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위인특대전집 (27) 이중섭.
이중섭(1916∼1956)
서양화가. 호는 대향.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서 미술 교사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도일, 분카학원 재학 중 일본의
미술 단체인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여 신인으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그
가 추구하였던 작품의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으며, 불상,
풍경등도 몇 점 전하고 있다. 주로 향토적이고 동화적이며, 가족에 대한 그
리움을 소재로 한 그림이 주를 이룬다. 대표작으로는 소 , 싸우는 소 , 닭과
가족 , 집 떠나는 가족 등이 있다.
1. 별을 보고 노래하던 시절
뉴욕 근대 미술관.
감상객들의 발길이 멈춘 채 떠날 줄 모르는 곳이 있다. 그들의 눈길은 깊
은 뜻이 담긴 어떤 환상을 쏘아보는 듯 은박지에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림
을 보고 있다.
황소 , 아이들 , 보면 볼수록 생명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명화이지만, 그
림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린 아이장난 같은 것. 순수하게 살기 어려운 시
대에 온갖 고난을 견뎌내며, 참다운 예술혼을 불태운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
이다.
현대의 고흐, 현대의 신화를 만든 예술가, 천재화가, 이중섭을 달리 부르는
이름만도 숱하게 많다.
이중섭은 세월이 흐를수록 잊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그 이름이 널리 알려
지고 진실을 찾는 예술혼으로 그린 그림의 생명이 더욱 찬연히 빛나고 있다.
평안 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앞산 맞은편에는 평원군 일대의 농지를 맡아 보는 부유한 농가가 두세 집
있다. 그 가운데의 한 집인 이희주의 집에서 1916년 4월 10일, 막내아들 이
중섭이 태어났다.
이중섭이 태어났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는
이렇게 유복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집안 대대로 농사만 지어 온 이중섭의 집은 할아버지 때에는 넓은 논밭과
함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농사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내 이씨에게 모든 일을 맡
기고는 바깥 출입도 없이 사랑방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허송 세월만 보내며 젊은 날을 지낸 이중섭의 아버지는 서른 살에
눈을 감음으로써 우울한 삶을 끝냈다. 그리하여 부인 이씨가 모든 일을 스스
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부인 이씨는 700석이 넘는 농지의 소작인과 고용인들을 거느리
면서 지시를 어기는 소작인은 엄하게 다스리기도 하며, 직접 농사를 짓고 집
안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했다.
이씨의 꽃을 가꾸는 솜씨며 나무를 다듬는 솜씨는 거의 전문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농사 말고도 원예, 축산까지 부업으로 하기도 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이씨는 이렇게
해서 곧 절망을 이기고 의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가장이 없는 집안의 일을 혼자 돌보다 보면 자칫 드세어질 듯도 싶지만,
세 아이들에 대한 이씨의 사랑은 그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뒷날, 이중섭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상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형 중석이 할아버지를 닮은 데 비해 이중섭은 아버지의 내성적 성격을 닮
았다. 이씨는 그러한 막내아들에게서 세상을 떠난 남편 모습을 떠올리곤 했
다.
형과 12년이나 나이 차가 나기 때문인지, 이중섭은 형보다는 누나와 더 친
했다.
10대 소년인 형은 이중섭과 대조적이었다. 방학 숙제로 곤충 채집을 할 때
면 표본에 필요하지도 않은 다른 곤충까지 잔뜩 채집하는 성미였다.
그런데 이중섭은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으면, 그 새가 날아갈 때까지 오
랬동안 바라만 보았다. 형제는 이렇듯 서로 다른 성격으로 성장했다.
마을 갯가에서 온몸을 진흙 투성이로 만들면서 그 진흙을 주물러 여러 가
지 모양을 만들었던 이중섭은, 일곱 살 때 평양 외가에 갔을 때, 먹으라고
준 사과를 먹지 않고 집 모퉁이까지 들고 가 그림을 그린 일도 있었다.
송천리 서당에서 동몽선습 과 논어 . 맹자 를 마친 이중섭은 아홉 살 때,
어머니 곁을 떠나 평양 이문리에 있는 외가로 갔다.
그 곳은 이중섭이 태어난 송천리보다 훨씬 크고 번화했다. 대동공원 기슭
의 커다란 집에는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와삼촌들과 외종 사촌 형제 자매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중섭에게는 새롭고 엄한 생활이었다. 집에서 지낼때의 어머니로부터 듬
뿍 받았던 자애로운 사랑 같은 것은 없었다.
