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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말(馬)이다

by Casey,Riley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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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말(馬)이다 

우리의 대인관계(對人關係)는 주로 '말'에 의존한다. 말은 세상사에 대해 말하는 이의 '인식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현방식이다. 그러나 '인식상태'의 오류란 그 어떤 사람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말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인식상태'에 대한 심층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요, 적어도 오류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말함에 있어 반성적인 겸허함이 내재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진정한 의미의 반성적인 겸허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고 기껏해야 지극히 형식적인 예의로서 자신을 방어하는 잔꾀나 부리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이 진리인양 독선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감을 넘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어찌 그런 말도 말이 될 수가 있으며 그런 말도 말이라고 들어 주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인가. 

'말은 말(馬)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상태'를 실어나르는 '도구'(道具)인 것이다. 따라서 '인식상태'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외형적으로 아무리 번지르르 해도 그 말이 과연 말이겠는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식상태'의 오류는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지 살펴보자.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핵심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파중에 유식불교(唯識佛敎)가 있다. 유식불교는 바로 우리의 '인식상태' 자체를 분석하는데 매우 귀중한 단서(端緖)를 제공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우리의 인식구조를 크게는 3층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제삼능변(第三能變)이다. 인식구조상 제일 바깥층으로서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여섯이다.
둘째는 제이능변(第二能變)이라고 불리는 층으로서 자기중심성 즉 에고(Ego)이다.
셋째는 초능변(初能變)으로서 먼먼 과거로부터 쌓아온 경험들이 축적된 곳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우리는 사물 자체를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 걸러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무엇을 '듣는다'고 할 때,
첫째는 귀가 허락하는 가시청(可視聽) 범위에서만 듣는 것이며,
둘째는 그중에서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듣는 것이며, 
셋째는 그중에서도 먼먼 과거로부터 쌓아온 경험들에 적합한 것만 듣는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대인관계를 악화시키는 최대의 것은 두 번째인 자기중심성 즉 에고(Ego)라고 할 수 있다. 불보살(佛菩薩)과 대중(大衆)의 핵심적인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으니 이와 관련시켜 말하는 유형을 궤변(詭辯), 달변(達辯), 눌변(訥辯)의 세가지 수준으로 이름 붙여서 구분해 보고자 한다. 

1. 궤변(詭辯)에 대하여 

유난히 자기중심성(Ego)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아무리 논리적이더라도 매우 일방적인 성격을 띤다. 그래서 궤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매우 전투적이다. 자기와 다른 인식체계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이나 감정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프롬'의 표현을 빌자면 '불타는 얼음'들이다. 한마디로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전혀 고려할 줄 모르는 지극히 '유아적'(幼兒的)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들이 학문, 도덕, 예술, 종교 등을 쬐끔 알게되면 그럴싸하게 포장된 말로써 단견(短見)의 칼날을 휘두르는 '망나니' 짓들을 일삼는 꼴들이란 참으로 가관(加冠)이다. 글이 격해지는 것을 막는 의미도 있고 해서 시(詩) 한편을 인용(引用)하면서 스스로 절제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머니, 이 세상은
무명옷 곱게 차려입은
목련이 피었습니다.
갓깬 병아리 입술모양 노란 개나리가
울타리마다 주렁주렁 인사합니다.
진달래 온 산에 붉게 덮여 오르고
어디선가 소쩍새 울어댑니다.
햇빛 맑은 한식날
슬프게 봄은 활짝 피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 세상은
생전에 어미니가 즐겨 보시던
TV나 신문지엔
쯧쯧 혀를 차시던 대로
차마, 보아서도 들어서도 무서운 일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리고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큰 칼이나 작은 칼이나
자루를 거머쥔 자들의 단견(短見)의 칼날은
어디서든 함부로 난무하고 재단되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도 이 세상은
-김정수 님의 '어머니, 이 세상은'-



