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제 1장. 유체이탈 이란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 보면
遺體(유체)란 "부모님이 물려준 몸"이라는 뜻이다.
유체 이탈이란
그 몸에서 빠져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즉,
죽은 사람이 아닌 자(산 자)가 임의로 육신을 이탈하는 행위다.
육신을 두고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통상,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방법에 따라서 양신이탈과 음신이탈로 분류한다.
양신 이탈(陽神離脫)이란 무엇인가?
선도(仙道)에서 수행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신의 내부에 응집되어 있는 양기를 뽑아내어
사람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양신이다.
완성된 양신으로 스스로 옮겨가고 육신은 태워 없앤다.
그것이 양신이탈이다.
다른 말로는"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고도 한다.
신선(神仙)으로 화한 것이다.
즉,
양신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신선(神仙)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한 두 번의 삶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누구누구는 신선이 되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전설(傳說)처럼 들려올 뿐이다.
그러면 음신이탈이란 무엇인가?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이
육신이란 옷을 벗어놓고 잠깐동안 자유로와 지는 상태를 말한다.
일부 선도인들 중에는
음신이탈을 매우 위험한 행위로 생각하여 금기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같이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이 이탈했다가 자신의 육체를 찾아가지 못 한다거나
이탈 중에 다른 놈이 자신의 육신을 차지하고
비켜 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탈을 실행(實行) 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음신이탈을 위험한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행(行)하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필자는 안다.
음신이탈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종교에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게 하며
神의 뜻을 바르게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더 확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되고,
기독교나 불교를 표방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음신이탈도 공(功)이 깊으면
팔백 겁(怯)을 환생(幻生)하지 않고
천상(天上)에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신이탈이 위험하거나 나쁜 행위는 분명히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환생, 전생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왜?
삶이란 단 한번뿐이며
그 삶을 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배워 왔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면
이단(異端)으로 취급받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윤회(輪回)한다는 것이 불변(不變)의 법칙(法則)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직자(聖職者)들도 더러 있다.
현재의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왜 윤회를 부정할까?
그것을 알고 싶으면 교회(敎會)의 역사(歷史)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아도
그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윤회의 법칙을 배제하면
성서(신약부분 )조차 해석(解釋)이 올바르게 되지 않거나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으로 유체 이탈을 실행한다면
필자가 헛소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 하게된다.
그것은 당신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필자의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믿어 주기만 해도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히 천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천국에 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다.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것이다.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음,
즉 정신(精神)이다.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정신은 영혼(靈魂)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간다.
정신이 바로 영혼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 상태를 보면 영혼의 상태도 짐작 할 수 있지만,
필설로 영혼을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탈을 실행하면서 알게 되겠지만,
보통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것이다.
지식(知識), 학식(學識), 교양(敎養), 재산(財産), 지위(地位),
경력(經歷), 경험(經驗), 외모(外貌) 등이 포함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기준의 차이가 있고,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하게된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된다.
지식이나 학식 등과 같이 기억 속에 있던 것조차 모두 사라진다.
이탈을 하면 어떤 상태인가?
죽은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다시 말하면 이탈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죽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지식이나 학식 따위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만 남는다.
흔히들 공(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헛것이 많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를 중요시 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똑같은 일도 공(功)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어떤 부자(富者)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 칭송을 받기 위해서
수십, 수 백 억의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나 사찰을 짓는 행위가
가난한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의 배고픔이 가여워서
밥 한 그릇 양보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치 없을 수도 있다.
이쪽에서는 神과 거래를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막상 저쪽에 가보면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흔히들 교회에서의 봉사활동(奉仕活動)이나
불도(佛徒)들의 방생하는 행위도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면,
재산을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하지 마라는 것인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런 행위에 자의든 타의든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이 쌓였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고,
수십 수백 억을 떼 내어 주어도
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고,
그런 행위가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에 할뿐이지
남에게 칭송 받기 위해서,
신(神) 앞에서 당당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自身)에게 가르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르치면 점차로 가능 해 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헛일이 되거나,
오히려 사이비(似而非)들에게 현혹되어
재산을 헛되이 버리고
영혼까지 타락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왼손"은 누구요 "바른손"은 누구인가?
왼손은 자신이요 바른손은 타인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왼손과 바른손이 모두 한 몸에 붙어있듯이
왼손도 자신이요 바른손도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헛소리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도 있고, 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낌이 잡힐 것이다.
혹시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알아내려고 노력 해야한다.
왜?
노력하는 동안 다른 것도 저절로 풀리는 덤을 얻을 테니까.
그분은 또
부자(富者)가 천국(天國)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였을까?
다른 말로 바꾸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모두들 부러워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넓고 호화로운 집,
소리 없이 굴러가는 -서민들의 집보다 몇 배나 비싼 자동차,
골프 회원권, 조용한 호숫가의 별장....
이런 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탈법, 불법을 하지 않고도 과연 가능할까?
권모술수 없이,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채지 않고도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까?
요즈음은 노태우씨의 비자금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매스컴의 태도변화는 나날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야당의 태도 또한 주목받을 만 하다.
자신들은 결백한 척 떠들어대는 사람들-
그들 대부분이
사후(死後)에는 비슷한 대접을 받거나
오히려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을 텐데...
자의든, 타의든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死後)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감출 수도 있고,
거짓으로 참회 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재물(財物)욕 이나 권력욕(權力慾) 모두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물(財物)욕이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권력욕(權力慾)이 없는 사람이 권좌(權座)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게되기 위해서는 온갖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다가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허전해진다.
그래서 사회 사업에도 적당히 참여하고,
절에 나가 불공도 드리고
큰돈을 헌납하여 절도 짓고 불상도 세운다.
어떤 이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그런 일을 한다.
교회에서는 대환영이다.
칭송도 대단하다.
어떤 작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꼬드겨 더 많이 우려 내려하고,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은 자는
마치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부자들은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니
돈으로 천국을 사려 할 수밖에 없고,
일부 종교인(宗敎人)들은 그것을 잘 이용한다.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 할 사람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다.
나중에 돈으로 때우면 되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이미 이 천년 전에 경고(警告)한 것이다.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그렇다면
부자, 권력자와 적당히 야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한 종교인들은 어떻게 될까?
여러분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필자는 확실히 알고있다.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 있게 여러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말을 쉽게 믿을 것이요
어떤 이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겠고
어떤 이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말을 믿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니까.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괜찮다 싶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휴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장본인들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앞으로도 대가를 지불해야하고
잘못하면 죽어서도 연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 중에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는 분들은
반드시 필자를 의심(疑心)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자 할 테니까.
확인 하고자 하는 과정이 유체이탈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바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그렇게 하는 과정 중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안다는 것은 지식(知識)의 수준이요 거품과 같은 것이다.
지식은 배우면 해결되지만, 깨달음은 배울 방법이 없다.
지식에는 스승이 있지만 깨달음에는 스승이 없다.
깨달음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깨달음은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각인(刻印)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말에 공감(共感)하고,
그 말을 믿고 실천에 옮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있을 때,
그 공(功)은 모두 자신의 것인 것이다.
필자에게 功(공)을 돌리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행 한일이다.
神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아첨에 불과하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사이비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자신을 망친 사람이나
사교(邪敎)에 포섭되어 영혼을 더럽힌 사람도,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타인들을 감언이설로 끌어들인 사람들도
그에 상응(相應)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루게 된다.
저승과 이승의 법칙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은
이쪽에서는 속임수가 일시적으로 통하나 저쪽에선 불가능하다.
이쪽에서는 법률을 통해서 양심의 법을 피해 나가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쪽에선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두환씨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했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그 당위성(當爲性)을 주장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양심의 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 밑에서 그들이 시킨 이상으로 과잉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장교, 사병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쪽(이승)에서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저쪽(저승)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해당자들은)
그 방법을 알아내면 이미 반 이상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어떤 부분이 생각난다.
전쟁 도중 어느 병사가 적국의 한 병사를 사살했다.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노모(老母)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병사는 자신이 사살했던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는 전쟁터에서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인 병사를 대신한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어린 필자도 제법 감동을 받았나보다.
양심의 법을 따르면
이승에서의 죄-그 무거운 짐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화가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미침을 잊지 말아야한다.
삶이 단 한번뿐이라면,
그 한번의 삶을 끝으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生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필자는 일 백 네 번째의 삶을 살고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아 왔기에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려고 한다.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정신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가 죽어 볼 수 없어도 나의 후손들이 살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 전생(前生)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것을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神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아래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맺고, 내가 푼다.
그래서
神은 참으로 공평한 분이시다.
아첨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을 부정했던 사람들에게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자신을 무지의 수렁으로 몰고 간 책임을
스스로 질뿐이다.
어제는 텔리비젼에서 학원 폭력에 관한 프로그램 방영이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폭력 써클에 가담하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침소봉대(針小棒大) 했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하고
행태도 고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불과 몇 년 후 모두들 후회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일,
남의 돈을 빼앗아 유흥장에서 낭비한 일,
용기를 자랑하느라고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만들고
담배로 지진 자국들.
그 모든 행위가 뼈아프게 후회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을 더럽힌 것, 자신의 몸에 흉터를 남긴 대가를
스스로 치루어야만 한다.
우리들의 인생도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인이 되어 처, 자식을 거느리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가족에게까지 물려준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혼의 타락-
양심의 법을 저버리는 일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권력욕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 모두
자신이 저지른 무게만큼 그 대가를 갚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예외는 없다.
어린아이들의 조그마한 폭력집단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폭력을 행사한 그들이나
똑 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남의 과오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악용한 사람도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하늘의 法이요, 우주의 法則이요, 양심의 法이다.
