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1-조선의 칼, 조선의 방패
김탁환
1, 육진의 수호신
오호라, 그대들은 떠들지 말고 나의 명령을 들어라, 지금 회땅의 오랑캐와 서주의 오랑캐
가 함께 일어났도다. 그대들은 갑옷과 투구를 잘 정비하며 방패의 끈을 잘 매어 완전하게
하고. 그대들의 활과 화살을 갖추며 그대들의 창칼과 칼날을 갈아 감히 잘못됨이 없도록 하
라. (서경 - 비서편)
정해년(1587년) 가을.
네놈은 송장이 분명하렷다?
퀭한 눈과 움푹 패인 볼, 찌부러진 귓불에서부터 희끗희끗한 턱수염까지 엉겨붙은 피딱지
를 보니 흡, 가슴이 답답해진다. 땀에 전 소매로 놋거울을 훔치며 한 식경이 넘도록 들여다
보아도, 저 안에 비친 것은 들숨 날숨이 붙은 인간이 아니라 차디찬 송장이다. 삭풍을 맞으
며 장대 끝에 높이높이 내걸렸던 머리가 제대로 임자를 찾긴 찾았는가.
아아! 네놈은 분명 송장이렷다?
모로 쓰러져 거친 숨을 내뱉는다. 붉은 피가 이불을 더럽혀도 몸을 추스려 주위를 정돈할
힘이 없다. 열흘째 계속되는 감환(감기). 잦은 기침과 미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날이
갈수록 사람의 꼴을 흥하게 만든다. 이틀 전부터 각혈이 시작되더니 오늘은 동헌에 나가 공
무를 보는 것조차 힘겹다. 가을바람도 견디지 못할 만큼 쇠약해졌단 말인가 이러고도 한 나
라의 장수일 수 있겠는가.
조산만호 이순신은 탁자 위의 서찰을 노려보았다. 녹둔도를 꼭 함께 둘러보자는 경흥부사
이경록의 독촉장이었다.
‥‥‥ 야인(여진족)들이 삼삼오오 강을 건너 초군(보초병)들을 살해하는 일이 잦아졌소.
또 한 차례 칼바람이 몰아칠 조짐이 아니겠소? 북병사께서도 노심초사 녹둔도 걱정을 하신
다오‥‥‥. "우훅!"
이순신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기운을 누르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혓부리까지 다다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건을 끌어당기기도 전에 한 움큼의 핏
덩이가 양손을 붉게 물들였다. 내장이 꼬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놋거
울에서 자신의 붉은 손을 찾았다.
녹둔포는 조산에서 남쪽으로 이십여 리나 떨어진 두만강 하구의 외딴 섬이었다. 이순신은
두 차례나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서찰을 띄워 녹둔도와 병력을 증원시켜주기를 청했다. 제아
무리 목책이 높고 튼튼하다고 해도 십여명의 군졸로는 수백 명의 여진족과 맞서싸울 수 없
었다. 그때마다 북병사는 야인이 자주 출몰하는 무산에도 충원할 병력이 모자란다며 군사를
더 보낼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힘겨운 전쟁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민초들이 아랫목에서 등을 지지고 부른 배를 두드릴 때도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령흥을 지키는 육진의 장졸들은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상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
우에도 육진을 떠날 수 없으며, 전투에서 패한 장졸은 참형에 처하겠다는 북병사의 특명까
지 내려졌다.
둔전감관 임경번이 섬돌에 서서 아뢰었다.
"경흥부에서 다시 전령이 왔습니다. "
이순신은 겨우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서늘한 기운이 코끝을 할퀴고 지나쳤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예, 장군 "
임경번은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화들짝 놀랐다. 식은땀에 전 이순신의 안색이 어둡기 그
지없었다.
"그럼 , 가세."
임경번이 만류했다.
"안 됩니다! 이 몸으로 배를 탄다는 건 무리입죠. 경흥부사를 모시는 일은 소인이 맡겠습
니다"
이순신은 희미한 눈웃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임경번은 언제 보아도 믿음직한 군
관이었다. 녹둔도의 방비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둔전을 일구는 데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경흥부사가 직접 온다고 하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운을 차려야만 했다. 이경록은 직
속상관인 자신을 제쳐두고 이순신이 북병사에게 직접 병력 증원을 요청한 일로 자존심이 무
척 상해 있었다.
"일으켜주게."
"장군!"
"허어! 이래 뵈도 십 년이 넘게 변경을 떠돌았다네. 이깟 감환 때문에 맡은 바 소임을 게
을리해서야 쓰겠나? 장수는 전쟁터에 나가서야 비로소 편히 몸을 뉠 수 있지. 내게는 운명
과 맞서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네. 몸은 무쇠가 아니니 때론 병들고 때론 다치기도 하겠지.
세월과 함께 점점 늙어갈 게야. 허나 마음만은 한결같다네. 스무 살의 초발심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싶어. 자, 어서 들어와서 갑옷 입는 거나 도와주게."
이경록과의 갈등을 아는 임경번으로서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무거운 갑
옷에 두 팔을 끼며 끄응끙 앓는 소리를 해댔다. 눈썹 아래까지 흐른 땀방울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다.
"보름 말미를 줄 터이니‥‥‥ 내일 새벽에 떠나도록 해."
"자, 장군!"
투구를 씌워주던 임경번의 두 손이 멈칫했다. 경기도 수원이 고향인 임경번은 홀어머니의
회갑이 가까웠는데도 녹둔도를 지키느라 휴가를 청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순신의 따뜻한 배
려가 가슴을 울렸다.
이순신은 임경번의 젖은 눈망울을 못 본 체하고 성큼성큼 대청마루를 가로질렀다. 임경번
은 알고 있었다. 조산만호가 한번 마음을 굳히면 어명이 내려와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정오 무렵, 이경록 일행이 조산에 닿았다. 이순신이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네었지만 키가
크고 눈매가 매서운 이경록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두만강 하구까지 내려가는 동안 긴 침
묵이 이어졌다.
협선으로 옮겨타자마자 걱정하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이순신이 고물로 달려가서
머리를 박고 꺼억 꺼어억 토악질을 시작한 것이다. 임경번은 이순신을 반강제로 배에서 끌
어내렸다. 지금처럼 오장육부가 뒤틀린 채 배를 타다가는 숨통이 막힐 수도 있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가을볕이 누그러들 때까지 나무그늘에서 푹 쉬시다가 쉬엄쉬
엄 건너오십시오."
협선은 순풍을 등에 업고 경쾌하게 나아갔다. 이물에 서서 녹둔도를 바라보던 이경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부령부사를 거쳐 종성부사로 가 있는 원균 장군의 첫 벼슬이 조산만호였다지 ?"
귀밑까지 뻗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임경번이 협선을 뒤따르는 갈매기때를 응시하며 대답
했다.
"그렇습죠. 그때도 소인은 녹둔도의 군관이었습니다. "
"호오, 그래? 그렇다면 녹둔도에서 야인 삼백여 명을 몰살시킨 전투를 알겠구나,"
"알다 뿐입니까? 소인이 직접 참전했습죠."
"원부사가 홀로 목책을 뛰어넘어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냐? 빗발치는 화살을 뚫
고 말이다."
임경번은 신바람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믄입쇼. 그땐 정말 대단했습니다. 원장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자 소인을 비롯한
장졸들도 한꺼번에 목책을 넘어 뒤를 따랐습죠. 오랑캐놈들,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리라곤 꿈
에도 생각을 못했던지 허둥지둥 해안으로 달아나느라 아우성이었습니다. 원장군께서는 장검
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놈들의 목을 쳤습죠. 수급 삼백 두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아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야인들은 이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습죠."
"과연 원부사는 용장임에 틀림없구나. 지금의 조산만호 이순신은 원부사와 비교해서 어떠
한가?"
임경번은 눈을 끔벅끔벅거리며 잠시 말을 접었다.
"말해보아라. 원부사에 비해 어떠한가?"
임경번이 마지못해 답했다
"어찌 감히 원부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원부사는 육진의 수호신이옵니다."
"하하하, 수호신!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다. 내가 상대를 잘못 택했구나."
이경록은 원균을 높임으로써 이순신을 낮우는 임경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종성부사
원균은 두만강을 건너가서 여진족의 본진을 급습한 적도 있는 그야말로 육진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원균 같은 부하가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마음 든든할까.
녹둔도로 건너간 이경록은 목책 경비와 가을걷이를 위해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군관
오형과 임경번이 십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목책에 남았고, 군관 이몽서는 백칠십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목책 주변의 곡식을 거두었으며, 이경록은 백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언덕을
넘어 농부들이 기다리고 있는 들판으로 나갔다.
"고생 많았슴매 ."
임경번은 오형이 내미는 요초(담배)를 받아 깊게 한 모금 당긴다. 귀화한 여진족에게서 압
수한 것이다. 볼이 넓고 눈꼬리가 유난히 처진 오형이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만호의 감환은 어떠심매?"
임경번은 바람에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많이 좋아지셨네. 늦게라도 오시겠다더군. 아무래도 추도쪽 낌새가 이상하니 각별히 주의
하라고 하셨어. 그래, 어떤가?"
추도는 여진족들이 배를 타고 함경도와 강원도 해안으로 내려올때 머무는 중간 기착지였
다. 함경도에는 여진의 배를 추격할 만한 군선이 없었기에, 조산만호 이순신은 임시방편으로
고깃배 두 척을 구해 아침저녁으로 추도 근방을 순시시켰다. 오형은 아무 걱정 말라며 길게
하품을 해댔다.
"우리 어선들만 서너 척 눈에 띌 뿐임등 괜스레 걱정이지비, 그놈아들이 목책꺼정 온 적
이 없지 않슴매? 설령 온다고 해도 내레 앞장서서 물리치겠슴둥. 이래뵈도 원균 장군을 바
로 곁에서 모셨던 사람임매. 걱정 마시라요. 야, 날발! 심심한데 뿔피리나 불어보라야."
뜀박질을 잘해서 '날발'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군졸이 전복 앞자락에서 뿔피리를 꺼냈다.
앳된 얼굴로 보아 스무 살을 채넘기지 않은 듯했다. 양볼에 공기를 가득 담은 후 힘차게 피
리를 불었다. 청아한 뿔피리 소리는 녹둔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의 귓가를
스쳐 멀리 추도까지 뻗어나갔다. 추수에 열심인 군사들도 그 깊고 그윽한 소리에 저도 모르
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하얀쌀밥과 비계가 둥둥 뜬 고깃국에 걸쭉한 막걸리가 놓인 저
녁상이 그들 앞에 차려질 것이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햅쌀밥인가.
뿔피리 소리가 뚝 멎었다. 눈을 감고 행복의 나래를 펴던 오형이역정을 내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누기 맘대로 멈추는 것임매? 윽!"
그 순간 꿩깃을 단 여진의 화살이 등에 박혔다. 그리고 목책을 넘은 칼날 하나가 오형의
목덜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갈랐다.
"적이다, 엎드렷 !"
좌우에서 쏟아진 화살을 맞고 군졸 셋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추도에서 밤을 지낸 여
진족들이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녹둔도에 상륙한 것이다.
"뿔피리를 불어 , 빨리!"
뿌우우 뿌우우.
날발이 잽싸게 뿔피리를 불어제꼈다. 오랑캐의 침입을 짤리는 신호였다.
"개새끼덜!"
임경번이 두 눈을 고양이처럼 뜨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장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새까맣게
목책에 들러붙는 적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정면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임경
번의 양미간을 정통으로 케뚫었다.
오형과 임경번이 죽자 목책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생존자는 뿔피리를 불며 언덕
으로 내뺀 날발뿐이었다.
이경록 일행이 목책이 내려다보이는 전승대에 이르렀을 때는 초군들의 시체가 이미 목책
여기저기에 즐비했다. 목책 주변에서 가을걷이를 하던 이몽서의 군사들도 대부분 적에게 사
로잡혔다. 참혹한 시체를 보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군사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탈
영이었다.
"윽!"
맨 앞에서 달아나던 군졸이 힘없이 푹 꼬꾸라졌다. 날렵한 애기살이 목젖을 관통했다.
"아니 , 이만호!"
배멀미 때문에 녹둔도로 건너오지 못했던 조산만호 이순신이 날린 화살이었다. 달아나던
군사들은 제풀에 주저앉아 꼼짝달싹도 못했다. 이순신이 그들을 엄히 문초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음을 각오한 채 싸우면 살고 요행을 꾀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요행을 바란 너희들을 군율에 따라 참수할 것이로되, 적이 눈앞에 있고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영병들은 이마를 땅에 찧으며 군령에 따르겠다고 했다.
여진족 오백여 명이 전승대 너머의 곡물까지 약탈하기 위해 다가섰다. 등짐을 진 포로들
도 줄잡아 칠십 명은 넘어 보였다. 목책을 지키던 군졸들이 전멸했기에 더 이상의 군사는
없으리라고 안심한 듯, 느리고 방만한 걸음걸이였다. 목에 걸린 사슴뼈 목걸이의 철렁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이순신의 군령이 떨어졌다.
"쳐랏!"
궁수들이 언덕 위에서 화살을 쏟아붓는 것과 동시에 이몽서를 비롯한 포로들이 일제히 등
짐을 풀고 백병전을 시작했다.
안팎에서 혈공을 당한 여진족들은 곡물을 그대로 둔 채 해안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이 발
빠른 궁수들과 함께 그들을 추격했다. 육십 명이 넘는 여진족들이 피를 뿌리며 순식간에 쓰
러졌다. 추격대가 솔숲을 벗어나서 해안으로 나서자, 요행히 배에 오른 여인족들이 일제히
돌을 던지고 화살을 쏘면서 저항했다. 아직 승선하지 못한 동료들을위해 시간을 벌려는 의
도였다.
"으윽!"
이순신이 갑자기 왼쪽 다리를 움켜쥐며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 화살이 허벅지에 깊숙이
박힌 채 좌우로 흔들렸다. 뒤따르던 날발이 재빨리 이순신을 들쳐 업고 솔숲으로 후퇴했다
여진의 배가 석양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까악 까아악 까마귀떼가 어두컴컴한 하늘을 빙빙
맴돌았다.
밤이 찾아오는 것과 동시에 녹둔도의 전투도 끝이 났다. 초군 열명이 전사했고, 적에게 끌
려간 경흥부의 군졸만도 백 명이 넘었다.
이경록은 목책에 쓰러져 있는 초군들의 시체를 솔숲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까마귀밥이
되도록 퍼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참혹 그 자체였다. 머리가 잘려나간 시신
이 다섯구,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은 시신이 세 구, 눈알이 모두 뽑힌 시신과 내장
이 흘러나온 시신까지 있었다. 이경록은 고개를 돌린 채 가슴을 두드리며 한참 동안 상한
비위를 다스렸다. 시체 주위로 몰려든 군졸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으흐흐흑!"
침묵을 깬 것은 이순신이었다. 허벅지의 화살을 뽑지도 않은 채 외걸음으로 뛰어와서 오
형과 임경번, 그리고 군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쓰러진 것이다. 이경록이 다가가서 위
로했지만, 이순신은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마음 약한 군졸 서넛이 땅을 치며 그 울음에 합
류했고, 냐머지 군졸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경록은 위로의 말을 던지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부하를 아끼고 사랑한다손 치더라도 어찌 저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장졸에게 죽음
이란 약방의 감초와도 같은 것 부하가 죽을 때마다 땅을 치고 하늘을 원망하며 곡을 한다면
어찌 전투를 이끌 수 있겠는가. 눈시울을 붉히며 내세에서의 행복을 비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이순신! 너는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적이구나.
함경북병사 이일이 이경록과 이순신을 종성으로 소환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였
다. 뇌물을 받고 휴가를 허락한 군관 둘을 본보기로 처형한 이일은 녹둔도의 수비대가 몰살
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패장인 이경록과 이순신의 목을 베겠다며 펄펄 뛰었다. 이경록이
곧장 종성으로 가지 못하고 경흥에서 이틀이나 허비한 것은 이순신의 허벅지 상처가 덧나서
였다. 화살을 간신히 뽑긴 뽑았지만, 뼈로 스며든 독 때문에 살갗이 시커멓게 변하고 허벅지
가 퉁퉁 부어오른 것이다. 워낙 오지라서 치료에 필요한 약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수도 있소. 그러니 나 혼자 다녀오라다. 몸조리나 하구려 ."
이경록은 이순신의 종성행을 반대했다. 상처를 염려해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벌려는 의
도도 있었다. 북병사가 패전의 책임을 묻겠다며 노발대발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러나 이순신은 기어이 날발의 등아 업혀 이경록과 함께 종성으로 떠났다.
북병사 이알의 군관 선거이(뢰쾨B)가 경원부 안원(촌토)에서 이순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 아래인 선거이는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했다. 좁은 이마와 Qy족한
턱 때문에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외모와는 달리 씨경을 외우면서 적진으
로 활시위를 당길 만큼 여유가 있었다. 작년 가을, 각 진의 군량미를 조사하기 위해서 선거
이가 조산을 방문했을 때, 둘은 처음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거이는 이순신이
지은 한시 몇수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이순신은 선거이가 강궁으로 화살 열 순(근,한 순은
화살 다섯 대를 쏘는 것)을 연달아 쏘는 것을 보고 호감들 가졌다 선거이가 전하는 종성의
분위기는 예상보다 더 어두웠다.
"형님, 지금 가면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 북병사는 모든 책임을 형님에게 돌릴 것입니
다. 차라리 되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순신은 빙그레 웃으며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모처럼 만났는데 상처 때문에 술도 한 잔 권할 수 없구나. 지난번 꿈을 꾸었더니, 네가
중풍을 앓고 있길래 걱정을 많이 했다. 이렇게 건강하니 내 마음도 기쁘구나 좋게 지낸다던
여인, 성이 홍이었지 아마, 그 여인과는 지금도 만나느냐? 언제 짬을 내서 함께 오렴, 낚시
라도 하며 실컷 즐겨보자꾸나 "
"형님 !"
이순신은 다시 날발에게 업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종성이 가까워지자, 이경록은 한 사람
이라도 먼저 가서 늦게 당도한 까닭을 설명하는 편이 낫다며 앞서 달려갔다.
황혼 무렵, 이순신은 선거이와 날발의 부축을 받으며 관아로 들어섰다. 앞마당에는 죄인을
문초하기 위한 형구들이 가득했다. 경흥부사 이경록이 마당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은 채 고
개를 떨구고 있었다. 북병사 이일의 추상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저놈을 묶어라!"
이순신온 오랏줄에 묶인 채 이일 앞으로 끌려갔다. 쩔뚝대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금이
저리고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고통을 참느라고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한 후 꿇어앉은 이경록의 곁에 똑바로 섰다. 대장검을 든 이일이 호
통올 쳤다
"죄 인은 무릎을 꿇어라."
나졸들이 다가와서 어깨를 눌렸으나 이순신은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
섰다.
"누가 죄인이란 말이오니까?"
"뭐 , 뭐얏?"
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대장검으로 이순신을 가리켰다.
"패군지장이 죄인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백여 명의 군사가 오랑캐에게 끌려가고 열 명의
군사가 목숨을 잃는 동안 너는 무얼 했느냐? 처음부터 전투에 참여한 것도 아니라지?"
꿇어앉은 이경록이 헛기침을 했다. 이순신의 약점을 미리 일러바친 것이다. 도끼눈을 뜬 이
일의 호통이 이어졌다.
"병법에 이르기를, 장수는 몸과 같고, 졸은 손과 같으며, 오는 손가락과 같다고 했다. 몸이
없는데 어떻게 손과 손가락이 제 구실을 하겠는가? 손과 손가락을 모두 잃은 몸이 어찌 살
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제 지은 죄를
알겠느냐?"
"선군관!"
이순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선거이를 찾았다 선거이가 다가서자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렇게 묶인 몸이니 네 손을 잠시 빌리자꾸나."
그리고 품에 감추어두었던 서찰을 꺼내게 했다. 선거이가 그 서찰을 이일에게 전했다. 서
찰을 훑어보는 이일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침묵을 지키던 이순신이 관아가 흔들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원부사가 녹둔도에서 거듭 대승을 거둔 후 야인들은 녹둔도를 멀리했소이다. 육진 중에
서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지목되어 둔전을 짓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지만 패배의 아
픔과 두려움은 세월과 함께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녹둔도에는 겨우 열 명 남짓한 군사들이
목책 하나에 의지해 있을 따름입니다. 수백 명의 야인들이 한꺼번에 녹둔도로 밀어닥친다면
당연히 중과부적이지요. 소장은 두 차례나 병력을 보강해달라는 글을 북병사께 직접 올렸습
니다. 지금 보고 계신 것이 바로 그 서찰의 초본입니다. 기억나시는지요? 장군께서는 조정에
장계를 올리실 때 반드시 이 초본을 첨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패전의 책임이 전
작으로 소장에게 있지만은 않음이 가려지겠지요. 또한 소장은 겁에 질린 장졸들을 이끌고
힘껏 적을 물리쳤을 뿐만아니라 야인의 수급을 육십 두나 거두었고, 애순 명이 넘는 군사들
을 구했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잘못이 소장에게만 있다고 하시겠소이까?"
이일은 서찰을 갈기갈기 찢은후 이순신을 다그쳤다.
"이런 요망한 것! 이따위 글로 내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냐? 너는 마치 내가 병력을
지원해주지 않아서 졌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북도의 어디라도 가보거라. 육진의 장졸들은 녹
둔도보다 열악한 상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오랑캐와 맞서고 있다 제 목숨 하나 살리기
위해 수많은 군졸들을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이따위 글로 상관인 나를 모독하다니. 더더욱
네놈을 살려둘 수 없다. 여봐라! 경흥부사 이경록을 옥에 가두고, 어서 저 여우 같은 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당장!"
"예이!"
나졸들이 이순신에게 달려들었다. 선거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형님, 어쩌시렵니까? 이대로 불귀의 객이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두만강을 건너 숨어버릴
것을.
"멈추어라."
이일의 오른편에 서 있던 건장한 체구의 장수가 나졸들을 제지했다. 밤송이 수염이 턱과
뺨에 제멋대로 돋아난 종성부사 원균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이일과 이순신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아니 , 원부사! 왜 이러는 거요?"
이일은 원균의 만류가 뜻밖이라는 듯 따져 물었다. 북병사의 군령을 부하 장수가 가로막
는다면 치도곤을 당할 터이지만 원균은 예외였다. 수많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지난
여름 무산 전투에서는 이일의 목숨까지 구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원균이 군정을
관장하는 종성이 아닌가.
"녹둔도의 병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만호의 몰골을 보아하니 죽기살기로 싸웠던
것도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요. 혀나 서둘러 목을 벨 것이 아니라 이
순신으로 하여금 이번 전투의 경과를 소상히 적어 정언신(함경도순찰사) 대감께 올리게 하
고, 조정에 장계를 띄워 결과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듯하오이다.
패군지장의 목숨을 앗는 것보다 녹둔도의 방비책을 세우는 것이 지금으로선 더 크고 중요
한 문제가 아니겠소이까? 우리 중에는 이만호보다 그곳 물정을 잘 아는 이가 없소이다."
원균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조리 있게 말을 맺었다. 몇몇장수들이 원균의 의견을
지지했다. 잠시 주위의 분위기를 살핀 이일은 대장검을 칼집에 꽃으며 명령을 번복했다.
"원부사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좋소, 그렇게 합시다. 죄인 이순신은 듣거라. 너는 녹둔도
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적도록 하라. 추호도 거짓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야. 여
봐라, 죄인을 옥에 가두고 지필묵을 가져다 주어라. 글을 마칠 때까지 잠을 재워도 아니되고
음식을 줘도 아니된다."
인시 (새벽 3시)가 가까웠다.
유시 (오후 5시)부터 붓을 들었지만 아직 절반도 쓰지 못했다. 책임감이 강했던 임경번과
늘 여유만만하던 오형이 자꾸 눈에 밟혔다. 퉁퉁 부은 왼발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무릅관절
이 시려서 다리를 접을 수가 없었다.
경흥에서 상처를 치료한 의원은 최악의 경우 다리를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독
이 묻은 여진의 화살을 맞고 수족을 자른 장졸이 조산에만도 열 명이 넘었다. 이순신은 어
금니를 깨물었다.
결코 다리병신으로 살지 않으리. 무용담을 듣기 위해 쌀이나 돈을주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뒤돌아서서, 자기들의 다리가 아니라 내 다리가 끊어져나간 것에 대해 안도
하리라. 동정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자결하리.
덜컥.
옥문이 열렸다. 원균이 헛기침을 하며 들어섰고, 개다리소반을 든군졸 하나가 그 뒤를 따
랐다. 횃불 아래 버티고 선 원균의 몸이 더욱 커보였다. 이순신은 주춤주춤 왼발을 끌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원균이 다가서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대로, 그대로 있으시오. 예서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오." 이순신은 원균의 얼굴
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마에서 왼쪽 눈으로 뻗어내린 칼자국이 뚜렷했다.
원균의 명성은 함경도 곳곳에 박혀 있었다. 어디서든지 승첩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누구
를 만나든지 영웅담을 들을 수 있었다. 덩치는 곰이지만 빠르기가 물찬 제비와 같고, 눈을
가린 멧돼지처럼 적진을향해 돌격하는 것을 즐기며, 한칼에 여진족 일곱의 목을 벨 만큼 검
술애 능한 장수. 군사들을 내 몸과 같이 아껴, 사흘 밤낮을 함께 어울리며 말술을 마시는 장
수.
이순신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전공을 세운 후 당당하게 상면하기를 원했는데 겨우
이런 곳에서 이런 몰골로 만나게 된 것이다.
"우선 이걸로 요기나 하시오."
소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국밥 한 그룻이 놓여 있었다. 이순신은 할 말을 잃은 채
소반과 원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어려움에 처한 장졸
을 돕는 장수.
"고맙소이다 원부사께서 소장의 생명을 구하셨소."
원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뭐 그깟 일을 가지고 그러시오. 도와줄 만하니까 도와주는 게지.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시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원균은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러가라. 그리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
옥리들이 곧 사라졌다. 죄수들의 뒤척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순신이 뜨거운 장
국밥을 삼키는 동안 원균은 조용조용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찰사 어른으로부터 그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소. 병법에 밝고 매사에 꼼꼼하다며 칭
찬이 대단하셨다오. 이억기나 김시민에 대해서도 언급하셨지만, 그대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
셨소. 언제 한 번 조산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소."
사 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계미년(1583년) 11월에 이순신은 경원부 건원보에서 권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함경도의 군정을 관장하던 정언신이 불쑥 이순신을 병영으로 불렀다 그는 문신이면서도 무
예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술상을 마주한 정언린은 먼저 이순신의 가계와 서애와의 인연을
물었다. 정언신에게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상대가 시
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면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이순신은 그의 눈길을 끝까지 피하
지 않았다. 정언신은 이 당찬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굴복시킬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위국공 이정은 정병 삼만
명만 있으면 연개소문을 사로잡아 바치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당태종이 이정에게 군사를 내
어주었다면 고구려가 멸망했으리라고 보는가?"
"아닙니다, 제갈량이 남반을 굴복시킨 것과 이정이 돌궐을 평정한것은 남만과 돌궐에 병
법을 아는 광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군무를 총괄하던 연개소문은 병법에 능
통했고, 안시성주 양만춘은 참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았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을 다
루는 솜씨가 관중과 악의에 버금갔습니다. 늙고 병든 이정이 고구려를 무식한 오랑캐의 나
라로 여기고 쳐들어왔다면 틀림없이 대패하여 고구려땅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허허,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정언신은 그 밤 내내 이순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가 되려면 무경칠서를 독파해야했다. 그러나 병법을 바탕으로 전투
에 임하는 장수는 극히 드물었다. 작은 싸움에는 용맹함이 빛을 발하지만, 큰 싸움에는 병법
을 아는 장수가 승리한다는 것이 정언신의 믿음이었다. 그는 이순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마
음속에 깊이 새겼다.
원부사 역시 정언신 대감께 시험을 당했던 것일까?
이순신은 소반을 옆으로 밀었다. 턱과 목을 타고 가슴까지 깊게 패인 또다른 흉터가 눈에
띄었다.
"군졸들은 날 불사신으로 생각한다오, 허허. 하지만 화살을 양미간이나 심장에 맞고 죽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소. 장수가 생사고락을 군졸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군졸
들은 진군의 북소리를 반기고 퇴각 나발소리를 아쉬워하는 법 . '부자지병' 이라는 말도 있
지 않소? 장수는 곧 군졸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오. 생각해보면, 그 동안 참 많은 부하
들을 잃었소. 꼭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버리곤 했지. 장수의 명령을 하늘처럼
여기는 사랑스런 나의 부하들. 그들의 시체를 언 땅에 묻을 때마다 행세하고 또 행세했다오.
너희들의 의로운 죽음을 더럽히지 않겠노라고, 망각하지 않겠노라고. 너구리 오형과 불곰 임
경번을 기억하오. 능히 열 사람 몫을 해내는 뛰어난 군관들이지. 나는 그들에게 목책을 끌어
안고 죽는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말라고 가르쳤다오. 그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누구보다도
잘 견뎠고, 동료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언 땅을 파서 똬리를 틀고 겨울잠을 자는 구렁이들
을 찾아내기도 했다오. 허나 부하들이 죽었다고 장수가 눈물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되오. 장
수는 바로 이가슴, 가슴으로만 울어야 하오. 살아남은 장졸들에게 그들의 장한 죽음을 기억
시킨 후, 칼을 갈고 밥을 먹으며 다음날의 전투를 대비해야만 하오. 알겠소?"
원균은 이순신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그의 등뒤를 슬쩍 훔쳐보았다 허벅지의 통증을 참으
며 이순신이 근근이 적은 글을 찾는 것이다. 원균은 이순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것을
펼쳐 읽었다. 두툼한 양볼에 점점 웃음이 차올라왔다.
"잘 쓴 글이오. 글씨에도 힘이 넘치는구려. 이 글을 보니 이만호가 얼마나 꼼꼼한 사람인
줄 알겠소이다. 허나 너무 억울해하진 마시오. 이렇게 힘든 상황이었다면 그대의 말대로 누
구라도 졌을 것이오. 이 원균이 나섰더라도 말이오. 북병사도 그것 때문에 이만호를 꾸짖는
것은 아니라오. 다만 병력이 부족해서 졌다는 그대의 변명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육진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오. 사흘 안에 북도의 장졸들이 그대의 이름과 녹둔도에서 죽은 군졸
들의 이름을 들을 것이고, 열흘 안에 그대가 북병사에게 반항했다는 사실이 전해질 것이오.
그대도 알다시피, 북도의 어느 곳도 선병안에 적힌 대로 군사들을 징집하지 못하고 있소. 병
력이 넉넉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단 말이오. 우리 군사 하나가 여진족 스물을 대적해야만 하
는 실정이오. 전투는 점점 힘들어지고 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육진
을 버릴 수 없소. 그대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이니 이해하오. 관찰사 어른
께 연락이 갔으니 극형은 면할 것이고, 어쩌면 가벼운 벌로 녹둔도의 과오를 덮을 수도 있
을 것이오.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그댄 아직 젊으니 큰 공을 세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소.
그러니 이 글은 찢어버리고 다시 쓰도록 하오. 옛날의 병법에 기대기보다 현재 그대가 처한
상황에 유념하면서 말이오."
원균은 이운신의 글을 찢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흩어진 종잇조각톨 바라보는 이순신의 얼
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 이게 무슨 짓이오?"
이순신은 옥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원균의 어깨를 뒤에서 꽉 붙들었다. 원균이 몸을 획
돌리자, 이순신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소반위로 쓰러졌다 쿵 소리와 함께 왼쪽 다리가 접히
면서 참을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아악!"
원균은 이순신을 볏단 위로 옮기고는 양팔을 제압한 후 배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바지를
끌어내린 후 허벅지를 감고 있던 무명천을 풀었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시커멓게 썩어들어
가는 살점이 드러났다.
"이 ‥‥‥ 이런."
원균은 설레설레 고개를저었다.
"여봐라! 어서 가서 청주와 화로, 인두를 가져오너라."
옥리들이 잽싸게 그가 명령한 물건들을 내왔다 원균은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화로에서
꺼내 후후 불었다.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원균의 눈짓에 옥리들이 달려들어
이순신의 사지를 틀어쥐었다. 원균은 청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으으 조오타. 이만호, 그댄 참 운이 좋소. 이대로 그냥 두면 그대는 사흘 안에 외발이가
될 거요. 어쩌면 허리 아래를 못 쓸 수도 있고. 허나 내가 고쳐줄 테니 걱정 마시오. 아프더
라도 꾸욱 참으시오. 날믿으시오. 알겠소?"
청주를 상처 부위에 들이부었다. 시원한 느낌과 함께 청주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
균은 이순신의 양손을 등뒤로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후 천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로 다시
화로에서 인두를 꺼내 빙글빙글 돌렸다.
"자, 시작하겠소."
원균은 인두로 허벅지를 사정없이 지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
으나, 원균은 눈 하나 꿈쩍 않고 타들어가는 살점을 바라보았다.
"그래, 바로 이 냄새야. 살이 타는 냄새지 두만강가에서 양쪽 종아리에 화살이 박힌 군졸
을 치료한 적이 있었어. 겁이 많은 놈이었던지 화로를 발로 차고 도망을 치며 비명을 지르
더군. 다시 끌고 와선 놈의목에 칼을 들이댔지. 혀를 깨물고 죽더라도 소리치지 마. 치료를
끝내고 보니, 정말 까무러쳤더라고. 지금은 종성부의 전령 노릇을 하고 있지. 얼마나 산을
잘 타는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 허허허, 요즘도 그놈 종아리만 보면 웃음이 나와. 꼭
내 살점을 떼서 그 종아리에 붙인 느낌이 든단 말이야."
화로에 인두를 달구어 이순신의 허벅지를지질 때마다 원균은 옥리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얼굴과 목과 가슴과 배와 허벅지와 어깻죽지에 흉터가 생긴 유래였다. 빛나는 전
설을 확인하듯, 그는 흉터 하나하나를 내보이며 그에게 낭처를 입힌 놈의 생김새와 이름, 나
이를 외웠다. 그리고 끝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어떻게 그딴 걸 다 기억하느냐고? 그놈들의 수급을 모조리 거두어 소금에 절였거든. 그
리고 여진의 아낙들에게 물었어. 이 용사가 누구냐고. 원균의 몸에 상처를 낼 정도라면 오랑
캐 중에서도 용감한 놈인에 틀림없거든. 그놈들의 수급은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으니, 언제
픈지 말만 해. 내 특별히 보여주지 . 하하하핫!"
두 달 후 허벅지의 상처가 아물 즈음, 평복으로 종군하여 조산에 머무르라는 어명이 이순
신에게 전해졌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 당하는 백의종군이었다.
2. 동방도
유성룡은 소위 사류로 일신에 큰 명망을 차지하고 시론을 주관하면서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추구할 필요는 없으나, 그는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도 사당을 배치시킬 뿐, 충현을 끌어들여 지난번의 과오를 고치는 계책을 마련하
겠라는 한 마디의 말도 없습니다. (중략) 그가 만약 병정을 차지하여 흥모를 재촉한다면 당
당한 국가일 경우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혈전에 임한 군사들이야 어찌 조그마한 손해뿐
이겠습니까. 유성룡은 진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반성해 보건대 태양 아
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전라도 유생 정암수의 상소문)
" '선조실록' 22년 12월 14일 정해조"
경인년(1590년) 3월 5일 아침
이조판서 유성룡은 수문장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돈화문을 빠른 걸음으로 통과했
다. 성균관 전적 허성과의 약속시간이 지난 것이다.
단보(허균의 자)가 제 누이의 글만 가져오지 않았어도‥‥.
그는 혀를 끌끌 찼다. 허난설헌의 글을 읽다가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 '서경' '여형편' 강독을 마친 후, 허균이 조심스럽게 문집을 내밀었을 때만 해
도
그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문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계해년(1443년)에 서장관으로 일본땅을 밟은 신숙주의 기행록을 세 번
읽었지만, 백 년도 훨씬 지난 글을 통해 현재 그곳의 사정을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같은 해에 세상을 버리다니, 묘한 인연이군.
유성룡은 작년 7월에 세상을 떠난 이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삼십년이 넘도록 다소곳하게
살림을 도맡아 했던 마음씨 곱고 인정 많은 아내였다. 허균이 내민 문핍을 선뜻 물리치지
못한 것도 마음 한켠에 쌓여가는 이씨에 대한 그리움 탓이었다. 잠시 머리로 식힐 겸 난설
헌의 유고를 펼쳤다.
유성룡은 난설헌의 짙은 눈썹과 영리한 눈매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허성, 허봉과 어울리
며 그들의 집을 드나들 때 먼 발치에서나마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재작년에 먼저
세상을 버린 허봉도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꼈었다.
"저 아인 괄괄한 허씨 집안 사내들과는 다르답니다.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그저 놀랄 따름이지요."
그리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난설헌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허봉의 뒤를 따른 것이다.
"허어 !"
시문을 한 편 한 편 읽어가던 유성룡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저나왔다. 냉수 한 그릇
을 마신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서안(책상)에 쌓여 있던 문서들을 내려놓고 난설헌
의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고에 실린 글은
여인네의 허튼 글이 아니었다. 영롱함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고, 기개는 백
두와 한라가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였다. 자못 열사의 기풍이 있었다.
미숙(허봉의 자)의 집안은 어찌 이다지도 뛰어난고. 형제들의 재주만 해도 아름다운 이름
을 전할 터인데, 그 누이마저 범인의 경지를 넘어섰구나.
허성은 금천교 난간에 기대어 남쪽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천교 아래를
흐르는 시내는 경복궁의 영제교, 창경궁의 옥천교의 시내보다 빠르고 힘이 넘쳤다. 유성룡은
허성에게 다가갔다. 하천 바닥의 기반석 위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해태가 눈에 띄었다.
작년 가을, 유성룡은 과묵하고 신중하기로 소문난 허성을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의 서장관
으로 추천했다. 학봉 김성일 역시 허성을 주목하던 터였고, 서인측에서도 이의를 달지 않았
다. 상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잘 중재하고 왜국의 사정을 소상히 탐문하고 오라는 당부
를 하고 싶어 허성에게 연락을 넣었더니, 출국 인사를 하기 전에 뵙고 싶다는 답신이 왔다.
"미안하네. 많이 기다렸는가?"
"아닙니다. 대감."
허성이 두 손을 모아쥐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유성룡이 짐짓 화를 I냈다.
"어허! 사석에선 그냥 형이라고 부르래두 내가 자네 아우 미숙과 형아우 하던 사이인데
자네한테서 대감 소릴 들어서야 쓰겠는가? 자네가 마흔셋, 내가 마흔아홉이니 우린 기껏해
야 여섯 살 차이라네."
허성은 큰 눈을 끔벅끔벅일 뿐 대답이 없었다.
"걸으면서 이야기함세."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진선문을 지나 숙장문 앞에 이를 때까지 허성은 유성룡
의 당부를 듣기만 했다. 풍신수길의 성격을 살피고, 그 휘하 장수들 중 뛰어난 자들의 장단
점을 파악하며, 바다를 건너을 수 있는 군선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라. 이윽고 유성룡
의 이야기가 끝나자 허성은 왼편의 인정문을 힐끗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란이 일어난다고 보십니까?'
허성의 물음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십여 년 전, 율곡 이이가 '적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먼저 준비해서 우리가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며 군사를 기르자고 했을 때 앞장서서 반대한 이가 바로 동인의 신
진학자였던 유성룡, 김성일, 허봉이었다. 선조의 즉위와 함께 조선은 바야흐로 새로운 태평
성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 화담 서경덕 , 남명 조식 등이 이룩한 학문
적 성과를 바탕으로 왕도정치의 초석을 닦았고, 수많은 서적들이 편찬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경에서 수경으로 벼 재배 방식이 바뀌면서 농업경제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또한 신
립, 이일, 원균 등의 용장들이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크고작은 승리를 계속 거두어 여진족에
대한 걱정도 접을 수 있었다. 명나라가 조선에 전쟁을 걸어오지 않는 한 평화는 오랫동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자네마저 그러면 어찌 하는가.
율곡의 허탈한 표정이 떠오른다. 허나 나는 그때의 일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백성들을 전쟁의 공포 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중에서 최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 조짐도 없으니‥‥‥ 율곡의 예언은 틀렸다.
허성은 지체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지금 왜인들이 움직이면 을묘년(1555년) 때보다더 큰 피해를 볼겁니다 방비책이 있으십
니까?"
을묘왜변은 삼천 명의 왜구가 칠백 척이 넘는 배에 나눠 타고 일시에 전라도를 노략질한
사건이었다. 사망자가 오천 명을 헤아렸고, 행방불명된 백성들도 기천 명이나 되었다.
유성룡은 마른침을 삼켰다. 을묘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만도 이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
런데 그보다 더 큰 왜란이 터진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란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사화동의 무리를 자진해서 잡아
보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유성룡은 닷새 전에 처형된 죄수들의 명단을 되뇌었다. 그중에는 왜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여 악명이 높았던 사화동도 끼여 있었다. 그는 원래 진도의 어부였으나, 탐관오리의 핍박
과 경제적 궁핍을 견디다 못해 대마도로 도망쳐서 왜구의 길잡이가 되었다.
작년 여름, 선조는 왜국에 통신사를 보내는 전제조건으로 사화동을 넘기라고 대마도주 종
의지에게 요구했다. 그것은 통신사를 파견하지 앓으려는 조정의 궁여지책이었다. 지금까지
대마도주가 tm스로 왜구를 잡아 조선에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마
도주 종의지는 의외로 선선히 사화동을 생포해서 바쳤을 뿐딴 아니라 납치했던 조선인들까
지 송환했다.
유성룡은 이 일을 평화의 증표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허성은 그의 주장에 선뜻 동
의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군요. 저들은 지금 자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화동을 죽여서까지 통신사를
데리고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저들에게 무슨 득이 있는지‥‥‥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안개 자욱한 미궁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넬 서장관으로 추천한 거네. 공식적인 일은 상사나 부사에게 맡기고, 자넨
성천지와 군관 황진을 데리고 시정을 살피게. 알겠는가?"
유성룡은 허성의 손을 꼭 쥐었다. 허성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번진다. 유성룡은 그 웃음
에서 허봉의 흔적을 더듬었다. 아홉 살이나 아래이면서도 언제나 형처럼 굴던 사내, 학봉 김
성일과 그가 주저할 때 먼저 나서서 율곡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사내, 왜국과의 친교는
천부당만부당하다며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린 조헌과 대적할 만한 유일한 사내, 신
선이 되고 싶다던 사내, 금강산에서 신선처럼 사라진 사내. 허봉! 자네라면 이 난국을 어찌
하겠는가? 인정문을 들어서며 허성이 다시 물었다.
"균은 어떻습니까? 생원시에 합격은 했다지만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
"괜한 걱정이야. 균의 재능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리고‥‥‥‥ 유성룡은 난설헌의 눈
부시게 빛나는 시를 떠올렸다. 그녀의 탁월함을 논하려 할 때 허성이 삽자기 넙죽 허리를
숙였다. 인정전 뜰에 좌의정 정철과 첨지중추부사 황윤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쉰다섯 살 동
갑내기인 그들은 서인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유성룡은 공손히 예를 표한 후 그들에게 다
가갔다.
"학봉은 같이 안 온 게요?"
정철이 반백의 수염을 쓸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상대의 심장에 주저없이 비수를
들이대는 위인이었다. 정철은 유성룡의 뒤에서 있는 허성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누군가 했더니 허엽 대감의 큰아드님이로군. 이 아침에 웬일인가? 참, 자네가 이번에 서
장관으로 뽑혔지,"
정철이 자문자답을 하는 동안 허성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정여립이 자네의 글재주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하며 돌아다녔다는데, 자네도 알고 있지?"
"무‥‥‥ 무슨 그런 터 , 터무니없는 말씀을."
허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유성룡은 정철을 쏘아보았다.
증거가 있으신가요, 대감? 허성까지 노리신다면 이번에는 저도 물러서지 않겠소이다.
"하핫, 농담이오, 농담! 젊은 사람이 농담 한 마디에 기가 꺾여서 어디에 쓰겠소? 그래가
지고서야 칼부림이나 일삼는 왜놈들을 꾸짖을수 있겠소? 하하핫!"
그 순간 학봉 김성일이 인정문으로 쑥 들어섰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그는 가볍게 목례
만 한 후 휑하니 뜰을 가로질러 광범문으로 샤라져버렸다. 정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
셨다.
"고이헌!"
유성룡은 허성의 소매를 끌어 그곳에서 물러났다. 광범문을 지나서 왼쪽으로 늘어선 선정
전의 외행각을 따라 걷는 동안 허성은 계속 딸꾹질을 해댔다. 선정문에 이르러서도 허성의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곧 주상전하를 뵈어야 하는데"
유성룡이 안절부절 못하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칠때 김성일이 선정문에서
썩 나왔다. 그는 다짜고짜 허성의 뒷덜미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화를 버럭 냈다.
