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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인간의 굴레 [서머셋 몸] 1

by Casey,Riley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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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굴레
서머셋 몸

  
  흐린 하늘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어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쌀쌀한 날씨였다. 유모는 어린아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커튼을 걷었다. 그리고 회
칠을 한 건넛집을 창 너머로 무심히 바라본 다음 아이의 침대로 갔다.
  "일어나요, 도련님." 유모가 말했다.
  그녀는 이불을 들치고 아이를 팔에 안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는 아직 잠이 덜 깨
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부르십니다." 유모가 또 말했다.
  아이를 안고 그녀는 아래층 방문을 열고 한 부인이 누워 있는 침대로 갔다. 그 부인은 아
이의 어머니였다. 부인은 두 팔을 벌려 아이를 자기 곁에 포근히 누였다. 아이는 왜 자기를 
깨웠느냐고 묻지 않았다. 부인은 아이의 눈에 키스를 하고 야윈 손으로 플란넬 잠옷을 입은 
아들의 따뜻한 몸을 어루만지고는 가슴에 꼭 껴안았다.
  "아가, 졸립지?" 어머니가 물었다.
  흡사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가느다란 약한 목소리였다. 어린 아들은 대답도 없이 그저 
좋아하며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어머니 품안에 안긴 것이 흐뭇했던 모양이다. 그는 어머니
에게로 파고들면서 졸린 눈으로 키스를 했다. 그리고 눈을 감기가 무섭게 다시 잠이 들어버
렸다. 의사가 들어와서 침대 곁에 섰다. 
  "이애를 좀더 데리고 있을 수 없을까요?" 어머니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는 대답도 없이 엄숙한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오랫동안 아들을 곁에 
두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키스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아들의 몸을 쓰다듬어 내려가
서 오른쪽 발을 잡고 조그마한 다섯 개의 발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왼발로 손을 
옮겼다. 마침내 부인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피곤하십니까?" 의사가 물었다. 부인은 말할 기력조차 없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다. 의사는 말했다.
  "이제 아이를 데려 가야겠습니다."
  부인은 너무나 기진 맥진해서 막을 수가 없었으므로 의사의 요구대로 어린 아들을 내주었
다.
  의사는 아이를 안아 유모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아이를 침대에 도로 데려다 뉘어요."
  "네, 그러겠어요."
  아직 자고 있는 아이를 안고 가버리자, 어머니는 가슴이 미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
  "가엾은 것, 저애는 어떻게 될까요?"
  간호사는 부인을 진정시키려 했다. 부인은 지쳐서 울음을 그쳤다. 의사는 방 맞은편에 있
는 테이블로 갔다. 그 위에는 사산아가 타월에 덮여 있었다. 그는 타월을 들치고 들여다보았
다. 휘장에 가려져 침대에서는 의사가 보이지 않았지만, 부인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
작할 수 있었다. 
  "계집아이였어요, 사내아이였어요?" 부인은 간호사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사내아이였어요."
  부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 때 유모가 침대로 돌아왔다.
  "도련님은 아직도 자고 있어요." 유모는 부인에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의사는 환자의 맥을 또 한 번 짚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별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오겠습니다."
  유모는 의사를 따라 나왔다. 
  그들은 잠자코 현관으로 걸어갔다. 의사는 발을 멈추며 물었다.
  "아이의 백부에게 기별했나요?"
  "네."
  "몇 시쯤 여기 오게 됩니까?"
  "글쎄요, 전보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어린애는 어떻게 하겠소? 내 생각에는 당분간 딴 곳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미스 월킨이 데려간다고 했어요."
  "누굽니까, 그 여자는?"
  "그 애의 대모지요. 그런데 마님은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1주일 후의 일이었다. 필립은 온슬로 가든에 있는 미스 월킨의 집 응접실 마루에 앉아 있
었다. 그는 외아들이었으므로 혼자 노는 데 익숙했다. 그방은 육중한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
고, 소파 위에는 3개의 쿠션이 놓여 있었으며, 안락의자 위에도 쿠션이 놓여 있었다. 필립은 
그것들을 모으고, 또 가벼운 의자들을 한데 모아 굴 모양을 만들었다. 커튼 뒤에 잠복해 있
으리라 상상되는 아메리카 인디언으로부터 몸을 감추려는 것이었다. 귀를 마룻바닥에 바짝 
붙이고 초원을 달리는 물소 떼의 발자국 소리도 들었다. 한창 이런 공상에 취해 있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났으므로 그는 숨을 죽이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 의자 하나를 끌어 
냈으므로 쿠션들이 마룻바닥에 우르르 떨어지면서 그 굴이 무너져 버렸다. 
  "어이구, 이 장난꾸러기. 월킨 아주머니가 보시면 야단 쳐요!"
  "와! 유모였구나." 필립은 소리 쳤다.
  유모는 허리를 굽혀 그에게 키스하고는 쿠션의 먼지를 털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아줌마, 인제 우리 집에 가는 거야?" 필립이 물었다.
  "그래요, 난 도련님을 데리러 왔어요."
  "아줌마가 새 옷을 입었네!"
  이것은 1885년의 일이었으므로, 그녀는 치맛자락을 펴지게 하는 허리받이를 착용하고 있
었다. 까만 비로드로 만든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는 꼭끼고 어깨는 날씬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겹의 넓은 주름이 있는 스커트에 비로드 끈이 달린 까만 보닛을 쓰고 있었다. 그
녀는 잠시 망설였다. 필립이 그녀가 예상했던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해 두었던 대
답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가 어떠신지 알고 싶지 않아요?" 유모가 먼저 그 말을 꺼내었다.
  "참, 깜박 잊었어. 엄마는 어때?"
  유모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엄마는 아주 편안하세요."
  "아이, 좋아."
  "엄마는 멀리 가셨어요. 엄마를 다시는 만나지 못해요."
  필립은 그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왜?"
  "엄마는 천국에 계시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 따라 울었
다. 유모 에마는 키가 크고 몸집이 큰 편이었다. 그녀는 데본셔 출신으로, 런던에 온 지 여
러 해가 되었으나, 아직껏 그 곳 사투리를 버리지 못했다. 눈물이 흐를수록 더욱더 감정에 
북받쳐서 그녀는 어린 필립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헌신적인 사랑, 즉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긴 필립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더욱이 그가 낯선 사람의 손에 맡겨질 것을 생각하니 더한층 가엾게 여겨졌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윌리엄 큰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가서 월킨 아주머니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요." 유모가 말했다.
  "인사하고 싶지 않아!" 필립은 본능적으로 눈물을 감추려고 하면서 대답했다.
  "그럼 그냥 가요. 2층에 가서 모자나 가져와요."
  필립이 모자를 가지고 내려왔을 때 에마는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립은 식당 
뒤 서재에서 새어나오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미스 월킨과 그녀의 언
니가 친구들과 가엾게 여겨 주리라고 생각했다.
  "아줌마, 나 들어가서 월킨 아줌마께 인사하고 올게."
  "그래요, 그러는 게 좋을 거예요."
  "아줌마가 먼저 들어가서 내가 왔다고 일러 줘요."
  그는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했다. 에마는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마의 이
야기 소리가 새어나왔다.
  "필립 도련님이 작별 인사를 하겠답니다."
  부인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별안간 잠잠해졌다. 필립은 쩔뚝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
다. 헨리에타 월킨은 불그스름한 얼굴에 머리털을 물들인 억세게 생긴 여자였다. 그 시절에
는 머리털을 염색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물의를 자아내던 때였다. 필립은 그의 대모 월킨 
아주머니가 머리를 물들였을 때 집안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일이 있
었다. 미스 월킨은 불만 없이 늙어 가는 그녀의 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서재에는 필립
이 알지 못하는 두 부인이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아이, 가엾어라." 미스 월킨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필립은 월킨 아주머니가 왜 점심 시간에 보이지 않았으며, 검은 옷
을 입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미스 월킨은 무어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전 집에 가야겠어요." 마침내 필립이 말했다.
  그는 미스 월킨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에게 또 한 번 키스를 했다. 필립은 그녀
의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낯선 부인 중의 하나가 그에게 키스를 해도 좋으냐고 묻자 
필립은 엄숙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울면서도 필립은 이 방 안의 분위기를 은근히 만족스럽
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동정해 주는 이 곳에 좀더 있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가 떠나 주기를 바라는 듯한 눈치였기 때문에 에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에마는 그 동안 친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지하실로 내려가 있
었다. 필립은 층계참에서 에마를 기다렸다. 헨리에타 월킨 대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애 어머니와 나는 절친한 사이였어. 난 그애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견딜 수가 없어."
  "헨리에타, 너는 장례식에 가지 않는 게 나을 뻔했어. 네 마음만 상하게 했잖아?" 헨리에
타의 언니가 말했다.
  그러자 낯선 부인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런 가엾은 앨 어떡하누! 이 세상에 그애 혼자 남았으니 정말 불쌍해. 더구나 그 애는 
다리를 절던데."
  "그래, 그 애는 절름발이야. 그게 그 애 엄마의 제일 큰 슬픔이었다우."
  이 때 에마가 돌아왔다. 그들은 마차를 불러 타고 마부에게 그들이 갈 곳을 일러 주었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캐리 부인의 장례를 치른 후였다. 그 집은 노팅힐게이트
와 켄싱턴 하이웨이 사이의 한산한 거리에 있었다. 에마는 필립을 응접실로 데리고 갔다. 필
립의 백부는 장례식 때 화환을 보내 준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었다. 장례식에 미
처 도착하지 못한 화환 하나가 마분지 상자에 담긴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필립 도련님이 오셨어요." 에마가 캐리 씨에게 말했다.
  캐리 씨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
더니 다시 허리를 굽혀서 필립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는 보통 키보다 약간 작고 뚱뚱한 
편이었으며, 대머리를 감추기 위하여 기다란 몇 개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고 있었다. 그의  
말끔하게 면도를 한 균형 잡힌 얼굴로 보아 젊은 시절에는 미남이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
었다. 그의 시곗줄에는 황금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필립, 넌 이제부터 나하고 같이 살게 된다. 어떠냐, 좋지?" 캐리 씨가 물었다.
  2년 전 마마가 유행할 때 필립은 백부의 목사관에 가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남은 것은 백부나 백모 생각보다는 오히려 다락방과 넓은 정원뿐이었다.
  "네."
  "이제부터 너는 나와 루이자 큰어머니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생각해야 해."
  필립은 입술을 가볍게 떨며 낯을 붉혔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내게 맡기셨단다."
  캐리 씨는 이 말을 하기가 퍽 거북했다. 하기야 그의 계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
둘러서 런던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오는 동안 내내 계수가 죽고 자기가 그 아들을 맡아서 
기르게 된다면 자기 생활이 여러 가지로 어지러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밖에는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이가 50이 훨씬 넘었고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아내는 여태껏 아이를 낳
지 못했다. 이런 집에 원치 않은 사내아이 하나가 들어와 버릇없이 소란하게 굴 것을 생각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계수에게 호감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넌 내일 나와 함께 블랙스테이블로 가야 한단다."
  "에마 아줌마도 가나요?"
  필립은 에마의 손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러자 에마는 그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아니야, 에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
  "싫어요, 난 에마 아줌마와 같이 갈래요."
  필립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에마 또한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캐리씨는 어쩔 수 없
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필립과 단둘이 있고 싶으니, 잠깐 나가 주었으면 좋겠소."
  "네, 그렇게 하지요."
  필립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렸지만, 에마는 가만히 그를 떼어 놓았다. 캐리 씨는 필립
을 두 팔로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울면 못 쓴다. 네겐 이제 유모가 필요없어. 이젠 학교에 갈 것도 생각해야지."
  "그래도 에마 아줌마와 같이 있고 싶어요." 아이가 되풀이하였다.
  "필립, 그러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너의 아버지가 남기고 간 돈은 조금밖에 안 된단
다. 그것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넌 이제부터는 한푼이라도 헛되게 써선 안 돼."
  캐리 씨는 이틀 전에 가정 고문 변호사를 방문했었다. 그의 아우인 필립의 아버지는 경험 
많은 유명한 외과 의사였으며, 완벽한 병원 시설은 그의 경제적 기반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
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패혈증으로 급사한 뒤, 그 자신의 생명 보험료와 세 놓은 부르
톤가의 집 이외에는 거의 한푼도 미망인에게 물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적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여섯 달 전의 일이었다. 그 때 이미 몸이 허약해진데다가 어린애까
지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계수 캐리 부인은 셋집을 얻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생각 없이 
승낙해 버렸다. 부인은 가구를 창고에 넣어 두고, 어떻든 어린애가 출생할 때까지 불편이 없
도록 하기 위하여 부당하게 비싼 집세를 주고 가구가 딸린 작은 집을 1년 기한으로 빌렸다. 
그녀는 여태껏 금전을 다루는 데 익숙지 못했으므로, 돌변한 환경에 맞추어 생활비를 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가졌던 돈도 이럭저럭 다 써버리고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비용을 청산하고 나자 조카 필립이 성장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의 양육비
로 남은 것은 겨우 2천 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사정을 어린 필립
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 필립은 아직도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다.
  "이젠 에마 아줌마에게 가봐라."
  캐리 씨는 에마가 누구보다도 더 잘 이애를 달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잠자코 필립은 백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백부는 다시 필립을 불러세웠다.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 떠나야 한다. 에마 아줌마에게 네 
짐을 모두 꾸려 놓도록 일러라. 장난감은 모두 가져가도 좋아.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아버지
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한 가지씩 가져가도 좋다. 다른 것은 죄다 팔아 버릴 테니
까."
  필립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캐리 씨는 사무적인 일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었으므로, 화
가 난 채 쓰기 싫은 사례장을 계속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책상 한쪽에는 청구서 뭉치가 놓
여 있었다. 이것을 보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그 중에서도 한 장은 엄청나게 비싼 값을 요구
하는 청구서였다. 캐리 부인이 운명하자 곧 에마는 시체가 안치된 방을 장식하기 위해 꽃집
에서 흰 꽃을 많이 주문해 들여왔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헛된 낭비였다. 에마는 그처럼 시
키지도 않은 일을 나서서 하는 여자였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에마와 같
은 여자는 해고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은 에마에게로 가서 그녀의 품안에 얼굴을 파
묻고 가슴이 터져라도 울어 댔다. 에마는 필립을 자기 친자식처럼 여겼으므로-그녀는 필립
을 생후 1개월 되던 때부터 돌보고 있었다-부드러운 말로 위로했다. 자주 가서 만나 보고 
그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필립이 가게 될 시골에 대한 이야기와, 데본셔
에 있는 그녀 자신의 집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엑세터 국도의 통행
세 징수원이라는 것과, 외양간에는 돼지도 있고 소도 먹이며, 얼마 전에 송아지를 낳았다는 
등,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필립은 눈물을 거두고 내일 떠날 여행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
했다. 에마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그녀는 그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옷을 침
대 위에 늘어놓고 챙기기 시작하자 필립도 거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장난감을 모아 오라고 
필립을 육아실로 보냈다. 그는 거기서 한참동안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나 마침내 혼자 있는 
데 싫증이 나서 침실로 돌아왔다. 에마는 그의 물건을 커다란 함석 상자 속에 넣고 있었다. 
그 때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져가도 좋다고 한 백부의 말이 생각났
다. 필립은 무엇을 가져가는 것이 좋겠냐고 에마에게 물었다. 
  "응접실에 가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오세요."
  "윌리엄 큰아버지가 거기 계셔."
  "괜찮아요. 거기 있는 건 아직은 모두 도련님 거예요."
  필립이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캐리 씨는 그 방에 보이지 않
았다. 필립은 이리저리 다니며 살폈다. 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낯선 사람의 방이었고, 필립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것이 어머니의 것이며, 어느 것이 집주인의 것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어머니가 좋아한다고 하신 조그마한 탁상 시계를 선택하기로 했
다. 그는 시계를 가지고 우울한 기분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필립은 어머니가 누워 있던 침
실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는 않
았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약간 무서웠다. 가슴
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러나 그 때 자기도 모르는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손잡이를 돌리게 
했다. 마치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심하듯이 조용히 손잡이를 돌리고, 잠
시 동안 문지방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어 용기를 냈다. 이젠 무서운 생각은 없어졌지만 어쩐
지 이상스러웠다. 안에 들어서자 문을 닫았다. 덧문은 닫혀 있었고, 1월 오후의 차가운 광선
이 비치는 방 안은 어둠침침하였다. 화장대에는 어머니가 쓰던 머릿솔과 손거울이 놓여 있
었고, 조그마한 접시에는 머리 핀이 들어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필립 자신의 사진과 아버지
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전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 가끔 이 방에 들어와 본 적이 있었
으나, 지금은 그 때와는 달라 보였다. 의자의 모양조차도 그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침대는 
마치 누가 그 날 밤 잠을 자려고 준비해 놓은 듯했고, 베개 위에 있는 상자 속에는 잠옷이 
들어 있었다. 
  필립은 옷이 가득 들어 있는 벽장을 열고 그 속에 있는 옷을 한아름 안고 얼굴을 파묻었
다. 옷에서는 어머니가 쓰던 향수 냄새가 그윽히 풍겼다. 그는 또 어머니의 물건이 들어 있
는 서랍들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리넨 의류 속에 라벤더 향수가 든 주머니가 있었
고,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상쾌했다. 그가 처음 방 안에서 느꼈던 이상한 느낌은 사라지고, 
그의 어머니는 잠깐 밖으로 산보 나가고 없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곧 돌아와 그와 
함께 차를 마시기 위해 2층으로 올라오실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 위에 어머니의 따뜻
한 키스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침대로 기어올라가서 베개를 
베었다. 그리고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필립은 눈물을 흘리며 유모 에마와 헤어졌다. 그러나 블랙스테이블로 가는 여행은 매우 
즐거웠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잊고 원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블
랙스테이블은 런던에서 6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짐을 짐꾼에게 맡기고 캐리 씨는 필립을 
데리고 목사관을 향하여 걸어갔다. 5분 남짓 걸려서 목사관에 이르렀을 때 필립은 그 정문
을 보자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다. 그것은 붉은 칠을 한 다섯 개의 창살로 된 문이었다. 
돌쩌귀가 달려 있어 안팎으로 여닫기가 쉬웠다. 문에 매달려 앞뒤로 흔들며 그네를 뛸 수도  
있었으나, 어른들은 언제나 못 하게 말렸다. 그들은 정원을 지나서 현관문에 이르렀다. 이 
현관은 방문객이 있을 때나 일요일에만 사용되고, 또 목사가 런던을 왕래할 때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는 문이었다. 보통 출입에는 옆 문을 사용했고, 또 정원사나 걸인, 부랑자를 
위한 뒷문도 있었다. 이 집은 약 25년 전에 교회식으로 지은 누런 벽돌에 붉은 지붕으로 된 
제법 큰 건물이었다. 입구는 교회 입구와 비슷했고, 응접실 창문은 고딕식이었다. 
  캐리 부인은 그들이 몇 시 기차로 올 것인가를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귀를 기울이고 있
다가,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 문으로 나왔다.
  "저기 루이자 큰엄마가 나오신다. 뛰어가서 키스해 드려야지."
  필립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뛰어가다가 우뚝 섰다. 캐리 부인은 키가 작고 퍽 늙어 보였으
나, 사실은 남편과 동갑이었다. 그녀의 얼굴엔 유난히 깊은 주름살이 많았고, 눈은 푸른색이
었다. 잿빛 머리는 젊은 시절에 하던 모양대로 곱슬곱슬하게 빗겨져 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유일한 장식품은 십자가가 달린 금 목걸이였다. 부인의 태도는 점잖고 목소리
도 부드러웠다.
  "윌리엄, 걸어오셨군요?" 부인은 남편에게 키스하면서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구려." 캐리 씨는 조카를 한번 힐끗 보면서 대답했다.
  "걸어오느라고 힘들었겠구나, 필립!" 부인은 필립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전 언제든지 걸어다니는걸요."
  캐리 씨는 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내심 적이 놀랐다. 루이자 백모는 필립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1층 홀로 들어갔다. 홀 바닥에 노란 타일이 깔려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검은 타일로 그리스 십자와 그리스도의 상이 무늬 놓여 있었다. 홀 밖으로 통하
는 큰 계단은 특별히 향기가 나는 소나무를 윤이 나도록 많이 남았으므로, 그것으로 만든 
것이었다. 난간에는 4대 복음서에서 따온 여러 가지 장식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돌아오시면 추우실까 봐 난롯불을 피워 놓았어요." 캐리 부인이 말했다.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검은 난로가 놓여 있었다. 이 난로는 날씨가 몹시 춥거나 목사가 
감기에 걸렸을 때만 피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캐리 부인이 감기에 걸렸을 때는 피우지 않았
다. 그것은 석탄 값이 비싼 탓도 있었지만 하녀 메리 앤이 여러 곳에 불을 피우는 것을 달
갑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로마다 불을 피우려면 하녀 한 사람이 더 필요했다. 겨울이  
되면 캐리 부부는 난로 하나만 피우고 지낼 수 있도록 식당에서 기거했다. 이것이 버릇이 
되어 여름에도 식당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응접실은 단지 일요일 오후에 캐리 
씨가 낮잠을 잘 때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토요일에는 설교문을 쓰기 위하여 서재에도 불을 
피웠다.
  루이자 백모는 필립을 2층으로 데리고 가서 길이 내다보이는 조그마한 침실로 안내했다. 
창문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나뭇가지가 매우 낮아서 그것을 타고 높이 올라가 
놀던 기억이 필립에게 떠올랐다.
  "네게는 작은 방이 어울릴 거야. 혼자 자도 무섭지 않겠지?"
  "네, 안 무서워요."
  필립이 전에 왔을 때는 유모가 함께 왔었으므로, 캐리 부인은 그를 돌볼 필요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필립을 쳐다보며 그를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
었다.
  "손은 혼자 씻을 수 있니? 못 하면 내가 씻겨 주지."
  "혼자 씻을 수 있어요." 필립은 자신 있게 말했다.
  "좋아, 그럼 차 마시러 올 때 손을 잘 씻었나 볼 테야." 캐리 부인은 말했다.
  그녀는 어린애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필립이 이 곳 블랙스테이블로 
오기로 결정되었을 때 캐리 부인은 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백모로서의 의무만은 다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고 
보니 필립이 백모에게 그러하듯이 그녀도 필립을 대할 때 서먹서먹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자기 남편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애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캐리 부인은 필립이 그
렇지 않기를 바랐다. 부인은 볼일이 있다고 말하고 나가 버렸으나 곧 다시 돌아와 필립이 
있는 방 문을 노크하고 밖에 선 채로, 혼자 수돗물을 틀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아
래층으로 내려가서 차 시간을 알리는 벨을 울렸다. 
  넓고 균형이 잡힌 식당에는 양쪽에 창문이 있고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가운데
에 큰 식탁이 있고, 한쪽 끝에는 거울이 달려 있는 으리으리한 마호가니 찬장이 있었다. 그
리고 또 한쪽 구석에는 작은 풍금이 놓여 있었다. 벽난로 양쪽에는 가죽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는데, 모두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는 '남편'이라고 불렀고 팔
걸이가 없는 다른 하나는 '아내'라고 불렀다. 캐리 부인은 결코 안락의자에 앉는 법이 없었
다. 그녀는 너무 편안한 의자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늘 분주하였다. 만일 팔
걸이가 달려 있다면 거기서 떠날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립이 들어왔을 때 캐리 씨는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부젓가락을 그의 조카
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는 크고 반짝거리는 쓰지 않은 것으로 '목사'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
는 작고 많이 쓰인 것으로 '부목사'라고 불렀다.
  "오늘 식사는 뭐요?"
  "메이 앤에게 달걀을 요리해 오라고 했어요. 여행을 마치신 뒤라 시장하실 것 같아서요."
  캐리 부인은 그녀 자신 별로 여행을 한 경험은 없었지만, 런던으로부터 블랙스테이블까지
의 여행은 퍽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목사의 봉급은 1년에 불과 3백 파운드밖에 되지 않았
다. 그래서 남편이 휴가 여행을 떠날 때에도 함께 갈 여유가 없었으므로, 목사 혼자만 떠났
다. 남편은 교파 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매우 즐겨서 보통 1년에 한 번씩은 런던에 갔고, 박
람회 관람차 파리에도 갔다온 적이 있으며, 스위스에도 몇 번 다녀온 일이 있었다. 메리 앤
이 달걀 요리를 가져왔으므로,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았다. 의자가 필립에게는 너무 낮았기 
때문에 잠시 동안 캐리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책을 의자 위에 놓아 주어야겠어요." 메리 앤이 말하였다.
  그녀는 풍금 위에서 커다란 성경책과 목사가 늘 읽는 기도서를 가져와 필립의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것 봐요, 윌리엄! 성경책 위에 앉힐 수 없어요. 서재에서 다른 책을 가져오도록 하세
요." 놀란 목소리로 캐리 부인이 말했다.
  캐리 씨는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메리 앤, 한 번쯤은 기도서 위에 앉혀도 괜찮을 거야. 기도서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
이 쓴 거니까. 그건 신이 기록한 책은 아니거든." 그는 말했다.
  "아, 난 그 생각은 미처 못 했어요." 루이자 백모가 말했다.
  필립은 그 책 위에 앉았고 목사는 기도를 드린 다음 달걀의 윗부분을 잘라냈다.
  "자, 이걸 먹으렴." 필립에게 그것을 주면서 말하였다.
  필립은 달걀 하나를 통째로 먹고 싶었으나 아무 소리 없이 주는 것만 먹었다.
  "그 동안 달이 알을 많이 낳았소?" 목사가 물었다.
  "아니오, 하루에 하나 아니면 두 개뿐예요."
  "필립, 그 달걀 맛이 어떠냐?" 백부가 물었다.
  "아주 맛있어요."
  "주일날 오후에 또 주마."
  캐리 씨는 언제나 일요일 간식 때는 저녀 예배 때 기운을 내기 위하여 삶은 달걀을 하나
씩 먹는 것이었다.
  필립은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늘 고독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러므로 이 목사관에서의 외
로움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메리 앤을 사귀게 되었다. 
메리 앤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으며, 뚱뚱하고 키가 작았다. 그녀는 어부의 딸로,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목사관에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곳이 그녀가 남의집살이를 시작한 집이며, 
이 집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다만 때때로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 내서 겁 많은 주인 
부부를 놀라게 하였다. 그녀의 양친은 항만로 밖의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었는데, 밤이면 양
친을 만나러 갔다. 그녀가 들려주는 바다 이야기는 필립의 공상을 자극했다. 어린 필립에게
는 항구의 비좁은 골목들도 어린 공상이 미치는 대로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필
립은 메리 앤의 집에 놀러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백모는 그가 어떤 점잖지 못할 것
을 배우지나 않을까 염려했고, 백부도 잘못된 교제가 선량한 품행을 그르칠 것이라고 반대
했다. 그는 거칠고 사나우며 비국교파 교회에 다니는 어부들을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필립
은 식당에 있을 때보다는 부엌에 있는 편이 마음이 더 편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장난감
을 가지고 부엌으로 가서 놀았다. 백모도 그것을 나쁘게 생각지는 않았다. 부인은 혼잡한 것
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내아이가 있으면 으레 집 안이 지저분해진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부엌을 어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경우 백부
는 심란해져서 필립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곤 하였다.
  그러나 캐리 부인은 필립이 학교에 가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으며, 그녀의 마음은 
이 부모를 잃은 어린이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비위를 맞추려는 백모의 태도는 어색했으며, 
수줍은 이 어린애는 늘 백모의 사랑에 무뚝뚝하게 대했으므로, 오히려 백모가 무안했다. 이
따금 부인은 부엌에서 들려오는 필립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인
이 들어가면 필립은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조용해졌다.
  그리고 메리 앤이 필립이 웃는 까닭을 설명할 때도 필립은 낯을 붉히곤 했다. 캐리 부인
은 메리 앤이 설명하는 장난이 조금도 우습지 않았으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했다.
  "여보, 필립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보다 메리 앤과 같이 있는 것이 훨씬 즐거운 것 같아
요."
  바느질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가정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야. 교육을 단단히 받을 필요가 있어."
  필립이 이 곳에 와서 두 번째 맞는 일요일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캐리 씨는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은 후에 낮잠을 자기 위해 응접실로 갔으나, 기분이 좋지 않아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날 아침 조사이어 그레이브스는 캐리 씨가 제단에 장식해 놓은 
촛대에 대하여 맹렬히 반대했던 것이다. 그 중고품 촛대는 그가 터캔베이에서 사온 것인데, 
보기에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조사이어 그레이브스는 그 촛대가 카톨릭의 것
이라고 했다. 그러한 비난은 캐리 씨에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에두워드 
매닝(1808~1892 처음에는 영국 국교의 목사였는데, 나중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추기
경이 되었음)이 영국 국교로부터 탈퇴한 것으로 끝을 맺은 종교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옥스퍼
드 대학에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다. 그는 블랙스테이블
의 저파교회(의식을 중요시하지 않는 영국 국교의 일파)의 교구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
보다는 좀더 화려하게 예배를 드리기를 좋아했고, 내심으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행렬 기
도와 촛불을 밝히는 것을 동경해 왔던 것이다. 다만 향불을 피우는 것만은 싫어했다. 그리고 
그는 프로테스탄트(신도교)라는 말을 실어하여, 자신을 카톨릭 교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는 카톨릭 교도에는 또 하나의 형용사를 덧붙여 로마 카토릭 교도라고 불러야 한다고 입
버릇처럼 주장해 왔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최선의 카톨릭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는 수염
이 없는 자신의 얼굴이 남에게 사제처럼 보이리라 생각하고는 만족스러워했으며, 또 그가 
젋었을 때는 금욕주의적 풍채를 지녔었다. 한번은 그가 휴가를 받고 절약하기 위하여 부인
을 동반하지 않은 채 프랑스의 불로뉴에 갔을 때 그 곳 사제가 그에게 다가와서 설교를 해  
달라고 청했다. 캐리 씨는 이 이야기를 가끔 자랑삼아 했다. 그는 부목사가 결혼을 하게 되
면 해임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성직록이 없는 성직자는 모두 독신이어야 한다는 
견해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선거 때 자유당원들이 그의 정원 울타리에 푸른 글
씨로 커다랗게 '이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고 썼을 때 그는 크게 노하여 블랙스테이블의 자
유당 지도자들을 고소하겠다고 위협했었다. 그는 조사이어 그레이브스가 무어라고 지껄이든
간에 절대로 그 촛대를 성단에서 치워 버리지 않으리라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흥
분하여 '비스마르크 같은 놈' 하고 한두 번 중얼거렸다. 그 때 별안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얼굴에 덮었던 손수건을 치우고 누워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갔다. 
필립이 식탁에 올라앉아 있었고, 사면에 장난감 나무 토막이 흩어져 있었다. 필립은 통나무
로 성을 쌓았는데, 기초가 잘못되어서 그 성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나무 토막을 갖고 뭐하는 거냐! 주일날에는 장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필립은 놀란 눈으로 백부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언제나 그렇듯이 필립의 얼굴은 몹시 
붉어졌다.
  "집에서는 주일날도 늘 놀았는데요." 필립이 대답했다.
  "아니야, 너의 엄마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다."
  필립은 그것이 나쁜 일이란 것을 알지 못했으며, 만일 그렇다면 자기 어머니가 그런 나쁜 
일을 하도록 승낙해 주었다고 인정받기는 싫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넌 주일날에 장난을 하는 것이 아주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구나. 주일날을 왜 안
식일이라 부르는지 아니? 오늘 저녁에는 교회에 가야 하는데, 하느님의 율법을 범하고 어떻
게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겠니?"
  캐리 씨는 당장에 나무 토막을 치워 버리라고 호령하고는 필립이 그것을 치우는 동안 지
켜보고 있었다.
  "넌 아주 장난꾸러기로구나." 그는 거듭 말했다. "천당에 계신 너의 어머니가 슬퍼하실 것
을 생각해 봐라."
  필립은 울고 싶었으나, 원래 남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했으므로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
려고 이를 악물었다. 캐리 씨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필립은 창가에 
서 있었다. 목사관은 터캔베리로 가는 한 길을 등지고 있어서 식당에서 반원형의 조그마한 
잔디밭을 내다볼 수 있었다. 들판에서는 양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흐린 하늘은 서글퍼 
보였다. 필립은 한없이 슬픔을 느꼈다. 
  이윽고 메리 앤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때 루이자 백모가 2층에서 내려왔다. 
  "잠 좀 주무셨어요?" 부인이 물었다.
  "아니, 필립이 어떻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지 조금도 못 잤어."
  그는 자기 자신의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필립은 침울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는 단지 한 번 시끄러운 소리를 냈을 뿐이
며, 왜 소리가 나기 전이나 후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해 봤으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부인이 이유를 묻자 목사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도 글쎄 잘못했다는 말도 한마디 하지 않는구려." 그는 말을 맺었다.
  "얘, 필립, 너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니?" 캐리 부인은 필립이 그의 백부에게 더 이상 
잘못 보일까 봐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필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버터 바른 빵만 먹어 댔다. 왜 필립은 잘못했다
는 말을 하기 싫은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귀가 윙윙 거리고 울고 싶었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기분 나빠할 건 없다." 캐리 씨가 말했다.
  모두들 말없이 차를 마셨다. 캐리 부인은 이따금 필립을 훔쳐보았으나, 목사는 일부러 그
를 모른 척했다. 필립은 백부가 교회에 갈 차비를 하려고 2층으로 가는 것을 보자, 객실에서 
자신의 모자와 코트를 가지고 나왔으나, 때마침 백부가 내려와서 그를 보고 말했다.
  "필립, 오늘 밤은 교회에 가지 않아도 좋아. 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갈 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큰 굴욕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그
리고 가만히 서서 백부가 차양 없는 넓은 모자를 쓰고 품이 큰 외투를 입는 것을 보고 있었
다. 캐리 부인은 다른 때와 같이 남편을 문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러고 나서는 필립을 향
해 말했다.
  "필립, 괜찮아. 이다음부턴 다시 장난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러면 큰아버지가 밤에 교회에 
데리고 가실 게다."
  그녀는 필립의 모자와 외투를 벗기고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나와 같이 기도문을 읽고 풍금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자. 어때, 그럼 좋지?"
  필립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캐리 부인은 놀랐다. 만일에 이애가 저녁 예배를 보려 하지 않
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큰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뭘 했으면 좋겠니?" 백모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
었다.
  필립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
  "필립, 넌 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니? 큰아버지나 나는 모두 너 하나만을 위해 주고 있다
는 걸 넌 모르니? 넌 내가 싫으냐?"
  "네, 싫어요. 난 큰어머니가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캐리 부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 같은 필립의 거친 말은 그녀를 너무나 놀라게 했
다. 그녀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남편의 의자에 주저 앉았다. 의지할 곳 없는 절름발
이 어린애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필립도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생각하노라면, 어린애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 하느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가
끔 어린애들을 바라볼 때 견딜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와 양
볼에 흘러 내렸다. 필립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제야 자기가 한 말 때문에 백모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백모의 곁으로 가서 키스를 했다. 백모의 청을 받
지 않고 스스로 마음이 내켜서 키스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은 공단옷을 입은 키
가 자그맣고, 주름살이 잡히고 혈색이 나쁘며, 우스꽝스런 곱슬머리를 한 이 가엾은 부인은 
그를 무릎 위에 앉히고, 팔로 그를 껴안고는 가슴이 터질 듯 슬피 울었다. 그러나 그 일로 
하여 그들 사이의 서먹서먹함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행복을 느꼈다. 그로 인하
여 가슴 아픈 것을 경험한 백모는 새로운 마음으로 필립을 사랑하게 되었다.
  캐리 씨 부부는 필립을 터캔베리의 왕립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부근의 성직자들은 
모두 자녀들을 그 학교에 보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이 학교는 영국 대사원과 연관되어 있
는 학교로, 교장은 대사원의 명예 회원이었고, 전 교장도 부주교였다. 여기서 소년들은 성직
자를 지망하도록 권고받았으며, 순진한 소년들로 하여금 일생을 하느님께 봉사하도록 교육
시켰다. 이 학교에는 예비교가 부설되어 있었는데, 필립은 예비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9월 
하순의 어느 목요일, 캐리 씨는 그를 터캔베리로 데리고 갔다. 온종일 필립은 들떠 있었으
며, 한편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소년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밖에는 학교 생활
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에릭 이야기>>도 읽었다.
  터캔베리에서 차를 내렸을 때 필립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내에서도 얼굴이 새
파랗게 질려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학교 정면에 있는 높은 벽돌담은 흡사 감옥 같은 인상
을 주었다. 거기에 조그만 문이 있어 초인종을 울리자 문이 열렸다. 키가 작고 텁수룩한 사
람이 밖으로 나와서 필립의 트렁크와 장난감이 든 상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필립과 
백부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크고 볼품없는 가구와 의자들이 벽 주위에 위엄 있
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윌슨 선생님은 어떤 분인가요?" 필립이 백부에게 물었다.
  "이제 만나 보면 알 거야."
  다시금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캐리 씨는 왜 교장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이 때 필립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말씀드려 주세요."
  캐리 씨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윌슨 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필립
에게는 그가 무서운 거인처럼 보였다. 그는 키가 6피트를 넘고, 어깨가 벌어진데다, 콘 손과 
붉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쾌활하게 큰 소리로 말했으나, 그의 지나치게 쾌활한 태
도가 필립의 가슴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는 캐리 씨와 악수를 하고 나서 필립의 
조그마한 손을 잡았다.
  "너, 이 학교에 오니까 기쁘지?"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
  필립은 낯을 붉히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몇 살이지?"
  "아홉 살." 필립이 대답했다.
  "'선생님, 아홉 살입니다.'라고 해야지." 백부가 주의를 주었다.
  "여기선 공부할 것이 아주 많단다." 교장은 유쾌한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서 그는 거친 손가락으로 그를 간질였다. 필립은 수줍고 거
북하여 몸을 꿈틀거렸다.
  "당분간 이애를 기숙사에 넣어 두도록 하지요. 어떠냐, 필립? 좋지? 너까지 모두 여덟 명
이란다. 별로 낯설지 않을 게다." 그는 필립을 향해 말했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윌슨 부인이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말쑥하게 가르마를 탄 얼굴이 거
무스레한 여자였다. 그녀는 도톰한 입술에 둥근 코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크고 검었다. 보
기에 매우 쌀쌀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부인은 별로 말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웃는 일
은 드물었다. 윌슨 씨는 먼저 캐리 씨를 부인에게 소개하고 나서 필립의 등을 부인에게로 
다정스럽게 밀며 소개했다.
  "헬렌, 이애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인데 이름은 필립 캐리라 하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필립과 악수를 하고 나서는 역시 입을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교장
은 이 때 캐리 씨에게 필립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어떤 책을 공부하고 있었는
가를 물었다. 캐리 씨는 윌슨 씨의 지나친 열성에 당황하여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필립을 선생님께 맡기고 전 가 봐야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저와 같이 있으면 걱정하실 게 없을 겝니다. 성적이 부쩍부쩍 오를 겝니
다. 어때, 그렇지?"
  필립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캐리 씨는 필립의 이마에 키스하
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 날 따라와. 공부방을 보여 줄테니." 윌슨 씨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가 뚜벅뚜벅 응접실에서 걸어 나가자 필립은 절뚝거리며 황급히 따라갔다. 마침내 그는 
기다랗고 살풍경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끝까지 닿는 두 개의 긴 책상이 놓
여 있었고, 책상들 양편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직 아무도 없구먼. 다음엔 운동장을 보여 줄 테니까,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놀
아." 윌슨 씨가 말했다.
  그는 길을 인도하였다. 이윽고 삼면이 높은 벽돌로 둘러싸인 넓은 운동장으로 나왔다. 남
은 한 면은 울타리로 되어 있어, 그 사이로 넓은 잔디밭이 보였고, 그 너머로 왕립 학교 건
물의 일부가 보였다. 어린 소년 하나가 발길로 자갈을 차면서 불쾌한 듯이 거닐고 있었다.
  "얘, 베닝. 너 언제 왔니?" 교장이 큰 소리로 불렀다.
  소년은 가까이 와서 교장과 악수를 했다.
  "새 동무가 하나 생겼다. 너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크니까, 절대로 놀려서는 안 돼."
  교장은 두 아이를 귀엽다는 듯이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큰 목소리는 그들을 두
렵게 할 뿐이었다. 그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네 이름이 뭐지?"
  "캐리."
  "아버지는?"
  "죽었어."
  "하, 엄마는 빨래 일을 하지?"
  "엄마도 죽었어."
  필립은 이 대답이 이 소년에게 어떤 애석한 생각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했지만, 베닝은 그
런 것쯤으로 짓궂은 짓을 그만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럼 너의 엄마는 전에 빨래 일을 했지?" 그는 말을 이었다.
  "응."
  필립은 은근히 화를 내며 대답했다.
  "그럼 너의 엄마는 빨래하는 여자였구나?"
  "아니야, 아니라니까."
  "그러면 빨래 안 했단 말이지?"
  이 소년은 자기의 논법이 성공하자, 기쁨으로 의기 양양해졌다. 이윽고 그는 필립의 발에 
시선을 돌렸다.
  "너 발이 왜 그러니?"
  필립은 본능적으로 발에 눈이 가게 되었다.
  "난 절름발이야." 그가 대답했다.
  "왜 그렇게 됐어?"
  "첨부터 그래."
  "조금만 보여 줘."
  "아니, 싫어."
  "그럼 좋아."
  이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소년은 발길로 필립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필립은 
전혀 예기치 않았기 때문에 막아낼 수도 없었다. 너무 아파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아픔보다 더한 것은 놀라움이었다. 그는 베닝이 왜 그렇게 걷어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
다. 주먹으로 그 애의 눈두덩을 꺼멓게 멍들게 해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더욱이 그 소년
은 필립보다 작은 애였으며, <소년 신문>에서 자기보다 작은 애를 때린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필립이 아픈 정강이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 또 한 소년이 
나타나자, 필립을 괴롭힌 베닝은 그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잠시 동안 그들 두 소년
은 필립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눈치였으며, 그의 발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필립은 
얼굴이 뜨거워지고 불쾌해졌다.
  다른 아이들이 떼를 지어 오더니, 잇달아 아이들이 모여들어서는 제각기 방학 동안에 한 
일들이며, 어디에서 방학을 지냈으며, 크리켓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는 등 이야기들을 꺼
내기 시작했다. 서너 명의 신입생이 보였고, 이들과 함께 필립도 어느 사이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태도는 퍽 수줍었고 초조했다. 무엇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겁게 하려 했으
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애들은 여러 가지로 필립에게 말을 걸
었고, 필립은 기꺼이 대답을 해주었다. 한 소년이 크리켓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못 해, 나는 절름발이야." 필립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 소년은 재빨리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필립은 그 애가 공연한 말을 물
었다는 듯이 겸연쩍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 아이는 수줍어서 잘못했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듯이 필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립의 불구의 다리는 더 이상 흥미를 끌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어
떤 아이의 머리털이 붉다든가 혹은 어떤 애는 지나치게 살이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지나치게 민감해졌다. 쩔뚝거리는 것이 되도록 나
타나지 않도록 그는 될 수만 있으면 뛰지 않으려 했으며 독특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다른 
아이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하여 성한 발 뒤에 병신 발을 숨기고는 될수록 가만히 서 있
었으며, 남이 흉을 보지나 않나 하여 눈치만 살폈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운동 경기에 한몫 
낄 수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은 그에게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다만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고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과의 사이에 장벽이 가로막
힌 것 같았다. 때때로 아이들은 필립이 축구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그 때에도 그들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대개 혼자 있었다. 처음에는 이
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아이들과 자기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덧 2년이 지나서 필립은 열두 살이 되었다. 그는 초급반에서 성적이 2,3등 안에 들었
으며, 크리스마스를 지나면 몇몇 애들이 본과로 가게 되므로, 그 때는 그가 최우등생이 될 
참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상품으로 받았다. 학교의 문장이 들어 있고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었으나, 질이 나쁜 종이에 인쇄한 내용이 형편 없는 책들이었다. 이와 같은 일들 때문에 아
이들은 그를 놀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불행하지 않았다. 한편 친구들은 그의 
이러한 성공을 그의 불구의 탓이라고 하여 시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가 상을 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야. 그 앤 공부하는 것밖엔 할 일이 없거든."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젠 윌슨 교장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윌슨 씨의 큰 목소리에도 익숙해졌고, 교장 선
생의 무거운 손이 어깨에 놓일 때면 필립은 막연하나마 그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지력보다도 학자로서의 성공에 필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예비교를 수료할 때 
어김없이 장학금을 타게 되리라고 윌슨 씨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필립은 자아 의식이 강해져 있었다. 갓난아이는 자기 몸이 주위사물에 속한 것이
며,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갓난아이는 자기의 발가락이 옆
에 놓여 있는 딸랑이와는 달리 자기 몸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발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노는 것이다. 다만 고통을 통해서만 자기의 몸에 대한 의식이 차차 자라게 되는 것
이다.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는 데도 이와 똑같은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은 자
기의 몸이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개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똑같이 깨달을 수 있으나, 자기
를 완전히 독립된 인격으로서 깨닫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자기와 남
이 별개의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사춘기 때부터이지만, 이러한 감정이 반드시 자기와 
남과의 차이점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까지 발전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는 
마치 벌집 속에 있는 꿀벌같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행복한 법이다. 왜냐하면 그
들에게는 행복을 포착할 좋은 기회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곧 다른 사
람들도 함께 하는 일이요, 그들의 기쁨이란 그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데 기인하는 것
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령 강림제 다음날에 함스테드 유원지에서 춤추는 남녀나 축구 시
합에 열광하여 아우성치는 관중들이나 폴몰 클럽 창문에서 왕의 행렬에 환호하는 군중들 사
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이들 때문이다.