이 법칙을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깊이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하늘의 법은 국가도, 종교도, 종파도 뛰어 넘는다.
이승과 저승,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이 하늘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들도 아집을 버려야한다.
특히,
종교인들이 대오 각성해야만 한다.
왜?
하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르게 전할 수 없고,
자신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란 에고이즘이
자신뿐만 아니라 순진한 많은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같던 80년도 초(初).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어느 고급호텔에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성실한(?) 방송매체 덕분에 이름 없는 필자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름하여
"전두환 장군과 구국을 위한 조찬 기도회".
종교인들이 알아서 했는지,
깡패들이 겁을 주어 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번 그런 일 들이 보도되었던 일이 있다.
화려한 호텔에서 밥상 받아놓고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처, 자식이 보고 있는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도들이 모두들보고 있는데,
그들은 용감하게 그런 짓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하느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비싼 기도가 통했는지,
그들의 하나님은 고급 호텔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빌어준 전두환 장군은 광주사태를 구국(?)의 결단으로
진압하고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이 하늘의 법칙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 얼마나 준엄한지 모르는 엉터리 목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불쌍하다.
神의 섭리가 얼마나 공평한지 모르는 자들이
神의 뜻을 가르친단다.
소가 웃을 일이다.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천년동안
싸우고 죽인다.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형제인데도 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고
미개한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일까?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부리던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던가?
노예 해방을 반대하여 전쟁하던 이들도 기독교도적인
사상이 밑바탕에 있었다.
이승만, 이기붕, 박 마리아....
박정희, 전두환씨와 그를 맹종하던 인물들...
그들 대부분이 불교나 기독교인이었다고 알고있다.
불교가 타락했나 기도교가 타락한 것인가?
아니다.
자신들의 영혼이 타락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이 종교적인 양심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욕, 재물욕이 양심의 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법- 즉 하늘의 법칙을 외면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과오가
두고두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았을 때의 고통은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살아남은 자들도 곧 알게된다.
머지않아 모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후회는 너무 늦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찾아내어 갚아야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전시적인 종교행사나 치르지 말고,
처절하리 만큼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길이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심의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가 뭔데 주제 넘는 소릴 하느냐고 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죽은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고,
그들이 어떤 경로를 가게되는지 보고 듣고 하였기 때문에
안타까움으로 하는 소리다.
필자의 말을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다.
필자는 내 말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직접 알아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육신이 수명을 다 하거나,
병으로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영혼이 머무를 집이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물러온 자기의 육신--
바로 그것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다.
우리가 죽은 자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것처럼
죽은 자들도 산 자를 볼 수 없다.
이탈은 육신으로부터 탈출이기 때문에,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요
건물과 물건들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탈을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을 보거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유체 이탈에 관하여 조금씩 언급이 되어있는 책들이 엉터리였고
영화나 소설 속의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무책임하게 써먹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필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마음만 바르게 갖는다면 틀림없이 모두 성공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 보일 터인데 어떻게 필자가
허튼 소리를 하겠는가?
이탈이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죽은 자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절대,
이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남들을 훔쳐보거나,
간섭 할 수도 없다.
이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유체이탈이 아닌 어떤 사술(邪術)로는 가능한지 모르지만
유체이탈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유체이탈을 하여 세계 각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보고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착각이나 환각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속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는
전혀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면 유체이탈이 왜 필요한 것일까?
이탈이 가능하다고 해서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없다.
이탈의 과정을 타인에게 보여줄 방법도 없다.
염력(念力)으로 애꿎은 숟가락을 구부리고 절단 할 수 있거나
염사(염력으로 사진 찍는 것)정도는 할 수 있어야
방송에 출연해서 돈도 벌고,
유명해져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있을 텐데,
유체이탈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른바 초능력이란 것은 눈꼽만큼도 얻을 수 없다.
잡신(雜神) 붙은 사람들 같이 용한 점장이 노릇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뿐이다.
한가지 더 할 수 있다면,
죽어서 제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 떠돌이 영혼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 중에는 자신의 가족 일원이었던 이도 있을 수 있고
생면 부지의 사람도 있다.
죽어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을 아무리 많이
구제 해 주어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신문에도 나지 않고,
상도 받을 수 없고,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도 없다.
모두들 산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
단 한 사람만 구해도 영웅이 된다.
구제된 사람도 영웅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때 모두들 보지 않았는가?
안타깝게 죽어간 사람들은 외면 당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재물도 생기고 위로도 받고
상도 받는다.
매스컴이나 정치인들은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아주지만
종교인들까지 한 다리 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유명해진 어떤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작업의 여파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는 불쌍하다.
가족들조차 도와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까지도 산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다.
왜?
죽은 자에게서는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 만 명을 여의도에 모아놓고 멋진 설교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도 방법을 모르면
죽어서 갈길 몰라 헤매는 단 한사람을 구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수천, 수 만 명도 구할 수 있다.
그 따위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며 벌받을 일도 아니니까.
한다고 해서 神으로부터 상 받을 일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이 길을 물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행(行)하면 되는 것이다.
왜?
옳은 일이니까.
필자는 그런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갈길 몰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이데올로기의 싸움에서
숱한 양민이 억울하게 죽었고,
몰지각한 일부 군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광주에서도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관계자들의 관리소흘, 정비 불량 때문에
교통사고, 건물의 붕괴사고, 개스 폭발 등
졸지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참동안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한(限)으로 뭉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도 조금만 도와주면 바른 길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바른 마음으로 이탈을 하면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3년 전쯤에 어떤 여인이 필자를 찾아왔다.
하얀 소복에 젊고 예쁜 여인이었다.
무턱대고 도와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400 여 년 전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단다.
죽은 자의 길을 가르쳐주고 가라 했더니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단다.
왜냐고 물었다.
자신은 어느 양반 집 처녀였는데
이웃에 있는 어느 흉악한 형제들에게 끌려가 윤간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결을 하였고 피맺힌 한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죽은 후 그들 형제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들 형제의 후손들이 태어나는 족족 병신이 되게 하거나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아비들이 죽은 후 그녀가 복수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때문에 400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죽은 자의 길을 가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신은 죽어서 산 사람에게 나쁜 짓을 했으니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단다.
내가 직접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안될 거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놀라며 그놈들이 쫓아 왔다고 하면서 내 곁을 떠나갔다.
그러자 곧이어 험악하게 생긴 장년의 남자 네 명이 들이 닥쳤다.
사방을 둘러보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나는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나로선 방도가 없었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해꼬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났다.
그 의문은 얼마 후에 풀렸지만 어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높은 곳으로 찾아 올라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당신이 해결해 주겠다 하시면서
이제 되었으니 걱정 말고 돌아 가라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은 결말이 났고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확인해 필요도 느끼지 않았으나
확인할 방법도 없다.
저승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생전에 살았던 곳과 이름까지
알고 있어야 가능한데
나는 그녀의 이름도 살았던 곳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에나 나올만한 이 이야기는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아빠,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했다.
혹자들의 비웃음을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것이다.
당신들도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경우를 참고하라고 썼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찾아다니거나 원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들 가능성도 있다.
당신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잘못하면 당신의 현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일로 인해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벌 할 수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限)이다.
한으로 맺힌 자는 그 한을 풀려고 한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恨)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염(念力)은
엄청나게 강하다.
강한 염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꾸민 얘기들도 있지만
전혀 사실 무근인 경우는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도 이런 짓을 한다.
그 때문에 흉칙한 사건들로 세상이 시끄럽기도 하고
감옥은 언제나 만원이다.
우리가 이승에서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에게 못된 짓을 해서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갚지 못하면 죽어서 까지 갚아야하고
자신이 못 갚으면 후손에게까지 물려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者,
재물을 위해서 남들을 울린 者,
남의 아내를 탐내어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者,
모두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불교에서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그저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法則이다.
우주의 법칙이고, 양심의 법이다.
이것을 외면한자들- 우선은 권좌에도 앉아보고, 재물도 뿌리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필자의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 말에 삼대(三代) 부자가 없고, 삼대 가난뱅이도 없다고 했다.
없는 사람을 위로하려고 그냥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나 지존파나 막가파의 젊은이들도
모두 이 법칙을 외면한 대가를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탈 후
당신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을
만날 수가 있다. 모두 죽은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을 구제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 그러한 일들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를 빙자하여 돈을 받는다거나,
기존의 종교 단체 안에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거나
이상한 언행을 하는 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올바른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경우에 그런 방향으로
타락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속지말기 바란다.
당신이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 이탈했을 때에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필자도 제법 오랫동안 착각을 하곤 했다.
얼마 전 동네친구를 만났었는데 나이도 엇비슷해서
평소에 말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는데,
결국 이혼하고 얼마 후 새 장가를 들었다.
그의 전처가 아니더라도 종교엔 관심이 없었고,
전처 덕분에 종교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이탈 후에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다른 남자 한 명과 같이 어떤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필자가 불러 세우자 다른 사람들은 가고 이 친구만
마지못해 섰다.
"야! 이 사람 진배(가명) 아니야? 참으로 오랜만일쎄.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사 개월이나 지난 후에 들었다네.
그래서 장례에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너무 섭섭히 생각
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보게 여기는 이승이 아닐쎄.
자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야.
사람이 죽으면 제 갈 길로 가야지 왜 헤매고 다니는가?
길을 몰라서 그러면 내가 데려다 주겠네."
필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그냥 여기서 살거야."
그는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여자들을 따라 가고 싶은 것이다.
"잠깐만 내 말을 더 듣고 가게. 지금은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이 싫어질 것이네. 그때에는 내 말대로 하게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네.
그러면 가까운 산(山)으로 올라가 보게.
