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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어두운 별

by Casey,Riley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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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별


                   1

 
 문소리가 났다. 내동댕이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닫았다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몹시 화가 난다는 얼굴로 불그레한 머리털의 여자가 한 다발의 서류를 책상 위에 홱 내던졌다.
 리는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띠며 그것을 흘끗 보고는 동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니? 좀 짜증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짜증이 난다고?"
 케리간 양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시늉을 했다. 자기의 불만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 남자에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틀림없이 말해 줄 테야… 그때가 되면, 너한테도 들려 주겠어. 지금은 말하지 않겠지만!"
 리 다모트의 입술이 말하고 싶은 듯 꿈틀 움직이고, 눈에는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 눈은 어떤 사람이라도 끌어당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짙은 청색을 띠고 있었다.
 또한 푸른 빛을 띤 크림색의 피부와 작고도 모양이 좋은 머리에 코로네트의 치장으로 산뜻하게 손질되어 있는 머리털도 매력적이었다.
 리 다모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첫눈에 그녀가 자제심이 강한 멋쟁이 아가씨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녀의 모양 좋은 입의 선에 깃들여 있는 따사로움과 붙임성을 보면 곧 자기의 견해가 맞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리 다모트는 그저 질질 끌려 매일매일 지내고 있는 그런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여성이었다.
 게리 케리간― 실제의 세례명은 로자린 케리간이지만 보통은 애칭인 케리로 알려져 있다―은 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리가 지금 진심으로 자기를 상대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 좋아."
 케리는 책상 끝에 걸터앉아 말했다.
 "아마 네가 좀 용기가 부족했다는 거겠지. 사장은 매력적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나를 겁주는 타입의 사람은 난생 처음 봤으니까."
 "그에 대해서 신경과민증이 돼 있는 게 아닐까?"
 리가 말했다.
 이 말은 케리의 푸른 눈동자를 더 한층 불타게 했다.
 "신경과민증이라구? 당치도 않는 말. 방금 전에도 내가 미치광이가 될 뻔했는걸.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삼 년간이나 그의 곁에서 일을 해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 뭐야. 삼 년이나 말야!"
 케리는 눈을 씰룩거리며 계속했다.
 "넌 돌로 만들어진 성인처럼 인내심이 강하구나."
 리는 엉겁결에 푹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사장에게도, 그의 짜증에도 전혀 흥미가 없기 때문이지."
 "너는 행복해… 하지만 그것도, 네가 제일 많이 부저에 의해 불려 가게 되기까지의 행복이지! 이 메러디스사의 임자에 대해서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업 이외의 것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거야."
 "절대로 사랑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는 가엾은 남자란 말이지!"
 이때 잔뜩 골이 난 벌의 웅성거림과도 같은 부저가 울려서 리의 작은 비서실의 고요를 깨뜨렸다.
 케리는 책상에서 뛰어내려 옆의 큰 방으로 달아났다. 리는 연필과 메모 용지를 쥐고 사장의 방 문으로 다가갔다.
 이 문은 요란하게 닫아서는 안 된다. 사장인 루이스 알드레트는 그러한 행동을 용서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메러디스 일족의 주인으로서 그 위엄을 다치게 하는 버릇없는 짓이나 모욕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때 그에게 이의를 내세우려면 그만큼 강해야만 했다.
 루이스 알드레트는 조용한 말투로 상대를 제압하고, 눈매만으로 상대를 흥분시킬 수가 있었다. 또 자기 회사에 대한 안전하고도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게다가 회사의 일이 바쁠 때는 자기가 솔선하여 지휘를 한다.
 그는 자신이 너무 유능하여 부하의 누구에게도 일을 맡길 수 없는 성격이다. 사원이 회사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을 했을 경우, 그는 사원을 곧 해고했지만 부당한 이유로 해고시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리는 사장의 방에 들어갔을 때, 기분이 나쁜지 어떤지를 알아보려고 살짝 그쪽을 살폈다. 루이스 알드레트는 우뚝 선 채로 큰 키를 꾸부리고 책상 위를 휘젓고 있었다. 그녀의 관측으로는 알드레트의 기분 상태는 한창 폭풍 속이었다.
 제발 잘 피하게 해주십사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도 완전히 무사히 넘어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하튼 루이스 알드레드에게는 저 스페인의 뜨거운 피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무슨 용건이세요?"
 "용건없이 벨을 울리지는 않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되받았다. 그가 매력있는 남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매력도 지금은 심한 짜증이 노출되어 헝편없었다.
 "브라운 켄튼사와의 계약서는 어디 있지?"
 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벽 쪽의 캐비닛으로 가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엊저녁에 이것을 챙겨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루이스에게 설명했다.
 리는 그의 기분이 약간 누그러진 듯 느껴졌다. 그는 서류철을 받아 쥐자 계약서를 꺼내어 이맛살을 찌푸리며 일어나서는 책상 앞에 선 채로 있는 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검은 눈빛을 찌푸리더니, 그리고는 온화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가도 좋아요."
 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 방을 나왔다. 이런 경험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라 이따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는 케리보다 자기의 감정을 잘 억제할 줄 알며, 사장을 다루는 데 익숙해 있었다. 루이스에게 비하면, 그녀의 남자친구인 브루스는 천사처럼 유순한 남자라고 할 만했다.
 리가 브루스를 생각하면서 몽상에 잠겨 있자니까 또 부저가 울렸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참을 수 없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방에 들어가니, 루이스는 잠시 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어두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러면서도 주뼛주뼛하고 기묘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스 다모트 여기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좋은 레스토랑을 압니까? 브라운 켄튼사의 사장과 얘기를 하고 싶은데, 단골 음식점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리는 재빨리 머리를 짜내었다. 카페라면 근처에 한두 집 있지만, 자기의 사장에게 알맞는 격조 높고 요리가 맛있는 가게는 한 집도 없었다.
 "리키라는 가게라면 걸어서 이삼 분 되는 곳입니다. 회사 사람들도 별로 가지 않고, 요리도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하다는 정도는 아니지만요."
 리는 망서리는 듯 말했다.
 "그래, 어디로 해서 가는 거지?"
 리가 가는 길을 가르쳐 주니까,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리는 케리를 점심에 끌어내려고 큰 방을 들여다보았다.
 케리가 타이프라이터에서 얼굴을 들었다.
 "리키 알지?"
 "응, 높은 사람한테 붙잡히지 않으면 거기서 만나자. 참 아까 말야, 스텔라에게서 전화가 왔었어. 내일 몇 시인가 자동차로 온다던데?"
 리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어머나, 스텔라가 돌아온다고?"
 케리는 약간 얼굴을 흐리면서 리를 바라보았다.
 "넌 스텔라를 참 좋아하는구나?"
 리는 놀란 듯한 시선을 던졌다.
 "물론이지. 집에서는 모두 스텔라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걸. 스텔라는 우리 집 같은 평범한 가족 중에서는 돌연변이야. 아름답고, 재능이 있고, 그리고 머리가 좋기 때문이지."
 다모트 집안은 정말로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므로 스텔라와 같은 사람이 나온 것은 일종의 경이였던 것이다. 가족들은 스텔라를 그 검은 머리와 남국적인 얼굴 생김새로 어두운 별(다크 스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만큼 위대한 여배우 스텔라 노데트를 자랑으로 여기고,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스텔라 다모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케리는 리의 얘기를 들으면서, 머리로는 이해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모트 집안의 다른 자매들도 보통 이상의 용모를 하고 있다.
 테스와 톰은 개구쟁이 쌍동이지만 십대인 줄리는 전문학교의 비서학과를 나왔고, 그리고 미인인 스텔라, 겉보기에 멋쟁이인 리, 이렇게 다섯 중에 누구 하나도 범용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것과는 별문제로, 케리는 다모트 일가가 스텔라에게 품고 있는 생각에는 전혀 반대였다. 확실히 스텔라의 윤기 있으며 까마귀 빛의 흑발은 적갈색 머리털투성이의 집안에서는 돌연변이이며, 영화 팬들에게는 낯익은 그녀의 나무랄 데 없는 용모는 여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태어나고 싶다고 동경할 정도로 아름다왔다.
 그러나 그 성격은 다모트 집안의 유전 체질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스텔라는 버릇없고 이기적이며, 말하자면 그 육체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케리의 생각은 리가 참다운 의미로 아름다왔다. 스텔라의 아름다움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것이라고 한다면 리의 아름다움은 카메오(Cameo:돋을새김)로 새겨진 듯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사랑스러운 침착한 얼굴 모습이며, 머리털도 스텔라의 것이 이국적인 정서를 풍긴다면 리의 것은 유럽적이었다.
 또한 리에게는 스텔라가 갖지 못한 확실한 성실성이 있었다. 인기 스타인 스텔라는 남에게 애지중지되는 것을 무척 좋아하며, 또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 의미도 없이 애교스럽게 웃기만 해도 남들은 기뻐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적어도 케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텔라는 이곳에 얼마나 머물러 있겠다고 그러던?"
 리의 물음에 케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스텔라는 두세 마디밖에 하지 않았어. 기자회견인가 뭔가 그런 일로 급한 모양이야. 집에 전활 했는데 통화중이라나.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사무실로 걸어온 거야."
 "스텔라답구나. 매스컴이 도무지 혼자 내버려 두질 않는다고 불만스럽게 말은 하지만, 사실은 그게 사는 보람이 되는 것 같아."
 케리는 약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스텔라 다모트는 명예욕에 홀린 사람이었다. 그녀는 항상 화제의 중심이 아니면 안 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만약 일단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 탐이 난다 하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빼앗고 마는 것이다.
 리는 비서실로 돌아가 루이스 알드레트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을 하려고 타이프로 향했다.
 손가락은 키 위를 뛰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이 어른거리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스텔라는 브루스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브루스와의 장래를 꿈꾸던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금 일에 열중하기로 했다. 이대로 브루스를 생각하고 있으면 몇 개월 전의 일까지 자꾸만 거슬러 생각이 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고 만다.
 리와 브루스는 약혼한 상태였다. 리는 첫눈에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정열은 침착한 외모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것이었다.
 브루스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리에게 웃음을 보이고 루이스 알드레트에게 올릴 어떤 기술 보고서를 내놓았을 때, 그를 보고 리는 금방 그를 사랑하고 말았다.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리의 가족들도 모두 초면에 브루스에게 호의를 가졌다. 저 개구쟁이 쌍동이는 찬성의 기분을 나타낼 때의 상투어인, '그는 오케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리는 가족 전원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졸업을 앞둔 줄리는 비서학과를 졸업하면 결혼하는 리 대신에 알드레트 밑에서 일하겠노라고 우겨댔다.
 낮 휴식을 알리는 벨 소리가 리의 몽상을 깨뜨렸다. 그녀는 일어나서 최근에 맞춘 검은 니트 재킷을 입었다. 문 밖에서 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나란히 깨끗하고 현대적인 건물의 하얀 문을 빠져나와 한길에 나서자, 길을 횡단하여 '러키'라고 쓰인 순수한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스토랑 안은 널찍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방이 한쪽 편에는 커튼으로 칸막이된 작은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검은 머리에 약간 흰 머리가 섞여 있는 중년의 여성이 둘의 곁에 다가왔다. 음식점 주인인 리키다. 커튼이 있는 작은 방으로 그녀들을 안내하면서 리키가 리에게 말했다.
 "매씨가 와 계세요."
 "동생이?"
 그때 한 작은 방의 커든이 열리더니 날씬한 젊은 여성이 포니테일로 한 청동색의 머리를 흔들며, 짓궂게 웃으면서 뛰어나왔다.
 "놀랐어?"
 "줄리!"
 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서 뭘하고 있니?"
 "홍역이 돌아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됐어. 하여튼 이러나저러나 학기는 끝난 거나 다름없지."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다른 과들도 유명했지만 그중에서도 비서학과는 특히 우수한 기숙학교였다.
 "홍역이 이제 그만해지면, 이번에는 정말로 학기를 끝내기 위해 돌아가서 졸업증서를 받아올 테야. 그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지."
 그녀는 들뜬 어조로 그렇게 말을 맺었다.
 리는 몹시 귀엽다는 듯이 동생을 껴안음과 동시에 바닥에 놓인 슈트 케이스에 눈길을 돌렸다.
 "너, 아직 집에 안 갔었구나?"
 줄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갔어. 나 말야, 갈아타기를 잘 이용해서 점심 조금 전에 여기에 도착하려고 많이 애썼지. 그렇게 하면 언니를 깜짝 놀래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깜짝 놀랐지, 확실히. 하지만 집에는 어떻게 하지? 모두들 기다리고 있을 게 아냐?"
 줄리는 아까와는 다른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었다.
 "괜찮아. 집에는 도중에서 전보를 치면 되니까. 하지만 가족도 모두 놀려 주고 싶거든."
 세 사람은 작은 방의 의자에 걸터앉아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계속 집에 있게 되니까, 메러디스사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어."
 "아직도 그런 얘기를 기억하고 있니?"
 리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응, 결심은 단단해."
 줄리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 언니들의 사장에게 홀딱 넘어갔나 봐."
 "아직 그를 만나본 적도 없잖아."
 리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되받아 말했다. 동생 일은 죄다 모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얘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를 봤어. 아까 이리로 오는 도중에 메러디스사 앞에서 마침 자동차에 올라타더군. 아주 훌륭하고 값비싼 자동차던데. 그래서 그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언니가 묘사하던 그대로의 남성이더군."
 "그래서 넌 당장 루이스 알드레트에게 빠지고 말았다, 이거지?"
 리가 분명히 희롱조로 말했다.
 "고백해 봐. 그의 어디가 그렇게 근사하게 보이던?"
 줄리는 십대다운 열정을 내보이면서 말했다.
 "그야말로 매력적이야. 살갗이 거무스름하고 로맨틱한 무드라…"
 "얼음같이 무감정하고."
 리가 훼방놓았다.
 "그래도 그는 근사해! 언니는 삼 년이나 같이 일해 왔으니까 잘 알 것 아냐?"
 리는 줄리가 반쯤 희롱하고 있는 줄로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것이 차츰 분명해졌다. 줄리는 한창 흥분하기 쉬운 나이또래다.
 머지않아 그것도 졸업은 하겠지만, 하여튼 루이스 알드레트의 초인간적인 매력의 포로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루이스 알드레트는 참으로 근사해."
 리는 겨우 동의를 나타내었다.
 "그건 인정해, 줄리야. 하지만 젊은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상대로서 생각했을 경우, 그는 제일 뒤에 처지는 사내란 말야."
 "그가 왜 그런 사내란 말야? 중년남자로 그만큼 좋은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걸. 스텔라 상대역의, 여자를 뇌쇄시키는 타입의 영화 스타 중에도 없어요."
 "얘기는 다르지만, 스텔라가 내일 돌아온단다."
 리는 무표정하게 그렇게 말하고, 동생의 반응을 기다렸다. 효과는 곧 나타났다.
 "스텔라가 돌아온다구?"
 줄리는 흥분한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며칠쯤 있는대?"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몰라. 스텔라 자신이 말하겠지."
 스텔라의 소식을 말하면서, 리의 눈동자에 기쁨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케리는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스텔라는 자주 자기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그것도 대단히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여, 어떤 의혹의 씨가 케리의 마음속에 움텄다.
 "참 반가운 귀향인데."
 줄리의 눈에는 별안간 장난기를 발휘할 때의 빛이 스쳤다.
 "언니의 사장을 소개해 봐요. 그때의 스텔라 언니의 반응을 보고 싶은데."
 "루이스 알드레트에게는 반쯤 스페인 사람의 피가 섞여 있단다. 그러니까 그가 보기에는, 여성은 종자의 보존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만약에 여성이 없어도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학 연구 기금이 있다면, 메러디스사는 필경 그 기금의 거대한 기부자가 되리라고 생각해."
 줄리는 킥킥 웃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곧 실망한 듯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던데― 그 눈을 보면 알지!"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에 판자로 완전히 칸막이 된 옆의 작은 방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파렴치하게 도청죄를 범한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에 대한 혹평의 전부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여자들은 루이스 알드레트가 옆방에 있는 것을 조금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리 자신도 루이스가 리키에서 점심을 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의 차는 옆길에 세워 놓았고 입구도 따로였기 때문에 세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루이스는 처음에는 뜻하지 않게 도청을 하는 판국이 되어 어리둥절했다. 그리하여 얘기를 안 듣기로 했지만, 천장 쪽은 전부 뚫려 있었으므로 그것은 무리한 노릇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그런 말이 들려왔다.
 "오늘 아침에는 놀랄 일이 여러 가지 있었어."
 리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루이스가 늘 익히 듣고 있는 온화한 목소리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줄리, 그 사람의 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 그 각하의 눈은 가장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거든."
 "하기야, 언니가 잘 알겠지 뭐."
 줄리는 대꾸했다.
 "난 흘끗 봤을 뿐야. 언니는 몇 년이나 같이 일하지 않았어. 알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언니가 그 사람한테 열중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느냐는 거야."
 "무리해서 알 필요는 없어."
 리가 역습했다. 그러는 동생이 끈질기게 묻는 것이 반 장난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가볍게 받아넘기리라 마음먹었다.
 얼마 안 있어 줄리가 메러디스사에서 일하게 되면, 그 매력적인 사장에 대한 인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줄리는 지금 감수성이 풍부하여 로맨틱한 것을 동경하는 나이다.
 언젠가는 이러한 반 농담조의 말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올 것이다.
 "루이스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함께 일하지 않았나 싶어."
 리는 동생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말이지, 그를 알게 되면 될수록 그를 로맨틱한 대상으로 생각해 오지 않았음을 깨닫게 됐어. 그는 대단히 좋은 사장이야."
 그녀는 상사로서의 루이스에 관해 여러 가지로 들려 주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옆의 작은 방에서 도청하게 되고만 남자에의 얄궂은 찬사였다.
 "줄리야, 너한테 그의 짜증을 견뎌낼 만한 재간이 있는지 몰라. 일러 두지만, 그에겐 로맨틱한 데라고는 티끌만치도 없단다."
 그리고 리는 그의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나하나 헐뜯어 갔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하다, 이런 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 살갗이 거무스름하다, 이것도 별반 말할 것이 못 돼. 스페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다 그러니까. 게다가 로맨틱한 정열에 대해서도 뭐…!"
 리는 줄리가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환상을 차례차례 부수어 갔다.
 "환멸을 주어서 안 되었지만, 줄리야, 로맨스란 네가 첫눈에 반한 사장 같은 사람이 아니고 이제부터 매일 함께 일하게 되는 사무실 안에 있는 법이야. 첫째로, 그는 젊은 여성을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할걸."
 케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가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사장의 얼굴이 보고 싶구나."
 "그거야말로 큰일이지!"
 리는 웃었다.
 "필경 아첨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옆의 작은 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남자는 중얼거렸다.
 "루이스 알드레트의 생활에는 편지를 쓰거나 장부 기입을 하거나, 말하자면 연필을 쥔 유능한 로보트 이외에는 여성이 차지할 장소가 없어."
 이 말에는 줄리마저도 웃음을 터뜨리고 그 이상 끈덕지게 우겨대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에는 대화도 끊어지기가 일쑤였고, 주문한 따뜻한 요리도 운반되어 왔다.
 다시 침묵이 계속된 후에, 또 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언니, 좀 부탁이 있는데."
 "얘기에 따라서는."
 리는 동생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줄리는 낄낄 웃었다.
 "사무실에 돌아가거든 루이스 씨의 미남상을 다시 한번 봐 둬. 그래도 미남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어떤지 오늘 밤 다시 알려 주었으면 좋겠어."
 "무엇 때문에?"
 "아니, 그냥 좀."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미남이 아니라고 하는 건 아냐… 다만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라고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리고 자기의 바로 주위야말로 로맨스가 어쩌구 하는 말이지."
 줄리가 말 뒤를 이었다.
 리는 동생의 눈 안에 춤추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광선에 불안을 느꼈지만, 루이스 알드레트에 관해서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의 작은 방의 사내는 그로부터 잠시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셈을 치르고 나갔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마음은 여느 때와 같이 사업 일에 골몰했지만, 자기의 용모를 헐뜯고, 자기에게 로맨스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단언하던 리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는 그로서는 성과를 올린 반나절이었다. 브라운 켄튼사와는 무사히 계약을 맺고,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할 수가 있어서 그 엿듣고 만 대화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서인 리가 서류철을 가지고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융단을 깔아 놓은 바닥 위를 사뿐사뿐 조용히 걷고 있는 그녀를, 루이스는 무의식중에 지켜보고 있었다.
 리는 완전할이만큼 무표정하고 완벽한 직장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청한 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목소리였다는 확신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혹시나 그 대화가 자기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하고 믿어버릴 뻔했다.
 그리고 또 줄리가 리에게 부탁한 일을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할 셈인가가 염려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 표정에서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타입의 비서가, 루이스 알드레트에게 알맞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침착하고 정숙하게 사무실 안을 움직이고 있는 리에게 주목하고 있는 동안에, 그에게는 지금까지 어떠한 정열적인 체험이 있는 것일까 하고 그는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리는 서류를 철하는 것을 끝내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시계를 보고 나서 그녀는 루이스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곧 5시입니다만, 다른 일은 없겠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리는 조용히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듯한 차분한 태도로 문을 닫고 가버렸다.
 몇 분 후에는 딸그락 딱그락하는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멎고, 커버를 씌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몇 초 후에는 사무실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단지 하나 불이 켜 있는 것은 루이스 알드레트의 방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혼자 남아서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자 일어나 서류를 캐비닛에 넣어 채우고는 내선전화의 단추를 눌렀다.
 "이제 됐어, 제닝스, 문 닫으러 와 주게."
 루이스가 회사 정문을 지나가자 수위가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힘찬 엔진 소리를 남기고 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루이스는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는 집 한 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는 또 그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고급 주택은 사치에 달한 것이었지만, 그가 일찍이 훌륭한 추억을 만들었던 그 희고 빛나는 집에 비하면 그것은 거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 하얀 집 생각만 해도 루이스는 관절이 허옇게 변할 만큼 주먹을 움켜쥐게 된다. 핸들을 다시 쥐고, 그 생생한 추억을 마음으로부터 쫓아내려고 했다.
 차는 순조로운 엔진 소리를 울리며 더부살이하는 노부부가 살림을 돌봐 주고 있는 자기 주택으로 향했다. 그 노부부는 그의 개인적인 일에는 말참견을 하지 않는 안성마춤인 인물이었지만, 그만큼 때로는 단단한 조개가 겨우 입을 열고 있는 것처럼 고독이 스며들어 오는 것을, 루이스는 이를 악물고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고독감을 북돋우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관광포스터에 그려져 있는 열대 식물의 짙은 녹색 숲인 것일까, 아니면 태양에 빛나는 하얀 집들인 것일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떤 선율인 것이었다. 정답게 호소하여 루이스의 감정을 세차게 유혹하고 끌어당기고 마는, 힘찬 리듬을 가진 오랜 스페인의 노래. 그 나른하고도 달콤한 음악을 들으면, 온갖 추억이 루이스의 마음에 한결 선명하게, 그리고 강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리가 집에 돌아오니, 줄리의 뜻밖의 귀가와 스텔라가 들를지도 모른다는 소식으로 온 집안이 한창 야단법석이었다.
 어머니인 마거릿 다모트가 줄리의 팔을 끼고 리를 마중했다. 마거릿은 아직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줄리와 같은 장난기마저 있다. 머리는 리와 같은 금빛나는 갈색인데 흰머리는 아직 한 올도 없었다.
 "이 농땡이 부리고 돌아온 말괄량이를 어떻게 생각하지?"
 리에게 물었다.
 "말괄량이?"
 줄리가 입을 삐죽거렸다.
 "이젠 열여섯 살이에요."
 "대단한 나이로구먼."
 모친은 다정스럽게 놀렸다. 거기에 쌍동이가 뛰어나왔다.
 쌍동이는 언제나 함께 뛰어들어왔다가 뛰어나가는, 마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회오리 바람과 같다. 둘이 다 불그레한 머리털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의 눈을 놀래 줄 만한 홍당무색인 것이었다. 줄리는 청동색이랄까, 연한 적록색의 희귀한 머리를 하고 있으며, 모친과 장녀인 리는 금갈색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이 집에 잘 놀러오는 케리도 또한 적갈색 머리여서 다모트 집안의 일원처럼 대우받고 있었다.
 현관의 문을 닫고 있는 리를 향해 모친은 말했다.
 "오늘 일은 어땠어?"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여느 때와 별로 다를 게 없어요."
 그리고는 어조를 바꾸었다.
 "스텔라가 온다니 근사하지 않아?"

                   2

 
 스텔라는 이튿날 밤 8시쯤, 값비싼 푸른 사파이어색의 로드스타를 손수 운전하여 찾아왔다.
 한 살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동생을 보고, 언제나 그렇듯이 리는 목이 메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친인 마거릿도 그와 같은 기분인 것 같았다.
 "아, 스텔라!"
 마거릿은 한숨을 쉬면서 여배우인 딸을 껴안았다. 그 꽃잎처럼 보드라운 뺨에 키스를 하니, 고급향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스텔라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자, 문득 줄리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머나, 꼬마 줄리가 아니야?"
 "꼬마라구?"
 줄리가 항의했다.
 "난 이제 열여섯 살이야. 속기사 자격도 따구 말이지!"
 "루이스 알드레트에게는 솜씨를 보여 주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라고 이 애한테는 말했지만서도."
 리가 농담조로 말했지만, 그 소리는 숨이 막힌 것처럼 작았다. 스텔라의 귀가는 리를 그만큼 흥분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루이스 알드레트라니?"
 "리 언니의 사장."
 줄리가 말했다.
 "언니, 아직도 그 무서운 잔소리꾼인 늙은이 밑에서 일하고 있어?"
 "늙은이도 아니고 무섭지도 않아."
 줄리가 말했다.
 "하지만 좀 까다롭기는 한 모양인데 그래. 스텔라 언니를 그 사람에게 소개하여 약간 부드럽게 할 수는 없나?"
 "그 사람 여자를 싫어하는 거니?"
 그렇게 물은 스텔라의 입가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이 흘깃 떠올랐다.
 "그래서 나 같으면 그를 잘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그래."
 줄리가 낄낄 웃었을 때, 쌍동이 테스와 톰이 뛰어들어왔다.
 "스컹크의 모피구나."
 테스가 말했다.
 의자 위에는 스텔라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밍크 코트가 있었다.
 "굉장한 자동찬데!"
 톰은 유리창에 코를 짓눌러 붙이며 감탄의 말을 했다.
 "이제 곧 태워 줄게, 얌전히 굴면."
 "언제든지 얌전하지, 안 그래?"
 톰은 동의를 구하며 엄마 쪽을 향해 보았다.
 "그럼, 가끔씩은 말야."
 마거릿은 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마거릿으로서는 스텔라와 같은 딸이 어떻게 자기한테서 태어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늦으시겠다고… 아까 전화가 왔더랬다."
 "괜찮아요. 화장을 고칠 시간이 생겨서 도리어 잘됐어요."
 스텔라는 웃었다.
 스텔라의 말에 모두들 따라 웃었다. 왜냐하면 화장하지 않은 그대로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에.
 스텔라는 스컹크의 모피로 잘못 보인 밍크 코트를 들고 줄리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화장을 고치러 갔다. 쌍동이도 정원으로 나가 버리고, 그 뒤에는 리와 모친이 남게 되었다.
 마거릿은 살짝 눈물을 훔치고는 일부러 기운차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자, 차라도 마실까?"
 마거릿은 주전자에 물을 부으면서 리더러 찻잔과 받침접시를 내어 쟁반에 놓으라고 눈짓으로 일렀다.
 "너, 좀 피곤해 보이는구나. 알드레트 씨는 여전히 까다로우냐?"
 "글쎄… 조금은 그래."
 "왜 일자리를 바꾸지 않니?"
 "뭐,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지면 일하기도 쉬운 곳이니까."
 리는 고개를 흔들면서 모친에게 복잡한 웃음을 돌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할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 굉장한 부자로 하고 싶으면 뭐든지 할 수 있잖아. 하지만 뭐랄까, 이따금 그 사람은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같이 느껴져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뿐이야. 그는 다시 여느 때의 엄격하고 차가운 인간으로 돌아가고 말아. 그래서. 아, 이것은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고치지만."
 "그렇지만, 혹시 알드레트 씨는 불행한지도 몰라. 부자에게는 또 그대로의 문제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야."
 주전자가 기운차게 끓어 둘이는 또 차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에 주인인 변호사 존 다모트가 귀가하여, 마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참에 스텔라가 이층에서 내려왔다. 부친은 힘차게 애정을 담아 스텔라를 껴안았다.
 스텔라가 벨벳 옷이 마구 구겨지겠다고 항의하자, 존은 웃으면서 농담했다.
 "요새 벨벳은 구겨지지 않을걸. 메러디스사에서 만든 것이라면 하고 리라면 말하겠지만서두."
 "아, 그래요, 리 언니의 회사 사장 말이군요."
 스텔라는 좀 빈정거리는 시선을 언니게게 돌렸다.
 "아직 만나뵌 적은 없지만."
 그때 부저가 울렸다. 테스가 문으로 뛰어가더니 케리가 온 것을 힘껏 소리질러 알렸다. 이윽고 케리는 큰소리로 지껄이며 들어왔는데, 스텔라에 시선을 멈추자 일순간 둘의 사이엔 적대의식에 불꽃이 튀겼다. 스텔라는 장기인 연기력으로 이내 곧 창끝을 거두었지만 케리는 좀처럼 그러지를 못했다.
 "안녕, 스텔라."
 케리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오늘 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장장 이 주일이나 집에 있게 됐어."
 기쁜 목소리로 줄리가 대답했다.
 이 주일이라니 너무 길어, 하고 케리는 슬쩍 중얼거렸다. 그녀는 스텔라를 좋아하지도 신용하지도 않았다. 아마 스텔라도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둘이 서로 반목하는 원인이었다.
 케리는 스텔라의 어딘가에 허점이 없는가 잽싸게 관찰했지만, 어 디에서도 그런 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미인이었다. 처음에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단역으로 출연했다고 가족에게 알려왔던 그 열여덟 살의 생일날부터 거의 나이를 먹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나, 그녀는 이제 스타가 된 것이다. 그녀의 작고 훌륭한 몸매와 윤기있는 검은 머리와 초록빛 눈동자가 그녀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여 스타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가족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케리는 그러한 스텔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슨 다른 이유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즉, 스텔라가 가족을 만나러 돌아온 것은 여배우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이롭기 때문이며, 별로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닐 것이라고. 스텔라는 자기 덕분에 유명해진 이 도시 사람들에게 애지중지 사랑받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은 또 좋은 선전이 되기도 했다.
 리에 관계되는 무슨 일로 스텔라가 승강이를 벌이게 될 거라고 케리는 예감했다. 스텔라는 한껏 추켜올려진 버릇없는 아이와 같았다.
 이를테면 동생들의 장난감을 탐내면 다들 기꺼이 스텔라에게 주고 만다. 뭐니뭐니 해도 스텔라는 아름다워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텔라는 이내 그 장난감에 싫증이 나서 내팽개치고 만다. 그리고 원 임자가 다시 가지고 싶어도 그때 장난감은 이미 망가지고 만 뒤다. 그래도 스텔라는 얻어맞는 일도 꾸지람을 듣는 일도 없었다. 하여튼 그녀는 스텔라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스텔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십 분쯤 지난 뒤에 현관의 부저가 또 울리더니 리와 함께 브루스가 들어왔다. 그는 튼튼한 육체와 억세 보이는 얼굴을 한 스물여섯 살의 청년인데, 리보다 한 살 위였다. 아무리 잘 보아 준다 해도 핸섬하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리에겐 그가 성실하고 믿을 만한 남성처럼 느껴졌다. 케리의 견해는 달랐다. 브루스에게는 자기가 착오를 일으켜도 완고하게 우겨대는 좀 언짢은 데가 있는데 케리는 이것을 그의 성격의 약점이 아닌가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다.
 리는 스텔라에게 브루스를 소개했다. 리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리가 스텔라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케리는 생각했다. 스텔라는 그 갈색머리를 한 촌스러운 얼굴의 사나이를 상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는 안 돼.'
 케리는 절망적으로 마음속에 기도했다.
 '브루스는 안 되구말구.'
 다음에 망가질 장난감이란 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인 것이다. 스텔라는 이번에도 그를 언니에게서 빼앗으려고 한다고 케리는 간파했다.