2. 달변(達辯)에 대하여 

궤변이나 늘어 놓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달변가들인데 이들은 사람들마다 다른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적어도 지적(知的)이나마 인정을 하는 사람들로서 궤변론자들에 비하면 자기중심성(Ego)이 상당히 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자기중심성(Ego)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기 주장을 펴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궤변론자들에 비하면 훨씬 '독기'가 적어 듣기에 부담이 별로 가지 않는다.
더구나 이 방면에 능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자기중심성(Ego)을 적절히 맞추어 가면서 말을 하기 때문에 듣기에 매우 기분이 좋다. 말하자면 달변이란 적어도 남의 자기중심성(Ego)을 건드리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남의 자기중심성(Ego)을 추켜주면서 전개되는 말을 일컫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에 의존하는 생활양식이라고 할 때 우리는 적어도 '달변'을 지향해야 한다. 궤변론자들끼리 만나면 전투가 일어나지만, 달변가들끼리 만나면 '대화와 타협'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궤변론자들에 비하면 약하다고 할까, 세련되었다고나 할까, 그러한 형태로 자기중심성(Ego)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어딘가 상쾌함이 없다. 좀더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앞의 궤변론자들은 거칠지만 직설적인 맛은 있는데 이 달변론자들은 매우 교활하기 짝이 없이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에 그 빤질 빤질함에 홀딱 속아 넘어가기 좋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와 타협'은 항상 예의 바른(?) 수준에서 겉도는 전투일 뿐이지 결코 깊은 인격적 만남의 차원이 되지 못한다. 

3. 눌변(訥辯)에 대하여 

어찌된 셈인지 자기중심성(Ego)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중심성(Ego)을 잔잔히 깨어있는 의식으로 미소속에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안다. 자기중심성(Ego) 그것은 산너머 흘러가는 구름처럼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안다.
이들은 자기중심성(Ego)이 없어서 엄청난 사물 자체의 '그러함'을 왜곡없이 그대로 인식하고 보니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 항상 머뭇거리며 수줍어하는 새악시일 뿐이니,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다. 

'대직(大直)은 약굴(若屈)하고 대교(大巧)는 약졸(若拙)하며 대변(大辯)은 약눌(若訥)이라.'(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처럼 보인다. 큰 기교는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참다운 웅변은 더듬는 듯 답답해 보인다.) 

그러나 더듬거리기만 하면 다 눌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강경하게 말할 때는 참으로 극단적이지만 궤변론자들처럼 독기가 없고, 유창하게 말할 때는 스스로 그 말을 그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달변론자들처럼 예의(?)가 없고, 오히려 무례(?)하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정체불명(正體不明)이요, 혼돈(混沌) 그 자체일 뿐이다. 

이상으로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궤변, 달변, 눌변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우리는 말하기 전에 내 말이 '궤변', '달변', '눌변'중 어느 유형이겠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말하는 것에 그칠 일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태도 또한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듣는다는 것은 또 다른 형식의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듣는 태도가 건성일 때 그것은 "네 말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매우 진지할때는 "네 말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즉 듣는 다는 것은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자기 수준 만큼만 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한계를 벗어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듣는 이의 태도 또한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니 과학적 태도, 예술적 태도, 종교적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첫째, 과학적 태도란 논리적 태도이다. 말의 내용 자체만을 논리적 기준하에 검토하는 것이다. '말은 말(馬)이다.'라고 할 때 말(馬)만 보고 그 말(馬)위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태도이다. 말을 듣는 데 있어서 가장 피상적인 태도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학자들이 대개 이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학자들이란 먹통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먹통들이 쓸데 없는 존경을 받는 것이 세상이니 노자(老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상현(不尙賢)이면 사민부쟁(使民不爭)이요 불귀난득지화(不貴難得之貨)면 使民不爲盜(사민불위도)요 불견가욕(不見可欲)이면 사심불란(使心不亂)이라.'(현명한 사람을 존경하지 않아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함이요,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중히 여기지 않아야만 백성들로 도둑이 되지 않게 함이요, 가히 욕망을 보이지 않게 해야만 마음으로 하여금 어지럽게 않음이라.) 

