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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는가

by Casey,Riley 202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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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 어떻게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는가
Chapter 6: How We Create Desire-independent Reasons for Action

 I. 연루(commitment)의 기본 구조.

 인간의 합리성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능력이자 인간이 원숭이와 가장 차이나는 점이 바로 행위의 이유로서 욕구 독립적 이유들을 창출해내고 그에 따라 행위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유들의 창출은 언제나 스스로를 여러 모로 연루시키는(commit) 행위자의 문제다. 고전적 모델은 그런 욕구 독립적 이유들이 존재한다거나 합리적 구속력을 갖는다는 점을 설명해주지 못하며, 또 사실 고전적 모델의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 있다는 점 자체를 부정한다. 우리는 고전적 모델에서는 장기적인 타산(prudence)이 이미 하나의 난점임을 보았는데, 고전적 모델에서 행위자는 행위 순간에 갖고 있는 욕구에 따라서만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당장에는 자신의 장기적인 타산적 고려들에 따라 행위할 욕구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행위할 이유를 갖는다는 것이 합리성의 요건의 하나일 수 있음을 우리는 덴마크의 흡연가의 경우에서 보았다. 고전적 모델은 이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고전적 모델에서는, 전우를 살리려고 수류탄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군인은 바닐라 아이스크림보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택하는 아이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있다고 해도 불합리한 말이 아니다. 군인은 죽음을 택하고 아이는 초콜릿을 택한다. 각 경우에 합리성이란, 선호의 사다리에서 더 높은 쪽의 계단에 오를 개연성을 증대시키는 것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극단적인 사례들이 욕구 독립적 이유들을 창출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마치 무엇인가 이상하고 별난 경우인 듯이 보이도록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하고자 입을 놀릴 때마다 욕구 독립적 이유들을 아주 많이 창출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장에서는 어떤 경우에 그런 이유들을 창출하는지 크게 몇 가지로 사례를 나누어 검토해보겠다. 우선 정확히 무엇이 쟁점인지를 말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욕구’나 ‘욕망’이란 말의 아주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 행위를 수행하려는 욕구나 욕망의 표현 또는 표명이다. 물론 이를 드릴로 긁어내려고 치과에 갈 때는, 충치를 긁어내야겠다는 충동이나, 열망, 열정, 욕망, 갈망 또는 기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순간에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나는 내 이를 긁어내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같은 욕구는 촉발된(motivated) 욕구 또는 이차 욕구다. 즉, 내 이를 튼튼하게 하려는 욕구가 촉발시킨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의도적 행위는 욕구의 표현이므로 다음 문제가 생긴다: 이런 욕구들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고전적 모델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행위를 하고 싶어서 하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나의 다른 욕구 때문에 수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욕구를 채우고자 마시는 것이다; 이를테면, 맥주를 마시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더 건강해지고 싶은 욕구도 있는 경우처럼. 그 밖의 가능성은 없다. 고전적 설명에 따르면 합리성이란 전적으로 욕구 충족의 문제다.
 모든 합리적 행위가 욕구 충족을 위해 수행된다고 말하는 것은 좀 어리숙해 보이며, 따라서 동기를 설명해야 할 때가 되면 고전적 전통에 있는 이론가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들은 합리적 동기 부여를 정확히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어떤 외적 이유도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합리적 행위는 행위자의 동기 집합 S 속에 있는 것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S의 내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S를 일차적으로 욕구란 말을 써서 논의해왔는데, 형식적으로 이 용어는 S의 모든 원소들에 대해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S가 평가 성향, 정서적 반응의 유형, 인격적 성실성, 다양한 투사 등과 같은 것들을, 즉 추상적으로는 행위자가 연루시킨 것의 구현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들을, 포함할 수 있다는 점을 잊게 해줄 수도 있다.”(강조 필자). B. Williams, "Internal and External Reasons" in Moral Lu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105.


