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3)을지문덕.
을지문덕 (?∼?)
고구려의 장군이다. 그는 침착하고 대범하였으며,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다. 또한, 시를
짓는 솜씨에도 뛰어났다. 영양왕 23년인 612년, 수나라 양제가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
려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우중문,우문술 두 장수로 하여금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은 항복하는 체하고 적진에 들어가 염탐하였다. 을지문
덕이 고구려로 돌아간 후, 속은 것을 안 수나라 군사가 추격을 시작하자, 후퇴하는 척하며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도하였다. 이 때 우중문의 화를 돋우고, 그를 유인하기 위해 보낸 시
는 유명한 명문장으로 남아 있다. 우중문은 지친 군대로 험난한 평양성을 공격하기 어렵다
고 판단하여 후퇴하였다. 이 때, 을지문덕은 살수(청천강)를 건너는 수나라 군사를 공격하
여 전멸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이다.
1. 천운을 타고난 소년
신라가 당의 힘을 빌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서기 668년이었다.
을지문덕은 태어난 해도, 죽은 해도, 부모 이름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망하기 100년 전쯤에 태어났다고 믿어진다.
을지문덕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이던 평양성 근처 석다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고구려는 갖가지 신을 믿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10월이면 귀신, 사직, 영성
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또 수신 이라는 동굴신도 믿었다.
고구려에는 서기 372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불교는 귀신 따위를 받드는 갖가지
미신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이를 적극 배격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을지씨의 집에 스님이 시주를 하러 왔다. 을지씨는 불교를 믿지 않았지만 후하
게 시주를 하였다. 마침 아내가 아기를 가졌고, 해산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으며 말하였다.
훌륭한 아기가 태어나실 것입니다. 태어난 아기는 장차 자라서, 글도 잘 하며 덕이 높을
것입니다. 스님,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저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구려의 역사를 볼 때,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여 강대한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계루부
(내부), 연노부(서부), 절노부(북부), 순노부(동부), 관노부(남부) 등 오부가 있었는데, 을
지씨는 계루부에 속하며 지배층에 속하였다. 각 부족은 독립적인 군사력과 조직을 가졌다.
그것은 이들이 기마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전통적 관습도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넓은 광야를 쉴 새 없이 이동하며 유목 생활을 하던 때에는 다른 부족을 공격하고, 또 공
격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력이 있어야 했고, 부족의 단결이 필요하
였다.
그런데 농사를 짓게 되면서 생활에 여유도 생기고 문화도 발전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농업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농경 민족에 비해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고구려가 쇠약해진
까닭도 이런 데 있었다.
태어나는 아이를 잘 키우셔야 합니다.
스님,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고맙소. 을지씨는 기뻐하며, 하인을 시켜 곡식을 가져오
게 하여 스님에게 또 시주하였다.
이윽고 을지씨 부인은 아주 씩씩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을지씨는 아기의 이름을 여러 가
지로 생각하다가, 글이 뛰어나고 덕이 높다는 뜻으로 문덕 이라 지었다.
스님의 말대로 이 아기에게는 글을 가르쳐 덕이 있는 지도자로 만들어야지. 무예만 뛰어
나가도 훌륭한 인물은 되지 못하니까.
이렇게 다짐한 문덕의 아버지 을지씨는 뜰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나무를 키우듯 아들
도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덕은 무럭무럭 자랐다. 아버지는 문덕에게 글을 가르쳤다. 문덕은 어느덧 대여섯 살이
되었다. 한 곳에 오래 앉아 스승으로부터 글을 배운다는 것은 지루하기만 하였다. 들판이고
동산에 올라가 마음껏 뛰어 놀고 싶었다.
아버지, 저는 글보다는 말달리기나 활쏘기를 하고 싶어요. 아이들은 칼싸움을 하며 재미
있게 노는데…….
문덕아, 그런 것은 네가 좀더 크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더욱이 너는 을지씨의 장손이
잖니. 집안을 이끌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글이란 어려서 배우는 법이다.
문덕은 눈을 샛별같이 빛내면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지혜가 무엇이죠?
그것은 슬기란다.
그럼 슬기는 무엇이죠?
이녀석, 꼬치꼬치 캐묻기는…….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아들의 질문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단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할 줄 아는 것도 슬기다. 예를
들어, 네가 길을 가고 있는데, 앞에 큰 바윗덩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하겠느냐?
…….
너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바위를 움직이려고 해도 꼼짝하지 않겠지. 그러나 나무 막대
로 지렛대를 삼으면 쉽게 움직일 수 있단다.
아, 그렇군요!
그래, 바로 이런 것이 슬기라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말을 들은 문덕은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공부보다는
무예를 더 좋아하였다.
그 당시 고구려에는 동맹 이라는 추수 감사제가 있었다. 이 때는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
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하루를 즐겁게 놀았다.
동맹은 조상신에 대한 제사뿐 아니라, 풍성한 가을 추수를 베푼 신들에 대한 감사의 잔치
행사였다.
동맹 행사에는 갖가지 무술대회가 있었다. 시름, 활쏘기, 말달리기, 돌팔매질 같은 무예
를 겨루는 것이었다.
열 살이 되었을 무렵, 문덕은 처음으로 활쏘기 대회에 나갔다. 구경꾼들은 문덕을 보자
수군거렸다.
아직 어린 아이가 아니오?
음 그렇지만 을지씨 대표로 나왔으니 활을 잘 쏘겠지.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소년 궁수와 과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덕은 말을 타고서도 쏠 수 있는 반궁을 들고 나왔다. 비록 큰 활은 아니었지만, 쇠뿔로
만든 전투용 활이라 문덕의 힘으로서는 시윗줄을 당기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문덕은 시윗줄을 힘껏 보름달처럼 잡아 늘였다. 화살은 과녁 중심을 꿰뚫었다. 그
는 세 개의 화살을 연달아 번개처럼 빨리 쏘았고, 그것들은 모두 과녁에 명중되었다.
앗, 신궁이다!
정말 활의 명수다.
온달 장군의 뒤를 이을 명장이 나타났구나!
온달은 평원왕 때의 고구려 장군이다.
문덕이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킬 적마다 약공은 피리를 불었고, 쟁을 울리며 사람들의 흥
을 돋우었다. 국가적 행사라 악공들도 한껏 차려 입고 나왔다.
악공의 음악에 맞추어 4명의 춤꾼이 각각 2인 1조가 되어 춤을 추었다. 이들은 머리카락
을 뒤로 틀어올리고, 이마에 연지를 바르고 금색의 모자 같은 것을 썼다. 그리고 2명은 노
란 저고리에 붉은 바지를 입고, 2명은 붉은 저고리에 노란 바지를 입고 있어 대조적이었다.
또, 까만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춤은 나비가 꽃을 반기는 것 같았고, 잠자
라가 하늘을 날 듯이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옛날에는 저런 춤을 구경도 못했었지.
할머니!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아요.
아름답기만 하면 뭐하나? 너무 사치스럽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감상도 각각 달랐다. 노인들은 화려한 춤이 사치스럽다고 느끼고 있었
으나, 젊은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해 보았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고구려는 지금 사회적 변화를 맞고 있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편해지자 낭비가 심해
졌다. 일이 조금만 힘들어도 하지 않았고 손쉬운 것만 찾았다. 악공의 악기가 많아진 것도,
춤꾼의 춤이 우아해진 것도 그런 현실의 하나였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즐겁게 노는 것과는 달리 개울에서는 아이들이 편을 갈라
돌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문덕은 한쪽 편의 대장이 되어 소리를 치고 있었다.
돌을 던져라, 던져! 저녀석들이 물러갈 때까지 돌을 힘껏 던져라.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돌멩이가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위험한 장난이었다.
이런 돌싸움에 대해서도 어른들의 생각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돌멩이에 머리를 맞아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요? 돌멩이쯤 맞았다고 죽지는 않
아요. 머리가 터지고 피가 나기는 하겠지만, 적과 싸우려면 그만한 용기는 필요해요.
문덕은 외쳐댔다.
야, 저 녀석들이 도망치고 있다. 바짝 뒤쫓아라!
문덕은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좋아했다. 동맹 행사에는 마술 대회도 있었다. 말을 타고 달
리면서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고삐도 없는 말을 타고 달리
며, 그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부렸다. 말 잔등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가 하면, 말 옆구리
에 찰싹 달라붙어 달리기도 하였다. 또, 달리는 말의 배 아래로 내려갔다가 반대편 옆구리
로 달라붙는 재주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문덕은 마술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한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사
이에 아버지가 곁에 와서 물었다.
문덕아, 말을 타고 싶니?
네, 아버지!
그럴테지. 말을 탈 줄 모른다면 우리 고구려 사람이라 할 수 없으니까. 조상들은 젖먹이
때부터 말을 탔었단다.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옛날에는 남자고 여자고 모두 말을 탔었지, 어머니가 젖먹이를 가죽 주머
니에 넣어 말 옆구리에 달고 광야를 달렸으니까.
문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 성왕이란다.
그 분은 어떤 분인데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쑹화 강을 지키는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다.
동부여에서는 정기적으로 활쏘기 대회를 열었고, 여기서 활을 가장 잘 쏘는 사람을 주
몽 이라 불렀는데, 아이도 왕자들이 참가하는 활쏘기 대회에 나가 모든 왕자들을 제치고 주
몽이 되었다. 그러나 왕자들의 미움을 사서 주몽은 새 땅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단다.
그래서요?
문덕은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차츰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주몽이 떠나려고 하자 그를 따르던 오이, 마리, 협부도 뒤를 따랐다. 그 당시 홑몸이 아
닌 주몽의 아내 예씨 부인은 함께 따라갈 수 없어 슬픔에 젖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주몽
일행은 밤새껏 달려 먼동이 틀 무렵, 엄수강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었다. 뒤쫓아오는 추격병
의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자, 주몽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그것을 밟고 무사히 건너 갈 수가 있었단다.
주몽은 그 뒤, 졸본 부여에 이르러 땅이 기름지고 산천이 험준하니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땅에 터를 닦고 고구려를 세우고, 자기의 성도 고시로 부르게 하였다.
이로써 고주몽은 동명 성왕으로 불리는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 기원전 37년, 그의 나이
스물 두 살 때의 일이었지.
그것이 우리 고구려의 시작이에요?
그렇다. 하루는 강물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왕은 생각했지. 옳지, 강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구나.
이리하여 왕은 비류국에 이르렀고 , 그 나라 왕 송양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항복을 받았
다. 그런 뒤, 왕은 다시 행인국을 쳤고, 북옥저를 쳐 없애어 영토를 넓혀 나갔던 것이란
다.
그 날 밤, 문덕은 밤늦도록 밤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동명 성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탓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망아지를 그에게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말을 바로 주고 싶다마는 망아지 때부터 공들여 키우는 게 좋을 것이다. 말은 워
낙 성미가 까다로운 짐승이니까 말이다.
문덕의 아버지는 씨족의 우두머리였던 만큼 말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문덕은 아버지가
어째서 망아지 때부터 길들여야 한다고 말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문덕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범이란 영감이 있었다.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더 많아
머리가 하얗고 수염이 온 얼굴을 덮을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기를 잘 하여 말과 함께 뛰어
도 뒤지지 않았다.
도련님, 망아지는 어른 말보다도 성질이 더 사납습니다. 그래도 좋겠습니까? 하고 범이
영감은 씨익 웃으며 겁을 주었다. 문덕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
그렇지만 망아지를 돌봐 주려면 매일 몸도 닦아주고 말똥도 도련님이 치워주어야 합니
다. 하고 범이 영감은 또 씨익 웃었다.