                   3

 
 루이스 알드레트의 일신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지금 그 가늘고 날씬하지만 탄력있는 손에 들고 있는 편지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편지는 또한 루이스를 십 년 전으로까지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그 높은 수목과 꽃으로 둘러싸인 희고 아름다운 집. 그는 그것을 십 년 전에 버렸었다.
 루이스는 다시금 편지에 눈을 돌렸다. 그는 지금도 부자였으나, 그 편지는 그를 더욱 부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한번은 체념했던 재산을 상속받아 늘 꿈꾸고 있던 그 하얀 집에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 조건을 충족하려면 루이스는 귀국하여 조부가 정한 상대와 결혼해야만 했다. 그것이 싫다면 십 개월 이내에 신부를 카라스트라노로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것은 조부 디에고 알드레트가 손자인 루이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집과 재산을 지켜 줄 사람은 그밖에 없다고 지목하고 있었던 결과였다.
 루이스는 다시 한번 편지에 시선을 주고는 방황하고 있던 기분을 여느 때의 냉정한 판단력으로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의 엷은 입술이 약간 삐뚤어졌다. 그는 카라스트라노를 원했지만 결혼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벌써 네 번째가 되는 이 편지를 훑어보았다.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는데,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 방법은 있다. 이 경우에는 사무적으로 하면 된다. 순전히 비즈니스로 딱 잘라서, 결혼 상대와 계약하고 서로간에 자유를 존중하며, 피차 따로따로 살아갈 것을 전제로 하여 결혼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하자면 이러한 비인간적인 계획에 기꺼이 협력해 줄 여성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어느 정도는 좋아하는 여성이 아니면 곤란하다. 아무래도 멕시코에서 얼마간 함께 지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과연 있을 것인가? 그러자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저 냉정하고, 때로는 너무 가라앉아 있어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리 다모트가 있지 않은가. 다른 여성들처럼 그녀가 바보처럼 헤프게 웃는 것을 루이스는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또 그녀가 실없는 잡담을 하는 것을 들은 적도 없었다. 리가 있는 사무실에 감돌고 있는 것은 그저 가라앉은 정적뿐이었다. 다른 여성들은 남자친구나 사생활, 일 따위로 잘들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지만 리 다모트는 다르다.
 그녀는 루이스가 싫어하는 센티멘털한 타입과는 인연이 멀고, 그가 바라는 대로의 일솜씨를 보여 주는 냉정한 여성으로 그에게는 생각되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책상 위의 부저를 눌렀다. 그 부저 소리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 턱도 없이 리는 여느 때와 같이 메모용지와 연필을 손에 쥐고 들어왔다. 그리고 늘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편지를 쓸 채비를 했다. 왜냐하면 대체로 늘 일정하게 이맘때쯤되면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데, 급한 볼일이 없는 한 그것은 그녀의 하루 첫 과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에 든 편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에 그 내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리는 처음에는 그가 말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듣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내용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리는 마치 통역이라도 하는 듯 그 내용을 요약해 보였다. 루이스 알드레트는 그녀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놀란 듯한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리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정말 미치광이가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이만큼 놀라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얼굴을 들고 말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알드레트 씨."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부탁하고 있는 것은 그저 단순히 비즈니스로써 결혼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리는 자신의 메모용지를 거듭 보았다. 거기에는 자기가 적은 글자가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신한테는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지만, 나는 근간 멕시코에 있는 조부의 재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입니까?"
 리는 루이스의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그 한마디 한마디를 되뇌이며, 그러한 '비즈니스 결혼'이란 놀랄 만한 말을 듣고도 태연해 있는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있었다.
 "나는 결혼하지 않으면 안 돼요. 물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또다시 리를 지켜보았다. 이 여자는 정말로 둔감한 건 아닐까, 혹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감정적이 아닌 인간이라도 이런 신청을 받으면 태연하게 있지 못할 텐데. 그녀는 눈을 가늘게 했을 뿐 마치 날씨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 리는 그 사이에 쇼크에서 몸을 가누려고 기를 썼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약혼 중입니다."
 이번에는 루이스가 쇼크를 받을 차례였다. 그는 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 리키에서 들은 그녀의 젊디젊은, 들뜬 듯한 목소리를 상기하고 야릇한 느낌에 젖었지만, 혹시나 그것이 그녀의 본성이며 사무실의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요. 그럼, 당신은 결혼하고도 일을 계속할 작정입니까, 아니면 그만두는 겁니까?"
 "그만두렵니다, 물론. 하지만 아직 결혼식의 날짜도 정해져 있지 않고, 다음에 올 사람의 사무 인계 준비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후임으로는 누구든지 고르실 수 있겠습니다."
 루이스는 생각 끝에 말했다.
 "실은 이 회사를 팔기로 작정했어요. 새로운 경영자는 회사 진용의 복안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되지만, 필경 당신은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있어 주길 바라지 않을까?"
 "저희들은 앞으로 이삼 년 동안은 결혼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리가 설명했다.
 "결혼이란 역시 대사업 아니예요. 저희들은 살기 편한 집을 살 수 있도록 저금하고 있어요."
 너무나도 건전하고 지나치게 실용적인 것은 아닐까. 루이스는 리가 결혼하고자 하는 남자에 관해 알고 싶어졌다. 그는 절약할 줄 아는 실제적인 남자일는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루이스는 둘에 관한 일을 머리에서 몰아내고 다른 편지를 집어들며 마치 여느 때 일의 계속을 하고 있는 것처럼 리더러 답장을 받아쓰게 했다.
 그러나 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공격과 수비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생각으로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줄리가 끈덕지게 주장한 그의 매력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루이스는 리가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키가 큰 남자의 부드러운 몸매, 그 긍지를 담은 검은 머리, 그리고 머리털과 마찬가지로 새까만 얼음처럼 차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루이스가 또 다른 편지를 꺼내었을 때 리는 그 손을 보았다. 날씬하고 예쁘게 세련된 귀족적인 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군가와 지금 전화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부드러웠다. 늘 이랬던 것일까. 말소리도 깊은 음악적인 억양을 띠고 얼마만큼 누그러진 것 같았다― 혹시나 전화의 상대는 여성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지금까지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 루이스 알드레트에게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리는 그러한 냉혈 인간 같은 사람의 결혼 신청을 앞에 놓고 자기가 아직 미련을 두고 헤매고 있는 기분임을 알아냈다. 결혼하여 석 달이 지나면 이번에는 즉각 취소라니, 냉혈한이라기보다 무서운 사람이로군. 이렇게 모욕스런 결혼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비즈니스로서의 이 결혼을 승낙할 수 있는 여자라면 가엾어.
 리는 그날 오전중은 좀체로 그 결혼 얘기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여느 때 하던 식으로 타이프를 칠 수는 있었다. 아무리 냉혈 인간과 같은, 로맨틱이란 말과는 반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미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루이스가 달라 보이게 된 것도 리로서는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아침에 리가 장갑을 끼면서 급히 회사에 나가려고 하니까, 아침식사에 휘청휘청 내려온 줄리가 언니의 옷차림을 자세히 뜯어보며 말했다.
 "언닌 어째서 그렇게 입는 것에 무관심해요? 어째서 늘 그렇게… 수수한 복장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그렇다고 프릴인가 뭔가 달린 것을 입고 일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리가 의뭉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렇게 너절한 여자로 보이니?"
 "아아니, 물론 그렇진 않지만."
 줄리는 얼굴을 훑어보았다. 리는 맞춤 스커트에 조촐한 옷감의 새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그 위에 가벼운 여름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의 복장은 언제나 완벽한 비서란 느낌이야."
 리는 그 깊은 푸른빛 눈동자를 장난꾸러기처럼 반짝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하려고 마음쓰고 있단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계속하고 있지 않니.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옛날에 사장에게 귀를 잡혀 내쫓 김을 당했을 거라구."
 "하지만 언제나 그렇단 말야."
 "너는 로맨틱한 걸 좋아할 나이니까. 그렇지만 충고는 매우 고맙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다."
 리는 놀리듯 말했다.
 "별말씀을. 하지만 루이스 씨는 근사해.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러는 줄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리는 문으로 향했다.
 '만약 메러더스사에 일하게 된디면 아예 그런 생각은 못하게 될 거야.'
 리는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동생의 말을 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은 그녀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게다가 줄리의 그 '완벽한 비서'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줄리뿐만 아니라 주위의 누구한테서나 그런 눈으로 보여지고 있음을 알고 있던 그녀는 지금은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유능을 지나쳐서 너무 침착하고 무감동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브루스를 대할 때도 그랬던 것일까? 그는 키스해 줄 때도 나한테 무언가 불만족한 느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낮 휴식 시간에는 여느 때보다 늦게 사무실을 나왔기 때문에 리키에 가니까 케리가 시내에서 물건을 사가지고 온 줄리와 둘이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점심을 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케리는 무의식중에 리가 어쩐지 기분이 언짢은 것을 눈치챘다.
 그래, 리의 언짢은 기분은 여기에 오기 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었다. 케리는 케리대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리는 그 일을 아직 모를 텐데. 즉 브루스가 스텔라를 몰래 만나고 있는 것을 리는 알 턱이 없을텐데― 케리는 천만뜻밖에 둘이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케리는 그전에 간 일이 있는 교외로 잠깐 기분전환을 위해 자주 드라이브하는데, 요전날도 거기에 나갔다가 조용한 전원의 작은 길에 스텔라의 차가 멎어 있고, 그 속에 스텔라와 브루스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케리의 차가 다가가니까 둘이는 얼른 몸을 떼었는데, 스텔라는 키스를 하고 난 여자의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리는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지만, 그때 브루스가 스텔라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하는 소리와 그 말에 대답하는 듯한 스텔라의 허스키한 작은 낮은 웃음소리가 시골 좁은 길의 고요를 깨고 케리의 귀에까지 들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냥 돌아보지 않고 지나갔지만 그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침묵으로 둘이 또 얼싸안았으리라는 것을 케리는 확신했다. 스텔라는 미인이다. 케리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점은 긍정했다. 그러나 뱀이라도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아름답다. 스텔라의 아름다움은 어딘가 그것과 흡사한 것은 아닐까?
 케리가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작은 방의 커튼 사이로 검은 머리가 이쪽을 엿보았다.
 "리키에 당신들이 있다는 걸 들었어. 같이 있어도 상관없겠니?"
 자니스 마틴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당연하다는 태도로 의자에 앉아 버렸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로 외근사원 중에서도 제일가는 수완가였다. 소문으로는 몇 년인가 전에, 결혼 직전에 상대를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상은 알 수가 없었다. 자니스는 그 후로 자기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네가 줄리구나."
 리가 소개하니까, 자니스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너를 만나고 싶었단다, 리가 늘 얘기해 주었으니까."
 "어머나 곤란해요! 어차피 나쁜 말뿐이겠죠."
 "그런 일은 없어요."
 자니스는 줄리에게 말하고는 다른 두 사람을 향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무슨 재미있는 일 없었어?"
 "글쎄, 리가 약혼한 일일까?"
 케리가 말했다.
 "그건 축하할 일이군요. 물론 브루스하고겠지?"
 "물론 브루스가 틀림없죠."
 케리가 약간 쌀쌀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다른 남성에게 눈을 돌릴 리도 없겠고."
 "그리고 리키는 결혼 축하로 '아아니'를 선물해 준대요."
 줄리가 입을 놀렸다.
 "아아니란 누구지?"
 "티 포트의 이름."
 줄리가 말했다.
 케리가 대신 자니스에게 설명했다.
 "그전에 말이야, 우리가 쇼를 보러 가기 전에 여기서 만났었는데 저녁식사도 끝나고 어딘가 장소를 옮겨 리와 브루스를 둘이만 있게 했었지."
 케리는 이때 리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알아챘다.
 "브루스가 프로포즈한 건 그때였어요. 여기서 그 아아니표의 티 포트에서 차를 따르는 소리에 자극되어 브루스는 프로포즈할 용기가 솟아났지 뭐야. 그런 까닭에 리키가 결혼선물로 하겠다고 약속한 거예요."
 루이스 알드레트는 무엇이 자기를 리키로 또 가게 만드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가깝고 음식이 맛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또다시 그들의 말을 엿듣게 되고 만 것은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하기야 이번에는 찻잔이나 접시 소리와 티 포트에서 차를 따르는 소리에 뒤섞여 리에게 프로포즈한 영국 사내의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지만, 그의 유능한 비서님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로맨틱하지 않은 남자를 고르고 만 것이다.
 브루스란 놈, 누군지는 몰라도 가엾구나! 언제까지나 그런 말을 듣게 되겠지, 필경. 루이스는 생각했다.
 그때 자니스 마틴은 웃음을 그치고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말야, 때로는 그러한 프로포즈가 달빛 아래서 속삭이는 것보다 좋을 때도 있지 뭐."
 다른 세 사람은 잠자코 있었다.
 자니스는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을 계속했다.
 "에드리언은 참다운 예술가였지. 하지만 결혼식 직전에 돈 많은 과부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말았어."
 자니스가 한숨을 쉬었을 때, 리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 여태까지 그를 만난 적은 없었어요?"
 자니스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내 만나고 싶었지… 하지만 실은 끼고 달아난 밤에 교통사고로 둘이 다 죽어 버렸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줄리가 몸을 떨었다.
 "어머나, 내가 젊은 애를 무서워하게 했구나."
 "아니예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게 무서운 일이군요. 당신의 희망이 그만 평생 이루어지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그게 두려워서…"
 "처음에는 두려웠지. 하지만 시간이 공포의 칼끝을 무디게 하는가 봐."
 조용히 말하고 있는 자니스의 얼굴을 보고 리는 이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오후에는 알게 되겠지만, 말해 버리지. 실은 말야, 메러니스사가 팔리게 됐어."
 "팔린다고?"
 케리가 반사적으로 되뇌었다. 
 "사장은 멕시코에 있는 조부님의 재산을 물려받게 돼. 그래서 회사를 팔아 버리는 거야."
 리는 그 이상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
 줄리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이 그런 명문의 사람인 줄은 아무도 몰랐잖아."
 "정식으로는 루이스 디에고 빨레아 데 알드레트라고 한단다."
 "무시무시한 이름이구나."
 케리는 말하면서 기묘한 표정으로 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어떻게 할 작정이래?"
 그때 리키가 요리를 날라왔다.
 "그런데 말야."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의 주인이 바로 요 옆방에 있는 걸 알고 있었나요?"
 "뭐라구요!"
 줄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무서운 침묵이 일동을 감쌌다. 모두들 서로가 얼굴을 쳐다보면서 자기가 어떤 말을 지껄여댔는가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장은 지난 주에도 리키에 가기로 되어 있지 않았던가.
 "루이스 씨는 지난 주 화요일에도 여기 오지 않았나요?"
 리가 부드럽게 물었더니, 리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당신들에게 주의시키려고 생각했으면서도 가게 일이 바빠서 어느 새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는 어느 자리에 앉아 있나요?"
 그렇게 질문하면서 생각했다. 지난 주 화요일이라면 줄리가 돌아온 날이다. 그때 리는 무례할이만큼 신랄하게 메러디스사의 사장을 실컷 마구 후려갈겼더랬다.
 "오늘도 같은 테이블이에요."
 리키가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너무 심한 말은 하지 않았겠죠?"
 그렇게 말하고는 리키는 다른 테이블로 가버리고, 뒤에는 깊은 침묵만이 남았다.
 자니스가 일동의 얼굴을 둘러보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무슨 심한 말을 한 게로구나."
 리는 끄덕이면서 머릿속으로는 그때 얘기한 내용을 상기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만약에 사장이 요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체면에 관한 일이라 아무 말하지 않을 거야. 이번에도 필경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는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루이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에는 별로 변한 데가 없었다. 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이 지나갔다. 고양이 프릭스는 등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았고, 스녹스는 한가로이 제 발을 핥고 있었다. 나날의 일에도 변화는 없고, 생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텔라가 런던에 돌아가는 전날 밤까지는.
 그날 밤에 모든 것은 결딴나고 말았다.
 그날, 브루스는 휴가를 취했다. 요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일만 죽 해왔기 때문에 야회를 위해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루이스는 그 야회에 대해 리와 케리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일찍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여 리를 놀라게 했다. 나중에 그런 배려를 해준 루이스에게 감사해야 좋을지 미워해야 좋을지 그녀는 판단하기가 어려웠지만.
 리가 여느 때보다 일찍 귀가해 오니, 집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어머니와 줄리는 영화 보러 간다고 했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고, 쌍동이 동생들은 무슨 퍼레이드의 연습인가로 아직 학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용한 것으로 봐서, 스텔라는 외출했던지 아니면 낮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리가 거실의 문을 연 바로 그때였다.
 "이런 일, 난 못해요. 리한테 못할 일이야. 언니에게 상처를 준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리는 그러한 말소리를 듣고 덜컥 놀라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저 소리는 어김없는 스텔라의 목소리― 얼핏 본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그녀의 날씬한 몸을 껴안고 스텔라의 볼에 머리를 기대며, 잘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하고 있는 상대의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아니, 리는 잘 알고 있었다. 브루스다, 그것은 리의 약혼자인 브루스였다.


