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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종대왕 [박종화] 04

by Casey,Riley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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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4 (태종호색)
박종화

  
    큰왕자의 학력
  태상왕 이성계의 재궁을 장사지내는 인산도 무사하게  끝났다. 함흥 갈대는 태
상왕 이성계가 그의  가장 사랑하는 불쌍한 딸  경순공주를 데리고 무학과 함께 
신위지지를 정한 후 능침을 꾸밀 때 이미  함흥서 옮겨 심었었다. 함흥서부터 건
원릉까지 천여 리 길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옮기니 하루가 채 못가서 건
원릉에는 갈대풀이 석양빛을 받아 창칼이 번쩍이는  듯했었다. 방석을 죽이는 난
리통에 남편 이제를 잃어  청상과부가 된 경순공주는 태상왕의 돌아가신 부음을 
양주 소요사에서 듣고  곡지통을 하면서 분상을 하여  한양성중까지 들어왔으나, 
아버지의 유해를  봉안한 빈전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전실  오라버니 되는 
상감 방원이 죽일까  겁을 집어먹은 때문이다. 대궐 안에서 초혼을  불러서 발상
할 때라든지 거상을 입은 성복제와 인산행렬에 당연히 참여할 만한 자격을 가진 
정정당당한 친딸이건만, 감히  대궐에 들어가지 못했다. 평상시 상감의 행적으로 
보아 반드시 신변에  위해를 가할 것이 분명한 때문이다. 경순공주는  백성 틈에 
숨어서 대궐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재궁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머금고 염주를 굴
려서 아바마마의 명보을  빌었다. 사람 물결 속에 휩쓸려 건원릉까지  나가서 먼 
발치로 함흥서 옮겨 심은 갈대를 바라보며 슬픈 중에도 마음을 놓기도 했다.
  온종일 떠들썩하던 장사가 끝나고 상감을 위시하여 백관들이 성중으로 돌아간 
후에 경순공주는 홍살문 밖에서 아버지의 능을 향하여 통곡하고 허배를 드린 후
에 이내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았다. 재우가 지
나고 삼우도 끝났다.삼우제  때는 왕손들이 건원릉에 나가서 전배하고 돌아왔다.   
 성복제와 인산 때도  나가지 아니했던 '제'가 삼우제에 나갈  리 없었다. 산상까
지 나갔다가 돌아온 '보'와 '도'는 언니 되는 '제'의 생각이 났다. '도'가 먼저 발론
을 했다.
  "이제, 대행 태상왕  전하의 삼우제도 지냈으니 허전하기 짝이 없고.  큰언니나 
찾아보러 갑시다."  '보'는 '도'의  말에 따랐다. 형과  아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의 처소에 들었다.  이제 '제'는 단정히 책상 앞에  앉아서 '대학'을 읽고 있었
다. 어려운 학문이다. '도'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도'는 항상 부왕께서 큰형
은 공부는 아니하고  매사냥만 한다고 타박을 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오늘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니 기막히지 아니한가. '대학'이다. 마음 속으로 존
경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언니, 어려운 책을  보십니다 그려!" '도'의 묻는  말에 '제'는 대답 없이  책을 
덮었다. '도'는 옆을 돌아  보았다. 뚜껑을 덮어논 남포석 벼룻돌 옆에 장지를 둘
둘 말아논 것이 있었다. 종이  등뒤로 먹발이 비쳤다. 큰형이 글씨 공부를 한 것
이 분명했다. 펴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형의 급한 성미에 펴보면 꾸지람을 할 
것 같아서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형의  글씨가 얼마나 늘었나 하고  보고 싶은 
생각이 버썩 일어났다. 죄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 말을 하고 펼쳐보
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언니, 글씨 공부도 했구려." '제'는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다.
  "좀 펼쳐  보아도 좋지?" '도'는 상긋상긋  웃음을 머금고 둘둘 말아논  종이를 
펼쳤다. 뚜렷뚜렷 글자가  나타났다. 먹이 광채를 뿜어 윤기가  종이에 가득했다. 
해자다. 획마다 기운차게 살았다. 구성궁예천명의  체를 임했다. '도'는 놀라지 아
니할 수 없었다. 공부 아니한다는 형이 글은 '대학'까지 읽고, 글씨는 구성궁체의 
멋을 거의 쫓게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도'는 혀를 빼고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함께 보던  '보'도 눈이 둥그래졌다. 형이 이같이 글씨를 잘 쓸
줄은 몰랐다. '도'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을 딱 별렸다. '도'는 형이 무서운  의
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공부를 아니하는 체하면서, 실속으로 공
부를 하고 있었다. '도'는 섣불리 잘 썼다고 칭찬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행동으
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조심조심  글씨 쓴 종이를 말아서 얌전
하게 한구석에 세워놓았다. '보'가 불쑥 말했다.
  "언니, 구성궁예천명체보다 조송설체가 더 낫지 않소?" 아는 체하고 한 마디를 
했다. 입이 간지러워서 그대로  앉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우 '도'보다 침착
하지 못했다. 큰형 '제'는 둘째 아우 '보'의 말을 닫지 껄걸 웃었다. 
  "하하하, 너도 조맹부 송설이 명필인 줄은 아는구나. 제법 눈이 떠졌다. 그러나 
조송설은 지조가 없는  사람이다. 나라가 망한 뒤에 원나라에 몸을  굽혀서 사위
가 되어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린 자다. 고려 이후에  이 나라 사람들이 멋도 모르
고 송설체를 본뜨려  하지만 지조 없는 사람의  글씨가 아무리 명필인들 가치가 
있느냐. 나는 추한 사람의 글씨를 본뜨고 싶지 않다!" 멋도 모르고 한 마디를 내
논 '보'의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는 그렇고 너희들한테 물어볼 말이 있다." '제'는 얼굴빛을 바로 하고 '보'와 
'도'에게 물었다. '도'는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큰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희들 인산에 참여하여 능상까지 나갔더냐?"
  "네, 나갔다 왔습니다.  삼우제까지 지내고 왔습니다." '도'가  대답했다. 큰왕자 
'제'는 정색하고 아우들에게 말한다. 
  "나는 불효막심한  놈이다. 할아버지 성복제에도 참례치  아니했고 영결종천을 
해서 나가시는 능행길에도  배종을 하지 못했으니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숭
배하기 싫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거탈로 슬퍼한 다는  것은 또한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남이 흉을 보거나  탈을 잡거나, 나는 내가 생각한 바른 길을 걸
어가보려 한다. 그래서 나는  구토증이 났다. 거탈울음을 우는 모든 사람들과 행
동을 같이하기  싫었다. 너희들은 나를 꾸짖지  말아라." '도'의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언니를 불민하다고 생각했다면 저희들이 어찌 오늘 뵈러  왔겠습니까?" '제'는 
돌연 한숨을 짓고 '도'에게 묻는다.
  "성복제와 장례 때  경순공주께서 들어오셨더냐?" '보'와 '도'는  경순공주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방석을 죽일 때 매부 이제를 죽였고, 그의 아내 경순공주는 
이미 중이 되어  정릉 흥천서와 양주 소요산으로  돌았으니 '보'와 '도'는 고모인 
경순공주를 말만 듣고 만나보지 못했다.
  "소요산에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성복제때도 뵙지 
못했고 인산 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우의 말을 듣는  '제'는 별안간 상기가 
되었다. 눈에 출혈이 되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도 너무하신다!  할아버지 관 뚜껑을  부여잡고 정말 피눈물이  나도록 
울 사람은 고모 경순공주가 있을 뿐이다. 어찌해서  정말 진짜로 울 사람을 아니 
불러들였단 말이냐! 할아버지의 영혼이 만약 계시다면 건성으로  우는 사람 몇백 
명보다 단 한  사람 경순공주의 울음을 가엾고 예쁘다고 생각하실  것이다. 아버
지는 사람이 아니다!" '제'는 뱉듯이  말끝을 맺었다. '보'와 '도'는 '아버지는 사람
이 아니다'하고 외치는  큰형 '제'의 말을 듣자 마음 속으로는  너무 과하다고 생
각했다.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침묵했다. '제'는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모
양이었다.
  "남편도 없고, 오빠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아니 계신 혈혈
단신의 고아다! 그나마  혹시 남자라면 모르겠다. 슬프고  외로워넛 불제자가 된 
일개 여승이 아니냐.  이 혈혈단신의 외로운 여인을 왜 아버지의  임종도 못보게 
했단 말이냐. 왜 초혼제나 성복제때 불러들이지 안했단 말이냐. 혈혈단신의 경순
공주가 반정혁명을 일으킬까 겁이  나서 아니 불러들였단 말이냐!: '제'의 울분한 
목소리는 더욱 거칠었다. '도'는 큰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자코 듣
고 있었다. 
  "당신은 국가를 창업한 큰 위인이라고 자처할  것이다. 천하를 주름잡을 큰 포
부를 가진 분이 어찌 그리 마음이 협하시냐? 집안의 누이동생 하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상감마마가 어떻게  나라의 큰 정치를 하겠느냐!" '제'는  말을 마치자 길
게 한숨을 지었다. '보'와 '도'는 형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타박할 수
는 없었다.
  "창황중 아바마마께서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 나셨을 것입니다" '도'는  아름
어름 이쯤 대답했다. 창황중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 난 듯했다는 '도'의 대답을 
들은 큰왕자는 더한층 흥분했다.
  "무어야, 창황중에 경순공주의  생각이 아니났다? 말이 되느냐. 진정으로 아버
지의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는 생각이 났으면 어찌 돌아가신 분이 가장 사랑했던 
누이의 생각이 나지 아니했단 말이냐. 경순공주는  전하께서 자기를 죽일까 두려
워서 하늘 아래 둘이 없는 아버지의 임종을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철천의 한이 
되었겠느냐. 모르면  모르되 공주는 대궐  안에 들어와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통곡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 필연코 백성 틈에 끼여서 아버지의  마지막 나
가는 영이를 바라보고 슬피 울어 혼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지 못하는 가
련한 몸을 운무 속에 숨겨서 종적을 감추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왜 이 생각을 
못하셨느냐 말이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리는 길은 지극히 착한 일
을 해야 하고,  밝게 덕을 밝혀야 한다. 이것이 왕천하하는  길이다. 덮어놓고 탐
욕과 시기로  백성을 위압한다면 나라는  위태하고 민심은 흩어질  것이다. 우선 
가까운 내 집안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한 나라를 요리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제'는 아우들 앞에  열변을 토했다. 모두 다 옳고 바른 탁록이었다.  '대
학'에 있는 명명덕과 재어지선이라는,  사람이 행해야 할 길을 그대로 옮겨서 주
장하는 것이었다. '보'와 '도'는 마음 속으로 더한층 형을 존경하는 생각이 우연히 
일어났다. '도'가 말했다. 
  "언니가 '대학' 공부를 하시더니 말씀이 더욱 향기롭습니다."
  "이 녀석, 향기가 무어냐. 내가 여자냐? 향기가  나다니, 하하하." '제'도 칭찬하
는 아우의 말이 듣기 싫지는 아니했다. '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향기는 속된  향기구, 언니의 향기는 글에서 나오는  향기올시다." '보'
보다 '도'는 할  살 아래건만 '제'의 말에  응구첩대로 대답했다. '제'는 '보'보다도 
'도'가 장래성이 있고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도'의 등판을 어루만졌다.
  "너는 요사이 무슨 글을 읽느냐?"
  "'소학'을 떼고 저도 '대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는 깜짝 놀랐다. 
  "네가 '대학'공부를  벌써 한단 말이냐?  그럼 너 격물치지를  해석할 줄  아느
냐?"
  "다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약간은 짐작합니다."
  "그렇다면 격물치지가 무슨 뜻이냐  풀어보아라." '도'는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
한다. 
  "아까 형님께서 경순공주를 말씀하셨죠. 구경꾼 틈에 몸을 숨겨서 태상왕 전하
의 영이를 바라보고 혼절해 울다가  잡혀 죽을까 두려워서 몸을 운무 중에 숨겨 
피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형님이 친히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경을 추리로 생각하셔서 보신 듯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격물치지올시다." '제'는 
놀랐다. '도'는 장차 큰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옳다! 더욱 공부해라." '제'는 '도'의; 등을 또 한 번 쓸었다.

    세자 문제
  태상왕 이성계가 돌아간 후에 세자를 봉하자는  여론은 또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대사간 황희는 나라의 국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빨리 세자를 정하
자고 주장했다. 황희는 강명 정직하면서도 관후장자의 풍도를 가졌다. 앞으로 대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복되게 할 사람이다.  황희는 인산을 치른 후에 대사간의 
자격으로 다시 상소를 올렸다. 대사간이란 언관이었다. 임금의 잘못하는 일을 간
하고 국가의 비정을 논란하는 독립된 관청의 장이었다.
  '대사간 신 황희는 돈수재배하고 전하께 아뢰옵니다. 지난번에 신은 국본을 튼
튼하게 하기 위하여 속히  세자를 정하시라 했습니다. 이제, 국가의 형편은 빨리 
세자를 정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여러 왕자를 두셨습
니다. 전하!  지난 일을 살피옵소서. 다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백대의 철칙인 큰왕자로써  세자를 책봉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지체할수록 폐
단이 되옵니다. 빨리 세자를  봉하옵소서. 밝으신 용단이 계시기 바라옵니다.' 상
소는 정원을 통하여  태종한테 올려졌다. 황희의 이번 상소는 첫  번째 상소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먼젓번 상소에는 그저 국가의 근본을 세우기  위하여 세
자를 봉하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상소에는 왕자를 지목해서  큰왕자로 세
자를 삼으라  했다. 세자란 현재의 왕이  돌아간 후에는 다음 세대의  왕이 되는 
것이니 실로 중대한 자리다. 세습적인 봉건시대에는  반드시 큰아들이 사왕이 되
는 것은  만고의 철칙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지금의 상감이 왕이  된 것은 
정상이 아니요, 변칙이다. 또한  지난 시절에 큰아들이나 둘째 아들로 차서를 따
라서 세자를 봉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으로 세자를 봉한 
것도 변칙이었다. 이로 인해서  왕실은 편안한 날이 없고, 골육상쟁하는 변이 거
듭거듭일어났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이 불상견의 사이까지 된것도  이 때문
이다. 대사간 황희는  이러한 지난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국가의 
박년대계를 위해서  이같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대사간 황희의  상소를 받아본 
태종은 이번에도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황희의 말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 속엔 딴 생각이 있었다. 사랑하는  애기 가희아의 소생 '비'가 있는 때
문이다. 가희아는 강계 출신의 요염한  기생이었다. 자색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궁중잔치 때 상감인 태종의 눈에 들어 하룻밤에  연을 맺었다. 일약 후궁이 되어 
옥동 같은 아들을 낳았다. 상감은 이름을 '비'라 지어주었다. 꽃보다도 더 아름다
운 가희아의 교태에  취한 임금은 그녀의 아들 '비'도 총명  영리하게 뵈었다. 태
종은 아버지가 서자 방석으로 세자를 봉했던 일을  씻은 듯 잊어버렸다. 이로 인
하여 자기가 칼을 뽑아  방석을 죽인 일도 잊었다. 색에 취한  사람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같았다. 애기의 아들  '비'로 왕사를 삼을 생각이 들었다. 입을 열어 말
은 하지 아니했으나 태종의 심경은 여기까지 빠지게  되었다. 이 눈치를 안 사람
은 누구보다도  왕후 민씨였다. 민씨는  여자면서 남자의 기상이  있는 능동적인 
인물이었다. 패기가 가득했다.  개염도 많았다. 이렇기에 방석을 죽이는  난리 때 
지금의 상감인  이방원에게 갑주를 입혀주고 어서어서  대궐로 쳐들어가서 일을 
성공하라고 격려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아버지 민제를 움직여서 하윤과 접
선을 시켜서 비밀한 중에  계획을 꾸몄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기의 친정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등으로 군사를 거느려 대궐로 쳐들어가서, 영추문앞에서 쫓겨나오
는 세자 방석을 죽이고,  달아나는 방번을 죽이고,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이성
계의 용상 앞에서  목을 잘라서 혁명을 완수하게 했던 장본인이다.  왕후 민씨는 
마음 속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을 때, 대사간  황희가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
었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대장군  민무구와 민무질을 내전으로 불러들였
다. 친정 동생들은 왕후 민씨께 문후를 드린 후에 시립해 있었다.
  "무슨 하문하실 일이 계시어 부르셨습니까?" 큰동생 민무구가 먼저 물었다.
  "대사간 황희가 국본을 빨리 정하시라는 상소를 올렸다는데 자네들은 이  일을 
아는가?"
  "네, 알았습니다. 황희는 과연 대사간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올시다. 지난번에도 
세자책봉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습니다마는 이번에는 장자로 세자를 봉하셔야 국
가가 태평하다고 아주 명토를 박아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대답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잠자코 계신 모양아닌가?"
  "네, 그러합니다."
  이번엔 아우 민무질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얼른  결정을 내리시지 않는 까닭을  자네들은 알고 있는가?"  왕후 
민씨는 눈을 들어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기생 출신으로 후궁이 된 가희아를 매우 
사랑하신다 합니다. 원인은 가희아의 소생인 '비'가 있는 탓이올시다."  왕후는 가
볍게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도 까닭을 아네그려. 그렇다면 왜들 가만히 앉아 있나?"
  "저희들은 외삼촌이 되는 까닭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민무질이 대답했
다.
  "못난 사람들일세. 직접 상소를 올리기가 거북하다면 이 기회를 타서 대신들을 
충동해서 여론을 일으키면 될 것 아닌가. 대의명분이  뚜렷한 이 일에 응하지 아
니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들은 나서지 말고 대신들을 움직이도록 하게."
  "아버님께 여쭙고 하정승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민무구는 하윤을 생각했
다.
  "잘 생각했네. 전하께서는  하윤의 말이라면 꼼짝 못하고 들으실 것일세.  더구
나 하윤은 아버님과  친할 뿐 아니라 정도전을  몰아내기 위하여 전하의 잠룡때 
아버님을 통하여 전하와 손을 잡은 사람아닌가.  꼭 하정승을 움직이도록 아버님
께 여쭙게."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민무구 형제는 내전에서 물러나왔다.  집으로 돌아
가 부원군  민제께뵈었다. 아버지 민제는  아들 형제들이 왕후전에  다녀온 일을 
벌써 알고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더냐?"
  "대사간 황희가 올린 상소에 대하여 빨리 협조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아
버님께서 하정승을 움직이시라 하셨습니다." 부원군 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한 마디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부원군 민제는 평교자를  몰
아 정승  하윤을 찾았다. 나라의 원로요,  금상전하의 장인인 민부원군의 행차가 
하윤의 집에 당도하니, 정승 하윤은 비록 지위가  높으나 신을 거꾸로 신고 뜰에 
내려 부원군을 맞이했다.
  "부원군 대감, 웬일이시오니까?" 민제의 손을  두 손으로 받들고 당 위로 올랐
다. 민제는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왜  대감댁을 못찾을 사람입니까?  너무 사람을 괄시하지  마십쇼, 하하
하."
  "아니올시다. 부원군 대감께서 연통도 없이  누지에 왕림하시니 너무나 황송해
서 여쭌 말씀이올시다." 민제는 은실 같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또 한 번 껄걸 
웃었다.
  "영의정댁을 누지라 하시면,  우리 같은 사람의 집은  무어라 불러야 하겠습니
까? 너무 겸손하신 말씀도 예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수작은 여유가 작작했다.
  인사가 끝난 후에 민제는 얼굴빛을 고치고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조용히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잡인을 금해주십시오." 하윤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후에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민제는 그래도 미심했다.
  "갑창이 있으면 닫아주시오." 하윤은 창 안에 있는 갑창을 닫았다.  방 안은 어
두컴컴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벌써 마음 속으로 민제가 찾아온 뜻
을 짐작했다. 민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밖에서 들릴 듯 말 듯 했다.
  "영상 대감, 대사간 황희가 올린 상소를 아셨습니까?"
  "알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옳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하시면 왜 영상대감의 자격으로 상주를 아니하십니까? 나는 와자
들의 외주부가 되니 혐의쩍어서  말씀을 못합니다마는 대감께서는 왜 지의를 하
고 계십니까? 대감께서도 정도전의 본을 뜨려 하십니까?" 민제는 하윤의 염통을 
솜방망이로 콱 찔렀다.  아닌게 아니라 하윤이 정도전이 자기 일신의  영화를 위
하여 강비한테 붙어서 서자 방석을 세자로 봉하게  한 때문, 방원과 함께 정도전
을 제거시킨  사람이면서도 역시 지난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 태종의 동정만을 살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 얼른 대답을 못했다. 민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난을 일으킬 때 대감을 내 사위인 금상전하께 천거한 사람이 바로 이 민제
올시다!" 민제는 은실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딱 부릅떴다. 부원군 민제는 계속
해서 하윤을 위협했다.
  "대감! 전하의 동정만을 살피실 것이 아니라 내  딸인 와후마마의 심정도 살피
셔야 합니다!" 민제는 또 한 번 소리 없는  솜방망이로 정승 하윤의 허구리를 콱 
찔렀다. 하윤은 당황했다.
  "때를 기다리는 중이올시다. 전하의 마음이  흐뭇하실 때를 기다리느라고 아직 
아뢰지 아니했습니다." 민제는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대사간까지 정론을 들어 주저없이  아뢰었는데, 어찌해서 정승인 대감은 때를 
기다린다 하십니까? 대감은  상감께서 서자로 세자책봉을 하시겠다고 하실 때를 
기다리십니까?"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연부역강 하시니 잘못  아뢰었다
가는 오해를 하실까 하여 시기를 보아  아뢰자는 것입니다." 하윤은 손을 비비면
서 초조하게 대답했다.
  "대감,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세자는 일찍이 책봉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왕자가 
많을수록 미리 책봉하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나라가  반석 위에 튼튼하게 놓여져
서 민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춘추대법인데, 대감은 어찌 이 일을 모르
십니까?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딴생각이 계시어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까 말씀한 대로 그저 전하의 마음이 움직이실 
때를 기다린 것뿐입니다." 영의정 하윤은 낭패했다. 좌불안석을 못하고 있었다.
  "대감, 나의  아들들은 못생겼습니다마는 원자의  외삼촌이요, 모두 다  대감과 
함께 상감을 도와서 혁명을 일으켰던 대장들이올시다.  대감이 간에 붙고 쓸개에 
붙어서 정정당당하게 태도를 취하지 아니한다면, 우리  다들들은 결코 대감을 그
대로 두지 아니하리다!" 민제는  추상같이 얼러댔다. 영의정 하윤은 납작 엎드렸
다.
  "네, 그저... 알겠습니다.  오늘은 해가 기울었습니다. 내일 곧 입조하여  전하께 
원자로 세자를 봉하시라 아뢰겠습니다." 부원군 민제는 다시 수염을 쓰다듬고 말
한다.
  "대감만이 혼자 아뢰실 것이 아니라 삼사를 동원하여 아뢰셔야 합니다. 사간원
에서는 황희가 이미 선편을  잡아 아뢰었거니와 사헌부와 홍문관의 모든 헌관과 
언관들이게 교장해서 아뢰셔야 합니다." 부원군 민제의 말소리는 장중했다.
  "네, 그리하오리다." 하윤은 민제의 위엄에 눌렸다. 부원군이 무서운 것이 아니
다. 부원군의 뒤에는 왕후 민씨가 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갑니다. 당부하오."  민제는 한 마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정승 하윤은 뜰 아래까지 내려 부원군을 전송했따. 영의정 하윤은 부원군 민
제의 위풍에 눌렸다.  이튿날 날이 밝자, 곧 대궐로 평교자를  몰았다. 빈청에 자
리를 잡고 삼사 장관을 청했다. 홍문관  대제학,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들
이 영의정의  분부를 받고 모여들었다. 하윤은  원래 능란한 재상이었다. 여태껏 
자기가 주저했던 태도를 버리고 점잖게 삼사 장관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백료의 장으로 있기 때문, 아직  앞을 서서 발론을 아니하였거나와 입세
자하는 일은 국가의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오.  지난번에 황대사간은 두 번씩이나 
세자책봉을 하시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아직 윤허하시는 말씀을 내리지 아니하셨
소.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떠하오?"
  "당연히 세자를 세워야 합니다." 대사간 황희는  자기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강
조했다.
  "황대사간은 이미 상소까지 올린 분이니,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홍문관 대제학과 대사헌은 여출일구로 대답한다.
  "원자로 세자를 봉하셔야 합니다. 대사관의 주장이 옳소이다."
  "그렇다면 나는 영상의 자격으로 오늘 전하께 알현하고 원자로 세자책봉을  하
시라고 아뢰겠소이다. 혹시 전하께서 나의 말씀도 윤허치 아니하실지 모르니, 여
러분들은 삼사가 교장을 해서 세자책봉을 주장하시오."
  "좋습니다. 대감의 뒤를 받쳐서 곧 삼사가 교장을  하겠습니다." 대사간 황희를 
빼놓고, 대사헌과 대제학도 민씨네 부자 형제의 권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일제히 
찬성을 했다. 왕후 민씨의  세력은 만만치 아니했다. 영의정 하윤은 내관을 통하
여 어전에 뵙기를 청했다. 사랑하는 후궁 가희아와  함께 있던 태종은 정승이 뵙
자는데 아니만날 수 없었다.
  "들라 해라." 함께 있던 후궁 가희아는 잽싸게 몸을 날려  협방으로 피했다. 정
승 하윤은 편전으로 들어 어전에 곡배를 드렸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
고 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사이 국사에 얼마나 바쁘오? 별일은 없는가?"
  "변방과 민생 일은 별일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이 있사와 정하께 알
현을 청했습니다."
  '중대한 일'이란 말에 태종의 눈이 둥그래졌다.
  "무슨 중대한 일이 생겼소?"
  "지난번에 대사간 황희는 두 번씩이나, 세자를  정해서 국본을 튼튼히 하라 아
뢰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아직껏 전하께서는 윤허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여론이 물끓듯 합니다. 속히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시어 민심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윤의 말을 듯자 태종은 껄걸 웃었다. 
  "내 나이 아직 사십이  넙지 못했는데, 뒷일을 어째 그리 걱정들을 하오.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리다." 이때 태종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내시가 들어왔다. 태종
은 내시를 바라보았다.
  "어찌해서 들어왔느냐?"
  "승지가 뵙기를 청합니다." 태종은 하윤에게 말대답하기가 거북하던 판에 잘되
었다고 생각했다.
  "불러들여라." 이윽고 승지는 상소문 한 뭉텅이를 들어왔다.
  "무엇이냐?"
  "삼사가 교장을 해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무슨 상소냐?" 옆에서 부복해 있는 하윤은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승지가 대
답해 아뢴다.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시라는 상소올시다." 태종은 화를 벌컥 냈다.
  "세자는 내 세자지 신하들의 세자가 아니다. 내가 내 아들을 택해서 세자를 봉
할 텐데 왜  이리 성화 독촉들이냐!" 승지는  황송했다. 그러나 상소문을 어전에 
아니 놓을 수 없었다. 벌벌 떨면서 옥좌 앞 책상 위에 놓았다.
  "읽어 보아라!" 승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헌부 헌관과  홍문관 교리며 사간
원 간관들이 연명을  해서 올린 삼사교장의 상소문을 읽었다. 모두  다 한결같이 
큰왕자인 원자로 어서 빨리 세자를 책봉하라는 상소다. 태종은 왈칵 성이 났다.
  "내가 내  아들을 골라서 어련히 세자를  봉할라구 이같이 성군작당들을 해서 
야단들이냐. 그래 원자가 불향해도 세자를 삼을란  말이냐!" 태종은 격했다. 승지
가 책상에 놓은 상소문을 방바닥에 내던졌다. 승지는 황송했다. 상소문을 주워서 
소매에 껴안고 물러났다. 정승 하윤이 고개를 들고 조용히 아뢴다.
  "전하! 국가는 전하  한 분의 국가가 아니올시다.  비록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오직 한 분이신 국왕이십니다. 그러나 국가는 사사로운  전하 한 분의 국가가 아
니올시다. 만백성의 국가올시다.  삼가 장관은 만백성들을 대표하여 바른 말씀을 
올리는 것이오니 삼사의  교장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옵소서.  아뢰옵기 황송하오
나 전하께서는 원자가 불량하다 하시니 어느 점을 가리켜 불량하다 하십니까?"
  "원자는 글공부는 아니하고 탄자를 놀리고 매를  길러서 장난만 하고 있소. 그
리고 성정이  괴팍해서 선대왕 성복제에도  참여치 아니하고, 인산  때도 나오지 
아니하였소. 이런 아이로  어떻게 세자를 삼겠소?" 하윤도 이  소문은 일찍 들었
다. 원자가 몸이 불편해서  나오지 아니했다고 당시 자자히게 소문이 돌았다. 하
윤은 태종이 큰왕자에게 세자책봉할 의향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총
희 가희아의 소생인 '비'에게 마음이 쏠린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각
의 수반인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자책봉에 대해서는 입을 봉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부원군 민제의 위협을 받은  후에는 아무리 해도 왕후 민씨의 
편이 되는  것이 처세하는 도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하께  알현을 결심하고 
빈청에 회의를 열어 황희의 주장이 옳다 한 후에 삼사교장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미 벌여놓은 춤이었다.  기어코 큰왕자로 세자를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아뢴다. 
  "소신도 원자께서 성복제와 인산 때 참여치 못하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
시에 원자께서는 병환이 있었다는 말을 전의한테  들었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참
여치 못한 것을 책방 할 수는 없습니다.  듣자오니 원자께서는 총명 영오하고 글
과 글씨가 모두  다 보통이 아니올시다. 그리하옵고 매 기르기를  좋아하고 탄자
를 잘 놀리는 일은 조금도 덕에 손상될  것이 없습니다. 탄자를 놀리고 매사냥을 
하는 것은 고려와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유풍으로 육예에 소속되는 일이올시다. 
신체의 발육을 위하여 좋은 일이온데 이것으로  허물을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하
윤의 말을 듣는 태종은 역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성복제와 인산은 막중한 의식인데,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반드시 나왔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탄자 놀리기와 매 기르는 일이 어찌 예악사어서수 육예 속
에 든단 말인가?" 태종의 대답은 무뚝뚝했다.
  "전하, 생각해보십쇼. 탄자놀이와  매 기르는 일이 어찌  육예 속에 아니 듭니
까? 탄자  놀리기는 활 잘 쏘는  기술에 통합니다. 일찍이  선태상왕 전하께서는 
소시 때,  함흥에서 퉁두란과 함께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탄자 
쏘기 내기를 해서 백발백중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태사왕께서 천하명궁이 되셨습
니다. 그리고 매는 사냥에 쓰게  되는 것이 사와 어에 통하는 일입니다. 어찌 육
예가 아니라 하십니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하여 임금은 친히  사냥을 하
는 법이올시다. 전하께서도  가끔 사냥을 나가시지 않습니까? 죄될  것이 없습니
다." 태종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정원에서 승지가 
또 들어왔다.
  "백관들이 청대를 드립니다."
  "백관들이 청대를? 무슨 일이냐?"
  "모르겠습니다. 문무백관이 다  함께 정청을 원합니다. 만조정 신하가 다  청대
를 원한다 하니  태종은 아니 만나볼 도리가 없었다. 어좌에서  일어나 정전으로 
향했다. 뒤에는 하윤이 따랐다. 대제학 민제, 대장군 민무구, 대장군 민무질 삼부
자는 하윤이 입대하고 삼사가 교장을 해서 원자로 세자를 책봉하라 해도 상감이 
얼른 허락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내시를  통하여 들었다. 그대로 앉아 있
을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좌우의정과 육조판서며, 삼군부 대장군을 총동원시켰
다. 민대제학과 민대장군들은  왕후 민씨의 친아버지와 친동생들이다. 모든 각과 
백료들은 민씨네를  괄시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원자가 세자가 되었다가 
상감이 되는 날에는 부귀영화의 한 깃을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원자로 세자를 
봉하자는 일은  대의명분으로 볼 때  정정당당했다. 모두 다  정청하기를 쾌하게 
승낙했다. 태종은 영의정 하윤이 시립한 앞에서 백료들의 정청을 받았다. 청대를 
드리는 수반은 대방군 민무질이었다.
  "무슨 일로 정청을 하느냐?" 태종은  벌써 눈치를 채었다. 그러나 조용히 물었
다.
  "오늘 문무백관이 다 함께  정청을 올리는 일은 국가의 대사를 빨리 결정하시
라는 일이올시다."
  "어떠한 국가의 대사인가?"
  "나라에는 세자가 있어야 합니다. 빨리  세자를 책봉하시라고 청대들을 드리는 
것입니다."
  "경들의 의향에는 누구로 세자를 책봉하야 좋다고 생각하는가?"
  "전하께서는 왕자를 많이 두셨습니다. 당연히 순서에 따라서 원자로 세자를 삼
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국가에는 또다시  혼란이 일어납니다." 왕비의 
친정 동생 대장군 민무구는 정난공신에 병마권을  잡은 사람이다. 목소리가 장중
했다. 태종은 불쾌하기 짝  없었다. 왕비의 동생이라는 세력을 믿고 이같이 백관
을 휘동하여  청대를 드리는 것이 무한  불쾌했다. 그러나 체면을 아니  돌볼 수 
없었다. 
  "과인도 생각이 있다.  쉬 결정하리라." 태종 이방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만만치 아니했다. 지기의 고집을 굽히기 싫엇다. 싸늘하게 대답했다.
