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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퇴계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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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위인특대전집 (11)이퇴계.



  이퇴계(1501∼1570)
  조선의 학자, 문신.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523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1534년, 문
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1545년, 을화사화 때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뒤 풍기
군수로 있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즐겼다. 1560년, 다시 대사
성, 부제학 등의 벼슬에 올랐으며 40년 동안 네 명의 임금을 모셨다. 그는 뒤에 어린 선조에
게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을 모아 중요한 내용만을 적은  성학십도 를 지어 올리고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도 도산 서당을 지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
으며 주자학의 대가가 된 뒤에도 자기 학설의 잘못된 점은 서슴지 않고 고쳐 나갔다. 주자
학을 만든 중국에서조차 이황의 주자학을 높이 평가하였다. 중요한 책으로는  성학십도,  주
자서절요 ,  계몽전의  등이 있다.


  1. 새벽

  태백산맥 기슭,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고요한 이 산마을에도 이른 봄의
아침은 밝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따라 자욱한 안개는 아침의 찬 기운을 한결 더 느끼게
하였다.
   꼬끼요. 하고 닭이 두 번째 홰를 쳤다. 이 소리에 이황은 번쩍 눈을 떴다.
  형들은 쿨쿨 자고 있었다. 들찬 쪽은 새벽 빛을 받아 희뿌연했다. 이황은 조그만 손으로
눈을 비비고 나서 머리맡을 더듬었다.
  어머니가 어제 저녁에 주신 선물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는 것이다.
   아, 있구나. 천자문 책!
  벌써부터 가지고 싶었던 책이었다. 이황은 8남매의 막내로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여태
까지는 형들의 책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누운 채 그 책을 집어서 가슴에 안았다가 뺨에 대 보았다. 향긋한 냄새가 코에 스
며들었다.
  어제 저녁, 어머니께서 불러 놓고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했다.
   황아, 너도 이젠 여섯 살이다. 내일부터는 형과 함께 글방에 다니도록 해라.
  어제는 황이 여섯 살 되는 생일이었다. 그는 얼마나 그 날이 오기룰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여섯 살이 되는 생일날부터 글방에 나가 공부하도록 해 주마.
  지난 해부터 어머니와 이렇게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좀 별난 아이였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한창 개구쟁이처럼 뛰어놀 나이인데도,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형이 다니는 글방 뜰에 가서 놀기를 좋아했다.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귀에 즐거웠고, 글방 선생님의 글 가르치는 소리가 신기했다. 그러다가 방 안에서 글
을 읽는 소리를 듣고 혼자 외어 보거나 문틈으로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벌써 지난
해부터 형을 따라 글방에 다니겠다고 어머니를 졸랐던 것이다.
   야, 오늘부터 나도 글방에 다니게 되었구나. 열심히 배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야지.
  이황은 무척 기뻤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에게는 글을 배운다는 것이 이토록 자랑스럽
고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덜쿵 덜쿵.
하는 소리가 안방에서 들려 왔다.
   아, 어머니께선 벌써 일어나서 베를 짜시는구나!
  이황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직 자고 있는 형들의 발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방에서
나가 마당 우물가로 갔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들었다. 곧 해가 떠오르려고 동녘 하늘이 붉은 빛으
로 물들어 아름다웠다.
  이황은 비를 들고 마당을 쓸었다. 어머니가 이 때 부엌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이게 웬일이냐?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 마당을 다 쓸다니!
   어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황은 웃으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오냐. 너도 잘 잤니?
   네, 사실은 너무 기뻐서 잠을 설쳤어요.
   왜 그랬지?
  어머니는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깨끗해진 마당을 둘러 보며 물었다.
   어머님이 말씀하셨지요? 글방에 다니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요.
  이황은 공손히 말했다.
   그래, 이제 황이도 다 컸구나. 네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니.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져서 어머니는 쌀바가지를 들고 우물가로 갔다.
  이황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그가 태어난 지 일곱 달 만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서른 두 살에 혼자몸이 된 어머니는 8남매 뒷바라지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농
사를 짓고 집안일을 돌보기에 눈코 뜰 새 없는 어머니임을 아는지라 어린 이황은 어떻게든
어머니를 도와 드리려고 애썼다. 곧잘 심부름도 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일이 없을까
궁리하는 효성스러움이 있었다.
  이제 글 읽을 나이가 되어 배우기를 즐거워하는 아들을 보자 문득 남편 생각에 설움이 복
받쳤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자, 어머니는 툇마루 앞에 이황과 형들을 불렀다.
   오늘부터 황도 글방에 공부하러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구나. 글공부를 한다고 글이
나 잘 외고 잘 짓는 것만을 제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행실을 바르게 가져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게 더 소중하다. 더구나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인만치 더욱 행동에 조심하고 주위 사람의 모범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형들도
황의 공부를 도와 주도록 해라.
   네.
   어머님,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어서 가거라.
  이황은 새 보자기에 싼 책을 옆에 끼고 바로 위의 형인 징을 졸랑졸랑 따라 갔다. 그 모
습을 대문밖까지 따라나와 지켜 보던 어머니는 옷고름으로 글썽해진 눈물을 닦았다.
  이 여섯 살 난 어린이가 앞으로 우리 나라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치게 될 퇴계 이황 선생
이다.
  어린 황은 책벌레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글방에서 배운 것은 꼭 복습하
여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애썼다. 게다가 총명했으므로,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우쳐 글방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았다. 친구들 사이에도 글을 잘 한다고 하여 교만하게 구
는 일이 없이 늘상 겸손했다.
  열두 살 때에는 마을 선생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느 날, 글방 선생이 이황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 학문이 더 깊은 선생을 찾아가거라. 나는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이 말을 들은 이황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황이 말없이 마루에 걸터앉아 시무룩해하고 있는데, 막내아들 황을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
가 물었다.
   얘야, 너 오늘 글방 선생에게 꾸중을 들었느냐?
   아니오, 어머니. 스승님께선 이젠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다른 스승님을 찾아보라고 하셨
어요.
  이황은 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원, 애두. 울 거 없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아버지께서 네 공부가 어느 정도냐고 물으시더
라. 앞으로는 네 형과 같이 작은아버지께 가서 배우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듣고서야 이황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무렵, 황의 작은아버지 이우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와 있었다.
  이우는 경상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청렴 결백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시와 문
장에도 능한 사람이었다.
  작은아버지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어린 조카 황이 책벌레라는 소문을 듣고 은근히
기뻐하던 참이었다.
  이황이 작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네 어머님 이야기를 들으니, 넌 장난치고 놀기보다 책 읽기를 더 좋아한다던데, 그 뜻과
목적이 무엇이냐?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깨우쳐 아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옵
니다.
  작은아버지는 이황의 이 대답에 자못 감탄했다.
  이런 말을 물으면 아이들은 흔히 과거(벼슬길에 오르기 위한 시험)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
아치가 되고 싶다고 대답하기 마련이었다.
   황아, 듣거라. 너에게는 장차 이 나라의 큰 학자가 될 싹이 깃들여 있구나. 열심히 공부
하여 우리 집안을 빛내라. 그럼 오늘부터 논어를 배우기로 하자.
  작은아버지는 이우는 학문도 깊을 뿐 아니라 단정하고 엄한 분이었다. 앉은 자세나 행동
이 신중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빈틈이 없었다. 곧잘 이우는 조카를 데리고 다니며 아름
다운 자연과 접하게 했다. 크나큰 대지안에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미물인가를 가
르쳐 넓은 마음과 겸손함을 지니도록 타일렀다.
  어린 황은 작은아버지의 가르침과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논어를 다 배우고 난 어느 날이었다.
  황의 형 징도 작은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므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우는 두 조카에게 시험삼아 물어 보았다.
   공자님의 가르침을 모두 합쳐 한 마디로 하면 인(仁)이라고 했느니라. 그 뜻을 풀이해 보
아라.
  너무도 갑작스러운 물음에 황도, 형인 징도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어려워 말고 너희들이 생각한 대로 말해 보아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은 작은아버지의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대답했다.
   인(仁)자를 보니, 사람 인(人) 옆에 두이(二)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둘 있
다는 뜻입니다만, 읽을 때 어질 인이라고 하니, 어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돕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의 이말에 작은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호오, 참으로 기특한 대답이로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인이란 다름아닌 사람의 마음을 이르는 것이니라.
  작은아버지는 이런 총명한 조카들을 가르치는 일에 큰 보람을 느꼈다.
  이 자리에서 형인 징은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 역시 아우 황에 못지않게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다.
  뒷날 형인 징은 충청 감사(도지사) 벼슬까지 했는데, 사화(옳은 것을 주장하던 선비가 모
략으로 입는 벌)에 얽혀 안타깝게도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황은 자라면서 더욱 글 읽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벼슬자리에 마음이 있어 하는 공부가
아니었으므로 새로운 책을 접할 때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라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황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시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도연
명은 미련없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와 시골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
을 즐겨 시로 나타낸 시인이다.
  이황도 시짓기를 좋아했다. 어린 황이 열다섯 살 때 지은  가재 라는 시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있구나.
  앞으로 가다가
  돌을 차고 달아나니 발도 많아라.
  한 웅큼 맑은 샘물로도
  사는 데는 충분하도다.
  강과 호수에 물 많음을
  물어서 무엇하리.

  살아가는 데는 한 웅큼의 샘물로도 충분하다는 이 시로 이황의 마음이 얼마나 어질고 욕
심이 없는가를 말해준다.
  작은아버지는  대학 ,  중용 등을 다 가르치고 나자 두 조카를 앞에 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신 너희들 아버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내 아들 가운데 능히 나의 업을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너희들 아버님이 말씀하신 나의 업이란 무엇이었
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성현의 말씀과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니라.
  너희들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나 이런 아들들을 두셨으니 어찌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겠느
냐. 아무쪼록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잊지 말기를 부탁한다. 알겠느냐?
   네.
  황과 형 징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 책들은 너희들 아버님께서 장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책들이다. 이제 이것들을
너희들에게 넘겨 줄 테니 갖고 가서 열심히 읽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그것은 만 권이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이었다.
   감사합니다.
   황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지키고 빛낼 큰 기둥이 될 것이다.
  숙부의 마음은 흐뭇했다.
  그 뒤 이황은 이 만 권의 책더미 속에 묻혀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그 즈음에
는 한 권의 책을 얻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질 수 있
었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이황의 아버지가 처음 결혼했던 부인의 아버지, 즉 장인은 여러 대째 학자인 집안 사람으
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장모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위에게
그것을 모두 물려 주었던 것이다.
  이 책들이 이젠 공부벌레라는 이름이 붙은 이황에게 주어진 것이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
으랴!
  그의 나이 열아홉 살 때의 일로, 그 무렵 쓴 시를 보면 학문과 인생에 대한 그의 깨달음
을 알 수 있다.

