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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돌이 이야기

by Casey,Riley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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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돌이 이야기 




   내가 '스크루콥'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의 감원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인 '체스워스'에서는 현재 전체 종업원에 대한 재채용 심사가 진행중이었다. 그것은 곧 전체 종업원의 반수 이상에 대한 감원심사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재채용 심사대상에서 이름이 빠져 있었고 그 이유가 내가 '스쿠루콥'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종업원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재채용 심사가 시작된 그 첫날 나는 불리우지 않았다. 그런데 불리움을 받고 들어가 재채용 수락서에 싸인을 하고 새로운 일 부서까지 배정을 받고 나온 한국인 송씨가 나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하며 '죠오'가 그러는데 이형은 '스크루콥'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송씨와 나는 약 2주 전에 현재의 직장과 같은 방계회사 가운데 하나인 '스크루콥'에 같은 직종의 자리가 났다는 사내 공고를 보고 같이 전근 신청을 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전근이 결정되었다더라는 송씨의 말은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진행중인 재채용 심사에서 내가 빠지게 되었다는 설명이 되는 셈이었다. '죠오'는 이번 재채용 심사, 곧 감원심사를 총 지휘하고 있는 책임자이므로 나의 전근이 결정되었다는 그의 말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말일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 전근을 가게된 '스크루콥' 인사과에 전화를 하였다. 나를 채용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할겸 전근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며칠전 '잡 인터뷰(구직면접)' 할 때 본 일이있는 '비다'라는 흑인 인사과 직원은 나의 전근 확인 인사말에 수화기 속에서 펄쩍 뛰며 전혀 그런 결정을 내린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그 자리는 비어있고 현재도 인터뷰가 계속되고 있는중이라고 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 지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는 내가 전근을 가게 되는줄 알고 나를 재채용심사 명단에서 아예 이름을 빼놓고 있는데 전근갈 회사에서는 나의 채용을 결정한 일이 없다고 시침이를 딱 잡아 떼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공중에 떠 버린 것이 아니냐? 나는 이번 감원대상에서 충분히 제외될 만큼 근속년도도 높고 근무성적도 몇개월 전 년례근무성적심사에서 상위권 판정을 받은 일이 있었다.  송씨와 내가 이 회상에서 일한 것은 아직 1년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그동안 우리 두사람 뒤로도 새로 채용된 멕시칸 신참이 십여명이나 더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송씨와 내가 함께 이번 감원에서 제외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과연 우리들의 그런 관례에 의한 계산 그대로 송씨는 재채용자 명단에 들어서 새로운 일자리까지 배정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감원에서 '그라인딩(grinding)'과 근무년조가 제일 짧은 '아랍' 출신 '알리'를 제외하고는 과원 전부가 재채용 심사 첫날에 구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무년조가 훨씬 상위권에 속하는 나는 '스크루콥'으로 전근 가게 되었다는 헛소문 때문에 아예 재채용 심사 명단에서 처음부터 이름이 빠져 있었으니 꼼짝없이 실직을 하게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석간 근무조인 나는 오전에 집에서 '스크루콥'에 전화문의한 결과를 즉시 현재 회사의 인사과 여직원인 '베티'에게 전화로 알려놓고 부지런히 차를 몰아 직장으로 달려갔다.