알았어.
이윽고 말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통나무로 울을 치고 드문드문 가로로 나무를 걸친 마
구간에 수백 마리의 말과 망아지들이 있었다.
도련님, 어떤 망아지로 하시렵니까? 가리켜 주시면 제가 목에 밧줄을 걸어 들리겠습니
다. 문덕은 두리번거리다가 몸이 튼튼하고 다리가 날씬한 검은 빛깔의 망아지를 가리켰다.
도련님은 역시 눈이 높으시군요. 저 망아지는 목 언저리에 흰 털이 드문드문 있는 것이
이 다음에 준마가 될 것입니다. 저 말은 오추마 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잘난 놈일수록 성
질은 고약한 법입니다.
범이 영감은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익숙한 솜씨로 망아지 몸에 밧줄
을 걸었다. 그리고 끌어내어 밧줄의 한 끝을 문덕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낯도 익힐 겸 망아지에게 운동을 시키도록 하십시오.
문덕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망아지인가? 문덕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망아지가 별안간 뛰기 시작했다. 망아지라고 얕볼 수 없는 무서운 힘이었다. 잡아
끄는 힘에 문덕은 앞으로 고꾸라져 질질 땅바닥에 끌려갔다. 하지만 문덕은 밧줄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따라갔다.
범이 영감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것 보십시오. 못된 망아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망아지는 얼마쯤 뛰다가 멈추었다.
문덕은 무릎의 허물이 벗겨졌지만 밧줄을 꽉 잡고 있었다. 문덕은 약이 올라 일어서자마자
밧줄을 힘껏 잡아 끌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망아지는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
었다. 그제야 범이 영감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놈이 도련님을 얕잡아보고 심술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껏 주먹으로 콧잔등을
때려 주세요. 그러면 앞으로는 도련님의 말을 잘 들을 것입니다.
그 후 문덕은 말과 거의 생활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문덕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동맹 행사의 마술 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던 것이다.
문덕은 달리는 두 마리의 말 위에서 온갖 재주를 부렸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활도 잘 쏘지만 말도 잘 타는구나! 범이 영감은 문덕에게 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가
르쳐 주었다.
말은 영리한 동물로 신경질이 많으나, 고구려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물입니다. 헤
엄도 잘 치고, 또 무리를 짓는 본능이 있어 아무리 낯선 곳에 가더라도 혼자 집을 찾아 돌
아오지요.
아버지는 문덕에게 역사 이야기를 자주 해 주었다.
동명 성왕 다음은 유리왕이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주몽의 아내 예씨 부인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유리였다. 유리가 하루는 활로 새를 쏘려다가 잘못하여 물을 긷는 여자의 물
동이를 깨뜨렸다. 그러자 그 여자는 유리에게 아버지 없는 자식이니까 버릇이 없다고 욕을
했단다. 유리는 울며 돌아와 어머니에게 어머니, 우리 아버지는 어디 계셔요? 하고 물었
지. 그러자 어머니는 주몽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너의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시다.
나라를 세우시고 왕이 되셨단다. 너도 컸으니 아버지를 찾아가거라. 하고 말하였단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에 찾아온 유리가 바로 고구려의 2대 왕인 유리왕이다.
주몽이 도읍으로 정한 졸본은 압록강 건너 지평선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넓은 광야였
다. 고구려 사람들의 조상은 이 벌판에서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고 밭곡식도 심으며 살았던
것이다.
유리왕 시절 고구려의 큰 적은 선비족이었다. 유리왕은 선비족을 무찔러 더욱 영토를 넓
혔고, 도읍을 국내성(통구)으로 옮겼다. 도읍을 새로 옮겼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의 힘이 커
졌음을 말했다.
유리왕에게는 힘이 세고 용맹스러운 해명 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해명의 소문을 들은
황룡국의 왕은 아주 억센 활을 고구려로 보내왔다. 해명은 그 활을 사자가 보는 앞에서 당
겨 꺾어 버리고는 내가 힘이 있는게 아니라 활이 너무 약하군. 하고 말하였다. 이런 말을
들은 황룡국 왕은 해명을 자기 나라로 초대하였다. 해명의 용맹이 두려워서 자기 나라에 불
러들여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것이지. 그러나 막상 해명을 만나 보니 그가 덕이 있는 것을 알
고 감히 죽이지 못했단다.
아버지께서 왜 나에게 해명 왕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을까?
문덕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사람은 무예만 있다고 자랑할 것이 못된다. 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
어느 날, 문덕은 아버지께 나아가 공손히 말했다.
아버님, 저도 이제 새해를 맞으면 열여섯 살이 됩니다. 그래서 수도를 하기 위해 석다산
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사람은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무 겸전이란 말이 있다. 글과 무예가 아울러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무예 중
에서도 칼쓰기, 활쏘기, 말달리기는 무인으로서의 기초 단련에 속한다. 그러나 장군이 되려
면 병법도 알아야 한다.
네.
병법은, 말하자면 지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유리왕 다음에 대무신왕이 뒤를 이었는데,
그 때 부여의 대소가 새로 일어나는 고구려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쳐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
은 대무신왕은 진구령 앞에 진을 치고 마른 풀 따위로 수렁을 덮었다. 부여의 대소는 이런
꾀도 모르고 고구려군을 공격했다가, 수렁에 기마대가 빠져 진멸하고 말았단다.
또, 왕은 을두지라는 인물을 얻어 대신으로 삼았다. 서기 28년,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대
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을두지는 왕에게 임금님, 지금 한나라가 대군으로
공격해 와서 기세가 자못 높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며, 적의 힘이 약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성을 포위
한 지 수십 일이 되었으나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자 을두지는 또 적들은 이 곳이 암석 지
대라 샘물이 없다고 믿고 이렇듯 오래 포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연못의 잉
어를 잡아 물풀에 싸서 좋을 술과 함께 적에게 보내십시오. 하고 말했다.
왕은 을두지의 꾀를 좇았고, 한나라 군사는 이 선물을 받자, 포위 공격이 소용없다고 생
각하고 스스로 물러갔단다.
문덕아, 이런 게 모두 병법이다. 너는 장군이 될 사람으로 아무쪼록 병법을 배우도록 하
여라. 문덕은 집을 떠나 석다산에 들어갔다. 때는 겨울이었다.
문덕은 산 속에 동굴이 있어, 그 곳에서 지내며 수도를 하였다. 수도란 다른 것이 아니었
다.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디는 것이 가장 큰 수도였다.
어느날, 문덕은 동굴 안의 모래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매일처럼 무예 단련을 하
여 몸이 고달펐던 것이다. 문덕은 꿈결에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얘야, 얘야.
문덕은 깜짝 놀라 눈을 떴지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턱
수염을 길게 드리운 사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네, 어르신, 저를 부르셨습니까?
음, 너는 왜 이런 곳에서 혼자 고생을 하며 살고 있느냐?
저는 고구려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중입니다.
하하하, 작은 녀석이 매우 똑똑한 말을 하는구나!
지금 저희 고구려는 사방이 적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허!
그 말에 노인은 감탄하였다.
제9대 고국천왕 대에는 을파소라는 명장이 있었다. 을파소는 정성껏 나라일을 살펴 상과
벌을 공평하게 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평안하였고 나라 안팎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문덕에게 을파소의 이야기를 해 주고 물었다.
너는 우리 고구려를 위해 도를 닦는다고 했지.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네, 장군이 되고 싶습니다.
장군이라면 나라의 지도자다. 어떤 지도자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냐?
그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기에 문덕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지도자라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말하자면 전쟁 같은 무서운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났다면, 적을 무찔러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지도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마.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르신은 어디에 사시는 뉘시옵니까?
그러나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난 집이 없는 사람이다. 저 흰구름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가 도 홀연히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백운 거사라고 부른다마는…….
문덕은 백운 거사로부터 천문, 지리와 병법을 배웠다. 어느덧 봄이 되어, 온 산을 덮고
있던 눈도 녹아 계곡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흘렀다. 또 나무에는 새싹이 움트고 새들도 봄
의 기쁨을 기저귀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길어서인지 문덕은 몸이 나른하여 곧잘 꾸벅꾸벅 졸았다.
하루는 문덕이 졸고 있는데, 백운 거사가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문덕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문덕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며 스승을 보자 말했다.
스승님, 아픕니다.
아픈 게 문제냐! 넌 이미 죽었다.
네? 제가 죽다니요?
내가 만일 적이었다면 네 목숨은 이미 없다.
그렇지만 스승님, 뒤로와서 때리는 건 비겁합니다.
이런 것도 병법의 하나이다. 병법은 어떻게든지 적을 이기는 방법이다.
백운 거사는 낮에 문덕의 머리를 때려 혹이 생기게 했음을 가엾게 여겼던지 저녁에는 밤
하늘을 가리키며, 천문을 가르쳐 주었다.
저기 북두칠성이 있지. 저 별자리 일대를 자미궁이라고 한다. 저 근처에 형혹성(화성)이
침범하면 지상에서도 전란이 일어난다.
침범하다니요?
우리가 볼 때, 자미궁의 별들과 형혹성이 겹쳐 보일 때를 말한다. 말하자면, 별이 가려
져 희미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불길한 징조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저 넓고 높은 하늘! 이 세계는 저렇게 큰
데, 거기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냐.
문덕의 수도는 계속되었다.
휘익, 휘익, 휘익!
밤의 공기를 가르며 긴 칼이 원을 그렸다. 휘영청 밝은 빛 아래 칼은 푸르스름한 빛을 뿜
으며 힘차게 춤추었다.
얏,엿!
아랫배로부터 토해지는 기합 소리와 더불어 문덕의 몸은 점점 단단해졌다. 그리고 언제
칼을 휘둘렀는지 팔뚝만한 나뭇가지가 잘려 떨어졌다. 무예 솜씨도 솜씨려니와 이는 무서운
정신력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달이 얇은 구름속으로 들어갔다. 문덕은 이윽고 달을 우러르며 기도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고구려를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옛고구려의 영광을 다시 누리
게 하옵소서!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때의 일이었다. 위나라의 명장 관구검이 대군을 이끌
고 고구려를 침범하자, 동천왕은 양맥의 골짜기에서 이들을 무찔렀고, 3000명이나 되는 적
군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왕은 자만심이 생겼다.
관구검이 명장인 줄 알았더니 별 것 아니었군. 그러나 며칠이 안 되어 고구려군은 위나
라 군사에게 대패하여 1만 8000명이나 전사하였다. 왕은 겨우 1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압록
벌로 달아났다. 관구검은 승세를 몰아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추격해 왔다. 왕은 남옥저
를 향해 달아났지만, 죽령에 이르자 군사는 거의 흩어졌고, 오직 밀우만이 곁에 따르고 있
었다.
임금님, 적의 추격이 다급합니다. 제가 힘껏 적을 막겠으니, 대왕께선 그 틈을 타서 달
아나십시오. 밀우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과 싸우는 동안 왕은 샛길로 빠져 나가 흩어진
군사를 다시 모았다. 그리고 비통하게 말하였다.
아, 밀우는 죽었을까? 만일 그를 구출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상을 주리라.
유옥거가 자원하였다. 그는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밀우를 찾아 내어 업고 돌아왔다.
왕은 밀우를 자기 무릎에 눕히고 몸소 간호하여 그를 살려 냈다.
적의 추격은 끈질겼고 악착 같았다.
