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오케의 남녀
위지에[余杰]
그리 못 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잘 살지도 않는 이 도시에서 제일 흔한 것이 가라오
케다. 이 도시는 지금 막 경제 발전이 시작되어 일시에 옛 모습이 사라지면서 형형색색의
새로 생긴 건물들이 끊임없이 외곽으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거리에는 건축 자재들이 아
직 제대로 치워지지도 않은 가운데 길 양편에는 줄줄이 늘어선 가라오케들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별천지'·'신천지'·'신세계'·'오아시스'·'해뜨는 집'·'피닉스' …… 끝없이 이어지는
간판, 입간판,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이 도시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곳임을 보여 주고 있
다. 거리 쪽의 전면은 식당이고, 가라오케는 뒤쪽 샛길 안의 깊숙한 곳에 있다. 화려하고 사
치스러운 홀과 룸들, 카펫·벽지·장식등·음향기구·소파·조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또는
노래 말고 뭔가 딴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 어지러운 노래 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와 거리
까지 들려 오면 총총히 길을 가던 행인들은 이마를 찌푸리곤 한다(그들은 모두 쓸 돈도 없
는 한심한 사람들이다).
가라오케 안의 남자들은 모두가 성공한 남자던가? 차안과 피안 사이에는 흔들거리는 한
가닥 구름다리, 그들은 머리와 찬스 그리고 머리와 찬스 아닌 그 무언가로 마침내 피안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중국에서 차안은 번뇌하는 인생이다. 버스 속에서 시달리고, 배춧잎만
씹고, 단칸방에서 부대끼면서 그 무수한 세월을 아름다운 꿈으로 지낸다. 피안은 즐거운 인
생이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산해진미를 즐기고, 넓직한 빌라에서 살면서 이미 시작된 꿈같
은 세계를 음미한다. 가라오케, 피안의 남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공직자가 아니면 사
장이다. 다시 말해 어떤 곳에서도 대접받을 수 있는 두 가지 신분이다. -- 특히 가라오케에
서는. 그들은 이곳에서 자기네 집보다도 더 편안하다. 혓속에 젖어드는 고급 술, 품속에 파
고드는 여인네, 하루를 고생한 뒤 갖는 최고의 휴식 방법이다. 그렇다. 그들은 너무나 힘들
었다. 관계·상업계·전쟁터가 삼위일체다. 먹고 먹히고 속고 속이는 가운데서 살아남는다는
것, 차안의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고되고 복잡하다.
여자들 역시 전투 중이다. 마오주석께서 이르시기를 삶은 곧 전투러니, 마오주석의 어록
이 가라오케에 그대로 축약되어 있다. 그녀들은 붉은 가죽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손님들의
부름을 기다린다. 사철 내내 에어컨을 틀어놓은 방안에서 그녀들은 바깥 세계의 온도가 어
떤지 모른다. 슬립 같은 원피스, 배꼽티, 초미니 반바지, 반짝이는 하이힐, 영원히 한여름 차
림이다. 어깨·등어리·허리·배꼽·허벅지, 있는 대로 드러내놓고 어둠 속을 탐색하는 눈길
을 잡아챈다. 사냥하는 자는 곧 탐색되는 자요, 사냥되는 자는 곧 탐색하는 자다. 이곳에서
는 또 하나의 논리가 존재한다. 그녀들의 뺨에는 두터운 화운데이션, 입술에는 새빨간 립스
틱, 그리고 얼굴에는 얼어붙어 있는 웃음. 미소는 일련의 피부 근육을 교묘하게 움직여 만들
어낸 결과이다. 그녀들은 포갠 다리를 한다. 다리는 더욱 길어 보이고 치마는 더욱 짧아 보
인다. 그녀들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담배를 사른다. 담배는 갈수록 짧아진다. 그녀들의
젊음처럼. 하지만 그녀들은 모른다. 바로 이때 비대한 몸집과 얼굴이 다가오고, 가냘픈 그녀
들이 마중을 나간다.
그녀들의 과거는 그리 수수께끼도 아니다. 어쩌면 엊그저께는 어느 중학교의 그저 그런
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는 안되고, 아버지가 일하는 한 달에 200위앤 짜리 작은 공
장에서 일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집에 틀어박혀 구박받기도 싫고. 그래서 어느 날 부모의 야
단 소리를 뒤로하며 뛰쳐나와 곧바로 이 먹고 마시고 노는 직업을 좋아하게 된. 어쩌면 얼
마 전에 같은 동네 고지식한 농민에게 시집갔던 새색시였는지도 모른다. 농사일도 못하고,
고생도 못견디고, 그래서 도시로 뛰쳐나온. 그렇지만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니 무얼 하
겠는가? 이 거대한 직업 세계에서 대부분은 보통 여자들일 뿐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
인공은 거의 없다. 그녀들은 몇 년 전 만 해도 그리도 겁많고 부끄럽고 견식이 없었다. 몇
년 후가 되자 세상살이에 통달해서 남자들의 속마음을 단번에 꿰뚫어 보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편의 환심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얻어낼 수 있는지 훤하게
되었다. 이게 바로 풍진 세상이다. 그녀들은 고용주와 나눠먹기의 비율을 논하고, 조건이 안
맞으면 곧바로 다른 집으로 옮긴다. 이 직업은 가장 이동이 잦은 직업이다. 룸은 그대로지만
아가씨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새 얼굴로 바뀐다. 말 그대로 '산천은 유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문에는 언제나 불빛이 현란하다.
사랑? 그녀들은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그녀들이 믿는 건 오직 돈뿐이다. 종교? 그 또
한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우상과 같이 위대하던 그런 남자들이 그녀들의 앞에서는 돼지
같은 본성을 드러내놓고는 하니까. 뭇사람 앞에서 이상과 존엄을 열변하던 그런 남자들, 사
무실에서 천하를 논하며 모두를 눈 아래 보던 그런 남자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만면에
친근한 웃음을 짓던 그런 남자들, 신문 지상에 시적 정취가 가득한 이름을 자랑하던 그런
남자들, 테이프 커팅에서 황금빛 가위를 들고서 커팅을 하던 그런 남자들, 찬란한 수사와 불
변의 진리를 만들어내던 그런 남자들이 그녀들의 육체에 엎어질 때는 모두가 꿈틀거리는 한
무더기 썩은 고깃덩어리로 변하는데 또 무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들의 방에는 그저
침대 하나 옷가방 하나 뿐이다. 손님들이 가 버린 후 얼굴의 화운데이션과 남자들의 타액을
지우고 나면, 귓가에는 아직도 남자들의 야수 같은 숨길이 맴돌고, 뱃속에는 성난 파도 같은
복통이 요동하고, 손에는 한 무더기 지폐들. 농민의 몇 달치 수입, 노동자의 한 달치 수입,
그리고 그들에게는 몇 시간 짜리. 그녀들은 웃고자 하지만 표정은 우는 것보다도 볼썽 사납
다. 거울 속에 비치는 갈수록 늘어나는 몸매는 그녀들이 이미 젊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
만 두자. 그만 두고 먼 곳으로 가서 이름을 감추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자. 아이
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두 번 세 번 재생한 처녀막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창문도 없는 방에서 그녀들은 별빛 찬란한 밤하늘을 꿈꾼다.
남자들은 이곳에서 낮에 이루지 못한 사업을 이룬다. 몽롱한 불빛 아래, 속에서는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쇳소리를 내고 있다. 낮에는 서로가 그리도 다르다. 품위가 넘치는 공직자와
속되기 짝이 없는 장사꾼, 함부로 웃음을 보이지 않는 공직자와 그저 웃으며 머리를 조아리
는 장사꾼. 욕망에 정복되자 그리도 똑같이 바뀐다. 아직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도 이미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눈길은 마치 손길처럼 소파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여인의 은밀한 곳
을 더듬고 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다. 그들의 세계도 보름달만은 아니다.
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마누라쟁이와 온 종일 컴퓨터 오락이나 하는 아들자식과 끝없이
손 벌리는 가난뱅이 친척들, 매섭게 다그치는 상사와 바람을 일으키며 호시탐탐 자리를 노
리는 부하. 이 지친 신경을 쉬게 할 가라오케마저 없다면 되겠는가? 공자님께서도 말씀하시
지 않으셨던가? '식과 색은 본성이니라'라고. 이건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다. 아니란 말인
가? 모두들 일하고 있다. 혁명은 온몸을 바쳐 분투하는 것. 연장 근무, 야간 근무를 하지 않
고 어떻게 위대한 혁명을 이룩하겠는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혁명을 위해 분투 중이다. 그녀들은 반세기 전 위대한 지
도자들이 이끌던 농촌의 도시 포위 혁명을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빈티 나는 시골과 촌티
나는 소읍이 도시로 돌격하는. 도시는 그녀들을 받아들이고 그녀들도 도시의 페니스를 받아
들인다. 도시는 그녀들에게 수많은 것들을 깨우쳐주고 그녀들도 도시에 수많은 것들을 보태
준다. 그녀들은 마침내 도시를 자신들의 자궁 속에 들여앉힌다. 어머니라는 신분과는 이별을
고하면서. 워렌 부인과 마르그리트, 리스스와 리우루스, 뚜스니앙과 동샤오완은 이국의 또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다. 다만 리시앙쥔과 쉬에타오의 흔적만은 찾을 수가 없다. 오늘날 그녀
들의 수많은 동업자들은 이 시대에 남아있는 진실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다.
이 도시는 함락된 도시다. 도시에는 최후의, 없는 곳이 없는 시가전이 전개 중이다. 전쟁,
가라오케와 그 비슷한 장소에서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찐용[金庸]은 그의 마지막 걸작 〈녹정기鹿鼎記〉에서 암시한 바 있다. 중국을 이해하려
면 먼저 황궁과 기방을 이해해야 한다고.
오늘, 황궁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余杰, 〈 拉OK廳中的男人和女人們〉, 《當代散文精品 1997》, (廣州 : 廣州出版社, 1997),
PP.77-80. (2000년 4월 2일 김혜준 옮김)
* 워렌 부인 : 매춘부를 다루어 여성의 입장을 변론한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의 희곡 〈워렌 부인의 직업 Mrs.Warren's Profession〉(1893)의 주인공.
* 마르그리트 : 고급 창녀인 마르그리트 고티에와 귀족 자제인 청년 아르망 뒤발의 사랑을
그린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춘희 Dame aux camelias, La〉(1848)의
여주인공.
* 리스스[李師師] :
* 리우루스[柳如是] : 1618-1664. 명나라 말의 이름난 기녀로 錢謙益의 첩이 되었는데 명나
라가 망하자 錢謙益에게 자살을 권함.
* 뚜스니앙[杜十娘] :
* 동샤오완[董小宛] : 1624-1651. 명나라 말의 이름난 기녀로 薛疆의 첩이 되었는데 난리 중
에 사망하자 그녀를 그리워하여 薛疆이 〈影梅庵憶語〉를 지음.
* 리시앙쥔[李香君] : 명나라 말의 이름난 기녀로 순무 田仰이 억지로 첩을 삼으려 하자 이
를 결연하게 거절함. 孔尙任의 〈桃花扇〉에 이 이야기가 쓰임.
