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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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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8)왕건.

 


  왕 건 (877∼943)
  고려 제 1 대 임금으로 재위 기간은 918∼943년이다. 개성에서 금성 태수 륭의 아들로 태
어났다. 895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900년 광주·충주 등을 쳐서 아찬의 벼
슬을 받았다. 그 뒤 계속 경상도·전라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무찌르는 한편, 정복한 지
방의 백성을 잘 돌봐 주어 믿음을 쌓아갔다. 918년 난폭한 궁예가 인심을 잃자 홍유·배현
경 등에 추대되어 고려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이듬해 개경으로 천도하여 발해 유민을 받
아들이고 여진을 쳤으며, 불교를 국교로 삼아 법왕사·왕륜사 등 여러 곳에 절을 세워 나라
의 기반을 닦았다. 935년 항복해 온 신라의 경순왕을 맞이하고,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완수하였다. 943년  훈요십조
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 새 집터

  신라 제48대 경문와 말년(875)의 일이다. 신라의 서울(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송악군(개
성)의 호족이며, 태수이기도 한 작제건의 맏아들 왕용건은, 말을 타고 예성강 어귀에 있는
영안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영안성은 아버지 작제건이 해상 무역을 도맡아 하는 본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었
다. 이 곳에 작제건이 다니러 와 있었다.
  작제건은 얼마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슬픔에 싸여 세상일에서 거의 손을 떼고 속리
산의 암자에 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불도를 닦고 염불을 외면서 아내를 잃은 외로움을 달래
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무 살이 조금 넘은 용건에게 큰 집안 살림을 맡겨 놓았으므로, 이따금 산에서
내려와 영안성 무역 관계 일과 집안일 등을 보살펴 주곤 했다.
   아버님, 그 동안 옥체 편안하시옵니까?
  영안성에 이르러 아버지께 정중히 인사를 드린 용건은 전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냐. 이번에 내가 온 것은 너에게 이를 말이 있어서이니라. 우리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지금의 그 집은, 거기서 네 어머니가 죽고 나도 떠나고 했으니 너무 쓸쓸할 것이고 또 집도
많이 낡았다. 그러니 네가 집을 새로 짓고 새 마음으로 새 출발하도록 하여라.
   그 집은 아직 사는 데 별 불편이 없습니다만…….
   그런 뜻이 아니다. 너도 이젠 장가를 들었으니 내가 진작 새 집을 마련해 주었어야 마땅
한데, 내가 절에 들어온 몸이라 여태 그것을 미루어 왔구나. 네 마음에 드는 터를 골라서 새
집을 짓도록 하거라. 제 집을 제가 지어 보는 것도 살림을 펴나가는 데 큰 공부가 되는니
라.
   네, 아버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송악으로 돌아온 왕용건은 새 집을 짓기 위해서 집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에 바랑을 짊어지고 삿갓을 쓴 스님 하나가 지나다가 멈춰 서서 집터
를 닦고 있는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허, 기장을 심을 땅에 삼을 심으려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로군!
  스님은 이렇게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마침, 일꾼들의 점심을 하녀의 머리에 이우고 오던 젊은 부인이 이 말을 들었다. 그
여인은 바로 왕용건의 아내였다.
  용건도 그 스님의 말이 예삿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 집터를 고른 터인지라 자
신도 없었고, 게다가 아버님이  제 집을 제가 지어 보는 것도 공부가 된다 고 하시던 말씀이
문득 떠올라 허둥지둥 스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스님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스님, 스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스님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스님, 저는 스님의 높으신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스님은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용건도 같이 합장으로 답례했다.
   스님, 다름이 아니옵고, 저는 아버님의 분부에 따라 새 집을 지으려고 터를 닦고 있습니
다만,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네, 그 일이라면 말씀드리겠소이다. 저와 함께 언덕으로 올라가시지요.
  용건은 의아해하며 스님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우리 나라 땅은 북쪽 백두산에서 뻗어 그 기운이 이 곳 송악에 와서 한 번 머물러 있습
니다. 그러니 그 힘을 입은 저 솔숲 앞 기슭에 집을 지으면 귀하신 아드님을 얻고 집안에
큰 운이 들어올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까?
   그러니, 집터를 조금 북쪽으로 옮김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 서른여섯 칸짜리
집을 지으십시오. 그리하면 집의 운세가 날로 번창할 것이오.
   스님, 감사합니다. 저희 집으로 가셔서 요기도 하시고, 하룻밤만이라도 편히 쉬어 가시지
요.
  용건의 집으로 같이 온 스님은 사랑방에 들어앉아 점심을 맛있게 들고 나더니, 왕용건에
게 공손히 합장하고는 벼루와 먹을 달라고 했다.
  그는 한동안 무엇인가 글을 쓰더니, 그것을 접어 봉토에 넣은 뒤 용건 앞에 내놓으며 말
했다.
   공이 아들을 얻게 되거든 이름을  세울 건  자로 하시오.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오. 그리
고 공의 이름도  융성할 륭 으로 고쳐 부르십시오. 이 봉투에 봉한 글은 소중히 간직했다가
아드님이 장성하면 그 때 열어 보십시오. 그럼, 소승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네,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만…….
   허허, 굳이 알고 싶다면 말씀드리지요. 제 법명은 도선이라 하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용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선대사라 하면 당나라로 들어가 일행 대
사의 설법과 지리법을 전해 받은 유명한 고승이 아닌가!
   그럼, 이만 일어나겠소.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도선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스님의 말대로 용건은 이름을 왕륭으로 고치고, 서른 여섯 칸의 집을 지은 해에 정말로
그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스님의 말을 따라  건 이라 지었다.
  때는 877년(신라 헌강왕 3)의 일이다. 서른여섯 칸짜리 집은 뒷날 고려의 왕궁인 연경궁의
터가 되었다.
  그 무렵, 신라의 제도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높은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왕륭은 아들 건에게 자기가 하는 해상 무역업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지만, 도
선 대사의 예언을 기억하며 한 나라를 일으킬 훌륭한 인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철이 들기 시작한 아들을 데리고 이름 높은 스승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또 스승을 모셔
오기도 하여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논어 · 대학 · 중용  등을 거의 뗄 정도로 아들 건은 총명했다. 한편, 활
쏘는 법·말 달리는 법·칼 쓰는 법·창 쓰는 법 등 여러 가지 무예도 익히게 했다.
  이윽고 열다섯 살이 된 왕건은 제법 의젓해졌으며, 성품도 너그럽고 다정했으므로, 따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자라면서 왕건은 산이나 들로 말을 달려 활쏘기며 창검쓰기를 익히기도 하고, 사
냥도 했다.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예성강에는 겨우내 쌓였던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높은 산 계곡을
따라 흘러들어 바람결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왕건은 네댓 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예성강 언덕을 달리고 있었다.
   으악!
  왕건이 뒤에서 나는 외마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뒤따라오던 한 친구가 언덕에서 말을
탄 채 굴러 예성강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파른 강기슭 굽이길을 돌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다.
   어푸! 어푸! 사람 살려!
  아이들은 어쩔 줄을 몰라 멍하니 지켜 보고만 있었다. 강물에 빠진 아이는 헤엄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강물은 눈이 녹은 물이라 얼음같이 차가웠다. 이 때, 왕건은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보고,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서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평소에 아버지에게서
익힌 헤엄 솜씨였다.
  왕건은 날쌔게 헤엄쳐 가서 물에 빠진 친구를 한 팔에 끼고서 강기슭으로 헤엄쳐 나왔다.
   야, 만세! 왕건 만세!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왕건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했다. 왕건이 물에 빠졌던 친구를 엎어
놓고 물을 토하게 하자, 얼마 뒤 그 친구는 정신을 차렸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거야. 정말 고맙다.
   뭘……. 그런데 네가 탄 말이 헤엄을 못 치는 걸 보니, 다리를 몹시 다친 모양이야. 밧줄
이 없으니 끌어낼 수도 없고 그냥 떠내려가고 말았어.
   사납긴 했지만 좋은 말이었는데……. 할 수 없지.
   참으로 안됐어.
  이 날 있었던 일이 온 송악 고을에 퍼지게 되어 왕륭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다고 모두들
칭찬했다.
  왕건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님을 받드는 마음이 두터웠다. 그래서 때때로 이름
난 큰 절을 찾아가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오늘도 절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꿩 한 마리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
다. 그 순간, 왕건의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맞았다!
  그가 쏜 화살을 맞고 까투리는 우거진 숲 속으로 떨어졌다. 말을 몰아 달려가 보니, 스님
차림의 한 사람이 그 꿩의 몸에서 화살을 빼어 던지고 있었다.
   스님, 그 꿩은 제가 잡은 것입니다.
  그러자 스님은 왕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으로 그걸 알 수 있지?
   이걸 보세요. 화살에 글자가 박혀 있습니다.
  화살을 주워서 스님 앞에 내보였다. 화살은 본 스님은 그 곳에 박혀 있는  왕  자를 읽었
다.
   네가 왕가냐?
   네. 그건데 스님도 사냥을 나오셨습니까? 전동과 활을 들고 계신 걸 보니…….
   그렇다고나 할까?
  자세히 보니 그 스님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눈이었다. 그러나 몸집은 크고 늠름해
보였다.
   스님도 살생을 하십니까?
   허허. 그야 고기가 먹고 싶으면 이렇게 나와 활 솜씨도 익힐 겸 사냥을 하지.
   넷? 그님이 고기도 잡수세요?
   암, 먹고말고. 그렇게 놀란 토끼눈을 하고 서 있지만 말고 나도 한 마리 잡은 것이 있으
니 여기서 같이 구워 먹자.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꽤 시장하구나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운 뒤, 싸릿대를 꺾어다가 자기 것과 왕건이  잡
은 꿩을 꿰어 털을 그스르더니 굽기 시작했다. 왕건도 배가 고픈 참이어서 말에서 내려 모
닥불 옆으로 다가앉았다.
   이것 보라고, 어린 친구. 나를 염불이나 외우는 중으로 보면 안 돼. 나는 앞으로 절에서
나와 기훤이나 양길의 부하로 들어갈까 해.
   넷? 기훤이나 양길의 부하로요?
  기훤과 양길은 이 무렵 북원 땅을 휩쓸고 다니던 도둑의 우두머리들로 그 세력을 점점 키
워 나가고 있었다.
   참 이상한 스님도 있구나, 스님이 불도를 닦을 생각은 않고 도둑의 무리 속에 뛰어들겠다
니……?
  아직 어린 왕건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허리춤에서 소금 주머니를 꺼
내서는 다 구워진 꿩의 살을 떼어 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왕건에게도 먹으라고 권했다.
   어서 먹어라, 배가 고플 텐데.
   네.
   나는 본디 신라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자였지. 그런데 왕실에서 버림받아 궁녀의 보
살핌으로 자라다가 세달사란 절에 들어가  선종 이란 법명으로 오늘날까지 살아 왔다. 그러
나 언젠가는 나를 쫓아낸 신라에게 이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
   그러면 스님은 반란을 일으키시려는 겁니까?
  왕건의 질문에 스님은 코웃음을 쳤다.
   반란이 아니다. 하늘은 의롭지 못한 무리를 치는 것을 바른 길이라고 했다. 이제 신라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두고 보아라.
  왕건은 그 괴이하게 생긴 스님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듣다가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
렵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이 무렵은 892년(신라 진성 여왕 6)으로, 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굶는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게 많았다. 그런데도 왕실에서는 백성들에게 세금 독촉을 심하게 했다. 그러자 이에 항거
하는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백성들은 결국 고향을 떠나 각지로 떠돌아다니며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조정에서는 이미 나라를 다스릴 힘을 잃고 있었다. 오히려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외면하면서 더욱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동안 반란 세력은 급격히 그 세력을 키워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다.
  즉 북원(원주)의 양질과 궁예,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그리고 원종과 애
노 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견훤은 전주를 근거로 하여  후백제 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멸망한 백제를 다
시 세우겠다면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끌어모아 신라에 대항했다.
  견훤은 상주 사람으로 본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장군 아자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뿐
만 아니라 그도 신라의 비장을 지냈다.
  이 때, 신라의 해안에는 해적들이 자주 나타나 백성들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해 가기 일쑤
였다. 견훤은 그런 해적들을 무찌르는 데 앞장서서 무예와 용기를 빛내기도 하였다.
  그는 싸움터에서 늘 공을 세웠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도둑들을 모아 부하로 삼았다.
그리고 늘 공정하게 대하여 인심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기질이 용맹했고, 지략이 뛰어났다.
  소문에 의하면, 어릴 때 그의 어머니는 아기를 나무 밑에 뉘어 놓고, 밭갈이를 하러 들에
나간 남편에게 점심을 내다 주러 갔다. 돌아와 보니 호랑이가 와서 어린 견훤에게 젖을 먹
여 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몸집이 컸으며 품은 뜻과 말솜씨가 어려서부터 남달리 빼어
났다.
   백제가 나라를 세운 지 600여 년 만에, 신라는 당나라에서 13만 원군을 이 나라에 끌어
들여 백제를 무너뜨렸소. 그러니, 내가 다시 잃은 나라를 세우고 백제의 원수를 갚겠소.
  견훤의 이 말을 들은 옛 백제 땅의 백성들은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이렇게 되자 신라의 정세는 한층 더 어지러워졌다. 서쪽에서는 견훤이 난을 일으켰고, 북
쪽에서는 양길이 세력을 굳히고 있었다.
   양길의 세력이 곧 이 송악 땅을 휩쓸려고 할텐데 어찌할 것인가?
  건의 아버지 왕륭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륭이 믿는 것은 바다의 세력이었다. 바다에서의 싸움이라면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자신
이 있었다. 그러나 양길의 군대는 거의 좀도둑이나 산도둑 떼들과 다름이 없었다.
  반란의 무리들은 거칠고 사나워 맞서 싸우기 어려웠다.
  그들은 마을에 쳐들어오면 금품이나 곡식을 노략질해 갈 뿐만 아니라, 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들을 막아 낸단 말인가?