이 때, 유유가 한 꾀를 내어 적진을 찾아가 말하였다.
우리 왕께서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까지 쫓겨 왔습니다. 이제 더 싸울 힘도 없어 항복
하려고 저를 먼저 보내어 음식을 바치니 받아 주십시오.
유유는 칼을 음식 속에 숨겼다가 기뻐하는 적장의 가슴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
때문에 적은 물러갔고, 고구려는 새로이 평양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석다산의 울창한 숲에는 호랑이, 늑대와 같은 맹수도 많았다. 문덕은 맹수의 울부짖음이
그 때의 적병들의 함성인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다.
문덕은 삭다산에서 겨울을 세 번 맞았다.
세월은 빨라 스무 살이 되었다. 이제는 소년이 아닌 젊은이였다.
산에 들어온 뒤로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았다. 전쟁에서 적을 무찌르는
병법과 전장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 또, 집에서 범이 영감이 가져다 준 여러 가
지 병서도 읽었다. 의문나는 게 있으면 백운 거사에게 묻고, 또 자기 스스로도 병법을 연구
하였다. 날마다 새벽이면 문덕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외쳤다.
나는 밀우나 유유와 같은 용사가 되겠습니다. 을파소 같은 명장이 되겠습니다!
제19대 광개토왕 때에 고구려는 백제의 도읍을 공격하여 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잡아왔
다.
그 후, 고구려는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하고, 만주 동쪽의 숙신을 정복한 후, 또다시 고구
려는 5만 명의 병력으로 경상도 방면의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을 무찔렀다.
또, 서기 408년에 요하에서 후연군을 크게 이겨 국경선을 요하까지 넗혔다.
문덕은 어느 날,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여 솥에 쌀을 넣고 죽을 끓였다.
그 때 백운 거사는 다리를 벌리고 지팡이를 무릎에 놓은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스승님도 낮잠을 주무실 때가 있구나, 하기야 노인이니까 고단하시겠지.
문덕은 단잠을 깨우게 될까 봐 혼자서 맛있게 죽을 먹었다.
그 순간이었다.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백운 거사는 지팡이를 들어 번개처럼 문덕의 머
리를 향해 내리쳤다.
휘익! 문덕은 어느 틈에 솥의 뚜껑을 한 손에 잡고 내려치는 지팡이를 막고 있었다. 그
리고 태연히 죽을 먹었다.
이제 너와도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네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
문덕은 밥 그릇을 내려놓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쪼록 산을 내려가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더욱 노력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배워도 이 세상의 일을 다 배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
네.
문덕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스승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상하게 여기며 문덕이 고개를 들자, 백운 거사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앗, 스승님. 어디 계십니까?
문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동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백운 거사의 모습은 없더
라도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문덕은 산을 내려왔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음은 벌써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 동안 별 일 없으실까? 하지만 지금은 많이 늙으셨을 거야.
처음에 석다산에 올라왔을 때는 범이 영감이 한 달에 한 번 쯤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산
에 왔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덕은 백운 거사를 만난 뒤
범이 영감에게 말하였다.
수도에 지장이 있으니 이젠 산에 오지 않아도 좋아. 먹을 것을 짐승을 사냥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을 수 있어. 그리고 옷도 나무 잎사귀나 짐승의 가죽으로 대용할 수 있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마.
알겠습니다, 도련님. 하지만 소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 일 년에 한 번 씩만 오겠습
니다.
그것도 좋겠지. 그렇지만 나와는 만나면 안 돼. 만나면 자연히 집 생각이 나니까 소금을
가져오거든 동굴 앞에 가만히 놔 두고 바로 돌아가. 낮에는 대개 동굴을 비우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서 범이 영감은 일 년에 한 번씩 소금과 약간의 쌀을 동굴 앞에 놔 두고 갔었다.
그런데 지난 해는 어쩐 일인지 범이 영감이 나타나지 않았다. 소금과 쌀을 아껴 먹었기
때문에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하였다.
어쩐 일일까? 할아범의 몸이 아프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그것도 곧 잊어버리고 이제
까지 열심히 배움에 힘썼다. 그리하여 스승님의 비술을 모두 배워 가지고 산을 내려오게 된
것이다.
마을이 보였다. 냇가에서 몇 사람이 말에게 목욕을 시켜 주고 있었다.
이봐! 이보라구!
문덕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뛰어오는 문덕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나야! 을지문덕이야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손도 흔들어 주지 않고 어떤 사람은 하던 일
을 계속하였다.
이상하다. 문덕은 그들이 있는 곳에 가까이 와서야 비로소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버지가 새로 구한 노예들일까? 고구려에서는 적의 포로를 종으로 부
렸다. 이것은 고구려 뿐 아니라 고대 국가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집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주변은 너무나 조용했다. 휘휘 부는 찬바람 소리만이
집 전체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문덕은
아버지, 어머니! 문덕이 돌아왔습니다. 라고 외치며 뛰어들어갔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
이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문덕은 보퉁이를 내던지고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가
까운 이웃집에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죽음의 마을?
어떤 집에서는 개 한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다가 문덕을 보고 몹시 짖어댔다. 그런 개라
도 남아 있다는 게 이 때의 문덕으로서는 고마웠다.
2. 불운을 딛고 일어서다.
해가 서산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무렵, 문덕은 자기 집 문 앞에 서서 멍하니 들
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한 떼의 사람들이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아주 허름한 옷차림에 모두가 나이먹은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 중에 맨 앞의 노인이 문덕을 보더니 외쳤다.
도련님! 문덕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그는 바로 범이 영감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생기를 찾고, 뛰어와서 문덕을 둘러싸
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범이 영감은 문덕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울었다.
이제는 문덕도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의 각오가 되
어 있었다.
할아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글쎄,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요. 어느 날, 난데없이 군사들이 몰려와 나리마
님을 잡아갔습니다.
침착하려 했으나, 너무나도 뜻밖의 일에 문덕은 그만 다그쳐 물었다.
아버님을? 어째서지! 지금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지? 그리고 어머님과 가족들은?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이미 지난 일입니다.
할아범, 어서 말해 봐.
나리마님을 돌아가셨습니다. 간신들의 모함을 받으셨던 것이지요. 나리마님이 덕망이 높
고 재산이 많은 것을 시샘하여 간신들이 임금님께 나리마님을 모함했던 것입니다.
문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왕명에 의하여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면, 다른 가족들의 운명은 물으나마나였다.
문덕은 돌이 된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제20대 장수왕은
재위 79년으로 오래 살았다. 장수왕은 서기 427년, 장수왕 15년에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
의 대성산로 옮겼다.
장수왕은 당시의 고구려는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하여 매우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 여러 왕조와 늘 싸워야만 했다.
전한→후한→진나라로 이어진 중국은 서기 304년에 5호 16국으로 분열되었다. 호는 중국
인이 자기네 민족이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오랑캐라 차별한 것으로, 이것은 다섯 민족에 의한
16국이 일어나 흥망을 거듭했던 것을 말한다.
다섯 민족은 모두 북방의 유목 민족으로 흉노, 갈, 선비, 저, 강이라 불렀다.
먼저 흉노족의 추장 유연은 흩어졌던 흉노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하여 서기 304년
에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고, 나라 이름을 한 이라 했다.
갈족의 지도자는 석륵이었다. 그는 서기 319년에 후조 라는 나라를 세웠다.
갈족 다음에는 선비족이 일어났다. 선비족은 모용씨, 우문씨, 걸복씨, 척발씨, 단씨의 5
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선비족의 모용외 다음에 그 아들 모용황이 전연 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한족의 진은 흉노족에게 멸망한 뒤, 양쯔 강 남쪽으로 도망쳐 왕조를 이었는데, 이것이
동진 이었다.
한편, 저족은 유비가 세운 촉한 지방을 근거지로 서기 351년 전진 을 세웠다.
전진에서는 그 뒤 부견이라는 명군이 나타나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 주었다.
부견은 서기 370년에 선비족의 전연을 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고, 동진과 비수에서 크게
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견은 이 싸움에서 졌고, 이 때, 전진에 속해 있었던 선비족의
모용수는 다시 후연 을 세웠다.
이 무렵, 같은 선비족인 북위의 척발씨는 고구려 및 주변의 나라들을 위협하였다.
척발씨 에게는 척발균이라는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 불길처럼 그 세력이 뻗
어 나갔다.
후연에는 한족의 풍발이란 자가 왕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였다. 그 후, 북위의 공격을
받자 당시의 왕이었던 풍홍은 고구려로 도망쳤다. 그 때, 고구려의 장수왕은 후연의 풍홍을
죽이고, 북위와 손을 잡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문덕은 분을 참지 못하여 말하였다.
우리 고구려는 장수왕 때부터 나라가 기울었어. 한족의 대신을 받아들이고, 그 문화를
흉내내어 백성들은 우리 나라의 무예를 숭상하는 기질이 나약해졌어.
하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리마님을 죽인 간신의 무리들은 도련님의 생
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에도 일부러 발길을 끊고 도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
문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문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아버지를 모함한 간신들이 문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객(암살자)을 보내어 문덕을 죽이려 할 것이다.
도련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을 건방지다 하실지는 모르오나, 정의는 반드시 이
기는 법입니다. 언젠가는 나리마님이 옳다는 게 꼭 밝혀지겠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임
금님도 나리마님의 일에 대해서는 몹시 후회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알겠다.
문덕은 범이 영감의 손을 잡으며 약속하였다.
지금은 할아범 말처럼 참고 참으며 견디기로 하지. 그러나 반드시 아버님의 복수는 꼭
갚고야 말 테다. 그런 때가 되면 자네들도 나에게 협력해 주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 을지씨의 젊은이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고생하며 살고 있습
니다. 그러나 도련님이 언제 어느 때라도 명령만 내리신다면, 그들은 천리를 멀다 않고 달
려올 겁니다.
이 때는 고구려 제25대 평원왕 때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부터 신흥국가인 신라의 공격
을 자주 받았다. 물론, 고구려의 힘이 아주 약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장수왕 56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지금의 삼척)을 빼앗았다. 또, 장수왕 63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수군으로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는 그 뒤 세력이 강성해졌고, 문화도 발전하였다.
고구려는 제20대 장수왕 78년에 수십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고구려 제21대 문자왕 때에는 신라군이 살수까지 진격해 왔고, 이를 물리쳤다고는 하나
신라의 힘은 대단하였다.
이어 제24대 양원왕 때에도 고구려는 백제의 독산성을 쳤지만, 신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중국에서는 척발씨의 북위가 세력을 확장하여 만주와 중국 북부 일대를 모두 차지
하였다. 이리하여 5호 16국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서기439년).
북위와 고구려는 서로 인척 관계였다. 북위의 효문제 황후는 고구려 사람 고조의 딸이었
다.
북위는 효문제가 죽자 혼란을 거듭하였고, 결국 서위와 동위로 나뉘었다.
이 무렵, 남쪽에서는 서기 502년에 양 이라는 나라가 새로이 일어났고, 소연이 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양 무제로 불교를 크게 일으켰으며, 아주 총명한 임금으로 세력이
강하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세력이 약해진 북위와는 형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양나라와 빈번한 사
신 왕래를 하였다. 그런데 이 양나라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서기 554년 서위의 공격을 받
고 4대 원제가 죽자,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가 일어섬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이렇듯 고구려와 중국의 나라들과의 관계는 아주 복잡하였다. 대륙이 수백 년 동안 전쟁
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흘러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어느덧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문덕의 아버지를 모함할 만큼 세력이
커졌던 것이다.
