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조조 (천하의 지혜를 모아라)
이재하
왜 지금 조조인가
머리말을 대신하여
1.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일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여
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의 평가 문제이다. 역사는 무엇보다도 역사적 행위들의 기록과
흔적이고, 그것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 속에서 언제나 변화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한 인간이나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만큼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 중의 하나가 조조다. 그는 지혜의 상
징인 제갈량이나, 그를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고 한량없이 어진 사람으로 통용되는
유비, 혹은 신의와 충절의 대명사인 관우와 달리, 간교함의 화신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조조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평가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이]가 동양에서 불멸
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사라지거나 다른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여전히 그
러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간 조조와 소설적 허구가 창조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조조는 상당히 다르다. 이 대목이 바로 필자가 지금 다시 조조를 거론하고자 하는 가장 커
다란 이유이다. 오늘의 역사는 소설 속의 조조가 아니라 역사 속의 조조의 모습을 정확히
밝히고 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필자는 한 인간으로서 조조를 정당
히 복권시키고 싶은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때는 1,400년 이후다. 실로 조조가 활약했떤 시대와는 적어도 1,100년이라는 역사의 거리가
존재한다. 이 장구한 역사의 틈 속에 조조에 대한 가혹한 왜곡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고 난 이후 생겨난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
가 있다. 중국 왕조 흥망의 역사는 두 가지 기본적인 틀을 지니고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
로, 아니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수도가 서쪽이나 북쪽에 위치하였을 때는 제
법 융성하였다가도, 이것이 동쪽이나 남쪽으로 옮기면 힘이 없는 왕조로 바뀌어 오래지 않
아 망하고 말았다. 서주와 동주, 서한과 동한이 그러하였으며, 또 남북조의 서진과 동진 및
북송과 남송이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어떠한 왕조라도 서북쪽에 자리잡은 이민족의 세력을
누르지 못하고 동남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망한다는 실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한족의 세
력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대로 조조를 높이 평가하다가도, 일단 동남쪽으로
밀려나고 말면 조조는 배척이나 타도의 대상으로 급변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삼국의 세
력 판도에서 중원 지역을 차지했던 조조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이처럼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던 조조는 급기야 촉한정통론의 관점에 서 있는 나관중의 소
설 [삼국지연의]가 등장함으로써 엉뚱한 방향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정사나 당대의 기록보
다 더욱 위력적인 흡인력을 지닌 것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통해 유비와 조조의 상대적
인 비교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처럼
폭발력을 지닌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없애도 이야기는 그런 대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만에
하나 조조를 빼버린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감안한다
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조조다. 허구인 소설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데는 그에 걸맞게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찾아 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소설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간 조조에게서 잘못된 것은 가차없이 비판
하되, 혹시 좋은 점이 있다면 만천하에 드러내고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2. [삼국지연의]속의 조조는 한마디로 악의 전형이어서 간사하고 악랄한 데다가 비정하
기까지 하여 전대 본받아서는 아니될 인물이다. 그리하여 소설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
같이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생각되게 만든다. 그러나 실존 인물 조조는 중국 한나라
말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군웅할거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
는 터전을 마련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경세제민의 정치가이자. 손무 이후 가장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 모
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가는 병법가이자 군사지휘관이었으며, 문학을 사랑하여 당대의
문학적 기운을 융성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또한 그 자신 스스로 빼어난 시인이
었다.
필자는 거대한 중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의 결
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의 씨앗을 고칠 뻔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있었
다. 나는 조조라는 한 역사적 인물에게서 그 계기를 발견한다. 조조의 매력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리잡고 있다. 조조는 어떠한 인간적인 매력이나 친화감도 없이 단
순히 뛰어난 용병술이나 매서운 법의 집행만으로 중원의 패자가 된 사람의 결코 아니다.
사실 전략이나 법으로만 천하를 호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조의 숨겨진 매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상상을 초월한 인간
경영이었다. 아울러 그것의 사상적 본질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였다. 조조는 자신의 뛰어
난 개인적 능력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주변의 무수한 인재들과 함께 중원을 제패했
다. 하지만 많은 인재를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유능
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면에서 조조는 하나의 커다란 그
릇이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번민과 고뇌와 욕심이 없을 수 없으련만, 자신을 제어
할 수 있는 심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비난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설혹 죽
이려고 했던 사람일지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인재로 등용할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등용했다. 또한 언제나 꾸준한 대화와 토론으로 커다란 동력이 되는 하나의 지점을 찾아
나갔고 그곳에 도달하면 즉각 대담한 실천을 옮겼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
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다른 누구보다도 조조의 휘하에 구름처럼 많
은 인재가 모여들었던 현상은 이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유비와 조조를 대비해볼 수 있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먼저 유비와 그의 장수 조운에 얽
힌 이야기다. 조운, 그러니깐 상산 조자룡은 유비 휘하의 가장 뛰어난 장수이다. 치열한
전투 중에 조자룡은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를 품에 안고 수십만 적진을 뚫고 나와 유비 앞
에 데려온다. 그야말로 주군의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은 초개와 같이 생각
한 것이다. 이에 유비는 부하 장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조자룡으로부터 건네
받은 자신의 친자식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린다. 인군의 전형이며, 참으로 눈물나도록
감동적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달리 본다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그처럼
소홀히 다루면서 만천하의 부모와 처자식은 얼마나 사랑으로 감쌀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조조와 고유에 얽힌 일화이다. 고유는 조조 휘하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수이거
나 책략가는 아니다. 다만 조조가 극도로 미워하는 적 고간의 조카다. 어떻게 하다 보니
고유가 자신의 휘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언제 그가 적과 내통할지 몰라 의심스럽게 만
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를 처벌하거나 몰아내기는 힘든 형편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실수할 수밖에 없는 직책을 맡긴다. 그러나 고유는 실수는 고사하고 누구
보다도 깔끔하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해낸다. 조조가 어느 날 밤 변장을 하고 여기저기 둘
러 다니다 보니 그 눈엣가시 같은 고유가 서류더미에 묻혀 일을 하다가 깜박 잠들어 있다.
조조는 소리나지 않게 가만히 털외투를 벗어 덮어주고 살며시 물러난다. 그 이후로 고유는
죽을 때까지 언제나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가린다. 그
러나 조조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 옳은 말이고,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자신의 털외투를 입
혀주기도 했던 고유가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귀엽기만 하여 그를 아끼고 사랑한다.
물론 고유는 조조 휘하의 즐비했던 모략가들이나 명장의 반열에 낄 수도 없는 인물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조조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조조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바탕으로 현실을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3. 조조는 위공이 되기에 앞서서 건안 15년(210)에 자신의 의중을 장문으로 밝힌 적이 있
었다. 그는 여기에서 자기가 죽거든 묘비에 이렇게 쓰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고 한나라 정서장군 주후의 묘"라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조조는 끝까지 한나라의 신하로 남기를 희망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사람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 조조가 누렸던 권위가 그렇거나와, 또 그가 죽은 뒤 아들 조비에 의해서 이루
어진 위왕조의 건립으로 진위가 무색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이 문제는 영원히 미
궁으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조조는 헌제를 허도를 맞아들인 건안 원년으로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기반을 다져
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이 중원의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아니면 전란으로 고생하는 만백
성을 위한 위정자의 의무였던 간에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삼각고리였다는 점이다. 먼저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는 군웅
할거로 사분오열된 중원을 하나로 통일해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백성들은 이리저리
끌려나가 숱한 싸움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중원통일은 우국지사의 입을 통하여 천만
번 외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밀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지도력과 용병술 및 정치적 기반이 총체적으로 통일되어 이루어지는 지극히 어려운 과업이
다. 물론 조조 개인의 정치적인 야심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숱한 싸움과 어려움을 헤쳐
나온 경험을 토대로 중원도 통일하고 백성도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조조 자
신은 이 중대한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반을 다져야만 했다. 또한 많은 인재를 모아야 하고, 좋은 정사를 펼쳐야 하며,
각지의 웅거세력을 복속시켜야만 했다. 실로 조조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사명감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그 결과 이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결과도 점점 불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인의 눈총은 따갑기만 하였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조조에게 언제나 따라 다니는 비판의 목소리는 이러한 것들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 속에서 이러한 조조의 실제적인 면모가 가감이나 과장 혹은 조금의 왜곡도
없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라도 마련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본다. 아울러 그
것은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는 작업이라도 생각한다. 지금의 역사
가 다시금 조조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조조는 한 개인적인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동양 사
회에서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실천적으로 결합시킨 최고의 실천가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
이다.
끝으로 지난 초여름 필자의 연구실로 느닷없이 찾아와 그동안 나 자신이 고민해온 조조에
대한 이러한 연구와 사색의 결과를 책으로 묶어 내게끔 제안하고 이끌어준 류종력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생각해보면 소설 속에서 왜곡된 조조를 역사 속에 존재한 진정한 조조로 찾아
내고 다시금 오늘의 조조로 되살리는 작업은 내 능력으로는 힘에 겨운 작업일 것이다. 주
변의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이 책의 결말마저 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울러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애써주신 바다출판사의 김인호 대표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무인년 추석을 앞두고 용연골 연구실에서, 이재하
서 장 : 조조를 위한 변명
한나라 말엽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 호걸들이 한꺼번에 군대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에서도 원소가 호시탐탐 천자의 자리를 넘보면 네 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의 강성함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위나라 태조 조조는 모략을 운용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그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채용하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겸비하였다. 조조는
사람들이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살펴 그들 각각에게 거기에 맞는 직책을 부여함으로써, 그
들이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랐으며, 지난날의 사사로운 원한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조정의 대
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건국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총명과 책략이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조야말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조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네 가지 이유 : 순욱
건안 4년(199)에 이르러서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유주마저 차지함으로써, 기존의 기
주, 청주, 병주 등과 아울러 네 지역을 완전히 그의 세력권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
럼 막강한 세력을 갖춘 원소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적수는 겨우 연주와 예주만을 차지
하고 있으면서도 천자를 등에 업고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던 조조뿐이었다. 따라서 조조와
원소의 생사를 건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상 이때 조조는 원소의 형세에 비해 훨씬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원
소와의 정면대결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곁의 최고 전술가들인 순욱과 곽가는 비
록 현실적인 국면은 조조에게 불리하지만 결국에는 원소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예로부터 커다란 과업을 이루고 못 이루고 하는 것의 이치는 이렇습니다. 실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비록 그의 세력이 약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지기 마련이며, 그렇지 않은 사
람은 그가 비록 강하더라도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의 존
망에서 익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공과 천하를 다룰 만한 사람은 원소뿐입니다.
원소의 인물됨은 겉으로는 너그러운 듯하지만 내심으로는 사람을 꺼려하여 일을 맡기고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명쾌하고 구애됨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쓰십니다. 이것은 바로 공이 판단력에서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원소는 머뭇머뭇 망설이며 결단성이 없어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큰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고 임기응변에 능합니다. 이것은 바로 공이 지혜에서 이기시는
것이지요.
한편 원소는 군대를 통솔함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명령의 계통이 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병사들이 비록 많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공께서는 법령
이 명확하고 상벌을 확실하게 행하시니, 병사들은 비록 많지 않으나 모두가 다투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웁니다. 이것은 바로 군사전략에서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원소는 대대로 명문이었던 가문에 의지하여 은연중에 지혜로움을 꾸미려 하
고 명예로움에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능력은 보잘것없으나 헛된 명성만 높은 사람들이 그
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들을 대우하며, 그들을 능
력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헛된 이름을 높이지 안습니다. 또한 공께서는 자신의 행동은 삼
가고 검소하면서도,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때에는 조금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므
로 천하의 충성스럽고 바르며 실속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의 부림을 받고자 하니, 이것
은 곧 덕으로 이기시는 것입니다.
무릇 공께서는 이 네 가지 장점을 지니시고, 천자를 보좌하여 순리에 따라 불의를 징벌하
고 계십니다. 하오니 감히 어느 누가 따르지 않을 것이며, 원소의 강성함쯤인들 무엇이 두
렵겠습니까?
건안 원년 조조는 가까스로 헌제를 허도로 맞아들여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원소의
진영에서도 헌제를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있었지만 오만했던 원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소는 힘없는 헌제를 모시느니, 아예 자신이 제왕의 자리에 오를 꿈을 키워 나가
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위세는 착각을 일으키기 좋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조조에게 선수를 빼앗겨 명분을 잃고 보니, 조조가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원
서는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와 가까운 견성으로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이러
한 요청을 무턱대고 받아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조조로서도 어떻게든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원소를 진정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조조는 헌제로 하여금 원소에게
태위와 대장군등 최고의 직위와 업후를 내리도록 조처하였지만, 한번 심사가 뒤틀린 원소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였다.
그런데 상황은 조조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조조는 동쪽으로 여포에게 곤욕을 치
렀고, 남쪽으로는 장수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원소는 곤경에 빠져들어가는 조조를 보며 쾌
재를 불렀다. 때마침 원소는 "불난집에 부채질" 이라도 하고 싶었던지 조조의 자존심을 짓
밟는 위로의 말을 담은 편지를 한 통 보내왔다.
편지를 받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조조의 거동은 평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조심스럽게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장수에게 패배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
시는 모양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조의 모습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종요는 순
욱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순욱이 대답했다.
- 잘 아시지 않소이까? 우리 공이 어디 그리도 아둔한 분입니까? 필시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저러지는 않을 거외다. 분명 말 못할 다른 일이 있겠지요.
이에 순욱은 조조를 만나 연유를 물었다. 그때서야 조조는 원소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내
보이며 한숨을 쉰다.
- 이제 저 원소의 불의를 징벌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힘이 부치니 어찌하면 좋
겠소?
조조의 심중을 익히 알고 있는 순욱은 이때 위와 같은 대책으로 조조의 의기를 북돋웠던
것이다.
양부란 사람도 순욱처럼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는 고향에서 주목의 심
부름으로 허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는 조조와 원소의 일전이 한발 한발 다가오던
시기였다. 허도를 다녀온 양부에게 여러 장수들이 물었다.
- 원소와 조조의 결전은 피할 수 없을 텐데, 당신이 보고 느낀 바로는 누가 이길 것 같소
이까?
- 원소는 너그럽지만 결단력이 없고, 책략은 좋아하지만 지혜를 적절히 활용할 줄 모릅니
다. 결단력이 없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지혜를 활용할 줄 모르면 일의 시기를 놓치게 되지
요. 지금은 원소가 비록 힘이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끝내 대업은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다릅니다. 그는 뛰어난 재주와 원대한 책략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를 맞추
어 결단을 내림에 머뭇거리지 않으며, 군법이 일사불란하고 병사도 정예들입니다. 또한 예
상 밖의 인물들을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맡기는데, 모두가 갖고 있는 역량을 다 발휘합니다.
그는 틀림없이 대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조조가 승리할 수 있는 열가지 이유 : 곽가
건안 초 조조가 아끼던 모사 희지재가 죽었다. 슬픔을 뒤로하고 조조는 인물들의 천거에
남다른 식견을 지닌 순욱과 의논하였다.
- 희지재를 대신할 인물이 어디 없겠소이까?
순욱은 기꺼이 곽가를 추천하였다. 당시 곽가의 나이 불과 20대 중반이었다. 조조는 곽
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기쁨에 넘쳤다.
- 그래, 내가 만일 대업을 이룬다면, 아마 이 사람 때문일 거야!
곽가도 조조를 만나본 뒤,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참으로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야.'
이 만남에서 곽가의 예리한 통찰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조는 곽가의 명쾌한 지적
으로 용기백배할 수 있었다.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 항우의 적수가 아니었던 점은 공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이옵니다.
그러나 고조께서는 오로지 지혜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록 강한 항우였건만 끝내는 사
로잡을 수 있었던 게지요. 제가 가만히 헤아려 보건대 원소에게는 질 수밖에 없는 열 가지
이유가 있고, 공에게는 이길 수밖에 없는 열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오니, 이제 비록 저
들의 병력이 강성하다고 하나 어찌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첫째, 원소는 번거로운 예법과 자질구레한 의식에 얽매이나 공께서는 일의 추이를 자연스
러움에 맡깁니다. 이것은 도에서 이기시는 것이옵니다.
둘째, 원소는 국법을 거슬러 움직이지만 공께서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천하를 거느리오니,
이는 의에서 이기심이옵니다.
셋째, 한 말 조정의 일들이 관대함에서 그릇되었사온데 원소 또한 관대함으로써만 일관하
기 때문에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매섭게 따지시니 위아래가 모두 법을
지킬 줄 압니다. 이는 다스림에서 이기시는 것이옵니다.
넷째, 원소란 인물은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으로는 꺼려 사람을 부리고도 그를 의심하며,
오로지 친척이나 자제들에게만 일을 맡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공께서는 겉으로는 헐렁해보
이나 속으로는 기미에 밝으시고, 한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아니하며 오로지 재능에 따를 뿐
친소를 구분하지 않사옵니다. 이는 헤아림에서 이기심이지요.
다섯째, 원소는 꾀함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여 일이 터지고 난 뒤에 실수가 허다합니
다. 그러나 공께서는 계책을 세우시면 곧장 실행하여 그 변화에 대응함이 무궁하십니다.
이는 지혜에서 승리하는 것이옵니다.
여섯째, 원소는 누대에 걸친 가문의 명예를 바탕으로 고상한 의논이나 겸양으로 명예를
거두려 합니다. 따라서 거기에 모여드는 인사들이란 거의 말주변이 뛰어나거나 겉모습이
그럴싸한 자들뿐입니다. 하지만 공께서는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정성으로 행동하며 허황
된 미명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검박함으로써 솔선하며 공이 있는 자에겐 아낌이 없으
십니다. 따라서 충직스럽고 바르며 원대한 식견을 가진 건실한 인사들이 다투어 부림 받고
자 하옵니다. 이것은 덕에서 이기심이옵니다.
일곱째, 원소는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얼굴에 안쓰러운 모습을 띠다가도, 눈
에 보이지 않으면 씻은 듯이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야말로 소위 어진 아녀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공께서는 눈앞의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는 때론 거들떠보지도 않으시
다가 심각한 사건에 이르러서는 마치 온 천하와 부딪힌 듯하십니다. 그리하여 입은 은혜는
거의 지나친 뒤에라야 느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설령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걱정하심이 주도면밀하게 보살피지 않은 것이 없사옵니다. 이것은 어짊에서 이기심이
옵니다.
여덟째, 원소는 대신들이 서로 다투는 마당에 헐뜯는 말을 들으면 흔들리지만, 공께서는
도리로써 아랫사람들을 다스려 참소에 젖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밝음에서 이기시는 것이
옵니다.
아홉째, 원소는 시비곡직을 가릴 줄 모르지만 공께서는 옳으면 예로서 권면하고 그러면
법으로 바로잡으시니, 이는 매사의 처리를 분명하게 하는 것에서 이기시는 것이옵니다.
열째, 원소는 허장성세만 좋아하지 병법의 요체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무찔러 그 병법을 활용함이 귀신과 같사옵니다. 그리하여 아군은 공을
믿고 적군은 공을 두려워하지요. 이것은 무에서 이기심이옵니다.
곽가가 조조에게 오기 전 원소가 다스리던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곽가는 원소를
만난 적이 있었다. 원소가 곽가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안달이었기 때문이다. 원소를
만나고 나온 곽가는 원소의 모신인 신평과 곽도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 무릇 지혜로운 자는 자기가 모실 사람을 정확하게 살필 줄 알아야만 할 것이요. 그러
면 모든 일에 틀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명도 세울 수 있게 되지요. 지금 내가 본
원소는 인물이 아니외다. 그는 단지 주공이 현인들을 대우했던 모습을 본뜨려고 할 따름이
지, 정작 인재를 부릴 줄은 모르는 것 같소. 그는 생각은 많지만 묶을 줄 모르며, 꾀는 좋
아하지만 결단력이 없군요! 그렇거늘 같이 천하를 구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패업을 이룩하기란 아예 바랄 수도 없겠지요.
이렇게 말한 곽가는 원소에게 다시는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순욱의 추천으
로 조조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곽가를 만난 조조가 물었다.
- 보다시피 저 원소는 기주의 무리를 거느리고, 또 청주와 병주마저 그를 따르고 있소이
다. 넓은 땅과 막강한 병력을 믿고 불손하기 짝이 없구료! 나는 그를 응징하고 싶지만, 힘
이 모자라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 젊디젊은 곽가는 나이답지 않은 당찬 어조로, 위와 같이 조조의 아픈 곳을 시원스럽
게 긁어주었던 것이다. 곽가의 실로 청산유수와 같은 말을 들은 조조는 가슴이 설레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 그대의 말이 지나친 것 같구려!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러시오?
여기에서 곽가는 맨 처음으로 조조를 위한 계책을 건의하였다.
- 지금 원소는 북쪽으로 유주의 공손찬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제 공께서는 그의 원정
을 틈타 동쪽으로 여포를 취하십시오. 먼저 여포를 꺾어놓아야만 합니다. 그냥 놔두었다가
만에 하나 원소가 치고 내려온다면 여포 또한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심히 두려운 결
과지요.
- 그럼 그럼, 그래야만 하겠지요.
조조는 곽가의 계책대로 원소의 틈을 이용하여 여포를 무찌를 수 있었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으신 나의 아버지 : 조비
조조는 정치적 수완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과 전술에도 뛰어나지만, 그는 문학가
로서 중국 문학사에도 획기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게다가 조조는 서예와 바둑과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고, 방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독서광
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조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 문헌 가운데 아들인 조비의 [전론
자서]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친께서 평소 시서와 문적을 좋아하셨지요. 하여 비록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가시면
서도 손에서 책을 놓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릴 때마
다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였답니다.
- 사람들이 젊어서는 학문을 즐겨하며 잊지 않다가도, 나이가 들면 곧잘 잊어버리더구나.
아마 나이가 들어서도 부지런히 책을 보는 사람은 오직 나와 원백업뿐인 듯싶다.
물론 이 글은 조비가 아들의 입장에서 부친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쓴 것이며, 따라서
얼마간 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 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말
을 솔직하게 썼을 것이다. 더구나 이 글에 들어 있는 [전론]은 당시의 문인과 문학을 상당
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조조가 내렸던 명령이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연히 느꼈을 것이다. 그가 구사
한 많은 고사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논어] 와 [사기] 등은 아
마 줄줄 외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수십 권에 달하는 병서를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평소 책에 기울였던 열정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결과다.
조조의 문학적인 기질과 정열을 말할 때, 곧잘 들먹이는 성어가 있다. 그것은 '등고필부'
와 '횡삭부시' 다. 글자 그대로 '등고필부' 란 높은 산에 올라 멋진 경치를 대하면 반드시
글을 짓는다는 뜻이며, '횡삭부시'는 싸우다가도 짬이 나면 창을 가로놓고 시를 읊는다는 의
미다. 현재 전하는 그의 20여 편의 시도 이렇게 지어진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원백업은 원유란 사람으로 원소의 사촌형이었다. 그는 일찍이 장안령을 지냈으며, 동탁
토벌의 군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당신에 박학다식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일찍이 하간
의 장초란 사람이 그를 태위 주준에게 추천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 원유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의젓함과 시대의 기둥이 될 만한 도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충성과 진실됨 및 어질고 곧음은 참으로 하늘로부터 타고난 듯합니다. 이제 모
든 고전을 섭렵하고 제자백가의 모든 저서에 밝으며, 산에 올라서는 시를 읊고 모든 사물을
보고서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을 지금 세상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이 사람과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스스로 이러한 원유와 자신을 묶어 아들을 타이르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나라 때 장화가 쓴 [박물지]란 책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한나라 때 안평의 최원과 그의 아들 식, 그리고 홍농의 장지와 그의 동생인 창이 모두
초서에 뛰어났으며, 조조는 그 다음이었다. 환담과 채옹은 음악에 뛰어났고, 풍익산자도와
왕구진 및 곽개 등은 바둑에 뛰어났다. 조조는 이런 방면에서도 이들과 자웅을 겨룰 정도
였다. 조조는 또한 양생법을 좋아하고 방약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어 방술에 능한 사람들을
불러들이곤 하였다."
양생법이나 방약에 대한 관심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치더라도, 초서
와 음악 그리고 바둑 같은 것들에서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오랜 기간 노력을 The아야만 상
당한 고수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이처럼 다방면에 걸친 조조의 능력은 그
가 소년시절을 그저 사냥이나 방탕으로만 보내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또한 조조는 23세
에 돈구령으로 나갔다가 뒤에 다시 의랑으로 불림을 받는데, 그가 의랑으로 임명된 이유는
바로 '정통고학' 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의 조화 : 왕침
[위서]는 위나라 사관이었던 왕침이 엮은 책이다. 진수가 [삼국지]를 집필하면서 조조를
비롯한 위나라의 역사 부분은 이 책을 저본으로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후세
에 완본이 전해지지 않고, 배송지의 주에 나타날 뿐이다. 만일 이 책이 완전하게 전해졌더
라면 더욱 생생한 인물들의 군상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태조(조조)는 천하를 다스리고 수많은 반역의 무리를 제거했다. 그가 군대를 통솔하고 싸
움을 수행함에는 대체적으로 손자와 오기의 병법을 따랐으나, 경우에 따라서 그때마다 기묘
한 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적을 속여 승리를 거두는 데 있어서 그 변화가 마치 귀신과
도 같았다. 그는 몸소 10여만 자의 병서를 지었으며,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 나갈 때는 자신
이 지은 병서를 활용하도록 하였다.
태조는 싸움에 임해서 손동작으로 지휘를 하였는데, 그 명령이 신속히 전달되어 집행되어
졌으며, 혹시 그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하는 자는 모두 패하였다. 태조는 적진에서 마
주해서도 마치 싸우고 싶지 않은 듯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한번 기회가 닥쳐 승세를 탈
때는 거센 물결처럼 몰아붙였다. 그러므로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겼고 요행으로 승리를 훔치
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인물됨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거짓으로 속일
수가 없었다. 그는 우금과 악진을 졸개들 사이에서 발탁하고 장요와 서황을 포로들 가운데
서 뽑아 썼건만, 이들 모두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움으로써 명장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이밖에도 미천한 곳에서 발탁되어 주목이나 태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
도로 많다. 태조는 이러한 능력으로 건국의 대업을 이룩하고 문무를 아울러 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군대를 거느리기 30여 년 동안 손에서 책을 놓아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낮에는 병법과 책략을 강론하고 밤에는 경전을 강구하였다. 또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반드시 시를 읊었고, 새로운 시가 지어질 때마다 악장이 만들어지곤 하였다.
재주와 힘이 절륜하여 활로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도 하였고, 몸소 맹수를 사로잡기도 하
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어느 날은 남피라는 곳에서 하루에 63마리의 꿩을 쏘아 잡은 적도
있었다. 또한 궁실을 지을 때면 곧잘 기구를 고안하곤 하였는데, 그것들이 일에 꼭 들어맞
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절약과 검소가 몸에 배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후궁들에게도 비
단옷이나 수를 놓은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를 곁에서 모시는 시종들마저도 두 가
지 색을 수놓은 신발은 신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휘장이나 병풍이 헤어지면 기
우거나 고쳐서 사용하였고, 이불도 실용성을 우선하여 장식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적군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을 때 혹시 진귀한 물건이 있으면,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말았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되 천금을 아끼지 않았으
나, 공이 없는데도 상을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털끝만큼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방
에서 왕에게 받쳐 오는 공물이 있으면 아랫사람들과 다 같이 누렸다. 태조는 줄곧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옛날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번거롭기만 하고 도움될 것
도 없으며, 또 풍속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죽을 때 입을 옷을
미리 만들었는데, 그것은 겨우 상자 4개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관중의 [삼국지]와 달리 이 글은 위나라 사관의 기록이므로 과분한
찬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실제적인 모습을
엿볼 수는 있다.
시대를 초월한 영웅 : 진수
건안 25년(220) 정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숨을 거두니, 그때 그의 나이 예순여섯이었다.
시호를 '무왕'이라고 하였고, 2월 21일 고릉에 장사지냈다. 조조는 결코 황제가 된 적은 없
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선양을 받아 위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황초
원년(220)조조를 '무황제'로 추존하였으며, 다시 황초 4년에는 그의 묘호를 '태조'로 정했다.
한나라 말엽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 호걸들이 한꺼번에 군대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에서도 원소는 호시탐탐 천자의 자리를 넘보며 네 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의 강성함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위나라 태조 조조는 모략을 운용하여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그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채용하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겸비하였다. 조조는
사람들이 타고난 재능을 살펴 직책을 부여함으로써 각자의 능력이 발휘되도록 하였다. 그
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치밀한 계획을 따랐으며, 지난날의 사사로운 원한은 염두에 두
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가 마침내 조정의 대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건국의 대업을 이룰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총명과 책략이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조야 말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수는 [삼국지]를 집필하면서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종합적인 평을 실었다. [무제기], 곧
조조의 전기를 65권으로 엮어진 [삼국지]의 첫째 권에 배치한 진수는, 어떠한 부분보다도
많은 정력을 모아 집필하였다. 그 분량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
에 있어서도 [삼국지]의 전체를 꿰뚫고 있어 마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이처럼
그가 조조 부분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호감의 반영이었다. 따라서
끝마무리로 이어지는 품평 또한 지극한 추앙의 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실로 "비범한 인물
이었으며, 시대를 초월한 영걸"이란 말을 그렇게 쉽사리 내릴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진
수란 사람이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엄연한 사학가였고, 그것도 역
사서의 모범으로 일컬어지는 정사 [삼국지]의 저자가 아닌가?
진수의 [삼국지]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및 범엽의 [후한서]와 더불어 '사사'
로 일컬어지는 역사서로서의 명작이다. 이 [삼국지]는 [사기]와 [한서]를 계승하여 이루어
졌으며, 완성된 것도 [후한서]보다 130년 정도나 앞선다. 특히 이 [삼국지]는 평이하고 간
결한 문체로 이름이 높다. 진수가 [삼국지]를 완성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죽은 해는 진나라 혜제 원강 7년(279)이었다. 따라서 조조가 죽은 지 불과 50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으니, 어느 정도 정확한 기록이라고 믿어도 될 것이다.
제 1 부 : 천하의 지혜를 모아라
원소와 조조가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다. 하루는 원소가 조조에게 물었다.
- 만일 우리의 기병이 실패한다면, 그때 근거지로 삼을 만한 곳은 어디겠소?
그러자 조조가 원소에게 되물었다.
-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남쪽으로는 황하를 방패삼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를 울타리로 하여, 북방 융적의 무리를
아우르겠소. 그리하여 남쪽을 향하여 천하의 패권을 다툰다면 아마 성공하지 않겠소이까?
원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조가 말했다.
- 나는 천하의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들에 의지하여 도리로써 그들을 이끈다면, 어디인들
이루지 못함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삼국지 위서] 중에서
인재를 모으는 것이 천하를 얻는 지름길이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조조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뛰어난 인재를
모으는 일이었다. 후한 말 군웅들이 각축하는 마당에서 훌륭한 인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
이는 것이야말로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이 문제의 해결에서 어느 누구
보다도 좋은 결과를 얻었던 인물이다. 조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참신한 인재등용책을 밝
혔다.
- 오직 재능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
당시로서는 실로 파격적이면서도 대담한 구호였다. 이렇듯 능력을 위주로 한 조조의 인
재등용 방식은 전통을 고수하는 다른 군주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군웅호걸들이 천
하쟁패를 다투던 당대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앞날을 내다보면 현실을 정확히 꿰뚫는 지혜로
운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창업이나 중흥을 이룩한 군주들은 하나같이 현인군자의 도움을 받아 그들과 더
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렸다.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그들을 얻
었던 뛰어난 인재들은 더러는 한 고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인물들이었으니, 어찌
요행으로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하랴? 이것이 바로 정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인재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음이리라.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 참으로 뛰어난 인재를 구하는 것보다 시급
한 일은 없다. 공자께서도 "맹공작은 조나 위의 가신으로서는 그 능력이 충분하지만, 등이
나 설의 대부는 될 수 없다." 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그 인물됨이 반드시 청렴한
사람이어야만 등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제나라 환공이 어떻게 춘추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
었겠는가? 오늘날에도 세간에 강태공 여상처럼 속으로는 뛰어난 재주를 품었으면서도, 겉
으로는 잠방이를 걸치고 위수가에서 낚싯대나 드리우고 있는 그런 사람은 없지는 않을 것이
다. 또한 진평처럼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은 오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위무지와 같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여러분은 나를 도와 철저하고도 세밀하게 살펴서 재능은 있으나 아직 초야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발굴해주기 바란다. 오직 재능이 있는 사람을 추천하라. 나는 그들을 중용하겠노
라.
조조는 건안 15년, 그러니까 210년에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전선에 휘말려 처
절한 패배를 맛본 지 일년 남짓되는 봄에 이 명령을 내렸다. 사실 조조는 나름대로 많은
인재를 갖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다가 큰코다친 것이었다. 강동의 손권쯤이야 쉽게 격파 할
수 있다고 얕잡아 보았던 것이었다. 그때까지 원소를 격파하고 오환을 정벌하는 등 숱한
싸움에서 악조건을 무릅쓰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순욱. 순유. 곽가. 정욱 등
과 같은 뛰어난 인재들의 지혜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적벽전투는
의기양양하게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조조는 이 싸움에서
새삼스럽게 주유처럼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장수와 제갈량처럼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
하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인물이 천하
를 얻는 데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와 용기, 게다가 훌륭한 인품까지
두루 갖춘 인물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을 어디 쉽게 찾을 수
있는가? 그럴 바에야 비록 인품이야 흠이 있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다면 과감하게 등
용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맹공작은 춘추시대 노나라의 청렴하기로 소문난 대부였는데, 재능은 별로 없었던 사람이
다. 따라서 비록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상경에 불과한 조씨나 위씨의 집안에서 비교적 일
이 간단한 가신의 임무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이나 설처럼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임무가 막중하고 일이 번거로운 국정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을 수는 없었던 것이
다.
관중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는 젊은 시절 한때는 의리 없고 비겁하여 무능력한 인물이
었다. 포숙과 같이 장사를 하면서 이익금은 저 혼자 차지하다시피 하였으며, 싸움터에 나가
는 족족 도망치기 바빴고, 관리가 되어서는 업무태만으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찍이 제나라의 공자 규를 섬겨 훗날 제환공이된 공자 소백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기
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마지막에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달성한 것이다.
또한 서한의 개국공신 진평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인물이었다. 형수와 정을 통하는 천하
의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고, 뇌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위무지의 추천으로 한고조 유방의
장수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조조는 주문왕이 강태공을 등용했듯이, 천하의 인
재를 빠짐없이 추천하라고 선포한 것이다.
옥에 티가 좀 묻은들 옥이 아니랴
조조는 언제나 이상을 추구했지만 본질적으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다. 고루한 과거의 이
습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인재를 등용함에서
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통적 관념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현실에 맞게 적재적소에 과감하게 인재
를 등용했다. 어지러운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품행의 잘못이나 인격
적 결함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진취적인 재능이 있기만 하다면 등용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무릇 품행이 바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요,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품행이 바른 것도 아니다. 어찌 진평을 품행이 독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
며, 소진을 신의가 두터운 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평은 한나라의 건국을 도왔
고 소진은 힘없는 연나라를 건졌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말한다면 결점이 있다 한들
어찌 버려둘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이러한 도리를 익히 살펴 묻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할 것이며, 관에서도 일을 소홀히 함이 없도록 하라.
이 명령이 내려진 건안 19년에 조조는 이미 위공으로 책봉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
에서 한 발 나아가 실질적으로 위나라의 패자로서 국가를 경영하고 있었던 때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수도를 건설하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더욱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비천한 신분이나 사소한 인격적 결함에 구애받지 않고 진취적인 능력만 있다면 등용하겠
다는 방침은, 중국의 오랜 문관제도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조조의 이러
한 방침은 전통적인 습관이나 관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당시 후한의 관리선발
제도는 적어도 덕행을 갖춘 사람이어야만 벼슬길에 추천될 수 있다는 원칙이 일관되게 지켜
졌기 때문이다. 사실 조조 자신도 '효렴'에 추천되어 관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시대에 천하를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실제적인 능력을 중시한
인재의 등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조의 정치적 방침은 헌제를 받들어 나라를 바로잡겠다
는 생각과는 서로 맞지 않기도 했다. 이것은 바로 조조가 한왕조에 대한 충성을 표방하며
유가를 따르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것을 무시해버리는 측면이 상존했
기 때문이다.