  내가 집이 있는 '오렌지 카운티'에서 57마일이나 떨어진 '웨스트 밸리'에 있는 현재의 직장으로 옮겨오게 된 것은 집 가까운 곳에 있던 전 직장인 '에스피에스'가 불경기를 견디지 못하여 회사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그 회사는 내가 미국 이민 생활을 한 지난 20년 동안에 일곱 번째로 다닌 회사였다. 나는 그 회사에서 7년 동안 일을 하였는데 회사가 불경기를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었다. 그후 지난 1년 동안 일하고 있는 현재의 회사가 다시 꼭 같은 이유로 종업원 3분지 2를 감원시키는 대폭경영 축소 발표를 들었을 때도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어째서 회사가 이런식으로 자꾸 쓰러지는가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미국 회사 생산공장에서 말단 기계운전공으로 일해온 경험으로 볼 때 미국회사들이 회사운영을 그런식으로 하고도 경제전쟁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산업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면 나에게는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나이 서른둘에 미국에 이민 와서 20년 동안 공돌이 노릇만(생업) 해 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경제나 경영이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실 하나가 있으니 곧 닭장의 닭들이 왜 하루 아침에 목을 꺽고 뻣뻣하게 죽어나가 자빠지는지, 그리고 돼지막의 돼지들이 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지 닭과 돼지 자신들이 사람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 자신에게서 그 까닭을 듣는 것 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정보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경제 전문가들이 90년대 초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저 길고도 지루한 80년대의 불황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든 또 말단 공원인 내가 주급 3백불을 받을 때 년봉 몇십만불에서 몇백만불도 받는다는 일급 경영자들이 뭐라고 하던지 간에 매일 아침 직접 젖을 생산해 내는 젖소처럼 물건 하나하나를 직접 내 손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말단 공원인 내 입장에서는 우리가 병든 닭이나 돼지처럼 쓰러지는 데는 당신네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미국에 이민와서 얻은 첫 번째 직장에서부터 그 후 지금까지 미국 산업체의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게된 첫 번째 병폐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 직장은 종업원 너댓명밖에 안되는 개인공장이었다. 나는 그때 견습공으로 그곳에 취직이 되어 생전 구경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라인딩 머신(grinding machine)'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초고속으로 돌아가는 둥그런 숫돌이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인지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인지 조차 구분이 안되었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보고 격으며 배우는 것이 있었던지 얼마후에는 서툰 영어였지만 미국 애들하고 제법 농지거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느날 일을 끝내고 '타임카드(출퇴근 카드)'를 찍고 나오는데 뒤따라 나오던 옆 기계의 백인 청년이 갑자기 등 뒤에서 "렛즈 겟 더 헬아라 히어(Let's get the hell out of here)'라고 냅다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처음에는 그말을 알아듣지 못했었다. 내 귀에는 단지 '렛즈 고(Let's go)'라는 정도의 뜻으로만 들렸었다. 그런데 그녀석은 타임카드를 찍을 때 마다 같은 소리를 내뱉듯 질러대는 것이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만큼 더 이민생활에 익숙해 졌을 때 나는 그 백인 청년이 내뱉듯 하던 말이 우리말로 의역을 하면 '빌어먹을 빨리 가자'쯤 된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짜식 되게 일이 하기 싫은 모양이로구나'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일년쯤 지나 다른 회사로 옮겨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도 같은 소리를 질러대는 종업원들이 있는 것을 알 게 되었고 그때쯤에는 그말이 단순히 일하기가 싫어서 몸을 비트는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 게 되었다. 그 말은 미국 공장의 공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회사에 대한 일종의 감정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 게 되었을 때 나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매일 먹는 밥벌이 터전이 되어주고 있는 일터에서 일 끝나는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하던 일 내 팽개치고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미국식 직장인들의 출퇴근 태도만도 나에게는 너무 야멸차게 느껴졌었는데 거기다가그것이 아무리 영어라는 언어의 일종의 일상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구지 지옥이라는 단어를 끌어다가 된소리로 질러대야 감정표현이 된다면 그런 기분을 가진 종업원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어떻게 젊어서 처음 입사한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종업원들이 만들어 내는 제품과 경쟁에서 이길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의문이었다. 미국 공장의 공원들은 어째서 자기가 하는 일과 회사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년봉 몇백만불씩 받는다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는 미국의 저 유명한 경영자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 곧장 인사과로 뛰어들어가 인사과장 '에드'를 만났다. 그런데 나의 설명을 별 관심없는 태도로 들으며 다른 급한 서류를 뒤적이던 '에드'는 나의 설명이 충분히 진행이 되었는데도 엉뚱한 대답만 하였다. 이번 재채용 심사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곧 우리회사 건물로 합류해 들어올 동계회사에 자리를 배치하도록 가능한 배려를 다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번에 우리회사는 사업규모를 반으로 축소하면서 그 빈자리에 미국 동부에 있는 또다른 방계회사 하나가 합류해 이사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에드'가 그 회사 운운하는 것은 나를 단순히 이번 재채용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들, 즉 감원대상에 든 사람들중 하나로 이해하고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게 아니라고 좀 강한 어조로 다시 처음부터 설명을 되풀이 하였다. 그제서야 '에드'는 나의 짧은 영어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그렇다면 자기가 알아보고 조처할 테니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인사과를 나온 나는 곧장 '죠오'가 이번 사내 재채용 심사 사무실로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이층 '미팅룸(회의실)'로 그를 찾아갔다. '에디'의 심드렁한 약속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되었던 것이다.

