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셋 몸
'무슨 일 있나요? 노라.'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뭐라고 회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가 때때로 한 것처
럼 오
늘 저녁도 노라가 출연하는 극장으로 가서 연극이 끝난 뒤에 그녀와 함께 거닐며 집으
로 돌
아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날 저녁따라 노라와 지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편지를
쓸까
했으나 여느 때처럼 '사랑하는 노라' 하고 시작하기가 싫어 전보를 쳤다.
'미안. 외출 불능. 필립.'
노라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위로 두드러진 광대뼈며, 곱지 못한 얼굴빛을 가진
못생
긴 조그마한 얼굴을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싫증이 났다. 그녀의 거친 살갗도 싫었다.
그는 전
보를 치고 나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다음날 그는 다시 전보를 쳤다.
'미안. 갈 수 없음. 편지하겠음. 필립'
밀드레드는 오후 4시에 오겠다고 했었다. 그에게는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거절할 수
도 없
었다. 그는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유리창을 내다보고 있다가 밀드레드의 모습이
보이
자 현관문으로 뛰어가 열어 주었다.
"그래? 닉슨 씨를 만났소?"
"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고 했어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대요. 그러니
이를 악
물고 참을 수 밖에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럴 수가 있나?"
그녀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무슨 이유를 말합디까?"
밀드레드는 구겨진 편지를 꺼내 주었다.
"여기 있어요, 당신 편지. 사실은 가지고 가지 않았어요. 어제는 당신에게 얘기를
못했지
만 난 에밀하고 정식 결혼을 한 게 아니었어요. 또 할 수도 없었고. 그 자식에겐 본처
가 있
고 어린애가 셋 있어요."
필립은 돌연히 질투와 고통을 느꼈다. 그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젠 다시 숙모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당신께 올 수밖엔 없었어요."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 남자를 따라간단 말이오?" 필립은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낮
은 목
소리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결혼한 남자인 줄 몰랐어요. 그래 결혼하자기에 마음
이 쏠렸
지요. 그러다가 두서너 달 동안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더니 다시 찻집에 찾아와서
결혼하
자기에 왜 그런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 응해 버렸던 거여요."
"그 사람을 사랑했던가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그 자식이 하는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말
에는 들을 만한 것도 있었어요. 날더러 후회시키지는 않겠다구요. 그리고 1주일에 7파
운드는
꼭 주겠노라고 약속했어요. 자기는 일주일에 15파운드를 벌고 있다고 했지만 벌기는
뭘 벌
어요? 그때 나는 매일 아침 찻집에 나가기도 싫고 숙모와의 사이도 좋지 못하던 때였
어요.
숙모는 나를 친척이기보다는 하녀처럼 대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내 일은 내손으로
해야지
내가 안 치우면 아무도 치워 주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 막심하지만 하여튼
그러한
때에 에밀이 찻집에 와서 결혼하자기에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같이 생각되
었던
거예요."
필립은 그녀 옆에서 물러나 테이블 쪽으로 옮겨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는 몹
시 자존심이 깎인 듯했다.
"화났어요, 필립?" 그녀는 동정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아뇨." 그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으나,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불쾌할 따름이오."
"왜요?"
"내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도 알 거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
는 물
불을 가리지 않았었소. 나는 당신이 다른 어떤 남자도 사랑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
했었소.
그런 불한당을 위해서 당신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다니 참으로 괴롭소. 그런 남자
가 무
엇이 그리 좋았기에."
"정말 미안해요, 필립. 나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정말이에요."
필립은 에밀 밀러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환자와도 같은 얼굴, 응큼한 푸른
두 눈,
멋은 내고 있으나 천박스러운 복장, 게다가 언제나 실로짠 빨간 조끼를 입고 있었다.
필립은
한숨을 쉬었다. 밀드레드는 일어나 그에게 오더니 한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필립, 날더러 결혼하자고 했지요.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하겠어요."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굽히고 필립에게 키스를
했다.
"필립, 마음이 변하지만 않으셨다면 이젠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무었이든지 하
겠어요.
당신이야말로 진짜 신사예요."
그는 심장의 고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말에 그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의 말은 고맙지만, 나는 이미 그 때의 내가 아니오."
"그러면 이제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아니오, 진정으로 사랑은 해요."
"그러면 좋은 기회인데, 왜 같이 즐기지 못해요? 지금은 아무 상관없지 않아요?"
필립은 그녀의 팔을 떼어 놓았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구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이래 상사병을 않고 있었소.
그렇지
만 이제는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불행하게도 생생한 상상력을 갖고 있소. 그 생각을 하
면 정
이 떨어지오."
"당신은 이상해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빙그레 웃었다.
"내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말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나 지금으
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군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필립."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했으며, 곧 옛날의 친밀한 사이로 돌아갔다. 시간이 늦어졌
다. 함
께 식사나 하고 극장에나 가자고 필립이 제안했으나, 밀드레드는 좀처럼 응하지 않았
다. 왜
냐하면 그녀는 상대에게 슬프게 보여 자기의 입장을 유리하게 지켜 가려는 생각이 있
었고,
따라서 곤란한 처지에 있으면서 오락장에 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본
능적으
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필립은 자기를 위해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
르렀다.
밀드레드는 따라가는 것이 자기 희생의 행동인 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가겠다고
했다.
그녀의 이해성 있는 행동을 보자. 그는 즐거웠다. 밀드레드는 전에 둘이서 자주 다니
던 소호
의 작은 요리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행복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더욱 쾌활해졌다.
버건디를 마시자 그녀는 얼근해져서 슬픈 척해야 한다는 것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필립은
장래에 대한 이야기나 하는 것이 무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은 일전 한푼 가진 것이 없지 않소?" 그는 기회를 타서 물었다.
"어제 당신에게 받은 것뿐이에요. 그 중에서 3파운드는 하숙집 주인 여편네에게 주
어 버
렸어요."
"그렇다면 10파운드쯤 더 줘야겠군요. 내가 그 변호사를 찾아가서 밀러에게 편지를
해 달
라고 해야겠소. 위자료를 조금은 받아 낼 수 있을 거요. 100파운드만 받아 내도 어린
애를 낳
을 때까지는 살아갈 수 있겠지."
"차라리 굶어 죽지 그 자식한텐 한푼도 안 받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버리다니, 괘씸하지 않소?"
"내게도 자존심이 있어요."
그러나 필립에게는 약간 난처한 문제였다. 의사 자격을 받을 때까지는 돈을 단단히
아껴
써야 했으며, 뿐만 아니라 내과 의사나 외과 의사나 개업을 하거나 혹은 남의 병원에
서 근
무하거나 간에 그 동안을 위해서도 돈을 얼마간 남겨 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필립은
에밀의
비열한 행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돈을 아껴 쓰라고 그녀에게 충고
할 수
도 없는 것이, 자칫하면 구두쇠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자식한테선 일 전 한푼 안 받을 작정이에요, 빌어먹을망정. 벌써 전부터 일자
리를 구
하려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런 형편(임신 상태)이라 몸에 해로울 것만 같아서요.
하여튼
몸을 생각해야 하지 않아요?"
"현재 일에 대해서 염려할 것 없소. 다만 일할 수 있을 때까지는 무엇이든지 내가
도와
줄테니까." 필립은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신만 믿어요. 너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줄 아느냐고 나는 에밀에게 말했어요. 필
립 당신
은 어느 모로 보든지 진짜 신사라고 그 녀석한테 말해 뒀어요."
필립은 점차로 그들이 어떻게 해서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에밀 밀러의
본처
는 남편이 때때로 런던에 가서는 그 동안 여자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취직
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본처는 이혼하겠다고 위협하고, 만일
그렇게
되면 회사측에서도 그를 해고 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들을 몹시 사랑했으므로
아이들
과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었다. 본처와 정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으
면 안 되게 되었을 때 그는 본처를 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밀드레드와의 사이에는 어
린애가
생기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 왔었다. 그러나 밀드레드가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어
임신
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자, 그는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한바탕 하고서 그대로 밀
드레드
를 차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애 낳을 달은 언제요?" 필립이 물었다.
"3월 초순이에요."
"앞으로 석 달 남았군."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밀드레드는 하이베리의 셋방에는 더 있지 않겠다고
말했고
필립 역시 그녀가 자기 가까이로 오는 것이 훨씬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튿날
방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녀는 복스홀 브리지가 근처가 적당할 것이라고 했
다.
"그쪽이 나중을 위해서도 가까워서 좋겠어요."
"그게 무슨 뜻이오?"
"거기에는 두어 달 남짓밖엔 머물러 있지 못하겠고, 그 다음엔 다른 집으로 가게 돼
요. 그
집은 점잖은 가정이에요. 그리고 집세도 1주일에 84실링만 내면 된 대요. 그 밖에 더
낼 건
없어요. 물론 해산할 때 의사에게 치를 돈은 따로 준비해야겠지만 요. 친구 하나가
거기에
가 있어서 알지만 그 집주인 아주머니도 좋은 사람인 모양이에요. 나는 그 아주머니에
게, 내
남편은 인도에 가 있는 장교인데, 어린애를 낳기 위해서 또 건강을 위해서 런던에
왔다고
그렇게 말해 둘까 해요."
밀드레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을 때 필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섬
세하고
가냘픈 자태와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는 차가우면서도 처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
의 가
슴속에 그가 예기치도 않았던 정열이 타오르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필립의 마음은 이
상하게
동요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필립은 하숙집에 돌아가면 노라한테서 편지가 와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아무것도 와
있지
않았고, 다음날에도 받지 못했다. 이 침묵은 그의 마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했다.
그들은
지난 6월 이래 그가 런던에 있는 동안 매일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라에게는 그가
이렇
다 할 이유도 없이 이틀이나 방문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혹시
밀드레
드와 같이 있는 것을 들키지나 않았나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노라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을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
다. 그
는 그 날 오후에 찾아가기로 했다. 그는 자기가 노라와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는 사
실에 대하여 오히려 그녀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관계를 계속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쾌해졌다.
이보다 앞서 필립은 복스홀 브리지가에 있는 어느 집의 2층방 두 칸을 밀드레드의
하숙방
으로 정해 주었다. 시끄럽긴 했지만 그녀가 창 밑에서 차량들의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좋아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온종일 왕래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그런 조용한 거리는 싫어요. 난 사람들이 북적
거리는
곳이 좋아요."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필립은 빈센트 광장을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를 때 그는 불안으
로 긴
장되었다. 노라를 너무 소홀히 대했다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노라가 그를 나무랄
까 두려
웠다. 그녀의 성미가 급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 싫었
다. 아마
도 제일 좋은 방법은, 밀드레드가 돌아왔는데,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은 전과 다름없
이 열렬
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더 이상 바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버리
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말하면 노라는 그를 사랑하는만큼 번민하리라고 생
각했다.
며칠 전만 해도 노라의 애정은 즐겁고 고마웠으나. 지금에 와서는 싫어졌고 귀찮아졌
다.
노라가 자기를 어떻게 맞아 줄 것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계단을 올라가는 동
안 그
녀가 취할 행동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문을 노크할 때 그는 자신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느꼈고,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무엇인지 열심히 쓰고 있던 노라는 그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발소리인 줄 알았어요. 이 장난꾸러기 ! 그 동안 어디 숨어 있었어요?"
그녀는 반가운 듯이 웃는 얼굴로 필립에게 다가와서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안았다.
그녀
는 그를 만나자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필립은 키스를 한 다음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
해 차
를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노라는 부산하게 불을 피워 물을 끓였다.
"어떻게 바빴던지 영 틈을 낼 수가 있어야지." 필립은 어색하게 말했다.
노라는 여느 때처럼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원고 청탁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어느 출판사로부터 처음으로 중편 소설을 청탁받았다는 것이며, 그것으
로 3백
15실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하늘에서 뜻밖에 떨어진 돈과도 같아요. 우리 이것으로 어디 같이 놀러가요.
옥스퍼
드에 가서 하루를 보낼까요? 나는 거기 대학들을 좀 보고 싶어요."
필립은 그녀의 눈에 자기를 힐난하는 빛이 보이지나 않나 하고 바라보았으나. 그런
기색
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밝고 도 명랑했다. 자기와 만난 것이 무척이나
즐거
운 모양이었다. 그의 가슴은 뭉클했다. 그는 달갑지 못한 사실을 차마 그녀에게 이야
기할 수
가 없었다.
노라는 토스트를 만들어서 조그맣게 썰어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 그의 입에 넣어 주
었다.
"이제 배가 불러요?" 그녀가 물었다.
필립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늘 좋아
하는 버릇으로 다가와서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아주 가벼웠다. 그녀는 아늑한
행복
감에서 오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팔에 등을 기댔다.
"재미있는 얘기나 해줘요." 노라가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빈말로라도 좋으니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어요."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되자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만은 노라를 행복하게 해주
자. 나중
에 편지로 말해 줄 수도 있겠지. 그 편이 오히려 쉬울 것 같았다. 그녀가 울 것을 생
각하자
마음이 괴로웠다. 노라가 키스를 해 달라고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므로 필립은 키스를
하면
서도 밀드레드의 핏기 없고 얇은 입술을 상상하고 있었다. 밀드레드에 대한 영적인
회상은
형체로서 계속하여 그의 의식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모습은 끊임없이 그의 주의를
산만하
게 했다.
"오늘은 통 말이 없으세요." 노라가 말했다.
노라가 말이 많다는 것이 그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필립은 이렇게
대답
했다.
"당신만 줄곧 이야기하고 내게는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그럴 수밖에."
"그러나 당신은 내 얘기는 하나도 듣지 않는걸요. 그건 실례예요."
필립은 노라가 어렴풋이라도 자기의 비밀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 약간 얼굴을
붉히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노라의 몸무게가 오늘은 견디기 힘들었고 자기를 건드리는 것
이 싫
었다.
"다리가 저려."
"아이, 미안해라." 노라는 그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신사 양반의 무릎에 앉는 버릇을 고칠 수 없다면 나는 몸이 좀더 가벼워 질 필요가
있군
요, 안 그래요?"
필립은 일어서서 일부러 다리를 쿵쿵 굴러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러
고 나서는 다시 그녀가 그의 무릎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난로 앞으로 가 섰다.
노라가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을 동안에 필립은 이 여자가 밀드레드보다 훨씬 더 좋은 여
자라
고 생각했다. 노라는 그를 즐겁게 해주는 점으로나 좋은 말동무가 된다는 것으로도
밀드레
드보다 훨씬 나았고, 영리하고 성품도 아주 좋았다. 노라는 그야말로 착하고 용감하고
정직
한 여자였다. 반면에 밀드레드에게는 이런 형용사로 표현할 만한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만일 필립에게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다면 노라와만 교제를 계속해야 할 것이
며, 그
녀는 밀드레드보다 훨씬 더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라는 그를 사
랑했고,
밀드레드는 단지 필립의 도움을 고맙게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걸국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녕
밀드
레드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루의 절반을 노라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단 10분
동안이
라도 밀드레드와 함께 있고 싶었고, 노라가 그에게 주는 모든 것보다도 밀드레드의
차가운
입술이 그에게는 더 기뻤던 것이다.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밀드레드는 나의 골수에 사무쳐 있다.' 필립은 생각했
다.
그녀가 냉혹했건 잔인했건 혹은 비열하고 우둔했건 욕심이 많았건 간에 필립은 밀
드레드
를 사랑하고 있었다. 노라와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밀드레드와의
불행을
택할 것이다.
필립이 일어서서 돌아가려고 하자 노라가 말했다.
"내일 도 오시죠, 네?"
"그럼." 필립이 대답했다.
내일은 밀드레드가 이사하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하므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나중에 전보를 칠 생각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밀드레드는 새 방을 보고서 퍽 만족해 했으며, 점심 후에 필립은
그녀를
데리고 하이베리로 갔다. 짐이라고는 옷을 넣은 트렁크 하나와 그 밖에 자질구레한
물건과
하숙방을 가정다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한 쿠션, 램프의 갓, 사진틀 등을 챙겨 넣은
트렁크
하나와 서너 개의 종이 상자뿐이어서 사륜 마차 꼭대기에 실을 수 있는 정도였다.
마차가
빅토리아 거리를 달릴 때 혹시 노라 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해서 마차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
앉았다. 전보 칠 기회도 없었지만, 복스홀 브리지가의 우체국에서 칠 수는 없었다.
그런 곳
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하고 밀드레드가 의아하게 생각할까 두려웠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갔으면서도 바로 가까이 있는 노라의 집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될
소리였다. 그는 노라의 집에 들려서 단 30분간이라도 만나고 와야겠다고 결심했으나,
곡 가
야할 의무같이 생각하자 화가 났다. 그녀 때문에 이렇게 비열하고도 불명예스럽고
교활한
꾀를 부려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그러나 밀드레드와 같이 있는 것은
행복
했다. 밀드레드가 짐을 푸는 것을 거들어 준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고, 더구나 자
기가 얻
어서 집세까지 치른 그 셋방에 여자를 맞이한 것인 만큼 인제는 마치 그녀가 자기의
소유물
이 된 것처럼 생각되어서 무척 행복스러웠다. 그는 밀드레드에게 수고를 시키고 싶지
않았
다. 그녀를 위해서 일해 주는 것이 즐거웠고, 그녀는 남이 자기를 위해서 기꺼이 일해
주는
성싶으면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짐을 풀어내려 정리해 주었
다. 밀드
레드가 오늘은 다시 외출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는 슬리퍼까지 가지고 와서 반장화를
벗겨
주었다. 밀드레드를 위해서라면 몸종 노릇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필립이 쭈그리고 앉아서 밀드레드의 구두 단추를 벗겨 주고 있을 때 그녀는 자랑
스러운
듯이 그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키스했다.
"당신을 이리로 모시느라고 나는 혼이 단단히 났소."
그는 방석과 사진틀을 정돈했다. 그 밖에 청자 항아리가 몇 개 있었다.
"꽃을 좀 사올 테니 그 병에 꽂으시오." 그가 말했다.
필립은 자랑스러운 듯이 자기가 한 일들을 둘러보았다.
"밖에는 나가지 않을 테니까 가운으로 갈아입어야겠어요. 뒤를 좀 내려 주어요."
밀드에드는 마치 필립이 여자이기나 한 것처럼 예사로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가 남
성이라
는 것은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이 요구가 나타내는 친
밀성에
필립은 가슴 깊이 감사했다. 그는 어색한 행동으로 지퍼를 내려 주었다.
"맨 처음 그 찻집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엔 내가 설마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당신에게
해주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소."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누구든 지퍼를 내려 줘야 옷을 벗을 수 있는 걸요." 그녀가 대답했다.
밀드레드는 침실에 들어가더니 값싼 레이스로 장식된 푸르스름한 가운으로 갈아 입
고 나
왔다. 필립은 그녀를 안락의자에 앉히고 차를 끊이며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같이 차를 마실 여가가 없겠는데, 귀찮은 약속이 하나 있으니 갔다가
30분
후에 돌아오겠소."
만일 밀드레드가 무슨 약속이냐고 다그쳐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하고 내심 걱정을
했으
나 그녀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이미 두 사람 분의 저녁 식사
를 준
비해 두었으니, 잠깐 다녀온 다음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자
고 말
했다.
필립은 서둘러 복스홀 브리지에서 전차를 탔다. 그는 노라한테 가면 오늘은 5분 이
상 있
을 수 없다고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라, 오늘은 인사할 시간밖엔 없군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필립은 방에 들
어서자
마자 이같이 말했다.
노라의 얼굴빛이 변했다.
"왜요? 무슨 일루요?"
필립은 하기 싫은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따라서 병원에서 임
상 강
의가 있어서 출석해야 한다고 대답할 때 그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기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같이 보여서 더욱 화가 끓어올랐다.
"그럼 할 수 없죠. 그 대신 내일은 온종일 같이 있어 주겠지요?" 그녀가 말했다.
필립은 노라를 얼빠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내일은 일요일이므로 하루종일 밀드
레드와
함께 있으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집에
밀드레드를 혼자만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이것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 보려고 생각했던 어느 장면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노라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그렇지만 고든 씨 부부를 내일 점심 식사에 초대해 놓았는데요. 벌써 1주일 전에
당신에
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고든 씨 부부는 지방 순회 공연을 마치고 일요일에 런던에 돌아오는 배우 부부였다.
"허, 참 미안하게 됐소. 깜박 잊었군." 필립은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못 올 것 같은데,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수는 없겠소?"
"그러면 내일은 뭘 하실래요?"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요."
"말하기도 싫은가요?"
"말 못 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말하라면 귀찮을 게 아
니요?"
노라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전과 같이 유쾌한 얼굴로 그에
게 다
가서서 두 손을 잡았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네? 필립, 내일은 당신과 같이 지내려고 손꼽아 기다리
고 있었
어요. 고든 씨 부부도 당신을 한 번 만나고 싶어해요. 같이 즐겁게 지내요."
"올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당신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에요. 안 그래요? 내가 언제 귀찮은 일을 당신께 요구
한 일
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이번 한 번만 당신의 그 약속을 취소해 줄 수 없겠어요? 어
떻게
하면 좋을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데." 필립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그녀는 아양을 떨며 물었다.
거짓말이라도 궁리해 볼 시간은 있었다.
"그리피스의 누이동생 둘이 내일 오기로 되어 있는데, 우리 둘이서 그 애들을 어디
로 데
리고 가기로 약속한 거요."
"그뿐이에요? 그리피스는 당신 말고라도 다른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노라는
다시
쾌활해지며 말했다.
그는 그보다 더 급한 핑계를 내걸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거짓말을 해도 서툰 거
짓말을
한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취소할 수는 없소. 일단 약속한 것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지
켜야겠
소."
"그렇지만 나하고도 약속하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내가 먼저 했을 텐데요."
"너무 그렇게 고집부리지 말아요." 그가 말했다.
노라는 발끈 성을 냈다.
"알았어요. 오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요. 당신이 지난 2,3일 동안 뭘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필립은 시계를 보았다.
"인제는 가봐야겠소." 그가 말했다.
"그럼 내일 못 오겠다는 거예요?"
"그렇소."
"그렇다면 다시는 오지 않아도 좋아요." 그녀는 다시금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좋을 대로 하라구. 좋을 대로 해." 그가 대꾸했다.
"더 이상 붙잡지 않겠어요." 노라가 빈정거렸다.
필립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 이상 시끄러워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울고불고 하는 일은 없었다. 길을 걸
어가면
서도 그는 그렇게 쉽사리 손을 끊게 된 자신에게 축하했다. 그는 빅토리아 거리로 가
서 밀
드레드가 좋아하는 꽃을 샀다.
저녁 식사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밀드레드가 가장 좋아하는 캐비어를 담은 작은
그릇을
식탁에 올려놓았고 집주인은 채소를 곁들인 커틀릿과 사탕과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필립은
밀드레드가 좋아하는 버건디를 주문했다. 커튼을 내리고 불을 피우고 램프에는 밀드
레드가
가져온 갓을 씌워서 방 안은 아늑했다.
"정말 가정적인 분위기인걸." 필립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 필립은 안락의자 두 개를 난로 앞으로 끌어당겨 함께 앉았다.
필립은 즐거운 듯이 파이프를 피워 물었다. 행복하고 느긋한 기분이었다.
"그럼 내일은 뭘 하겠소?" 필립이 물었다.
"난 털스 힐에 갈 작정이에요. 그 찻집 여지배인, 기억하시죠? 그 여지배인이 최근
에 결혼
했어요. 날더러 일요일에 놀러오라고 했어요. 물론 내가 결혼한 줄 알고 있지요."
필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당신하고 같이 지내려고 초대도 거절해 버렸는데."
만일 밀드레드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양보하여 같이 일요일을 지내도록 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 노라라면 서슴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이, 당신도! 어리석은 짓을 했군요. 나는 3주일 전부터 가겠다고 약속한걸요."
"그러나 어떻게 혼자서 가려고 하오?"
"내 남편이 출장 갔다고 말할 셈이에요. 그 여지배인의 남편은 장갑 장사를 하는
사람인
데 아주 수완이 좋다나 봐요."
필립은 잠자코 있었다. 쓰디쓴 그 무엇이 가슴속을 스쳤다. 밀드레드는 곁눈질로 그
를 힐
끔 쳐다보며 말했다.
"필립, 잠깐 놀다 오는 것을 그다지 원망하지는 않겠죠, 네? 이번만 외출하면 당분
간은 외
출이 없을 거예요. 약속을 해놓은 것이라서 그래요."
필립은 밀드레드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아니, 무슨 원망을 하겠소? 그저 당신만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그만이지, 나는
당신의
행복을 바랄 뿐이오."
안락의자 위에 밀드레드가 보던 푸른 장정을 한 얄팍한 책이 던져진 채로 엎어져 있
었다.
필립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보았다. 그것은 2펜스자리 중편 소설이었는데,
작자는
코트니 패지트였다. 패지트는 노라의 필명이었다.
"이 소설은 참 재미있어요. 다 읽었어요. 아주 잘 된 거예요." 밀드레드가 말했다.
필립은 언젠가 노라가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났다.
"내 소설은 하류 여자층에서 대단한 인기예요. 그들은 나를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는
모양
이에요."
필립은 언젠가 그리피스가 자기의 연애 사건을 고백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도
자기의
복잡한 연애 관계를 세세하게 그에게 이야기했다. 일요일 아침에 식사를 끝마친 두
사람은
잠옷 바람으로 난롯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필립은 그 전날 노라와 싸운 일을
자세
히 이야기해 주었다. 두통거리에서 그렇게 수월하게 벗어났으니 참 잘 되었다고 그리
피스는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금언을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부언했다.
"여자와 사랑을 맺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지만 일단 관계를 맺은 여자를 떼어버리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네."
필립 자신도 일이 그렇게 수월하게 처리된 것이 매우 통쾌했으며, 자신의 어깨라도
한 번
툭 치고 치하의 말을 던지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시원했다.
그는 털서 힐에서 재미를 보고 있을 밀드레드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행복하기만
하다
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자신을 실망시키면서 까지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 너
그러웠
다는 것은 그로서는 자기 희생의 행위였고, 그것을 생각하면 유쾌한 만족감으로 가슴
이 부
풀어올랐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에 그는 책상 위에서 노라로부터 온 편지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필립
지난 토요일에 지나친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용서하시고 전과 같이 오늘 오후 차
시간에
와 주세요.
당신의 노라
필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그 편지를 들고
가서
그리피스에게 보였다.
"회답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아." 그리피스는 그에게 충고했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그 여자가 나를 꼬박꼬박 기다릴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
단 말이
야. 우편 배달부의 노크 소리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네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그래. 나는 잘 알아. 그러니까 남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는 없단 말일세."
"여보게, 이런 일은 한쪽이 괴로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말이 안 나는 거라네. 그런
일은 이
를 악물고 참아야 하네. 그런 괴로움은 오래 계속되는 건 아니니까."
노라는 그로부터 그러한 심한 고통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다는 것을 필립은 깨달았
다. 그
녀가 얼마나 괴로워할 것인가를 그리피스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필립은 앞서 밀드레
드로부
터 그녀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번 민을 상기했다. 그는 그 때 경험했던
그런
괴로움을 남에게 맛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오라란 여자에게 고통을 주는 게 그렇게까지 마음 아프다면 그 여자에게로 돌
아가게
나." 그리피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필립은 일어서서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문제를 그것으로 끝맺지 못하는 노라 가 원
망스러
웠다. 노라는 이미 그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여
자들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유난히 눈치가 빠르다는데.
"어떻게 다른 도리는 없을까?" 그는 그리피스에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그렇게 떠들 건 없어. 사람은 이런 일은 곧 잊어버리는 걸세. 그 여
자도 아
마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자네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걸세. 사람은 자신이
일으킨
남의 감정에 대해서 과장하기 쉬운 법이라네."
그리피스는 말을 멈추고 재미있는 듯이 필립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
었다.
"이 봐, 자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기는 하네.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이 끝났
다고 해
줘. 아무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말해야 하네. 물론 그 여자는 괴로워하겠지만 뜨뜻미
지근하
게 하는 것보다는 아주 냉혹하게 잘라 버리는 게 결과적으로 그 여자를 덜 괴롭히는
거야."
필립은 책상에 앉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노라
당신을 불행하게 해서 미안하오. 그러나 나로서는 모든 일을 지난 토요일에 작정한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오.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않는 이런 상태를 계속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아요. 당신이 날 나가라고 하기에 그냥 나와 버렸소. 다시 돌
아가겠
다고 말하지는 않겠소. 안녕히.
그는 그 편지를 그리피스에게 보이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피스는 편지를 읽어
보고
는 눈을 반짝이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그만하면 되겠지." 그가 말했다.
노라가 편지를 받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필립은 불안한 오전을 보냈다. 그녀는
얼마나
놀랄까? 눈물을 흘릴 것을 생각하며 번민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슬퍼하
는 것
을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그 슬픔을 상상하는 편이 더 견디기 쉬웠다. 이제는 마음놓
고 밀
드레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오후에 병원 일만 끝나면 곧 밀드레드를 만나
러 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병원에서 나온 그는 우선 옷을 갈아 입으려고 그의 하숙으로 돌아왔다. 그가 방 열
쇠 구
멍에 열쇠를 밀어 넣자 등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좋아요? 반시간이나 당신을 기다렸어요."
그것은 놀랍게도 노라였다. 필립은 머리끝이 오싹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분개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결렬이 있었던 것 같은 감도 주지 않았
다. 그
는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
다.
"어서 들어와요."
그가 문을 열자 노라는 앞장 서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마조마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여자에게 담배를 권하면서 자기도 불을 붙였다. 그녀는 즐거운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난꾸러기! 어째서 그런 몹쓸 편지를 했어요? 만일 진정으로 그랬다면 난 속이
상했을
거예요."
"나는 진정으로 그런 거요. 장난이 아니오." 그는 정색하여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아요. 전에 내가 화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편지로 빌
지 않
았어요? 그래도 당신이 시원스럽지 않은 듯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 그야 물론
당신은
누구한테 얽매인 것도 아니고 나도 당신한테 요구할 권리는 없어요.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 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노라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충동에 쫓긴 듯이 두 팔을 벌리고 그에게로
다가
왔다.
"다시 사이좋게 지내요. 필립, 당신을 노엽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노라 가 그의 손을 붙들려고 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필립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때가 늦었소." 필립이 말했다.
노라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두 팔로 그의 무릎을 감싸안았다.
"필립, 제발 그런 어리석은 소리는 말아요. 나는 성미가 급해요. 그래서 당신의 기
분을 상
하게 한 줄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언제까지나 노여움을 풀지 않는 것은 어
리석은
일이에요. 서로 불행해진다면 무엇이 그리 좋겠어요? 우리들 사이가 얼마나 즐거웠
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노라는 필립의 두 손을 어루만졌다.
"아, 사랑해요,필립." 노라는 속삭였다.
필립은 노라에게서 몸을 빼고 방 저쪽으로 갔다.
"미안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소, 모든 것이 끝났소."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단 말씀인가요?"
"그런가 보오."
"당신은 나를 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결국 이 기회를 잡은 게지?"
필립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노라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잠시 필립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그가 뿌리치고 일어섰을 대 쓰러졌던 자리에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려고 하지도 않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물
방울이
연달아 뺨을 타고 굴러내렸다. 훌쩍거리지도 않았다. 바라보기가 너무 괴로워 필립은
몸을
돌려 버렸다.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
은 내 잘못이 아니오."
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정에 압도된 것처럼 그냥 기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
다. 필
립은 노라가 자기를 차라리 비난하는 편이 더 견디기 쉬울것만 같았다. 그는 노라가
노여움
으로 정신을 잃을 것이라 생각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는 서로 심한 말을 하며 싸운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그는 노라의 소리 없는 울음이 불안해져서 침실로가서
물 한
컵을 따라 가져다 주었다.
"물 좀 마시지 않겠소? 마음이 가라앉도록."
노라는 맥없이 입술을 대고 두어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손수건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눈물을 닦았다.
"물론 나는 당신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요." 노라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사랑이란 대개 그런 것이 아닐까? 한편에서 사랑하면 한편에선 다만 받을 뿐이고."
필립
이 대답했다.
그는 밀드레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쓰라린 고통이 가슴속을 스쳐갔다.
노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행하고 비참했어요. 내 생명 자체가 미웠어요."
그것은 필립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이었다. 지
금까지
그는 노라가 자기의 남편에 대해서나 빈곤한 생활에 대해서 불평하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그녀의 대담한 용기를 그는 언제나 존경해 왔
던 것
이다.
노라는 말을 이었다.
"그 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내게 친절하게 해주었어요. 나는 당신
을 슬기
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했어요.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렇게 이별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더구나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또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침착해져서 필립의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물 좀 더 주세요." 노라 가 말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면서 "내가 바보 노릇을
해서 미
안해요.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라서."
"오히려 내가 미안해, 노라. 나를 위해서 당신이 해준 모든 일에 대하여 나는 얼마
나 고맙
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오."
도대체 이 여자는 자기의 어떤 점에 반했을까 하고 필립은 생각했다.
노라는 한숨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가 남자한테 대접을 받으려면 심하게 굴어야 해. 상냥하게 대했다가는 도리어
천대
를 받으니까."
노라는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한참 필립을 뚫어지게 바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글세,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네?"
필립은 문득 결심을 했다.
"당신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이야기해야겠소.
사실상
나로서도 어쩔 수 없게 되었소. 밀드레드가 돌아왔소."
노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럼 왜 진작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나도 그만한 것은 마땅히 들을 만한데."
"글세, 그 말 하기가 어려워서!"
노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모자를 똑바로 썼다. 그리고 말했
다.
"마차를 좀 불러 주시겠어요?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
필립은 밖으로 나가서 지나가는 마차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노라가 뒤따라 거리로
나왔
을 때 그녀의 얼굴이 몹시 창백한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 갑자기 늙어 버린 것처럼
그녀의
걸음걸이는 무거워 보였다. 몹시 병에 시달린 사람처럼 보여서 차마 그녀 혼자 돌려보
낼 수
가 없을 것 같았다.
"집에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필립은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다리를 건너고, 어린
애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놀고 있는 지저분한 거리를 묵묵히 달렸다. 노라의 집 문 앞에 닿
았으나,
그녀는 바로 내리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일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노라, 용서해 줘요." 필립이 말했다.
노라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눈에는 다시 눈물이 어렸으나,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
였다.
"가여워라, 나 때문에 너무 근심하셨군요. 염려 마세요.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어
요. 깨끗
이 잊어버리도록 하겠어요."
노라는 재빠르게 필립의 뺨을 한 번 가볍게 쓰다듬고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차 삯을 치르고 나서 필립은 밀드레드의 숙소로 걸어갔다. 그의 가슴은 납덩어리
를 삼
킨 것처럼 무거웠다. 그는 자신을 책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과
일 상
점 앞을 지나갈 때 밀드레드가 포도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밀드레드에 대하
여 그
때그때 비위를 맞추어 주는 것도 또한 즐겁고 고마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후 3개월 동안 필립은 날마다 밀드레드를 만나러 갔다. 그는 책을 가지고 가서
차를
마시고 밀드레드가 안락의자에 누워 소설을 읽는 동안에 공부를 했다. 때때로 얼굴을
들고
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 때마다 행복스러운 미소가 그의 입술을 스쳤다. 밀
드레드
는 자기를 지켜보는 필립의 시선을 느끼곤 했다.
"나를 보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요. 바보, 어서 공부나 해요."
"폭군이군." 필립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어린애가 죽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관련된 사람 모두에게 다행
한 일
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쿵저러쿵 훌륭한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여자의 몸으로서 혼자 벌어먹기
란 여
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다가 달린 것이라도 있어 봐요, 아무것도 못 하지."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나라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어."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언제나 친절해요."
"원, 별소리를."
"당신의 친절에 대해 나는 아무런 보답도 못 해서 미안해요."
"난 보답을 바라지는 않소. 당신을 위해서 내가 뭘했다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거
요.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소. 나를 사랑해 주면 그만인 거요."
필립은 밀드레드가 자신의 육체를 은혜를 갚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예사로 내어 줄
수 있
는 상품처럼 생각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보답을 하고 싶은걸요.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는데."
"그거야 기다린다고 나쁠 것은 없겠지. 당신의 몸이 다시 좋아진 다음에 우리 어디
신혼
여행이나 갑시다그려."
"장난꾸러기!"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드디어 해산을 하기 위해서 산원으로 옮겨야 할 때가 왔다. 입원중에는 필립은 오
후에만
방문할 수 있었다. 밀드레드는 신분을 바꾸어 자기는 군인의 아내인데 남편은 소속
연대에
배속되어 인도에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립은 자기의 시동생이라고 원장 부인에게
소개했
다.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자기 남편이 인도에서 관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여자가 이
산원에
또 한 사람 있어요."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그런 것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겠소. 그 여자 남편과 당신
남편이
같은 배로 떠났다면 그만 아니오?"
"무슨 배로 떠났다고 할까요?"
"유령선으로."
밀드레드는 딸을 낳았다.
필립이 면회를 허락받아 들어갔을 때 아기는 산모 곁에 뉘어져 있었다. 밀드레드는
아주
기진해 있었으나, 모든 일이 끝나서 시원한 눈치였다. 그녀는 필립에게 아기를 보여
주면서
자신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았다.
"참 우습게 생겼지요. 어쩐지 내 자식 같지가 않아요."
아기는 빨갛고 쪼글쪼글하고 기묘했다. 필립은 아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는 뭐라
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더구나 그 산원의 원장이 자기곁에 서 있는 것도 거북했다.
자기
를 바라보는 원장의 눈치는 밀드레드의 이야기 같은 것은 곧이듣지 않고 자기를 갓난
아기의
아버지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요?" 필립이 밀드레드에게 물었다.
"글세, 메더린이라고 할지 세실리아라고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원장이 나간 사이에 필립은 몸을 굽혀 밀드레드의 입술에 키스했다.
"모든 일이 잘 돼서 기쁘오."
밀드레드는 가느다란 두 팔로 그의 목을 안았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필립."
"당신은 이제야 내 사람이 된 것 같군. 무척이나 오랫동안 난 당신을 기다렸지."
그 때 원장이 오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필립은 황급히 일어났다. 방 안에 들어선
원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3주일 후 필립은 아기를 안고 브라이튼으로 떠나는 밀드레드를 전송했다. 그녀는 빨
리 회
복되었고, 오히려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에밀 밀러화 함께 두 번 주말을 보낸 일
이 있는
어느 하숙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업상 독일로 가게 되었으므로 어
린애와
함께 간다는 내용의 편지를 하숙집에다 미리 보냈다. 밀드레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꾸며 대는 데 재미를 붙였고, 자세한 부분까지 지어 내는 것으로 보아 창작에
상당
한 재주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밀드레드는 브라이튼에서 아기를 기꺼이 맡아 길러 줄 여자를 찾아보겠다고도 말했
다. 그
렇게도 빨리 어린애를 떼어 버리려는 그녀의 냉정함에 필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
나, 밀
드레드는 어린애가 어머니를 따르기 전에 떼어 놓는 것이 어린애에게는 좋다는 상식을
구실
로 내세웠다. 그러나 2,3주일 동안 기르다 보면 밀드레드 같은 여자에게도 모성 본능
이 생기
리라고 필립은 생각하고 밀드에드에게 기르라고 권할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밀드레드는 아기를 과히 냉정하게 대하지는 않았고, 필요한 일은 다 했다.
때로는
아기가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고 필립에게 아기 이야기도 자주 했다. 그러나 마음속
으로는
무관심했다. 아기가 자신의 부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기는 아버지를
닮았다
고 하였고, 그애가 자라면 어찌하면 좋을 것이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무튼 어린애
를 낳
은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때 지금만큼만 세상 물정을 알았어도 어린애를 갖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필립이 어린애의 행복을 위하여 지나치게 생각한다고 도리어 그를
비웃었
다.
"당신이 이애의 아버지라고 해도 그 이상 떠들어대진 않을 거예요. 나는 에밀이 이
애 때
문에 당신의 반만큼이라도 걱정하는 꼴을 보고 싶어요."
기차 시간이 되었을 때 필립은 밀드레드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어린애에게도 키스
를 하
고 싶었으나, 밀드레드가 웃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밀드레드, 가거든 편지해 줘요. 난 당신이 돌아오는 날을 고대하겠소."
"시험에 낙제나 하지 않도록 해요."
필립은 열심히 공부해 왔다. 앞으로 시험이 열흘밖에 남지 않아서 그는 마지막 노력
을 기
울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시험에 합격하려고 열중했다. 첫째로 시간과 비
용(지난
4개월 동안 그의 돈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을 절약하고
싶었고,
둘째로는 이번 시험에 합격만 하면 힘든 학과는 끝나고 다음에는 내과와 산과 그리고
외과
를 이수해야 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해 오던 해부학이나 생리학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과목
들이었다. 그는 나머지 과목들을 내심 흥미를 가지고 기다렸다. 전번 시험에 실패했다
는 것
을 그는 밀드레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시험이 어려워서 대다수의 수험자가 첫 번
시험
에는 낙제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만일 합격하지 못했다고 하면 그녀는 자기를 멸시
하리라
고 생각했기 대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지껄여 남에게 창피를
준일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 만만하게 시험장에 들어갔다. 어느 과목의 시험이든 별로 어려운 것이
라고는
없었다. 그는 시험을 잘 치렀다고 생각했다. 시험의 후반은 구두 시험이어서 조마조
마했지
만, 용케도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그는 의기 양양하여 밀드레
드에게
합격의 전보를 쳤다.
그는 이튿날 밀드레드에게 편지를 써서 5파운드짜리 어음을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이렇게 썼다.
'만일 당신의 건강 상태가 좋아져서 이번 주말에 나를 만나고 싶다면 기꺼이 달
려가겠
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계획을 변경할 필요는 없소.'
그는 초조하게 편지를 기다렸다. 답장에는 진작 그런 줄 알았더라면 그대로 할 터인
데 마
침 토요일 밤에는 극장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또 필립이 그 하숙집에 와서 머
무르게
되면 그 집 사람들이 수군거릴 염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일요일 아침에 와서 하루
놀다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고, 함께 메트로폴에서 점심이나 한 다음 앞으로 어린애를
맡게
될 부인에게 가자고 했다.
일요일이 되었다. 좋은 날씨여서, 그는 그 날의 행운을 감사했다. 기차가 브라이튼
에 가까
워질 무렵 햇살이 차창을 통하여 담뿍 들이비쳤다. 밀드레드는 플랫폼에 나와서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마중을 나오다니 이거 참 고맙군." 밀드레드의 손을 잡으면서 그가 소리쳤다.
"내가 나오기를 바라셨지요."
"그야 여부가 있소? 그런데 얼굴이 썩 좋아졌는걸."
"네, 지금 있는 하숙집이 좋아서 그래요. 그 집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는게 좋을
것 같아
요.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에요. 아무튼 이번에 너무 오랫동안 집
에만 틀
어박혀 있어서 좀 나와서 재미있게 놀고 싶었어요. 어떤 날은 정말 심심해서 죽을
뻔했어
요."
밀드레드는 값싼 꽃으로 장식한 커다랗고 검은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제법
멋지게
보였다. 목에는 모조 백조의 털로 짠 기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대단히
여위었고, 전처럼 몸을 약간 앞으로 굽히고 걸었으나, 두 눈은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닷가로 걸어갔다. 몇 달 동안 그녀와 걷지 못했다는 것을 회상하고는 필립은
문득
자신의 발에 생각이 미쳐, 그것이 눈에 안 띄게 하려고 다리를 뻣뻣이 하여 걸었다.
"나를 만나서 기쁘지?" 그는 가슴속에 벅찬 애정을 느끼며 물었다.
"물론이죠. 물어 볼 필요도 없는 거예요."
"참, 그리피스가 당신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더군."
"건방져라."
그리피스에 관해서는 필립은 전에도 여러 번 밀드레드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바람둥이인가를 이야기했고, 그가 필립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여
말해
주던 그의 연애담을 필립은 밀드레드에게 되풀이해 주어서 그녀에게 재미있는 시간을
마련
해 주었다. 그 때마다 밀드레드는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
다. 필
립은 감탄해 가면서 그 친구의 훌륭한 용모와 매력을 과장해서 들려주었다.
"틀림없이 당신도 내가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요. 참 재미있고
유쾌한
친구인데 그런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걸."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을 때 밀립이 앓아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극진히 간호해 주
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그리피스의 희생적 정신을 극구 찬양했다.
"당신도 그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거요." 필립이 말했다.
"뭘요, 난 얼굴 잘난 남자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이들이 뽐내는 것이 난 싫어요.