 비슷한 구분이 “긍정적 태도”(pro attitude)에 대한 데이비슨(Davidson)의 규정에서도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 무엇인가를 할 때마다, 그는 (a) 일정한 유형의 행위들에 대한 모종의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으며, (b) 자신의 행위가 그런 유형이라고 믿고 있다(또는 안다, 지각한다, 인지한다, 기억한다)고 규정될 수 있다.” D. Davidson, "Actions, Reasons, and Causes" reprinted A. White (ed.) The Philosophy of A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79.
 또 자신의 긍정적 태도들의 집합에 대해 그는 다음 목록을 나열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원하거나 바라거나 존중하거나 귀여워하거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유익하다거나 책임져야 한다거나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같은 쪽, 강조는 필자) 이 목록의 문제점은, 윌리엄스의 문제점처럼, 행위의 욕구 의존적 이유와 욕구 독립적 이유의 구분을 흐리게 한다는 점이다. 즉, 하고 싶다는 것과 원하든 원치 않든 해야만 한다는 것의 구분을 흐리게 한다. 어떤 것을 원한다든가 바랜다는 것과 그것을 의무라고 여긴다든가 당신의 욕구와 상관없이 해야만 한다고 “연루”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왜 윌리엄스나 데이비슨은 연루나 책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지 않는가? “형식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또 다른 욕구일 따름인가?
 나는 두 사람 모두 이 대목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욕구 독립적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는 데에도 그것을 욕구와 동화시키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곧 만일 욕구를 포함하는 집합을 충분히 광의로 해석해준다면 어떤 사람의 연루나 책임 등도 정말로 욕구와 똑같은 집합의 원소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내가 시도하고 있는 욕구와 욕구 독립적 이유 사이의 결정적 구분을 흐리게 한다. 그런 구분이 왜 있겠는가? 물론 사람들은 자기의 의무감을 충족시키거나 자기들의 약속을 지키기를 원할 수 있다.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나는 초콜릿을 원하며 내 약속을 지키기를 원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약속의 경우에는 욕구가 욕구 독립적 이유, 즉 의무감의 자각으로부터 파생된다. 이유가 욕구에 선행하며 욕구의 근거가 된다. 초콜릿의 경우에는 욕구가 곧 이유다.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존재, 성격, 창출, 기능 등이 이 장의 쟁점들이다. 나는 다음의 적합성 조건들에 부합하도록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해명해줄 필요가 있다:
1. 해명은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이어야 한다. 즉,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과 기능이 우리 같은 생물학적 동물들에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인간은 침팬지와 다르지만 인간의 능력은 다른 영장류의 능력의 자연적 확장이다. 어떤 초월적, 비생물학적, 물자체적, 또는 초자연적인 것에도 호소하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우리처럼 땀내 나는 생물학적 동물들의 특정 능력에 관해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2.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를 명시해줄 필요가 있다.
3. 그런 장치 내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이유들을 어떻게 창출하는가?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의 기초가 되는 지향성의 논리적 구조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술해줄 필요가 있다.
4. 어떻게 합리성만으로도 그런 이유들이 행위자를 속박할 수 있게 하는지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어떤 합리적 이유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연루나 책임을 고려해야 하는가? 행위자가 왜 그런 것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가?
5. 그런 이유들에 대한 합리적 인지만으로도 어떻게 충분한 동기가 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런 것들 자체가 욕구 독립적이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이차적 욕구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가.
6. 1-5의 조건들에 답하기 위해 사용된 장치와 지향성이 어떻게 그런 이유들의 창출 및 작동에 충분한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일반 원리나 도덕 법칙 등의 도움은 전혀 필요 없다. 즉, 1-5에 대한 답은 욕구 독립적 이유들이 어떻게 창출되며 실질적인 도덕 원리의 도움 없이도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욕구 독립적 이유들은 자족적이어야 한다.
 서양 철학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내가 무모한 일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기획을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려는 짓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나는 만일 고전적 모델 및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일체의 전통을 잊을 수 있다면 실제로 토끼를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제들에 대한 답은, 세부적으로는 복잡하지만 그 기본 구조에서는 상당히 단순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여러 상이한 수준에서 대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설명이 적절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상학적”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수준에서는 행위자가 합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연루된 행동에 가담했을 때 그 행위자에게 일이 어떻게 보일지를 묘사해준다. 또한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에 사용되는 사회 제도들을 논의하는 사회적 내지 “사회구성적”(societal) 수준이 있는데, 그런 제도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큰 사회에서는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설명하려 할 때 논의되는 수준이다.
 이들 수준에서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가장 간단하고도 기본적인 수준의 지향성부터 논의하고자 한다. 이는, 말하자면, 현상학이나 사회학이라는 분자 수준보다 앞서는 원자 수준이다. 연루, 성실성 및 불성실성, 인간 제도들의 구체적 역할 등은 뒤에서 상론하겠다. 그러나 우선 인간 연루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원초적인 형태들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연루의 창출에 관련되는 지향적 현상들의 만족 조건은 무엇인가? 보통의 일상 언어를 할 줄 아는 화자와 청자가 하나씩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진술, 요청, 약속 등을 하는 관례들에 정통하다고 가정하자. 가장 단순한 형태의 언어 행위에서, 이를테면 화자가 주장이나 요청이나 또는 약속을 하는 경우에 그는 만족 조건들에 대한 만족 조건을 부과한다. 정확히 어떻게? 주장의 예를 잘 조사해보면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지 알아보자. 화자가 어떤 문장 예컨대 “비가 온다”를 발언하고 또 그가 비가 온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의도한다고 가정해보자. 행위에서 그의 의도는 부분적으로는 “비가 온다”는 발언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 발언은 그의 의도의 만족 조건들 중 하나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문장을 그저 발언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비가 온다는 것을 실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즉, 비가 온다는 것을 그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는 그 발언이 진리 조건, 즉 비가 온다는 하향 적합 방향을 갖는 만족 조건들을 충족시킨다고 의도해야 한다. 즉, 그의 의미 의도는 만족 조건(발언)에 만족 조건(즉, 진리 조건)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제 그의 발언은 하나의 지위 기능을 가지며, 날씨 상태를 참되게 또는 거짓되게 나타낸다. 또 그는 참 또는 거짓에 대하여 중립적이지 않은데, 그의 주장이 하나의 진리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지위 기능이나 만족 조건에 대한 만족 조건의 부과가 이미 하나의 연루다. 왜? 그 주장은 화자의 자유로운 의도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는 비가 온다는 주장을 떠맡았고 따라서 그 주장된 명제가 참임을 commit하게 되었다. 그가 주장이라는 양식으로 만족 조건에 대해 만족 조건을 의도적으로 부과할 때, 그는 그 조건이 만족되고 있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또 그 연루가 이미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다. 이를테면, 이제 화자는 자기 주장의 논리적 귀결들을 받아들일 이유를 창출했는데, 자기가 말한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요,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거나 정당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말을 할 때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장함에 대한 구성적(constitutive) 규칙들의 결과인 것이며, 화자는 그런 규칙들에 호소하여 만족 조건에 대한 만족조건을 부과한다. 연루의 창출은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며, 이 연루가 이미 언어 행위의 구조 속에 구현되어 있다. 어떤 주장을 할 때 화자는 하향 적합 방향을 갖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 화자는 하나의 연루를 창출하는데 이는 하향 적합 방향을 갖는다. 비가 온다는 그의 주장은 정말로 비가 오는지 여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이 된다. 그가 연루시킨 것은 세계가 실제로 그가 말한 대로일 때만, 즉 비가 오고 있는 때에만 만족된다.
 지금까지는 주장만 고찰했지만, 사실, 제대로 명제적 내용을 갖춘 모든 표준적인 언어 행위는, 만족 조건의 의도적인 부과가 화자를 다양하게 연루시키도록 또는 책임지도록 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을 동반한다. 청유문이나 명령문조차도, 그 명제적 내용이 화자보다는 청자에게 부과된 조건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여전히 화자를 다양하게 연루시킨다. 예컨대 만일 내가 당신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한다면 나는 당신이 방에서 나가도록 시키는 것과 당신이 방에서 나가기를 바래는 것에 대해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연루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는 방법은 연루의 논리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다. 연루란 우리의 조건을 행위의 이유들에 맞추는 작위적인 것이다. 하나의 연루는 하나의 명제적 내용 및 하나의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다. 따라서 만일 내가 다음 주에 산호세에 가려는 것에 연루되어 있다면, 그 명제적 내용은 “내가 다음 주에 산호세에 가려 함”이고 적합 방향은 상향이다. 이 연루는 세상이 그 연루의 내용에 부합하도록 변할 때만, 즉 내가 실제로 산호세로 갈 때만 만족된다. “필요 충분 조건”을 부여하려고 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연루란 어떤 행위 과정이나 정책 과정(또는 다른 지향적 내용; 이를테면 믿음이나 욕구 등에 연루되어 있을 수도 있다)에 대한 채택인데 여기서 채택이라는 성격이 그런 과정을 따라 추구할 이유를 부여해준다. 따라서 예컨대 나는 철학의 실천에 연루되어 있다. 또 이 연루가 일이 잘 안 풀리는 어려운 때에도 그것을 추구할 이유를 내게 부여해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앙이나 민주당 쪽으로 연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철수는 “연루”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순이가 말할 때 순이는 철수에게 일정한 행동과 태도로 계속할 이유를 부여할 어떤 정책을 철수가 채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들은 욕구 독립적이다. 이점이 비록 내가 묘사한 종류의 연루가 사람이 어쨌든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도 있는 것들을 하는 연루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 장에서 주로 만족 조건에 대한 만족 조건의 부과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연루를 창출하는 특수한 경우의 연루에 일차적인 관심을 둘 것이다.
 일단 연루의 논리 구조를 알면 언어 행위를 수행할 때 어떻게 연루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알기는 더 쉽다. 모든 연루가 언어 행위의 수행을 통해서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어떤 정책을 계속할 확고한 의도를 채택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책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고찰하고 있는 것은 공적으로 창출되며 보통은 타인을 향한 그런 부류의 연루들이다. 우리는 그런 연루를 어떤 다른 것에 만족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서 창출할 수도 있다. 이점이 주장 행위(assertive)에 대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공약 행위(commissive)의 경우보다 알기 어려운데, 주장의 경우에는 발언에 대해서 하향 적합 방향을 갖는 만족 조건을 부과하기 때문, 즉 하나의 진리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 주장을 할 때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연루들을 부과한다. 주장을 할 때 우리는 진리, 성실성 및 증거에 대한 책무를 진다. 또 그런 책무들은, 일반적인 연루들처럼,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다. 이런 책임은, 발언이 참이고 화자가 진지하며 자기 주장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는 그런 세상일 때에만 충족된다.
 그런데 왜 그런 연루, 책임, 책무 등은 행위자를 구속하는가? 왜 행위자는, 이성적으로 말해서, 그런 것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가? 왜 그런 것들도 다른 것들처럼 사회적 구성물이지 않는가? 그것은 화자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연루로서 창출했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에 대해 어떤 특수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기의 연루를 떠맡음으로써 자유롭고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속박한 것이다. 화자는 남의 주장이 참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연루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이 참인지에 대해서는 그 주장이 곧 자신이 연루시킨 것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무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추상적, 욕구 독립적 연루가 이차적 욕구를 어떻게 발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것이 동기 부여를 해줄 수나 있다는 것인가? 글쎄, 어떻게 증거나 증명 심지어 진리 그 자체가 누군가로 하여금 그가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동기 부여를 해주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이를테면 괴델 정리가 자기네 연구 계획을 망친다 해서 괴델 정리를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괴델 증명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면, 합리적으로 말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증명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미 그 정리를 받아들일 이유를 인정한다는 것이요, 그 정리를 받아들일 이유를 인정한다는 것이 이미 그 정리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이유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번 경우 및 뒤에 고찰할 다른 경우들의 교훈은 여타의 이유들처럼 욕구 독립적 이유들도 동기 부여를 해준다는 점이다. 일단 당신이 어떤 것을 행위에 대한 타당한 이유로 인정하면, 즉 일단 당신이 당신을 주체로 하고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어떤 작위성을 인정하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당신이 하기로 연루되어 있는 것을 하려고 원하는 근거로서 인정한 것이다. 내 이를 드릴로 긁어내게 해야겠다는 나의 욕구가 내 이가 고정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한 나의 인정 및 내 건강을 돌보려는 나의 욕구로부터 파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을 말하려는 욕구나 약속을 지키려는 욕구도 내가 진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든가 약속을 했음을 인정한다는 점 및 진술이나 약속이 연루나 책임을 창출한다는 점 그리고 내가 나의 연루와 책임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파생된다.
 사람들은 욕구 의존적 이유가 이차 욕구를 촉발하는 방식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욕구 의존적 이유가 촉발하는 방식은 욕구 독립적 이유가 촉발하는 방식이 당혹스럽게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이를 교정시켜야겠다는 내 욕구가 이를 드릴로 긁어내게 할 이유임을, 또 따라서 이를 드릴로 긁어내게 하기를 원하는 이유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내가 당신한테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 돈을 갚을 이유가 되고 따라서 돈을 갚기를 원하는 이유가 됨을 인정한다. 각 경우 모두 나를 주체로 하고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작위성의 인정이 행위 수행의 이유가 되고 따라서 행위를 수행하기를 원하는 이유가 된다.
 욕구 독립적 이유가 어떻게 동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특별히 문제될 게 전혀 없음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동기촉발(motivation)이란 인과적 충분 조건의 문제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에서 부분적으로 비롯한다. 전통적 생각의 약점은 일체의 동기 설명은 어떻게 그 행위가 불가피했으며, 어떻게 행위자가 진정 올바른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 행위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은 간격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 데에서 파생된 것이다. 나는 나의 의무감을 인정할 수도 있듯이 내 이를 긁어내게 할 필요성을 인정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어느 쪽 이유에 따라서도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들의 동기촉발력에 대한 해명에서, 우리는 충분 조건에 의해서 욕구 독립적 이유가 행위를 유발함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욕구 독립적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행위에 대한 다른 어떤 합리적 이유들도 또한 그렇지 않다.
 동기 이해에서 본질적 단계는 3인칭 관점과 1인칭 관점의 관계에 대하여 명확히 해두는 것이다. 3인칭 관점에서는, 모든 사회는 일군의 제도적 구조들을 갖고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런 제도적 구조들 속에 있는 의무론적(deontic) 구조에 의해서 여러 모로 동료 구성원들의 눈길 속에서 얽매여 있다. 구성원들은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시민으로서, 납세자로서 등등으로 얽매여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일인칭 관점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다. 왜 의식적 자아로서의 내가 남들이 내가 얽매여 있다거나 또는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야 하는가? 일인칭 관점에서는, 내가 그런 제도적 구조들 내에서 행동하면서,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류들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답이다. 제도적 구조들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지만, - 또 이점이 결정적인 점인데 - 내가 그렇게 창출하는 책임, 연루, 그밖의 동기 유발자들은 제도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책임, 연루 및 의무들을 내가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이런 동기 유발자들의 인정이 의식적 행위자로서의 나에게 합리적으로 요구될 수 있다. 이점은 진술의 경우만큼 명백하지는 않지만 약속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으로 명백하다. 내가 “약속하지”라고 발언했으므로, “그래 그렇게 말은 했지만 왜 그것이 약속이 되는지는 모르겠네”라고 내가 말할 수는 없으며, 또 일단 약속을 했으면, “그래 약속은 했지만 왜 그것이 나를 의무감에 빠지게 하는지는 모르겠네”라고 말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비가 온다”고 말했다면 “그래 그렇게 말은 했지만 왜 그것이 진술이 되는지는 모르겠네”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일단 진술을 했으면 “그래 진술은 했지만 그것이 왜 그 진술의 참에 대해 연루된 것이 되는지는 모르겠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상으로 내가 이 장에서 제시할 주된 논변들을 다소 주마간산 식으로 개괄해보았다. 이 논변들을 지금까지는 가장 근본적이고 원자적인 수준에서만 논의했다. 뒤에서 그 논변들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접근하면서, 욕구 독립적 이유가 행위에 대한 동기 유발을 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논변을 보다 상세히 재진술하겠다. 지금까지 제시된 주장에 관한 해명이 우리의 적합성 조건들에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알아보자.
1. 이 해명은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이다. 우리의 능력들은 보다 원시적인 동물 및 특히 영장류의 능력들의 확장이다. 원숭이는 지향성 능력이 있지만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하는 이차 수준의 지향성 능력은 없다. 원숭이는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비가 온다는 명제의 참에 대한 연루를 떠맡을 능력은 없다. 더욱이, 우리 인간들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인간들을 식별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라 우리가 이런 연루들을 남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해줄 사회적으로 창출된 제도들이 원숭이에게는 없다.
2. 우리가 행위의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할 때 쓰는 장치는 언어 행위의 구성적 규칙들 및 실제 인간 언어의 의미론적 구조 속에서의 그것들의 실현이다. 화자가 주장, 명령, 약속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풍부한 언어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화자와 청자는 으레 화폐, 재산, 국가, 결혼과 같은 여타의 제도적 구조들 속에 포함될 것이다. 그런 구조들은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복잡하다. 하지만 신비로운 것은 아니며 나는 다른 곳에서 상론한 바 있다. John R. Searle, 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1969, Cambridge Univ. Press, Expression and Meaning 1979, Cambridge Univ. Press, Intentionality, 1983, Cambridge Univ. Press.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New York: Basic Books, 1995

