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카한국위인특대전집 (21) 유관순.
유관순(1904∼1920)
여성 독립 운동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6년 예수교 공중교회 부인 선교사의 소개로 이
화 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6세의 소녀의 몸으로 앞장 서 대한 독립 만세
를 불렀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펴져 나가고, 일제에 의해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간
다. 유관순은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의 학교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의논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음력 3월1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
고, 만세를 부르며 일어나게 하였다. 이날 선두에 서서 행렬을 정돈하고 만세를 선창하던 관순은
일본 헌병대에 붙잡힌다.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재판을 거절, 공주 검사국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울 복심 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는다. 1920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르며 동려들을 격려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1. 흐르는별
시골에서는 저녁만 먹고 나면 캄캄한 밤이다. 등잔불을 켜는 들기름이나 또는 어쩌다가 사다
쓰는 석유를 아끼기 위해서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잠을 자기 때문이다.
천안 읍내 장에 갔다 오는 두남자가 서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두운 산길을 걷고 있
었다.
모퉁이를 돌아 마을이 멀지 않는 곳에 이르렀을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던 두 사람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여보게, 저기 저건.......
나무들 사이로 불빛이 깜박인다. 그것도 흐릿하게, 한곳에서 똑바로 비추고 있다.
도깨비불일까? 아니면, 짐승의 눈빛?
그러나 조금 뒤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불빛은 다름 아닌 지령 마을의 유씨 댁 불
빛이었기 때문이다.
어휴! 정말 진땀났는걸.
나도 마찬가지야. 자네의 그 괜한 도깨비 이야기 때문에 나까지 어처구니없게 겁을 집어먹었
네!
그런데 웬일일까? 저 집에 오늘 제사라도 있나? 때는 저녁 9시쯤이다.
뒷동산에서 울던 부엉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낑낑거리던 마루 밑의 강아지도, 외양간에 매오 둔 소도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없다.
이 시간이면 산도 들도 나무도 잠을 잔다.
자정이 얼마쯤 지났을 즈음. 뚝쇠는 사랑방에서 잠이 깼다. 잠이 깨자 뒷간(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무렵, 시골의 뒷간은 모두 집에서 꽤 떨어진 바깥에 외따로 서 있었다.
뒷간을 다녀온 뚝쇠는 하늘을 우러럴보았다.
별이 총총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겠는걸.
뚝쇠가 중얼거리며 눈길을 돌리려고 했을 때, 북쪽에서 별똥이 하나 꼬리를 끌며 밝은 빛을 내
고 떨어졌다.
앗, 별똥이리다! 저 별이 떨어지는 걸 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야!
뚝쇠는 이 밤중에 떨어지는 별이 자기만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흐뭇한 마음
으로 하늘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그는 깜짝 놀랐다.
어? 저건?
그는 눈을 비볐다. 뚝쇠 눈에 비친 것은 틀림없는 불빛이었다.
뚝쇠는 그 깜박이는 불빛이 보고 방금 보았던 별똥이 그 곳에 떨어져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라
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 불빛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아아, 저건 관옥이네 집이구나.
비로는 뚝쇠는 그 불빛이 반짝이는 곳을 알아차리고 안채로 들어섰다.
어머니, 어머니!
그러자 캄캄한 안방에서 이내 어머니의 대답이 들려왔다.
왜 그러느냐?
어머니 일어나세요. 쇠죽을 쑤어야 하잖아요.
아니, 뭐라고? 아직 첫닭도 울지 않았는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관옥이네는 벌써 불을 켰는데요.
관옥이네라니.....?
어머니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얼마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아기를 낳니 보다. 관옥이 어머니가 해산달인데 오늘 내일 하더니......
그럼 아기를 낳기 위해서 불을.....
뚝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한편, 이 무렵 관옥네 사랑방에선 잦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관옥의 아버지 유중권의 헛기침 소리에는 초조한 마음이 나타나 있었다. 부인 이씨가 해산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는 아기를 낳다가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유중권은 책에 다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는 본디 독서를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고전을 좋아했다.