"
"그래도 그 친구는 당신을 한 번 보았으면 하던데. 당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얘기
를 했
거든."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필립은 밀드레드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피스 이외에는 들려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금씩 말한다는 것이 결국 다 이야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밀드레드의
생김
새를 세밀한 데 이르기까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고 아마도 50번은 더 이야기했을
것이
다. 그래서 그리피스는 그 여자의 손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하얀가 하는 것을 정확
히 알
고 있었다. 필립이 그녀의 가냘픈 입술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였을 때 그리피스는 껄
껄 웃
었다.
"정말이지 다행히도 나는 무엇이든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는 않네. 그렇다면 인생
을 살
보람이 없어지지 않겠나?"
필립은 미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리피스는 고기와 술과 호흡하는 공기, 그 밖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사라의 환희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피스는 밀드레드가 해산할 동안 필립이 그녀의 뒤를 돌보아 준다
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참, 자네는 뭔가 보상을 받을 만하네. 하지만 돈푼이나 썼겠군그래. 난 그런 돈을
낼 수
있는 자네가 부러워."
"여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세.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겠
네." 필
립이 대답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필립과 밀드레드는 정거장을 향하여 걸었다. 그는 밀드레드
와 팔
짱을 끼고 앞으로 그들이 프랑스 여행을 하기 위해 세운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밀드레
드는 주말에 런던으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다음 토요일까지는 떠날 수 없다고 했다.
필립
은 이미 파리의 어느 호텔에 방까지 예약해 두고 표를 사는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2등으로 가도 괜찮겠지? 너무 낭비해서는 안 되고, 이왕이면 거기 가서 마음대로
쓰는
게 좋을 테니까."
라틴 구의 이야기는 벌써 1백 번이나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유서 깊은 거리를
거닐고,
뤽상부르의 아름다운 공원에서 정답게 앉아 쉴 것이다. 그리고 파리에서 볼 것을 다
보면
퐁텐블로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헐벗었던 나무에 바야흐로 새싹이 움트면 신록은 그
가 이
세상에 본 어느 것보다도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노래와도 같고 행복한
사랑의
애달픔과도 같을 것이다. 필립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밀드레드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그는 밀드레드의 두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았다.
"어떻소? 가고 싶지?"
"물론 가고 싶어요." 밀드레드는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그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나는 그 날까지 어떻게
견딜지
모르겠소. 무슨 일이 생겨서 못가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스럽군. 내가 당신을 얼
마나 사
랑하는지 이 안타까운 심정을 호소할 길이 없어 나는 때때로 미칠 것만 같소. 하지만
드디
어 드디어."
필립은 말을 중단했다. 그들은 정거장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들은 느릿느릿 걸어와
서 시간
을 낭비했기 때문에 필립은 겨우 작별 인사를 할 시간밖에 없었다. 그는 급히 키스를
한 다
음 개찰구를 향해서 달려갔다. 밀드레드는 그와 헤어진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쩔
뚝거리
며 달려가는 필립의 뒷모습은 보기에도 꼴불견이었다.
다음 토요일에 밀드레드는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날 저녁은 필립과 단둘이서 지냈
다. 같
이 극장 구경을 갔고, 저녁 식사 때는 샴페인을 마셨다. 그녀로서는 참으로 오래간만
에 갖는
런던에서의 즐거움이라 모든 것을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극장에서부터, 필립이 그녀
를 위
해 구해준 핌리코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 차 안에서 그녀는 그에게 바싹 붙어 앉아 있
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쁘지 않소?" 그가 말했다.
밀드레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좀처럼 애
정 표시
를 하지 않는 여자인 만큼 필립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그리피스를 초대했소." 그가 말했다.
"아이, 참 잘했어요. 나도 그분을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일요일 밤에는 그녀를 데리고 갈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안았으므로 필립은 밀드레드가
온종
일 자기와 단둘이만 있으면 지루해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리
피스는
유쾌한 친구이므로 하룻밤을 재미있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필립은
그들
두 사람을 다 좋아했으므로 그들이 서로 알고 친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남은 건 엿새뿐이오."
밀드레드와 헤어지면서 필립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일요일에 로마 노의 특별실에
서 저
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곳은 식사가 훌륭한데다 실제 가격 이상으로 비용이 많이
든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필립과 밀드레드가 먼저 도착해서 얼마 동안 그리피스를 기
다렸다.
"참 시간을 안 지키는 친구야. 아마 그 많은 애인들 중에서 누구하고 아직 놀고 있
는 모
양이지." 필립이 말했다.
그러자 조금 후에 그리피스가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잘생긴 남자였
다. 머
리와 몸의 균형이 잘 잡혀서 어딘지 모르게 위엄성이 있었고, 그것이 매력적인 풍모를
더해
주었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 대범하고 친절해 보이는 푸른 눈, 붉은 입술도 보
기에 아
름다웠다. 밀드레드가 황홀한 듯이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필립은 묘한 만족감
을 느
꼈다. 그리피스는 미소로써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밀드레드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제가 선생님 얘기를 들은 것만큼은 제 얘기를 듣지 못하셨을 거예요."
"헌 담도 마찬가지지." 필립이 한마디 했다.
"허, 이 친구 내 험담을 막 늘어놓은 모양인데." 그리피스는 껄껄 웃었다. 필립은
밀드레
드가 그리피스의 하얗고도 고르게 난 이와 유쾌한 미소를 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초면이지만 구면같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 내가 벌써부터 서로를 많이 소개해
두었
거든." 필립이 말했다.
그리피스는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가 마침내 마지막 시험에 합
격하여
의사 면허도 받았으며, 곧 북부 런던의 어느 병원에 상주 외과 의사로 임명되었기 때
문이었
다. 그는 5월 초순부터 근무를 시작할 예정인데, 그 사이에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다
녀올 작
정이었다. 따라서 런던에서의 생활도 그 주가 마지막이라 마음껏 재미있게 놀아 볼
생각이
었다. 그는 필립 자신은 흉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감탄하는, 그 유쾌한 실없는
소리
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별로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쾌
활한 말
투가 이야기를 생기 있게 해주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느끼는 어떤 생
명력이
그로부터 넘쳐흘렀다. 그것은 마치 체온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밀드레드도 필립
이 여
태껏 본 일이 없을 만큼 즐거워했다. 그래서 필립은 이 작은 파티가 크게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제2의 천성이 되어 버린 얌전빼는 조
심성마
저 잊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리피스가 말했다.
"당신을 밀러 부인이라고 부르기는 어쩐지 어색하군요. 필립이 언제나 당신을 밀드
레드라
고 불렀기 때문인가 보죠."
"그럼 자네도 그렇게 부르게나. 그렇다고 설마 자네 눈을 할퀴지는 않을 걸세."
"그러면 저분도 나를 해리라고 불러야 되지."
잠시 동안 필립은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본다는
건 얼
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피스는 필립이 항상 정색하고 있다고 해서 그
를 때
떄로 놀리곤 했다.
"필립, 해리는 당신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밀드레드가 미소를 띠었다.
"이 친구 과히 나쁜 놈은 아니거든요." 그리피스는 즐거운 듯이 필립의 손을 잡고
흔들었
다.
그리피스가 필립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의 매력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
두 술을
많이 못 하는 사람들이라 지금까지 마신 포도주로 얼근히 취해 있었다. 그리피스는 더
욱 수
다스러워져서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필립은 재미있어하면서도 제발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구수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연애담의
낭만과
웃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 모든 모험에서 그는 언제나 멋쟁이 노릇과 익살맞은
역할을
했다. 밀드레드는 흥분하여 눈을 반짝이면서 더 이야기하라고 졸라댔다. 그의 일화는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요리점의 등불이 꺼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놀랐다.
"어머나, 저녁이 참 짧기도 해라. 난 아직 9시 반이 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들은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안녕히 가세요." 밀드레드는 그리피스에게 인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
필립의
방에 차를 미시러 가려고 하는데, 오시지 않겠어요?"
"네, 그러지요." 그리피스는 미소를 띠었다.
핌리코로 돌아오는 길에 밀드레드는 필립에게 그리피스 이야기만 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
멋지게 차려입은 옷과 그의 목소리와 쾌활함에 그녀는 반해 있었다.
"그 사람이 좋다니 나도 기쁘오." 필립이 말하였다. "그 사람을 만나게 해 주겠다
니까 당
신이 코웃음치던 것 생각나오?"
키스를 청하는 듯이 그녀는 필립에게로 얼굴을 쳐들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
다.
"오늘 저녁에는 정말 즐거웠어요. 필립, 정말 고마워요."
"원 별소리를 다하는군." 그는 웃었으나, 그녀가 고마워하는 것에 감동되어 눈시울
이 뜨거
워졌다.
밀드레드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해리에게 내가 아주 홀딱 반했다고 전해 주세요."
"운, 알았어." 그는 웃었다.
"그럼 안녕히."
이튿날 그들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그리피스가 들어왔다. 그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았
다. 커다란 팔다리의 느린 동작에는 이상하게 관능적인 데가 있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동안
에 필립은 말없이 앉아 있었으나, 기분은 좋았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을 좋아했으므
로, 그들
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피스가 밀드레드의 관심을
끌었다
하더라도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 때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말
하자면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의 자기에 대한 애정을 믿는 나머지 아내가 다른
사내
와 허물없이 농담을 하더라도 다만 즐겁게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러나 7
시 반이 되었을 때 그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밀드레드, 저녁 식사를 하러 갈 시간이 다 됐소."
방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피스는 뭔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나는 이만 실례하겠소. 이렇게 늦은 줄은 몰랐는데." 마침내 그리피스가
말하였
다.
"오늘 밤 약속이라도 있으세요?" 밀드레드가 물었다.
"아니, 별로."
또 잠시 조용해졌다. 필립은 약간 불안해졌다.
"잠깐 손 좀 씻고 와야지." 필립은 말했다. 그리고 밀드레드를 향해 덧붙였다.
"당신 손 안 씻으려우?"
밀드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함께 가시지요?" 그녀는 그리피스에게 물었다.
그는 필립을 슬쩍 쳐다보다가 우울하게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필립의 눈과 마주쳤
다.
"어제 저녁에 같이 했는데, 방해되지 않을까요?" 그는 껄껄 웃었다.
"아이, 그건 상관없어요." 밀드레드는 마구 졸랐다. 그리고 필립에게 말했다. "당
신도 좀
권하세요, 필립. 뭐 방해될 거 있어요?"
"그 사람만 좋아한다면야 같이 가면 좋지."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리피스는 재빠르게 말했다.
"잠깐 내 방에 올라가서 옷 좀 갈아 입고 오겠습니다."
그가 나가자마자 필립은 화가 나서 밀드레드에게 돌아섰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 사람을 저녁에 청했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데. 아무 말
도 하
지 않으면 이상하잖아요?"
"허, 제기랄!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사람더러 할 일이 있느냐 없느냐 물어
봤소?"
밀드레드의 창백한 입술이 약간 뻣뻣해졌다.
"나도 가끔은 좀 재미있게 놀고 싶어요. 당신하고 단둘이만 있으면 언제나 따분해
서 못
견디겠어요."
그리피스가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손을 씻으로 침실로
들어
갔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식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필립은 기분이 좋지
않아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하면 그리피스와 비교해서 자기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
고 억
지로 불쾌감을 감추려고 애썼다. 그는 가슴속을 물어뜯는 듯한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술을
많이 마시고, 말을 하려고 했다. 밀드레드도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는 듯이 그의 비위
를 맞
추려고 노력하는 듯 친절하고 상냥했다. 필립은 질투심에 사로잡혔던 자신이 오히려
우습게
생각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극장을 향하여 마차를 달리는 동안 밀드레드는 두 사내 사이에 앉아
서 필
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노여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그리피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금 심한 고통이 그를
사로잡
았다. 그것은 진짜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그는 내심 크게 놀라 혹 밀드레드와 그리피
스가 서
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나 하고 진작 의심해 보았어야 할 의문을 자신에게 물어 보았
다. 의
혹, 분노, 낭패, 절망 등이 눈앞에 안개처럼 끼어 있어서 연극 같은 것은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한 마음의 동요를 감추어 보려고 애를 썼다. 이야기도 하고
웃기
도 했다. 그러나 그 떄 야릇한 자기학대의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는 무엇
좀 마
시러 가겠다고 말하고는 훌쩍 일어섰다. 밀드레드와 그리피스는 여태컷 한순간도 단둘
이 앉
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 두 사람만 남겨 두고 한 번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었
다.
"나도 가겠어. 나도 목이 어지간히 말랐어." 그리피스가 말했다.
"잔말 말게. 그냥 앉아서 밀드레드 상대나 해주게."
왜 그렇게 말했는지 필립 자신도 몰랐다. 자기가 받는 고통을 한층 더 견딜 수 없는
것으
로 만들려고 일부러 그들만을 한자리에 남겨 둔 것이다. 그는 술 파는 곳으로 가지 않
고 발
코니로 올라갔다. 거기서는 자기의 몸을 숨긴 채 아래층의 두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
다. 두
사람은 무대를 보는 것은 그만두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피스
는 여
느 때처럼 달변으로 말하고 있고, 밀드레드는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립은
머리
가 몹시 쑤시기 시작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돌아가면 방해가
될 것
이 뻔했다. 그들은 자기가 없는 동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지금 얼마
나 괴
로워하고 있는가! 그는 부끄러움에 몸이 화끈거렸다. 자기가 없는 것을 그들이 얼마나
즐거
워하는가를 그는 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지만, 모자와 외투를 두고 나온 데다 나중에 많은 변명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밀드레드가 귀찮아하는 기색을 본 듯하여 그
는 내
심 낙담했다.
"꽤 오래 걸렸군." 그리피스는 웃는 얼굴로 맞아 주었다.
"아는 사람을 만났어. 얘기를 하느라고 빠져나올 수가 있어야지. 둘이서 잘 구경하
고 있을
줄 알았어."
"응, 나는 재미있어. 밀드레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녀도 아주 만족한 듯이 킥킥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필립이 주춤하리 만큼 야비
한 무
엇이 있었다. 그는 이제 돌아가자고 말했다.
"응, 가세. 그럼 우리들이 마차로 호텔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리피스가 말했
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꾸며서 어떻게 해서라도 필립과 단둘이 남게 되지 않으려고
그녀가
그리피스에게 시켰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차 안에서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지도
않았고
도 밀드레드 역시 손을 내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그녀가 그리피스의 손
을 잡
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 맺혀 잇는 생각은 모두가
참으로
비열하다는 것뿐이었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들 두 사람이 자기 몰래 만나기 후해
무슨
계략을 꾸몄을까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그들만을 남겨 둔데 대해서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 두 사람이 일을 꾸미라고 자리를 비켜 준 셈이었다.
"마차는 그대로 잡아 두게. 너무 피곤해서 집에까지 걸어가지 못하겠으니." 필립은
밀드레
드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리피스는 유쾌한 듯이 지껄이며, 필립이 묻는 말에나 겨우 대
답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리피스는 무슨 언짢은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
아야 할 것이라고 필립은 생각하였다. 필립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자 마침내 그리피스
도 갑
자기 불안해져서 말을 멈추었다. 필립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 어
색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는 중에도 시간은 지나갔고, 잘못하면 말할 기회를 놓칠 것
만 같았
다. 차라리 모든 것을 탁 털어놓는 것이 속시원하겠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 밀드레드를 사랑하나?" 그가 정색하여 물었다.
"내가?" 그리피스는 껄껄 웃었다. "아니, 자네 오늘 저녁 이상하게 굴더니, 그 때
문에 그
랬었구먼.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이 사람아."
그는 필립의 팔에 팔짱을 끼려고 했으나, 필립은 몸을 피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필립은 알아차렸다. 그리피스로 하여금 밀드레드의 손을 잡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해리, 그야 자네한테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자네에겐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잖은
가. 제발
나한테서 그 여자를 뺏어가진 말아 주게. 그 여자는 내 생명이나 다름없어. 난 정말
비참했
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고, 복받쳐 오르는 흐느낌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필립은 자신
이 몹
시 부끄러웠다.
"허, 이 사람아, 인제 자네를 괴롭힐 일은 조금도 하지 않겠네. 난 자네를 너무 좋
아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어. 바보 같은 장난을 했을 뿐이야. 자네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
알았
더라면 좀더 조심했을 텐데."
"그게 정말인가?" 필립이 물었다.
"아 뭐, 그까짓 여자, 난 서푼어치도 생각지 않네. 맹세하네."
필립은 마음이 놓였는지 한숨을 쉬었다. 마차가 하숙집 문 앞에 섰다.
이튿날 필립은 기분이 좋았다. 너무나 붙어 다녀서 밀드레드가 귀찮아하지나 않을까
염려
하여 그는 저녁 식사 때까지는 만나러 가지 않기로 했다. 필립이 데리러 갔을 때 그녀
는 이
미 외출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시간을 이렇게 잘 지키다니 참 놀랄 만하다고 그녀를
놀려
댔다. 그녀는 필립이 사준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멋지다고 한마디했다.
"다시 가서 고쳐 달래야 하겠어요. 스커트가 잘못 되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피리에 갈 때 입으려면 빨리 양장점에 가서 고쳐 달라고 재촉해야겠소."
"시간이야 넉넉하겠죠."
"앞으로 사흘밖에 안 남았어. 11시차로 갈까? 어때?"
"좋을 대로 하세요."
거의 한 달 동안은 그녀를 독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를
탐욕
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자신의 정욕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도대체 나는 당신이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지당한 말씀."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몸은 너무도 여위어서 뼈가 보일 정도였다. 젖가슴은 남자처럼 펑퍼짐했다.
얇고
핏기 없는 입술은 보기 흉했으며, 살갗은 옅은 푸른빛이었다.
"여행할 때는 블로드 정을 많이 사 줘야겠는걸." 필립이 웃으면서 말했다. "살찌고
혈색도
좋게 해 가지고 데려올 테야."
"난 살찌고 싶지 않아요."
밀드레드는 그리피스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필립은 그녀에
대해
꽤 자신이 생긴 것 같아 다소 악의적으로 말했다.
"어젯밤에는 해리하고 아주 재미를 많이 보는 모양이더군."
"그 사라에게 내가 반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웃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어떻게 알아요?"
"내가 물어 봤지."
그녀는 필립을 쳐다보면서 잠시 망설이더니 얼굴에 기묘한 빛을 띠었다.
"그럼 이 편지 좀 읽어 보시겠어요? 오늘 아침 그이한테서 온 건데."
그녀는 봉투 하나를 꺼내 놓았다. 필립은 시원시원하고 똑똑한 그리피스의 필적을
보았다.
8페이지가 넘었다. 글솜씨도 좋고 솔직하고 매혹적인 편지였다. 여자와 사랑을 많이
해 본
남자의 편지였다. 그는 밀드레드에게 자기는 아주 열정적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는 것,
처음 그녀를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필립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
고 있
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
었다
는 것, 필립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 자기는 자신이 몹시 부끄럽지만, 그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무슨 큰 힘에 붙들린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또 그녀가 좋아할 구구한 찬사가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는 내일 점심을 같이 해주겠다니 감사하며, 보고 싶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
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편지의 날짜는 어젯밤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그 날 밤 필립과 헤어진 후에 썼으며, 그리피스는 필립이 잠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무렵에
부치러 나갔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편지를 읽었으나, 겉으로는 놀란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
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조용하게 그 편지를 돌려주었다.
"어때? 점심은 재미있었소?"
"그럼요." 그녀는 힘주어서 대답했다.
"그리피스를 너무 믿지 마오. 그는 나비 같은 바람둥이라오. 알겠소?"
밀드레드는 편지를 다시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걸요." 억지로 냉정한 목소리를 내서 그녀는 말했다. "무
엇이 나
에게 닥쳐왔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나로서는 좀 심각한 문제인걸. 안 그렇겠소?" 필립이 물었다.
그녀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당신도 별로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지요?"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머리털이라도 쥐어뜯으면 좋겠소?"
"당신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어요."
"이상한 일이군, 나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미리부터 알
고 있었
어. 아무튼 당신들 두 사람을 붙여 준 내가 미련한 놈이지. 물론 그 사람이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낫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나보다 쾌활하고 미남이고 유쾌하고 당신을 즐겁게
해줄
얘기도 할 수 있고."
"그게 무슨 말인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요. 내가 미련한지는 모르지만, 그건 어찌할
수 없
어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는 아니에요. 어림없지요, 그렇고말
고. 당신
은 나한테 지나치게 잘난 척해요."
"아니, 싸음을 할 작정이오?" 필립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천만에요, 그렇지만 난 모르겠어요.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나를 마치 무어라 할까,
그렇게
취급하는지, 뭐라 할까."
"그건 미안하게 됐소. 당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소. 다만 조
용하게
얘기나 할까 했지.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으로 떠들고 싶지는 않소. 당신이 그
사람에
게 반한 줄은 나도 알았지만,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기분
나쁜 것은 그자가 당신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이오. 그자도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열
중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소. 당신을 서푼어치도 생각지 않는다고 내게 말한 그 녀석이 침도
마르기
전에 이따위 편지를 당신에게 쓰다니 얼마나 더러운 놈인지."
"당신이 그 사람에게 욕설을 해 가지고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면 그
건 큰 잘못이에요."
필립은 말이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자기의 참뜻을 알아듣게 할는지 알 수 없었
다. 냉
정하게 이치를 따져 가면서 말하고 싶었으나 마음이 산란해서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
다.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오래 가지 못할 사랑인데, 모든 것을 희생해 보았자 아무런
보람
도 없는데 아니오. 하여간 그 사람은 한 여자와 교제를 해도 열흘이 못 가는데 당신은
더구
나 냉정한 여자이니 이런 일은 당신에게 별로 이로울 것은 없을 거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생각일 뿐이에요." 밀드레드가 싸움이라도 할 듯 덤비는
바람에
필립은 난처해졌다.
"당신이 그자를 사랑한다면 어찌할 수 없소.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참아 보겠소.
당신과
나, 우리는 제법 잘 지내지 않았소? 그리고 나는 조금도 당신에게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는
데, 당신은 그렇게 나오는구려. 그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잘 알
고 있
소. 그러나 당신도 나를 좋아하기는 했던 것이오. 그러니까 처음 예정대로 파리로 여
행을 가
면 당신도 그리피스를 잊어버리게 될 거요. 당신이 그 사람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결심
만 한
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게요. 나도 당신한테 뭘 좀 요구할 자격이 있을 성싶은
데."
밀드레드는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 식사만 했다. 오랜 침묵이 계속되어 숨막힐
지경
이 되었을 때 필립은 밑도 끝도 없이 단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밀드레드가 듣고 있지
않는
것을 일부러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그저 대답만 할 뿐 자발적으로는 한마디
도 하
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무뚝뚝하게 가로막았다.
"필립,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못 갈 것 같아요. 의사가 가서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그럼 언제 갈 수 있겠소?"
밀드레드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겁이 난
듯이
시선을 피했다. 순간 그가 두려웠던 것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깨끗이 취소해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요컨대 나는 당신과 함께
못 가
겠어요."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나도 짐작했어. 그러나 약속을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단
말이야.
차표, 배표, 뭣이든 이미 다 샀으니까."
"당신이 그러지 않았어요. 가기 싫으면 억지로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나도 마음이 변했어. 더 이상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데
려가겠
어."
"필립, 나는 친구로서 당신을 퍽 좋아해요.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요. 나는 갈 수 없어요, 필립."
"1주일 전만 해도 좋아하며 가겠다더니."
"그 때는 지금과 형편이 달랐지요."
"그러피스를 만나기 전이었다는 게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도 할 수 없다고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얼굴은 골이 난 듯이 굳어지더니 눈앞에 있는 접시만 들여다보았다. 필립의
얼굴
도 화가 나서 새파랗게 질렀다. 할 수 있다면 불끈 쥔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갈겨 주
고 싶
었다. 그리고 그는 퍼렇게 멍든 그녀의 눈자위까지도 상상해 보았다. 열여덟 살쯤 되
어 보이
는 두 청년이 가까운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끔 밀드레드를 쳐다보곤
했다.
예쁘게 생긴 여자와 식사를 하고 있는 그를 부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필립을
대신하
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침묵을 깨뜨렸다.
"나하고 같이 간다고 무슨 좋은 일이나 있나요? 나는 언제나 그리피스를 생각하고
있을
게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별로 재미가 없을 게 아니겠어요?"
"내가 재미있건 없건 그것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야." 그가 대꾸했다.
밀드레드는 필립이 방금 한 말을 무슨 뜻인가 생각하다가 갑자기 낯을 붉혔다.
"그건 너무 심해요."
"그게 어쨌단 말이오?"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정말 훌륭한 신사인 줄 알았어요."
"천만의 말씀!"
재미있는 대답이었다. 그는 말하면서 그만 웃어 버렸다.
"제발 웃지 말아요." 그녀가 큰소리를 쳤다. "필립, 나는 당신과 같이 갈 수 없어
요. 대단
히 미안해요. 미안한 줄은 나도 알고 있지만 가기 싫은 걸 어떡해요?"
"당신이 고생하고 있을 때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주었는데, 벌써 잊어버렸소? 어린애
를 낳
을 때까지 생활비를 제공했고 치료비도 무엇이고 다 치러주었소. 브라이튼에 가는
비용도
내가 치러 주었소. 어린애의 양육비도 대주고 있고, 당신 옷값도. 그렇소, 지금 입고
있는 옷
의 어느 한 조각이라도 내가 사주지 않은 것이 있소?"
"만일 당신이 신사라면 내게 해준 일을 내 앞에게 낯뜨겁게 늘어놓지는 않을 거예
요."
"내가 신사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 응? 내가 신사였더라면 당신 같은
더러운
여자하고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나를 좋아하건 말건 그런 건 상관
없어!
난 바보 취급을 당한 게 분하단 말이야! 나와 같이 간다면 좋지만, 안 갈 테면 네
멋대로
해봐!"
밀드레드의 두 볼은 분노로 빨갛게 상기되었다. 말할 때의 그녀의 목소리는 평상시
의 점
잔빼던 말투는 자취를 감추고, 속되고 상스러운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난 한 번도 당신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당신은 강제
적으로
나왔지 뭐해요? 내게 키스할 때마다 난 몸서리가 났어요. 인제는 굶어 죽더라도 당신
따위
한텐 손대지 못하게 할 테예요!"
필립은 접시에 있는 요리를 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목구멍의 근육이 움직이지 않았
다. 그
는 술을 벌꺽벌꺽 들이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몸이 떨려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밀드레드가 일어서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하얀 테이블 보만 들
여다보
고 있었다. 만일 거기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필립은 그녀의 목을 얼싸안고 정열적으로
키스
를 했을 것이다. 그녀의 입에 입술을 지그시 누를 때 여자가 그 길고 새하얀 목을 뒤
로 젖
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필립은 마침내
급사
가 자기들을 이상스러운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계산서를 요구했다.
"인제 그만 갈까?" 필립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대답도 않고 핸드백과 장갑을 챙기고 코트를 걸쳤다.
"언제 또 그리피스를 만나기로 했어?"
"내일이오." 그녀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 사람하고 잘 의논해 봐."
밀드레드는 기계적으로 백을 열고서 안에 든 종잇조각을 들여다보더니 끄집어 냈다.
"이 옷의 청구서예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쩌란 말이오?"
"내일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그럼 치러 주지 못하겠단 말이에요? 사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서."
"못 하겠어."
"해리한테 청할 테에요." 밀드레드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흥, 기꺼이 치러 줄 거야. 그자는 지금 나한테 빚이 7파운드나 있어. 그리고 지난
주일엔
현미경까지 잡혀먹던데. 완전 빈털터리가 되었거든."
"그런 것으로 날 위협할 필요는 없어요. 나도 밥벌인 넉넉히 할 수 있다구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인데. 나는 더 이상 한푼도 못 주겠어."
밀드레드는 토요일에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방세와 어린애 양육비 등을 생각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음식점을 나와서 거리에 들어서자
필립이
물었다.
"마차나 불러 드릴까? 난 좀 걷고 싶은데."
"돈이 한푼도 없어요. 오늘 오후에 다 떨어졌어요."
"그러면 걷는데도 나쁘지 않을걸. 내일 만나고 싶거든 차 시간에 와요. 내 방에
있을 테
니."
그는 모자를 벗어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러다가 곧 뒤돌아보았다. 밀드레
드는 그
와 헤어진 장소에 힘없이 서서 오가는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
가사 웃으며 돈을 쥐여 주었다.
"여깄소. 2실링이니 이것으로 돌아가시오."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돌아서서
가버렸
다.
이튿날 오후 필립은 자기 방에 앉아서 밀드레드가 과연 올까 생각하고 있었다. 간
방에는
잠을 설쳤다. 그는 학교 클럽에서 이 신문 저 신문을 손에 닿는 대로 읽으면서 오전을
보냈
다. 방학 때여서 런던에는 그가 아는 학우들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한두 사람 만났으며, 장기도 두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이 끝난 뒤 그
는 피
로를 느꼈고, 머리가 쑤셔서 하숙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 소설을 읽었다. 그리피스
는 보
지 못했다. 전날 밤 필립이 돌아왔을 때 그는 없었고, 그 후 그가 돌아오는 소리는
들렸으
나, 여느 때처럼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필립의 방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찌감치 나가는 모양이었다. 필립을 피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문을 가볍게 두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문간에 밀드레드가 서 있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시오." 필립이 말했다.
밀드레드가 들어오자 그는 문을 닫았다.
"어젯밤 2실링을 주셔서 고마워요."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녀가 필립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필립은 강아지가 장난을 치다가 얻어맞고는
주인
의 노여움을 풀어 보려고 겁에 질려 아첨하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었다.
"해리와 함께 식사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필립, 나와 함께 파리에 가고 싶다면 나도 가겠어요."
승리의 쾌감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이었다. 곧 의심
이 일
어났다.
"돈 때문에 그러나?" 필립이 물었다.
"어느 정도 그렇기도 해요." 그녀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해리는 아무것도 못해요. 이 집에 5주일 분의 방세가 밀려 있대요. 게다가 당신에
게 7파
운드의 빚이 있지요. 양장점에서는 돈 달라고 또 재촉하는 거예요. 그는 잡힐 거라도
있으면
잡힐 텐데 벌써 다 잡혀먹고 없나 봐요. 새 옷 값을 받으러 온 여자한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느라 혼이 났어요. 토요일에는 방세를 청산해야 하는데, 그렇게 쉽사리 일자리
를 구하
지 못해요. 빈 자리가 나기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것을 침착하고 불만스런운 말투로 마치 운명의 불공평을 헤아리면서 그것
도 자
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는 그녀
가 말하는 뜻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어느 정도라고 했겄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요. 해리가 그러는데, 당신은 우리 두 사람에게 참 친절하대요. 그이하고는
참 좋은
친구라면서요. 나한테도 당신같이 친절하게 해준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이가 그러는
데, 우
리는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 대요. 그이는 당신이 말한 것 그대로 자기는 천성이 원래
건달
이라 당신과는 아주 딴판이라고 했어요. 내가 해리 때문에 당신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
은 짓
이라고 그 자신도 말하더군요. 자기는 오래 가지 못하지만 당신하고는 오래 갈 수 있
대요."
"그럼 정말 나와 함께 가고 싶소?" 필립이 물었다.
"그래도 좋아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는 비참한 듯이 처졌다. 마침내 승리했
다. 그는
그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굴욕을 가볍게 비웃었다. 그녀는 힐끔
그를 쳐
다보았으나 말은 없었다.
"당신과 함께 떠나기를 나는 퍽 기다렸소. 드디어 나에겐 그 모든 괴로움 끝에 행복
이 찾
아오는가 보오."
그는 하려던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갑자기 밀드레드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구
슬 같은
눈물이 마구 떨어졌다. 그녀는 노라가 앉아서 울었던 바로 그 의자에 앉아서 의자의
등에
이마를 갖다 대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여자 목도 무던히 없는 놈이로구나.' 필립은 생각했다.
그녀의 여윈 어깨가 흐느낌으로 들먹거렸다. 그렇게 몸을 내던지고 우는 여자를
필립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참으로 괴로웠고, 그의 가슴은 미어질 것 같았다. 자기도 모
르는 사
이에 필립은 그녀에게로 가서 두 팔로 여자의 몸을 안았다. 그녀는 별로 싫어하지도
않고
슬퍼서 못 견디는 것처럼 그의 위로에 몸을 맡겼다. 그는 나지막하게 위로의 말을 속
삭였다.
그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그저 그녀에게 몸을 굽혀 몇 번이고 키스
를 했
다.
"그렇게도 슬프오?" 마침내 필립이 말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어린애를 낳을 때 죽어 버렸으면 오죽 좋았겠어요?" 그녀
는 신
음했다.
모자가 방해가 되었으므로, 필립은 그것을 벗겨 주었다. 그녀의 머리를 의자의 등에
더 편
하게 기대게 해주고 나서, 그는 뒤로 물러 나와 책상머리에 앉아 밀드레드를 바라보았
다.
"사랑이란 참 무서운 거요. 응?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싶어하거든.
" 그가
말했다.
조금 후에 그녀는 미칠 듯한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양팔을
내려뜨
린 채 맥없이 앉아 있었다. 흔히 화가들이 의상을 걸치는데 쓰는 장식 인형과 흡사한
기묘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처럼 그리피스를 사랑하는 줄은 몰랐소."
그는 그리피스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리피스의 입장에
서 서
서 그의 두 눈으로 보았고, 그의 두 손으로 감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
피스의
육신이 되어 생각할 수도 있었고, 또 그의 두 입술로 그녀와 입을 맞출 수 있었으며,
그의
푸른 눈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그녀의 열정이었다.
그는
이 여자가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야말로
그녀가 정말로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무너지
는 것
같았고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이상하게도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소. 가기 싫으면 나와 함께 갈 필요는 없소.
그리고
돈은 그전과 다름없이 주겠소."
밀드레드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가요."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 아파하면서."
"네, 그 말은 옳아요. 난 애정 때문에 고민해요. 그이 말처럼 그게 오래가지는 않으
리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당장에는."
그녀는 말을 멈추고 마치 기절이나 할 듯이 눈을 감았다. 엉뚱한 생각이 필립에게
떠올랐
고 그는 다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떠오르는 대로 그저 내뱉었다.
"그럼 왜 그 사람하고 어딜 가지 않소?"
"어떻게 가요? 우리에겐 돈이 한푼도 없는 줄 당신도 알면서?"
"내가 돈을 대주지."
"당신이?"
그녀는 고쳐 앉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반짝이기 시작하고, 얼굴에는
생기
가 돌았다.
"아마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그 사람하고 끝장을 내고 그 다음에 내게 오는 거
요."
그렇게 말을 해버리고 나니 그는 몹시 괴로웠으나, 고통이 일종의 기묘하고도 야릇
한 감
정을 그에게 주었다. 밀드레드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돈으로! 해리는 상상도 못할걸요."
"아니, 그 사람이야 상관없지. 당신이 설득하면 돼."
그녀가 반대하지 이쪽에서 고집을 부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밀드레드
가 끝
내 거절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5파운드 주지. 그러면 그 돈으로 토요일부터 월요일가지 놀 수 있어. 쉬운 일이야.
그 사
람은 월요일에는 집으로 돌아갈 거야. 북부 런던에서 근무를 시작해야 하니까."
"아니 필립, 그게 정말이에요.?" 밀드레드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소리쳤다.
"만일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신다면 갔다온 뒤부터는 나는 당신을 온몸을 바쳐 사랑
하겠어
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다른 생
각 다 잊어버리겠어요. 정말 우리에게 돈을 주시겠어요?"
"응."
그녀는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 같았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녀가
제정신
이 아닌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그의 두손을 잡
으면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필립, 당신은 정말 호인이에요. 당신같이 좋은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나중에 화
를 내시
지는 않겠지요?"
그는 미소를 띠면서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얼마나 고통스
러웠는
지 모른다.
"지금 해리한테 가서 이 말을 해도 좋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당신이 가도
좋다고
그랬다고 말해도 좋을까요? 당신이 그렇게 약속을 안 하면 그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거예
요. 아, 내가 얼마나 그이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당신은 모를 거예요. 갔다와서는 당
신이 좋
아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월요일엔 당신과 함께 파리든 어디든 다 가겠어요."
그녀는 일어나서 모자를 썼다.
"어디로 가려고?"
"해리한테요. 날 데리고 가 주겠느냐고 물어 보아요."
"벌써?"
"여기에 좀더 있을까요? 원한다면 더 있겠어요."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다.
"아니, 괜찮아. 빨리 가는 게 좋을 거요. 한 가지 말할 게 있는데, 나는 지금 그
리피스를
만나는 건 참을 수 없어. 내 속이 상할 거란 말이야. 난 그 사람한테 나쁜 감정이나
그런 것
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해줘 그렇지만 나하고 부딪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해 줘."
"잘 알았어요." 그녀는 얼른 일어섰다. "해리의 말도 나주에 당신에게 알려 드리겠
어요."
학교 지하실에서 점심을 마친 뒤에 필립은 하숙으로 돌아왔다. 그 날은 토요일 오
후였고,
주인 아주머니는 계단을 쓸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집에 있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아니오, 아침에 학생이 나가신 후 곧 나가셨습니다."
"돌아오지 않을까요?"
"아마 안 오시겠지요, 다 가지고 가셨으니까요."
어떻게 된 일인지 필립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
터 공
립 도서관에서 얼마 저네 빌려온 버튼의 메카 기행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어 보았으
나, 마음
은 딴 곳에 가 있어 조금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나깨나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
렸다.
그리피스가 밀드레드를 떼어 놓고 컴버랜드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는 생
각되지
않았다. 돈 때문에 밀드레드는 곧 찾아오리라. 필립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읽었
다. 그는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구절 두 구절 억지로 두뇌 속에 새겨 넣었지
만, 참
고 있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완전히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돈을 주겠다
는 둥
그런 어리석은 수작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하고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러나 일단 말을
내놓
은 이상 이제는 그녀보다는 자신을 위해 취소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한 번 결정한 일
은 기
어코 하고야 마는 그런 병적인 고집이 그에겐 있었다. 그는 3페이지 가량 읽었지만
머리에
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가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깨닫고
보니 같은 한 구절을 몇 번이나 거듭해서 읽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악몽의 무슨
공식과
도 같이 그런 것이 무섭게 그의 생각과 얽히는 것이었다. 내가 돈을 주지 않으면 두
사람은
떠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마다 자기가 돌아왔느냐고 물어 보러 오는 그들
의 꼬
락서니가 눈앞에 선했다. 그들이 실망할 것을 상상하면 재미가 있었다. 그는 기계적으
로 아
직 그 같은 구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오면 돈을 줘야
지. 그리
고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비열해질 수 있나 보자. 이제 더 이상 한 줄도 읽을 수 없
었다.
글자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의자에다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은 채 고통으로
마비되
어서 밀드레드가 오기만 기다렸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밀러 부인이 왔는데요."
"들여보내 주시오."
그녀를 맞아들이는 데 있어 지금까지 자기가 느낀 것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그는
마을을 가다듬었다. 그는 몸을 내던져 무릎을 꿇고 여자의 두 손을 잡고서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방법은 없
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말과 행동을 모두 그리피스에게 일러바칠 것이었다. 이런 것을
생각하
면 그는 부끄러웠다.
"아니, 어디 같다는 건 어찌 됐소?" 그는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가는 중이에요. 해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보기 싫어한다고 했
더니 일
부러 자리를 피하고 있어요. 그래도 잠깐 들어와서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는
데요."
"아니, 만나고 싶지 않아." 필립이 말했다.
그가 그리피스를 만나든 안 만나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을 그는 알
수 있
었다. 이렇게 그녀가 온 이상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 주었으면 했다.
"이거 봐요, 5파운드 옜소. 이젠 가보시오."
그녀는 그것을 받고 고맙다고 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언제 돌아올 테요?" 그가 물었다.
"월요일 에요. 해리가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가 하려고 하는 말이 얼마나 굴욕적인가 하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질투와
정욕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면 돌아와서 곧 알려 드리겠어요."
그는 그녀와 악수를 했다. 커튼 사이로 문 앞에 서 있던 사륜 마차에 밀드레드가
뛰어오
르는 것을 그는 보았다. 마차는 굴러가 버렸다. 그는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두 손으로
얼굴
을 가렸다. 뜨거운 눈물이 솟아 나왔다. 그는 자기 자신에 화가 났다. 그래서 주먹
을 불끈
쥐고 몸을 꿈틀거리며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고통에 찬 흐느낌이 쏟아져
나왔
다.
마침내 월요일이 되었다. 필립은 그리피스에 대해 혹독한 증오심을 느꼈지만, 밀드
레드에
게는 참혹한 냉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통한 욕망만 느낄 뿐이었다. 그것은 놀랍
고 불
쾌했으나,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어찌하랴! 다만 욕망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어떤 화
해라도,
한층 더 불명예스러운 굴욕이라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저녁 무렵, 그의 마음과는 달리 필립의 발걸음은 밀드레드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해
서 움
직여졌다.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으나 캄캄했다. 필립은 그녀가 와 있느냐고 물
어 볼
수도 없었다.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중에도 편지 한 장
없었
다. 점심때 찾아갔으나 하녀가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웬일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리피스는 어느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야했고 밀드레드에겐
돈이 없을 텐데 어찌 된 일일까 하고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았다. 필립은 오후에 또다시 그녀
의 하숙집을 찾아가서는 지난 1주일간의 일은 전연 없었던 것처럼 은근하게 오늘 저녁 식사
나 같이 하자고 몇 자 적어 놓고 왔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적어 놓고 혹시나 하고 기다려
보았다. 1시간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수요일 아침에는 찾아가기도 부끄러워서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편지를 보냈고, 돌아올 대 답장을 받아 가지고 오라고 일렀다. 그러
나 1시간 후에 아이는 그 편지를 그대로 가져왔고, 부인께서는 시골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
으셨다는 대답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필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마지막의 배신은 정
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그녀를 저주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리피
스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살인하는 쾌감도 이해할 수 있는 듯싶었다. 캄캄한 밤중에 만
나서 그의 목 바로 경동맥 언저리에다 비수를 찔러 마치 개처럼 길바닥에서 죽어 넘어지도
록 내버려두었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걸어다녔다. 슬픔과 분노로 정신을 차
리지 못했다. 그는 위스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술을 마셨다.
화요일 저녁에도, 수요일 저녁에도 그는 술에 취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목요일 아침, 그는
늦게야 일어나서 흐릿한 눈에 누런 얼굴로 무슨 편지나 와 있지 않나 하고 거실로 들어갔
다. 그리피스의 필적을 보았을 때 야릇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라고 써야 좋을지 모르겠네 만 그래도 뭘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 보네.
내게 대해서 너무 노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네. 밀드레드와 같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네. 나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어떤 일을 해서라도
그녀를 내 손안에 넣으려고 했네. 자네가 우리에게 같이 가라고 여비까지 대주겠다고 제의
했다는 말을 밀드레드한테서 들었을 때 나는 가지 않을 수가 없었네. 지금 모든 것이 끝나
고 보니, 나 자신 부끄럽게 짝이 없고, 내가 그처럼 바보였던 것이 후회되는군. 나에 대해서
노하고 있지 않다고 편지해 주기를 바라며, 한 번 찾아가 자네를 만나 보려고 하는데 허락
해 주었으면 하네. 자네가 나를 만나기를 원치 않더라는 말을 밀드레드한테서 들었을 대 나
는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쓰렸네. 제발 부탁하건대 한 줄이라도 좋으니 답장 좀 써 주게나.
그리고 나를 용서한다고 해야 나의 마음도 좀 편해지겠네. 나는 자네가 노했으리라고는 생
각지도 않았네. 만약 노했더라면 설마 돈까지 주겠노라고 했겠나 말일세. 그러나 나로서는
그 돈을 받지 않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네. 나는 월요일에 귀향했는데 그녀는 혼자
서 옥스퍼드에 한 이틀 더 머물고 싶다고 했네. 수요일에는 런던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니,
이 편지가 닿을 무렵이면 자네는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걸세. 만사가 잘 되기를 충심으로 믿
어 마지않네. 나를 용서한다는 답장을 해주기 바라네. 아무쪼록 곧 해주게. 해리
필립은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답장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사과하
는 그리피스를 그는 멸시했다. 그가 양심에 거리낀다는 말도 필립은 참을 수 없었다. 삶이
하고 싶다면 그런 비겁한 짓도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나중에 후회한다는 것은 더욱 비겁한
짓이었다. 참으로 뻔뻔스럽고 비겁하고도 위선적인 편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감상적인 말투
도 그는 불쾌했다.
'비열한 짓을 해 놓고도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네놈에게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쉬울 테지.'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리피스에게 단단히 복수할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랬
다.