흔히 윤리는 철학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먹통들을 생각한다면 윤리는 철학이 아니라 차라리 다음에 말하는 예술을 넘어 종교에 접근한다. 과목상으로 말하자면 사회과가 인접과목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 미술이 인접과목이다. 

둘째, 예술적 태도란 심미적(審美的) 태도이다. 말의 내용 자체보다는 그 표현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것이다. 노래를 듣는다고 할 때 과학적 태도가 가사를 중시한다면 이 태도는 곡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전자가 말에 얽매여 있다면 이 태도는 상상히 말의 얽매임으로부터 풀려나 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궤변론자들과 낭비적인 맞상대를 하지 않게 되고, 그들의 독기(毒氣)를 간파할 수 있게 된다. 또 내가 말할 때 독기를 실어낼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억제해서가 아니라 나의 미적감각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예술적이 될 필요가 있다. 예술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예술적이 될 필요는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술가라고 해서 모두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다. 예술가이면서도 그 언행(言行)에서 독기가 풀풀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실제로 모처에 근무할 때 자칭 난(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날이 그 언행(言行)이 난을 닮아야 할 터인데 자기들 끼리만 몽쳐 다니면서 직장의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었다. 정말 가관들이었다. 그래서 원수가 되기를 각오하고 동양철학의 정수(精髓)이시며 작명(作名)의 대가(?)인 나는 그 모임의 이름을 이렇게 귀엽게 이름을 고쳐 주었다. '독사회(毒蛇會)'. 

셋째, 종교적 태도란 선(禪)의 태도로서 말하는 사람의 전인격을 느끼는 것이다. 가사와 곡 그리고 그를 넘어서 말하는 이가 풍겨내는 기(氣)을 섬세하게 느끼는 것이다.
첫사랑에 빠졌을 때가 그렇다고 하던가. 상대방의 말과 음성은 말할 것도 없고 눈빛, 숨결, 손가락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고감도의 안테나가 되어 그 모두에서 '그(그녀)'를 느낀다. 그것은 직관적(直觀的)인 것이고 지극히 심미적인 것이며 완벽한 아름다움의 상태이다.
우리가 사랑에 그토록 관심이 많고 가슴이 설레는 것은 단지 이성(異性)과의 만남 때문은 아니다. 이성(異性)에 의해 깨우쳐지기 쉬운 선(禪)의 태도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禪)을 취하기 보다는 이성(異性)에 집착한다. 그래서 결혼 생활 속에서 선(禪)이 계속 자라나지를 못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마음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異性)이 없이도 선(禪)의 태도를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이성(異性)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 이들이 '홀로'있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홀로'서도 너무나 풍요롭고 넉넉한 사람인 것이다. 이 만한 힘도 없는 사람들의 '홀로'있음이란 억지요, 고립이요, 외로움이며 사이비 자유에 빠진 사람일 뿐이다. 당연히 결혼생활을 통해서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홀로'에 도달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의존을 점차 벗어나야 하며 그것을 빌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불교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있다. 소리를 '듣는다'가 아니라 '본다'고 했으니 소리를 본다는 것이 바로 남의 말을 듣는데 있어서 종교적 태도 즉 선(禪)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말 자체에 얽매여서 옳으니 그르니 따지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하도 지겨워서, 말은 번지르르한데 독기(毒氣)와 천기(淺氣)가 풀풀거리는 사람들을 대하기도 이젠 지쳐서, 이렇게 머리도 꼬리도 없이 글을 써보았다. 독자 여러분의 혜안(慧眼)을 기대할 뿐이다.
* 젊은 시절의 글 중에서, 

From sikido, 200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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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제목이 맘에 들었습니다. 네...우리 모두 축배를 듭시다.
퍼온 곳은http://user.chollian.net/~sikido/