내가 지난 20년간 미국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경험한 다른 놀라운 사실 하나는 미국공장에는 제대로 된 훈련계획에 의해서 훈련받은 공원이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일을 한 여덜개의 미국 공장에는 계획된 훈련과정에 의해서 훈련받은 숙련공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 자신 견습공으로 처음 취직이 되어 훈련받은 과정부터가 그랬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입사한 고참 공원에게서 이 '버튼'을 누르면 숫돌바퀴가 돌아가고 저 '버튼'을 누르면 기계가 정지 된다는 식으로 훈련 받은 것이 견습공으로 받은 훈련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스스로 일 해 가면서 혼자 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회사에 처음 입사 할 때 기대했던 말하자면, 우리회사 제품은 이런 것인데 완성된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야 된다, 그중 내가 맡을 분야는 이 부분을 알맞게 깍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은 지난 공정 과정과 다음 공정 과정에 잘 들어가 맞기 위해서 이러 저러한 점이 중요하므로 항상 그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일을 진행 시켜야 된다는 식의 기초적인 설명 같은 그런것은 아무데서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공원 서너명밖에 안되는 작은 회사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첫 직장 이후 지난 20년동안 일한 다른 회사들은 모두 방계회사를 미국 전역과 혹은 구라파에 까지 두고 있는 큰 회사들이었지만 나는 단 한군데서도 종업원들의 기술향상이나 자질향상을 위해서 일년에 단 한번이라도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시키는 회사를 본 일이없었다. 다만 안전교육만은 크고 작은 회사를 불문하고 년중 계속적으로 시키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종업원이 안전사고를 내게 되면 회사의 보험금이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내가 일을 한 여덜개의 미국공장에서는 정상적인 기술훈련을 받은 공원들에 의해서 제품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사한 고참 아무에게서나 주먹구구식으로 배운 기술로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결과 공원들 마다 기계를 운전하는 방법이 다 달랐다. 오전 근무자가 자기식 대로 기계를 조립해 놓고 일을 마친 후 퇴근하고 나면 오후 근무자는 들어오자 마다 오전 근무자를 향해 욕설부터 한 바탕 쏟은 후 자신의 방법대로 기계 조립을 다시 한 후 일을 시작하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 되었다. 그렇게 기계를 뜯었다 맞췄다 하는데 소비되는 시간만도 나로서는 계산해 볼 길은 없었지만 막대한 수치가 나올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위에 오전 근무자와 오후 근무자 간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일년 열두달 서로 다른 일하는 버릇에 대한 사소한 불만들이 해소되지 않은채 쌓여만 가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미국 공장의 신출내기 공원들은 진득하게 한 자리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미국에서 일을 한 70년대 중반부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90연대 초까지 나는 어느 공장에 새로 취직이 되어도 3개월만 지나면 내가 속한 과에서 최고 고참축에 들게 되곤 하였다. 80년대의 그 길고 지루하였던 불황을 거치면서 눈에 띠게 공원들이 옮겨다니는 일이 뜸해지긴 하였지만 아직도 숙련공들은 새 일자리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나이가 젊은 공원들은 걸핏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곤 하였다.
  따라서 이력서 한장 써내고 쉽게 취직을 하여 기계 앞에 서면 이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제품이 변기통인지 밥그릇인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정과정이 세밀히 분업화 된 것도 물론 원인일 것이다. 나 자신 지금까지 거의 모든 회사에서 내가 바퀴숫돌에 갈아낸 쇠붙이들이 다음 공정 과정에서 바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 거꾸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도 모르면서 일년 열두달 쇠붙이를 갈아낸 것이 수십만개도 더 될 것이다. 그런식으로 해서 조립되어 나온 제품들이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그토록이나 동경하던 세계 제일의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였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의 직장으로 옮겨 오기전 직장이었던 '에스피에스'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된 가장 큰 원인이 다름 아닌 누적된 반품으로 인한 손실이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도 놀라운 뉴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죠오'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마침 자리에 앉아있던 그가 나를 보고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였다. 나는 아침에 집에서 '스쿠루콥'으로 전화하여 나의 전근소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었을 때 바로 지금 저 '죠오'의 수상한 얼굴표정이 눈앞에 떠 올랐었다. 나는 당장에 이번건은 '죠오'가 나를 미워하여 꾸며낸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의심을 하게 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지난 봄 회사에서 무리하게 하루 10시간 근무를 요구하였을 때 '오바타임(over time. 연장근무)' 근무시간 배정에 관계된 일 때문이었다. 