  "전하, 만약에 원자로 세자를 봉학지 아니하시고 다른 왕자로 세자를 봉하신다
면 제이의 방석의  난이 일어납니다. 골육상쟁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이  또 일어
난다면 큰일이올시다. 전하!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뜰어 엎드렸던 만조백관들이 
일제히 읍했다.
  "전하! 굽어 통촉하시옵소서."  태종은 어이가 없었다. 비로 곧 위협이었다.  속
에서는 부아가 끓었다. 곧  호통을 쳐서 꾸짖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옛생각
을 하니 또한 일리가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머릿속에는 무한한 번민이 끓
었다. 그러나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들의 말을 들어 원자로 세자를 봉하리라!"

    세자 제

  태종은 밤새도록 괴로웠다. 예쁜 가희아가 낙담할  것을 생각하니 금창이 메어
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백관들이 정청하는  앞에서 허락을 해놓았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날이 밝자 정전에 나가  승지를 불러 원자  '제'에게 세자책봉할 
것을 선포하라고 일렀다. 세자를  내정한 소식은 조야에 퍼졌다. 기생 출신 가희
아는 이 소식을  듣고 아들 '비'를 껴안고 밤새도록 울었고,  왕비 민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었다. 한 여인은 패배자의 슬픈 마음이요, 한 
여인은 네가 나를 어찌할 테냐 하는 승리의  기쁨을 띤 조소였다. 상궁은 대전과 
중전의 명을 받들어 '제'의 처소로 나갔다.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서  세자책봉의 분부가 내리셨습니다. 곧  택일을 하여 
책봉 예식을  거행사신다 합니다. 들어가 사은을  드리셔야 합니다." '제'는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다. 왕 노릇은 하기  싫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행적을 
생각해보았다. 큰아버지  진안대군과 둘째아버지 상왕의  행적을 항상 숭배했따. 
이신벌군의 누명을 쓴  그 왕의 자리에 주저앉고 싶지 아니했다.  골육상쟁을 한 
그 피비린내 나는 용상에 앉아서 후계자 노릇을 하기가 싫었다.
  "사은이 무슨 사은인가. 그런  허례는 차리고 싶지 아니하네." 한 마디로  차갑
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털끝만큼도 반가운 빛이  없었다. 일개 궁녀인 상궁쯤의 
머리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고맙다고 문안을 드리셔야 합니
다."
  "고마워? 하하하." '제'는 소리를 높여 깔깔 웃었다.
  "나는 몸이 아파서 못들어가겠네." '제'는 슬몃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갔다 나오셔야 합니다."
  "왜 이래, 귀치않게." 상궁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들어갔다. 왕비 민씨께 사유
를 아뢰었다. 이날 밤에 왕비 민씨는 친히 '제'의 처소를 찾았다. 
  "고집을 부리지 말고  아바마마께 사은 문후를 드려라. 너는 장자다.  큰아들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중전은 어떤 아들보다도  특별히 큰아들 '제'를  사랑했다. 
'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대신, 어마마마께는  지극한 효성을 
다하는 때문이다. '제'는 대전에는 형식적으로  문안을 드렸지만 아마마마께는 진
심으로 효도를  다해서 아침 저녁으로 기후의  안태하시기를 축원하면서 문안을 
드렸다. 어마마마는 이 아들의  진심을 알았다. 뿐만 아니다. 첫배의 아들이었다. 
정이 깊었다. 왕자 '제'는 어마마마의 말씀에 차근하게 대답했다.
  "소자는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올시다." 민비는 놀라는 모습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장자다. 장자는 당연히 세자가 되는 법이다. 사사로
운 민가에도, 큰아들은 봉제사  접빈객을 하는 책임을 갖는 것이다. 세자 되기가 
소원이 아니란 말이  무슨 소리냐. 두말 말고 아바마마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을 해라."
  "세자책봉이 되면, 다음 세대에 왕이 되는 것입니다. 세자가 되기 싫다는 것보
다 임금이 되기 싫어서 아뢰는 말씀입니다." '제'는 고개를 숙여 자애스런 어머니 
앞에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 민비는 딱하다는 듯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
라본다.
  "임금 노릇을 하기  싫다니 무슨 소리냐. 천하 사람들이 다  이 자리를 원하는
데, 어찌 너는 싫다 하느냐?"  '제'는 어머니 앞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골육상쟁
한 추한 일을  니ㅗ까리기 싫었다. 더구나 추한 그 자리를  이어받기가 거북하다
고 말하기 난처했다. 다만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소자는 임금 노릇을 할  역량이 없습니다. 만백성을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  
민비는 의젓한 목소리로 아들을 타이른다.
  "임금 노릇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임금 혼자 만 가지 일을 다 통찰
한단 말이냐. 국가에는 경험이 많은 원로 재상이 있고, 포부와 경륜이 있는 대신
들이 있다. 모두 다 이들이 보필을 해서  백료를 거느리고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
이니 조금도  주저할 것이  없다. 공연히  딴소리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제'는 그래도 불복했다.
  "비록 백관의 보필이 있다 해도, 군왕 되는 사람은 경천위지하는 큰 포부와 제
세안민하는 큰  경륜을 가져야 합니다.  소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담당하지 못할 
일이올시다." 큰왕자의 말을  듣는 어머니 민비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에 
'제'가 영영 세자책봉을 거부하고  자리에 아니 나간다면 다음 대의 와우이는 상
감의 애첩 기생  출신인 가희아의 아들 '비'로 세자 책봉을  하기 십상팔구다. 그
러나 민비는 '비'의 일을 지적해서 말하고  싶지는 아니했다. 다만 겉으로 변죽을 
울렸다.
  "만약 장자가 세자의 지위를 사양한다면, 반드시 왕실에 분란이 일어나는 법이
다. 예로부터 어느 국가를 말할  것 없이 탈은 이런 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너는 
내 말을 우습게 듣지 말고  아바마마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침묵을 지켜 있거
라." 민비는 말을 마치자 얼굴빛을 엄숙하게 지었다. '제'는 아버지보다도, 할아버
지보다도 어머니를 가장  존경했다. 왕실에 분란이 일어난다는 말에 더  이상 항
변할 도리가 없었다.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나는 이제  내전으로 돌아간다. 잘 생각해  보아라." 왕비는 '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곤 궁전으로 돌아갔다.  어마마마가 돌아간 후에, '제'는 한동안 마
음이 괴로웠다. 세자의 책임을 지면 반드시 다음 대의 왕의 자리에 나가게 된다.  
진정 말이지, 이신벌군을 했다는  그 자리, 형제와 조카들을 죽이고 주저앉아 있
는 그 자리의  후계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큰아버지 진안대군의  조촐한 행식이 
그지없이 그립다. '제'는 눈을 감고 누워서 만  가지 생각 속에 잠겼을 때 외삼촌 
민무구가 창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어서 생질이  세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외삼촌 
중의 하나다. '제'가 세자 되는 데 난색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누님께 듣고 부
랴부랴 들어왔다.
  "지금 중전마마께 드닺오니 원자께서 세자 되는 것을 소원치 아니하신다  하니 
정말입니까?" '제'는 원자였다. 비록 외삼촌이라 하나 깍듯이 존대하는 경어를 썼
다. '제'는 침묵을 지켰다. '왜 이리들 귀찮게 하나'하고 대답을 아니했다.
  "원자께서 비록 세자 되기가 싫다 하셔도, 부락불 그 자리에 아니나가시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원자께서  세자의 자리를 거부하신다면 골육상쟁의  변란이 일
어나는 것은 둘째요, 어마마마께서 폐위가 되십니다." 외삼촌의 말을  듣는 '제'는 
귀를 의심했다.
  "폐위라니?"
  "네,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서인이 되십니다." '제'는 아직도 소박했다. 깜
짝 놀랐다.
  "내가 세자를 거부한다고 어찌해서 어마마마께서 폐비가 되신단 말씀이요?"
  "허,허, 원자께서는 아직도 세상 물정을  모르십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많은 후
궁들을 두신 중에 강계 기생 출신인  가희아를 장중보옥같이 귀여워하십니다. 가
희아의 소생은 나이 지금 원자와 비슷합니다.  가희아는 은근히 전하께 '비'로 세
자를 삼으시라고 아양을 떨고  있다 합니다. 만약 '비'가 세자가 되는 날, 중전마
마께서는 폐위가 되시고  가희아가 왕비가 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까짓 골육상
쟁은 다음 문제올시다.  원자께서는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마마마의 정경을 
생각해보옵소서." 외삼촌 민무구의 말을 듣는 '제'는 흥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말이 되오? 어찌 감희 우리 어머니를 폐위시킨단 말요. 그렇다면, 나는 곧 세
자가 되리라!" '제'의 눈가에는 불그스런 홍훈이 돌았다.
  "그러하니 원자께서는 아무 말씀 마시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아마 일
간 곧  세자책봉 예식이 있을 것입니다.  실상을 말씀합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원자께 세자책봉하실 의향이 없으신  것을 만조백관이 들고 일어나서 겨우 윤허
를 내리신 것이올시다.  깊이 통촉하옵소서." 외삼촌 민무구는 이같이 말하고  물
러났다. 세자 노릇이 하기 싫어서 무한  고민하던 원자 '제'는 어머니가 폐위되기 
쉽다는 외삼촌 민무구의  말에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마음에 없는  자리건만 결
연히 세자책봉을 받을  것을 결심했다. 이튿날, 한낮이 되었다.  세자책봉의 칙명
이 내렸다. '제'는 황금덩을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앞에는 삼군부 어영대장 민무
구가 말 탄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기치 창검을 바람에  펄럭이며 나가고, 뒤에
는 정원 승지와  내관 궁녀들이 왕세자의 황금덩을 휩싸서 나갔다.  다음에는 훈
련대장 민무질이 기병  천 명을 거느려 대궐로 들어갔다. 세자책봉  예식이 거행
되기 직전이었다. '제'는 먼저 내전으로 들어가  부왕고 모후 민씨의 처소에 문안
을 올렸다. 태종은 왕후 민씨와 함께 장차 세자가 될 '제'를 바라보면서 돌연 '제'
를 향하여 물었다.
  "그 동안 글을 많이 읽었느냐?"
  "놀지 않고 읽었습니다."
  "세자가 된 후에는 공부를 더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 '제'는 공손히  대답했다. 태종은 다시 '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씀을 내
린다.
  "내 나이 어느덧 벌써 사십이 되었다.  청하지 아니한 백발이 찾아와서 머리털
과 살쩍이 희끗희끗  서리가 내린 듯하구나.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임금의 자
리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주야로 책을 읽고 있다.  내가 이같이 밤낮을 가리지 아
니하고 글을 읽고 있는  그 까닭은 무슨 까닭이냐. 내가 글을  읽는 뜻을 알겠느
냐? 말을 해 보아라." '제'는 잠자코 대답을 아니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
지 말씀은 새빨간 거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도대체 글을 읽을 틈이 없었다. 이심 
이전에는 글을 많이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십 이후부터는 고려왕실을 엎어놓느라
고 동분서주했고 고려왕실이  넘어온 후에는 형제싸움, 숙질싸움, 부자싸움에 연
며이 없었다. 어느 하가에 글을 읽어서 연구할  틈이 없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
었다. '제'는 어안이 벙벙했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너무나 심한 거짓이다.  요
사이 정사하는 틈에  아버지는 경연이라 해서, 대신들과 경서에 대한  것을 이야
기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달에 한두 번 정사하고 난  틈에 한두 시
각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는 그 글공부는 진정 글공부가 아니다.  '제'는 잠시 눈
을 감아본다. 아버지의 뻔뻔스런 가면이 마땅치 않았다. 골육상쟁을 했던 아버지
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한탄하면서, 자기를  책방하는 것이 마음에 역했다. 아무
리 생각해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는 책망이다. '제'는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 '제'의 모습은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의 
모습이었다. 이때 대전내시는 상궁을 통하여 아뢴다.
  "세자책봉의 의식을  거행하실 시각이 가까웠습니다. 만조백관들은  지금 정전 
넓은 뜰에  나열해 있습니다. 속히 정전으로  납시기 바랍니다." '제'는  상궁에게 
인도되어 새로 치장한  동궁으로 나갔다. 동궁 내전에는 새로 배치된  동궁 소속
의 상궁과 나인들이 뜰에 내려 '제'를  맞이했다. 상궁과 나인들은 '제'의 땋아 늘
인 머리 편발을  끄르고 상투로 틀어올렸다. '제'는  아직 장가를 들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동궁빈이 아직 없다. 그러나 총각으로  머리를 땋아 늘이고 세자책봉하
는 의식을 거행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가리고  동백 기름을 발라서 멋지게 상투
를 틀었다. 상투고비에는 황금 마구리에 새빨간  산호가지를 물린 조그마한 동곳
을 멋지게  꽂았다. 머리털이 흐트러지지 말라고  이마에는 인모 망건을 씌웠다. 
망건 위에는 다시 인모  탕건을 씌웠다. 도홍 띠 분홍 중막을  멋기고 세자의 정
복인 강사포를 입힌  후에 머리 위에는 익선관을 씌웠다. '제'는  귀찮아서 몇 번
인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절차라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정원 승지는 
춘방사령들에게 영을 내려 세자가 탈 옥교를  받들어 나왔다. '제'는 승지가 고하
는 대로 옥교에  올라 창덕궁 명정전으로 향했다.  만조백관들은 정일품, 종일품, 
정이품, 종이품의 글자를  새겨논 품계석 앞에 열을 지어 섰다가  동궁의 옥교가 
나타나자 천세를 불러 세자를 맞이했다. 이때 태종은  정전 용상 위에 민비와 함
께 출어해 있었다. 승지는 동궁을 어전으로 인도하여  배례를 시킨 후에 다시 전 
밖으로 물러나와 월대  앞에 미리 배치해놓은 교의에 앉게 했다.  뜰에는 아악을 
아뢰는 악공들이 청아한 관현악을 아뢰고, 국가의  근본을 축복하는 장악원 기생
들은 전모란 꽃춤을  자지러지게 추었다. 태평 기상을 아뢰는 아악과  춤이 멎어
진 후에 승지는 세자책봉하는  옥책문을 상감과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 낭랑히 
받들어 읽었다. '국가에는 반드시  왕세자가 있어야 그 나라의 국본이 든든한 것
이다. 이제 원자인 '제'로 왕세자를 책봉한다.  모든 신료와 국민들은 다 함께 왕
세자를 모시어  더욱 나라일에 근면하여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게 하라.' 승지가 
책봉문을 읽고 나리 '제'의  앞에 모시어 섰던 내시와 궁녀들은 익선관을 벗기고 
황금 면류관을 머리에 얹었다.  왕이 쓰는 면류관의 줄수보다 줄이 성기다. 승지
는 세자를 인도하여  용상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정식으로  왕세자의 의상을 
입고 왕과 왕후 내외분께 예를 올리는 것이다.  세자책봉의 의식이 끝난 후에 군
신들은 천호만세 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찍 태자를 세우는 일은 국본을 존숭
하고 인심을 안정케 하려는 까닭이다. 과인은 본시  덕이 없는 몸으로 선조의 누
적된 덕과 태상왕 전하의 창업하신 위대한 업적을 받들어 항시 황송하고 조심하
여 책임의 무거움을 느꼈다. 다행위 왕후 민씨가  정위 중궁에 있어 내조의 공을 
이루었고, 원자 '제'는  맏아들로 태어나 범속하지 아니한  자질을 가졌으나 아직
도 예법을 잘안다고 찬양할 수 없다. 장차 아찌 어진이를 친할 수 있으며, 옛 교
훈을 받지 못했으니 또한 어찌 나라 다스리는  정치를 도와줄 수 있으랴. 이러하
므로 성균관에 입학시켜서  학문을 닦게 한 지 여러해가 되었다.  때마침 종친과 
대보들은 감국과 무군할 세자의  자리가 아직고 정해지지 아니한 것을 염려하여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원자는 천성이 어질고 효도할 뿐 아니라, 학문이 일취월장
하니 빨리 세자로 세워서 모든 국민의 바라는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과인은 여러 사람들의 여론에 좇아서  오늘 옥책과 인수를 '제'에게 주
어 왕세자를 봉한다. 이러한 국가의 큰 경사를  당하여 마땅히 특별한 은전을 내
린다. 오늘 새벽 이전에 모반대역과 살조부모, 부모 처첩 살부노비 죄를 범한 자
를 제외하고 모두 다  무죄백방 시키라.' 교서의 낭독이 끝나니 만조백관들은 또
다시 천호만세하면서 왕과  왕세자의 큰 덕을 예찬했다. 왕의 교서는  곧 주자소
로 넘기어 태종 계미자로 인출되어 조선  팔도로 퍼져나가고, 왕세자 '제'는 승지
의 인도로 좌상에 올라 사은하는 예를 올렸다.

    태종 호색
  '제'는 이제 당당한 일국의 왕세자가 되었다.  일국의 왕세자가 된 크나큰 일을 
왕실의 조상을 모신 종묘에 고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왕세자 '제'는 종묘에 나
가 왕세자가 된 봉고제까지 지냈다. 숭배하지  아니하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신주 
앞에도 나가서 고유를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태종은 모든 나라일이 차차 안정
되어 가니 마음으로 기뻤다. 어거지를 써서 임금의  자리를 차지한 지도 벌써 여
러 해가 되었다. 무던히도 싸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고려왕실을 뺏느라고 아버
지 이성계를 도와주고,  고려 때의 무수한 충신과 열사를 죽이고  없애느라고 애
를 썼던  일은 벌써 선천적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다시  쳐들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씨네 왕국이 확고부동한 태세  위에 놓인 후에는 왕의 자
리를 차지하느라고 한층  더 임이 들고 괴롭고 어려웠다. 형제를  죽이고 형제를 
쫓아내고, 부자가 원수가 되는 이 모든 추하고 상서롭지 못한 일을 겪었다. 하기
는 이면  체면 차릴 것 없이  다 용감하게 치워버렸으나, 무한  괴롭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슬프고 부끄러운 과정을 치르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자기가 칼자루를 잡는 이  대권을 잡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태종은 이제 비
로소 길게 한숨을  쉬었다. 태종은 세자까지 봉해놓고 호화로운 궁궐  용상에 편
안하게 앉아보니,  이제는 근심 걱정이 태반이나  사라졌다. 그는 정신이 쇄락하
고, 마음이  거뜬했다. 좋은 의복을 입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다. 한 번 부르면 천만 사람이 쥐죽은듯 조용하게 명령에 복종했다. 임금 노
릇은 한 번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연부역강했다. 나이 아직 사십니 
될까 말까 했다.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아름다운 자색을  가진 궁
녀들은 갖은 교태를 지어서 자기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안일한 
데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양으로 다시 온 후에 첫 번째 봄을 맞이했다.
  초저녁이었다. 왕실의 모든 체통과 예법은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풍속을 그대
로 답습하게 되었다.  상궁과 나인들의 꼭두에는 고려왕실에서  거행하던 나인이 
많았다. 내시들도 고려  때 왕실을 섬기던 내관들이 새로운 궁녀와  내관들을 지
도하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태양은 꺼지고, 어전에는 등촉방 내시가 황금 
촉대에 불을  켜놓고 나갔다. 조금 있으려니  아름다운 궁녀가 나타났다. 나이는 
삼십이 될까 말까 했다.  궁녀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황금  홑첩지를 얹고 물
빛 저고리를 입었다.  자줏빛 고름에 남끝동이 색의 조화를 이루어  더한층 아름
다웠다. 호수 빛 같은  남치마에 백설 같은 흰 버선을 신고  조용히 걸어 어전에 
부복했다.
  "아뢰옵니다. 수라를  내전에 준비했사옵니다." 목소리는  곱고 아늑했다. 왕은 
처음 대해보는 궁녀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나타난 상,  중, 하, 삼정
은 고루 균형이  잡혔다. 이마와 관골과 지각이 삼등분으로 정제하게  자리를 잡
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 토실한 두 볼,  널찍하게 받친 턱에다가 눈은 맑고 초롱
거렸다. 입은 붉은  꽃판이 갓 터져서 벌과  나비라도 부를 듯 예뻤다. 얼굴판만 
잘생긴 것이  아니다. 몸맵시도 제법 사부주가  들어맞았다. 어깨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아니했다. 살이  찌지 아니해서 저고리 위로 드러난 어깨판은  마치 학이 
죽지를 벌린 듯 날씬했다. 팔과 다리도 알맞았다.
  "수라를 내오지 아니하고 어찌해서 내전에 준비했느냐?"
  "오늘은 왕후마마께서  내전에서 수라를 받들라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듭시와 
젓숩기 바라옵니다." 아름다운  궁녀는 조신하게 대답했다. 말소리는  아까보다도 
더한층 고왔다. 마치 가을 밤에 호젓이 사랑을  불러 노래하는 초충의 음향 같았
다. 은방울을  흔드는 듯했다. 궁녀지만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왕은  슬몃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오늘은 왜 내전에서 먹어야  하느냐?" 왕은 부리부리한 큰 눈을 다정하게  떴
다. 눈웃음을 띠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중전마마께서 오래간만에 겸상반으로  수라를 받으시려 하십니다. 통촉해주시
기 바랍니다."
  "번거롭구나. 들어갔다가 나오고 나왔다가 들어가고 -  편하게 내다 먹을 수는 
없느냐?"
  "못하실 리가 있습니까.  상감마마께오서는 하늘 아래 한 분이십니다. 곧  천자
이십니다. 어느  누가 감히 상감마마의  명령을 복종치  않겠습니까. 그러하오나, 
다만 오늘만은 왕후마마를 위하시어 내전에서 의좋게 겸상반으로 젓수셔야 합니
다." 궁녀는 한  팔을 짚고 한 손으로 무릎을  쓸며 아뢰었다. 왕은 마음 속으로 
세자의 어머니 왕후 민씨의 얼굴과 처음 대해보는 이 궁녀의 얼굴을 비교해보았
다. 민씨는 쾌활한 여자다. 손도 크고 발도 크다. 말이 여자지 반은 여자요, 반은 
남자다. 말하자면 여장부다. 시원할 때는 무척 시원하면서도 어떤 때는 어거지가 
너무 세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왕실을 엎어버릴 때 내조의 공이 많았다. 고려를 
전복할 때 큰 공이 많았을  뿐 아니라 세자 방석을 내쳐서 죽일 때도 민씨의 공
은 컸다. 오늘날 태종이 용상에 올라앉은 것은  태조으이 힘도 크지만 아내 민씨
의 공도 크다.  범과 사자 같은 동생들 사오형제를 시켜서  물샐틈없이 혁명세력
을 조성시켜 온 그  공로는 모두 다 민비한테로 돌려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 왕
위에 나가기 전에 큰며느리가  아니므로 봉제사는 아니했다 하더라도 그 ㅁ낳은 
동족을 다루고 주무르고,  인하족척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그  솜씨라든지 접빈
객을 하는데, 하윤, 조준, 이무, 이숙번 같은 일등 가는 모사와 범 같은 장수들을 
떡 주무르듯  반죽하고 버무려서, 오늘날  그들로 일등공신이 되게  하고 자기는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어준 민비다. 혁명을 성공한 그 반분의  공로는 민
비한테로 아니 돌려보낼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이씨네 집안에 대한 왕비 민씨의 
공로는 또한 크다.  여자는 출가해서 잘난 딸보다도 잘난 아들을  쑥쑥 낳아야만 
비로소 큰소리를 치는 법이다. 민씨는 큰아들 '제'를 낳았다. 둘째 아들 '보'를  낳
았다. 셋째 아들  '도'를 낳았다. 넷째 아들 '종'을 낳았다.  그리고 딸도 아들한테 
지지 않을 만큼 잘난 딸 넷을 낳았다. 
  첫째 딸은 정순공주다.  청평부원군 이백강한테로 하가시켰다. 둘째 딸은 경정
공주다. 평양부원군 조대림한테 시집갔다. 셋째  딸은 경안공주다. 길창군 권규한
테로 하가했다.  넷째 딸은 정선공주다.  의신군 남휘한테로  시집보냈다. 민씨는 
밋밋한 아들 사형제에  아름다운 따 사형제를 한 삼줄에 쭉  뽑아놓았다. 사위들
은 모두 다 일등공신이 아니면 모두 다  일등가는 공신의 아들들이다. 민비의 어
깨는 의젓하게 떡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모든 비빈과 궁녀
들을 위압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비빈과 궁녀뿐이 아니다. 그의 
앞에는 개국공신이니, 중흥공신이니 하는 공신 따위가  감히 고개를들지 못할 존
재다. 왕비라는 왕 다음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개국공신
보다, 중흥공신보다 내조의 공이 컸다. 왕비를 떼오놓고 보다라도 당당한 정실부
인으로 아들 사형제 딸  사형제의 어머니다. 그뿐 아니다. 그의 주위에는 민ㅆ의 
친정 아버지와 동생들  사오형제가 모두 다 일등가는  개국공신이요, 중흥공신이
다. 사위 네 사람도 다 일류가는  공신부원군이다. 그러나 민비는 곱지 아니했다. 
뼈가 굵었다. 나이 들었다. 지체도 높았다.  보드랍고 여낙낙한 맛은 약에 쓰려야 
구해볼 도리가 없다.  여자는 아름다와야 한다. 보드라워야 한다.  여낙낙해야 한
다. 고분고분해야 한다. 남자의 품안에 조용히  포근하게 안겨 있어야 한다. 방싯
방싯 웃어주여야 한다. 그러나 민비에게 이 모든  조건은 구하려야 구할 길이 없
다. 그뿐이 아니다. 왕비 민씨는 왕 자신보다도  한 살이 위다. 이제 사십 고비인 
왕비는 점잖고  의젓하고 틀거지가 있고 위엄성스럽지만  품안에 안아줄 애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크고 점잖은  존재다. 뿐만이 아니다. 아내 민비는 오늘날 와서
는 늙었다. 다산을 한탓인지 좌우편 살쩍엔 벌써  청하지 아니한 흰 터럭이 네다
섯 올,  서릿빛을 뿜기 시작했다. 삼십까지는  그래도 박색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이마에도 가로줄이 지기 시작했다. 뺨에도 윤기가 거칠어
져서 가슬가슬하게 되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허언이 아니다. 
  왕은 궁녀를 바라보면서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궁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아름답기만 하지 아니했다.  확실히 푸르고 싱싱했다. 아름다
운 모습을 아무리 갖추었다 하나 푸르고 싱싱한 매력이 없다면 여자의 아름다운 
가치는 상실되고  마는 법이다. 왕은  궁녀한테 푸르고 싱싱한  매력을 강렬하게 
느꼈다. 푸르고 싱싱한 매력은 이십대 여인의  예쁘고 아름다운 매력보다 장년기
에 처해  있는 남성한테 더한층 강한  감흥을 보내는 법이다. 왕은  마음 속으로 
민비와 궁녀를 대조해보면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사랑이 아니었다. 뜨거운 사
랑의 진짜 꽃이 피려면 세월을 거쳐서 개ㅗ하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왕은 사랑
을 느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격한 충동을 느꼈다. 
  "오늘 수라상의 별미는 무엇이냐?" 왕은 궁녀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궁녀는 태
종의 하문을 받자 두  볼에 빨갛게 홍조가 일어나ㅆ.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왕은  여인의 태도가 밉지 않다고 생각했다. 밉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이 들기 시작하는 조짐이다. 왕은  어글어글한 큰 눈에 엷은 웃
음을 머금고 귀여운 듯 궁녀를 바라보았다.
  "왜 말이 없느냐?" 궁녀는 여전히  고개를 다소곳 숙였다. 이마를 들지 아니했
다. 왕은 팔을 들어 어수로  고개를 숙인 궁녀의 이마를 들었다. 방싯 웃음을 머
금은 채 대답이 없는 궁녀의푸른  눈에는 상긋상긋 소리 없는 웃음이 붉은 안개
를 뿜어 일어났다. 궁녀는 푸른 눈과 붉은  입술가에 의연히 미소를 풍기면서 고
요히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느냐?" 왕은 궁녀한테  어서 대답을 하라고 분부를 내린다. 궁녀
는 보시시 고개를 들었다. 
  "두 분 마마께서 의초가 좋으시라고  콩찰떡을 올린 것입니다." 궁녀는 나직나
직 대답해ㅆ. 소리는 작았으나  음향은 맑았다. 여성 특유의 내음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 왕의 강한 육체를 자극시켰다. 
  "콩찰떡을 먹으면 의초가 좋아지느냐?"  왕은 이미 자기 자신을 억누를 수  없
는 감정에 부닥쳤다. 어수를  늘여 궁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궁녀는 어찌해
야 좋을지 몰랐다.  지존인 상감이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도  없었다. 달아날 수
도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아무리 높고 높은 상감이라 
하나 이성인 남자다. 남자한테 생전 처음  손목을 잡혔다. 부끄러웠다. 나이는 삼
십을 약간 넘었다 하나,  아직껏 남자의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숫처녀였다. 가슴
이 두근거렸다. 두 방망이로  염통 한복판을 다듬이질치는 듯했다. 죄를 범한 것 
같았다. 왕의 손길이 온 것이요, 자기 자신이  손을 내민 것은 아니건만, 난생 처
음 크나큰 죄를 범한 듯했다. 
  "대답을 해보아라." 왕은 미소를 풍기며 또 한 번 재촉했다.  궁녀의 얼굴은 더
한층 화끈 달았다. 
  "어수를 놓아조시옵소서. 대답해 올리오리다." 궁녀는 겨우 한 마디를 해서, 상
감의 손이 풀어지기를  애절하게 바랐다. 삼십을 넘은 노처녀인 궁녀는  생전 처
음 남자의 손길이  자기 손에 닿아졌을 때,  감촉과 마음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송구스럽고 불안만  했다. 도의적으로 내전에 계신 왕후마마께,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착잡한  감정 속에 빠졌다. 어서 상감께서 손을  푸렁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손만 풀어주면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고 우럭거리는 열기가 내
려갈 것만 같았다. 전하는 또 한 번 미소를 풍겨 궁녀를 바라본다. 
  "손을 잡았기로서니  그다지 두려워하느냐.  그럼 풀어줄게 대답을  해보아라." 
전하는 궁녀의 싱싱한 얼굴을 맥맥히 지키면서 손을 풀었다. 
  "이제는 대답을  하겠느냐?" 궁녀는 거뜬함을  느꼈다.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재강에 취한 듯 우럭거리는 얼굴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찰떡같이 떨어지지 마시라고 오늘 밤 사라상에는 찰떡을 특별히 올렸다  합니
다." 칠분은 부끄러움  속에 파묻고, 삼분은 안도의  감정이 소생된 채로 궁녀의 
모습은 왕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부채질해주었다.
  "너하고 나하고 찰떡같이  의가 좋아지면 어떻겠느냐?" 손에서 떠ㄴ던  와으이 
손길은 어번엔 궁녀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왕의 억세고 강한  팔뚝은 궁녀의 
가는 허리를  감은 채 몸을 안아  이웃방 협실로 들어갔다. 구중궁궐  지밀 안은 
산중같이 조용했다. 백주건만  태고처럼 적막했다. 궁녀는 천지개벽 같은 변란을 
당했다. 궁녀는 상감을 사람  이상의 신으로 숭배해왔다. 이 까닭에 신의 행동으
로 생각했다. 신을 반항할 수는 없었다. 번연히 앞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기막히
고 무서운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감히 반항하고 앙탈할 도
리가 없었다. 상감이라는 신격과 같은 지상명령에 그대로 복종할 뿐이었다. 한편 
중전에서는 수라상을 받들어놓고  왕후는 대전이 듭시기를 고대했다.  더구나 오
늘 밤의 수라는  내전에서 겸상으로 모시자는 왕후 민씨의 의도였다.  상궁 이하 
모든 궁녀들은 왕비의 뜻을 받들어 만반준비를  다 차려놓았다. 아늑하고 따뜻한 
침실에는 화려찬란한 봉황 금침이  펼쳐졌고 중전 큰방에는 사라상 위에 신선로
가 김을  뿜어 바글바글 끓었다.  민비는 대전으로 궁녀를  내보내놓고 왕전하가 
임어하시기를 고대했다. 대전에서는 영영 동정이 없었다. 한 식경이 되어도 소식
이 없었다. 두 식경이 되었건만 여전히 기별이 없다. 황후 민씨는 남자같이 성정
이 급했다. 아까,  자기 자신이 고려 때부터  궁녀로 부리던 궁인을 대전으로 내 
보낸 생각도 할 새가 없었다. 민후는 혼자  수라상 앞에 앉아서 대왕전하의 행차
가 듭시기만 기다렸다. 암만 기다려도 전하의 어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웬일이냐, 상감께서는?"
  "아직 아니 들어오십니다."
  "너희들이 너무나 무엄하고나. 어찌 여태껏 청좌를 올리지아니했느냐?"
  "궁녀가 뫼시러 나갔습니다."
  "어느 때 나갔단 말이냐?"
  "아까 중전마마께서 대전으로 청좌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고려 때부터 지밀에
서 거행하던 아이올시다." 왕후 민씨는 비로소  당신이 고려 때부터 거행했던 지
밀나인을 대전으로 보낸 일을 생각했다. 
  "웬일이냐, 여태 아니 돌아오니, 함흥차사가 되었단 말이냐." 민후는 요새 새로 
유행되는 말을 썼다. '함흥차사'란 말은  부왕되시는 시아버지께서 함흥으로 가신 
후에 자기 남편인 상감이  사신을 보내서 문안을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청하면 태조는 크게  노해서 사신의 목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이  돌아오지 못
하는 사신의 이름을 함흥차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전마마께옵서 아직 납시지  못하신다면 자기라도 먼저 돌아올 일이지 너무
나 방자합니다." 민왕후의  친정에서 대궐로 들어온 늙은  상궁은 민후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대전으로 나간 젊은 궁녀를 헐뜯었다. 왕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누구든, 대전으로 빨리 나가서 수라를 받으시라고 아뢰어라."