결국 조조가 중시했던 인재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
면 그들의 덕행이나 학문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다. 그는 고결한 인품이나 순수한 학문
을 현실적인 정치와 분리시켜서 생각했던 것이다. 일찍이 숙순통이 일컬었던 바 "선비란
진취에는 함께 할 수 없고 수성에만 함께 할 수 있다" 와 같은 맥락이었다.
정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조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전군교위를 맡고 있었는데, 조
조는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한편 이러한 정비에게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었는데, 바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잡음이 많이 생길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때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곤 하였다. 엄격한 법집행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는 조조의 군율로 보아서는 파격적인 경우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욱 흐르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는 말처럼 정비는 정말로 소도둑
이 되고 말았다. 그가 조조를 수행하여 손권을 공격하러 갓을 때의 일이다. 정비는 자기집
소의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보고는 슬그머니 관가의 소와 바꿔치기 해버린다. 이 사건은 즉
각 조조에게 보고된다. 이번에는 꼼짝없이 옥에 갇힌 몸이 되었고, 맡았던 관직을 상징하는
인수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하루는 우연히 조조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시치미
를 뚝 떼고 조조가 묻는다.
- 어이 정비, 그동안 별고 없겠지? 아니, 그런데 자네, 인수는 어디에다 두고 맨몸인가?
조조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여긴 정비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 떡 바꿔 먹었지요.
그러자 조조는 너털웃음을 짓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이야기하였다.
- 오래전부터 동조의 모개가 말하곤 했네. 정비를 엄하게 다스리라고 말일세. 그렇지만
나는 정비를 항상 용서해주라고 하였다네. 나 또한 정비가 욕심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바
는 아니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나에게 있어서 정비는 무엇인 줄 아는가? 그는
마치 쥐는 무척 잘 잡지만 틈만 나면 음식을 훔쳐먹는 개나 마찬가질세. 음식을 훔쳐먹는
것이 밉상이긴 하지만, 그리 큰 손해는 아니거든. 게다가 쥐를 다 잡았으니 우리 집 창고야
별 탈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 조조는 그를 복직시키고 예전처럼 대우해주었다.
품행에만 매일 수는 없지
조조가 품고 있던 한결같은 이상은 천하의 통일과 패업의 달성이었다. 따라서 인재등용
의 표준은 강태공이나 진평. 소진 등과 같이 책략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작은 시냇물은 조그만 흙탕에도 금방 더러워져 본래의 빛깔을 잃어버리지만, 커다란 강물
은 사소한 잡동사니가 섞인다고 해도 제빛깔을 잃지 않고 흘러간다. 가을철 들판을 황금빛
으로 물들이는 벼들도 오줌과 똥과 같은 지저분한 것들과의 조화 속에서 풍성한 수확이 보
장되는 법이다. 새로운 도전과 창조를 위해서는 규정된 틀이 아니라 거침없는 변화와 파격
이 필요한 것이다.
옛날 이윤과 부열은 천민 출신이었고 관중은 환공의 적이었지만 이들을 등용하여 나라를
일으켰다. 소하와 조참은 조그마한 고을의 아전에 불과했고 한신과 진평은 오명과 부끄러
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마침내는 왕업을 성취하도록 도움으로써 천주의 이름을 드날렸다.
한편 오기는 탐욕스런 장수로 아내를 죽여 믿음을 구했고 돈을 뿌려서 벼슬을 구하였는가
하면,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가지 않았던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위나라에 머물면 진
나라가 감히 동쪽을 넘보지 못했고, 초나라에 머물면 삼진(한. 위. 조)이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했다.
이제 천하에 지극한 덕을 지니고서도 초야에 묻혀 있거나, 또는 과단성 있고 용맹하여 적
을 마주해 힘써 싸울 수 있는 그런 인물을 구할 수 없을까? 만일 학문아 얕은 아전이라고
하더라도 뛰어난 재주와 기이한 자질을 갖춰 장수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 오명과
수치를 지니고 있거나 혹은 어질지 못하고 불효하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운
용하는 전략과 전술에 능통하다면 그대들은 각기 아는 바대로 천거하여 버려지는 자가 없도
록 하라.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노예 출신이었던 이윤을 과감하게 재상으로 등용하여 하나라의 걸
왕을 무찌르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한편 은나라의 왕 무정은 성을 쌓는 노무자 가운데
에서 부열이라는 사람을 등용하여 나라의 안정을 튼튼하게 다졌다. 이처럼 역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꼭 명망 있는 가문의 출신이거나 인품이 고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관중이나 진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신이나 오기 및 소하. 조참 등
이 모두 그러했다.
한신은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는 먼저 다다익선이란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한신이 한나
라의 고조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역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조는 10만 정도의 병사
를 지휘할 수 있는 그릇이지만, 자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젊을 적에 허우대는 멀쩡하니 컸지만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해 빨래하는 아낙이 던
져주는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곤 했다. 또 그는 고향 회음에서 무뢰배의 가랑이 밑이나 기
어다니는 겁쟁이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고조 유방의 장수가 되어 항우를
꺾는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오기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그도 고국인 위나라에서는 한낱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그가 노나라의 임금을 섬기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자 아내마저 가차없이 죽였으며, 나아가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코빼기조차
내밀지 않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조는 지금까지의 역사로 볼 때 왕업과 제왕의 패업을 이룩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죄인이나 비천한 사람들도 과감하게 등용한 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실천
에 옮긴 것이다. 따라서 조조는 인재를 구하는 과정에서 오직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움
직이는 지혜와 용맹이 있는가를 따졌을 뿐 그들의 사소한 오명이나 수치스런 행동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또한 그들의 부덕이나 불효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한
가지의 수완이 있으면 그 한 가지에 해당하는 임무를 맡기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조조의 이러한 방침은 중국역사상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실현되지 않은 창조적이고 독특
한 정책이었다. 여기에서 현실을 대하는 그의 철저한 리얼리스트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소모적인 험담은 이제 그만
조조는 냉정하고 가차없으며 혹독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또한 호방하고 담대
한 포용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특히나 애정이 많이 기울
였다.
조조의 휘하에 서선과 진교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틈
만 나면 서로 다투었다. 군율을 위하여 과감하게 내치자니 인물이 아깝고, 그대로 두자니
여론이 걱정되었다. 국가의 중책을 맡아 환란을 극복해야 할 처지의 조조로서는 이들의 지
혜를 활용해야만 했다. 다름의 글은 서선이 진교의 과거사를 문제삼아 시비를 거는 데 대
해 조조가 중재를 하며 내리는 명령이다.
천하가 어지러워진 이후로 풍속과 교화가 무너졌으니, 비방하는 말만 가지고서 상을 주거
나 벌을 내릴 수는 없으리라. 그러하니 건안 5년(200) 이전의 일은 일체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 만일 이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죄로
벌하겠노라.
서선과 진교는 고향도 같고 지나온 경력도 거의 엇비슷하다. 어찌보면 서로가 친할 수
있는 그런 처지였건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광릉 출신으로 한결같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후한 말의 어지러움을 피하여 강동 지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손책이 이들을 욕심냈다. 그러자 이들은 강동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군이란 사람의 추천으로 조조의 휘하에 들어와 신임을 얻게 된다.
먼저 서선에 대한 조조의 신임은 어떠하였는가? 조조는 서선을 자신의 비서관 격인 사공
연속으로 삼고 제군태수 등의 직책을 부여했다. 오래지 않아서 마초가 반기를 들자, 조조는
수춘을 거쳐 마초 정벌에 나섰다. 이때 조조는 서선 등 관속들에게 당부하였다.
- 이제 멀리 마초를 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곳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마
음이 놓이지 않네. 그러나 그대들이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안심이 되네. 부디 내가 없는 동
안 잘 해주길 바라네.
이렇게 말한 조조는 서선을 좌호군으로 삼고, 뒷일을 부탁한 뒤 떠났다. 물론 서선은 조
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원정에서 돌아온 조조는 그를 조정 내외의 관원을 임명하
고 파면하는 일을 담당하는 승상동조연으로 삼고 위군태수를 제수했다.
진교는 논리가 정연하고 신의가 두터웠던 인물로, 그에 대한 조조의 애착은 매우 깊었다.
그와 조조가 처음 만난 것은 진군의 부탁을 받고 허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당신 진군이 태
수로 잇는 광릉지방에 손권이 쳐들어왔다.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가자 진군은 진교를 조조
에게 보내서 구원을 요청했다. 진교는 조조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아주 요긴한 곳입니다. 이제 당신의 구원을 받게 된다면 좋
은 울타리가 되겠지요. 그리하여 동오의 허튼 수작을 좌절시킴으로써 서주 방면을 영원히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뿐입니까? 그대의 무공과 전략이 멀리까지 떨치게 되며, 어질다는
소문이 자자해질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직 당신을 따르지 않았던 지역도 저절로 따
라오게 되겠지요. 거기에다가 덕을 높이시고 위엄만 기르신다면, 그야말로 천하의 패권을
이루시리라 생각합니다.
조조는 이러한 진교를 기특하게 여겨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리하여 되돌
아가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진교는 굳이 사양하였다. 이때 진교가 한 말은 조조에게 더
욱 강한 여운을 남겼다.
- 우리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지라 그 위급함을 알리려고 제가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제가 비록 신포서처럼 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감히 홍연의 의리마저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포서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로 오자서란 사람과 친구였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왕에게 억울하게 살해되자, 오자서는 초나라를 떠나며 신포서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
다.
- 나는 기필코 초나라에 복수할걸세.
- 자네는 복수를 하게나. 하지만 나 또한 반드시 우리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
네.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무찌르고 부형의 원한
을 설욕하였다. 이때 신포서는 진나라로 달려가 7일 밤낮을 울며 애걸한 끝에 마침내 구원
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다시 섰으나, 신포서는 초나라에서 내리는 상을
마다하고 숨어버렸다.
홍연이란 인물은 제환공 시절 위나라의 신하였다. 제환공이 위나라와 혼약을 맺고자 했
는데, 위나라는 환공의 요구를 무시하고 허나라와 사돈을 맺은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
고 난 뒤 오래지 않아서 북쪽 오랑캐가 위나라로 쳐들어왔다. 다급한 위나라는 제환공의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혼약이 깨진 앙금으로 환공은 위나라를 돕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나
라는 망하고 임금은 죽어 오랑캐의 먹이가 되었는데, 살이 다 뜯겨 나가고 간만 남았다고
한다. 이처럼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홍연이 돌아왔다. 홍연
은 간을 앞에 두고 복명을 하면서 말했다.
- 임금은 속이 되고 나는 겉이 되리라.
그러고는 자신의 배를 갈라 그 간을 집어넣고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제환공 또한 느끼
는 바가 있어 이렇게 탄식하였다.
- 위나라 왕은 저런 신하가 있는데도 망하였거늘, 나에게는 이런 신하가 없으니 망할 날
도 멀지 않았구나!
이러한 인물들은 거론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진교의 위인됨에 호의를 가진 조조가 곧
바로 구원병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결국 진교는 조조의 막하에 들어와 가까운 위치에서 보필하는 직책을 맡아 그 능력을 인
정받고 있었는데, 서선이 그의 과거사를 문제삼곤 하였다. 진교의 과거사란 같은 성씨와 결
혼하였던 것을 말한다. [위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진교는 본래 유씨였는데, 외가에 양자
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의 일가인 유씨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조조는 이상과 같은 명령을 내려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란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처럼 과거의 사소한 과오를 묻어버리고 새로 출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전란이 끊
이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조가 기
주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난 뒤 내렸던 "원소 일가와 어울려 악행을 저질렀던 모든 사람
들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 라는 명령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문무를 굳이 따져야 하나
조조는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찾아내서 등용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검증된 부하들 가운데에서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되면 파격적인 인사조치를 취하기도 하였
다. 그래서 그는 비록 깊은 학문과는 거리가 먼 무사라 할지라도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하고 중책을 맡기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조조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우려하는 사람 또
한 많았다. 건안 8년(203)에 조조는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목
소리를 높였다.
국정을 논의하는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군리는 비록 그가 능
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덕행이 군국의 관리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그러나 이러
한 생각은 내가 보기에, 이른바 "정도에는 같이 할 수 있지만, 변화에는 같이 할 수 없다."
는 것이 아닌가 한다. 관중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능력
을 보상받게 해주면 백성들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투사로 하여금 그 공을 보상받게 해주면
병졸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이 두 가지가 나라에서 이루어지면 천하가 안정된다." 고.
나는 무능한 사람과 싸움에 용감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녹과 상을 주고서도, 공을 세우고
나라를 일으켰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훌륭한 임금은
공이 없는 신하에게 벼슬을 주지 아니하며, 싸우지 아니한 군인에게는 상을 주지 않는 법이
다. 나라가 안정이 되었을 때에는 덕행을 높이 사야겠지만, 어지러울 때에는 공과 능력을
중시하여야만 한다. 그래도 이 마당에 덕행만을 중시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
은 마치 대롱구멍으로 호랑이를 보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건안 원년을 기점으로 이미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를 호령' 하는 위치에 선 조조는, 이
때쯤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 따라서 그만큼 새로 점령한 지역도 늘어났고,
아울러 점령지를 다스릴 지방관도 필요하게 되었다. 조조는 지방관으로 문관 출신들보다는
오히려 무인이나 군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조의 이러한 인사방식은 유가만이 아니라 법가나 병가를 숭상하는 그의 세계관에서 우
러나온 자연스런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현실에 맞는 현실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새
롭게 점령한 지역은 아무래도 적의 출몰도 잦으려니와 민심도 안정되지 않은 까닭에 반란이
일어나기 쉬웠다. 따라서 출몰하는 적을 공격하거나 반란이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군대
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자들이 적격이었다.
또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장군의 사기도 고려해야만 한다.
사실 싸움에 임하는 무장들 가운데에는 백전노장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경험이 많아 전
투에 능숙하지만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실전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
렇다면 이 사람들에게도 다른 길을 열어줘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내린 조조의
명령은 무장들의 사기진작을 넘어서서 그들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의미도 들어 있었던 것이
다.
참된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어렵다.
조조가 평생에 걸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전투를 치렀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
원을 통일하고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적이 정벌에 있지 않은
이상, 싸움이 끝나면 미웠던 적장이라도 과감하게 용서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점령지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데에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조조는 적의 점령지를 탈환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하나의 일을 실시하였다. 그것
은 곧 그곳의 사대부들과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조조는 이런 자리를 통해 많은 인재를 거두어들임으로써 단순하게 영토를 확장한 것 이상
훨씬 커다란 기쁨을 누리곤 하였다. 이렇듯 조조는 천하의 통일을 위하여 점령지를 확대하
기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예전
부터 거두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그렇게 해왔소이다. 이제 그대도 영혼이 있다면 나
의 이 말을 들으리라.
유표의 휘하에 괴월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고조 때의 모략가였던 괴통의 후손으로,
집안 내력이었던지 그도 역시 모략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생각이 깊고 지혜로웠던 그는 일
찍이 하진의 부름을 받고 종조연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 당시 환관들은 조정을 제
멋대로 요리했고, 지방의 토호들과 결탁하여 온갖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다. 피끓는 젊은이
로서 괴월은 이들의 만행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병권을 쥐고 있었
던 하진에게 환관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누이였던 하태후 덕분에 벼락출세를 했던 하진이야말로 결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인이었다. 조조도 일찍이 [해로행] 이라는 시를 통하여 하진을 '원숭이 몸을 하고
옷을 걸친 사람' 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하진의 우유부단함을 실감한 괴월은 이미 일이 어
긋났음을 알고 지방의 한직을 자청해 낙양을 떠났다. 그 뒤 괴월은 유표를 도와 형주 경내
를 평정함으로써, 유표로 하여금 막강한 세력권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러한 괴월과 조조의 인연은 길고도 험했다. 하진이 환관을 주살하려고 하였던 때가 중
평 6년(189)이었는데, 이때 조조는 35세로 낙양에서 서원팔교위 가운데 하나인 전군교위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조 또한 괴월과 마찬가지로 환관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하
진에게 나름대로의 대책을 건의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이즈음 조조는 벌써 괴월의 인물됨
과 능력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건안 13년(208) 조조는 유표정벌에 나섰다. 이 해
바로 유표는 병사하였고, 유표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조조는 여기에서 괴월
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토로했다.
- 형주를 차지한 것이야 별로 기쁘지 안소이다만, 괴월과 같은 훌륭한 인재를 얻은 것이
더없이 반가울 따름이라오.
그러나 이처럼 반가운 지략가였지만 오래지 않아 조조의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고 말
았다. 임종을 앞둔 괴월은 조조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 집안을 부탁하였고, 이에 조조는
벌써 이 세상과 운명을 달리한 사람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답장을 띄웠다. 위 글이 바
로 그것이다. 죽은 자의 지혜까지도 아까워 우는데, 산 자의 지혜에 대한 애착이 오죽하였
으랴?
옛날 어느 군주가 천리마를 구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곳곳에 천리마를 구한다는 대자
보가 내걸렷다. 이때 한 사람이 죽은 말의 뼈다귀를 싸가지고 와서 돈을 요구했다.
- 내가 사려고 하는 것은 펄펄 살아 내달리는 천리마이지, 천리마의 죽은 뼈가 아니다.
감히 뉘 앞이라 놀리려드는고?
-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전하께서 소인의 물건을 사신다면 사람들은 죽은 천
리마의 뼈도 그처럼 비싼 값으로 사들였는데 살아 있는 천리마야 오죽 하겠는가 하고 생각
할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진다면, 천하의 천리마는 모두 왕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왕은 천리마를 손쉽게 구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앞뒤를 재지 않고 무조건 약속을 지키려는 우직함을 말할 때 순식이란 사람을
들먹인다. 순식은 춘추시대 진헌공의 유언을 들은 고명대신이었다. 진헌공은 "다른 나라의
길을 임시로 빌려쓰다가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 는 가도멸괵이나 "입술이 없으면 이
가 시리다"고 하는 순망치한이란 고사성어로도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가도'라고 하면 우
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은 왜국 풍신수
길의 가도정명에 대항하여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외치고 순
절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진나라의 헌공은 상당히 유능한 임금으로 25년간 재위하였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호색한인데다가 여자에 너무나 약했다. 왕위에 오른지 5년째 되던 해에 서융을 정
벌하면서 여희라는 미인을 얻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희는 몇 년
뒤 혜제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녀는 이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존의 태자였던 신생과 공자 중이, 이오 등은 계모의 등쌀에 못 이겨 망
명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 가운데 중이는 수십 년을 국외로 떠돌다가 드디어 환국, 춘추오
패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 되었던 인물이다.
여희는 순식을 태부로 삼아 혜제를 보필하도록 하였다. 진헌공은 임종을 앞두고 순식을
불러 당부했다.
- 나는 혜제를 후사로 삼고 싶소.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려 대신들마저 나의 뜻을 따르
려고 하지 않은 듯하오. 하여 나는 변란이 일어날까 심히 걱정되오. 그대는 이 일을 해낼
수 있겠소?
- 염려하지 마십시오.
-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는가?
- 이렇게 맹세를 드리겠습니다. 설혹 이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세상사람들과 마주
해도, 그들이 나를 보고 약속을 저버렸다고 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제 저를 믿고 안심하
실 수 있겠사옵니까?
결국 헌공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순식은 헌공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목
숨을 버렸다.
때로는 고인의 지혜까지도
건안 18년, 그러니까 213년에 조조가 위공의 자리에 올랐을 당시 진군이란 사람을 어사중
승으로 삼았다. 어사중승은 어사대부를 보좌하는 직책이며, 어사대부는 조정에서 관리를 탄
핵하거나 감찰하는 고위관직이다. 조조는 어떠한 정책을 마련하거나 개정하려고 마음먹으
면, 담당자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한 의견수렴의 절차를 밟곤 하였다. 여기에서도 확연
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조조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아들 진군으로 하여금 선친
의 의종이 무엇이었던가를 이야기해보도록 한다. 매사에 완벽을 기하여 철두철미하게 사업
을 진행시키려고 하는 조조의 신중한 자세와 아울러 지혜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좋
은 실례다.
어떻게 하면 고금에 밝고 사리에 통달한 자를 얻어서, 이 일을 시원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으려나! 예전 진홍려께서도 육형이 태형보다 오히려 낫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일컬
음이 아니었던가 싶소. 이제 어사중승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각을 밝힐 수 있으시겠지요?
조조는 형벌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조조는 형벌, 다시 말해 법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혼란한 시대를 평정하는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백성
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
으로 조조는 기존의 형벌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시정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바로
육형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조가 육형을 부활시키려는 의도나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서 알려면, 무엇보다도 중국의
형법제도의 대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순 시절부터 형벌에 관한 이야기야 많이 등장하
지만, 그래도 중국의 형법다운 형법이 문자로 정리된 것은 주나라 목왕 때 사구(요즈음으로
말하며 법무부나 내무부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에 해당함)를 지냈던 보후가 제정한 '여
형'이 처음이다. '삼' 이나 '오' 란 숫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중국의 전통으로 형벌은 '오형'으
로 일컬어져왔으며,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한서형법지]에 의하면 여형의 오형 규정은 모두 3,000가지로, 묵벌 1000, 의벌 1000, 비벌
500, 궁벌 300, 대벽 200 이었다. 묵벌은 먹으로 얼굴에 글자를 새기고 뜨는 형벌, 의벌은
코를 자르는 형벌, 비벌은 무릎 뼈를 도려내거나 발을 자르는 형벌, 궁벌은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이며, 마지막 대벽은 사형을 일컫는데, 오늘날에 견주어 생각하면 실로 소름끼칠 정도였
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하고 끔찍한 형벌들이 모두 제대로 시행이 되었을까는 의심스럽지
만, 세월이 흘러 진나라 시황제가 등장하여 강력한 법치주의가 표방되었을 때는 실제 이러
한 형벌들이 상당히 집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한나라 문제 13년(167)때에는 묵의비 세 종류의 형은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곤장이
나 채찍으로 때리는 태형 등으로 바뀌었는데, 그 취지가 무색해지는 경우도 흔했던 모양이
다. 예컨대 얼굴을 뜨는 형벌은 머리칼을 자르고 변방으로 보내 성을 쌓거나 수발을 자르
는 형벌은 500대의 태형 등으로 바뀠지만, 혹독한 노역이나 매를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처럼 복잡다기한 형벌도 후한 말에 이르러서는 엉
망이 되고 말았다. 당시 잦은 민란은 소요진압을 목적으로 한 통치자들의 특별 사면을 남
발시키게 하였다. 이런 저런 상황에서 조조는 육형을 부활시킴으로써 혼란스런 법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았다. 이를 담당자에
게 맡겨 논의에 부쳤으나, 부활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지난날 대홍려(지금의 외무부 장관과 의전수석이 합쳐진 정도의 직책)을 지
냈던 진기라는 사람이 육형에 대해서 언급하였던 것을 상기하고, 때마침 조조의 막하에 있
던 진기의 아들 진군을 불러 의견을 개진토록 조처하였다.
진군은 당시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할아버지 진식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양상군자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느 해인가 몹시 흉년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 도둑이 대들보 위에 숨어 있
는 것을 본 진식은 시치미를 떼며 아이들을 불러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다.
- 무릇 사람이란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아니되느니, 착하지 않다는 사람도 알고 보면 본
심이 그렇게 악했던 것은 결코 아니니라. 자꾸 하다보면 버릇이 되는 법이거늘, 저 들보 위
의 군자도 아마 그렇지 않겠니!
그러자 화들짝 놀란 도둑은 자신도 모르게 방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도둑은 이마를
조아리고 죄를 빌었다.
- 그대의 생김새를 보아하니 악인 같지는 않구나! 부디 못된 마음을 이겨내고 좋은 사람
이 되게나. 하기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렇지, 어디 자네의 본심이었겠는가?
이렇게 말한 진식은 비단 두 필을 줘 보냈다. 이러한 소문이 돌자 고을에 도둑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나 한 번 들어온 도둑을 잘 대우해주었다고 해서 결말이 좋을 수는 없
을 것이다. 진식처럼 평소에 쌓아온 고결한 인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오죽하면 사람
들이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형벌을 더 받았으면 더 받았지, 진 선생의 꾸지람을 들을 수는
없어." 라고 말하였겠는가? 이러한 진식은 그의 아들 진기. 진심과 함께 '삼군'으로 일컬어
지며 세인의 추앙을 받아, 예주 일대에서는 집집마다 이들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걸렸다고
도 한다. 그가 84세로 세상을 뜨자 천하에서 모여든 선비가 3만 명이 넘었을 정도로 존경
을 받았다.
일찍이 진군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며, 아버지의 후광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 진식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곤 하였다.
- 이 아이는 틀림없이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
후한 말 공융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의 후손으로 뛰어난 학식과 언변을 갖춘 유명인사
였다. 당시 공융과 친교를 맺는다는 것은 '사교계의 화려한 왕자와 친분을 맺는 사람' 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이러한 공융의 나이는 진군의 아버지인 진기와 진군의 중
간쯤 되었던 모양이다. 공융은 진기와 친구처럼 지내다가 후일 진군과도 친구가 되었는데,
그 거만스럽기 짝이 없었던 공융이 진군을 만난 뒤에는 진기에게 아버지의 예를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로 진군의 명성 또한 드높아지게 되었다. 원래 진군은 유비가
예주목 되었을 때 유비를 위하여 일을 하다가. 후에 유비와 결별하고 조조를 따랐던 사람이
기도 하다.
다음으로 조조의 물음에 대한 진군의 대답을 살려보자. 조조의 물음에 대해 진군은 망설
이는 기색이 하나도 없이 이렇게 답변했다.
- 저의 선친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한나라에서 육체에 가하는 형벌을 없애고
곤장을 때리는 것으로 빠꾼 이유는 본래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고 인자함을 베풀려고 함이었
다. 그런데 오히려 죽는 사람만 늘어나게 되었다. 이야말로 겉으로는 형을 감한다고 하였
으나 실제로는 오히려 형이 더욱 무거워졌을 뿐이다" 저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형벌이란
겉보기에 가벼우면 쉽게 범하고, 또 실제의 처벌이 과중하면 백성을 해치게 됩니다. [상서]
에도 나와있습지요. "오형을 조신하게 처리하여 삼덕을 이룩하라"고. 또한 [역경]에도 "코
를 베거나 발을 자르는 법은 정사와 교화에 보탬이 되며 악을 징벌하고 살인을 줄일 수 있
다."고 하였나이다. 이제 사람을 죽인 자를 죽이는 것은 옛날의 제도에 합치합니다. 그러
나 다름 사람을 상하게 한 자에게 머리털을 자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옛
날의 형벌을 되살리셔서 간음한 자는 거세하시고 도둑질한 자는 그 발을 잘라버린다면, 아
마 음란한 행위와 도둑질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릇 삼천가지나 되는 형벌을 다 복원
할 필요야 없겠지만, 음행이나 절도 등은 오늘날의 걱정거리이니, 먼저 실행하시는 것이 마
땅한 줄로 아옵니다. 한나라 법률로도 마땅히 죽여야 할 죄는 인정을 두지 말고 죽여야 할
것이오나, 그 나머지는 육형을 가하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죽이거나 살리는 것이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명공께서 태형으로 죽이는 형벌을 육형으로 바꾸신다면, 이는
실로 사람의 몸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처사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가만히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고, 또 자신의 뜻과도 일치하였다. 종요도 찬성이었
다. 그러나 왕랑과 왕수는 끝까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반대하였다. 왕랑과 왕수가
한사코 반대한 것은 원칙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아직 동오나 파촉을 평정
하지 못한 상황에서 육형을 시행한다면, 사람들이 공연히 겁부터 집어먹어 민심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조는 이 논의를 미결로 남겨둔 채,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칭찬했다. 조조는 자신의 좁은 주관을 비우고 모든 지혜
로운 의견을 모으기 위해 힘썼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조의 감정이었다.
조조가 꿈꾸는 세상
지혜란 어디에 활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출세나 영달, 혹은 안락한 삶을 위한 효
과적인 수단으로 쓰이는 것만이 아니다. 참된 지혜의 진정한 용도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쓰여져야만 한다. 지혜로운 군주와 어진 신하는 태평성세를 이루기 위한 가장 밑바탕이다.
게다가 만백성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어, 신상필벌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으로 삼는 태평성세의 모습을
다음의 시속에서 읊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세
태평성세를
관리의 성화도 없는 이 세상
임금은 어질고도 지혜롭고
재상과 신하들 한결같이 충성스럽고 선량하구나
모두가 예의 바르고 겸양하니
백성들 다툴 일도 없다네
삼 년 갈이에 구 년의 먹거리
창고엔 곡식이 가득 가득
반백의 중늙은이 짐 진 자도 없다네
때맞추어 내리는 비에
온갖 곡식도 무성하구나
싸움터를 달리던 말 거둬들여
밭에 거름이나 내리라
공후백자남 제후들
한결같이 그 백성들 사랑하여
그릇됨 물리치고 올바름 드러내며
마치 부형인 듯 자식처럼 백성 돌본다네
예의와 국법 어김 있으면
명확한 판결로 형벌 내릴 뿐이로니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 줍는 이도 없다네
옥사는 텅 비었고
계절은 한겨울이건만 판결할 일조차 없구나
사람들 모두가 팔구십 세
천수를 누리누나
은덕은 널리 널리
초목과 미물에도 미침이여 {대주}
이 시속에서 조조는 정치적 이상향,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이러한 이상사회에서 다스리는 자는 부형이 자제를 대하듯 백성들을 사랑하고, 한편으로는
상과 벌이 엄격하고 명확하다. 사람들은 예정 바르고 겸손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
로를 위해 양보할 줄 알며 어떠한 종류의 다툼이나 범죄도 없다.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풍
성하여 3년 농사만 지으면 9년 동안 먹을 양식이 마련될 정도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평화롭고 풍족한 생황을 즐겨 그 천수를 다할 수 있다.
이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 한낱 유토피아적인 몽상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조조는 이러한 세상을 꿈꾸며 일평생을 두고 오늘과 다른 내일을 위해 쉼 없이 자신을 발전
시켜나갔다. 조조는 또한 시대가 자신을 움직이고 지시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그가 생각하
는 이상적인 방향에 맞게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시대가 그를 선택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시대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또한 처음부터 호랑이를 그리려고 했을 때는 고
양이라도 그릴 수 있지만, 아예 호랑이를 그리는 것은 능력 밖이라고 포기하고 고양이를 그
리려고 한다면 결국 쥐새끼밖에 그리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기탄 없이 건의하소서
조조는 앞의 말과 뒤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가장 싫어했고,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대의를
위해 직언을 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조조는 옳다고 생각되는 의견을 머뭇거리
지 않고 과감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다음 글은 언로에 대한 조조의 인식을 한눈에 보여준
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이끌며 천자를 보필함에 있어서는, 무릇 관리들이 눈앞에서만 따
르는 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시경]에서도 "나의 계책을 들어준다면 그리 큰
후회는 없으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간절하게 충언과 비판의 목소
리를 얻고자함일 것이다. 나는 국가의 중책을 맡은 이후로 줄곧 중정을 잃을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러나 요 몇 년 사이 좋은 건의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것을 어찌 언로를
넓히는 데 정성을 쏟지 않은 나의 허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조정의 각 부처에
배속된 관원들은 매월 초하루에 모든 정책의 잘못된 점을 대해서 제각기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라. 나는 그것들을 기꺼이 참고하겠노라.
국가에서 어떠한 정책을 마련하거나 실행하려고 할 때 적어도 두 가지의 요건은 갖추어야
한다. 먼저 관료가 정책의 취지를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거기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 하는 시늉만 낸다면 이미 일은 그르친 것이다. 우리 속담
에 "호랑이 사냥에 궐 따지기(호랑이 사냥에는 열중하지 않고 제살 궁리만 한다는 뜻)"란
말처럼 그저 시간 때우기로 공무가 진행된다면 뻔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에
도 문제가 되고 있는 복지부동이다. 복지부동은 곧이어 면종복배로 이어질 것이고, 그러한
관리들 밑에 있는 백성들은 마치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되고 말 것이다.
또 관료의 적극적인 찬동과 일사분란한 업무가 뒷받침되었다고 하더라도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모든 일이 허사다. 백성들이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시책 자체가 고루
이익이 되는 것임은 물론 아침에 내린 명령이 저녁에 뒤집어지는 조령모개가 아니라는 확신
을 주어야 한다. 고추 심으래서 고추 심고, 양파 삼으래서 양파 심고, 소를 키우라고 해서
융자까지 얻어 자식처럼 키웠더니, 막상 수확기나 출하기가 닥치고 보니 본전은 커녕 빚만
고스란히 남는다면 그 누가 따르려 하겠는가?
춘추시대 상앙이란 사람은 진효공을 도와 변법을 시행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중
국 최초의 통일국가 출현의 기틀을 마련했던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변법을 만들어놓고 아
직 반포하기 전이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백성들이 믿고 따르지 않으면 허사가 아니겠
는가? 상앙은 꾀를 하나 내었다. 그는 왕궁의 남문 옆에 세 자쯤 되는 막대기를 꽂아 놓
고 대자보를 써 붙였다.
- 이 막대기를 북문으로 옮겨 꽂는 사람에게는 십 금을 주겠노라.
십 금의 양이 정확하게 얼마였는지 지금 가름하기는 힘들어도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으리
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껏 나라
에서 하는 일에 이골이 나도록 속아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상앙은 현상금을 대폭 올렸다.
- 이 막대기를 북문으로 옮겨 꽂는 사람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노라.
한 떠꺼머리 총각이 속는 셈치고 옮겨보았다. 곧 상앙은 그를 불러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다.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 퍼져나갔다.
- 그래! 이번에 새로 좌서장이 되었다는 상앙은 약속을 철석같이 지킨다나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앙은 변법을 시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국가나 개인이나 큰 일을 치루고 나면 긴장이 풀어져 해이해지기 십상이다. 건안 11년
조조가 막강한 원소의 잔당까지 완전히 제압함은 물론이거니와 숱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
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휘하 모든 사람의 지혜가 하나로 뭉쳐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러
나 이러한 때 자칫 자만에 빠지거나 안일로 이어진다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
다. 다시 마음자세를 가다듬을 때였다. 이제 조조는 의견수렴의 장을 활짝 열고 건전한 비
판과 창의적인 지혜를 모을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이다. 또한 각 부서의 관원들이 예전처럼
활발한 건의를 하지 않았는지 되새겨 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조조는 아예 건의를 정례화
시키는 방안까지 마련하였다.
조조의 이러한 명령의 효과는 오래지 않아서 곧 현실로 나타났는데, 여기에 얽힌 일화는
줄곧 조조를 악인으로 몰아부쳤던 [조만전] 에서조차도 찬탄할 정도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조는 원소의 근거지인 기주 등을 완전히 차지한 뒤, 내친김에 오랫동안 중국의
북방을 꾸준히 괴롭혀왔던 오환족마저 정복할 계획이었다. 오환족도 오환족이지만 원소의
아들 원상과 원희가 오환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생각
과는 달리 장수들은 한결같이 반대하고 나섰다.
- 원상은 꽁지 빠지게 달아난 패잔병일 따름입니다. 또한 오랑캐 족속이란 탐욕스러워
힘없는 원상을 곱게 보지 않을 터인데, 그들이 어찌 원상을 위하여 힘을 쓰려고 하겠습니
까? 지금 공께서는 적지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을 정벌한다면, 유비는 반드시 유표를 설득
하여 허도로 치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에 하나라도 뒤탈이 생긴다면 후회해도 소
용없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조조 또한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오직 곽가 한 사람만은 생각
이 달랐다.