                   4

 
 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으로 그 자리에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방을 나와 살짝 문을 닫았다. 그녀는 이러한 장면에 맞닥뜨린 사람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자기가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리로서는 아직 이것이 꿈이며, 가볍게 떨쳐 버리기만 하면 사라지고 말 악몽같이만 느껴졌다.
 브루스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스텔라와 사랑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가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을 애무에 열중해 있던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잠시 리는 문앞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집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강아지 스녹스마저 보이지 않았다― 스녹스는 왜 그런지 스텔라를 싫어했다― 고양이 프릭스도 또한 새끼들과 어울려 부엌에서 자고 있으며, 거실에 들어오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마 리가 현관으로 들어와 있었다면, 혹은 만약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귀가했더라면, 브루스의 팔에 안긴 스텔라를 목격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둘이는 현관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를 알아들었을 것이다.
 리는 겨우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엌을 지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거기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이냐? 정원수처럼 집 앞에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혼란된 리의 마음이 가르쳐 주었다. 이웃 사람들의 이목이라는 것이 있다. 우두커니 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자기에게 타이르고는 정처없이 그녀는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태까지의 리는 자기만의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사랑에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브루스와 스텔라는 생각해 보면 다시없이 불행한 한 쌍이 아닌가? 그것도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스텔라가 겨우 애인을 구했다는데, 나라는 약혼자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슬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엾은 입장에 놓여 있으면서 아직 동생의 심정에 동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브루스에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이대로 스텔라와의 연정을 지속하고 있을 것이라면, 리와의 약혼은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브루스를 단념한다는 것은 리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남이 본다면, 자동차 앞에 몸을 내던질 것 같은 자세였는지도 모른다― 리에게는 그만한 정도의 용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리의 마음은 앞으로의 일로 가득차 있었다.
 정말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장에 약혼을 파기할 것인가? 리는 지금 스텔라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려고 애썼다. 세 사람 중의 둘이 행복해진다면, 한 사람이 상처입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닌가. 내가 브루스와 결혼하는 것은 세 사람이 다 불행해지고 마는 일이다.
 리는 무의식중에 걷는 속도를 빨리했다. 쇼크와 절망으로 어떻게 되어 버리기 전에 무슨 좋은 방책을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걸음을 빨리하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다소 밝아졌다. 해결의 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만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족들도 벌써 돌아왔겠지. 리는 도저히 야회에 나갈 기분은 되지 않았다. 두통을 구실 삼으면 된다. 내가 가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면, 브루스는 필경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리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 스텔라는 런던으로 떠나고 만다. 어떻게 하면 둘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인 줄 모르게 약혼을 해소할 수가 있을까. 그럴싸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딱한 일이다. 다른 애인이 생겼다고 해본들 아무도 믿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집안 사람들도 리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상대가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남아 있는 것은 일뿐이었다. 루이스 알드레트뿐이었다.
 별안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더 이상 생각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명명백백하다.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하면 만사가 다 잘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기까지는 한순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스와 한집에 사는 것이 그 '비즈니스 결혼'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 그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겠지만, 리는 왜 그런지 지금까지 이상의 것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일하고 있을 때의 루이스의 그 냉정한, 끊임없는 잔소리꾼 같은 성격에는 따라갈 수 없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정해졌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브루스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루이스 알드레트에게 말하기 전에는 잠자코 있자고 그녀는 새삼 자기에게 타일렀다.
 그날 밤 리는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아무래도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울고 싶은 생각은 그만 사라졌다. 자제심이 이긴 것이다.
 리는 여느 때와 똑같이 출근하여 루이스 알드레트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루이스를 특수한 눈으로 보고, 그가 그다지 냉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척 매력적인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있는 자기를 알아챘다.
 루이스의 날카로운 검은 눈은 똑바로 리를 바라보며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알드레트 씨, 만약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루이스는 눈으로 리가 언제나 걸터앉는 의자를 가리켰다.
 리는 걸터앉으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이렇게 하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실은 요전에 말씀하신 비즈니스 결혼 일입니다만… 저, 아직 신부 자리는 비어 있을까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주저하는 듯 말했다.
 "제 말은 만약에…"
 "즉 마음이 변했다는 거군요?"
 루이스가 받아서 말했다. 그의 검은 눈이 살피듯이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의 약혼은?"
 리는 루이스의 응시를 받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취소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젯밤인가요?"
 "네."
 그녀는 조용히 잘라 말했다.
 "그래요?"
 라고 했지만, 리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루이스의 검은 눈을 리는 의식했다.
 "그럼, 내 신청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지요?"
 "네."
 라고는 했지만, '신청'이라는 말이 하도 기묘해서 자기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터질 듯한 이상한 기분을 간신히 억제했다. 
 "그런데 저, 우리들의 결혼이 일종의 비즈니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만 할까요?"
 자기와 루이스가 서로 결혼한다는 것이 그녀에겐 이상야릇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텔라와 브루스라면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나로서는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는 편이 오히려 좋겠어요. 지금 이 일을 알고 있는 건 조건을 내걸어 온 조부하고 나뿐이오. 물론 당신을 빼놓고는."
 "자세한 걸 여쭈어 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목소리를 가라앉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아직 냉정한 사무적인 음향이 풍겼다.
 "그 일부는 당신도 아는 그대로요. 그리고 결혼한 뒤에 얼마 동안은 카라스트라노에서 살지 않으면 안 돼요. 더욱이 표면상으로는 보통의 부부처럼 행세하고, 그리고는 유언의 유효 기간이 지나면 비즈니스 결혼을 해소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으로 법률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애요."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루이스의 표정이 약간 이그러지고 미간을 벌리는 듯했다.
 "조건을 듣고 싶지는 않나요?"
 "조건이 있나요?"
 "사례도 안하고 부탁하려고 생각지는 않아요. 뭐라 해도 비즈니스 결혼이니까요."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리는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문득 그때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어떤 보상을 받는다면… 그럼 저… 별다른 형태로 지불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의 표정이 험해졌다.
 "어떤?"
 루이스가 냉담하게 물었다.
 "가능하면 저와 사랑에 빠진 시늉을 해주셨으면 해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긴 시간이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도저히 루이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고,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무릎을 꽉 쥐고 있는 자기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혼을 파기했다는 것도 그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모양이죠?"
 루이스가 물었다.
 리는 그 뒤의 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서 얼핏 고개를 들었으나, 루이스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무슨 못마땅한 일이 있으세요?"
 잠깐 사이를 두고 리는 물었다.
 "아니, 당신의 그전 약혼자를 질투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면."
 브루스를 질투하게 만든다? 둘이 뜨겁게 사랑하니까 브루스가 스텔라와 잘 되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는 제 동생과 결혼합니다."
 리는 기분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아, 과연."
 루이스는 말했다.
 그 순간 리는 자기가 브루스를 도로 빼앗기 위해 루이스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가 의심했음을 느꼈다.
 "전 동생을 참으로 좋아해요. 그래서 이제는 브루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동생에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동생에게 말해 줄 필요가 있어요."
 루이스는 천천히 몸을 의자에 파묻고는 그녀를 계속 지켜보았다. 그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긴 했지만, 눈에는 호기심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리는 눈물 따위와는 무관한 의지가 강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물고 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동안에 리에 대한 흥미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당황한 표정을 하여 미안합니다."
 조용히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제 입장도 이해되셨을 줄 압니다. 저는 아직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아직 정식으로는 파혼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것이 구실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당신으로서는 필요한 일이지요?"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 우연히 둘의 얘기를 엿듣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들의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잘 후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것밖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박애주의를 발휘한 셈이군요."
 루이스가 말했는데, 리는 놀란 시선을 돌렸다.
 "제가요? 아뇨, 하지만… 달리 할 도리가 없으니까요."
 달리 할 도리가 없다고? 하고 루이스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또 그의 눈에 아이러니컬한 빛이 떠올랐다.
 "요전에 리키에서 들은 바로는 나의 상대역을 맡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리는 대번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럼, 듣고 계셨단 말씀이에요?"
 "겨우 조금만 들었어요."
 루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것은 죄많은 일이었지만, 내가 말한 것은 믿어 주겠지?"
 "물론입니다."
 리는 급히 말했다. 자기가 그 점심때 노닥거렸던 일이 떨떠름하게 생각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과는 루이스에 대해 생각이 달라졌는가 자문해 보았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다고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루이스는 그러한 리의 마음을 읽어보고, 다시금 아이러니컬하게 검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감히 말한다면, 나는 나대로 이 '연기'에 협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때요?"
 루이스 알드레트와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간파되지는 않을 걸로 생각합니다."
 "이번 경우는 침착해 있으면 되니까 말이오."
 루이스는 말했다. 리는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당신의 형편이 괜찮으면 이달 말에는 우리는 결혼하게 됩니다."
 그는 계속했다. 그 말투로는 사람이 결혼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회사가 팔려 버리고 나면, 이제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루이스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통의 서류에 시선을 떨구며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고개를 들고 까다로운 얼굴로 묻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스페인어를 모를 테니까, 조금은 배워 두는 것이 좋겠죠. 아무래도 카라스트라노에서 몇 달은 생활해야 할 테니까, 그러는 편이 당신에게도 좋겠고. 물론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어요. 그것은 마지막에 일괄하여 드리기로 하지요."
 "하지만, 그러면 저는…"
 리가 말하는 것을 루이스가 긴 손가락을 들고 막았다.
 "비즈니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일체 맡겨 주세요."
 그는 잘라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리는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 맡겨 드리겠습니다."
 루이스는 전화에 손을 뻗쳤다.
 "스페인어 학교에 연락할게요. 참 좋은 학교입니다…"
 "저 스페인어를 할 줄 압니다."
 루이스 밑에서 일하게 된 후로 처음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고, 리는 속이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벌써 말할 줄 압니까?"
 루이스는 즉시로 기분을 돌려 대화를 갑자기 스페인어로 바꾸었다.
 "어디서 배웠나요?"
 리는 한순간 머뭇거렸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스페인어로 말함으로써, 그녀의 스페인어 실력을 테스트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단히 능숙하게 스페인어로 답변했다.
 "그 전에 멕시코나 남미 지방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한 일이 있어서…"
 리는 그렇게 말하는 루이스를 보면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러고 보면 그는 그다지 지독한 사내 같지는 않게 생각되었다. 그런 생각이 뜻밖에 얼굴에 나타났던 모양이다.
 그의 얼굴에 말하고 싶은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별로요."
 리는 얼른 부정했다. 그러고는 곧 결심한 듯이 덧붙였다.
 "다만, 당신이 약간 전과 달라져 보였어요. 그다지 냉담하거나 두렵지도 않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두려운 사람이라구?"
 루이스는 되묻더니 어깨를 지지러지게 했다.
 "생각하면 우리들이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없습니다, 안 그래요? 결국엔 우리는 앞으로 부부 구실을 해야 하니까 친구가 될 필요가 있지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붉게 했다. 
 "네, 물론이에요."
 리는 당황하며 말했다.
 "이제 고백하자면, 당신이 맡아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루이스의 말투는 정중했다.
 리는 다시 놀라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표면밖에 못 봤던 거예요. 확실히."
 리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자기가 루이스를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것 같군요."
 그는 뜻이 같음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당신의 가족들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아무런 사실도 모르다니 이상하잖아요?"
 문제는 딴 데에도 있었다. 이와 같이 얘기가 결정되고 보면, 루이스가 그의 가족과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가족들의 반응도 그녀에게는 불안스러웠다. 이 삼 년 동안 곁에 있어도 항상 마음놓고 가까이 하기 어려웠던 루이스 알드레트가 이 몇 분 동안에 아주 딴 면을 보인 것이다.
 루이스는 리가 말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바쁘게 지내는 사람임을 깨닫고 가속들의 인물평에서 부분적인 것은 빼고 간추려 얘기했다.
 "그럼 스텔라란 누이동생이 약혼 파기의 원인이었단 말인가요?"
 리가 말을 마쳤을 때 루이스는 말했다. 그는 저 유명한 여배우인 스텔라 노데트가 그녀의 누이동생이란 말을 들어도 놀라는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리는 똑똑히 수긍해 보였다. 그때의 괴롭던 회상이 떠올라서 이젠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서 일단 기묘한 회견은 막을 내렸다.
 사무실 안은 처음으로 친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가장 골치아픈 문제가 남아 있었다. 브루스에게 어떤 방법으로 이 사실을 믿어 줄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리에게는 이것이 가장 괴로운 역할이었다.
 리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화 구경에 데리고 가려고 브루스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에 나타난 브루스는 피곤한 듯한 안색이었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기 전에 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차를 세워 주실래요? 할 얘기가 있어요."
 브루스는 흘끗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고 차를 옆으로 붙여 엔진을 끄고 리의 얘기를 기다렸다.
 "우리의 약혼, 해소하고 싶어요."
 리는 있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대소한다구?"
 "네."
 그녀는 어두컴컴해진 속에서 빨리 해결지어 버리려는 듯이 급하게 말했다.
 "결국 우리의 결혼이 순조롭게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깨달았어요."
 브루스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더니 똑바로 리 앞에 마주보게 앉았다.
 "대체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야?"
 리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용서받는 것부터 부끄럽지만, 약혼할 때부터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어요. 저한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나 저완 연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더랬어요. 그렇지만, 이제와서는…"
 그녀는 자기의 미지근한 발표를 깡그리 끊는 듯한 행위를 보이더니 결단적으로 말했다.
 "하여간에 이젠 이대로 견딜 수 없어요."
 "그건 누구지?"
 브루스는 목메어 물었다.
 "루이스 알드레트."
 "루이스 알드레트?"
 그는 너무 놀라 루이스를 모욕하는 어조로 말했다.
 "넌 미쳤잖아?"
 "조금도 안 미쳤어요."
 대답하면서 리는 눈물이 복받치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이처럼 당신을 아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전 삼 년 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정말로 남몰래, 루이스도 저도요."
 그렇게 말하고, 리는 항상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빼서 브루스에 게 건네주었다.
 브루스는 그것을 무의식중에 받아 쥐었다. 
 "무슨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예컨대… 스텔라와?"
 "스텔라와?"
 되풀이했던 리의 음성은 당황했다.
 "스텔라가 내게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그… 스텔라와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잖을까 해서."
 "스텔라와 당신의 힘으로?"
 리는 브루스가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브루스는 머뭇거리면서 안정되지 못한 태도였으나, 갑자기 말했다.
 "스텔라하구 나는…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러나 스텔라는 너에겐 말하지 말라고 했어."
 "스텔라와 당신이?"
 리는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이 꾸며대면서. 그리고는 명랑한 어조로,
 "그건 멋있는데요! 그럼 나도, 그러나 부끄러움을 참아야 한다는 까닭은 아니니깐."
 그리고 나서는 그녀의 어조는 진지해졌다.
 "무슨 뜻이지요… 스텔라가 나한테 말해선 안 된다는 건?"
 "네가 약혼을 해소당하고 받을 충격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거지, 떠나기 전에는."
 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혀 몰랐던 게 부끄러워요… 게다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려서… 모두 저 때문이에요."
 "다 끝난 얘기야, 이젠."
 브루스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리에게 키스를 했다. 그 키스는 그녀가 필사적으로 쌓아올렸던 거짓말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여태까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지?"
 브루스는 조용히 말했다.
 "스텔라와의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지… 그건 그렇구, 그런데 루이스 알드레트가 어떻게 우리들 사이로?"
 리는 입술을 캐물었다.
 "당신과 스텔라에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내가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넌 실제로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잖아?"
 "네, 그건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구? 그러면서 그와 결혼하다니? 스텔라는 틀림없이…"
 "스텔라는 아무것도 몰라요."
 리는 딱 잡아떼며 가로막았다. 지금에 와서 단 한 가지의 길은 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루이스하고는 그저 계약결혼이에요. 그래서 일시적인 것뿐이에요."
 그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싶은 듯했지만, 리는 생각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하더라도 그것은 부자연스럽지는 않다고 스텔라에게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브루스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런 행동하는 꼴은 볼 수 없어…"
 "더 좋은 방법은 없어요."
 리는 확실히 말했다.
 "다만, 이것만은 약속해요. 스텔라에게는 정략적인 결혼이란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겠다고."
 "알았어."
 브루스는 잠깐 있다가 겨우 수긍했다. 그리고 나서 둘은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보러 갈 예정이었던 슬픈 영화 따위는 이제는 볼 생각이 없었다.
 "나도 함께 가서 대신 말해 줄까?"
 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 혼자 가는 게 좋을 성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브루스에게 반박의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얼른 안녕히, 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영화관에 간 게 아니야?"
 어머니 마거릿이 반색하며 물었다.
 "네."
 리는 말할 뿐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얘기는 해야 할 것이었다.
 "저, 이젠 브루스와의 약혼을 그만두었어요."
 조용히 침착한 어투로 말하고 나서, 약혼반지가 없어진 왼손을 보여드렸다.
 어머니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브루스와의 약혼을 이제 그만뒀다구?"
 리는 그렇다고 하며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마세요. 둘이서 결정했으니까요."
 "그러나, 너는…"
 "전 브루스를 사랑하고 있지 않고, 지금까지도 사랑하지 않았었는걸요."
 잠깐 침묵이 계속된 후에 마거릿이 온화하게 말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이냐, 자세히 얘길 해봐라."
 "얘기할 것도 정말 없어요. 오늘 제가 용기를 내서 브루스에게 결혼 안한다.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말해 버렸어요."
 여기까지 단숨에 말해 버리고, 리는 한번 숨을 돌렸다. 뒤가 막혔다가 곧 내뱉았다.
 "루이스 알드레트하고."
 "루이스 알드레트?"
 줄리의 음성은 비명에 가까왔다.
 어머니는 더욱 조용히 반복했지만 눈에는 충격이 똑똑히 엿보였다. 적어도 리가 언제나 그려 보이던 냉정한 직장의 상사와 결혼하는 딸의 처지를 염려한 것이리라.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너무도 뜻밖이어서."
 "미안해요. 사전에 무슨 말씀을 드렸어야 했던 건데, 그걸 못했어요."
 "정말로 언니, 그이와 결혼할 작정이야?"
 줄리가 숨막히듯 물었다.
 "곧 약혼을 발표하고서 이 달 말엔 결혼할 작정이야."
 그 다음엔 당연히 준비해 두었던 만들어 낸 말을 두 사람에게 해야 했다. 근무를 시작했을 때부터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루어질 희망이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노라고 리는 얘기했다.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연극을 해내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쉬운 것은 무슨 까닭인지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런 식이라면 브루스와 합동전선을 펴서 모든 사람을 잘 속여나갈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스텔라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속이는 자신에 대해 혐오증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니는 지금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었잖아."
 줄리가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리키의 가게에서도 루이스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있었잖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회사에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가는 잘 알잖아."
 "그건 그래요."
 줄리가 동의했다.
 마거릿은 장녀에게 반색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놀라는 느낌에 묻혀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처럼 놀라본 적은 없어."
 마거릿이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너의 본심이라면 할수없지. 그런데 그 루이스 알드레트 씨와는 언제 만날 수 있지?"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어머! 큰일인데!"
 줄리가 얼빠진 소리를 했다.
 "어쩌면 직장 우두머리가 언니의 남편이 되는 게 아닌가요?"
 남은 문제는 아버지인 존 다모트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리에게는 염려되었다. 어머니한테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얘가 뭘 하려 한다구?"
 그는 물었다.
 리는 한순간 놀라서 입술을 깨물었으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리도 닮은 아버지의 어두운 푸른 색 눈이 잠시 동안 날카롭게 샅샅이 훑어내리듯이 딸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놀랄 만한 일은 그가 전적으로 동의를 나타냈다는 사실이었다.
 "훌륭한 남성이다, 루이스는."
 "어머나! 무슨 말씀을!"
 어머니는 말했다.
 "당신도 약간 놀랐겠지요?"
 "놀라긴?"
 존이 말했다.
 "그 사람이 얘와 결혼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상대자야. 브루스는 팔방미인이지만서두."
 아버지는 브루스와 스텔라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리는 새삼스럽게 브루스와 스텔라에 대해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리는 잠시 후에 자기 방으로 올라가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남몰래 울었다. 아침까지는 눈물이 말라 버리도록 해서 얼굴에는 어제 했던 일이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할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리는 울고만 있었다.
 이윽고 리는 반듯이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일은 끝났다. 이제 와서는 그녀는 브루스가 아니고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회사로 나가면서 리는 억지로라도 루이스를 사랑하는 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그다지 못마땅하게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루이스의 방에서 울려올 부저 소리가 날 때까지는 역시 약간은 부끄러워지는 어색한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걱정은 전혀 없어졌다. 루이스는 평소처럼 마치 약혼 같은 것은 하지 않은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케리 편은 전혀 달랐다. 하루의 업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리의 사무실로 무턱대고 들어와서는 평소와 같은 직선적인 어조로 물었다.
 "네가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한다는 소문으로 회사 안이 한창 들끓고 있는데, 너도 알고 있니? 나는 지금 방금 들었지만,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는 빨리 손을 쓰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해서 찾아왔어. 이런 소문을 퍼뜨런 얼뜨기를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구나!"
 리는 그녀를 쳐다보면서 입술에 여유있는 웃음을 띠었다.
 "헛소문은 아니야. 루이스와 결혼할 거야."
 "너 머리가 돈 거 아니냐?"
 "아냐,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거든."
 "설마…"
 케리는 기를 쓰며 말했다.
 "너는 말하자면 오히려 나보다도 그를 좋아하고 있지 않아."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면서 사실을 고백해 주기를 리에게 부탁했다.
 "이런 바보 같은,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말은 난생 처음이야. 어서 실토를 해줘."
 "어머나, 우리는 어제 오늘 사귄 사이가 아니야. 너의 식구들보다도 내게 대해선 더 잘 알면서."
 리는 어깨를 흔들었다.
 "알았어, 너한텐 손들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야. 시종여일하게 상거래일 뿐이야. 루이스는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멕시코로 가서 결혼해야 한대."
 케리는 청천벽력인 듯이 머리를 옆으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럼, 브루스에 대해선 어떡할래?"
 그렇게 질문은 해보았지만,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어 버렸는지 케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브루스는 스텔라하고 결혼하고 싶어진 거야."
 리는 조용하게 얘기했다. 그녀는 브루스와 스텔라에 대한 관계를 알게 된 과정과 그 때문에 얼마나 상처가 컸었던가를 요령있게 이야기를 했고, 케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케리는 스텔라가 브루스를 사랑한다고는 믿고 있지 않았다. 심심풀이로 언니의 약혼자를 빼앗았을 뿐이었다.
 스텔라의 본심은 브루스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고 하는 서글픈 한 토막 장난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텔라에게는 그것은 한 가지 놀음에 불과했다. 리와의 약혼을 해소한 브루스가 뒤를 쫓아온다손쳐도 그런 것이란 스텔라에게는 조금도 흥겨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를 남겨 놓은 채로 스텔라는 런던으로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5

 
 콜웨스턴 거리는 급속하게 발전한 거리였다.
 거리의 한가운데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고 한쪽은 새롭게 발전한 구역이며 건너쪽은 옛날부터 내려오던 조용한 옛 시가지라는, 이 두 거리로 나뉘어졌다.
 그 강에 놓여진 목조 다리와 철교가 콜웨스턴의 새 거리와 옛 거리와의 대조를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신시가의 중심은 강을 향해 있어서 사무실들이 들어 있는 건물과 유명한 상점이나 커다란 백화점이 그 의젓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거리를 둘러싸듯이 옛날부터의 시의 주택지가 펼쳐져 있어서 조용하고도 한가로운 분위기를 가득 풍겨 주고 있었다.
 기슭에서부터 다모트 가에 이르기까지의 기울어진 땅 위에는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그 꼭대기에는 풍화작용으로 잿빛으로 퇴색된 석조 건물이 고색창연한 느낌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 다모트 가의 부엌에서는 마거릿이 두 딸들과 함께 아침식사의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회사는 휴일이었다. 쌍동이 아이들도 돕고 있었지만 떠들기만 하고 도리어 방해가 되었을 뿐이어서 나중에는 뜰로 쫓아내어 세 사람은 간신히 정숙한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스텔라와 브루스의 관계를 다모트 집안 사람들이 알고 나서 아흐레가 지나갔다. 그러나 아직은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런던으로 스텔라를 만나러 갔으나 자택이나 영화회사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유명한 여배우가 무명의 남성을 만날 턱이 없으며 있는 곳도 알려 주지 않았다. 브루스는 여배우에게 매달리는 팬의 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허탕치고 런던에서 돌아온 브루스는 할수없이 편지로써 연락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스텔라 언니하고 브루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묘한 생각이 들어요."
 줄리가 말했다.
 "브루스 같은 사람을 고르다니, 꿈에도 생각 못했어."
 그리고는 확실히 기분 나쁜 기색을 시선에 나타내면서 리를 보았다.
 "루이스란 사람은 연애하는 방법조차 모르는군요… 언젠가 리키의 상점 안에서 리 언니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잖어?"
 "줄리야!"
 리는 당황해서 항의했다.
 그러나 거기에 또 뛰어들어온 쌍동이 오누이들 때문에 그 이상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다.
 뒷마무리를 마치자 줄리는 책을 들고 뜰로 나갔고, 리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잡초를 뽑으러 나갔다. 어머니인 마거릿은 물건을 사려고 콜웨스턴 중심가로 자동차를 운전하여 나갔다.
 마거릿이 용무를 마치고 차에 돌아와 보니, 웬일인지 그 고물 자동차는 움직이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어이없어하며 차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에 낯익은 주차장의 관리인이 가까이 왔다.
 "고장입니까, 다모트 부인?"
 그 이름을 듣고, 부근에 있던 한 남자가 돌아다보았다.
 관리인은 차의 보닛을 들더니 머리를 박고, 잠깐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머리를 들고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모르겠으니 전문가에게 보입시다."
 "그래요. 그럼 저는 버스를 타고 갈 테니까, 잘 부탁합니다."
 그때에 마거릿의 옆쪽에서 깊이 있는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마거릿은 뒤돌아다보았다. 키가 크고 거무스름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남자에게서는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보는 관점으로써는 남자가 입고 있는 의복에 집중되었고, 그것이 고급품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고장으로 생각합니다만…"
 말한 관리인의 태도는 존경하는 마음이 표시되어 있어 마거릿은 자기의 눈이 정확했음을 만족히 생각했다.
 "그러면 다모트 부인, 괜찮으시다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가느다란 미소가 남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저는 루이스 알드레트입니다."
 마거릿은 한순간 충격을 받았으나, 그후에는 대단한 흥미를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맏사윗감과의 첫대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사를 했다. 루이스는 명령하는 데 익숙해진 태도로 그녀의 차를 수리공장으로 가져가도록 처리했다. 마거릿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자기의 딸이 고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반은 걱정으로, 반은 여성 특유의 호기심을 품은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여자로서의 마거릿의 육감은 그의 매력을 곧 통찰하였다. 솔개 같은 날카로운 용모, 검은 눈,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짙은 검푸른 색의 머리털, 하얗고 건강한 치아, 그리고 힘있게 다문 입가. 그녀의 눈은 딸보다도 날카로운데다 인생 경험도 풍부하였기에 리가 미처 못 본 여러 가지 점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굳게 다문 입가는 오랫동안 의지의 힘으로 극기심을 배양해 온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걸 마거릿은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남자는 과거에 호되게 상처받았던 일이 있는 인간의 자랑과 고독을 그녀에게 느끼게 했다. 그러므로 그는 두번 다시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결심하여 빈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있으리라.
 루이스의 표정을 덮어 주고 있는 냉엄한 극기심과 그 음성은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했지만, 마거릿은 그래도 이제는 벌써 딸의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갑작스런 약혼에 대해서 지나친 충격을 받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루이스는 말했다.
 검고 화사한 대형차는 미끄러지듯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충격이라고요?"
 마거릿은 웃으면서 그의 뒷머리를 보고 있었다.
 "놀랐다면, 그건 딸애가 약혼을 그럴듯하게 감추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의 얼굴에 따사로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그녀는 그 옆얼굴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 놀라셨던 원망을 저한테 품어 주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용서해 드리지요."
 그녀는 관대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딸이 어째서 그가 지독한 남자라는 인상을 갖도록 자기들에게 강요했을까, 그 이유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니 얼마나 매력적인 남성인가.
 지금 마거릿은 마음속으로 리가 반려자로서 왜 그런 상대를 선택했을까, 하고 염려했었던 최후의 의문도 풀렸다. 이 사람을 안 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루이스 알드레트는 딸의 일생을 맡길 만한 상대자로서 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느낀 것이다.
 
 징글텁에서는 리의 잡초 뽑는 일도, 줄리의 독서도, 쌍동이의 침입으로 모두 방해되었던 때였다.
 "또 아파치의 습격이다!"
 줄리가 외쳤다.
 테스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너는 나의 포로."
 "나도 잡힌 거야?"
 리가 물었다.
 "아냐, 너는 나무로 올라가라. 아파치의 신부다."
 톰이 말했다. 
 "어머! 싫어, 아파치의 신부라니."
 톰은 잠깐 생각하다가 두 사람의 역할을 약간 바꾸었다.
 "그럼, 줄리 누나는 다른 종족에게 붙잡힌 인디언의 딸이고, 리 누나는 그 딸을 건져내려고 하는 추장의 부인으로 만들자."
 리는 연기를 위로 올려준 톰에게 경의를 표했다. 톰과 테스는 번쩍거리는 녹색의 천을 어디서 찾아냈는지 닭털깃을 혁대처럼 만들어서 리의 머리에 매어 붙였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줄리는 재미있어서 언니가 못하게 하기 전에 올렸던 머리를 풀더니 길게 땋아서 어깨 위로 드리워 버렸다.
 "저것 봐라!"
 테스가 기쁘게 외쳤다.
 "정말 인디언 같구나."
 테스는 닭의 털을 줄리의 머리에도 꽂고 나서는 뒤로 돌아서 만족스럽게 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때 테스가 호주머니에서 오랫동안 쓰고 있던 립스틱을 끄집어 내었다.
 "어머! 안 돼, 안 된다니깐!"
 리가 당황해서 말했다.
 "괜찮아요, 리 언니!"
 그러는 동안에 톰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줄리는 해묵은 마른 능금나무에 기대어 킥킥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리는 리대로 테스에게 립스틱으로 어떻게 되어지는지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
 리가 이젠 그만두라고 말릴 때, 톰이 케리를 앞세우고 커다란 포장용 마분지 상자를 안고 돌아왔다.
 케리는 순간 몹시 놀라는 듯하다가 금방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심하니?"
 리가 애처롭게 소리질렀다.
 케리는 킥킥거리면서 말했다.
 "스스로 확인해 보려무나!"
 "그렇게 못하는 게 오히려 다행일 것 같다."
 리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곁에 있는 톰과 테스를 보았다.
 톰과 테스는 마분지 상자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끄집어 내어 뭔지 모르게 속삭이고 있었다. 줄리와 케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무엇이 나타나는지 자세히 보여 대단히 기뻐했다.
 리의 코에 파란 색깔의 줄 무늬가 그려지고, 이마에는 다른 줄이 그어지면서도 온순하게 가만히 있었다. 톰은 리가 입고 있는 카키색 샤쓰 위로 허리 둘레에 가죽 끈을 매어 달았다.
 "이게 어때?"
 테스가 물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눈을 반짝거리면서 케리가 말했다.
 "후세에 남을 걸작이다. 사진을 찍을까?"
 케리는 얼른 카메라를 가지러 가버렸다.
 "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고 있어."
 테스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언니는 저쪽에."
 그녀는 줄리에게 능금나무 쪽을 가리켰다. 줄리는 능금나무에 묶이면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테스가 묶여 있는 언니들을 그럴싸하게 보며 돌아다녔다.
 "잘 됐구나. 그렇지만 리 언니가 능금나무에 올라간다면 더 재미날걸."
 줄리가 리를 놀려대었다.
 "언니의 그 꼴을 약혼자가 본다면 뭐라 할까!"
 리는 아파치의 지시에 따라서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마침 줄리의 바로 위에 뻗은 가지까지 오자, 거기서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렇지, 참 좋구나!"
 테스는 어린애답게 정신없이 떠들며 좋아했다.
 케리는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집 밖에 자동차가 멈춰 서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카메라를 갖고 나오려 하자, 마거릿과 함께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잘 있었어, 케리?"
 마거릿이 반색하며 말했다.
 "너는 물론 알드레트 씨를 잘 알고 있겠지?"
 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다는 정도가 아니다. 리키의 상점에서 있었던 모종의 사건도 있었으니까. 그 사람 자신도 리키 상점의 작은 곁방에서 엿들은 적이 있어, 케리의 음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딸애들은 어디 있지?"
 마거릿이 물었다. 케리는 모두가 과수원으로 가서 테스와 톰이 아파치 장난을 하는 것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가지러 왔다는 사실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인디언을 찍는 거라고?"
 마거릿은 웃으면서 케리가 갖고 있는 카메라를 보았다.
 "네 그래요."
 하며 케리는 급히 덤비었다.
 "엄마가 돌아왔다고 리에게 알리는게 좋겠는데, 결국 그애는…"
 그렇게 말하면서 케리는 리의 약혼자 쪽을 슬쩍 보았다.
 마거릿은 머리를 흔들고 웃으면서,
 "알드레트 씨는 그런 걸 관심에 두지 않을 줄로 아는데요."
 하고는 수수께끼를 품은 듯한 눈매로 미소를 띠며 루이스를 보았다.
 "그게 약간…"
 케리는 리의 얼굴에 칠한 립스틱 줄 무늬며, 닭털 같은 것을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괜찮을 거예요."
 마거릿은 들뜬 소리로 말하며 케리의 손에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내가 찍어 주지."
 이때는 벌써 케리가 자리를 뜬 몇 분 동안에 테스와 톰은 리를 완전히 나무에 매어 놓었다.
 리는 나무 위에 있었다. 루이스까지 세 사람이 왔을 때는 바로 그러한 때였다.
 리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를 듣고 놀라서 주위를 돌아보다가 또다시 너무 놀라서 숨이 막힐 듯했다. 정말이지 나무 속에 구멍이라도 있다면 숨어 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리의 기분으로서는 설마 이런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무에서 내려오기도 무서웠고, 루이스의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듯한 검은 눈을 보게 되자, 더욱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가 한 발짝씩 나무에 가까이 올수록 리는 슬금슬금 움직이며 어딘가 숨어 버릴 데는 없나 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위로 올라간다면, 이파리가 무성한 속에 숨을 수도 있음직해서 올라가기 시작했으나 곧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깜짝할 새도 아니었다. 인디언의 분장 그대로 리는 루이스의 팔 안에 굴러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잠깐 그녀는 루이스의 팔 안에서 몸이 굳어 버린 채로 있다가 갑자기 몸을 흔들어 빠져나오더니 앞만 보며 단숨에 깨끗한 세계인 자기의 방으로 달려들어가, 거기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케리가 방안에 들어와 보니까, 리는 립스틱을 지우고 침대에 앉아서 울고 웃으며 하고 있었다. 케리는 아래층의 루이스에게는 '화장 지우기'를 도와 주고 오겠다고 말하고 올라왔으나, 마음속으로는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의 얼굴을 보고 곧 안심하였다.
 "멋있는 구경거리예요, 제로니모 부인."
 "케리야, 난 어쩜 좋아?"
 리는 울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아까는 미리 알려 주질 못해서 미안해. 그런데 말이지, 엄마가 태연하셨기 때문이야."
 "루이스는 틀림없이 아파치하구 결혼하는 게 아닐까 해서 조마조마 하고 있지 않을까."
 리는 웃었다.
 "나도 그렇게 놀란 적은 없었어… 자, 얼굴을 더 말끔히 씻어야지,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나온 리는 아주 깨끗해져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긴 머리채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입었던 가운을 벗으니 꾸미지 않은 하얀 슬립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는 평상시의 검은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를 입는 것을 케리는 히쭉히쭉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더 여자다운 건 없니?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리는 약간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생각난 듯이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어던지더니, 머리 모양과 어울리는 더 여자다운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엷은 플란넬 천의 소매 없는 짧은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는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케리는 그녀의 빗을 들고,
 "자, 내가 풀어 줄게. 그게 빠르겠어."
 했다.
 준비는 완전히 끝났지만 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가 두려워졌다.
 "잘 되게 해봐."
 방안을 함께 나오면서 케리가 속삭였다.
 "테스가 없는 것만도 다행이야."
 톰과 테스의 음성이 멀리에서 열린 창으로 들어왔다. 둘은 다시 과수원으로 쫓겨간 것이었다. 
 보드라운 옷자락 소리를 내며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루이스한테로 향해 가면서, 리는 이 옷이 브루스를 위해서 만든 것임을 회상했다.
 스텔라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그날부터 그녀는 브루스를 만나지 않았다.
 그 회상이 날카롭고 무서운 칼끝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이대로 가면, 그 자니스 마틴 같은 입장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이젠 다시 만날 수 없는 남자를 그리워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자니스가 말하던 것처럼, 시간이 아픔을 달래 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괴로움의 아픔은 평생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회상 같은 것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잊어야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보다 더한 의지의 힘으로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리는 케리와 나란히 복도를 지나서 언제나 기분이 좋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케리가 작은 소리로 '힘을 내' 하고 귓가에서 격려했다.
 안방에서는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여러 사람과 함께 계셨다.
 루이스는 편안하게 아버지와 잡담하고 있다가, 두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 빠르게 보고는 일어섰다.
 그의 새까만 눈은 두 여성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리로 말하면 그의 쪽을 쉽게 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안방으로 들어갈 때부터 그가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것이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 방법임을 재빨리 느끼고 있었다.
 리는 아무리 애써도 웃는 얼굴은 어딘지 끌려가는 듯했다. 그와 비교하면 루이스가 맞서 웃는 얼굴은 리가 사무실에서는 볼 수 없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안녕하시오, 리 양."
 그의 인사는 예의바른 태도였으나, 몇 년 동안이나 그녀에 대해서 익숙해진 말투같이 느껴졌다. 그러한 루이스의 태도가 리의 기분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주었다.
 그는 리의 크리스찬 이름을 모르니까,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이 리라.
 그는 역시 그녀를 미스 다모트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리 쪽으로 손을 내밀면서 가까이 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약간 끌어당기는 듯하면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는 것이다.
 "아까 과수원에서 뵈온 부인에게 소개를 받으시렵니까?"
 그렇게 루이스가 말하자 일동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그녀의 일은 잊어버리세요."
 리는 대답하면서 어깨에 놓인 루이스의 손이 따뜻함을 처음 느꼈다.
 마거릿이 웃으면서,
 "그렇게는 안 돼요. 멋있는 사진을 찍었으니 약혼자에게는 추가로 만들어서 드리겠어요."
 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사람이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로 나오는 경우가 있으면 그것을 보여 주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다시 그녀게게 거북하지 않은 다정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하면서 미소를 띠고 앉았다.
 "우리는 루이스 씨에게 아파치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주시도록 여러 가지로 말씀드렸어."
 어머니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루이스는 리의 곁에 앉더니 다시 그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황은 그의 날씬한 손이 허리로 돌아왔음을 느꼈을 때에는 일종의 통증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자극시켰다.
 어머니는 그러한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딸의 태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리는 천성이 사람들 앞에서 애정을 나타내 보이는 성질은 아니라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다.
 잠깐 웃음섞인 이야기가 계속되어진 후에 화제는 루이스의 가계로 옮겨졌다.
 "멕시코의 가정 얘기를 해주시겠어요?"
 마거릿이 그를 향해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
 "뭐라 했던가요… 카라스트라노, 확실히 리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는데요?"
 루이스는 응대하였다.
 "그렇습니다. 이번이 십 년 만입니다."
 루이스의 검은 눈이 갑자기 먼곳을 보는 듯한 시선이 되어지고, 서글프다고 할 수 있는 웃음이 입가에 떠올랐다. 그 모습은 이 방에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파묻혀 버려진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줄곧 기억하고 계시죠?"
 리는 충격적으로 말했다.
 그 음성에 루이스는 놀라며 돌아다보았다. 눈이 말할 수 없이 상냥스러웠다.
 그녀는 불현듯 그것은 가식을 버린 그의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대한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요. 나에게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음성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새까만 눈 속에는 지극히 짧은 순잔 한스럽게도 지나간 날의 상처의 덩어리가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뜻밖에도 리로 하여금 그의 쪽으로 손을 뻗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절대로 잊어버린 적이 없었지요…"
 루이스는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잊어버릴 염려는 없다. 카라스트라노는 그의 것이 되어지니까. 그래서 루이스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는데, 이번은 연기라고 리는 생각했다. 그 까닭은 그가 리를 향하여 웃어 보였기 때문이다.
 "함께 카라스트라노로 갑시다… 혼자 가기보다는 훨씬 좋으니까요."
 "언제 연애생활이 끝나는 거죠?"
 갑자기 애띤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멕시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테스야."
 마거릿이 돌아보지도 않고 막내딸이라고 짐작만하고 책망했다.
 "그래 무엇을 알고 싶지?"
 테스는 천진난만한 눈매로 루이스 쪽을 보고 있었다. 이 동생이 다음에 어떤 질문을 루이스에게 퍼부으려고 하는지 리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쳤다.
 "선생님의 조상님들께서는 그 스페인의 정복자들과 합세를 해서 멕시코로 쳐들어 왔었던가요?"
 테스는 물었다. 
 루이스는 응대를 했다.
 "그렇게 했었지, 돈 하비에라는 사람이 우리 집안의 선조였지요. 나는 그 조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요?"
 테스는 말하고 호기심에 가득찬 눈매가 되었다.
 "거기는 어떠한 곳인데요?"
 "카라스트라노 말인가?"
 다시 그의 눈은 상냥해졌다.
 "널찍하면서… 아주 옛날 모양이고, 그 둘레에는 꽃이 가득했고, 가운데 뜰에는 분수가 있어서 언제나 노래를 부르는 듯이 물이 솟아올랐어… 우리 어머니는 영국 사람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후 몇 년 후에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지."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리는 그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불안해졌다. 테스는 틀림없이 어째서 그가 고향을 버리고 영국으로 왔는지를 물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스는 전혀 딴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의 생일 파티에 와 주시겠어요?"
 테스는 물었다.
 "고마와요, 아가씨. 대환영으로 초대를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차도 다 마시고 테이블 위가 정리된 다음 리는 루이스와 함께 복도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만의 작별인사를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잠시 동안은 두 사람뿐이었다.
 "저는 생일 파티 초대를 사양할 걸 그랬지요?"
 그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니… 아니, 물론 그런 게 아니예요. 당신에게 무리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당신은 내가 어떤 것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군."
 루이스는 역습을 했다.
 리는 그때에 비로소 그가 진심으로 테스의 생일 기념 잔치에 오고 싶어하는 것을 깨달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겠지요."
 그는 말하고 리를 기묘한 눈으로 보았다.
 "그 파티에는 당신의 그전 약혼자도 초대할 예정입니까?"
 리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그는, 이것으로 결정되었다는 듯이,
 "그럼 내가 동생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가 없어지겠군요."
 했다.
 리는 루이스에게 테스의 장난에 대해서 경고할 것을 단념했다. 다만 테스가 만족으로 생각하는 '벌금놀이'에 대하여만 충고하고 그쳤다. 루이스가 무어라고 말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았습니다."
 루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럼 될수록 동생의 수법에 걸리지 않도록 해요."
 "나도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요, 당신이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연극을 한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맙니다."
 리는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지며,
 "그것은… 그러나 너무나 걱정이 되기 때문에…"
 하고는 말이 막혀 버렸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흥미있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지만 당신은 아마 이런 연극의 역할을 그만두어 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은 없어요, 알드레트 씨."
 "그렇게 믿고 있겠습니다."
 루이스는 상냥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더니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고 검은 통을 끄집어 내었다.
 리는 얼른 그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는 아이들같이 손을 뒤로 했다. 그는 그녀의 왼손 손목을 거세게 잡았다.
 "당신이 후회하는 줄은 알지만 이건 불가피한 나쁜 관습이니까."
 리는 거만스럽게 낯을 들었다. 이러한 광경을 가족에게 보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
 루이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꼭 잡은 채로 또 한쪽 손으로는 통의 뚜껑을 열고 짙은 색깔의 사파이아 반지를 보였다.
 "이런 것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통례이고, 댁의 가족되시는 분들에게도 당신이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이 안심될 겁니다." 
 "네, 그건 그렇겠지만요."
 어색하게 동의한 리의 손가락에 루이스는 반지를 끼어 주고 말았다. 그 반지는 그녀에게 꼭 맞아서 마치 주문하여 만들게 한 것 같았다.
 "아주 멋지군요."
 간신히 그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의 눈빛에 맞추어서 샀다고 해도 좋겠지요?"
 명백히 조롱하듯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저의 눈빛을 기억하고 계시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어요."
 리는 대답하였다.
 "생각 못했었다구?"
 그렇게 말하고 갑자기 루이스는 손으로 리의 턱을 잡아 치켜올렸다. 리는 그가 키스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루이스는 그대로 스스로 조소하는 듯이 웃었을 뿐이다― 그는 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예상하였던 것일까?― 그리고 리를 놓아 주었다.
 "적어도 나는 당신이 다이아몬드를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소."
 "저는… 반지는 사파이아가 좋아요."
 리는 약간 모순된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루이스는 안방의 문 쪽을 가리키고,
 "우리가 헤어질 인사를 위해선 너무 시간을 많이 소비했지요?"
 했다.
 리는 다시 얼굴에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애매하게 말했는데, 그때 루이스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대었기에 리의 몸이 긴장했다. 
 "이것은 연기에 필요한 덤입니다."
 그는 설명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여성이 상대자와 작별을 아쉬워하는 인사로써는 너무나 수줍은 태도 같습니다."
 리는 아주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자기의 손바닥에 상대의 뜨거운 입김을 느꼈다.
 긴장하여 얼굴을 쳐든 리의 눈에 조롱하는 듯한 빛이 사라진 진지한 루이스의 얼굴이 있었다.
 "그럼 이제 작별할 때가 온 것 같군."
 "안녕."
 그녀도 말했다. 그리고 근 삼 년 동안 그와 일을 함께 하면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스페인 말을 왜 하는지 그 참뜻을 리는 추측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나간 후에 리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서 있었다. 그리고는 섭섭한 듯한 얼굴로 안방으로 돌아온 그녀를 부모는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그 사람 맘에 들었어, 대단히."
 어머니는 말했다.
 "그럼 아버지께선?"
 다모트 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훌륭한 남자다."
 하고 나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스텔라와 브루스의 일인데."
 "왜 그것이 저와?"
 리는 뜻밖에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건 말이지, 여태껏 아무 말도 안해 봤지만."
 마거릿이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사실은 말이다, 네가 브루스하고 약혼했을 적에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어떤 점인데요?"
 "네가 그와의 약혼을 파혼했을 때, 그게 분명해졌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말씀하셨다.
 "그 남자는 약하다… 남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 데가 있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요."
 리는 말했다.
 "약한 점은 숨기고 보여 주지 않았던 거야."
 마거릿은 동정하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스텔라가 그 남자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염려했었지."
 "틀림없이 용케 꾸며 보였던 거야."
 줄리가 맛장구를 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
 리는 안방 문 옆에서 스텔라와 브루스의 얘기를 듣던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반대 의사를 끼워 넣었다.
 "틀림없어요. 제가 스텔라와 그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스텔라 언니가 브루스 같은 남자하고 결혼한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어. 그러나 그것은 싹싹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대표자들과 공연해 왔던 데 대한 발동일는지도 모르죠."
 줄리가 분석해 보였다.
 "브루스는 평범한 타입의 남성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게다가 그 말대로 일종의 반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모두가 잘 돼 나갈 것 같애요."
 리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러면 이제 잘 돼 가리라고 모두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케리는 언짢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하여튼 스텔라에 관해서는 모든 사정이 잘 되어졌으니까 어쨌든, 하고 케리는 생각했다.
 친한 벗인 리에 대해 생각하면, 그녀가 루이스 알드레트와 결혼하는 편이 브루스와 같이 사는 것보다야 훨씬 행복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케리는 그날 오후 루이스를 관찰하고 있을 때,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너의 루이스는 진짜 신사지?"
 마거릿이 결론적으로 말했다.
 리는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이윽고 천천히 응대했다.
 "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항상 냉담하고 침착하기 때문에 그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거예요."
 "리 언니는 루이스 씨가 절반은 스페인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거죠. 저는 내기를 해도 자신있어요."
 줄리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리는 아까의 루이스의 행동을 회상하고 갑자기 얼굴을 뜨겁게 붉혔다.
 "그래, 어찌 됐어?"
 케리는 흥미있다는 듯이 대답을 요구했다.
 "그의 행동은 스페인 사람다왔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림을 의식하고 리는 화제를 바꾸려고 반지를 보였다. 그 순간에 줄리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날 밤 리는 침대에 누우면서 오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한가지 한가지 대소를 막론하고 다시 회상해 보았다.
 그 복도에서 헤어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 루이스 알드레트는 사실은 키스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망상이란 말이냐? 혹은 그의 들뜬 기분뿐이었을까?