  "누구를 내보내오리까?  지명하여 하교를 내려주시기 바라오."  왕후의 심복인 
늙은 상궁은 재촉하는 궁녀를 내보내는 데 왕후가  친히 지명할 것을 청했다. 교
활한 늙은 상궁이었다.  상감의 품행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괴상한 일이 생긴 
듯싶었다. 앞으로 어떠한 좋지 아니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자기의 책임을 회
피하기 위하여 왕후에게 지명할 것을 요청했다. 
  "자근비를 내보내도록 하라." 자근비는 역시  민비의 친정에서 데려온 심복 궁
녀다. 자근비는 왕후의 명령을 받들고 대전으로 나갔다. 먼저 대전내관한테 물었
다. 
  "중전마마께서 몹시  기다리시는데 대전께서는 청좌를  여쭈어도 아니 듭시니 
웬일이요?"
  "아직 볼일이 계신가 봅니다." 대전내시는 뜰 앞에서 대답했다. 
  "먼저 나왔던 중전나인은 어찌 되었소?"
  "아까 청좌를 드린다고  전각으로 올랐습니다.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소."  자근
비가 전각 앞 보석을 바라보니 댓돌 위에 전하의 우단신과 궁녀의 운혜신 한 켤
례가 풍정 있게  놓여 있었다. 자근비의 입에서는 저절로 기묘한  소리가 떨어졌
다. 
  "에구머니나, 도섭스러워라."  대전내시는 자근비의  기뵤한 소리를 듣자  벙긋 
미소를 풍겼다. 
  "젊은 상궁이 내전에서 나온 지 벌써 두어 시각이 넘었는데, 여태껏 아니 나오
니 웬일이오?" 자근비는  다시 내관한테 물었다. 내시는 궁녀  자근비의 말에 아
무 대답도 아니했다. 다만 소리  없이 웃음을 풍길 뿐이었다. 대궐 안은 물을 뿌
린 듯 조용했다. 궁녀 자근비는 진퇴유곡이 되었다. 상감마마의 전각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중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막연히  자신을 잊은 
채 신발 두 켤레만 바라보고 있다.
  "어찌하면 좋소?" 궁녀  자근비는 남녀의 신을 바라보며 대전내시한테  초조하
게 물었다. 
  "무엇을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 내관은 자근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전께 어서 수라를  젓수라고 중전마마의 전갈을 받들어  나왔는데, 문을 꼭 
닫고 계시니 어찌하오. 오도가도  못하고,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말씀
을 묻는 것입니다."
  "별수없지. 전하의  동정이 계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내관은 유들유들 대답했다. 초조한 사람은 자근비뿐이었다. 
  "공사청께서 중전나인이 도다시 나왔다고 거래를 드려 주실 수는  없소?" 공사
청이란 내시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하하하, 누구 목이  달아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오. 전하의 기침소리가  나기 
전에는 꼼짝달싹할 도리가 없소이다." 내관의 말을  듣는 자근비는 더 한층 초조
했다. 중전이 기다릴 생각을 하니 몸은 마치 바늘방석을 밟고 서 있는 듯 했다. 
  "공사청게서 거래를 못드려주신다면 나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아뢰어보리까?" 
자근비는 망설였다. 
  "당신의 목은 아마 여남은 개 되나보구려. 세상 살기가 구치 않거든 한번 전각 
문을 열어보구려." 대전내관은 여전히 펄짱을 끼고 유유하게 푸른 하늘만 바라본
다. 자근비는 더욱 초조했다. 
  "중전마마께 톡톡히 꾸지람을 들어놨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꾸지람 듣는 것은 오히려 예삿일이지 뭐요. 방 속 일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당신이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가, 만약에 기막힌 일이 벌여졌다면, 그것을 
당신이 어찌 담당하고 휘갑을 칠 테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불경죄로 목이 달아
나오, 달아나. 쓸데없는 생각말고 빨리  중전으로 돌아가시오." 자근비는 하는 수 
없었다. 언제 대전 덧문이 열릴지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무료하게 발길을 돌렸
다. 중전에서 민왕후가 눈이  빠지도록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대전으
로 나간 자근비도 감감하게 소식이 없다. 민왕후는 성이 벌컥 났다. 
  "자근비도 함흥차사가 됐단  말이냐. 빨리 나가서 알아보아라." 민왕후의  노염
은 서릿발 같았다. 중전은 발끈 뒤집혀졌다. 
  "이것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메는 냉반이 되고 탕은 냉국이 되었구나.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세상  천하에 이런 법이 있느냐. 이런 변이 있느냐." 민왕
후의 거센 음성은 쩡쩡 전각 들보를 울렸다.  중전내시들은 설설 기고 상궁 이하 
무수리들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두 번째 나간  자근비란 년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라." 중전 민비의 
호령은 또 떨어졌다. 벼락은 계속해 떨어진다. 이번엔 내시를 꾸짖는다. 
  "내관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시들은 공현히 왔다갔다 좌왕우왕하면서 
바짓가랑이에 바람만 일으켰다. 왕후의 처소인 중전  안이 발끈 뒤집혀서 황황방
조할 때 대전에 나갔던 심복 궁녀 자근비가  들어섰다. 늙은 상궁은 지옥에서 고
국 사람을 만난 듯 반가왔다. 손짓해 자근비를 불렀다. 
  "에그 항아님, 어서 빨리 들어오게.  야단법석이 났네. 상감마마께서는 곧 들어
오시나?" 자근비는 근심어린 얼굴로 대답한다. 
  "들어오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뵙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뵙지를 못했다니, 대전에 아니 계시단 말인가?"
  "계시긴 계셨습니다마는 용안을 뵐 수 없었습니다."
  "왜 어디로 나가셨나?"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늙은 상궁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먼저 나갔던 궁녀하고 한 방에 문을 꼭 닫고 계십니다. 그러하니 어떻게 용안
을 뵐 수 있습니까? 도대체 용안을 뵈워야만 수라니, 무어니 하고 아뢸 텐데, 용
안은 커녕 옥체의 그림자조차 뵙지 못했으니 딱한 일이 아닙니까? 한 말씀도 올
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늙은 상궁은 깜짝 놀랐다. 
  "에구머니나, 저 일을  어찌하나. 먼저 나간 상궁은  고려 때부터 왕실 예법에 
밝다 햇 선생삼아  궁중에 두었는데, 저 일을 어찌하나. 내  그저, 얼굴이 해ㅂ그
레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더라니." 늙은 상궁은 변덕스럽게  손뼉을 치면서 펄펄 
뛴다. 
  "중전마마께서는 상감이 아니 들어오신다고 역정이 잔뜩 나신 모양이죠?"
  "역정이면 이만저만한 역정이신가?  두 번째 나간 항아님마저 아니들어온다고 
노발대발하시어 지금 항아님을  불러오라고 야단법석을 하시면서 분부를 내리셨
네. 공사청과 상궁방은 말할  것 없이 지금 망지소조해서 모두 다  벌벌 떨고 있
는판일세.'
  "어찌하면 좋습니까?"
  "무엇을 어찌해? 이실직고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자근비 항아님의 몸이 위
태로울 테니 어서 빨리 들어가서 아로도록 하게."
  "저 사람의 목숨이 아깝습니다." 자근비는 입맛이 썼다.
  "하지만 어찌하나. 자네가  살아야지." 늙은 상궁과 자근비는 가만가만  주고받
은 후에 중전 처소로 올랐다. 궁녀와 내시며  별감들은 그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
다. 늙은 상궁은 중전에 오르자 민후께 부복해 아뢴다. 
  "아뢰옵니다. 대전에 나갔던  자근비가 돌아왔습니다." 중전 민비의 역정은  더
한층 격렬했다. 
  "이제야 겨우 돌아왔단 말이냐. 대전께서는  곧 들어오신다고 분부를 내리셨다
더냐?
  "대전마마를 뵙지 못하고 그저 돌아왔다 합니다."
  "대전마마를 뵙지 못했다고?  어디로 가셨단 말이냐?" 왕후 민씨는 더욱  노했
다.
  "자근비를 빨리 불러라." 늙은 상궁은 자근비를 민후 앞에 인도했다. 
  "네가 대전으로 나간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해서 상감을 모시고 들어오지  아니
했느냐?" 자근비는 난처한 얼굴빛으로 아뢴다. 
  "아까 분부를 받자옵고  곧 대전으로 나갔습니다. 상감께  아뢰어 빨리 수라를 
젓수시라고 아뢰려  했사오나, 전하께 아뢸  기회를 갖지 못하와  여태껏 시각을 
지체했사오니 죄당만사이옵니다."
  "전하께 아뢸 기회를 갖지 못했다니 무슨 말이냐? 전하께서는 대전에 아니 계
시더란 말이냐?"
  "아니올시다. 계시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뢰지 못하였더냐?
  "전하께서는 문을 꼭 닫고 계셨습니다."
  "공사청한테 부탁해서 '중전에서 왔습니다'하고 아뢰지 못했더냐?"
  "공사청도 아뢸 두리가  없었습니다. 문을 굳게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석  댓
돌 위에는 상감마마의 우단신  한 켤레와 어느 여인인지 모르옵니다마는 여인의 
예쁜 분홍  운혜신이 의좋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쯤 되었으니  쇤네나 공사청은 
말할 나위도 없었습니다마는 저희들보다 십  배 백 배 높은 사람이라도 감히 대
전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근비의 말을 듣는 민황후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일었다.
  "분홍 운혜신은 누구의 것이라  하더냐?" 먼저 대전으로 나간 궁녀의 신인  줄 
자근비는 번연히 알건마는 '궁녀의 신이올시다'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알지 목했습니다. 알아보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먼저 나간 궁녀는 어찌 되었느냐? 지금 어디 가 있느냐?"
  '대전에 있습니다. 분홍 운혜신이  바로 먼저 모시러 갔던 그 궁녀의 신이올시
다.' 자근비는 이같이 아뢰고 싶었으나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어야 하갰다고 생각했다. 
  "총망중 아직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민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자리에
서 일어났다. 이제는 수라상이  문제가 아니다. 음식이 식고 찬 것쯤은 이야깃거
리도 되지 않는다. 수라상보다도 더 큰 생활의 문제가 불을 질러 일어났다. 
  "자비를 놓아라." 민후의 음향은 장중했다. 남자 이상으로 묵직했다. 
  "지비를 놓랍신다." 늙은 상궁은 앵무새모양 큰 소리로  외쳤다. 젊은 궁녀들이 
일제히 내관한테 전령을 내린다. 
  "자비를 놓랍신다." 무예청들은 황망히 자비를 누마루 끝에 등대했다. 
  "가자. 앞서라." 왕후는 자근비에게  명령을 내렸다. 민왕후의 옥교는 쏜살같이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내시는 발발 떨며 왕후의  옥교를 맞아들였다. 대전 속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뜰 앞에 서  있는 울창한 나뭇가지에 새소리만 한가
롭게 들릴 뿐이었다. 
  "대전마마 계시냐?" 민왕후는  자근비의 부축을 받고 욕교에서 내리자  대전내
시에게 물었다. 
  "예, 계시옵니다."
  "혼자 계시냐?"
  "아까 중전에서 나온 궁인이 아직 물러가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느냐?"
  "든 일이 없사옵니다." 민왕후는 전각 만전창문 앞에 우뚝 섰다.  댓돌 디딘 보
속을 굽어보았다. 기막히지 아니한가.  전하의 검은 우단신 한 켤레와 절미한 여
자의 분홍신이 의좋게 나란히 놓여 있었다. 민왕후의  눈에는 금방 불이 활활 붙
었다. 대뜸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자근비는  부들부들 떨
면서 감히 더 오라가지  못했다. 대전내시며, 옥교를 멘 무예별감들도 하회가 어
찌 될 것인가 하고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  섰다. 민왕후는 지게문을 벼락같이 열
어젖혔다. 대전 온돌방은 텅 비었다. 아무도  없다. 보료 장침에 문갑, 연상, 사방
탁자, 청자, 백자,  필통, 연적, 필세 등  문방사우들이 벌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방 안에는  사람의 살내음이 스며들었다. 남자와  여자의 냄새다. 누리한 냄새와 
향긋한 분내음이 은은히 떠돌았다. 누리한 냄새는 남자의 냄새다. 전하의 살내음
이 분명했다. 민왕후가 반평생 동안 상상 맡아보던 그 냄새다. 또 하나의 내음은 
지분의 향취다. 젊은  여인의 내음이 분명했다. 민왕후의  눈에는 또 한 번 불이 
활활 달았다. 쏜살같이 벽장 옆에 붙어 있는 협실문으로 향했다. 새로 지은 창ㄱ
덕궁을 구경할 때 쓸데없는 방을 겹겹이 만들었다고 뜨악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문이었다. 민후는 아무  연통도 없이 협실문을 열어젖혔다. 민후는  기가 막혔다. 
눈앞에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전하의 편으로  본다면 기막히도록 
좋은 향락이지만 민후의 감정으로  본다면 기막힌 불의의 추잡한 행동으로 보였
다. 민후의 눈에는  세 번째 불이 붙었다. 잡담 제하고  뛰어들었다. 전하와 궁녀
는 소스라쳐 놀랐다. 
  "수라를 젓수라 했더니  이것이 수라입니까?" 민후는 전하를 향하여  벽력같이 
소리쳤다. 민후는 왕후의 막중한 자리에 있었으나, 야성이 넘치는 괄괄한 성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왕후라는 존엄한 체통을 잊은 채, 여장부의 솜씨가 그대로 폭
발되었다. 전하도 폐하도 안중에 없었다. 
  "이따위 짓을 하시려고 임금의 자리를 뺏으셨소. 계집이란 계집을 모조리 훑어 
자시려고 임금 노릇을 했단  말씀요." 민후는 눈을 딱 부릅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전하의 용안을 흘겼다.  전하는 면난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의복을 매만지고 벗어논 감투와 갓을 썼다. 
  "꼴 좋소!" 민후는 또 한  번 전하의 용안을 흘기며 큰 소리로 외쳤다. 민후의 
분노는 절정에 올랐다. 일부러 여러 사람이 들어보라고 떠들어댔다. 한바탕 화살
을 전하한테로 퍼붓던  민후는 핏발이 벌겋게 돋은 눈을 궁인한테로  돌렸다. 엄
파 같은 손길이 궁인의 뺨으로 떨어졌다. 
  "이년, 너보고 수라 청좌를 여쭈라고 보냈지, 구미호 짓을 하라고  어전에 보냈
더냐?" 궁인의 눈에서는 번갯불이  번쩍 일었다. 볼이 몹시 아팠다. 자기는 아무 
죄도 없건만 태산 같은 큰 죄를 졌다고 생각했다.  민후의 손뼉은 한 번 더 왼편 
뺨으로 '철썩'하고 떨어졌다. 
  "이년아, 이년아. 왜  벙어리가 되었느냐. 왜 대답이 없느냐." 왕후마마의  떠들
어대는 큰 고함  소리에 대전궁녀들이 모여들었다. 복도와  마루청에서 기웃거릴 
뿐, 감히 정전  협실로들어가지 못했다. 민후는 궁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지
르르 끌었다. 
  "이거, 왜 이러오. 이쳤소?" 전하는 차마 그대로 볼 수 없었다. 위엄이 있는 얼
굴로 민후를 꾸짖었다. 체통 잃은 꾸지람은 더한층 체모를 잃을 뿐, 성검이 서지 
못한다. 
  "잘 말씀하십니다.  제가 미쳤다고요? 정말 색에  미친 양반이 따로  있으면서, 
뻔뻔스럽게 날 복  미쳤다고 하십니까?" 민후는 다시  전하를 흘겨본 후에 버썩 
궁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궁인의 머리채는 산발이 되어  풀어지면서 문지방 
밖으로 끌려나갔다. 아무런 죄도  없는 궁인이었다. 강제로 몸을 짓밟힌 한 떨기 
희생화다. 왕후는 자기 자신을 구미호라고 욕해서  꾸짖었지만 자기의 깨끗한 속
마음을 버선 속 뒤집어 뵈듯  뵐 수가 없다. 그대로 슬픔이 폭발했다. 목을 놓아 
울면서 끌려나왔다. 뜰 아래는 내관과 무예청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전상을 지켜
본다. 때마침 일은 공교롭고  창피하게 되었다. 복새를 떠는 통에 밤은 어둑어둑 
컴컴했다. 등촉방  내시들은 소란통에 전각과  행각이며 처마 끝에  등롱을 달아 
불을 켜서 돌아다녔고, 동궁은 춘방사령과 내관을  앞세우고 대전에 문안을 드리
러 들어왔다.  중전에 기별해보니 다 대전에  계시다는 소식을 득고  동궁 '제'는 
대전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동궁 문안 듭시오." 춘방내시는  합문 안으로 들어오자 큰 소리로 외쳤다.  뒤
미처 소년 동궁은 초립 쓰고 남전복을 입고  합문 안에 나타났다. 연둣빛 태사신
을 신고 가볍게 발을 옮겨 들어섰다. 대전내관은 어찌해야 좋을 지 몰랐다. 큰일
이었다. 대전과 중전의  향기롭지 못한 싸움을 소년 동궁한테 보게  해서는 아니
될 텐데,  동궁이 문턱까지 들어왔으니 큰일이었다.  보통 종척이나 대신들 같으
면, 사후청에서 기다리라 하겠지만, 저녁 문안 들어온 동궁을 무엄하게 사후청에 
기다리라 할 수가 없었다. 대전내시는 황급했다. 
  "동궁 문안 듭시오." 하고 들어오는 춘방내관을 향하여 급히 손을 흔들어 저었
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궁의  발길은 벌써 합문 안 정전 뜰에 들어섰다. 동궁 
'제'는 소명했다. 발길을 합문  안에 들여놓았을 때, 대전 안의 공기가 이상한 것
을 느꼈다. 내관과 궁녀들은 우둥우둥 뜰 아래 몰려섰는데, 얼굴빛이 모두 다 야
릇하도록 흥분되었다. 딱딱하도록 긴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황급했다. 그
뿐만 아니다.  늙은 내시는 차마 말을  못하고 동궁 소속인 내관을  향하여 급히 
손사래를 쳐서 들어오지 말라는  뜻을 표했다. 동궁 '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왕이 계신 정전을  바라본다. 등촉방 내시가 금방 불을 켜논  전각 처마 끝
에는 청사초롱이 은은히 불빛을 던졌다. 동궁의  시야에 초롱불이 흔들거리며 댓
돌을 비췄다. 검정 우단신  한 켤레와 분홍신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
고 따로 떨어져 있는 왼편  댓돌에는 눈익은 아마마마의 남빛 운혜신이 놓여 있
었다. 분홍신은  누구의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동궁은  까닭을 모르고 두어 걸음 
앞으로 옮겼을 때 별안간 대전  안에서는 비단을 찢는 듯한 강강한 목소리가 들
렸다. 어마마마의 화난 목소리다. 
  "제가 미쳤다고요? 정말 색에 미친  양반이 따로 있으면서, 뻔뻔스럽게 날보고 
미쳤다고 하십니까?" 용이치  아니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동궁 '제'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주춤  걸음을 멈추고 있을 때 대전내시가 허리를  굽실하고 앞으
로 나타났다. 
  "웬일이냐?" 동궁 '제'는 나직이 물었다. 
  "대전마마와 중전마마께옵서 약간 불쾌하신 모양입니다.  저녁 문안은 조금 뒤
에 드리는 것이 좋을까 아뢰옵니다." 이때 내관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내
전 장지문이 '우당탕'하는 큰 음향을 내면서  지게문이 활짝 열렸다. 중전의 엄파 
같은 손은 가냘픈 궁녀의 머리채를 끌어 청마루  끝까지 나왔다. 곱고 맵자한 자
태를 가진 궁녀다. 그러나 끌려나오는 바람에  머리채는 갈기갈기 찢어져 산발이 
되었다. 좌우 옆 뺨은  부풀어올라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마루청까지 궁녀를 끌
고 나온 어마마마는 큰 소리로 제조상궁을 불렀다. 
  "제조상궁 게 있느냐?" 별력같은 큰  소리로 외쳤다. 뜰에 섰던 제조상궁이 벌
벌 떨며 댓돌 앞에 손을 모았다. 
  "네 이년을 잡아내려 육시청참시켜라!" 어마마마는 눈에 불이 활활 달았다. 아
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동궁 '제' 자신이 뜰에 섰건만  보이지 않는 모양
이다. 뒤미처 아바마마가  쫓아나왔다. 의괸이 비뚤어졌다. 거울도 볼  툼이 없었
던 모양이다. 창의 앞섶이 흐트러졌다. 띠도  띠지 못했다. 어마마마의 외치는 호
령 소리에 이어  아바마마의 옥음이 떨어졌다. 옥음이라기에는  너무나 과분하다
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아니다. 질자배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다.  임금의 음성을 
'옥음'이라고 책에 씌어 있으니 '제'는  그대로 옥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떻
든 질자배기 깨지는 듯한 옥음이 떨어졌다. 
  "왕후마마의 말씀을  들어서는 아니된다. 궁인은  아무 죄도 없다. 육시처참을 
해서는 아니된다. 살려라! 네가 잘 맡아서  궁인의 몸을 보호해두어라." 어마마마
는 죽이라고 하고 아바마마는 살려두라 했다. 궁녀들은 벌벌 떨고만 섰다. 
  "이년, 내 말대로 해야 한다! 저년을 죽이지 아니하면 네 목도 성치 못하리라." 
어마마마는 말씀을 마치자 발을 '탕'굴렀다. 
  "아니다. 죽여서는  아니된다. 어명이다. 네가  잘 보호해두어라." 일이  급하니 
상감은 자칭 어명이라  부르짖었다. 아바마마는 어마마마와 경쟁을 해서 외쳤다. 
임금이 되고 왕후가 되었건만 아직도  야인의 습성이 남아 있는 왕과 왕비의 싸
움은 장관이었다. 어마마마는 눈을 딱 부릅떴다. 부왕을 바라본다. 
  "체통을 좀  차리시오, 체통을 -. 어명이  무슨 어명이오. 색  좋아하는 어명은 
어명이 될 수  없소. 빨리 처치해라! 더구나 그년은 고려왕조의  궁인이다." 어마
마마는 고려왕조의 궁인이란 말을 덧붙였다. 고려의  옛 신하와 고려왕궁의 소속
으로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결딴이 나는 판국이었다.  이용해 써먹을 것을 다 써
먹은 후에는 그대로 처치해버리는 것이 이때의  불문율이었다. 민비는 어명을 꺾
기 위하여 구려 때 궁인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어명을 꺾어버리고 궁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머리 풀어 산발한 궁인은 애절하게 울었다.
  "소인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수라를 젓수라고 중전마마의 명을 받들어 전하께 
아뢴 죄밖에 없습니다.  대전마마께서 얼른 돌려보내주지 아니하시어  이 지경이 
된 조밖에 없습니다.  청천하늘이 굽어보십니다. 한평생을 깨끗이 지내온 처녀의 
몸을 버린 일밖에 없습니다." 궁녀는 처량하게 목을 놓아 울었다. 구슬프게 하소
연하는 젊은 궁녀의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간장을 녹여줄 듯했다.  내관을 위
시하여 모든 궁녀들은  비로소 까닭을 짐작하게 되었다.  세자'제'도 비로소 까닭
을 알았다. 제조상궁은  아직도 어찌할 줄 몰랐다.  궁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
다. 상감은 '살려주라'하고 왕후는  '처참을 하라'하니, 어느 편 명령을 들어야  할
지 손을 댈 길이 막연했다.
  "어서, 끌어내지 못하느냐?"  민후의 분노한 큰 목소리가 또 떨어졌다.  이때였
다. 세자'제'는 섬돌을 딛고 청마루로 올라섰다. 분노에 떠는 왕후와 흩어진 의대
가 바르지 못한 대왕의 눈에 동궁 '제'의 청으로 오르는 모습이 비쳤다. 
  '제'는 두 손길을 마주잡고 조용히 아뢴다. 
  "소자 '제'는 저녁 문안을 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온돌로 듭시어 문안을 받으시
기 바라오." 두  내외는 비로소 창피하고 어색함을 느꼈다.  더구나, 소년 세자였
다. 더한층 창피함을  느꼈다. 억세고 줄기차고 기운센 부왕도  창피함을 느꼈다. 
콧대가 세고 남자를  능가하는 왈각달각한 성격을 가진 민후도 기가  꺾였다. 왕
과 왕비는 세자가 하자는 대로 온돌로 걸음을  옮기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자의 
문안을 아니 받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온돌 안으로 들어간  세자는 두 분 
보모께 문안 절을 올렸다.  문안 절을 받고도 창피해서 서로들 입을  봉한 채 아
무 말도 못했다. 세자 '제'는 조용히 말씀을 아뢴다. 
  "두 분 마마께옵서 오늘 매우 불쾌하신 듯하옵니다. 그러하오나 불초한 소자는 
감히 아뢰옵니다.  두 분께옵서는 한 사람의  사삿사람이 아니십니다. 한 나라의 
국부요, 국모십니다. 체통에 어긋됨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부왕과 왕비는 대답
할 말이 막혔다. 보통 왕자 같으면 어린  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눌러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세자다. 세자의 말을  단번에 눌러서 꺾어  버릴수는 없었다. 
더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자의  말대로 너무나 임금과 왕후의 점잖은 체통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고 변명할  도리는 없었다. 그들은 창피하고 
부그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세자의 총명하고  숙성한 말에 마음 속으로 제각기 감
탄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뿐이 아니었다.  든든하고 대견한  생각까지 들었다. 
상감과 왕후는 코가 맥맥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세자 '제'는 다시 고
개를 들어 아뢴다. 
  "불초한 소자, 황송하오나  감히 두 분 마마께  아뢰옵니다. 지금 합문 안으로 
들어오다가 잠깐  보니 궁녀 한 명이  어마마마께 큰 죄를 진  듯합니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는 용서하라 하시는  듯합니다. 한 분은 죽이라 하시고 한  분은 살
리라 하시니,  일심동체이신 두 분 마마께서는  건도와 곤도를 어기신 듯합니다. 
소자느 ㄴ글도 읽었습니다마는  하늘과 땅의 협화가 없이  그 집안이 화합할 수 
없습니다. 그 집안이 화합하지 못하면, 그 집안이 흥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라
가 불안하다 했습니다. 더구나, 두 분  마마께서는 백성들의 부모십니다. 이 영향
이 치국평천하에 미치는  것을 생각해보시옵소서." 못을 박는  세자의 똑똑한 말
에, 부왕과 모후는  더한층 코가 맥맥했다. 잠자코 아무 말도  내리지 못한다. 세
자는 또 아뢴다. 
  "지금 제조상궁은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어느  분의 하교를 받들어야 좋을지 떨
고 섰습니다. 비빈 이하 상궁과 궁인을  통솔하시는 일은 어마마마의 권한이십니
다. 백관을 통솔하시는 것은  아바마마의 특권이 십니다. 명령이 두 갈래로 났으
니, 황송하오나 제조상궁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춥니까? 깊이 통촉하시기  바라오." 
경위에 꼭꼭 닿는 세자의 말에 전하와 왕후는  또다시 말이 막혔다. 변명할 도리
도 없 아들 앞에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얼마쯤 성미들이 누그러졌다. 양심들이 
유연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자 '제'는 또다시 아뢴다.
  "황송하오나 궁녀를 춘방으로 넘겨주시옵소서. 소자가 불초하오나 적당히 치죄
하겠습니다. 그러하와야 두 분의 위신이 서시옵니다."
  '제'의 제의에 왕고 왕후는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좋다." 왕은 겨우 한  마디를 내렸다. '좋다' 하고 대답하는 왕의  말씀에 왕후
는 반대할 수 없었다. 
  "어마마마도 춘방에 맡기옵소서."
  "맘대로 해라." 세자는  모후의 승낙마저 받았다. 세자는  곧 대청으로 나갔다. 
제조 상궁에게 분를 내린다.
  "이 궁인을 춘방으로 옮기게  하라. 춘방에서 죄를 다스릴 것이다." 상궁이  명
을 받았다. 세자는 다시 춘방내시를 불렀다. 
  "듣거라. 제조상궁한테 죄인을  넘겨받아서 춘방에 대령해 있게 하라. 모든  일
을 내가 조처하리라." 
  "삼가 의지를 받들겠습니다." 춘방내시는 세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제조상궁은 
고려 때  궁인을 춘방내시한테 인도하고 춘방내시는  궁인을 보호하여 춘방으로 
나왔다. 세자는 연소했으나 침착했다.  이날 밤에 세자는 고래 때 궁인을 춘방으
로 불렀다. 춘방 소속의  나인들은 고려의 궁인을 동정했다. 찢어진 의복을 새옷
으로 갈아입히고 흩어진  머리를 가다듬게 한 후에 세자의 처소로  인도했다. 세
자는 좌우릴 물리치고 조용히 묻는다. 
  "너는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전마마의 크나큰 노여움을 샀느냐?"  고려 궁인
은 마음 속으로 세자한테 감사함을 느꼈다.  더구나 세자는 순결무구한 소년이었
다. 진심으로 자기를 구해준 은혜를 뼛속까지 느꼈다. 
  "세자 아기씨께 아뢰오. 소인의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는 백골이 진토가 될지라
도 어찌 다 갚사오리까. 그러하옵고 명철하신 세자  아기씨 앞에 쇤네가 어찌 속
여 말씀하오리까. 소인은  추호도 범한 죄과가 없사옵니다." 세자는 단정한  눈으
로 궁녀의 얼굴을 지켰다. 
  "그렇다면 어마마마께옵서 어찌 그리 노하셨더냐?"
  "중전마마께서는 쇤네를 그릇 곡해하셨습니다."
  "어찌 된 일이었느냐?" 세자의 음성은 엄숙했다. 
  "쇤네는 중전마마의 명령으로 대전에 나가 전하께 수라를 젓수시라 전갈  말씀
을 아뢰었습니다. 이 일이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해서 죄가 되었느냐?"
  "상감께서는 빨리 중전으로 듭시지  아니하시고 소인을 희롱하셨습니다." 세자
는 묵묵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 고려 궁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인은 몸을 피하려  무한 애를 썼으나, 전하께서  위력으로 억누르시는 일에 
꼼짝 도리 없이 전하의 뜻에 복종할  다름이었습니다." 고려 궁인은 억울한 회포
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세자는 또렷
한 눈을 들어 고려 궁인의 태도와 말을 살폈다.  거짓 꾸며서 하는 말이 아닌 것
을 알았다. 울연히 동정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사색을 드
러내지 아니했다. 
  "여자는 아름답다 하나, 구미호  같아서 요망한 성격으로 남자를 고혹시킨다더
라. 대전께서 희롱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대전을 고혹시킨 것이 아니냐." 세자는 
또렷이 궁녀를 꾸짖어 보았다. 
  "제 어찌 쇤네의 몸을 살려주신 세자 아기씨 앞에 추호인들 거짓 말씀을 아뢰
오리까. 쇤네는 고려 때부터  궁중 소속으로 있던 나인이 올시다. 중전마마의 천
은이 앙극하시와  여태껏 궁중에 몸을  기탁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몸으로 어찌 
중전마마를 저버리고, 대전마마를 고혹했사오리까. 명철하신 세자께서는 깊이 통
찰해주시기 바라오." 고려 궁인은 또  한 번 느껴 울었다.  고려 떼부터 궁 소속
으로 있었단 말에 세자의 귀는 번쩍 띄었다.  고려의 왕족과 고려의 충신이며 고
려 때 궁속들은 모조리 바다에  넣지 아니했으면 불 속에 태워 죽였다는 이야기
를 귀가 젖도록 들은 세자  '제'다. 새삼 귀가 번쩍 띄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자
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네가 고려 때부터 있던 궁인이냐?" 고려 궁인은 나직이 대답하였다. 
  "예, 그러하옵니다." 솔직한 소년 세자였다. 꾸밈 없이 물었다. 
  "네, 어찌 죽지 않고 궁중에 붙어 있었더냐?" "왕은이 감격하다 아뢰지 아니했
습니까. 더구나 중전마마의 은혜가 태산같이 크십니다. 궁중의 예절과 풍속을 안
다 하와 새  왕조의 나인들이 두 분 전하께 아뢰옵고  목숨을 부지해주셨나이다. 
이 점으로 보아도 쇤네는 백골난망이온데, 쇤네가  어찌 중전마마를 저버리고 대
전마마께 구미호의 짓을  하였사오리까? 싶이 통촉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세자
는 비로소 궁녀의 모든 언행이 속여서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았다. 
  "진정, 네가 고려의 궁인이란  말이냐?" "예, 그러하오이다. 중전마마를 위시하
여 온 궁중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세자는 다시 캐어 묻는다. 
  "어느 때 너는 궁인으로 들어왔더냐?" 세자의 얼굴엔 위엄기가 있었다. 
  "태상왕 전하 때부터 새양머리한 궁녀로 목숨을 부지하와 오늘날까지 내리  있
었습니다. 어느 때가  죽을 날이온지 쇤네 스스로도 죽을 때를  기약하지 못합니
다마는 노늘날  대전마마를 고혹시킨 선수가 쇤네라  한다면 죽사와도 억을하여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고려 궁인은 말을 마치자 이번엔 길게 한숨을 지었다. 
처량한 정경이었다. 세자는 어렴풋  모든 정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려 궁인을 
향하여 다시 물었다.