  홀로 수풀 초가집에
  만 권의 책을 사랑하며
  읽고 생각하기
  십 년이 넘었네.
  아직도 부족하나
  살마 사는 이치에 부딪힌 듯하니
  나의 마음 끈잡아
  큰 진리를 보리라.

  이토록 많은 책 속에 파묻혀 학문의 길에 파고들 수 있도록 해 주신 아버님의 은혜를 잊
지 못해 이황은 종종 얼굴도 모르는 아버님 무덤에 가서 꿇어앉아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아버님, 참으로 고마우신 유산을 물려 주셨습니다. 작은아버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소자
는 아버님의 업을 받들어 기필고 대성하겠습니다.
  여기서 이황과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황은 연산군 7년(1501) 11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에서 태어났
다. 토계동은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는 구슬같이 반짝이는 시냇물이 출렁이
며 흘렀고 뒷산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이황의 아버지는 이식이라는 분으로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웃 여
러 동네의 존경을 받던 진사로 학문이 깊은 선비였다.
  진사만 하여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군 또는 한 고을에 진사가 몇 사람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시험, 이를테면  소과 에 급제해야 비로소 진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벼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진사라고 하면 진짜 양반인 것이다.
  이황의 아버지 이 진사는 처음엔 예조정랑(총무처 관리) 김한철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3
남 1녀를 낳았다. 그 중 아들 하나는 어려서 죽고, 김씨 부인은 스물아홉 살 때 아들 둘 딸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김씨 부인이 낳은 두 아들이 장가들어 따로 살림을 나갔으니 황의 큰집 형님 이잠과
이하이다.
  아버지는 다시 별시위(장교) 박치의 딸에게 장가들어 4형제를 두었다. 맏이가 의, 둘째가
해, 셋째가 징, 넷째인 막내가 퇴계 이황이다.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이황에게 어머니는 각별한 보살핌으로 아
버지의 생전의 뜻을 일깨워 주었다.
  이황의 학문은 나날이 그 깊이를 더해 갔다.
  아버님이 물려 주신 책들 중에서 이황은 어려운 철학책  성리대전 을 읽었다. 스무 두 살
때는 옛 중국의 철학책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주역 을 읽었다.
  주역을 터득하기 위해 이황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거의 잊을 정도로 열심이
었다.
  이 때문에 소화 불량증에 걸린 이황은 한평생 이 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스물한 살 때, 이황은 허찬의 딸과 결혼했다. 부인이 첫아들을 낳은 스물세 살 때 어머니
의 분부에 따라 서울의 성균관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집에 머슴으로 있는 하인을 데리고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점심 때가 되자 하인이 밥을 지어 이황에게 올렸다.
  그런데 밥에는 콩이 섞여 있었다.
   쌀은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지만, 콩은 어디서 났기에 밥에 섞었느냐?
   저 밭에서 좀 따 왔습니다요.
   그럼 남의 콩을 허락도 없이 따왔단 말이냐?
   네, 밥을 맛있게 지으려고…
   내가 그 밥을 어찌 먹겠느냐? 알고서 내가 그 밥을 먹는다면 나도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앞으론 그런 못된 짓일랑 하지 마라.
  이황은 그 밥을 먹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 그의 마음은 이렇게 곧았다.
  서울에 도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된 이황은 실망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인데, 모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있
었다. 바로 기묘 사화 때문이었다.
  기묘 사화란 중종 14년(1519)인 기묘년에 일어났던 사화로, 홍경주·남곤 등의 늙은 대신
들이 이상적인 정치를 부르짖는 젊은 선비 조광조·김정 등을 헐뜯고 모함하여 죽게 하든가
또는 귀양을 보낸 사건이다. 이 일로 나라의 정치를 새롭게 펴보자던 젊은 선비들이 70여명
이나 목숨을 잃거나 벼슬에서 쫓겨났다.
  바로 4년 전에 일어난 이 일 때문에 젊은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가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황은 학문을 닦는 것이 꼭 벼슬길에 오르기 위함이 아니라 생각하고 다른 선비
들이 수군거리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했다.
  선비들은 이황의 행동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황은 누가 뭐라고 수군대건 그런 것에는 조
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성균관 서고에는 난생 처음 대하는 진귀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자기 집에도 책이
많았지만 그것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황은 서고에서  심경부주 란 책을 보고 크게 마음이 설레었다. 이 책은 옛날 송나라 학
자들의 깊은 생각을 적은 것으로 매우 어려운 책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몇 번씩 반
복하며 노력하여 드디어  심경부주 의 깊은 뜻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 이황의 기쁨은 실로 컸
다. 한 줄 한 줄이 모두 마음을 사로잡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책을 믿기를 신과 같이 했고, 이 책을 공경하기를 엄한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이황은 늙어서도 새벽에 촛불을 켜 놓고 이 책을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성균관에서 여러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책읽기에만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람 김인후와 친하게 사귀었다.
  김인후는 뒷날 중종 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 현령 등의 벼슬에 올랐으나 명종 1
년에 을사 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힘쓴 학자
이다.
  그는 이황과 헤어져 먼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이황을 칭송하는 시 한 수를 보내왔다.

  그대는 영남의 천재요
  문장은 이태백과 두보요
  글씨는 왕희지로세.

  이태백과 두보는 옛 중국의 뛰어난 시인이고, 왕희지는 중국에서 첫째가는 서예가로 알려
진 사람이다.
  이황이 성균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과거를 보라고 권했다. 학
문 그 자체를 기꺼워하는 이황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어머니의 권고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는 스물네 살 때 과거 시험을 치렀으나 연거푸 세 번 떨어졌다.





