그들은 왕을 만나자 말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역적 을지씨의 아들 문덕이 살아 있었고, 석다산에서 수도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새끼 때 날카로운 어금니나 발톱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경들은 나더러 을지문덕을 죽이라는 말이오?
후환이 두렵습니다. 일찌감치 없애야 합니다. 평원왕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는 을
지씨와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으나, 간신들의 모함에 넘어가 을지씨를 죽이게 되었고, 곧
그는 그 일에 대하여 후회하고 있는 터였다.
그렇습니다. 을지문덕은 틀림없이 대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들
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왕님을 위해서입니다. 아무쪼록 문덕을 처치할 수 있도록 승낙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왕은 승낙하지 않았다.
문덕은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소. 더욱이 죄 없는 그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오.
평원왕은 왕이 되었을 때,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닌 이상 사형수를 모두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만큼 백성을 아끼고, 고구려의 장래를 염려하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구려는 양원왕 때에 크게 세력이 기울어졌다. 양원왕 7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은 일대 공격을 해 왔다. 그리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를 점령하였고, 신라는
죽령 이북의 10개 고을(지금의 강원도 일대)을 차지하였다.
그 때, 고구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를 분히 여겼었고, 나라일을 염려하였다.
나라 꼴이 어찌 되었기에 이젠 작은 신라나 백제에게까지도 이런 업신여김을 당해야 한
단 말인가! 이 나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평원왕은 어렸을 적부터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특히 신라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양원왕 9년에는 신라가 다시 백제의 한강 하류까지도
점령해 버렸다.이 떼문에 신라와 다시 백제의 동맹은 깨어졌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어쨌든 고구려는 빼앗긴 땅을 되찾지 못한 채 서기 559년에 평원왕이 왕위에 올랐고, 이
웃 나라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라, 그들의 세력이 커지자 나라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간신들은 왕이 승낙을 하지 않자, 그 곳에서 물러나와 자기들끼리 음모를 꾸몄다.
대감, 임금님께서 승낙하지는 않으셨지만 죽이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소. 그러니 우리
가 자객을 보내어 문덕을 죽이는 게 어떻겠소?
그러다가 나중에 임금님의 노여움을 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런 건 간단하오.
…….
그 때는 자객을 우리가 보내지 않았다고 잡아떼면 되오. 자객에게 많은 돈을 주어 문덕
을 죽인 뒤, 다른 나라로 보내 버리면 될 게 아니오. 이렇게 감쪽같이 일을 해치우면 우리
는 안전할 거요.
나쁜 짓을 하면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법인데, 간신들은 이런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한편, 을지문덕은 뜻밖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듣고 복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상대는 나라의 대신이었고, 문덕에게는 그들을 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혼자 곰곰이 생각하였다.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어떻게든지 나를 죽이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그들
을 안심시키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때 을지문덕은 백운 거사로부터 배운 병법을 생각하였다.
옳지! 거짓으로 미친 척하자, 그러면 그들도 안심하고 나를 그대로 버려 둘 게 아닌가?
이 날부터 을지문덕은 거짓 미치광이가 되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맨발로 도읍거리를 이
리저리 뛰어다녔다. 쓸데없이 아무나 보고 히죽히죽 웃고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문덕을 보고 수군거렸다.
가엾기도 하지. 을지씨의 도련님이 저런 꼴이 되다니!
무리도 아닐세. 집안이 망했으니, 미칠 수밖에 더 있겠나?
간신들이 보낸 자객들도 이런 문덕을 보자 비웃었다.
여보게 우리가 미친 사람을 죽이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필요가 없지 않나. 돌아가 대감
께 보고하세.
자객들은 간신들한테 가서 자기들이 본 대로 보고를 하였다.
대감, 을지문덕은 미쳤습니다. 그는 쇠똥이나 말똥이 흩어진 땅바닥에서 뒹굴고 히죽거
리며 웃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놀려도 실실 웃기만 할 뿐입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우리 눈을 속이려고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
라. 너희들은 다시 가서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여라!
자객들은 밤낮으로 문덕을 따라다니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였다.
어느 날, 문덕은 거리에서 혼자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 둘 문덕
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자객들도 뭐라고 떠들고 있나 들어보려고 사람들 틈에 끼여들어 귀
를 기울였다.
여러분! 내 말 좀 들어 봐요. 글쎄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을 비웃고 있어요,
문덕은 찢어진 옷을 걸치고 입에는 거품을 물고, 주먹을 여기저기 휘둘러 가면서 소리소
리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래, 뭐라고 하며 비웃고 있나?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바보들이라고 해요
어째서 바보라고 하지?
우리 신라가 북한산주를 점령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너희들은 무서워서 쳐들어오지도
못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겁쟁이고 바보다.
미친 사람의 미친 소리라고 웃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객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수군거렸다.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을지문덕이 미친 게 아니잖아?
음, 아무래도 수상해. 어떻게 미친 사람이 나라 걱정을 할 리가 있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어떻게 할까? 대감께 보고해야 되지 않겠나. 하며 그들은 수군거렸다. 그 때 문덕은 두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거기 있는 중놈들! 무엇을 수군거리고 있지?
자객들은 섬뜩하며 놀랐다. 사람들이 모두 자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객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우리가 어째서 중이냐. 네 눈에는 우리가 중으로 보이느냐?
중이니까 중이라고 했지. 내가 틀린 말했어.
문덕은 그러면서 헤헤 웃었다. 자객들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본디 고구려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절풍건을 썼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았다. 귀족은
절풍건에 새 깃을 두 개 꽂고, 귀인일수록 자줏빛 헝겊을 많이 사용해서 만들어 썼으며, 그
것을 소골 이라 불렀다. 물론, 귀인은 금과 은으로 소골을 장식하였다.
서민은 갈색의 허름한 옷에 절풍건을 쓰고, 여자는 수건 비슷한 것을 썼다. 그러나 중은
민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자객들은 느닷없이 문덕이 중이라 욕했으므로, 혹시 절풍건이라도 벗겨진 줄 알고 머리에
손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중이 아닌 우리를 중이라고 욕하는 것을 보니 문덕은 정말로 미쳤구나.
그런데 문덕은 헤헤 웃고 나더니, 또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여러분 저놈들은 틀림없는 신라의 첩자들입니다. 신라의 첩자들이 중으로 가장하여, 우
리 고구려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들은 분명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당시 중들은 신라나 고구려를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그 중에는 진짜 첩자도 있었다.
군중들의 분노는 자객들을 향해 폭발하였다.
저놈들을 잡아라!
자객들은 허둥지둥 그 곳에서 달아났다. 문덕은 혼자 춤추고 웃고 있었다. 자객들은 하마
터면 군중들에게 죽을 뻔했지만, 간신히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간신들한테 가서 그
대로 보고하였다.
문덕이 정말 미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간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의 보고를 듣고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안심이라니요?
처음에 을지문덕이 미쳤다고 했을 때, 우리는 믿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미친다고 생
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너희들의 보고
를 듣고 보니, 문덕은 반은 미치고 반은 제정신인 것 같다. 그런 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죽일 필요도 없으니 내버려두자.
간신들은 그렇게 말하며 기뻐했지만, 진짜로 속았던 것은 간신들이었다. 을지문덕은 이렇
게 될 것을 내다보고 꾀를 썼던 것이다.
그 뒤, 을지문덕의 모습은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간신들은 왕의 부름을 받아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걱정하였다.
가을 추수가 가까워 오는데, 때아닌 서리와 우박이 쏟아져 곡식이 모두 얼어 죽었소.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소?
간신들이 나서서 아뢰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게 어떨까요?
그것이 좋을 것 같소.
왕도 허락하였다.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평원왕 23년 봄에 별똥이 비오듯 떨어졌다. 당시는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와 사람의 운
명을 점치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 그 해 7월에는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이 모두 얼어 죽었다. 10월이 되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왕은 각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무당의 굿은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왕의 노여움을 겁낸 간신들은 다른 핑계를 대
었다.
서리와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치게 한 까닭은 앞서 죽임을 당한 역적 을지씨가 원귀가
되어 대왕님을 원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적의 아들 문덕과 그 무리들의 목을 베어 하늘
에 제사를 지내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이 때에는 나라에 재난이 있으면 하느님의 대리인 왕이 덕이 없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
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흉년이 들면 백성들에게 몸소 모범을 보여야 했다.
왕은 음식을 줄이고 궁전에서의 잔치도 금하였다. 또 명산과 큰 강에 왕의 사자를 보내
어, 산신과 수신에게 지성도 드렸다. 굿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평원왕은 문덕을 죽여야 한다는 간신들의 말을 듣자 버럭 화를 냈다.
책임이 있다면 임금인 나에게 있다. 어찌하여 죽은 사람을 끌어내어 죄를 뒤집어씌우고,
인심을 어지럽게 하려 하느냐!
간신들은 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왕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왕은 즉시 간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내 너희들을 당장 죽이고 싶지만 참겠다. 대신 북쪽 북경에 가서 요하성을 지켜라. 만
일, 그 곳에 가서 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때에는 용서치 않으리라.
왕은 한때 간신들의 말을 듣고 을지씨를 죽였지만, 그 일이 늘 마음에 걸려 후회하고 있
었다. 그래서 간신들을 조정에서 멀리했던 것이다.
평원왕은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 안에서는 추수를 못 하였기 때문에
그 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죽어 갔다.
그런데 중국 대륙에서는 새로이 수나라가 일어나 고구려에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평
원왕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너무도 걱정이 많아 병이 날 정도였다.
하루는 태자가 걱정을 하며 말하였다.
아버님, 이러시다가 정말로 병환이 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기운을 내십시오.
태자야, 너는 수나라 사신의 건방진 태도를 보았겠지. 수나라는 마치 우리의 상전이나
된 것처럼 우리더러 조공을 바치라고 한다. 그래서 치밀어오르는 부화를 가까스로 참고 달
래어 보내기는 했다마는 그들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모두 힘을 합하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는 이렇게 평원왕을 위로하였다.
3. 고구려의 국난
5호 16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서기 439년에 화북지방을 통일한 것은 선비족이 세운 북
위 였다. 북위는 발달된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북위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강남 지방에서는 동진이 무너지고 송나라가 일어났
는데, 이 때로부터 수나라가 남북을 통일할 때까지를 남북조 시대 라고 한다. 남북조는 양
쯔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왕조가 있었다는 뜻이다.
애당초 북위는 선비족의 척발씨로 다른 부족들에게 천대를 받고 있었다. 이리하여 북위의
서쪽에서는 선비족 우문씨의 우문태가 스스로 왕을 받들어 서위 라 하였고, 동쪽에서는 발
해 군수(허베이 성 징 현) 출신의 고환이 왕을 받들어 동위 라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서위에서는 우문태가 그 왕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북주 라고 일컬었다.
이 때, 북주에 양견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양견은 아버지의 공적에 의해 그 지위를 물려
받았다. 또 양견의 맏딸이 북주 선제의 왕비가 되어,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
다.
동위도 신하가 왕을 죽이고 북제 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서기 577년에 북주에게 멸망되
고 말았다.
이리하여 북주는 중국 대륙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강남에 진나라가 있다고는 하나
약소국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선제가 죽자, 그 아들 정제는 너무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식상의 왕이었
고, 양견이 이를 대리하였는데, 얼마 후 스스로 왕이 되어 서기 581년에 수나라를 세웠다.
즉, 수나라의 문제인 것이다.