3. 당신은 그런 일을 만족 조건에 대해 만족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해낸다. 모든 그러한 부과는 연루며 모든 그러한 연루는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한다. 맹세나 약속의 경우에서처럼 만족 조건이 화자를 언급하고, 명제적 내용이 화자에 의한 어떤 자발적 행위를 구체화하면, 그 같은 만족 조건의 부과 속에서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가 명시적으로 창출된다. 주장의 경우, 행위에 대한 연루는 암시적으로일 뿐이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연루다. 발언에 대한 만족 조건의 부과는 화자에게 연루를 부과하는 것이다.
4. 당신이 떠맡은 연루들은 당신을 얽매고 있는데, 그것이 당신의 연루이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자유롭고 의도적으로 그 주장을 했고 따라서 스스로 그것이 참이라고 연루시켰으므로, 합리적으로는, 당신이 그것의 참이나 성실성, 일관성, 증거 또는 함축에 대해 무심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인식상의 합리성이면 충분하다. 당신은 그저 당신 자신의 스스로 창출한 연루 및 그 논리적 귀결을 인정해야만 한다.
5. 그런 이유들이 동기 촉발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이 그것들을 동기 유발자로서 창출했기 때문이다. 즉, 상향 적합 방향의 명제적 내용을 갖는 작위성을 창출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당신을 얽매고 있는 것이다. 만족 조건에 대한 만족 조건의 부과에서 당신의 의지를 활용함에 의해서, 당신은 이런 조건들에 비추어서 미래의 당신의 의지를 제약한 것이다. 이점은 약속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해질텐데, 거의 모든 언어 행위에 약속의 요소가 들어 있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약속을 일종의 주장으로 간주하려 했다. 그러나 주장을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일종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6. 주목할 점은 우리가 조건 1-5에 대한 답을 어떤 실질적인 외적 원리들에 의거하지 않고서 진술했다는 점이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 “주장들이 일관되도록 해야 한다”와 같은 원리들은 주장 개념에 내적인 원리들이다. 적절히 연루될 수 있기 위한 어떤 외적인 도덕 원리도 필요하지 않다. 참에 대한 연루는 주장이라는 지향성의 구조 속에 구현되어 있다.