  당시 회사에서 두시간 '오바타임' 시간 배정을 할 때 오전 근무자 들에게는 평상시 출근시간 그대로 새벽 여섯시에 출근해서 퇴근때 두시간 더 연장하여 일하도록 하였었다. 그결과 평상시에 오후 두시에 출근해서 밤 열한시에 퇴근을 하던 오후 근무조는 평상시 보다 두시간이 더 늦은 오후 네시에 출근을 해서 다음날 새벽 세시에 퇴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전 근무조는 평사시나 다름 없이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해서 두시간 연장해서 일을 한 후 아직 해가 있을 때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오후 근무조는 두시간 '오바타임' 일을 위해서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평상시 보다 네시간이나 뒤로 쳐지게 된 것이다. 밤 열두시 전후의 한시간과 낯 열두시 전후의 한시간의 차이가 얼마나 크게 다른지 그 시간에 후리웨이(고속도로)까지 안 나가 보고 일반 시내 도로에 자동차 지나가는 숫자만 세어 보아도 너무자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석간 근무조는 한시간만 늦게 집에 돌아가도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어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상식에 어긋난 '오바타임' 시간배정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아닌 '죠오'였던 것이다. 석간 근무조였던 나는 당연히 그 부당성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같이 들고 일어나 가세하여 결국 '죠오'의 그 부당한 시간배정은 이틀만에 취소되고 말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죠오'의 얼굴은 나와 마주칠 때 마다 쓴 오이꼭지를 씹은 표정이 되곤 하였다.
  두번째로 '죠오'가 일부러 나를 감원대상에 집어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된 까닭은 그는 이미 다른 회사에 있을 때부터 동양 사람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을 그가 우리회사에 올 때 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회사에 있을 때 그의 과에는 동양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난 20년간 미국공장에서 겪은 문제들중 가장 심각하게  느낀 것은 중간 감독자들에 관한 문제였다. 미국 공장의 반장과 감독, 부서 책임자들은 거의 모두가 말단 공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과나 부서의 제품 공작 과정에 대해서는 자신이 경험한 일이므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여덜개의 회사 감독들은 하나같이 사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전혀 교육이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문외한 들이었다. 그 결과 날마다 그런 감독들의 불합리한 사람 관리 때문에 일반 공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전쟁상황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내가 '에스피에스'에서 일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도 일거리가 밀려들어 하루 열시간 작업이 일년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공원들은 '오바타임' 수당으로 주급액수가 불어나는 것도 좋지만 나중에는 지칠대로 지쳐서 입만열면 짜증이었다. 그런데 토요일 '오바타임'까지 강요하고도 일거리가 잘 빠져 나가지 않자 마침내는 일요일에도 일할 것을 강요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어느 한인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을 책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 '오바타임'만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런 사정을 과 반장에게 사정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서 감독에게 직접 말 하여 보았고 그래도 안되어서 할 수 없이 부서 책임자를 찾아가 사정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도 첫마디로 '노!'였다. 그러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계속 가능한 설명을 덧붙여서 되풀이 하여 내가 교회에 안 가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내가 교회에 안가면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갈바를 모르게 될 것이고 혹 어른들이 예배 드리는 사이에 밖에서 무슨 사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식이었다. 그러자 그 부서 책임자는 무슨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 올랐다는 듯, 그러면 자기가 우리교회 담임목사님게게 편지 한 장을 써 줄테니 그걸 갖다 보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정말로 그가 그런 편지를 써 줄 것인지 의심스러워 써 달라고 해 보았더니 그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몇줄로 된 편지를 써 주는 것이었다(나는 지금도 그 편지를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올 때 미국은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배우고 왔었다. 그런데 한 유명한 세계적인 회사의 중간 감독직에 있는 백인이 교회 주일학교 책임을 맡고 있는 직원 한 사람이 일요일에 교회에 갈 수 없는 이유서를 담임 목사님에게 써 주면서 까지 '오바타임' 일을 시키려고 하다니! 이것이 오늘의 미국 정신의 현주소였던가?