                   6


 다음 월요일에 루이스와 리는 사장과 비서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있었고, 토요일 오후의 작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
 다만 한번 루이스가 리에게 '댁은 다 평안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서 리는 아주 태연하게 '네에,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루이스는 그 말을 듣더니 마음이 놓인 듯하는 얼굴로 편지의 내용을 불러 주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어서 루이스는 리에게 수요일에 이 주일 정도의 예정으로 카라스트라노로 간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순간 리는 그가 테스의 생일 파티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루이스를 나쁘게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 따위는 익숙해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는 파티에는 참석할 수 있도록 돌아온다고 말하여 리의 의심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파티날이 되어서도 루이스한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사무실로는 편지가 와 있노라고 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다. 편지는 사실 왔었지만, 그것은 사무적인 것뿐이었다.
 루이스가 과연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랐지만, 리는 약혼자를 맞이할 때에 적합하도록 정성껏 몸치장을 했다.
 드레스는 진한 사파이어의 푸른 색으로 골랐다. 그것은 루이스가 준 반지와 거의 같은 색깔로써, 리의 머리 색깔과도 잘 어울렸고 또한 눈동자의 반짝거리는 푸른 빛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로 나오자, 줄리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리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휴!' 휘파람을 불더니,
 "언니를 데리고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멕시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루이스 씨가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야."
 하고 건방지게 말했다.
 파티 준비가 시작되었다.
 요 얼마 동안까지는 브루스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운 약혼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루이스 알드레트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 살뜰한 약혼자라는 말은 사실 기묘한 메아리처럼 리의 마음을 불안하게도 했고 들뜨게도 만들었다.
 테스는 오후중에 아이들만의 파티를 마치고 피로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테레사 다모트 양의 기대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테스는 아침에 일어날 때보다는 씩씩해졌고 장난을 즐기고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재주도 지금 최고의 상태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쌍동이의 짝도 여느 때와는 아직 달랐다. 오늘은 평소의 깨끗지 못한 몸차림새가 아니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모두가 테스의 파티라고 했지만 물론 쌍동이를 위한 파티였다. 다만 톰은 이런 일을 싫어했다.
 리가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둘은 긴의자에 무릎을 굽히고 유리창에 코를 박고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평소대로 둘이 어질러 놓은 것을 깨끗이 치웠다.
 "야아, 대단하군."
 자동차는 무엇보다도 톰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저것 봐라, 우리 집 앞에 와 섰다."
 테스도 외쳤다.
 루이스의 자동차였다. 이전에 루이스가 왔을 때, 쌍둥이들은 과수원에 가 있어서 이 차를 보지 못했었다. 확실히 훌륭한 차였다. 차체도 길고 크롬칠을 한 검은 고급형 차였다. 루이스의 의복과 마찬가지로 수수하긴 했어도 상당히 값비싼 것이었다.
 이런 차의 소유자로서 루이스는 대단한 재산가라고 생각되게 하였다. 루이스와의 결혼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회사의 동료들에게 부러운 표정을 나타내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약에 이 결혼이 거짓이 아니었더라면 리 자신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서 안내를 해드려야지."
 어머니가 말했다. 딸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주위의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모셔드릴 기회를 주려고 마음을 썼던 것이다. 리는 그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때 테스가 갑자기 띠어 보인 흥미있는 듯한 표정을 보자 불안스러워졌다.
 리가 뒤로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가자 테스는 흥미있는 얼굴로 문을 빠져 뜰로 나갔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테스는 또 한번 방으로 되돌아와서 현관으로 통하는 복도로 남몰래 나왔다. 그녀는 어떤 중대한 목적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리는 문을 열고 루이스를 맞아들였다. 톰을 흥분시켰던 그 훌륭한 자동차에서 금방 내린 큰 키에 약간 거무스레한 얼굴인 그를 쳐다보고 리는 가볍게 놀랐다. 루이스는 또 변한 것 같았다.
 카라스트라노에서 지낸 이 주일 동안은 그의 살갗을 더욱 검게 태운 것 같았다.
 다만 그것뿐인데, 리는 갑자기 목구멍이 틀어막히는 듯한 숨찬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잘 돌아와 주셨어요."
 리는 덤비면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바를 말해 버렸다.
 "물론입니다. 내가 말했지요. 때를 맞추어 돌아오리라고."
 마치 자기가 결정한 일은 틀림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루이스는 조롱하는 듯한 이상한 웃음을 띠고 계속했다.
 "당신 오늘 밤은 참으로 미인이군."
 뜨거운 피가 볼에 상기되어짐을 느끼고 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도 보지 않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분 같은 사람이 어째서 이런 말을 할까 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그러나 또 한 사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리에게는 보여지지 않았지만, 루이스의 눈치빠른 시선은 현관에 이어져 있는 복도 구석에 작은 붉은 털 얼굴이 살짝 엿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작은 얼굴은 확실히 기대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안방 쪽으로 데리고 갈 태도를 보였다. 그 찰나에 깜짝 놀란 외침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언니에게 키스해 주지 않으세요? 브루스는 언제나 했는데."
 그 순간, 리는 동생을 단방에 때려 주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이 철없는 어린 것을 유달리 사랑했었기에 더욱 그 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여튼 이런 일로 루이스가 깜짝 놀랄 만한 말을 자기에게 말한 이유는 알게 되었다.
 "테스야, 네가 보는 데서는 할 수 없어."
 "애개개."
 테스는 그건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럼 전 밖으로 나가 드리겠어요."
 테스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리는 되돌아보고 조무래기가 정말로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루이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테스의 말을 그리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 애는 항상 뭔가 엉뚱한 소리를 잘하니까요. 우리들이 약혼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리는 그 다음에 해야 할 말이 막혀 버렸다. 루이스가 그것을 거들어 주었다.
 "저 애는 그 표적이 보고 싶었던 거겠지."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가 마음속으로 뭣을 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복도 구석에서 살짝 엿보다니 그애답지 않았다. 반드시 뭔가 있다는 것을 그 약싹빠른 머릿속에서 틀림없이 생각해 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해보았지만, 리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다.
 테스가 무얼 하든지 오늘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일날이기에 평소보다도 장난도 관대하게 보아 넘겨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니 열 개의 눈과 딱 마주쳤다. 사랑하는 장면을 못 봐서 유감스러웠던 테스도 물론 벌써 돌아와 자리잡고 있었다.
 마거릿은 루이스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참, 참으로 잘 됐어요. 정말 와 주셔서 고마워요. 우리는 흔히 이렇게들 말하고 있답니다. '테스의 생일 파티를 볼 수 있도록 살아 남은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원자폭탄이 터져도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루이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도 대단한 능력을 얻어 가질 수 있겠습니다."
 줄리는 평소보다도 다소 정숙하게 인사를 했는데, 그녀의 말괄량이 기질은 언제까지나 가면을 쓰고 견딜 수는 없었다. 리가 메러디스 회사의 소유자와 약혼하는 정도로써 얌전해지거나 두려워할 줄리는 아니었다.
 잠시 후에 줄리는 언니보다도 몇 배나 두려움없이 툭 털어놓고 행동하게끔 되었다.
 톰은 아직도 창에 코끝을 박은 채로 가만히 밖에 세워 둔 번쩍거리는 대형 자동차에 홀려서 루이스 쪽은 방안에 들어왔을 때에만 슬쩍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중에서도 테스란 아이는 자기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언니와 루이스를 흥미진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꼬마 숙녀의 성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언제보다도 곱게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 슬슬 가면이 벗겨지지나 않을까… 하며 리는 이 여동생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일어선다손 쳐도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았지만, 뭔가 깊이 생각에 묻혀 있는 듯한 얼굴이 되어질 때가 가장 마음이 불안스러웠다.
 톰은 문제 밖이었다. 그는 테스가 관심을 가지는 일 따위는 조금도 흥미를 갖지 않았으며, 지금은 밖에 서 있는 자동차에 홀딱 마음이 끌려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톰을 두려워한다면 톰이 저 차를 태워 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윽고 루이스는 선물 꾸러미를 내놓고, 쌍둥이에게 한 사람씩 나누어 주어서 기쁨이 절정에 오르게 했다. 그것은 진짜 인디언의 사슴가죽 구두로써 루이스가 카라스트라노에 나가 있을 때 주문해 두었던 것이었다.
 리는 놀라는 빛을 띠면서 남몰래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파티에 때맞추어 돌아온 것과 두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슴가죽 구두까지 맞춰 주었다. 어떻게 두 아이의 작은 발에 꼭 들어맞게 치수를 재었을까― 틀림없이 그때 그가 처음 여기로 왔었던 날에 만난 그 아파치의 습격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갑자기 루이스가 돌아다보았다. 리의 시선을 잡은 그의 표정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현관에서 보여 주었던 조롱하는 듯한 웃음과는 아주 판이한 것이었다.
 "제로니모 부인에게 맞추어 지은 것도 갖고 왔어야 할 걸 그랬지요?"
 "아뇨, 그랬다면 그 사람은 부끄러워서 죽어 버렸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리는 그가 어떻게 제로니모를 다 알고 있는지 이상스러웠다. 이것은 케리하고 영화 놀이를 할 때에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틀림없이 어머니나 줄리가 재미있어서 가르쳐 주었으리라.
 "왜 그래요?"
 루이스는 변함없이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야유하는 것도 아닌 다정함을 보인 채 다시 물었다.
 "나는 그 이름을 내 자손을 위해서 영원히 기록에 남겨 놓으려 합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제로니모 부인은 그때에는 틀림없이 나뭇잎 속으로 도망쳐 버리려 했었지요."
 "그렇게 안한 게 다행이었어요."
 루이스의 음성은 대단히 낮고 조용했기 때문에 그 한마디는 리에게만 들렸다. 다른 사람은 모두가 지금 받은 사슴가죽 구두를 신고 방안을 걸어다니는 쌍둥이의 모습에 홀딱 정신이 팔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난 제로니모 부인 쪽이 좋았지요."
 그가 덧붙였다.
 "그 립스틱을 바른 무서운 얼굴이 마음에 드셨나요?"
 리는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럼요, 그 호화찬란한 화장을 한 여자아이에 대해서입니다."
 루이스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날까지 당신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멍청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비서는 너무나 완벽해서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잃고 있지나 않나, 하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엄청나게 유능해서 실수를 저지를 일이란 만에 하나도 없지만, 다만 그것만의 여성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그때, 나는 아주 그와는 다른 여성을 만나게 됐었지요. 그녀는 여동생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약혼을 파기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되더라도 누구에게도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고 있지. 그래서 자기 여동생의 행복이 절대로 망가지지 않도록 결단적인 행동까지 감히 저질러 버렸어― 그런 여성을 나는 만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더욱이 그녀는 어린 동생이나 여동생들과 어린애들 같은 장난까지 함께 어울려 해낼 수 있는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동안 리는 무슨 얘기가 자기에게 속삭여 왔었는지 알지 못하고 루이스의 눈을 쳐다본 채로 황홀감에 젖어 돌부처마냥 서 있기만 했다.
 그때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다.
 구원을 받은 것처럼 그녀는 현관 쪽을 돌아다보았다.
 "틀림없이 케리일 거예요. 제가 마중나갔다가 올게요."
 그렇게 재빨리 말하고는 마거릿이 현관으로 가려는 것을 말렸다.
 현관에는 케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장래의 서방님께서 와 계시는 거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데가 있어."
 케리는 솔직히 말했다.
 "그렇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 요전번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호화로운 짓을 해 보였지만,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게 아니야, 전혀."
 리는 약간 당황스러운 웃음을 띤 얼굴을 흔들었다.
 "사실은 그분은 전보다 아주 더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럼 무슨 일이 있었구나?"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니도 잘 모르겠어. 내가 지나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
 리는 가까운 친구인 케리에게까지 루이스가 점점 매력적인 남성으로 생각되어 간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저 장난꾸러기 어린 테스가 무언가 깜짝 놀랄 말을 했었니?"
 케리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리는 다만 액운을 몰아내는 미신의 손가락을 열십자로 마주 합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케리도 생긋 웃었다.
 "나도 리를 위해서 액운을 쫓아 드리지."
 리가 루이스에게 경고했던 바대로 테스는 밤이 늦어지자 '벌금놀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테스의 마음은 잠시 동안 선물로 받은 사슴가죽 구두 때문에 혼란했었지만,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온 어떤 생각은 반드시 해보고 싶었다. 테스는 모든 사람에게 선언했다.
 "오늘 밤은 나의 생일 파티입니다. 그러니까 벌을 받는 사람은 어떤 벌칙이라도 그것을 실행해 주지 않으면 안 돼요."
 "물론이지."
 마거릿이 분명히 인정하자 이 놀이는 시작되었다.
 아주 만족하다는 표정으로 테스는 안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방석에 기분 좋게 작은 몸을 묻었다. 그 모양은 마치 불꽃 같은 머리의 인형이며, 장난꾸러기 아이의 인형 같기도 했다.
 "그럼 먼저 당신부터 시작합니다."
 테스는 루이스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여태까지의 이런 내기를 해본 적이 없으리라고 생각되니까 먼저 규칙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걸 답변 못하거나 틀린 답변을 하여 제게 발각되었을 때는 당신은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루이스는 응대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웃음을 띠며 말하더니,
 "그 대신 나에게는 쉬운 것을 부탁드립니다."
 하고 덧붙였다.
 "그럼 쉬운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테스는 얌전하게 동의했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서른네 살입니다."
 "어디 출생입니까?"
 "카르스트라노."
 대체로 이런 정도라면, 하고 리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리고 액운을 쫓는 열십자의 주문을 외우려고 합쳤던 손가락을 떼려고 했다. 그 찰나였다.
 "여태까지 약혼을 한 적이 있습니까?"
 모두가 리 쪽은 과거에 한 번 약혼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테스의 입장으로서는 만약 루이스가 약혼한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감출 이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루이스는 약간 굳어져 머뭇거리고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리는 흘끗 그의 옆얼굴을 살폈으나 그 표정은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역시 과거에 무언가 사건이 있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루이스의 신변에 굳은 껍데기를 위장시키는 듯한 사건이 일어 났었으리라.
 "리는 몇 살입니까?"
 테스가 또 질문했다. 금세 루이스의 얼굴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리는 한사코 루이스에게 손가락으로 암시를 보내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서 테스는 이 벌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암시는 테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테스는 언니가 얼른 멈춘 손가락을 흘끗 보고는 루이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약혼녀가 몇 살인지도 모르시는군요. 가르쳐 드리지요. 리는 스물다섯 살입니다."
 그리고는 만족스럽게 중얼거려 보였다.
 "이 벌은 잠깐 뒤로 보류해 두겠습 니다. 그러면 이젠 분명히 리의 순번입니다…"
 리는 주의깊게 대답하며 말했다. 테스의 질문의 제한 시간만 잘 견디어 내면 된다.
 그러나 리에게도 위험한 함정은 있었다. 루이스가 그녀의 나이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리도 루이스에게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다만 구원받을 수 있는 점은 만약에 그녀가 틀린 답변을 하더라도 루이스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그대로 모르는 척해 주리라는 점이었다.
 테스는 언니를 혼란시키려고 질문을 연거푸 쏟아 놓았다.
 "당신은 지금 그 회사에 몇 년 동안 일하고 있습니까?"
 "삼 년입니다."
 "그 전에는 어디서 뭘 했지요?"
 "젠슨 협회."
 "그럼 그 이전엔?"
 "비서 양성 전문학교."
 테스는 이런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언니가 이런 질문이라면 하고 안심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이 까다롭고도 꼼꼼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다음에 던진 질문은 함정이 만들어져 있었다.
 "브루스 이외에 당신에게 키스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사실대로 대답해 놓고는 리는 자신이 지금 무얼 말했는지 깨닫고 놀랐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 그녀의 대답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약혼자인 루이스와 키스 정도는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리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그, 말하자면, 네 있어요, 라고 할 작정이었어요."
 당황하며 정정했으나, 테스는 아주 자신있는 만족감에 젖은 얼굴로 '명백히 내가 이겼어요'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쩔 작정이었건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무어라고 했는지 그게 문제로 되어지는 겁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당신은 벌 받아야 합니다."
 테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뜻있는 듯한 여유를 두었다.
 "여러분, 제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건 아시지요."
 테스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가족 되는 사람들은 서투른 글씨로 써 팽개쳐진 종이가 너저분하게 널린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해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사랑의 장면이 잘 써지지 않아서 큰일입니다."
 리는 아차 했다. 무거운 납덩이를 삼킨 듯이 가슴이 괴로와지고 몸이 가라앉아 가는 듯싶었다. 이미 다음에 들려올 말이 무엇인지 억측할 필요도 없었다.
 "두 분이 그 모범을 보여 주십시오. 물론 되겠지요?"
 테스는 언니와 루이스에게로 기대에 넘쳐흐르는 시선을 옮겨 가면서 말했다.
 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든 요령있게 이 함정을 뚫고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만이 오가고 있었다.
 어째서 테스가 루이스가 도착했을 때, 오자마자 현관까지 뒤쫓아갔는지 이제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벌은 단번에 거절해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리는 강한 어조로 나왔다.
 "다른 벌로 해주어요."
 "무슨 이유죠?"
 테스는 고집스럽게 강조했다.
 "그것이 내기의 규칙이 아닌가요?"
 "그런 짓을 해봤자 너의 소설에 아무것도 도움도 안 돼."
 태연스럽게 리가 말했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는…"
 "당신의 연기에 방해가 된다는 건가요?"
 테스는 아주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상관없어요. 그래도 해 보이면 좋겠어요."
 그랬더니, 루이스가 명백히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리하여 구원하듯이 어머니가 테스를 책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게나 키스 따윈 하지 않아. 보다 다른 벌로 해요."
 테스에게 명령했다. 테스는 영화 배우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흔하게 키스를 하는데, 하면서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으나, 곧 언짢은 듯이 다른 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후에는 파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리는 그러는 동안에 줄곧 어머니인 마거릿 눈에 떠올라 있는 걱정하는 듯한 기분을 눈치채었다.
 어머니는 딸인 리가 루이스에게 키스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무슨 영문이 있을 듯하여 근심하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리는 어머니의 마음속을 살피더니 어떻게든 루이스와 키스해 보여야겠다고 초조하게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불가능할 것같이 보였고, 그러자 더욱 못할 것 같았다.
 작별인사의 시간이 되어 루이스가 야유조로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을 리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키스의 흉내를 내는 것도 거북스럽다면 웃음거리라고 생각 안 됩니까?"
 리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럿이 있는 자리에선 대단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것은 그이하고…"
 리가 약간 어깨를 움츠리고 딱한 듯이 입속에서 말을 얼버무렸다.
 "그 사람과는 아직까지 한 번도 키스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까?"
 루이스가 뒤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리가 인정하는 것을 보자 조롱하듯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렇다면 한번 키스해 버리면 그 다음에는 흉내낼 필요가 있을 때 약간 하기 쉬워지겠지요."
 루이스의 말이 어떤 뜻인지 깨달아지기 전에 루이스는 재빨리 리를 양팔에 껴안더니 조금도 덤비지 않고 키스를 했다. 그가 그런 행동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기에 리는 놀라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리는 루이스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뉘우쳤다.
 그녀가 그전에 리키의 상점에서 말한 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든지 사랑하는 방법마저 모르는 사람이라고 리는 루이스에 대해서 말했으나 그것은 다만 틀렸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루이스의 키스의 방법은 그가 여성에게 처음으로 키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의 키스를 상대자가 기분 좋게 받아들이게 할 방법까지 터득하고 있는 남성이었다.
 리는 브루스와 서로 사랑하고 있었을 때에 키스란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는 분해서 화를 낼 지경이었다.
 루이스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자기가 숨도 쉬지 못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알고 리는 놀랐다. 만약에 그때에 그녀가 자기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리의 고운 입술은 떨리고 있었으나 무의식중에 상대를 유혹하듯 반쯤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루이스의 팔이 거세게 리를 조였다. 그 동작에는 미친 듯한 정열이 깃들어 있었다. 리는 놀라며 뜻밖에 그를 쳐다보았다. 금세 자기의 시선이 상대의 눈동자 속에 삼켜 들어가 버렸다.
 언제나 냉정해서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을 듯이 보여지는 검은 눈동자 속 깊이 끓어오른 듯한 광채가 스며 있었다. 루이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그는 다시 몸을 굽혀 리에게 키스를 했다.
 두 번째의 키스는 아까 한 것과는 아주 달랐다. 열정적이고 육감적이며,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켜 버릴 듯한 것이었다.
 브루스는 한번도 이렇게 키스를 해준 적이 없었다. 신체의 중심에까지 짜릿하게 하는 키스였다. 리는 놀라웠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며, 그 다음은 그저 그의 팔 속에서 자신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오 분쯤 지나서 마거릿이 케리와 함께 나왔을 때, 리는 아직도 현관 입구에 몽롱하게 서 있었다.
 "너 눈 좀 떠 봐라."
 웃으면서 마거릿이 소리쳤다.
 "달콤하고 멋진 꿈 속에 묻힌 얼굴이야."
 리는 깜짝 놀라 몸을 떨면서 어머니 쪽으로 돌아섰다. 붉은 피가 그녀의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마거릿의 웃음소리를 듣고 줄리가 왔다.
 "어머나, 언니, 어쩐 일이야?"
 마거릿은 장난기 섞인 웃음을 웃었다. 
 "리야 상관할 것 없다. 우리는 방금 오는 길이다.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기에."
 그녀는 딸의 뜨거워진 볼에 손가락을 대면서 장난 섞인 웃음을 크게 웃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분에게 키스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 저렇게 되어 버린다면."
 리는 치밀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르면서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날밤, 침대에 들어가서 리는 자기의 내부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풀어나가려 했다. 처음에는 루이스에게 키스를 당했어도 자기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키스 때에는 무엇인지 상상을 초월한 것이 자기 안에서 생생하게 흘러나왔던 것이다. 온몸 전체의 신경이 하나가 되고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여태까지 이처럼 몸을 틀어잡고 흔드는 듯한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하여 그렇게 느끼게 한 것이 다름아닌 루이스 알드레트였다는 사실이 더욱 이 사건 전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엇다.
 나는 지금까지도 브루스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리는 그렇게 믿어 왔었다. 그런데 다른 남성의 키스로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이 들뜬 마음의 주인공이었을까?
 그때 확실히 리는 꿈 속에서 황홀한 경지에 젖어 있었다. 루이스가 팔을 풀고 난 다음에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것조차 허망한 것으로 거의 귓속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이상한 뭣인가 찾는 듯한 표정으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던 루이스를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무엇인지 한마디를 속삭이고 몸을 돌려 가버렸던 것이다.
 리가 자기를 되찾은 것은 사람들이 현관으로 몰려왔던 때였다.
 침대 속에서 리의 육체 속의 피는 살랑살랑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나갔는데도 아직까지 그의 입술이 자기의 입술에 닿던 순간을 상상하고 리는 몸을 떨었다.
 그 놀랄만한, 상상도 못했던 키스는 그녀를 분간할 수 없는 낙원으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키스의 회상을 안은 채로 루이스와 다시 얼굴을 맞대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리는 자기에게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도대체 쓸데없는 생각인 것이었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얼굴을 대하자,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냉정한 표정이었다. 루이스는 리를 방으로 부르더니 여태까지 삼 년 동안 해온 그대로 사무적인 어투로 편지 내용을 불러 주었다. 
 리 자신도 이전과 같이 침착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냉정하게 있는 것에 대해 깜짝 놀라고 있었다. 리는 전혀 몰랐지만 그녀가 일을 마치고 방을 나온 후에, 루이스는 잠시 동안 그 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은 약간 가늘어져 가고 있었다.