* 쉬에타오[薛濤] : ?-834?. 당나라의 이름난 기녀로 시에 능했음.
겨울 바다를 보러 갔던 사람
리우신우[劉心武]
우연히 서북 지방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온 한 초등학교 선생을 만났다. 언뜻 보아 나이
가 쉰은 넘어 보였다. 얼굴에는 길고 깊은 주름이 패어있는 데다가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보니 그의 두 눈이 힘있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실은 참 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이제 막 마흔이 넘은 장년의 나이
였다. 그는 베이따이허[北戴河]에서 베이징[北京]을 거쳐 다시 기차를 타고 바다와는 그리도
아득한 곳에 있는 그의 작은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를 만난 날은 북서풍이 오래 가물었던 베이징의 회색 대기를 할퀴어대고 있었다. 그런
매서운 겨울날에는 보통 사람들은 따스한 남쪽을 찾아가는 법이다. 그런데 자기 돈으로 여
행을 나선 사람이 하필이면 베이따이허를 택하다니!
그는 왜 거기에 갔을까? 무슨 별스런 취향일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20년 전 그의 마을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는 교과서에는 전등·전선·전화·텔레비전·전차 …… 등등 끊임없이 전기가
언급되고는 했고, 학생들은 늘상 '선생님,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라고 묻고는 했다. 그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남의 스승이라면서 너무나 견문이 부족해 진짜배기 전등조차 본 적이
없다니! 어느 날, 방학하기 전 날, 어떤 학생이 또 '전등이 어떻게 생긴 건데요?'라고 물었
을 때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이튿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그는 마른 음식을 추슬러
서 100여 리 밖에 있는 현성으로 떠났고, 온 종일 걸어 그 날 밤중에야 겨우 현에 도착했다.
그가 현 교육국의 문을 두드렸을 때 숙직하고 있던 사람은 처음에 그가 무슨 부랑자인 줄로
알았다. 그가 천장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전등을 보고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웃다가 울다가
하는 걸 보자 이번에는 미친 사람인 줄로 생각했다. …… 다음 날 현 교육국의 국장은 친히
그를 안내하여 전화·전축·전기다리미 따위를 보여 주었고, 영화관에 데리고 가서 영화까
지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떠날 때 그에게 전구 한 알을 선물했다. 전구 알은 후
일 그의 교실에서 가장 귀한 교구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나도록 조심 조심 보관되었다. 그 벽
촌의 작은 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오게 됐을 때, 그가 담임을 맡고 있던 반의 학생들은 마치
장중한 의식을 거행하듯이 그 전구를 교실의 전등 소켓에 끼웠고, 아이들의 열광적인 박수
소리 가운데 전등이 빛을 발하며 초라한 교실을 밝게 비추자 그는 또 다시 웃다가 울다가
했고 ……
후일 그는 현성에서 연수받는 기회를 갖게 되고, 모범교육자로 선발되어 성 소재지에도
가게 되고, 정식으로 사범학교 학력을 갖추게 되고, 이어서 대학 과정도 공부하게 되고, 그
의 견문은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그의 학교도 완전히 달라졌으며 그가 있는 곳에서는 이제
자주 영화상영단이 찾아와 영화도 틀어주고는 한다. 지세가 험한 산촌이라 이 마을은 지금
까지도 텔레비전 난시청지역인 탓에, 돈 많은 걸 자랑하기 위해 대형 컬러 텔레비전을 설치
한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텔레비전 시청이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즐
거움이기는 하지만. 물론 그에게는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의 온갖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늘었다. 그런데 이 근래에는 학생들이 늘상 '선생님, 바다가 어떻게 생겼
는데요?'라고 묻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열심히 학생들에게 설명하고는 했고 …… 하지만 학생들도 영화에서 바다를 본 터라 그의
경험이란 것이 학생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형편이었고 ……
이리하여 이번에는 직접 바다를 보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하
자마자 그는 길을 나섰다. 그가 현 교육국에 이 장거를 알리자 국장까지도 몹시 부러워했다.
이미 환갑에 가까운 국장 역시 진짜 바다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왜 여름 방학 때가 아니라 겨울 방학 때 바다를 보러 가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
했다. 겨울에 바다를 보러 가면 돈도 절약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두 눈에 이채로운 빛을 내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겨울 바다는
또 다른 장관입니다!"
그는 말했다. 그가 막 베이따이허에 갔을 때는 사람들이 그가 부랑자나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했다가 나중에는 아주 따스하게 대해주더라고. 그렇게도 시설 좋은 휴양소들이 겨울만
되면 특별히 회의 따위가 열리지 않는 한 너무나 적막해지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늘
너무 쓸쓸하다고 느끼게 된다더라고. ……
그는 이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겨울 바다를 실컷 보았다고 했다. 갖가지 각도와 광선
속에서, 여유를 잡으면서 보기도 하고, 콧노래를 하면서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춤을 추면서
보기도 하고, …… 그의 이야기는 나마저도 부러울 정도였다. 아니 질투가 날 정도였다. 왜
냐면 나도 여름 바다를 본 적은 많지만 쉰이 넘을 때까지 겨울 바다를 본 경험은 없었으니
까. 이 점만 두고 말하자면 내 인생은 서북 고원의 작은 마을에서 온 이 초등학교 선생만큼
도 풍성하지 않은 셈이었다.
겨울 바다를 보러 갔던 사람은 베이징을 떠났다. 삼등열차를 타고 다시 그 아득한 곳으
로 떠났다. 그는 베이징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티엔안먼[天安門]에는 갔지만 이허위앤[
和園]이니 만리장성이니 하는 데는 가지도 않았다. 그는 말했다. 우선은 돈도 얼마 남지 않
았고(바다를 보기 위해 그는 5년 여 동안 저축한 돈 1000여 위앤을 몽땅 써버렸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바다를 보고자 했던 꿈을 이루었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다고!
나는 그저 우연히 그를 만났을 뿐이다. 그가 떠난 후 심지어 그의 모습도 잘 기억할 수
가 없다. 다만 그의 빛나는 두 눈과 온 몸 가득한 바다 냄새만이 오래 오래 내 마음 속을
떠돌면서 이렇게 깨우쳐주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그가 장인 정신을 가지고서 이상
의 횃불을 지피기만 한다면 그의 인생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劉心武, 〈冬日看海人〉, 《1996年中國散文精選》, (武漢 : 長江文藝出版社, 1998), PP.16-18.
(2000년 3월 26일 김혜준 옮김)
도사탑
위치우위[余秋雨]
1
뭐까오굴[莫高窟] 정문 앞에는 개천이 있고 이 개천을 지나면 공터가 하나 있는데, 그곳
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부도가 서 있다. 탑은 원형으로 호리병처럼 생겼고 겉에는 흰 칠
이 되어 있다. 무너져내린 몇몇 탑을 봐서는 벽돌로 기초한 위에 탑 가운데 말목을 세우고
그 주변에 황토를 발라 만든 듯했다. 이로 볼 때 그 동안 뭐까오굴의 주지승들이 넉넉하지
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서녘으로 가라앉으며 찬바람이 불어오자 이 퇴락한
탑들은 더욱더 황량해 보였다.
그중 탑 하나는 세운 연대가 그리 오래지 않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탑에는 비문
이 새겨져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탑의 주인이 다름아닌 왕위앤루
[王圓록]였던 것이다.
그는, 역사에 기록되어있듯이, 바로 뚠후앙석굴의 죄인이다.
나는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무명 솜옷을 입고서 초점없는 시선에 위축된 그의 모습
은 그 시대의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중국인이었다. 그는 원래 후베이성[湖北
省] 마츠엉현[麻城縣]의 농민으로 흉년 탓에 깐수성[甘肅省]까지 흘러들어와 도사를 하게 되
었고, 여기 저기를 전전하던 끝에 뭐까오굴에 거처하게 되었다. 중국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하
게도 고대 중국의 가장 찬란한 문화를 그가 지키게 된 것이다. 그는 단 몇 푼의 돈에 외국
모험가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뚠후앙의 문물을 바리바리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오
늘날, 뚠후앙연구원의 전문가들은 매번 굴욕적으로 외국의 박물관으로부터 뚠후앙 문헌의
마이크로필름을 구입해오고, 한숨을 내쉬며 확대기에 넣어야만 한다.
그에게 분노의 불길을 퍼부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비천한 인물이요 너
무나 하찮은 존재요 너무나 우매한 작자였다. 아무리 퍼부어도 그에게는 쇠귀에 경읽기일
것이다. 목석 같은 표정으로 대할 테니까. 이런 무지한 자에게 그와 같은 문화적 책임을 묻
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도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민족의 비극이었다. 왕도사는 그저 그 비극에 잘못 등장한 어릿광대일 뿐
이었다. 어떤 젊은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 날 저녁 상자를 바리바리 실은 수레 대열이 막 출발하려고 할 때 모험가인 스타인은 고
개를 돌려 서녘의 선연한 저녁놀을 바라다보았다. 그곳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의 상
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2
어떻게 장엄한 불교 성지를 한낱 도사가 와서 관리를 하게 됐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중국의 문관들은 다 어디로 갔기에 어째서 그들의 그 넘쳐나는 상주문에는 뚠후앙에 대한
이야기가 한 마디로 없는 것인가?
시절은 20세기 초 구미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세기의 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댕은 그
의 작업실에서 조각을 하고 있었고, 르누아르·드가·세잔은 벌써 창작 후기에 들어섰고, 마
네는 그의 〈풀밭 위에서의 식사〉를 전시한 바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동방의 예술
에 대해 선망의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뚠후앙의 예술은 바로 그때 왕도사의 손안에
있었다.
왕도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동굴 안을 돌아보는 걸 좋아했다. 마치 늙은 농부가 자
기 집을 둘러보는 것처럼. 그는 동굴 안의 벽화가 좀 불만이었다. 거무죽죽한 것이 쳐다보고
있자면 눈도 좀 침침해졌다. 좀 밝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일꾼 둘을 시켜서 석회 한 통
을 가져오게 했다. 장대에 짚으로 만든 솔을 달고 석회통에 담갔다가 칠을 하기 시작했다.
석회칠 한번으로는 칠이 너무 엷었다. 이 색 저 색이 은은히 비쳐 나왔다. 농민이란 일을 하
면 성실하게 하는 법이다. 그는 다시 한번 꼼꼼히 칠을 했다. 이 지역은 대기가 건조해서 금
방 석회가 말라버렸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당나라의 미소도 송나라의 의상도. 동굴 속
에는 오로지 흰색뿐이었다. 왕도사는 땀을 훔치며 아둔한 웃음을 지었고, 내친 김에 석회 값
을 물어 보았다. 이리 저리 셈해보자니 일단 다른 동굴을 더 회칠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선 이 몇 개만 칠해두지라면서 달관한 듯이 솔을 내려놓았다.
