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7)원효, 의상.
*원효(617∼686) : 신라의 승려로서 성은 설 씨라고 한다. 설총의 아버지라는 설이 있으
며 압량(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나 648년 황룡사에서 출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도를 닦았다. 650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공부하러 가던 도중 당항성에서 깨달음
을 얻어 되돌아왔다. 한때 요석공주와 살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라
고 하는 이도 있다. 원효는 종교의 규칙이나 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승려 생활을 이어나갔
다. 그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 을 풀이하여 세상에 불법을 전했으며 나이가 들자
깊은 산의 절로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고 도를 닦으며 남은 삶을 보냈다.
1. 화랑도의 기상
울창한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산골짜기 아래 풀밭에서는, 젊은 낭도들의 우렁찬 외침 소
리가 하늘 높이 메아리쳤다.
에잇, 얏! 에잇, 얏!
낭도들은 저마다 칼과 창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술을 닦기에 여념이 없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선 화랑의 우두머리 서당 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만! 이제부터 냇물에 몸을 씻고 점심을 먹는다.
낭도들은 와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골짜기로 흘러 내리는 맑은 냇물 속으로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들었다. 모두 스무 살 안팎의 피가 끓는 씩씩한 젊은이들이었다.
우리 서당님은 훈련도 철저하게 시키지만, 우리 마음도 썩 알아준단 말이야.
고구려군이 칠중성에 쳐들어왔을 때 우리 서당님은 그들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지 뭔가!
그건 여러 해 전의 일이야. 지난해에는 백제가 우리의 대야성(합천)에 쳐들어와 성주 품
석 장군은 전사하고, 서당님과 아주 친한 화랑 죽죽님을 잃고 크게 패했다는 거야. 그래서
친한 벗을 잃은 서당님은 몹시 아파하고 계시다나 봐.
하지만 언젠가는 큰 공을 세울 날이 있을 거야. 우리 고을에서는 서당님만큼 무술이 뛰
어나고 기개가 높은 화랑은 없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학문도 퍽 깊다지 않은가.
시원한 찬물을 온몸에 끼얹으며 낭도들은 자기들의 지도자인 서당에 대한 칭찬의 말을 아
끼지 않았다.
점심이다! 모두 모여라!
식사 당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을 마친 낭도들은 모두 점심을 먹기 위해 빙 둘러 앉았다.
반찬은 산나물 무침과 소금에 절인 짠지 정도가 고작인 조촐한 밥상이었으나, 모두 식욕
이 왕성한 장정들인지라 꿀맛과 같았다.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서당은 낭도들을 집합시켰다.
커다란 바위 위에 떡 버티고 선 서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수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여러분이 성심 성의껏 노력하고 협심한 보람으로 큰 성과
를 거두었다. 지금 우리 신라는 곡려와 백제의 잦은 침공으로 위태롭기 그지없다. 우리의 땅
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최대의 목표인 삼국 통일을 반드시 이
룩해야 한다.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가, 보름 후 해 뜨는 시각에 모두 이 자리에 모여 다음
수련을 시작하기로 한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 화랑도의 다섯가지 계율을 외우기로 한다. 모
두 큰 소리로 다 같이 외우도록 한다!
네!
다섯 가지 계율을 외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첫째, 임금님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한다. 둘째,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한다. 셋째, 벗
을 사귐에 있어 신의로써 한다. 넷째,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다섯째,
살생을 잘 분간해야 한다!
그럼 모두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효도로써 받들도록 하여라!
네!
이리하여 낭도들은 저마다 자기의 칼과 창, 그리고 보퉁이를 둘러메고 뿔뿔이 흩어졌다.
낭도들의 지도자인 화랑 서당도 짐을 꾸려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 무덤에 드러서 참배를 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어머니 무덤 가에는 노란 산국화가 몇 송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
다. 서당은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흰 구름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서당은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당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당은 늘 마음 속에 허전함을 간직한 채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화랑이 된 후,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숱한 적군을 무찔렀다. 그가 쏜 화살, 그가
휘두른 칼에 쓰러져 죽은 적은 자기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그들
의 부모가 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장차 훌륭한 장군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
가 하고 의심했다. 웬만한 죽음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화랑다
운 화랑이고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서당의 마음은 비단결같이 고와서
적이든 아군이든 주검을 눈앞에 보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난번 대야성의 싸움에서 같은 화랑도로서 절친한 사이였던 죽죽의 죽음을 본 뒤부터 서
당의 마음은 더욱 삶에 대한 허무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삶과 죽음의 참뜻을 더 깊이 알
고 싶었다.
그것을 탐구하려면 불교를 연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면 머
리를 깎고 중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과 인연을 끓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과연 허락해 주실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서당은 벌떡 일어나 앉아 어머니 무덤을 향해 물었다.
어머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싸움터에 나가 공을 더 세워 훌륭한 장군이 될까
요? 아니면 불문에 들어가 부처님의 말씀을 깨우치고 이 세상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괴로움
을 구제할까요?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쏴아쏴아 하고 귓가를 스쳐
갈 뿐이었다.
서당의 머릿속에는 자기를 낳을 때 어머니가 겪으셨다는 일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버지
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서당 이란 원효 대사 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그는 617년 신라 제26대 진평왕 39년에 경
상 북도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산시 자인면이다.
불지촌은 발지촌 또는 불등을촌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름에 부처님의 땅 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원효 대사라는 훌륭한 스님이 이 고장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서당의 할아버니느 잉피공이라는 분이었고, 아버지 설담날은 내마 라는 벼슬을 지내고 있
었는데 사리 부인과 함께 아버지 잉피공을 모시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
만, 그 부부에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아직 자식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리 부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가 부처님께 통했던지, 어느 날 밤 매우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하늘의 별 중에서 가장 큰 별 하나가 쏜살같이 품안으로 들어오기에 깜짝 놀라 잠이 깨었
떤 것이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은 설담날은 몹시 기뻐했다.
그 꿈은 태몽임에 틀림없소. 아마 우리 집에 하늘이 내려준 아기가 태어나려는가 봅니
다.
그런 꿈을 꾼 뒤, 사리 부인은 정말 아기를 갖게 되었고, 어느덧 열 달이 가까웠다. 사리
부인은 친정에 가서 몸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첫아기는 친정에 가서 낳는 것이 우리 나라의 풍습이었다.
설담날 부부는 하녀 몇 사람을 데리고 사리 부인의 친정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친정으로 가던 사리 부인이 밤나무골에 이르렀을 때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사리 부인은 그만 배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허어, 이거 야단났군. 저 고개만 넘으면 될 텐데‥‥‥. 좀 힘을 내 봐요.
옆에서 지켜 보던 남편과 하녀들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기만 했다.
진통은 점점 더 심해지고, 사리 부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여기서 아기를 낳으려나 봐요‥‥‥.
사리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고통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설담날은 하는 수 없이 겉
옷을 벗어 밤나무 가지에 걸어 막을 친 뒤, 마른 풀을 긁어 모아 자리를 만들었다. 사리 부
인은 그 자리에 누웠다.
하녀들은 부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돕고, 설담날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타까움을 누르며
아무 탈 없이 아기가 태어나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얼마 후에 쳐 놓은 산실이 오색 찬란한 구름으로 휘감겼다.
어느덧 이 구름이 밤나무 골짜기에 가득 찼다.
참 이상한 일도 있구나.
설담날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조금 뒤, 밤나무 숲을 에워싼 오색 구름이 천천히 걷혔다.
이윽고, 응애, 응애!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서방님, 기뻐하세요. 마님께서 아들을 낳으셨어요.
급히 뛰어들어가 보니까 예쁜 갓난아기가 사리 부인의 치마폭에 싸여 있었다.
귀한 손자를 보게 된 할아버지 영피공은 기쁜 마음으로 아기의 이름을 서당 이라 지었다.
이 아이가 후에 신라의 불교를 크게 일으킨 원효 대사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사리 부인은 서당을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어린 서당은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기에 마음 한구석이 늘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자란 서당은 신라의 풍습에 따라 전쟁터에도 몇
번 나가 공을 세우며 씩씩한 젊은이로 자라났다.
서당이 이렇게 자기가 태어날 때의 일이며, 그 후의 일들을 머릿속으로 더듬고 있을 때,
뒤쪽에서 석장 소리가 들려 왔다.
서당이 벌떡 일어나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니, 바랑을 등에 메고 석장을 든 행각승이 산에
서 내려오고 있었다.
행각승은 서당 앞으로 오더니,
나무 아미타불.
하고 합장을 하고 나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젊은이는 화랑인 모양인데, 웬일로 무덤 앞에 앉아 수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
소?
행각승이 묻는 말에 서당은 애써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제 얼굴이 그토록 수심에 차 보입니까?
그렇소. 큰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얼굴이오. 실례지만 어디에 사는 뉘시오?
저는 압량군 불지촌에 사는 내마 설담날님의 아들 서당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여긴 어머님의 무덤이겠구려?
스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젊은이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은덕으로 아들을 낳은 뒤 이승을 떠났다는 것을 나는 잘 알
고 있소.
서당은 깜짝 놀라며, 행각승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스님의 반짝이는 눈에는 깊은
지혜와 덕이 담겨져 있었다.
스님,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젊은이의 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불공을 드릴 때 내가 부처님께 기원을 올렸기
때문이오.
서당은 그 말에 더욱 놀랐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스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저는 어머니 모습을 모릅니다. 어떻게 생기신 분이십니까?
젊은이의 모습을 물에 비추어 보시오. 그것이 바로 어머니 모습이오.
행각승은 서당의 어머니 모습을 다시 떠올리려는 듯이 눈길을 먼 산으로 향했다.
스님, 저는 지금 두 갈래 길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화랑의 기상을 살려 우리 나라를 침
공하는 외적을 무찌르는 데 몸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의 말씀과 그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를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행각승은 서당의 맑은 눈과 넓은 이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다 우리 신라의 젊은이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오. 그러나 젊은이의 상으로 보
아 장군보다도 학문의 길이 맞을 것 같소. 또한 어머니와의 전생의 인연으로 보아서도 부처
님의 훌륭한 제자가 되는 길이 옳을 듯하오. 우리 나라에 원광 법사나 자장 법사 같은 훌륭
한 스님이 있기는 하오만, 앞으로는 학승이 필요할 거요. 2년 후에 황룡사에 9층탑이 준공되
지요. 그 때 그 곳으로 출가하도록 하시오.
스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법명은 무엇이옵니까?