산 중턱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한 채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을 거두어 주는 곳이지.
그곳까지 가면 자네의 일은 다 한 것이지.
다음의 일은 그 집에서 일하는 이들이 다 알아서 해 줄거야.
찾기 힘들면 사람에게 물어 보게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 둘 일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집은
모두 예수의 관할 아래 있네.
자네는 살았을 때 예수쟁이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많아서 그랬고
자네 잘못은 아니니 아무 염려 말고 찾아가게나.
살아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했다거나 해서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네.
그분은 어느 누구든지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고,
또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도 흔쾌히 용서하여 받아주지.
자네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네.
그분을 만나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잊지 말게."
필자가 다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라졌다.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먼저간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여러분들도 그들을 설득하기 바란다.
이탈을 한 후에 집안을 살펴보면 낯선 사람도 들어와 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나를 더 무서워한다.
무작정 내쫒지 말고 잘 설득해서 그들이 죽은 자의 길을 가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필자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점점 강인해 졌고,
강해지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점점 강인해져 시시한 귀신 따위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탈 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앞서도 설명을 했다.
그들 중에는 아주 악질적인 종류도 있다.
산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지만.....
90년도에 필자는 동대문 종합 시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민방위 훈련을 한다고 했고,
공습경보를 하고 있는 동안 이탈을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경보 10분전에 준비에 들어갔다.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려 퍼지고 소등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탈을 시작했다.
이런 곳(시장)에는 어떤 종류의 망자들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탈된 후 가게에서 나가지 않고 통로를 내다보니
열 여섯이나 열 일곱 살쯤 된 여자가 걸어서 내 앞을 지나갔다.
막 지나는 순간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너는 누군데 죽어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런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니?"
필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댔다.
"아저씨는 누군데 남의 일에 간섭이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대드는 것이 여간 악종이 아니었다.
그런 부류들은 설득해도 안되고, 또 설득이 되지도 않는다.
말을 더 붙였다가는 필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지경이었다.
"알았다.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네 갈 길로 그냥 가거라."
필자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녀는 사나운 눈을 흘기며 멀어져
갔다.
좀 넓은 통로에 나서니 산 자들만큼이나 죽은 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말을 해보려는 순간 불이 켜지고, 싸이렌이 울려
이탈은 중지되었다.
그날 밤 집에서 이탈을 한 후에 시장으로 다시 갔다.
큰 통로에 가보니 제법 많이 몰려 있었다.
거기서 일장 연설을 하니 여러 사람들이 필자를 따라 나섰다.
스물 댓 명 정도 되었는데, 원해서 가는 이도 있고
남들이 가니 덩달아 따라 나선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아있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를 따라 나섰던 이들은 지금쯤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죄 값을 다 치르고 이미 환생하였는지도 모른다.
87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먼저 떠난 후 이십 년을 외롭게 살다가 떠났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나쁘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요만,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마음씨 착한 여인이었다.
어머니 시신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못난 자식들 모두 용서 하시고 마음 편히 가시오.
아들 여섯, 딸 하나 어느 누구 하나라도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은 이 없고, 지금도 당신께 걱정을 드리고 있지만,
모두 잊고 떠나시오.
어머니는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아름답게 살다가 부디 윤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드십시오. 잘 가요, 어머니. "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가 몇 달이 지난 후
못 견디게 보고싶어졌다.
삼일동안 이탈을 해 보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열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복스럽게 예쁜 처녀가 찾아왔다.
"너는 누구냐?"
"당신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기에 인도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너는 천사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그래요"
"죽은지 얼마나 되었나?"
"3년 되었어요"
"어쩌다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는가?"
"고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안됐구나, 인생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사고로 죽다니...
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이런 일은 누가 시키는가?"
"위에서 시키는 일이지요."
"그래...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은 어디냐? 나를 그곳까지
인도 해다오."
"어머니는 지금 파림촌에 머물고 있어요."
"파림촌? 어서 가자. "
어둡고 음산한 산야를 지나 어느 곳에 당도하니 네거리가 나오고
그곳은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파림촌 이라는 곳인가?"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파림촌 이예요.
그곳에 가시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어 있답니다."
"왜 너는 갈 수가 없지?"
"그건 말씀 드릴 수 없고 , 저는 이제 그만 갑니다."
"잠깐, 너를 다시 불러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글쎄요,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살았을 때 너의 성이 무엇이었지?"
"진(陳) 이었어요"
"그러면 진양 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이제 그만 가 보게"
그녀는 떠나고 필자는 그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갔다.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탈의 시간이 끝나고 육신으로 저절로
복귀하고 말았다.
재차 이탈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이탈을 하려면 상 단전에 기(氣)가 충만(充滿)해 있어야 하는데,
다 소비하고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 두 시간의 이탈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삼십 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녀와의 대화에 너무 많이 시간을 허비해 버린 결과였다.
다음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이탈을 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진양"을 외쳐댔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검정양복의 사나이
두 명이 나타났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을 어머니께 데려다 주려고 왔습니다."
"진양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갔습니다.
자! 우리들을 따라 오십시오"
그들을 따라 한참을 갔다.
어느 지점에 도착을 하자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십시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왔고
그 끝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엉엉 울다보니 반응이 없었다. 놀라서 얼굴을 쳐다보니 분명히
어머니이긴 한데 모습이 변해져 있었다.
집에 있던 낡은 처녀 시절의 사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칠십 세의 노인이 죽었는데 처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열 일곱 처녀를 중년의 사내가
끌어안았으니 그럴 수밖에..
놀란 마음으로 인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어찌된 일입니까? 노인이 처녀로 변하다니요."
"사람이 죽으면 시간이 감에 따라 연령이 퇴행합니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다시 환생하게 되지요"
"아버지는 작고한지 이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와 거의 변함이 없는데,
어째서 어머니는 돌아 가신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처녀처럼 변했습니까?"
"그것은 살았을 때 공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환생할 기회를 빨리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살았을 때에 인자하고, 존경 받을만한
인품을 지녔었는데도 별로 변함이 없고,
어머니는 착하기만 했지 별다른 공을 쌓은 것이 없는데요..."
"여자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공이 크답니다.
아이를 낳고, 열심히 잘 키우고,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공이 되지요."
"곧 다시 태어난다니 어디서 어떻게 태어납니까?"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려고 합니까?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할텐데..."
"지금 우리들의 대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닌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미국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0000, 부인입니다."
"부인이라니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구의
부인이 된다는 것까지 정해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습니다."
"언제쯤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육십 오세 되면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때가되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를 읽고
"이 사람 정신병자로군."하는 사람도 있고,
"이 친구 소설 쓰고 있네." 하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필자의 경험 중 하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이다.
필자의 얘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비웃음으로 회피하거나...
필자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나서
숙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부, 부모, 자식.....
이 관계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로 맺어지는 관계는
서로의 선택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 같지만,
외견상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지방에서 저지방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숙명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제짝을 찾기 위한 행로라고 할 수가 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면 이미 부부로 맺어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왜 부부로 맺어 졌을까?
그것은 업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고 용서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저절로 그냥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면 파탄이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한으로 남게 마련이다.
한은 또 다시 업으로 남는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그 안에서 다시 잘못을 저질러
형량이 늘어나는 것과 닮은꼴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세상의 부부들이여 이점을 잊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이탈을 한 후에 맞게되는 죽은 자의 세계, 즉 구천을 벗어난 곳은
자신의 염이 상당히 강해야만 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가치 기준으로
인간들의 사후(死後)상태(狀態)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승에서 그럴듯해 보이던 사람도
사후에는 우리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식과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던 인물이나,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던 종교 지도자였거나,
그러했던 인물들이 의외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에서부터 꽤나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하가
되거나,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인물이 있다.
P씨는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종파를 부흥시키고,
자신의 교세를 확장했다.
한때에는 엄청난 재물과 기업과 사람들을 거느린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송두리채 바치고
스스로 그의 교도가 되어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망쳐 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는 죽었고, 그의 교회도 서서히 무너져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이탈 중 우연히 그를 보았다.
기독교적 논리로는 그는 죽어 천국에 가 있거나,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후에는 하느님 옆자리쯤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그에게 사기 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뛰쳐나온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타고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본 사실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사실을 왜곡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파견된 인물이었거나,
어떤 연유로 그쪽의 세력과 결탁(結託)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생전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나쁜 길로 빠져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눈치 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모두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어둠의 세력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악인, 구제불능의 악인으로 출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고정된 시각으로 인간을 보려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만한 분별력이 없으며,
선이든 악이든 힘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필자가 어떤 이(?)에게 물었다.
"저는 천사(天使)입니까? 아니면 악마(惡魔)입니까?"
"너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천사와 악마의 능력을 반반씩 가지고
태어났다. 네가 천사의 능력을 갖거나 악마로 되는 것은 오직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천사나 악마가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처럼
인간에게 간섭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한 존재는 없다는 얘기다.
순전히 내 선택에 의해서 나 자신이 순간순간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당신 스스로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닌 멍청이도 될 수 있고...
필자가 처음 투표를 해 본 것이 70년인가 다음해이던가
대통령 선거 때였다.
김대중씨가 아깝게 지고, 박정희씨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그후에는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했다.
각자 이유가 다르겠지만,
식자층에서는 야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의 이유는 모르지만 필자도 역시 열심히 야당에 표를
던진 사람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이 정권 잡기를 바래서?
아니다.
군부 독재가 싫어서?
싫긴 하지만 내 표 한 장이 바꿀 수는 없다.
야당 후보가 좋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줄기차게 야당에 표를 던졌을까?
그것은 균형 때문이었다.
집권당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긴다.
