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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한국위인특대전집 (19)윤봉길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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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19)윤봉길.

 

  윤봉길(1908∼1932).
  일제 때 독립 운동가. 충남 예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라고 오랫동안 살았
다.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3·1 운동이 일어나자 분격해서 학교를 그
만두고 말았다.
  그 뒤 최병대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21년 성주록의 오치서숙에 들어가 중국의 옛 학문들
과 유학을 공부했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 계몽 운동 ·농촌 부흥 운동에 뛰어들
어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치게 하고 과학적인 농사법을 익히게 하려고 많은 노력
을 기울였다.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차리기도 했다. 윤봉길은
손수  농민 독본 을 썼으며 학교를 가지 못하는 가난한 농촌 청소년들을 가르쳤고 연극·체
육 행사를 통해 농촌 사람들에게 항일 정신과 단결심을 불어넣었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에서 생활하며 독립군이 되고자 했다. 상하이에서 김구
를 만난 윤봉길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목숨 바쳐 독립을 위해 싸운  의사 이다.


  1. 알밤의 꿈

  8월 하순 어느 날 밤이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이것 저것을 치우다 방으로 들어온 김씨(김원상)는 자신도 모르게
 휴우우. 하고 한숨을 쉬며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루 종일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힘든 밭일을 하느라고 몸이 지칠데로 지쳤다. 거기다가 집에 돌아와서 저녁밥을 지어 먹고,
늦도록 집 안을 치우기까지 했으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남편 윤황은,,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기까지 하며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자신도 옆에 쓰러져 누워 자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잘 수는 없었다.
  김씨는 겨우 몸을 일으켜 장롱 위에 얹힌 반짇고리를 내렸다. 바느질을 좀 하다가 잘 셈
이었다.
  그런데 몇 바늘 꿰매지 못하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안 되었다.
할 수 없이 반짇고리를 밀어 놓고 누웠다.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김씨는 자다가 꿈을 꾸었다. 혼자 밤나무 사이를 걸어갔다. 밤나무 가지에 조그만 밤송이
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밤송이가 많이 달린 걸 보니 올해는 밤 풍년이 들겠네. 밤을 많이 따겠어.
  김씨가 밤송이들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밤나무 가지에서 밤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누가 밤나무 가지를 흔든 것도 아니고,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참으로 이상한 일
이었다.
  김씨는 얼른 치마폭을 펼쳐 떨어지는 밤송이를 받았다. 치마에 떨어진 밤송이는 다른 밤
송이보다 유난히 컸다.
  그 밤송이 속에서 알밤 하나가 굴러 나왔다. 잘 익은 알밤이었다. 새파란 밤송이 속에서
알밤이 굴러 나온 것이 이상했다. 아직 밤송이 속에 알밤이 들어차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
텐데 말이다.
   어서 누구에게 보여 주자.
  김씨는 남편에게 먼저 알밤을 보여 주려고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
았다.
  안간힘을 썼다.
   으음 음…….
  김씨가 안간힘을 쓰는 소리를 듣고 남편이 놀라서 밤을 깼다.
   여보, 왜 그러오? 무슨 일이오?
  남편이 몸을 흔드는 바람에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난 김씨는,  제가 꿈을 꾸었군요. 하며 얼
굴을 붉혔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단잠을 깨게 해 드려서…….
   괜찮소. 무슨 일인가 하고 걱정을 했다가, 꿈이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는
구려. 그런데 무슨 꿈이었기에 그처럼 힘들어 하였소?
   그건 알밤 때문에…….
  김씨는 마음을 가다듬고 꿈 얘기를 자세하게 했다.
   이 꿈이 나쁜 꿈이 아닐까요?
   글세, 그런 것 같지는 않소. 만약 새파란 밤송이가 그냥 떨어지기만 했다거나, 밤송이 속
에서 쭉정밤이 나왔다면 몰라도, 탐스럽게 여문 알밤이 나왔지 않소.
  틀림없이 좋은 꿈일 것 같소. 당신이 치마폭을 펼쳐 받았으니, 태몽일 것 같기도 하고…
….
  남편의 말을 들은 김씨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더구나  태몽 이란 말까지 듣자, 물에 던져
진 쇳덩이 같던 몸이 바람결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새파란 밤송이 속에서 굴러 나온 알밤의 꿈은 바로 태몽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난 뒤부터 김씨에게는 태기가 있었으며, 열 달 후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1908년(순종 2년) 6월 21일 오후 8시.
   으앙!
  우렁찬 아기 울음 소리가 가야산 아래에 자리잡은 충청 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마을
의 고요를 깨뜨렸다.
  첫울음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웃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들은 첫울음 소리만 듣고도,  큰 장군감이 태어난 것 같군.
   우리 마을에 경사 났어.
   우리 마을 뿐 아니라, 나라의 경사야. 나라를 구할 인물이 태어난 거라고.
하고 수군대며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뻐했다.
  이 아기가 바로, 뒷날 이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귀중한 목숨을 스스로 내던진 의사
윤봉길이었다.
  윤봉길의 본 이름은  우의 였다.  봉길 이란 이름은 독립 운동을 할 때 지은 별명이었다. 이
두가지 이름 말고,  매헌 이라는 호가 또 있었다.
  윤봉길은 고려 때의 유명한 장수인 윤관의 28대 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두더지 란 별
명을 얻으면서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산을 늘려 놓은 부자였다. 그렇지만 재산을 나눠
줄 때, 대부분의 재산은 맏아들에게 물려주고, 윤봉길의 아버지인 둘째 아들에게는 겨우 논
열다섯 마지기만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맏아들은 글도 가르쳤지만, 둘째 아들은 글마저 가
르치지 않았다.
  윤봉길의 아버지 윤황은 글을 모르고 가난했지만, 착하고 알뜰하게 살아가려고 애썼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올바르게, 부지런히 사는게 행복일 거요.
  남편의 말을  들은 윤봉길의 어머니 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버지께서 항상 하시는  사람의 복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있다. 는 말씀을 잊지 않고
있어요. 부지런하면 복을 받고, 행복해진다는 걸 믿어요.
  하고 맞장구쳐 주었다.
  김씨는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일에도 정성을 다 쏟았다.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 아이는 보통 아이와 달라. 새파란 밤송이 속에서 굴러 나온 여문 알밤 같은 아이야.
어떻게든지 잘 길러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다짐을 하곤 했다.
  윤봉길은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길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방바닥
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문설주를 잡고 일어서기도 했다.
  말을 배울 때가 되자, 보통 아이들과는 견줄 수 도 없을 만큼 빨리 배웠다. 생각하는 것도
매우 영리했다.
  어릴 때부터 몸집이 큰 윤봉길은 힘이 매우 세었다. 세 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가 골목에
나가 큰 아이들을 때려 울리곤 했다.
  얻어맞은 아이들의 부모가 화풀이를 하려고 달려왔다가는 도리어 자기 아이를 꾸짖고 말
았다.
   이런 못난 것! 그래, 저 어린 아이한테 맞아서 울어?
  그리고는  윤봉길을 보고,
   넌 세 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가 어찌 그리 힘이 세냐? 장사야, 장사! 하고 혀를 내둘렀
다.
  성질이 급한 윤봉길은 말을 할 때도 빨리 했다. 그래서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혀
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발음이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 김씨는 그러한 윤봉길을 보고 걱정을 했다.
   그냥 두면 안 되겠어. 내가 가르쳐야 하겠다.
  아버지 윤황과는 달리 한글을 깨친 어머니 김씨는 흰 종이에 글자를 써서 가르치기 시작
했다. 쉬운 글자부터, 조금씩 가르쳤다.
  윤봉길이 다섯 살 되던 해부터는 큰아버지인 윤경에게 보내어 천자문을 배우게 했다. 사
촌 형과 이웃집 아이들이 함께 배웠다.
  윤봉길은 한자를 읽을 때, 발음을 똑똑하게 하지 못했다. 자꾸만 틀리게 읽으니까, 큰아버
지가 야단을 쳤다.
   넌 왜 혀를 제대로 돌리지 못하느냐?
  때로는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윤봉길은 그만 글방에 가기가 싫어졌다. 천자문 공부도 하기 싫었다.
   글을 배워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어머니는 윤봉길을 달래어서 등에 업고 글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아침  저녁으
로, 배운 천자문을 복습시켰다.
  윤봉길은 조금씩 천자문 공부에 재미를 들이게 되었다. 읽을 때 발음도 똑똑하게 하고, 외
우기도 잘 했다.
  어머니는 맏이인 윤봉길뿐만 아니라, 세 동생을 키우는 데도 정성을 다 쏟았다.
  그래서 두 남동생 성의와 남의, 여동생 임의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2. 애국심이 싹트다.

  큰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던 윤봉길은 열한 살이 되던 1918년 4월에 예산면에 있는 덕산
공립 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다.
  글방과 다른 신식 학교에 가서, 딱딱한 한문공부가 아닌 여러 가지 공부를 배우고 익히니
재미가 있었다. 여러 가지 시간 중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체조 시간이었다.
  체조는 윤봉길의 성격과 몸에 제일 잘 어울렸다.
  교사들은 금테를 두른 모자에 제복을 입고, 긴 칼을 옆에 차고 글을 가르쳤다.
   글을 가르치는데, 뭣하러 무시무시한 칼을 차고 가르칠까?
  윤봉길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 교사들은 우리 나라 말과 글은  조선어 라 하고, 자기 나라 말인 일본어는  국어 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일본인 교사들은 말이나 행동이 매우 당당했다. 그러나 한국인 교사들은 달랐다. 일본인
교사들에게 굽신거리며 아첨을 했다.