  천진 난만한 어린 필립은 그가 절름발이라고 해서 받는 조롱을 통하여 강한 자아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가 처해 있는 환경은 너무나도 특수한 것이어서 보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기존의 방법도 그에게는 적용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궁리할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의미도 잘 모르며 읽은 많은 책들은 그로 하여금 더 많
은 공상에 잠기게 했다. 번민과 부끄러움이 가득 찬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움트고 있었다. 희미하나마 그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것은 때때로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을 저지르고는 나중에 왜 자
기가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일종의 종교적인 풍조가 학교를 휩쓸었다. 품위 없는 말을 쓰는 것을 들어볼 수
가 없었고, 어린 소년들의 사소한 행동이라도 용서되지 않았다. 커다란 소년들은 중세의 귀
족들처럼 완력으로 약한 애들을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갔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는 필립은 신앙심이 대단히 두터워졌
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성서 협회에 가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런던으로 안내서를 부
쳐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안내서에는 지원자의 이름과 연령, 학교 등을 기입하게 되어 있는 
용지와 1년 동안 매일 저녁 지정된 성경 구절을 읽겠다는 엄숙한 서약서가 들어 있었다. 그
리고 반 크라운을 보내라는 청구서가 있었는데, 이것은 회원이 되고자 하는 지원자의 열의
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고, 한편 협회의 사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
명되어 있었다. 필립은 지체없이 지원서와 돈을 보냈고, 대신 매일 읽어야 할 성경 구절을 
지정하여 인쇄한 1페니 정도의 캘린더와, 한쪽에 선한 목자 그리스도와 양의 그림이 있고, 
다른 한족에는 매일 성경을 읽기 전에 드려야 할 짧은 기도문이 적혀 있는 가장자리가 붉은 
줄로 화려하게 장식된 종이 한 장도 받았다.
  그는 매일 밤 가스등이 꺼지기 전에 예정된 일과를 마칠 수 있도록 재빨리 잠옷을 갈아 
입었다. 그는 다른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비평을 가하지도 않고 성경 속에 있
는 잔인, 기만, 망은, 무성의, 교활 등에 관한 이야기를 열심히 읽었다. 이러한 일이 만약 그
의 실생활에서 일어났더라면 무서운 공포를 일으켰을 것이나, 그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읽
어 나갔다. 왜냐하면 그 모든 죄악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계시 아래서 행해진다고 생각되었
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번갈아 읽는 것이 성서협회의 방침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접하게 되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한 이런 일만 하는 게 아
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해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 믿고 구
한 것은 다 받은 줄로 알라.'
  이 성경 구절이 필립을 특별히 감동시킨 것은 아니었으나, 2,3일 후 일요일이 되자, 목사
가 설교를 할 때 우연히도 이 성경 구절을 택하게 되었다. 왕립 학교 학생들은 성가대석에 
앉아 있었고, 설교단은 한구석에 있었으므로 설교자는 그들과 거의 등지고 있게 되었다. 그
러므로 필립이 설교를 들으려고 애써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설교단까지의 거리는 무척 떨어
져 있었으므로 목소리가 성가대까지 들리도록 하려면 맑은 목소리와 발성법의 지식이 필요
하였다. 더구나 오랜 관습에 의하여 터캔베리의 목사는 커다란 교회 운영에 유용한 재능보
다는 학식에 의하여 선발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만은 바로 2,3일 전에 읽
었던 탓인지는 모르나 필립의 귀에 뚜렷이 들려와서 별안간 마치 그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
는 것같이 들렸다.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이 구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 날 밤 
침대에 들자 곧 복음서 책장을 들춰 그는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찾아 보았다. 그는 책에서 
읽은 것은 모두 맹목적으로 믿어 왔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은 이상하게도 다른 의미
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무에게도 물어 보
기가 싫었기 때문에 이 의문을 크리스마스 휴가 때까지 미루어 두었다가 드디어느 날 기회
를 얻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막 기도가 끝났을 때였다.
  캐리 부인은 언제나 그러하듯 메리 앤이 갖고 들어온 달걀을 세어서는 날짜를 기입하고 
있었다. 필립은 테이블 앞에서 무심코 성경을 뒤적거리는 척했다.
  "저, 큰아버지, 여기 이런 구절이 있는데, 정말 이 말씀대로 돼요?"
  그는 마치 우연히 그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손가락으로 그 구절을 가리키며 물었다.
  캐리 씨는 안경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는 때마침 난로 앞에서 <블랙스테이블 타임스>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것은 그날 저녁 신문사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배달된 것으로 목사는 
언제든지 읽기 전에 한 10분쯤 신문을 난롯불에 말리는 버릇이 있었다.
  "어떤 구절 말이냐?" 그가 물었다.
  "저어, 만일 네가 믿음이 있다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구절 말이에요."
  "필립,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되구말구." 접시 광주리를 집어들면서 캐리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필립은 대답을 청하는 듯이 백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믿음이 문제다."
  "큰아버지,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대로 될 수 있다는 말씀이지
요?"
  "그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될 수 있다." 목사가 말했다.
  "자, 그러면 필립, 그만 큰아버지께 인사하고 가서 자거라. 오늘 저녁에 당장 산을 옮겨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루이자 백모가 말했다.
  필립은 큰아버지의 이마에 키스하고 캐리 부인에 앞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자기가 바
랐던 대답을 들은 것이었다. 그의 조그마한 방은 몹시 추웠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에는 
덜덜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괴로운 조건 아래서 기도를 드린다면 더욱더 하느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그의 차가운 손과 발은 전능하신 하느님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었다. 오늘 밤도 그는 무
릎을 꿇고 손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절름발을 낫게 해주시기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께 기
도드렸다. 필립은 절름발이 같은 것은 산을 옮기는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뜻이면 반드시 나으리라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똑같은 기도를 하고 나서 그는 이 기적이 일어날 날짜까지 정해 놓았다.
  "오 하느님, 당신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베푸사, 만일 당신의 뜻이옵거든 제가 학교로 돌아
가기 전날 밤 저의 발을 고쳐 주시옵소서."
  그는 자기의 이 간절한 소원을 기도문으로 만들어 아침에 식당에서 백부가 꿇어앉아 기도
를 마치고 일어날 때까지의 틈을 타서 그 기도문을 입 속으로 외웠다. 저녁에도 되풀이했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잠옷을 입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거듭거듭 똑같은 기도를 했다.  
그는 하느님이 고쳐 주실 것을 꼭 믿었다. 그가 방학이 어서 끝나기를 열심히 고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층계를 한꺼번에 세 계단이나 뛰어 내려간다면 백부가 얼마나 놀랄 것인가. 또 아침 
식사 후에 루이자 백모와 같이 새 구두를 사기 위해 황급히 서두를 것을 생각하고 그는 혼
자서 웃음을 지어 보는 것이었다. 학교 아이들도 모두 깜짝 놀라리라.
  "야, 캐리, 네 발이 웬일이냐?"
  "응, 이젠 다 나았어." 그는 마치 그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는 또 축구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빨리 뛰고 있는 자기 모
습을 눈앞에 그려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부활절  학기 마지막 무렵에 운동
회가 열리는데, 그는 경주에도 참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른 애들과 똑같이 된다면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그렇게 되면 그가 절름발이란 것을 
아직 모르는 신입생들의 이상한 눈초리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 목욕을 할 때도  
옷을 벗고 그 성치 않은 발을 숨길 때까지 남모르는 조심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기도했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말
씀을 굳게 믿었다.
  마침내 학교에 돌아가기 전날 밤 그는 흥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밖
에는 눈이 소복히 내렸으며, 루이자 백모도 이 날 밤만은 보통 때와 달리 자기 침실에 불을 
피우게 했으나, 필립의 작은 방은 이 날도 몹시 추웠다. 손이 곱아서 칼라를 풀 수도 없었
다. 이빨이 딱딱 마주쳤다. 하느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보통 때와는 다른 무엇을 해야겠
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침대 앞에 있는 양탄자를 걷어치우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잠옷을 입는다는 것도 마음이 약한 표시라 생각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잠옷마저 벗어 버리고 발가숭이로 기도를 했다. 그가 자리에 누웠을 
때는 너무나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한번 잠이 들어 버리자, 그는 이튿날 아침 메
리 앤이 더운물을 가지고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잤다. 그녀는 커튼을 걷으면서 필
립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이 날 아침이 바로 그 기적이 이루어질 
아침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은 기쁨과 감사로써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우선 손을 뻗쳐서 
지금은 완전하게 나았을 발을 만져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조차도 하느
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발이 완전히 나았으리라고 믿었다. 마침내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오른쪽 발가락을 
왼발에 슬쩍 대 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서 그 발을 만져보았다.
  메리 앤이 기도하려고 식당에 들어가려 할 때 필립은 쩔뚝거리며 계단을 내려가서 아침 
식탁에 앉았다.
  "필립, 넌 오늘 아침 웬일인지 조용하구나." 루이자 백모가 말했다.
  "아마 내일부터 학교에서 먹어야 할 식사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 백부가 말했다.
  필립은 가끔 엉뚱한 대꾸를 잘하여 백부를 화나게 하곤 했다. 백부는 그건 얼빠진 공상의 
나쁜 버릇이라고 말해 왔다. 지금 필립은 또 엉뚱한 말을 꺼냈다.
  "저 말이지요, 큰아버지. 하느님께 어떤 일을 해 달라고 기도 드릴 때, 가령 산을 움직이
는 것 같은 것 말이에요, 정말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는데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지 않는다면 그건 무엇 때문일까요?"
  "넌 정말 이상하구나. 요전에도 산을 움직이느니 뭐니 하고 묻더니." 루이자 백모가 말했
다.
  "그건 네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거야." 백부는 대답했다.
  필립은 이 설명을 참말이라 생각했다. 하느님이 발을 고쳐 주시지 않은 것은 그의 믿음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 이상 신앙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 하느님께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드리지 않았던 탓이리라.
  그는 기껏 19일 동안 하느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부활절까지 기한을 정하고 2,3
일 후부터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 중에 부활하신 날이므로 하느님도 
기뻐하실 것이요, 더욱 자비로운 마음이 내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필립은 그의 소
원을 이루는 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즉 초승달이나 얼룩말을 보고
는 자기 발이 낫게 해 달라고 빌었다. 때로는 유성을 찾으려고 하늘을 열심히 쳐다보기도 
했다.(초승달, 얼룩말, 유성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음). 학교에서 외박 허가
를 받고 목사관에 돌아와서 닭고기를 먹을 때는 루이자 백모와 같이 창사골을 잡아당기며 
그의 발이 낫기를 빌었다(창사골을 두 사람이 서로 잡아당겨 긴 쪽을 얻은 사람은 소원이 
성취된다는 미신이 있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스라엘의 신보다 더 오래된 영국 
민족의 신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생각만 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똑같은 말로써 전능한 하
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어떻든 똑같은 말로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
요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번에도 자기의 믿음이 부족하지나 않
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 
원칙 이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완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국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치 유모가 가끔 그에게 들려주던 소금의 이야기, 소금을 새 꼬리에 얹기만 하면 
어떤 새라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작은 소금 주머니를 갖고 켄싱
턴 공원으로 간 일이 있었으나, 아무리 소금을 새 꼬리에 놓으려고 해도 새 곁으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부활절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 기도를 그만두었다. 필립은 자
기를 속인 백부에 대하여 내심 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성경 
구절도 역시 말과 뜻이 다른 이야기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백부가 자기를 농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립이 열세 살 되던 해에 입학한 터캔베리의 왕립 학교는 오랜 전통을 자랑했다. 선생들
은 때때로 <타임스>나 <가디언>지에서 읽을 수 있는 교육계의 새로운 사조를 절대로 용납
하지 않았으며, 이 왕립 학교의 오랜 전통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굳게 지켜 나가기를 진
정 원하였던 것이다. 필요없는 사어를 너무나 철저하게 가르쳤으므로 이 학교를 거쳐 나간 
학생들은 훗날에 호머나 베르길리우스를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휴게실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면 대담한 선생 한두 사람이 수학이 점점 중요한 학문으로 
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선생들 전체의 생각은 역시 고전이 수학보다 더 고상한 학문
이라고 고집했다.
  독일어나 화학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프랑스어만 담임 선생이 가르칠 뿐이었다. 
외국인 교사들보다도 그들이 학교를 통솔하는 데 더 능란했으며, 문법도 프랑스 사람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불로뉴에 가서 음식점 여급들이 영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에는 커피 한 잔도 시키지 못하고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그런 것은 별로 문제
가 되지 않는 듯했다. 지리 시간에는 주로 학생들에게 지도를 그리게 하였으며, 이 방법은 
특히 산악 지대가 많은 나라를 배울 때는 매우 재미가 있었다. 안데스 산맥이나 아페닌 산
맥을 그리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필립이 이 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25년 동안이나 교
장으로 지내 오던 플레밍 박사는 이제는 귀가 어두워져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의 일
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평교사 중에서 교장을 선발한다는 것은 이 학교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었
다. 교직원 회의에서는 예비 학교의 교장 윌슨 씨가 선출되기를 원했다. 윌슨 씨는 왕립 학
교의 선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들 모두가 20여 년 전부터 아는 처지여서, 그라면 새 
교장으로 들어가도 자기네들을 괴롭힌다든가 하는 염려는 없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회의결정은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퍼킨스라는 사람을 교장으로 선출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퍼킨스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이름부터 기
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퍼킨스가 포목상 퍼킨스 씨의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플레밍 박사는 점심 식사 직전에 선생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했
는데, 그 자신도 몹시 당황하는 태도였다. 선생들도 같은 기분으로 말없이 점심만 먹었으며 
사환들이 방을 나갈 때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선생들은 모두 그리 중요한 선생들은 못 되었고 이 학교를 거
쳐 나간 졸업생들에게 한숨쟁이, 콜타르, 눈깜짝이, 물딱총, 뺨치기 등의 별명으로 더 잘 알
려진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톰 퍼킨스를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논의의 대상에 오른 것은 그가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모두들 그를 잘 지억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하
며, 헝클어진 검은 머리털에 눈이 큰 소년이었다. 마치 집시처럼 생긴 아이였다. 통학생으로 
이 학교가 재학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돈은 한품도 들이지 
않고 공부를 했다. 물론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종업식 때는 언제나 많은 상품을 탔다. 그
는 이 학교의 자랑거리였으며, 그가 행여 어딘가 더 큰 사립 학교의 장학금을 받고 그 학교
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염려하던 일을 이젠 씁쓸하게 떠올렸다. 플레밍 박사는 
당시 포목점으로 친히 찾아가서-그들은 캐더린가에 있는 퍼킨스 쿠퍼 상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톰 퍼킨스가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는 이 학교에서 떠나지 말기를 바란다
고 부탁한 일조차 있었다. 그 학교는 퍼킨스 쿠퍼 상점의 물건을 많이 샀으므로 퍼킨스 씨
는 기꺼이 응낙했다. 퍼킨스는 계속해서 우등을 하였으며, 플레밍 박사가 알고 있는 그 누구
보다도 고전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졸업할 때는 이 학교에서 졸업생에게 주는 최고의 
장학금을 받았으며, 모들린 대학(옥스퍼드 대학 중의 하나)에서도 장학금을 받아서 마침내 
그의 찬란한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보에는 해마다 그의 대학에서의 훌륭한 성적을 보도했고, 그가 두 과목 수석
을 했을 때에는 플레밍 박사 자신이 교지 첫장에 몇 줄의 찬사의 글을 썼다. 그 즈음 퍼킨
스 쿠퍼 상점은 불경기에 빠졌었으므로, 그의 이러한 성공은 그의 모교에서 더한층 환영을 
받았다. 쿠퍼 씨는 붕어처럼 술만 들이켰고, 톰 퍼킨스가 학사 학위를 따기 직전에 포목 상
점은 파산 신청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톰 퍼킨스는 그의 천분에 맞는 직업을 갖게 되어 성직자에 임명되었고, 웰링턴 학
교에서 조교로 있다가 럭비 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그가 다른 학교에서 성공한 것은 좋지만 자기네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그의 통
솔 아래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였다. 일찍이 '콜타르'는 그에게 가끔 
벌을 준 일이 있었으며, '물딱총'은 그의 따귀를 갈긴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목사회가 
이 같은 과오를 저질렀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가 파산한 포목상의 아들
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쿠퍼 씨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더
욱 그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의 부임을 부감독이 열렬히 지지했다는데, 그렇다면 부
감독은 틀림없이 톰 퍼킨스의 저녁 식사는 교내에서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톰 퍼킨스가 
식탁에 낀다면 어떻게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또 그 지방의 주둔 부대에서는 그
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톰 퍼킨스가 장교나 유지들 사이에 버젓이 낄 수 있으리라고 기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교장으로 부임해 오면 이 학교는 크게 불리할 것
이다. 학부형들은 모두 불만을 품을 것이며, 대규모의 동맹 휴학을 한다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를 퍼킨스 교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다니! 선생들은 항의의 수단으로 
단결하여 사표를 제출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즉시 사표가 수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표를 제출하는 것은 보류하기로 했다. 25년 동안이나 비길 데 없이 무능한 재주로 
5학년을 담임한 '한숨' 선생은 "별수 없어. 새로 부임된 교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수밖
에."하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1년이 지났다. 필립이 입학했을 때는 옛날 선생들이 모두 그대로 있었으나 그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저항은 물론 외면적으로는 새 교장의 의견에 동
의하는 듯하면서도 뒤에서 그러는 것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저학년에서는 여전히 담임 선생이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상급반에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언어학 학위를 받고 프랑스의 국립고등학교에서 3 년간 교편을 잡은 
경험이 있는 새 선생이 부임해 와서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또 그리스어 대신 독일어를 배우
겠다는 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선생이 종래에 필요하다고 생
각되었던 것보다 더 체계적으로 수학을 가르쳐 주었다. 새로 온 이들 두 선생은 모두가 성
직자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이것은 실제적인 혁신이었으며, 이 두 선생이 새로 부임하자 그
전에 있던 선생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실험실이 설비되었고, 교련반이 설치되었다. 
모두들 학교의 성격이 변해 간다고 말했다. 앞으로 퍼킨스 씨가 그의 어수선한 머릿속에서 
무슨 계획을 생각해 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 학교는 사립 학교치고는 작은 편이었
으며, 기숙사 학생은 불과 2백 명을 넘지 못했고, 교회 건물들 때문에 교사를 증축한다는 것
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학교 구내에는 선생들이 살고 있는 집 한 채를 빼놓고는 모두 교
회 관계의 성직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건물을 더 지을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퍼킨스 씨는 
현재 교사의 두 배나 되는 큰 교사를 지을 만한 넓은 장소를 얻으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
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학생들을 끌어 올 작정이었다. 퍼킨스 씨는 켄트 주의 시골 소년
들과 접촉하는 것은 그들 도회의 소년들에게도 좋을 것이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이 지방
의 소년들도 영리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퍼킨스 씨가 이런 계획을 '한숨' 선생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모두가 본교의 전통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런던의 소년들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우리들은 조심해야 할 겁니다."
  "어리석은 소리요." 퍼킨스 씨는 말했다.
  그러나 퍼킨스 씨의 그러한 여러 가지 개혁 중에서도 가장 선생들의 반발을 산 것은 때때
로 그가 다른 선생의 학급을 대신 맡아서 가르치는 사실이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담
임 선생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콜타르'란 별명을 가진 터너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수업을 바꾸어 가르친다는 것은 피차간에 거북한 일이었다. 아침 기도가 끝나면 으레 아무
런 예고도 없이 선생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거는 것이었다.
  "오늘 11시에 6학년 반을 내가 가르치고 싶은데, 어떨까요? 이제부터는 서로 돌아가면서 
수업을 하기로 합시다."
  이러한 일이 다른 학교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터켄베리에서만
은 아직껏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는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최초의 피해자는 터너 씨였다. 
그는 교장의 오늘 라틴어를 가르치리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렸고, 학생들이 돌대가리처럼 
보여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역사 시간의 마지막 15분을 이용하여 그 날 학습할 예정
인 리비우스(로마의 역사가)의 한 문장을 미리 해석해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학급에 들어가 
퍼킨스 씨가 매긴 성적표를 보자 그는 깜짝 놀랐다. 학급의 최우등생이던 두 학생의 성적이 
매우 좋지 못했으며 반대로 평시에는 존재도 없던 다른 애들이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우수한 학생 엘드리지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우울한 어조로 이
렇게 대답했다.
  "퍼킨스 교장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해석은 하나도 시키지 않았어요. 교장 선생님은 제게 
고든 장군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어 보셨어요."
  터너 선생은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학생들은 분명히 혼이 났다는 표정들이었고, 그도 
역시 그들의 불만에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든 장군이 리비우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
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엘드리지는 고든 장군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주 혼이 났다고 하던데요."
  그는 일부러 웃음을 지으면서 교장에게 물었다.
  퍼킨스 씨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들이 카이우스 그라쿠스의 농지법을 알고 있기에 그러면 혹시 아일랜드의 농지 분규 
사건에 대해서 아는가 했소. 그러나 아일랜드에 관해서는 더블린이 리피 강가에 있다는 것
밖엔 모르더군요. 그래서 고든 장군에 관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이로부터 하나의 놀라운 사실, 즉 새 교장은 박식만을 좋아하는 지식광이라는 사실이 알
려지게 되었다. 그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주입시킨 학과의 시험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한숨' 선생은 달이 갈수록 더욱 근심이 
커 갔다. 더욱이 고전 문학에 대한 교장의 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급 3 학년 
담임인 '물딱총' 선생도 나날이 신경질만 늘어 갔다.
  필립이 입학하여 최초로 들어간 반은 '물딱총' 선생의 반이었다. 고든 목사는 조급하고 화
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필립처럼 수줍은 아이를 가르치는데는 아마 이 선생만큼 적당치 않
은 선생은 없었을 것이다. 필립이 이 본과로 진학해 올 때는 그가 처음 윌슨 씨가 교장으로 
있는 예비교로 들어갈 때 느꼈던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예비 학교에서 같이 지내던 소년들
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젠 어린애가 아니며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의 불
구도 덜 눈에 띄리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고든 씨는 그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켰다. 더욱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학생을 잘 알아내는 고든 씨는 필립을 유달
리 싫어하는 것같이 보였다. 필립은 공부를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을 
공포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잘못된 대답을 해서 선생으로부터 야단을 맞는 것보다는 오히
려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 있고 싶었으며 그가 일어나 해석할 차례가 오면 가슴이 서늘해지
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이 핼쑥해지는 것이었다. 즐거운 시간이라고는 퍼킨스 씨가 대리 수
업을 할 때뿐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상식을 중히 여기는 교장 선생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나이에 비해 정도가 높은 여러 가지 이상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가끔 퍼킨
스 씨가 교실에서 질문을 하다가 다른 아이들이 모를 때면 그는 필립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 미소는 언제나 필립을 환희에 차게 해주었다.
  "자 캐리, 네가 말해 봐."
  그럴 때마다 올라가는 그의 좋은 성적이 고든 씨의 적개심을 부채질했다. 어느 날 필립이 
해석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필립을 노려보면서 그의 엄지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
고 있었다. 필립은 조그만 목소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우물거리지 마라!"
  선생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순간 무엇이 필립의 목구멍을 콱 막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 계속해. 계속해 보란 말이야!"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는 더욱 높아 갔다. 그 결과 필립은 알고 있던 것까지도 잊어버리
고 말았다. 그는 활자가 총총히 박힌 책장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든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졌다.
  "모르면 왜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거야? 도대체 아는 거냐, 모르는 거냐? 지난 시간 해
석해 준 걸 들었어, 안 들었어? 왜 말을 못 해? 말해봐. 돌대가리, 말을 해 봐!"
  선생은 마치 자기 몸이 필립에게로 달려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 의자의 팔걸이를 꽉 붙들
고 있었다.
  학생들은 지난날 그가 어떤 애의 멱살을 쥐어서 거의 숨을 막히게 하던 일을 상기했다. 
앞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오며 흉악하고 무서운 얼굴로 변해 갔다. 그는 이미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필립은 이 구절을 바로 전날에는 완전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
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왜 모르는 거야? 단어를 하나하나 해석해 봐. 정말 모르는지, 알고도 그러는지 곧 알아내
고야 말 테니까."
  필립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하얗게 질린 채 떨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선생의 숨결은 
마치 코를 고는 듯 점점 높아 갔다.
  "교장은 너를 영리하다고 하더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난 알 수 없어. 일반 상식인
가. 흥, 자기 반에서는 무얼 가르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넌 돌대가리일 뿐이야!"
  선생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이 말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금 목청을 높여 되풀이했다.
  "돌대가리! 돌대가리! 절름발이 돌대가리!"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화가 조금 풀리는 듯했다. 필립의 얼굴은 갑자기 새빨개졌다. 
선생은 징계자 명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필립은 들었던 <<시저>>책을 내려놓고 조용히 밖
으로 나갔다. 징계자 명부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검은 표지의 책으로, 이름
이 세 번만 오르면 회초리로 매를 맞게 되어 있었다. 필립은 교장 선생 집으로 가서 서재의 
문을 노크했다. 퍼킨스 씨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교장 선생님, 징계자 명부를 좀 내어 주세요."
  "저기 있다." 퍼킨스 씨는 턱으로 명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니?"
  "저도 모르겠습니다."
  퍼킨스 씨는 필립을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대꾸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필립은 명부
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 후 수업이 끝나자 그는 교장 선생에게로 명부를 다시 가져갔다.
  "어디 내가 한번 보자. 고든 선생은 네가 '태도 극히 불손'이라고 올렸구나.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교장 선생이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고든 선생님은 저를 절름발이 돌대가리라고 했어요."
  퍼킨스 씨는 그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애가 빈정대느라고 그러는 것이나 아
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필립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
고 눈에는 아직도 두려움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퍼킨스 씨는 
일어나면서 명부를 내려놓고 몇 장의 사진을 집어들었다.
  "내 친구가 오늘 아침에 아테네의 멋진 사진을 보내 왔어. 이것 봐. 이게 아크로폴리스의 
사진이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필립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한장 한장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과 더불어 
폐허의 모습은 점점 생생하게 변해 가는 듯했다. 디오니소스 극장도 보여 주었다. 관객들이 
어떤 순서로 앉으며, 푸른 에게 바다를 바라볼 때 얼마나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고든 선생 반에서 공부할 때 그는 늘 내게 집시 점원 녀석이라고 부르곤 했단다."
  필립이 사진에 열중하여 이 말의 뜻을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퍼킨스 씨는 살라미스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손톱 끝에 검은 때가 낀 손가락으로 그리스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의 배
치된 모양을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 후 2 년 동안을 필립은 단조롭긴 했으나 즐겁게 지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조롱
을 받은 일도 없었고, 불구로 인하여 여러 가지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으므로 친구들의 주의
를 끌지는 못했으나, 그는 도리어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또 친구들 간에 인기도 없었으므
로, 외로운 생활을 혼자 즐기고 있었다.
  그 때부터 필립은 간식 시간에 이어 교장 선생의 서재에서 열리는 견신례 준비반에 참석
하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 퍼킨스 씨는 이 시간만은 아주 엄숙하게 소년들을 지도했다. 이 
시간에는 다른 선생들로 하여금 그를 경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의 익살도 전
혀 볼 수 없었다. 그는 매일 분망한 틈을 타서 가끔 견신례를 준비하는 소년들을 따로 모아 
15분에서 20분간 지도할 수 있었다. 그는 소년들로 하여금 견신례가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최초의 가장 엄숙한 단계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영혼 속에 깊이 파고
들어 그 자신의 열렬한 신앙을 그들 마음속에 그대로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필립이 
수줍은 중에도 자기에 못지 않은 정열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필립이 본질적
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교장 선생은 이야기하던 주제를 바꾸
었다.
  "너는 장차 커서 무엇이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저의 백부께서는 저더러 성직자가 되라고 하세요." 필립이 대답했다.
  "그런데 네 생각은?"
  필립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기가 성직자의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우들 성직자 생활만큼 행복한 생활도 없을 게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특권인가 하는 것
을 너도 알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지만 우리들
은 남보다 더 한층 하느님과 가까운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네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만일 네가 마음만 결정한다면-지금 당장에라도-너는 영원한 기쁨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장은 필립이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잘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그의 눈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네가 지금처럼 계속한다면 얼마 안 가서 이 학교에서 전교 수석이 될 것이며, 졸업할 때
는 틀림없이 장학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네 재산은 얼마나 되지?"
  "백부께서는 제가 스물한 살이 되면 1 년에 1백 파운드씩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부자가 되겠는걸. 난 내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어." 교장은 잠시 동안 머뭇거리다가 
앞에 놓여 있는 압지에 부질없이 연필로 낙서를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너의 직업 선택은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너는 신체적인 활동을 요
구하는 직업은 택할 수 없을 테니까."
  불구의 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그러하듯이 필립은 온통 빨개졌다. 퍼킨스 씨
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너의 불행에 대해서 너무나 신경을 쓰는 것 같구나. 너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느
님께 감사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니?"
  필립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의 말을 곧이듣
고 하느님이 문둥이와 소경을 고쳐 주신 것처럼 자기 발도 고쳐 달라고 여러 달 동안이나 
애써 기도한 일을 생각했다.
  "네가 그 불행을 반항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에게 부끄러움이 될 수밖에 없어. 그
러나 만일 네가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짊어지고 나갈 
수 있겠기에 너에게 주신 십자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불행이기보다는 오히려 행복
의 근원이 될 것이다."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필립이 그리 달갑게 생각지 않는 눈치였으므로, 
교장은 그를 그만 돌려보냈다.
  그러나 필립은 교장 선생의 말을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필립은 앞으로 다
가올 견신례 생각만 하게 되었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환희에 휩싸였다. 그의 영혼
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같았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온 정신을 다하여 완전해지기를 열망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치려 
하였고, 장차 성직자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제까지의 견신례 준비와 그가 읽은 책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장의 압도적인 영향에 의해서 그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어, 마침
내 이 영광스러운 날이 다가왔을 때 그는 두렵고 한편 기쁜 나머지 어떻게 할 바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성당 앞까지 
혼자 걸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식에 참석한 전교생들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온 
낯선 손님들과, 자녀의 견신례를 보기 위해 모인 학부형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절룩거리는 모
습을 보여주어야 하므로,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되었
을 때 그에게는 문득 이 모든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교회
의 웅대한 둥근 천장 아래서 조그맣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는 절뚝거리며 성단을 향하여 올
라갔는데, 그 동안 그는 의식적으로 그 자신의 불구를 그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필립은 산꼭대기의 희한한 대기 속에서는 오래 살수가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종
교적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 일어났던 일이 이제 다시금 그에게 닥쳐왔다. 신앙의 아름다움
을 너무도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의 가슴속에서는 자기를 희생하려는 욕망이 보석 같
은 빛을 발하면서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힘은 그 야망을 이룩하기에는 너무
나도 부족한 것 같았다. 또한 그는 너무 지나친 열정으로 인하여 곧 지쳐 버렸다. 그의 마음
은 갑자기 이상한 고갈을 느끼게 되었다. 한때는 언제나 그와 같이 계시다고 믿었던 하느님
의 존재를 그는 점차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종교적인 행사에는 어김없이 참석했으나, 
이젠 그것도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처음에 이러한 마음의 변화에 대해서 
스스로를 나무랐고, 지옥불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새삼스럽게 그의 믿음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식어 버리고 차츰 다른 일에 대한 관심이 그의 생각을 어지럽게 했다.
  필립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독서하는 습관이 그로 하여금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든 독서가 그에게는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얼마 동안 친구들과 같이 있다 보
면 곧 지쳐서 초조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독서에서 얻은 광범위한 지식이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고 마음은 끊임없이 긴장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멸감
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게되었다. 모두가 그를 건방지다고 비난했으며, 그가 남보다 뛰어난 점
이라는 것 역시 그들 모두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도대체 뽐
낼 게 뭐가 있느냐고 빈정거리며 물었다. 한편 그는 점점 익살스러워져 갔다. 그는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찌르는 신랄한 말을 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런 말이 남의 마음을 얼마
나 상하게 하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다만 재미있기 때문에 곧잘 심한 말을 했던 것이
다. 피해를 받은 상대방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도 또한 매우 기분이 상
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받은 굴욕 때문에 그는 친구들을 꺼리게 되었으므로 이러한 습
관은 지금도 버리지 못해 그는 여전히 수줍고 말이 적었다. 그는 친구들의 호감을 사지 못
할 일만 하고 다니면서도 다른 애들의 쉽게 얻는 인기를 진심으로 열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친구들의 인기를 멀리서 바라다만 보고 몹시 부러워했다. 한편 이런 인기 있는 아이들에게
는 유달리 심하게 빈정대어 주고 싶고 쓸데없는 농담을 걸어 곯려 보기도 했으나, 그들과 
처지를 바꿀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않을 셈이었다. 아니 팔다리만 멀쩡하다면 
학교에서 제일 머리가 둔한 아이하고라도 서슴지 않고 바꾸리라 생각했다.
  필립은 6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진정으로 학교가 싫어졌다. 포부를 잃은 그는 
성적이 좋아지든 나빠지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침에 깨어나면 또 하루의 지루한 생활
을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맥이 탁 풀렸다. 남이 하라니까 해야 하는 모든 일과 제한과 속
박이 싫어졌다. 그 제한과 속박이 무리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제한과 속박이기 때
문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를 그리워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한다든
지 머리가 나쁜 애를 위하여 그가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을 거듭 말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
었다.
  퍼킨스 씨의 강의는 듣고 싶은 사람은 듣고, 듣기 싫은 사람은 안 들어도 되었다. 그는 열
성이 있는 한편 방심했다. 6학년 교실은 낡은 수도원을 복원한 건물의 한쪽에 있었고, 그 때
문에 창문도 고딕식이었다. 필립은 이 창문을 몇 번이고 그려 보는 동안에 권태를 잊었으며, 
때로는 장대한 교회의 탑이라든가 구내로 통하는 정문을 그려 보기도 했다. 그에게는 그림 
그리는 재간이 있었다. 루이자 백모는 젊었을 적에 수채화를 그렸으며, 교회나 낡은 다리, 
아름다운 집들을 사생한 앨범을 지금도 몇 권 갖고 있어서 가끔 목사관에서 열리는 다과회 
석상에서 손님들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언젠가 필립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서 모사화구 한 
상자를 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백모의 그림을 본보기로 하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백모의 그림을 잘 모사했으며, 얼마 안 되어 자신의 그림을 그
릴 수가 있게 되었다. 백모는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시끄러운 장난을 
막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그의 스케치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늘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림 중에서 몇 장은 사진틀에 넣어서 침실에 걸어 놓았다.
  어느 날 오전 수업이 끝나고 그가 교실에서 쩔뚝거리며 걸어나오고 있을 때 퍼킨스 씨가 
그를 불렀다.
  "캐리, 네게 잠깐 할말이 있다."
  필립은 멈칫 서서 기다렸다. 교장 선생은 여윈 손가락으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무언지 할말을 곰곰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캐리, 너 요새 웬일이냐?" 그는 불쑥 이렇게 말을 꺼냈다.
  필립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필립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
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교장 선생이 말을 계속하기만 기다렸다.
  "요즈음 난 너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너의 태만하고 부주의해졌어. 공부에도 흥미를 
잃은 것 같고. 아주 게을러지고 타락했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것뿐이냐?"
  필립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지긋지긋한 만큼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
가.
  "이번 학기 성적은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지고 있어. 알겠니? 나로서는 좋은 성적을 
줄 수가 없다."
  필립은 성적표가 그의 집인 목사관에서 그의 백부모에 의하여 어떤 취급을 받는가를 그대
로 이야기한다면 퍼킨스 씨는 무어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전번에도 성적표가 아
침 식사 때에 우편으로 도착하자, 캐리 씨는 귀찮다는 듯이 한 번 힐끗 보고는 필립에게 넘
겨 주었던 것이다.
  "네 성적표다. 잘 봐 두어라." 고서 목록이 들어 있는 포장지를 뜯으며 백부는 말했다.
  "성적이 좋으냐?" 루이자 백모가 물었다.
  "내 실력에 비하면 좋지 않은 편이에요."그는 웃으면서 성적표를 백모에게 주었다.
  "나중에 안경을 쓰고 읽어 봐야지." 백모는 말했다.
  그러나 조반 후에 메리 앤이 들어와서 푸줏간 주인이 왔다고 말했다. 그럭저럭 백모는 깨
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퍼킨스 씨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네 태도에 실망했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난 네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지 할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지만 너는 통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는 것 같
아. 다음 학기엔 반장을 시키려고 했지만 조금 더 기다려 봐야겠다."
  필립은 얼굴을 붉혔다. 남보다 뒤떨어진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이 즐겁지는 않았다. 그는 입
술을 깨물었다.
  "그 밖에 또 할말이 있다. 이제는 장학금에 대한 것을 차츰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왔어. 
아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필립은 교장의 이런 훈계가 귀찮아졌다. 교장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다.
  "저는 옥스퍼드 대학엔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는 말했다.
  "그건 또 왜? 나는 네가 성직자가 되길 원하는 줄 아는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어째서?"
  필립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퍼킨스 씨는 늘 하는 버릇처럼 마치 페루기노의 그림에 나타
나는 사람 모양 이상한 몸가짐으로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그의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어루
만지고 있었다. 마치 필립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듯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다가는 
갑자기 생각난 듯 가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퍼킨스 씨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밤 필
립이 몇 장의 서류를 가지고 교장의 서재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교장 선생은 또 전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다만 이번에는 전번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는 교장이 학생
을 대하는 입장에서가 아니고 다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필립의 
성적이 나쁘다든지 옥스퍼드 대학 진학에 필요한 장학금을 저마다 얻으려는 심한 경쟁에서 
필립의 입장이 불리하다든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장래에 대한 그
의 생활 태도가 변했다는 것이었다. 교장은 성직에 대한 필립의 열의가 다시 한 번 타오르
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련된 말솜씨로 먼저 그의 감정에 호소했다. 교장 자신의 감
정이 이미 크게 움직였으므로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필립의 정신적 변화는 교장의 
마음속에 쓰라린 번민을 일으켰으며, 그는 필립이 다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탓으로 일
생 동안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버리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어조는 사람
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 무엇이 있었다. 필립은 외관상으로는 매우 침착해 보이지만-타고
난 성격과 학교에서 여러 해 지내는 동안의 습관에 의하여 가끔 얼굴을 붉히는 외에는 좀처
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사실은 무척 감정적이어서 감정에 쉽사리 움직이는 경향이 있
었으므로 곧 교장 선생의 말에 깊이 감동되었다.
  교장 선생이 자기를 생각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무척 고마웠으며, 자기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학교 전체의 일을 돌보
아야 할 바쁜 교장 선생이 자기의 일을 이다지도 염려해 주는 것을 생각할 때 한편 자랑스
럽기도 했으나, 또 한편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난 싫어. 죽어도 싫어!'하며 죽을 힘을 다
해서 끝까지 저항하는 마음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지중에 자기가 교장에게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서 우러나오는 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물이 가득 찬 그릇에 담근 
병 속으로 물이 콸콸 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전 싫어요. 죽어도 싫어요!"
  마침내 교장은 필립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나는 너의 결정을 좌우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께 인도하여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기도해라."
  필립이 교장 선생 집에서 나왔을 때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구내로 통하는 아치 
통로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느릅나무에 앉아 있는 까마귀도 죽은 듯이 조
용했다. 그는 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었다. 화끈 단 몸에 비를 맞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는 
이제 감정의 열기에서 벗어나 조용히 다시 한 번 교장 선생의 말을 되씹어 보았다. 그는 자
기가 교장 선생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교회를 쳐다보았다. 그는 교회가 미웠다. 그것
은 억지로라도 참석해야 하는 그 지루한 긴 예배 시간 때문이었다. 찬송가는 한없이 길어서 
그 동안에는 내내 일어서 있어야만 했다. 단순한 설교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움직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앉아 있으려면 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문득 그는 블래스테이블에서 주일날이면 두 번씩 보던 예배 생각이 났다. 블랙스테이블 
교회 안은 몹시 썰렁했다. 그리고 포마드 냄새와 옷에 먹인 풀 냄새로 꽉 차 있었다. 설교는 
부목사와 백부가 한 번씩 번갈아 했다.
  필립이 성장함에 따라 그는 백부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래가 솔직하고 
고지식한 그는 목사가 되어 자기가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진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거짓된 행동에 그는 분개했다. 그의 백부는 마
음이 약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무엇이고 번거로운 일은 모두 피하려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소원이었던 것이다.
  퍼킨스 씨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필립
은 그의 고향인 동부 앵글리어의 한구석에서는 목사들이 실제로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를 알고 있었다.
  블랙스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화이트스톤이란 교구의 목사는 독신이었는데, 심심풀이로 
최근에 와서 농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방 신문에는 그가 지방 법정에 제기한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로 한 소송 사건에 대한 기사가 매일 실리다시피 했다. 그것도 품삯을 달라고 
하는 노동자나 사기죄로 고소한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소송사건이었다. 그 밖에도 소를 굶
겨 죽였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또 얼마 안 가서 그에 대한 커다란 배척운동이 있으리라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또 펀 교구의 목사는 턱수염을 기르고 인물이 훤한 사
람이었는데 아내는 그의 학대에 견디다 못 해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입을 
통해서 그의 타락한 사생활에 대한 추문이 이웃에 퍼지게 되었다. 또 바닷가 조그만 마음 
서얼 교구의 목사는 매일 저녁 목사 주택 근처의 선술집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 
곳의 집사들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의논을 하러 캐리 씨에게 온 일도 있었다. 그런 
마을에서는 가난한 농부들이나 고기잡이들 외에는 아무도 그들과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으
며, 기나긴 겨울밤에는 벌거벗은 나무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사방을 둘
러보아도 한결같이 갈아놓은 단조한 밭 밖에는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 곳은 가난
이 깃들이고 있는 곳이었으며, 할 만한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네들의 성격 속
에 숨어 있는 온갖 비뚤어진 심사가 온통 드러났고, 그것을 제약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차츰 편협해지고 괴벽해졌던 것이다. 필립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기
는 했으나, 그의 어리고 고지식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
었다. 그는 좀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퍼킨스 씨는 얼마 안 가서 그의 충고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학기가 끝날 때까지 필립에게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성적표에는 지독한 악평을 써 보
냈다. 성적표가 집에 도착해서 백모가 필립에게 성적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잘것없어요."
  "그래? 내가 한번 봐야겠군." 백부가 말하였다.
  "제가 터캔베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얼마 동안 독일에라도 다
녀왔으면 하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백부가 말하였다.
  "그게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는 장학금을 타지 못할 게 아니냐?"
  "여하간 저는 장학금 받기는 다 틀렸어요. 더욱이 저는 그렇게까지 옥스퍼드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뭐라고? 너는 성직자가 될 작정이 아니었느냐?"백모는 자못 당황한 듯이 말했다.
  "그 생각은 벌써 오래 전에 포기했어요."