"뚝 그치지 못해? 그러니 저놈들이 우릴 우습게 여기는 게 아닌가. 정여립이 서린에서 동
인으로 말을 바꿔 탔으니 동인과 교분을 나누는건 당연한 일이야. 서찰 몇 통 주고받은 걸
가지고 역적으로 몬다면, 정여립이 율곡 문하에 있을 때 숙식을 함께 한 서인들은 역적 중
에서로도 역적이지. 그런데 그대는 뭐가 무섭다고 딸꾹질인가?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가?"
"어허, 목소리를 낮추시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가?"
유성룡이 김성일의 팔을 붙들며 만류했다.
"들을 테면 들으라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송강, 저 늙은 여우를 풀이고 나도 죽음세.
저것들은 퇴계 스승님 무덤까지 파헤칠 놈들이야. 난 어럽게 살고 싶지 않으이."
유성룡은 자기보다 세 살이 위인 김성일의 직언 때문에 항상 가슴을 졸였다. 문득 임신년
(1572년)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경연장에서 선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과인은 어떤 임금인가?"
신하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요순 같은 임금이십니다.
"전하께서는 한고조 유방보다 더 큰 덕을 지니셨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선조는 입에 발린 대답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때 김성일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사옵니다."
선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신하들은 김성일이 제 무덤을 스스로 팠다고 생각했다.
불호령과 함께 관직을 잃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홍문관수찬으로 경연에서의 논의를 기
록하는 거사관까지 겸하던 유성룡이 보다못해 나섰다.
"신하들이 요순이라고 대답한 것은 전하께서 요순과 같은 임금이되시도록 인도한 것이옵
고, 김성일이 걸주에 비유한 것은 전하께서 걸주와 같은 폭군이 되시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
오니, 모두 전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사옵니다."
그제야 선조는 화를 풀고 김성일을 칭찬한 후 경연을 끝냈다. 김성일은 그렇게 강직하고
꼿꼿한 위인이었다. 아마도 그 점이 퇴계의 마음에 들었으리라.
유성룡은 김성일을 달래어 대청 (대신들의 회의 장소)으로 들어갔다. 겨우 딸꾹질을 멈춘
허성은 사옹원(궁중음식을 관장하는곳)에 청하여 냉수 한 사발을 얻어 마셨다, 영의정 이산
혜가 유성룡 일행을 반겨 맞았다.
"어서들 오시게."
"일찍 등청하셨습니다, 영상 대감."
"요즘 통 새벽잠이 없어요. 찬바람이 가슴 깊은 곳까지 휘잉허니 불고‥‥‥ 서애는 아니
그런가?"
이산해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동인인 그가 서인천하인 조정에서 탄핵당하지
않고 영상의 자리를 지키는것도 다 그 뛰어난 처세술 덕분이었다. 그런 그도 요즘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벌써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사림이 삼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산
해는 안색이 창백한 허성에게 물었다.
"부족한 건 없는가?"
"없습니다. "
좌의정 정철, 우의정 심수경, 그리고 황윤길이 나란히 대청으로 들어섰다. 이산해는 유성
룡 일행을 맞아들일 때처럼 환한 웃음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김성일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외면했고, 허성은 시선을 내리깐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유성룡은 간간이 이산해
를 거들면서 통신사가 왜국의 본토에 도착할 때까지 오늘처럼 맑은 날씨가 계속되기를 기원
했다. 심수경이 맞장구를 쳤고, 황윤길은 유성룡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도승지 조인후가
황급히 문을 들어왔다.
"주상전하께서 곧 편전으로 납실 것이옵니다. 어서 자리를 옳기시지요."
대신들이 조인후를 따라서 삼삼오오 편전으로 향했다.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선정전을 감
쌌고, 내시와 궁녀들이 분주하게 뜰을 오갔다. 대조전에서 중전 박씨와 함께 겸상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선조는 봄경치를 완상하며 느린 걸음으로 회정당을 거쳐 편전으로 들어섰다.
어좌에 앉아서 잠시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금빛의 여의주와 봉황, 그리고 꽃구름이 조각된 보개(양산처럼 어좌를 덮는 덮개)가 오늘
따라 아름다움을 더했다. 불혹에 가까운 선조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열여섯의 나이
로 보위에 오른후 벌써 이십삼 년 동안이나 옥좌를 지키고 있었다. 퇴계와 율곡 같은 신하
들이 곁에 머물렀던 즉위 초에는 유선록, 근사록과 같은 책을 간행했을 뿐만 아니라, 사화의
소용돌이에서 처형당한 조광조를 증직시켜 사림의 칭송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을해년(1575
년)의 동서분당을 기점으로 당쟁이 격화되었던 이십대 후반에는 잠시 마음을 잡지 못해 주
색에 빠지기도 했지만, 계미년(1583년)과 정해년(1587년)에 여진족이 함경도를 침입한 후로
는 성심을 되찾고 정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는 신하들을 대하는 요령도 생겼다.
선조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나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며 공맹
의 도를 펼치려고 하였다. 이 와중에 대의명분을 앞세운 사림들의 신권이 세조 이후 점점
허약해진 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선조는 왕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동서로 나뉜 신
하들의 틈바구니에서 양손에 각각 채찍과 당근을 들었다.
편애하는 신하도 변방으로 내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도 가까이불러 칭찬했다. 그의
채찍이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바뀔 때마다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더 큰 충성을
맹세했다.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균형을 유지하기 쉬웠다. 이러한 비법을 일깨워준
신하가 바로 이조판서 유성룡이었다.
경오년(1570년), 흥문관부수찬 유성룡은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사리에 합당한 주장을 경연
장에서 펼쳐 임금의 무지를 깨우치는 신하로 이름이 높았다. 선조가 천수와 인사에 관해 물
었출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천수란 추위나 더위 같고 인사는 가죽옷이나 갈옷과 같사옵니다. 추위나 더위는 사람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가죽옷이나 갈옷을 갖추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사옵니다. 하
여 성인들이 천수는 말하지 않고 오르지 인사만을 논한 것이옵니다."
선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어떠한가?"
유성룡은 방금 사용한 비유를 그대로 끌어들였다.
"임금이 몸이라면 신하는 그 몸을 보호하는 가죽옷이나 갈옷과 같사옵니다. 임금는 사계
절의 변화에 따라 응당 그 의복을 맞춰 입어야하며, 신하는 물러나서 임금의 부르심을 기다
리고 나아가서 임금의 뜻을 밝게 살펴야 할 것이옵니다. "
의복을 고르듯 신하를 선택하라!
선조는 그 말을 새겨들었다. 그 동안 대부분의 당상관(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이 삭탈관직
이나 귀양의 아픔을 겪었다. 유성룡에게만은 채찍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허나 내일 일을 누가 알랴? 철 지난 헌옷처럼 그대를 내팽개쳐야하는 날이 오면 그대는
웃으며 날 이해해줄까? 서애! 그대가 내게 원망의 눈빛을 보낸다면 내 그날의 경연을 상기
하는 비망기라도 한 장 써주리라.
"내일 왜국으로 떠날 상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음니바."
영의정 이산해가 맨 처음 처리할 안건을 꺼냈다.
"먼길에 고생이 많겠구나. 몸건강히 잘다녀 오도록해라. 과인은 그대들의 노고를 잊지 않
겠노라 헌데 왜국에 줄 선물은 모두 준비되었는가?"
2월 28일, 선조는 인정전에서 헌부례(포로를 바치는 의식)를 치렀다. 그는 그날 승전국의
임금처럼 대마도주 종의지에게 호통을 쳤다.
"다시 한 번 조선으로 들어와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노략질을 일삼는다면 과인이 친히 대
마도를 치고 왜국의 본토를 응징하리라."
황윤길이 올린 문서를 좌부승지 황우한이 받아서 선조에게 전했다.
"백미 서른 섬 , 호피 쉰 장, 인삼 한 상자, 한지 삼백 장, 비단 백 필이라‥‥‥‥ 영상!"
선조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산해를 찾았다.
"부족하지 않을까? 과인의 생각으론 여기 적힌 것의 두 배 정도는 되어야 체면이 설 것
같은데‥‥‥"
"지당하신 분부이시옵니다."
이산해는 즉시 선조의 뜻을 받아들였다. 불만을 아뢰려고 고개를든 김성일을 유성룡이 눈
짓으로 만류했다. 선심을 쓰겠다는 임금의 뜻을 거스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물을 더 마련
하기로 결정한 후 황윤길과 김성일, 허성은 서둘러 편전에서 물러났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성룡에게 물었다.
"이판은 학봉과 함께 회계 문하에서 공부하였다지? 학봉은 어떤 사람인가?"
"안으로 성학, 밖으로 왕도를 실천하는 사람이옵니다. "
"또한 허성은 이판과 호형호제하던 허봉의 친형이라고 들었다 그는 어떤가?"
"힘써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명륜당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옵니다. "
"대단하구나. 그런 위인들을 벗으로 둔 이판은 얼마나 굉장한 사람인가?"
선조는 물 흐르듯 하는 유성룡의 말솜씨를 비꼬았다. 유성룡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정여립이 율곡에게서 배울 때 유성룡, 그대를 가리켜 크게 간악한자라고 평했다지?"
선조는 틈만 나면 지나간 상소문을 다시 읽는 습관이 있었다. 총명하고 빈틈 없는 신하들
의 기를 꺾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전하! 신은 영남 변두리의 미천한 출신으로, 본디 어리석고 학문도 얕아서 쓰여질 만한
재능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체질이 허약하여 질병마저 곁들였으며 지식이 천박하여 일에 부
딪치면 어쩔 줄을 모르옵니다. 이것이 어찌 큰일을 담당할 만한 그릇이겠습니까? 신을 멀리
내쳐주시옵소서."
"불윤(허락할 수 없다) !"
선조는 목울음을 우는 유성룡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를 위로하
고 싶었지만 군왕의 위엄을 보이려면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좌의정 정철에게 시선을 옮겼
다.
"좌상! 중전이 좌상의 언문가사에 흠뻑 빠져 있는 걸 아는가?"
정철은 대답을 늦추며 선조의 안색을 살폈다. 맞장구를 쳤다가 유성룡처럼 눈물을 쏟을지
도 모를 일이었다.
"관동별곡은 과인도 읽은 적이 있지만, 두 미인곡(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어젯밤 처음 읽
었느니라. 자못 언문의 씀씀이가 황홀하고 기특한 구석이 많아서 놀랄 따름이었다. 헌데 그
가사에 나오는 미인은 도대체 누군가, 과인한테만 살짝 가르쳐줄 순 없는가?"
선조는 진작부터 정철이 지은 가사를 읽었고 그 미인이 다름 아닌 선조 자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동인으로부터 탄핵을 당한 후 강원도와 전라도, 함경도의 외직을 떠돌아가 고
향인 창평에 머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정철, 임금을 위해 언문가사까지 짓는 정
철이라면 언젠가 유용하게 쓸 날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 그 미인은 다름이 아니오라 .. "
정철은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정여립의 역모가 밝혀졌을때 선조에게는 이 일을 책임질 위관(사건을 맡아 조다하는 관
리)이 필요했다. 처음 위관으로 임명된 우의정 정언신마저 정여립과 서찰을 주고받은 사실
이 발각된 후로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산해와 유성룡은 정여립과 같은 동인이었
고, 운근수나 윤두수는 그릇이 작았으며, 이항복과 이덕형은 아직 어렸다. 그때 역적을 체포
하여 엄히 다스리라는 정철의 비밀 차자(상소문)가 올라왔다. 선로는 정천에게 이 일을 맡기
기로 한 후, 밤새 그가 쓴 언문가사와 시조를 다시 읽었다. 임금을 향한 충정이 새로웠다.
그의 기대를 어기지 않았다. 정여립과 술 한 잔 나눠 마시겨나 손 한 번 잡은 사람까지 모
두 찾아내서 옥에 가두었다. 오늘 두미인곡을 들먹인 것도 정철로 하여금 임금에 대한 충성
심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사랑하시니) 이 마
음 이 사랑견줄데가 전혀 없다' (사미인곡)는 고백과 '차라리 사라지는 낙월이나 되어서 님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속미인곡)는 다짐을 잊지는 않았겠지?
정철이 이 일을 맡은지도 반년이 가까웠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된것이다. 선조는 정철의 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정여립이 퍼뜨린 참어(유언비어)는 무엇무엇인가?"
정철은 준비해온 문서를 참조해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네 가지이옵니다. 첫째는 목자망전읍흥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것이옵니다.
둘째는 전주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것이옵고, 셋째는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는 집안에서 왕
이 난다는 것이오며, 넷째는 정씨가 계룡산 아래에 도읍을 정한다는 것이옵니다. 모두 역적
정여집이 왕이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사옵니다. "
"죽일 놈!"
선조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여립
그는 경오년(1570년)에 등과하여 이이와 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계미년(1583년)에는
예조좌랑에까지 오른 위인이다. 이듬해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을 비판한 후
동인으로 자리를 옳겼다. 유비를 배신한 위연의 관상이라며 선조가 멀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로 낙향하였다.
움푹 패인 눈과 오똑한 코, 유난히 양은 입술을 지닌 정여립은 전주에서 곧 이름을 얻었
다. 한양에서 배운 학문의 깊이와 소유하고 있던 전주 일대의 전답이 큰 힘이 되었다. 훈구
나 척신들이 임금에게 의지해서 한양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한다면, 사림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그들은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지방의 명망가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제자들
을 키우는 것은 물론이고, 각 지방의 행정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사병까지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건국이념으로 천명한 조선은 사림의 정계 진출과 그에 따른 각
지역의 학맥 형성으로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여립 역시 그런 사림 중 하나였다. 그
리고 정여립은 선조가 다시 그를 찾기까지 기다리씨에는 피가 너무 뜨거운 사내였다.
정해년(1557년), 왜구가 서해안을 침입하자 전주부윤 남언경은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주에는 왜구와 맞서 싸을 만한 관군이 없었던 것이다. 정여립은 곧 자신이 조직향 대동계
의 계원들을 이끌고 왜구를 격퇴했다.
그는 진안의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 정여립은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만민이 평등한 대동세계 건설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정
주학을 기반으로 하여 사농공상의 차별을 분명히 하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정면으로 대립되
는 사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의 대동계는 칠 년이 넘도록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으며, 왜
구를 물리친 후로는 전주부윤이 직접 대동계를 후원하고 보호하기까지 하였다. 사림의 힘이
그만큼 크고 강했던 것이다.
안악군수 이축의 장계를 통해 정여립이 한양에 반군을 투입하여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선조는 전주부윤이 정여립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역적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치고, 그 역적이 사람을 모으도록 돕
고, 군량미와 무기를 마련하는 데 앞장을 설 수 있는가? 어찌 전주부윤뿐이랴, 어전에서 만
만세를 외치며 피가 나도록 타닥에 이마를 부딪는 신하들도 정여립과 내통한 것이 분명하
다. 내 어찌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겠는가.
정철을 앞세워 대대적인 옥사가 진행되었다. 이른바 기축옥사였다. 이 옥사의 명분은 역적
을 처단하는 것이었지만 선조의 속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그는 사림의 날개를 꺾어 흔들리
는 중앙집권톨 강화하고 싶었다. 정철이 호남 사림은 물론이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후
광을 입고 있는 영남 사림까지 조사하려 했을 때 선조가 묵인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옥사는 어떠한가?"
"정여립과 내통한 역적 이발, 백유양 등 삼백여 명을 극형에 처했사오며, 죄가 있는 천여
명을 옥에 가두어 엄히 심문하고 있사옵니다."
"역적은 한 놈도 살려줘서는 안 된다. 좌상! 옥사가 잘못되면 그대에게 죄를 묻겠다, 알겠
는가? 역적들을 능지처참하는 것으로 끝내지마라. 그 목을 사대문 밖에 효수하고,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변방으로 보내 본보기로 삼으라. 사지는 들판에 버려 짐승의 주린 배를 채우
게 하렷다. "
정철은 식은땀을 흘리며 선조의 분노를 가슴에 아로새겼다. 유성룡은 어금니를 깨문 채
상념에 젖어들었다.
옥사는 계속될 것이다.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와 중종 대의 기묘사화를 겪으며 훈구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림들보다 더 많은 사림들이 죽으리라. 뜻있는 선비들은 산림에 몸을 묻
을것이며, 조선은 예와 도를 잃은 채 제멋대로 부유하리라.
"다음은 무엇인가?"
평소 때라면 이쯤에서 오전 회의를 접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수사로 쓸 만한 장수를 대신들이 추천하였사옵니다. "
좌부승지 황우한이 이산해로부터 문서를 받아 올렸다. 선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수들
의 이름을 쭉 훌었다.
"좌상과 우상은 모두 원균을 꼽았고, 영상과 이판은 이순신을 추천했군. 원균은 무자년
(1588년)에 두만강을 건너가서 시전부락을 불태우고 녹둔도를 침탈했던 여진족을 섬멸한 맹
장이니 능히 수사가 되고도 남을 인물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녹둔도에서 백여 명의 군사를
잃은 패장이 아닌가? 작년에 정언신도 이순신을 추천한 적이 있지만, 그가 과연 수사의 직
분에 적합한 인물인지 모르겠다. 현감으로 족한 위인이 아닌가?"
유성룡이 대답했다.
"신은 순신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 성품을 아옵니다."
선조가 그의 말을 잘랐다.
"잠깐 이판은 순신을 정읍현감으로 추천할 때도 같은 소릴 했었다. 마을 이름이 뭐라 했
지?"
"건천동이옵니다 "
"그래 맞다, 건천동! 허봉도 그곳에서 자랐댔지?"
"그러하옵니다. "
"또 누가 있느냐?"
"예"
"건천동에서 자란 사람들 말이다. 내가 알 만한 사람들로 열 명만 들어보아라."
함정에 걸려들었구나!
유성룡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종서, 정인지가 같은 시대이옵고, 양성지, 김수온이 같은 시대이오며, 유순정, 권민수,
유담년이 같은 시대이옵고, 노수신과 유협이 같은 시대이옵니다. 또한 신과 이순신, 원균, 허
봉 등이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사옵니다 "
"그대와 이순신, 그리고 원균이 모두 건천동에 살았다?"
"그러하옵니다. "
"쯔쯧‥‥ 그따위 작은 인연으로 나라의 장수를 추천한단 말이더냐? 건천동 바깥에는 장
수가 없어?"
"그,그게 아니옵고‥‥‥
"닥쳐라! 건천동 출신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너희들도 뭉쳐서 거사를 벌일 작정이겠구나."
"아니옵니다, 전하!"
선조는 뜸을 들이며 호흡을 골랐다. 군권을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사화동을 죽였으니 왜구를 막을 수사를 새로 뽑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니다. 이 일은
다음에 다시 살피도록 하겠다. "
유성룡은 할 말을 잃었다.
전하께서는 나마저 정여립의 잔당으로 몰 작정인가? 전하의 싸늘한 말투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구나 정녕 떠날 때가 온 것인가? 역적으로 몰리느니 차라리 스스로 눌러나는 편이 낫
다.
선조는 기축옥사의 정당성을 역사속에서 입증받고 싶어했다. 흥문관의 여러 학자들과 함
께 이십 년 가까이 경연에서 공부한 것이 큰도움이 되었다.
"어젯밤 '통감강목'의 '동한헌제기'를 다시 읽었다. 이런 의문이 생겼느니라. 유비가 오
와
위를 평정한 다음에도 헌제가 살아 있었다면 유비는 왕위에 오르지 않고 끝까지 헌제의 신
하로 남았겠는가?"
영의정 이산해가 대답했다.
"소열(유비의 시호)은 헌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제위에 나아갔으며, 그에게는
제갈량과 같이 의로움을 아는 신하가 있었사옵니다. 만약 헌제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
역시 이산해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내는군.
선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영상의 말이 옳다, 유비라면 정성으로 헌제를 섬겼을 것이다. 허나 항우가 의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한고조 유방 역시 용상을 포기했을까?"
좌외정 정철이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신하된 자가 살아 있는 임금을 폐하고 용상에 오를 수 있겠사옵니까? 한고조 역시
충과 의제를 중히 여긴 인물이었으니 충심으로리 새논 보필하였을 것이옵니다."
"임금된 자가 어리석고 광포할 뿐 아니라 때로는 나약하고 무능해도 말이냐?"
세조가 단종을 내치고 왕위를 이은 일도 있지 않은가?
선조는 침묵으로 신하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과묵하고 청렴하기로 소문난 우의정 심수경
이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일흔을 훨씬 넘긴 노학자의 연륜이 배어나왔다.
"일찍이 퇴계는 '임금은 마땅히 인혜해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이것이 바
로 이다'고 말했사옵니다. 임금을 공경 하지 않고 힘으로 제압하려드는 신하는 세상의 참된
이치를 거스르는 자이옵니다. "
심수경은 원칙론에 머물렀다. 임금다움을 논하기에 앞서 신하다움을 강조한 것이다. 그 말
은 또한 '천하만물은 만인의 것이니 누군들 왕이 아니겠는가'라는 정여립의 주장에 대한 반
박이기도 했다. 임금과 신하는 엄연히 다르며, 그 차이로부터 각자의 참된 역할을 찾아야한
다는 퇴계의 주장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선조는 심수경
의 딱 부러진 대답에 덧붙일 물음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유성룡에게로 옮겨갔다.
"이판! 아까부터 잠자코 있는 걸 보니, 이판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렷다. 아
니 그런가?"
상념에서 깨어난 유성룡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딴생각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다만‥‥‥ 무엇이냐?"
유성룡은 선조의 딱딱한 시선을 느끼며 답했다
"조선은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중하는 정주학의 나라이옵니다. 일찍이 전하께서도 퇴
계와 율곡을 아끼시고, 수많은 전적들을 편찬하여 이 나라의 기풍을 바로잡으셨사옵니다. 신
은 지금의 옥사가 전하에게 누를 끼치고, 선비들이 세상에 나서는 데 걸림돌이 될까 두렵사
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
유성룡은 눈을 질끈 감고 선조의 불호령을 기다렸다. 파직은 물론이고 어쩌면 당장 하옥
하라는 어명이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위는 한없이 조용했으며, 앞에 앉은 심유경의 잔
기침 삼키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유성룡은 고개를 들어 어좌를 살폈다. 그때까지 유성
룡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선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선조는 유성룡이 황급히 고개를 숙
이는 것과 동시에 어좌에서 일어서며 짧게 힘주어 말했다.
"지도(알았다) !"
편전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홍문관부수찬 조영직에게 천하도(세계지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천하도 말씀이십니까?"
키가 작고 턱이 뭉툭한 조영직은 두 차례나 되묻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라졌다가, 곧
지도 한 장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유성룡은 그가 내민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이, 이런 !"
조영직은 불만스런 유성룡의 표정을 읽고 몸둘 바를 몰랐다. 유성룡이 누구인가. 이십 년
이나 홍문관에 머물면서 대제학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 아닌가. 홍문관의 일이라면 부처
님 손바닥 보듯 하는 그가 화를 낸다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천하총도 말고 딴 건 없나?"
"예? 몇 장 더 있긴 합니다만 (천하총도)가 가장 최근에 그려진 것 입죠"
유성룡은 주먹으로 가볍게 이마를 두드렸다.
"미안하네만 그지도들의 사본을 모두 가져와 주게나 찾을게 있어서 그러이 ."
"알겠습니다. "
조영직은 나는 듯이 문서고로 가서 지도들을 더 가져왔다 유성룡은 조영직이 가져온 지도
다섯 장을 비교하며 면밀히 살핀 후 그중 한장을 택했다. 태종 2년(1402년)에 좌정승 김사
형, 우정승 이무 등이 만든 혼일강리 역대국도지도 였다.
"이걸 잠시 빌려감세. 내일 아침에 돌려주지 ."
지도 보기를 즐기는 선조는 틈만 나면 흥문관에 명을 내려 지노를 가져오도록 했다. 이
사본들은 미리 의문나는 점들을 짚어두려고 별토로 준비해둔 것이다.
"알겠습니다 "
홍문관 장서의 궐 밖 대출은 대제학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조영직은 선선히 허락했다. 진
본이 문서고에 있는데 무슨 큰일이야 있겠는가. 더구나 서애 대감이 빌려가시겠다는데 만류
할 까닭이 없지! 조영직은 지도를 껑성껏 말아서 내밀었다.
"고맙네 자넨 작년 가을에 홍문관에 들어왔지?"
"그, 그러하옵니다. "
조영직은 웃는 낯으로 답했다.
"경연에도 참가했겠구먼."
"기사관으로 네 차례, 검토관으로 한 차례 참여했습죠."
"전하께서 특별히 관심을 두시는 부분이 있는가?"
"글쎄요‥‥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를 즐겨논하기는 하십니다만, 오늘
석강(저녁 강의)에는 관우의 어리석음을 살피겠다고 하셨습니다."
유성룡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우의 어리석음!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살려준 대목을 논하려는 것이리라. 전하께서는 작
은 인정에 끌려 조조를 살려준 관우를 비웃으시리라. 그리고 역적의 씨앗은 자라기 전에 베
는 것이 올싸른 이치라고 하시겠지. 전하께서는 한고조 유방처럼 두려움과 존경을 한몸에받
는 군왕이 되고 싶으신 게다. 그렇다면 나는 전하의 심중을 장량처럼 읽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허균이 찾아온 것은 자시 (저녁 11시)가 넘어서였다.
유성룡은 퇴청후 저녁상도 물리고 (혼일강리역 대국도지도)를 살폈다. 중국의 지명은 비교
적 상세했으나 왜국은 그 크기와 형태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겨우 경상도만한 사파 모양의
섬 하나가 거제도 아래 붙어 있을 뿐이었다. 대마도주 종의지를 따라온 왜승 현소의 말에
따르자면 왜국은 조선 침략을 위해 이십만 명의 대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저렇
게 작은 땅덩어리에서는 오만 명의 군사도 모으기 힘들 것이다.
'네놈은 왜 허구한 날 술이냐?"
유성룡은 허균의 불쾌한 얼굴을 보며 화를 냈다. 요즈음도 이태백의 제자를 자처하는 손
곡 이달의 패거리와 어울리는 모양이었다. 허균이 고개를 숙인 채 킬킬킬 웃었다.
"스승님, 너무 역정내지 마십시오. 얼마남지 않은 호시절, 놓치기가 아까워 이런답니다."
"죽은 네 형을 생각해라."
"그래요! 형만 생각하면 더러운 이놈의 세상 확 뒤집히는 꼴을 보기도 싫습니다. 제대로
돌아가기에는 어차피 틀린 세상 아닙니까?"
"말조심해라. 뒤집히다니? 그게 사대부가 입에 담을 소리더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스승님! 참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참을 수 없을때 아니, 참고 싶지 않
을 때는 어찌 해야 합니까?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고래를 불러도 참기 힘들 때, 그때 말
입니다. 도와 예로 되돌아 가기 위해 썩어 문드러진 시체라도 들추듯이 공자왈 맹자왈을 해
야 합니까?"
"에이잇! 그런 자세로 어찌 시문을 익히겠느냐? 오늘은 그냥 돌아갸고 내일 다시 오도록
해라."
허균은 대답 대신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곁눈질했다. 골똘하게 시도를 살피던 허균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웃음이 점점 심해져서 양어깨가 흔들릴 정도였다. 유성룡은 그 비웃
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놈! 어서 나가지 못할까?"
그제서야 허균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훔치며 웃음을 그쳤다.
"스승님, 어디서 이따위 엉터리 지도를 구하셨습니까? 이건 똥입니다, 똥! 하여튼 Ep놈들
허풍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천하의 절반을 자기네 영토로 그려 넣다니,"
"떼놈이라니. 말조심해라, 이놈!"
허균은 소맷자락에서 둘둘 만 종이를 쓰윽 꺼냈다. 입에서는 여전히 술냄새가 풍겼지만
두 눈은 샘물처럼 맑고 차가웠다
"스승님, 이건 명나라 역관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
허균은 천지도를 펼쳤다. 영길리(영국)와 불랑서(프랑스)가 지도의 중앙에 있었다. 한참이
나 지도를 살폈지만 유성룡은 조선과 명나라를 찾을 수가 없었다.
"조선은 어디에 있지? 대명은?"
"히힛, 스승님 그쪽이 아니에요. 거긴 아비리가(아프리카)죠. 무진장 덥고 무서운 짐승들이
사는 땅입니다. 명나라와 조선은 그보다 더 오른쪽에 있어요."
그제야 유성룡은 지도의 오른쪽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명나라와 조선을 찾을 수 있었
다. (혼일강리역 대국도지도)에서는 명나라가 가장 컸고 그 다음이 조선이었는데, 천지도에
서는 명나라가 고작 아비리가의 절반 정도였고 조선은 영길리보다도 작았다 믿을 수 없는일
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섬이었다. 어림짐작만으로도 조선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였다. 왜국이 저렇게 크단 말인가?
"어디서 이런 잡도를 구했느냐? 명나라가 세상의 중심인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다."
허균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소생도 그런 줄 알았습죠. 하지만 지금 명나라엔 수많은 양이 물려와서 이런 지도를 팔
고 있답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비밀리에 그것들을 사서 이렇게 번역까지 했구요. 명나라가
왜 허황된 집토예 매달릴까요? 소생에게 중국말을 가르치는 역관은 아비리가까지 타녀왔다
고 합니다. 아비리가에서 조선까진 걸어서 십 년은 족히 걸린답니다. 얼마나 먼 나라인지 짐
작이 가십니까, 스승님?"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유성룡의 표정을 살폈다. 유성룡은 돌부처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네 말을 믿을 줄 아느냐? 열흘 전쯤에 너는 동남쪽 섬나라에 사는 척곽이란 사내를 직
접 만났다고 했다. 키는 십 척이고, 배 둘레는 키와 같으며, 머리에는 수탉을 얹었고, 붉옷에
횐 띠를 둘렀으며, 붉은 뱀으로 이마를 둘렀다는 것이다. 이 지도는 척곽처럼 허황된 것임이
분명하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니 할 수 없군요. 이건 공자님이 와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스
승님이시니 특별히 보여드리지요. 전날에 말씀드렸던 그 척곽이란 놈에게서 훔친 것입니다."
허균은 지도 한 장을 마저 펼쳤다. 동방도란 이름 아래, 조선팔도와 네 개의 섬으로 이루
어진 왜국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천지도에서처럼 왜국이 조선보다 두 배 가까이 더 컸다.
조선팔도와 해안과 내륙에는 숫자가 빼곡이 적혀 있었고, 부산에서부터 한양까지는 붉은 점
들이 뱀처럼 늘어졌다.
"이 숫자는 뭔가? 붉은 점들은 또 무엇이고?"
허균은 유성룡의 코끝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되물었다.
"정녕 모르신단 말씀이신지요?"
유성룡은 제자의 검은 눈동자와 (동방도)를 번갈자 쳐다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호시절이라고 했겠다?
유성룡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제자의 속마음을 알아챘다. 허균은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스승님은 대단하십니다. 제 마음을 읽으셨군요. 스승님의 추측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이 숫자들은‥‥‥‥
"그렇습니다. 군사의 수를 적은 것이지요. 조정에서 파악하고 있는것과 차이가 큽니다 동
래에서 한양까지 길목을 지키는 우리 군사가 만명도 채 되지 않으니까요. 이 붉은점들은 한
양으로 가는 지름길입죠. 검은 점이 찍힌 곳은 전투가 예상되는 지역이고."
"어디서 이걸 구했느냐?"
유성룡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척곽이란 놈에게서 훔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그놈은 분신술과 함께 하늘을 나는
재주도 지녔나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선팔도를 이렇게 훤히 꿰뚫을 수 있겠습니까? 다
음에 만나면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그 재주를 배워야겠습니다. 답답한 도성을 떠나 넓디넓
은 세상 구경이라도 하렵니다. 일 년 내내 눈만 내리는 나라에도 가고, 사방이 모래로 가득
한 나라에도 가렵니다. 하늘을 찰 수만 있다면 이까짓 일들, 하루 만에라도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곳과는 다른 저곳의 삶을 살피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스승님이야 늘 성현이
지나가신 큰 길로만 따라가라 하시지만, 소생은 그 큰 길에서 벗어나고 싶네요. 늪에도 빠져
보고, 뻘밭을 달려보기도 하고, 바다를 헤엄치고도 싶습니다. 척곽이란 놈은 그래요, 아주아
주 자유롭고 가벼워 보입니다. 삶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니까 하늘을 날 수도 있는 것이겠죠.
소생이 배우고 나면 스승님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스승님이 절 믿으실 게 아닙니
까?"
허균은 천지도와 동방도를 둘둘 말아 소매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유성룡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거 놓으십시오. 뼈 부러지겠습니다. "
"그 지도를‥‥ 다오."
허균은 호들갑을 멈추고 유성룡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승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허균은 다시 자리에 앉은 다음, 지도를 꺼냈다.
"드디어 스승님에서 소생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이렇게 기쁜일이‥‥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입죠. 떼놈들과 척곽에게서 이걸 빼내느라 술값이 꽤나 들었거든요. 지도를
드리는 대신 소생의 청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말해 보아라."
허균은 탁자 옆에 놓여 있는 허난설헌의 유고를 가리켰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말했다.
"누이의 문집에 발을 써주십시오."
이것이었느냐? 술 취한 척 내게 와서 지도 두 장과 맞바꾸려 한 것이.
류성룡은 쓴웃음을 웃었다. 허균의 말을 따라가다보면 늘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허균은 허성보다 강하고 허봉보다 지혜로웠다. 한없이 속되
고 천박하게 보이지만 천하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유성룡은 그런 허균이 허봉처럼 헛되이
부러져 삶을 탕진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밤, 그를 불러 사문과 예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품에 안기에는 너무 날개가 큰 송골매였다. 술김에 뇌까리는 시
는 이미 이태백의 경지에 이르렀고, 함부로 내뱉는 말에는 제자백가의 깨달음이 녹아 있었
다.
"그러지. 그게 무슨 힘든 일이라고."
"감사하옵니다, 스승님. 역시 스승님은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
습니다. 내일 저녁엔 술 마시지 않고 일찍 오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허균은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유성룡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 두 장을 고이 접어두고 허난설헌의 유고를 찾아서 폈다.
지도는 내일 아침에 찬찬히 살피면 되는 것이고, 이 밤에는 난설헌의 시를 읽으며 허균의
너스레와 허봉의 패기에 찬말들 속에 묻히고 싶었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허씨 집안
의 세천재와 사귄 것을 기뻐하면서, 또한 그중 둘을 벌써 잃은 것을 슬퍼하면서 .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서 있네.
쓸쓸한 바람이 백양나무에서 불고,
도깨비불이 솔숲에써 반짝이네.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재사지래늡 몰을 너외 무덤에 붓네.
나는 알지, 너회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따르며 노는 줄을.
비록 뱃속에도 아이가 있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기를 바라리요.
하염없이 황대 (븟률)의 노래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는 소리 삼키네.
허난설헌, (곡자)
3.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찬다
하늘은 존귀하여 위에 있고 땅은 낮아 아래에 있으니 그 사이에 만물이 모두 일정한 법칙
과 위치를 갖고 있다. 성인이 이를 본받아 역을 지어내어 만물로 하여금 자기의 생명을 다
누리고 자기자리를 얻게 하였다. 성인이 일을 할 때 먼저 어진 사람과 도모하고, 동시에 귀
신에 점을 쳐서 길흉의 이치를 구하였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비록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주역), (계사전) 하, 12장
신묘년(1591년) 2월 1일.
정읍현감 이순신은 첫닭이 울기 전부터 어둠이 깔린 마당에 나와 있었다. 악몽 때문에 잠
을 이를 수 없었다.
겨울비가 어둠을 쫓으며 얼음알갱이와 뒤섞여 쏟아졌다 장닭의 울음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리저리 쓸렸다. 번뜩이는 칼날이 먼저 눈에 띄었고 채 마르지 않은 핏덩이가
뚝뚝 장창을 타고 내렸다 그 창끝에 낯익은 얼굴이 붉은 혀를 쑥 내밀고 희멀건 눈을 뜬채
걸려 있었다. 광화문에 효시된 정언신 대감의 머리였다. 그리고... 수급을 탁탁탁 쪼아대는
까마귀의 부리짓을 뒤로 한 채 유성룡 대감이 울부짖으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이 보였
다. 가슴을 찢는 소리가 귀에 쟁쟁쟁 울렸다
정읍과 태인에서도 정여립과 교분이 있던 선비가 넷이나 목숨을 잃었다. 동인을 탄핵하는
상소가 끊일 날이 없다는 소문이고보니 두 대감의 앞날 또한 편할 리 없으리라. 그러나 참
형은 지나치다 상벌의 공정함은 군왕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는 기초라고 하지 않았던가.
솜바지에 저고리를 곁으로 입었지만 꽃샘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서 이부자리를 걷고 정자관을 쓴 후에 붓을 들었다. 쓰다만 일기를 끝낼 참이었다. 병자년
(1576년)에 벼슬길로 나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일기가 벌써 열다섯 권을 넘었
다. 전라도와 한양, 함경도를 오가는 바쁜 생활 중에도 일기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역사란 결국 후대의 기록이다. 그것은 체험에 의지한 글쓰기가 아라 사료에 근거한 글쓰
기이다. 그 사료를 최초로 만드는 자는 개인일 수밖에 없다. 물처럼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영
원히 남겨두기 위해서는 우선 붓을 들어야만 한다.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보편의 언어
로 옮겨두어야 한다. 기억은 언제나 부정확하며 불확실하다. 오직 내가 쓰고 있는 이것들만
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장해 준다.
기억에도 아득한 건천동 시절부터 무엇이든 옳겨 쓰던 버릇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그때
의 글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는 두형 희신과 요신이 잠든 후에도 밤늦도록 일기
를 썼다.
병자년 식년무과에 급제한 후 처음 유성룡을 찾아갔을때의 일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끄
적거리는 습관을 그때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난 자네가 홍문관으로 올 줄 알았네 어렸을 때부써 틈만 나면 끄적거렸으니까. 헌데 무
과라‥‥ 놀랍군."
중요한 공문서의 사본은 일기에 꼭 끼워두었다. 녹둔도의 패전으로 죽을 뻔한 후로는 더
욱 철저하게 공문서를 챙겼고, 작성 경위를 함께 적어두었다.
어젯밤, 그는 전라감사에게 보낼 서찰의 초본을 일기에 옮겨 적다가 잠이 들었다. 열흘
전, 유부녀를 희롱한 죄로 곤장 스무 대를 맞은 박생원이 그를 남솔로 전라감영에 고발한
것이다. 남솔은 지방수령이 지나치게 많은식솔을 거느려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죄로 파직 사
유가 되고도 남았다.
그는 큰형 희신(1535 ∼1581)과 작은형 요신(1542∼1580)이 일찍 세상을 버린 후부터 집
안의 가장으로 형수와 조카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무관으로 변방을 전전하느라 가족
을 다독거릴 틈이 없었다 만호와 같은 순수 무관 벼슬로는 식솔들의 의식주를 책임지기 힘
들었다.
정해년(1587년), 조산에서 백의종군을 하던 이순신은 인생의 갈림길에 섰다. 계속되는 흉
년으로 가족이 모두 굻어 죽게 생겼다는 연락이 아산 본가로부터 온 것이다
식솔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부가 될 덧인가, 아니면 식솔들을 희생해서라도 장수의 꿈을
키울 것인가?
백의종군 전까지는 장수의 길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막상 백의종군을 당하고 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었다. 살아갈 길이 막막했고 미래는 암흑 그 자체였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
무자년 (1588년) 여름, 이순신은 한양으로 유성룡을 찾아가서 모든 것을 표기하고 가족들
이나 거느리며 살겠다고 했다. "촌부로 늙겠다 이 말인가?"
"제 나이 벌써 마흔넷입니다. 변방을 전전하기에는 늙었고, 백의종군을 당했다는 치명적인
오점까지 있지요. 이렇게 떠돌다가 객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가장으로서
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요, 회신 형이나 요신 형도 이제 제가 가족들을 챙기기를 바라실 겝
니다.
"여해(이순신의 자)! 자네 말대로 지금 포기하면 자네 인생은 없어지는 거네. 이러자고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변방으로 떠돌았는가? 요신도 자네의 이 못난 꼴을 보면 대로할 걸세. 잔
말 말고 이삼 년만 참고 견디게나, 우선 아산으로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게. 몸도 추스리부
애도 좀더 연마하고 말일세."
"자신이 없습니다. 장수는 저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허 , 약한 소리 말게. 날 믿어! 내가 자네 하나 살피지 못하겠는가? 자네가 꼭 필요할
날이 올 걸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수보다 늘 삶에 대해 깊이 천착하는, 그래서 전투
자체를 총괄적으로 살피고 반성할 수 있는 장수가 이 나라를 구할 날이 있을 거야. 자네 외
엔 아무도없어. 오직 자네만이 해줄 수 있다네. 난 자넬 믿어. 자네도 날 믿고 기다려야 하
네, 알겠는가?"
이순신은 용기를 얻어 곧장 아산으로 낙향했고 그곳에서 승천을 염원하는 이무기처럼 일
년 반을 기다렸다. 등용의 날은 의외로 쉽게 찾아들었다.
기축년(1589년) 겨울, 이조판서 유성룡의 도움으로 종육품 정읍현감이 된 것이다. 종사품
조산만호가 되었을 때보다도 기쁨이 더했다. 정읍은 예로부터 양식이 풍족한 고을이니 식솔
들의 끼니 걱정을 접어도 되는 것이다.
박생원의 고변을 받은 전라감영은 이순신에게 형수와 조카들을 충청도 아산으로 돌려보내
식솔을 줄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선처를 바라는 서
찰을 전라감사에게 띄웠다.
‥‥‥ 일찍이 형님들이 돌아가실 때, 저는 조산만호와 충청병사의 권관으로 일하느라 임
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이 전하기를, 형수와 조카들을 잘 거느려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두 분 형님의 한결 같은 유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도록 저
는 야인들을 막느라고 식솔들을 되돌아보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형님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고을의 수령된 자가 스무 명이 넘는 식솔을 거느리는 것이 법에 어긋난다는 것
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수와 조카들을 아산으로 돌려보내 굻겨 죽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을 보내고 형수와 조카들은 그냥 이곳에 머무르도록하여 주십
시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식솔을 많이 거느린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만, 의지할 곳 없는 식
솔들을 차마 제 손으로 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젖은 눈을 손바닥으로 쓰윽 훔쳤다
빈 방에 홀로 남아 일기를 쓰노라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밀물지어왔다. 붓을 든 채 웃기
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가슴속에 꼭꼭 묻어두었
던 상념들이 붓끝에꺼 살아났다. 인간의 영혼을 호수처럼 맑게 하는 것이 글이라고 했던가
탁자 아래에서 대나무로 만든 산통을 꺼냈다. 향나무로 만든 서죽(점을 칠때 쓰는 산가지)
쉰 개가 빽빽하게 꽃혀 있었다. 눈을 감고 그중 하나를 뽑아서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서죽은
태극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양손바닥에도 땀이 배어나왔다. 수건으로 땀
을 훔친 후 나머지 마흔아홉 개의 서죽을 움켜쥔채 이마에 가만히 댔다. 눈꺼풀에 덮인 눈
동자가 상하좌우로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지독한 어둠 속으로 수많은 상념들이 지나쳤다. 그
의 머리꼭대기에서 운명이라는 괴물이 불춤을 추었다. 남솔로 삭탈관직을 당한다면 그의 삶
도 끝장인 것이다. 다시는 그 아득한 추락을 딛고 삶의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리라. 운명의
불춤과 맞서기에는 그의앞에 놓인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지만 섣불리 운명에 제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주역의 힘을 빌려서라도 정면으로 이 고난을 뚫고 나가고 싶었다. 서죽을
뽑을 때마다 손끝에 힘이 넘쳤고, 손놀림 하나짜나에 절도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서죽의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첫닭이 울고 날이 밝았다.
정자관을 벗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솜바지와 저고리가 온통 땀에 절어서 끈적거렸다. 가파
른 산을 오른 사람처럼 거친 숨을 푸우푸우 몰아쉬었다.
임신년(1572년) 겨울, 그는 장인인 방진으로부터 주역을 배웠다.
칠 년 동안 준비를 하고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지만 낙마하는 바람에 등과하지 못한 바로
그 해였다. 그 동안 방진은 사위가 마음놓고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낙방한 이순신은 장인을 볼 면목이 없어서 피해 다녔다. 그러나 방진은 보약까
지 지어주며 부러진 왼쪽 다리나 잘 치료하라고 했다.
그래도 이순신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불면증에 걸려 며칠 밤을 새웠고, 음식을 받아들이
지 못하는 위장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토악질을했다.
보다못한 방진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사위의 방문을 확 열어젖뜨렸다. 그는 자
리에 앉자마자 도포자락에서 주역과 산통을 꺼냈다.