한편, 강남에서는 동진→송나라→양나라→진나라의 차례로 왕조가 바뀌었고, 이 때는 진
나라가 있었다.
태자는 수나라의 강대한 힘을 두려워하는 아버님이 안타까웠다.
아버님, 너무 염려 마십시오. 밖으로는 진나라와 손을 잡고, 안으로는 널리 인재를 뽑아
고구려의 힘을 다시 키운다면 수나라가 아무리 강대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음, 태자의 말이 옳다. 곧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수교하도록 하자. 그런데 지금의 국
난을 감당할 인재가 우리 고구려에 있을까?
있습니다. 하고 태자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그게 누구인가?
을지문덕입니다. 을지문덕은 제가 듣기로 천문, 지리에 능통하고 석다산에서 백운 거사
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그는 10여 년 동안 갖은 고난을 겪어 가
며 살아 왔기 때문에 사람됨이 원만하고 덕망도 높다고 합니다.
평원왕은 태자의 손을 잡았다.
정말로 좋은 말을 해 주었다. 즉시 을지문덕을 불러 시험해 보고 싶구나.
황공합니다. 곧 을지문덕을 찾아 입궐시키겠습니다. 며칠 뒤, 을지문덕은 왕궁에 입궐
하였다. 그는 그 동안 옛 을지씨의 무리를 은밀히 만나 가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였다.
을지문덕이 대궐 문 앞에 서자, 수문장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들어선
곳은 넓은 광장으로 저만치 두 번째 성문이 보였다. 그런데 성문은 굳게 닫혀 있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후, 을지문덕이 들어왔던 성문마저 닫히고, 문덕은 독 안에 갇힌 쥐가 되어 버렸다.
살기가 있구나. 나를 해치려는 것일까? 아니야 나를 시험하려는 것일지도 몰라.
을지문덕은 곧 그것을 눈치챘다. 을지문덕은 미리 그런 일을 대비하여 관복 속에 갑옷을
껴입고 왔던 것이다.
을지문덕은 온몸을 긴장시키고, 광장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순간 광장을 둘러
싼 옹벽 위에 수십 명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쏘아라!
장수의 구령과 함께 수십 명의 궁수가 일제히 문덕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을지문덕은 순간적으로 칼을 뽑아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을 잘 막아 내었다. 주로 얼굴
과 머리를 보호하는 칼놀림으로 번개처럼 휘두르는 칼 솜씨는 과연 대단하였다. 화살들이
두 동강이 난 채 툭툭 땅에 떨어졌다.
중지!
그들을 지휘하던 장수가 외쳤다. 화살 공격은 시험인지라 한 번으로 그쳤다.
을지문덕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자, 장수는 다음의 명령을 내렸다.
둘째 성문을 열어 드려라!
을지문덕의 눈앞에서 내성의 성문이 열렸다. 길이 곧장 나 있고 멀리 궁전이 보였다. 그
런데 길 양쪽에 창검을 든 무시무시한 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을지문덕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중간쯤 갔을 때, 장수의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을지문덕!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칼을 들고 들어오느냐?
이 당시 왕 앞에는 무기를 지니고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옹벽 안의 광장에서
화살 공격을 받았던 을지문덕이었다. 그런 만큼 무기를 쉽게 버릴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을지문덕은 태연히 칼을 풀어 땅에 놓고 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평원왕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경은 좀더 가까이 오라.
황공하신 분부이옵니다.
을지문덕은 아홉 번 절을 하고 일어나서 천천히 왕 앞으로 걸어갔다. 궁전 아래 돌층계에
는 벼슬아치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을지문덕의 모습을 보자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웃었다. 을지문덕의 모습이 별로 늠름하지도 못한데다가 한쪽 다리를 몹시 절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이것도 사실은 을지문덕이 왕을 시험하려는 병법의 하나였다.
사람이란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기 쉽다. 만일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됨
됨이를 평가한다면, 참으로 인재를 알아 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 태자가 돌층계 중간까지 내려오며 위로의 말을 하였다.
다리가 몹시 불편하신 것 같구려. 자, 사양 말고 내 손을 잡으시오.
황공하옵니다.
을지문덕은 사양하지 않고 태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끌어 주는 힘에 상반신을 기
울이듯이 하면서 태자의 귀에 재빨리 속삭였다.
태자님, 제 다리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눈치채지 못
하였다.
을지문덕은 이윽고 왕 앞에 읍하며 섰다. 읍이란 임금께 올리는 예의 하나다. 맞잡은 손
을 얼굴 앞으로 들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가 펴면서 내리는 동작을 말한다. 그 때, 태자
는 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을지문덕의 다리 절음은 깊은 뜻이 있어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오! 왕은 을지문덕의 지혜로움에 흐뭇해하며 말하였다.
여러 가지로 경을 시험하여 미안하오. 이것도 모두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구려.
황공하옵니다.
지금 우리 고구려는 북쪽으로 수나라, 그리고 남쪽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호시탐탐 기회
를 엿보고 있소. 과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고구려는 어찌해야만 좋겠소?
대왕님, 지금 우리 고구려는 가장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본디 강력한 적과 맞서
기 위해서는 적의 적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고구려는 불행히도 그런 나라가
없습니다, 하기야 수나라의 적으로 진나라가 있기는 합니다만 진나라는 제가 알기로는 임금
이 놀기를 좋아하여 궁녀를 상대로 매일 잔치나 베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진나라는 머지
않아 수나라에 멸망되고 말겠지요.
궁전 안이 조용해졌다. 을지문덕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웃던 벼슬아치들도 그의 힘찬 소
리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진나라가 있는 게 우리 고구려에는 도움이 되겠지요.
따라서 진나라와는 친선을 꾀하고 수나라에 대해서는 되도록 시간을 벌어가며, 그들의 비위
를 맞추도록 하십시오. 남쪽의 신라와 백제는 큰 염려를 마십시오. 그들이 좀 귀찮게는 굴
고 있지만, 우리를 크게 공격할 힘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가 자기네들끼
리 힘껏 싸우도록 부추기고, 그 사이에 우리의 힘을 길러 수나라에 대비해야 합니다.
평원왕은 기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전략이오. 경은 장군이 되어 우리 고구려를 지켜 주시오.
황공하옵니다.
왕은 태자에게 명하여 보검을 가져다 주도록 했다.
장군, 내가 지금 내린 이 보검은 나를 대신하여 이 나라의 군대를 지휘하라는 신임의 표
시오. 만일 장군의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곧 왕명을 어기는 것이므로, 단호히 그 자의
목을 베어 버리시오.
이리하여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게 되었다. 문덕은 왕의 이름으로
곳곳에 방문을 써 붙이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오라, 고구려의 젊은이들이여. 지금 이 나라는 위기에 빠져 있다. 피가 끓고 있는 젊은
이로 어찌 이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방문을 보고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을지문덕은 군대를 조직하고, 그들을 재능에 따라
훈련시켰다. 을지문덕은 특히 왕에게 다음과 같이 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대왕님, 대사령을 내려 주십시오. 죄인에게도 나라에 이바지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 적과 싸울 수가 있습니다.
좋도록 하시오.
을지문덕은 5부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평원왕은 또 을지문덕의 건의를 좇아 조서를 내렸다.
백성들은 모두 자기 맡은 일에 힘쓰라. 특히 여자들은 누에치기에 힘쓰고, 노인과 어린
이는 농사에 힘쓴다면, 아들과 지아비들이 안심하고 나라 방위에 힘쓰게 되리라.
이리하여 고구려는 그 해 곳곳에서 대풍년이 들었다. 왕도 기뻐하였고, 백성들의 집에서
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군사들을 맹훈련시켜 정예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군사들이 안심하고 싸울
수 있도록 갖가지 병역 제도를 만들었다.
군사로 마흔 살이 넘으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하라. 창칼을 들고 적과 싸우는
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은 아니다. 후방에서 자기 향토를 지키며 농사를 짓는 것도 훌륭한
애국이다. 또한, 집의 가장이나, 맏아들, 늙으신 부모님을 모셔야 할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라. 집에 돌아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도 국민된 도리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을지문덕을 어버이처럼 여기며, 그의 덕을 칭찬하였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생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아 주십니다. 그분
의 지휘 아래라면 전쟁에 나아가 용감히 싸우다가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나라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고구려 군대는 놀랄 만큼 사기가 올랐다. 을지문덕은 이런
공로로 어느덧 대장군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을지문덕은 왕께 나아가 아뢰었다.
3년 전에 비한다면, 우리 고구려의 힘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위협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평원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을지문덕을 더없이 신임하고 있었다. 지위가 높아지고
세력이 커졌다고 해서 을지문덕이 결코 교만해지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장군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성을 몇 개 더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편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유리하
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 대성산의 산성이었다. 을지문덕은 왕에게 건의하여 성(장
안성)을 하나 더 쌓고 도읍을 그 곳으로 옮겼다.
대성산은 오늘날의 평양 동북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고구려는 장안성을 쌓기 전 여
기에 도읍을 두었는데, 이 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한 동서 3제곱킬로미터쯤의 구조였다.
고구려는 외국의 침략이 잦았기에 그런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그 곳에 궁전과 조정을 두었
다.
그렇기 때문에, 산기슭에 자연히 민가들이 들어섰고, 거리를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생각건대, 문덕은 이런 무방비의 시가지 주변에 다시 성벽을 쌓고, 적의 습격을 대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책인 수서 나 당서 를 본다면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 즉 고구려
도읍의 나성에는 많은 절과 민가들이 있었다. 수나라가 군사가 이 나성에 돌입하자 그 곳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나라 군사들은 그런 물건들을
약탈하기에 바빴다. 이 때 고구려의 복병이 나타나 수나라 군사들을 무찔러 허둥지둥 도망
쳐 죽은 자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설명하겠다.
을지문덕은 왕을 대신한 태자와 함께 작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의논하였다.
태자님, 장안성 이외에도 각 곳에 성을 쌓아야 합니다. 적의 침입에 예상되는 지점에 성
은 아니라도 성체를 쌓고 봉화대를 두거나 기마 연락병을 두어 급할 때에 알리도록 하는 것
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대장군
태자는 왕보다도 을지문덕을 더욱 신임하고 있었다. 요즘에는 왕이 나이가 많아 자주 병
석에 눕기 때문에 태자가 모든 정사를 처리하였다.
을지문덕이 신하로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왕이나 태자가 신임해 주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으리라. 다행히 을지문덕에게는 그를 이해하고 뒤를 밀어 주는 태자의 신임
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자님, 드디어 진나라도 멸망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나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소.
예로부터 중국의 양쯔 강 이남, 강남은 기후가 따뜻하고 비도 많이 내려 농업이 발달하였
다. 농업이 발달하면 상업도 활발해진다.
진나라는 그러한 강남에 자리를 잡았고, 도읍은 건강(지금의 난징)이었다.
북주의 황제를 죽이고 일어난 양견의 수나라는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는데, 진나라는 거기
에 대한 대비도 않고 왕도 대신들도 백성들도 사치에만 빠졌고, 모두들 돈벌이에만 몰두해
있었다.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는 현무호에서 매일처럼 뱃놀이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현무호는 둑을 쌓고 양쯔 강 물을 끌어들인 호수로, 본디 수나라 군사의 조련장으로 건설
되었으나, 진숙보는 여기에서 궁녀들과 뱃놀이를 하며 즐겼던 것이다.
진숙보는 걸핏하면 신하에게 명하였다.
여봐라! 오늘은 현무호에서 뱃놀이를 하고 싶구나.