나는 대안이라 부르지요. 2년 후 황룡사 법당에서 만날 거요. 나무 아미타불!
대안 스님은 합장을 하더니 총총히 사라졌다.
서당은 멀리 사라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대안 스님과의 만남은 참으로 신
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돌아가신 어머니가 대안 스님을 불러 자기 앞에 나타나게 하
여, 앞으로 나아갈 두 가지 갈림길에서 하나를 택해 준 것이라고 믿었다.
대안 스님과 헤어진 서당은, 장군이 되어 벼슬길에 오르는 것보다는 불교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병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그 날 이후, 서당은 가까운 절을 찾아가서 닥치는 대로 불경을 읽었다. 중이 되기 전에 먼
저 불교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알아두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황룡사의 9층탑이 준공되는 날이 가까웠다.
서당은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있는 황룡사를 찾아갔다.
대안 스님이 벌써 와서 서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내 말을 잊지 않고 찾아 주어서 반갑소.
사바 세계를 헤매던 저를 불문으로 이끌어 주신 은덕,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오.
이리하여 서당은 645년(선덕 여왕 14)에 황룡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마침내 스님이 되
었다. 서당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이다.
출가한 서당은 원효 라는 법명을 얻었다.
황룡사에 9층탑이 세워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자장 법사가 당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어느 날 하늘에서 보살의 말씀이 들려 왔다.
너희 나라에 돌아가 9층탑을 세우면 백성이 모두 편안하게 살 것이며, 이웃 나라가 항복
하리라.
이 말을 들은 자장 법사는 신라에 돌아오자 왕에게 아뢰어 탑을 세우도록 권했다. 그 탑
은 서라벌 어디에서나 보였고, 높이가 70미터나 되었으니 얼마나 웅장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서당이 원효라는 스님이 된 것은 탑이 준공된 바로 그날이었다.
원효는 이 황룡사에서 얼마 동안 불교의 의식을 배우는 한편, 능엄경 · 기신론 · 금강경
등 절에 있는 불경을 공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잉피공에게서 글을 배웠기 때문에 불경을 터득하는 데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더욱이 그는 출가하기에 앞서 가까운 절에서 기초적인 불경을 읽어 두었기 때문에 이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승려 생활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행의 나날들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밤이 깊어 세상 만물이 모두 잠든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
으며, 온종일 힘든 일과에 쫓겨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이러한 고행을 통해서만이 훌륭한 스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원효는 고된 하루
의 일과를 치르면서도 불경 공부에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또한 승려로서 지켜야 할 계율이나 수행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직 참된 길을 위하여 부지런히 누구보다도 열심히 불도를 닦았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원효는 뒷날 훌륭한 스님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이다.
2. 해골 바가지의 물
황룡사에 들어간 원효는, 어느 특정한 스승을 모시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터득할 때까지
혼자 몉 번이고 거듭거듭 불경을 읽고 공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깨우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그 때까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불교 서적은 모조리 공부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어
느 특정 종파만을 따르고 그 종파의 경전을 먼저 읽어 본다는 그런 태도가 아니었다.
불교에 관한 것이라면 어떠한 책이든 차근히 읽고 스스로 깨닫고 터득할 때까지 연구했
다. 그리고 완전히 이해한 다음 자기의 생각을 달아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원효가 불교의 참뜻을 공부하려는 태도가 이러했으므로, 몇 해 지나지 않아 황룡사에 있
는 불경은 모조리 다 읽었다.
원효는 전에 살던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 집을 고쳐 초개사라는 절을 지었으며, 또 자기가
태어난 산골짜기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원효는 많은 불경을 모아들이고, 초개사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원효는, 당시 신
라 안에 들어와 있던 불교 서적을 모두 공부하였다.
한편, 포교에도 힘썼다. 병 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성심껏 돌보아 주었으며, 노인을 존경하
고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어느덧 멀리 서라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룡사에서 같이 공부했던 의상이 초개사로 원효를 찾아왔다.
의상은 원효보다 여덟 살 아래였으며, 열아홉 살 되던 644년(선덕 여왕 13)에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 스님이었다.
의상은 원효보다 먼저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된 사람이었다.
저와 함께 당나라로 가서 불법을 배우지 않으시겠습니까?
의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불경을 읽다가 뜻이 풀리지 않는 대목이 나오면 답답할 때가 많
아요. 같이 가기로 합시다.
원효와 의상은 한마음이 되어 굳게 손을 맞잡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먼 길을 떠나게 되었
다. 원효와 의상은 육로를 통해 당나라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 무렵,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북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백제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 때에 신라 사람이 백제나 고구려의 땅을 밟는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불법을 공부해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일에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하
는 생각으로 고구려 땅을 밟았다.
원효와 의상은 고구려 땅에 들어서자마자, 고구려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에게 붙잡혔다. 신
라의 첩자로 의심받은 것이다.
우리는 신라 사람으로,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는 중이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행색을 보고도 첩자로 의심을 한단 말이오?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결국 당나라에 가는 것을 단념하고 신라로 되돌아왔
다.
그러나 두 스님의 굳은 뜻은 꺾이지 않았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당나라로 떠나는 배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와 의상은 당주계(경기도 남
양만)를 향해 떠났다. 661년(문무왕 1), 원효가 마흔다섯 살, 의상은 서른일곱 살 되던 해였
다.
며칠 동안 걸음을 재촉하여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남양)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덧
날이 저물고 빗방울마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헤매면서 쉴 곳을 찾아다녔다.
아무리 찾아도 인가가 없으니, 노숙을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의상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니, 빗방울까지 떨어지지 않소? 비라도 피할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두 스님은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헤매다가 마침내 토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바랑을 베고 눕자마자
그대로 잠에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원효는 목마름을 느끼고 눈을 떴다. 날이 어두워진 뒤 이 토굴을 찾으러
헤매고 다닌 탓인지 갈증이 심하여 목이 탈 지경이었다.
행여나 바깥에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이라도 마시려고 밖으로 나가 보았으나, 세찬 바람 소
리만 들려 올 뿐 비는 그친 것 같았다.
어딘가 골짜기를 찾아가면 물을 마실 수 있을 텐데‥‥‥. 처음 온 곳이라 어디에 있는
지 이 캄캄한 밤에 알 수도 없고‥‥‥.
원효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그랬더니 뭔가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영락없이 바가지처럼 생긴 그릇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앗, 물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원효는 기쁜 마음으로 그 바가지 물을 죽 들이마셨다. 타는 듯하던 갈증은 금방 사라지고,
온몸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맛보는 냉수의 맛 같았다.
원효는 마시고 난 물바가지를 머리맡에 놓아 두고, 다시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원효와 의상은 눈을 떴다.
사방을 둘러본 의상이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눈으로 말했다.
아니, 이 토굴은 오래 된 무덤이 아닙니까? 저걸 보시오. 해골 바가지가 뒹굴고 있습니
다.
원효는 더 놀랐다.
뭐, 뭐라구? 해골 바가지라니?
어젯밤 자기가 잠을 잤던 머리맡에는 정말 사람의 해골이 놓여 있었다.
목마름을 참지 못해 어젯밤 그토록 달게 마셨던 물이 해골에 괴어 있던 물이라는 것을 원
효는 그 때 비로소 알았다.
원효는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와락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퍼뜩 원효의 머리를 번갯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간밤에 내가 마신 물이 그 자체가 더러운 물이라면 그 때 바로 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
실은 그것을 냉수라고 믿었기 때문에 깨끗하고 맛좋은 냉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
서는 그것을 더러운 해골에 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이 나는 것이
다.
이를테면 깨끗함과 더러움, 좋아함과 싫어함 등 모든 인간의 분별력은 자기의 마음으로부
터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낡은 무덤의 토굴에서 나온 원효와 의상은 당주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인가에서 방을 얻은 두 사람은 저녁을 먹은 뒤 곧 잠자리에 들었다. 의상은 피곤한
탓인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원효는 잠이 오지 않았다.
불경에 이르기를, 모든 인간의 분별은 마음에서 생긴다고 했다. 어젯밤 마신 해골 바가지
의 물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의 근본 이치를 깨달은 지금, 먼 당나라까지 가서 불교
의 이치를 더 배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음 날 아침, 원효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당나라에 가는 것을 그만두겠습니다. 혼자 당나라로 가셔서 좋은 불법을 배워 오십
시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의상은 적잖이 놀라며 물었다.
원효는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난 뒤 하나의 깨달음을 얻은 바를 의상에게 대충 설명
했다.
나는 신라에 돌아가 그 마음의 불법을 펴도록 하겠소. 스님은 아무쪼록 먼 길을 조심해
서 다녀오시오.
원효는 의상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의상은 애초의 결심대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 법사의 제자
가 된 지 10년 만에 신라로 돌아와, 화엄종 을 널리 폈다.
그는 676년(문무왕 16)에 왕의 명령을 받아 부석사(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소재)라는 절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편, 서라벌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서 불법을 닦으며, 법성종(해동종 또는 원효종이라
고도 함)을 새로 제창하여 포교에 힘썼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불교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 사상대로 따랐다.
그래서 모든 스님들은 구족계(비구승과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법)를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원효는 이런 형식에 얽매인 계율주의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스님들이 엄격히
지키고 있는 법을 벗어나 고기도 먹었고 술도 먹었다. 또한 기생이 있는 술집에도 드나들었
다.
이러한 원효를 보고 다른 스님들은 물론 신도들도 파계승이라고 헐뜯었다.
그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권하는 동료 스님들에게 원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일이 죄되는 일이며, 어떤 일이 착한 일인지는 분간하기 어렵소. 왜냐하면, 어떤 경
우에는 속의 뜻은 그릇된 것인데 밖의 모양은 바른 것같이 보일 때가 있소. 또 어떤 경우에
는 겉으로 나타난 행위는 좋지 않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속은 순박하고 깨끗한 경우가 있
소. 속된 것과 참된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오.
이렇게 불경의 참뜻을 깊이 깨닫고 있는 원효의 말은 어느 것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었
다.
원효는 하나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온갖 수행을 아끼지 않았다.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서는 이제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같은 스님의 입장에서 좋게 해석하려 해도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기괴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분황사에 들어앉아 참선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거리의 거지들과 어울렸
다.
그러므로 형식에 치우쳤던 당시의 스님들이 그를 탓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단 불교의 진리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되도록 그를 피했다. 왜냐 하면 아무도 원
효의 깊은 학식과 능변, 그리고 진리에 임하는 자세와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원효는 자기가 깨달은 생각에 따라 저술에 힘쓰기 시작했다. 화엄경소 · 대승 기
신론소 등의 훌륭한 불경 해설 책들을 지어 수많은 불도자의 길잡이가 되게 했다.