그러나 하여간 밀드레드가 런던에 돌아와 잇는 것을 알았다. 그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
고서 면도할 사이도 없이 차를 한 잔 들이켜고는 그녀의 집을 행해서 마차를 달렸다. 그에
게는 마차가 마치 기어가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야만 했다. 제발 그녀
가 반가이 맞아 주게 해줍소서 하고 믿지도 않던 하느님에게 무의식중에 빌었다. 자기로서
는 다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터질 듯한 가슴을 움켜쥐고 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다 그
녀를 품안에 껴안아 보았으면 하는 불타는 듯한 욕정으로 그는 모든 괴로움을 잊었다.
"밀러 부인 있소?" 그는 유쾌한 어조로 물었다.
"나가셨는데요?" 하녀가 대답했다.
그는 멍하니 그 하녀를 쳐다보았다.
"1시간쯤 전에 오셨다가 짐을 싸가지고 어디론지 가버리셨어요."
잠깐 동안 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 편지를 주었소? 어디로 간다고 말하던가요?"
그는 또 밀드레드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이제 그녀는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는 겨우 체면만은 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 좋아요. 아마 나중에 무슨 연락이 있겠지요. 혹시 다른 주소로 편지를 했을지도 모
르겠군."
그는 발걸음을 돌려 절망한 상태로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짐작했어
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를 전연 생각해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며, 처음부터 자기를 조롱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정도 없고 불친절하고 자비심도 없는 여자였다.. 그것도 할 수 없다
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받고 있는 고통이란 극심했고 참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어 비
리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맺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강물에 몸을 던지든지
철로에 가로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말로 표현하자마자 그는 반발심이 일었다.
날이 감에 따라 이 불행도 잊혀질 것이라고 그의 이성이 일러 주었다. 전심 전력을 다한다
면 그녀쯤이야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따위 천한 계집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어리석
은 짓이다. 단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함부로 내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미친 짓이다. 지금
같아서는 이 격정을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을 것 같았으나, 결국 이것도 시간 문제에 불과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런던에 있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기의 불행을 회상시켰다. 그는 블랙스테이블
에 돌아가겠다고 백부에게 전보를 치고서 허둥지둥 짐을 꾸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탈 수
있던 첫차에 올라탔다. 괴로움을 참아 온 더러운 방을 떠나고 싶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자신이 미워졌다. 미친 것도 같았다.
신학기가 시작되기 이틀 전에 필립은 방을 구하려고 런던에 올라왔다. 웨스트민스트 브리
지가의 샛길을 두루 찾아보았지만, 더러워서 마음에 들지않았다. 마침내 케닝턴에서 조용하
고 옛 기풍이 감도는 한 집을 찾아냈다. 이 템스 강 건너편 부근은 대거리가 묘사한 런던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작품 뉴컴가에 나오는 사륜 마차가 일가족을 태우
고 서부 런던으로 달려간 그 케닝턴 대로의 플라타너스는 한창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필립이 택한 거리의 집들은 대개가 2층집이었고, 대부분의 유리창에는 셋방이 있다는 게
시문이 붙어 있었다. '가구는 없음' 하고 덧붙인 어는 한 집을 그가 노크했더니, 말이 적고
무뚝뚝한 여주인이 나와서 조그마한 방 4개를 보여 주었다. 한 방은 수배가 달린 부엌이었
다. 세는 1주일에 9실링이라는 것이었다. 필립은 방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방세가 싸서 그냥 그 집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여주인에게 방 청소와 아침 식사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으나, 할 일이 많아서 바쁘다고 대답했다. 방세만 받으면 그 밖에는 더 이상
간섭하고 싶지 않다고 여주인이 말한 것이 오히려 필립의 비위에 맞았다. 저 모퉁이를 돌아
가면 우체국을 겸한 식료품 가게가 있는데, 거기서 물어 보면 혹시 시중을 들어 줄 부인에
를 알려 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필립은 파리에서 사들인 안락의자를 비롯하여 테이블, 몇 장의 그림 등 지금까지 돌아다
니면서 모아 둔 약간의 가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백부는 그에게 조립식 침대를 하나 주
었는데, 그것은 백부가 8월 이후에는 방을 세놓지 않아 앞으로 그것을 쓸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따로 10파운드를 들여서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응접실
로 사용하려는 방에는 10실링을 들여서 황색 벽지를 발랐다. 그리고 벽에는 언젠가 로슨이
준 그랑 조귀스탱 강변의 스케치와 그 자신이 파리 시절에 매일같이 면도를 하면서 바라보
곤 하던 앵그르가 그린 오달리스크와 마네가 그린 올림피아 복제판을 걸었다. 자기도 한때
는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얻었다는 것을 회상하기 위해서 스페인 청년 미구엘 아푸리아의 목
탄 스케치도 걸어 놓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다리는 어떤 특이한 힘을 가지고 마루를
디뎠으며, 얼굴에는 글처럼 인상적이던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나체화로서 그의 작
품 중에서는 가장 잘 된 것이었다. 필립 자신에게도 그 그림의 결점이 눈에 잘 띄었으나, 그
것이 여러 가지 지난 일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볼 만했다. 미구엘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그는 생각해 보았다.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을 추구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아마도 헐벗음, 굶주림, 질병 등에 시달려 어느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절망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서 센 가의 탁한 물결 속에서 죽음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유럽인의 변하기 쉬운 성미 때문에 투쟁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지금쯤은 마드리드
의 어느 사무실 서기로 있으면서 그 열렬한 웅변을 정치와 투우에 토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
까?
필립은 자기의 새 하숙방을 와서 구경하라고 로슨과 헤이 워드를 청했다. 한 사람은 위스
키 병을 들고 왔고, 다른 한 사람은 거위간이 든 파이를 갖고 왔다. 그들이 자기의 취미를
칭찬하자 필립은 기뻤다. 그 주식 중개인인 스코틀랜드 사람도 초대할까 했으나 의자가 세
개뿐이라 자연히 손님의 수가 제한되었다.
필립은 이제는 내과학과 외과학의 강의에 출석했다. 매주 일정한 날 오전에는 외래 환자
에게 붕대를 감아 주고서 얼마쯤의 돈을 벌 수도 있게 되어 기뻤으며, 청진법과 청진기의
사용법도 배웠고, 조제법도 배웠다. 7월에는 약물학의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으며, 여러 가지
약품을 써 가지고 물약을 조제해 보고, 환약을 만들어 보고, 연고도 만들면서 여러 가지 약
제를 다루는 일에 재미가 났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흥미 같은 것을 끌어 낼 만한 일이라
면 무엇이든지 그는 탐욕스럽게 달라붙었다.
한 번은 멀리서 그리피스의 모습을 본 일이 있었으나,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까 봐 피해
버렸다. 그는 그리피스의 모습을 본 일이 었었으나,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까 봐 피해 버렸
다. 그는 그리피스의 친구를 몇 사람 사귀어서 알고 있었으나, 그는 그들을 꺼리게 되었다.
그들은 그가 그리피스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무엇 때문에 그런가도 눈
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키가 크고 작은 머리와 활기없는 태도를
하고 다니는 램스던 이라고 하는 청년은 그리피스를 숭배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넥타이
니, 신발이니, 말을 할 때의 몸짓까지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필립이
답장을 해주지 않아서 그리피스는 몹시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화해라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런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던가?" 필립이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네. 단지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야." 램스던이 말했다.
"그 사람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미안해하더군. 그리고 자네보고 언제나 호
인이라고 했어. 나는 그 사람이 화해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네. 자네를 만나기가 무서워
서 병원에도 못 나온다네. 자네한테 찔려 죽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서 말일세."
"그놈의 새끼는 죽여 버려야 해."
"그러니까 그 사람은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것
일세."
"참 철없고 히스테리컬한 놈이군. 그놈이 걱정할 게 뭐람? 그놈에겐 나 같은 건 있으나마
나 한 인간이니까 나 같은 친구야 없더라도 아주 잘해 나갈걸세. 이젠 그런 자식에게는 조
금도 관심이 없네."
딱딱하고 차가운 사나이라고 램스던은 생각하면서 냉혹한 얼굴로 잠깐 동안 필립을 쳐다
보았다.
"해리는 그런 여자하고 관계한 걸 후회하고 있어."
"그래?" 필립이 물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쌀쌀하게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이 통쾌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이 얼마
나 세차게 뛰는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램스던이 말을 계속하기를 초조
하게 기다렸다.
"필립, 자넨 이제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나? 물론 깨끗이 잊었지."
그는 밀드레드와 그리피스의 그 후의 관계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머리가 둔한
청년이 완전히 곳아 버릴 만큼 태연한 태도로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그의 이야기를 죄다 들
었다. 그리피스와 함께 보낸 옥스퍼드에서의 주말은 그녀의 불시의 열정을 가라앉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부채질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피스가 그녀에게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 동안 그 곳에
서 너무나도 행복스러웠지 때문에 그녀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일이지만, 혼자서 옥스퍼드에
이틀 가량 더 묵기로 했다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고 권유하든지 간에 그녀는 필립에게 돌아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립에 대해서 반감이 일었던 것이다. 그리피스는 시골에서
그 여자와 함께 지낸 이틀 동안에 이미 염증이 났기 때문에 자기가 일으킨 정열의 불길이
너무나 거센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리피스 역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구태여 싫
증나는 것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편지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
아 냈다. 그리고 다정하고도 꼼꼼한 사람인데다가 본시부터 예의가 바르고 누구에게나 호감
을 갖게 하는 사람인 그리피스는 고향에 돌아가자 기다랗고 달콤한 편지를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표현의 재주가 없었으므로 서투르고 야비한 솜씨로 열정적이고 너저분
한 글을 길게 써서 답장을 했다. 그 편지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다음날에도 연달아 편지
가 왔고, 또 그 다음날 세 번째 편지가 왔을 때 그녀의 사랑이 즐겁다기보다는 오히려 두렵
게만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답장을 안 해주었더니, 병을 않고 있느냐, 내 편지를
받았느냐, 소식이 없는 것이 궁금해서 죽겠다는 따위의 전보로써 쉬지 않고 재촉해 왔다. 그
는 마지못해 회답은 해주었으나, 노여워하지 않을 정도로 될 수 잇는 한 냉담하게 써 보냈
던 것이다. 자기 어머니는 전보라면 무슨 큰일이나 난 줄 알고 벌벌 떠는 구식 사람이어서
일일이 설명해 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전보는 치지 말라고 써 보냈다. 그 뒤에 그녀에
게서 기어코 그를 좀 만나야겠다는 편지가 왔으며, 그 곳으로 가서 그의 부친이 개업하고
있는 마을에서 4마일 가량 되는 도시에서 묵기 위하여 물건을 잡힐 작정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리피스는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그가 전보를 쳐서, 그런 짓을
하면 정말 난처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런던에 올라가는 즉시 알려 주겠노라 약속은 했으
나, 막상 올라와 보니 그가 취직한 병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없느
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대 그는 앞으로는 어떤 구실로든지 여기에 찾아와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그리고 3주일 만에 다시 보니 확실히 싫증나는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 여자 때문에 애를 태웠던가 그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고, 될 수 있는 한 그녀와 절교하
기로 결심했다. 그는 싸우기를 꺼리는 사람이었고 또 남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았으므로 밀드레드로 하여금 더 이상 시달리지 말자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만나면 즐겁고 유쾌하고 명랑한 태도를 보였다. 도 그녀를 그
동안 만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구실을 꾸며댔다. 어떻게 해서든지 앞으로는
그녀를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여자가 억지로 그에게 약속을 시키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전
보를 치고서 피해 버렸다. 그리고 하숙집 여주인에게도 밀드레드가 찾아오거든 나가고 없다
고 말하라고 일러 두었다. 밀드레드는 거리에서 기다릴 대도 있었으며 그녀가 2시간 동안이
나 병원에서 자기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는 그저 싹싹하고 친
절한 말 몇 마디를 던져 주고 무슨 직업상 약속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는 내뺐다. 그는 남몰
래 살짝 병원을 빠져나가는 데 귀신이 되어 버렸다. 한 번은 그가 하숙집에 돌아갔을 대 울
타리 부근에 서 있는 어떤 여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으므
로 그는 발길을 돌려 램스던의 하숙으로 찾아가서 하룻밤만 그의 침실에서 재워 달라고 부
탁했다. 다음날 하숙집 아주머니는 밀드레드가 몇 시간 동안이나 문간에 주저앉아 울고 있
어서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순경을 불러 대겠다고 까지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준 램스던을 필립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는 발뺌을 잘했네 그려. 해리 말일세만 그렇게 귀찮게 굴리라는 것을 미
리 알았더라면 그런 여자와 관계를 맺느니보다는 차라리 지옥에라도 갔을 거라고 하던데."
필립은 그 날 밤 오랜 시간 동안 그리피스의 하숙집 문전에 앉아 있었을 밀드레드의 모습
을 상상해 보았다. 쫓아내려고 하는 여주인을 힘없이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 여자는 지금 뭘하고 있대?"
"응, 다행히도 어디 일자리가 있나 봐. 그래서 늘 바쁜 모양이야."
여름 학기가 끝나기 바로 전에 필립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그런 일에 잘 훈련된 그리
피스도 그녀가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 대는 바람에 드디어 화를 내면서 성가셔 죽을 지경
이니 스르로 물러나서 다시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밀드레드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네. 도무지 어떻게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램스던은 말
했다.
"그래, 모든 것이 다 끝난 셈인가?" 필립이 물었다.
"응, 열흘씩이나 만나지 않았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해리는 여자를 차 버리는 데 아주 선
수라네. 하기야 이번 경우가 제일 힘들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무 탈없이 차 버렸어."
그 후 필립은 밀드레드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런던의 들끓는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봄이 되자 그는 외과 외래 환자 계에서 조수의 임무를 끝내고 입원 환자 계의 의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6개월간 계속했다. 의무원의 일과라는 것은 매일 오전중에 의무장을
따라 남자 병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자 병동을 회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상을 기입하고,
실험하고, 그 후는 간호사들과 소일했다. 매주 두 번씩 오후에 의무장은 하객들을 데리고 병
동을 돌면서 환자를 검진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그 때마다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외래 환자계에서와 같이 흥미와 변화가 없었고, 또 현실과 많은 접촉은 없었으나
필립은 여기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환자와도 잘 지낼 수 있었으며, 자기가 치료할 때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흐믓해졌다. 그는 환자의 병에 대해서 특별히 깊은 동
정심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환자들이 그를 잘 따랐다. 한편 필립은 거만하지 않다고해서 다
른 의무원들에 비해 더욱 인기가 좋았다. 그는 명랑했고 환자들에게 친밀감을 주었으며, 그
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병원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
만 필립도 여자 환자보다 남자 환자가 다루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 환자들은 항상 불
평이 많고 걸핏하면 짜증을 내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로 간주하고 있
는 시중을 잘 들어 주지 않는 쌀쌀한 간호사들을 몹시 비난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고 그저
말썽 많은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다.
얼마 안 가서 필립은 다행히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의무장은 필립에게
새로 입원한 남자 환자 한 사함을 맡아 보게 했는데, 필립은 그 환자의 침대 곁에 앉아 카
드에 여러 가지 기입 사항을 적고 있다가 직업란을 보고 그의 직업이 신문 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는 마흔여덟 살이고, 이름은 소프 애덜리였는데, 병원 환자로 드물게 보는
이름이었다. 그는 급성 황달을 앓고 있었는데, 뭔가 병상이 분명하지 않아 주의를 요했기 때
문에 입원하게 된 것이었다. 필립이 자기의 의무로 묻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그는 유쾌
하고 교양있는 말씨로 대답했다. 그는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은 머리와 손으로 보아
보통 키보다는 작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필립은 남의 손을 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소프의 손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의 손가락은 붓끝같이 가늘고 여간 예쁘지 않았으며, 손톱
은 연한 장밋빛이엇다. 피부는 아주 고왔으며 황달병만 아니었다면 매우 희고 고왔을 것이
다. 그는 이불 밖으로 손을 내놓고 있었다.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나머지 작
은 손가락들은 약간 벌리고 필립과 이야기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듯이 자기 손을 바라보곤 했
다. 필립은 눈을 반짝이면서 환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의 안색은 황달병으로 누르스름했
으나 빼어난 얼굴이었고 푸르고 맑은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지고 있었다. 매부리코였으나
눈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코밑에 짧게 기른 회색 수염, 그리고 약간 빠지기는 했으나
곱슬거리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젊었을 때는 꽤 아름다운 머리였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하
였으며, 아직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신문 기자시라죠? 어느 신문입니까?"
"아무 신문에나 다 쓰지요. 내 글을 싣지 않은 신문이라곤 아마 하나도 없을 게요."
마침 침대 곁에 신문이 한 장 있었는데, 그는 팔을 뻗쳐 그것을 집으면서 광고란을 펴 보
였다. 광고란에는 필립이 잘 아는 상회인 런던 리젠트가의 린 핸드 세들리 상회가 큰 활자
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는 그보다 조금 작지만 굵직굵직한 활자로 '망설임은
시간의 적이다'라는 교훈적인 글이 있었고, 이어서 '왜 오늘 당장 주문하지 않는가?'라는 문
구가 붙어 있었는데, 그 합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살인범의 가슴에 양심의
방망이질을 하는 듯이 '왜 지금 주무하지 않는가?" 라는 문구가 거듭되고 있었다. 그리고 대
담하게도 '세계 일류 시장에서 들여온 수천 켤레의 장갑을 경이적 대염가로 봉사! 세계에서
가장 신용 있는 업자로부터 입하한 수천 켤레의 양말을 희생적 할인 가격으로 제공!' 그리
고 끝으로 앞의 질문을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는 결투장에서 도전의 장갑을 던지는 것과 같
이 활자가 널려져 있었다. '왜 지금 당장 주문하지 않는가?" 하고.
"말하자면 나는 린 핸드 세들리 상회의 신문 광고계에 있습니다." 소프는 말하고 나서 그
아름다운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그렇지만 자랑할 만한 직업은 못 되지요." 하고 덧붙였다.
필립은 새오 온 환자에게 으레 하는 질문을 계속했다.
그 질문은 아주 상투적이었으나, 그 중에는 호기심으로 환자가 감추어 두고 싶어하는 경
력을 캐내려고 일부러 꾸며 낸 질문도 있었다.
"외국에서 사신 적이 있으십니까?"
"스페인에서 11년 살았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톨레도에 있는 영국 수도 회사의 서리 노릇을 좀 했습니다."
이 환자의 대답에 필립은 더한층 흥미를 느꼈으나,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거
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는 대강 질문을 끝내
고 다음 환자에게로 갔다.
소프 애덜리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얼굴에 누른빛은 남아 있었으나 차츰 나아갔
다. 그는 다만 의사가 어떤 반응이 정상적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퇴원해선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아직 누워 있는 것이었다.
필립은 틈만 있으면 소프를 찾아갔으므로 그와는 친국해졌다. 소프는 참으로 말솜씨가 대
단했다. 별로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불을 붙여 주는 열
의와 활기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오랜 세월 도안 가식의 세계에서 살아온 필립은 그의 이야
기를 들을 때 자기의 공상이 차차로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오양의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듯함을 느꼈다. 애덜리는 예의도 발랐다. 그는 사회 면에서나 지적 면에서도 필립도다 아는
것이 많았다. 나이도 훨씬 위였고, 그의 여유있는 풍부한 화제는 일종의 우월성을 보여 주었
다. 그러나 그는 병원 안에서는 무료 치료를 받는 환자로서, 또 병원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병원의 모든 규칙을 잘 지켰다. 그는 이 두가지 생활 방식 사이에서 침착한 태도로 유머까
지 섞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필립이 애덜리에게 왜 이런 부속 병원에 입원
했는가를 물은 일이 있었다.
"아, 나의 신조는 사회가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남김 없이 이용하는 거요.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최대한 잘 이용하려 합니다. 즉 나는 병이 나면 이런 병원을 이용하여 치료
를 받습니다. 염치 불구하구요. 그리고 나는 자식들도 모두 기숙 학교에 보내 교육시키고 있
소."
"네, 그래요?"
"그 애들은 내가 윈체스터의 퍼블릭 스쿨에서 받은 교육보다 훨씬 나은 교육을 받고 있
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달리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가 있겠소? 아이
들이 모두 아홉이나 된다오. 내가 퇴원하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오시오."
"꼭 한 번 가 보고 싶습니다." 필립이 대답했다.
열흘 후에 소프 애덜리는 퇴원해도 괜찮을 정도로 완쾌되었다. 그는 필립에게 자기 주소
를 적어 주었고, 필립은 다음 주일 1시에 수프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소프는
언젠가 필립에게 말하기를 그의 가족은 이니고 존스가 지은 집에 산다고 한 적이 있었다.
소프는 어떤 화제나 입에 올리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 집의 오래된 참나무 난간에 대해서
도 열심히 설명했었다. 이 날 필립이 찾아갔을 대도 현관문을 열자마자 문지방의 정묘한 조
각을 보이면서 필립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집은 챈서리 레인과 홀본 사이
에 있는 좁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낡아빠져 금방이라도 다시 칠을 해야 할 만큼 헐어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옛시대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일 대는 과거에는 훌륭한 주택
가엿으나, 지금은 빈민굴이나 거의 다름없었다. 좀더 깨끗한 회사 건물을 세우기 위해 그 근
방 집들을 철거하려는 계획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집세가 아주 싸서 애덜리는 그의
수입에 알맞은 값으로 2층과 3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필립은 이전에는 애덜리가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키가 너무 작은 데 놀랐다. 그는 아마 5피트 5인치
쯤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옷차림도 아주 기묘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잘 입는 푸른 색의
리넨 바지에 낡아빠진 밤색 비로드 저고리를 입고 빨간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낮은
칼라에 넥타이는 펀치지의 만화에 잘 나오는 프랑스인이 달고 다니는 나비 넥타이였다. 그
는 반색하며 필립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금방 집 자랑을 하기 시작했으며, 사랑스러운 듯 난
간을 어루만졌다.
"여길 보시오. 좀 만져 보시오. 꼭 비단결 같지요. 얼마나 훌륭한 솜씨입니까? 그런데 5년
후에는 철거하는 사람이 이것을 다 부숴서 땔감으로 팔 것이랍니다."
그는 필립에게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아래층도 꼭 보여 주겠노라고 했다. 가 보니 셔츠
바람의 남자와 살이 찐 여자 그리고 어린애 셋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이분을 모시고 또 천장 구경을 왔습니다. 어때요, 이렇게 훌륭한 것
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참, 이분은 캐리 선생입니다. 내가 입원해 있을 적에 이분한테 많은
신세를 졌지요."
"어서오십시오." 셔츠 바람의 남자가 말했다.
"애덜리 씨의 친구분이시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애덜리 씨는 아무에게나 이 천장을
구경시킨답니다. 우리가 무얼 하고 있든, 자고 있든 목욕을 하고 있든 마구 들어오신답니
다."
이 집에서는 애덜리를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애덜리를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그가 그 능란한 말솜씨로 17세기 천장의 아
름다움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입을 크게 벌리고 듣고만 있었다.
"이런 천장을 뜯어 내다니 될 말입니까? 그렇잖소, 호치슨? 그래도 당신은 이 거리의 유
지 아닙니까? 왜 신문에 기고하여 항의하지 않습니까?"
셔프 바람의 남자가 웃으면서 필립에게 말했다.
"애덜리 씨는 무엇이고 이렇게 농담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딘답니다. 하기야 이런 집은 비
위생적이어서 살기에 마땅치는 않지요."
"위생이란 것이 다 뭐람? 나에겐 그래도 예술이 제일이오!" 애덜리는 큰소리로 외치고 이
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는 애들이 아홉이나 있는데, 그 애들은 하수도 사정이 나쁘다는 곳
에 살아도 원기가 너무 왕성해서 걱정이오. 안 될 말이오. 예술을 파괴하는 그런 모험은 안
될 말이오. 당신들의 소위 신시대 사람의 의견 같은 건 난 안 듣겠소. 내가 이 집에서 나갈
때는 이사하기 전에 배수가 정말 나쁜가를 확인해 볼 거요."
그 때 노크하는 소리가 나더니 금발의 계집애가 들어왔다.
"아빠, 엄마가 이야기 그만 하시고 올라오셔서 점심 잡수시래요."
"이애가 내 셋째 딸입니다." 애덜리는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마리아 델 필라르지만 제인이라고 부르면 더 대답을 잘 한답니다. 제인, 너 코 풀
어라, 응?"
"아빠, 손수건이 없어요."
"쯔쯔, 아이두 원." 그는 굉장히 큰 무의 잇는 손수건을 주면서 말했다.
"하느님이 어디다 쓰라고 너에게 손가락을 주신 줄 아니?"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필립은 벽에 까만 참나무 그림 판자를 두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 한가운데는 스페인어로 메자 드 비어라헤라고 부르는 쇠 받침대가 있는 좁다란 티크 테
이블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이 앉을 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탁으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또 넓고 판판한 팔걸이와 가죽 등받이와 가죽 깔개가 있는 두 개의 큰
의자가 있었다. 그것들은 보기에는 우아했으나 앉기에는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 밖에 가구라
고는 조금 거핀 솜씨였지만 세밀하게 조각된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식이 있는 반들거
리는 대 위에 놓인 바르게 노 책상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여러 군데 깨지긴 했으나 화려
한 접시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벽에는 스페인파 화가의 오래 된 그림 몇 폭이 아름다우나
낡은 틀에 끼워져 걸려 있었다. 그림도 어두운 것이었고, 오랜 세월과 허술한 보존으로 몹시
상했고, 화상도 평범한 것이었으나, 어딘가 정열이 넘쳐 있었다. 필립에게는 이들은 모두 고
대 스페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애덜리가 아름다운 장식과 비밀의 서
랍이 있는 바르게노 책상을 필립에게 보여 주고 있을 때 옅은 갈색 머리를 등 뒤로 땋아 늘
인 키가 큰 소녀가 들어왔다.
"점심 준비가 다 되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데요. 자리에 앉으시면 곧 가져오겠어요."
"샐리, 이리 와서 캐리 선생과 악수해라." 그는 말하면서 필립을 돌아보았다. "참 크지요?
이애가 큰딸입니다. 너 몇 살이지, 샐리?"
"이번 6월에 열다섯 살이 돼요."
"나는 이애 이름을 마리아 델 소르라고 지었답니다. 첫애였기에 저 카스티야의 휘황한 태
양에 바쳤지요. 그러나 저 애 어머니는 늘 샐리라고 부르고 또 남동생들은 푸딩 누나라고
부른답니다."
소녀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하얀 이빨이 고르게 났고, 보기 좋은 회색빛
눈에 넓은 앞이마, 나이에 비해서 키가 크고 자세가 바른 소녀였다. 두 볼은 불그레했다.
"가서 어머니더러 오셔서 캐리 선생한테 인사드리라고 여쭤라."
"어머니는 식사가 끝나신 다음에 오신대요. 아직 목욕도 안 하신 걸요."
"그럼 우리 가서 만나 봅시다. 손님도 요크셔 푸딩을 드시기 전에 그걸 만든 손과 악수해
야 하니까."
필립은 주인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작고 아주 혼잡한 부엌이었다. 떠들썩했으나 낯선
사람이 들어가자 조용해졌다. 한가운데에는 큰 식탁이 놓여 있었고, 그 둘레에는 애덜리의
아이들이 침을 삼키면서 앉아 있었다. 오븐 앞에서는 부인이 잘 구워진 감자를 하나씩 꺼내
고 있었다.
"캐리 선생이오, 베티." 애덜 리가 필립을 그의 아내에게 소개했다.
"아니,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손님을 모시고 오다니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부인은 때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무명 옷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
에는 핀을 많이 꽂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보다 키가 3인치는 더 컸으며, 파란 눈과 친절한
인상을 가진 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전에는 미인이었으나 나이가 들고 어린애를 많이 낳
았기 때문에 살이 찌고 지저분해진 것이다. 파란 눈은 광채를 잃었으며, 살결은 거칠고 불그
스름해졌으며, 미리 빛깔도 바랬다. 부인은 허리를 펴고 앞치마에 손을 닦은 다음 손을 내밀
었다.
"잘 오셨어요." 느린 목소리로 어딘지 필립에게는 귀에 익은 억양으로 말했다.
"주인이 입원했을 때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하시더군요."
"자, 그럼 이젠 우리 아이들을 소개해야겠군요." 그는 말한 다음 얼굴이 둥근 곱슬머리의
소년을 가리켰다. "이놈이 소프, 우리 집 장남입니다. 우리 가족의 칭호와 재산, 책임의 계승
자이지요. 저놈들은 애덜스탠, 해럴드, 에드워드." 그는 그보다 작은 사내아이들 셋을 가리켰
다. 그들은 모두 장밋빛 얼굴로 건강해 보였으며,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웃
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 아이들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접시만 들여다보았
다." 이번엔 딸 애들 차례입니다. 저애가 아까 말한 마리아 델 소프."
"푸딩 누나!" 남동생 하나가 소리쳤다.
"이 녀석, 네 유머는 돼먹지 않았어." 그는 가볍게 그 애를 꾸짖고 계속해서 딸들을 소개
했다. "저애들이 마리아 델 소르 메시데세, 마리아 델 필라르, 마리아 델 라 콘셉숀, 마리아
델 로자리오입니다."
"난 이애들을 샐리, 몰리, 코니, 로지, 제인이라 부릅니다." 애덜리 부인은 말했다. "여보,
인제 당신 방으로 모시고 가세요. 곧 식사를 보내 드릴테니까요. 애들은 식사하고 목욕시킨
다음에 그 방으로 보내겠어요."
"여보, 내가 당신 이름을 짓는다면 비누 거춤의 마리아라고 하겠어. 당신은 항상 비누로
어린 것들을 못 살게 구니까."
"캐리 선생, 먼저 들어가세요. 그렇게 안 하시면 주인 양반은 언제 식탁에 앉으실지 몰라
요."
애덜리와 필립은 수도원의 의자 같은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샐 리가 쇠고기 두 접시, 요
크셔 푸딩, 구운 감자, 양배추 요리 등을 가득 가져왔다. 애덜리는 호주머니에게 6실링을 꺼
내 샐 리를 시켜서 맥주를 사러 보냈다.
"저 때문에 이렇게 식탁을 다로 차리신 게 아닙니까? 자제분들과 다 같이 먹어도 괜찮은
데요." 필립이 말했다.
"아니오, 난 항상 이렇게 따로 먹습니다. 나는 이런 구식 관습을 좋아하니까요. 난 남자들
의 식탁에 여자가 끼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첫째, 이야게에 방해가 되고 또 여자들 자
신에게도 좋을 건 하나도 없지요. 즉 남자와 이야기하면 여자들은 여러 가지 딴 생각을 하
게 되고 또 여자란 그런 생각을 시작하면 항상 불만이니까요. 이렇게 맛좋은 요크셔 푸딩을
맛보신 일이 있소? 이건 아무도 우리 마누라를 못 따라갈 겁니다. 숙녀와 결혼하지 않은 덕
분이지요. 보셨겠지만, 우리 마누라는 숙녀가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필립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머뭇거렸다.
"그런 것은 별로 생각지 않았는데요." 그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애덜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너털웃음을 잘 웃었다.
"그렇소, 우리 마누라는 숙녀가 아니며 또 그 비슷한 것도 아닙니다. 장인은 농부였답니
다. 마누라는 평생 가도 발음에 관심을 안 가졌습니다. 애들은 모두 열둘을 낳았는데, 지금
은 아홉이 살아 있지요. 내가 이젠 그만 낳아도 좋을 때라고 말해도 워낙 고집이 세서 아마
스물을 낳을 대까지는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그 때 샐 리가 맥주를 들고 들어왔다. 필립에게 한 컵 다르고 식탁을 돌아서 맞은 쪽에
앉은 자기 아버지에게 한 컵 따랐다. 애덜리는 딸의 허리를 안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크고
예쁜 계집애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지만 스무 살이래도 곧이들을 정
도지요. 태어나서 한 번도 병이라고는 앓은 적이 없어요. 이애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참으로
행운아야. 그렇지, 샐리?"
샐리는 방긋 웃으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주책을 떨곤 하는 데는 익숙해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얌전하게, 그러면
서도 아주 사랑스러운 태도로 듣고 있었다.
"아버지, 어서 잡수세요. 다 식어요." 소녀는 아버지의 팔에서 몸을 빼면서 말했다.
"푸딩 잡수실 때에는 불러 주세요, 네?"
그들은 다시 단둘이만 남았다. 애덜리는 백랍으로 만든 컵을 들고 죽 들이켰다.
"사실 영국 맥주보다도 맛좋은 술이 있을까요? 구운 고기, 라이스 푸딩, 왕성한 식욕과 맥
주, 이 단순한 인생의 향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려. 나도 전에 숙
녀와 결혼한 일이 있더랍니다. 제발 당신은 아예 숙녀와는 결혼하지 미시오."
필립은 웃었다. 아무튼 유쾌한 기분이었다. 기묘한 옷을 입은 조그만 사나이, 그림 판자를
댄 방, 스페인 풍의 가구, 영국식 식사, 이 모든 것이 보기 좋은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웃으시는군요. 자기보다 모든 의미에서 정도가 얕은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요. 당신은 역시 동등한 지능의 소유자를 원하시겠군요. 당신 머릿속에는 부부란
것은 일종의 친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만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소. 마누라와 함께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요. 베티가 미분학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요. 나는 요리를 할 줄 알고, 아이들을 돌볼
줄 아는 여자만이 필요한 거요. 난 양족 다 실험해 봤답니다. 그래서 잘 알지요. 자, 그럼 푸
딩을 부릅시다."
그는 손뼉을 쳤다. 곧 샐 리가 다시 들어왔다. 그녀가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을 때 필립이
일어나 도우려 하자 애덜 리가 말렸다.
"그냥 두어 주시오. 샐리는 당신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을 거요. 그렇지, 샐리? 그리고
시중드는 동안 당신이 가만히 앉아 계신다고 해서 실례라고 생각지도 않을 겁니다. 이 애는
그놈의 기사도니 뭐니 하는 것을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샐리?"
"네." 샐리는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샐리, 너 내말 알아듣고 대답하니?"
"아아뇨,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런 말씀 하시면 싫어하세요."
애덜리는 껄껄대고 웃었다. 샐리는 크림이 담뿍 묻고 맛있어 보이는 라이스 푸딩 두 접시
를 가져왔다. 애덜리는 입맛을 다시며 먹기 시작했다.
"우리 집 관습 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일요일 점심은 항상 같은 것을 먹는 답니다. 말하자
면 일종의 의식이지요. 1년에 50번 있는 일요일에 점심마다 구운 쇠고기, 라이스 푸딩을 먹
고 부활제 낟에는 양고기와 완두콩, 미카엘제에는 구운 거위 고기와 사과 소스를 먹지요. 이
렇게 우리는 전통을 지켜나갑니다. 샐리도 결혼하면 내가 가르쳐 준 여러 가지 유익한 말은
잊게 되겠지만, 사람이 착하고 행복하게 되려면 일요일에는 반드시 구운 쇠고기와 라이스
푸딩을 먹어야 한다는 것만은 잊지 않을 겁니다."
"치즈 잡수실 대는 또 불러 주세요." 샐리는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물총새의 전설을 들은 일이 있소?" 불쑥 애덜 리가 물었다. 화제를 갑자기 바꾸
곤 하는 그의 이런 화법에 필립은 이미 익숙해 있었다.
"물총새의 수컷이 물 위를 날아가다 지치면 그 암컷이 날아와 수컷을 등에 태우고 다시
날아간답니다. 물총새의 정신, 바로 그것이 남자가 아내에게 바라는 모든 것이겠지요. 나도
첫 번째 마누라오 3년 동안 같이 살았소. 숙녀였지요. 그 여자의 1년 수입은 1천 5백 파운드
였소. 켄징턴의 작은 벽돌 집에서 가끔 아담한 만찬회를 열곤 했지요. 참 예쁜 여자였답니
다. 누구든지 그렇다고 말했지요. 만찬회에 참석한 변호사 부부도, 문학하는 주식 중 개인도,
풋내기 정치가도 모두 그렇게 말했었지요. 참말로 예뻤소. 교회에 갈 때엔 내가 실크 해트를
쓰고 프록 코트를 입는 것을 도와 주었고, 고전음악 감상회에도 같이 갔었고, 또 일요일 오
후의 강연회를 참 좋아했었죠. 매일 아침에는 꼭 8시 반에 식사를 했고, 내가 늦잠을 자게
된 때에는 아침 식사는 다 식어 있었소. 독서도 잘 선택해서 했고, 좋은 그림을 감상할 줄
알았으며, 훌륭한 음악을 들었고 또 좋아했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나에겐 아니꼬워
못 견딜 지경이었소. 아직 그녀는 아름답지요. 켄징턴의 작은 벽돌집에 살면서 모리스 벽지
를 바르고 휘슬러의 에칭화를 벽에 걸고, 여전히 간터에서 송아지 크림과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주문해서 만찬회도 열구요. 20년 전과 똑같이 살고 있답니다."
필립은 애덜 리가 어떻게 하여 그 금실이 좋지 않은 부인과 이혼했는가는 물어 보지 않았
다. 그러나 애덜리 자신이 말을 꺼냈다.
"지금의 마누라 베티는 나의 정식 처가 아니라오. 본처는 아무리 해도 이혼을 승낙해 주
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우리 애들은 모두 사생아들이죠. 그렇다고 뭐 나쁠 게 있습니까? 베
티는 켄징턴의 작은 그 벽돌집에 있던 하녀였지요. 4,5년 전에 생활이 아주 곤란했는데, 아
이들은 일곱이나 있었지요. 그래서 본마누라에게 원조를 좀 청하러 갔었지요. 그 때 그 여자
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시오? 만일 내가 베타를 버리고 외국으로 간다면 원조해 주겠답니다.
베티를 버리다니, 천만에 ! 그래 얼마 동안은 굶주리다시피 하며 지냈지요. 본처가 하는 말
이 나는 빈민굴 생활을 좋아하는가 보다구요. 하기는 내 자신이 보더라도 나는 타락했고 망
할 징조가 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포목 상회의 광고 담당자로 주급 3파운드로 생활하고 있
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켄징턴의 벽돌집에서 살지 않게 된 것을 매일같이 하느님께 감사드
립니다."
그 때 샐 리가 체더 치즈를 담은 접시를 가지고 들어왔다. 애덜리는 능숙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큰 오해라고 생각하오. 물론 자식들을 신사
와 숙녀로 만들려면 돈이 들지요. 그러나 나는 내 자식들이 신사와 숙녀가 되는 것을 바라
지 않소. 샐리도 내년쯤에는 아마 제 밥벌이를 하게 될 거요. 양장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게
될 것이오. 그렇지, 샐리? 사내 자식들은 국토 방위에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 해군이
된다면 좋겠는데. 유쾌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음식 좋고, 봉급도 좋고, 늙으면 연금도 나
오니까."
필립은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애덜리는 하바나 엽초를 자기 손으로 말아 피웠다. 샐리는
식탁을 치웠다. 필립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탁 털어
놓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필립에게는 겸연쩍은 일이었다. 작은 몸뚱이에다가 엄청나게
힘있는 목소리, 다소 허풍이 섞인 과장과 외국인 같은 용모, 아무튼 애덜리는 놀랄 만한 사
람이었다. 또한 애덜리는 자기가 떠나 온 고향의 자기 가문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시대풍의 큰 저택 사진을 필립에게 보이고 애덜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덜리 가문은 이 집에서 7백 년 동안이나 살아왔소. 이 집의 아름다운 천장과 벽
난로는 참 귀한 것입니다."
그는 벽장으로 가더니 거기서 족보를 꺼내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필립에게 보이고 어린애
처럼 좋아했다. 사실 그 족보는 훌륭한 것이었다.
"같은 이름이 여러번 나오지요. 소프, 애덜스탠, 해럴드, 에드워드, 즉 이 이름을 따서 우
리 아들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지요. 그리고 딸들에게는 스페인식의 이름을 붙이고."
필립은 얼른 의혹심이 생겼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고, 물론 악
의에서는 아니지만 다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받고 놀라게 하고 탄복하게 하
기 위해서 하는 수작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앞서 애덜리는 그에게 자기는
윈체스터 퍼블릭 스쿨에 다녔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태도의 차이에 눈치가
빠른 필립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 유명한 공립 학교에서 교육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덜 리가 그의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훌륭한 인척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동
안 필립은 이 사람이 윈체스터의 어느 상인이나 경매인 혹은 석탄 장사의 아들이나 아닐까,
그리고 성이 같다는 것만이 그가 자랑삼아 설명하고 있는 족보에 나타나는 명문과의 유일한
관계가 아닐까 생각하며 속으로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문에 노크 소리가 나더니 아이들 한 떼가 몰려들어왔다. 이젠 모두 말쑥하게 보였다. 그들
의 얼굴은 비누로 씻어서 반들거렸고 머리도 곱게 빗겨져 있었다.
샐 리가 그들을 데리고 주일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애덜리는 활기 있고 연극하는 것 같
은 몸짓으로 아이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농담만 보더라도 애덜 리가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잘생겼다는 것을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보
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아이들은 필립 앞에서 조금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아
버지가 다녀오라고 말했을 대 그들은 해방된 것처럼 좋아하며 뛰어나갔다. 조금 후에 애덜
리 부인이 들어왔다. 머리의 핀은 다 빼 버렸고 앞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 늘이고 있었다.
무늬가 없는 검정색 옷에 값싼 종이꽃을 꽂은 모자를 쓰고, 너무 일을 해서 거칠고 붉어진
손에 검은 염소 가죽 장갑을 억지로 끼려하고 있었다.
"난 교회에 다녀오겠어요. 부탁할 일 없으시죠?"
"당신의 기도나 잘하우."
"아무리 기도드려도 당신에겐 소용이 없어요. 당신은 기도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까
요." 부인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필립을 향해 애교부리는 것같이 말했다. "주인은
아무리 권해도 교회에 안 나가세요. 무신론자나 다름없지요."
"루벤스의 두 번째 처와 닮았지요. 우리 마누라에게도 17세기 의상을 입혀 놓으면 아주
훌륭할 거요. 마누라를 얻으려면 저런 마누라를 얻으란 말입니다. 잘 봐 두시오." 애덜리는
말했다.
"이 양반은 혼자서만 떠들고 계시네."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부인은 장갑의 단추를 겨우 끼웠다. 그러나 방을 나가기 전에 다시 필립쪽을 보고 약간
거북한 듯이 그러나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차 시간까지 여기 계시겠지요? 주인은 항상 좋은 이야기 상대자가 없어 적적해 하신답니
다. 마음에 맞는 분이 어디 많습니까?"
"차 시간까진 계시구말구." 애덜 리가 대신 대답했다. 그리고 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다시
필립에게 말했다. "나는 아이들을 주일 학교에 보낸답니다. 그리고 마누라가 교회에 나가는
것도 찬성이지요. 나는 여자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나 자신은 종교가
없습니다만, 여자와 아이들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다고 믿소."
필립은 10시에 그 집에서 나왔다. 아이들은 8시 반에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그들은 필립이
키스하도록 아주 천연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이 사랑스러웠고, 그들에게 정을 느꼈다.
샐리는 손을 내밀 뿐이었다.
"샐리는 두 번 이상 만나지 않은 남자에게는 키스를 받지 않는답니다."
그의 아버지가 변명했다.
"그럼 꼭 다시 한 번 초대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늘 농담만 하세요." 샐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애는 참 침착하답니다." 애덜 리가 옆에서 말했다.
부인이 아이들을 재우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빵과 치즈와 맥주로 저녁을 먹었다. 얼마 후
에 필립이 부인에게 인사하기 위해 부엌에 갔을 때 부인은 앉아 쉬면서 주보를 읽고 있다가
또 와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주인에게 일자리가 있을 동안은 일요일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이었어요. 그리고 우리로서
도 오셔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시면 고맙겠어요."
다음 토요일에 필립은 애덜리로부터 내일 곡 오기를 바란다는 엽서를 받았다.
그러나 애덜리의 수입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주 초대에 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차 시
간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초대가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필립은 건포도 과
자 한 상자를 사 가지고 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온 가족이 몰려나와 그를 환영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가지고 간 과자는 완전히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필립은 함께 모여 차를
마시도록 했다. 따라서 부엌에서 떠들썩하고 재미있게 차를 마셨다.