   똑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왜 다르게 행동할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일이 참 많았다.
  윤봉길이 2학년으로 올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1919년 3월 초였다.
  교실에서 한국인 선생님과 함께 수신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 교실 문이  드르륵  급하게
열렸다. 일본인 교장이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급하게 들어서더니, 외치듯이,
   수업은 그만 한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거라. 얼마 동안 휴교를 할 테니, 학교에 오지
말아라. 지금 장터에서 나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학생들은 절대 가까
이 가지 않도록 해라. 하고 서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쫓기듯 다른 교실로 가버렸다.
  갑자기 교실이 시끌시끌해졌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뒤,
   지금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장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을 거다. 또 헌병들이 마구 총칼을 휘둘러 댈 것이니, 너희들은 장터를 피해서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하고 일러 주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윤봉길은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대한 독립 만세가 무엇입니까?
  다른 아이들도 눈빛을 반짝이었다.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머뭇거리다가,
   우리 나라 사람끼리 나라를 세워 살기를 원한다고 외치는 것이지.
  하고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창 밖을 살폈다.
   우리 나라 사람끼리 나라를 세워 살기를 원한다고 외치는 게 뭐가 나빠서, 일본 헌병들
이 총칼을 휘두르며 막으려고 하지요?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니, 어서 돌아가거라.
  선생님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서둘러 교실을 나가 버렸다.
  아이들은 책보를 싸 들고 일어섰다.
  윤봉길은 아이들 몇을 데리고 장터로 달려갔다.
  장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그들은 손에 든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
라,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쳐대고 있었다. 장날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날이 아니라, 독립 만세를 부르는 장날이
되었다.
  사람들마다 손에 들고 흔드는 태극기는 힘차 보이기도 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그
태극기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눈물이 울컥 솟았다.
   대한 독립 만세!
  윤봉길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몰려선 데
로 달려가려고 했다.
  바로 그 때였다.
   탕 탕 탕탕 탕탕…….
   대한 독립 만세!
  일본 헌병들이 쏘아 대는 총 소리와 그칠 줄 모르고 외쳐 대는 만세 소리가 뒤섞여 들려
왔다.
   악!
   으악!
  맨 앞에서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 몇이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사람들은 계속
해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일본 헌병과 경찰은 이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그 바람에 앞장 서서 만세를
부르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리고 주재소로 끌려간 사람도 많았다.
  함께 만세를 부르던 장꾼들은 총 소리에 사방으로 흩어졌고, 이것을 구경하던 학생들도
겁에 질려 달아났다. 윤봉길은 마구 총을 쏘아 대는 일본 헌병과 경찰을 보고,
   왜놈들은 왜 당연한 것을 부르짖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저렇게 악마처럼 잔인하게 굴
까? 정말 나쁜 놈들이다.!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놈들이 총을 쏘아 댄다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려면 뭣하러 만세를 불렀을까? 총칼
이 그렇게 무서우면 처음부터 뛰쳐나오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꼬마도 만세를 불렀소까?
  저쪽에서 일본 헌병 하나가 총을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윤봉길은 일본 헌병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미웠다. 그래서 화를 못 참아 씩씩거리며 가만
히 서 있기만 했다.
  일본 헌병은 윤봉길을 쏘아보더니,
   이 자식아! 여기 있으면 죽어. 알았소까? 빨리 집으로 가!
라며, 총개머리로 등을 냅다 밀었다. 윤봉길은 비틀거렸다. 일본 헌병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도망간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악마 같은 놈들!
  윤봉길은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돌렸다.
  윤봉길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왜놈들이 왜 올바른 우리 나라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나요? 무엇 때문인가요?
하고 물었다.
   우리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란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셨다.
   아버지, 무엇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나요? 우리 나라를 왜 왜놈들에게 빼앗겼느냐 말이예
요?
  윤봉길이 아버지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따지듯이 물었다.
   우리 나라가 힘이 약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과학 문명도 뒤떨어져 있었단다. 앞으로 너희
들은 애써 배우고, 또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빼앗긴 나라를 꼭 되찾아야 해.
  아버지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긴 듯 가늘게 떨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윤봉길도 마음이
슬퍼졌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꼭 애써 배우고 힘을 길러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이바지
하겠다는 결심이 솟아 올랐다.
   아버지, 전 인제 학교에 가지 않을 거예요.
  윤봉길의 결심에 찬 말을 들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애써 배워야 한다고 금방 말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왜놈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시키는 걸 배워서 뭘 해요?
   그렇지만 공부는 해야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힘을 기를 수가 없어 왜놈들과 맞서서 겨
룰 수가 없단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우리 나라를 꼭 되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가슴 속
에 꽉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부는 할 거예요. 아버지 말씀대로 공부는 애써서 할 거예요. 그렇지만 왜놈한테 배우지
는 않겠다는 말이예요.
   그럼 누구한테, 어디서 배우겠다는 거냐?
   이제부터 학교 대신에 서당에 가서 공부를 할 거예요. 서당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그제서야 아버지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윤봉길의 결심에 찬 말이 매우 든든하게 여
겨졌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이 아이한테는 어딘가 남다른 데가 있어. 마음 속에 큰 뜻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거야.
꼭 큰 일을 하게 될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3. 깊어지는 학문

  윤봉길은 학교를 그만 둔 다음 날부터 최병대라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서당에 다녔다.
  최병대 선생님은 아이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공부를 가르
치는 분이었다.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참 스승이었다.
  윤봉길은 이 서당에 들어가서 한문을 열심히 배웠다. 전보다 공부하는 태도가 퍽 달라졌
다.
  윤봉길은 전에 큰아버지의 서당에 다닐 때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 때문에 다녔었다. 그렇
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스로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를 잘 하여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마음 속 깊이 맹세하고, 공부를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윤봉길은 선생님으로부터 한 번 배운 것을 어떻게 하든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자꾸 읽고 또 쓰고, 거듭 거듭 연습하여 머릿속에 쑥쑥 집어 넣었다.
  윤봉길은 한문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문을 스스로 익히기 위해 예산 장터
까지 가서 잡지를 구해 와서 읽었다. 그러는 한편, 우리 겨레의 정신적 등대가 되는 동아 일
보를 사서 읽기도 하였다.
  윤봉길은 모든 것이 전과 달랐다. 마음은 넓고 깊어지고, 몸가짐도 의젓해졌다. 때로는 잠
자는 것조차 잊고 공부에 정신을 쏟았다. 장터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독립 만세 운동의
뜨거운 바람이 그의 가슴 속에 애국심의 불을 당겨 준 것이었다.
  어느덧 2년이 흘러갔다. 윤봉길은 튼튼하고, 씩씩하고, 의젓한 소년이 되었다.
  하루는 최병대 선생님이 윤봉길을 불렀다.
   내가 그 동안 너에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친 듯하구나. 그러니 너는 이제 나보다 훨씬
나은 선생님을 찾아가서 너의 공부를 훌륭하게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 말을 듣고 윤봉길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저는 어떤 스승을 만나 공부를 배우란 말씀입니까?
   이웃 마을에 있는 오치숙을 찾아가거라.
  이웃 마을에 있는  오치숙 이란 서당에서는, 성주록이라고 하는 한문 학자가 글을 가르치
고 있었다. 호가  매곡 인 그는 특히 예법에 관한 글과 유교의 경전에 밝았다. 그런데다가 정
의감이 강한 선비였다.
  윤봉길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아들을 오치숙에 보내어 성주록의 지
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윤봉길은 다음 날부터 오치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사서와 삼경을
배우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르고, 의롭고, 지혜롭고, 또한 어질게 살아
가야 함을 깨우쳐 주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갔다.
  오치숙에는 윤봉길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없었다. 모두 윤봉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
중에는 마흔이 넘은 사람도 있었고, 눈이 내린 듯 머리가 흰 할아버지도 있었다.
  윤봉길이 오치숙에서 처음으로 시를 지었을 때였다.
  성주록 선생님은 윤봉길이 지은 시를 보더니
   시를 짓는 솜씨가 뛰어나구나.
하고 칭찬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칭찬을 한 일이 없었다.
  윤봉길은 칭찬을 받고 나서,
   글은 배우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배운 글을 잘 나타낼 줄 알아야 비로소 학문이 이
루어지는 것인 모양이로구나.
하고 크게 깨달았다.
  그 뒤로, 윤봉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 윤봉길은 학문이 점차 깊어져 갔
다. 아무도 그의 학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오치숙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윤봉길은 참으로 대단해.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친단말이야. 그야말로 천재라니까.
하고 칭찬하며 부러워했다.
  윤봉길은 결혼한 뒤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학문을 닦는 데 열중했다.
  오치숙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외우는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볼 때마다 윤봉길은 맡
아 놓고 1등을 했다.
  봄과 가을에는, 오치숙에서 배우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장의 선비들까지 한데 모여서 실력
을 겨루는 행사가 펼쳐졌다. 바로  한시 짓기 대회 였다. 이 때에도 윤봉길은 으뜸을 놓치지
않았다.
  윤봉길은 학문뿐 아니라 힘이 세기로도 이름이 났다.
  결혼을 하던 다음해,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였다.
  동네 사람들은 윤봉길의 힘이 얼마나 센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
  먼저 윤봉길의 친구인 환길이가 나서서 산에 가자고 꾀었다. 윤봉길은 환길을 따라 가야
산 중턱 산소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 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저 상돌을 들어 올리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장사라고 불러 줘야 해.
   오늘 우리 동네에 장사가 나타났으면 좋겠어.