평양 외가로 온 이중섭은 시내 종로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형이 평양 제이 고등 보통 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
가 동양 척식 대학 상과에 입학할 때까지 이중섭은 형과 함께 외가에거 지
냈다.
이중섭은 자기보다 두 살 위인 이종 사촌 이광석과 같은 반이었다. 뒤날
시인이 된 양명문, 소설가가 된 김이석과도 한반이었다.
이중섭은 이광석과 함께 외가 바로 뒤의 대동 공원이나 대동문 근처에서
어울려 놀기도 하고, 모란봉 부벽루 까지 달려갔다 오기도 하며, 보통 학교
시절을 보냈다.
평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이중섭은 4학년이 되면서부터 그림그리
기에 더욱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교과서 겉장이나 공책 빈 구석마다 온통 그
림이 들어찼다.
오직 그림 속에서 살며 모든 것을 말 대신 그림으로 나타내려는 듯싶었다.
심지어는 시험 치르기 전날에도 태연하게 그림을 그렸다. 늘 사이가 나쁜 그
와 비슷한 또래의 막내이모가 미친 아이 라고 욕을 하는데도 그림에만 열중
했다. 그러다가 정 참을 수 없으면 대드는 대신 다락방 속에 처박혀 울거나
공원 숲 속에 가서 실컷 울었다.
보통 학교를 마친 이중섭은 정주에 있는 오산 중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중섭은 오산 중학교에서 5년 동안의 중학 과정을 밟으면서 미술에 대한
눈이 환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부부 미술 선생이 있었는데, 그들의
영향이 커 그의 예술 바탕을 이루게 해 주었다.
얻은 것은 미술뿐만이 아니었다. 이승훈의 맏사위 주기용과 젊은 철학자
김기석의 가르침은 이중섭에게 민족의식과 주체 의식을 깨우쳐 주었다.
여기에 또한 잊혀진 조국 역사에 대한 함석헌 선생의 열렬한 가르침이 있
었다. 머리를 박박 깎고 흰 두루마기자락을 휘날리며 함석헌 선생이 교단 앞
에 서면, 교실안의 수많은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다. 그의 가르침은 한국인
의 긍지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이중섭은 오산 학교에서도 그다지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성적은
좋았다. 체능과 예능과에서는 늘 우등생이었다. 게다가 그는 오산 학교의 명
물이었다.
수재들의 모임에 아구리 란 이름으로 가입된 이중섭은 다른 4명과 함께학
교 곳곳에 많은 이야기를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역시 그림이었다.
이중섭은 3년 후배로서 그와 마찬가지로 화가를 꿈꾸는 김창복과 함께 하
숙을 했는데, 그는 집에서도 그림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부부 미술 선생 임용련, 백남순을 만난 것은 큰 기쁨이었다.
평안 남도 남포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임용련은 한국이 일본지배 밑에 놓
일 즈음 벌써 미국 시카고 미술 학교와 예일 대학을 졸업할 만큼 일찍 서양
문물을 접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감동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임용련은 오산 중학교에서 이중섭을 발견했다. 기쁨에 들뜬 그는 이중섭에
게 후기 인상파의 화법, 또 그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야수파의 거칠고 개성
짙은 화법을 소개 하였다. 그리고 정해진 미술 교육 원칙에서 벗어나, 스스
로를 불태워 버릴 만큼의 정열로 에스키스(스케치)를 거듭하라고까지 요구했
다.
하나의 예술은 수많은 예술의 습작으로 이루어진다. 밑바닥을 비우지 마
라. 밑바닥 없이는 어떤 그림도 되지 않는다. 에스키스를 바닷가 모래알보
다 더많이 해라. 그런뒤에야 너의 예술이 있게 된다.
이런 정열적인 가르침은 이중섭의 타고난 재질을 더욱 북돋워 주었다.
임용련은 아내 백남순에게 이중섭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중섭은 첫눈에 들었어, 틀림없이 큰 화가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어.
이중섭은 수채 물감과 밀가루를 한데 섞어 짓이긴 뒤, 구덕구덕 마르기 시
작할 무렵 캔버스에 발랐다, 누가 가르쳐 준 기법도 아니건만 이렇게 해서
독특한 입체감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형체의 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이화 같은 이중섭의 천재적 기법은 스승인 임용련을 감탄시키고도 남았다.
무에서 만들어라. 무에서 찾아 만들어라.
임용련은 자신의 천재성을 그대로 오산 중학 미술 교육에 쏟아부었고, 이
중섭은 오산 중학교의 교육이 베푸는 모든 것을 목마른 사슴처럼 받아들였
다.
