년쯤 갈라져 있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결국 언젠가는 하나가 될 텐데. 반만년 역사
동안 우리 민족은 갈라졌다. 합쳤다를 반복해오지 않
았는가.
그리고 통일이 되면 무엇보다 꼴 보기 싫은 것은 부
동산 투기다. 남한의 돈좀 있다는 졸부들이 대거 북
한으로 몰려가 여기저기 땅을 사놓아 땅값을 올려놓
을 것이다. 경치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별장이 들
어설 테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목이 좋은 곳은
택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파트나 상가를 잔뜩 지
어 땅값만 올료놓을 것이다. 남의 집에사느 ㄴ것은
서럽다. 자기 집 한채 장만하기 위해 일생을 개미처
럼 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통일이 된다음에도 그
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닌가.
그리고 지역 감정은 또 얼마나 심할 것인가. 반토막
인 남한에서만도 경상도, 전라도 갈라지고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재 파벌을 만드는 판국이다. 북한 사람들
에게도 함경도 사람, 평안도 사람, 황해도 사람 사이
에 지역잠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간에 반목과 무시 질
시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북한 애들이 줄리아나에
몰려와서 물 다버렸다"느니 "남조선 애들이 순진한
평양 여자들 다 망쳐놓았다"는 식의 말이 나오지 않
을까? 아니면 "북한 사람하고 결혼하려면 호적을 파
거라"든가 "남조선 사람은 다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
겠는가. 그러느니 차라리 그냥 이댜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게 내 생각이다.
당당한 소수는 아름답다.
물론 나는 우리 나라를 영웡히 반쪽으로 나눠놓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적어도 10년 안에 통
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남북 문제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시대 상황이 통일을 향해 나아가
고 있더는 것쯤은 안다.
또 남북이 합쳐지면 시너지 효과로 인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고 주면의 강대국들이 함부로 우리를 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안다. 또한 통일의 모
드 ㄴ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슬기롭
고 부지런하기 때문에 통일된 우리나라는 더욱 발전
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통일이 싫다. "너, 정말 통일이
싫은 거야?왜?도대체 뭣 때문에 우리 민족의 지상 과
제를 외면하는 거야,엉?"하고 다그치지 않길 바란다.
또 함부로 내게 반통일주의자라고 낙인찍지않길 바란
다.
통일을 원하는 사람의 10명중에 9명이라면 나머지
한사람은 반드시 "나는 통일이 싫다"고 말할수 있어
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명모두가 통일을 바라느 ㄴ것
은 10명중에 7명이 통일을 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
다는게 내 생각이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통일을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통일을 워하는 사람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
도 공존하는 것이다. 통ㅇ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
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수 있는 자
유가 아닐까? 자신과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서
묵살하고 표현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체주의
며 독재다. 그 동안 우리는 그 독재를 신물나게 경험
하지 않았는가?
'섹스가 전쟁보다 부도덕한가?' 미국의 포르노 잡지
발행인인랴리 플린트는 이렇게 묻는다. 래리 플린트
는 그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수많은 엄숙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내가 미치광이라고 한다. 좋다. 난 포르노
에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포르노광인 나는 내가 원
하는 바를 말하고 표현할 귄리가 있다. 당신들이 마
음껏 나를 욕할 자유가 있듯이."
래리 플린트와 달리 나는 포르노광은 아니다. 그러
나 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도색 잡지를 보고 포르
노 비디오를 본다고 해서 당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가. 나 혼자 보고 즐기고 자위를 하든 말든 그게 당
신과 무슨 상관인가. 더 나아가 내가 당당히 포르노
광이라고 말한들 그게 도대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
을 끼치는가.
세상엔 마더 테레사도 있고 래리 플린트도 있다. 사
회에서 요구하는 규범의 정도대로 걷는 사람도 있지
만 엉뚱하고 기발한 사람고 있다. 그가 사이코든 도
덕군자든 누구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권
리가 있다. 그리고 그 권리는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
의 지상과제보다 결코 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
각한다.