 II. 동기와 적합 방향.

 지금까지는 어떻게 연루를 창출하며 또 그에 의해 동기 유발이 되는지에 대한 해명을 그 개략적인 골자만 제시했다. 이 절에서는 좀 더 상세한 해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솔직히, 지금까지의 해명은 아주 논쟁거리라든가 자극적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해명은 엄청난 반발에 직면하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대부분의 반발은 우리의 특유한 철학적 전통에서 비롯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런 식의 해명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사실과 가치, 즉 “존재”와 “당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이 전통 하에서 사실들의 세계에서의 가치들의 지위 및 그런 세계에서의 규범성의 원천에 관하여 무수히 많은 책이 산출되었다. 마찬가지 전통 속에 “윤리”나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포함되어 있으며, 저술가들은 행위의 이유에 대해서는 실로 거의 관심이 없이 자기네들의 구미에 맛는 윤리적 주제들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들은 사실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가치들은 설명을 요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처럼 땀내 나는 생물학적 동물들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규범성이란 도처에 아주 많이 널려 있다. 세계는 기실 대체로 우리와 무관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단 당신이 그런 사실들을 적합 방향을 갖고서 표상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이미 규범들을 갖고 있게 되고, 이 규범들이 그 행위자를 얽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지향성은 규범적 구조를 갖고 있다. 어떤 동물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 믿음은 참, 합리성, 일관성이라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동물이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 의도는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어떤 동물이 지각을 갖고 있다면, 그 지각은 세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또 그 동물은 문제의 지향적 상태가 바로 그 동물의 상태라는 점에서 참이나 성공이나 정확성에 대해 무심할 수 없다. 당신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을 때 내가 당신의 믿음의 참, 거짓에 대해 무심할 수는 있지만 내가 어떤 믿음을 가질 때도 마찬가지로 무심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요 참이라는 규범적 요구가 그 믿음 속에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관점에서는 규범성을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존재(is)에 대한 꾸밈없는 표상은 그 동물에게 하나의 당위(ought)를 부여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특수한 점은 규범성에 있다기보다는 언어의 사용을 통하여 일군의 공적인 연루들을 창출하는 인간의 능력에 있다. 전형적으로 인간들은 공적인 언어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이를 해내는데 이때 화자는 의도적으로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한다. 이런 언어 행위는 화자가 유의미한 언어 행위를 수행하고 그것을 다른 화자/청자들에게 의사소통하는 데에 사용하는 제도적 구조의 존재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런 장치를 사용해서 화자는 자기가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할 때 연루를 떠맡을 수 있다. 사실 연루를 떠맡기를 피할 방도가 없다. 주장이라는 언어 행위는 참에 대한 연루요, 약속이라는 언어 행위는 미래의 행위에 대한 연루다. 둘 다 화자가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한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언어 행위는 화자를 이차적인 만족 조건 집합에 연루시킨다. 주장의 경우, 화자는 주장이 참임에 연루되어 있으며, 약속의 경우에는 그가 수행하기로 약속한 행위를 실행한다는 것에 연루되어 있다.
 일단 동기가 창출되면, 그것의 인식은 행위에 대한 내적 이유를 제공한다. 이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허무맹랑하더라도 어떤 외적 동기 유발자를 받아들이면 행위자는 행위의 내적 이유를 부여받을 수 있다. 불합리하게도 내가 책상 뒤에 호랑이가 숨어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나는 위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고, 그에 따라 아무리 나의 이유가 불합리하다 해도 행위에 대한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된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에 관하여 중요한 점은, 일단 행위자가 문제의 이유를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창출했으면 그것의 수용이 인식적 합리성의 문제로서 합리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앞서 논의했던 비가 온다는 진술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가 어떤 진술을 할 때마다 나는 참되게 말할 이유가 있다. 왜? 진술이란 그저 그 표현된 명제의 참에 대한 연루이기 때문이다. 진술을 하는 것과 그것의 참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키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아무 차이가 없다. 즉, 언어 행위에는 첫째 진술을 한다는 것과 둘째 그것의 참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키는 것이라는 두 가지 독립된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진술하는 것만 있을 뿐이고 그것이 곧 참에 대한 연루인 것이다. 당신이 나보고 “바깥 날씨가 어때요?”라고 묻고 내가 “비가 온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자. 그것으로써 나는 비가 온다는 명제의 참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킨 것이다. 참에 대한 나의 연루는 내가 거짓말을 할 경우에 가장 명백하다. 실제로는 내가 비가 온다고 믿지 않으면서 거짓말로 “비가 온다”고 말한다면, 내게 내 발언은 거짓말로서 이해되는데 그것은 내가 참이라고 믿지 않는 명제의 참을 그 발언이 내게 연루시키기 때문, 정확히 그 때문이다. 또 그 거짓말이 거짓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내가 하나의 진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따라서 나를 그 표현된 참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키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 정확히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 지적을 실수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실수를 했다고 해보자. 나는 비가 온다는 것을 진실되게 말했지만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 역시 나의 언어 행위에는 잘못이 있다, 즉 그 말은 거짓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잘못인가? 어쨌든, 모든 참인 명제에 대해 거짓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이 잘못인 것은 진술의 목적이 참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실패하는 것은 그 진술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술을 할 때 나는 그것이 참임에 대해 스스로를 연루시키며, 여기서 나의 실수가 나로 하여금 그 연루에서 실패하게 한다.
 고전적 모델에서는 이런 간단한 사실들을 해명해줄 길이 전혀 없다. 고전적 모델에서는 두 가지 별도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는데, 즉 진술을 한다는 제도가 있고 그런 다음, 그와 별개로, 참을 말하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가 있다고. 어떤 이유에서 진술을 할 때 나는 참을 말하려고 해야 하는가? 고전적 이론가는 단지 진술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이유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만일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나쁜 귀결들이 있게 될 것임을 느낀다는 것이라거나 혹은 진술한다는 것과는 논리적으로 무관한 도덕 원리로서 거짓말은 나쁘다라는 식의 원리를 내가 갖고 있거나 또는 그냥 내게 참을 말하려는 성향이 느껴지거나 아니면 그 진술을 하는 것과 내적 관계가 없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일 것이다. 고전적 모델 상으로는 모든 그러한 이유들은 그와 같이 진술을 하는 것의 본성과 독립적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참에 대한 연루가 진술 행위에 내적임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진술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참에 대한 연루가 진술 행위에 내적인가? 왜 우리는 진술은 하지만 그것의 참에 대해서는 연루되어 있지 않는 식의 진술 제도를 가질 수는 없는가? 대체 연루가 뭐 그리 대단한가? 음, 어느 면에서는 언어 행위를 그것의 통상적인 연루 없이 수행할 수도 있다. 이는 소설 작품에서 생기는 일이다. 소설 작품에서는 저자가 본문에서 했던 발언의 참에 대해 책임지라고 아무도 저자에게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경우들을, 연루가 실제 발언의 진리 조건이 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형태에서 비롯된 파생적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자, 왜? 또 그 답은 의미 자체의 본성에서 따라나온다. 내가 비가 온다고 말할 때 비가 온다는 주장의 참에 대해 내가 연루되어 있는 이유는, 비가 온다는 발언을 하면서 그 발언에 대해 일정한 만족 조건을 의도적으로 부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저 발음 연습 중이라거나 연극의 리허설을 한다거나 시의 한 구절을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내가 비가 온다고 진지하게 주장할 때 내가 그 명제의 참에 대해 연루되어 있는 이유는, 나의 행위 의도가 “비가 온다”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나의 행위 의도의 만족 조건에 내가 비가 온다는 만족 조건을 의도적으로 부과할 때 내가 그 발언의 참에 대한 연루를 의도적으로 부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복컨대, 내가 그런 일을 공적으로 접근가능한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언어 및 언어 행위라는 인간의 제도 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보다 전통적으로 해석된 대로의 실천 이성에 이상의 교훈 중 몇 가지를 적용시켜 보자. 많은 경우의 실천적 추론에서, 사람들은 미래에 어떤 행위를 수행할 이유를 현재에 창출한다. 내 생각에 어떻게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행위가 미래의 행위들에 대한 이유들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문제를 보다 근접해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종류의 경우들을 살펴보자. 내가 술집에 가서 맥주를 주문한다고 하자. 맥주를 마시고 술값을 낼 때가 다가온다고 하자. 이제 문제는, 내가 나의 행동을 맥주값을 치를 책임을 지도록 의도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이런 사실과 관계없이, 맥주값을 치르려는 욕구와 같은 이유를 가져야만 하는가 또는 맥주값을 치를 이유를 갖기 위해서 나의 동기 집합에 어떤 다른 적절한 원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 즉, 내가 맥주값을 치를 이유가 있는지를 알려면, 나는 맥주값을 치를 어떤 욕구가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나의 동기 집합을 먼저 세밀히 조사하거나 또는 내가 마신 맥주값을 치르는 것에 대한 어떤 일반 원리들을 내가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가? 내 보기에 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맥주를 주문하고 가져온 맥주를 마심으로써 이미 나는 맥주값을 치르는 것에 대한 연루나 책임을 의도적으로 창출한 것이며, 그런 연루와 책임이 일종의 이유인 것이다.
 그런 명백한 경우조차도 해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고전적 모델의 불합리한 점이다. 참을 말해주는 경우에서처럼, 고전적 모델의 옹호자는 내가 나의 “동기 집합” 속에 적절한 욕구를 놓아둘 수 있을 때에만 내가 맥주값을 지불할 이유를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 단지 내가 맥주를 주문하고 그것을 마심으로써 스스로 맥주값을 지불할 이유를 창출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내가 그럴 수 있도록 해준 상황의 형식적 특징들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행위자 A가 장차 행위 X를 수행할 욕구 독립적 이유를 갖고 있다는 주장의 진리 조건은 정확히 무엇인가? A에 관한 어떤 사실이 그가 그런 이유를 갖도록 해주는가? 음, 행위자 A는 자신이 장차 행위 X를 수행할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했다는 한 가지 종류의 사실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떻게 그런 창출을 착수하게 되는가? 나는 이미 이 문제를 만족 조건에 관한 논리적 문제로서 대답한 바 있지만, 이제 이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고찰해보자. 행위자 A가 맥주를 주문할 때 이 문제가 그에게 어떠해 보였겠는가? 글쎄 만일 내가 행위자였다면 내게는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지금 나는 맥주를 갖다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책임이 있게 되리라고 이해하고서 맥주를 가져오라고 시키려 하고 있는 바로 그런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바로 이 수행에 의해서, 맥주를 갖다주었을 경우, 내가 이제 어떤 책임을, 따라서 이유를, 내가 장차 행위할 이유가 되는 이유를, 갖게 되도록 한 것인데, 내가 지금 창출하는 그 이유는 나의 미래의 여타 욕구들과 독립적이 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행위가 나에 대한 이유를 창출하기 위한 충분 조건은 그것이 나에 대한 이유를 창출하기를 내가 의도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런 책임을 창출한 형식적 메커니즘은 진술하는 경우에 내가 연루를 창출한 형식적 메커니즘과 정확히 평행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내가 나의 발언에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만족 조건을 부과한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를 할 책임을 떠맡은 것이다. 발언에는 이점이 명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냥 “맥주 좀 갖다주세요”라고만 말했을 뿐이고, 이 발언은 청자가 내게 맥주를 갖다주어야 한다는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만족 조건을 갖는다. 하지만 상황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이해해보면, 이는 약속의 경우를 고찰할 때 상세히 검토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또한 나 자신, 즉 나의 장차의 행동에 대해서도 만족 조건을 부과한 것이다. 또 이점을 나는 조건적 책임의 형태로 부과한 것이다. 책임은 세계에서 책임 쪽으로의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다. 책임은, 대개는 그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의 행동의 형식으로, 그 책임의 내용에 부합하도록 세계가 변해야만 만족 또는 충족된다. 따라서 책임은 일종의 외적 동기 유발자이다. 책임은 항상 인간이 창출하는 것이라서 인간의 태도에 상대적으로만 존재하며 존재론적으로 주관적이긴 하지만 책임의 존재는 인식적으로는 객관적이다. 또 여러 번 그런 경우들을 보아왔듯이, 존재론적 주관성은 인식적 주관성을 함축하지 않는다. 설령 책임의 창출이나 존재는 관찰자 상대적이라 해도, 내가 어떤 책임 하에 있다는 점은 평범한 사실의 문제일 수 있다.
 내가 묘사한 것과 같은 경우에서 행위자의 자유를 전제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일인칭 관점에서, 스스로에 대한 어떤 이유의 창출을 자유롭게 떠맡음으로써, 이미 나는 그러그러한 것이 나에 대한 이유가 되었으면 하는 욕구를 표명한 것이다. 현재에 내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함으로써 나는 이미 미래의 내 의지를 얽매어 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의 답은 시시할 수 밖에 없다. 왜 그것이 이유가 되는가? 내가 그것을 이유로서 창출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이 나에 대한 이유가 되는가? 내 맘대로 그것을 나에 대한 이유로 창출했기 때문이다.
 1장과 3장에서의 간격에 대한 논의에서, 모든 효과적인 이유들은 행위자가 창출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미래의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의 특이성은, 지금 내가 효과적인 이유를 사용함으로써, 내가 장차 행위할 잠재적으로 효과적인 이유를 창출해냈다는 점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문제가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다. “나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욕구 독립적 이유를 포함하여 내가 나를 위한 이유로 창출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나에 대한 모종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자발적인 행위를 수행할 때, 행위의 원인과 그 행위를 실제로 실행한다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으며, 그저 내가 그 행위를 수행하면 그 간격은 메워지게 된다; 또 이 경우, 그 행위의 수행 그 자체가 그 다음 행위에 대한 이유의 창출이 된다.
 동기에 관한 한, 내가 묘사했던 경우들에서 이유가 욕구의 근거일 수는 있지만 그 역은 안 된다. 일상 언어로는 이런 경우에 대한 올바른 묘사는 “내가 지불할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불하고 싶다”는 것이다. 또 이유, 합리성 및 욕구 사이의 연관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을 구속력 있는 책임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이미 그것의 존재론이 어떤 외적 동기 유발자, 즉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것의 존재론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미 행위에 대한 이유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것을 행위에 대한 이유로 인정한다는 것이 이미 그것을 그 행위를 수행하려고 욕구하는 이유로서 인정한다는 것이다.