고전은 미처 몰랐던 옛 사람의 깊은 지혜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먼저 읽던 곳 다음을 이어 작은 소리로 읽어 나갔다.
요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지 어느덧 50년, 나라가 과연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백성이 자기를
임금으로 존경하고 다스려지고 있는지, 백성이 자기를 임금으로 존경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들도 몰랐다. 할 수 없이 임금이 평복으로 갈아 입고 몰래
거리로 나가 보았다. 한 노인이 나무 그늘에 누워 배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쉰다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고 배가 고프면 밭
을 갈아 먹으니 우리에게 임금이 무슨 소용인가.
그는 읽던 곳을 읽고 또 읽었다.
흠, 요임금이 어진 정치를하여 백성들은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태평
성대를 누렸다는 이야기로군. 백성이 못살고 괴로우면 임금이 원망을 듣게 마련이지. 그나저나
어찌 되었을까?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유중권은 다시 책 위로 눈길을 떨구었다. 그러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밤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군.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왜 이리 아침이 더디 올까?
꼬끼오!
어느덧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함께 부엌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부엌 뒷문을 열고 뒤꼍에 있는 우물로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른 새벽에......?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분명히 응아, 응아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1904년 음력 3월 15일, 충청 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지령 마을에 큰 별이 떨어졌다. 크고
빛나는 별이 바로 그 곳으로 내려와 유관순으로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 유중권은 이 곳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명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이씨 부인 역시
선비의 집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용모와 덕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었다.
관순이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이미 오빠 관옥이 있었고, 뒤에 관복·관석 두 동생이 생기게 되
었다.
그 날 유중권은 아침 일찍 안채로 들어갔다. 새벽에 태어난 딸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함빡 담겨 있었다.
에헴!
그가 점잖게 헛기침을 한 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인은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니, 가만히 누워 있구려. 수고가 많았소.
부인 이씨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딸이라 실망하셨지요?
무슨 말을. 예로부터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지 않소. 그리고 또 우리 집에는 이미 맏아들
관옥이 있지 않소.
유중권은 부인의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 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부인은 몸조리나 잘 하시오. 나는 아이의 이름을 생각해서 짓도록 할 테니.
그는 기쁜 얼굴로 안채에서 나왔다.
그 무렵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을때는 돌림자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를 남자보다 낮게
생각하는 관습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겨 남자보다 낮게 생각하는 관습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겨 온
유중권은 관 자란 돌림자로 이름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부르기 쉽고 뜻이 서로 어울리는 마땅한 글자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그는 탁! 하고 무릅을 쳤다.
옳지! 순할 순자, 그게좋겠군. 그래, 관순이라고 이름을 짓자.
이렇게 마음먹은 그는 이 이름을 부인과 의논했다. 이씨 부인도 무척 기뻐했다.
당신이 좋으시다면......
너그러울 관자에 순할 순자, 얼마나 좋은 이름이오,
유관순의 가족이나 용두리 사람들은 비록 아기의 앞날을 알지는 못했으나, 관순의 태어남을 모
두 진심으로 기뻐했다.
2.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러나라들
유관순이 태어난 1904년은 어떤 해였을까?
그 무렵,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둡고 오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1904년에는 일본과 러시
아가 으르렁 거리다가 마침내 러일전쟁 이 일어났다.
중국, 러시아, 일본 세나라 가운데 가장 크게 침략의 야심을 품고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유관순은 무럭무럭 자랐다.
유관순은 어렸을 때의 일이라 확실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몹시 원통해하던 모습이 어
렴풋이 머릿속에 새겨졋다.
그 분명치 않은 기억을 관순은 뒷날 철들고 나서 물어 보았다.
네가 그때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버지는 딸의 총명함에 놀라며 그때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두 살나던해, 그러니까 1905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러시아와 싸우던 일본은 10월이 되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지. 그래서 우쭐해진 일본은 그 다음달 11월에 을사조약 이라는 터무니없
는 조약을 우리나라에 강제로 맺게했다.