이리하여 필립은 일요일마다 애덜리 집을 방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가 아이
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들이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필립이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기가
무섭게 아이들 중의 하나가 찾아온 사람이 필립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유리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큰소동을 일으키며 아래층으로 달려내려와 필립을 맞아들인 다음 그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심지어 차를 마실 때에도 그들은 서로 필립의 옆자리를 차지
하려고 다투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집 아이들에게 필립 아저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애덜리는 참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필립은 조금씩 그 사람의 경력을 알
게 되었다. 애덜리는 여러 번 직업을 바꾸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는 실
론 섬의 차 농장에서 일을 했고, 미국에서 이탈리아 술의 판매도 해보았으며, 톨레도 수도
회사에서 서기 노릇을 한 것이 그의 직업 중에서도 제일 오래 계속된 것이었다. 그 다음에
는 기자가 되었고, 어느 석간지의 경범 재판소 출입 기자도 되어 보았으며, 그후 중부 지바
의 어느 신문사 부주간에 이어 리비에라의 어느 신문사 주간도 되어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여러 가지 직업으로부터 얻은 재미있는 일화를 남에게 이야기할 재료로 삼고 있었고, 그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책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내용이 특이한 책을 좋아했
다. 자기의 깊은 지식보따리를 털어놓을 때 듣는 사람이 경탄하는 것을 보고 그는 어린애같
이 즐거워했다. 그러나 3,4년 전 극도로 빈곤에 빠졌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큰 포목 상회
의 광고부에 취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 그는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너무나 적합하지
않은 직업이라고 느꼈으나, 부인의 주장과 빈곤 때문에 별수 없이 계속해 왔던 것이다.
필립은 애덜리의 집을 나와서 챈서리 거리를 지나 스트랜드를 거쳐 걸었다. 그리하여 의
사당가 끝에서 버스를 타곤 했다. 애덜리 가족을 알게; 된지 약 6주일 되던 어느 일요일이
었다. 이 날도 그는 이 길로 걸어갔으나 켄징턴으로 가는 버스가 만원이었다.
그 때는 6월이었지만 하루 종일 비가 온 뒤라 밤에는 쌀쌀했다. 그는 자리를 잡기 위해
피커딜리 광장가지 걸어갔다. 버스는 분수 곁에서 정거했는데, 여기서는 서너 명 이상 탈 때
가 별로 없었다. 이 버스는 15분마다 오므로 그는 조금 기다려야 했다. 그는 무심코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집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어서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는 애
덜 리가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멎는 것 같았다. 밀드레드를 본 것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주일 동안 그녀를 잊고 있었다.
그녀는 샤프츠버리 거리 한모퉁이에서 길을 건너오려고 서서 마차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건너갈 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깃털 장식이 굉장히 잔뜩 꽂힌 밀짚모자를 쓰고 검은 명주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는 여자가
스커트를 길게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마차가 다 지나가자 그녀는 스커트 자락을 끌면서 길
을 건너 피커딜리 쪽으로 걸어갔다. 필립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뒤를 따랐다. 말을 걸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늦게 어디를 가는 것인지 궁금했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
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에어 가를 돌아서 리젠트가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피커딜리
광장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 때 그녀는 중절모를 쓰고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키가 작은 사
나이를 바짝 따랐다. 그리고 그 남자를 스쳐 가면서 눈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몇 걸
음 앞서 가더니 수완 앤드 에드 호텔 앞에 왔을 때 걸음을 멈추고는 한길 족을 보며 기다리
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남자가 거기까지 왔을 때 그녀는 방긋이 웃었다. 그 남자는 잠시 동
안 그녀를 훑어보더니 그냥 고개를 돌려 흔들거리며 걸어가 버렸다. 필립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서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참 동안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
었다. 그러나 걸음을 재촉하여 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밀드레드!"
그녀는 깜짝 놀라 홱 돌아섰다. 그리고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으나 어두워서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얼마 동안 그들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여기서 당신을 만나다니!"
필립은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떨리기만 했다. 꼬리를 물고 머리에 떠오
르는 말들은 모두 믿을 수가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신파조의 대사뿐이었다.
"너무도 무서운 일이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숨가쁘게 중얼거렸다.
밀드레드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얼굴을 돌리고 발 밑 보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필립은 이 순식간에 당한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이야기라도 좀 할 수 없을까?"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요. 나 혼자 내버려 두세요."
밀드레드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는 이 여자가 급작스레 돈이 필요해서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돈이 필요해서 그런다면 내게 2파운드가 있는데."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말해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걷고 있을 뿐인데요. 같은 직장에 있는 여
자와 여기서 만날 약속이 있어요."
"제발 이젠 거짓말은 그만 해." 필립이 쏘아붙였다.
그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은 조금 전에 한 말을 되풀이했다.
"어디 가서 이야기나 좀 합시다. 당신 하숙방으로 갈 수는 없소?"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남자는 데리고 갈 수 없어요. 원하신다면 내일 만나 드리겠
어요."
필립은 밀드레드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놓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어디든지 갑시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아는 방이 하나 있긴 해요. 그러나 6실링이나 내야 해요."
"그건 문제가 아니오. 어디쯤인데?"
주소를 듣고 마차를 불렀다. 그레이스 인 거리 근처의 대영 박물관을 지나서 지저분한 골
목길에 들어서자 밀드레드는 마차를 멈추었다.
"문 앞까지 타고 가면 주인이 싫어해요."
그들이 마차에 오른 이래 처음 한 말이었다. 몇 걸음 걸어가서 그녀는 어느 집 문을 세
번 세게 두드렸다. 부채꼴 장식 창문에 '방 있음' 이라고 쓰여진 푯말이 걸려 있었다.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키가 크고 나이가 듬직한 여자가 나와 그들을 맞아들였다. 그 여자는 필립
을 힐끗 보고 밀드레드와 무어라 소곤거렸다. 밀드레드가 앞장 서서 필립을 안내하여 깊숙
한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방은 캄캄했다. 밀드레드가 필립에게서 성냥을 받아 들고 가스 등
에 불을 붙였다. 가스등에는 등피도 없었고 씩씩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사방을 둘러보
니 음산하고 작은 침실이었는데, 소나무로 만든 것처럼 색칠을 한, 방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레이스로 만든 커튼은 더러웠고, 벽난로는 커다란 종이 부채로 가리
어져 있었다. 밀드레드는 벽난로 옆에 있는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필립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는 창피스러웠다. 이제 보니 밀드레드는 아주 진하게 연지를 찍었고, 병든 사
람같이 보였다. 뺨에 찍은 연지 때문에 그녀의 푸르스름한 살빛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
녀는 방심한 사람처럼 힘없이 종이 부채를 발보고 있었다. 필립은 적당한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울음이 나올것같이 목이 메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이건 정말 너무나 무서운 일이야!"
"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요? 내가 이 꼴이 된 것을 보면 오히려 속 시원해 하실 줄
생각했는데."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내가 좋아서 한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그럴 수가 있나.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오." 그가 소리쳤다.
"흥,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 고나 할 수밖에."
그는 더 할말이 없었다. 그녀가 비난이나 조소로 생각할지 모르는 말을 하게 될까 두려웠
던 것이다.
"어린애는 나하고 같이 살고 있어요. 브라이튼에 그대로 두려고 했지만 돈이 어디 있어야
지요. 할 수 없이 지금 같이 데리고 있지요. 하이베리 쪽에 방을 얻었어요. 주인에게는 무대
에 나간다고 말해 뒀지요. 매일 웨스트 엔드까지 걸어 다니려면 상당히 힘이 들어요. 그러나
여자에게 방을 빌려주는 집을 쉬 구할 수가 있어야지요."
"전에 일하던 찻집에 다시 나갈 수 없소?"
"이젠 가도 일자리가 없어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리가 뻣뻣해지도록 찾아다녔어요.
꼭 한 번 용케 구했으나 몸이 좀 아파서 1주일 가량 쉬었다 다시 나갔더니, 이젠 안 쓰겠다
고 그러지 않아요. 그럴 수 있죠. 그런 곳에 몸이 약한 여자를 둘 리가 있어요?"
"참, 몸이 퍽 약해진 것 같은데."
"오늘 저녁도 못 나갈 텐데 별도리가 있어야죠.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전번
에 에밀에게 편지로 지금 몹시 돈에 쪼들리고 있다고 써 보냈는데, 돈은커녕 답장도 없었어
요."
"나에게 써 보냈더라면 어떻게 됐을 텐데."
"그런 일이 있은 후라 나는 죽어도 당신에게 그런 편지는 하기 싫었어요. 더구나 내가 고
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은 내가 지은 죄값을 받는 것
이라고나 할까요. 꼴 좋다, 하고 당신이 말해도 나로서는 할말이 없는 입장이니까요."
"아직도 나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어떻소?"
문득 그는 이 여자 때문에 받은 쓰라린 고통을 회상했다. 그녀로부터 받은 고통을 생각하
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와서는 한낱 흘러간 추억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자기는 이미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동정심이 우러났을 뿐이었으므로, 그로서는 자유로워진 것이 기뻤다. 필립은
물끄러미 밀드레드를 쳐다보면서 어째서 이런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홀딱 반했던가하고 자문
해 보는 것이었다.
"당신은 정말 어느 모로 보나 신사예요. 지금까지 내가 알아 온 남자들 중에 신사라고는
당신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참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필립, 돈 좀 빌려 주시겠어요?"
"마침 잘 됐어, 지금 조금은 가지고 있는데. 2파운드밖에 안 되지만."
"갚아 드릴께요."
"아니, 괜찮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그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러고 보니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은 하나도 못 한 셈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현실을 아무
렇지도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밀드레드는 다시 그 무서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필립으로서는 그것을 막을 길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나 돈을 받아 넣었다. 필립도 일어났다.
"바쁘시죠?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것 같은데."
"아니, 별로 바쁘지는 않소."
필립은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는 밀드레드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얼마 동안 침묵이 흘렀다. 드대로 앉아 있기가 쑥스러워 필
립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당신이 나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 데는 정말로 감사해요. 나는 당신이 나를
마구 욕할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녀가 전에 에밀한테서 버림을 받았을 때도 자기에게 찾아와 이렇게 울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의 고민, 자신의 굴욕감이 지금의 감정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 난 어떻게 해서라도 발을 빼고 싶어요. 이런 생활에 진저리가 났어요. 나 같은 여자
에게 이런 생활은 맞지 않아요. 정말 나는 이런 여자는 아니에요. 이 생활을 청산할 수만 있
다면 어떤 일이든지 하겠어요. 하녀 노릇이라도 하겠어요. 아,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자기 자신이 가련해졌는지 밀드레드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그녀는 히스테리컬하게 흐느
끼며 온몸을 떨었다.
"이 생활이 어떤 것인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몸소 당해 보기 전엔 아무도 몰라
요."
필리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빠져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를
생각하니,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같이 괴로웠다.
'불쌍한 사람, 참으로 불쌍한 여자야.'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깊이 감동되었다. 그 때 의외의 묘안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의 가슴은 행복감으로 부
풀어올랐다.
"이것 봐요. 진정으로 청산하고 싶다면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 나도 요즈음엔 상당히
궁해졌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데까지 절약해서 살아야만돼. 지금 나는 케닝턴에서 작은 아파
트 같은 곳에 살고 있지. 마침 빈 방이 하나 있는데, 당신만 좋다면 아이를 데려와도 좋아.
그런데 지금 나는 매주 3실링 반이나 주고 청소와 밥짓는 여자를 쓰고 있거든. 그러니 그
여자가 하던 일을 당신이 하면 되잖겠어? 당신과 어린애의 식비는 그 여자에게 지불하던 돈
보다 그리 많이 들지는 않을 거요. 한 사람이 먹으나 두 사람이 먹으나 큰 차이는 없을 게
요. 어린애는 많이 먹지 않으니까."
밀드레드는 울음을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은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나를 다시 데리고 가겠단 말씀인가요?"
필립도 이 질문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어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을 오해하면 안 돼. 나는 다만 돈이 들지 않는 방과 식사를 제공하려는 것뿐이니까.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지금 그 여자가 하는 일을 그대로 해 달라는 것뿐이지, 그 밖에
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소. 당신도 그 정도의 요리는 할 수 있겠지."
밀드레드는 몸을 벌떡 일으켜 필립 쪽으로 오려고 했다.
"필립, 정말 고마워요."
"그만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요." 그는 마치 그녀를 밀어내듯 팔을 내밀면서 재빨리 말했
다.
그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던 것이다.
"나는 당신하고 친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나 사는 집으로 오겠다는 뜻이겠지?"
"네, 가겠어요.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당신이 후회할 일
은 않겠어요. 필립, 믿어 주세요. 그럼 언제 갈까요?"
"내일 올 수 있다면."
그녀는 갑자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울긴 또 왜 우는 거요?" 필립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 감사해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 별소리를 다. 괜찮소, 이젠 돌아갑시다."
그는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내일 5시 반경에 오면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밤이
너무 깊어져 걸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나, 집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일을 한 기쁨에 취해 있었다. 그는 마치 바람을 타고 가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가
벼웠다.
이튿날 필립은 일찍 일어나 밀드레드를 위해 방 하나를 치워놓았다. 지금까지 쓰던 파출
부는 그만두게 했다. 6시경에 밀드레드가 왔다. 창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필립은 곧 내려
가서 맞아들여 2층으로 짐 나르는 것을 도와 주었다. 짐이라고 해야 당장 필요한 것 이외는
다 팔았고 갈색 종이에 싼 큰 보따리가 서너 개 있을 뿐이었다. 옷은 어제 저녁에 입었던
검은 비단 옷을 입고 있었고, 비록 연지는 바르고 있지 않았으나, 눈가의 검은색은 세수만으
로는 씻어지지 않아, 그것 때문에 더 쇠약해 보였다. 어린애를 팔에 안고 마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몹시 애처롭게 보였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인
사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잘 찾아왔소."
"이 근처엔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어린애는 어머니 팔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애를 몰라보실 거예요."
"참, 브라이튼으로 데리고 간 후로는 한 번도 못 보았는걸."
"어디다 누일까요? 참 무거워요. 무거워서 오래 안고 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글세, 여기에 요람이 있을 리 없고." 필립이 이상야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잠은 나하고 같이 자요. 늘 그렇게 해 왔어요."
밀드레드는 아이를 안락의자에다 누이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전에 필립의 하숙집에 있던
물건은 거의 다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 중에 다만 한 가지 새로운 것이 있었는데, 로슨이
지난 늦은 여름에 그린 필립의 초상화가 벽난로 위에 걸려 있었다. 밀드레드는 그 그림을
곰곰히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들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당신은 저 그림보다는
잘생겼어요."
"흥, 막 올라가는군!" 필립은 웃으며 말했다. "전에는 한 번도 날더러 잘 생겼다는 말은
한 적이 없으면서."
"나는 남자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미남은 싫어요. 미남은 누구나 잘난 척하거
든요."
그 때 그녀의 눈은 본능적으로 방 안의 거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거울이 없었다. 그래
서 두손을 올려 자기 앞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여기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무어라고 할까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아, 이 집엔 주인 부부가 있을 뿐 아무도 없는데 남편은 종일 밖에 나가있고 부인은 토
요일마다 방세를 치를 때 만나는 것 이외에는 전연 얼굴을 볼수 없소. 내가 여기 와서부터
지금까지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면 알 만하지."
밀드레드는 짐을 풀고 정돈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필립은 책을 들고 읽으려 했으나
너무 흥분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다가 미소를 띤 눈
으로 잠자는 어린애를 바라보았다. 필립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밀드레드에 대
한 애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알았다. 지난날의 감정이 이렇게 깨끗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
니 자신도 놀라웠다. 오히려 그녀에게 육체적인 반발심까지 희미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는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
다. 이윽고 문을 두드리며 밀드레드가 들어왔다.
"노크는 안 해도 좋소. 이 집을 한 번 돌아보았소?"
"그렇게 작은 부엌은 처음 봤어요."
"그러나 우리들의 산해 진미를 요리하게 엔 충분할걸." 필립도 가볍게 반박했다.
"부엌에 아무것도 없는데요. 나가서 무얼 좀 사가지고 와야겠어요."
"그러시오. 그런데 꼭 한 가지 당신에게 주의해 둬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는 지독히 절약
해서 살아가야 하오."
"그럼 저녁 식사거리로 무엇을 사 올까요?"
"그거야 당신이 잘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 오면 되지 않소?" 그는 웃었다.
밀드레드는 필립으로부터 돈을 받아 들고 나갔다. 그녀는 30분 후에 돌아와 사 온 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계단을 올라온 탓인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아, 빈혈증이 있군. 이따가 약을 갖다 드리지."
"가게를 찾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어요. 소 간을 사왔어요. 간 맛있죠? 그리고 간은 많이
먹지 못하니까 다른 고기보다 경제적이기도 해요."
부엌에 가스 난로가 있었다. 난로에 간을 얹어 놓고 밀드레드는 들어와서 식탁 준비를 했
다.
"이건 또 왜 한 사람 몫만 차리는 거요? 당신은 안 먹을 셈인가?"
밀드레드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볽히면서 말했다.
"나하고 같이 먹는 걸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글쎄요, 그래도 나는 식모인걸요. 그렇잖아요?"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두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요, 응?"
그는 웃어 버렸으나 이렇게 겸손해진 그녀를 볼 때 무엇인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
꼈다. 불쌍했다. 이 여자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 내가 당신에게 은혜를 베푼다고는 생각지 마시오. 이것은 단순히 고용 관계니까. 나
는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것뿐이요. 따라서 당신은 내게 신
세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천하게 생각할 것은 없소."
밀드레드는 이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두 뺨에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대체로 이
러한 여자들은 일하는 것을 아주 천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필립은 병원에 있을 때의 경
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약간 성가셔졌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몸이 피곤하고 불편
해서 그런 말을 한 걸 가지고 뭘 그러는가 하고 그 자신을 나무랐다. 그는 일어나 식탁에
자리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때 어린애가 깨어났다. 밀드레드는 어린것에게
먹이기 위하여 유아식을 벌써 끊여 놓았다. 간과 베이컨 요리가 다 되어 그들은 마주 앉았
다. 필립은 절약하기 위해서 식사 때 물 이외에 딴 음료는 마시지 않았으나, 집 안에 위스키
가 반 병쯤 남아 있는 걸 생각해냈다. 그래서 위스키를 조금 마시면 밀드레드가 기운을 차
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저녁 식사를 즐겁게 하려 했으나, 밀드레드는
풀이 죽고, 지친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그녀는 어린애를 재우려고 일어났다.
"당신도 일찍 자는 게 좋을 것이오.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네, 그릇을 다 씻고 자겠어요."
필립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옆 방에서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 어떤 때는 필립도 견딜수 없이 외로웠던 것이다. 밀드레드
가 들어와 식탁을 치웠다. 그리고 조금후에 달가닥거리며 그릇 씻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같
은 검은 옷을 입은 채 이것저것 다하다니 참 그녀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필립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책을 가지고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오슬러의 내과학을 읽고 있
었다. 오랫동안 가장 많이 쓰이는 교과서였던 테일러의 내과학 책에 이어서 학생들간에 인
기가 높아진 책이다. 조금 후에 밀드레드가 걷어 올렸던 소매를 풀어 내리면서 들어왔다. 필
립은 잠깐 돌아보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가 여기서 이상한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하
고 밀드레드가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므로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냉정한 태도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 9시에 강의가 있는데, 아침 식사를 8시 15분에 먹게 해주어야겠소. 그렇게 할
수 있겠소?"
"그럼요. 할 수 있구말구요. 의사당가에 있을 때는 아침을 끝내고 8시 20분에 헌 흙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요. 뭐."
"당신 방이 마음에 들면 좋겠소. 오늘 밤만 잘 쉬면 내일은 아주 딴 사람이 될 것이오."
"당신은 늦도록 공부하세요?"
"보통 11시나 11시 반까지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그들 사이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필립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밀드레
드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동안 그녀가 침실을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침
대에 올라갔는지 침대가 삐걱거렸다. 이튿날은 화요일이었다. 필립은 전과 같이 황급히 조반
을 먹고 9시 강의에 늦지않도록 달려갔다. 밀드레드와 오래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니 그녀는 그의 양말을 깁고 있었다.
"상당히 부지런한데."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무얼 하고 지냈소?'
"나요? 방청소 마치고, 어린애 데리고 밖에 나가 산보도 하구요."
밀드레드는 낡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찻집에서 일하던 시절에 제복으로 입던 옷이었
다. 그 때보다 더 헐었으나 어제 입었던 검은 비단 옷보다는 잘 어울렸다. 어린애는 마룻바
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한참 필립을 보았다. 필립이 곁
에 앉아서 발바닥을 간질이자 아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햇볕이 창문으로 새어들어 부드러운 빛을 던졌다.
"집에 돌아왔을 대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좋거든, 여자와 어린애는 방에 좋은 장
식물이 되니까"
그는 병원 약국에서 강장제를 한 병 얻어 가지고 왔다. 그것을 밀드레드에게 주면서 식후
마다 먹으라고 했다. 이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약인데, 열 여섯 살 때부터 불규칙적이나
마 계속해 먹어 온 것이었다.
"로슨 같으면 당신의 그 창백한 살 빛을 좋아할 거요. 훌륭한 그림이 되겟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지금의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소. 그래서 당신의 안색이 우유 짜는 여자
와 같이 뽀얗고 혈색이 좋아야 기쁘겠소."
"하지만 나는 벌써 나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검소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필립은 담배 쌈지에 담배를 넣고 모자를 썼다. 화요일 밤은
대개 비크가에 있는 술집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밀드레드가 온 바로 다음날이 화요일이라
는 것이 필립으로서는 기뻤다. 그것은 밀드레드와의 관계를 명백하게 해두고 싶었던 까닭이
다.
"외출하세요?"
"그렇소. 화요일 밤에는 늘 외출하오. 내일 다시 만나요. 그럼 잘 자요."
필립으로서는 화요일마다 술집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철학자 같은 주식
중개인 마칼리스터가 늘 와 있어, 두사람이 모이면 천지간의 만물에 대해서 신나게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헤이워드도 런던에 있을 때는 늘 참석했다. 헤이워드와 마칼리스터는 속으로
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나 1주일에 한 번씩 이 날만은 습관적으로 만났다. 마칼리스터는
헤이워드를 보고 불쌍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헤이워드의 섬세한 감정을 전적으로 무시하
고 있었다. 항상 핀잔 주는 말투로 그의 작품에 대해서 질문했고, 또 그의 미래의 대작에 대
한 희미한 의견을 조소를 띠며 듣곤 했다. 가끔 두사람 사이에 논쟁이 격해질 때가 있었으
나, 펀치와 같은 좋은 술이 있고, 그들은 술을 좋아했으므로 날이 샐 무렵에는 의견의 차이
는 잊혀지고 아주 친근한 친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도 두 사람 다 주점에
와 있었으며, 로슨까지 와 있었다. 로슨은 그 무렵 런던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 만찬회에 초
대받는 날이 낳아서, 이 술집에도 전과 같이 자주 오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가 좋았다. 그것
은 최근에 마칼리스터가 수지맞는 주권을 사 주어서 두 사람 모두 50파운드 가량 벌었기 때
문이다. 돈쓰기는 좋아하고 그렇다고 벌지는 못하는 로슨에게는 그것이 큰 벌이였던 것이다.
그즈음 로슨도 비평가들에게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몇몇 상류 계급의 귀부인들이 무료로 그
림의 모델이 되어 주겠다는, 소위 초상화가들의 출세 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누라의 얼굴을 그리게 하고 돈을 듬뿍 주겠다는 부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로슨은 주
식에 의한 이번 엉뚱한 벌이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힘 안 들이고 돈을 버는 방법으로서는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제일일세!" 그는 장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이쪽은 현금이라곤 한푼도 낼 필요가 없으니까."
"자네는 지난 화요일에 여기에 오지 않았으니까 좀 손해를 본 셈이군그래?" 마칼리스터는
필립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럼 왜 편지를 해주지 않았나? 1백 파운드란 돈이 지금 내게 얼마나 요긴한가를
자네는 모를 걸세."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 할 수 없지. 누구든지 현장에 없으면 할 수 없네. 지난 화
요일에 여기에 오지 않았으니까 좀 손해를 본 셈이군그래?" 마칼리스터는 필립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럼 왜 편지를 해주지 않았나? 1백 파운드란 돈이 지금 내게 얼마나 요긴한가를
자네는 모를 걸세."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 할 수 없지. 누구든지 현장에 없으면 할 수 없네. 지난 화
요일에 좋은 소식을 들었기에 이 친구들 보고 물었지, 한 판하지 않겠는가고. 그래서 수요일
아침 이 친구들 몫으로 주식 1천 장을 샀던 걸세. 그랬더니 오후에 껑충 오르지 않았겠나.
그래 당장 팔아 버렸지. 이 두 사람은 50파운드씩, 나는 2백 파운드 벌었네."
필립은 그들이 부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투자한 마지막
저당권도 최근에 팔아 버렸었다. 지금 손에 가진 총 재산은 6백 파운드밖에 안 되었다. 장래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고 무서웠다. 의사 자격을 얻을 때까지는 아직 2년이 남았고, 그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은 돈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지금 계획으로는 자격을 얻은 후
에도 얼마 동안은 병원 근무를 할 예정이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나가도 앞으로 3년
동안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 있는 이 돈으로 아무리 절약해서 생활을 한다 해
도 3년 후에 남는 것이라고는 1백 파운드를 넘지 않을 것이었다. 만일 병으로 돈벌이를 못
하게 된다든가 직업을 구하지 못할 경우의 비상금으로서는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다. 여기서
한 판만 잘 된다면 형편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워,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닐세. 근간에 또 건수가 생길 것이니까. 아프리카의 경기가
좋아질 것이니, 그러면 그 때엔 자네도 한 몫 끼도록 하세." 마칼리스터는 남아프리카 주식
시장에 간 일이 있었는데 1,2년 전에 큰 경기로 일확 천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가끔 해주었다.
"그럼, 다음 기회에는 꼭 잊지 말아 주게."
그들은 한밤중까지 앉아 이야기했으나, 집이 제일 먼 필립이 먼저 일어났다. 마지막 전차
를 잡지 못하면 걸어갈 수밖에 없었고, 걸어간다면 상당히 늦어질 것이었다. 다행히 전차를
집어탔으나 그래도 집에 도착한 것은 12시 반쯤 되어서였다. 2층에 오라가 보니 놀랍게도
밀드레드는 아직 자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왜 아직 자지 않고 있소?"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
"아직 졸리지 않아서요."
"그렇지만 잠을 자야 하오. 그래야 피로가 풀리니까."
밀드레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보니 저녁 식사 후에 다시 그 검은 비단 옷
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당신이 늦게 오시면 무슨 심부름이라도 있을까 해서요."
이렇게 말하고 밀드레드는 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미소의 그림자가 그녀의 얇고 파리한
입술에 떠올랐다. 필립은 그 미소가 무엇을 암시하는가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
도 했다. 순간 약간 당황하기는 했으나 곧 유쾌하고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잘 자구려."
"벌써 주무시려고 그러세요?"
"벌써라니? 1시가 다 되어 가는걸. 요즘은 늦게까지 있으면 아침에 일찍 깨지 못하겠어."
밀드레드는 필립의 손을 잡고 미소를 띠면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필립, 저번 날 밤에 당신이 날더러 이 아파트로 오라고 했을 때 당신은 나에게 요리와
청소 이외의 일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 때 내가 한 대답이 진정이라고 생각하셨는
지는 몰라도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고?" 필립은 손을 빼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었는
데."
"어머, 어리석게 굴지 마세요."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 말을 진정으로 들었소.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당신을 여기로 오라고 하지 않
았을 거요."
"왜요?"
"하여튼 그것은 곤란하다니까. 무어라고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내가 만약 그랬다가는 만사
는 끝장이오."
밀드레드는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러세요? 좋도록 하세요.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해주십사고 무릎을 꿇고 애원할 여
자는 아니랍니다."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그 후 생활은 아무 일 없이 진행되었다. 필립은 하루 종일 병원에서 지내고 밤에는 애덜
리를 찾아가거나 비크가의 술집으로 갈 때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공부했다. 그 동안 자기가
조수로 일하고 있는 의사가 만찬회에 초대한 일이 한 번 있었고, 동료 학생들이 연 파티에
서너 번 간 일도 있었다. 밀드레드는 그 단조로운 생활을 곧잘 해 나갔다. 그녀는 밤에 때때
로 필립이 자기를 혼자 남겨두고 외출하곤 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했으나, 불평을 하지는 않
았다. 이따금 필립은 그녀를 극장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식사와 숙
소를 제공하는 대가로 가사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처음의 약속을 필립은 철저
히 지켜 왔다. 그녀는 이번 여름동안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을 단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
립의 허락을 얻어 가을까지 이 집에 머물기로 했다. 가을이 되면 어떻게든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당신이 취직한 후에도 있고 싶으면 있어도 좋소. 빈 방도 있고 하니 전에 있던
여자를 다시 불러서 어린애를 보게 할 수도 있으니까."
입원 병동 조수로서 2학기가 끝날 무렵 필립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7월 중순 어느 화요일
밤 비크가의 그 술집에 갔더니 아무도 없고 마칼리스터만 혼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앉아서
아직 오지 않은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고금 후에 마칼리스터가 말을 꺼냈다.
"참, 오늘 좋은 뉴스를 들었는데, 클라인폰테인의 주식 말일세. 로데지아에 있는 금광인데,
자네도 한 판 해볼 마음이 있으면 해보게. 좀 벌이가 될 것 같네."
필립은 이러한 기회를 상당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조금 주저하게 되었
다. 지금 잘못되어 손해를 본다는 것은 그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필립에게는 투기
꾼의 기질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하고는 싶은데, 용기가 안 나서. 만일 잘못하면 얼마나 잃게 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애당초 말도 꺼내지 말걸. 난 또 자네가 한 번 해보고 싶어하기에 한
말인데." 마칼리스터는 냉정하게 말했다.
필립은 마칼리스터에게 무시를 당한 것 같았다.
"그거야 하고 싶긴 한데." 그는 말하면서 웃어 보였다.
"자네, 돈을 잃어 볼 용기가 없으면 벌지도 못하는 법이라네."
그렇게 말하고 마칼리스터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이야기에 맞장구는 치
면서도 속으로 만일 이번에 그가 주식을 사지 않고, 투기를 안 했다가 그 결과 돈벌이의 기
회를 놓치게 된다면 다음 만날 때 이 친구들이 자기를 굉장히 놀려 댈 것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더구나 마칼리스터는 입버릇이 고약한 사나이였다.
"자네가 좋다고 생각하면 한 번 해보겠네." 그는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말해 버
렸다.
"좋네, 그러면 2백 50장 사 주겠네. 그래서 반 크라운만 올라가면 곧 팔아 버리겠네."
필립은 그렇게 되면 전부 얼마나 벌게 될까 하고 곧 속셈을 해보았다. 입안에 침이 괴었
다. 30파운드가 굴러들어오게 되는 것이었다. 어쩐지 일이 잘 될 것만 같았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밀드레드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다.
"나는 주식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는 들어 본 일이 없어요. 전에 에밀이 늘 그러던데
주식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부터가 잘못이래요."
필립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즉시 신문을 한 장 사서 주식 시세란을 보았다. 주식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마칼리스터가 말한 주식이 어디있는지 찾아 내는 데도 힘이 들
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주식이 4분의 1이 오른 것을 알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만일 마칼리스터가 살 것을 잊어버렸든가 혹은 다른 이유로 사지 않은 것을 아닐까 하고 생
각하니,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마칼리스터는 팔면 전보를 치겠다고 말했었다. 필립은 전차
를 기다릴 수가 없을 만큼 흥분했다. 그래서 마차를 잡아탔다. 이것은 평소에는 하지 않는
낭비였다.
"전보 오지 않았소?" 그는 방에 뛰어들면서 물었다.
"안 왔어요." 밀드레드가 대답했다.
그는 이 대답을 들으니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너무 실망이 컸던 탓으로 의자에 털썩 주
저앉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결국 내 몫은 사주지 않았구나, 망할 자식!" 그는 고함을 질렀다. "참, 복도
없는 놈이야, 나는. 돈을 어디다 쓸까하고 하루 종일 생각했었는데."
"그럼 그 돈을 어디다 쓰려고 했어요?"
"그까짓 적 지금 와서 생각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어? 아, 그 돈이 생겼더라면."
그 때 그녀는 한바탕 웃고 나서 한 장의 전보를 내주었다.
"잠깐 놀려 본 거예요. 내가 먼저 뜯어보았어요."
그는 여자의 손에서 빼앗듯이 전보를 받았다. 과연 마칼리스터는 그에게 2백 50주를 사서
그가 말한 대로 반 크라운의 이윤으로 팔아 버렸던 것이다. 매매 계산서는 내일 보낸다고
쓰여 있었다. 순간 그녀의 너무도 잔인한 장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곧 노여
움보다 기쁨으로 가슴이 가득 차 버렸다.
"이젠 살았다!" 그는 소리쳤다. "원한다면 당신에게도 옷을 한 벌 사 주겠소."
"네, 꼭 한 벌 필요해요."
실은 필립도 요즘에는 돈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생활비는 거의
같을 것이라고 필립 자신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잘못이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비가 두통거리가 되어 있었다. 밀드레드는 결코 알뜰한 살림꾼이 못 되었다. 매일 식당
에서 밥을 사먹는 것만큼이나 돈이 들었다. 어린애에게 옷을 사 줘야 했고, 밀드레드에게는
신발, 우산, 기타 그녀의 말에 의하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소한 물건들이 필요했다. 그녀
는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말했으나 별로 취직 자리를 찾아 다니는 눈치조차 없었다. 그러다
가 감기가 들어 약 2주일간 누워 있게 되었고, 나은 다음에도 한 두 군데 사람을 구하는 광
고에 응모했으나 되지 않았다. 너무 늦게 가서 그 자리는 차 버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녀
의 건강 상태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힘겨운 노동이었다. 한 번은 일리자리가 생겼으나
봉급이 1주일에 14실링밖에 안 되었다. 그녀는 더 많이 주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가
지 않았다.
"남이 올려다 준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값싸게 굴면 도리어 웃음
거리가 돼요." 그녀가 말했다.
"뭐, 14실링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필립은 냉정하게 말했었다.
14실링을 벌게 된다면 생활비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필립은 생각지 않을 수가 없
었던 것이다. 밀드레드는 자기가 취직을 못 하는 원인은 면접할 때에 입고 갈 깨끗한 옷이
없는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필립은 새 옷을 한 벌 사 주었다. 그 후 몇 군데 찾아다
닌 모양이었으나. 필립은 그때서야 정말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을 하
기가 싫은 것이었다.
필립이 아는 돈벌이라고는 주식 매매밖에 없었다. 그는 여름 같은 행운이 한 번 더 찾아
와 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트랜스바알에서 전쟁이 일어나 남아프리카 주변 시장은
전혀 경기가 없었다. 마칼리스터의 말에 의하면 한 달 내로 레드버스 불러가 프리토리아에
입성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호경기가 다시 올 석이라고 했다. 다만 끈기 있게 기다릴 수밖
에 없다고 했다. 그들은 영국군의 정세가 불리해지기를 바랐다. 영국군이 불리해지면 주가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때를 기다려 사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필립은 애족하는 신
문의 '시정'란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는 근심스럽고 초조했다. 그래서 그는 본의는 아니
었으나 밀드레드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녀 역시 성격이 상냥하지도 않고
참을성이 많은 여자도 아니었으므로 같이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필립은 늘 자기
가 심한 말을 한 데 대해서 사과하려 했으나, 밀드레드는 남을 용서하는 성질이 아니었으므
로 한 이틀 동안은 토라져 있곤 했다. 음식을 먹는 태도나 벗은 옷을 여기저기 흩어 놓는
것으로써 필립의 신경을 돋구곤 했다. 필립은 이 여자의 엉터리 없는 짓에는 화를 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는 그런 것에는 아주 무관심해져서 화를 내는 때라고는
없게 되었다. 밀드레드와의 마음내키지 않는 동거 생활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그러던 중에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함께 이틀간의 휴가를 얻었다. 필립은 크리스
마스 트리를 사다가 방을 장식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밀드레드와 어린애에게 각
각 조그만 선물을 했다. 단 두 식구에 큰 칠면조 한 마리를 살 수는 없었다. 밀드레드는 닭
고기를 굽고 근처의 식료품 상점에서 크리스마스 푸딩을 사다가 찌기도 했다. 포도주도 큰
마음 먹고 한 병 샀다. 식사를 마치자 필립은 벽난로 가에 있는 큰 안락의자에 앉아 파이프
를 빨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술을 마신 탓으로 그렇게까지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돈
걱정도 잠시 잊을 수가 있었다. 그는 행복감에 잠겼고 기분이 좋았다. 조금 후에 밀드레드가
들어와서 어린애가 잠들기 전 잠자리 키스를 해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밀드레드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키스를 해주고 가스 불을 끄고는 어린애가 깨어 울 경
우를 생각하여 문을 열어 놓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어디 앉으려오?" 그는 밀드레드에게 물었다.
"당신은 의자에 앉으세요. 나는 마루에 앉겠어요."
필립이 의자에 앉자 여자는 난로 앞에 앉아서 필립의 무릎에 기댔다. 필립은 복스홀 브리
지가에 있던 이 여자의 하숙집에서 둘이 늘 이렇게 앉아 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
그 위치는 반대였다. 그 때에는 필립이 마룻바닥에 앉고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어 앉았
던 것이다. 그 때 그는 이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것을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이 여자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이 생겼다. 그는 또 그녀의 어린애의 부드럽고 작은
손이 자기의 목덜미를 만지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소?" 그는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그를 보고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꿈
꾸듯이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여자가 몸을 돌리면서 필립을 이상스럽다
는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이리로 온 후 한 번도 키스해 주지 않을 걸 아세요?" 그녀는 갑자기 말문을 열었
다.
"왜, 키스해 주길 원하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만 전처럼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겠지요? 그렇죠?"
"난 당신을 무척 좋아해요."
"아이를 더 좋아하면서."
필립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밀드레드는 필립의 손에 자기의 뺨을 살며시 댔다. 그
리고 마루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물었다.
"그러면 이젠 나를 노엽게 생각하지 않는단 밀이죠?"
"노여워할 이유가 있어야지."
"아, 나는 지금처럼 당신이 그리워 본 적은 없었어요. 나는 구렁텅이 속을 한 번 헤치고
나와서 비로소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밀드레드가 항상 즐겨 읽던 값싼 대중 소설 가운데 나온 구절들을 이런 방법으로 사용하
는 것을 생각하니,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방금 이 여자
가 쓴 그 말이 이 여자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또
이 여자는 패 밀리 해럴드지에나 나오는 이런 과장된 말이 아니고는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 둘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필립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결국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마치 지금가지 침묵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말했다.
"화는 내지 마시오. 이럴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이랬다저랬다하는 당신을 나쁜 여자다,
지독한 여자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바보였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원망한 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었소. 나는 또 나의
힘으로 당신이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오. 지금 생각해 보니 무리한 일이
었다는 것을 알겠소. 나는 무엇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
고 믿었던 것이오. 지금 생각해 보니 무리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겠소. 나는 무엇이 한 사람
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지 모르겠소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오. 그것은 친절을 베풀거나 너그러운 태도로 대하거나 그런 종류의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오."
"나는 당신이 정말로 나를 사랑했더라면 아직도 사랑해 줄 것으로 믿고 있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그랬었지. 이 사랑이야말로 평생을 가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생
각했었소 당신과 함께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했었소. 당신과 함께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했었으니 까. 그리고 도 당신이 늙고 시들
어서 아무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가 빨리 와서 당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
기를 원하기도 했었소."
밀드레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잠시 후에 일어나 잠자리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냘프고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인데 굿 나잇 키스를 안 해 주시겠어요?"
필립은 웃고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키스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 침실로 돌아갔다. 필립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위험의 절정은 2,3주일 후에 닥쳐왔다. 밀드레드는 필립의 태도 때문에 이상한 흥분 상태
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뒤섞여 있었으나, 이 감정
들은 곧잘 변했다. 그러나 대개는 혼자 집에서 곰곰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밀드레드는 자기의 감정을 모두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자기의 감정을 자신도 알
지 못했다. 그러나 몇 가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또 그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아직껏 필립이란 인간을 전혀 이해한 적도 없었고 도 그다지 좋
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만 필립을 신사라고 믿고있는 까닭에 그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을 만족스럽게 생각해 왔었다. 그녀에게는 필립의 아버지가 의사였고 백부가 목사라는 것이
상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가지 그를 바보 취급해 왔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조금 멸
시하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앞에서는 기분이 딱딱해지고 편치 않았다. 자
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고 필립이 언제나 지기의 태도를 비평하고 잇는 것같이 느껴졌
다.
처음 이 케닝턴의 작은 하숙집으로 옮겨왔을 대는 생활에 시달려 아주 지쳐 있었고 부끄
러운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항상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했었다. 이제부터는 방세를 낼 필
요도 없게 되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돈벌이하러 나가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 마음이 불
편할 때면 언제든지 조용히 누워 있을 수 잇게 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었다. 지금
까지 자기가 해온 생활을 뒤돌아보면 몸서리가 났다. 싫더라도 좋은 척하고 장단을 맞추고
아양을 떨어야 했던 때를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사내들의 난폭함과 저속한 욕지거리가 문
득 머리에 떠오르면 가련했던 자신을 생각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추억은 자주
떠오르지 않았다. 필립이 자기를 구해준 데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필립이 얼마
나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그를 얼마나 지독하게 대해
왔던가를 생각하면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죄의 값을 치르
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만 생각했던 것이
자기의 은근한 제의를 필립이 거절했을 때는 참으로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비싸게 굴고 싶거든 얼마든지 비싸게 굴어 봐 멋대
로 해 보라지. 흥, 누가 더 아쉬운가? 얼마 안 가서 필립이 먼저 달려들겠지. 그 때는 내가
거절해 주어야지. 내가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다간 큰 오해지. 밀드레드는 필립쯤은 얼마든지
움직일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속을 빤
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제로 전에는 싸울 적마다 그는 이젠 다시는 안
오겠다고 맹세하고도 얼마 안 가서 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기 앞에서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았던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그는 땅
에 길게 누워서 그 위를 그녀가 밟고 넘어가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엉엉 소리내어 자
기 앞에서 운 적도 있었다. 필립을 조종하는 것쯤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고
그의 감정을 무시해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저 무턱대고 내버려 두면 반드시 오래지 않아
서 납작기어서 따라오게 마련이었다. 밀드레드는 필립이 그렇게 심한 굴욕도 자기 앞에서는
잘 참아 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여 혼자 웃었다. 자기로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해온 셈
이었다. 지금은 남자들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알았더니와 이 이상 남자와 교제하기도 싫었
다. 여기서 차라리 필립과 결혼해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필
립은 완전 무결한 신사이리만큼 간단히 웃어 버릴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바삐 서
둘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행동 개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간지러운 느낌은 있지만 필립이 점점 더 어린애를 사랑해 간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유
리한 일이었다. 남의 어린애를 그렇게까지 귀여워한다는 것은 조금 우스운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필립은 보통 사람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두 가지 달라진 점도 있었다. 전에는 덮어놓고 복종했고, 자기를 위해서라면 무
엇이든지 즐겨 해주었고, 자기가 화를 내면 금방 풀이 죽고, 조금 친절하게 말을 해주면 아
주 기뻐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지난 1년 동안에 필립이 조금이라도 진보했으
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자기가 시분 나빠해도 필립이 무관심한 척하는 것은 일종의 연
극이라고 생각했다. 떄때로 필립이 책을 읽으려고 자기에게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자기는 화를 내야 옳을지 기분 나빠해야 옳을지 분간을 못 하다가 결국 아
무 쪽도 안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이야기할 때 필립이 그들은 육체적이
아니고 다만 정신적인 우정 관계만을 계속하자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밀드레드의 생각
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으로 미루어 보아 필립은 틀림없이 자기가 임신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자기가 임신할 우려는 조금도 없
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나, 결국 필립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밀드레드는 모든 남
자들도 자기가 생각하는 것같이 이성과의 교제라면 으레 성 관계라고만 규정짓는다고 생각
했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 온 여자였다.
