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권력의 순환고리:검열의 미시분석
I. 우리 사회에서 살아 숨쉬듯이 예술을 재단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개봉되었으나 야한(?) 부분은 가위질을 당했다. 그러나 <너에게...>는 내용보다는 외설 논쟁 덕분에 유명해졌다...54년 3월에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분개한 황산덕 교수는 "아직도 철없는 남녀관계 묘사만이 문학이고 성욕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느냐" 며, "대학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비난했다.
귀스타프 모르
출현
92년 8월에 출간된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언도. 그러나 <즐거운 사라>는 노출을 극대화하면서 자신의 성적매력을 인정받으려는 문화가 이미 사회 전반에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은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과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체제파괴적 사상을 담은 음란물이라는 주장이 맞붙었다.
88년 극단 바탕골의 <매춘>은 "외설 일변도의 대사와 퇴폐적 분위기가 너무 많다"며. 공연장을 폐쇄했다. ... 94년 들어서면서 성을 상품화한 벗기기가 연극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10여편의 외설 연극가운데 가장 관객이 많이 몰리는 연극에 대해서만 단죄하는 것은 사회전반이 음란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정치적 쇼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잠잠하던 연극계가 지난 3월 <포르노를 좋아하세요>라는 연극으로 음란 논쟁에 휘말렸다. 결국 한국연극협회의 항의에 몰려 서울시는 15일간의 행정 처분을 내리고 내용의 시정을 요구했다.
외설논쟁들은 '표현의 자유는 간섭없이 고유하게 지켜야 한다'는 쪽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음란하고 사악한 생각이 체제를 무너뜨리는 병균으로 퍼지기 전에 법과 공권력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없애야 한다'는 쪽의 싸움이라는 형식을 취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외설 논쟁과 이를 둘러싼 검열장치들이 섹스어필이 보편화되고 성적인 매력이 출세와 돈벌이의 주요한 수단이 된 사회에서 미풍양속을 지켜내고 음란 문화의 확산을 막는 데 얼마나 효과를 가져왔는지 ...<1995년 5월 4일, 뉴스 플러스>
도대체 어디까지가 외설이냐 혼란이 가속된 가운데 <에로스 훔쳐보기>(이섭, 심지출판사)는 저자나 발행인의 소명기회 한 번 없이 행정조치를 기다리고만 있어...분개하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미술전문지나 미술관의 카탈로그를 통해 이미 알려진 그림들이다." <에로스 훔쳐보기>의 음란도서 규정은 차라리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성의 사회적 문화적 욕구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96년 3월 7일, 뉴스플러스>
69년 소설 염재만의 <반노>는 5차례의 재판 끝에 무죄판결. 같은 해에 박승훈의 <0년의 구멍과 뱀과의 대화>, <서울의 밤>, <영점하의 새끼들>는 음란물로 유죄 판결. 그러나 박씨의 작품들도 현재의 '외설 잣대'로 본다면 그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92년 8월 단행본으로 출간된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씨(당시 연세대교수)는 "인간은 사회적 자아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아도 가지고 있다."면서 이 작품은 "개인적 자아의 중요한 부분인 성의 문제를 다룬 것일뿐"이라고 항의. 다시 4년 만인 지난 11월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사법처리 방침이라는 도마 위에... <1996년 12월 12일, 한겨레 21>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시민단체의 '고발'-간행물윤리위의 음란물 판정-책의 자진폐기라는 문학 외적 평가만으로 일방적으로 진행. .....지난달 30일 서울지법은 <내게 거짓말을 해 봐>의 작가 장정일씨에게 '음란문서 제조죄'로 징역 10월을 선고, 구속.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원색적이고 상스러운 표현을 사용..., 절반 이상이 변태적이고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로 돼 있다"는 것이 그 이유.<1997년 6월 12일, 한겨레, 21>
홍콩 영화감독 왕자웨이의 <부에노스 아이레스>(1997) 수입금지, ......<레드 헌트> 상영을 이유로 서준식 인권영화제집행위원장 구속...11월 14일 문화정책연대가 <우리사회,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주요쟁점중의 하나는 발족 한달을 맞은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의 위상이었다. 참석자들은 공진협이 공륜 규정을 약간 손질해 운영되며 심의기준이 여전히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등을 지적했다. ....여성발제자들은 심의위원들이 대개 중장년층의 남성이라는 점을 들어 공진협이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가치관을 심의기준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97년 11월 27일 뉴스플러스>
신학철(55)씨의 모내기가 압수된 지 올해로 10여 년째. 1987년에 완성해서 같은 해 8월 <제2회 통일전>(그림마당 민>에 출품. 그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89년 단국대 민주동문회에서 민미협 발행의 89년도 달력에 수록된 「모내기」그림을 사용해서 부채를 만들었다가 단속되는 과정에서 문제. 이적물 표현혐의...그 뒤 석달만에 보석....