그 조약이란 쉽게 말해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보호국이 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나라를 송
두리째 집어 삼키겠다는 왜놈의 나쁜 수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때 그렇게 땅을 치며 통곡하셨군요.
그 얼토당토 않은 조약이 맺어지자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대김 등 여러 뜻인는 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지. 그리고 전국 도처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단다. 아마 못돼도 15만 명쯤이 잔
인한 왜놈들에게 학살을 당했을게야. 정말 통탄할 일이지.
그러던 1907년 , 헤이그 특사 사건 이 일어났다. 일본의 간섭과 횡포를 더 이상 참을수 없게된
고종황제가 이준,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헤이그로 보내어, 때마침 열리고 있던 만국 평화 회의
에서 일본의 침략과 야욕을 폭로하려 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트집잡아 고종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우리나라의 군대까지도 해산
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 유관순은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초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관순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그 무렵
천자문은 아이들이면 누구나 다 배우는 책이었다. 한문 글자가 꼭천자, 그것도 넉자씩 한 구절이
되어 엮어져 있는 책이다.
아버지가 먼저 글자를 가리키며 읽었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르황...
그러면 관순은 맑은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아버지는 인자한 웃음을 담고 말했다.
네 글자를 한꺼번에 읽으면 천지현황 이 된다. 한 번 천지현황이라고 읽어 보아라.
네, 처지현황.
그뜻을 새긴다면 하늘과 땅은 아득히 넓고 또한 누르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네
그러나 관순은 공부도 공부였거니와 아버지에게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아버지, 오늘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주세요. 공부를 잘했으니까 한가지 해줄까?
네, 해주세요.
관순은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앉으며 말했다. 동생 관복은 아예 아버지 무릎위에 앉았다.
아버지는 재미있는 옛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서울 한강 건너에 아차 고개 라는 조그만 고개가 있다. 그고개 이름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려면 홍계관 이야기를 알아야한다. 홍계관은 명종때 사람으로, 점을치면 백번이면 백번, 다 귀
신처럼 알아맞추었다.
그렇게 점을 잘쳤어요?
암! 그런데 어느날, 그가 혼자서 자기명수를 점쳐보았더니, 아무해 아무달 아무날 죽을것이라
고 나와 있지않겠니. 오직 한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은 임금님의 용상아래 숨어있으면 자기으 죽음
을 면할수도 있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이뜻을 임금님께 아뢰어 허락을 얻고 그날이 오자 용상 아
래 숨어 있었단다.
그래서요?
한편, 명종 임금님은 쥐를 한 마리 잡아서 상자속에 감추시고 분부를 내리셨다.
이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맞추어 보아라.
홍계관은 거침없이 대답했지.
네, 쥐가 세 마리 들어 있습니다.
이대답에 임금님은 크게 노하셔 명령을 내리셨다.
너는 지금까지 엉터리 점으로 세상 사람들을 속여왔구나. 여봐라! 저녀석을 사형장으로 끌고
가서 목을 베어라!
그럼 죽였나요?
계속 들어 보아라, 홍계관이 형장에 끌려오자 집행관이 물었다.
마지막 소원은 없느냐?
그래서 홍계관은 마지막 점을 쳐 보았지. 그랬더니 사형을 한 시각만 늦추면 살수있을 것이라
는 점괘가 나왔지. 홍계관은 집행관에게 사정해서 사형을 늦춰달라고 부탁했지. 집행관은 그 부
탁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요?
한편, 임금님께서는 홍계관을 사형터에 보내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자 속의 쥐를 꺼내
어 배를 갈라보게 했더니, 그속에 새끼가 두 마리 들어있지 않겠느냐.
어머나!
죄없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곧 달려가서 형 집행을 중지하라! 하는 명을 받든 임금님의
사자가 말을 타고 달려가서 손을 크게 휘저으며 외쳤어.
형을 중지하시오, 어명이오!