얼마 전 어느 신문사에서 주최한 대학생 연수에 강
영ㄴ을 하러 가서 물어 보았다. 통일을 원하는 사람
은 선들어보라고.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얼핏 살펴보니 서너명이 손을 들지 않고 있었
다. 참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눈
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손을 들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소수의 의견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사회는 건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 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통일이 ㅅ습니다. 왜냐하면....."
라라무리족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다 뭐란 말인
가? 연극을 하고 무용을 하고 시를 쓰는. 그러나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달린다.
입에선 술냄새가 났다. 논산 훈련소에서 교관들이
신병에게 기합을 주듯 우리는 그들에게 선착순 달리
기를 시켰다. 오늘 촬영할 분량이 많은데 그들은 어
제 밤새도록 데킬라를 마시고 불을 피워놓은 채 노숙
을 한 것이다. 일단 술이 깨야 한다고 판단한 우리들
은 쉴새없이 그들을 뛰게 만들었다. "저기 보이는 소
나무 있죠? 거기까지 뛰어갔다 오세요." 그들은 달리
기는 자신있다는 듯 몇 번이나 내달았다. 빅토리아노
는 그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올해 나이 55세.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벌써 며칠째 술에 찌들어 이미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평균 고도 2천5백m의 멕
시코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조금 빨리 걷기만 해도 숨
이 차올랐다. 그런데 빅토리아노는 가죽끈 하나 달랑
달린 '쪼리'(일본말을 써서 미안하지만 이 표현밖에
적당한 것이 없다. 그들의 신발은 슬리퍼도 아닌 말
그대로 쪼리였다)를 싣고 잘도 달렸다. 라라무리족은
달리는 것이 일상화된 사람들이다. 멕시코 인디언 중
의 한 종족인 그들은 '타라우마라'라고도 불린다. '달
리는 사람들'이 란 뜻이다. 매년 4월에 열리는 그들의
축제 '카르라 데 볼라'에서 그들은 장거리 달리기 경
주를 한다. 그 거리는 무려 2백50km에 이른다. 그들
은 나무로 깎아 만든 어른 주먹만한 공을 차면서 그
거리를 2박3일 내지 3박4일 동안이나 달린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천 년 이상 내려온 그들
의 전통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주자에게 내기를 거는데 상품은 보통 양이나 소 같은
가축이나 맷돌 같은 농기구가 고작이다. 그리고 경기
에서우승한 사람은 영웅 대접을 받는다. 두 달 내지
석 달에 한 번씩 약식 경주도 벌인다. 이때 경주 거
리는 1백km로 비교적 짧은(?)편이다. 몇 번 소나무까
지 왕복 달리기를 한 빅토리아노는 금세 술이 깬 얼
굴이 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분명
폭음을 했을 텐데 그들은 신기하게도 금방 술이 깼
다. 달리기가 생활화돼서 그런지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도 뛰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루
시아노와 달리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옥수수밭을 가
로질러서 차바의 밭이 끝나는 곳까지 달리는 것이었
는데 우리는 내기를 했다. 상품은 일회용 라이터였다.