원효는 절에 틀어박혀 목탁이나 두드리고 불경을 읽는 것만이 불도를 닦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절에서 나와 세상의 중생들과 함께 어울리며 고통과 즐거움을 같이하면서 부처의 가르침
을 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원효는 서라벌의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알
리는 데 온 힘을 The았다.
위로는 왕족과 귀족, 또 아래로는 천한 거지와 부랑아들에게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
리 알렸다.
원효의 가르침으로 신라의 온 백성이 불교를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원효의 정토 사상
이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일부에서는 원효를 비판하며 멀리하였다.
흥, 그까짓 땡중이 하는 소릴 누가 믿는대?
아무렴. 저 원효는 승려라고 할 수가 없어.
승려의 신분으로 어찌 그런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다닐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소리에도 원효의 정토 사상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고, 신라
에서는 천민과 걸인 누구를 막론하고 염불을 외우게 되었다.
대중 속에 깊이 파고든 이러한 종교의 힘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더욱 나라를 발전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신라에서는 불교가 귀족이나 상류 사회에만 보급되어 있었다. 원효는 이것을
널리 일반 백성들에게도 가르쳐야겠다는 뜻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는 가엾은 중생들의
마음을 구하려 했던 것이다.
서민들과 늘 가까이 지내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원효 대사의 법회에는 자연히 많
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원효 대사는 어려운 불교의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주었으며, 더욱이 그의 설법이
유창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나라로 높아졌다.
어느 날, 원효 대사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설법하고 있는데, 신도들 중에 넋을 잃은 듯이
바라보는 어여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 공주였다.
요석 공주는 아유타 라고 불리던 소녀 시절부터 마음씨가 착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므로,
수많은 화랑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공주는 거진랑이라는 화랑과 결혼했으나 그는 불행
히도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홀로 된 요석 공주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오늘 원효대사의 설법을 들으러 나온 것이었
다.
3. 흔들리는 마음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의 설법을 듣고 돌아온 날부터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넓은 이마 아래 반짝이는 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듯이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부처님
의 말씀을 쉽게 풀이하여 주던 원효 대사의 늠름하고 사나이다운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은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고, 낙을 주시려고 온갖 고행을 하시며 깨달음을 얻으신
분입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을 고루 사랑
하시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요석 공주의 귀에는 원효 대사의 말이 아직도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남의 눈에 뛸까 두려워서 평민의 옷으로 갈아 입고, 시녀 하나를 데리고 몰래 분
황사로 가서 말로만 듣던 원효 대사를 처음으로 보고, 또한 설법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공주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어 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살아 있는 부처의 모습 같은 원효 대사의 모습이 공주의 마음에 자리잡고 떠나지 않
았다.
이리하여 요석 공주가 원효 대사를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은 마침내 마음의 병이 되어, 공
주는 병석에 앓아눕는 몸이 되었다.
왕은 요석 공주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유명한 의원을 보냈다.
의원은 요석 공주의 맥을 짚어 보았으나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의원은 홀몸
이 된 공주의 심기가 불편한 탓으로 진단하고 보약을 꾸준히 달여 올렸으나 별로 효험이 없
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가 시녀를 불렀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원효 대사님을 가까이에서 만나 뵐 수 없겠느냐?
이 말을 들은 시녀는 공주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지난번처럼 분황사에서 원효 대사님의 법회가 열리는 날에 가시면 만나 뵐 수 있어요.
공주의 몸으로 분황사에 자주 드나들다가 남의 눈에 띄어 원효 대사님에게 폐가 될 뜬소
문이 퍼질까 두렵구나. 무슨 다른 도리가 없을까?
시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주님께서 대사님의 설법을 듣고 싶다고 하셔서 법회를 이 요석궁에서 가지시면 어떨까
요?
시녀의 이 말을 들은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대사님께서 여자들만 있는 이 곳에 와 주실는지? 만약
거절하시기라도 한다면‥‥‥.
그건 염려 마세요. 모셔 오는 방법은 저희들이 마련할 테니까요. 왜 공주님께서 병이 나
셨는지 이제 알겠어요.
시녀는 입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
며칠 뒤, 분황사 앞에 호화로운 수레 한 대가 와서 멎었다.
수레를 따라온 사령이 원효 대사의 승방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원효 대사님 계십니까?
누구요?
글을 쓰고 있던 원효 대사가 방문을 열었다.
요석 공주님의 분부로 온 사령입니다. 공주님께서는 고명하신 원효 스님을 요석궁에 모
시고 법회를 열고 싶으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사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이 무렵, 신라의 귀부인들 중에는 독실한 불교 신도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이름 난 집으로
모셔서 설법을 듣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원효 대사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포교에 열중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쾌히 승
낙한 뒤 수레를 타고 요석궁으로 향했다.
요석궁의 널따란 대청에는 공주를 비롯하여 많은 시녀들이 원효 대사가 당도하기를 기다
리고 있었다.
윗자리에 앉은 원효 대사는 여자들만 모여 있으니 이 법회에서는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효 대사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살 사상에 대해서 설명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성품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누구든지 부처님이 되겠다는 서
원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누구라도 보살이 되려면 번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해야 하며, 자기가 쌓은 착한 근본과 그 공덕을 남을 위
해 바쳐야 합니다. 이런 수행을 끊임없이 계속한다면 그의 삶이 끝난 다음에 부처 즉 보살
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원효 대사는 여태껏 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넓게 일반 민중에게 개방하려
는 자기의 뜻을 설명했다.
공주는 물론이고, 모든 시녀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었다.
법회를 끝마친 원효 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황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한 시녀
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공주님이 스님께 당나라에서 구해 온 진귛나 차를 대접하시겠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진귀한 차라면 사양할 수는 없겠지요.
이윽고 원효 대사가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그윽한 향기가 감도는 요석 공주의 방이었
다.
원효 대사는 공주가 하얀 손으로 들어 바치는 찻잔을 받아 진귀한 차의 맛을 음미했다.
공주는 애끓는 눈으로 원효 대사를 바라보더니, 머뭇머뭇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사님‥‥‥. 이 몸을 가엾이 여기시고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원효 대사는 무슨 뜻인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저는 대사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끊지 못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병을 얻었습니다. 대사님
이 이 몸을 건져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죽고 말 거예요.
원효 대사는 이 때 비로소 요석 공주가 자기를 부른 까닭을 알았다.
공주님, 저는 이미 출가하여 부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중의 몸입니다.
대사님, 이 몸이 죽는 것을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그것 또한 부처님의 계명을 어기는 살
생이 되지 않을까요?
원효 대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떼었다.
공주님, 법망경 이란 불경에 이르기를, 살생이란 반드시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만이 아니
라 남이 죽으려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살생이라 하였소. 공주님의 소원이 정
녕 그러시다면 아바마마의 허락을 얻으시오.
아바마마는 제말을 얼토당토 않은 말이라고 들어 주시지 않을 거예요. 대사님께서 부탁
하신다면 들어 주실 것이옵니다. 아바마마는 대사님을 존경하고 계시니까요.
불문에 들어온 몸이 어찌 외람되게 그런 청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공주는 방울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갑자기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시퍼런 칼끝으
로 자기 가슴을 찌르려 했다.
그러시다면 저는 죽는 수밖에 없어요.
놀란 원효 대사는 재빨리 공주의 손에서 칼을 빼앗고 말했다.
공주님,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 생각해 볼 여유를 주시오.
급한 대로 이렇게 말하고 요석궁에서 물러나온 원효대사는 요석 공주의 목숨을 살리는 방
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는 불경의 개척법에 생각이 미치었다. 그것에 따르면 불문에 든 중은 계명을
어디까지나 지켜야 하되 부득이한 경우에는 계명을 어겨도 크게 죄가 되지 않는다는 글이
생각났다.
공주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것은 공주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므로 큰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
며, 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서라벌 대궐 앞에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한 중이 있
었다. 그는 다른 아닌 원효 대사였다.
도끼에 자루를 끼게 할 자는 없을까?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을까 하노라.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원효 대사는 이 노래를 연신 부르면서 분황사로 돌아갔다.
원효 대사는 며칠을 두고 똑같은 노래를 같은 시각에 왕궁 앞을 지나면서 신이 들린 사람
처럼 불렀다.
그러자 이 소문은 서라벌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
다. 원효 대사의 노래는 마침내 무열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무열왕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 뜻을 깨달았는지 이렇게 말했다.
원효 대사가 귀부인에게 장가 들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허허허.
이렇게 말하면서 껄걸 웃은 무열왕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요석 공주
였다.
얼마 전에 요석궁에 있는 시녀가 와서 한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상감마마, 요석 공주님의 병은 상사병인가 싶사옵니다. 원효 대사를 요석궁에 모시고 법
회를 연 뒤부터 한결 병세가 나아졌사옵니다.
무열왕은 그 때 시녀의 말을 듣고 신기한 일이라고 여겼으나, 이제 원효 대사의 노래 뜻
과 맞추어 보니 그 내력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열왕은 곧 관리들에게 수레를 주어 원효 대사를 찾아 요석궁에 모시도록 은밀히 일렀
다.
관리들은 때마침 문수사로 가는 사천문 다리를 건너가는 원효 대사를 만났다. 한 관리가
원효 대사에게 말했다.
저희들은 상감마마의 분부로 대사님을 모시러 가는 중입니다.
상감께서 웬일로 나를‥‥‥?
대사님이 부른 노래의 뜻을 알고자 함입니다.
무열왕이 자기를 찾는 연유를 알게 된 원효 대사는 일부러 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었다.
관리들은 물에 빠져 생쥐같이 된 원효 대사를 수레에 태우고 요석궁으로 향했다.
요석궁 앞에 수레를 대자, 원효 대사는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여기는 대궐이 아니지 않소?
대사님, 대궐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가까운 이 곳에서 옷을 말려 입으셔야 합니다.
원효 대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관리들을 따라 요석궁으로 들어갔다. 곧 요석 공주
가 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합장하며 대사를 맞았다.
대사님, 이 몸의 무례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대사는 아무 말도 없이 합장으로 답례했다.
얼마 후, 깨끗한 비단옷으로 갈아 입은 원효 대사는 산해 진미가 가득 차려진 음식상을
받았다. 비단옷이며 음식들은 원효 대사가 이제까지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하고,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조금 후에 요석 공주가 선녀같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 입고 조용히 들어와 원효 대사의 잔
에 조심스럽게 술을 따라 올렸다.