그런데 그것을 빨리 집행하라는 재촉인 줄로알고 집행관은 홍계관을 사형시켰어.
어머나!
관순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혀있었고,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임금님은 그말을 듣고 아차 하며 크게 슬퍼하셨지 그때부터 그곳을 아차고개라고 불렀단다.
유관순은 단지 이야기만을 좋아했을뿐 아니라 기쁜일에는 마음껏 웃고, 슬프고 안타까운 일에
는 눈물을 흘리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천자문 한권을 다 배운 관순은, 아버지에게 다른 책을 배우기로 했다.
관순아, 오늘부터는 동몽선습 이라는 책을 공부하기로 하자꾸나, 사람이 어째서 짐승들과 다르
며 귀한것인지.....
그때, 갑자기 명 서방이 뛰어들었다.
나리, 나라가 망했습니다!
나라가 망했다니?
네, 제가 오늘 새벽 장에 갔다 왔는데, 장에서는 모두들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8월29일인가
한성(서울)에서 합병 조약이 맺어졌다나요.
뭐라고?
아버지의 두 눈에선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관순은 이날일을 죽을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고 생각했다. 관순도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경술 국치!
1910년 8월29일 이로써 대한제국 이 끝나고 민족의 수난기가 시작되었다.
통감이 된 침략자 데라우치는 곧 순종 임금을 창덕궁에 가두고 통감부 를 조선 총독부 라고 고
쳤다.
지령리는 시골이었기 때문에 며칠 뒤에야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서 쓰러졌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키는 무자비한 탄압 정치와 의병
진압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를 죽였다.
그리고는 일본 계엄 아래 국권 침탈이 선포된 것이다.
일본군 육군 대장인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일본 헌병들에게 옷만 갈아 입혀 경찰과 학교 등 우리나라 곳곳에 보내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하고 수시로 잡아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괴롭혔다.
이른바 힘으로 억누르려는 무단정치 를 한 것이다.
그러나 애국자들은 곳곳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을 벌였다.
총독 데라우치는 경무 총감 아키시를 불러 말했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를 모조리 없앨 좋은 방법이 없겠소?
있습니다.
어떻게?
아카시는 총독의 귓가에 소근거렸다.
하하하! 자네는 역시 영리한 친구야.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 이란 것을 꾸며 체포자 명단을 미리 작성한 뒤 1910년 12월 27
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총독을 참석시켰다.
선천 부근에서 안명근이 체포되고, 이어 독립 지사 600명이 체포, 105명이 기소되었다. 이를
105인 사건 이라 한다.
3. 까치가 물어다 준책
세월은 나라의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해두해 훌쩍 지나갔다.
관순은 어머니를 도와 아침 설거지며 빨래를 했다.
까까까, 까까까.....
관순은 손을 멈추고 부엌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은 왜 저렇게 까치가 울까? 까치가 울면 기쁜소식이 있다는데...
관순아, 이리온.
네, 어머니.
관순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씨부인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반닫이에서 꽤 큰책 두권을 꺼내
어 주었다.
이게 뭐예요?
그것은 신구약 성서 와 찬송가 라고 씌어진 책이었다.
어제, 공주 감리교 충청도 교구에 있는 사 부인이 다녀갔다. 며칠후에 다시 들른다면서 널 주
라고 두고 가더구나.
관순은 그책 두권을 소중한 물건처럼 가슴에 품었다. 가죽 표지에 금박 글씨로 씌어진 책이
신기하기만했다.
그리고 그책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뿌듯했다.
관순은 그날저녁, 떨리는 가슴으로 자기방에 들어와 책의 첫장을 넘겨 보았다.
창세기 모세 일경 이라고 씌어 있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데 하느님이신 신
은 물로 다니시더라....