이긴 사람은 2개, 진 사람은 1개였다. 루시아노를 이
긴 그는 의기양양하게 이번에는 티셔츠 같은 걸 내기
에 걸어달라고 했다. 점심 때가 돼서 우리는 그들에
게 정어리 통조림과 과자 한 봉지씩 나눠주었다. 빅
토리아노느 정어리를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과자
만 우물거리며 씹어먹었다. 통조림은 집에 가서 아들
에게 줄 거라고 했다. 오후가 되자 그들은 게을러졌
다. 과음을 한 데다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잤으니 시
에스타(낮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우겼다. 그곳에서
시에스타는 일상이었다. 도시의 우체국이나 관공서도
보통 2시에서 4시까지는 문을 닫았다. 하긴 자동차로
하루 정도는 달려야 포장도로가 나오는 이곳에서는
시간을 지키거나 바쁘게 뭔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
다. 그러므로 속이 타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이 없었
다. 산속이라 해가 일찍 지는 데다 낮에 촬영해야 할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빨리 맷돌 만들기를 찍자고
했다. "맷돌은 아무 돌이나 써서 만드는게 아니다. 이
곳에서 한참 가야 맷돌 재료가 되는 돌을 구할 수 있
다." 빅토리아노는 돌이 있는 강까지 가는 게 귀찮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수고비를 조금 더 주겠
다고 했다. 우리는 "공짜로는 못하겠다"는 그들에게
하루 50페소의 일당을 주고 있었다. 우리 돈으로 6천
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빅토리아노는 "최소한 70페소
는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페소가 120월 정도니까
그는 우리 돈으로 2천4백 원 정도를 흥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정도의 돈벌이도 그들에게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았다. 대신 꾀 부리면
안 된다."고 그를 다그쳤다. 그리고 우리는 빅토리아
노와 그의 친구들을 하루 종일 부려먹었다. 2천4백
원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들을 몰아쳤다고 해
야 한다. 좋은 그림이 나올때까지 몇 번씩이나 반복
시켰다. 빅토리아노가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
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한 끼 식사만도 못한 상패
촬영이 끝나고 그곳의 보건소에 들렀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보건소 소장인 닥터 알베
르토가 우리에게 신문 스크랩을 보여주었는데 빅토리
아노가 달리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미
국과 멕시코신문의 기사들을 모두 합쳐 30여 개쯤 됐
다. '한번 더 달릴 수 있다' '멕시코의 신화-1백마일을
달리다' '달리는 사람들의 자랑스런 후예……' 놀랍게
도 빅토리아노는 1993년 미국 덴버에서 열렸던 세계
장거리 달리기 대회의 우승자였다! 그의 나이 51세
때, 1백60㎞를 20시간 19분32초에 달려 세계 각지에
서 몰려든 젊은 주자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참가자
중엔 미국 해병대도 있었고 일본의 철인 3종경기 아
마추어 선수도 있었다. 그는 덴버 대회 말고는 여러
차례 1백 마일 달리기에 참여했다. 우승은 한 번밖에
하지 못했지만 매번 완주했으며 2년전 까지만 해도 2
위를 했다. 닥터 알베르토는 빅토리아노가 받은 황금
빛 상패(賞牌)도 보여주었다. 보건소가 그 부근에서
마을 회관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전시되
어 있었다. 한 마디로 빅토리아노는 '스타'였다. 우리
는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미국과 멕시코의 신문에
30번도 더 실린 기사의 주인공을 무턱대고 부려먹었
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우리는 의문이 들었다.
상금은 없는가? 마라톤은 왜 하지 않는가? 이 의문에
대해 닥터 알베르토가 설명해 주었다.
"기본적으로 타라우마라 사람들은 마라톤에 익숙하지
않다. 2백㎞를 고른 속력으로 뛸수는 있어도 42㎞를
전력을 다해 뛰지는 못한다. 언젠가 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완주는 했지만 등수안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거리가 너무 짧다'는게 참가자들의 불만이었
다. 1백m와 2백m가 다르듯이 40㎞와 2백㎞도 다른
것 같다. 그리고 1백 마일 달리기는 아마추어 경기이
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상금이 없다. 있다고 해도 1백
달러에서 3백달러 정도이다. 미국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가하는 경비도 후원자가 대준다."
빅토리아노는 덴버 대회에서 받은 상금 3백달러를 농
기구 사는 데 썼다고 한다. 그가 세계적인 장거리 주
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하루에 6천원만 주면 부릴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문에 수십 번이나 그의 얼굴이 실렸지만 라이터 한
개에 내기달리기를 하고 통조림을 챙겨두어야 할 만
큼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랬다. 빅
토리아노의 실속 없는 상패는 한 끼 식사만도 못했
다. 그의 가난은 그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날
밤 내내 잠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명예란 무엇인가?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젼에 나오는 게 다 뭐란 말인
가? 연극을 하고 무용을 하고 시를 쓰는, 그러나 한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뭔가 창조한다는 자부심과 명예 하나 때문에 쉽게 구
차해지지 않고 쉽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예
술가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만난 부시맨과의 대화
우리는 낮은 바위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했다.