네 알았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하들은 그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보통 황제가 행차를 하면
무장한 근위병들이 여러 가지 깃발을 나부끼며, 금도끼와 은도끼를 번쩍거리고 행진하기 마
련이다. 그러나 진숙보의 행진에는 그런 근위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비단옷
으로 몸을 장식한 궁녀들이 황제의 가마 앞뒤를 따랐다.
간신들은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갖가지 일을 꾸며냈다. 어떤 간신은 길에 황금으로
만든 연꽃을 깔고, 왕비가 그것을 밟고 지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진숙보는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시를 지었다.
오 왕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황금의 연꽃이 피어나는구나.
미녀를 일컬어 금련 이라고도 하는데, 금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 무렵, 수나라의 양견은 진나라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싸움에 필요한 배를 많이 만들고, 단숨에 건강으로 쳐들어가 진나라를 정복하자.
그러자 대신은 양견에게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병선을 만든다는 것을 진나라가 알면 대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밀로 해야 합니다.
비밀로 할 것 없다. 하늘을 대신하여 진나라를 벌하는 것이니 그럴 필요 없지.
양견은 사치에 빠진 진나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진숙보는 나라의 멸망 따위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수나라는 건강의 상류에서
숱한 병선을 만들었고, 배를 만들 때 생기는 대팻밥 따위를 강물에 마구 버렸다. 그것들을
발견한 진나라 사람들은 걱정을 하며 떠들었지만, 진숙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기 589년, 마침내 수나라 군사가 건강에 쳐들어왔다. 진숙보는 수나라 군사가 쳐들어왔
을 때도 궁전에서 궁녀들과 잔치를 벌이고 있다가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을지문덕은 지금, 그와 같은 진나라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의 앞날을 염려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태자님, 진나라는 어떻든 우리는 대비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겠
지요.
평원왕 32년, 왕은 병석에 눕게 되자, 태자와 을지문덕을 가까이 불렀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죽음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나라가 망하고 장차 수나라가 우리를 침략할 것을 생각하
니 걱정이로구나.
태자가 먼저 왕을 안심시키고 울면서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을지문덕이 있습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잘 훈련된 정예 부대를 키워 냈
습니다.
오, 을지문덕!
왕은 을지문덕과 태자의 손을 꼬옥 쥐었다. 나는 죽더라도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리라.
그대들은 아무쪼록 힘을 합쳐 동명 성왕 이래의 사직을 지켜주오. 평원왕은 서기 590년 10
월에 세상을 떠났다. 태자가 그 뒤를 이었고, 그가 제26대 영양왕이 되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과 의논하며 나라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닦았다.
평원왕이 죽자, 수나라의 문제는 사자를 고구려에 보내 왔다. 사자는 영양왕 앞에서 교만
하게 국서를 읽었다.
너희 고구려는 작은 나라로서 어찌 큰 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 너희들도 진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진나라는 고구려보다도 인구가 많고 양쯔 강의 천연적
방비가 있었다. 그런데도 진나라는 망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잘 생각하여라. 요하(랴오허 강)의 인구가 진나라보다 과연 많을 것이냐?
우리 수나라의 장군 하나만 보내더라도 고구려 하나쯤은 짓밟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공
을 바치지 않는다면 너희 고구려도 진나라와 같이 멸망시키고 말겠다.
이것은 협박이었다. 영양왕은 화가 나 수나라의 사자를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라고 명하
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북방의 여러 민족과 다툼을 벌였으며, 중국의 여러 나라와 싸움을
하였으나 결코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겨우 중국에서 새로 일어난 수
나라가 조공을 바치라고 하니 실로 우스운 일이었다. 더욱이 새로 등극한 영양왕은 기상이
뛰어나 남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한 수치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큼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저놈의 목을 베지 않고.
그 때 을지문덕이 말렸다.
대왕께서는 한 때의 분을 참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되도록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전략을
잊으셨습니까? 앞으로 조공을 생각해 보겠다고 적당히 대답하시고 사자를 돌려보낸 뒤, 급
히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수나라 사자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때, 수나라는 이미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첩자가 끊임없이 오갔다. 고구려에서도 수나라의 내막을 낱낱
이 알고 있었으며, 수나라도 고구려의 방비책을 살피고 있었다.
수나라의 문제는 적이라고는 하지만 뛰어난 임금이었다. 양견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과거
를 실시하여, 문제라고 불렸다. 또, 균전제를 실시하여 경제를 발전시켰다.
균전법은 백성에게 골고루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이다. 옛날부터 명군이라면, 백성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수 있도록 해 주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차이를 되도록 없애야 한
다. 이래야만 사회 불안이 없어지고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수나라의 문제는 백성들에게 골고루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 땅의 종류는 노전(보통의
밭), 뽕나무밭, 주택의 대지 등이었다.
수나라의 문제는 이렇듯 과거 제도와 균전법을 실시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잘
못한 점도 많았다.
문제는 수나라를 세우자, 자기의 주인이었던 북주의 우문씨를 거의 죽여 버렸다. 그런 뒤
그가 멸망시킨 진나라와 북제(지금의 산둥 성 일대)사람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하여 과거 제
도를 실시하였다. 그들 일부를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새 왕조에 대한 충성을 바랐던 것이다.
문제가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외국 침략이었다.
문제는 장군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우리 수나라에게는 눈엣가시다. 그대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곳 땅을 빼앗
아라. 그리하여 그 땅을 그대들이 나누어 갖고, 그 곳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며 마음껏 재물
을 갖도록 하여라.
옛날의 전쟁은 노략질이 보통이었다. 수나라 문제는 북제나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로
를 세운 부하들에게 고구려를 주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침략을 하자면 구실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대해 협박을 하며 조공을
바치라고 한 것이다.
이 무렵, 수나라 문제의 귀가 번쩍 트이는 정보가 있었다. 고구려의 요하성을 지키는 성
주로부터 밀사가 보내져 온 것이다.
황제 폐하, 고구려가 상국인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만일 고구려를 치신다면, 저희들은 충성을 다하여 길 안내를 하겠습니
다.
요하성의 성주란 바로 을지문덕의 아버지를 모함하여 죽게 한 간신이었다. 그들은 을지문
덕이 고구려의 대장군이 되어 병마권을 잡게 되자, 언제 어느 때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그래서 밀사를 보내어 조국을 배반하고 전쟁의 길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수나라의 문제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곧 통역인 유사령과 함께 밀사를 만나서
고구려의 정보를 알아 냈다.
고구려에는 을지문덕이란 뛰어난 명장이 있다는데, 우리 수나라 군대가 공격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네, 을지문덕은 말뿐이지 별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어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자를 어찌 명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알았다. 우리가 고구려를 쳐들어가면 너희들은 반드시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수나라의 문제는 이 밖에 다른 정보를 듣고 있었다.
이 무렵, 백제는 위덕왕 때였다.
어느 날, 제주도에 수나라의 배가 한 척 표류했다. 백제의 왕은 이 배가 수나라로 돌아가
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고, 사자를 딸려 보내어 뱃길의 안내를 자청하여 수나라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 때 백제의 사자는 고구려의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삼국사기 에도 백제왕 창은 수나라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 군의 안내를 하겠다고
말했다. 라고 적혀 있다.
고구려도 이런 정보를 모를 리 없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과 의논하였다.
수나라가 우리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소. 차라리 우리가 먼저 치는 게 어떻겠소?
그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요하성의 무리가 적과 내통을 하고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
다.
알겠소. 내가 대신 장군의 원수를 갚아 줄 테니 장군은 뒤에 남아 도읍을 단단히 지켜
주시오.
영양왕 9년, 서기 598년에 왕은 몸소 수나라를 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말갈병 1만 명의
도움을 얻어 먼저 요하성에 가서 배신자들을 모두 죽이고, 이어 요하를 건너 그 서쪽 일대
를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위충은 사자를 문제에게 보내어 위급함을 알렸다.
수나라 문제는 이 보고를 받자, 즉시 수군(해군)과 육군 30만 명의 대군을 보냈다.
수나라 문제 양견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용·광·준·수·량이었다. 양견
은 막내아들 양량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왕세적을 부원수로 삼았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는 데 있어 두 가지 길을 택하였다. 하나는 육지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고, 다시 압록강(염난수)을 건너 침입하는 방법을 썼다.
때는 음력으로 6월이었고, 장마비가 계속되었다. 게다가 전염병까지 돌았다.
고구려의 군사들은 수나라 군사를 맞아 용감히 싸웠다. 장마비로 강물이 불어나자, 곳곳
에서 수나라 군사의 보급로를 끊고 적을 기습하여 섬멸시켰다.
한편, 수나라의 수군은 산둥 반도의 내주(라이저우), 등주(덩저우) 등을 출발하여 바닷길
로 침공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많이 가라앉았다.
이리하여 고구려군은 바다와 육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수서 에도 가을 9월, 수나라의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 팔구였다. 라고 적혀
있다.
고구려의 온 백성이 모두 기뻐하였다. 을지문덕은 조용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번의 승리는 하늘의 도우심이 컸습니다. 장마나 폭풍으로 수나라 군사는 싸우기도 전
에 이미 반은 거꾸러졌고, 남은 자들도 병들고 굶주려 싸울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으음.
수나라는 인구가 많아 군사 몇십만 명이 죽었다고 해서 침략을 중지할 자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전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하여 더 튼튼한 병력
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판단은 옳았다. 그는 고구려를 다시 침략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겨 이를 연기하였다.
그것은 양견의 가정 문제였다.
수나라 문제는 완전한 독재자로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독고
황후에게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양견은 일찍이 맏아들 양용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황태자 양용은 원씨라는 정실 부인이
있었는데, 첩인 운씨를 총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원씨가 원인 불명으로 갑자기 죽었다. 독고 황후는 태자가 첩을 사랑한
나머지 아내를 독살했다고 생각하여 이를 문제에게 말하였다.
태자는 본부인을 두고도 첩을 사랑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여 자기 부인마저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태자는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태자 자리에서 쫓
아내고, 다른 왕자로 태자를 삼도록 하십시오.
이리하여 양용은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보다 앞서 문제의 셋째 아들 양준은 병으로 죽었다. 문제는 막내아들 양량을 태자로 봉
하고 싶었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이 있고, 넷째 아들 양수는 병약하였다.
아무래도 태자로는 둘째 아들 양광을 세워야 했지만, 문제는 이 아들을 싫어하였다.
문제는 고생하여 자랐기 때문에 소박하고 검소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양광은 사치스
럽고 낭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독고 황후는 말하였다.
태자는 광밖에 없습니다. 차례로 보나 인품이나 재주로 보나 그를 태자로 삼으셔야 합니
다.
문제는 할 수 없이 황후의 말을 좇아 양광을 태자로 봉하였다. 태자가 된 양광은 대신 양
소와 짜고, 병석에 누운 문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이가 바로 수나라 양제이다. 이 때
가 고구려의 영양왕 15년 때였다.
황제가 된 양광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누른 후, 백성들의 뜻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결심을 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영양왕 14년 장군 고승을 시켜 신라의 북한산성(오늘의 서울)을 공격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평왕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으며, 성 안에서도 성을 지키던 군사
들이 일제히 몰려 나왔기 때문에 고승은 포위를 뚫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이 때,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수교를 하는 한편, 국경을 조금 뒤로 물리었다.
4. 살수 대첩
수나라의 양광이 황제가 되자, 그의 사치스러운 성격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고, 일들을
크게 벌였다.