삶은 다함께 부르는 축배의 노래입니다. -텅빈충만(充滿)- 

주위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일이지만 작은 말다툼 하나라도 이쪽 말을 들어보면 이쪽이 옳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저쪽이 옳다. 저마다 논리가 정연하여 어디 흠잡을 데도 없이 옳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싸움판이다. 옳음이 싸움을 일으킨다면 교사인 나로서는 옳게 살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싸움질 하라고 가르치는 것밖에 안되는 꼴이니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결국 나는 싸움을 일으키는 옳음은 진정한 옳음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진정한 옳음의 조건은 무엇인가를 자문자답해 보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여 해결의 실마리는 어릴 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어릴때 다른 아이와 싸우면 어른들은 "둘다 똑같다. 같으니까 싸우지" 그렇게들 말씀하셨다. 그말이 그때는 그렇게 야속하고 억울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100% 옳고, 상대가 100% 틀렸음에도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야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 종아리를 맞아 가면서 아프게 아프게 가슴에 새긴 그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보고 싶다. 

세상은 어울려 사는 맛이다. 그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원리다. 내가 100% 옳기에 100% 틀린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옳기 때문에 양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울려 사는 삶을 실현해야 한다. 양보하여 어울려 삶을 실현할 수 없는 100% 옳음은 사이비 옳음일 뿐이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가지만, 한국사람이면서도 우리는 너무 서구화 되었다. 배우는 것 먹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나도 모르게 우리는 서구식 사고방식에 물들고 말았다. 이것이 더 큰 문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당한다. 문화적 침략을 당함이요, 얼을 빼앗기는 것이다.
100% 옳다는 것, 옳음 그 자체만을 분석하는 것, 그것은 서구적 스타일이다. 
한국적 스타일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양보할 수 없는 100% 그것은 100%가 아니다. 다시 말한다면 '서구적 100%+α' 이것이 바로 한국적 스타일이다. α,그것은 바로 양보의 마음씀이다. 이것은 넉넉한 내면적 공간의 힘이다. 나는 공간을 말한다. 나는 공간을 사랑한다. 
양보할 수 없는 100%, 그것은 '꽉참'이다. 양보할 수 있는 100%, 그것은 '텅빔'이다. 동양의 허(虛), 공(空)은 이러한 텅빔을 일컫는다. 꽉참이 과학이라면 텅빔은 에술이다. 동양은 예술을 사랑한다. 동양화의 여백, 그것은 이러한 텅빔을 형상화한 것이다. 물감이 모자라서 남긴 것이 아니다. 텅빔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예술가의 삶에 텅빔이 없다면 그 텅빔은 사이비다. 나는 이렇게 단언한다. 예(藝)는 도(道)이다. 서예는 서(書)를 통한 도의 추구이며 태권도는 태권을 통한 도의 추구이다. 도는 텅빔의 체험적 이해이다.
그러나 동양마저도 오해했다. 텅빔을 문자 그대로 텅빔인줄 알고 지극히 소극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다. 세속을 도피하여 혼자 고고한 사람도 나왔다. 텅빔, 그것은 강자의 논리다. 양보할 수 있는 100%, 그것은 지극히 강자의 논리이다. 양보할 수 밖에 없는 0% 옳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양보도 아니다. 