- 그렇지 않습니다. 저 유표란 인물은 의심이 많고 과단성도 없습니다. 유비야 우리의
허를 찌르고 싶겠지만 혼자서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유표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어쩔 도
리가 없지요. 그러나 유표는 유비의 말을 절대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친김에 오환
족을 치시도록 하시지요.
이에 조조는 힘을 얻어 오환정벌의 깃발을 올렸다. 그러나 오환정벌은 실로 천신만고의
원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길인데 홍수로 끊어진 곳이 태반이었다. 다행히 전주의
도움으로 노룡새를 지나 오환을 무찌를 수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더욱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느덧 다가온 겨울,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극심한 가뭄이었다. 200여 리
를 행군하는 동안 물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수천 필의 말을
잡아 허기를 채우고 땅을 깊이 파고 나서야 물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어
가면서 업성으로 돌아온 조조는 지난날 오환 정벌을 말렸던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했다. 사
람들은 모두 의아해하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사를 마친 조조는 반대했던 모
두에게 후한 상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돌이켜보니 내가 지난해 오환 정벌에 나섰던 것은 사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행운을
바랐던 일이었다. 내가 비록 그들을 무찌를 수 있었지만, 실로 하늘이 우리를 도왔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올바른 일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내가 오환정벌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대들이 말렸기 때문에 더욱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탓이
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모두에게 상을 내리노니 앞으로 그대들은 거리낌없이 진언
하도록 하라.
작은 일을 잘하는 자가 큰 일도 잘한다.
리얼리스트에게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리얼리스트는 저기 멀리 보이는 이상을 달성
하기 위하여 지금 당장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조조는 천하통일이라는
장구한 이상적 목표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마주하여 언제나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다. 먼 미래는 바로 오늘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에 보이는 평소의 행동은 이러한 조조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내가 옛날 양읍에서 군대를 일으킬 생각을 품고 대장장이와 함께 작은 칼을 만들고 있었
다. 그때 북해에서 손빈석이란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는 빈정거리면서 말
했다. "대군을 모집하려고 한다는 사람이 고작 풀무장이와 어울려 칼이나 만들고 있단 말
인가?"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일을 능히 할 수 있어야 큰 일도 잘하는 법이
아니겠소? 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공자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분인가 봅니다. 어이하여 그토록 못하시는 것이
없나이까?
- 어허, 모르는 소리! 나는 어려서부터 어렵게 컸느니라. 하여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
이 없었다. 그런 너희들 눈에 두루 능통한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어찌 사람이 잡다한 것
을 모두 잘한다고 해서 군자이겠느냐?
사실 공자는 소위 팔방미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었다. 어디 사람 됨됨이가
남만 못하였는가. 학식이 남조다 뒤떨어졌는가? 거기에다 말 다루는 솜씨건 악기를 연주
하는 기량이건 모두가 수준급이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쉽다면 부인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였다고나 할까? 하기야 가정과 세상이 동시에 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
다.
72명의 수제자와 3,000명의 문하생을 길러냈고, 10여 년 기나긴 세월의 외유와 시. 서. 역
등의 고전 정리작업이 그를 꽁꽁 묶어 놨으니, 어느 틈이 있어서 따뜻한 아랫목에서 부인과
오순도순 정을 나눌 수 있었겠는가? 오늘처럼 마이크로 하는 강의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인
터넷과 같은 고속통신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가정과 부인에게는 충실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때로는 얼굴이 손톱자국이 나는 것도 비일비재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인간
삶의 교훈을 그토록 역설하면서도 끝내 다하지 못한 말 한 토막을 이렇게 남긴 것이다.
- 여자와 소인을 만나면 어찌해야 좋을 줄 모르겠다네! 가까이하기에도 어렵고, 그렇다
고 멀리하려 하면 원망을 하니 말일세!
[논어] 400여 장 가운데 겨우 한 마디, 그것도 소인과 곁들여서 한 말이었으니, 어디 될
법이나 한가? 눈 씻고 둘러보아도 여자가 반절인데! 그래도 공자는 회한은 없었던 모양이
다. 그래서 또 어느날은 이렇게 되뇌었다.
- 군자는 고정된 틀에 얽매여서는 안 되는 법일세.
조조는 어느 누구보다도 공자에 심취했던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공자의 전철을 똑같이 밟
으려 하지는 않았다. 공자의 여한을 풀려고 자나깨나 노력했던 사람에 가깝다. 조조가 공
자와는 달리 여자들을 잘 다루었는가의 문제는 접어두고라도, '군자불기'는 채득한 사람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군사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략과 사기이다.
중국 전쟁사에서 화려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의 전투는 병법
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순욱의 [사승론]
이나 곽가의 [십승십패론]에서 그 원인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적인
평가이거나 주관적인 입장에서 헤아린 분석에 가깝다. 그러나 이에 반해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조조가 전쟁의 승패를 따지고 그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는 방식을 보면 자못 간결하
면서도 명확하다. 조조는 이 싸움을 군사지휘자의 전략과 병사들의 사기가 결합하여 빚어
낸 합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원소의 투구는 만 조였으나 나의 투구는 20조밖에 안 되었으며, 본초(원소의 자)의 말투구
는 300개였으나 나는 열 개도 채 못되었다. 하여 나는 너무나 적은 나머지 사용하지도 않
았다. 그러나 나와 우리의 군대는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로써 마침내 그들을 격파할 수 있
었던 것이다. 그때의 병사들은 실로 정예부대여서 오늘날의 너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
느리라.
위의 글은 비록 짤막한 일화에 불과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러한 해묵은 과거의 일을
상기시켜가며 굳이 명령으로 내린 데에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평소에 이러한 소신을 갖고 줄곧 살아왔으며, 그렇게 살아왔음이 결코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일말의 후회가 없다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아가서
부하장령들에게도 이렇게 매사에 소홀함이 없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나라에도 충성한다.
조조가 "오로지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라."고 명했다 하여,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깡그리
무시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효심이 깊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산의가 있다면 다
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필요한 인물이라면
얼마든지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다음의 글은 조조의 도덕관과 아울러 그가
얼마나 인재를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그 왕에게는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조조가 연주목이란 직책을 맡아 고을을 다스리고 있을 때, 필심이란 사람이 조조의 수행
비서관격인 별가로 있었다. 오래지 않아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맞아들여 모반을 꾀하면서,
필심의 어머니와 동생 및 처자식들을 잡아 가뒀던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조는 어쩔 수
없이 필심을 떠나보내려고 하였다.
- 그대의 노모가 저쪽에 계시니, 그대는 나를 떠나가도 괜찮소.
- 저는 공을 섬긴 이상 절대로 떠나가지 않겠습니다.
조조는 이러한 그의 충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필심은 종
적을 감추고 말았다. 조조는 복양의 패전을 딛고 마침내 여포를 무찌르게 되었는데, 이때
필심도 사로잡힌 몸이 되어 조조 앞에 끌려나왔다. 주위에 도열해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필
심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 천만 뜻밖에도 조조는 위와 같이 말하고는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를 곧바로
노국상이라는 벼슬에 임명하였다.
장범, 무작정 따르진 마시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심지가 굳고 속세와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인물들은 존재한다. 이
들은 속세에 찌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
가 생겨난다. 그렇지 않아도 인재의 고갈을 느껴온 조조로서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기도
하고, 또 서운하기도 했다. 조조가 깊이 아끼고 있던 인재 장범마저 속세를 떠나 초연히 살
고 있는 병원을 본뜨려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이에 조조는 장범에게 은근한 권고를 내린
다.
병원이란 자는 명성이 높고 덕이 뛰어나, 그의 청아함은 속세를 멀리하지요. 그는 우뚝
솟아 나를 위해 일하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장공께서도 자못 그를 본
받고자 한다는데, 나는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처음으로 그렇게 하는 자는 칭송 받지만 뒤따
르는 자는 별 볼일 없을 수도 있답니다.
병원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는 당대 유
학의 대가인 정현과 함께 사림의 거묵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병원은 속세의 부귀영화
와는 담을 쌓고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며 도나 닦으려고 했다. 물론 그도 결국에는 조조의
휘하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된다. 조조가 병원과 같은 사람을 등용한 데에는 그 사람의 능력
도 능력이지만,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지러운 현실을 도피하여 초야에 묻히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징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병원에게는
한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많은 자리를 거쳤지만 그는 그때마다 병을 핑계로 항상 집
에만 붙어 있고 등청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천하의 조조도 그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따라 배우거나 흉내내려고 한다는 데에 있었
다. 장범 또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장범은 명문귀족의 후예로 그의 동생 장승. 장소 등과 함께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한
번은 장범의 아들과 동생 장승의 아들을 도적들이 붙잡아간 적이 있었다. 이에 장범은 아
들을 구하려고 도적의 소굴로 찾아갔다. 도적들은 장범의 아들만 내주고 동생의 아들은 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범이 말했다.
- 당신들이 내 아들을 돌려준 것이 고맙기는 하오. 그러나 무릇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 인지상정이겠지만, 내 동생의 아들을 두고 갈 수는 없소. 더군다나 나의 조카는 어리다
오. 그러니 내 아들을 두고 갈 터이니 조카를 돌려주시오.
장범의 이러한 의기에 도적들도 감동되어 무사히 두 아들을 구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범을 원술을 비롯한 많은 군주들이 너도나도 등용하려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나
아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건안 13년 이후 조조의 휘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조조는
병원과 장범의 인품을 존경하여 나중에 아들 조비를 맡기다시피 하였다. 조조가 원정을 나
갈 때면 항상 이들을 남겨 뒷일을 부탁하였고, 조비에게는 모든 일을 이 두사람에게 물어서
처신하도록 타이르곤 하였다.
무고와 모함을 경계해야
귀가 가벼우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남의 말을 잘 듣지 말고 자신의 주관만을
고집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진정한 속뜻은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기초해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현상을 설명하는 말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데 정치나 군사를 다루는 일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무고와 모함, 비방과 모략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것을 분별해낼 줄
아는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대의 선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훌륭한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오. 나는 주월
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참으로 믿을 수가 없었소. 이제 다시 순영군의 글월을 받아보니,
그대가 어질고 충성스럽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소.
위진은 위자의 아들이었다. 위자야말로 조조에게는 회한의 인물이었다.
조조가 동탁의 전횡을 성토하기 위하여 진유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였다. 위자는
당시 진유의 명망가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 조조는 이러한 위
자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서 자문과 도움을 청했다. 이때 위자는 조조를 보
고 은근히 속으로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래, 이 사람은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거야.'
이렇게 생각한 위자는 조조에게 여러 가지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그렇지요. 이미 세상이 어지러워진 지 오래지요. 아무래도 군대의 힘이 아니고서는
바로잡을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이어서 그는 말을 덧붙였다.
- 그리고 군사를 일으키려면 바로 지금이 그 때인 것 같소이다.
이리하여 위자는 집안의 재산을 모두 털어 기병에 따른 자금을 조달하였고, 조조는 그의
도움으로 3,000명의 병사를 모아 중원평정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이 3,000의 병사와 조홍, 하후돈 등 친인척이 주가 된 부장들을 이끌고 위자와 더
불어 연합군의 말석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싸움이었던 형양 전투에서 위자는 전사
하고 말았으니, 조조의 상심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여 조조는 죽을 때까지 진유를 지나
기만 하면 위자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주곤 하였다. 이토록 깊은 인연이 맺어진 위자의 아
들 위진을 조조는 황문시랑과 호조연 및 군사참모로 가까이 두었고, 관내후에 봉하기도 하
였다.
건안 38년(213)에 동군의 주월이란 사람이 모반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위진이 주
월의 모반에 가담하였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조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에 조조
는 순욱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
혀졌다. 그리하여 조조는 위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지난날을 상기하고 위로와 격려를 아
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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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은 삼군의 목숨이 걸린 것이거늘
조조는 유가의 전통 속에 있었지만 병가를 숭상하고 항상 현실에 적용하기에 애썼다. 특
히 병사를 다루거나 군율을 집행하는 데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당대에서나 후세에서나
조조는 법을 너무 엄격하게 집행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조는 법의
집행이 잘못되어 억울하게 처벌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무진 애를 썼다. 따라서 건안 19년
12월 조조는 형벌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전담 부서인 이조연속을 설치하고, 또 군중에서의
억울한 처벌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모든 것이 이러한 조
조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릇 형벌이란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것이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형벌을 관장하는 자가
자신의 직무를 충분히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람
에게 어떻게 삼군의 장병들의 생사에 관한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몹시 두렵
다. 이제 법리에 밝은 자를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형벌을 담당하도록 하라.
혁혁한 전공에 대해서는 두터운 포상을 내리고, 잘못이 분명한 패전에 대해서는 책임을
분명히 물었을 때, 군대의 사기는 높아지고 책임감이 강화되며, 나아가 전투력으로 귀결된다
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이 원리를 현실에 정확히 실천한 조조는 한말의 군웅들 가운데
천하의 패권을 얻는 데 성공했고, 원소는 그런지 못해 결국 그의 막강한 터전을 지키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조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조는 법을 적용하는 데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 비록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준엄한
심판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봄에 조조가 원정을 나간 적이 있다. 들판에는 수확기에 접어든 밀밭이 펼
쳐져 있었으나, 농민들은 군대의 행렬이 삼엄한지라 수확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에 조조는 주변의 백성들에게 알렸다.
- 나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역도를 토벌하러 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수확기임에도 불구
하고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나서게 된 것이다. 나는 장졸들에게 명하여 그대들의 농사를 절
대로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이 수확에 전념하도록 하라.
그러자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조조를 칭찬하였다. 조조는 다시 장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 어느 누구도 밀밭을 밟아서는 안 된다.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리라.
명령이 떨어지자 수만 명의 병사들은 밭두둑을 기다시피 조심조심 행군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기마병들도 모두 말에 서 내려 한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밭고랑을 헤치
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조조가 탄 말 앞에서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랐
다. 이에 놀란 조조의 말이 그만 밀밭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이것을 본 조조는 군법무관격
인 주부를 불러 자신을 치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주부는 승상을 감히 벌할 수는
없다고 하며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 나 자신이 법을 만들어 놓고 내가 그 법을 어겼으니, 어찌 내가 장수로서 병사들을 제
대로 지휘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한 조조는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곁에 있던 곽가가 조조를 제
지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 [춘추]의 대의에 따르면 존자에게는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더군다나 승상
께옵서는 지금 대군을 통솔하셔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거늘 어찌 자결하실 수 있단 말입니
까?
말없이 한참을 망설이던 조조가 결단을 내렸다.
- 이미 춘추지의가 그렇다면 죽음은 면할 수 있겠군.
이렇게 말한 조조는 뽑았던 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땅에다 내동댕이쳐버렸다.
- 머리털을 자르는 것으로 목숨을 대신하겠소
잘려진 머리는 장대에 묶여져 전군에게 돌려졌다.
- 승상의 말이 밀밭을 밟았기로 승상은 머리카락을 잘라 목숨을 대신하였노라.
모든 장졸은 군법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겼고, 조조의 호령도 빛을 잃지 않게 되었
다.
물론 이 이야기는 조조의 잔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더욱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 원래
이 이야기의 출처가 조조를 나쁜 쪽으로 몰아갔던 [조만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
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다는 점
이다. 앞에서도 중국 고대의 형벌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자는 것은
묵형에 해당한다. 묵형은 얼굴을 먹물로 떠서 글자 등을 새기는 형벌로 사형에 다음가는
중벌이었다. 주로 대역죄 등 국사범에 적용하던 것이었는데, 한나라때에는 가혹하다고 하여
이른바 '곤겸성단용'이라는 형벌로 바꿨다. '곤'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며, '겸'은 목에 쇠
사슬을 채우는 것을 말하고, '성단용'은 변방의 성을 쌓는 곳으로 끌려가 노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치욕적인 형벌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번의 실수로 인재를 버려서야
능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나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한 훌륭한 인재는 오랜 기간의 실
천적 경험속에서 그 재능이 단련되고 완성된다. 그러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듯이 실수는 한순간에 닥칠 수도 있다. 만약 한 번의 실수로 능력 있는 인재를 버린다면
이 또한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일벌백계로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한번
의 용서로 그 사람의 의기를 북돋우고 앞날을 기약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군대를 통솔하는 과정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순간은 밖으로는 적국과대치하고 안으로는 예
측할 수 없는 간교한 음모의 기미가 있을 때이다. 옛날 등우는 광무제의 군대를 나누어 서
쪽으로 갔다가, 종흠과 풍음의 모반을 당하여 스물네 필의 말만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고 하는데, 그렇다면 등우가 어쩌다가 이렇게 군대를 잃어버렸겠는가? 그대가 나에게 보낸
서신을 보건대 정성스럽기 그지없고 게다가 자신의 허물을 모두 적고 있는데, 아마 반드시
그대가 말한 대로만은 아닐 것이리라.
주령은 본래 원소 휘하의 장수였으나, 조조를 도우러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던 사람이다.
조조가 40세 되던 해, 그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으로 도겸 정벌에 나섰다. 이때만 해
도 조조와 원소는 사이가 좋았던 때였다. 이에 원소는 수령에게 군사를 붙여 주면서 조조
를 돕도록 하였는데, 주령은 조조를 도와 상당한 공을 세웠다. 이 싸움이 끝나고 원소는 원
대복귀명령을 내렸지만, 주령의 돌출행동이 터졌다.
- 내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조공 만한 인물이 없었소. 이는 참으로 훌륭
한 주군감이요. 이제 내가 모실 만한 인물을 만났는데, 다시 어디로 가리오?
이렇게 말한 주령은 끝네 원소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조조의 휘하에 머물기를 원했다. 주
령이 거느렸던 사졸들도 평소 주령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던 터인지라, 모두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조조가 기주를 점령한 뒤였다. 조조는 주령에게 원소 휘하에 있던 사졸들로 새롭게 편제
된 병사 5,000명과 1,000필의 기병부대를 이끌고 허남이란 곳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때 조
조는 그에게 당부하였다.
- 저 기주의 신병들은 여지껏 느슨한 지휘를 받아왔소. 지금은 비록 우리 군에 편제되어
겉모습은 제법 정돈된 듯하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불만이 많을 거이다. 그러니 그대는 위엄
을 보이되, 상황에 따라서는 너그럽게 어루만지기도 해야 할 걸요. 그렇지 않으면 잔꾀를
부릴지도 모른다오.
당부를 받고 임지로 떠나간 주령에게 아니다 다를까 조조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중
랑장 정앙이란 자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주령은 곧 정앙의 소요를
진압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조조의 당부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대비가 없었더라면 큰 낭패
를 볼 뻔하였다. 이에 주령은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는 한편, 자책하
는 의미로 사의를 밝혔다. 그러자 다시 조조는 직접 편지로 주령의 처사에 대해서 위로와
격려를 실어 보낸 것이다.
전한 말 적미라는 이름을 가진 농민반란군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왕
망이 한을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우자, 유분자를 황제로 옹립하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들의 숫자는 30만명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위세를 떨쳤는데, 상대와 구별을 짓기 위해 눈썹
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후한 말 황건적과 유사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이에 후한
광무제는 이들은 진압하기 위하여 대장 등우에게 2만명의 병사를 주어 보냈다. 그러나 도
중에서 등우 수하의 장수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러고 보니 적미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등우는 겨우 24기의 말만 이끌고 의양(본문의
낙양은 조조의 착각인 듯)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광무제는 등우의 죄를 묻지 않고 중용
하였다고 한다. 주령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자세한 사정을 듣자 조조는 광무제의 고사를
떠올리며, 주령의 능력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산은 높음을 마다 않고 바다는 깊음을 싫어하지 않거늘
조조는 젊은 시절 이미 효렴에 천거되어 의랑이 되었고, 낙양의 북부도위를 거쳐 돈구령
을 지내며 고을을 다스렸다. 그는 잠시 관직을 떠난 적도 있었지만, 황제의 비서관에 해당
하는 의랑을 거쳐 제남상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중년 이후 본격적으로 군웅의
대열에 서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가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헌제를 허도로
맞아들여 막중한 국가의 제반사를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르러 조조는 이미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의 신하가 아니라 오히려 천자의 권
위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었으며, 또한 그에 걸맞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안일이나 부귀공명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안으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적들과 전투를 하느라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조조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많은 번민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며, 이러한 현
실의 고민이나 갈등을 유달리 예민했던 감수성에 기대어 시가로 표출하곤 하였다. 아래의
[단가행]은 조조의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시이다.
술 마시며 노래하세
우리네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침 이슬과 같은 우리네 인생
흘러가 버린 세월 아까울사
가락이 절로 서러워짐은
맺힌 시름 떨쳐버리지 못함이지
어이하면 이런 시름 잊으리까
오직 술뿐이로세
사모하는 님들이여
그리움에 지친 나의 마음 아시나이까
오로지 그대들이 보고파
이제껏 괴로움 읊조린다오
사슴들 정답게 무리지어
들판의 풀을 뜯고
나에게는 훌륭한 손님들 모여
풍악 울려 즐긴다오
밝고 밝은 저 달빛
어느날사 거두리까
마음에 맺힌 시름
떨쳐버릴 수 없구려
비록 길이 험하고 멀다지만
찾아와 안부를 묻고
모여서 담소하고 즐긴다면
옛날의 정다움 되살아나리
달이 밝아 별은 드문데
까막까치는 남으로 날아가누나
나무 주위를 세 번 맴돌건만
어느 가지에 의지하랴
산은 높음을 마다하지 않고
바다도 깊음을 싫어하지 않는다네
주공이 진정으로 현사를 맞이 할 제
천하의 인심이 쏠렸다다지요
국가를 다스리는 일의 정점에 설수록 조조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일까? 또
는 그가 당면한 정치적 현실 앞에서 가장 심각하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무엇을 생
각하였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재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문제로
줄곧 마음을 조린다.
그는 이미 [해로행] 이란 시에서도 "아 우리 한나라 20대에 이르러, 그 신하 참으로 어리
석음이여" 라고 하여 '소임불량'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정국의 혼란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거기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가 놓여 있었다. 조조의 큰 뜻을 몰라주는 사람도 많았거니와 수많은
오해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조는 이러한 장애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근심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단가행]에는 바로 이러한 그의 복합적인 심사가 종횡으로 얽혀있
다.
옛사람의 훌륭함을 본받고파
조조는 목숨을 건 전투를 치루고 나서도 막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할때면 언제나 손에 책
을 들고 보았다고 한다. 또한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떠난 원정길에서도 높은 산에 오르거
나 감흥이 치솟아 오르면 시를 짓곤 하였다. 조조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철저한 리얼리스트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 마음속에는 인간적인 감성
이 넘실거렸다. 때문에 그는 선인들의 지혜와 모범을 본받고자 했으며, 이것을 곧잘 시로
나타내곤 했다.
주나라 서백 창
성스러운 덕을 간직하고
천하를 삼분하여
그 가운데 둘을 차지하였다네
하지만 은나라를 받들어
신하의 도리 다하였건만
숭후의 비방으로
갇힌 몸이 되었다네
나중에 죄를 용서받아
군대를 이끌고 가
오랑캐를 무찌른 것은
공자도 칭찬하였던 바라네
뛰어난 덕행을 갖추고서도
오히려 은나라를 받들었으니
그의 훌륭함 기린다오
제나라 환공의 업적
패자의 으뜸이구나
아홉 번이나 제후를 모아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천하를 바로잡으면서도
무력으로만 하지 않았고
정도를 내세우고 속임수가 없었으니
그 덕을 길이 칭송함이라네
공자의 칭찬은
관중도 같이 기렸다네.
백성들은 그의 은혜 입었음을
환공의 묘당에 배향되고
신하로서의 예 않아도 되었다네
임금 소백도 감히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으니
인신의 위엄이 이러하였다오
진나라 문공 또한 패자가 되어
몸소 천자를 받들었다네
그리하여 규찬과
제기 및 활과
화살
그리고 천자의 군대가 내려졌네
위엄이 높아 제후들이 따르니
모든 장수들 그를 존경하였고
천하가 이를 알게 되고
그 명성은 제환공에 버금갔다네
하양의 제후들 모임에서는
주나라 천자의 명을 사칭하였건만
오히려 그 이름 빛났다네.
조조는 이 시에서 주문왕과 제환공과 관중 그리고 진문공을 거론하여 그들의 한결같은 충
절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복선과 언어의 이중적인 의미구조를 활용하
고 있다. 조조가 여기에서 거론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모두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했다.
주문왕은 당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하고서도 오히려 은나라를 섬겨 신하로서의 절조를 잃
지 않았던 사람이며, 제환공과 진문공 또한 존왕양이를 실천했던 인물들이다. 조조는 이들
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자신이 현재 왕의 권위에 버금갈 정도로 누리고 있는 특혜에 대
한 변명을 함으로써 일반인들의 비판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제 2 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오
하늘과 땅 사이에 우리네 인간이 가장 귀하다.
임금을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려고 모범 되는 법을 만들었네 천자의 수레 자국과 말의 발
굽이 온 사방에 두루 미쳐 그릇됨 물리치고 올바름을 드높여 뭇백성들 잘살게 만들었다네
천지간에 사람이 가장 귀하지
조조는 숱한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권좌에 올랐고 좋든 싫든 정치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만족을 모르는 이상주의적 성격을 타고난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
의 몸 속에 활활 이글거리고 있는 이상을 향한 정열과 에너지는 그를 한순간도 현실에 안주
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앞길을 개척하도록 이끌었다. 그자신 문학적 감성이 넘치는 훌
륭한 시인이었던 조조는 이러한 자신의 이상과 심정을 시로 나타내곤 하였다. 그 가운데에
서도 특히 다음의 [도관산]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이 시를 통하여 어떠한 산문이나 포
고문에서도 밝힐 수 없었던 그의 총체적인 국가관을 밝히고 있다.
천지간의 만물 중에
우리네 인간이 가장 귀하다
임금을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려고
모범 되는 법을 만들었다네
천자의 수레 자국과 말의 발굽이
온 사방에 두루 미쳐
그릇됨 물리치고 올바름을 드높여
뭇백성들 잘살게 만들었다네
오 훌륭할사 그 옛날의 어진 임금이여
온 세상을 두르 잘 다스려
공후백자남 제후를 세우고
농업의 기틀을 세우고 법을 바로 잡았네
차라리 형벌은 없앨 수 있었으되
함부로 죄를 사하지는 않았으니
고요와 후보가
어이 할 일이 없었으랴
애닯구나 후세엔
함부로 제도를 고치고 율령을 바꿔
백성을 괴롭혀 임금이 되고
부역에 사람들을 내몰았다네
순임금 칠그릇 쓰자
열 나라가 등을 돌렸다지
요임금 통나무 서까래에
미치지 못함이라오
세상 사람들 백이를 칭송함은
풍속을 장려코자 함이려니
사치란 해란 참으로 큰 것
검약이랴말로 우리 모두의 덕일세
허유처럼 서로 사양한다면
어찌 송사인들 있으리까
다 같이 사랑하고 이익을 같이 한다면
남남이라도 친척이 되리라 [도관산]
조조는 이 시에서 그가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사회의 정치제도와 경제사상 그리고 사회풍
속 등을 폭넓게 그리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첫머리에서 천지간의 모든 만물 가운데 인
간이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하는 인본주의 사상을 밝힌다.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둔전제를 시행한 것이나 비록 반란을 일으킨 적이지만 황건적을
자기의 백성으로 포용한 것,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민생안정책은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상의
기초 위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사회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조직과 일정한 통제
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입군', 즉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고 올바르게 이끌어갈 군
왕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군왕은 군림하거나 부리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입군'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목민', 다시 말해 백성들이 잘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때
문에 '목민'을 위해서는 제도와 법률이 필수적이 조건이다. 아울러 이러한 제도와 법률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군왕에게는 권리보다는 오히려 의무가 따르게 된다.
군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세심하게 보살피며 신상필벌을 명확하게 실행하여야만 한
다. 그래야 나라의 백성들이 풍요를 누릴 수 있다. 특히 봉건제후를 세우고 효율적인 경제
정책을 제시하고 법질서를 엄격히 하는 것은 결코 게을리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조조는 강력한 법치를 표방했다. 그는 난세를 맞아 세상을 평정할 수 잇는 유일한 방도
가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조조도 죽기 직전의 유언에서는 법치만이 유일한 난국타개
의 방법은 아니라고 약간 물러서기는 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생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요와 후보가 어이 할 일이 없으리까?" 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모
든 인간은 비록 만물의 영장이기는 하지만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스림의 법도를 세우는 것이 바로 법치다. 조조의 정치관과 인간관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조조의 시각도 여기서 비롯한다.
이어서 조조는 조정과 사회의 혼돈을 낳는 가장 커다란 요인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
나는 제왕의 사치다. 사치스러운 제왕은 백성들을 필요 없는 노동과 부역으로 내몰아 그들
의 힘을 축낸다.
- 요임금은 서까래마저도 깎지 않고 그대로 두었거늘 어찌하여 순임금은 칠기까지 썼던
고? 그렇게도 성군으로 추앙 받는 순임금이었건만 10개의 나라가 등을 돌렸다지 않는가?
조조는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켰던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최대의 강점이다. 그래서 그는
실제 생활에서도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여 한 벌의 옷을 10년동안 꿰매입기도 했다. 또한
위 시에서 조조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미덕은 겸손과 양보다. 바로 백이와 허유가 대표적
으로 보여주듯이, 서로에 대한 겸손과 양보는 앞으로 생겨날지 모르는 분란을 미연에 방지
하는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천하통일의 기틀은 농업
사실 그동안 한 인간으로서 조조만큼 많은 비난을 받아온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러한 현
상은 통상 [삼국지]라고 불리는 소설 [삼국지연의]가 동양에서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
고 난 이후 줄곧 계속되었으며,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
러나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간 조조와 소설적 허구속의 조조는 상당히 다르다.
실존인물 조조는 중국 한나라 말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군웅할거의 소용돌이를 잠재우
고, 그나마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잇는 터전을 마련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는 백성을 사랑한 경세제민의 정치가였으며, 뛰어난 병법가이자 군사지휘관이기도 했으며,
또한 빼어난 시인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조조의 마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로 둔전제를 들 수 있다. 둔전제란
군량을 자급할 목적으로 평상시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건안
원년(196)에 조조가 조지와 한호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한 이 둔전제는 철저히 파괴되었던
농촌경제를 되살리고 민생안정을 가져다준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간사하고 비정한
인간의 전형으로 치부되던 인간 조조가 지극히 백성을 사랑하고 걱정했던 현명한 관리였음
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군대를 굳세게 하고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데 있다. 진나
라는 농사에 힘써 천하를 통일하였고, 한무제는 둔전으로 서역을 평정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선대의 좋은 본보기다.
중국 역사상 조조가 처음으로 둔전제를 실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조는 후한 말 각
종 전쟁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국가적 난국속에서 둔전제를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성과를
올린다.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고 군사력이 강화되었으며 지도력도 높아졌다. 물론 이러한
성공을 거두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우선 연주와 예주를 비롯한 허도 주변 지역은 조조가 여포를 무찌른 뒤 상당히 안정을 되
찾은 곳인데다, 지주들이 거의 몰락해버린 터라 그들이 소유했던 토지는 국가의 공전으로
귀속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또한 조조는 청주에서 황건적 100여만 명의 투항을 받아
들임으로써 많은 수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새로운 노동력도
얻었다. 아무도 없이 버려진, 그러나 기름지기 이를 데 없는 황하 유역에서 그들은 마음껏
경작하고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는 당대의 상황을 간파한 절묘하고도 효율적인 정책이었다.
후한 말의 국가적 혼란 속에서 군웅들은 한결같이 천하의 패권을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
었다. 그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군사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분한 군량의 확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황건적으로 대표되는 농민들의 집단적인 봉기와 계속된 흉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대부분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지경에서 둔전제는 다스림을 받는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나 다스리는 조조의
입장에서 보나 결정적인 해결책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둔전제의 성공은 바아흐로 조
조가 중원의 패자로 등장하는 가장 커다란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둔전에 관해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조조의 둔전에 대
해서 후세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역시 수확량의 배분이었다. 기본적으로
경작자와 관의 할당은 5:5였다. 그러나 밭갈이 소가 없는 농민들에게는 관에서 소를 빌려
두는 대신 수확량의 60%를 내야만 하였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일컬어져왔던
9분의 1세나 십일조에 비추어 본다면 엄청난 착취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수확량
의 배분은 조조를 각박한 수탈자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조의 둔전이 단지 관과 민 둘뿐이고 그 가운데 이익을
챙기는 지주나 그 무엇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언제 한번
십일조 등의 이상적인 조세제도가 지켜진 적이 있었던가? 더구나 당시 둔전제 실시전의 농
민들은 뼈빠지게 일해보았자 겸병과 수탈 아래 입에 풀칠도 할 수 없는 처지 였다. 그런데
이제 농민들은 이전처럼 먹거리를 찾아 떼 지어 몰려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며, 열심히 시책
에 따르기만 하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일정한 삶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한편 관에서 거두
어들인 곡식은 군수나 공용으로만 쓰였지 결코 어떤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데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 황건적 진압에 나섰던 원소나 유비 등 여러 군웅들은 황건적을 진압하는 데에만 신
경을 썼지 이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달랐다. 조정의 무능과
탐관오리나 지방호족들의 전횡이 급기야 농민반란으로 이어진 것임을 조조는 확연하게 인식
하고 있었다. 따라서 황건적들을 일방적으로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살길을 열
어주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조조는 이러한 인식을 실천으로 옮겼던 것
이다.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새롭게 점령하는 지역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할 일도 그만큼 많아진다. 이때 가장 중요
한 것은 점령지역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민중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시급히 푸는
일이다. 그래야만 조기에 정치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다음은 조조가 기주를 점령하고 나
서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다.
하북 지방은 원씨 형제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니, 금년의 세금은 내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호족의 겸병을 막는 법을 만들도록 하라.
건안 9년(204) 기주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 조조의 나이도 어느덧 쉰이었다. 인생의 황혼
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인생의 황혼과는 달리 천하는 아직도 그의 활
약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전투에서 거두는 승리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다스려야 할
지역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또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할거 세력을 제거하고 중원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키워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통치지구뿐만 아니라 새로 점령한 지역의 민중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일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민심을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다른 지역도 마음놓고 원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조는 기주를 비롯한 하북지역을 점령하고 난 이후 가일층 정치와 경제의
개혁과 질서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 이 당시 후한 말 농촌경제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조정안에서는 환관과 외척이 쉴
새 없이 주도권 다툼을 펼쳐 황제의 권위를 거의 무력화시켰으며, 지방에서는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지방 호족들의 전횡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마음대로 농민들을 착취하였고, 농민들은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들었다. 머리에 노
란띠를 두른 황건적의 반란이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 나간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
었다. 특히 원소는 기주를 차지하고 난 뒤 아예 호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수탈을 묵인하
였으므로, 농민들의 고난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기주를 점령한 조조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곳의 질서를 회복하
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겸병을 막고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일반 백성의 과중
한 부담을 덜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난이 웬수
조조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이기도 했겠지만 시를 쓰기 위한 제재로서 민간에 떠
도는 노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민간 가요는 대부분 애달픈 삶을 노래가락에 담아 풀
어보려는 것이다. 때로는 함포고복(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며 즐김)을 노래하는 '격양가'도
있었겠지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민생의 어려움을 민간가요를 통해서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거기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로 승화시키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기본적인 도리가 아니겠는가?