치치와누는 치치와누의 언어로, 나는 내 언어로, 처음
에 난 웃음이 나왔지만 곧 웃음을 거두었다. 치치와
누의 눈이 '나는 진지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어디에 살고 싶은지 묻는다면
1996년 봄 나는 남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부시맨과 내가 10일 동안 생활하는 장
면을 촬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세계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한 곳을
택하라"고 한다면 난 서슴없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택하겠다. 그곳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인종 문제나
치안 위기와 같은.
남아공은 내가 생각하는 아프리카와 전혀 딴판이었
다. 나는 밀림과 그 사이를 돌아 다니는 동물들, 그리
고 새까만 토인들을 상상했다. 그러나 남아공은 유럽
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현대적인 도시엔 빌딩과 쇼
핑센터, 호텔이 즐비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 부국이며 상업의 중심지이다. 내게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무엇보다 자연과 문명의 조화였다. 수도
요하네스버그는 온통 숲속에 싸인 도시였고 인도양을
가르는 케이프타운은 바다와 산이 함께 있는 그림같
은 곳이었다. 물론 도시에서 자동차를 타고 두 시간
만 가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사파리가 있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도 있다. 그곳에선 우리가 흔히 상상
하는 '아프리카'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영화 '부
시맨'으로 세계에 널이 알려진 부시맨은 실제로 한
때 아프리카 남부의 칼라하리 사락에 퍼져 살았다.
지금은 극소수만 존재한다. 칼라하리에 약 2백명이
원시 그대로 살고 있으며 카가캄마라는 부시맨 보호
구역에 5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습관 때문에 아직도 하루에 한 끼와 물 한 모금
만으로도 한 달 정도는 버틴다고 한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인가보다. 백인들이 마련해준 보
호구역 안에는 벽돌로 지은 집도 있고 물도 넉넉한데
그들은 도대체 씻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사막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씻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
기 때문이다. 생맥주 한 컵 분량인 5백㏄의 물로 한
가족이 열흘 동안 마신다고 하니 세수나 목욕은 아예
엄두도 못 냈던 것이 당연하다. 평소엔 남녀 무두 손
수건만한 가죽으로 신체의 주요 부분만 가린 채 생활
하는데 가끔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고 도시에 나가기
도 한다. 병이 나면 병원에도 가고 아주 드물지만 젊
은 부시맨들은 보호구역을 빠져 나와 디스코 테크에
가서 놀기도 한단다.
때론 몸짓이 더 많은 걸 전한다.
치치와누는 부시맨 미술가였다. 1m60의 키에 45㎏
이 채 될까 말까한 호리호리한 몸매였는데 1백m를
12초에 달리는 준족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노을이 붉은 어느날 그는
나를 자신의 작업장에 초대했다. 작업장이라고 해서
따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지붕이었고 땅
이 곧 마당이었으며 바위와 잡목이 끝없이 펼쳐진 카
가캄마 사막의 한귀퉁이였다. 카가캄마는 케이프타운
에서 자동하초 약6시간 걸리는 곳인데 '부시맨 보호
구역'쯤 되는 곳이다. 치치와누와 나는 전혀 말이 통
하지 않았다. 그는 혀를 입천장에 때려서 내는 이상
한 발음으로 부시맨 말을 했다. 주로 '틱탁 똑딱'하는
소리와 콧바람이 들리는 전부였다. 난 우리말을 했다.