  그러나 나의 '죠오'에 대한 의심은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난 20년간 미국공장에서 일하면서 미국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와 상대방이 피할 길이 없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기다려서 잡아야 된다는 사실을 수 없이 경험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번 나의 부당한 감원조치도 아무리 '죠오'에 대한 의심이 마음으로는 심증이 가더라도 사실로 증명되기 전에는 아무낌새도 보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아주 친한 사람과의 사이에 생긴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사고라도 설명하듯 '죠오'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 내가 '스크루콥'에 전화로 확인해 보니 그곳에서는 나를 채용한 일이 없다고 한다. 우리 회사 인사과에도 알아보았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더라. 그러니 누구한테서 그런 정보를 받았는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이 내가 말한 대충 내용이었다.

그러자 '죠오'는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식으로 우물우물 넘기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그렇다면 범인은 바로 너였구나, 하고 순간 나는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느낌이었다. 한 중요한 인사결정을 책임진 사람이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소문에 의해서 인상판정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아직 그와 다투어서는 안된다. 우선 감원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빼 내어서 재채용자 명단으로 옮겨 놓는 일부터 해결해야만 된다.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전근 소문이 전혀 사실무근 이었음을 말하고 지금이라도 나를 재채용 심사 대상자 명단에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죠오'는 피할길이 없었던지 '지금 재채용 수락서에 싸인을 하면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전근신청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하였다. 나는 당연히 상관 없다고 대답하였다. 아직 결정된 일도 없는 전근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이곳에 남겠다는 뜻이었다. '죠오'는 그때 분명히 그렇다면 그렇게 조치하겠다고 대답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에스피에스'에서 일 할 때 일요일 '오바타임' 문제로 감독자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어느날의 일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과 감독이 내 기계로 다가와 거기 쌓여 있던 일거리들을 살펴 보다가 왜 이쪽 아래 있는 일거리부터 기계에 올리지 않고 납품일이 늦은 일감부터 기계에 올렸느냐고 다짜고짜 나무라는 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가 트집잡고 있는 일거리는 평상시 아무 문제 없이 늘상 그런식으로 진행되어 오던 납품기일의 오차범위 안에 드는 일이었고 또 내가 기계에 올린 일거리도 아니었다. 필시 먼저번 근무조가 기계에 올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간단하게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커피머신에서 뽑은 종이 커피잔을 아직 손에 들고 있던 그는 성질 급하게 내 발등 앞에다 커피잔을 집어 던지며 버럭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정색을 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서툰 영어였지만 평상시와는 달리 또박 또박 끊어서 그에게 말하였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되었건 당신이 지금 내 발등을 향해 커피잔을 던진 것은 아주 잘못한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과하라. 그렇지 않으면 상부에 보고해서 정식으로 문제삼겠다.
  그날 씩씩 거리며 나를 자기 사무실 까지 데려갔던 그 감독은 그 일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반장 앞에서 나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말았다.
  과의 감독이나 부서 감독자들과의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그래도 반장들과의 어려움에 비하면 꽤 견딜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감독과 직접 부딪치는 일은 반장에 비해 훨씬 횟수가 적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장은 하루 여덜시간이든 열시간이든 꼬박 얼굴을 맞대고 일 해야 되는 사이었다.
  미국 공장의 반장들의 본래 임무는 공원들의 공작과정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공원들 각개인의 근무태도를 감독자에게 보고하는 일이 실제로는 더 큰 일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자신에 관계된 일거수 일투족을 일러바치는 사람앞에서 마음 편하게 지낼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만약 둘 사이에 조그만 문제라도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오래 견디며 좋은 작업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다가 미국 공장의 반장들은 거의가 다 백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칼리포니아의 미국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들은 대부분이 나처럼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가장 많은 비율이 멕시칸이고 그다음이 동양 사람들로 필린핀인, 월남인, 한국인 등이었다.
