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술 철학을 위한 초기 전략*
2)J. Margolis** 저
예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해 나갈 때 우리는 국부적인 특정한 세부 사항에 늘 매혹된다. 예를 들어, 여섯 살 나이로 뛰어난 그림들을 그렸던 자폐증 소녀에 관한 이례적인, 이러한 종류로서는 아마도 최초일 보고서가 최근에 출판되었다.1) 그 소녀를 치료하였던 정신과 의사들과 교사들은 마침내 소녀가 몇 마디 말을 구사할 수 있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의 결과로서 그 소녀는 일견 언어를 대신했었던 것같던 신선한 창조의 경이로운 흐름을 완전히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어린 신동들이 보여 주는 식의 천재성은 조형 예술의 기교를 배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이론을 펼쳐 왔다. 왜냐하면 조형예술에서 요구되는 이들 기교들의 완숙은 이를테면 수학적 재능이나 음악적 재능과는 달리 문화적 영향력에 특유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사실 N. 데니스2)의 보고에 따르면 K. 뷜러는 초기의 언어 학습이 초기의 그래픽 능력을 압도하게 되어 결국 언어가 "그래픽 능력을 완전히 삼켜 버린다"고 실제로 주장했다고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천재 소녀 나디아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평범한 일상적 지각으로 간주되는 것과 외견상 별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 자신들이 본 것을 그림으로 변형시키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지각 사이에 놓여진 차이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수많은 사례들은 설명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면서 계속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사례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언어 및 문화 습득 과정의 성공이 적절한 행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목격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습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은 물론이다. 자폐증 소녀의 그림이나 아이들의 노래만큼 블레이크의 삽화나 쿠페렝의 성가곡 등 우리의 눈과 귀를 매혹시키는 모든 예술적 창조들은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차단시켜 놓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창조적 정신의 작업을 분석해 왔다고 주장할 수 없음은 확실한 일이다. 따라서 특히 예술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창조적 정신이 모여있는 광상을 샅샅이 뒤져보는 것이다.
예술 철학의 성립을 위한 최초의 전략 2
2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관한 이론을 펼쳐 나갈 때 한 개념의 힘은 선택된 세부 사항들을 해명하는 데에 있다기보다 (물론 그런 일을 해야 하기는 하지만), 광범한 탐구 영역들간의 더욱 긴밀하고 확실한 통일성 - 우리의 직관에 필적할 설득적인 사유의 스킴을 마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감지된 통일성 - 을 규정하는 데에 있다. 예컨대 예술 작품, 언어, 인간의 역사, 그리고 지능이 있는(intelligent) 인간의 사려깊은 행위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문화적으로 의미 있고(significant) 문화적으로 창발적인(emergent) 현상이라고 말하려 한다. 이 점을 승인하는 일은 아주 용이한 듯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승인은 훨씬 덜 분명한 생각, 즉 예술론은 자신이 조직해 놓고 있는 영역이 인간의 문화적 삶의 다른 모든 두드러진 모습들과 체계적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리라는 생각을 부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그러한 이론의 전망과 함께, 우리가 발견들을 조정하여, 예술과 다른 문화적 현상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도한 왜곡을 줄이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우리의 직관에 허용하기만 한다면 예술과 그 밖의 인간 문화를 결부시키는 데서 오는 잠재적 획득물들을 학문적으로 강화된 그럴듯한 내적인 진실과 맞바꾸는 일마저 가능할 것이다. 개념의 변화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불연속적인 이론들마저 정식화되고 있는 바의 언어의 초기와 후기의 국면 사이에 통시적으로 필연적인 중복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파이어아벤트3)나 쿤4)과는 다른 생각이다.) 결국에 가서 이 말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제안이란 우리의 흥미를 끄는 가장 강력한 대안의 개념들에 대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이론을 주장하기 위한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거의 학문적인 연구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학자들의 논쟁은 우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예술 공동체의 사람들, 더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배경으로 하여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론은 박식한 다른 전문 이론가들의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쳐야 한다.
외관상 명백한, 그렇지만 단지 외관상으로만 그럴 뿐인 한 여담이 예술, 인간의 역사, 행위, 언어, 인간의 공통적인 문화적 자격을 강조하는 입장이 지닌 힘을 보여 줄 것이다. 분석 철학권 내에서 존재론적 논쟁에 대한 계속된 회피 이후 등장한 P. F. 스트로손의 유명한 저서 『개체들』5)은 그것이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대담하고 참신한 듯이 보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person)과 신체(physical body)는 모두 "기본적 개별자들"(basic particulars), 즉 "그 집합의 개별자들에 대한 지시체들(references)을 확인하지 않고서 다른 집합들의 개별자들에 대한 지시체들을 모두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할, 그러나 다른 집합들의 개별자들에 대한 지시체를 확인하지 않고서 그 집합의 개별자들에 대한 지시체들을 모두 확인하는 것은 가능할 그러한 개별자들의 구분 가능한 집합들 또는 범주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스트로손은 인간에 관한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거부하고, 인간과 신체 양자가 모두 기본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것을 위반을 하면 모순이라는 조건으로, 스트로손의 견해에 있어서는 인간과 신체가 동일한 하나의 것으로 취급될 수 없었고, 물체는 인간의 고유한 부분들을 형성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물체에는 오직 물질적 속성만이 귀속될 수 있는 반면, 인간에는 인간적 속성과 물질적 속성 양자 모두가 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물체는 구분된다고 언급되고 있다.