돌아가서,그 텅빔을 모른다면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토리 키재기의 똑똑함으로 서로를 헐뜯는 어리석음만 있을 뿐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즉 텅빔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옛 어른들은 똑같다고 했고, 텅빔을 모른다면 싸울 수 밖에 없다는 뜻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여겨진다.
같은 맥락에서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던 "사람이 좀 어리석은 데가 있어야 한다"는 말도 '텅빔'의 상태가 그 내면에 내재되어 있어야 바른 삶을 살 수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텅빈 상태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전한 상태임을 지적한 말로 볼 수가 있다. 약(略)하여, 제목대로 '텅빈충만'을 강조하신 말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들인 노동과 직업에서의, 물질과 권세에서의, 사상과 종교에서의 '텅빔'을 소주제로 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1. 노동과 직업에서의 '텅빈충만'
노자의 도덕경 제20장 첫 구절에 "絶學(절학)이면 無憂(무우)"란 말이 나온다. 
여기서 '학(學)'이란 꼭 학문을 말한다기 보다는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일삼는 태도를 말함이라고 우선 얘기할 수 있다. 세상의 유식쟁이들은 온갖 그럴듯한 근거를 들이대어 직업을 분별하여 수직적인 등수를 매긴다. 1위 법관, 2위 의사 등등. 이렇게 치밀하게 잘 따지는 상태가 '꽉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똑'소리가 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유식쟁이들의 논리에 한번 말리게 되면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모두들 1위를 향해 아귀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패배감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리하여 노자는 말했다. "不尙賢(불상현)이면 使民不爭(사민부쟁)"이라고. 도덕경 제3장에서의 말씀인데 유식쟁이들을 존경하지 않도록 해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절학(絶學)'이란 사려분별을 일삼는 태도를 끊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텅빔이란 바로 이 등수의식을 버린 상태인데 세상에서는 '버린다'는 것을 소극적 의미로 받아 들이는 듯 하지만 실은 대단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한 일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버린다'는 것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 어린이 같이 잔잔한 미소로서 바라보며 즐기는 삶의 태도가 인생을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확신하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 세상에서 말하는 1위 직업이나 내 적성에 맞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해도 그것을 되씹고 꼬집고 하면서 한숨짓는 일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임을 깊이 자각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우침 속에 삶은 피어나는 것이며, 그동안 등수에 사로잡혀 살았던 내 모습을 생각할 때면 배꼽이 가려워서 웃음이 입가에 그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웃음, 그렇다. 등수의식을 버린 사람들은 잘 웃는다. 입가에 항상 웃음이 어려 있고 그 삶은 경쾌하다. 도무지 심각하지를 않고 맑은 장난기가 흐른다. 이것이 바로 노동과 직업에서의 '텅빈충만'의 모습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선비정신이 있었다. 평소에는 덕으로써 이웃을 감화하고 유사시에는 M-16을 들고 뛰어 나갔던. 선비란 누구인가. 만 사람의 존경을 받은 선비란 누구인가. 그는 글을 읽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의 말처럼 유식한 무식자가 꽉찬 것이 세상이다. 진정한 선비는 어떤 직업에 속한 사람이든 자기 직업에 대한 철저한 자긍심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이 노동과 직업에서의 '텅빈충만'의 모습이다.
예수는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다. 어부, 속세에서는 별로 높은 지위는 아니나, 그 솜씨가 나날이 낫도록 단지 꾸준히 나아가면, 그리하여 자기 직업의 내면에 흐르는 한가닥 오직 한가닥인 그 맥을 잡게 되면 자긍심이 솟는다. 그 자긍심 앞에서는 귀천의식은 한낱 허깨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어부는 어부라기보다는 이미 선비이다. 만 사람을 낚아 올리는, 즉 만 사람의 존경을 받게 되는 진정한 선비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과 직업에서의 '텅빈충만'의 모습이다.
세상을 탓하지 말자. 이러한 '텅빈충만'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것을 세상을 탓하지 말자. 그러한 격정과 책임전가적인 마음이 일렁이고 있는 그 상태가 오히려 '텅빈충만'을 방해하는 최대의 요인이다. 문제는 나의 내면에 있고, 모든 것은 나에게서 구해야 한다. 요즘 최신 히트 용어로는 "내 탓이요"이다. 
무슨 일을 하든 순수한 집중의 경지가 떠오르도록 연습해야 한다. 순수한 집중, 그것은 어린이와 같은 맑음이다. 결과에 얽매여서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 같이 독기가 풀풀거리고 긴장된 집중과 대비된다. 