그는 고읍 근처 들판 여기저기에 매어진 소를 눈여겨보곤 했다. 뒷날 그의
영원한 주제가 된 소 는 바로 이시절에 비롯되었다.
이중섭의 소는 김진섭의 말 과 함께 일제 시대와 해방을 즈음해 쌍벽을
이루었다. 그가 그린 소는 다른 화가들이 그린 소와 달랐다. 소 자체가 하나
의 신앙이었고, 이중섭 자체가 소였다.
오산 학교 시절의 이중섭은 미술에의 정열뿐만 아니라, 모든 방면에의 정
열로 활활 타올랐다. 힘센 장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오산 학교 대표 단
거리 선수로 뛰기도 했으며, 권투는 수준급이었다.
또, 폴 발레리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오, 소나무 , 불어라 봄바람 같은 노
래를 가수 못지 않게 불렀다.
이따금 이중섭은 잠들 무렵, 선생이 하숙방마다 살피고 간 다음, 몰래 같
은 방의 김창복과 수재 친구들을 불러 내어 옥수수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소에 깊이 빠져들고 부터는 이런 부질없는 낭만도 가라앉았다. 이
중섭은 해질녘이면 들로 나가 땅거미가 몰려올 즈음의 소를 한참 바라보다
가 어두워져서야 하숙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중섭의 오산 중학교 시절,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총칼을 앞세우고 제국주
의를 착실히 다져 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불똥은 오산 학교로 튀어 왔다. 국
어 없애기 정책 이 실시된 것이었다.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은 다른 학교들보다도 그 충격이 컸다. 또한, 오산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충격도 컸다.
이중섭은 하숙방에서 김창복에게 우울한 말을 던졌다.
한글을 없앤다면, 우리가 조선 사람인지 왜놈인지 알 수 없겠군,
그렇습니다, 형님. 큰일이지요,
그래, 그림만 남는구나. 모든 것을 그림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어,
언뜻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중섭은 그토록 열중하던 데생도
잠시 쉬고 독특한 구성의 그림을 몇장씩이나 그렸다. 그림이 다 완성되자,
이중섭은 그것을 임용련 선생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보십시오, 선생님. 한글 자모를 가지고 구성한 그림입니다.
그 날, 임용련 선생의 말없는 찬동을 얻고 하숙집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김
창복을 향해 다짐하듯 말했다.
창복아, 나는 이제부터 진짜 조선 소만을 그릴테다. 그리고 우리나라 한글
을 남겨 놓을 테다. 너도 네 그림에 조선을 담아 보아라,
서기 1936년 3월, 이중섭은 오산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앨범에 일
본에서 한반도로 불덩어리가 날아드는 그림을 남겼다, 그 나름대로의 저항
의식이었다.
졸업을 한 이중섭은 3년 전 원산으로 이사한 집으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새로운 곳이었다.
오산을 떠나기에 앞서 이중섭은 학교 서쪽에 있는 제석산에 올라가 발 밑
에 굽어보이는 오산 일대를 그렸다. 그리고 그림을 임용련 선생에게 드렸다.
임용련은 이중섭을 붙잡고 말했다.
나는 외국을 여러 곳 다녀 보았다. 미국에서도 살아보고, 프랑스에서도 살
아 보았지, 하지만 내나라 조선만큼 좋은 곳은 없더구나, 무릇 조선 사람
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땅에서 일해야 해, 내 말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중섭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일본 유학을 포기해야 할까요?
임용련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아니지.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으로 가야 해. 갈 수 있으면 가는 거
야.
이중섭은 이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서기 1937년, 이중섭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참으로 어렵게 이룬 길이었다. 아버지 역할을 맡은 형이 고집스럽게 막는
바람에 내내 원산에 남아 있다가 가까스로 어머니를 통해 허락을 받아 냈다.
그러므로 현해탄을 건너 다니는 부관 연락선은 그에게 특별한 뜻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도쿄 제국 미술 학교에 입학하기까지의 일 년은 고독으
로 이어졌다.
이중섭은 일본에 유학 와 있는 이종 사촌들, 평양과 오산 중학교시절의 선
배들에게 자신이 일본에 와 있음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저 칸다에 있는
미술 연구소에만 다니다가 이듬해 4월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중섭은 일 년 뒤, 도쿄 제국 미술 학교보다 훨씬 자유롭고 귀족적이며,
천재 교육의 중심지인 도쿄 분카 학원으로 전학하였다.
분카 학원 1학년에는 학국인 유학생 홍하구, 안기풍, 이정구, 이주행 들이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면서도 내성적인 이중섭을 좋아한 홍하구는 만석꾼의
맏아들로, 이중섭과 거의 같은 때에 문학부 창작과에서 서양화과로 옮겼다.