사방의 동굴벽이 전부 새하얀데 동굴 한 가운데의 조각상이 너무 눈에 걸리적거렸다. 이
깔끔한 농가에 그녀들의 간들간들한 몸매는 너무도 눈길을 끄는 일이었고 그녀들의 아리따
운 미소도 좀 거북했다. 도사는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보았다. 도사라면 신선이나 영관을 만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일꾼들에게 철추를 몇 개 빌려 와서 원래의 조각상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을 시켰다. 일은 수월했다. 몇 차례 아니라서 간들간들한 몸매는 부스러기가 되어
버렸고 아리따운 미소는 흙이 되어버렸다. 이웃 마을에 미장이가 몇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불
러와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신선과 영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장이가 한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도사는 상관없다, 흉내만 내면 된다라고 다독거렸다. 이리하여 아이들
이 눈사람을 만들 듯이 여기는 코요 저기는 손발이요 식으로 어쨌든 그럭저럭 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이제 다시 석회를 가져와 거기다 흰칠을 입혔다. 두 눈도 그리고,
수염도 넣고, 그럴싸했다. 도사는 숨을 돌리면서 미장이들에게 사례를 하고는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 이 동굴들에 들어서서 허여스름한 동굴벽, 허여스름한 괴이한 조각상을 마주 대하
자니 내 머리 속도 온통 허여스름했다. 나는 거의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눈앞에는
솔들과 철추만 어른거렸다. "그만!" 나는 마음 속으로 고통스럽게 외쳤다. 하지만 뒤돌아보
는 왕도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스런 표정이다. 그래, 그는 자기 집을 정리할 뿐
인데 웬 참견이란 말인가? 나는 심지어 무릎을 꿇고 간절히 그에게 빌고 싶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만. …" 그렇지만 뭘 기다린단 말인가? 내 머리 속은 여전히 허여스름했다.
3
1900년 5월 26일 이른 아침 왕도사는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동굴 속에 쌓인
모래를 청소했다. 뜻밖에도 동굴 벽에 금이 가면서 틈새가 생겼다. 그 속에는 또 하나의 동
굴이 있는 것 같았다. 왕도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얼른 동굴을 파보았다. 아! 동굴
가득한 옛 문물들!
왕도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 아침 그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 문을 열어제쳤다
는 것을. 한 영구적인 학문 분야가 바로 이 동굴에 의해 이루어지리라는 것도. 재능이 넘치
는 수많은 학자들이 이 동굴 때문에 평생을 바치게 되리라는 것도. 중국의 영광과 치욕이
이 동굴로 인해 회자되리라는 것도.
지금 그는 담뱃대를 입에 문 채로 동굴 속을 다니면서 집히는 대로 뒤적여본다. 그는 당
연히 이것들이 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일이 좀 묘하다는 것만 느꼈을 뿐이다. 왜 하필이면
내가 여기에 있을 때 동굴벽이 갈라졌을까? 혹시 신령이 내게 내린 보상이 아닐까? 다음
번 현성에 가게 될 때 경전 몇 개를 가져다가 현장에게 좀 보여 봐야지. 이 희한한 일도 좀
들려주고.
현장은 문관이었다. 사안의 중요성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깐수성 교육
감[學臺]인 이에츠츠앙[葉熾昌]도 알게 되었다. 그는 금석학자여서 동굴의 가치를 알았고, 인
사재무담당관[藩臺]에게 이 문물들을 성정부로 옮겨 보관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문물이
너무 많아 운송비가 적지 않자 관료들은 주저했다. 그저 왕도사가 잇따라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낸 문물들만이 관리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중국은 가난했다. 그러나 잠시만 이들 벼슬아치들의 호사로운 삶의 면면들을 들여다본다
면, 결코 그까짓 운송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
다. 중국의 관리들이 모두 학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창 밝고 책상 깨끗한 서재에
서 출토된 경전들을 뒤적거리면서 어느 시대에 썼는지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조국의 유산을 잘 보호하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심이 없었다. 그들은 우아하게 수염을 쓰다
듬으면서 "다음에 그 도사더러 다시 몇 개 좀 가져오라고 이르도록 하라!"라며 아랫사람에
게 분부하고, 이미 받은 것들은 잘 싸두도록 했다. 누군가 서울 나으리의 생일에 보낼 선물
이 생긴 셈이다.
바로 이 때 구미의 학자, 중국전문가, 고고학자, 모험가들은 만리를 멀다 않고 풍찬노숙
을 하면서 뚠후앙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문물 몇 가지
를 가지고 돌아가는 운송비에 쓰고자 했다. 그들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사막에 뼈를 묻
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두들겨 맞고 살해당한 작정까지 하면서 지금 막 열어제
쳐진 이 동굴로 달려왔다. 그들이 사막에서 음식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을 때 중국 관리들의
응접실에서는 다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세관도 없었고 수속도 없었다. 외국인들은 곧바로 이 동굴 앞에 도착했다. 동굴에는 벽돌
을 쌓아올리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는데 열쇠는 왕도사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외국인들
은 다소간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들이 만리 길을 달려 도착한 종착역에는 삼엄한
문물 보호 관리소도 냉담한 박물관 관장도 만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경비원이나 수위조
차도 만날 수가 없었다.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 꾀죄죄한 촌티나는 도사였던 것이다. 그
들은 그저 유머러스하게 어깨만 한번 으쓱하면 그뿐이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서 금방 도사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세워놓았던 수많은 계획
들은 다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도사가 바라는 건 그저 극히 간단한 장사였을 뿐이었다. 마치
바늘 두 개와 닭 한 마리를 바꾼다거나 단추 하나와 채소 한 광주리를 교환하는 그런 식이
었다. 이런 장사를 자세히 되풀이하자면 아마도 나의 펜이 제대로 나가지 않을 것 같다. 그
래서 나는 간단히 말해야 하겠다. 1905년 10월, 러시아인 보르체프가 몸에 지니고 있던 러시
아 물건 약간으로 서적 한 무더기와 경전을 바꾸어 갔다. 1907년 5월, 헝가리인 스타인[M.
A. Stein]이 은전 한 꾸러미로 경전 스물 네 상자, 비단과 그림 다섯 상자를 바꾸어갔다.
1908년 7월, 프랑스인 펠리오[P. Pelliot]가 소량의 은전으로 열 수레의 6000여 권이나 되는
필사본과 그림을 가져갔다. 1911년 10월, 일본인 요시카와 코이치로오[吉川小一郞]와 타치바
나 미즈코시[橘瑞超]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적은 돈으로 필사본 300여 권과 당나라 조각상 두
점을 가져갔다. 1914년, 스타인이 다시 와서 그때도 약간의 은전으로 경전 다섯 상자 600여
권을 바꾸어갔고, ……
도사도 망설인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하다간 신령의 노여움을 살까 무서워서. 이런 망설임
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극히 간단했다. 스타인은 이렇게 그를 구슬렸다. 자기는 당나라 승
려를 지극히 숭배하는데, 이번에는 당나라 승려들의 발길을 거꾸로 밟아오면서 인도에서 중
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오게 되었느라고. 좋다. 기왕에 서양 중이라니 가져가도록 하지 뭐.
왕도사는 시원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외교적 수사도 필요 없었다. 몇 마
디 즉석에서 지어낸 동화만 있으면 되었다.
한 상자, 또 한 상자. 한 수레, 또 한 수레. 모두 잘 싣고 단단히 묶은 다음, 휘익--!, 수
레 대열이 출발했다.
성정부로 가는 게 아니었다. 일찍이 나으리들이 말한 바처럼 운송비가 없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런던으로 가는 거다. 파리로 가는 거다. 뻬쩨르부르크로 도꾜로 가는 거다.
왕도사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허리숙여 절을 하면서 먼 데로 배웅까지 나갔다. 그는 공손
하게 스타인을 '스나으리 타인님', 펠리오를 '펠나으리 리오님'이라 불렀다. 그의 주머니에
생긴 묵직한 은전은 평상시 시주 때는 만지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스
나으리, 펠나으리의 '보시'에 감사했다. 수레 대열이 이미 멀어져갔는데도 그는 여전히 길어
귀에 서 있었다. 사막에는 두 줄기 깊이 패인 수레 자국만 남아있었다.
스타인네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학술보고와 탐험보고는
언제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종종 이상한 왕도사가
등장했고, 외국의 청중들로 하여금 이렇게 멍청한 인물의 손에서 이와 같은 유산을 구해낸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암시했다. 그들이 산
넘고 물건너 먼길을 간 것은 뚠후앙의 문헌을 암흑 속에서 햇빛 속으로 구해내는 일이었다
고.
그들은 모두가 실천적 정신이 넘치는 학자들이었다. 학술적인 면에서 나는 그들에게 탄
복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글에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이 빠져있다. 나서서 반박하
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고, 내 마음 속에는 오늘날 한 젊은 시인이 쓴 싯귀 몇 구절이 떠오
를 따름이다. 그건 시인이 위앤밍원[圓明園]을 불태운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에게 쓴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내가 한 세기 먼저 태어나지 못한 것이.
으스스한 옛성에서
별빛 어스름한 광야에서
내 당신과 마주 보고 서서
내가 당신이 내던진 흰장갑을 집어들거나
당신이 내가 내뿌린 칼을 받아들거나
나와 당신이 서로 전마를 타거나
저 멀리 하늘을 뒤덮은 깃발들을 물리치고
구름떼같은 병사들을 물리치고
성아래서 생사를 겨루지 못한 것이.
학자들에게 이 싯귀는 어쩌면 너무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진짜 이런 방
법으로라도 그들의 수레 대열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사막에서 마주 보고 서서. 그들이 당신
네들은 연구할 능력이 없잖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좋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학문의
우열을 겨루어 보자. 뭐든 좋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이렇게 몰래 가져가는 것
만은 안된다.
나는 다시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수레 대열이 정말 나 때문에 멈춘다면,
그 다음에는 또 어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그 당시의 서울로 가져가야 될 것이다. 운송비
는 잠시 논하지 말자. 하지만 당시 동굴의 문헌 중 상당량은 분명 서울로 가지 않았던가?
그 모습이라는 것이 나무 상자에 담지도 않고 그저 거적자리로 대충 꾸린 것이었고, 연도의
벼슬아치들은 손을 쑤셔넣어 잡히는 대로 빼갔고, 걸음을 멈추는 곳마다 몇 꾸러미씩 그냥
머물러야 했고, 결국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여기저기 다 흩어져버리고 꼴이 아니었고.
위대한 중국이이라면서 경전 몇 권조차도 보존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떨 때 나는 독한
마음으로 내뱉고 싶다. 벼슬아치들에게 무수히 짓밟히는 모습에 비하자면 차라리 런던 박물
관에 수장하는 게 낫겠다고. 하지만 필경 이 말도 그리 후련치는 않다. 대체 내가 막아선 수
레 대열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곳도 안되고, 저곳도 안되고. 나는 그저 사막 한가운
데 멈춰세워 놓고는 한바탕 통곡할 밖에 없다.
아, 나는 너무나 한스럽다!