이때의 성서는 지금 것과는 달리 한문이 반이상이었고 번역도 지금과는 달랐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 하는 첫 구절은 관순에게 있어 적지 않은 놀라움을 주
었다. 그러나 되풀이해 읽어 보니 천지창조 라는 이 구절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물론 모르는 것도 많았다. 지루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사부인이 올적마다 물어서 조금씩 깨달아 갔다. 사부인은 눈이 파랗고 머
리가 노란 서양여자로, 몹시 친절하고 상냥했다. 관순은 사부인의 가르침으로 성경의 뜻을 알면
알수록 재미를 느꼈다.
겨울이 지나가고 정월이 되었다.
관순의 나이 열세살이 된 것이다.
새해 인사를 하러 관옥과 관석이 집을 나설 때 관순이도 따라 나섰다.
작년 겨울 외갓집에 갈때에는 관순이가 먼길을 가는걸 망설이던 어머니도 이번에는 순순히 승
낙해 주었다.
금년에는 꼭모든 친천집들을 다녀오너라.
이렇게 이르기까지 했다.
왜냐 하면 유중권이나 어머니 이씨 부인은 큰 결심을 했던 것이다.
공주 감리교 충청도 교구에 있는 사부인이 종종 관순네 집에드나든 뒤부터 관순에 대한 사부인
의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사 부인이 관순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마을의 여러댁을 다니며 많은 규수들을 보아왔지만, 댁의 따님 관순이처럼 얌전하고
똑똑하고 영민한 아이는 처음 보았어요.
뭘요....
어머니 이씨 부인은 딸을 칭찬하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
아닙니다. 정말 시골에 그냥 두기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여자들도 남자 못지
않게 배워서 훌륭한 지도자가 될 때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머니 이씨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저도 그 애가 예사 아이하고는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가정 형편도 그렇고...
사부인은 한 무릎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관순이를 서울로 보내서 학교에 넣도록 하세요
어머 서울로요?
네, 그렇습니다. 서울로 꼭 보내세요. 학비 걱정은 마시고.....
그렇지만 의논도 해 봐야겠고...
지금 확답을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시간은 많습니다. 언제든지 승낙만 해 주시면 됩니
다.
그럼 바깥어른과 의논해 보겠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유중권과 관순의 서울 유학에 대해서 의논을 했다.
관순이를 허울로 보냅시다.
이씨 부인은 대뜸 말했다.
공주 감리교의 사 부인이 책임진다고 하셨어요. 그애는 여자라도 훌륭한 일을 할 게 틀림없어
요.
그렇게 보이오?
유중권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관순이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밝은 별똥별이 떨어졌다는 마을
의 소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렇다면 나도 반대는 않겠소. 다만 어린 자식을 객지에 홀로 보내는 것이 염려스럽구
려.
아니에요. 그 애는 제 오라번니나 동생보다도 꿋꿋한 데가 있어요. 언젠가, 공동 묘지 옆을 밤
에 혼자 지나올 만큼 대담한 아이지요.
허허 , 그런 일이 있었던가?
관순의 서울 유학에 대한 부모님의 마음은 거의 정해졌다.
관순네 형제들은 친척집에 세배하러 길을 나섰다. 오빠 관옥과 관복은 앞장서 걸어가고, 관석은
관순과 손을 잡고 걸었다.
누나, 어디로 세배가는 거야?
관석이 물었다.
용머리로 간단다.
바로 관순이 밤길을 걸어 북방산을 지나온 동네이다.
본디 유씨 가문은 용두리에 여러 집이 모여 살고 있었다. 용머리도 용두리의 한 동네로 아저씨
댁이 있었다. 그리고 관순의 숙부인 유중무도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용머리도 용두리의 한 동네
로 아저씨 댁이 있었다.
그리고 관순의 숙부인 유중무도 이 마을에 살며 교회 전도사 일을 보고 있었다. 관순 남매는
아저씨 댁이며 작은 아버지 댁에 가서 세배를 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는 세배를 받고, 관
순을 칭찬했다.
절하는 모양이 마치 날아갈 듯 보기 좋구나.
관순은 얼굴이 빨개졌다.
작은아버지 유중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너 이번에 서울로 가게 된다면서? 여기서 할 일이 있더라도 꼭 서울로 가겠다고 떼를 써라.