                   7


 런던의 스텔라에게 브루스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케리가 예상한 그대로 스텔라는 몹시 분노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는 작아지고 상냥스러운 입가도 굳어져 버렸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저 매력적인 미인과는 아주 다른 사람과 같은 심술궂은 노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컨대 케리와 같은 사람들은 스텔라의 상냥하고 매력이 넘쳐흐르는 육체 밑에는 실제로 어떤 본성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말할나위없는 바보야."
 스텔라는 그렇게 욕을 퍼부어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브루스 같은 자는 자기의 사랑의 상대자로서는 가장 하치의 사내였다. 간단히 손을 끊어 버리려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어떤 여자라는 사실이 폭로되게 마련이었다.
 허영심이 강한 스텔라로서는 세상에서 시끄러운 여자라고 언제나 보여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도 케리가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별다르게 친애하는 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두가 자기를 숭배해 주는 것이 유쾌하기도 했고,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리는 특히 그때에 약혼을 파혼했던 것일까?
 리가 일부러 그 시기를 택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스텔라는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데 필요한 모든 사람의 찬사를 잃지 않기 위해서도 어떻게든 한 차례 연극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브루스와 헤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 이유로 브루스와의 결혼을 거절하는 일이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자기가 떠난 뒤에 콜웨스턴에서는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혹은 저 고양이 같은 케리가 리에게 밀고했는지도 모른다. 스텔라는 케리가 자기를 싫어하고 있다는 데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틀림없이 무슨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스델라는 믿고 있었다.
 자기 희생 같은 것은 바보 같은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리의 앞에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서… 예컨대 무어라고 하든지… 그렇다, 루이스 알드레트라는 사람이 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루이스 밑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리는 자기를 희생시킨 것처럼 꾸미어 동생에게 사랑을 양보할 것을 생각해 내었던 것이야. 리의 약혼이 해소된 것을 듣고, 그 알드레트 씨 같은 사람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손을 뻗친 게 진상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리도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는 여자야. 알드레트 씨는 대단한 부호라는 소문이 자자하니까.
 하여튼 콜웨스턴으로 돌아가 보자, 라고 스텔라는 결심했다. 그래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찾아내야 해. 만약에 가능하다면 브루스는 리에게 돌려주자. 그래, 그는 원래 리의 소유였으니 그것이 좋겠어.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알드레트라는 사내와 리의 사이를 끊어 버려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직섭 가봐야지. 이런 일은 편지로만 결정이 되어지지 않으니까.
 ― 이러한 이유로 그때부터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스텔라의 사파이어 청색의 가두 여배우가 그녀가 자라난 낡은 돌로 지은 집으로 왔다.
 영화의 일거리는 마침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의 장면을 촬영하고 있어서 스타인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 현상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연 마거릿은 이 유명한 여배우인 딸이 또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지만, 이윽고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었다.
 "어머나, 깜짝이야."
 꼭 껴안은 어머니의 팔에서 벗어난 스텔라는 아름다운 얼굴에 적잖게 깊은 생각에 젖은 표정을 나타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딸의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 마거릿은 걱정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생겼니?"
 "브루스 때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스텔라는 안방 소파에 몸을 던졌다.
 마거릿은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약간 안심한 듯한 웃음이었다.
 "무슨 일인데 걱정하는 거지? 걱정될 건 하나도 없다. 리에 관한 일이라면 루이스 알드레트와 매우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그게 사실일까요. 그러나 리가 얼굴 보는 것조차 역겹다던, 그 보잘것없는 남부 아메리카 사람 따위와 결혼을 하다니 전 싫어요."
 마거릿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보잘것없는 남부 아메리카 사람'을 만나본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을 거야. 루이스는 l80센티 이상의 키에 너처럼 남성을 많이 보아온 사람이라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보증할 수가 있어요. 만약에 너의 가슴속이 브루스 때문에 넘쳐흐르고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야."
 장난삼아 덧붙여 타일러 주었다. 
 만약 케리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스텔라의 가슴속을 메우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지금 틀림없이 루이스 알드레트라고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이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마음속은 끓어 번질 듯했지만, 표현으로는 마치 안도감을 되찾고 있는 듯이 스텔라는 말했다. 이리로 돌아오는 도중에 세웠던 스텔라의 계획은 이와 같았다.
 ― 먼저 브루스에게 '리는 진정으로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다만 나에게 양보해 주기 위해서 알드레트라는 사내와 약혼했을 뿐이에요' 라고 말해 줄 것, 그리고 아름다운 희생적 행위라고 하는 옷을 걸치고 리에게 브루스를 돌려보내 주며 언니 대신에 행운을 잡자. 세상은 나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마거릿은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돌아다보며 말했다.
 "물론이지,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어. 돌아온 사람은 틀림없이 리야. 리를 직접 만나보라구. 그럼 안심이 될 거야."
 밖의 문이 닫히는 소리에 이어 재빠른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그 멋진 자가용을 보고 할머니가 오신 줄만 알았어요."
 마거릿은 리를 보자 아무런 서론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스텔라는 말이다, 브루스 때문에 골치를 잃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너더러 말을 들어보라고 했던 참이야, 그러면 금세 해결해 준다고. 이젠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두 스텔라는 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 걱정하고 있단다."
 스텔라는 힘없이 미소를 띠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 사건만으로 고민해 온 것처럼.
 그리하여 '정말이야?' 하고 스텔라는 말했다.
 "리가 브루스와는 사랑하는 체하고만 있었을 뿐이고, 사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믿어지지 않아요."
 마거릿은 킥킥 웃었다.
 "그날 밤의 그 사람을 보았다면 스텔라도 믿을 수가 있을 거야!"
 "엄마!"
 리는 재빨리 가로막았다.
 "그런데 알드레트의 자동차가 떠나간 후에도 거의 오 분 동안이나 현관에 붙어선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었지… 행복감에 묻혀 멍 청해졌던 거야."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리라는 딸은 항상 냉정이 지나쳐서 브루스에 대한 태도에도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는 것 같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가 사랑에 도취되어서 혼란에 빠져 있는 모양을 발견하고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안이벙벙해진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 두고 리는 이층의 제 방으로 올라가 거기서 오랫동안 거울 속의 자신을 지켜보았다.
 
 결혼식 날 리는 천둥소리로 눈을 떴다. 그녀는 침대 위에 단정히 앉더니, 창 건너 쪽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상대자와 결합되어야 하는 이 결혼을 날씨마저 축복해 주지 않는 것일까. 한 줄기의 햇빛쯤이라도 밝게 반짝여 주었으면 했다. 마치 천지 그 모두가 앞으로 닥쳐올 결혼생활의 험악함을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후 한 시간이 흐르자 천둥은 멀어져 소리를 삼켰고, 태양이 밝게 빛났다. 그래서 이때에야 비로소 리는 브루스를 잃어버린 것을 지독한 상처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은 자기의 애정이 완전히 루이스 알드레트에게로 옮겨진 때문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 이유로써는 역시 이 결혼의 배후에는 무언가 위험한 것이 숨겨져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리는 남편이 되어 줄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자기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는지 명백한 결론을 끌어내기가 두려웠다.
 교회에서가 아니고 등기소라는 무미건조한 장소에서 올리는 결혼식 따위인데 어째서 이토록 흥분해 버리는 것인지, 리는 남몰래 그러한 자신에 대해 놀라고 있었다.
 그럴 때 줄리가 뛰어들어와서 아침식사는 침대에서 먹겠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집안이 온통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는 모든 사람의 독촉을 받아 준비를 서둘렀다. 이 따끈한 나의 침대도 오늘로 영원히 하직이다. 리는 침대를 떠나 화장의 마지막 손질을 한 다음 식장인 등기소로 향했다.
 모두들 집을 떠나려 할 때 스텔라가 향수 냄새를 팍팍 풍기고 검정색의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펄럭이면서 도착했다.
 스텔라는 언니에게, '행복을 빌어, 언니' 하고 애정을 깃들인 듯한 모습으로 키스를 했다.
 그리고 다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으나, 아버지인 존이 이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리는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가슴의 단추 구멍에 카네이션을 꽂은 정장을 했다. 지금쯤 벌써 루이스가 등기소에서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른다.
 루이스의 얼굴은 아주 태연하며 흥분하는 태도는 없었다. 그 검은 수수께끼를 풍기는 눈은 리에게 쏠렸으나, 사무실에서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리는 하얀 신부 의상을 입은 자신을 루이스는 어떤 느낌으로 보고 있을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로서는 역시 혼례식의 의상을 입고 양친을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평소대로 얼룩 티 하나도 묻지 않은 복장이었다. 큰 키에 거무스름한 살갗의 루이스 알드레트는 리가 여태 알지 못했던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에 리는 여동생인 줄리에게 루이스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깎아내리면서 로맨틱한 점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금처럼 자기가 그에게 붙어서서 남녀 사이의 가장 굳센 인연의 밧줄로 맺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있다.
 그때는 브루스와 약혼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루이스 알드레트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곧 끝날 간소한 결혼식.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은 리 알드레트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리 알드레트란 이름은 그다지 그녀를 기묘한 기분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웬일인지 아득한 옛적부터 그렇게 불려져 온 것 같은 자연스런 음향을 품고 있었다.
 리 알드레트. 신부가 그렇게 되풀이해서 중얼거렸을 때, 호적계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를."
 루이스는 아무 주저도 없이 리의 몸에 팔을 둘러 리의 머리를 기울게 하고, 자기 몸을 굽혀 입술을 맞대고 예법대로 키스를 하였다. 전번의 키스 때 같은 정열적인 느낌은 없었으나 리는 루이스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자, 볼에 뜨거운 핏기로 물들였다. 리는 루이스에게 자신의 가슴의 고동소리가 들렸을 거라고 염려했다.
 한편 스텔라는 대단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훌륭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을까. 늠름하게 큰 키, 더운 강철 같은 강인한 모습이었다. 굴곡이 깊은 얼굴은 햇볕에 타서 거무스름하지만 단정하고, 약간 냉담한 듯한 입 가장자리는 강렬한 정열을 암암리에 보여 주고 있다.
 검은 머리는 반짝반짝 빛나며, 여성을 금세 포로로 만들어 버릴 힘이 깃들여 있었다. 신부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는 깊이 있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리가 저런 사람의 아내가 되다니.
 스텔라는 저런 사내와 결혼하고 싶었다. 돈, 지위, 그리고 사람을 매혹시키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 놀람과 함께 스텔라는 부럽게 느꼈다. 결혼식이 계속되는 동안은 스텔라는 그런 표정을 용케 숨겨 왔지만, 식이 끝나자 루이스에게 향해서 화사한 웃음을 꽃피운 얼굴을 보여 주었다.
 "언니를 잘 부탁해요, 세뇨르 알드레트."
 스페인 식으로 불러 준 스텔라를 루이스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럴 생각입니다. 행복하게 해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해요."
 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리로서는 스텔라를 향해서 한 말이었지만, 자기의 말이 너무나 진실성을 띠고 있었기에 당황해졌다.
 "아, 두 분 덕분에 전 감상적으로 되어 버렸군요."
 스텔라는 명랑하게 말했다.
 "울어 버릴 것 같애."
 그러나 스텔라의 눈에서는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텔라가 도착한 이래의 모든 태도를 관찰해 온 케리는 만약에 울어야 할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리의 행복 때문이 아니고 부러워진 까닭이리라고 단정했다.
 케리는 이 아름다운 여배우의 눈이 손아귀에 넣고 싶은 짐승을 앞에 놓고 있는 동물처럼 가늘어지는 꼴을 놓치지 않고 보아 왔던 것이다.
 스텔라도 이 남자에게 눈독을 들였었구나, 브루스를 언니에게서 빼앗아 버린 데서 만족하지 못하고 제2의 획득물을 노리면서, 식욕이 끓어 번지는 빨간 손톱으로 도사리고 있는 거야.
 루이스 알드레트는 어떤 태도로 나올까? 케리는 그쪽을 흘끗 엿보았으나, 스텔라에 대한 루이스의 반응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케리는 마음속으로 루이스도 남자다. 다른 남자들과 같이 스텔라에게 끌려갈 것은 뻔하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루이스는 어쩔 작정일까. 이 결혼식이 정말로 '실무적인 결혼'에 불과하다면, 무슨 권리가 있어서 그날 밤에 현관에서 리가 들떠 버릴 정도로 열을 올리게 해 버렸단 말인가.
 케리에게 있어서 연애와 남성은 양쪽이 모두가 번거로운 것이었다. 사랑은 충돌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남자란 아주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다소간 의식이 있는 여자라면 양쪽 다 요령껏 처리해 나가지 않고서는 케리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도 표면상만으로는 일단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남자친구와 사귄 적이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주위에 훌륭한 본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케리의 말에 의하면, 남자라는 존재는 간단하게 여자의 생활을 뒤집어 엎어 버리며, 그런 짓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족속이었다.
 우선 브루스. 스텔라가 나타나기만 해도 금방 그 포로가 되어 리를 버리려고 했다. 이번에는 루이스의 차례다. 이 남성도 박쥐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스텔라의 광채나는 검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를 본다면 금세 끌려 버려서 그 아름다운 얼굴 뒤쪽에 깃들이고 있는 흉칙한 마음을 꿰뚫어볼 수는 없을 테니까…
 케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간소한 피로연이 베풀어졌다.
 리는 밀월 여행용으로 맞춘 어두운 녹색의 상쾌한 웃옷과 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줄리는 언니의 둘레를 떠들며 돌아다녔고, 마거릿은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엄마, 전 멕시코로 가는 것뿐이에요. 달나라에 가는 게 아니예요."
 리는 그렇게 위로의 말을 하였다. 그것도 오래 있는 것도 아니예요, 곧 돌아와요―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는 엄마의 눈물은 항상 붙어 돌아가는 거란다."
 마거릿은 이렇게 변명하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행복하게 살아라, 저분은… 루이스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고 상냥하게 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리는 조용히 대답하면서, 이날 비로소 이 결혼이 '실무적인 결혼'임을 생각해 내고 웬일인지 끔찍스럽게 느껴졌다.
 밀월 여행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동차 밖에서 '행복한 밀월을!' 하고 외친 줄리의 음성이 리의 기분을 더욱 불안과 흥분에 빠뜨렸다.
 진짜 밀월 여행이라면! 이 여행에서 또 한번 그날 밤 헤어질 때 현관에서 주고받은 그런 키스를 그에게서 당하면 어쩌나! 그날 밤의 키스를 회상했을 때, 리는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겨우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반드시 루이스는 내가 리키의 상점에서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스의 입장에서도 그 순간은 약간은 나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주는 것 같았어― 그래서 새삼스럽게 이 결혼이 진정한 의미로써의 결혼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을 깨달은 것이었다.
 항구로 가는 열차에 시간을 맞춰 가려고 두 사람은 출발했다.
 차 속에서 리는 살짝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 이 말의 음향은 유쾌했고, 이 말로 불러야 하는 남자가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의 기분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리의 볼에 부드러운 털 한 다발이 스쳤다. 그것은 루이스가 결혼 선물로 준 밍크 코트였다.
 이 코트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루이스와의 작은 충돌을 회상하고, 리의 얼굴에 가까스로 웃음이 떠올랐다.
 진짜 결혼이 아닌데 그렇게 사치스러운, 한재산이 될 만큼한 선물 같은 것은 받지 않겠노라고 리는 주장했었다.
 루이스의 입장에서도 완강하게 받아 주기를 원하며 양보하지 않기에 할수없이 지고 말았던 것이다. 표면상만으로라도 이것은 의젓한 결혼이니까 신부에게 선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두 사람 사이가 진짜 결혼처럼 보이는 편이 자기에게도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 루이스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 선물을 살 만한 여유는 충분하다고도 했다. 완고한 주장을 세우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 리는 갑자기 이분의 의견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 승부를 할 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그때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생겨났다. 루이스의 눈에서 조롱하는 듯하던 빛이 사라져 버리고 더욱 친근한 눈매로 바뀌어진 것이다.
 모름지기 그 전까지는 여자라는 것들은 비싼 선물을 탐내는 탐욕적 동물이라고 루이스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리가 그러한 비싼 선물을 받고 싶어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루이스의 고정관념이 깨뜨려진 것이다 
 둘이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타자 리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이 블루 헤이즈 호는 과거에는 백만장자용의 배로 알려졌고, 지금도 그 호화로운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리는 돈 욕심이 강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돈이 많다는 사실은 역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안 되는 몇 달 동안이라도 이토록 사치스러운 것에 싸여 지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즐거운 기분이었다.
 한 가지 회상이 리에게 떠올랐다. 이전에 줄리에게, 만약에 세계 제일의 미남자인 억만장자가 나타나도 브루스와 바꿀 수는 없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리 자신은 블루 헤이즈 호를 타고 미남자이며, 억만장자는 못 되어도 상당한 부호와 결혼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루이스 알드레트라는 인간 자체이며 돈은 그다지 대견스러운 것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의 방으로 안내받았을 때, 리는 내부의 호화로움에 숨이 막히었다.
 영화의 호화선의 세트라면 몰라도 현실에 이러한 사치스런 선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널찍한 개인용의 라운지가 있고, 그 안쪽에는 두 개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무심코 한쪽 문을 연 리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침실이며, 침대가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그때 루이스의 손이 리의 팔에 닿았다. 그녀는 놀라서 몸을 굳게 움츠리고 가슴의 고동을 누르려고 했다.
 "방이 하나 더 있어요. 나는 그쪽을 사용할 테니까."
 루이스는 조용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부러 큰 방을 부탁해 놓았던 겁니다."
 리는 말이 막혀 버렸다. 보이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라고 물어보려 했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루이스가 갑자기 말을 시작했다.
 "그날 밤에 현관 쪽에서 그런 키스를 해 버려서 미안해요. 매우 불안스러웠을 테죠."
 이젠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한 채였다. 그래서 그 화제는 끊어 버릴 작정인 것 같았는데, 리는 불현듯 루이스에게 물었다.
 "그것은 리키의 상점에서 제가 그렇게 말한 때문이었지요?"
 "어느 정도는."
 루이스는 약간 웃어 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알랑거리는 겉치레 말로는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우선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나라고 해서 다른 남성과 다르진 않아요. 더욱이 내게는 절반쯤 스페인 사람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러나 실토를 합니다만, 그날 밤 당신이 매력에 넘친 여성임을 깨달은 것이 이유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그렇게 키스를 해 버려서… 제발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리는 새빨갛게 되어 버렸다. 싫어, 이건 마치 풋내기 여학생이 아니야, 라고 자기를 책해 보았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리의 냉정함과 침착성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루이스가 이런 기분을 들게 만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더욱이 아직도 두 사람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인데.
 리는 이 대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될지 몰랐다. 확실히 리키의 상점에서 자기가 한 말은 잘못된 것이었다.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루이스가 거듭 물었다.
 리는 슬쩍 눈을 들었다가 당황해져서 내리떴다.
 "아뇨, 전혀."
 네, 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루이스를 모욕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 키스를 마음에 없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까. 루이스 자신도 리의 기분을 통찰해 버린 것 같다.
 "고맙군요. 진짜 기분을 말해 줘서."
 "거짓말을 해도 어차피 아실 테니까요."
 리는 루이스를 쳐다보며 솔직히 말했다.
 루이스는 응대했다.
 "그러믄요, 나는 알 수 있지요."
 루이스는 몸을 숙이며 입술을 가볍게 리의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 조롱하듯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
 "이거, 약속을 그만 어겨 버렸습니다."
 리로서는 이렇게 약속을 어겨 버리려면 언제든지 어겨 주었으면 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리는 스스로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있까… 도저히 억눌러 버릴 수 없는 감정이 살랑살랑 끓어올라왔다… 리는 이 결혼이 어느 기간으로 끝나 버려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지금은 똑똑하게 그녀의 속에 그런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안내양이 짐을 풀고, 루이스가 사람을 만나러 나간 사이에 리는 갑판에 올라왔다.
 얼마 후 루이스는 용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젠 배가 떠납니다."
 하고 알렸다.
 그 음성은 부드럽고 그 검은 눈은 멀리 멕시코로 달려가는 듯했다.
 틀림없이 나 같은 존재에는 관심이 없어, 라고 리가 생각하고 있는데, 루이스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돌렸다. 리도 어느 새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어 버렸다.
 루이스는 리를 안고 있는 팔을 세게 조이며, 점점 멀어져 가는 육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는 마치 지금까지의 생활과 새로운 생활의 구획을 그어 주는 것 같았다.
 리는 이 새로운 생활도 잠깐 동안뿐이며 이윽고 다시 이 바다를 건너서 그전 생활로 되돌아가야 함을 언뜻 생각하자 슬퍼졌다.
 그날 밤, 커다란 식당의 식사는 훌륭했다. 리는 그 사치성에 눈을 뺏겨 버렸지만 충분히 맛보았고 솔직한 기쁨에 젖고 있었다. 두 사람용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 후에 무도회실로 갔다. 항해의 첫날째였지만 미국행의 비교적 짧은 일정 때문인지 선객들은 벌써 축제 기분이었다.
 루이스와 리는 곧 무도회의 소용돌이 속에 흡수되어 갔다. 두 사람은 대단히 익숙하게 스텝이 맞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신혼 첫 밤의 무미건조한 기분은 사라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떠벌이기도 했고 웃을 수도 있었다.
 깊은 밤중에 리는 혼자서 화사한 침실에 누워 있으면서도 생각은 멍청해졌었다. 곁의 침대는 텅 비었다. 기묘한 신혼의 밤이었다. 몇 날쯤 전에는 브루스와 결혼할 작정이었다. 브루스와 결혼했다면 이러한 화사한 방에서 첫날밤을 맞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신부가 혼자서 자는 일도 없으리라. 루이스도 지금 다른 방에서 자기처럼 침대에 들어가 천장을 쳐다보면서 쓸쓸함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옛날 약혼했다는 여성을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잠들지 못한 채 리는 이 생각 저 생각에 묻혔다. 그 여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루이스는 그 사람에게 어떤 복수를 받았을까? 그가 그처럼 여자에게서 커다란 상처를 받은 원인은 무엇일까?
 그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가 냉혹한 사람인 줄만 알았었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러나 상당히 심한 타격을 받았었겠지, 저렇게까지 철저한 여성 혐오자가 되어 버렸을 정도니까.
 그러나 리는 자그마한 만족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루이스의 태도는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변해졌다. 리의 진심이 통해진다면, 그 상처에서 재생할 수도 있겠고, 그녀는 그것을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려고 생각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에야 리는 겨우 잠이 들었다. 그녀가 간신히 눈을 뜨고 라운지로 나가니 이미 루이스가 그곳에 있었고 웃는 얼굴로 맞아 주었다.
 "식사는 이리로 갖고 오게 부탁했습니다."
 "어머, 잘 되었군요. 웬일인지 좀 피로했나 봐요."
 리는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루이스는 웃으면서,
 "영국에 있으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리는 시계를 보며 킥 하고 웃었다.
 "타이프를 치고, 아침 커피를 마시고 옆방 사람이 무엇인가 찾을 것을 못 찾아 화가 나서 벨을 울려올 것을 대기하고 있을 때예요."
 루이스는 한쪽 어깨를 추켜세웠다.
 "내가 사무 처리할 때에는 그렇게 화를 잘 내었나요?"
 리도 조롱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경우에 따라서였겠지만요."
 "그럴 때는 리도 화가 났겠군?"
 "아-뇨, 당신의 신경질이란 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리는 명백히 말했다.
 "당신은 분별있는 여성이야."
 여태껏 리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 자신도 자기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에 뜻밖에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였을까? 당신은 언제나 마치…"
 "마치 사무실용 비품 같은 여자?"
 "그래요, 대체로 그런 타입의 여자라고 생각했지요."
 "당신은 그게 희망이었잖아요? 저는 자기의 임무에 대해서는 정성껏 했어요…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성공하고 싶었어요. 브루스를 만나게 될 때까지의 일이지만요."
 리는 담담하게 말을 계속했다.
 "성공하고 싶으니까 바라시는 태도로 일을 하려고 결심했어요. 비품 같은 비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되어 보이려고요."
 "나는 냉정한 표면만의 당신을 보고 있으면서 당신의 진실한 모습을 몰랐소."
 "그러나 알아 버렸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는 않아요."
 루이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유언이 없었다면 진정한 당신을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겁니다."
 "어째서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유언을 하셨을까요?"
 루이스의 건조한 시선이 리의 눈에 엉키었다.
 "당신은 알고 있을 테지만…"
 그런 말을 받아들으면서 리는 얼굴이 붉어짐을 깨달았다. 그 유언의 이유는 그녀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결혼을 강제로 시킴으로써, 카라스트라노의 상속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마치 리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자기 행동을 남에게서 명령받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당신은…"
 말하려다 리는 입을 다물었으나, 루이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나는 처음부터 유언의 조건을 요령있게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결혼하고 있습니다. 카라스트라노를 상속받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신 일은… 사기 같은 것이 아닐까요?"
 리는 조용히 말했다.
 "사기?"
 "네, 그렇잖아요? 위장결혼으로 뒤를 잇자는 거니까요."
 리는 이 말을 하고는 그것이 너무나 노골적인 데 스스로도 놀랐다.
 루이스의 눈동자에는 약혼을 결정했을 때에 흔히 보여 주었던 그 야유스럽게 조롱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럼 당신은 유언의 조건대로 하라는 말인가요?"
 리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럴 예정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예요. 그러나 그 할아버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을 예정이라면 보통 결혼을 해야 할 거예요."
 "그러나 나는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이 일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결혼이 해소되어 당신이 그냥 혼자서 그쪽으로 가 살면, 결국 카라스트라노를 타인에게 넘겨 주게 된다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친척이라도 계십니까?"
 "아무도 없어요."
 루이스는 내뱉듯이 중얼대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카라스트라노를 타인의 손에 넘기는 일은 절대로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들의 결혼이 해소되면 이번엔 당신 자신이 자유롭게 상대자를 선택할 수 있을 거예요."
 "양친의 명령에 따라서 나와 결혼할 온순한 스페인의 아가씨, 그렇게 되어질까요?"
 루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말씀드릴 일이 아니었어요."
 리는 딱 잡아떼듯 말했다.
 "이 결혼엔 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래서 당신 자신도 이 결혼은 어차피 해소하고 싶은 건가요?"
 리의 말을 도중에서 가로채어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는 루이스는 일어서서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되어 잠시 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담배가 없다고 하면서 방을 나갔다.
 리는 루이스가 나간 후에 일어났지만, 그때에 이르러서야 두 손을 튼튼히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들의 결혼을 해소한 후에, 루이스가 다른 상대자와 결혼할는지 모른다는 것을 상상하니, 리의 가슴은 새로운 아픔으로 갈래갈래 찢어지고 만 것이다.