<현실동인 창립전>(1979, 오윤 외), <서울현대미술제>의 출품작인 "시민"(1980), <현실과 발언 동인 창립전>(1980), <2000년 작가회 2회전>(1980), 5명의 작가(임옥상, 김경인, 강광, 홍성담, 신경호)....(1981), 최민화의 만화작품 <세오랑캐>(1984), 홍성담의 <대동세상>(1985), 20대의 힘전(1985), <민족미술열두마당>(1986), <81-84 문제작가 작품전>(1986), 신학철의 <모내기>, <반아파르트헤이전>(예술의 전당, 1991)등은 전시를 원천봉쇄..., 작품이 압류..., 작가들은 연행되어 불구속 입건.... <1998년, 6월호 미술세계>
최근 새영화 <노랑머리>의 등급보류 파문... 영화인들 사이에 '청산되어야 할 대물림'... 심의에 참여한 유현목, 박종원 감독을 놓고 "직분에 충실한 점은 인정되지만 표현의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영화의 특성이나 당한 후배감독의 입장으로 볼 때 너무한 처사였다". 유감독은 <오발탄>의 연출자로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켰고, 당시 군사정권으로부터 상영정지를 당했다. 영화인들은 그것의 상당 부분이 피해자인 영화감독을 비롯해 시나리오 작가, 영화과 교수, 평론가 등 영화계 식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9년 4월 9일, 경향신문, 27면>
II. 지식이 예술을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권력이 바뀌면 지식도 바뀐다.
-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
현대사회는 푸코에 의하면 거창한 구경거리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이다. 여러 가지 이미지의 허울 속에서 우리들의 신체는 심층적인 공격대상이 된다. 대대적인 교환의 추상화한 체계 뒤에는 유용한 힘을 얻기 위한 정밀하고 구체적인 훈육이 계속되며, 정보 소통의 경로는 지식의 축적과 집중화의 지주가 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개인이라는 허울 좋은 전체성은 우리의 사회질서에 의해서 절단되고, 기호들의 작용은 권력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개인이라는 허울 좋은 전체성은 우리의 사회질서에 의해서 절단되고, 억압되고, 변질되지는 않지만, 개인은 사회질서 속에서 힘과 신체에 관한 전술에 의거하여 세심하게 만들어진다.
인간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이라는 두 과정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생산 장치의 기술적인 변화, 노동의 분업, 규율중심적인 방식의 완성은 매우 긴밀한 일련의 전체관계를 유지시켜 온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은 규율중심적인 권력이라는 특유한 양식을 초래하는 데, 그것의 일반적 양식, 힘과 신체를 복종시키는 방법, 한마디로 말해서 그러한 '정치 해부학'은 아주 다양한 정치체제나 기구, 혹은 제도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권력은 '국가기구에만 한정시켜 계급적인 시각에서 나온다는 맑시스트적인 시각'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아래로 일방적으로 전달되기보다는 사회적 육체를 향해 무한히 확산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작동하에서 개인의 정체성이란 신체 위에, 행동 위에, 그리고 욕망 위에 가해지는 권력관계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말해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주관성, 싸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실존과 같이 이성의 명증적 자기확실성을 토대로 하여 실천하는 주관적인 의지에 의한 자발적 행위자가 아니다.