"자네 마음이 정 그러하다면 오늘부터 이걸 읽도록 하게 "
이순신은 충혈된 눈으로 방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져가십시오, 장인어른!" 방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난 자넬 알아. 자네는 삶의 고통들을 가슴에 꼭꼭 쌓아두는 사람이지. 바로 그 성격 때문
에 자넨 제풀에 꺾여 목숨을 재촉할 걸세. 난 내여식이 청상과부로 늙는 걸 원치 않아. 하늘
이 정한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나. 옛말에 이르기를 '너에
게 큰 의심이 있거든 마음으로 도모해보고, 주위 선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백성에게 묻고,
그리고 복서로써 물어보아라'고 했네. 나와 의논하기 싫거들랑 주역에 의지하도록 하게"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은 문무를 겸비한 위인이었다. 특히 그는 강궁의 달인으로 이순신에
게 활쏘기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의 장수들은 누구나 한두 가지 점치는 법을 알았고,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는 통과의
례처럼 점을 쳤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싸워야 했던 그들에게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
편이 필요했다.
대다수의 장수들은 주역을 읽는 대신 자연현상에서 길흥을 밝히는 자연관상점이나 꿈을
푸는 몽점, 동물이나 식물을 이용하는 수복, 조복, 수복, 화복등에 의존했다. 이 점들이 대부
분 길흥을 분명히 드러내는 데 반하여, 주역에는 양자택일이 통하지 않았다. 장수들에게는
역의 상을관찰하고 역의 뜻을 깊이 이해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의 변화를
예순 네가지 괘로 살필 필요도 없었다 승패와 사생을 아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삶의 결 하나하나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천지만물의
변화를 제 마음에 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은 아픔까지 꼭꼭 곱씹었다. 하나의 일을 격
을 때마다 수십 가지 시선으로 반성을 했는데, 그 반성은 종종 하루를 넘기고 한 달을 넘기
기 일쑤였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가슴속에서는 항상 불꽃이 일었다. 가야 할 길
을 가지 못한 불꽃,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버린 불꽃, 침묵을 지켜야 할 자리에서 혓바닥을
내보인 불꽃. 이 불꽃을 살피기 위해서라면 단순한 위안보다 더 깊고 아득한 혼돈이 나츨지
도모른다. 무궁무진한 괘의 변화를 살피다보면 인생의 부침에도 유연해지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부터 방진은 낙담한 사위에게 산통 잡는 법과 팔괘의 의미를 가르쳤다.
이순신은 천지만물의 속성을 표사하고 있는 설괘전 삼장을 특히 좋아했다.
"우레로써 움직이고, 바람으로써 흩뜨리고, 비로써 윤택케 하고, 해로써 건조시키고, 산으
로써 정지시키고, 연못으로 기쁘게 하고, 건으로써 통치하고, 곤으로써 저장한다. "
오늘따라 괘를 뽑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손안에 든 서죽이 유난히 서늘했고 좌우로 자꾸 흔들렸다 이런 날은
괘를 뽑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지만물이 순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일월과
사시가 어긋나지 않는다면 괘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주역을 펼치고 뽑아놓은괘
를 맞추어가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택풍대과 (못의 물이 너무 많아서 그 속에 나무가 잠길 상이다.)"
이 괘는 인생을 바꿀 중대한 사건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진퇴양난에 빠질 수로 있고, 성급하게 만사를 해결하려다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그 고비를 넘긴다면 기쁨 또한 각별하다.
"이‥‥‥ 이것은!"
이순신은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하기 전날 밤에도 이 괘를 뽑았었다.
왜구라도 쳐들어오는 것인가?
그러나 정읍은 전주와 인접한 내륙이라서 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한적이 한 차례도 없었다.
그렇다면 서애 대감께 기어이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일까?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다. 죽음이
이마를 비비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괘를 이루는 여섯 개의 효중에서 주효(괘의 중심이 되는 효)인 이양(여섯 개의 효중에서
아래서 두 번째에 있는 양효)의 풀이를 찾아 읽었다.
"마른 버드나무에 새싹이 돋는다.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얻는다.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얻
는 것은 분수를 넘어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내가 첩이라도 얻는다는 말인가?"
딱딱한 얼굴에 웃음이 스며들었다. 마흔여덟에 첩을 또 들인다는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이미 본부인인 방씨 외에 첩인 부안댁을 들였으며, 방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 딸 하나,
부안댁과의 사이에 자녀를 각각 둘씩 두었다. 미열이 잦고 여진족의 화살에 맞은 허벅지가
욱신거리는 요즈음은 두 여인네를 안기에도 힘에 겨웠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오늘 하루 각별히 주의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사또, 기침하셨습니까?" 이방과 형방이 대청마루 아래에서 그를 찾았다. 공무를 보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들어오너라"
형방이 자리에 앉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또! 잡았사옵니다."
이방이 힐끗 형방의 상기된 볼을 살피며 끼여들었다.
"잡은 것이 아니옵고 새벽에 제 발로 걸어들어 왔습죠. 허나 아직 진범이라는 증거는 없
사옵니다. "
"이방!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형방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사또만 아니라면 당장에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였다. 이방
이 세 치 혀를 쏙 내밀었다.
"누구이더냐?"
그는 그들의 다툼을 모른 체하고 물었다.
"태인에 사는 박진사의 딸 박초희이옵니다. "
정읍의 동진강에서 백일도 채 지나지 않은 아기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두 달 전의 일이
다. 얼굴이 돌로 짓이겨지고 몸 전체가 심하게 부패되어 시커멓게 변한 시신은 인간의 형상
이 아니었다. 물고기들에게 뜯어먹힌 뺨은 허연 뼈가 드러났고,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내장은 사타구니를 감싸고 있었다. 시신 보기를 밥먹듯이하는 형방도 사나흘이나 밥맛을 잃
었다. 검시를 맡은 의원 최중화는 직접적인 사인이 질식이라고 단정지었다. 목을 졸라 죽인
다음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는 것이다. 정읍과 태인의 나졸들을 모두 풀어 아기가 없어진 집
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아기를 잃은 부모가 찾아오기를 바랐지만 감감 무소식 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문둥이떼를 보았다는사람이 부쩍 늘었고, 밤마다 강변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형방이 이를 갈며 소문의 진원지를 추적했으나 그 또한 떠도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살
인자를 잡기 전에는 그 누구도 편히 몸을 될 수가 없었다.
"박초희 라면‥‥‥‥"
이방이 대답했다
"그렇습죠. 정해왜변(1587년) 때 보성까지 침입한 왜구에게 남편인 생원 조창국을 잃고 대
마도로 끌려갔다가, 작년 봄 사화동을 넘겨받을 때 함께 송환된 바로 그 박초희이옵니다. 한
양에서 내려와 시댁이 있는 보성으로 갔으나 왜구와 몸을 섞은 년이라 하여 쫓겨났고, 태인
의 친정집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그곳에서도 가문을 욕보였다 하여 문전박대를 당했습죠. 그
후로는 여기저기 주막집을 전전하며 새끼주모 노릇을 했는데, 싸고난 미색에 글공부까지 한
양반집 아낙이라 인기가 그만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형방도 꽤나 눈독을 들였더랬습니다요.
헌데 작년 가을부터 소식이 딱 끊어졌습죠. 한양으로 갔다는 말도 있고, 아비인 박진사가 더
이상 보다못해 집안으로 들였다는 말도 있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요." 대마오에서 송환된 조선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해당 관아에 나가이것저것 조사를 받
아야만 했다. 박초희가 사라진 후 발빠른 군졸 다섯을 풀어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헛
수고였다. "간단히 말해라. 박초희가 누군지는 나도 알고 있다. 헌데 그녀가 왜 살인을 했
단 말이냐?"
이방과 형방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쭈뼛거렸다. 형방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워낙 오락가락 말이 틀려놔서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요. 다만 아기
를 잃어버렸는데 그 아기를 자기가 죽인 것 같다고 했습죠."
"어미가 제 자식을 죽였단 말이냐?"
"그렇습니다요."
친족살인은 삼강지도를 해치는 중죄로 극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장성한 자식이 부모를 살
해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어미가 핏덩이같은 아기를 죽이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 죄인을 심문할 채비를 갖추어라, 내 엄히 문초하리라."
이순신은 서둘러 관복으로 갈아입고 동헌으로 나갔다. 육방과 곤장을 든 나졸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대문 밖은 살인범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붐볐다.
산발한 박초희는 양 다리를 좌우로 쩍 벌린 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맨발에 옷은 갈기갈
기 찢어졌으펴 얼굴에는 땟물이 줄줄 흘렀다.
됫간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몸냄새도 지독했다.
형방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박진사의 딸 박초회가 분명하냐?"
그녀는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은 후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제발 절 조선으로 보내지 말아요. 그냥 이곳에 살게 해줘요. 전 거기 가면 더러운 년이라
고 맞아죽어요. 아버지가 절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누구죠? 누가 내 남편을 죽였어요?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다고!"
형방이 소리쳤다.
"죄인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렷다. 네 남편 조창국은 사 년 전에 죽었느니라."
"여보!"
박초희가 형방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려고 했다. 형방은 기겁을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
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여보! 어서 와서 제 아랫배를 만져봐요. 부끄러워 마세요. 부부사이에 가릴 게 뭐가 있어
요.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어서 와서 귀를 기울여봐요. 들리죠? 당신과 나의 아기가 숨을
쉬고 있답니다. 당신을 닮은 용감하고 똑똑한 아들일까요, 나를 닳은 착하고 예쁜 딸일까
요?"
"무엇들 하는 게냐? 어서 저년을 잡아라!"
형방의 명령을 받은 나졸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들었다. 그녀는 두다리를 벌린 채 깔깔대
며 웃기 시작했다. 이방이 끼여들었다.
"실성한 계집이옵니다. 미친년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사옵니까?"
형방이 이방의 말을 잘랐다.
"아니옵니다, 사또! 새벽에 관아 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저렇게 심하지는 않았사옵니다.
잃어써린 아기를 찾으러 왔노라며 통곡하는걸 소인이 똑똑히 들었습죠. 이실직고할 때까지
곤장을 치시옵소서."이순신은 고개를 갸웃거궈며 두서없이 던진 그녀의 이야기들을 구슬을
꿰듯 하나로 엮었다. 대마도에서의 행복, 첫 아이를 가진 어미의기쁨,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
으려는 절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녀는 지금 조선에 와서 맞닥뜨린 불행 -시집
과 친정에서 쫓겨남, 아기의 죽음 -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마도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퇴행하는 중이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최중화에게 박초희를 살피도록 명령했다. 최중화가 앞장을 서자 군졸
넷이 그녀의 사지를 번쩍 들고 뒤따랐다.
골반의 형채와 유두의 색깔로 봐서, 박초희는 석달 안에 아기를 낳았음이 분명하다는 진
찰 결과가 올라왔다. 형방은 그것 보라며 의기양양했고, 이방은 눈을흘기며 살인의 과정이
입증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박초희는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사지가 들린 채 뜰로 나
왔다.
이순신은 눈을 감고 지금까지의 일을 꼼꼼히 되짚었다.
주막집을 전전한 것은 출산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방책이었고, 작년 가을에 갑
자기 잠적한 것은 더 이상 부른 배를 사람들앞에 내놓을 수가 없어서 였겠지. 그렇다면 지
극 정성을 다해 낳은 아기를 왜 죽인단 말인가? 정녕 그녀가 죽였을까?
"사또!"
형방의 다급한 외침에 눈을 떴다. 박초희가 살괭이처럼 달려오는것이 보였다. 그녀는 계단
을 획 뛰어오르더니 대청마루 구석에 놓인 목침을 품에 안았다.
"가만!"
이순신은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형방과 나졸들을 제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하고 부
드럽게 바뀌었다.
"울지 마, 아가! 착하지? 네가 울면 나졸들이 와서 잡아간단다. 어서 젖을 물어 이것 참
큰일났네. 이제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으니 어쩌면 좋아. 그렇다고 이 어린것을 안고 마을
로 내려갈 수도 없고. 아가야! 울지 마. 그러다가 사람들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자, 아가, 울지 마. 이 어미도 괴롭단다. 천주님! 어찌하여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옵니까?"
이순신은 고개를 돌려 형방에게 귀엣말을 했다
"애기 울음소리를 내. 당장!" "애기 울음이라굽쇼?"
이순신이 먼저 양손을 둥글게 입가에 모아쥐었다.
"으앙!" 그러자 형방과 이방, 나졸들도 따라했다. 난데없이 관아는 아기 을음소리 로 가득
찼다. "으앙, 으아아앙!"
박초희가 목침을 저만큼 밀어놓으며 화를 버럭 냈다
"그만 해 ! 넌 누굴 닳아서 엄마 말을 안 듣는 거니? 울지 마. 네가울면 우린 잡히고 말
아. 그럼 넌 죽어 알겠니? 죽는다니까."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잔잔해졌다.
"배고파. 추워. 이러다간 사흘도 견디지 못할 거야. 이러자고 애를낳은게 아냐. 애아빠도
없는 마당에‥‥ 저앤 평생 내 뒤를 따라다니며 날 불행하게 만들 거야. 나 혼자 몸이라면
뭘 못하겠어. 아, 살고싶어 !"
"으아땅!"
그녀는 목침이 있는 곳까지 무릎으로 걸어가서는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굵은 눈
물이 목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불쌍한 우리 아가! 조선으로 오지 않았다면 천주님의 축복 속에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
걸음마도 배우고, 칼 쓰는 법도, 글 읽는 법도배워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되었을 텐데. 이곳
에선 아무도 널 축복하지 않는구나. 욕하고 저주하고 침을 뱉을 뿐이지. 아가야! 그래도 이
엄말 원망하진 않겠지? 널 위해서라면 이 엄만 뭐든지 했고, 앞으로도 할 거야. 그러니 어서
울음을 그치렴, 착하지?"
"으앙, 으아앙!"
그녀는 갑자기 목침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표정이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 웬수! 좋아.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그녀는 쿵 소리가 나도록 목침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양손으로 목침을 감싸 쥐
는 시능을 했다. 이순신이 손을 휘휘 내젓자 을음소리가 뚝 멎었다. 그 순간 그녀는 옆에 놓
인 바둑판을 들어 목침을내려찍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이 뒤따랐다.
"죽어 , 죽엇 !"
그녀는 열 번도 넘게 목침을 내리친 다음 바둑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치
켜들고 박수를 치벼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금전에 자식을 죽인 어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녀에게는 윤리도 사랑도 없었다. 오직 배고픔과 추위에
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기쁨뿐이었다. 생존본능이 모성애를 누른 것이다.
누가그녀에게 악귀의 웃음을 가르쳤는가? 그녀의 잘못이라곤 절개나 윤리보다 생존을 택
한 것뿐이다. 그녀를 살인자로 내몬 자는 누구인가? 꽃다운 새색시를 왜구에게 빼앗기고, 되
돌아온 그녀를 품어주지 못한 우리들이 아닌가? 약자를 보살피지 못한 내가 아닌가? 이순
신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미친 계집이로고. 형방! 저 계집은 자식을 잃고 실성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선
목욕부터 시키고 최의원에게 맡겨 치료토록 하라. 그 사이 행적은 정신이 돌아온 후에 묻도
록 하겠다." "하오나...
그는 형방을 쏘아보았다.
"형방! 설마 저 목침에 관심을 두는 건 아니렷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범행을 재현할 바
보는 없어. 아니 그런가?"
"그‥‥‥ 그렇습죠."
박초희가 끌려나간 후에도 관아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문지기가 황급히 달려와 아뢰었
다. "사또, 선전관이 어명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 이순신은 육방과 나졸들을 제 위치에 세
웠다. "속히 들게 하라."
입모를 쓰고 청색 도포를 입은 선전관 유용주 군졸 다섯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어명을 받으시오."
이순신은 뜰 아래로 걸어내려와서 돗자리 위에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유용주가 관교(사
령장)를 큰소리로 읽었다.
"정읍현감 이순신을 종사품 진도군수에 임명하노라."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이순신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사은숙배를 올렸다. 종육품에서 종사품으로 네 계단이
나 특진을 한 것이다
관교를 받은 이순신은 유용주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용주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
음을 확인한 후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우상께서는 안녕하신가?"
"여전하십시다. 나랏일에 눈코 뜰 새 없으시죠."
유성룡의 먼 조카뻘이 되는 유용주는 재작년에 무과에 급제한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었다.
일찍이 유성룡은 그를 신임해서, 이순신을 비롯한 변방의 장수들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는
심부름꾼으로 삼았다.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있을때도 서너 번 다녀간적이 있었다 꺽다리 유용주가 선전관이 되
어 관아로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은 작년 봄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유성룡의 온화한 얼굴
을 떠올렸다. 내게 뭔가 전할 말씀이 있으신 게구나.
"한양의 분위기는 어떤가? 역적들을 여전히 잡아들이고 있나?"
유용수는 꾸부정한 어깨를 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웬걸요. 요즈음은 주춤합니다. 저잣거리에 걸리던 역적들의 머리도 사라졌고, 우상 어른
도 이쯤에서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눈칩니다."
다행이군 정언신 대감이 귀양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서애 대감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안심이야.
"알았네. 잠시 나가 있게."
이순신은 유용주가 마당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서찰을 펼쳐 찬찬히 인기 시작했다.
여해 보게나.
반 년 만이군. 곧바로 답장 주지 못해 미안허이, 자네가 보낸 유자는 아껴두며 맛있게 먹
었네. 수고스럽게 뭘 그딴걸 자꾸보내나. 다음부턴 차라리 그곳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시나
몇수 지어 보내도록 하게 . 생각해보니, 건천동 시절 자네의 글솜씨를 얼핏 살핀 후론 아직
까지 자네와 마주 앉아 시를 읖은 적도 없네그려 . 다음에는 꼭 목멱산(남산) 기슭에라도 올
라 회포를 풀세. 자네의 배움이 깊다는 것은 나암(정언신의호) 대감으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정읍에서 조용히 지낸 것은 잘한 일이야. 솔직히 난 이번에도 자네가 상관들과 다툴까 걱
정이었네. 자네도 생각해보게. 십오년 동안 숱하게 변방을 떠돌았으면서도 겨우 종육품 현감
이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물론 그 모두가 자네 탓이라고 생각지는 않네. 하
지만 문신에게 문신의 도리가 있듯이, 장수에게도 그 나름의 관례가 있을 게야. 정도를 걷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난 자네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네. 큰 뜻을 위해 작은 일쯤은 눈감아주
는 처세도 한 번쯤 생각해보게나.
갑자기 진도군수로 임명을 받아 놀랐을 테지. 하지만 자넨 곧 전라좌수사로 옮겨갈 걸세.
한꺼번에 정삼품 수사로 임명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편법을 쓰는 것이네. 그 동안 전라좌수
사로 이유의, 원균, 유극량 등이 거론되었고 더러 임명도 해보았네만, 전하께서는 영 마음을
놓지 못하시네. 그래서 내 자네를 추천했지.
감회에 젖는 자네 얼굴이 손에 잡하는 듯허이. 그간의 고초를 내가 왜 모르겠나. 이제 과
거지사는 모두 잊고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도록 하게. 통신사들이 왜국에서 올린 글에 따르
자면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아. 그곳에서른 수많은 무사들이 거리 곳곳을 활보하고 있고,
조선으로 가자는 망령된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고 하네. 통신사들이 곧 돌아온다니 자세한
상황은 그때 다시 전해주겠네.
어머님의 건강은 어떠신가? 어린 시절, 요신을 따라 자네 집에 갔을 때 어머님께서 마침
팥죽을 끓여주셨다네.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몰라. 난 아직도 가끔씩 그 맛이 그립네.
균이 왔다고 하네. 허엽 대감의 셋째로 총명하기가 그지없지. 봉과의 추억도 더듬을 겸 심
심풀이로 시문을 가르치는데, 그 재미가 제법 쏠쏠해. 언제 기회가 나면 자네에게도 소개하
도록 하지. 그럼, 몸 건강히 잘 있게. 좌수영으로 곧 연락하겠네.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뒤로 젖혔으나 왈각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
다. 드디어 백의종군의 오명을 씻고 정삼품 당상관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분경(승진 운동)을 하지 않아서 좌천에 좌천을 거듭할 때도 있었고, 패장으로 몰려 백의종
군을 당한 적도 있었다. 참으로 참기 힘든 순간들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복구하고 싶을때도
많았다. 그러나 업위에는 그 법의 집행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돈이 있었으며, 제일 윗자리
에는 천명을 받은 군왕이 있었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벼슬을 탐내고 명성을 동경하며 , 어떤
자에게는 재물을, 어떤 자에게는 여자를 갖다바쳤다. 갑자기 종성부사 원균의 충고가 떠올랐
다.
"좋은 눈이오.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구려. 하지만 이만고는 군율을 지키는 장수보다 전
투에서 승리하는 장수가 되어야 하오, 알겠소?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복수의 칼을
갈지도 마시오. 누구도 전쟁에서 패한 장수를 감싸주지는 않는다오. 결코 타인에게 약점을
보이지 마시오. 스스로를 아끼시오. 인생은 돌이킬 수 없으며 목숨은 하나뿐이라오. 전쟁은
정치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 않소? 참이 곧 거짓이 되고 흑이 곧 백도 되고 황도 되는 정치
이기면 모든 것이 황금빛이지만 지고 나면 똥투성이로 변하는 정치 , 그러니 여러 가지 가
능성을 열어두도록 하시오. 그럼 이만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도 차츰 이해가
될 게요. 하하핫." 이순신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원균의 웃뜸을 지웠다.
원칙과 처세는 다르다. 원부사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다가 결국 원칙을 포기하라
고 권유했다 하지만 원부사의 생각은 틀렸다. 군율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어찌 목숨을 걸고
싸을 수 있단 말인가?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움직이는 군율이 하는 것
이다. 나는 결코 전쟁을 정치로 간주파지 않겠다. 이겼다고 모든 것을 황금으로 색칠하고,
졌다고 모든 것을 뒷간으로 돌리지 않겠다. 판단하고, 확인하고, 대비하겠다. 상황에 맞는 법
을 만들고, 그 법에 근거하여 군사들을 엄히 다스리겠다. 그리하여 꼭 이기는 전투를 하겠
다.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군사는 없다. 그럼에도 군사들이죽음을 무릅Tm고 적
진으로 돌진하는 것은 군율이 엄격하고 법과 제도가 빈틈없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투
에 임하기 전에 상벌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 시행에 착오가 없다면 백전백승을 거두게 마
련이다.
일몰과 함께 몰려들기 시작한 먹구름은 자정 무렵 기어이 비를 뿌렸다. 얼음알갱이가 섞
인 겨울비였다. 최중화는 곤바게 잠든 박초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체온이 제대로 돌아왔다. 응급 처방으로 당귀사역탕을 먹인 것이 효과가 있
었다 처음에는 오한이 끝없이 이어져 이불을 몇 겹이나 덮고도 추위를 호소했었다. 부르튼
손발과 퍼렇게 멍이 든 허리를 살피건대 적어도 열흘은 들판에서 지샜음이 분명했다. 산후
조리를 해야 할 시기에 꽁꽁 언 몸으로 돌아다녔으니 병이 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혈허
증(빈혈 증상)과 심하지결(명치가 답답하고 물체가 걸린 듯 가득 찬 느낌)을 호소하기에 ,
우선 침으로 상초(횡경막 위에서 어깨까지)에 막힌 혈맥을 풀고 반하와 인삼, 황금들 곁들여
반하사임탕을 달여먹였다. 정신을 슥습하기보다 몸을 보양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물탕(여
인네의 혈허를 돕는 보약)이나 당귀보혈탕(사물탕과 비슷한 종류의 보약)을 한 제 이상 먹
인 후에라야 본격적인 치료를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의원 계신가?"
방문을 여니 우의를 걸친 이순신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아니, 사또! 어서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최중화는 버선발로 달려나가서 이순신을 맞아들였다. 이순신은 우의를 벗고 박초희가 잠
든 건넌방을 힐끗 살피더니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중화는 뒤를 따르면서 이순신의 걸
음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이순신은 왼쪽 다리의 신경통 때문에 벌써 일 년이 넘도록 침을
맞고있었다. 날이 습하거나 눈비가 오는 날에는 통증이 심해서 쩔뚝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심하지 않은 듯 발걸음이 가볍고 힘이 넘쳤다.
방으로 들어선 이순신은 갓을 벗고 솜바지와 직령포를 풀어헤친후, 다리속곳만 입은 채 천
장을 바라보며 똑바로 드러누웠다. 시커멓고 꺼칠꺼칠한 왼쪽 허벅지살다 드러났다.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사또." 최중화는 머리맡에 뜸과 침구를 가지런히 놓았다.
"고맙네." 이순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최중화는 허옇게 새기 시작한 이순신의 머리카락
과 깡마른 볼, 각진 턱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살폈다. 병오년(1546년)에 태어난 최중화는 이
순신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러나 이순신이 최중화보다 적어도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욱신거리는군. 내일 새벽에 길을 나서야 하는데 걱정일세."
최중화는 먼저 양 무릎 아래 족삼리에 뜸을 놓았다. 막혀있는 혈맥을 풀면서 사지의 기운
을 소통시키기 위해서였다. 횐 연기와 함께 씁씁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올해 들어서
는 근육통과 함께 관절통까지 생겼다. 다리를 구부렸다가 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도 있었
다. 오두탕을 먹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뜸을 놓은 후, 최중화는 익숙하게 중침을 하초(배꼽 아래)와 손등에 놓기 시작했다. 이순
신은 선잠에라도 빠졌는지 미동도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심해졌다 최중화는 이마에 맺힌 땀
을 둠쳤다. "박초희는 어떤가?"
이순신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그것이 궁금해서 오신 겁니까? 최중화는 입가에 맺힌 웃
음을 지우며 딱딱 끊어서 답했다.
"환시, 환청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분간하지 못하며, 이곳의 나
와 저곳의 나를 동시에 한몸으로 생각합니다. 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불규칙하게 오르내
리고, 혈의 흐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충분히 다스린 다음 시호가용골모려탕이나 계지
가용골모려탕으로 그 정신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한 서너 달 치료하면 차도가 있으리
라고봅니다만‥‥‥‥
이순신이 그의 말을 잘랐다.
"최의원도 박초희가 아기를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발목의 침을 뽑던 최중화의 오른손이 움찔 떨렸다.
이순신은 일 년을 넘게 치료받으면서 단 한 번도 관아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꿀먹은 벙
어리처럼 침을 맞고 증상에 대해 몇 마디 물은후 돌아갈 뿐이 었다
"글, 글쎄요‥‥‥‥
이순신은 눈을 감은 채 판결을 내리듯이 말했다
"나는 박초희가 진범이라고 생각하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아기의 목을 쏘르고
돌로 쳐죽인 것이 분명해. 낮에 그녀가 목침을 들고 벌인 일은 사실일 것이야. 검증할 필요
도 없지." "사또! 하오면?"
"왜 내가 그녀를 하옥시키지 않고 최의원에게 맡겼는가를 묻고 싶겠지 그래, 궁금할 거야.
그녀에게 벌을 주는 건 너무나도 간단해. 헌데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들은 어떻게 벌하지?
그녀를 겨울 들판으로 내몰고, 그녀의 손에 돌을 쥐어준 살인자들 말이야. 박초희는 살고 싶
었던 게야. 처음에는 자기도 살고 아기도 사는 길을 찾았을 걸세. 주막을 떠난 것도 그 때문
이겠지 헌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둘 다 죽든지 아기만 죽든지, 양자택일의 순간이
찾아온 거야. 최의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 나라면, 글쎄, 어떤 길을 택채도 아기는
죽는 거니까 내 살 길을 도모하겠네‥‥‥ 이런 생각들이 지나갔다네. 내겐 좀더 정리할 시
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최의원에게 그녀를 잠시 맡긴 거야."
최중화는 침을 다 뽑은 후, 부엌으로 나가 따뜻한 물과 수건을 내왔다. 그는 아직까지 가
정을 꾸리지 못했다. 못다 이룬 꿈 때문이었다. 그의 희망은 임금을 직접 치료싸는 내의원와
당상의였다. 지금 그 자리는 함께 동문수학한 동갑내기 허준이 맡고 있다. 스승인 양예수가
최중화 대신 허준을 어의로 추천했던 것이다. 최중화는 대궐을 드나드는 허준의 모습을 떠
올리며 아침마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비록 그에게 뒤졌지만 언젠가는 꼭 그를 능가하는
명의가 되키라.
이순신은 밤낮 없이 공부에 매진하는 최중화를 아꼈다 그에게서 운명의 불춤에 호되게 당
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자의 쓸쓸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뒤쳐진 길을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득히 앓서가던 상대의 됫모습마저 보이지 않을 때, 그때부터
는 오직 자신과의 싸움만이 남는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이대로 패배를 자인할 수 없
다는 단 하나의 자존심만이 자멸의 나락으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이곳을 떠나면 사나흘 안에 새 현감이 올 걸세. 그때 다시 박초희가 문초를 받는다
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워. 친족살인은 극형이지. 여보시게 , 최의원!"
"예!"
최중화는 뜨거운 물에 수건을 담갔다가 이순신의 허벅지를 덮었다. 이순신은 고통을 참으
며 말을 이었다.
"나는 박초희를 살리고 싶네. 누가 그녀를 벌할 수 있단 말인가? 영혼이 너무 맑아서 이
런 일이 생긴 게야. 난 그녀를 두고 떠날 수가없네. 그러니 최의원이 날 좀 도와줘 !"
최중화는 수건을 내려놓고 이순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죄인을 탈출시키자는 겁니까? 그러다가 잡히면 사또의 앞날은 사라지는 겁니다. 그녀의
처지가 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또께서 참견할 일이 아니지요. 사또에게는 사또의 길이
있고, 박초희에게는 또 그녀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사또, 무릇 연민이란 감정의 낭비일 따
름이지요. 이순신 역시 최중화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연민이 아니네. 박초희는 자네와 내가 훗날 맞닥뜨릴 수도 있는 절망의 얼굴이야.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위로해주지 않을 때 우리도 박초희처럼 되지 않을까?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삶을 부여잡지 않을까?
이윽고 치중화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순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봄바지와 직령포를 입었다.
"지금 박초희를 데리고 가겠네. 최의원은 박초희가 달아났다고 사나흘 후 관아에 알리도
록 하게. 그리고 박초희에게 필요한 약을 지어줬으면 하네 "
"이 장대비를 맞으며 그녀를 데리고 가시겠다는 겁니까?"
"야반도주하기 엔 좋은 날씨야."
이순신이 희미하게 미소를 삼켰다
두 사람은 건넌방으또 자리를 옮겼다. 인기척에도 박초희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이순신은
허리를 약간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갈라지고 뺨과 목이 멍투성이였지만
참으로 고운 얼굴이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여인이여!
그대가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두지는 않겠소. 그대가 짊어진 그상처들을 말끔히 씻을
수 있도록 내 도와주리다. 안심하오, 내내 마음놓으시오.
최중화는 박초희가 입을 우의와 먹을 음식을 챙겨왔다. 이순신이 어두컴컴한 거리를 향해
짧게 내뱉었다. "날발!"
한 사내가 바람처럼 어둠을 뚫고 마루 위로 쓰윽 올라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
가 박초희를 가볍게 들쳐업었다. 날발은 꾸벅 이순신에게 목례를 한 후 순식간에 어둠 속으
로 사라졌다. 약에 취한 박초희는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고맙네. 새벽에 약을 찾으러 사람을 보내겠네, 수고스럽게 관아로 나오진 말게 여기서 작
별인사를 하세. 그 동안 최의원 덕분에 다리가 많이 좋아졌어. 잊지 않겠네. 더욱 정진해서
꼭 어의가 되시게."최중화는 그가 내민 손을 힘껏 쥐었다. 차고 단단한 손이었다
"몸조심하십시오."
관아로 돌아가는 이순신의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웠다.
연민은 감정의 낭비일 뿐이다?
누구에게 물어도 최중화처럼 답하리라. 하지만 이순신은 이미 박초희를 빼돌렸고, 그 책임
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그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만날 때마다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안으로 곪아서 짓물러 터지는 상처를 혼자 견디기란 너무나도 힘들
다. 그럴 때는 누군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고 축복이된다. 그 상처가 도덕과
법을 넘어선 곳까지 뻗쳐갈 때, 외로움과 고통은 몇 배로 커진다. 박초희는 그것을 견디지
곳해 아기를 죽이고 미쳐버린 것이다 그녀를 그냥 내버려두면 자살하거나 처형될 것이다.
설령 국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죽음이 그녀의 영혼을 덮치기 전에 재생의 길을 열어주
고 싶다. 갑자기 새벽에 뽑은 점괘가 떠올랐다.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얻는다? 박초희를 만나려고 그런 괘를 뽑았던 것일까?
박초희의 맑은 눈과 파르스름한 귀밑머리가 아른거렸다. 정읍현감이 된 후로 그는 아내인
방씨와 첩인 부안댁의 처소를 피했다 남솔의 짐까지 지고 있는 마당에 마음 편히 여편네를
품을 수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서책을 읽고 공무를 보았다. 전라
감영에서 순무사들이 오기라도 하면 어쩔 수 없이 관기를 불렀지만그의 눈에 드는 계집은
없었다. 그런데 박초희는 달랐다. 아직까지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으나 오래 전부터 가까
이에서 알고 지낸 사이같았다. 그녀의 불행이 곧 그의 불행으로 느껴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 연민 때문에 그녀를 빼돌린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제
대로 답을 채릴 수 없었다.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한시라도 빨리 오늘 일을 정리하고 싶었다. 붓을 들면 지금의
혼란스러움이 그나마 정리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도 잡히리라 그는 관아의 담을 끼고 달려
가서 훌쩍 후원의 담을 뛰어넘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붓을 들고 횐 여백을 메워나가고 있
4. 호걸천하
남을 사랑하되 친해지지 아니하거든 그 어짊을 반성하고, 남을 다스리되 다스려지지 아니
하거든 그 지혜를 반성하고, 남을 예로 대하되 답하지 아니하거든 그 공경하는 마음을 반성
하라 (맹자, 이루편)
신묘년(1591년) 2월 20일. 녹도만호 정운은 새벽부터 습사(활쏘기 연습)를 하기 위해 뒷산
활터로 갔다. 강한 해풍과 짙뜬 안개 때문에 호랑이가 그려진 솔(과녁)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양볼이 실룩거릴 때마다 입 주위에 더덕더덕 솟은 밤송이 수염이 춤을 추었다. 호흡
을 고르며 기를 단전에 모은 다음, 비정비팔(활을 쏠 때 두 발의 형세)로 사대에 섰다. 궁대
에서 세목박두(촉이 등근 화살)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왼손으로 줌통(활의 한가운데 쥐는
곳)을 잡고 천천히 활을 들어올렸다. 줌손(줌통을 쥔 왼손)이 명치에 이르자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바람이 되밀리면서 회오리를 쳤다. 일순간 솔 주위가 환하게 드러났다. 황급히 깍
지손(화살을 쥔 오른손)과 줌손에 힘을 실어 이마까지 활을 끌어을렸다. 서늘한 깍지손이 귀
에 닿았다. 허석지와 두 팔을 고정시킨 후깍지손을 확 비틀었다. 솔이 다시 안개 속에 묻혔
다. 적요.
다시 회오리바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좀처럼 밀려오지 않았다. 줌통을 쥔 왼손이
가늘게 떨렸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끙, 신음소리를 뱉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바
람이 불어닥쳤다. 두팔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하면서 깍지손이 춤을 추듯 하늘로 튕겼다. 시위
를 떠난 화살은 열 걸음쯤 날아가다가 코를 박고 떨어졌다.
"이 , 이런 ! 낙전이라니 ."
산을 내려오면서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곱 살에 활을 잡은후로 처음 당하는 일이
었다. 경오년(1570년) 무과에 합격할 때는서른 발을모두과녁에 맞추어서 친림한 임금의 칭찬
까지 받았던 그였다. 이순신 때문인가?
환도를 꺼내 닦으면서도 내내 얼굴을 펴지 않았다.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이 진도군수와
가리포첨사를 거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종육품 현감이었던 자가 하루아침에 정삼품 수사가 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접
한 순간부터 온종일 술만 마셨다. 이순신은 그보다 육 년이나 늦게 무과에 급제한 새까만
후배였다. 더구나 녹둔도 전투에서 여진족에게 패해 백의종군까지 당한 위인이 아닌가.
눈을 감으니 지난 이십 년 세월이 화살처럼 스쳐갔다.
종구품 권관, 종육품 찰방, 종오품 판관을 거쳐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종사품 만호가 되기
까지, 왜추와의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한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슬이 올라가
지 않은 이유는 단하나, 조정에 연줄을 대지 못해서였다. 그가 세운 전공은 언제나 상관의몫
이었으며, 그는 그저 별 과오 없이 변방을 지키는 하급 장수에 불과했다. 모든 미련을 털고
깨끗하게 물러나려 했지만 왜구들이 이웃 마을을 노쟉질했다는 소리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조정의 눈먼 문신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자신에게 주어진 바다
를 굳건히 지켜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불운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은 능력도 없는 자가 하루아침에 수사 자리를 꿰어차는 것이다. 그 동안 내려온
수사들은 활을 두 순도 채 못 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한달전, 종성부사를 지낸 원균이 전라좌수사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운은 누구보
다도 기뻐했다. 원균이라면 두만강을 직접 건너가서 여진의 본거지인 시전부락을 싹쓸이했
던 조선 제일의 용장이 아닌가. 이제 전라좌수영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군대도 거
듭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원균은 좌수영으로 내려오기도 전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삭탈
관직을 당했다. 사간원이나 사헌부의 철부지 서생들이 하는 일이란 것이 고작 그따위였다.
왜 원균을 내쫓고 이순신을 보내는 것일까? 이순신은 남솔을 일삼아서 구설수에 올라 있
는 자가 아닌가? 탄핵을 당해야 한다면 응당 이순신이 먼저일 터이다. 그런데 원균은 좌수
영으로 오기도 전에 벼슬을 빼앗기고, 이순신은 쥐새끼마냥 잘도 피해 다니다가 순식간에
당상관이 되었구나. 한 나라의 장수를 이런 식으로 뽑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다.
정운은 아침을 먹은 후 곧바로 판옥선에 몸을 실었다. 부임하는 좌수사를 맞기 위해 좌수
영으로 모시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을 차고 뱃전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새벽에 낙전을 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낙전을 하면 망신살이
뻗친다고 했다. 해무(바다안개)가 걷히면서 수영에 늘어선 판옥선들이 모습을드러냈다. 낙안
과 방답, 사도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늦었네그려 ."
백발이 성성한 낙안군수 신호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전라좌수영은 보성, 낙안, 흥양, 순천, 광양등 다섯 고을과 방답, 사도, 여도, 발포, 녹도 등
다섯 포구를 아우르고 있었다. 5관 5포의 장수들 중에서 순천부사 권준이 서열상 제일 위였
지만, 그는 문관 출신이었기에 장수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낙안군수 신호가 늘
선임자 노릇을 했다 젊은날에 신호는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여진족과도 싸웠고 경상도, 전라
도, 강원도, 황해도 등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운은 신호를 형님처럼 모시며 따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곤란한 일을 격으셨다면서요?"
"뭐, 별일 아니었네. 신경쓰지 말게." 깡싸른 몸에 유난히 턱이 긴 신호는 죽도 란 별명답
게 모든일을 원칙대로 처리하는 장수였다.
지난 연말, 순천 출신의 강복구라는 군졸이 휴가를 신청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다. 신호는 진법훈련중임에도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훗날 강복구의 어머니가 멀
정하게 살아 있음이 밝혀졌다. 신호는 휘하 강졸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강복구의 목을 벴다.
"살아 있는 어머니를 죽었다고 했으므로 그 불효를 이루 말할 수 없고, 장수를 속이고 병
영을 이탈했으므로 그 불충이 하늘에 닿았다. 불충불효한 금수만도 못한 놈을 내 어찌 살려
둘 수 있겠는가." 강복구의 부모가 전라감영까지 찾아가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탄원했다.
친호는 감영에서 사흘이나 밤샘조사를 받았으나 군율을 앞세워 조목조목 맞선 끝에 무혐의
로 풀려났다. "다들 모였습니까?" 정운이 판옥선에 꽃혀 있는 깃발들을 살피며 물었다
"이곳으로들 나올 걸세. 수사께서 직접 군선을 살피시겠다는군 "
"예? 오자마자 감찰부터 하겠다는 겁니까? 도대체 우릴 뭘로 보고."
모처럼 갑옷틀 입고 투구를 쓴 신호의 얼굴도 밝지만은 않았다. 정운의 밤송이 수염이 좌
우로 요동을 쳤다.
"처음부터 기를 꺾어놓겠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형님!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턱수염을 쓸던 신호가 정운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말을 할 때는 먼저 그 뜻을 헤아려보라고 몇 번이나 일렀거늘‥.
정삼품 전라좌수사를 하룻강아지에 비유하다니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형니임 !"
정운은 눈물이라도 뚝뚝 떨굴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신호의 말투에는 찬서리가 더
했다.
"행여 수사 어른께 몹쓸 장난이라도 칠 요량이면 당장 그만두게. 아무리 우리보다 파이가
어리고 과거급제가 늦었다손 치더라토 어명으로 전라좌수사가 되었음을 명심해야 할 게야.
내 말뜻 알겠는가?"
"예, 형님 !"
정운의 고개가 힘없이 수그러졌다. 그러나 순순히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관5포의 장수들이 웅성대며 부두로 걸어나왔다. 그들의 발걸음 역시 느릿느릿 힘이 없었
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장수들은 순천부사 권준을 필두로 바다를 등진 채 열을 맞춰
늘어섰다.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산굽이를 돌았다. 장군기를 든 군졸이 앞서 달렸고, 응복(무장들의
평상복)을 입은 이순신이 그 뒤를 따랐다.
날렴한 군졸 일곱이 그를 호위했다.
"어서오십시오, 장군. 순천부사 권준입니다. "
말에서 내린 이순신믄 순천부사 권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다. 지난 겨울, 두 사람
은 전라감영에서 잠깐 스친 적이 있었다. 이순신은 남솔을 해명하기 위해서였고, 권준은 왜
구로부터 입은 피해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권준은 종삼품 부사였고, 이순신은 종육품
현감이었다.
이순신은 권준의 안내로 부두에 늘어선 오관의 수령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정운의 차례가
되었을 때, 이순신은 걸음을 멈추고 획 돌아섰다. 오포의 장수들과는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
다는 건가? 이순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정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판옥선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이순신은 말이 없었다. 권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끔
씩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였다. 열두 척의 배를 꼼꼼히 살핀 후 동헌으로 향했다.
수사가 부임하는 첫날 밤은 휘하 장수들과 먹고 마시며 인사를 트는 것이 좌수영의 오랜
관례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잔칫상을 물리며 핏대부터 올렸다.
"군선의 상태가 최악이오. 열홀간의 말미를 줄 테니 완전히 보수토록 하시오. 보름 후에도
이 꼴이라면 군율에 따라 곤장으로 다스리겠소"
좌우로 늘어선 5관5포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석 달 열흘을 줘도 될까말까 한 군선의 보수를 겨우 열흘 동안에 해치우라? 판옥선이 무
슨 곡괭이 자루인 줄 아나? 그들은 군선에 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좌수사를 한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석에있던 군관 나대용이 보다못해 나섰다.
"장군, 열흘은 무립니다. 아직 바람이 차고 소나무도 단단하지 않으니, 적어도 두 달 말미
는 주셔야 군선을 살필 수 있겠습니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겼을까 떡벌어진 어깨와 곧게 뻣은
등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낙안군수 신호가 턱수염을 쓸면써 거들었
다.
"그렇습니다. 군선의 보수가 시급한 문제이긴 합니다. 허나 시일을 촉박하게 잡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 보수를 해야 합니다. 재고하시지요."
진퇴양난이었다. 수사로서 처음 내린 군령을 되물릴 수도 없었고, 이치에 맞지 않은 군령
을 끝까지 고집할 수도 없었다. 군선을 보수하는 일이 그다지도 오래 걸린단 말인가? 한참
을 망설인 끝에 결국 나대용의 뜻을 따랐다.
"좋소. 한 달 보름 후에 다시 군선들을 시찰토록 하겠소. 만반의 준비를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
기회를 엿보던 정운이 헛기침을 두어 번 쏟았다.
"장군, 녹도만호 정운이오이다. 녹둔도에서 장군이 거둔 승첩은 잘알고 있소이다. "
승첩? 이놈이 !
이순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운은 고개를 숙여 이순신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또한 장군의 무예가 출중하시다는 소문도 들었소이다. 저희들에게 그 솜씨를 조금이나마
보여주실 수 없겠소이까?"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머금은 정운의 모습은 지나치게 비굴해 보였다. 낙안군수 신호의
눈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곧 화약이라도 폭발할 분위기였다. 이순신이 선선히 승낙했다.