정치 선진국에서도 집권당이 바뀌는 예가 거의 없는데,
우리의 경우에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호남사람들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저소득층이 많다.
서울의 달동네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호남 사람들이 많다.
보통 때는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다.
출신 도를 따질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호남 사람들의 바람이 거세어 지고,
타 도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된다.
거치른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말도 하기 힘들다.
김대중씨라고 호칭했다가는 봉변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도" 김대중선생을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다.
누가 그들에게 호의를 갖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우리라고...
왜?
여러 사람이 나서면 나설수록 그 욕은 바로 김대중씨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여당에서 요리(?)하기가
쉽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하진 않을텐데...
아주 절친한 호남 출신 친구에게 필자의 의견을 얘기했더니
처음엔 펄쩍 뛰다가 결국은 승복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김대중씨나 집권당에서 알까? 모를까?"
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모르겠지... 자신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서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시키겠나? 아마 모르고 있을 거야."
"이 순진한 친구야, 자네는 어찌 산전 수전 다 겪은 그 양반이
그 정도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 양반 이미 환갑이 넘었고, 두뇌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또 그 주변에 서울대학교 출신의 수재들이 즐비하네.
이들이 모두 자네만큼도 생각이 못한 돌 머리라고 생각하나?"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경상도 출신이네.
우리 형수 네 분 중에서 두 분이 전라도 출신이지.
그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여섯 명이지.
그놈들은 모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 애들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인가?"
".................."
"나라꼴이 바로 되려면 우리 백성들이 정치인들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어주니까 가지고 놀지.
지역 감정 부추기는 놈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찍어주지 말아야해.
그들이 하는 장난을 가만히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스스로 부끄러워 그런 짓을 못하게돼.
그건 그렇고,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닐쎄
자네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직책도 있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다니라고 하나?"
"그렇지, 그것을 노방 전도라고 하는데, 성서에도 있다네"
"상가나 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는가?"
"지나치게 떠드는 것이 싫을 때도 있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또 성서에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래서 옳은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 말인가?"
"그렇다네."
"노방 전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대상이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대며,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을 마치 사탄같이 대하고,
그렇게 오만(傲慢)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태도가
과연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 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자신의 행위가 도리어 반감(反感)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招來)한다면,
그것은 과연 예수를 위한 일일까? 그 반대일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네"
"지금부터라도 해 보게. 어떤가?"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없어서.... 어쨌든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김대중 선생을 지지합시다 하면서 외치고 다니면서 오히려
반감을 사서 역효과를 내는 행위가 김대중씨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그렇다네."
"예수를 믿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에서 신음하고 만다는 그 외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면,
그래도 그 행위가 옳다는 말인가?"
"........................ 그래도 성서에..."
"성서에 전도하려면 떠들어대라고 써 있는가?"
"그렇지.."
"누가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러면 전철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예수의 직접 명령을
받았을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가?"
"...................................."
"예수 흉내를 내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듯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네.
예수는 바로 신(神)이다 그 점은 인정하나?"
"당연하지."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를 선택하였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었지?"
"그래"
"왜 그랬을까?"
"자신의 뜻을 널리 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물론이네. 그런데 처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죄가 된다.
물론 그 죄는 처자식을 버린 당사자의 것이고....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짓게 했네.
어떻게 생각 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도리어 영광이
아닐까?"
"그런 얘기는 자네 같은 예수쟁이의 변명이지.
예수는 사람이면서 신이네. 당신 스스로 밝혔듯이...
그 양반(예수)은 자신의 선택 때문에 죄를 짓게 할리가 없네.
남겨진 처자식이 고생하면서 아버지나 예수를 원망하게
두지 않을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고, 자신이 바로 신(神)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네."
"..................................."
"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들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가?"
그들이 예수의 화신인가? 그들이 신인가? 아니면 그러한 권한을
신에게 부여받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처자식을 버리고 교회 일에 미친 사람을
만들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가출하여 교회 사업에 미친
사람들이 적지 않네.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위해서 가족을 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그들은 누구의
부름을 받았는가?
버림을 받은 이들과 그런 일들을 보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은
교회나 예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교회도 욕먹고, 예수도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네.
그렇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와 교회를 위한다는 그들이 하는 꼴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전도의 목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서
바른길을 가르쳐줌이 아니던가?
전도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비 기독교인들이나 무 종교인들에게 참뜻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면,
예수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
"칭찬이 도리어 욕이 되고, 존경심을 떠 벌이고 다니는 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 보게나 과연 내 말이 틀렸는가를..."
"........................................"
"오래 전에 방송에서 어떤 목사가 청량리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잠깐 본 일이 있지.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일은 여기저기서 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대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변질이 되더라도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이 되겠지만
우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목사가
초대되어 몇 마디 얘기를 하더군.
목소리를 들으니 여느 목사나 전도사들에게서 듣던 그 가식적인
뼈가 없더군.
그래서 아, 이 사람은 그래도 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하더군.
자신은 나중에라도 교회를 짓지 않겠다고...
목사나 전도사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
매스컴을 탔으니 많은 후원자가 생길 것이고, 돈도 많이 생기겠지.
그런 후에도 변질이 되지 않는 다면 , 그 사람은 뭔가를 제대로
아는 양반이지.
나는 그 사람이 끝까지 변치 않고 돈이 생기는 대로 밥을 지어
더 많은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네.
그것은 여의도에 백만 명의 신도를 모아놓고 신을 찬양하고,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하는 그런 행위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일이네.
그런 일이야말로 기독교를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일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세. 미안하지만 예수쟁이 적인,
상투적인 말투, 예수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둥의 표현을 나는 아주 싫어하네.
왜냐하면 예수나 하느님 즉 神은 인간이 자기 마음에 드는 짓을
한다고 해서 간사한 우리 인간들처럼 해해거리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화를 내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
"좀 전에 자네가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말은 뭔가?"
"잘 들어두게 이 예수쟁이야. 그런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예수는 누구인가? 대답해봐."
"...................................."
"이 사람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예수는 바로 神이 아닌가?
맞아? 안 맞아?"
"맞아. 바로 神이시지."
"그러면 그 양반이 뭣하러 인두껍을 쓰고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꼬?"
"인간을 구원하려고..."
"맞았네, 앗따! 그눔 신퉁허다. 고런것도 다아네 그랴.
그런데, 그 말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온 것이지
직접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지?"
"그렇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항시 들먹이는 성경에서 보세.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왔고, 또 그랬고,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까지 두었다. 맞는가?"
"그래"
"왜 교회에 짜잔 - 하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교회에 나타나서 기적과 위엄을 보여주고 그들을 굴복시킨
다음에 잘못된 교회부터 바로 잡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교회에 쌓여있는 재물로 배불리 먹여주고 했으면,
잘못된 교회도 바로 세울 수 있었을 테고,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장수무대에 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봐, 예수 믿는 자네가 말해보게. 생각할 여유를 주 테니까..."
"에-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고, 또........."
"됐네 이 친구야.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영광은 무슨 얼어죽을......
그 양반이 그렇게 하지 않은 절대적인 이유가 있지.
그것은 바로 神은 절대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네.
인간이 천국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인간들의 결정에 따라 가족 사회, 국가, 이 세상을
이루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네.
그 방법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 알려져 있네.
인간들의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에 어지럽고 시끄럽고
괴로울 뿐이지.
그 양반은 새삼스럽게 그 법칙을 깨우쳐 준 것일쎄."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 짐작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한국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인간이 윤회를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살아가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굳이 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신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속성과 국제 정세 때문일 것이네.
그 분이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올바른 가르침을 펼치면,
정치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결탁해서 로마로 하여금
당신을 죽이게 할 것과 그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그것을 핑계로 많이 죽이고 죽고 하는 과정을 겪은 후,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게되고,
로마로부터 유럽을 비롯해서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전파되고...
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알게되고,
아이고 숨차라.
즉, 국제 정세의 흐름이 당신의 정신을 널리 퍼지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란 말씀이야.
예수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나서 똑같은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그 가르침이 지금처럼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
"이렇게 가정을 해보세. 만일 예수께서 일본이나 중국, 아니면
우리 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 졌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나. "
"..............................................."
"그래서 예수쟁이들의 말투들-
특히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는 따위의 표현이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싫어하네.
그러한 표현은 神을 인간급으로 격하(格下)시키는 말이 된다네.
알겠는가?"
"....................................................................."
"동의 할 수가 없는 모양이군. 지금은 그럴껄세.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금까지 헛소리 같은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자네 스스로 알게 될걸쎄.
神은 神이다.
人間이 아니다.
몇몇의 인간들이 부추긴다고 높아질 존재가 아니며
몇몇의 인간들이 모욕한다고 격하될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을 대하는가?
인간과도 같은 성향을 지닌 조잡한 존재로 대한다.
누가 그렇게 대하는가?
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글을 보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펄쩍 뛸 것이다.
필자를 두둘겨 패고싶은 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
이단자로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반성해 보아야한다.
신을 믿는다면서 신을 저질로 표현하고 있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조물주라고 하면서 조잡한 인간에 빗대어
비교한다.
신이 불편 부당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변덕쟁이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 정도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누가?
바로 우리들-기독교인들이 그러고 다닌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놈은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해서 학교도 잘 다녔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의사가 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위치에 이르러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제 멋대로 하였다.
시키는 대로하지 않고 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다녔다.
가라는 법대는 가지 않고 자동차 정비에만 매달렸다.
형은 의사가 되었는데, 동생은 기름에 절은 정비공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 보기에 창피스럽고 분해서 자식으로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있는 재산 다 털어서 큰아들에게는 병원을 지어주고
고생하고있는 작은아들에게는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큰아들은 외견상 불편한 것이 없었다.