그래서 둘사이는 무척 가까워젔다.
얼마 뒤, 오산 시절 수재 모임 회원으로 고릴라 라 불리던 이준명이 도쿄
로 건너왔다. 그 또한 화가를 꿈꾸고 있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
고 있다가 무작정 이중섭만 믿고 건너온 것이다.
이중섭은 이준명을 자기 아파트에 머물게 했다. 원산의 실업가로 탄탄하게
발판을 굳힌 형 중석으로부터 보내 오는 학비의 일부는 이준명의 학비로 들
어갔다.
이중섭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초저녁부터 잠을 잤다. 그리고는 온 세상
이 잠든 12시에서 1시쯤 일어나 밥을 먹은 후, 새벽까지 줄곧 데생 연습을
하거나 나름대로의 구상을 스케치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런 시간에라야 그는 자기만의 시간, 모든 것을 자신에게 쏟는 본디 자세
로 돌아오는 귀중한 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있던 이준명이
친구 집에 가 있거나 할 때면, 이중섭은 문밖에 면회 사절 이란 종이를 붙여
놓고, 겨울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쓴채 1 주일이고 2
주일이고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미술 지식을 전혀 써먹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서는
조선 냄새, 된장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소의 표현 방법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이제는 소의 뼈대만 그렸다. 사람도
뼈대만 그렸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며칠씩 방 청소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방
은 늘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은 곧 분카 학원의 여러 교수와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말들이 퍼졌다.
루오가 나타났다네. 시커멓게 칠하는 학생이야.
루오처럼 선이 굵은 학생이 나타났어,
이중섭이 머물고 있는 아파트에는 10년 동안 파리에서 살다 온, 그 곳 화
단에도 익히 알려진 스다 세이슈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분카 학원 교수였다.
태평양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중국과 한국을 두루 돌아보기도 했던 스
다는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민족 차별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오직 소중한 것은 자유이며, 삶의 목적은 예술 창작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었다.
이중섭과 화가를 꿈꾸는 학생들은 스다 세이슈의 집을 자주 찾았다.
이중섭이 처음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스다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얼굴에는 모든 게 그려져 있네. 자네가 분카 학원에서 루오 란
별명으로 불린다는 것도 알고 있지. 나도 언젠가는 한국에 한번 가 보려고
생각하네. 한국의 고대 미술은 정말 감탄을 자아내거든.
그래서 이중섭은 자신이 그린 소 그림을 들고 스다의 학교 밖 화실을 찾
게 되었다.
선생님, 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스다는 이중섭이 내미는 그림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진지한 침묵이 흐른
뒤, 스다는 입을 열었다.
놀랍군. 자네는 대단한 화가가 될 걸세. 확신하네. 자네 그림에 감탄했어.
스다는 찾아온 방문객과의 면담을 다음 날로 미루고는 이중섭과 마주앉았
다. 그는 코냑 한 병을 꺼냈다.
이건 내가 쭉 아껴 오던 술일세. 화가로서의 세례라고 생각해도 좋지. 자,
함께 마실까? 자네 그림을 축하하는 뜻에서.
이중섭은 이렇게 해서 새로운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어느 날, 이따금 고향 이야기며 그림 이야기를 나누곤하던 이종 사촌 이광
석이 찾아왔다. 이중섭은 캔버스에 박혀 있던 초췌한 얼굴을 들고 오랜만에
웃음을 띠었다.
이광석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피곤해 보이는군. 잠깐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좋지, 형. 겨울 거리나 구경할까?
두 사람은 긴자 거리로 나와 싸구려 술집에서 맥주를 놓고 마주앉았다. 화
가, 시인, 소설가를 비롯해 예술 지망생들이 주로 찾는 집이었다.
요즈음 네 그림 속의 소는 예전의 소가 아니더구나. 놀랐다.
와세다 대학 법과에 다니는 이광석은 전공은 다르지만 가장 이중섭의 그
림을 아끼고 이해해 주었다.
그럴 테지. 소를 꿰뚫어 보면 소 뼈다귀가 나와 버려. 요즈음에는 송천리
소, 오산 소, 송도원 소가 한꺼번에 내 가슴 속을 메우거든. 이 곳에서는
소를 볼 수 없기 때문이지. 기억으로 소를 꿰뚫어 보면 그만 그렇게 돼.
그러면서 그는 이광석에게 무엇인가를 내보였다.
나, 한 가지 엉뚱한 일을 하고 있어.
내보인 것은 그가 도쿄에 온 지 얼마 안 되고부터 남몰래 실험해 온 그림
조각이었다.