스트로손의 설명은 그가 외견상 미쳐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가 말하는 "인간"은 단순히 감각 능력이 있는 생물(sentient creature)일 뿐이지 기운생동하는 의미에서의 인간이라고 결코 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인간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지진 않지만 자신과 결부된 물체와 엄밀하게 동일한 속성들을 가질 수 있게 될터인데 말이다. 서로의 부분이 아닌 별개의 두 존재자는 정확히 동일한 하나의 장소를 차지한다는 점이 스트로손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승인되어야만 한다. 이 밖에도 또다른 문제점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것이 인간이 물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스트로손의 경탄스럽고도 합당한 주장에 대한 경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만일 그의 제안이 조금이라도 옹호되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옹호되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예술 철학과 관련해서 볼 때, 스트로손의 전략에서 특히 시사적인 점은 간단히 말해 인간과 물체가 순전히 지각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서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이론의 귀결이 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감관에 의해 식별될 수 있는 신체가 가지는 성질들은 그 성질들이 무엇이건간에 신체와 (비이원론적으로) "결부되어"(affiliated) 있다고 언급 - 어떤 점에서는 스트로손에 의해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언급 - 되는 인간으로부터 신체를 구분해 낼 수 없다. 일단 이 점이 파악되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 쉬운 일임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주장의 논제가 훨씬 더 명확할 것이다. 단어와 문장이 비록 순수히 지각적인 수단에 의해서는 소리나 징표로부터 구분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들과 "결부되어 있는" 바의 그들 소리나 징표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모든 문화적 현상들이 이러한 특성을 나타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즉 모든 문화적 현상들이 일정 의미에서 (비이원론적으로 그리고 비환원적으로) 일종의 물체나 물질적 존재자와 결부되어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러한 유형이 예술 작품에서도 나타난다고 곧바로 상정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를 통해 나타난 많은 유명한 예술론들의 허점을 지적하는 그리고 더욱 흥미롭고 새로운 최근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매우 경제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는 완전한 논증이 아니며 단지 논증의 전략에 대한 약술에 불과하다. 이 방법을 추구하는 이유는 이 방법이 시작의 간결성과 밝은 전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적어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직관에, 적어도 그럴 듯한 유비에, 그리고 문화계의 다양한 하위 영역들이 맺는 관련을 알고자 한 처음의 관심으로 우리를 환원시키는 개념적인 실마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가 취하는 접근 방식의 장점은 극단적 환원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에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에 대한 현행의 존재론을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이미 유명한 예술론을 구성한 사람들의 주장과 승인에 대하여 적어도 변증법적인 논의를 진행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도 놓여 있다. 다음의 몇가지 표본적인 사례들은 이러한 중요한 시작이 지닌 두드러진 힘을 한 몫에 보여줄 것이다.
예술 작품의 존재론과 감상에 관련된 가장 시사적인 최근의 논문들 가운데 하나인 「예술계」에서 A. 단토는 많은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6) 그의 주장은 더 체계적이고 더 명백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ⅰ) 예술 작품은 "예술적 동일화(identification)의 이다(is)"에 의해서, "실제 [물리적] 대상"과 관련되고 또 구분된다. 즉 예술 작품은 실제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의 물리적 성질을 소유하거나 물리적 부분을 통합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존재자로 동일화되고 현재와 같은 존재자(entity)가 된다. (ⅱ) 예술 작품은 그것이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의 의미에서) 곧바로 실제 대상이 될 때 실제 대상으로 오해되기 쉽다. (ⅲ) 예술 작품은 (물리적 대상의) 실제 세계에 그리고 단토가 "예술계"로 명명한 세계에 분명히 속하는, 따라서 "이중 국적을 향유하는" 존재자의 표본이다. (ⅳ) 우리가 일정 의미에서 동의하는 예술론은 "[어떤 대상을] 예술계로 끌어올려 그 대상이 그 대상의 이다(예술적 동일화의 이다가 아닌 다른 이다의 의미에서)인 실제 대상으로 붕괴되는 것을 막아주는" 이론이다. (ⅴ) 서로 다르지만 지각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두 예술 작품은 하나의 동일한 실제 물리적 대상과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의 의미에서)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리적 대상은 이러한 동일화에 의해 "그 스스로의 부분으로 ... 포함된다." (ⅵ) 어떤 예술계 이론을 이용해서 물리적 대상을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물리적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ⅶ) "어떤 것을 예술 작품으로 보는 것은 예술론의 분위기나 예술사에 대한 지식처럼 눈이 식별해낼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이 곧 예술계이다." 즉, 예술 작품 생산의 인과적 역사적 조건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며, 그러한 지식은 어떻게 실제 대상이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에 의해서) 예술 작품과 관련되는 가를 설명하는 이론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흥미를 자아내는 이러한 일련의 주장에는 숨길 수 없는 어떤 약점이 있다. 첫째, 순수히 물리적 대상인 동시에 예술 작품인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 있다는 주장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의도적이지만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애매성이 있음이 명백하다. 만일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가 일상적인 동일성의 "이다"가 아니라면 (이는 틀림없이 참이다), 단토의 주장처럼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 이중 국적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만일 단토가 스스로 공감하면서 언급했던 스트로손의 입장과의 유비를 지지한다면, 그는 물리적 대상의 부분들이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의 부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그가 물리적 대상의 부분들이 예술 작품의 부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가 일상적인 동일함의 "이다"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만일 그가 부분들에 관한 논제를 일관성 있게 고집 한다면, 그는 예술 작품의 동일화가 비지각적인 종류의 고려들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듯이 보인다.