그 잔을 받아 마신 원효 대사는 공주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서로의 가약을 축하하는
술이었다.
이렇게 하여 꿈결 같은 시간이 지나, 원효 대사가 요석궁에 들어온 지 보름이 되었다.
원효 대사는 이젠 파계승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마음의 가책을 더 이상 이겨 낼 수 없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주를 불렀다.
공주, 나는 오늘 떠나려 하오. 내가 전에 요석궁에서 설법한 보살이 되는 길을 공주는 몸
소 걸어 주시기 바라오. 공주의 마음 속에 깃들여 있는 착한 불심을 찾아 내어 꾸준히 공덕
을 쌓는다면 이 이별의 슬픔도 곧 잊고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나의 길을 찾아가
야 할 전생의 업보가 남아 있소. 그것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그러시다면 영영 만나 뵙지 못할까요?
공주, 나를 찾지 말고 앞으로는 불심을 찾으시오. 그리고 다시 극락에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원효 대사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는 요석궁 문을 나섰다.
공주는 복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다시 가사를 걸치고 떠나
는 원효 대사의 뒷모습이 눈물 속에 아른거렸다.
요석궁을 나온 원효 대사는 어디로 갈 것인지 막연하였다.
아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파계한 중으로서 그는 다시 분황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무턱대고
걷다 보니 어느덧 남산 기슭에 이르렀다.
원효 대사는 거기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것을 구경하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연은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갔다.
아, 나는 저 떠도는 구름 같은 몸이 되었구나.
원효 대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스님, 무엇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뒤를 돌아본 원효 대사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안 법사가 아니십니까?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그렇구려. 스님이 화랑이었을 때 만났고, 다음은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제자
가 되었을 때 만났고, 이번에는 스님이 요석 공주에게 장가 드신 후에 만났으니 세 번째입
니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요석 공주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가사를 걸치고 바랑을 진 차
림을 하고 있으니‥‥‥?
원효 대사는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법사님도 알고 계셨군요.
하하하, 나뿐만 아니라 저기서 연을 날리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스님이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리라는 걸 미리 내다보고 있었소. 이렇게 또 만난 것
도 전생의 인연인가 봅니다. 나는 언제나 잊지 않고 스님을 위해 불공을 드렸어오. 이 신라
의 불교를 크게 일으킬 분이 원효 스님이라는 걸 믿고 있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대안 법사님의 은덕을 입어 제가 요석궁에서 다시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르
겠습니다. 스님이 거처하고 계신 곳은 어디십니까?
원효 대사는 이렇게 우연히 대안 법사를 만나게 된 것이 무척 기뻤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을 때였으니만큼 더욱 그랬으리라.
나도 지금은 원효 스님과 마찬가지로 떠돌이중입니다. 발길이 닿는 곳이 내 거처지요. 아
무튼 나를 따라와 보구려.
대안 법사는 남산 골짜기를 숨이 차지도 않은 듯 사뿐사뿐 올라갔다. 도중에 절이 몇 군
데 있었으나 모두 지나쳐 버리고 어느 바위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 다 왔소. 여기가 바로 내 집이오.
그 바위굴은 앞이 탁 트이고 서라벌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
었다. 멀리 황룡사의 가람과 9층탑이 저녁 노을빛 속에 장엄하게 솟아 보였다.
웬만한 절보다도 이 곳이 부처님의 정토 같습니다.
그렇게 보아 주니 고맙소. 스님, 저 9층탑의 존엄한 모습을 보구려. 저 탑의 치솟는 기운
을 타고 통일할 날이 멀지 않을 게요.
저도 그렇게 될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서라벌 거리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황룡사에서는
저녁 종이 울렸다.
댕, 댕, 댕‥‥‥.
두 스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염불을 외웠다. 풀숲에서는 벌레들이 울기 시작했다.
자, 안으로 듭시다.
두 스님은 바위굴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짚이 두툼하게 깔려 있고, 그 위에 돗자리가
놓여 있었다.
대안 법사는 조그만 등잔에 불을 켰다. 바위굴 안은 둥그스름하고, 천장도 사람의 선 키보
다 조금 높았지만, 그런 대로 지내는 데에는 아무 불편 없는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바위굴 안에는 얼마 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대안 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님, 석가모니께서는 일찍이 화려한 궁전과 사랑스러운 아내를 버리고 사바 세계로 나
가 온갖 수련과 고행을 쌓은 뒤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지금 원효 스님의 입장이 석가모니
께서 궁전을 떠나실 때와 같다고 봅니다. 물은 한 군데 머물러 있으면 썩습니다. 골짜기를
흘러 바위에 부딪히는 물처럼, 스님도 번뇌와 시련을 겪은 뒤에 화엄경에서 말한 장엄한 세
계의 바다로 이를 수 있습니다.
법사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잡시다.
두 스님은 누워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원효 대사가 일어나 보니, 언제 일어나 어딜 갔는지 대안 법사가 보이질 앉
았다. 조금 뒤, 굴밖에서 기침 소리가 나더니 대안 법사가 들어왔다.
마을에 탁발(동냥)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미를 잃은 너구리 새끼를 주웠어요. 당
분간 내가 어미 노릇을 해 주어야겠소, 허허허.
대안 법사는 장삼 소맷자락 속에서 귀여운 너구리 새끼 다섯 마리를 꺼내 놓았다.
법사님, 그것도 부처님의 대자 대비하신 마음입니다. 관세음 보살!
원효 대사는 이렇게 말하고 두 손 모아 합장했다.
한편, 원효 대사를 떠나 보낸 요석 공주는, 마음의 적적함을 메우지 못하고 허전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라벌은 물론이고, 온 나라에서 학승으로 이름 높은 원효 대사를 사사로운
자신의 상사병 때문에 파계시킨 죄를 생각하면 죄스럽기 한이 없었다.
요석 공주는 그럴 때면 집에 모신 관음상 앞에 꿇어앉았다.
누구든지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원효 대사가 일러 준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는 관음상의 자비에 매달리듯 날마다 불공을 드렸다. 그 불공의 탓인지 이제
는 죄스러운 마음이 차츰 가시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요석 공주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새 생
명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스님의 아기를 가졌구나. 원효 스님은 나에게 더 깊은 인연을 주고 가셨어. 아아, 스
님‥‥‥.
요석 공주는 어쩔 수 없이 아기를 잉태한 것을 부모님에게 알렸다.
그러자 다음 날, 무열왕은 요석 공주가 원효 대사와 혼인한 것을 온 나라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가 자기 곁을 떠난 직후에 바로 시녀들을 시켜 원효 대사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보았으나, 분황사에는 돌아가지 않아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편히 쉴 집도 없고, 지닌 것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원효 스님의 처지가 오죽하랴. 배고픈
땐들 없으실까‥‥‥.
요석 공주는 원효 대사를 위해 손수 지은 옷을 앞에 놓고 만지작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내 잘못으로 대사님에게 크나큰 괴로움을 주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요석 공주는 지난 일만 뉘우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서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여 훌륭히 낳아 기르는 것이 원효 스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여겼
다. 그러나 원효 대사는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4. 중생들 속에서
바위굴 안에서 대안 법사와 같이 지내는 동안, 원효 대사는 여태까지 불경을 통해서 깨우
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혼자 깨우치는 것만이 부처님의 뜻을 터득하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널리 중생 속에 실천하고 퍼뜨려 글을 모르는 모든 백성들에게 전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계를 한 원효 대사는 다시 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중의 옷을 입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사·장삼 대신 평민이 입는 옷인 짧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까만 모자를
썼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소성 거사 또는 복성 거사 라고 하였다.
소성이나 복성이란 말은 남만 못한 천한 사람 이라는 뜻이며, 거사란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원효 대사의 모습은 서라벌 거리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는 주막집에
찾아가 술꾼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또 아이들과 어울려 놀아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어느 날, 원효 대사는 길을 가다가 줄을 타는 광대놀음을 구경하게 되었다.
줄 밑에서는 탈을 쓴 다른 광대가 뒤웅박을 손에 들고, 장단을 맞추어 우쭐우쭐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들도 신이 나서 덩달아 어깨를 들먹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원효 대사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구나! 나도 저 광대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을 노래로 지어 모든 백성들에게 퍼뜨려야
겠다!
마침내 이상한 차림을 한 원효 대사의 모습이 서라벌 거리에 나타났다. 그는 큰 길에서
표주박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어 무애가 를 부르고 돌아다녔다.
그러자 아이들이 원효 대사의 뒤를 줄줄 따라다니며 같이 무애가를 불렀다.
무애가 란 화엄경 의 한 구절을 원효 대사가 쉽게 풀어서 만든 노래로, 모든 속박을 벗어
나면 삶과 죽음의 구별도 넘어서 한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는 뜻이 담긴 노래였다.
이리하여 원효 대사는 무애가를 부르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정처없이 신라의 방방
곡을 떠돌아다녔다.
이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원효 대사가 나타나는 마을에서는 이상한 차림을 한 그의 모습
을 보려고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원효대사의 노랫소리
에 맞추어 모두 같이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모든 중생들 들어 보소.
부처님 말씀 들어 보소.
선함도 악함도 마음에 달렸나니
깨끗함도 더러움도 마음에 달렸나니
부처님 마음같이 자비롭고 온유하면
모두가 극락 정토로 가리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풀이한 이 노래는 원효 대사가 지나간 마을마다
퍼져서, 모두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또한 서로 힘을 합쳐 절을
짓고 탑을 세우기도 하여 신라 백성들의 마음을 단합시켰다.
그 무렵, 불교에 관심이 깊은 무열왕이 인왕 반야경 을 강설할 스님을 구하고 있었다.
왕에게 경전을 강설할 스님이라면 불경을 깊이 공부한 학승이 아니고선 하기 어려운 일이
다.
그 때, 누군가가 원효 대사를 추천했다. 왕도 원효의 학문적 재질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위
에 있는 고승들에게 원효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승들이 반대했다. 그가 중으로서 계율을 파계했고, 지금은 광대처럼 떠
돌아다니며 불교를 더럽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당시의 대표적인 고승들이 왕을 모시고 베풀어진 인왕 백고자회 에는 원효 대사의
얼굴이 끼지 못했다.
그 때, 원효 대사는 호거사에서 절머슴처럼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다 주며 임시 기거하고
있었다. 여기 머무르게 된 까닭은, 우연히 이 절에서 금강 삼매경 이란 처음 보는 불경을 얻
었기 때문이다. 원효 대사는 그것을 연구하며 그 풀이를 종이에 적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탁발을 나갔던 원효 대사는 길에서 우연히 대안 법사를 만났다.