따라서 그녀가 해온 남자와의 교제라는 것은 실제로 그것뿐이었고, 또 그 남자에게 성 관계
이외에 다른 흥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니 필립이 다른 여
자와 사랑을 하고 있지나 아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간호사 혹은 그가 밖에서
만나는 모든 여성을 경계해 보고 의심해 보았다. 밀드레드는 여러 가지의 기술적 질문으로
애달리 집에는 위험 인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간호사 쪽에도 다른 의학생들과 마
찬가지로 직무상 같이 일한다는 것뿐이고 필립은 성에 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말하자면 간호사란 단지 요오드포름의 희미한 냄새와 더불어 필립의 머릿
속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필립에게 오는 편지라고는 없었고 그의 소지품 중에서도 여자 사
진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만일 이렇게까지 조사해도 필립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면 필립은 감추는 데는 선수일 것이었다. 더구나 밀드레드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아
주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고, 애당초 그 질문에 대해서도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고, 애당
초 글 질문 속에 무슨 숨겨진 목적이 있다는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녀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이것은 안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다른 여자와 사랑하고 있지만 않
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필립이 실제로 자기를 대하는 태도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만일 지금과 같은 태도로 자기를
대할 생각이었다면 왜 자기를 이 집으로 들어오게 했을까?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다, 밀드레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든가 동정한다든가 친절을 베푼다는 그런 성질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이란 필립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가 이런 태도로 자기를 대하는 것은 첫째로 기사도 정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값싼 대중 소설의 가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필립의 부드러운 태
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낭만적인 설명을 붙여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비통한 오해, 불에 의한 정호, 그리고 눈같이 깨끗한 마음, 그리고 눈보라치고 살을 에는 듯
한 추운 크리스마스 밤에 고요히 죽는 것 등의 공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필
립이 절대로 그녀와 같은 방에서 자려 하지 않고 또 그 때 그 말의 어조가 전과 확실히 달
라진 것을 느꼈을 때야 비로소 필립이 자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 사
실을 알고 밀드레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립이 전에 자기에게 하던 말들, 또 얼마나
그가 당신을 사랑했는가를 생각하니 그녀로서는 몹시 무시당한 것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되고 보면 밀드레드는 타고난 오만으로 견디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
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필립이 한없이 미워져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한 번
모욕을 주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다. 한
두 번은 그의 앞에서 울기도 했다. 도 한 번은 지극히 부드럽게 달래 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이 밤에 강변을 거닐다가도 필립의 팔을 슬며시 잡으면 필립은 그녀가 자기 몸에 닿는 것
이 불쾌하기나 한 것처럼 무슨 이유를 붙여 슬쩍 팔을 빼 버리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필립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애를 통하는 것
이었다. 필립은 날이 갈수록 어린애를 귀여워했다. 밀드레드가 어린애를 때리거나 밀치면 필
립은 화를 냈고, 또 그녀가 어린애를 안고 서 있으면 필립의 얼굴에는 옛날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곰곰 생각하면 밀드레드는 분해서 못 견디게 되고 언제든지 한 번 복수를 하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필립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꼭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초조해질 뿐이었다. 때
로는 필립에게서 이상한 욕정을 느끼기도 했다. 필립의 정열은 완전히 식어 버린 것 같았고,
그 생각을 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필립이라는 사람을 알기 시작한 것 같았
다. 그녀에겐 필립이 하는 일마다 자기에게 나쁘게 하는 것 같아 보였고,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과실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지도 않게 생각되엇다. 그녀는 그들이 이런 상태로 살아간
다는 것은 부자유스럽다고 늘 생각 해 왔었다. 그 때 문득 떠오른 것은 사정이 좀 바뀌어서
만일 자기가 그의 어린애를 배게 된다면 필립은 틀림없이 자기와 결혼해 주리라는 것이었
다. 좀 특수한 성격을 가지기는 했으나, 필립은 어떤 면으로 보나 신사이고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것은 밀드레드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확고한 신념
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필립과의 관계에 큰 변화를 일으켜 보려
고 결심했다. 이제는 키스도 해주지 않게 되었으나,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키스하게 만
들 것이었다. 밀드레드는 전에 필립이 얼마나 자기에게 뜨거운 키스를 했던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필립의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2월 초순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필립은 오늘 밤은 로슨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말
했다. 그 날은 로슨의 생일이어서 생일 축하연을 하기 위하여 로슨의 화실에서 파티가 열리
게 되었으므로 늦게 야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로슨은 비크 가의 술집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펀치를 두 병 사왔고, 그들 은 그 날 밤 즐겁게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밀드레드는 여자도
그 파티에 참석할 것인가를 물어 보았으나, 필립은 여자 손님들은 없고 초대받은 사람은 남
자들뿐이며,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나 할 것이라 했다. 밀드레드에게는 별로 재미가 있
을 것 같지 않았다. 만일 자기가 화가라면 모델 여자라도 대여섯 명 초대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밀드레드는 필립이 나간 후 침대에 오라가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후에
좋은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그녀는 필립이 들어올 수 없게 현관문을 잠가 버렸다. 필립이
돌아온 것은 밤 1시경이었다. 그리고 문고리가 걸려 있는 것을 알고 무어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밀드레드는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왜 문고리를 걸어 놓았소? 여하튼 자는 사람을 깨워서 미안하지만."
"일부러 열어 두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걸렸을까?"
"자, 빨리 돌아가 자구려, 감기 걸리겠소."
그는 거실로 들어가 가스 등을 켰다. 밀드레드도 다라 들어와 벽난로 앞에 섰다.
"발을 좀 녹여야겠어요. 꽁꽁 얼었어요."
필립은 앉아서 구두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반짝거리고 두 뺨은 상기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고 왔다는 것을 곧 알 수가 있었다.
"재미있었어요?"
"암, 재미있었지."
필립이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하고 웃고 했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
흥겨운 기분이 남아 있었다. 그 날 밤 파티는 그로 하여금 화려했던 생활을 회상케 했었다.
그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호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아직 안 주무시겠어요?"
"난 좀더 있다가 자겠어. 졸리지가 않은걸. 로슨 자식 기분이 몹시 좋아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있었다오."
"무슨 얘길 그렇게 했나요?"
"누가 알 게 뭐야? 세상의 온갖 문예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우리는 모두 목청껏 떠들면서
도 그것은 누구보고 들어 달라는 것은 아니었거든. 참 당신에게 그 광경을 보여 주고 싶었
소."
필립은 그 때의 광경을 다시 눈앞에 그리면서 크게 웃었다 밀드레드는 덩달아 웃었다 그
녀는 분명히 필립이 과음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그녀가 은근히 바랐던 것이기도 했
다. 사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던 것이다.
"좀 앉아도 괜찮아요?" 그녀는 말은 했으나, 필립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무릎 위에 앉
아 버렸다.
"지금 자지 않겠으면 가운이라도 입고 오는 것이 좋겠는데."
"난 괜찮아요. 이대로 있어도." 그녀는 두 팔로 필립의 목을 껴안으면서 필립의 얼굴에 자
기 뺨을 비벼 대며 말했다.
"필립,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요, 네?"
필립은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사랑해요, 필립."
"쓸데없는 소리 그만둬요."
"진정이에요, 당신 없이는 못 살겠어요. 나는 당신을 원해요."
그는 그녀의 팔을 풀면서 말했다.
"자, 일어나요.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고 또 나를 바보 취급하고 있소."
"정말 사랑해요, 필립. 지금까지 잘못한 것은 모두 사과하겠어요.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요. 인간으로서 이렇게 부자연스런 생활은 할 수 없어요."
필립은 의자에서 빠져나와 그녀만 남겨 놓았다.
"미안하오, 하지만 때가 너무 늦었어."
밀드레드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울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어쩌면 그렇게도 냉정하세요."
"아마 내가 과거에 당신을 지나치게 사랑했던 탓인가 보오. 정열이 다 식은 모양이오. 이
젠 그런 생각만 해도 무섭소. 지금도 당신을 보면 에밀이나 그리피스의 얼굴이 떠오르거든.
이것만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오. 신경 과민인가 보오."
밀드레드는 필립의 손에 마구 키스를 했다.
"그만두라니까!"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다시 힘없이 의자에 쓰러졌다.
"이대로는 못 살겠어요. 만일 사랑해 주지 않겠다면 나는 차라리 어디로 가버리겠어요."
"글세, 그런 부질 없는 소리는 그만 해요.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이오? 있고 싶으면 언제까
지든지 있어도 괜찮소. 우리 사이가 친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명심한다는 조
건 아래서 말이오."
그 때 밀드레드는 갑자기 지금까지의 격렬한 흥분으로부터 조용히 아양을 떠는 웃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필립에게로 가까이 가서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
리로 속삭였다.
"정말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세요. 당신은 너무 신경이 예민해요. 나도 얼마든지 좋은 여자
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기 얼굴을 필립의 뺨에 비벼 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에게
는 그녀의 웃는 얼굴이 혐오스런 교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을 암시하는 듯
한 빤짝거리는 그의 눈은 그에게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
다.
"싫다니까!"
그러나 밀드레드느 허리를 놓지 않았다. 필립의 입술을 찾아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나 필
립은 그녀의 손을 잡아 데고 그대로 거칠게 밀어 버렸다.
"아, 불쾌해!"
"뭐, 불쾌하다고?"
밀드레드는 넘어지려다가 벽난로 가를 잡고 몸을 일으키면서 필립을 뚫어지게 노려보았
다. 두 볼이 상기되더니 으하하 하고 성난 웃음을 한바탕 크게 웃었다.
"불쾌한 건 나야, 이놈아!" 그녀는 소리지르고 나서 잠깐 숨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무서운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있는 대로 높여서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욕설이란 욕설은 다 털어놓았다. 너무
나 추잡한 욕이기에 필립은 깜짝 놀랐다. 보통 때는 항상 세련된 척하고 조금 거친 말만 들
어도 놀라던 이 여자가 어떻게 이런 입에 담지 못할 추잡한 말을 다 알고 있는지 필립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밀드레드는 필립에게 다가와서 필립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대고 또다
시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일그러졌고, 입가에는 거품이 하얗게 묻어 있
었으며, 입을 놀릴 때마다 침이 마구 튀어나왔다.
"난 네놈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 한 번도 없어! 너 같은 놈은 처음부터 내 놀림감밖엔 되
지 못했어! 흥, 너같이 아주 지긋지긋한 놈은 처음 봤어! 아이, 보기 싫어. 난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네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곤 했어! 네가 내 입에 키스할 때마
다 나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어! 그리피스도 너를 비웃었지! 우리는 너를 바보라고 했어!
이 바보 같은 자식! 얼간이! 천치!"
그리고 다시 지독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필립의 결점이란 결점은 모조리 늘어놓았다.
노랑이라고도 했다. 얼빠진 놈이라고도 했고, 속이 텅 빈 이기주의자라고도 했다. 어쨌든 필
립이 가장 아프게 느낄 만한 약점에 대에서 가장 혹독한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가려고
하다가 그래도 모자랐던지 추잡한 욕설을 히스테리컬하게 계속하여 마구 퍼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문을 홱 열어제치고 다시 돌아서서 필립의 마음을 찌르는 유
일한 말이라 믿고 잇던 최후의 말을 내뱉었다. 그 한마디 말 가운데는 그녀의 가슴에 서린
증오와 악의가 몽땅 들어 있었다.
"이 절름발이야!"
이튿날 아침 늦잠을 잔 것같이 느껴 필립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9시였다. 침
대에서 뛰어내려 면도를 하기 위하여 따뜻한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밀드레드는
아직 부엌에 나와 있지도 않았고 엊저녁 식사한 그릇들도 씻지 않은 채 설거지통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밀드레드, 일어나지. 너무 늦었는데."
또 한 번 더 크게 두드렸으나,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엊저녁 말다툼 때문에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너무 바빠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면도
할 물을 불에 얹어 놓고 너무 차지 않게 전날부터 물을 받아 두었던 목욕탕으로 뛰어들었
다. 그는 자기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동안에 그녀가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여 그
것을 거실로 갖다 놓으리라 생각했다. 전에 두서너 번 말다툼했을 적에도 그랬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그녀가 일어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도 무얼 좀 먹고 나가려면 손수 만들어 먹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늦잠을
자 버린 아침에 그녀가 이런 심술을 부리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다. 그가 출근할 준비가 다
되었을 대에도 밀드레드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방에서는 일어났는지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필립은 손수 차를 끓이고 빵에 버터를 발라 구두를
신으면서 그것을 먹었다. 그리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큰 길까지 뛰어가서 전차를 탔다. 신문
판매소 앞에 전황 뉴스를 알리는 게시라도 없나 하고 창 박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가 우연히
어젯밤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쨌든 지나간 일이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 생각을 해보니 여
간 망측한 일이 아니었고, 또 자기가 엊저녁에 한 일도 우스웠다. 필립도 인간인 이상 그렇
게 자기 감정을 쉽게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때는 자기도 흥분해 있었다. 그
를 그러한 입장에 서게 한 밀드레드가 밉살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녀의 감정의 무서
운 폭발, 그리고 그녀가 늘어놓은 더러운 욕설들이 다시 머리에 떠올라서 새삼스럽게 놀랐
다. 특히 최후에 한 그 말을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리려는 것처럼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동료들도 자기에게 감정이 상할
때면 반드시 그의 불구에 대해서 한마디했고 필립도 그런것쯤에는 이젠 익숙해 있었다. 학
교에 다닐 때와같이 필립의 눈앞에서는 하지 않지만 병원에서도 사람들이 그가 안 보는 줄
알고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것을 그는 종종 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필립은 이 모든
행동이 악의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고 단지 사람이란 흉내내기를 좋아하는 동물이고 도 그렇
게 함으로써 가장 쉽게 사람들을 웃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흉내내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일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병동은 그에게 즐겁고 친밀감을 주었
다. 간호사장이 와서 사무적인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면서 인사했다.
"오늘은 상당히 늦으셨는데요, 캐리 씨."
"네, 엊저녁에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그만."
"얼굴에 그렇다고 쓰여 있어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웃으면서 필립은 첫 번째 환자에게로 갔다. 결핵성 궤양을 앓는 소년이었다. 먼저 붕대를
풀어 주었다. 소년은 필립을 퍽 따랐다. 필립은 새 붕대를 감아 주면서 재미있는 농담으로
소년을 놀려 주었다. 필립은 항상 환자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
고 치료할 때에도 아프지 않게 조심해서 잘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필립의 동료 중에는 거칠
고 아무렇게나 하는 조수도 있었다. 점심은 동료들과 함께 간이 식당에서 먹곤 했는데, 버터
바른 핫케이크와 코코아 한 잔의 간단한 식사였다. 그들은 먹으면서 전쟁 이야기를 했다. 의
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일선으로 갔으나, 군 당국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병원 근무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절당했다. 어쨌든 전쟁만 오래 계속된다면 앞으로는 자격증만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갈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전쟁
은 얼마 안 있어 끝날 것 같아 보였다. 로버트 장군이 참전했으니 전쟁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칼리스터의 의견도 또한 그러했다. 이대 기회를 잘 살피
다가 전쟁일 끝나기 직전에 주식을 냉큼 사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평화가 오기만 하면 반
드시 경기가 좋아질 것이니 잘만 하면 틀림없이 크게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언제
든지 기회만 호면 사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지난여름 30파운드 번 것으로 필립의 욕심은 상
당히 커졌던 것이다. 이번에는 한 2백 파운드 가량 벌고 싶었다.
일과를 마치고 그는 전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밀드레드가 오늘 저녁에는 어떠한 태도
로 나올 것인가 몹시 궁금했다. 아마 약이 잔뜩 올라 있어 대답도 안 하리라 생각하니 답
답해졌다. 겨울로서는 제법 따스한 밤이었고, 남 런던의 잿빛 거리에도 벌써 2월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자연은 길고 긴 겨울이 지나면 바야흐로 태동을 시작하는 것이요, 온갖 생
물은 잠을 깨고 봅의 선구자가 다시금 약동을 시작할 때 대지에는 고개를 쳐드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필립은 더 멀리 타고 가버리고 싶었다. 자기의 방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어린애를 보고 싶은 충동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 때 어린애가 무어라고 웅얼거리면서 아장아장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혼자 웃었다. 그러나 집 앞에까지 와서 무심코 유리 창문을 올려다보았을 대 창
문이 온통 깜깜해 깜짝 놀랐다. 2층에 뛰어올라가서 문을 두들겼으나 대답이 없었다. 밀드레
드는 외출할 때면 언제든지 열쇠를 매트 밑에 넣곤 했으므로 그 곳을 찾아보니 있었다. 거
실 쪽으로 가면서 성냥을 켰다.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난 것같이 느껴
졌다. 가스등의 스위치를 틀어 불을 붙였다. 방 안이 환해졌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순
간 숨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 온 방 안이 엉망이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
었다. 필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밀드레드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캄캄했다. 불을 켜고 나서 그는 그녀가 자기 물건 전부와 어린애의 것
전부를 가지고 나간 것을 알게 되었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유모차가 늘 놓여 있던 곳에 그
것이 없는 것을 알았으나, 침대보와 요에도 칼자국이 크게 남아 있었다. 거울은 아마 망치같
은 것으로 부순 모양이었다. 필립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여기도
모든 것이 무자비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세숫대야와 물병이 부서져 있었고, 거울은 산산조각
이 났으며, 이부자리도 갈가리 찢겨 있었다 베개에는 밀드레드의 손 하나가 넉넉히 들어갈
만큼 구멍을 내어 베개 속의 새털을 꺼내어 온 방에 뿌려 놓은 것이었다. 담요에도 역시 칼
로 푹푹 찌른 자리가 있었다. 화장대 위에 필립의 어머니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사진틀도
유리도 산산이 깨어져 있었다. 필립은 부엌으로 들어가 보았다. 컵, 푸딩 접시, 쟁반 할 것
없이 깨어질 수 있는 것은 전부 깨어져 있었다.
필립은 숨이 막혔다. 밀드레드는 편지 한 장 남겨 놓지 않았다. 자기의 분노의 표시로 이
런 파괴만을 남겨 놓은 것이다. 필립은 그녀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부술 때 지었을 심각
한 입을 악문 표정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
무나 놀란 그는 이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그녀가 놓고 간 식도와 석탄
부수는 망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또 난로 속에 버려진 고기 칼을 보았다. 이만큼이나 파
괴하려면 시간도 상당히 걸렸을 것이다. 로슨이 그려 준 필립의 초상화도 열십자로 찢어져
있었고, 자기가 그린 그림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마에의 올림피아,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필립 4세의 사진들도 석탄망치로 부숴 놓았다. 테이블보도 커튼도 둘밖에 없는 안락의자도
칼로 찢겨 다시 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필립은 두서너 개의 푸른색과 하얀색의 접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별로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푼돈을 모아 한 개씩 사서 모은 것으로 상당
히 아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시도 가루가 되어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책도 윗면
에다 칼로 그은 자리가 있었으며, 제본되어 있지 않은 프랑스 원서는 일부러 한 장씩 뜯어
놓았다. 벽난로 위에 놓여 있던 장식품들도 역시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칼과 망치로
찢고 부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찢고 부숴 버린 것이었다.
물론 필립의 소지품 전체를 팔아도 30파운드가 못되었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오랜 친구처
럼 정이 들었고, 그는 가정적인 사람이어서 그것이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쓸데없
는 골동품 같은 물건에도 애착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을 자랑
스럽게 여겨 왔으며, 많지 않은 돈으로나마 이 방들을 조촐하고 개성 있게 꾸며 놓았던 것
이다. 그는 절망으로 완전히 맥이 풀려 버렸다. 밀드레드도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토록 지독
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
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양복장이 놓여 있는 복도로 나가 보았다. 문을 열어 보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양복장만은 잊어버린 모양으로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
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 폐허같이 되어 버린 광경을 보고 어찌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다
시 정리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더구나 집 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잇지 않았
다. 그는 몹시 시장했으므로 밖에 나가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돌아왔을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어 있었다. 어린애를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이 어린애도 처음에는 자기를 보고 싶어할 것이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잊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밀드레드가 나가 버린 것이 오히려 고마웠고,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참을 수 없이 귀찮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 집을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에 집주인에게 나가겠다고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에게는 이 파손된 것들을 수선할 충분한 돈이 없었다. 돈도 상당히 줄
어들었으므로 이제는 더 싼 하숙을 구해야만 했다. 이 집에서 나가는 것은 오히려 기쁜 일
이었다. 이 집에 그대로 있게 된다면 그 경비도 걱정되거니와 밀드레드에 대한 기억이 영원
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필립은 이사 계획을 실천에 옮길 때까지는 마음을 진정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중고품 가구상과 상의해 보니 부서진 것과 안 부서진 것들을 모
두 합해서 3파운드면 사겠다고 했다. 이틀 후에 그가 일하는 병원 바로 건너편에 있는 하숙
집에 방을 구해서 이사했는데, 그 방은 그가 처음으로 의학생이 되었을 때에 하숙하던 그
집이었다. 이 하숙집 주인은 상당히 점잖은 여자였다. 필립은 1주일에 6실링으로 제일 꼭대
기층 방을 하나 얻었다. 그 방은 좁고 누추한, 뒷집의 뜰이 바라다 보이는 방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자기 옷 몇 가지와 책밖에는 없었으므로 그렇게 싼 방을 얻은 것이 다행이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자신 이외는 아무것에도 중요할 것이 없는 필립 캐리의 운명이 조국이 당면
한 시국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남아 전쟁이 커진 것이다. 역사의 창조 과정이란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립과 같은 미미한 존재인 일개의 학생의 생
활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일종의 모순 같기도 했다. 남아프리카의 마게르스폰테인,
콜렌소, 스티온콥 등지에서 패전을 거듭하여 이튼 학교의 전통을 다에 떨어뜨리고, 영국 국
민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영국 귀족과 신사 계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선천적으로 소위 통치 본능을 타고났다고 큰소리를 쳐 왔었고, 또 아무도 이에 반
대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낡은 질서는 허물어져 가고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있었다. 그
러나 거인은 다시금 그의 힘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승리와 비슷한
것에 당도했다. 크론예이는 파르데베르크에서 항복했고 레이디스미스는 구출되었다. 그리고
3월 초순에 로버트 장군은 블룸폰테인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 소식이 런던에 전해진 2,3일 후였다. 마칼리스터가 비크가의 술집에 나타나서 주식 거
래소의 경기가 조금 회복된 것 같다고 기쁜 듯이 말했다. 종전은 눈앞에 다가왔다. 로버트
장군은 몇 주일 안 가서 피리토리아에 들어갈 것 같아 보이고 주식 시세는 벌써 오르기 시
작했다. 어쨌든 호경기가 올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자, 마침내 때는 왔네!" 그가 필립에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서기 전에 얼른 서둘러야지, 우물쭈물 기다려서는 안 되네. 사려면
지금밖에 없네."
그는 비밀의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금광의 지배인이 마칼리스터으 거
래소의 한 중역에게 전보를 쳐 왔는데, 자기네 금광은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마칼리스터는 이것
만은 투기가 아니라 투자라고 말했다. 그는 그 중역 자신이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
여 자기 여동생들에게 각각 5백 주씩이나 사 주었다는 이야기를 필립에게 들려주었다. 더구
나 그 중역은 영국 은행 주식과 같이 절대 안전한 것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몫 잡아야겠네." 마칼리스터가 말했다. 주식 가격은
2파운드 8분의 1에서 4분의 1로 오르내렸다. 마칼리스터는 필립에게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되고 한 장에 10실링만 오르면 팔아 버리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3백 주를 살 것이라고 말하
면서 필립에게도 3백 주 살 것을 권했다. 주식은 자기가 보관하고 있다가 좋은 기회만 오면
팔아 주겠다고 말했다. 필립은 그릇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스코틀랜드 사람이
기 때문에 신중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도 있었고, 또 다른 이유는 지난번에도 실수 없이
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필립은 두말없이 동의했다.
"아마 결산 전에 팔게 될 것일세. 만일 그렇게 안 되면 자네 주식은 자네에게 돌려보내겠
네." 마칼리스터가 말했다.
그것은 참 좋은 방법이라고 필립도 생각했다. 이익 배당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며, 한푼도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는 신문의 주식 시세란을 새로운 흥미
를 가지고 매일 읽기 시작했다. 이튿날 마칼리카로부터 들어오는 소식도 신통치 않고 필립
몫으로 산 주식도 한 장에 2파운드까지 내려가자 필립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나 마칼리스
터는 이러한 것에도 낙관적이었고 무어인이 그 이상 지탱할 수는 없으며 4월 중순까지는 로
버트 장군이 요하네스버그에 입성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는가 안되는가 내기를 해도 좋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산 때에 필립은 40파운드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상당
한 타격이었으나 그래도 주식은 그냥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필립과 같은 형편에
서는 40파운드라는 손해는 너무 컸던 것이다. 그 후 2,3주일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무어인
들은 자기네들이 이미 싸움에 졌으므로 항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
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두 번 작은 전투에서 이겼으므로 필립의 주권
은 또 반 크라운 떨어졌다. 전쟁이 곧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필립도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마칼리스터를 만나 보니 그도 이제는 낙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손해를 최소 한도에서 막는 것이 현재로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네. 차액도 최소 한
도까지 지불해 버린 것 같은데."
필립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는 홍차와 버터 바른
빵만을 되는대로 먹어치우고 급히 클럽의 독서실로 가서 신문을 보았다. 때로는 전황이 시
원치 못했고 또 때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주식 시세에 동요가 있다
면 그것은 하락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판다면 약 3
백 50파운드 가량을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고, 손에 남는 것이라고는 겨우 80파운드 남짓이
될 것이었다. 그는 주식 거래에 손을 대는 것 같은 바보짓을 한 것을 절실하게 후회했다. 그
러나 이대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결정적인 사태가 벌어져 다시 값이 상승할는
지도 모르기 대문이었다. 이제는 이익을 바라지는 않았다. 담나 손해를 적에 하기를 바랄 뿐
이었다. 그래야만 그는 병원 의학 교를 수료할 수 있는 것이었다. 5월부터 여름 학기가 시작
되고, 여름 학기가 끝나면 산과학의 시험을 칠 예정이었다. 그러고 나면 1년일 남은 셈이었
다. 일일이 계산하니 수업료 외에 모두 합해서 1백 50파운드면 어떻게 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의 최소 경비였다.
4월 초순에 그는 마칼리스터와 만나기 위해 비크가의 술집으로 갔다. 마칼리스터와 함께
정세를 토론하면 마음이 약간 편해지고 또 자기 이외의 많은 사람들도 역시 손해를 보고 있
다는 것을 알면 그 자신의 고민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술집에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고 헤이워드 혼자만 있었다. 필립이 자리에 앉자마자 헤이워
드가 말했다.
"난 이번 일요일에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전선으로 가네."
"자네가?" 필립이 놀라 소리쳤다.
헤이워드가 그런 행동을 취하리라고는 전연 예기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병원에서도 많은 사람이 군대에 나가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자격만 가진 자라면 누구든지
환영했다. 그리고 기병으로 뽑혀 갔던 사람들도 그들이 의학생 출신이란 것이 발견되기만
하면 곧 병원 근무를 시킨다고 집에 편지했다. 애국심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리고 사
회의 모든 계급으로부터 의용군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무얼로 가게 되나?"
"도싯 기병대일세. 기병으로 나간다네."
필립이 헤이워드와 알게 된 지도 8년이나 되었다.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 할 수 잇는 그에
대한 필립의 열광적인 숭배로부터 비롯되었던 젊은 날의 친밀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러나 습관이 되어서 헤이워드가 런던에 있을 때엔 1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만났다. 지금도
헤이워드는 상당히 세련된 감상을 가지고 많은 책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필립은 아직도 마
음이 너그럽지 못하여 때때로 헤이워드의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초조해질 대가 있었다. 지
금의 필립은 인생에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이란 예술뿐이라고 생각했던 옛날의 그와는 달랐
다. 행동과 성공을 멸시하는 헤이워드가 미웠다. 펀치를 저으면서 필립은 헤이 워드와의 옛
날의 우정, 그리고 그가 반드시 튼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큰 기대 등을 회상하고 있었
다. 그런 환상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지금은 그가 여전히 탁상 공론만 일삼을 뿐 아무 일도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이 워드의 연수입 3백 파운드도 서른다섯 살의 현재에는
그가 젊었을 대보다도 생활비로서는 훨씬 더 곤란하다는 것을 알았다. 양복만은 지금도 일
류 양복점에서 맞춰 입은 것 같았으나,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만큼 오래 입었다. 너무
살이 찌고 그의 자랑인 아름다운 금발도 그의 대머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의 푸른 눈은 빛
을 잃고 희미했으며, 지나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케이프로 가려는 생각을 했나?"
"응, 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마땅히 가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일세."
필립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알수 있는 것은 자
기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불안에 헤이워드가 쫓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 한구
석에 숨어 있던 어떤 힘이 그로 하여금 조국을 위하여 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도대체 애
국심이란 일종의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주의에 도취하여 조국 영국이란
그에겐 유랑의 땅에 불과한 것이라고 장담한 그 인만큼 더욱 이해하기 곤란했다. 한낱 집단
으로서의 영국 동포란 헤이워드의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필립은 사람들이 자기네 인생관
과 정반대가 되는 일들을 곧잘 하는데, 이것이 대관절 어떤 힘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이 워드가 야만인들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비웃으면서 방관한다면 그것
이 오히려 그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도대체가 눈에 보이지 않
는 힘에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같이 보였다. 그리고 이 힘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저런 행
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성으로서 자기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하
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이성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행동을 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란 참 이해하기 어려워." 필립이 말했다. "자네가 기병으로서 일선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걸."
헤이워드는 약간 부끄러운 듯이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제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자신이 완전히 건강체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불쾌한 것을
참아 보는 것도 가치없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네."
영어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을 일부러 프랑스어를 섞어 가며 이야기하는 악취미가
아직 헤이워드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마칼리스터가 들어왔다.
"캐리, 마침 잘 만났네. 꼭 한 번 만나려던 참일세. 우리 주식 거래소에서는 더 이상 자네
주식을 쥐고 있을 수 없다고 그르네. 시장도 극도로 경기가 없고 하니 자네더러 전부를 되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네."
필립은 맥이 탁 풀렸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손해를 전적
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차라리 그쪽에서 전부 팔아 주게."
"물론 그것이 상책이겠네마는 나는 그것을 팔 자신이 없네. 시장은 불경기로 아무도 그
주식을 살 사람이 없단 말일세."
"그러나 1파운드 8분의 1일이라고 시세가 났던데?"
"응, 그건 그렇지만 실제로는 소용없네. 그 값으로는 절대 못 파네."
필립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전혀 아무 가치가 없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으이. 얼마쯤 받을 수는 있을 걸세. 하나 여보게, 살 사람이 없단 말일
세."
"그럼 얼마라도 좋으니 팔아버려 주게."
마칼리스터는 필립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번에는 좀 타격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미안하이.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일세. 이 망할 놈의 전쟁이 이
렇게 오래 끌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 했거든. 자네에게 사라고 권한 것은 나지만 나 역
시 손해를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일세."
"그건 괜찮네. 사람이란 도박을 하게 마련이니까."
필립은 여태껏 서서 마칼리스터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앉았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완
전히 방심 상태에 있었다. 갑자기 골치가 무섭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들이 사내답지
않다고 할까 두려웠다. 그 자리에 한 시간 가량 앉아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 공연히 큰 소리
를 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어났다.
"자네는 참 침착하이." 악수를 청하면서 마칼리스터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고 3,4백 파운드의 손해를 보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필립은 그의 누추한 하숙방으로 돌아오자 절망에 휩쓸려 침대에 몸을 던지며 몸부림쳤다.
자기의 어리석은 행동이 한없이 후회되었다. 한 번 저지른 일은 지나가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이제 와서 그것을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자신에게 타일러 보았으나, 역시
괴롭고 후회스런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는 비참한 꼴이 된 것이다. 밤새도록 잠
을 이룰 수 가 없없다. 지난 몇 해 동안 쓸데없는 돈을 낭비한 것이 자꾸만 생각나 골치가
쑤시고 아팠다.
그 이튿날 저녁때 마지막 우편으로 결산서가 도착했다. 예금 통장을 보니 전부 청산해 버
리면 그래도 7파운드가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7파운드! 그는 청산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마칼리스터에게 돈이 없어 청산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되었
더라면 얼마나 창피하고 비참했을 것인가. 여름 학기 동안 필립은 안과의 조수로 근무했었
는데, 한 학생이 검안기를 한 대 팔겠다고 해서 산 일이 있었다. 아직 돈은 치르지 않았지만
안 사겠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 책도 몇 권사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
에 남는 것은 5파운드 가량 될 것이었다. 그 돈으로는 앞으로 6주일밖에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누에도 매우 사무적으로 보이는 편지를 블랙스테이블의 목사인 그의 백
부에게 썼다. 편지 사연은, 전쟁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는데, 만일 백부가 보조해 주지 않는
다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1백 50파운드만 빌려 주시오, 다달이 보내 주셔도 좋을 것이
며 물론 그 돈에는 이자를 지불할 것이요, 원금도 자기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 조금씩 갚겠
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늦어도 1년 반후에는 면허를 받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매주 3파운
드로 의무원이 될 것은 틀림없다고 써 보냈다. 그랬더니 백부로부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
겠다는 회답이 왔다. 그리고 세상이 이렇게 험한데 무엇을 팔아서라도 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돼먹지 않은 말이라고 했고, 도 돈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병들었을 때의
비상금으로 두어 두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한 의무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편지 끝머리에는 일장의 설교가 있었다. 몇 번이고 경고하고 주의를 시켰는데, 필립은 한
번도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게 된 것을 의외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
었다. 지난날의 방조하고 중심 없는 생활이 이런 결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기하고 있었다
는 것이었다. 필립은 편지를 읽어 가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필립은 백부가 이렇게 거절하
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완전히
공허 상태로 변하고 말았다. 만일 백부의 보조가 없다면 병원에는 나갈 수가 없게 된다. 이
것을 생각하니, 온몸이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존심을 꾹 누르고 다시 백부에게 편지를 썼다.
자기 앞에 부딪힌 절박한 사정을 자세히 적어 보냈다. 그러나 필립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
음인지 백부의 회답은 일단 결정한 마음을 돌려 도와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이미
스물다섯이니 독립할 수 있는 나이이며, 물론 백부가 죽으면 약간의 유산이 있을 것이나 그
때까지는 한푼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편지 속에는 필립이 걸어나온 길에 반대하
던 사람이 지금 자기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고 마음껏 자기 만족에 되취해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필립은 드디어 옷을 전당포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사는 아침밥 이외에 한 끼만 더
먹기로 하고 생활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오후 4시에 버터 바른 빵과 코코아 한 잔을 먹고
다음날 아침까지 견디었다. 밤 9시경에는 배가 고파서 참기 어려웠으므로 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로슨에게서 돈을 빌려 볼까 생각했으나 거절당할까 두려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러나 결국 5파운드를 꾸어 달라고 말해 보았다. 로슨은 기꺼이 구어 주기는 했으나 돈을 주
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1주일 후엔 돌려 주겠지? 표구 장사에게 치러야 할 것이 있어서 그러네. 요즘은 나도 아
주 불경기야."
필립은 1주일 후에 돌려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돌려주지 못하면 로슨
이 자기를 무어라고 생각할까 창피스러워서 한푼도 쓰지 않고 이틀 후에 도로 갖다 주고 말
았다. 로슨은 막 점심 먹으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필립에게 같이 나가서 먹자고 권했다. 음
식이 목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음식다운 음식을 먹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
었다. 일요일에는 애덜리 집에만 찾아가면 톡톡히 잘 먹을 수가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애덜
리에게는 차마 이번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애덜리의 가족 전부가 필립을 상당
히 부자라고 생각해 왔었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만일 자기가 한푼 없는 신세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대우가 달라질까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여태까지, 비록 늘 가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필립은 끼니를 걱정해 본 일은 없었고, 또 이런 일은 필립과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립은 마치 불미한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창피스러웠
다.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입장은 자기 경험의 테두리 밖에 속했다. 그는 이번 일에는 정말
놀랐고 병원에 계속해 나가는 것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
망만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회
고해 보니 그는 자기가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대 현실의 비참한 생활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으며, 그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편한 집에 돌아와 있겠거니 하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
러나 현재 그는 약 1주일 후에는 돈이 한푼도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장 돈
을 어떻게 벌도록 힘써 보야 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격만 있었다면 최근에는 군의의 수요가
굉장하니까 비록 절름발이라 할지라도 남아프리카의 케이프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만일 불구자만 아니었더라면 요즘 끊임없이 모집되어 가는 의용 기병대에라도 입대할 수 있
을 것이었다. 그는 의학교의 학생과장을 찾아가 어디 공부 잘 못 하는 학생의 가정교사 자
리는 없을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나 과장의 대답은 아마 그런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것
이었다. 또 필립은 의약 신문의 광고란을 보고 풀햄가에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 면허 없는
조수를 구한다기에 응모해 보았다. 가서 만나 보니 그 의사는 필립의 절름발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필립이 병원 실습생의 4학년이란 것을 듣자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필립은 이것
이 다만 거절의 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의사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 활동적일 수 없는
조수는 쓰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립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 보려고 마음을 돌렸다.
그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알기 때문에 토신 담당자 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는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울고싶을 지경이었으나,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직접 면접
한다는 광고에는 용기가 없어 가지 못했으나 편지만 가지고도 되는 모집에는 모두 응모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쓸 만한 경력도 없었고 더구나 추천서 한 장 없었다. 또 그는 자기의
프랑스어나 독일어 지식이 결코 상업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업의 전
문 용어를 거의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다고 속기나 타자를 치는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생각해 보아도 희망이 없었다. 그의 부친의 유산 집행인이었던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내 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것은 필립의 돈
을 투자해 주던 어떤 저당을 그 변호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팔아 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백부도 닉슨 씨가 필립의 처사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했었다. 또 닉슨 씨는 전
번의 공인 회계사무실에서 1년 동안 필리브이 사무 태도가 매우 게으르고 무능했었다는 것
을 듣고 있는 터였다.
"차라리 굶어 죽었으면 좋겠다!" 필립은 중얼거렸다.
한두 번은 자살이라도 해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국에서 독약을 들고 나오기는
쉬운 일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아무 고통도 없이 자기 목숨을 손쉽게 끊을 수 있다는 것
을 생각하니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필립의 진정한 생각은 아니었다. 전에
밀드레드가 그를 버리고 그리시스와 달아나 버렸을 대에도 고통을 잊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
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분은 그 때와 다른 것이었다. 지금의 그는 자기
의 입장을 누구에게 고백하고 상의해 보고 싶을 뿐이었으나,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래서 여전히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방세는 3주일분이나 밀려 있었고 여주인에
게는 월말에는 돈이 생길 것이니 월말에 전액을 지불하겠다고 말해 둔 것이다 여주인은 아
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입술을 삐죽 내밀고 싫은 얼굴을 했다. 월말이 되었다. 방세를 지불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돈이 없다고 대답하기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여주인에게 백부에게 편지를 보내서 다음 토요일에는 틀림없이 청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부탁해요. 우리 역시 당신한테 방세를 받아서 집세를 내야 하니까, 오래 끌 수가 없
어서요." 여주인은 별로 화를 내어 하는 말은 아니었으나, 말 속에는 무서운 결심이 암시된
것 같았다. 여주인은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만일 다음 토요일에도 안 주시게 되면 부
득이 병원의 학생과장에게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여주인은 필립을 잠깐 보고 가구 하나 없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특히 힘을 주어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극히 자연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고기가 아주 맛좋게 구워졌는데, 잡수시려면 내려오세요. 점심 대접하겠어요."
필립은 이 말을 듣자 발끝까지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울음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그러나 지금은 시장하지 않아요."
"아, 그래요? 그럼 좋아요."
여준이니 내려가자 필립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주먹
을 꽉 쥐었다.
토요일은 방세 지불을 약속한 날이다. 1주일 동안 내내 무슨 요행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
보았지만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이렇듯 극단적인 궁지에 빠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정신이
멍해져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이 모두
가 터무니없는 농담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동전 몇 닢뿐이었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양복은 죄다 팔아 버린 후였다. 그 외에 팔아야 몇 푼 받지 못할 책 몇권과
사소한 물건 한두 가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인 아주머니는 항상 필립의 출입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이 이상 다른 것을 가지고 나가다가는 여주인한테 제지당하지
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고 보니 남은 길이라고는 솔직히 방세를 치르지 못하겠다고 말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6월 중순이었다. 밤하늘
에는 별이 총총하고 따스했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는 밖에서 노숙하기로 결심했다. 템스 강
은 잔잔하고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첼시 강변을 서서히 거닐다가 피곤해져서 벤치에 앉아
서 졸았다. 무엇에 깜짝 놀라 잠을 깨었다. 얼마 동안이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경찰관이 자기를 흔들며 일어나 저리 가라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니 주위에
는 아무도 없었다. 도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하고 걷기 시작한 것이 치지크까지 와버렸고,
거기서 다시 잠을 잤다. 얼마 후 벤치가 너무나 딱딱해서 잠이 깨었다. 밤이 굉장히 길게 느
껴졌다. 그는 부르르 덜었다. 자신의 비참한 꼴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없었다. 강 언덕에서 잠을 잤다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에 사로 잡혀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화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필립은 이렇게 잠
을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군인, 목사, 그리고 대학 출
신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자기도 정녕 자선단체로부터 국물이나 얻어 먹으려
고 줄지어 섰는 그런 삶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자살
해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 곤란한 입장을 로슨
에게 이야기만 하면 도와줄 것이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을 일 같았다. 왜 이렇게 실수만 하는 것일까. 그는 항상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것만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부가 이기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가능할 때에는
불우한 사람을 돕기도 했는데, 자기가 이렇게 까지 궁지에 빠졌다는 것은 세상이 몹시도 불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에는 약간의 유산을 주겠다고 말한 백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유산이 도대체 얼마
나 되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고, 기껏해야 2,3백 파운드 박에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혹시 그것을 기한부 양도의 조건으로 어디서 돈을 꿀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것은 승낙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 백부는 동의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젠 백부가 죽을 때까지 이럭저럭 견디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 날부터 며칠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다. 식사라고는 거의 하지 못했으므로 점점 쇠약해
지고 기력조차 없어져 갔고, 어차피 희망조차 없는 취직자리를 구하러 다닐 힘도 없어졌다.
혹시나 취직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종일 상점의 뒷문에서 기다리는 일이나 한마디로 거절당
하는 일에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온 런던을 편력했고 자기처럼 헛되
이 직업을 구하려고 다니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알게 되었다. 한두 사람은 필립과 친해지려
고 말을 걸어 왔으나 필립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그들의 접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로슨에게는 그후 5실링 빌린 것을 아직 돌려주지 못했으므로 찾아가지 않았다. 의식가지 흐
려져서 무엇을 생각하려야 생각할 수도 없어졌다. 까짓것 이젠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기분
이 되어 버렸다. 울기도 많이 물었다. 처음에는 울음이 나오면 화가 나고 창피스러웠으나 결
국에는 우는 것이 일종의 위안도 되고 굶주림도 잊게 해주는 것 같았다. 새벽에는 추위 때
문에 적지않은 고통을 느꼈다. 어느 날 밤 속옷을 갈아 입으려고 자기 하숙방으로 돌아갔다.
모두 잠들어 있음이 틀림없을 3시경에 슬며시 기어들어가 5시에 다시 나왔다. 그때 침대에
올라가 누워 보았더니 그 부드러움이란 꿈속 같았다. 뼈마디마다 아프고 쑤셨으나 그래도
누워 있는 동안은 그 쾌감에 도취했다. 어떻게나 기분이 좋았던지 잠들어 버리기가 싫었다.
이제는 굶는 것은 보통이고 배고픈 것도 예사였지만, 다만 힘이 없을 뿐이다.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자살의 유혹이 있었으나, 그는 기를 써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자살의 유혹이 자기 마음을 사로잡고 자기 자신이 어떻게 막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늘 자신에게 자살이란 어리석은 일이라고 타이르고 곧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의 현재 경우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현실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고 말하자면 끝내 견디기만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처럼 생각하는
관념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밤마다 그는 내일은 백부에게나 변호사 닉슨 씨, 아니면 로
슨에게 편지를 써서 두 번 다시 이런 밤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
침이 되면 차마 자기의 완전한 실패를 고백하는 굴욕스런 짓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로
슨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랐고, 더구나 로슨과의 교제에 있어서 로슨은 사람이 가벼웠으며,
필립 자신은 상식을 자랑해 왔던 터였다. 로슨에게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를 모두 말해야만
했고, 만일 로슨이 도와 준다 해도 그 후에 자기를 얼마나 멸시할 것인가 생각하니 불안했
다. 그래도 백부나 변호사는 그를 조금은 도와 주겠지만, 그들의 질책을 듣기 싫었다. 필립
은 누구에게서든지 비난이나 질책은 듣기 싫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
니 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되뇌었다.
고난의 날이 계속되었다. 필립은 애덜리를 찾아가는 일요일이 오기를 몹시 기다렸다. 그리
고 왜 조금 더 일찍 애덜리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필립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가려고 했으므로 그를 찾아가지 않은 것이지만 애덜리
야말로 필립과 같은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 본 일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식사 후에 곤란한 사정을 이야기할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 만나서 무어라 말할 것인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았다. 그래서 그러한 시험의 기
회를 될 수 있는 대로 연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즉 필립은 친구들에게 대해 신뢰
감을 완전히 잃고 있었던 것이었다.
토요일 밤은 상당히 추웠다. 밤새껏 떨었다. 토요일 오전부터 다리를 질질 끌고 애덜리를
방문한 일요일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마지막 2펜스도 체링 크로스에 있는 유료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몸단장을 하는 데 다 써 버렸다.