우리는 단토의 설명을 그 자신이 인용했던 설득력있는 사례들을 통해 세련화 시킬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뉴튼의 제 1법칙」과 「뉴튼의 제 3법칙」이라는 (가공의) 두 프레스코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지각적인 식별 불가능성이 쉽게 논변될 수 있음을 맛깔스럽게 확증한다. 두 작품은 검은 수평선에 의해서 정사각형에 가깝게 분할된 동일한 흰 직사각형들처럼 보인다. 단토가 지각적 구분에 관해서 완전히 다르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는 다음 두 논제를 강조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a) 서로 완전히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지각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두 예술 작품을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동일화 하기는 가능하다. (b) 어떤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동일화하는 것은 예술계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통해 알려진 비지각적인 인과적?역사적 배경에 의존한다. 더 최근에 단토는 (출판되지 않은 논문에서) 어떻게 맨해튼 지역 전화 번호부를 일종의 소설로 해석하는 동시에 일종의 조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매우 간결하고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단토가 예로 제시한 사례들의 그럴듯함과 그가 제시한 해명의 일반적인 취지는 그가 제시하는 노선에 다소간 따르는 이론을 필요로하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덧붙여져, 예술 작품이란 본질적으로 (또는 어떤 대안적 의미에서 특징적으로) 지각적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론들을 아주 위태롭게 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몇 가지 약점이 지적됨에도 불구하고 단토의 논제가 지닌 힘을 파악하는 일은 비어즐리가 수년 동안 옹호해 온 이론과 같은 유명하고 대단히 영향력 있는 이론들을 일거에 격파하는 일인 셈이다.
이러한 논증을 세부적으로 응용하기 전에 우선 논증의 전략을 명확히 해보자. 우리는 인간, 예술 작품, 단어와 문장, 인간 역사를 형성하는 행위 등의 문화적 현상들이 그런 현상들을 문화적으로 창발하는 것으로 구획 짓는 어떤 독특한 성질들을 공유한다는 일반적인 직관에서 출발한다. 핵심적인 단서는 단순한 신체로부터 인간을, 단순한 징표와 소리로부터 단어와 문장을,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으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그리고 이와 매우 유사하게 물리적 재료로부터 그 물리적 재료 속에서 어떻든 표현되는 예술 작품을 분류해 내기 위해서는 일종의 기능적이고 비지각적 구분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 인간에 관해서는 스트로손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하나의 제안을 했고, 언어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 점을 논의하지 않았으며, 예술에 관해서는 단토가 바로 이러한 논제를 역설했다. 문화적 현상에 대한 보완적인 분석이 결핍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골리스7)를 참고하라). 그러나 이 논제는 예술 작품을 철저하게 본질적으로, 특징적으로, 또는 뚜렷하게 지각적 특질의 용어로 다루는 이론들에 상당한 의구심을 던져 놓는 변증법적인 기능을 한다. 이 논제를 역설하는 것이 그럴 듯한 부분적인 이유는 지각적인 용어로는 적합하게 분류될 수 없는 표본적인 사례들이 쉽게 얻어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다른 종류의 항목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들 속에서도 쉽게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는 다루기 가장 힘든 예술인 문학과는 대조적으로 이른바 시각예술 속에서조차도 이러한 사례들이 쉽게 얻어질 수 있다. 라우쉔베르크의 「Erased DeKooning drawing」과 뒤샹의 「L.H.O.O.Q. shaved」를 시각예술 속에서의 이러한 사례로 들 수 있다 (빙클리의 논문8)을 참고하라). 이 논제가 그럴 듯한 또 한가지 이유는 이것이 어느 특수한 문화 이론, 즉 단순히 어느 해당 목적만을 위해 마련된 어떠한 이론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이끌어진다. 물론 적합한 이론을 마련하는 일이 결정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은 위에서 언급된 비지각적인 고려의 중요성을 수용하거나 설명해 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단토의 논제를 지지하는 일에 어떤 올바름 직한 무게가 있다. 왜냐하면 문화적 영역 속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불일치를 효과적으로 또는 조금도 설명하지 못하는 한, 어떠한 형태의 반론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적 현상이 의도적 용어, 인과적 혹은 생산적 용어, 기능적 용어, 또는 역사적 용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특히 표본적인 사례들이 보여주는 장점에 근거하였을 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 만큼을 승인하는 것은 곧 예술 작품이 비지각적인 용어로 동일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적 특질들에 대한 식별이 지각적 취미의 한 형태라는 F. 시블리9)의 널리 알려진 이론은 단지 예술에 대한 감상에만 그 자신의 의도대로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에 즉시 약점이 드러나게 된다. 미적 개념의 논리적 특유성에 대한 시블리의 견해는 그 자신의 논제가 그러한 개념들이 본성상 반드시 지각적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미적 취미와 관련된 비지각적인 구분을 인정하라. 그러면 우리는 시블리의 이론이 수용할 수 없는 구분을 인정하게 된 셈이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의도주의 오류를 비난하는 W. 윔셋과 비어즐리의 논증10)은 예술 자체의 본성과 현저하게 반대되는 듯이 보인다. (만일 예술이 문화적 현상으로 인정된다면) 의도성을 고려하는 일이 지닌 적합성을 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듯하다. 물론 지금까지의 설명들은 논증을 단순히 약술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의 설명들은 고려되고 있는 전략이 지닌 경제성과 밝은 전망을 보여준다.