일류 대학 나와 유능한 의사가 되고, 부모의 힘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건물에 개업도 하고 부모도 모시고 있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돈 많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하고....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 강요하여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결혼까지 당신 마음대로 정해버려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하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 혼자 밖에 없었다.
동생까지 집에 오지도 못하게 아버지가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동생처럼 쫒겨나서
좋은 집과 고급승용차,
골프채를 잃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동생의 몫까지 자기 차지가 되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자기만을 사랑해 주었고,
자신의 갈 길을 일일이 정해 주었고,
전 재산을 물려준 아버지가 그에게는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단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작은아들도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편협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했고 불쌍해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늙어 병들고, 힘이 없어지자
큰아들 내외의 불화 때문에 그 집에 살수가 없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양로원에 돈과 함께 맡겼다.
처음으로 어버지의 진로를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모셔다가
임종때 까지 봉양하였다.
또 다른 아버지가 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평생 노동일을 했다.
자식을 일곱 명이나 두었는데, 어떤 놈은 악착같이 공부해서
선생도 되고,
어떤 놈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공업학교를 나와서 취직해서
살림을 도왔고,
또 다른 놈은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집 배달원이 되었다가 후에
주방장이 되었고,
또 다른 놈은 어려서 가출하여 감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겨우 세끼 밥 먹여준 것 외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특히 일찌감치 비뚤어진 길을 가고있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결국 사랑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그는 장사로 성공하여 큰 점포를 운영하고
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내가 아는 이 두 가지 얘기를 읽고 나서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첫 번째 얘기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지만 자식을 편애하여
미워하는 놈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아버지는 물질적으로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길렀다.
자식을 편애하는 것은 부모로써 가장 못할 짓이다.
그것은 사랑 받는 자식과 미움을 받는 자식, 그리고 당사자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
주위에서는 손가락질한다.
충고해 주는 이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의 충고 따위는 듣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이런 정도의 인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엄청난 착각이다.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에도 전교의
대상이 모두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무언가 미지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처지가 개선되거나 반전되기를 희망한다.
현재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를 용서하고,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을 깨끗하게 다스리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서글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 것이
지금에 와서는
형편없이 왜곡된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물질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들은 점점 참된 인성을 상실해
간다.
사이비 종교나 사교들은 애초에 기복신앙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고,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무지의 수렁으로 몰아 넣는
악마 같은 자들이 하는 짓이지만,
기독교나 불교에서조차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매스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개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집단은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신도들을 모으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쓰는 사이비 종교인이 많이
생겨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종교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일신의 부귀 영달을 위하여 그런 짓을 하는 종교인들이 들끓고
있으니
천국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 그들은 반드시 기복 신앙을 조장한다.
둘째, 성서(성경)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성서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자신의 의지대로 해석하거나
흐름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한 구절만 떼어내서 필요한곳에
갖다 붙인다.
특히, 신구약을 섞어 적당히 뜯어 맞추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의 재산을 우려내는 방법을 총 동원한다.
기독교의 탈을 쓴 사이비들은 대개가 그렇다.
성서를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자면 한이 없다.
살인, 강도, 강간, 불륜 행위조차까지 합리화시킬 수 있다.
제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속지 말기를 바라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불교의 탈을 쓴 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비슷하다.
특히 "나는 언제 득도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어째서 그런가?
득도(得到)라는 경지를 잘은 모르지만,
진실로 득도(得道)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득도를 했노라고 자랑하며, 신도를 모으고 ,
그러한 것을 기화로 치부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를 아는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도 권유를 했다.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새로운 종파를 설립하거나....
그렇게 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때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러한 발상(發想)이 사이비로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잘만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는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체 이탈의 목적을 설명하다보니 장황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께서는 목적이 어떤 것인지 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제 3장. 그밖에 하고 싶은 얘기들.
<귀신(鬼神)은 있는가?>
여러 사람이 필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다 지어낸 이야기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인정하든 말든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우겨도 없게 마련이지.
귀신이 별건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지.
나도 귀신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다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그런 귀신은 없지."
"귀신이 있다면 어디 데려와 보슈. 그러면 내 믿겠소."
"자네가 믿든 말든 나와 상관이 없네, 그런데
내가 무엇이 안타까워 자네에게 증명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자네가 굳이 알고 싶다면 만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는 있네."
"어디 설명해보소. 내 그 귀신을 만나보리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명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내 말대로 실행한다면 오늘밤에라도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유체 이탈 방법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에구...무시라..."하고
부르르 떨더니 하면서 자리를 피해버렸다.
왜 우리는 귀신을 볼 수 없을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히 귀신은 육신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이 남의 육신을 빌려 나타났다고 치자.
우리 눈에 귀신으로 보이겠는가? 보통 사람처럼 보이겠는가?
당연히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귀신을 볼 수 있을까?
내가 육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도 귀신(鬼神)이 되어야만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과 분리되어 저승에 편입하게 된다.
저승은 어디인가?
죽은자들의 세계를 통 털어 저승이라 하자.
이승처럼 천차만별의 세상이 그쪽에도 존재한다.
천국, 또는 천당이라 하는 곳은 제일 좋은 곳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난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선도에서는 이곳을 동천복지라고 하며
세분하여 36동천 72복지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도 그렇게 많은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아래 여러 단계의 여러 층이 존재하고 있다.
필자가 어떤 이에게 물었더니(저쪽 세상에서) 크게 일곱으로
나눈다고 했다.
확인할 바는 없지만 필자가 돌아다니며 본 것은 이 세상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곳이 있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공존하고있는 죽은자의 세상이 있다.
이 세상이 물질의 세계요 양(陽)의 세계라면 여기는 음(陰)의 세계요 비 물질의 세계다.
이 세상과 똑같은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집도 같고, 가구도 같다.
인간이 만든 것은 그쪽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없다.
인간들이 만든 전기는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순간에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젼을 켜도 작동을 않고, 등(燈)도 켜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밤은 무척 어둡다.
낮에는 어떨까?
낮에는 그쪽도 밝다.
태양 에너지는 지속적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죽은자의 세상도
밝혀준다.
그 때문인지 죽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세월이 지나면 알게되지만 급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모른다.
87년도에 필자가 임의로 유체이탈이 가능했을 때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이 밤중에 길가에 나와 앉아 있습니까?"
"글쎄, 자다가 더워서 길가에 나왔는데 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이 근처인데....."
그는 자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죽은 줄 알게 되겠지만
얼마나 헤매고 다닐지 모를 일이다.
철들지 않은 어린애들은 더 심하다.
언젠가 이탈해서 방안을 둘러보니 여자아이들 셋이 자고 있었다.
제일 큰놈은 5, 6학년쯤 되어 보이고 둘째 놈은 2,3학년,
작은놈은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였다.
"얘들아 너희들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자고있니?
너희들 형제니?"
아이들이 겁을 먹고 경계를 했다.
"괜찮아. 아저씨한테 얘기해봐."
제일 큰놈이 입을 열었다.
"얘들은 제 동생들인데, 막내가 물에 빠져서 건지려고 하다가
함께 빠져 죽었어요."
"저런,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래, 언제 죽었는데
이렇게 헤매고 다니나?"
"5년쯤 되었을 거예요."
"5년씩이나 갈길 못 찾고 헤매다니... 불쌍한 놈들 같으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돼. 하늘나라에 가면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단다.
아저씨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가겠니?"
큰놈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째도 별 반항 없이 따라 나서는데
막내는 앙탈을 부렸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혼날까봐
겁이 나서 그랬는지, 죽은자의 세상에서 헤매는 저질인 어른들이
괴롭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겁을 내고 앙탈이 심했다.
제일 큰놈과 필자가 양쪽에서 손을 잡고 겨우 데려다 주었는데,
필자의 손을 물어뜯고, 발버둥치고,
아무튼 대단히 힘들게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은 이미 환생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바램이지만....
그 녀석들 다시 태어났으면 물을 대단히 무서워할게 틀림이 없다.
부모가 일찌감치 수영교실에 보내서 가르치면
물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겠지만.
여관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급한 볼일 때문에 외출을 해야한다고 잠시만 봐달라고 하기에
그런 곳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있나 나가 보았다.
요즈음 여관이란 곳이 여행자는 별로 없고 잠깐 동안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그때문인지 방마다 색정관계로 한이 맺힌 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죽은자의 세상에는 이승 같은 부부관계도 없고, 연인 사이도
없다.
윤리, 도덕도 없고, 법도 없다.
그래서 무질서하고 엉망이다. 난잡하다.
방마다 모두 그랬다.
어느 방문을 열어보니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혼자 누워있었다.
필자를 보더니 몹시도 부끄러워했다.
"얘야, 너는 어찌해서 이런 곳에서 혼자 누워있니?"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배시시 웃으며 수줍어하며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려고만 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난잡한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얘야,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단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이런데 있으면 못된 놈들만 만나게 돼.
잘못이 있었으면 대가를 치르고 다시 태어나야지.
다시 태어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도하고
아기도 낳아서 예쁘게 기르고 싶지 않니?
그러자면 이곳을 떠나야해. 내가 데려다 줄 테니 나를 따라올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필자를 따라 나섰다.
심성이 착한 처녀 같았으니 이미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88년쯤의 얘기다.
어느 날 집밖에 나섰더니 군화발 소리가 요란했다.
일개 소대쯤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열을 지어 구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맨 앞의 인솔자를 불러 세웠다.
"여보시오. 당신들 이 밤중에 왜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고 있소?"
"우리는 전쟁 중에 우리 진지에 포탄이 떨어져 소대 전원이 함께
죽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다니고 있어요."