  내가 현재 공장에서 하고 있는 일은 검은 냉각 기름이 하루종일 수돗물 틀어놓은 듯 쏟아져 내리고 있는 밑에서 쇠붙이를 숫돌 바퀴 사이에 집어 넣어 머리카락 굵기의 10분지 1의 오차 범위 내에서 규격에 맡게끔 갈아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날 그날의 일거리가 좋은 일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자연 문제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출근하면 기계옆에 쌓여 있는 그날의 일거리부터 살피는 것이 공원들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일거리를 배정하는 반장이 특정인에게는 날마다 좋은 일거리를 갖다 맡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괘씸죄를 걸어 나쁜 일거리만 갖다 맡긴다면 그 공원이 견뎌날 수가 있겠는가? 나와 같이 일하던 어떤 월남 피난민 한사람은 날마다 나를 붙잡고 반장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다가 끝내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다시는 회사에 나오지 못하게 된것을 본일도 있었다. 미국 공장의 화장실 벽은 공원들의 감독자들에 대한 불평을 토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배설구다.  그곳에는 각종 기상천외한 욕설과 그림들이 지우고 또 지워도 년중 끊일날이 없었다. 그런 경험을 20년 동안 끝도 없이 경험하던 나는 내가 만약 미국 공장의 사장이 된다면 제일 먼저 반장들부터 무조건 다 해고 시킬 것이라는 공상아닌 공상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회사내 전체 감독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관리에 관한 교육과 훈련부터 시킬 것이라고 결심도 하였다. 그렇게 훈련시킨 사람들 가운데서 새로 반장을 뽑되 그들에게는 공원들의 일을 도와 주는 임무외에는 절대로 다른 아무 권한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공상을 끝도 없이 되풀이 하였다.
  내가 이민 초기 때부터 듣기 시작하였던 내식대로 해석한다면 '에잇. 이 지옥 같은 데서 빨리 벗어나자' 라는 말이 되는 그 '렛즈 겟 더 헬 아라 히어'라는 말은 거의가 다 감독자들과의 사이에서 생긴 스트레스 때문임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관리에 관한 무지 때문에 이와 같이 감독자들과 공원들 사이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손실이 생기고 있는데도 나는 지난 20년간 단 한군데 회사에서도 감독자들에 대한 인간관리 교육을 실시하는 회사를 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들은 전에 흑인들을 짐승 취급하여 그들을 대하는데 인간관리의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 처럼 대부분이 이민자나 소수의 흑인들로 채워지고 있는 공원들을 그런 차원에서 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죠오'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그날 일이 다 끝나도록 이제나 저제나 그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석간 근무조 시간이 다 지나 가도록 '죠오'는 재채용 수락서에 싸인 하라고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밤 깊은 고속도로를 한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내 머리속에는 지난 20년간의 이민생활이 긴 영화의 필름처럼 이어지며 떠올랐다. 흑인들에 대한 뼈속에 박힌 인종차별로 세상에 너무나도 유명한 미국사회.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고 별 나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영화에서 동양인이 등장하였다 하면 밥그릇을 입에 갖다대고 긴 젖가락으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중국인이나 혹은 백인들의 하인 노릇을 하는 모습으로나 그리고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의식속에 있는 동양인의 위치였다.