  2. 스님의 가르침

  이렇게 왕륭이 어지러운 나라의 정세를 고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마당에서 머슴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리, 웬 스님이 찾아와 뵙고자 합니다.
   뭐, 스님이…….
  왕륭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대문 쪽으로 급히 나갔다.
  문 앞에는 누추한 옷차림의 스님 한 분이 멀찍이 서서 새로 지은 집을 감개 무량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도선 대사님이 아니십니까?
  왕륭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도선 대사도 합장하며 공손히 절을 했다.
   나무 관세음 보살. 17년 만이군요.
   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습니다. 그런데 대사님께서는 늙지 않은 예전 모습 그대로이십니
다.
   원, 별말씀을. 이젠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늙지 않다니, 하하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잖아도 대사님께서 언제나 들러 주시려나 하고 해마다 학처
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륭은 너무 기뻐서 총총걸음으로 도선 대사를 사랑채로 모셨다.
   대사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솔수 앞에 터를 잡아 새 집을 짓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스님
이 이름을 지어 주신 아들 건은 올해 열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허허, 벌써 17년이라. 이젠 건이도 씩씩한 젊은이가 되었겠습니다그려.
   네, 도선 대사님께서 축원해 주신 덕분으로 건이에겐 글공부도 시키고, 말타기나 활쏘기
등의 무예도 조금씩 익히도록 했습니다.
   오는 길에 보니까 뒷산의 소나무들도 제법 많이 자라서 우거졌더군요. 그런데 건이는 어
디 있습니까?
   대사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요즈음 가까운 절에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마음을
닦고 있습니다. 곧 불러 오도록 이르겠습니다.
  왕륭은 곧 하인을 불러서 건이를 데리고 오도록 분부했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아드님 건을 얼마 동안 나에게 맡겨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건
이도 이젠 남을 다스릴 만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왕 공도 아실 테지만 나라 안은 지금 도
둑 떼가 여기저기에 몰려다니고,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극심한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
다. 또 한편으론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다고 일어섰습니다. 시국이 이런 걸 보니, 신라 천 년
의 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워서야 어찌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겠습
니까. 이 송악도 양길이 이끄는 수천 명의 도둑의 무리에게 언제 짓밟힐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밤에 편히 눈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왕 공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아드님께 천문 지리와 병법을 가르쳐 이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깨우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왕건이 돌아와 두 어른께 공손히 절을 했다.
   소자를 찾으셨다고요. 아버님.
   허허, 그렇다. 어서 스님께 인사 올리도록 해라. 고명하신 도선 대사님이시다.
  왕건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선 대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연 천운을 타고난 귀한 아드님입니다. 넓은 이마하며 맑은 눈……. 허허허, 아버님과
여태껏 얘기를 나누고 허락을 얻었다네. 자넨 이제부터 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네, 대사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자, 그럼 서둘러 떠나세.
  이리하여 도선 대사는 곧 왕건을 데리고 송악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다.
  도선 대사는 이 날부터 왕건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군사를 움직여 진을 치는 법, 적을 공
격하는 법, 적을 유인한여 허점을 찌르는 법, 군사를 다스리는 법, 점령한 고장의 민심을 너
그럽게 다루는 법 등 여러 가지 비술을 가르쳤다.
  다음은 천문 지리를 익히게 했다. 산천의 형세를 보아 그것의 이로움과 불리함, 또는 이것
을 이용하는 법, 사철의 변화와 그것이 땅에 미치는 영향 등을 터득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
닫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도선 대사가 일찍이 중국에서 익혀온 열여덟 가지의 신비스러운 무술까
지 가르쳐 주었다.
  성질이 너그럽고 착실한 왕건은 놀라운 속도로 그 가르침을 익혀 나갔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와도 왕건의수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 대사가 조용히 왕건을 불렀다.
    이제 내가 아는 것은 모두 자네에게 가르쳐 주었네. 머지않아 이 나라는 세 토막으로
나뉘게 될 것일세. 그 때에는 자네가 이 나라의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일어나야 하네. 그것이 하늘의 명이라네.
   대사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겠습니다.
  절에 있는 동안 2년이란 세월이 흘러 열아홉 살이 된 왕건은 도선 대사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더욱 건장하고 늠름해진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말했다.
   대사님의 크신 은공을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그겠습니다.
   뭘요. 이젠 소승의 마음이 놓입니다. 건이를 이 나라의 대들보로 키워 놓았으니까요.
   그런데 대사님, 그 동안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양길의 두를 이어 궁예가 더 크게 세
력을 잡았다고 합니다. 신라와 후백제를 정벌하여 새로이 고구려를 일으키겠다며, 멋진 기름
진 이 송악과 개풍 등을 치고 한산주로 쳐들어가기 위해 임진강을 건널 계획이라고 합니
다.
  도선 대사는 숨을 깊숙이 들이쉬었다.
   나도 그런 소문은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깊이 생각해 봐야겠소.
   그 궁예의 무리는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뜻과는 달리 도둑떼 이상으로 사납기 이를 데 없
습니다. 승패는 겨루어 봐야 알겠지만, 이 송악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우리 조상들이 이룩
해 놓은 터전이 불바다가 되고, 죄없는 백성들이 무참히 죽어야 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
까?
  왕륭의 걱정하는 말을 들은 도선 대사는 왕건의 의견을 물었다.
  그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왕건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소자의 생각으로는 궁예와 싸워서는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
은 왕자로, 어려서 왕실의 버림을 받고 자란 사람이어서 신라에 대한 원한이 대단히 큽니다.
그것을 고구려의 원수를 갚는다는 말로 바꾸어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데다가, 그
의 군사는 너무도 강합니다. 이 송악 고을의 힘으로 용감히 싸우다가 죽는 것도 사나이다운
의로운 일이오나, 패하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더 좋은 기회를 기다려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
다.
   좋은 기회라니……?
  왕륭이 아들 건에게 물었다.
  이 때, 도선 대사가 왕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왕 공, 아드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기회를 보아 왕 공
의 송악 땅을 궁예에게 넘기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궁예는 왕 공 부자를 굳게 믿을 겁니다.
그 때 아드님을 궁예의 부하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이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방법입니다.
   대사님, 사납기로 소문 난 궁예에게 건이를 맡겨도 괜찮을지요?
   그 점은 염려 마시오. 궁예는 어릴 때 세달사라는 절에서 기거하던 중이었는데, 워낙 배
운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버림받은 몸이라 의심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
니 장차 부하들의 신망을 잃게 될 겁니다. 그 때는 아드님이 궁예의 부하를 거느릴 몸이 되
고, 세 조각 난 이 나라를 통일할 겁니다.
   대사님, 듣고 보니 정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큰 뜻이 있다 해도 의지할 데가 있어야 합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 법입
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송악 땅은 언제쯤 궁예에게 넘기는 것이 적절하겠습니까?
   궁예가 임진강을 건너서 들어올 무렵에 넘기셔야 합니다. 아마도 궁예는 금년 안에 이
송악 땅을 짓밟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빨리 이 곳으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까?
   네. 지금이 궁예의 운세가 한창 뻗칠 때입니다. 그러니 궁예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두
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사람됨을 알아야 그와 탈없이 사귈 수 있을테니까요.
  도선 대사는 이렇게 말하고, 궁예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
다.
  궁예가 태어난 것은 신라 헌안왕 때인데, 어느 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날, 일관이 헌안왕에게 아뢰었다.
   이번에 태어나신 왕자님은 중오절(음력 5월 5일)에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나면서부터 이가
돋아나 있었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 괴이한 빛이 집 언저리에 감돈 것으로 보아, 앞으로 이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을 할 인물로 생각되옵니다. 그러므로 이번 왕자님은 기르지 않는 것
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궁중의 한 후궁이 그녀의 친정으로 가서 왕자를 낳았는데, 그 왕자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
다.
  그 왕자를 낳은 날이 흉일인데다가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집 지붕 위에 괴이한 빛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일관이 자기의 판단을 임금에게 아뢴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난 헌안왕은 신하를 불러 그 후궁의 집에 가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없애라
고 분부했다.
  명령을 받은 신하는 그 후궁의 집으로 가서 강보에 싸인 왕자를 빼앗아 높은 다락으로 올
라갔다. 그 곳에서 던져 죽이려고 한 것이다.
  그 때, 이 불행을 눈치 챈 유모가 몰래 다락 밑에 숨어 있다가 떨어뜨린 아기를 재빠르게
받았다.
  그런데 불해하게도 받을 때 잘못하여 유모의 손가락이 아기의 눈을 찌르고 말았다. 목숨
은 가까스로 건질 수 있었으나 아기는 그만 애꾸눈이 되고 말았다.
  유모는 그 왕자를 안고 어딘가로 도망쳐 온갖 고생을 다 겪어 가며 몰래 길렀다.
  그 아이는 커 가면서 제 또래의 아이들보다 몸집도 훨씬 크고 장난도 여느 아이들보다 심
했다.
  아이가 철이 들 무렵, 유모는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 놓고 지난날의 자초지종을 모두 잉
야기해 주었다.
   도련님은 고귀한 임금님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의 몸이니 앞으로 장난을 삼가세요. 만일
심한 장난이 남의 눈길을 끌어 도련님이나 저의 신분이 밝혀지면 살아 남을 수가 없게 됩니
다.
  그 뒤부터 궁예는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마음 속에는 신라에 대한 복
수심이 불길처럼 타 올랐다.
   어디 두고 보자. 내 이 원수를 꼭 갚고야 말리라!
  어느 날, 궁예는 굳은 표정으로 유모에게 절을 하고 꿇어앉아 입을 열었다.
   저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궁예는 이렇게 인사를 하고 훌쩍 집을 떠났다.
  그 길로 그는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 있으면서 궁예는 무술을 아는 스님에게서 틈틈이 활쏘기, 칼쓰기, 창쓰기 따위의 전
쟁에 필요한 무술들을 익히고, 담력을 길렀다. 자기를 버린 신라에 대한 앙갚음을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결심에서였다.
  무술 연마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을 날던 까마귀가 무엇인가를 궁예
앞에 떨어뜨렸다. 이상히 여겨 주워 보니  왕 이라고 씌어진 조약돌이었다.
  궁예는 이 신표를 품 속에 간직하여 중얼거렸다.
   이것은 내가 머지않아 왕이 된다는 하늘의 뜻이다. 더욱 무술을 갈고 닦아 때가 오기르
기다리자.