  "중전께서는 수라를 받으시고 대전께서 들어오시지 아니하시니 참다못하여  대
전으로 납신 것이로구나." "예, 그러하옵니다. 쇤네를 시키시어 빨리 대전으로 듭
시라고 전갈을 하셨으나, 대전께옵서는 여러 가지로  하문이 계시고 소인을 돌려
보내지 아니하시니, 궁금하시와  친히 납신 듯합니다. 그리하옵시고 향기롭지 못
한 일 목도해 보신 중전마마께옵서 분ㄴ조하신  건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그러하
오나 쇤네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대전마마의 무서우신  권력 앞에, 한 점 티가 
없던 깨끗한  처녀의 몸이 기왓장이  되어 깨어진 것뿐이옵니다. 억울하오이다." 
고려 궁인은 소리를 죽여  느껴 운다. 측은한 생각이 세자의 마음을 휩싸안았다. 
세자는 모든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소리 높여 동궁 궁녀를 불렀다. 
  "협실에 누구 있느냐?" "네-." 하는  긴 대답 소리와 함께 동궁의 늙은 상궁이 
나타났다. 
  "중전궁인을 네가 잠시  맡아서 보호하라. 디시 부를 때까지."  "분부대로 거행
하겠습니다." 동궁 상궁은 고려 궁인을 거느려 세자 앞에서 물러났다. 이날 밤에 
세자는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단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날이 밝은 후에 
세자는 중전으로  문안을 드리러 갔다.  동궁 소속의 내관들은  중전보다 대전에 
문호를 드리는 것이 원칙이라 아뢰었다. 
  "동궁마마께 아룁니다. 대전에 먼저 문안을  드리시고 중전으로 향하시는 것이 
전례올시다." "나도 알고 있다. 더  말하지 말라." 세자는 벌써 스스로 주견이 서 
있었던 것이다. 동궁내관들은 다시  더 대꾸할 길이 없었다. 세자는 중전으로 들
어서자 상궁과 둥녀의 반가운 웃음을 받으며 중전실로 향했다. 중전 역시 지난

밤에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직도 악몽의  장면이 눈앞
에 선했다. 이때 중전상궁은 세자의 문안 들어온 것을 아뢰었다. 
  "동궁마마께서 문안차 들어오셨습니다." 중전은  세자가 들어왔다는 말에 새로
운 정신이 들었다. 
  "어서 들라 해라." 이윽고 세자는 중전상궁한테 인도되어  중전 민씨께 뵈었다. 
세자는 일부러 얼굴에  화색을 가득히 띠었다. 중전도 사랑하는 세자의  웃는 얼
굴을 대하자 마음이 적이 화창했다. 
  "앉거라." 세자는 아직  장가 전이었다. 빈을 맞이하지  아니했다. 이런 까닭에 
어마마마는 해라를 했다. 
  "어마마마, 침수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할  수가 있느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과 몸이 다  함께 피곤했으니, 눈도 붉었을 거야."  민후의 얼굴은 거칠었다. 
머리는 흐트러졌다.  그러나 눈은 붉지 아니했다.  여장부인 민후건만 시앗을 본 
그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이 온몸을 휩싸안았다. 
  "과히 붉지 아니합니다.  그저 약건 어떤 듯합니다. 마음을 지ㄴㅇ하시면  관계
치 않을 듯합니다.  전의를 불러 문후케 하오리까?" 세자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
안케 히드릴 방법을 알았다. '전의를 불러 문후케 하오리까/  하고 다정하게 묻는 
한 다미 달은 모후의  마음을 무한 기쁘게 했다. 한제 약을  달여 먹는 것보다도 
당장 효험이 있었다. 
  "화기로 난 병을 약 가지고 되겠느냐. 몸에서  우라난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
지만, 마음 속에서 생겨난  병은 마음으로 고쳐야 한다. 전의를 부른대야 소용이 
없다." 민후의 마음은 아까보다 훨씬 풀어졌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참말로 지당하십니다. 밖에서  침노해 들어온 병이 아니라
면 마음으로 다스리시면  됩니다. 마음은 사람의 정신을 좌우할 수  있는 추도리
올시다. 어마마마, 거울을 보시옵소서. 붉으셨던 안정이 한결 맑아지셨습니다. 마
음이란 과연 정신을  좌우하는 것이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곧 지밀상궁을 
불렀다. 
  "거기 누구 있느냐? 가까이 오너라." 지밀상궁이 나타났다.
  "거울을 올려라." 지밀상궁은  세자의 분부대로 경대를 받들어 들여왔다.  세자
는 손수 경대를 받아 들고 모후 앞에 비췄다.  세자는 경대를 든 채 조용히 아뢴
다. 
  "어마마마, 보시옵소서. 눈의 붉은 기운이  금방 가시었습니다. 그저 마음이 제
일이올시다. 마음을  편안케 하시옵소서. 어마마마의 몸은  천금옥체십니다. 그저 
마음을 편안케 하시옵소서.  그리하시옵고 간밤에 못주무셨으니 낮에  침수해 드
시옵소서. 한결 정신이  쾌락하실 것입니다." 민후는 세자가 비춰주는 거울을  바
라보니 붉다고  생각했던 눈에는 한 점  붉은 기가 없다. 민후의  마음은 더한층 
명랑했다. 민후는 아까까지 눈이  붉은 줄아 알았는데, 이제 아들 세자가 비춰주
는 거울을 바라보니 붉었다고 생각했던 눈은 씻은 듯 운권청천이 되었다. 
  "세자의 말이 참으로 옳구나. 너의 효성에 내 마음이 가라앉는 듯 하더니 이내 
눈이 씻은 듯 맑아졌구나." 민후는 세자를 더한층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
으로 효자 아들로 세자를 삼은 것을 무한  기쁘게 생각했다. 민후는 한편으로 어
제 세자가 동궁으로  데리고 나갔던 고려 궁인의  처치가 어찌 되었는지 하회가 
궁금했다. 그러나 세자에게 궁녀의  일을 먼저 묻기는 면난했다. 잠깐 입을 다물
고 여기 대하여 세자의 말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세자는 고려 궁녀에 대하
여 한 마디 보고의 말이  없었다. 이때, 중전 뜰 앞에서 내관과 궁녀들이 수군거
리는 대화소리가 들리면서 지밀나인이 들어와 세자께 고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하께서는 대전에 아직 문안을  드리지 아니하셨습니
까?"
  "왜 그러느냐?"
  "대전에서 별감이 들어왔사옵니다. 문안을 올리실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세자
저하께옵서 듭시지 않는다고 물어보라 하시어 동궁서부터 이곳까지 들렀다 합니
다." 세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간밤에 어마마마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상하셨다. 곧 병환이 나실 듯 생각되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당 대전마마께 문후를 먼저 올리고  중전에 문안을 
드리는 것이 도리에 온당한 노릇이나 오늘만은 불편하신 중전에 먼저 들어 문후
를 올린 것이다. 대전마마께는  곧 나가서 문안을 드릴 예정이다. 혹시나 하문이 
계시거든 이 뜻을 전달해 아뢰어라." 조리정연한 세자의 말에 어마마마는 더한층 
크게 세자의 정을 느꼈다. 
  '진실로 세자는  효자로구나'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 뿌듯하게  일어났다. 뿐만 
아니었다. 대전부다  자기한테 문안을 먼저 들어온  일을 비로소 알았다. 궁녀가 
세자의 전갈을 받들어 문 밖으로  나간 후에 민후는 세자한테 미소를 던져 묻는
다. 
  "대전에 들르지 아니하고 나한테 먼저 들렀더냐?" 민후의 음성은  더한층 은은
했다. 
  "예, 그렇습니다." 
  "문안 전례가 있다. 대전에 먼저 들렀더면 좋았을 것을-." 민후는 그래도 대전
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정은 최후에 가서는  이같이 어찌할 수 없는 모양
이다. 세자는 모흐의 심경을 짐작했다. 무릎을 고쳐 꿇고 차근히 아뢴다. 
  "제 어찌 예절을 모르리까마는 , 간밤의 형세로 미루어보아 대전께옵서는 별일
이 없으시고, 어마마마께서는  옥체 불편하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하와 
중전에 먼저 문안을 드린 후에 대전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병환이 납실 듯한 급
한 분을 제쳐놓고  아무 탈이 없으신 분께  '침수 안녕하시냐'고 묻는 일은 일종 
혀례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허례가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소자는 그같은 
가면을 쓴 허례는 배격하고 취하지 아니하려 합니다." 세자가 어마마마께 아뢰는 
말씀은 정정당당했다.  소위 학문이 깊고  아름 높다는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말이다. 민후는  자기 아들이건만 숙성하고  판단이 빠른 세자의  언행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했다. 세자는 말씀을 계속했다. 
  "다행히 어마마마께서는 소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심려 아니 계시오니  이
런 좋을데가 없습니다.  그저 아마마마께 아뢰옵니다. 어마마마께옵서는 보통 여
인이 아니십니다. 만백성을 거느리시는 국모십니다. 옥체와 마음을 다 함께 푸른 
하늘모양 넓고 크게 가지시어 화힌  기분과 아름다운 덕으로 이 세상을 밝혀 주
시고 이 나라를 명랑하게 해주시옵소서." 
  "너, 세자는 과연 나의 스승이로구나." 어마마마는 비로소  감격한 뜻을 세자한
테 털어 말했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감격한 말이 떨어지지 비로소  궁인에 대한 
말을 아뢰기 시작했다. 
  "어제 동궁에서 소자는  무축 궁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 궁인을 죽여버리려 
했습니다." 세자는 '죽여버린다'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분정지두에 죽여버리라고 말을 했지만 어찌 차마 죽여 버릴 수야 있느냐." 민
후의 감정은 세자의 능소능대한 화술에 넘어가서 절정에 올랐던 감정이 슬몃 풀
어지기 시작했다. 
  "소자는 꼭 죽이려 했습니다. '구미호 같은 년'이라고 호통까지  쳤습니다. 그러
나 다시 한  번 궁녀의 말을 들어보니 궁녀는  절대로 선손을 건 것이 아니올시
다. 궁녀는 고려 때부터 궁중에 있던  여인으로 어마마마께서 죽이지 아니하시고 
여태껏 길러주신 큰 은혜를 결초보은한다 합니다." 세자의 지성스럽게 아뢰는 말
에 민후는 귀를 기울여 듣는다. 
  "궁녀는 힘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위엄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제왕의 권위  앞에 
헌헌장부들도 모두 다 무릎을 굻는 이 판국에 일개 가냘픈 망국 여인으로 새 나
라 상감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마마마, 그리하와 소
자는 차마 궁녀 목을 베지 못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어마마마께서 지금이라도 궁
녀의 목을 베라 하시면 독 목을 베도록 하겠습니다." 
  "그만두어라. 인명이 불쌍하다." 민후는 결국 세자한테 지고  말았다. '지금이라
도 죽이시라면 죽이겠다'는  세자의 농소능대한 말에 어머니  민씨는 넘어가버리
고 말았다. 세자는 비로소 마음이 후련했다. 
  "어마마마께옵서 이같이 큰 은덕을 내리신다 하오면 궁인은 두 번  재생지은을 
느껴서 기막힌 충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궁인은 춘방상궁에게 부탁하여 기르
기로 하겠습니다." 
  "나의 면목을 보아서 세자궁에서 잠시  맡아두는 것이 좋겠다." 민후는 담담하
게 허락을 내렸다. 
  "그러하오면, 어마마마의 너그러운 의지를 받들어 구려 궁인을 소자가 있는 춘
방에 잠시 거두어 두겠습니다." 세자는 더  한 번 어마마마의 너그러운 덕이라고 
칭송히새 말씀을 올렸다.  세자의 말씀을 듣는 민후는  더 한 번 화헤게 풀렸다. 
고개를 끄덕여믿음직스럽게 큰아들을 바라본다. 
  "소자는 아직  대전에 문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어서 가보아라." 어마마마는  마음 속으로 큰아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세
자 '제'는 내전에서  물러나와 부왕이 계신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내시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세자를 어전에 인도했다.  태종은 간밤 일을  생각하니 아들을 
대해보기가 극히 면난했다. 처음에  화끈하고 볼이 달았다. 그러나 슬기 있고 배
짱이 두둑한 태종이었다. 시치미 떼고 들어오는 세자를 엄숙히 바라본다. 세자는 
아버지 앞에 공손하게 문안 절을 올렸다. 
  "침수 안녕하셨습니까?" 태종은 마음이 불편해서 단잠을 이루지  못했으면서도 
용포 소매 속에 손을 놓고 의젓이 대답한다. 
  "세자도 잘 잤느냐. 과인은  별일 없이 온속을 했느니라." 태종은 일부러  의젓
을 빼느라고 우리말로 '잘잤느니라'  하고 대답해도 좋을 것을 일부러 문자를 써
서 '온숙'이라고 대답했다. 세자  '제'는 잠깐 눈을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
젯밤처럼 의복이 흩어지고 의관이 비뚤어진 아버지는  아니었다. 익선관도 다 반
듯하게 썼다. 훤하게 잘생긴  용안에 제법 위엄기도 있어 보었다. 아버지의 말씀
과 행동거지는 어젯밤  궁녀 한 명을 가운데  두고 어마마마와 떠들어대고 다투
던, 그 볼썽사나운 추태를  부리던 그 모습은 아니었다. 의젓하고 점잖고 위엄기 
있어 보였다. 그러나 모두 다 진실성을  잃은 가면이었다. 진정한 발가벗은 사람, 
참 인간인 아버지는  아니었다. 추잡한 속물, 야욕덩이 욕심의  화신인 아버지다. 
그 위에 제왕이라는 무섭고 권위 있는 가짜  왕관에, 가짜 의복을 입혀논 우상이
었다. 세자는 아버지의 순수하지  못한 가식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
늘 이 문제를 가지고 해결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아바
마마께 아뢴다. 
  "어젯밤, 궁녀는 춘방에 잘 보호해 두었습니다." 세자는  간결하게 보고를 올렸
다.
  "응, 그랬어." 태종은 보통 보고를  받은 무관심한 태도를 지었다. 그저 그랬느
냐고 대답할 뿐이었다. 간밤에 임금님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어머니와 다투면서 
액정하인들ㅇ 앞에서  '죽여서는 아니된다'고 멧돝처럼  날뛰던 그때 그태도와는 
전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세자는 가만히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나이 어린 
아들 앞에서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부끄럽고 곤란하니 이같이 어름어름 대답해두
시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우선 춘방상궁에게 어명이 내리실 때까지 보호하라고 일렀습니다." 세자는 부
왕의 눈치를 살피면서 또 한 번 뇌까렸다. 태종은 이번엔 대답도 아니했다. 잘했
다는 말도 없었다. 못했다는 말도 없었다.  긍정도 아니요 부정도 아니었다. 궁녀
에 대하여 다시는 더 말을 아니해 주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어마마마께 지금 사뢰었습니다.  죽여서는 아니 된다고 -  다행히 어마마마께
서도 혼연히 승낙하시는  전지를 내리셨습니다. 살려두기로 하셨습니다."  세자는 
말을 마치자, 총명한 눈을 들어 부왕을 살펴 보았다. 부왕은 역시 담담한 표정이
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랬어." 한 마디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도대체 판단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대
답이었다. 
  "무책임하구나!" 세자는 생각했다  분한 마음이 슬며시 움직였다. 세자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동안 춘방에 두었다가 섟이  삭은 후에 대전으로 봉환하겠습니다." 아바
마마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아니했다. 하룻밤 사
이에 아주  딴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같이 죽이지 말라고  왕후인 어마마마와 
다ㅜ던 아버지는 겨우 한  밤을 지난 오늘 와서는 냉랭하기 짝이  없다. 바로 불 
아니 땐 내욱들이었다. 
  "앞으로 어찌하오리까?" 세자는 짓궂게 아버지한테 물었다. 
  "내버려 두어라." 차디찬 한 마디가 떨어졌다. 세자는 더 한 번 분했다. 너무나 
무책임한 대답이다. 
  "춘방에는 오래 두지 못합니다." 세자는  아버지의 한 마디만 득고 싶었다. '춘
방에는 오래 두지  못한다'는 세자의 말에 아버지는 약간  마음이 켕기는 모양이
다. .
  "내전으로 데려가면 반드시 풍파가 일어날 것이고 춘방에 오래 두지  못한다면 
어찌하느냐. 내전에서 너의  어머니는 아니 데려갈 테고. 이러하니  별수 있느냐.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지." 태종은 비로소 자기의 본마음을 펴 헤쳤다. 
  "섟 삭은 후에는 내전으로 데려가시어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게 하시어  거처케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왕실의 전범인가 합니다." 
  "모두 다 골치  아프다. 두었다 이야기하기로 하자."  전하는 용안을 찌푸렸다. 
욕심으로 인해서  일을 저질러놓았으나 실로  두통거리였다. '골치  아프다'는 한 
마디 말이  비로소 태종의 입에서 떨어졌다.  진심이었다. 세자는 골치 아프다는 
아버지를 더 괴롭게  해드리기가 미안했다. 우선 이쯤 해놓고 나중에  일을 처리
하리라 생각했다. 
  "고려 궁인에 대한 일은 나중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소자는 이만 물러갑니다." 
세자의 물러간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비로소 시원한 생각이 들었다.  등에는 진
땀이 흘렀다. 정포은  선생을 선죽교에서 때려 죽일 때도 이같이  진땀을 흘려보
지는 아니했다. 서아우  방석과 방번을 죽였을 때도 이같이 진땀은  흘리지 아니
했다. 아버지 이성계가  쏘는 화살이 환영문 기둥을 맞혔을 때도  이같이 진땀을 
흘리지 아니했다. 세자의 물러간다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세자는 물러가다가 다시 발꿈치를 돌렸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차근하게 아
뢴다. 
  "아바마마! 어마마마께는 소자가  아뢰겠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고려 궁인한테
는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시옵소서. 더구나  보통 궁인이 아니옵고  고려 때부터 
궁인이라는 그 점을 생각하시와 은헤를 베푸시옵소서." 
  "물러가거라. 네, 무엇을 안다고 감히 이런 일에 참예하느냐." 부왕의 목소리는 
금방 딴판이었다. 큰 소리롤 호령을 내렸다.  용안은 금방 엄숙했다. 아버지의 넓
고 큰 경험으로  아들을 푸근하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엇다. 제왕의  위력으로 아
들을 억눌러버리려 했다. 세자 '제'는 슬폈다. 대답없이 머리를 숙여 대전에서 물
러나간다. 고려 궁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태종은 며칠 동안 우울한 날을 보냈다. 
더구나 고려 궁인을 춘방으로 보낸  후에 태종은 적막한 긴긴 밤을 침실에서 쓸
쓸하게 지냈다. 그렇다고 내전에는 들어가기 싫었다. 투기가 많은 민비한테 점점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왕이 되기 전에 젊었을 때는 내외간  금실이 좋아서 
아들 사형제와 딸  사형제를 두어서, 민후의 몸에서 생산된 왕자와  공주가 팔남
매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민후의 용모가 늙기 시작했다. 장대한 몸집
을 가진 여장부는 더한층 쉽게 늙는 것  같았다. 아니다. 확실히 쉽게 늙었다. 이
제 민후에게는 아름다운 여성미라고는 한 곳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고집이요, 만만치 않은  성정이요, 딱딱하고 억센 기백뿐이었다.  몸은 왕후의 귀
한 존재요, 세자의 어머니요, 요룡여호한 네  왕자의 어마마마요, 네 공주의 친정
모후요, 네 사람 부마도위의 장모다. 여기다가 친정 아버지는 시아버님 태노대왕
을 도와서 새 나라를 이룩한 일등공신 민제요,  사형제나 되는 동생들은 범과 같
고 용과  같다는 별명을 가진 사람으로  태종을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한 민무질, 
민무구 형제들이다. 이같이 민후의 주위에 있는 인물만이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왕후면서도  개국공신이요, 정국공신이다. 남편인 태종을 도와서 임
금이 되게 했다. 방석, 방번의 난 때는 민후 자신이 남편에게 갑옷투구를 입혀주
면서, 어서 나가서 대결하라 했다. 남편의 친형이 되는 방간과 싸울 때도 남편을 
격려하고 군사들에게 술을  권해서 크나큰 승리를 거두게 했던 것이다.  이런 점
을 보아 민후는 이제 태종에게 있어서는 아리따운 아내라기보다 뜻을 같이한 동
지였다. 민후는 이같이  해서 점점 고분고분한 여자의 티를 세워로가  함께 잃어
버리게 되었다. 이쯤 되어도 태종을 더 그에게 바랄 것이 없는데, 민후는 그래도 
남성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행동은 남성에  가까우면서도 아직도 여성이란 감
정은 몸 안에 가득하게  잠겨 있었다. 남편인 태종은 한창 연부역강했다. 궁인과 
무수리를 곧잘 건드렸다. 민후는 남자 같으면서도 이것이 싫었다. 역시 자기만을 
사랑해주고 존경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완전히 여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어찌 할 수  없는 본연의 자세였다. 이 까닭에 고려  궁인의 사건이 일어났
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후에 태종  이방원은 더한층 민후한테 정이 떨
어졌다. 태종은 더 한층  대전에서 내전으로 발길을 옮기지 아니했다. 태종이 한
창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 개국공신에 중흥공신을 겸하여  이름이 일세를 
진동하는 완산부원군 이숙번이 어전에 뵙기를 청했다.  이숙번은 고려 때 장신으
로 태종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공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그보다도 태종 이방원에게 있어서는  방석, 방번, 방간의 형제들을 처치할 때 태
종의 편이 되어 혁명을 일으킨 때문, 태종에  대한 공로는 영의정 하윤과 맞서는 
국가의 큰 인물이었다.  이제 나라는 태평하여 밖으로 외적의 근심이  없으니 장
수의 임명을  맡아 있는 이숙번은  도저히 문관 재상들보다도  몸이 한가로웠다. 
아침 일찍 군문에 나가서 군무를  보살핀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임금 부럽지 아
니한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넓고 넓은 궁궐 같은  저택에는 기화요초가 
끊일 사이 없이 아름다운 웃음을 웃고, 울창하게  푸른 수해를 이룬 후원에는 진
기한 새소리에 학두루미가  춤을 추고 세상 밖의 별건곤을 이루었다.  집은 고대
광실이어서 궁궐이  무색할 지경이요, 넓은  마당 남향판에는 못을  파서 고기와 
자라를 길렀다. 여름엔 연꽃이 피어 향기롭고, 가을에는 연밥을 껴안은 연줄기가 
아름다웠다. 열 걸음에  한 정자요, 백 걸음에 누각이 화려했다.  다만 왕궁이 아
닌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붉고  푸르게 단청을 칠하지 아니했을 뿐 모든 구조와 
배치는 대궐에 손색이  ㅇ벗었다. 집만 좋고, 터만 넓은 것이  아니다. 그의 집에
는 삼천궁녀는 아니지만,  삼십 가기와 삼삽 무희  와 삼십 시녀가 있었다. 모두 
다 양갓집 여자를 뽑아 시녀를 삼고,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기생들을 뽑아
서 무희와 가희를 만들었다. 이숙번의 집에는 노래와  춤이 끊일 사이 없고 거문
고, 비파, 양금, 해금, 퉁소, 가야금 등 악기를 타는 음향이 끊일 사이 없었다.  세
상에서는 그를 제왕의  팔자보다도 더 낫다고 비평했다. 아닌게 아니라  임금 태
종은 임금노릇을 하귀 위하여 형제간에 살육  싸움이 계속되었고, 부자간에 씻지 
못할 한을 못박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왕위에 나간 후에는 슬며시 아
내와 화합지 못한 우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개국공신으로 중흥공
신까지 된 이숙번의 팔자가 도리어 임금보다  낫다고 탄식했다. 이숙번이 내관을 
통하여 뵙기를  청하니 태종은 지체없이  이숙번을 만났다. 밖으로  국가의 일이 
없으니 임금과 신하는  날마다 만날 기회가 없었다. 태종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이숙번의 문안을  받았다. 점잖은 재상이요, 장군의 절이었다.  또한 연침자
리다. 태종은 경의를 표하여 서서 문안을 받았다. 
  "오랫만이오, 완산부원군." 태종은 절하는  이숙번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숙
번도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몸을 굽혀 아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용안을 우러러뵙기 소원이었소이다마는 일 없이 승후하옵
기 황송하와 자주 옥체를 대해 뵙지 못했습니다." 
  "과인 역시 경을 대해 보고 싶었고. 요사이 별고 없이 무양하오?" 왕의 중신을 
대하는 옥음은 은근했다. 
  "성상께서 항상  애호해주시는 덕택으로 별탈 없사옵고  집안도 무고하옵니다. 
모두 다 지극하신 왕은 이로소이다." 태종은 이숙번이 아뢰는 '왕은'이란 말에 마
음이 더 흐뭇했다. 
  "그래 웬인인가? 오늘은 해가 서편에서 떴던가,  이 과인을 다 찾아 보러 왔으
니. 하하하." 드높게 웃으며 농을 했다. 
  "황송하오이다. 기실은 전하께 청쪼울 일이 있사와 어전에 들어왔소이다." 
  "과인한테 청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하하. 부원군이 과인한테 청을 하다니, 나
보다도 팔자가 좋다고  세상에서 떠드는 부원군이, 청할 일이 있다  하니 뜻밖이
오, 하하하. 무슨 청인가, 말해보오."
  "청이 있다 해도  이만저만한 청이 아니옵니다. 황송합니다. 미신의 집으로  거
둥을 해줍시사고 우러러 청을 하옵니다. 죄송무지하옵니다." 
  "경의 집으로 과인을 청하려 하는가? 그것 쉬운 일, 가고말고. 경의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전하께서 덕과 복이 많으시어 지금  나라는 국태민안한 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밖으로는 왜구의  침공이 없고 안에서는  백성들이 격양가를 부릅니다.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신가 합니다.  연하온 중, 때마침 미신의 귀빠진  날이 되었습니다. 
혼자 이날을 무료하게 지내기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와, 감히 아뢰었
습니다. 다행히 허락해 주신다면  미신 생전에 더할 수 없는 광영이올시다. 대단
치 아니한 일로 성청을 번거롭게 하오니 죄당만사올시다."
  "오오, 겨으이 생일이라, 과인 어찌 아니 가겠소. 집 구경도 할 겸 꼭 나가기로 
하겠소." 태종은 이숙번을 향하여 호탕한 옥음으로 쾌하게 허락했다.
  "날짜는 어느 날인가?"
  "내일이올시다."
  "곧 고둥령을 내리겠소."
  "황감하여이다."
  "만조백관들도 다 모이는가?"
  "백관이야 어찌 다 부르겠습니까? 원로들만 청하겠습니다."
  "경의 덕으로 유쾌한 하루를 보내리라."
  "황감하여이다."

  강계기생 가희아
  원로장군 이숙번은 왕은을 감사하면서 금관조복에 단 옥패소리를 청아하게 일
으켜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숙번이 어전에서 물러간  후 태종은 정운에 기별하여 
거둥령을 내렸다.  만조백관이 움직이는 거둥이  아니라 약식거둥이었다. 태종은 
훗훗하게 이숙번의 집을 찾고 싶었으나 임금이 미행을 했다면 조정 신하들의 공
론이 부산할 테니 미행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생각한 끝에 약식거둥령을 내린 
것이다. 날이 밝은 후에 태종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오늘은 완산부원군 이숙번의 생일이라 한다.  과인을 청하므로 약식으로 거둥
을 하려니와, 평소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사찬을  내리게 하라." 내관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내수사에 기별하여 사찬을 내렸다.  갸자에 가득가득 사찬을 실었
다. 어물로부터 시작해서 유과,  생과, 증과, 양지머리, 우둔, 돼지다리 등  진수성
찬이 갸자에  가득가득 실려서 이숙번의  집으로 나갔다. 이숙번은  조복을 입고 
사낯ㄴ을 받은 후에  다시 태종이 납시는 기별을  듣고 대문까지 니가서 지영을 
했다. 태종은 황금연을  탔으나, 만조백관들의 배행은 제례시키고 무예청과 별감
들만의 호위를 받으며  이숙번의 집에 당도했다. 이때 신하로 주인의  부름을 받
아 모인 사람들은 영의정 하윤, 전임대신 배극렴장군, 이무장군, 민무구 장군, 민
무질 장군, 민무희 등 태종의처남 되는 민씨 삼형제도 끼여 있었다. 주인 이숙번
은 말할 나위도 없고, 모든 장성들은 대문 밖까지 나가서 태종을 모시어 들였다. 
태종은 오래간만에 거리 구경을 하니 유쾌하고 즐거웠다.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연서 내려 무예청들의 부액을 받고 청에 오르자,  부께를 맨 좌우편 난간 안에서 
아련히 풍악 소리가  자지러진다. 왕의 친림을 맞이해 들이는 청아하고  맑은 아
악소리다. 전하는 마음이 더한층  싱그러웠다. 봉안을 들어 풍악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붉은 옷 푸른 옷을 입은  악공들은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삼현육각을 
앞에 놓고  제천수 곡조를 일제히 아뢰어  전하를 환영했다. '하늘과 가지런하게 
오래 사십쇼'하는 송축하는 음악이었다.  태종은 또 한 번 기쁨을 느끼면서 발을 
옮겼을 때, 넓은 대청 안엔 녹의홍상을 입은  시녀들이 화관 몽두리에 한삼 자락
을 흩날리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어  좌우편으로 갈라진다. 제천수  아악 곡조에 
맞추어 화려한 춤으로 상감 태종을 환영해  맞이하는 모양이다. 춤가락은 봄바람
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인들은  푸른 소맷자락을 들어 미인문을  이룩했다. 앞에서 
인도하는 이숙번이 가득 웃음을  풍기면서 여인들은 푸른 소맷자락을 들어 미인
문을 이룩했다. 앞에서 인도하는 이숙번이 가득 웃음을 풍기며 태종에게 아뢴다. 
  "가기들이 전하의 친림하심을  황송하고 기뻐하와 미인으로 문을 만들어 환영
의 뜻을 표합니다.  불가불 옥보를 미인문 안으로 옮기셔야 하겠습니다."  기발한 
생각을 짜낸 환영이었다. 태종은 호협한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경의 덕에 생전 처음으로 미인문으로 걸음을 옮겨보는  구려, 하하하." 태종은 
드높게 웃으며 미인문을 지나 이숙번의 거처하는  큰방으로 들었다. 모든 대신과 
장성들이 상감 태종의  뒤를 따라 미인문을 거쳐서 큰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는 전하는 모시는  왕좌의 보료가 주석으로 포진되어 있고, 어느  틈에 산해진미
의 음식상이 좌우 옆으로 질서 있게 벌여있었다.  전하가 자리를 잡은 후에 미인
으로 문을 이루었던 아름다운 무희와 가희들은 연회장으로 연보를 옮겨서 한 명
씩 두 명씩, 황금잔대를 받들어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중에 가장 아름다운 젊
은 미기가 어전에 엎드려 큰절을 올린 후에  황금잔을 받들어 술을 올렸다. 태종
은 절을 하고  약주를 올리는 아름다운 기생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을 하늘모양 
시원하고 맑았다. 이마는 넓지도 아니하고 좁지도  아니했다. 오똑한 코, 엷은 입
술에 두 볼은 명랑하도록 밝았다. 태종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여태 본 여인 중
에 이만한 여자를 대해 본 일이 없었다. 민후는 말할 것 없고, 일전에 손을 댔다
가 세자한테 창피를 당했던,  고려의 궁인보다도 열 갑절 아름다웠다. 젊어서 서
방님으로 있을 때 몇몇 기녀들을  상대로 하여 기생집에도 한두 번씩 드나든 일
이 있었드나 이만한 아름다운 기생을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종의 눈
과 마음은 자주 기녀한테로 쏠리게 되었다. 기녀는  금잔에 술을 가득 부어 태종
께 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술을 권하는 권주가다. '남훈전 달  밝은 밤에 팔월팔
개 다리시고 오현금 탄일성에  해오민지온혜로다. 우리도 성주뫼옵고 동락태평하
리라.' 권주가는 권주가지만 보통  권주가가 아니다. 제법 유식했다. 임금에게 술
을 권하는 권주가로는 가장 적절한 노래다. 태종은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란다. 기
생 속에도 이만큼 유식한 기생이 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기생의 얼굴을 바라본
다. 개싱의 손으로  넘겨주는 술을 단숨에 마시었다. 술맛도  아름다웠다. 술에는 
미인의 향취가 도는 듯했다. 
  "네 어찌 그런  권주가를 아느냐?" 태종은 술을  마신 후에 빈 잔을  기생한테 
주며 물었다. 
  "황공하여이다. 전하께옵서는 만백성을 거느리신 제왕이십니다. 옛적  성군이신 
순의 정치를  해줍시사 하여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황송천만이옵니다." 기생은 
나직나직 땁했다. 임금  앞이라고 떨고 무서워하지도 아니했다. 귀염을 받으려고 
교툐도 부리지 아니했다. 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에 천연한 태로도 아뢰었다. 기생
은 안주로  봉탕을 올린 후에 다시금  잔에 술을 부어 어전에  받들었다. 봉탕은 
계탕이었다. 태종은 일부러 술잔을 받지 아니하고 기생을 취재히본다. 
  "네 어찌 하구많은 술안주에  나한테 봉탕을 주느냐?" 기생은 붉은 입술을  열
어 상긋 웃으며 대답한다. 
  "전하께는 용탕을 올려야만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반상에는 용탕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봉 대신 닭을 쓰는  격으로 봉탕을 올려서 안주를 하시게 한 것입니
다." 말이 되었다. 얼른 꾸며대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전하의 마음은 더 한 번 기
생한테로 쏠렸다. 