 III. 동기 문제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Immanuel Kant, Groundwork of the Metaphysic of Morals, 1964, Harper Torchbooks: New York
에서 형식적으로는 내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했다. 나의 문제는 “모든 행위가 그 행위를 수행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면 어떻게 욕구 독립적 이유가 실제로 행위를 촉발할 수 있느냐?”이다. 칸트는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순수 이성이 실천적일 수 있느냐?”라는 형태로 나타냈다. 또 그는 그것이 왜 우리가 정언 명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관심이란 바로 그것에 의해서 이성을 실천적으로 되게 하는 것, 즉 행위하려는 의지를 결정해주는 원인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이 부적절하다고 본다. 다음이 그가 말한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이성적이지만 감각의 영향을 받는 존재에게 이성만으로도 ‘당위’라고 규정해주는 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의무를 완수할 때 어떤 쾌감이나 만족감을 불어넣어주는 힘이 이성에게 있어야 하고 또 따라서 감성을 이성적 원리들에 일치하도록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과성을 이성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다”.(p.128) 그래서 칸트의 견해 상으로는, 순수 이성은 쾌감을 유발해야 하며, 우리가 실제로 순수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바로 이 쾌감 때문이다. 칸트는 어떻게 순수 이성이 그런 쾌감을 유발할 수 있기나 하는지를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 까닭은 우리는 경험의 대상들 속에서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순수 이성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좋지 않은 논변이다. 칸트의 주장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행위함으로부터 “쾌감”을 얻지 않는 한 욕구 독립적 이유에 입각해서 행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칸트가 적합 방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우리가 아무 “쾌감”도 없는 많은 행위를 그것을 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속을 지킬 때 쾌감을 느낄 필요가 없듯이 내 이를 긁어내도록 할 때 “쾌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를 긁어내게 하는 것이나 약속의 이행으로부터도 약간의 만족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를 긁어내게 하거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런 쾌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 내가 제시하고 있는 견해 상으로는, 이유의 타당성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행위를 촉발하기에 족하다. 여분의 쾌락이나 욕구나 만족을 가질 필요는 없다. 행위 수행의 동기가 곧 그 행위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위한 동기다.
 이점은 이 책의 논변 뿐 아니라 칸트의 논변 및 또 사실 고전적 모델 일반에 관한 논쟁에서도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점이다. 칸트는 고전적 모델을 여러 모로 공격하고는 있지만, 고전적 모델의 가장 나쁜 특징의 하나를 받아들인다. 칸트는 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할 때 지금 당장 “쾌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 행위를 지금 당장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고 가정한다. 만일 모든 행위가 정말로 욕구의 만족을 위해 이루어지고, 모든 행위가 그 자체 그 행위를 수행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면, 일체의 행위 수행에는 어떤 욕구 만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여러 가지 혼동이 뒤섞인 것이라서, 이제부터 그 혼동들을 가려내 주고자 한다. 우선 욕구 만족을 위해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 이를 고정시키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이를 긁어내게 한다. 또 내 이를 긁어내게 할 그 당시에는 긁어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긁어내게 한다. 그러나 나의 의도적 행위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어떤 “쾌감”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음은 도출되지 않는다. 내 이를 고정시키고 싶은 일차 욕구가 이를 긁어내게 하고 싶은 이차 욕구를 촉발할 수 있고, 이 이차 욕구가 다시 그 행위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교정된 이를 갖게 되어서 얻는 만족감이 이를 긁어내게 하는 행위에 이월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는 내가 어떤 것을 욕구하는 데 대한 욕구 의존적 이유를 갖게 되는 경우인데, 그 욕구 의존적 이유가 이차 욕구의 근거가 되는 방식은 욕구 독립적 이유가 이차 욕구의 근거가 되는 방식과 정확히 동일하다. 내 약속을 이행하려는 나의 욕구는 내가 약속을 했으며 따라서 책임이 있다는 욕구 독립적 사실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내가 약속을 이행하려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약속 이행으로부터 어떤 쾌감을 끌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내가 내 이를 고정시키려는 일차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 이를 긁어내는 것으로부터 어떤 쾌감을 끌어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칸트의 잘못은 대부분의 고전적 전통에 있는 저술가들에게 암시적으로만 있었던 잘못을 충분히 명시화해주고 있다. 모든 행위가 욕구의 표현이고 모든 행위가 어떤 욕구의 충족이 동기가 된 것이라면 행위를 촉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욕구 충족, 즉 쾌감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오류다. 모든 행위가 실은 그 행위를 수행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행위가 욕구 충족이라는 목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도출되지는 않으며, 행위가 쾌감이라는 의미에서의 욕구 충족에 의해서만 촉발될 수 있다는 점이 도출되지도 않는다.