  이런 말을 들은 윤봉길은 동네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상돌을 들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서 가장 힘이 센 두철이와 만용이도 나
서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쯧쯧……. 우리 동네에 힘쓰는 사람이 이렇게도 없으니 큰일이구려. 예산에서 개최되는
씨름 대회에 우리 마을 대표로 누구를 뽑아 보내야 하겠소?
  동네 사람 중의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두철이가 선큼 나서서 상돌을 들어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나가서 한번 들어 보려무나,
  환길이가 넌지시 말하자, 윤봉길은
   어른들도 들지 못하는 상돌을 내가 어찌 들 수 있겠니?
라며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넌 들 수 있을거야, 틀림없어. 어서 나가서 들어 보라니까.
  환길이가 떠밀다시피 하자, 윤봉길은 하는 수 없이 상돌 앞으로 나왔다. 모든 사람들의 시
선이 윤봉길에게로 쏠렸다.
  윤봉길은 상돌을 잡더니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상돌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와아! 상돌이 들어 올려진다.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동네에서 어른 장사로
알려진 기철과 만용이도 들어 올리지 못한 상돌을 소넌인 윤봉길이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우리 시량리에 장사가 숨어 있었구려! 윤봉길은 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힘도 우리 마
을에서 으뜸가는구려!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윤봉길을 칭찬했다.
  윤봉길의 이 소문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날개 돋친 듯이 퍼져 나갔다.
  어느 날, 오치숙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 성주록 선생님이 윤봉길
을 불렀다.
   어찌 부르셨습니까?
  윤봉길이 궁금해서 물었다.
  성주록 선생님은 윤봉길을 바라보더니,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말했다.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다음가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부모에 효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윤봉길의 대답을 들은 성주록 선생님은 몹시 기뻐했다. 윤봉길이 벌써 높은 학문의 경지
에 이르러 있음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이었다. 윤봉길은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을 위해 목숨을 잃은 사육신의 굳은 절개
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탄을 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
  이 시조는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지은 것이다. 시조 속에 임금을 향한 절개가
굳게 나타나서, 윤봉길은 이 시조를 즐겨 읊곤 했다.
   사람이 지조는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
  이런 생각을 줄곧 했다.
   배운 사람은 나라와 겨레를 사랑할 줄 알고, 아낄 줄 알아야 해. 나는 커서 빼앗긴 나라
를 되찾도록 힘쓰겠어.
  이렇게 혼자서 다짐을 하기도 했다.
  성주록 선생님은 제자 윤봉길에게  매헌 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매헌 은 성삼문의 호인
 매죽헌 에서 가운데에 있는  죽 자를 빼고 만든 것이었다.
   눈 속에서 꽃눈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퍼뜨리는 꽃이 매화니라. 너는 그 매화처
럼 맑고 고귀한 품성을 갖추도록 하여라.
  성주록 선생님은 윤봉길에게 호를 지어 주며 이렇게 부탁을 하였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마음에 꼭드는 호를 얻은 윤봉길은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몸과 마음을 닦기 위해 애를
썼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성주록 선생님이 윤봉길을 불렀다.
   내가 떠날 때가 됐네. 자네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어. 자네와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
지만 어쩔 수 없네.
뜻하지 않은 말을 들은 윤봉길은 소스라쳐 놀랐다. 알고 보니 성주록 선생님을 떠나기 위한
짐까지 이미 꾸려 놓고 있었다.
   스승님, 그건 안 됩니다. 저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자넨 나에게 더 배울 것이 없네. 나보다도 학문이 높네. 이젠 더 학문이 높은 스승을 찾
도록 하게.
  성주록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오치숙을 떠나갔다.
  윤봉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른 지방에서 이름 높은 스승을 모셔 오려고 마음먹었다.
아들이 학문을 더 높게 쌓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셔 온 스승마다 얼마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다. 모두 학문이 훌륭했으나, 윤
봉길의 글재주를 따를 수 없어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4. 야학과 월진회

  스승들이 떠나가 버리자 윤봉길은 마음이 허전해졌다.
  하루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공동 묘지 부근
에서 어느 시골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은 푯말을 한 아름 안고 다가오더니,
   이 푯말을 좀 보시고 어느 것이 우리 아버지 푯말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 아버지 푯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하며 푯말을 땅바닥에 와르르 내려 놓았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엇이오? 이건 공동 묘지의 묘표가 아니오? 이걸 어쩌자고 뽑아서
들고 다니오?
  윤봉길은 깜짝 놀라서 청년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저는 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산소가 우리 아버지
산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사느라고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우리 아버지 푯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발
좀 우리 아버지 푯말을 찾아 주십시오.
   아버지의 이름은 알고 있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시오.
   우리 아버지 이름은 김동성입니다.
   김동성이라면 이것이오.
  윤봉길이 푯말을 찾아주자, 청년은,
   이것입니까?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제야 우리 아버지의 산소를 찾게 되었습
니다.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였다.
   그런데 이 푯말들을 뽑은 자리에 무슨 표시라도 해 두었소?
  윤봉길이 묻자, 웃음이 가득하던 청년의 낯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큰일 났습니다. 푯말을 돌아다니면서 뽑기만 하고, 뽑은 자리에 아무 표시도 해 놓지 않
았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지요? 이젠 우리 아버지 산소를 찾을 길이 없어졌으니 이를 어쩌
면 좋습니까? 게다가 남의 산소까지 잃어버리게 했으니, 이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청년은 땅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울음을 삼켰다.
  청년을 내려다보던 윤봉길은
   우리의 적은 왜놈뿐만이 아니다. 무식도 우리의 무서운 적이다! 두 적을 어떤 일이 있더
라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 글을 모르는 문맹자한테 글을 가르쳐서 눈을 뜨도록 해 줘
야겠다.
  크게 깨달은 윤봉길은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위로해 주고,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동네에 내려온 윤봉길은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보았다.
   뒷산 공동 묘지 부근에서 자기 아버지 산소를 찾고 있는 청년을 만났지. 그 청년은 눈물
겹도록 불쌍한 청년이었어.
  윤봉길은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청년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
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겠지? 우린 부모 덕분에 글을 배웠어.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 글을 못 배운 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면 좋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야.
  친구들이 모두 좋다고 했다.
   어서 가르칠 방법을 의논해 보세.
  윤봉길은 친구들과 함께, 글을 못 배운 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의논했다. 우선 장
소부터 정했다. 윤봉길의 사랑방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일은 골고루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야학에서 사용할 물품을 사러 예산으로 나갔다. 동생 성의를 데리고 갔다. 흑판
과 지우개, 백묵, 공책, 연필 등을 샀다.
  야학을 한다는 소문이 좍 퍼져 나갔다. 야학을 시작하는 날, 어른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윤봉길은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 우리는 모두 농민이요, 농민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한결같이 무식하고 가난합니
다. 가난하기 때문에 무식하고, 무식하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난에서 벗어
나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을 한탄하지 말고 열심히 배워서 가난에서 벗어납
시다. 배울 시간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옛 사람들 중에도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
히 공부해서 이름을 떨친 분이 많습니다. 여러분, 일하다 쉬는 틈틈이 글을 배웁시다. 이것
만이 부자가 되는 길이요, 또한 남의 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러분, 무식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무서운 적을 몰아냅시다.
하고 힘주어 외쳤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감동해서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 야학에 나온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윤봉길과 친구들은 힘이 빠졌
다.
   그냥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아.
   글 모르는 사람들을 조사하여 명부를 만들면 어때?
   열 살에서 스무 살까지 조사를 해서 만들기로 하지.
  의논한 대로 명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명부에 적힌 사람들의 부모를 일일이 찾아가 야학
에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돈은 한 푼도 들지 않습니다. 공책도, 연필도, 모두 공짜로 줍니다. 공부가 끝나면 여자들
은 집에까지 데려다 주겠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윤봉길과 친구들의 열성에 감동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야학에 나오는 사
람이 늘어만 갔다.
  서너 달이 지나자 처음 계획한 대로 되었다. 윤봉길은 한글도 가르치고, 체조와 노래도 가
르쳤다. 체조를 할 때 붙이는 구령과 노랫말은 모두 우리말이었다. 그래서 기쁨이 더욱 컸
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교과서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말로 된 교과서가 없었다.
   우리 말로 된 교과서가 있어야 돼. 내가 만들겠어.
  윤봉길은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세 권 만들었다. 이름은  농민 독본 이라고 붙였다.
  농민 독본에  우리의 앞길 이란 단원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제1과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는 똑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나는 밭을 다루고 너는 쇠를 다룬다.
  우리들 세상이 잘 되도록
  쉬지 말고 일을 하자.
  앞으로 앞으로 더욱더욱 앞으로
  또한 다른 과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기도 했다.
  인생은 자유로운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을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세상은 귀한 것이다.
  나에 대한 생각, 대중에 대한 생각
  자유는 대중의 자유에서 우러나온다.
  윤봉길은 낮에는 들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하루 종일 힘든 농사일을 하고도 밤에는 야학
의 학생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또한 국사책이나 위인 전기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윤봉길은 학생들에게 가끔 우리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
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가슴에 나라 사람의 불씨를 심었다.
  야학에는 계속 나와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 나온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가르치기가 힘들었다.
   공부할 방이 더 있어야겠어. 글을 조금 깨친 사람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
에 반을 나누어야해. 둘이나 세 반으로 말이야. 지금 이 사랑방 말고 방을 더 구해 보는 게
어떻겠어? 교실을 더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이대로는 공부가 안 돼.
   빨리 교실을 마련하는 게 좋겠어.
  윤봉길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교실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곧 청년들의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새 집을 지을 의논을 하였다. 산을 가진 사람을 목
재를 대 주기로 했다. 목수 일을 하는 사람을 집 짓는 것을 돕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목
재를 잘라서 나르기로 했다.