새 수도를 건설하는 것은 새 나라의 얼굴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북주의 흔적은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 버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건설하여라.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었다. 그래서 성벽은 물론이고 건물들을 모두 부수어 땅을 고른 다
음, 북주의 궁전이 있던 자리를 파서 큰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성벽을 다시 쌓고 궁전을
새로 지었으니, 그 노동력과 비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양제는 수도 뿐 아니라 각지에 궁전
을 지었는데, 그 공사비도 실로 엄청난 비용이었다.
부제(문제)께서 이루지 못한 고구려 원정을 하여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얻고야 말겠다.
양제는 용주(용 모양의 배)를 타고 대운하를 북쪽으로 향하여 하북성의 탁군에 이르렀다.
용주는 3000명의 인부들이 양쪽으로 끌었는데 추위와 굶주림, 피로로 10분의 2 가량의 사람
들이 죽었다고 한다.
양제는 천하에 호령하여 탁군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여양과 낙구라는 곳에 창고들이 있었
고, 그 곳에서 배로 군량을 탁군으로 날랐다. 배가 천 리나 이어졌고 인부가 60만 명이나
동원되었는데, 쓰러져 죽은 자가 너무나 많아 사람들은 송장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다녔다
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부역으로 일정량의 군량을 나르게 했다. 백성들은 이것을 피
하여 깊은 산 속으로 도망쳐 도둑이 되기도 하였다.
또, 곳곳에서 군사로 끌려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도 많았다.
그런데도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무리하게 이끌었다.
총사령관은 양제의 사위인 우문사급의 아버지 우문술로, 그 총병력은 113만 3800명이었다
고 한다.
군대의 행렬이 960리에 뻗쳤고, 다시 내·외·전·좌·우의 황제 직속의 6군이 출발했는
데, 이 역시 80리에 이르렀다.
고구려 영양왕 23년 2월 수나라의 양제는 요하에 이르렀다. 우문술은 이보다 앞서 수나라
땅이었던 요서에서 작은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을지문덕이 미리 세워 놓은 작전의
일부였다.
야, 고구려도 별것이 아니로구나. 15년 전의 원수를 갚자.
하지만 요하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하는 꽤나 넓은 강으로 건너편 강 언
덕에는 고구려군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양제가 도착하자, 수나라 군사들은 공격을 서둘렀다. 이 때, 수나라의 공부상서
우문개라는 자가 처음으로 부교를 생각하여 이를 놓았다.
부교가 놓이자 수나라 장수 맥철장, 전사웅, 맹차 등이 앞장 서서 건너왔다. 이것을 본
강 언덕의 고구려군은 이들을 공격하여 건너오는 수나라 장수들을 모두 죽였다.
이 곳에서 수나라 군사들은 열 자 남짓의 미완성 부교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다. 강 언덕
에서 쏘아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요하는 피로 벌겋게 물
들었고, 시체가 둥둥 떠내려갔다.
이것을 본 양제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강물을 시체로 메우는 한이 있더라도 공격하여라, 전진하여라!
결국은 하주라는 자가 결사대를 이끌고 이틀 만에 부교를 완성시켰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 부교를 건너 끝없이 밀려왔다. 고구려군과 수나라 군사들은 요하에서 자기들의 목숨을
다하여 맞붙어 싸웠다. 마침내 병력 차이로 밀린 고구려군은 요동성으로 후퇴하다가 요하
기슭 싸움에서 1만 명 가량의 전사자를 냈다. 물론 수나라 군사들은 그 이상의 전사자를 냈
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어 요동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요동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수나라
의 양제는 우문개 등을 시켜 갖가지 방법을 다 썼다. 땅굴을 파고 들어가기도 하고, 둑을
쌓아올려 물을 끌어들여서 성을 물에 잠기게도 했지만, 요동성은 끝까지 버티었다.
3월쯤부터 포위하여 4월·5월·6월이 되었지만,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개미 떼 같은 대군
앞에서도 요동성을 잘 지키었던 것이다.
수나라 군사들은 곳곳에서 죄도 없는 고구려 백성들을 잡아다가 고구려 군사들이 보는 앞
에서 죽이고, 베주머니를 수만 개 만들어, 흙을 담아 성벽보다 더 높게 쌓아올리고, 그 위
에서 화살을 쏘아대기도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때, 요동성을 지킨 성주가 누구였는지 우리측 기록에도, 중국측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아 안타깝다. 그러나 항복하거나 함락되지 않아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수나라 양제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는 성 서쪽의 몇십 리쯤 떨어
진 육합성이란 곳에 있었는데, 여러 장군들을 불러 호통을 쳤다.
그대들이 임무를 게을리하기에 아직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게 아닌가? 힘껏 싸우지
않는 그대들을 당장 처벌하리라.
양제의 호령에 수나라 장군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어 벌벌 떨었다. 결국 양제는 직접
군사들을 지휘하며, 결사적으로 공격하였지만 요동성은 끄덕하지 않았다.
한편, 성 안에서는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있는 힘을 다하여 성을 지켰다. 성벽이 무너지
면 장정들은 그것을 하룻밤 사이에 다시 쌓아올렸으며, 아녀자들은 돌멩이를 나르고 부상자
들을 간호하였다.
수나라 양제는 마침내 작전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모든 작전이 실패하고 말겠다. 요동성이나 항복하지 않는 고구려의 성은 그
대로 놔 두고, 즉시 남쪽으로 진격해 압록강을 건너라.
이 작전 변경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과 때맞추어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내호아
는 부총관 주법상과 더불어 강회의 수군과 병선 수백 척을 이끌고, 산둥 반도 내주를 출발
하였다.
강회란, 중국의 양쯔 강과 화이허 강을 가리키는 말로, 이 두 강 유역은 중국에서도 가장
이름난 곡창 지대로, 소금도 많이 산출되어 부유한 곳이다. 또, 큰 호수가 있어 중국의 수
군하면 으레 이 곳 출신을 말하였다.
내호아와 주법상이 이끄는 병선 수백 척은 서해 바다를 건넜다. 중국의 산둥 반도와 황해
도의 장산곶은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깝다. 내호아도 아마 이 항로를 이용하여 곧장 건너와
육지를 끼고서 북상하려고 했으리라.
그들은 패수(대동강) 하구에 이르러 강을 거슬러올라갔다. 그리고 고구려군의 소부대와
마주쳤다. 내호아의 부대는 이 소수의 고구려 수비대를 격파하여 사기가 올랐다.
고구려군의 수비가 엉성하고 저항도 별로 없다. 우리가 단숨에 공격한다면 평양성을 내
손아귀에 넣고 왕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주법상이 만류하였다.
장군, 경솔하게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육군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다음
에 협동하여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승리가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우물쭈물 육군이 오기를 기다리란
말인가?
장군, 저는 나중에 폐하의 꾸중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애당초의 계획은 육군과 수군이
합류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되어있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작전의 기본이었다.
적의 수도를 공격하자면 가지고 있는 힘을 다 모아 공격하는 게 원칙이다. 왜냐 하면, 지
키는 쪽으로서도 수도가 함락된다면 전쟁은 진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군도 수도
를 지키기 위해 그 곳에 대병력을 투입할 것이다.
하지만 을지문덕의 작전은 그것이 아니었다.
내호아는 마침내 화를 벌컥 냈다.
닥쳐라! 너 같은 겁쟁이는 이 곳에서 배나 지키고 있어라. 나는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왕을 사로잡겠다!
내호아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나를 따라 적의 도읍을 공격하려는 자는 나서라. 그곳에는 금은과 명주가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와아!
부하들은 함성을 올리며 앞을 다투어 나섰다. 그 수효는 모두 4만 명이나 되었다. 배에
남겠다는 자는 겨우 1만 명도 안 되었다.
내호아는 이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고구려군의 저항은 없었다. 마을
마다 가축이 그대로 버려져 있고, 주민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미리
지시를 받고, 이미 모두 산으로 피난해 버린 뒤였던 것이다.
야 소가 있다. 돼지도 닭도 있구나!
수나라 병사들은 좋아하며 소와 돼지를 잡아먹고, 술이 없나 눈알을 벌겋게 하고 찾아다
녔다.
밤이 되자, 주위의 산들에서 불길이 올랐다. 봉화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있었다.
내호아는 그것을 보고도 코웃음을 쳤다. 고구려의 보초병이 자기들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연락하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오히려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놈들이 허둥거리고 있구나.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평양성도 함락될테지.
수나라 군사들이 먹고 마시고 있을 동안 평양성에서는 영양왕이 대신들을 모아 작전 회의
를 열고 있었다. 을지문덕은 요동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의 육군을 담당하기 위하여 멀리 나
가고 없었고, 이 방면의 전투 지휘는 왕이 직접하고 있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화평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대왕님, 수나라 군사는 2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 총병력의 열 갑절이 넘습니
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강화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 적은 이미 왕성의 이삼십 리 밖에 와 있소. 다시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고 말겠소.
이튿날 새벽에 내호아는 평양성 밖까지 도달하였다. 그는 척후대를 내보내어 정찰을 시켰
다. 정찰병들이 돌아와서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대장군님! 적은 모조리 도망쳤습니다. 얼마나 허둥대었는지 길에 금은과 피륙이 널려 있
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
네.
척후대의 보고를 듣고 내호아의 부하들이 먼저 들떴다. 그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평양성
의 외곽(나성)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수나라 병사들은 약탈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미 군대의 질서도 지휘도 없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민가에 침입하여 금은이 없나, 피륙이 없나 하며 벽을 무너뜨리고 방바닥을 파
헤쳤다.
고구려군은 계획적인 후퇴를 하고 있었다. 나성에는 절이 많이 있었는데, 그 곳에 약 1만
명의 정예 부대가 복병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약탈이 절정에 이르자, 고구려군은 절 문을 열고 일제히 나와 수나라 군사를 들이
쳤다.
수나라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싸우지도 못한 채 태반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도망쳤으나 아군은 이를 추격하였다. 쫓겨가는 수나라 군사들은 산 위로 피난해
있던 고구려 사람들이 습격하였다.
도망치지 말라, 적은 얼마 안 된다.
내호아는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 싸울 용기를 잃은 군사는 자기 그림자만 보고도
놀라 몇십 리고 달아나기 마련이다. 내호아가 가까스로 배 있는 곳까지 도망쳐 왔을 때에는
남은 부하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사들을 추격하여 배가 있는 데까지 왔다.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수나라 병선들을 불화살로 공격하였다. 내호아와 주법상은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여기
서도 수나라 군사들은 수없이 죽어 자빠졌다.
마침내, 길었던 하루가 저물었다. 하지만 수나라 병선은 계속 불타올라 주변은 대낮처럼
훤했다. 내호아는 다시 패수 하구로 달아나 바다로 나갔지만, 병선 10여 척에 군사도 20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5만 명의 수나라 수군이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편, 요동의 수나라 군사들은 양제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우문술은 부여길로 나오고, 우중문은 낙랑길로 나오고, 형원항은 요동길로 나오고, 설세
웅은 옥저길로 나오고, 신세웅은 현토길로 나오고, 장근은 양평길로 나오고, 최홍승은 수성
길로 나오고, 조효재는 갈석길로 나오고, 위문승은 증지길로 나와 압록강 서쪽에 모두 모였
다. 말하자면 아홉 갈래로 나뉘어 압록강 부근에 도착한 것이었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 곳에서 석 달 동안 쓸 수 있는 식량과 무기와 갑옷, 침구 등을 보급
받았다.
우문술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적은 우리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그러니 무기나 식량을 조금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
다. 무겁더라도 지고 가면서 싸워라. 만일 버리는 자가 있다면 목을 베겠다.