너는 정말이지 아까운 재주를 갖고 있다. 아무쪼록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오.
네.
관순은 밖으로 나왔다. 동네 여자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곳에 순덕이와 이쁜이의 모습이 보였
다.
여기서도 관순이 서울로 공부하러 간다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모두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쁜이가 먼저 관순에게 말했다.
너는 좋겠다.
뭐가?
얘, 능청 떨지 마. 서울 가는 일 말이야.
뭐,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
관순은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우리 노래나 하자.
무슨 노래?
찬송가.
좋아.
세 소녀의 노랫소리는 맑고 밝게 울려 퍼졌다.
4.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요즘 관순은 술 심부름으로 사랑방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자연히 아버지가 동네 친구분들과 나누는 말을 듣는 기회도 많아졌다.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흥분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왜놈들에게 온갖 수모를 받고 있소.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
내가 말해 볼까? 우리가 배우지 못한 탓이오! 우리가 어두운 탓이오! 우리가 어리석은 탓이오!
물론 가난해서 못살기 때문에 남들처럼 배우지 못했다고 변명도 할 수 있을지 모르오. 그러나 그
건 어디까지나 변명에 지나지 않소.
으음.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실망만 하고 있어야 하겠소? 책임만 느끼고 있으면 뭘 하겠소! 그 책임을 행
동으로 옮길만한 결심이 있어야지...... 그 방법이란 우리의 자식들을 가르치는 일이오. 지금까지
서당이 있고 향교가 있어서, 학문을 안 가르쳤던 것은 아니오. 그러나 지금 세상에 좀더 힘있게
살아가자면 신학문을 가르쳐 주어야 하오.
그럼 유 주사는 학교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른 고장에 뒤떨어질 수 없지 않소.
아버지 유중권의 말은 불길을 뿜는 듯했다.
관순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사랑방에 나왔다가 한구석에 앉아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흥호 학교 가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
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큰 곤란은 자금 문제였다. 이 문제로 여러 번 모임이 있었다.
시골에서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가을에 농사를 지어, 그 수확 가운데서 얼마를 떼어 내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 거두는 곡식의 양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리
넉넉하게 학교를 세우는 경비를 낼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이 생각다 못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아니꼽지만 장터에 사는 고모다에게 돈을 빌려 쓰도록 합시다.
그 말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로 일본과 싸워 나갈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학교를 세우려는
것인데, 그 자금을 일본인에게서 빌려 쓰다니!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소!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었다.
물론 나도 그것이 옳지 않은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고 보니......
유중권도 이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무렵, 일본인들은 어중이 떠중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빨리 경제의 실권을 잡아 갔다. 일본인들의 돈벌이를 위하여 일본 군대는 총
칼의 힘으로 갖가지 터무니없는 조약을 강요했다.
그들이 모든 관청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물론, 돈벌이가 될 만한 사업을 모두 차지하였다. 또,
같은 일을 하여도 일본인의 월급은 우리 나라 사람보다 몇 갑절 더 많았다.
그러니 그들 일본인이 살 찌고 돈을 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일본인들은 우리에게서 토지를 거의 빼앗다시피 하였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무렬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그 땅이 자기 땅이라는 표시를 해 두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일본인
들은 등기 제도를 만들었다.
여보게, 자네 등기라는 거 했나?
등기가 뭔가?
이런 답답한 사람 보게. 자네 땅을 관청에 가서 신고해야 하는 거야.
아니, 내 땅 가지고 내가 농사짓는데 왜 관청에 신고하고 허락을 맡아야 하나?
그걸 하지 않으면 땅을 다 빼앗는다네.
자네 무슨 소릴 하는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릴 듣고 와서는......
허허, 내 말 듣게. 괜히 큰코 다치기 전에.