  2. 어머니 은혜를 갚고

  동네 사람들은 이황이 책벌레라는 말은 들었지만, 세 번씩이나 과거에 떨어진 것을 보고
더러 빈정거리고 비웃었다.
   그렇게 열심히 학문을 닦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공부를 하는 체만 했지 아무 것도 깨
닫지 못한 게 아니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밤낮 책에 파묻혀 있으면서 무얼 했기에 번번이 떨어지지,
원.
  그는 여태껏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서울에까지 보내 공부를 시켜 준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과거에 붙어 어머니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황은 중종 22년인 1527년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경상도 향시의 진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며 생원시험에는 2등을 차지했다. 뒤이어 과거인 진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당시의 과거 제도는 문과·무과·잡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중 문과는 다시 소과시와
대과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소과시는 초시와 복시를 거쳐야 했고 대과시는 초시·복시·전
시를 거쳐야 했다.
  소과 초시는 향시라 하여 각 도에서 3년에 한 번씩 실시하였고 여기에 합격한 사람들이
서울에서 모여 치르는 시험을 소과 복시라 하였다.
  또 대과 초시는 소과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치르는 시험이었고 여기에 합격한 사람들이
대과 복시에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네 단계 시험에 모두 합격한 사람이 임금님 앞에서 치르
는 시험이 대과 전시였다. 이황도 두 번째 단계까지 합격하였던 것이다.
  그 해 10월, 둘째 아들 태가 태어나 기쁨이 더욱 컸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란 기쁨이 있으면 반드시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그의 부인 허씨가
둘째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직 어린 두 아들, 더구나 갓난 젖먹이까지 남기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황의
슬픈 마음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린 아들들은 이미 늙으신 어머님이 뒤를 보살펴 주셨지만, 천성이 어질고 착한 퇴계로
서는 항상 어린 자식들이 마음에 걸려 불쌍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서른 살 때 권질이라는 사람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이 부인을 새로이 맞아 마음을 가라앉히자, 어머니의 권고도 있어서 이번에는 서울로
가서 문과 전시를 보게 되었다.
  전시란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베풀어지는 마지막 과거 시험이므로 여기서 급제한
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영광이었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게 되기 때문
이다.
  이 시험에 그는 급제했다. 서른네 살 때의 일이다.
  이 전시에 급제한 것은 본인의 경사일 뿐 아니라 나라의 큰 경사이기도 했으므로 그 환영
이 대단했다.
  합격자에게는 임금으로부터 홍패(붉은 종이에 이름을 쓴 합격 증서)와 모화(임금이 주는
꽃이 달린 모자)가 내려진다.
  이황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이황은 동리 앞까지 나와 기다리는 형들과 이웃 사람들의 마중을 받았다.
  큰집 형님이 달려와 손목을 덥석 잡으며 반겼다.
   정말 장하구나. 이제야 우리 이씨 문중에 환하게 빛이 들게 되었구나.
  이황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모든 것이 어머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과 형님들 덕분입니다.
  집 대문으로 들어서자 마루 끝에 서 있는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흰 머리카락에 주름 잡
힌 어머니 얼굴.
  이황은 뛰어가 어머니 앞에 엎드렸다.
   어머님,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그 목소리는 감격에 복받쳐 떨리고 있었다. 여태껏 이날을 기다리며 온갖 고생을 혼자 한
어머니였다.
   어서 사당에 가서 조상 어른들께 인사부터 드려라. 준비는 벌써부터 해 놓았다.
  어머니는 기쁨을 감추고 조용히 말했다.
   네, 어머니.
  이황은 울고 있었다. 너무나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황은 사당에 나아가 절을 하고 조상들에게 급제했음을 보고했다. 사당 참배가 끝나자
비로소 가까운 가족끼리 모여 앉았다.
  이황은 어머니에게 다시 정중히 절을 하고 홍패를 올렸다.
   어머님,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요?
  어머니는 이황으로부터 홍패를 받으시며 입을 여셨다.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고 있었다.
   황공하옵게도 임금님께서 내려 주신 황패가 아니냐! 그러나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
의 네 경사는 너 혼자의 힘이 아니다. 오직 조상님의 은덕임을 알아야한다. 네 아버님도 지
하에서 물론 기뻐하시겠지만 너를 친자식처럼 아껴 주시고 글을 가르쳐 주신 작은아버님도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이황을, 어려서 여러 면으로 지도하고 공부를 가르친 작은아버지 이우는 그가 열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없었다.
  작은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그를 찾아온 한 선비에게 이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는 장차 우리 집안을 빛낼 큰 기둥이 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어린 이황은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던 것이다.
   학문을 닦아서 반드시 작은아버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머
니와 작은아버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이황은 그것이 어제 일만 같이 느껴졌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작은아버지의 말을 통해서
들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업을 이어 달라고 했다. 그 뜻은 학문의 길을 닦으라는 유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황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벼슬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되도록 시간을 내어 학문을 계속하
리라 결심했다. 나라일을 보면서 그 틈틈이 학문을 익히고 깊이 연구한다는 것은 물론 어려
운 일이겠지만 결코 중간에서 포기하지는 않으리라고 이황은 단단히 다짐했다.
  벼슬을 하여 처음 나가는 것을 출사라고 하는데, 이황은 1534년 서른네 살 때 처음으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승문원은 이웃 나라의 문서를 맡아 보던 관청으로, 부정자는 종9품 벼슬로 말단직이었다.
  이황은 그 해 부정자에서 박사(정7품) 벼슬까지 승진했다. 이 1년 동안에 그는 승문원에서
일했을 뿐 아니라 예문관의 검열, 춘추관의 기사관 관직도 겸했다.
  예문관은 임금의 말씀이나 국가의 사신이 상대국에 가서 전할 임금의 명령문 따위를 짓는
관청이고, 춘추관은 국사를 엮는 관청이다.
  두세 군데의 일을 겸해 보자니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이황은 젊었을 때 식사까지 거
르고 공부한 것이 위장병을 갖게 하여 몸이 튼튼하지 않았다.
   소신이 젊어 몸 돌보기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일을 보기에 힘이 부치옵니다. 부디 고향
에 돌아가 불편한 몸을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간곡한 말로 사표를 써냈다. 그렇게 해서 1년동안의 휴직을 허락받았으나 나라에서
는 이황을 언제까지 버려두지 않았다.
  1년 휴직 기간이 끝나자 다시 조정에 나와 일을 보아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
  이황은 서른여섯 살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성균관의 전적(종6품)이 되었고 서른일곱 살이
되던 1537년에는 승의랑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분주하게 나라일에 몰두하던 이황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픈 소식을 들었
다. 그의 뒤에서 항상 힘이 되어 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동안 서울에서 생활하
느라 옆에서 어머니를 돌보아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아아, 어머님. 조금만 더 살아 계셨더라면……. 이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황은 서둘러 고향집에 내려가 장례를 치렀다. 살아 계실 동안 효도를 못한 것에 한이
맺힌 이황은 어머니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지냈다. 그렇게 움막 생활을 하는 동안 이황의
몸은 몹시 쇠약해졌다.
  1539년, 쉴 사이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 홍문관 수찬(정6품)이 되었다. 이 때 경연의 검토
관을 겸하게 되었는데, 경연이란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이황의 학문이 높았기 때문에 임금의 학식이나 덕을 높여 주는 소임을 맡았던 것이다.
  이황이 이렇게 임금과 자주 만나는 벼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부탁을
하였다.
  그 당시의 경연관들은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재물을 긁어 모으기에 바빴으므로 이황에게
도 승진 부탁을 하기 위해 뇌물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부디 제 벼슬이 한 품계만 오르도록 힘써 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우선 제
조그만 정성을 표하고자 하오니 받아 주십시오.
  그는 짐꾸러미를 지고 온 하인을 부르려 했다.
   그대가 이 나라의 관원이오? 위로는 상감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보살펴
야 하는 벼슬아치가 아닌가 말이오? 그대의 녹으로 어찌 그런 재물을 모았소?
  이황의 서슬 퍼런 고함소리에 그 사람은 몸둘 바를 몰라 하다가 이황 앞에 엎드려 사죄했
다.
   소인이 일찍이 대감마님의 명성은 들었사오나 재물을 앞에 놓고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삽기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벼슬아치란 백성을 돌보기에 몸을 아끼지 말아야지, 백성 위에서 권력이나 휘두르고 제
잇속만 채우기에 바쁘다면 어찌 백성들이 믿고 따라 주겠소?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할 테
니 부디 앞으로는 그런 생각일랑 버리시오.
  이황은 그 사람을 타일러 보내면서 주위 벼슬아치들의 타락에 나라일이 염려되었다.
  어느덧 이황의 나이 마흔 살을 넘어 홍문관 교리(정5품)로 있을 때의 일이다.
  서소문 안에 살고 있는 그의 집에 좌의정(정1품, 정부의 둘째가는 벼슬) 권철이 찾아왔다.
  권철은 나중에 영의정(총리)까지 된 사람으로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한 훌륭한 대신이었
다.
  권철이 이황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저녁 시간
이 되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다.
  들어온 밥상을 보고 권철은 깜짝 놀랐다. 상 위에는 보리가 섞인 밥 한 그릇에 반찬이라
곤 짠지 한 접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교리라면 그래도 높은 벼슬인데 이황이 이처럼 어
려운 살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억지로 권철이 밥을 먹고 있는데 술이 들어왔다.
  검은빛마저 도는 막걸리로 이황은 그 양푼을 받자 술잔에 따라 권철에게 권했다.
  권철은 술을 받아서는 눈을 감다시피 하면서 쭉 들이켰다.
  이황이 한 잔 더 권하자 권철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일어났다.
   날도 저물었으니 돌아가겠네.
   우리집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백성들의 음식에 비하면 진수성찬
이지요. 백성들은 없어 못 먹는 음식을 나라의 대신이 삼키기 어렵다면 큰일 아닙니까?
  그 날 집에 돌아간 권철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일찍이 입맛의 버릇을 잘못 길러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당했소.
  이황의 위대한 점은 이런 검소한 생활을 신념으로 삼아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없이 지켰다
는 점이다.
  이황이 사는 서울 집 뜰에는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길게 뻗어 넘어 와 있었다. 가을이 되
면 언제나 다 익은 밤이 이황의 집 뜰에 떨어졌다.
  이황은 집의 아이들이나 하인들에게 일러 그 밤은 한톨도 주워 먹지 못하게 하고, 모두
이웃집 담 안으로 던져 보내게 했다.
  때로는 스스로 주워서 던져 보내기도 했다.
  그것을 본 하인이 이황에게 물었다.
   나리, 집 안에 절로 떨어진 밤을 왜 모두 던져 보내십니까요?
   그것을 몰라서 묻는 거냐? 비록 밤 한 톨이지만 내 물건이 아니니 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떨어진 잎은 소인들이 치워야 합니다요. 그러니 떨어진 밤 몇 톨쯤은…….
   그만한 대가는 이미 받은 게야.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우리 집 뜰에 만들어 주어 더위를
피하게 하니 그것으로 족하지.
  이황의 이런 말에 하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황에게 있어서 이러한 생활은 고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에 있는 이황의 밭 가운데 길이 나 있었다. 이 길 때문에 밭에는 곡식이 자라지 못해
피해가 많았다.
  하루는 하인들이 그 길을 막아 사람들을 못 다니게 했다. 이것을 본 이황은 하인들을 불
러 타일렀다.
   내 이익만 생각해서 남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한 짓이다. 막아 놓은 울타리를 당
장 없애라.
  하인들은 그 말에 불평했다.
   그 땅은 대감마님 댁의 땅입니다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다녀서 농사 피해가 이
만저만이 아닙니다. 나리께서 장사를 하신다면 밤낮 밑지기만 하시겠습니다.
   그 길이 가장 지름길이어서 그 곳으로 다닐 것이다. 내가 곡식을 덜 거두면 마을 사람들
이 편하게 다닐 수 있지 않느냐. 마을 사람들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 옳은 도리이니라.
   마을 사람들이 나라의 그 어진 뜻을 알아나 줄까요?
   몰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언제나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황은 이렇게 자신의 이익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다.
  이황은 조정에서 임금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직책인 경연관으로서 임금과 가까이 있어 임
금의 신임이 두터운데도 성품이 꼿꼿하여 결코 부정한 짓을 저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3. 당파 싸움 속에서