  새로 지을 집의 이름은  부흥원 이라 하기로 했다. 마을을 부흥시킨다는 뜻이었다.
  좀 크게 지어서 야학당으로 쓰는 한편 회의장으로도 쓰고, 물건을 싸게 사고 파는 공동
구매 조합의 일도 볼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우선 실천 목표를 아래와 같이 정했다.
  1) 증산 운동을 편다
  2) 마을 공동 구매 조합을 만든다.
  3) 일본 물건을 배척하고, 국산품을 애용한다.
  4) 부업을 장려한다.
  이튿날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선 주춧돌을 놓고 산에서 베어 온 목재는 다듬어서 기
둥을 만들어 세웠다. 모든 청년들이 열심히 일을 했다.
  집을 짓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부흥원이 다 지어졌다. 마을 청년들이 하나로 뭉쳐 땀흘
려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윤봉길은 친구들과 함께 야학당을 부흥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부흥원이 잘 되어 나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였다.
  어느 날, 윤봉길이 부흥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다.
   윤봉길 씨가 어디 계십니까?
   내가 윤봉길이오. 나를 왜 찾소?
  윤봉길은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는 보통이었으며 어깨가 딱 벌어지고, 생김새가
당당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신문 기자입니다. 윤 선생께서 농촌 계몽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취재를 하려고요.
  청년의 눈빛이 번쩍번쩍 빛났다. 보통 사람과 다른 눈빛이었다.
  윤봉길은 청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 마주앉자, 청년이 말을 시작했다.
   나는 만주 독립군의 특무 공작원인 김태식입니다.
   그렇습니까?   윤봉길은 눈을 번쩍 떴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특무 공작원은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첫째로는, 숨은 동지를 포섭하는 일이지요. 윤 선생을 찾아온 것도 이 첫 번째 임무 때문
이랍니다. 둘째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왜군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알아 내는 것입
니다. 셋째로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 반대 운동을 펴고, 독립군에게 군사 자금을 모아 보내
는 것입니다.
  윤봉길은 감격하여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하였다.
   김 동지, 참으로 애국적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저도 독립 운동에 나서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윤 선생은 농촌에 남아서 농촌 부흥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저와
자주 연락을 합시다. 그러면서 농촌 부흥 운동에 힘쓰도록 하십시오.
  김태식은 이렇게 말하면서, 독립 운동이 되어 가고 있는 형편과 상하이 임시 정부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갔다.
  큰 용기를 얻은 윤봉길은 농촌 운동에 더욱 열중했다.
  윤봉길은 편지를 썼다. 경성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사촌 동생 윤신득에게 쓰는 편지였다.
책을 사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윤봉길은 경성에서 책이 도착하기 전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을 돌려가며 읽기로 했다.
  독서회는 날이 갈수록 활발해졌다. 야학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윤봉길은 야학당의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바라는 것 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고 물어 보았더니,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다.
   저는 쌀밥을 실컷 먹고 싶습니다.
   저는 예쁜 새 옷을 입고 싶습니다. 새 구두도 신어 보고 싶고요.
  학생들의 얘기를 듣고 윤봉길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틈틈이 민족 정신을 길러 주려고 애썼는데도 겨우 이 따위 대답뿐이라니…….
  그 때였다. 백영기라는 학생이 큰 소리로,
   저는 왜놈을 한 놈이라도 쓰러뜨리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음 그렇지! 그것이 바로 내가 바란 대답이야.
  윤봉길은 혼자 속으로 기뻐했으나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네 생각이 옳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아무 데서나 해서는 안 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야. 지금 한 말을 다른 데 가서 옮기면 절대로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윤봉길은 혹시나 해서 학생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1929년 3월 윤봉길은 월진회를 만들었다. 윤신득을 비롯한 서른여덟명의 회원이 달마다
회비 10전씩을 냈다. 그것으로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월진회는 세 가지 목표를 정해 놓고 활동하였다.
  첫째는, 부업을 장려함으로써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일이었다. 월진회에서 새끼돼지 몇 마
리를 사다가 회원 몇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기르도록 하였다. 그 새끼 돼지가 커서 새기를
낳으면 새기 한 마리만 월진회에 다시 내면 되었다.
  닭도 치게 하였다.
  또 축산에 관한 책을 사서 돌려 가며 읽기도 하였다.
  둘째는, 산림을 녹화하고, 과실 나무를 기르는 일이었다. 월진회 회원들은 마을 앞 냇가에
포플러 묘목을 6000그루 가량 심었다. 밤나무 묘목을 1000그루 가량 심었다.
  셋째는, 학문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학예회를 자주 열어 회원의 교양을 높이는 일
이었다.
  월진회의 회장을 밭은 윤봉길은 정성껏 일을 했다.
  그는 원진회 회가를 지어서 회원들이 부르도록 하였다. 회가는 3절까지 만들었는데, 1절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았다.
  조화신공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절승경개 수덕산의 정기를 모아
  금수강산 삼천리 무궁화원에
  길이길이 빛을 내는 우리 월진회
  동네 사람들 중에 월진회에 들겠다는 사람이 점점 늘어 갔다.
  어느 날 아침, 맨 처음에 새끼 돼지를 얻어 간 청년이 급하게 달려왔다.
   우리  돼지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어요.
   그래요? 새끼 다섯 마리나……!
   어서 가 보세요.
  청년은 윤봉길을 끌고 집으로 달려갔다.
   저것 보세요.
  청년이 돼지 우리를 가리켰다. 새끼 돼지 다섯 마리가 어미돼지의 젖을 빨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이제  돼지 부자가 됐군요.
   정말입니다. 이제 월진회에 새끼돼지 한 마리를 내놓아도 저는 다섯 마리의 돼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청년은 윤봉길에게 절까지 꾸벅하며 고마운 마음을 나타냈다.
   천만에요, 이것은 당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귀중한 대가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계속 부지런히 노력하십시오. 틀림없이 가난을 물리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윤봉길은 청년을 칭찬해 주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또 윤봉길은 월진회를 이끌면서 수암 체육회를 만들었다. 수암 체육회를 만든 윤봉길은,
   어떻게 하면 동네 청소년들이 튼튼한 몸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하지만 운동 기구를 산다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을 차고 놀면 어떨까? 그건 축구공만 있으면 될 게 아닌가. 그런데 여긴 운동장이 변변
치 못하잖아. 이걸 어떡하지?
  수암 체육회 청소년의 체력을 생각하던 윤봉길은, 윤씨 문중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 곳은 넓이가 약 5만㎡ 가량 되는 데다 그다지 경사가 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땔감으로
나 쓰일 잡목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윤봉길은 숨을 깊게 깊이 쉬더니, 이 곳에 불을 질렀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맹렬한
기세로 타 들어갔다. 겨울철의 나뭇잎과 나무는 바싹 말라 있어서 더욱 잘 탔다.
  산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면사무소나 주재소에서 알면 붙잡혀 갈 일
이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산에 불길이 번지는 것을 보고 혼자만 알 수 없는 웃음을 띠었다.
   우리 시량리의 청소년들이 이 곳에서나마 씩씩하게 공을 찰 수 있도록 해야지.
  윤봉길은 이런 생각을 하며 타 들어가는 불길을 보고 있었다. 불은 벌써 산의 5분의 2 가
량의 나무를 완전히 태우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몰려 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손에 산불을 끌 수 있는 연장을
들고 달려와 산불을 끄려고 애를 썼다. 어떤 이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나뭇가지 잎을 치우
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이 붙은 나무의 불을 열심히 끄고 있었다. 그리고 산불에 경험이 있
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톱과 곡괭이를 들고서 불붙지 않은 나무를 미리 거꾸러뜨렸다.
  대낮에 일어난 불은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산의 약 4분의 1 가량을 태운 다음 꺼졌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거 이만하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어.
   그러게 말야. 우리 마을 사람들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산을 태우고 말았을 걸.
이라고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산불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윤봉길이 산불을
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윤봉길이 시량리 마을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동네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선생님, 이 일이 어찌된 일일까요?
  월진회 회원 한 사람이 마을로 내려와서 윤봉길에게 이렇게 물었다. 윤봉길은 입가에 미
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이 산불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네.
   누가 일부러 불을 놓았나요?
  윤봉길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도대체 누가 불을 놓았다는 겁니까?
   그 불은 내가 놓았다네.
   네?
   내가 그 불을 놓았다니까. 수암 체육회의 운동장이 필요해서 말일세.
  윤봉길은 담담한 모습으로 불이 꺼진 산을 바라보며 대답을 했다. 그리고,
   우리 수암 체육회의 회원들이 뛰어놀 운동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디 운동장 구
하기가 쉬워야 말이지. 밭 한 평이라도 있으면 곡식부터 심어야 하는 세상이니……. 그러나
저 곳이면 우리들 수암 체육회 회원들이 마음껏 뛰어놀 만한 장소가 되겠지?
하고 의연히 말한 뒤,
   수암 체육회는 몸을 길러 주고 우리의 협동심을 길러 줄 걸세. 했다.
   윤선생님의 높은 뜻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청년은 혀를 내둘렀다.
  그 뒤, 윤봉길은 수암 체육회 회원들과 힘을 합쳐 불탄 자리를 잘 다듬어서 1만여㎡의 운
동장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수암 체육회 회원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을 했으며, 때로는 이웃 마을과 운
동 시합을 하기도 했다. 경기 종목은, 운동량은 많으나 경기 비용이 적게 드는 축구 경기가
대부분이었다.
  윤봉길은 그의 고향에서 이처럼 열심히 노력한 결과, 농촌 지도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
지기 시작했다.