등기 시일이 지나자, 일본인들은 등기를 하지 않은 모든 땅을 임자 없는 땅이라하여 자기네들
땅으로 만들었다. 또, 토지 측량이라는 것을 실시하여 주인 없는 땅이나 아직 개간되지 않은 땅을
자기네 총독부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땅들을 제멋대로 일본인에게만 싼값으로 팔아넘겼다.
이렇게 해서 어느 틈엔가 우리 국민의 땅이 반 이상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땅을 잃은 우리 농
민들은 일본인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만 나라를 빼앗는 게 아니었다. 어느덧우리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까
지 위협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조선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나만 잘 살
면 그만이지.
일본인들은 자기네들 때문에 점점 더 못살게 된 우리 백성을 더욱 악랄하게 이용했다. 가난해
진 우리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 주고 터무니없는 비싼 이자를 받아 먹는 고리대금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말했다.
결국 왜놈의 돈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적의 돈을 써서 빨리 일어서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요.
마침내 유중권도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으나 일본인 고모다의 돈을 빌려 쓰는 데 찬성했다.
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이런 모든 것을 뼈저리게 아파했기 때문에 흥호 학교를 세웠다. 그는
비록 일본군이나 민족 반역자에게 맞서 칼이나 총을 들고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이런 경제적
침략을 누구보다도 미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왜놈들을 하루빨리 이 땅에서 내쫓아야 한다. 이런 침략자들
을 물리치고 우리 민족이 독립하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이 큰 뜻을 위해 일본인의 돈을 빌려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고모다로부터 빌려 쓴 돈 때문에 뒤에 얼마나 큰 고통과 봉변을 당하게 될지 유중권
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고모다라는 일본인은 털끝만큼도 인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중권은 고모다에게 갚아야 할 돈이 준비되지 않자 어느 날 학교를 대표하여 고모다를 찾아갔
다.
아무래도 기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 동안 여유를 주십시오.
그러자 고모다는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상 같으면 염려가 있겠습니까. 기한은 연기해 드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만, 석 달만 연기
해 드리지요.
안 됩니다. 석 달은 너무 짧습니다. 1년만 연기해 주십시오. 그 때는 추수도 할테니 돈을 갚기
가 쉽습니다.
안 됩니다. 석 달도 많이 봐 드리는 것입니다.
유중권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석 달 뒤에 다시 연기를 간청하자, 지금 안 된다고 싸워 봤자 소용이 없다
고모다는 여전히 간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석 달도 조건이 있지요.
아니, 조건이라니?
이자를 내셔야지요. 그 이자는 지금까지의 1할 이자가 아니고 2할 이자에 원금까지 합해서 주
셔야 합니다.
뭐라고?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헤엣......, 우리도 장사니까요.
결국 유중권은 더욱 큰 빚만 짊어진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학교 문을 닫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은 날로 깊어 갔다.
고모다에게 빌려 쓴 돈은 100원이었는데 이자까지 해서 130원 남짓한 돈을 갚아야만 되었다.
그 무렵 100원은 굉장히 큰 돈이었다.
일본인에게는 큰 돈이 아니었지만, 우리 백성에게는 엄청난 돈이었다.
논 한 마지기를 팔면, 그것도 가장 좋은 땅이라야 2원 안팎이었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이 돈을 같이 갚아야 했지만, 모든 책임은 유중권에게 있었다.
약속한 석 달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 되자, 고모다는 관순의 집으로 뻔질나게 찾아왔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지는군요. 물론 준비는 되셨겠지요? 뭐 유상께서 어련하시겠습니까.
여보게, 고모다. 조금만 더 연기해 주게. 조금만 더 연기해 주면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갚
겠네.
아니 지금 누굴 놀리시는 겁니까?
고모다는 간사스런 웃음을 띤 얼굴로 이렇게 유중권을 놀려대며 한참을 노닥거리닥 돌아갔다.
날이 지남에 따라 고모다의 얼굴엔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뱀 같은 눈초리를 번득이며 관순의 집
안을 훑고 갔다.
유중권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으며 몇 번이나 고모다에게 사정을 해 봤다. 그러나 고모다
의 교활한 성격을 안 뒤부터는 숫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상! 갚을 것이 없으면 땅이라도 내놓으시오. 집을 내놓든지.