                   8


 뉴욕부터는 항공로를 통해서 멕시코 시로 들어갔다.
 예약해 놓은 호텔은 작으면서도 우아한 고급 호텔로써 그 건물은 멕시코 시에서도 한결 돋보이는 초현대적인 건축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루이스와 함께 거리로 나간 리는 여기저기서 옛날 도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둘은 대사원 앞에 서서 소카로 방면을 바라보았다. 거기는 일찍이 고대 아즈텍 인이 왕래한 테노치테토란의 대광장의 유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고대의 광장 자리에 이 현대 도시가 서 있어서, 더욱 그 밑에서 과거의 음성이 속삭여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는 유적에 심취한 듯한 리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고대 아즈텍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고 계십니까?"
 리는 그렇다고 응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루이스가 사랑하는 고향이었다.
 일 주일 동안 유적을 구경한 후에 루이스와 리는 서서히 카라스트라노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도중에 오치테와칸에 들러 가기로 했다.
 여기는 멕시코 정부가 그전에 있었던 대도시를 발굴한 곳이어서, 그 고대의 유적은 지금도 웅장했던 과거를 호흡하고 옛날의 영광을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신성한 사원 도시의 최초의 것이며, 토르테카 족의 최대의 도시 테오치와칸이다.
 거기에는 그 오랜 신비적인 건축물을 만들었던 사람들, 목공술과 농업에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
 테오치와칸의 골짜기 전체는 길이 13.5마일, 너비 2마일 정도로 포장되어 있는데, 스페인 사람이 오기 전에 모든 영명이 이미 황폐해졌고 의젓한 건물의 잔해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그 피라밋이 천천히 뒤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어디보다도 이테오치와칸이 회상에 남으리라고 리는 생각하였다.
 거기에서 카라스트라노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그날은 상당히 큰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호텔에는 관광객이 퍽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 미국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 머문 곳은 완전히 스페인 식 호텔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을 식당으로 개조한 것으로, 윗층은 수는 적었지만 한적한 방이 있는 호텔이었다.
 아침에 가벼운 조반을 먹고 나서 둘은 다시 차를 탔다. 기차로도 갈 수 있으나 드라이브를 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이 루이스의 의견이었다.
 점심때 가까이 되어서 어떤 작은 마을에 들어섰을 때, 루이스는 차의 속도를 늦추고 리를 돌아다보았다.
 "어때? 점쟁이에게 들러볼까요?"
 "재미있겠네요."
 리는 곧 대답했다.
 점쟁이는 키가 작은 주름살투성이인 노파인데, 호숫가의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점쟁이는 수수께끼 같은 눈매로 두 사람으로 보더니, 리를 바깥의 걸상에 앉으라고 명령하고 자기는 커다란 평편한 물그릇을 앞에 놓더니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 리에게 한 줌의 흙을 쥐어 주며 그것을 물그릇에 던져 넣으라고 했다.
 리가 명령대로 하자, 노파는 물그릇 속을 들여다보며 잠깐 지켜보고 있었다.
 "불행했었구나."
 얼굴도 쳐들지 않고 금세 노파는 말했다.
 "잠깐 동안은 잊어버릴 수 있지만, 곧 다시 생각하게 된다. 슬 픔은 물을 흐르게 만든다."
 물그릇에 떠 있는 먼지 티끌을 비밀이 깃든 것처럼 쑤시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부정하는 듯이 그때까지 구름에 가려 있던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수면에 햇살이 반짝이었다. 뜻밖에 리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웃고 있지만…"
 노파는 급히 얼굴을 들고, 리가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보고 말했다.
 "당신의 인생에는 '어두운 별'이 있군요. 그 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태양이 떠올라서 영원한 행복을 찾아낼 수는 없어요."
 노파는 그 말만 하고는 일어나서 물을 호수에 버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문을 덜컥 잠가 버렸다.
 루이스는 동전 몇 개를 걸상 위에 놓고 리를 데리고 차에 돌아왔다. 그때서야 루이스는 리가 가만히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웃음을 띠며 물었다.
 "설마 정말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설마 그런 일이."
 리는 대답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덧붙여 버렸다.
 "제가 불행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저런 늙은이들은 사람의 얼굴을 읽는 방법이 숙달됐지. 그러나 앞으로는 리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보살필 테니까 염려 말아요."
 루이스의 말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진정으로 리를 생각하는 듯했으며, 여태까지의 남을 대할 때 꾸며 오던 태도를 벗어났다. 그러나 리는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할 수는 없었다. 노파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운명에 '어두운 별'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리고 불현듯 스텔라를 가리켜서 농담 반으로 '어두운 별'이라고 부르는 것을 회상하고는 깜짝 놀랐다.
 "웬일입니까?"
 "아니예요, 아무것도."
 "그런 걸 갖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한 손을 핸들에서 떼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점쟁이 따위한테 데리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엉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꺼림칙하네요. 그러나 누구나 미신을 믿는 마음은 있어서 깜짝 놀라게 될 때도 있지요."
 "이제 그만 잊어버려요."
 리도 가급적 그럴 작정이었다.
 그러나 금세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서는 스텔라를 가리켜서 '어두운 별'이라 부르고 있었다.
 자랑과 애정을 깃들여서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스텔라는 확실히 언니인 자신의 생활에 불행을 초래시켰지만 그것은 고의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브루스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두운 별'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는 영원한 행복은 올 수 없다는 것일까.
 리의 마음은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오후도 저물어 갈 무렵이 되어 경사진 고갯길을 올라간 막바지에서 루이스는 차를 세웠다. 그는 차에서 내려 언덕 끝까지 리를 데리고 갔다.
 "저것이 카라스트라노야."
 루이스가 가리키는 쪽을 리는 바라보았다. 언덕 기슭의 평원 저편에 보석처럼 흰 건물이 있고, 꽃들이 뿌려져 찬란하게 빛나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거리가 움츠리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워라."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리는 비로소 루이스가 이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이 없는 결혼을 강행한 이유를 알 듯했다.
 낮은 산들의 사이를 내려오니 거기가 카라스트라노의 거리였다. 거리 전체가 마치 오랜 식민지 시대를 보여 주는 영화의 세트처럼 전통적인 복장을 한 소박한 남녀가 여기저기에 한가로이 걷고 있었다.
 리는 루이스가 이런 옷을 입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싶었다. 카라스트라노에서는 그도 이와 같은 옛날 옷을 입는지 궁금해서 리는 그를 보았다. 현대식인 보통 복장보다는 그쪽이 더욱 루이스에게 걸맞을 것 같았다.
 흰 건물로 가까이 갈수록 부근의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찻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도로는 모두가 곧게 높이 솟아 있는 건물로 통하고 있었다. 
 넝쿨장미가 옛 돌담 벽에 감겨져 있었고, 높은 철문이 열려 있었으며, 무엇인지 사그라져 가고 있는 가문(家紋)이 새겨져 있었다.
 리는 그 문장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차가 그대로 지나쳐 버려서 더욱 많은 장미꽃이 피어 흐드러진 문 앞 뜰에 도착했다.
 바로 정면에 계단이 있고 그곳 풍속으로 만든 활 모양의 문이 위쪽으도 이어져 있었다. 이 문이 끝나는 곳에 테라스가 있으며, 거기는 작고 푸른 타일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흰 벽에 둘러싸인 속에 육중한 나무문이 있었다.
 둘은 철문과 같은 문장이 찍혀 있는 커다란 문을 지나 어두컴컴하며 텅 빈 홀로 나왔다.
 거기에는 작은 키에 뚱뚱한 여성이 있어서 두 사람에게 옛 풍속대로 무릎을 굽혀 경건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뒤에는 집 식구들이 나란히 서 있다가 루이스가 하나 하나 소개를 하자, 모두가 각각의 예법으로 리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뚱뚱한, 하녀들의 우두머리인 크리스티나 에스토릴이 모든 사람을 해산시켰다.
 루이스는 크리스티나에게 커피를 가져오도록 명령한 후에 리를 안뜰을 바라볼 수 있는 천장이 낮은 좁고 기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그 뜰은 희한했으며, 리는 곧 그곳을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저 뜰을 걷고 싶어서 다리가 근질글질해 못 견디겠어요."
 리의 말에 루이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좀 쉬고 나서 안내하지요. 틀림없이 맘에 들 겁니다."
 둘이 앉아 있는 걸상은 등받이가 높고 오래 묵은 나무 제품으로 손질이 잘 되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등과 다리 부분은 금으로 장식한 가죽이 씌워져 있어 아직도 번쩍이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가져온 커피는 손으로 그린 그림이 박혀진 섬세하고 작은 잔에 담겨 있었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올라가는 것 같군요."
 커피잔에 입을 대먼서 리가 말하자, 루이스가 응대를 했다.
 "카라스트라노는 식민지 시대에 지은 것입니다. 외관은 옛날 그대로 남겨 두고 내부만 근대적으로 개조한 것이죠."
 "훌륭한 건축물이에요."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루이스는 일어섰다.
 "그럼 기대하고 있는 정원으로 안내하지요."
 루이스는 복도로 나와 전부 유리를 낀 회랑으로 통하는 활 모양의 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 길은 이 저택의 남쪽으로 통해 있으며, 남쪽의 일층은 완전히 무도장인 홀에 해당했다.
 홀의 옆에는 좁고 기다란 장식창이 작은 안뜰을 향해 있었다.
 "정말 멋져요."
 숨을 헐떡이면서 리는 말했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홀에 음악과 흥청거리는 이야기소리가 메아리치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루이스도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 집으로 돌아온 축하로 댄스 파티를 열어야겠어요."
 집으로 돌아왔다구? 리는 자기에게 대해서도 돌아온 셈이란 말인가, 하고 느꼈다.
 "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리를 소개해야겠어…"
 안뜰을 가로질러 북쪽의 건물 쪽으로 걸어가면서 루이스는 그렇게 말했다.
 북쪽은 리셉션 룸으로 되어 있으며, 리셉션 룸 이외에도 크고 작은 방이 있었다. 여기는 알드레트 집안의 하인들의 방인 듯했다. 그리고는 둘은 홀 쪽으로 되돌아갔다. 넓은 계단을 올라갔더니, 발소리가 그 작은 나뭇조각의 낡은 판자로 된 복도에 울려왔다. 계단은 아마도 몇 세기를 거쳐 온 것이며, 그 폭 넓은 계단을 옛날의 카파레로나 검은 머리에 보석을 박은 핀을 꽂고 화려한 옷자락을 나부끼던 귀부인들이 지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리는 자기와는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자라날 때까지 전혀 다른 남성과 결혼한 것이 새삼스럽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옛날 리의 고국인 영국의 배가 루이스의 나라인 스페인의 갈레 선박과 대치하여 싸운 적이 있었다.
 그녀의 선조들 가운데는 해적이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어쩌면 그 가운데는 알드레트의 선조가 인솔한 배를 습격한 자가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그의 선조가 정복자와 함께 신대륙으로 건너오게 되었었다면, 바로 그 당시의 영국의 해적들은 카리브 바다를 어지럽게 돌아다녔으니까.
 계단 위에 삼각형의 방이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보존한 방이었다. 
 거기에서는 홀이 내려다보였다. 홀의 양쪽 날개는 섬세한 무어 식의 회랑으로 통하여 있었다. 회화실의 좌측과 중앙의 일부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고, 우측과 중앙의 남은 부분에는 잘 닦여진 칸막이 판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 초상화를 본 리는 빙그레 웃으며,
 "선조님이시죠?"
 하고 루이스에게 물었다.
 "그분을 소개하지요. 돈 사비엘 마누엘 호세 파레아 데 알드레트."
 리는 킥 하고 웃었다.
 "대단히 훌륭한 이름이군요!"
 리의 볼에 루이스의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그럼, 놀리지 말라구."
 그 손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미끄러져 내리더니 그대로 거기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살짝 껴안았다.
 돈 사비엘은 정복자들과 함께 멕시코로 건너와서 카라스트라노를 건설한 선조였다. 그대로 서서 둘은 그림을 차례차례 보고 있었다.
 돈 페리에, 그는 도박으로 알드레트 집안을 파산 직전에까지 빠뜨렸었다. 돈 레나트, 그는 페루의 잉카의 비밀을 발굴해서 카라스트라노를 고쳐 지었고, 알드레트 집안의 가산을 보호하였다. 돈나 로자리아, 그녀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버이들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을 강제로 시키자 비구승으로 절에 들어갔다…는 등등이었다.
 초상화의 설명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건장한 턱과 얇은 입술이 특징인, 바로 리의 곁에 있는 남자를 꼭 닮은 초상화가 있으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붙어 있는 한 쌍의 남녀는 루이스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으나 그것이 그의 부모였다.
 리의 주의를 끈 것은 자기들의 앞에 있는 초상화였다.
 "당신의… 조부님이신가요?"
 루이스는 그렇다고 했다. 그의 입가에 엄숙함이 풍겼다.
 "그래요, 내 조부요."
 그렇다면 이 양반이 손자에게 결혼을 무리하게 강제로 하게 한 사람이었다.
 리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거무스름한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다시금 자기가 결혼한 상대자와 많이 닮았음을 알고 놀랐다. 적어도 둘은 성격도 닮았으리라, 그래서 충돌하고 말았던 것이다.
 리는 이때 갑자기 루이스의 그전 약혼녀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리는 이상야릇한 입장에 선 신부였다. 남편에 관해서 아는 것이란 한 가지도 없으며, 더욱이 그 양친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갔었는지 알 바가 없었다.
 "왜 그러지?"
 리의 얼굴에 질문하고 싶은 표정이 떠 있음을 루이스는 놓치지 않았다.
 "당신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머뭇거리듯이 리가 말했다.
 "확실히 그것은 공평하지 못하군요, 내 편은 리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으니까."
 "그럴까요?"
 루이스는 웃음 띤 얼굴이 되더니 그녀의 어깨에 올려 놓았던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는 조롱 비슷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나는 리가 나무에 올라가거나 인디언 식의 새털을 머리에 꽂는 취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둘은 건물의 북쪽으로 통하는 회랑으로 나왔다. 양쪽에 방이 있고, 그 몇 개는 안뜰을 향해서 창이 열려져 있다. 다른 쪽은 바깥쪽의 발코니를 향해서 열려져 있다. 또 계단이 있지만 이것은 정면 계단처럼 산뜻하지는 못하였다.
 회랑의 끝까지 와서 둘은 건물의 뒤쪽에 있는 하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을 돌아보았다. 이 구역은 중후한 느낌이 드는 조각이 새겨진 문으로써 다른 구역과 아주 구별되어졌다. 그것은 봉건적인 옛날을 회상하게 하는 것인데, 놓여져 있는 세간살이들은 다른 방들처럼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소박한 느낌이 드는 좋은 물건들이었다.
 루이스와 리는 댄스홀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남쪽의 중앙에 있는 회랑을 지나 저택의 바깥쪽으로 나왔다.
 카라스트라노의 앞뜰을 들여다보는 큰 창으로 햇빛이 넘쳐흘러 들어왔다.
 이 회랑에는 조각한 나무와 모양이 새겨진 가죽을 붙인 의자가 여러 개 놓여져 있었다.
 그 문의 건너쪽 구역은 카라스트라노의 주인과 그 신부를 위해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훌륭한 살림집이었다. 방의 한쪽 문은 내인용의 욕탕으로 통해져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커다란 더블용의 침대였다. 조각을 새겨 넣은 기둥에 새빨간 색깔과 황금색의 얇은 천이 다발이 붙은 끈으로 매어져 있고, 위 덮개의 천도 역시 진한 붉은 색과 황금색이었다.
 "어머나!"
 얼굴이 붉어짐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이 시트의 진한 홍색과 같은 정도였으리라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당황하다기보다는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것 봐요, 리러가 준비하면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다니깐."
 두 사람의 짐은 이 방에서 절반 정도 풀어 놓인 채였다. 아마 짐을 풀던 젊은 심부름꾼이 용무가 있어 나가 버린 듯했다. 리는 겨우 안심했다.
 루이스는 조롱 비슷한 웃음을 띠었다.
 "화장실도 물론 있습니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서 또 다른 작은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이 방 안에는 사치스럽지는 않아도 혼자서 사용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가구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조부님은 줄곧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해서 간호인이 이 방에 살았죠."
 "그랬었나요."
 그렇게 말하고 리는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큰맘 먹고 물어보았다.
 "저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무슨 소문을 퍼뜨리진 않을는지요?"
 조만간에 소문이 퍼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호텔에 있는 동안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친근하지만 호기심에 넘치는 눈들에 속속들이 보여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신혼 초기의 부부가 계속해서 침대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호화로운 더블용 침대가 아니고 싱글용 침대 두 개를 놓았다면 어떻게든지 속여낼 수 있는 용기도 났을는지 모른다.
 리는 어쩌면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루이스는 화장실의 침대 건으로 리러와 이야기를 하겠노라고 나갔다.
 그 동안에 리는 자기 짐을 풀어 버릴까 했다. 그러나 자기의 의복을 한 벌 끄집어 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멕시코 인의 소녀가 얼굴을 나타냈다.
 소녀는 마리아라고 했는데 그녀는 카라스트라노의 새로운 여주인에게 짐을 풀게 하다니, 사환의 입장에서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리는 곧 일을 착수했다. 마리아가 존경과 찬탄의 심정을 깃들여 리에게 미소를 던지고 얼른 여행 가방 속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리는 지위도 여가도 있는 귀부인다운 태도로 행동해야 했다.
 만찬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기 전에 목욕탕에 들어갔다 왔더니, 마리아가 기다리고 있다가 옷매무새를 도와 주었다.
 리는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시중들어 주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신분을 잠시 동안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온 여태까지의 생활을 생각하면 아주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리가 골라낸 드레스는 순수한 백색이었다. 소박하나 우아한 새단으로 만든 것이어서 요란스러운 장식이 없는 것인만큼 더욱 화사하게 보이는 드레스로 이것은 영국에서 갖췄던 혼례식 의상 중의 한 벌이었다.
 물론 리 자신이 산 것은 아니고 루이스가 새로 열어 준 은행 구좌에서 지불한 것이었다. 멕시코 시에 도착했을 때에도 루이스는 다시 새로운 은행구좌를 열어 주었다. 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루이스는 듣지 않았다.
 루이스는 부자 남편을 둔 아내로서의 세상에 대한 체면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는 필요한 옷가지들을 살 때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사파이어 반지나 밍크 코트도 사 주었기 때문이다.
 옷매무새를 마치고 마리아에게 머리를 다시 풀어 다듬도록 시키고 있는데, 루이스가 돌아왔다.
 그는 리에게 싱긋 웃어 보였는데 매력에 넘치고 있는 그의 웃는 얼굴은 그녀의 가슴을 뜻밖에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루이스도 목욕탕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잠시 후에 조용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리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카라스트라노의 현재 주인으로서는 귀가하신 첫날 밤은 기분 좋게 지내야 하며, 그 여자 주인으로서의 자기도 행복해야만 할 입 장이었다.
 마음속 깊이에서는 이 행복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다는 현실적 감정을 가져야 하겠지만 오늘 밤만은 행복하고 싶었다. 멀지 않아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그 생활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리는 알드레트가 일시적인 남편이었던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비서 생활로 되돌아갈 필요는 전혀 없다. 루이스는 리가 혼자서 독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주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자그마한 일을 시작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머리를 다 손질한 마리아가 나가자, 리는 루이스에게 말했다.
 "저는 먼저 가 있겠어요. 다시 한번 회화실에서 그림을 보고 싶으니까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요."

 몇십 분이 지난 후에 두 사람은 객실에서 얼굴을 마주 대했다.
 루이스의 모습은 매력에 넘쳐 있었다.
 이 밤은 남쪽 나라 풍속의 밤옷을 입고, 검은 머리의 얼굴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자랑에 가득차 높이 떨치고 있었다.
 리가 들어가니까, 검은 머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수색대는 필요없었던 것 같아요."
 리도 웃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상당히 세밀히 설계되어져서 길을 잃기 힘들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에요, 루이스."
 "잘 되었군요."
 루이스도 리가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카라스트라노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식사 전에 셰리 술을 할까요?"
 리가 컵을 받아 들자 루이스는 정원 쪽을 보며 속삭였다.
 "돌아와 보니까, 여태까지 용케 여기를 떠나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요."
 "왜 여길 떠나 살아왔어요?"
 그렇게 말해 버리고 나서 리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리의 질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그 거무스름한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할아버지와 다투었기 때문에."
 요즘에 보이지 않던 조롱하는 기색이 얼굴을 스쳤다.
 "원인은 여자 때문이었지요, 역시."
 "그 약혼하셨었다는 그분 때문에?"
 리는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고 당황하며 덧붙였다.
 "용서하세요.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게 아니었는데."
 "왜? 괜찮아요."
 루이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오히려 당신은 알아 두어야 할 겁니다. 어차피 누군가 당신 귀에 속삭일 테니까."
 루이스는 컵을 리로부터 받더니 팔걸이 의자 쪽을 가리켰다.
 "이 쪽에 앉지."
 자기는 선 채로 말했다.
 "이제 어떤 것부터 얘길 하면 될까."
 "네…"
 리는 어느 정도 조심성있게 질문했다.
 "양친께서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전에도 약간 물어보았습니다만."
 "그렇지, 언젠가 제로니모 부인을 만났을 땐가 얘기했지요."
 조롱하는 듯이 웃음을 띠더니 그는 얘기를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몇 해 후에 말을 타시다가 사고로 돌아가셨구요."
 "그래서 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셨군요."
 "그렇죠, 나는 그분들의 시중이 조련치 않게끔 힘에 겨운 짓을 했던 것 같아요. 나는 그… 어느 편인가 하면 방종스러운 젊은이였지요."
 그가 웃음을 띠자, 리도 따라서 웃어 버렸다.
 "당신께서 방종하셨다니 믿기 어려워요."
 "아니, 난 그런 것 같애. 우리 멕시코 인은 스페인의 피를 받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혈기가 많은 편이어서 그러는 게 보통이죠. 나의… 장난은, 적게 생각지 않았던 것 같애요.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맹렬한 반대에 부닥쳤어요."
 "알겠습니다."
 "알아요?"
 루이스는 흥미있다는 듯이 그렇게 리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멜디스 다스트로. 삼류 캬바레의 댄서였지요. 나도 세상을 좀 아는 것 같았지만 멜디스 쪽이 훨신 더 위였지요. 세상 사람들은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러한 그녀의 정체를 통찰했었어요. 그러나 나는, 나는 결혼할 결심이었어요. 그래서 카라스트라노를 뛰쳐나왔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녀와의 생활을 해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멜디스는 그렇지 않았지. 카라스트라노를 버리자, 카라스트라노에서 아무것도 받지 말자― 이런 것을 그녀는 오히려 기쁘게 생각하리라고 믿었었지."
 "그게 아니었나요?"
 "그게 아니었어요. 결혼식의 꽃을 사러 간 동안에 멜디스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멜디스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카라스트라노이며, 조부의 재산이었지요. 루이스 알드레트는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조소하는 듯한 동작을 보이고는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나이 또래의 젊은 것들은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해 가는 것 같아요. 나는 멜디스를 단념할 수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헤어지고 싶었으나, 그때부터 나는 카라스트라노에서 그녀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부님을 원망했지요. 그런 결과로 모든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영국으로 갔지요. 그때 어머니의 양친은 아직 생존해 계셨고, 어머니의 결혼 때도 충돌이 있어서 양친은 반대했는데 어머니는 거역하고 우리 아버지한테로 달려갔어요. 내가 갔을 때에는 아직도 그 괴로움이 남아 있는 듯했으나 기쁘게 외손자인 나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외조부모님은 그것이 알드레트 집안에 대한 상처가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내가 멕시코의 집을 나쁘게 얘기하는 걸 기뻐했어요. 그래서 멜디스 집으로 들어갔고, 그 후의 일은 알고 있는 것 그대로입니다."
 이제는 다 알 수 있었다. 고독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젊은이. 사랑했던, 배신당한 그녀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던 조부를 원망하는 가엾은 젊은이.
 자신을 위해서 잘 되라고 충고해 주는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게 되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늙은 돈 디에고는 완강하며 관용치 못했던 같다. 저 초상화에도 완고성과 고결성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완고한 태도가 루이스를 이 땅 위에서 몰아내었고, 영국의 알지도 못했던 친척집으로 쫓아 버렸을 것이었다. 적어도 루이스는 그 고향을 잊으려 애썼고,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여자에게서 상처를 입고는 정열적인 모든 것에서 멀어져 버리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카라스트라노를 되찾게 된 지금, 루이스는 오랜 세월의 금제(禁制)에서 풀려난 것처럼 보여진다. 최초에는 그처럼 냉정하게 체결한 계약결혼이 조금씩 내용을 바꾸어 가고 있는 듯싶어 염려되어졌다.
 그것은 리가 자기 집 식구들이 있는 데서는 서로 사랑하는 듯이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날 밤 현관에서 키스를 교환한 이후의 변화였다. 이제는 루이스는 새로운 생활, 새로운 사랑에 눈떠서 재출발을 할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리와의 계약결혼이 끝날 때에 루이스는 정말 헤어질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리는 웬일인지 그다지 반갑지가 않았다. 리는 저도 모르게 눈썹이 좁혀졌다. 리 자신도 처음부터 계약결혼을 할 계획이었고, 그것을 변경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런데… 
 "웬일입니까,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네, 아니… 저, 너무 가엾어서."
 "다 흘러간 옛날입니다. 옛날 일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는 손을 내밀었다.
 "만찬입니다."
 리는 얼른 일어섰다. 표면상으로는 이젠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으나, 이 일만은 잊어선 안 된다고 가슴에 새겨 넣은 것이다. 어차피 이 결혼엔 종말이 오고 만다고.


                   9


 리는 루이스가 방으로 들어왔기에 읽기 시작했던 편지에서 눈을 떼었다.
 리가 카파스트라노에 와서 두 날이 지났다.
 "케리한테서 온 거예요, 그녀를 기억하시겠죠?"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리키의 상점에서 내게 대해 당신과 똑같은 의견을 말하던 아가씨죠."
 리는 얼굴을 붉히며 킥 하고 웃었다.
 "아직도 용서해 주지 않고 있나요?"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걸 당신이 믿어 줄 때까지는."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 주저하고 있는 듯싶더니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보석통을 끄집어 내었다.
 "당신이 아즈텍의 귀걸이가 좋다고 말했기에 이걸 만들게 해보았지요."
 리가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멕시코 시의 박물관에서 탄복했던 것과 똑같은 금으로 만든 귀걸이 한 짝이 들어 있었다. 기쁨으로 눈을 반짝거리면서 리는 갑자기 뛰어올라 루이스에게 키스를 하고 말았다. 또다시 새빨갛게 되었다.
 루이스는 키스를 싫어하는 눈치는 전혀 없고 놀려 주듯이 웃고 말했다.
 "그렇지. 이것이 감사하다는 마음을 직선적으로 나타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그의 눈은 그녀가 당황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했다.
 "또다시 선물할 것을 생각해야지."
 "이젠 너무 많이 받았어요."
 "이런 감사를 받을 수만 있다면, 또 선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몸을 굽혀 리의 입술 가득히 키스를 했다.
 그의 눈에는 따뜻한 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이 카라스트라노에 와서 두 달 동안에 나날이 더해 온 것이었다.
 리는 루이스의 가죽 띠에 붙어 있는 은장식 단추를 보고,
 "승마?"
 하고 물었다.
 그는 영국인이 입는 것 같은 승마복은 입지 않았었다. 검은 바지의 끝을 짧은 부츠 속에 용케 잡아 넣고, 목을 넓게 열어 놓은 명주 와이샤쓰, 거기다가 은장식의 단추가 붙은 폭넓은 가죽띠를 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회사에서 리에게 구술 필기를 시킬 때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어때, 다시 한번 연습해 볼까요?"
 "네, 꼭 하고파요."
 리는 이층으로 가서 루이스의 것과 짝이 되는 부인용의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다. 가장자리가 넓고 꼭대기가 높은 모자를 쥐고 준비를 마쳤다. 보통 승마복보다 훨씬 늘씬한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더니 루이스가 무엇을 생각해 내고 있는 듯이 회화실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에 붉은 명주 목도리를 두르고 리와 같은 가장자리가 넓은 검은 모자를 끈으로 목의 뒤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처럼 루이스의 라틴 혈통이 선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리는 방 입구에서 그러한 그를 바라보았다. 루이스의 모습은 마치 '알드레트 집안의 최후의 한 사람'을 보여 주고 있는 듯했다.
 "오랜 세월 알드레트 집안을 이어온 이 남자들, 그 여자들."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리는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사람이 당신."
 조용히 말한 듯했으나 그것은 루이스의 귀에 들렸다.
 그는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복잡한 시선을 리에게 던졌다.
 "바로 그렇지. 나는 알드레트 가계의 최후의 사람."
 이라고 되풀이하다가 갑자기 계단쪽으로 조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과거는 과거고… 자, 승마 연습을."
 둘은 함께 계단을 내려서 테라스에서 바깥뜰로 나왔다. 마굿간은 거기에 있었다. 카라스트라노로 온 후 두 달 동안에 리가 타고 있는 작은 밤색 털의 암말이 그녀를 보고 울며 인사를 했다.
 리는 말의 매끄러운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마굿간지기가 안장을 놓는 동안에 루이스 쪽을 보고는 한 마리의 검은 말이 가까이 와서 코를 문질렀다.
 "오늘은 틀렸어."
 루이스는 말에게 말했다.
 "내일 타 줄게, 판."
 오늘을 위해 골라낸 말은 흥분하기 쉬운 자색털이 난 것이었다.
 다모트 집안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케리의 친척네 농장에서 새끼말을 타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리의 승마 연습이라곤 해도 처음 배우는 정도는 아니었다.
 카라스트라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은 말에서 내려 언덕 꼭대기에서 흰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리의 눈에는 처음 볼 때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와서는 그 꿈 같은 아름다운 건조물 속에는 초근대적인 설비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컨대 그 평탄한 땅의 끝에 있는 길고 낮은 건물은 소형 비행기의 격납고였고, 카라스트라노의 강가까지 이어진 가로수 옆에는 알드레트 저택과 근처에 있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전력을 보내주는 데 충분한 발전소가 있었다.
 카라스트라노는 전세기의 유물처럼 보이면서도 근대과학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달 전에 처음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 같아요."
 리는 루이스에게 미소를 보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카라스트라노를 되찾으려는 당신의 마음을 알겠어요."
 "그래요. 난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했어요. 다소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결혼은 기쁜 오산이었어요. 불쾌한 정도가 아니지요."
 "그래요?"
 리는 루이스의 시선을 마주보며 별생각 없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어쩔 셈이에요? 이 계약이 끝난 후에는…? 벌써 두 달이 지나갔어요. 앞으로 계속 혼자 사실 작정이에요?"
 루이스는 잠깐 침묵을 지켰으나 갑자기 손을 내밀어 리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또 설교?"
 "나는 줄곧 당신의 장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물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루이스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해 봐요. 당신의 설교는 꼭 듣고 싶으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저에겐 조부님이나 당신도 아주 완강한 분으로 생각되어요. 당신은 명령에 복종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조부님이 바라는 것과도 반대되는 일을 하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충고는 고맙습니다."
 어느 정도 메마른 소리로 루이스가 혼선을 그었다.
 리는 그의 얼굴을 살피었으나 특별히 번거롭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조부님은 만나셨어요, 카라스트라노를 떠난 후에?"
 "몇 번."
 "최근엔?"
 "여섯 달 전에."
 리는 무엇인가를 확신한 듯이 응대했다.
 "조부님께서 유언에 조건을 붙이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조부님께서는 당신과 만나서, 더욱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당신께 카라스트라노를 상속시켜야겠다 생각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당신의 후계자가 반드시 태어나도록 하는 방법을 취했던 거예요. 만약, 다른 유언이 가능하더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당신이 그전의 조건에 도저히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무조건으로 당신이 카라스트라노를 상속받도록 하는 공작이 되어져 있었다고 생각해요."
 "만사를 제쳐 놓고 카라스트라노를 나에게 물려 주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조건을 안 붙였어야 될 텐데, 왜 그렇게 했죠?"
 "당신의 다음 대에도 타인한테 카라스트라노를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였겠죠. 반 년 전 당신과 만났을 때, 조부님은 당신이 결혼할 의향이 없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에요. 사실은 조부님에게 대한 당신의 비난은 잘못된 거예요. 나까지도 당신은 결혼 따윈 생각조차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잠시 동안 둘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대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은 그 조건을 거부하고, 훨씬 뒤에 당신이 말하는 다른 유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되었다는 뜻이군요."
 "이제,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저의 생각이 잘못인지도 몰라요, 다른 유언이란 건 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이런 방법으로 조부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 생각으로는 법률상의 수속이 다 끝나고 카라스트라노가 정식으로 내 것이 되었을 때, 지금 우리의 결혼은 해소되고 새로운 보통 결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카라스트라노의 후계자를 만든다, 라는 겁니까?"
 "그래요."
 리는 눈을 들지 않고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뭔지 대단히 결단적인 것을 자기 입장도 분별하지 않고 말해 버린 거라고 후회를 했다.
 "그러나 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루이스는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꼭 잡았다.
 "리, 당신이 카라스트라노의 후계자를 낳아 주지 않겠소?"
 리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로 몽롱해진 리의 눈과 루이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하여 리는 똑똑히 깨달았다. 나는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다, 줄곧 사랑해 왔다고.
 둘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채로 있었다. 리의 흩어지는 가슴은 어찌하여 여지껏 몰랐었는지 뉘우치는 마음이 가득했다.
 퍽 오래 전부터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었으면서 자기는 깨닫지 못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브루스를 사랑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 형식적인 결혼이 끝나지 않기를 열망했다는 사실, 게다가 그날 밤의 키스에 대한 자기의 반응, 그것만으로도 자기 속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깨달았어야 했다.
 루이스는 최초의 카라스트라노 방문에서 여러 해 동안의 자기 규제를 벗어던지고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태까지와는 아주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남성으로. 브루스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리가 자기의 청으로 깜짝 놀라서 침묵해 버렸음을 알게 된 루이스는 부드럽게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깜짝 놀란 것 같은데. 당신에겐 예상도 못했던 일 같군요."
 리는 생각했다. 과연 예상 못했던 일일까. 자기가 그렇게도 늙은 돈 디에고의 유언의 조건에 구애됐던 심정 밑에는 무엇인지 다른 것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옛날 가문 이름이 사라져 갔었기 때문일까.
 일시적인 위장을 하여 카라스트라노를 되찾아선 안 된다고 하며 루이스를 꾸짖은 것은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다, 거기엔 이 결혼의 최초 약속처럼 다만 거래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깊이 숨겨진 리 자신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의미에서 루이스의 진짜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가 침묵한 채로 있으니, 루이스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다가 꼭 껴안았다.
 "내 아내가 되는 게 어려운 일일까?"
 리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목구멍에 굳은 것이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떨리고, 다만 눈을 크게 뜨고 루이스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줄곧 카라스트라노에서 사는 것은 아니야."
 루이스는 설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번창한 데가 좋다면 멕시코 시에 가면 되고, 바닷가에는 별장도 있지. 당신은 그다지 돈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 것 같지만, 하여튼 돈으로 해결되는 일이라면, 나는…"
 "제발 돈에 대한 건 말씀하지 마세요."
 리는 이 말만 겨우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루이스는 조금 웃어 보였다.
 "당신을 설득시킬 수 있는 알맞는 말을 찾아낼 수가 없지만, 요컨대 당신이 영국으로 가지 않고 언제까지든지 여기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
 "무엇이 필요할 때, 지저분하게 늘어 놓는 사람은 위선자뿐이에요."
 그런 말이 리의 입에서 나와 버렸다.
 루이스의 얼굴에 희망이 되살아나고 팔에 힘을 넣어서 안고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얇은 명주 블라우스를 스쳐 루이스 손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은 것은 아니겠지…"
 하더니 잠깐 사이를 두고 말했다.
 "어때?"
 "네, 좋아요."
 "당신은 두 달 전에 사랑하는 사랑을 잃었어."
 루이스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리는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반응을 루이스는 느낀 듯했다.
 "그러나 이 카라스트라노에서도 생활은 풍부하고… 시간이 흐르면 괴로움은 희미해 가는 겁니다. 나 자신이 경험한 일이지만."
 리는 루이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를 몹시 사랑했었죠?"
 루이스는 미소로 웃으며, 부정하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이미 먼 옛날에 사랑은 꺼져 버렸어. 그때에는 괴로움이 영원히 계속될 듯이 느껴졌었지만… 어느 날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없어져 버리더군. 사랑이란 오직 로맨틱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럼, 지금에 와선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다는 건가요?"
 "낭만주의자가 말하는 소위 이상적인 사랑이란 것?"
 루이스는 목을 흔들었다.
 "만약에 남자와 여자가 사이좋게 함께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어?"
 "저도 동감입니다만."
 그렇게 동의는 했지만, 리는 그의 이론 성립 방법이 틀렸다고 느꼈다.
 곧 사라지는 것은 일시적인 흥분일 뿐이고, 브루스에 대한 자신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참다운 사랑에 직면하면 어느 새 사라져 가고 잊어버리게 된다.
 리의 표정에 구름이 낀 것일까. 루이스는 얼굴을 가까이 해서 그녀의 표정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그 콜웨스턴의 밤처럼 키스를 했다. 그날 밤처럼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불길이 타오르고, 정열의 밀물이 단번에 두 사람을 현실의 바닷가에서 뺏어가 황홀한 물결 사이로 끌어가 버렸다.
 이윽고, 루이스는 팔의 힘을 늦추어 리의 빨개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놀려 주는 듯한 미소가 떠 있음을 보고, 리는 고개를 숙였다. 리는 루이스가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쓸쓸해졌기에 자기로서도 뜻밖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이건 다만, 카라스트라노를 위한 것뿐이죠?"
 바보 같은 질문이다. 방금 자기편에서 모든 것을 카라스트라노를 위해서,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또한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러나 루이스는 이제 무엇을 느낀 것처럼 리의 눈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다만 그 때문만은 아니야."
 천천히 생각하며 말하는 어조였다.
 "그것은 아마 내가 당신이 벌써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사랑할 순 없어도 함께 행복을 찾을 수는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번 키스를 했다.
 "당신에겐 괴로운 일일는지도 모르지."
 겨우 얼굴을 들더니 루이스는 리에게 물었다. 리는 다만 루이스의 이름을 속삭일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결정 안해도 돼. 자, 이젠 슬슬 카라스트라노로 가자. 그리고 당신은 이 말을 잘 생각해 봐줘. 오늘 밤에라도 답변해 주면, 난 기쁠 텐데… 무리하라는 건 아니야."
 둘은 다시 말을 타고 카라스트라노로 돌아왔다. 리의 입장으로서는 그때, 그 장소에서 그렇게 생각했다면 대답이 가능했었다. 그녀는 이제 절대로 카라스트라노를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루이스가 리의 방으로 왔을 때, 창은 열어젖혀져 있어서 가까운 언덕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정원의 장미꽃 향기를 실어 들였다.
 리가 만약에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장미꽃 향기는 평생토록 잊지 못하리라.
 리는 거울 앞에 앉아서 그 길고 반짝이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내가 해줄까?"
 리가 빗을 건네주었더니, 루이스는 리의 풍성한 머리를 천천히 빗겨 주었다.
 그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브러쉬가 바닥에 떨어졌다. 루이스는 머리를 한 다발 들어올리고 거기에 볼을 대었다.
 "아름다운 머리야. 끊어 버리지 말고 그대로 두면 좋겠어."
 리는 가슴이 설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전에 나에게는 유능한 비서가 있었지만… 나는 귀여운 이 아내가 훨씬 좋아."
 리는 몸 전체가 떨려옴을 느꼈다.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이렇게 되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우리들이 서로 자기를 숨겨 놓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되는데."
 루이스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지만 곧 재미있는 듯이 웃어 버렸다.
 "늙은이란 교활하지. 조부께서는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리는 그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의 손이 리의 어깨를 잡았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었다.
 "그럼, 당신은 오늘 밤부터 리 알드레트, 나의 아내다. 당신은 그러면 되지?"
 "네, 전 당신의 아내예요."
 리는 그렇게 낮은 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루이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 하얀 팔에 입술을 대었다.