때마침 이러한 전략은 양날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전략은 예술 작품을 단순히 지각적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포기케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전략은 물리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 사이의 관계를 동일성 관계 이외의 다른 관계로 명료화하도록 한다. 이러한 전략에 따르면 시블리의 이론과 비어즐리의 이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뿐만 아니라 단토의 이론과 스트로손의 이론도 적어도 각각의 이론이 그 이론 스스로가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구분과 모순되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스트로손의 이론은 수적 동일성 개념을 정식화함에 있어서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것을 핵심적인 사실로 승인하면서도, 수적으로 구분되는 두 사물이 동일한 장소를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승인함으로써 실패한다. 그리고 (우리의 쟁점에 보다 적절하게 관련되어 있는) 단토의 이론은 예술 작품이 물리적 대상인 동시에 (단순한) 어떠한 물리적 대상과도 다른 대상이라고 은연중에 주장함으로써 실패한다.
역설적이게도 단토의 입장이 지닌 불안한 애매성은 우리가 그 자신의 설명의 취지에 따라 다른 문화적 현상에 대한 그의 분석을 엄밀히 검토할 바로 그 때 더욱 큰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행위 이론(action theory)이 가장 교훈적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1) "나는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행위들을 경기장 담장 안과 일상생활 안에서 지니게 되는 종류의 의미로 그 행위들이 채색되기 전에 분리해 내고자 한다...나는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행위를 기본적 행위라고 부를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나는 우리가 행하나 그러나 우리가 또달리 행하는 어떤 별개의 것을 통해서는 행하지 않는 그러한 행위들을...기본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매개된 행위 [매개된 행위 속에서 우리는...우리가 행하는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행한다]는 기본적이지 않다 (cf. 브랜드12); 스타우트랜드13))." 따라서 단토는 기본적 행위를 매개된 행위의 "구성 요소"로 간주한다. (이 점에서 그는 D. 데이빗슨14)과 다르다. 데이빗슨은 매개된 행위처럼 보이는 행위를 동일한 하나의 "원초적(primitive) 행위"에 대한 대안적인 기술로 간주하고자 했다.) 단토는 매개된 행위를 기본적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매개된 행위는 "의사 소통의 조직으로 흡수된...더 인간적이고 더 사회적인 것으로" 구분되고 "인간적 또는 문화적 용어로 기술된...인간 역사의 일부로 축적된다." 그러나 단토는 기본적 행위가 "일련의 생리적인 [움직임]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기본적 행위가 매개된 행위와 동일하지 않다는 그의 논점을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강화시켜 준다. 지금껏 우리는 기본적 행위와 매개된 행위 사이의 관계가 물리적 대상과 예술 작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문화적) 유비를, 즉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에 평행하는 구조를 형성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우리가 다양한 문화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된 특징에 관해 처음에 지녔던 직관을 매우 깔끔하게 개정하게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행이 인간의 기본적 행위의 경우에서와 똑같은 의미에서 이루어 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토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두 종류의 행위를 모두 수행하는 "나"는 동일한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적 행위가 일련의 생리적인 움직임과 엄격하게 동일시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에 평행하여 기본적 행위는 일련의 생리학적 움직임과 (문화적으로) 동일한 것이다라는 그러한 의미로서는 기본적 행위가 단토가 원래 설정했던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채색되지 않은 행동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점은 두 종류의 행위를 모두 수행하는 자가 문화적으로 교육받은 동일한 한 행위자임을 인정함으로써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여담처럼 들리는 이러한 주장은 단토의 예술론에 대해 교훈적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하나의 동일한 대상인 예술 작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예술 작품으로서의 "이중 국적"을 향유한다는 논제를 명료화하는데 (그리고 자극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환원주의의 유혹을 명백히 피하는 방법 속에서 예술 작품의 존재론을 명료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비어즐리는 미학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 속에서 예술 작품의 본질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미학』15)에 달린 색인은 "예술 작품"(work of art)이라는 표제 하에 극소수의 항목들을 보여 주며 "예술"(art)이라는 표제 하에서는 아무 항목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술 정의나 예술 작품의 존재론에 관련된 것도 전혀 없다. 그리고 "예술 작품"이라는 표제 아래 그가 제공하는 항목들도 암시적으로는 "미적 대상"이라는 표제를 지칭한다. 문학에 대한 탁월한 개괄을 펼친 이후, 비어즐리는 예술 작품의 본성을 검토하는 일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의 본성을 검토할 때,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예술에 관한 두 논제에 반대하는 일이었다. 그는 (ⅰ) 단토에 반대하여, "모든 예술 작품이 반드시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아직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16), (ⅱ) T. F. 디피17)와 G. 디키18)에 반대하여, "예술의 자격을 수여할 만한 종류의 대상"이라는 논제를 순환적인 것으로,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19)