수십 명의 소대원들이 필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저 소대장 뒤만 졸졸 따라 다니고 있었다.
"여보시오 소대장, 전쟁이 끝 난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갈곳을 못 찾고 헤맨단 말이요?
참으로 한심한 일이군. 저쪽에 山이 보이시오?"
"예!"
"그리로 올라가시오. 중간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하나 보일거요.
그 집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곳인데 그리로 가시오.
그러면 당신의 임무는 끝이요."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 나서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이런 일들은 너무 많아서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독자 중에서도 이런 일을 숱하게 격을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기도 하고, 두려움에도 떨게될 일도
생길 것이나 실행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게될 것이며,
두려움에서도 해방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95년이었는데
현재의 시점은 1998년 11월 중순이다.
요즈음은 자주 이탈을 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러하지만,
필자도 생업이 그리 순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누가 찾아오거나 주위에 있는 것을 느끼면
몸이 저절로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이탈을 하는데
어김없이 누군가 집안에 들어와 있다.
며칠전인 11월 초순경에 어떤 아이가 찾아왔다.
오륙 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얘야,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니?"
"....................."
"너는 누구냐?"
"제 이름은 이 비례(혹은 미례)라고 해요."
"너는 언제 죽었니?"
"작년에(97년) 잠실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런데 왜 죽은 자의 길을 가지 않고 지금까지 떠도는 거지?"
"안 되요...... "
"왜 안되지? 내가 데려다주련?"
"우리 집 전화 번호가 000 국에 0000 이예요. 연락 해 주세요."
"그래, 아저씨가 연락해주마."
그러고 있는데 험상궂은 남자가 뒤따라와서 싫다는 아이를 끌고 가 버렸다.
이런 경우 필자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순간적으로 끌고 가버렸기 때문에 전혀 힘을 쓸 수도 없고,
해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방법을 모른다.
끌려가는 아이가 싫어한다는 것은 느꼈으나 도리가 없었다.
정신이 돌아온 나는 연필을 찾아 전화번호를 적었지만
번호의 앞자리 수 하나가 아물거렸다.
아침에 비슷한 번호를 다 생각해 보고 전화를 했지만
정확한 번호는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이 비례(혹은 이 미례)라는 아이를
아시는 분은 필자에게 연락 바란다.
아이를 악마 같은 사내에게서 해방시켜줄 방법을 가르쳐줄
예정이니까.
물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이와 유사한 일로 대가를 바라며 접근하는 사람도 경계해야 한다.
아이가 힘든 상태에 있으니 해결해주면 좋으리라.
하지만 필자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경우다.
부모가 해주어야한다.
<전생(前生)과 전생(轉生),윤회(輪回) >
요즈음 전생(前生) 여행이란 책이 유행이다.
전생(前生)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TV프로 제목 같다.
물론 윤회(輪回)하기 때문에 전생(前生)도 있고
전전생(前前生)도 있고,
당연히 다음생도 존재한다.
믿거나 말거나 있는 것은 있다.
유체 이탈을 실행에 옮겨보는 사람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게된다.
꼭 전생(前生)을 알 필요가 있을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전생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고통이 전생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전생에서 내가 죄를 지어서 현실에서
고통을 받나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전생의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 어떻게 하든
그 갚음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84년인지 그 다음해이던가 단편적으로 전생을 구경했다.
구경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그 체험을 다시 했다.
죽기 바로 직전의 경험이었다.
당시에 나는 중국인이었다. 필자의 나이 스무 살 전후였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한 죄로 팔 다리를 모두 잘린 채로
서서히 죽어갔다.
그 때문에 숨이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다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는 순간 아프지는 않았지만 시큰거렸다.
팔 다리가 다 잘린 몸뚱이는 시체더미 위로 던져졌으나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뺨이 땅바닥에 닿았고, 다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썩은 물이
뺨을 적셨다.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했고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그리고... 죽었다.
그리고 날았다.
푸른 하늘을, 멀리 아래로는 바다가 보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단편적인 전생 구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전체를 다 알고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등등
모든 사실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현실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련한 짓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금생(今生)의 일들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전생(前生)을 알려고 애를 쓰다니....
금생(今生)에서의 일을 생각해보자.
10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크게 충격 받거나 심각했다거나 하는 중요한 사실들만
대충 떠오르고 세세한 기억은 없었다.
필자가 걸음마를 하다가 화로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덴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방안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고 내 앞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누구인지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가 언제쯤인지 몰랐다.
서너 살쯤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다 언젠가 어머니께 물었더니
첫 돐을 조금 지나서였단다.
사실 그런 정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필자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워낙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 댓 살쯤 되었을 때 형들을 따라다니며 전쟁 때 부서진 탱크를
놀이터로 알고 들락거리던 일들도
단편적으로 기억이 날 뿐이다.
그래서 자기최면으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 가보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으로 몰입하였다.
맑은 마음으로 들어가자 기억을 스스로 퇴행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면서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해서 아주 어린아이 시절까지 내 의지로 돌이켜 보았다.
다음단계는 전생(前生)이었다.
전생(前生)으로 가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 들어갔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끔직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멈출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필설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
굳이 설명을 하자면,
산채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토막토막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나 팔을 톱으로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하고....
사금파리로 뼈를 갉아내는 듯한 느낌, 그런 것이었다.
한참동안 지속되던 고통이 끝나자
검은 양복에 금발의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자기를 따라오란다.
따라갔더니 별로 크지 않은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전의 그 엄청난 고통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지옥(地獄)이나 연옥(煉獄)의 고통이 그렇습니까?
지옥이나 연옥의 고통이 그토록 엄청난 것이라면 살아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참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필자가 물었을 때.
그는 명함크기의 하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Txxxxx Aooooo"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태어날 이름이었습니다."
"아니? 내 이름은 김 아무개이지 이것은 아닌데요."
"당신은 원래 그 이름으로 스웨덴에 태어나기로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어째서 한국 땅에 태어났지요?"
"그쪽에서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거부당했다는 얘기는?"
"낙태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금전의 그 엄청난 고통은....?"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에 낙태당시의 고통이 되살아
난거지요."
"세상에! 그렇게 낙태의 고통이 그렇게 지독하다니...."
필자는 그런 고통을 누군가에게 준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했다.
모르고 한 짓이지만 잘못은 잘못이요, 죄는 죄다.
이 부끄러운 얘기를 하는 것은 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카톨릭에서는 낙태를 준엄하게 금지했었다.
세월에 따라 약간 변질된 점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명(天命)을 거역하는 행위인 것이다.
필자의 경우처럼 고통을 겪는다해도
전생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전생여행이란 책을 통해서 호기심이 부쩍 일었을 테고
녹음 테이프를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행해 보았지만 대부분이 실패했을 것이다.
필자의 고등학교 다니는 작은아들 녀석도 잘 안되더라고
얘기했다.
"아빠, 이거 가짜 아닙니까?"
"이거 엉터리 아닙니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네가 전생을 알아서 어디 쓸려고 그러니?
네가 전생을 꼭 알아야만 할 절실한 무언가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네가 전생을 알고자하는 것은 호기심 때문이겠지...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믿거나 말거나 전생은 누구에게도 있었고,
또,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내 말을 믿고 너는 네 공부나 해라.
지금은 네가 그런 일에 마음 쓸 시기가 아니다."
아들에게는 이 정도의 얘기로 진정시키고 말았다.
상대가 학생이라면 같은 얘기를 해주고싶다.
그러나
꼭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몇 마디 부언하겠다.
가장 확실하게 알고 싶으면 <전생여행>의 필자인
김 영 우 박사를 찾아가면 된다.
테이프를 들으면서 하고 싶은 분들에게 몇 마디 도움을 주자면
다음과 같다.
그 과정이 유체이탈을 실행하는 방법과 매우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약간 달라져야 하고
준비상태가 달라져야만 한다.
유체 이탈은 육신을 잠재워야하기 때문에
육신이 잠을 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만
전생여행을 하기 위한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
즉,
자기최면을 해야하는데,
육신이 피로해서 잠을 자려고 할 때에는
실행해 보았자 꿈속으로 빠져버린다.
따라서 전생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은 충분히 잠을 자 둔 상태에서
실행을 해야 꿈이나 환상으로 빠질 확률이 낮다.
그리고 한 두 번 해보고 "에이, 엉터리구나."
하고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
한번에 안되면 두 번.
두 번에 안되면 열 번이라도 해서 성공을 해야하고
그 중에서 한번의 성공으로 얻은 결론을
진짜라고 단언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열 번을 성공해도 거의 대부분이 환상이나 꿈을 볼 확률이 많다.
수 십 번을 실행에 옮겨 성공을 하다보면
그 중에서 확실한 것이 잡힐 것이다.
필자도 타인에 의해서 최면을 받아 본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방면에 많은 경험과 능력이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해결되리라는 것은 안다.
막연하게 자기최면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실망을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몇 마디 부언했으니 참고를 하면 좋겠다.
(전생여행의 필자에게 누가 되지는 않겠지요?
허락 없이 언급한 것에 대해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언쟁>
A는 독실한 기독교 신도다.
어느 날 A가 물었다.
"전생(前生)이 어디 있소? 성경(聖經)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
"성서(聖書)가 전부는 아니외다."
"성서(聖書)가 전부가 아니라니요? 그런 불경(不敬)이 어디 있소?"
"그러면 내가 묻겠소. 성서는 몇 권입니까?"
"육십 여섯 권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칠십 이권인데 어찌 당신네는 여섯 권이
부족하오?"
"카톨릭은 이단 아니오? 우상 숭배하는..."
"누가 그렇게 가르칩디까?"
"목사님이..."