구조주의 시각에서 보는 주체는 구조의 틀에서 형성되는 무의식적인 운반자에 불과하다. 푸코는 이러한 구조주의의 시각을 수정하여 사유세계란 것도 역시 외면적으로 나타난 언표나 행위와 다름 아닌 계열적인 구조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계열적인 구조"는 계열들간에도 관계를 맺어 끊임없이 "계열의 계열"을 이루어 우리의 사유가 되는 것이다.
지식이 권력과 상관없이 성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돌라, idola)이다. "지식없는 권력의 행사란 불가능한 것이며, 권력의 효과없는 지식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권력의 움직임이 새로운 지식의 대상을 만들어 내어 또다른 지식을 형성한다. 권력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지식을 생산하며, 또한 역으로 지식은 권력의 효과를 유도한다. 그렇기에 권력은 그 작동 메커니즘에 있어서 좀더 섬세하고 때로는 불투명한 경로를 지니며, 각각의 개별자가 일정한 권력을 지니고 있기에 권력은 자신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강화된 지식은 자신외의 모든 사물을 타자화시킨다. 물론 타자화되어 수의에 덮히는 사물은 광기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감성이다.
'우리가 확정한 중간 정도의 지능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체질적인 성향'과 '타고난 성격'에 의해서든 '위험한 사고방식', '타락한 도덕', '사회적 의무에 대한 위험스런 생각'에 의해서든 악질적인 수형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격리, 혼자서 하는 산책,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 해야 할 경우에는 "석재 절단 작업이나 펜싱 시합을 할 때 사용되는 종류의 가벼운 철가면"이 필요할 것이다.
이 미시적 권력형식에 의하면, 권력은 편만성, 비강제성 무명성들의 특징을 띠며, 모든 곳에 있는 것이다. 모세혈관과 같이 개별자에게 미치는 권력의 효과는 개인의 육체와 행동, 태도, 그들의 담화, 그리고 학습과정이나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곳에까지 우리의 무의식적인 작용으로 침투해 들어와 의식의 내부로 스며들게 된다.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일망 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감방죄수들은 중앙 감시자가 자기를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자신이 그 감시자의 눈에 항구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길들인다. 다시말해 '일망 감시장치'가 '전방위 감시망' 되는 것은 감시자의 눈이 어느새 감시 당하는 자의 내부로 들어와 있게 되는 것이다.
피감시자의 눈은 곧 감시자의 눈이 되며, 죄수는 죄수이자 동시에 스스로 자기를 감시하는 간수가 된다. 자크 라캉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는 주체가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Other)의 눈으로 자기(및 대상)를 보는 '응시'(gaze)의 확립이며, 그것은 곧 검열관의 내부화이고 검열의 내면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어떤 형식이든 영화에 대한 검열은 감독들의 창작의욕을 꺾는다. 검열에 한두번 당해본 감독들은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그 섬에 가고 싶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박광수)
권력은 새로운 통제양식을 통해 이를테면 학교, 공장, 병원 등의 길들이기 장치, 제도, 훈육자들에게로 분산되고 사회적으로 두루 퍼져있다. 과거의 형벌제도 같이 육체적인 형벌이 아니라 훨씬 세련되고 비강제적인 훈육법을 사용한다. 과거 육체는 형벌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육체와 정신이 모두 길들이기의 대상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명령의 내면화는 그 명령이 제시하는 여성성과 여성미의 규범에 맞추어 현대의 여성이 자기 육체를 가꾸고 개조하는 것이 자아상으로 내면화되는 것이 감시와 검열로 의식되지 않게 성공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는 것처럼 예술 창작에 있어서도 그러한 검열은 작가 스스로 내면화되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마찬가지로 마음의 검열, 검열의 무의식화, 검열의 내면화는 예술의 경계를 예술가 자신의 손으로 긋도록 만드는 것이다.
III. 창작의 근원인 모호하고 축축한 광기
집단적으로 고려될 경우 범죄자들은 결코 광인이 아니다. 고의로 사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과 광인을 혼동한다면, 이는 광인에게 불공평한 처사일 것이다.
-감사와 처벌, 미셸 푸코-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해보자. 그 띠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전혀 새로운 풍경 속에 들어서게 된다. 밖이 안으로 안은 밖으로,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전이(inverse)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현상들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 즉 하나의 현상과 다른 현상들이 비의적으로 서로 얽혀있음을 드러내게 되는 일종의 연금술이다.