이게 뭐지? 아, 이건 은박지 아냐?
음, 은박지야. 하지만…….
이광석은 이중섭에게서 은박지를 조심스러게 받아들고는 주의 깊게 들여
다보았다.
사방 10센티미터 가량의 은박지에 새까맣게 먹칠을 한 뒤, 뾰족한 칼로 선
을 긁어 만든 그림이었다. 깊은 계곡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또 다른 은박지
는 손으로 비벼서 신비스러운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좋구나, 아주 좋은데.
이게 좋다고?
그래. 게다가 어머니가 그려져 있지 않니? 내가 가져도 될까?
형이 좋아하니까 가져도 돼.
이광석은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 두 장을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6.25때, 어려운 피난 생활로 캔버스와 물감을 구하기 힘든 탓에 그리기 시
작하였다고도 전해지는 그의 은박지 그림은, 사실은 도쿄 시절에 벌써 독창
적으로 실험되었다.
일본에서 쇼와 약학 전문 학교에 다니는 이종 사촌 누나 효석이 언젠가
이렇게 물었다.
중섭아, 너는 어떤 여자가 좋으냐?
이중섭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가 대답했다.
아무나 한 군데에만 반하면 되지, 뭐.
그러던 이중섭은 일본 여자 야마모토 마사코와 만나 국경을 뛰어넘은 사
랑을 이루게 되었다.
이중섭이 분카 학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이준명과 함께 전람회를 보러 가던 이중섭은 길에서 같은 학원
미술부 2학년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서로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때, 이준명이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멋있는 아가씨인걸.
학교 다닐 때의 간편한 옷차림이 아니라 완전히 정장을 갖추어 입으니 20
대의 화사한 젊음이 눈에 두드러졌다. 마사코는 뭔가 아쉬운 듯, 이준명이
뒤돌아보았을 때에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준명은 이중섭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차라도 같이 마시지 않고…….
이중섭은 전혀 미련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여자는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네. 마치 그림과도 같지. 한 번 빠지면 다
른 곳에 빠질 힘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만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우연히 스다 교수의 화실 가
까이에서 두 사람이 부딪혔다. 마사코는 얼른 말을 걸었다.
그림을 한 점 사고 싶어요.
그림이라면, 제 그림 말입니까?
네, 스다 교수님께서 무척 칭찬하시더군요. 꼭 가지고 싶어요. 허락해 주
세요.
부끄럽습니다. 학생이니 팔고 사는 건 하지 맙시다. 그렇게 원하시니 한
점을 드리지요. 한데, 놀림감이될까 두렵군요.
둘 사이의 대화가 길어지자 발길은 자연히 학교 앞 찻집으로 옮겨졌다. 담
배 연기로 자욱한 찻집에서 마사코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일본 여자답
게 얌전하게 말했다.
조선 이야기를 들려 주시지 않겠어요?
아…….
문득 이중섭의 목이 메었다. 눈이 아린 것도 담배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
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썩 잘 하지 못한답니다. 그저 서러운 역사를 지닌
나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일본에서도 유명한 회사 사장의 막내딸 마사코와, 일본 제국주의의 발 아
래 짓밟힌 한국에서 온 유학생 이중섭은 그렇게 마주앉아 이야기 나누기를
한 번 , 두 번, 차츰 횟수를 거듭해 갔다.
분카 학원 학생들이 누구나 그러했듯이 마사코나 이중섭도 예술의 도시
파리로의 유학을 꿈꾸었다.
그런데 이중섭의 형 중석은 파리로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마사코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이 파리로 갈 수 있었으나, 유학을 서두를 수 없게 되었다. 지금
가장 큰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건 바로 이중섭이었다.
때가 때인 만큼,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한국
이나 일본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현실 가운데서도 마사코는 이중섭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
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천진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되어 갔다.
하루는 마사코가 장난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머리가 좋아지는 약이 있대요. 책을 한 번 읽으면 그 책을 죄다 외울 수
있는 그런 약이래요.
그래? 그런 약이 있소? 효석 누나는 그런 말을 안 하던데.
있어요, 그런 약이. 바로 파예요.
파? 먹는 파 말이오?
네, 파 한 뿌리를 콧구멍에 넣고 한참 있으면 머리가 좋아진데요.
그래? 그게 정말이오?
이중섭은 마사코를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앞 가게에서 파 두
뿌리를 샀다. 한 뿌리씩 두 콧구멍에 찌르고 한참을 있었다. 눈물이 줄줄 흐
르고 자꾸만 재채기가 났지만 , 미련스러울 만큼 참고 참았다. 나중에는 머
리가 아프고 콧구명이 얼얼했다.