  3. 어지러운 나라

  891년(신라 진성 여왕 5)에 가뭄이 들고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
이 일어났다.
   나라 안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반란하는 무리들을 끌어모은다면 나의 뜻을 이룩할 수 있
을 것이다.
  궁예는 이렇게 생각하고 절에서 나와 우선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 무렵, 기훤은 죽주에서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러나 기훤의 성격이 거칠고 오만했기 때문에 그의 밑에서 일하기가 힘들었다.
  기회를 엿보던 궁예는 기훤의 부하 원회·신훤 등을 자기 편으로 만든 뒤, 그들을 거느리
고 이번에는 북원(원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양길은 궁예의 뛰어난 힘과 담력을 알아보고,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겨 동부 지방을 공략하
게 했다.
  궁예는 군사를 이끌고 주천(예천)·내성(영월) 등의 10여 성을 빼앗고, 894년에는 명주(강
릉)를 점령했다. 그가 거느린 군사는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
서, 마침내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양길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견훤에게서 벼슬을 받은 양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새 나라를 세워, 당나
라와 짜고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를 쳐야 한다.
  895년(진성 여왕 9)에는 저족(인제), 생주(화천), 철원 등의 10군이 그의 손 안에 들어갔
다. 그러자 패서(황해도)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많은 장군들도 궁예의 밑으로 들어갔다.
  궁예의 세력은 점점 크게 늘어나면서 강성해 가자 그 앞에 대적하는 자가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철원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의 자리에 앉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굳히
게 되었다.
   하지만 궁예는 하늘의 운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복과 덕이 없으니, 왕 공께서 송악 땅을
그에게 넘기더라도 도로 돌려 주고 철원으로 돌아갈 것이오.
  도선 대사는 긴 이야기를 마치자, 소맷자락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왕건에게 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이 책을 펼쳐 보시오.
   네, 감사합니다.
  왕건이 받은 그 책의 겉자에는  도선비기 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도선 대사가 손수 지
은 책으로, 풍수 지리설과 음양 도참설이 담겨 있었다.
  훗날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에 이 책은 정치 사회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궁예를 어느 때 찾아가 보리까?
   내가 떠난 뒤 올해 안으로 찾아가 보시오.
   송악 땅은 언제쯤 궁예에게 넘기오리까?
  이 물음에 도선 대사는 묵묵히  도선비기 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린  도선비기  안에 씌어 있소이다. 임진강을 궁예가 치러 들어올 때 슬쩍 넘기시
오. 그렇지 않고 대항한다면 죄없는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이오. 그러나 그 땅은 곧 되돌
아올 것이니 마음놓고 내주셔도 됩니다.
  그러고 나서 도선 대사는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이제 빈도는 이곳의 일을 마쳤으니 부처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대사님, 이렇게까지 자상하게 저희 부자에게 일러 주시니 이 은혜를 뭘로 다 갚겠습니까.
부디 부처님의 공덕이 있으시기를 빕니다.
  왕륭이 인사말을 하자, 아들 건도 도선 대사 앞에 정중히 절을 했다.
   스승님께서 저를 아껴 주시고 가르쳐 주신 드 뜻을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떠나는 도선 대사를 왕륭과 아들 건은 멀리까지 바래다 주고 서로의 헤어짐을 아쉬워했
다.
  그 무렵, 궁예는 철원을 근거지로 삼고 남쪽의 양길과 맞서고 있었다.
  어느 날, 왕륭은 아들 건을 불러 앉히고 물었다.
   궁예는 이제 남쪽의 양길을 치려고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송악 땅을 궁예에게 바친다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사자를 보내 궁예의 뜻을 떠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버님 말씀이 옳습니다. 궁예가 군사를 움직이려면 군량미가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러니 사자를 보낼 때 쌀 백 섬쯤 선물로 바치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기로 하자.
  이리하여 왕륭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사자에게 주고 쌀 백 섬도 딸려 보냈다.
   장군, 소생은 송악 땅의 태수 왕륭이라는 사람이옵니다. 장군께서 이 어지러운 나라를 걱
정하여 의로운 거사를 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 송악 땅을 장군께
바쳐 조금이나마 장군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군량미 백 섬을 함께 보내
드립니다. 받아 주십시오. 사자에게 회답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궁예는 몹시 기뻐했다.
   왕륭이라면 송악의 호족이 아닌가! 그의 세력은 예성강 유역은 물론 멀리 강화도까지 이
르고 있다는데, 이건 저절로 굴러든 호박이야, 허허허.
  궁예는 곧 사자에게 회답을 보냈다. 머지않아 양길을 치러 떠날 터이니, 이 달 그믐에 직
접 철원까지 와서 자기를 만나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군량미는 고맙게 받겠노라고 했
다.
  모든 준비를 끝내자, 왕륭 부자는 철원성을 향해 떠났다. 왕륭이 앞장 서고 왕건은 궁예에
게 바칠 예물과 군량미 백 섬을 실은 수십 대의 수레와 함께 뒤따랐다.
  철원성에 도착한 왕륭은 문지기에게 알렸다.
   송악 태수 왕륭이 장군을 뵈러 왔소이다.
  전령이 뛰어들어가 궁예에게 알렸다.
   송악 태수 왕륭이란 사람이 장군님께 뵙기를 청하옵니다.
   기어이 왔구나. 어서 들어오라고 일러라.
  이윽고 왕륭은 궁예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궁예는 애써 기쁜 표정을 숨기려고 굳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륭은 먼저 송악 땅의 지도가 담긴 상자를 궁예에게 바쳤다.
  송악 일대를 자세히 그린 지도를 보자, 궁예의 얼굴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왕륭이 공손히 말했다.
   장군의 의롭고 용맹스러운 명성을 들은 지 오래 되었사오나 오늘에야 이렇게 귀하신 얼
굴을 대하게 되니 큰 영광이옵니다. 장군께서는 신라 왕실의 왕자였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토록 귀하신 몸을 이렇게 가까이서 대하게 되니 황공하기 그지없사옵니다.
  궁예는 기쁜 나머지 왕륭의 손을 덥석 잡았다. 왕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게 자식이 하나 있는데 장군의 부하로 거두어 주시면 더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이리하여 궁예는 왕건을 비장에 임명하고 철원 태수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아버지 왕
륭에게는 금성 태수의 벼슬을 내렸다.
  금성으로 내려간 왕륭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앞으로 바자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여러 가
지 지장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생각 끝에 왕륭은 궁예를 찾아갔다.
   장군께서는 앞으로 이 나라를 통일하여 큰 뜻을 펴시려면 송악에 성을 쌓고 그 곳을 서
울로 삼으심이 좋을듯하옵니다. 송악은 이 나라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사방을 두루
다스리기에 알맞은 곳입니다.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궁예는, 여러 장수와 왕륭 부자를 데리고 송악으로 가서 산세를
살펴보기로 했다.
  궁예는 주위를 돌아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왕건에게 성을 쌓는 일을 맡기고, 서울을 철원
에서 송악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왕륭은 속으로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간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불러 넌지시 일러 주었다.
   지금 송악에 성을 쌓는 일은 궁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장차 네가 큰 일을 꾀할 때, 요긴하게 쓸 성을 쌓는 것이니 온 정성을 다해 단단히
쌓도록 해라.
   네,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왕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왕건은 도선 대사로부터 배운 천문 지리학을
이용하여 송악성을 튼튼히 쌓아 갔다.
  송악성은 짓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완성되었다.
  성이 완성되자, 궁예는 서울을 송악으로 옮기고, 왕건의 벼슬을 높여 정기 대감(기병 사령
관)에 임명했다.
  이 때가 898년(신라 효공왕 2)이었다.
  왕건은 이제부터 무공을 쌓아 자기 세력을 넓힐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궁예에게 청원했
다.
   대장군님, 새로 성을 쌓고 서울을 옮기신 이 기회에 소장에게 수병 1천 명을 주신다면
예성강 유역의 검개(김포)와 혈구(강화), 공암(양평)을 쳐서 장군의 세력안에 넣고 돌아오겠
습니다.
  그 말을 들은 궁예는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오! 내 이제까지 육지에서만 싸웠을 뿐, 배를 이용하는 수군은 생각조차 못 했구나. 과연
영특하도다.
  궁예는 곧 신숭겸 장군에게 일러 왕건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출병하도록 했다.
  왕건은 수병과 군선(전투함)을 거느리고 예성강을 내려가면서 검개, 혈구, 공암 등에 상륙
했다. 신라 군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왕건의 군사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실지 훈련으로 잘 단련된 부대였다. 또한 그 대장 왕건