  이황이 마흔다섯 살 된 해인 을사년(1545)에 조정에는 큰 변이 일어났다. 이른바 을사 사
화로 당파 싸움이 마침내 피비린내나는 참극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 때, 이황의 벼슬은 정4품인 응교에서 종3품인 전한이 되어 있었다.
  을사 사화란 명종의 외숙(외삼촌) 윤원형과 인종의 외숙 윤임이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윤
원형의 당파가 승리를 거두고 정권을 빼앗은 사건을 말한다.
  본디 이 두 당파는 몇 년 전부터 사이가 나빴는데 을사년에 중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폭발하였다.
  중종 임금이 돌아가시자 그 세자인 인종이 임금자리에 올랐다.
  윤임은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 왕후의 친정 오라비로서 인종의 외삼촌이 된다.
  한편, 윤원형 형제는 중종 임금의 둘째 부인이며(인종의 서모), 인종의 다음 임금인 명종
의 어머니인 문정 왕후의 친정 오라비로서 명종의 외삼촌이었다.
  이들은 조정의 세력을 잡으려고 서로 싸웠는데, 사람들이 부르기를 윤임의 당파를  대윤
이라고 하였고, 윤원형 형제의 당파를  대윤  이라고 하였고, 윤원형 형제의 당파를  소윤 이
라고 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은 기뻐했다. 이제는 자기 세상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당파를 미처 처치하기도 전에 인종 임금은 재위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자 인종의 뒤를 이어 경원 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제 13대 명종이다.
  하지만 이 때 명종은 나이가 열두 살이었기 때문에 문정 왕후가 발을 늘이고 임금 뒤에
앉아서 정치를 일일이 듣고 하는  수렴 청정 을 폈다.
  그러자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형제의 세력이 커진 것이다. 윤원형 형제는 문정 왕후와
손을 잡고 지난 날의 원한을 풀기로 작정했다.
  윤임의 일당이 역적질을 음모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그의 집안 및  대윤  당파와 관계된
선비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을사 사화에 걸려든 유명한 사람으로는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부제학 나숙 등 10
여 명으로, 그들은 처형되었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벼슬자리에서 쫓겨나 귀양을 떠났다.
  그러나 이황이 군자임은 세상이 다 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지 못했다.
그에게 벌을 내리면 사화에 걸려든 사람들이 모두 억울한 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동정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을사 사화는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어제까지 권세를 자랑하던 벼슬아치가 오늘은 그
아들 또는 손자의 목과 나란히 효시(죄인의 목을 잘라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되는 것을
보고는 조정에 남은 벼슬아치들은 벌벌 떨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세력을 잡은 윤원형 형제의 눈치만 슬슬 살치며 기를 펴지 못했다.
  물론 조정 관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당파 싸움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이황 역시 별로 많지 않은 그런 관리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벼슬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사퇴원을 내고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소원했다.
  그 까닭은 영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함을 하고
남을 죽여서까지 권세를 얻으려는 그런 흐리고 어지러운 세상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이황은 자기의 소신을 거침없이 말하곤 하였다. 그의 신념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명종 원년인 을사년에 올린 상소문으로, 왜인(일본인)이 여러 차례 화평을 청해 온
데 대해 이황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이다.
   듣자 하오니 조정에서 왜인의 걸화(화평을 빔)를 거절한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괴이
하고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 일에 국가 백 년의 걱정이 달려 있고 수많
은 백성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인 줄로 압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이 상소문을 대비시어
깊이 살펴서 처리해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이황은 또,
   속담에  교만한 아들이 어미를 꾸짖는다  고 하였듯이, 미리 주의하여 단속지 않으면 교
만해지고, 나아가서는 어미를 꾸짖게까지 되는 법이옵니다. 이것은 물론 그 아들이 틀렸사오
나 아들을 그렇게 되도록 버려둔 어버이의 잘못도 크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왜인들
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미리 주의하여 단속하는 것이 좋사옵니다. 너무 지나치게 잘 해 주
면 더욱 방자해지고 욕심만 부릴 염려도 없지 않사옵니다.
하고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까지 자세히 아뢰었다.
  이황은 이와 같이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그는 나라 안의
더러운 권력 다툼이 아니라 나라 밖 멀리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일본 해적)였
다.
  일본은 그 무렵 이른바 전국 시대로서 수많은 호족(세력을 가진 집안)들이 천하 통일을
위해 저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질을 했다. 그러므로 치안이 확보되지 않고 주먹 센 장수
가 약한 자를 무너뜨리는 그런 세상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계속되어 칼이나 창을 쓰는 법이
발달되었다.
  게다가 일본은 산이 많은 나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지가 아주 적은 데다가 좁은
섬나라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많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가장 가까운 외국으로서 우리 나라를 엿보기 시작한 것은 당연
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왜구들은 조그만 배를 타고 우리 나라 남해안이나 나중에는 서해안 일대까지 습격하고 갖
은 만행을 저질렀다.
  밤중에 몰래 습격해 와선 아무런 방비도 없는 마을을 공격하고 곡식이나 재물을 빼앗아
갔다. 집에 불을 지르고 어린 아이나 노인을 죽였으며 젊은이나 여자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이런 왜구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요한 고을에 군대를 두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기습 전
술로 들이닥쳤기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하나가 왜구의 노략질 때문
이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이 왜구 토벌로 이름이 높아진 장군이었다. 때문에 나라를 세
우자 맨 먼저 왜구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이성계는 그들 왜구를 귀순시키는 정책을 썼다. 왜구 가운데 귀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들에게 우리 나라 여자에게 장가들게 하고 땅을 주어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부산포
같은 항구를 열어 주어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는 한편 각 해안의 경비를 철통같이 엄하게 하여 이런 따뜻한 정책을 무시하고 침범
하는 자들이 있으면 단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정책을 썼기 때문에 그 심했던 왜구의 피해도 차츰 줄어들었고 남해안이나 서해안
일대의 우리 나라 백성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이황도 이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에 대한 대책으로서 그들의 화평의 뜻을 받아
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세종 대왕 때의 삼포(세 항구) 개항만 하여도 그렇다.
  현명한 세종 임금은 왜인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웅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를 개방하여 왜관(왜인의 무역관)을 설치하도록 하고 그들을 그 곳에 거주시켰으며 무역을
하게 하였다.
  왜인들은 이처럼 무역을 하게 하고 많은 혜택을 줄 때에는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조용
했지만 제한을 가하면 그 본래의 사나운 야만성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삼포 왜란이 그 한 가지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이 어려서 글방에 다니던 때인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 왜란은, 경상도에 있는
삼포의 왜노들이 난을 일으켜 백성들을 많이 죽인 일로서 나라에서는 이 왜노들을 토벌한
뒤 그들의 왕래를 막았었다. 왜노들로 인해 큰 피해를 입자 강경 정책으로 나간 것이다.
  그 무렵, 부산 첨사 이우증이 부산포에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제한시켰다. 또 웅천 현감이
본래의 규정대로 무역 이외에 왜인이 돈놀이를 하거나 다른 사업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렇게 되자 조선과의 무역에서 그 이익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었던 대마도주 소모리노
부라는 자가 군사 300명을 이끌고 부산포에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부산 첨사가
전사하고 우리 나라 백성이 많이 참살 되었다. 이 왜인들의 소란은 곧 평정되었으나 그로
인해 왜관은 자연히 폐쇄되고 무역의 길도 끊어졌다.
  이황의 상소문에서 말한  걸화 는 왜인들이 그 때 잘못을 뉘우치고 화평을 청하며 무역의
길을 다시 열어 달라고 애원함을 뜻한다.
  이황은 그들 무지한 굶주린 무리들을 상대하자면 튼튼한 국방력을 길러 감히 덤벼들지 못
하게 하든가 아니면 먹을 것을 주어 잘 구슬리는 두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종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은 조정에서는 이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왜인
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 막 실권을 잡은 윤씨 일파들은 눈앞의 권력 다툼에
눈이 어두워 이러한 외교적인 수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이 때 이황의 상소문을 받아들였다면, 명종 원년인 을사년으로부터 46년 뒤인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황보다 25년 손아래인 율곡 이이도  10만 양병론 을 부르짖어 왜인의 침입인 임진왜란을
미리 내다보고 걱정했는데, 이이는 실천을 중시하여 당쟁의 조정에 힘쓰는 한편 10만 대군
을 기르자고 주장하며 대공수미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했었다.
  이황이 그보다 먼저 예견했다는 것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황은 정치가가 아니라 학문을 연구하고 닦는 것을 더 즐겨한 선비라
당파 싸움의 조정을 잘 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 무렵의 끈질긴 당파 싸움으로서는 뒷날
다가올 임진왜란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이황 같은 현명한 학자의 주장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 권력자가 있었더
라면 임진왜란의 엄청난 피해는 훨씬 줄일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 그 무렵 조정 형편은 어떠했을까?
  을사 사화로 대윤 세력을 무너뜨린 소윤은 그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소윤의 중심
인물은 윤원로, 윤원형 형제였으며 그들을 따르는 무리로서 지중추부사 정순봉, 병조판서 이
기, 호조판서 임만령, 공조판서 허자등이 있었다.
  이들은 정권을 잡자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그런 뒤 이번에는 윤원로와 윤원형의
두파로 갈라져 싸웠다.
  두 사람 다 윤지임의 아들로서, 말하자면 피를 나눈 형제 사이였는데 권력 쟁탈에 있어서
는 형제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윤원형은 조카인 윤춘년을 시켜서 상소문을 올리게 하여 윤원로를 역적으
로 몰아 귀양보냈다가 이듬해 죽어 버렸다.
  이것은 소윤이 정권을 잡은 지 겨우 1년, 명종 1년이 지난 병오년(1546)의 일이었다.
  다음해인 명종 2년 정미년(1547)에는 정순봉·정언각 등이 문정 왕후에게 거짓으로 고해
바치기를,
   송인수 등이 임금님을 몰아내기 위한 역적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라고 하여 송인수·이약수·임형수 등이 사약을 받아 죽었으며, 이언적·곽자·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것을 정미 사화라고 부른다. 윤원형은 이것을 계기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기반
을 닦았으며 감히 그 앞에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무렵에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 아버지 또는 자기 할아버지가 역적질을 하였다는
죄를 뒤집어쓰면, 그 아들·조카에 이르기까지 남자는 모두 죽게 되고 여자는 종으로 팔려
갔다.
  때로는 삼족이라고 해서 부모 형제와 외갓집, 처갓집까지 화를 입었다.
  이러한 사화가 몇 년 동안 쉴 새 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니 이황의 마음은 어떠했을
까?
  이황은 이런 틈바구니에서 말 같지 않은 것은 아예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차라리 귀를
막고 안 듣는 게 백번 천 번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실천하고 자기가 믿는 길만을 충
실히 걸어갔다.
  이러한 이황의 처신을 세상에서는 믿음직스럽게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찾아가 중요한 의
논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황은 이럴 때도 입이 무거워 할 말만을 몇 마디 할 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따
르게 하는 힘이 바로 덕이며, 그의 인품은 스스로 빛을 내게 되고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이황은 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되었고 10월에는 다시 풍기 군수로 자리를 옮겨 갔
다.
  이 때까지 조정의 내직에 있다가 대궐 밖의 외직으로 나온 것이다. 을사 사화, 정미 사화
등의 사건으로 조정안이 너무 어수선하여 내직에 환멸을 느끼고 이황 스스로 자청하여 외직
으로 나온 것이었다.
  만일 이황이 출세를 바랐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직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직에 있어야만이 임금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고 조정의 큰 벼슬아치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신임이나 추천을 받아 높은 관직과 출세를 할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황은 그것을 마다했다. 한번 외직에 나가면 좀처럼 조정으로 다시 불려 돌아오
기가 힘들다. 더욱이 이황처럼 아무런 당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기란 하
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황이 단양 군수로 내려가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백성들의 관리에 대한 원성 또한
대단했다.
  관리들은 백성들을 잘 다스려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
을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니 군수인 이황이 지나가면 백성들은 두려운 빛을 띠고 도망쳐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관리들을 욕했다.
   이황이라는 자가 새로 군수로 왔다면서?
   사람이 바뀌면 뭘하나. 그놈이 그놈이지.
  이렇게 서로들 수군댔다.
  백성들의 송사(법적인 사건)가 있으면 그 결과는 뻔했다. 군수에게 돈을 많이 가져다바친
사람이 으레 이기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송사보다도 서로들 뇌물을 바치기에 바빴다.
  큰 잘못이 없어도 논밭이 많거나 돈이 많으면 불러다 볼기를 쳐 없는 죄도 만들어 씌웠
다. 심한 경우에는 논밭을 빼앗아 가거나 집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황은 먼저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비행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처벌했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동안 계속하니 관리들의 비행이 완전히 근절되었다.
  백성들은 차차 새로 온 군수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백성을 위함이 마치 어버이 같으니
이황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몇 달 뒤에는 단양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뒤 풍기 군수로 있을 때도 단양에서와 똑같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한편, 이 곳 특히
소백산 기슭에 백운동 서원을 크게 일으켰다.
  백운동 서원은 전에 풍기 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세운 서원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
자 하나뿐인 서원이었다.
  주세붕은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1543년, 고려 충렬왕 때의 학자 안향을 제사지내기
위해 백운동에 있는 자신의 옛집에 이 서원을 세웠던 것이다.
  유학을 연구하는 선비들이 모여 공부했던 이 서원이 그 무렵에는 이름만 있을 뿐, 집도
낡고 선비도 드물었다.
  이황은 그것이 안타까워 임금께 글을 올려 서원을 다시 일으키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청을 받은 명종 임금은 이황의 학문에 감동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청을 모두 들어
주었고, 서원 이름을  소수 서원 이라 고친 현판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서원에 딸린 논과 밭까지도 내려 주어 거기서 매년 거둬들인 곡식은 서원에
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먹을 양식으로 충분했다.