때문에 주로 손짓과 발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했
다. 그는 자주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다. 도기
나 나무판에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그림 솜
씨가 좋아서 가끔씩 카가캄마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그의 그림을 팔곤 했다. 그날 그는 나를 한 50m쯤 되
는 바위 앞에 데려가더니 천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스프링복(사슴의 일종)과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물과 사람을 다리부터 그리는 게 신기했다. 우리는
보통 머리부터 그린다. 머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니
까. 대대로 사냥을 하며 살아온 그들에겐 계산을 하
는 머리보다 빨리 달리는 다리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보통
1백m를 11초 내지 12초에 주파한다. 그는 어디선가
깨진 병을 주워와 그 속에 나뭇잎을 넣고 연신 환각
초를 피워댔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나 춤을 출 때면
언제나 환각초를 피웠다. 술이 없으므로 환각 성분이
있는 나뭇잎을 뜯어 담배처럼 피우는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아마도 맨 정신으론 예술을 할 수 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먼저 스프링복을 그리고 나서 달려가는
사람을 그린 그는 그림과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
리고 우리의 몸짓 대화가 이어졌다. '이게 나란 말인
가?' '그렇다' '나보다 더 길쭉하게 그렸다' '아니다. 너
도 길쭉하다' '어쨌든 고맙다.' '네 이름을 써달라.' 나
는 쪽지에 내 이름을 영문으로 써주었다 그는 그림
아래에 영문으로 'ROJIN'이라고 썼다. 나도 그 보답
으로 그림을 그렸다. 되도록 부시맨에 가까게 홀쭉하
고 엉덩이가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그리고 그 밑에
치치와누라고 썼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껄걸 웃었다.
그리고 나서 낮은 바위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치치와누는 치치와누의 언어로, 나는 내 언
어로.
처음에 난 웃음이 나왔지만 곧 웃음을 거두었다. 치
치와누의 눈이 '나는 진지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나는 인생과 예술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그는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진지
하게 들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면서. 그리
고 내게 또 근엄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기도 했다.
'틱탁 똑딱'이 내가 들을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러나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을 한다는 건 느끼고 있었
다. 그의 손과 발은 하늘과 땅을 두루 가리키고 있었
고 누런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는 노을이 사리지고 별이 뜰 때까지 많
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치치와누와 나는 자기
자신에게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날 우리가 서
로에게 한 말은 실은 자신과의 대화였다.
왜 떠나느냐고 묻거든
몽마르트에 갔을 때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났
다면 그걸로 만족해도 좋다. 떠벌릴 수 없는 자랑거
리보다 누구에게 설명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 한 조
각을 지니고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의미니까.
파리에 '파리'는 없다.
파리에 가면 꼭 가야 할 곳은? 루브르 박물관, 몽
마르트 언덕, 퐁텐블루 성, 센 강, 개선문, 에펠탑, 샹
제리제?
파리에 가서 꼭 가야 할 곳이란 건 없다. 파리에 도
착한 순간 당신은 이미 꼭 가야 할 곳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파리에 가면 꼭 루브르를 봐야 하고
런던에 가면 대영 박물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법
이 어디 있단 말인가.
파리 리볼리 거리의 노상카페에 앉아 크루아상과 카
페오레를 마시고, 런던 피카딜리 뒷골목의 호프네집
에서 기네스 맥주를 한 잔 하는 게 대영박물관을 돌
아 다니는 것보다 더 나을런지도 모른다.
1992년 런던에 갔을 때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었다.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어딜 여행했느냐"고 물었
다. "소호의 극장가와 포르노숍을 둘러보고 영국 대학
생들과 맥주를 마셨다. 밤엔 스타디움이란 디스코 테
크에가서 춤울 췄고" 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런던까지 와서 술 마시고 춤추러 다
녔냐? 박물관도 가고 버킹엄 궁전도 보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대영 박물관은 6개월을 다 봐도 다 못 본다
는데." 한 마디로 날 정신 나간 놈 취급했다. 나라고
해서 대영 박물관과 버킹엄 궁전을 구경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영국 친
구들과 쏘다니는 게 훨씬 더 재미있었다. 옥스퍼드
근처의 리딩 대학에 다닌다는 두 친구였다. 흑발에
갈색눈을 가진 톰과 금발에 푸른눈인 하워드는 금세
나와 죽이 잘 맞았다. 우린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
면서 거나하게 취했다. 그리고 우린 디스코테크에 가
서 신나게 춤을 추기로 했다. '스타디움'이란 곳은 인
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곳엔 일본과 영국, 미국,
헝가리, 남아공 등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 몸을 흔
들어대고 있었다. 영국인 친구들은 디스코테크에서도
무척 점잖았다. 처음엔 우리끼리 얘기하고 우리끼리
놀았다. 그더다 곧 주위에 있는 여자들과 어울리게
됐다. 처음에 우리는 담뱃불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키
가 170㎝는 넘어보이는 금발의 독일 여성들에게 접근
했다. 그들은 무척 냉랭했다. 라이터만 빌려주고는 곧
자기들끼리 놀 뿐이었다. 다음은 일본 여자들이었는
데 영어가 통하지 않아 도무지 대회가 되질 않았다.