  5. 독립군을 찾아

  1929년 가을이었다.
   오늘 월진회 학예회가 열리는 날이지?
   저녁을 얼른 해 먹고 구경갑시다.
   어떤 걸 할까?
   그거야 가 보면 알지.
  월진회의 학예회가 열리는 날,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월진회에서도
그 동안 많은 준비를 했다. 프로그램만 해도 농악·합창·독창·유희·연극 등 동네 사람들
이 관심을 가질 만하고, 흥미있는 것만 골라 모았다.
  연극을 상연할 때였다. 관객들인 동네 사람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연극을 구경하였다.
사실 그 연극은 윤봉길이 이야기의 내용을 쓰고, 연극 지도도 한 것이었다.
  연극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토끼와 다람쥐가 길을 가다가 함께 빵 한 개를 주웠다. 그런데 둘은 이 빵을 사이좋게 나
누어 먹지 못하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다투고 있었다.
  이 때 여우가 나타났다. 여우는 토끼와 다람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서,
   그럼 내가 너희 둘에게 빵을 똑같이 나누어 주면 어떻겠느냐?
라고 말하였다. 토끼와 다람쥐는 서로 바라보면서 좋다고 했다.
  여우는 빵을 받아서 둘로 잘랐다. 그런데 빵 조각이 하나는 크고, 하나는 좀 작았다.
   어? 이것 봐라. 이게 더 크잖아? 내가 분명히 똑같이 나누어 준다고 했는데, 이걸 어떡한
다? 옳지! 내가 큰 쪽을 한 입 먹으면 되겠군.
  여우는 이렇게 말하며 큰 조각을 입에 넣고 푹 베어 먹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어먹은
쪽 빵 조각이 더 작아지게 되었다.
   이것 봐라? 이번엔 이 쪽이 더 크잖아. 그러면 이쪽을…….
  여우는 또 빵 조각을 입에 넣고 푹 베어먹었다. 그러다가 혼자서 빵을 다 먹어버리게 되
었다.
   이제 빵이 없으니 서로 다툴 일도 없겠지?
  여우는 능청맞게 웃으며 그 곳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던 토끼와 다람쥐는
울상이 되었다.
  연극을 본 마을 사람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연극 속에 담긴 뜻을 모두들 되새기
고 있었다.
  그럴 때, 순사 부장이 윤봉길에게 와서,
   내일 우리 주재소로 나오시오. 하고 말했다.
   네? 왜 그러십니까?
   나와서 좀 조사 받을 게 있소.
  이튿날, 윤봉길은 덕산에 있는 주재소로 갔다. 윤봉길을 기다리고 있던 순사 부장은 그를
보자마자 따지듯이 물었다.
   어젯밤의 연극은 도대체 뭔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 대일본 제국을 여우에 비교해서 욕한 것이지?
   아니, 부장님은  이솝이야기 도 모르십니까? 어젯밤 연극은 서로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
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 네가 하는 일을 보면, 네가 어떤 뜻을 가지고 이 연극을 꾸몄는지 알 수 있다. 앞으
로는 주의하기 바란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주재소에서는 더 이상 트집잡을 것이 없었으므로 윤봉길을 풀어 주었다.
  그 해 11월, 일본에 대항하는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이 시작된 곳을
전라 남도 광주였다. 일본 학생들이 우리 나라 학생들을 얕보고 함부로 굴자 울분이 폭발했
던 것이다.
   윤신득도 한양에서 학생 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대요.
  예산 농업 학교에 다니는 정종진이 입술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윤신득은 윤봉길의 사촌
동생이었다.
   우리 나라 전체가 항일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조용히 있다니…….
  윤봉길이 혼자말로 탄식을 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종진과 함께 예산 농업학교에 다니는 정종호가 결의에 찬 눈빛을 반짝이며 윤봉길에게
물었다.
   우리도 학생 운동에 호응을 해야지.
  이 날 윤봉길은 정종호, 정종진과 함께 학생 운동 계획을 세웠고, 예산 농업 학교도 학생
시위 운동에 함여 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이 학생 운동에 194개 학교가 참가했고, 참가한 학생 수는 무려 5만 4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학생 사건으로 1642명이 구속되었고, 무기 정학 도는 퇴학 처분을
받은 학생들도 수천 명을 헤아렸다.
  윤봉길은 이 사건으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정종호와 정종진이 월진회 회원이요?
   네.
   그럼 월진회가 이번 학생 운동을 조종했습니까?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정종호와 정종진이 월진회 회원이잖소까?
   회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월진회 회원들이 학생 운동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월진회 회원이 주동이 되어 이번 일을 일으켰으니 당장 월진회를 해산하시오.
  윤봉길은 주재소에서 있었던 일을 월진회 회원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월진회 회원들
은 분노를 느끼면서 월진회의 앞날에 대해 걱정을 했다.
  윤봉길은 월진회 간부에게,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겠소. 우리에게 아무리 큰 일이 닥친
다고 해도, 미리 생각하여 모든 것을 대비해 둔다면, 일을 당하여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일에 대한 대책과 마음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하겠다는 것이오. 하고 일렀다.
   월진회는 우리 마을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월진회 간부들은 힘 주어 말했다. 윤봉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내가 월진회를 걱정한다면 여기서 떠나야 하지 않느냐. 지금 주재소에서는 나만 감시하고
있다. 나 하나만 이 곳에서 없어지면 주재소의 순사 부장도 더 이상 월진회를 해산하라고
하진 않겠지. 그래, 떠나자. 나라 밖에 가서 직접적인 독립 운동을 해 보자.
하고 결심을 한 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윤봉길은 나라 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이흑룡을 만났다. 이흑룡은 잡지사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 독립군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저도 가 본 지 여러 날 되어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며칠 후에 다시 갈 것 같은데, 그 때
형편을 살폈다가 일러 드리지요.
  윤봉길은 이흑룡이 다시 만주에 간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 때 나도 함께 갈 수 없겠소?
  윤봉길은 이흑룡에게 시량리의 형편과 자신의 결심을 밝히고, 도움을 청했다. 이흑룡은,
며칠 뒤 윤봉길과 신의주역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 곳에서 두 사람이 만나, 함께 만주
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럼 며칠 후 신의주역에서 만납시다.
   그럽시다. 신의주에서 만납시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덥석 잡고 며칠 후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윤봉길은 떠날 준비를 하였다. 부모님께는 마지막 효도를 하려는 듯 과자와 수건을 사다
드렸다.
  자신이 쓰던 사랑방을 정리하던 윤봉길은 붓을 잡고 마지막으로 글을 써 보았다.
   장부 출가 생불환
  이 말은  사나이는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는 뜻이었다.
  윤봉길은 글자를 써 놓고, 한 자씩 그 의미를 되뇌어 보았다.
  이윽고 떠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평소처럼 수수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 두 살
난 아들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모르고 해맑게 웃기만 했다.
  윤봉길은 아들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님, 예산에 다녀오겠습니다.
   거긴 왜?
   네, 동생 신랑감이 어떻게 생겼나 좀 알아 봐야 하겠어요.
   그래? 네 동생 신랑감이니, 찬찬히 잘 보고 오도록 하여라.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윤봉길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마음을 굳게 먹은 윤봉길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내 다녀오리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윤봉길이 집안 식구들 하나하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문을 나선 윤봉길은 삽교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정든 집이며, 그 동안 열성
을 바쳐 일했던 회관이며, 마을의 풍경을 하나씩 눈에 담으려고 애쓰면서도 발걸음을 재촉
했다.
  삽교역에 도착한 윤봉길은, 곧장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때 윤봉길의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기차에 오른 윤봉길은 멀어져 가는 고향을 내다보며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작별의 말을
하였다.
   내 뜻을 이룬 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땐 침울하고 어두운 고향이 아니라, 밝고 희망
서린 고향일 것이다. 고향아, 그 동안 잘 있거라!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 솟아 올랐다.
   아버님과 어머님! 제가 어찌 용서를 빌 염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가장 큰 도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빼앗긴 내
나라를 도로 찾는 것이 지금의 효도보다 더 큰 일이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부모님 슬하를 떠
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저의 불효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윤봉길은 해를 넘길수록 흰머리가 늘어만 가는 부모님이 오래도록 건강하길 빌었다.
  당황해하는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부인! 얼마나 당황하겠소. 어린것들을 당신에게 떠맡기고 이렇게 떠나가는 나 자신도 당
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는구려. 그 동안 같이 살아 온 당신과 내 가족을 생각하기에 앞
서 더욱 큰 일이 가로 놓여져 있으니 어찌하겠소? 내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해야 하는 이 일
을 당신을 이해해 주리라 믿소.
  이 세상에서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그 누가 알아주겠소? 지금 우리들은 일본놈들로부
터 하나같이 압박과 굴욕을 받아 가며 살고 있는 것이오. 우리도 배앗긴 나라를 다시 찾으
면 우리가 애타게 바라는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소. 그 때를 위해나는 싸
우려 하오.
  이러한 큰 일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나는 앞서서 나선 분들을
따르고, 또한 뒤에 따라올 분들을 위하여 의연히 나서려 하는 것이라오.
  나는 당신을 믿고 있소. 염치 없는 일인 줄 알지만, 부모님과 어린것들을 부탁하오.
  윤봉길은 어린 자식들의 모습도 떠올렸다.
   내가 너희들 곁에 없더라도,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다오. 그래서
꼭 오고야 말 새롭고 영광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다오.
  윤봉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난 일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앞날을 설계하다 보디 어느
덧 기차가 경성역에 도착하였다.