이튿날, 마사코를 만난 이중섭은 그 이야기부터 했다.
아무래도 뭐가 잘못되었나 보오. 머리가 좋아지기는 거녕 아프기만 하던
걸.
마사코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미안해요. 장난이었어요.
이중섭은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작 장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주 혼났단 말이오.
그러고는 두 사람은 이광석을 만나 맥주집에서 다시 한 번 그 일을 이야
기하며 한바탕 웃었다.
어려운 사회 속에서도 어린 아이처럼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었지만, 마
사코의 집에서나 이중섭의 집에서나 혼인 말은 나올 줄을 몰랐다.
집안의 가장이나 다름없는 형의 반대와 일본의 침략전쟁은 프랑스로 날아
가려던 이중섭의 발을 동양권에 묶어 놓았다. 묶여 버린 이중섭의 발을 더욱
무겁게 한 것은 마사코였다. 그녀는 잠자코 프랑스 유학을 단념하고 이중섭
의 곁에 머물렀다.
서기 1943년, 미술 창작가 협회 제7회전에서 이중섭은 망월 이란 작품으로
태양상을 받았다. 이것으로써 그는 도쿄에서의 활약을 끝냈다.
그는 작품 소 와 망월 을 액자에서 떼어 둘둘 말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마사코와 결혼한다. 고 못박고는 귀국길에 올랐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전쟁은 일본뿐 아니라 한반도에까지 퍼져 그 비참함
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쌀을 공출한다, 재산을 징발한다, 남자들은 징용
한다는 등, 일본군부는 전쟁과는 아무 이해 관계도 없는 한국에까지 그 책임
과 의무를 떠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원산은 이중섭에게 긴장 대신 안정을 주었다. 이
중섭은 학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갈 위기에서 이미 원산의 유지이자 유명 인
사인 형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처음에 원산으로 이사 왔을 때, 형 중석은 시내가 아닌 변두리에 대지 넓
은 초가를 여러 채 사들였다. 그러고는 전세를 놓기도 하고, 이중섭에게 화
실로 내어 주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는 시내 광석동에 백화점을 열고, 그 안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30평짜리 광석동 창고는 이중섭의 차지였다.
화실이라면 미술에 관한 책과 화집이나 석고상, 나름대로의 장식이 있을
법하건만, 도대체 이중섭의 화실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도구
와 침대와 화실 안의 살림살이가 전부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넓은 화실은 더
욱 썰렁했다.
한번 작품을 시작하면, 이중섭은 그 안에서 먹고 자며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가 한 가지 작품이 끝나면 새로운 소재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새벽 먼동이 틀 때의 하늘빛을 관찰하려고 조카 영진을 깨워 광석동 뒷산
으로 함께 오르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도 도쿄 시절처럼 냉수 마찰을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이중섭은 산에 올라 새벽 으스름한 빛을 빨아들이
며, 떠오르는 신비로운 햇빛을 눈여겨 보았다. 이중섭은 광석동 뒷산을 내려
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저 빛은 날마다 다르단 말이야.
그는 또한 생선을 스케치하러 저녁마다 부두로 나갔다. 그 곳에서 그는 스
케치북에 생선 대가리와 모통과 꼬리 부분, 아니면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그리거나 생선을 여러 마리 잔뜩 채워 넣었다. 생선 눈알만 스케치 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이중섭은 송도원 들판으로 소를 관찰하러 가기도 했다. 오산 중학
교 시절부터 소를 관찰해 온 그의 의식에는 소에 대한 인상이 뚜렷이 자리
잡혀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끝없이 요구했다. 새로운 눈으로 소를 보아야 한다고 거듭
타일렀다.
이 밖에도 바다며 닭 따위가 이중섭이 자주 다르는 소재였다. 도쿄 시절에
주로 다루었던 소재인 어머니는 바다, 닭, 생선으로 바뀌었고, 이어 6.25 피
난 시절에는 어린이가 그의 캔버스를 채우게 되었다.
원산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지난 다음, 이중섭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기 1945년,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 전쟁은 날로 심각해져 갔다. 도쿄 하
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격기가 날았고, 사람들은 공습을 피해 짐을 꾸려
시골로 피난하였다.
모두들 시골로 떠나고 있을 때, 마사코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모 곁을 떠나
기로 결심했다. 부모도 이제는 딸을 붙잡아 둘 수만을 없었다.
마사코는 곧장 시모노세키로 갔다.