  4. 벼슬을 버리고

  이황은 풍기 군수로 1년 동안 있다가,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만 열중할 결심을
굳혔다.
  명종 4년, 자신의 나이 마흔아홉 살이 되는 9월에 상관인 경상도 감사에게 사퇴원을 써서
올렸다.
  그러나 사퇴원에 대한 감사의 대답이 없었다. 세 번이나 연거푸 사퇴원을 올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황은 석 달 동안이나 더 기다리다가 아무런 허가 없이 짐을 꾸려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3년 전, 즉 을사 사화가 일어난 1545년 다음해 이황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 그의 두 번째
부인 권씨마저 세상을 떠났었다.
  그 때 고향에 돌아온 일이 있었던 이황은 그 당시 토계(토계동 시내 이름) 동쪽 바위 옆
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집을 이황은 양진암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들어앉은 뒤로 토계라는 시내 이름을 퇴계라 고치고, 퇴계를
자기 호로 삼았다.
  퇴계가 이런 저런 일로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생활이 그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
향의 양진암에 들어 앉아 학문의 길로 들어서려고 할 때, 뜻하지 않은 검은 구름이 그에게
덮쳐 왔다.
  퇴계의 형 이해가 올린 상소문이 화근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해가 동생인 퇴계보다 5년 전인 중종 23년(1528)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의 대사헌
벼슬에 있을 때였다.
  명종 5년(1550)에 이해는 세도가 당당한 윤원형의 심복인 이기의 죄를 들어 공격하는 상
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옳지 못한 행동을 밝히고 백성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는 곳으로,
이기가 권력을 이용해 횡포를 부리자 이해가 그 죄를 밝혀냈던 것이다.
  이기는 이 때 벼슬이 영의정이었다. 퇴계와 마찬가지로 성미가 곧은 이해로서는 이기가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고 당파 싸움을 하는 짓을 차마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
다. 이기는 윤원형과 더불어 을사 사화·정미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옳은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였으므로 바른말을 하여 상소를 올린 이해는 도리어
이기와 윤원형 들의 모함에 빠지게 되었다.
   상관을 헐뜯었다.
  이러한 죄를 퇴계의 형 이해에게 뒤집어 씌워 관직에서 쫓아냈다. 뿐만 아니라 명종 5년
8월, 갑산으로 귀양 가는 도중 이해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퇴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기는 퇴계도 이해의 형제이니만큼 자기를 미워한
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상소하였다.
   퇴계 이황의 벼슬을 모두 거두어 주십시오.
  이기로서는 퇴계가 상관의 허락 없이 임지인 풍기를 떠난 것이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
다.
  이리하여 퇴계는 그야말로 형님의 죽음과 벼슬을 빼앗기는 이중의 불행을 겪어야 했다.
  벼슬은 바라던 바가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부인을 잃은 뒤에 다정했던 형님마저 잃은 것은
너무도 슬펐다.
  그런데 이기의 조카인 이원록이 퇴계의 억울함을 잘 알고 숙부인 이기의 횡포를 못마땅하
게 여겨 임금께 상소문을 올렸다.
   퇴계 이황은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지만 한 가지라도 그릇된 일이 없는, 이 나라의 정말
깨끗한 선비이옵니다. 그의 죄가 무단히 임지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여러 번 사
퇴원을 내었고 끝내 회답이 없기 때문에 후임자가 오기 전에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을 따름
이옵니다. 그가 벼슬을 버린 것은 오직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이옵니다.
  이리하여 퇴계는 삭탈 관직을 면하게 되어 벼슬이 전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퇴계는 임금
에게 간곡한 감사의 글을 써 올렸지만 고향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황은 그 다음해 2월 퇴계의 한쪽에 한서암이라는 집을 짓고 여기에서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즐겼다.

  시냇가 바위 사이에 초옥을 지으니
  바위 틈의 붉은 꽃이 지금이 제철이네.
  덧없이 흐른 세월 늦기는 하였지만
  밭갈고 책 읽으니 더없이 즐겁구나.

  아늑한 오막살이에 일이 없는데
  책만 네 벽에 가득 찼도다.
  옛 사람은 이미 여기에 없는데
  그 말의 향기는 아직도 그윽하기만 하여라.

  퇴계가 한서암에서 고요한 생활을 즐기던 시절에 읊은 시이다.
  번거로운 벼슬살이를 멀리한 퇴계는 이 한서암에서 더욱더 학문의 연구에 분발하였고 깊
은 사색에 잠겼다. 그리하여 훗날 불후의 저술들을 이룩하는데 이 시절의 생활이 그 밑바탕
이 되었던 것이다.
  퇴계의 깊은 학문적 연구는  주자 전서  연구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사상 또한 이  주자 전서 의 연구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을 간추려 쉰여섯 살 되던 해  주자서절요 라는 책을 내었다.
  퇴계를 도와 준 이원록은 정의감을 갖고서 많은 선비를 구해 주는 데 애를 쓴 사람이었
다.
  그는 숙부 이기의 횡포를 말렸지만, 권세에 눈이 어두운 숙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원록은 이런 숙부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고, 어떤 술자리에서 숙부에 대한 비난을 했다.
  이것을 엿드고 있다가 이기에게 고해 바친 자가 있었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임백령이
란 사람이 이 사실을 잔뜩 부풀리고 거짓말까지 곁들여 이기에게 일러바쳤던 것이다.
  몹시 화가 난 이기는 자기 친조카였지만 이원록을 잡아다가 매질을 했고 멀리 강계로 귀
양을 보냈다.
  이러한 이기는 천 년이나 영화를 누릴 듯싶었으나 명종 7년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비웃었다.
   그놈 잘 죽었다. 조카까지 잡아먹으려고 하더니 제가 먼저 천벌을 받아 죽었구나.
  이기는 풍성 부원군이란 훈작까지 받았으나, 그가 죽은 뒤 선조 1년에는 그 작위가 깎였
고 그의 묘비는 쓰러뜨려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혔다.
  을사 사화 등 끔찍한 사건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결국 뒤끝이 좋지 않았
다.
  한편, 이원록은 이기가 죽고 난 뒤에도 귀양이 풀리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이기가 죽은 뒤
에도 소윤의 우두머리인 윤원형이 그대로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원록은 명종 20년, 이황 등 많은 선비의 상소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퇴계로선 지
난 날에 입었던 그의 은혜를 갚은 셈이었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이와 같이 세월이 지나면 모두 하늘 아래 드러나기 마련이다.
  퇴계는 본디 벼슬보다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퇴계가 쉰두 살 되던 해, 그 무렵의 대학자인 조식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그것을 보
면 이 때의 퇴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머님이 늙으시고
친구들이 권하는 바람에 과거를 보아 나라의 녹을 얻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말에 그만 마음이 움직였고 우연히 벼슬에 이름이 오르
게 되면서부터 티끌 같은 세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뒤, 병이 더욱 심해졌고, 또한 스스로 헤아려 보니 세상에서 아무 한 일도 없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을 멈추어 옛 성현의 글을 찾아 더욱 열심히 읽게 되었습
니다.
  또 이로부터 홀연히 깨달아 뒤늦게나마 길을 고쳐잡고 방향을 돌이켜서 남은 빛이나 거두
어 볼까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것을 스스로 찾고 한 알 두 알, 또는 한 치 두 치 쌓아
가는 도중에 만의 하나라도 얻는 바가 있게 되면 제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로 볼 수 있듯이 퇴계는 학문과 그 진리를 찾는데 모든 인생의 목표를 두었다.
  그는 쉰 살이 훨씬 넘었으나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식은 퇴계와 동갑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마침내 대학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높았으므로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의 추천으로 전생서 주부에 임명됐으나 추임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여러 번 벼슬을 주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임금이 친히 불러도 가서 학문
에 대한 의견을 말했을 뿐 벼슬을 끝내 받지 않았다.
  퇴계는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한 조식을 부러워했다.
  조식의 문하에서는 김효원, 김우옹 같은 이름난 학자가 배출되었다. 조식은 퇴계보다 2년
뒤인 선조 5년(1572) 일흔두 살로 세상을 떠났지만  남명집  같은 저서로 그 이름이 오늘날
까지 알려져 있다.
  퇴계는 양진암 옆의  한서암 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는 생활을 즐겼다. 그의 호인 퇴계의
퇴자는 물러선다는 뜻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말하며, 계자는 시내 이름인 토계의 계에
서 따온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초가 오막살이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론 바람이 치네.
  마른 곳을 찾아 가구를 자주 옮길 제
  책은 헌 상자 속에 거두더라.

  이 시조는 퇴계가 학문 연구에 뜻을 두고 있었던 한서암 서재의 초라한 풍경을 노래한 것
이다.
  어느 날, 영천 군수였던 허시가 퇴계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허시는 그의 서재를 보고 하
도 초라한 데 놀라서 물었다.
   이처럼 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래도록 습관이 되어서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네.
  그는 이 한서암에서 5년 동안 살았는데, 그의 학문과 인격을 우러러 모여드는 학생들이
날로 많아졌다. 그들은 퇴계와 더불어 시도 짓고 학문도 연구하였다. 퇴계는 이젠 방이 비좁
고 학생들에게 너무 폐를 끼친다고 느낀 나머지 새로운 거처를 찾았다.





























  5. 도산서당

  이황의 나이 쉰다섯 살이 되던 1555년, 그는 고향의 도산 남쪽에 물이 맑고 경치 좋은 곳
을 가려 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이황이 직접 지휘하여 지은 서당은 5년 만에 완성되었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이 서당의 동쪽 구석에 조그만 연못을 팠다. 거기에는 연꽃이 피어났고 고기가 뛰놀았다.
그리고 둘레에는 화단이 있어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 등이 자라났다.
  서당 출입문은 싸리문이었고, 그 문을 나서면 냇가에 이르러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
다. 그 중에서도 냇물 한가운데 있는 큰 바위 이름이 반타석이었는데, 생김이 안장처럼 생겨
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불어나면 물 속에 잠겼고, 물이 빠지면 그
모습이 드러났다.
  도산 서당 앞 낙천에는 은어가 많았다. 나라에서는 여름부터 가을철에 걸쳐 고기잡이하는
어량을 두고, 그 근처에서 사사로이 고기를 잡는 일을 금했다.
  퇴계는 늦가을에 관가의 고기잡이가 끝날 때까지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면
서도 부역 일에는 앞장서서 나가 이웃들로 하여금 본받게 했다.
  퇴계는 도산 서당의 경치 좋고 공기 맑은 산 속에서 책을 읽다가 지치면 냇가로 내려가
맑고 찬 물에 손을 담그기도 했다.