4
나만 한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뚠후앙연구원의 전문가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한
스러워한다. 그들은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직 굳은 얼굴로 수십 년을 파고들면서
뚠후앙의 문헌을 연구하고 있다. 문헌의 마이크로필름은 외국에서 사오면 되고, 치욕을 느낄
수록 더욱더 연구에 전념한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뭐까오굴에서 뚠후앙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수 일 간의
회의가 끝난 뒤 일본학자 한 사람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과거의 관점을 수정하고
싶습니다. 이 수 년 간의 성과가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뚠후앙도 중국에 있고 뚠후앙학도
중국에 있다는 것을!"
중국의 전문가들은 그다지 격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묵묵히 회의장을 나와 왕도사의 부
도 앞으로 다가갔다.
余秋雨, 〈道士塔〉, 《文化苦旅》, (上海 : 知識出版社, 1992), PP.1-7. (2000년 3월 19일
김혜준 옮김)
뚠후앙석굴[敦煌石窟]
중국 깐수성[甘肅省] 뚠후앙현[敦煌縣] 남동쪽 20 km 지점에 있는 불교유적. 소조불상과
벽화 등의 불교미술품 외에 많은 고문서류가 발견되어 동서문화교류사 또는 중국불교사 연
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07년 영국의 A.스타인과 그 다음해 프랑스의 P.펠리오에
의해 알려졌다. 밍사산[鳴沙山] 기슭에 길이 1.6 km에 달하는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불교석
굴이 있는데, 뚠후앙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불상조각이나 벽화가 있는
동굴은 469개소에 달한다. 빙하기의 충적층에 속하는 수성암으로 된 석굴이어서 불상은 모
두 소조상이며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 석굴을 만든 사람들은 벽화의
제작에 힘썼다. 이들 벽화는 표면에 석회를 칠한 벽면 위에 짙은 채색의 불교회화를 치밀하
게 묘사했는데, 제작 연대별로는 위나라 때가 22굴, 수나라 때가 90굴, 송나라 때가 103굴이
있다. 그 중에는 청나라 때에 들어와서 그린 것들도 있다. 뚠후앙석굴의 조사보존사업은
1960∼70년대에 걸쳐 행해졌는데 197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것인 AD 366년의
것으로부터 492개의 동굴이 조사되어 2,000여 채의 채색소조상과 4만㎡의 벽화를 조사 연구
하고 500여㎡의 벽화와 30여 채의 소조상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북위와 당의 견직
물 60여 점, 748년의 문서, 인쇄된 불상 등을 발견 조사하고 계속 연구하고 있다. 뚠후앙문
서 중의 불교관계서적을 통해 중국의 불교 수용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사
전》에서)
석간 신문이 없는 도시
지앙쉰[江迅]
역사에 의해 탄생된 모든 것은 역사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다시 한번 이 말이 증명되었
다.
7월 26일 홍콩의 《신완빠오[新晩報]》가 종간되었다. 홍콩에 남은 마지막 석간이었던 이
신문이 지는 해처럼 위태위태하다가 마침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홍콩은 석간 신문
이 없는 대도시가 되었다.
신문업의 흥기와 발전은 한 사회가 현대화로 나아가는 지표자 사회 변천의 실록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화를 성장시키는 강력한 촉진제였다. 홍콩은 신문의 도시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인구 비례로 따져서 홍콩은 세계에서 중국어 신문이 가장 많은 도시
였다. 1000명당 300부의 신문이 발행되었으니 분명 세계 최고였다. 1921년에 홍콩 최초의 석
간인 《香江晩報》가 창간된 후 한때 17종의 석간이 발행되기도 했다. 석간 시장이 가장 번
성했던 시기는 1950,60년대로 당시 《工商晩報》·《明報晩報》·《新聞夜報》·《香港
夜
報》·《今夜報》·《中聲晩報》·《眞保》 등 11종이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선 후 석간
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했는데, 최근까지는 그래도 2종의 석간을 읽을 수 있었다. 그중 《星島
晩報》는 작년 12월 18일에 종간했고, 하나 남은 《신완빠오》도 5년 전부터 매년 1000만
홍콩달라의 적자가 발생했다.
《신완빠오》의 종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럭저럭 [홍콩반환일인]
'7월 1일'까지는 버틴 셈이다. 홍콩 사람들이 《신완빠오》를 말할 때면 으례 신판 무협소설
과 리앙위성[梁羽生]·진용[金庸]을 들먹거리고는 한다. 진용의 첫 번째 무협소설 〈칼과 검,
은혜와 원수〉가 바로 이 신문에 연재되었다. 문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탕르언[唐人]의 〈금
릉의 꿈〉, 푸이[溥儀]의 〈나의 앞 반생〉, 저우쭈어르언[周作人]의 자서전 〈저우쭈어르언
의 회상기〉, 주중리[朱仲麗]의 〈지앙칭 야사〉, 쉬주츠엉[徐鑄成]의 〈바다끝 이야기〉 등
이 《신완빠오》에 가장 먼저 게재되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상을 치르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그를 기리듯이, 《신완빠오》가 요절한 후 홍콩 사람들 모두가 그 존재 가치를 늘
어놓는데, 애도의 목소리 가운데는 괜한 칭찬도 적지아니 들린다. 마치 지금도 많은 돈을 벌
어들이고 있는 신문들보다 더 좋은 신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완빠오》의 사망은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아쉬운 감정을 갖도록 하는 모양이다. 마지막 날 《신완빠오》는 3만 부나
더 많이 발행했다. 45세의 애독자 시에주피아오[謝柱標]는 1970년대부터 《신완빠오》를 읽
기 시작해서 20여 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신완빠오》를 샀다고 한다. 그는 종간을 안타까
와 하면서 "종간 후 석간 신문 보는 습관 대신 텔레비전을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한다.
홍콩, 인구 630만의 없는 게 없는 이 세계적인 도시가 석간 신문 한 부도 지켜내지 못하
다니. 왕년의 신문업계의 대부 츠아리양용[査良鏞](진용)은 《신완빠오》의 종간에 대해 이
렇게 말한다. "석간은 세계적으로도 장래성이 없었다. 1980년대에 내가 《明報晩報》를 종간
하기로 했을 때 신문사의 모든 사람이 반대했었다. 신문이 1년에 수백 만 홍콩달라 씩 여전
히 큰 이익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장래성이 없다고 봤다. 당시 영미에서도 연구
결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석간은 장래성이 없다고 했다."
홍콩의 조간은 수 십 면에 달한다. 홍콩 사람들은 조간을 받아들면 아침에는 왕왕 뉴스
의 표제나 훑어본다든가 혹 증권이나 부동산에 투자한 사람들이 경제면을 좀 자세히 읽어보
는 정도다. 오락면·문예면·경마면 까지 포함에서 나머지 부분은 점심때나 저녁 퇴근 후로
미뤘다가 그때 자세히 읽는다. 매일 두 세 시간 씩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신문 두 부
를 읽는다는 것은 무리다. 밤이 되면 홍콩 사람들은 대부분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텔레비전
의 뉴스는 그 날의 소식인 데다 소리도 있고 그림도 있으니 생동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튿날 아침 조간을 읽으면 된다.
홍콩 사람들의 생활의 리듬은 매우 빠르다. 그전에는 페리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한가롭게 신문을 펼쳐들고 여유를 즐겼지만 이제는 지하철을 타는 데다가 해저터널까지 생
겨서 출퇴근 때 걸리는 시간이 줄었다. 더군다나 지하철은 서 있기도 곤란할 정도로 복잡해
서 신문을 손에 들고 타기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홍콩사람들은 낮에도 전쟁이고 밤에
도 용맹정진이다. 직업과 부업을 왔다갔다하면서 밤낮으로 일하는 데다가 간혹 한밤중에도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즐기니 신문 읽을 시간이 있을 리 없다.
과거 홍콩의 조간은 비교적 진지한 편이서 대체로 국제뉴스나 경제뉴스를 중시했다. 반
면에 석간은 흥미성 기사가 많았다. 그렇지만 근래에는 레저·문화·사회·실용·특집 등의
공간마저도 일간에게 뺏겨 버렸다.
《신완빠오》의 죽음은 시장에 의한 것이다. 마침내 홍콩에서 석간은 사라져 버렸다. 홍
콩의 석간 문화는 이제 역사가 되어 버렸다. 홍콩의 주류 문화는 고도로 번영한 상업사회
문화다. 상하이 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홍콩이 아시아 문화 중심지의 주요 후보지임을 인
정하면서도 "경제 실용의 원칙이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라고 일종의 우려를 표명한 바 있
다.
홍콩의 신문 사업은 춘추 전국 시대에 들어섰다. 그 어떤 사람도 과거의 시각으로 신문
시장을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초안정적 시스템도 장기간 유지할 수는 없게 되었고, 정으로
동을 제압한다는 작전으로는 석간에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신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경쟁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결정된다. 석간은 모두 오후에 발
행된다. 따라서 그것이 다루는 뉴스는 오전에 일어난 것뿐이다. 뉴스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
는가. 심지어는 주식 시장도 마감되지 않을 때다. 석간 신문이 오후 신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원고 마감을 오후 5시로 한다면 그나마 관공서나 회사가 막 업무를 끝내는 시
간이라 그 날의 주식 시황을 먼저 입수할 수도 있고, 오후 7,8시에 발행할 수 있게 된다. 더
구나 홍콩 사람들은 8,9시에 귀가해서 저녁을 먹는 게 보통이다. 혹시 그렇게만 된다면 혹시
석간이 지속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홍콩의 언론학자 쑤야오지[蘇약機]는,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석간의 쇠퇴가 정상
적인 것이고, 이미 석간의 생존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심지어 조간까지도 조만간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더욱 놀랍다. 최근의 시장 조사로는 홍콩의 신문
독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신문을 읽는 시간 역시 줄어들고 있으며, 젊은 사람일수록 신
문을 잘 안읽는다고 한다. 석간의 사망은 조간 쇠퇴의 징조일 뿐이며, 이는 구미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홍콩의 신문 사업이 흥성하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홍콩이 신문 하나 없는 도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97.8.13.)
江迅, 〈沒有晩報的都市〉, 《面對永恒 : 筆會文粹 1997》, (上海 : 文匯報筆會編輯部 編,
1998), PP.361-363. (2000년 3월 5일 김혜준 옮김)
아, 상하이 남자
롱잉타이[龍應臺]
나는 타이완 여성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20년을 살았고, 러시아에서 남아프리카까지, 이
스라엘에서 필리핀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에서 정말 내가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상하이 남자들을 알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10년전 대륙문학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민족의 시련이니 10년의
재앙이니 하는 따위가 아니었다. '어? 어째 소설에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하는 건 남자가
더 많네?'하는 것이었다. 한번 내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 들고 펼쳐 보자. 아니나 다를까!
부부가 손님을 초대했는데 "13일 아침 일찍 저우민은 일어나자마자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저우민이란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것이다. "임시로 살
고 있기 때문에 주방 기구가 제대로 없어서 특별히 근처 여관에서 밥그릇 세 개, 큰 접시
10개, 작은 접시 5개, 찜통 하나, 솥 하나를 빌어온다." 저우민은 이어서 생선을 손질하기 시
작하고, 그의 마누라는 이 옷 저 옷 멋진 옷을 입어 보고는 화장을 시작한다. 타이완 소설에
서는 이런 이야기란 찾아 볼 수가 없다. 타이완 소설가에게는 지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
이다.