그러나 부관 연락선은 벌써 미군 폭격으로 현해탄에서 침몰하고 난 뒤였
다.
그녀는 임시로 마련된 연락선을 구해 쉴 새 없이 폭격기들이 나는 현해탄
을 가까스로 건너 한국에 닿았다.
마사코가 그토록 위험한 길을 택한 것은, 사실은 이중섭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지만 뱃속에 그의 아기가 잉태되어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마사코는 사랑을 아는 여자야.
서기 1945년 4월, 마사코가 이중섭을 찾아왔을 때, 형 중석은 감탄의 말을
하고, 두 남녀의 혼인을 승낙해 주었다. 줄곧 일본 사람을 미워했고, 무엇으
로든 일본인의 기를 꺾어 놓으려 했던 형이 일본 여자를 제수로 인정한 것
은, 그만큼 마사코의 큰 사랑을 진심으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중섭은 마사코를 보고도 가식이 없는 느린 소리로 말했다.
용케 왔구먼. 연락선이 끊어졌다지?
그 해 5월, 이중섭은 아름답고 순한 마사코와 혼례를 올렸다. 마사코는 한
국인의 아내가 되면서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었다.
한국인을 창씨 개명시키려 눈에 불을 켰던 그 때에, 한국인의 이름을 갖겠
다고 한 일본인은 아마 그녀뿐이었을 것이다.
한때 프랑스행을 계획했던 여자, 부잣집 막내딸로 사랑만 받으며 자란 여
자인 남덕은 어느새 한국인 이씨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앞치마 차림으로 우물가에 나가 빨래하는 일은 둘째치고, 일본 사람답지
않게 매운 반찬, 짠 반찬 가리지 않는 그녀는 집안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도쿄에 있을 때, 이중섭의 아파트를 드나들며 한국식 반찬에 입맛을
길들인 그녀로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일뿐만 아니라 남덕은 시어머니며 시아주버니를 깍듯이 받들었다.
이러한 정성은 드디어 집안 사람들로부터 쓸 만한 여자 라는 칭찬을 받
게 되었다.
신접살이는 공습과 함께 시작되었다. 원산으로 소련폭격기가 날아들면서
이씨 집안은 안변으로 피난했다. 어수선한 짐더미 속에서 이중섭은 쓸쓸하게
웃었다.
당신은 여기까지 와서 또 피난을 하는구려.
저는 당신의 그림 곁에만 있으면 돼요.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당신은 프랑스와 너무 멀어졌군.
프랑스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곧이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질 운명이었
다. 의식주, 고향, 가족 관계, 그림까지도…….
그러나 아직 닥쳐올 운명을 예감하지 못했으므로, 감히 그 같은 말을 입밖
에 내놓을 수 있었다.
이중섭의 어머니는 신혼인 두 사람을 생각해서 원산시내 광석동에 방 3개
짜리 집을 얻어 분가시켰다. 넓은 마당을 본 이중섭은 무작정 닭을 쳤다. 닭
을 먹기도 하고 보기도 하며, 닭 그림을 그렸다.
그 해 여름, 일본에는 원자 폭탄이 떨어졌다. 입에서 입을 통해 건너온 이
소식을 듣고, 남덕은 맨 먼저 잿더미가 된 일본 땅을 떠올렸다. 그녀는 부모
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2. 어두운 현실
서기 1945년 8월 15일, 원산 시내 곳곳에는 흥분의 물결이 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종이 태극기가 사방에 펄럭였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으로 나부끼던 태극기는 하나 둘 눈앞에서 사라져 갔
다.
이중섭은 그림 이외의 것에는 무감각한 편이었다. 더구나 아무것도 확실하
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정치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
다.
그 해 10월, 서울에서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가 열렸다. 소식을 듣고 이중
섭이 그림을 가지고 서울로 갔을 때에는 이미 전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대신 미도파 백화점 지하의 벽화 제작일을 부탁받았다. 이중섭은 쾌히
승낙하고 별화의 소재를 생각하였다. 여러 가지의 소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
이 맴돌았다. 도쿄에서 실험한 바 있는 은박지 그림도 벽화를 위한 예비 작
업이었다.
이중섭은 미도파 백화점 지하벽에 천도복숭아나무를 그리고 나뭇가지마다
동자가 매달린 그림을 그렸다. 어찌 보면 도쿄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단 한 가지, 페인트로 그렸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꺼림칙했으나, 벽화로 한국
의 냄새를 구체화시킨 경험에는 아주 만족했다.