미의 본질을 규명하는 미학사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뫼비우스 현상과 같은 풍경에 들어서게 된다. 인간 본질의 이면에는 이성이 부재하는 순간 감성이 자리하고, 감성이 사라지는 순간 이성이 자리하는, 니체가 이야기하는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광기'가 서로 얽혀있음을 알게 된다.
광기의 근원은 푸코에 의하면, 열정이 갖는 위험과 열정들 간에 이루어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정신의 일탈은 맹목적으로 욕망에 집착한 결과이며, 열정을 다스리거나 통제하지 못한 결과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호색, 적대감, 타락한 취미, 슬픔에서 비롯되는 우울, 거부하는 데서 오는 황홀함, 과음, 과식, 불쾌함, 육체적인 악 등이 가장 나쁜 질병인 광기의 원인이 된다."
이성의 출발을 알리는 데카르트의 사유의 시각에서 보면, 광기의 근원인 열정은 자명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장애물이 되며, 신념에 찬 정치가나 경제학자들이 경전으로 읽는 스미스와 볼테르에게도 정열은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이성이 요구한 것은, 종교나 관례에 치우치지 않고 또 편견이나 정열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정보에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인 다음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푸코에 의하면, 우리안에 내재한 광기를 촉발시키게 하는 광인은 나병환자와 같이 르네상스 이후 이성의 시대에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으로의 유배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성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쓸모없는 상상력, 공상의 모태인 광기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인가.
니체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의 광기는 아폴론적 의지의 영원한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 광기는 세계의 유일한 실체의 반영이며, 사물의 아버지, 즉 '영원한 모순'을 비추는 것이다. 광기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존재의 충족 이유의 원리를 해명하고 개체화의 원리를 지탱시키케 하는 아폴론적인 이성"을 파기하고 자연의 가장 깊은 근저로부터 환희로 넘치는 황홀감을 맛보게 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자아의 본질, 다시말해 신의 본질은 엘리아데(M.Eliade)에 의하면 니콜라스 드 쿠사(Nicolas de Cusa)가 의미하는 '역의 일치'의 존재이며, 헤라클레이토스의 눈으로 보면 <신은 낮-밤이요, 겨울-여름, 전쟁-평화, 포만-기아>인 것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의식이 뚜렷한 밝고 자명한 세계인 낮의 세계이며, 광기의 세계는 의식이 멈추는 '그 순간'인 밤의 세계이다. 눈과 귀를 스스로 막는 '그 순간'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이야기 했듯이 '백일몽처럼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맹목의 세계'이며, 이성의 죽음을 의미하는 그 어둠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한 광기를 통로로 하여 푸코는 인간 존재의 베일을 벗기려 했다.
광기는 하인로쓰(Heinroth)가 주장하기에 사람 속에서 정신의 밝고 성숙한 안정성에 반대되는 것, 즉 모호하고 축축한 요소, 어두운 무질서, 뒤섞이는 혼돈, 모든 사물의 싹이자 죽음의 요소의 현현인 것이다.
그 원천은 프로이트주의자의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결정주의가 지배하는 한 개인의 정신세계'가 자신의 무의식적인 검열에 의해 억누르려 해도 억누를 수 없는 성적인 욕망, 즉 리비도이며, 플라톤주의의 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에로스인 것이다. 그것들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에게도 자아의 본질인 이데아와 초자아로 이르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과욕도 또한 광기가 탄생하는 순간이 된다. 지나친 지식의 과욕 또한 광기로 전환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 이성의 눈에 무의미하던 모든 사물은 의미로 가득찬 세계로 변모한다. 그것은 무질서하고 쓸모없는 학문을 재단하여 처벌하고 세계의 언어를 정리 정돈하며, 세계를 인지하고 복원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이성의 여백에 이성을 채워넣는 것이다.