아니, 대안 법사님이 아니십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참으로 오래만이오. 어디 주막에나 들러 막걸리라도 한잔 합시다.
원효 대사는 이렇게 소탈한 대안 법사를 좋아했는데 그에게는 항상 배울 점이 많았다.
두 스님은 주막에 들어가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그 동안 지내 온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대안 법사님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 서라벌로 올라가는 길이오. 당나라에서 금강 삼매경 이란 불전을
임금께 선물로 보내 왔는데, 이 불경을 설법할 만한 스님을 구하고 있다고 해서 나를 부른
모양인데, 일단 가 보아야 알겠소.
금강 삼매경이라면, 제가 지금 있는 호거사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요? 참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안 법사는 급히 일어나 나갔다.
저, 법사님. 제가 머물고 있는 절에서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가시면‥‥‥.
그러나 대안 법사의 모습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원효 대사는 어리둥절하여 그
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무렵, 왕은 금강 삼매경 을 당나라에서 선물로 받고는 신라의 여러 불도들에게 강론하
여 연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중앙 대사찰인 황룡사에 대규모의 법회를 준비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고승들의 참석을 예상하여 수백 석의 자리를 마련하고,
이 금강경을 강설할 대사를 선택하라고 분부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누가 이 불경을 강론할 것인가?
왕을 보좌하던 고승들은 의논을 거듭했으나 그럴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 때 누군가가, 기이한 행색으로 속계에 묻혀 살기는 하되,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한 일도
있으며 박식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대안 법사를 추전했다. 왕은 곧 대안 법사를 불러들이도
록 명을 내렸다.
대안 법사는 왕의 이 부름을 받고 서라벌로 오던 중 우연히 원효 대사를 만났으며, 그가
지금 금강 삼매경 을 연구중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궁궐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왕 앞에서 금강 삼매경을 훑어본 대안 법사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소승은 감히 이 어려운 불경을 강론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에 놀란 왕이 말했다.
아니, 박식한 법사가 불경을 모르겠다면, 우리 신라에는 이 불경을 해득할 스님이 한 사
람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이 불경을 풀이할 수 있는 스님이 신라에 꼭 한 사람 있사옵니다. 그는 바로 지금 호거
사에 있는 원효 대사이옵니다.
대안 스님의 이 말에, 여기저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원효 대사를 파계승이라
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고승들이었다.
왕은 곧 원효 대사를 부르도록 했다.
황룡사에서는 사람을 호거사로 보내 원효 대사를 찾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 곳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주지 스님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급히 호거사에서 나와 원효 대사가 지나간 길을 더듬어 가며 물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이 마을을 지나갔다고 할 뿐 종적이 잡히지 않았다.
마침내 서라벌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초개사에서 원효 대사를 간신히 찾
아 냈다.
원효 스님, 급히 황룡사에 가셔야겠습니다.
파계승인 나를 무슨 일로 부르는 겁니까?
실은 금강 삼매경을 강론할 사람으로 원효 스님을 모셔 오라는 분부가 내려졌습니다.
원효 대사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대안 법사가 나를 천거했구나‥‥‥.
원효 대사는 왕의 부르심인지라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원효 대사는 서라벌로 가는 길에 말을 마다 하고 소달구지를 타고 갔다. 소달구지 위에
책상을 놓고 금강 삼매경을 풀이한 소 다섯 권을 지었다. 그런데 황룡사에서 강론이 있을
즈음 새로 지은 책이 몽땅 없어졌다.
아마 원효 대사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밤 사이에 훔쳐 간 모양이었다.
원효 대사는 하는 수 없이 왕께 허락을 얻어 금강경의 요점을 세 권으로 다시 지었다. 이
것을 약소라 한다.
황룡사 대법당 안에는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들, 그리고 요석 공주도 와 있었다. 그
좌우로 문무 백관들과 몇백 명의 승도들이 빽빽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요석궁을 떠난 지 2년 만에 서라벌의 황룡사에 다시 돌아온 원효 대사는 마침내 금강 삼
매경을 설법하게 되었다.
원효 대사가 알기 쉽게 써 가지고 온 해설 초안을 들고 연단에 오르자, 법당 안은 곧 물
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원효 대사는 빛나는 눈으로 법당 안을 둘러본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의 근원은 욕심을 떠난 것입니다. 홀로 맑고 깨끗하며, 삼공의 바다를 참이니 거짓이
니 하는 대립에서 떠나 모두 다 둥그렇게 융합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
므로 옳다 그르다 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은 그 하나하나가 따로따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강 삼매경을 강설하는 원효 대사의 낭랑한 목소리는 큰 법당 안에 물 흐르듯 울
려 퍼졌다.
원효 대사의 가장 원숙한 사장적 경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 이 금강 삼매경론 이다.
사실 당나라나 인도의 불교도들도 원효 대사가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 깊은 경전의 참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경은 모든 분별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다 는 것을 밝혀 주는 원효 대사의 깨달음과
꼭 일치한다. 모든 것이 마음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매 라고 하며, 또 그 결과를 금강 삼매 라고도 한다.
그리워하던 원효 대사의 모습과 목소리를 오랜만에 대하는 요석 공주의 눈에는 기쁨의 눈
물이 흘러넘쳤다.
이것이 모두 원효 스님의 말씀에 따라 그 동안 내가 부처님을 성심껏 섬긴 은덕이로구
나!
하고 요석 공주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즈음, 요석 공주는 귀여운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요석궁에서 원효 대사와 맺은
사랑의 결실로써 태어난 이 아기는, 자라서 훗날 신라의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이름을 설
총 이라 하는데, 한림 학사라는 벼슬에 이르렀고, 이두를 정리했으며, 신라 10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원효 대사는 어려운 금강 삼매경을 쉽게 풀이하여 강설한 다음 한 마디 덧붙여 말했다.
얼마 전에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 소승은 감히 낄 수도 없었는데, 이제 기
둥 한 개를 구하게 되자 비로소 홀로 낄 수 있게 되었소.
원효의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 강론 이후, 원효 대사는 깊은 절에 틀어박혀 모든 불경을 파헤치고 요점을 풀이했다.
원효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686년(신문왕 6)이다. 깊은 산 속에 있는 혈사에서 입적했는
데, 그 때 원효 대사의 나이는 일흔 살이었다.
*의상(625∼702) : 신라의 승려로서 화엄종의 시조이다. 경주에서 한신 장군의 아들로 태
어나 644년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661년 당나라 종남산에서 지엄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던 중 당나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671년 신라
로 돌아와 임금한테 이 사실을 알렸다. 676년, 의상은 임금의 명에 따라 영주에 부석사를 세
우고 그 곳에서 화엄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화엄종을 열었다. 이어서 해인사·범어사 등 10
개의 절을 세워 화엄 교리를 널리 펴나갔다. 그 뒤 화엄 교리가 신라 불교의 바탕이 되었으
며 오늘날까지 화엄은 우리 불교의 중요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1. 부처님이 이끄는 길
양쪽으로 푸른 소나무가 싱그러운 가지를 뻗어올리고, 그 사이로 죽 이어진 오솔길을, 어
머니와 아들이 정답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 곳은 황복사 앞의 산문에 가까운 곳이었다.
산들바람에 실려 소나무의 향긋한 냄새가 일지 소년의 코에 스며들었다.
어머니, 소나무 냄새가 좋지 않으세요?
일지 소년은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참 좋구나.
어머니는 아들의 보드라운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일지는 다시 재잘거렸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는 것보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오는 것이 더 즐거워
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여느 집 아이들하고는 좀 별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했
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 나이인데 어머니를 따라 100일 동안의 불공에 하루도 빠지
지 않고 같이 와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또한 기특하기도 했다.
일지야,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니?
보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날마다 불공을 드리고 있잖아요?
황복사의 넓고 정갈한 뜰에 들어선 어머니와 아들은 주지 스님의 인도를 받아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불전 한가운데 조용히 미소를 띠고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일지 소년은 웬지 모
르게 마음이 포근해 지는 듯했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염불을 외우는 소리가 우렁우렁 대웅전 천장에 울렸다.
일지는 어머니를 따라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합장했다.
부처님, 우리 아버님을 굽어 살피시어 무사히 돌아 오시게 해 주세요. 우리 어머님도 이
렇게 정성들여 날마다 아버님을 위해 불공을 드리고 계시니 도와 주세요, 나무 아미타불.
일지는 이렇게 빌고 나서 부처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반쯤 감은 듯한 눈, 조용히 다문 입,
둥그스름한 얼굴을 바라보자 한결 마음이 가라앉고 흐뭇해졌다.
불공을 마친 어머니는 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저희들의 100일 동안의 불공을 위해 너무나 애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그런데 마님은 아주 훌륭하고 어진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100일 동안 하루도 거르
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불공을 드리러 오는 어린이를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더니 불단에 놓여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 보살상을 하나 들
고 왔다.
너의 정성이 너무도 갸륵하여 이것을 네게 주는 것이다. 장차 커서도 열심히 부처님을
모시도록 하여라. 일지는 관음 보살상을 받고 기뻐했다.
스님, 잘 간직하겠어요.
스님은 일지의 얼굴을 지그시 보더니 말했다.
마님, 아드님의 상을 보건대, 장차 이 나라에 큰 빛을 밝힐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잘
키우십시오.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황복사에서 나와 산문을 지나 다시 정답게 소나무 길을 걸었다.
이 어린이가 훗날 신라에 화엄교 라는 불교를 크게 일으킨 의상 대사 이다.
그는 625년(진평왕 47)에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에서 김한신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무렵, 신라는 작은 나라였으므로 백제와 고구려의 침범을 종종 받고, 국경선에서는 싸
움이 그칠 날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일지의 아버지인 김한신 장군은 전쟁터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이러한 관계로 어린 일지는 아버지보다는 독실한 불교 신도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났다.
부처님을 극진히 모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일지는 점점 나이가 들자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때, 신라의 젊은이들은 씩씩한 화랑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벼슬을 하는 것
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일지도 역시 화랑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처럼 몸이 튼튼하고 건장하지 못했으므로 장
차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지의 아버지 김한신 장군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불행히 전사했다는 소
식이 들려 왔다.
이 슬픈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며칠을 두고 울었다. 일지도 하늘이 무너진 듯이 앞이 캄
캄했다.
일지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저는 화랑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어머니 생각은 어떠하십니
까?