                   10

 
 이튿날 아침.
 리가 화장실에서 머리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어두워졌다. 눈이 손으로 가려진 것이다.
 "단번에 알 수 있어요."
 리는 웃으면서 루이스의 손을 잡았다.
 "저를 그런 기분으로 만든 심술쟁이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뿐이니까요."
 루이스도 미소를 띠었다.
 "벌써 싫어졌어?"
 그는 리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대었다. 그리고 뒤에서 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하고는 다시 깊은 키스를 했다. 리는 뼛속까지 녹아나는 느낌이어서 가슴이 파도쳤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달콤한 쾌감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었다.
 리가 겨우 얼굴을 들자, 루이스가 장난꾸러기처럼 물었다.
 "어때? 브루스 샤민은 이런 키스를 했어?"
 리는 볼이 붉어짐을 느끼며 웃었다.
 "아ㅡ니, 이런 키슨 당신뿐…"
 그러자 루이스의 입술에 다시 어린애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 내 것이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꼭 들었어요."
 리는 그의 말 흉내를 내어 대답했다.
 이 사람이 정말로 저 영국에서는 얼음처럼 냉정하게 생각되었던 루이스 알드레트일까? 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루이스는 리의 대답을 듣고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 참 기분 좋은데. 그럼 이제부터는 브루스 때문에 머뭇거릴 필요는 없겠지?"
 "절대로 괴로와 안해요."
 리는 똑똑히 부정했다.
 "잘 됐어, 내가 말한 대로야. 괴로움이나 실패는 사라져 간다."
 루이스는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그녀의 아래턱에 대었다.
 "이젠 절대로 당신을 브루스에게로 돌려 보내지 않겠어."
 "틀림없이 그는 스텔라와 결혼할 거예요."
 "우리만큼 행복할까?"
 "이처럼은 아니겠지만요."
 루이스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더니, 리의 화장 속옷으로 들여다보이는 어깨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머리빗을 들고는 사랑스러운 듯이 리의 머리를 천천히 빗겨 주는 것이었다. 
 스텔라에게서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 후 삼 주일쯤 지난 뒤였다. 멕시코에서 촬영이 있어서 비행기로 온다는 내용이었다.
 리는 동생을 만나는 것이 솔직히 말해서 웬일인지 기쁘지가 않았다.
 리는 스텔라가 언니인 자기에게 대해서 저지른 배신을 지금은 꼭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리의 마음에는 유리창의 더러워진 얼룩처럼 깨끗하고 맑게 씻어 버릴 것은 못 되었다.
 리는 사랑하는 남편이 눈부실 듯한 스텔라를 보고 옛날 같은 여자의 마력에 매혹되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해 했다.
 그러나 동시에, 리는 스텔라를 만나고도 싶었다. 스텔라는 가족의 한 피붙이며 그 동생을 통해서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가족에게 알리고 싶어서였다.
 "어머, 스텔라를 만나게 되다니, 멋있어."
 리는 웃으며 말했다.
 "라몬 탈몬테와 공연하다니. 당신 라몬을 아세요?"
 "라몬은 나의 옛 친구야, 매우 인기있는 배우지. 그렇지, 멕시코의 집을 잠가 둘 이유는 없어. 사람을 보내어 공기를 환기시키도록 하자구. 그러면 동생이 와도 모두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리와 루이스가 이곳으로 돌아올 무렵에 그 집은 남에게 빌려주고 있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었다.
 리는 그러한 생각에 어쩐지 동의하고 싶지가 않았다.
 "번거로운 일이잖아요? 호텔에 숙박하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 같애요. 제작진 일동이 함께 오게 되니까요."
 "동생이 오더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이야기, 즉 계약결혼 따위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줘요."
 "당신의 어머니는 스텔라를 통해서 이쪽 형편을 여러 모로 듣고 싶어하실 거야. 그러니까 화제를 갖고 돌아가야 하잖겠어요? 우리들의 결혼이 아주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아시도록 해드려야지."
 며칠 후에 루이스와 리는 멕시코 시로 날아가 시내에 있는 알드레트의 저택에서 평안히 지내었다.
 그것은 안뜰이나 분수까지도 카라스트라노의 건물을 닮고 있었다. 식당의 난로 위에는 늙은 돈 디에고의 초상이 걸려 있고, 가구들은 검은 색깔의 아주 화사한 것뿐이었다.
 리는 창을 가리고 있는 천을 만져보았다. 이러한 비품들을 알드레트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귀중하게 애정을 깃들여 취급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었다.
 루이스는 리에게 이 집안을 다시 정리시켜서 가구의 배치도 바꾸는 등 기분전환을 하도록 제안했다.
 리는 놀랐다. 이토록 살기 좋은 가정적인 분위기를 파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새로운 여주인의 기호에 따라서 집안을 변화시키는 일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리는 이대로 충분하다고 루이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스텔라를 위해서 아래층의 방을 비워 두었다.
 침대 덮개는 자수가 가득히 놓인 것을 준비했고, 가구는 모두 윤이 나는 검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통일했다.
 옷장도 거울도, 방에 붙은 욕탕도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리는 멕시코 시에 있는 동안은 스텔라에게 부자유스럽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동시에 스텔라 자신으로부터도 언니의 심정을 불안스럽게 하는 행동은 삼가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깃들어져 있었다.
 한편 리는 스텔라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루이스에게 눈치채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다.
 가끔 루이스의 의아스러운 눈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육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리는 그것이 자신의 너무나 대견스러움에 지나치게 기뻐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입장에서 질문을 내세우는 것은 불안하다는 심정을 상대자에게 고백하는 일이기에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맑게 개인 날이었다.
 두 사람은 스텔라를 마중하려고 공항으로 차를 몰게 했다. 차가 달림에 따라 그녀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아 갔다. 떠들썩한 말로 속이려고 남편의 얼굴을 슬쩍슬쩍 살피면서도 불안을 참을 수 없었다.
 왜 무슨 구실이라도 찾아서 스텔라를 호텔로 가게 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해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여배우는 일류 호텔에서 스탭진들과 함께 묵는 것이 온당하지 않느냐고 스텔라와 루이스를 설득시키려고 해보았자 그것은 무리한 이야기였다.
 하여튼 이대로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는 편지에 이렇게 써 보냈던 것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이 편리하도록 '부탁한다'고.
 공항에서 마중나온 그들을 발견하자, 스텔라는 리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평소 그대로 정성껏 옷차림을 가꾸어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것을 보고 리의 기분은 다시 침울해졌다.
 재회의 흥분에서 깨어나자 스텔라가,
 "언니, 천지개벽하게 예뻐졌네."
 하고 과장하는 소리를 외쳤다.
 입에서 쏟아지는 말과는 달리 그 눈은 변함없이 조롱하는 듯이 반짝거렸다.
 "결혼했기 때문이겠지. 언니 아주 의젓해졌어. 처음에 보았을 때는 누군가 하고 못 알아봤다니깐, 글쎄."
 루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리는 발랄해 보이죠?"
 "과연 그전보다 다시 태어난 것같이 생기충천이군요. 틀림없이 서방님의 애정이 바다같이 깊은 까닭이겠죠, 호호."
 스텔라의 아름다운 눈은 루이스에게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키스해도 좋겠지요, 루이스 씨? 우린 형제자매 사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 붙어서 꽃잎같이 부드러운 입술을 루이스의 거무스름한 볼에 눌러붙였다.
 리가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강력한 향수 냄새가 그를 포옹했다.
 "아아!"
 스텔라는 긴 속눈썹을 파닥거려 보였다.
 "당신 같은 분을 형부로 삼게 돼서 참으로 기뻐요."
 루이스는 그 대답으로, 나도 당신 같은 처제를 갖게 되어 기쁘다는 따위의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스텔라가 조수석에 앉고 아내가 뒷좌석에 앉아 버리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리가 그렇게 하고 싶었나 보다 하고 단순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리는 멕시코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퍼붓는 속을 공항에서 집으로 향해 오면서 계속 침착을 잃었다. 스텔라의 내방이 자기들의 결혼생활에 금을 긋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앞으로의 몇 주일 동안이란 고뇌의 낮과 밤이 되어지리라. 그러나 루이스는 브루스와는 다르다. 리는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을 놓았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지금까지와 같이 동생에게 변함없는 행동으로 대하면 그만일 거야. 루이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집에 도착하여 스텔라는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방에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리는 식모에게 지시하고 나서,
 "이젠 브루스와의 약혼을 발표했니?"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옷장 앞에 섰던 스텔라는 돌아다보며,
 "약혼 같은 걸 뭣 때문에 해."
 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불쾌한 듯한 빛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스쳤다.
 "요컨대, 브루스는 나라는 여자가 아니고 매력적인 영화배우를 사랑했던 거예요. 브루스가 그렇게 말했는걸."
 "어머!… 그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언니는 언니 일만 해도 벅차니까, 그리고 이제 언니는 모든 게 잘 됐으니까― 나에게는 이렇게 되는 게 적합해."
 그렇게 말하고는 스텔라는 자연스러운 것인지 연기인지 그 귀여운 입술을 떨면서 홱 뒤로 돌아서서,
 "이 얘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 잘 알겠다, 네 기분."
 그렇게 말하고는 리는 얼른 덧붙였다.
 "네가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브루스 따윈 생각지 말고 즐겁게 지내 줘. 이 멕시코 시는 멋진 곳이다. 반드시 마음에 들 거야. 루이스에겐 친구가 많으니까 좋은 사람도 소개해 줄 수 있으니 괴로와할 틈도 없을 거야."
 "고마워."
 스텔라는 이쪽으로 향했는데, 그 긴 속눈썹의 깊은 데에 숨은 눈을 보아도 그녀가 진심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스텔라는 곧 태도를 바꾸어서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이제부터 내려가서 형부랑 같이 얘기를 하자구. 그런 사람하구 결혼해서 참 다행이야, 정말 멋있는 분이에요."
 립스틱을 약간 고쳐 바른 다음 마스카라를 칠하고 나서 말했다.
 "게다가 또 이 집은 대단하군."
 "카라스트라노를 구경하고 나서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리가 그렇게 말하자, 스텔라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카라스트라노로 가기로 했어요? 나는 이 나라가 맘에 들어. 언제까지라도 있고 싶을 지경이야. 이러다간 나를 쫓아내는 데 고생스러울는지도 모르겠네."
 "설마."
 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슴이 덜컹 해서 스텔라 모르게 십자가를 그었다.
 루이스는 큰 방에서 자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식전에 마실 술을 준비하고 스텔라가 안락의자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스텔라의 옷에 대해서, 이 방면에 취미가 있는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식당으로 들어갈 때에는 주인답게 스텔라에게 왼손을 내어 들었다.
 루이스가 정중하게 격식을 차려 부르자, 그녀는 곧 정정했다.
 "미스 노데트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건 일할 때 부르는 이름이에요. 한 가족이잖아요. 그냥 스텔라라고 불러 주세요."
 "스텔라?"
 루이스는 가볍게 반색하며 응대했다. 그리고 그 여운이 맘에 든 듯이,
 "스텔라, 결국 배우라는 뜻이군."
 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스텔라에게 쏠리고, 그녀의 눈의 깊은 광채에 아주 매료되어 버린 듯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두운 별"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루이스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스텔라는 약간 당황한 듯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제 이름에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저는 사실은 더욱 더욱 높이 올라가 훨씬 빛나는 존재가 되고파요. 별 같은 건 새벽엔 사라져 버리거든요. 저는 백주의 태양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걱정할 건 없어."
 리는 그렇게 말했다.
 "너의 인기는 절정인데."
 "그럴까요?"
 스텔라는 루이스에게서 시선을 걷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듯한 말을 내뱉았다.
 "전, 여배우로서 성공하는 것보다 결혼에 성공하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이젠 연기를 하는 것도, 유명인으로서 여러 가지를 요구당하는 것도 딱 질색이에요. 그에 비교하면 결혼은 멋져요. 보상도 훨씬 많고…"
 루이스는 또 스텔라를 향하여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가장 좋은 생각입니다, 스텔라."
 그리고 리 쪽에 미소를 띠어 보였다.
 리의 가슴은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리하여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우린 너를 환영하는 조촐한 디너 파티를 열 예정이야. 멋있는 파트너도 초대했단다."
 "어머, 무슨 계획이 있는 것 같군요."
 "네가 어차피 만나게 될 사람이지만, 한 발짝 앞서서 우리가 초대했어."
 "누군데? 난 얼른 알고 싶어요."
 "라몬 탈몬테. 이번에 너의 영화 공연자다. 멕시코 시에서 가장 여자를 잘 녹이는 사람이란다."
 스텔라는 그런 사내는 흥미가 없었으나, '기쁘군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화제는 최근의 세상 형편으로 옮아졌다. 아까 이층에서 스텔라는 완전히 기가 죽은 듯이 보였지만, 그런 태도가 믿어지지 않게 루이스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틀 후의 밤, 스텔라를 환영하는 디너 파티가 열렸다.
 리는 처음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루이스가 사준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진한 사파이어색의 빌로도에 작은 진주로 솜씨도 곱게 자수가 놓여져 있어, 스커트의 주름은 발꿈꿈치까지 가느다랗게 선을 긋고 있었다.
 상당히 품질이 좋고 이것만으로도 돋보이게 해서 다른 몸치장은 그밖에 필요없었다. 그러고도 리는 거울 앞에서 목걸이를 보석으로 할까, 사파이어로 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럴 때, 루이스가 들어왔다. 그는 화장대 위에 넙적한 모양의 가죽상자를 놓고는 리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고 상자를 들고 뚜껑을 열어 보였다. 진주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마! 멋있어라."
 "당신 목에 걸면 더 멋질걸."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늘고 보기좋은 손가락으로 그 진주를 리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리고 또 같은 짝으로 만든 귀걸이도 끄집어 내어 보였다.
 모든 것으로 몸단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선 리는 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리는 휙 돌아서서 루이스의 목에 팔을 걸고 키스를 했다.
 "어떻게 보답해 드릴까요."
 "감사할 사람은 나야. 나는 사는 낙을 잊어버리고 있었어. 껍데기 속에 틀어박혀 굳어져 버린 세월은, 오직 죽음 그것이었어."
 루이스는 조용히 그렇게 말하고 리를 꼭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를 상냥하게 품에서 떼어놓고,
 "서서히 동생도 준비가 되었겠지, 가서 거들어 주면 어떨까?"
 했다.
 "오늘 밤은 동생한테는 중요한 밤이니까 가능한 한 그녀를 추켜세워 줍시다."
 리가 스텔라의 침실로 가기 전에 루이스는 또 한번 불러세웠다.
 "어때, 동생을 만나서 괴로운 일은 없소?"
 "브루스의 건 때문인가요?"
 리는 미소를 짓더니 목을 흔들었다.
 "괴로운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것은 벌써 아득한 옛적에 잊어버렸어요."
 "그래? 그럼 안심이군. 그럼, 동생이 여기로 온 걸 당신은 기뻐하고 있다는 건가?"
 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곧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네, 그애를 만나 반가왔어요."
 루이스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띠었다. 
 "멀지 않아서 당신 친구인 케리도 여기로 불러오도록 합시다."
 그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소년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누군가 라몬 탈몬테와 결혼하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친구 좋은 사람이야."
 리도 웃으며 말했다.
 "가엾은 라몬, 오늘 밤은 반드시 스텔라의 매력에 완전히 녹아 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잠깐 동안은 케리가 와도 쫓아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 정말로 케리가 여기로 와 준다면 멋질걸요. 그래서 결혼 상대라도 발견했으면 기쁘겠어요."
 "그러나 우선 스텔라를 결혼시켜야 해."
 루이스가 그렇게 말했다.
 리가 스텔라의 방으로 가 보았더니, 그녀는 그 화려한 드레스의 등 가운데 호크와 악전고투 중이었다. 스텔라는 리를 보고는 재빨리 그 빌로도의 드레스와 새로운 진주 목걸이에 눈을 굴리었다.
 스텔라는 빨려들어가듯이 손을 내밀어 진주를 어루만지며 꼼꼼히 정검했다.
 "진짜야, 응? 묻는 게 바보지만."
 "루이스가 아까 주었어."
 "좋군요."
 스텔라는 휙 돌아서 거울을 향해 똑바로 서서 거기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샅샅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상한 표정이 스텔라의 얼굴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스텔라는 이번에는 리의 손을 잡고 손가락을 조사하며 말했다.
 "언니의 결혼이 성공한 걸 축하해."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길게 늘려 놓듯이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성공이라고 한 말은 대단히 요령있게 잘 해간다는 정도의 의미야. 하지만 언니하구 루이스는 '계약' 같은 결혼이겠지?"
 "계ㅡ약?"
 리는 숨을 삼켰다.
 스텔라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는 돌아서더니 언니의 볼을 달래는 듯한 손짓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안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를 위해서 언니는 능숙한 연기를 해 보였어. 그러나 지금은 어때? 만약에 진짜로 저 사람과 결합하자면 여간 현명하지 않고서는 실패할걸. 루이스란 사람, 미인에게, 그것도 영국 여성의 냉담한 아름다움에 상당한 취미가 있는 것 같애요. 나에게 던진 그의 시선을 보고 곧 알게 되었지."
 스텔라의 눈에 조롱하는 듯한 광채가 나타났으나 입만은 리를 위안하는 것이었다.
 "괜찮을 거야, 언니가 바짝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그러나 내 충고를 잘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이 부근의 라틴 미인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말야."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벌써 손님들은 모여 있었다. 리는 벌써 이 밤의 즐거움이 깡그리 없어져 버린 듯이 몽롱한 생각에 잠기며 기계적으로 라몬 탈몬테와 그밖의 손님에게 스텔라를 소개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자기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오늘 밤에는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스텔라는 자기의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보고 질투가 일어난 나머지 저렇게 밉살스러운 말을 지껄인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심술궂기만 한 행동은 아니다. 어떤 경고의 선언인지도 모른다. 만약에 브루스보다 먼저 스텔라가 루이스를 만났다면 루이스에게 눈을 박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텔라는 그것을 지금에 와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리는 자기 미래의 행복에 동생이 불길한 존재로 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스텔라가 신용할 수 없는 여성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루이스였다. 리가 그를 아무리 신용한다 하더라도 아직도 잘 모르는 면이 많이 있는 것이다. 스텔라가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루이스 편에서 숙소를 제공하자는 자청이 있었던 사실을 회상하고 리는 불안해졌다.
 리로서는 지금은 다만 동생이 한시바삐 촬영을 끝내고 무사히 이곳을 떠나 주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스텔라는 라몬 탈몬테가 마음에 든 것처럼 그후 몇 주일 동안은 라몬을 안내역으로 삼고 멕시코 시를 남김없이 보고 돌아다녔고 상당히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리는 동생이 외출했을 때만 안심할 수 있었다. 실제로 루이스는 훌륭한 남편이 되어서 이러한 불안을 갖는다는 것은 그에게 대해서 미안했지만 도저히 그것이 마음에서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던 어느 날 일이었다. 영어를 잘할 줄 아는 가정부인 마리아가 객실에 있던 리한테로 와서 영국의 세뇨르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영국의 신사? 이름은?"
 "브루스…?"
 리가 급히 현관으로 나갔더니, 거기에 확실히 브루스가 있었다.
 그는 약간 어색하고 불안스러운 태도였다. 그런데 리를 보더니, 그전에 약혼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태도로 두 팔을 내밀며 걸어왔다.
 리가 이 거리의 유명한 대저택의 안주인이며,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숙녀로 변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 태도였다.
 리는 놀라서 멈춰섰다.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지요, 브루스 씨?"
 리의 음성은 냉정하였다.
 브루스의 표정에 놀람과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내민 팔을 내릴 힘조차 없이 중얼거리었다.
 "웬일인지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인 것 같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어떻게 브루스는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리는 냉정한 머리로 생각했다.
 "스텔라를 만나러 오셨나요?"
 "그럼 그녀는 벌써 와 있군."
 "그래요, 이럭저럭 삼 주일이나 됐어요."
 리는 브루스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스텔라를 만나려고?"
 거듭 물었으나 주저없이 그렇게 자기에게 손을 내밀며 올 만큼 되고 보면 스텔라를 만나려고 그 멀리서 올 리는 없는 거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매력적인 여동생?"
 브루스는 야유하는 어조로 말했다.
 "벌써, 스텔라와 나의 관계는 끝났어. 나는 천하의 바보였지. 그러나 빨리 눈을 뜬 것만도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바보였다구요?"
 리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것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나를 배신하고, 이번에는 스텔라마저 배신했죠."
 "스텔라가 그렇게 말했나?"
 "배신 안했단 말예요?"
 "스텔라는 틀림없이 눈물을 머금으면서 고백했겠지. 당신의 순결한 동생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듣고 싶은가.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나도 스텔라에 대해서 얼마든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동생 때문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리는 브루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됐어. 그렇게까지 옹호한다면 아무 말도 않기로 하지. 그러나 스텔라가 당신한테 말한 정도는 나도 듣게 해주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졌는지 알고 싶은 거야."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스텔라에게는 내게 거짓말할 이유 같은 것 없을 거예요. 당신은 매력적인 영화배우 같은 건 이미 신물난다고 스텔라한테 말했다면서요?"
 브루스는 고개를 흔들면서 리에게 가까이 와서 그 손을 잡았다. 그의 음성에는 절망적인 여운이 있었다.
 "언제나 당신은 스텔라의 정체를 깨닫게 될까. 그녀는 당신 가족 중 어느 누구와도 닮은 데가 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자기 이외의 사람에 대한 사정 같은 건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 자야. 리, 알아 둬야 해. 스텔라는 단지 나를 조롱했을 뿐이었어. 함께 놀기만 하는 상대로만 사귀었고, 결혼한다는 건 전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만 해도 당신은 스텔라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버렸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지난 일이야. 지금은 벌써 사랑 따윈 하지 않아요."
 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냉정한 태도에 스스로도 놀랐다.
 브루스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무런 감정도 솟아오르지 않았다. 스텔라에 대한 동정심도 없었지만, 역시 언니의 입장으로써 동생을 변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참으로 당신은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식어지는 사람이군요. 저는 동생을 비난하고 싶지 않으며, 또 당신들의 일에 대해서 이미 흥미를 잃고 만 사람이에요."
 브루스는 짤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스텔라는 뭣을 하든지 책망할 것이 못 된다는 건가… 항상 순결한 죄 없는 처녀란 말인가. 그러나 멀지 않아 그녀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 때가 올 거야. 그때에 가서 호된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해요."
 리는 재빨리 브루스의 손을 뿌리쳤다.
 "그런 말씀하시려면, 어서 돌아가 주세요. 대체 뭣 때문에 이곳에 오신 거죠?"
 "난 당신은 데리러 왔어."
 리는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잠깐 가만히 브루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당신은 제가 루이스와 결혼한 걸 잊어버렸나요?"
 "그러나 다만 계약결혼이라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리, 나와 함께 영국으로 가요. 당신과 함께라면 원만할 거야. 스텔라에 대해서는 한때의 불장난이었어."
 "그래서 우리들의 약혼을 해소한 시점에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자는 건가요?"
 "루이스와의 결혼은 파기할 수 있겠지?"
 "만약에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뭐라구?"
 리는 담백한 심정으로 말했다.
 "명백히 밝혀 두지만, 이젠 루이스와 헤어질 생각은 없어요, 브루스. 당신이 스텔라를 버렸다든가, 스텔라가 당신을 버렸다든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저는 루이스를 사랑하고 말았어요. 틀림없이 처음엔 계약결혼으로 끝낼 계획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이혼 따윈 제가 생각할 게 아니예요."
 그의 눈에는 분노가 뻗쳤다.
 "망할 것! 역시 스텔라의 말이 맞구나. 스페인 자식이 그런 계약쯤 지킬 리가 없지. 스텔라는 그렇게 말했어."
 "그런 언사는 듣고 싶지 않아요."
 리는 내뱉듯 말했다.
 "잘못했소."
 브루스는 뜻밖에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상하군요. 어째서 스텔라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브루스 씨, 당신이 스텔라에게 저의 결혼이 단지 계약결혼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던가요?"
 그래서 스텔라는 자신의 마음이 아직도 브루스에게 있다고 오해하고 자기는 몸을 빼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약혼 파기의 책임을 브루스에게 전가시키는 말을 했을까? 아니야, 그럴 리는 없다. 스텔라는 실제 내용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여기 왔을 때 곧 그걸 말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미안한 듯이 대답했다.
 "그녀에게 말하려고는 하지 않았어. 어쩌다 무심코 말이 미끄러지고 말았지…"
 갑자기 그때 스텔라가 뜰과 마주선 문의 창가에 나타났다.
 "리 언니, 언닌 그 장소를 모르실까…"
 말문을 열었다가 놀라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브루스를 보았던 것이다.
 스텔라의 놀람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연기였다.
 "어머! 브루스, 어떻게 여길…"
 리는 스텔라를 달래듯이 곧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 돌아가시는 길이다."
 "아니, 금방 안 가요."
 브루스가 딱 잡아떼었다.
 "가기 전에 이것만은 확인해 둔다."
 브루스는 스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또 무슨 말을 조작해서 리에게 말했지?"
 스텔라는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길을 언니쪽으로 돌렸다.
 "리 언니, 무슨 말인지 전 전혀 몰라요."
 "모르겠지."
 브루스가 야유를 가득히 담고 말했다.
 "너는 나와 결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장난삼아 약혼하고 그걸 고의로 깨뜨렸으면서도 그것이 거짓이란 말이지? 너는 나를 조롱하면서 맘대로 즐겼다는 기억조차 없단 말이지? 약혼을 깨뜨리고도 너에겐 아무 책임도 없다는 뜻이지?"
 스텔라는 애원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이봐요, 리 언니, 정말 이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닥쳐!"
 브루스가 외쳤다.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있을 거야. 네가 여기로 온 것은 리의 결혼생활을 파괴시켜 주자고 하는 속셈이었지? 너는 리의 결혼식 때 루이스 알드레트를 보고 그의 전재산을 몽땅 낚아채기로 결심하지 않았었나?"
 리는 사람을 부르려고 벨이 있는 데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브루스가 그 손을 막아 버렸다.
 "아니야, 좀더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줘."
 "이젠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했을 거예요."
 리는 벨을 틀어잡고 힘껏 눌렀다.
 "샤민 씨가 가신대요, 티나."
 리는 스페인 말로 외쳤다.
 "전송해 드려요!"
 가정부 우두머리가 나와, 브루스는 음성을 낮추었다.
 "알았어, 그럼 가지. 그러나 멀지 않아 반드시 날 만나고 싶어질 거야. 나는 이 부근의 멘데트에서 숙박 중이니까 만약 내게 볼일이 있거든…"
 "당신을 번거롭게 할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럴까?"
 흘끗 스텔라 쪽을 보고, 브루스는 냉소를 지었다.
 "리, 당신은 나와 영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단언하지만."
 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티나를 따라 나갔다.
 두 자매는 한동안 가만히 상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니, 언니는 브루스가 한 말 따윈 믿지 않지?"
 스텔라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물론이지."
 "고마워. 쓸데없는 말 따위는 믿지 말아 줘요."
 스텔라는 흘끔 언니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런데 뭐예요, 그 계약결혼이란?"
 하고 물었다.
 "그럼, 정말 그 사실을 몰랐었니?"
 "물론이죠. 전 언니는 상당히 행복한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행복하지."
 "그럼, 이 결혼이 정략적이란 건?"
 "그건 말이야, 루이스는 카라스트라노를 상속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써 결혼해야 했던 거야. 나는 그런 결혼이라도 하면 브루스와 네가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었어."
 스텔라는 부끄럽다는 듯이 보였다.
 "어머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리는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만사는 잘 되어 가는 것 같다. 처음에는 루이스에 대해서 조금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러나…"
 "그렇다면, 일시적인 결혼이란 뜻이군요. 그게 사실이라면 빨리 헤어지는 편이 좋겠어."
 스텔라의 언질에 대해서 리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그게 달라졌다니까."
 리는 당황해서 덧붙였다.
 "우리들은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어. 때문에 루이스는 진짜 결혼을 하자고 했지. 지금의 우리 사이는 몸도 마음도 일체가 되어버린 부부인 거야."
 스텔라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리 언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못 알아듣겠어. 만약에 이 결혼의 미래에 자신을 가지지 못하겠으면, 이혼해 버리는 거예요. 아니, 그런데 지금 단계에서 결혼생활에 백 퍼센트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리는 자신있는 듯이 미소지어 보였다.
 "나에겐 자신이 있단다. 이혼 따윈 하고 싶지 않아요. 벌써 브루스 따윈 만나고 싶지도 않다니까. 난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단다, 죽도록."
 스텔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그럴까? 그전에는 브루스를 좋아하고서."
 "자신이 있어. 그야 브루스를 좋아는 했었지만 사랑한 건 아니었거든. 지금에 와서 그것을 똑뜩히 알았단다."
 스텔라는 수수께끼 같은 시선을 리에게 던졌다.
 리에게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인생에는 여러 가지 오해나 실패가 있는 것이다, 라는 건가요?"
 어깨를 움츠리며 스텔라가 말했다.
 "자, 이젠 브루스에 대한 일일랑 말끔히 잊어버리고 옷이나 갈아입자. 루이스가 일을 마치면 어디든 구경하러 데려다 준댔으니까."
 그날 오후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내내 스텔라는 무슨 생각에 깊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자 드라이브가 대단히 즐거웠노라고 루이스에게 인사를 했다.
 저녁식사 전에 스텔라는 리보다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사 전에 술을 마시게 되어 있는 객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루이스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칵테일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는 시간이 조금 늦어 바삐 객실로 내려갔다. 그날 오후에 오고간 이야기에서 동생의 의문은 풀렸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가 객실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혼자 계실 때 만나게 되어 다행이에요, 루이스."
 스텔라의 아름답고 맑은 음성이었다.
 "저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있어야죠. 그런데 오늘 오후 조그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도 이것만은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루이스는 놀란 듯하며 조용한 소리로 대답했다.
 "괴로움이 있으면 혼자 걱정하지 말고 말해 봐요."
 "언니와… 브루스의 사건인데요."
 "뭐라구?"
 "참말로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
 스텔라의 음성이 약간 낮아졌다.
 어째서 리는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은 적어도 그녀에게는 마땅치 못했다.
 그러나 자기의 이름과 브루스의 이름을 듣고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그러나 전 알고 있어요, 형부가 카라스트라노를 상속받기 위해서 리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루이스는 잠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러니까 형부가… 아직 언니하구 표면상만으로 결혼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두 분이 계약을 실행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언니도 요령껏 임시 조치로 그 자리만을 좋도록 꾸미려고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 결혼의 진짜 이유를 리가 당신에게 말했습니까?"
 "아니예요. 다만 상세한 사정을 어떤 사람에게 실토하고 있는 것을 제가 들어 버렸어요."
 "이런 개인적인 일을 누구한테 이야기했을까?"
 "브루스입니다."
 "아!"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리에게 들렸다. 리의 발은 뿌리박힌 듯해서 방으로 뛰어들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와 약혼했던 그 남자?"
 "네, 물론 저하구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는 리 언니를 무척 좋아해요.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는. 그러나…"
 스텔라는 거기서 긴 한숨을 쉬고는 수줍어하던 태도를 송두리째 빼버리고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브루스가 찾아왔을 때, 저는 뜰에 있었어요. 사실을 말한다면, 그 사람의 택시가 가까이 왔을 때 마침 저는 금방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저는 방해가 될까 봐 나가고 싶었지만."
 스텔라는 여기까지 단숨에 말하고 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전달되었으면 했어요, 둘이 현관에서 펼친 정서 가득한 재회 장면이."
 루이스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때에 비로소 리의 결혼 얘기도 엿들었어요. 언니는 이 결혼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실토했습니다. 브루스는 언니를 영국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어요. 리는 그럴 순 없다고 대단히 놀란 음성이었습니다."
 "브루스가 멕시코에 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저런, 리가 말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럼, 더욱 곤란하군요."
 "곤란하다니, 무슨 뜻이지?"
 "왜냐하면 그들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
 루이스의 대답은 왜 저렇게 매정할까.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구나. 문 밖에서 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음성에는 전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특별히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리는 어째서 브루스에 대한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문 건너편에서 스텔라의 얘기는 계속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사실까지 얘기해 버린 것은 리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예요. 언니는 행복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리고 형부께 있어서도 퍽 중요한 사람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럼, 스텔라는 내가 언니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로군."
 "언니는 행복한 체 가장하고 있는 거예요. 제 눈을 속일 수 없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언니를 잘 알고 있어요. 알아들으시겠어요? 그리고 이런 복잡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저 때문이에요. 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언니가 행복하게 살아 주었으면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처제가 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대단하군요."
 루이스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때서야 겨우 제정신을 회복한 리는 큰 숨을 들이마시고 발소리를 내면서 객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 이야기를 엿듣지 않고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 듯이 웃는 얼굴로 행동하였다.
 루이스 자신은 평소보다 불친절한 태도로 그날 밤 식사를 마칠 동안 계속 리의 표정에 주의를 쏟고 있었다. 스텔라는 흘러넘칠 듯한 미소를 퍼부어 가며 리를 반겼다.
 리는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대단히 미묘한 입장에 서게 되자 난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브루스가 영국에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왜 루이스에게 침묵으로 흘려보냈던 것일까? 그 때문에 사태가 더욱 복잡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리는 스텔라가 고의로 이러한 상황을 조작했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언니의 행복을 질투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스텔라는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들은 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여태까지의 사실들을 모두 잘 정리해 보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그날 밤, 부부는 서로 침대를 달리해서 잤다. 둘만이 기억하고 있는 저 기념할 만한 밤부터 이 시간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루이스는 저녁식사 후에 친구한테로 찾아 나갔으나 돌아온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리를 깨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몰래 다른 방에서 잤다고 우기면야 그럴듯이 납득도 가겠지만 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마치자 지금부터 카라스트라노로 돌아가야겠다고 루이스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곧 짐을 꾸려야겠어요."
 리가 말하자, 루이스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나는 한 이삼 일 동안만 다녀오려고 하니까."
 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침묵을 지켜 버렸다. 여기서 다투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리가 짐을 꾸리는 일을 돕기 시작하자,
 "왜 그전 약혼자가 찻아온 걸 얘기 안했소?"
 하고 물었다.
 "얘기할 참이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소?"
 "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만약에 이때에 루이스가 키스라도 해주었더라면 리는 얼마나 용기가 났었을까. 그러나 루이스는 덤비는 듯이 여행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늦어질 것 같다고 하면서 나가 버렸다.
 리는 현관에서 그가 탄 차가 멀리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바라보고 있었다.
 리는 혼자 남겨 버려진 것이었다.
 자신도 응당 카라스트라노로 가고 싶었다. 지금 그녀는 상상 속에서 카라스트라노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몇 분이면 집으로 갈 수 있을 텐데."
 카라스트라노는 리에게 있어서는 이제 고향이 되어 있었다.
 자기가 태어나 자라난 콜웨스턴 이상으로 '정든 고향'이라는 느낌이 충만했다.
 물론 영국의 고향땅도 그리웠지만 카라스트라노는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아주 다른 감정이 깃들여진 곳이었다.
 지금에 생각하면 브루스와 결혼 직전까지 갔었던 사실이 무섭게 생각되었다.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망상은 사라지고 비로소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를 발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만약에 스텔라가 그 당시에 콜웨스턴에 와 있어서 브루스를 만나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어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루이스 알드레트에 대한 자기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다름아닌 스텔라가 아니었던가.
 리는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루이스는 지금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이미 카라스트라노에 도착했을까? 함께 가 주었더라면 계단을 올라갈 동안에 나를 껴안아 올렸겠지, 그리고 널찍한 현관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와 있다는 생각 이상으로 뭔가 마음의 고향같이 느껴졌다. 마치 섬세한 면사포 속에 싸인 듯한 황홀한 행복의 나날의 회상이 끊임없이 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샤워에서 금세 돌아와 있는 루이스, 청동기(靑銅器)같이 건강에 넘치는 모습, 아직도 젖어 있는 검은 머리… 야회복을 입은 세련되어 완벽한 스타일의 루이스. 잘 어울리는 멕시코 식으로 만든 승마복을 입고 명랑하게 웃고 있는 루이스.
 알드레트 가계(家系)의 선조들의 초상화가 있는 회화실. 알드레트의 자손들을 위해서 남겨진 하얀 담벽의 공간.
 그 공간은 전에는 공간인 채로 남겨질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리는 언젠가는 사랑하는 루이스에게, 당신이 최후의 자손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고 말리라고 하는 흐릿한 기대 속에 있었다.
 리가 회화실로 들어서면 반드시 루이스가 와서 리를 그 벽 앞에 세워 놓는 것이었다.
 지금 그러한 것을 회상하면서 리는 웃음이 터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든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남성이 바로 루이스다.
 저 둘만의 자그만한 비밀의 낙원이라고 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대체 어떻게 되어졌단 말인가? 루이스는 자기들의 위장 결혼을 진짜 결혼으로 바꾼 것을 후회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역시… 브루스와의 사건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다음 날 리는 브루스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브루스가 이 이상 사건을 만들어 분규를 일으키지 않도록 못을 박아놓고 싶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호텔에 없었다. 외출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집으로 돌아왔으나 도저히 안정이 되지 않아서 정처없이 다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스텔라하고는 이미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내내 스텔라는 골치가 아프다면서 차양을 내려놓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어차피 리는 이제부터는 스텔라를 신용하고 싶지 않았다. 리는 현재 이 세상 아무도 신용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생각을 맛보고 있었다.
 리는 남국의 강렬한 태양 밑에서 몽롱한 발걸음을 서서히 옮겨 돌아다니다가, 시들어 버린 풀처럼 피로에 지쳐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11