 IV. 특수한 경우로서의 약속.

 통상 이런 쟁점들을 논의할 때는 약속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행위자가 창출한 욕구 독립적 이유들이라는 현상은 그보다 더 넓게 만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 없이는 애초부터 사회 생활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약속은 그 중에서 하나의 특수하고도 순수한 종류의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다른 것보다도 약속에 관한 논쟁의 역사가 더 잘 나타나 있으며, 만일 내가 약속을 지킬 책임을 설명해내고 표준적인 오류들을 몇 가지 밝힌다면 내가 옹호하고 있는 것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 데에 어떤 이유를 갖고 있는가? 또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은 이렇다: 약속은 정의상 책임의 창출이다; 또 책임은 정의상 행위에 대한 이유다. 그에 따른 문제가 생긴다: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의 원천은 무엇인가?
 고전적 모델에서는 참을 말하는 것에 대한 연루가 진술 행위에 내적인 것처럼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약속 행위에 내적이라는 사실을 해명할 길이 없다. 즉, 약속은 정의상 어떤 것을 할 책임을 떠맡는 것이다. 고전적 전통에서는 이런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점을 부인하자면, 고전적 모델의 옹호자들은 대체로 좀 이상한 것을 내 생각엔 오류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절에서는 내가 접한 가장 흔한 오류들에 대한 간략한 목록을 제시하겠다.
 우리가 주저없이 버려야 할 흔하면서도 나는 틀렸다고 보는 세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약속을 지켜야 할 어떤 특수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에 관해 생각해보면 엄밀히 말해서 약속과 도덕성 간에는 어떤 특수한 연관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내가 당신네 파티에 가겠다고 약속하면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그것이 도덕적 책임이기도 한지는 그 경우의 성격에 달려 있겠지만, 내가 가는 대개의 파티에서는 도덕적 책임은 아닐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어떤 중대한 도덕적 문제가 관련될 때 약속을 하지만, 그와 같은 약속에 관한 어떤 점도 일체의 약속은 도덕적 문제를 포함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와 같은 약속이라는 관습에서는 모든 약속을 지킬 책임은 도덕적 책임으로 간주될 만큼 중대할 것임을 보장해줄 것이 전혀 없다. 도덕적으로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약속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련된 잘못은 나쁜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때는 그 약속을 지킬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이다. 그런 경우를 올바로 말해주자면 사실 약속을 지킬 책임은 있지만 그 약속된 행위의 사악한 성격 때문에 무효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점은 일치법과 차이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 행위를 하겠다고 약속한 사람과 약속하지 않은 사람 간에는 차이가 있다. 그 약속을 한 사람은 약속을 하지 않은 사람은 갖고 있지 않은 이유를 갖고 있다. 법에서는, 불법적인 것을 하겠다는 계약은 무효로 간주되며 법정에서 강요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계약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법이 그 계약을 효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셋째이자 셋 중에서 내가 가장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은, 약속을 지킬 책임을 딱 부러진 책임이 아닌 “일견상”(prima facie) 책임이라고 여기는 점이다. 이런 견해는 대개 책임끼리는 갈등을 일으키는데 흔히는 그것들 모두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을 극복하고자 (데이비드 로스[David Ross] 경이) W. D. Ross, The Right and the Go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30, p.28.
 고안한 것이다. 로스 경의 말로는 책임 A가 책임 B를 압도할 때 B는 진짜 철저하고도 무조건적인 책임이 아닌 일견상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혼동된 것임을 다른 곳에서 John R. Searle, Prima Facie Obligations in Practical Reasoning edited by Joseph Raz, Oxford Readings in Philosophy, Oxford: 1978, pp 81-90.
 상론한 바 있으므로 그 논변들을 여기서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보다 중요한 책임이 B를 압도한다 해서 그것이 곧 B가 철저한, 무조건적인 등등의 책임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말해두겠다. 처음부터 정말로 압도할 만한 것이 없다면 압도할 수 없다. “일견상”이란 인식론적 문장 수식구이지, 책임 유형에 대한 술어가 아니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는 책임들간의 갈등 현상을 기술하는 데 적합한 용어가 될 수 없다. “일견상 책임”론은 나쁜 철학보다 더 나쁜, 나쁜 문법이다.
 나는 다음이 약속을 지킬 책임에 대한 가장 흔하고도 심각한 잘못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 모두는 방식만 상이할 뿐 고전적 모델의 수용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첫째 잘못:
약속을 지킬 책임은 타산적이다. 지금 이 약속을 지킬 이유는 안 지키면 장차 내가 약속을 해도 신뢰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유명한 얘기지만 흄이 이런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결정적이고 마찬가지로 유명한 반론을 받기 쉽다: 이 해명에 따르면, 살아 있는 어떤 사람도 내 약속을 모르는 경우에는 그 약속을 지킬 책임이 전혀 없게 될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한테 아들이 은밀히 한 약속은 그 아들이 아무에게도 그 약속을 말할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책임도 동반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왜 내가 장차 신뢰받지 못하게 되겠는가? 내가 책임을 떠맡고서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 오직 그 때문이다.
둘째 잘못.
약속을 지킬 책임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도덕 원리의 수용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런 수용을 하지 않았다면 행위자는 타산적 이유를 빼고는 약속을 지킬 아무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의 잘못은 진술을 할 때 참에 대한 연루의 경우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이다. 진술을 한다는 것과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에 대해 연루시킨다는 것의 관계를 순수 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진술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모델은 약속에서의 책임을 약속 행위에 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약속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즉, 이 반론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은 약속함과 책임의 관계가 내적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의상 약속은 책임을 떠맡는 행위다. 책임을 떠맡는다는 말이 없이는 약속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진술의 경우에는 참에 대한 연루가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 가장 분명히 드러남을 보았듯이, 약속의 경우에는 책임이 약속 행위에 내적임을 불성실한 약속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 내가 지킬 의사도 없는 불성실한 약속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나의 기만 행위는 내게는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내가 약속했던 사람에게는 후에 부정직한 행위로 보일 수 있을 텐데, 정확히 왜냐하면 내가 약속을 했을 때는 나는 내가 약속한 것을 하겠다고 스스로를 속박하고 책임을 떠맡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약속을 할 때 나는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짐작해보거나 예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장차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 나의 의지를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나의 부정직한 약속은 충족시킬 의도가 전혀 없이 책임을 떠맡은 것이나마 내게는 하나의 약속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잘못. (이는 둘째 잘못의 보다 정교한 변형이다.)
만일 책임이 정말로 약속에 내적이라면 약속을 지킬 책임은 약속이라는 제도로부터 파생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약속을 했다는 사실은 하나의 제도적 사실이며, 일체의 책임은 그 제도로부터 파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모든 제도가 동일한 지위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노예 제도도 약속만큼이나 하나의 제도다. 그래서 만일 약속이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한다는 견해가 옳다면, 불합리하게도 노예도 약속자 만큼이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즉, 약속에 대한 욕구 독립적 견해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므로 거짓임에 틀림없다. 문제를 올바로 보는 길은 실제로는 제도가 책임의 근거라고 보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리를 제도와 관계없이 수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제도를 시인하거나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 어떠한 약속의 책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으레 우리는 약속을 지키라고 또 따라서 제도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받아들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우리의 시인이 책임의 본질적 원천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제도라는 점에서는 약속이나 노예 제도나 매한가지다. 지금의 우리의 논쟁에 관한 한 유일한 차이점은 우리가 전자는 좋고 후자는 나쁘다고 생각해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임은 약속 행위에 내적이지 않고, 약속 행위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부터 외적으로 파생된다. 약속의 책임이 창출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음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 약속을 깨지 말지어라”.
 이 반론은 이 문제에 관한 고전적 모델의 관점을 요약해주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렇다: 약속을 지킬 책임은 약속이라는 제도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내가 약속을 할 때, 약속이라는 제도는 그저 내가 이유를 창출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나 도구일 뿐이다. 약속을 지킬 책임은 약속을 하면서 내가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이유를 창출한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된다. 의지의 자유로운 행사는 그 의지를 속박할 수 있으며, 이는 “제도”나 “도덕적 태도”나 “평가적 발언”과 아무 상관없는 논리적인 점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노예는, 타산적 이유들을 제외하고는, 노예 소유자에 복종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행사해서 자신의 의지를 속박한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노예는 계약 노동자와 똑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심지어 똑같은 보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판이하게 다르다. 계약 노동자는 노예가 창출하지 못한 이유를 스스로 창출했다. 약속의 책임이 약속 제도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영어로 말하면서 떠맡은 책임이 영어라는 제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잘못이다: 내가 영어는 어떻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내가 영어로 말할 때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고전적 모델에서는, 약속을 지킬 책임이 약속 자체에 대해서는 항상 외적인 것이다. 만일 내게 약속을 지킬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a) 약속 제도는 좋은 것이라고, 또는 (b) 자신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도덕 원리를 내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만 그럴 수 있다. 이 두 입장 모두에 대한 간단한 논박이 있다. 두 입장 모두 이 두 조건 중 어느 한 쪽이라도 결여되면 도대체 약속을 지킬 아무런 책임도 없게 될 것이라는 귀결을 지닌다. 그래서 약속 제도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나,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 원리를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약속을 지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며 이 책을 통해서 그 불합리성을 여러 면에서 지적해오고 있는 것이다.
넷째 잘못.
“약속”, “책임” 등의 말에는 서술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라는 실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서술적 의미로 이런 말들을 사용할 때는 단지 사실을 보고할 따름이지 행위에 대한 이유를 실제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평가적 의미로 사용할 때는 단지 사실을 진술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이 관련되는데, 왜냐하면 이 경우 우리는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하고 그런 도덕 판단은 단지 사실들로부터는 결코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로 논의 전체에 걸쳐 체계적인 애매성이 존재한다. 애매성이란 단어의 서술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 사이에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짧게 하겠다. 이 단어들에 그런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 것은 “개”, “고양이”, “집”, “나무” 등의 단어에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언제라도 단어들을 그 정상적인 연루가 동반되지 않도록 사용할 수는 있다. “저것은 집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저것은 사람들이 집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 경우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점은 연루시켰지만) 그것이 실제로 집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연루시킨 것이 아니다. 이제 마찬가지로 “그가 약속했다”라든가 “그가 책임을 졌다”고 말할 때도, “약속”이나 “책임”이란 단어 주위에 인용부를 붙임으로써 그 단어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동반되는 연루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다고 해서 이런 단어들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거나 그 문자 그대로의 사용에 어떤 애매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약속”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약속을 한 누군가가 약속을 함으로써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책임을 졌다는 것이다. 이런 단어들에 별도의 의미를 설정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회피인 것이다.

 V. 종합적 설명: 욕구 독립적 이유의 사회적 역할.

 이 장에서 지금까지는 내가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 창출의 원자적 구조라고 일컫는 것을 묘사하고자 했으며, 약속이라는 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철학적 전통을 비판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면서 주장과 약속의 몇 가지 특징들을 논의해왔다. 또한 “현상학적 수준”에서의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도 간략히 논의했는데, 그 경우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장차 자기가 어떤 것을 할 이유를 창출할 것이라는 이해에 입각해서 행위한다. 이제 나는, 원자적 구조의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특별히는 욕구 독립적 이유의 역할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생활에 대해서 보다 일반적인 해명을 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언어를 갖고서 제도적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자아에 의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이 왜 만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당신이 결혼을 하거나 술집에서 맥주를 주문하거나 집을 사거나 대학의 강좌에 등록하거나 단골 치과 의사와 진료 예약을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경우 당신은 장차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욕구가 있느냐와 관계없이 당신이 장차 그런 일을 할 이유를 창출하게끔 제도적 구조에 호소하고 있다. 또 그 경우 당신이 그것을 당신을 위한 이유로 자발적으로 창출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을 위한 이유인 것이다.
실천적 합리성에서 이성의 역할에 대한 일반적 해명에는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특징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1. 자유, 2. 시간성, 3. 자아 및 자아를 갖는 일인칭 관점. 4. 언어 및 여타의 제도적 구조들, 5. 합리성.
각각을 차례로 생각해보자:

자유로운 행위
 나는 합리성이 자유를 전제하는 것과 외연이 같다고 이미 논변한 바 있다.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행위가 자유로울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행위가 합리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연관시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합리성은 차이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합리성은 여러 가지 합리적 행위 과정과 비합리적 행위 과정 사이에서 진정한 선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행위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면 합리성은 아무 차이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합리성이 작동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전적으로 믿음과 욕구에만 유발되는 사람은, 고전적 모델에 따르면, 전적으로 합리성의 영역 밖에서 강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믿음과 욕구를 갖고서도 자유롭게 행위하는 사람, 즉 그 믿음과 욕구를 효과적인 이유가 되도록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이 합리성의 영역 안에서 행위하는 사람이다. 행위의 자유, 간격, 그리고 합리성의 적용가능성은 외연이 같다.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으므로 나는 만족 조건에 대해 만족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내가 장차, 그 때가 되면 그것을 하고 싶을지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것을 할 이유가 되는 이유를 창출할 수 있다. 의지를 속박할 수 있는 능력이 이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자유의 표명이기 때문에만 그러한 것이다.