비어즐리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단서는 그의 미적 대상 개념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진행된 논변의 맥락 속에서, 일견 지엽적인 듯한 방식으로 문제에 다시 한번 접근할 수 있다. 첫째, 비어즐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시블리의 의미에서) 미적 성질들을 소유하는 일이 예술 작품에서는 정상적인 일이다는 주장에...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미적 성질들에 대한 소유가 제도(institution)의 존재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면, 예술은 다음 조건의 의미에서, 즉 'P가 예술 작품의 정상적인 성질인 경우, 만일 어떤 제도의 존재가 "이 예술 작품은 성질 P를 가진다"는 문장의 진리 조건들 가운데 포함된다면,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제도적 대상이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제도적인 존재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비어즐리의 전략은 예술이 본질적으로 지각적이라는 논제의 한 변형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만일 제도론이 지각성을 수용하게 될 수 있다면, 비어즐리는 제도론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둘째, 비어즐리는 실제로 문화적 창발의 문제 일반을 건드리고 있다. 그는 구현의 "이다"("is" of embodiment) 개념에 주목하며 (마골리스의 글을 참고하라20)), 인간과 예술 작품 사이의 유비를 인정하고 예술 작품과 인간의 행위 사이의 더욱 심화된 유비에 관심을 기울인다. (아직 분명하게 해결되진 않았지만) 하나의 사건(event) 또는 하나의 행위(action)로 추정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기술 -"그 남자의 팔의 움직임(the man's arm's moving)", "그 남자의 팔 들어올림(the man's raising his arm)", "그 남자의 신호함(the man's signalling)"- 에 관해서 비어즐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관점에서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들이다... '구현'에 관해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팔의 움직임이 신호함과 동일한 사건일 수 없다는 주장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다... 인간 사회를 떠나서는 신호함 같은 행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분명 사회나 문화에 의존하지 않는 팔 들어올림 같은 행위는 존재할 것이다. 팔 들어올림, 그것은 사회와 문화에 의존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호함이 "문화 의존적"이고, 팔 들어올림이 신호함과 동일한 하나의 행위라면, 비어즐리 자신이 채택한 가설에 따라 문제의 행위인 팔 들어올림은 문화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비어즐리는 그 행위, 즉 팔 들어올림이 "그 남자의 팔의 움직임"이라는 단순한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입증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점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즉, 비어즐리는 단토 자신이 이전에 해결하지 못했던 바로 그 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문화 현상에 관한 우리들의 담론이 지닌 특유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동일성 이외의 어떠한 관계 (예술적 동일화의 "이다", 구현의 "이다", 또는 어떤 적합한 유비)도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입증하지 못함으로써 의혹을 증폭시켰다. 특히, 만일 비어즐리가 신호함이 문화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는 이미 그 행위가 오직 비지각적 근거, 즉 의도적, 역사적, 선택된 인과적 근거에서만 동일화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 온 것이 된다. 더 나아가 만일 비어즐리가 그 남자의 팔의 움직임이라는 물리적 사건이 지각적인 근거에서 동일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아주 합리적인 듯이 보인다), 팔 들어올림이라는 행위가 팔의 움직임이라는 사건과 동일하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만일 비어즐리가 자신이 의도한 듯한 대로 인간, 예술 작품, 그리고 인간의 행위 이 세 가지에 대한 분석이 적합한 공통된 규정을 따라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는 예술 작품 (또는 그의 설명의 문맥에서 예술 작품의 적절한 대리물)이 지각적 대상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 철학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배경 속에서 문제들을 점검하는 작업이 지닌 장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비어즐리는 예술 작품이 "무엇에 관함"(aboutness)이나 (브렌타노의 의미에서의21)) 지향성(intentionality)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단토와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은 아주 공정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논쟁은 단토의 주장이 지닌 핵심을 놓치고 있다. 단토가 「예술계」에서 모든 예술 작품이 지향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서 더 중요한 내용은 비록 어떤 특정한 예술 작품이 무엇에 "관한"(about)것이 아닌 경우라 할지라도 "무엇에 관함"의 문제들이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예술 작품(단순한 물리적 대상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예술 작품)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어진 작품이 어떠한 것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발견은 비지각적인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어즐리의 반대는 역설적이게도 더 중요한 주장을 확증하고 있다.