당시 사회주의가 배출한 남자들은 정말 평등사상을 가졌다고 내심 감탄했던 게 기억난
다.
외국에서 만난 대륙 여자들은, 좀 과장하자면, 모두가 자신만만하고 말도 잘 했다. 남편
의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공한 남자의 뒤에
는 부드러운 여자가 있다'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담은 대륙 여자들에게는 통하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앞장서서 나아가지 남자의 그늘 뒤에 가려 있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타이완 여자들은 곳곳에서 전통적인 '미덕'의 흔적을 내보인다. 따스하고, 양순하고,
예의바르고, 검소하고, 양보하고, … 안 갖춘 게 없다. 표정이나 몸짓도 '아리따운 미소여,
그윽한 시선이여' 식의 수줍음을 추구한다. 자칫 부주의해서 자기 일이 너무 잘 되기라도
한다면 이는 남편에게 미안한 일로 '월권'이라고 생각한다.
스위스 여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표권이 없었다. 독일 여성은 결혼 전에야 아마도
야심이 없지도 않았겠지만 일단 아이가 생기고 나면 달라진다. 유치원·초등학교·중고등학
교가 전부 오전 수업만 하기 때문에 오후에는 집에서 보모·청소부·요리사·기사 겸 정원
사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들은 모두 무급직이라는 걸 곧 알게 된다. 남편에게 손
을 내밀어 생활비를 타 써야 하는 마누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일 여성은 유럽에서도 유
명한 현모양처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기 일을 희생하는 걸 미덕으로 여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여성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작은 마을을 지나다 보면 집집마다
아낙네들이 이불을 말리고 유리를 닦는 걸 볼 수 있다. 닦고 또 닦고, 먼지 하나 없이 닦으
면서 남편이 귀가후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륙의 남녀 평등에 대해 나름의 짐작이 있었다. 그런데 상하이의 남자들이
대륙 남자 중에서도 독자적인 길을 걷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부류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
치 못했다.
낯선 도시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이것저것 두런거리는 소리를 엿듣다 보면 대충 그 도시
의 문화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안데르센의 고향에서는 인어공주가 여하히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사랑을 따르기가 힘들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그림 형제의 동
네에서는 신데렐라의 계모에 대해 논하는 걸 들을 수 있다. 리앙[李昻]의 '남편 살해'[殺夫]
마을에서는 마누라 린씨가 어떻게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폭간당했는가에 대해 소곤거리는
걸 들을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화든 사실이든 간에 떠다니는 이야기 속에서 학대
받는 사람은 모두 어린이와 여자인 법이다. 24효는 아동의 피학대사요, 열녀전은 여성의 자
기학대서다. 하지만 20세기 말 중국 상하이에서는, 기이하게도 떠도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학대받는 사람은 모두가 남자다.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쫓겨나서 한밤중에 황후우 강변에서 배회한다. 집은 아내의 직장
에서 내준 것이라서 아내가 문을 가리키며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밖에 애인이 생겼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부인이 그더러 매일 기어다니며 방바닥을 닦게 하는
데 손목이 탈골될 정도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원래대로 끼어 맞추고는 다시 닦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귀가가 늦었더니 책상이고 책장이고 옷가지가 모두 대문밖에 내팽겨쳐
져 있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어떤 사람은 이혼을 하려 했더니 마누라가 과도를 손목에 대고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다시는 감히 이혼 얘기를 꺼내지도 못한다. 하지만 마누라는
그때부터 밤마다 남편에게 사랑을 강요한다. ……
"남자--", 나는 조심스레 더듬거리며 물었다. "남자--도 강요당한다구요?" 나도 그렇게
무지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상하이 남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좀은
특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안돼?" 친척은 깔보듯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장씨는 매일 시체처럼 출근하느라 더
이상 이혼을 요구할 힘도 없어. 마누라가 그를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니까!"
그래! 그렇다면 상하이 남자들은 스웨덴 남자들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유엔이 발표한
글을 외국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스웨덴에서는 남자들이 부인에게 매맞는 게 일반적
이라서 남성 보호 조직을 만들어 학대받는 남자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스웨덴
의 남녀평등권은 유럽에서도 가장 진보적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여성의 권리
가 신장되면 남성이 여성을 대신하여 피학대자가 되는 걸까? 서로 간에는 일종의 권력 투쟁
이 불가피하다는 말인가? 나는 더 깊이 생각해 볼 새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이 상하이 남
자가 신이 나서 자신이 얼마나 마누라를 겁내는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누라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면 뭐든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한다니까. 그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옆에 사람들이 너나 없이 거들어 댔다. 말해, 어서 말하라구! 화장실에
가서 어쩌는지.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워낙 깔끔한 걸 좋아해서 [공중화장실의]
변기에 그의 몸이 닿지 않도록 시키는 바람에 그는 늘상 변기통 가장자리에 두 발을 딛고
올라가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본다는 것이다. 한번은 화장실을 청소하는 할머니가 밖에서
들여다보다가, 아이쿠, 그의 다리가 보이지 않자 그만 욕을 퍼부으면서 빗자루로 화장실 문
을 두들겨 댔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안했다. 마누라가 내려오지 말랬으면 내려오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문화계의 어떤 사람과 점심을 하게 됐다. '개미탕'을 먹은 다음 그는 한 가지 결
혼 생활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아주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그는 이마의 땀을 닦고서는, "집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다음날 우리는 함께
회의에 참석하게 돼있었는데, "처가 말이죠, 일찍 돌아와 음식 준비를 해놓으라는군요. 처가
쪽 친척이 오기로 했다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분개하며 말했다. "내 일찍 돌아가나
봐요! 처가 친척이지 내 친척인가? 두고 보세요." 이튿날 회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양
반이 보이지 않았다. 하∼, 나는 알았다. 딴 사람들이야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겠지만.
이어서 이종 언니가 그녀 집에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한 일이다. 나는 당연히 언니보고 힘
들 테니 나가서 먹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언니는 귀찮긴 뭘이라고 했다. 언니네에 도착하니
상에는 이미 따끈따끈하게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언니와 나는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여전히 톡톡 탁탁 소리가 들려 왔는데, 대체 누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던
가?
한 젊은 남자가 뜨거운 국을 받쳐들고 들어왔고 언니가 소개를 했다. 앞으로 아마도 사
위가 될 사람인데, 엔지니어로 마침 외지에서 인사하러 온 김에 주방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과연 귀찮긴 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 남자는 그릇을 씻고 주방을 정리했다.
주방 일을 끝낸 후 그는 우리 두 여자가 시내 옷가게를 둘러보는 걸 모시고 나섰다. 오
후 내내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 그의 손에는 갈수록 무거워지는 크고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
었다.
"이런 게 말이야 타이완에서는 가능할 것 같애 어때?" 타이베이에 돌아온 후 나는 대학
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뭔가가 떠오른 듯이 생각을 더듬어가며 말을 했다. "그러니까 기억이
나는데, 상하이에서 별로 친하지 않은 어떤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어. 하루는 외출했다 돌아
오니까 말이야, 그 집 남자가 내가 벗어 놓은 속옷을 빨아서 베란다에 널어놓은 거야. 대경
실색을 했지 뭐."
"인제 알았어."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상하이 남자잖아."
나 역시 깨달았다. 상하이 남자는 정말 이렇게도 사랑스런 존재라는 걸. 상하이 남자는
시장을 보고 밥을 하고 방바닥을 닦으면서도 자신이 하찮다고 여기지 않고, 여자들의 옷을
빨면서도 자신이 비참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자들과 소곤거리며 말하면서도 자신이 사내답
지 못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자들이 잘난 체하도록 해주면서도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기지
않고, 아내의 성공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은 실패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상하이 남자는 침팬
지처럼 쿵쾅거리며 가슴을 두드리고 털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남성적 가치를 증명해 보일 필
요가 없는 것이다. 아, 이들이야말로 진짜 바다같이 넓고 하늘같이 높은 남자들이다! 해방을
추구해온 우리들 20세기의 신여성이 꿈에도 못잊으며 바라던 인물이 바로 이처럼 영웅의 환
상에서 벗어난, 부드럽고도 사리에 밝은 남자들이 아니었던가? 알고 보니 이들이 모두 상하
이에 있는 것로구나.
"천만에, 나는 상하이 남자는 별로예요!" 스물 다섯 살 짜리 한 독자는 경멸의 표정을 짓
는다. "꼬부라진 콩나물처럼 생겨 가지고 퇴근할 때 갈치 한 마리 사들고 들어가서 밥이나
하는 치들이 상하이 남자라구요. 나는 북방 남자가 좋아요. 남자답잖아요. 나는 여인네가 되
고 싶다구요."
나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예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르쳐 주고 싶었다. 이 어린
아가씨야, 그 남자답다는 것 때문에 당신은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할거야.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의 삶의 발전이라구. 세상의 고귀한 남자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걸 당신은 몰라.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저 곤혹스런 마음으로 이 매혹적인 도시를 떠났을 뿐. 상하이
의 남녀는 정말 평등한 것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빙산의 일각 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만난 상하이의 이른바 문화계 엘리트들은 모조리 남자들이었다. 타이베이나 미국 독일
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영역의 사회적 자원과 권력은 여전히 남자들의
손아귀에 있고, 상하이 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하며 능력 있는지 하는 것도 사적인 영역에 국
한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남녀간 권력의 평등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었다. 온 세상과 마찬가
지로.
스물 다섯 살 짜리 아가씨의 사내다운 남자에 대한 꿈은 그냥 코웃음치고 말 일은 아니
다. 미국 시인 Robert Bly가 쓴 〈Iron John : A Book About Men〉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
은 아마도 수많은 남녀가 겪는 곤혹스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된 남자, 부드러운 남자, 여자 속옷 빠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들이 사내답지
못하다고 싫어하는 여자들을 만나게 되면 어찌 해야 되는 걸까? 반대로 남자 옷을 입고 남
자 걸음을 걷고 남자와 '동지'가 되어 그들과 나란히 천하를 경영하는 여자들이 여자 맛이
없다고 싫어하는 남자들을 만나게 되면 또 어찌 해야 되는 걸까?
상하이에서는 다시 남자들의 애완용 '카나리아'나 여인네가 등장했다. 마치 역사가 거꾸
로 가는 듯이. 대체 남녀간의 문제는가 상호 견제 관계라는 등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걸
까?
생선을 든 채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사랑스런 상하이 남자들도 혹시 지금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무거운 건 아닐까?
龍應臺, 〈아, 上海男人!〉, 《面對永恒 : 筆會文粹 1997》, (上海 : 文匯報筆會編輯部 編,
1998), PP.1-6. (2000년 2월 21일 김혜준 옮김)
어머니의 강
야오산삐[堯山壁]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내게는 항상 한 줄기 강이 따라 다닌다. 마치 나그네의 허리춤에 꼭
동여맨 띠처럼.
고향 집 앞의 조그만 강이 바로 그것이다. 현의 지도에는 그저 단속적으로 그려져 있는
한 줄기 푸른 선일 뿐인 그 강을 고향 사람들은 니양허[泥洋河]라고 부른다.