  경성에 도착한 윤봉길은, 경성역 근처의 큰 건물을 구경하다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갑자기 길을 떠난 자기를 너무 찾지 말라는 것과 당분간은 일을 위해서 돌아갈 수 없
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을 잘 모셔 달라는 것이 편지의 내용이었다.
  윤봉길은 그 날 밤,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신의주로 가는 기차는 밤에 출발하였다.
기차는 유난히 붐볐다. 윤봉길은 어서 빨리 신의주에 가서 이흑룡을 만나고 싶었다.
   이흑룡을 만나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야 할텐데…….
  자세를 고쳐 앉으며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던 윤봉길은 깜빡깜빡 졸았다.
  6. 동지를 만나다.

  찬바람이 어깨를 감쌌다. 윤봉길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폈다. 기차는 기적 소리를 울리
며 밤을 새워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어느 새 밖은 날이 밝아 있었다. 윤봉길은 기
지개를 켜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흑룡이 신의주역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은 어떤 일을 하고 있
을까? 상하이엔 우리 나라 임시 정부가 있다는데,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윤봉길이 앞으로의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윤봉길의 어깨를 툭 쳤다.
   이 봐, 어디까지 가는 거야?
  윤봉길이 쳐다보았더니, 날카로운 눈을 가진 두 사나이가 윤봉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
봉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빤히 마주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가지 가느냐니까.
   신의주까지 갑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요?
  윤봉길은 그들이 일본 형사라는 걸 얼른 알아차리고 짐짓 되물었다. 한 사나이가 조그만
수첩을 꺼내 보였다가 얼른 집어넣었다. 형사임을 알리는 신분 증명서였다.
   신의주에? 거긴 왜 가는 거야?
  윤봉길은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얼하러 가느냔 말이야?
   사촌 동생 집에 갑니다.
   그래? 사촌 동생의 이름이 뭐야?
   윤천의입니다. 하늘 천 자와 거동 의자입니다.
   네 이름은 뭔데?
   윤우의(윤봉길의 원래 이름)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면서 일본 형사가 된 이 사나이는 윤봉길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음 그 사촌 동생이 신의주 어느 동에 살지?
  윤봉길은 신의주에 가 본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알지도 못하는 동네 이름을 마구 댈 수도
없었다.
   신의주 무슨 동에서 사촌이 사는가?
   …….
   역시 어딘가 수상한 놈이로군.
  윤봉길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조선인 형사에게 걸릴 게 뭐람.
  쓴 입맛을 다시며 다음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기차가 정거장에 멈췄다. 형사들
은 윤봉길을 기차에서 끌어내렸다. 역을 바라보니  선천역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선천이라면
평안 북도 땅이었다.
  윤봉길은 선천 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윤봉길은 무서운 고문과 함께 혹독한 조사
를 받았다.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뭐야?
   너 조선 독립군이지?
   중국에 있는 누구와 연락하고 있는 거야?
   조선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어디로 가는 중이야?
  왜놈 형사와 조선인 형사가 갖은 고문을 하며 조사를 했으나, 윤봉길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으며, 자기는 독립군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티었다.
  조사를 받는 동안 윤봉길은 유치장의 독방에 갇혔다. 윤봉길은 이번 일을 곰곰이 생각하
며 조선인 형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을 왜놈에게 팔아먹다니, 도대체 저 놈은 조상이 있는 놈인가, 없
는 놈인가?
  형사들은 윤봉길의 고향에 있는 주재소에 윤봉길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윤봉길-농사를 지으며 농촌 계몽 운동을 함.
  별다른 혐의를 못 잡은 형사들은 윤봉길을 풀어 주었다. 붙잡혀 들어간 지 달포만인 3월
하순이었다.
  이흑룡이 신의주역에서 윤봉길을 기다리다가, 혼자 압록강을 건너간 지 오래된 때였다.
  유치장에서 나온 윤봉길은 우선 쉬고 싶었다. 지칠대로 지친 그는 여관을 찾았다.
   정주 여관 이라는 여관에 들어갔다. 윤봉길은 몰골이 수척하고,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
었다. 달포를 옷 한 벌로 유치장에서 지냈기 때문이었다.
  오랫만에 여유를 가진 윤봉길은 고향에 편지를 썼다. 사촌 동생 윤신득에게 쓴 편지는 부
모님의 안부를 묻고, 야학회와 월진회에 대한 격려, 그리고 입을 옷을 한 벌 보내 달라는 내
용이었다.
  윤봉길은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따뜻한 방에 누워 있다 보니 저절로 신음 소리가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윤봉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세수를 하려고 우물가로 나갔다. 이 때 옆방에서
도 한 사나이가 세수를 하러 우물가로 나왔다. 옆방 사나이는 윤봉길을 보더니,
   손님은 몸이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죠?
하고 말을 걸었다. 윤봉길이 자세히 보니 20대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네, 형사들이 뭘 조사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요? 저런 ……. 제가 약을 좀 가지고 있는데, 방에 들어가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있으면 좋아지겠지요.
  그 청년은 윤봉길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자기 방에 가서 약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윤봉길의 방에 따라 들어와서 여기 저기 약을 발라 주었다. 청년의 이름은  김태
식 이라고 했다. 윤봉길은 그가 일본에서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청년은 윤봉길에게,
   그런데 어디를 가시다가 이렇게 되셨소? 하고 물었다.
   네, 신의주에서 누굴 만나기로 약속하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윤봉길은 기차와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을 김태식에게 들려 주었다.
  김태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윤봉길은 생각을 했다.
   고향에서 만났던 독립군 공작원 이름과 같구나.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밤이 되자 김태식을 윤봉길을 다시 찾아왔다.
   윤 형은 저희와 동지가 될 수 있겠습니다.
   네?
  윤봉길은 찬찬히 김태식을 뜯어보았다. 낮에 병간호를 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조
선인 형사에게 혼난 사실을 생각했던 것이었다.
   실례되는 일인 줄은 알고 있으나, 오늘 윤 선생의 내력을 알아 보았습니다.
   제 내력을 알아보셨다고요?
   네, 윤 형의 말씀을 듣고 경찰서에 사람을 넣어 알아 본 것입니다. 농촌 계몽 운동을 하
셨다고요.
   …….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독립단에 들기 위해 만주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대학을 나오고도 이렇게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군요.
   앞으로 윤 형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네, 독립군에 들어갈 작정입니다.   두 청년
은 서로 숨김 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김태식이 윤봉길에게 말했다.
   윤 형, 윤 형은 집안의 장남이고, 또한 부모님도 생존해 계시며, 게다가 하시던 농촌 계
몽 운동도 있으니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농촌 운동을 하시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윤봉길은,  나는 부모에 효도하는 것보다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더 큰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마십시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김태식은 말없이 한동안 윤봉길을 바라보더니 옆방에 있던 두 사나이
를 데려 와서 소개시켜 주었다.
  먼저 선우옥이란 40대의 사나이는 독립단 공작원으로, 김태식에게 소개장을 써 준 사람이
었다. 다른 한 사람은 한일진이란 20대의 청년으로, 김태식을 만주에 있는 독립단까지 안내
할 사람이었다.
   윤 동지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우옥이 먼저 인사를 한 다음, 차례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새벽녘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윤봉길은 김태식으로부터 양복 한 벌을 얻어 입었다.
  밤새 얘기를 나누었던 선우옥이 윤봉길에게 말했다.
   윤 동지. 나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독립 운동은 해 오고는 있지만, 이 일
이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일본 형사의 감시가 심해서 함부로 국경을 넘
을 수도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생각에는 윤 동지는 맏아들이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저도 나라를 위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곳 신의주에 잠시 머물다가 기회를 봐서 국경을 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봉길이 선우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독립단 연락원을 만나러 갔던 김태식과 한일
진이 돌아왔다.
  그들은, 청산리 싸움에서 이름을 떨쳤던 김좌진 장군의 암살한 범인이 공산당원임을 알아
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윤봉길은 그 소식과 나라 안팎의 사정 얘기를 들은 다음 더욱 단단히 뜻을 굳혔다.
   선우 선생님, 저는 꼭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 운동을 하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윤봉길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본 선우옥은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윤 동지 부디 뜻을 이루기 바랍니다.
   제 마음을 알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7. 겨레를 위한 맹세

   여기가 안둥입니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넌 한일진은 기차에서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만주에 있는 안둥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약 250리를 걸어가면 우리의 독립단이 있습니다. 그 곳과 이미 연락
을 취해 놓았으니, 서둘러 가도록 합시다.
  윤봉길은 여기서부터 평소 사용하던 윤우의라는 이름 대신 윤봉길이란 이름을 사용하였
다. 실제 이름을 감추는 것이 독립 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차가운 바람을 헤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윤봉길은 빽빽한  숲 속에 위치한 독립단 숙소를 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김태식도
상기된 얼굴로 독립단 숙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이 독립단에 도착해서 먼저 만난 인물은  고 씨 성을 가진 대장이었다.
  한일진의 소개를 받은 고 대장은, 윤봉길과 김태식을 보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시설은 누추하지만 내 집 같이 지내십시오.
라며 반갑게 맞았다. 좋은 인상을 풍기는 고 대장은 함경도 태생이라고 했다. 사람이 좋게
생긴 만큼 규율은 엄하지 않은 듯했다.
  사흘 후에 윤봉길 일행은 남만주 일대의 독립단을 돌아보기 위해 떠났다가 그 해 10월에
다시 안둥에 돌아왔다. 여관에 자리잡은 그들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어떻습니까? 만주의 우리 독립군 실태가 아주 좋지는 않죠?