낟알은 방아 찧을 수도 없고
조각난 배는 꿰맬 수도 없구나
뒤주 속엔 곡식 한 말도 남지 않았고
반짇고리 열어봐야 한 자의 베조각도 없건만
친구 찾아와 빌려달라 하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콩 한 알이라도 있으면 갈라먹으련만 그것마저도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오죽하면 "서
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는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당시 후한 말의 상황이 그러했다. 그래
서 조조는 그처럼 둔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도관산]이라는 시에서처럼 태평성세에 집
착했던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다시 시작할 때
점령지의 민중들이나 사대부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특히 종전의 세려고가 행동을
같이 했던 사대부들은 더욱 그러하다. 만일 이들의 잘잘못을 따져서 벌을 내리자면 온전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옛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라"는 명령이야말로 정치적 안정과 민심의 수습을 이룰 수 잇는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원씨 부자와 함께 나쁜짓을 하였던 자들도, 이제는 옛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출발
하도록 하라. 사사로이 복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장례를 치르는 자는 모두 법에 따
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일찍이 조조는 서선과 진교의 갈등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내렸던 [위서선의진교하령]에서
도, 건안 5년 이전의 과거사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 사람들에게는 엄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한
적이 있다. 조조는 건안 10년 정월 원담을 죽이고 기주를 다스리기 시작한 때나, 건안 13년
유표의 형주를 차지하고서도 이와 비슷한 령을 내려 사대부들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조치
는 점령지의 안정이나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아가서는 인재의 발굴이라는
관점에서도 꼭 필요한 조치였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조조는 적이 다스리던 수많은 지
역의 인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인재를 얻었다.
이러한 조치는 적의 점령지뿐만 아니라 아군 내에도 적용될 수 있다. 건안 5년 조조가
원소의 본영을 점령하였을 때의 일이다. 전쟁의 포획물 중에는 원소의 각종 문서 보관함도
있었다. 거기엔 허도의 여러 신하들이나 조조 막하의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많이 있
었다. 이런 편지들이야말로 적과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런 편지 묶음이 조조에게
전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조는 이것을 살펴보지도 않고 태워버리도록 명령하
고는 이렇게 말했다.
- 원소가 한참 막강하였을 때는 나조차도 버티기 힘들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
떠했겠는가!
이런 모습은 얕은 꾀나 간사함에서 나오는 임기응변의 술책이 아니라 조조라는 한 인간의
진정한 사람됨의 넓이와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 복수는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때로 그러한 행위는 찬양되기도 했다.
자기가 모시던 주군을 위해서 끝까지 복수하는 것은 신의의 표현이기도 하였고, 부친의 원
수를 갚는 것이 효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한 대 이후로 유학이 이념화되면
서 이러한 인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나라 때부터 사적인 복수를 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으로 처벌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정서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을지언정, 죽음이 두려워 원수를 그냥 놔두는 것
은 가문과 나라의 수치라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처럼 군벌이 서로 갈려 대치하는 내전의
상황에서는 복수의 연결고리가 끝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 조조는 개
인적인 원한에 따른 복수에 대해서 엄중히 경계했던 것이다.
조조는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루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그것은 유교의 전통
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형편에 지나친 장례로 인한 낭비는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였다. 어느 시기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보다 약간 앞서서 조조는 금주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이것도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마당에 한쪽에서는 귀한 곡식으로 술을 빚는다
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힘없는 농민을 수탈해서야
건안 5년(200) 관도 전투에서 조조는 최대의 난적이었던 원소의 주력부대를 예상을 뒤엎
고 격파한다. 이에 격분한 원소는 2년이 지난 뒤 여름에 피를 토하고 죽게 되며,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은 형제간에 반목하는 가운데 조조와 대치한다. 그러나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
란 터에 우애마저 저버린 그들이 어찌 조조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건안 9년에 조조는 원소 일가의 근거지였던 기주까지 완전히 점령한다. 이때 조조
는 원소 지배하의 백성들에게 1년간의 조세를 감면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명령을
내린다.
[논어]에 이르기를 "나라와 고을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의 숫자가 적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지 않음을 걱정하며, 재정이 궁핍함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평화롭
지 못함을 걱정한고"고 하였다.
그러하건만 원소의 일가의 다스림은 호족이나 친척들로 하여금 마음껏 전횡과 겸병을 자
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따라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호족들의 조세를 대신 내기 위
하여 가재도구를 다 내다 팔아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심배의 일족은 죄인을 몰래
빼돌리고 그들의 조세를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넘기기까지 하였음에랴. 이러한 지경에 처한
백성들이 우리에게 의지하고 싶었으나 그들의 군사가 드세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있었겠는
가?
이제 이러한 백성들에게 한 마지기당 넉 되의 농지세, 그리고 가구당 명주베 두필과 솜
두 근반만 바치도록 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한 각 고을의 수령들은 명확하게 살펴 힘있는 자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숨기거나, 혹은
힘없는 자들에게 대신 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예나 지금이나 전투의 요체는 승리하기까지가 아니라 승리한 다음부터이다. 아무리 뛰어
난 전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승리감에만 도취하여 마무리가 시원치 않았을 때, 이는 곧
내리막길의 시작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일찍이 노자도 "자기의 공을 자랑하는 자는 공이 없
다"고 하였다. 뛰어난 현실주의자 조조가 이를 몰랐을 리 없고, 당연히 소홀히 하지도 않았
다.
조조가 즐겨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가 [논어]였다. 그는 공자를 좋아하였고, 그만큼 공자
의 말을 즐겨 인용하기도 하였다. 조조는 계씨가 전유를 치려고 하였을 때 이의 부당함을
지적했던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스리는 자의 기본 자세를 밝히고, 이어서 조목조목을
들어가며 백성들의 형편에 맞는 조세를 정해 나갔다.
원소와 조조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일반 백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만일 원소가
백성들의 처지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해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처럼 막강한 터전을
쉽게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백성들이란 오로지 힘만 있으면 당연
히 따라오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 결과 원소는 기주를 비롯한 네 개의 지역을 다스리면서
도 여전히 호족의 전횡이나 겸병을 막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 변방을 어지럽혔던 오환족과도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험담과 비방을 멀리 하라
때로는 험담과 비방이 훌륭한 인재를 죽일 수 잇다.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고 민생을 안
정시키기 위해서는 재능이 있는 인물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할 처지였던 조조는 사실
과 맞지 않는 험담과 비방을 철저히 경계해야 했다. 다음의 명령은 건안 10년(205)에 기주
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내린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기주는 원래 원소의 근거지 였다.
이곳은 원소의 다스림을 받는 동안 사회의 기풍이 상당히 문란해져 있었으므로, 이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조조는 먼저 이를 바로 잡아야만 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로 다투는 것은 옛날에 성인께서도 몹시 미워했던 바이다. 그런
데 내가 듣기로 기주의 풍속이 하도 얄궂어 아비와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편을 달리하여 서
로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 직불의에게는 형이 없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형수와 정을 통했다고 비방하였
고, 제오백어는 세 번 모두 아버지가 죽고 없는 여자에게 장가들었건만 사람들은 그가 장인
을 때렸다고 헐뜯었다. 한편 왕봉이란 사람은 조정을 제멋대로 농락하였건만 곡영은 오히
려 그를 신백에 비유했고, 왕상은 충의지사였건만 장광은 그를 일컬어 정도를 왜곡시키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곤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여, 하늘과 임금을
기만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나는 사회의 기풍을 바로잡고자 하는데, 이상의 네 가지 폐단이
사라지지 않음을 나는 수치로 여길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 군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편견을 갖지 않고 두루두루 친하다. 그러나 소인은 두루 친하
지 않고 끼리끼리만 친하다.
조선시대 영조가 탕평책을 펴면서 성균관 앞에 공자가 한 이 말을 친필로 써서 탕평비를
세웠던 것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조조 또한 환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로 당파를 만
들어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따라서 조조는 공자의 말과
더불어 진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던 조고의 지록위마(진나라의 신하 조고가 자신의 막강한
권위를 시험하고자 2세 황제인 호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했던 것)를 상기하였을 것
으로 여겨진다.
말로 사람을 헐뜯기는 너무나 쉬우며, 한번 뱉어버린 말은 부풀려지기 일쑤이다. 조조는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하는 데 험담이나 비방과 같이 떠도는 현상이 아니라, 그 속에 가려진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전통이라도 지나친 것은 고쳐야
물이 없다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패업의 달
성은 물론이거니와 천하의 질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법
도를 세우거나 풍속을 유지하고, 전통을 발전시키는 일도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긍정
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민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는 적절한 대응 조치가 필요한 것
이다. 현실주의자 조조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태원과 상당, 그리고 서하와 안문 등의 고을에서는, 동지가 지난 다음 105일
째 되는 날에는 개자추를 추모하여 불기를 끊고 차가운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오
자서가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해서 오나라 사람들이 물까지 끊고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
로지 개자추만을 위하여 한식을 한다는 것은 치우친 처사가 아니겠는가? 한편 저 북방은
추위가 혹심한 곳이다. 그런데도 이대로 한식을 계속한다면 늙은이와 어린이 및 병약한 자
들이 견디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이 명령이 도착하는 즉시로, 사람들로 하여금 차가운 음식
을 먹지 말도록 하라. 만일 이것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 가장은 반 년의 형벌에 처하고,
이를 방관하는 관리는 100일의 형벌에 처하며, 그 고을의 장령 또한 한달의 봉록을 빼앗겠
노라.
개자추에 얽힌 설화는 한식을 낳았고, 이 한식은 중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
인 의식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한식이 우리 동양에서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지가 지난 105일이면 24절기로는 청명쯤에
해당하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식목일쯤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비가 자주 와서 나무를
심기에 안성맞춤인지라 식목일로 정해졌을 것이다. 또한 추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땅이 얼
었다 녹았다 하면서 조상의 무덤이 보기 흉하게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자손들은 이 시기가
되면 선영의 묘를 돌아보고 허술한 곳을 손보는 것을 도리처럼 여긴 것이다.
한편 "봄불은 여우불"이란 말이 암시하듯 일년 가운데 화재의 위험이 가장 많은 시기이기
도 한다. 그리하여 하루 동안만이라도 불기를 끊음으로써 화재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
는 의미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연유로 한식은 우리들의 정서 속에서 면면이 그 맥을
유지하여 왔던 것이다.
이 한식의 설화 속에 나오는 개자추는 중국 춘추시대 오패의 하나였던 진문공의 신하였
다. 그는 진문공이 왕이 되기 전 19년 동안 망명길을 떠돌 때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지
극정성으로 보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문공이 바야흐로 환국할 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서
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을 본 개자추는 이들에 대해서 환멸을 느낀 나머지, 결연히
이들과 결별한 채 어머니를 모시고 면상의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문
공은 망명길에서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모두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나, 개자추의 공적은 까맣
게 잊고 있었다. 이때 개자추를 흠모했던 누군가가 이를 못마땅히 여겨 궁궐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용이 하늘에 오르려면 다섯 마리의 구렁이가 도와야 한다네. 이제 용은 하늘에 오르고
네 마리 구렁이는 각기 제 집을 차지하였건만, 홀로 남은 한 마리는 머물 곳이 없다네."
이 글을 본 문공은 뒤늦게 개자추의 공을 생각하고 그를 불렀으나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면상의 산 속에 숨어 있음을 안 문공은, 이 산 주위를 모
두 그에게 봉지로 내리고 '개추전'이라고 하였으며, 그 산을 '개산'이라 불렀다.
이러한 개자추의 설화는 그러나 비극의 결말로 전해지기도 한다. 개자추가 끝까지 산 속
에서 나오지 않자, 문공은 산 전체에 불을 놓아 어쩔 수 없이 그가 나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진위야 어찌됐든 이때부터 사람들은 개자
추의 절개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기일에 차가운 음식을 먹었는데 여기에서 한식의 풍속
이 생겨났다고 한다.
조조도 한식의 전통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친 감이 있어 금지시킨 것이다.
한대에는 대개 1달 동안이나 한식을 행하였다고 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3일간의 '절화
한식'은 여전하였다. 사실 이러한 풍습을 순수한 애도의 뜻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충절을 강조하려는 위정자의 조장이나 방관도 개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
라서 전통적인 인습에 얽매이거나 현실적인 실리에서 벗어나는 행동 그 자체에 거부감을 갖
고 있던 조조로서는, 이러한 풍습의 금지가 충분히 예상되는 조치였다. 조조는 오랜 전란으
로 호구마저 현저히 줄어든 마당에 이러한 허례는 정말로 쓸데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고쳐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고향도 무인지경
건안 6년(201)에 조조는 원소의 비호 아래 여남에 주둔하고 있는 유비를 무찌르고 다음해
정월 초현으로 진군하지만 서글픈 감회에 젖는다. 다음의 글에는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했
다는 기쁨 대신 전란의 상처로 피폐해진 나라의 모습을 대하며 깊은 회한에 잠기는 조조의
모습이 절실하게 배어난다.
내가 의병을 일으켰던 것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나운 무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
러나 우리 고향의 백성들이 거의 모두가 죽고 말아 이제는 온 고을을 종일토록 돌아보아도
아는 사람을 만나볼 수 없을 지경이니, 나는 서글픈 마음에 가슴 메이는 듯하다. 이제 의병
을 일으킨 뒤로 싸움에서 죽어간 장교나 병사들 가운데 만일 뒤를 이을 자손이 없는 자는
그들의 친척이라도 대를 잇도록 하라. 또한 이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주고 밭갈이 소를 공
급하도록 하라. 또 학교와 선생을 두어서 이들의 자식들을 가르치도록 하라. 묘당도 지어
후손으로 하여금 그 선조를 제사지낼 수 있게 하라. 이리하여 만일 죽어서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죽어 그들을 만날지라도 달리 또 무슨 유감이 잇겠는가!
조조가 초현에서 느끼는 감회는 색달랐다. 바로 이 초현은 그의 고향이었다. 더구나 그
가 진유의 이오에서 동탁토벌의 기치를 들고 기병 하였을 당시에 그를 따랐던 병사들도 대
부분 이 지역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곳 초현의 백성들이야말로 처음부터 조조와 생사고
락을 같이 해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기병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숱한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무엇으로 이들을 위로하며 보상할 수 있을? 가능하다면 어떠한 조치를 취해서라도
이들의 후손이나마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했던 병사들에 대한 조조의 애정이 진솔하게 나타난다. 아울러 군벌들의 난
립과 혼전으로 산산이 파괴된 마을의 모습을 대하여 상당히 치밀하게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내리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위무책은 오늘날의 원호법과도 별반 다름이 없다.
전몰장병의 가정을 보살피라
숙적 원소를 격파하고 내친 김에 변방의 지대의 골칫거리였던 오환족까지 평정한 쪼는 남
쪽으로 기수를 돌려 형주마저도 손아귀에 넣는다. 이에 기세가 한껏 달아오른 조조는 동오
에 웅거하고 있던 손권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건안 13년(209) 적벽대전에서 유
비와 손권의 연합작전에 말려 일생일대의 뼈아픈 참패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조조는 참패
의 한탄에만 빠져 있지 않고 전몰장병의 가정에 대해 걱정하며 세심하게 배려한다.
요 몇 년 사이 우리 군대는 자주 싸우러 나갔던 바, 때로는 전염병을 만나 군리와 사졸들
가운데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아졌다. 그리하여 노처녀와 홀어미가 늘어나고
백성들은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떠도는 실정이다. 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 이를 소홀히 하겠는가? 이는 실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명령하노니 전사자가 잇는 집 가운데 살림이 궁핍하여 그 가족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집에는 정부에서 식량공급을 중단하지 말라. 그리고 지방관들은 이들을 위로하고 구
제하여 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조조는 때론 한없이 부드럽고 넓은 면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직설적이고 솔직한 면
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 성격은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적벽대전의 패
배는 이러한 조조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하나의 사건이었다.
따라서 손권과 유비측에서 대승이라고 말할수록 상처받은 자존심을 참기 힘든 조조는 스
스로 퇴군하였다고 짐짓 허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연환계"에 속아 타버
린 선단에 대해서도 자신의 병졸들이 풍토병에 걸려 도저히 싸울 수 없었던지라 스스로 불
사르고 퇴군하였다고 말하곤 하였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변명인지는 분명하
지 않지만 자존심 강한 조조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뼈아픈 패배의 상처를 딛고 제시하는 사후조처는 실패 앞에서 냉정
하게 반성하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는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현명한 지휘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극빈 가정을 돌보라
건안 21년(216) 겨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가뜩이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란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유행한 것은
그야말로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래의 글은 이러한 민생의 어려움을 돌보기 휘하여 건
안 23년에 내린 명령이다
지난 겨울 전염병이 돌아 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으며, 군대도 멀리 싸우러 나갔기 때문에
농토의 개간이 줄어들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사태가 매우 염려스럽다. 따라서 모든 백성
들 가운데 여자 나이 일흔이 넘었으나 남편이 없는 사람과 열두살 이하로서 돌보아 줄 부모
형제마저 없는 자, 그리고 앞을 못보는 자, 손을 못쓰는 자, 다리를 못쓰는 자로서 처자나
부형이 없거나 벌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에서 종신토록 먹을 것을 마련해주도록 하라.
어린이는 열두 살이 되면 공급을 끊고, 너무나 가난하여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운 집에는 그
식구 수에 따라서 곡식을 대여해주도록 하라. 집안에 나이가 많은 노인이 있어 부양해야만
할 집이나 아흔이 넘은 노인이 있는 집에는, 한 사람에 한해서 군역을 면제하도록 하라.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고 하였다. 그래서 민
심이 천심이며, 민심을 얻는 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실상 백성을 다스
리는 관리나 다스리는 자의 수장인 군주는 근본적으로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다.
우리 동양에서 전통적인 유학이 만들어낸 '어진 정치'라는 것도 오용의 소지가 많다. 그
것이 위정자의 항구적인 통치를 위하여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한 부속물로 악용될 수도 잇
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조금만 변질되면 폭정으로 치달을 위험도 있다. 백성을 위한다
는 정치가 결국 주객이 전도되어 통치권을 위한 수단으로 바뀔 수도 잇는 것이다.
조조의 목표는 첫째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둘째로는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중원을
통일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마지막 희망에 대해서는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숱한 비판과 의심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조조 자신도 주위에서 천심이 그에게 있다고 부추기자, "정녕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주문왕이 되겠노라"고 한 말도 그 혐의를 더욱 짙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조조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킨다면 비록 혐의는 짙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비판할 덕목은 아니
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조는 먼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방법의 문제에서 진정으로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
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백성들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인식하고 있어는 점이다.
후세들의 교육을 위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조조는 학문을 즐기고 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학문을
숭상하고 문학을 사랑했던 조조가 있었기에 당시 '건안칠자'라고 하는 빛나는 문제들이 활약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안 8년에 내린 다음 글을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조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후세
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는 [수학령]은 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조조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천하가 혼란에 휩싸인 지 벌써 15년, 어린 자제들이 인의예양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가 없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서글프다. 따라서 모든 고을에서는 각기 유가의 경전을 배우
고 익히는데 힘쓰도록 하라. 500호가 넘는 고을에서는 학교를 세워 그 고을에서 학문이 뛰
어난 사람을 뽑아 교육시키도록 하라. 그리하여 옛선왕들의 도가 끊기지 않도록 힘쓴다면
천하의 이로움이 되리라.
하북을 평정하고 난 조조가 아직 전화가 다 가시지도 않았던 상황에서 이처럼 서둘러 교
육정책에 신경을 썼던 것은, 청년시절에 이미 경학에 상당한 조예를 갖춘 덕분에 의랑으로
선발되었을 만큼 학문을 좋아하였던 그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조가
'선왕지도'와 '인의예양'의 유가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은 그 자신의 학문관과 어긋난다고 볼
수도 있다.
조조 자신의 학문은 유가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가에 더욱 기울어져 있었다.
손성의 [이동잡어]에서도 조조를 일컬어 "여러 가지 책들을 두루 보았으나 특히 병서를 즐
겨 보았다."고 말하고 있듯이 조조는 병가에 가장 커다란 관심을 쏟았다. 또한 조조의 저술
로 기록되어 있는 책들도 대부분 병법과 관계가 잇는 것들이다. 그의 [사마법주]는 바로
춘추시대 사마양저를 중심으로 한 제나라의 병법을 주석한 책이며, 이밖에 [손자약해] 3권,
[속손자병법] 2권, [병서접요] 10권, [병서요론] 7권, [병서] 13권, [병서요략] 9권 등도 모
두 병법에 관계된 책들인데, 이 가운데 손자의 병법을 주석한 책은 지금도 남아 있다. 물론
이 책들은 제목이 시사하듯 독창적인 저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병서들을 보면서 주를 달거
나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병서에 능통했던 것은 분명하다. 어찌보면 그
는 손자 이후 최대의 병법가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조가 여기서 자신의 학문관과 엄연히 거리가 잇는 유학에 대해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조가 뛰어난 현실 감각을 지니고서 학문의 효용가치를 적절하게
배려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병법이 필요하지만, 사회의 안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한 통치술로는 유학이 알맞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양산천 굽어보니
후한 말 끊임없이 계속된 농민의 봉기는 왕권의 쇠퇴를 가져왔다. 황실의 외척과 환관들
은 조정의 권위를 뿌리째 뒤흔들었으며, 지역에서는 동탁을 비롯한 군벌들이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여 나라는 온통 환란에 빠졌다. 이때 미약한 힘으로 군웅들의 뒤축에 낀 조조는
남다르게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인 혼란과 당시의 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해로행]이라는 시를 쓴다.
아, 우리 한나라 20대에 이르러
그 신하 참으로 어리석음이여
마치 원숭이에 옷 걸친 듯
보잘것없는 지혜에 꾀함만 크네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임금만 매인 몸이 되었네
흰 무지개 해를 꿰더니만
제 몸 먼저 죽임을 당했다네
간악한 신하 국권을 뒤흔들어
태후를 시해하고 낙양을 불사르네
나라의 터전을 뒤엎고
종묘마저 잿더미로 변해
서쪽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며
서럽게 흐느끼며 나아가는데
낙약산천 굽어보니
미지의 서글픔 젖어오네 [해로행]
이 시는 후한 말 영제 말년으로부터 헌제 초년에 이르는 기간의 풍경을 한편의 다큐멘터
리처럼 보여준다.
원래 '해로'는 장례를 치를 때 상여를 메고가면서 불렀던 만가로, 그 가사는 이러하다.
"염교(부추와 흡사한 식용 채소)잎에 맺힌 이슬, 어찌 이다지도 쉽게 마르나요. 이슬이야
말라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내리지만, 사람은 죽어 한번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올 수 있으리."
이처럼 장송곡으로 널리 불러졌던 이 노래는 그 애절한 가사 때문에 굳이 장례에서뿐만
아니라 연회나 심지어는 결혼식장에서도 불렸다. 유달리 악부민가에 관심이 많았던 조조에
게는, 당시 내일의 상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시대와 그 속에서 아무죄 없이 죽어
가는 백성들의 심정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촉한의 제갈량은 그의 유명한 [출사표]에서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
리한 것은 바로 전한이 융성하게 된 까닭이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한 것은
후한이 기울게 된 까닭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보다 상당히 앞서서 조조 또한 같
은 진단을 내리고 있었던 셈이다.
투구와 갑옷엔 서캐와 이가 들끓고
동탁의 세력이 커지자, 관동 곧 함곡관의 동쪽 각 고을의 군벌들이 연합하여 동탁군을 토
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 꿍꿍이 속이 있어서 서로 관망만 하고
전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서로가 다투고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하여 조조는 연합군 내부의 불화와 고통받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호리행]이라는
시로 읊었는데, 그가 여기에서 보여주는 백성들의 고난에 대한 동정은 달리 그 무엇이 계산
된 것이 아닌 진실된 것이다. 이 시는 앞에서 읽었던 [해로행]이라는 시와 함께 당대의 사
회상을 반영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이유는
간악한 무리를 토벌코자 함이었고
처음 맹진에 모여 의기투합한 것은
단숨에 함양을 정복하기 위함이었네
많은 군대 모이고 보니 생각도 제각각이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앞장서 싸우려 하질 않네
자신들의 이익만 내세워 다투더니
결국엔 서로 치고 받고 마네
회남에선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북방에서는 원소가 옥새를 새기는구나
투구에 갑옷엔 서캐와 이가 들끓고
만백성들 죽어만 가네
백골은 들판에 나뒹굴고
천리에 닭 울음소리 하나 없구나
살아 남은 백성이란 백에 하나나 될까
이 모든걸 생각할수록 애간장만 타는구나 [만리행]
'호리'도 마찬가지로 만가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저승은 어드메에 있는가? 영혼을 거두어가는 데는 그 어느 누구 가리지도 않는구나.
저승사자 어이 그다지도 서두는지 우리네 목숨 잠시 머뭇거릴 수도 없다네."
함곡관 동편의 각 고을에서는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원소를 맹주로 삼아, 헌
제를 등에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주나라의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맹진에서 제후들을 모았던 것, 또는
유방과 항우가 진의 폭거를 멸하려고 강력한 기세로 함양으로 짓쳐들어갔던 것과 흡사하였
다. 그러나 초기의 이러한 의기충천한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연합군 내부의 갈등과 서로
간의 이기심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곧바로 일반 백성들이나 하층 병사에게 혹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무엇
보다도 심각한 후한 말의 사회적 현실이었다. 동탁이 거느린 군대가 낙양을 불사르고 난
뒤 이어서 관중을 휩쓸어버림으로써 빚어졌던 그 처참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
경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참옥상은 "그래도 힘이 있는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갔지만, 노약자
들은 피난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 두세 해 안에
관중지방은 인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관동지방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관동의 여러 고을에서도 동탁을 토벌하기 위한 기병으로 "여러 군대가 서로
다투고 또 제멋대로 군사를 풀어 노략질을 일삼으니 백성들 가운데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그리하여 그 옛날 번창했던 중원지방은 "이름 있는 도성도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고,
100리를 가도 백성의 흔적이 없는 곳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정도로 황량하게 바뀌고 말았
다. 더구나 언제 어디인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한 가문이 모두 전멸하는가 하면, 굶주림과
질병을 만나 천하의 호구가 크게 줄어들어 열에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비록 12주가
있다고는 하나 그 백성들의 수는 한나라 때의 큰 군 하나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조조는 결국 마지막 여섯 째 구절에서 "투구와 갑옷엔 서캐와 이가
들끓고 / 만백성들 죽어만 가네 / 백공을 들판에 나뒹굴고 / 천리에 닭 울음소리 하나 없구
나 / 살아 남은 백성이란 백에 하나나 될까 / 이 모든걸 생각할수록 애간장만 타는구나." 하
며 처절한 심경을 토로한다. 이처럼 처절한 묘사는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
고서는 나올 수 없는 감정이다.
끝이 없는 원정의 길
조조는 거의 한평생을 야전에서 생활했다. 그는 30세에 기도위가 되어 황건적을 진압하
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30여 년 간을 줄곧 싸움터를 떠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말을 타고
진두지휘하여 싸움에 나섰던 것만 하여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커다란 것만 꼽아도 원소
군대와의 관도전투, 장수와의 전투, 장노와의 관중전투, 오환족 정벌, 적벽대전, 유비와의 전
투 등이 있다.
조조는 전쟁을 천하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필요악으로 보았다. 조조는 결코 호전적인
성격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주를 달고 엮은 [손자주]의 서문에서 "성인은 군사를
일으킬 때 병기를 거두어들였다가 꼭 필요한 때가 되어서야 움직이며, 부득이할 때에만 사
용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식
견과 시인의 섬세함마저 함께 지니고 있었던 조조는, 군막생활의 애환을 몇편의 시로 용해
시키고 있다.
북녘의 태행산
험하기도 하구나 왜 이리 산이 높은지
구절양장 구비구비 구부러진 비탈길에서
수레바퀴마저 부러져나가네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북풍은 처량하기 그지없는데
사나운 곰은 우리를 향해 웅크리고
범과 표범도 길섶에서 울부짖누나
골짜기엔 백성도 드물건만
눈발은 어이 이다지도 어지러운지
아득한 길 바라보며 탄식하나니
원정길을 회포도 많구나
내마음은 어이 해 이다지 괴로운가
어서 빨리 고향에 돌아 가고파
물은 깊은데 다리마저 끊어져
길 가운데서 서성거릴 뿐
긴가민가 옛길도 헷갈리고
저녁 어스름에 잠잘 곳도 없구나
한없는 원정길 몇 달이던가
사람도 말도 허기에 지쳣다오
배낭 메고 섶을 주워 모아
얼음 깨서 죽을 쑨다오
서글프다 동산의 노래여
내 가슴 처량하기 그지없구나
이 시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악지대를 행군해 가는 고통을 읊은 것으로, 건안 11년(206)
고간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 지은 시다. 건안 9년 조조가 업성을 함락할 당시에 원소의 외
조카인 고간은 병주목으로 있었다. 이때 고간은 조조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스스
로 항복한 뒤 자사가 되었다. 한편으로 원소의 두 아들 원희와 원상은 오환으로 달아나 선
우를 부추겨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변경을 침범하곤 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오환 정벌에 나
섰다.
이때 고간은 다시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업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조조의 반격을 이
겨내지 못하고 물러나 호관을 지키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조조는 업성으로부터 출병하여
태행산을 넘어 고간을 어렵게 정벌할 수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엄동설한이 계속 되는 정
월이었는데, 날씨는 춥고 땅은 얼어붙었으며 눈도 펑펑 쏟아져내렸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시 가운데에는 행군의 어려움과 이 싸움에 대한 감회가 서려 있다.
당시 조조의 나이도 이미 52세였다. 의기와 투지로 일관된 삶을 꾸려운 그도 이제는 노
년에 접어들었고, 때로는 심신의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원소를 격파하고
업성을 함락할 당시만 해도 중원은 통일을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항복했
던 고간마저 또 다시 배반하여, 추운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든다. 군사들은 추위에 하나 둘
쓰러져가고 천하평정을 향한 승리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러한 여러가지 심사가 뒤엉키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긴 탄식을 하고 만다.
그러나 조조는 탄식에만 머물지 않고 시야를 넓혀 부하 장병들을 걱정한다. 동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군사들을 쉬게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이미
본거지로 돌아가기도 어려운 이상 어쩔 수 없이 원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날이 갈수록
사람과 말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죽어간다. 밥지을 쌀은 커녕 물마저
제대로 구하기 어려워 겨울 얼음을 녹여 죽으로 허기를 채울 뿐이다. 부하장병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니 조조는 '가슴이 처량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저 병사들의 아픔을
내시의 자손이라는 출신성분과 보잘것 없는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숱한 난관을 극
복하며 한 발 한 발 정상으로 올라갔다. 조조의 성공은 가문의 배경과 행운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가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부
러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중국에서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굳이 촉한정통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조조가 악인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에는 이러한 측면도 작용했다. 물론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인 중국에서 조조와 같은 현실주의자가 제대로 평가되는 것조차 힘
든 일이었다.
사실, 조조가 원소를 비롯한 군웅들을 차례차례 물리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의 통
솔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통솔력은 엄정한 군율과 부하들에 대한 세심
한 주의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조조는 항상 인재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부하장병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조조라는 지도자를 마음으로 따
랐던 이유다. 다음의 시는 가가 얼마나 일반 병사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호흡을 같이 하려
고 애썼는가를 한눈에 보여준다.
고니와 기러기가 날아오는 북녘
그 곳은 인적도 없는 곳
날아오르면 만여 리
가거나 머물거나 줄을 지어 난다네
겨울엔 남녘의 먹이를 먹고
봄이면 다시 북녘으로 날아가건만
들판에 굴러다니는 다북쑥
바람 따라 흩날려 머나먼 곳에
길이 뿌리와는 헤어져서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음이여
어이하여 이 병사의 신세
온 사방을 떠돌아야만 하나
말안장 벗겨볼 날도 없고
투구와 갑옷 곁을 떠난 적 없구나
쉬엄쉬엄 늙어가건만
어느날사 고향에 돌아갈까
용은 깊은 연못에 깃들고
맹호는 높은 산에 살며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을 향하건만
이 몸 고향을 어이 잊는단 말인가 [거동서문행]
앞서 보았던 [고한행]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병사들의 고통까지 읊었다
고 한다면, 이 시는 아예 병사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남북으로 철
을 따라 이동하는 기러기는 언뜻 보기엔 이리저리 떠도는 병사의 시세와도 같다. 그것들도
먹이를 찾아 수만리를 배회하며, 가거나 머물거나 줄도 짓지 않는가? 하지만 병사와는 근
본적으로 다르다. 기러기들은 계절이 바뀌면 언제나 자유롭게 고향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전쟁터로 하염없이 떠돌아야만 하는 우리네 신세란 무엇이랴! 이러한 병사들의
한탄과 고통을 조조는 다북쑥에 빗대어 묘사한다. 다북쑥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아랑곳
없이 바람결에 흩날려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 뿐이다. 그리고 영원히 제 뿌리를 찾아
오지 못한다. 적어도 전쟁터를 떠돌며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마저 없는 병사의 눈에는 자신
의 처지가 다북쑥과 같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끝없는 싸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치세를 위한
전쟁인가? 누구를 위한 치세란 말인가? 설혹 이 전쟁이 모든 사람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필연적인 싸움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토록 싸움터를 헤매야만 하는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
가? 가슴의 황혼은 다가오는데, 몸서리치는 전쟁이 끝날 날은 언제인가?
여기에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는 이 시의 화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병사의 회한을 조조가 아닌 다른 사람, 곧 병졸이 읊었다면 어찌하였을까? 그것이
자칫 불평불만으로 비쳐지지는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전쟁터
의 지휘관이 이만큼까지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려 시로 읊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있었는가?
이것만 보아도 조조는 병사들의 고통과 상처를 위로해주는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매
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 3 부 : 의심나면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 말라
그대는 백이의 풍모와 사어의 강직함을 지녔구려! 탐욕스러운 사람은 그대의 이름을 흠
모하여 청빈해지고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절개가 굳은 선비도 그대를 우러러보며 힘쓰나
니, 그대야말로 가히 시대를 이끄는 자로다. 따라서 동조에 임명하나니 나아가 그 직책을
수행하도록 하시오.
탐욕도 강직함 앞에선 무너지는 법
윗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적재적소에 따른 인물 배치다. 꼭 필요한 자
리에 꼭 필요한 사람을 쓰는 것은 모든 사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관건이다. 조조는 다른 어
떤 것보다도 이것을 잘 하였다. 때문에 처음에는 미미한 힘을 갖고 있던 조조가 세력의 열
세를 극복하고 중원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염은 조조와 숱한 애증이 얽힌 사람인데, 본래 의젓한 모습과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최염에게 조조가 관리의 선발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기면
서 칭찬을 실어 당부하는 내용이다.
그대는 백이의 풍모와 사어의 강직함을 지녔구려! 탐욕스러운 사람은 그대의 이름을 흠
모하여 청빈해지고 가슴에 품은 뜻이 크고 절개가 굳은 선비도 그대를 우러러보며 힘쓰나
니, 그대야말로 가히 시대를 이끄는 자로다. 따라서 종조에 임명하나니 나아가 그 직책을
수행하도록 하시오.
최염은 후한 말 혼란기를 맞아 숱한 인생유전을 겪은 인물이다. 그는 남자들은 시기하고
여자들은 너나없이 흠모할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스런 눈매를 지녔
고 수염은 넉 자 남짓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우렁찼다. 하지만 이러한 그도 어렸을 적에는
사람의 주의를 끌 만한 점이 별달리 없었다. 더듬거리는 말투에다 글공부는 뒷전이고 검술
이나 배우겠다고 허둥대었다.
당시 한나라에서 남자는 23세부터 2년간 병역에 복무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처음 1년은
'정졸'이라고 하여 거주지에서 근무하였으며, 다시 1년간은 '수졸'이 되어 변방을 수비하거나
'위사'가 되어 황궁을 지키는 병사가 되었다. 이처럼 2년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56세까지
거주지의 예비병이 되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은 이러한 병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최염은 청년시절에 학문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터라 23세가 되자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그는 군대에 가기 싫었던지 이때부터 작심하고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하여 [논
어]와 [한시]에 정열을 쏟았으며, 29세가 되어서는 후한 말 유학의 태두였던 정현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4년 만에 겨
우 집으로 돌아와 거문고를 타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최염을 불러낸 사람은 원소였다. 원소의 휘하에 있으면서 최염은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제시하며 직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러는 그를 원소는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원소가 결정적으로 최염의 말을 듣지 않고 패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관도에서 조조
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이때 그는 원소에게 당부한다.