"좋소. 보아하니 정만호도 왜나 무예에 능한 것 같소만, 활이라면 나도 웬만큼은 다를 줄
아오. 두어 순 쏘아서 자웅을 겨루는 게 어떻겠소?"
됐다, 미끼를 물었어! 정운의 표정이 한여름 뙤약볕처럼 환해졌다.
"그럼, 감히 청하겠소이다. "
정운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동헌을 빠져나갔다. 권준과 신호는 걱정스런 얼굴로 어깨를 서
로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은 은근히 이 대결을 즐기는 눈치였다. 좌수사의 실력
을 가늠하게 되었으니 손해볼 것이 없었다.
정문을 나써서 담벼락을 끼고 왼쪽으로 걷다가 가파른 언덕을 을랐다. 좌수영의 장졸들을
훈련시키는 넓은 활터가 나왔다.
정운은 날랜 순졸 둘을 뽑아 개자리 (화살의 적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과녁 앞에 판웅
덩이)로 들여보냈다. 바탕(사대에서 과녁까지의 거리)은 백오십 보가 족히 넘었다.
"화살은 무얼 쓸 텐가?'
신호가 정운에게 물었다.
"육량전이 어떻겠습니까?"
"뭣이 , 육량전?"
육량전은 싸리, 대나무, 쇠, 힘줄, 깃, 도피, 풀등 일곱가지 재료로 만든 것인데, 그 무게가
여섯 냥이나 나가는 무거운 화살이었다. 습사에서는 유엽전이나 가는 화살인 세전을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정운은 난데없이 전투용 쇠화살인 육량전을 들먹인 것이다.
"그렇다면 활은?"
정운이 웃으며 지체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정량궁이죠."
정량궁은 길이가 다섯 자 다섯 치짜 되고 무게가 백근이 넘는 강궁이었다. 발사 후의 반
동이 너무 심해서 평범한 사내는 앞으로 달려나가며 그 힘을 업어야지만 쏠 수 있었다. 그
러므로 정량궁을 제자리에서서 쏘는 사람은 명궁 중에서도 명궁이었다. 신호가 다시 물었다
"바탕이 너무 멀지 않은가? 정량궁을 사용해서 육량전 쏠 때 과녁은 백 보 이내로 주네.
헌데 지금 저 바탕은 백오십 보가 넘어."
이순신은 신호의 뒤에 서서 물끄러미 과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순신의 표정에서 난처함
을 읽어낸 정운은 활터의 장졸들이 모두 들을수 있도록 큰소리로 말했다.
"명궁이신 수사께서 겨우 백 보 이내의 과녁에다가 화살을 쏘실 수야 있겠소이까? 적어도
저 장도는 되어야죠. 무사 어른! 관중(과녁을 맞추는 것)은 알과녁에 맞는 것만 셈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알과녁은 과녁의 한복판에 붉은 색을 칠한 홍심을 뜻했다. 이순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
였다
"한 순씩 번갈아서 각자 한 획(쉰 발)을 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좋도록 하시오."
궁대에 육량전을 꽃고 정량궁을 준비하는 군사들의 손졸림이 분주했다. 쉴새없이 역풍이
불어왔다. 흙바람은 앞이 훤히 트인 평사(사대와 과녁의 높이가 같은 활터)를 가로질러 장졸
들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미친 짓이야!
신호는 사대로 나가는 정운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육량전은 팔과 등에 심각한 충격을 주기 때문에 세 발씩 나누어 쏘는 것이 기본이고, 한
선에 열두 발 이상은 쏘지 않았다. 그런데 쉰 발을 쏘겠다니‥‥. 서른 발도 쏘기 전에 인대
가 늘어나고 어깨 근육이 파열될 것이다.
정운은 사대에서 길게 심호흡을 한후 횐죽치참수리깃이 달린 육량전을 시위에 걸었다. 그
리고 태산을 밀듯이 줌통을 밀었다. 새벽에 범했던 실수를 상기하며 허벅지와 두 팔을 고정
시켜 시위를 당겼다. 앞가슴을 확 편 후 화살을 쥔 깍지손을 가볍게 놓았다.
휘이 익
육량전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관중이오!"
개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군졸이 고전기 (화살의 명중 여부를 알려주는 깃발)를 흔들었다.
여기 저기서 탄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정운은 다시 궁대에서 육량전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첫 순 다섯 발을 모두 홍심에 명중시켰다.
이제 이순신의 차례였다.
이순신은 사대로 나서며 정량궁의 활시위를 두어 차례 당겨보았다. 야윈 뺨과 웅크린 어
깨 때문에 정량궁이 더 크고 길어 보였다. 사대에 서서 주변 풍경을 찬찬히 훑어본 후, 오른
손 약지와 중지를 들어 바람의 흐름을 살폈다.
선관지형에 주찰풍세라. 막막강궁(센 활)을 쥐고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구나.
신호는 사대에 선 이순신의 남다른 여유로움을 눈여겨보았다. 강궁을 쏠 때에는 바람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하는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앞가슴을 완전히 펴니 정량궁이 부러질듯 휘청거렸다. 첫 번째
화살이 퐈녁을 향해 날아갔다.
"넘었소!"
개자리의 군졸은 고전기를 흔드는 대신 화살이 과녁을 지나쳤음을 알렸다. 비록 관중이
되진 못했지만, 장졸들은 좌수사가 쏜 활이 이백 보를 넘게 날아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힘에서는 결코 녹도만호 정운에게 밀리지 않는 것이다. 이순신은 다시 오른손을 들어 바람
의 흐름을 살핀 파음 두 번째 화살을 뽑아들었다.
"뒤났소(화살이 줌손의 뒤쪽에 떨어짐) !"
이번에는 화살이 과녁의 왼편에 떨어졌다. 이순신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바람의 흐름을
다시 읽고 세 번째 화살을 쐈다.
"관중이오!"
개자리의 군졸이 신나게 고전기를 흔들었다. 이순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머지 두
발을 모두 홍심에 꽃은 후 차대에서 물러났다. 이순신은 땀을 닦거나 물을 마시지 않고 가
만히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화살들이 날아간 방향과 시위를 당길 때의 자세를 돌이켜
보는 듯했다. 개자리의 군졸들이 과녁에 꽃힌 화살들을 노루발(화살을 뽑는 기구)로 뽑는 동
안 이순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정운이 나섰다.
맞바람이 강하쎄 불어왔다. 바람이 더 강해지기 전에 화살을 쏘려는 듯 서둘러 시위를 당
겼다.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 위태롭긴 했지만 다섯 발의 화살은 이번에도 모두 홍심에 꽃혔
다. 정운은 밤송이 같은입을 벌리고 허허허 웃어제꼈다.
이순신이 다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사대로 나섰다. 첫 발은 과녁을 넘었고, 두 번째 화살
은 과녁의 오른쪽에 떨어졌다. 나머지 세 발은 처음 쏜 것처럼 모두 홍심에 꽃혔다
이렇게 네 순을 도는 동안, 정운은 뒤난 것 하나를 빼고 열아홉 발을 관중시켰고 이순신은
고작 열두 발에 머물렀다. 이대로 나간다면 정운이 열다섯 발 이상을 앞선다. 숭리를 예감한
정운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졌고, 다소곳이 차례를 기다리는 이순신의 묵상도 조금씩
길어졌다.
다섯 번째 순을 돌기 위해 사대로 나저는 정운을 신호가 붙들었다.
"서두르지 말게. 오른쪽 어깨가 빨리 열리고 줌손이 많이 흔들려. 만작(활을 쏘기 위해 시
위를 최대한 당긴 상태)에서는 회목(손목)을 고정시키도록 하게 욕심을 버리고 무아로 빠져
들어야 해. 알겠나?"
정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형니임 , 걱정 마십시오. 이 아우, 아직 끄떡 없습니다. "
사대에 섰을 때 갑자기 구름이 해를 가렸다. 주위가 컴컴해지고 빗방울이 바람에 실려 흩
날렸다. 정운은 궁대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시위에 걸었다. 앞서 쏜 화살들과는 달리 흰죽지
참수리깃이 구겨져 있었다. 물을 끓여서 증기를 쏘이면 깃이 감쪽같이 세워질 터이지만 그
럴 시간이 없었다. 소나기라도 퍼붓기 시작하면 구겨진 깃이 화살의 방향을 완전히 흐트러
뜨릴지도 몰랐다. 중지와 검지로 부지런히 깃을 쓸어내린 후 다시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
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만작에 이르렀을 때 줌통을 잡은 왼쪽 손목이 뒤로 꺾였다. 그
와 동시에 줌팔이 붕어죽(활을쥔 왼팔의 팔꿈치 안쪽이 하늘을 향한모양)으로 바꿔었다.
"코를 박았소!"
화살은 오십 보도 채 날아가지 앉고 땅에 박혔다. 주위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이런, 개, 개 같은‥‥‥‥
정운은 욕설을 뱉으며 황급히 화살을 하나 더 뽑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위를
당기는 왼손이 다시 꺾였다. 왼팔이 붕어죽으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정량궁이 발 아래 떨어
지고 육량전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윽!"
정운이 왼팔을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목과 팔꿈치를 삐고 어깨 근육이 파열되었
으며 인대가 늘어난 것이다. 정운의 양볼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신호가 황급히 달려나갔
다.
"어서어서 의원에게 보이게 !"
나대용이 정운을 업고 그 자리를 떴다.
휘이익 .
쓰러진 정운을 겹겹이 에워싸고 왁자지껄하던 군졸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순신이 사대에 서 있었다. 정운이 다쳤으니 승부는 이미 끝이 났다. 그런데도 이
순신은 계속 육량전을 쏘고 있었다. 신호는 사대로 가서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임 첫날
부터 수사의 말에 부목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순간 권준이 신호의 손목을 가만히 붙
들었다
"잠간만!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아요? 이수사는 마치 이런 일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조금
도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고 있어요. 정만호처럼 덜렁대지도 않고 바람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이 ."
신호는 걸음을 멈추고 사대에 서 있는 이순신을 바파보았다.
"관중이오!"
"관중이오!"
"관중이오!"
"관중이오!"
"관중이오!"
다섯 발이 모두 알과녁에 꽃혔다. 고전기를 흔드는 군졸의 목소리에 흥이 더했다. 새 수사
의 활솜씨에 넋을 빼앗긴 장졸들어 일제히 우레와도 같은 함성을 쏟아부었다. 이순신은 아
무런 응대도 없이 정운이 차고 있던 궁대를 주워 허리에 마저 둘렀다. 그리고 육량전 스물
다섯 발을 반으로 갈라 두 궁대에 나란히 꽃았다. 그는 비바람도 구경꾼도 관심 밖이라는
듯, 다시 사대에 서서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발 중에서 열일곱 발이 흥심에 들
어갔다. 쉰 발 중에서 서른네발을 관중시킨 것이다
"물 한 잔만 다오!"
한 획을 쏜 이순신은 그제서야 물을 청하고 의자에 앉았다. 신호를 비롯한 장수들과 군졸
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참으로 명궁이시옵니다. 장군!" 권준이 운을 뗐다.
"명궁이시옵니다, 장군!"
장졸들도 저마다 찬탄을 늘어놓았다. 이순신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장졸들을 한 사람씩
응시했다. 장수다운 장수를 모시게 된 것을 기뻐하는 눈망울들이었다.
천둥 번개가 쳤다. 빗방울이 삽시간에 굵어지더니 소나기로 변했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
었다.
"좌수영으로 돌아간다!"
권준의 명령에 따라 장졸들이 서둘러 활터를 뛰어내려갔다. 낙안군수 신호만이 뒤처리를
위해 몇몇 군사를 거느리고 남았다. 이순신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을 감고 자리를 지켰
다. 신호는 이순신이 비를 맞지 않도록 그 위에 군막을 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무리를 끝낸 신호가 돌아왔을 때도 이순신은 며전히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시지요."
대답이 없었다. 신호는 이순신의 얼굴을 곰곰이 살폈다. 이런!
황급히 군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순신의 두 뺨은 백짓장처럼 창백했고, 식은땀이 이마
에서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장군!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이순신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겨우 대답했다.
"오, 오금이 펴지지 않소. 엉치뼈가 끊, 끊어질 듯‥‥ 강궁을 쏘느라고 하체에 무리가 간
것이다."
"장군, 정신 차리십시오. 장군!"
신호는 이순신을 들쳐업고 좌수영을 향해 냅다 뛰었다. 끙끙, 이순신은 신호의 등에 얼굴
을 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육량전을 한 획이나 쏘았는데 몸이 성할 리가 없지. 뼈를 깎는 고통이었을 텐데, 장졸들이
활터를 떠날 때까지 참고 견디다니 무서운 사람이다. 이번에는 좌수사가 제대로 온 걸까?
헌데 이순신을 따라다니는 그 이상야릇한 소문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무능하고 겁많고 항
명을 밥먹듯이 하는 장수, 그러면서도 조정 대신들에게 아부해서 좌수사까지 오른 위인! 속
단하긴 아직 일러. 더 지켜볼 일이다.
술판은 해가 완전히 기운 후에야 시작되었다.
횃불을 든 군사들이 좌우로 늘어선 가운데 빗방울이 간간이 기왓장을 때렸다. 곱게 단장
한 기생들이 사이사이 앉아서 술시중을 들었다.
주색을 좋아하고 도박을 즐기는 흥양현감 배흥립은 벌써부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기생들
의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술고래로 유명한 사도첨사 김완은 제 옆에 앉은 기생을 아예
배홍립으로 밀어두고 연거푸 술잔만 비워댔다 왼팔에 부목을 댄 녹도만호 정운과 제대로 오
금을 펴지 못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마주 앉아 서로를 칭찬했다
"장군, 정말 대단하십니타. 소장, 활을 잡고 나서 오늘 처음 패했소다"
"무슨 소리 ! 내 어찌 정만호의 활솜씨를 따를 수가 있겠소? 그댄 정말 백발백중 명궁이
오."
순천부사 권준이 그들의 자화자찬을 방해했다. 그는 '샌님'이라는 별명답게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소생 휘하에도 활을 제법 잘 쏘는 군관이 있지요. 수사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치의 솜
씨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정운이 정색을 했다.
"그래요? 권부사께도 그런 숨겨둔 보물이 있었소이까? 어디 한 번봅시다. 무예가 뛰어나
면 수사께서 큰 상을 내리실 터이지만, 만약 그재주가 작고 보잘것없을 땐 권부사가 벌주로
탁주 한 동이를 마시는것이 어떻겠소?"
권준이 웃으며 답했다.
"좋지요. 소생이 추천한 군관의 활솜씨가 남다르다면 정만호 역시술 한 동이를 마시는 것
이 어떻겠소?"
"물론이오. 헌데 한 동이로는 양이 차지 않으니 세 동이로 합시다. "
융복을 입은 군관이 어둠을 뚫고 뜰로 나섰다. 목이 굵고 가슴이 두터운 사내의 왼손에는
어둠을 닳은 흑각궁이 들려 있었다.
기생 하나가 쇳소리를 냈다.
'어맛! 유, 육손이야!"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육손이와는 눈만 맞추어도 재수가 없는 법이다.
"변존서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육손이고 흑각궁을 사용하지요. 지금은 제 휘하의 궁수대
를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변군관! 그대의 솜씨를 보여드려라."
"예!"
변존서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효시(날아가면서 소리를 내쓴 화살)를 흑각궁에 걸었
다. 권준의 손짓에 따라 횃불을 든 군졸들이 담벼락까지 물러났다. 뜰은 두어 걸음 앞도 분
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권준이 웃으며 이순신에게 권했다.
"자, 던지시지요."
눈을 가리고 횃불도 없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물건을 맞추겠다는 것인가?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권준이 재차 독촉했다. 이순신은 잔칫상 위에 놓인 굴비 한 마리를 뜰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변존서가 어깨를 틀면서 화살을 쏘았다. 휴우우우웅, 화살은 어둠을 뚫고 날아가서
대들보에 박혔다. 권준이 천천히 대들보로 다가가서 화살을 뽑았다. 놀랍게도 굴비의 머리가
화살에 꿰어져 있었다.
"미,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정운이 벌떡 일어서며 고래를 흔들어댔다. 권준이 변존서와 귀엣말을 나누었다.
"목표물이 너무 커서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엽전 두 개를 동시에 던지시지요."
"내가 하겠소."
정운이 대청마루 끝으로 나섰다. 태조 이성계가 화살 하나로 날아가는 기러기 두 마리를
쏘아 떨어뜨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그때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이었
고 눈을 가리지도 않았다. 헌데 지금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한밤중이고, 게다가 궁수는 두눈
까지 가렸다.
"에 잇 !"
정운은 변존서의 등뒤로 엽전을 던졌다. 변존서는 몸을 한 바퀴 획굴린 다음 연거푸 화살
을 쏘았다 군졸들이 엽전의 텅 빈 중심을 꿰뚫은 화살 둘을 곧 찾아왔다. 명중이었다. 변존
서가 일어나서 목례를 캤다.
"대단해. 명궁 중에서도 명궁이로세."
이순신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변존서가 정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발 아래를 보십시오."
정운이 고개를 숙여 주위를 살폈다. 가슴에 화살을 맞은 쥐 한 마리가 섬돌 위에 널브러
져 있었다. 화살 셋을 순식간에 쏘아서 허공과 지상의 목표물을 맞춘 것이다. 정운은 내기에
서 졌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가 술동이를 오른팔로 끼고 마셔대는 동안, 이순신은 술을
권하며 변존서를 말석에 앉혔다 아까부터 이순신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맴돌고 있었
다.
"오랜만이구나. 실력이 많이 늘었어 ."
변존서도 역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권준이 끼여들었다.
"변군관과는 구면이십니까?"
"외가쪽 아우라오. 아산에서 한마을에 살았지요."
이순신이 건천동을 떠나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했을 때, 그곳에는 어머니 초계 변씨의 일
가붙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변존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일찍부터 장수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해서 아산을 떠날 즈음, 그의 장인 방진은 변존서
를 새로운 내제자로 받아들였다. 변존서는 방진에게서 삼 년 남짓궁술을 익힌 후 금강산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작년 봄 세상에 나와 식년무과에 거뜬히 합격한 것이다. 서울에서 훈련
원 봉사를 하는줄 알았는데 어느 틈에 순천까지 내려와서 권준의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
다. 해마다 지방의 군졸들을 가르치기 위해 훈련원의 장수들 중에서 무예가 출중한 이들을
가려 뽑는데 거기에 선발되었다고 한다.
"금강산에서는 누구로부터 배웠는가?"
"청호거사로부터 이옵니다. "
"청호거사? 그 유명한 맹인궁사 말인가? 덤벼드는 호랑이 일곱 마리를 단숨에 잡았다
는‥‥. 그가 금강산에 있단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
전주감영을 습격한 호랑이 일곱 마리를 한꺼번에 때려잡은 청호거사의 명성을 이순신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변존서가 청음이 뛰어나고, 두 눈을 가리고도 자유자재로 활을 쓰
며, 소리나는 화살을 사용하는 것도 맹인인 청호거사의 영향이 컸다. 이순신은 변존서의 손
을 맞잡으며 그 무예의 뛰어남을 거듭 칭찬했다.
지도만호 송희립이 뚱뚱한 몸을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화가 치밀수록 아랫배가 튀어나오
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인 그의 별명은 '복어' 였다.
"장군, 소인의 재주도 보아주십시오."
송희립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뒤뜰로 사라졌다. 권준이 이순신에게 술을 권했다.
"송희립은 타고난 독전가입니다. 형 대림, 아우 여립과 함께 북을 치면 십 리 밖의 적들도
두려움에 떨죠. 격군(노젓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북소리 만한 게 없습니다. 북소
리를 따르다보면 고통도 두려움도 모두 잊으니까요."
송희립 삼형제가 용고(군악용 북)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무명천을 질빵으로 삼아 북을
허리에 받쳤다. 새로운 구경꺼리를 만난 기생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먼저 송희림
이 왼손으로 가볍게 북을 쳤다. 그러자 대립과 여립이 함께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는 안개가 숲을 감싸듯이 낮고 느린 소리가 울려나왔다. 북을치는 순간보다 그 북이 울려나
가는 시간이 더 길고 장중했다. 북소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송희립이 반박자 빨리
오리를 이끌었고, 대립이 힘있게 제자리를 지키며 리듬을 유지했으며, 여립이 잰걸음을 뛰듯
이 여운을 조절했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면서 소리는모두 여섯 개로 나누어졌다. 하늘,
땅, 산, 바다, 사람, 짐승이 내는 소리를 닮은 여섯 개의 울림은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고 흩어
졌다가도 다시 모여들었다. 송희립의 양손지 차츰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깨를 넘고 머리를
지나서 허공을 찌를 듯이 솟구친 북채가 절벽어서 떨어지듯 북을 두드렸다 심장이 쿵쿵쿵쿵
뛰었다. 바다가 산을 삼키고 하늘이 땅을 덮는 소리였다. 송희립이 고함을 내질렀다.
"비이!" 북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북이 동시에 둥둥둥둥 사람들의 가슴으로
차고들었다. 권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쾌속으로 적선에 접근할 때 치는 거랍니다"
삼형제의 팔이 앞뒤로 사정없이 뛰놀았다. 송희립이 더 큰소리로 외쳤다.
"파 !"
"적선과 부딪치기 직전에 치는 거지요. 두려움을 없애고 최고 속력을 내기 위함입니다. "
북소리가 여섯 갈래로 흐트러졌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빨리 삼키는 바람에 북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점점 커졌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 소리는 세상의 중심을 뚫고도 남음이 있
었다. "휴우 !"
송희립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북소리를 늦추었다. 일순 세상이 평화로워지더니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독전 시범을 마친 송희립 삼형제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냈다. 이순신은 손수 그
들에게 술을 따랐다 뚱뚱한 희립은 낄낄 웃으며 두 잔이나 받아 마셨고, 키가 큰 대립은 맏
형답게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으며, 막내 여립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낙안군수 신호가 장검을 들고 횐 수염을 쓸면서 뜰로 나섰다.
"흥이 올랐으니 이 몸도 춤이나 한판 추었으면 하오이다. "
군관 나대용이 장창을 들고 일어섰다.
"소장도 신군수를 돕겠습니다. "
송희립과 송대립이 용고를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낙안군수 신호가 장검을 들고 빙글빙글
맴을 돌았다. 나대용 역시 장창을 돌리며 그주위를 여덟 팔자로 휘저었다. 나대용의 춤은 민
첩하고 사위가 분명해서 잘 다듬어진 옥과 같았다. 두 다리는 땅바닥을 쓸듯이 유연했고, 두
칼은 천기를 품었다가 자르듯이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변화무창하게 흔들렸다 신호
의 검무는 나대용을 능가했다 숨을 탁탁 끊으며 팔을 내뻗을 때마다 검기가 상대의 눈을 찔
렀으며, 땅을 박차고 솟구쳐오를 때는 천년을 사는 학이 무릉을 찾아 떠나는 듯했다.
신호!
무진년(1568년)에 장수가 된 신호는 이순신과 원균보다도먼저 조산만호를 지냈다 이순신
은 병법에 밝고 신중하면서도 대쪽같이 원칙을 지키는 신호의 명성을 진작부터 듣고 있었
다. 신호는 소문보다도 더 크고 강한 사람이었다. 이순신에게는 좌수사가 없는 와중에서도
좌수영을 지키고 이끌어온 신호의 경험과 신중함이 필요했다.
고개를 돌려 옆게 앉은 순천부사 권준을 살폈다. 문신이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는 있
지만 각 장수들의 성격과 장단점을 세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무가 줄기라면 문
은 뿌리이며, 무가 표면이라면 문은 그 이면이 아니던가. 신호와 권준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
는다면 좌수영을 꾸려나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권준이 그의 마음을 헤아리듯 장수
들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전라좌수영에는 인재들이 많습니다. 훌륭한 수사틀 만나면 능히 천명 몫을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지요. 육손이 변존서의 활솜씨나 복어 송희립의 격고 솜씨도 뛰어나지만, 나대용의
장창 솜씨도 그에 뒤지지 않습니다. 특히 그는 군선을 만드는 데도 남다른 조예가 있어서
전라좌수영의 판옥선들을 좀더 강하고 빠르게 개량하고 있지요. 그외에도 광양현감 어영담
과 군관 이언량도 물건입니다.
저쪽에 앉아 있는 광양현감 어영담은 내년이 환갑이랍니다. 조상 대대로 어부였기에 남도
물길을 제 손바닥 보듯 하는 사람이지요. 뭐니뭐니 해도 저 사람의 장기는 끝없이 바다에
얽힌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젊은 날에는 아예 매설가(직업적 이야기꾼)로 나설까 고
민까지 했다더군요. 그 옆에 앉은 이언량은 어영담과는 반대로 지독한 독설가입니다. 피부가
유난히 희기 때문에 백돼지로 통하죠.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봉대를 이끌기에는 안성맞춤이죠. 두
사람은 사흘이 멀다 않고 싸운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둘은 서로의 능력
을 누구보다도 아끼니까요."
흥양현감 배흥립이 권준에게 시비를 걸었다.
"부사 영감, 젖비린내 나는 것들 뒤나 봐줘서 어쩌겠다는 겁니까? 씨팔, 제깟 놈들이 재주
를 피워봤자지. 어디 전쟁이 혈기로만 되는 거랍니까? 니미럴! 병법에도 이르기를 장수는
무릇 깃발로 전투를 지휘한다고 했소이다. 장수가 할 일은 상황을 파악하고 결단을 내려 신
속하게 군졸들을 이끄는 것이지, 칼이나 창을 잡고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외
다. 군졸들을 내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시공에 얽매이지 않고 신속 정확하
게 연통(연락)을 취할 수 있어야 하오. 지금처럼 천지사방이 깜깜할 때 군선들을 출동시키려
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이까? 깃발을 식별하기엔 주위가 너무 어둡고, 사람을 보내기엔 지형
이 험하고, 북소리도 들리지 않을정도로 먼 거리라면 말입니다 "
'욕쟁이'라는 별명답게 배흥립의 말투는 매우 거칠었다. 아무도 선뜻 그가 던진 문제에 답
을 내지 못했다. 배흥립은 유난히 짙은 눈썹을 위아래로 씰룩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답을 혼자만 알고 있는 아이처럼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앞니 사이로 새
어 나오는 웃음은 음흥하다 못해 두드러기가 돋을 정도였다.
"들어오너라!"
이윽고 배흥립이 명령을 내렸다. 군졸들이 길이가 열 척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방패
연을 들고 들어왔다. 태극이 가운데 위치하고 거대한 청룡 두 마리가 좌우에서 하늘로 솟구
치는 형상이었다.
"올려라!"
방패연의 네 귀퉁이에 불을 놓았다. 불길이 번지는 것과 동시에 방패연이 빠르게 하늘로
떠올랐다.
"저러다가 금방 타버릴 게 아닌가?"
광양현감 어영담이 물었다.
"천만에 ! 태극 주위를 물로 적시고 살에 철심을 넣었기 때문에 오늘 밤 내내 타고도 남
음이 있지요. 자, 슬슬 시작해볼까,"
배흥립은 천천히 뜰로 내려가서 얼레를 건네받았다. 얼레를 왼쪽옆구리로 획 당기자, 방패
연은 곤두박질치듯 수직으로 떨어졌고 굉음이 터져나왔다. 땅이 흔들리고 잔칫상 위의 그릇
들이 달그락꺼릴 정도였다. 흥양의 판옥선에서 배흥립의 신호에 따라 천자총통을 발사한 것
이다. 배흥립은 놀라 자빠진 사람들을 보며 낄낄댔다.
그는 다시 얼레를 들고 좌에서 우로 한일 자를 그었다. 그러자불 타는 연이 우에서 좌로
수평이동을 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날렵한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불붙은 방패연
하나가 더 하늘로 떠올랐다 뒤를 이어 방패연 두 개가 나타났고, 그 뒤를 꼬리연 세 개가
뒤따랐다. 일곱 개의 연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불춤을 추었다. 해안에서 나타난 여섯 개의
연이 배흥립의 방패연을 따라 뱀처럼 움직였다. 이윽고 일곱 개의 연이 일직선으로 나란히
섰다. 배흥립이 얼레를 가슴에 대고 원을 그리자 대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 한동안은
그 연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 , 북두칠성이네 !"
배흥립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던 눈밝은 기생 하나가 아는 체를 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일곱 개의 연은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빼어닳았고, 배흥립의 연이 국자손잡이의 끝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얼레를 군졸에게 넘겨주고 대청마루를 오르는 배흥립에게 기생들이 앞다투
어 달려들었다.
"오, 귀여운 것들!"
배흥림은 기생들의 볼을 차례차례 꼬집으며 즐거워했다. 이순신은 배흥립의 능청이 싫지
만은 않았다. 송희립 삼형제와 배흥립만 있다면 군선끼리 은밀히 연통을 취하는 데 어려움
이 없을 것이다.
배흥립의 흥을 깬 것은 사도첨사 김완이었다. 김완은 작고 날카로운 눈 때문에 박쥐로 통
했다. 술상을 들여을 때부터 잠자코 마신 탁주가 족히 열 동이는 넘어 보였다 엉거주춤 자
리에서 일어났으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상 위로 쓰러졌다. 상다리가 부러지면서 술과
음식이 제멋대로 뒤었다. 약주 사발에 코를 박은 김완은 니안한 기색도 없이 킬킬킬 웃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때까지도 허공에서 불타고 있는 일곱 개의 연을
가리켰다. 그의 입술이 둥글게 옴츠라드는가 싶더니 귀를 찢는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장군, 하늘을 보시옵소서 . 이제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겝니다. 킬킬킬."
김완은 털썩 주저앉아 탁주 한 동이를 마저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원을 그리고 떠 있
던 연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하더니, 일곱 개의 연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
어져버렸다. 얼레를 든 군졸들이 연을 모으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무엇인가가 연줄을 끊
은것이다.
"이, 이런 개자식 !"
배흥립이 김완에게 달뗘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두사람은 병오년(1546년)에 태어난 동갑
내기였다.
"킬, 킬킬킬."
김완은 입가로 허연 술을 흘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배흥립의 주먹이 김완의 콧잔등
을 후려갈겼다. 쿵 소리와 함께 김완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신호가 싸움을 말렸다.
"그만들 둬. 수사 어른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야?"
그때까지도 이순신은 영문을 모른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연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
었다. 권준이 웃으며 말했다.
"김첨사가 배현감의 연줄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
"연줄을 끊다니? 어떻게 말이오?"
권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송롤매 한 마리가 섬돌 위로 내려앉았다.
그 뒤를 이어 한마리의 송골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령을 기다리는 군졸들처럼 머리를 치
켜들고 꿈쩍도 하지않았다.
"바로 저것들 짓이지요. 김첨사가 휘파람으로 부리는 송골매입니다. 모두 열 마립죠."
"호오, 송골매를 부린다?"
"김첨사 집안은 매사냥꾼으로 이름이 높지요. 배현감이 지나치게 자랑을 늘어놓으니까 약
이 올랐던가 봅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이순신은 배흥립과 김완을 불러 공평하게 벌주로 술 두 동이씩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 다
음부터 주먹질을 하면 곧바로 옥에 가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사과하고
흔쾌히 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방금 전에 오갔던 주먹다짐을 깡그리 잊은 듯, 나란히앉아
서 기생들의 치맛자락에 머리를 처박았다. 김완이 짧고가는 휘파람을 불자 송골매들이 일제
히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순신은 장수들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금이 저리고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오
늘 밤만은 만취하고 싶었다.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은 진흙에 묻힌 옥돌이었다. 때를 얻지 못
해 웅크리고 있을 뿐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고도 남을 재목들인 것이다.
이제 나는 저들과 함께 술 마시고 사냥 다니고 전투를 벌이리라. 생사고락을 같이하리라.
나대용, 변존서, 송희립 삼형제, 이언량 등 젊은 장수들과는 부자의 정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들을 수족처럼 부릴수 있어야지만 좌수사의 위용이 서는 것이다. 권준과 신호는 늘 가까
이에 두고 조언을 구할 장수들이고, 배홍립과 김완에게는 척후와 연통을 맡기면 될 것이다.
정운은 범 같은 성미만 잘 다스린다면 능히 선봉장으로 쓸 수 있으리라.
독주를 들이켜며 밤하늘을 우러렀다. 녹둔도에서 전사한 임경번과 오형의 얼굴이 선명하
게 떠올랐다. 그들을 잃은 후로 사 년 내내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냈다. 만나는 장수마다 손
가락질을 해댔고 군졸들까지 뒤꽁무니에서 믿지 못할 장수라며 침을 뱉었다. 육진에서는 더
이상 장졸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었기에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출발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전라좌수영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곳까지도
녹둔도 패전의 풍문이 흘러내려와 있었지만, 어쨌든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은 우려 반 기대반
속에서 그를 맞아주었다. 모든 것은 그가 이제부터 하기 나름이었다. 유성룡 대감이 서찰에
함께 적어 보낸 삼략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전투중에 술이 한 통 들어오자 장수는 그것을 강에 쏟게 했어. 그리고 장졸들과 함께 그
물을 마셨다네 한 통의 술을 들이붓는다고 강이 술맛을 낼 리야 있겠는가? 그럼에도 장졸들
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웠지. 장수의 마음이 자신들에게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 감읍했기
때문이야. 여해, 자네도 부하들을 이처럼 대하도록 하게.
5. 어떤 기다림
판중추부사 신 이황은 삼가 재배하여 말씀 올리나이다 엎드려 생각하옵기를 도는 형상이
없고 천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 낙서가 나옴으로부터 성인이 그것으로 인하여 괘효를 지으
니 도가 비로소 천하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 착수할 것이며, 고훈
은 천만 가지니 어디로부터 들어갈 것입니까? 성학은 큰 단서가 있고, 심법은 지극한 요량
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만들고 해설로 가리켜 사람에게 입도의 문과 적덕의 기를 보
여주는것은 이 또한 후현들의 부득이한 일입니다. 하물며 인주의 일심은 만기가 말미암은
바요, 백책이 모이는 곳이요. 중욕이 호공하고 군아가 번갈아 찬진하는 곳입니다. 한번 태홀
해지고 방종이 계속되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번지는 것 같아서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황, 진성학십도차)
신묘년(1591년) 윤3월 30일.
한호는 아침 일찍 목멱산에 올라 목욕재계를 끝내고 돌아왔다. 정오가 될 때까지 정좌하
여 당시를 읽었고, 오후에는 장자를 뒤적거리며 소일했다. 윗목에 벌여놓은 문방사우 쪽으로
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호가 한양에 머물 때마다 시중을 드는 기생 애랑은 음식이며 과일을 내오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광해군에게 글을 써주기로 약조한 기일이 벌써 이틀이나 지났던 것이다. 오늘
도 광해군이 가노(집안의 하인)를 시켜 술과 음식을 보내왔지만 한호는 전혀 고마워하는 기
색이 아니었다. 애랑은 그가 저러다가 끌려가서 치도곤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새벽
부터 찾아와 섬돌 곁을 지키고 선 광해군의 가노는, 오늘까지 글이 나오지 않으면 뒷일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귀띔했다. 이래저래 애랑은 마음이 급했다.
한호는 아예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
다. 애랑은 급한 마음에 팔을 흔들어도 보고 새치 섞인 턱수염을 쥐기도 했지만, 그는 겨우
실눈을 뜨고 농담을 건넬뿐이었다
"어허! 사랑을 나누기엔 아직 이르지 않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렴 ."
애랑은 등을 보이며 돌아누운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조선 제일의 명필 석봉 한호.
명나파 조정에까지 명성을 떨쳤지만 아직 벼슬다운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벼슬 자
리에 연연하지 않는 괄괄한 성격 탓이었다.
팔도를 유람하면서 시 쓰고 술 마시는 것이 평생의 즐거움인 사내. 선조가 몇 번이나 예
조나 공조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번번이 거절했다 그런 한호가
딱 한 번 자신의 녹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계유년(1573년)에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등계달에게 행서로 이백의 시 몇 수를 써주고 극찬을 받은 직후였다.
"암행어사라면 한 번 생각해봅지요." 선조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암행어사가 그렇게 탐이 나느냐?" "암행어사는 산천을 즐기며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나
마 해볼 만한 자리옵니다. 신은 집돼지처럼 한양에 갇혀 평생을 썩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
선조는 한호에게 암행어사를 맡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졸지에 집돼
지 취급을 받은 대신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벼슬 대신 '목
구철저삼만' 이라고 새겨진 최상품 먹과 압록강변의 위원석으로 만든 팔괘연을 상으로 내렸
다. 먹과 벼루를 받은 한호는 정승 자리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명필의 이름을 얻은 한호도 이제 내년이면 천명을 안다는 쉰 살이
었다. 그는 손에 붓을 쥔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글씨를 썼다. 돈을 받고 쓴 글씨도 있었고,
계집을 받고 쓴 글씨도 있었으며, 어명을 받고 쓴 글씨도 있었다. 문도 있었고, 시도 있었으
며, 비문도 있었고, 행장도 있었다. 화룡점정의 마음으로 쓰기도 하고, 심심풀이 삼아 쓰기도
했다. 그 많은 글씨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한양에서 쓴
것보다 금강산이나 지리산을 떠돌며 쓴 것들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마지못해 쓴 것이 아니
라흥에 겨워 저절로 붓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한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후궁이나 대군, 정승이나 판서의 부탁으로 글씨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 봄에는 중전 박씨를 위해 열녀전을 해서로 적어 바쳤고, 가을에는 영의정 이산
해의 부탁을 받고 중용을 초서로 옮기기도 했다. 글씨를 얻은 이들은 팔도유람에 지친 그에
게 두둑한 노잣돈으로 답례했다. 광해군이 글씨를 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호가 궁중연회에서 솜씨를 자랑할 때도 광해군은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광해군이 싫었다. 발톱을 감춘 호랑이 , 이빨을 숨긴 독사. 광해군의 눈초리
는 상대의 가슴을 꿰뚫을만큼 위압적이었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으로 가득했
다.
만약 광해군이 용상에 오른다면 지금의 전하보다 열 배는 더 무서운 군왕이 되리라 한치
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신하들의 목을 죄리라.
조정의 여론은 광해군이 너무 차갑고 용의주도하다며 거리를 두는쪽과 군왕의 품격이 있
다며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쪽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령 전자의 입장을가진 신하라
고 하더라도 광해군의 매력으로부터 자유로을 수는 없었다. 혐오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광
해군은 죽음과 맞설 만큼 사내 다웠다
동인과 서인이 뜻을 모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것도 이런이유에서 였다. 우뚝 솟
은 바위를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갈고 다듬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광해군
의 매력에 눈이 멀어 선조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선조는 종종 경연관들에게 대군들의 품
성을 묻곤 했다. 경연관들은 비교적 솔직하게 각자의 의견을 개진했다. 대부분의 대군들이
서너 개의 장점과 한두 개의 단점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광해군은 오로지 장점뿐이었다
"요순의 자질이 보이십니다. "
"한무제보다 더 강하고 공명정대하십니다. "
"사서삼경에 두루 능하시면서도 매사에 조심하시고 겸손하시기가 잘 익은 나락과 같사옵
니다. "
선조 역시 광해군의 뛰어남을 알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대수롭지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앵무새처럼 광해군을 싸고돌자 문득 섭섭해졌다. 한 나라의 군왕인 자신도 그런
극찬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섭섭함은 곧 질투로 바뀌었고 질투는 분노가 되었다.
선조는 신하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건의하자마자 이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광
해군이 세자가 되면 임금과 세자가 더 자주 세인들의 입에 비교대상으로 오르내릴 것이다.
선조는 광해군을 될 수 있으면 멀리 두고 싶었다. 운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
로 책봉하더라도, 백성들이 광해군의 젊음에 눈이 멀지 않을 때까지 시간을 끌 작정 이었다.
선조는 함부로 세자 책봉을 건의한 책임을 엄하게 물었다 당근과 채찍을 바꾸어 쥔 군왕
앞에서 송강 정철은 덧에 걸린 새앙쥐 신세로 전락했다. 동인의 불만을 해소하고 서인의 힘
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철은 새로운 미인곡을 지을 겨를도 없
이 삭탈관직을 당했고 유성룡이 좌의정으로 옳겨 앉았다.
열흘 전, 한호는 선조에게 초서로 쓴 노자의 도덕경을 바치기 위해 입궐했었다. 선조는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산 후 지나가는 말로 광해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한
호는 선조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공자께서는, 여러 사람이 그를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하고, 여러 사람이 그를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선조는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고 더 많은 상을 내렸다.
한호는 광해군으로부터 부름을 받고도 사흘이나 칭병한 채 가지 않았다. 광해군이 아침
저녁으로 약을 보내왔기에 마지못해 글씨를 쓰기로 약조를 했지만, 광해군과의 만남은 끝내
피했다. 얼음 같은 눈동자에 갇히기 싫어서였다. 내시와 상궁 중에는 광해군의 사람도 적지
않으니 탑전에서 아뢴 말이 벌써 광해군의 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약값을 치르는 셈치고 허락은 했지만 역시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광해군으로부터 글
을 받은 후에는 불안감이 더했다. 그것은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낮익은 대목이었다.
나는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며, 성공하
는 자와 함께 하리라.
이 글은 삼군을 통솔한다면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는 애제자 자로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답이었다. 공자는 용감하고 무예가 뛰어난 장수보다 매사에 조심하고 적의 전술을 간파할
수 있는 장수를 원했다. 삼군을 통솔하는 장수네게는 훌륭하게 싸웠다는 평판보다 작은승리
가 더 중요하다.
광해군이 하필이면 왜 이 문장을 적어달라는 것일까?
광해군은 지금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조의 분노가 언제 그의 손발을 묶어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군왕의 마음을 헤아린 약삭빠른 무리들이 광해군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세자 책봉을 성급하게 거론한 신하들을 향한 문책이 아닐까? 승리를 얻어내지 못하는 용
기는 만용인 것이다. 지피지기하지 못한 자들이여, 조심하고 침잠하라. 도대체 이 글을누구
에게 주려는 것일까?
한호는 어둠이 방을가득 채우고 나서야 슬그머니 자리에서 실어나 윗목으로 갔다. 팔괘연
의 연당에 천천히 물을 따랐다. 어둠속에서도 그의 행동은 빈틈이 없었다. 한호는 다섯 살에
스승인 학산거사를 만났다. 스승은 일 년이 넘도록 붓을 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눈을 가린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을 갈게 했다. 눈을 감고서도 먹과 벼루의 위치를 알고
먹의 농담을 가늠하게 된후에야 비로소 붓을 쥘 수 있었다.
아, 이 냄새 !
한호는 깊고 그윽한 먹의 향기가 좋았다. 현란한 글씨보다 방안을 가만히 덮는 먹의 무심
을 닮고 싶었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팔괘연은 변화무창한 먹의 움직임을 대지의 품처럼 잘
도 감쌌다. 봉망(먹을 가는 곳)의 강도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오늘은 부드럽고 세련된
유호필보다 강하고 힘찬 강호필을 쓸 작정이었다. 광해군의 마음이라면 역시 강호필이 제격
이다. 가부좌를 튼 채 끝없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한호는 언제나 그의 손을 떠난 글씨들이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기원했다. 다행
히 이름을 얻은 덕에 글씨들이 불쏘시개로까지 떨어진 예는 없었지만, 그래도 젊은 날에 쓴
글씨 중몇 장이 여염집 벽지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글씨도 나름대로의 삶을 산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라고 하더라도 천차만별인 법이다. 세
상에 나오자마자 하루 만에 불타버리기도 하고, 궁궐의 대문에 걸려 자손 대대로 이어지기
도 한다. 무릇 글씨는 인간됨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분신인 그대들이여! 자존심을 지켜
라. 비천하게 사느니 차라리 극락왕생하라, 그대들에게는 그대들에게 합당한 시간과 공간이
있느니, 속인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거든 먼저 돌아누워라.
숨을 내뿜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종이를 펴서 가지런히 놓았다. 중봉(붓)을쥔
손의 움직임찌 빨라졌다. 일점일획을 찍을 때마다 붓끝에 힘이 넘쳐났다. 그의 시선은 여백
미 남아 있는 아래로만 향했다.
나는 없음에서 있음을 마련한다. 붓놀림 하나에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담아내려 한다. 나는
나의 먹과 벼루, 붓과 종이를 지배한다. 군왕이라도 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 나는 아무
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붓을 쥔 신이다.
신이 되어야 한다.
글씨를 모두 마친 후 비로소 불을 밝혔다. 바로 그때 남루한 도포차림의 사내가 방으로
성큼 들어왔다.
"석봉 어른, 이 밤에 불도 켜지 않고 무엇하고 계시는지요? 혹 밤일을 시작하신 게 아닐
까 하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
"단보 아닌가? 이게 얼사 만이야?"
그는 허균의 손을 반겨 잡았다
"한 삼 년 되었습죠? 둘째 형이 금강산 산신으로 속세를 떠났을 때 뵙고 처음이니까요."