이 슬기롭고 용맹했으므로 도저히 당해 낼 자가 없었다.
  백성들은 왕륭의 아들 왕건을 환성을 올리며 환영했다. 왕건은 백성들을 다정하게 위로했
다.
  이제 궁예의 영토는 한강 이북을 거의 휩쓸고, 멀리 한강 이남에까지 넓혀져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며 개선한 왕건에게 보검을 하사하고, 벼슬도  아제한 으로 높
여 주었다.
  왕건이 수군 1천 명으로 혈구를 항복받고, 검개와 공암을 점령하고 돌아와 높은 벼슬을
받게 되자, 장군 신숭겸과 복지겸도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대장군님께 아룁니다. 저희들에게도 군사를 주시면, 한산주 언저리에 남아 있는 땅을 정
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궁예는 두 장군이 스스로 나서서 출전하겠다 하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선선히
두 장군에게 군사 5백 명씩을 내주었다.
  신숭겸과 복지겸은 단번에 승령(장단 북쪽, 토산 남쪽)을 쳐서 항복받고, 인물(풍덕) 등을
무찔러 신라 땅 일부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렸다.
  두 장군이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신훤과 원회 등 다른 장군들도 서로 공을 세우겠다고
앞을 다투었다.
   모든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용맹을 떨치고자 하니, 이제 원수를 갚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구나.
  그런데 이 때, 왕건에게 듯하지 않은 비보가 전해졌다. 금성 태수로 부임해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왕건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자기의 장래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마디마디 창자가 끊어지는 듯
했다.
  왕건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숨돌릴 겨를도 없이 금성으로 달려갔다.
   아버님, 한평생 소자를 위해 애써 주시던 아버님이 어이된 일이옵니까? 소자는 아버님
뜻을 받들어 기필코 뜻을 이루겠습니다.
  왕건은 찢어지는 마음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미 목숨이 끊어진 아버지를 다시 살아오게 할 도리는 없었다.
  왕건은 멀리 옥룡사로 돌아간 도선 대사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영구를 고향에 모셔다가 송
악산 아래 속굴 속에 장사지냈다. 이 석굴이 창릉이다.
  이 무렵, 남쪽에 견훤, 북에는 궁예와 양길, 이렇게 세 호걸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
는 판국이 되었다.
  그 해 11월, 궁예는 신라의 임금이나 열 수 있는  팔관회 를 송악산 아래에서 열었다. 팔관
회란 불교의 큰 행사의 하나로, 동짓달에 임금이 백성들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
와 춤으로 기쁨을 나누는 신라 고유의 축제이다.
  이 때, 북원경(원주)의 양길은 국원(충주)을 비롯하여 30여 성을 점령하고 호시탐탐 궁예
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궁예가 분수도 모르고 팔관회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는 펄쩍 뛰었다.
   뭣이라고? 그 애꾸놈이 임금이나 여는 팔관회를 열었다고? 일찍이 내 밑에 들어와 빌붙
어 살더니, 나를 배신하고 나가서 이젠 내 땅까지 넘봐? 괘씸한 것 같으니라고. 내 반드시
그놈을 쳐서 천하에 그 죄를 밝혀 줄 테다.
  이듬해, 양길은 국원을 비롯한 30여 성의 성주와 대군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향해 진군하
였다. 깃발과 창검은 백 리를 이었고, 군사들의 함성은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궁예는 모든 장군을 모아 놓고 양길을 막아 낼 의논을 하였다.
   본디 양길이란 자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양길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신라와
후백제를 치려 했는데, 양길의 운이 다하여 제 스스로 죽을 땅으로 걸어 들어왔구나. 누가
선봉에 써서 양길을 막겠는가?
  그러자 왕건이 궁예 앞에 나가 아뢰었다.
   비록 몸에는 아비의 상복을 입었사오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사오
니, 부디 저에게 앞장 설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왕건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
는 장수였다.
   오, 왕건 장군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슬픔을 누르고 적을 막으러 앞장 서겠다
하니, 참으로 기특한 일이다.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날엔 후한 상을 내리리라.
  왕건은 궁예의 허락을 얻어 양길이 건너려는 임진강의 모든 나루터에서 배를 한 척도 남
기지 않고 자기쪽 기슭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양길이 강을 건너려고 하는 동안에 적의
앞길을 끊어 기습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왕건의 선봉대가 가평의 비뇌성에 닿았을 때 척후병이 쏜살같이 달려와 보고했다.
   양길의 대군이 횡성을 지나 지금 막 가평 땅에 들어 왔습니다.
   음, 알았다.
  비뇌성에서 가까운 명지산은 지세가 험했다. 적이 들어온 곳은 넓은 들판이었다. 마침내
양길은 들판을 지나 명지산 고갯마루를 넘기 시작했다.
  이 때, 왕건의 추상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일제히 공격 개시! 공격하라!
  마치 장마비가 퍼붓듯이 화살이 양길 진영으로 날아갔다. 이에 기가 꺾인 적들은 허둥지
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왕건의 명령이 떨어졌다.
   총공격!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이 싸움으로 양길의 부대는 크게 참패하고 그 세력이 줄어들었다.
  궁예는 눈엣가시 같은 양길을 꺾자 왕건에게 2000명의 군사를 주어 한강 이남의 광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건의 어진 덕망과 전술을 알고 그 곳 성주는 스스로 항복해 왔다. 왕건
은 새로 점령하는 곳마다 백성들의 민심을 너그러이 수습하고 위로했다. 점령하면 노략질부
터 일삼는 양길과는 전혀 다른, 군자 같은 태도였다.
  왕건은 당성(남양), 청주, 괴양(괴산) 등 여러 곳에서 싸우고, 또는 스스로 항복시켜 남쪽
의 넓은 땅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이 때가 900년(신라 효공왕 4)으로 궁예는 왕건을  아찬 으로 승진시켰다.
  이듬해, 완산주(전주)에 본거지를 두고 세력을 넓힌 견훤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후백제
를 세운 것을 보고 기회를 벼르던 궁예도 송악(개성)에 본거지를 두고 후고구려라 부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궁예를 위해 남쪽의 넓은 땅을 평정해 준 왕건은 이번에는 북쪽 땅을 넓히려고 평양을 향
해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다가 어느덧 날이 저물어 정주(연안) 땅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방죽을 끼고 들어앉은 큰 동네에는 수양버들이 가늘고 긴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고, 푸른
버들가지 사이로 은은히 보이는 크고 작은 시골집 굴뚝에서는 저녁 연기가 어지럽게 피어올
랐다.
  아름다운 경치에 취한 왕건은 말에서 내려 쉴 곳을 찾았다.
  그런데 마을 앞 우물에서 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물을 긷는 처녀를 보자, 왕건은 갑
자기 목마름을 느꼈다.
  왕건은 말에서 내려 우물 가 처녀 곁으로 다가가,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겠소?
  하고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아무 말 없이 바가지에 가득 물을 뜨더니 살며시 일어나 실같이 드리워진
버들가지를 휘어잡고는 버들잎을 훑어내려서 바가지 위에 띄워 왕건에게 내밀었다.
  목이 마르던 왕건은 물 위에 뜬 버들잎 때문에 급히 물을 마실 수 없어서 버들잎을 한쪽
으로  후후  불며 먹고 나서 아가씨에게 물었다.
   낭자, 왜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물을 빨리 마시지 못하게 했소?
   목이 타시는 길손이 물을 급히 마시게 되면, 물에 체하게 되기 때문이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왕건은 놀라면서 다시금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맑
고 까만 눈이 그녀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여태껏 왕건이 찾고 있던 여자인 것만
같았다.
  왕건은 아가씨의 집에서 밥을 짓도록 부탁하여 군사들에게 배부르게 먹게 한 뒤, 아가씨
의 아버지를 만나 그녀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간청했다.
  아버지도 젊은 왕건 장군의 소문을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쾌히 승낙했다. 이 날 밤,
아가씨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벌였다.
  왕건은 부하들의 축복 속에서 간단히 혼례를 치른 뒤, 지금은 전쟁중이므로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의 말을 남기고 신부와 작별했다. 이 때, 왕건은 스물아홉 살이었고, 신부 유
화 부인은 열아홉 살이었다.
  유화 부인은 그 날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남편 왕건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뒷
날 왕건이 시중(총리)이라는 벼슬자리에 앉게 된 뒤에야 다시 만나 남편을 따라 철원으로
가게 되었다.
  후고구려의 임금이 된 궁예는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에 국호를  마진 , 연호를  무태 라 하
였고, 다음해인 905년, 서울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임금이 된 뒤부터 궁예의 성격은 점점 오만하고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미륵불이라
부르게 하고, 불경을 손수 20여 권이나 지은 뒤,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그 불경은 불도에도 어긋나며 또한 이치에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석총이라는 스
님이 이를 반대하자, 궁예는 당장 그의 목을 베어 죽이게 했다.