- 지금 천자는 조조의 보호 아래 허도에 계시며, 지금 모든 백성들은 공이 천자를 따르기
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이곳을 잘 지켜 천자에게 신하로서 직분을 다함으로써, 우
리의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주관적인 욕심만 앞세워 천하의 패권을 달성하기
에 급급한 원소에게 이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원소가 죽고 난 뒤 원소의 두 아들은 서로
최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최염은 병을 핑계삼아 어디에도 끼지 않았다.
결국 노여움을 산 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조조가 기주를 함락하자 조조의 휘
하로 들어가게 된다.
당시 최염을 불러들인 조조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어제 기주의 호적을 살펴보았더니 족히 30만은 되겠더이다. 이 기주가 크다는 것
을 새삼 알겠소.
그러나 최염의 입에서 터져나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 지금의 천하는 사분오열되어 구주가 갈갈이 찢겨져나간 상태입니다. 이제 공이 비록
기주를 차지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원씨 형제는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곳
기주의 들판에는 뭇 백성들의 시체와 해골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잇지요.
이러한 마당에 천자의 군대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진 정치를 베푸시고 백성들의 삶을 두
루 살피셔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고 함이 마땅하거늘, 오히려 호적이나 뒤져 군사의
숫자부터 헤아리시다니요! 이것이 어찌 기주의 모든 사람들이 공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
까?
이것이 최염과 조조의 첫만남이었고 최초의 대화였다. 실로 점령자의 총사령관격인 조조
와 포로의 처지나 다름없는 최염의 대화치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
의 기재였다. 결국 조조는 자세를 바로잡고 최염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공융이나 허유 및 루규 등이 보여줬던 입바른 소리나 빈정거림
과는 달리 당당한 헌헌장부의 기개였다. 따라서 조조는 줄곧 그를 신임하고 인재선발이라
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으며, 그 또한 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조라는 그릇 위에 최염
은 훌륭한 인재라는 물을 댔던 것이다.
또한 최염은 후계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조조를 설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조는
후계를 생각하며 장자인 조비와 둘째인 조식을 놓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 스스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하고 빼어난 시인이었던 조조는 천재적인 문학적 자질을 타
고난 둘째 아들 조식에 대한 애착이 매우 깊었다. 그리하여 조조는 이 문제로 많은 사람들
에게 자문을 구하곤 하였는데, 이는 철저하게 비밀을 요구하는 사안이었음은 물론이다. 또
한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나 앞일이 오리무중인데 노골적으로 지지를 표명한다는 것 자체가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염만은 달랐다. 그는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조조에게 말했다.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춘추]의 대의를 따라 마땅히 장자를 후사로 삼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오관중랑장 비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하오니, 정통을 잇는데 조금도 부족함
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죽음으로 지키겠나이다.
최염의 이러한 직언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조식은 최염의 조카사위였으므로
조조나 주위의 사람들은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아무튼 조조는 그의 강직함에 다시 한 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조비를 후사로 결정하였다.
백이는 동생 순제와 함께 서로 왕위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우리에게는
사육신 가운데 하나인 성삼문 시조 속에 등장하여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러한 백이를 추
앙하는 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여기에서 조조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맹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백이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눈으로는 음란한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난잡
한 음악을 듣지 않았다. 올바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올바른 백성이 아니면 다스
리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법도가 서면 나아가 벼슬하였고 어지러우면 물러나 숨었다.
난폭한 정치를 자행하는 조정이나 사나운 백성이 사는 고을에는 차마 살지를 못했다. 그가
이렇게 하였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것을 마치 조정에서 벼슬할 때
의 예복이나 예관차림으로 진흙탕이나 숯덩이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그
는 포악한 주의 세상을 만나 북쪽 바닷가에 살면서 천하기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이런 백
이의 행동과 모습을 전해듣게 된 사람은 그가 아무리 탐욕스러운 자라도 청렴하게 되었고,
아무리 나약한 자라도 뜻을 세우게 되었다.
사어의 강직함을 거론하여 최염을 부추긴 것 또한 의미가 깊다. 사어는 춘추시대 위나라
의 대부로, 그가 죽기 직전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 나는 평소 거백옥이 어질다는 사실을 자주 칭찬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그를 관직에 오르
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미자하의 모자람을 나무란 적이 많지만 아직도 나는 그를 관직에
서 물러나게 하지못하였다. 신하가 되어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물러나
게 하는 일을 게을리하였으니, 나는 죽어도 본채에서 상을 치를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
러니 너희들은 이제 내가 죽거든 본채가 아니라 그 모퉁이에서 상을 치르도록 하라.
사어의 아들은 부친의 이러한 유언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위나라
임금이 그 까닭을 묻게 되었고, 그 연유를 알게 된 위군은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
하를 축출한 뒤, 사어의 빈소를 본채로 옮기게 하였다고 한다.
인복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
조조는 인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조에게 있던 인복은 천운에 따라 태어날 째
부터 타고난 것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 자신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얻
어졌다는 점이다. 인복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
였던 조조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지휘자는 휘하의 병사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을 맡겨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서 명확한 신상필벌이 뒤따라야만 한다. 그러면 앞에서 복종하고 등뒤에서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자연 인복이 따라오지 않겠는가? 다음의 일화는 자기 스스로 인복을 만들어
나가는 조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옛날의 소하는 관중을, 구순은 하내를 평정하였는데, 그대가 바로 그러한 공로를 세웠소.
이제 그대에게 납언의 직책을 맡기고자 하오. 내가 생각하기에 하동은 우리의 팔과 다리처
럼 중요한 지역으로 그곳이 튼실해야만 천하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므로 또 다시
그대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러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수고를 부탁하오.
두기가 하동 태수가 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것은, 어찌 보면 우연의 낳은 결과였다.
어느 날 조조는 순욱에게 말했다.
- 하동은 전략상 요충지라오. 그대는 나를 위하여 옛날 소하나 구순처럼 이곳을 안정시
킬 사람을 천거해주지 않으려오?
소하는 한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이었던 장량이나 한신과 더불어 삼걸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며, 구순은 후한 광무제때 명신으로 다같이 하동 인근의 고을을 평정하거나 잘 다스렸던 사
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상기시킨 것이다. 조조의 부탁을 받은 순욱은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던 두기를 떠올렸다. 당시 상서령이었던 순욱은 시중 경기와 담을 맞대고 이웃에 살았
다. 그런데 하루는 밤새도록 이웃 경기의 집에서 고담준론이 오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순욱은 경기에게 지난밤의 일을 물었다.
- 뛰어난 인재가 있는데도 그를 추천하지 않는다면, 어이 벼슬자리를 지킬 자격이 있다고
하겠소이까?
이렇게 해서 두기를 만난 순욱은 그의 재주를 높이 사 추천하였고, 조조는 곧장 그를 하
동 태수로 삼았다고 한다.
두기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 계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나이 스물에 고향 두릉에서 공조라는 작은 벼슬아치가 되어 재판의 기민
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낙 성격이 활달한 나머지 꼼꼼함은 덜 했던지라, 어떤
사람이 그를 일컬어 공조감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말을 들은 두기는 대뜸 "나는 공
조에는 맞지 않지만, 하동 태수에는 맞을 것이오"하고 말했다 한다. 그는 훗날 자신의 말과
같이 하동 태수가 되어 그곳을 천하의 모범적인 고을로 만들게 된다.
하동의 두기를 본받을지어다
두기가 다스리던 하동 지역은 함곡관이라는 관문이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그만큼 전란에 시달리기 쉬웠으며, 백성들이 동요할 소지 또한 많았다. 그러나 백성에 대한
두기의 어진 보살핌과 현명한 정책의 시행은 천하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리저리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커다란 물줄기를 만나면 하나의 물줄기로 합해져서 흐른
다. 말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필의 훌륭한 준마는 여러 다른 말들은 이끌어 한 방
향으로 나가게 한다. 이러한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조조가 하동의 훌륭한 모범을 다른 고을
에도 전파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옛날 공자께서는 안회에 대해서 늘상 감탄해 마지않았소. 이는 마음속으로부터의 애정이
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준마로써 뭇 말들을 이끌게 함과 같은 이치였다오. 그대들이 두
기를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그의 훌륭함을 본받기를 지금의 나 또한 바라는 바요.
두기가 하동을 다스렸던 방법은 상당히 독특했다. 전란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자
의 무위이치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그는 엄격한 형벌로써가 아니라 너그러움과 은혜로 백
성들을 어루만졌다. 사람들끼리 송사가 벌어지면 먼저 이들을 불러 타이르고 돌아가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하였으며, 그러고도 해결이 되지 않으며 다시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이 서로 양보하게 되어 몰아볼 정도로 다툼이나 분쟁이 줄어들었다. 그는 또 효자나
정절이 높은 부녀자 등에게는 군역을 면제시켜주거나 틈이 나는 대로 위로잔치를 열어주곤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 고을 전체가 풍요롭게 되자, 그는 농한기를 틈타 직접 나서서
백성들에게 무예와 학문을 가르쳤다.
이러한 두기의 선정은 곧바로 효과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두가지 사례가 이를 반증한다.
한수와 마초가 반기를 들었을 당시 주변의 홍농이나 풍익 등의 고을에서는 그들을 따랐지
만, 오직 이 하동만큼은 지근한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또 조조가 한중 정벌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하동에서는 군수물자를 운반할 사람 5,000명
을 동원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서로 사기를 북돋우며 말했다.
- 사람이 죽으면 한번 죽지 두번 죽는가?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부군(곧 두기)을 저버리
지 맙시다.
그리하여 끝까지 단 한 사람도 도망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조조가 두기의 진가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평로장군 유훈
이란 사람이 극형에 처해진 일이 있었다. 유훈은 직위도 직위였지만 조조와도 친했던 사이
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의 위세를 감히 거스릴 사람이 없었다. 유훈의 죄상을 정리하는 가
운데 눈에 띄는 편지 하나가 나왔다. 그것은 유훈이 자신의 위세를 이용하여 뇌물을 은근
히 요구하는 편지였다.
- 그대는 복도 많아! 그렇게 대추가 많은 고을에 사니 말이야!
- 우리 고을에 대추도 많고 맛도 좋습니다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좀 참으시지요.
두기는 유훈을 마치 보채는 아이 달래듯 은근슬쩍 거절하고 말았는데, 이 거절의 편지가
불거져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조조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참으로 권세에
아부하지 않는 두기야말로 시대의 표상이지 않은가? 하여 조조는 다음과 같은 칭찬의 말과
함께, 귀와 같은 글을 각 고을에 띄웠던 것이다.
- 공자께서도 말했었지! "조왕신에 아첨하지 않는다."고. 참으로 두기가 그러한 사람이
구료.
공자가 55세 때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여러 차례 들
렸던 곳이 위나라였다. 당시 위나라의 영공은 공자를 환대하면서도 정작 아무 임무도 맡기
지는 않았다. 공자는 안탁추라는 자로의 처형 집에 머물기도 하고, 거백옥이란 사람의 집에
도 묵어 가면서 영공을 꾀나 자주 만났다. 그런 공자에게 있어서 위나라는 달고 쓴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영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 공 선생, 군대의 진법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구료.
- 저는 제사에 관한 일이라면 들은 적이 있어도, 군대의 일이라면 배운 바가 없습니다.
다음날 다시 공자는 영공과 마주 않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마친 하
늘에는 기러기 떼가 줄을 지어 날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영공은 하늘가의 기러기에만
눈길을 줄 뿐, 공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였다. 공자는 다시 위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공은 늙으막에 남자라는 요염하기 그지없는 여자를 왕비로 삼았다. 하루는 이러한 남
자로부터 공자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만나자니 별무소득이요, 그렇다고 거절하지니
위나라에 머무는 사람으로서 꺼림칙하다 하여 "내 몸이 떳떳하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라는
생각에 공자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공자가 남자와 독대를 마치고 나오자, 성미가 괄괄했
던 제자 자로가 마뜩찮은 표정을 하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공자는 고개를 들어 하
늘을 보고 말했다.
- 내가 만일 조금이라도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면, 하늘이 나를 벌 줄 거라
네! 하늘이 나를 벌 줄 거라네!
만세의 사표 공자도 이처럼 곤혹스러울 때가 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러한 위나라에 왕손가란 음험하기 짝이 없는 왕의 근신이 있었다. 그는 공자가 영공으
로부터 어떠한 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루는 왕손가가 공자
에게 노회한 질문을 던졌다.
- 속담에 "터줏대감에게 아첨하는 것보다는 차리리 조왕신에게 아첨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옛날 중국에서는 한 가정에서도 '오사'라고 하여 집안 곳곳에 제사를 지냈던 모양이다.
예컨대 대문이나 우물, 부엌이나 측간, 그리고 안방의 서남쪽 모퉁이 등이다. 이러한 전통
은 농경사회의 의식을 반영한 원시신앙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는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부엌은 온 집안 식구
의 건강을 책임지는 수라청이 아닌가? 그러나 한 순간 방심하면 터전을 잿더미를 만들어버
릴 수도 잇는 곳이다. 하여 우리네 조상들은 조왕신을 모셔놓고 정성을 드렸다. 측간만 하
여도 그렇다. 가장 질 좋은 거름이 나오는 곳이다. 인분과 부엌에서 나오는 재는 하나로
버무려져 못자리 등을 할 때 쓰는 귀중한 생산의 밑바탕이다. 대문이나 우물, 장독대나 광
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삶에 대한 경외와 소박한 바람이 일구어낸 미풍인지
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여러 가지 집안의 신들 가운데 조왕신과 터주대감에 대해 조금 더 더듬어
보기로 하자. 조왕신은 까마득한 옛날 염제 신농씨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신농씨는 세상
에 처음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전설상의 제왕이다. 그는 또 불의 덕으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러한 신농씨는 죽어서 조왕신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제삿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왕신은 1년에 꼭 하루만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인간
의 선악을 고해 바친다고 한다. 그날이 음력으로 섣달 스무나흘이다. 하여 사람들은 되도
록 자신의 잘못보다는 선행을 말하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 날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고 한다.
이렇게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언제나 한 번 더 들르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방의 서남쪽 모퉁이다. 이곳은 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곳이며, 평소에도 집안의 어른이
앉는 자리다. 따라서 집에 신이 있다면 가장 높은 신이 거처하는 자리다.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아뢰는 자리이니,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냈건 아니면 대문이나 우물에 지냈건
무조건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터주대감의 자리
이긴 하지만 결국은 별반 정성도 없이 뒤치다꺼리로 밀린 처지이고 보니, 이러한 속담이 생
긴 것이다.
그렇다면 왕손가의 시커먼 속내가 들여다 보이지 않는가? 영공보다는 먼저 자기에게 잘
만 보이면 공자 당신이 원하는 바를 순조롭게 이룰 수 있을 텐데, 그리 세상물정도 모르냐
고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겠는가? 바른길 올바른 삶을 위하여 대를 이어 노력해도 시원찮아
할 공자에게 이 무슨 허무맹랑한 짓거리란 말인가? 공자는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 그렇지 않소이다. 조왕신에게 꾐을 받고 미움을 받고 하는 것이야 무슨 대수이겠소?
참으로 하늘로부터 죄를 얻으면 빌 곳도 없다오.
조조는 공자가 말했던 여운을 살려 두기를 칭찬하고, 곧바로 다음의 [하령증두기질]이란
명령을 내렸다.
- 하동 태수 두기야말로 공자께서 "우임금이야말로 나로서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구나"라고 말한 그대로구나. 이제 중이천 석으로 봉록을 올려주도록 하라.
태수의 기본 녹봉(오늘날의 연봉)은 2,000석이었는데, 두기에게만 특별히 상향 조정된 '중2
천 석'은 이보다 50퍼센트가 많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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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일수록 법질서가 바로서야
조조의 휘하에 고유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조에게 항상 곤란만을 안겨준 고간의 조카
였지만, 고간을 떠나 조조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고간에게 워낙 괴롭힘을 당했던 조
조인지라 그의 조카인 고유를 처음에 좋게 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조조는 고유에게 섣불리 믿음을 줄 수가 없었다. 생각하다 못해 고유를 임명한
것이 죄인을 다루는 자리였다. 죄인을 다루는 일은 형평을 바로잡기가 대단히 힘이 들기
때문에 어찌하든 실수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고유는 이러한 직책을 맡아 조금의 실수
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의 집행이 엄정하고 미결되는 사건 하나 없었다.
이에 조조는 처음과 달리 오히려 그에게 남다른 애정을 베풀고 승상창조연으로 삼았다. 다
시 건안 18년(213)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 당시, 조조는 고유를 군중의 형법을 담당하는 이조
연으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한다.
무릇 안정된 시대를 다스리고 이끌어가는 데는 예법이 으뜸이겠지만, 난세를 바로잡는 정
사에 있어서는 형벌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순임금은 네 흉악한 무리를 내쫓고
고요와 같은 옥관을 두었던 것이며, 한고조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버리고 소하에게 율
령을 제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대는 청렴한데다가 식견도 뛰어나며, 일을 처리함
에 공평하고 타당한 도리를 세워 법률에도 밝으니, 부디 근면근신할 지어다.
조조와 고유에 얽힌 일화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고유는 말하자면 원수같이 생각하는 적의 조카다. 어찌하다보니 자신의 휘하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적과 내통할 것만 같아 항상 자신의 휘하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적과 내통
할 것만 같아 항상 걱정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적의 조카라는 이유
만 가지고 그를 어떻게 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조조는 그에게 실수하기 십상인 자
리를 맡겼는데, 이게 웬일인가! 실수는 커녕 일처리가 더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것이 아닌
가.
하루는 조조가 변장을 하고 늦은 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눈엣가시 같던 고유가 서류에
묻혀서 깜박 잠들어 있지 않은가. 조조는 소리나지 않게 가만히 털외투를 벗어 덮어주고
살며시 물러난다.
조조는 속으로 '이것봐라, 거참 쓸 만한 인재인걸!' 한다
고유는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모두
가 사심이 아니라 대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밤에 덮여진 외투의 임자였던 조조는 고유
가 입을 여는 것이 마냥 즐겁고 고맙기만 했다.
이러한 고유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고향은 진유라는 곳이었는데, 이곳
은 바로 조조가 처음으로 기병 했던 곳이기도 하다. 고유는 이 고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
했다.
- 이제 숱한 영웅들이 제각기 패권을 잡겠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진유
땅은 가장 치열한 싸움터가 되겠지요. 조조는 지금 연주에 머물고 있지만, 그는 원대한 뜻
을 품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그대로 앉아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곳의 태수 장막
도 틈을 엿보아 떨쳐 일어날 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 진유에는 살아날 사람이 아마 없게
되겠지요. 저는 이제 여러분들과 같이 이곳을 떠났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나이 어린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머지않아서 고유의 말은 현실로 나
타났다.
고유는 지극한 효성과 강직함으로도 소문이 났었는데, 원소를 무찌른 조조는 그에게 관이
란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곳에서 여지껏 수탈을 일삼았던 못된 관리들이 고
유가 부임해온 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줄행랑을 쳤다. 이에 고유는 그들은 가시 불러들여
지나간 죄를 용서하고 다시 임무를 맡기자 한결같이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조조는 후일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매우 혹
독한 면이 있었다. 특히 싸움에 있어 도망병에 대한 처벌은 더욱 그러했다. 한번은 군악대
가운데 송금이란 자가 도망친 적이 있었다. 조조가 만든 '신과'라는 법에 따르면 싸움중에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그의 처자식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송금의 처
자식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조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도망자가 더 늘어날 것이 염
려되어 법을 더욱 강화시켜, 송금의 어머니와 두 동생마저 노역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러
자 다시 조조의 주위에서 이들마저 죽여야 한다는 의논이 일기까지 하였다. 이때 고유는
조조에게 말했다.
- 병사들이 도망하는 것은 참으로 미운 일입니다. 그러나 듣자하니 그들 가운데 후회하
는 자들도 있다고 하옵니다. 제 생각에 도망자의 처자식을 아예 용서해주시면 어떨까 합니
다. 그러면 적진에서 그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처럼 법을 적용해도 지나친 처사이온데 이제 이를 더욱 강화시킨
다는 것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도망친다면 그 가족은 장차 자기
들마저 죽게 될 것이 두려워 모두 도망쳐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일래야 죽일 수도
없지요. 이것이야말로 도망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도망치게 만
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고유의 건의를 받은 조조는 이를 흔쾌히 수용하고 송금의 어머니와 동생을 살려주었는데,
이러한 고유의 말로 살아난 사람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조조가 [논어]를 탐독하였던 흔적은 그의 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논어
]에서 줄곧 강조되어 온 덕치나 예교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덕치와 예교가 이상적일 수
는 있으나, 그것은 엄연히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고 난 뒤에라야 조화를 이룰 수 있
다고 보았다. 따라서 당대의 현실이 결코 태평성세라고 할 수 없을진대, 예와 형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태평성세라고 일컬
어지는 순임금 시절에 고요와 같은 유능한 법집행관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다고 하여 혹독한 처벌만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진나라의
가혹한 형벌에 대해서 한고조가 소하에게 법령을 간단하게 만들도록 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
었다. 결국 형벌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의
조화를 감안하여야 하는 것이다. 형벌에 대한 조조의 인식은 단순한 이해로 그친 것이 아
니라, 바로 법리에 밝은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권면함으로써 표리의 조화를 이루었
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처럼 고유에 대한 불쾌감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오히려 그에게
높은 직책을 수여하며, 기대 어린 당부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조조의 용인술이었
던 것이다.
의심 나면 쓰지 말고 쓰거든 의심하지 말아야
난세에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고, 마
찬가지로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을 믿고 같이 일을 추진
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조조는 사람을 다룰 적에 쉽게 신뢰를 주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를
믿었으면 대단히 결정적인 계기가 없는 한 그 믿음이 변치 않았다. 한번 커다랗게 믿은 뒤
에는 사소한 의심으로 그 믿음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승상의 자리에 오른 뒤에 조조는 승상부에 동조와 서조의 직책을 두어 인사에 관련된 업
무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서조는 승상부의 관원들을 임명하거나 파면하는 업무
를 관장하였다. 다음은 조조가 장제를 서조에 임명하는 장면이다.
순임금이 고요를 등용하자 어질지 않은 자들이 자취를 감췄다고 하오. 이제 옳고 그름의
판단이 정확하기를 어진 그대에게 바라오.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는 선인들의 지혜를 조조는 실
천으로 옮긴 것이다.
장제의 인물됨은 워낙 빈틈이 없고 또한 그 일처리는 꼼꼼하고 강직하기 이를 데 없어 사
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와서 장제가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들은 조
조는 자신있게 말하였다.
- 장제가 설마 그러할까! 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필시 어리석은 사람의 소행일
것이다. 공연히 모함을 즐기거나 반란을 꾀하는 자가 지어낸 것일 게야.
이렇게 말한 조조는 소문의 진원지를 서둘러 색출하도록 시키고, 오히려 그를 승상주부의
서조속으로 삼았다. 조조의 신임이 한층 두터워진 장제는 그 후에 맡은 일을 더욱 열심히
했음은 물론이다.
한번 일을 맡겼으면 끝까지 믿어야
왕필이라는 신하가 허도에 머물며 황제의 호위부대인 우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조의 측근 가운데 누군가가 왕필을 못미더워하여 고체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그
때까지 자신이 지켜보았던 왕필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고 그 직책을 예전대로 수행할 것을
지시한다.
장사의 직책을 겸직하고 있는 왕칠은 마치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듯 온갖 어려움을 당할 때
부터 나를 도와 일했다. 그는 충성스럽기 이를 데 없어 무슨 일을 맡든 철저했고, 마음은
철석과도 같으니 나라의 훌륭한 관리감이 분명하다. 어쩌다 오래도록 중책을 맡기지 못했
을 따름이다. 눈앞의 천리마를 버려두고 타지 않고 다시 어디를 헤매며 구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짐짓 그를 불러들여 이미 능력에 맞는 자리를 맡긴 것이다. 장사로서 예전처
럼 일을 겸직하도록 하라.
충정 어린 직언은 언제든지 받아들여야
지나친 형벌의 적용은 자칫 억울함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창조적인 의견의
제출마저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손권을 공격하려고 할 때였는데 장마가 계속되는 등 여건
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여기저기서 손권 정벌을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조는 한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몹시 마음
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손권 정벌에 대해서 다시 말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노
라고 경계령을 내렸다. 조조가 이처럼 단호하게 언로를 막은 적은 예전에 별로 없었던 일
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규라는 자가 정벌이 옳지 않다는 건의서를 올리려고 글의 초안을 작성
하다가 발각되어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의 충정을 이해하고 복직시킨다.
가규가 악의를 가지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제 그를 다시 복직시키도록 하시오.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가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조에게
간하려고 하였던 것도 어쩌면 어려서부터 길러진 강직한 기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일
찍이 고아가 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겨울이면 입고 나설 만한 변변한 바지 한벌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번은 그의 처형이 집에 와서 잔 적이 있었는데, 아침에 마땅히
걸칠 것이 없었던 그는 그만 처형의 바지를 꿰어 입고 문밖을 나섰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를 상피 붙어먹은 자라고 놀려댔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가규가 어려서부터 전쟁
놀이에만 열중하는 것을 본 그의 할아버지는 병법을 입으로 가르쳐줬다고 한다.
가규가 후일 하동의 속현인 강읍을 다스릴 때의 일이다. 때마침 원소의 휘하의 곽원이
이 지방을 쳐들어와 휩쓸게 되었다. 주변의 모든 고을이 쉽게 함락되었지만, 가규가 지키고
있는 강읍만은 관민이 똘똘 뭉쳐 워낙 완강하게 버티는지라 쉽사리 함락할 수 없었다. 그
러자 곽원은 오랑캐 선우와 힘을 합쳐 다시 쳐들어 왔다. 어쩔 수 없이 함락의 위기에 놓
이게 되자 강읍 사람들의 곽원에게 간청하였다.
- 우리의 현령인 가규만은 죽이지 말아주시오.
성이 함락된 뒤 가규를 욕심낸 곽원은 그를 굴복시키려고 하였지만, 가규는 털끝만큼도
동요함이 없었다. 사람을 시켜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도록 하자, 그는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
다.
- 내 어찌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너희 같은 적도들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화가 불같이 치솟은 곽원이 가규를 당장 처형하려고 서둘자, 강읍의 모든 백성들의 성 위
로 올라가 외쳤다.
- 약속을 저버리고 우리의 어진 현령을 죽인다면, 우리도 다 함께 죽겠소.
이렇게 해서 가규는 생명을 건지게 된다.
가규의 이러한 기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의 귀에까지 들어가, 곧이어 그는 민지령이
란 직책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가규는 다시 한 번 조조의 신임에 부응하여 그의 지혜와 용
맹을 떨친다. 그러자 마초를 공격하는 길에 홍농을 들른 조조는 홍농이 서쪽 지역으로 진
출하는 요충지임을 깨닫고는 가규를 홍농 태수에 임명한다.
가규에게 홍농 태수라는 직책을 맡기고 나서야 안심하고 조조는 원정길에 서둘렀다.
- 천하의 태수들이 모두 가규만 같다면야,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규의 인물됨이 강직하여 따라갈 자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때로는 어려움도 많았다. 당
시 둔전은 중앙에서 직접 관할하는 체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의 둔전을 관장하
는 둔전도위는 태수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당히 고자세였다.
한 둔전도위가 가규에게 불손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를 보다 못한 가규는 급기야
그를 잡아다 몽둥이 찜질로 다리를 부러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가규는 면직되고 말
았지만 그를 신뢰하는 조조는 오래지 않아 가규를 다시 불러 자신의 비서관 격인 승상주부
로 삼았다.
미축을 영군태수에
조조는 건안 원년(196) 헌제를 옹위함으로부터 전란을 종식시켜야 할 책무를 짊어지게 된
다.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적절한 인물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 곳이라도 안정을 되
찾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다음의 글은 조조가 미축이란 사람을 뽑아
새로 편입된 지역의 관리로 임명할 것을 헌제에게 간청하는 내용이다.
태산군은 광활하게 넓을 뿐 아니라 지난날에는 도적이 들끓던 곳이옵니다. 이러한 상황
을 감안하시어 다섯 현을 떼어 내 영군으로 만들고, 청렴한 사람을 가려뽑으셔서 이곳을 지
키는 장수로 삼았으면 하옵니다. 편장군 미축은 평소에 충성심이 깊고 절개가 굳을 뿐만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이러한 미축을 영군태수로 삼아 그곳의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도록 하시옵소서.
미축은 지금의 억만장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갑부였다. 그는 집에서 부리는
머슴이나 머무는 손님이 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갑부도 하루아침에 망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귀신에 얽힌 이야기다. 시대가 혼란스러워 내일을 기약할 수 없
게 되면, 잡귀나 미신이 성행하게 되는 법이다. 그 당시가 실로 그러하였다.
미축이 낙양에 갔다가 고향 동해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덧 고향이 몇 십 리밖에 남
지 않았을 즈음에서 귀부인 한 명을 만났다. 걷기에 지친 듯한 이 부인은 미축에게 태워줄
것을 간청하였다. 미축은 흔쾌히 부인을 태워줬다. 이리하여 다시 몇 리쯤이나 더 갔을까?
부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수레에서 내렸다. 수레에서 내리 부인은 멈칫 멈칫거리다가
미축을 불러 세우고 말했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입니다. 지금 난 동해땅 미축네 집을 불사르려고 가는 길이
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당신의 수레를 타게 되었지요. 이제 당신의 호의에 감동하였던지라
내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리는 것이랍니다.
이에 놀란 미축은 부인에게 매달려 사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부인이 할 수 없다
는 듯이 말했다.
- 허나 저로서는 불을 놓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나는 느릿느릿 갈 터이니, 그대는 서둘러 가십시요. 해가 중천에 왔을 때 불길이 솟을 것입
니다.
이리하여 잽싸게 집으로 달려온 미축은 재물을 모두 집밖으로 옮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낮이 되자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다.
미축은 유비와 처남매부 사이로, 유비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서주목 도겸의 밑에서 별가종사로 있었는데, 도겸이 죽자 유비를 맞아들여 서주목으로 앉혔
던 사람이다. 이때가 건안 원년이었다. 여포는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유비
의 근거지를 빼앗고 하비성을 공격하여 유비의 처자식마저 억류한 적이 있었다. 이리하여
떠돌이 신세가 된 유비에게 미축은 자신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삼게 하였으며, 또 2,000여명
의 병사와 재물을 희사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조조는 이러한 유비의 일행을 맞
아들였고, 미축 또한 조조의 마음에 들어 영군의 태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
아서 유비는 조조와 길을 달리하였고, 미축 또한 유비를 따라 영원히 조조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어지러운 고을을 그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태산군은 전란으로 많은 시달림을 받았던 곳이다. 백성들은 터전을 버리고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런 고을에 조조는 여건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크고 작은 침입이나 반란을 진압하
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모시켜놓았다. 이에 조조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무재와 더불어
황제를 호위하는 우림기병을 통솔하는 기도위라는 직책을 내리고, 태산군도 여전히 다스리
도록 하였다.
무릇 마음에 뜻을 두면 반드시 그 일을 이룬다고 하는데, 절개 굳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대는 태산의 태수로 부임한 이래 간사한 무리들과 도적들을 사로잡고 폭도들을 토벌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적진을 몸소 뚫
고 싸우면서 매번의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옛날 구순은 여와 영에서 이름을 드날
렸고, 경감은 청주와 연주에서 공을 세웠지요. 이제 그대의 업적이 그들과 버금갑니다.
조조가 여건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오래 전 연주목이란 직책을 맡고 있던 시절부터였다.
조조가 보기에 여건은 담력과 책략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환란을 이겨
내고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를 조조는 관심을 가지고
줄곧 지켜보았고, 그 또한 한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여건은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가 뽑아 일을 맡긴 사람 가운데 왕상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왕상득리로 유명한 효자중의 효자다.
왕상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계모를 모시고 살았다. 계모는 왕상을 번번이 헤치거나
괴롭히려고 하였지만 왕상의 효성을 그럴수록 더하였다. 엄동설한 어느 겨울이었다. 어머
니가 갑자기 잉어를 먹고 싶어했다. 이에 왕상은 강으로 가서 꽁꽁 언 얼음을 깬 뒤 옷을
벗어붙이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가는 어머니의 입맛을 맞추어 드렸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지극정성인 그의 효심 앞에서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는 30여 년을 봉양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여건의 주선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이 때 그
의 나이 쉰이 넘었다. 그는 곧고 성실하며 능력도 뛰어나 세인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공과
태위등 최고의 관직까지 지낼 수 있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
본"인 것이다.
그대라면 믿을 만하오
건안 24년(219)에 조조는 안팎으로 위급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몸소 서쪽으로 원정하여
유비와 싸우고 있을 즈음에, 다시 남쪽에서는 관우가 번성을 공격해 들어온다. 그런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왕도인 업성에서는 위풍이란 자가 군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
으켰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참으로 간담이 서늘했던 한 순간이었다. 이에 조조는
서혁을 뽑아 업성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하면서, 다음의 명령을 내린다.
옛날 초나라에 득신이 있었기에, 진문공은 편히 앉을 수도 없었소. 또한 한무제 때에는
조정에 급암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회남 왕은 모반을 접었다고 하오. [시경]에서도 그랬
지요. "그대는 나라의 기둥이다."라고. 이 모두가 아마 그대를 일컬음이 아닌가 싶소!
먼저 그 당시 반란의 주모자였던 위풍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는 뛰어난 언변과 호소력
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몰고다녔던 사람이다. 이러한 그는 종요의 추천으로 서조연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조조가 업성을 비운 틈을 이용하여 업성을 점거할 생각으로 모반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 날짜가 돌아오자, 자신의 조직원 가운데 하나가 그만 업성에 남아서
지키고 있던 조비에게 고해바치고 말았다. 이리하여 곧바로 위풍은 피살되고 그 일당도 진
압되었지만, 위풍을 추천했던 승상 종요와 업성의 치안 담당자인 중위 양준은 파면되었다.
보고를 받은 조조는 탄식하며 말했다.
- 위풍같은 작자가 감히 모반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내 밑에 야무진 신하기 없기 때문
이다. 어찌하면 제갈풍과 같은 사람을 얻어 양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 때 곁에 있던 환계가 서혁을 추천했고, 조조도 그의 인물됨을 익히 알고 있었던지라
곧바로 그를 임명했다.
서혁은 조조가 사공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신임을 받았다. 여러 종류의 직책을 두루 거
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그의 강직한 성미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정의란 자가
있었는데, 이사람은 뛰어난 재주와 언변을 지니고 있었다. 조조가 사위로 삼으려고까지 하
였던 인물이고 보니 꽤나 들먹거렸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런 정의와 친해지려
고 노력하였으나, 서혁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번이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의 때문에 서혁은 한때 관직에서 멀러난 적도 있었지만, 그의 강직한 인품은 또
다시 조조의 부름을 받게 된다.
한번은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려고 떠나면서 뒷일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조가
당부한 말을 보면 그에 대한 신임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그대의 충성심과 곧은 성격은 그 옛날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요. 하지만 그
대는 좀 성격을 부드럽게 하였으면 더 좋으련만. 예전에 서문표란 사람은 자신의 조급한
성미를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항상 부드러운 가죽끈을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그대가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이기는 그런 방법도 좀 터득했으면 하오. 이제 그대에게 이곳의 일을
부탁하노니, 나로 하여금 뒷걱정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길 바라오.
득신이란 사람은 자가 자옥으로 춘추시대 초나라 성왕의 장수였다. 당시 초나라는 진나
라와 큰 싸움을 벌였는데, 초나라 군대를 이끄는 장수가 바로 자옥이었다. 그리고 적국 진
나라의 왕은 다름 아닌 진문공으로 19년을 국외로 망명하는 동안 초나라의 신세를 많이 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열국들 사이에 얽힌 관계는 하루를 점치기 어려울 정도로 시비가 뒤바
뀌었으니, 어디 어제의 시혜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서로간에 밀고 밀리는 싸
움에 결국 진나라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진문공은 싸움에 이기고도 탄식이었다.