"하곡(허봉의 호)이 귀천한 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는가? 그렇다면 난설헌이 세상을 버
린 지도 이 년이 가까웠구먼 그땐 몹쓸 돌림병에 걸려 문상도 못했다네 미안허이. 참, 악록
(허성의 호)은 어떤가? 부산포에 내리자마자 오랏줄에 묶여 의금부로 끌려왔다고 들었네
만‥‥‥‥
1월 29일, 통신사 일행은 부산포에 닿았다. 아홉 달 만의 귀국이었다. 험난한 뱃길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으나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풍신수길의 답서를 하루라도 빨리 조정에 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그들을 맞은 동래부사 고경명은 다짜고짜 서장관 허성과 수행
원 성천지를 포박하였다. 두 사람이 정여립과 내통하였으므로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린 것
이다. 죄인들이 의금부에 닿은 것은 2월 11일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문초가 이어졌다.
신문이 계속될수록 죄는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정여립을 비판하는 허성의 잡문이 여럿
발견되어 위관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정여립에게 칭찬받은 사람이 모두 역적이라면 남아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곧 누명을
벗고 복직되실 것입니다. "
"그래야지. 악록만한 인재가 어디 있다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역적으로 몰다니. 웃기는
세상이야!"
한호는 허성의 따뜻한 웃음을 떠올렸다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인 허봉이나 허균에 비해,
허성은 일의 앞뒤를 꼼꼼히 따지는 인물이었다.
"아하! 또 어둠을 벗삼아 글씨를 쓰고 계셨군요."
허균이 윗목으로 다가서며 아는 체를 했다. 한호는 허균의 거침없는 행동에서 하곡 허봉
의 그림자를 더듬었다.
계유년(1573년), 서른한 살의 한호는 이제 갓 스물세 살이 된 허봉을 조정에서 처음 만났
다. 천하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읖고 글씨를 쓰기로 이름이 높은 명나라의 문신
등계달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습제 권벽, 문봉 정유일, 서애 유성룡이 종사관으로 임명
되었으며, 한호가 수행원으로 뽑혔다. 그때 허봉은 약관의 나이로 태사가 되어 임금을 바로
곁에서 보필하고 있었다. 등계달은 수행원 한호의 글씨와 한림학사 허봉의 시가 뛰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로 한호와 허봉은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되었다. 여덟 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런 문제
도 되지 않았다. 허봉은 한호의 글씨를 왕희지에 비겼고, 한호는 허봉의 시를 이백과 왕유에
견주었다. 한호는 허봉을 위해 주역, 중용, 참동계, 황정평을 적어서 선물했고, 허봉은 갑술
년(1574년)에 명나라로갔을 때 한호를 위해 이백의 초당집을 직접 사가지고 왔다. 한호가 늦
게나마 시에 눈을 뜬 것도 허봉의 도움이 컸다. 함께 산천을 유람할 때면, 허봉은 호방함의
진면목을 보인다며 이백의 시를 줄줄 외워댔다. 허봉이 객사했을 때 한호는 종자기를 잃은
백아처럼 슬퍼했다. 그런데 오늘 허균을 보니 종자기가 생환한 느낌이었다. 아우가 총명하다
는 소리를 허봉으로부터 몇 차례 듣긴 했으나 이렇게 당당하고 거침없는 청년으로 자랐을
줄이야.
"대단하십니다. 형님의 칭찬이 과한 게 아니었군요. 필세가용이 뛰고 호랑이가 먹이를 덮
치는 듯하며 동명산과 고대산이 웅장함을 겨루는 것 같습니다. 해법(해서 쓰는 법)이 참으로
묘하군요. 안진경의 위며 자경 (왕희지의 자)의 아래요, 송설(조맹부의호)과 형산(문징명의
호)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전답을 몽땅 팔아서라도 사고 싶은 심정이에요."
"놀리지 말게."
풍이 센 것까지 똑같군. 한호의 마음이 밝자졌다.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며 성공하는 자와 함께 할 것이다! 옳은 말입
니다. 이 세상에는 대의를 품은 자들이 많군요. 광해군은 그중에서도 특출납죠. 미리미리 눈
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누가 압니까? 나중에 판서 자리 하나라도 던져줄지
." "어떻게 알았나?" 허균이 왼쪽 눈을 찡긋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밖에 광해군 댁 가노가 있길래 넘겨 짚었을 뿐입니다. 헌데 광해
군께서는 이렇게 멋진 글을 누구에게 선물할 작정 이신가요?"
"모르겠네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허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산해 대감 아니면 유성룡 대감일 것입니다. 군자는 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않으며, 소
인은 편당마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습니까? 동인들을 개백
정처럼 쳐죽이던 송강이 좇겨났으니 이제 조정은 두 정승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광해군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겠지요. 어릴 때부터 군왕을 꿈꿔온 광해
군이 아닙니까? 지금 같아서는 신성군이 세자가 될 것 같지만 변란이 일어나면 상황이 급변
할 터 ! 그댄 광해군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입니다. 길어야 일 년이지요. 일 년만 버티면
광해군이 권력과 영광을 한몸에 차지하겠군요."
한호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세자의 자리를 뒤흔들 만큼 큰변란이 일어난단 말인가?
"변란이라니? 무슨 변란이 터진단 겐가?"
허균은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쓸면서 딴전을 피웠다. 헛기침을 뱉으며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기도 했다. 술 청하는 버릇도 허봉과 같군.
한호는 급한 마음을 누르고 애랑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보낼 글씨를 내주고 주안상을 차
리도록 했다. 애랑은 한호가 광해군과의 약조를 지킨 것을 기뻐하며 상다리가 휠 정도로 푸
짐하게 상을 내왔다. 한호는 곁에 앉으려는 애랑을 내몰았다. 변란에 관한 이야기를 기생과
함께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균은 열흘을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술과 안주를 먹었
다. 한호는 허균의 행색을 찬찬히 살폈다.
"짚신을 여러 벌 꾸린 걸 보니 여행이라도 떠나려는가 보군."
허균이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운 후 답했다.
"꿈에 작은형님을 뵈었습니다. 변란이 나기 전에 금강산에 와서 한잔 하고 가라고 그러시
더군요. 한양을 떠나기 전에 석봉 어른을 찾아뵈라는 말씀도 하셨구요. 형님께 전할 말씀이
라도 있으십니까?"
한호가 웃으며 말했다.
"친구를 버리고 신선들의 땅에 가서 잘 먹고 잘 사느냐고 물어봐주게. 이태백과 술잔을
기울였는지도 궁금허이."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
허균이 소맷자락에서 서책을 한 권 꺼냈다.
"누이의 문집입니다. 생전에 누이는 석봉 어른께 가르침을 받은 걸 자랑스러워 했지요."
벌써 십 년도 지난 옛일이었다. 한호는 허봉을 따라서 그의 집에 갔다가 몇 차례 난설헌
에게 붓 쥐는 법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난설헌은 좀처럼 웃을 줄을 몰랐다. 하나를 가르치
면 열을 아는 신동이었지만, 그 딱딱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었다. 한호는 허균의 손을 굳게
잡았다. 조심하게. 자네의 형이나 누이처럼 단명해서는 안 돼 . 자네만이라도 오래오래 살아
서 재능을 꽃피우도록 하게.
"어서어서 출사하여 벼슬길로 나서야지? 자네 형은 그 나이에 이미 사관이었어 "
허균이 웃음을 그치지 않고 대답했다.
"석봉 어른 눈에는 소생이 벼슬에 환장한 놈으로 보이십니까? 이거, 실망이 큰뎁쇼. 저와
함께 생원이 된 이이첨이란 친구가 그러더군요. 하루 빨리 세상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에 오르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소생은 일찍이 팽택령(도잠)이 팔십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과 적선(이태백)이 임금에게 총애받는 귀족을 우습게
여긴 일을 사모해 왔습죠.
석봉 어른도 신선의 꿈을 꾸신다고 작은형으로부터 들었습니다만‥‥‥ 그새 마음이 변하
신 겝니까?' "허허허." 난형난제로세.
한호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티끌 같은 세상, 아등바등 일상에 갇혀 살 것이 아니라 새
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천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자던 허봉과의 약속이 기억났다.
"곧 쑥대밭이 될 조정에는 들어가서 뭣합니까?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
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고 했습니
다. 차라리 무예나 익혀 제 한 목숨 지키고 식솔과 함께 심심산중으로 숨는 것이 상책입죠."
"쑥대밭?" 허균이 낯빛을 고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월에 부산까지 큰형을 마중 나갔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협선을 빌려 대마도 쪽으로 십
리쯤 나갔다가 운 좋게 통신사 일행이 탄 판옥선을 만났지요. 고목처럼 마른 큰형이 이물
쪽에 서 있더군요. 물과 음식을 가린 탓에 몸이 부쩍 약해진 게죠. 큰형은 절 보자마자 반가
움을 나누는 것도 미루고 그곳 상황을 소상히 일러주었습니다. 왜인들이 내년 봄에 조선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군졸과 군량미의 징발도 끝이 났고,
지금은 풍파를 헤치고 바다를 건널 군선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더 자세한 걸 묻고
싶었지만, 판옥선이 항구에 닿자 마자 큰형이 오라를 받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지
만 변란이 일어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큰형이 누굽니까? 확실한 사실이 아니고는
입도 뻥긋 않는 양반이 아닙니까? 그러니 석봉 어른께서도 난을 피할 준비를 하십시오."
한호는 허균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매사에 신중한 허성이 변란을 걱정했다면 터
무니없는 추측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야 난이 미치겠느냐? 을묘왜변 때도 전라도와 경상도만 화를 입
었을 뿐이야. 설령 자네 말대로 을묘년보다 더많은 왜구가 노략질을 한다손 치더라도 경상
도와 전라도의 장수들이 물리칠 테지 ."
"하하하!" 허균이 갑자기 크게 웃으며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한호도 엉거
주춤 엉덩이를 들었다. 허균은 한호의 입장을 청산유수처럼 막힘 없이 논박했다
"이건 노략질이 아닙니다 전쟁이라구요. 한나라가 한나라를 삼키는 전쟁. 왜가 조선 팔도
를 차지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오는 겁니다. 왜군은 수십 년 동안의 전투로 단련된 강병이고
소중화를 자처하는 조선의 군졸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입죠. 전조왕씨(고려) 때는 공과 사, 귀
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남자라면 모두 병의 의무를 졌습죠. 재상의 아들이 창을 들고 서
얼, 노비들과 나란히 전쟁터로 나갔으니 백만 대군인들 두려웠겠습니까? 허나 지금 왜가 바
람처럼 건너와서 남도에 배를 부리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조선은 결코 승리할수 없습니다.
저들은 어린애 손목 비틀듯이 밀고 올 겁니다. 한양과 개성은 물론 평양까지 위협할지도 모
르는 일입죠. 세상이 온통 불바다로 변한다 이 말입니다‥‥‥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
상이 뒤집히는 것도 나쁘진 않습죠. 백 마디 말보다 단 한 번의 평험이 모든 걸바꿀 수 있
으니까요. 호된 맛을 봐야 정승, 판서들도 정신을 차릴 것이 아닙니까? 다만 폐허로 변할 금
수강산이 아까울 따름입니다. 여장을 꾸린 것도 마지막으로 명산대찰을 둘러보기 위함입니
다. 시흥을 불러일으켜 절구나 몇 수 건질까 합니다. 그럼 석봉 어른, 난리통에 목숨 부지
잘하십시오. 다음에 만나뵈올 때는 소생이 지은 졸시나 몇 편 초서로 옮겨주십시오. 이런!
손곡 선생님과 서소문 밖에서 만나기로 약조한 시각이 넘었군요. 이별주 자알 마셨습니다.
다음엔 소생이 머리를 올려준 기방으로 안내합죠. 안녕히 계십시오!"
신묘년(1591년) 4월 1일.
사내의 몸놀림은 야생마처럼 빠르고 힘이 넘쳤다. 딱딱이를 들고 야순(밤순찰)을 도는 야
경꾼들을 피해 도로와 숲, 다리와 흙담을 오가며 길을 재촉했다. 달빛에 비친 사내의 희고
윤곽이 분명한 얼굴에는 불그스레한 윤기마저 흘렀다. 꽉 다둔 입술에는 쾌락을 멀리하는
의지가 엿보였고, 크고 빛나는 두 눈동자에는 삶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담겨 있었다. 힘겹게
몸을 놀리면서도 땀 한 방뜰 흘리지 않았다. 웬만한 불운쯤은 능히 부수고 나갈 건장한 체
구의 사내는 천하를 품을 만큼 넓은 가슴과 단단한 사지를 지니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금빛
칼 한자루가 들려 있었다 하늘과 땅을 베고도 남음이 있는 보검이었다. 몸종 하나 없이 평
복 차림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밤거리를 배회할 신분이 아닌 듯했다.
이렇듯 영웅의 풍모를 지닌 사람이 미꾸라지처럼 야경꾼의 눈을 피해 어디로 가는 것일
까? 사내는 목적지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이나 같은 장소를 돌면서 밤고양이나
들개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미행 여부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사내는 한 달이 넘도록 지독한 살기 속에서 지냈다.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나실 때도, 심
지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번뜩이는 눈동자들이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있
기 위해서 발버등을 쳤지만 번번이 꼬리가 밟혔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부리시는 승전색(내시)인가? 선조는 일곱 명의 내시에게 별운검을 맡
겼고, 무공이 높은 그들은 은밀히 궁을 나와서 대군들과 대민들을 감찰해왔다. 그러나 한 달
내내 미행이 붙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자 책봉 문제로 크게 진노하셨음이야.
다행히 오늘 밤은 미행을 따돌린 듯했다. 벌써 인시 (새벽 3시)가 가까웠다. 그는 숨을 깊
게 몰아쉰 후 개천을 따라 냅다 뛰었다. 더이상 지체하면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날이 밝을
것이다. 발 아래로 하수가 흐르는 좁고 어두컴컴한 길이었다. 오물이 발목을 더럽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거미처럼 담벼락에 바짝 붙인 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스무 걸음쯤
달려가니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약속대로 쪽문이 열려 있었다. 등을 밝힌 늙은 노복
이 수건과 버선, 그리고 목화(나무신)를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군 나으리."
유성룡이 버선발로 마당까지 내려와서 그를 맞았다. 광해군은 습관처럼 주위를 살폈다. 길
을 안내한 늙은 노복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광해군은 유성룡과 손을 맞잡았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오자니 이렇게 힘이드는군요. 만나자는 청을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 무슨 말씀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유성룡은 늙은 노복에게 잡인들의 접근을 물리치도록 이르고 뒤돌아섰다 광해군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성룡은 눈을 내리깔고 이제 열일곱 살이 된 광해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난이 닥칠 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다처럼 넓게 생낙하고, 기회가 오면 맹수처럼
덤벼드는 눈부신 청년 광해. 그대는 왜 이토록 누추한 몰골로 나를 찾아왔는가?
광해군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지루할 정도로 상대의 말을 다 들은 다음
짧고 단정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사람들은 그런 태도에서 군왕의 위풍을 느꼈다. 공빈
김씨의 또다른 소생으로, 말 많고 허풍이 센 첫째 왕자 임해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내주신 족자는 잘 받았사옵니다. 석봉의 글씨는 언제 보아도 단단하고 힘이 넘칩니다."
유성룡이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석봉을 잘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함께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거나 명나라로 보내는 문서들을 작성한 적이
수십 뻔이지요. 그 사람, 매사에 좀 덜렁대고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몇 번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풍류에 능하고 소탈한 호인입니다. 시에도 일가견이 있는 뛰어난 예인이지
요."
유성룡은 한호와 어울렸던 젊은 날을 좋은 쪽으로만 추억했다. 술과 계집질로 밤을 지새
우고 학문을 게을리 하며 선비들을 안하무인으로 알보는 것이 싫어서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학인'이 아니라 '예인'이라고 언급한 정도면 광해군도 눈치를 챘으리라.
"공자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어둠이 걷히기 전에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정황 때문일까? 광해군의 태도는 지난날과 달
랐다. 유성룡은 광해군의 단도 직입적인 물음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족자를 받은
후벌써 열 번도 넘게 그 문장의 숨은 뜻을 음미했던 것이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책임른 막중해지는 법이요."
유성룡은 용장보다 신중한 장수를 선택하겠다는 공자의 말을 책임의 경중으로 돌려 말했
다. 전쟁터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니, 장수된자는 수많은 군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
해서 전황을 쉽없이 되짚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몸을 사리는 유성룡을 한순간에 짓
뭉갰다.
"그렇다면 왜 함부로 건저(왕세자를 정하는 일)문제를 꺼내서저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였
는지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한 나라의 정승들이 그렇게 가벼이 입을 놀려서야 되겠습
니까?"
역시 건저 문제 때문이었구나, 허나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왕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인종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왕통을 잇지 톳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조선의
십이대 임금 인종이 후사(왕위를 계승할아들)도 없이 세상을 떠났기에 친동생이 왕위를 이
으니 그가 곧 명종이다. 명종 역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인종의 서제인 덕흥군의 아
들 균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곧 선조인 것이다. 그러니까 명종과 선조는 적통이 아니다, 더
군다나 선조 역시 중전인 박씨에게서 아직 아들을 보지 못했고, 추궁들만이 아들을 낳았을
따름이다. 조정 중신들은 후궁들의 암투가 왕실을 어지럽힐까 염려하여 진작부터 건저문제
를 의논해왔다. 세자를 정하고 왕자들의 서열을 확실히 해두면 후궁과 그 외척들이 딴마음
을 먹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서열로 보면 임해군이 먼저이겠으나 중신들은 모두 광해
군을 첫손으로 꼽았다. 광해군은 그 학문과 품성이 세종대왕의 청년 시절에 비교될 정도였
다. 그래서 서인인 좌의정 정철, 해원부원군 윤두수,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간 이해수도 모두 광해군을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지금
과 같은 태평성대에 세자 책봉을 서두르는 것은 임금에 대한 불충이라며 크게 분노했다. 처
음 말을 꺼낸 정철을 삭탈관직 시켰을 뿐만 아니라 윤두수, 윤근수, 백유성 , 유공진 등 서
인들을 외직으로 내몰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산해를 비롯한 동인들은 임금의 분노에 몸을
사린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건저문제로 가장 손해를 본 쪽은 서인이었고, 광해군 역시
선조의 눈 밖에 나는 것을 피할수 없었다. 기축옥사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동인들만 어부지리를 취한 꼴이 되었다. 광해군은 지금 유성룡에게 그것을 따지고
있었다
"건저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신하된 도리이옵니가. 다만 전하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지요. 화씨의 구슬을 생각하시옵소서 ."
유성룡은 신하들이 관직을 잃거나 귀양가는 지금의 상황을 화씨의 구슬에 비겼다.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얻은 옥돌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주위의 신하들이 그 옥돌을 돌이라고
하여 화씨의 두 다리를 잘랐다는 이야기. 군왕에테 바른 말을 전하기는 어렵고 그로 인해
화를 입기는 쉽다는 뜻이다. 광해군은 박학과 달변으로 소문난 유성룡의 임기응변에 감탄했
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비유로써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사람. 유연하기가 물과
같고 빠르기가 제비와 같은 사람.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기회 앞에서 위기를 가늠하는 사
람. 광해군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영상과 좌상 대감이 서인을 치려고 꾸민 일이 아닙니까?"
건저문제로 서인들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나니 동인들이 서인을 내치기 위한 미끼로 그 일
을 이용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산해와 유성룡이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일찍이 주자께서는 군을 이끌어 당으로 삼는 것을 꺼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도 붕당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하셨지요. 문제는 붕당을 이룬 무리들이
군자인가 소인인가를 살피는 것이옵니다. 서인이라 하여 무조건 배척하고 동인이라 하여 덮
어놓고 옹호한다면, 그것이 곧 소인의 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동과 서는 서로를 적대
하은 소인의 당이 아니라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경쟁하는 군자의 당이 되어야 할 것이옵
니다. "
유성룡은 붕당을 긍정한 율곡 이이의 주장을 되뇌었다. 살아 생전 율곡은, 정치란 상대가
있게 마련이며 논쟁을 거쳐 도에 다가가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때 유성룡은 그 마음을 헤아
리지 못하고 허봉, 김성일 등과 함께 율곡을 반핵했었다. 그 결과 동서의 당쟁은 격화되었
고, 급기야는 기축옥사와 건저문제를 통해 양쪽 다 막대한 피를 흘린 것이다. 이제 이런 무
의미한 싸움은 끝내야 한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헌데 좌상 대감!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광해군이 본심을 털어놓았다. 오늘 유성룡을 찾아온 것도 앞으로의 처세를 묻기 위함이었
다.
아바마마는 내가 중신들을 움직였다고 생각하신다. 이번 기회에 인빈이 낳은 신성군에게
세자의 위가 넘어가지는 않을까? 아바마마를 직접 찾아뵙고 잘잘못을 가려야 할까?
근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영의정 이산해는 능구렁이처럼 임금
의 마음을 살피며 신성군 쪽으로도 뜻을 두는 눈치였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유성룡을 찾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유성룡은 퇴계의 수제자로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학문을 익혔고, 외교에서도 수완을 발휘
해서 명나라 황제 신종으로부터 하사품까지 받은 동인의 지도자였다. 한호에게 글씨를 부탁
한 것은 유성룡에게 의논할 문제를 넌지시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분간 경이원지하시옵소서. 군왕의 뜻한 바를 거역하지 말것이며 군왕의 말을 공격하거
나 배척하지 말고 비위를 맞추셔야 합니다. 대군 나으리에 대한 전하의 노여움이 풀리실 때
까지, 믿음과 은택이 두터워지실 때까지 기다리시옵소서 "
광해군이 가까이 다가앉으며 유성룡의 양손을 붙들었다.
"역비, 대감께서는 살 길을 열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헌데 대감께서도 한비 (한
비자)를 읽으십니까?" 이 , 이런 !
유성룡은 가슴한켠이 뜨끔했다. 그는 방금 한비자의 세난편을 근거로 광해군의 처세를 논
한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불교, 도교와 함께 관중, 상앙,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를 망국을
재촉하는 이단으로 규정했다. 유성룡은 퇴계의 애제자이니 당연히 이단을 멀리할 일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좌의정에 오른 후부터 부국강병의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와중에, 춘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왕국을 열었던 진나라의 법가적 전통에 관심을 가져왔다. 법가를
가까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간들의 지탄을 면달길이 없겠지만, 솔직히 공맹만으로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당장 왜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군사들
을 훈련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 것인가? 법가의 사상이 공맹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만큼 저급하며, 노자에 기대어 만물을 논하는 꼴이 자못 우습기도 했지만, 그 속에는 약육강
식의 현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너무 법가의 책만 들추었던 탓일까? 처세를 묻
는 광해군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한비자의 주장을 들이댄 것이다.
"공맹을 접하기 전에 잠간 뒤적인 적이 있사옵니다. 허나 소생이올린 말씀은 한비의 주장
이 아니라 군왕을 대하는 기본 이치일 뿐입니다. "
숨길 수 없는 것이 눈동자라고 했던가? 유성룡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광해군의 눈동자에
서 용상을 향한 욕망을 읽어냈다. 군왕이 되기 위해 천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가 바로 광해군이리라. 그는 결코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리라.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
기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지금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기 위해 잠시 몸을 움
츠리고 있을 뿐이다.
유성룡은 광해군이 소리 소문 없이 조정의 대소사를 살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
다. 중신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학문게 매달리는 광해군의 단정한 자세 뒤에
는 언제나 폭발하기 일보직전의 욕망이 이글대고 있었다. 그것은 왕실의 권위를 우습게 여
기고 파당을 지어 나라를 망치는 신하들을 단칼에 베고 싶은 욕망이기도 했다
"대감! 실은‥‥‥ 오래 전부터 한비와 관중, 그리고 상앙의 삶을 읽어왔습니다"
"나으리 ! 그것들은 이단이옵니다. 가까이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정도만을 보시옵소서. 하늘의 이치를 사사로운 이익으로 살피지 마시옵소서."
"대감! 지금 이 나라가 흔들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바로 신권이 왕
권을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이병 (군주가 신하를 형벌과 은덕을 사용하여
다스리는 방법)의 묘로 중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시지만 역부족이십니다. 신하
들이 파당을 지어 법을 어기고 무리의 이익을 취하는데도 그에 합당한 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군왕의 위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군왕
은 신하들을 국법에 따라 엄격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랑이가 그 발톱과 이빨을 떼어내어 개에게
주면 호랑이는 반대로 태에게 굴복당하고 말 것입니다. 엄정한 법이 있어 신하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들을 군왕의 절대적인 통제 안에 두어야만 나라의 기틀이 바로 설 것입니다. "
유성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옵니다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백성들이 불변하는 법에 얽매여 군왕을 따르는 것은
실로 매맞기를 두려워하여 쟁기를 더 빨리 끄는 황소와 다를 바가 없사옵니다. 인간이란 무
룻 도와 예에 외하여 상하관계가 성립되게 마련이온데 한비는 그것을 짐승의 논리로 바꾸었
사옵니다. 불변하는 법에 얽매이면 백성들은 그 법의 맹점을 찾아 사적인 이익을 얻기에만
진력할 것이옵고, 결국에는 의리와 정도를 잊고 수치를 모른 채 오직 이익만을 쫓는 짐승이
될 것이옵니다. 어찌 열성조가 굽어보시는 이 나라를 짐승의 나라로 만들 수가 있겠사옵니
까? 부디 마음을 돌리시옵소서 "
"상앙은 나라가 흥하게 되는 것이 농사와 전쟁을 통해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조선의 상황
은 어떠한지요? 풍년이든 흉년이든 백성들은 탐관오리에게 곡식을 빼앗겨 굶어 죽고 있으
며, 대뿌분의 장정들은 병의 의무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망하고 전쟁을 해도
망한다면 길은 오직 하나, 법으로 그 모두를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며 어리석은 자는 그 법에 묶인다고 했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
치며 어리석은 자는 그 예에 구속된다고 하였습니다. 옛 법들을 고쳐서 백성를이 새로운 삶
을 누리게 해야겠지요. 남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쟁터에서 죽거나 농사에 힘쓸 각오를 해
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자와 농사에 힘쓰는 자는 후하게 상을 주어야겠지요. 그
대신 서책이나 뒤적이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죽이는자들, 허황된 말과 글로 미래를 점치는
자들은 엄하게 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려면 우선 성왕이 나야겠지요. 법에 근거하여 매사
를 판단하고,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할 뿐만 아니라 공을 위해 사를 희생시키며, 신하들의
마음을 위세로써 누를 수 있는 군왕 말입니다. "광해군의 분노는 깊고 넓었다. 저대로 두었
다가는 채 자라기도 전에 꺾이고 말리라, 그가 꺾이고 나면 누가 이 나가를 이끈단 말인가?
유성룡이 반대 의견을 강하게 개진했다.
"진시황을 기억하시옵소서 , 비록 그가 한비와 이사의 술책을 따라서 천하를 통일하였지
만, 그가 죽자마자 진나라는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술책이 짐승의 이치를 따랐기
때문이옵니다. 공맹은 비록 중원을 제패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뜻은 이미 세앙을 덮고도 남
음이 있사옵니다. 조급한 마음을 접으시고 제발 성학을 닦으시옵소서."
광해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현실정치와 외교에 밝은 신하라지만 유성룡은 역시 퇴
계의 제자인 것이다. 지금 당장 그 틀을 깨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리라. 유성룡의
입에서 한비의 문장이 나온 것만으로도 큰 구학이 아닌가. 적어도 유성룡은 공맹에 기대어
소중화를 꿈꾸면서 파당을 지어 다투는 무리와는 다르다. 그 역시 부국강병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은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물었다. "성학이란 무엇입니까?"
"성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일찍이 순임금께서는 우임금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
하니 오직 면밀카고 일관되게 그 중심을 잡으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제왕의 학과 신하의 학은 다른 것이겠군요."
"그렇지 않사옵니다 퇴계 스승님께서 무진년(1568년)에 올리신 「육조소」를 살피면, 군왕
이 갖추어야 할 세 번째 조목으로 성학을 돈독하게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
습니다. 연이어 성학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경으로 근본을 삼아 이치를 따지며 지를 다하
고 몸에 돌이켜 실을 이행하는 것이 도를 깨닫는 요체이니 , 군왕과 신하가 무슨 차이가 있
겠느냐고 하겠지요,"
광해군이 이의를 제기했다.
"도를 깨치는 학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면, 도를 깨친 신하가 도에 이르지 못한 군왕을 징
벌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탕왕과 무왕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의 군왕
을 시해했지요. 이를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천자국인 은을 치려고 떠나는 제후국
주의 무왕을 비난하며 수양산에서 굻어 죽은 백이와 숙제의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유성룡은 도가 하나라는 정의로부터 신권의 강화를 유추한 광해군의 영특함에 새삼놀랐
다. 광해군은 선조의 균형감각을 물려받은 것은 물론이고, 멧돼지처럼 밀어붙이는 저돌성과
상대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지나치게 강하고 단단함
만을 추구하며 감정을 툭툭 내뱉는 것이 약점이지만, 그것 역시 세월의 부침 속에서 여유와
포용력, 그리고 유연함으로 바뀌어 가리라.
"어찌 천명을 받들어 용상에 오른 임금을 신하가 사사로이 평할 수 있겠사옵니까? 퇴계
스승님께서도 임금은 한 나라의 머리요, 대신은 그 복심이요, 대간은 그 이목이라고 하셨습
니다. 복심과 이목이 머리의 역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광해군이 한 발 물러섰다. "듣고보니 좌상 대감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마음으로 성학을 닦아야 합니까?" 유성룡은 미소를 띠며 편안한 음성으로 답했
다.
"반성하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것을 총이라하고, 마음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
는 것을 명이라 하고, 내가 나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이라고 하옵니다. 소생은 이 셋을 항
상 마음에 담고 지냅니다마는, 대군 나으리께서는 그중에서도 강에 마음을 두심이 어떠하온
지요?"
"강? 스스로를 이겨라, 이 말씀이신가요?"
"순임금께서도 스스로를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생이 보기에도 대
군 나으리께서는 참으로 군왕의 재목이십니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대부분 소생과 같은 생
각일 것이옵니다. 하지만 천재와 미인은 빨리 죽는다는 속언도 있지 않사옵니까? 남의 이목
을 끌게 되면 말이 나게 되고, 그 말들에 횝싸이면 천수를 누릴 수 없사옵니다. 나으리의 뛰
어남이야 천하가 다 아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셔서 자중하시옵소
서. 그리고 때를 기다리시옵소서, 용이 되기 위내 천 년 세월을 하루같이 기다리는 이무기의
마음을 지니시옵소서."
광해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룡에게 자문을 구한 것은 참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오직 그만이 이 위기를 벗어날 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혔다. 마당을 빗질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광해군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성룡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손수 방문
을 열어주었다. 새벽찬 공기가 그들의 얼굴로 확 밀어닥쳤다. 어젯밤의 눅눅했던 마음이한결
풀어진 느낌이었다. 유성룡은 이 총명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가무사히 삶의 고비를 넘기기
를 진심으로 바랐다 광해군은 목화를 신다 말고 마루케 서 있는 유성룡의 왼팔을 잡아끌었
다. 유성룡이 놀란눈으로 얼른 허리를 숙였다 광해군의 더운 입김이 귓불에 닿았다. 광해군
이 사라진 후에도 유성룡은 오랫동안 마루에 서서 그외 속삭임을 되씹고 있었다.
"때가 오면 절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
6. 칼날 쥐애 거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는 천하의 힘을 다했어도 오히려 녀러 해 동안 준공하지 못하였사온
데. 이 성을 쌓는 데는 그 높이나 넓이나 길이가 비록 장성에 비기지는 못할지라도 완급도
물을 것 없이 일제히 일으켰으니. 도탄에 빠진 생민의 괴로움이 그보다 더할 데가 없나이다.
하물며 조그마한 나라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마치려 하오니 비록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히
하려 단들 되겠나이까. (김성일, 축성의 정지와 시페를 아뢰는 차자)
신묘년(1591년) 10월 2일 새벽 .
바다를 휘감으며 올라온 초겨울 바람이 전라좌수영을 매섭게 흔들었다. 양손을 비벼대며
추위를 이기려는 보초병들의 머리 위로 드문드문 눈발이 날렸다. 첫눈이었다. 멀리서 여염집
개들이 짖어댔고, 까치들이 떼를지어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낮게 날았다. 손을 내밀어 첫눈
의 차가움을 즐기는 군졸도 있었고, 아예 입을 벌려 눈송이를 삼키는 군졸도 있었다. 예년에
비해 보름이나 늦게 찾아든 눈이었으므로 기다림이 지루했던만큼 기쁨도 컸다. 나이 든 군
졸들은 마당으로뛰어나을 자식들을 그리며 미소지었다. 작은 행복이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
지는 순간이 었다.
이순신은 지난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지도 벌써 여덟 달, 계절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유성룡으로부터의 서찰은 한 달에서 보름, 보
름에서 열흘로 그 기간이 짧아졌다 유비무환을 강조하는 행간에 전쟁의 암운이 점점 더짙게
드리웠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은 이곳에서도 심심찮게 돌았다. 피난을 가기 위해 미리
양식과 옷가지를 챙기는 백성들도 있었다.
한순간도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었다.
정해왜변(1587년) 때 왜군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이 년 뒤에 돌아온 공태원과 김개동, 이언
세를 번갈아불러 왜군의 사정을 살폈다. 특히 진무(하사관) 공태원은 왜의 말까지 익혀 그네
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김개동과 이언세는 왜가 결코 쳐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했지만, 공태원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장담했다. 어젯밤에도 세 사람을불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는 까닭이 무엇이냐?"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진해 출신의 김개동이 답했다.
"글마들은 근본이 하찮은 도적뗍니더. 맹나라로 노략질 감시로 우리 쪽을 넘보는 경우는
있어도, 우째 저거들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겠십니꺼?"
목포가 고향인 이언세가 거들었다
"그렇지라. 갸들은 글을 몰라 병법에 무지허고, 예를 몰라 상하의 위계가 없어뿐지요. 시
방 서로 직이기에 급급허고 바람과 땅의 흔들림을 막기에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지라. 고놈
들은 키가 난쟁이만허고 팔도 쥐새끼처럼 짧으요. 하룻강생이 범 무서운 줄 모리고 뎀비면
단숨에 수장시켜 뿌리면 그만이지라."
공태원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했다. 분노를 삭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한심한 놈들! 그딴 식으로 입에 발린 소리만 하면 천벌을 받아.
장군! 저놈들 이야기는 몽땅 거짓부렁입니다. 왜놈들이 병법과 예절을 모르긴 하지만 수
백 년 동안 그 좁은 섬에서 전쟁만 해왔습니다.
검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하고, 전투에서 패하면 할복까지도 서슴지않습니다. "
"할복? 스스로 배를 가른단 말이냐?"
이순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대마도에 붙들려 있는 동안에도 두 번이나 할복의 의식이 거행되었
지요. 무사들은 칼로 배를 그으면서도 끝까지 대마도주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고 죽음에 대
한 공포를 이겨냈습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경건한 기운이 가득했지요. 패배를 죽음과 맞
바꾸는 놈들입비다.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
공태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패배를 죽음과 맞바꾸는 놈들이라면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강병임에 틀림없다. 김개동과 이언세를 돌려보내고 공태원과 둘만 남았다. 간단하
게 주안상을 내오도록 명령한 후 공태원에게 탁주 한 사발을 직접 따라주며 물었다.
"우리 군아 열 명과 왜군 열 명이 검으로 맞선다면 승패가 어떠하리랴고 보는가?'
"필패입니다."
공태원이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우리 군사 스무 명과 왜군 열 명이 싸운다면?"
"어림 없습니다"
"오십 명과 열 명이 싸운다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
이순신의 미간이 조금씩 좁아졌다
"그렇다면 왜군 열 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우리 군사가 몇 명이나 필요하다는 말이냐?"
"적어도 백 명은 있어야 대적할 수 있습죠."
"백 명? 저들의 검술이 그다지도 뛰어나단 말이냐?"
"그들은 검 한 자루로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습니다. 두 살만 되면 검을 쥐고, 다섯 살이
면 목검으로 전쟁놀이를 하죠. 열 살이 넘으면 전쟁터로 나가고, 열두 살부터는 직접 적을
죽여 상을 탑니다. 갓 스무 발이 되기도 전에 수천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며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습니다. 검은 그들에게 돈이자 명예이며 삶이자 죽음입니다. 그러니 어찌 저들의 검
술이 뛰어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이놈의 목을 걸지요."
자정 무렵 공태원을 돌려보냈다.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않았다.
조선은 오랫동안 활을 주무기로 삼아왔다 쌍방간에 거리를 두고 전투를 벌인다면 백전백승
이겠지만, 백병전으로 일관한다면 결단코 왜군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쌓고 있
던 성곽도 무너뜨리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왜군만 명
만 부산에 상륙하여도 한양까지 그대로 밀고 올라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군제의 개편이 필요하다.
각 진의 군사를 한곳에 모은 후 조정에서 장수가 내려을 때까지 기다리는 제승방략식 지
휘체계는 바뀌어야 한다. 검 하나에 모든 걸 의지하는 왜군은 바람처럼 가볍고 재빠르다. 조
정에서 장수가 내려오기도 전에 저들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횝쓸고 한양으로 들이닥치리라.
최선의 방책은 전쟁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태원의 말대로 왜국의 실력자 풍신수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조선을 취하려 한다면 틀림없이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왜군이 육지에 발을 딛기 전에 치는 것이다. 경상좌수사와 우수사, 전라좌수사와 추수사가
합심해서 왜군 선단을 수장시키면 된다. 하지만 왜선은 제비처럼 작고 날래다. 바람을 등지
거나 안개를 만나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어떻게 그 미꾸라지 같은 놈들을 칠 것인가?
난제, 난제로다!
왜는 역사의 첫머리부터 한반도를 넘보아왔다. 지진과 태풍이 끊이질 않는 섬을 탈출하여
기후와 토양이 좋은 한반도에서 사는 것이 그들의 평생 소원이었다. 힘이 약할때 한반도의
남해안을 급습하여 재물을 챙겼고, 힘이 강할 때 한반도의 땅과 바다를 모두 차지하려고 술
수를 부렸다. 일단 상륙한 왜구는 몰아내기 힘들다. 능선을 타거나 강줄기를 따르면 뒤쫓기
도 쉽지 않다. 더구나 수만, 혹은 수십만의 왜군이 상륙한다면 그글이 하삼도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전쟁은 일방적으로 조선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왜 수군이 조선
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후 황해도와 평안도, 그리고 하삼도에 동시에 왜군들을 풀어놓는
다면 조선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왜와의 전쟁은 우리가 바다를 지킬 수 있는가 없는
가로 판가름이 난다. 하여 바다는 곧 목숨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은 천천히 바닷가로 나왔다. 판옥선 두척이 찰랑대는 물결에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눈발이 얇게 깔리기 시작한 모래사장을 정처없이 걸었다. 반백의 수염이 좌우로 흩날렸고,
오른손에 쥔 장검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그는 좌수영을 나서면서부터 습관처럼 같은말을
중얼떠리고 있었다.
"천하의 눈으로 사물을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로들으면 들리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지혜로 생각하면 알지 못할것이 없다 "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십니까?"
뒤돌아보았다 순천부사 권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른새벽부터 웬일이오? 회의는 오후인데. "
오늘은 군중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군선의 감찰과 군기의 확립을 위한 자리였지만 지난달
부터는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비책을 논의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녹
도만호 정운이나 사도첨사 김완, 흥양현감 배흥립, 광양현감 어영담은 무조건 정면승부를 벌
여 적을 쳐부수면 될 일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전라도를 노략질한 왜구들은 정규
군이 아니라 해적떼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선수군을 만나면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토끼몰이에 무슨 준비가 필요하단 말인가?
권준과 신호, 그리고 나대용을 비롯한 젊은 군관들은 이순신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
다. 그들도 사만 명이 넘는 왜군이 한꺼번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군선을 대마도에서 만들
기 시작했다는 공태원의주장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의 절반만이라도 바
다를 건너오는 날에는 을묘왜변보다 더 큰 화를 겪을 것이다. 더군다나 왜군들이 전쟁으로
단련된 무사들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적과 싸우려면 천시를 얻어야 하고, 전투에 필요한 채물을 갖추어야 하며, 완벽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시간을 얻는것은 전투에 앞서 점괘와 날씨 변화와 길흥의 조짐들을 살피면 되
니 별도로 두고, 재물을 모으는 것과 전략을 짜는 것이 문제이지요."
권준의 목소리는 작고 차분했다. 눈동자는 새벽별처럼 반짝였고 혀는 해초보다 길고 부드
러웠다.
내 마음을 읽고 있구나.
이순신은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잠자코 권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경오왜변을 아십니까?"
경오왜변은 중종 5년(1510년)에 일어난 변란으로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의 왜인들이
함께 난을 일으켰기에 '삼포왜란' 이라고도 불렸다. 권준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옛말에 앞이 막히면 뒤를 돌아보라고 했지요. 왜군을 막으려면 그들과 맞섰던 기록들을
검토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며칠 동안 경오년의 기록들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서찰
하나를 발견했지요. 경오년에 도원수였던 유순정 대감이 쓴 것인데 수중 철쇄의 상세한 도
안과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
"수중 철쇄?"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는 왜선들을 잡으려면 미리 덫을치고 그
물을 놓는 수밖에 없습니다. 섬과섬 사이에 철쇄를 심고 적을 유인하면 화살과 화약을 낭비
하지 않고 쉽게 전투를 끝낼 수 있지요."
"섬과 섬 사이에 철쇄를 건다 이 말이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남해는 섬이 많아 다도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름에 걸맞도
록 몇 군테 길목에 함정을 파는 거지요. 뱃길에 서툰 적은 틀림없이 우리가 쳐놓은 함정에
걸려들 것입니다. "
"그 철쇄를 설치했었소?"
"아닙니다. 조정의 허락까지 받았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요."
이순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권준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유순정 대감이 자리를 옳기고 다음해에 왜의 사신 붕중이 찾아와서 백배사죄하는 통에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왜변이 있었지만 아무도 수중 철쇄를 기억
해내지는 못한 듯해요. 노략질이나 일삼는 변변찮은 왜구라면 애써 철쇄를 만들 필요가 없
겠지만 전면전에서는 비수 서너 개쯤 숨겨둘 필요가 있겠지요. 소생이 그 동안 어현감과 함
께 몇 군데 물길을 보아 두었습니다. 낙안군수 신호가 침착하고 사람을 잘 부리니 그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그럽시다. "
이순신은 선선히 승낙하며 가슴을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문관이라는 이유만으
로 장수들에게 따돌림을 받던 권준이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지략을 지닌 것이다
"또다른 계책은 없소?'
권준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지요. 저와 함께 나대용과 이언량이 몇 가지 문서를 살폈으
니 다른 계책들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고 작설차를 나눠마셨다. 이순신은 쓰린
속을 다스리기 위해 매일 아침 차를 마시고 있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몸이 으슬으슬 춥고
한기를 느낄 때가 많았기에, 화로를 아예 방에 두고 썼다. 두 사람은 화로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감환의 조짐이 보였다. 권준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며칠 전, 밤하늘을 살필 기회가 있었습니다. 장군의 운성이 눈에 띄게 흔들리더군요. 몸
을 추스리십시오. 술을 줄이고 충분한 수년을 취하셔야만 합니다. "
별자리까지 살핀단 말인가? 권준의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했다.
"새벽 푸렵, 거대한 운성 하나가 장군의 운성 아래로 다가서더니 함께 오랫동안 빛났습니
다. 장군을 도을 귀인이 곧 나타날 징조이지요. 그를 오른팔로 두고 쓰십시오."
이순신은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생각들을 끄집어냈다. 유성룡 대감에게도 묻지 않은 것이
었다.
"왜국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까닭이 무엇이라고 보시오?"
권준은 팔자 수염을 어루만지며 킁킁 헛기침을 했다
"장군께서는 사서에도 밝으시니 춘추시대나 전국시대의 군웅할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전
쟁이란 결코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전쟁은 창과 칼을 들
고 벌이는 정치입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맹과 같은 현인들은 만백성을 인으로 다스리
는 것이 정치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인간이 도달하고픈 이상향일 뿐입니다. 무릇 정치란 자
기 편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전쟁은 정치의 가장 강
력하고 극단적인 형태라 하겠습니다. "
"그렇다면 저들이 노리는 이로움은 무엇이오?"
권준은 발이 세 개인 화로를 힐끗 바라보았다.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를 떠올려보십시오. 공명은 유비를 따라 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중원이 위, 촉, 오 세 나라로 나뉠 것을 예언했지요. 위가 가장 큰 나라였지만 촉과 오를 합
친 힘에는 미치지 못했기쎄 국지전 양상을 띠면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평화가 이어진 것
입니다. 그러나 촉과 오가 반복해서 그 힘이 약해지자 위는 순식간에 두 나라를 집어삼키고
말았습니다. 지금 명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조선과
왜국이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치는 것입니다."