  "네가 다시 술을 따랐으니 술잔마다 노래를 불러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내가 흥이 나서 술을 마시겠다. 좋은 노래가  있으면, 또 한 번 불러다오."  기생
은 방긋 웃고 한 손으로  술잔을 들고 한 손으로 상 변죽을 울려 장단을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금준에  가득한 술을 옥잔에 받들고서,  심중에 원하기를 만수무
강하옵소서. 남산이 이  뜻을 알아 사시장청하시다.' 시원하고  실경을 읊은 즉흥
시조다. 태종은 만열된 기쁨을  느꼈다. 전하는 미인이 올리는 금술잔을 받아 단
숨에 쭉 마신다. 태종은 술을 마신 후에  이번에는 무슨 안주를 집어주려나 하고 
기생의 눈치를 살폈다. 기생은 ㄱ무늬 화려한 청자  대접에서 생선 한 점을 집어 
권한다. 
  "안주를 젓수시옵서서."  전하는 기생이 입에 넣어주는  생선 한 점을  씹었다. 
임금은 기생에게 묻는다. 
  "무슨 생선이냐?"
  "용이올시다." 기생이 대답했다. 
  "용이라니? 이런 용은 처음 보았구나. 용이 아니라 잉어로구나."
  "전하게서는 언제 용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용이란 사람들이 생각으로 상상
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잉어는 용이 되는 생선이라 합니다. 그러하와 등룡이라 
하지 않습니까? 문자에도 '등룡문'이란 글이 있습니다. 깊이  통촉하옵소서." 기생
은 안존한  말씨로 도란도란 아뢰었다.  태종은 기생의 머리가  무한 영민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속에서 아들이 나오면 제법 총명 영리한  인물이 나올 텐데-.' 하고 아끼
는 생각도  일어났다. 전하는 봉탕 대신  계탕 안주를 먹고 이번에는  장차 용이 
될 수 있는 잉어 안주를 자시었다. 남자한테 여자란 이같이 필요한 모양이다. 남
자가 만일 계탕을 봉탕이라 하고  잉어 고기를 용으 고기라 했다면 단번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임금은 임기응변하는 기생의 솜씨를  머리가 좋다고 마음 속으
로 간절하게 느꼈다. 전하는 차차 주흥이 도도했다. 이번엔 빈 잔을 들어 기생한
테 청했다. 
  "술은 삼배주라 하는데  두 잔만 먹어 쓰게쓴냐. 한  잔만 더 따라라. 석 잔을 
마시어보기로 하자." 기생은  전하가 먼저 술을 청하니  확실히 자기한테 호감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흐뭇했다.  황금잔에 다시 호박빛 술을 
가득히 부어 올리며 상긋상긋 웃음을 머금어 아뢴다. 
  "약주는 삼배주의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상쾌하시라
고 젓숫는 술이니 옥체에 해치 않도록 젓수시면 좋습니다." 
  "옳은 말이다. 살아서 석잔,  죽어서 적 잔을 마신다는 말은 보통 술량이 적은 
사람을 표준해서 한  말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흥을 돋우고  운치를 일으
키기 위해서 유식한  문자를 지어내서 또다시 방편을 정했느니라. 네가  술 좋아
하는 사람들이 핑계삼아 만들어논 글을 짐작하느냐?" 
  "무식한 쇤네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들은  풍월로 얻어들은 바가 있습니다. 
옮겨보오리까?" 태종은  반넘어 술잔을 기울여  마시면서 기생의 입술을 바라본
다. 
  "일고 이단 삼품 오가 칠의라  합니다. 한 잔 술은 괴롭고, 두 잔 술을 홋홋하
고, 석 잔  술을 품주요, 다섯째 잔은  가하고, 일곱 잔 술을  마땅하다는 뜻이라 
하옵니다." 태종은 기생이 유식한 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제법이라 생각했다. 손
에 든 술잔을 들어 마저 마시려 할 때 기생은 맑은 목청을 뽑아서 노래를 또 한 
번 불러 전하의 신명을 돋우어준다. 
  '무학이 비봉에 올라  국도를 정하올제 자좌오향으로 성궐을  이뤘는데 좌청룡 
우백호와 남주작 북현무 귀격으로 벌여 있고 전대하 한강수는 이여천지근원이라 
태묘는 좌에 있고, 사직은  우에 있다. 삼봉이 수려하니 인걸호준하고 와우산 유
덕하니 민식 풍족이라, 성계신승하여 억만년지 무강이삿다. 하늘이 주신 뜻을 반
들어 만만세를 누리소서.' 청이 좋아서 노랫소리는 마치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맑고 맑았다.  임금뿐만이 아니었다. 만좌가 귀를 기울여  가사곡조를 들었다. 
한양에 왕도를 배판한 후에 어떤 이름없는 시인이 노래를 지어 새왕도의 풍수를 
예찬한 시였다. 임금 태종의  입이 방긋 벌어진다. 더구나 '만만세를 누리소서'하
는 마지막 종장을 듣는 전하는 시흥이 도도해서 어개가 으쓱했다.
  "이제 부르는 시를 누가 지었다 하더냐?"
  "모르겠습니다. 어느 유식한 선비가 왕실을 예찬해서 지었다 하옵니다.  소인의 
고향에 이 노래가 자자합니다." 태종은 이름없는 문사가 이씨왕조를 예찬하여 지
었다는 말을 듣자 더한층 마음이 흐뭇했다.
  "네 고향은 어디고 네 이름은 무어라 하느냐?"
  "보산 태상 가희아올시다."
  "보산 태생이야?  보산이면 바로 강계로구나.  강계의 고호가 바로  보산 아니
냐?"
  "네, 그러하오이다." 
  "강계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다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제가 무슨 미인 축에 들겠습니까? 소인보다 몇 갑절 잘생긴 여인이 거재두량
이올시다."
  "네가 미인이  아니면, 천상항아를 미인이랴  하랴. 겸손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사양이 너무 과하다. 강계 기생은  말을 잘 태고 춤도 잘 춘다더라. 과연 그러하
냐?"
  "네, 그러하옵니다. 보산보는 나라의 국경이 가가운 곳이오라, 기생들을 교육시
킬 때 말달리는 법과 창  쓰는 기술이며, 검무 추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하
니 말 달리는 법은 저절로 배워집니다." 
  "어재서 네 이름을 가희아라 하였느냐?" 기생은 태종의 하문을 듣자,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아뢰기 황송합니다.  자의 부모가 거적자리에 낳아놓고  가희아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가희아라고 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할만한 아이라고 해서  이같이 이름
을 지었다 합니다."
  "잘 지은 이름이다. 너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할 남자가 없겠다." 태종은  점점 
마음이 강계  기생 가희아 한테로  기울어진다. 도연히 술기운이  돌아 가희아의 
부드러운 손을 애무했다. 홀연 군신들이 모여  있는 좌석에서 꺄르르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태종가 가희아는 서로 손을 잡은 채, 군신들이 모여 있는 좌석을 바라
보았다. 재상  배정승이 희끗희끗 머리가  세아 반백이 넘은  나이면서 술기운이 
높아서 기생 설중매를 희롱하고 있다. 
  "네 요년, 설중매야. 네가  내 사랑을 받아 줄 수 있느냐?" 설중매는  함흥기생
이었다. 이름이  자자하게 서울과 시골에 퍼진  일등 기생이었다. 설중매는 방실 
웃으며 대답한다. 
  "대감게서 소인 설중매를  진정으로 사랑해주신다면 소인이 어찌 받지 아니하
겠습니까. 그러나 약주김에 허튼 말씀을 내리시는 듯합니다. 진정으로 사랑만 해
주십시오. 얼마든지 받아 모시겠습니다.  호호호." 설중매는 간드러지게 둣어대며 
대답했다. 
  "네 요년, 너는 정조가  너무 없다더라. 동가식 서가숙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더라. 도대체 네 서방이  몇 명이나 되느냐?" 설중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천한 기생이라  하나 너무나 사람을 모독하는 소리다. 마음이  좋지 않아 
불쾌하기 짝이 벗다. 그러나 설중매는 원체 이름 높은 명기였다. 슬쩍 마음을 돌
려 아스러지게 대답한다. 
  "왕씨도 섬기고 이씨도  섬기는 배정승 대감하고 동가식 서가숙하는 설중매하
고 어울려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중매의 대답을  듣고 자리에 가득 찬 
신하들은 손뼉을 치고 깔깔 웃었다. 가희아의 손을  잡고 얼근히 취해 있는 전하
의 용안이 뭉그러지면서  드높은 웃음을 껄걸 웃었다. 가희아도 소리를  죽여 방
긋 웃었다. 야무지게  야유를 보낸 설중매의 높은 수단에 모두들  꺄르르 웃어댄 
것이다. 임금을 바꾸어  섬긴 배정승은 마치 일부종사를 못한 기생의  팔자와 다
름이 없다. 자기도  의리를 지키지 못한 위인이 어지 기생의  동가식 서가숙하는 
행동을 조롱하느냐고 매섭게 야유를 한 것이다.  배정스으이 취한 기운이 일시에 
깨져버렸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개국공신중에도 두 패가 있
었다. 배정승처럼 고려ㅗ앙실을  섬기다가, 이씨왕조로 와서 나라를 섬긴 변절공
신이 있고, 순전히 고려 대 벼슬을 아니한  선비로서 있의 개국을 도와준 개국공
신이 있다. 고래  대 벼슬을 아니했던 개국공신들은 입가에 상쾌한  웃음을 띠어 
배정승의 욕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배정승과 함께  고려조정에 절개를 
지키지 못한 대신들을 배정승과 같이 얼굴빛이  변했다. 연회자리는 금방 어색하
게 되었다. 임금  태종도 설중매의 재치 있는 대답에 용안이  뭉그러지면서 껄걸 
웃었다. 그러나 연회좌석이 쓸쓸하고  어색하게 되니, 임금의 좌지로 볼 때 일시
동인의 태도를  취하고 싶었다. 얼른 수습할  방책이 머리에 떠오르지 아니했다. 
자리가 점점 스산한 편으로 기울어지려 할 때 가희아가 태종한테 고한다. 
  "자리가 소슬해지옵니다. 소인이  노래를 불러 이 자리를 바로잡겠습니다."  태
종은 영리한 가희아의 의사를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런 수단이 있겠느냐?"
  "염려 마시옵소서. 노래로 노염을 풀어보겠습니다." 
  "빨리 노래를 불러보아라." 태종은 잡았던  가희아의 손을 풀어주며 허락을 내
렸다. 가희아는 저를 들어 어상 앞에서 변죽을 울리며 청을 높여 노래를 부른다.
  '동가도 대가요,  서가도 큰집이라. 조그만  설중매가 동서에  끼였으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사동사서 하리라.' 가희아의 청  좋은 노랫소리는 만
좌를 놀라게 했다. 예로부터 있는 시조가 아니라, 가희아가 임기응변으로 지어서 
부르는 즉흥시조다. 
  '조그만 설중매가 동서에  끼였으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사동사
서하리라.' 노래부른 가희아의  시조는 만좌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었
다. 기생들의  일부종사 못하는 신세를 변명해주었을  뿐 아니라, 변절한 배정승 
일파를 흠씬 두둔하여 변호해준 노래다. 또 한가지  태종이 노래를 좋게 들은 점
은 가희아의 부른  노래는 조금도 정치성을 띠지 아니했다. 설중매가  꼬집어 말
한 대로 왕씨니 이씨니 하고  여기 벼슬하고 배반한 ㅅ들을 조금도 입초시에 올
려놓지 아니하고 기생의  동가식 서가숙하는 행동만을 들어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부드럽게 넘겨버린 점을 태종은 좋게 생각했다. 임금뿐 아니었
다. 왕씨를  배반한 배정승의 일당도 좋아했다.  새로 이씨만을 섬기는 공신들도 
마음이 흐뭇했다. 모두들 껄걸 웃었다. 태종은 가희아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만좌
를 향하여 칭찬한다. 
  "아까 설중매의 대답은 알싸한 호초알 같더니, 이번 가ㅡ히아의 시조는 사람의 
마음을 창해 바다같이 넓게 만드는 시조다. 가상하기 작이 없다. 경들은 이 유쾌
한 노래를 듣고 벙벙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가희아를 보내서 술을 한 잔씩 다르
게 할 테니 사양 말고 대백으로 받으라." 임금의 말씀이 떨어지니 가희아는 한편 
손에 황금 주전자를 들고 한편  손에 백자 큰 잔을 들어 먼저 배정승 앞에 나가 
술을 따른다. 
  "대감, 이 술 한 잔을 젓수시고 동가식 서가숙 하는 저희들의 팔자를 불쌍하게 
생각해줍시오." 가희아는  미소를 지어 웃으며  나직나직 말을 보냈다. 배정승도 
노염이 풀리면서 가희아의 술잔을 받았다. 
  "너의 바다같이 넓은 말씨에 나는 감동되었다. 과연  너는 천하명기다." 배정승
은 마음이 흐뭇했다. 가희아의 따라 올리는 큰 술잔을 단숨에 쭉 들이마셨다. 
  "대감, 조금도 노하지 마십쇼. 설중매의 말을 어리광을 부려서 버릇없이 한 말
씀이옵니다. 아이들의 어리광은  어른이 받아주셔야 합니다." 가희아는  배정승을 
떡 주무르듯 했다. 
  "아니다. 아마 내가  술이 좀 높아서 아니할  소리를 했느니라. 나한테서 먼저 
듣기 싫은 소리가 나갔으니, 보복이 돌아온 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냐. 나는 너한
테 새로 큰 교훈을 받았느니라." 배정승은 가희아 앞에 자기 잘못을 사과하지 아
니할 수 없게  되었다. 가희아는 배정승을 어루만진 후에 술잔을  들고 좌중으로 
돌았다. 소슬했던 잔치자리는  다시 화기가 가득한 잔치자리로 어룰려졌다. 가희
아는 좌중에 골고루 술을 다른 후에 어전으로 돌아가 아뢴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주흥을 돋우기 위하여 강계에서  배운 검무춤을 한 번 추
겠습니다." 검무춤을 추겠다는 가희아의 아뢰는 말을 듣자 태종은 더욱 기뻤다. 
  "좋다. 검무를 추어 과인의  주흥을 더욱 돋우게 하라." 가희아는 어전에서  물
러나 설중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 복색을 갈아입고 나왔다. 두  기생은 아리따
운 기상의 옷을 벗고 군관의 화려한 복색을  차렸다. 밀화패영 오색이 찬란한 공
작미를 꽂은 검은 전립을 쓰고 붉고 누런  동달이 단 군복에 남전복을 덧입었다. 
양편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멋지게 걸어나오는 가희아와 설중매의 맵시는 남복
으로 차린 때문  더한층 아름답고 예뼜다. 가희아는 씩씩하고 헌칠한  중에 여자
의 맵시가 곁들여서 시원스럽게 아름답고, 설중매는  안존하고 애잔한 여인의 맵
시에 남복을 차려서 그립같이 고왔다. 두 기생은  마루에 올라 먼저 군례를 어전
에 드리고, 다음엔 장군들과 재상에게 군례를 드린후에 양편으로 갈라섰다. 마치 
전장에 임해 있는  장군과 장군의 대결하는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은  장군과 재
상들은 땀을  쥐어 강계 기생  가희아와 함흥기생 설중매의  검무춤을 바라본다. 
두 기생은 제각기 군례를  마친 다음 제각기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가
희아가 먼저 칼을 뽑았다.  희다 못해 푸른 빛을 뽑는 긴  칼이 칼집에서 뽑아지
면서 허공 위에  흰 무지개를 그렸다. 가희아의  칼 뽑는 거동을 보자, 설중매도 
칼을 뽑았다. 두편 기생들은 말을  타고 뛰는 듯한 기상으로 춤을 추며, 한편 칼
을 허공에  받들었다. 순간 그들은 왼편  손으로 또 하나의 긴  칼을 환도집에서 
뽑았다. 서릿빛 검광이 두 개 두 개 네 줄기를 허공에 뿜어 찬란했다. 두 기생은 
또한 번 말이 뛰는  형상으로 춤을 추어 나오면서, 서로 쌍검을  들어 어르기 시
작했다. 두 팔에 쌍검을  들어 어울려 추는 태깔은 마치 남복  입은 선녀가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남전복 자락이 퍼뜩 바람에 날리면서  홍공단 치맛자
락이 펄럭했다. 하얀 버선발이 앞자락을 헤치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지었다. 다음 
순간 도 하나의 버선 치맛자락을 박찼다. 위에서는  칼이 돌고 아래서는 발이 아
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붉은  치마는 가희아의 치마요, 푸른 치마는 설중매의 치
마다. 초한 전쟁에 패공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어 싸울 때 항우가  홍문연 큰 잔
치를 열고 패공을 죽이려 하니  항우의 삼촌 항적은 패공을 살리려 하여 검무를 
추었다. 이것을 본 항우의  또 하나의 삼촌 항백은 패공을 죽이려  하여 또 하나
의 칼춤을 추었다. 위기일발인  이 찰나에 맹장 번쾌가 뛰어들었다. 대갈일성 항
백을 꾸짖어 물리치고 패공의  목숨을 구해낸, 역사 깊은 항장무를 본뜬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기생의 검무는 명색만 검무였다. 칼은 장검이  아니요 단
검이었다. 그것도 진짜 칼이 아니요 무딘 백은으로 칼 모양을 만들었다. 다섯 개 
여섯 개의 단검 무더기는 두  팔을 벌려 춤을 출 때 댕그랑 거리는 음향을 내어 
아름다웠다. 춤과 음향은  서로서로 선율을 일으키면서 아담한  기당풍류를 자아
냈다. 그러나 강계 기생 가희아가 함흥 기생  설중매를 적수로 하여 춤추는 칼은 
바로 전쟁에 쓰는 서리  같은 긴 칼이었다. 태종 이하 장군과  재상은 두 기생의 
능숙한 솜씨에 손뼉을 치며 갈채가 대단했다. 이제는 한체 어울려, 선과 선을 그
려 맴돌았다. 허공에는  흰 무지개, 원과 원을 글 둥글둥글  광을 뿜었고, 아랫도
리는 전복자락과 치맛자락이 푸른 빛 붉은 빛을 뿜어 금수 비단의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가희아의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고 설중매의 자태도  드러나지 아니했
다. 다만 위에는  흰 무지개가 허공에 살기를  뿜어 칼 부딪는 소리가 처절하고, 
아래는 다섯 가지 빛깔이 현란한 광채를 뿜어  눈을 부시게 할 뿐이었다. 무예를 
넘어, 절묘한 예술의 경지로  육박해 들었다. 모든 사람은 박수 갈채를 넘어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한동안 절정에 올랐을 때 춤은  한편 쪽 검광이 기울기 시작했
다 둥글게 원을 그려 쌍무지개를 뿜었던 서리 같은 빛깔은 돌여 환편 검광이 스
러지면서 설중매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났다. 힘이 모자라고 숨이 가빴다. 얼굴빛
이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칼을 내려 청에 박고 가희아한테 군례를 드렸다. 설중
매가 가희아한테 완전히 져서,  항복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박수 갈채와 환호
성이 도 한  번 일어났다. 전하를 위시하여모든 장성들은 가희아의  검무 솜씨에 
어린 듯  취한듯했다. 가희아는 설중매의  항복하는 군례를 받은  후에 아리따운 
웃음을 머금과 전하께 예를  올렸다. 만좌의 박수 갈채 소리가 또  한 번 요란했
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게 했다. 
  "과연 명불허전한  명기로구나. 강계의 검무춤을  내가 비로소 보았다. 이번엔 
과인이 술을 다라서 너의 무예를 칭송하리라." 전하는 친히 금배에 술을 가득 부
어, 가희아에게 내렸다. 무한한 광영이었다.  가희아는 사양치 아니하고 어사주를 
받들어 마시었다. 전하는 설중매를 불렀다.
  "네 비록 패했다 하나,  재주가 없어서 진 것이 아니다. 천생여질에 힘이 약해
서 진 것이다. 너의 재주를 가상하게 생각한다. 가희아한테 내린 같은 술을 주리
라." 전하는 설중매한테도 어사주를 내렸다.  설중매는 공손히 잔을 받들었다. 군
신의 갈채 소리는 또 한 번 요란했다.  전하는 내시를 불러 가희아와 설중매에게 
상급으로 비단을 내리고  대궐로 돌아갔다. 이날 밤 전하는 가희아의  모습이 눈
에 어른거려 단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전하는 조회를 파하고  만 가지 일
을 재결한 후에 어제 친림한 일을 사은하러 들어온 이숙번을 어전에 불렀다. 
  "어제 경의 생일잔치에 과인은 오래간만에 쾌하게  심신을 펼 수 있었소. 경의 
팔자는 내 팔자보다도 낫다 생각하오." 전하는  용안에 가득 미소를 띠고 이숙번
을 향하여 어제 지낸 일을 치사했다. 이숙번은 황송했다. '임금의 팔자보다 낫다'
고 하는 전하의 말씀은 까딱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소리다. 
  "모두 다 망극하신 성은으로  소신은 오늘날 전하 슬하서 늦은 복을 누리옵니
다. 소신이 일찍 전하를  받들어 모시지 못했던들 어지 이같은 복을 받사오리까. 
어제만 해도 갸자에  가득히 사찬을 내리시와, 모4든 시녀들이  즐겁게 지냈사오
니, 또한 성상전하의  은혜올시다." 이숙번은 전하의 말씀이 혹시나 물쾌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연해 성상전하의 은혜가 망극하다고 아뢴다. 태종은 
진심으로 유쾌했던 것이다. 이숙번의 두려워하는 심경을 알 까닭이 없었다.
  "오늘 과인은 경의  집으로 미행하려 하니, 경은 과인을 박대하지  아니하겠소. 
하하하." 전하는 미행을 하겠다고 하고 드높게 웃음을 웃었다. 미행은 임금이 세
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변복을 하고 몰래 행동을 하는 것을  미행, 곧 가만히 
하는 행동이라  부르는 것이다. 태종은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건만, 이숙번은 
'미행'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미행을 하시겠다는 말인지 얼른 알아
듣지를 못했다. 
  "네, 미행이오니까?"  한 마디를 해놓고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전하는  여전히 
빙긋빙긋 미소를 보냈다.  전하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자기한테 적의를  가진 것
이 아닌 것을 알았다. 
  "전하께옵서 어제도 친림하시고 오늘 또 미행을 하신다면 소신 일문에  넘치는 
광영이올시다. 삼가  받들어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어느때쯤 친림하시올지 아주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완산부원군 이숙번은 두 팔을 짚고 전하의 미행할 시간
을 물었다. 
  "낮에는 일이 많으니 밤이 좋겠소. 술시는 너무 이르고 해시쯤이 좋겠소. 해시
에 나가기로 하겠소." 
  "삼가 성지를 받들어 만반준비를 차리겠습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요. 다 소용없는 노릇이오. 밤참으로 간단하게  주안상이나 
차려두라 하오. 경과  함께 즐기리다. 그리고 술  따를 가희는 경의 집 가희아를 
대령케 하오." 이숙번은 '가희아'란 말을  듣자,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미행의 목
적이 가희아한테 있는  것을 안 때문이다. 이숙번은 어전에서 물러난  다음 집으
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 속에 빠졌다. 전하가 가ㅡ히아로 인하여  미행까지 한다
니 가희아한테 고혹된 것이 틀림이 없다. 장차  이 일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은가 
하고 곰곰 생각해본다. 잘못하면 조정 대신과  백성들한테 크나큰 의심과 지탄을 
받기 십상팔구다. 
  고려 말엽 공민왕 때 왕사 신돈은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상배한 후에 실신지경
에 이른 왕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여 공주의 모습과 방불한 미녀 반야를 집에
다 두고 왕을 미행시킨 일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민왕은 한달에 두세 
차례 신돈의 집을 미행했다. 아름다운 반야를  꼭 노국공주의 혼신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결국  반야의 몸에는 아기를 뱄다.  이 아기가 바로  아명으로 모니노요, 
나중에 왕우라고도 하고, 신우라고도 부르는 우왕이다. 공민왕은 아기 나이가 돌
이 넘었을 때, 반야는 데려오지 아니하고 모니노만 대궐로 데려왔다. 그 후에 공
민왕이 죽으니 모니노가  왕이 됐던 것이다. 뒤에 전하의 부왕인  태조와 전하는 
고려의 신하로 고려의 임금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기 위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식
이라 해서 모든  문헌과 역사를 신우로 바꾸어놓고  그의 아들 창왕도 신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숙번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모든 사실이 주마등처럼 달렸다. 경
우는 약간 다르지만 임금이 한 여자를 보기 위하여 자주 자기 집으로 미행을 한
다면 세상 평판이 좋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다. 좋지만 않을  뿐 아니라 혹여나 
가흐아의 몸에 어린아이가 생긴다면 까딱잘못하다가는 신돈과 같은 누명을 쓰시
가 십상팔구라 생각했다. 이숙번은 곰곰 생각한 끝에 가희아를 사랑으로 불렀다. 
가희아는 이숙번의 가기인 때문,  항상 이숙번의 집 내아에 있었다. 예쁘고 아름
다운 가희아는 명랑한 웃음을 지어 주인대감 사랑방 앞에 문안을 드렸다. 
  "가희아 등대하였소." 은방을을 흔드는 듯한 목소리로 고했다.
  "들어오너라." 가희아는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 자락을 휘어잡고 주인대감 앞에 
고요히 섰다. 
  "가가이 앉거라. 할말이 있다." 가희아는 대감이 별안간  무슨 분부를 내리려나 
하고 대감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숙번은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얼굴에 지었다.
  "큰일났다." 밑도끝도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가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궁금증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무슨 큰일이 났습니까?" 새까만 눈에  반짝 빛을 뿜어 물었다. 이숙번은 가희
아의 묻는 말에 엄숙한 표정을 지어 대답했다. 
  "상감께서 너를 보러 내 집에 또  오신다 했다." 가희아는 비로소 안심하는 표
정을 지었다. 
  "오늘 또 거둥령을 내리셨습니까? 그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놀랐습니다." 
  "거둥령을 내리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미행으로 오시는 것이다." 
  "거둥령을 내리고 오시는 것이 큰일이지 미행으로 오시는 일이 어찌  큰일입니
까." 가희아는 방글거려 웃으며 대답했다. 
  "일이 많아서 큰일이  아니다. 미행으로 밤에 자주  찾아오시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오시는 일이니  너한테는 무상한 광영이다마는 국가의 월로로 있
는 나한테는 거북한  일이 많게 되겠다." 완선부원군  이숙번은 가만히 탄식조로 
말했다. 
  "황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희아는 총명 영리했다. 주인대감 이숙번의  난처
하다는 눈치를 짐작해 알았다. 죄송하기 짝이 없다는 사죄를 잊지 아니했다.
  "내가 너한테 당부할 일이 있다.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 실행하겠느냐?"
  '듣자온 후에 소인의  힘으로 될 만한 일이라면 분부대로 받들겠습니다."  이숙
번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남녀간에 정이 움직여서  사랑이 싹트는 일은 사람의  본능이다. 나는 너한테 
정이 흐르는 상감의  심정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네가  상감게 향의하는 
그 정을 끊으라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상감을  진정으로 흠모해 모
실테냐?"
  "천한 계집이 어찌 감히 하늘같이 높으신 대왕전하를 흠모하고 사랑한다  하오
리가. 하오나 만약에 상감께옵서 미천한 제  몸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거두아주신
다면 결초보은하여 한평생 받들려 하옵니다." 이숙번은 비로소 고객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오늘 너한테 당부할 말이 있다." 
  '삼가 받들겠습니다."
  "너, 고려 때 신돈의 이야기를 들었느냐?" 
  '온 세상이 다 아는 노릇 아닙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이야기는 귀
에 젖도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터놓고 내가  이야기를 할 테다. 너는 우리 집 가기가 아니냐. 
까딱 잘못하다가는 나는 신돈의 꼴이 되고 너는  반야의 신세가 되고, 앞으로 혹
시 네  몸에서 왕자가 나온다면 우왕꼴이  될테니, 그런 누명을 쓰게  된다면 네 
신세와 내 신세는  아무 가닭없이 아주 망해버리고 말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했
을 때 내 등에는 진땀이 흘렀다. 사람이란  눈앞에 보이는 일만 생각해서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먼일까지 생각해두어야 한다. 알아듣겠느냐?"  완산
부원군 이숙번의 말을 듣자 가희아는 까만 눈을 깜박였다.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마는  어찌하면 좋으리까?" 이숙번은 목소리를  나직하
게 해서 가희아의 ㅁ는 말에 대답했다.
  "오늘 전하께서 미행으로 내 집에 오시는 것은 너를 괴러 오시는 것이다. 그대
로 놀러만 오시는 것이 아니다.  알아듣겠느냐?" 가희아는 아무리 기생 출신이라 
하되, 얼른 말대답하기가 거북했다. 잠깐 얼굴을 붉혔다.
  "오늘 밤엔 반드시 너한테 취침령을 내리실  것이다. 그때 가서 너는 호락호락 
몸을 허락해서  노류장화의 노릇을  해서는 아니된다.  알아듣겠느냐?" 가희아는 
대답대신 눈을 깜박였다. 다음 말을 들어보자는 눈치다. 
  "이 점이 네나 내나 흥하고  패히는 기로에 서 있는 두 갈래길로 갈라지는 긴
요한대목이다. 알아듣겠느냐? 신돈이 되고 반야가 되는냐, 그렇지 아니하면 그대
로 개국공신 이숙번이가 되고 조촐한 후궁 가희아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란 말
이다." 
  "알아듣겠습니다." 가희아는 총기있는 눈을 깜박이며 가만히  대답했다. 이숙번
이 말을 계속한다.
  "절대로 내 집에서는 전하께 몸을 허락하지  말란 말이다. 아주 대궐 후궁으로 
들어간 연후에  몸을 전하께 맞기란 말이다.  이리 해야만 뒤에 혹시  왕자가 네 
몸에 탄생한다 해도 이러니저러니 군소리가 없을 것이다.  네가 능히 이 큰 결심
을 하겠느냐?" 가희아는 주인대감 이숙번의  깊은 뜻을 비로소 알아들었다. 자리
서 일어나 절을 올린다.
  "부모 부다도 더 크고 넓은 은덕을 무슨 수로 다 갚으오리까. 명심해서 거행하
겠습니다." 이숙번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하나, 극히 어려운  일이리라. 죽이고 살리는 생사여탈의 칼자루를 잡고  있는 
제왕 앞에 단  하룻밤이라도 굽히지 않고 항거한다는  일은 네가 여간한 결심을 
갖지 아니하고는 될 수  없는 법이다. 어디 오늘 밤에 네  행동을 지켜보기로 하
리라. 그럼 물러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취하라." 가희아는 내아로 돌아가고 이
숙번은 상감의 미행을 맞이할 준비를 차렸다.  간단한 다담상을 차리라고 숙설간
에 영을 내린 후에 사랑  별실에는 안석 장침에 보료와 방석을 문방사우와 함께 
벌여 화려찬란하게 포진을 해놓았다. 이날 밤 해시가  되자 이숙번의 집 솟을 대
분 앞에는 과연 두사람이 문을 두르렸다. 한  사람은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손
에는 호박 등을 들었고, 한 사람은 갓을 쓰고 직령을 입었다.
  "누구요?" 문하인이 물었다.
  "묘동 사는 이한량이 대감을 뵈러왔소." 하고 대답했다. 극비의 행동이었다. 
  "들어오시라고 일러라." 이숙번은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부러 문간까지 맞이
를 하지 아니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문하인한테 인도되어 주인대감이  있는 큰
사랑으로 들어갔다. 갓 쓰고 직령 입은 사람은 대감의 방으로 들어가고, 머리 동
이고 등불 든 사람은  손에 든 등불을 끈 후에 청지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숙번
은 방 안에서  상감을 맞이했다. 전하가 듭시사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했
다. 
  "일부러 나가서 대가를 맞이하지 아니했습니다. 통촉히주시옵소서."  전하는 반
갑게 이숙번의 손을 잡았다. 
  "미행을 하는데 맞이가  어디 있겠소. 맞이를 한다면 어디 미행이라  할 수 있
소. 당연한 일이오." 임금이나 신하의 음성은  모두 다 작았다. 이숙번은 마음 속
으로 밤도 이미 깊었거니와 어서 빨리 상감을 대궐로 돌려보내야만 하겠다고 생
각했다. 이숙번은 벽에 늘인  설렁줄을 흔들었다. 하인이 긴 대답을 하고 앞으로 
달려왔다. 
  "숙설간에 기별해서 아까  마련하라 했던 다담상을 빨리  올리라 해라. 그리고 
가희아가 있거든 술정을  받들고 나오라 일러라." 하인이  청령하고 물러난 후에 
주인은 상감을  호화롭게 꾸민 별방으로  인도했다. 이윽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연삽하게 일어나면서 가희아는 자그마한  연엽소반에 다담상을 받들어 들어왔다. 
전하의 용안에 화기가 가득했다. 가희아는 다담상을  방문안에 놓고 먼저 전하께 
향하여 한 팔을 짚어 문안을 드렸다. 
  "어제는 너무나 과분한 굄을 받자와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산새처럼 아
름다운 목소리로 나불나불  지껄였다. 전하의 눈에 비치는  가희아의 화용월태는 
어제보다도 더한층 아름다워  보였다. 미소를 던져 가희아의  일동일정을 바라본
다. 가희아는 전하께  문안을 올린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담상을  받들어 올렸
다. 이숙번은 마음에 정한 일이  있었다. 두어 잔 약주를 어전에 올린 후에 허리
를 굽혀 전하께 아뢴다.