  옛날의 서재로 돌아와
  고요히 향을 피우고 앉으니
  산 속의 늙은이로는 됐을망정
  속된 세상이 걱정 없음이 요행이오.

  산 속의 취미를 그대는 아는가
  세상 일 따위는 말도 안 되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이여
  삼가 높은 벼슬일랑 사랑 마오.

  영화와 욕심은 구름 같아 본디 없는 것
  부귀는 사람을 못 살게 구니 두렵지 않을소냐.

  가멸거나 귀하거나 뜬구름만 같아
  우연히 얻어짐이 나의 소원 아니오.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 같더라.

  퇴계의 이러한 시들은 산 속에 홀로 숨어 조용히 사는 것을 더없이 즐거움으로 읋은 것이
다.
  지금도 남아 있는 도산 서당의 유적을 보면, 그가 거처하던 방은 겨우 사방 3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렇듯 초라한 방이었지만 퇴계는 처음에 바랐던 것보다 지나치게 높고 크게 지어졌다고
오히려 걱정까지 했다고 하니 퇴계가 지녀온 검소하고 질박한 생각을 알 수 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일상 생활은 매사에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숫대야도 질그릇
을 썼고, 베옷 입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나들이할 때에는 칡으로 삼은 신에 죽장을 짚었다.
  퇴계는 스스로 잘난 체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조심했고, 잘못을 알면 곧 고
치기에 힘썼다. 그러한 그에게서 우리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언제나 실생활에서 보여 준 그
의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도산 서당을 세우자 제자들이 사방 곳곳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퇴계는 무엇보다도 겸허한 것으로써 덕을 삼았다. 도를 이미 밝게 깨우쳤으되 항상 깨치
지 못한 듯하였으며, 덕이 이미 높았으되 덕을 닦지 못한 것으로만 여겨 늘 정진의 태도가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한결 같았다.
  그는 비록 젊은 사람에게라도  너 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그가 누구라도 겸손과 경의를 잊지 않았고, 자리에 마주 앉으면 첫인
사로 반드시 가족의 안부부터 물었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비록 대단치 않은 이야기라도 잠깐 생각했다가 대답하고, 말을 듣자
마자 당장 무엇이라고 대꾸하는 법이 없었다.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끔찍한 나머지 꿈속에서까지 제자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
난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자기도 넉넉한 살림이 못 되면서도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양식을 보낸 준 일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님이 오면 비록 손아랫사람이라도 마당에까지 내려가 맞아들였으며, 옳지 못한 물음이
나 말을 건네 오면 묵묵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오직 사리가 이러이러한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뿐이다.
  퇴계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으나 늘 흐트러짐이 없었고, 벼루에 가는 먹조차도 언제나
똑바로 같았다.
  또 새벽에 일어나 향을 피우고, 바로 앉아 날이 밝도록 글을 읽되, 한 번도 흐트러진 태도
를 볼 수가 없었다. 반드시 경건한 태도를 가졌으며 어쩌다 몸이 고단해지면 눈을 감고 그
대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를  산 부처 라고까지 일컬었다.

  몸이 물러서니 내 분수에 편안하고
  학문이 늦으니 나이 늙어 걱정이네.
  내 언덕 위에 거처할 곳을 마련하고
  흐르는 물가에서 날마다 반성하네.

  퇴계의 이 무렵 생활을 이 한 편의 시로 눈앞에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생활을 이처럼 날마다 반성하고 고칠 점은 곧바로 고치면서 살았다.
  일찍이 군대의 말을 조사하는 직책을 띠고 평안도 의주 땅에 가서 한 달이나 머물러 있으
면서도 일 이외의 다른 일이나 놀이에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가 젊었을 때, 친구들과 어울려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사냥이 끝나 술을 마시고 취
한 채로 말을 타고 돌아오다가 떨어져 까무라쳤다. 깨어나 보니 몸이 몹시 아팠다.
  그 뒤로는 스스로 반성하고 제자들에게 그 때 일을 회상하며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분수에 지나치면 좋지 않네. 그 중에서도 술은 적당히 마셔야지, 지
나치면 자기 스스로를 망칠 뿐 아니라, 이웃 사람의 웃음 거리가 되고 마네.
  이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는 퇴계가 조정과 완전히 인연을 끓은 것은 아니었다.
  조정에서 퇴계를 여러 번 불렀기 때문에 부득이 서울에 올라가 길면 몇 년, 짧으면 몇 달
씩 있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러면 그 무렵의 조정 형편을 알아보기로 하자.
  이 때의 조정에는 아직도 윤원형이 정권을 잡고 세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문정 왕후는
명종 8년에 비로소 섭정(임금 대신 정치를 맡아하는 일)의 자리를 내놓고 모든 권한을 임금
에게 돌려주었다.
  이 무렵 문정 왕후는 보우 스님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의 불교를
배척하는 사상을 어기고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문정 왕후는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
사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시키기까지 했다.
  명종 임금은 정치의 대권을 가지면서부터 퇴계를 자주 부르게 되었다. 명종으로서는 퇴계
의 높은 인격과 학문을 우러러보고 스승으로서 모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퇴계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겠다
는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고, 당시의 조정 형편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모든 권한이 임금인 명종에게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문정 왕후와 윤원형의 정치에 대한
간섭은 여전했다.
  더욱이 문정 왕후는 스님 보우를 마음대로 대궐에 드나들게 허락하고 임금과 만날 수 있
는 이례적인 대우까지 해 주었다.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퇴계는 이런 일이 매우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이런 까닭을 겉
으로 내세워 임금의 부름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신병과 늙음을 사양하는 이유로 내세워 거절했지만 세 번에 한 번은 그래도 올라갔다. 그
럴 때마다 임금은 퇴계를 극진히 대접하여 스승으로 모셔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퇴
계는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도산 서당으로 내려왔다.
  명종은 퇴계 같은 어진 이를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펴려고 애썼지만 어머니인 문정 왕후
와 외숙인 윤원형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모두 사림(유교의 선비)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문정 왕후는 스님 보우를 신임하여 그에게  판선종업도 대선사 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고
승과(승려를 등용시키는 시험)와 도첩(승려의 신분 보장 허가장) 제도를 부활시켰다.
  이것은 유교를 섬기는 선비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렇지만 문정 왕후가 있는 한 아
무런 소용이 없었다.
  또한 윤원형은 부처나 무당 따위의 미신을 믿었으므로 선비들을 깔보았다.
  그는 피비린내나는 을사 사화, 정미 사화를 일으켰던 장본인인 이기가 죽은 뒤 명종 1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2년 뒤인 명종 20년 문정 왕후가 죽자 그의 세력도 하루 아침에 무너지
고 말았다.
  윤원형은 대사간 박순, 대사헌 이역의 탄핵을 받아 하루아침에 관직에서 쫓겨났을 뿐 아
니라, 모든 관위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강음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 곳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병을 얻어 목숨을 잃고 말
았다.
  문정 왕후의 신임을 받았던 보우는 제주도에 귀양갔다가 그 곳에서 제주 목사 변협에 의
해 목이 잘려 죽었다.
  퇴계가 읊은 시의 구절처럼  영화와 욕심은 구름 같아 본디 없는 것 이라는 말이 맞다. 한
때 착한 선비를 억울하게 죽이고 권세를 잡았던 윤원형의 비참한 끝을 보면 알 수 있다.
  퇴계의 이런 욕심을 버린 가르침이나 예의바른 몸가짐은 자기 아들이나 형, 친척들에게
언제나 큰 감동을 주었고 큰 교훈이 되었다.
  한 번은 퇴계가 서울에 머물러 있을 때,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지내는 아버지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 때마침 집경전의 참봉으로 있던 맏아들 준이 일용품을 실어 보낸 적이 있
었다.
  그러나 퇴계는 낮은 벼슬에 있는 아들이 어떻게 그리 많은 물건을 구할 수 있는가 의심하
여 적이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들을 타일렀다.
   좋지 못한 습관이 몸에 배게 되면 뒷날 고치기 힘들게 되는 법이니, 앞으로는 아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퇴계는 자기의 생일날에도 아들들에게 축하의 잔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내가 어머님 생신날에 잔을 올리지 못했거늘, 어찌 너희들의 잔을 받겠느냐?
  그러나 마지막 한 분 살아 있던 형 징이 들고 온 술만은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들었다.
  이 형에 대한 퇴계의 공경은 극진했다. 어렸을 때 작은아버지에게서 같이 공부를 배웠던
형이다.
  언제라도 이 형이 찾아오면 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었고, 윗자리에 모시고 공손히 받드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형제간의 우애를 지킬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게 했다.
  이와 같이 모든 행실이 바른 퇴계였기에 그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 탐관 오리를 몰아 내고
또 이를 바로잡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퇴계가 마흔두 살 때, 암행 어사가 되어 충청도 지방의 민정을 살펴보게 되었다.
  이황은 초라한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많이 모일 듯한 곳으로
찾아다니며 그들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날 오후 퇴계는 공주 땅의 한 주막으로 들어섰다. 여러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막
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흥분한 얼굴로 떠들고 있었다.
   아니, 판관이면 백성들 착취해 먹는 벼슬인가?
   글세, 이런 법도 있는가? 죄없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없는 죄도 만들어서 용서해 주는 값
이네, 하고 물건이니 곡식이니 모조리 빼앗아 가니 원…….
   도대체 백성 돌보라는 벼슬아치인지 도적인지 알 수가 없네.
  퇴계는 다른 마을을 몇 군데 더 들렀으나 모두 판관을 욕하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퇴계는
당시 공주 판관이었던 인귀손의 행패를 철저히 조사한 다음 임금에게 아뢰었다.
   공주의 판관인 인귀손은 성미가 고약하여 깨끗하고 부지런한 목사 이명의 명을 어기고
그릇된 일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관청의 물건을 말에 실어 자기 집으로 가져가는데, 이 욕심이란 말로 나타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흉년이 들었으니 괴로운 백성들을 도와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
겠으나 먼저 그런 탐관 오리들을 징계한 뒤에라야 굶주린 백성들을 도와 주는 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퇴계의 이 말에 임금은 당장 그 벼슬아치를 잡아다 옥에 가두고 벌을 주었다.
  이러한 퇴계를 탐관 오리들은 몹시 무서워했다.
  퇴계가 예순여덟 살 때의 일이다. 그는 임금 앞에서 강의를 하는 자리에서 중종 임금 때
기묘 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사람됨과 그의 학식, 행적 등을 바른대로 아뢰었다.
  그리고 기묘 사화가 남곤 등 간악한 무리들의 짓임을 밝혀 냈다. 퇴계의 이 말에 조광조
의 명예가 되찾아졌으며 마침내 임금은 그 간악한 무리들을 벌하게 했다.
  퇴계는 젊었을 때부터 남의 신세 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스물한 살 때의 일이다.
  퇴계가 장가든 처가는 영주에서 매우 넉넉한 집안이었다. 처가에는 좋은 말이 많이 있었
지만, 그는 자기가 마련한 변변치 못한 말만을 탔다.
  벼슬길에 올라 서울에 있을 때도 그는 가마를 타지 않고 대궐로 들어갈 때면 늘 말을 탔
다.
  집에 말이 없으면 남한테 빌려서라도 말을 타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대감의 체면에 말을 타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가마에는 여라 사람이 따라야 하지만, 말은 나 혼자서도 타고 다닐 수 있지 않으냐.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수고할 필요는 없다.
  퇴계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대감의 체면이 깎이는 것은 어찌하렵니까?
   사람의 인품이 어찌 타고 다니는 것에 달렸다고 생각하는가? 편리해서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인데. 나에게는 가마가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이 말에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친분이 있는 사람이 퇴계에게 노새 한 필을 보내왔다. 그러나 퇴계는 그 사람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편지와 함께 노새를 돌려 보냈다.
   노새를 보내준 것은 고맙지만, 아직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에게서 하찮은 선물일지
라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노새 같은 것을 어찌 받을 수 있겠소?
  퇴계의 이러한 겸손한 생활은 죽을 때까지 한결 같았으니 옛 성현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
현한 분이었다.