그런데 한꺼번에 많은 식량과 무기를 받은 수나라 군사들은 총사령관의 엄한 명령에도 불
구하고,
요동 천 리를 걸어오며 지칠 대로 지쳤는데, 여기서 자기의 몸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식
량과 무기를 지고 가라니 정말 너무하는구나! 그런다고 누가 미련스럽게 지고 갈 줄 알고?
라고 불만을 터뜨리며, 식량과 무기를 몰래 버리거나 땅 속에 파묻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의 이런 사기 저하를 첩자로부터 보고 받고, 수나라의 대군을
막기 위하여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적군이 이르는 곳에 식량은 한 톨도 남기지 말라. 그리고 맞서 싸우지도 말라. 내가 적
을 무찌를 계책을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수나라 군사들은 광대한 요동벌을 지나오는 동안 고구려의 식량을 전혀 얻지 못
하였다.
또한,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의 글을 써 가지고 직접 적진을 찾아가, 그곳의 동정을 살피
기로 마음먹었다. 을지문덕의 부하 장군들은 처음에 이것을 알고 깜짝 놀라며 말렸다.
대장군님, 그러다가 적군에게 살해되면 어쩌시렵니까?
을지문덕은 이 말에 웃으며 말하였다.
적이 나를 죽인다면 그것도 나의 운명이다. 내가 죽더라도 이미 수립한 작전대로 행동하
여 싸우면 된다. 그러나 적의 상황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면 좀 더 나은 작전을 세
울 게 아니냐? 내 목숨이 위태롭다고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마저 놓칠 수는 없다.
을지문덕은 이런 비장한 각오로 적진을 찾아갔다.
적진에 도착한 을지문덕은 첫눈에 수나라 군사의 사기를 알 수 있었다. 적병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고 반은 얼빠져 있었다.
을지문덕은 막사에 안내되어 우문술과 만났다. 위무사인 유사룡이 통역을 하였다. 우문술
과 을지문덕과의 일문 일답이 시작되었다.
우문술이 교만하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우리 진영에 찾아왔소?
저희 고구려는 상국과 싸울 뜻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복할 뜻을 전하고 상국에서 다행히
받아 주신다면, 우리 국왕과 함께 항복할까 합니다.
우문술은 이 말을 듣자 기뻐하였다.
그게 정말이오? 진정 당신의 왕과 함께 와서 정식으로 우리한테 항복하겠단 말이오?
그러합니다. 만약 제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여기 항복의 글을 가지고 왔으니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고구려가 갑자기 항복하다니 수상하다. 을지문덕을 진중에 잡아두고 고구려왕이 항복하
기를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은가?
우문술은 그것을 동료 장군들과 의논하였다. 그러자 유사룡이 이를 반대하였다.
을지문덕을 잡아 두는 것을 우리 수나라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만약, 이 일이 알
려진다면 신의 없는 우리를 누가 믿고서 항복하러 오겠습니까. 그러니 을지문덕을 돌려보내
어 왕과 함께 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을지문덕은 유유히 적진을 빠져 나와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수나라 군대가 아무리 기다려도 고구려왕은 항복하러 오지 않았다.
우문술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수나라 군사는 전쟁이 곧 끝난다고 기뻐하
며, 식량을 아끼지 않고 먹어 버려서 이제는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문술은 장군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 같소.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단 물러갔
다가 다시 오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우중문이 이를 반대하였다.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다니 말도 안되오. 장군은 30만 명의 대군을 가지고서 어찌
적을 두려워한단 말이오. 압록강을 건너 넉넉잡아 사흘이면 평양성을 점령할 수 있고. 거기
에는 우리의 수군도 와 있을 것이니 공격합시다.
이리하여 수나라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이 보고를 받자 싱긋
웃었다.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을 찾아간 보람이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하였소. 이제는 지친
적을 되도록 깊이 유인하여 한꺼번에 모두 죽이는 일만이 남았소.
수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오자, 아군은 싸우는 척하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다.
이 때 고구려군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는 척하며 달아났다고 한다.
야, 적이 도망친다. 추격하라, 추격하라!
우중문은 앞장 서서 외쳤다.
이러다가는 사흘이 아니라 하루면 평양성에 도달할 수 있다! 거기에는 술과 고기가 너희
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어 추격하라!
와아, 와아!
수나라 군사들은 기를 쓰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을 뒤쫓았다. 마침내 그들은 살수(청천강)
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도달하여 진을 쳤다. 하룻동안에 200리 이상을 달려
온 셈이다. 해가 지자 그들은 그 곳에서 쉬기로 하였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수나라 군사들이 주둔한 곳의 사방 언저리 산에 수없이 많은 불길
이 나타나고 고구려군의 함성이 산과 들을 뒤흔들었다. 그뿐 아니라 잔뜩 믿었던 내호아의
수군이 벌써 오래 전에 전멸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적장 우중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앗, 적의 함정에 빠졌다. 급히 퇴각하라!
수나라 군사들이 당황하여 철수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군사가 문득 땅에 떨어진 종이
쪽지를 보고 우중문에게 바쳤다. 우중문은 그것을 읽자 와들와들 떨었다.
그것은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비웃는 시가 씌어져 있는 쪽지였다.
신묘한 그대의 꾀를 무엇이라 말할까? 천문과 지리에 통달했겠지? 싸움마다 이겨 공 아
니 높겠는가? 바라보라, 만족함을 알거든 이 싸움을 그만두는 게 어떤가?
장군, 무슨 글입니까?
속도 모르는 부하가 물었다. 우중문은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렀다.
후퇴다, 후퇴!
수나라 군사들은 미처 쉬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다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마치 썩은 풀을 베듯이 그들을 베어 버렸다. 지칠 대로 지친 수나
라 군사들은 그저 정신 없이 달아났다.
그들은 도망치다가 나무만 우뚝 서 있어도 놀라 주저앉았다. 올 때에는 아무도 없는 벌판
과 산길을 마구 달려왔으나, 도망치는 길에는 고구려 사람 모두가 유격대로 변하여 이들을
무찔렀던 것이다.
마침내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 강을 건너올 때는 물이 무릎까지도
차지 않아 손쉽게 건너왔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가려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 물벼락인가! 캄캄한 밤중에 느닷없이 급류가 쏟아져 수나라 군사들은
수없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것은 을지문덕의 지시로 강 상류를 미리 막아 두었다가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를 건널 때, 둑을 터놓은 것이었다.
사람 살려!
아, 나 죽는다!
수나라 군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급류 속에 휘말려 떠내려갔다가, 거기에 또 고구려군이
강 양편에서 화살을 쏘아댔다. 수나라의 장군 신세웅은 여기서 죽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처음에 압록강을 건넜을 때는 모두 9군으로, 병력은 30만 5000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곳곳에서 고구려군에게 전멸되어 요동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여
명이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수군도 이 참패를 수습할 길이 없어 자기 나라로 물러갔다. 수나라 양
제가 아무리 발을 구르며 화를 내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양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우문술을 군사로 강등시켰고, 쇠사슬에 묶어 끌고 돌아
갔다고 한다.
하지만 우문술의 아들 우문사급이 양제의 딸 남양 공주의 남편인지라 사형만은 시키지 않
았다. 그 대신 위문사인 유사룡이 을지문덕을 살아 돌아가게 한 죄로 목이 잘렸다.
양제는 영양왕 24년 2월, 다시 원정군을 조직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번에도 양제는
몸소 전쟁터에 나갔다.
지난 번에는 멀리 평양성을 공격하려다가 실패를 보았다. 이번에는 요동의 적군 성을 이
잡듯이 하나하나 짓밟고 나아가도록 하라.
수나라 양제는 요동에서 철수할 때, 각지에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
해를 입었다. 그 때의 경험이 뼈에 사무쳐 이런 작전을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도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요동의 무려라를 함락시켜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했을 뿐이었
다.
더 이상의 전쟁은 백성을 괴롭힐 뿐이다. 무도한 황제를 타도하자! 라고 외치며, 양소의
아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6월,
이 일로 양제는 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양현감은 고구려 원정의 병참을 맡고 후방인 여양에서 남쪽의 곡식을 북쪽으로 보내는 책
임자였다. 그는 친구 이일과 손잡고 여양에서 가까운 낙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하여 두 달 만에 평정되었다.
양제는 부하에게 명령하였다.
이번에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것은 인구가
많은 탓이다. 인구가 많으니까 반란을 일으키는 자나 도둑들이 많아진다. 죄가 있는 자는
가족까지 모두 죽여라.
이 때문에 3만여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때, 수나라 병부시랑(국방 차관) 괵사정이 양현감의 반란에 연루되어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괵사정은 제3차 고구려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는데, 그의 고구려 도망은 양제의 마음을
더욱 노하게 만들었다.
영양왕 25년에 양제는 제4차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병력을 탁군에 집결시키고 양제
가 앞장 섰다. 양제는 우문술, 양의신 등을 보내어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
나 이들은 압록강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수나라 군사의 별동대인 왕인공은 부여도로 나가 신성 가까이 이르러 거기서 고구려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고구려 군사들은 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적과 싸웠다. 수나라 군
사들은 이때 비루, 충, 운제, 충제간 등 갖가지 신무기를 사용하였다.
비루는 바퀴가 달린 높은 망루이다. 그곳에서 성안을 향해 굽어보며 화살을 쏘았다. 충은
성문을 부수는 무기이다. 거대한 통나무를 수레에 장치하고, 그것으로 공이처럼 성문을 들
이받아 성문을 깨뜨리는 것이다. 운제는 구름 사다리란 뜻으로 성벽에 걸쳐 기어오를 수 있
게 만든 무기다. 충제간만은 약간 색다른 무기로, 이것은 길이가 열다섯 자나 되는 일종의
장대이다. 장대 끝에 매달려 성벽에 내려, 성벽을 지키는 군사와 백병전을 벌일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였다.
제아무리 많은 도구를 사용하여도 신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포위된지 수십
일 동안 결사적으로 이들을 막아냈다.
이 때, 내호아는 수군으로 고구려의 요동 반도 끝에 있는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도
이 즈음에는 어지간히 싸움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도망쳐 와 있었던 괵사정을 잡아 수나라
로 돌려보내며 화평을 요청하였다. 수나라 양제도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해야 승리할 가망
이 없으므로 화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으로 내 체면은 섰다.
양제는 이렇게 생각하고 함거에 실려 온 괵사정을 끌고 대흥성에 돌아가서 그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고, 고기와 국물을 벼슬아치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하였다.
이것은 옛날부터 황제가 신하를 경고하기 위하여 쓰던 처형 방법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것이야 어찌 되었던 살수 대첩 이후의 을지문덕 장군은 어찌 되었을까?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수나라의 제3차, 제4차 침공
을 맞았을 때,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활약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왕에게 이런 말
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으로 고구려는 안심입니다. 적이 다시 쳐들어오려면 적어도 20년, 아니 30년은 걸려
야 하겠지요.
을지문덕은 아무리 인구가 많고 큰 나라라 하여도 네 차례에 걸쳐 패전을 하였다면,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 수나라 양제는 무리한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에 신하들의 반란으로 서기 618년에
죽임을 당하고 나라도 멸망했다.
수나라의 뒤를 이어 당나라가 일어났는데, 보장왕 4년에 당나라 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공
격하였다.
그 때까지 을지문덕은 살아 있지 않았겠지만 꼭 30년 뒤에 고구려는 다시 국난을 맞게 되
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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