- 초나라 군대를 무찔렀는데도 어이하여 대왕께서는 걱정이십니까?
- 내가 듣기로 싸움에 이기고 나서 편안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성인뿐이라고 하오. 그래
서 나는 두려워하는 거요. 또한 저쪽에 아직도 자옥이 살아 있거늘 내 어찌 즐겁겠소.
그런데 싸움에서 진 자옥은 성왕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다.
이 소속을 들은 진문공은 그때서야 기뻐하였다고 한다.
급암은 한무제때의 대신이었다. 그의 강직함은 물불을 가리지 않아서, 어떤 높은 권세를
가진자가 왕과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
시 [회남자]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회남왕 유안은 역모를 품고 장기간 준비를 마쳤으나, 오
로지 급암이 조정에 버티고 있음으로 해서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 결국에는 역적모의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 자결하고 말았다.
왜 그대들을 보내는지 아는가
건안 22년(217) 유비가 오란을 파견하여 하변이란 곳에 주둔하자, 조조는 곧바로 자신의
사촌 동생인 조홍을 보내 이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홍은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뛰
어났지만, 그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성미가 급했다. 이에 조조는 이러한 조홍의 과오를 옆에
서 바로잡아줄 만한 사람, 곧 신비와 조휴를 수행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옛날 한고조께서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였거늘, 장량과 진평이 그 허물을 바로잡았
다고 한다. 이제 신좌치와 조문열의 노고가 가볍지만은 않으리라.
우수마발처럼 하찮은 약초도 잘 간수하였다가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훌륭한 의원이다.
'우수'는 '차전자'라는 약초로 곧 길섶에 흔히 자라는 질경이며, '마발'도 습지나 썩은 나무
등걸에서 자라는 풀이다. 이처럼 하찮은 풀이라도 여러 가지 약재와 어울리면 좋은 약이
된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풀포기조차도 의미 없는 것이 없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제각기 쓸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품성도 갖가지고 재능도 한결같지 않다.
따라서 완벽한 인간의 추구란 그 자체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원이 갖가
지 약초의 성질을 헤아려 좋은 약을 만들어 내듯, 지도자는 여러 사람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잘 활용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조조는 이러한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인물이다.
신비의 자는 죄치, 조휴의 자는 문열로 조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들이다. 이러한 신임이
깔려 있었으므로 당부의 말도 지극히 간결하게 "노고가 가볍지만은 않으리라."로 대신하였
다. 아울러 자신과 동족인 조홍의 결점을 굳이 드러내기도 마음내키지 않아 하는 조조의
심사도 엿보인다.
그렇다면 신비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는 형 신평과 함께 원소를 모시고 있었다. 신비
는 일찍이 조조가 사공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탐냈던 인물이었으나, 이미 원소의 휘하에 들
어간 그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원소가 죽고 난 뒤 원상이 평원성
에서 그의 형 원담을 공격하였을 때다. 동생의 공격을 버티기 어려웠던 원담은 평원상 신
비를 조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원담의 사자가 되어 조조를 만나게 된
신비는 자신의 언변을 한껏 발휘하게 되는데, 이때 오고간 조조와 신비의 기탄 없는 대화는
가히 일품이다.
당시 조조는 형주의 유표를 칠 생각으로 서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비로부터 원담의
항복의사를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공격하는 말머리를 돌려 기주로 갈 생각이었
으나, 며칠 뒤 다시 생각을 바꿔 유표를 치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눈치챈 신비가 조조
를 만났다. 이때 조조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 원담을 믿어도 될까? 게다가 원상을 이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단 말야!
- 명공(조조)께서는 지금 믿고 말고를 물으실 계제가 아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셔야 합니다. 원씨 형제가 저렇게 서로 싸우는 것은 실로 큰 착각에
서 비롯된 우둔한 행동입니다. 저들은 아랫사람들의 이간질에 속는 줄은 모르고, 이기기만
하면 마치 천하를 평정하기나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명공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 원상이 원담의 어려움을 보면서도 곧장 무너뜨리
지 못하는 것은, 그도 힘이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밖에서 패하고 모신들은 안에서
죽어갔는데도, 형제는 여전히 다퉈 이미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해마다 계속되는 싸움으
로 투구와 갑옷엔 서캐와 이가 들끓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가뭄과 황충의 피해로 기근마
저 들었습니다. 나라 안에는 저장된 곡식도 없으려니와 밖으로는 병사들이 먹을 마른밥조
차도 없습니다. 위로는 천재요 아래로는 이재를 만나, 그곳의 백성들은 어리석고 그렇지 않
고를 떠나 누구나 다 와해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원상을 저버렸음을 증
명하는 것입니다. 병법에서도 그런 않았습니까? "돌로 된 튼튼한 성과 커다란 연못, 그리
고 백만의 대군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으면 지킬 수 없다."고. 이제 명공께서 업성을 공격
하신다면, 원상은 군대를 돌려 구원하려 달려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도 본거지를
잃고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원담이 그
뒤를 습격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이때 명공의 위엄으로 피곤에 지친 적을 치기란 마이
세찬 바람이 가을 낙엽을 쓸어버리는 것과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원상을 명공
에게 주려하심인데, 이제 명공께서는 취하지 않으시고 형주를 치려고 하시다니요? 또한 형
주는 먹을 것도 넉넉하고 백성들도 안정된 마당에 흠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경]에서
중훼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어지러운 나라는 공격하여 얻고, 망할 징조가 보이는 나라는
그대로 병합한다."고. 지금 바야흐로 원씨 형제는 별달리 원대한 계획도 없으면서 서로 치
고 받고 싸우니 이른바 어지럽다는 증거요, 안으로는 곡식이 없고 밖으로는 군량도 바닥났
으니 이른바 망할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실로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
로 하루하루 연명하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어쩔 도리도 없이 오직 내년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지요. 그런데 혹시 내년에 풍년이라도 들어보십시오. 언뜻 정신을 차려 백성을 돌보
고 안팎을 추스린다면, 이는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시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하오니 이제 원담의 간청을 받아들여 어루만져주신다면, 그 이로움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입
니다. 뿐이겠습니까? 지금 천하 사방의 적들 가운데 하북의 원씨 형제만큼 강한 세력도
없습니다. 만일 하북을 평정하신다면 명공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천하를 진동시킬 것입
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이치에 꼭 들어맞았다. 이에 조조는 다시 형주를 치려는 생각을 접고
여양으로 군대를 돌려, 다음해 업성을 함락하게 된다. 원소 형제로서는 결국 믿고 보낸 사
자가 원수 조조의 명참모 노릇을 하고 만 격이다. 조조로서는 인복이 터진 것이고 원소 형
제로서는 형세를 판단하고 사람을 담아내는 그릇이 작아 생긴 자업자득의 결과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조는 업성을 함락하고 난 뒤 신비를 치하하고 의랑에 천거하였다.
조휴는 조조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후한 말의
혼란을 맞아 조조의 집안도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모양이다. 조휴도 고향을 떠나 10여 세
에 늙은 조모를 모시고 오군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조가 의병을 일으켰
다는 소문을 듣고 천신만고 끝에 조조에게로 돌아왔다. 이때 조조는 "우리 집안의 천리마"
라 칭찬하고 아들처럼 사랑하여 조비와 같이 기거하도록 하였다. 조조가 이렇듯 그를 원정
때마다 데리고 다니며 친위대장으로 삼았던 것만 보아도 신임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
다.
조홍을 수행하여 보낼 때도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 이제 너는 비록 홍의 참모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네가 대장이니라.
이곳에서의 전투는 예상보다 큰 싸움으로 비화되었다. 사실 이 곳은 조조의 세력권과 유
비의 세력권이 맞닿는 완충지대였다. 따라서 이곳을 누가 완전히 장악하느냐 하는 문제는
향후 주도권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유비측에서도 조홍이 오는 것을 보고 휘하의 명장
장비와 마초를 추가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조가 조휴와 신비를 묶어 보냈던 배려는 적중
했다. 조홍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조급하게 처단하지 않고 항상 조휴나 신비의 의견을 따
랐다. 그리하여 유비의 공격을 무난히 차단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조조가 걱정했던 문제가 자칫 터질 뻔하였다. 승리감에 도취된 조홍은 아니나 다
를까 흥겨운 술판을 벌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느닷없이 무희들을 불러들였는데, 하
나같이 얇은 비단 옷만 걸친 채 거의 알몸들이었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무희들이
춤을 더욱 출수록 그들은 몸에 걸친 비단옷이 나풀거렸고 좌중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신비나 조휴도 별반 말리지 않았다. 만일 이런 일이 싸우는 도중에 일어났
다면 반드시 말렸겠지만, 워낙 주색을 밝히는 조홍인지라 한 번쯤 해소하는 것도 무방하리
라 여겼나보다. 이 때 정색을 하고 조홍을 나무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무도 태수 양부였
다.
- 남녀가 유별한 것이 나라의 법도이거늘, 어찌하여 뭇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여자의 알몸
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이오! 비록 걸왕과 주왕이 문란함이라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양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조홍은 조조의 경계도 있었던지라, 곧바로
무희들을 물리치고 양고를 주저앉혔다.
본문 가운데 한고조의 탐욕과 호색을 바로잡은 사람을 장량과 진평이라고 하였는데, 이것
은 조조의 실수가 아니면 오기다. 진평이 아닌 번쾌다. 한고조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제
일먼저 입성하였을 당시, 유방은 그 많은 보물과 궁녀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곁에서
장량과 번쾌가 제지하였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때 만일 유방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였
다면, 민심은 커녕 천하도 그의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오.
병원이란 사람은 조조가 활약하던 시대에 사대부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던 인물이다. 어
렵사리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조조는 그에게 태자 조비를 잘 가르치도록 부탁한다.
간결한 몇 마디로 임명의 말을 대신하였지만, 그 가운데에는 자신의 성품과 아울러 대로는
부드럽게 이끌어야 할 필요도 있으리라는 은근함도 배어 있다.
내 아들은 나약하고 재주마저 없으니 바로잡기 어려울까 염려되오. 욕심이 많은데다가
자제력도 부족하니 바른길로 이끌어주시오. 비록 어진 사람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쑥
스러워하지 않겠소이까?
건안 12년(207) 겨울이었다. 조조는 천신만고 끝에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조조는 업성이 그리 멀지 않은 창국이란 곳에서 연회를 열고 승리를 자축했다. 술이 얼큰
해진 조조가 말했다.
- 내가 이기고 돌아왔으니, 이제 곧 저기 업성의 제군들이 우르르 몰려오겠지! 오늘이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는 빠짐없이 올 거야. 그렇지만 그 가운데 딱 한 사람, 병원은 오지
않을 테지!
이보다 앞서서 조조는 "구름 속에 숨어있는 백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림의 거목 병원을
동각좨주로 임명한 적이 있었으나, 워낙 고고하였던지라 조조도 어찌할 수 없어서 한 말이
었다. 조조의 말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서였다. 병원이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천만 뜻
밖에도 그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조조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신을 손에 든
채 부리나케 마중을 나갔다.
- 어진 사람은 참으로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단 말이요? 내 생각에 당신은 틀림
없이 오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데, 이렇게 멀리서 왕림하시다니요? 실로 나의 허기진 마음
을 채워주시는구료.
조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병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
갈 때였다. 수백 명의 사대부들이 우르르 병원에게로 몰려가 인사를 들이는 것이 아닌가?
조조가 괴이하게 여겨 곁에 있던 순욱에게 물었다.
-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병원의 안부를 묻는 것이지요.
- 명성이 저처럼 높으니, 사대부들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겠군!
- 저 사람은 우리 시대에 본받아야 할 특별한 사람으로, 사대부들의 표상이옵니다. 하오
니 명공께서는 마땅히 예를 다해 대접해야만 할 것입니다.
- 그럼, 참으로 나 또한 그런 마음을 먹은 지 오래였다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로 조조는 그를 더욱 더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렇다면 조조도 마음으로부터 존경한 병원이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학문과 고결한 인품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천하의 패권을 얻으려는 사람들
로부터 숱한 부름이 있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나라를 휩쓸었을 때는
가족들을 이끌고 섬으로 피난하여 울주산이란 곳에서 지내다가, 요동으로 옮겨와 살았다.
병원이 요동이 머물러 지낸다는 것이 알려지자 1년 내에 그가 사는 마을로 수백 가구가 몰
려와 살았으며, 수학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사공에 오른 조조 휘하의 인물이 되었는데, 때마침 조조는 사
랑하던 아들 조충을 잃었었다. 이때는 건안 13년으로 조충의 나이도 겨우 13살이었다. 조
충은 환부인의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재주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가 대여섯 살
되던 해였다. 오나라에서 손권이 엄청나게 큰 코끼리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조조는 도대
체 이 짐승의 무게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뭇사람들에게 이것의 무게를 달 수
있는 방법을 물었으나,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이 때 어린 조충이 싱겁다는 듯 뇌까렸다.
- 하 참! 코끼리를 배에 실어 뱃전에 물에 잠겨들어간 만큼 표시해두었다가, 다른 물건
을 실어보면 될 것을 가지고선!
모두가 조충의 기지에 놀랐음은 물론이다. 영민함이란 잡다한 지식과 속세에 찌든 핏발
선 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해맑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법이다. 또한 조조의 지칠 줄 모
르는 탐구욕이 이러한 일화의 기초적 배경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조조의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의 죽을 위기에 빠졌다. 창고
에 넣어둔 조조의 안장을 쥐가 갉아먹어 몹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때마침
조조의 심경이 날카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까딱하면 생명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조충은 창
고 관리원에게 3일뒤에 모습을 드러내라고 일러놓고, 자신의 옷을 마치 쥐가 슬은 양 칼로
저며놓고는 수심이 가득찬 양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조조가 물었다.
- 사람들이 그러던 걸요. 쥐가 옷을 갉아먹으면 그 옷 주인이 안좋다고!
- 쓸데없는 소리. 다 헛소리란다. 걱정할 것 전혀 없어!
이때 창고 관리원이 나타나 쥐가 물어뜯어 엉망이 된 안장에 대해서 고했다.
- 내 자식의 옷은 곁에 두었는데도 쥐가 슬었는데, 창고에 넣어둔 안장쯤이야?
이처럼 영특하고 귀여운 자식이 죽고 나니 조조는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죽은 자식
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병원의 어여쁜 딸도 얼마 전에 죽
었다. 이에 조조는 영혼결혼식이라도 올려주고 싶었던지 합장을 제의했다. 그러자 병원은
당차게 말했다.
- 합장은 예가 아니오이다. 이 몸이 스스로 명공에게 몸을 허락하였던 것은, 명공께서
저로 하여금 올바른 도리를 저버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공의
지시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공께서는 어찌하시렵니
까?
조조는 끝내 자신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건안 16년 지리했던 후계자 논쟁이 조비로 결정이 되자,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유독 병원은 공적인 일이 아니고서는 조비에게 가까이 가질 않았다.
조조는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넣어 슬며시 물어보게 하였다.
- 내가 알기로는 나라가 위태로울 땐 재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임금이 자리를 비울 땐 세
자를 받들지 않는 것이 도리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조조는 그를 오관장사로 삼아 조비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때도 일화 한 토막이
전해진다.
태자 조비가 마련한 연회에 100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조비는 흰소리를 하였
다.
- 임금과 아버지가 다 같이 살아나기 어려운 병에 걸렸소. 그런데 여기 딱 한 알의 약,
그러니까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 약이 있소. 임금을 살리겠소이까? 아버지를 살리겠소이
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의견이 분분했다. 임금을 살리겠다느니, 아버지를 살리겠다느니. 그
러나 곁에 있던 병원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에 태자 조비가 의견을 물었다. 이윽고 병원
은 퉁명스럽게 한 마디로 이야기했다.
- 그야 물론 아버지이지요!
머쓱해진 조비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러한 병원에게는 한 가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많은 자리를 거쳤지만 그는 그 때마
다 병을 핑계로 항상 집에만 붙어 있고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조조도 이것 많
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이를 흉내내려고 하는 것이었
다. 앞에서 살펴본 장범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로서는 병원이
공직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관없이, 그 이상으로 효과를 거두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는 패전의 책임도 묻겠소
마땅한 적임자를 찾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부적절하게 기용되는 일을 없앤다는 뜻도 된
다. 능력에 맡는 자리를 맡기고 그 소임을 다했을 때 포상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반대로 믿
고 맡긴 일을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했을 때는 응분의 조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조는
지금까지 포상에만 치우쳤던 점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그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건안
8년(203) 이 명령을 내린다.
[사마법]에 "장군이 싸움에 임하여 퇴각하며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지요. 그래서
조괄의 어머니도 아들이 싸움에 패하더라고 그녀까지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빌었던 것입니
다. 이것은 바로 옛날에도 장군이 밖에서 싸움에 지고 돌아오면, 안으로 집안 식구들이 죄
를 받았다는 뜻이외다. 내가 장수를 파견하여 출정시킨 이래, 공로만 포상하고 죄를 처벌하
지 않았던 것은 국법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여러 장수들에게 풀정을
명령함에, 싸움에 패하면 죄를 주고 손실을 끼치는 자에게는 관직과 작위를 거두어들이겠소
이다.
[사마법]은 중국 고대의 군사 업무에 관계된 의식이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한서예문
지]에도 이와 관계된 155편의 기록이 있기는 하나,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5편만이 남아서
전해진다. [수서]나 [구당서] 및 [신당서예문지]등에 서는 사마양저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
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시대 제경공때 사마양저가 병법을 저술한 적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뒤 제위왕이 신하들에게 명하여 고대의 병법을 엮게 한 적이
있었는데, 양저의 병법도 그 가운데 일부분으로 끼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조나라 효성왕 7년(260)에 진나라와 조나라가 장평이란 곳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실로 양
국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싸움이었다. 당시 조나라 장수 염파는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백
전노장으로, 진군을 번번이 물리쳤던 인물이다. 따라서 진나라로서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대였다. 진군의 의중을 익히 알고 있는 염파는 지구전을 펼치기를 무려 3년, 진군의 부대
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조급해진 진군은 첩보원들을 파견하여 조나라에 소문
을 퍼뜨렸는데, 그 소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마복군 조사의 아들 괄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 염파
처럼 겁 많은 장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염파의 지구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조왕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왕은 염파를 조괄로 교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나라는 전성기를 누려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그것은 오로지 몇 명의 명장과 명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나라에는 평권군을 비롯하
여 염파와 인상여 및 조사 등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전
구깃대의 걸물들이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국운도 시들기 시작하였던지 평원군과 인상여는
늙고 병들었으며, 조사마저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 겨우 한 사람 염파마
저도 신진으로 교체되는 마당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인상여는 병든 몸을 이끌고 왕에게
나아가 충언을 서슴지 않았다.
- 왕께서 명성만 듣고 조괄을 장수로 삼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이제 조괄을 쓰
는 것은 마치 아교로 거문고의 발을 붙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조괄은 그의 아버지가
모아놓은 병서나 읽었을 따름이지, 실제적인 전투에서 가장 필요한 임기응변에는 어둡사옵
니다.
'교주금슬'이란 말이 있다. 거문고나 비파를 만들 때 아교풀로 발을 붙이면 한 가지 소리
밖에 나지 않음을 두고 한 말로, 융통성이 조금도 없음을 일컫는다. 이렇게 까지 말렸건만
조왕의 끝내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괄의 어머니가 직접 글을 올려 조왕을 말리고 나섰
다.
- 내 아들 괄을 장수로 삼아서는 아니되옵니다.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한 나라의 총사령관이 된다는데, 쌍수를 들고 말리
겠는가? 조괄의 어머니 또한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괄의 아버지 조사는 원래 농지의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하급 관리에 불과하였다. 그가
조세를 거두는데 평원군의 집에서 조세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군은 무영왕의 아들이
요 혜문왕의 동생이며 효성왕의 숙부로, 모수자천에 얽힌 고사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세도
가이고 보니 그의 가신들 또한 세리 정도야 안중에 두었을 리 만무하다. 이에 조사는 평원
군의 집사들을 법으로 다스려 아홉 명이나 죽이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평원군은 조사를
죽일 셈이었다. 이 때 조사가 뱉은 말은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 당신은 우리 조나라의 귀공자이옵니다. 이제 당신의 집을 봐줌으로써 공평을 잃는다
면, 법도가 무너지게 됩니다. 법도가 무너지면 나라가 허약하게 되겠지요? 나라가 허약하
면 주변의 제후국들이 쳐들어올 것입니다. 제후들이 쳐들어오면 우리 조나라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무슨 수로 부를 누리겠습니까? 뿐입니까? 당신처럼 고귀
한 자가 법도를 받들면, 위아래가 공평하게 됩니다. 상하가 고르면 나라가 넉넉하게 되겠지
요. 나라의 살림이 풍족하고 넉넉하면 우리 조나라는 굳건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고
귀함을 계속하여 누릴 수 있으리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뭐가 있겠소이까?
이러한 조사를 평권군은 왕에게 추천하였고, 왕은 이를 중용하여 조나라의 재정을 충괄하
게 하였다. 조사는 풍족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진군을 무찌르는 등 혁혁한 전공 마저 세움
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인물이다.
이런 조사의 아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익히는 데 전념하여, 마침내는 아버지는 고
사하고 그 어느 누구도 그와 병법에 관한 이론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
나 조사는 이런 아들을 단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남편
조사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 전쟁이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문제요. 그런데도 우리 아이는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
지 않소 그려! 우리 조나라가 내 자식놈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뿐이겠지만, 만일 장수로
삼는다면 아마 우리 조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자는 틀림없이 이 놈이 될 것이오.
하여 그녀는 극구 말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왕은 듣지 않았다.
- 도대체 이유가 뭐요?
- 이 천첩이 아이의 아버지를 모셨을 때는 이러하였나이다. 장군이 되었을 당시 제가 음
식을 만들면 같이 먹는 사람들이 수십명 이었으며, 친구들이 수백 명씩이나 되었습니다. 또
한 대왕께서나 종실에서 상으로 내리는 것이 있으면 하나도 남김없이 군리나 장교들에게 나
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대왕의 명을 받고 장수가 되어서는 집안 일이라곤 털끝만큼도 묻
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아들은 다르옵니다.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었습니다만
존경하여 찾아오는 군리 하나 볼 수 없으며, 대왕께서 하사한 금은 비단도 우리 집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뿐입니까? 매일 집안 살림을 챙기고 좋은 물건이 있으면 사들
이곤 합니다. 하오니 대왕께옵선 그 애비와 견주어 어떻다고 생각되시옵니까? 아무리 부
자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딴판이오니, 제발 보내지 말아주시옵소서.
- 그대는 그리 걱정하지 말라. 나는 이미 결정하였노라.
- 대왕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이 천첩도 어쩔 수 없사옵니다. 하오나 딱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내 자식놈이 싸움에 지더라도 저를 연좌시키지는 말아주시겠나이까?
- 그러리다. 허나 지는 일은 없을 거외다.
그리하여 장장 3년을 끌어온 지리한 싸움은 불과 40여 일 만에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장군이 된 조괄은 전열을 가다듬는다면서 염파가 여지껏 부려왔던 장교나 군리 및 군제를
모조리 바꿔버렸다. 실로 진군의 작전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이에 진나라의
장군 백기는 풋내기 조괄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조괄은 화살에 맞
아 죽고, 45만명의 조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조괄의 어머니야 약속 대문에 살아날 수 있었
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하후연의 실수를 거울로 삼을지어다
조조의 막하에서 용기로만 따진다면 하후연과 대적할 만한 장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
나 지나치게 성급하고 무모한 면이 있어 항상 조조의 가슴을 조리게 하였던 인물이었다.
숱한 전공을 세운 그였지만 결국에는 무모함으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에 조
조는 곧바로 하후연의 작전상 실수를 면밀하게 조사한 뒤, 이를 글로 써서 모든 장수들에게
하달하여 거울로 삼도록 하였다.
이번 달 적들이 방어용 목책인 녹각을 불살랐다. 녹각은 본진에서 15리나 떨어져 있었는
데, 하후연은 자신이 직접 400명의 병사를 데리고 녹각을 보수하러 갔었다. 그러자 적들은
산 위에서 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골짜기에서 갑자기 쏟아져나와 하후연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후연은 적을 맞아 싸웠지만, 마침내 적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후퇴하였
지만 하후연은 흔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애석하였다. 그는 본래 용병에는 형편없었던지라,
군중에서도 '멍텅구리 장군'이라고 불렸지. 주장은 직접 싸우는 것조차도 피해야 하거늘, 하
물며 녹각을 보수하러 가다니!
조조와 하후씨와의 관께는 남달랐다. 어떤 책에서는 조조의 부친 조숭이 환관 조등의 양
자로 들어가기 전에는 하후씨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좀더 자세한 것은 다음에 이야기할 기
회가 있겠지만, 조씨와 하후씨의 혼인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동족은 아니었
던 것 같다. 하후돈의 아들 하후무는 조조의 사위였고,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연 또한 조조
의 조카사위였다. 당시의 풍속으로는 동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조조가
하후씨와 인연이 깊었고, 또 주위에 하후씨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
후연만 해도 조조가 진유에서 기병할때부터의 수족과 같은 장수였다. 그는 또 조조와 동서
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하후연의 죽음은 조조를 무척이나 슬프게 하였던 모양이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보여줬던 용감무쌍한 모습과 숱한 전공은 제껴두고라도, 거의 한평생을 수족처럼 지내왔던
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조조는 하후연의 조급하고 무모함에 대해서 항상 이렇게 주의를
주곤 하였다.
- 장수라면 겁을 낼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지나치게 용기만 믿어서는 안 되지! 장
수는 마땅히 용기를 기본으로 삼아야겠지만, 그래도 싸울 때는 지략과 치밀한 계획으로 승
리를 거두어야만 하네. 그렇지 않고 단지 용기로만 싸운다면, 그것은 한 필부의 싸움에 지
나지 않지.
이러한 평소의 당부도 크게 그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다. 건안 24년(219) 3년을 끌어온
양평관에서의 유비와의 대치는 모두가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촉한 쪽에서는 유비가 직접 장비와 마초 및 황충 등 맹장들을 동원하
여 독전하였으며, 조조도 하후연을 비롯하여 서황이나 장합 등을 포진시켰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하후연의 죽음을 계기로 이 싸움은 유비의 우세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조조에게 있어서 하후연을 잃은 슬픔은 더욱 그를 아쉽게 만들었던 것이다. 글 가운데 "병
사들은 돌아왔으나, 하후연은 오지 않았다."고 한 말만 보아도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싸움은 실로 조조의 마지막 패전이었다. 조조는 이 패배가 있고 난 뒤 몇 개
월 지난 건안 25년 봄에 편두통이 재발하여 결국 죽고 말았는데, 혹시 이 영향도 받지 않았
나 생각되기도 한다.
고인들이 앉았던 자리는 이러했소
조조의 아들 조비는 아버지의 일상을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손에
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독서광이었던 조조는 옛사람들의 치적과 아울러 그들이 어떠
한 자리에서 어떻게 소임을 다했는가를 한편의 시로 옮겨 보았다.
고공단보는
덕을 쌓고 인을 베풀어
한결같은 도리를 펴
빈에서 백성을 다스렸지요
태백과 중옹
천자의 인자한 덕을 지녔음이여
백대의 모범이로고
머리 자르고 몸에는 문신 새겨 숨었음이여
백이와 숙제
그 옛날의 현자로세
동생에게 나라를 양보하고
수양산에서 주려 죽었다네
지혜로울사 저 산보여
선왕을 도왔음이여
어이하여 두백을 등용하여
우리네 성현 누를 끼쳤을까
제환공의 패업이여
중보의 도움이었지
뒷날 수작을 등용하자
미물들도 흐트러졌다지요
저 안평중은
덕을 쌓고 인을 갖추었지
세상과 더불어 덕을 감춤은
운명만은 아니리니
공자가 살아실 젠
천자를 떠받들어
제도에 따라 의례를 집행하고
벼슬길에 있었다네 [선재행(일)]
여기에서 조조는 10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해 추앙과 비평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주나라 왕조의 터전을 닦은 고공단보를 노래하고, 이어서 나라를 양보하였던 태백과 중옹
그리고 백이와 숙제 등의 덕을 기려 자신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나라를 차지하려는
생각이 없음을 표명한다. 그리고 뒤이어서는 중산보와 관중 및 안영을 찬양하여 신하로서
자신이 절개를 지킬 것임을 은연중에 빗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주선왕과
제환공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말년에 훌륭한 신하를 등용하지 못하여 결국 나라
를 망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다.
조조가 이처럼 시에서 고인들을 등장시킨 목적은 옛일을 빌려 현재를 판단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거나 자기를 변호하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당
시가 제위를 놓고 군벌들이 서로 투쟁을 벌였던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나라를 양보하는
미담이란 아무런 현실적인 의미도 갖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조조 자신도 주문왕을
본받는다는 데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건안 12년 조조가 유비를 정벌하려고 하였을 때
유이가 이를 말리면서 주문왕의 덕을 닦는 것이 좋으리라는 건의를 올렸는데, 그에게 조조
는 "이제 설령 나보고 주문왕의 덕에 맞게 처신하라고 해도, 아마 나는 그런 사람이 죄지는
못할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 4 부 모든 공은 그대들의 것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포악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무찌르기 어느덧 19년이 흘렀
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개인의 공이었겠는가? 이는 곧 현명
한 그대들의 힘이었다. 아직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필코 훌륭한 그대
들과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다.
애석토다 곽가여
곽가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조조 휘하의 모사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은 명이 짧은 것이었던지, 그도 겨우 서른여덟이
라는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러한 곽가의 죽음은 건안 12년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조조의 기쁨 앞에 비통으로 다가왔다. 이에 조조는 곽가를 추천했던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의 절망에 가까운 애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곽봉효는 그 나이 마흔이 채 안 되었건만 나와 더불어 11년 동안을 함께 일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같이 무릅썼지요. 그는 또한 두루 통달하여 세사에 막힘이 없었던지라, 나는 내가
죽은 뒤의 일을 그에게 부탁하려고 하였다오. 그런데 내 어찌 갑자기 그를 잃게 될 것을
생각이나 하였겠소. 비통하고 마음에 사무친다오. 이제 표문을 올려 그의 아들에게 일천
호를 더해주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이오!
생각하면 할수록 애절함이 깊어만 가는구료. 도한 봉효는 진정으로 나의 마음을 알아주
었던 사람이었소. 천하에 서로를 알아주는 사람은 적은게지요. 지기를 잃었음이여! 애통
하고 애석한지고. 어찌하오 어찌하오!
건안 초 어느 날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다.
- 희지재가 죽고 난 뒤로 마땅히 전략을 의논할 만한 인물이 없구료. 여남과 영천에는
원래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고 하던데, 누구 희지재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겠소이까?
이에 순욱은 곽가를 추천하였다. 조조는 곽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기쁨에 넘쳤다.
- 그래, 내가 만일 대업을 이룬다면, 아마 이 사람 때문일 거야!
곽가도 조조를 만나본 뒤,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참으로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야.'
이러한 만남을 기회로 곽가는 죽을 때까지 줄곧 조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
조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명쾌한 지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조조와 여포가 대치하고 있었을 때였다. 몇 차례의 싸움에서 패배한 여포는 하비성으로
들어가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의 군대는 줄기차게 하비성을 공격하였으나, 쉽
사리 함락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도 하나같이 지쳤다. 조조는 어쩔 수 없이 일단 회군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 곽가가 한사코 조조를 말렸다.
- 아니 됩니다. 옛날 항우는 한고조 유방과 70여 차례를 싸웠으나,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전멸하여 목숨을 잃고 나라까지 망치게 된 이유가 무었이
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용기만 믿고 꾀가 없었던 까닭이지요.
이제 저 여포는 싸울 때마다 패하여 기력이 쇠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팎으로 원군도 잃
고 말았습니다. 헤아려보십시오. 지금 여포의 위력이 항우만큼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께서 계속 몰아붙이기만 하신다면 여포쯤이야 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조조는 이러한 곽가의 말을 따랐고, 드디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후 다시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손권의 형 손책이
뛰어난 무력과 용맹을 바탕으로 강동을 차지하였고, 조조와 원소의 대결을 탐타 황제가 있
는 허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때 유독 곽가만이 생각을 달리했다.
- 그럴 수도 있겠지요. 지금 손책은 강동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그가 죽인 사람들은 한
결같이 영웅호걸로 알려진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린 사람들 또한 용맹무쌍한 자
들입니다. 하오나 손책은 경솔하기 이를 데 없어 후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있다손 치더라도, 알고 보면 중원을 외롭게 치달리는 천리마 신
세입니다. 만일 자객이라도 만난다면 필경 일대일의 승부가 벌어지겠지요. 제 짧은 소견으
로는 언뜻 이러한 느낌이 옵니다. 그는 아마 이름 없는 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정말 우연히도 곽가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만일 이 때 소문이 두려워 허도를
방비하기 위하여 주력을 분산시켰더라면, 그런 않아도 수적 열세에 시달리던 원소와의 관도
전투를 승리로 끝마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신기할 정도로 정확한 판단과 예측을
하는 곽가였으니, 조조가 그를 더욱 신뢰하고 흠뻑 빠졌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곽가가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조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지경이었
을 것이다. 조조는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떠나면서 병이 깊은 곽가를 업성에 남겨두고 갔었
지만, 돌아왔을 때도 그의 병은 낫지 않았다. 조조가 보낸 의원과 파발마의 발길이 수없이
이어졌지만, 그는 결국 죽어가고 말았다. 조조는 친히 곽가의 상을 치르고 순유 등을 돌아
보며 탄식하였다.
- 그대들은 나이가 나와 같은 또래이나, 오직 곽가만이 가장 젊었었소. 이제 천하의 대
업을 이루고 난 뒤, 뒷일을 그에게 부탁하려 하였는데... . 그만 한창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
으니, 이것이 정녕 운명이란 말인가!
몸을 사리지 않았던 곽가
조조의 속마음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곽가의 죽음은 조조로 하여금 좀처럼
떨처버릴 수 없는 비탄에 빠지게 했다. 곽가의 아들 곽혁에게 식읍 1,800호를 내리고, 순욱
에게도 편지로 통한의 심정을 하소연했지만 수비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다시
한 번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병약함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열성을 바쳤던 곽가를
애도했다.
애석할사 봉효여! 나의 마음에서 지울 수 없구료. 세상일이나 병법을 다루는 일에서도
그 어느 누가 따를 사람이 없었지요. 또한 사라들은 누구나 병을 두려워하건만, 그는 남방
에 전염병이 돌자 늘상 말하기를 "제가 남쪽으로 간다면 살아 돌아오지는 못할 겁니다."라
고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나와 함께 계획을 의논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오.
이것은 그가 비단 계획을 살피면서 충성심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기필코 공로를 세우
고자 하는 의지에 목숨마저도 돌보지 않았기 때움이었지요.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그러하
였으니, 내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소이까?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관계를 일컬어 '지기' 또는 '지음'이라고 한다. 이런 지기나
지음을 갖기란 언뜻 생각하며 쉬울 법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이 한평생을 두고
이런 지기를 한 명이라도 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수많은 인재 속에서 살았던 조조는 그
런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었다.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는 관계도 바로 이런 인연을 말하는 것이 아
닐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사람을 알되 그 사람의 얼굴만 알 뿐이지, 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호랑이를 그리되 가죽만 그렸지, 뼈는 그릴 수 없는 것과도 마
찬가지인 것이다.