   네, 그래서 저는 이 길로 미국으로 들어가 돈을 벌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군에게 군
자금으로 보내야 하겠습니다.
  한일진이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김태식은,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저는 이 곳에 남겠습
니다. 남아서 직접 왜놈과 싸우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윤봉길을 쳐다보았다. 윤봉길도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저는 이 길로 상하이로 가겠습니다. 그 곳에는 우리 나라 임시 정부가 있으므로 분명히
제가 할 일이 있을 겁니다.
  윤봉길과 김태식, 한일진은 서로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늦도록 나라의
장래를 얘기했다.
  이튿날, 김태식을 안둥에 남고, 윤봉길과 한일진은 항구 도시인 칭다오로 떠났다. 칭다오
에는 황익성이란 청년이 있었다. 황익성은 그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윤봉길을 친형
처럼 따랐다. 윤봉길과 한일진이 황익성의 집을 찾는데는 어렵지 않았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형님!
  황익성은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맞아들였다.
  황익성은 한일진이 미국으로 떠나도록 주선해 주었다.
   한 동지, 미국에 가서 부디 꿈을 이루시길 빕니다. 이건 제 성의이니 얼마 되지 않지만
여비에 보태십시오.
  윤봉길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한일진에게 내밀었다.
   윤 동지, 뜻은 고맙지만 윤 동지도 돈이 필요할 게 아니오?
   저야 조국 가까이에 있으니 언제라도 우리 동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은 그
러지 못할 테니, 긴요할 때 쓰도록 하십시오.
   윤 동지, 정말 고맙소이다. 평생 동지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칭다오의 부두에서 한일진을 전송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윤봉길 앞으로 편지가 와 있었
다. 어머니의 회답이었다.
   ……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객지에서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느라고 애쓰는 너의 모습
이 눈에 선하단다. 그러나 나라를 위하는 일도 좋지만 집에도 다녀갔으면 좋겠구나. 너의 아
버지와 너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고, 특히 너의 아들들이 아빠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찌하겠니? 그러나 이미 나라를 위해 나섰으니, 일하는 순간만은 집안 걱정 말고 열심히
하도록 하여라.
  윤봉길은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편지를 가슴에 품고 어머니
의 체온을 느끼려고 애써 보았다.
   어머님, 고향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반드시 이 곳에서 이루고야 말겠습니다.
  윤봉길은 눈물로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불효 자식을 용서 해 달
라는 사죄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썼다.
  황익성의 집에서 지내던 윤봉길은 1931년 7월에 상하이로 갔다. 윤봉길은 상하이에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막일을 하면서 하숙 생활을 해야만 했다.
  윤봉길이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을 만난 것은 그가 상하이에 온지 석 달째가 되었을
때였다. 윤봉길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본 안공근은 윤봉길을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했
다. 그리고 교포 실업가 박진을 소개시켜 주어서, 윤봉길은 박진의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박진은 상하이에 있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많은 사람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지내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상하이에는 세계 여러 나
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은 영어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나도 영어를 배워야 하겠구나.
  윤봉길은 박진에게 말하여 공장 일이 끝나는 틈을 이용하여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공장의 2층에 야간 강습회를 열어 운영하였다.
  이렇게 윤봉길이 바쁘게 생활하던 어느 날이었다. 김구가 박진을 찾아왔다. 박진을 찾아온
김구는 윤봉길을 보고 나서 박진에게 물었다.
   저 청년을 못 보던 청년인데…….
   아, 윤군 말인가요? 약 한 달쯤 전에 새로 왔습니다.
   그래요? 듬직해 보이기는 한데…….
  네, 말이 적고 행동이 무거워, 그 속마음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박진은 윤봉길을 불러 김구에게 인사를 시켰다.
   윤 군, 이 분이 김구 선생님이시네. 인사 드리게나.
  윤봉길은 몹시 기쁜 마음으로,
   윤봉길이라고 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나이는 어떻게 되었소?
   금년에 스물다섯입니다.
   그런데 상하이에는 뭣하러 왔소?
   저…….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선생님을 조용히 만나 뵙고 말씀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윤봉길은 김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김구는 조용히 윤봉길을 바라보더니,
   그렇게 하시오. 난 언제든지 좋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우리 깊은 얘기를 나누어 봅시
다. 하고 승낙한 후 총총이 돌아갔다.
  김구는 상하이 임시 정부의 지도자로서 우리 나라 독립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윤봉길은 가슴이 벅찼다. 평소 말로만 듣던 김구와 얘기를 나눈데다가 다음에 만날 약속
까지 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박진은 윤봉길에게 김구와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김구를 만난 윤봉길은
   고향에 있을 때도 선생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하고 공손히 말했다.
   고향이 어딘데요?
   충청 남도 예산군 덕산면입니다.
   그런데 이 곳엔 왜 왔습니까?
   저는 고향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광주 학생 운동을 계기로 왜놈들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기왕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할 바에는 차라리 이 곳 중
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만주를 거쳐 여기 상하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윤봉길은 고향에서 있었던 일과 이곳까지 오면서 겪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김구는 가만
히 눈을 감고 윤봉길의 말을 듣더니,
   독립 운동은 농촌 계몽 운동과는 다르오. 알다시피 몹시 위험해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
기 때문이오. 윤군은 차라리 고향에 가서 계속 농촌 운동을 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립을
돕는 게 좋지 않겠소? 라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오직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독립 운동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서 이 곳까지
왔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를 되찾는 일에 이 한 몸을 바치려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
라 독립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십시오.
   윤군!
  김구는 손을 내밀어 윤봉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김구는 얼마 뒤에 윤봉길을 임시 정부의 요원으로 추천하였다.
  윤봉길은 김구를 만난 뒤 박진의 공장에서 나왔다. 임시 정부의 일을 도와야 했으므로 시
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윤봉길은 그 동안 푼푼이 모았던 돈으로 조그만 야채 가게를 차려
채소 장사를 하였다. 채소 장사를 하면서, 채소를 사러 온 일본 사람들로부터 군대의 움직임
에 관한 정부를 얻을 수 있었다. 얻은 정보는 즉시 김구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윤
봉길에게 뚜렷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이듬해(1932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윤봉길은 신문을 주워 들고 김구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이런 통탄할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윤봉길은 김구 앞에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에는  조선 청년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암살하
려고 폭탄을 던졌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김구는 계속 흥분하고 있는 윤봉길에게,
   이봉창 의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 조선 사람의 기개를 온 천하에 알렸소. 이것
만 해도 작으나마 목적을 달성한 것이오. 하고 말했다.
   선생님, 저에게는 언제쯤 큰 일을 맡기시렵니까?
   마음을 조급히 먹지 마시오. 일이란 때가 있는 법이니, 꾸준히 기회를 노려야 할 것이오.
자칫 감정에 얽매이다 보면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오.
  윤봉길은 김구의 가르침에 멀리를 끄덕이며,
   나도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 말리라. 라고 다짐하였다.
  그즈음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상하이 사변을 상하이에 있던 일본 중이 중국인에게 살
해된 것이 실마리가 되어 일어났다. 일본은 중국에 있는 일본 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상
하이에도 군대를 보냈다. 이 때문에 중국 군대와 일본 군대가 상하이 근처에서 싸움을 벌였
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저항이 뜻밖에 오래 이어지자 싸움을 그치고 말았다.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갔다.
   선생님, 이번 상하이 사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윤군!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네. 조금 더 기다리게. 그들이 어떤 구실을 붙여 어떻게 싸
움을 하는지 잘 관찰해 두게.
  김구는 조용한 목소리로 윤봉길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4월 20일 점심 때였다. 채소 행상을 하던 윤봉길의 눈길이 상하이 신문에 딱 멈췄다. 4월
29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식과 함께 상하이 사변의 승리를 기
념하는 식을 펼친다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여기에 가는 일본인은 도시락과 물통과 일본기만
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윤봉길은 한걸음에 김구에게로 달려갔다.
   선생님!
   윤군!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부르려 하던 참이었네.
   선생님도 아셨습니까?
   음!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는 듯하네.
   선생님, 이번 행사에 누가 참석합니까?
   아마 이번 행사에는 이 곳에 새로 부임한 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이 참석할 것이네.
   그럼 목표는 시라카와입니까?
  김구는 대답 대신 머리를 천천히 끄덕였다. 윤봉길은 김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윤군! 이번 일은 목숨이 필요한 일이네. 다시 생각해보게.
   이 곳에 올 때부터 제 목숨은 이미 선생님의 것이었습니다. 제 한 목숨 조국을 위해 값
지게 쓰도록 해 주십시오.
   으음…….
  김구는 윤봉길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더니,
   윤군 고맙네! 당분간 훙커우 공원 근처 상황을 잘 살피도록 하게. 나머지 일은 준비되는
대로 다시 알려주겠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김구는 윤봉길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김구는 남몰래 폭약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을 찾아갔다. 김홍일은 왕보슈를 시켜 물통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만들게 했다.
  4월 26일, 윤봉길은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 애국단에 입단하였다. 한인 애국단은 임시
정부의 특공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였다. 그는 낡은 중국옷 대신 양복을 입고 김구 앞
에 섰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선서문을 읽음으로써 겨레에 대한 굳은 맹세를 하였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
국을 침략하는 적을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 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 애국단 앞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태극기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8. 공원의 폭음

  윤봉길은 매일 야채 수레를 끌고 훙커우 공원 주위를 맴돌며 형편을 살폈다. 특히 공원
안의 식이 펼쳐질 장소를 샅샅이 살폈다. 시라카와가 앉을 자리를 짐작해서, 폭탄 던질 자리
를 정해 보기도 했다. 또한 발걸음으로 식장과 자기가 설 자리까지의 거리를 재어 놓기도
했다.