  4. 포악한 임금

  한편, 궁예는 도읍을 옮긴 지 6년 후인 911년에 나라 이름을 다시  태봉 이라 고치고, 연호
는  수덕 만세 라 하였다.
  궁예는 왕건의 힘으로 날로 영토가 넓어지고 부강해지자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
다.
  자기의 머리에는 황금 관을 쓰고, 몸에는 황포를 입었다. 그리고 손에는 황금 지팡이를 짚
었다.
  또한 부인 강씨를 관음 보살이라 하고, 큰아들을 천광보살, 둘째 아들을 신광 보살이라 하
여 신하들과 백성들로 하여금 우러러 받들게 하였다.
  궁예는 걸핏하면 장수나 대신들까지 불러 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짐에게는 사람의 마음 속을 훤히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재수가 있다. 그러니 누구든 내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알겠느냐!
  대신이나 장군뿐 아니라, 심지어는 왕후와 왕자들까지도 의심했다. 게다가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 심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신하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 일이 예
사였다.
  궁예의 포악한 궁예와 가까이 있다가는 자기도 언제 어떤 일로 엉뚱한 의심을 받아 화를
입게 될지 몰라 계속 싸움터에서만 지냈다.
  왕건은 자기가 7년 전에 평정했던 나주가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수많은 수군의 공격으로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수군을 몰고 가서 견훤과 싸웠다. 그 전투에서 견훤의 수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그리고 그 무렵 수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해적의 두목 능창까지 붙잡
아 처치하여 동요하던 나주 지방의 인심을 안정시켰다.
  이 공으로 왕건은 시중(총리)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왕건은 나주 지방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궁예의 곁에 있다가는 자칫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나주에 머무르는 동안, 왕건은 훌륭한 전함이 필요함을 깨닫고 많은 배를 만들었
다. 머지않아 견훤과 목숨을 건 큰 싸움을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
다. 그만큼 왕건은 언제나 먼 앞날을 내다보며 일했다.
  그 때, 그가 만든 전함 중에는 하도 넓어서 그 배 위에서 말을 달릴 수 있는 것도 있었으
며, 높은 누각을 세워 그 모양이 큰 집처럼 당당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가 이토록
해상 작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 끝낸 것은 914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왕건도 언제까지고 나주 지방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궁예의 부름을 받고 철원
으로 올라왔다.
  궁예가 왕후와 두 아들을 죽이고 난 며칠 뒤, 궁예는 왕건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마마, 왕건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경이 어젯밤에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반역 음모를 꾸미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
오?
  느닷없는 궁예의 물음에 왕건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제 나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
  왕건은 이렇게 생각하며, 도리어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찌 소신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마마의 오해이십니다.
   나는 미륵불이라서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데, 경은 나를 속이고 있소. 바른 대로
대답하시오!
  궁예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뒷짐을 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때, 장주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렸다.
  붓이 데구루루 굴러 왕건 옆에 멈췄다. 최응은 그것을 줍는 체하며 뜰 아래 왕건에게 귀
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하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화를 면하는 길이옵니다.
  왕건 역시 최응의 말대로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왜냐 하면 궁예는 자기가 자랑
하는 신통력을 인정받으면 매우 기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급히 그 자리에 엎드렸다.
   실은 소신이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 말을 듣자, 궁예는 만족한 듯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과연 경은 정직한 사람이오. 잘못을 이실직고했으니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소. 다시는 나
를 속이려 들지 마시오.
  이 일로 인하여 왕건은 죽음 대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궁예로부터 하사받았다. 그
뒤부터 왕건은 도선 대사의 가르침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기며 언행을 더욱더 조심했다.
  궁궐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 빠르게
전해져 갔다.  백성들은 모이면 나라의 앞 일을 걱정하였다.
   임금이 미쳐서 왕비와 왕자 형제를 죽이고, 대신들까지도 마구 못살게 구신다 하니, 이제
장차 나라가 어찌될 것인지……!
   신라·태봉·후백제 가운데서 그래도 태봉이 가장 큰 나라인데, 이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될 것 같소?
  장군과 대신들은 백성들보다 걱정이 더욱 컸다.
   세상에 이런 괴이한 일도 있소? 그 영특한 궁예 임금이 미쳐 버리다니, 기가 막힌 일이
오.
   하는 행동을 보니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소. 앞으로 나라의 장래가 큰 근심이오.
   왕자들마저 죽여 버렸으니, 임금자리는 누구에게 물려준단 말이오.
   삼국 통일의 과업을 눈앞에 두고 뜻밖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단 말이오.
  장군과 대신들은 이처럼 앞 일을 걱정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 온 어느 날의 일이었다.
  철원 저자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당나라 사람 왕창근의 가게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 노
인은 스님 차림인 것으로 보아 도승인 듯싶었다.
  노인은 왼손에 질그릇, 오른손에는 낡은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 노인이 왕창근에게 물었다.
   여보시오. 이 거울을 사시겠소?
   거울 값이 얼마나 하오?
   쌀 한 되만 주시지요.
  노인의 말에 왕창근은 쌀 한 되를 주고 거울과 바꾸었다.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놓자, 햇빛을 받은 거울에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왕창근은 이상히
여겨 그 글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섯 줄의 한문 시였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았다.
   옥황 상제가 아들을 진한·마한에 내려 보내어 먼저 닭을 잡고 오리를 쳤다. 뱀띠 해에
두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푸른 나무에 숨고, 하나는 검은 금의 동쪽에 나타난다.
  왕창근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마침내 그것을 궁예에게 바쳤다.
   이상한 거울이로다. 예사로운 글귀가 아니로구나.
  궁예도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글을 잘 하는 선비를 불러 풀이해 보도록 일렀다.
  여러 선비들이 머리를 맞대고 오랫동안 글뜻을 풀이해 보려고 애썼다. 그 결과, 마침내 다
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푸른 나무는 소나무이니 송악이고, 검은 금은 쇠이니 철원이다. 두 용이란 궁예와 왕건을
가리킨다. 먼저 닭을 잡고 오리를 치다 함은, 왕건이 계림(신라)을 얻고 나중에 압록강을 차
지한다.
  선비들은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궁예에게 말할 수 없었으므로 거짓으로 궁예의 비위에 맞
도록 풀이해 주었다.
   그렇다면 매우 좋은 징조가 아니오?
   그런 줄로 아뢰옵니다.
  궁예는 매우 기뻐서 한쪽밖에 없는 눈을 빛내며 오랫동안 큰 소리로 웃어 댔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석 달이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밤이 이슥하여 홍유·배현경·신
숭겸·복지겸 등이 왕건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명성 높은 장군들이었다.
  왕건은 그들이 밤중에 갑옷 차림의 굳은 표정인 것을 보고 필시 무슨 심상치 않은 일 때
문에 온 것임을 짐작했다.
  왕건은 옆에 있는 부인 유씨에게 말했다.
   부인,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뒤꼍 텃밭에 열린 햇참외로 시원한 냉채라도 만들어 해오
도록 하오.
  왕건은 그들이 꺼낼 비밀스런 이야기를 그의 아내 유씨 부인이 듣게 되는 것을 꺼렸던 것
이다.
  유씨는 곧 남편의 뜻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홍유 장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임금님은 형벌이 지나쳐 죄없는 백성과 신하를 마구 참살하고 있소. 심지어는 왕비
와 왕자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소. 그러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처지
요. 마치 임금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소. 이러한 때 덕망이 높은 왕 시중께서 임금의 자리
에 앉아 백성들을 편히 살도록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겠소?
  홍유 장군의 이 말에 왕건은 정색을 하며 거절했다.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내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소. 그런 불충스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기회를 얻기는 힘들지만, 기회를 놓치기는 쉬운 법이오. 그러니 부디 하루라도 빨리 거사
를 일으키는 것이 좋을 듯 싶소.
  배현경 장군이 이렇게 말하자, 신숭겸 장군도 옆에서 거들었다.
   옳은 말씀이오. 나도 배 장군의 말에 저적으로 찬성이오. 하늘이 내려 주신 이 기회를 놓
쳐서는 안 됩니다.
   나도 찬성이오.
  복지겸 장군이 말했다.
  모두의 뜻은 이미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오직 왕건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 왕건은 입을 무겁게 다물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이 때, 유화 부인이 화채상을 내오다가 방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왔다.
   아녀자가 대장부의 일에 참견할을 용서하십시오.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하심을 듣고
비록 아녀자이지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시중 대감, 부디 나라와 백성을 살려 주시옵소
서.
  말을 마친 유화 부인은 곧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게 하고 긴 칼을 내주었다.
  이리하여 네 장수는 왕건을 호위하고 밖으로 나가 새벽이 되자, 노적가리 위에 왕건을 앉
게 하고 임금과 신하의 예를 드렸다. 그런 다음 군사들을 시켜 거리마다 뛰어다니면서 외치
게 했다.
   왕 시중께서 의로운 깃발을 들고 일어나셨습니다!
  벌써 궁궐 문 앞에는 1만 여 명이나 되는 군사와 백성들이 왕건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포악한 임금은 물러나라!
   가짜 미륵불은 지옥으로 가라!
   와아, 와아, 애꾸눈은 물러나라!
  바깥의 함성을 들은 궁예는 평민의 옷으로 갈아 입고 북문으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리
고 걸어서 부양(평강) 땅 골짜기까지 도망쳤다가 그 곳 백성들에게 들켜 맞아 죽었다. 그야
말로 포악한 임금의 비참한 마지막이었다.  궁예 왕은 결국 자신이 뿌린 씨를 스스로 거둔
셈이 되었다.
  한편, 왕건은 이튿날 포정전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고려 라 고치고,  천
수 라는 연호를 쓰기로 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라에 불만을 품고 있는 백성들에게 고구려를 부흥시켰다는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
으려는 뜻이 포함된 것이었다. 때는 918년, 신라는 경명왕 2년, 고려로서는 태조 1년 6월 15
일의 경사스러운 날이다. 이 때 왕건의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임금 자리에 오른 이틀 뒤, 고려 태조 왕건은 조서를 내려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기
는 부덕하지만 그런 그릇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으니 한마음으로 새 나라를 일으키자고 알
렸다.
  그러나 모든 신하가 그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환선길은 혁명 때, 정병 대장으로 왕건을
호위하는 요직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의 부추김으로 역모를 꾸몄다.
  어느 날, 편전에서 학자들과 함께 나라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환선길이 부하 50여 명을 이
끌고 와서 왕건을 해치려 했다. 태조 왕건은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짐은 그대들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소. 이것이 다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환선길은 태조의 태연함을 보고, 당당한 태도나 추상같은 호령에 겁을 집어먹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결국 그는 유격병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다.
  한편, 왕건은 널리 숨은 인재를 구하기에 힘썼다.
  숨어 살던 선비 박유가 와서 절하자, 왕건은 극진한 예로써 맞아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자기의 성을 따서 왕유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왕유는 본디 성품이 곧고 글을 잘 하여 궁예의 왕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있었는데, 궁
예의 포악한 행동을 보고 산 속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왕건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
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의 자제들을 서울로 불러 들여 그들에게 높은 벼슬과 넓은 땅을 하
사하고, 서울의 귀족 딸들과 결혼을 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지방의 호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차츰 나라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가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919년부터 고려의 정치 제도는 점점 기틀을 잡아 갔
다.
  왕건이 임금이 된 직후에는, 세 나라 사이에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 무렵의 신
라는 고려나 후백제에게 거의 빼앗겼기 때문에 조그만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제 고려와 싸
움의 상대가 되는 것은 후백제밖에 없었다.
  후백제의 임금 견훤은 고려의 새 임금이 된 왕건을 다소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 왕건과 나주에서 수군을 이끌고 마주 싸우다가 크게 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훤의 휘하에 있는 장수들은 고려가 나라의 기틀을 잡기 전에 치자고 주장했다.
   왕건이 새로 나라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변방에 있는 호족들은 결코 왕건을 임금으로 받
들지 않을 겁니다. 이 때를 놓치지 말고 고려를 쳐야 합니다.
  견훤은 신하들의 뜻과는 달랐다.
   아니오, 원수를 둘씩 만들 필요는 없소. 우리는 먼저 신라를 쳐서 우리 것으로 만든 다음
에 고려를 칠 힘을 길러야 하오.
  견훤은 신하들의 뜻을 물리치고, 도리어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이  때, 선물로는 공작의 깃으로 만든 아름다운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 등을 보
냈다.
   왕건과 친선을 맺어 두면, 우리가 신라를 칠 때 못 본 체하겠지.
  견훤은 이런 속셈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호시탐탐 신라를 쳐부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왕건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되어 주춤거리고 있었다.
  신라·후백제·고려 세 나라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이 무렵, 하루   태조 왕건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말했다.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은 황폐된 지 오래 되었소. 지금은 오랑캐들이 그 곳에서 노략
질을 일삼고 있소. 앞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거기서 살게 하여 우리 땅으로 굳혀야 하오.
  왕건은 사촌 동생 왕식렴을 평양으로 보내어 지케게 하고, 황주·해주·백주 등에 사는
백성들을 평양으로 이주하여 살게 했다.
  919년 1월에는 서울을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큰 절 열채를 도성 안에 짓게 했
다.
  왕건은 나라를 다스리는 세 가지 목표를 뚜렷이 세웠다. 북쪽의 오랑케들을 징벌하거나
무마하여 통합할 것, 불교에 의한 국가 사회 생활을 통이랄 것, 고구려의 옛 땅을 찾을 것
등이었다.
  이듬해인 920년(태조 3) 1월, 신라의 경명왕이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터서 서로 친하게 지
내자는 뜻을 전해 왔고, 왕건은 후한 선물을 보내어 화답의 뜻을 전했다.