'피쉬(Fish)'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시미'라고 해
야 할 정도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안착한 곳은
미국인들의 개방적인 태도였다. 대학교 1학년생인 세
명의 여대생들은 영국 신사 두사람과 한국인이 친구
가 됐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다. 우리들 여섯 명
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신나게 춤추고 마시며
이야기했다. 헤어질 땐 주소까지 나눠가졌는데 안타
깝게도 그 쪽지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영국 친구들은 정중했으며 미국의 여학생들은 활달했
다. 그리고 내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면서 배
운 영어는 영국 영어와 거리가 먼 철저한 미국식 영
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국인들이 하는 영
어를 듣다 영국인들이 하는 영어를 들으면 마치 사투
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중에 엠마 톰슨이나
안소니 홉킨스, 휴 그랜트 같은 영국 배우들의 영어
를 영화를 통해 듣고 영국식 영어가 훨씬 감칠맛 난
다는 사실을 깨닫긴 했지만. 내가 레드 제플린이나
조지 마이클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그 친구들은 놀라
자빠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짜식들, 록음악은 세계 공
통어라는 것도 모르는지.
지금, 이순간
어쨌든 이들과의 만남은 3일 동안 대영 박물관을
돌아 다니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유쾌한 경험을 접어두고 꼭 남들 다 가는 곳을 둘러
봐야 할까? 박물관이나 성 같은 곳은 늙어서 다시 올
ㄸ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설사 못 오면 또 어
떤가, 세계 어디를 가든 나와 같이 숨쉬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더 좋지 않을
까? 런던에서 좋은 경험을 했던 나는 파리에 갔을 때
도 유명한 곳,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보다는 후미진
곳, 낯선 곳을 더 가보려고 했다. 건물보다는 사람을
더 많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사진 찍는 것에 매달
려 그때 순간의 감흥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
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렇게 노력하게 된 이유는
나폴레옹이 살았다는 퐁텐블루에 갔을 때 만나 친구
가 아르헨티나 사업가 때문이었다. 그는 열심히 셔터
를 눌러대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은 마치 사진 찍기 위해 여행하는 것 같아.
도대체 감상할 시간도 없이 사진만 찍는다. 이곳의
하늘과 나무, 그리고 강들을 보면 참 아름답지 않는
가. 지금 여기에서 보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집에 돌
아가서 사진을 보면 뭐 하느냐?" 그리고 그는 여행할
때 절대로 카메라는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했다. 사
진 찍다가 진짜 중요한 걸 놓치는 수가 많다는 것이
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파리에
갔을 때 파리를 사랑하게 됐다면 그걸로 성공이다.
굳이 루브르에 들르지 않아도 된다. 루브르에 가는
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미술책을 통해
서 걸작이라고 들어온 작품들을 대하는 순간 '진짜
걸작이다'라는 감동보다는 '이제야 책으로만 보던 것
들을 실제로 봤다'는 단순한 도취에 젖을 수 있기 때
문이다. 몽마르트에 갔을 때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났다면 그걸로 만족해도 좋다. 굳이 거리의 화가
에서 초상화를 그려달라거나 기념품을 사지 않아도
된다. 떠벌릴 수 있는 자랑거리보다 누구에게도 설명
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 한 조각을 지니고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의미니까.
"그게 무슨 문제예요?"
사실 나이가 무슨 문제인가. 열다섯 살짜리 여자와
서른한 살짜리 남자가 만나면 안 되는가. 아니, 열다
섯 살과 서른한 살이 서로 사랑하면 안 되는가.