    흔히 미국문화를 '멜팅팥'의 문화라고 말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미국사회 곧 미국이라는 가마솥의 가장 밑바닥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들과 문화들이 마치 물과 기름이 마주친 것 처럼 조금도 서로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공장의 공원들이 일을 마치고 회사 차고에서 차를 몰고 떠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도 채 안된다. 일 끝난후 한국에서 처럼 회사원들 끼리 서로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일은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로가 각각 모래알 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업원들을 어떻게 해서든 하나로 접근시켜 보려고 어떤 프로그람이든 만들어서 일년에 한번이라도 시도나마 해 보는 회사를 나는 20년 동안 한군데서도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마음과 감정이 서로 통하지 않는 수십종의 다른 인종들이 한 회사라는 지붕밑에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모여 앉아서 만들어 내는 생산품과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가정사 까지 짐작할 수 있는 같은 언어와 문화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제품과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얼마만큼이나 생길 수 있을까? 나는 미국에 온 후 내가 한국에서 생각하던 그런 세계 최상품의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는 이제 더 이상 이땅위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다음날 출근하는 즉시로 다시 인사과를 찾아가서 어제 만났던 '에디'를 다시 만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에디'의 태도는 어제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 당장은 너무 다른 일들이 바뻐서 나의 문제를 처리 할 수 없지만 꼭 기억하고 처리해 줄테니 가서 일하고 있으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나는 인사과를 나와 어제처럼 다시 이층 '죠오'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재채용 심사를 위해 임시 사무실로 쓰던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죠오'의 모습은 회사안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회사에서 재채용 심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 수요일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일 것은 계산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다음주는 성탄 휴가와 년말 휴가가 시작되는 주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오전까지 재채용 심사가 이미 다 끝난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우리과에서 어제 저녁 까지 불리워 가지 않았던 가장 근무년조가 짧은 '아랍' 출신의 '알리'마저도 마지막으로 불려가 재채용 수락서에 싸인을 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불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죠오'의 모습은 회사 안 어디에도 없다. 그는 아마 일찍 휴가라도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미국 공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적임자를 바로 만나야 된다는 것이 나의 그동안의 경험이었다. 지난번 일하던 '에스피에스'에서 지나친 '오바타임' 문제로 우리 과의 감독이 내 발등에 커피잔을 내 던질 정도로 갈등을 겪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과에는 유난히 한국 사람들이 많았었다. 오전 오후 근무조를 다 합치면 열댓명은 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근처의 여러 한인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일요일 '오바타임'은 우리 모두가 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부서 책임자라는 사람이 주일학교 교사인 직원에게 일요일 정상출근을 강요하면서 그의 담임목사에게 사유서 까지 써주는 마당이니 누가 누구에게 가서 더 하소연 해 본단 말인가?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내 책임은 어떻게든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그런 일로 고심하고 있던중 나는 우리 부서 책임자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부공장장이 기독교인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대충 설명한 후 대짜고자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출애급 얘기를 끌어다가 '렛 마이 피플 고 투 처치(Let my people go to church)'하고 그의 코 앞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외쳤다. '단 스캇'이라는 이름의 그 기독교인의 표정이 일순 하얗게 질리는 듯 하였지만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 할 때 마다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일요일 '오바타임' 문제는 각자 자유 선택에 맡겨지게 되었다.

지금 감원 위기에 놓인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그때의 그 '단 스캇' 같은 적임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 '단 스캇'은 이곳에서 누구란 말인가? 인사과장인 '에드'가 마땅히 이 일을 처리해 주어야 할 장본인인데 그는 딴전만 피우고 있고 일을 저지른 '죠오'는 간곳이 없다.
  나는 급히 옛날의 그 구원자 '단 스캇'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우리과의 감독을 만나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말해 주고 당신 생각에 내가 이제 누구를 더 만나보면 좋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티브'라는 이름의 우리과 감독은 잠간 기다리라고 한후 사내 방송으로 '제프'라는 사람을 찾았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스티브'가 스피카를 놓고 나를 향해 잠시후 '제프'가 올테니 그에게 한번 말 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급히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스티브'의 대답이 그가 바로 얼마전에 새로 부임온 공장장이라는 것이었다.
  잠시후 '제프'라는 이름의 그 공장장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보니 30대 중반의 백인 청년이었다. 첫눈에 그가 공장장이 된 것은 내가 그동안 경험한 바 대로 공원에서부터 출발해서 된 것이 아니고 학교에서 공부한 경력을 가지고 된 것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나는 순간 어떤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자마자 절망적이었다. 그도 나의 케이스를 단지 재채용 심사에서 탈락한 일반 공원의 불평 정도로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모든 심사는 이미 종결되었으므로 이제와서 되돌이킬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안이 바짝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며칠 있으면 성탄절이고 곧 이어서 새해가 다가 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년말 장기 휴가로 들떠 있는판에 나는 실직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된단 말인가?