필립이 초인종을 누르자 조그마한 머리가 창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곧 필립을 맞
아들이기 위해 아이들이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창백하고 근
심에 싸인 얼굴로 그들의 키스를 받았다. 그들이 표시한 이 순진한 애정에 필립은 그만 가
슴이 뭉클해짐을 느껴 터져나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핑계를 대면서 계단에서 잠깐 서
있었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 있었으므로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왜 지난 일요일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필립이 병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자 무
슨 병이냐고 물었다. 필립은 그들을 웃기기 휘하여 아주 이상야릇한 병명을 댔다. 그 병명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합성어로서 그야말로 이상야릇한 이름이었다. 과연 그들은 이 병명을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들은 필립을 응접실로 끌고 가서 그 병명을 아버지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다시 말해 보라고했다. 애덜리는 필립을 보자 일어나 악수를 했다. 애덜리
는 필립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의 눈을 둥글고 조금 튀어나왔기 때문에 항상 빤히 보는
것처럼 보이나 오늘따라 그 시선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우리는 많이 기다렸소." 애덜리는 말했다.
필립은 거짓말에는 익숙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지 못한 이유를 거짓말로 말했을
때 그의 얼굴은 빨개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 때 애덜리 부인이 들어왔다. 그들은 악수를 했
다.
"이젠 좀 괜찮으세요, 미스터 캐리?"
이 말을 듣고 필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이들과 함께 들어왔을 때는 부엌 문
이 닫혀 있었고, 그 후로 아이들은 필립 옆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가 병들어 있던
것을 상상했을까?
"10분쯤 있어야 식사가 되겠는데요. 기다리고 계실 동안에 에그 밀크를 한 컵 드릴까요?"
부인은 그 독특한 느린 어투로 말했다.
부인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빛이 있었는데, 그것이 필립을 불안하게 했다. 그는 억지로 웃
어 보이고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대답했다. 샐 리가 들어와서 식탁 준비를 했다. 필립
은 전처럼 샐리를 놀려 주려고 했다. 머지않아 샐리는 엘리자베스라고 불리는 어머니의 숙
모같이 뚱뚱보가 될 것이라고 이 집 식구들은 샐리를 곧잘 놀려 대곤 했었다. 아이들은 한
번도 그 할머니를 만나 본 일이 없었으나, 보기 싫을 정도로 뚱뚱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
다.
"샐리, 요즘 무슨 일이 있었니?" 필립은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좀더 살이 찐 것 같은데."
"아저씨는 살이 빠진 것 같아요. 해골바가지 같은걸요." 샐 리가 보복해 왔다.
이 말을 들은 필립은 얼굴이 붉어졌다.
"샐리, 또 말대꾸를 하니?" 애덜 리가 소리를 질렀다.
"벌금으로 너의 금발 한 가닥을 자르겠다. 제인, 가서 가위를 가져온."
"그렇지만 아버지, 아저씨는 빼빼마르셨잖아요? 가죽하고 뼈밖에 남지 않을걸요." 샐 리가
대꾸했다.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아저씨는 아무리 말라도 괜찮지만 너는 뚱뚱하면 볼 수 없을 지경
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애덜리는 자랑스럽게 샐리의 허리를 안으며 기쁜 듯이 딸을 바라
보는 것이었다.
"식사를 차려야겠어요. 아버지. 나만 편안하면 살이 쪄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요."
"아, 요것이!" 애덜리는 팔을 휘들러 때리는 척하면서 말했다.
"홀본에서 보석상을 하는 레비의 아들 조지프란 녀석이 청혼을 해 왔다는 사실을 가지고
요것이 나를 놀려먹는단 말이야."
"어머나,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시는군요? 아주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그 녀석이 청혼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성 조지와 메리 여왕에 맹세코 그놈의 콧잔 등을
잡고라도 그놈이 어떤 속셈으로 그러는 건지 물어 봐야겠다."
그 때 부인이 나타났다.
"그만 앉으세요.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자, 너희들은 가서 손을 깨끗이 씻고 와. 꾀를 부
리면 안 돼. 밥먹기 전에 내가 일일이 검사할 테니까. 자, 빨리."
필립은 게걸스럽게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먹어 보니 위가 거부하는 바람에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머리도 멍해져서 애덜 리가 다른 날과 달리 오늘따라 아주 말을 하
지 않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게 안락한 집에서 편안히 앉아 있자 기분도 상당히 부
드러워졌으나, 때때로 창 밖으로 눈을 돌려 바깥 날씨를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던
날씨가 흐리고 추워졌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비가 섞인 바람이 이따금 유리창을 때려
흔들었다. 필립은 오늘 밤은 어떻게 잘 것인가 걱정이 되었다. 이 집 사람은 일찍 자니까 10
시가 지나면 돌아가야 했다. 쓸쓸한 어둠 속으로 나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필
립은 이런 밤에도 밖에서 자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야기를
함으로서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으나, 이야기 도중에도 유리창을 때리는 비바람 소
리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3월의 날씨 같은데요. 이건 영국 해협을 건널 마음이 내키지 않는 날씨인걸." 애덜 리가
문득 말했다.
조금 후 식사가 끝나고 샐 리가 들어와서 식탁을 치웠다.
"값싼 것이지만 엽초나 한 대 피우시오." 애덜리는 엽초 한 대를 필립에게 주었다.
필립은 그것을 받아서 불을 붙여 흐믓해지도록 빨아들였다. 참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샐리 식탁을 다 치우고 나가려고 할 때 애덜리는 문을 꼭 닫고 가라고 일렀다.
"이제는 방해할 사람도 없소. 부를 때까지 아이들을 들여보내지 말라고 베티에게 말했으
니까요." 애덜리는 필립을 향하여 말을 던졌다.
필립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필립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애
덜리는 늘 하는 버릇으로 안경을 콧등에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지난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없기에 수요일에 당신 집
으로 찾아갔었소."
필립은 얼굴을 돌려 버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장의 고동이 심해졌다. 애덜리는 잠깐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침묵이 필립에겐 견딜 수 없이 갑갑했다. 그럴 때 무어라고 말해
야 할지 한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숙집 여주인이 그라는데, 지난 토요일부터 들어오지 않는다고, 또 지난달 방세도 받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한 주일 내내 어디서 잠을 잤소?"
필립은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창 밖만 내다보았다.
"아무 데도 아닙니다."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소."
"그건 또 왜요?" 필립이 물었다.
"베티와 나도 역시 지금의 당신과 같은 입장에 처했던 적이 있었소. 다만 당신보다 더 지
독했던 것은 우리에게는 돌보아야 할 어린 것들이 딸려 있었던 것이오. 왜 우리 집으로 오
지 않았소?"
"차마 올 수가 있어야지요."
필립은 하마터면 울음이 나올 뻔했다. 몹시 피곤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왜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가 하고 갑자기 애덜리에게 화가 났
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드디어 눈을 감은 채 흥분하지 않기 위하여 서서
히 지난 1주일간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가 한 일이 어
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다. 애들 리가 들으면 아주 바보로 생각
할 것 같았다.
"그럼 일자리가 생길 때까지 우리 같이 있습시다." 애덜리는 필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
서 말했다.
필립은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시오?"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 집에 폐를 끼칠까 두려워 본능적으로 거절했던 것이다.
또 그에게는 남의 호의를 냉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타는 성질이 있었다. 더구나
애덜리가 그날그날 벌어 먹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많은 식구에다가 또 손님까지
받아들일 방도 없거니와 돈도 없다는 것을 필립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꼭 우리와 같이 있어야 하오. 소프는 제 동생과 같이 자고, 당신이 그 애 침대를 쓰면 되
니가요. 식구 하나가 더 늘었다고 해서 별 차이는 없을 것이오."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덜리는 문으로 가서 부인을 불렀다. 부인이 들어오자 애
덜리는 말했다.
"여보, 미스터 캐리가 우리 집으로 오시게 됐소."
"그래요? 참 잘 됐어요. 내가 가서 침대 준비를 해 놓겠어요."
부인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진심으로 친절히 말했다.
필립은 크게 감동되었다. 그는 지금가지 사람들로부터 친절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다. 그래서 이렇게 애덜리 부부가 친절히 대해 줄 때 그는 놀랐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애덜리 부부는 둘이서
모든 것을 상의했고, 필립의 완전히 지쳐 버린 비참한 모양을 못 본 척했다. 부인이 방을 나
가자 필립은 의자에 들을 기대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약간 웃었다.
"밖에서 자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날씨인데요. 안 그렇소?"
애덜리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포목상에 취직 자리를 빠른 시일 내에 구해 주겠다고 필립
에게 말했다. 그린 앤드 세들리 상회에서는 몇 사람의 사원이 일선으로 갔는데, 상회에서는
애국적인 열의로 입대한 사람들이 하던 일은 현직 사원들이 해야만 했다. 그들이 일을 더
많이 한다고 해서 상회측으로서는 그들에게 월급을 인상시켜 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애국
심의 발로와 경비의 절약으로 상회는 일석 이조의 득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계
속되고 그렇다고 상회의 경기는 나쁜 편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부터 휴가철이 되어 한꺼
번에 몇 사람씩 2주일간의 휴가를 얻고 가버리게 되자 사원을 더 고용해야만 했다. 필립은
지금까지 모두 거절당한 예를 생각하면 이번에도 취직이 잘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애덜리는 자기로서는 그래도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만큼 지배인도 자기 말이라
면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의상 디자인과 포스터를 그리는 좋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 틀립없
었다. 필립이 하계 대매출용 포스터를 그려서 주었더니, 애덜 리가 그것을 가지고 상회로 갔
다. 이틀 후에 애덜리는 포스토를 도로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지배인은 포스터를 보고 매우
칭찬하기는 했으나, 마침 현재 도안과에 빈자리가 없다고 대단히 섭섭히 생각하더라고 말했
다. 필립은 혹시 다른 과에는 빈자리가 없는가고 물었다.
"아마 없을 거요."
"정말 그렇까요?"
"그런데 내일 상회에서 안내인을 한 사람 모집하는 광고를 내려고 하는 모양인데." 애덜
린는 설마 이런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의심스럽게 필립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 데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요?"
애덜리는 이 물음에 약간 당황했다. 그는 훨씬 더 좋은 자리를 얻어 줄 것처럼 필립에게
기대를 하게 했었고, 또 한편으로는 언제가지나 필립을 거저먹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럼 좋은 자리가 생길 때까지 해보겠소? 일단 취직하고 있으면 그만큼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이니까."
"아시다시피 나는 자존심이 과히 강하지 않습니다." 필립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 그렇게 하실 작정이시면 내일 아침 9시 15분 전까지 상회로 가셔야 할 겁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취직난이 상당히 심했다. 필립이 상회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면서 만났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오후에 공원에 누워 있던 사람이었다. 그도 필립처럼 집도 없고 밖에서 밤
을 새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모인 사람들은 가지각색이었다. 젊은이, 늙은이, 키 큰 사람,
작은 사람 할 것 없이 오늘 지배인과 면접을 하기 위하여 몸단장을 하고 왔다. 머리도 조심
스럽게 빗어 넘기고 손도 깨끗이 씻었다. 그 후에 안 것이지만, 그들은 식당과 작업실로 통
하는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복도는 몇 야드마다 대여섯 단의 계단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상
점 내부에는 전등이었었으나, 여기에는 철사망을 씌운 가스등이 씩씩 소리를 내며 타고 있
었다. 필립은 제시간에 도착했으나, 사무실로 불려들어간 것은 거의 11시쯤이었다. 사무실은
치즈 조각을 옆으로 뉘어 놓은 것처럼 삼각형이었다. 벽에는 코르셋을 입은 여자의 사진들
이 걸려 있었고, 그 밖에 푸른 색과 하얀색의 줄이 있는 잠옷을 입은 남자의 포스터와 한
장은 푸른 바다 위를 돛에 바람을 가득 받고 달리는 배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 톷에는 '대
매
출' 이라고 커다란 글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사무실의 제일 넓은 쪽은 진열장의 뒤쪽이었
는
데, 필립이 면접하러 들어갔을 때도 점원이 왔다갔다하면서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지배
인은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는 붉은 빛이 도는 머리털과 수염이 있는 안색이 퍽 좋은 사나
이였다. 시겟줄의 중간쯤에 몇 개의 축구 메달이 달려 있었다. 그는 소매가 짧은 셔츠 하나
만을 입고 전화기가 놓여 있는 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애들 리가 쓴 그 날
의 광고 문안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필립이 들어오는 것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석에 놓은 작은 책상 앞에 앉은 타이피스트에게 편지를 받아 쓰게 한
다음 필립에게 성명, 주소 그리고 경험을 물어 보았다. 지배인은 금속성의 높은 목소리로 말
했는데, 그 목소리는 그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윗니가 크고 고르지 못하
다는 것을 필립은 곧 알았고, 힘껏 잡아 당기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 같았다.
"애덜리 씨로부터 저의 이야기를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오옳아, 자네가 그 포스터를 그린 젊은이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포스터는 돼먹지 않았어. 우리에겐 소용없어."
그는 필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지금까지 면접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프록 코트도 한 벌 사야겠군그래. 물론 없을 테지. 보아하니 자네는 훌륭한 청년인데, 미
술로 밥벌이가 안 되었던 모양이지."
이렇게 말하는 그는 필립을 채용한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저돌적인 말
투로 물었다.
"집은 어디가?"
"저의 양친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자네 같은 젊은 사람들을 도와 주기를 좋아하네, 내가 채용한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은 어엿한 지배인들이 되었거든. 내가 말하기에는 좀 쑥스럽지만 그들은 모두 내게 감사하
고 있어. 그들은 내가 자기네들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를 알고 있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 상업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고, 만이 착실하게만 한다면 장차 출세할 수
도 있어. 자네만 똑똑히 한다면 장차 나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할 것도 없네. 알겠나, 이 사람
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존칭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게
들리고 좀 지나칠까 꺼려졌다. 지배인은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을 하면 자신의 중요성이
느껴지고 만족스러운지 한참 동안 지껄이다가 겨우 결정을 내렸다.
"그럼 자네를 쓸 테니 해보게나."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곧 일을 시작하도록 해보게나. 봉급은 1주일에 6실링이지만 식사, 의복, 숙소는
일체 여기서 제공하네. 그러니까 그 6실링은 고스란히 남는 거지. 그것을 가지고 자네는 마
음 데로 쓸 수 있어. 그리고 그 지불은 한 달에 한 번씩 하네. 그리고 월요일부터 와주게.
불만 없겠지?"
"없고말고요."
"해링턴 거리 알지? 샤프츠버리가에 있네. 거기가 숙소일세. 10번지, 원한다면 일요일 밤
부터 가서 자도 좋네. 그런 자네 마음대로야. 짐은 일요일에 옮겨도 좋고."
지배인은 고개를 한 번 끄덕하더니 말을 맺었다.
"그럼 가보게."
애덜리 부인은 필립이 있던 하숙집에서 짐을 찾아올 수 있도록 밀린 방세를 지불하라고
돈을 넉넉히 빌려 주었다. 5실링과 양복 한 벌의 전당표를 주고 역시 전당포에서 프록 코드
를 한 벌 샀다. 옷은 몸에 잘 맞았다. 그 밖에 전당포에 잡혀 놓았던 양복도 찾았다. 짐은
먼저 짐꾼 패터슨을 시켜 해링턴으로 보내고 월요일 아침 애덜리와 함께 상회로 출근했다.
애덜리는 필립을 의상부의 구입 계장에게 소개시키고는 곧 가버렸다. 구입 계장은 키가 작
고 말이 많은 쾌활한 사람으로 나이는 서른 살 가량으로 보였으며, 이름은 샘프슨이었다. 필
립과 악수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큰 자랑거리인 교양을 과시하기 위해 필립에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의외에도 필립이 할 줄 안다고 하자 놀랐다.
"또 다른 말은?"
"독일어도 합니다."
"아, 그래? 나는 가끔 파리에 가지, 파를레브 프랑세? 막심 요리점에 가보았나?"
필립은 의상부의 계단 맨 꼭대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하는 일이란 손님들에게 여러 매
장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샘프슨이 소다를 떨며 말한 바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매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얼른 필립의 다리를 보았다.
"다리가 어떻게 되었지?"
"네, 한쪽 발이 절름발입니다. 그러나 걷는 데나 일하는 데 불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샘프슨은 잠시 의심스럽게 필립의 발을 보고 있었다. 지배인은 왜 하필 이런 사람을 고용
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그는 지배인이 자기가 발병신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일을 잘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저기에 있는 여점
원에게 가서 물어 보면 되오."
샘프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버렸다. 필립은 각 매장의 소재를 머리에 기억하면서
혹시나 안내를 구하고 있는 손님이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럭저럭 각 매장
의 위치를 알게 되어 물어 보는 사람이 있어도 다른 점원에게 되묻는 횟수가 훨씬 적어졌
다.
"오른쪽으로 가시다가 왼쪽으로 돌면 있습니다."
일이 한가할 때면 말을 걸어 오는 여자들도 한둘 있었으나, 필립은 그들이 자기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시에는 점심을 먹으러, 그리고 5시에는 차를 마시러 식당에
갔다. 그는 서 있다가 식당에 사서 자리에 앉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점심 식사로는
버터를 잔뜩 바른 두툼한 빵 조각이 나왔다. 잼통에 자기 이름을 써 붙여 간직해 두곤하는
사람도 많았다.
6시 반이 되어 일이 끝나면 필립은 기진 맥진해 버렸다. 점심 식사때 필립의 옆에 앉았던
해리스란 사람이 해링턴의 숙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 방에 빈
침대가 하나 있고, 다른 방들은 모두 만원이므로 자기 방으로 오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해
링턴 거리에 있는 합숙소는 원래는 양화점이었다. 점포로 쓰던 방을 침실로 사용하고 있는
데, 방안은 몹시 어두웠다. 그것은 유리창을 위로부터 4분의 1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판자로 막아 버렸기 대문이었다. 더구나 창문을 열 수가 없으므로 공기가 통하는 구멍이란
저쪽 구석에 있는 채광 창밖에 없었고, 방안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필립은 그 방에서
자지 않게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해리스는 2층에 있는 거실로 필립을 데리고 올
라갔다. 방 안에는 벌레먹은 이빨이 한 줄로 놓인 것 같은 건반의 낡은 피아노가 한 대 놓
여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뚜껑 없는 담배 상자에는 도미노놀이 기구가 가득 들어 있었고,
그 밖에 달이 지난 스트랜드 매거진과 그래픽같은 잡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밖의
방은 모두 침실로 쓰이고 있었다. 방안에는 여섯 개의 침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트렁크나
궤짝이 놓여 있었다. 가구라고는 서랍 달린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네 개의 큰 서랍과
두 개의 작은 서랍이 있었는데, 필립은 신참자인만큼 작은 서랍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랍에
는 각기 열쇠가 달려 있었으나, 모두 똑같은 것이었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리 스는
필립에게 중요한 물건은 트렁크 속에 넣어 두라고 충고해 주었다. 벽난로 위에는 거울이 놓
여 있었다. 해리스는 화장실도 안내해 주었는데, 그 곳에는 여덟 개의 세면대가 한 줄로 놓
여 있었다. 여기서 그들 모두 세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옆방에는 변색되고 여기저기 대가 묻
어 있는 나무로 만든 목욕탕이 두 개 있었다. 둘레에는 목욕할 때마다 달라지는 물 부피의
변화를 알리는 검은 테가 간격을 두고 나 있었다.
필립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7시에 요란스럽게 울리는 종소리에 잠을 깼다. 그리고 8
시 15분 전에는 옷을 모두 입고 양말을 신은 채 신을 신기 위하여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에 늦지 않기 위해서 옥스퍼드가에 있는 상회까지 뛰어
가면서 구두끈을 매었다. 만일 8시에서 1분이라도 늦으면 아참은 굶어야 했고 또 일단 상회
안으로 들어간 뒤에는 요기를 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
끔 8시까지 못 들어갈 것을 미리 알면 부근에 있는 상법에서 빵을 두어 개 사 가지고 들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돈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잔을 마시고는 8시 반이면 다시 그 날의 일을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가시다가 왼쪽으로 돌면 됩니다."
얼마 안 가서 필립은 이런 대답을 거의 기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매우 지루했다. 며칠 일하고 나니 그의 다리는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부드럽고 두꺼운
양탄자가 오히려 발을 화끈거리게 해서 밤에 숙소에 돌아와 양말을 벗기도 어려웠다. 이것
은 동료들에게 공통된 불평이기도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담 때문에 양말과 구두가 배겨나
지 못하고 그저 썩기만 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들은 모두 이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으며,
잠잘 때에 아픈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고 자는 것으로 아픈 것을 잊어보려고 했다. 처음에
는 필립 역시 발이 아파 잠을 못 이루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놓고 찬물에 발을 담근 채 해링
턴의 숙소에서 울면서 밤을 샌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봉급은 한 달에 한 번씩 회계 주임이 지불했다. 봉급날이 되면 점원들은 차를 마시고 나
서 마치 미술관 입구의 관람객처럼 질서 정연하게 복도에 열을 지어 선다. 그들은 한 사람
씩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회계 주임은 돈을 담은 나무쟁반이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
는데, 점원의 이름을 묻고 다시 대장과 대조해 불후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 번 힐끔 보고 금
액을 큰 소리로 말하고는 쟁반에서 돈을 내어 세어 준다.
"고맙소. 그 다음 분."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받는 사람은 이런 대답을 하고 물러났다.
필립은 월급 중에서 이것저것 제하고 나자 18실링밖에 남지 않는 것을 알았다. 이 돈은
필립이 난생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만큼의 자존심과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고 더욱 우울한 감정에 젖었다. 이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을 보니 새삼스럽게 지금
의 자기 지위가 장래성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월급에서 15실링으로 애달리 부인에게
빚진 돈일부를 갚으려 했으나 부인은 10실링 이상은 끝내 받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하시면 빚을 다 청산하려면 여덣 달이나 걸리겠는데요."
"주인이 일하고 있는 동안에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월급이 오를지 누가 압
니까?"
학교에서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의학 서적을 읽으려고 했으나 곧
헛된 일임을 알았다. 하루의 고된 근무를 마치고 지쳐 버린 몸으로 주의력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병원에 갈 날이 언제 올는지도 모르면서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은 헛일같이만 느껴졌다. 잠결에도 그는 그런 꿈에서 개어날 대에는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여러 사람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은 질색이었다. 지
금까지는 고독한 것이 몸에 익었는데, 여기서 혼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때가 그에게는 가장 절망에 빠지기 쉬운 때였다. "오
른쪽으로 가시다 왼편으로 돌면 있습니다, 부인." 이런 생활이 끝없이 계속되고 그러면서도
파면 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고, 회사측에서는 그들을 복직시킬 것을 보장했으므로 그 대
는 현재 일하고 있는 점원 일부는 해고당할 것이다. 그러니 필립으로서는 이 보잘것없는 일
자리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백부가 죽는 것이었다.
백부가 죽기만 하면 그의 유산 4,5백 하운드가 필립의 손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 돈만 가지
면 필립은 병원 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된다. 필립은 정말 백부가 죽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
는 백부가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았다. 일흔 살이 훨씬 넘었을 것이고, 정확한
나이는 모르나 적어도 일흔 다섯 살은 되었을 것이다. 백부는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어
해마다 겨울이 되면 심한 기침을 했다. 기관지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노인성 기관
지염에 관해서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내과 교과서를 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심한 추위만 오면 노인은 그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필립은 비가 오고 추워지기를 간
절히 기다렸다. 지나치게 그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편집과잉 되다시피 했다. 백부의 병은 너
무 더워도 심해진다. 8월에 접어들어 심한 더위가 3주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필립은 백부가
갑자기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 말할 수 없이 기쁨에 날뛰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계
단의 맨 꼭대기에 서서 손님의 안내를 하면서도 항상 그 돈을 받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확실히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5백 파운드는 넘지 못할 것 같았고, 그에겐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당장 이 곳을 벗어날 것이다. 나간다는 예고
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짐만 꾸리면 작별 인사도 할 것 없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병원으로 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었다. 많이
잊어버렸을까? 그러나 반 년만 있으면 기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곧 산
부인학, 다음에는 내과, 그리고 다음에는 외과의 세가지 시험을 치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
나 백부가 자기와의 약속을 어기고 유산을 교구나 교회에 기부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약이 올랐다. 그러나 백부는 그렇게 잔인한 사람은 아닐 것
이었다. 필립은 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도 생각해 두었다. 산다는 것은 장
래에 좀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 대문이므로, 만약 백부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게 된다면
미련 없이 목숨을 끊으리라고 결심했다. 자살할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 때는 어떤 고통
없는 약을 쓸것이며 또 그 약을 어떻게 구할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해 두었다. 유산 상속이
안된다 하더라도 이런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
다.
"오른쪽으로 도셔서 계단을 내려가십시오. 네, 부인, 왼편으로 죽 가십시오. 아저씨, 앞으
로 곧장 가십시오."
필립은 행복했던 시절에 잘 다니던 곳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서 다녔다. 비크가에 있는
술집에서의 작은 모임은 어느새 없어졌다. 친구들을 실망시켰던 마칼리스터는 다시는 그 속
에 나타나지 않았고, 헤이워드는 케이프로 가버렸으며, 다만 로슨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필립은 그 화가와 자기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기분이 들어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성 마틴스 레인에 있는 무료 도서관에 가서 남은 시간이나 보
내려고 점심을 먹은 후에 옷을 갈아 입고 리젠트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로슨과 마주쳤다. 처
음 순간은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으나 로슨은 대뜸 그에게 말을 건넸다.
"나의 화실에 가서 같이 이야기나 좀 하세, 응?"
"못 하겠네."
"왜 그러나?"
"할 이야기가 있어야지."
필립은 로슨의 눈에 일종의 고통스러운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미안한 생각은 들었
으나 할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자기의 곤란한 입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매일 매일을 견
디어 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마음을 풀어놓으면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이 두
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비참했던 날의 가지가지 일들을 회상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싫었다. 그래서 로슨의 얼굴조차 보기가 싫었다.
"그럼 언제든지 좋으니 한 번 놀러오게. 저녁이라도 같이 억세나, 응? 날자는 자네 편리한
대로 정하게."
필립은 로슨의 친절에 감동했다.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자게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다
고 그는 생각했다.
"호의는 감사하네만 그만두겠네." 필립은 손을 내밀고 작별을 했다.
로슨은 필립의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에 어리둥절해 하면서 손을 잡았다. 필립은 급히 몸
을 돌려 쩔뚝거리며 걸어갔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언제나 하듯이 자기 자신의 우둔한 행동을 스스로 책망하
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친구의 따뜻한 우정을 꺾어 버렸다는 것을 생각하자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 때 뒤에서 누가 뛰어오는 것 같더니 곧 로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은
돌아선 순간 알 수 없는 적개심으로 싸늘하게 굳어 버린 얼굴로 로슨을 보았다.
"또 뭔가?"
"헤이워드의 소식을 들었나?"
"케이프로 간 것은 아네."
"죽었다네, 상륙 직후에."
필립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장티푸스였다네. 운이 나빴지. 자네가 이 소식을 못 들었을까 해서 알려주네. 나도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당황했었네."
로슨은 머리를 끄덕해 보이고 가버렸다. 필립은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필립으로서는
자기 연배의 친구를 잃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헤이 워드의 죽음은 그에게 이상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또 필립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게 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한 번은 죽
는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는 믿어지
지가 않았던 것이다. 헤이 워드와의 우정은 벌써 오래 전에 식어 버렸건만 그의 죽음은 필
립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는 헤이워드와 주고받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다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헤이워드와 처음
만나 함께 지내던 하이델베르크에서의 몇 달동안의 즐겁던 생활이 생각났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만 아파 왔다. 헤이워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헤이워드에 대해서 지
녔던 흠모의 정을 생각했다. 그러나 흠모는 환멸로 변했고, 그것은 다시 무관심으로 변해 버
렸으며, 나중에는 지나간 추억과 습관으로만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몇 달 동안 매일 만나고, 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친
밀해졌다가도 막상 서로 작별하게 되면 그래도 여전히 살아나가는 것이며, 그렇게 아쉽던
사람도 결국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알 수 없는 일의 하나
일 것이다. 그 사람이 없어도 섭섭하거나 외롭지도 않고 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
이다. 필립은 새삼스럽게 하이델베르크 시절이 생각났다. 그 때 헤이워드는 큰 꿈을 안고 미
래에 대한 정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조금씩 실패를 받
아들이고, 마침내는 그도 죽어 버린 것이다. 그가 지내 온 생활만큼이나 그의 죽음도 허무했
다. 죽을 때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맹랑한 병으로 죽어 버렸으나, 애당초 태어나지 않았
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을도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필립은 백부의 가정부인 포스터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
면 연락해 달라고 자신의 주소를 알려 주기는 했으나, 혹시 병원으로 편지가 와 있지나 않
을까 하고 1주일에 한 번은 병원의 편지함에 가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가 다시
는 보지 않기를 원했던 필적으로 쓰인 편지가 그 편지함에 한 통 꽂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동안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 혐오스런 기억들이 되
살아났다.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하고 봉투를 찢어 읽어 보았다.
친애하는 필립
잠깐이라도 좋으니 될 수록 빨리 만나 주실 수 없을까요? 큰 걱정거리가 생겼는데, 나로
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돈 문제는 아닙니다.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한길에 나가 어둠 속에 뿌렸다.
"흥, 만나 달라구? 빌어먹을!"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불쾌감이 솟구쳤다. 그녀가 비참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고통을 받든 간에 그것은 그녀의 죄
값으로 마땅했다. 한없이 그녀가 미웠고, 그녀를 한때 사랑했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혐오
감이 일어났다. 그는 지난 일을 회상하기만 해도 역겨웠다. 필립은 템스 강을 건너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밀드레드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있어도 도무
지 잠이 오지 않았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근심스러웠다. 혹시 병이 들어서 먹
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절망적인 처지가 아
니면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필립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약한
마음에 화가 났으나, 그녀를 한 번 만나 보지 않고서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튿날 아침 그는 엽서 한 장을 써서 상회로 나가는 길에 우체통에 넣었다. 그 엽서에서 그는,
밀드레드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니 그것 참 안되었다, 또 될 수 잇는 대로 보낸 주소로 오늘
저녁 7시에 찾아가 보겠다고 했다.
주소를 갖고 찾아간 곳은 더러운 뒷거리에 있는 지저분한 하숙집이었다. 다시 그녀를 만
나는 것이 싫었으므로 밀드레드가 집에 있느냐고 물어 보면서도 내심으로는 제발 외출하고
없기를 빌었다. 얼른 보아 사람들의 출입이 삼한 집같이 보였다. 필립은 밀드레드가 보내 온
편지의 소인을 보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병원 편지함에 꽂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초인종을 듣고 나온 여자는 필립의 물음에는 대
답도 않고 그가 뒤따르도록 복도를 따라 죽 걸어갔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한 방의 문을 노
크했다.
"밀러 부인, 남자 손님이 오셨어요."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밀드레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다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들어오세요."
그가 들어가자 그녀는 문을 닫았다. 매우 작은 침실이었다. 그녀가 살던 방들이 언제나 그
러했지만 이 방 역시 깨끗하지 못했고, 닦지 않은 신발이 굴러다녔으며, 작은 장롱 위에는
모자가 놓여 있고 그 옆에 가발이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블라우스가 허물처럼 구겨
져 있었다. 필립은 벗어든 모자를 걸 곳을 찾았다. 문 뒤에 박힌 못에는 치마가 너절하게 걸
려 있었고, 치맛자락은 흙투성이였다.
"좀 앉으세요, 네?" 밀드레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편지 받고 놀라셨지요?"
"아니, 목소리가 쉰 것 같은데, 목병이라도 생겼소?"
"네, 얼마 전부터 그래요."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왜 찾았는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방 안에 들어서자 첫눈에 그녀가 옛날의 타락한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어린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벽난로 위에는 어린애의 사진이 놓여 있었으나, 방
안에는 어린애가 살고 있는 흔적을 볼 수 없었다. 밀드레드는 손수건을 가지고 작은 공을
만들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벽난로의 불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필립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고도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하숙집에서 나가기 전보다 훨씬 여위어 있었다.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의 피부는 누
르스름하고 거칠었다. 밀드레드는 머리를 염색했고, 그래서 갈색이 되어 있었는데, 그 머리
때문에 그녀는 많이 달라 보였고 전보다 더 천박해 보였다.
"답장해 주셔서 정말 안심했어요. 나는 당신이 이제는 병원에서 나오셨을 줄 알았어요."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필립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젠 자격을 얻으셨겠죠?"
"못 얻었소."
"왜요?"
"나는 병원을 나오 버린 지가 오래 됐소. 18개월 전에 무슨 사정으로 할 수 없이 그만두
었소."
"당신은 변하기 쉬운 사람이에요. 정말 당신은 한군데 곡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이 말을 듣고도 필립은 잠자코 있었으나, 마침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투기를 했다가 운이 나빠서 그만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몽땅 잃어버렸지. 그래
서 의학 공부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어. 그것보다도 먹고 살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만 되었
단 말이오."
"그럼 지금은 무얼 하세요?"
"상점에 나가지."
"그래요?"
밀드레드는 이 때 필립을 힐끗 보더니 곧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초조
한 듯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자꾸만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래도 의학 공부하신 것을 잊어버리진 않으셨겠지요?" 그녀는 이상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전부 잊어버리지는 않았지."
"만나고 싶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어요. 목이 어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밀드레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에 가보지 그래요?"
"병원엔 가기 싫어요. 학생들이 뚫어지게 날 볼 것이고, 혹시 입원하라고 할까 봐 걱정이
에요."
"어디가 아파서 그러시오?" 필립은 외래 환자실에서 쓰던 그 틀에 박힌 냉정한 말투로 물
었다.
"종기가 나서 그래요. 도무지 낫지가 않아요."
순간 필립은 등골이 서늘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어디 목구멍을 좀 봅시다."
그는 밀드레드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그녀의 목구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때 돌연
히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싸여 있었다.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였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는 필립이 자기를 안심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감히 위로의 말을
청할 용기는 없었으나, 간절히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정말 좋지 않은데."
"무슨 병일까요?"
병명을 말해 주자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입술도 빛을 잃어 노랗게 되었다. 처음
에는 소리를 죽여 힘없이 울더니 마침내는 목이 메어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참 안되었지만 가르쳐 주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는 마침내 말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 나을는지 모르겠어요."
필립은 이런 위협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 가진 게 있소?" 그가 물었다.
"7파운드 있어요."
"아무래도 이런 생활은 그만둬야 하오. 일자리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나는 별로 도와줄
힘이 없소. 1주일에 12실링 벌이밖엔 못하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이에요?" 그녀는 초조하게 울부짖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아무튼 일자리를 찾아야 하오."
그는 아주 엄숙히 그녀 자신의 위험과 또 다른 사람에게 미칠 위험성에 대해서 주의를 주
었다. 밀드레드는 침통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는 그녀를 위안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결국
그가 시키는 대로하겠다는 대답을 억지로 받았다. 그는 처방을 써서 이웃에 있는 약국에 맡
기겠으니, 약은 절대로 시간을 지켜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필립이 자리에서 일어
나자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되오, 목은 나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가려고 하자,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그의 저고리를 붙들었다.
"아, 나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나는 두려워요. 제발 나 혼자 버려 두고 가지 마세요. 누구
하고 의논할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곤 당신뿐이에요." 그녀는 목쉰 소리로 외쳤다.
필립은 그녀의 영혼이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필립은 그녀를 보던 시선을 힘없이
땅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두 번씩이나 자기의 생활에 뛰어들어와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여
자다. 지금 와서 자기에게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는 여자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이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 밀드레드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녀를 만나 보지 않고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감정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이 여자를 떼어 버릴 수는 없는 모양이로군.'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
다.
당혹스럽게도 그는, 그녀에 대해 기묘한 육체적인 혐오감을 느껴, 그것 때문에 그녀 곁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럼 날더러 어떡하란 말이오, 응?"
"같이 나가서 식사나 해요. 내가 사겠어요."
그는 잠깐 망설였다. 필립은 영원히 자기의 생활에서 떠나간 줄 알았던 여자가 자기 생활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안타까울 만큼 불안해하면 필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지나친 행동을 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나
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내게 톡톡히 복수를 한셈이에요. 지금 당신이 나를 버
리고 가면 나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어요."
"좋소, 갑시다. 그러나 값싼 것으로 해야 하오. 나는 요즘은 도무지 돈의 여유가 없어서."
그가 말했다.
밀드레드는 앉아서 신을 신었다. 그리고 치마를 갈아 입고 모자를 썼다. 그들은 나란히 걸
어서 토텐햄 코트가에 있는 식당까지 왔다. 필립은 이런 시간에 식사하는 습관을 벗어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밀드레드는 목이 아파서 무엇을 삼킬 수가 없었다. 그들은 차가운 햄을
조금 먹고, 필립은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들은 전에 항상 하던 대로 마주앉아 있었는데,
필립은 그녀가 그 때를 추억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앉아 있어도 할말이 없었고, 필립이
억지로라도 화제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없이 침묵만 지킬 것 같았다. 식당의 밝은
불빛 아래서 또는 그 불빛을 휘황하게 반사하는 값싼 거울에 둘러싸여 그녀는 한층 더 늙고
추해 보였다. 필립은 어린애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으나, 물을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는 지난 여름에 죽었어요."
"아, 그래?"
"불쌍하단 말이죠?"
"아니, 차라리 잘되었지."
그녀는 물끄러미 필립을 보다가 그가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외면을 했다.
"당신은 그 때 그 애를 무척 귀여워했지요. 난 어쩌면 남의 자식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 하고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약방에 들러 필립이 주문해 두었던 약을 가
지고 왔다. 그 더러운 하숙방으로 돌아오자 필립은 그녀에게 우선 1회분을 먹게 했다. 그리
고는 필립이 해링턴으로 돌아갈 시간이 될 때까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필립에게는 몹시 지루했다.
필립은 그 후에도 매일 밀드레드에게 갔다. 그녀는 필립이 처방한 약을 먹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결과는 극히 양호하여 그녀도 필립의 솜씨를 대단히 신뢰하게 되었다. 병이 나아
감에 따라 그녀는 점점 힘이 났고 이야기도 아주 잘하게 되었다.
"이젠 일자리만 구하면 만사 해결이에요. 나에겐 이번 일이 참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 경
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을 살려 정말 이런 생활은 다시 하지 않겠어요."
필립은 그녀와 만날 때마다 일자리를 구했는지 물어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그리 걱정할
것은 없고 언제든지 구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고 돈도 아직은 조금 남아 있으니, 1주일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도 옳았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후에 필립은 좀더 적극적으로 독촉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립의 말에 다만 웃을 뿐이었
다. 그녀는 훨씬 쾌활해졌고 필립에게 귀찮은 사람이라고까지 했다. 그녀는 어떤 식당에서
일할 생각이며, 지금까지 몇 사람의 식당 주인들과 만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어떤 이
야기를 했다고 일일이 그 대화까지 옮겨 가며 이야기해 주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정적인
것은 없었으나 다음 월요일에는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급히 서둘러 보았댔자 아무 소용
없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일을 맡는 것은 오히려 큰 잘못이라고 말했다. 필립은 초조한 듯
이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돼. 아무 일이라고 잡히는 대로 해야 돼. 나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고,
당신 돈도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 아니잖아?"
"아직은 조금 남았으니 다 없어질 때까지 기다려 봐야지요."
그는 밀드레드를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자기가 여기에 찾아온 지 벌써 3주일이 지났다.
그 때 그녀는 7파운드도 못 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상했다. 그는 그녀가
말한 몇 가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그녀가
과연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보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아마 처음부터 그를 속여 왔는지 모
를 일이었다. 그녀가 가진 돈이 이렇게 오래 가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했다.
"방세는 얼마요?"
"이 집 주인 아주머니는 참 친절한 사람이에요. 보통 하숙집 주인과는 달라요. 방세는 언
제든지 내가 편리할 때 내도 좋다고 그랬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심스런 점이 있었으나, 그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라 입 밖
에 낼 수가 없었다. 또 설사 말을 해 보았자 그녀가 바른 대답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
었고 알고 싶으면 그 자신이 알아 내야 할 것이었다. 매일 저녁 8시에 그녀의 집에서 나오
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그는 그 날도 8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바로 해링턴으로 돌아
가지 않고 피츠로이 광장 한모퉁이에 서서 기다렸다. 그 곳에 서서 윌리엄가로 걸어오는 사
람을 알아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싫증이 날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자기의 추측이 틀렸구
나 하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7번지의 문이 열리며 밀드레드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필
립이 방 안에서 본 그 모자에 많은 꽃을 달고 이런 거리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계절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밟아 토텐햄 코트가까지 왔다. 거기서 그녀
는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옥스퍼드가에 와서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본 다음
극장 쪽으로 길을 건너갔다. 그는 급히 뒤쫓아가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연지를 바르
고, 입술은 새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밀드레드?"
그녀는 그의 말소리를 듣고 주춤했다. 그리고 언젠가 거짓말을 하다가 발각되었을 때와
같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두 눈에는 분노의 빛에 솟구쳤다. 그것은 필립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지만 상대방의 비난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위하려 할
때에 나타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혀 끝에 맴도는 말들을 참고 이렇게 말했다.
"아, 극장에 가는 길이에요. 매일 밤 혼자 하숙방에 앉아 있으면 정말 갑갑해서 죽겠어
요."
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안 돼! 그런 일을 하면 당신 몸에 위험하다고 내가 몇번이나 말하지 않았어? 아직도 발
을 못 뺀단 말이오?"
"흥, 그만둬요. 이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에요?" 그녀는 거칠게 말했
다.
"제발 이리 와요. 내가 집에 데려다 주지. 당신은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그것은 범죄 행위야."
"그래서 어쨌단 말이에요? 자기네들이 좋아하는 일인데. 나는 내가 상대하는 남자들까지
일일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네들은 내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으
니까요."
밀드레드는 필립을 밀어 버리고 입장권 판매소로 걸어가서 돈을 밀어넣었다. 필립은 가진
돈이라고는 모두 3펜스밖에 없었으므로 따라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옥스퍼
드가를 천천히 걸어갔다.
"나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는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을 맺었다. 그 후 필립은 다시는 밀드레드를 만나지 못했다.
날이 가고 또 달이 갔다. 겨울도 어언간 지나가고 공원의 나무들도 움이트고 새 잎이 돋아
났다. 필립에게는 지긋지긋한 무기력 상태가 계속되었다. 세월은 무거운 발걸음으로나마 쉴
새 없이 흘렀다. 이대로 가면 오래지 않아 청춘도 다 지나가 버릴 것이고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늙어 버리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백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필립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7월이었다. 그
때 그는 2주일 후에는 휴가를 얻으려던 참이었다. 목사관의 가정부 포스터 부인에게서 온
편지에 의하면, 의사의 말인즉 백부는 앞으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백부를
생전에 다시 한 번 보고 싶으면 지금 곧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구입 계장에게로 가
서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샘프슨 씨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필립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쉽게 승낙했다. 필립은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필립이 그만두
는 이유가 다소 과장되어 그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그들은 필립이 큰 행운을 만났
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싫다고 생각했던 그 상회의 사람들과 막상 헤어지게 되었을
대 서운한 감이 드는 것은 이상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해링턴의 합숙소에서 더나올
대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 때의 감정을 전부터 너무나 자주 상상해 보았기 때문인지
닥치고 보니 아무런 느낌이 없었고, 다만 며칠 동안의 휴가를 떠날 때와 같은 담담한 기분
이었다.
'아무튼 내 성격은 이상하거든, 어떤 것을 그렇게 열렬히 바라고 있다가도 그것이 현실
이
되어 나타나면 도리어 실망하게 된단 말이야." 필립은 혼자 중얼거렸다.
블랙스테이블에는 점심때가 되어 도착했다. 포스터 부인이 현관까지 마중 나왔는데, 그는
부인의 안색을 보고 백부가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좀 나으신 것 같아요. 목사님은 원래 기력이 좋으시니까요." 부인이 말했다.
부인은 목사가 누워 있는 침실로 필립을 안내했다. 캐리 씨는 필립을 보자 가볍게 웃었다.
그것은 마치 적을 다시 한 번 보기 좋게 속여 넘겼다는 듯한 흡족하고 교활한 뜻으로 보였
다.
"어제는 마지막인 줄 알았다. 사람들도 모두 단념했었지. 그렇지, 포스터?" 캐리씨는 기진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무튼 목사님의 기력은 보통이 아니에요, 그건 확실해요."
"몸은 늙었으도 아직 수명은 남아 있것다." 캐리 씨는 중얼거렸다.