  백모는 놀라는 눈초리로 필립을 바라보았으나, 곧 자제하고 조용히 남편의 컵에 차를 따
라 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필립은 백모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백모를 괴롭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거리의 재봉사가 만든 몸에 
꼭 맞는 검은 드레스, 주름잡힌 얼굴에 몹시 피로해 보이는 눈, 그리고 반백의 머리를 가진 
백모의 모습은 우습게도 보였으나, 한편 가련해 보였다. 필립은 백모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
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백부가 부목사와 같이 서재로 들어가 버리자 필립은 두 팔로 백모의 
허리를 안았다.
  "괴롭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면 성직자가 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럴까요?" 필립이 말했다.
  "필립, 나는 아주 실망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성직을 가지는 데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네가 부목사가 되고 때가 오면-결국 우리는 영원히 살수는 없을 테니-큰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단다."
  필립은 몸을 떨었다. 그는 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의 심장은 마치 덫에 걸려 날개를 
퍼덕이는 비둘기처럼 펄덕거렸다. 백모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소리없이 울었다.
  "제가 터캔베리를 떠나도록 백부님께 말씀드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학교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나 캐리 씨는 한번 결정한 일은 쉽사리 변경하지 않았다. 필립을 열여덟 살까지는 왕
립 학교에 두었다가 그 다음에 옥스퍼드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학교에 
예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학기 등록금은 내야 할 형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백부는 지
금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 과격한 말까지 해 가며 대화
하던 끝에 필립이 말했다.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 때에 자퇴할 수 있도록 학교에 말씀해 주시겠어요?"
  "교장 선생께 편지를 해서 의견을 물어 봐야겠다."
  "아, 제발 빨리 스물한 살이 되었으면!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니, 정말 진저리가 나
요."
  "필립, 백부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못 쓰는 거야!" 백모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퇴학하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분은 학생 한사람에 대하여 그
만큼씩 돈을 더 받을 수 있으니까요."
  "왜 너는 옥스퍼드 대학에 가기 싫다고 하는 거냐?"
  "교회에 들어가지 않을 바에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너는 이미 교회에 들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백부가 말했다.
  "그럼 목사가 되지 않을 바에는 말씀입니다." 필립은 재빨리 정정했다.
  "필립, 도대체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백모가 참견을 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으니까요. 무엇을 하든지 외국어를 배워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바보 같은 학교에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독일에서 1년쯤 지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생활이 현재 학교 생활의 연장이나 거의 다를 것이 없다고 생
각했으나, 그것까지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갈망했
다. 더욱이 옥스퍼드 대학에 가면 어느 정도 옛 학우들 사이에 친면이 있을 것이므로, 그들
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학교 생활은 실패라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출
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에 가고 싶어하는 그의 희망은 최근에 블랙스테이블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어떤 견해
와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마을 의사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머물며 바깥 세계의 
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으며, 이 곳 바닷가에서 8월을 지내러 온 피서객들도 제각기 세상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캐리씨도 구식 교육이 지금에 와서는 옛날처럼 유용하지 않다는 것과 
현대의 언어라는 것이 그의 젊은 시대와는 달리 차차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을 들어 알
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아우가 일찍이 시험에 낙제를 하고 독
일로 건너간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아우가 거기서 패혈증에 걸려 죽어 버렸기 때문에 그로
서는 아무래도 필립을 독일로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여러 가지로 오
랫동안 의논한 결과 필립은 한 학기 동안만 더 터캔베리로 돌아가 있다가 크리스마스 때 학
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필립도 이런 결정을 불만스럽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런데 학교로 돌
아온 며칠 후 교장 선생이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너의 백부한테서 편지를 받았다. 네가 독일에 가고 싶어한다고 하면서 내가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물으셨어."
  필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백부가 약속을 안 지키는 데 분격했다.
  "이미 모든 일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는 말했다.
  "어림도 없다. 나는 네가 자퇴한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생각한다는 답장을 써 보냈다."
  필립은 곧 책상에 앉아서 백부를 공박하는 편지를 썼다. 어른에게 해서는 안 될 심한 말
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분한 나머지 밤늦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는 그들의 지금까지의 자기에 대한 처사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는 초조하게 답장을 기
다렸다. 답장은 2,3일 후에 왔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쓴 백모의 부드러운 편지였다. 그 내
용은 백부에게 그런 편지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과 백부는 몹시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이었
다. 또 필립은 너무 심한 편지를 썼으며, 그런 것은 기독교인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들
로서는 필립만을 위하여 최선을 닿고 있으며, 또 그들은 필립보다 세상을 많이 살았으니 무
엇이 필립에게 해롭고 이로운 것인지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주먹을 불
끈 쥐었다. 이런 따위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듣던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것이 옳은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금 세상 형편을 필립 자신만큼 알지도 못하면서 
나이만 먹으면 으레 그만큼 더 지혜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편지는 퍼
킨스 씨에게 보낸 백부의 편지를 취소했다는 소식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필립은 다음 반공일까지 울분을 달랬다. 토요일 오후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하기 때
문에 화요일과 목요일을 반공일로 하고 있었다. 6학년 학생들이 모두 가고 난 후에도 필립
은 나중까지 남아 있었다.
  "선생님, 오늘 오후에 블랙스테이블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안 돼." 교장은 대뜸 대답했다.
  "아주 중대한 일이 생겨 백부님을 꼭 만나야 하겠습니다."
  "안 된다는 말 안 들려?"
  필립은 대답도 없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모든 일에 일일이 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 
굴욕, 더욱이 냉혹한 거절을 당한 굴욕 때문에 그는 욕설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와서는 
교장 선생이 한없이 미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도한 일을 자행하는 교장의 독재하에서 
필립은 몸부림쳤다. 너무 화가 나서 전후를 가릴 새 없이 점심을 먹고 나서는 전부터 잘 알
고 있는 뒷길로 빠져나와 블랙스테이블 행 기차 시간에 꼭 알맞게 정거장으로 걸어내려갔
다.
  그가 목사관에 이르렀을 때 백부와 백모는 식당에 앉아 있었다.
  "얘, 넌 어디서 튀어나오는 길이냐?" 백부가 물었다.
  그는 필립을 보고 달갑게 생각지 않는 눈치였으며 다소 거북해하는 태도였다.
  "저의 퇴학 문제 때문에 백부님을 뵈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떠나기 전에 하셨던 약속
과 1주일 후의 큰아버지가 하신 일과는 전혀 다르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군
요."
  필립은 자기의 대담한 태도에 자신도 적이 놀랐으나, 이미 할말까지 생각해 두었으므로 
가슴이 몹시 울렁거리는 것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말해 버렸던 것이다.
  "너, 교장의 허락을 맡고 여기 왔니?"
  "아니오, 교장 선생님께 이야기를 했더니 거절했어요. 제가 오늘 여기 왔다 갔다고 이야기
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정말 혼날 테니까요."
  백모의 뜨개질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이러한 장면에 익숙지 못한 부인은 큰 충격을 받
았던 것이다.
  "너의 행동으로 봐서는 교장에게 이야기해서 혼을 내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야." 캐리 씨
가 말했다.
  "고자질쟁이가 되고 싶거든 얼마든지 일러 보세요. 요전에도 그런 편지를 교장 선생님께 
내셨으니 이번에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한 것은 필립의 큰 실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목사가 노리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례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놈과 나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아." 그는 위
엄있게 말했다.
  캐리 씨는 일어나 재빨리 그 방을 나가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자물쇠 잠
그는 소리가 들렸다.
  "아, 어서 스물한 살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매여 사는 것이 진저리가 나서 못 살겠
어!"
  루이자 백모는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얘, 필립, 백부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 되겠니?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해라."
  "전 조금도 잘못한 게 없어요. 백부님은 정말 비겁해요. 물론 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금
전의 낭비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백부님께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그건 백부님 돈이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맡겨 두다니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필립!"
  화가 나서 지껄이던 필립도 백모의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자기가 어떤 심한 말을 했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
했다.
  "필립, 넌 어째서 그리 무정하단 말이냐? 우리가 오직 너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하기야 우리는 아무 경험이 없어, 자식을 길러 본 사람 같지는 못할 거야. 그
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장 선생님께 의논 해 본 거란다. 난 너에게 친어머니처럼 되려고 애
써 왔다. 나는 너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왔어."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작고 가냘픈, 어딘가 노처녀다운 애절한 모습이 필립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는 목구멍에 
갑자기 큰 덩어리가 막히는 듯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런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는 사과했다.
  필립은 백모 옆에 무릎을 꿇고 양팔로 그녀를 껴안아 눈물에 젖은 여윈 뺨에 키스를 했
다. 백모는 슬프게 흐느꼈다. 필립은 평생을 헛되게 보낸 이 백모가 문득 가엾게 생각되었
다. 백모는 일찍이 자기의 감정을 이처럼 겉으로 나타낸 일이 없었다.
  "필립, 하기야 나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네게 해주지는 못했어. 그러나 그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란다. 나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너에게 어머니가 안 계신 거나 
마찬가지로 슬픈 일이란다."
  필립은 자기가 화를 냈던 일도 모두 잊어버리고 서투른 말과 어색한 애무로나마 백모를 
위로하는 데 열중했다.
  그 때 시계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점호에 늦지 않게 터캔베리에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
차를 타기 위하여 곧 뛰어나가야만 했다. 기차간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생각해 보니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의지가 약한 자기 자신을 생각하자 은근히 화가 났다. 
백부의 허세와 백모의 눈물 때문에 처음 먹었던 마음을 돌이킨다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
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백부와 백모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르나 교장에
게 편지 한 장이 왔다. 교장은 그  편지를 읽으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그 편지를 필립에게도 보여 주었다.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경애하는 퍼킨스 선생님
 저의 조카에 관한 일로 다시금 귀하를 괴롭혀 드림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오나 그 애의 백
모와 저는 그 애 문제로 몹시 염려하고 있습니다. 필립은 학교를 그만두려 하고 있으며, 그 
애의 백모 역시 그 애의 불행한 현재 생활을 동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애의 친부모
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몹시 곤란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 애 자신은 자
기 성적이 나빠지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고 학교에 이 이상 머물러 있는 것을 금전
의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 보셔서 그의 마음에 추호
도 변함이 없다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크리스마스 때 학교를 그만둘 수 있도록 선처해 주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윌리엄 캐리
  필립은 그 편지를 교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자기의 승리에 대하여 일종의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뜻을 관철시킨 데 대하여 큰 만족을 느꼈다. 그의 의지가 다른 사람의 
의지를 압도한 것이다.
  "네 편지 한 장으로 곧 마음을 바꾸는 너의 백부에게 내가 시간을 소비하여 답장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교장은 노한 듯이 말했다. 필립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
다. 그의 얼 굴 표정은 매우 침착했으나, 두 눈에서 반짝이는 득의의 빛은 숨길 수가 없었
다. 퍼킨스 씨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겼군그래. 안 그래?"
  마침내 필립도 터놓고 웃었다. 그는 환희를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넌 정말 학교를 그만두고 싶으냐?"
  "네, 그렇습니다."
  "이 곳에 있는 것이 불행하단 말이지?"
  필립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누구든 자신의 감정 내부로 파고들려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
로 경계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퍼킨스 씨는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학교라는 것은 원래 그저 보통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거야. 말하자면 구멍이 사방에 
뚫어져 있는만큼 마개는 그 모양이 어떻든 간에 구멍을 막아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학교로
서는 보통 수준 이외의 학생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쓸 여가가 없단 말이다." 이렇게 말하
고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필립을 향해 말했다. "이것 봐, 한 가지 이야기할 게 있어. 인
제 학기말도 다 되었으니, 한 학기 더 머문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거야. 독일에 가고 
싶다면 크리스마스 직후보다는 부활절 후에 떠나는 것이 좋을 거야. 아무래도 한겨울보다는 
봄철이 훨씬 더 좋을 테니까. 다음 학기를 마치고 나서 간다면 그 때는 나도 말리지 않겠다. 
너의 생각은 어떠냐?"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필립은 이제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자, 너무 기뻐서 남은 1학기쯤은 상관
하지도 않았다. 부활절만 되면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임을 생각하자 학교도 감옥처럼 생각되
지 않았다. 기쁨에 넘쳐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필립은 감정을 외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아직껏 수줍어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으나, 기분
이 썩 좋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럴 때면 보기에는 말없이 태연하게 절룩거리며 다녔지만, 
그의 마음속은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보다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헤아릴 수 없는 공상이 쉴 새 없이 떠돌아 걷잡을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이런 공상을 해보는 것만 해도 그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이제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오랜 동안 소홀히 하였던 공부를 남은 학기 동안에 보
충하려 했다. 머리는 더 활발하게 움직였고 지능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
끼게 되었다. 학기말 시험은 성적이 매우 좋았다. 이에 대해서 교장은 한마디만 했다. 필립
이 쓴 논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하듯이 논문의 비평을 하고 나서 이
렇게 말했다.
  "그래, 어리석은 흉내를 내는 것은 이제 그만두기로 작정한 것 같은데, 어때?"
  그리고는 번쩍이는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필립은 고개를 숙인 채 어색한 듯 빙그
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여름 학기말에 수여되는 여러 가지 상들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질 것으로 생각하던 6명의 
학생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필립을 자기네들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고 있었으나, 이제 다시
금 그를 자못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부활절에는 학교를 떠나게 되고, 따라서 어
떤 면으로도 그들과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필립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히
려 그들이 불안해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필립은 다른 애들의 장래가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자 흐뭇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상들을 자기 손 안에 넣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애들이 받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라 생각되었다.
  마침내 종업식 날이 되었다. 그는 작별 인사를 하려고 교장 선생에게로 갔다.
  "그렇지만 이미 독일에 갈 준비를 해놓았는데요." 필립이 말했다.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지."
  교장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학교가 너를 잃는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학교에서는 머리는 좀 둔하지만 착실히 공부하는 애들이 게으름피우는 
영리한 애들보다 성적이 좋은 편이야. 그러나 총명한 애가 공부를 시작한다면, 이봐, 이번 
학기의 네 성적처럼 되는거야."
  필립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칭찬을 받아 본 일이 드물었으며, 아직껏 자기를 총명한 아이
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교장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도 알겠지만 둔한 애들의 머릿속에 무엇을 억지로 쓸어넣기란 정말 재미없는 일이거
든. 그러나 선생이 채 말도 끝내기 전에 이미 다 알아듣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이 세
상에서 가장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필립은 교장 선생의 친절에 마음이 녹아 버렸다. 그가 떠나든말든 퍼킨스 씨는 개의치 않
을 줄 알았다. 그는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으쓱해졌다. 훌륭한 성적으로 이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에 간다면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O.K.S 시합에서 돌아온 학생들에게 얻어들은 이야기며, 언젠가 서재에서 읽어 준 편지 속
에 쓰여 있던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생활들이 홀연히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
꼈다. 지금 여기서 굴복한다면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로 보일 것이며, 더욱이 백부는 교장
의 책략이 성공한 것을 알고 만족의 미소를 지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자기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업신여기고 깨끗하게 넘겨 주려고 하던 극적인 양보의 계획이 그저 
평범한 결과를 맺고 말 것이 아닌가. 조금만 권면했더라면 그는 자기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
고도 교장이 하라는 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이런 마음속의 갈등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고 여전히 평온하고 무표정했다.
  "저는 아무래도 떠나야겠습니다." 그는 말하였다.
  자신의 위력으로 사물을 처리하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퍼킨스 씨는 자신의 능
력이 직접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다소 초조해졌다. 그러나 할 일이 많아 바쁜 교장은 
생각없이 고집만 부리는 이런 학생 하나를 위해서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럼 좋다. 네가 정말 원한다면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지키겠다. 언제 떠날 
작정이냐?"
  필립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는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기가 진 편이 좋지 않았
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5월 초에 떠날까 합니다."
  "돌아오거든 찾아오려무나."
  그는 손을 내밀었다. 만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었더라면 필립은 마음을 바꾸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교장은 이미 그 일이 결정되어 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필립은 교
장의 집을 나섰다. 마침내 그의 학교 생활은 끝나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나 그 순간에 믿
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미칠 것 같은 환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교정을 거
닐었다. 그는 깊은 침울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이 어리석은 짓이나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시 교장 앞
에 가서 학교에 머무르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올바른 행동을 했는지 반성해 보았다.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주위 환경이 불만스러웠다. 사람이란 언제든지 자기 고집대로 해놓고서 그 때마다 뒤
에가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같이 공상해 보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필립의 백부에게는 미스 윌킨이라는 베를린에 사는 옛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목사의 딸
로서 부친은 링컨셔 마을의 목사였다. 캐리 씨는 그 곳에서 부목사로서의 그의 마지막 임기
를 보냈던 것이다. 부친이 죽은 후로 그녀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
로 다니면서 여러 곳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캐리 부인과는 계속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그녀는 두서너 번 이 곳 블랙스테이블의 목사
관에 와서 휴가를 보낸 일도 있었다. 그 때마다 약간의 식비만은 지불했다. 필립의 청을 반
대하는 것보다는 들어 주는 것이 덜 시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한 캐리 부인은 미스 윌킨슨에
게 편지를 써서 그녀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미스 윌킨슨은 독일어를 배우는 데는 하이델
베르크가 제일 적당한 곳이며 숙소로는 엘린 교수 부인 집이 좋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1주
일에 30마르크면 생활할 수 있을 것이고, 지방 고등 학교의 교사인 그녀의 남편이 그를 가
르쳐 줄 것이라고 했다.
  5월 어느 날 아침, 필립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짐을 손수레에 실은 채 그는 짐꾼을 
따라서 정거장을 나섰다. 하늘은 푸르게 개었고 그들은 잎이 무성한 가로수가 있는 거리를 
지나갔다.
  필립은 대기 속에 그 무언가 상쾌함을 느꼈고, 새로운 생활을 위하여 외국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불안함을 아울러 느꼈다.
  아무도 마중나와 주지 않아 그는 약간 섭섭했다. 짐꾼이 커다랗고 하얀 문 앞에 그를 남
겨 두고 가버리자, 한 소년이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응접실은 녹색 비로드로 덮인 가구가 
가득 차 있었으며, 한가운데에는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주름 장식으로 단단
히 묶은 꽃들이 물병에 꽂혀 있었다. 꽃 주위에는 가죽 표지를 씌운 책들이 정성스럽게 정
돈되어 있었다.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요리 냄새를 풍기며 여주인인 교수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머리를 모양있게 빗
어올린 붉은 얼굴에 키가 작고 퍽 단단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녀는 구슬처럼 반짝이는 작은 
눈동자와 정이 넘쳐 흐르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필립의 양손을 잡고 미스 윌킨슨
의 소식을 물었다. 미스 윌킨슨은 이 곳에서 몇 주일 동안 자기와 함께 지낸 일이 두어 번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독일어와 서툰 영어로 말을 했으나, 필립은 자기는 미스 윌킨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그 때 그녀의 두 딸이 나타났다. 필립의 눈에는 
그리 어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녀들은 스물다섯은 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었다. 언
니인 테클라는 어머니를 닮아서 키가 작고 침착하지 못한  태도였으나, 얼굴은 매우 예뻤으
며 머리털은 검고 길었다. 동생인 안나는 키가 크고 얼굴이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애교 있는 
미소를 짓고 있어 필립의 눈에는 언니보다는 동생의 인상이 좋았다. 얼마동안 점잖은 이야
기를 주고받은 후 교수 부인은 필립을 그가 있을 방으로 안내해 주고 나서 가버렸다. 필립
의 방은 정원의 나무 그늘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탑 속에 있었고, 벽이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침대가 놓여 있어, 책상에 앉아서 보면 조금도 침실같이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짐을 
풀고 책을 끄집어냈다. 마침내 그는 독립한 인간이 된 것이었다.
  1시에 벨이 울려서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을 때 부인의 손님들이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교수 부인은 필립을 자기 남편에게 소개했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한 중년 남자로서, 금발은 
잿빛이 되어 가고 있었고, 푸른 눈은 매우 온화해 보였다. 그는 정확한 영어로 필립과 이야
기했다. 그의 영어는 일상의 회화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영국 고전 연구에서 익힌 옛날식의 
영어였다. 필립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만 볼 수 있는 말들을 일상 회화로 사용하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엘린 부인은 자기의 집이 가정이지 하숙집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
나 그 차이가 어디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자의 민감한 판단이 필요했다. 모두들 
응접실에 잇닿은 길쭉하고 어두운 방에 있는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필립은 몹시 수줍어하면
서도 거기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16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한쪽 끝에 앉아서 요리를 
담고 있었다. 처음 필립에게 문을 열어 주던 그 텁수룩한 소년이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소
년은 접시 소리를 시끄럽게 내면서 꽤 민첩하게 손을 놀렸으나 먼저 요리를 받은 사람들은 
마지막 사람이 자기 몫을 받기도 전에 다 먹어 치워 버리는 것이었다. 부인은 독일어가 아
니면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필립은 말을 하고 싶으나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
는 이제부터 함께 생활해 나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여주인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부인 서
넛이 앉아 있었으나, 필립은 그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린 소녀가 둘 있었는데 둘 
다 금발이고, 그 중 한 소녀는 퍽 아름다웠다. 필립은 그녀들이 헤드비히 양과 카실리에 양
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실리에는 머리를 기다랗게 땋아 늘이고 있었다. 그녀들
은 나란히 앉아서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가끔 필립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한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하면 서로 킥킥거리고 웃는 것이었다. 필립은 그들이 자
기를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얼굴을 붉혔다. 그녀들 옆에는 누르스름한 얼굴에 너그러운 
웃음을 짓는 중국인이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그는 대학에서 서구 사회상을 연구하고 있다
는 것이었다.
  그는 아주 빠른 어조로, 더욱이 기묘한 억양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소녀들은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때마다 그녀들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면 그도 
함께 재미있다는 듯이 따라 웃었으며, 그 때마다 편도 같은 두 눈이 감겨 버리곤 했다. 미국
인도 서너 명 있었는데,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누른빛이 도는 거친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신학교 학생들이었다. 필립은 그들의 서툰 독일어에 뉴잉글랜드 억양의 콧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립은 그들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는 미국인이
란 사납고 극성스런 야만인들이라는 이야기만을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식후에 그들이 잠시 동안 응접실의 딱딱한 녹색 비로드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안나 양이 필립에게 함께 산보하러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필립은 곧 이에 응했다. 일행은 제법 많았다. 주인의 두 딸과 그 밖에 다른 두 소녀, 미국
인 학생 하나, 그리고 필립이 끼여 있었다. 그는 안나 양과 헤드비히 양과 나란히 걸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여자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블
랙스테이블에는 농부의 딸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그는 
워낙 수줍었으므로 그녀들이 그의 불구를 조롱하는 것 같아서, 캐리 씨 부처가 자기들과 농
부들의 신분에 차이를 두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을 의사 집에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다 필립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아서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병원 조수들에게로 시집을 가 버렸었다. 왕립 학교에서는 얌전하다기보다는 대담
한 소녀들이 서너 명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남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는 소녀가 있어 그들 사
이에 연애 사건이 있었다는 등 남학생들이 상상해 낸 터무니없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필립은 항상 그들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소녀들에 대한 자기의 내심의 
두려움을 감추려 했다. 또한 그의 상상이라든지 그가 읽은 책들은 그로 하여금 바이런적인 
태도를 동경하게 했으며, 그는 이 불건전한 자아 의식과, 한편 여자에 대해서는 친절한 태도
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 사이에서 고민했다.
  지금 그는 쾌활하고 즐거워해야 될 줄은 알았으나, 어쩐지 머릿속이 텅비어 있는 것 같아 
이야깃거리를 하나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주인집 딸인 안나는 일종의 의무감에서 자주 
그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녀의 언니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안나는 때때로 그 반짝이는 
눈동자로 필립을 바라보다가는 웃음을 터뜨려서 그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필립은 그녀가 자
기를 아주 우습게 여기는 것같이 느꼈다.
  그들은 언덕을 따라 소나무 숲 사이를 거닐었다. 소나무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필립
은 즐거움을 느꼈다. 따뜻하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마침내 그들이 언덕 꼭대기에 이
르렀을 때 햇빛을 담뿍 받은 라인 강 유역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금빛 햇발을 받고 반짝이
는 한없이 넓은 들판 저 멀리 곳곳에 도시가 산재해 있었고, 그 사이로 은빛 강물이 띠처럼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필립이 알고 있는 켄트 주의 한구석에서는 광대한 들판이란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해안에서 먼 수평선만 보일 뿐이었다. 이제 그의 눈앞에 보이는 광대한 들판은 
그로 하여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의기 양양해졌다. 그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필립이 어떤 다른 잡념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참다운 아름다움을 느껴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버리고 그들 세 사람만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소녀들은 무엇인지 계속 독일어로 재잘거리고 있었으나 필립은 그들이 가까이 있는 
것에는 무관심한 채 눈앞의 경치만을 마음껏 즐겼다.
  "아, 정말 행복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필립이 하이델베르크에 온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여주인은 해이워드라는 영국인
이 그 집에 오게 된다고 말했다. 바로 그 날 저녁 식사 때에 하숙집 식구들은 그 낯선 청년
을 볼 수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온 가족이 흥분 속에서 지내 왔다. 이쪽에서 간청한 결과인지 은근한 
협박의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테클라 양의 약혼자인 영국 청년의 양친이 그녀를 영국으
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그림 재주를 자랑하기 위한 수채화 앨범과 아울
러 상대방 청년이 얼마나 자기에게 열중해 있나 하는 증거를 청년의 양친에게 보이기 위하
여 청년이 보내 온 한 묶음의 편지를 가지고 떠났다.
  1주일이 지나자 이번에는 헤드비히 양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신의 애인이니 중위가 양친
과 함께 하이델베르크로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중위의 양친은 아들의 극
성스러운 요구와 헤드비히 양의 부친이 약속한 결혼 지참금에 마음이 움직여서 며느리가 될 
본인을 만나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도 올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만나 본 결과는 아주 만족스
러운 것이었고, 헤드비히 양은 공원에서 자기의 애인을 이 하숙집 식구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 기회를 가져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여주인 가까이 상석에 앉은 늙은 부인들은 좀 불안해하는 빛이었
으나, 헤드비히 양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이야기
하자, 엘린 부인은 기뻐하면서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마이보우러(백포도주에 과즙을 탄 음
료)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엘린 부인은 그 달콤한 음료를 만드는 자기의 능란한 솜씨
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소다수와 향초를 띄운 백포도주
가 담긴 큰 그릇이 산딸기와 함께 응접실 둥근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안나 양은 필립에게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게 되어 서운하겠다고 놀려댔다. 그는 당황하
였고 한편 자못 우울해졌다. 헤드비히 양은 몇 곡의 노래를 불렀고, 안나 양은 웨딩 마치를 
연주했으며, 엘린 교수는 <라인의 파수꾼>(구독일의 국가)을 불렀다.
  이렇게 흥겹게 떠드는 동안에 새로 하숙하게 된 하숙생에게 필립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
다. 필립은 식사 때에 그 사람과 마주앉았으나 쉴 새 없이 헤드비히 양과 이야기를 했으며, 
새로 온 하숙생은 독일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잠자코 식사만 하고 있었다.
  필립은 그가 연한 푸른빛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그가 싫어졌다. 헤이워드
는 스물여섯 살로, 길고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털을 무심코 쓰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크
고 연한 푸른빛 도는 눈동자에는 어딘가 피곤해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는 말끔히 면도를 
하고 있었고, 입술은 얇았으나 입 모양은 고운 편이었다.
  안나 양은 관상학에 취미를 갖고 있어, 나중에 필립에게 그는 두상이 아주 훌륭하며, 반대
로 얼굴 아랫부분은 보잘것없다고 말했다. 두뇌는 사색적이지만, 턱은 개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크고 못생긴 코에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안나 양 자신은 노처녀 생활을 면치 
못할 팔자였으므로 그녀는 언제나 개성이라는 것을 중요시했다. 안나와 필립이 이런 이야기
를 하는 동안, 청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떠들썩한 이 파티를 거만
한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한데다가 꽤나 점잔을 빼고 있었다. 그
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 미국인 신학생 위크스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이 두 
사람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검은 저고리에 희고 검은 점이 있는 바지를 입은 미
국인 학생은 아주 말쑥해 보였고, 살이 없고 비쩍 마른 그의 모습에는 이미 목사 특유의 은
근함이 배어 있었다. 한편 그 영국 청년은 트위드 천으로 만든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
며, 기다란 팔다리를 가진 그의 동작은 느렸다.
  필립은 이튿날까지도 이 새로 온 청년과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다. 점심을 먹기 전에 그들
은 응접실 발코니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헤이워드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영국 사람이죠?"
  "그렇습니다."
  "식사는 어제 저녁처럼 늘 그렇게 좋지 못합니까?"
  "늘 그 정도죠."
  "아주 형편없던데요?"
  "그렇구 말구요."
  필립은 별달리 식사가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사실은 맛이 있어 즐겨 먹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이 좋지 못하다는 식사를 자기만은 구태여 좋다고 고집하는 분별
없는 사람으로 인정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테클라 양이 영국으로 떠나 버린 후 동생 안나에게는 집안 일이 부쩍 늘어서 전처럼 오랫
동안 산보를 즐길 여가가 없었다. 들창코를 한 조그만 얼굴에 금발을 길게 땋아 늘인 카실
리에 양은 요즘 어쩐 일인지 사람을 피하는 눈치였다. 헤드비히는 가버리고 항상 그들과 함
께 산보를 가던 미국인 위크스도 남부 독일로 여행을 떠났으므로 필립은 대개 혼자 있었다. 
수줍어하는 좋지 못한 습성이 있었던 탓인지 혹은 동굴 생활을 하던 조상으로부터의 격세 
유전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그는 언제든지 처음 만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첫인상이 
사라지고 나서야만 비로소 사귀는 버릇이 있었다. 이런 습성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교
제를 어렵게 했다. 헤이워드와의 교제도 그리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산보 나가
자고 헤이워드가 청해 왔을 때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만한 적당한 변명을 찾지 못해 마
지못해 승낙했던 것이다. 자칫하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
으나, 그는 이것을 웃음으로 감추려 하면서 늘 해오듯 같은 변명을 했다.
  "나는 도무지 빨리 걸을 수가 없어서."
  "별말씀을. 걷기 대회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나는 천천히 거닐기를 좋아해요. <<마리우
스>>(월터 페이터의 교양 소설)에서 페이터가 한 말 생각나지 않으세요? 조용한 산보는 서
로 이야기하는 데 가장 좋은 자극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필립은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했다. 그는 가끔 좋은 화제를 생각해 내기는 했지만, 
언제나 말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난 뒤에 생각이 났다. 헤이워드는 말하기 좋아하는 성질이
어서 필립보다 조금 더 경험이 많은 사람이 듣는다면 그는 스스로 자기 말에 도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거만한 태도가 필립에게는 인상 깊었다. 필립은 
자기가 거의 신성시하는 사물에 대하여 경멸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 경
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헤이워드는 운동 경기에 대한 맹목적인 열광을 멸시했으며, 
운동 경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트로피 벌레라는 욕설로 비난했다.
  그러나 필립은 헤이워드가 그 대신 문화라는 다른 종류의 미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깨
닫지 못했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거닐다가 성으로 올라가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앉
았다. 유유히 흐르는 라인 강의 한 지류인 강변 계곡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도희의 집집
마다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는 담청 색 안개를 이루어 마을을 덮었고, 높은 지붕과 교회의 
첨탑들은 중세풍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곳에는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소박함이 
있었다. 헤이워드는 <<리처드 페버럴>>(그릇된 교육사상으로 비극적 운명에 빠진 청년을 
그린 조지 메리디스의 소설)과 <<보바리 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또 베를렌과 단
테, 머슈 아놀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즈음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오마르 하이암
>>(11세기경의 페르시안 시인, 천문  학자)은 소수의 특수한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었으나, 
헤이워드는 그것을 필립에게 몇 번이고 거듭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시의 암송을 매우 즐겨
서 자작시나 다른 사람들의 시를 단조로운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외우곤 하였다. 집으로 돌
아갈 즈음에는 필립의 그에 대한 이제까지의 의혹은 열광적인 찬미로 변해 버렸다.
  그 뒤로 그들은 매일 오후 함께 산보를 하게 되었고, 필립은 얼마 안 가서 헤이워드의 환
경도 다소 알게 되었다. 그는 시골 판사의 아들로 얼마 전에 아버지가 죽자 유산으로 연 3
백파운드를 받고 있었다.
  차터하우스(영국의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그가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에 성적이 특히 
우수했기 때문에 트리니티 학교의 책임자는 자기 대학에 와주어서 고맙다는 만족의 뜻을 표
했다고 한다. 그도 자기의 찬란한 앞날에 대하여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되도록 지
적인 서클에 출입했고, 브라우닝의 시에 열중했으며, 테니슨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셸리
가 전처인 헤리엣을 학대한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미술사도 조금 건드려 보았으며, 그
의 방에는 와츠나 번 존스(영국에서 당시 문제가 되었던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 그리고 보
티첼리 등의 그림의 복제품이 걸려 있었다. 또한 염세적인 시도 꽤 많이 썼다. 친구들은 그
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판했으며, 친구들이 자신의 장래의 성공을 예언할 
때에도 그는 즐겨 귀를 기울였다.
  얼마 안 가서 그는 미술과 문학에 있어서는 권위자가 되었다. 뉴먼(19세기 영국의 신학자
이며 사상가. 나중에 카톨릭으로 개종함)의 <<아폴로지아>>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카톨릭
의 신앙의 아름다움이 그의 미학적 감각을 자극했다. 매콜리(19세기 영국의 문호)를 읽는 편
협한 사상을 가진 둔한 그의 부친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곧 개종해 버렸
을 것이다.
  그가 다만 보통 성적으로 진급하였을 때 친구들은 뜻밖의 일이라 모두 놀랐으나, 그는 어
깨를 한 번 으쓱하고 나서 자기는 시험관의 노리개가 아니라고 가볍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는 언젠가 구두 시험 치르던 때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보기 흉한 칼라를 단 선생이 
논리학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지루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 때 언뜻 눈에 띈 것이 선생
이 신은 장화였다. 그것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보여서 그는 그대로 잠자코 킹스 스쿨에 있는 
예배당의 고딕식 건축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캐임브리지 시절에도 때로는 즐거운 날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큰 만찬회를 
베푼 적도 있었고, 그의 방에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이야기중에는 가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는 필립에게 그 시절에 얻어들은 경구 하나를 인용했다.
  "헤라클레이토스여, 사람들은 나에게 말해 주었노라, 그대는 죽었노라고."
  시험관과 장화에 대한 우스운 일화를 되풀이해 들려주면서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
다. "물론 어리석은 일이었지. 하지만 이 어리석은 이야기 속에도 무언지 조금 쓸 만한 게 
있어."
  필립은 약간의 전율을 느끼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헤이워드는 변호사 공부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는 클레맨트 법학원에서 판
자로 벽을 두른 아담한 방을 빌려, 그 방을 트리니티 학교에 있을 때 쓰던 방처럼 꾸미려고 
애썼다. 막연하나마 정치적인 야심도 있어 자신을 휘그당 당원이라고 말했고, 진보적이면서
도 신사다운 취향을 가진 클럽에 추천되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변호사 개업을 하고(다소 
인간적이라고 해서 대법원을 선택했다) 여러 가지 소망을 성취하고 나면 때를 기다려 어떤 
선거구를 대표하여 의회에도 진출하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오페라 구경을 가고, 그와 취미를 같이하는 소수의 훌륭한 친
구들과도 사귀었으며, 더욱이 완, 선, 미를 표방하는 어떤 만찬 클럽에도 가입했다. 그는 켄
싱턴 스퀘어에 사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부인과 플라토닉한 애정 관계를 맺었으며, 매일 
오후 희미한 촛불 아래서 그녀와 차를 마시며 조지 메러디스나 윌터 페이터에 대한 이야기
를 주고받았다.
  변호사 협회의 시험이란 어떤 바보일지라도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어서 그
는 느긋하게 공부했다. 그러나 최종 시험에 낙제했을 때 그는 개인적인 모욕이라도 받은 것
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켄싱턴 스퀘어의 부인은 그에게 그녀의 남편이 인도에서 휴가를 받아 돌아오
는데, 남편은 여러 가지 점으로 믿음직한 사람이긴 하지만 마음이 넓지 못한 사람이므로, 젊
은 남자가 자주 찾아온다는 것을 이해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헤이워드
는 인생이란 추악한 것으로 충만해 있다고 생각했고, 다시금 시험관들의 냉소적인 버릇 앞
에 서야할 생각을 하니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발 앞에 굴러 있는 공을 걷어차 
버리는 것이 속 시원할 것같이 느껴졌다.
  연 3백 파운드로는 런던에서 신사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 곤란하여 그는 빚도 상당히 졌으
며 그의 마음은 존 러스킨이 그토록 매력있게 묘사한 베니스나 플로렌스를 동경하고 있었
다. 그는 변호사라는 속되고 번잡한 직업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
짝에다 이름을 내걸고 소송사건 의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모자라는 것만 같
았고 정치라는 것은 고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했다. 클레맨트 호텔의 방을 정리하고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지난 겨울은 플로렌스에서, 금년 겨울은 로마에서 지냈으며, 이번 여름은 괴테의 저서를 
원문으로 읽기 위해 독일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헤이워드는 아주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학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갖고 있
었고, 자신의 감정을 웅변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능히 한 사람의 작가에 빠져 그 작가에 공
명할 수 있었으며, 그 속에 있는 최상의 것을 남김없이 발견하여 그 작가를 깊이 이해하고, 
그 작가에 대해 분별 있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필립도 책은 많이 읽은 편이었으나 그는 닥치는 대로 분별없이 읽어 왔으므로, 이제 와서 
그의 독서를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를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그 곳 조그마한 대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헤이워드가 이야기한 훌륭한 책들을 읽기 시
작했다. 흥미있는 책들은 아니었으나, 끈기 있게 읽어 나갔다. 그는 자기 향상을 열망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주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8월 하순이 되어 위크스가 남부 독일에서 돌아왔을 무렵에는 필립은 완전히 헤이워드의 
감화를 입고 있었다. 헤이워드는 위크스를 싫어했다. 그는 위크스의 검은 저고리와 흑백 무
늬가 있는 바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뉴잉글랜드인다운 양심에 대해서도 비웃는 태도
였다.
  필립은 처음에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위크스에 대한 헤이워드의 비난에는 만족한 듯
이 귀를 기울였으나, 반대로 위크스가 헤이워드에 대해서 마땅치 않은 이야기를 할 때면 화
를 내곤 했다.
  "당신의 새 친구는 아마 시인인가 보지?"
  근심에 지친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위크스가 말했다.
  "네, 그는 시인이죠."
  "자기가 시인이라고 하던가? 미국에서 같으면 전형적인 건달이라고 할 작자인데."
  "그렇지만 이 곳은 미국이 아니잖아요." 필립은 쌀쌀하게 대꾸했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대, 스물다섯? 장려금인가 무엇인가를 받아서 시만 쓰고 아무것도 하
는 게 없는 모양이지?"
  "당신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필립은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아, 이해를 못 하다니. 그런 작자들은 1백하고도 47명이나 보았어."
  위크스의 눈동자는 반짝거렸으나, 미국인의 유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필립은 입술을 
깨문 채 정색을 하고 서 있었다. 필립에게는 위크스가 중년 남자로 보였으나 사실은 서른을 
넘을까말까 한 나이였다. 길고 여윈 몸매는 학자답게 등이 굽어 있었고 크고 모양 없는 머
리에는 숱이 적고 희끗희끗한 머리털이 붙어 있었다. 그는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얇은 
입술과 날카로운 코, 그리고 툭 불거진 앞이마가 투박한 느낌을 주었다. 태도는 냉정한 데다
가 깔끔하여 냉혈 동물처럼 정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 더욱이 어떤 이상야릇한 성질이 
있어서 그 자신이 당연히 잘 어울리게 되는 진실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썽을 일으키는 것
이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나, 같은 국적을 가진 미국인 신학생
들까지도 그를 의아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의 신앙은 아주 이교적인 데가 있어 이것이 그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 그의 기형적인 
유머가 그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만날 수 있었지요?" 필립은 여전히 정색을 하고 물었
다.
  "파리의 라틴 구에서 만났고, 베를린이나 뮌헨의 하숙집에서도 만났어. 페루자나 아시시의 
자그만한 여관에도 살고 있지. 또 그런 자들은 플로렌스의 보티첼리 앞에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서 있고, 로마에서는 포도주를 지나치게 마시고, 이 독일에서는 맥주를 굉장히들 들이
켜고 있거든. 이들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칭찬하고, 머지않아 위대한 책을 집필할 작정이
지. 생각해 봐. 그러는 동안에 훌륭한 책이 147명의 훌륭한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한 가지 슬픈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147권의 훌륭한 책이 실제로 하나도 쓰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그래도 지구는 여전히 돌아가거든."
  위크스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지루한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그의 회색 눈이 깜
박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필립은 이 미국 사람이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
리고 얼굴을 붉혔다.
  "당신은 나를 놀리려고 빈정거리고 있군요."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듯이 말했다.
  헤이워드는 날만 새면 내일은 남부 독일로 떠난다고 벼르면서도, 짐을 꾸리기도 귀찮고 
여행이 지리할 것을 생각하고는 차일피일 미루는 가운데 어느덧 한 달이 지난 크리스마스 
직전, 축제 준비에 쫓겨나듯이 떠나 버렸다.
  그는 독일인들이 흥겹게 노는 꼴을 볼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매년 때가 
되면 으레 있는 떠들썩한 독일인들의 흥청거림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쳤고 그런 싱거운 꼴
을 보지 않기 위해서 그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필립은 그를 떠나 보낸 것이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필립은 솔직한 사람이어서 누군가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볼 때면 화가 나는 것이었다. 헤이워드의 감화를 다분히 받고 있었으나 
헤이워드의 우유 부단함이 섬세한 감수성 탓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그의 솔직한 태도를 
헤이워드가 늘 은근히 비웃는 것을 내심 분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 후 그들 사이에는 편지 왕래가 있었다. 헤이워드는 편지를 아주 훌륭하게 썼으며, 의식
적으로 재주를 부려 그 편지에 꽤 공을 들였다. 그의 성격은 그가 접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
에 대해서는 뛰어나게 민감하여 로마에서 보낸 그의 편지는 이탈리아의 섬세한 향기까지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는 고대 로마인의 도시에는 로마 제국의 몰락한 자취를 제외하고는 별
로 신통한 것이 없다고 썼다. 그러나 교황이 있는 로마는 그의 마음을 끌었으며, 말을 가려
서 쓴 그의 편지 속에는 로코코적인 아름다움이 기막히게 잘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고대 교회 음악과 알반 언덕에 대한 것도 써 보냈고 은근한 향 냄새라든지 비오는 
날이면 불빛이 보도에 반사되어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밤거리 이야기도 써 보냈
다. 아마 그는 이러한 훌륭한 편지를 다른 여러 친구들에게도 써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편지가 필립의 마음에 얼마나 큰 괴로움을 주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편
지는 필립으로 하여금 현재의 생활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느끼게 했다.