어머니는 야윈 얼굴에 걱정스러워하는 빛을 떠올리다가 말했다.
얘야, 이 어미가 너마저 싸움터에서 잃어버리면 무슨 보람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겠
느냐. 넌 스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겠지? 너는 장차 커서 이 나라에 빛을 밝힐 인물이 된
다고 하셨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효심이 지극한 일지는 그 날부터 스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관음 보살상을 모셔 놓고 며칠
을 두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선가 귀에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일지야, 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야 하느니라!
이 말을 들은 일지는 마침내 황복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법명으로 의상 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세월이 흘러 신라에서도 손꼽히는 스님이 된 의상은 당나라에서 새로이 화엄종이라는 불
법이 성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상은 자기도 당나라에 가서 화엄경을 비롯하여 다른 불교에 대해서 더 폭넓게 배워야겠
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느 날, 불지촌(지금의 경상 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초개사에 있는
원효를 찾아갔다.
원효는 의상보다 1년 늦은 645년(선덕 여왕 14)에 황룡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 스님으
로, 두 사람은 서로 친척뻘 되는 사이였다. 원효의 나이는 의상보다 여덟 살 위였다.
스님, 당나라에 같이 가서 불법을 배워 오지 않으시렵니까?
의상이 이렇게 묻는 말에 원효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불경을 읽다가 뜻이 풀리지 않을 때는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오.
의상과 원효는 똑같이 불경을 깊이 연구하는 학승이었으므로 서로 뜻이 맞아 곧 당나라로
떠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배편을 얻기가 어려웠으므로 당나라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고구려 땅에 들어서자마자 두 스님은 신라의 첩자로 의심받고 순라병에게 붙잡혀 옥에 갇
히는 신세가 되었다.
철저한 조사를 받고 진짜 스님이라는 것이 증명되자 간신히 풀려나와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뜻은 거기에서 꺾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11년째가 되는 해에 당나라에 떠나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다시
행장을 갖추고 당주계(지금의 경기도 남양만)을 향해 떠났다.
며칠을 걸어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남양) 근처에 이르렀을 때, 어느덧 날이 저물고 빗방울
마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근처에는 인가가 없었다. 우연히 토굴을
발견한 두 사람은 그 곳에 들어가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눈을 뜬 원효는 어두워서 샘물을 찾지 못하고 다시 토굴 안을 더듬어
들어왔다. 그런데 토굴을 더듬다 보니 바가지 같은 것이 손에 닿았다. 거기다 그 안에는 물
까지 있었다. 그 찬물을 맛있게 마시고 난 원효는 다시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전날 밤에 그토록 맛있게 마신 물은 해골 바가지에 괴었던 물이었다.
그것을 본 원효는 와락 구역질이 일어났다.
그 순간, 원효는 인간의 모든 분별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의 이치를 깨달았다.
원효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구태여 당나라까지 가서 불법을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결정
하고는 의상과 작별한 뒤 서라벌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의상은 처음의 생각대로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당나라의 양주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며칠 쉰 다음, 의상은 원효가 준 편지를 가지고 등주 적산의 법화원으로 향했
다. 거기에는 원효가 잘 아는 사람이 있어, 편지를 전하면 그 이름 높은 지엄 화상에게 안내
해 줄 것이라고 했다.
의상이 적산 법화원에 이르고 보니, 원효가 일러 준 그 사람은 몇 년 전에 이사해 버리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의상은 그 절 주지 스님의 승낙을 받고 당분간 지엄 화상이 있는 곳을 알아
낼 때까지 법화원에 그대로 묵기로 했다.
그러나 의상은 그냥 이 절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저녁으로 탁발(동냥)을 나가다.
탁발을 다니면 별의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집에서는 욕설만 퍼부으며 내쫓고, 어떤
집에서는 시끄럽다고 구정물을 끼얹기도 한다.
의상은 그런 것을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않고, 도리어 목탁을 두드려 불경을 외우면서 부
처님의 공덕을 빌어 주었다.
당나라는 일찍부터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크게 번성시켰기 때문에 신도들이 꽤 많았
다. 이런 불교 신도들이 있는 집은, 문간에서 목탁 소리가 나기만 하면 곧 그릇에 공양미를
담아 가지고 나와 불경을 외고 있는 의상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의상은 중국말을 열심히 익혀 웬만한 말은 거의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디 학문에 대한 지식이 깊고 머리가 뛰어난 의상은 말을 익히는 재주도 빨랐다.
중국말을 알아야만 앞으로 지엄 화상을 만나더라도 불경을 쉽게 익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
중국말 공부에 더욱더 열의를 The았다.
법화원이 있는 적산 고을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는 동안, 의상에게 언제나 고맙게 대해
주는 집이 하나 있었다. 뜰 앞에 탱자나무가 한 그루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의상이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그 집의 점잖은 아주머니는
큰 그릇에 공양미를 수북이 담아 가지고 나와 자루에다 부어 주었다.
그럴 때면 대청에 한 아가씨가 나와서 대문 쪽을 바라보곤 했다. 거리가 멀어서 생김새는
알 수 없었으나 몸집으로 보아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집의 딸인 듯싶었다.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의상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집 앞에 이르러 전과 다름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우
자, 그 집 딸이 공양미를 가득 담은 그릇을 들고 조심조심 대문 가로 나왔다.
살결이 백합꽃같이 희고, 관음 보살처럼 동그스름하게 생긴 어여쁜 아가씨였다.
아가씨는 부끄러운 듯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의상이 공양미 자루를 벌리자 아가씨
는 떨리는 손으로 공양미를 붓다가 그만 절반 가량을 땅에 흘렸다.
아니, 이를 어쩌지요‥‥‥.
아가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괜찮습니다. 제가 주워 담지요.
의상은 몸을 웅크리고 땅에 떨어진 공양미를 주워 담았다. 아가씨도 얼굴이 빨개진 채 흐
트러진 공양미를 그릇에 모아 담았다.
아가씨는 이러시지 말고, 내가 주워 담는 동안 냉수나 한 그릇 떠다 주시오.
의상은 공양미를 묘령의 아가씨와 같이 주워 담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워낙 목이 말
라 이렇게 말했다.
네. 드리지요.
그녀는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의상이 공양미를 다 주워 담았을 때 그녀는 냉수 한 대
접을 들고 나왔다.
스님, 드세요.
그 냉수를 받아 단숨에 들이킨 의상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정말 감로수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냉수는 탱자즙을 곁들인 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얼굴이 다시 발그레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부처님 공덕이 아가씨 집안에 깃들기를 빕니다. 나무 아미타불.
의상은 조용히 돌아서서 발길을 옮겼다. 아가씨는 문가에 선 채 의상이 멀리 사라질 때까
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부터 의상이 그 집에 들르면 반드시 그 아가씨가 나와 공양미를 베풀었다.
하루는 그 집에 들렀더니, 아가씨가 나와 수줍은 듯이 물었다.
저‥‥‥, 스님은 당나라 사람 같지 않으신데 어디서 오셨는지요.
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불경을 더 공부하려고 당나라에 왔습니다. 당분간 이 나라 말
을 익히려고 지금 법화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법명은 의상이라 합니다.
그녀는 몹시 반가운 듯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저의 아버님도 신라 사람이었어요. 교역으로 당나라에 드나들다가 이 곳에 눌러앉게 되
었다나 봐요. 어머님은 당나라 분이고요. 아버님은 교역 관계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셨다
가 풍랑을 만나 돌아가셨어요. 많은 재산을 남기시진 했지만‥‥‥.
말끝을 맺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수심에 찬 듯 쓸쓸해 보였다.
나무 아미타불‥‥‥. 저 실례지만 아가씨의 이름은‥‥‥?
선묘라고 불러요.
참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아버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겠습니다.
선묘와 헤어져 의상이 법화원에 돌아오자,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수소문
하던 지엄 화상이 종남산 지상사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 왔던 것이다.
의상은 특별히 부탁하여, 지상사로 지엄 화상을 찾아 떠나기 전까지 주지 스님으로부터
당나라 말을 더 철저히 배우기로 승낙받았다. 따라서 전과 같이 탁발을 나갈 필요도 없어졌
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선묘는 의상의 낭랑한 독경 소리가 들리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
다.
검고 짙은 눈썹 아래 부처님같이 자비스러운 눈을 한 의상의 얼굴을 그리며 날마다 애타
게 기다리던 선묘는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선묘의 어머니는 몹시 걱정이 되어 의원을 불렀으나 어떠한 약을 써도 낫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에 집으로 탁발하러 오던 중을 자기 딸이 사모한 나머지 앓아눕게 되었다는
사연을 선묘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어머니는 급히 법화원으로 의상을 찾아갔다.
스님, 제발 제 딸을 살려 주세요. 병이 위중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의상이 몹시 놀랐으나 선뜻 선묘의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어머니의 안내로 의상이 방으로 들어서자, 선묘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파리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며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스님!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선묘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선묘야, 울지만 말고 말해 보아라. 네가 스님을 모셔오면 꼭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
냐?
어머니는 민망스러운 듯이 딸에게 타일렀다.
스님‥‥‥ 소녀는 평생토록‥‥‥ 스님을‥‥‥ 모시고 싶어요.
선묘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모기 소리만 하게 간신히 말했다.
의상의 가슴은 철렁했다.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마음은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속세를 떠난 수도자입니다. 불문의 계
율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이 때, 선묘의 어머니가 말했다.
스님, 이 세상 사는 방법이 그 길뿐이겠어요. 제발 제 딸의 소원을 들어 주세요.
의상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이 몸은 머지않아 불경을 공부하러 먼 길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기 전에 아가씨에게 드
릴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의상은 품 속에 늘 간직하고 다니던 관음 보살상을 꺼냈다.
이 불상은 제가 어릴 때부터 소중히 아끼던 것입니다. 아가씨가 이 관음 보살에 날마다
성심껏 염불하고 모신다면 병도 절로 낫게 되고, 부처님의 자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의상은 선묘의 손에 그 불상을 꼭 쥐어 주었다.
스님의 몸처럼 믿고 잘 모시겠어요.
선묘는 다소곳이 말했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나무 관세음 보살!
의상은 손을 모아 합장한 다음 물러나왔다.
선묘는 의상이 준 관음 보살상을 두 손에 꼭 쥔 채 쓰러져 울었다.
이튿날, 의상은 짐을 꾸려 가지고 법화원을 떠났다. 그의 걸음은 머나먼 종남산을 향하고
있었다.