포스터 부인은 필립의 백부에게 피곤해지니 말을 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주인은 노인을
대할 때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이 친절하게 말했으나, 그러면서도 어딘지 명령조였다. 사람들
이 기대를 뒤집어 놓았다는 만족감에 젖은 목사의 표정에는 어딘지 어린애 같은 모습이 있
었다. 목사는 사람들이 필립을 불렀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고 필립이 온 것이 헛일이 된 것
을 흥미있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심장마비만 일어나지 않으면 한두 주일 내에는 완쾌될 것
같았다. 전에도 심장마비가 여러 번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꼭 죽는 줄만 알았으나 역시 죽
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기력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나 아무도 그것이 얼마
나 강한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고 캐리씨는 생각했다.
"한 이틀 있을 작정이냐?" 그는 필립이 휴가 온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로 물었다.
"네, 그럴 생각입니다." 필립은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하기는 바닷바람을 좀 쐬면 네 몸에 좋을 게다."
조금 후에 의사 위그램 씨가 와서 진찰을 마치고 의사다운 태도로 필립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엔 정말 가망이 없네. 필립, 자네 백부를 잃는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네. 자네 백부와 나는 35년간이나 친하게 지내왔다네."
"그렇지만 지금은 상당히 경과가 좋으신 것 같은데요."
"지금은 순전히 약기운으로 살아 계시는 것인데 오래 가지 못할 걸세. 엊그제 양일간은
정말 심했다네. 대여섯 번이나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네."
의사는 잠시 말이 없더니 문간까지 오자 필립에게 갑자기 물었다.
"포스터 부인이 무슨 말을 안 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집 사람들은 미신을 믿거든. 포스터 부인은 목사가 무엇을 가슴속에서 간직하고 있는
데, 그것을 고백할 수는 없고 그래서 그것을 털어놓지 못해 죽지 못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
어."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정말 캐리 씨는 훌륭한 일생을 살아 오셨어. 의무를 다
하셨고 또 교구 목사로서도 착실한 분이셨지. 돌아가시게 되면 모두들 슬퍼할 걸세. 그러한
제나 백부가 양심에 가책을 받을 일이란 있을 리 없지. 후임으로 어떤 분이 올는지 모르나
캐리씨의 반만큼이나 훌륭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야."
그 후 며칠 동안 캐리 씨의 병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좋던 식욕은 감퇴되
었고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의사 위그램 씨는 목사를 괴롭히는 신경통의 통증을 진정
시키기 위해 진통제를 계속해서 놓았다. 그러나 그 진통제는 끊임없는 수족의 경련과 함께
더욱더 그를 쇠약하게 만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만은 맑았다. 필립과 포스터 부인은
교대로 노인을 간호했다. 포스터 부인은 지난 몇 달간은 완전히 혼자서만 환자를 돌보아 왔
지 대문에 몹시 지쳐 있었으므로, 적어도 밤에만은 잠잘 수 있게 해 주기 위하여 필립은 밤
에는 꼭 자기가 간호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리하여 깊이 잠들지 않기 위하여 안락의자에 앉
아 촛불을 가리고 천일 야화를 읽으며 밤을 새웠다. 소년 시절에 읽어 보고는 이번이 처음
이었지만, 다시금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앉아서 밤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곤 했으나, 환자는 아편 기운이 덜어지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필립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마침내, 어느 날 아침 새벽녘, 새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올 무렵, 문득 필
립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침대 곁으로 갔다. 캐리씨는 천장을 보면서 반듯이 누워 있
었다. 필립이 곁에 가 섰으나 캐리 씨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노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필립이냐?" 노인이 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변했기 때문에 필립은 깜짝 놀랐다. 낮고 쉰 목소리였다. 공포에 떠
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네, 왜 그러세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은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백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것 같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도 몇 해는 괜찮으실 겁니다." 필립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백부의 눈에는 눈물이 솟아나왔다. 그것을 보자 필립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목사는 지금까
지 인생의 모든 일에 있어서 감정을 드러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만큼, 지금 이 눈
물을 보게 되니 어쩐지 무서웠다. 말할 수 없는 심한 공포를 표시하는 것임에 틀립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몬스 씨를 불러오너라. 성찬을 받고 싶다."
시몬스 씨란 부목사였다.
"지금입니까?"
"응, 그렇지 않으면 늦어."
필립은 포스터 부인을 깨우러 갔으나 생각한 것보다는 시간이 늦어서 부인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곧 사람을 보내도록 이르고 그는 백부의 방으로 돌아왔다.
"시몬스씨를 부르러 보냈느냐?"
"네."
침묵이 흘렀다. 필립은 침대 곁에 앉아 이마에 쉴 새 없이 맺히는 땀을 닦아 주었다.
"네 손 좀 잡아 보자, 필립." 백부가 말했다.
필립이 내민 손을 노인은 마치 임종의 순간 위안을 찾기 위해 생명을 붙드는 것처럼 힘껏
붙잡았다. 아마 백부는 평생 동안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
금 이 순간에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은 땀으로 축축하고 차가
웠다. 미약하나 필사적인 힘으로 필립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지금 죽음의 공
포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든지 한 번은 이런 공포에 부딪힐 것이라고 필립은 생각
했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러고도 사람들은 자기가 창조한 인간이 이토록 혹독
한 고통을 받도록 내버려 두는 신을 믿는 것이다. 필립은 백부를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고, 지난 2년 동안을 매일 그가 죽기만 빌어 왔었으나, 지금은 솟아오르는 동정심을 억
누를 수가 없었다. 짐승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도 큰 대가를 지불해야 된단 말인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 침묵을 깨뜨리고 캐리 씨가 물었다.
"아직 안 오셨니?"
잠시 후 포스터 부인이 조용히 들어와서 시몬스 씨가 왔다고 알렸다. 시몬스 씨는 법의와
두건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포스터 부인은 성찬용 접시를 가지고 왔다. 시몬스
씨는 말없이 필립과 악수한 다음 직업적인 엄숙한 태도로 환자 곁으로 갔다. 필립과 부인은
자리를 피했다.
필립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이슬이 맺힌 정원을 거닐었다. 하늘은 맑게 개었고, 새
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있었다. 소금기를 실은 바닷바람은 상쾌하고 시원했다. 장미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나무의 푸른 색과 잔디의 푸른빛은 선명하고 찬란했다. 필립은 거닐면서 지금
백부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신비스런 일에 관해서 생각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무어라 형
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조금 후에 포스터 부인이 나와서 백부가 찾는
다고 말했다. 부목사는 법의와 두건을 다시 가방 속에 넣고 있었다. 환자는 머리를 약간 돌
려 미소를 띤 얼굴로 필립을 맞았다. 필립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백부에게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공포에 떨던 빛은 보이지 않고 얼굴의 경련도 사
라져 버렸다. 참으로 고즈넉하고 행복스러운 표정이었다.
"난 이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 백부의 목소리도 아까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주님의 부르심만 있으면 언제든지 나의 영혼을 주님 손에 맡길 준비가 되어있다."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백부가 진정으로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은
또 거의 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백부는 구세주의 피와 살을 받았다. 도 그 피와 살이
그에게 힘을 주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겁내지 않게 한 것같이 보였다.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고요히 자기를 내맡기고 있었다. 백부는 한마디 더 했다.
"먼저 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다시 만나련다."
이 말을 듣고 필립은 또 한 번 놀랐다. 백부가 백모에 대하여 얼마나 냉정하고 이기적이
었으며, 겸손하고 헌신적인 백모의 사랑에 대하여 백부는 얼마나 둔감했던가를 그는 너무나
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목사는 깊이 감동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포스터 부인은
울면서 부목사를 문까지 따라갔다. 환자는 이제 지쳐서 가볍게 졸기 시작했다. 필립은 침대
곁에 앉아 임종을 기다렸다. 아침이 다 지날 무렵 백부의 숨소리는 코고는 소리로 변했다.
의사가 들어와 보고 운명이 가까웠다고 말했다. 이제는 의식마저 잃었으며, 때때로 이불깃을
잡아당겼다. 그는 뒤척이며 소리를 질렀다. 의사 위그램 씨는 그에게 피아 주사를 놓았다.
"이젠 주사도 소용이 없어. 곧 운명하시겠어."
의사는 시계를 보고 나서 다시 환자를 보았다. 1시였다. 의사는 점심 생각을 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그럼 선생님은 기다리실 필요가 없겠지요." 필립이 말했다.
"그렇지, 이젠 별수없으니까." 의사는 대답하였다.
필립은 죽음의 과정을 호기심을 가지고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무력하게 죽음과 싸우
고 있는, 혼수 상태에 빠진 이 환자에게는 사람다운 곳이 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헤벌어진
입에서 이따금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태양이 뜨겁게 들이
비치고 있었으나, 정원의 나무들은 상쾌하고 시원한 기분을 주었다. 활짝 갠 날이었다. 쇠파
리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치며 붕붕거렸다. 그 때 갑자기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필립
은 깜짝 놀랐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놀랐다. 노인의 수족에 한줄기 경련이 일어나더니 백부
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기계는 드디어 운동을 멈춘 것이었다. 쇠파리는 아직 유리창에
서 시끄럽게 붕붕거리고 있었다.
장례식은 조사이어 그레이브스가 능숙한 수완을 발휘해서 경제적이면서도 화려하게 치러
주었다. 장례식을 끝내자 조사이어는 필립과 함께 목사관으로 돌아왔다. 백부의 유언장은 그
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순서로 유언장을 아침 일찍 차를 마시면서 필립에게 읽어
주었다. 유언장은 백지 반장에 적혀 있었는데, 캐리 씨의 유산 전부는 조카 필립의 소유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유산으로는 가구류 이외에 은행에 80파운드 가량, 그리고 ABC 회사
에 20주, 올솝 양조 회사와 옥스퍼드 극장에 몇 주, 그 밖에 런던의 어떤 식당에도 몇 주 있
었다. 그레이브스 씨는 이 모든 것은 자기가 권해서 사게 된 것이라고 했으며, 그는 만족스
러운 듯이 필립에게 말했다.
"사람이란 먹어야 되고 술도 마셔야 하네. 즐기기도 해야 된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사람이
필수로 하는 그와 같은 것에 투자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틀립없다네."
그의 말은 그가 한탄한면서도 시인하고 있는 대중의 저속성과 선택된 사람들의 보다 고상
한 취미의 미묘한 차이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투자액은 모두 합해서 약 5백 파운드 가량
되었고, 기기다 은행의 잔고와 가구류를 합하면 필립에게는 그야말로 횡재였다. 그는 아직
행복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퍽 마음이 놓였다.
며칠 수 필립은 런던으로 왔다. 그리고 2년만에 처음으로 성 누가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
고 부속의학교의 학생과장을 오래간만에 만났다. 그는 필립을 보자 몹시 놀랐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필립에게 그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가를 물었다. 여태까지 겪은 여러 가지
경험은 필립으로 하여금 일종의 자신을 갖게 했으며 사물을 보는 눈도 달라지게 하였다. 전
같으면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당황했을 것이나 지금의 필립은 아주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며, 그 이상 더 물을 수 없도록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해 넘겼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부득이 휴학을 했었으나 이제 와서는 될 수록 빨리 의사의 자격을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가 치를 수 있는 첫 시험은 산과학과 부인병학이었다. 그는 부인병 환자 병동에 조수로서
등록했는데 마침 그 때는 방학중이었으므로 주수 자리를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다. 그
는 여기서 8월의 마지막 주와 9월의 첫 두 주일 도안 근무하기로 하였다. 면접이 끝나자 필
립은 학교 구내를 거닐었다. 여름 학기말 시험이 전부 끝났기 때문에 구내는 다소 한산하였
다. 그는 또 냇가의 난간을 따라 거닐기도 하였다. 그의 가슴은 한껏 부풀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고, 지난날의 모든 고통과 어리석은 행동과 불
행은 저 흘러가는 냇물에 흘려 버리고 말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앞길이 양양한 것을 깨달
았다.
겨울 학기가 시작되기까지의 몇 주일 도안 필립은 외래 환자계에서 지냈고 10월에는 다시
정규 의학과를 시작했다. 필립은 너무나 오랫동안 학교를 쉬었으므로 동료들은 거의 전부가
낯선 신입생들이었으며 기가 다른 관계로 그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필립의 동기생들은
거의 자격을 받아서 지방의 병원이나 요양소의 의사로 간 사람도 있었고, 성 누가 병원에
취직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지난 2년간 휴학했던 것이 그에겐 정신적인 휴양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번에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애덜리 가족은 필립의 운이 트인 것을 대단히 기뻐해 주었다. 필립은 백부의 유물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내어 그들에게 선물하였다. 샐리에게는 백모의 것이었던 금사슬을 주었다. 샐
리는 완전히 성숙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양장점에 견습생으로 다니고 있었으며,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온종일 리젠트가에 있는 직장에서 일했다. 샐리는 순박한 푸른 눈과 넓은 이마, 숱
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에 커다란 엉덩이와 풍만한 젖가슴을 가진 건간한 여자가 되어 있었
다. 그녀가 잘생긴 것을 늘 자랑하던 애덜리도 뚱뚱해지지 말라고 항상 샐리에게 경고했다.
짐승과 같이 건강하면서도 여성적인 것이 생리의 매력이었다.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도 많았
지만 한 사람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샐리는 그들에게 연애라는 것은 부질없
는 일이라는 인상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젊은 남자들이 샐리와는 가까이 할 수 없었으리라
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니이에 비해서는 너무나 성숙했다.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어린 동생들의 시중을 들어 온 때문인지 주부다운 면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
는 샐 리가 고집이 세다고 불평하는 적이 있었다. 원래 말이 적은 여자였으나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일종의 조용한 유머를 이해하게 되었고, 때로는 겉모양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흥
미가 가슴속에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들을 하곤 했다. 필립은 샐리에 대해서
는 이 집의 다른 식구들처럼 친밀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그는 샐리의 너무나
무관심한 태도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녀에게는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데가 있다고 필립
은 생각했다.
필립이 샐리에게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을 때 애덜리는 수선을 피우며 필립에게 키스해야
한다고 일렀으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섰다.
"싫어요. 안 할 테에요."
"저것이 은혜를 모르는 군. 왜 싫으냐?" 아버지는 큰 소리로 물었다.
"남자들에게서 키스를 받는 게 난 싫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필립은 샐 리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흥겹게 생각했으나 곧 애덜리와의 화제를 바
꾸어 그의 주의를 딴데로 돌렸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었음인지 다음에 필립이 찾아갔을 때 단둘이 된 틈을 타서 샐리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키스 안 하겠다고 말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지 않으셨어요?"
"아아니, 조금도." 필립은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샐리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
던 것 같은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주신 목걸이는 정말 고마워요."
필립은 샐리와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녀는 할 일만 착실하게 해 나가
면 되는 것이지 별로 말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비사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
느 일요일 오후에, 집에서 한가족처럼 대우를 받고 있는 필립은 애덜리 부처가 외출한 후에
방에서 책을 일고 있었다. 그 때 샐 리가 들어와서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계
집애들은 옷은 전부 집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샐리는 일요일에도 한가하게 놀 수가 없었다.
필립은 샐 리가 자기와 이야기하고 싶어 온 줄로 알고 책을 놓았다.
"계속해 읽으세요. 혼자 계시는 것 같아서 온 것뿐이에요."
"샐리처럼 말이 없는 사람도 없어." 필립이 말했다.
"우리 집에서 말 많은 사람으로는 아버지 한 분으로도 충분해요."
그 말에는 비꼬는 듯은 전혀 없었다. 다만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통하여 그녀의 아버지의 가치를 측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샐 리가 소녀 시절에
영웅같이 보던 아버지는 이미 아니었다. 샐리는 아버지의 유쾌한 말과 때로는 생계에 곤란
을 초래하는 낭비의 습관을 비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능숙한 말솜씨와 어머니의
실제적인 상식을 비교해 보았다. 아버지의 유쾌한 성격이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는 했지만,
때로는 몹시 귀찮기도 했다. 필립은 몸을 굽히고 일하고 있는 샐리를 바라다보았다. 샐리는
건강하고 원기 있어 정상적인 여자로 보였다. 가슴이 평평하고 빈혈증에 걸려 핏기 없는 얼
굴을 한 다른 여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샐리의 모습은 볼 만하리라 생각했다.
얼마 후 샐리에게도 뒤를 따르는 사나이가 나타났다. 샐리도 직장에서 사귄 친구들과 종
종 외출을 하였고, 남자 친구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모로 보나 유능한 전기
기사로서 매우 성공한 청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샐리는 어머니에게 그 남자가 구
혼해 왔다고 말했다.
"그래, 너는 무어라고 했니?" 어머니가 물었다.
"당분간은 아무하고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도 귀찮게 굴기에 이번 일요일에 차 마시러 집에 와도 좋다
고 했어요."
이것이야말로 애덜 리가 기다리던 기회였다. 샐리의 아버지로서 위엄성을 가지고 그 청년
을 감복시킬 수 있도록 그는 오후 내내 연습을 거듭했는데, 마침내 아이들까지 참다 못 해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애들은 중지하지 않았다. 청년이 찾아올 무렵에 애덜리는 어디선가 이
집트식 모자를 끄집어 내어 그것을 써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쓰시려거든 쓰시지요." 부인이 말했다.
부인은 가장 좋은 검은 비로드 옷을 입고 있었으나, 해마다 살이 쪄 가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 꼭 끼었다.
"당신은 샐리의 앞날을 망치려고 그러시우?" 부인이 말했다.
부인은 모자를 벗기려고 했으나 애들 날쌔게 몸을 피했다.
"손대지 말라니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모자는 벗지 않을 테야. 오늘 오는 젊은 친구에게
우리 집이 보통 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식시켜 줘야 해."
"어머니, 아버지더라 그냥 쓰고 계시라고 하세요. 도널드슨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게서 손을 떼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게 하면 차라리 나는 시원하겠어요." 샐 리는 평상시의
무관심한 태도로 말했다.
필립은 이것은 젊은이에 대해서 상당한 시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애덜리의
갈색 비로드 저고리와 늘어뜨린 검은 넥타이 그리고 붉은 이집트 모자는 순진한 젊은 전기
기사에게는 놀라운 광경임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찾아온 그 청년은 애덜리로
부터는 스페인 귀족의 예의로써, 그리고 부인으로부터는 자연스럽고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이리하여 모두 다리미질용 테이블 주위에 놓은 등받이가 달린 수도원용 의자에 앉았다. 부
인은 잘 닦은 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그것은 오늘의 향연에 영국 전원의 풍미를 더해 주
었다. 테이블 위에는 부인이 손수 만든 과자와 빵이 놓여 있었다. 차도 시골 냄새가 물씬한
것이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필립에게는 17세기식의 집안에서 더욱 기묘하고 매력적으로 보
였다. 애덜리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비잔틴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즈음 그는 로
마 흥망사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대 배우처럼 손짓을 하며 그 청년에게 테오도라와
아이린 난잡한 이야기를 하여 그를 당황하게 하였다. 애덜리는 거리낌없이 처음 온 손님인
그 젊은 전기 기사에게 늘상 하는 궤변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 청년은 별수없이 입을 다물
고 부끄러운 듯이 아래만 보고 있었다. 다만 흥미있게 듣고 있다는 표시로 말 사이사이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부인은 애덜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지만, 젊은 손님에게 차
와 과자를 권하기 위하여 가끔 입을 열었다. 필립은 샐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샐리는 눈을
아래로 깔고 말없이 침착하게 듣고만 있었다. 샐리의 긴 속눈썹은 볼 위에 아름다운 그림자
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이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또 이 젊은 기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만
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젊은 기사가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곱게 면도하고, 쾌활
하고 정직하게 보였으며, 키도 후리후리하고 체격도 좋았다. 필립도 그가 샐리에게 좋은 배
필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한 쌍을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생
각하자 가슴이 쓰리고 질투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얼마 후 그 구혼자는 시간이 되었으
니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샐리는 말없이 일어나서 그를 문까지 바래다 주었다. 샐 리가 돌아
왔을 때 애덜리는 크게 외쳤다.
"샐리, 참 좋은 청년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 집으로 맞아들이겠다. 세상에 널리 알리
고 나는 축가를 짓겠다."
샐리는 테이블 위에 있는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시선을 필립에게로 돌렸다.
"캐리 씨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생들 전부가 필립을 필립 아저씨라고 불러도 샐리는 끝내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그냥 이름만을 부르지도 않았다.
"참 훌륭한 배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샐리는 재빨리 다시 한 번 필립을 보고는 약간 얼굴을 붉히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 한마디를 들어도 참으로 점잖은 청년이야. 그런 사람이라면 어떤 여자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게다." 이번에는 부인이 말했다.
샐리는 이 말을 듣고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필립은 좀 이상해서 샐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한 말을 다시금 곰곰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다른 애인의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내가 말을 해도 대답이 없니?" 어머니가 참다 못 해 물었다.
"그이는 바보 같아요."
"그럼 결혼 안 하겠단 말이냐?"
"네, 안 하겠어요."
8월 호에 필립은 마지막 관문인 외과 시험에도 통과하여 마침내 자격증을 받았다. 그것은
성 누가 병원에 들어온지 7년 만에 받는 것이며, 나이는 서른이 다 되었다. 개업 자격들을
손에 들고 왕립 외과 대학의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음, 이제부터가 진짜 인생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날 그는 서무실에 나가서 병원 근무 희망자로 이름을 등록했다. 서무주임은 검은 수
염을 기른 유쾌하고 체격이 작은 사람으로서 필립에 대해서는 항상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
는 필립의 성공을 축하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한 달 동안만 남쪽 해안 지방에 가서 임시 조수로 일할 생각은 없소? 식사와 방
을 제공하고 1주일에 13실링이라는데."
"좋습니다."
"도싯 지방에 있는 판리라는 곳인데, 사우스 박사라는 사람을 도와 주는 거요. 곧 떠나야
하오. 원래 있던 조수가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렸다 하오.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서무 주임의 태도에는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어쩐지 의심스러웠다.
"혹, 별다른 사정이나 있지 않은가요?" 필립이 물어 보았다.
서무 주임은 이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구, 사실은 그 의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퍽 까다로운 사람인가 봐 그래서
아무도 그에게 사람을 소개하지 않는다네.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말을 해 버리니까 사람들
이 좋아하지 않는가 봐."
"그러나 저처럼 갓 졸업한 사람에게 만족할까요? 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데."
"천만에. 그쪽에서 응당 환영해야지." 서무 주임은 재치있게 대답했다.
필립은 잠깐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몇 주일간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터에 조금이라도
돈을 벌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 반가웠다. 이 곳 병원이나 혹은 다른 병원에서 의무 연한을
마치면 스페인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는데, 그 대를 위해서 그는 돈을 모아둘 필요가 있었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오늘 오후에 떠나 주어야겠는데, 그래도 괜찮겠소? 그렇다면 곧 전보
를 치지."
필립으로서는 며칠 더 있다가 가고 싶었지만, 애덜리 집에는 그가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어젯밤에 찾아갔었으므로 곧 떠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짐
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날 저녁 오후 7시 조금 지나서 판리 역에 내렸다.
마차를 타고 사우스 박사를 찾아갔다. 넓고 나지막한 벽토를 칠한 집으로, 버지니아 담쟁이
가 집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하녀가 나타나 필립을 진찰실까지 안내했다. 진찰실에서는 한
노인이 책상에서 무엇인가 쓰고 있다가 필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일어서지도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다만 빤히 필립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필립은 약간 당황했으나 곧 먼저 말
했다.
"제가 올 것을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늘 아침에 성 누가 병원의 서무 주임이 전
보를 치셨을 텐데요."
"그래서 저녁 식사를 30분이나 늦추고 있는 중이오. 세수를 해야죠?"
"네."
사우스 박사의 재치있는 태도가 필립에게는 오히려 유쾌했다. 그 때 비로소 그가 일어나
는 것을 보니 중키에 여위었고 백발은 짧게 깎고 있었다. 큰입은 꽉 다물고 마치 입술이 없
는 사람같이 보였다. 깨끗이 면도를 했으나 희고 짧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단
단해 보이는 턱과 더불어 얼굴이 더한층 모가 나게 보였다. 그는 갈색 나사복에 희고 긴 양
말을 신고 있었다. 옷이 너무 헐렁해서 다른 사람한테서 얻어 입은 것 같았다. 19세기 중엽
의 유복한 농부를 연상케 했다. 그는 문을 열고 건너편에 보이는 문을 가리키며 필립에게
말했다.
"저 방이 식당이고 당신의 침실은 2층에 올라가서 첫방이오. 준비가 다 되면 아래층으로
내려오시오."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필립은 사우스 박사가 자기를 살펴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의사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의사는 자기의 조수가 지껄이는 것을 좋아하
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자격을 얻었소?"
"어제입니다."
"대학에도 다녔소?"
"아니오."
"작년에 내 조수가 휴가로 없을 때 대학생을 임시 조수로 보내 줬는데, 나는 제발 다시
그러지 말라고 했소. 나는 점잔빼는 것은 딱 질색이란 말이야."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 식사는 간단했으나, 상당히 좋았다. 필립은 겉으로는
침착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임시로 고용된 것만 해도 한없
이 기뻤다. 별안간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웃을 일도 아닌데 느닷없이 웃고 싶었다. 의사로서
의 위엄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킥킥거리고만 싶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사우스 박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살이오?"
"서른 살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졸업했다는 건 어찌 된 일이오?"
"스물세 살에 의학을 시작했고, 중도에 2년동안 휴학했으니까요."
"왜 휴학했소?"
"돈이 없어서요."
사우스 박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필립을 보았으나,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그는 물었다.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오?"
"모릅니다."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전부가 어부와 그들의 가족들인데, 이 병원은 어민
조합 병원이오. 원래는 내 병원 하나밖에 없었지만, 사람들이 이 곳을 상류 계그븨 해수욕장
으로 만들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이 벼랑위에 새로 병원을 차렸지. 돈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병원으로 가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치료비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사람들뿐이오."
그 병원과의 경쟁이 이 노인에게는 제일 쓰라린 점이라는 것을 필립은 곧 알 수 있었다.
"저는 경험이라곤 전혀 없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경험이 있든 없든 당신 또래가 무엇을 알겠소?"
2,3일 동안을 사우스 박사는 필립의 행동을 엄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기회만 생기면 신랄
한 핀잔을 주려고 노리고 있었다. 이것을 눈치챈 필립은 가벼운 흥미를 느끼며 일을 해 나
갔다. 그는 일이 새로워서 무엇보다 기뻤다. 그리고 독립심과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진찰을 받으러 왔다. 필립은 환자들에게 자신을 가
지고 지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큰 병원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밖에 보지
못하는 벼의 경과를 여기서는 끊임없이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붕이 낮은 어부
의 집을 왕진하고 다니는데, 그들의 집에는 어구와 돛, 그리고 원양 항해의 기념품, 즉 일본
에서 가져온 필기, 멜라네시아의 창과 노, 이스탄불 시장에서 사온 단도들이 걸려 있었다.
게다가 소금 냄새를 풍기는 바닷바람은 신선함을 더해 주었다. 필립은 어부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네들도 필립이 거만하지 않은 것을 알고는 마음놓고 젊은 시절의 긴 여행
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다.
한두 전 필립은 오진을 한 일이 있으며, 또 한 번은 사우스 박사와 병에 대해 의견이 상
반된 때도 있었다. 첫 번째 의견 충돌이 났을 때에 사우스 박사는 지나친 말로 핀잔을 주었
다. 그러나 필립은 상대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으면서 듣기만 했다. 그러나 필립은 말재주도
있어 곧 응답할 수도 있엇다. 한두 마디 대구를 하면 사우스 박사는 그만 입을 다물고 이상
한 얼굴로 필립을 보는 것이었다. 필립의 얼굴을 심각했으나 눈만은 웃고 있었다. 먼저 조수
들은 모두들 자기를 싫어했고 두려워했을 뿐 이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분
통이 터져서 필립에게 짐을 싸게 하고 다음 기차편으로 쫓아 보내고 싶었다. 전에도 마음에
맞지 않는 조수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 쫓아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또 그렇게 한다면
필립은 자기를 더한층 놀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자신이 우습게 생각되어 늙은
의사는 마음과는 반대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만 외면을 하고 말았다. 얼
마 후에 그는 필립이 계획적으로 자기를 곯려 놓고는 자기가 골난 것을 보고 재미있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곧 흥겨운 생각이 나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놈 꽤 뻔뻔스럽고 뱃심 좋은 놈이로군."
필립은 애덜리에게 지금 도시에서 임시 조수로 근무하고 있다는 편지를 하였다. 곧 답장
이 왔다. 페르시아 왕관처럼 어마어마한 형용사로 가득 찬, 고딕 활자처럼 아름답고 읽기 어
려운 글씨로 쓰여 있었다. 온 가족이 매년가는 켄트의 홉 농장에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
었다. 그리고 필립을 설복하기 휘하여 여러 가지 아름답고 복잡한 말로 필립의 영혼에 위로
가 된다는 이야기며 굽이치는 홉의 덩굴에 관해서 설명했다. 필립은 이 곳에서의 계약 기간
이 끝나는 대로 곧 가겠노라고 답장을 보냈다.
판리에서의 4주일간의 계약 기간은 빨리 지나갔다.
계약이 끝나는 마지막 주일 어느 날 저녁, 사우스 박사와 필립이 처방을 쓰고 있는데 어
린 소녀가 진찰실로 들어왔다. 신발도 신지 않고 남루한 의복에 얼굴이 더러운 계집애였다.
필립이 문을 열어 주었다.
"선생님, 아니비 레인에 있는 플래처 부인 집까지 빨리 좀 와 주세요."
"플래처 부인이 어떻게 됐냐?" 사우스 박사가 물어뜯는 듯한 소리로 물었다.
소녀는 늙은 의사에 대해서는 본 척도 하지 않고 필립 쪽을 보고 말을 되풀이했다.
"플래처 부인의 작은아드님이 다쳤어요. 제발 좀 곧 와주세요."
"부인에게 내가 곧 간다고 해라." 사우스 박사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소녀는 잠시 동안 머뭇거리며 더러운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그대로 서서 필립을 쳐다보았
다.
"왜, 그러니 응?" 필립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부인께서는 새로 오신 선생님더러 와 달래요."
약제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사우스 박사가 복도에 나타나 호령을 하였다.
"아니, 플래처 부인은 내가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냐? 제 애미 뱃속에 있을 때
부터 내가 돌봐 주었는데, 지저분한 자식 새끼는 내가 보면 안 된다던?"
소녀는 금방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이 보이더니 마음을 돌렸는지 빨간 혀를 불쑥 내밀며 사
우스 발사를 향해 날름거렸다. 그리고는 늙은 의사가 깜짝 놀란 틈을 타서 있는 힘을 다하
여 달아나 버렸다. 필립은 노인이 노여워하는 것을 보았다.
"피곤하실 거예요, 아이비 레인까지는 꽤 먼길입니다." 사우스 박사 자신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필립이 말했다.
늙은 의사는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먼길이라구? 다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보다는 두 다리가 온전한 사람에게 더 가까워."
필립은 얼굴을 붉혔고 잠시 동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냉정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갈까요? 선생님이 가시겠습니까?"
"뭣 때문에 내가 가? 자네를 불렀는데."
필립은 모자를 집어쓰고 환자 집으로 갔다. 돌아온 것은 8시가 다 되어 서였다. 사우스 박
사는 식당에서 난로에 등을 쬐며 서 있었다.
"퍽 오래 걸렸군."
"죄송합니다. 왜 먼저 식사하시지 않구?"
"응, 기다리구 싶었으니까. 여태껏 플래처 부인 집에 있었나?"
"아니오. 돌아오는 길에 해지는 것을 구경하느라구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늙은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하녀가 구운 생선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을
필립은 맛있게 먹었다.
"해지는 것은 왜 보고 있었나?"
필립은 입 속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 대답했다.
"그저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랬죠."
늙은 의사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듯이 필립을 보고 있더니 그림자 같은 미소가 그의 피곤
한 얼굴에 떠올랐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하녀가 포트 와인을 두고 나간
뒤에 노인은 의자에 기대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필립을 쏘아보았다.
"아까 자네의 발 얘기를 해서 조금 가슴이 아팠지?"
"사람들은 제게 화만 나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반드시 저의 발 얘기를 꺼냅니다."
필립은 노인을 쳐다보았다.
"약점을 발견해서 기쁘세요?"
늙은 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약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들은 얼마 동안 말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우스 박사는 필립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여기에 더 머물지 않겠나? 이하선염에 걸린 그 바보 같은 조수는 파면시켜 버릴 테니."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가을에 제가 임명을 받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
앞으로 다른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내 말은 나하고 동업하자는 말일세." 노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필립은 깜짝 놀라 물었다.
"이 고장 사람들 사이에 자네 인기가 괜찮은 모양이야."
"그것은 선생님께는 더욱 재미없으실 것으로 생각했는데요." 필립은 냉담하게 말했다.
"개업 40년에 조수의 인기가 나보다 좋다고 해서 내가 눈곱만큼이라도 걱정할 줄 아나?
그렇지는 않네, 이 사람아. 나와 환자 사이에는 아무런 감전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네. 나는
환자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 아닐세. 치료비만 받으면 그만일세. 자네는 어떻게 생각
하나?"
필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박사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가 아
니고 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놀랐기 대문이었다. 의사 면허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
람에게 동업을 제안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사우스 박
사가 자기에게 동업을 제안한 것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적지않게
놀랐다. 성 누가 병원의 서무 주임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생각해 보
았다.
"이 병원은 1년에 약 7백 파운드의 수입이 있어. 따라서 자네의 몫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자네가 지불해야 할 돈은 조금씩 편리한 대로
지불하면 되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이 병원은 자네가 물려받을 것이니까. 여기저기 큰 병원
으로 몇 년 돌아다니다가 혼자 개업할 때까지 의무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으리라
고 생각하네만."
자기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번 뛰어들 기회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근래에
는 의사 수호가 넘칠 만큼 많다. 그가 아는 동료들의 태반이 이 정도로 장래가 보장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여기 있게 된다면 과거 4년 동안의
저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가지 고생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 가운데서도 항상 한 가지 희망, 즉 자격을 얻고 나서 한 번 멀리 여행을 하리라는
희망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아침에 잠이 깨면 먼길을 떠나고 싶어 온몸이 쑤시는
듯합니다. 여행을 한다고 해서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전의 제가 보지 못한
곳이면 아무 데든 가고 싶습니다."
바야흐로 그 목적을 달성할 날이 눈앞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내년 6월이면 성 누가 병원
에서의 근무 기간이 끝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스페인으로 떠날 작정이었다. 낭만의 나라 스
페인에서 5,6개월 동안만 머물리라. 스페인 여행을 마치면 배를 타고 동양으로 갈 것이다.
아직 많은 인생이 그의 앞에 가로놓여 있었고, 세월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도 형편에 따라서
는 사람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나라의 생활도, 풍습도, 이상한 이국인들 사이를 방랑하면서
몇 해고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여행에서 무엇을 찾고 또 무엇을 가져오게 될는지 모르
나 아무튼 삶에 관한 새로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설사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가슴을 갉아먹는 듯한 불안감만은 발산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우스 박사는 그에게 최대의 친절을 베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적당한 이유 없이 거절한다
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일 같았다. 그래서 필립은 수줍은 태도로 시치미를 떼고, 왜 그렇듯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한 계획을 달성하는 것이 그처럼 그에게 중대한 일인가를 설명하려
고 했다.
사우스 박사는 조용히 필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그의 날카로운 늙은 눈에 온화한 빛
을 띠었다. 그가 자기의 제안을 강요하지 않는 것도 필립에게는 더한층 고맙게 생각되었다.
호의는 때때로 명령조로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늙은 의사는 필립의 말을 수긍한 것
같았다. 필립에게는 무엇인지 모르게 이 노인을 끄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 늙은 의사는
필립을 대할 때면 왜 그런지 모르게 웃음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필립은 노인을 괴롭히는 일
이 없었으며, 한두 번 노인은 필립의 어께에 손을 얹은 일조차 있었다.
필립이 떠날 때 노인은 정거장까지 따라나왔다. 그의 표정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참 즐거웠습니다. 선생님의 친절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떠나게 되니 더 기쁘지?"
"여기서도 유쾌했습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게지. 아무렴, 아직 젊으니까." 그는 조금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거든 언제든지 돌아오게. 나의 제안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해 두게."
"참으로 감사합니다."
필립은 객차의 유리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늙은 의사와 악수를 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 필립은 앞으로 홉 농장에서 지낼 2주일을 생각했다. 애덜리 식구들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하늘이 말게 개어 필립의 마음을 더욱 상쾌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 사우스
박사는 무거운 걸음으로 텅 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더 늙고 외로워진
것같이 느껴졌다.
필립이 펀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그 곳은 애덜리 부인의 고향이었다. 부인은 해마
다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이 농장을 찾아왔으며, 농장에서 홉 따는 일은 부인이 소녀 시
절부터 해온 손에 익은 일이었다. 해마다 여기 오는 것은 다른 켄트 사람들처럼 약간의 돈
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1년에 한 번씩 즐거운 가족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하
는 일은 힘들지 않았고 야외에서 하는 공동 작업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오랫동안의
즐거운 소풍이나 다를 바 없었다. 홉을 따는 사람들은 전에는 모두 헛간에서 잠을 잤는데,
약 10년 전에 들판에 오두막집을 열을 지어 세운 후로 애덜리 가족도 다른 가족들처럼 매해
같은 오두막집에 머무는 것이었다. 애덜리는 필립을 위하여 선술집에 필립이 거처할 방을
하나 구해 놓았고, 그 집에서 마차를 빌려 정거장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여관에서 홉 농장
까지는 4분의 1마일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필립의 방에 가방을 두고 걸어서 오두막집이 있
는 목장가지 갔다. 오두막집이라고 하나 12피트 평방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 있는 길쭉하고
나직한 움막에 불과했다. 오두막 앞마다 모닥불이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저녁 요리를 하는
것을 보며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애덜리의 아이들은 바닷바람과 햇볕으로 얼굴이 모두 거
무스름해 있었다. 애덜리 부인도 챙이 넓은 보닛을 쓰고 있어 딴사람 같았다. 오랜 도회지
생활도 부인을 완전히 변하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인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또 시골에
서 자라났기 때문에 농촌에서 보는 부인의 모습은 더욱 편안해 보였다. 부인은 고기를 굽는
한편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필립을 보자 활짝 웃으며 힘껏 악수를 했다. 애덜리는 전원
생활의 환희에 흥분되어 있었다.
"애들아, 어서 와서 저녁을 먹어라. 샐리는 어디 갔니?"
"여기 있어요, 엄마." 샐리는 집 안에서 나왔다.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꽃이 샐리의 얼굴에 아름다운 빛을 던졌다. 필립이 최근에 본 샐리
는 양장점에 다니기 사작한 후부터 말쑥한 차림만 보아 왔으나 오늘은 일하기에 간편하고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늬 있는 옷의 소매를 겉어
올려서 튼튼하고 둥그스름한 팔이 드러나 보였다. 그녀 역시 보닛을 쓰고 있었다.
"동화에 나오는 젖짜는 아가씨같이 보이는걸." 필립은 샐리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샐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은근하고도 얌전하게 필립의 시중을 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필립에게는 더한층 마음에 들었다. 샐 리가 옆에 앉아 있자 기분이 좋았다. 이따금
눈을 돌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하였다. 한 번은 두 사람의 시선
이 마주치자 샐리는 고요한 미소를 띠었다. 필립이 돌아가려고 일어나자 애덜리 부인이 말
했다.
"아침 식사는 6시 5분전에 드는데, 아마 그렇게 일찍 일어나기도 힘드시겠죠. 우리는 6시
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니까."
그 때 애덜 리가 소리쳤다.
"아니야, 물론 일찍 일어나야 하지, 우리들하고 독같이 일해야 돼. 자기 식비는 벌어야 하
니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지. 안 그런가, 필립?"
그러자 부인이 또 말했다.
"애들이 조반 전에 해수욕을 가니까 돌아오는 길에 '졸리세일러'에 들르게 하지요. 그 앞
을 지나가게 되니까."
"해변으로 가는 길에 나를 깨워 주면 나도 같이 가서 해수욕을 하겠어요." 필립이 말했다.
제인도 해럴드도 에드워드도 이 말을 듣고 환성을 올렸다. 이튿날 아침 필립은 곤히 잠들
어 있었는데, 아이들이 방으로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잠이 깼다. 사내애들은 침대 위에까지
뛰어올라왔으므로 필립은 슬리퍼로 그들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옷을 걸치고 내려갔다.
아침 해가 뜰 무렵이었다. 바람은 싸늘했으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아침해가 황금빛으로
찬란히 비치고 있었다. 샐리는 수영복과 수건을 팔에 걸치고 코니의 손을 잡고 길 복판에
서 있었다. 엊저녁에 본 그녀의 챙 넓은 보닛은 엷은 자줏빛인 것을 그 때야 알았다. 모자의
빛깔에 대비되어 검붉은 샐리의 얼굴은 사과를 연상시켰다. 필립을 보자 그녀는 느릿하고
애틋한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 때 필립은 샐리의 이가 고르고 유난히 하얀 것을
알았다. 그는 왜 지금까지 그것을 보지 못했을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냥 주무시게 하려고 했는데, 애들이 꼭 가서 깨우겠다고 그러지 않아요? 정말 가고 싶
어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내가 말렸는데두요."
"아니, 난 정말 가고 싶어."
그들은 한참 동안 겉다가 늪을 가로질렀다. 해변까지는 1마일쯤 되었다. 바닷물은 차고 회
색으로 보였다. 필립은 보기만 해도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애들은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샐리는 느릿느릿하게 행동했고, 애들이 모두 필립에게 달려들어 물장
구를 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물 속으로 들어왔다. 수영이라면 필립은 자신이 있었다. 물
속에서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물개의 흉내를 내기도 하고 뚱뚱한 여자가 머리를 물에 적
시지 않으려고 쩔쩔매는 흉내를 내기도 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러
자 아이들도 그대로 따라 했다. 물놀이는 떠들썩 해져서 샐 리가 화를 내며 모두들 물에서
나오라고 야단을 칠 정도였다.
"아이 참, 애들이나 다름 없으세요. 선생님이 안 오셨을 때는 모두 이러지는 않았어요."
샐리는 샐쭉해서 어머니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샐리는 아름다운 머리를 한쪽 어깨로 넘기고 모자를 손에 들고 걸었다. 오
두막집으로 돌아와 보니 애덜리 부인은 이미 농장으로 나간 뒤였다. 애덜리는 다 낡은 바지
를 입고 셔츠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저고리의 단추를 꼭 잠그고 있었으며, 챙이 넓은 모자
를 쓰고 모닥불에 생선을 굽고 있었다. 기분이 퍽 좋은 것 같았다. 흡사 산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오는 일행을 보자 향긋한 연어를 구우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
스에 나오는 마녀들의 합창 대목을 불렀다. 그리고 가까이 온 그들에게 말하였다.
"다들 빨리 식사하고 나가 봐야지. 어머니가 화내신다."
얼마 후에 그들은 목장을 건너 농장 쪽으로 나갔다. 제인과 해럴드는 버터 바른 빵을 손
에 든 채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농장에 도착했다. 처음에 부딪친 홉 농원은 필립에게 소년
시절의 한때를 회상시켰으며, 여기저기 보이는 홉 건조소는 켄트 주의 특유한 풍경이었다.
샐리의 뒤를 다라 홉 이랑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 필립에게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양은 솟아올라 여기저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
고 있었다. 필립의 눈은 초목들의 푸른 빛깔을 한없이 즐겼다. 홉은 무르익었으며 시실리의
시인들이 보랏빛 포도송이에서 찾은 아름다움과 정열이 여기에도 있는 것 같았다. 샐리를
따라가면서 필립은 풍요함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기름진 켄트의 당에서 흐믓한 흙냄새가 풍
기고 상쾌한 9월의 산들바람에 홉의 향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필립은 자기의 광주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샐리의 광주리에 함께 따 담았다. 제인
은 필립이 자기를 도와 주지 않고 샐리 언니만 도와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눈
치였다. 그래서 필립은 샐리의 광주리가 가득 차면 제인을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샐리는 거의 자기 어머니만큼이나 일손이 빨랐다.
"재봉하는 손이라 아플 것 같은데." 필립이 물어 보았다.
"아니에요. 손이 부드러울수록 잘 따져요.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따는 거예요. 당
신도 거친 일을 해서 손과 손가락이 굳어졌다면 그렇게 잘 따지는 못할 거예요." 샐 리가
대답하였다.