이순신이 눈을 부라리며 권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방금 무엇이라고 하셨소? 조선이 왜국과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친다고 하셨소?"
"물론 조선이 명나라를 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서융의 침탈로 어려움을 겪는 그들이 동이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
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동서로 협공을 당하고서는 제 아무리 천자의 나라라고 하더라
도 배겨낼 재간이 없습니다. 명나라가 조선을 도우며 왜국을 멀리하는 것도 실은 조선과 왜
국이 힘을 합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지요. 조선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왜군이 황해를
가로 지른다면 쉽지 않은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분간 명나라는 조선이 왜국과
아웅다웅 다투기를 바라고 있지요. 시간을 벌자는 속셈입니다. 서융의 반란을 정벌한 후 조
선과 힘을 합쳐 왜국을 치고, 그 다음엔 조선마저 삼키려 덤비겠지요."
"그럴 리가‥‥‥ 명나라는 도리와 신의를 중시하는 대국이 아니오?"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곧 도리요 신의입니다. 조선과 왜국이서로 다투다가 창방이
깊은 상처라도 입는다면 명나라는 주저하지 않고 압록강을 넘어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 배
신을 논해봐야 헛된 일이지요. 당나라가 신라를 배신하고 이 땅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일을
떠올려보십시오. 친구도 적이 되고 적도 친구가 되는 것이 국가끼리의 관계입니다. 왜가 대
군을 이끌고 건너온다면 그것은 왜국과 조선만의 전쟁이 아닙니다. 명나라가 개입할 것이며
그 틈을 타서 서융과 북적이 세력을 얻을 것입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에 따라 천하
가 새롭게 재편되겠지요. 적어도 왜국은 조선을 정복한 후 명나라를 칠 마음을 굳힌 것 같
습니다. 사분오열 되었던 힘을 하나로 모은 지금의 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합니다. 조선
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요. 정명가도를 주장하는 왜국과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칠 것이냐,
아니면 명나라로 가려는 왜군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것이냐."
"어찌 우리가 오랑캐에게 길을 내어줄 수가 있겠소?"
"오랑캐도 천하를 얻으면 천자의 나라가 되고, 천자의 나라라도 힘을 잃으면 오랑캐가 되
는 법이지요. 원나라도 예전에는 한갓 북쪽 오랑캐에 불과했지만 힘을 모아 천하를 지배하
지 않았습니까?"
칭기즈칸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함으로써, 천자의 나라도 무너질 수 있으며
힘센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권준은 왜국의 풍신수길이 제2의 칭기즈칸
을 꿈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망상이라고 디웃을 수도 있지만 천하는 결국 꿈꾸는 자에게
정복당하게 마련이다.
"명나라도 왜국의 속셈을 알고 있다고 보시오?"
"공공연한 비밀이 아닐는지요. 왜국은 틀림없이 중원을 노리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왜국과
조선의 관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근 이백여 년 만에 통신사가 왜국에 다
녀왔지 않습니까? 밀약이 오고간 것이 아닐까 의심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왜군의 침공과
명나라의 의심을 동시에 받는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지요. 의심도 풀고
침공도 늦춘다면 좋겠지만 이미 힘의 균형은 무너진 듯합니다.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대
의명분을 찾아야겠지요
"대의명분?"
"어차피 조선은 소중화를 꿈꾸는 나라입니다. 아직은 왜국과 손을잡을 만큼 이익에 밝지
못하죠. 그렇다면 천자국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여 명나라를 끌어들여야 합니
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권준은 닥쳐을 전쟁을, 왜국과 조선의 대결이 아니라 명나라를 지키려는 국가들과 명나라
를 무너뜨리려는 국가들의 대결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조선은 명나라를 위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었다 권준은 참으로 세상을 널고 크게 읽는 눈을 가졌다.
"권부사는 왜군을 조선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오?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야지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오? 조선이 건국한 이후, 아직까
지 원군을 청한 적은 없지 않소? 여진과 왜구도 우리의 힘으로 물리쳐왔고‥‥‥·, 조선의
힘만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허나 문제는 전쟁이 끝난 다음이지요. 조선이 왜군
을 막기 위해 힘을 모두 쏟으면, 그후 명나라는 별어려움 없이 조선을 삼킬 것입니다. 운이
좋아 조선이 손쉽게 왜군을 물리친다면, 반대로 명나라는 조선의 힘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겠
지요. 둘 다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명군을 전쟁터로 끌어내야 합니다.
그들에게 누가 우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확인시켜야죠. 그리고 전쟁을 해나가면서 이해득
실을 따져야합니다. 왜군을 물리치는 것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흑심을 방비할 비책이 필요해
요. 명나라죠 어떤 식으로든 이 전쟁에 끼여들려고 할 것입니다. 위기가 곧 기회이지요. 지
금의 상황을 잘 이용하면 조선은 명나라와 맞서면서 왜국을 휘하에 두는 강국으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얼마나 최소화하면서 명나라를 압박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
다. 그렇다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덤벼서는 안 되겠지요.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와 것이
니까요. 세 힘이 팽팽히 맞서다가무너지는 순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물고 늘
어져야죠 ."
갑자기 밖이 웅성거리더니 군졸 하나가 큰소리로 아뢰었다.
"장군!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께서 오신다는 전갈이옵니다. "
이순신은 권준을 대동하고 서둘러 동헌으로 나갔다. 벌써 전라우수사를 태운 배가 부두에
닿았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연퉁도 업이 좌수영을 방문한 까닭이 무엇일까?
"마중을 나가셔야지요."
정삼품 수사가 찾아왔는데, 안방에서 두 다리 뻗고 맞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15관
12포를 거느린 전라우수영은 5관 5포를 가진 전라좌수영보다 곱절은 크다. 같은 정삼품이라
고 하더사도 전라좌수사는 그 병력과 관할하는 지역에 있어서 경상우수사나 전라우수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마중을 나가기에 앞서 갑옷으로 갈아입은 후 투구를 쓰고
칼을 찼다.
지나치시군.
권준은 이순신의 행동에서 석연찮은 점을 읽어냈다.
전투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저렇듯 중무장을 할 필요가 어디 있단말인가? 저 차림새는 다
만 우수사에게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좌수사께서는 우수사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이순신은 동헌을 나서며 우수사의 이름을 되뇌었다.
이억기 ! 나와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장수.
이억기는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의 후손으로 선조의 십이촌 조
부뻘이었다. 신유년(1561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장수의 꿈을 키웠으며, 무과에 장원
으로 급제한 후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종삼품 경흥부사로 임명되었다. 선조의 특별한 배
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계미년(1583년) 10월에 경흥부에 속하는 건원보의 권관 자리를 얻었다. 종구품의
말단 관직이었다. 그때 그는 경흥으로 부임인사를 가서 처음으로 이억기를 만났다. 스물세
살먹은 부사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순신의 나이는 불혹을 코앞에 둔 서른아흡 살이었다. 그
때 이억기는 별다른 말 없이 여진족의 침탈에 만전을 기하라고만 명령하고 그를 건원보로
돌려보냈다.
이억기는 그 후에도 임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전공을 잇달아세 웠다. 경흥부사와 온
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 추장인 울지내와 니응개, 울마치를 베고 선정을 베풀었던 것이다.
북병사 이일의 총애를 받아 '좌억기우원균'으로 통했으며, 우의정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순
천부사로 임명되었다가 겨우 서른한살의 나이로 전라우수사에 오른 것이다.
이순신은 녹둔도의 패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억기가 달갑지 않았다. 이억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잊혀진 상처가 재발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허나 이제는 이억기에게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다. 같은 수사로서 당당하게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백의종군하던 옛날의 이순신이 아니라 당상관이 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모습
을 보이리라.
갑옷에 투구를 쓴 이억기가 큰 걸음으로 좌수영의 정문을 지나서 동헌을 향해 똑바로 걸
어 들어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턱수염과 크고 날카로운 눈매, 거친 피부와 왼쪽 볼에 세
로로 난 칼자국이 육진의 장수를 두루 지낸 풍모를 드러냈다. 이순신이 서너 날자국 앞으로
나서서 그를 맞았다.
"어인 일이시오? 연락도 없이 ."
이억기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랜만이오, 장군. 우리가 경흥에서 만난 게 팔 년 전이었던가요?"
고이헌 놈!
이순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종구품 권관 시절을 상기시킴으로써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이다. 이억기는 이순신의 일그러진 표정을 무시한 채 좌우를 둘러보았다.
"수영이 아담하오이다. 5관 5포를 다스리기엔 부족함이 없겠소."
이억기는 아담하다는 말로 좌수영이 우수영보다 못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눈치 빠른 이순
신이 그 속내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 이순신은 순천부사 권준을 먼저 소개했다.
"아, 내 후임이로군. 하마터면 이장군 밑에서 중위장 노릇을 할 뻔했소이다. "
이억기가 순천부사에 그대로 있었다면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을 수밖에 없었다. 옛 부하를
상관으로 모신다는 것, 이억기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으리라. 서둘러 자리를 옳기고 싶다고
은밀히 임금께 상소를 올린 것도 그 수모를 모면하기 위함이었다.
모욕을 주기 위해 왔는가?
이순신은 이억기의 뼈 있는 팔에 마음을 상했다.
제 목숨 하나 살리려고 부하들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은 놈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수사의 재목이 못 된다고 외치고 싶은 거겠지, 어디 , 네놈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땐 네
목을 베어버리겠다. 권준은 이순신이 어금니를 깨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위처럼 침착한
사람이 흔들리고 있다. 권준이 서둘러 이억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제서야 이순신도 얼굴을 고치고 이억기를 방으로 안내했다. 투구를 벗자 이억기의 바다
처럼 넓은 이마와 숯덩이처럼 검은 눈썹이 드러났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
이순신은 권준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보냈다. 권준은 가볍게 몸을 일츠켜 밖으로
나갔다. 이억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늙으셨소이다. 환감을 넘긴 노친네 같아요."
마흔일곱의 이순신은 횐 머리가 유난히 많았다. 특히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로는 턱수염
과 앞머리가 거의 백발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늙었다는 말은 귀에 거슬렸다
아직도 강강궁을 쓰는 내게 늙었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장군께서 좌수영을 훌륭하게 다스리고 계시다는 소식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소이다. 판옥
선을 늘리고, 봉수대도 열 곳이나 더 만드셨지요? 염초와 유황도 충분하고 군량미도 넉넉하
다고 들었소이다. "
뒷조사를 했는가? 칭찬조차 비웃음으로 들렸다.
"헌데 어인 일이시오."
이순신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단했다. 서론을 접고 어서 본론을 시작하라는 요구였다. 이억
기는 험험 헛웃음을 웃은 뒤 이야기를 꺼냈다.
"사흘 전, 해남에서 수상한 놈을 하나 잡았소이다. 각 관과 포의 장수와 군졸 수를 염탐하
고, 뱃길을 묻고, 군선의 크기를 알아내려고 하더군요. 잡아다가 족치니, 처음에는 억울하다
고 딱 잡아뗍디다. 함경도 경흥이 고향이라는데 그곳 지리를 하나도 몰랐소이다. 호통을 치
며 경흥과 온성의 지명을 줄줄 외웠더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싹싹 빌더군요. 헌데 그놈이 왜
놈말로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니겠소이까?'
"그렇다면‥‥‥?"
"그렇소이다. 왜의 간자(간첩)이지요. 대마도에서 보름 전에 건너왔다고 했소. 조선말은 경
오왜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에게 배웠고, 오백 명 정도가 조선팔도로 흩어져서 염탐을
하고 있다고 했소. 오백 명이라면 조선팔도를 구석구석 살피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소이까?
조선에 처음 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번까지 다섯 번째랍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설명
을 듣느니보다 직접 그놈을 문초합시다. 이곳으로 끌고 왔소이다. "
"그럽시다. "
이억기는 거드름을 피우거나 모욕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왜국의 심상찮은 동태를 함께 의
논하기 위해저 좌수영을 찾은 것이다. 이순신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그의 태도가 마
음에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동헌으로 나갔다.
"끌어내라!"
이억기의 명에 따라 산발한 죄수가 동헌 앞마당으로 끌려나왔다.
통역을 하기 위해 공태원이 죄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태원과 죄수의 두 눈이 동시에 놀
라움으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냐?"
순천부사 권준이 물었다. 공태원이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이놈을 압니다요. 이름은 송호이고, 대마도주의 식솔들을 호위하는 자입죠. 경오년에 대
마도로 끌려가서 몇몇 왜놈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더랬습니다. 송호는 그중에서도 제일 머
리가 좋고 성실해서 금방 조선말을 익혔습니다. 나중에는 팔도 사투리까지 구사할 정도였지
요. 보기엔 저렇게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착하고 인정도 많아서, 소인이 아플 때는 병수발
도 곧잘 해주었습니다. "
이순신이 말했다.
"이실직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고, 조선에 쏜 이유가 무엇이며 왜국의 사정은
어떠한지 물어보아라."
"예 , 장군!"
공태원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송호에게 갔다 두 사람은 왜말로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처
음에는 묵묵히 듣기만 하던 송호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면서, 나중에는 침을 튀기며 손과
발을 동원하여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공태원이 송호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이순신
과 이억기에게 뛰어왔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혈기왕성한 이억기가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대마도 사람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이억기가 다그쳤다.
"다만 대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주기엔 이미 때가 늦었답니다. 왜의 본토에서
대마도로 벌써 오만 명의 대군이 건너오기 시작했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마도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길잡이 역할을 맡았답니다. 그래서 이삼 년 동안 간자가 되어 조선을
돌아보았다는군요. 헌데 이상한 건 당분간 대마도로 귀향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답니다. "
"귀향하지 말라? 대마도로 돌아오지 말라는 멋인가?"
이번에는 이순신이 장검으로 대청마루를 쾅쾅 두드리며 물었다.
공태원이 송호에게 다가가서 재차 확인했다. 공태원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까지 했다. 이윽고 공태뭔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왜는 내년 봄에 조선을 칠 계획이라고 합니다 간자들은 각자 맡은 길을 안내해야 하기에
귀향할 필요가 없습죠."
침묵이 홀렀다. 이순신도 이억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으나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전쟁!
내년 봄부터 조선과 왜국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군중회의는 유시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예정되었던 신시 (오후3시)에 회의가 열리지 못한 것이다. 성격이 급한 녹도만호 정
운과 사도첨사 김완은 군기를 잡는답시고 애꿎은 군졸들만 들볶았다.
순천부사 권준과 군관 나대용, 군관 이언량은 사랑방에 모여서 서책을 뒤적였고, 흥양현감
배흥립과 광양현감 어영담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주거니 받거니 지난날의 무용담들 늘어놓
았다. 이순신이 이억기와 나란히 동헌으로 나오자 섬돌 곁에 서 있던 날발이 뿔피리를 짧게
두 번 불었다. 군중회의를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좌중을 둘라보며 이순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서 알고들 있겠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의 도움으로 왜의 의중을 확실하 알게
되었소. 저들은 겨울이 지나자마자 곧바로 조선을 침탈할 것이오. 경상도로 상륙하는 선봉대
는 곧장 한양으로 진격하고, 후발대는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량미를 확보한 다음 섬진강, 금
강, 한강을 통해 북상한다는 계획이오."
"쥑일 놈들!"
정운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선봉대의 병력은 오만 명이오."
"오만? 장군! 지금 오만이라고 하셨소이까?"
김완이 되물었다.
"그렇소. 후발대는 선봉대의 열 배는 될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조총이 라는 신무기
로 무장하고 있다고 하오."
어영담이 고개를 설레설래 저으며 끼여들었다.
"내 평생 왜군 오만 명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오만 명이 얼마
나 많은 숫자인 줄 아시오이까? 지금 조선을 지키고 있는 군사를 모두 합해도 오만이 될까
말까 할 거요. 근데 선봉대가 오만이라니. 허풍도 이런 허풍이 있을까?"
욕쟁이 배흥립이 맞장구를 쳤다.
"어현감 말씀이 맞소. 어떤 새끼가 그딴 싸가지 없는 소릴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속아서
는 아니됩니다. 아니되고 말고."
이순신이 다시 좌중을 둘러본 후 단정적으로 말했다.
"왜군은 틀림없이 올 것이오. 우린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소.
이억기가 거들었다.
"우선 왜의 간자를 한양으로 압송했소.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간자의 말을 믿지 않을 것
이오. 이미 지난봄에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합의를 보았으니 번복은 힘들 테지. 그렇다고 이
대로 앉아서 전쟁이 터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소. 우리끼리라도 방비를 서두릅시다. "순천
부사 권준이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라도 해야겠지요. 하지만 우선 조정에 이곳 정찰을 소상히 알리는 편이 좋겠습니
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야 없지 않겠습니까?"
"괜한 오해라면‥‥‥‥"
이억기가 권준을 돌아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역적 정여립의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방비를 하려면 군사와 무기와 군량미를 모으고
군선들 수리하고 각 관과 포를 전시 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전라좌우수사가 힘을 합쳐 반
란을 일으켰다고 오해받기 십상이지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소를 올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억기가 권준의 주장에 반대했다.
"안 될 말이오. 지금 알렸다간 하찮은 왜구 앞에서 벌벌 떠는 겁장이라고 이장군과 내 목
이 달아날 것이외다. "
권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억기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군요. 조정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방비를 하
는 겁니다. 강태공이 이르기를, 군무는 장수가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하며 군왕의 통제를 받
아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바로 지금이 그에 합당한 때입니다. 여기 모인 장수들부터 먼저
생사고락을 함께 할 것을 피로써 맹세한 후 계획을 짜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아무도 권준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난 권준이 탁주 한 동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피 대신 준비한 술입니다 "
이순신이 먼저 탁주 한 사발을 단숨에 비웠고, 그 다음엔 이억기가 받아 마셨다. 권준과
이언량, 신호가 차례차례 탁주를 들이켰으며 박쥐 김완이 남은 술을 통째로 비웠다.
혈맹의 의식이 끝난 후 이억기는 우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순신은 회의
를 잠시 중단하고 부두까지 배웅을 나갔다. 과거의 앙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곧 다시 오겠소이다. "
이억기 역시 패장 이순신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웠다.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이순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으며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수사!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오만 아니라 오십만의 왜군이 오더라도 맞설 수 있소이다.
"
이억기는 이순신과 굳은 악수를 나눈 후 총총히 떠나갔다. 권준이 이순신의 곁으로 다가
가서 속삭였다.
"장군의 품으로 들어온 그 운성이 바로 전라우수사였나 봅니다. "
이순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권준은 몇 마디 덧붙이려다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이억기의 관상을 보니 불혹에 이르기
도 전에 세상을 버릴 팔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날, 전라우수사의 죽음을 미리 예측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지금 전라좌수사에게 큰 힘이 되고 있지 않은가.
이순신이 좌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아섰을 때 나대용이 성큼뛰어나와 일행을 막아섰
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지난번 회의 때 소장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왜선과의 싸움에 유리하도록
판옥선을 개조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 동안 권부사의 도움을 받아서 삼국시대 이래로 지금
까지 우리가 만들었던 군선들을 군관 이언량과 함께 쭉 훌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여러 장수들께서 허락하신다면 여기서 그 모양과 쓰임새를 설명하
고 싶습니다만‥‥‥‥
이순신은 권준으로부터 귀띔을 받았기에 순순히 허락했다. 나대용은 일행을 이끌고 바닷
물이 채 빠지지 않은 해안의 물웅덩이를 찾아갔다. 이언량이 횃불을 든 군사들과 웅덩이 주
위를 삥 둘러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이 자리를 잡고 앉자 나대용이 군졸들에게 명령
을 내렸다.
"시작하라."
두 명의 군졸이 한조가 되어 각양각색의 모형 군선들을 물웅덩이에 띄웠다. 앙증맞은 군
언들이 균형을 잡고 일렬 횡대로 늘어서는 것을 본 장수들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이언량이
넉살 좋게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말로 설명드리면 답답해하실 것 같아서 나군관과 소장이 직접 만
들었습죠. 그럴듯합니까?"
모형 군선은 놀라을 만큼 정교했다. 돛은 물론 좌우로 쌍을 이루는노까지 달려 있었다. 나
대용이 기다란 지휘봉을 들고 설명을 했다.
"먼저 낯익은 것들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쪽을 보시지요. 개국초기부터 중종 명종대왕
때까지 사용되던 팔십 명 정원인 대맹선, 육십 명 정원인 중맹선, 삼십 명 정원인 소맹선입
니다. 이 배들은 군무와 조운을 함께 할 목적으로 세조대왕 때에 개발된 것입니다. 왜선과
비교해볼 때 그 크기나 속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왜구를 막는 데 큰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현재 조선 수군의 주력인 판옥선입니다. 정원이 백구십여 명으로 대맹선의 두 배가
넘습니다. 이 배의 특징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 있습니다. 노를 젓는 격
군들은 갑판 아래, 즉 판옥 내에 숨어서 배를 조종하며, 활과 창을든 군사들은 상갑판 위에
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를 벌입니다. 검에 능한 왜군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배를 크게 만들
고 상갑판을 높였으며, 그 결과 우리 수군의 주특기인 활을 좀더 쉽게 멀리까지 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두와 선미가 상대적으로 낮아서 적의 침탈을 자주 받았으며, 상갑판
위의 군사들피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 적의 활이나 창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
다. 따라서 판옥선의 보강은 왜군들의 침탈을 어렵게 만들면서 우리 군사들의 피해를 최소
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나대용이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질문이나 보충설명을 받기 위해서였
다 낙안군수 신보가 아는 체를 했다.
"고려 말에 과선을 만들어 왜군을 몰살시켰다고 들었소만‥‥
나대용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고려 현종(1011년) 때부터 숙종(1097년) 때까지 근백 년 동안 고려 수군은
과선 일흔다섯 척을 만들어 왜구를 섬멸했지요. 기록을 살피면, 과선은 배의 좌우에 칼을 빽
빽하게 꽃아 왜구의 침입을 막고, 선두에는 쇠로 만든 뿔을 달아 왜선을 당파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과선입니다. 과선과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배는 별맹선입니다 상갑판을 등글게 만들어 완전히 복개를 하고, 상갑판 위의 군
사들을 판옥 내에 배치시키는 것이지요."
사도천사 김완이 물었다.
"그렇게 되면 왜군들이 복개한 갑판에 들러붙을 게 아니오? 또한 갑판 안에서는 활이나
대포를 쏠 수 있는 거리도 짧아지고 시야도 가릴 것이오."
"바로 보셨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별맹선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큰활약을 못했지요. 그렇
지만 판옥 내부에 대포나 화살이 숨어 있기 때문에 적에게 공격의 방향을 들키지 않는 장점
이 또한 있습니다. 그래서 소장과 이군관은 과선과 별맹선의 장점만을 추려서 판옥선의 장
점과 합치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지요. 자, 이쪽을 보시지요. 거북선입니다. 태종대왕 때 잠시
사용한 기록은 있지만 그때는 중맹선이나 대맹선을 개조했기 때문에 그다지 위용을 드러내
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판옥선의 하체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거북선을 만들 계획입니다. 우
선 별맹선처럼 상갑판을 완전히 복개한 후 그 위에 과선처럼 칼과 창, 송곳 따위를 꽃습니
다. 그리고 선두에는 용머리를 달아서 그 입으로 대포를 발사하고, 선미인 거북 꼬리로도 역
시 대포를 쏘는 것입니다. 외판의 두께를 네 치 이상으로 하여 당파에 용이하도록 하고, 좌
우로 여섯 개 티상의 포를 동시에 쏠 수 있도록 포혈을 만듭니다. 여덟 개에서 열 개의 노
를 좌우에 달아 속력을 높이고, 돛을 달아 바람의 힘도 이용합니다. 쉽게 불이 붙는 것을 막
고 칼과 송곳들을 고정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철판을 목판 위에 덧씌울 수도 있겠습니다.
"사도첨사 김완이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노를 젓는 격군과 포를 쏘는 군사들이 한공간에 머무는것이 되오. 그 상황에서
포를 쏘면 소리가 귀를 찢고, 독성이 강한 유황 연기가 판옥 내에 가득해서 질식할 우려가
있소이다. "
나대용은 이미 그것까지 계산에 넣은 듯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지요. 우선 적송으로 만든 우리의 판옥선은 포를 발사한 후의 충격
으로 배가 갈라지거나 파손될 염려는 없습니다.
포성은 귀마개를 해서 막으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유황인데, 질식하지 않으려면 환기를
충분히 해야겠지요. 우선 용두 아래와 거북 꼬리에 큼지막한 문을 내서 바람이 통하게 하고,
각 포혈 위에도 적의 동정을 관망하고 목표물을 조준하기 위해 작은 창을 내는 것이 좋을
듯캅니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로 공기를 통하게 하고 노를 저어 바람을 끌어온다
면 질식사의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
나대용의 설명이 모두 끝났다. 장수들은 거북선 주위로 몰려가서그 생김새를 구경했다. 순
천부사 권준이 보충설명을 했다.
"거북선은 시야가 좁기 때문에 목표물을 조준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적의 선단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괴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전후좌우로 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리며 거침없이
적선을 치받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모. 적들은 거북선을 바다의 괴물이나 해룡쯤으로 여길
지도 모르죠. 이왕 거북을 닳을 거면, 등판에 거북무의를 그려넣는 것토 좋을 성싶군요. 전
라좌수군의 선봉을 맡길 만한 배입니다. "이순신은 나대용과 이언량을 불러 그 동안의 노고
를 위로했다. 나대용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고, 이언량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즐거워했
다. 거북선을 만들어서 돌격선으로 쓰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순신이 나대용
에게 물었다.
"우선 한 척만 만들어보오. 얼마나 시간이 들겠소?"
나대용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적송은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함께 일할 솜씨 좋은 목수들도 내일이면 다 모일 것입니
다. 석 달만 주시면 당장 전투에 나갈 수 있을만큼 완벽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
"좋소. 석 달을 주지. 그 동안 그대 둘은 거북선을 만드는 데만 매달리도록 하시오. 그리
고 순천부사도 아랫사람을 보내어 거확선 만드는 일을 도우시오. 거북선의 성능이 확인되면
순천에서도 곧바로 거북선을 만들도록 합시다 알겠소?"
"예, 장군!"
"자, 그럼 돌아갑시다 다음 회의는 열흘 후에 열기로 하고 오늘은 마음껏 취해봅시다. 나
군관과 이군관에게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탁주 두 동이씩을 먹이는 것이 어
떻겠소?"
이순신의 목소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의 심중을 살펴 미리미리 일을 추진한 권준과
나대용, 이언량이 너무나도 미더웠던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언이 있듯이, 하루에 한 가지씩만 잘못을 고치자. 그리고 신상필벌
을 명확히 할 것. 군율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만이 장수의 위엄을 지켜준다. 허나 그보다 더
뚱요한 것은 장수들의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들이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씩 상하의 위계를 잊고 남자와 남자로서 살을 비비고 피를
섞어야 하리, 혈육의 정으로 똘똘 뭉칠 만큼 서로의 살에 깊이 빠져 들어야 하리. 내가 곧너
이고 네가 곧 내가 되어야 하리. 한배를 타고 이 세상의 끝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음을, 나
의 몰락이 곧 우리 전부의 파멸임을 각인시켜야 하리. 이제부터 그대들은 전라좌수사 이순
신의 휘하 장수란 사실을 평생 자랑스러워 하게 되리라. 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설령 내일
아침 전쟁이 터지더라도 오늘 밤은 그대들과 함께 대취하리라.
7. 시선과 양장
꽃나무 사이제 놓인 한 단지 술을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시네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네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르네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행락은 오로지 봄이 다하기 전에 즐기는 것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픈들리네
술을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칠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지네
영원히 무정한 놀이를 맺어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하네
(이백. 월하독작)
신묘년(꾹9P쑤, 1591년) 11월 5일.
금강산에 머문 지도 열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노잣돈이 떨어져서 한양에 두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속세의 일들을 티똘처럼 잊고 지냈다. 평생을 올라도 금강산의 진면목을 알
기 어렵다는 선현의 말씀이 거짓은 아니었다. 춘하추동은 물론이고 조석으로 변하는 산의
기운과 풍경을 보노라면 시심이 절로 흘러넘쳤다.
개골산, 풍악산, 열반산, 지단산, 금강산, 중향성.
산의 이름이 이토록 다양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수많은 시심을 하나의 이름 안에 가둘
수 없었으리라.
허균이 금강산을 찾은 것은 죽은 형 허봉의 흔적을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허봉은 계미
년(1583년)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다가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되었고. 을유년(1585년)에 유
배가 풀린 후로는 줄곧 팔도의 명산을 순례하며 세월을 보냈다. 무자년(1588년)까지 석 달이
멀다 않고 금강산을 찾았으며 껼국 그곳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허봉의 나이 서른여덟 , 허
균의 나이 갓 스물을 넘겼을 때의 일이다.
기축년(1589년)에 누이 난설헌마저 세상을 버리자 허균은 이 년 동안 누이의 문집을 만들
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누이가 어렸을때부터 그린 그림들을 모으고 시문을 정리했다. 서애
유성룡으로부터 발도 받았고, 손속 이달이 기억하는 난절헌의 습작들도 되살려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문집이 완성되자 죽은 형 허봉에게 그 문집을 보이고 싶어졌다. 두 아우에게 글
을 가르치고 이달, 유성룡, 한호와같은 스승들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허봉이었다.
"서둘러 ! 불정대에 닿기도 전에 소낙비를 만나겠군 "
선두에서 발을 재게 놀리던 니달이 자꾸 뒤처지는 허균을 독려했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
이 그들의 머리 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벌써 다섯 시간이나 능선을 타는 중이었다. 허균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것을 겨우 참았다. 이제 곧 쉰을 바라보는 이달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
다. 평생을 방랑으로 살아온 그에게 이깟 능선쯤은 아무것도 아닌 듯 했다.
형의 임종을 지킨 사람, 형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나와 누이의 스승.
이달을 tm승으로 모시고 배운 지도 벌써 십 년이 가까웠다 불현 듯 처음 이달을 만나던 날
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달은 금강산을 유람한 후 남루한 몰골로 허봉을 찾아왔었다. 하인들은 그를 거
렁뱅이로 취급해서 대문 출입조차 막았고 구정물 세례를 퍼부으며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이달은 그수모를 모두 감내하며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허봉이 퇴청하기만을 기다렸다.
허균이 형의 부름을 받고 뒤뜰로 나갔을 때, 이달은 웃통을 훌러덩 벗고 물수건으로 입술과
이마의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작은 키, 족제비처럼 깡마른 얼굴과 구부정한 허리. 허균은
이달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허봉이 이달의 앞자리늘 내
어주었다.
"손곡 선생이시다. "
허균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저자가 팔도 기생을 후리고 다닌다는 이달이란 말인가? 진작부터 그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다. 머리를 올려준 기생이 마흔 명을 넘을 뿐만 아니라 팔도에 퍼져 있는 자식들이 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기생의 자식이니 또 기생의 자식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세간의 비아냥
거림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이달은 이수함과 기생 사이아서 태어난 서얼이었던 것이다.
역시 천출은 속일 수 없구나.
허균은 눈을 내리깐 채, 앞에 앉은 사내의 보잘 것 없음을 비웃었다.
신동이라는 칭찬에 우쭐해 있던 시절이었다. 허봉이 차분한 목소리로물었다.
"고려의 시인들에 대해 공부한다고 들었다 그래, 그들의 시가 어떠하더냐?"
"이규보의 시는 웅장하고 여유가 있으며, 정지상과 진화의 시는 곱고 아름답습니다. 이인
로와 이제현은 치밀하며. 이색은 깊고 순수합니다. 정몽주는 호탕하고 장대하며, 이숭인은
너그럽고 편안합니다. 각각 일가를 이루었으나 중원의 시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허봉이 다시 물었다.
"중원 최고의 시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와중에도 이달은 쩝쩝 소리를 내가며 술을 들이켰다. 예의라고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
이었다.
"소동파입니다. 호방한 기풍과 엄격한 절조가 으뜸이지요. 저도 그와 같은 시인이 되고 싶
습니다. "
이달이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허균을 꾸짖었다.
"뎃끼, 이놈! 동파가 뭐냐 동파가. 이왕 시인이 되려면 이백이나 두보를 흉내낼 일이다. 동
파가 호방한 구석이 있긴 해도 삼류에 불과하다는 걸 정녕 모른단 말이냐?"
허균이 지지 않고 대들었다.
"맑고 강건하기는 하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당시는 송시에 비해 부족함이 많
습니다 아무리 그릇이 크고 마음이 넓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갈고 다듬는 자의 세련된 손맵
시가 없고서야 어찌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허 ! 그래도 네가 옳다는 게냐? 소동파나 황산곡을 본보기로 삼아서는 기껏해야 말장
난에 그칠 따름이다. 글자 몇 개를 예쁘게 다듬었다고 세상이 달라진다더냐?"
허봉이 웃으며 이달에게 청했다.
"그러지 말고 손곡 자네가 직접 한 수 읖게나 내 술 한 잔 거하게 낼 터이니 ."
"그럴까?"
이달은 거침없이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읖었다. 밤을 지새우며 시어를 갈고 다듬던 허균에
게는 참으로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맑은 날 굽은 난간에 오랫동안 앉았지만
중문까지 닫아걸고 시도 짓지 않네
담장 구적의 작은 매화가 바람에 다 떨어지니
봄빛은 살구꽃 가지 위로 옮겨가는구나
이달은 입맛을 쩝쩝쩝 다시며 술을 들이켰다. 이달이 읖조린 시를 되뇌던 허균의 얼굴이
점잠 흙빛으로 변해갔다. 소동파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허균은 넙죽 엎
드리며 사죄했다.
"몰라 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달은 그를 본 체 만 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봉도 웃으며 뒤따랐다.
"자네 동생 덕에 호강하게 생겼으이. 어서 앞장을 서게. 술에는 노래와 춤, 계집이 따라야
하는 법이야."
다음날부터 허균은 이달에게서 당시를 배웠다. 이달은 스무 권이 넘는 서책을 던져주고는
그 모두를 외우게 했다.
"시란 꽃과도 같고 술과도 비슷하지 . 무릇 시의 좋고 나쁨을 평하기 전에 그 시의 향기
를 맡을 수 있어야 하는 법. 내음도 모르면서 무슨 시를 쓴단 말이냐."
문선, 태백, 성당십이가, 유수주, 위좌사, 당음 등을 외우는 데 꼬박 오 년이 걸렸다. 그때
까지 이달은 시를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은 젊어서부터 방랑을 즐겼다. 허봉 역시 여행을 좋아했지만, 그 동안 관직에 얽매인
몸이라서 나고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세인들은 귀양에서 풀려난 허봉이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유성룡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허봉의 귀경을 종용하기도 했
다. 그러나 허봉은 이달과 함께 산천유람을 즐기면서 세월을 낚았다 두 사람의 기행에 관한
소문이 팔도에 널리 퍼졌으며, 허균은 그들의 방랑을 종종 이백과 두보의 방랑에 견주곤 했
다.
이백과 두보는 동시대에 태어나 천하를 방랑하며 놀라운 시편들을 토해놓았다. 그들은 서
로를 갈망했지만,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은 천보 3년 초여름부터 일 년 남짓이었다(744년∼
745년). 그들은 양송 지방을 함께 여행했고 서로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간직한 채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허봉과 이달 역시 시를 지으며 함께 지내기를 평생토록 염원했지만 같
이 지낸 시간은 삼 년 남짓이었다. 허봉이 죽고 나서도 이달의 여행은 계속되었지만, 허봉과
의 나날처럼 가슴 설레지는 않았다. 첫정은 그만큼 눈부시고 사무치는 법이다.
허균이 금강산 기행의 동반자로 이달을 선택한 것은 백 번 잘한 일이었다. 당시를 외우는
솜씨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달의 기억력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허봉의 그림자가 슬그머러 검은 얼굴을 드러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잘랐던 참나무 밑동
도있었고, 함께 밤이슬을 피하던 동굴도 있었으며, 사흘 밤낮으로 술을 마셨던 누각도 있었
다. 현판이나 바위에는 어김없이 허봉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글씨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는
이달의 회고담을 소상히 받아 적었다.
세 차례의 금강산 기행 중에서도 이번이 가장 힘들었다.
허봉이 석 달 동안 다녔던 길을 열흘 만에 따라잡자니 피곤이 더했다. 겨울이 성큼 다가
섰고 전쟁이 터진다는 소문이 금강산 자락에까지 퍼졌다. 시간이 부족했다
첫날은 영평에서 출발하여 단발령을 넘은 후 장안사에서 유숙했다. 장안사 주지 동호는
금강산 원경을 읖은 허봉의 오언 절구 두 수를 선뜻 내놓았다. 둘째 날엔 시왕백천동으로
들어가서 깎아지른 바위와 솟구치는 시내를 구경하고 영원에서 묵었으며, 그 다음날엔 망고
대를 가까스로 오른후 송라를 지나 만폭동에서 술을 마신 다음 표훈사에서 쉬었다. 넷째 날
에는 진헐대를 거쳐 개심사에 이르렀다. 개심사 산문 밖에서 허균 일행을 맞은 사람은 뜻밖
에도 서산대사이었다 그는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로 시문에 두루
능한 고승이었다
"어서들 오시오. 시선이 다 되셨구려 ."
합장을 하는 휴정의 희고 긴 수염이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달이 웃는 낯으로 화답했다.
"이 몸이 시선이면 대사께서는 부처이십니까? 괜한 놀림 마시고 곡주나 한 잔 주시지요."
휴정이 허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잘 성장하셨소. 아버님의 눈과 형님의 가슴을 지녔구려. 가히 한 시대를 주름잡을
재목입니다. "
허균은 몸둘 바를 몰랐다.
"생전에 아버님께서는 대사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늘 당부하셨습니다. 소인이 게을러 미
처 찾아뵙지 못하고 십여 년 세월이 물같이 흘렀으니 송구스러울 나름입니다. 헌데 저희들
이 올 줄을 어찌 아셨습니까?"
휴정이 염화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동자 하나를 앞세워 산길을 오르니 곧 정양루
였다. 일만 봉우리가 발 아래 늘어섰고, 보름달이 훤하게 누각을 비추었다. 곡주와 산나물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역시 대사께서는 중생의 마음을 헤아리시는군요."
이발이 염치불구하고 술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허균은 다소곳이 앉아서 아버지 허엽, 작은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다독거리기라도 하
듯 휴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말에, 중생의 몸은 태허와 같으니 번뇌는 어느 곳에서 다리를 편히 할 것인가라고 했
지요. 번뇌는 집막에서 오고 집착은 또다른 집착을 낳게 마련이외다. 떠난다는 것은 돌아온
다는 것이며, 헤어진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지만
어제 우리는 서로가 머무는 곳을 알지 못했고, 내일 우리는 서로다른 길로 떠날 것이외다. "
벌겋게 술기운이 오른 이달이 휴정을 거들었다.
"대사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다섯 가지 색깔은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음정은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상하게 한다고 했지요. 구태여 앎을 쫓으면 남는 것은 허무
뿐입니다. 헌데 이놈은 끝까지 제 형의 그림자를 찾겠다고 날쉽니다. 그려 ."
허균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지만 선현와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도를 찾는 것이 인생이 아닐는지요? 내적인 만족
과 함께 인간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 또한 값어치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이나 형님처럼
물러나 시선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도 옳은 일이나 상도와 상법이 없어진, 풍전등화와도 같
은이 나라를 구하는 일 또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깨달음이 산문에만 있고 속세에는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방삭도 유언하기를,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숙제는 우둔하
고 주하사(주나라의 벼슬)가 된 노자는 노련하다고 했지요."
허균은 주나라 벼슬을 장막 삼아 속세의 삶을 끌어나갔던 노자의 처세를 인용해서 이달의
노장적 세계를 비꼬았다. 이달이 목청을 높였다.
"이놈아! 그래봤자 정승 판서밖에 거 하겠느냐? 자리와 돈이 탐나면 솔직히 그렇다고 해
라. 깨달음에는 빈부가 없고, 시에는 귀천이 없는 법이다. 대체 무엇이 값어치 있는 보석이
며, 무엇이 값어치 없는 똥이라더냐? 네 썩어빠진 두 눈이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느냐?"
휴정이 이달을 진정시켰다.
"시선의 경지를 너무 쉽게 가르치려 하지 마세요. 어제는 걷더니 오늘은 앉고, 오늘은 앉
더라도 내일이면 눕는 것이 인생인데, 어찌 청년의 마음을 한꺼번에 다잡으려고 하십니까?"
이달이 .비틀비틀 난간으로 물러서더니 두등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며 이백의 시들을 읖기
시작했다. 곧 그의 낭송은 울먹임으로 변했고 통곡으로 이어졌다.
이달은 눈물이 많은 사내였다.
술에 취해 울고 풍경에 취해 울고 그리움에 취해 울고 시에 취해 울었다. 그리고 달밤에
누각에서 술을 마신 후 또다시 울었다. 그가 한 번 울음을 터뜨리면 아무도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시와 울음이 섞이다가 울음이 시를 삼켜버렸고, 정분을 나눈 여인들의 이름이 하나
씩 호명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름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휴정
과 허균은 이달의 울음에 익숙했으므로 헛되이 그 슬픔에 개입하지 않았다.
"금강에서 무얼 배웠소?"
"한양에는 없는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세 치 혀에 더럽히지 않은 산과 손때가 묻지 않
은 바위. 늘 그곳에 변함없이 있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지요. 부끄러움이 앞섰고,
좀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
"참으로 큰 깨달음입니다. 허나 그 풍경들이 어찌 금강에만 있겠습니까. 중생이 머무는 속
세라면 어디든지 있지요."
"허나‥‥‥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에서 어찌 한결같은 고요가 있겠는지요?"
"풍전등화라고 하면‥‥‥ 왜국과의 전쟁을 이름인가요?'
허균은 깜짝 놀라며 들었던 술잔을 떨어뜨렸다. 금강산에서 수도하는 노승이 어찌 곧 닥
쳐을 전쟁의 조짐을 알고 있단 말인가? 휴정은 예의 그 인자한 웃음으로 허균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노자께서는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이해할 수 있으며 ,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오. 나가는 것이 멀면 멀수록 아는 것은 점점 작아지는 법
이외다. "
휴정은 장삼의 소매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대마도의 중 천형이 보낸 것이었다.
"어디에나 살생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서로 싸우고 죽이려는
마음을 지우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바로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닐까 걱정이외다. "
허균은 서찰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조선 조정을 깨우쳐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이 나면 이 나라 백성들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
"모든 것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뜻이지요. 소승은 다만 살생을 줄이는 쪽을 택할 것이
외다. "
"직접 전쟁터에라도 나서시겠다는 뜻입니까?"
휴정은 다시 염화미소를 지었다. 기생들의 이름을 부르던 이달의 목소리가 차츰 울부짖음
으로 바뀌고 있었다.
휴정의 웃음과 이달의 울부짖음.
속세를 떠나 깨달음을 쫓는 그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새로운 깨달음을 위한 화두
일까?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욕망을 샅샅이 훑을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일까? 저 둥근
달처럼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신이 없다면, 다가오는 운명을 관조해서
는 안 될 것이다. 도와 예, 아름다움과 격조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세상에 나아가 정치
를 해야 한다. 힘과 권위로써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
서산대사와 헤어진 다섯째 날에는 사자봉을 가로질러 보덕굴에서 묵었고, 여섯째 날에는
화룡담을 거쳐 마하연에서 이슬을 피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과 봉우리를 넘나드는 바람 소
리가 우수수 흔들리는 삼나무, 회나무들의 가지들과 어울려 밤새 귀를 간지럽혔다. 일곱째
날에는 운흥을 거쳐 바로 구정봉을 오르다가 소나기를 만나서 비로봉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
하고 자월암에서 쉬었으며, 여덟째 날에는 불정대에 도착하여 일천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시
원하게 떨어지며 옥빛무지개를 만드는 장관을 구경했다. 그 다음날에는 백천교를거쳐 명파
에서 밤을 지새웠고, 마지막 날에는 신라 화랑 안상과 영랑이 놀았다는 삼일포를 둘러보았
다.
이달은 그곳에서 배를 한 척 빌려 삼일포 앞바다의 작은 섬 송도까지 가기를 원했다. 허
봉과 마지막으로 술잔을 기울인 곳이 바로 송도의 거북바위라고 했다. 과연 송도의 동남쪽
모퉁이에는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두사람은 거북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이 제법 거셌다. 이달은 평소처럼 탁주 한 동
이를 단숨에 비워나갔다. 허균은 바위에 부서져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를 오랫동안 바라보
았다.