  봄이 되면서 헤이워드의 편지는 더욱더 열광적이 되었다. 그는 필립에게 이탈리아로 오라
고 권했다. 그에 의하면 필립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그의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다는 것
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모두 둔해빠지고, 거기서의 생활은 신통치 못하며, 그렇게 딱딱한 환
경 속에서 어떻게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고 부추겼다. 지금 이탈리아의 타스키니
에는 봄이 와서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하고, 필립이 바야흐로 열아홉 살이 되었으니 함께 
와서 움브리아의 산간 마을을 소요함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가 쓴 지명이 필립의 가슴속
에 파고들었다. 카실리에도 그녀의 애인과 같이 이탈리아로 떠나 버리고 하숙집에 없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필립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들뜨는 것이었다. 그는 돈이 없어 여행
을 못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그는 백부가 처음 약속한 매달 15파운드 이상은 보내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돈도 필립은 아껴 쓰지를 못했다. 보내 주는 돈은 하숙비
와 수업료를 제외하고 나면 몇 푼 남지 않았으나, 그나마도 헤이워드를 따라다니면서 모두 
써 버렸던 것이다. 필립의 돈이 떨어질 무렵이 되어도 헤이워드는 여행을 떠나자든가 연극
을 구경하러 가자든가 또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자고 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필립은 자기
는 돈이 부족해서 그런 곳에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헤이워드의 편지는 자주 오지 않게 되었고, 그 사이에 필립은 다시금 마음을 가라
앉혀 꾸준히 공부를 계속했다. 대학에도 나가 한두어 강좌를 들었다. 당시 피셔(독일의 철
학자)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중이었고, 겨울 학기에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훌륭한 강의를 하
고 있었다. 그것이 필립이 철학 공부를 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실제적인 기질을 가진 그는 
추상적인 것에는 쉽사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으나, 이 형이상학적인 연구에 귀를 
기울이는 중에 예기치 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줄타기하는 광대가 심연 위
에서 위태로이 재주부리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전율을 느끼게 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
의가 그의 젊은 마음을 매혹하였고, 그는 자기가 이제 들어가려는 세상이란 냉혹한 비애와 
암흑이 가득 찬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생각은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가
려는 그의 열정을 조금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그 후 그의 백부를 대신하여 편지를 써 보내곤 하던 백모로부터 이제는 영국으로 돌아오
는 것이 어떠냐는 편지가 왔을 때 그는 기꺼이 동의했다. 이제는 그가 장차 무엇을 할 것인
지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월 하순에 하이델베르크를 떠난다면 8월 한 달 동안 모
든 문제를 함께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백모에게서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하이델베르크의 엘린 부인집에 그를 소개
해 준 미스 윌킨슨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으며, 그녀가 블랙스테이블에 와서 몇 주일 
동안 같이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달 어느 날 프라싱에서 배를 타게 될 것이므로 
만약 필립이 그녀와 같은 때에 돌아오게 된다면 여행 길에 그녀를 도와주며 블랙스테이블에 
함께 올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줍음 때문에 필립은 그녀보다 하루 이틀 늦게야 출발할 
수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필립은 미스 윌킨슨을 찾아 헤매는 자신의 모습과 그녀 옆에 가
서, 당신이 미스 윌킨슨입니까, 하고 물어 볼 때의 자신의 쩔쩔매는 꼴(자칫하면 사람을 잘
못 보아 창피를 당할지도 모른다)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더욱이 기차간에서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해야 할는지, 아니면 그녀를 무시하고 책만 읽고 앉아 있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
으며, 따라서 그녀와 한 배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마침내 필립은 하이델베르크를 떠났다. 그는 3개월 동안 오직 장래 일만을 생각해 왔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생활이 행복한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안나 양이 그에게 <<제킹겐의 나팔>>(요제프 폰셰펠의 서사시)을 선사했
고 그 답례로 필립은 윌리엄 모르시의 책을 한 권 선사했다. 그들이 서로 교환한 선물을 공
교롭게도 그들은 읽지 않았다.
  필립은 백부와 백모를 보고 놀랐다. 그는 전에는 그들이 이렇게 늙은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목사는 별달리 냉정하지도 않은 무관심한 태도로 맞아 주었다. 그는 전보다 조금 더 
뚱뚱해졌고, 머리도 더 벗어졌으며, 머리털도 전보다 더 세어 있었다. 필립은 백부가 어쩐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루이자 백모는 그를 양팔에 껴안고 키스했고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필립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백모가 얼마
나 마음으로 자기를 사랑해 왔는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 필립, 네가 떠나고 나선 하루가 천 년같이 생각되더구나." 백모는 울음 섞인 목소리
로 말했다. 백모는 필립의 두 팔을 어루만지면서 회색이 만면하여 조카의 얼굴을 들여다보
았다.
  "아주 컸어. 이젠 어른이 다 됐구나."
  필립의 코밑에는 수염이 조금 돋아나 있었다. 그는 면도칼을 사서 때때로 조심스럽게 털
을 밀어 냈다.
  "네가 없으니까 쓸쓸해 못 살겠더라." 백모는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오
니 마음이 기쁘지, 어때?"
  "네, 그렇구 말구요."
  백모는 하도 여위어서 그의 목을 안은 가냘픈 양팔은 병아리 뼈를 연상케 했다. 여윈 얼
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젊은 시절 그대로의 곱슬곱슬한 머리는 희어져서 우습
게 보이면서도 애처로운 인상을 주었다. 쇠잔한 백모의 가냘픈 몸은 가을 낙엽과도 같아 세
찬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필립은 이 조용한 두 사람의 생
애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고, 
지금 그들은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지금 한창 젊고 활기에 넘치
는 필립은 그들의 생애가 헛된 것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라고는 없었으며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 태
어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는 루이자 백모가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한편 백모가 자기를 그렇게까지 사랑해 준다고 생각할 때 불현듯 백모에 대한 애착을 느끼
는 것이었다.
  캐리 씨 부처가 그들의 조카를 맞아들이는 동안 방해되지 않도록 일부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스 윌킨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필립, 이분이 미스 윌킨슨이다." 캐리 부인이 소개했다.
  "탕자가 돌아왔구먼요. 탕자의 단춧구멍에 꽂을 장미꽃을 가져왔어요."
  그녀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쾌활하게 웃으면서 그녀는 이제 막 정원에서 꺾어 온 꽃을 필립의 웃옷에 꽂아 주었다. 
그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어 낯을 붉혔다. 미스 윌킨슨은 백부가 부목사로 있을 때에 마지
막으로 받들던 목사의 딸이라는 것을 필립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지방 성직자의 딸들을 
몇 알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모두 볼품없는 옷을 입고 투박한 장화를 신고 다녔었다. 또 그
녀들은 대개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필립이 블랙스테이블에 살던 어린 시절에
는 홈스펀이 동앵글리어 지방까지는 수입되지 않았고 성직자 가정의 여자들은 화려한 색의 
옷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머리는 잘 빗질되어 있지 않았으며, 옷에 먹인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성적인 매력을 지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자기들
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
해서는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스 윌킨슨은 성직자의 딸이면서도 블랙스테이블의 성직자의 딸들과는 딴판이었
다. 회색 꽃무늬를 놓은 흰 모슬린 가운을 입고 끝이 뾰족한 하이힐에 살이 비치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아직 세상 물정에 경험이 적은 필립의 눈에는 그녀가 굉장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필립은 그녀의 옷이 아주 값싸고 보기에만 화려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는 공들여 빗어졌고 앞이마 한가운데에는 곱슬머리를 드리우고 있었
다. 머리는 검고 윤이 흘렀으며 여간해서는 헝클어지지 않을 것같이 보였다. 크고 검은 눈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사나운 독수리를 연상케 했으나 정면에서 보면 괜찮
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입이 크고 웃기를 잘했으나, 웃을 때면 커다랗고 누런 이빨을 숨
기려고 애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립을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아주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의 행실에 대해서는 필립은 아주 엄격한 견해를 자기고 있어 숙녀
는 분을 바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미스 윌킨슨은 성직자의 딸이니만
큼 응당 숙녀라야 할 것이었다.
  필립은 그와 같은 미스 윌킨슨을 철저히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말에는 프랑스 
억양이 섞여 있었는데, 영국의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그녀가 왜 그런 발음을 하는지 
필립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부자연스러웠고, 더욱이 수줍은 척하면서도 쾌활한 
태도는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필립은 2,3일 동안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녀를 적대시했으
나, 미스 윌킨슨은 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매우 상냥스러웠으며, 자
주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끊임없이 필립에게 판단을 요구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차가움과 
비굴한 면이 있었다. 또 필립을 잘 웃기기도 했는데, 필립은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꼼짝을 못 하는 성미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때때로 꽤 재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재간이 있어 이것을 잘 받아 주는 상대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백부나 백모는 전
혀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결코 웃는 일이 없었다. 필립은 미
스 윌킨슨과 점점 사귀게 되어 수줍은 마음도 극복하게 되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 
그녀의 프랑스어의 억양에 신기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 의사가 베푼 원유회
에서는 그녀의 옷차림이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해 보였다. 큼직큼직하고 하얀 점이 박힌 푸
른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필립에게는 일종의 쾌감을 일으켰다.
  "모두들 당신을 좋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필립은 웃으면서 말했
다.
  "버림받은 말괄량이로 보이는 것이 내 일생의 꿈이에요." 그녀는 대답하였다.
  어느 날 미스 윌킨슨이 자기 방으로 가고 없을 때, 필립은 루이자 백모에게 그녀가 몇 살
이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얘야, 숙녀의 나이는 묻는 게 아니란다. 그러나 그 여자가 너하고 결혼할 수 없는 나이라
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백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여보, 윌킨슨도 이제는 퍽 나이가 들었을 거요. 우리가 링컨셔에 있을 때 이미 다 큰 처
녀였으니까.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 아니오? 그 때 그 애는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
지."
  "그 때는 아직 열살도 못되었겠지요?" 필립이 물었다.
  "열 살은 더 되었을 거야." 루이자 백모가 말했다.
  "아니, 스물에 가까웠을걸." 백부가 말했다.
  "아니오, 기껏해야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이었을 거예요."
  "그러면 지금은 서른을 넘었겠군요." 필립이 말했다.
  그 때 2층에서 미스 윌킨슨이 방자멩 고다르의 노래를 부르면서 계단을 사뿐사뿐 내려왔
다. 그녀는 필립과 함께 산보를 나가려고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필립에게로 와서 손을 내밀
고 장갑의 단추를 채워 달라고 했다. 필립은 서툰 솜씨로 단추를 채워 주었다. 그는 조금 당
황했으나, 친절을 다했다. 이제 그들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였으므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한가로이 거닐었다. 그녀는 베를린 이야기를 들려주고, 필립은 하
이델베르크에서 지내던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보잘것없는 화제가 새로운 흥미
를 자아냈다. 그는 엘린 부인 집에서 하숙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했다. 그 때는 그렇게도 의
미 심장하게 들리던 헤이워드와 위크스 사이의 토론 이야기를 필립은 비꼬아서 이야기해 주
었으므로,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같이 들렸다. 필립은 미스 윌킨슨이 자기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웃어 주는 것이 기뻤다. "난 당신이 그런 줄 몰랐어요. 꽤 풍자적인데요." 그녀가 말
했다.
  그리고는 필립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어떤 연애 사건이라고 있었느냐고 농담삼아 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필립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으나, 그녀는 그의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당신은 무척 비밀을 지키시는군요. 당신만한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는 빈정댔
다. 필립은 얼굴을 붉히며 웃어 버렸다.
  "당신은 지나치게 남의 일을 알고 싶어해요." 그는 얼버무렸다.
  "그것 봐요. 내 추측이 맞았지요. 저 얼굴 붉히는 것 좀 봐." 그녀는 쾌활하게 웃었다.
  필립이 독일에서 돌아온 후 2주일 동안 그와 백부 사이에는 그의 장래에 대한 여러 가지 
의논이 있었다. 옥스퍼드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필립이 단호히 거절했고, 이제는 장학금을 
받을 가망조차 없어졌기 때문에 백부도 그것은 단념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필립의 전재산
은 2천 파운드뿐이었다. 이것을 5푼의 이자로 투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 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이제는 원금마저 조금 줄어들었다. 옥스퍼드 대학에 간다고 하면 적어도 
1년에 2백 파운드는 가져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이 남은 돈마저 3년 동안에 모두 써 버
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공부를 한다 해도 그의 생
계를 유지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곧장 런던으로 가고 싶었다. 백모는 
신사가 가질 직업은 네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육군, 해군, 그렇지 않으면 법률가나 성직
자라는 것이었다. 하기는 백모의 시동생, 즉 필립의 부친이 개업의였으므로 의사라는 직업도 
신사의 직업 가운데 추가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젊었을 때는 아무도 의사를 신사라고 생각
지 않았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육군이나 해군은 필립에게는 불가능했고, 성직자가 되
는 것도 절대 반대였다. 그래서 단지 남은 것은 법률가뿐이었다. 언젠가 마을의 의사가, 요
즈음은 기술 방면으로 나가는 신사들도 많아졌다고 이야기했으나 백모는 이에 반대했었다. 
  "필립이 기술자가 되는 것을 난 원치 않아요." 백모가 말했다.
  "여부가 있소? 그 애는 좀 고상한 직업을 가져야 돼." 백부가 곧 맞장구를 쳤다.
  "그럼, 자기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게 하지요."
  "전 그건 싫습니다." 필립이 반대를 표시했다.
  백모는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필립이 옥스퍼드에 가지 않는 한 법률가가 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캐리 씨 부부는 법조계에서 성공하려면 학위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결국 필립을 변호사의 견습생으로 들여보내는 데 합의했다. 그들은 가족의 
고문 변호사이며 고 헨리 캐리 씨의 유산 처리의 공동 집행자였던 앨버트 닉슨 씨에게 편지
를 보내어 필립을 채용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2,3일 후에 회답이 왔는데, 자기 사무실에
는 현재 빈자리가 없다는 것과 자기로서는 그 계획에 대해서 절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지
금 변호사라는 직업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어 자본이나 연고 관계가 없는 사람은 사무 서기 
이상으로 승진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차라리 공인 회계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공인 회계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백부나 백모는 전혀 몰랐고 더욱이 필립 자신도 그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얼마 후에 닉슨 씨로부터 다시 편
지가 왔는데, 현대 상업 발전과 회사의 증가에 다라 장부를 점검하고 그들의 재정 관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잘 정리해 주는 공인 회계사의 사무소가 많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국가 면허를 받은 후부터 이 직업은 해가 갈수록 사회의 존경을 받고 수입도 괜찮
은 중요한 직업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닉슨 씨가 과거 30년 동안이나 거래하고 
있는 공인 회계사 사무소에 지금 견습 서기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며, 3백 파운드만 낸다면 
필립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3백 파운드도 견습기간인 5년 동안에 반액
이 월급으로 지불된다는 것이었다. 장래성이 신통한 것은 아니었으나, 필립은 무엇이든지 직
업을 잡아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여하간 런던에 가서 살게 된다는 생각을 하자 그가 느끼는 
가벼운 실망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캐리 씨는 닉슨 씨에게 편지를 내어 그것이 신사의 
체면에 알맞은 직업인가고 물었다. 닉슨 씨는 면허가 나오고부터는 퍼블릭 스쿨이나 대학을 
나온 사람들도 나온 사람들도 들어오고 있으며, 만약에 필립이 싫어해서 1년 후에 그만두기
를 원한다면 공인 회계사 허버트 카터 씨는 그 돈의 반액을 반환해 줄 것이라고 했다. 이렇
게 하여 모든 것은 결정되고 필립은 9월 15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되었다.
  "런던으로 떠나려면 아직 한 달이 남았군요." 필립은 미스 윌킨슨에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굴레를 벗게 되고 나는 굴레를 쓰게 되는 셈이군요." 미스 윌킨슨이 대답
했다.
  그녀의 휴가는 6주일 예정이었으므로 필립이 출발하는 날보다 하루 이틀 앞서 떠나게 되
어 있었다.
  "우리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왜 만날 수 없을라구요? 만나겠지요."
  "그런 목석 같은 이야기는 그만둬요. 당신같이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난 처음 봤어요."
  필립은 얼굴을 붉혔다. 미스 윌킨슨이 자기를 졸장부라고 생각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때로는 아름답게도 보이는 젋은 여자였으며, 그도 스무 살이 가까웠다. 그들이 서로 
예술이나 문학 이야기만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부자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필립은 그
녀에게 구애를 해야 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꽤 많이 했었다. 미스 윌킨슨이 파
리에 있을 때 어떤 화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무른 일이 있었는데, 그 화가가 언젠가 그녀에
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해 온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화가가 너무 열렬하
게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녀는 구실을 만들어 두 번 다시 모델이 되지 않기로 했
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런 종류의 일에는 익숙하다는 것이 명백했다.
  커다란 밀짚 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는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 날은 그들이 사귄 이래 
가장 무더운 오후였다. 땀방울이 그녀의 입술 위에 줄을 지어 맺혀 있었다. 그에게도 이젠 
로맨스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미스 윌킨슨은 거의 프랑스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
며, 이런 것이 그들 사이에 있을 법한 사랑의 모험에 박차를 가했다. 필립이 밤에 침대에 누
워 이런 것을 생각하든지 혹은 정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때면 그는 그녀를 눈앞에 그
리고 전율을 느꼈으나, 막상 그녀를 만나고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필립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털어놓고 이야기한 이상 필립이 사랑을 고백한
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필립은 자기가 아무런 사랑의 표시도 하지 않은 것
을 미스 윌킨슨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필립 혼자만의 상상인지 모
르지만, 지난 이틀 동안에 두어 번 그녀의 눈에 희미하나마 자기를 멸시하는 눈치가 보이는 
듯하였다.
  "무슨 공상을 하고 있어요?" 가볍게 말하고 미스 윌킨슨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
았다.
  "당신에겐 말 않겠어요." 필립이 대답했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서 그녀에게 키스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데 과연 그녀가 키스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더욱이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
이 어떻게 키스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마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도 모르며 혹은 따귀를 갈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백부에게 일러바칠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재미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는 백부가 어떠한 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틀립없이 백부는 의사와 조사이어 그레이브스에게도 이야기를 할 것
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아주 바보 취급을 받게 될 것이었다. 백모는 미스 윌킨슨의 나이가 
서른일곱 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모두가 미스 윌킨슨의 나이는 그의 어머니뻘이 된다고 
놀려 댈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글쎄, 뭘 그렇게 곰곰 생각하고 있어요?" 미스 윌킨슨이 웃으며 또 물었다.
  "바로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필립은 대담하게 말했다. 이런 말은 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날 생각하고 있었어요?"
  "참, 당신은 알려고 하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오."
  "장난꾸러기!" 미스 윌킨슨이 말했다. 역시 똑같은 말투였다. 언제나 필립이 애를 써서 여
기까지 화제를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면 으레 그녀는 여자 가정교사를 연상케 
하는 말을 던져서 필립의 기분을 잡쳐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도 필립이 만족할 만큼 
노래를 잘 부리지 못하였을 때 그녀는 농담으로 그를 장난꾸러기라고 불렀다. 이번에 필립
은 아주 시무룩해졌다.
  "나를 어린애 취급 하는 것은 그만두시오."
  "노하셨나요?"
  "기분 나빠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필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 손을 잡았다. 요즘에 와서 밤에 그녀와 악수할 
때면 그녀가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는 것같이 느낀 일이 두어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의심
할 여지가 없었다.
  이튿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비가 온 뒤라서 정원은 향기롭고도 상쾌했다. 필립은 
해수욕을 하고 돌아와서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는 목사관에서 테니스 시합이 
있었다. 미스 윌킨슨은 아주 멋진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그녀는 같은 옷을 입는데도 남다
른 솜씨가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부목사의 부인이나 시집 간 의사의 딸에 비해 미스 윌킨
슨은 훨씬 고상하고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빨간 양산을 받쳐 들고 잔디밭 가
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허리띠에는 장미꽃이 두 송이 꽂혀 있었다. 양산의 붉은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더한층 아름다웠다. 필립은 테니스를 좋아했다. 서브를 잘 넣었고 뛰는 
것이 서툰 탓으로 네트 가까이 서서 공을 받아 쳤다. 발이 말을 잘 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법 민첩했고 공을 놓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날 게임마다 이겼기 때문에 필립은 
아주 기뻤다. 차를 마실 때 필립은 더워서 헐떡거리면서 미스 윌킨슨의 발 가까이 누워 있
었다.
  "플란넬 운동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걸요. 멋지게 보여요."
  필립은 기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이 붉어졌다.
  "칭찬해 주시는 데 답례를 해야겠군요. 오늘 유난히 아름다워 보입니다. 정말 반하겠어
요."
  그녀는 생긋이 웃어 보이고는 검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필립을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필립은 그녀에게 같이 산보하자고 청했다.
  "오늘은 운동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어요?"
  "오늘 밤 정원을 거닐면 참 즐거울 겁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필립은 기분이 좋았다.
  "이것 봐요. 당신 때문에 나는 캐리 부인한테 꾸중을 들었어요. 당신과 시시덕거려서는 안 
된다구요." 그녀는 말했다. 뒤뜰을 거닐면서 미스 윌킨슨이 또 말했다.
  "필립, 당신은 나와 시시덕거렸었던가요? 난 그걸 도무지 알아 차리지 못했는데요."
  "농담을 하신 거지요."
  필립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다만 조금 웃어 보일 뿐 피하
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필립은 의기 양양했다. 마침내 그는 
마음먹은 대로 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좀더 일찍이 그렇게 했
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번 더 키스를 했다.
  "이젠 그만 해요." 미스 윌킨스이 말하였다.
  "왜요?"
  "너무 좋아서요."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들의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필립은 열
렬한 애인으로서 행세했다. 미스 윌킨슨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영어로도 말하고 프랑스어로도 되풀이했다. 그녀
는 필립을 여러 면으로 칭찬해 주었다. 눈이 매력적이라든가 관능적인 입술을 가지고 있다
는 말을 듣는 것은 필립에게는 난생 처음이었다. 필립은 일찍이 자기 용모에 대하여 마음을 
써본 일이 없었으나, 이제는 여가만 있으면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는 만족감을 느끼
곤 했다. 그녀와 키스할 때마다 그녀의 영혼마저 뒤흔들어 놓는 격렬한 정열을 느끼며 황홀
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키스를 했다. 그것은 미스 윌킨슨이 은연중에 
자기에게 바라고 있는 말을 하는 것보다 키스를 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필립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 있는 자기의 이야기를 자랑삼아 어떤 친구에게, 자기
의 사소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털어놓고 싶었다. 가끔 미스 윌킨슨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필립은 당황했다. 그런 때는 헤이워드라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이워드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풀어 주었을 것이고, 필립에게 대책
까지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필립은 일을 서둘러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시간에 그냥 맡겨 
두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꼭 3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난 견딜 수가 없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요.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미스 윌킨슨이 말했다.
  "당신이 조금이라고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그렇게 모른 척할 수는 없을거요." 필립이 속
삭였다.
  "아, 당신은 왜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죠? 남자란 모두가 똑같아요. 언제나 만족
할 줄을 모르거든."
  그래도 필립은 자꾸만 졸랐다.
  "글세 그건 불가능하다니까요. 어떻게 여기서 그럴 수 있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필립은 온갖 계획을 제의하였으나 미스 윌킨슨은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모험을 하긴 싫어요. 당신 백모가 아시기라도 하면 큰일날 거예요."
  며칠 후 필립은 아주 훌륭한 계교를 생각해 냈다.
  "이것 봐요. 다음 일요일 저녁에 말이지요, 당신은 머리가 아파서 교회에 못 나가겠으니 
집이나 지키겠다고 말해요. 그러면 필시 백모가 교회에 가실테니까요."
  일요일 밤이면 메리 앤을 교회에 보내기 위해서 캐리 부인은 보통 집에 남아 있었다. 그
러므로 저녁 예배에 참례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백모는 아주 반가워할 것이다.
  필립은 그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기독교에 대한 자기의 견해가 변화한 것을 친척들에게 
피력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이해해 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나가는 편이 오히려 무난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침 예배만 참석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대한 점잖은 양보라고 생각
했다. 그 반면에 저녁 예배 참석을 거절하는 것은 자유 사상의 정당한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수단을 제외하자 미스 윌킨슨은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
었다.
  "아니, 난 그렇게 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일요일 저녁 차를 마실 때 그녀는 필립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 오늘 저녁엔 교회에 나가지 못하겠어요. 어이구, 머리가 아파서 빠개지는 것 같아서
요." 그녀가 캐리 부인에게 말했던 것이다.
  캐리 부인은 몹시 걱정을 하면서 자기가 늘 먹고 있는 물약을 마셔 보라고 했다. 미스 윌
킨슨은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나면 자기 방에 가서 눕겠다고 했다.
  "그래, 정말 뭐 또 필요한 게 없수?" 캐리 부인이 여전히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네, 없어요.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는 내가 교회에 나가 봐야지."
  "네, 그러세요. 다녀오세요."
  "큰어머니, 저는 집에 있을 테니까 미스 윌킨슨이 무엇이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 때 필립이 말했다.
  "그럼 응접실의 문을 열어 두는 게 좋겠다. 그래야 미스 윌킨슨이 벨을 울리면 네가 곧 
듣지 않겠니?" 캐리 부인은 필립에게 일렀다.
  "그러겠습니다."
  이리하여 6시 이후에는 집 안에 필립과 미스 윌킨슨만이 남게 되었다. 필립은 불안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한 계교를 꾸미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도 해 보았으
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가 스스로 만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만일 
이 기회에 행동하지 않는다면 미스 윌킨슨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복도에 나가
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정말 머리가 아픈 것이
나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녀는 그가 한 말을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필립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될 수 있는 대로 발소리를 죽여 가며 가만가만 계단을 올라갔다. 삐걱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추곤 했다.
  그는 미스 윌킨슨의 방 문 앞에 이르러서 가만히 엿들어 보았다. 이윽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마음을 진정하고자 이렇게 서 있는 동안 적어도 5
분은 지나간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도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나
중에 후회할까 두려웠다. 그것은 흡사 수영장에서 가장 높은 다이빙대에 올라간 것 같았다. 
아래서 쳐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막상 그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
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올라온 이상 다이빙대의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창
피하여 할 수 없이 뛰어내리게 되는 것이다. 필립은 용기를 냈다. 손잡이를 가만히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자기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느꼈다.
  미스 윌킨슨은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화장대 옆에 서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
다.
  "아, 당신이었어요? 무슨 일이죠?"
  그녀는 겉옷은 벗어 버리고 속치마만 걸치고 서 있었다. 짧은 속치마는 장화 목 위까지밖
에 내려오지 않았다. 속치마는 번쩍거리고 검정색이었고 붉은 천으로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소매가 짧은 하얀 속옷차림이었다. 그녀는 괴상하게 보였다. 필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스 윌킨슨이 그처럼 망측하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때
는 이미 늦었다. 그는 문을 닫고 잠가 버렸다.
  필립은 이튿날 아침 일찌감치 눈을 떴다. 그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베니스식 덧문을 통해 마루 위에 비쳐든 햇살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기분
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스 윌킨슨은 자기를 에릴리로 불러 
달라고 했으나 어쩐지 그는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녀를 미스 윌킨슨으로밖에
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렀다가 그녀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일
이 있었으므로, 그는 아예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가 어렸을 때 해군 장교의 
미망인이었던 루이자 백모의 여동생이 에밀리 아주머니라고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을 가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보다 더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다. 그는 처음
부터 미스 윌킨슨으로 그녀를 알게 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그녀의 인상으로부터 그 이름을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필립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하튼 그는 그녀의 최악의 모습
을 보았던 것이다. 캐미솔과 짧은 속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가 느꼈던 실망은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또 그는 그녀의 약간 거친 살갗의 촉감과 목덜미에 잡힌 길게 뻗친 
주름살을 기억했다. 그의 승리의 기쁨은 짧았다. 필립은 다시금 그녀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
으나 아무래도 마흔 아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미스 윌킨슨은 그저 수수하게 생긴 늙은 여자에 불과했던가? 남달리 공상이 
많은 필립의 눈앞에는 분에 넘치도록 화려하고 나이에 비해서 너무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부인복을 입고 쪼글쪼글 여윈 얼굴에 지나친 화장을 한 미스 윌킨슨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
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녀를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더구나 그녀와 다시 키스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런 일이었다. 필립은 소름이 끼쳤다. 이것이 사랑이란 말인
가?
  미스 윌킨슨과 다시 얼굴을 대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하여 필립은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옷을 갈아 입었다. 마침내 필립은 한풀 꺾여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벌써 
기도가 끝나고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았다.
  "저런 게으름뱅이!" 미스 윌킨슨이 쾌활하게 소리쳤다.
  필립은 그녀를 바라보고는 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 있는 그녀는 
퍽 아름다워 보였다. 왜 자기가 그녀에 대해서 방금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의아해졌다. 필립은 
다시금 흐뭇해졌다. 미스 윌킨슨의 이와 같은 변화에 그는 적지않이 놀랐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다시금 단둘이 만나게 되자 미스 윌킨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의 노래 공부를 위하여 응접실로 갔을 때 그녀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음계 연습
을 하다가 얼굴을 들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앙브라스 무아(안아 줘요)."
  필립이 허리를 굽히자 미스 윌킨슨은 양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 때문에 필립은 숨이 
막힐 듯했다.
  "아, 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진정으로 사랑해요!" 미스 윌킨슨은 프랑스어 억양으
로 소리쳤다.
  필립은 영어로 말해 주었으면 싶었다.
  "정원사가 언제 창 앞을 지나갈는지 모르잖아요?"
  "아, 정원사 따윈 상관없어요. 상관없어요. 어떻든 상관없어요."
  필립은 이것이 마치 프랑스 소설에 나오는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연히 비위가 상
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저, 난 바닷가에 가서 한바탕 헤엄을 치고 돌아올까 해요."
  "아니, 오늘 아침만은 가지 말아 줘요. 제발 오늘 아침만은!"
  필립은 왜 가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럼 여기 있는 게 좋겠어요?" 그는 웃었다.
  "아, 필립. 아니, 좋아요. 가도 좋아요. 당신이 바닷물에 팔다리를 담그고 기운차게 헤엄치
는 모습을 상상해 보겠어요."
  필립은 모자를 쓰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나갔다.
  '여자란 못 하는 수작이 없다니까.' 그는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즐겁고 행복했고 또 자랑스러웠다. 확실히 그녀는 자기에게 애정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은 2주일도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을 마치고 정원을 산보할 때면 미스 윌킨슨은 오늘도 또 하루 지나갔다고 한숨을 지
었으나 필립은 너무 유쾌해서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만약에 자기
도 베를린에 가는 대신 런던으로 갈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
면 그들은 같은 런던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그러한 상상은 그에게 아무런 흥분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런던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즐겨 상상해 보았으며, 그런 생활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생활을 거의 숨김없이 터놓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미스 윌킨슨은 헤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눈치챘다. 마침내 그녀가 떠날 날이 다가왔
다. 그녀는 희고 검은 체크 무늬의 간편한 여행복을 입고 창백하고 침울한 얼굴로 아침 식
사 자리에 내려왔다. 그 모습은 유능한 가정교사로서 어울려 보였다. 필립도 잠자코 있었다. 
이런 경우에 해야 할 적당한 말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난밤에 정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였으며, 앞으로 단둘이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립
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 날 아침 미스윌킨슨이 층계에서 키스하려 들지도 몰랐으므로 그
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일부러 식당에 남아 있었다. 그는 입버릇이 사나운 중년에 가까운 
메리 앤에게 그들이 함께 있는 장면을 들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메리 앤은 미스 윌킨슨을 
싫어했고 늙은 고양이라고까지 불렀다. 캐리 부인은 몸이 편치 않아 정거장까지는 나올 수
가 없었으므로, 캐리 씨와 필립이 미스 윌킨슨을 전송해 주었다. 마침내 기차가 움직이기 시
작할 때 기차에 오른 그녀는 몸을 굽혀 캐리 씨에게 키스했다.
  "필립, 당신에게도 키스를."
  "좋습니다." 필립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가 기차의 승강대에 한 걸음 올라섰을 때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키스했다. 필립은 내리
고 기차는 떠났다. 미스 윌킨슨은 좌석 한쪽 구석에 몸을 푹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필립
은 목사관으로 돌아올 때 마음이 사뭇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래, 무사히 전송했수?"
  그들이 집에 이르렀을 때 루이자 백모가 남편에게 물었다.
  "그랬소. 그 여자는 왜 그런지 울상이더군. 나에게도 키스하고 필립에게도 키스했다오."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니까 위험할 거야 뭐 있겠어요?" 캐리 부인이 말했다.
  며칠 후 필립은 런던으로 떠났다.
  부목사가 반즈에 있는 하숙집을 소개해 주어서 필립은 편지를 내어 주급 14실링으로 예약
을 했다. 저녁때 그 곳에 도착하자 마르고 주름살투성이의 우스꽝스럽게 생긴 작은 여주인
이 나타나서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고기 요리를 곁들여 차를 가져다 주었다. 공간의 
대부분은 찬장과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었고, 한쪽 벽에 기대어 소파가 놓여 있었다. 벽난로 
옆에는 그것과 짝을 이루어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 안락의자 등에는 흰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스프링이 부러졌기 때문에 쿠션이 놓여 있었다.
  차를 마시고 나서 필립은 짐을 풀고 책을 정리해 놓았다. 그는 책을 읽으려 했으나 마음
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바깥 거리의 고요함이 그의 마음을 약간 불안하게 했으며, 그는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다음날 그는 일찍 일어났다. 학교 다닐 때 런던 연미복에 실크 해트를 썼으나 너무 낡아서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상점에 들러 새것을 사서 썼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았으므로, 스
트랜드가를 산책했다. 허버트 카터 회사의 사무실은 법원가로 들어가서 다시 작은 거리로 
굽어 들어가 있었으므로 찾아가는 데 두서너 번 길을 물어야 했다. 모두들 그를 자꾸만 쳐
다보는 것 같아서, 혹시 모자에 상표가 그대로 붙어 있지나 않나 싶어서 모자를 벗어 보기
도 했다. 목적지에 다다라서 문을 노크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겨우 9시 
반이었다. 밖으로 나갔다가 10분쯤 후에 돌아왔을 때는 여드름투성이의 얼굴에 스코틀랜드 
억양이 강한 급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필립은 허버트 카터 씨가 있느냐고 물었으나,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몇 시에 나오십니까?"
  "10시부터 10시 반 사이에 나오십니다."
  "그럼 기다려야겠군."
  "무슨 용건이신데요?" 급사가 물었다.
  필립은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일부러 익살스러운 태도를 지어서 그런 기색을 감추려 했
다.
  "여기에 취직할까 해서요."
  "아, 당신이 바로 새로 오시는 서기님이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굿워디씨가 곧 나오실 겁
니다."
  필립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그는 나이가 자기와 같아 보이고 자신을 하급 서기
라고 부른 그 급사가 그의 발을 유심히 보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낯을 붉히고 앉아서 그 발
을 성한 발 뒤에 감추었다. 사무실 안은 어둡고 불결했다. 천장에 있는 창으로부터 햇살이 
들어오고, 방 안의 책상은 석줄이었고 걸상이 마주 놓여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우중충한 권
투 시합의 판화가 한 장 걸려 있었다. 얼마 후에 서기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들
은 필립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급사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중에 알
았지만, 그 급사의 이름은 맥도걸이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맥도걸이 일어섰다.
  "굿워디 씨가 나오십니다. 지배인이십니다. 오셨다고 전해 드릴까요?"
  "네, 그래 주십시오." 필립이 말했다.
  급사는 방을 나가더니 곧 돌아와서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필립은 그를 따라서 복도를 지나 가구가 거의 없는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에
는 키가 작고 야윈 남자가 난로를 등지고 서 있었다. 중키보다 훨씬 작은 키에 머리만 엄청
나게 컸으므로, 그 머리는 몸뚱이 위에 맥없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우스꽝스러웠다. 
얼굴은 넓적하고 납작했으며 눈이 툭 불거지고, 성긴 머리카락은 갈색이었다. 양볼에는 군데
군데 구레나룻이 나 있었는데 털이 짙게 나 나 있어야 할 곳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살
빛은 약간 누르스름했다. 그는 필립에게 손을 내밀며 벌레 먹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
는 거만한 어조로 이야기했으나 수줍어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는 자기가 잘난 것처럼 일
부러 그렇게 꾸미려고 애쓰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필립에게 일이 마음에 들게 될 것을 바라
며, 다소 불편한 일도 있겠지만 익숙해지면 재미있고 돈도 벌 수 있을 것이며, 요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우월감과 수줍음이 이상하게 뒤섞
인 태도로 웃어 보였다.
  "카터 씨는 곧 오실 거요. 월요일 아침에는 가끔 늦소. 오시면 곧 당신을 부르겠지만 그 
때까지할 일을 조금 드리겠소. 부기와 장부에 대해서 좀 알고 있소?"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소. 학교에서는 사무에 관한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까. 가만있자, 어떤 일이 
좋을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옆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커다란 마
분지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상자 속에는 수많은 편지가 마구 뒤섞여 있었는데, 그것을 추
려서 보낸 사람들의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해 놓으라고 했다.
  "견습 서기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하지. 거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하나 있소. 이름은 
윌슨이라고 하는데, 저 양조업자 윌슨 크랙톰슨이라고 있지 않소? 그 윌슨의 아들이오. 실무
를 배우기 위해 1년 동안 여기 와 있기로 한 거요."
  굿워디 씨는 7,8명의 서기들이 사무를 보고 있는 방을 지나서 구석진 방으로 필립을 데리
고 갔다. 유리 칸막이로 분리된 방이 있었는데 윌슨은 의자에 기대 앉아 <스포츠 맨>이라
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몸집이 크고 억세게 생기고 옷차림도 훌륭한 청년인데, 굿워디 씨가 
들어가자 얼굴을 들었다. 그는 지배인을 굿워디라고만 부름으로써 자신의 신분이 높다는 것
을 암시하려 했다. 한편 지배인은 윌슨과 자기는 허물없이 친한 사이라고 했으나 윌슨은 그
것을 오히려 그의 신사 신분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좋아했다. 굿워디
가 나가고 필립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글쎄, 리골레토(경마용 마리 이름)를 취소해 버렸으니 어쩌자는 것일까?"
  윌슨이 필립에게 말했다.
  "그랬어요?"
  경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필립은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그는 윌슨의 값비싼 의복을 두려운 듯이 바라보았다. 연미복은 몸에 꼭 붙어 잘 어울리고 
퍽 큰 넥타이의 한복판에는 값비싼 핀이 맵시 있게 꽂혀 있었다. 난로 위에는 실크 해트가 
놓여 있었는데 뻔쩍거리는 종 모양의 것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옷차림이 보잘것없는 것같이 
느껴졌다. 윌슨은 사냥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지옥 같은 사무실에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노릇이며 사냥을 
갈 수 있는 날은 단지 토요일뿐이라고 푸념했다. 그리고 총쏘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또 도
처에서 초대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일이
나, 이런 일이 오래도록 계속될 것도 아니고, 이 지옥 같은 곳도 1년뿐이니 1년만 지나면 곧 
실업계로 진출하게 될 것이며, 그 때는 1주일에 나흘은 사냥하며 마음껏 총도 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자넨 15년간 있게 된다구?"
  비좁은 방에서 팔을 휘저으며 그가 말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필립이 대답했다.
  "앞으로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될 거요. 봉급 계산은 카터가 해준다오."
  필립은 이 젊은 신사의 교만한 태도에 얼마간 압도당했다.
  블랙스테이블에서는 양조업자들을 오히려 경멸의 눈으로 보아 왔고, 백부도 술에 대하여 
가벼운 조롱을 했었는데, 이렇게도 거만하고 잘난 체하는 녀석들을 보는 것은 필립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윌슨은 자기가 윈체스터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필립이 받은 교육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자 그의 태도는 더한층 거만해지는 것
이었다.
  "물론, 퍼블릭 스쿨에 가지 못할 바에는 자네가 다닌 그런 따위 학교도 무방하겠지."
  필립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물어 보았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 카터만이 좀 괜찮은 편이고 그와는 종종 식사
도 같이 하지만 나머지 작자들은 모두 어중이떠중이들이라 상대가 안 되니까."
  이윽고 윌슨은 다시 책을 보았고, 필립도 편지들을 가려 내기 시작했다. 그 때 굿워디 씨
가 들어와서 카터 씨가 나왔다고 전했다. 그는 필립을 그의 방 옆에 있는 넓은 방으로 안내
했다. 커다란 책상에 한 쌍의 큰 안락의자가 있었고, 마루에는 터키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
며, 벽에는 사냥하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카터 씨는 책상에서 일어나 필립에게 손을 내밀
었다. 그는 기다란 프록 코트를 입고 있어 군인 같은 풍채였다. 콧수염에는 기름을 발랐고 
잿빛 머리는 짧고 말끔히 깎여 있었다. 꼿꼿한 자세로 그는 늠름하게 말했으며, 자기 집은 
엔필드에 있다고 했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와 시골 생활의 장점에 대한 이야기에 그는 매우 
열중했다. 그는 허트퍼드셔의가마 의용대 장교 출신이며 그 후에 보수당 협회의 의장까지 
지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어떤 지방의 고관이 그를 런던의 실업가로 생각할 사람은 없
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자기의 생활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고 만족했다는 것이었
다.
  그는 필립에게 유쾌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굿워디가 자네를 돌보아 줄 걸세. 윌슨은 좋은 친구이고 완전한 신사야. 게다가 훌륭한 
사냥꾼이지. 필립, 자네는 사냥을 해 보았나? 안 해 보았다고? 그것 참 유감인데. 사냥이란 
신사에게는 유일한 스포츠라네. 하나 요즈음은 여가가 없어서 나도 아들에게 맡겨 버리고 
말았어. 내 아들은 지금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는데 럭비 학교 출신일세. 럭비 학교는 참 
좋은 학교일세. 학생들이 모두 우수하구. 한데, 우리 아들도 2년 후에는 견습 서기로 이리로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립 자네에게도 좋을 걸세. 자네는 내 아들을 좋아하게 될 것일세. 
참, 그 애는 사냥을 썩 잘한다네. 하여튼 나는 자네가 이 곳에서 잘해 나가고 또 하나는 일
에 취미를 가지기 바라네. 가끔 있는 내 강의에도 빠지지 말고 출석하기 바라네. 그 강의는 
이 직업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것일세. 이 직업에서는 신사가 필요하다네. 지배인인 굿워디
도 내 강의에 참석하지. 그러니까 무엇이나 모르는 게 있으면 굿워디가 가르쳐 줄 걸세. 그
런데 자네, 글씨는 잘 쓰는지? 좋아, 그것 굿워디가 보면 알테니까."
  필립은 카터 씨의 신사연하는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필립의 고향인 잉글랜드 동남부에서는 신사와 비신사를 엄격히 구별했으나 신사는 자기가 
신사라는 것을 뽐내지 않아야 했다.
  연말에는 할 일이 대단히 많았다. 필립은 톰슨이라는 서기와 함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
면서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필립이 지출 항목을 부르면 톰슨이 점검했고, 때로는 기
다란 계산표를 여러 장씩 받아 가지고 계산했다. 필립은 계산이 아주 서툴고 또 느렸다. 틀
린 것을 발견하면 톰슨은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여위고 혈색이 나쁜 마흔쯤 
되는 사람으로 새까만 머리털과 까칠까칠한 콧수염에 볼은 푹 팬데다가 코 양쪽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는 필립을 견습 서기라는 이유로 싫어했다. 필립은 3백 페니의 돈을 
내고 5년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발전의 가망이 있었지만 그는 경험과 능력이 있는데도 불
구하고 주급 35실링 이상의 서기로는 승진할 가망이 없었다. 그는 대가족을 거느리기에 꽤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필립의 태도가 거만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곧잘 화풀이를 하
는 것이었다.
  자기보다 교육 정도가 높다고 해서 빈정거렸고, 발음이 나쁘다고 바보 취급을 했으며, 또 
필립이 런던 사투리를 안 쓴다고 괘씸하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필립과 이야기할 때는 그는 
일부러 에이치(H)를 과장해서 발음했다. 처음에 그는 단순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를 잘했
으나, 차차 필립이 공인 회계사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모욕을 주었다. 그의 공격
은 우둔했으나 필립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그는 무턱대고 우울한 태
도를 취했다.
  "아침에 목욕 갔다왔나?"
  일찍 출근하는 것을 오래 지속하지 못한 필립이 사무실에 늦게 출근하자 톰슨은 그렇게 
소았다.
  "네. 당신은?"
  "아니, 난 신사가 아니야. 서기에 지나지 않거든. 토요일 밤에나 목욕을 가지 뭐."
  "아, 그러니까 당신은 월요일이면 늘 기분이 좋지 않군요."
  "오늘은 간단한 계산을 좀 해주겠어?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아는 신사에게 이런 걸 부탁해
서 미안하지만."
  "그렇게 비꼬아 말하는 의도는 과히 훌륭하지 못한데요."
  그러나 필립은 봉급도 적고 무뚝뚝한 다른 서기들이 자기보다 더 유능하다는 사실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굿워디 씨도 그에게 한두 번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자네도 지금쯤은 어느 정도 배웠어야 할 텐데, 급사보다도 못하니." 톰슨은 짜증을 냈다.
  필립은 시무룩해서 듣고 있었다. 그런 꾸지람을 듣는 것도 싫었지만 굿워디가 그에게 계
산서를 정산하도록 주었다가 만족스럽게 되지 못했을 때 다른 서기들에게 고쳐 쓰게 하는 
것을 볼 때면 굴욕을 느꼈다. 하는 일이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견딜 만도 했으나 이제는 
지리하기만 했으며, 일에 대한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일을 더욱 싫어하게 되
었다. 응당 자기가 맡은 일을 해야 할 때도 그는 가끔 사무소 용지에 장난삼아 그림을 그리
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윌슨의 모습을 이모저모로 스케치했다. 윌슨은 그
의 재주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림을 집으로 가지고 간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사무실에 나와
서 그는 자기 가족들이 모두 칭찬하더라고 말했다.