  강가에 가서 돌멩이로 폭탄을 던지는 연습도 되풀이해서 하였다.
  4월 28일 저녁에 윤봉길은 새 양복과 일기장을 싸들고 김구에게로 갔다.
   선생님! 드디어 내일입니다.
  김구는 윤봉길을 김해산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해산은 김구와 윤봉길을 집 안으로 맞
아들인 다음, 집 주위를 살폈다.
  김해산은 김구와 윤봉길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윤봉길은 자리에 앉자, 김구에게,
   선생님 훙커우 공원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고 말했다.
   윤군 수고가 많았네.
  김구는 김해산에게 맡겨 둔 물통 모양의 폭탄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건네 받아 윤봉길
에게 주었다.
   선생님, 폭탄이 두 개인데……. 한 개는 실패할 경우 다시 쓰라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
다.
   아니네. 한 개는 의거에 사용하고, 나머지 하나는 놈들에게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느니
보다 스스로 죽기 위해 마련한 것이네!
   네, 잘알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윤봉길은 김구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야 제 몫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
   윤군의 두 어깨에 우리 임시 정부의 장래가 달려 있네. 부디 잘 해 내기 바라네.    선생
님, 염려 마십시오. 저는 내일을 위하여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 기필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
겠습니다. 내일 벌어질 일이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보입니다.
   윤군, 고맙네.
  김구는 윤봉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 때, 김해산이 조촐한 술상을 내왔다.
  김구는 술상을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거사에 대한 격려를 하였다. 윤봉길은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윤군,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자, 내일의 성공을 빌며…….
  김구는 윤봉길에게 잔을 권했다.
  윤봉길은 김구가 돌아간 뒤 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난 일들이 눈앞에
차례로 떠올랐다. 부모님과 동생, 아내와 아이들, 함께 일한 친구들과 마을 청년들…….
   어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큰 일을 앞두고…….
  윤봉길은 온갖 잡념을 뿌리치고 잠을 청하였다.
  4월 29일 아침이 밝았다.
  윤봉길은 김구와 둘이서 아침을 먹었다. 의거를 앞둔 마지막 식사였다.
  아끼는 젊은이를 떠나보내는 김구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날의 일을 김구는
 백범 일지 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월 29일 아침이었다. 나는 김해산의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
을 먹으면서 조용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하고 평소와 똑같은 태도가 마치 농부
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하게 밥을 먹는 것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도 용감무쌍한 그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나에게,
   지금 상하이에는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은데, 윤군과 같이 용감한 인
물을 다른 데로 구태여 보낼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김해산에게 나는 말하기를,
   일은 해야 할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지. 윤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
다.
  이렇게 김해산 군에게 대답을 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시를 알렸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나에게 주면서 자
기의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시
계는 2원짜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자기 시계하고 바꾸자고 하며, 왜냐하면 자기는 앞으로
한 시간 밖에는 시계가 소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나는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갖
고 나의 시계를 윤군에게 주었다.
  윤봉길은 김구, 김해산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날씨는 비가 내릴 것같이 흐렸다.
  김구는 윤봉길과 헤어지는 광경을  백범 일지 에 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축식장에 가려고 차를 세워 그 차에 올라탄 윤군은 자동차에 올라앉자마자 지니고 있던
지갑을 꺼내어 내게 주었으므로,
   돈을 가지면 어떠해서 그러느냐? 하고 묻자 그가,
   자동차 값을 치르고도 5원이 남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자마자 자동차는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윤군에게,
   후일에 지하의 저 세상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을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천하의 영웅인 윤봉길을 태우고 훙커우 공원 쪽을 향하여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윤봉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조용히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아우들아! 사랑하는 아내여, 귀여운 나의 아이들아. 나의 동지 월
진회 회원들이여, 오늘의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윤봉길은 손에 들고 있는 도시락 폭탄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어깨에 멘 물통 폭탄을
쓰다듬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훙커우 공원의 기념식장 주변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물샐 틈 없이 늘어서 있었다.
  윤봉길은 다른 일본인들 틈에 끼여 일장기를 들고, 짐짓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공원 안에
있는 기념식장으로 들어갔다. 공원 입구를 지키던 일본 군인들은 조금도 윤봉길을 의심하지
않았다.
  식장으로 들어간 윤봉길은 미리 보아 두었던 바로 그 자리까지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갔
다. 폭탄을 던지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단상의 중앙에는 시라카와 육군 대장, 노무라 해군 대장, 우에타 육군 중장, 시게미쓰 공
사, 무라이 총영사, 가와바타 거류민단장, 우노 거류민단 서기장 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단상의 아래에는 학생, 재향 군인, 소년단, 기타의 단체와 민간인들이 늘어섰다. 또한 단상의
좌우에는 군의 대표자와 초대받은 민간 유공자들이 늘어섰다.
  사열식이 끝나고, 11시 40분에 식이 시작되었다. 개식사는 상해 지구 일본인 거류민단장인
가와비타가 하였다.
  개식사가 끝나고 일본 국가가 이어졌다. 그리고 일 분 동안의 묵념을 하는 순서가 되었다.
   바로 지금이다!
  윤봉길은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물통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여 들고, 정확하게 시라카
와를 향해서 힘껏 던졌다. 참으로 순간적인 일이었다.
   콰-앙!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 소리가 기념식장을 뒤흔들었다. 훙커우 공원을 진동시킨 이 폭음
소리는 우리 겨레의 성난 외침이며, 독립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피끊는 외침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단 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윤봉길은 일이 뜻대로 성공했음을 확인하고 나서, 도시락 폭탄을 터뜨려 죽으려고 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폭탄을 꺼내드는 순간에 일본 헌병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윤봉길은,  대한 독립 만세! 하고 외치고는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가와비타 거류민단장과 시라카와 대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노무라 대장
·요시다 중장·시게미쓰 공사·무라이 총영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9. 돌아온 유해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린 소식은 곧장 상하이 시내에 퍼져 나갔다.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이 터졌대!
   일본의 높은 군인들이 많이 죽었대!
   중국 정부의 특무대가 시한 폭탄을 장치해서 분풀이를 하였다는군.
  처음에는 중국 청년이 폭탄을 던진 것이라고 소문이 났다가, 나중에 한국 청년 윤봉길이
한 일이라는 게 밝혀졌다.
  윤봉길을 붙잡아간 일본 헌병은,
   너를 조종한 자가 누구냐? 이름을 냉큼 대라! 하고 다그쳤다. 그러나 윤봉길은,
   나는 우리 민족을 대신해서 할 일을 스스로 했을 뿐이다.
라고 대답하여 모진 고문에도 결코 굴복함이 없었다.
  윤봉길은 일본군의 군법회의 법정에서도
   내가 할 일은 우리 민족을 위한 일이다. 내가 내 겨레를 위해서 한 일을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재판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 라며 당당히 맞섰다.
  5월 25일에 윤봉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윤봉길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사형 집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윤봉길은 일본의 고베에 도착하여, 그 날 오후에 오사카 육군 위수 형무소의 독방에 갇혔
다.
  12월 18일에 윤봉길은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졌다.
  1932년 12월 19일 7시 40분. 윤봉길은 마침내 육군 작업장으로 끌려가서 총살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형무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자 윤봉길은,
   오직 할 일을 했을 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라고 당당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너희도 피와 뼈가 있다면 반드시 대한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
이 드날리고, 나의 무덤 앞에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윤봉길이 일으킨 의거로 밖으로는 세계 만방에 우리 겨레의 얼을 높이 드러내 보였으며,
안으로는 우리 겨레의 가슴 속에 애국심과 독립 정신을 새롭게 불어 넣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총통인 장 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이 해 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해 냈다.
라고 윤봉길의 의거를 높이 기리고, 그 후 우리 나라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도 우리 겨레가 독립을 애타게 원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 나라의 임
시 정부를 지지했다.
  일본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1945년, 윤봉길이 죽은 지 13년 뒤에 우리 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대한 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가 쓴  도왜실기 에서 윤봉길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우리가 오늘 조국의 광복을 얻은 데에는,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 있다. 그 먼 원인은,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일으킨 의거이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정부는 우
리의 독립 운동을 적극 후원해 주었으며, 마침내 장 제스 총통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한 민국의 초대 부대통령인 이시영도 윤봉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게 된 것은, 윤봉길 의사의 덕이 크다. 우리 임시 정부와 윤 의사를
비겨서 말하면,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 금방 가라앉으려는 위급한 때에 윤 의사가 위험
을 무릅쓰고 물 속에 뛰어들어 건져 준 것과 같다.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일본에 있던 독립 운동가 박열, 이강훈 등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
를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윤의사가 처형 당했을 때의 육군 작업장 소장은, 그 일이 너무 오래됐고 또한 그
때의 군인들이 한 일이라 자기는 잘 모르겠노라고 했다. 이에 발열과 이강훈 등은 육군 작
업장을 구석구석 뒤졌으나 끝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하긴 묘표조차 없는 그
의 유해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당시의 형무소에서 간수로 근무했던 시게하라가 찾아와 주어, 그의
도움으로 윤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가나자와 형무소 쓰레기 하
치장에 묻혀 있었다.
  그 해 6월, 박열과 이강훈의 노력으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의 유해가 고국으로 말
없이 돌아왔다.
  빈소로 달려 온 김구는 윤봉길의 유해를 붙잡고,   윤군!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7월 7일,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유족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나라 최초의 국
민장으로 치러졌다. 윤봉길 의사는 서울 효창 공원에 고이 잠들어 있다.
  1962년, 정부에서는 대한 미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내려,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애국심을 높이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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