시간
 이론 이성의 진술들은 실천 이성의 진술들이 본래적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는 방식과는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untensed). “나는 B라는 사실을 만들고 싶어서 행위 A를 하려 한다”는 본질적으로 미래를 지칭하지만, “가설 H가 증거 E에 의해서 실증된다”는 본질적으로 전혀 시간 제약이 없다. 물론 특수한 사례들의 경우에는 특정의 역사적 상황들을 참조할 수도 있지만 위의 진술은 무시간적이다. 실로 동물들에게는 즉각적인 이유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없다면 시간을 배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와 일인칭 관점
 앞으로 고찰할 경우들에서는, 자신에 대한 이유의 창출에 참여한 합리적 자아들의 행태의 논리 구조를 우리가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본질적이다. 어떤 외적 관점이나 삼인칭 관점도 어떤 자유로운 행위자가 자신이 장차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인지 관계없이 장차 자신을 속박할 이유를 창출할 수 있는 과정을 설명해줄 수 없다.

언어 및 그 밖의 제도적 구조들.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자면 행위자가 언어를 가져야 한다. 혹자는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하는 원초적, 선언어적 존재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을 체계적으로 창출하고 남들과 의사소통 할 수 있으려면 인간 언어에 특유한 종류의 협약적 상징 장치가 요구된다. 더욱이, 사회적 관계들은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할 때 동반되는 의무론적 관계들을 우리가 나타낼 수 있기를 요구하며, 또한 우리는 요구되는 방식으로 시간을 배열할 언어가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는 자기의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창출한다는 사실을 나타낼 방도가 있어야 하며, 문제의 시간적 및 의무론적 관계들을 나타낼 언어적 방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좁은 의미의 언어 외에, 즉 진술을 하거나 약속을 하는 것과 같은 언어 행위 외에도, 또한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에 작용하는 초언어적 제도적 구조들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사회가 사유재산 제도를 유지해야 재산과 관련된 욕구 독립적 이유가 있을 수 있으며, 사회에 결혼 제도가 있어야만 결혼 제도와 관련된 욕구 독립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유가 제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창출되는 얼개나 구조를 제도가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유는 행위자가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속박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한다.

합리성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는 관행이 사회적으로 효과적일 수 있으려면, 그것은 관련된 행위자의 합리성에 의해서 효과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내가 합리적 행위자라는 점 때문에 나는 나의 이전의 행동이 나의 현재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창출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다섯 요소 전체의 결합
 자 이상의 내용들을 하나의 일반적 해명이 되도록 통합해보자. 우선 시간은 어떻게 조직화할 수 있는가? 분명한 답은 우리는 우리가 지금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방식으로 장차 일이 그렇게 되도록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명종 시계를 맞추어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날 이유가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또한 오전 여섯 시에는 우리가 잠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이유에 따라 행위할 수 있지 못할 것임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자명종을 맞추어둠으로써 장차 어떤 이유에 따라서 행위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자명종이 없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도록 해야 한다고 해보자. 자명종을 여섯 시에 맞추어두는 것과 남한테 여섯 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경우 모두 나는 내가 내일 아침 여섯 시에 깰 수 있도록 지금 무엇인가를 한다. 차이점은 자명종의 경우에는 원인만이 창출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이유가 창출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글쎄, 상이한 종류의 경우들이 존재할 수 있겠다. 문제의 인물이 미덥지 않으면 “날 여섯 시에 깨워주면 5 달러를 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경우 나는 하나의 약속을, 그 사람에게 5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을 한 것이고, 그가 그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는 내가 그에게 5 달러를 내겠다는 조건 하에 날 깨워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것이 계약의 전형이다. 각자는 상대편으로부터 어떤 이득을 받는다는 조건부로 약속을 한다.
 보다 현실적인 경우에서는 내가 그냥 상대로부터 깨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나는 “여섯 시에 깨워 줘”라고 하고 그는 “그래”라고 말하는데, 이런 맥락에서는 그가 무조건적인 약속을 하고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한 것이다.
 세 번째 종류의 경우에서는, 도대체 아무 약속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그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않지만 그가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아침 식사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보자. 나는 그가 나를 깨우지 않고서는 먹을 수 없도록 일체의 조반거리를 잘 놓아두기만 한다. 이를테면 조반거리를 내 방에 두고 문을 걸어 잠근다. 그가 조반을 들자면 내 방 문을 두드려서 날 깨워야만 한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종류의 경우에도 날 깨울 이유를 창출하지만 이 경우의 이유는 타산적 내지 욕구 의존적 이유다. 그는 “나는 조반을 원한다. 쟤를 깨우지 않고서는 조반을 들 수 없으니 쟤를 깨워야겠다.”라고 추론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방법 모두 경우에 따라서는 마찬가지로 잘 작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세 번째 경우가 얼마나 이상한 경우인지 주목하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남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남을 어떤 입장에 처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고 싶도록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형태의 인간의 사회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사회적 토대 위에 시간을 조직화 할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의 미래의 행동에 관한 합당한 예측들을 정당화해줄 메커니즘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쾰러(Kohler)의 원숭이들처럼 욕구만 갖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조직하고 다른 자아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시간을 조직화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조직화하고 조정하려면, 욕구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갖겠지만 욕구 독립적이 될 일군의 그러한 것들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행위에 대한 이유를 제공할 일군의 외적 동기 유발자들의 창출이 필요하다. 즉 상향 적합 방향을 갖는 명제적 내용 및 주체로서의 행위자가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합리적 자아들을 속박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런 합리적 자아들이 그런 것들을 자신들을 속박하는 것으로서 자유롭게 창출할 경우다.
 이제 언어 및 여타의 제도적 구조들의 역할에 대해서 눈길을 돌려보자. 제도적 사실들의 많은 특징들이 분석을 요하고 있다; 나는 그 중 몇 가지를 다른 곳에서 분석해본 바 있어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The Construction of Social Reality, New York: The Free Press, 1995
 그러나 지금의 논의에 필수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제도적 사실들의 경우에는 지향성과 존재론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역전된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사실인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 무겁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므로 저 대상이 무거워 보인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제도적 실재의 경우에는, 존재론이 지향성에서 비롯한다. 어떤 유형의 사물이 돈이 되자면, 사람들이 그것을 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돈이라고 생각하고 그 밖의 적절한 태도를 지니고서 적절하게 행동하며 또 만일 그런 유형의 사물이 그들의 태도에 의해 정해진 위조 화폐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다른 모든 조건들을 만족한다면 그것은 돈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일정한 종류의 사물을 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돈으로서 사용하고, 여기고, 다루는 데에 협력한다면, 그것은 돈이다. 이 경우 “처럼 보인다”(seems)가 “이다”(is)에 선행한다. 이런 현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물리학의 일부로서 보아주면, 좀 시시한 음향학적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주목할만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그 소리들은 영어 문장이며 그 발화는 언어 행위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그 소리들을 문장이요 언어 행위라고 생각하고 또 우리 모두가 협력해서 그 소리들을 문장이요 언어 행위로서 사용하고, 해석하고, 반응하고 또 일반적으로 간주해준다면, 그 소리들이 우리가 그런 것으로 사용하고 간주하고 다루고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아주 간략히 말하고 있지만, 이런 현상들이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 되어 있음을 시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떤 자연적(brute) 실재를 일정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하나의 제도적 실재를 창출하고 있다. 문제의 대상들 - 화폐, 재산, 정부, 결혼, 대학, 언어 행위 - 은 모두 산이나 눈더미와 같은 자연적, 물리적 현상들 수준에서도 서술해줄 수 있다. 그러나 집단 지향성에 의해 우리는 그것들에 지위를 부과하며, 그와 더불어 그렇게 부과하지 않았다면 수행할 수 없었을 기능을 부과해준다.
 다음 단계는 우리가 이런 제도적 현상들을 창출할 때 행위에 대한 이유도 창출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지갑 속에 있는 좀 지저분한 종이 조각들을 잘 간직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것들이 단지 종이 조각 이상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소중한 미국 화폐 조각들이다. 즉, 제도적 구조만 주어지면, 그런 제도적 구조가 없다면 있을 수 없었을 일군의 총체적인 행위 이유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가 행위에 대한 일군의 이유들을 창출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제도적 실재에 관한 한 (적절히 이해되었을 경우에)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남한테 돈을 꾸거나, 술집에서 맥주를 주문하거나, 결혼하거나, 클럽에 가입한다고 할 때, 나는 제도적 구조를 이용해서 이유들을 창출하는 것이며 그 이유들은 제도적 구조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의 결정적 문제, 즉 어떻게 그런 구조들을 이용해서 욕구 독립적 이유들을 창출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에 답한 것이 아니다. 내가 돈을 바랄 아주 훌륭한 이유들을 갖고 있지만 그 이유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나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모두 욕구 의존적이다. 그러나 내가 돈을 치러야 할 책임에 관해서는 어떤가? 남에게 내 빚을 갚아야 하는가? 이러이러한 경우에 돈을 주겠다는 나의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가? 만일 일군의 사람들이 하나의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유일한 기능이 내가 그들에게 돈을 주도록 하는 것이라 할 때 그것만으로는 내가 아직은 그들에게 돈을 주어야 할 아무런 책임이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창출했을지 몰라도 그것이 내게는 이유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제도적 실재를 이용해서 나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들을 창출할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자유와 일인칭 관점의 특징들을 도입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그 때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욕구가 없어진다 해도 나를 속박해줄 그러한 이유를 지금 어떻게 내가 창출할 수 있는가 이다. 나는 이 문제를 삼인칭 관점에서 보면 대답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삼인칭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통해서 일련의 소리들을 내뱉는다. 그는 “내가 널 아침 여섯 시에 깨워줄 것을 약속하지”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 어떻게 그의 의지를 속박할 이유를 창출한 것일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입으로 이런 소리들을 내뱉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내 의도가 무엇인지를 일인칭 관점에서 알아보는 것이다. 또 일단 문제를 일인칭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 해결책도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널 아침 여섯 시에 깨워줄 것을 약속하지”라고 내가 말할 때, 나는 내가 너를 아침 여섯 시에 깨워줄 어떤 특수한 유형의 욕구 독립적 이유, 즉 책임을 스스로 자유롭게 창출한 것을 알게 된다. 이점이 약속에 핵심적인 모든 것이다. 실로 약속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약속은 모종의 책임을 의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 또 그 같은 책임은, 정의상, 그 행위자의 뒤따르는 욕구들과 독립적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내가 어떤 의도를 갖고서 소리를 냈다는 것과 내가 그런 의도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것이 내게는 사실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로부터 “사실이다”에 도달하게 되는지, 또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구조들에 관해 내가 방금 말한 것에로 되돌아가야 한다. 바로 이 처럼 보인다(seems)가 이다(is)에 선행한다는 점이 제도적 구조의 특성이다. 만일 내게 내가 약속을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 그것이 내가 한 것을 할 때에 나의 의도였으며, 당신에게는 당신이 약속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내가 지금은 열거하지 않겠지만 다른 곳에서 지겹도록 상세히 열거했던 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Oh. 3.
 다른 모든 조건들, 즉 약속을 창출시킬 가능성에 관한 다른 모든 조건들이 제시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약속을 창출한 것이다. 나는 미래에 나를 속박할 어떤 새로운 것을 의도적으로 창출한 것이다; 즉, 그것은 나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인데 내가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자유롭고 의도적으로 창출했기 때문이다.