  "소신은 모밍 좀 고단하와 옆방으로 물러가겠습니다. 모든 거행은 가희아가 바
듣겠사오니 안심하옵시고 하명해주시기 바랍옵니다." 
  "홋홋해 어찌하오." 전하는 미소를 지어 이쯤 대답하고  더 만류하지 아니했다. 
불감청이언정, 소원하는 바였다. 이숙번이 물러간 후에 별방 속방은 산방같이 아
늑했다. 다담상을  가운데 두고 전하와 가희아가  마주앉아 있을 뿐이었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았을 때 전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오늘 과인이 이같이 야심한 중에 미행을 나온 것은 누구 때문인지 네가 아느
냐?"
  "쇤네 같은 천한 계집이  어지 감히 존엄하옵신 상감마마의 높으신 뜻을 추측
하오리가. 황공무지하오나, 아올 길이 없습니다." 가희아는 요암한 교태를 지으면
서 말소리만은 도렷도렷 낭랑하게 대답했다. 전하는  자기의 미행해온 일을 모르
겠다는 가희아의 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밤은 해시가 넘어 자시가 되었다. 온 
천지는 적막한 강산  속에 잠들었다. 다만 한 나라의 제왕이  범나비마냥 아름다
운 기녀 앞에  사랑을 구하는 장면이 이숙번의 집에서 벌어졌을  뿐이다. 전하는 
가희아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그래, 네가 이 방에 내가 온 뜻을 모르겠단 말이냐. 나는 너를 사모한다. 너무
나 박정하고나." 전하는  호소하는 듯, 애원하는 듯 가희아의 도독하고  재치있어 
보이는 귓가에 속삭였다. 가희아는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했다.
  "전하께옵서 깊은 밤에 미행하시는 것은 백성들의 질고를 살피시기 위하여  납
신 줄  알았더니, 소인을 사모하여 찾으신  것이라 하시니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 연하오나 소인은  이름이 천하와 노류장화의 기생의  몸이 되었습니다
마는 아직도 깨끗한 처녀의 몸이 올시다.  전하께옵서 진정으로 사모해주신다 하
오면 절차를 밟아 사랑해주옵소서." 가희아는 명랑한 얼굴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대답했다.
  "절차란 무엇이냐?"
  "비록 천기라 하오나 전하께옵서 소인의 몸을 한 번 범하시는 때는 전하의 사
람이올시다. 전하의 사람으로 재상의  집 가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청문이 사납
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말 소인을 사랑하신다면 오늘 밤은  그대로 환궁하
옵시고 밝은 날 소인을 대궐로 부르시어 궁녀의 책임을 맡기신 후에 괴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의  부모십니다. 전하의 일거일동은 곧 이나라 백성
들의 교화에 크나큰 영향이 미치옵니다." 가희아는 처절한 얼굴에 싸늘한 기상을 
띠어 도란도란 아뢴다. 가희아의 한 마디 말은 전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전
하는 취했던 술기운이 단번에  깨는 듯했다. 슬몇 자기의 위치를 돌아보았다. 가
희아가 보통 기생이 아닌 것을 알았다.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네 말이 옳다. 과인이  잠깐 주흥에 겨워서 너를 범하려 했구나. 뜻이 있으면 
내링 ㄹ다시 기별하리라. 상을 물리고 이부원군을 들라 해라." 가희아의 한 마디 
바른 말에 전하는  얼른 심기를 돌렸다. 가희아는 전하의 너그러운  태도가 존경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가희아는 다담상을 받들고 조용히  어전에서 물러
났다. 이윽고 이숙번이 들어왔다.
  "약주를 좀  젓수셨습니까?" 이숙번은 가희아를 통해서  일이 무사하게 된  줄 
알았던 것이다. 가슴이 후련했다. 전하는 이숙번을 바라보며 호협하게 웃는다.
  "오늘 밤 과인은 경의 집 가기의 높은 풍도를 비로소 알았고. 가희아로 후궁을 
봉할 테니 내일 중사가 나오거든 함께 들여보내주오."
  "봉명하겠소이다." 이숙번은 은근하게 대답했다. 다음날 전하는  내관을 이숙번
의 집으로 내보내서  가희아를 불렀다. 나라 법네 기생들은 말을  타지 아니하면 
휘장과 뚜껑이  없는 가마바탕을 타는  것이 원칙이다. 세상에서는  가마 바탕을 
판교라고 불렀다. 널판자로 만든  교자 바탕이라 해서 판교라고 했다. 전하는 내
관을 이숙번의 집으로  보낼 때 잔치도 아니하는  대궐 안에서 기생이 출입하는 
것을 보면 바깥  사람들의 비평을 받을까 해서  일부러 가마를 보내서 가희아를 
맞이했다. 전하는 내관을 이숙번의 집으로 보내놓고 도다시 곰곰 생각해본다. 가
희아를 데려다가 후궁을 삼는다면 투기 많은 민후는 반드시 강렬한 질투의 화살
을 또 보낼 것이  분명했다. 가희아뿐 아니었다. 정력이 절륜한 자기로서는 앞으
로 몇 사람의 후궁이  생겨날지 모를 일이다. 전하는 혼자 가만히  궁리 속에 빠
져본다. 어떠한  법을 정해서 민후의  입을 꼼짝 못하도록  봉해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전하는 급히 또 한 명의 내관을 불렀다. 
  "정원으로 나가서 승지를 들라 해라." 내관은 정원으로  달려가 승지를 청했다. 
승지는 급히 추창해 들어왔다. 
  "부르셨사옵니까?"
  "경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제왕이 후궁을  두는 데 무슨 법규가 있는가? 역대 
제왕의 기록을 살펴서 고증해 올리라."
  "특별히 일정한 법은 없습니다마는 후가 있고 비가 있고 빈이 있습니다. 그 밖
에 모든 후궁들이 또 있습니다. 대개 국왕이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 어떠한 법
류를 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삼천궁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천궁녀를 함
빡 후궁으로 삼는다한들 누가 감히 막으리까."  승지는 임금이 별안간 후궁을 묻
는데, 무슨 법이  있느냐 물으니 슬며시 눈치를 채고 임금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삼천궁녀를 쳐들었다. '삼천궁녀'소리를 듣는 전하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산천궁녀야 크고 넓은 나라  중원에서나 둘 것이지 나라가 작은 우리 나라에
서야 둘 수 있겠는가.  비빈과 후궁들을 몇 사람이나 둘 수  있을까 대신과 의논
해서 결정하라. 그리하고 앞으로 비빈 사이에서  나오는 왕자와 공주들의 칭호도 
적당한 규범을 마련해서, 곧 상신하라." 승지는 곧 빈청으로 나가 대신들과 의논
했다. 대신들은 급히 승지와  함께 내명부와 외명부의 법규와 왕자, 왕손의 호칭
을 마련하여 어전에  바쳤다. 내뭉부는 궁중에서 후궁이 되어 벼슬을  받은 궁녀
를 가리킨 것이요, 외명부는  벼슬하는 사람들의 아내가 받는 가자요, 왕자 왕손
의 호칭은 적과 서를 구별하여 법을 정하자는  의도였다. 승지와 대산한테 한 번 
명령을 내리자 모든 계급은 지체없이 정해졌다. 승지는 어전에 복명했다. 
  "먼저 내명부와 외명부의 법규를 정했습니다. 내명부는 대궐 안 지밀에서 왕명
을 받들어 벼슬  계급을 내리는 것이옵고, 외명부는 신하들의 부인  되는 사람은 
저절로 그 남편의 벼슬 계급에 따라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올시다." 전하는 기
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먼저 외명부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  전하는 체면을 차리느라고 면저 외명부
의 설명을 들어보려 했다. 
  "외명부는 아까 아뢴대로  그 남편의 벼슬 계급에  따라서 품위를 정했습니다. 
우선 부마의 아내, 곧 왕후의 다님은 공주의 칭호를 드리고, 후궁의 따님은 옹주
라 하고, 왕비의 어머니,  곧 부원군의 아내는 정일품의 가자를 주어 부부인이라 
하고, 상감의 유모는 종일품의 가자를 주어 봉보부인이라 하고, 왕세자의 다님이 
시집을 갔을 때눈 군주라 호칭히새 정이품의  가자를 내리고, 왕세자의 서따님이 
시집을 갔을 때는 현주라 부르면서 정삼품의 가자를 내리시는 것이 좋다고 의논
했습니다." 
  "좋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다음에 나라의 일가인 종친들의 칭호를 아뢰겠습니다. 정일품 지위에 가는 상
감의 적자인 대군의 부인은 군부인이라 해서 왕후의 어머니와 동등한 지위를 갖
게 하고, 군부인이라 해서 종일품의 가지를 내리고, 나라 일가의 종손 되는 종정
경의 아내는 현부인이라  해서 종이품의 가자를 내리고, 군의 아들  도정의 아내
는 정삼품  신부인의 가자를 내리고, 도정의  아들 정의 처는 신인이라  해서 정 
또는 종삼품으로  하고, 정의 아들 수의  아내는 혜인이라 해 정  또는 종사품의 
가자를 주기로 했습니다." 전하는 마음에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을 말하라." 
  "문관과 무관의 처 되는 사람들의 칭호를 가자품위에 따라서 문무의  구별없이 
통일해 부르기로 했습니다."
  "말해보라."
  "정일품 영의정 및 좌.우의정의 부인과 공신부원군의 부인과 영돈녕부사 및 무
관으로 정.종이품 어여대장, 훈련대장, 총융사의 부인은 정경부인이라 하고, 다음
에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조판서의 부인은 정부인이라 하고, 옥관자를 붙인 
정삼품까지, 당상관의  아내는 숙부인이라 하고,  정. 종삼품의  아내를 숙인이라 
하고, 사품의 아내를 영인,  오품의 아내를 공인, 육품의 아내를 의인, 칠품의 아
내를 안인, 팔품의 아내를 단인, 구품의 아내를 유인이라 했습니다." 태종은 관자 
다는 법을 묻는다.
  "정이ㄹㅁ에서 종이품까지가 금관자를 달고 정삼품이 되어야 비로소  옥관자를 
다는 법이 아닌가?"
  "네, 그러하옵니다."
  '정삼품 이하의 사람은 어떤 관자를 다는가?"
  "당하삼품서부터 구품까지는 대모관자를  답니다. 그리하고 백두서민들은 흑가
으로 된 쇠뿔관자를 답니다."
  "그렇다면 외명부의 칭호를 내린 신하들에게도 관자와 같이 어더한 표지가  있
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명부는 별로 밖으로 나가 출입할 기회가  없습니다. 대궐에도 경사 때 한거
번에 들어가 알현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표지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대로 저
웁인, 숙부인 하는  호칭만 가지면 넉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
덕였다. 이제는 내명부에 관한 일을 묻는다.
  "다음엔 내명부에 대하여 칭호와 표지를 말하라."
  "내명부는 임금의 후궁으로 빈과 귀인과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워, 숙원 여
덟 계급을 두어봤습니다. 그래서 정일품을 빈이라 하고 종일품은 귀인이요, 소의
가 정이품, 숙이가 종이품, 소용이 정삼품, 숙용이 종삼품, 소원이 정사품, 숙원이 
종사품, 이같이 해서  여덟계급으로 정했습니다. 이 것이 후궁의  계제올시다. 이 
칭호는 후궁으로 봉하기  전에는 아무리 제왕의 은총을  받은 궁녀라 하는 부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후궁의 높고 낮은 표지는 어찌하기로 했는가?"
  "그것은 첩지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삼품  이상은 황금으로 쌍봉황을 조각하
여 첩지를 달고 삼품 이하는 단봉황 첩지를 달게 했습니다." 전하는 돌연 기운착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후궁에 여덟 계급이  있다 하면 과인은 아무리  후궁을 두기 싫다 해도 여덟 
명의 후궁을 둘 수 있구나, 하하하." 전하의 호방한 웃음소리는 넓은 방 안에 ㅇ
려퍼졌다. 승지는 또다시 태종의 비위를 맞춘다. 
  "계급은 비록 여덟이라 하오나 후궁은 천백도  두실 수 있습니다. 한 계급마다 
열 망의 후궁을 두시면 팔십 명이요, 백 명을 두신다면 팔백 명이 됩니다."
  "경의 말대로 한 계급에 백 명씩 둔다 해도 중국의 삼천궁녀를 따라가려면 까
맣게 아득하구나." 태종은 또  한 번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가 마음 터
놓고 호방하게 웃는 것을 보자, 승지는 죄었던 마음이 풀렸다. 
  "삼천궁녀는 궁녀들의 총수올시다. 모두 다 제왕이 손을 대신 후궁이 아니올시
다.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승지는 미소를 지어 아뢴다. 
  "모든 칭호를 아뢴 대로 정하오리까?"
  "좋다. 곧 법으로 규정하라." 전하는 만족한 표정으로  내외명부의 칭호와 규제
를 정하라 했다. 전하가 승지에게 후궁의 계급을 정했을 때, 이숙번의 집으로 가
희아를 데리러 나갔던 내관은 복명을 아뢰었다.
  "가희아를 데려왔사옵니다." 전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판교를 태우지 아니하고 가마로 데려왔느냐?"
  "분부대로 거행했습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왔느냐?"
  "정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창경궁을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전하는 내관의 
말을 듣자 더욱 만족했다. 
  "지금 어디 있느냐?"
  "대전 합문 바께 가마 안에 있사옵니다." 
  "상궁을 보내서 맞이해  들일 테니 잠깐 더 기다리라  해라." 전하는 내관에게 
이르고 일방 대전상궁을 불렀다. 
  "공신 이숙번이 그의 집 가기를 바쳤다. 도로 보내자니, 공신을 대접하는 예가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텐데, 너도 짐작하거니와 중전마마 성정이 
대단하시니, 내전에 거두어둘 수  없다. 거처할 곳을 정할 때까지 비밀하게 거두
어두게 하라." 상궁도 가희아의 일을 감감하게 몰랐던 것이다. 비로소 분부를 듣
고 이숙번의  집에서 기생 하나가 들어오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일개 상궁의 
몸으로 가타부타 아뢸 도리는 없는 일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상궁은 대답을  올리고 합문밖으로 나가서 가희아
를 가마 속에서 맞이해 들였다.  대전 별당 조용한 방은 열도 넘었다. 상궁은 벌
써 눈치를 챘다. 가희아를 그중 넓고 화려한 방으로 인도 한 후에 복명을 했다. 
  "기생을 인도해두었습니다." 
  "어느 방으로?"
  "대전 별당 그중 큰 상방으로 인도했습니다."
  "먹을 것을 들여보낸 후에 목욕을 시키고 의복 일습을 내리게 하라. 모든 일을 
내전에서 모르도록 일체 비밀을 지키라."
  "알아들었습니다."
  "만일 일후라도 내전에  있는 비자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중전마마께서 아시게 
되는 날은 네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알았사옵니다."
  "나중에 또다시 이르리라. 아까  말한 대로 음식과 의복을 내리도록 하라."  전
하의 분부를 받은 상궁은 가희아에게 음식과 의복을 보내기 위하여 어전에서 물
러났다. 전하는 가희아를 대궐로  데려온 후에 온종일 정사를 살폈다. 그의 끈기 
있는 참을성과 박력있는 정치적  솜씨는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다 데려오고도 모
든 일을 태연스럽게  처리했다. 밤이 깊은 후에 전하는 조용히  지밀상궁을 불렀
다. 
  "가희아가 있는 처소에 나의 금침을  펴게 하라." 지밀상궁은 가희아의 처소에 
전하의 금침을 펴고 대전으로 돌아가 고했다. 
  "금침을 별방에  포진하였습니다." 전하는 고려 궁이느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한 달이 넙도록  공방으로 지냈다. 사나운 민비의 침소로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
었다. 그런 후에  아직 다른 후궁은 없었다.  몸이 제왕의 자리에 있으니 함부로 
욕심을 처라할  수도 없었다. 아제, 자색과  재주가 뛰어난 가희아가 궁중에까지 
들어왔으니 어서  빨리 대하고 싶었다.  더구나 모든 이면과  체면을 차리느라고 
반나절과 초저녁을 그대로  허송한 후였다. 어서 혼자 있는 빈  방에서 가희아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포진이 다 되었느냐?  내가 나가리라." 전하는 상궁한테  어색한 웃음을 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늙은 상궁은 사방 등을 들고 앞을 인도했다. 길고 긴 
복도를 돌아 정원으로 내렸다. 자정이 이미 넘었다. 온 대궐은 어둠속에 조는 듯 
잠겨 있었다. 다만 십여 채 전각 중에 한  채 전각만이 은은하게 불빛을 뿜고 있
었다.
  "이 방이냐?" 전하는 손으로 불빛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 
  "네, 그러하옵니다." 지밀나인은 앞을 서서 별당 창문의 앞고리를 잡았다. 창문
이 '덜컹'하고 소리를 내었다.  다음엔 아자 장지문이 나타났다. 사욱ㅇ은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오르시옵소서." 전하는  부액도 받지 않고 올랐다. 모든 내시
와 궁녀며 액정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늙은 제조상궁  이외엔 한 사람의 궁녀와 
액정도 거느리지 않고 왔던  것이다. 전하는 사십대의 건장한 몸이었다. 선뜻 마
루 위로 올랐다. 옥등잔에  불빛이 밝았다. 다시 앞에는 기름먹인 창호에 불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늙은 상궁은  손으로 가볍게 창호를 두드린 후에 또  한 번 문
을 밀었다. 향훈이 전하의  코로 스쳤다. 방에서 나오는 따뜻한 기운은 가희아의 
몸내음을 한데 실어기지고  전하의 코를 여지없이 흔들어주었다.  전하의 마음은 
아름다운 사람을 대하기  전에 먼저 아름다운 사람의 향훈을 맡았다.  마음이 취
하고 흔들렸다. 가희아는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하를 맞이했다. 화관 족두리
에 기생의 예복인  몽두리를 입고 허리를 반쯤  굽혀 전하를 맞이하는 그자태는 
마치 물을 박차는 제비같이 날렵하고 예뻤다. 
  "황공무지하여이다."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한 가희아의 맑은 목소리가 떨
어졌다. 늙은 상궁은 손등불을 방 한편에 놓은  후에 다시전하를 화려한 금침 위
로 인도했다. 
  "진좌하옵소서." 전하는 만족했다. 미소를 던지며 홍공단 이불  자락에 황학 백
학을 멋지게 수논 금침  위에 앉았다. 가희아는 영리했다. 늙은 상궁이 지휘하기 
전에 벌써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을  알았다. 눈같이 희면서 아름다운 곡선미
가 나타나는 조그마한 발길을 사뿐사뿐 디디고 어전으로  가까이 갔다. 한 간 통
쯤 떨어진 곳이었다. 두팔을  소리 없이 벌렸다가 다시 모은 후에  날아갈 듯 큰
절을 올렸다. 한 번이 아니다. 네 번이었다. 사배의 절차를 밟은 것이다. 늙은 상
궁은 가희아의 큰절이 끝날 무렵 상감께 아뢰었다. 
  "소인은 물러갑니다. 내일  일찍 대령하겠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
했다. 
  "대전 침실은  네가 지키고 있으라. 모든  일은 극비에 부쳐라. 알아듣겠느냐? 
나중에 후하게 상금을 내리리라."
  "과히 하념하지 마시옵소서. 분부대로 명심하여 거행하겠습니다."  늙은 상궁은 
눈치가 빨랐다. 자기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상금
은 후히 주리라'하는 상감의  말씀에 더욱 기쁨을 느꼈다. 윗목에 놓아두었던 손 
등을 들고 종종걸음을  걸어 어전에서 물러나갔다. 문은 닫혀지고 방은  더욱 탐
탁하도록 오붓했다.  제왕과 기생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탈박을 벗겨놓으면 
한 사람의 씩씩한  장년 남자요, 한 사람의  절묘한 예쁜 여자다. 전하는 도연히 
흥이 일어났다.
  "하루 만에 너를 대해 보니, 네 양자가 더욱 예쁘고  묘하고나." 가희아는 기생
이었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소인도 전하께서 환궁하신 후에 잠을 못이루고 밤을 꼬박 새면서  그리워했습
니다. 뜻밖에 이제 대궐로  부리시와, 천안을 지척에 모시오니 황공 감격한 마음 
아뢸 길 없사옵니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아 무릎앞에 이끌었다. 
  "너는 나의 후궁이 되어야 한다." 전하는 가희아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열을 
뿜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다시 바른손을 들어  가희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강하게 감을 뿐이 아니었다. 뺨을 가희아의 뺨에 대어보았다. 손바닥에 달아오르
는 가희아의 열기가  분내음과 함께 전하의 코로 핍박해 들어왔다.  전하의 관능
은 미칠 듯 고조되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황공무지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전하
는 가희아를 번쩍 들어 무릎위에 앉혔다. 
  "네가 정말 처녀라 하더니 과연 처녀냐?" 
  "어느 존전이라  소인이 감히 거짓으로 아뢰었으리까.  시험해보시면 아시오리
다." 가희아는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시험해보시면 아시오리다' 한  가희아의 
대답은 더한층 전하의 정을 부채질해주었다. 전하는 가슴이 설레었다. 마음이 부
풀어올랐다. 가희아의 아름다운 볼에 입을 대었다. 
  "네가 비록 기녀라 하나 처녀의  몸이라 하니 내가 오늘 밤을 혼인 초야로 해
서 너를 맞이하리라. 네 생각에 어떠하냐?" 
  "황공무지하여이다." 가희아는 감격했다.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한다. 
  "내 비록 너를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지 못할망정 오늘 밤 이신방 안에서는 모
든 절차를 귀밑머리 마주 풀어 혼인하는 양주같이 하리라."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사옵니다." 가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지ㄴㅇ
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무릎위에 앉혔던  가희아를 슬몃 내려놓고 말한
다. 
  "혼인하는 첫날 밤에 신랑이  신부의 옷을 풀어주지 아니하면 금실이 좋지 못
하다 하더라. 그래서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옷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 나라에 전
해지는 수천 년래 민속이다.  말하자면 속레의 하나다. 먼저 아름다운 전통을 지
켜서 너를 우대하는 뜻을 표하리라." 가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말없이 감
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가희아의 머리에 쓴  족두리에 손을 
대었다. 황금으로 아로새긴 금나비가 바르르 떨었다. 석웅황, 금패, 밀화,  비취옥, 
산호, 자마노가 진보석을  둥글둥글 갈아서 백옥 화관 위에 구슬  꿰듯 꽂아놓은 
보옥꽂이가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모든  것을 조용히 삼감한테  맞기고 초연히 
앉아 있는 가희아의 까만 눈과 윤을 머금은  오똑한 코는 더한층 아름다웠다. 전
하는 홀린 듯 가희아의  아름다운 자태에 다시 한 번 취했다.  전하는 이내 손을 
들어 족두리 뒤편  머리 밑에 꽂아논 조그마한 금비녀를 뽑았다.  머리쪽에 걸려 
있던 화관 족두리가 벗겨졌다. 전하는 족두리를 색상자에 담았다. 가희아의 머리
에는 황금첩지와 낭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전하는  황금첩지를 풀어 상자에 담고 
황금용잠에 걸오논 구슬  달린 댕기를 거두었다. 용점을 빼고 머리를  틀어 백옥
서북잠을 꽂아 주었다. 족두리와 낭자를 내린 가희아의 민얼굴을 더한층 고왔다. 
전하가 머리쪽을 틀어줬으니 임금이 관례를 해준 것이다. 
  "이제 너는 관례를 했다. 내 손으로 네 머리를 얹어주었으니 너는 내 아니로구
나."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가희아는 '아내'라고 까지  불러주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더한층 마음에 감격을 느꼈다. 
  "상감마마, 과분하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어수로 머리를 얹어주신 것도  일생에 
ㅇ지 못할 영광이온데, 소인이 어찌 아내의 칭호를 받자오리가. 하료하시는 말씀
만 반자와도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아내란 반드시 정실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민가로 말한다면 첩도  아내요, 
궁중으로 말한다면 후궁도 아내다. 내조해주는 사람은 다 아내라 해도 좋으니라. 
자아 밤이 깊어간다. 또  한 가지 의식을 차려보기로 하자." 전하는 미소를 지어 
가희아를 바라번다. 가희아는  전하가 도 한 가지 의식을 차려보자는  말뜻을 알
아들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처녀라 하나 기생이
었다. 신방 치르는 이야기를 귀에 젖도록 들었다. 새삼 부끄러울 것은 없으나 아
는 체해서 말때꾸할 수는 없었다. 가만히 침묵을 지켜 앉아 있었다. 전하는 말없
이 가희아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이번에 할  일도 신란이 신부한테 첫날밤에  아니 치러서는 아니되는 행사의 
하나다. 상감 같은 점잖은 분이 해괴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놀라
지도 말아야 한다." 전하는 가희아를 지그시 바라본 후에 넌짓 손을 들어 여자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가희아는 전하께서 장차 무슨  짓을 할 것을 판연히 짐작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를 바싹 오그리고 손으로  전하의 손을 덮었다. 고름을 
풀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자세다. 노랑 화장저고리에 자줏빛  명주고름을 잡았던 
전하의 손길에 수줍은 듯 반항하는 가희아의 손이 눌려진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흥그럽게 해주었다. 고름을 풀어 저고리를 벗기는  전하의 손을 본능적으로 막아
내는 여자의 태도는 확실히 처녀성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여자의 방어태세다. 가희아의  막아내는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더한층 유쾌하고 
기쁘게 했다. 
  "손을 내려라. 이같이 해야만  한평생 해로하고 의가 좋다 하더라." 그러나  가
희아는 손을 내릴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서 상감이 고름을 못풀
도록 눌러버렸다. 손을 내리면  긍정하는 표시가 된다. '옷을 벗겨주시오'하고 희
구하는 태도가 된다. 금방  반항하던 태세를 긍정이나 희구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대로 반항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가희아는 강하게  전하의 어수를 
잡았다. 전하는 쾌감을  느꼈다. 한편에서 저항하면, 한편에서 쾌한  감정을 느기
는 것은  오직 남녀간에만 있을 수  있는 투쟁의 쾌감인 것이다.  전하는 힘차게 
가희아의 손을 젖혔다.  가희아는 강하게 비트는 전하의 손길을 느끼며  입이 딱 
벌어지도록 아팠다. 맥이 풀리면서 가희아의 손은 내려졌다. 자주 고름이 풀어지
면서 가희아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옥 같은  젖봉오리는 마치 분원백자 천도역적
을 쌍을 지어논 것같이  아름다웠다. 전하의 눈에 아름답게 느꼈다. 꼭지는 주사
를 칠한 듯 붉고도 선명했다. 전하의 눈은 황홀한 경지를 넘어 아찔했다. 확실히 
처녀가 분명했다.  전하는 가희아의 입으로  몇 번인지 처녀라고  뇌까리는 말을 
들었다. 이숙번의  집에서 잔치할 때도 들었고,  대궐로 데려온 후에도 처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나 반신반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옥등잔 불빛 
아래 나타난 가희아의 유방은 순수한 처녀성을  잃지 아니한 보배로운 존재였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네가 진실로  처녀로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하의 입에서는 감탄하는 
소리가 떨어졌다. 가희아는 아무리  기생이라 하나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희아는 목소리를 가늘게 가다듬었다. 
  "상감마마, 불을 꺼주시업소서." 전하는 요포 소매를 번쩍  들어 옥등잔을 향하
여 후려쳤다. 마치  아름다운 보배를 누가 곁눈질해 앗아갈 듯한  야릇한 충격을 
느꼈다. 불은 꺼지고 한 쌍 아름다운 천도연적은 짙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 
가만한 숨결이  칠흑의 어둠속에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전하의  팔은 가희아의 
허리를 강하게  감았다. 이제는 아무도 천도진사  연적을 앗아갈 사람은 없었다. 
완전히 자기만의 것이라 생각햇다. 어둠 속에서 뜨거운 애무가 일어났다.
  "첫날밤 생사가 아직도 미진하구나." 전하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렀다. 치
마 그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가희아의 저항도 없는 듯했다. 도다시 속곳 끄
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엔 칠흑 같은 밤이 조용히 때를 옮겼다. 전하는 가희아
가 처녀인 것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생이면서 여태껏 처녀성을 지켜
왔다는 사실은 전하로  하여금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전하는  어둠속에서 가희아
를 포옹했다. 
  "너는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아름다운 몸을 백옥같이 보존했느냐?"
  "한평생 버리지 아니하실 분을 기다렸을 뿐이었습니다." 가희아의 고운 음성이 
베개 위에서 떨어졌다. 전하의 음성이 어둠 속에서 또 일어났다. 
  "하늘이 주시는 연분이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랴." 전하는 더  한 번 가희아를 
애무했다. 다음날 전하는 가희아에게 내명부의 칭호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가
만히 생각해보니 기생  가희아에게 내명부, 곧 후궁의 칭호를 내린다면  궁중 지
밀 안의 불평은 말할  것도 없고 조정 신하들의 여론이 대단할  것 같았다. 전하
는 가희아에게 후궁으로 봉하는 일을 잠깐 보류하고 대전에 가까이 두어 의대의 
거행이며, 수라상을 들고 나오는 것이며, 침소의 보전 등 모든 전하의 뒷배를 살
피게 했다. 가희아는 원래 병령백리한 여자였다. 나비같이 잽싸거ㅗ 물찬 제비같
이 몸을 놀렸다.  남자 같은 민비는 말할 나위도 없고,  경험 많고 일 잘 한다는 
상궁과 궁녀들도 안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민첩한  행동은 따라갈 도리가 없었
다. 전하는 이숙번이  바친 가희아에 의해서 다시 인생의 즐거운  쾌락을 맛보게 
되었다. 가희아가 없으면 수라상을 받을 때 밥맛이 없고, 침실에서 취침할 때 잠
이 오지 않도록 적막감을 느꼈다. 태종이 앉아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가희아가 돌
아다녔고, 가희아가 있는 곳에는 항상 태종이  있었다. 다섯 달의 세월이 흘렀다. 
전하는 깊은  밤에 가희아와 침소를 함께  했다. 전과 같이 전하의  애무가 한창 
깊었을 때 가희아는 전하의 팔베개위에서 가만히 아뢴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극히 수줍은 목소리다. 
  "무슨 말이 있느냐?" 가희아는 전하게 아뢴다고 해놓고 얼른 아뢰지 못한다. 
  "왜 말이 없느냐?"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전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말을 못하느냐?" 전하의 옥음은 조금 커졌다. 
  "전하, 소인은 황공하옵게도  용종을 배었습니다." 가희아의 목소리가 떠는  듯 
떨어졌다. '용종'이란 말에 전하의 귀가 번쩍 띄었다. 
  "네가 과인의 용종을 배었단 말이냐? 내 아들을 뱄단 말이냐?"
  "네, 그러하오이다. 아들이 될지 딸이 될지 모릅니다마는 아기를 배었습니다."
  "몇 달이 되었느냐?"
  "다섯 달이 되었습니다."
  "다섯 달, 다섯 달이면 아이가 놀겠구나."
  "네, 그러하옵니다." 전하는 가희아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가희아의 
배에 무엇이 굼틀굼틀 움직였다. 굽이굽이 배를 차며 굼틀거렸다. 전하는 신기하
기 그지 없었다. 
  "다섯달이라 했지?"
  "네, 그러하옵니다." 전하는  가만히 가희아가 대궐로 들어온 달수를  짚어보았
다. 다섯달이 분명했다. 
  "몸조심해라." 분부를 내렸다. 다시 다섯 달이 지났다. 가희아는 옥동자 아들을 
낳았다. 가희아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거니와 전하의 기쁨도 하늘만큼 컸다. 태
종은 가희아의 몸에서 난 아들 이름을  '비'라 지었다. 서자의 순위로는 첫아들이
지만 정실인 왕후 민씨가 생산한 순위로  따져본다면, 가희아가 난 '비'의 석차는 
세자 '제', 효령대군 '보', 충녕대군 '도', 성녕대군 '종'의 바로 다음인 다섯재 아들
이 된다. 태종은 '비'에게  경녕군의 칭호를 내리고, 가희아는 왕자까지 낳았는데 
그대로 궁중에 있는 기생으로 둘 수는 없었다. 혜선옹주의 칭호를 내렸다.태종은 
민후의 입을 막기 위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내명부와 외명부의 직제를 새로 마련
했건만, 아직도 새 제도를 쓰기 어려웠다. 고려때 쓰던 후궁의 칭호를 그대로 본
따서 혜선옹주라 명명한 것이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강계 기생 가희아
는 일약 태종의  후궁이 디어 혜선옹주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받았고,  그의 소
생인 '비'는 경녕군이  되었다. 왕후 민씨는 돌연하게 일어난 이  일을 보자 정신
이 아득하고 입맛이 썼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놀아나 다니던 기생년의 몸에서 난 아이에게 경녕군의 칭호가 무엇이며, 기생
한테 옹주 대접이 웬일이냐!"  펄펄뛰면서 꾸지람을 내렸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후 민씨는 가희아가 대궐로 들어온 날짜를  소급해서 조
사하라 했다. 그러나 아기가 잇은 것은 확실히  대궐 안으로 들어온 이후의 일이
었다. 흠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가희아 한 몸이라면 어떠한 흠을 잡아서라도 내
쫓겠지만, 왕자를 낳아놨으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왕자 '비'는 무럭무럭 자랐
다. 사형제를 낳아서  오붓한 왕실을 이루었던 민후의 즐거운 꿈은  여지없이 깨
어져버리고 말았다. 왕자는 왕자라 하나, 왕자 속에는 피가 다른 왕자가 섞여 있
게 되었다. 한 어머니  삼줄에 사형제가 오롱조롱 매달렸던 왕실의 계보는, 아들
은 아들이기는 하지만 딴 어머니의 피로 엉클어진 왕실의 계보를 이루기 시작했
다. 왕은 기뻣으나  왕후 민씨는 분노에 떨었다. 며칠을 두고  곡기를 끓였다. 민
후는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큰아들인 세자  '제'가 문안을 들어가고, 둘째 
아들인 '보'가 승후를 하고,  셋째 아들인 '도'가 문안을 하고, 넷째 아들인  '종'이 
사후했다. 아들들은  아머니의 병환이 난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세자 
'제'는 지난번에 야단법석이  난 고려 궁인을 동궁에  데려다두고, 무사타첩이 되
도록 처리한  소년 세자다. 어머니도  성미가 너무 급하시지만  부왕인 아버지의 
호색하는 행동이 자못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세자 '제'는  어머니께 문후를 드린 
후에 위로하는 말씀을 올렸다. 