춘추시대 백아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다. 그가 거문고를 타면 말들도 흥에 겨워 풀을
뜯을 정도였지만, 정작 그의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단 한 사람 그의 친구 종자기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항상 어울려 지냈
다. 백아가 마음속으로 태산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타면, 어느새 종자기는 태산을 시로 읊
는다. 다시 넓은 바다를 생각하고 거문고 줄을 몇번 퉁기면, 곧바로 바다를 읊는 시가 종자
기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참으로 둘도 없는 지음지교의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해 종자기
가 먼저 죽고 말았다. 백아는 친구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들
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애통스러웠다. 그리하여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
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백아절현'이란 고사성어는 이렇게 하여 생겨낫는데, 아마
조조가 곽가를 잃은 슬픔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곽가의 빛나는 판단과 안목이 돋보인 사건을 하나 들자면, 오환정벌을 앞두고 있을 때였
다. 오환을 정벌하고 원소군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패퇴시키기 위한 이 싸움은, 어느 누구
도 섣불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조조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원저 나간
틈을 이용하여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도를 치고 들어올 것만 같아 주변의 모두가 이구동성
으로 이 원정을 말렸다. 그러나 곽가만은 달랐다.
-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지금 공의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킨다고 하더라도, 저들
오랑캐는 길이 멀고 험한 것만 믿고 무사태평일 것입니다. 하오니 이런 틈을 이용하여 갑
자기 공격해 들어가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난날 원소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푼 적도 있고, 또 그의 아들 원상과 원희가 그곳에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기주를 비롯해 원소가 다스렸다 네 개의 지역은 우리의 위세에 눌려 따르고는 있지
만, 아직 공의 덕치와 시혜를 피부로 느낄 정도는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환을 마저
치지 않고 남쪽으로 형주를 취하려고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원상은 오환의 힘을 바탕으로
아버지 원소 휘하의 인물들을 모아 다시 치고 내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네 지역이 그들에
게 호응하게 되지요. 오환의 우두머리 답돈 또한 녹녹한 인물이 아닌지라, 엉뚱한 욕심마저
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렵게 얻은 이 네 지역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되리란 보장이 없을 것 아닙니까?
모두들 형주의 유표를 걱정하는 모양인데, 제 생각에는 전혀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 유표는
식객이나 모아놓고 이야기나 즐기는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주가 유비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유비를 중용하면 다룰 수 없을까 걱정이고, 소홀히
하면 떠나갈까 염려하지요. 이러하거늘 유비에게 군사를 내주어 허도를 치게 하겠습니까?
더 이상 염려 놓으시고 오환을 치십시오.
이러한 곽가의 자신에 찬 건의는 조조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결국 오환을 향해 진군하여
이현에 이르렀을 때였다.
- 병법이란 속전속결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천리길을 행군하여 저들을 기습해야
만 합니다. 그러니 이 많은 군수물자를 가지고 가려다가는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요. 하
오니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여기에 놓으시고, 행장을 가볍게 하여 길을 재촉하십시오.
이 한 마디가 곽가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병이 깊어진 곽가는 더 이상 조조를 따라갈 수 없어 그곳에 눌러 앉고 말았다.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조조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에 임박한 곽가의 잦아드
는 숨소리뿐이었다.
둔전의 성공은 오로지 조지의 공
둔전제의 성공은 조조를 중원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가장 기초적인 토대였
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조에게 둔전을 건의한 조지야말로 최고의 공신이다. 조지의 아들
처중에게 식읍을 주고 제사를 지내도록 주선하면서 내렸던 다음의 명령은 조조가 그를 얼마
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고 진유 태수 조지는 천성이 충직하고 재능이 있었소. 그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원정과 토벌에 참여하였다오. 후일 원소가 기주에 웅거하고 있었을 당시, 원소 또한
조지를 욕심내 데려가려고도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였소. 그러던 조지가 오히려 나에게는
동아령을 맡겠다고 간곡히 부탁하였지요.
지난날 여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연주가 거의 나를 등지고 여포를 맞아들였지만 오직
범현과 동아현만은 온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조지가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지켰던 노력
덕분이었지요. 그 뒤 군량이 모자라 우리의 대군이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때 동아의 곡식
을 옮겨와 허기를 메울 수 있었던 것 또한 조조의 공이었다오.
황건도를 격파하고 허도를 천자를 맞아들임에 이르러서는 적도들의 자산, 곧 그들이 갖고
있던 경작용 소나 농기구 및 노동력 등을 얻을 수 있었소. 그리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둔전
을 실시하게 되었다오.
당시 관에서 대여해 준 소의 사용 횟수를 셈하여 징수액을 정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던지
라 그렇게 하였다오. 그러나 조지는 이렇기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리하여 시행 후에도
줄기차게 와서 "관우를 기준으로 징수액을 정하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풍년이 들어도
곡식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며, 홍수나 가뭄이 들면 거둘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
곤 하였지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지난번의 규정대로 하고 풍년이 들더라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오. 그럼에도 조지는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
떻해야 할 줄을 모르고 상서령 순욱과 의논해보라고 하였다오. 때마침 고 군모좨주 후성이
말하기를, "관우를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는 것은 관전을 위한 계산일 뿐이옵니다. 조지의
생각대로 한다면 관은 이롭겠지만, 둔전객에게는 이롭지 않사옵니다"라고 하면서, 후성 또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던지라, 나는 조지를 의심하기까지도 하였다오.
이런 가운데에서도 조지는 오히려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둔전
의 징수액 문제를 아뢰었지요. 그제서야 나도 조지의 말을 옳다고 여겨, 그를 둔전도위로
삼아 둔전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었다오. 마침 그 해에는 크게 풍년이 들었었고,
그 이후로 마침내 이를 바탕으로 둔전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지요. 그리하여 군량을 풍족
하게 함으로써 여러 역도들을 꺾고 능히 천하를 평정하여 왕실을 융성하게 할 수 있었다오.
이제 조지와 그 공을 함께 하려고 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말았으니, 한 고을을
그에게 추증한다고는 하나 오히려 어울리지도 않는구료. 이제 거듭 그의 공로를 생각하고
마땅히 봉작을 하여야겠다고 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루고만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허
물이었소. 조지의 아들 처중에게 봉작을 더하여 조지를 제사지내게 함으로써 그의 불후지
공을 기리도록 하시오.
건안 초 조지는 우림감이란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조조가 군량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는
것을 보고 둔전제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으로 임명하
여 허현에서 둔전을 실시한 결과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조는 둔전을 여
러지역으로 넓혀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군량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 궁핍을 겪지 않게 되
었다.
이렇게 지대한 공을 세운 조지였건만, 건안 초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따라서 이 글은 조
조가 조지를 애도하는 글이기도 하다. 조조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요점만 추려 적는 것이
특색인데, 여기서는 다분히 지난날의 자질구레한 것까지 들추어가며 써내려가고 있다. 이것
은 바로 조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공로를 더욱 높이 사고 있다는 조조의 심사를 반영하
는 것이기도 하다.
약방의 감초 순유
조조의 모사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던 인물 가운데 순유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표시 나
지 않게 조조를 보필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순유에 대해서 조조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
었다. 다음의 [청봉순유표]는 헌제에게 순유의 공로를 치하하도록 요구한 짤막한 글이지만,
조조의 진정이 배어 있다고 하겠다.
군사 순유는 처음부터 신을 보좌하여 싸울 때마다 수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지금까
지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유의 전략 때문이었사옵니다.
순유는 자가 공달로 순욱에게는 같은 집안의 조카뻘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
했으며, 하진의 밑에서 황문시랑이란 벼슬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순유는 동탁의 전횡을
만나 이를 좌시하지 않고 하옹등 마음이 맞는 몇사람과 함께 분연히 일어섰다.
- 저 동탁의 무도함은 하은걸주보다도 더욱 심하여, 온 천하에 원성이 자자하오. 지금
그가 비록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긴 하지만, 실은 한 필부에 지나지 않소. 이제 곧장
그를 쳐죽임으로써 만백성을 위로합시다. 그런 뒤 천자를 보필하여 천하를 바른길로 이끈
다면, 이는 실로 제환공과 진문공의 의거가 아니겠소이까?
이 가운데 하옹이란 사람은 일찍이 조조를 보고 "한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면 천하를 바로
잡을 사람은 바로 이 자일 게야."라고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의 모의는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으며, 순유와 하옹은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옥에 갇힌 하옹은 자
결하고 말았지만, 순유는 태연자약했다. 오래지 않아서 동탁이 제거되자 그 또한 살아날 수
있었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그에게 임성상등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나아가지 않았던 그
는, 촉군 태수를 자청하고 나섰다.
나름대로 웅지를 품고 있었던 그는 촉한이야말로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백성들도 많
았기 때문에 자청한 것이다. 태수를 임명받은 그는 촉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당시 황건적의
난 등으로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던지라, 형주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당시 조조는 헌제를
허도로 맞아들여 더 많은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조조는 순욱으로부터 순유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편지를 보냈다.
- 지금 천하는 대단히 어지럽습니다. 따라서 그대처럼 지혜로운 인재가 마음을 쏟아야만
할 때이지요. 듣자하니 그대가 촉한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것 같소만, 저간의 사정을 살펴
보건대 아마 쉽사리 풀리진 않을 것 같소이다.
이렇게 하여 순유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조조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지, 곁에 있던 순
욱과 종요를 돌아보고 말했다.
- 공달은 예사 인물이 아니외다. 이제 내가 그와 더불어 일을 꾀할 수만 있다면, 천하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소.
조조는 그에게 여남 태수와 상서의 직을 맡기고, 다시 작전참모격인 군사로 삼았다. 이러
한 순유는 조조를 도와 여포를 무찌르고 원소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책
을 강구함으로써, 조조의 기대에 부흥하였다.
이 글은 건안 9년(204) 관도에서 원소를 무찌르고 난 뒤 내린 것으로 생각되며, 3년 뒤인
건안 12년 조조는 다시 다음과 같은 [하령대논공행봉]이란 명령문을 내려 그의 공을 치하했
다.
- 충성스러운 데다가 공명정대하며 치밀한 모략으로 나라의 안팎을 편안하게 한 사람은
순욱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순유다.
또한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온 조조는 친히 순유의 집을 방문하여, 수많은 그의 건의에 감
사의 표시로 이런 말을 했다.
- 이제 천하의 어려운 일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구료.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이 공을 누
리고 싶을 따름이오. 옛날 한고조는 장자방에게 식읍 3만호를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였다지
않소? 아제 나 또한 그대가 원하는 곳을 식읍으로 내릴까 하오.
순유의 인품은 따를 수 없어
순유는 치밀한 계산과 차분한 지혜로 조조의 군막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였던 인물이었
다. 그는 또한 고결한 인품을 지녔던 모양이다. 자칫 공로가 많으면 우쭐하거니 뻐길 만도
하련만, 전혀 그는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순유의 대해서 조조는 칭찬을 아
끼지 않았다.
순공달은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하나 안으로는 지혜로우며, 밖으로는 겁이 많은 듯하지만
속으로는 용맹스럽고, 겉보기는 나약한 듯하나 안으로는 굳세다. 또한 자신의 선을 자랑하
지 않으며 자기의 일을 남에게 시키지도 않는다. 참으로 그의 지혜로움은 따를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어리석은 듯함은 도저히 따를 수 없다. 비록 안자나 영무자라 하더라도 이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덕행을 지닌 인물이 안회였다. 자가 자연이었기
때문에 안연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그는 실로 안빈낙도의 대명사가 된 인물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칭찬하는데 있어서만은 인색한 편이었다. 그것은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칭찬 만한 교
육이 없다고 하지만, 때로는 강한 질책과 사랑의 회초리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
르치고 배우고 본받는다'는 한자의 의미 속에는 한결같이 회초리를 뜻하는 '등글월문 부수'
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공원의 한 켠에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은 이 화가
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였다. 완성된 그림을
앞에 놓고 이 화가는 엉엉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었다.
- 저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고선 울기는 왜 우는거요? 멋진 작품을 완성하였으면 기뻐서
날뛰어도 시원찮을 텐데!
- 모르는 소리올시다. 나는 지금껏 그림을 그려왓습니다만, 그때마다 나는 나의 그림에
서 잘못된 구석을 발견할 수 있었소. 그러나 오늘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고칠 데가 없구료.
그러니 이제 나의 그림은 더 이상 발전할 길이 없는 게지요. 그러니 어찌 서럽지 않겠소이
까?
더 이상 나무랄 데가 없다든지, 또는 이제 더 배울 것이 없다면 끝장인지도 모르겠다. 하
산해야지 않겠는가? 공자의 문하생의 관계가 어디 보통관계였던가? 또한 공자 자신도 죽
을 때까지 모자람을 되뇌이면 노력했던 인물이고 보면 제자들을 쉽게 칭찬만 할 수는 없었
을 것이다. 이러한 공자에게 칭찬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안회다.
어느 날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 내가 하루종일 안회와 얘기를 나눠도, 그는 이렇다 저렇다 통말이 없더구나. 나는 처
음에 그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했었다. 그래서 그가 평소에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느니라.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보면 이미 내가 말했던 것을 조금도 틀림이
없이 실천하고 있더구나. 안회는 어리석지 않아! 참으로 그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야!
아마 이 칭찬은 안회가 공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
은 주로 문답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에서 어린 안회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을 법도 하
건만 전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때문에 공자뿐만 아니라 다른 제
자들도 안회의 영특함을 모르고 오히려 어리석지 않나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안회는 찢어지게 가난하였던 모양이다. 가난이 자랑될 것이야 없겠지만 그 가난
에 찌들어 공연한 원망이나 무리한 행동으로 벗어나려고 한다면 악행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
로 가난이다. 그래서 사람의 성품은 그가 곤궁할 때 살피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공자의 칭찬은 또 이어졌다.
- 한 소쿠리의 거친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가난한 동네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싫어한다. 하지만 안회는 그처럼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빈민굴 같은 곳에 살면서도, 유유자
적하며 도를 닦으며 즐길 뿐이다. 참으로 안회는 어질구나! 참으로 어질어, 안회는!
단사표음과 안빈낙도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처럼 공자의 칭찬을 독차지했던 안회가
왜 그리도 빨리 죽었는지! 공자의 서러움은 하늘을 우러러 원망할 정도였다. 공자보다 서
른 살이나 어렸던 그가 공자가 죽기 10년 전에 요절한 것이다. 스물여덟에 백발이 되더니
만 서른두 살에 죽고 말았으니, 오늘날로 치면 조로증이나 파킨슨병에 걸렸던 것인지도 모
른다. 어느덧 회갑을 넘긴 공자는 영특하기 그지없고 훌륭한 성품을 지닌 그에게 자신이
못 다한 일을 맡기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 하늘이 나를 버림인가? 하늘이 내가 하는 일을 옳다고 여기지 않으심인가?
공자가 평생을 통하여 이처럼 서러워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 자식 공리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낼 때보다도 더했으니 말이다. 공자는 그의 장례라도 후하게 치르기
위하여 자신의 수레를 선뜻 팔기까지 하였다. 몇년 뒤 아들이 죽었을 때였다. 제자들이 이
번에도 수레를 팔아 아들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자고 건의하자, 공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 조촐하게 치르면 되지, 무어 그렇게 까지 할 것이 있느냐.
오십대 중반부터 노나라를 떠나 10여 년 동안 국외를 떠돌던 공자는 이러한 안연의 죽음
을 계기로 귀국을 서둘렀다. 제자들마저 고생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국에 돌아오자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공자를 환대하고 정치자문이 되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공자는
한사코 뿌리치고 고전정리에 몰두하였다. 하는 수 없이 애공을 훌륭한 제자의 추천을 의뢰
했다.
- 선생님의 제자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곧 인품과 학식이 있다는 의미다.
- 안회라는 제자가 있었지요. 그 성냄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적이 없었고, 같은 잘못
을 두 번 되풀이하는 적이 없었소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죽고 말았으니, 지금
은 그런 제자가 없답니다.
실로 공자에게는 아픈 상처의 기억을 되살리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영무자는 춘추시대 위나라의 대부였던 영유로, 문공과 성공때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렸던 문공 때에는 별 탈 없이 나라를 위해 일했고, 나라를 혼란지경으로 이
끈 성공 때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이렇게 그를 칭
찬한 적이 있다.
- 나라에 질서가 바로 서면 지혜로웠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리석었도다. 그의 지혜는
흉내낼 수 있어도, 그의 어리석음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대개 나라가 안정되면 나아가 벼슬하고 어지러우면 물러나 보신하는 법인데, 영
무자만은 어리석다고 하리 만치 혼란속에 몸을 던졌음을 두고 한 말이다.
조조가 생각하기에 순유야말로 이들 곧, 안회와 영무자의 인품을 빼박은 것으로 여기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순유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처럼 조조의 신임을 받았던 순유는 건안 19년(214) 손권 정벌을 수행하는 도중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순유의 나이는 58세였다. 순유야말로 싸움에 임해서는 빛나는 전략과
전술로 백전백승의 승리를 지휘하는 전략가요, 조정에서는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상서령을
맡아 뛰어난 인품으로 백관을 이끌어 가는 명재상이었다. 이러한 그의 죽음 앞에서 조조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다음과 같은 애도사를 썼다.
나는 순공달과 20여 년을 함께 정벌을 다녔지만, 그는 추호도 그릇됨이 없었노라. 순공달
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른바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양으
로 그 자리에 서게 된 자로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안평중은 사람들과 잘도 사귀도
다. 오래도록 그를 공경하는구나."라고 하였던 바, 공달이 바로 그런 사람이로다.
세상에는 출세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며 안달하는 사람도 있고, 드문 경우지만 가
만히 있어도 저절로 능력을 인정받아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어느 시대를 막
론하고 선비와 소인배는 공존하는 법이며, 진정한 정치가와 그렇지 않은 정치가가 있는 것
이다. 순유는 보기 드문 인품과 능력을 갖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라의 평화
와 안정을 위하여 애썼던 그런 사람이었다.
공자의 문하생 중에 자금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자공에게 물었다.
- 우리 선생님은 어느 나라에 가시던지 꼭 그 나라의 정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선생님이 자꾸 보채서 물어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연스
럽게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자금의 눈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이 언뜻 보기 흉해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수제자인 자
공의 의견을 물어보았던 것이다.
- 자칫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우리 선생님은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양으로 그자리에 서게 된 분이라오. 출세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
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겠소?
이러한 자공의 공자관은 그리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공자는 10여 년 동안 국외를
떠도는 동안 궁색한 모습을 많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공자를 일컬어 '초
상집 개'같다고 안쓰러워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공자는 세상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세상을 끌어안고 방황했던
사람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병약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년가장으로서의 어린시
절, 창고지기와 동물사육사로 보낸 20대, 그러면서도 틈을 내어 꾸준히 학문에 몰두했던 공
자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커다란 가르침과 새로운 희망을 준다.
30대에 이미 촉망받는 인물로 성장하여 국비유학생이 되어 주나라를 다녀온 뒤부터 교육
에 힘썼고, 50대 초반부터는 중도재라는 지방관을 시작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 그 능력을 발
휘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오늘날의 건설부나 농림부 정도가 합쳐진 기관의 장관격인 사공
을 거쳐 내무부와 법무부 정도가 묶여진 사구를 지내기도 한다. 때로는 재상의 임무도 맡
기도 하였다. 아마 10년쯤만 더 활약했더라면 노나라가 정말로 살기 좋고 부강한 나라로
변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50대 중반부터 고국을 떠나 떠돌아야 했던 공자로서도, 어찌
한 번 자신의 이상을 펴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애석하기 이를데 없다.
안영은 자가 평중으로 공자와 같은 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었다. 그는 검약과 신의가 투
철했다. 오척단구 작달막한 체구였지만, 몸에 배인 검소함으로 시대와 나라를 이끌었던 인
물이다. 이러한 안영과 연관된 하나의 일화는 흐뭇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안평중의 수레를 모는 마부의 이야기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의 수레를 모는 자이
고 보니 그 수레를 모는 품새가 자못 의기양양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부의 아내
는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마부에게 느닷없이 이혼을 요청했
다.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한 마부는 아내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낮에 보았던
남편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 오는 내가 당신의 모습을 보았더니 정말 가관이더군요! 마부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
고 그처럼 의기양양하단 말인가요? 당신은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던가요? 온 나라 사
람이 존경하는 안평중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도 모르게! 그 자그마한 체구에 얼마나 공손
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지 안스럽기까지 합디다. 거기에 비한다면 당신의 모습이란 참으로
보기에 흉할 정도로 뻐기더군요? 보아하니 당신은 평생 마부밖에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는 사람하고 살아서 내가 무슨 좋을 꼴을 보겠습니까!
마부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안평중은 평소와는 다른 마부의 행동거지가
아무리 보아도 이상했다.
- 자네 오늘따라 모습이 이상하구만! 지금까지의 그 의젓하기만 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
는가?
아부는 어제 밤의 자초지종을 고하였다.
- 그래, 훌륭한 아내를 두었군! 원래 어진 아내를 두면 남편이 그릇되지 않는 법이라네.
이에 안평중은 마부를 승진시켜 더 좋은 자리를 주었는데, 그는 누구보다 임무를 잘 수행
했다고 한다. 사실 그의 능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어진 아내가 그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
기에 "어진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든다"고 하는가 보다.
아무튼 조조도 순유의 행동 속에서 살아 있는 공자와 안평중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모른
다. 순유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러했기에 조비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너무나 자연스러
운 것이었다.
- 순공달은 우리 시대의 사표이니라. 너는 마땅히 정성을 다해 공경해야만 할 것이야!
조비 또한 아버지의 조조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병이 깊은 순유를 문병했던 조비는
침상 아래에서 절을 올리기도 했다.
순유는 병법의 천재이고, 주도면밀한 전략과 전술의 대가였다. 병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
을 집필할 계획으로 12부문에 걸친 병법서를 구상하던 중 갑작스런 병으로 죽고 말았다.
조조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당대를 위해서도 너무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후연, 나도 어려웠을거요
조조의 휘하에는 순욱이나 순유와 같은 지략가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지장과 용장들
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하후연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용장 가운데 용장이
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조조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오며, 천하평정을 향한 조조의 대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았던 장수였다.
송건이 나라에 반역하고 무리를 지은 지 30여 년이었건만, 하후연이 일거에 그들을 무찔
렀도다. 그는 관우지방을 마치 호랑이가 뭇 짐승을 호령하듯이 가는 곳마다 거침이 없었나
니, 공자께서 "나도 네가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
양주는 서량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황하강 상류에 위치한 고을이
다. 따라서 그만큼 중앙정부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강족과 인접해 있었
다. 그리하여 중원이 어지러울 때면 강족의 유린이 잦았으며, 마초나 한수가 이 지역을 기
반으로 웅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는 마초와 한수의 세력을 이 곳에서 섬멸한 뒤 내친
김에 송건의 무리까지 평정하였는데, 이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은 무모하리만큼 속전속결로 전투를 이끄는 용맹한 장수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때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적의 의표를 정확히 찌르기도 했다. 그
의 무모함은 '백지장군', 곧 '백지'나 '백치'와도 같은 별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다
른 한편에서는 신출귀몰한 축지법의 장수로 불리기도 했다.
- 하후연은 3이에 오백 리를 가고 6일에 천 리를 간다.
만일 하후연과 같은 장수가 조금만 지략을 겸비했다면, 참으로 무서운 장수가 되었을 것
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건안 19년 하후연이 저와 강등 오랑캐 부족의 힘을 규합한 한
수와의 전투를 하게 되었다. 오랑캐 족의 기동력이나 전투력은 오랜 전통을 갖고 다져진
그들만의 장점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주력으로 삼아 도전하는 한수와의 싸움은 하
후연이 적격이었을 법도 하다. 당시 하후연 휘하의 장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 한수의 본진을 들이칩시다.
- 아닙니다. 저족의 본거지 흥국을 짓밟아버립시다.
하후연은 말했다.
- 내 생각으로는 이러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지금 한수가 거느리고 있는 병사는 상당한
정예용사들이오. 또한 흥국도 성이 튼실하다지 않소? 그러니 이제 곧바로 한수의 본채를
공격한다고 해도 쉽사리 함락하기는 힘들 것이오. 아예 강족이 흩어져 사는 장리강을 공격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한수의 진영에 들어가 있는 장리강가의 강족들이 모두 제 고향을
구하려고 달려갈 것이오. 한수는 저강족들을 떠나보내고 본채를 지키려면 고립무원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장리강을 구원하려고 한다면 우리와 들판에서 맞붙을 수밖에 없겠지.
하후연의 생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그리하여 강족의 힘을 얻지 않고서는 해볼 도
리가 없었던 한수는, 하는 수 없이 본채를 벗어나 하후연군과 들판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
래도 여전히 한수의 병력은 막강하였다. 휘하 장수들은 더럭 겁이 났다.
- 적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영채를 세우고 참호를 파서 느긋하게 싸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아니오. 우리는 천릿길을 행군하며 지금까지 잘 견디며 싸워왔소. 이제 다시 영채를
세우고 참호를 파라고 한다면 우리 병사들이 지쳐 쓰러지고 말 거요. 저들 가운데 강족 등
은 마음이 심란할 것이니, 비록 숫자는 많아 보여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하후연은 군사를 휘몰아 한수를 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다시 하후
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흥국도 무찔러버리고, 수천 섬에 달하는 곡식과 군수물자를 거두
어들일 수 있었다. 이 싸움이야말로 하후연의 용기에 지략이 결합한 좋은 본보기였다. 이
에 조조는 하후연에게 군령을 어긴 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부절을 내려 야전총사
령관으로 삼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연은 또 하나의 전과를 올렸다. 내친 김에 송건마저 평정해버린
것이다. 송건이라는 자는 일찍이 30여 년 전부터 후한 말의 혼란을 틈타, 이 양주의 포한이
란 곳에 터전을 잡고 독립적인 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칭 '하수평한왕'이라
부르고, 백관을 두어 자주적인 독립국처럼 행동했다. 이들의 세력은 별반 위협을 느낄 정도
의 것은 아니었지만, 중원통일이라는 대명제에 있어서 그대로 놓아두기에는 볼썽사나운 존
재였다. 하여 조조는 하후연을 중심으로 이곳을 완전히 평정함과 아울러 유능한 관리들을
파견하여 안정된 고을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하후연의 빛나는 전과에 힘입어 조조는 양주를 없애고 옹주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조는 이 고장 출신인 장기를 자사로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자네가 이제 고향의 자사로 부임하게 되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백주 대낮의 거리를 활
보하는 것이 되겠군!
'금의양행'이란 말이 있다. 이말은 초패왕 항우가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난 뒤,
우쭐한 심정을 감출 수 없어 고향에 하루 빨리 돌아가 자랑하고 싶었던 일화에서 나온 말이
다. 이때 사람들이 말렸다.
-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고향에 돌아가시다니요?
항우는 침울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고향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 이것
이야말로 비단옷을 입고 칠흙같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지 않겠소이까?
사람들은 항우의 그릇이 작음에 새삼 놀라 빈정거렸다.
- 그러게 말이야. 초나라 사람들을 일컬어 '큰 원숭이에 모자를 씌운 것'과 마찬가지라고
놀려대더니만, 그 말이 정녕코 빈말이 아니었군!
일반적으로 역사란 성공한 자들의 것이며 또한 그 성공은 오래도록 보존한 자들의 것이
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진시황이나 항우는 성공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지 못하여 손해를 본
사람들이다. 시황제의 업적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악랄한
임금으로 나쁜 모습만 들추어졌으며, 항우 또한 인간적인 모습은 간데 없고 우유부단의 대
명사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하는 말이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인 자공에게 물었다.
- 너와 안회를 비교하였을 때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 제가 어찌 감히 안회와 견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뿐입니다.
- 그래, 같을 수 없지. 나 또한 네가 그와 같지 않다고 하는 심정을 이해한단다.
공자는 자공의 말을 듣고, 자공의 솔직함과 안회의 뛰어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
다. 조조는 공자의 이 말을 상기하면서 하후연의 뛰어남을 칭찬한 것인데, 한편으로는 당시
곁에 있었던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하후연을 지략이
없는 인물로 알고 모두들 깔보았던 것에 대한 은근한 질책도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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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
서황은 차분하고 사려 깊은 장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조조는, 줄곧 성
미가 급한 하후연과 함께 출전시키는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따라서 하후연이 많은 전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서황의 보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황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활약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다른 장수들보다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
다. 다음의 글은 냉정하고 차분한 판단으로 그가 거둔 전공에 대해 조조가 치하하는 것이
다.
이 마명각의 잔도는 한중으로 통하는 목구멍과도 같은 험한 길이다. 이곳을 유비가 안팎
이 통할 수 없도록 끊어버려 한중을 취하려고 하였거늘, 장군이 일거에 적들의 계획을 깨뜨
렸으니, 그야말로 뛰어난 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인지고!
조조군과 유비군의 양평관 전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에 유비는 진식이란 장수를
보내 마명각의 잔도를 끊어버리도록 하였다. 이 길은 한중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이다. 만
일 이 길이 끊긴다면 조조군은 한중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잔도란 깎아지른 절벽 등에 구
멍을 파고 지지대를 박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든 대단히 험난한 길이다. 그 모
습은 지금의 설악산 비선대나 울산바위를 오르는 길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유비군의 동정을 눈치챈 서황은 잽싸게 달려가 진식을 무찌르고 잔도를 살려냈던
것이다. 이처럼 서황의 기만한 활약을 전해들은 조조는, 서황의 노고를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서황의 작전과 평소의 생활 태도는 여느 장수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적과 싸움에 임할
때는 언제나 척후병을 멀리까지 내보내 철저하게 상황을 살피고, 마치 자신이 없어 공격을
꺼리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러다가도 승산이 있다고 여기면 한순간의 틈을 주지 않는 속
전속결의 기습으로 승리를 거두곤 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거나 사람들과 어
울리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옛 사람들이야 훌륭한 주군을 못 만나서 걱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훌륭한 주군
을 만났소. 이제 마땅히 공을 세워 갚을 뿐, 사사로운 명예인들 무엇하리오!
조조가 주변의 인재들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했든, 주변의 출중한 인물들이 조조에게 반하
여 믿고 따랐든 그는 분명 인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
서황의 전공을 그 누가 따르리
건안 24년(219) 한중의 싸움이 있고 난 두세 달 뒤, 형주에서 유비 휘하의 맹장 관우와 조
조 휘하의 조인 사이에 커다란 싸움이 붙었다. 전세는 관우에게 유리하였고, 조인은 성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만일 관우가 조인을 꺾고 북진한다면 중원의 조조로서는 큰 위협이 아
닐 수 없었다. 이에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서황은 번성과 양양
에서 관우의 예봉을 꺾고 대승을 거두었다.
적의 진채의 주위에 파놓은 참호와 설치한 녹각이 열 겁이나 되었지만, 장군은 싸움을 걸
어 모두 이겼도다. 그리하여 마침내 적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많은 적을 베었구나! 이 몸
도 30여 년을 싸워왔고 용병에 뛰어난 옛날 장수들에 대해서도 많이 들어보았소만, 그대처
럼 곧장 적진으로 뛰어들어 승리를 거둔 자는 듣도 보도 못하였소. 또한 번성과 양양의
포위망은 거와 즉묵보다 더 견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겼으니, 장군의 공이야말로 손무나
사마양저보다도 뛰어나구료.
옛날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장군 악의는 제나라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70여 개의 성을 함락
시켰다. 그러자 제나라의 장군 전단은 악의의 예봉과 전면 대결을 피하고 거와 즉묵 두 성
만을 굳게 지키고 지구전을 폈다. 악의가 이 두 성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니,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결국 전단은 지구전에 휘말린 악의를 공격하여 잃었던 성을 모두
되찾았다고 한다. 조조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번성과 양양을 굳게 지키다가 일거에
관우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서황을 치하하고, 나아가서 그의 용병술이 손무나 사마양저보
다도 뛰어나다고 추켜세운 것이다.
당시 서황이 거둔 승리는 조조를 말할 수 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때문에 보기 드문 성대
한 축하연을 열었다.
서황이 대승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돌아온다는 전갈이 오자 조조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
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마피란 곳까지 진군하여 머물고 있다가 승리를 안고 돌아오는
서황을 위하여 몸소 7리를 나아가 축하연을 열었고, 직접 술을 따라 그 노고를 치하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서황의 변함없는 모습은 이 순간에도 돋보였다.
마피는 오랜만에 모든 군대가 모여 승리를 자축하는 마당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 사졸
들도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느긋하게 전군을 한번 돌아보았던 모양이다.
모든 사졸들은 흐트러진 대오에서 빠져나와 서로들 조조를 보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부대만은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건 서
황의 부대였다.
또한 후세에 무성으로 추앙 받는 관우는 결국 서황에게 패한 뒤 이 해 겨울에 처참한 최
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물론, 관우의 죽음은 실로 그 자신의 지나친 자존심이 부른 결과이
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제갈공명과의 갈등에서 빚어진 결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종요여 고맙소 그대의 뒷받침이
단 한 번의 겨룸을 끝나는 전투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벌이는 지구전을 위해서는 전
략가나 장수, 혹은 병사들 이외에 중요한 승리의 요인이 있다.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전투부
대를 제대로 지원하기 위한 정치적인 배려 따위가 여기에 포함된다. 조조가 종요에게 보낸
다음의 글을 이 방면에 대한 조조의 관심을 짐작하게 한다.
그대가 보내준 말은 위급할 때 매우 잘 쓸 수 있었소. 그리고 관우를 평정하여 조정에서
는 서쪽을 살펴야만 할 걱정을 덜게 되었으니, 이것은 그대의 공이오. 옛날 소하가 관중을
지킬 적에 농업 생산을 높이고 군대를 튼튼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대 또한 그러하구료.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했을 때, 종요는 관서에서 꾸준히 조조를 위협하고 있던 마
등과 한수를 묶어 놓고 있었으며, 게다가 한편으로는 조조에게 2,000필의 말을 보내 결정적
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이 글은 종요의 이러한 처사에 대한 치하다.
종요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숙부와 함께 낙양을 향해 길을 가고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관상가가 어린 종요를 한참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 이 아이의 상을 보니 대단한 귀상이요. 다만 수액이 염려된, 부디 조심하도록 하시오.
이런 말을 듣고 채 10이를 가지 못해서 다리를 건너다가 말이 놀라는 바람에 그만 어린
종요는 깊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종요는 살아날 수 있었지만, 희한하게 맞아떨어
진 관상가의 말은 숙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숙부는 종요를 더욱 귀히 여기
고 학업에 열중하도록 전심전력을 다해 그를 돌봐주었다고 한다.
후일 종요는 학문의 수준이 높았던 것은 물론이요, 인품이 고결하고 정무의 처리도 뛰어
나 조조의 아들과 손자인 문제와 명제때에 이르기까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모든 전공은 그대들의 것
조조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탐했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내려진 식읍이나 재물을 목숨을 걸고 수많은 전투에서 동고동락한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언제나 병사들의 실생활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피려고 노
력했다. 건안 12년 봄에 내린 이 [분조여제후연속령]은 이러한 그의 마음 씀씀이를 잘 보
여준다.
옛날 조사와 두영은 장군이 되어 자신이 받은 천금을 아끼지 않고 하루아침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큰공을 이루고 그 명성이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관계
된 기록을 읽으면서 일찍이 그들의 인품을 흠모해 마지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장수나
사대부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움을 치르는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어진 사람들은 지혜와 계
책을 내놓기를 아끼지 않았고 뭇 병사들도 그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에서 힘을 얻을 수 있
었다. 그리하여 험난함을 이겨내고 어지러움을 평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호읍 3만을
내어 포상을 실시하고자 한다. 나는 두영이 천금을 나누어주었던 의리를 본받아 이제 천자
로부터 받은 식읍을 갈라내 여러 장수와 관원 그리고 지난날 진과 채 지역에서 싸웠던 사졸
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아쉬운 대로 여러 사람들의 노고에 보답 할 수 있다면, 천자께서 나
에게 베풀어준 커다란 은혜를 독차지하는 것은 아니되리라. 또한 싸움에서 죽어간 사람의
자녀들에게도 곡식을 주어 돕도록 하라. 한편 중년이 들어 풍족할 때는 조세를 모아두었다
가, 장치 크게 여러 사람들과 함께 누리도록 하라.