  5. 신라의 슬픔

  그 해 10월, 후백제의 견훤이 드디어 1만 병력으로 신라의 대야성(합천)을 무너뜨리고 진
례성(청도)으로 쳐들어오자, 신라의 경명왕은 아찬 벼슬의 김률을 급히 고려로 보내어 원병
을 청했다.
   지금 견훤이 1만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쪼록 원병을 보내시어
그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이에 태조 왕건은 곧 구원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은 몹시 분개했다.
   내가 귀한 선물까지 보내고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는데, 원병을 보내다니……! 어지 두고
보자. 기어이 이 원수   갚고 말 것이다!
  견훤은 이렇게 분개하며 물러갔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견훤은 924년(태조 7) 7월, 그의
아들 수미강과 양검으로 하여금 고려의 지배하에 있는 조물성(안동)을 맹렬히 공격하게 했
다.
  이 때, 고려 장군 왕충이 왕건에게 자청하여 말했다.
   전하! 소신에게 군사를 주시면, 견훤의 군사를 거뜬히 물리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참으로 장하오! 곧 출전할 준비를 해 주오.
  조물성 군사들과 왕충 장군은 목숨을 걸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면서 대항했으므로 후백제
의 수미강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돌아갔다.
  다음 달, 견훤은 명마 한 필과 함께 사신을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족하에게 제 자식 녀석이 무례한 짓을 저질러 삼가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견훤은 이듬해 10월, 직접 정예군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시 조물성을 공격해 왔다.
이는 신라 변경의 호족들이 자꾸만 태조 왕건에게 귀순해 가자, 이를 막기 휘한 생각에서였
다.
  또한, 고려가 남쪽으로 뻗어가 신라와 접촉하려는 것을 끊어 버리려는 속셈이었다.
  태조 왕건도 정예군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견훤은 임시 변통으로 적의기세를 꺾으려고 글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고 볼모로 그의
조카 진호 장군을 보내 왔다. 태조 왕건도 싸움을 계속하면 병사들의 희생이 클 것이 뻔하
므로 사촌 동생 왕신을 볼모로 보내어 화친을 하기로 했다.
  926년(태조 9) 4월이었다. 볼모로 고려에 와 있던 견훤의 조카 진호 장군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태조는 그 유해를 정중히 후백제로 보내 주었다. 진호 장군은 원인을 알 수 없
는 병으로 앓다가 죽었는데, 견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고려 왕이 내 조카를 죽인 거야.
  견훤은 불같이 노하여 당장에 고려의 볼모 왕신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지난 해에 보낸
말을 돌려 달라고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태조는 껄걸 웃고는 사신에게 말을 돌려 주었다.
  견훤은 이것을 신호로 왕신을 사형에 처하고,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웅진(공주)으로 진격했다.
  왕건은 각 성의 성주들에게 명령했다.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밖으로 군사를 내보내어 싸우지 마라!
  신중하게 작전을 짜기 전에 전쟁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신라의 경애왕은 왕건에게 사신을ㄹ 보내어 말했다.
   견훤이 화친을 맺고 나서도 이를 어기고 출동하니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오. 견훤은 저
절로 무너지고 말겁니다.
  그러자 태조가 대답했다.
   견훤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그의 악이 극도에 달해서 제풀에 꺾이기를 기다리는 것이오.
  이와 같이 고려 태조는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서로 도왔다.
  그러나 4월에 시작된 전쟁은 10월이 되도록 이렇다할 결말이 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고려에서는 수비만 할 뿐 공격 태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에 접어들면서 고려는 공격을 시작했다. 육군은 웅주·운주(홍성) 등을 공격하
여 빼앗고, 수군은 강주(진주)를 쳐서 빼앗았다.
  전쟁이 커지자, 신라에서도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크게 패하고 완산주로 쫓겨가 분
을 삭이고 있던 견훤은 927년 6월에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남해안 일대를 휩쓸고 삽
시간에 근품성(상주)을 쳐부수고 불을 질렀으며, 곧 고울부(영천)를 빼앗고 신라의 서울 금
성(경주)으로 진격했다.
  경애왕은 견훤의 군대가 신라의 서울인 금성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했다.
   병사 1만 명을 몰고 가 경주를 지키도록 하라!
  왕건은 공훤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의 서울을 수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고려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라의 서울 금성은 완전히 후백제의 군사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고려에서 원군이 올 것을 철석같이 믿은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후궁들을 거느리고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흥겹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고? 고려의 원군이 벌써 도착했는가?
  경애왕은 술잔을 든 채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경애왕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 놀이에 정신이 팔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 때, 온몸이 피투서잉가 된 군사 하난가 뛰어들어와 급히 아뢰었다.
   전하,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왔습니다. 어서 피하시옵소서!
  잔치는 난장판이 되었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왕성 남쪽에 있는 별궁으로 피신했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후백제 군사들의 창고 칼에 찔려 죽어 가는 신라의 대신과 신하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궁궐안의 금은 보화는 모두 후백제 군사의 손에 들어갔다.
  견훤은 경애왕을 왕비와 함께 궁전 뜰에 엎드리게 하고 호령했다.
   너는 네 죄를 알렷다! 일찍이 너의 못된 조상들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를 무너
뜨렸다. 오늘 내가 그 원수를 갚으러 왔다. 더욱이 너는 북쪽 도둑 떼의 우두머리 왕건을 끌
어들여 나를 쳤으니 네 죄는 죽어 마땅하다. 어서 이 칼로 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렷다!
  견훤은 벌벌 떠는 경애왕 앞에 칼을 던져 주었다.
  이리하여 경애왕은 자결함으로써 비참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사흘 후, 싸움에 이긴 견훤은 많은 보물과 포로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을 떠났다.
  이  때, 그는 경애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볼모로 잡아 데리고 갔으며, 경애왕의 친
척 동생인 김부를 신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이 그처럼 서둘러 떠난 것은 고려의 원군이 오
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의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곧 신라로 조문하는 사신을 보내는 동시에 정예병을 거느리고 공산으로 떠났다. 견
훤이 군대를 이끌고 그 곳을 지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 신숭겸 장군이 왕건에게 아뢰었다.
   전하, 견훤은 지금 싸움에 이겨서 그 기세가 몹시 당당할 것이옵니다. 그러니 급히 서두
를 일이 못 되는 줄 아옵니다.
  그 말에 태조 왕건은 이렇게 대답했다.
   견훤이 한 짓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할 일이니, 꼭 벌을 주실 거요. 겁낼 것이 못 되
오.
  이리하여 왕건의 군사는 왕건을 선두로 말을 달려 공산(팔공산)에 당도했다.
  한편, 승리감에 젖은 견훤은 금성에서 노략질한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볼모와 대신들의
부녀자들을 포로로 몰고서 의기 양양하게 공산 아래에 있는 미리사 절 앞에 당도하게 되었
다.
  왕건의 군대와 견훤의 군대는 여기서 맞부딪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신숭겸 장
군의 말대로 신라를 무찌르고 난 후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는 견훤의 군사들은 뜻밖에
도 무척 강했다.
  불꽃 튀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군사의 수가 훨씬 우세한 후백제군은 고려의 정예 기병 5천을 에워싸면서 덮쳐 왔다.
  고려군은 먼 길을 오느라고 말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므로 후백제군의 기세에 눌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싸움에서 왕건의 군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 때, 필사적으로 싸우던 신숭겸 장군이 전세의 위급함을 알아 차리고 태조에게 아뢰었
다.
   신이 전하를 대신하여 항북하는 체할 터이니, 그 틈을 타서 피하십시오.
   내가 어찌 신 장군을 죽음의 구덩이에 남겨 둔 채 피할 수 있겠소.
  태조 왕건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신 장군은,
   전하, 귀하신 옥체를 보전하시어 훗날을 기약하시옵소서.
  하고는 태조가 들었던 중군의 깃발을 빼앗아들고 적군 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아갔
다.
  그 사이, 태조는 간신히 몸을 피해 싸움터에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신숭겸은 후백제군과
맞서서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했다.
  이번의 싸움은 난생 처음 맛보는 참패였으나, 왕건은 훗날을 기약하라는 신숭겸 장군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태조는, 신숭겸이 충절을 지켜 장렬히 싸우다가 장렬히 싸우다가 죽었다는 뜻으로  장절
공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쇠로 만든 그의 형상을 주조하여 공신연 때면 그 초상을 맨 윗자
리에 앉힌 뒤, 술을 부어 놓고 위로했다고 한다.
  929년(태조 12) 7월, 견훤은 5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의 의성부를 공격해 왔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의성부의 성주인 홍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다.
   아, 이젠 나의 두 팔을 다 잃어버렸구나!
  그러나 왕건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후백제의 공격을 막는 한편, 군사력을 튼튼히 갖
추면서 백성들에게는 어진 정치를 했다. 그리고 신라와 친교를 맺었다. 또한 3년 전에 거란
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따뜻이 받아들였다.
  그의 꿈은 이 삼천리 땅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 터전이며, 발해의 터전이었던 만주 벌판까
지 뻗쳐 있었다.
  드디어 견훤과의 일대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견훤은 그 이듬해인 태조 13년(930)에 고창군(안동)을 포위했다.
  지난 날 공산 싸움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왕건은, 그 뼈아픈
패전의 복수를 하기위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고창군 병산에까지 내려와 진을 쳤다.
  견훤도 그 근처의 석산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매일같이 격전을 벌였다. 왕건도 명자이지만 견훤도 그에 못지않은
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견훤의 후백제군이 왕건의 고려군에게 크게 패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였고, 그러한 대승리의 힘을 몰아 영안(풍산), 하곡(안동 부근), 송생(청송) 등
30여 지방을 일거에 손에 넣었다.
  이 해 2월에, 태조 왕건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병산 싸움의 승리를 알리자, 경순왕은 크
게 치하하면서 만나기를 청해 왔다.
  이듬해 2월, 신라 임금이 거듭 태조 왕건과 만나 보기를 청해 오므로 태조는 50여 기병만
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인 금성을 방문하였다.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까지 나와 예로써 태조를 맞이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
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신라는 참으로 불행한 나라요. 오래 전부터 견훤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 형편이 말
이 아닙니다. 이 보다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왕건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다.
   걱정 마시오. 신라 뒤에는 우리 고려가 있지 않소. 슬픔을 거두시오.
   말씀만이라도 감사하오이다.
  이리하여 왕건은 금성에서 수십 일을 묵으면서 국교를 더욱 두터이 하고 돌아갔다.
  태조 왕건이 떠날 때 길거리에는 수많은 신라의 백성들이 나와 그를 전송했다.