  "자네는 왜 미술가가 되지 않는가? 그야 물론 돈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2,3일 후에 우연히 카터 씨는 윌슨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윌슨은 스케치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다음날 아침 카터는 필립을 불렀다. 카터 씨를 대면하는 일이 별로 없
었기 때문에 필립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에게 갔다.
  "이것 봐, 자네가 사무실 밖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지 상관없지만, 자네가 스케치한 걸 보
았는데 모두 사무소 용지에 그려 있었어. 그리고 굿워디가 말하기를 자넨 아주 태만하다고 
하더군. 자네가 힘을 다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공인 회계사가 되긴 틀린 노릇이야. 공인 회계
사란 아주 훌륭한 직업이거든. 그 때문에 좋은 사람을 쓰려고 하는 거야. 자네도 열심히 견
습을 해서..."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끝맺을 말을 생각했으나, 적당한 말이 미처 떠오르지 않
았다. "힘을 다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돼." 그는 오히려 줏대 없는 말로 끝을 맺어 버리고 
말았다.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1년 후에 그만둘 수 있음과 동시에 계약금의 반을 돌려준다고 
한 약속만 없었더라면 아마 필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을 것이다. 장부의 계산보다는 
뭔가 자기에게 적당한 일이 있음직했고 더욱이 자신이 경멸하는 일을 솜씨있게 해치우지 못
하는 것은 굴욕인 것 같았다. 톰슨과의 사소한 말다툼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3월에 윌슨
은 사무소에서 1년간의 견습을 끝냈으며, 필립은 그를 조금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떠
나고 나니 어쩐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원들은 자기들에 비하면 필립과 윌슨이 다
소 높은 계급에 속한다고 해서 두 사람을 경원했는데, 그런 사실이 오히려 필립과 윌슨 사
이를 맺어 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은 무미 건조한 무리들과 4년 동안을 같이 지내
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필립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런던의 생활에서 여러 가지 신기
하고 훌륭한 일들을 기대했으나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런던의 
생활이 역겨웠다. 사귄 친구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 사람들과 사귀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
하고 있었다.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싫었다. 이런 생활을 더 이상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았
다. 그래서 밤이면 침대에 누워서, 다시는 그 음울한 사무실과 거기에 모인 군상을 보지 않
게 되고 게다가 그 단조로운 하숙방을 떠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
이었다.
  봄이 되자 그에게 큰 실망을 주는 일이 생겼다. 헤이워드가 봄철에 런던으로 오겠다는 편
지를 보내 왔기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날 것을 즐겨 기다렸었다. 필립은 요즘 와서 독서도 많
이 했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늘 머리에서 감돌았기 때문에 누구와 토론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그는 추상적인 문제에 대하여 기꺼이 흥미를 가져 줄 사람은 누구 하나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온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헤이워드가 이번 봄의 이탈리아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좋
은 날씨이므로 그 곳을 버리고 런던으로 갈 수는 없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필립은 실망했
다. 뿐만 아니라, 헤이워드는 그 편지에서 왜 필립은 이탈리아로 오지 않느냐고 했다. 세상
이 이렇게 아름다운 때 사무실에 처박혀 아까운 청춘을 부질없이 보내서야 되겠는가? 편지
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자네는 잘도 견디네그려. 나는 지금도 플리트가나 링컨스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날 지
경일세. 인생을 보람있게 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 두 가지밖에 없으니, 그것은 사랑과 예술이
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사무실에 앉아서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이란 나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노릇일세. 자네는 아직도 실크 해트를 쓰고 우산과 조그마한 검은 가방을 들고 
다니나? 우리는 모름지기 인생을 모험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보석 같은 강한 불꽃으로 우리
의 정열을 타오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왜 파리로 가서 미술 공부를 하지 않는가? 나는 항상 자네가 그 
방면에 재능이 있다고 믿어 왔네.
  이러한 충고는 필립이 요즈음 때때로 막연하나마 마음에 그리고 있던 그의 앞날에 대한 
공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생각에 놀랐으나, 그래도 그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
었으며, 그런 것에 대하여 부단히 숙고하는 것만이 지금의 그의 비참한 환경에서 도피하는 
유일한 길인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도 그가 수채화를 잘 그린다고 칭찬했으며, 미스 윌킨슨도 그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거듭 찬
탄했었다. 또 윌슨의 가족같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그의 스케치에 감탄했던 것이다.
  프랑스어로 인쇄된 <<보헤미안의 생활>>이란 책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책을 
런던으로 가져왔는데, 우울할 때면 서너 페이지만 읽어도 로돌프나 다른 사람들이 춤추고 
애무하고 노래부르는 그 화려한 다락방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전에 런던
을 동경한 것처럼 파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환멸이 있으리라는 두려움은 없
었고, 그는 로맨스와 아름다움과 사랑을 동경했으며, 파리만이 그 모든 것을 그에게 줄 것같
이 생각되었다. 그는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했으며, 자기가 다른 사람만큼 그다지 못할 이유
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미스 윌킨슨에게 편지를 보내어 파리에서는 생활비가 
얼마나 들 것 같으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1년에 80파운드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이
라고 회답해 왔으며, 필립의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했다. 또 그녀는 필립이 사무실에
서 썩는 생활을 하기에는 재주가 너무나도 아깝다고 했다. 그녀는 훌륭한 화가가 될 사람
이 서기가 될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고 극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좀더 자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필립은 원래 신중했으며, 우량한 증권에서 1년에 3백 파운드의 수입이 있
는 헤이워드가 그에게 모험을 하라고 권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필립은 자기의 전
재산이 1천 8백 파운드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의 어는 날, 뜻밖에 굿워디 씨가 그에게 파리에 같이 가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그들의 사무소는 파리의 포부르 생 토노레에 있는 어느 영국인 소유 호텔의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1년에 두 번씩 굿워디 씨가 한 사람의 서기를 데리고 건너갔다. 매해 그와 
같이 가던 서기가 공교롭게도 앓아 누웠고, 다른 서기들은 일이 밀려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
다. 굿워디 씨의 생각으로는 필립은 사무소에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또한 그의 연
기 계약 덕분에 직무상의 즐거운 일거리를 향유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택하게 된 것
이었다. 필립은 기뻤다.
  "거기 가면 종일토록 일해야 되네. 하지만 밤에는 완전히 자유일세. 그리고 파리는 역시 
파리거든." 굿워디 씨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호텔에서 대우도 잘 해
주고 식사도 모두 주니까 비용은 조금도 필요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남의 비용으로 파리 여
행을 하는 셈이니 얼마나 신나는가."
  그들은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칼레 항구에 도착했다. 눈부시게 차려 입은 짐꾼들이 
손짓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필립의 가슴은 뛰었다.
  '이게 진짜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기차가 시골길을 달릴 때 그는 주의를 집중하여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연달아 나타
나는 모래 언덕에 감탄했으며, 그 모래 빛깔은 그가 여태껏 보아 온 어떤 빛보다도 아름다
워 보였고, 운하와 끊이지 않는 포플러에 매혹되었다. 파리의 가르 뒤 노르 역에서 기차를 
내려 덜커덩거리는 시끄러운 마차를 타고 자갈길을 굴러갈 때 그는 마치 새로운 공기를 마
시고 도취한 사람같이 크게 환성을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건장하고 쾌활한 지배인을 
호텔 문 앞에서 만났는데, 그 프랑스인은 제법 영어도 하는 것 같았고 굿워디 씨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므로 아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지배인 부부와 함께 지배인
의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필립은 감자를 곁들인 비프 스테이크처럼 맛있는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포도주처럼 감미로운 술을 마셔 본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인습에 따라 점잖은 가장 노릇을 해 온 굿워디 씨에게도 이 프랑스의 파리는 음탕한 사람
들의 낙원이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지배인에게 음침한 구경 거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
다. 그는 오래간만에 한 번씩 파리에 와서는 마음껏 향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향락마저 
없다면 인생은 녹슬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저녁을 마치고 나
면 그는 필립을 데리고 물랭 루주나 폴리 베르제르 같은 데로 갔다. 굿워디 씨는 음란한 장
면을 볼 때마다 그의 작은 눈을 기묘하게 반짝이고 얼굴에는 교활하고 관능적인 미소를 띠
었다. 그는 외국인을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그와 같은 장소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그러한 것들을 용납하는 국민은 그 장래가 좋지 못할 것이라고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레뷰 같은 데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여자가 나타날 때면 그
는 팔꿈치로 필립을 쿡쿡 찔렀고, 홀에서 어슬렁거리는 매춘부들 중에서 몸집이 뚱뚱하고 
기운이 세어 보이는 여자를 가리켜 보여 주기도 했다. 그가 필립에게 보여 준 것은 가장 저
속한 파리였으나, 필립은 환영으로 어두워진 눈으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침 일찍이 그
는 호텔을 뛰쳐나와 샹젤리제 거리로 가서는 콩코르드 광장에 섰다. 6월의 파리는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필립의 마음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로 끌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이 곳에 로맨스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거의 1주일을 파리에서 지내고 일요일에 그 곳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 밤늦게 
반즈의 음울한 하숙방에 들어섰을 때 필립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계약을 취소하
고 미술 공부를 하러 파리로 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별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1년을 채울 때까지는 사무실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8월 하순에 휴가를 가질 예정이
었는데, 그는 그 때 허버트 카터 씨에게 돌아올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필
립은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기는 했지만, 거짓으로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척할 수는 없었
다. 그의 마음은 미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중순이 지나자 할 일도 많
지 않았으므로 그는 첫 번째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강의에 나간다는 구실을 만들 수 있었으
므로, 사무실을 많이 빠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그는 국립 미술관에서 보냈
다. 그는 파리에 관한 책과 회화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러스킨에 몰두했으며, 발레리가 쓴 
화가들의 전기도 탐독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화가 코레지오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 사람이 
어떤 위대한 걸작 앞에 서서 "나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하고 부르짖는 모습을 상상하기
도 했다. 이제는 주저하는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는 자기에게 위대한 화가의 소질이 있
다는 것을 확신해 마지않았다.
  "결국 부딪쳐 보는 것뿐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마침내 8월 중순이 되었다. 카터 씨는 그 달을 스코틀랜드에서 지내고 있었으므로 그 동
안 굿워디 씨가 사무실을 맡고 있었다. 파리 여행 후로는 굿워디 씨도 필립에게 퍽 호의를 
갖게 된 것 같았으며, 필립도 얼마 안 가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었으므로, 그 기묘하고 작은 
사나이를 너그러운 태도로 대할 수가 있었다.
  "캐리, 내일부터 휴가지?" 굿워디 씨는 필립이 휴가를 받는 전날 밤 말했다.
  이 저주스런 사무실에 처박혀 있는 생활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필립은 이 날 하루 종일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죠. 오늘이 만 1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자네는 아마 성적이 좋지 못한 것 같네. 카터 씨도 불만이셔."
  "제가 카터 씨에게 가지는 불만만은 못할 겁니다." 필립은 유쾌하게 대꾸했다.
  "그런 말을 해서 쓰나?"
  "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만약 제가 공인 회계사가 되기를 원치 않으면 1년 후에 그
만둘 수 있고 카터 씨는 계약금의 반액을 반환하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조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10개월 동안이나 이 일을 싫어했으면 충분하지요. 일도 사무실도 싫어졌고 런던까지도 
싫어졌습니다. 여기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지내느니 차라리 해협을 건너는 게 좋겠어요."
  "그래, 하긴 자네는 공인 회계사로서는 적당치 못한 것 같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필립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태까지 저에게 베풀어 주신 친절
에 대해서는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괴로움을 끼쳐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
다. 저는 처음부터 이 일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자네가 참말로 그렇게 결심했다면 작별하기로 하세. 앞으로 자네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가까이 있게 되면 언제든지 놀러오게나."
  필립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실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사무실의 여러분을 다시는 안 만날 작정입니다."
  필립이 설명한 계획을 듣자 블랙스테이블의 그의 백부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한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끝까지 달라붙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굳게 믿어 
왔던 것이다. 의지가 약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도 초지 일관하는 것을 굉장히 과장하
는 사람이었다.
  "너는 네 자유 의사로 공인 회계사를 선택하지 않았더냐?" 그가 따졌다.
  "저는 그것을 런던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젠 런던도 싫어지고 그 일에도 싫증이  나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
다."
  사실상 백부와 백모는 필립이 화가가 되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필립의 양친
이 점잖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화가라는 것은 점잖은 직업이 
못 되며 떠돌이들의 불미스럽고 부도덕한 직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더
구나 파리에 간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할말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파리에 가는 것을 나로서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백부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파리는 죄악의 소굴이다. '붉은 옷의 여인'이나 '바빌론의 여인'(성경에 나오는 매춘부들)
들이 그들의 악을 마음껏 내뿜는 곳이야. 소돔과 고모라도 오늘날의 파리처럼 사악하지는 
않았다. 너는 신사답게 크리스천답게 자라 왔으니만큼 만약에 네가 그런 유혹에 들게 되는 
것을 방임해 둔다면 나는 너의 양친의 신뢰를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이미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또 제가 과연 신사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논쟁은 점점 격렬해졌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필립 자신이 소유하기
까지에는 아직도 1년이 남아 있으며, 그 기간 동안 그가 사무실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송금을 계속해 주겠다고 백부는 말했다. 필립은 공인 회계사가 될 생각이 없는 바에는 계약
금의 반액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을 때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부
는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필립은 온갖 체면을 내팽개친 채 백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백부님에겐 제 돈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제 돈이 아닙니까?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닙니다. 제가 파리에 갈 것을 결심했다면 백부님은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어찌 됐든 저는 런던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백부는 반박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여튼 내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일을  네가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게 돈을 줄 수 없
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파리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의 옷과 책과 아버지의 보석을 
팔면 되니까요."
  루이자 백모는 불안과 슬픔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필립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므로 
그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든 그의 흥분을 부채질해 줄 뿐이라는 것을 부인은 알고 있었다. 
마침내 백부는 더 이상 필립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위풍스럽게 그 방을 나가 버렸
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백부와 조카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필립은 헤이워드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에 대한 소식을 묻고 그로부터 회답을 받으면 곧 출발하리라 마음먹었다.
  백모는 그들이 논쟁하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했다. 백부에 대한 증오심
에서 필립이 자기마저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부인은 그지없이 괴로웠다. 필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인은 남편이 나간 틈을 타서 마침내 필립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필
립은 백모에게 런던 생활의 환멸과 미래에 대한 그의 포부를 터놓고 이야기했고 백모는 주
의 깊게 들어 주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번만은 제 소원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설사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싫증나는 견습 서기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
리고 저는 그림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저 자신이 알고 
있어요."
  이처럼 열심히 원하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백모는 남편만
한 신념이 없었다. 위대한 화가들이 그들 양친의 반대를 받은 일이 있으며, 그러한 반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부인은 책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결국 공인 회계사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생활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훌륭한 생활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네가 파리에 간다는 것이 걱정스럽다. 런던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은 없지 않겠니?" 백모는 슬픈 어조로 말했다.
  "그림 공부를 하려면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은 파리뿐
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백모는 변호사인 닉슨 씨에게 편지를 써 보내서 필립이 런던에서의 그의 
일에 불만을 갖고 있으니 그의 진로를 바꾸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 보았다. 닉슨 
씨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경애하는 캐리 부인
  허버트 카터 씨를 만나보았는데, 필립은 성적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만약에 그
가 그토록 그 일을 싫어한다면 이번 기회에 계약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
는 물론 대단히 실망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말을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앨버트 닉슨
  이 편지를 목사에게 보였으나 그것은 그의 완고성을 더해 주었을 따름이었다. 필립이 어
떤 다른 직업, 가령 그의 아버지의 직업이었던 의사 같은 직업을 선택한다면 승낙하겠지만 
파리로 간다고 하면 아예 송금을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파리에 가서 그림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방종과 육욕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가 말했다.
  "백부님께서 다른 사람의 방종을 비난하시는 것을 들으니 매우 흥미롭습니다." 필립은 건
방지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헤이워드로부터 회답이 와 한 달에 30프랑만 내면 방을 얻을 수 있
는 호텔 이름과 어떤 미술 학원 대표에 대한 소개장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필립은 백모에게 
그 편지를 읽어 주었다. 그리고 9월 1일에 떠나겠노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너는 돈이 없지 않니?" 백모가 일깨워 주었다.
  "오늘 오후에 터캔베리에 가서 보석을 팔겠어요."
  그는 아버지로부터 금시계와 보석 반지 두서너 개, 사슬 달린 단추 몇 개, 두 개의 핀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핀 하나는 진주로서 값도 상당히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물건의 가치와 팔리는 가격과는 다르단다." 루이자 백모가 말했다.
  필립은 미소를 지었다. 백모의 그 말은 백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압니다. 그러나 모두 합하면 적어도 1백 파운드는 받을 수 있을 거고 그 돈으로 제가 스
물한 살까지는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는 캐리 부인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조그마한 보
닛을 쓰고는 밖으로 나갔다. 1시간쯤 지나 돌아온 백모는 응접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필립
에게로 와서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필립이 물었다.
  "얼마 안 되지만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백모는 약간 쑥스러운 듯이 웃어 보이면서 
대답했다.
  봉투를 뜯어 보니 5파운드 지폐 11장과 1파운드 금화가 가득 든 조그만 종이 주머니가 들
어 있었다.
  "아버지의 보석을 팔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은행에 예금해 두었던 돈
인데, 1백 파운드는 될 게다."
  필립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백모님, 전 받을 수 없어요. 백모님의 따뜻한 정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것은 받을 수
가 없습니다."
  캐리 부인은 결혼할 때 3백 파운드의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돈을 조심스럽게 예금해 
두었다가 예기치 않은 비용이나 급한 자선이나 남편이나 필립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을 하는 데 써왔던 것이다. 해가 거듭됨에 따라 그 돈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백부는 그
것을 늘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는 늘 부인을 부자라고 불렀으며 그 돈을 암탉이 품고 
있는 달걀에 비유했다.
  "어서 받아 두어라, 필립. 분별 없이 써버리고 지금은 그것밖에 남지 않았구나. 네가 받아 
준다면 난 기쁘겠다."
  "그 돈은 백모님에게도 필요하지 않아요?"
  "아니다, 난 필요없다. 나보다 너의 큰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실 경우를 생각해서 가지고 있
던 돈이다. 하기야 급한 용도가 생길까 하고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젠 나도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하니..."
  "백모님, 그런 말씀은 마세요. 백모님은 오래 사실 거예요. 백모님이 안 계시면 저는 어떻
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죽어도 한이 없다."
  백모는 목멘 소리로 말하면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지만, 곧 눈물을 닦고 조용히 웃어 보
였다.
  "나는 너의 백부가 혼자 남아서 모든 고통을 받지 않도록 바랐기 때문에 나를 먼저 부르
시지 않기를 하느님께 기도해 왔지만, 그 양반의 생각은 내 생각과 같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 양반은 나보다 더 오래 살기를 원하고 계셔. 나는 그 양반이 바라는 아내가 되어 드리지 
못했다. 만약에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너의 백부는 재혼하실 게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
기를 바라고 계시다. 너는 내 생각이 이기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필립? 그렇지만 만약
에 백부가 먼저 가신다면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을 게다."
  필립은 백모의 주름잡히고 여윈 뺨에 키스를 했다. 그러나 왜 이 압도적인 사랑이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렇듯 냉담하고 이기적이고 항상 자
기 중심인 남편에 대해서 백모가 그렇게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러나 백모는 남편의 냉담과 이기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역시 정성껏 남편을 사
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돈을 받아 주겠지, 필립?" 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백모가 말했다.
  "하기야 너는 이 돈이 없어도 지낼 수는 있겠지만, 받아 준다면 나는 그만큼 기쁘겠다. 나
는 늘 널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싶었어. 나에게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친자식
처럼 사랑해 온 것을 너도 알지 않니? 네가 어렸을 때는,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네가 병
이라도 앓아서 내가 너를 밤낮으로 간호해 줄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단다. 그
러나 너는 한 번밖에 앓은 적이 없었어. 그것도 학교에서였지. 하여튼 나는 그처럼 널 도와 
주고 싶어해 왔다. 그러고 보니 이젠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거야. 장차 네가 위대
한 화가가 되더라도 나를 잊지 말아 다오. 내가 너를 첫출발시킨 것을 기억해 다오."
  "정말 친절하세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필립은 감사의 말을 했다.
  백모의 피로한 눈에 미소가 떠올랐는데, 그것을 순수한 행복의 미소였다.
  "난 아주 기쁘단다."
  며칠 후 캐리 부인을 필립을 전송하러 정거장으로 나갔다. 객차의 입구에 서서 그녀는 눈
물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필립의 마음은 설렜다. 그는 기차가 어서 떠났으면 싶었다.
  "한 번 더 키스해 다오." 백모가 말했다.
  필립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백모에게 키스를 했다. 기차는 기적 소리도 우렁차게 떠
났고, 백모는 그 작은 정거장의 목조 플랫폼에 서서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수건을 
흔들었다. 부인의 가슴은 천금같이 무거웠으며, 목사관까지 2,3백 야드밖에 안 되는 길이 천
리길같이 생각되었다. 앞길이 창창한 아이인만큼 필립이 떠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하느님이 그를 보호하시어 유혹으로부터 멀리해 주시고 행복과 행운을 
그에게 베풀어 줍시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필립은 찻간에 자리를 잡고 나자 곧 백모의 생각은 잊어버리고 다만 미래에 일어
날 일만을 생각했다.
  헤이워드가 소개해 준 어느 미술 학원 학생 대표 미세스 오터에게 편지했더니 곧 답장이 
왔으며, 그의 호주머니에는 다과회 초대장까지 들어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짐을 마차에 싣고 큰 거리를 지나 다리를 건너 라틴구의 좁은 길을 
따라서 천천히 지나갔다. 몽파르나스 거리를 벗어난 곳에 있는 되제콜 호텔에 싸구려 방을 
하나 빌렸다. 그 곳은 그가 공부하려는 아미트라노 미술학교에 다니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사환이 나와서 짐을 받아 들고 6층까지 올라가더니 오랫동안 창문이 닫혀서 곰팡내가 나는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의 대부분을 커다란 나무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불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창에는 모두 똑같은 거무스름한 천으로 만든 무거운 커튼이 드리
워져 있었다. 세면대 역할을 겸하고 있었고 루이 필립 왕조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옷장도 
있었다. 벽지는 오래 되어 퇴색했지만, 갈색 잎 무늬는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필립에게는 
그 방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이미 밤이 늦었으나, 그는 흥분되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 가로수길을 따라서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역 앞 광장은 아크등이 
휘황하게 비치고 있었다. 누런 빛 전차들이 이리저리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는 기쁨에 
넘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한바탕 웃어 댔다.
  갈증도 나고 군중들을 더욱 가까이 보고 싶어서 그는 베르사유 카페 앞에 놓인 탁자에 앉
았다. 날씨 좋은 밤이어서 사람들이 탁자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쪽에 한 가족이 모여 있는가 하면 저쪽에는 기묘한 모자를 쓰고 
턱수염을 기른 사람이 손짓을 해 가면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필립 가까이에는 화가처
럼 보이는 두 남자가 그들의 아내같이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으며, 뒤쪽에
서는 미술에 대하여 큰 소리로 토론하는 미국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도 흥분으
로 떨렸다. 밤늦도록까지 앉아 있어서 지치기는 했으나, 너무나 행복해서 자리를 떠날 생각
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었을 때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는 파리의 온갖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음날 차 마시는 시간쯤 해서 그는 리옹 드 벨포르로 가서 라스파유 거리에서 접어든 작
은 걸에 있는 오터 여사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서른 살 가량 되어 보였으며, 시골티가 나
는데도 숙녀티를 내려고 애쓰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게 필립을 소개했다. 그녀
가 3년 동안이나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으며, 남편과 이혼한 여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은 응접실에는 그녀가 그린 초상화가 두어 장 있었는데, 필립의 미숙한 
눈에는 이 그림이 아주 훌륭하게 보였다.
  "나도 저만큼 그릴 수 있게 될는지요?" 그는 오터 여사에게 물었다.
  "그럼요, 물론 금방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자기 만족의 태도로 그녀는 대답했다. 그
녀는 매우 친절했으며, 그에게 종이 집게나 도화지와 목탄 같은 것을 살 수 있는 상점 주소
를 가르쳐 주었다.
  "내일 9시경에 아미트라노에 갈 거예요. 그 때에 당신이 나오게 되면 좋은 자리를 잡는다
든가 그런 여러 가지 것을 주선해 드리겠어요."
  오터 여사의 집을 나온 필립은 그림 도구를 사러 갔다.
  이튿날 아침 9시가 되자 그는 학교로 갔다. 오터 여사는 벌써 나와서 싱글거리면서 그에
게 다가왔다. 이 학교 학생들이 자기와 같은 신입생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고 필립은 
퍽 걱정스러웠다. 화실에서는 신참자가 놀림감이 된다는 것을 책을 읽어서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오터 여사는 그에게 자신을 갖게 해주었다.
  "여기서는 새로 온 사람을 놀리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어요. 학생의 절반이 여자들이고 
이들이 화실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화실은 크고 장식이 전혀 없었으며, 회색 벽에는 입상한 몇 개의 습작품만이 핀에 꽂혀 
있었다. 가운 같은 것을 몸에 걸친 여자 모델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열두서너 명 되는 남녀
들이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린 스케치를 들여
다보며 연구하고 있었다. 모델의 최초의 휴식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운 것을 그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 여기에다 화가를 세우시죠.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제일 쉬워요."
  필립은 그녀가 일러준 곳에 화가를 세웠다.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 그를 
소개했다.
  "이분이 캐리 씨, 이분은 프라이스 양. 캐리 씨는 그림 공부가 처음이니까 조금씩 도와 드
릴 수 있겠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모델 여자 쪽을 보고 일렀다.
  "자, 포즈를."
  모델 여자는 읽고 있던 신문 <프티 레퓌블리크>를 옆에 놓고 거북한 듯이 가운을 벗어 
던지고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치고 섰다.
  "참, 어리석은 포즈예요. 왜 저런 포즈를 택했는지 모르겠어." 프라이스 양이 말하였다.
  필립이 들어갈 때 화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모델 
여자도 냉담하게 그를 한번 슬쩍 쳐다보았으나, 이제는 누구하나 필립에게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았다. 그는 앞에다가 아름다운 도화지를 놓고는 어색한 듯이 모델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여태껏 나체의 여인을 본 일이 없었다. 그 모델은 
젊은 여자는 아니었으며 젖가슴에는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윤기 없는 금발이 헝클어져 앞
이마에 늘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그는 프라이스 양이 그린 그림을 얼른 
보았다. 이틀 동안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척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으며 화면은 끊임
없이 지워서 더러워져 있었다. 필립의 눈에는 인물이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았다.
  '난들 저만큼이야 못 그릴라구.' 필립은 내심 생각하였다.
  그는 먼저 머리부터 시작했으며, 차차 아래쪽을 그려 내려가려고 생각했으나 왜 그런지 
상상으로 그리는 것보다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을 알았다. 어려운 부분
에 이르렀을 때 그는 프라이스 양을 슬쩍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매우 성실한 태도로 그리고 있었다. 열중한 나머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눈에는 불
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화실 안은 아주 무더워서 땀방울이 이마에 구슬같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스물여섯 살의 쳐녀로서 숱이 많은 황금색의 머리털을 하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머
리카락이기는 했으나 그것을 뒤로 빗어 넘겨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 널찍한 이마에 작은 
두 눈을 갖고 있었다. 살갗은 건강치 못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양볼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
다. 옷차림은 너무나 불결해서 옷을 갈아 입지 않은 채 침대로 들어가곤 하지 않는가 의심
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엄숙하고 말이 없었다. 두 번째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그
녀는 몇 걸음 물러서서 자기 그림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안 그려지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필립에게 물었다.
  "당신 것은 어때요?"
  "전혀 되지 않는군요." 필립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녀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해선 아무것도 안 돼요. 먼저 치수를 재세요. 그러고 나서 종이에다 가로세
로로 직선을 그어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재빠른 솜씨로 가르쳐 주었다. 필립은 그녀의 열정적인 태도
에 감동되기는 했으나 그녀 자체에서는 전혀 여성의 매력을 찾아볼 수 없어서 오히려 반발
을 느꼈다. 가르쳐 준 데 대해 감사하고 그는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많은 사
람이 들어왔는데, 여자들은 늘 일찍 도착하기 때문에 나중 사람은 대개가 남자들이었으며, 
시기적으로 보아서 이만하면 화실은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얼마 있으니까, 호리호리
하고 검은 머리카락에 유난히 큰 코를 한, 말을 연상시킬 만큼 기다란 얼굴을 한 젊은 청년
이 들어왔다. 그는 필립 곁에 앉더니 그 너머로 프라이스 양에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했
다.
  "많이 늦으셨군요. 방금 일어나서 오시는 길이에요?" 프라이스 양이 물었다.
  "날씨가 하도 좋기에 바깥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상상해 보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지
요."
  필립은 웃었으나 프라이스 양은 그의 말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는 그게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나 같으면 일어나 밖에 나와서 그것을 마음껏 즐
기겠어요."
  "익살꾼의 생활 방식은 그게 다르지요." 청년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별로 그리고 싶지 않은 것같이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모델의 포즈는 이미 전날에 스케치해 두었었다. 그는 필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영국에서 오셨습니까?"
  "네."
  "어떻게 이 아미트라노에 오게 되셨는지요?"
  "내가 아는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무엇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
다."
  이 말을 듣고 프라이스 양은 대뜸 반박했다.
  "왜요? 여기는 파리에서 제일 좋은 학교예요. 미술이란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
일한 학교란 말이에요."
  "미술이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요?" 청년은 반문했으나 프라이스 양이 
대답 대신 그를 경멸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자 덧붙였다. "요컨대 학교란 것은 모두 나쁘
지요. 어차피 학구적이거든요. 이 학교가 대개의 학교보다는 덜 해롭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교수들이 다른 학교보다 무능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으니까."
  "그러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학교에 나오십니까?" 이번에는 필립의 다그쳐 물었다.
  "나는 더 좋은 코스를 알지만 그걸 택하지 않고 있는 거지요. 프라이스 양에게 물어 보시
오. 학식이 있는 분이라 그것을 라틴어로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클라튼 씨, 당신 이야기에 나를 끌어들이지 말아요." 프라이스 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화살을 갖고 모델을 채용해서 자기 혼자서 
끝까지 싸워 내는 것뿐입니다." 클라튼은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인 것 같은데요." 필립이 말했다.
  "필요한 것은 돈뿐이랍니다." 클라튼은 대답한 후 그리기 시작했고, 필립은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몹시도 여위었으며, 큼직큼직한 뼈가 마치 몸뚱이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고, 팔꿈치는 너무 뾰족해서 남루한 저고리 소매를 뚫고 삐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가 입은 바지는 다 낡았고, 장화는 가죽조각으로 덧댄 것이었다. 프라이스 양이 일어나서 필
립의 화가 쪽으로 왔다.
  "클라튼 씨가 잠시 동안만 잠자코 있으면 내가 당신을 좀 도와드리겠어요." 그녀는 말하
였다.
  "내가 유머를 잘 한다고 해서 프라이스 양은 나를 퍽 싫어한답니다. 그런데다가 내가 천
재이기 때문에 더 미워하지요."
  클라튼은 생각에 잠긴 듯이 자기 화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위엄있
게 말했으나, 커다랗고 못생긴 코를 보면 그가 하는 말조차 우스웠다. 필립은 웃지 않을 수
가 없었으나 프라이스 양은 얼굴이 검붉어지면서 화를 냈다.
  "자신을 천재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지 누가 또 있어요?"
  "그런데 나에게 가장 가치없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나 자신이거든요."
  프라이스 양은 필립이 그린 것을 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해부적 구상이니 면이니 선이
니 그 밖에 필립이 이해하지 못할 다른 여러 가지에 대하여 유창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녀는 화실에 나온 지가 오래 되어서 교수들이 주장하는 요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
립의 그림에서 결점을 지적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올바로 고칠 수 있는가에 대해
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그처럼 수고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필립이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 처음 왔을 때엔 모두 그렇게 해주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도 처음 온 사람에게 이렇게 해드리는 거예요."
  "프라이스 양은 당신 개인에게 어떤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일종의 의무감에서 자기의 
지식을 당신에게 팔고 싶어하는 거랍니다." 클라튼이 다시금 빈정거렸다.
  프라이스 양은 부아가 난 듯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자기 화가로 돌아갔다. 시계가 12시
를 울리자 모델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내려왔다.
  프라이스 양은 그림 도구를 챙겼다.
  "점심 먹으러 그라비에 식당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요." 그
녀는 클라튼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필립에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라비에 식당으로 안내하겠소." 클라튼이 필립에게 말했다.
  필립은 그에게 감사하고 따라나섰다. 나가는 길에 오터 여사는 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패니 프라이스가 도와드렸어요? 그녀가 도와주리라고 생각하고 당신을 거기에 자리잡게 
했어요. 성질이 까다롭고 좋지 못한 여자이긴 하지만 그림 그리는 비결은 잘 알고 있어서 
도와줄 생각만 있으면 처음 온 사람에게는 매우 도움이 될 거예요."
  거리로 내려오면서 클라튼이 필립에게 말했다.
  "당신은 패니 프라이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소.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그는 익살을 떨었다.
  필립은 웃었다. 세상에 사람이 없어 하필 마음에도 없는 프라이스 양에게 좋은 인상을 주
었단 말인가? 그들 두 사람은 조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학교의 학생 몇 명이 먹고 있었으며, 클라튼은 서너 사람이 앉아 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1프랑을 내고 달걀 한 개와 고기 한 쟁반, 그리고 치즈와 조그마한 포도주 한 병을 샀다. 커
피는 따로 사야 했다. 그들의 탁자는 인도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노란 전차가 끊임없이 종
을 울리면서 거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참, 당신 이름은 무엇이죠?" 자리에 앉자 클라튼이 물었다.
  "캐리라고 합니다."
  "내 친구 캐리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플라나간 씨, 그리고 이분은 로슨씨입니다." 클라튼
은 엄숙한 어조로 소개했다.
  그들은 웃으며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러 가지 화제를 한꺼번에 뒤섞어 이야
기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모두 자기 말만 떠들어 댔다. 그들은 여름
에 자기네가 다녀온 지방에 대한 이야기와 화실과 여러 유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필
립은 들어 보지도 못한 모네, 마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등의 이름들을 들먹이며 이야기
를 주고 받았다. 필립은 귀를 기울여 들었으며, 다소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듯 했으나  
가슴은 기쁨으로 뛰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어느덧 지나가 버렸다. 클라튼이 일어서며 필립
에게 말했다.
  "오늘 밤 이리로 나오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이 라틴 구에서 위장병에 걸리
기 알맞은 음식을 가장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니까요."

  아미트라노에서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교수들이 와서 그 동안 그린 것을 비평해 주기로 되
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초상화를 그리거나 미국인을 단골 손님으로 갖지 않으면 거의 돈
벌이가 되지 않았으며, 이름난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미술 학교에서 1주일에 두세 시간을 
소비해서 그들의 수입을 올리는 것을 재미로 알고 있었다. 화요일은 미셸 롤랑이 아미트라
노에 오게 되어 있는 날이었다. 그는 흰 턱수염에 혈색 좋은 얼굴을 한 중년이 넘은 사람이
었으며,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장식화를 그린 일이 있었다. 그 그림들은 모두 그가 가
르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앵그르의 제자로서 미술의 진보
에 대해서는 전혀 둔감했으며 마네, 드가, 모네나 시슬레 같은 어릿광대 무리에 대해서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미워하고 있었지만, 교수로서는 탁월하고, 도움을 주었고, 친절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람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금요일에 나오는 푸아네 교수는 사귀기 곤
란한 사람이었다. 그는 보기 흉한 이빨을 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데다가 헝클어진 회색 턱
수염에 가혹한 눈초리를 한 주름이 많고 귀가 작은 사람이었다. 그의 말소리는 컸고 말은 
조소하는 투였다. 그의 그림은 뤽상부르 미술관에도 팔렸으며, 스물다섯 살 때에 이미 앞날
이 촉망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개성보다는 오히려 젊음에 기인했었는지 그 
후 20년 동안 그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성공을 가져다 준 풍경화를 되풀이해서 그리는 것밖
에는 다른 것은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이 한결같이 단조롭다고 비난하면 그는 으레 이렇
게 대답했다.
  "코로도 단 한 가지밖엔 그리지 않았어. 왜 난들 그렇게 못 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몹시 시기했고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개인적인 증
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까닭은 자신의 실패의 원인이 대중이라는 불결한 동물을 매혹시
킨 광적인 유행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셸 롤랑은 인상파란 협잡꾼이라고 
온건한 말로 비난하고 경멸하는 데 그쳤으나, 이에 반해서 푸아네 교수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음탕하다든지 추악하다는 말은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네들의 사생
활을 욕하는 것을 꽤 즐거워하여 독설을 일삼고 모욕적인 추잡한 말까지 써가며 그들의 침
실의 비밀을 들추어 냈다. 그들의 출생의 적서 관계나 부부 관계에 순결성이 없느니 하며 
공격을 가했다. 더구나 그는 비열한 욕설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양적인 비유나 강세법을 사
용하기도 했다.
  그는 또 학생들의 그림을 비평할 때도 경멸의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그들
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의 지독한 조소는 여자들을 울렸으며, 그들이 울
면 그는 비웃었다. 그의 공격으로 심한 괴로움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때때로 항의가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그가 화실에 남아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미술 교수로서는 파리에서 일류
였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그 학교를 경영하고 있는 늙은 모델이 그에 대하여 감히 이의를 
내놓다가도 이 화가의 맹렬한 반박 앞에서는 도리어 그 항의가 굴욕적인 사과로 변하고 마
는 것이었다. 필립이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교수는 그 푸아네였다. 필립이 화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나와 있었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학생 대표인 오터 여사
를 데리고 이 화가에서 저 화가로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패니 프라이스는 필립 옆에 앉아서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신경과민으로 창백했고, 때때로 손을 멈추고 블라우스
에 두 손을 닦곤 했다. 두 손은 초조해서 화끈거렸다. 갑자기 그녀는 얼굴을 찡그려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 하면서 필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그림 어때요?"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필립은 일어나서 그림을 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눈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의아스러웠다. 그 그림은 아주 형편없었다.
  "나는 이 그림의 반만큼이라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넌지시 대답했다.
  "그건 좀 무리지요. 당신은 새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이 나만큼 그리기를 원한
다는 것은 좀 지나친 생각이에요. 나는 여기 온지 2년이나 된걸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패니 
프라이스는 필립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화실에 있는 사
람들 모두가 그녀를 정말로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필립은 곧 알게 되었고,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는 좋아하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푸아네 교수 일로 해서 오터 여사에게 불평을 말했어요. 그분은 지난 1주일 동안 
한 번도 내 그림을 보아 주지 않으셨어요. 오터 여사가 학생 대표라고 해서 그분은 그 여자 
곁에서 반시간이나 보냈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 돈을 내고 있어요. 내 돈이라고 해서 다
른 사람들의 돈만 못할 게 없잖아요? 나만이 다른 사람들처럼 주의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
해할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목탄을 집어 들었으나 그대로 그 목탄을 내려
놓았다.
  "더 이상 그리지 못하겠어. 신경질이 나서."
  그 때 그녀는 오터 여사와 함께 걸어오는 푸아네를 보았다. 유순하고 평범하고 그러면서
도 자신 만만한 오터 여사에게는 뽐내는 기색이 없지 않았다. 푸아네 교수는 루스 챌리스라
는 어수선하게 생긴 영국 여자의 화가 앞에 앉았다. 그녀는 활기는 없어 보였으나 정열적이
고 아름다운 까만 눈과 점잖아 보이면서도 관능적인 여윈 얼굴에 상아 같은 살갗을 갖고 있
었는데, 그러한 스타일은 번 존스의 영향하에 당시 첼시 지방의 젋은 여자들이 키워 낸 것
이었다.
  푸아네 교수는 기분이 퍽 좋은 것 같았으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대뜸 그녀의 목탄을 
받아 쥐고서는 재빠른 솜씨로 그녀의 그림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챌리스 양은 기쁜 듯이 벙글거렸다. 교수는 클라튼에게로 다가왔다.
  필립은 초조해졌다. 오터 여사가 잘 이야기해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으나 그래도 그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졌다. 푸아네 교수는 묵묵히 엄지 손가락의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면서 
클라튼의 그림 앞에서 잠시 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섰다가 화가 위에 마침내 떼어낸 살거스
러미를 뱉어 버렸다.
  "이건 아주 훌륭한 선이야. 자네도 이젠 제법 그리게 됐어." 그는 마음에 드는 선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클라튼은 대답은 없으나 남의 비평에는 무관심한 듯 늘 
하는 풍자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교수는 또 말하였다.
  "자네는 약간의 재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클라튼을 좋아하지 않는 오터 여사는 입술을 오므렸다. 과연 그의 그림에서는 잘못된 점
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푸아네 교수는 앉아서 자세한 기술적인 비평을 계속했다. 오터 여
사는 서 있는 것이 지리했다. 클라튼은 아무 말 없이 가끔 고개만 끄덕였으나 푸아네는 자
기의 비평과 그 비평의 이유를 클라튼이 이해하는 것을 알고는 만족해했다. 대개 학생들은 
비평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
어나서 필립에게로 갔다.
  "이 학생은 온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되었어요. 전에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전혀 없는 초보
자랍니다." 재빨리 오터 여사가 설명해 주었다.
  "알겠어." 푸아네는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그 때 오터 여사는 프라
이스 양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께 말씀드린 학생은 바로 이 여자예요."
  푸아네는 마치 불쾌한 동물을 바라보듯이 프라이스 양을 보았다. 음성도 점점 높아졌다.
  "너는 내가 너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학생 대표에게 
불평을 말했다지? 자, 보여 줘, 내게서 주의를 받고 싶은 그림을!"
  패니 프라이스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그녀의 건강치 못한 피부 밑의 혈색이 기묘한 자줏
빛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대답도 없이 그녀는 이번 주일 첫날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푸아네는 앉았다.
  "그런데 무어라고 말해 주면 좋겠어? 이 그림이 잘 되었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지? 하나 
그렇지를 못해. 잘 그려졌다고 말해 주었으면 좋을 테지? 어림도 없어. 어디고 좋은 점이 있
으면 말해 주면 좋겠지? 전혀 없어. 그러면 어디가 좋지 못한가를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지? 
모두 돼먹질 않았어.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고 싶겠지? 찢어 버리는 게 좋아. 이젠 만
족하나?"
  프라이스 양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더구나 오터 여사 앞에서 그 모든 말을 들었기 때
문에 그녀는 미칠 듯이 화가 치밀었다. 프랑스에 꽤 오랫동안 살아서 프랑스 말도 곧잘 했
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로 말했다.
  "그는 나를 이처럼 취급할 권리가 없어. 내 돈도 다른 사람 것과 마찬가지것이야. 배우기 
위해서 그에게 돈을 내고 있는데, 그건 나를 가르치는 말이 아니야!"
  "뭐라고 말하고 있지? 뭐라고 하는 거야?" 푸아네가 물었다.
  오터 여사는 통역하기를 주저했으나, 프라이스 양은 프랑스 말로 밉살스러운 듯이 말했다.
  "저는 가르쳐 달라고 돈을 내는 거예요."
  푸아네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소리를 높이고 주먹을 불끈쥐고 흔들었다.
  "제기랄, 난 너를 가르칠 수 없어. 차라리 낙타를 가르치는 게 쉬울 거야." 이렇게 말하고
는 오터 여사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물어 봐 줘, 이 여자는 오락으로 이것을 하는 건지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건지."
  "저는 화가로서 생계를 유지하려고 해요."
  프라이스 양이 대답했다.
  "그러면 너는 완전히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내 의무일 것 같아. 
재능이 없으면 말이 안 돼. 재능이란 건 거리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넌 소
질이 조금도 없어. 여기에 온 지 몇 해나 되었어? 다섯 살 난 어린애라도 배우면 너보다는 
더 잘 그릴 거야. 할말이 단 하나 있는데, 그 희망 없는 노력을 포기하라는 거야. 생계를 유
지하려거든 너는 화가는 그만두고 차라리 식모 노릇이나 해."