운동장에 가득찬 잡초를 뽑아 보았는가. 한포기 한포기 정성껏 뽑아 보았는가. 따스한 흙의 감촉을 느끼며, 따사로운 햇살을 마냥 즐거워 하며 시간이 사라진 경지에서 노닐어 보았는가. 심심해서든 벌로서든 계기야 무엇이든 좋다. 벌이면 또 어떠한가. 벌은 바로 '텅빈충만'을 위한 수도의 장이다. '텅빈충만'이 벌의 목적이며, 거기에 다다를 때 비로소 벌은 완성이 된다. '텅빈충만', 그 순수한 경지를 느껴 보았는가.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가을 하늘을 보았는가. 아름다움의 찬미가 절로 깊은 내면에서 흘러 나옴을 보았는가. 
선(禪)이 바로 이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거한 상태, 그것이 바로 선이다. 팔다리야 꼬고 앉든 쭉 뻗고 앉든 마음대로 하라. 나는 전공이 와선이요, 부전공이 침선이다. 그래도 충분히 선의 세계를 익혔다. 

기도, 기도도 바로 이것이다. 손바닥 비비고 앉은 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겨울날 손이 몹시 시려울 때 하는 짓이다. 경전을 읊조리고 앉은 것이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녹음기가 대신할 수 있다. 일상사 모두가 선이요, 기도일 뿐이다. 그렇다. 나날의 삶 그 자체가 이미 선이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온몸으로 선과 기도가 이뤄지는 사람만을 존경한다. 이런 사람만을 나는 존경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속세에 있으면서도 이미 속세에 있지 않음이요, 속세에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속세에 있음이다. 성(聖), 속(俗)은 원래 구별이 없는 것이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천국과 지옥은 하나이다. 

때가 되었다. 우리 내면은 너무나 공간이 없다. 너무나 좁아진 상태가 되었다. 인간미, 그것은 공간의 힘이다. 오늘날 너무나 거친 심성을 가진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 많은 것도 바로 공간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 세태로부터 우리는 탈출를 꿈꾸어야 한다.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의 비참함을 문제삼지 않는다. 힘과 힘만으로 부딪쳐 세상을 살아가려 한다. 너무 똑소리가 나게 살아가려고 한다. 텅빔이 없다. 

2. 물질과 권세에서의 '텅빈충만'
물질과 권세, 이것은 우리가 속세에서 구하는 2대 가치라고 보아도 잘못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남보다 훨씬 많은 것을 그리고 귀한 것을.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때로는 남의 가슴에 콘크리트 대못을 치는 만행도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삶은 소유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의 삶도 있다. 
먼저 소유의 삶이란 금력이든 권력이든 소유의 정도를 가지고 삶의 행, 불행을 저울질 하는 삶이다. 우리 사회에 증가하고 있는 폭력과 저항은 이 소유의 삶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폭력, 그것은 소유의 삶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 사람들에게 슬픔을 불러 일으킨다. 이 슬픔을 불러 일으킨 일, 그것이 바로 폭력이다. 내가 나의 소유물을 자랑한다는 것, 그것은 소유하고자 한 사람에게 시기를 불러 일으킨다. 이 시기를 불러 일으킨 일, 그것이 바로 폭력이다. 그리고 슬픔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이미 저항이다. 시기를 한다는 것, 그것이 이미 저항이다. 결국 소유의 정도를 가지고 행, 불행을 저울질 하는 의식수준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한 폭력과 저항은 피할 수 없다.
이에 비하여 무소유의 삶이란, 소유를 위한 행위 그 자체에서의 희열을 삶에서의 근원적인 가치로 보는 삶이다. 그리하여 소유 그 자체와는 상당한 거리의 내면적 공간이 있다. 소유를 위한 행위, 그 자체에서의 희열에 빠져있기에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슬픔보다는 아릿다운 내면적 매력을 준다.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소유 그 자체와는 상당한 거리의 내면적 공간이 있기에 소유를 자랑하지 않아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시기를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깊은 내면적 공감을 준다.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이런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소유 그 자체를 중시함을 볼때 가벼운 미소만을 던질 뿐 결코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소유 그 자체를 중시하는 사람보다 훨씬 고귀한 내면적 쾌락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소유물을 통해 자기를 과시할 때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 결코 시기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소유 그 자체를 중시하는 사람보다 훨씬 고귀한 내면적 쾌락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벼운 미소를 던지는 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아 주는 일, 이것이 바로 무저항이다. 그리고 무소유의 삶 이것이 바로 물질과 권세에서의 '텅빈충만'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의 삶에 머무르는 한 폭력과 저항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그것이 미미할 때는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또 그것이 뚜렷할 때도 그를 교훈으로 하여 아예 삶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즉 무소유의 삶을 살아갈 생각을 내어보지 못한다. 오히려 "저놈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저런 놈은 인간 쓰레기다"고 분노하면서 무자비한 저항을 행사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무자비한 저항을 하는 사람이나 다같이 소유의 삶의 차원에 매여 있는 점은 동일함을 보지 못하는가.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노는 어린이에게 더 멋지게 보이는 장난감을 주지 않으면 그 물건을 놓지 못하듯이,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소유의 삶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 철부지 삶을 놓지 않는 것, 그러나 우리의 슬픔은 소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많은데 그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실증적으로 즉 온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 점이다. 예수의 말처럼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는 점이다. 