형님은 여기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약관의 나이로 조정에 들어가 요순시대를 재
현하기 위해 몸을 던진 형이 아니었던가? 귀양 한 번 당했다고 움츠러들거나 삶을 포기할
형이 아니다. 그렇다면 형의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천을 떠돈 궁극
적인 이유, 조정의 부름을 단호히 거절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허공
을 맴돌았다. 형님이 남긴 글귀들은 한결같이 신선과 술과 달을 노래하고 있었다. 나라에 대
한 근심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떠냐? 이참에 나와 함께 아예 여기에 눌러앉는 것이 ."
이달은 허균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곳에 숨어 지내면 형의 절망과 또다른 희망
의 자락을 어렴풋하게나마 쥘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세상을 등지기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확 바꾸고 싶었다.
"아서라, 이놈! 세상이 어디 네놈 마음대로 획획 뒤집을 수 있는 손바닥이라더냐? 이 바위
가 수만 년 동안 웅크리고 앉았듯이 세상도 또한 그러한 법이야. 칼을 댈수록 상처만 늘지 .
하곡의 마음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겠느냐? 에잇! 열흘 동안 헛고생만 했구나. 머엉청한
놈!"
허균이 술을 한 잔 들이켠 후 물었다.
"내년 봄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실 건지요?"
"어떻게 하다니? 이놈아, 언제 세상살이가 전쟁이 아닌 적이 있었더냐? 보아허니 네놈은
은근히 전쟁을 기다리고 있구나."
"전쟁을 기다리다뇨?"
"세상을 단숨에 쓸어버릴 계기를 찾고 싶은 거겠지 허나 세상 일이란 처음도 끝도 없는
법. 억지로 매듭을 지으려들다간 제 목숨만 갉아먹어. 전쟁을 겪고 나면 태평성대가 열리리
라고 보는 거냐? 허허허, 꿈깨라, 꿈깨 ! 요순시대에도 혁명을 원하는 놈들은 있었더랬다.
모두 처형당해 망각의 강에 가라앉았지. 당시 삼백 수를 단숨에 외워도 문전박대를 당하는
세상이다. 조그마한 틈도, 인정도,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 비정함 그 자체지. 네깟 놈의 음풍
농월대로 뒤집힐 거면 수만 번도 더 뒤집혔겠다"
"금강산에 머무르실 것입니까?"
"번뇌는 어느 곳에서 다리를 편히 할 것인가라는 서산대사의 말씀을 벌써 잊었느냐? 쭈글
쭈글한 몸이야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흐르면 그만이다. "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삼일포로 다시 나왔다. 허균은 눈물 많은 스승과 헤어질 때가 왔음
을 깨달았다. 옷매무시를 고치고 큰절을 올렸다. 이달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콧노래를 흥얼
거렸다. 허균은 남아 있던 노잣돈을 모수 내놓았다 그 돈이 없으면 스승은 새벽이슬을 맞으
며 길거리에서 구걸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쟁이 나면 누가 맑고따스한 스승의 시를 알
아주리요.
돈을 챙긴 이달은 술통을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그는 똑바로 설 수 없을 만큼 취해 있었다. 허균이 이달을 부축하며 물었다.
"하루만 더 함께 게시지요. 술이 깰 때까지만이라도."
이달이 허균의 팔을 뿌리쳤다.
"일없다! 계집들처럼 치맛자락이나 붙들고 이별을 아쉬워하랴."
이달은 천천히 오던 길을 되짚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허균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스승의
됫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스승이 지은시들이 천지사방을 맴돌았다. 허균은 스승의 시
를 평하기 위해 아껴두었던 문장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언젠가 스승의 시를 논할 자리가
있다면 단숨에 써내려갈 마음으로 준비해둔 것이었다.
손곡 이달의 시는 이백에 근본을 두었고 왕유(당나라시인)와 유장경(당나라시인)을 드나
들어 기운이 다사롭고 풍취가 뛰어나며 빛이 곱고 맑아 담담하다. 그 곱키는 남위 (춘추시
대의 미녀)가 옷을 차려 입고 밝은 화장을 한 듯하고, 그 온화함은 봄볕이 온갖 풀을 덮은
듯하며, 그 맑음은 서리 같은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흐르는 듯하고, 그 울림의 청아함
은 마치 높은 하늘에서 학을 타고 피리 부는 신선이 오색구름 밖을 떠도는 듯하다. 끌어당
기면 노을빛 비단과 미풍의 잔물결 같고, 깔아놓으면 구슬이 앉고 옥이 달리며, 두드리고 갈
면 비파의 애절함과 구슬의 울림이요, 억제하고 누르면 말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로 오르던
용이 몸부림을 거둔다. 그 일없는때에 천천히 걸음은 평탄한 물결이 넘실넘실하여 천리를
흘러가는 듯하며 태산의 구름이 바위에 걸려 흰옷도 되고 푸른 개도 되는 듯하다. 개원, 천
보, 대력 사이에 놓아도 왕유의 대열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이
름난 시인들과 비교하면 그들 또한 눈이 휘등그레져 구십리나 물러설 것이다.
허균의 방랑은 계속되었다.
한양을 따나올 때부터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에는 전라도를 훑어볼 계획이었다. 기축옥사
의 여파 때문에 전라도는 입신양명이 봉쇄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정여립에 대한 분
노를 시도 때도 없이 폭발시키는 군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전라도 출신의 그 누구도 중용
되지 않을 것이다. 이 틈을 이용해서 기호와 영남의 사림들이 조정의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
였다. 이제 전라도는 곡물이나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예속의 땅이자 혁명을 꿈꾸는 반란의
땅이었다.
공주의 고분들을 둘러보고,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을 도는 동안에
도 내내 그들의 한파 설움을 느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라
도는 늘 견제의 대상이자 착취의 땅이었다. 황토에 일구어놓은 곡물들은 어침없이 경주나
개경 혹은 한양의 통치자들에게 돌아갔으며, 전라도의 백성들은 황금들판을 바라보면서도
보릿고개 걱정을 해야만 했다.
선운사와 백양사에서는 여인네들의 탑돌이가 줄을 잇고 있었다. 그녀들은 어제만큼의 오
늘, 오늘만큼의 내일만을 소망했다. 정치의 길이 막힌 사내들이 술과 한숨으로 꿈을 지울 때
여인네들은 오늘의 작은 행복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마음에 기대었던
것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종교만이 가득한 땅.
탐관오리를 몰아내거나 조정의 지나친 조세포탈에 대항할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정의
를 부르짖다가는 하루아침에 역도로 몰려 삼족이 죽임을 당할 것이니, 제 목숨 단축하는 짓
을 사서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허균은 그들의 깊은 체념이 무서웠다. 허무와 절망의 깊은 강에 빠진 저들에게 나라가 무
슨 의미가 있으며, 임금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자꾸 안으로만 쌓이는 체념들은 한이 되
고 눈물이 되었다가 결국 언젠가는 참을 수 엄는 분노로 터질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역적
이 되고 피비린내가 황토를 뒤덮을 것이다.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허균의 자문자답은 끝이 없었다. 우선 과거에 응시한 선비들을 실력대로 뽑아야 한다. 글
을 가리기도 전에 지방에 따라 차등을 둔다는것은 멀정한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자르고 병신
노릇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나라를 병신으로 만드는 자들을 모정에 두고 쓸 수는 없는 노
릇이다. 법을 바르게 세우고, 그 법을 지키고 감시할 인재를 새로 쁩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는 개선이나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
싸그리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이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노래가 울려퍼지도록 하리라.
창평, 옥과, 곡성을 지나 순천으로 접어들었다.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가 바로 코앞이었
다. 허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앞으로 서찰을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유성룡의 말이 기억났
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병법에 밝고 무섭게 신중한 사람이지. 적을 공격해서 몰살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책임진 곳을 빼앗기지는 않을 거야."
무섭게 신중한 사람!
허균은 그 대목이 마음에 늘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침착하고 입이 무거운 장수
가 있어야 한다. 명분이야 문사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힘과 기세로 소인배들을 몰아내는 일
은 장수들의 몫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앞날을 위해 장수들을 미리 만나둘 필요가 있었
다.
서애 대감이 과대평가를 하신 것은 아닐까?
허균은 이순신을 따라다니는 이상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녹둔도에서의 패전은 물론이고,
북병사 이일에게 대들면서 패전의 책임을 회피한 일, 정읍현감으로 있으면서 남솔을 일삼았
으며, 동인에 아부하였기에 벼락출세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소문들에만 기댄다
면 이순신은 겁 많고 책임감 없는 장수이면서, 가족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이
고, 당파 싸움을 이용해서 당상관에 오른 소인배였다.
그러나 정반대의 소문도 함께 떠돌았다.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하옥된 정언신을 만나기 위
해 직접 옥으로 찾아갈 만큼 의리 있는 사내이고, 군졸들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는 인정 많
은 장수이며, 송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로 소문난 명판관이라는 것이다
허균은 한 인간에게 상반된 두 가지 가면이 덧씌워져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소문이 번잡
하다는 것은 순리대로 몸을 낮추어 세상을 살지 않아서일 테고, 그 소문들이 상반된 것은
쉽게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아서일 것이다.
모처럼 사람다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구나.
사흘 후, 아침상을 물릴 때 즈음 뿔피리를 옆구리에 찬 전령이 허균을 찾아왔다. 좌수사가
열흘 전부터 5관 5포를 돌며 감찰중이기에 오늘 밤 늦게나 좌수영에 닿을 것이라고 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가벼운 몸짓이 전령으로서는 제격이었다.
"이름이 뭔가?"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날발이라고들 합지요."
날발을 따라 순천을 떠났다. 말고삐를 잡은 날발은 십 리 길을 단숨에 내달았다.
축지법을 쓰다니‥‥‥‥ 놀라운 일이야.
좌수영에 닿았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이순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허균은 서재로 안
내되었다. 서책이 한쪽 벽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장수의 방에 이토록 많은 서책이 있는
것은 참으로 낮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랫목에 비스듬히 앉아서 서책을 들추다가 스르
르 잠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한 달이 넘도록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것이다.
모처럼 꿈에 누이가 보였다.
둘은 함께 이달 앞에 무릎을 꿇고서 시를 외우고 있었다. 허균은 자꾸 시구를 틀려 이달
의 꾸지람을 받았지만 난설헌은 한 글자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이달이 혀를 끌끌 찼다.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이번에는 허균과 난설헌이 석봉 한호 앞에서 글씨를 쓰는 광경이 꿈속에서 피어올랐다.
곧고 힘차게 뻗는 그녀의 필체를 보며 한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뇌까렸다.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눈을 뜨니 주위는 온통 깜깜했고 바람 소리가 차고 매서웠다. 허균은 방안에 덩그러니 혼
자 누워 있었다.
"장군께서 오십니다. "
날발의 외침에 서둘러 마루로 나왔다.
"반갑소이다. 이순신이외다. "
허균은 우선 병색이 완연한 이순신의 얼굴에 놀랐다. 횐 턱수염과 구부정한 어깨가 나이
를 더 먹어 보이게 했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수사의 소임을 다한단 말인가? 서애 대감의
안목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
술을 서로 권한 후 이순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애 대감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소이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동량이라고 하셨는
데, 과연 틀린 말씀이 아니군요. 서애 대감은 어떠십니까?"
"여전히 바쁘시지요. 저 역시 장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병법에 밝고 용인
술에 능하시다구요."
이순신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소장은 그저 서애 대감의 보살핌으로 이자리까지 오게 되었지요.
보시다시피 몸도 아프고 기운도 예전 같지않아서 갑옷과 투구가 무거을 지경입니다. 허허허
."
이순신은 왼손으로 갑옷의 앞가슴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은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처럼 나
약하고 힘이 없었다.
"방비는 어떻습니까?" -
"그게‥‥‥ 소장이 워낙 뱃멀리를 심하게 앓아서 5관 5포를 모두 둘러보지는 못했습니
다. 하지만 만호나 첨사들이 다 잘 알아서들 하고 있겠지요. 허허 "
"왜구들의 동정은 어떠한지요?'
"제깟 놈들이 별수 있겠습니까? 요즘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지요. 다 나랏님의
덕이 사해에 넘쳐남입니다. "
허균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게다. 서애 대감으로부터 왜국의 사정을 전해 들었을 터인데 시치미를
뚝 떼는군. 무섭게 신중하다더니 과연 !눈치 빠른 허균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며 비굴하게
구는 이순신의 마음을 읽었다. 이족에서 진심을 내보이기 전에는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으
리라. 허균은 미리 준비해간 지도 석 장을 꺼냈다.
"왜놈 장사치들에에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보시지요."
두 장은 조선 팔도를 담았고, 나머지 한 장은 전라도 지역을 세밀하게 옮긴 것이었다. 전
라좌우도의 관과 포의 크기와 병력, 그리고 장수의 이름과 나이까지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조정에서도 이렇게까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도를 가지고 있진 못하리라. 지도를 살피던 이
순신의 눈초리가 점점 매서워졌다. 왜의 간자가 모든 것을 알아냈으니 백전백패는 불을 보
듯 뻔한 일이었다. 허균이 이순신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전쟁에서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많이 생각한 자가 적게 생각한 자를
이긴다 함은 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
이순신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과연 소장은 왜군의 침탈에 대비하고 있소이다. 5관 5포의 방비를 감찰한 결과, 사도첨사
김완이 군량미를 부풀려서 허위보고한 것외에는 별문제가 없었지요. 공격하기에는 힘이 모
자라지만 지키는 데는 넉넉함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시름 놓았더랬습니다. 허나 이것들을 보
니 소장의 생각이 좁고 얕았군요."
허균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이순신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육신은 늙고 병들었으나 사리가 분명한 어투와 상대의 심장을 꿰뚫는 눈매에는 양장
의 자질이 흘러넘쳤다. 이 나라에는 지금 위엄과 덕망을 갖추고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 양장
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허균 역시 괜히 둘러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담은 의문을 곧바로
꺼냈다.
"녹둔도의 패전은 어찌된 것인지요?"
죽창에 눈을 찔린 듯 이순신의 온몸이 움찔 떨렸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이고 북방은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동남쪽으로는 왜구
와 이웃해 있고 북으로는 말갈과 여진이 늘우리를 위협하고 있지요. 세종대왕 시절, 사군육
진을 세워 북방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나 지금은 잊혀진 영광에 불과하외다. 수령들은 사
치하고, 장수는 임기가 끝나 하루 바삐 한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훈련되지 않은 군졸들
은 쇠잔하여 풍토병에 걸리기 일쑤입니다.
조그마한 적이라도 쳐들어오면 흙담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질 형국이지요. 머지않아 여
진은 힘을 키워 우리를 넘볼 것입니다. 어쩌면 고셔시대 원나라에게 당했던 그 끔찍함을 다
시 맛볼 수도 있지요."
이순신은 녹둔도의 패전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고 정책의 잘못으로 설명하였다. 허
균은 말갈과 여진, 그리고 왜구를 함께 논하는 이순신의 넓은 안목에 감복했다.
"옳습니다. 만약 그 같은 오랑캐의 침입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
이순신은 대답을 늦추고 허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방비의 허술함이야 낡은 제도
를 그대로 고수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책임을 따진다면 현존하는 제도조차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수령과 장수들의 전횡이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내게 무슨 답을듣고 싶은
걸까?
"군졸을 다스리고 장수를 통솔해서 한 나라를 굳세게 하는 자는 오직 임금뿐입니다. 나라
가 위기에 빠진다면 그 책임은 응당‥‥."
"임금에게 있다는 맡이오?'
이순신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전쟁의 책임을 임금에게 돌리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었다.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상벌을 논하는 것인데, 임금에게 어찌 상이나 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군왕은 나라에 의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한다 했습니다. 무릇 임금이란 하늘이 내는
것이지요. 하늘이란 무엇입니까?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했듯이 백성의 바람이 곧 하늘의 뜻
입니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걸주와 같은 폭군은 하늘의 뜻을 저버렸으므로 당연히 덕
이 높은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과 같은 새로운 임금에게 쫒겨나는 것이지요."
"헛, 허어 !"
이순신은 저토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침없이 임금의 처벌을 논하는 허균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서애 대감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계셨군. 하지만 저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제 목숨 하나
건사할 수 있을까?
이순신은 유성룡의 유연하고 차분한 성품을 떠올렸다. 유성룡은 날아오는 화살이라도 능
히 품을 만큼 넓고 깊은 아량을 지녔다. 허균은 아직 유성룡의 처세술을 배우지 못한 것이
다.
"나랏님을 걸주와 비교하는 건 비약이 심하시외다. 퇴계와 율곡의 가르침을 받아 태평성
대를 활짝 연 분이 아닙니까? 설령 왜구나 여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패하더라도 그것은 나
랏님의 잘못이 아니지요.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나랏님의 눈과 귀를 가린 벼슬아치들의 잘
못입니다. 또한 군졸들을 통솔하지 못한 장수들의 책임도 크고."
"그렇지 않습니다. 책임을 정승 판서와 장수들에게만 돌린다면 백성들이 용서치 않을 것
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백성의 뜻이지요. 지금은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
게 부림을 당하는 항민이거나 불만을 가슴 깊이 묻고 시름하고 탄식하며 윗사람을 탓하는
원민에 머물고 있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갈아엎기 위해 떨치고 일어설 호민들이 나타날 것
입니다. 호민들이 앞장을 서고 원민과 항민이 그 뒤를 따른다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
제이겠지요.
"호민이라 하면‥‥‥?"
"진나라가 망한 것은 진승, 오광 때문이고, 한나라가 멸망한 것도 황건적에서 비롯되었으
며, 당나라도 왕선지와 황소의 난으로 끝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임금이 백성의
뜻을 살피지 못한 틈을 타서 호민이 일어섰기 때문이지요."
"그만! 그렇다면 그대는 진승이나 모광, 황건적, 황소처럼 이 나라를 뒤흔들고 싶다는 말
이오?"
"아니지요. 우선은 임금이 백성의 뜻을 헤아리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임금이 천명을 거역한다면 호민의 거병을 막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
이순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주안상이 뒤집혔고, 허균의 온몸에 술과 안
주가 튀었다.
"닥치시오. 만약 고대가 호민을 자처하며 난을 일으킨다면 이 칼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
오. 지금 당장 그대의 목을 벨 것이로되, 서애 대감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주겠소. 다시
는 그딴 소리 입 밖에 내지마시오.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한 목숨 보전하는 길이외다 "
허균이 따라 일어서며 이순신의 팔을 붙들었다
"임금에게 돌아갈 책임을 장수가 져야 한다면 언젠가는 장군도 그족쇄에 걸리고 말 것입
니다. 필부도 천명을 받으면 임금이 되고, 임금도 천명을 잃으면 필부가 되는 이치를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이노오옴, 닥치지 못할까!"
이순신은 당장에 칼을 뽑아들 기세였다. 그러나 허균 역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오
히려 더 큰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것입니다. 그땐 장군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번
전쟁이 임금을 향한 장군의 허황된 믿음을 뒤흔들어 놓을 테니까요."
"에잇 !"
이순신은 허균의 손을 뿌리치고 장검을 뽑아들었다. 뒤로 콰당 자빠진 허균의 얼굴에 싸
늘한 미소가 맴돌았다.
"장군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소인의 목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드지지요. 어서어서 가
지고 가십시오. 정여립보다 더한 역적을 잡았다고 나랏님께 아뢰고 상을 타십시오."
장검을 든 이순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균의 비웃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대숲을
뚫고 온 바람이 아기 울음소리를 냈다. 이순신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긴 숨을 들이쉬며
뽑아든 검을 천천히 칼집에 넣었자, 그리고 휭하니 방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
로 사라졌다. 날발이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허균은 옷을 털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은 모두 끝이났다. 일부러 극단적인
주장을 펴서 이순신의 반응을 살폈던 것이다.
당장 대의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침착하고 신중하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이순신의
태도는 훌륭했다. 아직 전쟁이 터지지 않았으니 쉽게 마음을 돌리지는 못하겠으나 전쟁이
터지면 그의 충정도 바뀌리라. 그때 나는 다시 와서 물으리라. 누가 이 환란의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8. 때늦은 사랑
황곡은 일찍이 짝을 잃었지만
칠 년이 지나도록 다른 짝을 찾지 않네
고개 숙이고 홀로 잠들며 다른 새들과 같이 지내지 않네
밤중에 슬피 울며 옛 짝을 생각라네
운명으로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흘로 자는 것이 무슨 근심이리오
과부가 죽은 지아비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기를 수십 번
흐르는 눈물 스스로 감당치 못하누나
죽은 짝을 못 잊음이 슬프고 비통하네
날으는 새도 그러한데 하물며 정숙한 여인에게서랴
비록 좋은 짝이 있다 하나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리
(유향, 노과도영편)
신묘년(1591년) 12월 31일
세상의 빛을 모두 삼켜버린 칠흑 같은 그믐밤이었다. 전라좌수영에서 십 리쯤 떨어진 용
두리 대숲으로 해풍이 몰려들고 있었다. 대나무들은 덧없이 한 해가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
며 우우우우 몸을 흔들었다. 주막은 천년 묵은 이무기가 몸을 뒤틀며 승천하는 것처럼 굴뚝
으로 횐 연기를 뿜어 올리며 대숲을 등진 채 바다 쪽을 향해 있었다. 주모가 재작년에 팔자
를 고쳐 전주로 나간 후로는 먹이를 구하려고 대숲에서 내려온 들짐승들만이 간간이 이곳을
찾을 따름이었다. 백년묵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해서 길손을 유혹한다는 풍문이 돌면서부터
마을 사람들은 대낮에도 주막을 지나는 것을 꺼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들풀과 거미줄이
주막을 더욱 흉물스럽게 만들었다.
봄부터 주막에 새로 사람이 들었다. 서른 살 안밖의 여인네가 국밥을 팔며 다시 길손을
맞은 것이다. 빼어난 미모가 입소문으로 퍼지자 짓궂은 뱃사람들이 너나없이 몰려들었다. 그
녀의 곁에는 옆구리에 뿔피리를 찬 사내가 늘 붙어 다녔다.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는 사내는
피리부는 솜씨만큼이나 쌍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이 빠르고 날카로웠다. 한 번 그의 검무를
구경한. 뱃사람들은 그녀를 집적거릴 엄두도 내지못했다.
그가 항상 주막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진법훈련이 있을 때나 좌수영에서 급히 찾을 때는
열흘이나 보름씩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 역시 장사를 쉬었다. 길손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요깃거리를 청해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그녀가 용두리로 왔을 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달이
는 냄새가 대숲까지 퍼졌다. 어떤 날은 밤새 눈물을 흘린 듯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어떤
날은 숨을 헉헉대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병색은 늦은 봄으로 접어들면서
차츰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밥장사를 시작하면서 부터는 울거나 비명을 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웃음을 잃은 여인이었다
뱃사람들이 아무리 우스갯소리를 해도 그녀는 보조개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눈 밑에
깔린 검은 기미가 더욱 그녀의 표정을 어둡게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쉽게 범접하지 못할 어떤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여전히 물기가 배어 있는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별무리가 유난히 많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녀는 소복 차림으로 마당에 나와서
건넌방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젯밤, 급한 전갈을 받고 좌수영으로 간 날발은 오늘도 돌아오
지 않을 모양이었다. 멀리서 컹컹컹 개짖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가서 아궁이 앞에 앉았다. 장작불이 틱틱 불꽃을 튀기며 타올랐
고, 솥뚜껑을 열자 더운 김이 얼굴을 확 감쌌다. 바가지로 더운 물을 가득 떠서 헛간으로 옮
겼다. 숭숭 뚫린 헛간의 지붕 사이로 별들이 보였다. 참나무로 잔 아름드리 욕통에 팔팔 끓
는 물과 찬물을 적당히 뒤섞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헛간 문을 안에서 잠그고
소복을 벗었다. 저고리와 치마는 물론 속곳까지 완전히 벗은 다음 욕통으로 들어갔다. 봉긋
한 젖가슴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뽀얀 속살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
다.
"아아!"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뚫린 지붕 사이로 드문드문 낯선 별무리가 눈에 띄
었다. 오늘따라 별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몸을 추스릴 만큼 병이 나은 늦봄부터, 폭우가 쏟아지거나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도, 그녀
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마다 몸을 닦았다.
욕통에 몸을 담근 후 무명천으로 피가 날 만큼 온몸을 문질러댔다. 입으로 쉬쉬쉬쉬 거친
숨소리를 뱉어가며 몸에 붙은 악귀를 모두 씻어내려는 듯했다. 처음에는 날발이 만류하고
나섰으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가!"
그녀는 두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허공 중 어디쯤에 죽은 아기가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갑자기 무명천으로 온몸을 벅벅 문질러댔다.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도 멈출 줄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푹 숙인 채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가 욕통에서 일어섰다. 여기저기 검붉은 반점이
생긴 그녀의 몸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다시 소복을 입고 헛간을 나와 방으로 들어갔
다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묵주를 꺼내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입에서 성모마리
아를 향한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동정녀여 !
당신은 다른 인간들과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
다. 하늘도 당신과 어울리지 않으며 당신 자궁의 깊이는 이 땅의 무엇과도 같지 않습니다.
오, 동정녀여! 지금 내가 부르짖습니다 죄많은 주의 종을 버리지 마소서.
성모 마리아의 얼굴은 어느새 어머니 퇴촌 안씨의 얼굴로 바뀌었다. 안씨는 꿈에 요동 벌
판을 달리는 호랑이를 보고 딸을 낳았다며 팔자가 드셀 것을 늘 염려했었다. 용하다는 무당
에게 사주를 물으니 남자를 여런 죽일 살이 끼었다고 했다.
그러나 박초희의 어린 시절은 행복 그 자체였다.
아버지 박진사는 다정다감하고 학문에 뜻이 깊어 고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림이었고, 다
섯 명의 오빠는 홍일점인 그녀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하나
를 가르치면 열을 알만큼 총명했고, 양귀비 뺨칠 만큼 미모도 뛰어났다. 오빠들 어깨 너머로
글을 깨우쳐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사기와 한서까지 두루 읽었다 박진사는 외동딸이 지나
치게 똑똑한 것을 탐탁지않게 여겼으나 공부하는 것을 드러내놓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봄, 그녀는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로 시집을 갔다. 신랑인 생원 조창국은
보성에서 이름난 갑부의 외아들이었다. 그녀는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춘하추동을 남편
과 시부모의 사랑속에서 지냈다. 빨리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남편은 늦
게 본 자식이 효)라인 법이라며 크게 괘념치 않았다.
불행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흉한 얼굴을 비쭉 들이밀었다.
정해년(1587년) 3월에 전라도를 급습한 왜구가 보성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순식간에 마을
은 불바다로 변했고,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의 머리 위로 왜구들의 칼날이 번뜩
였다.
조생원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부모가 먼저 뒷문으로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왜구들이
대문을 넘어 들이닥쳤다. 이대로 도망치다가는 모두 잡힐 판이었다.
"먼저 가오. 내 곧 뒤따라가리다. "
조생원은 뒷문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여보!"
조생원은 아무 염려 말라는 듯 벙글벙글 웃으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
는 걸음을 억지로 옳겼다. 비명 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시부모와도 헤어졌고, 결국 마을을 지키는 오백년 묵은 느티나무 앞에
서 왜구에게 생포되었다. 온몸이 묶인 채 배에 태워졌다.
대마도에 도착한 후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근 한 달을 굻었을 뿐만
아니라 혀를 깨물기도 했고 목을 매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왜인들이 그녀를 살려냈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었다.
대마도에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 여자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대부분 왜인의 아내가 되어
아들딸 낳고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조선인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삶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벙글벙글 웃던 남편
조생원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치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이제 당신도 가정을 꾸려야 하오."
눈이 크고 맑은 사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선인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쏟으며 외쳤
다.
"차라리 절 죽여요."
그는 그녀의 눈물을 외면했다
"잘 들으시오, 당신은 이곳에서 살아야만 하오. 이곳 사내들이 당신에게 적잖이 눈독을 들
이는 상황이라서 내가 미리 손을 썼다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아내요. 조선에서의 일은 피차 묻지 않기로 합시다. 어차피 되돌아
갈 수도 없고, 설령 돌아간다 해도 오랑캐와 피를 섞었다 하여 돌팔매를 당할 것이 뻔하오.
나는 강제로 당신을 취할생각은 없소. 당신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기따리겠소. 나는 사화
동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이름이 무엇이오?"
"흐흐흑!"
그녀는 대답 대신 눈물을 쏟았다. 사화동은 말없이 그녀의 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슬그
머니 방을 나갔다.
다음날부터 사화동은 끼니 때마다 찾아와서 생선도 주고 쇠고기나 달걀도 주었다. 어떤
날은 들꽃 한 묶음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으나 결코 재가할 뜻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직 남편인 조생
원의 생사도 몰랐던 것이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대마도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그 즈음부터 사화동은 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왜말로 한 줄을읽고 그 뜻을 조선말로
풀어주었다. 일찍이 읽지도 보지도 못한 책이었다. 사화동은 그 책이 성경이라고 했고, 대마
도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했다.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
로 흘렸다. 천주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 모세, 야곱, 아브라함 등 낯선 이름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그는 그녀가 차갑게 외면해도 성경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예수님은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오. 인간의 죄악을 씻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소.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오."
성경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찬송가를 불렀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감정을 나타내는 데 안
성맞춤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리다. "
그의 구애는 끈질기고도 진지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싫어요. 남편이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예요."
첫눈이 오던 날 아침, 사화동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리
였다 닷새가 지나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반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던 사내가
발길을 딱 끊은 것이다. 중병이라도 든 것은 아닌지, 고기잡이를 나섰다가 변이라도 당한 것
은 아닌지 별별 걱정이 앞섰다. 답답한 마음을 누르치 못해 조선인 여인네들에게 수소문을
해보았다. 그녀들은 냉랭한 태도로 그의 행선지를 가르쳐 주었다. 비단파 약재를 구하기 위
해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조선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사화동은 노략질을 하려고 조선으로 떠난 것이다. 왠지 그
가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가슴 한켠이 텅 비는 것 같았고, 이제 정말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그를 삶의 든든한 버팀
목으로 받아를이고 있었던 것이다.
읽지도 못하는 성경책을 품에 안고 날마다 바닷가로 나갔다. 눈이 내리고 집채만한 파도
가 밀려을 때도 그녀의 기다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날이 갈수록 사화동의 얼굴이 더욱 또
렷하게 떠올랐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날까지
눈에 선했다.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외간 남자와의 사랑 더구나 시댁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왜구의
앞잡이와의 사랑이라니‥‥‥ 있을수 없는일이다 다시는 바닷가로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하
지만 다음날 해가 떠오르자마자 그녀의 발걸음은 어김없이 파도 치는 쪽으로 향했다.
정해년(1557년)이 가고 무자년(1588년)이 밝았는데도 사화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 달 이
상 시일을 끈 적이 없다고 여인네들이 쑥덕댔고, 난파당했거나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아서
죽었을 것이라는 풍문도 돌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기도는 시작되었다. 그가 읽어준 시편의
몇 대목을 흉내내어 하늘에 계신 신에게 그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죄를 더 짓지 말게 도와주세요.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죽고 죽이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
천주님이 그녀의 기도에 화답했던 것일까. 사화동은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2월 5일 새벽
대마도로 돌아왔다. 조선을 거쳐 명나라에까지 건너갔다 오느라 시일이 걸렸다고 했다. 그녀
는 그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그대로 부두에 쓰러져 기절을 했다. 터질 듯한 가슴을 주
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화동은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꼬박 반나절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떳을 무렵은 어느새 황혼이 짙은
저녁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화동을 찾았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꿈이었나?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차려섰다. 거기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두 눈에
서 눈물이 주르륵 볼을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문 앞으로 이끌었다. 길고넓
적한 비석이 담벼락에 끼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보성에 갔었쏘. 당신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오. 당신이 믿지 않을것 같아서 저걸 가져왔
소."
그녀는 무릎이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비석 앞에 쭈
그리고 앉았다 손바닥으로 비석을 쓰다듬었다. 분명히 그 비석에는 '학생창녕조공창국지묘'
라고 새겨져 있었다. 눈웃음이 많던 남편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쳤다.
"여보! 으으흑, 여보!"
사화동은 울부짖는 그녀의 곁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겨울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한 새벽녘에야 그녀의 어깨를 보듬어 안았다. 그녀가 손을 휘저
으며 뿌리쳤지만 그는 더욱더 완강하게 그녀를 안으며 속삭였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울리지 않겠소. 내가 당신을 지켜주리다. 당신을 사랑하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이때까지 쥐고 있던 삶의 한 축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
었다. 그리고 그 무너짐과 함께 또다른 평안이 찾아 들었다.
사랑일 것이야. 이것 역시 사랑일 것이야.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전다. 삼강오륜의 가르침도 더 이상 그녀를 옥죄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사랑을 잡고, 그 사랑의 품에서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고 싶었다.
무자년(1588년) 3월, 그들은 부부가 되었다. 번잡한 예식은 피했고, 냉수 한 그릇 떠다놓고
맞절을 하는 것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
다. 왜말도 열심히 배웠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그해 겨울, 드디어 그들 부부는 포르투
갈에서 온 선교사 산체스로부터 영제를 받았다. 사화동의 세례명은 베드로였고, 박초희의 세
레명은 마리아였다.
그들은 평범한 어부가 되었다. 사화동은 더 이상 조선을 노략질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지
않았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 역시 양반집 마
님의 기억을 지우고 어부의 아내로 변신했다. 가끔씩 북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산천을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곁에는 늘 믿음직한 남편이 있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풍신수길의 무사들이 속속 대마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곧 조선을 정복하고 명
나라와 대적할 것이라며, 이 전쟁의 선봉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뱃길에 밝은 대마도인들이
서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만약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을 때는 천주교 신자인 대마도인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겠다는 협박도 했다. 대마도주 종의지는 풍신수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유연하게 대처했다.
대마도인들은 결코 왜국과 조선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전쟁이 터져 본토의 무사들이 대마도로 물어오는 날이면 대마도인들이 그들의 수발
을 모두 떠맡아야 했다. 간혹 조선에 가서 노략질도 하지만, 어쨌든 대마도는 조선에서 사들
이는 곡물로 삶을 연명하는 실정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언처럼 잘못하다
가는 양 국가의 눈 밖에 날 가능성이 컸다.
종의지는 궁여지책으로 우선 천주교 활동을 금지시켰다. 성경과 찬송가를 감추었고 대마
도에 와 있는 선교사들도 당분간 인근 섬에 숨겼다. 그리고 은밀히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
내 전쟁이 곧 터질 것임을 알렸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그들의 충고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혹세무민한다며 꾸짖기까지 했다. 종의지는 풍신수길의 측근이자 자신의 장
인인 소서행장에게 조선의 상황과 대마도의 처지를 알렸다. 두 사람은 조선의 통신사를 받
아들여 풍신수길의 마음도 달래고, 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임으로써 조선이 스스로 방책
을 바련하도록 배려하기로 합의했다. 대마도의 사신이 다시 한양으로 갔으나 조선 조정은
통신사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백년이 넘도록 별다른 왕래 없이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
는 마당에 새삼스레 오랑캐의 땅에 사신을 보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사신이 한양을 두세 번 왕래하는 동안 무자년(1588년)도 가고 기축년(1589년)이 밝았다.
더 많은 무사들이 대마도로 건너왔고 사화동은 그들에게 간단한 조선말과 조선의 지리를 가
르치라는 대마도주의 명령을 받았다. 고기잡이를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으나 그대신 대마도
주가 적지 않은 재물을 내렸기에 생활은 더 윤택해졌다.
이제 박초희도 웬만큼 왜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비밀 미사에 참석하는 동안 천주님
에 대한 믿음도 나날이 쌓여갔다. 그 크신 천주님의 품 안에서 행복과 평안을 누리는 법도
익혔다. 사화동은 그녀를 위해 값비싼 책들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명나라의 장사치들에게 구했소. 이백과 두보의 시선집이라고 하더군."
사화동이 무사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동안 그녀는 집에서 성경과 성당이가를 번갈아
읽었다. 한편으로는 삶의 이치를 익혔고, 한편으로는 외로움을 달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가 밤이 되면 어김없이 사화동이 돌아왔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
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대마도가 아무리 전운에 쉽싸여도 그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
로만 들렸다. 이대로 영원히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그해 겨울이 마지막이었다.
동짓달 초저녁부터 곤히 잠든 그들의 침실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들이 닥쳤고 다짜고짜
사화동을 오랏줄로 묶어 데리고 가버렸다. 맨발로 앞마당까지 따라나갔던 그녀는 하얗게 쌓
여 있는 눈 위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이 밝자 이유가 밝혀졌다. 조선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내는 조건으로 사화동의 송환을
요구해온 것이다 그 동안 몇 차례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한 것이 화근이었
다. 어느새 그는 조국을 배신한 왜구의 주구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대마도주 종의기에게 사화동과 통신사를 맞바꾸는 것은 남는 장사였다. 귀화한 조선인 하
나보다는 대마도인 전체의 목숨이 더욱 소중했다. 박초희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렸는데, 이런 식으로 사화동을 죽음의 땅으로 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동분서주하며 남편을 살리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
도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경인년(1590년) 2월, 조산에서 악명이 높던 십여 명의 사내들이 모두 옥아 갇혔다. 그때까
지 수 차례 감옥을 찾았지만 남편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으로 출항할 날이 오
늘내일 하는 가운데 대마도에 끌려온 조선인들도 함께 송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자진해서 신청을 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주저하자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남편이 없는 대마도, 남편을 버린 대마도, 남편을 죽음의 구렁
텅이로 몰아넣은 대마도에 홀로 남아 있을 까닭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남편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송환선을 타면 어쨌든 한배에서 남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남편과 만날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녀는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성경과 찬송가와 묵주, 그리고 남편의 옷가지를 꼼꼼하게
챙겼다. 혹 쓰일 데가 있을까 싶어서 남편이 선물한 금가락지 네 개도 함께 넣었다 빈 방에
우두커니 앉아 새벽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막고
토악질을 했다.
"아!"
그녀는 아랫배를 감싸 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기가 들어선 것이다. 일 년을 넘게 임
신을 원했으나 소식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하필 이런 때에 임신이라니. 그녀는 아랫배
를 쓸면서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아가! 이 기쁜 소식을 꼭 아빠에게 전해줄게.
송환선은 짙은 안개가 섬 전체로 낮게 가라앉는 새벽에 대마도를 떠났다. 백여명의 조선
인들온 멀어져가는 섬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불안감
이 맴돌았다.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간들 무얼 할 수 있을까. 대마도에서 왜인들과 살다 왔
다고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까. 왜인들과 몸을 섞고 가정을 꾸렸던 여자들에게 불안감은
더했다 그녀들은 대부분 귀국을 원치 않았으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이다.
송환선에서도 남편과의 만남은 여의치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 송환을 요구한 자들은 오랏줄에 묶여 갑판 아래에 격리되었다. 그녀는 초
조했다. 이대로 부산에 닿으면 남편과는 영영 이별일 것이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절히 기
도를 했다.
천주여 !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남편을 만나게 해주소서.
순풍을 등지고 조용히 흘러가던 배가 갑자기 좌우로 흔들렸다. 역풍이 불면서 높은 파도
가 밀어닥쳤다.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조선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떠밀렸다.
그녀는 경계가 소흘한틈을 타서 재빨리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냐?"
칼을 든 사내 둘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는 품에서 금가락지를 꺼냈다. 하늘의 도우심이
었을까.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얼핏 그들도 산체스 신부에게서 한동안 교리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좀더 대담하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금가락지를 내밀었다. 그들은 한동
안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걸어 잠근 방문을 열어주었다 사화동은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온몸
이 친친 감긴 채 묶여 있었다.
문이 열리자 손바닥만한 빛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곧 다시 문이 닫혔고 방안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여보!"
그가 먼저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머
깨와 허리, 가슴과 사타구니에 겹으로 오랏줄이 묶여 있었다. 그는 잠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괜한 짓을 했소. 조선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개돼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것이오. 차라리
대마도에 그냥 머무는 편이 나았소. 어차피 나는 죽을 목숨. 당신만이라도 대마도에서 편안
히 지내기를 원했는데‥‥‥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꺼칠꺼칠한 볼과 턱, 갈라터진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그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아기를‥‥‥ 우리들의 아기를 가졌어요."
"아기 !"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이런 몰골로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는 것이 한없이 억울했다.
"그렇다면 더욱 조선으로 가서는 아니되오. 그 애가 내 자식인 것이 알려진다면 결코 목
숨을 부지할 수 없소. 설령 운이 좋아 그 사실을 숨기더라도 평생을 불안하게 보내야하오.
여보! 돌아가시오. 대마도에서, 천주님의 넓은 품에서 아기를 낳고 기르도록 하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늦었어요. 이제 곧 부산에 닿는걸요. 여보! 어떻게 해야지만 당신을 살릴 수 있을까요?"
차가운 침묵이 흘떴다 이윽고 그가 짧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입맞추어주오.그리고 오늘부터 당신과 나는 남남이오. 절대로 아는 척일랑 마
시오. 알겠소? 살아남으시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오,"
"...."
그가 몸을 앞으로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굵은 눈물이
혀에 닿았다. 그는 마치 첫날밤을 치르는 신랑처럼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사화동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곧 처형당했고, 백여 명의 조선인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
내졌다. 그녀는 시댁이나 친정에서 모두 문전박대를 당했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다가 아
기를 낳았다.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아기를 돌로 쳐죽였다.
"천주여, 용서하소서 . 용서하소서."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아무리 목욕을 해도 몸에 붙은 죄악은 씻겨 나가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묵주를 손에 쥐기만
하면, 자살은 죄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이라는 산체스신부의 말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남
아야한다는 사화동의 마지막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죄값을 치르고 싶었다. 정읍현감 이순신을 자진해서 찾아간 것도 이쯤에서 삶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대는 죄가 없소. 그대가 대마도까지 끌려간 것도, 그곳에서 재가를 한 것도, 또 정신이
혼미하여 아기를 죽인 것도 그대의 죄가 아니오. 죄가 있다면 그대에게 죽음 같은 삶을 강
요한 이 세상에 있소.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그녀를 이곳 용두리까지 데려온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녀의 무죄를 거듭 주장했다. 그러
나 남편을 둘씩이나 죽게 만들고, 제 손으로 낳은 아기마저 죽인 여자가 어찌 죄가 없겠는
가 그녀는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순신은 결코
그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지켜주리다. 이젠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오."
그녀는 이순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호의를 베푸는지 알지못했다. 죄인을 빼돌린 사
실이 발각되면 그 역시 벼슬을 잃고 중벌을 받을 것이다.
"험 험 !"
마당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묵주를 베개 밑에 감추고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휘잉 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눈을 움찔하며 턱을 뒤로
뺐다. 융복 차림의 이순신이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오래 전
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몸을 옆으로 돌리자 그는 다시 헛기
침을 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아랫목을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이런! 냉골이구먼. 몸을 차게 해서는 아니된다고 최의원이 그랬다오. 자, 잠깐만 기다리시
오. 내 아궁이불을 보고 올 터인즉"
그는 휭하니 부엌으로 가서 마른 장작을 네댓 개 더 아궁이에 밀어넣고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가져온 보자기를 풀었다.
"허허허, 떡국을 끓일 수 있도록 준비해왔다오. 떡국도 없이 새해를 맞아서는 아니될 일이
지 "
내일이면 이순신도 마흔여덟 살이다. 마흔여덟이면 삶의 부침을 모두 겪고도 남을 나이였
다.
"그대도 이제 서른이구려. 스물아홉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고, 초년운이 그저 조금 나빴
다고만 생각하오. 이제 다시는 그런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거요. 몸 건사 잘하고 어떻게 하
면 더 행복해질 것인가만 생각하도록 하오. 내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소."
그녀는 시선을 내린 채 입을 열었다.
"장군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소녀는 참으로 더럽고 더러운년이어요, 지아비를 둘
씩이나 잡아먹은 박복한 년이지요."
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더럽다니? 그렇지 않소. 당신은 첫눈보다도 더 맑고 깨끗하오"
아니어요. 소녀는 더 이상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요. 장군께 누를끼치고 싶지 않으니 내일
이라도 저를 옥에 가두세요."
그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어허 ! 다시는 그딴 이야길랑 마시오."
그녀는 대마도에서 남편을 새로 들였다는 것만 말했을 뿐 그 남편이 바로 사화동이라는
것은 밝히지 알았다. 그러나 그가 계속 이렇게 호의를 베푼다면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
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를 멀리 내치세요. 소녀가 대마도에서 만난 남자는..."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사화동의 이름이 그녀의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초희 !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겠소?"
그녀는 천천히 고대를 들어 그의 움푹 패인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그런 눈을 가진
사내를 두 명 알고 있었다. 조창국과 사화동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들, 그녀는 천천
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여자가 아닌가 저분에게 화를 입힐 수는 없어.
"나 역시 절망의 밑바닥에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알고 있다오. 초희 ! 내가
곧 그대이고 그대가 곧 나요. 내가 함께 하리다. 나를 믿으시오. 내 사랑을 믿으시오."