  6. 무너지는 후백제와 신라

  성품이 어진 태조 왕건의 덕망을 신라 백성들도 찬양했다.
  왕건이 신라에 다녀온 이듬해 932년에 견훤의 심복인 공직 장군이 왕건의 덕망을 사모하
여 스스로 항복해 왔다.
  이 일에 화가 난 견훤은 공직 장군의 두 아들과 딸을 잡아들여 불로 지져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았다.
  그리고 부하 상귀를 예성강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염주(연안), 백주(배천), 정주(풍덕) 등
세 고을의 선박 백여척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저산도를 습격하여 말 3 백 필을 빼
앗아 갔다.
  이 무렵, 여진과 거란은 왕건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남쪽의 후백제를 먼저 쳐부순
뒤 북진 정책으로 여진과 거란을 치기로 하였다.
  2년 뒤인 934년(태조 17) 9월, 왕건은 유금필 장군과 함께 후백제의 운주(홍성)를 공격하
여 크게 무찔러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항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견훤에게 충성을 맹
세했던 여러 장수들도 도망쳐 왕건에게로 와서 항복했다.
  그 무렵, 후백제의 조정에는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견훤은 왕비 이외에도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들이 아홉 명이나 되었
다.
  그 중에서 견훤은 지혜가 뛰어난 넷째 왕자 금강을 제일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작정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큰아들 신검은 간신배인 능환의 꾐에 빠져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란 절
에 가둔 뒤, 동생 금강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좋은 기회가 왔음을 기뻐했다.
   이는 필시 간악하고 교활한 견훤을 치라는 하늘의 뜻이다.
  유금필을 대도통 장군으로 삼아 남쪽 바다의 요충지인 나주 공략에 출정시켰다.
  후백제를 없애려면 그들의 강대한 수군력을 깨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견훤의 아들 신검이 임금에 오른 후백제는 집안 싸움에다가 북으로는 고려의 육군이, 남
으로는 유금필의 수군이 덮쳐 오자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때, 석 달 동안이나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막내아들 능
예 등과 함께 그 곳에서 빠져 나왔다. 나주에 이른 견훤은 그 곳을 지키는 고려 장수에게
왕건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유금필과 만세 장군으로 하여금 견훤과 그 일해들을 정중히 모셔
오게 하고, 견훤이 당도하자 따뜻이 맞이했다.
   너무 상심치 마시오. 족하가 저보다 나이 10년이 위이시니 앞으로 상보라 부를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대궐에서 편안히 지내시면서 저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렇게 후하게 대접하니, 견훤의 지위가 백관의 위에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신라는 영토의 거의 전부를 후백제와 고려에게 빼앗겼으므로, 나라라기보다는 한
낱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의 마음은 모두 어질고 힘이 센 고려 태조 왕건에
게 쏠리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지탱할 형편이 못 되었다.
  어느 날, 신라 경순왕은 조정의 모든 신하들과 왕족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우리 신라는 오랫동안 견훤의 화를 입어 왔기 때문에 나라는 기울 대로 기울고, 또 백성
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었소. 이러한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짐은
이 나라를 더 이상 이끌어 갈 힘이 없소. 그래서 고려에 국토를 내놓고 항복하는 것이 어떨
까 ㅎ여 경들을 부른 것이오.
  경순와의 말은 너무나 침통했다.
  이 말을 들은 신하들 가운데는 끝까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과 경순왕의 뜻을 찬성
하는 사람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이 회의 광경을 지켜 보던 태자가 강경하게 반대의 뜻을 아뢰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심치 말고
충신과 의사들을 모아 끝까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옳은 길이옵니다. 어찌 천 년 사직을 하
루아침에 남에게 내줄 수 있겠습니까? 아바 마마, 부디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태자의 마을 듣고 있던 경순왕이 조용히 말했다.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죄없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어 가는 형편이다. 짐으
로선 차마 못 볼 일이로다.
  이리하여 경순왕은 결정을 내리고,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어 항복할 뜻을 밝혔다.
  태자는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궁궐을 떠났다. 그 길로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굴을 집으로 삼고, 풀과 나무 뿌리를 캐어 먹으며 지냈다. 옷도 삼베 옷만을 걸
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자를 마의태자, 즉  삼베 옷을 입은 태자 라고 부르게 되었다.
  935년(태조 18) 11월, 경순왕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을 떠났다. 백성들도 ㄴ
너도나도 임금의 뒤를 따랐는데, 그 행렬이 30여 리에 이르렀다.
  다음달인 12월, 태조 왕건은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하기 위해 개경(송악)으로 오고 있다는
기별을 받고, 그들 일행을 맞기 위해 의장을 갖추고 성 밖까지 나갔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리고 자기의 맏딸인 낙랑 공주를 경순왕과
맺어 주어 아내로 삼게 하는 극진한 대접을 했다.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은 경순왕은 이윽고 왕건에게 항복의 글을 올렸다.
   신라는 오랫동안 위험한 난리를 겪어 나라의 운이 다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나라를 이끌
고 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하오니 부디 저를 신하로 삼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받은 태조 왕건은 신라 왕을 비롯한 문무 백관을 천덕전에 모아 놓고 말했다.
   짐이 신라의 경순왕과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을 맺어, 두 나라가 저마다 사직을 보전하
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 왕이 굳이 짐의 신하되기를 청했으니 짐으로
서는 부끄럽기 한이 없으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소이다.
  태조 왕건의 말이 끝나자, 경순왕은 뜰 아래로 내려가 신하의 예를 올렸다.
  그 자리에서 김부(경순왕)에게 태자의 윗자리인 정승 벼슬을 주었으며, 해마다 천 석의 봉
을 내려 주기로 했다. 그리고 신라의 옛 서울 금성(경주)을 김부의 식읍으로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부를 따라 고려로 온 모든 신라 사람들을 조정에 채용하고, 토지와 녹을
주어 신라에 있을 때보다 더 우애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신라 천 년의 왕조는, 경순왕을 끝으로 망하고 만 것이다.
  고려는 이와 같이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에는 아직도 후백제
신검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이듬해인 936년(태조 19) 2월에, 견훤의 사위이며 후백제의 장군인 박영규는 아내와의논한
끝에 왕건에게 사람을 보냈다.
   고려에서 후백제를 치기 위해 군사를 보낸다면, 신검을 무찌르는 데 제가 앞장을 서겠습
니다.
  이 편지를 받아 본 왕건은 크게 기뻐했다.
   후백제로 인해 통일이 늦어졌거늘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
  와건은 박영규가 보낸 밀사를 휘히 대접하고
   만일 그대의 은혜를 입어 신검을 무찌르게 되면 그 공을 높이 치하하겠소.
  라는 글을 써 보냈다.
  그리고 몇 달이 자나서 견훤이 왕건에게 아뢰었다.
   소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하고 있음은 그 위력으로써 죄를 저지른 자식을 베자는 것입니
다. 전하께서 군사를 빌려 주신다면 제 손으로 불효한 제 자식의 목을 치고 싶사옵니다.
  태조는 드디어 삼국을 통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태자 무와 박술희 장군으로 하여금 1
만 군사를 이끌고 천안부(천안)로 진군하게 했다.
  태조 왕건은 9월에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당도하여 견훤과 함께 모든 병사를 열병
한 뒤, 일선군(선산)으로 진군하여 일리천이란 강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 신검의 군사와 마주
보고 진을 쳤다.
  고려군의 진지에서 진격의 북이 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 일었다.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 때,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은 싸움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하달음
에 달려와 투항했다.
  왕건은 그를 따뜻이 맞아들여서 물었다.
   신검은 어디 있느냐?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 고려는 좌군과 우군을 합쳐 후백제의 중군을 치면 힘들이지 앟
고 이길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태조 왕건은 곧 공훤 장군을 시켜 중군을 들이치며 협공했다. 그러자 후백제군은 무너지
며, 탄령(대전)을 넘어 황산(충청남도 연산)으로 달아났다.
  쫓기다 못한 신검은 두 아우 양검과 용검을 거느리고 고려군에 항복해 왔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3200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왕건은 항복해 온 후백제군에게는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사로잡은 병졸들과 장
수들의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왕건은 싸움터가 대충 정리되자, 적의 장수이며 간신배인 능화을 끌어와 꿇어 앉히고 엄
하게 말했다.
   네가 능환이라는 자이더냐?
   네, 그러하옵니다. 죽을 죄를 지었사오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간악한 능환은 듣거라. 모시던 임금을 절에 잡아 가두고, 신검을 꾀어 임금이 사랑하는
아들 금강을 잡아 죽이게 한 뒤, 신검을 새 임금을 세운 것은 네 놈의 짓이렷다. 너는 마땅
히 죽을 죄를 지었느니라.
   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다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와 왕실을 망치고 살기를 바랐더냐?
  왕건은 그 자리에서 능환의 목을 베게 했다. 다음은 신검을 끌고 오게 했다. 신검은 끌려
나오기가 무섭게 머리를 조아렸다.
   간사한 자의 꾐에 빠져 부왕을 쫓아내고, 아우를 죽였으니 그 죄 죽어도 마땅하오나 제
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부모 형제의 인연도 모르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신검은 능환의 꾐에 빠져 역적질을 했다 해서 목숨만은 살려 귀양 보냈다. 신검의 아우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 보냈다.
  후백제를 치는 데 공을 세운 견훤의 사위 박영규에게는 좌승이라는 높은 벼슬과 밭 300만
평을 하사했다.
   견훤이 왕위를 잃고 가까스로 도망쳐 온 뒤로, 그의 신하였던 자 가운데서 한 사람도 그
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경의 부부만이 천 리 밖에서 밀사를 시켜 위로해 주
었소. 또 고려에 귀순하려 했으니 그 의리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소.
  왕건은 이렇게 박영규를 차지한 뒤, 역마를 내 주어 그의 가족들을 개경으로 데려오게 하
였다. 또한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려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신검의 목을 손수 베려던 견훤은 그만 분통이 터져 등창이 나서 황산
사라는 절에서 앓다가 죽었다.
  이로써 후백제는 나라를 세운 지 45년 만에 고려에게 망하고 말았다.
  왕건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19년 만인 936년에 후삼국의 통일을 이룩했다. 왕건의 나이
는 예순 살이었다.
  삼국 통일을 축하하는 잔치가 끝난 이튿날부터 태조 왕건은 그 동안 전쟁에 공을 세운 장
수들을 각 성의 성주로 임명하고, 허물어진 성들을 고쳐 쌓게 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쓰는 한편, 고구려의 옛 서울인 평양도
다시 복구하게 했다.
  백성들은 덕이 있는 왕건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복구 작업에 힘을 모았다.
   본디 평양 땅은 고조선 시대부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도읍으로서 번창했던 곳이오. 지
금은 여진족들이 사냥터로 삼고 있으니 이를 그냥 둘 수는 없소.
  왕건은 사촌 동생 왕식렴을 평양으로 보내 그 곳에 대도호부를 설치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한 후, 이름을 서쪽 도읍이라는 뜻에서  서경 이라 부르게 했다.
  서경에 관청을 세우고 옛 성을 다시 견고하게 쌓았으며, 왕건 자신도 자주 가서 지스를
했다.
  학교도 세웠다.
  몇 해가 지나자 서경은 몰라 보게 훌륭한 고을이 되었다.
  글을 좋아하는 태조 왕건은 그 소문을 듣고 최승로 어린이를 불러들여  논어 를 읽게 했
다. 최승로는 그 어려운 한문책을 줄줄 외우고 뜻도 풀이했다.
   오, 기특한 어린이로다! 너의 재주는 신라의 최치원 선생과 비길만하구나.
  왕건은 그 어린이를 크게 칭찬하고 푸짐한 상을 내린 뒤 학자들이 모여 있는 원봉성에 입
학시켜 주었다.
  최승로는 뒷날 이름난 학자가 되었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건은 원래 무인 출신이어서 나라을 세운 초창기에는 주로 무신을 등용하여 그 쪽으로
나라일을 많이 보아 왔지만,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문신, 즉 선비들을 많이 등요하여 그
들에게 나라일을 맡겼다.
  이렇듯 여러 가지로 자상하게 백성들을 보살핀 일들중에서도, 태조 왕건이 제일 크게 힘
써 이룩한 것은 나라 곳곳에 절을 짓는 일이었다.
  왕건은 언제나 자기 자신은 수양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으나, 부처님의 크나큰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고, 모든 백성들이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후백제를 무너뜨린 뒤, 그 승리를 거둔 땅 황산(논산군 연산)에 세운 개태사라는 절이 바
로 왕건의 생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왕건은 그 절을 다 세운 뒤, 다음과 간은 글을 밝혀 놓았다.
   나로 하여금 통일 과업을 이룩하게 해 주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이 절을 세우노
라.
  그리고 태조 왕건은 대장경을 두 벌 베껴서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에 각각 한 부씩 두
고자 생각한 일도 있었다.
  왕건은 그 문제를 존경하는 극양 스님과 의논했다. 그러자 극양은 태조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은혜와 임금님의 덕이 땅과 함께 영원할 것이오며, 하늘같이 드높아 이 나라에
는 만복이 깃들 것이옵니다.
  한 번은 이엄이라는 스님에게 왕건은 이렇게 물었다.
   피치 못할 전쟁 때문에 평생 동안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로 인해 장차 화를 입게 되
지 않을는지 모르겠소.
  오랜 전쟁 동안 비참하게 죽어 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왕건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왕건의 말을 들은 이엄 스님이 말했다.
   불도의 가르침은 까닭없이, 그리고 죄없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감 마마께
서 삼국을 통일하시는 큰 뜻을 이룩하시는 데 적의 무리를 쳐 없애는 것이 어찌 죄가 되겠
습니까? 많은 절을 세우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셨으니 상감 마마야말로 살아 계신
부처님이나 진배없사옵니다.
  이엄 스님의 말을 듣고 난 태조 왕건의 얼굴에는 비로소 밝은 빛이 감돌았다.
  942년(태조 25) 10월, 거란의 임금 태종이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사신 30명을 보내면서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보내 왔다.
   이 놈들이 이제 우리 고려를 넘보기 시작하려는구나. 어디 고려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
접 겪어 보아라.
   대왕 마마, 우리 거란의 임금과 손을 잡으시고 화친을 도모하소서.
  거란의 사신들이 왕건에게 이렇게 아뢰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건은 큰 소리로 외쳤
다.
   듣기 싫다! 어찌 짐승 같은 그대들의 임금과 손을 잡고 이웃이 되겠는가? 발해는 우리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나라인데, 어찌 거란이 함부로 그 임금을 잡아 가고 멸할 수 있단 말
인가? 보기 싫으니 썩 무러가가!
  이렇게 크게 꾸짖은 뒤, 그들 사신 30명을 모두 뱃길이 닿지 않는 먼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들은 만부교 다리 밑에 매어 두어 굶어 죽게 했다.
  태조 왕건은 몇 해 전, 고려에 와 있던 서역의  말라 라는 스님을 통하여 중국의 후진과
국교를 맺고, 고려와 후진 사이에 있는 거란을 양쪽에서 공격하여 쳐 없애려는 계획을 세우
고 있었다.
  그러나 후진이 거란을 두려워하여 이 일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왕건은 계속하여 야만족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
었다. 그러나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는 생각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란에게 쫓겨 고려에 피해 와 살고 있는 불쌍한 발해의 유민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많
아, 왕건은 항상 이들을 딱하게 여겨 왔다.
  또한 왕건의 북진 정책도 꾸준히 이루어져, 이젠 신라때와는 달리 서북쪽으로는 청천강
이남, 동북쪽으로는 영흥 지방까지 개척되어 있었다. 앞으로 압록강까지 진출할 수 있는 터
전이 마련된 셈이었다.
  그 이듬해 4월, 태조 왕건은 건강이 나빠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8. 교훈을 남기고