3. 사상과 종교에서의 '텅빈충만'
내가 종교인이었던 시절, 나는 입만으로 기도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온몸으로 기도하는 종교인이고 싶었다. 나는 제 혼자 잘나 설쳐대는 종교인이 아니라, 아름답게 이웃과 화합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종교인이고 싶었다. 나는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독선적 사고를 가진 종교인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대해 깊은 애정의 시선을 가진 폭넓은 종교인이고 싶었다. 나는 앵무새 같이 경전의 구절이나 줏어 섬기는 종교인이 아니라 경전의 구절 구절 깊숙히 흐르는 뜨거운 삶의 교훈을 읽어내는 밝은 눈을 가진 종교인이고 싶었다. 
나는 당시의 나의 그 모든 바램들이 실현된 상태가 예수나 부처의 모습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고, 또한 그들이 신도들에게 바라는 바였다고 생각한다. 그 옛날 나처럼 종교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에 절망하고 있는 젊음을 위하여 먼저 이 점을 이야기 해두고 싶다. 

마태복음 제18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 까지 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수제자이다. 그가 스승인 예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용서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를 영 몰랑하게 보고 상투 꼭대기로 기어 오르던데요. 그놈들을 그냥 놔둬요? 럭키 세븐이라고 하니 일곱번 까지만 참고 그 다음부터는 콱 죽여놔야 되지 않을까요? 보세요! 사람들이 하도 기어 올라서 상투는 커녕 대머리가 될 판입니다. 요번 태풍으로 배가 부셔져서 멸치도 못잡아 약살 돈도 없는 데요" 예수가 말한다.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가 럭키 세븐으로 나오니까 그대로 맞받아 예수도 럭키 세븐으로 답했다. 코믹하고도 명쾌한 답이다. 이처럼 멋진 고차적 코미디도 없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예수는 단 한번만 용서해도 나는 그만 숙연해져 다시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해도 나는 또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웃기고 있네.." 라고 뇌까리며 보란듯이... 이 차이는 무엇인가. 
이와 꼭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강 이런 이야기다. 어떤 스님이 전몰장병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총소리 한방 빵!" 하고 끝을 맺자 모두 숙연히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본 다른 스님이 외워 두었다가 추도사를 할 때 "총소리 한방 빵!"했더니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라는 이야기를 ... 