조조는 헌제로부터 3만 호의 봉지를 받으면서, 그 옛날 조사와 두명이 천금을 아끼지 않
고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일을 떠올린다. 조사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으로 한나라를
도와 진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마복군에 봉해졌다. 그는 부하들을 잘 보살펴
조나라의 임금이나 왕가에서 내리는 것이 있으면, 이것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한편 두영은 전한 경제때의 장수였다. 당시 오. 초 등 일곱 나라가 난을 일으키자
경제는 그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천금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두영은 이 천금을 모두 부하들
에게 나누어주고 말았다. 두영은 칠국의 난을 평정하고 난 뒤 무기후에 봉해졌다.
이에 조조는 그의 봉지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를 장병과 군리 및 진과 채의 쌍무에서 고생
한 병사들, 그리고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의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다짐하고 이 명령문
을 쓰게 된다. 이 글은 비록 명령문의 형식을 띄고 잇지만, 마치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바
로 옆에 서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생동감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전통적인
명령문이 보여주는 판에 박힌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조조의 파격적
인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조조는 자기에게 주어진 봉읍의 조세를 휘하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뿐만 아니
라, 점령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물건이나 사방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들도 흔쾌히 나누어주곤
하였다. 한편으로 신상필벌을 엄격히 하여 별다른 공도 없이 막연히 상을 바랐던 사람들에
게는 매몰차리만큼 뿌리쳤다.
오환 정벌은 전주의 공
조조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의 하나인 오환 정벌은 사실 전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저
히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조는 전주의 공을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였
으며, 이에 걸맞는 포상을 다각도로 강구하였다. 헌제에게 올렸단 다음의 글에는 전주의 이
러한 칭찬과 아울러, 그에 대한 자신의 솔직담백한 심정이 어우러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주는 학문이 높고 무예 또한 뛰어납니다. 그는 아랫사람들을 어루만지는 데는 온화하
고 위를 섬김에는 삼가 조심하며, 때와 이치를 헤아려 나아가고 물러감이 의리에 합당하옵
니다. 애초 유주가 어지러워지고 오랑캐와 한족이 서로 싸움에 이르러서는, 이곳의 백성들
이 이리저리 흩어져 의지할 곳마저 없었지요. 이때 전주는 종족을 거느리고 서무산으로 피
난하여, 북으로는 노룡새를 막고 남으로는 험로를 지켰지요. 그는 이곳에 조용히 숨어살며
농사를 지어먹고 지내니 백성들도 이에 교화되고 모두가 받을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원소
부자의 위력이 삭방에 떨침에 이르러서는, 이들은 멀리 오환과 힘을 합쳐 길게 세력을 형성
하고 수차례에 걸쳐 전주를 불러냈지요. 그러나 전주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지요. 후에 신
이 폐하의 명을 받들고 이현에 진군하였을 때, 전주는 먼길을 스스로 와서 오랑캐를 토벌하
는 방법을 진언하였사옵니다. 이는 마치 광무군이 연나라 공격에 대한 계책을 건의하고, 설
공이 회남왕 경포의 성세를 헤아렸던 것과도 같사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사병으로 하여
금 신의 노포(군중에서 공개적으로 적 등이 볼 수 있도록 만든 공시문)를 들려보내 오랑캐
의 무리를 유인하게 함으로써, 한족들이 도망 나오게 되자 오환은 이것을 알고 놀라 어지럽
게 되었지요. 또한 폐하의 군대가 출세하여 산중 900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전주는 그의
사병 500명을 거느리고 산골의 길을 인도하였나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환을 무찌르고 변
방을 평정할 수 있었지요. 이제 전주는 문무에 공이 뛰어나고 절의 또한 가상스러우니, 삼
가 그의 아름다움을 총애하시어 상을 내리심이 마땅하리라 생각되옵니다.
전주는 자가 자태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뛰어나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가 스물두 살 되던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동탁은 헌제를 핍박하여 장안으로 천도하였
으며, 천하는 바야흐로 하루를 점칠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상황이었다. 이때 헌제의 종친
이었던 유주목 유우는 자신의 충정을 천자에게 알리고 싶었으나, 적당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어 걱정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사람들이 전주를 추천했다.
- 전주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문무를 겸비했고 지략도 대단합니다. 그라면 공의 충정
을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뽑힌 전주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간난신고를 지혜롭게 헤쳐가며, 드디어 장
안에 이르러 천자를 알현할 수 있었다. 헌제는 이러한 전주의 용기와 지혜를 가상스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헌제는 그에게 황제를 호위하는 우림기병을 통솔하는 기도위를 내렸지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양한다.
- 폐하께서 몽진으로 심기가 불편한 이 때, 제가 무슨 큰 공로가 있다고 분에 넘치는 영
광을 입을 수 있겠나이까?
조정 대신 가운데 그의 의기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삼부에서도 그를 서로 쓰려
고 안달이었지만, 그는 끝내 답장을 받아 유주를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전주가 유주에 당도하기도 전, 유주에서는 세찬 풍파가 일어났다. 요동태수 공손찬이 유
우를 죽이고 유주를 병합해버린것이다. 돌아온 전주는 유우의 묘소에 회신을 바치고 통곡
하였고, 이를 알게된 공손찬은 그를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말렸다.
- 전주는 의사입니다. 공께서는 그를 예우함이 마땅하거늘,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하십
니까? 사대부들의 신망을 잃을까 두렵소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전주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 내가 모시던 주군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나는 세상에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소이
다.
말을 마친 전주는 자신의 종족을 이끌고 서무산 깊숙이 숨어들어, 몸소 밭을 일구어 살면
서 부모를 봉양하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로 이곳은 5,000여
호의 큰 고을이 되었다. 전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 여러분들은 이 못난 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멀리서들 옮겨와 이제는 큰 고을이 되었
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바로잡고 다스리는 지도자가 없는지라 모든 것이 중구난방이지 않
소이까? 이래가지고서는 오래갈 수 없지요. 하루빨리 어질고 연륜이 높은 분을 뽑아 우리
의 지도자로 삼았으면 합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전주의 말에 적극 찬동이었다. 하여 막상 뽑힌 사람은 나이 어린 전주였
다. 이에 전주는 20여 가지의 꼭 필요한 법도와 예절을 만들고, 학교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
쳤다. 실로 노자가 추구했던 이상국의 실현이며, 묵자가 부르짖던 겸애와 상동의 실현이었
다.
이러한 전주를 원소 부자는 수차례에 걸쳐서 장군의 인수를 내리며 불러냈지만, 그는 결
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건안 12년(207)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려고 나섰을
때였다. 전주의 미명을 익히 알고 있었던 조조는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조조도 그가
순순히 부름에 응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조
조의 전갈을 받은 전주는 수하에게 길 떠날 채비를 시켰다. 천만 뜻밖의 행동에 놀라 사람
들이 물었다.
- 옛날 원소가 그토록 수차에 걸쳐 정성을 다해 불렀었건만, 끝내 굽히지 않으셨잖습니
까! 헌데 이제 조조의 사신이 겨우 한 번 온 것에 불과한데, 번갯불에 콩 볶듯이 서두시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십니까?
전주는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로 답했다.
- 이 일은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라오.
사신을 따라 조조의 군문에 당도한 전주는 곧바로 사공호조연이 되어 조조와 머리를 맞대
고 대책을 숙의하게 되었다. 조조는 그에게 조령을 내렸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조조의 군대
를 따라 무종으로 이동하였다.
때는 여름이었다. 계곡물이 불어나 있었고 요소요소 적들이 지키고 있어서, 도저히 앞으
로 나아갈 수 없었다. 조조가 대책을 묻자 전주가 말했다.
- 이 길은 여름이나 가을이면 항상 물이 불어나 있습니다. 하여 얕은 곳은 수레가 지날
수 없으며, 깊은 곳이라고 하여도 배조차 띄울 수 없지요.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잇긴 한데
어떨는지요. 옛날 북평군의 처소가 평강이란 곳에 있었사온데, 거기로 가는 길이 달리 있습
니다. 그 길을 따라 노룡새를 벗어나면 유성에 당도할 수 잇지요. 한무제 이래로 이 길은
다닌 적이 없었으니, 한 200년쯤 족히 되었지요. 그러나 아직 그 흔적은 찾을 수 있으니 가
능할 것입니다. 아마도 저 오랑캐들은 대군이 틀림없이 무종산을 거쳐서 오리라 생각할 것
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마음을 놓고 별로 방배도 하지 않겠지요? 보시다시피 무종산 계곡
은 물로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을 저들도 아는지라, 우리가 결국 철군하리라고 믿기 때문이지
요. 이제 회군하는 척 물러납시다. 그리고 노룡새를 따라 백단의 험로를 뚫을 수만 있다면
더욱 빠른 길이 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들이친다면 오환의 수괴
답돈의 머리쯤이야 호주머니에 든 물건이지요.
이리하여 조조는 강가 길섶에 나무를 깎아 이런 글을 남기고 길을 달리 잡았다.
- 지금은 여름인지라 홍수로 진군할 수 없구나. 기다려라, 겨울에 다시 오마.
전주가 제시한 절묘한 전술은 실로 천군만마와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조조는 전주의 수하 수백명을 동원하여 앞서게 하여 진군하여, 드디어 한무제 이후
수백 년에 걸친 걱정거리였던 오환을 일거에 진압할 수 있었다. 조조는 이 오환 정벌로 원
씨 일가의 잔당을 완전히 소멸하고 이들에게 잡혀간 한족 10여 만도 되찾을 수 있었으니,
조조의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전주는 실로 강직하고 펑렴결백하였다. 오환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웠
으면서도 한사코 포상이나 작위를 거절하였다. 몇 해에 걸쳐 조조는 전주에게 부재. 조령.
정후. 의량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다른 신하들로부터 명령을 어긴다고 하여 엄중히 문책하여야 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조조는 전주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옛날 백이와 숙제는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떠났으며 무왕을 나무라기까지 하였으니, 가히
어리석고 우활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오히려 "인을 추구하여 인
을 얻었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전주가 뜻을 꺾지 않는 것은 비록 도리에는 합당하지 않지만, 단지 청렴과 고상함을
지키려는 것일 따름이리라. 만일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전주의 생각처럼 한다면,
이것은 곧 묵자의 겸애와 상동의 설법이나 노자의 말이 완성되는 것과 같은 태평성세를 누
리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의논이 비록 옳기는 하나, 이제 다시 사예교위에게 되돌려 이 일
을 제고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오환 정벌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조조는 항상 하던 대로 논공행상을 서둘렀다. 물론
최고의 공로자는 전주가 아니었겠는가? 조조는 전주를 정후에 봉하고 식읍 500호를 내렸
다. 그러나 전주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 제가 애초 무리를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은, 힘을 길러 나의 주군이었던 유우의
원소를 갚고자 함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뜻도 이루지 못한 마당에 사사로운 영리를 누
리다니요. 이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옵니다.
조조는 그의 이러한 의지를 꺾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허락하였지만, 두고두고 마음에 걸
렸다. 몇 년이 지난 뒤 조조는 다시 전주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하였다. 어찌 보면 서로의
자존심 대결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호의를 계속 무시하는 전주 때문에 마
음이 언짢았던 것이다.
- 그래, 한 사람의 고결한 인품이야 이룰 수 잇겠지만, 흠집 난 천자의 위엄은 어찌한단
말인가? 다시 그에게 전날 내렸던 작위를 받아들이도록 조처하라.
그래도 전주는 상소문을 올려 죽음을 맹세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를 너댓 번 끝내 결말이 나지 않았다. 급기야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은 크게 비화되어 조정 전체가 들끊었다. 이에 조조는 세자인
조비와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의견을 개진토록 하였다. 조비의 생각은 이러했다.
- 아버님, 옛날 초나라의 영윤 자문이나 신포서 등도 끝까지 상을 거절한 사례가 있지 않
습니까? 이제 전주의 절개를 높이 사 들어주도록 하시지요.
오늘날 국무총리격인 상서령 순욱이나 서울시장격인 사예교위 종요도 조비와 같은 생각이
었다. 전주의 공로도 공로지만 자존심이 상한대로 상한 조조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마
지막으로 전주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하후돈을 불렀다.
- 자네가 한 번 나서주게. 가서 자네의 두터운 정으로 넌지시 권하여 보게나. 필히 자
네의 생각인 것처럼 해야 할걸세.
하여 하후돈은 전주의 집으로 가서 며칠을 묵으며 정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는
미리 눈치를 채고,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후
돈 또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떠나올 때였다. 하후돈은 전주의 등을 두드
리며 말했다.
- 어이, 전주. 주둔이 그토록 간절하니,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없겠는가?
- 장군님,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이 주는 의리를 저버리고 숨어사는 딸깍발이일 따름
이외다. 은혜를 입어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 해도 과분한 몸이지요.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그깟 노룡새 정도의 하찮은 일을 팔아 작위와 바꾼단 말입니까? 설령 나라에서 이 주에게
은총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저의 마음이 편하리라 생각하시나요? 여태껏 장군만은 나를 이
해하는 분으로 알고 있었소이다. 허나 이제 장군마저 이러하신다면 저는 도대체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어쩔 수 없이 작위를 내린다면, 저는 자결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겠지
요?
말을 마친 전주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하후돈의 말을 전해들은 조조 또한 눈시울을
적시고, 어떠한 패전에서 얻은 것보다도 더한 좌절의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
슬픔은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는 조조만이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좌절이었다.
전주의 고집을 들어주는 수밖에
전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조조는 허탈했다. 그러나 조조는 전주의 절개를 높이 사
고 칭찬하며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자신을 죽이려 하거나 모함했던 사람까지도 포
용하여 인재로 등용했던 조조이고 보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옛날 백성자고가 제후를 그만두자 하나라 우왕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고 하오. 뜻이
높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존경하는 주군은 한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오. 이제 전
주가 고집하는 바를 들어주도록 하시오.
요순과 우임금 시절의 까마득한 이야기다.
요임금은 백성자고란 사람을 제후로 삼았었는데, 이 사람은 세임금의 시대를 다 거쳤던
인물이다. 요임금은 효행으로 소문난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다시 순임금은 황하의
치수사업으로 유명한 우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 백성자고는 우임금이 왕이
되자, 제후의 자리를 팽개치고 농부가 되어버렸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우임금은 그를 찾
아가 이유를 물었다.
- 옛날 요임금이 천하를 다르실 때 당신을 제후로 삼았었소.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자리
를 물려주었고, 순임금은 또 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소. 그런데 이제 내가 천하를 다스리자
새삼스럽게 자리를 떠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요?
그러자 자고가 말했다.
- 옛날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백성들이 상을 주지 않아도 부지런하였고 벌을
내리지 않았어도 두려워하였소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임금인 당신이 많은 상과
벌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어질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덕은 지금부터 무너질 것이
며, 형벌을 이제부터 무거워질 것입니다. 아마 후세의 혼란도 지금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어서 빨리 떠나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일이나 방해하지 마십시오.
말은 마친 자고는 오로지 밭을 가는 데 열중일 뿐, 더 이상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우임금
은 도저히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조조는 여기에서 전주
를 백성자고에 자신을 우임금에 빗대, 서운함과 상한 자존심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어서였을
까?
이러한 전주는 46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조조가 이세상에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유일한 인물로 기록된다. 그러면 애초 조조를 위하여 그처럼 헌신적으로 노력
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바로 오환과의 전투가 전주 자신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오환족들이 전주의 서무산에 쳐들어와 노략질과 많은 사람을 죽였던 일
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조조가 전주를 자기 사람으로 끝내 만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강직한 기상을 높이 평가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양부, 더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마초는 당대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꼽는 맹장이었다. 이러한 마초와 끝까지 대치하며
항거했던 양부의 기지와 충성은 조조를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그리하여 조조는 마초를 물
리친 뒤 논공행상에서 양부의 공로를 치하하고 관내후에 봉했으나, 양부는 끝내 사양하고
받지를 않았다. 이에 조조는 그에게 정성어린 편지를 보냈고, 그러자 양부도 더 이상 사양
하지 않았다.
그대가 여러 열사들과 더불어 세웠던 큰공을 관서의 백성들은 자랑으로 여기지요. 옛날
자공이 상을 거절하자 공자께서도 옳은 일을 막게 된다고 나무라지 않았던가요? 그대야말
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위하여 싸웠소. 강서의 모친 또한 강서로 하여금 서둘러 싸우
도록 하였다고 하니 그녀의 지혜로움이 정녕코 대단하였구료. 비록 양창의 아내라고 한들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녀는 진정 현명하고 어질구료! 반드시 역사에 기록하
여 그녀의 충정이 묻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소.
중원에서 멀리 떨러진 함곡관 서쪽 관서 지방인 농서와 농우 및 양주는 조조에게 가장 골
치 아픈 지역의 하나였다. 더구나 이곳은 유비의 파촉과도 접경이어서 만일 유비가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면 천하통일의 길은 요원하게 된다. 때문에 오래 전부터 한수와 맹장 마초가
버티고 있었다.
조조는 건안 16년(211) 관서 정벌에 나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지만 아직도 마초와 그 잔당
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본거지인 기주
와 유주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하후연 등을 장안에 주둔
시켜 관서를 지키도록 조처하고 업성으로 회군을 서두른다. 이때 양주자사 위강의 참군으
로 있던 양부가 조조에게 진언한다.
- 마초는 용맹스럽기가 마치 한신이나 경포와 같아, 강족이나 호족 등 오랑캐들 사이에서
는 위세가 대단합니다. 하오니 대군이 철수하려거든 단단히 방비를 갖추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가 이곳이 더 이상 우리의 땅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조조는 양부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경황중에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철
군하고 말았다. 그러자 양부의 예상이 곧 현실로 나타났다. 마초는 오랑캐들의 무리를 이
끌고 다시 이곳을 엄습하였고, 거의 모든 고을이 추풍낙엽처럼 마초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러나 단 한 곳 양부가 있던 기성만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마초는 장노의 원병까지 아
울러 만여 명의 병사로 기성을 몰아쳤다. 하지만 성안에서는 자사 위강 이하 남녀노소가
똘똘 뭉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기를, 마치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처럼
하였던 모양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부의 동생 양악의 분전은 눈부셨다. 그러나 이처럼 무려 8개월을 버
텼으나 기다리던 원군은 올 기미조차 없었고, 백방으로 장안의 하후연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의 고난을 보다 못한 자사 위강은
마초에게 항복할 생각이었다. 이때 양부는 울부짖으며 목청을 높였다.
- 우리들의 부모 형제가 의로움으로 힘을 북돋우며 싸우지 않소이까? 이 마당에 죽음만
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없소이다. 그 옛날의 어떠한 성도 이처럼 철옹성은 아니었을 것이오.
하거늘 길이 남을 공을 팽개치고 의롭지 못한 이름을 뒤집어 쓰다니요. 저는 죽음으로 이
성을 지키겠소이다.
그러나 결국 자사와 태수는 항복을 결정하고 성문을 열어 마초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입
성한 마초는 약속과는 달리 자사와 태수의 목을 자르고, 양부만은 민심수습 차원에서 죽이
지 않았다. 이에 양부는 겉으로는 마초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를 물리칠 궁리
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죽자 장례를 핑계삼아 마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고답로 역성으로 달려갔다. 이 역성에는 그의 외사촌 형인 무이장군 강서란 사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외숙모와 강서를 만나 저간의 일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
하였다.
- 자네의 통한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디 우리 힘으로 마초를 당해낼 재간이 있는가?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는가?
- 성을 끝까지 지키지도 못하였고, 모시던 사람이 죽었건만 따라 죽지도 못했소이다. 하
오니 내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리요! 하지만 마초는 아버지와 임금을 저버린 역도입
니다. 그는 관서의 주목과 장수들을 도륙하엿으니, 이것이 어찌 나만의 걱정거리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의 치욕이지요. 형은 많은 군사를 부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도를 토벌하려
고 하시지 않다니요! 형은 옛날 조순의 이야기도 듣지 못하였나요? 지금 마초가 비록 강
하다고 하나, 그는 의리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찾아보면 틀림없이 많은 허점이 있을 것
입니다. 그의 허를 찌르면 생각보다도 쉽게 도모할 수 있지요.
이때 곁에 있던 강서의 어머니가 결연한 모습으로 외조카 양부를 거들고 나섰다. 그녀는
실로 여장부였다.
- 에라, 이 못난 자식놈아! 기성에서 자사 위강이 참혹하게 당한 것이 어찌 그 고을만의
수치이겠느냐! 너마저 저버린다면 이 조카 양부 혼자 어떻게 하라고? 나를 염려할 필요는
없다. 서둘러라. 일이 지체되면 그르칠 수 잇느니라.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는 법, 이왕 죽
을 바에야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면 정의로운 죽음이 아니겠느냐? 어서 속히 떠나거라, 내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말고.
이리하여 양부는 강서와 뜻을 같이하고 주변의 강은. 조양. 윤봉. 공신. 양관 등 10여 명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마침내 기성을 탈환하고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싸
움에서 양부의 친척은 거의 죽었으며, 자신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결국 마초는 한중으로 달
아났으나, 도중에 역성을 쳐서 강서의 어머니는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조조는 양부를 비롯한 11명에게 작위를 내렸는데, 양부는 한사코 사
양하며 이러한 글을 올렸다.
- 저는 위강이 살아 있을 때 적을 막지도 못하였고, 또 그가 죽었을 때 같이 죽지도 못하
였습니다. 의리로 따지자면 마땅히 내쳐야 할 사람이오며, 법으로 따져도 죽어야 마땅하거
늘 상이라니요? 더군다나 마초를 죽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조는 이러한 양부의 인간됨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공자가 자공을
나무랐던 일을 예로 들면서, 사양이 좋지 못한 전례를 남길 수 있음을 지적하고 달랬던 것
이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언변을 지녔다. 그의 세 치 혀에서 뿜어내는 변
설은 한 때 다섯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전상이란 자
가 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곁에 있는 노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에 공자는 분연히 일어
나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 그래도 우리 노나라는 선영이 있는 곳이요 부모의 나라다. 나라의 운명이 이처럼 위태
로운데, 너희들이 그대로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느냐?
하여 뭇 제자 가운데 선발된 인물이 자공이었다. 자공은 노나라를 떠나서 제나라로 가서
전상으로 하여금 기수를 돌려 오나라를 치도록 설득하였고, 다시 오나라로 가서는 제나라와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또한 월나라로 가서는 오나라를 안심시키도록 조처하고, 진나라
로 가서 오나라와의 결전을 준비시킨 연후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때가 효빈의 주인공인
서시와 오월동주와 와신상담등의 고사가 생겨난 시대였으니,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족히
책 한권은 될 것이다. 하여튼 자공은 이러한 노력으로 노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강성하게 하였다.
또한 월나라 구천으로 하여금 춘추의 또 하나의 패자가 되게 하였으니, 실로 "자공이 한
번 뜨자 오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의 의기와
용인술 또한 상당한 경지였다고 할 만하다. 자공은 이러한 와중에서 각국에 잡혀갔던 노나
라의 백성들을 되찾아올 수 있었는데,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노나라의 법에 의하
면 열국에 잡혀간 노나라 백성들을 되찾아오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숫자만큼 포상금을 주기
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공은 이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공
자가 그를 나무랐던 것이다.
- 이는 분명 자공의 잘못이니라. 노예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오는 노나라 사람들의 숫
자가 줄어들게 될 거야!
양창이란 사람은 후한 초기 승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당시 창읍왕이 음란에만 빠
져 군왕의 길을 걷지 않자, 고명대신이었던 대장군 곽광은 이를 폐위시키고 선제를 옹립하
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승상인 양창에게 대사농 전연년을 보내
의향을 묻게 하였는데, 주변머리 없는 양창은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
고 허둥대기만 하였다. 이때 양창의 부인이 나서서 남편을 설득시키고 곽광의 일에 동조함
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조는 이러한 양창의 아내의 지혜를 강서의 모친에 비
유하고 사서에 기록하여 남기도록 하였는데, 그녀의 정렬은 지금도 열녀전에 남아 있다.
공을 세운 자에게 반드시 벼슬과 상을
조조가 가장 중시했던 것은 휘하 장병들의 창조적인 건의와 전투의 공적에 대한 치하한
보상이었다. 건안 12년(207)에 조조는 최대의 숙적이었던 원소를 무찌르고 난 뒤 공신들에
대한 봉작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내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히는 포악한 무리들을 무찌른지 어느덧 19년이 흘렀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개인의 공로이었겠는가? 이는 곧 현명한
그대들의 힘이었다. 아직 천하가 완전히 평정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기필코 훌륭한 그대들
과 함께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 홀로 그 공로를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
안할 수 있겠는가? 서둘러 사대부들의 공로를 평정하여 작위와 포상을 행하도록 하라.
조조가 기병한 것이 중평 6년(189)이었으므로 건안 12년(207)이면 벌써 19년의 시간이 흐
른 뒤였다. 조조에게 이 19년 이란 참으로 많은 발전과 성공을 가져다 준 소중한 시간이었
다. 조조는 이때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언제나 숱한 난관에 봉착하였지만 고비 고비마다
돌파구를 찾아 헤쳐나왔다. 어찌 이것이 조조 혼자만의 능력이나 행운만으로 가능하였겠는
가?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조조 주변의 훌륭한 참모들의 기지와 장병들의 목숨을 건 분투였
다. 최대의 적으로 여겼던 원소의 대군을 꺾은 것도 꿈결만 같다. 이제껏 그토록 바라온
통일의 대업도 결코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역
량을 재집결하여 또 한 번 도약할 때다. 지금까지의 공로를 나누어 가지고 앞날을 기약하
자. 당시 조조의 마음은 바로 이랬을 것이다. 이에 조조는 20여 명의 공신을 열후에 봉하
고, 나머지에게도 그들의 공로에 따라 많은 포상을 베푼 것이다.
이때는 조조가 포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점령지와
아울러 둔전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가로 창고에 곡식이 그득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다.
순욱이여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건안 8년, 조조가 원소의 주력부대를 완전 무력화시키고 업성을 함락하기 얼마 전이었다.
사실 원소와의 힘겨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가장 커다란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전략과 전술에
탁월한 병법가 순욱의 치밀한 전투에 대한 분석 때문이었다. 이에 조조는 누구보다도 먼저
순욱의 공을 치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헌제에게 [청작순욱표]라는 표문을 올려 그의 공
로를 소상하게 적고, 이에 걸맞는 작위를 내릴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순욱은 야전의 공
이 없음을 이유로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작위를 받아들일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고, 순욱은 만세정후에 봉해졌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해온 이리 우리는 한나라의 조정을 바로 세웠소. 하여 나는 그대
의 도움으로 조정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그대의 도움으로 인재를 선발할 수 있었고, 그대
의 도움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그대의 도움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오.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거이오. 무릇 공이란 반드시 들판에서 벌이는 전투에서
얻어지는 것만이 아니라니, 바라건대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순욱은 자가 문약으로 영천 영음의 명문거족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및 숙
부 등이 모두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형제 8명을 당시 사람들은 '여덟 마리의 용'이
라 부를 정도였다. 그 또한 일찍이 인물평으로 이름이 알려진 남양의 하옹으로부터 '왕을
보좌할 명재상의 재목감'으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당대의 권세가인 중상시의 사위가 되었다.
효렴에 선발되어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동탁의 시대를 만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 영천은 드넓은 평야로 머지않아 천하가 전쟁이 휘말리게 되면 가장 치열한 격전
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만 합니다.
순욱은 자신의 종족을 이끌고 기주로 이사하였다. 원소는 이러한 순욱을 극진하게 예우
하였으나, 끝내 그의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원소의 인물됨이 큰그릇이 아니라고 생
각하였던 까닭이다. 몸을 사리던 그는 헌제 초령 2년(191) 조조가 동군태수로 부임하자, 결
연히 원소의 울타리를 벗어나 조조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순욱을 만난 조조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이 될걸세.
순욱과 조조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 만남을 계기로 조조는 물고기가
물을 만나고, 독수리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조조의 활약상에서 순욱의 역
할을 빼버린다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 조조의 활약상이 아니다. 구구절절이 적은 편지의 표
현처럼 조정을 바로잡고 인재를 선발하며, 계획을 세우고 치밀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순욱의 도움이지 않았던가? 당시 순욱의 나이는 29세였고, 조조의 나이는 37
세였다.
순욱을 얻은 조조는 군웅들을 차례로 꺾고 중원제패의 터전을 차근차근 다져나갈 수 있었
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여포와의 싸움을 앞두고 세웠던 순욱의 치밀한 전략은 대단한 것이
었다. 흥평 2년(195) 조조는 도겸이 죽자 먼저 서주를 치고 난 다음에 여포를 도모할 생각
이었다. 조조에게 있어서 도겸은 자신의 부친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무엇보다도 먼
저 앙갚음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순욱의 말림이 없었더라면 큰 낭패를 보았
으리라.
- 장군! 여포를 저대로 놔두고서 서주를 친다는 것은 천만부당하외다. 옛날 한고조와
후한 광무제가 취했던 태도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한고조는 관중을 고수하였고, 광무제는
하내를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이곳을 튼실히 지킴으로써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지
요. 확실한 근거지가 있어야만 나아가 적과 싸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
다.
장군께서는 얼마 전 그래도 연주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를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백성들이 장군을 얼마나 흔쾌히 따랐습니까? 서북쪽으로 황하와
동남쪽으로 제수를 낀 이 연주는 천하의 요지입니다. 지금 비록 여포와의 싸움으로 어지러
워지기는 하였지만 그런 대로 버틸 만한 곳입니다. 하오니 이 연주야말로 장군의 관중이요
하내이옵니다. 이곳을 먼저 평정하지 않고는 어느 무엇도 이룰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조는 진궁의 계략으로 장막과 여포에게 연주의 태반을 잃고 순욱과 정욱 등의
노력을 겨우 견성과 범현 및 동아현 등 세 곳의 성만을 지킨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순욱
이 이 말을 했을 때는 복양의 싸움에서 여포를 꺾고 다시 연주를 탈환한 뒤 였다. 더구나
이 때 여포는 유비에게 달아나 하비성에 머물고 있었다. 다시 순욱의 말은 이어진다.
- 이제 장군께서는 이봉과 설란을 무찌르고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진궁을 공격한다면,
진궁을 결코 서쪽을 돌아볼 틈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를 이용하여 우리는 들판에 널
린 보리를 수확하여, 군량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엿보아 일거에 여포를 들
이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여포를 격파한 뒤 다시 남쪽으로 양주의 유요와 힘을
합쳐 수춘의 원술을 공격합시다. 그러면 회수와 사수 사이의 땅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잇지
요. 그런데도 장군께서 이제 만일 여포를 그대로 버려두고 동쪽으로 서주를 공격한다면 어
찌 되겠습니까? 여포를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병사를 남겨두고 가면 서주를 치기 어려울
것이며, 그렇다고 병사를 적게 남기면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모두 성을 지키는 데에만
동원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포가 장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다시 쳐들어
온다면, 이제 겨우 숨을 돌린 백성들이 더욱 흔들리게 되겠지요. 그러면 견서이안 범현 등
두세 곳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나머지는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연주를 잃고 말겠지요.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요. 만일 서주를 함락하지 못한다면 장군께
서 돌아갈 수 잇는 곳이 달리 있겠소이까? 서주는 도겸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쉽사리
함락할 수 잇는 곳이 아닙니다. 저들은 지난번 장군에게 패한 적이 잇기 때문에, 지금쯤은
안팎에 똘똘 뭉쳐 철저히 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곳은 이미 보리를 거두어들
였을 시기이니 군량도 풍부할 것입니다. 성을 단단히 쌓고 들판을 말끔히 치워놓은 상태에
서 장군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하오니 장군께서 서주성을 공격해도 쉽사리 빼앗지 못하고
들판에는 먹을 곡식도 한톨 없다면, 장군의 그 많은 병사는 열흘이 못 되어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지난번의 공략으로 이미 장군이 아버님을 해친
징벌은 갚은 셈입니다. 사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사옵니까? 서주의 젊은이들
은 그때의 원한이 사무쳐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려들 것이니, 어디 항복할 생각을 하려고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곧바로 함락하기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무릇 일을 벌임에 있어서 그
런 경우는 없겠지요?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꾸고, 편안함을 위태함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
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판단이 아닌것 같습니다. 하오니 장군께서는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시지요.
조조는 순욱의 말을 따랐다. 이에 수확을 거두는 등 군량과 힘을 비축하였다가, 여포를
완전히 무찌르고 연주를 평정하였다.
순욱, 그대의 겸손은 지나치구료
건안 12년 기주를 완전히 평정한 조조는 또 다시 순욱의 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리
하여 조조는 헌제에게 다시 표문을 올려 순욱에게 식읍 1,000호를 더하여 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순욱은 한사코 사양한다. 조조는 또 정성어린 편지로 그를 설득시킬 수박
에 없었다.
그대의 책략은 표문에 밝힌 두 가지뿐만이 아니외다. 지난번에도 겸손하게 빼시더니, 이
번에도 또 사양하시는구료. 공은 정녕 노중연만을 본받으려고 하시나이까? 이는 성인이나
절개를 중히 여겼던 자들도 귀히 여기는 바는 아니올시다. 옛날 개자추도 이런 말을 하였
다지요. "사람들의 재물을 훔치는 것도 도적이라 한다."고.
하지만 그대야말로 치밀한 책략으로 뭇 적도를 평정함으로써 드러난 공이 백을 헤아리고
도 남을 정도임에랴! 이제 그대가 이 두 가지만 가지고서 봉작을 되돌리고 또 다시 사양하
시니, 겸손의 덕을 취하려 하심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이까?
여기서 조조가 언급하는 순욱의 책략 두 가지란 원소와 관도에서 일전을 벌일 때의 순욱
의 결정적인 역할을 뜻한다. 그 하나는 조조가 원소의 위세에 눌려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
려고 할 때 적극 만류했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원소의 주력부대를 꺾고 난 뒤 회군하려
고 할 때도 말렸던 것이다. 만일 이 때 순욱의 강한 반론이 없었더라면, 누가 중원을 제패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조는 삼국의 최강자로 나설 수 잇게
된 것이다.
건안 5년 관도에서 원소와의 대치는 조조에게 있어서는 실로 힘에 부치는 싸움이었다.
당시 조조는 지니고 잇는 군량마저 아주 적었으므로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욱의 생각은 조조와 달랐다.
- 원소는 지금 모든 병력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승패를 겨루려고 합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공께서는 어쩔 수 없이 매우 약한 병력으로 지극히 강한 적군을 마주하
게 된 것이지요. 하오나 여기에서 만에 하나라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경에는 그들
에게 기선을 제압 당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천하의 패권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
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공께서도 원소의 그릇됨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평범하고 무능한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인재를 모아들일 줄만 알았지 인재를 활용할 줄 모릅니다. 이것이
공과 다른 점이지요. 공께서는 뛰어난 무용과 밝은 지혜를 지니신데다가, 천자를 대신하여
반군을 도벌한다는 명분마저 가지고 계십니다. 하오니 반드시 승리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
니다.
실로 천만원군을 얻은 듯 자신감을 실어주었던 순욱의 편지였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따랐다. 그리하여 결국 조조는 원소 휘하의 맹장인 안량과 문추 등을 죽임으로써, 원소의
예봉을 완전히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원소의 세력은 상당하였다. 또 다시 지리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이에 조조는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고 원소도 겁을 먹었으니 쉽사리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회군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유표를 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욱이 이번에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 이제 원소가 싸움에서 졌으니, 그의 병사들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겁입니다. 마땅히
이 틈을 이용하여 다시 공격한다면 완전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하온데 이런 원소를 버려
두고 멀리 형주를 치려고 하시다니요! 만에 하나 원소가 잔당을 수습하여 우리의 뒷덜미를
치게 된다면, 그때는 여태껏 싸워 어렵게 거둔 승리가 물거품이 되고 말지 않겠사옵니까?
이번에도 순욱의 말은 승리를 안겨주게 되었으니, 조조가 그처럼 공을 치하하려고 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사였다.
조조와 순욱은 후한 말 헌제 때 내외정의 두 핵심축이었다. 이 둘이 힘을 합쳐 당시 숱
한 군웅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비록 오와 축을 제외한 중원이기는 하였지만 소강을 유지하
고 상당한 문화도 이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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