  "어마마마, 소자는 모든 일을 짐작합니다. 모두 다 아바마마께서  지나치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누르지 아니하면 
하늘에 가득 차  있어도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세자  '제'는 어마마마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하여 일부러 아버지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평을 했다. 이러해야만 어
마마마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으드려서 병환이 속히 낫도록 해드리자는 생각이었
다. 자리에 누워서 음식을 전폐한 민후는 동궁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약간 시원해
지는 듯했다. 역시  큰아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자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본
다. 아들  중에 역시 관록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흩어진 머리를 손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동궁의 말이 옳다. 도데채 그분이  사람이냐? 사람이면 사람답게 체면을 지켜
야 하지 않느냐.  제왕의 체통으로 하고 많은 여자들에 기생년을  대궐로 돌여다
가 잠을 잔단 말이냐. 잠자는 것은 고사하고  기생을 후궁을 삼아서 옹주를 삼는 
법이 어디있느냐.  그나 그뿐이냐. 아무리  세상이 망했기로서니  그래, 기생년이 
난 자식을 군이 다 무어냐.  도대체 군은 왕의 다음 가는 자리다. 그래 기생년의 
자식을 뻔뻔스럽게 군을  봉하다니 말이 되느냐. 이러고도 이 집안이  흥한단 말
이냐." 민후는 아들  동궁을 향하여 펄펄 뛰며  하소연을 했다. 호소무처가 되어 
답답했다. 화병까지 났던  민후는 믿음직하다고 생각하는 아들을  향하여 기고만
장하게 울분을 풀어놓았다.  세자는 더한층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어마마마의 
마음을 위로한다. 
  "아바마마의 행동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말하자면 주책이 없으십니다. 
욕심으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 사물을 판단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
된 일을 어찌합니까.  증이파올시다. 엎어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 깨
진 시루는 성한  기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덮어두시는 것이 가장 점잖고, 
좋은 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어마마마, 화가 나신 것은 당연하십니다.  그러나 진
정하십쇼. 참으시어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세자 '제'의  '화를 참고 오래오래 
살라'는 말에 민후의 마음은 한결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자는 궁녀를 불렀다.
  "이리오너라." 늙은 상궁이 세자의 분부를 받고 앞에 나타났다. 
  "부르셨사옵니까?" 
  "아무리 잡숫기 싫다  하시더라도, 지성껏 잡술 것을 권해드려라. 미음은  풀내
가 나니 잣죽이나 행인죽을 쑤어드려서 잃으신 입맛을 회복해드리도록 해라." 세
자는 정중하게 상궁한테 분부했다. 민후는 과연 효자라고 생각했다.
  "입을 봉하시고 곡기를 끓으시니 황송쩍기만 했습니다. 분부대로 곧 수어 올리
겠습니다."
  "울화가 뜨시면 입맛도 없으신 법이다. 잣죽과 행인죽을 잡수신 후에는 흑임자
죽과 율무죽을  쑤어드리게 하라. 아무리  맛이 좋고 몸에  유익한 용미봉탕이라 
해도 똑같은 음식을  번번이 드려서는 아니되는 법이야. 잣죽을 잡순  후에는 행
인죽으로 바꾸고,  행인죽을 바친 후에는  흑임자죽으로 갈아드리고, 흑임자죽을 
잡순 후에는 율무죽으로 고쳐드려야 한다."
  "예, 동궁마마의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나는 어마마마의 달게 잡숫는 것을 보고 나갈 테니 곧 잣죽을 수어가지고 들
어오도록 하라." 세자의 분별을 듣자 민후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내 알들이로구나!" 마음 속으로 탄복했다. 
  "어마마마, 다시 누워  계시옵소서. 죽을 쑤어 올리는  동안 누워 계시는 것이 
좋을까 하오." 세자는 몸을 일으켜 얼굴이  초췌하고 야위고 머리가 흐트러져 산
발이 된 민왕후의 몸을 부축해서 가만히 자리에  뉘었다. 남편의 사랑을 뺏긴 민
후는 아들의 지성스런 효성에 눈시울이 화끈했다. 베개에 누워 눈물이 흥건했다. 
이윽고 잣죽이 들어왔다. 세자는 소누 잣죽 쟁반을 받들었다. 
  "동궁마마께옵서 어찌 손수 쟁반을 받드시옵니까.  소인들이 거행하올 테니 염
려 마시옵소서. 전례에 없는 일이올시다."
  "자식이 어머니께 음식을  받드는데 무슨 전례를 찾느냐.  아무리 세자라 하나 
부모 앞에야 그까짓  인작이 무슨 굉장한 것이라고  음식도 받들지 못한단 말이
야." 민왕후는 참을 수 없도록 기뻤다. 
  "미안하고나." 한 마디를 남기고 세자가  받드는 잣죽을 그릇이 비도록 맛있게 
자시었다. 세자의 마음도 기뻤다. 
  "어마마마, 그저 모든 일을 참으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민후는 지성스
런 세자의 효성에 감동되어  남편인 태종보다도 아들세자한테 크나큰 기대와 희
망을 갖게 되었다. 

  또하나의 후궁.
  이후부터 민후는  인생에 대한 희망을 남편인  태종보다 아들세자한테 붙이게 
되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러 오는  세자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 유
일한 낙이요,  즐거움이었다. 차차 구미도 돋고  기운도 차릴 수  있었다. 민후의 
마음이 약간 가라앉고  몸도 소복이 되었을 때  대전지밀에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대왕이 또 한사람의 궁녀를 건드린 때문이다. 일개 기생으로 '비'의 어
머니가 된 가희아가 순산을 하고 산실에 드러누워 있기 시작할때부터 일어난 일
이다. 여자가 한 번  순산을 한 후에는 백 일이 지나야만  건강한 사람으로 ㅗ한
원이 되는 것이다. 가희아가 산모가 되어 산실로  들어간 후에 태종의 모든 시중
은 월화 시녀가 하게 되었다. 월화는 민비의 심복 궁녀로서 성은 신씨였다. 고려 
궁인과 전하 사이에 일어났던 사랑의 일을 민비한테 고해서 민비가 대전까지 쫓
아나가게 했던 왕비의 가장 신임하는 시녀였다.  수라상을 받들어 시중드는 일로
부터 전하의 의대를 바꾸어드리는 일, 침소에  드시는 금침을 깔아드리는 일들을 
가희아를 대신해서 월화는  맡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월화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하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두 편에서 사랑이 서로 화합이되고, 해조되
어 움직여지는 행위가 아니고 한편 쪽에서만  강력하게 움직여진 행동이다. 이러
한 행위는 사랑과  정이 움직여진 행동이 아니다. 한편에서 강제로  침략한 행동
이니, 표현하는 어휘를 사랑이  아니라 침략이라 해도 좋다. 월화는 금침을 깔다
가 돌연 전하의 침략을 당했다. 호소무처였다.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일을 
당한 후에 월화는 벌벌 떨었다. 누구보다도 민비의  투기하는 성격을 잘 아는 때
문이다. 고려  궁인을 두들겨 패듯,  자기를 사매질치면  어찌하나 생각해보았다. 
조인광좌중에 머리채를 끌고 나가서 욕을 뵈면  어쩌나 생각해보았다. 더구나 자
기는 민비의  가장 신임을 받는 심복  궁녀다. 믿는 궁녀로 왕비의  사랑을 뺏는 
행동을 했다고 오해하기가 십상팔구다. 월화 자신은  강제로 침략을 당한 일이지
만, 밖에서 볼 때 누구나 넓은 생각으로보아주는  너그러운 사람은 그기 드물 것
이다. 월화는 고민 속에 들었다. 크게 가책을  받았다. 마치 죄를 범한 죄수의 몸
과 같았다. 월화는 될 수 있으면 이 행동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거미줄치듯 
쳐들어오는 전하의 침략은 점점  더 월화의 몸을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묶어버
렸다. 월화는 지극하게  비밀을 지켰다. 그러나 비밀마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월화는 전하의  침략을 당한 지 석  달이 못되어 몸에 이상스런  징후를 느꼈다. 
다달이 하던 구실이 끊어지고 입에서 군침이 돌로  구역질이 났다. 석 달이 지났
다. 뱃속에서는 완연히  아기가 놀았다. 월화는 더한층 놀랐다.  비밀을 지키려던 
굼은 사라지고 말았다. 민후를 두려워하는 생각은 더한층 심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는  없었다. 월화는 가만히 동료에게 의논했다. 심복 궁녀
는 두  가지 게책을 가르쳐주었다. 첫째는  아기를 배게 한 장본인  전하께 태기 
있는 것을 고하고,  둘재는 왕후 민씨께 자백하라 했다. 결코  자의가 아니요, 타
의로 된 일을 아기를 난 후에 왕후께 아뢰는 것보다 죽지 못해서 당한 일이라고 
정성껏 아뢰는  것이 일을 수월하게  매듭짓는 일이라고 훈수를  했다. 워로하는 
죽이면 어찌하나 하고 더한층 떨었다.
  "마마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나를 죽이시면 어찌하오?"
  "말이 그렇지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닐세. 벌을 받을 각오
하고, '어찌하면 좃습니까' 하고 사실대로 아뢰어보게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그저 이실직고로 아뢰는 것이 상책이오." 동료 나인은 월화의 마
음을 굳세게 했다.  월화는 동료 궁녀가 시키는 대로 어느날  금침을 포진하다가 
전하 앞에 나가 부복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마는 소인의 몸에 이상한 일이 있사옵니다."
  "어떠한 이상한 일이 있느냐?"
  "용자를 배 안에 모시었습니다." 태종은 기쁜 빛을 용안에 띠고 묻는다.
  "어느 때부터 태기가 있느냐?"
  "석 달이 지났습니다." 전하의 입에 웃음이 흘렀다.
  "아들을 꼭 낳아라." 전하는  월화의 어깨를 쳐주었다. 월화는 이내 엎드려  울
었다. 가만한 철읍성이 전하의 마음을 흔들었다.
  "좋은 경사다. 왜 우느냐?"
  "상감마마의 은총을 지극히 받자옵는  이 몸이오나, 왕후마마를 배반한 죄상은 
태산같이 크옵니다. 앞으로 왕후마마게옵서 이 일을 아신다 하면, 소인의 목숨을 
풀끝의 이슬이올시다. 한 몸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하오나, 배안에 든 용자의 
몸이 가엾습니다." 월화는 진심으로 울었다. 민왕후의 질투는 누구보다도  전하가 
더 잘알고 있었다. 한바탕  버구가 또 일어나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체면상 월화 
앞에 약하게 뵐 수는 없었다.
  "왕후마마께서 설마  너한테 어찌하시겠느냐.  염려 말고 물러가거라."  전하는 
의젓하게 분부를 내려  월화를 내보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장차  민후에 대
하여 어찌 말하나  하고 생각이 머릿속에 떠나지 아니했다. 인생을  비관해서 음
식을 전폐하고 몸수습을 아니해서  자리 보전을 하고 누웠던 민후는 세자 '제'의 
지성스런 효도에 감동되었다. 세자가 친히 바친  잣죽에 입맛을 붙이고 위로하는 
말씀에 정신을 가라앉혀서  흐트러진 머리와 의상을 가다듬었다.  모든 궁녀들도 
민후가 마음을 돌리는 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대전에 나가 금침을 
포진하고 돌아온 원화는 중전의 침실로 들어갔다.  월화는 왕후가 가장 사랑하는 
심복 나인이었다. 어려서부터 딸같이 길러왔다. 아직 왕후가 되기 이전부터 민후
의 앞에서 시중을 들다가 태종이  왕위에 나가 대궐에 거처하게 되니 왕후는 대
궐로 데려다가 시녀를 삼았던 것이다. 와후는  대소사를 월화한테 당부했고 비밀
을 지켜야 할 일은  월화를 통해서 행동했던 것이다. 이 까닭에  고려 궁인과 전
하의 일을 살필 때도 대전으로  월화를 내보내서 불의 증거를 당장 잡아냈던 것
이다. 이러한  경과를 지낸 후부터  민후는 더한층 월화를  믿음직스럽고 귀엽게 
생각했다. 월화는 곧 민후의 팔이요 다리였다. 민후는 월화를 의지해야만 든든했
고 월화는 민후가 계시므로 살아 갈 수 있는  든든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조용
히 침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월화의 모습을 바라본 민후는 미소를 지어 물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 슬픔과  분노와 한탄 속에서 영영 웃음을 잃었던  중전마
마였다. 세자의 문후를  받아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딸자식과 같은  월화를 보고 
웃는 미소다. 중전의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바라보는 월화의 마음도  반짝 하고 
반가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숨이 두근거렸다. 덜렁 하고 쓸개가 뚝 떨어지는 
듯했다. 장차 이  아름답지 모한 일을 어찌  이뢰랴 했다. 자기를 믿고 알아주고 
반가워하는 왕후의 웃음을  바라보니 마음은 더한층 괴로웠다.  가슴이 두근대고 
얼굴이 붉어졌다.  월화는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산란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어디 갔다 왔더냐?"  역시 미소를 지어 조용히 웃는 왕후의  얼굴이었
다. 월화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대전에 나가서 수라상을 거행하옵고  금침을 포진해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월
화의 목소리는 떨렸다. 민후는 월화의 마음 속을 알 까닭이 없었다. 
  "강계 기생도 애를 낳고 들어앉아  있으니 전하께서는 마음이 달떠계시겠구나. 
군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서 어찌 견디시더냐."  민왕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하
에게 야유를 던졌다. 민비의  비틀어진 말씀에 월화의 간은 또 한  번 떨어질 수
밖에 업성ㅆ다. 마치 자기의 일을 소상히 알고 묻는 듯했다. 죄밑 같아서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자기와 전하 사이의 비밀한 일을  민비가 어느 틈에 벌써 알았나 
하고 의심해보았다. 
  "어떠냐, 전하의 눈치가. 이새는 조금  가라앉는 눈치더냐. 또다시 어떤 년한테 
손을 대는 일은 없더냐?" 왕후 민씨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월화는 말을 듣고 
가만히 한숨을 지었다. 민후의 말씀은 자기의 일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
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민후가 말씀한 이일을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떤 년한테 손을 대는 일은 없더냐'하는 이 물음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가슴은 
또 한  번 덜컥떨어졌다. 전하는 어떤  년이 아니라 결국 자기한테  손을 대어서 
아기까지 배게 만들어놓았다. 이 말씀을 어떻게 대답해서 아뢰나 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절호한 기회다.  자기 신상의 일을 아니 말씀드린다면 모르되  기왕 말씀
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온 마당에 절호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
했다. 월화는 민비  앞에 엎드렸다. 왈칵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소리를 내어 느
껴 울었다. 별안간 느끼는 울음소리에 민후의 눈이 둥그래졌다.
  "웬일이냐? 별안간 왜 우느냐?"
  "마마, 소인을 죽여줍시오. 배은망덕한  이 몹쓸년을 죽여줍시오." 월화는 엎드
린 채 울음 반 말 반 하소연을 했다. 
  "네가 무슨 배은망덕을 했기에 이같이 우느냐?"
  "소인은 천참만율할 년이올시다. 그저 수인을 죽여줍시오." 
  "무슨 짓을 했기에 네가 배은망득을  했다 하느냐? 갑갑하고나. 어서 말해보아
라." 민후는 엎드려  느껴 우는 월화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월화는 치마끈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누르고 아뢴다. 
  "바로 석 달  전 초승께 일이옵니다. 강계 기생 가희아가  순산이 되어 산실로 
들어간 후에 대전에서 수라상과  의대며 금침을 받들어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리
셨습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아라. 아는 일이다." 민비의 얼굴빛은 금방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죽
을 죄를 졌다는 둥 배은망덕을  했다는 둥 느껴 우는 모든 행동이 보통 일이 아
니라, 큰일을 저지른 듯했다. 큰일은 별것이  아니다. 호색하는 대왕이고 보니 고
려왕실의 궁인이나, 강계  기생 가희아한테 저지른 추잡한 일을 월화한테  또 저
질렀구나 하고 얼굴에 찬바람이 동지 섣달  삭풍이 불어오듯 일어났다. 워로하는 
민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가  꽉 질렸다. 입술이 빳빳했
다. 혀가 굳었다. 얼른 뒷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어서 말을  해보아." 민후의 옥음은 엄숙했다.  월화는 죽음을 각오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날 밤  수라상을 물리고 금침을 포진하는  도중에 전하께옵서 돌연 침실로 
듭시와 소인을 힘으로  범하셨습니다. 소인은 무척 반항했사오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보통 어른이  아니시고 하늘을 대신하신 상감마마이시고보니 
옥체를 건드려 저항할  수는 없고 그저 소인의 몸만 피하려  노력했사옵니다. 더
구나 마마께옵서 소인을 믿으시고 귀여워하시는 생각을 하오니 차마 그 일을 받
다들일 수  없었습니다. 소인은 울면서 살려줍소사  하고 미친 듯 부나비  날 듯 
피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최후에 가서는 힘으로 당해내는 재주가 없었습
니다. 결국은 처녀의  몸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월화는 말을 마치자  왕비앞에 
엎드려 다시 흐느꼈다. 
  "이년, 고얀년, 내가 너를 자식 기르듯  해서 심복으로 삼아왔는데 네 이년, 네
가 먼저 꼬리를 쳐서 구미호 짓을 해가지고 전하를 고혹시켜 놓고 이제 와서 변
명을 하느냐?" 왕비는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에 다시 질투의  불길을 뿜었다. 눈
에서도 불이 일었다. 쌍심지가 되어 활활 두 눈에서 타올랐다. 
  "아니올시다. 소인이  어찌 감히 꼬리를 쳐서,  전하를 유혹하겠사오니까. 하늘 
같은 마마의 은덕을  생각한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추호라도  먹었으리까. 그
저 통촉을 내려주시기 바라오." 
  "그래, 그 뒤에 어찌 되었느냐?"
  "석 달 후에 몸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태아가 생긴 듯하오이다."
  "배안에서 노느냐?"
  "예, 그러하오이다." 왕비의 노기는 절정에 올랐다. 벽에 걸린 불자자루를 거꾸
로 들어 사매질을 쳤다.
  "고얀년! 음분한년!" 왕비의 본  성격이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격렬하게 일어났
다. 워로하는 아픈 것보다도  그때, 그 심정을 몰라주는 왕후마마가 너무나 무정
하다고 생각했다.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천지개벽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몸이 으스러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불자대로  아프게 내리치는 왕후의 매를 
달게 받았다. 괴상하게  우는 월화의 목소리를 듣고 궁녀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
들었다. 감히 후마마의  침실로 들어가지는 못해 우둥우둥 밖에 모여  안의 동정
을 살폈다. 
  "웬일이냐? 무슨 변이 또 일어ㄴ느냐?"
  "월화가 들어갔어. 월화가 대전  전속이 되더니 탈이 또 난 모양이지."  궁녀들
은 더한층 속삭였다.
  "월화가 죽느냐, 팔자를  고치게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로구나." 왕비의  목소리
가 침전에서 새어나왔다. 
  "이년, 보기 싫다.  나가거라." 왕비는 월화한테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월화
는 흐트러진 의복의 매무새를 바로잡고, 왕비의 앞에서 추장해나갔다. 월화가 침
실문을 열고 전 밖으로 나가려 하니 엿듣던 궁녀들은 흩어지고 세자 '제'가 늙은 
상궁을 앞세우고 밤문안을  들어오는 길이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월화와 함께 
놀았다. 아버지 태종이 아직 왕위에 나가지 아니하고 보통 왕자로 있을 때, 워로
하는 '제'를 업고 본집과 외가로 왕래하면서 '제'의 소꿉동무도 된일이 있었다. 월
화의 나이 '제'보다 훨씬 위가 되니  '제'는 누님처럼 따르기도 했다. 아버지가 왕
위에 나가고 어머니가 왕비가 된  후에 월화는 어머니를 모시어 대궐 안에 있었
고 '제'는 세자가 되기 전에  외가에 많이 있었으니 대궐 안에 들어간 후에는 자
주 상종을 못했으나 '제'는 월화를 아직도 잊지 아니했다. 
  '제'는 밤깊게  어마마마께 문안을 들어오다가  방문 밖에서  월화와 마주쳤다. 
월화의 눈은 퉁퉁 붓고 눈물  흔적이 아직도 도화양협에 남아 있는데 윤이 흐르
는 검은 머리는 흩어졌고,  웃매무새는 말이 아니었다. 월화는 세자와 눈이 마주
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세자는 즉각적으로 '월화가 어마마마께 큰 꾸지람을 들
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월화는  뜻밖에 세자를 뵙고 깜짝  놀랐다.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옴치고 뛸 수 없었다. 흐트러진 자기 자신의 머리와 산란해진 의
복에 관심을 두면서 눈으로 인사를 올리고 부끄럼을 이기지 못해서 행각 밖으로 
줄달음쳐 나갔다. 세자는 수상하게 생각했다. 늙은 상궁을 돌아보며 묻는다. 
  "월화 저 애가 왜  눈이 저리 퉁퉁 부었소?" 늙은 상궁은 궁녀들을 통해서  중
전마마께 매를 맞고 꾸중을  들은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세자
께 아뢰기에는 너무나 난처했다. 
  "모르겠습니다." 간단히 대답했다.
  "모르다니, 노상궁이 모를 리가  있나. 꼴을 보니 보통 꾸지람을 들은 것이 아
닌 성싶은데.  머리꼴하며 옷매무새하며 말이 아니로군.  어찌 상궁이 모른단 말
요." 세자의 추궁은 급했다. 
  "월화가 초저녁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무슨 말씀인지 아뢰다가 왕비마마의 언
성이 높아지고 톡톡히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소인들은 감히  들어가 여쭈어보지 
못했습니다. 황공무지하여이다. 더 이상 어뢰옵지 못하겠습니다." 세자는 지금 월
화가 막 나오는 것을 보니 상궁의 대답이  꾸며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
자는 조용히 모후의 침실문을 열었다. 조용했다. 아무도 없다.
  "누구냐?" 날카로운 모후의 성음이 들렸다. 
  "'제'올시다. 세자올시다."  세자는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장지 안으로 들어갔다. 
어마마마인 민비는 자리에 누웠다가 세자가 들어온 것을 알고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띠고 일어나 앉았다. 
  "오오, 세자냐. 밤늦게 문안을 또 들어왔구나." 감격한 어조다.  그러나 불빛 아
래 비치는 모후의 옥안은 말이 아니다. 머리는  흐트러지고 눈을 퀭하게 움쑥 들
어갔다.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물결쳐 흘렀다. 몇 달 전부터 마음을 가라앉히
고 잣죽이며 깨죽을 들어서 신색이 차츰 좋아졌던 어머니의 모습은 다시 초췌해
지고 두 눈에는 이글이글 화기가 일었다. 마치  고려 궁인을 끌어낼 때 나타났던 
그 모습이었다. 가희아가 기생의 몸으로 후궁이  되어 삼일신방을 치렀다는 소식
을 듣고 펄펄 뛰던  그때 그 얼굴의 추한 모양과 비슷했다. 세자  '제'는 마음 속
으로 무슨 일이 또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가 들어올 때  문 앞에서 워로하
의 눈이 퉁퉁 부어서 울고 나가는 모양을  보았다. 확실히 월화와의 사이에 어떤 
좋지 못한 이링 일어난듯했다. 그러나 워로하는 어마마마의 교전비였다. 어릴 때
부터 외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본집으로 와서 한집안 식구가 되어 딸자식같이 
살아온 처녀 색시였다.  고려 궁인이나 강계 기생 가희아보다도 나이가  훨씬 아
래다 아버지께서 비록 호색을 할망정, 설마하니  어마마마의 교전비인 딸자식 같
은 월화한테까지 손을  뻗쳤을 리는 만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속에 워로하가 
휩쓸려 들어가서 말초사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세자는 이쯤 해석을  내리고 어
마마마께 묻는다. 
  "어디 옥체가 불편하오십니까? 불편하시다면 숨기지 마시고 전의를 불러 맥을 
짚어보도록 하옵소서. 아까 아침 문안을 드리올 때도, 기분이 매우 좋으셨사온데 
이제 뵈니, 별안간 혈색이 좋지 아니하신 듯 하오이다."
  "별일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머니 왕비는 아들한테 민망하다고 생각
했다. 
  "아니올시다. 옥체를 범연히  생각하시어서는 아니되십니다. 그저 옥체와  마음
을 편안케 하시어 만수무강하시옵서서."  세자의 지성으로 토로하는 '만수무강'한 
마디에 민비는 왈칵 슬픔이 폭발했다. 
  "죽느나만 못해. 이골 저골 다 아니 보고 죽느니만 못해."  어마마마는 말을 마
치자 그대로 느껴  울었다. 세자는 쓰러져 느껴 우는 어마마마를  ㅂ축해 이르키
며 등을 어루어 쓸었다. 
  "왜 이러십니까? 그저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왕비는 한숨을 짓고 말씀한다. 
  "옥체를 보중하려 하나 알 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항상 세자의 효성을 생각
해서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모든 일을 참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를썼건
만, 사나운 바람이 자꾸자꾸  불어와서 내 마음을 흔드는 구나. 폭우가 쏟아져서 
내 몸을 적시는구나. 내 몸을 안정시키고 싶건만  사나운 바람은 끊일 사이 없이 
내 몸을 흔들어주는 구나. 나는 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건만 사나운 비는 
내 마음을 괴롭고 차갑게 만들어주는구나. 이러하니  내 어찌 배겨나겠으며 사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어마마마는 아들의 몸에 의지하여 기막힌 
하소연을 한다. 
  "어마마마, 무슨 원통하신 일이  또 생기셨습니까?" 세자는 어마마마를 껴안았
다.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도대체 궁중이 이같이 추하고 누해서 어떻게 배겨 사느냐 말이다. 상감마마란 
분은 교전비를 또 건드려놓았구나. 이 꼴이  되었으니 내가 관음보살의 후신이라
도 배겨나겠느냐 말이다. 기막히지  아니하냐. 자식같이 길러서 이 꼴이 무슨 꼴
이란 말이냐." 세자 '제'도  기가 막혔다. 설마하니 아바마마가 아무리 호색을  한
다 하나 딸자식같이  길러낸 어마마마의 교전비까지 범할 줄을 몰랐다.  아까 문 
밖에서 월화가 눈이  퉁퉁부어서 나갈 때도, 지금 어마마마의 손을  마주잡고 등
을 어루만져 위로해드리면서도,  '월화가 어떠한 일에 힙쓸려서 말초사에 들었구
나' 생각했을 뿐, 이같은 일이 아버지와 월화 사이에 일어났을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너무나 심하구나!" '제'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너무나 아연했다. 어마마마를 위
로할 말이 없다. 
  "저년, 월화년을 능지처참해서  죽여야 하겠다." 어마마마의 입에서 폭언이  떨
여졌다. 입귀퉁이에서 허연  거품이 제거품직듯 뿜어졌다. 어마마마의 분노와 질
투는 감정의 절정에  올랐다. 세자는 어머니 마음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
라앉히기 위해서 참을  삼켰다. 세 번, 네 번  삼켰다. 눈을 감았다. 입술 사이로 
가만한 한숨이 흘럿다. 짐승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러고 만백성의 예의와 염
치를 어떻게 훈계하고 가르칠 것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세자! 이러고 내가 살아야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투기를 한다고 말
하겠지만 글세,  왕실꼴은 장차 어찌 되며,  나라꼴은 어떻게 된단  말이냐. 금수 
아니냐. 금수로서  나라를 어찌 다스린단 말이냐.  여기다가 월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다. 씨를 배었다. 씨를 배어놨으니 이일을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저년을 죽
여 없애는 수밖에 없다." 민후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월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다. 씨를 배었다'하는 모후의  말을 듣자, 세자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눈을 감아 가만히 생각해본다. 일을 또 한 번 무사하게 만들
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부왕 되는  아버지의 소위를 생각한다면  구역이 나서 
아무 첨견도 하고 싶지  아니했다. 그대로 캐어묻지 않고 내버려두고 싶었다. 어
마마마가 월화를 죽이든  살리든 처분대로 하시라고 내맡겨두고  싶었다. 아바마
마와 어마마마가 싸우건 말건, 추태를 부리든  질투를 하든간에 도무지 간섭하기 
싫었다. 그러나 이제  어마마마께 월화의 몸은 빈몸이 아니라 씨가  들었다는 말
씀을 듣자 세자의 심경은 각도를 달리하여 변해졌다. 
  '월화도 살리고 어린애도 구해야  한다!' 세자 '제'는 맘 속으로 이같이 정했다. 
질투와 분한으로 펄펄 뛰는 어마마마를 다시 위로한다. 
  "아바마마의 행동은 좋다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자식의 도리에 이 일까지 간
할 수는 없고 실로 딱한 노릇이올시다. 어서  하루바삐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 몸을 단속했으면 합니다." 
  "개꼬리 삼 년 묵어도 황모아니된다는 말마따나 너의 아버지 버릇이  고쳐지느
냐. 한 번 주전부리에  맛을 붙여보아서 참지를 모ㅅ고 저 짓을  하니 암만 해도 
뜨거운 형상을 좀 보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월화년을 죽여버려야 한다." 민비
는 또 한 번  월화를 죽여야 한다고 펄펄 뛴다. 세자 '제'는  좋은 낯으로 어마마
마를 바라 뵙고 아뢴다. 
  "어마마마, 죄는  아바마마한테 있지 월화한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소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기색을 다시 살피며  한 마디 던져보았
다. 
  "어째 그년한테 죄가  없단 말이냐. 계집이 꼴를 치니까 그런  일이 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합니다. 소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월화는  어려서
부터 어마마마의 교전비로  자라난 심복이올시다. 아무리 천하의  요망스런 계집
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양심이 있는 법이올시다.  월화는 어마마마의 마음이 괴로
우실 것을 뻔히 알 터인데 월화 제가 먼저 아바마마를 고혹시킬 수는 없을 것입
니다. 소자는 오히려 월화가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가여워? 그년이 가여워? 내  자리를 뺏으려 하는 년인데 그년이 가엾단 말이
냐. 자식까지  낳아보아라. 네 자리는 노리지  않을 줄 아느냐.  방석이나 벙번도 
처음에는 얌전한  계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옆에서 충동질을 하고  영감이 젊은 
후실이나 첩한테 미치게 되면  큰아들제쳐놓고 태자도 봉하고 세자도 봉하는 것
이다. 너무 인심이  좋아서 동정만 해서는 아니된다."  민후는 계모 되는 강씨와 
그의 소생이었던 방석,  방번의 예를 들어 세자의 자리도 위태롭다고  펄쩍 뛰었
다. 세자는  부드럽게 얼굴빛을 지어  어마마마의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위로하는 말을 사뢴다.
  "어마마마, 소자의 걱정은 마시옵서서. 소자는 이미 장성해가는 몸이올시다. 아
무 염려도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방석은 애당초부터 윗분들을  제쳐놓고 세자가 
되었고, 소자는 정당한 큰아들로  세자가 된 몸이니, 방석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소자의 일은 방심하옵소서.  하하하." 세자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명랑하게 웃었다. 
  "믿는 나무에 곰이 핀다는 말이 있다. 세상일을 누가 안다더냐.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진 임금이 후궁한테  미쳐서 폐세자 폐태자를 한 일이 '사기'에도 오죽 
많으냐. 방심할 일이 아니다." 세자는 다시 간곡하게 사뢴다.
  "어마마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까짓것 임금 노릇 아니하면 그만  아니오
리까. 하하하. 임금이 무어 그리 좋은 줄  아십니까. 천하에 제일 귀찮은 것이 임
금의 자리올시다. 세상 천하 만가지 일에 임금이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짜
로 임금 노릇을 잘 하려면  밥을 먹을 틈이 없고 자고 싶으나 잘 시각이 없습니
다. 크게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과 외교로부터, 작게는 비가 아니 
와서 가물어도 걱정,  비가 너무 와서 홍수가  져도 근심, 백성들 자신이 못나고 
게을러서 굶주려도 걱정, 일기가  고르지 못하여 역병이 돌아도 근심, 날이 밝아
도 걱정, 밤이  깊어도 걱정, 한평생 근심과  걱정인 임금의 자리가 그다지 좋을 
것 없습니다. 하하하. 그저  소자는 두 분 전하게옵서 법으로 세자를 봉하셨으니 
세자가 되었을 뿐, 나중에  임금이 되는 것은 그다지 기뻐하지도 아니합니다. 하
하하. 어마마마, 가만히 생각해보시옵소서. 저 끝없는  넓고 넓은 푸른 하늘로 암
놈, 수놈이 짝을 지어  맨 데 없이 훨훨 날아가는 백학  두루미의 모습을 바라보
십쇼. 월마나 헌칠하고 자유스럽습니까. 소자는  그리 생각합니다. 임금의 자리보
다도 세자의 좌처보다도, 매인 데 없는 왕자의 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
마마마, 그렇지  아니합니까. 소자는 세자 노릇을  하지 말라면 선뜻 내놓겠습니
다. 원통하게 생각할  소자는 아닙니다." 세자는 어마마마를 향하여 더한층  쾌활
하고 명랑한 웃음을 웃었다. 어마마마의 울적한 마음을 풀어드릴 작정이었다.