대저 말이란 뒷받침되는 내면적인 힘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 즉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앞 소주제에서 말한 노동과 직업, 물질과 권세에서의 '텅빈충만'의 상태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내면에 표현키 힘든 힘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고 그 힘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텅빈충만에 관한 그 사람의 말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즉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과 종교에서도 말씀 자체만 중히 여기어 암기만 하는 사람과 그 말씀을 넘어 그 말씀에 힘을 부여하는 내면적인 것을 체득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후자가 올바른 것이다. 불교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은 안보고 가르치는 손가락을 본다는 말은 이점을 잘 지적한 것이다. 내면의 힘을 보랬더니 말씀만 보고 있는 꼴이다. 말씀을 넘어 내면에 도달한 상태,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본 상태, 그것이 바로 사상과 종교에서의 '텅빈충만'의 상태이다. 

따라서 나는 사상과 종교가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논리 정연함이나 호화찬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뒷받침하는 내면적 힘이 있을때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이 없으면 성인보다 더 훌륭한 말을 해도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점은 일상사에서도느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에 감동함은 그 사람의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에 실린 평소 삶을 통한 내면적 힘에 의해서가 아닌가. 실로 그러한 힘이 없는 말이란 아무리 멋져 봐야 성서에서 말하듯 '울리는 괭과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나 자신의 옛 모습이었던 입만으로 기도하는 종교인, 제혼자 잘나 설쳐대는 종교인,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독선적 사고를 가진 종교인, 앵무새 같이 경전의 구절이나 줏어 섬기는 종교인, 이들은 하나같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런 내면적 힘이 결여된 사람들을 일컬음이다. 말씀에 사로잡힐 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며,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된다. 그 숱한 사상가, 종교가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별처럼 고상한 말들의 하나씩만 확실하게 실천해도 요즘처럼 세상이 이렇게 거칠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근본은 "내 탓이오"이다. 

이렇게 '텅빈충만'의 세계를 말하면 듣는 사람의 태도는 세가지가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도덕경 제 41장의 내용인데 약간 각색하여 이야기 한다. 

첫째는 상급의 인물로서 '적극 실천파'이다. 오늘의 엉키고 설킨 삶의 많은 사람들이 '텅빈충만'의 상태를 체험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가치관의 대변혁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스스로 그 체험적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둘째는 중급의 인물로서 '반신반의파(半信半疑派)'이다. '텅빈충만'의 상태가 아름답긴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없느니 하는 핑계나 대면서 실천을 통한 체험적 이해는 전혀 노력이 없는 사람이다. 꼭 이루어야 할 일이면 단지 해야할 일이지 미리 운이나 달고 꼬리를 감추는 이런 나약한 사람은 좀 적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세째는 하급의 인물로서 '냉소(冷笑)비꼼파'이다. 이런 사람들은 들어도 이해하지못한다. 자기 생각에만 사로 잡혀 있기에 '텅빈충만'의 세계를 말도 안되는 궤변이라며 크게 웃는다. 노자는 이 유형의 사람들에게 속이 상했음인지,안타까움에서인지 한마디 더 첨가하였다. "그러한 속물들이 들어서 대뜸 알 수 있다면 그 따위 텅빈충만은 별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속물들이 비웃는 텅빈충만은 그만큼 크나큰 뜻이 있는 것이다. 예수식으로는 돌밭에 뿌린 씨앗 꼴인데 이런 사람은 전혀 없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끝으로 시를 한편 남기면서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많은 대화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속리 (俗離) 

속세를 그대로 삶아 먹으라
그렇게 말하는 뜻은
성(聖)속에서 길잃어 버린
눈먼 성자를 깨우치고자 함이었지요 

세월은 살같이 흘러가고...
얼키고 설켜 못내 끈적한 속세에서
눈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마, 노력의 부족도 있으려니와
차마 눈뜸에 의미없는(?) 일들도
속세엔 하도 많아서... 

공곡성(空谷聲)을 전하는 스승을 찾아
속리를 할까 생각해 본적도 있었지요 

그 한 생각도 잠시로 접고
아직 속세로 맘돌림은
이렇게 자연스레 익는 것도
재미있다 싶어서지요. 

쓸쓸히 멋적게 웃고 다니며
세상을 젓고 다니다가도
때로는 사무치는 외로움 있어
홀로 피울음 흘리지 만요... 

-속리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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