 이제 의지를 속박하는 능력이 미래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창출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지금 나의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이점이, 설령 노예주와 노예가 모두 제도적 구조 속에서 행위한다고 해도, 욕구 의존적 이유만 빼고는 왜 노예가 노예주에게 복종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 바 있다. 노예가 갖는 유일한 이유들은 타산적 이유들이다. 노예는 자신이 행위하기 위한 이유를 창출할 때 결코 어떤 자유도 행사하지 않았다. 한 제도적 구조 속에서 행위자가 어떻게 행위에 대한 외적 이유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면, 그 제도적 구조 속에서 행위자가 스스로에 대한 이유를 자유롭게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본질적이다. 행위자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그것을 자신에 대한 이유로서 창출했기 때문에 그것이 행위자에 대한 이유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이는 그것이 다른 모든 이유를 압도할 이유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실생활에서는 어떤 행위를 할 혹은 하지 않을 수많은 경쟁적 이유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때가 되어도 여전히 행위자는 그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을 갖가지의 다른 경쟁 이유들에 비추어 자신의 약속을 비교 검토해볼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간, 제도적 구조, 일인칭 관점, 자유 이렇게 네 가지 측면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다섯 번째 측면으로 합리성을 보자. 합리적으로 행위할 능력이란, 일관성, 추론, 증거의 인식 및 그 밖에 다른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 일군의 능력들에 대한 통칭이다. 합리성에서 현재의 논의에 중요한 측면들에는 행위의 이유들을 여러 모로 운용하는 능력이 포함된다. 이 시점에서는 그것을 좀 모호하게 보이도록 하고자 하겠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우리에게 다음으로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한 어떤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려는 의도를 갖고서 자유롭게 행위했다고하고, 또 내가 (약속에 대해서든 맥주 주문에 대해서든 아니면 다른 무엇에 대해서든) 그 모든 조건들을 만족시켜서 내가 그 이유를 창출하는 데 정말로 성공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때가 되었을 때 나는 그같은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 사전에 이유를 창출한 것이 지금 제약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데에는 인식적 합리성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이 순간에 대한 제약 이유로서 과거에 창출했던 이유가 정확히 지금 이 순간에서의 제약 이유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약속을 한다든가 맥주를 마시는 것에 대한 어떤 별도의 도덕 원리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책임의 창출과 존속에 관한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 당신이 행위에 대한 이유가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순전히 논리적 모순이다. 이것이 내가 이 장을 시작할 때 들었던 불합리한 사례의 요점이다.

 V. 요약 및 결론

 이 장에서 나는 사람이 어떻게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고 그에 입각해서 행위하도록 촉발될 수 있는지를 보이는 데 관심을 두어 왔다. 행위자가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사실은 무엇이며, 그런 이유가 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형태의 동기라는 주장에 대응하는 사실은 무엇인가? 나는 이런 문제들을 세 가지 상이한 수준에서 논의하려고 해왔다. 최초이자 가장 기본적 수준은 행위자가 만족 조건에 만족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연루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지향성의 원자론적 구조의 수준이다. 두 번째 수준은 “현상학”의 수준인데 여기서는 행위자에게 어떻게 보일 것이냐를 논의한다. 행위자한테 보이기에는,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의도적인 행사를 통하여 그가 그 행위를 수행하기를 바라는지 여부와 독립적인 행위 이유를 장차 그가 갖게끔 장차 자신의 의지를 규제하도록 그가 연루들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또 세 번째 수준은 사회 일반의 수준으로서, 그런 욕구 독립적 이유들의 체계를 갖는다는 것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사람이 욕구 독립적 이유를 창출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촉발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기본적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런 제도적 사실들의 창출에 충분한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 이런 구조들은 반드시 언어적이지만 이 구조들이 여타의 제도들도 포함시킬 수도 있다. 그런 구조들은 우리가 집을 사고 맥주를 주문하고 대학에 등록하는 등등을 할 수 있게 해준다.
2. 이런 구조들 안에서, 행위자가 적절한 의도를 갖고 행위한다면, 그것은 욕구 독립적 이유의 창출에 충분하다. 구체적으로, 만일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가 그런 이유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도를 갖고서 행위한다면, 달리 제반 여건이 적절하다면, 그는 그런 이유를 창출한 것이다. 결정적인 의도는 그것이 이유이어야 한다는 의도다. 욕구 독립적 이유는 제도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제도는 그런 이유들의 창출 수단을 제공할 따름이다.
3. 그런 이유들을 창출할 때 지향성의 논리적 형식은 늘 만족 조건에 대한 만족 조건을 부과하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 창출의 가장 순수한 경우가, 말하자면, 약속이다. 그러나 약속이란 약속을 하는 사람을 명제적 내용의 주어로 하고 자기 지시적 요소를 만족 조건에 부과한다는 점에서 언어 행위 가운데서도 특이한 행위다. 약속의 만족 조건은 화자가 어떤 행위를 실행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화자 자신이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약속에는 자기 지시적 요소가 있으며, 이 요소는 여타의 언어 행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장 행위에는 자기 지시적 요소가 없다.
4. 일단 책임이 창출되면, 행위자는 그 책임을 그 후에 뒤따르는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인식적 합리성이라는 요건이다. 책임은 행위에 대한 이유의 구조를 갖는다. 상방 적합 방향을 갖고 행위자를 주체로 하는 작위성이 존재한다.
5. 일단 행위에 대한 욕구 독립적 이유가 창출되었으면, 다른 어떤 이유의 인식도 그 행위를 수행할 욕구를 촉발할 수 있듯이, 그 이유가 행위 수행의 욕구를 촉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을 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인식한다는 것이 이미 그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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