디키에 대한 비어즐리의 반론 또한 양날을 가지고 있다. 디키의 논제가, 즉 예술 작품은 일종의 제도적인 자격 수여를 통해 예술작품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논제가 불합리하거나 공허하게 들리기는 한다(마골리스를 참고하라22)). 그러나 비어즐리는 예술 작품이 특정 문화의 제도적인 생기를 통해 예술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디키의 주장에 대해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디키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앞서 살펴본 바에 따라 예술 작품이 비지각적 근거에서 동일화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행위와 물리적 사건 사이의, 인간과 물체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 이미 언급된 바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키의 전략이 문화적 현상에 대한 더 유망한 접근 방식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수여하는 행위에 대한 그의 논제가 지닌 약점 이외에도, 그는 인공품이나 제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매우 등한시하고 있다. 그는 단토의 예술계 개념을 빌어, 예술을 구분짓는 표식은 눈으로 "식별될 수 없는" "비전시적(nonexhibited) 성질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디키는 이러한 언급이 "설명을 요구"한다는 점을 올바로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예술계가 "개별적 예술 작품의 제시(presenting)를 위한 틀"을 제공하는 "제도" 혹은 "관행"(established practice)라고 말할 뿐이다.
그렇지만 디키는 "특수한 종류의 미적 의식, 미적 주목, 혹은 미적 지각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논제를 강조하고 이를 논증한다. 비어즐리가 거부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이 바로 이 논제이다. 그러나 비어즐리의 논증은 다소 모호하다. 왜냐하면 그는 미적 상황에 대한 최근의 설명에서 "지각"이라는 개념을 "경험"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23) 그러나 문맥상으로 봤을 때 비어즐리가 자신의 초기 주장, 즉 우리가 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지각하는 대상이다는 주장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분명하다. 아마 (문학에 대한 언급에서처럼) 그는 "지각"이라는 용어보다 "경험"이라는 용어가 더 광범위한 영역을 수용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개념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 그의 의도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단순히 지각적 -조형 예술 또는 음악에나 걸맞는 의미에서의 지각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조형 예술이나 음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지각적인 것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설명에서 비어즐리는 "지각적이고 의도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언급한다.24) 그러나 여기서 "의도적인" 이라는 말은 조형 예술과 음악 속에서 미적으로 지각된 것과 단지 유사한 것이 문학에 대한 미적 경험 속에서 나타날 때 그것을 포괄하려고 쓰였음에 틀림없다.
비어즐리의 몇 가지 언급은 그의 입장을 분명하게 할 것이다. "대상의 미적 가치는 미적 만족을 제공하는 능력을 통해 그 대상이 소유하는 가치이다." 그리고 "만족은 복합적 전체의 형식의 통일성에 대한 그리고/또는 지역적 특질에 대한 주목으로부터 일차적으로 획득될 때, 그리고 그 희열의 크기가 형식의 통일성의 정도와 그리고/또는 지역적 특질의 강도와 함수 관계에 있을 때, 그러할 때 미적이다." 따라서 미적 가치에 대한 비어즐리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다음과 같다. (ⅰ) 미적 가치는 대상 안에서 객관적으로 발견되고 또 대상에 의해서 소유된다. (ⅱ) 미적 가치는 특히 "올바르게 경험될 때" 지각 또는 경험에 의해서 구별된다. (ⅲ) 미적 가치는 형식의 통일성과 지역적 특질(quality)이라는 성질들의 함수이며, 비어즐리는 이러한 성질들을 지각적인 것으로 항시 해석했다. "동일한 미적 대상"에 대한 복수의 "제시물"(presentations)과 관련된 비어즐리의 입장25)은 사실상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미적 대상에 대해서 기술할 때 [그러한 대상의] 지각 가능한 성질에 관심을 갖는다. 지각 가능한 성질들이라는 말을 표현키 위해 '특질'이라는 단어를 별도로 남겨 둘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복합물의 지역적 특질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어떤 복합물의 지각적인 지역적 성질들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는 통일성이 대상에 대한 "경험 속에 존재하는 현상적으로 객관적인 제시물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상적으로 객관적인 제시물"이라는 말을 "시각적, 청각적 혹은 언어적" 현상에서처럼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자각하거나 의식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함에 틀림없다. 여기서 "인과적 조건들...물리적 기반, 창조의 물리적 과정, 그리고 [대상을 생산해 낸 사람의] 전기적 배경에 대한 지식"은 명백히 배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어즐리는 이러한 유명한 논제를 전개하고 있는 바로 그 문맥에서 "예술 작품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신중하게 만들어진 무엇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작품(work)이다. 그것은 아트(art) 혹은 기교의 산물이다. 적어도 예술이란 용어의 전통적 의미속에서는 그러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인정이 "미적 대상"에 비어즐리 자신이 부과한 제한들을 뒤업는 듯이 보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비어즐리는 "예술 작품"과 "미적 대상"을 동치개념으로 다루고 싶어하지 않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 작품'이라는 용어를...