내가 철이 들었을 때 니양허는 이미 마른 강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 말로는
예전에는 수량도 풍부한 사철 내내 흐르는 강이었다고 한다. 강은 타이항산[太行山]에서 흘
러나와 따루소택지[大陸澤]로 흘러 들어가는데, 비록 전장이 백리가 안되고 배도 띄울 수 없
기는 했지만 그 일대의 젖줄로 인근 사람들을 먹여 살려 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또 이 강은
우리 집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어서 서쪽에서 흘러와 일부러 구비지면서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항일전쟁 때 아버지가 상류에서 전투를 하면 종종 물길을 따라
산자 이파리나 감나무 이파리를 흘려보냈고, 세심한 어머니는 강가에서 이를 보면 아버지의
신발이 닳았다거나 담배가 모자란다는 걸 알아채고 적당히 준비하여 몰래 연락원을 통해서
보내주고는 했다. 아버지가 하류에서 활동을 할 때면 간혹 강가에서 물길을 따라 흘러 내려
오는 삼대나 무청을 보고서 할머니도 건강하시고 아이도 무사하다는 걸 알게 되어 마음놓고
전투에 나서고는 했다.
나중 아버지는 임무차 마을에 돌아왔다가 적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었는데, 적은 십수 명
의 동네 사람들을 붙잡아놓고 아버지의 행방을 대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지 하라고 했
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적을 유인하여 마을에서 뛰쳐나가 강물에 뛰어들었고,
맞은 편에 다다를 쯤 총에 맞아 강물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면서 사라져버렸다. 그 해 니양
허는 대단한 홍수가 있었다. 강물이 마을로 넘쳐들어 마당으로 집으로 쏟아지면서 사람들의
가슴까지 밀려들었다. 하늘에는 해를 볼 수가 없었고 비는 그칠 새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 그건 어머니의 눈물이요 통곡이라고 했다.
참으로 기이하게도 이듬해 니양허는 무슨 불가사의처럼 물길이 끊어지면서 강물은 말라
버리고 강바닥은 메마른 모래를 드러냈다. 실은 기후의 변화로 허베이성[河北省] 남부에 3년
가뭄이 들면서 온천지가 그리 변해 버린 것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게 모두 어머니의 눈물
이 메말라 버린 탓이라고 했다. 한창 나이의 아낙이 비와 이슬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따스함
이 필요한 어린아이가 햇빛의 은택을 잃어버림으로써, 어머니의 마음도 식어버리고 방초가
무성하던 마음자리와 더불어 강바닥도 모래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영웅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강에 돌로 된 다리를 놓았고, 아낙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늘
강가에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떠나버린 사람은 돌아올 수가 없었고, 말라버린 강물은 되채
워질 수가 없었다. 말라버린 강바닥, 메마른 물길은 어머니에게도 고향의 대지에게도 영원히
아물지 않는 한 줄기 상흔이었다.
적군은 화근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면서 우리 모자를 끝까지 추적했다. 선량한 주변 사람
들은 어머니에게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마음을 크게 먹을 것을 권했는데 그건 바로 개가
였다. 독한 일가 친척들은 자기들이 부담을 덜고 조금이라도 재산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우
리 이름으로 된 반 마지기 옥답을 팔아치웠으니 그건 곧 명줄을 끊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구걸까지 해가면서 풍찬노숙으로 이곳저곳을 숨어 다녔다. 사람들은 어머니 품에
안긴 말라비틀어진 나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고는 했다. "쯧쯧, 네가 어른이 되겠나
모르겠다!"라고. 어느 날 흙바람 속에서 어머니가 길을 잃고 어떤 마을을 찾아들었는데 듣고
보니 《24효》에서 꾸오쥐[郭巨]가 아이를 묻었다는 찐디엔촌[金店村]이라고 했다. 대경 실
색을 한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단숨에 십리 길을 달려나와 니양허에 다다르자 땅바닥에
쓰러져 통곡하기 시작했다. "보소, 이 양반아! 천길 물길이든 만길 절벽이든, 내 이 놈 길러
어른 만들어 당신에게 보이리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던 그 시절, 과부와 어린 자식이 살아나간다는 건 말이 그렇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남아있던 반 마지기 천둥지기는 우리 모자의 명줄이었다. 과
붓집 문 앞에는 시비도 많은 법이지만 어머니는 절대로 남에게 사정하지 않았다. 갈고, 일구
고, 뿌리고, 김매고, …… 전부 혼자였다. 다른 사람보다 힘은 몇 배나 더 들면서 수확은 훨
씬 적었다. 양곡 몇 말로 어찌 입에 풀칠이나 하겠는가? 추수철이나 보리타작 때면 어머니
는 나를 들쳐업고 뚱푸오리[東泊里]로 이삭을 주우러 갔다. 어느 핸가 강가를 따라 십리 밖
에 있는 뚱푸오리로 보리이삭을 주우러 갔을 때다. 어머니는 나를 나무 그늘 아래 뉘어놓고
이삭을 줍기 시작했는데, 이삭을 줍다보니 너무 열중하여 그만 나무 그늘 아래의 나를 잊어
버리고 말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달려왔을 때는 나무 그늘은 벌써 전에 한참 옆으로 자리
를 옮겼고 나는 땡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6월의 태양은 참으로 독해서 나는 하마
도 빨갛게 익어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지만 울다 지쳐서 잠들어 있었고, 온 얼굴에는
눈물이 말라버린 자국이 이러 저리 소금기와 함께 남아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등에는
보리를 지고 가슴에는 아이를 안은 채 니양허를 따라 하염없이 걷는데, 갈수록 무거워졌지
만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 만근인 다리를 움직여
십리 길을 다 걷는데는 족히 너댓 시간이 걸렸다. 니양허의 모래바닥에 길게 어머니의 발자
국이 남으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첫닭이 울고 있었다.
어렵사리 나를 키우면서 어머니는 나를 야오산[堯山]으로 중학교를 보내고, 징타이[邢台]
로 고등학교를 보내고, 티엔진[天津]으로 대학교를 보냈다. 나는 매번 니양허 강가를 따라
떠났고, 어머니는 매번 마을 어귀 그 돌다리에 서서 내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학을 졸업하자 나는 본래 티엔진에 남아 일하기로 되어있었다. 티엔진은 여러 강이 합
쳐지는 하류인 넓은 하이허[海河]도 있는 데다가 부오하이만[渤海灣]까지 가까웠다. 그렇지
만 내 마음 속에는 오로지 한 줄기 니양허뿐이었다. 세 번이나 고향 배치를 지원했고, 모두
허가를 받지 못하자 '보훈 우대'를 신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귀향했고, 언제든지 니양허 강
가로 갈 수도, 어머니를 뵈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3년
후 허베이성에서는 다시 나를 티엔진으로 발령하면서 전업 작가로 근무하도록 했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온갖 핑계로 마다했다. 이유는 어머니를 모셔
야하기 때문이었다. 관련 부서에서는 정말 대단하게도 일부러 어머니까지 찾아갔다. 어머니
는 듣자마자 대노를 하시면서 -- 나는 어머니가 내게 그토록 화를 내시는 걸 처음 보았다
-- 심하게 나를 꾸짖으셨다. "새를 키우는 건 날려보내기 위해서다. 내가 어렵사리 너를 키
운 것은 새장 속에 가두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게는 네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는 더
네가 필요하다. 나 때문에 앞날을 그르친다면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나를 못난 사람이라고
얼마나 원망하겠느냐."라고.
나는 다시 이별을 연연해하며 니양허를 떠나 성회로 돌아갔다. 스물 대여섯 살 때였다. 당시
나는 아직 결혼 상대가 없었는데, 일에 너무 전념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에게 너무나 감은하
여 내 마음을 다른 누구에게 나눠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나는
수정주의의 싹으로 비판을 받게 되어 일도 무망하게 된 데다 어머니의 재촉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럭저럭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 곧 이어서 나와 아내는 또 학
습반이다 간부학교다 해서 교육을 받아야 했고, 어머니가 다시 내 아들을 고향집으로 데려
가 키우게 되었다. 내 아들도 니양허 강가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아이는 착해서 날마다 할
머니를 따라다니며 강가에서 놀면서 장난감 총을 둘러메고 돌다리를 왔다갔다하며 할아버지
를 지켰다. 노친네들은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법이어서 옛날에 나 때보다도 더 손자를 아
끼셨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차마 아이를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다칠까봐서. 하지만 마을의 교육 환경이 사실 너무 안좋아서 아이의 일생
을 그르칠지도 몰랐다. 그건 꾸오쥐가 이이를 묻은 우매한 효성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오
랜 시간 고민 끝에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세 살 된 딸아이를 오빠와 교대시키는
것이었다. 아내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 두어 차례 눈물을 떨구더니 끝내는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다시 딸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고, 나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
어 온종일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다시 또 아내가 나서서 왔다갔다하며 설득에 설득을 거
듭하더니 마침내 어머니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모시고 왔고, 아버지의 보훈증서까지 가져와
서는 벽에 걸어놓고 날마다 볼 수 있도록 했다.
한 평생 외롭게 살면서 사람 세상의 온갖 고생을 다해본 어머니는 마침내 천륜의 즐거움
을 맛보게 되었다. 들락날락하는 아들 며느리, 희희낙낙하는 손자 손녀를 보면서 어머니는
확실히 즐거워하셨다. 아내가 은근히 말했다. "애들 할머니가 몸도 좋아지시고 얼굴의 주름
살도 펴지신 것 같아요. 몇 마디 노래도 흥얼거리시고요."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모내기노래[秧歌]라 불리는 전통극의 구절로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것들이다. 어머
니는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 그런지 읊는 것도 〈秦雪梅弔孝〉, 〈三娘敎子〉, 〈卷席筒〉
따위의 쓰라린 가락뿐이었다. 다만 전에는 고통스러울 때면 우는 대신 노래를 하시더니, 이
제는 즐거우셔서 노랫가락을 읊조리셨다.
한 달쯤 지나자 어머니의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종 혼자서 창밖의 버드
나무를 보며 넋이 나간 듯하고 간혹 버드나뭇잎을 주워오기도 하셨다. 아내는 애들 할머니
가 드시는 것도 줄고 주름살도 다시 늘기 시작하는 걸 보니 뭔가 노친네의 마음이 편치 않
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지붕에 세 세대라서 생활 습관이 다르다보니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어머니는 노냥 반찬 한번 만드는 데 들이는 기름으로 어머니 혼자서 한
달은 먹을 수 있겠다고 불평하시고는 했고, 내다버린 푸성귀 겉대를 주워와서는 경단을 만
들고는 했는데 아이들은 맛대가리가 없다고 투덜댔다. 또는 4,5백 위안이나 들여 텔레비전을
사서 뭐하냐, 외삼촌네 집 짓는 데 보태주는 게 낫지, 옛날에 우리를 얼마나 도와주었는데
…… 등등. 나는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트인 사람이라 지난 일
은 마음에 두지 않는 분이다. 어머니의 마음이 고향으로, 니양허 강가로 가 있었던 것이다.