  "세자야, 네 마음은 어찌  그리 넓으냐. 너만 같으면 이 세상에 아무런 싸움과 
시비도 아니 일어나겠다." 
  "그렇지 아니합니까. 한세상  살고 갈 것을 시비하고 싸워서 무엇합니까.  하하
하." 민비의 꽁꽁  뭉쳐진 마음은 세자의 웃음  가락 속에 흩어져버렸다. 세자는 
다시 어마마마께 웃는 낯으로 고한다.
  "어마마마, 월화는  제 자신이 범한  죄가 아니올시다. 죽이시어서는 아니됩니
다." 세자는 죽인다는  말을 일부러 강한 말투로  표현했다. 민비는 세자의 넓고 
넓은, 폭이 큰 말을 들은  후에 가슴과 마음이 전보다 훨씬 풀렸다. 그러나 얼른 
대답을 아니했다. 
  "어마마마, 월화는 심복이올시다. 어마마마의  심복이옵니다. 앞으로 후궁은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어마마마의 심복은 생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마마
마, 어마마마께서는 새로 심복을 만들어야 하실 판인데, 이는 심복마저 죽이신다
는 말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월화를 죽이시면 쌍죽음이 납니다. 뱃속
에 있는 아기까지  죽이게 되지 아니합니까. 깊이 통촉하시어 월화가  계속 심복
이 되도록 하시면서 높은 성덕으로 또 위엄을 보이시어 왕후의 성덕을 누리시기
를 소자는 간절히 바랍니다." 세자는 이제 너털웃음도 웃지 아니했다.
  "그리하셔야 국모의 덕이 손상되지 아니하고 나라가 바로잡힐 것이올시다." 민
비는 여러 차례 간곡하게 아뢰는 세자의 말에  마음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가
만한 한숨이 실그러진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세자의 부탁대로  하련다." 민비는 마침내 워로하를  아니 죽인다고 허락하는 
말씀을 내렸다. 세자는 기뻣다. 
  "감축하옵니다." 말을 마치고 넙죽 절을 올렸다. 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바라
보는 민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어렸다. 
  '이같이 착하고 어진 아들을 둔 그의 아버지는  어찌해서 저렇듯 욕심 많은 행
동을 하나." 하고 생각해 보았다. 
  '욕심만이 아니다. 정력  절륜의 야수의 행동이다. 나라의  정권을 뺏듯 여인의 
색향을 뺏는  야욕이다.' 민비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또다시 분노가 불길처럼 
솟았다. 
  "세자의 지극한 정성과 넓은 생각을 본받아 월화한테는 더 이상 벌을 주지 아
니하련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 너의 아바마마께 월화까
지 건드린 죄는  수죄를 해야만 하겠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점점  버릇이 자라
서 못된 짓을 할  것이다. 아주 싹을 잘라버려야 하겠다." 세자는 어마마마의 심
정을 짐작했다. 빙긋 웃으며 아뢴다. 
  "부부의 싸움은 칼로 물을 베는 듯하다  하더이다. 아무리 끊으려 하시나 ㄱ어
질 수 없습니다. 한 번 톡톡히 싸움을 해보십시오."
  세자는 드높게  웃음을 웃어서 어머니  마음을 위로했다. 세자가  물러간 후에 
평지풍파가 일어났던 궁중은 다시 조용했다. 금방 죽음을  당할 줄 알고 눈이 퉁
퉁 부어 울고 있던 월화도  그 슬픈 신세를 마음 속으로 울다가 이내 잠이 들었
다. 당장 곧 큰일이  일어나는 줄 알고 벌벌 똘고 있던  궁녀들도 세자가 물러간 
후에 중전 침실에 아무 소리가 일어나지 아니하니 제각기 처소로 돌아가면서 안
도의 한숨을 지었다. 두렵고 황송해서 감히  침실로 들어가지 못했던 제조상궁도 
비로소 후의 침실문을 열고  들어가서 왕비의 동정을 살피면서 이부자리를 깔았
다. 민비의 태도는  아까완 전연 딴판이었다. 얼굴빛이 부드러웠다.  말소리도 딴
판이었다. 상궁과 궁녀들은 이번에도 세자의 간곡한  말씀이 이렇듯이 마마의 마
음을 돌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모두 다 세자의  큰 덕을 우러러보는 마음이 간절
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민비는 세수간 나인을 불렀다. 수세를 한 후에 머리
를 빗었다. 
  "미음을 가져오너라. 기운을 좀  차리겠다." 상궁과 나인들은 기뻤고, 후마마께
서 자진해서 조반을 청하시니, 이제는 마음이 활짝  풀려서 다시 전의 민비로 돌
아가나보다 하고 마음이 모두 다 거뜬했다.  상궁과 궁녀들은 부랴사랴 녹두죽을 
쑤어 바쳤다.  녹두는 서늘한 성질을  가진 곡식이라서 예로부터  화기와 독기를 
제해주는 음식이었다. 민비는 상을 받고 물었다.
  "녹두죽을 쑤었느냐?" 
  "마마께서 하도  구미가 없어 하시기에 별미로  녹두죽을 쑤었습니다." 왕비는 
기분좋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워 좋구나." 
  "녹두죽은 화기를 누른다 하기로, 구미도 당기시게 할  겸 쑤어봤습니다." 상궁
은 화기를 눌러뜨리기 위하여 녹두죽을 쑨 것을 은근히 표시했다. 
  "너희들의 지극한  정성을 잊을 수 없구나."  민비는 탄식조로 말씀을  내렸다. 
한평생을 같이하려고 두렵고 무서운  혁명까지 일으켜서 죽음 속에서 다시 삶의 
영광을 취했던 상감은 이제  지난날의 고생과 맹세를 잊어버리고 한평생의 배우
자인 자기를  소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인 상감에 비해서  아드님 세자의 
효심과 궁녀들의 지성에 인간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고맙다고 느꼈
다. 상궁은 음성을 나직히 하여 다시 고한다.
  "소인들의 정성은 대단할  것이 무어 있습니까마는 세자마마의 지극하신 효심
이야 하늘이 내신 쇼자십니다. 어제만 해도  밤 늦도록 어마마마를 위로해드리시
고 조금이라도 입맛을 붙이시도록 저희들에게 음식을 분별하시고 동궁으로 나가
시는 그  모습은 소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과연  세자께서는 옛적의 
증자님 같으신 효자십니다." 
  "아닌게 아니라 큰아들은 남부럽지 않게  잘 두었느니라." 왕비의 입가엔 웃음
까지 돌았다. 왕비는 자리 조반을 마친 후에 상궁에게 분부를 내렸다. 
  "월화란 년을 불러들여라."  왕비의 목소리는 장중했다. 웃음빛이 입가에  돌았
던 얼굴엔 금방 화기가 사라지고 가을 서리가  날리는 듯 차가웠다. 상궁의 가슴
이 둑 떨여졌다.
  '월화를 기어코  죽이시려나보다!' 상궁은 금방  변해진 민비의 얼굴과  음성을 
보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손과 발이 떨렸다.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대청으
로 향해  나갔다. 밖에 있는  나인들도 워로하를 대령시키라는  분부가 내렸다는 
말을 상궁한테 듣고 역시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엔 월화가 요절이 나는구나!'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모두들 
수군거렸다. 상궁을 통해서 들라  하는 분부를 받은 월화는 당황했다. 마음을 진
정할 수 없었다. 간밤에 중전마마께서는 역정이  높으시어 보기 싫다고 나가라고 
고함을 치셨다. 당장 죽이라는 영을 내리시지는 아니했지만, 마음을 놀수는 없었
다. 오늘 새벽같이  부르시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제는 꼭 죽게  되었다고 생각
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당해보지 못했지만, 죽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라 
느꼈다. 마음이 떨렸다.  슬펐다. 여기 도 한 가지 슬픔이  월화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뱃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자라니기 시작하는 조그마한 물체다. 이 물체는 보
통 사람의 정기가  아니다. 세상 인간 중에  제일 높고 거룩하다는 상감의 씨다. 
몇 달만 지나면 한  사람 어린이의 생명이 될 것이다. 자기가  죽게되면 이 생명
도 죽고 말  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결에  모성애를 느꼈다. 어
떻게 임금의 씨를 살릴 수는 없는가 생각했다.  앞으로 이 임금의 씨가 어찌하면 
큰일을 할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가 죽게 되면 두 몸이 함께 죽는다.
눈물이 앞을 탁 가렸다. 슬픔이 복받쳤다. 월화는 상궁의 뒤를 따라 왕후의 침실
로 향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의 모습과 같았다. 죽음을 직면하
고 가는 길이었다. 곱상그려  떨었다. 왕비 민씨는 곱상그려 들어오는 월화의 모
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기가 등등했다.  눈에 다시 살기가 쨍하게 서
렸다. 순간 왕비는 끙하고  큰소리를 쳤다.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화기를 진정
해서 누르는 소리다. 간밤에 세자 '제'의  월화를 죽여서는 아니된다는 말을 생각
하고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질투의 화염을  참는 소리다. 상궁은  왕비의 눈치를 
살피고 월화는 두  손을 마주잡아 고개를 숙이고 섰다. 왕비의  우렁찬 목소리가 
떨어졌다. 
  "월화야, 이년. 너를 곧 참형에 처할 것이지만 세자저하의 간곡한 청을 들어서 
목숨을 부지해주기로 한다. 알아듣겠느냐?" 꼭  줄일줄 알았던 왕후가 세자의 청
을 들어 살려준다는  옥음을 내리자 월화는 반신반의했다. 자기 귀를  의심할 지
경이었다. 월화를 살려준다는  왕비의 한 마디 말씀에 살얼음판 같던  왕비의 침
실엔 화기가 은은히 돌기  시작했다. 상궁의 얼굴에 활짝 웃음빛이 돌았다. 상궁
은 왕후마마의 앞에 큰절을 올리고 부복했다. 
  "황공 감격하여이다. 월화를 살려주신다는 크나큰 말씀, 억이 사해에  가득하옵
니다. 월화 당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마마의 곁에 시측해 있는  소인들 부색 명
은 하해 같은 성덕에 감읍할 뿐이옵니다."  반신반의하면서 멍하게 서 있던 월화
는 상궁의 치하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왕비가 자기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말씀이 
정말인 것을 알았다. 고마운 감정이 왈칵  솟구쳤다. 콧부리가 찌르르 했다. 눈물
이 핑돌았다. 그러나 입은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너무나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아
니했다. 상궁은 큰절을 올리고 월화의 몸을 끌었다. 
  "바다 같고 태산 같으신  중전마마의 큰 덕을 입어 재생지인이 되었으니 결초
보은을 하고 간뇌도지를 해도 부족하오. 어서어서  중전마마께 절을 올려서 살려
주신 은혜에 사은을 하시오." 월화는 이미 상감의 용종을 잉태한 여자다. 상궁은 
존대하는 말을 써야만 했다. 상궁은 말을 마치자  월화의 몸을 이끌어 왕비 앞에 
큰절을 올렸다. 월화는 상궁이 시키는 대로 왕비 민씨께 큰절을 올렸다. 이미 목
숨을 살려주기로 허락을 내린 민비였다. 피하지 아니하고 절을 받았다. 
  "게 앉거라." 왕비는 장중하게 앉으라는 영을 내렸다. 음성이 약간 부드러웠다. 
월화는 황송해서 감히 앉지를 못한다. 
  "앉으라면 앉아라." 왕비의 음성은 더한층 부드러웠다. 
  "앉으라는데 어서 분부를 받드시오." 상궁이 권했다. 월화는  몸을 굽혀 부복해 
엎드렸다. 왕후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말씀을 내린다. 
  "아까도 말했거니와 너를  살려주는 것은 순전히 세자저하의 간족하게 청하는 
말씀을 들어서 너를 살려주는 것이다. 세자의 은혜를 한평생 잊지 말아라." 월화
는 "네"하고 모기 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옵서 너를 살려주라고  하신 까닭을 알겠느냐?" 왕비는 다시  엄숙
한 얼굴빛을 지어 월화를 바라본다. 
  "소비 감히 세자의  뜻을 촌탁하오리까. 황공무지로소이다." 민비는 다시  장중
하게 말씀을 내린다.
  "너는 앞으로 후궁이  되더라도 나의 심복이 되어  전의 교전비로 있을 때 그 
충성을 버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소비 감히 추호인들 옛마음을 버리고 교만 방자하리가. 오늘 지금이 시각까지
도 마마를 우러러뵙는 마음  태산 같사옵고,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그저 아까까
지도 죽여주신다 하여도 일호 반점 원망을 품지 아니하였습니다." 월화는 소인이
라 하지 아니하고 교전비로 있을 때 지칭하던 소비란 말로 제 몸을 낮추었다. 
  "네가 앞으로  자식을 낳아도 왕자를 낳았다  하여 세자저하께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된다." 
  "세자저하는 소비를 살려주신  재생의 은인이십니다. 소비 어찌  교만하오리까. 
지난날 마마를 모시던 옛 월화로만  생각해주옵소서." 월화의 지성스럽게 아뢰는 
말씀에 민비의 돌같이 딱딱했던 얼굴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앞의 일이 환하다. 전하께서는 이후에도 많은 궁녀들한테 손을 대실 
것 같다. 앞으로 너는 나의 시복이 되어 모든 궁녀들의 동정을 보살펴다오. 나도 
또한 전과 같이 너를 대하리라." 
  "마마의 바다 같으신 은덕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마마와 세자저하를 위하옵는 
마음 추호도  변함이 없사옵니다. 분부대로  모든 후궁과 왕자들의  일을 일일이 
살피오리다." 
  "네가 만약 명심한다면 너에게는 저절로 큰  복이 내리도록 하리라. 앞으로 네
가 후궁이 되어 옹주의  칭호를 받는 것은 내가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
지 다른 궁녀들의 칭호와 후궁은 전혀 인정하지  아니할 것을 결심했다. 너도 내 
태도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왕비마마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다만 일편단심 왕비마마와 동궁저하
의 너그러운 뜻을 받들 뿐이옵니다." 
  "대전마마께서 첫 번 손을  대신 고려 궁인은 춘방에 있어 세자저하의 감독을 
받고 있으니 너한테는 부탁할 필요가 없다. 너는  강계 기생으로 후궁 명색이 된 
가희아와 그의  몸에서 난 왕자의  일동일정을 살피라. 그리고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궁인들의 행동도 손살피듯 알아서 아뢰어라."  왕비는 세자가 권한 대로 월
화를 전과 같이 심복을 삼아서 모든 지밀 안 동정을 살피라고 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물러가거라." 왕후는 월화를 내보낸 후에 상궁을 불렀다.
  "나의 탈 것을 등대시켜라. 대전으로 향하리라." 왕비는  또다시 전하와 대결할 
결심을 했다. 옥교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중전이 대전에 친림하는 
일은 없었다.  대전 궁녀들은 황황히 중전을  맞이했다. 태종은 때마침 가희아와 
함게 서온돌에 있다가 상궁한테 중전이 듭시었다는  말을 들었다. 가희아는 황망
히 몸을 피하고  태종은 의복을 바로잡아 왕비를 맞이했다. 태종과  왕후가 한자
리에 모인  것은 고려 궁인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처음 되는  일이었다. 서로들 
서먹서먹하고 안정되지  아니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왕비는 
거대한 몸집에 위풍이 늠름한 얼굴을 번쩍 들어 태종을 바라본다. 
  "전하를 대해 뵌 지  오래만입니다." 사나이처럼 남편 태종께 말을 건넨다.  태
종은 왕비의 위엄에 눌렸다.  뿐만 아니었다. 정궁인 왕후대접을 아니할 수 없었
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비를 맞이했다.
  "웬일이오? 이른 아침에  왕후가 외전까지 친림을 하니  무슨 좋은 일이 생겼
소?" 태종은 왕비의 노기 서린 얼굴을 보자 가희아가 아니면 월화의 일로 온 것
을 짐작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왕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가
득 웃음을 띠고  어처라고 불러본다. 민비는 전하의 능글능글 웃는  모습을 보자 
더한층 화증이 났다. 
  "좋은 일입니가? 전하께서나 좋은  일이 많으시지 저 같은 몸에 좋은 일이 있
을 턱 있습니까. 오늘  아침 일찍 나온 것은 하도 전하를  만나뵙지 못하니 뵙고 
싶어 나온 길이올시다.  한창 후궁들과 재미를 보시는 중에 연통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이다."  후는 여전히 비고아 대답했다. 태종은 일부러  왕비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같이 딱딱하고 거칠고 윤기 없는 큰 손이다. 가희
아와 월화의 손만 잡아보다가 몇 해 만에 왕비의 손을 잡아보니 이건 바로 나무
하는 떠꺼머리 총각의  손길보다도 딱딱했다. 그러나 전하는 내색을 할  수 없었
다. 반가운 듯 거칠거칠한 손을 이끌어 보료 위에 앉게 했다. 
  "마마는 공연히 과인을  놀리고 의심하지 마시오. 내, 한창 정무다단하여  국사
를 처결하고 있었는데, 어느  하가에 후궁들과 재미를 보고 있겠소. 쓸데없는 츠
측으로 과인을 의심하지 마시오." 
  "정무가 다단하시오. 하하하. 금방 저 협실로 피한 아이는 누구오니까?  승정원 
입직승지오니까? 다른 데는 영웅호걸로 자처하시면서 여자들한테는 그다지도 녹
록하고 츱츱하시오." 왕비는 나인을 통하여 가희아가  협실로 피한 것을 벌써 알
고 들어왔던 것이다. 태종은 이른 아침부터 대전에서  큰 소리가 나면 창피 막심
하다고 생각했다. 왕비의  비위를 맞춰서 요란스런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왕후의 체통은 일월같이  밝고 크다 하오. 그가짓  궁녀들의 잗단일에 관심을 
갖지 마시오. 하하하. 어찌해서 왕림하셨소?"
  "그 말씀은 전하게로 돌려보내 드립니다. 전하께서는 체통을 좀 지키시어 사시
의 질서를 지키는  하늘과 같이 묵묵한 천도를 다하십시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짓입니까. 별별 오입을  다하시다가 이제는 자식 같은 나의 요전비  월화까지 빼
앗아가십니까?" 왕비는 큰 눈을 딱  부릅떠서 태종을 바라보았다. 전하의 얼굴빛
이 약간 붉어졌다. 두 볼이 화끈 달았다. 
  "월화는 지금 수태까지  된 몸입니다. 남의 자식을  이같이 만들어 버리셨으니 
장차 대왕의 처신을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왕비는 날카롭게 따졌다. 태종은 다
시는 입을 벌리지 못했다. 
  "나는 그년을 참형에 처하려 했습니다. 아무리  딸자식 같은 교전비라 하나 차
마 그  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뒤에 나타나는 후궁들을 경계하려  하여 월화를 
참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동궁이 들어와서 간곡하게 빌었습니다. 월
화의 몸은 홑몸이  아니라 이미 전하의 낙윤을 배었으니, 워로하를  참형하면 곧 
왕자를 참형에 처하는 것이나 매한가지 일이라고  밤새도록 간햇습니다. 저는 세
자의 지성스럽게 간하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지극한  어진 성품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지간 골육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과 세자의 
인자한 어진 마음을 가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세자한테 지고 말았
습니다. 월화를  참형에 처하려던 결심을  버리고, 월화를  살려두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이  대전으로 나온 것은 이 일을 전하게  아뢰려고 온 것입니다." 
전하는 왕비의 말을  듣자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처음에는 또다시  어떤 야
료를 치려나 하고  경게하는 마음으로 왕비를 대했는데, 왕비의 태도로  보아 당
장 급한 야료는  없을 것 같았다. 우선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한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번  월화사건에도 세자가 들어서 또 간했다 하니  창피한 노릇
이라 생각했다. 나이  먹은 아들이 간했다 해도 부끄럽고 겸연쩍어서  얼굴을 들
기 어려운 일인데 아직 나이 어린 세자한테 두 번씩이나 간함을 당해서 일을 무
마시켜 놓았으니 수모스럽고  창피하기 한량없었다. 태종은 한편으로  무사 타첩
이 된  것은 고마운 일이나, 세자가  중간에 들어 일을 가라앉힌  것은 불쾌하게 
생각ㅎ다. 
  "왜 세자한테 알렸소?" 돌연 태종은  왕후를 향하여 반발하는 말을 보냈다. 왕
비는 태종이 욱하고 퉁명스런 말을 듣자 참으려던  부아가 다시 불끈 솟았다. 민
비는 전하를 향하여 큰 소리로 말한다. 
  "알리다뇨, 누가 세자한테 알렸단 말씀입니까? 고려 궁인 때만 해도 세자가 문
안 들러 왔다가 전하의 추한 모습을 목격한  것 아닙니까. 기생년을 데려다가 아
이를 배게 하고 후궁으로 봉한  것도 온 대궐 안에서 쑥덕공론이 일아나고 조선 
천지 백성들이 손가락질을 해서 웃게 되니 세자가  저절로 안 것이 아닙니까. 이
번 월화의 일만  해도 세자가 문안을 들어왔다가 월화와 마주쳐서,  전하와의 일
을 안 것입니다. 누가  세자한테 알렸단 말씀입니까. 남을 원망하기 전에 전하께
서는 먼저 자기 몸 처신을 생각해보십쇼. 그리해서 채신을 잃지 않도록 하십쇼." 
불끈했던 태종은 민비의 기승스런 반격에 다시 콧대가 숙었다. 
  "아직 장가 전인 세자가  공부는 아니하고 공연히 부모들이 하는 일에 참견해
서 이러니저러니 생각하게 된다면 장래  일이 닥하게 될 테니 걱정이 되어서 하
는 말이오." 태종의 옥음은 다시 부드러워질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전하의 몸 처신을 잘하실  생각은 아니하시고 세자의 장래 일을 걱정하신 말
씀은, 진정으로 전하께서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신다면 아무리  여자한테 욕심이 
왕성하다 하더라도 참아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금수가 되는 법입니다."  전하는 
꼼짝없이 민비의 혹평을 받았다. 
  "아들 걱정 마시고 먼저 전하의 걱정을 하시오. 백성들한테 입으로는 삼강오륜
을 실천하라고 떠들어대면서 하시는  짓은 딴판이니 백성들이 전하의 말씀을 믿
겠습니까. 세자는 참 효자입니다.  전하께서 효자 노릇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보신 
적이 계십니까?" 태종은 아버지  태조에게 대항했던 가지가지 무수한 일이 생각
났다. 과연 불효자였다. 대답할 말이 없다. 잠자코 천장만 바라본다. 천장 위에는 
황금으로 조각한 청룡 황룡이  영롱한 여의주를 희롱하면서 휘황찬란한 빛을 뿜
는다. 임금을 용해 비해서 장식해논 왕의 자리 용상의 천장이다. 
  '저 용틀임 청룡 황룡을 차지하고 싶어서  아버지와 싸우면서 불효노릇을 했구
나.' 전하는 한  귀로 민비의 꾸짖는 말을 듣고, 꿈틀거리는  용틀임 천장을 바라
보면서 감회가 자못  깊다. 민비는 말없는 전하를 보자 더한층  기운이 만길이나 
솟았다. 
  "어제 첩은 월화년을 죽이려 했소이다. 죽여서 다른 궁녀들을 경계하려 했습니
다. 그러나 죽이지 아니한 것은 세자가 울면서 간한 때문입니다." 태종은 민비를 
향하여 어린 세자에게 남녀에 관한 일을 왜 알렸느냐고 한 마디 말을 했다가 이
미 꼼짝도 못하고 왕비의 폭백만 받았다. 왕비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세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과연 훌륭한 인물이  될 사람입니다. 첩이 월화를 죽
인다 했더니 '배  안에 들어 있는 아바마마의  씨는 어찌합니까'하고 간했습니다. 
월화는 어마마마의  교전비니 죽이든 살리든  어머니 맘대로 하시려니와,  그 배 
안의 아이는 아바마마의 왕자입니다. 왕자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같이 한다면 
한꺼번에 두 생명이 없어진다 했습니다." 왕비는 숨이 찬 듯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계속한다. 
  "그리고 세자는 인도로 보아서 차마 못할 짓이라 했습니다. 첩은 이 말에 감동
이 되었습니다. 이리해서 모든 분한 것을 다 참아버리고, 월화를 죽이려 하던 일
도 포기해버렸습니다." 나무와  돌이 아닌 태종이었다.  아들만 칭찬하고  자기를 
사람값에 쳐주지 않는  아내를 밉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인도를  찾아 말하면서 
두 죽음을 만들어서는  아니된다고 말했다는 소리를 듣자 왕은  마음 속으로 '아
들 세자가  제법이구나' 하고 감탄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민비는 다시 
전하를 타이르다시피 한다. 
  "오늘 아침에 첩이 대전으로 나온 것은,  세자의 충성스럽게 간하는 말을 듣고 
월화를 처치해  죽일 것을 아니  죽이겠다고 전하게 아뢰러  나왔소이다. 월화를 
아니 죽이는 이유는  순전히 세자의 말을 들어  배안의 핏덩이를 불쌍히 생각한 
때문이올시다. 이것은 다 세자의 덕으로 그리 된것이라 생각하십쇼." 
  "잘 생각하셨소." 오래간만에 전하의 말씀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전하께서는 이제부터 개과천선을 하십쇼. 기왕 마련하신 후궁들, 고려  궁인이
나 강계 기생이나 이번에 또 장난을 치신 월화,  이 세 사람은 저도 전하의 후궁
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들 세 사람의 후궁들을  거느리시고 편안하
고 행복된 생활을 하십쇼." 
  "고맙소." 전하는 이내 왕비에게 항복하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 세 사람의 후궁을 인정해드린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다른 
궁녀나 상궁에게 손을 대신다면 그때 가서는 단연코 용서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소. 나도  사람이지." 전하와 왕비는 약간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
다. 전하는 상궁을 불렀다.
  "오늘 아침 중전마마와 함께 수라를 받으리라. 그같이 준비하라." 
  "알겠사옵니다." 상궁은 벙긋  웃고 물러간다. 세자는 이리하여 전하와  왕비의 
사이를 다시 화합시켜 놓았다. 오래간만에 태종과  민비는 엉켜진 얼음이 풀어지
기 시작했다. 고려 궁인과  강계 기생 가희아와 월화 세 사람의  후궁을 왕비 민
씨가 인정해준다는 말에 태종도 마음이 훨씬  풀어졌다. 심기가 흐뭇해서 상궁을 
불러 아침 수라를 왕비와 함께 하겠다고 분부를  내렸다. 상궁은 곧 내외분 수라
상을 어전에 올렸다. 전하와 왕비는 오래간만에  수라상을 받으며 화합하게 이야
기를 주고받았다.
  "기왕 월화를 후궁으로 인정해준다  하니, 가희아 홍씨한태 혜선옹주의 칭호를 
내리듯이 월화에게도 칭호를 내려야 할 테니 무어라 했으면 좋겠소?" 태종은 의
좋게 물었다.
  "전하께서 명명하실  것이지 첩이 아무리 배짱이  넓다 한들 시앗의 별명까지 
지어줄 마음은 없습니다." 왕비는 마음이 속으로 약간 풀렸으나 겉으로 한 번 비
꼬아 보았다. 
  "월화는 특별하지 아니하오?  중전의 교전비로구려. 기왕 목숨까지  살려준 터
이니 이름을 지어준다면 두 번 살아난 재생의 기념도 되고  -. 꼭 중전이 지어주
어야 하겠소이다. 하하하."  태종은 수라상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 비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쳐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오래간만에 지밀에서  전하와 대비 사이에 터
져나오는 웃음소리다. 
  "가희아에게 후궁의 칭호를  내리셨으니 월화한테도 후궁의 칭호를 아니 내리
실 수 없습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고 두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내친 걸
음에 칭호를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왕비도 오래간만에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마의 너그러운 태도에 후궁들은 감동해서 울겠소. 하하하." 
  "가희아와 월화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니 월화는 가희아보
다 좀더 위가  되는 칭호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가희아는 아무리  숫처녀였다 할
지라도 기생이올시다.  기생을 후궁으로 삼아서  혜선옹주라 했는데, 월화야말로 
당당한 숫처녀올시다. 첩이  어려서부터 길러낸 아이고보니 말은  교전비지만 딸
이나 매일반올시다. 이 아이를 가희아와 동등하게 대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칭호를 주는 것이 좋겠소?" 
  "딸의 칭호는 공주입니다. 신녕공주라 하십시다." 
  "좋구녀. 믿음직스럽고, 평안하게 지내란 말이구려. 하하하. 중전,  과연 고맙소. 
그러나 또한가지 청이 있소." 
  "무엇이오니까?" 
  "저것의 뱃속에 무엇이 들어다 하니, 만약  아들이 나온다면 이름을 지어야 할
텐데 아주 그 이름도 재생의 은인인 중전이 지어주어야 하겠소." 왕비는 선뜻 허
락했다. 
  "인이라 하십시다." 
  "인? 과연 좋구려." 
  "옷의변 항렬자와  매일반 되니, 세자 이하로  모두 같고, '인'은  인과관계라는 
뜻입니다. 모두 다 전생의  업원으로 이리 된 듯합니다. 그러하니 인자를 내리시
는 것이 좋습니다." 
  "하하하. 중전의 높은  의견이 맞소이다. 나는 가희아의 아들을 비자로  지었는
데 이것은 생각지도  않고 지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아니할 짓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글자  뜻이 되는구려. 역시 이름도 마음대로 지어지는  것이 아닌
가 보오. 허허허." 
  "그렇습니다. 모두 다 하늘이 굽어보시고, 천지신명이 지키셔셔 세상일을  판정
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나 별명 한  가지라도 자기의 욕심대로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으로 훌륭하게  지었다 해도 결국은  하늘의 마음이 
반영되어서 나중에는 하늘이 지시하시는 운명대로 되고 마는 것이 이 세상 이치
인가 합니다." 태종은 다시 중전에게 묻는다.
  "기왕 고려 궁인까지  후궁으로 두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춘방에서 어느 때쯤 
대전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소?"  태종은 모처럼 좋아진 왕비의 비위를 맞추느
라고 동궁에 있는  고려 궁인을 언제쯤 데려오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사실상 고
려 궁인은 한 번 작별한 지 일 년이 넘었건만 지척이 천 리라고 만나볼 길이 망
연했다. 더구나 내외 싸움을 만류하기 위하여  세자가 동궁으로 데려다 보호하고 
있으니 점잖은  체통으로 동궁에 출입을  할 수도 없고,  세자보고 돌려보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단념했으면서도 항상 눈에 삼삼 어려서 사모하는  정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월화를 후궁으로 인정하는 왕비의 특별한  생각에 곁들
여 제대로 운이 터져서  고려 궁인도 후궁으로 인정을 받게   되니, 태종은 마음 
속으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한시바삐 대해  보고 싶은 생각이 그름처럼 피어
올랐다. 
  "오늘 밤이라도 데려오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대전 안에는 절대로 두어서는 아
니됩니다. 후궁들은 일체 누구나 막론하고 따로  처소를 정하시어 전하께서 출입
을 하시도록 하셔야  합니다. 첫째로 문안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  전하의 위신이 
떨어져서 제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올시다. 그리고  어린 왕자들이 보더라도 교양
에 대단히 좋지 아니합니다.  아가도 보십쇼. 내가 나오는데 가희아가 협실로 뛰
어 달아났습니다. 왕자들이 볼 때 이  꼴이 무슨 꼴이겠습니까. 왕자뿐입니까. 입
시해 들어왔다가 신하들이  이 모양을 본다면 기가 막힐 것입니다.  단연코 별처
소를 차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다시 한 번 당부하고 다짐해둡니다. 아까도 말
씀했지만 세 후궁 이외에 전하께서  또 다른 궁녀에게 손을 대시는 딜이 있다면 
그때 가서는 왕후의  직권으로 단연코 지밀을 숙청시킬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
니까?" 
  "좋소, 좋소." 태종은 동곳을 뺀다.  천하의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태종도 색 앞
에는 비굴했다. 다시 왕비에게 청한다. 
  "그럼 세자한테 중전이  말씀해서 고려 궁인을 대전으로 들여보내도록 해주시
오." 왕비는 물끄러미  흘겨볼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기왕 마음을 
돌려서 아들의 말에  좇아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는 판이었다. 생색을  내야 하겠
다고 생각했다.
  "세사람 후궁 이외에는  다시는 다른 여인들한테 눈을 거들떠보시지 않는다는 
맹세를 제 앞에서 똑똑히 하신다면 세자한테 말해서 고려 궁인도 대전으로 돌려
보내오리다." 왕비의 말을 들은 태종은 입이 벙긋 벌어졌다. 
  "중전의 부탁이 이같이 간곡하시고 지나간 모든 일을 다 들어주시는데  과인이 
나무나 돌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감동이 되지  않겠소. 가희아와 고려 궁인과 월화 
이외에는 다시는 후궁을  아니 두기로 하겠소. 과히  염려 마시오." 왕비는 마음 
속으로 태종의 대답이 믿을 만한  말이 아닌 줄 판연히 알면서도 일부러 격려하
는 말을 보냈다.
  "장부일언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보통 남자가 아니라,  제왕
의 몸이십니다. 식언을 하시어서는 아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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