용의주도하게" 지금껏 회피해 왔지만 (일단 비예술이 미적으로 감상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예술 작품이 아닌 모든 지각적 대상들로부터 예술 작품을 분리"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고 비어즐리는 말한다.26) 그러므로 비어즐리는 예술 작품을 지각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일과 그리고 예술 작품이란 그것이 문화적으로 교육받은 인간의 어떤 노력 -지각적으로 식별될 수 없는 그리고 미적 영역으로부터 명백히 배제된 노력- 에 의해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예술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일을 동시에 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인다. 결국 비어즐리는 그가 우리로 하여금 미적으로 감상하도록 초대했던 바로 그 대상이 우리의 적합한 감상적 주목을 제한하게 되어 있는 조건 아래서는 그러한 대상으로 동일화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은 확실히 배리적(reductio)이다. (곤혹스럽게도, 더 이상 동일한 예술 작품에 대한이 아닌) "동일한 미적 대상"에 대한 복수의 "제시물"과 관련된 비어즐리의 입장이 지닌 다른 모든 널리 알려진 난점들도 그가 이러한 본질적인 딜레마를 간과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마골리스의 글을 보라.27))
한가지 최종적인 참조가 우리의 일반적 전략을 완성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N. 굿맨은 예술 작품을 단순한 지각적인 대상으로 다루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예술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8) 그는 재현, 상징적 기능, 위조품, 기보법을 분석함으로써 이를 상세히 논증했다. 그러나 예술의 상징적 기능에 대한 굿맨의 설명은 상당한 결함이 있다. 그 본질적인 약점은 직접적으로 예술 작품에 귀속될 수 있는 혹은 직접적으로 "예술 작품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속성들(attributes)의 범위와 관련된다. 따라서 우리는 단토의 설명을 검토할 때처럼 굿맨의 설명을 검토할 때에도 예술의 속성들이나 예술의 동일성 조건과 관련된 혹은 양자 모두와 관련된 어떤 난점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예술의 동일성 조건과 관련되어서는, 예술 작품의 재인(reidentification)에 대한 굿맨의 제한이 설득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다는 점 이외에는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있는 점이 없다. (우리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예술 작품의 성질들에 대한 굿맨의 설명이다.
굿맨은 예술 작품이 "특별한 종류의...상징 체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예술 작품이 예술 작품으로서(qua) 어떤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비록 예술 작품이 어떤 다른 종류의 상징적 성질을 지니는데 실패한다 할지라도, 예술 작품이 항상 혹은 특징적으로 표현적 성질들을 지니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표현되는 것은 은유적으로 예화된다"; "거의 모든 사물은 거의 모든 다른 사물을 지칭할 수 있거나 심지어 재현할 수도 있는 반면, 어떤 하나의 사물은 자신에 속한 그러나 본래는 속하지 않았던 것만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굿맨의 논제를 두 가지 지점에서 압박할 수 있다. (a) 표현적 특질들의 소유는 왜 예화를 함축해야 하는가? 그리고 (b) 표현적 특질들은 왜 은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굿맨의 논제에 내재된 동일한 고려들이 이 두 물음을 풀어낸다.
굿맨은 예화(exemplification)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화는 소유(possession) 더하기 지시이다. 상징하지 않고서 가지는 것은 단순히 소유하는 것이다...[천의] 조각 [하나]는 그것이 가지기도 하고 지시하기도 하는 성질들만을 예화한다." 그러므로 만일 예술 작품이 성질들, 특히 표현적 성질들을 예화하지 않고 단순히 소유한다면, (굿맨의 용어로) 우리는 예술 작품이 상징 체계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강한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 된다. 논증은 간단하다. 우선, 어떤 대상이 자신이 예화하지 않은 수많은 성질들 (예컨대, 지각 가능한 성질들)을 지닐 수 있음이 굿맨이 든 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푸른 천 한 조각은 비록 문제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푸른 천의 혹은 특정한 푸른색의 샘플이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그 천 조각을 하나의 샘플로 다루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굿맨의 논증이 표현적 성질들은 어떤 독특한 방식으로, 즉 은유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의 논증은 전혀 설득력이 없게 된다. 이 때 논증의 두 번째 단계는 다음과 같다. 비록 표현적 성질이 처음에는 은유적으로 귀속된다 할지라도, 어떤 대상이 그 성질을 소유할 때 그 대상이 그 성질을 예화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즉, 불쾌감을 주는 어떤 사람을 "두꺼비임"(being a toad)으로 예화한다고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고도, 우리가 그에게 "두꺼비임"을 귀속시키는 일은 논리적으로 완벽히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귀속(literal ascription)과 은유적 귀속(metaphorical ascription) 사이에 차이가 없어 보인다. 비록 표현적 귀속을 은유적으로 해석할 이유도 아직은 없지만 말이다. 이제 논증의 세 번째 단계는 다음과 같다. 어떤 대상이 표현적 성질을 소유할 때 그 대상은 그 성질을 예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굿맨은 예술 작품이 (예화하지 않고는) 표현적 성질을 결코 단순하게 소유할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도 이러한 논증을 제공하지 않는다.