작품을 심연에 빠져들게 하는 광기는 예술활동의 공간이며, 인간의 활동이 끝에 이르기 위한 무한한 이정표이다. 그러기에 작품이 존재하는 그 순간 광기는 무대의 배후로 사라진다. 니이체, 반 고흐, 아르토의 광기는 그들의 작품을 둘러싼 아우라이다. 타스(Tasse)의 광기, 스위프트(Swift)의 우울, 루소(Rousseau)의 정신착란 등은 그들의 작품에 있어서 고유한 것이며, 그 자체로 그들에게 모두 귀속하는 것이다. 이들에겐 삶이 곧 텍스트이며, 동일한 격정을 의미하고, 동일한 고통을 음미한다.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의 진정한 본성을 결코 재생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본질을 '개념들'로 드러낼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카시러의 통찰처럼 죽음 너머에 놓여 있는 찬란한 것들을 영혼이 감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푸코의 광기이다. 그러한 광기를 통해서, 그리고 광기에 의해서 독자는 불완전한 세계에 자신이 추방되어 있는 것을 느끼고 그 세계를 뚫고 나와 자신에게 계시된 천국으로 들어가길 갈망하는 것이 작품에 내재한 광기를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실세계의 물체들의 배후, 그리고 그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세계에 은닉된 의미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이러한 광기로 인해서이다. 독자는 그것을 통해 지식이 갖는 무기력함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현상과 인간 본질의 양태 가운데 하나의 축인 감성, 즉 푸코가 말하는 예술가들에게 내재해 있는 광기를 분리시킨다면, 근대 이후에 나타나는 수많은 예술운동이나 현상은 이해도 설명도 곤경에 처하여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말그대로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그 광기의 문제, 다시 말해서 광기의 작용이 예술가에게서 어떻게 그 기능을 수행하는 가 하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일종의 가짜 문화를 본다. 질적 가치에 충실한 예술가는 현대 문명의 양적 가치들 앞에서 따돌림과 반역의 상태에 처해 있음을 느낀다. ...예술가의 반발과 혁명의 꿈, 회고적이고 예언적인 그의 유토피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거나 옛 질서를 회복하려는 그의 불가능한 욕망들이 그곳에 있다."
광기는 건강한 사회를 지탱시켜주는 힘의 원천이며, 광기로 인해 우리의 이성은 이성에의 본성을 잃치않으며, 보다 건강한 윤리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위협적이고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 즉 이성의 사유로서 결여된 세계를 꿰뚫어 보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IV. 변태의 형이상학
이성이 주재하는 금단의 구역은 결국 지상에 내려온 여신, 악의 몸을 빌어 현신한 인식(le Conscience dans le Mal)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존의 사회체계에 의존해 예술의 기준을 재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술의 기능에 활력을 주기 보다는 기존의 체계에 의거한 잣대로 재단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기에, 예술이 지닌 그 본래의 의미와 기능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않고, 인간의 감성을 황폐화시키고 메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과 <제도> 사이의 거리, 규범과 자유, 통제하는 것과 통제되는 것 사이의 위상적인 거리이다.
이성의 잣대로 외설을 빌미삼아 예술을 재단하는 행위가 인간의 감성적인 요소들과 예술은 별개의 문제, 다시말해 예술분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예술 창작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요받는 전제가 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현상들, 예술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이면에는 예술작품이 타고난 작가의 천재적인 예술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이며, 또한 진정한 예술 작품은우리의 보편적 미감에 호소하거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에 그 책임을 창작가에게만 전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이 우리에게 매우 위안을 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과 현실을 편안하게 만들며, 제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착각은 긍정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삶으로 부터 도피나 무의미한 해악을 낳기 쉽다.
이성의 잣대로 외설이든, 정치 이데올로기이든 우리의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예술의 표현 영역을 구속하거나, 재단하고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은 양파를 찾으려고 양파껍질을 계속 벗겨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감성을 다루는 대부분의 현대예술은 푸코가 보았듯이 변태의 시각, 그리고 더 나아가 변태의 형이상학으로 관통하여 그 주제를 다룰 때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0) | 2023.06.05 |
---|---|
예술 철학을 위한 초기 전략 (0) | 2023.06.05 |
왕건 [한국위인전집] (0) | 2023.06.05 |
한국위인특대전집 (5) 왕인 (0) | 2023.06.05 |
에이브라함 링컨의 힌트 - 엘러리 퀸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