  그가 한 조각의 목탄을 집어 들고 종이에 눌러 대자 그 목탄 조각은 부러져 버렸다. 그는 
화를 버럭 내면서 부러진 끝을 가지고 기다란 선을 힘차게 그었다. 그는 빠르게 선을 그으
면서도 혹독한 평을 가했다.
  "이봐, 이 두 팔의 길이가 다르지 않은가? 이 무릎을 봐, 얼마나 우스꽝스러우냐 말야. 다
섯 살 먹은 아이 그림이라니까. 이건 다리를 갖고 서 있는 게 아니야. 또 이것을 발이라고 
그린 건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화를 내며 그어진 목탄 자국은 순식간에 프라이스 양이 오랜 시
간 동안 애써서 그린 그림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마침내 푸아네는 목탄 조각을 던져 버리고 일어섰다.
  "프라이스, 넌 내 충고대로 가서 재봉이나 해." 이렇게 말하고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말했
다. "12시다. 그러면 제군, 다음 주일에 또."
  프라이스 양은 천천히 자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필립은 다른 사람이 나가는 것을 기
다려서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려고 했다.
  "안됐습니다. 그분은 지나치게 냉혹하군요."
  그런 말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 화가 난 듯이 그를 노려보
았다.
  "당신은 그 말을 하려고 남아 있었어요? 당신의 동정을 바라고 싶으면 내가 청하겠어요. 
저리 비켜 줘요."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서 화실을 나가 버렸다. 필립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나서 쩔뚝
거리며 그라비에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잘했어. 그렇게 성미가 고약한 년에게."
  필립이 오늘 일어난 이야기를 식당에서 했을 때 로슨이 그렇게 말했다.
  파리에서의 생활비는 필립이 생각했던 것처럼 값싼 것이 아니어서 2월에는 가지고 온 돈
의 대부분을 써 버렸다. 백부에게 이것을 호소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고 그렇다
고 해서 백모에게 곤궁한 사정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백모가 이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주머니에서 얼마라도 보내 주려고 애쓸 것이 틀림없지
만, 백모는 가진 돈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터였다. 이제 3개월만 지나면 법률
상 성년에 이를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는 얼마 안 되지만 그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수의 패물 가운데 몇 개를 팔아서 그 동안 
살아가려고 했다.
  이 무렵, 라스파유 거리에 조그마한 화실이 하나 비어 있으니 그것을 같이 빌려 쓰자고 
로슨이 필립에게 제의했다. 매우 값이 싼 것이었다. 따로 방 하나가 붙어 있어서 침실로도 
쓸 수 있고, 필립은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로슨이 혼자서 조용히 사
용할 수도 있었다.
  로슨은 여러 학교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후 결국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
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며, 1주일에 3,4일만 모델을 채용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필립은 비용 때문에 주저했으므로 그것을 계산해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화실을 
갖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실제적으로 계산했다. 비용은 지금의 방에서 생활
하는 것보다 별로 더 들 것 같지 않았다. 집세라든지 관리인에게 맡기는 세탁 비용은 다소 
더 들겠지만, 아침 식사를 손수 해 먹을 수 있어 결국 절약이 되는 것이었다. 1,2년 전이라
면 필립은 불구의 발에 대해서 지나치게 민감하여 어떤 사람과도 한방에 같이 지내는 것을 
거절했겠지만, 그러한 불구에 대한 병적인 생각은 차차 줄어들었다. 파리에서는 그러한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았고, 그 자신은 물론 그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
람들이 그것을 끊임없이 주의해 보고 있다는 생각만은 아주 버리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그 곳으로 짐을 옮겼다. 침대 두 개와 세면대와 의자 서너개를 사서 처음
으로 자기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들은 너무나 흥분해서 새 침대에 누워 새벽 
3시까지 자지 못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그들 스스로가 불을 피우고 커피를 끓여서 잠옷 바람으로 마셨다. 이런 
일들이 필립에게는 무척 즐거웠기 때문에 11시 가까이 되어서야 아미트라노에 나가게 되었
다. 그는 마음이 형편없이 즐거웠다. 패니 프라이스를 보고는 머리를 끄덕여 인사했다.
  "어떠십니까?" 그는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 있어요?" 그녀가 대꾸했다.
  필립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난 다만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인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럼 당신은 나하고도 다투고 싶은 게로군요? 늘 그렇게 나오기 때문에 사실 당신과 이
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겁니다." 필립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해다.
  "그런 건 내게만 상관된 일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패니 프라이스가 왜 그렇게도 불쾌한 말을 하는지 이상해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정말 싫은 여자라고 단정했다. 모두가 그녀를 싫어했다. 어느 정도 부드럽게 대
하는 것은 다만 그녀의 독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면전에 있든 없든 태연하게 
지긋지긋한 험담을 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즈음 필립은 마음이 퍽 즐거웠기 때문에 그러
한 프라이스 양에 대해서도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다. 이따금 그녀의 좋지 못한 기분을 풀
어 줄 방법으로 말을 건네었다.
  "이리 좀 와서 내 그림을 보아 주시지 않겠어요? 굉장히 지저분하게 되어 버렸어요."
  "고마워요. 그렇지만 나는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필립은 놀라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느 때나 가장 기꺼이 나서서 해주는 
일은 남에게 충고를 해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지막하고 노여움을 품은 날카로운 목소
리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젠 로슨이 학교에 안 나오니까 내 충고라도 받아 보겠다는 말이군요? 흥, 참 고마워요.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도와 달라고 해 보시죠.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다 남긴 찌꺼기는 원
치 않아요."
  로슨에게는 교육자적 본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면 그것을 남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했으며,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그도 얻는 바가 있었다. 
필립은 별다른 생각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옆에 앉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패니 
프라이스는 질투로써 마음을 죄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충고를 받는 필립을 날로 더해 가
는 노여움으로 감시해 왔다. 필립은 그녀의 감정을 상상조차 못 했다.
  "흥,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는 나를 좋다고 상대하더니 다른 사람들을 사귀게 되니
까 나 같은 사람은 헌 장갑처럼 버렸지요?" 그녀는 또 쏘아 붙였다. 그리고는 그 '헌 장갑
처럼'이라는 케케묵은 비유를 만족한 듯이 되풀이했다. "흥,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바보짓은 하지 않을걸요."
  그녀의 말에도 다소 진실성이 있기는 했지만 필립은 화가 벌컥 치밀었다. 그래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
  "그만두시오. 나는 당신이 내게 충고해 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탁해 본 
것뿐이오."
  그녀는 숨을 헐떡이더니 괴로움에 찬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그 때 눈물이 주르르 두 뺨
에 굴러내렸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녀의 이러한 새로운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
는지 알지 못한 채 필립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기는 했지
만, 그녀에게로 가서 괴롭혀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할 생각은 없었다. 사과를 하면 도리어 그
에게 되쏘아붙일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후 2,3주 동안 그녀는 그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필립은 그녀가 자기와의 사이를 끊어 
버린 데 대해 불쾌감을 느꼈으나 차차 그것을 오히려 속시원하게 생각했다. 그녀와 그렇게 
부담스런 교제를 계속하지 않아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마치 자기의 소유처럼 취급하던 
그녀의 태도에 그는 적이 부아가 났던 것이었다. 어쨌든 놀라운 여자였다. 그녀는 매일 8시
에 화실에 나와서 모델이 자리를 잡으면 곧 일을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부
지런히 몇 시간이고 끈기있게 어려움과 싸우면서 시계가 12시를 칠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
녀의 그림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대개의 젊은 사람들이 보통 몇 개월만 공부하면 
도달할 수 있는 수준 낮은 기술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매일 똑같은 보기 흉
한 갈색 옷을 입고 나왔는데, 그 옷에는 지난번에 비올 때 묻은 진흙이 그대로 가장자리에 
말라 붙어 있었다. 필립이 처음 만났을 때 본 해진 옷자락은 아직껏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로 와서 얼굴을 붉히면서, 할말이 있는데 나중에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몰론 좋습니다. 그럼 12시에 남아서 기다리겠어요." 필립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날 오전 일과를 마치자 그는 그녀에게로 갔다.
  "나하고 좀 걷지 않겠어요?" 그녀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고 물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2,3분 동안 말없이 걸었다.
  "당신은 일전에 나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 입씨름은 그만 합시다. 사실 싸움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필립이 말했다.
  그녀는 괴로운 듯이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나도 당신과는 다투고 싶지 않아요. 파리에서 친구라고는 당신뿐이거든요. 난 당신이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우리들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느꼈어
요. 나도 왜 그런지 당신에게 마음이 끌렸어요.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의 뜻을 알겠지요? 당신
은 절름발이예요."
  필립은 낯을 붉히고 본능적으로 절뚝거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의 불구
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싫었다. 그는 패니 프라이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
었다. 그녀는 못생기고 무뚝뚝하고, 한편 필립은 불구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뭔가 통하
는 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몹시 화가 치밀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만은 참았다.
  "당신은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나의 지도를 원했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림 자체는 아주 
틀렸다고 생각했나요?"
  "당신 그림이라고는 다만 아미트라노에서 본 것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판단하기 곤란합
니다."
  "나도 당신이 다른 작품들을 보아 주기를 바랐어요. 아직껏 다른 사람에게는 보아 달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당신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나도 매우 보고 싶습니다."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워요. 10분쯤 걸릴 거예요." 그녀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큰 거리를 걸어가다가 샛길로 빠져서 다시금 골목길로 들어섰다. 구멍가게가 
띄엄띄엄 있는 초라한 골목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발을 멈추었다.
  그들은 계단을 몇 개 올라가서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경사진 천장과 조그만 창문이 있
는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은 닫혀 있어서 방 안은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날씨가 꽤  쌀
쌀한데도 불은 없었고 불 피운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자리는 아침에 일어난 그대로였
다. 의자 한 개와 세면대를 겸해 쓰는 서랍장 하나, 그리고 싸구려 화가가 가구의 전부였다. 
어떻든 아주 누추한데다가 어수선하고 불결한 것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인산을 주었다. 
화구와 화필이 흩어져 있는 벽난로 위에는 컵 한개와 더러운 쟁반 한 개 그리고 주전자  하
나가 얹혀 있었다.
  "거기에 계세요. 잘 보이도록 의자 위에 세울 테니까요."
  그러고서는 18인치와 12인치쯤 되는 조그마한 유화 스무 점을 보여 주었다. 하나씩 차례
로 의자 위에다 세우면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나씩 바라다보고는 그는 머리
를 끄덕였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잠시 후에 초조한 듯이 그녀가 물었다.
  "한 번 쭉 보고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필립이 대답했다.
  그는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무
어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단순히 잘못 그렸다든지 혹은 색채 감각이 없는 사람이 서툰 
솜씨로 색을 칠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혀 명암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고 원근법도 괴상했다. 정말 다섯 살 난 어린애가 그린 그림 같았다. 그러나 어린애라면 
어떤 순진성이라도 있었을 것이며 적어도 눈으로 본 것만은 그대로 그리려는 시도라도 있었
겠지만, 이 그림은 천박한 기억만을 잔뜩 담은 통속적인 작품이었다.
  필립은 언젠가 그녀가 모네라든지 다른 인상파에 대하여 열중해서 이야기하던 것을 생각
해 보았으나, 여기 있는 그림들은 왕립 미술관의 가장 나쁜 전통들뿐이었다.
  "자, 이것이 전부예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필립도 남들 못지않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도 뻔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
어놓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 굉장히 훌륭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때 필립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늘 혈색이 좋지 못한 그녀의 양볼에는 핏기가 감돌았고,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생각에도 없는 말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참다운 말을 듣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참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걸요."
  "그런데 무슨 비평할 말은 없어요? 당신도 다른 사람처럼 어디고 좋아하지 않는 점이 반
드시 있을 텐데요."
  필립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살펴보았다. 낡은 다리가 있고 담쟁이로 덮인 오막살이와 풀이 
우거진 둑이 그려져 있는 풋내기 화가의 풍경화였다.
  "물론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이 그림은 색조가 약간 
이상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프라이스 양의 얼굴이 별안간 흐려지다니 그 그림을 재빨리 뒤집어 놓았다.
  "당신은 하필 이 그림을 들어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그린 것 중에서 
가장 잘된 것이에요. 난 내가 사용하는 색조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색조란 것
은 가르칠 수 없는 거예요. 색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백 년 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
예요."
  "모두가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필립이 되풀이했다. 그녀는 만족한 듯이 그 그림
들을 바라보았다.
  "그럼요, 나도 내 그림이 부끄러울 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필립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 시간이 퍽 늦었군요. 나가서 점심을 같이 하지 않겠어요?"
  "내 점심은 집에 준비되어 있어요."
  그녀의 점심은 준비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아마 필립이 돌아가고 나면 관리인이 
점심을 가져올 것 같았다.
  그는 급히 밖으로 나와 버렸다. 방 안의 곰팡내로 머리가 몹시 아팠다.
  3월이 되자 살롱전에 출품하려고 모두들 흥분하고 있었다. 클라튼은 출품작을 한 점도 준
비하지 않았으면서도 로슨이 내놓은 두 개의 초상화를 비웃었다. 로슨의 그림들은 그림 공
부 하는 학생의 습작품답게 그저 모델의 얼굴을 그대로 꾸밈 없이 옮긴 건에 지나지 않았으
나 그래도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클라튼은 완벽만을 목표로 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이 없
는 작품은 절대로 내놓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로슨에게도 화실 밖으로는 내 놓
을 수도 없는 졸작을 출품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두 점
이 모두 입선되었을 때도 그의 경멸에는 변함이 없었다. 플라나간도 출품했으나 낙선되고 
말았다. 오터 여사는 <나의 어머니 초상>이라는, 이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나무랄 데 
없는 그림을 출품해서 아주 좋은 장소에 걸리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작별한 이래 만나보지 못했던 헤이워드가 파리에 와서 며칠 동안 머물
게 되었는데, 때마침 로슨의 입선을 축하하기 위하여 베푼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헤이워
드를 꼭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열망하던 필립은 막상 그를 만나자 의외로 실망을 했다. 용모
가 퍽 변한 것 같았다. 아름다웠던 그의 머리칼은 윤기를 잃었고 수려하던 모습도 점차 시
들어 가는 것같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는 그전보다 흐릿해졌고 얼굴은 멍하니 넋을 잃은 사
람 같았다.
  그러나 헤이워드의 정신 상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열여덟 살 때의 필립을 
감동시켰던 그의 교양은 스물한 살의 필립에게는 뭔가 가벼운 경멸을 일으켰다. 필립 자신
이 많이 변했던 것이다. 예술, 인생, 문학에 관한 그 자신의 낡은 견해를 경멸해 왔기 때문
에 그는 옛날 그대로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헤이워드 앞
에서 자기의 그런 생각을 펼쳐 놓을 생각은 없었으나, 화랑을 안내하는 동안 자신이 최근에 
와서 갖게 된 혁신적인 견해를 헤이워드 앞에 토로했다. 마네의 올림피아 앞에서 그는 극적
인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그림 하나만 준다면 옛날의 대가들은 하나도 없어도 좋아요. 다만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나 베르메르(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는 예외지만."
  "베르메르라니?"
  헤이워드가 물었다.
  "아니, 베르메르도 모르세요? 그렇다면 당신은 교양이 부족한데요. 그를 한시바삐 아셔야 
합니다. 그는 현대 화가와 같이 그림을 그린 유일한 옛날 화가랍니다."
  필립은 헤이워드를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끌고 나와서 서둘러 루브르 미술관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볼 만한 그림이 아직도 더 있지 않은가?"
  무엇이고 많이 보아 두려는 관광객다운 열성으로 헤이워드가 말했다.
  "별것 없어요. 그런 것은 <<베데카>>(독일의 칼 베데카가 출판한 유명한 여행편람)라도 
가지고 다니며 나중에 당신 혼자서 보는 것이 나을 거예요."
  루브르 미술관에 이르자 필립은 그를 대화랑으로 안내했다.
  "<지오콘다>(다빈치의 모나리자 상)를 한번 보고 싶은데."
  헤이워드가 말했다.
  "아, 그건 문학에 지나지 않아요."
  마지막에 조그마한 방에 들어가서 필립은 베르메르반 델프트의 <레이스 직공>앞에서 발
을 멈추었다.
  "보십시오. 이것이 이 루브르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입니다. 마네 것과 흡사하지요."
  그는 엄지손가락을 내저으며 이 매력적인 작품을 자세히 설명했다. 화실에서만 통용되는 
말을 굉장히 효과있게 사용했다.
  "그러나 내게는 어쩐지 그렇게 훌륭한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헤이워드가 말했다.
  "물론 이것은 화가들의 그림이거든요. 문외한의 눈에는 훌륭한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을는
지도 모르지요."
  "뭐라구?"
  "문외한 말이오."
  예술 애호가가 대개 그러한 것처럼 헤이워드도 공정하려고 무척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독단적이었으나, 자기 주장이 뚜렷한 사람을 대하
면 반대로 양같이 온순하였다. 그는 필립의 주장에 영향을 입어서, 그림의 올바른 판단자는 
화가 자신이며 화가들의 교만한 주장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필립의 말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한 이틀 지난 후에 필립과 로슨이 파티를 열었다. 챌리스 양도 와서 요리를 맡아 해주기
로 했다. 챌리스는 같은 여성에게는 전혀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여자였다. 그녀를 생각해서 
다른 여자들을 초청하려는 제안도 그녀는 반대했다. 클라튼과 플라나간, 포터 그 밖의 두 사
람이 모인 파티였다. 가구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델용 테이블을 식탁 대용으로 쓰고 
손님들은 여행 가방 위나 마룻바닥에 그냥 앉았다. 파티에는 챌리스 양이 손수 요리한 수프
에다가 근처 음식점에서 구운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양다리를 가져오게 했다. 감자는 챌리스 
양이 이미 요리해 두었으며 화실은 그녀가 기름에 튀긴 홍당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홍당무 튀김은 그녀의 특기였다. 이어 배 구이(배에 브랜디를 끼얹어 구운 것)가 들어왔
다. 다음에는 방 안에 늘어놓은 다른 요리에까지 맛을 더해 주는 접시가 들어왔는데, 그것은 
브리 산 치즈였다. 헤이워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트위드 복지의 양복
과 트리니티 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영국 사람 티를 냈다. 모두
들 헤이워드를 친절히 대해 주었으며, 수프를 먹을 때에도 날씨라든지 정세에 대한 이야기
만 주로 했다.
  양 다리를 기다리는 동안에 잠시 시간이 있어서 챌리스 양은 담뱃불을 붙여 물었다.
  "라푼젤, 그대는 머리를 풀어헤칠지어다." 그녀가 별안간 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우아한 손을 들어 리본을 풀어헤치자 금발이 어깨 위로 늘어졌다. 그녀는 머리
를 흔들었다.
  "이렇게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는 게 훨씬 편해요."
  커다란 갈색 눈, 해맑고 금욕적인 얼굴에 창백한 피부, 넓은 이마는 마치 번 존스의 그림
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붓끝 같은 손가락에는 니코틴이 짙게 배어 있었고 연한 자주 
색과 초록색의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에겐 켄징턴 번화가(화가 번 존스가 여기에 
살고 있었음)의 낭만적인 멋이 있었다. 방자한 탐미주의자였으나, 친절하고 착한 여자로 그
녀의 뽐내는 듯한 태도는 다만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밖에서 노크 소리고 들리자 모두 환성을 울렸다. 챌리스 양이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양의 다리를 받아들고는 마치 은쟁반 위에 받쳐 든 세례 요한의 머리(마태 복음 14
장에 나오는 살로메 이야기)처럼 위로 높이 쳐들었다. 여전히 입에 담배를 문 채 사제와 같
은 엄숙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양고기는 순식간에 다 먹어치웠다. 이 창백한 여인이 이렇게도 왕성한 식욕을 가졌다는 
것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클라튼과 포터는 그녀를 끼고 양쪽에 앉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았다. 챌리스 양은 대개의 남성들에게 여섯 주만 지나면 싫증을 느끼
는 여자였으며, 그 자신의 발 밑에 순정을 바치는 남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
고 있는 여자였다. 사랑하다 헤어진 남자에 대하여 그녀는 악의를 품는 일이 없었으며, 친밀
감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친구로서 대해 주었다. 이따금 그녀는 우울한 눈으로 로슨을 바라
보았다. 배 구이 요리는 대성공이었다. 그것은 브랜디의 탓이기도 하며 한편 챌리스 양이 그
것은 치즈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덕분이기도 했다.
  "이것이 기가 막히게 맛이 있는지 맛이 없어서 구토가 날 지경인지 난 분간을 못 하겠어
요." 그녀는 그 기괴하게 섞은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후에 말했다.
  계속해서 커피와 코냑이 들어왔으므로 다행히 구토가 나는 것은 모면하고 모두들 앉아서 
담배를 즐겁게 피워 물었다. 무엇이든지 유달리 예술적인 것이 아니면 행할 수 없다는 챌리
스 양은 퍽 우아한 태도로 크론쇼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눈으로 시
간의 어두운 심연을 바라보면서 이따금 수심에 잠긴 눈으로 로슨을 보며 긴 한숨을 짓는 것
이었다.
  이 무렵에 필립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월요일 아침에는 그 주의 모델을 선발하기 때
문에 많은 모델 후보자가 학교에 모여들었다. 어느 날 분명 직업적인 모델은 아닌 듯한 청
년이 선발되었다. 필립은 그 청년의 태도를 보자 관심이 끌렸다. 모델 대에 올라섰을 때 그
는 두 발을 굳건히 디디고 서서 주먹을 꽉 쥐고 머리는 늠름하게 쳐들고 있었다. 이러한 것
이 한층 더 그의 모습을 멋있게 보이게 하였다. 군살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고 근육은 마
치 쇳덩어리와도 같이 튀어나와 있었다. 머리는 모양있게 짧게 깎았고, 짧은 턱수염에 크고 
검은 눈과 짙은 눈썹을 하고 있었다. 여러 시간이나 계속되는 포즈를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계속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는 굴욕과 확고한 결심이 뒤섞여 있었으며, 정열적인 정력을 지닌 그의 풍모
는 필립의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했다. 일이 끝나서 옷을 입었을 때 그의 모습은 마치 남
루한 옷을 입은 임금같이 보였다. 그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으나, 한 이틀 지나서 오터 여
사가 말하기를 그 모델은 스페인 사람으로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아마 굶주리고 있는 모양이지요?" 필립이 물었다.
  "왜요? 입고 있는 옷을 보았어요? 아주 말쑥하고 단정하던데요."
  그 무렵 같은 아미트라노에 다니는 한 미국인 학생인 포터가 필립에게, 자기는 두어 달 
동안 이탈리아에 다녀올 테니 그 동안 자기 화실을 쓰라고 했다. 필립은 기뻐했다. 로슨의 
거만한 충고에 짜증을 느끼고 있던 필립은 혼자 따로 있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 주일의 마지막 날에 그는 그 스페인 청년에게로 가서, 그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하였
으니 며칠만 자신의 화실로 와서 모델이 되어 달라고 했다.
  "나는 직업적 모델이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는 다른 일이 있습니다." 그 스페인 청년이 대
답했다.
  "그럼, 지금 나와 같이 가서 점심이나 들면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은 이렇게 말하고는 상대편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덧붙였다. "점심쯤 같
이 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그 청년은 동의를 했다. 두 사람은 밀크 홀로 갔다. 스페인 청년
은 빠르고도 알아듣기 힘든 서툰 프랑스어를 했다. 필립은 말의 호흡을 맞추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필립은 그가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파리에 왔으나, 이제 와
서는 밑천 한푼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식생활을 해결하고 있었다. 개인 교수도 
하고 주로 사무 서류 같은 것을 손 닿는 대로 번역도 했으나, 마침내는 그의 훌륭한 자태를 
팔아서까지 빵을 벌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델은 제법 돈벌이가 되는 것으로 
한 주일 번 돈으로 두 주일은 충분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멍하니 듣고만 있었
다. 하루에 두 프랑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는데, 그것조차 없어서 그의 육체를 드
러내 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운 일이며, 모델이란 직업은 굶주리
지만 않는다면 허용되지 않는 타락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스페인 청년은 말했다.
  필립은 그 사람의 몸 전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머리만 그려서 내년 살롱전에 
출품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왜 하필 나를 그리고 싶다고 하십니까?" 스페인 청년이 따졌다.
  필립은 그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 좋은 초상화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단 1분이라도 글쓰는 시간을 낭비할 순 없습니다."
  낭만을 그처럼 좋아하는 필립은 이 스페인 청년과 접촉할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필
립은 그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 스스로의 즐거움
을 위해서 당신에게 모델이 되어 드리지요."
  마침내 스페인 청년은 이렇게 승낙했다.
  필립은 돈을 받으라고 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고, 마침내는 다음주 월요일 1시에 오기로 
결정을 지었다. 그는 필립에게 미구엘 아푸리아라고 찍힌 명함을 주었다.
  어느 날 미구엘 아푸리아는 그의 원고의 일부를 가져왔다. 그는 매우 흥분한데다가 서툰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므로 필립은 그가 읽는 것을 잘 알아 들을 수 없었으나 그것이 빈약한 
것이라는 것은 알았다. 필립은 그리고 있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넓은 이마 뒤에 
감추어진 두뇌는 텅 빈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정열적인 눈동자도 인생에 있어서 평범한 것
밖에는 볼 줄 모르고 있었다. 필립은 그의 초상화가 싫어졌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모델의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그는 애써 그린 그림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영혼의 의
지를 그린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이렇듯 모순 덩어리인데 도대
체 영혼의 의지가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필립은 미구엘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청년의 훌륭한 노력이 부질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필립은 슬펐다. 미구엘은 훌륭한 작가가 될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
었으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필립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속에 무엇인지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이 시간만 낭
비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이 가지는 자신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필
립은 패니 프라이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자기의 재능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자신 만만
한 여자였다.
  "만약에 내가 진실로 훌륭한 화가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나는 깨끗이 그림을 
단념하겠다. 이류 화가가 되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필립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밖으로 나가려 할 즈음에 관리인이 편지를 가지고 그를 찾아왔다. 
루이자 백모님이나 헤이워드가 아니면 편지가 올 데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본 일이  
없는 필적이었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와 주세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제발 당신이 곧 
와 주셔야 해요. 다른 어떤 사람이 내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어요. 
내 소유물을 모두 당신에게 드립니다.
  F.프라이스
  추신:사흘 동안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필립은 불현듯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는 황급히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여태껏 파리에 있었다는 것이 필립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만날 수 없었
으므로, 영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하숙집에 도착하자, 그는 곧 관리
인에게 프라이스 양이 방에 있느냐고 물었다.
  "있을 겁니다. 요 이틀 동안 외출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필립은 2층으로 뛰어올라가서 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고, 열쇠 구멍에는 안쪽으로 열쇠가 꽂혀 있었다.
  "아, 제발 무서운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으면." 필립은 소리쳤다.
  그는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서 관리인에게 그녀는 틀림없이 방 안에 있다고 말했고, 그녀
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어쩐지 처참한 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여 염려가 된다고 말했
다. 그리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필립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도 하지 않던 무뚝뚝한 관리인도 이 말을 듣고는 놀랐다. 그리고 자기가 주거 침입의 책임
을 질 수가 없으니까, 둘이서 경찰에 알리자고 말했다. 그들은 함께 경찰에 갔다가 자물쇠 
제조공도 데리고 왔다. 관리인은 프라이스 양이 지난 3개월간의 방세도 지불하지 않았고, 또 
신년에도 오랜 습관으로 관리인으로서는 마땅한 권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선물도 받지 못했
다고 했다. 그들 네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
었다. 자물쇠 제조공이 일에 착수하여 마침내 모두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필립은 비명
을 지르고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 비참한 여인은 끈으로 목을 매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이 방에 들었던 사람이 휘장을 치기 위해서 천장에 박아둔 
못에다 끈을 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의 조그마한 침대를 옮기고 의자 위에서 목을 맨 
다음 그것을 발로 차서 마룻바닥에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그들은 끈을 끊고 그녀를 내려놓
았다. 시체는 아주 싸늘했다.
  필립은 그 불행한 사건을 뇌리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힌 것은 
그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보다 더한 노력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
며, 그녀처럼 성실성을 가지고 노력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란 것은 조금도 의미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미구엘 아푸리아도 그런 사
람 가운데 하나였다. 필립은 그 스페인 청년의 영웅적인 노력과 그가 쓰고 있는 졸렬한 작
품과의 심한 차이에 적지않이 놀랐던 것이다. 필립은 이러한 불행한 학교 생활로부터 자기 
분석의 습성을 기르게 되었고, 마약과도 같은 음험한 버릇은 그의 제2의 천성이 되어서 이
제 와서는 감정을 분석하는 데도 일종의 날카로움을 갖게 되었다. 미술에서 감명을 얻은 것
도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은 로
슨에게는 직감적인 감동을 일으켰다. 로슨의 예술 감상은 직감적인 것이었다. 플라나간 같은 
이도 필립 같으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즉석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필립 자신의 감
상은 어디까지나 지적인 것이었다. 만약에 그에게도 예술적인 천품이 있다고 하면 그들과 
같이 정서적이고 직감적으로 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물건
을 보고 그저 정확하게 그것을 그린다는 피상적인 재주 이상의 무엇이 자기에게 있는가 생
각해 보았다. 물건을 보고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그는 다만 기
술적인 능란한 솜씨는 경멸하라고 배워 왔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되 그것을 감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은 다만 지성만으로 
그린 것이라는 것과 참다운 그림이란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돈은 겨우 1천 6백 파운드밖에 되지 않았다. 이젠 지독히 절
약할 필요를 느꼈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그는 돈을 벌 가망이 없었다. 미술사를 펼
쳐 보아도 돈 한푼 벌지 못한 화가들이 수두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도 빈곤에 몸을 내맡겨
야 할 입장에 있었다. 빈곤하더라도 불후의 명작을 내놓는다면 그야 가치 있는 일이겠지만, 
그는 도무지 이류 이상의 화가는 될 가망이 없는 것 같아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러한 것을 위해서 청춘과 인생의 즐거움을, 그리고 인생의 여러 기회를 포기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 화가들의 생활이 참으로 편협하고 좁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20년 동안이나 명성을 좇아 전전 긍긍하다가 마침내 염치도 체통도 없
이 술에 빠져 버린 사람도 있었다.
  패니 프라이스의 자살은 그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일깨웠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절망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한 방법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푸아
네 교수가 그 가엾은 여자에게 주었던 경멸적인 충고를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그녀가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헛된 노력을 단념했었더라면 그녀를 위해서도 훨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필립은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참다운 화가나 음악가에게는 예술에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예술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을 필립은 깨닫게 되었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의 노예가 되어, 결국에는 그들을 
사로잡은 본능의 속임수에 빠지게 되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
게 새어나가는 것이다.
  필립은 인생이란 것은 그것을 그리느니보다는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
러 가지 인생의 경험을 추구해서 그 인생이 제공해 주는 모든 감정을 순간순간으로부터 얻
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어떤 행동을 하여 그 결과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한번 결심한 바에
는 당장 실행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다음날 오전은 푸아네 교수가 나올 차례였다. 필립은 그
녀가 목숨을 끊은 후로는 화실이 이상하게도 쓸쓸한 것 같았고 이따금 그림을 그리던 프라
이스 양이 손을 움직이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녀의 존재는 
살아 있을 적보다도 죽고 난 지금에 더욱더 뚜렷하게 느껴졌고, 밤이 되면 가끔 꿈속에서 
그녀를 보고는 무서운 소리를 지르면서 잠을 깨는 때도 있었다. 그녀가 겪은 갖가지의 괴로
움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푸아네 교수가 아미트라노에 나오는 날은 오데사가의 조그마한 요리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는 것을 필립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서 점심을 먹고 그 곳으로 가서 밖에서 그
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혼잡한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필립은 마침내 푸아네 교수가 고
개를 약간 숙인 채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몹시 떨렸으나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갔다.
  "저어, 선생님, 여쭈어 볼 말씀이 있는데요."
  푸아네 교수는 그를 힐끔 보고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에게 미소로써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가 물었다.
  "저는 선생님 밑에서 거의 2년 동안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림 그리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를 선생님께서 솔직히 말씀해 주셨으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립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푸아네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잠자코 걷기만 했다. 그
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필립은 그의 표정에서 이렇다 할 아무런 반응도 엿볼 수가 없었
다.
  "글쎄, 무슨 소린지 난 잘 모르겠는걸."
  "저는 가난합니다. 만일 타고난 재주가 없다면 일찌감치 다른 일로 옮기는게 나을 것 같
아서 그럽니다."
  "자네는 자네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제 친구들은 모두 자기네가 재능이 있는 것같이 믿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 중에 몇몇
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봅니다."
  푸아네의 무정해 보이는 입가에 미소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이 근처에 사나?"
  필립은 자기가 사는 곳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푸아네는 그를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의 화실에 좀 가볼까? 자네의 그림들을 좀 보여 주게."
  "지금 말씀입니까?"
  "왜, 안 되겠나?"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선생 옆에 서서 말없이 걸어갔다. 그는 몹시 당황했
다. 푸아네 교수가 지금 당장 자기의 화실로 가서 그림을 보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여유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와주십사고 부탁하든가 그
렇지 않으면 교수의 화실로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고도 싶
었다.
  필립은 걱정으로 떨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푸아네 교수가 자기 그림을 보고는 얼굴
에 묘한 웃음을 띠고 자기에게 악수를 하면서, '응, 잘됐어. 계속해서 꾸준히 해보게. 참 자
네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네.'하고 말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필립의 마
음은 마구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한 상상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대단한 기쁨을 
주었다. 그렇게만 되면 그는 용기를 가지고 계속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마침내 성공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면 당면한 고난이라든가 궁핍, 실망 이런 것은 문
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대단히 열심히 공부해 왔다. 그러기에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
이 허사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일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전에 패니 프라이
스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음을 생각하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필립의 집에 다다랐다. 필립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제발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하고 용기를 내어 푸아네 선생에게 말하고도 싶었다. 그는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들
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관리인이 필립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겉봉을 보고는 그
는 그의 백부의 필적임을 알았다.
  푸아네 교수는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필립은 할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고, 교수 
역시 잠자코 있었다. 침묵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교수가 앉자 필립은 아무 말 없이 초상
화 두 장과 풍경화 두세 점과 몇 장의 스케치를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필립은 야릇한 흥분을 누르며 말했다.
  "자네는 아까 가난하다고 했것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난하다뿐이겠습니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필립은 마음속에 갑자기 
싸늘한 그 무엇을 느끼며 대답했다.
  "생계에 관해서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처럼 사람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네. 돈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멸시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 사람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일세. 돈이란 제 육감과 같은 것이어서 이것 없이는 다른 오감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걸세. 적당한 수입이 없이는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반 이상이 막혀버리는 
걸세.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1실링 벌 수 있는 일에 대해서 1실
링 이상의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걸세. 자네는 빈곤이 예술가에게 최대의 자극이 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몰라. 그러나 그런 수작을 하는 놈들은 빈곤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껴 
본 적이 없을 걸세. 빈곤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나 비굴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수작이란 
말일세. 빈곤은 사람을 끝없는 굴욕 속에 몰아넣는 것이며, 사람의 날개를 잘라 버리고 암처
럼 영혼을 좀먹는 것이라네. 그렇다고 해서 큰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세. 다
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구속당하지 않고 일할 수 있고, 또 너그럽고 솔직하며,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면 되는 걸세. 작가든 화가든 간에 생계를 위해 전적으
로 그의 예술에 의지하는 예술가들을 나는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네."
  필립은 자기가 내보인 여러 그림들을 조용히 치웠다.
  "저에게는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푸아네 교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말했다.
  "자네는 손재주만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네.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과히 무능하지 않은 꼼꼼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걸세. 자네는 자네보다도 못하거나 자네만한 
화가를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걸세. 자네가 보여 준 그림 중에서는 그 어느 것에서도 타고난 
재주를 발견할 수 없고 다만 근면성과 지성을 볼 수 있을 따름일세. 요컨대 자네는 그저 평
범한 화가밖에는 되지 못하겠네."
  이 말을 듣고 필립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저 때문에 수고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감사한 마음 이루 다 말씀드
릴 수가 없습니다."
  푸아네 교수는 일어나서 갈 것처럼 보이더니 돌아서서 필립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자네가 내 조언을 듣고 싶다면 말하겠는데, 대담하게 나서서 다른 일에서 자네의 
행운을 찾아보도록 하게. 이렇게 말하면 무정하게 들릴지 모르나,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것
은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자네만한 나이였을 때 내가 지금 자네에게 한 것 같은 충고를 나
에게 해주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하게 생각했을 
걸일세."
  필립은 놀라운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푸아네 교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눈은 여전히 진지하고 서글퍼 보였다.
  "때늦게 자신의 범용함을 깨닫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네. 그렇게 되면 낙심해도 소용이 없
으니까."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약간 웃어 보이고는 황망히 돌아서서 방에서 나갔다.
  필립은 기계적으로 백부에게서 온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여태까지는 주로 백모가 그에게 
편지를 했었기 때문에 백부의 편지를 본 그는 적이 걱정이 되었다. 백모는 지난 3개월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모의 병을 간호하기 위하여 블랙스테이블로 돌
아가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 백모는 돌아올 것 없다고 
회답해 왔었다. 백모는 조카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8월까
지 기다릴 테니 그 때 돌아와서 2,3주일 머무르도록 하라고 했었다. 또 백모는 그를 다시 보
지 못하고 죽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된다면 그에게 알리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백부에게서 편지가 왔으니 이는 필경 백모가 위독하여 그 자신이 펜을 들 수 없기 때
문이리라 생각되었다. 필립은 편지를 뜯었다.
  필립, 보아라.
  너의 백모가 오늘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려 주게 되어 슬프다. 백모는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평화롭게 잠드셨다. 병세가 너무 급작스럽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너를 
불러올 시간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백모는 세상을 하직할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
으므로 축복받은 부활에 대하여 확고 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소
도의 뜻을 받들어 안식하신 것이다. 백모는 장례식에 네가 참석하는 것을 원할 것이니, 나는 
네가 곧 귀국하기를 바란다. 당연한 일이라 하겠지만, 지금은 나 혼자서 당황하고 있다. 네
가 어서 와서 내 짐을 덜어 주기 바란다.
  너의 다정한 삼촌
  윌리엄 캐리로부터
  이튿날 필립은 블렉스테이블에 도착했다. 필립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 가까운 친척 중에서 
죽은 사람이라고는 백모의 죽음이 처음이었다. 그가 백모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은 컸으며 
이상한 불안까지 느꼈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40년 
동안이나 사랑해 주고 돌보아 주고 늘 같이 살아 오던 배필을 잃은 백부에게 어떤 삶이 닥
쳐올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백부는 절망적인 슬픔에 휩싸여 넋을 잃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는 백부와의 첫대면이 두려웠으며, 적당한 위로의 말이 한마디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 듯한 말 몇 마디를 마음속으로 연구해 보았다. 옆 문으로 목사관에 들
어간 그는 식당으로 가보았다. 백부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기차가 늦었구나." 백부는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필립은 격정이 복받쳐 오르게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와 다름없는 백부
의 태도를 보고 그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부는 얼른 보아 상심한 듯했으나, 침착
한 태도로 필립에게 신문을 넘겨 주었다.
  "<블랙스테이블 타임스>에 너의 백모에 관해서 간략한 기사가 실렸어."
  필립은 기계적으로 그것을 훑어보았다.
  "2층에 올라가 백모를 뵙지 않겠니?"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백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루이자 백모는 꽃에 둘러싸여 커
다란 침대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잠깐 기도를 해주겠니?" 백부는 말했다.
  그리고는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필립도 그렇게 하라는 뜻이었으므로 그는 백부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그는 고즈넉한 백모의 주름진 자그마한 얼굴을 보았다. 그는 다만 한 
가지 감정만을 느꼈는데, 그것은 얼마나 헛된 일생이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캐리 
씨는 헛기침을 하고 일어섰다. 그는 침대 발치에 놓인 화환 하나를 가리켰다.
  "저것은 이 지방 어른이 보내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마치 교회에서 늘상 하는 것 같은 
나직하고 침울한 목소리였다.
  "차가 준비됐을 게다."
  두 사람은 다시 식당으로 내려갔다. 닫혀진 덧문이 구슬픈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백
부는 자기 아내가 자리잡고 앉아서 공손하게 차를 따르곤 하던 식탁 끝머리에 앉았다. 필립
은 그들의 목으로 무엇이 넘어가지 않을 것같이 생각했으나, 백부의 식욕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평상시와 같은 마음으로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
었다. 필립은 약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맛있는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 때 백부가 
말을 꺼냈다.
  "내가 부목사로 있을 때와는 모든 것이 많이 변했어. 내가 젊었을 때는 문상객들에겐 으
레 검은 장갑 한 켤레와 모자에 두를 검은 비단 한 폭을 주었지. 루이자는 그런 헝겊을 모
아두었다가 옷 만드는 데 쓰곤 했지. 장례식이 12번이면 새 옷을 한벌 장만할 수 있다고 말
했지."
  그리고 백부는 기증받은 화환의 수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벌써 화환이 24개나 들어왔다
는 것, 그러나 펀의 목사 부인인 롤링슨 여사의 장례 때는 32개나 들어왔었다는 것, 그러나 
아마도 내일이면 백모에게도 화환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내일 11시에 장례식이 
거행되니까 롤링슨 여사쯤은 손쉽게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루이자는 생전에 롤링
슨을 싫어 했다는 것이었다.
  "매장은 나 혼자 할 테다. 매장할 때 다른 사람은 손을 못 대게 하겠다고 너의 백모에게 
약속했으니까."
  필립은 백부가 두 번째 과자를 집는 것을 보고 못마땅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
황에서 백부는 너무나 게걸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메리 앤은 확실히 과자를 잘 만든단 말야. 앞으로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과자를 만들어 
줄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메리가 나가게 되나요?" 필립은 놀라며 물었다.
  메리 앤은 필립이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목사관에서 살
았다. 그녀는 필립의 생일을 한 번도 잊지 않고 언제나 값은 쌀 망정 정성어린 선물을 해주
곤 했었다. 필립은 그녀에게 진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메리는 나가게 된다. 홀로 있는 여인을 이 집에 두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 같으니
까." 백부가 대답했다.
  "하지만 어쩌면! 메리는 지금 마흔이 넘었을 텐데요."
  "그래, 그쯤 됐을 거다. 하지만 요즘엔 그 여자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어. 무엇이든지 제
멋대로 하려고 한단 말이야. 이 기회에 말을 해야겠어."
  "그야 틀림없이 다시없는 기회지요." 필립은 말했다.
  필립은 담배를 한 대 꺼냈으나 백부는 불을 붙이지 못하게 막았다.
  "아서라,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안 된다." 백부는 점잖게 타일렀다.
  "네, 알았습니다." 필립이 말했다.
  "너의 백모가 2층에 있는 동안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예의가 아니겠니?"
  장례가 끝난 후에 은행의 지배인이며 교회의 집사인 조사이어 그레이브스가 저녁 식사를 
하려고 목사관에 왔다. 덧문은 모두 열어제쳤는데, 필립은 야릇한 안도감을 느꼈다. 집안에 
시체가 있을 때는 꺼림칙했던 것이다. 살아 있을 때는 언제나 온화하고 친절했지만, 2층 침
실에 싸늘하고 빳빳한 시체로 누워 있을 때는 어쩐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불길한 그림자
를 던져 주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립은 그러한 자신에 크게 놀랐다.
  그는 1,2분간 식당에서 교회 집사와 단둘이 머물러 있게 되었다.
  "당분간 백부님을 모시고 여기 머물러 있어야겠지? 백부님이 혼자 계시는 것이 안됐으
니." 집사가 말했다.
  "별 예정도 없으니까 백부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머물러 있겠습니다." 필립이 대답했
다.
  며칠 후에 백부는 필립에게 앞으로 2,3주일 동안 블랙스테이블에서 지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필립이 대답했다.
  "파리에는 9월에 들어가도 괜찮겠지?"