의상은 낯선 땅의 산을 넘고 또 넘었다. 종남산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걷다가 지치면 고
개 언덕 위에서 쉬었다. 하늘의 흘러가는 흰 구름을 쳐다보면 선묘의 아리따운 얼굴과 모습
이 절로 떠올랐다.
선묘는 지금쯤 몸이 나아서 자리에서 일어났을까? 내가 준 나무 불상에 불단에 차려 놓
고 열심히 불공을 드려 주었으면 얼마나 고맙겠나‥‥‥. 그러는 동안에 부처님의 가르침도
깨우치고 나를 잊어 주겠지. 선묘야, 부디 몸 성히 있거라.
2. 해동에서 온 제자
종남산의 지상사 종각에서 댕댕 아침 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엄 화상은 일어나 앉아 간밤에 꾼 이상한 꿈을 생각하고 있었다.
동쪽 바다 멀리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그 나무에서 기다란 가지 하나가 뻗어 이 곳 종남산까지 와서 드리웠다.
신기하게도 그 나뭇가지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하고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봉황은 없고 반짝반짝 빛나는 마니 보주(구슬) 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주우려는
순간, 너무나 눈이 부셔서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지엄 화상은, 아무래도 이것은 동쪽에서 귀한 손님이 올 것이라는 조짐으로 보았다.
그 날, 의상이 이 절로 찾아들었다.
지엄 화상은 자기를 찾아온 낯선 스님을 맞아 방으로 안내했다.
소승은 신라에서 온 의상이라고 합니다. 지엄 법사의 높으신 이름을 전해 듣고 가르침을
받으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마친 의상은 지엄 화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순 살은 넘어 보이는 지엄
화상의 얼굴에는 그윽한 위엄이 담겨 있었다.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나도 깨달음이 적은 사람이지만 앞으로 함께 불법을
공부합시다.
쾌히 승낙을 받은 의상은 지엄 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지엄 화상 밑에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현수가 가장 빼어났다.
의상이 지상사에서 몇 해를 공부하는 동안, 현수와 제일 친해졌다.
의상은 화엄경 의 깊은 뜻이나 이치를 꿰뚫어보는 데 뛰어났고, 현수는 화엄경 의 글을
풀이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
하루는 먼 등주에서 온 심부름꾼이 보따리 한 개와 편지 한 장을 의상에게 전했다.
편지에는, 선묘가 이제는 몸이 나아 나무 불상에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있다는 것과, 의상
이 불도를 닦은 뒤 어리석은 자기를 제도해 달라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보따리를 펴 보니 겨울철 겹옷과 두꺼운 버선이 들어 있었고, 얼마간의 금전과 은
전도 들어 있었다. 의상은 곧 지엄 화상에게 이 사연을 말하고, 보내 온 시주를 받을 것인지
에 대해 의논했다.
받지 않는 것도 죄이고, 그것을 받고도 능히 그 은혜를 갚을 도력이 없어도 죄일 것이니
라. 이 훈계를 듣고, 의상은 선묘의 시주를 고맙게 받기로 하였다.
어느덧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지엄 화상은 제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모았
다.
나는 이제 이 세상과는 인연을 끊을 때가 가까웠다. 그래서 화엄경의 뜻이 너무 깊고 복
잡하여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쉽게 풀어서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았다.
벽에 걸어 놓은 72가지의 그림 속에 화엄경의 전체 뜻이 요약되어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감탄했다.
그러나 의상은 그 그림을 더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상은 며칠을 두고 연구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전체의 뜻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지엄 화상 앞에 갖다 바쳤다.
과연 그대는 해동의 현자로구나! 정말 장하도다!
의상이 그린 그림을 본 지엄 화상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이것이 유명한 화엄 일승 법계도 이다.
지엄 화상은 다른 제자들을 불러 의상의 그림을 보이고 그 재주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의상에게 의지 , 현수에게는 문지 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의상은 뜻으로, 현수는 글로 이어 달라는 마음에서였다.
이 일이 있고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지엄 화상은 조용히 의상을 불렀다.
앞으로 사흘이 지나면 나는 열반에 들게 되네. 나의 화엄의 전통을 해동에 전할 사람은
오로지 자네뿐일세. 부디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게.
이렇게 말한 다음, 지엄 화상은 자기가 쓰던 바리와 불경을 의상에게 주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높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사흘 뒤, 지엄 화상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의상은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을 여의었다.
그 뒤, 의상의 이름은 당나라에서도 크게 떨쳤다.
스승을 여읜 뒤 1년 가량 더 머물러 있던 의상은 이제 신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고국으로 가지고 갈 불경을 수집하려고 당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의상 스님!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웬 노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스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고명하신 스님을 잘 알고 있는 신라 사람입니다. 이것을
스님께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노인은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의상은 궁금히 여기며 쪽지를 받아 펴 보았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치신 스님의 소식을 들으니 무척 기쁩니다. 은밀히 여쭐 말씀이 있
으니 급히 뵈었으면 합니다.
김흠순 올림
김흠순은 신라의 대신인데, 사신으로 건너왔다가 백제 사람들의 농간으로 당나라에 붙잡
혀 있는 중이었다.
의상은 노인을 따라 김흠순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가서 몰래 만났다.
스님, 와 주어서 고맙소. 지금 백제의 잔당들이 당나라 대군을 움직여 신라를 치려고 합
니다.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임금님께 이 사실을 알려 드리시오.
의상은 이 말을 듣고 곧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나라가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데 더 이
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의상은 그 동안 정들었던 지상사의 현수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등주의 적산을 향해 떠났다. 거기서 항구로 나가 배를 타고 고국에 돌아갈 생각에서였다.
적산에 다다른 의상은 전에 자기를 사모했던 선묘의 집에 들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몰
래 밖에서 집안을 엿보자, 아담하게 꾸며진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합장한 선묘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다.
불단에는 자기가 준 관음 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선묘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의상은
문득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의 대자 대비한 공덕이 선묘에게 베풀어졌음을 느끼고 조용히 발
길을 돌렸다.
그러나 선묘는 순박한 아가씨인지라 의상이 본 바와는 달리 부처님의 크신 힘에 의지하
여, 의상이 돌아올 날을 10년 동안 빌고 또 빌고 있었던 것이다.
항구 쪽을 향해 걸어가던 의상은 어쩐지 발길이 자꾸만 머뭇거려졌다.
이제 떠나면 영영 만나지 못할 선묘를 생각하자, 직접 만나 마지막 말이라도 남기고 가는
것이 옳은 도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다시 선묘의 집으로 가서 옛날같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웠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선묘의 귀는 의상의 목탁 가락과 불경 외우는 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다.
아아, 의상 법사님임에 틀림없어.
선묘는 맨발로 뛰어나오며 의상 법사의 옷자락을 잡고 흐느꼈다.
법사님! 저를 영영 잊으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찾아 주시다니‥‥‥.
선묘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어서 선묘의 어머니도 다급히 뛰어나와 의상을 옷깃을 잡으
며 눈물을 글썽였다.
의상 법사는 집 안으로 들어가 앉은 뒤, 선묘와 선묘의 어머니에게 10여 년 동안이나 공
부하는 자기를 뒷바라지해 준 은혜에 대해 감사했다.
이 날 밤, 선묘는 의상 법사를 모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로 호소했다.
법사께서 본국으로 가시는 편에 소녀도 꼭 데려가 주옵소서.
이 말에 얼마 동안 생각하던 의상은 입을 떼었다.
어머님도 이 곳에 계신데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나는 신라에 돌아가면 지엄 화상의 뜻
을 받들어 화엄경을 널리 펴기에 바쁜 몸이어서 그대를 돌볼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부디
나를 잊고 관음상에 불공을 드리는 데 온 마음을 쏟아 주기 바라오. 이 세상은 한 방울 이
슬 같은 것이지요. 나무 관세음 보살.
이 말을 남기고 의상은 이튿날 새벽에 몰래 선묘의 집을 빠져 나왔다.
의상은 입 속으로 관세음 보살을 외우며 먼 나그네 길을 재촉했다. 그는 자신의 초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날이 밝은 뒤 잠에서 깬 선묘는 의상이 떠났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의상을 선창 가에서 보았다는 동네 사람의 말을 들은 선묘는 미친 듯이 부두로 달려갔다.
그러나 의상을 실은 배는 이미 바다 위에 떠 가고 있었다.
선묘는 눈물을 흘리며 옷함을 바다로 던졌다.
의상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정성을 다해 지어 놓은 법복이 들어 있는 함이 물결에 쓸려
갔다.
선묘도 그 뒤를 따라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물결은 선묘를 삼킨 채 넘실거렸다.
배는 부두에서 멀어진 지 오래 되었다. 아침 해가 안개 짙은 부두의 사람 그림자를 비쳤
으나 그것은 이제 개미만큼이나 작은 점으로 아물거렸다.
그러니 의상은 선묘가 바다로 뛰어든 것을 알 리 없었다.
배는 둥실둥실 바다 물결에 흔들렸다.
그 때, 홀연히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오며 조그만 상자가 나는 듯이 물에 떠서 의상이 탄
배를 따라붙었다.
아니, 저건 뭐지?
뱃사공이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의상도 이상하게 여겨 그 상자를 뱃사공과 같이
배에 건져 올려 뚜껑을 열어 보았다.
정성껏 다듬어 만들어진 법복이었다.
이것을 본 의상은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다.
선묘가 바다에 띄운 것이로구나. 내가 새벽에 몰래 떠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가 부
두로 쫓아와서 바다 물결에 던졌는가 보다. 그런데 어떻게 신기하게 이 배까지 따라왔을
까?
뱃사공은 의상은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법사님의 덕이 높으신 줄 알고 하늘에서 내려주신 건가 봅니다요.
의상은 이 신기한 일에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선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무 관세음 보살‥‥‥.
의상은 거듭거듭 외웠다.
눈을 떠 보니 바다 위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앞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의상은 걱정이 되어 뱃사공에게 물었다.
앞이 안 보이는데 괜찮겠소?
염려 놓으십시오. 바다 위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습지요. 부처님께 기도나 잘 드려 주
십시오.
기도는 드리고 있소만‥‥‥.
이윽고 거센 바람이 불어 배를 쏜살같이 몰아갔다. 때는 한낮이었으나 하늘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의상을 태운 배가 바다 한복판에 들어서자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덮이고,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귀를 찢는 듯한 천둥 소리가 우르릉 꽝
꽝 하고 울렸다.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며 배는 산 같은 파도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다. 배에 탄 사람들
은 모두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사공은 겁에 질린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검은 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
소리는 더욱 요란하게 바다 위에 진동했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았다.