벽화를 그려 주고 받은 돈으로 이중섭은 불상, 연적, 도자기, 촛대, 목공예
품을 한아름 사들였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이라는 어수선하고 느슨한 틈을 타
서울 시내 곳곳에는 골동품을 파는 임시 가게들이 줄지어 섰다.
고객은 주로 미군 장교들이었다. 조상의 넋이 어린 불상이며 항아리가 헐
값에 외국인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본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
은 나머지 그러한 결심을 한 것이다.
이중섭은 끝내 출품하지 못한 그림과 골동품을 싸 짊어지고 원산으로 되
돌아갔다.
다음 해에 다시 서울에 오려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그 길로 6.25
때까지 다시는 서울에 오지 못하였다.
원산에서의 이중섭은 화가이자 광석동 고아원 선생이었다. 원산 여자 사범
학교 미술 선생 자리도 마다하고 넝마주이와 거지아이들을 거두었다. 그 불
우한 어린 아이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동자 신선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달갑지 않게 비추어지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그의 형 중석은 악질 부르조아로 찍힌 터였다. 여기에 덧붙여 이
중섭도 부르주아 작가 란 이름을 얻었다.
털 뽑힌 닭, 수염 없는 스탈린 그림은 격렬한 비판대에 올랐고, 공산주의
자들의 압박은 계속 이어졌다. 재능은 있으나, 그들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
지 않는다면 골치 아픈 부르주아에 지나지 않았다.
이중섭은 이 곳에서 맏아들을 디프테리아로 잃고 말았다.
이중섭은 더 이상 원산에서는 버티고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시
외인 송도원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서기 1947년 여름,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이중섭은 이 무렵 까마귀를 그리기 시작했다. 소, 생선, 고목, 닭, 어린 아
이, 천도복숭아에 이은 그림 소재였다.
서기 1949년 봄,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송도원 시대도 1950년 여름으로 막을 내렸다.
6.25는 이중섭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9월에 이르러 마흔
다섯 살 이하의 남자 긴급 동원령이 내리고서야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중섭은 그림도구만 달랑 챙겨서 석왕사 뒤 학이리 폐광에 숨어 있다가 국
군을 맞았다.
원산 시내는 8.15 해방 때처럼 다시 한 번 흥분에 휩싸였다. 시공관에서는
원산 시민 위안의 밤 이 열리고, 종군 예술가들이 잇달아 얼굴을 나타내는가
하면, 몇몇 화가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우익 미술 단체를 만들고, 이중섭에게 대표 자리를 맡아 주었으면
하고 뜻을 밝혔다.
서기 1950년 11월이 지나갈 무렵, 이중섭은 기어이 신미술가 협회 위원장
직을 떠맡다시피 했다.
그 해 12월, 귀를 에일 듯한 북녘 바람 속에 느닷없는 꽹과리 소리가 나면
서 60만 명의 중공군이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유엔 군과 국군은 되
밀리기 시작했다. 이중섭이 있는 원산에도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중섭은 해답 없는 질문을 자꾸만 자신에게 던졌다. 부딪쳐 오는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곳을 떠나거라.
이중섭의 어머니는 나직하나 단호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맏아들 중
석이 죽고 난 뒤, 단 하나 남은 아들이다.
어머니…….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네 형과 같은 죽음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이 곳을 떠나거라. 나는 일흔 살을 넘겼으니 살 만큼 산 셈이다. 어서 가
거라.
한 차례 눈물 어린 이별을 나누고, 이중섭 일행은 허탈한 발걸음을 옮겼
다.
서기 1950년 12월 6일, 저녁 무렵의 원산 부두는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파도가 아우성칠 때마다 모든 외침은 잠겨 버렸다.
날 좀 태워 줘요!
살려 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살겠다고 외쳐대는 부두는 지옥이나 다름없
었다.
휘몰아치던 북녘 바람이 잠깐 멎었을 때였다. 임시로 쳐놓은 제4부두 철조
망 안에서 한 병사가 이중섭 일행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그들에게로 다가왔
다.
당신들, 예술가입니까?
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틀림없습니까?
그렇습니다.
병사는 거듭 확인하고 나서 망설이듯 말했다.
그렇다면…… 잠깐 기다리시오.
병사는 배의 트랩을 오르더니 한 해군 문관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중섭을 보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중섭 선생님 아니십니까?
네, 제가 이중섭입니다.
그는 본디 원산 사람인데 해방 바로 뒤에 월남하여 해군 문관으로 있다가,
이렇게 원산으로 오게 되었노라고 설명했다.
일행이 몇 명이십니까?
모두 9명입니다.
문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잠시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곧 자신이 책임지
겠으니 배에 오르라고 했다.
사실은 예전부터 선생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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