  필립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푸아네가 한 말을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아직껏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장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탁월한 화가가 되
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참이라 미술을 집어치우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했으나, 불행하게
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 자신뿐이고 남들에게는 패배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으로밖
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패배했다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집쟁
이라서 어떤 방면에 있어서 자기에게 재능이 없다는 의심이 생기면 억지로라도 그 방면을 
지향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
이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미술 공부를 깨끗이 집어치우지 못하게 할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자 보는 눈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영국 해협을 건너 보니 이제까지 중대하게 생각되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하잘것없는 것같이 
보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음식을 내놓던 식당이나 그 곳에서 보내던 따분한 생
활에 그는 싫증을 느꼈다. 친구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런 것은 이제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난 척하는 오터 여사, 허영에 들뜬 루스 챌리스, 걸핏하면 다투는 로슨과 클라튼, 
그들 전부에 대해서 싫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로슨에게 그의 짐을 보내 달라고 했다. 1주
일 후에 짐이 도착했다. 화구들의 포장을 풀었을 때 그는 냉정하게 자기 작품을 검토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사실 자체를 흥미롭게 느꼈다. 백부는 그의 그림을 매우 보고 싶어했다. 필
립이 파리로 가려고 하는 것을 그토록 반대했었으나, 이제는 너그럽게 용인해 주는 태도였
다. 그는 그림 그리는 학생들의 생활에 흥미를 느끼고 필립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사실
상 그는 조카가 화가인 것이 약간 자랑스러웠고 손님이 오면 조카 이야기를 꺼내기를 좋아
했다. 필립은 그에게 미구엘 아푸리아의 초상화를 보여 주었다.
  "왜 이 사람을 그렸니?" 캐리 씨가 물었다.
  "모델이 필요하던 중에 그 사람의 머리에 흥미를 느꼈어요."
  "여기엔 그런 모델이 없으니 날 그려 보지 않으련?"
  "안자 계시기 힘드실 텐데요."
  "괜찮아, 그쯤이야."
  "그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필립은 백부의 허영심이 우스웠다. 그는 자기의 초상화를 갖고 싶어하는 것이 뻔했다. 무
엇이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다면 그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심사였다. 2,3일 동안 기다
리는 눈치를 보이더니 그 후로는 필립의 태만을 참다 못해 언제 그릴 작정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필립이 자기 초상화를 그리려 한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부는 어떤 비오는 날 아침 식사 후에 필립에게 말했다.
  "자, 오늘 아침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게 어떨까?"
  필립은 읽고 있던 책을 놓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전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왜?" 백부는 놀라서 물었다.
  "이류 화가가 되는 게 그리 신통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이류 화가밖엔 될 수 없
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허, 그럴 수가 있나! 파리로 가기 전에 너는 네가 틀림없이 천재라고 장담하지 않았니?"
  "잘못 생각했습니다." 필립은 겸연쩍은 듯이 대답했다.
  "직업을 택한 이상 그것을 끝까지 계속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아야 할 텐데 너에게는 끈기
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야 무엇에 써먹겠니?"
  필립에게는 그의 이번 결심이 얼마나 영웅적인 것인가를 몰라 주는 백부가 불만스러웠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안 끼느니라." 백부가 말을 이었다.
  필립은 무엇보다도 이 속담을 싫어했고, 또 그 말은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필립이 공인 회계사 일을 그만두기 전에 백부와 말다툼할 때도 백부는 이 속담을 되풀이했
던 것이다. 백부는 지금 그 때의 일을 회상하는 모양이었다.
  "너도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다. 일정한 직업을 잡도록 해야 하지 않겠니? 처음에는 공인 
회계사가 되겠노라고 떠들더니 그것도 싫증이 나서 화가가 되겠다고 하더니만 이젠 또 그것
도 싫어졌다구?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여기까지 말하고 캐리 씨가 필립의 결점을 지적하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필립은 목사가 
하던 말 끝을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 맺었다.
  "결단성이 없고 무능하고 선견지명도 없고 의지가 박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요."
  목사는 조카가 자기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필립은 정색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백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부는 이 기회에 필립을 단단히 책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제 네 돈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상관치 않겠다. 너도 한 사람의 역할을 해 나가야 할 
나이가 되었단 말이야. 하지만 네 돈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과 불구의 몸으로
는 벌어먹을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무렵 필립은 누구나 그에 대해서 화를 낼 때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서 한마디 하
고 싶어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이 유혹에는 거의 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는 인간 전체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만한 말에 상심한 기색을 나타
내지 않을 정도로 수양이 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도 두통거리였던 수줍어하는 버
릇도 인제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백부님 말씀처럼 제 돈 문제는 백부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고, 저는 독립해 나갈 수 있
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네가 미술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반대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너도 이젠 인정하
겠지?"
  "그 문제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의 충고를 받고 처음부터 일을 성취하는 것보다
는 자기가 저지른 실패에서 얻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요? 저는 제 운명을 시험해 보았습니
다. 그러니까 이제는 안정된 직업을 택하렵니다."
  "뭣으로?"
  실은 그 자신도 아직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필립은 이 질문에는 대답이 막혔다. 
그저 여러 가지 직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게 가장 알맞은 직업은 너의 아버지 직업을 이어서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
  "참 이상한 일이군요. 정말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의사를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사란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 같았고 또 사무실 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다시는 사무실에 취직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백부에 대한 그의 대답은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일을 결정한다는 것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서 옛날 자기 아버지가 있
던 병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파리에서 보낸 2년간은 정말 허송 세월이었구나."
  "글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그 2년간이 재미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두 가지 
유용한 것도 배웠어요."
  "그게 뭔데?"
  필립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대답에는 백부를 비꼬는 뜻도 없지 않았다.
  "전에는 전연 보지도 않던 손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 집이나 나무를 볼 때 그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배경으로 해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
고 또 그림자라는 것도 검은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색깔이 있다는 것도 배웠어요."
  "네 깐에는 네가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는 경박하기 짝
이 없다."
  캐리 씨는 신문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필립은 지금까지 백부가 앉아 있던 이 방에서 
제일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쓸쓸한 날씨에도 아
득한 지평선까지 뻗친 푸른 벌판에는 온화한 기운이 떠돌았다. 일찍이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아늑한 매력이 그 풍경 속에 깃들여 있었다. 2년간의 프랑스 생활은 그에게 고향의 아
름다움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백부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자기에게 경박한 성격이 있었다는 것
은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일찍 부모를 잃었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었던가 하
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른 점
의 하나였다. 그 점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똑같은 태도로 사물을 볼 수 없게 했던 것
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이 이해 타산을 떠난 유일한 순수한 감정인 것이다. 그는 
육친 아닌 사람 사이에서 그만하면 순조롭게 자란 편이지만, 자애와 관용으로 대우받은 적
이 없었다. 필립은 자제력을 자랑으로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그의 동료들의 조롱을 받는 가
운데서 형성된 습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그를 냉소적이고 냉정하다고도 했다. 
냉정한 태도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습관이 지나쳐 이제는 감정을 나
타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감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이 베풀어 주는 사소한 친절에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어떤 때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학교 시절의 쓰라린 생
활과 참았던 굴욕, 놀림을 당할까 마음을 죄던 일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나와서 이 세상과 맞섰을 때의 고독감, 그의 활발한 상상력이 약속했던 것과 실제 생활에서 
당하는 것 사이의 극심한 차이를 발견한 데서 오는 환멸과 실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라는 인간을 외부로부터 바라보고 재미있는 듯이 미소를 지을 수 있
었다.
  '그렇고 말고. 만일 내가 경박한 인간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목을 달아매고 죽었을는지도 
몰라.'
  그는 즐거운 듯이 생각해 보았다.
  이리하여 9월 마지막 날에 그는 1천 7백 파운드의 돈과 절름발을 가지고 생애에 세 번째 
출발을 하려고 다시금 런던으로 떠났다.
  필립이 공인 회계사의 견습으로 들어가기 전에 치른 시험은 그대로 의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는 성 누가 병원 부속 의학교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
가 그 학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여름 학기가 끝나기 전에 런던으로 올라온 그는 그 학교의 학생과장을 만났다. 그로부터 
하숙집의 일람표를 하나 얻어 가지고 허술한 집에 하숙을 정했는데, 거기서 병원까지는 걸
어서 2분밖에 안 걸리는 편리한 곳이었다.
  의학도의 생활에 관한 필립의 생각은, 대개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19세기 중
엽에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생활 모습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브 소여(디킨
스의 소솔 <<피크위크 페이퍼스>>에 나오는 의학도)가 과거에는 존재했을지 모르나, 오늘
날의 의학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사를 희망하는 사람들 속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따라서 그 중에는 게으른 자, 
무모한 자도 있었다. 의사란 한가로운 직업이라 생각하고 2년 동안을 빈둥거리며 지내다가 
돈이 떨어진다거나 또는 부모들이 성이 나서 더 이상 학비를 대주지 못하겠다고해서 마지못
해 병원에 나가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험이 너무나 어려워서 낙제에 
낙제를 거듭하여 넋을 잃고서 일종의 공포증에 걸린다든지, 무시무시한 종합 시험 위원실에 
들어서자마자 지금까지 철저하게 알고 있던 지식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해마다 젊은 학생들의 악의 없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그 중에는 겨우 약제사 시험에나 합격
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렇지도 못한 자는 무자격 조수가 되어서 고용주에게 마구 부려지는 
위태로운 지위에 있는 자도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빈곤과 술 그것뿐이었고, 그들의 말로는 
하느님만이 알았다. 그래도 대개의 의학생들은 부지런히 공부하는 중류 계급의 청년들이었
고 자기네 집에서처럼 상당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급을 받았다. 또한 의사
의 자제가 많았는데, 그들에게서는 이미 직업적인 태도가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장래는 결
정되어 있었으며 자격을 받으면 곧 병원에 취직하고 그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어쩌면 선의
로서 한 번쯤 극동 여행을 하고 와서는 그들의 부친과 같이 일하다가 여생을 지방의 개업의
로서 마칠 것이다. 한두 사람은 특히 뛰어나서, 매년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주는, 여러 가지 
상과 장학금을 받고서 병원 내에서 여러 보직을 맡다가 간부로 승진하고 하라가(런던의 일
류 의사들이 많은 거리)에 진찰실을 설립하고 마침내는 어느 분야의 대가가 되어 돈도 벌고 
지위도 높아지며 명예로운 칭호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필립은 비좁은 그의 하숙방에 안주했다. 책을 정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그림과 스케치
를 벽에 걸었다.
  위층 응접실에는 그리피스라는 5학년 학생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와 만나는 일
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주로 그가 병실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그가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학에 다녔던 학생들은 대개가 그들끼리만 교제하는 것이
었다. 젊은 사람으로서 있음직한 일이지만, 그들은 갖가지 수단으로 자기들처럼 혜택을 입지 
못한 학생들에 당연한 열등감을 심어 주었다. 다른 학생들은 마치 올림포스 신전들 같은 그
들의 모습을 눈꼴 사납게 여겼다. 그리피스는 숱이 많은 곱슬머리와 파란 눈, 그리고 흰  살
갗에 붉은 입술을 가진 키가  큰 청년이었다. 활기있고 언제나 명랑해서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행운아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웬만큼 피아노를 칠 줄 알았고 우스운 노래를 재미있게 
부르기도 했다. 필립이 홀로 그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위층에서 그리피스가 친구들과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그는 저녁때 파리의 화실에 앉아서 로슨과 플라나간, 그
리고 클라튼 같은 친구들과 함께 예술과  도덕과 현재의 연애 사건으로부터 미래의  명성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즐거운 때를 회상하고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영
웅적인 거동을 취하기는 쉽지만 그 결과를 감수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곤란한 것은 의학 공부가 그에게 지리하다는 것이었다. 실험  교수로부터 질문을 당하는 일
은 없어졌으나 강의 시간 중에도 주의가 집중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해부학이라는 것은 막
대한 사실을 암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싫증나는 학문이었다. 해부도 이제는  귀찮아졌다. 
책에 있는 도해나 병리학 표본실의 표본을 보면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대번 알 수 있는
데 무엇 때문에 힘들여 그것들을 해부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사귀는 수도 있었으나, 특별히 친한 친구는 없었다. 그것은 특
별히 그들과 이야기할 화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의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려고 
하면 그들은 그가 선심쓰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내킨다고 해서 남이
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질의 인간은 아니었다. 언젠가도 미
술에 취미가 있는 어떤 학생이 필립이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는 말을 듣고 미술에 관해
서 그와 토론을 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필립은 자기와는 아주 딴판인 그의 견해에 
염증을 느꼈고 더구나 상대방의 생각이 통속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다음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필립은 인기를 얻고 싶었지만 남들에게 아첨할 수는 없었다. 또 실없이 붙임성 있게 굴다
가 배척을 당할까 두려워 사교적인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아직껏 남아 있는 수줍음을 과
묵한 태도 뒤에 감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보면 지난날의 왕립 학교 시대의 경험을 
지금 다시금 겪고 있는 셈이었다. 다만 현재의 의학도 생활이 자유스러워서 대개는 혼자 생
활을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별로 사귀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지만 필립은 던스퍼드란 학생과 우연히 친한 사이가 되었
다. 그것은 던스퍼드는 필립이 이 학교에서 맨 처음 알게 된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던스퍼
드도 런던에는 별다른 친구가 없는 모양이어서 결국 두 사람은 토요일 밤이면 같이 영화 구
경도 가곤 하였다. 그는 사람이 좀 모자라는 듯했지만 성격이 좋고 절대로 성을 내지 않았
다. 언제나 싱거운 이야기만 했지만, 필립이 웃어 대면 자기도 덩달아 웃었는데, 그의 웃는 
표정은 꽤 멋있게 보였다. 필립도 그의 솔직 담백한 면이 좋았으며, 그의 성격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필립 자신이 갖지 못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 의사당 거리에 있는 찻집에 자주 갔다. 던스퍼드가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를 좋
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그녀에게서 하등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허리가 
가늘고 키는 큰 편이나 가슴이 마치 남자의 가스같이 펀펀했다.
  "파리에서는 저런 여자쯤은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필립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지만 얼굴이 매력적이야." 던스퍼드가 대꾸했다.
  "얼굴이 무슨 상관이람?"
  그녀는 레이튼 경, 앨마태디머, 그 밖에 수많은 빅토리아 왕조의 화가들이 그 세대 사람들
에게 그리스 미녀의 전형으로 받아들이게 할 만한 반듯한 얼굴과 푸른 눈동자와 널찍한 이
마의 소유자였다. 머리숱이 상당히 많았고 그것을 독특하게 매만졌는데, 앞머리는 알렉상드
랑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빈혈증이 있는 듯 입술이 파리했고 살결은 고왔으나 두 
볼에는 핏기가 전혀 없어 푸르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손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무척 애를 
쓰는 모양이었는데, 그 손은 가늘고 희었다. 그녀는 지리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던스퍼드는 여자에 대해서는 매우 수줍어했으므로 그녀에게 한 번도 말을 걸어 보지 못했
고 필립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말만 먼저 걸어 달란 말이야. 그 다음부터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필립은 친구를 위해서 한두 마디 말을 걸어 보았으나, 그녀는 짤막한 대답만 할 따름이었
다. 그녀는 두 사람을 저울질해 보았다. 그녀는 그들을 새파란 애송이 학생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소용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던스퍼드는 갈색 머리털과 코밑 수염을 기른 독일인같이 보이는 사람이 그 찻집에 들어오
면 언제나 그녀로부터 특별히 친절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
서너 번 재촉을 해야 겨우 그녀에게 무엇을 주문할 수 있었다. 알지 못하는 손님에게는 그
녀는 새침하고 도도하게 굴며 친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찻집 손님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흔히 다과를 주문하는 여자 손님들로 하여금 기다리다 못 
해 약이 오르게 만들면서도 관리인에게 불평을 말하게까지는 만들지 않는, 손님을 다룰 줄 
아는 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던스퍼드는 그녀의 이름이 밀드레드라고 필립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찻집에 있
는 다른 아가씨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참 얄미운 이름인데." 필립이 말했다.
  "왜? 난 그 이름이 좋은데." 던스퍼드가 말했다.
  "아니, 좀 거만한 이름이야."
  마침 그 날은 그 독일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차를 가지고 왔을 때 필립은 
빙긋이 웃어 보이면서 말을 건넸다.
  "오늘은 그 사람이 오지 않았군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쌀쌀하게 말했다.
  "아니, 그 붉은 콧수염을 기른 양반 말이오. 인제는 딴 여자한테 붙었나?"
  "원, 걱정도 팔자야. 자기 일이나 걱정하시죠." 그녀는 톡 쏘아붙였다.
  그녀는 그대로 가버리더니 잠깐 동안은 별다른 손님이 없었으므로 의자에 걸터앉아서 손
님이 놓고 간 석간을 읽기 시작하였다.
  "에이, 바보. 성나게 하면 어떻게 해." 던스퍼드가 필립을 나무랐다.
  "화를 내든 말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필립이 대답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는 내심 화를 내고 있었다. 일부러 이쪽에서는 기분을 맞추어 주려
고 했는데, 상대방이 골을 낸다는 것은 기분나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산서를 요구하면서 
좀더 얘기를 해볼 셈으로 웃는 얼굴로 다시금 말을 붙였다.
  "이제 우리는 서로 말도 않는 사이가 됐나 보죠?"
  "나는 손님의 주문이나 받으면 그만이에요. 손님들에게 얘기할 것도 없고 또 손님한테 얘
기를 듣고 싶지도 않아요."
  이렇게 잘라 말하고는 그녀는 계산서를 놓고 먼저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필립은 노여
움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필립, 자네도 고것한테는 꼼짝 못하는걸." 밖에 나와서 던스퍼드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년같으니라구. 다시는 안 갈 테야." 필립은 투덜거렸다.
  던스퍼드에게 주는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으므로 그 후부터는 차를 마시는 곳도 변경하
게 되었으며, 던스퍼드는 딴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 여급한테서 받은 푸
대접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친절하게 대했더라면 필립은 그녀를 완전히  
잊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가 자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옹졸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3,4일 동안은 다시는 그 찻집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지켰으
나 그 일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는 그녀를 만나는 것쯤은 별일 아니겠지 하는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한 번 만남으로써 그녀를 그 이상 생각지 않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
다.
  어느 날 오후 필립은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웠던지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던스퍼드를 혼
자 남겨 두고, 다시는 안 가려고  맹세했던 그 찻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들어서자마자 그 
여급이 보였다. 필립은 그녀가 맡은 테이블에 앉았다. 어째서 1주일 동안이나 오지 않았느냐
고 먼저 말을 걸어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려 보았으나 주문을 받으러 와서도 아무 말을 하
지 않았다.
  "처음이시던가요?" 그녀가 다른 손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거니와 필립
에 대해서 안면이 있다는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정말 자기를 잊어버렸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녀가 차를 가지고 왔을 때 넌지
시 물어 보았다.
  "오늘 저녁 내 친구가 여기 오지 않았소?"
  "아니오, 요 며칠 동안 못 봤는데요."
  이것을 이야기의 실마리로 삼으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할말이 생각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말할 여유를 주지 않고는 곧 가버렸다.
  계산서를 요구할 때 비로소 그는 말할 기회를 얻었다.
  "날씨가 더럽게 나쁘지요?" 그가 말을 건넸다.
  그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창피스러웠다. 왜 
그녀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속을 태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종일 이 안에만 있으니까 날씨야 어떻든 내게는 상관없어요."
  필립은 그녀의 거만한 말투에 약이 올라서 비꼬는 말이 입가에까지 나오는 것을 겨우 참
았다.
  '정말 저년이 무슨 건방진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장에 관리인 한테 일러바쳐 
해고시킬 텐데. 그렇게 되면 내 속이 시원하겠다.' 필립은 화가 잔뜩 나서 혼자 투덜거렸다.
  필립은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리석은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빈혈증에 걸린 하
찮은 여급이 한 말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
만, 그는 묘한 굴욕감을 느꼈다. 비록 던스퍼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무안당한 것을 아
는 사람은 없었고 어쩌면 던스퍼드는 잊었을 것이 분명한데, 필립은 수치심을 씻지 않고서
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았다. 필립은 매일 
그 찻집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그녀에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은 명백하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그러한 인상을 지워 버리게 할 만한 재치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
이 예민한 사람이 드고 싫어할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가 들어서서 "안녕하십니까?" 인사하면 그녀도 "안녕하
세요?" 이렇게 되넘길 뿐이었다.
  한번은 혹시 그녀가 먼저 인사를 하나 시험해 보기 위해서 일부러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 속으로 점잖은 사회에서는 쓰지 않는 
쌍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차를 시켰다. 그는 다시는 한마디도 하지 않
기로 결심하고 평소에 하던 인사도 없이 그 찻집을 나와 버렸다. 아예 다시는 그 찻집에 안  
가겠다고 거듭 맹세했으나, 다음날 차 시간이 되자 왜 그런지 마음이 들떴다. 그는 다른 일
들을 생각하려고 해보았으나 자신의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단념한 듯이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말란 법도 없으렷다.'
  갈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였기 때문에 그가 찻집에 들어갔을 때는 7시가 거의 다 되었다.
  "난 또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그가 자리에 앉자 그렇게 말을 걸어 왔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이 있어서 일찍 못 왔소."
  "사람의 살을 째느라구요?"
  "그런 게 아니고."
  "당신은 학생이죠?"
  "그렇소."
  그러나 그것으로 그녀의 호기심은 만족된 것 같았다. 시간도 늦어지고 그녀가 맡은 테이
블에는 손님도 없었으므로,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무슨 소설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
다. 그 시절에는 6펜스짜리 보급판이 나오기 전이었다. 그 당시 가난한 문사들이 원고 청탁
을 받아 닥치는 대로 쓴 싸구려 소설책이 지식이 얕은 대중을 상대로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필립은 신이 났다. 그녀 편에서 말을 걸어 왔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자기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면전
에서 경멸하는 말을 한없이 털어놓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쳐다본 그는 
그 옆모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계급의 영국 여자들 중에서 숨막힐 
정도로 완전 무결한 윤곽을 가진 여자를 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은 대리석같이 차가웠다. 그리고 연한 푸른 빛이 도는 그녀의 섬약한 피부는 건
강치 못한 인상을 주었다. 여급들은 모두 똑같이 무늬 없는 검은 옷에 하얀 앞치마와 소매
끝동을 달고 조그마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필립은 호주머니에서 종잇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몸을 굽히고 입을 오물거리며 소설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스케치가 끝
나자 그것을 테이블 위에다 두고 나와 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기막힌 묘안이었다. 왜냐하면 
다음날 필립이 그 찻집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방긋이 웃어 보이면서 말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시는 줄은 몰랐어요."
  "파리에서 2년 동안 미술 공부를 했답니다."
  "엊저녁에 당신이 두고 간 그 그림을 여지배인에게 보였더니 깜짝 놀라시던데요. 저를 그
린 거지요?"
  "그렇소." 필립이 대답했다.
  그녀가 필립의 주문을 받아 차를 가지러 간 동안 다른 여급이 오더니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린 로저스 양의 그림을 보았어요. 영락없더군요."
  필립은 처음으로 그녀의 성을 들었다. 계산서를 요청할 때 그는 그 성을 불러 보았다. 그
랬더니 밀드레드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어떻게 내 성을 아세요?"
  "당신의 친구가 그 그림 이야기를 할 때 들었소."
  "그 여자도 한 장 그려 줬으면 해요. 아니, 그려 주지 마세요. 그려 주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계속해서 엉뚱한 말을 했다.
  "늘 당신하고 같이 오시던 그 젊은 분은 어디 있어요? 이제 다른 데로 가셨나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군요." 필립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분은 미남 축에 들거든요."
  필립의 가슴은 이상하게 동요되었다. 자기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사실 던스퍼드는 멋
진 곱슬머리와 좋은 혈색과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의 소유자였다. 필립은 그의 그러한 장점
을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 친구는 요즘 연애하느라고 바쁘답니다." 필립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다음날에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 찻집에 가서 점심이라도 시켜 먹을까 했으나 생
각해 보니 그 때쯤은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따라서 밀드레드와 이야기할 틈도 없을 것 
같았다. 이전 같으면 지금쯤은 던스퍼드와 함께 차를 마시러 나갔을 것이지만, 요즘에는 그
와 함께 찻집에 다니지 않았으므로 시계를 몇 번이나 본 후 그는 네 시 반에 그 찻집으로 
갔다.
  그는 밀드레드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2주일 전까지는 매일 보이다가 
그 후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던 그 독일 사람과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녀의 웃음
소리가 저속한 데 소름이 끼치도록 놀랐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불러 보았다. 그는 그만 성급해져서 확 치밀어올라 지팡이로 테이블을 소리나
게 두들겼다. 그제야 그녀는 샐쭉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로 왔다.
  "안녕하십니까? 무척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녀는 그가 익히 아는 거만한 태도로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하고 있었소?" 그는 또 말했다.
  "주문하시는 것을 갖다 드리겠어요. 당신과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차와 토스트." 필립은 짧게 말했다.
  필립은 골이 잔뜩 났다. 그는 마침 <스타>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차를 가지고 
왔을 때에도 그것을 읽고 있었다.
  "계산서를 갖다 주시오. 그러면 다시는 신세를 안 질 테니." 필립은 쌀쌀하게 말했다.
  그녀는 계산서를 기입해서 기계적으로 그의 테이블 위에 놓고는 그 독일 사람한테로 돌아
가 버렸다. 곧 그들은 즐거운 듯이 다시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독일 사람은 독일인 특유의 둥근 머리와 누르스름한 얼굴을 한 중키의 사나이였다. 코밑 
수염은 짙고 빳빳했으며, 연미복에 회색 바지를 입고 굵다란 금시계를 차고 있었다. 필립은 
다른 여자들이 자기와 저쪽 테이블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의미 있는 눈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틀림없이 자기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피가 끓어올랐다. 그리
고 밀드레드란 여자가 갑자기 싫어졌다. 제일 좋은 방법은 다시는 이 찻집에 오지 않는 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자기가 졌다는 생각을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
기가 그녀를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한 계교를 꾸몄다.
  다음날 필립은 다른 여급이 맡은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주문했다. 밀드레드와 친한 독일
인은 그 날도 와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밀드레드는 필립을 본체 만체하였다. 그래
서 그는 찻집을 나가려 할 때도 일부러 그녀가 자기 앞을 지나가는 순간을 택하였다. 그는 
나가면서 마치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
렇게 사나흘 동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당장 무슨 말이라도 걸지나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어째서 이제는 자기가 맡은 테이블에 오지 않느냐고 물으리라. 그러
면 가슴속에 맺혀 있던 그 증오감을 그대로 퍼부어야겠다. 그런 일로 마음을 쓴다는 것이 
그 자신 우습기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밀드레드는 또 한 번 필립을 굴복시킨 셈이었
다. 그 독일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게 되었으나 필립은 여전히 다른 테이블에 앉곤 했
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하는 일에 대하여 그녀가 전혀 무
관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렇게 계속한댔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아직 단념할 필요는 없어.'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다음날에는 그전에 앉던 테이블에 앉았다. 그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
에게 저녁 인사를 했다. 그는 얼굴은 평온했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무렵 희가극이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함께 보러 가자고 하면 틀림없이 좋아
하리라고 생각했다.
  "여보시오, 언제 우리 같이 저녁 식사는 하고 <뉴욕의 미인>을 구경하러 갈까요? 특별석
을 예약해 둘 테니."
  그는 그녀의 마음을 끌려고 일부러 나중 말을 덧붙였다. 이곳 여자들은 연극 구경을 가더
라도 하층 자리에나 앉을 것이며 어떤 남자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보통석보다 나은 자리에는 
앉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밀드레드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
지 않았다.
  "그러죠, 뭐."
  "그럼 언제 가기로 할까?"
  "목요일엔 일찍 끝나요."
  약속은 되었다. 밀드레드는 헌 힐에서 숙모와 같이 살고 있었다. 연극은 8시에 상연되므로 
7시에는 저녁을 먹어야 했다. 빅토리아 역 2등 대합실에서 만나자고 그녀가 말했다. 밀드레
드는 즐거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초대에 응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
라는 태도였다. 필립은 적이 속이 상했다.
  필립은 약속 시간 30분 전에 빅토리아 역에 도착해서 2등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는 점점 안타까워져서 역구내로 들어가서 도착하는 교외선 
열차를 지켜보았다.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으나 밀드레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초조해졌다. 그는 1등 대합실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의 가슴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었구려. 나는 또 영 안 오는 줄 알았지."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 그런 말을 하세요? 그냥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2등 대합실로 오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1등 대합실에도 앉을 수 있는데 구태여 2등 대합실에 갈 건 
없잖아요? 안 그래요?"
  필립은 자기는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 없이 둘이서 마차에 올라탔다.
  "어디서 저녁을 하려는 거지요?" 그녀가 물었다.
  "아델파이 관으로 갈까 하는데 어떻겠소?"
  "난 어디든지 좋아요."
  밀드레드는 달갑지 않은 듯이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고 해서 토라진 그녀는 필
립이 말을 붙여도 필요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품질이 낮은 검은 긴 외투를 걸치고 
털실로 짠 숄을 머리서부터 둘러쓰고 있었다. 그들은 요리점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밀드
레드는 만족한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테이블 위에 있는 램프의 빨간 갓, 황금빛을 발하
는 여러가지 장식들, 거울 등이 방의 호화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여기는 처음이에요."
  그녀는 방긋이 웃어 보였다. 이미 외투는 벗고 있었다. 파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도 전보다 
더 공들여 빗겨져 있었다. 필립은 샴페인을 주문했는데, 그것이 오자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굉장하군요."
  "샴페인을 주문했다고 해서 그러는 거요?" 그는 마치 샴페인 아니면 마시지 않는 사람처
럼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난 당신이 극장에 가자고 하기에 정말 놀랐어요."
  대화는 그다지 수월하게 진전되지는 않았다.
  밀드레드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필립은 자기가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 상
대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닫자 초조해졌다. 그녀는 다른 손님들을 보면서 필립의 이야기는 듣
는 둥 마는 둥 했고 그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필립이 한두 마디 농담도 했
지만, 그녀는 것을 진담으로 들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그 찻집에 있는 다른 여급들에 대해
서 이야기할 때만은 신이 나서 귀담아 들었다. 그녀는 찻집 여지배인이 아니꼬워 견딜 수 
없다고 했고, 그 여지배인의 나쁜 행실을 모조리 들고 나왔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극장으로 향했다. 필립은 교양이 꽤 높은 청년이라 희가극을 경멸
하는 눈으로 보았다. 만담도 야비하거니와 음악도 싱거워서 이런 것은 아무래도 프랑스인들
이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밀드레드는 아주 즐거운 듯 옆구리가 아프도록 웃어 대곤 했다. 때
때로 우스운 게 있을 때는 같이 웃기 위해서 필립에게 곁눈질을 했다. 그녀가 박수를 치는 
것도 가관이었다.
  "나는 이 극장에 일곱 번째 왔지만 앞으로 일곱 번쯤 더 와도 좋아요."
  1막이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이어서 그녀는 특별석에 앉은 여자들에게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그녀가 칭찬할 만한 여
자는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고, 그녀에게 흠 잡히지 않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떤 여자에 
대해서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흠을 잡기 위해서였다. 내일 그녀는 찻집의 다른 여급들에게 
필립을 따라갔더니 어떻게나 지루한지 죽을 지경이었다고 지껄이지나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녀가 싫으면서도 왜 함께 있고 싶은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물
어 보았다.
  "재미있었어요?"
  "그럼요."
  "언제 또 한 번 같이 갈까요?"
  "네."
  이런 말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냉담한 태도를 생각하면 그는 미칠 지경으로 화가 
났다.
  침대에 누웠을 때 필립은 자기가 밀드레드 로저스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름도 괴상했다. 그는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지 않았다. 말라빠진 몸도 
싫었으며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가슴뼈가 두드러져 나온 것을 이 날 밤에 처음 보았다. 그
녀의 생김새를 하나씩 검토해 보았다. 입술도 싫었고 병적인 안색도 불쾌했다. 그녀는 그저 
비속했다. 교양없는 소리를 툭툭 하는 것은 그녀의 정신이 텅 빈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희가극의 익살에 낄낄거리던 것을 회상했다. 그리고 술잔을 입에 갖다 댈 때 곧게 뻗치던 
그녀의 새끼 손가락을 회상했다.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얌전한 척하는 그녀의 태도도 
밉살스러웠다. 그리고 그 거만한 태도, 그는 몇 번이고 따귀라도 갈기고 싶었다. 그리고 갑
자기 왠지 모르게, 아마도 그녀를 때려 주고 싶었던 때문인지 아니면 그 조그마한 예쁜 귀
를 생각해서였는지 그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녀가 한없이 그리웠다. 가느다
랗고 연약한 그녀의 몸을 팔에 껴안고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 파리한 
뺨을 쓰다듬었으면 했다. 그녀가 그리웠다.
  그는 사랑이란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해주고 세상이 봄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
했었고, 그러한 환희에 찬 행복감을 동경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제까지 알
지 못했던 영혼의 굶주림이요, 괴로운 그리움이요, 쓰디쓴 고뇌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
는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기억하는 것은 처음 두어 차례
를 빼놓고는 그 찻집에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쓰리던 감정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에
게 말할 때는 이상하게도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는 생각이 났다. 그녀가 가 버리면 그
는 쓸쓸했고, 그녀가 그에게로 오면 그 때는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불 속에서 사지
를 뻗고 기지개를 켰다. 끊임없이 이 영혼의 아픔을 어떻게 견뎌 낼 것인가?
  필립은 토요일 밤에 관람할 연극표를 미리 사두었다. 그 날은 찻집에서 일찍 나오는 날이 
아니었으므로, 밀드레드는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 입을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집에서 옷
을 가지고 와서 가게에서 갈아 입을 작정이었다. 다행히 여지배인이 기분이 좋으면 7시에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해 줄 것이다. 필립은 7시 15분부터 밖에서 기다리기로 약속했다. 극장
에서 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마차 속에서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허락해 주리라 상상하고 
그는 가슴이 사무치도록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차 안은 여자의 허리를 껴안기 편하
게 되어 있어서(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택시보다 훨씬 편리했다) 그 즐거움으로 말하면 
그 날 밤의 비용을 빼고도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에 약속을 어기지 않도
록 하기 위해서 찻집에 들어선 순간 그는 거기서 나오는 불그스름한 머리 빛깔과 빳빳한 코
밑 수염을 기른 그 독일인과 마주쳤다. 그는 이미 그 사람의 이름이 밀러이고 영국에 귀화
한 독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꾸었고 영국에서 다년간 살았던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필립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영어는 유창했고 자연스러웠
지만, 토박이 억양은 없었다. 그 사람이 밀드레드와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필립
은 그를 몹시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 그녀의 쌀쌀한 기질을 다행하게 생각했다. 그
렇지도 못했더라면 그야말로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은 할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 녀석도 자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슴
이 덜컹했다. 그가 우선 생각한 것은 밀러의 돌연한 출현이 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밀회를 
방해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근심으로 가슴이 죄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밀드레드가 그에게로 와서 차 주문을 받아 가더니 곧 가지고 왔다.
  "정말 미안해요. 오늘 저녁은 갈 수 없겠어요."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보지 마세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
에요. 숙모가 어젯밤부터 몸이 불편한데, 오늘은 심부름하는 계집애가 쉬는 날이라 내가 가
서 함께 있어 주어야겠어요. 앓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그럼 할 수 없군. 그 대신 집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그렇지만 극장표를 사셨는데 그냥 버리기 아깝지 않으세요?"
  필립은 호주머니에서 극장표를 꺼내 보란 듯이 찢어 버렸다.
  "왜 그러세요?"
  "그까짓 희가극 나 혼자 보러 가리라고 당신은 생각하오? 이 표는 당신을 위해서 샀을 뿐
이오."
  "정말 그러시다면 바래다 주는 것도 그만둬요."
  "딴 약속이 있는 게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도 딴 남자와 마찬가지로 역시 자기 생각만 하시는군요. 숙모
가 편찮은 건 내 탓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계산서를 재빨리 써주고는 가버렸다. 필립은 여자란 것을 거의 몰랐다. 여자를 아
는 사람이라면 그녀들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할지라도 가만히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이다.
  필립은 그 찻집 밖에 지켜서 있다가 밀드레드가 그 독일인과 함께 나가는지 어떤지를 살
피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7시가 되
자 그는 찻집 맞은편 보도에서 밀러를 찾아보았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 때 밀
드레드가 나타났다. 그와 같이 샤프츠버리 극장에 갈 때 입었던 외투와 숄을 걸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했다. 그는 몸을 피하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다. 밀
드레드는 약간 놀란 듯했으나 곧바로 그에게 걸어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바람 좀 쐬고 있소."
  "더러운 자식 같으니! 나를 염탐하고 있었지? 신사인 줄 알았더니!"
  "뭐야, 신사가 너 같은 계집을 거들떠보기나 할 줄 알아?" 그는 화가 나서 대꾸했다.
  필립의 가슴속에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어떤 악마가 숨어 있었다. 밀드레드가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만큼 그도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것은 내 자유예요. 꼭 당신과 함께 가야 할 의무는 없어요. 똑
똑히 말해 두지만 난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뒤를 밟히거나 염탐을 당하기는 싫어요."
  "오늘 밀러를 만났지?"
  "그런 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사실 만나지 않았어요. 또 잘못 봤군요."
  "나는 오늘 오후에 그 사람을 보았소. 내가 들어갈 때 마침 찻집에서 나오던데."
  "보았으면 어쨌단 말이에요? 내가 원한다면 그이와 함께 갈 수도 있잖아요? 무슨 참견이
에요?"
  "그 사람이 당신을 기다리게 한 게로군."
  "뭐요? 당신 같은 사람이 기다려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그 사람을 기다리겠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어서 집에 돌아가서 당신 일이나 걱정하세요."
  그의 마음은 분노로부터 절망으로 변했다.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밀드레드, 너무 그러지 마시오. 사실 말이지 난 당신을 좋아하고 있소. 정말 당신을 진정
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발 마음을 돌려 줘요. 나는 오늘 저녁을 무척 기다렸소. 
봐요, 그 사람은 오지 않지 않소? 그 사람은 정말 당신을 두푼어치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나하고 식사나 함께 하지 않겠소? 극장표도 다시 살 테니 당신 가고 싶은 데로 같이 가요."
  "싫어요.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어요. 나는 작정했어요. 한번 작정하면 난 꼭 그대로 하
는 사람이에요."
  그는 그녀를 잠깐 쳐다보았다. 괴로움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보도에 서 
있는 그들 곁을 지나갔다. 그는 밀드레드가 눈을 두리번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밀러를 군중 틈에서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필립은 괴로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는 없소. 너무나 심한 창피요. 이제 가면 정말 아주 가버릴 
거요. 오늘 밤 나와 같이 가지 않으면 나를 다시는 못 볼 거요."
  "그것이 내게 대단한 일이나 되는 줄 아시는 모양이군요. 아이, 속시원 해. 할말은 모두 
그뿐인가요?"
  "그럼 잘 있어요."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혹시 뒤에서 부르지나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절뚝
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가로등 기둥에까지 와서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손짓으로 
자기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기꺼이 잊어버리겠다. 방금 그가 받
은 굴욕도 감수하리라. 그러나 밀드레드는 돌아선 채 필립은 염두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녀
는 그와 헤어지는 것을 정말 시원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어서 그는 생물학을 공부했다. 책을 앞
에 펴놓고 앉아서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한 자 한 자를 입술을 움직이며 읽었지만 아무것
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은 계속 밀드레드에게 돌아갔고, 그녀와 다투던 때 했던 말
만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억지로 책에만 정신을 쓰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는 산책을 하러 나섰다. 템스 강 남쪽의 거리는 평일에는 어수선했고 오가는 사람과 마차로 
활기에 넘쳤다. 그러나 오늘 같은 일요일에는 상점 문도 닫히고 거리에는 마차도 없어 고요
하고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필립에게는 그 하루가 끝나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밤이 되자 고단해서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월요일에 되자 그는 새로운 결심으로 인생을 출발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
다수의 학생들이 겨울 학기의 중간에 있는 짧은 방학을 이용하여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필립은 블랙스테이블로 내려오라는 백부의 초청을 거절했다. 시험이 곧 닥쳐온다는 것이 구
실이었다. 공부는 너무나 소홀히 했으므로, 교과 과정상 3개월간 해야 할 분량의 공부를 단
지 1주일 동안에 외어 버려야만 했다. 그는 정신 없이 공부에 몰두했다. 밀드레드도 하루하
루 지남에 따라 자연히 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력을 스스로 축하했다. 그가 받아 온 
고통도 이제는 전과 같은 고민이 아니고 말하자면 말에서 떨어진 사람이 비록 뼈는 부러지
지 않았으나 전신에 상처를 입은 듯한 그런 아픔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난 몇 주일 동안
의 자기의 경우를 호기심을 가지고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는 흥미있게 자기의 감정을 분
석해 보았다. 자기라는 존재가 약간 우스워 보였다.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그런 경우에 인간
의 사상이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고할 때에는 대단한 만족을 주
던 그의 인생 철학 체계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런 점에 당황했다.
  그러나 때때로 거리에서 밀드레드와 같은 모습의 아가씨를 볼 때면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듯했다. 그래서 견딜 수 없어 헐떡거리며 쫓아가 보지만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딴 여자이곤 
했다. 학생들은 시골에서 돌아왔다. 그는 던스퍼드와 함께 ABC 찻집에 차를 마시러 갔다. 
낯익은 여급의 제복을 보자 그는 다시금 밀드레드 생각이 나서 목이 메어 말도 할 수 없었
다. 혹시 그녀는 다른 찻집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칠는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그래서 던스퍼드가 뭔
가 눈치를 채지나 않을까 하여 두렵기까지 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던스퍼드가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했으나, 마음은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말을 그
만 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마침내 시험날이 되었다. 필립은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자신 만만하게 시험관 책상 앞에 
나섰다. 서너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여러 가지 표본을 그에게 보였다. 그는 강
의 시간에 자주 빠졌으므로 책에서 보고 공부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당하자 쩔쩔맸
다. 모르는 것을 감추려고 우물쭈물했으며 시험관도 구태여 귀찮게 캐묻지 않았다. 그리하여 
금방 10분이 지나갔다. 그는 그 시험에 합격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붙여 놓
은 결과를 보려고 시험장에 가보니 놀랍게도 그의 번호가 합격자 번호 가운데 없었다. 놀라
서 그는 세 차례나 거듭 명단을 읽었다. 던스퍼드도 그 곳에 와 있었다.
  "참 안됐네." 던스퍼드가 동정했다.
  그는 조금 전에 필립의 번호를 물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필립은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합격한 것을 알았다.
  "아니, 괜찮아. 자네가 합격해서 잘됐네. 나야 7월에 다시 치르지 뭐."
  그는 일부러 태연한 척했으나 얼마 안 가서 말할 수 없는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처럼 보였다. 당장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밀드레드를 만나고 
싶은 마음의 유혹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한테서 위로의 말을 들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야 하든 말든 간에 한 번 보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결국 그
녀는 여급인 만큼 손님을 모시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그리워하는 
사람이라고는 단지 그녀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자신에게까지 감출 필요는 없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그 찻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물론 창피한 일이
었으나, 이제 그에겐 자존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혹시나 그
녀한테서 편지라도 오지 않나 하고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소를 병원으로 하면 그가 
받아 보리라는 것도 그녀는 알 만했지만, 편지는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든 말든 그녀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 명백했다. 그는 속으로 이런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자를 만나야지. 기어코 만나 봐야지.'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걷는 시간도 아까워, 보통 때는 웬만해서는 부르지 않는 
마차까지 집어탔다. 그는 그 찻집 밖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혹시 나가지나 않았을까 하
는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급히 걸어들어갔다. 그는 밀드레드를 재
빨리 찾아냈다. 자리에 앉자 그녀가 다가왔다.
  "홍차 한 잔하고 핫케이크를 주오."
  그는 간신히 그 말을 했던 것이다. 당장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이 혹시 죽었나 하고 생각했어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미소를! 필립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생각해 오던 지난번 
작별의 장면을 그녀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보고 싶으면 편지라도 한 장 해주리라고 생각했소."
  "너무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어요."
  그녀는 부드러운 말은 도무지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하필 이런 여자에게 얽매이게 
된 자기의 운명을 새삼스럽게 저주했다. 그녀는 차를 가지러 갔다가 그것을 가져왔다.
  "여기에 잠깐 안장도 괜찮아요?" 그녀가 물었다.
  "앉아요."