  6. 학문과 자연을 벗삼아

  이렇듯 어진 퇴계를 우러러 명종이 옆에 두고 좋은 정치를 하려고 여러 번 불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퇴계가 끝내 사양하고 가지 않자,  어진 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
도다!  는 제목으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그리고 몰래 화가를 도산으로 보내서 그 곳 아름다운 산수의 풍경을 그려 오게 한 뒤, 그
무렵의 명필인 송인으로 하여금 퇴계의  도산기 와  도산 잡영 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
어, 임금이 거처하는 방에 두고 늘 그리운 정을 스스로 달랬다.
  퇴계가 유명한  도산 십이곡 을 지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 시조는 그가 지은 다른
책들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우리말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큰 값어치가 있다.

  안개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니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기 바라노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 상청하리라.

  퇴계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그
의 어진 소원이 깃들여 있는 시조로 도산 십이곡 중에 있는 시이다.

  난꽃이 골짜기에 있으니 자연이 좋디 좋구나.
  흰 구름 산에 있으니 자연이 보기 좋구나.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을 더욱 잊지 못하겠구나.

  퇴계는 산과 들을 거닐며 아름다운 꽃과 푸른 산에 걸린 흰 구름을 벗삼아 학문의 깊이를
깨치면서도, 임금을 잊지 못한다고 노래했다.
  도산 서당의 그림을 화가에게 시켜 그려오게 하고 그걸 날마다 보며 자기를 그리워하는
임금 생각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퇴계는 나이들어 늙었음에도, 시력이 상하고 건강을 해칠 정도로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
다.
  그의 서재에 써붙였던 오직 하나의 표어는,
   번거로움을 바로잡는 데는 고요함만한 것이 없고,
  졸렬한 것을 바로잡는 데는 부지런함만한 것이 없다. 는 옛날 시의 한 구절이었다.

  옛 사람도 날 못 보고 나도 옛 사람 못 보았네
  옛 사람 못 보아도 행하던 길 앞에 있구나
  행하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행하고 어쩔꼬.

  옛 사람이란 옛 성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퇴계는 이들 성현들의 행하던 바를 자기 몸으
로 행하며 살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당시에 행하던 길 몇 해를 버려 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나
  이제야 돌아오니 단 마음 마르리.

  퇴계는 벼슬길에서 어지러운 당파 싸움만 보았고, 그 틈바구니에서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다가 학문의 길로 뒤늦게 돌아왔음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마음은 다시 먹지 말고 학문에만 나머지 여생을 모두 바쳐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퇴계의 제자들 가운데는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조목·정구·유성룡·기대승 등, 우리나
라 유학을 대표하는 뛰어난 학자들이 수없이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을 사랑하던 퇴계는 벼슬 자리에는 비록 뜻이 없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데는 그 어
느 충신 못지 않았다.
  이 무렵, 퇴계가 사는 도산의 경치와 글을 병풍에 그려 놓게 하고 그를 아끼며 그리워하
던 명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퇴계의 나이 예순여섯 살 때의 일이다.
  그런데 명종에겐 아들이 없었으므로 덕흥군 초의 아들인 균을 임금으로 앉혔다.
  이분이 1568년에 조선 왕조 제 14대 임금이 되신 선조이다.
  선조는 유명한 임진왜란을 당한 임금으로 우리들에게 더 알려졌지만 퇴계 이황, 율곡 이
이, 백인걸 같은 신하를 쓴 임금으로 유명하다.
  2년 전에 문정 왕후가 죽고 권세를 부리던 윤원형도 쫓겨나 죽었으므로, 선비들은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마음놓고 벼슬할 수 있게 되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고 잘못 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선비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기뻐했다.
  이 때, 새로 임금이 된 선조는 퇴계를 여러 번 불렀다.
  퇴계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예순일곱 살의 나이를 돌보지 않
고 그 해 8월에 먼길을 재촉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온 퇴계는 대제학이라는 높은 벼슬로 어린 선조를 모시며 나라일을 보았다.
  퇴계는 어린 선조 임금을 도와 어진 정치를 펴게 하는 한편 예순여덟 살 되던 8월에는
 무진 6조소 라는 글을 지어 어린 임금에게 올렸다.
  6조소는 어질고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해 몸을 살피고 마음을 닦아 지키고 행하여야 할 일
을 여섯 조목으로 나누어 자세하게 적은 글로, 임금으로서의 시급한 문제를 다룬 훌륭한 글
이었다.
  이 글은 어느 한 구절도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좋은 글이었다.
  고향이 그리워진 퇴계는 곧 대제학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선조는
퇴계에게 계속 나라일을 도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퇴계는 나이 많음을 이유로 끝내 대제학에서 물러났다.
  그 해 12월, 퇴계는 선조 임금의 높은 덕과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성학 십도 를 써 올
렸다.
  이것은 열 개의 도표와 간단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학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이
자세히 담겨져 있는 뛰어난 글이다.
  퇴계에게 이  성학 십도 는 그의 일생 최대의 역작으로 선조 임금이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
를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선조는 퇴계의 뜻을 갸륵히 여겨 신하들에게 병풍으로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다.
  이듬해 3월에 퇴계가 마지막으로 곁을 떠나던 날, 임금은 더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뜻이 굳음을 알자 임금도 더는 말리지 못하고 좋은 말
이나 남기고 갈 것을 부탁했다.
   지금은 정치가 잘 되어 나라가 편안할 것 같사오나 남쪽과 북쪽으로 외적의 침범이 걱정
되옵니다. 갑자기 나라에 큰 변이라도 생기면 흙과 같이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깨어지고 말
징조조차 없지 않사오니, 백성과 마음을 같이 하시고 덕을 높이 가지시옵소서. 그렇게 백성
을 내 자식같이 어여삐 여기신다면 백성들도 나라일에 헌신하여 위와 아래가 평안할 것이옵
고, 나라일도 잘 되리라고 믿사옵니다.
  퇴계는 임금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아뢰었다.
  이것은 선조 2년(1569)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에 벌써 그는 앞으로
나라에 큰 변란이 생겨 걷잡을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질 것을 예측하고 미리 충고를 했던 것
이다.
  뿐만 아니라 퇴계는 사화의 폐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도 임금께 아뢰었다.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바른 사람만을 등용하기 때문에, 임금께 무
슨 잘못이 있으면 신하는 싸우면서까지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은
그에게 성가신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럴 때 간사한 무리들이 틈을 타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게 되는데, 임금이 자기 마음에
든다고 이런 사람들을 쓴다면 그야말로 나라는 어지러워집니다.
  이렇게 되면 임금은 간악한 소인들과 한 무리가 되어 간신들이 뜻을 얻어 하지 못하는 일
이 없게 됩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시고 정치를 펴나가시면 나라에는 어지러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된 지 2년밖에 안 된 선조는, 이러한 퇴계의 말에 감동하여 나라를 다스
림에 있어 지표로 삼으리라 마음먹었다.
  선조 임금은 퇴계가 곁을 떠남을 몹시 가슴 아프게 여겼다.
  그리하여 표범 가죽의 요 하나와 후추 두 말을 친히 내리고, 고향인 경상도 감사에게 명
을 내려 쌀과 콩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 세심한 데까지 마음을 써 주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타고 갈 말을 마련해 주고 군졸을 시켜 호위까지 분부했
다.