"전생이 없다고 믿으십니까?"
"전생이 어디 있어요?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고,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믿고,
죽어서는 천국에 들어간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또 공평하신 분이라고
하였는데, 이 세상에 같은 처지에 처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논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지독한 심술쟁이에다가
욕심쟁이요."
"아니? 무슨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합니까?"
"세상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통 없이 편하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장애자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세상에 버려져 굶어 죽는
이들도 허다하게 있소.
그들도 하느님의 똑같은 축복으로 태어났습니까?"
"................................."
"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
"성서가 언제 쓰여졌는지 아십니까?"
"................................."
"성서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쓰여졌는지도 모르면서
걸핏하면 성서를 들먹입니까?
당신네 목사에게 물어보면 믿음이 부족해서
엉뚱한 의문을 품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니 내 알려주리다.
구약 성서는 젖혀두고 신약성서만 가지고 얘기합시다.
신약성서는 쓴 사람의 이름이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마태오가 썼고, 요한 복음은 분명히 요한이
썼다는 얘깁니다.
그 성서들이 정확히 언제 쓰여졌는지 나도 잘 모릅니다.
들은 얘기지만,
신약 성서의 핵심인 사 복음서 중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간 후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랍니다.
왜 그렇게 세월이 흐른 다음에 쓰여졌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제일 먼저 썼다는 것이 마가복음(마르꼬)이고,
다른 것은 40년, 60년이 지나서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예수의 행적을 네 가지나 한꺼번에 올려놓았지요.
왜 네 가지나 함께 올려놓았을까요?
그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 썼던 까닭에 사람마다 기억도
틀리기 때문에 정확을 기하느라고 그랬겠지요.
그리고 예수의 행적을 남긴 문서가 사복음서 밖에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마 예수의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많이 썼겠지요.
아마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문서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중 가장 정확하고 상세한 기록들만 네 개를 뽑아서
성서로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누가 성서를 선택하였을까요?
로마에서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 와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고,
교회는 대외적으로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바티칸공의회란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정책이나 교리, 교회 법을 제정할 때
교황을 위시한 지도자들(추기경)이 모여서 논의하는 단체입니다.
그 바티칸공의회에서 여러 가지 문서들 중에서 이러이러한
것들만을 성서로 채택하자 하고 결정을 했답니다.
그 시기가 예수께서 죽은지 300여 년이 지난 4 세기 경 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 보니 성서에 대해 말도 많았겠지요.
인간사가 다 그렇지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썽이 좀 많습니까?
그래서 다시 성서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다시 모여 논의를 했는데,
결국,
처음에 정한대로 그대로 사용하기로 다시 결정을 했답니다.
그것이 11세기경입니다.
지금 카톨릭에서 사용하고있는 72권의 성서는
이러한 과정과 우여곡절을 겪어서 결정된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지금의 66권만이 진짜 성서라고 우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내 얘기가 사실인지 당신네 목사에게 가서 물어보실 의향은
있습니까?"
"......................................................"
"개신교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기에
정통 뿌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카톨릭을
우상숭배자요 이단이라고 말합니까?"
"개신교는 카톨릭이 부패했을 때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해서 시작되었고........에...또...."
"마르틴 루터는 무엇을 하던 사람입니까?"
"그건....잘.. 모르는데요...."
"마르틴 루터는 신부였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그는 종교개혁을 한 사실도 없는
그저 카톨릭의 평범한 신부들 중 한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종교 개혁을 했다고 교과서에 써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시의 교회 법은 엄격하기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습니다.
루터의 논리가 당시의 교회 법을 어긴 것이지요.
지금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루터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파문 당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엄격한 교회법은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파문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파문을 당한 루터는 지금의 개신교 형태로 교회를 변형했을까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가 파문 당한 사실은 카톨릭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부패 때문에 교회와 정면 충돌 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당시의 교회 법으로 논의가 금지된 어떤 사안을 놓고
해석이 달랐다는 것이 그가 파문된 이유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종교개혁이라니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나도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자세한 자료도 없고 해서
이 정도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이 주장하는 사실은 너무 근거도 없고,
맹목적인 면이 강합니다. 인정하시겠습니까?"
"건....그렇고, 전생, 환생에 대해서는 성서에 전혀 언급이
없는데요........."
"또, 성서 얘기입니까? 성서가 전부 다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지만,
승복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전해 내려온 문서를 모두다 성서로 채택한 것이 아닙니다.
공의회에서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한 것이 지금의 성서이고,
그 밖의 문서들도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구전(口傳)되어 오는 것도 있고요....
성서 외의 것들은 성전(聖傳)이라고 부른답니다.
좌우간, 초기 교회에서는 전생(轉生)이 정설(定說)로 되어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들은 얘기지만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553년 유스띠노스 황제 시절에 교황과 황제의 마찰로 인해서
그 얘기(환생)를 금지시켰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전통이 지켜지고 있답니다."
***독자 여러분께 충고한마디....***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하고는 절대로 논쟁(論爭)을 하지 마십시오.
특히, 종교(宗敎)문제(問題)나 교리(敎理), 성경(聖經)의 해석(解釋) 등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달려드는 사람에게는 깨우쳐줄 방법이 없답니다.
제2부. 유체이탈의 실행
1부에서의 온갖 잡소리를 읽으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유체이탈이란 것이 장난으로 하거나
호기심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얘기에 공감(共感)하는 분도 있겠고,
헛소리로 생각할 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본인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
저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걸음씩, 한가지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얄팍한 생각도 드러나 보일 것입니다.
정치 행태나 정치인들의 속임수도 보입니다.
당신의 직관력은 한층 더 발전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점점 온화한 성격으로 변해 갑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도 창피할 정도로 감정이 여려질 것입니다.
필자도
요즈음에는 TV에서 헤어진 형제나 부모를 수십 년만에 만나
오열하는 사람들을 보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아픔이 거짓말처럼
내 가슴에 전이(轉移)되는 현상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영혼을 닦아주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전(前)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길가의 걸인, 육교 위의 장애인,
청량리 홍등가의 붉은 불빛아래 진열되어있는
자식 또래의 처녀들이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이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더라도 당신의 그 느낌은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격정이나 욕망에서 헤어나게 될 것입니다.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가리라 믿습니다.
흔히들
타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참으로 겸손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게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학식, 직위, 재산, 외모, 등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난
-보잘것없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스스로에게 가르쳐주고,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때 참된 겸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겸손이란 상대적이 아닙니다.
참된 겸손이란 바로 자기자신이 대상일 뿐입니다.
참된 겸손을 통해야만 참된 사랑도 가능하고,
깨달음도 한층 더 가까워집니다.
윤회와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숙명을 깨닫게 되면
가족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부모, 형제, 처, 자녀...
기꺼이 용서해줄 수 있고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행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이미 어제의 당신이 아닙니다.
이미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실행 환경.>
첫째조건, 방해받지 않을 장소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들락거리거나 시끄러운 곳에서 유체이탈은 불가능하다.
전화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려도 안되고,
야채나 생선 장사의 트럭이 갑자기 떠들어대도 곤란하다.
이탈이 되었더라도 즉시 복귀하기 때문에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을 장소를 택한다.
그것이 불가능 할 때에는 시간을 잘 선택한다.
둘째 조건,
음(淫)한 장소는 피해야한다.
음(淫)한 장소는 어딘가?
여관 같은 곳이다.
색정(色情) 관계로 한 맺힌 망자(亡者)들이 득실거린다.
잘못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빠져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귀신이 나온다는 곳도 피해야할 장소다.
왜?
공포심이 배가될 것이다.
공포심은 괴로움을 수반하게 된다.
지박령이 (터 귀신이라고도 함)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있으면
소리가 난다.
집안에 지박령이 있으면 가끔씩 가구 등이 깨지는 소리를 낸다.
명상이나 기도를 하면 방해를 잘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놈은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내기도하고,
어떤 집에서는 한 밤중에 옥상에서 사람이 뛰어 다니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초보자가 그런 곳에서 이탈하기란 쉽지 않다.
공포심이 그것을 매우 힘들게 만든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는 자신의 집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기온의 변화가 별로 없는데도 집안의 어떤 기물에서 소리가
난다면
십중팔구 지박령의 짓이다.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안식향을 태운다.
안식향은 경동시장의 한약재상에서 쉽게 구입 할 수 있다.
7, 8년 전에 한근에 3,000원에 사서 필요한 여러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대부분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을 했다.
이 방법은 동의보감에 나와있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보면 "안식향을 태우면 鬼神을 쫓고 神을 부른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몽중귀교"에도 처방되는 약재다.
<몽중귀교>란 무엇인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꿈속에서 귀신과 교접하는 행위를 말한다.
꿈속에서는 남매간의 통정도 있을 수 있고, 그보다 더
망칙한 꿈을 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꿈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허 준 선생은 <몽중귀교>를 병으로 분류해서
치료하라 했을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꿈으로 알고) 귀신과 교접을 한다.
귀신과의 교접과 꿈과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어떻게 구별해야하나?
필자가 주위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거의 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바르게 가르쳐 주었지만 제대로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단순한 꿈은 자신이 제 3자로 보인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귀신과의 교접은 실제로 자신이 行 하고 있기 때문에
제3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꿈에서와는 달리 그 느낌이 생시와 똑 같다.
입술이 닿는 느낌, 피부의 감촉....등등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잠이 막 들 무렵에 겪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이 깊이 들 때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 틈은 우리가 죽은자의 세계를 잠깐 인식하는 순간이다.
(대부분이 저승과의 접촉은 모른다.)
몸의 상태에 따라서 그 시간이 조금 길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자신이 평소에 원했다면 이성이 다가온다.