너무 먼 한국 남자와 멕시코 소녀
메시코 북부의 도시 치와와의 성당 주변엔 쇼핑 센
터가 모여 있다. 그곳에서 나와 김 형은 쇼핑도하고
시진도 찍으며 모처럼 휴식을 취했다. 주변에는 푸른
나무와 벤취들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가게들이 늘어
서 있었다.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나와 달리 김형은
연신 셔트를 눌러댔다. 쇼핑거리의 가운데에 이르렀
을 때 발랄한 여학생 세 명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시진 좀 같이 찍어도 되겠느냐?" 그들은 이내 포즈
를 취해주었다.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헤어졌
다. 한 민속품 전문점에 들어간 김 형과 나는 혹시라
도 길이 엇갈리게 되면 6시에 호텔에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쇼핑을 하다 보면 서로 찾다가 볼일을
못 보는 수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별로 살 것이 마땅
치 않았던 나는 '치와와'라고 새겨 진 은반지만 하나
사서 끼고 그곳을 나왔다. 다시 성당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시계를 보니 벌써 20분 전 6시였다. 나는 호
텔로 발걸음을 볼렸다. 한 블록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호텔이었다. 글런데 쇼핑 거리가 끝나는 곳, 마
지막 벤치에 아까 그 여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인사를 했다. "돈데
아미고?" 그들은 친구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쇼핑
하고 있을 거다." 나는 스페인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그들은 영어를 조금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불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조금 이해 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대화만 한다면 가끔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도 있었다. 그들과 내가 나눈 대화는 대
충 이런 것들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에서" "아,
한국" "네." "고등학생?" "네." "몇 살이지?" " 열다섯
이요." "셋 다?" "네." 그들은 우리 나이로 열아홉 살
쯤 돼 보였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무척 싱그러운 모습의 소녀들은
역시 낯선 동양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치
와와 좋아요?" "응, 괜찮은 거 같아." "멕시코엔 뭐
하러 오셨어요?" "일 때문에" 그럭저럭 6시가 거의
다 됐다. 호텔은 5분 거리였다. 나는 이제 그만 가봐
야겠다고 했다. "좀 더 얘가하다 가요." "이제 그만
가봐야 돼, 저녁 약속이 있어." "저녁이요? 무슨 저녁
을 벌써 먹어요?" "지금 여섯 신데?" "멕시코에선 아
직 대낮이에요. 우린 여덟시나 돼야 저녁을 먹거든
요." "그래? 한국에선 여섯 시에도 저녁 먹어." "조금
있다 우리랑 같이 먹지......" "미안. 선약이 있어서."
"친구분도 불러서 우리랑 같이 놀아요, 네?" 나는 이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너희들 열다섯 살
이라며?" "그런데요?" "내가 몇 살로 보이지?" "스물
둘? 셋?" "고맙군, ㅈ게 봐줘서. 하지만 내 나이는 벌
써 서른하나야." "그래요?" "그리고 너희들이 내 친구
라고 생각하는 그 어저씨는 서른일곱이야." "그래서
요?" "그래서요라니?" "그럼 만날 수도 없어요?" "너
희들은 너무 어려." "켈 프로브렘(그게 무슨 문제예
요)?" "무슨 문제냐구?" 난 한 방 얻어 맞은 것 같았
다. "포르케(왜냐 하면)......" 하지만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풋풋한 그녀들의 눈은 내 입만 바
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왜냐하면 말이지......"
왜 안 되나요?
물론 나는 기혼자라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
나 그녀들은 내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녀들의 질문 역시 정당했다. 나는 열다섯 살짜리
소녀와 그 두배나 되는 나이를 먹은 남자의 만남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그런 만남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나이가 무슨
문제인가. 열다섯 짜리 여자와 서른한 살짜리 남자가
만나면 안 되는가. 아니, 열다섯 살과 서른한 살이 서
로 사랑하면 안 되는가. 스스로 신세대라고 주장하던
나였는데 나 역시 관습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는 내 속마음을 들킨 듯해 저녁 약속을
핑계로 얼른 그곳을 도망쳐나왔다. 머나먼 멕시코의
저돌적인 10대들로 인해 굳어진 내관습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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