 
 리가 뜰에서 직접 응접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스텔라와 브루스의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밀회였다.
 그 순간에 리는 콜웨스턴의 집에서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던 때의 일을 회상했다. 그때에는 충격과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즉각 몸을 피해 버렸으나, 이번에는 잠시 몸을 숨겼을 뿐, 거기 멈춰서서 귀를 기울여 흘러나오는 이야기소리를 듣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저는 말이죠, 당신이 조금 더 기뻐해 줄줄로 알았어요."
 스텔라는 가볍게 대꾸하는 어조로 말했다.
 "결국엔 모두가 당신을 위한 결과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내게는 조금의 양심은 남아 있다. 너처럼 할 수는 없어."
 브루스는 대답했다.
 "어머! 그래도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수법이거든요. 틀림없이 당신은 저한테 깍듯이 감사의 예의를 지켜 줘야만 될 거예요. 저는요, 벌써 리의 이혼을 위한 기초공사는 완성했다니깐요. 당신은 한시바삐 리를 설득시켜 영국으로 끌고 가세요."
 "어머! 저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리는 문을 홱 열어젖히며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너는 나와 브루스의 약혼을 깨뜨려 놓았다. 그러나 알아 둬라, 스텔라. 나와 루이스의 결혼을 파괴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리는 동생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스텔라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여지는 것이었다. 
 스텔라의 어떠한 사소한 언행도 확실한 의미가 깃들어 있어서 지금까지의 동생에게 대해 품고 있었던 이미지가 엉망진창으로 깨어지고 부서져 내리는 것이었다.
 스텔라가 여유만만하게 이쪽으로 돌아앉았다. 잠시 동안 스텔라는 말없이 있었으나, 그러는 동안에 점점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언니는 예상하지 않는 데서 나타나는 도깨비 같은 취미가 있군요."
 했다.
 스텔라는 천천히 자신있게 말했다. 별로 부끄러워하는 눈치도 없고 당황해 하지도 않았다.
 "마침 여기 나타나게 된 건 내 운이 좋았던 탓이야."
 리는 조용하게 말했다.
 "얘 스텔라야, 소란을 피우게 한 말을 퍼뜨리고 다닌 게 대체 누구니? 내가 몰랐다면 너는 그 흉칙한 음모를 성공시켰을는지도 몰라. 대체 너는 루이스에게 무슨 얘길했었지? 저렇게 훌쩍 카라스트라노로 떠나가게 한 건, 네가 뭣인가 쫑알댔기 때문이지?"
 "몰라요, 그렇게도?"
 스텔라는 비웃는 듯이 말했다.
 리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한테 묻는 것부터가 무리란 말이지? 알았다. 나는 루이스한테 따질 테다."
 그리고 나서 잠깐 말을 중단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엄격한 어조로 바꾸었다.
 "스텔라야, 나는 네가 말한 대로 이 결혼을 파괴하는 장난 따위는 하지 못하게 할 거다."
 스텔라가 어떤 인간인지 속속들이 알고 난 지금, 리는 다모트 집 식구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미인을 오해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어두운 별'
 그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그 이름.
 그것은 이제 새롭게 불길한 의미의 날개를 펼치면서 리의 귓전을 때렸다. 그 점쟁이 할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리는 자기의 행복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설사 양심의 가책을 받는 수단이라 할지라도 모든 무기를 철저히 사용하여 스텔라의 음모와 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에 와서 리는 스텔라라는 여자는 어떤 남성과도 진실한 사랑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루이스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이거야말로 루이스를 위해서 싸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행복을 수호하기 위해서 나는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스텔라의 음성이 리의 상념을 깨뜨리며 뛰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언니는 날 나가 달라고 하겠지?"
 "당연하지, 그건."
 조금도 변함없는 엄격한 태도로 리는 말했다.
 "언닌 루이스에게 어떻게 말할 작정인가요?"
 하는 스텔라의 얼굴에는 냉소가 비쳤다.
 "동생이 부자 남편을 뺏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나 말할 셈인가요?"
 스텔라는 문 앞쪽으로 걸어가서 기대더니 거기 머물러 선 채 들뜬 미소를 지으며,
 "리 언니에게 최후의 충고를 던지겠어. 언니는 브루스하고 다시 합치는 편이 좋겠어요. 그러나 나는 한사코 루이스를 가지고 말 거야."
 했다.
 "우리의 결혼을 깨뜨리는 따위의 장난은 내가 용인할 수 없어."
 "어마마! 나하구 싸울 텐가, 정말?"
 그 음성 속에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믿고 있다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어조가 풍겨 있다.
 리는 그래도 엄격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해보자, 너 스텔라."
 "그럼, 발악해 보시지."
 스텔라는 잠깐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나갔다.
 리는 차디찬 물결이 서서히 온몸 가운데로 퍼져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말을 내뱉았지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스텔라는 그렇게 아름다운데다가 전혀 양심의 찌꺼기 하나도 느낄 줄 모르는 비정한 여자였다.
 우리 멕시코 인에겐 스페인 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쉽게 감정에 빠져드는 면이 있어, 라고 말하던 루이스의 말이 생각났다. 스텔라가 노리고 있는 것은 루이스의 그러한 면이리라.
 "휘유!"
 브루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당신이 거기서 스텔라한테 그렇게 단호하게 얘기할 줄은 몰랐소, 리."
 브루스는 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승산은 없어. 스텔라가 상대자인 이상엔."
 "전 해볼 작정이에요."
 브루스는 힘을 내어 리를 끌어들이려 했다.
 "루이스 따윈 스텔라에게 줘 버리지. 우리는 다시 한번 행복을 틀어잡아야 해. 반드시 되고 말 거야."
 리는 그를 떨쳐 버렸다.
 "벌써 우리 사이는 끝났어요."
 "스텔라는 양심 따윈 전혀 없는 계집애란 말이야. 목적을 위해선 무엇을 저지를지 몰라. 만약 당신이 지금 곧 나와 영국으로 돌아간다면 불행한 꼴은 면할 거니까."
 "저는 루이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스텔라는 루이스를 불행하게 만들 거예요."
 브루스는 갑자기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자 재빨리 리를 끌어안더니,
 "당신이 루이스를 사랑한다니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속삭였다.
 리의 냉담한 태도가 브루스의 격정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팔 속에서 버둥거리는 리를 더욱더 끌어당겨 조이면서,
 "리, 당신은 날 사랑하고 있어. 당신은 스텔라 때문에 루이스와 결혼한 것뿐이잖아."
 했다.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접근시켰다. 리가 얼굴을 돌리자, 그의 음침한 분노가 폭발했다.
 "이렇게 하면 알겠지."
 하더니 무리하게 강제로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역효과였다.
 리는 자기가 브루스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혐오감을 가졌음을 그 순간까지 몰랐었다.
 스텔라는 그러는 동안에 현관까지 나갔으나 루이스의 거무스름한 커다란 몸을 보고 멈춰섰다. 그리고 의미심장하다는 듯한 웃음으로 루이스 앞에 막아섰다.
 "저쪽으로 가지 마세요."
 루이스는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왜냐구요? 저기에 브루스가… 리와 하나가 돼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이스는 무의식중에 걸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스텔라가 그 팔을 눌렀다.
 "노하지 마시고… 전에 말씀드렸지요, 출발하시기 전에 저들의 일은."
 그리고 잠깐 숨을 들이키고 나서 말했다.
 "제가 한 말을 생각해 보셨나요?"
 "물론."
 그렇게 말하고 루이스는 스텔라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무엇인가 더러운 것이 닿은 듯 스텔라의 손을 떨쳐 버렸다.
 "나와 아내의 생활에 간섭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집에서 나가 주기 바란다. 내 집에는 스페인 전통의 가풍이 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것을 깨뜨려야 할 때가 왔어.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거든. 당신 동생은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으로 언니의 행복을 더럽히려고 온갖 발악을 하고 있는 짐승이다, 라고."
 "저에게는…"
 스텔라가 말을 끼워 넣으려는데 루이스가 그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리고 네게서 들은 것을 생각해 보았지. 그러나 나는 아내가 브루스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브루스는 너 같은 계집애 때문에 리를 버린 남자다. 나는 그런 비겁한 인간에게 그녀를 돌려 줄 수가 없어. 자, 한시바삐 나가 줘."
 그렇게 말하고는 루이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금 스텔라한테 제지당한 방으로 들어갔다. 스텔라는 잠시 동안 어쩔 줄 모르고 어안이벙벙해 서 있다가, 이윽고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 루이스가 들어간 방문을 향해 온갖 욕지거리를 다 퍼부었다. 그리고 쾅쾅 발을 구르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루이스는 벌써 뒷손으로 문을 닫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루이스가 방안에 들어섰을 때, 브루스가 마침 리에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만약에 스텔라가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크게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는 브루스에게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으며 한쪽 손이 자유롭게 되자, 주먹을 틀어쥐고 상대의 배를 쥐어박았던 것이다. 브루스는 비명을 터뜨리면서 몸을 비틀어 리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좋지 않은 방법을 쓰는군. 보통은 따귀를 후려갈기는 거야."
 루이스의 우스꽝스러워 하는 음성에 둘은 동시에 돌아다보았다.
 리는 파랗게 질리고, 브루스는 어쩔 줄을 몰랐다.
 루이스는 조소와 경멸을 깃들이면서 가볍게 반기듯이,
 "안녕하십니까?"
 라고 조용히 말했다.
 "처음 뵙겠지만,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는지."
 "곧 떠나 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빨리 작별하다니 유감이군요. 그러나 당신이 갑자기 출발한다는 건 당연한 일로 생각하죠."
 루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점잖게 머리를 숙였다.
 "안녕히 계십시오."
 브루스는 입속에서 뭔가를 중얼대고 있었으나, 홱 돌아서더니 달려나가 버렸다.
 "알드레트 가계의 사람으로서는 나는 보기 드문 자제심의 소유자지."
 루이스는 조용히 말했다.
 "난 영국의 피도 섞여 있으니까."
 "루이스…"
 리는 두 손을 내밀며 남편에게로 달려와 안기려 했으나,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아 우뚝 서고 말았다.
 브루스와의 그러한 현장을 목격당하여 버리자, 어떻게 설명을 해야 알아들을지 막연했다.
 루이스는 곧 평소와 같은 명랑하고 웃음담긴 얼굴이 되었다.
 "설명이나 변명은 필요없어요, 당신은 내 것이야."
 루이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런 사내한테 당신을 딸려 보낼 순 없어. 당신은 내가 그런 허락을 할 것 같았어?"
 리는 숨을 몰아쉬면서 루이스에게 꼭 매달렸다.
 "루이스, 전 영국으로 가기 싫어요. 믿어 주세요. 스텔라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전부 거짓이에요."
 "난 당신을 믿고 있소.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와 함께 가고 싶어해도 난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어."
 행복한 생각이 리의 몸을 마비시켰다.
 "어머! 떠나다니, 그럴 리가?"
 리는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할 순 없어. 싸워서라도 난 당신을 놓치진 않아."
 다음 순간 리의 몸은 루이스의 팔 안에 들어 있었고, 리는 키스의 폭풍에 휘말려 들었다. 완전한 사랑과 신뢰가 거기에 있었다. 남편과 아내는 그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리는 스텔라에 대한 것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루이스와 리는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랑의 방파제를 굳게 굳게 쌓아올려 왔었던 것이다.
 루이스의 검은 눈동자가 젖어오며 뚫어지도록 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까지의 역사는 참으로 길었었죠?"
 리는 생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저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이 카라스트라노의 후계자를 낳아 달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모르고 있었어요. 그때서야 저는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어요. 당신에게 여러 가지 이론을 펼쳐온 것도 무의식중에 이 결혼이 진짜였으면 하는 기대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카라스트라노의 이야기를 해서 제 자신의 본심을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
 루이스는 온화한 웃음을 떠올리었다. 모든 것이 흡족한 것처럼 보였다.
 "나도 그랬어.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지. 그때 당신을 영원히 나의 아내로 만들고 싶었어."
 "당신은 그때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였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은 인간이나 같으니까."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검은 눈이 그녀의 눈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우린 둘 다 완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군."
 갑자기 루이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아까 스텔라에 대해 무슨 얘길 했었지? 염려되는 거라도 있는가?"
 리는 눈을 내리떴다.
 "아ㅡ뇨, 이제 괜찮아요."
 이제는 스텔라 때문에 충돌이 일어날 걱정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동생한테 관대한 기분으로 대하고 싶었다.
 "당신도 스텔라가 어떤 사람인가를 지금에야 깨달은 것 같군."
 루이스는 리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리는 놀랐다.
 "루이스,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조용한 음성이었다.
 "지금 같으면 내가 그녀더러 나가라고 해도 화를 내지 않겠지?"
 리는 웃어 버렸다.
 "어머, 루이스, 당신이 스텔라에에 나가 달라고 하셨다구요? 저 역시 같은 말을 그애에게 했었지요."
 "그건 잘했어. 생각하는 각도가 똑같았군."
 그렇다, 똑같은 것이었어. 행복감에 도취되면서 리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이스가 카라스트라노에서 되돌아온 것도 이 결혼을 지키려고 결심한 까닭인 듯싶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황급히 출발했었던가?
 "그런데 스텔라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시면서 어째서 카라스트라노로 가버렸어요? 그애의 말이 원인이 아니었던가요?"
 리는 큰맘 먹고 물어보았다.
 루이스는 수긍했다.
 "그렇지, 스텔라가 하는 말에도 조금은 진실이 포함된 듯싶어서. 우리가 맺어졌을 때, 당신은 아직도 브루스 샤민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루이스는 손은 내밀어 리의 손을 잡고 자기의 양손 안에 감싸쥐었다.
 "나는 당신이 그 동안 이해해 준 것으로 생각하고, 이렇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 결혼한 게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사실 당신은 행복하게 보였지. 그런데 동생이, 브루스는 아직도 계속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그는 이것이 다만 계약결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데리러 왔다고 하겠지.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대해서 진심이 아닌 충실을 내세워서 브루스를 쫓아 돌려보내 버렸다고 했어.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러한 점에 진실이 있는 듯했었어."
 그리고는 루이스가 확실한 어조로 바꾸어 말했다.
 "그때에 나는 얼마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었지. 당신과 함께 있음으로써 얻어진 행복은 다만 성격이 맞는다든지, 당신이 매력적인 미인이라는 점만은 아니라구. 나는 자신이 얼마나 깊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어. 갑자기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좋으랴. 확실히 나와 함께 있는 당신은 행복하게 보였어. 그러나 그 영국사람을 마음속으로 지금도 계속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와 싸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카라스트라노에 돌아가서 당신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지, 그리고 결의를 굳힐 작정이었어.
 그러나 카라스트라노에서 당신과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찾아낼 필요는 없었어. 그것은 카라스트라노에는 가는 데마다 넘쳐나고 있었어. 당신과의 즐거웠던 나날의 회상이 그 일대에 굴러다니고 있었지. 나는 놀라 버렸어. 우리들이 서로가 사랑하지 않고 지냈었다면 카라스트라노의 달력이 그렇게까지 행복으로 흘러넘쳤을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것을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하룻밤이면 충분했어.
 당신은 아직도 내가 품고 있는 이러한 생각을 잘 모르고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확신했던 거야. 그러니까 나는 금방 돌아왔지. 만약에 당신이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희망하여도 나는 당신을 보내지 않으려고 결심했어. 나는 당신에게 대한 사랑에 완전한 자신을 갖게 되었으니까. 지금 잠깐 동안은 원만하지 못하더라도 참고 견디어 내려고 생각했던 거야. 당신이 나의 것이고, 또 한 남자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각성할 때까지는."
 리는 갑자기 웃어 버렸다.
 "과거의 유물이라고요. 누군가가 버리고 잊어버린 헌 장화 같은 것이군요."
 이 말을 듣는다면 브루스가 얼마나 노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그 헌 장화마저 사라져 가 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우리들이 같은 시간에 똑같은 생각을 제각기 하고 있었다니…"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당신도 나도 서로 서로가 굳게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어. 스텔라는 우리들에게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왔었는지도 모르지."
 루이스는 리를 꼭 껴안고 키스를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카라스트라노로 돌아갔다. 이번만은 누구한테서도 훼방당하지 않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어두운 별'은 사라져 가고 말았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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