필립은 샐 리가 재빠르게 손을 놀려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가끔 그녀가 어머
니 같은 마음으로 필립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더한층 귀여웠다. 처음에는 필립이 아
주 서툴러서 샐 리가 웃곤 했다. 샐 리가 필립에게 여러 송이를 한꺼번에 다는 방법을 가르
쳐 주기 위하여 허리를 굽혔을 때 두 사람의 손이 마주 닿았다. 순가 샐 리가 얼굴을 붉히
는 것을 보고 필립은 놀랐다. 그는 샐 리가 완전히 성숙한 여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샐리는 말괄량이 소녀였고, 아직도 소녀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몇 사람 나타난 것을 보
더라도 그녀는 이미 소녀는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 며칠 되지 않았으
나 샐리의 사촌 한 명이 그녀를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것 때문에 샐리는 많은 사람으
로부터 놀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 갠이라는 이 청년은 천 근처에 사는 농부와 결혼
한 샐리 이모의 아들이었다. 사람들은 왜 그가 매일 홉 밭을 지나가는가를 알고 있었다.
휴식 시간은 건조자의 형편에 달려 있었다. 3시나 4시경에는 그 날 밤 새도록 말릴 홉을
거둬들였다. 그런 날은 작업이 일찌감치 끝났다. 그러나 대개는 5시가 되어야 하루의 분량이
끝났다. 작 조마다 그 날 거든 홉의 계량을 마치면 연장을 챙기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
아가며, 남자들의 대부분은 술집으로 갔다. 종일토록 작업하고 나서 한잔 마시는 맥주의 맛
이란 매우 상쾌했다.
"이젠 가서 주무셔야겠지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해 보는 것이 처음
이실 테니까. 퍽 피로하셨겠어요." 애덜리 부인이 필립에게 말했다.
"아저씨, 우리하고 내일 아침에 또 해수욕하러 가지요?" 사내애들이 외쳤다.
"암, 가구말구."
필립은 피곤했으나 행복했다. 저녁을 먹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몸을 벽에 기대고 파
이프를 피워 물고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샐리는 바삐 오두막 집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필
립은 샐리의 민활한 동작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우아하다기보다는 가볍고 활달했다. 엉덩이와 두 다리에는 힘이 있었고, 땅을 디디는 발끝에
도 강한 자신이 넘치는 것 같았다. 애덜리는 이웃집 사람과 이야기하러 나가고 없었다. 조금
후에 애덜리 부인이 혼잣말처럼 말하는 것이 들렸다.
"또 차가 떨어졌군 애덜리더러 블랙 상점에 가서 사다 달라고 했는데." 부인은 말을 멈추
었다가 잠시 후에 소리질렀다. "얘 샐리야, 너 얼른 블랙상점에 가서 차 반 파운드만 사오너
라. 다 떨어졌다."
"그러세요, 어머니."
블랙 상점 여주인은 반 마일 떨어진 곳에 우체국과 잡화상을 겸한 작은 오두막을 갖고 있
었다. 샐리는 걷었던 옷소매를 내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함께 갈까, 샐리?" 필립이 물었다.
"괜찮아요, 혼자 가도 무섭지 않아요."
"물론 무섭지는 않겠지만, 나도 가 잘 시간이 되었고, 도 마침 발을 좀 놀려 보려고 하던
참이니까."
샐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나섰다. 길은 조용하고 하얗게 보였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여름밤이었다. 두 사람 다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이렇게 늦어도 아직 더운걸." 필립이 말했다.
"드문 일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침묵에 흘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 나란히 걷는다는 것
만 해도 즐거웠고,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생울타리 근처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두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들은 울타리 밑 계단에 꼭 붙어 앉
아서 필립과 샐 리가 지나가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구일까요?" 샐 리가 필립에게 물었다.
"퍽 행복해 보이지?"
"저 사람들은 우리도 애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들의 목적지인 상점의 불빛이 보였다. 그들은 사게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불빛에
눈이 부셨다.
"늦게 오셨군요.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죠." 여주인은 말한 다음 기둥시계를 보며 9시가
다 되었다고 말했다.
샐리는 홍차를 반 파운드 샀다. 애덜리 부인은 한 번에 반 파운드 이상을 사는 일이 없었
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나오 걷기 시작했다. 가끔 이름 모를 밤짐승이 짧고 날카로운 소리
로 울었으나, 밤의 정적을 더한층 두드러지게 하는 듯했다.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여 보세요. 파도 소리가 들릴 거예요." 샐 리가 말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자갈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다시 생울타리 앞을 지날 때 아까 본 애인들은 아직 거기에 있었
다. 그러나 이번에는 속삭이는 대신 서로 꼭 껴안고 사나이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한 바쁜 모양이죠." 샐 리가 말했다.
모퉁일를 돌아가자 따스한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대지는 신선함을 내뿜고 있었다.
진동하는 듯한 밤공기 속에 이상한 그 무엇이 있었고, 무엇인지 모르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
는 것 같았다. 침묵은 그 순간 어떤 의미를 띠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필립도 야릇한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가슴에 가득 차서 그대로 녹아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
다. 녹아 버릴 것 같다는 이 낡아빠진 말이 지금 야릇한 그의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행복감과 기대감으로 가슴이 떨렸다. 문득 필립은 제시카와 로렌조가 서로의 말끝
을 이어 가며 주고받은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사라의 속삭임이 생각났다. 그들의 기지에
넘치는 대화 뒤에는 사라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밤의 공기 속에 도대체
무엇이 깃들여 있기에 이처럼 그의 감각을 신기하게 눈뜨기 해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는 순수한 영혼이 되어 대지의 향기, 음향, 그 밖의 모든 것을 혼자 맛보는 것 같았다. 이처
럼 아름다움을 느껴 본 일은 없었다. 혹시나 샐 리가 말을 꺼내어 이 마술을 깨드리지나 않
을까 두려웠으나, 샐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는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
어졌다. 그녀의 나직하고 풍성한 목소리는 전원의 밤 바로 그것의 소리 같았다.
두 사람은 홉 밭의 입구까지 왔다. 오두막집으로 돌아가려면 그 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필
립이 울타리 문을 열어 주면서 샐리에게 말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여관으로 가보겠어."
"같이 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샐리는 손을 내밀었다.
필립은 손을 잡고 말했다.
"샐 리가 정말 마음이 착하다면 동생들같이 키스로 인사해 줄 텐데."
"네, 좋아요."
필립은 농담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저 다만 행복했고, 샐 리가 좋았고, 이 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한 번 키스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을 던졌던 것이었다.
"그러면 굿 나잇 키스." 그는 웃으면서 샐리를 끌어들였다.
샐리는 그에게 입술을 내맡겼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풍만한 입술이었다. 키스는 약간 오랫
동안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한 송이의 꽃 같았다. 다음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파로 샐리의 몸을 꽉 껴안았다. 샐리는 그가 하는 대로 조용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샐리의
몸은 탄력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립은 제정신을 잃어버렸
다. 그의 감각은 홍수와도 같이 그를 압도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여자를 울타리 밑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
필립은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해럴드가 깃털로 그의 얼굴을 간질
이고 있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을 본 아이들은 환성을 울렸다. 그는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이
다. 제인이 소리쳤다.
"어서 가요, 게르름뱅이 아저씨. 샐리 언니는 아저씨가 빨리 안 오시면 기다리지 않겠대
요."
그 말을 듣자 간밤의 일이 생각났다. 필립은 맥이 풀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누웠다. 어떻게 샐리와 만날 것인가? 갑자기 양심의 가책ㅇ르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가슴 아프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샐리는 그에게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만
나는 것이 몹시 두려웠고 왜 그렇게 바보짓을 했을까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
러나 아이들은 그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필립의 수영복과 수건을 들
고 나섰고, 애덜스탠은 그의 이불을 벗겼다. 이리하여 3분 후에는 모두 한길에 나와 있었다.
샐리는 필립을 보자 방긋 웃었다. 그전과 조금도 다름 없이 아름답고 천진 난만한 미소였다.
"옷 입으시는 데 그렇게 시간이 걸려요? 난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아주 미묘한 변화가 아니면 큰 변화가 있
으리라 예감했었다. 그녀는 그에 대하여 부그러움이거나 노여움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다
더 친밀한 태도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전의 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떠들고 웃어 대면서 해변으로 갔다. 샐
리만은 말이 적었는데, 그녀는 워낙 온순하고 말이 적었던 것이다. 그녀는 필립에게 말을 걸
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말을 피하지도 않았다. 필립은 에젯밤의 사건이 그녀에게 큰 변동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쪽 손에는 계집아이, 다른 손에는 사내아이를 붙잡고 걸어가며 겉으로는 태연스럽
게 말을 하고 있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열심히 그 설명을 찾고 있었다. 샐리는 어젯밤 일을
영원히 잊어버리려는 것인가? 아마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어젯밤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비상한 환경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고로 생각하고 일체를 잊어버리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연령과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력과 성숙한 지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아무튼 그는 자기가 샐리라는 여자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샐리는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들은 물에서 개구리 흉내를 내며 놀았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 날도 떠들썩했다. 샐리
도 역시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감시했고 너무 멀리 나가면 불러들이곤 했다. 아이들이 잘 노
는 동안에는 샐리는 천천히 앞뒤로 헤엄쳐 다녔고 간혹 누워서 가만히 떠 있기도 했다. 얼
마 후 샐리는 물에서 나와서 몸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 명령적인 어조로 동생들을
불러 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물 속에는 필립만이 남게 되었다. 이 기회에 필립은 힘차게
헤엄쳐 보았다. 두 번째 아침이라 차가운 물에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선한 바닷물 속에서 마
음껏 놀 수 있었다. 팔다리를 물 속에서는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는 것이 더욱 유쾌했다. 그는
길고 힘차게 물을 헤치며 헤엄쳤다. 그러나 그 때 샐리는 수건을 몸에 감고 물가로 내려왔
다.
"빨리 나와요, 필립." 샐리는 마치 자기의 보호 밑에 있는 소년에게나 하듯 불렀다.
그리고 필립이 샐리의 그 명령적인 태도를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물에서 나오자 다시금 꾸
중을 들었다.
"그렇게 물 속에 오래 있으면 못 써요. 입술이 새파래요. 그 이를 좀 보세요. 딱딱 마주치
잖아요?"
"네, 네, 나갑니다."
전에는 샐 리가 그에게 이런 태도로 말한 적이 없었다. 엊저녁 사건이 그녀에게 그런 권
리를 준 것 같았다. 그녀는 필립을 자기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것이었
다. 몇 분 후 그들은 옷을 입고 집을 향해서 걸어갔다. 샐리는 필립의 손을 보고 또 말했다.
"저 손 좀 봐요. 아주 새파래졌네."
"아, 이것 괜찮아. 혈액 순환 관계니까 곧 좋아질 테지."
"이리 줘 보세요." 그녀는 필립의 손을 잡더니 그의 손이 붉어질 때까지 양손을 다 문질
러 주었다.
필립은 어쩔 수 없었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가만히 샐 리가 하는 대로 보고 있었다. 아이
들 앞이라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으며, 그녀의 눈과 마주쳐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샐 리가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며, 다만 우연히 마주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
다. 그 날 종일 샐리의 태도에는 필립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암시를 보일 만한 점
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다른 날보다는 조금 말이 많아졌다고나 할까, 그것뿐이었다. 홉 밭
에 모두 모여 앉아 다시 일을 할 때 샐리는 필립이 말을 듣지 않고 추워서 새파래질 때까지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밤의 사건
은 샐리에게 필립에 대한 보호 의식을 일깨운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동생을 대할 때처럼
필립에게도 모성 본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그는 샐리와 다시금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었다. 샐리는 저녁밥을 짓
고 필립은 모닥불 옆의 풀 위에 앉아 있었다. 애덜리 부인은 살 것이 있어 마을로 내려갔고,
아이들은 각각 제멋대로 다른 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필립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
침묵도 그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어떻게 말을 시작할 지 몰랐다. 샐리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을 걸 때나 특별히 할말이 있을 때가 아니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여자였던 것이다. 결국 필립 쪽에서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샐리, 나에게 골을 내고 있어?" 그는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샐리는 슬며시 눈을 들어 그를 보고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
"제가요? 왜 제가 골을 내요?"
이 말에 필립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냄비 뚜껑을 열어 한 번 젓고 나서 다
시 뚜껑을 닫았다. 맛있는 냄새가 확 퍼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고요히 미소를 띠고 필립을
쳐다보았다. 입술이 약간 벌어진 것이 보였다. 눈으로 웃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필립은 가슴은 귀에 들릴 만큼 크게 두근거렸다. 일시에 전신의 피가 얼굴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 웃었다.
"난 전연 몰랐는데."
"바보."
"왜 나를 좋아했지?"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샐리는 모닥불에 나무를 조금 더 놓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마 이전에 당신이 밖에서 주무시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우리 집으로 오신 날부터 좋
아진 것 같아요. 그 일을 기억하세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침대를 내여드
렸지요."
그는 이 말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샐 리가 그 때의 일을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공포와 치욕감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다른 남자와는 결혼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거여요. 지난번에 어머니가 저더러
결혼하라는 남자가 있었죠? 그이가 너무나 귀찮게 굴어서 차를 마시러 오게 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필립에게 너무 뜻밖의 말이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참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역시 이것이야말로 행복감일지도 모른다.
샐리는 냄비 속을 한 번 더 휘젓고 말했다.
"아이들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갔을까? 저녁 준비가 다 되었는데."
"내가 가서 찾아볼까? " 필립이 물었다. 이런 실제적인 화제로 돌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마음이 놓였다.
"그럼 부탁할까요? 저기 어머니가 오시네요."
필립이 일어나자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말했다.
"오늘 밤에 같이 산보할까요? 아이들을 재워 놓고 나가게."
"그래."
"그럼 생울타리에서 기다려 주세요. 일이 끝나면 곧 가겠어요."
그는 생울타리 밑 계단에 걸터앉아 별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양편에는 익기 시작한
산딸기 덩굴이 덮여 있었다. 땅에서는 밤의 향기가 올라왔고 공기는 부드럽고 고요했다. 그
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이란 눈물과 울음의
열정으로만 생각해 왔었는데, 샐리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일 이것이 사
랑이 아니라면 왜 샐 리가 그에게 몸을 내맡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사
랑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키가 크고 햇볕에 그은 건강한 얼굴에 늠름한 모습을 한 그녀의 사촌인 피터 갠에게 그녀
가 사랑을 느꼈다면 도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샐리는 그의 무엇에 반했단 말인
가? 그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을 샐 리가 하고 있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샐리의 순결성만은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샐리 자신은 의식하지 않고 있으나
그녀가 느끼고 있는 여러 가지, 즉 대기와 희망과 아름다운 밤에 의한 도취, 자연 그대로의
본능, 흘러넘치는 부드러운 분위기, 어머니나 누님 같은 감정, 이런 것들이 서로 얽혀서 그
러한 결과를 만든 것이리라. 그는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샐리의 마음속에 사
랑의 감정이 가득 찬 나머지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바쳐 버린 것이었다.
그 때 한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 여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샐리!" 그는 나직이 불렀다.
샐리는 멈칫하다가 필립이 있는 쪽으로 왔다. 그녀와 함께 달콤한 전원의 향기가 풍겨 왔
다. 새로 깎은 풀 냄새, 무르익은 홉의 향기, 푸른 잔디의 신선함, 그런 것을 모두 한몸에 지
니고 다니는 건강한 여자의 몸이 필립의 가슴에 힘껏 안겨졌다.
"우유와 꿀. 샐리는 우유와 꿀 같아." 필립이 말했다.
그는 샐리의 눈을 감게 하고 한쪽씩 양쪽 눈에 키스했다. 그녀의 건강한고 포동포동한 팔
이 팔꿈치까지 드러나 있었다. 그는 샐리의 두 팔을 만지면서 새삼스럽게 그 아름다움에 놀
라는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그녀의 팔은 루벤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답고 투명하며 황금빛 솜털이 나 있는 팔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색슨 민족의 여신의 팔
같았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소박한 자연미를 인간이 가질 것 같지 않았다. 필립은 모든 남성
의 마음속에 핀다는 요크와 랭커스터라는 이름의 희고 붉은 장미, 접시꽃 , 인동덩굴, 참제
비고깔꽃, 바위취 등의 만발한 오막살이의 정원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어째서 나를 좋아하게 됐지? 나는 절름발이이고, 평범하고, 못생기고, 하잘것없는 사람인
데." 그가 물었다.
샐리는 두손으로 필립의 얼굴을 감싸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나서 대답했다.
"당신은 바보예요. 정말 바보예요."
홉 따기가 끝날 무렵, 필립은 성 누가 병원의 의무원 임명 통지를 받고, 애덜리 가족과 함
께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트에 적당한 방을 하나 얻고 10월 초순부터 근무
하기 시작했다. 일에 자신이 생겼다. 샐리와도 자주 만나 매일의 생활이 매우 유쾌하게 느껴
졌다. 외래 환자를 담당하는 날 이외에는 매일 6시 이후에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샐 리가 일
하는 양장점 가까이 가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거기에는 늘 젊은 남자들이 몇 사람씩
'상용출입구'라고 쓰여 있는 근처나 조금 떨어진 길모퉁이를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 양장점에서 여자들이 삼삼 오오 떼를 지어 나오다가 그 젊은 남자들을 발견하고는
서로 쿡쿡 찌르며 웃곤 했다. 샐리는 무늬 없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농장에서 그
와 같이 홉을 따던 샐리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나오다가 그를 보자
걸음을 늦추고 싱긋 웃어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번화한 거리를 뚫고 같이 걸어갔다. 필립
은 그 날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고, 샐리는 양장점에서 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샐리와 함께 일하는 여자들의 이름도 모두 알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필립은 샐
리가 항상 숨기고 있으나,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함께 일
하는 동료와 남자 감독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비평을 가했고, 때로는 뜻밖의 농담을 하여 필
립을 웃기기도 했다. 또 그녀는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하나도 우스울 것 없다는
듯이 아주 심각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상당히 예민한 관찰이 엿
보여 필립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필립이 웃을 때면 눈웃음을 지어 유머를 이해하고 있
다는 뜻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악수했고, 헤어질 때도 악수를 했다. 한 번은
필립이 샐리에게 자기 하숙방에 가서 같이 차나 마시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샐리는
그것을 거절했다.
"아니에요, 안 가겠어요. 남보기에 이상할 테니까요."
그들은 일찍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샐리는 다만 이렇게 같이 걷는 것
이상의 교제는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필립과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필립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러
면서도 사귀면 사귈수록 좋아지는 샐리였다. 그녀는 모든 일에 유능하고, 자제심이 있었으
며, 정직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이 여자야말로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믿을 수 있는
여자였다.
"당신은 참 훌륭한 여자요." 어느 땐가 필립이 무심코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저는 다른 여자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해요."
필립은 자기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매우 좋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녀와 같이 있으면 무척 즐거웠다. 샐리에게는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열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여점원에게 자신이 생각해도 어리
석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하튼 그는 샐리를 퍽 좋아했고, 그녀의 훌륭한
육체미를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단 하나의 결점도 찾아볼 수 없는 놀랄 만
한 동물이었다. 샐리의 육체적인 완전성은 항상 그에게 일종의 외경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녀 앞에서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런던으로 돌아와서 약 3주일 되던 어느 날, 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필립은
샐 리가 오늘은 유달리 잠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침착한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달라
보였으며 양미간은 거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샐리, 왜 그래?" 필립이 물어 보았다.
샐리는 필립을 보지도 않고 앞만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다. 안색이 조금 흐려졌다.
"글세, 저도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듣자 필립은 홀연히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심장의 고동이 갑자기 빨라지고
안색이 창백해진 것 같았다.
"모르겠다니, 그럼 혹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한 걸음도 더 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샐리를 보니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며, 억지로 울음
을 참고 있었다.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어요. 아마 괜찮겠지요."
그들은 말없이 첸서리 레인까지 걸어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항상 갈라지는 것이었다. 샐리
는 손을 내밀고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걱정하실 건 없어요. 어떻게 잘 되겠지요."
샐리와 헤어진 필립은 착잡한 기분으로 걸었다. 왜 자기는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어리석고 못난 녀석 같으니! 이것이 제일 처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는 솟아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몇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자신을 멸시했다. 왜 그
런 경솔한 짓을 했을까? 그러나 그렇게 자책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각은 겉잡을 수 없는 혼
란 가운데서 한줄기의 상념이 이어져 있었다.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모든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원하고 있던 것이 지금 겨우 손에
닿을 정도가 되자, 그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장애에 부딪힌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결연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무엇
인가 큰 성격적 결함이 있어, 그 결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결함은 바로 미래에
살아 보려는 그의 정열이었다. 그래서 병원 근무를 하게 되자마자, 그는 여행 계획을 너무
구체적으로 생각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현실과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절망적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미래의 목표가 눈앞에 보이고, 참기 어려웠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발을 내디뎌도 결코 해롭지 않을 성싶었던 것이다. 그는 우선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다. 그나라는 그가 항상 그리워하던 나라였다. 스페인의 정신, 로맨스, 색채, 역사,
영광, 그 모든 것이 그의 혈관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어느 나라도 주지 못할 메시지를
이 나라가 그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코르도바, 세비야, 톨레도, 레온,
다라고나, 버고스 등의 옛도시의 꾸불꾸불한 거리를 마치 어릴 적부터 걸어다닌 것처럼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의 우대한 화가들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화가들이었고, 다른 나라 어
떤 그림보다도 그의 번민에 가득 찬 마음에 의미가 깊은 그들의 걸작품을 보게 되는 날의
환희를 생각하면 그의 맥박은 미친 듯이 뛰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어떤 시인보다도 국민
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위대한 스페인의 시인들의 작품도 그는 이미 읽어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영감의 원천을 세계 문학의 커더란 조류에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
의 나라의 향기 높은 열대의 형원과 황량한 산악 지대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이라고 생각되
었던 것이다. 불과 2,3개월 후에는 영혼과 열정의 웅장한 표현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스페인어를 필립은 그 자신도 귀로 직접 들을 수 있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
페인에서도 남쪽 안달루시아는 필립의 정열을 만족시키기에 너무 부드럽고 감각적이며, 어
느 면으로는 너무 통속적인 것같이 느껴졌다. 그의 상상은 오히려 바람 부는 카스티야의 들
판이나 아라곤과 레온의 험한 산악 지대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 미지의 나라와
의 접촉이 그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그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는 더욱 멀고 더욱 미지의 이상한 장소들의 신기한 것고 부딪혀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고 필립은 이미 선의를 싣고 다니는 많은 선박 회사와
연락해서 항로를 정확히 알아 두었으며, 실제로 그 배에 탔던 사람들로부터 각기의 항로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일일이 알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동양 기선 회사와 말레이 기선
회사는 대상에서 제외해 놓았었다. 이들 회사에서는 여간해서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없었고,
여객선에서는 선의에게는 자유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회사 이외에도 동양으
로 큰 부정기 화물선을 보내는 회사가 얼마든지 있었고, 그 배들은 하루 이틀 혹은 2주일간
이나 도눙의 여러 항구에 기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의의 자유 시간도 많았고 때로는
내륙으로 여행할 수도 있었다. 봉급이 적고 식사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에 희망자가 별로 많
지 않았고, 런던에서 의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면 응모만 하면 틀립없이 취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선객이래야 이름도 없는 항구에서 항구로 장사하러 다니는 몇몇 사람이 있을 정도였
으므로, 배에서의 생활은 실로 한가하고 즐거울 것이었다. 필립은 그 배들이 출항하는 항구
의 이름을 모두 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항구의 하나하는 필립의 가슴에 눈부신 열대의 햇
빛, 마력적인 색체, 신비와 졍열에 넘치는 삶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필립이 바라
고 있던 삶은 그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바로 눈앞에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마 도
교나 상하이에서 배를 바꾸어 타고 남태평양의 섬들을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는 어디
서든지 필요했으므로, 그는 버마의 내지에 들어가 볼 수 있을 것이고, 수마트라나 보르네오
의 무성한 정글을 찾아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그는 아직 젊었고 세월의
흐름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영국에는 친척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으니, 몇 해 동안 온 세
계를 방랑하며 인생의 아름다움과 놀라움과 다채로움을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덜컥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는 샐 리가 잘못 판단했다고는 생각지 않
았다. 그것은 틀립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무튼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연은 샐리를
어린애의 어머니가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고쯤으로 자기의 앞길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리피스
를 생각해 보았다. 그 친구라면 그런 문제쯤은 눈 하나 깜박하기 않고 들어을 것이다. 그리
피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귀찮다는 듯이 약은 수작으로 꽁무늬를 빼고 뒷일은 여자 혼자
서 적당히 처리하게 버려 둘 것이다. 이번 일만큼은 불가항력이었다고 필립은 그 자신에게
변명했다. 그 책임은 자기와 샐리에게 독같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도 세상을 알고 세상 현실
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모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모험을 한 것이다. 이런 사고쯤으로 그
의 생애의 설계도를 파괴한다는 것은 미친 것일 것이다.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
끼고 있고 따라서 그 인생을 될 수록 유익하게 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똑똑히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물론 샐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할 것이다. 상
당한 금액을 줄 수도 있었다. 강한 사람은 결코 자기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았다.
필립은 이 모든 것을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으나, 그로서는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 내가 이렇게 약하단 말인가?' 그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샐리는 그를 믿었고, 또 그에 대하여 친절했다. 그는 이치로 따지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감정이 용납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
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가 멀리 여행하는 중에도 잠시도 마음의 평화는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샐리의 양친이 그렇게 친절히 대해 주었
다. 그들에게 배은 망덕으로 보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해결책은 샐
리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우스 박사에게 편지해서 그가
결혼할 것이라는 것과 지난번의 제안이 아직 변하지 않은 채로 있다면 응하고 싶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이었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것이 그에게 가능한 유일의 길
이었다. 거기서는 자기의 불구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아내의 소박한 모습도 웃음
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샐리는 아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기이하고도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또 태어날 자기 아이를 생각하면 감회가 깊었다. 사우스 박사가 그를
그 때처럼 반가이 맞아 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 어촌에서 샐리와 함께 지낼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자신 가보지 못한 나라
로 향해해 가는 큰 배들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아마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
같았다.
아내에게 줄 결혼 선물에 그는 큰 희망을 걸었다. 자기 희생! 그 말의 아름다움에 그의
마음은 들뜨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날 저녁 내내 그것만을 생각했다. 너무나 흥분해서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어느새 방에서 쫓겨나듯 거리로 나와 버렸다. 가슴이 기쁨으로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버드케지워크 거리를 몇 번이나 왕복했다.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가 결혼을 청할 때의 샐리의 행복스러운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지금 시간이 그렇
게 늦지만 않았더라도 당장 그 길로 샐리에게로 뛰어갔을 것이었다. 그는 아늑한 거실에서
샐리와 지낼 긴 밤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바다가 보이도록 덧문을 열어 놓은 채 샐리는 고
개를 숙이고 바느질을 하고 있고, 그는 책을 읽는다. 갓을 씌운 램프 불이 샐리의 탐스러운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해준다. 두 사람은 자라나는 어린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문
들 그를 바라보는 샐리의 눈에는 사랑의 빛이 떠오른다. 그들은 환자인 어부들과 그들의 마
누라들과도 아주 친한 시이가 되어 간다. 또 그와 샐리도 어부들의 단조로운 생활의 슬픔과
시쁨을 함께 맛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는 다시금 자기와 샐리의 사랑의 결정인
아들을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의 애정을 느끼고 있었으며, 팔다리가 온전한 어린것의 몸을
어루만지는 기분을 상상해 보았다. 그 아니는 틀립없이 잘생겼을 것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인생에 대한 내 꿈을 송두리재 물려주리라.
그는 토요일에 국립 미술관에서 샐리와 만나기로 했다. 샐리는 일이 끝나는 대로 거기에
와서 필립과 함께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들은 만난 지 이틀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
다. 그 동안 필립은 기쁨을 잠시도 잊을 수 없었으며, 구태여 그녀를 만나려고 애쓰지 않은
것은 그런 기분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그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해도 참을 수 가 없
었다. 사우스 박사에겐 편지를 보냈는데, 전보로 답장이 왔다.
'이하선염쟁이를 파면시켰음, 언제 오겠나?"
그러한 전보를 그는 지금 그의 호주머니 속에 갖고 있었다.
그는 다정한 푸른 눈을 가진 샐리를 생각했다. 그의 입술에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국립 미술관의 계단을 올라가 제1실에 들어가 앉았다. 샐 리가 들어
오는 것을 잘 보기 위해서였다. 그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았다. 특별히 어
느 한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나, 훌륭한 색채와 선의 아름다움이 그의 영혼에 영향을
미쳐 오는 것이었다. 그는 샐리 생각으로 분주했다. 진달래와 난초로 가득 찬 꽃집에 단 한
송이 외롭게 핀 수레국화처럼 런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샐리를 런던으로부터 끌어 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인 것이다. 켄트의 홉 농장에서 보고 비로소 샐 리가 도시의 여자가 아니라
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의 부드러운 하늘 아래서 더 한층 아름답게 피어날 여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샐 리가 들어왔다. 그는 일어나서 맞았다. 그녀는 손목에 흰 커프스를 단 검은 옷
을 입고 있었으며, 목에는 리넨 칼라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악수를 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10분. 배고프지 않아?"
"그다지 시장하지 않아요."
"그럼 여기에 좀 앉을까?"
"그러세요."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무튼 샐 리가 옆에 있으니 즐거웠다. 건강
이 넘치는 샐리 옆에 있으면 몸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생명의 빛이 후광처럼 샐리의 주
위에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어땠어?" 필립은 마침내 웃음을 띠고 물었다.
"아, 괜찮았어요. 제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래?"
"기쁘지 않으세요?"
그는 머릿속이 이상야릇한 감정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필립은 샐 리가 걱정한 것을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그것이 착오일것이라는 의심은 한순간도 해 보
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새로 세운 모든 계획은 한갓 꿈에 불과했다. 그처럼 공들여
그린 생활 설계도도 결국은 실현될 수 없는 한갓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금 자유
로운 몸이 되었다. 자유! 당초의 그의 계획을 포기할 필요가 없었고, 자기 멋대로 살수 있는
인생이 필립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다만 우울
해질 뿐이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미래가 이제는 황량한 공백으로 그 앞에 뻗쳐 있는 것처
럼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그가 다년간 위험과 궁핍을 무릅쓰고 거친 바다를 방황하다가 마
침내 아름다운 황구를 만나 입항하려는 순간 역풍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그 배에 실린 채 바
다로 밀려나가는 격이었다. 육지의 온화한 목장과 상쾌한 숲을 항시 마음에 그려 왔기 때문
에 다시금 물결치는 망망한 바다로 되돌아갈 것을 생각하자, 가슴은 불안으로 가득 차는 것
이었다. 다시는 그 고독과 폭풍우에 도전할 용기가 없을 것 같았다. 샐리는 맑은 눈으로 그
를 바라보고 다시금 물었다.
"기쁘지 않으세요? 나는 당신이 퍽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쓸쓸한 표정으로 샐리를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글세 원, 기쁜지 안 기쁜지."
"이상하네요. 다른 남자 같으면 기뻐할 텐데요."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결
코 자기 희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아내와 가정과 사랑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모
두가 지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으므로, 그는 지금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아내와 가정과 사랑을 깊이 원했다. 그까짓 스페인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
며, 코르도바, 톨레도, 레온 따위의 도시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목적지는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 평생 그는 다만 남의 말과 글로써 주입된 이상만을 추구해 왔었고, 자
신의 진정한 소원은 한 번도 가져본 일이 없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다. 항상 그의 인생 항로
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의해 좌우되었고, 결코 그의 영혼에서 우러나와 자신의 뜻
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망상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이 치워 버렸다. 말하자면 그는 항상 미래를 위하고 미래에만 살았었지 제일 중요한 현재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게 내버려 두곤 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이상은 무엇인
가?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무의미한 인생의 사실로부터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
를 짜 내려 했던 욕망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무늬, 즉 인간이 태어나 일하다
결혼해서 자식 낳고 마침내 죽는다는 것 또한 가장 완벽한 무늬가 아닐까? 행복에 몸을 맡
겨 버린다는 것은 패배를 승인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패배는 많은 승리보다도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는 얼른 샐리를 보았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다시 외면을 하고 말했다.
"오늘 나는 샐리에게 결혼을 청하려고 했어."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당신의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되잖아요?"
"방해물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스페인 여행이랑 다른 여행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걸 또 어떻게 알았지?"
"알죠. 언젠가 아버지하고 열심히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어요."
"이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와 결혼해 주겠지, 샐리?"
샐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의 움직임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필립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럼 당신은 마음에 없단 말이지?"
"아, 그거야 물론 저도 가정을 가지고 싶고 또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필립은 가볍게 웃었다. 이제는 샐리의 성격도 어지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당신 왜에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아, 그렇다면 이것으로 결정이 되었군."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그렇죠?"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
"배가 고파요."
"하하, 샐리!"
필립은 웃으면서 힘있게 샐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난간에 잠깐 동안 서서 트라팔가르 광장을 바라보았다. 이륜 마차와 합승 마차들이
바삐 왕래라고 있었고, 삶들도 가기 저마다의 방향으로 분주히 걸어가고 있었다. 햇볕이 쨍
쨍 내리쬐고 있었다.
몸의 생애와 작품 세계
램버스의 라이자에서 인간의 굴레까지
윌리엄 서머셋 몸은 1874년 1월 25일, 당시 주불 영국 대사관의 고문 변호사로 근무하던
아버지의 임지, 파리에서 태어났다.
병벽에 가까울 만큼 잦았던 여행 경험에서 비롯된 다양한 작품 배경과, 건조한 듯하면서
도 선명하고 꾸밈이 없는 문체, 인간성과 삶에 대한 통찰의 예리함이 놀라운 영국의 소설가
이자 극작가인 몸의 생은, 훗날 그의 문학 생활에서도 발견되듯이 출생부터가 모국이 아닌
외지에서였다는 것이 미묘한 조짐을 보인다고나 할까.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폐
결핵으로 돌아가고, 2년뒤인 1884년, 열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병사한다. 그는 이 대부
터 본국의 켄트 주 휘트스테이블의 목사였던 숙부 헨리 맥도널드 몸의 집에서 성장하게 된
다.
자식을 길러 본 적이 없는 숙부 댁에서 자라게 된 몸은, 고아라는 자신의 처지를 의식한,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불행한 소년기를 맞이하였다.
그 해에 켄터베리 킹스 스쿨 예과에 입학했고, 3년 뒤 본과에 진학 한 그는, 어릴 때부터
심한 말더듬이로 친구들이나 교사들로부터 멸시를 받았고, 그 영향으로 얻게된 심각한 콤플
렉스는 이후 그의 실생활과 문학 활동에 여러 가지 의미의 바탕이 되었다.
1890년에 이르자 건강이 나빠져 폐결핵을 앓게 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한동안 정양 생
활을 해야만 했다. 다음해, 그는 숙부의 배려로 독일의 하이켈베르크 대학에 청강생으로 유
학을 떠났고,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뒤에 그는, 이 시기부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문학도로서의 결의를 굳
힌 것도 이즈음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지만, 1892년에는 세인트 토머스 부속 의학교에 입학
하여 별 관심이 없던 의학 공부를 해야만 했다.
세인트 토머스의 학창 시절은 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체험의 무대였다.
의사 자격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과 동시에 의학을 등진 그는, 훙날, 그 때 좀더 진지
하게 의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통해 보다 많은 것을 얻지 못했음을 한탄했을 만큼 이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 활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의 처녀작 램버스의 라이자는 발표되자마자 당시의 지식층에 의해 상당한 호평을 받았
고, '새로운 자연주의 작가의 출현' 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이 작품은 몸 자신에게 장래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의학도로서 빈민굴의 생활을 경험하고, 실제로 맞닥드린 일들을 사실 그대로 그려낸 이
작품 이후 그는 돌연 희곡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렇다 할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
고, 어쩌면 이 시기가 몸으로서는 처녀작 발표 이후 작가로서의 첫 방황을 경험한 시기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돈이 아쉬운 나머지 형편없는 작품들을 써갈겼다.'는 이 시기에 몸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서너 편의 장편과 함께 많은 희곡을 집필 발표했으나, 그의 작가적인
안정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1907년에 이르러 그의 희곡 프레더릭 부인이 상연되어 흥행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몸은 일약 뛰어난 극작가로 부상했고, 1908년에는 프레더릭 부인과 함께 탐험가, 잭 스트로,
도트 여사 등 네 편의 작품이 런던의 네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물론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된 몸은 지난날의 고통스럽고 불행했던 생활을 돌이
켜보고 좀더 먼 앞날의 꿈을 생각하는 여우를 되찾게 되었다.
'극작가로서 성공을 얻은 뒤 평생을 극작가로 살리라 결심했을 때, 미래는 마치 내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척 분주했고 또한 행복했다. 게다가 머릿속 가득 새로운
작품의 구상이 넘치고 있었지만, 그러한 성공이 내가 바라던 모든 것을 내게 가져다주지 못
했던 때문인지, 아니면 으레 성공에 뒤따르는 허탈감 때문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나
는 그 이후 꼬리를 물고 잇달아 떠오르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추억의 반추에 시달리게 되었
다. ' 회고록 51장
이 때 1912-1914 집필된 것이 바로 그의 자전적 소설이며 그의 명성을 드높인 인간의 굴
레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탈고된 이 작품은 시기적인 원인으로 별다른
반향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오히려 미국에서 시작된 호평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그는 무언가 자신이 기여할 만한 일을 찾아 수소문한 끝에
프랑스 동부 전선의 적십자 야전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 한편, 작가로서의 명성과 그의 뛰어난 어학 능력을 인정 받아 본국 정보부의 비밀
첩보원으로서 스위스에 체류, 활동했다.
끝없는 방랑의 길
제네바에서 특수 임무를 띠고 활동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본연의 일을 잊지 않았다. 이 시
기에도 그는 작품을 위한 많은 소재를 취했으며, 이때의 체험이 뒷날 아셴덴 (1928)의 바탕
이 되었고, 당시 희곡 훌륭한 분들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일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어릴 적에 앓았던 폐질환이 재발하게 되자, 그는 곧
첩보원을 사퇴하고 휴양차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듬해인 1916년, 여전히 그는 방랑벽을 버리지 못하고 남태평양 군도 여행기에 올랐다.
이 때 몸은 프랑스 동부 전선의 야전 병원에서 만났던 제럴드 핵스턴과 동행하였다.
이 여행은 몸에게 소중한 경험을 안겨 주었고, 이 시기에 비들의 단편 소설의 소재를 얻
게 되었으며, 몇 년 뒤 발표되는 달과 6펜스의 뼈대도 이 때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달과 6펜스는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일시에 베스터셀러에 올라 호평을 받았지만, 무엇보
다도 이 작품의 발표를 계기로 대전 전에 발표한 인간의 굴레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는 것
이 귀중한 소득이었던 것이다.
1917년, 이전부터 사귀어 오던 저명한 의사의 달이며 이혼 경력이 있는 구에린 시러 다르
나도와의 사이에서 딸 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그녀와 결혼한다.
그 해에 몸은 다시 본국과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러시아에 잠입하게 된다. 당시의 특수
임무는 볼셰비키 혁명을 무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사실상 실패로 돌
아갔으며, 귀국할 무렵 그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어 한동안 스코틀랜드의 한 별장에서 정양
하게 된다.
그 곳에서 몸은 남양 군도 여행에서 얻은 소재를 살려, 그의 문학적 지위를 굳게 해준 달
과 6펜스를 집필했다.
1919년 이 작품을 발표한 몸은 건강의 회복과 함께 다시 여헹길에 올라 인도네시아, 말레
이 반도, 보르네오를 거쳐 남양 군도를 여러차례 방문했다.
이러한 그의 어쩔 수 없는 방랑벽은 결국 그의 결혼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1927년 이혼과 함께 몸은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로 이주해 정착할 것을 결심하지만 여전히
그는 여행을 즐겼고, 중국, 인도, 서인도 제도 등을 떠올랐다. 1936년대의 동남아 여행에서
그는 동양인의 숭고한 철학과 아름다운 문화 유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때의 깊은 관
심을 1944년 그의 만년의 걸작 면도날로 승화시키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생애와 문학관 등을 꾸밈없이 서술한 자전적 에세이 회고록(1938)을
발표했고,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수집의 임무를 띠며, 이에 관
해 몇 편의 평론을 발표했다.
1940년 6월 휴양지인 칸을 여행중이던 그는 프랑스 함락 소식을 접하고 영국으로 돌아왔
으나, 몇 달 후 미국으로 건너가 7년 간의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몸은 그 동안 몇 편의 중,장편과 단편 소설, 그리고 주로 자서전적 성격을 띤 에세이를 발
표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작업은 역시 면도날의 집필이었던 것 같다.
70세라는 그의 연륜과 그가 늘 입버릇처럼 자부심과 겸손을 위장한 오만함으로 말했던
'통속 작가'의 이미지를 충분히 되새길 수 있을 만큼 이후 그의 작품은 읽는 재미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가 스스로 평가한 몇 가지 작품들을 살펴보면, 남다른 창의와 상상력이 깃
들여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면도날 역시 스스로 '평범한 기록'에 불과하다고 평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별반 호평을 받지 못한 작품이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널리 애독되는
작품이 되었다.
그는 1965년 12월, 자신이 태어났고 그토록 애정을 느꼈으며, 작가로 키워 준 스승의 나라
라고 일컬었던 프랑스에서 연명하였지만, 그의 60년을 넘는 창작 생활에 있어서 함 번도 남
달리 과용하거나, 그렇다고 해서 남보다 뒤지는 태도도 결코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대중 작가니 통속 작가니 하는 세인의 평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세계 문학
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엮어질 수 있는 거도 그만이 가진 특이한 문학관과 남다른 인간관이
늘 평자의 올바른 관점에 부응하는 까닭인 것이다.
예술가보다 이야기꾼
서머셋 몸은 일평생 한 번도 자신이 예술을 한다거나 창조적인 일을 우해 삶을 건다거나
하는 주장을 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더구나 그는 '재미있는 이야
기를 전하고, 그에 따른 수입으로 작가는 쾌적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일관된 태도로 창작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한 면모는 어쩌면 그의 소년 시절에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
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 말더듬이였다든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괄시를 받았으며, 더구나 부
모가 없는 외로운 처지였다든지 하는 그만의 콤플렉스는 그로 하여금 자기 혼자만의 고뇌를
안게 하고, 그래서 남보다는 훨씬 냉철한 안목으로, 뛰어난 감성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해주
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가 남긴 얘기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말이 언제나 역설적이며 주
금은 비틀린 듯한 어조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자조적인 말투
위에 작가적 성공으로 얻은 정신적인 여우를 더한, 이른바 독설적인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의 긴 작가 생활 동안 20여 편의 장편,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 30여 편의 희곡,
기행문, 에세이 평론집만 해도 10여권에 이르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작가적 역량을 헤아
려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굴레를 비롯해서 달과 6펜스 등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몸의 냉소적이며 방관자
적인 입장은 그가 문학에대해 취하고 있는 자세, 곧 체험을 중시하는 태도와 자연주의적 경
향을 잘 반영한 것이며, 그의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 또한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
다.
인간의 굴레에 대하여
인간의 굴레가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무대
를 거의 그대로 빌려 쓰고 있다는 이유에서이지만, 실제로 그에 대한 몸의 항변은 그런 일
반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작품 속의 주인공 필립은 터캔베리의 왕립 학교에 다녔고, 하이델베르크의 유학 생활, 파
리 유학, 세인트 토머스 부속 의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했고, 이러한 이야기는 몸 자신의 성
장 과정과 실제로 부합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말더듬이였던 것이 필립에게서는 다리가 불구인 것으로, 그의 부친이
변호사였던 것이 필립에겐 의사로, 또한 필립은 의학교를 마친 뒤 의사로서 남게 되며, 필립
의 아내 샐리는 몸이 그리는 이상적인 아내 상에 불과하다는 것 등은 실상 허구인 셈이다.
인간의 굴레의주인공 필립은 결점투성이의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끝없는 자기 연민, 고집
과 이기심, 지나친 감수성과 어울리지 않는 속물 근성 따위를 그려낸 작가의 의도는 ,'소설
을 이야기일 따름이지 결코 삶의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종교,진리,윤리에 대한 그의 인습적인 관념은 처음으로 이 벗들을
통해 도전받게 되었다.
이 작품의 제29장에는 인생, 철학 혹은 진리에 대한 몸의 기나긴 추구와 탐색의 새로운
출발에 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간의 굴레를 그의 대표작으로 끌어올린 저변엔, 필립과 함께 악마적인 느낌을 주
는 여인 밀드레드의 존재가 있다.
그녀는 저속하고 비정하며, 놀라울 만큼 부정한 여자로 묘사되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
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도록까지 이끌어내어
이야기를 진전시킨 것이야말로 몸의 탁월한 솜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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