아니, 뭐, 뭐라고?
흥, 집도 뭐 변변치 않군.
고모다는 집 안을 샅샅이 살펴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소. 기일 안에 빚을 갚지 않으면 집을 차압하겠소.
고모다는 집안을 한버 둘러보고 갔다. 아버지 유중권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유중권은 마침내 병석에 눕고 말았다. 높은 열이 오르고 밤엔 헛소리까지 했다.
이 녀석, 내가 갚으면 어쩔 테냐?
이 헛소리에 어머니와 더불어 병 간호를 하던 관순은 깜짝 놀라곤 했다. 집안 식구 모두가 큰
걱정에 잠겼다. 관순은 몰래 혼자서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자비를 내려 주소서.
마침 깊은 밤중이었다. 어머니 이씨 부인도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간호를 했기 때문에 잠깐 눈
을 붙이려고 안채로 들어가고 없었다.
관순은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며 아버지를 찬찬히 살폈다. 숨결 소리가 고른 것을 보니 아
지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던 관순의 눈물이 아버지의 앙상한 다리에 떨어졌다.
관순은 급히 눈물을 씻고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보호를 내려 주십시오.
관순아!
아버지는 어느 틈에 눈을 뜨고 관순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네.
관순도 아버지도 눈물이 글썽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약해서 이렇게 소리 없이 울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딸이 기특해서 고맙기만
했고, 딸은 아버지가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아버지, 여태껏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좀 자거라. 내 병은 이제 걱정 없으니......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가서 자라니까......
그래도 관순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관순의
손을 끌어다가 꼭 쥐어 주었다. 관순도 아버지의 손을 마주 쥐었다.
내가 병이 든 것은 일본인 고모다로부터 빌려 쓴 돈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돈보다 더욱 큰 근
심 때문에 병이 든 것이다.
말하자면 고모다에게 시달리는 건 작은 일이고 나라를 뺏기고 그걸 근심하는 건 더 큰일이다.
그 큰 근심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지력이 점점 꺾이어 앓아 눕게 된 것이다. 내 말 뜻을
알아듣겠니?
네.
예로부터 나라 없는 백성 없고, 조상 없는 자손 없다고 했느리라. 그런데 우리는 5천 년의 역
사와 문명을 갖고서도 지금 나라 없는 슬픔을 겪고 있다. 그것은 위로는 조상에게 죄송한 일이요,
아래로는 너희들 자손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이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어 나를 병들게
한 것이다.
네, 잘 알겠어요.
아버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흥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슬퍼하기만 하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겨 내야 한다.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살아나는 방법이 무엇일
까? 우리도 배워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만들었다. 그 학교를 건설함으
로써 하루바삐 우리도 힘을 기르고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지식을 갖추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네.
아버지는 조용히 천장을 보고 누워 있고, 관순은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너희 11대조 되시는 몽인 할아버지께서는 아호가 어우 선생이었다. 그분은 광해조 때 이조 참
판을 지내셨기 때문에 인조 임금이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시자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광해
임금이 아무리 포악한 임금이더라도 신하는 임금께 충성을 바치는 게 도리라 절개를 지킨 것이
다.
조정에서는 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아까워해 벼슬을 다시 하라는 권유를 몇 번 했었지만 할아버
지는 끝내 사양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늙은 과부 라는 시를 지어 비유하며 벼슬을 사양하셨단다.
늙은 몸이 새로이 단장하고 시집가면 무엇하리오.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김자점이란 사람의 모함을 받고 돌아가셨지만 한 번 옳다고 생각한
마음은 끝내 바꾸지 않으셨다.
관순은 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동안 새삼 가슴 뿌듯한 긍지를 느꼈다.
우리 가문에 유인석이라는 훌륭한 장군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병신년에 고종 임금의 왕비이
신 명성 황후께서 왜놈에 의해 돌아가시자 의병을 일으키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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