그 돌다리야말로 진짜배기 아버지의 보훈증서였던 것이다. 노친네가 4층에 사시다보니 학교
갈 애는 애대로, 출근할 어른은 어른대로 다 가버리고 나면, 찾아와 이야기 할 동네 아주머
니나 할머니도 없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는 내가 퇴근해 돌아오니 어머니는 혼
자서 길가에 앉아 차가 어떻게 지나가든 사람이 어떻게 북적이든 그냥 졸고 계셨다. 나는
마음이 저려 결국은 어머니가 고향집으로, 그녀의 니양허로 되돌아가시는 데 동의하고 말았
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온 종일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
럼 니양허가 나를 따라 다녔다. 마침내 어느 날 나는 몇 년을 가지 않았던 고향에 갔다. 차
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멍해졌다. 나를 낳고 길러준 동네, 나를 낳고 길러준 니양허가 맞단
말인가? 눈앞에 펼쳐진 숲이 나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푸른 숲 속
에 돌다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다리였다. 다리 양켠은 분명 니양허일 텐데 지금은
녹음이 무성했다. 모래바닥은 옥토로 변했고 큰 사발만큼 굵은 백양나무가 가지런하게 쭉쭉
뻗은 채로 물길을 메우면서 마을의 방풍림을 이루고 있었다. 몇 년을 떠나 있었더니 마을에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해냈구나라고 싶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싶은 심정
이었다.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노인 한 분이 오시는 데 먼 일가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싱글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이 나무들을 누가 가꾸었나 한번 맞춰보
게. 바로 자네 어머닐세. 자네 어머니만큼 이 강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딨겠나? 이 몇 년간 현
에서 어머니에게 준 보훈연금으로 몽땅 묘목을 사서는 하나 하나 손수 심었다네. 세우고 바
르고 끈으로 묶고 하면서 신창 깁듯이 열심히 하셨지. 묘목이 눈을 틔우자 또 날마다 강가
를 지키면서 염소나 철없는 애들을 막는데 진짜 어릴 때 자네들을 키우는 것보다 더 애쓰는
것 같더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온몸의 피가 더워지는 것 같았다. 단 걸음에 고향집으로 내닫
으며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는 예전처럼 급히 달려나와 가방을 받아들고 연
신 춥거나 덥지는 않았는지 물으면서 먹이고 마시게 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돋보
기를 걸치고 한 어린애에게 침을 놓아주고 있었는데, 그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정이 가득한
눈길로 나를 한번 건네다 보며 웃으시더니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셨다. 침을 맞은 아이가
으앙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 애에게 쏠렸다. 아이들에게 침을 놓아
주는 것은 외가댁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이었다. 아낙네들이 바느질하는 침으로 혈
을 찾아 피를 뽑고 그에 맞춰 약으로 보하는 것인데, 내가 어릴 적에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면 어머니가 침을 놓아주고는 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며 "시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이
런 침을 놓으실까? 감염되면 어쩌려고."라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내 앞에 침을 흔들어 보
였다. 중의학에서 사용하는 은침이었고, 다른 한 손에는 알코올을 묻힌 약솜까지 들고 있었
다. 어머니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기다리고 있던 아낙네들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
이, 모두 내게 말해댔다. "할머니가 얼마나 용하신데요. 아이 보는 데는 워낙 경험이 많으셔
서 큰 병이고 작은 병이고 침 한 방이면 다 된다구요. 돈도 안받지 선물도 필요없지 얼마나
큰 적선인데요." "할머니를 모시고 가면 안돼요. 우리 동네는 할머니가 없으면 안된다구요.
지난번에 한 달 동안 안계실 때 동네에서는 하늘이라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니까요. 맨날 이
집 문을 두들겨대느라고. 댁은 나라사람이니 자기만 생각해서는 안돼요. 이 댁 할머니는 이
댁 애들 할머니가 아니라 온 동네 애들 할머니라구요." 나는 나대로 내 걱정을 말했지만 동
네 사람들은 그들대로 각자 떠들어댔다. 말인즉슨 사람 마음이란 목석이 아니라서 지난 번
어머니가 감기가 들었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들여다보러 왔고, 그 바람에 구판장에
통조림이니 먹거리가 몽땅 동이 났으며, 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를 아껴뒀다가 치료받으
러 온 아이들에게 약과 함께 나눠줬다는 것이다.
식사 후에도 어머니의 간이진료소에는 계속 사람들이 찾아와서 제대로 나와 말할 틈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집을 나서서 숲속으로 가 보았다. 나무 아래 삼삼오오 아이
들이 놀고 있었다. 나는 일찍이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이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부럽게 쳐
다보았다. 나뭇가지에서 새들이 짹짹거리며 즐겁게 지저귀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인생에
대한 가지가지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마치 내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나
뭇가지로 되돌아와서는 눈감아도 훤한 수풀 속을 날아다니면서 짹짹거리며 즐겁게 지저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다시 되돌아가실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사람마다 다 뜻이 있는 법,
어머니가 영원히 이 니양허 강가에 사시도록 해드리자. 영원히 돌다리 옆에, 아버지 옆에 사
시도록 해드리자. 어머니의 뿌리가 여기에 있고, 어머니의 땅이 여기에 있고, 어머니의 기쁨
과 슬픔이 여기에 있고, 어머니의 천지가 여기에 있으므로.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
다. 어머니의 그 신고한 일생을 지탱해온 힘은 단순히 수절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종의 삶에 대한 신념과 인격의 힘이었던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어머
니는 나와 내 아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계시지 아니한가!
며칠 뒤 나는 고향을 떠났다. 한 줄기 강, 녹색의 강, 어머니의 강을 데리고서. 지금 그
물결은 수시로 내 몸속으로 밀려들어와 내 심장의 터빈을 돌리면서 내 두 눈을 전보다 더욱
환하게 만든다.
堯山壁, 〈母親的河〉, 《父母天地心》, (石家莊 : 河北敎育出版社, 1998), PP.13-19. (2000
년 4월 15일 김혜준 옮김)
* 전설에 따르면 晉나라 사람인 효자 郭巨가 어머니께서 드실 음식이 모자랄까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산 채로 묻으려고 땅을 팠는데 땅속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는 글과 함께 황금
이 나왔다고 함.
울 줄 모르는 여자
한샤오후이[韓小蕙]
1
여자가 울 줄 모른다는 것,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구든 그런 경우가 있다. 이 황당한 세상이 털이 숭숭난 마수를 쳐들고 흉악한 태도로
그대에게 덤벼드는. 그대는 보검을 꺼내들어 단칼에 이 마수를 베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
대는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이때 그대는 온몸의 핏줄이 '쫙쫙' 갈라
터지는 것을 느끼면서 죽었으면 죽었지 이런 치욕을 참고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대는 또 사
랑스러운 그대의 딸아이를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딸아이의 보석 같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
는 그 순간 그대의 마음은 뒤흔들린다. 이리하여 그대의 가슴 가득 비분이 북받치면서 그
얼마나 한 바탕 울고 싶어지는가. -- 물론 그대도 알고 있다. 울음이 문제 해결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그대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불복과 비판을 보여
준다. 동시에 울음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하다. 무거운 부담을 털어 버리고 천둥 번개
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내는 그런.
여자의 눈물에는 연약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건 또 웬일인가? 아뿔싸, 그대는 자신이 울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
설사 마음 속에서는 벌써부터 찡해져서 長江이 넘실거리고, 黃河가 넘실거리고, 淮水·太
湖·珠海가 넘실거리더라도, 설사 목구멍과 눈에서는 벌써부터 泰山이 메고, 華山이 메고,
衡山·恒山·崇山이 메더라도, 그러나 눈물은 마치 애타게 바라는 단비처럼 바라면 바랄수
록 더 나오지 않는다.
그대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그대의 그 옛날 선조들처럼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하
늘을 향해 비는 수밖에. 울고 싶다고, 울음을 갈망한다고, 울기를 기도한다고. 그런데도 하늘
은 기어코 그대를 징벌한다. 은택을 베풀어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대를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밀어 넣는다.
이리하여 그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은 가닥 가닥 포승이 되어 그대를 묶고 또 묶는
다. 그대의 두 눈은 불길에 타올라 피어린 동굴이 되고, 그대는 온 세상이 망망한 바다로 변
해버렸음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는 견디지 못하고 폐부가 찢어지는 소리로 부르짖는
다.
"그래 내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무슨 엄청난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2
이 때 그대는 울 줄 아는 여자들을 그 얼마나 부러워하게 되는가!
그녀들은 주룩 주룩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린다. 혹은 '훌쩍훌쩍 쿨쩍쿨쩍 곡조도 없이, 큰
구슬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고', 혹은 '푸른 바다 달은 밝고 진주에는 눈물어리고, 푸른
들 해는 따스하고 옥에는 연기 피어오르고', 혹은 '베갯머리에는 눈물이요 창밖에는 빗물이
라, 창 하나를 사이 두고 날 밝도록 흐르누나'이고, 혹은 …… 이리하여 세상이 이 노랫소리
같은 흐느낌 속에 녹아들면서 가닥 가닥 아름다운 무지개가 다리를 놓아 그녀들이 두둥실
떠오르도록 맞아들인다. 설령 남자들이 일시 수 천 가지 곤란함 수 만 가지 어려움이 있어
서 그 즉시 그녀들을 봉래산으로 모시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의 그 만리장성 같은 팔을
펼쳐서 드넓은 품안에 그녀를 품게 될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눈물을 좋아한다. 여자의 눈물은 그들의 영웅적 기개의 마르지 않는 원천
인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울 줄 모르는 여자라는 것,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이런가. 그대는 흐르는 눈
물이 남자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련이 이미 그대를 철저히 소외시
켜 버리고 말았다. 그대는 더 이상 우둔하지도, 꿈꾸지도, 기대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이는
비단 그대가 사랑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도록 만드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아예 그대를 위
험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수호전의 무골호인인] 무대 같은 남자로 하여금 마치 성난
사자처럼 갈기를 꼿꼿이 세우고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그대에게 달려들도록 만들 것이다. 그
를 신통찮은 인물이라고 얕잡아 보지 말라. 그대를 요리하는 쯤은 누워서 떡먹기요 식은 죽
먹기다. 그저 손가락만 놀려도 끝이다. 세상의 질서는 애시 당초 태고 적에 정해진 것이다.
그대는 미친 척할 수도 있고, 바보인 척할 수도 있고, 속일 수도 있고, 응석을 부릴 수도 있
고, 잔꾀나 잔재주 또는 꼼수를 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대는 결코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오직 그들을 향해 울 수만 있을 뿐이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대에게 '부
드러운 맛이 없어'라는 표현을 선사하면서, 그대로 하여금 도저히 그냥 삼켜버릴 수가 없도
록 만든다.
사실 이건 이해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태양은 아무리 어두울 때라도 태양이라고 부르
는 법이니까.
3
결국 그대는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자가
울 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 라는.