그 이성은 물론 색정에 한 맺힌 망령이다.
그러나 상대와의 교접이 시작되면 금방 의식이 돌아온다.
몸이 같은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즉 잠이 깨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바로 잠이 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꿈으로 생각하기 쉽다.
어떤 여인은 얼마전 남편이 죽었다.
처음에 몹시 슬퍼했던 그녀는 곧 다시 생기를 찾았다.
가까운 사람이 물어 보았더니 "저는 남편이 살아있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마치 살아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하더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그이는 밤마다 저를 찾아와요. 사랑도 나누는 걸요."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더라고 필자에게 전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즐기면 오래지않아 그녀는 발병하거나 쇠약해지고 만다.
그 귀신의 정체는 남편이 아닐 가능성이 많으며, 남편이라 해도
거부해야한다.
그래야만 죽은자의 길을 갈 수가 있을 테니까.
어째서 남편이 아니라고 단정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둘 다 독실한 기독교도다.
예외도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은 평소에 교육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혼탁한 죽은자의 세상에서 헤매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이 여자도 암으로 남편을 잃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밤마다 찾아와 자기를 위로해 준단다.
에수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 그녀는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몇 해전 신문에서 읽은 것인데 서양에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사랑했던 부부는 한쪽이 사망한 후에도 50% 정도는 만나고
사랑도 나누고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모두 몽중귀교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신은 어떤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은 없는가?
아마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귀신과의 교접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유체 이탈은 자신의 의식이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에-
그 찰나에 온힘을 다하여 뛰쳐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가위눌리는 무서움을 겪어 보았겠지만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 그랬다.
입대하던 해인 1972년에는 몹시도 시달렸다.
잠을 자기가 무서웠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창문으로 시커먼 놈이 들어와 가슴에
올라타고 목을 졸라댔다.
불을 켜고 자도 소용이 없었고 기도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포를 시달리다보니 갑자기 척추가 마비되었다.
이십 여일 만에 회복이 되었지만 참으로 무서운 기억이었다.
군(軍)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가 자던 막사 터가 6.25 때 시체를 매장했던
자리였다는 것이었다.
사회인이 되고 일들이 몹시도 어렵게 진행되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도 파산되기 일쑤고, 작은 사업을 해 보고
싶어도 자금 조달할 능력이 없었다.
주위에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많았지만 도움 받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수재 소리를 듣던 내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사회생활도 공부처럼 쉬울 줄 알았던 자만심이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도 어려움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숱한 밤을 기도로 새워 보았고, 명상으로 원인을 찾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중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러자 가위눌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옛날에는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래서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의 잘못 때문에 내 주위에 이런 것들이 넘실거리고
그것들의 방해로 내 삶이 이리도 힘들고,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자.
내가 하려는 이 행위가 神의 노여움을 사서
설사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이들에게 나의 고통이 전가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그래서
며칠 밤을 준비했다.
기도하고, 명상을 하고, 신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두려움, 공포와 함께 맞서 싸우고 , 같이 죽으려고
그 세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잠이 들 무렵에 나를 향해 다가와 괴롭히던 그 형상을 향해
마주쳐 나갔다.
"너 나하고 같이 지옥으로 가자! 내가 너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괴로움을 같이 당해보자.
내 아이들이 너희들 같은 더러운 놈들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목숨이 아까울 게 없다!"
그러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공포심의 산물이었다.
당신이 이탈을 하기 직전에 느끼는 공포, 이상한 소리들은
모두 당신 속에 숨어있는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탈의 횟수가 거듭되어도 이상한 소리 ,
낄낄 거리는 웃음,
말소리
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미처 이탈되지 않았을 때에는 몹시 두렵다.
이때에는 이렇게 말하라 아주 강하고 독하게.
"너 누군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일어나서 혼내줄 것이다."
더 심하고 원색적인 말도 좋다.
그럴수록 자신이 점점 강인해 지니까...
그 정도면 약한 놈은 대부분이 도망가고 없다.
이탈이 되었으면 방안을 샅샅이 살펴보아야 한다.
낯선 사람이 있으면 겁먹지 말고 필자가 해온 것처럼
해보면 된다.
설득해 보고 안되면 쫓아버려야 한다.
아주 강경하게...
몸이 둥실 뜨는 듯하면 마음을 가다듬고 바로 잡을 수 있다.
전기 스위치가 있으면 켜보자.
딸각 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자. 실제처럼 느껴진다.
이번에는 방문을 열지 않은 채로 그냥 통과해 보자.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가능하다.
그런데 벽 통과는 쉽지 않다.
이탈이 되면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그 욕망을 억제하도록 해야한다.
당신의 평소 생각과는 다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이탈한 당신의 영은 본능만으로 움직이기 쉽다.
스스로 달래고 일깨우고....
천방지축으로 뛰어가려는 어린아이처럼 분별력이 없다.
스스로 가르치고, 억제하고....
그러다 보면 점점 이성이 살아나 성숙해 질 것이다.
물론 단 시일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번 한 얘기지만 그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혼미하기 짝이 없는 저질 영(靈)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 이제 이탈을 실행해 보자.
바른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환상으로 갈 수도 있으니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자.
(실행의 첫 단계 호흡)
유체이탈을 실행하자면
우선 호흡과 정신통일로 상(上)단전(丹田)에 기를 모아야한다.
유체이탈이 가능한 시간은 상 단전에
기(氣)가 얼마나 차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도 처음에는 5분에서 20분 정도였으나 요즈음은
두세 시간이상도 가능하다.
이미
단전호흡을 해본 사람은 약간의 준비만으로도 충분하다.
필자는 16초간의 호흡으로 준비를 했다.
단전호흡처럼 길게 호흡하면 오히려 방해 될 수도 있으니
4초나 8초 정도로 쉽게 하는 것이 좋다.
초침 소리에 따라서 하나, 둘 해도 좋고
다른 방법을 써도 괜찮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종교에서 사용하는 주문 같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귀신 부르는 주문 같은 것은 절대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는 "精神一到 河事不誠"(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사용했다.
8초씩 16초간의 호흡을 했다.
단전호흡처럼 의식을 하 단전에 두고 깊게 호흡하지 말고
상 단전(미간)에 두고 배를 불룩이지 말고 편하게 하면 좋다.
그러면 5-10분이면 누구나 氣를 느낄 것이다.
氣의 가느다란 줄기가 머리 위에서 뚫고 들어와 미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몸을 약간씩 흔들어 댈 것이다.
심한 경우는 몸이 심하게 요동 칠 것이다.
놀라거나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단순히 기의 움직임에 몸이 동조할 뿐이다.
한참을 그러다 잠잠해지면 된다.
그러한 과정이 없어도 미간이 그저 묵직해 지면
준비는 된 것이다.
눈을 감고 준비하는 동안 눈앞에 무서운 형상이나
기괴한 모습이 자꾸 나타나면 중지하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자기 바란다.
이때 억지로 행하면 공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호흡을 하며 준비하는 중에 눈앞에 녹색의 빛이나 청색의 빛이
보이면 충분히 준비 된 것이다.
어찌되었던, 상단전이 묵직하면 이탈이 준비된 것이다.
*호흡의 자세
결가부좌나 반가부좌, 이도 안되면 책상다리를 해도 좋다.
이때, 엉덩이 밑에 방석을 적당히 깔아서
허리가 펴질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한다.
시선은 자신의 코끝으로 향하고 눈을 감는다.
벽에서 1미터 이상 떨어져 자리를 잡는다.
(기의 작용으로 흔들리다가 벽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둘째 단계 편하게 누워 정신통일)
이제 편하게 눕는다.
베게는 너무 높지 않게 하되 목뒤에 받치고,
팔 다리를 편히 뻗고 힘을 뺀다.
눈을 감고 의식을 상 단전에 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자.
"하늘에서 기운이 내려온다. 내 두 눈 사이로
들어온다."
이미 준비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두 눈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들어올 것이다.
미간에 바람이 살랑거리는 느낌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정신은 맑아지고 심신은 피로해져 잠이 온다.
이 때,
아주 강하게 자신에게 암시하라.
"자! 이제 잠이 온다. 잠이 온다.
내 육신은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난다."
이렇게 몇 번 강하게 되 뇌이면
거짓말처럼 잠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귀에서 -앵- 하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이때 다시
"자! 이제 일어난다. 일어난다."하고 강하게 외쳐야한다.
물론 소리는 내지 않지만...
그러면 순간적으로 이탈이 될 것이다.
처음 시도하더라도 십중팔구 이탈에 성공할 것이다.
이탈에 한 번 성공하면 당신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이탈이 가능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만날 수도 있다.
불교인이라면 "석가"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적이 불확실하면 안 된다.
"내가 하느님이다." 하고 길을 막는 놈이 있으면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도 기독교인에게는 의심스러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도 바른 마음으로 이탈을 하다보면
필자의 주장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 사람 앞에 나타나 "내가 예수다"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
어떻게 진짜를 판별할 수 있는가?
만나 보면 알게된다.
당신은 유체 이탈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헛소리를 하거나
환상이나 환각, 환청을 사실로 착각하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갈 길을 거부하고
구천을 떠도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체 이탈이 어려운 것은 절대 아니다.
유체 이탈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힘들뿐이었다.
당신은 이제 사물을 바로 보고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문 앞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그마한 나룻배로 먼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큰 바다로 가볼 수도 있고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수를 가볼 수도 있다.
연못에서 맴돌다 그칠 수도 있고,
물 빠진 개펄에 얹혀진 채로
무의미하게 앉아 있다 돌아올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육신을 비워놓고 없는 동안 딴 놈이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영은 자기의 육신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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