  퇴계는 평생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백여 명의 사람과 1천여 통의 편
지를 나누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에는 교통도 불편했으니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문하생, 아들, 조카등과 그 무렵의 이름난 학자도 끼여 있
다.
  그 중에서도 기대승과 8년 가까이나 여섯 번에 걸쳐 긴 서신 토론을 벌였다. 그것은 그
후에 유학자들에게 귀중한 연구 과제가 되었다.
  기대승은 호를 고봉이라고 하며, 중종 22년(1527)에 태어나 선조 5년(1572)에 죽은 유교의
대학자였다.
  고봉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고전에 능통했다.
그리고 퇴계와 학문적인 토론인  4단 7정 에 대한 서신 토론을 벌였다.
  퇴계보다도 훨씬 후배였지만 토론을 하는 사이 퇴계도 고봉의 이론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
고, 후배가 아니라 똑같은 자격의 학자로서 존경했다. 이 점이 또한 퇴계의 위대한 점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대개 다만 나이가 위라는 한 가지만 가지고서도 손아랫사람을 얕보는 버
릇이 있다.
  그렇지만 퇴계는 조금도 그런 오만한 생각을 가진 일이 없었고, 아무리 후배라도 그의 학
설이 옳다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흔히 학자는 자기 고집에 빠지기 쉽지만 퇴계는 이렇듯 큰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퇴계와 고봉이 무슨 토론을 했는가를 알아보자.
   4단 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테면, 사람
에게는  인 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이 있다. 측은지심이란 남을 동정해 주는 마음을 뜻한
다.
  또  의 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 이 있다. 이것은 나쁜 짓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또  예 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 이 있다. 이것은 양보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끝으로  지 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 이 있다. 이 것은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마음
을 가리킨다.
  유교에서는 이 네 가지 마음이 사람에게는 저마다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음은  7정 이란 무엇일까?
  4단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7정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이를테면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사랑함·미워함·탐냄이라 하였으며, 또 어떤 이
는 이것을 기쁨·노여움·근심·생각함·슬픔·놀라움·두려움의 일곱 가지로 보았다.
  퇴계와 고봉은 이  4단 7정 을 갖고서 토론을 벌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에 대한 새
로운 경지가 더욱 깊이 파헤쳐졌다.
  여기서 퇴계의 학문은 철학적인 깊이까지 파고들어 하나의 독창적 학파를 이루었으며, 이
웃 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퇴계를  동방의 주자 라고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는  자성록 이란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언제나 자기
생활에 대한 반성과 자기 학문에 대한 반성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
록 큰 학문을 이루고 대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4단 이 있으므로 반성도 하고 그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7정 에 사
로잡혀 그것을 실천 못 하면 결코 완성된 인격자가 될 수 없다.
  유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데에 있었으며, 퇴계는 그것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선
뭇사람의 모범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퇴계의 학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리학이다. 성리학이란 사람의 성품인  인성 과 하늘의
뜻인  천리 에 대해서 밝힌 학문이라고 하겠다.

  어진 분 순은 옹기구이로도
  즐겁고 편안했으며
  연명은 밭갈이하면서
  그지없이 기쁜 얼굴을 지녔네.
  성현들의 마음과 일을
  내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백수로 돌아와서
  은둔을 시험하네.

  이것은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때에 지은 시이다.
  순은 중국 우나라의 임금으로 부모에 효성스럽고, 형제 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나라를 잘
다스린 것으로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사람이다.
  연명은, 즉 도연명으로 중국 진나라의 시인이다.
  백수란 하얗게 센 머리라는 뜻이고, 은둔이란 세상 일을 피하여 조용히 사는 것을 말한다.
  이 한 편의 시로 우리는 퇴계의 한평생 삶에 대한 겸허한 태도와 인생관을 알 수 있다.

  퇴계는 선조 3년(1570) 1월부터 12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있
다.
  본디 유교에서는 죽음을 매우 엄숙한 일로 생각하며 그 시간과 장소와 또는 죽음에 임하
는 태도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
  1월에 퇴계는 임금께 글월을 올려 이제는 벼슬을 사양하기를 아뢰었으나 허락되지 않았
다.
  조정에서는 퇴계가 서울에 와서 직접 벼슬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벼슬을 내려 주었던 것이
다. 그것이 이황에게는 마음의 부담이 되어 임금께 사양하는 글을 올렸던 것이다.
  10월에는 고봉 기대승에게  심성 , 즉 사람 마음의 본질에 대한 글을 쓴 편지를 보냈다.
  퇴계는 이처럼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때에도 학문에 대한 정열을 버리지 않았다.
  11월 9일, 퇴계는 큰집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걸린 감기가 낫지 않아 앓다가 영영 일어
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여전히 책을 보았으며 제자들과 토론하고 기대승에게 편지도 썼
다.
  12월 3일 퇴계는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돌려주라고 했다. 그는 가
르치는 제자들에게 책을 잃거나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이 무렵, 맏아들 준이 봉화 현감으로 있었는데 그의 상관인 감사에게 사직서를 내라고 일
렀다.
  그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만일 아들이 관직에 머물러 있다가 자신이 죽는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라의 일인 봉화 현감의 직책을 소홀히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일이고 봉화 현감의 일은 공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퇴계는 미리 아들에게 사직할 것을 분부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퇴계는 점점 병 증세가 나빠져 못 일어나게끔 되자 집안 사람들에게 무당굿
따위를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금하였다.
  이 무렵엔 병을 낫게 하고 집안의 우환을 없앤다고 해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일이 많
았던 것이다.
  12월 4일, 퇴계는 조카 영을 불러 유서를 받아 쓰게 했다.
   첫째, 나라에서 내리는 예장(장사를 지내기 위해 갖추어 주는 예물)을 사양할 것.
  둘째, 무덤에 비석을 쓰지 말 것. 다만 조그만 돌을 세우되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
공지묘 라고 쓰고, 뒷면에는 향리(태어난 곳), 세계(대대의 계통), 지행(행동), 출처(벼슬 경
력)를 간략하게 쓸 것.
  그리고 퇴계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시켜 이것을 쓰라고 하면, 고봉 기대승같이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반드시 사실보다 지나치게 칭찬하는 말로 과장해서 쓰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므로, 나는 내 손으로 적은 명문(비석의 글자)을
만들어 두었다. 그 글이 어딘가 있을 것이니 찾아내어 그대로 쓰도록 하여라.
  구경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 것이고 나의 행상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다르니 모
든 일을 반드시 예법으로 거행하도록 하거라.
  숨이 몹시 차서 헐떡대던 퇴계는 이 말을 마치자 잠시 쉬었다가 여러 문하생들을 만났다.
  집안 식구들은 말렸다.
   몸도 편치 않으신데…….
   아버님, 누워 계셔야 합니다.
  그러자 퇴계는 담담한 목소리로 식구들에게 말했다.
   죽음과 삶이 갈리는 이 때에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보지 않을 수 없지.
  퇴계는 문하생들을 대하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러나 엄숙한 몸가짐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과 더불어 학문을 연구하고 최선을 다 하였으나 어리석고 게을러 변변치 못한 일
뿐이었소. 그러니 내 평소에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날마다 여러분을 가르쳤으니 참으로 부
끄럽소.  하고 탄식했다.
  이것은 얼마나 겸손한 말인가. 더욱이 이 말은 죽음을 며칠 앞둔 사람이 한 말이었다.
  퇴계의 제자들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달까지도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병든 몸을 감
추고 자기들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이와 같이 퇴계의 몸이 크게 불편할 줄은 미처 몰랐다.
  또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퇴계의 곧은 기상과 선비 정신, 그리고 그 겸허함에
실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들 가운데는 유학으로 크게 성공한 제자들
도 있었고 훌륭한 정치가로 정치를 잘했던 제자들도 많이 나올 수 있었다.
  퇴계는 이미 자기가 죽을 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5일에 퇴계는 일어나자 자신이 들어갈 관을 짜라고 일렀다.
  이것은  아침에 길을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라는 공자의 말씀을 몸소 실행하는 것
과 같았다.
  7일이 되자 퇴계는 제자인 이덕흥을 불러 부탁했다.
   도산 서당의 책들을 그대가 관리하게.
  8일 아침, 퇴계는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화분에 옮겨 심은 매화에 물을 주도록 해라.
  매화를 잠시 바라보던 이황은 다시 방을 한번 둘러본 뒤 대야에 떠온 물에 손발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고는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이 날 저녁 여섯 시에 퇴계는 잠자듯 운명했다.
  생명의 불은 한 번 꺼지면 다시 켜지는 법이 없다. 그러나 퇴계는 생명보다 더 큰 것을
이 세상에 남겼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귀한 학문이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
상객들이 줄을 이었다.
  선조 임금은 며칠 뒤 이 소식을 듣자, 곧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이라는 최고의
영예로써 그를 대접했다.
  더욱이 친히 우승지까지 내려보내서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5년 뒤에는  문순 이라는 시
호(죽은 뒤 내려 주는 이름)를 내렸다.
  그리고 임금이 직접 쓴 글로  도산 서원 이라는 현판까지 보내 주었다.
  퇴계 이황은 이 세상을 영영 떠났지만, 그가 남긴 학문과 더불어 도산 서원은 조선 왕조
시대의 학자와 훌륭한 벼슬아치를 길러 낸 유명한 학당이 되었다.
  영조와 정조 임금 시대에는 임금의 명령으로 도산 서원의 그림을 그려 오도록 한 일이 있
었다.
  정조 16년(1792) 3월, 임금은 이만수를 도산 서원으로 보내어 친히 지은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한 뒤, 그 이튿날 서원에서 과거를 치르게 했다.
  이 때, 시험장에 들어온 지원생이 놀랍게도 7천여 명에 답안지가 3천6백여 장이었다고 하
니, 그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겠는가.
  이 모두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고인의 덕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몸소 가르친 문하생으로는 조원철을 비롯하여 유성룡·김성일·정구 등 수많은 유
학자와 정치가들이 나왔다.
  다시 정구의 문하에서 장현광·허목이 나왔고, 실학파의 중진인 이익은 허목의 영향을 받
아 퇴계의 학문에 대해 연구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퇴계의 문집을 읽고  도산사숙록 을 지었다.
  이렇듯 퇴계의 학문은 끊임없이 이어져 조선 말기에 와서도 이한주·곽종석 같은 유명한
유학자들이 나왔다.
  퇴계의 학문은 우리 나라에서만 후세까지 이어져 빛을 낸 것이 아니다. 그가 지은  주자서
절요 가 일본에 전해지자, 야마사키라는 유명한 학자는 이 책을 읽고 탄복한 나머지 퇴계의
학문을 연구했다.
  그러자 일본의 수많은 학자들이 야마사키의 뒤를 이어 앞을 다투며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
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학식의 깊이와 넓이가 중국의 학자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위대하
다는 것을 새삼 밝혀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마침내  이퇴계 서초 라는 열 권으로 된 연구 문집이 나오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살아 있던 일본의 역사학자 도쿠토미 소호의 아버지도 죽기 얼마 전, 그의
일기에 퇴계의 말을 기록하였다고 하며, 도쿠토미의 스승은 도쿠토미가 고향에 돌아갈 때
퇴계의  자성록  첫머리의 글을 인용하여 기념으로 써 준 일이 있다 한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임금의 스승이던 모토다는 퇴계의 학문을
임금에게 강의했으며, 일본의 교육 정신은 바로 퇴계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1926년 베이징 상덕 여자대학의 조전해가 퇴계의  성학 십도 를 나무판에 새겨
서 이것을 종이에 찍어내어 병풍으로 만들어 널리 팔았다고 한다.
  퇴계의 학문은 이와 같이 시대가 바뀔수록 그 위대함이 점점 더해 갔다. 그러나 그의 참
된 훌륭함은 그러한 저술을 통해 가르침을 주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맑고 어진 진리를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았으며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의 겸허한
인품이야말로 그의 학문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그는 일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의 학문에 잘못이 있음을 깨우쳤을 때에
는 바로잡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어질고 무던했던 인품을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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