그대의 눈앞에는 이런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황막한 황야 한 끄트머리에 말 두 마리가 서 있다. 말에는 각기 여자가 타고 있다. 두 여
자는 나이도, 체력도, 목표도, 심지어 마주칠 위험도 같다. 다른 것이라면 붉은 옷을 입은 한
여자는 울 줄 안다는 것이다. 울었다 하면 날랜 말은 그녀를 위해 광야를 달리며 길을 열
것이요, 울었다 하면 충성스런 시위가 그녀의 앞뒤를 보살펴 줄 것이요, 심지어 울었다 하면
자상하기 더 할 나위 없는 기사들이 그녀에게 일산을 받쳐주고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이리
하여 그녀의 여정은 평온하고 평안하며 흡족할 뿐만 아니라 시적인 정취가 넘쳐날 것이고,
그녀는 가뿐하게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다른 한 여자는 울 줄
을 모른다. 황야는 자신이 가진 모든 야만과 흉험함과 잔혹함을 거리낌없이 다 드러낸다. 호
랑이와 표범, 이리와 늑대, 독사와 전갈, 방울뱀과 도마뱀, 늪과 웅덩이, 도둑과 강도, 그리고
하늘조차도 비를 퍼붓고 번개를 내리치고 …… 흰옷의 여자가 지칠 대로 지쳐 천신만고 끝
에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온 몸은 상처 투성이요 옷은 누더기며 머리는 산발이고
심정은 극도로 처참하다. 그녀와 생사를 같이 한 말조차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혈육이 모호
하고 ……
단지 그녀가 울 줄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녀의 운명에는 이처럼 고통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는 그녀의 일생에서 넘고 건너야 할 수많은 역정 중의 오직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여자가 울 줄 모른다는 것, 충분히 비참한 일이다. 그녀를 아껴주고 도와주고 보호해줄
남자, 두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려줄 남자는 없다. 그녀 또한 도망칠 수도 애걸할
수도 자위할 수도 없다. 내심의 사랑과 증오도 쏟아낼 수가 없다. 고통의 바다만 망망하다.
대체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4
그러나, 여자가 울 줄 모른다는 것, 어쨌든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대는 가슴을 펴고 길을 걸을 수 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을 볼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하고, 성심으로 일하고, 선량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 자유롭게 노래하고, 웃고, 치장하
고, 화장하고, 수영하고, 등산하고, 독서하고, 글 쓰고, 영화 볼 수 있다. 그대는 영원히, 정말
영원히 무릎을 꿇는 심리적 굴욕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이리하여 그대의 면전에는 비로소 태양이 진짜 황금이 되고, 달이 진짜 옥이 되고, 하늘
이 진짜 다이아몬드가 되고, 대지가 진짜 비취가 되고, 그리고 여자 역시 비로소 진짜 그대
자신이 될 것이다. 완벽한 산, 완벽한 강, 완벽한 숲, 완벽한 초원, 완벽한 도시, 완벽한 시
골, 완벽한 초목, 완벽한 우주는, 완벽한 여자와 완벽한 남자가 함께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
다.
물론 인간은 목석이 아니다. 내심에서 사랑과 증오, 은혜와 원수, 달콤함과 쓰라림, 흥분
과 침잠,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이라는 시뻘건 용암이 끓어 넘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여자는 성현이 아니다. 연약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럴 때는 얼른 집으
로 돌아가서 문을 잠그고 혼자가 된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요리도 하고, 바느질도 하
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후련하게 한 바탕 울기도 하고. 그러나 설령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
들릴 정도로 울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을 붙들어매야 한다. 남자의 눈물은 가볍지 아니하고,
여자의 눈물도 싸구려가 아니다. 까오츠앙지엔[高倉健]은 "남자답기 위해서는 참아야 할 것
이 너무나 많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기실 여자가 참아야 할 것은 훨씬 많다. ……
5
그런 점에서 문학을 삶의 방식으로 삼고 있는 우리 같은 여자들은 참으로 신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면 펜을 찾아들고서 격렬하게 출렁이는 마음의 물길을 따라 거침
없이 단숨에 천리를 쏟아낸다. 거친 바다 세찬 파도, 사나운 천둥 무서운 벼락을 다스리는
것, 가장 고급한 삶의 향수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 어떤 여자도 다 울 줄 안다. 다만 내용과 형식이 다를 뿐이다. 목적지가 다를 뿐이고
값어치가 다를 뿐이다. 나보고 말하란다면, 성실 그리고 자존심, 바로 이것이 아름답고 사랑
스러운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1993년 4월 24일 베이징[北京] 시에허[協和大院]에서
韓小蕙, 〈女人不會哭〉, 《韓小蕙散文》, (北京 : 華夏出版社, 1999), PP.144-150. (2000년
4월 9일 김혜준 옮김)
이 별
린훼이[林非]
듬직하고 훤칠한 뒷모습, 그렇게 클 때까지 어루만져왔던 한 뒷모습이 총총히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탑승대기실의 끝자락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눈도
그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비행기에
오르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내 이 두 눈이 지구의 저편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더욱 안타까
웠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내리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내가 우울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아오훵[肖鳳]이 살며시 나의 손을 쥐었다. 말없이 우
리의 눈길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릴까봐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
로 처연한 모습 중에서도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마치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듯이 고개
를 저으며 말했다. "왜 한번 돌아보지도 않는 걸까요?"라고.
그리 크지 않은 탑승대기실은 불과 수십 걸음이면 끄트머리에 닿을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우리 곁을 지키면서 영원히 멀리 떠나지 않을 바에
야 오늘과 같은 헤어짐은 있게 마련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폐쇄되고 단조로운 젊은 시절
을 보냈던가? 아들이 시아오훵의 젖을 먹을 무렵에는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이 사
랑스런 아이에게 바다 건너 유학 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는.
시아오훵은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으니, 아들만큼은 바깥 세상을 다니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아마도 그런 뜻이 굳세었던 탓인지 내 예상과는 달리 흘리게 마련인 눈물도 억제할
수 있는 모양이다.
우리 옆에도 배웅을 나온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총망하게 멀어져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만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덩달아 내 마음도 무거워지면서 아들이 지금쯤은
비행기에 올랐겠지 하고 생각했다. 문득 수십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아들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였을 때다. 나를 가장 사랑해주시던 모친은 내가 하루 속히 이 답답한 고향을 떠
나 상하이의 중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셨다. 어느 햇빛이 좋은 아침, 모친에게 이별을 고하
고 길을 떠나려 할 때, 모친의 눈에서도 시아오훵의 바로 이런 고통스런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모친은 정신을 다잡으면서 "집 생각은 하지말고 열심히 공부하거라"고만 말
씀하셨다. 나는 그 당시 나를 사랑하는 모친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음을 전혀 알아차
리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제는 모친에게 이 말씀을 드릴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그저 묵묵히 구천에서
편안히 쉬시기를 기원할 뿐.
시아오훵은 어찌 이리도 강하게 될 수 있을까? 그녀는 이 훌쩍이는 어머니를 위로하기까
지 한다. "아들이 유학 가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울고 그러세요?"
나는 눈에 눈물이 출렁이는 걸 느끼고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가벼운 움직임에도
눈물이 쏟아질까 봐 겁이 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시아오훵을 끌어당겨 조용히 그곳을 떠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푸르른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황망히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우리를 향해 어지러이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나지막이 말을
나누며 아들이 막 걸음마를 하던 그 무렵을 더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는 나를 오른 손으로
는 시아오훵을 꼭 붙잡고서는, 파릇파릇한 풀밭을 걸으며 치솟은 나무들도 바라보고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도 바라보던 그 새카만 눈동자에는 동경과 신비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또 항상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아들의 크고 빛나는 눈을 바라보면서 왜 그렇게 웃어대
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아들은 아직 그런 어려운 문제를 답할 수는 없었지만.
천진난만하던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총명하고도 훤칠한 대학생이 되었을
까? 아닌 게 아니라 내 머리카락도 모두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들이 언젠가 티엔진[天津]에 강의를 나가면서 내게 플라톤과 키케로의 이야기를 물었
다. 읽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대답이 신통치는 못했다. 그런데 아들의 관심과 취미가 벌써
우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를 들면 아들은 우리가 십여 년 전에 가르쳤던 음악 감상 방
식에 대한 견해를 부정했다. 매혹적인 선율에 젖어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살이의 번뇌와
고통을 카타르시스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시아오훵은 아들이 없을 때 살짝 내게 말했다. "
어른들이 이리도 사랑하는데 자기가 무슨 고통이 있겠어요?"
"세대마다 자신만의 고통이 있는 법이요." 나는 곤혹스런 심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불현
듯 아들이 이미 장성하여 우리가 곰살궂게 마련해준 이 작은 세계를 벗어나 버렸음을 느끼
게 되었던 것이다.
밤에 세 사람이 한도 끝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온 집안의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어느 날 시아오훵은 아들의 결혼 문제를 꺼냈다.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익어왔던
일이었다.
평상시 늘 유쾌하던 아들은, 뜻밖에도 다소간 처량하면서도 풍자 섞인 말투로, "두 분 교
수님의 월급을 다 합쳐봤자 음식 파는 노점상이 버는 것만큼도 안될텐데, 어느 어여쁜 아가
씨가 이런 집의 아들을 좋아하겠어요?"라고 했다.
시아오훵이 분개해서 말했다. "사람은 그 자신의 가치로 평가해야 하는 법이야!"
"엄마, 엄마의 고상한 이상주의는 접으세요. 시대가 이미 지났어요." 아들은 슬쩍 시아오
훵의 어깨를 치며 그녀가 계속 말하려는 걸 막으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듯이 웃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시아오훵이었지만 아들과는 논쟁하고 싶지는 않았던지 한참 후에
야 내게 살짝 말했다. "클린턴이 아무리 대단해도 클린턴의 어머니 눈에는 영원히 어린아이
라구요."
바로 그 날 밤 아들은 TOEFL과 GRE를 치러가겠다고 했다. 곧바로 시험을 쳤는데 시험
도 참 잘 쳤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분
명히 깨닫게 되었다. 아들이 곧 우리를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지금 먼
곳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의 많은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막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벌써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썰렁하고 허전했다. 바깥은 맑고
무더운 한여름 날씨였는데도. 왕년의 즐거움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 바로 그 막 이
땅을 떠나버린 비행기 속에 있구나. 나는 문득 모친이 나의 장도에 앞서 하셨던 말씀이 떠
올랐다. "대장부는 천하에 뜻을 두어야 하는 법이다."라는. 그래. 이렇게 한 세대 한 세대 이
어나가야 하겠지. 나이든 세대로 하여금 이렇게 인생의 이 떫은맛을 맛보도록 해야만 하겠
지.
아들의 방에 들어선 시아오훵은 살그머니 아들이 쓰던 책상도 쓰다듬고 아들이 오늘 아
침까지도 자고 일어난 이불도 쓰다듬더니, 마침내 눈물을 떨구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날마다
시카고라는 이 낯선 도시에 관심을 쏟으면서 아들이 그곳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라는 상념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마음을 졸이면서 수수께끼 같은 그 머나먼 곳을 축원하게
될 것이다.
1993년 10월
林非, 〈離別〉, 當代散文名家精品文庫 林非卷》, (成都 : 四川人民出版社, 1997),
PP.242-245.
책,영화,리뷰,
가라오케의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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