거센 파도가 뱃전을 치고 배 안으로 쏟아지자, 손님들은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우왕 좌왕
하기 시작했다.
의상은 뱃머리로 나가 두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은 채 부처님의 도움을 열심히 빌었다.
그 때,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의상 앞에 커
다란 용의 모습이 나타났다.
용은 하늘을 날아서 의상이 탄 배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배 가까이에 다가온 용의 모습
을 보고 의상은 깜짝 놀랐다.
아니, 용이 선묘의 모습처럼 보이다니‥‥‥.
용은 한참 동안 배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선묘의 옷이 바람에 나부꼈다.
스님, 걱정 마세요. 저는 선묘예요. 스님이 돌아가시는 바닷길을 지켜 주려고 바닷물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어요. 바다는 곧 잔잔해질 거예요. 저는 언제까지나 스님 곁에 있으면서
스님을 지켜 드리겠어요.
용의 커다란 입에서는 선묘의 고운 목소리가 이렇게 흘러나왔다.
이윽고 하늘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햇빛이 바다 위로 밝은 빛을 쏟아부었다. 거친 바람
도 그치고 바다는 다시 잔잔해졌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의상은 용의 입을 통해 들려 온 선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선묘! 저 소리는 분명히 선묘의 목소리가 아닌가! 선묘가 바닷물에 몸을 던져 용이
되다니! 대체 선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의상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용의 모습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선묘는 이젠 이승의 사람이 아니구나. 부처님, 선묘의 영혼을 위로해 주옵소서. 나무 관세
음 보살‥‥‥.
3. 태백산의 기운을 타고
그 뒤부터 배는 순풍을 타고 동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신라 땅에 이르렀다.
의상은 고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671년(문무왕 11)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장을 풀 사이도 없이 곧 문무왕을 뵈러 궁성으로 들어갔다.
전하, 소승은 귀국하기 전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에서 김흠순 승상을 만나 위급한 소식
을 고국에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사옵니다.
그래, 김 승상은 잘 있던가?
아니옵니다. 백제 잔당드르이 농간을 들은 당나라 조정이 김 승상을 그 곳에서 바깥 출
입도 못 하도록 감금하고 있사옵니다.
으음‥‥‥. 그런데 위급한 소식이란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오.
백제의 잔당들이 감언 이설로 당나라의 황제를 움직여 신라를 정벌하려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비책을 하루 속히 마련해 주시기를 전하께 아뢰어 달라
고 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소승은 귀국 날짜를 급히 앞당겨 돌아왔습니다.
정말 고맙소, 의상 대사. 실은 우리 신라군이 지난 6월에 부여 석성에서 당나라 군사를
무찔러 5천여 명의 목을 자른 일이 있고, 또한 10월에는 당나라의 배를 70여 척이나 격파했
소. 그것은 당나라의 행군 총관(야전 사령관)인 설인귀가 우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이 땅에 눌러앉아 주인 행세를 하고, 게
다가 온갖 약탈과 만행을 우리 백성에게 하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우리가 우리의 주권
을 지키려는 뜻을 방자한 설인귀에게 보여 준 것이오.
전하, 그것은 정말 잘 하신 일이옵니다.
이것을 보고 백제의 잔당들이 신라와 당나라 사이를 이간질하고 당나라를 충동질하여 신
라를 친 다음, 멸망한 백제를 다시 일으켜 보려는 음모임이 분명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대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당나라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
소승의 생각으로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전과 같이 당나라와의 화친을 도모함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전에, 소승이 먼저 가서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고승들의 힘을 빌려 화
친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대사의 뜻은 정말 고맙소. 그러나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오. 의상 대사는
앞으로 좋은 터를 찾아서 절을 지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도록 부처님께 기원해
주시오.
문무왕은 의상의 노고와 공적을 치하한 뒤 후히 상을 내리고 절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튼튼히 다지기 위한 사원을 건립하라는 명을 받은 의상 대사는 목욕
재계한 뒤, 부처님 앞에서 며칠을 두고 기원했다.
좋은 절터를 잡기 위한 기원은 이루어져 태백산에 절을 짓기로 결정했다.
의상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절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절터를 둘러싸고 욕설을 퍼부
으며 절을 짓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 곳에는 절대로 절을 지을 수 없다. 어서 헐어 버리자!
와아! 와아!
훼방꾼들은 와르르 달려들어 삽과 괭이로 일꾼들이 열심히 닦아 놓은 절터를 마구 헤쳐
놓고 헐어 버렸다.
일꾼들은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우락부락한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당나라에서 온 의상이라는 가짜 중이 이 곳에 절을 짓는다니 말도 안 돼! 우리가 여태껏
믿어 온 부처님 말씀과는 생판 다른 화엄종이라는 가짜 불교를 퍼뜨리려고 여기에 절을 짓
는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훼방꾼 가운데서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실, 이들은 소승
불교에 속하는 승려들이 보낸 훼방꾼들이었다.
불교는 크게 소승 불교 와 대승 불교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소승 불교는 부처님의 계율을 엄격히 지키려는 형식에 치우친 면이 있으며, 또한 부처님
의 구원을 혼자만이 받으려 한다. 반면에 대승 불교인 화엄종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큰 뜻이 담긴 적극적이며 폭넓은 교리를 주장하는 불교이다.
신라에는 그 무렵까지 소승 불교의 승려들이 귀족이나 상류 사회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세력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대승 불교인 화엄종이 신라에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다.
소승 불교도들로 이루어진 훼방꾼들이 날마다 몰려와 방해를 놓으므로 일꾼들은 일을 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 대사는 어느 날 일꾼들을 이끌고 아침부터 절터에 나왔다.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오.
대사님, 정말 괜찮을까요? 그놈들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이렇게 걱정의 말을 하는 일꾼도 있었다.
글세, 염려 말고 일이나 하시오.
일꾼들은 부지런히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꾼들의 걱정대로 훼방꾼들이 또 나타났다.
의상 대사는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절터 한복판의 바윗돌 위에 서서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더니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
다.
순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빗물이 쏟아졌다. 산에서는 홍수처럼 물이 콸콸 흘러내
렸다.
모두 깜짝 놀라 절터에서 피했다.
별안간 사방이 캄캄해지고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 눈과 귀를 막았다.
이윽고 눈을 떠 보니, 절터에는 마치 용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져 있었다. 사방
10미터나 되는 큰 바위였다. 그 남쪽으로 10미터나 되는 곳에는 우물이 움푹 패여 있었다.
그것을 본 의상 대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저 우물에서 선묘의 넋이 용이 되어 하늘로 치솟으며 큰 바위를 떨어뜨렸구나! 아, 선묘
야. 너는 나를 언제까지나 따르며 이렇게 도와 주는구나.
의상 대사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너무나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던 훼방꾼들이 다시 절터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
했다.
이 때, 절터에 떨어졌던 용 모양의 바위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면서 훼방꾼들 앞에서 빙글
빙글 돌았다.
느닷없이 날아와서 자기들의 앞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바위를 본 훼방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쳤다.
그러자 바위는 다시 제자리에 와서 쿵 하고 떨어졌다. 의상 대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바위 위에 절터를 닦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대사님, 이것이 어찌 된 천지 조화입니까?
모두가 부처님이 보살펴 주시는 공덕이오. 나무 아미타불!
이런 이적이 일어난 이후부터 훼방꾼들은 절터에 얼씬 거리지 않았다.
의상 대사는 이 절을 다 지은 다음, 돌이 하늘로 떠올랐다는 뜻에서 부석사 라고 이름을
붙였고, 우물은 선묘정 이라고 이름 지었다.
영주에서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곳에 세워진 것이 바로 이 절이다.
의상 대사는 이 절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신라에 화엄종을 널리 퍼뜨렸다.
그 뒤, 의상 대사는 금정산에 범어사를 세웠다.
이 때, 원효 대사는 금정산에 와서 산세를 구경하다가 범어사에서 서남쪽으로 10여 리 산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또 하나의 명당자리를 발견했다.
버들가지 같은 산줄기를 뒤로 등지고, 끝없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동해가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원효 대사는 이 곳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수도했다.
의상 대사도 이 암자에 와서 그윽한 나무 냄새를 맡으며 화엄경에 대해 원효 대사와 서로
그 진리를 물으며 탐구했다.
젊었을 때 같이 당나라로 불법을 배우러 가려다가 한분은 가는 도중에 불법의 진리를 스
스로 깨닫고 돌아와 나라 안에 대중적인 법성종을 폈고, 또 한 분은 초지를 살려 당나라로
가서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이렇게 서로 만나 옛 정을 잊지 않고 서로 물으며 불도의 깊
이를 더욱 파헤치며 지냈다.
훗날, 우리 나라의 이름난 산의 큰 절이나 암자는 거의 의상과 원효가 아니면 아도 화상
이 세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이 두 고승의 지식과 밝은 눈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의상 대사를 좇아 가르침을 받은 자만 해도 무려 3천여 명이 된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끝이 없었다.
가야산의 해인사, 동래의 범어사, 원주의 비마라사, 구례의 화엄사 등 10여 군데의 절을
중심으로 제자를 보내어 중생을 제도하는 화엄종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의상 대사의 이름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 곳에 화엄종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
동해안 양에 있는 낙산사도 의상 대사가 세운 절이다. 낙산사 옆 바닷가 절벽 위에서 의
상 대사가 기도드리던 곳에 뒷날 제자들이 정자를 세웠다. 그 곳이 바로 의상대 이다.
이 곳에서 의상 대사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멀리 바라보며, 목숨을 걸고 관세음 보살을
뵙도록 기도한 백화도장 발원문 은 아래와 같다.
나의 모든 마음과 넋이 당신 마음 속에 살아 있고, 당신 또한 내 마음 속에 같이 있어 언
제나 떠날 때가 없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몸 가루가 되고 모진 업보가 이 몸과 더불어 다하
게 될 때,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이 몸을 건져 내어 당신 곁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옛날에
당신이 아미타불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이 몸은 당신 앞에 무릎 꿇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부
처님께 돌아갈 것을 맹세하나이다.
의상은 대승 불교인 화엄종을 우리 나라에 처음 일으켜 불교 문화의 꽃을 방방곡곡에 심
은 뒤 702년(성덕왕 1)에 일흔일곱 살의 나이로 입적(승려의 죽음)하였다.
고려 숙종은 의상 대사의 큰 공을 기리어 해동 화엄시조 원교 국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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