  "대관절 그 동안 어디 계셨어요?"
  "런던에 있었지요."
  "나는 또 방학이 되어서 어디 가신 줄로 생각했어요. 그럼 왜 오시지 않았어요?"
  필립은 핼쑥하고 정열적인 눈으로 밀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내가 말한 일이 있지 않소?"
  "그럼 지금은 누구를 만나고 있는 거죠?"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에게 굴욕의 잔을 들어 마시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말을 함부로 하는 여자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심히 그의 기분을 상
하게 했으나, 그녀로서는 그럴 의도는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남을 염탐한다는 것은 비겁하지 않아요? 당신만은 신사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그러지 마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문제는 간단하죠. 당신 같은 여자를 정신 없이 사랑하다니, 난 못난 바보였어. 당신이 나
를 서푼어치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말야."
  "당신이 신사라면 다음날 와서 용서를 빌 줄 알았어요."
  인정이란 조금도 없는 여자였다. 그는 그녀의 목을 바라보았다. 가지고 있는 케이크용 칼
로 그 목을 푹 찌르고 싶었다. 해부학을 충분히 공부했기 때문에 경동맥을 정통으로 찌를 
자신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의 창백하고 가냘픈 얼굴에 키스를 퍼붓고 싶기도 했
다.
  "내가 얼마나 열렬히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당신에게 알려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은 아직까지 나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어요."
  그는 파랗게 질렸다. 이 여자는 자기는 조금도 잘못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그녀는 그에게 빌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자존심은 있었다.
  '꺼져 버려라, 이년!' 이렇게 고함지르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사랑이 그를 
비굴하게 만든 것이었다. 밀드레드를 만나지 못하게 되느니 차라리 무슨 창피라도 달갑게 
받으리라.
  "밀드레드, 그 날 저녁엔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주시오."
  겨우 이런 말이 나왔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나도 이야기하겠어요. 그 날 저녁 난 당신과 함께 갔더라면 좋
았을 걸 그랬어요. 밀러가 신사인 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본것을 그 때 알게 됐어요. 그 사
람은 완전히 끊어 버렸어요."
  필립은 숨이 가빠졌다.
  "밀드레드, 오늘 저녁 나하고 같이 나가지 않겠소? 갑시다. 그리고 어디서 식사나 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숙모가 기다릴 거예요."
  "내가 전보를 치지. 찻집에 남아 있을 일이 생겼다고 꾸며댈 수 있지 않소? 그러면 알 게 
뭐요, 응? 제발 가요. 당신과 만난 지가 참 오래 되지 않았소? 조용히 얘기나 좀 합시다."
  밀드레드는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걱정 마시오. 옷을 어떻게 입었건 상관없는 곳으로 갑시다. 그러고 나서 극장으
로 갑시다. 제발 내 말을 들어 줘요. 그러면 난 정말 기쁘겠어."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애처로울 만큼 애원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가도 좋아요. 난 어디 가본 지가 퍽 오래 됐어요."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필립은 3월 말의 해부학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그와 던스퍼드는 골격 표본을 놓고서 
서로 질문을 해 가면서 함께 공부하여 인체 골격의 모든 부분과 여러 가지 결절과 홈 등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암기할 정도가 되었으나,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자 필립은 얼떨떨해
져서, 자기 대답이 모두 틀리는 것만 같아 올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낙제를 예상하
고 다음날 발표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두 번째의 낙제로써 그는 동기생 중에서 열등하고 
태만한 학생이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근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생각할 일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밀
드레드 역시 다른 여자처럼 분별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깨우쳐 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여성에 대해서 한 가지 확고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나더라도 꾹 참고 사소한 친절로 상대방을 
공략할 것이며, 신체적으로 피로했을 때는 사람의 마음이 연약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법이므
로 그런 기회를 이용할 것이며, 또 그녀가 일할 때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마음의 피난
처가 되어 주면서 그러한 기회를 엿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자기 친구들과 그들이 찬양하는 아름다운 숙녀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밀
드레드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말하는 인생에는 매혹과 즐거운 환락이 있었고 천박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자기의 회상속에 미미라든지 로돌프라든지 무제트라든지 그 밖
의 소설에 나오는 많은 인물의 진지한 사건들을 섞어 가면서 그는 밀드레드의 귀에 노래와 
웃음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가난뱅이 하층 생활 얘기나 아름다움과 젊음의 로맨틱한 이야기
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결점에 대해서는 결코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고 간
접적으로 암시함으로써 은연중에 굴복시키려 했다. 그는 그녀의 냉담에도 실망하지 않았고 
여자의 무관심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지리하게 하지나 않았는가 생각
해 보았다. 그는 다정하게 대하고 재미있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결코 성내지도 않았고, 불
평하지도 않았으며, 나무라지도 않았다. 약속을 했다가 그녀가 어기는 일이 있어도 이튿날 
그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가 변명을 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가 자기에게 고
통을 준다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고민을 나타내면 그녀는 싫증을 내
던 과거의 경험을 살려 조금이라도 그녀를 괴롭힐 만한 감정은 감추려고 노력했다. 참으로 
그는 영웅적이었다.
  밀드레드는 그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나(똑똑히 깨닫지 못
한 탓도 있으리라) 그 작용에 대한 반응이 조금씩 나타났다. 허물없이 이야기도 하게 되었
고 또 자기의 사소한 근심을 그에게 호소하게도 되었다. 그녀는 찻집 여자 지배인이나 동료 
여급 또는 자기 숙모에 대해서 언제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도 제법 잘하게 되
었다. 말하는 것이 모두 싱거운 것들뿐이었지만 필립은 지리한 기색도 없이 귀를 기울였다.
  "나에게 사랑을 내세우지 않을 때만은 당신이 좋아요." 밀드레드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
었다.
  "고맙군." 그는 웃었다.
  그녀가 한 그 말이 그를 얼마나 실망시켰는지, 또 그가 그처럼 가볍게 대답하느라고 얼마
나 힘이 들었는지를 밀드레드는 깨닫지 못했다.
  "이따금 키스하는 건 괜찮아요. 난 별로 아무렇지도 않고 당신도 즐거울테니까요."
  때로는 저녁 식사를 시켜 달라고 조르기까지 하게 되었으나, 그 요구가 여자 편에서 나온
만큼 그는 몹시 기뻤다.
  "아무한테나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녀는 변명삼아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소." 그는 빙그레 웃었다.
  4월 말경 어느 날 저녁, 밀드레드는 그에게 또 저녁을 사달라고 했다.
  "그럽시다. 그러고 나서 어디로 갈까?" 그가 물었다.
  "아이! 아무 데도 가지 말아요. 그냥 앉아서 얘기나 해요. 괜찮죠?"
  "괜찮구말구."
  '조금은 자기를 생각하게 된 게로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3개월 전 만하더라도 저녁 내내 
이야기를 하면서 지내자는 것은 그녀에게는 생각만 해도 지리해서 못 견디었을 것이었다. 
화기에 찬 저녁이었다. 그리고 봄이라는 것이 필립의 기분을 돋우었다. 지금은 사소한 것으
로도 만족했다.
  "여름철엔 강이 좋을 거요." 필립은 소호 행 버스의 2층에서 말했다.
  낭비를 삼가기 위해 마차를 타지 말자고 밀드레드가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버스를 탄 것
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일요일마다 우리 템스 강가에 가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바구니에 도시락을 넣
어 가지고."
  밀드레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밀드레드는 그의 손
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조금은 나를 좋아하게 된 모양이로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바보, 당신을 좋아하는 줄 인제야 알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데 오겠어요?"
  요즈음에는 두 사람은 이미 소호에 있는 조그마한 요리점의 단골 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
래서 그들이 들어가자 여주인이 웃는 얼굴로 맞아들였다. 급사도 인사를 했다.
  "오늘 밤에는 내가 주문할게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필립은 밀드레드가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메뉴 판을 넘겨 
주었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의 가짓수가 적어서 모두 몇 번씩 
먹어 본 것들이었다. 필립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한 두 볼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자 밀드레드는 담배를 피
워 물었다. 그녀가 담배 피우는 일은 드물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건 보기 싫어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오늘 저녁 내가 당신에게 저녁을 사달라고 해서 놀라지 않으셨어요?"
  "천만에, 난 기뻤소."
  "필립, 말할 게 있는데요."
  필립은 재빠르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그는 수
련이 잘 되어 있었다.
  "말해 보구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말했다고 또 바보 짓은 마세요. 사실은 결혼을 할까 해요."
  "뭐라구?"
  그는 달리 할말이 미처 생각나지 않았다. 이따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
으며, 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상상해 본 적도 없지 
않았다. 앞으로 느끼게 될 절망을 생각할 때 그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으며, 그를 사로잡을 
미칠 듯한 노여움의 폭발로 자살을 생각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느낄 감정을 너무나
도 완전히 추측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다만 맥이 풀린 듯한 느낌뿐이었다. 중병에 걸린 사람
이 기력이 완전히 약해져 병의 결과는 어찌되었든 이대로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기분
이었다.
  "그럭저럭 나이가 되어 가지 않아요? 이제 스물넷이니 나도 들어앉을 때가 됐어요."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산대 뒤에 앉아 있는 요리점 여주인을 바라보았고, 그리
고 어떤 여자 손님이 쓰고 있는 모자에 달린 빨간 깃털을 오랫동안 쳐다보고만 있었다. 밀
드레드는 초조해졌다.
  "축하해 주시겠지요?"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쩐지 거짓말 같은데. 저녁 먹으러 가자기에 기뻐한 것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우
습군. 결혼 상대는 누구요?"
  "밀러예요."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밀러하고?"
  필립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그 사람하고는 몇 달 동안이나 못 만나지 않았소?"
  "지난 주일 어느 날 점심 먹으러 와서 결혼하자고 했어요. 돈도 꽤 잘 버는 모양이에요. 
지금은 1주일에 7파운드지만 장래는 유망하대요."
  필립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내내 밀러를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그
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외국 태생으로 이국적인 매력이 있어 그것을 그녀도 의식적으
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드디어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군. 최고 입찰자에게 낙찰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 언제쯤 결혼할 작정
이오?"
  "다음 토요일이에요. 통고도 했어요."
  필립은 갑자기 격렬한 고통을 느꼈다.
  "그렇게 빨리?"
  "등기소에서 바로 결혼식을 할까 해요. 밀러가 그렇게 하재요."
  필립은 몹시 피로를 느꼈다.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곧장 돌아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계산서를 청구했다.
  "그럼 마차를 불러서 빅토리아 역까지 보내 드리죠. 오래 기다리기는 싫은 테니."
  "같이 가시지 않겠어요?"
  "당신만 괜찮다면 그만두고 싶소."
  "좋을 대로 하세요."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아니, 이젠 그만두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소. 나는 이 이상 내 자신을 불행하게 할 필요는 
없겠소. 어서 타시오. 마차 삯은 치렀소."
  그는 고래를 끄덕이고 나서 입술에 억지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는 버스에 뛰어올라 집으
로 돌아왔다. 자리에 눕기 전에 담배를 피웠으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별로 괴롭지도 않았
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 곧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필립은 밀드레드가 결혼하는 날을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아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맛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바로 그 토요일 아침에 일찍 도착할 예정이니 방을 구하
는 것을 도와 달라는 헤이워드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한시름을 던 것같이 느껴졌다. 마
음을 딴 곳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던 참이라 필립은 기차 시간표를 살펴보고 헤이워드
가 꼭 타고 올만한 기차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중 나갔다.
  그들이 이번에 런던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들은 역에다 짐을 맡
겨 두고 유쾌한 기분으로 나섰다.
  헤이워드는 곧 그의 특성을 나타내어 우선 한 시간 가량 국립 미술관에 가보자고 했다. 
얼마 동안 그림을 보지 못했는데, 생활의 조화를 위해서도 한번 가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
다. 파리에서 그들이 만난 이래 헤이워드는 근대 프랑스 시인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또 프랑스에는 시인들이 우후 죽순격으로 나타났으므로, 그는 아직 필립이 알지 못하는 몇 
사람의 새로운 천재 시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한 가지 화제는 새로운 화제로 이어
지고, 그들은 흥겹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해는 빛나고 공기는 따스했다.
  "자, 이젠 공원에나 가지. 방은 점심 먹고 나서 얻기로 하고." 헤이워드가 말했다.
  공원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느껴지는 그러한 날씨
였다. 나무들의 신록은 하늘을 배경으로 매우 아름다웠으며, 옅 푸른 하늘은 하얀 조각 구름
으로 수놓여 있었다. 풍치를 돋우는 연못의 한 끝에는 근위 기병대 병사들이 회색 빛깔로 
한데 모여 있었다. 그 근처의 가지런하고 우아한 풍경은 18세기의 회화와도 같은 매력을 가
지고 있었다.
  그 경치는 너무나도 목가적이어서 꿈속에서나 보는 숲 속의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와토(프
랑스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한층 산문적인 장 밥티스트 파테르(프랑스 화가)의 그림을 연
상시켰다. 필립의 가슴은 가벼워졌다. 지금까지 그는 책에서만 읽은 것이지만, 그가 자연을 
보는 태도도 미술적이었기 때문에 미술은 영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러 이탈리아 요리점으로 들어가 이탈리아의 유명한 포도주인 키엔티를 
주문했다.
  식사를 오래 끌면서 그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기억
을 일깨우기도 하고 파리에 있는 필립의 친구들 이야기도 하고, 책, 그림, 도덕, 인생을 논했
다.
  필립은 시계가 3시를 치는 것을 들었다. 지금쯤 밀드레드는 결혼식을 끝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는 가슴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잠깐 동안은 헤이워드가 말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유리잔에 키엔티를 가득 부었다. 술에 익숙지 않은 그는 한 잔에 얼근해졌다. 
우선은 근심도 사라지고 자유로웠다. 민감한 두뇌로 그처럼 몇 달 동안이나 놀았기 때문에 
헤이워드와의 이야기에 취해 있었다. 그 자신과 취미를 같이하는 말 상대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헤이워드의 방문은 필립에게 매우 유익했다. 필립은 날이 갈수록 밀드레드 생각을 잊게 
되었다. 그는 과거를 혐오의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찌해서 그러한 수치스러운 사랑에 굴복하
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고 그토록 그녀에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밀드레드
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와서는 그의 상상은 그녀의 인물이나 행동에 있어
서의 결점을 과장해서 나타냈다. 그런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
질 정도였다.
  '제기랄, 내가 얼마나 못난 녀석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일은 어느 파티에서 저지른 끔찍한 실수 같은 것이어서 유일한 치료법은 잊는 것뿐이
었다. 그가 경험한 타락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그를 도와 주었다. 그는 허물을 벗은 뱀과 같
아서 낡은 껍질을 구역질 날 만큼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는 것이 
몹시 반가웠다.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그 광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세
상의 기쁨을 잃었던가 하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사랑도 그것으로 충분했고 사랑이 그
런 것이라면 다시는 사랑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필립은 자기가 겪었던 일을 헤이워드에게 
약간 이야기해 주었다.
  "소포클레스가 아니었던가? 생명의 줄기를 파먹어 버리는 야수 같은 정열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구원해 줍소서 하고 빌었다는 그 사람 말야."
  필립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주위의 공기를 마치 난생 처음 마시는 것처럼 들이마셨으
며, 듣고 보고 하는 세상의 모든 일을 마치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고 
밀드레드에게 미쳤던 기간을 그는 6개월 동안의 고역이라고 불러 보았다.
  헤이워드가 런던에 자리잡은 지 며칠 후에 필립은 블랙스테이블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았
다. 어느 비공개 미술 전람회 초대장이었다. 그는 헤이워드를 데리고 갔는데, 목록을 쭉 훑
어보다가 로슨의 그림도 나와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친구가 보낸 게로군. 우리 가서 만나 봅시다. 필시 자기 그림 앞에 있을 테니."
  그 그림, 루스 챌리스의 반면상은 한쪽 구석에 걸려 있었고, 아닌게 아니라 그 곳에 로슨
도 있었다. 그는 비공개 전람회에 모여든 화려하 군중들 틈에 끼여 커다란 중절 모자에 퇴
색한 헐렁한 옷을 입고 약간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는 필립을 보자 어쩔 줄 모르고 
반갑게 맞더니 이전 같이 수다스럽게 런던으로 이사를 왔다느니, 루스 챌리스는 바람둥이였
다느니, 새로운 화실을 마련했다느니, 파리에서는 볼장 다 보았다느니, 초상화를 그려 달라
는 청탁을 여기저기서 받았다느니 하고 지껄여 댔다. 그리고 점심이나 같이 하고 지난날 이
야기나 실컷 하자고 했다. 필립은 로슨에게 헤이워드와는 파리에서 이미 안면이 있었을 것
이라고 회상시켰으나, 재미있는 것은 로슨은 헤이워드의 멋진 의복과 점잖은 태도에 약간 
눌리는 기색을 보인 것이다. 로슨과 필립이 함께 빌려 쓰고 있던 그 옛날 초라한 작은 화실
에서 볼 때보다는 그러한 의복과 태도가 헤이워드에게는 더욱 잘 어울려 보였다.
  필립은 퍽 순조롭게 공부를 해 나갔다. 7월에 제1차 종합 시험의 세 과목(그 중 두 과목
은 전번에 낙제한 과목이었다)을 보게 되어 있었으므로, 공부할 것이 상당히 많이 밀렸던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즐거웠다. 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모델을 찾고 있던 로슨이 
어느 극장에서 대역을 맡아 보고 있는 소녀를 하나 발견하여 모델로 앉아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간단한 오찬회를 열기로 했었다. 그 소녀는 시중하는 부인을 한 사람 데리
고 왔었으므로, 남녀 두 사람씩 짝을 맞추기 위해서 초대된 필립은 그 부인의 상대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만나 보니 그 젊은 부인은 우스운 소리를 잘하는 말주변이 좋은 여
자였으므로, 그 여자 상대가 되는 것은 용이했다. 그녀는 필립에게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말
했다. 그녀는 빈센트 광장에 셋방을 얻어 살고 있으며, 5시에는 언제나 차를 마시기 위하여 
집에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그녀의 집에 한 번 찾아갔다가 그녀의 환대에 크게 만족하여 다음에 또 찾아갔다. 
네스빌이라고 하는 그 여자는 수수하게 생겼지만, 명랑한 스물다섯 살 가량의 매우 작은 여
자였다. 명랑한 두 눈에 높이 올라붙은 광대뼈와 커다란 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얼굴
에 나타난 지나치게 대조적인 빛깔은 어딘지  근대 프랑스 화가의 어떤 초상화를  연상시켰
다. 살갗은 새하얗고, 두 볼은 불그스름하였으며, 눈썹과 머리카락은 검었다. 기묘하고 좀 부
자연스러운 인상이었으나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인상을 주었다. 남편과는 별거하고 
있어 값싼 단편 소설을 써서는 자기와 자녀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소설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업자가 두어군데 있어서 그녀는 일거리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원고료는 아주 박해서 3만 단어의 소설 한 편에 겨우 15파운드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결국 그건 독자들에게 2펜스짜리밖에 안 되니까요. 그리고 독자들은 똑같은 줄거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도 좋아하거든요. 나는 단지 등장 인물의 이름만 바꿀 따름이에요. 쓰다가 
싫증이 나면 세탁이랑, 어린애의 옷이랑, 이런 것을 생각해서 다시 펜을 들곤 하죠."
  한편 그녀는 임시 고용 여배우를 필요로 하는 여러 군데 극장에 다니며 일자리가 있을 때
는 그것으로써 한 주일에 16실링 내지 21실링을 벌 수 있었다. 하루 일이 끝나면 아주 고단
해서 잠자리에 녹아떨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최선을 다했다. 날
카로운 유머 감각이 있어서 여러 가지 괴로운 환경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패
해서 돈 한푼 없을 때도 있었으나, 이런 때는 보잘것없는 집 안 물건을 전당포에 잡히고 형
편이 나아질 때까지 버터 바른 빵만 먹었다. 그래도 항상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필립은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생활이 재미있었으며, 그녀는 자기의 고생에 
관해서 기묘한 이야기를 해서는 그를 웃겼다. 왜 더 훌륭한 문학 작품을 쓰려고 하지 않느
냐고 물어 보았으나, 그녀는 자기 재능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하루에 수천 단어를 써내려 
가는 형편없는 소설이었으나 그래도 벌이는 괜찮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서
는 그것이 제일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그러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는 미래의 희망이
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친척도 없는 것 같았고 또 친구들이라 했자 모두 그녀와 비슷한 가
난뱅이들뿐이었다.
  "장래 일은 생각지도 않아요. 3주일분의 방세나 치르고 한두 파우드의 식비나 내면 걱정 
안 해요. 장래 일을 현재 일처럼 걱정한다면 살맛이 있겠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
멍이 있거든요."
  얼마 안 가서 필립은 날마다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같이 차를 마시게 되었다. 따라서 자
기의 방문으로 그녀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방문할 때면 언제나 과자라든지 버터 또
는 약간의 차를 사가지고 갔다. 그들은 서로 세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녀의 세례명은 노
라였다. 여성한테서 받는 동정은 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으며, 또 그는 자기의 모든 걱정
에 기꺼이 귀를 귀울여 주는 벗을 가졌다는 것이 기뻤다. 시간은 꿈결과 같이 흘러갔다.
  그는 노라에 대해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그 여자는 정말로 즐거운 이야기 동무였다. 그는 
그녀를 밀드레드와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사람에게는 일절 흥미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밀드레드의 완고한 어리석음과 노라의 재빠른 이해력, 하마터면 밀드레드와 같은 
여자에게 평생 얽매일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노라에
게 자기의 쓰라린 사랑의 경험담을 죄다 이야기했다. 별로 명예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노
라가 그처럼 따뜻한 동정을 보여 주는 것이 즐거웠다.
  "인제 그 여자와의 관계는 모두 끝났지요?" 노라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말했다.
  그녀는 애버딘 종 강아지처럼 때때로 머리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놀고 있는 시간이라고는 없었으므로,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느질감을 놓지 않았
다. 필립은 그녀 가까이 편히 앉았다.
  "물론이죠. 끝나고 나니 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 가엾어라. 그 동안 퍽 괴로우셨겠군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동정심을 나타내기 위
해서인지 한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 손을 잡고 키스를 했으나 노라는 재빨리 잡아뺐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싫습니까?"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방긋 웃었다.
  "아아뇨."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으나, 웃느라고 벌어
진 두 입술은 떨고 있었다.
  "어때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구려. 친절하게 해주어서 정말 감사해요. 나는 당신을 대단히 좋아
합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 해요."
  필립은 그녀의 두 팔꿈치를 잡고서 끌어당겼다. 그녀는 뿌리치지도 않고 앞으로 조금 몸
을 굽혔다. 그는 그녀의 빨간 입술에 키스를 했다.
  "왜 이러세요?" 노라가 나직이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좋아서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두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고, 한 손으로 그
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 짓을 하시다니 당신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우리들은 참 좋은 친구예요. 이대로 
지내는 게 좋을 거예요."
  "정말로 내 양심에도 호소를 하려면 그렇게 내 볼을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걸요."
  그녀는 킬킬 웃을 뿐 그의 볼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했군요." 그녀가 말했다.
  필립은 한편 놀라면서도 약간 흥미를 느끼며 여자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두 눈이 부드
러워지고 젖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매력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노라, 나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는 또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당신같이 영리한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세요?"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소."
  그렇게 말한 필립은 팔을 돌려서 그녀를 덥석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노라는 웃고 얼굴을 
밝히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기꺼이 그의 포옹에 몸을 내맡겼다.
  이윽고 그는 포옹을 풀고 앉아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들었소."
  "왜요?"
  "정말 놀랍군요."
  "만족했어요?"
  "즐거웠소. 그리고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고마워요." 필립은 진심으로 외쳤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키스를 마구 퍼부었다. 이것이 필립에게는 진실하고 오래 갈 
수 있을 듯이 보인 행복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애인이 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친구 사이였다. 노라에게는 모성 본능이 있
어서, 필립에 대한 애정에서 만족을 느꼈다. 말하자면 어루만지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시
끄럽게 떠들어 댈 어떤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가정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필
립의 건강 또는 의복을 살피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그가 늘 마음을 쓰는 불구에 동정했고, 
그러한 동정은 본능적으로 친절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본시 젊고 튼튼하며 건강해
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었다. 또 그녀는 활기가 있었고 
명랑했다.
  그녀가 필립을 좋아하는 까닭은 모두 흥겨운 일에 대해서 자기와 같이 웃어 주었기 때문
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립이라는 인간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그러 이야기
를 필립에게 했더니, 그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원, 별소릴. 내가 말이 없는 사람이고 또 말참견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러는 게죠."
  필립은 노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인간적으로 매우 좋아했고, 같이 있
는 것이 좋았고, 그녀가 말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의해서 그는 자
신을 회복했는데, 이를테면 그녀가 그의 마음의 상처에 고약을 발라준 셈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한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용기와 낙관주의와 운명에 대
한 과감한 대결에 감동했다. 또 그녀는 무엇보다 솔직하고도 실제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
었다.
  "나는 말이죠, 교회라든가 목사들이라든가 그런 것을 일절 믿지 않아요. 그러나 하느님만
은 믿어요. 우리가 의무를 다하고 절름발이 개가 계단을 못 넘고 낑낑거릴 때 넘어갈 수 있
도록 도와 주는 한 하느님은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참견하지 않을 거예요. 이 세상
에는 좋은 사람이 많아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참 가엾어요."
  "그럼 내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립은 물어 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그런 거야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는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방세를 치르지 않고도 좋을 것이고 소설을 쓸 필요도 없을 거구요."
  노라 역시 여자라 아양을 잘 떨었다. 필립이 대화가가 될 가망이 없는 것을 깨닫고 파리
를 떠나온 것은 용기 있는 일이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극구 칭찬을 받았을 때 필립
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의 행동이 과연 용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의지의 박약
에 의한 것인지, 그는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노라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그는 마음이 흐뭇했다.
  다른 친구들이 본능적으로 지껄이는 화제에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야기했다.
  "당신이 그 발에 대해서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필립의 얼굴
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으나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사람들은 당신의 불구에 대해서 당신처럼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 호기심을 갖지만 다음부터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 거예요."
  필립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노하셨어요?"
  "아니, 별로."
  그녀는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아시겠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이 
불행하게 된다면 난 싫어요."
  "하고 싶은 말은 어떤 말이든지 해도 좋습니다." 필립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소."
  그녀는 다른 면에서도 그를 조롱했다.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그가 화를 내면 그녀는 웃어 
버림으로써 그를 더욱 점잖게 만들었다.
  "당신이 하라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소." 한번은 필립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라든지라구요?"
  "그렇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요."
  필립은 자기의 행복을 깨닫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노라는 아내가 남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으며, 그러고도 그녀는 그녀대로 자유로웠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가 
사귀어 온 친구 중에서 가장 좋은 벗이며 남자한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해심을 가진 
여자였다. 그들이 성적 결합은 두 사람의 우정을 강하게 맺어 주는 사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성관계를 맺은 것은 우정을 완전하게 해주었지만,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
은 아니었다. 필립도 성욕을 채웠기 때문에 마음이 침착해지고 타인과의 접촉에 있어서도 
보다 더 원만해졌다. 자기 자신을 바로잡은 느낌이었다. 이따금 그는 그 무서우 정열에 사로
잡혀 있던 지난 겨울을 생각하고 밀드레드에 대한 증오와 자기에 대한 혐오로 가슴이 뭉클
해졌다.
  시험이 다가오자 노라도 그에 못지않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의 열성에 필립은 기분이 
좋았고 감동했다. 노라는 시험 결과가 발표되면 빨리 와서 알려 줄 것을 약속하게 했다. 이
번에는 세 과목 모두 무난히 합격했다. 그것을 노라에게 알려 주었더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
며 기뻐해 주었다.
  "참 반가워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에이 바보, 그렇다고 울어?" 그는 웃었으나 자신도 목이 메었다. 그렇게 기뻐해 주는 데 
고마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필립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현기증이 나서 도로 자리에 누웠다. 그는 
문득 병이 난 것을 알았다. 손발이 쑤시고 오한으로 덜덜 떨렸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을 때 열린 문으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차 한 잔과 토스트 한 
조각만 달라고 부탁했다. 몇 분 후에 노크 소리가 나더니 위층에 하숙하고 있는 그리피스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1년 동안을 같은 집에서 살면서도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나 나누는 정
도였다.
  "몸이 편찮으시다지요. 어떻게 되셨는지 좀 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왔습니다." 그리피스
는 말했다.
  필립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아니, 별것 아닐 테니 곧 낫겠지요."
  "그러면 체온이나 재보는 게 어떨까요?" 그리피스가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필립은 오히려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지 마시고."
  필립은 체온계를 입에 물었다. 그리피스는 침대 옆에 앉아서 시끄럽게 지껄이더니 조금 
후에 체온계를 빼 보았다.
  "어이구! 이거 봐요. 누워 있어야겠소. 다콘 선생을 모셔다 진찰을 해야겠소."
  "원 별말씀을. 아무 일도 없어요.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필립이 말했다.
  "걱정 안 할 수 없어요. 열이 있으니 꼭 누워 있어야겠소."
  그의 태도에는 위엄과 친절이 뒤섞인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간호법이 훌륭하군." 필립은 미소를 짓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피스는 베개를 똑바로 해주고, 이불의 주름을 맵시있게 펴서 잘 덮어 주었다. 그는 탄
산수 병을 가지러 필립의 거실로 갔으나, 거기에 없는 것을 알자 방에 가서 가져왔다. 그리
고 덧문을 닫았다.
  "자, 한숨 자시오. 그러면 회진이 끝나는 대로 선생을 모시고 오겠소."
  필립은 몇 시간이나 홀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가 깨지는 듯했고 팔다리가 쑤셔서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건강하고 명랑한 그리피스가 들어왔다.
  "디콘 선생님이 오셨소." 그가 말했다.
  그 의사가 다가왔다. 필립도 얼굴만은 알고 있는 그 중년 의사가 담담한 태도로 몇 마디 
질문을 하고 진찰을 마치자 그리피스는 싱글거리며 물었다.
  "무슨 병입니까?"
  "유행성 감기요."
  "바로 그것이로군요."
  디콘 선생은 초라한 하숙방을 둘러보았다.
  "입원하시는 게 어떻소? 독방이 있으니까, 여기보다는 거기 가 있는 게 훨씬 편할 텐데."
  "아니오, 여기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필립이 말했다.
  그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고, 또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수줍어졌기 때문이다. 간병해 준
다고 시끄럽게 떠드는 간호사도 싫었고, 병원이 지나치게 깨끗한 것도 싫었다.
  "선생님, 제가 간호하겠습니다." 그리피스가 말했다.
  "그러시오, 그럼."
  의사는 처방을 해놓고 몇 가지 주의점을 말하고 돌아갔다.
  "자, 인제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일직 간호사, 숙직 간호사를 나 혼자서 겸한 셈이
니까." 그리피스가 말했다.
  "대단히 고맙소. 하지만 수고해 주시지 않아도 좋을 텐데."
  그리피스는 차갑고 마른, 커다란 손으로 필립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서 그의 친절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 그럼 난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오겠소."
  잠시 후에 그는 약을 가지고 와서 필립에게 1회분을 먹게 했다. 그리고는 위층에 책을 가
지러 갔다가 내려왔다.
  "오늘 오후에 내가 당신 방에서 공부해도 괜찮을까요?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일이 있거든 
불러 주시오."
  해질 무렵, 필립이 선잠에서 깨어 보니 그의 거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피스에게 
친구가 와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 밤에는 오지 말아 줘." 그리피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몇 분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가 그리피스가 거실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는 모양이었고, 그리피스가 또 뭐라고 말하는 것을 필립은 들었다.
  "나는 지금 이 방에 있는 2학년 학생을 간호하고 있는 참이야. 그 친구 유행성 감기를 앓
고 있어. 오늘 밤에는 트럼프놀이를 못하겠어."
  조금 후에 그리피스가 혼자 남게 되자 필립은 그를 불렀다.
  "아니, 오늘 밤 파티를 나 때문에 연기한 게 아니오?"
  "아니, 당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오늘 밤에는 외과 공부를 꼭 해야겠기에 그랬소."
  "연기하지 마시오. 나는 곧 나을 테니,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고."
  "아니, 괜찮소."
  필립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밤이 되자 헛소리까지 했다. 새벽녘에 그는 어렴풋이 잠에
서 깨어났다. 그는 그리피스가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난로에다 석탄을 한 덩어
리씩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파자마에 가운을 입고 있었다.
  "뭘 하고 있소?" 필립이 물었다.
  "깼구려.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불을 피우려고 했는데."
  "왜 잠을 자지 않으시오? 지금 몇 시나 됐는지요?"
  "5시쯤 됐을 거요. 오늘 밤에는 자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랬소. 위층에서 
안락의자를 가지고 내려왔소. 요를 깔고 누웠다가는 아주 잠들어서 불러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기에."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러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어떡할래요?" 필립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땐 당신이 나를 간호해 줘야지." 그리피스는 웃으며 말했다.
  아침이 되자 그리피스는 덧문을 열어제쳤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기 때문에 피곤하고 
창백한 것 같았으나, 활기에 차 있었다.
  "자, 이젠 몸을 씻어 드리지." 그리피스는 유쾌하게 필립에게 말했다.
  "아니, 나 혼자도 씻을 수 있어요." 필립은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만일 입원했더라면 간호사가 씻겨요. 나도 간호사만큼은 할 수 있어."
  필립은 대항할 기력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손과 발, 얼굴, 가슴 등을 씻도록 그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피스는 아주 부드럽게 씻어 주면서 계속 친절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서는 
마치 병원에서 하는 것처럼 홑이불을 갈고 베개를 똑바로 고쳐 주며 담요 같은 것도 정돈해 
주었다.
  "오늘은 아서 간호사장더러 와서 간호하라고 해야지. 그리고 디콘 선생도 오늘 아침 일찍 
오실 게구."
  "당신이 왜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지 모르겠소." 필립이 말했다.
  "내게는 좋은 실습이 돼요. 환자를 다루는 것은 재미있거든요."
  그리피스는 필립에게 아침 식사를 갖다 준 다음 옷을 갈아  입고 식사를 하러 나갔다. 10
분도 채 못 되어 그는 포도 한 송이와 꽃을 조금 가지고 돌아왔다.
  "당신은 친절하기도 하구려." 필립이 말했다.
  그는 닷새 동안 누워 있었다.
  노라와 그리피스는 교대해 가며 그를 간호했다. 그리피스는 필립과 나이가 같았지만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모성적인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는 생각이 깊고 온후하면서도 용
기를 북돋워 주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좋은 특질은 그가 접촉하는 사람이면 누구에
게든지 마치 건강을 나눠주는 것 같은 힘찬 활력이었다. 필립은 남들이 어머니나 누이한테
서 받는 총애를 받아 보지 못했으므로 이 활달한 청년의 모성다운 친절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는 점점 회복되었다. 그리피스는 그의 옆에 앉아서 자기의 연애담을 이야기하여 그를 즐
겁게 해주었다. 그는 바람둥이로 서너 명의 여자와 동시에 연애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
기에서 일어나는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가 꾸며 낸 계책은 흥미 진진한 이야깃거리였
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모든 일을 낭만적인 채색을 가하면서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는 빚에 쪼들려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전당포에 잡히고 있었으나, 그래도 항상 유쾌하고 호
탕하고 돈을 헤프게 썼다. 그는 천성이 타고난 모험가였다. 그는 미심쩍은 직업을 가진 사람
들과 건달들을 좋아했고, 따라서 런던의 술집을 드나드는 깡패들 가운데도 알고 지내는 사
람이 수두룩했다. 매춘부들도 그를 친구로 대했고, 자신들의 생활의 어려움과 성공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노름꾼들도 그의 경제적 곤란을 알고서 점심을 사거나, 5파운드 지폐도 
꾸어 주었다. 시험에는 번번이 낙제했으나, 그는 늘 태연했으며, 양친의 훈계에는 공손한 태
도로 복종했으므로 리즈에서 병원 개업을 하고 있는 그의 부친도 그에게 차마 크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책에 대해서는 나는 아주 무식하단 말야.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거든." 그리피스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피스에게는 인생이 너무나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풍만한 청춘 시절을 겪고 
그럭저럭 자격이라도 얻게 되면 아마도 개업의로서는 크게 성공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 사교적인 수단만으로도 넉넉히 환자를 고칠 수 있을 것이었다.
  필립은 학교 시절에 키가 훤칠하고 씩씩한 동급생을 우러러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
가 회복되었을 무렵에는 두 사람은 극진한 사이가 되었으며, 그리피스가 자기의 자그마한 
응접실에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필립과 더불어 시간을 보
내는 것을 즐거워하는 모습이 필립에게는 묘하게도 만족스러웠다. 필립은 때때로 그를 리젠
트가의 한구석에 있는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헤이워드는 그를 바보로 보았지만, 로슨은 그
의 매력을 인정했고,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그리피스는 푸른 눈과 흰 살
갗과 곱슬머리를 하고 있어, 그의 모습 자체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흔히 그들은 그리피
스가 모르는 일에 대해서 토론했지만, 그럴 때면 그리피스는 그 멋진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띠며 마치 자기가 참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처럼(사실 
그렇기도 했지만)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자리에 있는 마칼리스터가 주식 중개인이
라는 것을 알자 그는 열심히 묻기 시작했다. 마칼리스터는 점잖은 미소를 띠면서 만일 어느 
시기에 어떤 주식을 샀더라면 얼마를 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립도 군침을 삼켰다. 그도 
여러 면으로 예상 이상으로 돈을 쓰고 있었으므로 마칼리스터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음 기회에 좋은 주가 있으면 곧 알려 드리죠." 그 주식 중개인은 말을 이었다."때에 따
라서 있을 겝니다. 중요한 건 오직 때를 잘 포착하는 것뿐이지요."
  만일 50파운드쯤 벌어서 노라가 겨울에 그렇게도 필요로 하는 털외투를 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필립은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리젠트 거리에 있는 상점들을 들여다보
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골라 보았다. 노라는 필립의 인생을 그렇듯 행복하게 해주
었기 때문에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응당 받을 만했다.
  어느 날 오후였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노라와 차를 마시러 가기 전에 목욕이라도 하기 
우해 병원에서 돌아와 하숙집 방문을 열 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 주면서 그에게 말
했다.
  "어느 젊은 부인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어요."
  "나를요?" 필립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를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노라밖
에 없는데, 그러나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돌려보내려고 생각했지만, 세 번이나 찾아와서 만나지 못하느니 낭패스러워하는 것 같아 
내가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지요."
  그는 얘기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밀어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뜨끔했다. 밀드레
드가 와 있었다. 그녀는 앉아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 황급히 일어섰다. 그에게 다가오지도 않
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립 역시 너무도 놀라서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몰랐
다.
  "무엇 하러 왔소?" 그가 물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울기 시작했다. 손으로 눈을 가리지도 않고 그대로 두 팔
을 늘어뜨린 채 흐느껴 울고만 있었다. 마치 일자리를 구하려는 하녀처럼 보였다. 불쌍할 정
도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잘 몰랐다. 발걸음을 홱 돌려 방에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는 겨우 말했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해요." 밀드레드는 울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
  필립은 그녀를 선 채로 내버려 두었다. 우선 그는 침착해져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고,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절망한 듯이 중얼거렸다.
  "대관절 어떻게 된 영문이요?" 그가 말했다.
  "에밀이 나를 버렸어요."
  필립의 가슴은 뛰었다. 그리고 자기가 아직도 그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도 그녀를 잊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앞에서 풀이 죽
어 힘없이 서 있었다. 그 여자를 껴안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키스로 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아, 얼마나 오랫동안의 이별이었던가! 어떻게 그것을 참아 왔는지 자신도 잘 몰
랐다.
  "앉기나 하시오. 그리고 뭘 좀 마셔요."
  그는 의자를 불 가까이 끌어당겼다. 밀드레드는 앉았다. 위스키와 소다수를 섞어서 한 잔 
주자 그녀는 여전히 흐느껴 울면서도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는 애수에 잠긴 눈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눈 밑에는 큰 주름이 잡혀 있었고, 지난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그녀는 더 
여위고 창백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결혼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도 자신의 가슴을 부풀어오르게 하는지 필립도 알 수 없었다. 
억지로 그녀와 사이를 두려고 했으나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얹었다.
  "고생을 했다니 참 안됐군요."
  밀드레드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방해가 되는 모자를 벗
어 버렸다. 필립은 그녀가 그처럼 울 수 있는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것이 밀드레드의 마음을 좀 가라앉게 한 모양이
었다.
  "필립,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한테 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 봐요."
  "말할 수 없어요. 말 못 하겠어요." 그녀는 그의 몸을 뿌리치면서 외쳤다.
  필립은 여자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뺨을 그녀의 뺨에 갖다 댔다.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지 않소?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내가 한 번이라
도 나무란 적이 있소?"
  밀드레드는 조금씩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때때로 흐느껴 울었기 때문에 거의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지난 일요일에 에밀이 버밍엄에 갔었어요. 목요일에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금요일
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편지를 했더니 회답도 없어요. 그래 또 편
지를 보냈지요. 만일 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으면 내가 버밍엄까지 쫓아가겠노라고 했더
니 오늘 아침에 어느 변호사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할 권리는 없다고 하면
서, 정 내가 귀찮게 굴면 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법이 있나! 자기 아내에게 그렇데 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담. 그전에 싸움이라도 했
었던 게지."
  "그럼요. 지난 일요일에 한바탕 싸웠어요. 그이는 내가 싫어졌다고 말했어요.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곧 돌아왔어요. 그래서 진정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요. 어린애 낳을 달이 된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깜짝 놀랐어요. 될 수 있는 대로 감추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말했더니 어린애를 밴 것은 내 잘못이라고 하면서 무슨 대책을 
세웠어야 할 게 아니냐고 하잖아요. 그 자식이 내게 한 수작을 당신이 한번 들었더라면 좋
을 뻔했어요. 하지만 나도 진작부터 그 자식은 신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나도 
치를 돈이 없구요. 셋집 주인 여편네도 너무하지. 나를 도둑년처럼 취급해요."
  "나는 또 당신들이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는 줄 알았지."
  "그 자식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하이베리에 있는 가구가 달린 셋방을 얻었을 
뿐이에요. 그 자식은 정말 나쁜 놈이에요. 날더러 돈을 헤프게 쓴다고 했지만 헤프게 쓸 돈
을 주기나 했어요?"
  하여간 그녀는 하찮은 일과 중요한 일을 극단적으로 혼동하는 여자였다. 필립은 어리둥절
했다. 이야기 전체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 그런 불한당이 있나!"
  "당신은 그놈을 몰라요. 설령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빈다 하더라도 인제 나는 죽어도 그 
녀석한테 가지 않겠어요. 그런 빌어먹을 자식을 사랑했다니 나도 바보였지. 게다가 수입도 
말하 만큼 되지 않아요.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필립은 잠깐 생각을 했다. 그녀의 슬픔에 감동해서 자신의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럼 내가 버밍엄에 가볼까? 그 사람을 만나서 결판을 지어 주지."
  "그럴 수는 없어요. 그놈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내가 알아요."
  "그렇지만 그 사람도 위자료 정도야 각오하고 있겠지. 그런 의무는 회피 할 수 없지 않소. 
그런 일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니까 변호사에게 의뢰하는 게 좋을 거요."
  "내가 어떻게 의뢰해요? 돈 한푼 없는데."
  "돈은 내가 다 대주지. 우리 아버지의 유언 집행을 해두던 변호사인데 그분에게 편지를 
쓰지. 아니면 지금 당장 나와 같이 그분을 찾아가 볼까? 아직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아니, 편지나 써 주세요. 나 혼자 가겠어요."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밀드레드는 
돈이 한푼도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는 그전날 수표로 찾아다 놓은 것이 있어서 
그녀에게 5파운드를 줄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니, 나도 당신을 위해서 일하게 되어 기쁘오."
  "아직도 저를 좋아하세요?"
  "이전과 변함이 없어."
  그는 밀드레드가 내민 입술에 키스했다. 전에는 그녀가 그렇게 공손하게 몸을 맡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난날에 받은 온갖 고통이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밀드레드가 돌아가고 나서 그는 그녀가 2시간이나 자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는 더없이 행복했다.
  "가엾은 여자 같으니."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까지 느낀 것보다 더 큰 사랑으
로 가슴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8시경에 전보를 받기까지  그는 전혀 노라를 생각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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