굿맨의 주장을 비록 옹호할 만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룰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대상에 대한 해석 방법에는, 즉 우리가 표현적 성질을 귀속시켜야 하는 그러한 대상에 대한 해석 방법에는 오직 한가지만이 가능한 듯이 보인다. 굿맨의 주장을 다룰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조정은 예술 작품을 단순한 지각적 대상으로 간주할 것을 -물론 굿맨은 이에 반대하지만- 우리에게 강요한다. 논증을 위해서 예술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물리적 대상의 독특한 기능 작용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자. 어떤 대상들을 지각 가능한 성질들을 소유하고 있는 물리적 대상들로 해석하자. 그리고 그 대상을 표현적 성질들을 예화하는 독립체로 간주함으로써만, 그 대상이 그러한 성질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따라서 예술 작품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만일 표현적 성질들을 소유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라면, 예술 작품에 대한 동일화는 비지각적인 배경에 의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굿맨의 논제에 따르면 그러한 소유 자체는 그 대상이 어떤 상징적 기능, 즉 예화를 가진다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표현적 성질들이 예화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굿맨의 논제에 대한 조정에 근거해 살펴보았을 때 그 성질들은 지각적인 용어로 동일화될 수 있는 대상에 귀속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예술 작품의 개념적인 구분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문제는 굿맨이 예술 작품은 지각적 대상이 아님을 이미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예술 작품이 (ⅰ) 순수히 지각적인 용어만으로 적절히 동일화되거나 재인될 수 있는 혹은 (ⅱ) 지각적 종류로만 이루어진 성질들로 귀속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나 만일 예술 작품이 문화적 존재자이거나 문화적으로 창발한 존재자라는 주장이 인정된다면 다음을 부정할 만한 이유가 없을 것이다. (1) 예술 작품은 문자 그대로 표현적 성질들을 소유하며 (2) 예술 작품은 표현적 성질들을 예화하지 않고도 이를 소유한다. 이는 예술 작품이 본질적으로 또는 특징적으로 상징적인 기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굿맨의 근거 하에서는 예술 작품이 상징적 기능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그의 전체적인 전략은 자기 봉사적(self-serving)인 듯 싶다. 먼저 예술 작품이 상징적 기능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라. 그리고 예술 작품이 소유하는 중요한 (표현적) 성질들이 무엇이건 간에 예술 작품은 부여된 상징적 기능에 의해 그러한 성질들을 소유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상징적 기능, 즉 예화를 부여하라. 이러한 전략이 지닌 자의성은 특히 스타일에 대한 굿맨의 설명29)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스타일이란 오직 예술 작품 그 자체의 상징적 기능과만 관련된다"; 사실, 스타일은 작품이 소유하고 있는 스타일에 대한 작품의 예화와 관련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경제적이고 전혀 불필요하다. 그 이유는 이미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굿맨의 설명은 예술계에서 문자 그대로 요구되는 종류의 귀속에 부적합한 실제 대상들(예컨대, 물리적 대상들)의 패러다임에 암묵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외관상 그럴듯함의 대부분을 얻는다. 굿맨의 논제를 거부하게 되면서 우리는 예술 작품을 구분키 위한 다른 기반을 다시금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설명을 중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설명은 가장 논쟁적인 예술론들에 대한 검증 작업 - 문화의 다양한 하위 영역들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들간의 개념적 통일성을 마련코자 이루어진 검증작업 - 이 어떠한 철학적 힘을 지녔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초기의 변증법적 연습으로 의도되었다. 만일 지금까지의 고찰들이 참으로 효과적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전략이 현재의 영미 미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들의 본질적인 약점을 경제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더 만족스러운 예술 철학이 해결하리라고 기대되는 핵심적인 수수께끼들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금술 이야기 ] (0) | 2023.06.05 |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0) | 2023.06.05 |
예술과 권력의 순환고리:검열의 미시분석 (0) | 2023.06.05 |
왕건 [한국위인전집] (0) | 2023.06.05 |
한국위인특대전집 (5) 왕인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