  943년의  어느 날이었다.
  병세가 점점 깊어져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아진 왕건은, 대광 벼슬에 있는 총애하는 신하인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 라고 하는 훈계를 내렸다.
  일찍이 열아홉 살에 궁예의 부학 된 뒤, 지금까지 48년 동안 한시도 쉴 새 없이 전쟁 아
니면 나라일에 시달려야 했던 왕건은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쳐 큰 병을 얻
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죽은 뒤 후손들이 자칫 그릇된 정치를 할까 봐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와 태자 왕무를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왕건은 자리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 중국의 순 임금은, 역산에서 밭을 가는 농부의 몸이었으나 덕이 높아 요 임금으로
부터 왕위를 이어받으셨다. 한나라 고조는, 패택에서 일어나 한나라를 세우는 큰 일을 이루
었다.
  짐은 한낱 평민으로 수양도 부족하고 덕도 없는 사람인데, 어쩌다 잘못 임금으로 추대받
아 임금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분수에 넘치는 호화 생활을 삼가면서 애써 힘쓴 지 19년 만에 비로소 후삼국을 통
일할 수 있었다.
  임금 자리에 오른 지 어언 25년, 이미 나는 마음도 늙었다. 오직 두려워하는 바는 자손들
이 정과 욕심을 함부로 하여 기강을 어지럽힐까하는 일이다. 따라서 훈계를 주는 것이니, 이
를 후손에게 전하여 아침 저녁을로 펴보고 길이 거울로 삼기 바란다.
  이 말에 이어서 열 가지 교훈이 주어졌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불교를 보호하고 받들 것.
  2) 도선 스님의 풍수 지리설에 따라 절을 짓도록 할 것.
  3) 왕위는 큰아들, 맏손자 순으로 잇도록 할 것.
  4) 거란은 야만족이니 상대하지 말 것.
  5) 서경을 중요시하여 나라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를 거행할 것.
  7) 백성을 사랑하고 올바른 정사를 펼 것.
  8) 유능한 인재를 뽑아 쓸 것.
  9) 관리의 상벌을 공정하게 할 것.
  10) 몸을 닦아 인격을 쌓을 것.
   모두 빠뜨리지 않고 받아 적었소?
   네, 마마.
   그럼 제목은  훈요 십조 라 하시오. 그 뜻은 열 가지의 교훈이라는 뜻이오.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대대로 물러 지키도록 하겠사옵니다.
  박술희는 태조 왕건이 그 자손에게 길이 남겨 교훈을 삼으려는 훈요 십조가 적힌 두루마
리를 조심스럽게 말았다. 그리고 큰 절을 한 뒤, 두루마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물러나왔다.
  이렇게 훈계를 내린 태조 왕건은 점점 병세가 나빠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왕건의 나이 예순일곱 살로 보자면 노환이 틀림없지만, 역시 몇십 년 동안에 쌓인 피로가
일시에 큰 병을 만든 것 같았다.
  그러자 재상 염상을 비롯하여 왕규·박수문 등의 신하들이 임금께 병문안을 왔다.
  왕건은 병석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짐이 병석에 누운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소. 이제 죽음이 임박해 생각해 보니, 죽음이란
마치 오랫동안 자기 집을 떠나 있던 나그네가 일을 다 마치고 제 집에 돌아감과 같다는 생
각이 드오.
  다만 힘써 하고자 했던 일들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그것이 마음 아플 뿐이오.
   대왕 마마!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신하들은 저마자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짐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에 처리하지 못한 나라일들이 많을 터이니, 경들은 태자와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시오.
  그런 며칠 뒤였다. 왕건은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스스로 알고, 유언을 받아 쓸 신하를
불렀다.
  유언장이 완성되자 태자와 왕후를 불러들였다. 태자와 왕후에게 뭔가 말을 하려던 태조는
통증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태자와 왕후, 대신들은 어버이같이 인자하고 덕이 높은 임금님의 힘없는 모습을 대하고는
모두 목놓아 울었다.
   대왕 마마!
   대왕 마마께서는 온 백성의 어버이신데, 오늘 저희들을 두고 가신다 하니 그 슬픔을 견
딜 길이 없사옵니다.
  태조 왕건은 그 울음소리에 다시 눈을 뜨고 조용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울지들 마오. 예로부터 삶이란 덧없는 것이라 했소. 나는 이제 부처님 곁으로 가오. 내자
죽거든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도록…….
  왕건은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태자와 왕후를 비롯한 문무 백관들이 태조 왕건에게 하늘과 같이 거룩한 임금이란 뜻의
 신성대왕 의 시호를 올리고, 현릉에 장사를 지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남긴 유언에 따라 장례는 간소하고, 모든 제물들은 검소하
게 했다.
  태조 왕건은 살아 있을 때는 싸워서 정벌하는 곳마다 인자하게 그 곳 백성들을 위로했으
며, 죽을 때까지도 올바른 교훈을 내린 훌륭한 임금으로 먼 훗날까지 칭송받게 되었다.











  (특집)
  신비의 스님 도선

  도선은 827년(신라 흥덕왕 2)어 태어나 898년 (효공왕 4)에 세상을 떠난 승려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 씨이며 전라 남도 영암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어떤 이는 도선이 신라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라고도 하지만 뚜렷이 밝혀진 사실은 없다.
  도선은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의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이름난 절을 찾아다
니며 불도를 닦았다. 그러다가 846년 (문성왕 8), 전라 남도 곡성의 동리산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하던 혜철 스님을 만나 불도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불도가 무어냐고 묻는 도선의 질문에 혜철 스님은  말이 없는 것이 말이요(무설설), 법이
없는 것이 법이다(무법법) 라고 대답해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주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
해지고 있다.
  850년, 도선은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았다. 는 것은 정식으로 승려로
인정받는 절차를 밟았다는 뜻이다.  구족계 란, 불교의 비구니나 비구가 꼭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이 계율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절차를 밟아야 누구나 정식으로 인정하는 승려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승려란,  비구 와  비구니 를 말하는데 비구는 출가하여 가족을 거
느리지 않는 남자 승려를 말하고 비구니는 그런 여자 승려를 가리킨다.
  그런 다음 도선은 운봉산에 굴을 파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여름에는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한철을 보냈다. 그러다가 도선이 자리를 잡은 곳은 전라 남도 광양 백계산에 있는 옥
룡사였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면서 수도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옥룡사는 매일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너도 나
도 도선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헌강왕까지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도선은 일흔 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효공왕은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면서  효공선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 도선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옥룡사에  징서혜동탑 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도선을  대선사 로 받들고 덧붙여  왕사 로 부르게 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의 인종은 도선을  선각국사 로 높이 받들어 모셨다.  대선사 란 불도를 닦아 높은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는 뜻이며,  왕사 란 임금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선각국사 란 일찍이 깨달음을 얻
은 승려라는 뜻(선각)과, 나라의 으뜸가는 스승 승려(국사)라는 뜻이 합해진 이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선에 대한 삶과 죽음이 수수께끼처럼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몇백 년을
살았다는 셈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도선은 불교 역사에서보다 풍수지리나 무도·무술 등에
신비한 능력을 가졌던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도선은 실제로 있었던 인물
이기보다 전설 속의 도선이기도 한다.
  도선이 전설 속의 인물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때부터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왕건이
태어나 고려를 세울 것이라고 미리 예언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 때문에 고려의 임금들은
도선을 매우 공경했다. 하지만 도선과 태조가 참으로 만났었는지조차 아무도 알 수 없다. 어
쨌든 태조는 도선이 썼다는  도선비기 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태조는  훈요십조 에서 제2조를 완전히 도선에 대한 믿음으로 채웠다. 도선이 이르기를 신
라는 절을 아무데나 마구 지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해서 태조 자신은 절을 지어서는 안 될
곳과 되는 곳을 정해 두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고려 때는 도선이 정한 자리에 세운 절을  비
보사 라고 했으며 그 자리에 세운 탑을  비보사탑 이라고 했다.
  서울 특별시 도봉구 우이도에 있는 도선사는 도선이 지었다는 절이다. 그는 862년, 여기다
절을 세우면서 1천 년 뒤 불도가 사람들의 발에 밟힐 때 다시 불도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곳이라면서 그 곳에 절을 세웠다. 그리고 1863년(조선 철종14) 세도가 김좌근이 힘을 보태
고쳐 지었으며 칠성각을 세웠다. 1887년(고종 24) 임준이 이 곳에 오층탑을 세우고 이 탑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셨다.
  도선이 쓴 것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거의 풍수지리에 관한 기록들로 도선비기·송악명당기
·도선답산기·삼각산명당기 등이다.  송악명당기 는 개성에서 집이자 절, 무덤을 쓰기 좋은
자리와 거기에 관한 설명이 들어 있으며  도선답산기 는 도선이 나라 안의 산을 돌아보고 느
낀 좋은 산과 나쁜 산에 대한 설며이다.
  이밖에 도선의 사상을 미륵 사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이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고려의 호국 불교가 도선의 사상에서 많은 영
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일제 때 침략가 1천 년 이상 일부러 피해온 짓을 골라서 했
다. 그것은 도선이 좋은 자리라고 한 곳을 나쁘게 만들고, 나쁜 자리라고 한 곳을 중심지로
만들어 우리의 민족혼을 죽이려고 했던 짓이다.
  말하자면 도선의 풍수지리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는 땅과 물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이
깃들여 있는 자연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도선은 산과
내와 강 등이 어우러지는 속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 생태계와 그 안에 더불어 살고 있는
우리를 우리 고유의 사고 방식에 따라 설명했는지도 모른다.
  일제는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은 민족혼의 뿌리를 말리고 우리의 고유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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