  내가 지난 20년 동안 경험한 미국 공장 생활은 지금 까지 쓴것 처럼 보다 부정적인 느낌이었지만 그런 중에도 아주 좋은점 한가지가 아직까지 미국 사회속에 뚜렸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문제라도 법적으로 정당성이 입증되고 또 적임자만 바로 만난다면 틀림없이 바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 혼자 말로 그같은 사실을 가리켜 '미국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그 위대한 유산은 바로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오늘날에 와서 미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같은 기독교 정신이 급격히 빠져 나가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 유산은 곳곳에 남은 곳이 많았던 것이다. 바로 부잣집은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식일 것이다. 나는 바로 그 한가지 미국의 남은 유산의 힘으로 지난 20년 동안 미국 공장 생활의 그 수도 없이 많았던 문제들을 헤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 이민 오기 전에 이태원과 보광동 등지에 살면서 자주 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흑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로 세상에 유명한 백인들이었지만 그러나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이쪽에서 받아 주면 있는 것이고 받아주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이미 얼마 안되는 체험에 의해서였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가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정신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을 왔고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미국 공장의 험난한 공돌이 생활을 그 정신을 가지고 헤쳐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같은 신념은 오늘 이 시간 까지 나를 한번도 실망 시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같은 20년 동안의 내 신념의 약속마저도 이번에는 깨지고 끝내 부당한 감원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
  나는 다시 한번 바짝 타고 있는 입술에 침칠을 하고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쉰후 이때 까지와는 달리 아주 침착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공장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제프씨, 좋습니다. 당신마저 내가 이대로 감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나는 미국에 이민 온지 20년이 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민 오기 전에 우리나라 정부로 부터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준법정신이 강한 시민들의 나라이므로 우리들도 이민가면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교육을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이 회사에 오기 전에 일곱 개의 다른 회사에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중 어떤 회사에서도 무슨 부당한 처사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는 법과 규정대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회사에서 재채용 심사를 시작할 때 회사에서 선택한 심사 방법은 전체 종업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 골고루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라고 선언 하였었습니다. 나는 그 공정을 기하겠다는 말을 약속으로 믿었습니다. 나의 경우는 근무년조나 근무성적이 심사를 거친다 해도 사규나 관례에 의해서 결코 제외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과 공원 30명중 재채용에서 누락된 사람은 나 하나뿐 나머지 29명은 모두 재채용이 되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누군가에 의한 잘못된 정보 때문에 아예 재채용 대상자 명단에서 이름이 누락되었던 것입니다. 회사에서 회사원 각 개인에게 모두 공정한 결과가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 할 때 나는 그 약속은 잘못이 발견될 시는 즉시 시정하겠는 뜻도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분명 잘못된 정보로 심사 자체가 시행되지 않았는데도 시정되지 못한다면 이번 경우야 말로 나의 지난 20년 미국 이민 생활에서  첫 번째로 겪게 되는 부당한 처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첫 번째 부당한 재판장으로 나의 남은 생애 동안에 기억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내가 당신의 부당성을 하루라도 빨리 용서하고 당신의 이름을 잊어 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그 기간이 짧게 걸리든 길게 걸리든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제라도 나의 감원 과정에 잘못된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여기 까지 말하는 동안 젊은 공장장 '제프'의 얼굴은 친구의 얼굴 처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당신이 지적한 잘못된 정보에 의한 과오를 지금 이 자리에서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당신의 재채용이 결정 되었습니다. 인사과에 가서 재채용서류에 싸인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었지요?"
  '제프'가 이렇게 말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마주 잡는 나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년말 휴가가 끝난 후 첫 출근을 하자 즉시 감원이 실시 되었는데 그첫번째 명단 38명 중에 놀랍게도 '죠오'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회사를 떠나기전에 이번 일이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은 자기 자신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총 지휘해서 진행한 일 중에 그런 실수가 생겼으므로 사과한다고 나에게 말 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따듯이 잡아 주었다. *

  부기 :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때 전근하려고 하였던 바로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회사 복도에서 누군가 저 앞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아주 반색을 하며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 아닌 '죠오' 그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은 우리 공장에서 하청을 받아다가 일하는 근처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주 이곳에 온다고 하였다.
  그후 '죠오'는 그의 말대로 자주 우리 회사에 일거리를 받으러 왔고 나를 볼 때 마다 반색을 하며 꼭 악수를 청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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