사랑!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양팔로 붙들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
가 이렇듯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선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단단히 작심을 하고 온 모
양이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빼며 버티려고 했지만, 강궁을 오십 순이나 연속해서 쏘는 대장
부의 힘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무 말 마시오. 그저 이렇게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오. 아무것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겠소.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소. 다만 내 곁에서 날 지켜봐주오. 나를 보고
힘을 얻으시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언제든지 내게 연통을 주오. 당신이 힘들고 지칠 때, 주
저앉아 울고 싶을 때 내가 당신 곁에 있겠소. 당신을 지켜주리다. "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품은 참으로 넓고 따스했다. 사화동이
잡혀간 후로는 그 누구로부터도 이렇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
을 감았다. 이대로 그의 품에서 잠들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그에게 더 이상 마음을 열어서
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마구 부딪쳤다.
안 돼. 이제 와서 내가 또 무슨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아냐. 안 되는 일이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더욱 힘꼇 그녀를 안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한몸이었다는 듯이.
"소녀는‥‥ 소녀는‥‥‥
"아무 말 말라하지 않았소 내 다아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줄을. 허나 지금은 그딴
생각일랑 모두 잊으시오. 그저 내 품에서 평안을 찾구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잃어버렸던
행복의 순간들을 찾아주고 싶소. 당신도 내게 그렇게 해주오."
"소녀가 어떻게 그런 일을‥‥‥‥"
"쉬이! 당신은 할 수 있소. 정읍에서 당신의 그 맑고 고운 눈망울을 보자마자, 난 내게 행
복을 가져다줄 사람이 바로 당신이란 걸 깨달았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그 행복의 순간들을 함께 하십시다. "
이순신이 포옹을 풀고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퉁퉁부어오른 그녀의 눈 밑
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쳐주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죽은 두 남편과 아기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고, 자신의 미래도염
려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남자의 숨결만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르 감기는 것과 동시에, 이순신은 그녀의 볼과 콧등과 이마를 거쳐 작고 작은 입술에
하늘 같은 사랑을 불어넣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거듭 연습한 사람처럼 손과 입과 눈이 머물
러야 하는 곳을 정확히 찾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눕히고 차례차례 옷을 벗겼다. 흉하게 붉은 반점이 돋아난 속살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반점을 손으로 더듬으며 입을 맞추었다. 종아리와 허벅지와
배와 가슴과 등에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상처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그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산을 넘고강
을 건넜다.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밤이 한없이 더디 새기만을,
아니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멎기를 빌었다. 그들은 거듭거듭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새
벽이 오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새해를 알리는 장닭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9. 모순
공은 충성스럽고 순박하여 정직한 자세로 국가를 위하여 진중에서 죽겠다는 뜻을 품고 처
음에는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써 조야에 명성을 떨치더니, 해구와 만나 싸워서
진열이 와해되는 날에는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장병들을 격려하였으며, 이순신에
게 마음과 힘을 합하기를 청하고, 반드시 흉도들을 초멸하여 해상의 기세를 확청하기로 기
약하였다. (김간,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
병조참의 조인득은 어전에서 말하였다.
"소신이 일찍이 종성에 가서 보았더니. 원균은 비록 적군이 만 명이나 되어도 그들 앞에
종횡으로 돌진해 들어가려고 하더이다. 그 행군 또한 심히 진실할 뿐 아니라 탐욕 따위는
알지 못하더 이다. " (선조실록, 29년 10월 21일 갑신조)
임진년(1592년) 2월 3일 오후_
원균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백마의 엉덩이를 채찍질하며 숭례문을 통과했다. 활을 어깨에
두르고 머리를 흑두건으로 묶었으며 긴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안장에 묶인 토끼와 링이
피를 뚝뚝 흘리며 출렁거렸다. 도성에서는 함부로 말을 달릴 수 없었지만 그를 막는 군졸은
없었다. 누구라도 그의 부릅뜬 호랑이 눈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날에는 오금을 펴지 못했
다. 문지기들은 숭례문을 무사 통과시킬 명부를 자기네들끼리 지니고 있었는데, 원균은 이일
과 함께 그 명부의 제일위칸을 차지했다.
"형니임 ! 저 왔습니다. "
원균은 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함을 질러댔다. 이일이 방문을 열며 환한 얼굴로 맞
았다.
"조용히 하게. 여기가 어디 두만강변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허허허 ."
원균이 지지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우가 형 집에 와서 큰소리 좀 쳤기로서니, 그것도 죄가 됩니까?"
이일의 등뒤로 한성판윤 신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정삼풍 경상우수사의 앞을 그 누가 막겠소."
원균은 신립을 보고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렇지요. 이제 이 원균은 큰 바다를 뛰노는 고래올시다. 아니 그렇습니까, 형
님?"
"그럼 ! 자 어서 안으로 드세."
주안상을 받은 세 사람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상석에 앉은 신립은 마흔일곱 살이고, 이
일은 쉰다섯, 원균은 이일보다 두 살 어린 쉰 세 살이였다. 가장 나이가 적은 신립이 상석을
차지한 것은, 그가 정이품 한성판윤일 뿐만 아니라 임금이 총애하는 왕자 신성군의 장인이
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터진 건저문제로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는것이 불투명해진 후 신성
군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만약 신성군이 보위에 오른다면 신립은 임금의 장
인이 되는 것이다. 벌써부터 방방곡곡의 벼슬아치들이 신립의 눈에 들기 위해 사시사철 선
물을 갖다 바치는 형편이었다
"사간원의 좀생원들이 또다시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습니까?"
원균이 어금니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작년의 악몽이 기억에도 생생했다.
원균은 신묘년(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신립과 이일이 탑전에서 직접 임
금께 아뢴 결과였다. 짐을 꾸리고 여수로 낙향할 채비를 서두르던 차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하는 소를 올린 것이다. 종성부사로 있을 때 군졸 다섯을 이유 없이
죽인 벌을 내리라는 것이다. 원균은 그들이 군령을 어기고 여진족 포로들을 몰래 살려주었
기에 군령에 따라 참했음을 이미 아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그 포로들이 대부
분 부녀자이거나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원균을 비난했다. 여진의
아이들을 살려주면 오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아비의 원수를 갚으러 두만강을 건너올 것이
라는 원균의 주장을 사간원의 젊은 문신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부임지에 닿기도 전에
벼슬을 잃었고, 그 후 일 년을 넘게 사냥과 술로 울분을 달래야만 했다.
"걱정 마시게. 이번에는 내 확실하게 그쪽도 입막음을 했으이. 이억기나 이순신까지 수사
로 나갔으니 누가 원장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제 아무리 천하의 유성룡이라고 하더라도 말
이야."
유성룡, 이놈! 네놈이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로 내 앞을 이다지도 가로막는단 말이더냐.
원균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십여 년 전, 건천동에서의 나날들이 눈에 선했다.
작고 볼품없는 죽도를 휘두르며 저잣거리를 달리는 아이들, 긴 댕기머리를 휘돌리며 진흙
탕을 뒹굴고 감나무를 오르는 아이들, 글공부보다 들판으로 질주하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
머리통 하나는 더 큰체구에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원균은 그 아이들의 대장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이요신과 유성룡이 원균에게 도전장을 냈다. 열두 살의 원균
은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그들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이들을 공평하게 나누고
전쟁놀이를 시작했다.
이요신과 유성룡은 길이 좁고 소나무가 좌우로 빽빽하게 들어찬 언덕까지 계속 후퇴했다.
원균과 그를 따르던 아이들을 앞뒤로 포위한 후 협공하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유성룡과 이
요신이 발걸음을 돌려 총공격을 명령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아이들이 들개처럼 원균에
게 달려들었다. 원균의 괴력은 그 순간부터 빛을 발했다.
"죽엿 !"
원균은 하늘을 찢는 고함과 함께 성난 사자처럼 아이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숫자만 믿
고 정면으로 달려들던 아이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황혼이 깊어갈 즈음, 싸움은 원균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났다. 이요신과 유성룡 편 아이들이 모두 쓰러진 후에도 원균이 끝까
지 살아남았던 것이다. 원균은 승장의 권리를 행사했다.
"옷을 벗겨라! 하나도 남김없이 , 모조리 !"
원균의 명을 받은 아이들은 죽도를 휘두르며 포로가 된 아이들의 옷을 벗겼다. 여기저기
서 울음이 터져나왔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맨 앞에 꿇어앉은 유성룡과
이요신도 눈물을 훔치며 바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하핫!"
원균은 그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겨울바람이 아이들의 엉덩이를 세차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때 뒷줄에서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싫어. 벗지 않을래."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원체 약골인지라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죽도에
어깨를 맞아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아이. 일곱 살 코흘리개 이순신이었다. 원균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건 승장의 권리다. 감히 내 명을 어기겠다는 거냐?"
"싫어싫어 ! 난 싸우러 왔지 옷 벗으러 온 게 아니야."
원균이 죽도로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너도 승장이 되었어야지. 포로 주제에 군령을 거역하는게 말이나 돼? 얘들아, 어서
저 말 많은 포로의 옷을 벗겨라!"
아이들 넷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이순신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웅크린 채 발버둥을 쳤다. 반 벌거숭이가 된 유성룡이 그의 앞으로 썩 나섰다.
"대장, 저앤 지금 감환을 심하게 앓고 있어."
원균이 유성룡의 아랫배를 죽도로 깊게 내질렀다. 유성룡은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자, 덤벼 , 덤벼보라니까. 나랑 싸워서 이기면 네 소원을 들어줄게,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으면 자, 내 가랑이 사이로 기면서 개처럼 짖기라도 해. 성의를 보이란 말이야."
원균은 신립과 이일이 권하는 잔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그들과 함께라면 활화산
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사간원의 좀생이들을 몽땅 육진에 끌어다놔야 합니다. 하룻밤도 못 지내고 오줌을 질질
흘릴 것들이 함부로 포로를 죽였으니, 군졸을 참했느니 헛소리나 하는 꼴이라니. 무릇 포상
에는 신의가 있고 처벌에는 예외가 없는법 부하들에게 엄하지 않고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일이 맞장구를 쳤다.
"허허, 그 재미있겠구먼. 사간원뿐만 아니라 조정의 문신들을 모두 데리고 가는 게 어떻겠
는가?"
험험, 신립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거제도에 부임하면 꼭 육진에서 했던 것만큼만 해주시게. 보나마나 군기는 엉망이고 군
선과 무기도 낡고 녹슬었을 것이야. 본보기로 몇 놈쯤 목을 베서라도 기강을 바로 세우도록
하시게. 십만 명은 능히 태울 배가 필요하오. 이장군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감찰하고 내가 경
기도와 황해도를 둘러본 후 함께 전략을 짜도록 합시다. "
"전략이라시면?"
"왜놈들을 응징하는 일 말이오. 만에 하나 왜놈들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어지럽힌다면 이
번에는 그놈들을 내치는 데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오. 전하께서도 직접 바다를 건너가서 그
들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라고 은밀히 명하셨소."
"본토를 직접 치신단 말씀이오이까?"
"쉬잇, 목소리를 낮추시게 아직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어야 하오. 어떻소? 예전에 두만강을
건너갔을 때보다 더 멋진 일이지 않소?"
"허허 , 이번에도 원균 자네가 앞장을 서야 하네, 알겠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그들은 술잔을 높이 들었다. 만주 벌판의 날바람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들은 각자의 가
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오직 세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계미년(1583년) 봄부터 여름까지 여진족 추장 니탕개는 삼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
만강을 넘나들었다. 곡식과 의복을 빼앗기 위한 일시적인 노략질이 아니라 육진을 한꺼번에
삼키려는 전초전의 성격이 강했다. 남의 땅을 빼앗기는 쉬워도 이미 얻은 땅과 성을 지키기
란 어려운 법이다. 온성부사 신립이 두만강을 건너자고 했을때 경원부사 이일과 부령부사
원균만이 그 제안에 동조했다. 나머지 삼진의 부사들은 개죽음을 자초할 뿐이라며 발을 뺐
다.
두만강을 건너기 전 탈영병 일곱의 목을 베었다. 원균은 군졸 하나의 목을 베어서 나머지
군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다면, 마땅히그 군졸을 참해야 한다고 믿었다. 탈영병의 시
신을 뒤로 한 채 두만강을 건넌 장졸들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살아서 되돌
아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군령에 따라 앞으로 달려나가서 여진족의 목을 벨 따
름이었다. 원균이 앞장을 섰고 이일이 뒤를 따랐다. 신립은 맨 뒤에 처져서 멈칫거리는 군졸
들의 목을 쳤다.
니탕개의 삼천 군사와 삼진 연합군의 일천 군사는 두만강가에서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
지 않은 채 사흘 낮 사흘 밤을 싸웠다. 첫날에는 여진의 군사들이 기세를 올렸지만, 둘째 날
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원균이 괴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내달리자 여진족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던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삼진의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여진족을 밀어붙였다.
조선군은 두만강에서 이십 리를 더 전진하여, 황혼 무렵 니탕개의 강존부락에 이르렀다.
만여 명의 여진족들이 평화롭게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만강을 넘어온
조선군이 이렇게까지 깊숙이 들어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신립이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횐
연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탕개는 벌써 야산으로 숨었소. 우리가 이대로 물러선다면 저들은 반드시 뒤통수를 치
려고 덤빌 것이오. 그러니 싹을 자릅시다. 니탕개뿐만 아니라 만주에 사는 모든 여진족들에
게 본보기를 보입시다. "
이일과 원균은 기꺼이 신밉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들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원균의
군사들이 북쪽과 서쪽의 야산을 점령하고, 이일의 군사들이 동쪽의 강과 잣나무숲을 막고,
신립의 군사들이 남쪽의 평야를 가로지르기로 했다. 백마를 탄 원균이 북소리에 맞추어 언
덕을 내려왔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엿!"
이일 역시 잣나무숲을 나서며 외쳤다.
"수급을 거두어라! 그 수에 따라 후한 상을 주리라."
군졸들의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따진족들의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아기를 업고 달리
는 아낙네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 코흘리개 아이들이 조선군의 칼날에 무참히 쓰러
졌다. 서쪽과 북쪽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았고, 시체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홀러
내려왔다. 건장한 장정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니탕개를 따라서 두만강으로 출정했다가 아직
귀향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죽어가는 여진족돌은 니탕개가 이끄는 군사들의 부모이거나 아
내이거나 자식들이리라.
칼날을 피해 남쪽으로 내달리는 여진족들을 바라보며 신립이 외쳤다.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지도록, 복수할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도
록 깡그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돼. 저것들은 조선의 적이다. 저들이 사라져야
만 조선에 평화가 온다. 알겠느냐? 자, 궁수! 활을 쏘아라, 모조리 죽엿!"
횡으로 늘어선 신립의 군졸들이 일제히 활을쏘았다. 앞서 달리던 여진족들이 목석처럼 쓰러
졌다. 요행히 화살을 피한 이들도 달아날 마음을 잃고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신립의 군
졸들이 칼을 빼어들고 엎드린 채 살려달라고 비는 여인네와 아이들의 목을 베었다. 피가사
방팔방으로 튀었다. 새파랗게 질린 여인네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군
졸들은 먼저 여인의 배를 갈랐고, 품속에서울고 있는 아이들의 목을 쳤다. 사흘 밤낮을 싸운
군졸들에게는 자비의 눈빛도, 주저하는 기미도 없었다.
야수의 밤 그 자체였다.
밤이 으슥해지자 군졸들은 여진족의 시체를 한곳으로 모았다. 목이 없는 시체들의 봉우리
가 만들어졌다. 군졸들은 허리에 두른 수급들의 숫자를 서로 비교하며 즐거워했다.
신립의 명령에 따라 봉우리에 불을 붙였다. 크고 밝은 불꽃이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군사
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질러댔다.
"이 야야야얏!"
신립과 이일, 그리고 원균은 연명으로 장계를 올렸다. 두만강을 건너가서 니탕개의 군사들
을 섬멸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도 그들의 전공을 인정하여 신립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로 임명했으며, 이일과 원균에게도 상금과 포상이 주어졌다. 군사들에게도 가져온 수급에따
라 풍족한 쌀과 의복이 지급되었다.
그로부터 삼 년 동안 여진족의 노략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두만강가에서 눈물을 뿌
리는 여진족은 많아졌지만 그들은 감히 용기를 내어 두만강을 건너오지 못했다.
신립과 이일, 원균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존부락의 씨를 말린 것을 비밀에 부쳤다.
군령을 어긴 군졸 다섯을 처형했다고 탄핵 상소를 내는 문신들은 만여 명의 부녀자와 노인,
코흘리개들을 죽인 신립 일행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세 사람은 누구
보다도 가까워졌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육진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량이나 자비가 아니라
힘과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서로의 신념을 확인했다.
원균이 화제를 돌렸다
"성을 쌓는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신립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다 칼자루도 쥘 줄 모르는 유성룡의 염려 때문이라오. 경상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
광, 충청감사 윤선각을 시켜 미친 듯이 성을 쌓고있소. 허나 왜놈들을 물씨치는 데 성이 무
슨 소용이 있단 말인지‥‥‥‥ 활을 쏘고 말을 달려 쓸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우리가 언제
성벽에 숨어서 왜놈들과 싸운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소?"
이일이 맞장구틀 겼다.
"옳은 말씀입니다. 중요한 건 군사들의 사기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감찰에서도 그 점에
유념해야겠지요."
"왜국의 사신이 가져왔다는 조총은 어떤 것입니까?"
원균은 대마도에서 가져온 조총에 관심을 표명했다. 말 그대로 나는 새도 맞혀 떨어뜨리
는 총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총은 가공할 무기임에 틀림없다. 신립이 너털웃음으로 원
균의 말을 잘랐다.
"허허, 천하의 원장군도 하찮은 조총이 걱정되는 거요? 왜놈들의 괜한 허풍에 속아서는
안 되지요. 어찌 나는 새를 맞힐 수 있단 말이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놈들이 총알을 장전
하기 전에 쓸어버리면 그만이외다. 조선의 궁수들은 그 열 배의 몫을 하고도 남음이 있소.
괜한 걱정일랑 접어두시구려 .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게, 원수사."
원균은 신립의 주장에 일단 수긍했다. 병법에 능하고 사리판단이 분명하며, 군율을 엄격하
게 지키기로 소문난 신립이 아닌가. 이일이 신림을 거들었다.
"그렇지. 자넨 내려가서 경상, 전라의 수사들을 먼저 휘하에 두도록 하게, 경상좌수사 박
홍이야 운이 좋아 그 자리에 앉았을 뿐이니 논외로 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자주 불러 가르치도록 해. 이억기는 함경도에서 함께 여진족을 막은 적도 있으니
말이 통할 테고, 문제는 이순신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이순신이 어디 정삼품 수사에 합당한
재목인가? 녹둔도에서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고 줄행랑을 친 겁쟁이지. 그때 목을 베었더라
면 지금처럼 괜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유성룡을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다는 소문
이니, 자네가 단단히 혼을 내주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네는 종성에서 죽을 뻔한 이순신
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타일러보고 정 안 되겠으면 연통을 주게. 썩은 이
는 하루라도 빨리 뽑는게 상책이니까. 알겠는가?"
"하하핫, 형님. 아무걱정 마시고 절 믿으십시오. 철부지 이억기나 겁쟁이 이순신이 어찌
제 말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만취한 원균은 자정이 넘어서야 건천동 집으로 돌아왔다. 장남 사웅이 대문 밖까지 나와
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닳아 골격이 굵고 자태가 자못 늠름한 소년이었다. 사웅은 비
틀대며 말에서 내리는 원균을 부축했다.
"아버님, 하례드리옵니다. "
벌써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원균은 사웅을 힘껏 끌어안았다. 찬서리 몰아치는 함경도에
서 청춘을 보내는 동안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신립과 이일도
장수의 기개가 엿보인다며 사웅을 여러 번 칭찬했다.
"하하핫. 그래, 이제 거제도로 가는 거다. 가서 왜놈들을 쓸어버리자꾸나, 사웅아!"
"예, 아버님 "
"그 동안 네가 세상에 품은 불만을 이 아비도 아느니라. 육진에서 거둔 전공에 비해 대접
이 시원찮음을 왜 내가 모르겠느냐. 허나 장수는 물러나서는 때를 기다리고 부름을 받은 후
엔 나아가서 힘껏 싸우면 그만이니라. 재물과 벼슬은 헛것이다 장수에게는 싸워야 할 적과
지켜야 할 땅과 보살펴야 할 군사들이 전부란 것을 명심해라. 올해 네나이가 몇이더냐?"
"열여섯이옵니다. "
"열여섯? 열심히 무예와 병법을 익힐 나이로구나. 여진족 중에는 활로 독수리를 잡는 독
수리잡이들이 있지. 언제나 선봉에서 내달리며 적장의 눈을 맞히는 용사 중의 용사다. 너도
지금부터 이 아비의 검술과 함께 독수리잡이들을 능가하는 궁술을 익히도록 해라. 예로부터
거제도에는 이름난 궁사들이 많으니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게다. 새벽 일찍 출발할 터
인즉 채비를 차려라 "
"예 , 아버님 ."
원균은 대문을 들어서서 별채가 있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사웅은 그를 불러세우려다 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간섭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지 .
한양으로 돌아온 후 원균은 한 번도 안방을 찾지 않았다. 이십여년간 변방을 떠도느라 본
부인과의 정이 식어서였기도 했지만, 생사를 넘나든 무옥과의 사랑이 워낙 각별했기 때문이
었다.
"무옥아! 하하핫, 내가 왔다!"
원균은 별채 앞마당에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치마저고리를 단정
하게 입고 옥비녀를 꽃은 여인이 나타났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드시지요. 주안상을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
"그래? 역시 너뿐이구나."
원균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벌써 이삿짐을 싸서 윗목에 차곡차곡 재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무옥이 말없이 술을 따랐다.
"무옥아! 우리는 남쪽으로 가느니라. 네 고향과는 천리도 더 떨어진 먼 곳이다. 그곳으로
가면 두 번 다시 두만강을 건너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좋으냐?"
여진의 춤추는 보석, 무옥. 그녀와 살을 섞은 지도 어언 구 년이었다.
강존부락을 불태우고 부령으로 회군하자마자 원균은 이내 돌림병에 걸렸다. 온몸이 퉁퉁
붓고 계속 설사를 해댔다. 푸닥거리를 하러 막사로 찾아온 박수무당은 여진의 악귀들이 원
균의 위와 장을 갊아먹는 중이라고 했다. 신립과 이일이 돌림병에 용하다는 약을 구해왔지
만 차도가 없었다 후방으로 옮겨 치료를 받도록 권했으나 원균은 한사코 막사에 남기를 고
집했다. 니탕개가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두만강을 건너올지도 모르는 판에 군졸들을 버리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고열과 냉기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열흘이 흘러갔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횟수가 점점 더 늘었고, 어떤 날은 피똥을 싸기까지 했다 군사들의 사기는 겨울
두만강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원균은 꿈과 생시를 헤매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었
다. 이마와 양볼에는 죽음의 기미가 가득했다.
바다 안개 속에서 흘연 여의주를 문 응룡(날개 달린 용)이 나타나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
렸다. 그를 태운 응룡은 막사를 뚫고 하늘로 치솟아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원에 이르렀다. 장
검을 빼어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낮고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워 이길 수 있느냐?"
거대한 흑곰 한 마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단칼에 흑곰의 목을 베었다. 풍악과 함
께 흑곰의 시체가 바라졌다.
"싸워 이길 수 있느냐?"
천년 묵은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그에게 돌진했다. 그는 칼을 뽑아 구렁이의 머리에
꽃았다. 풍악과 함께 걸쭉한 목소리가 다시 그를 휘감았다.
"싸워 이길 수 있느냐?"
번쩍이는 빛과 함께 거대한 옥구슬 하나가 그에게 굴러왔다. 됫걸음질을 치며 칼을 휘둘
렀지만 옥구슬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옥구슬에 깔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눈을
떴다.
신비하고 이상한 꿈이었다. 손을 뻗어 물을 마시려는데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 시
퍼렇게 날이 선 단도가 그의 심장을 노리고있었다.
"헛 !"
원균은 비호처럼 공중으로 몸을 날리며 자객의 오른손을 걷어찼다. 단도가 허공을 가로질
러 방금 그가 누워 있던 임상에 꽃혔다. 그는 자객의 사지를 제압한 후 가슴을 깔고 앉았다.
자객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육중한 그의 몸을 당하지 못했다.
이곳까지 단신으로 숨어들다니, 대담한 놈이군.
원균은 호통을 치며 자객의 복면을 벗겼다.
"필시 니탕개가 보냈으렷다‥‥‥‥ 아, 아니, 넌 계집이 아니냐?"
덥수룩한 수염 대신 백옥같이 고운 볼과 산딸기 같은 입술이 드러났다.
"웨, 웬수. 죽어랏!"
그녀는 서툰 조선말로 원균을 저주하며 침을 뱉었다. 원균은 얼굴에 묻은 침을 천천히 닦
아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갓 스물을 넘겼을까? 짙은 눈썹과 고운 턱이 평양기생 뺨치듯이
아름다웠다.
"나를 죽이고 싶으냐?"
"......"
"부모형제의 원수를 갚고 싶어?"
그는 침상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어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렴. 그 칼이 내 심장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조선
의 장수는 하늘이 돌보시느니라. 네깟 여진 계집의 손에 죽을 내가 아니란 뜻이다. 허나 복
수를 위해 나를 찾은 네뜻은 가상쿠나. 형가(위나라의 자객)의 용기나 예양(진나라의 자객)
의 의리에 비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전쟁은 사내들의 몫이다. 너 같은 계집이 노
닐 곳이 못 되니, 어서 두만강을 건너 네부모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렴, 그리고 다시는 이따
위 무모한 짓을 벌이지 마라. 알겠느냐?"
그녀는 손에 쥔 단도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무언
가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훌쩍 자리늘 떴다.
무옥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후였다. 그녀는 백주대낮에 원균의 막사로 걸
어들어왔다. 그때 원균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고비에서 허덕이
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름 모를 풀 몇 포기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풀을 햇빛에 말린 후 물에 풀어 그의 입술에 적셨다. 장졸들은 독초가 아니냐며
의심했지만, 신립과 이일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이왕 죽을 목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진의 비방에 마지막 기대를 건 것이다.
다음날부터 당장 약효가 나타났다.
무옥은 그의 곁에서 묵묵히 열흘을 버텄다. 마침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 무옥은
그가 앓았던 침상에 쓰러져 꼬박 이틀을 잤다.
그녀는 니탕개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몇 번이나 되돌려 보내려 했지만 무옥은 끝까지 그
의 곁에 머무르기를 고집했다. 마음을 처음으로 허락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것이 그들의 법
이라고 했다. 원균은 그녀의 첫사랑인 것이다.
무옥은 술을 따르면서 끝없이 웅얼거리며 빠르게 흩어지는 여진말로 무운장구를 비는 주
문을 외웠다.
"귀여운 것 ! 자, 어서 이리 오려무나."
원균이 두 팔을 활짝 벌리자 무옥이 다람쥐처럼 품에 쏙 안겼다.
그는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그녀의 양볼에 입을 맞추었다 무옥은 전혀 싫은 내색을 하
지 않고 방긋방긋 웃었다.
"너도 기쁘냐?"
무옥의 저고리 고름을 서둘러 풀어헤쳤다.
"당신은 하늘이 내신 분이어요."
무옥은 몸을 내맡긴 채 익숙한 조선말로 답했다.
"하늘? 그래, 나는 하늘에서 왔지. 헌데 너는 어디서 왔누?"
원균은 오른손으로 치마끈을 쥐고 왼손으로 무옥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성난 멧돼치처럼
코방귀를 풍풍 내뿜으며 그녀를 거칠게 쓰러뜨렸다. 그녀는 가볍게 허리를 활처럼 위로 젖
히며 능숙하게 그의 윗옷을 벗겨냈다. 그녀의 몸은 그녀가 즐겨 타는 백마처럼 희고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녀를 찍어누르는 원균의 검게 그은 몸에는 여기저기 화살과 칼에 맞은 흉터
가 남아 있었다.
무옥은 그 흉터 하나하나를 손바닥으로 쓸고 혀로 핥으면서 다시는 이 자리에 흉터가 남
지 않기를, 죽음이 이 몸에 영원히 깃들이지 않기를 바라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에게 정사는
사랑의 확인이면서 죽음을 쫓는 신성한 예식이었다.
오늘따라 원균은 서둘러 그녀의 몸 속으로 돌진했다. 무옥은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그의
성급함을 다독거릴까 말까 잠시 생각했다. 원균은 그녀의 애무가 끝나기를 기다려주던 다정
다감한 남자였는데, 오늘은 술을 다 마시기도 전에 다짜고짜 옷고름을 틀어쥔 것이다.
당신의 기쁨이 하늘에 닿았네요. 큰 승리에서도 결코 마음을 풀지않던 당신이 이렇게 활
짝 내 품에 뛰어들 줄이야! 그래요, 오늘은 당신 뜻대로 하세요. 하늘에 닿은 당신의 기쁨을
제게 나누어주세요.
무옥은 양팔로 그의 등을 힘껏 감싸며 이슬처떰 흩날리는 땀방울을 핥았다. 그들의 사랑
은 들판을 질주하는 늑대처럼 흐드러졌다.
"무옥아! 무옥아! 무옥아!"
그는 연신 무옥의 이름을 되뇌며 귓불과 목, 젖가슴을 물어뜯었다.
무옥은 양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들의 사랑은 전쟁보다도 더 지독했다.
임진년(1592년) 3월 11일 새벽 .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놋대야에 얼굴을 담그고 눈을 끔벅끔벅 거렸다. 벌겋게 실핏줄이 돋
은 흰자위가 바늘로 찌르듯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시야가 흐리고 어둑
어둑했다. 몇 번 눈을비빈 후에야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새벽부터 고기잡이를 시작한 어
선들이 섬을 돌아 나왔고, 장창을 든 초군들이 목석처럼 서 있었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은 후에는 통증이 더했다. 처음에는 좀쌀 같은 이물질이
눈알을 굴러다니는 것 같다가 이내 눈을 뜰 수없을 만큼 쓰리고 아렸다. 약을 써봤지만 소
용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서 밤새 읽던 책을 폈다. 정읍에서 사귄 한의사 최중화의 충고가 떠올랐다.
"이렇게 눈을 혹사하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유념하십시오. 밤샘은 금물입니다. 어
떻게든지 자시를 넘기지 말고 잠자리에 드십시오.
내가 만약 농부라면 최중화의 말을 따를 수도 있으리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밭을
일군 후, 지친 육신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두어 번 토낙거리고
잠자리에 든다면 안질이 씻은 듯이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장수에게 그것들은 평생
누리지 못할 호사가 아닌가. 진법훈련과 군중회의로 밤을 지새운 날이 몇몇이며, 술과 노래
와 무용담으로 새벽을 맞은 날이 몇몇이었던가.
품계가 오를수록 수면시간은 줄어들고,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들게
마련이다. 그러니 시린 눈을 비비며 조각잠을 잘 수밖에 !
열흘 전 선전관 유용주가 증손전수방략책 이라는 유성룡의 글을 은밀히 전해왔다. 방어를
위한 열 가지 전략을 논한 글이었다. 여러 병법을 참고해서 지어보기는 했는데, 실제 전투에
서의 유용성을 짐작하기 어려워 검토와 비평을 부탁한다는 유성룡의 서찰이 동봉되었다.
서애 대감의 박학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문신이 작성한 병법서인지라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 목차를 열람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무경칠서를 통독하고 응용한 흔적
이 곳곳에서 묻어났던 것이다. 유성룡이 내세운 열 가지 방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척후는 정살과 수색, 간자의 사용법을 논한 것이며, 둘째, 장단은 아군의 장점을 살
펴 적군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셋째, 속오에서는 부대의 편성을 포괄적으로 다루었고,
넷째, 약속은 부대간의 연통을 논한 것이며, 다섯째, 중호에서는 진지의 구축 방법을 설명하
고 있다. 여섯째, 설책은 진지주위에 목책을 만늘어 장애물로 활용하는 법을 밝혔고, 일곱째,
수탄은 하천을 방어하는 요령을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여덟째, 수성은 성을 쌓고 지키는 방
법이다. 아홉째, 질사는 화살을 효과적이고도 끊임없이 쏘는 법이며, 마지막 통론형세는 지
형지물의 활용법이다.
역시 서애 대감이시다!
지금까지 적을 공격하는 병법은 몇 가지 있었으나 적의 침탈을 막는 병법은 전무했다. 왜
가 바다를 건너오면 조선의 산하와 백성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은 밤을 새워 수군의 실상과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방책을 평하였다. 소략하게
언급된 부분을 찾아서 대의를 거스르지 않게 보충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열 가지 방책
중에서 장단과 수탄, 그리고 통론형세에 주목했다. 몇 부분은 아예 문장 전체를 암송할 정도
였다
자기를 알고 남을 알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길이고,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을 알
지 못하면 백 번 싸워서 백 번진다.
무릇 적을 만나 중과, 강약이 현저하게 차이가 날 때에는 반드시 험난한 곳을 점거하여야
만 적을 막아낼 수있다. 이른바 험하다는 것은 높은 산과 큰 바다와 같은, 적군은 전진하기
어렵고 아군은 수비하기 쉬운 곳이 모두 이것이다. 큰바다의 험난함을 이용하는 것이 높은
산보다 더 낫다.
장책은 산성을 만들고 목책을 설치하여 반드시 지키겠다는 계획을 삼고 저축된 물자를 다
거두어들이고 들판을 깨끗하게 치우고 기다려서 적으로 하여금 우리에게서 식량을 얻지 못
하게 하는 것이다.
바다를 건너온 왜군은 속전속결을 원할 것이다. 우리는 성급하게 맞서지 말고 바다를 장
애물 삼아 그들의 군량미가 다 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상책이다. 성을 잃으면 창고와
들판을 불지른 후 후퇴하고, 적이 지친 기색을 보이면 매복과 기습으로 적의 사기를 꺾는
것이다.
증손전수방략책의 핵심은 인내였다.
적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섣불리 군선을 움직이지 말 것이며, 후퇴하는 적을 단숨에 몰아
치지 말 것이다. 싸우기를 즐기기보다는 준비하고 기다려라. 끊임없이 적의 약점을 생각하
고, 주위를 살피고, 엄정하게 군졸들을 다스리고, 기기묘묘한 장애물을 설치하라.
이순신은 유성룡의 뜻이 자신과 같음을 깨달았다.
왜국이 오랫동안 준비한 전쟁이라면 하루이틀 사이에 승패가 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성을
쌓고 목책을 만들고 큰 바다와 산을 이용하여 우리도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일기에 끼워두었던 그림 한 장을 펼쳤다. 지난달에 완성된 통제영 거북선의 설계도였다.
그 동안 거북선을 만드는 계획은 유성룡에게까지 비밀에 부쳤다. 한양에서 이 사실을 알았
다가는 기괴한 배를 함부로 만든다는 질책과 함께 벼슬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그
간의 경과를 유용주 편으로 알릴 때가 왔다.
기뻐하시겠지. 이제야 좌상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구나.
이순신은 뿌듯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무과에 급제한 지도 벌써 십육 년. 그 동안 줄
곧 유성룡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왔다. 녹둔도의 패전으로 백의종군하게 되었을 때도, 남솔
때문에 고초를 겪을 때도 유성룡은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여해는 반드시 대기만성할 것이야. 힘을 내게."
서애 대감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 그의 마음이 울적한 날 나는 통곡할
것이며,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 나의 삶도 끝나리 .
눈알이 다시 쓰려왔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답장을 썼다. 서찰을
읽으며 빙그레 웃을 유성룡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몸은 비록 한양과 여수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늘 곁에서 모시겠노라고 썼다. 건천동 시절부터 늘 대감만을 따라다녔듯이 어떤 화
를 입더라도 대감의 뜻에 따르겠노라고 썼다.
"방답첨사께서 오셨는뎁쇼."
이순신과 약속한 날이 오늘이었던가?
지난 1월에 방답첨사로 부임한 동명이인을 만나기 위해 진해루로 나갔다. 방답첨사는 전
라좌수사와 순천부사에 이어 좌수영에서 세 번째로 높은 자리였다. 주먹코 어영담과 검은
윤기가 흐르는 수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이순신이 허리 숙여 그를 맞이했다.
이순신, 올해 나이 서른아흡 장창을 자유자재로 쓰고 바위보다도 과묵한 사내 .
오늘은 그와 함께 어영담이 그린 해도를 바탕으로 방어선을 정할 작정이었다. 순천부사
권준도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전라감영의 부름을 받고 급히 전주로 가는 바람에 오지 못했
다.
이순신은 뚫어져라 해도를 쳐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월에 부임인사를 왔을 때도 그는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참다 못한 어영담이 구
질구질한 농담을 늘어놓았다.
"늙은이를 앞에 두고 눈싸움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그런데도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영담은 멋쩍은 표정으로 단청이 곱게 어우러
진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방답첨사의 긴 턱수염을 훑어내리며 이순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량을 막아야겠지?"
이순신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전세가 유리하면 한산도와 칠천도까지 전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쉽지만은 않을 것
이옵니다. 문제는 남해도겠지요.
"남해 ?"
"만약 적이 남해를 점령하고 군량미와 무기, 군선을 탈취한다면 그대로 적의 전진기지가
됩니다. 그러면 전라좌수영은 이미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습니다. 남해 미조항
께서 좌수영까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니까요."
어영담이 이순신의 말을 따랐다.
"그렇습죠. 남해에 쌓아놓은 양식과 무기라면 좌수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습
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겠소?'
이순신은 되새김질을 시작한 황소처럼 잠시 뜸을 들였다. 성질이 급한 어영담이 가슴을
쳤다.
"어유 답답해. 늙은이 심장 터져 죽는 꼴을 보려고 이러시우?"
이순신은 방답첨사가 준비한 답을 헤아려 보았다. 남쪽 바다에 수많은 섬이 있지만 그중
에서도 농사를 지을 만큼 크고 비옥한 섬은 거제와 남해 둘뿐이다. 경상우수영이 거제에 있
는 것이나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있는 것도 왜구의 침탈로부터 두 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화시에는 부의 원천이었던 두섬이 전쟁시에는 화의 근원이 될 수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뿐이다 남해가 적의 품으로 들어가기 전애 먼저 화근을 잘라버리는 것.
이순신이 콧잔등을 찡긋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해를 지켜야지요. 만에 하나 남해를 잃을 징후가 보이면‥‥‥"
"징후가 모이면?"
"우리가 먼저 남해를 치는 것입니다. "
"먼저 남해를 친다?'
"군량미와 무기와 군선을 불태우는 거지요. 고것이 최선입니다. "어영담이 놀란 눈으로 펄
쩍 뛰었다.
"미쳤소? 우리가 스스로 남해의 군량미와 무기와 군선을 없앨 수는 없소이다. 더군다나
남해는 전라좌수영 소속이 아니라 경상우수영 관할이오. 만약 우리가 남해를 쑥대밭으로 만
드는 날엔 자중지란이 벌어지고 말 거요."
이순신은 방답첨사의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에 가슴이 뜨끔했다.
유성룡이 주장한 통론형세의 장책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그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휘하에 두고 쓰려면 지나친 칭찬은 금물이다.
"전라좌수군이 경상우수영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 우리는 어명에 따라 전라좌도
만 지키면 그뿐이오. 혹 남해현령이 구원을 청한다면 또 모를까‥‥‥ 남해현령이 누구지?"
이순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기효근입니다. 성격이 불 같은 용장이라더군요."
"그를 아는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예전에 읖은 시구 하나를 외우고 있습니다 '집과 나라 위태
한 오늘 / 임금과 어버이 어디로 갈꼬 / 신하의 가슴에는 눈물만 가득 / 저 달만 하염없이
바라보노라.' 나라를 걱정하는 단심을 헤아릴 수 있지요."
"일단 노량을 최후의 보루로 하고 남해의 군량미와 군선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은밀히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서둘러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이순신의 지독한 침묵과 단정한 말투에
휘둘릴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은 겸상을 해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어영담은 아까보다 한결 밝고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이순신을 놀렸다.
"거, 수염 한 번 근사합니다. 그려. 달고 다니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
"....."
"하루에 몇 번이나 수염 소재를 하시누?"
"....."
"혹시 모친께서 태몽으로 관운장이라도 만나셨는가?"
"....."
이순신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밥그릇을 비웠다. 그리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노골적으로 농담을 건넨 어영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육십 평쟁 저런 바위는 처음입니다. 찔러도 피 한 방을 나지 않을 인물이외다 "
갑자기 군졸들의 탄성과 함께 부웅붕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마당에서 들려왔다. 이순신은
어영담과 함께 서둘러 동헌으로 나갔다. 앞마당에서 이순신이 장창을 전후좌우로 빙빙 돌려
대고 있었다. 머리 위에 있던 창끝이 어느새 허리 아래로 움직였고, 앞지르기로 상대의 심장
을 노리던 창끝이 어느새 뒤에서 덤비는 적의 배를 갈랐다. 환호성을 지르던 군졸들이 이순
신과 어영담을 보고 곧 허리를 숙였다
"무슨 짓인가?"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소화를 돕고 있었습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습관이지요."
어영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식후에 그렇게 몸을 놀려서야 곧 다시 배가 고프지 않겠소?"
이순신이 처음으로 어영담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소장은 하루에 일곱 끼를 먹습니다. "
어영담이 배를 잡고 웃었다.
"허헛, 세상에 일곱 끼를 먹는 사람이 어디 있소? 첨사가 이 늙은이를 놀리시는 게구랴.
어쨌든 창솜씨는 대단합니다그려. 관운장이살아 돌아와도 형니임, 하겠어요."
떠벌이 어영담은 과묵한 이 사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사설이나 타령이라면 누구에
게도 뒤지지 않는 어영담이지만 말을 아끼는 재주는 없었다.
그때 전령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경쾌선을 타고 남해 쪽으로 척후를 나갔던 군
사였다.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한 척이 곧장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과 전
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께서 타고 계시다는 전갈이옵니다. "
"원장군과 이장군이 함께 온단 말이더냐?"
이순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억기가 두어 번 전령을 띄워 함께 경상우수영을 방문하자고 청했었다.
육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가 아닌가. 이제 각자 승진하여 그 인연을 남쪽 바다에
서 이어가게 되었으니 마땅히 자축을 해야 할일이다. 나이로 보나 무과에 급제한 시기로 보
나 그 동안 세운 전공으로 보나 원균이 제일 윗사람이니 부르기 전에 먼저 찾아가저 화포를
푸는 것이 아랫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이억기는 내심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육진에서
나란히 용맹을 떨치던 장수였바. 원균보다 스무 살이나 아래인 이억기는 여진족과의 전투중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원균의 도움을 받았고, 그 덕분에 사지에서 벗어난 적도 여러 차례였
다.
원균이 두만강을 건너가 니탕개의 강존부락을 치자고 했을 때 이억기는 선뜻 응하지 않았
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수만 명의 여진족이 한꺼번에 맞대응을 하면 천여 명의 병력으로는
승리할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서서 위험을 자초하느니 굳게 육진을 지키는 것이 상책
이리라. 그러나 원균이 강존부락을 쓸어버리고 돌아왔을 때 이억기는 그 앞에서 차마 고개
를 들 수가 없었다. 원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이억기는 원균을 닳
고 싶었다. 세심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확인한 후 이순신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순신은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다.
이순신은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서둘러 부두로 나갔다. 이순신과 어영담이 그 뒤를 따랐
다. 경상우수영의 판옥선이 섬을 돌아 포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물에 갑옷을 입은 장수들
이 여럿 보였다.
고병 (북치는 병사)들이 환영의 뜻을 알리는 북을 쳤다. 판옥선에서도 화답하는 나발 소리
가 길게 울려퍼졌다.
"드디어 원장군을 만나게 되는구먼."
어영담의 혼잣말이 귀에 거슬렸다. 주위에 늘어선 장졸들의 표정을 살폈다. 하나같이 살아
있는 영웅과의 만남에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하하핫, 이장군, 이게 얼마 만이오? 종성해서 헤어진 후 꼭 오년만이구려 ."
원균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이순신은 침착하게 예의를 차렸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연통이라도 주셨다면 마중을 나갔을 것입니다만‥‥‥"
"허, 괜한 수고를 끼쳐서야 쓰나 우리 사이에 그딴 격식을 따질 필요까진 없지 않겠소?
듣자하니, 군무에 바빠서 눈코 뜰 새 없다고 합디다. "
우수영으로 직접 찾아오지 않은 것을 비꼬는 것이다. 원균의 뒤에 이억기가 서 있었다.
"소장이 부족한 점이 많아서‥‥‥"
"그렇겠지요. 수사 노릇 하기가 어디 그렇게 쉽겠소? 나나 이억기장군은 육진에서 부사를
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이장군은 처음이니 어려움이 많을 거요. 언제든지 연통을 주시오, 내
힘껏 도을 테니 ."
"감사합니다. "
원균이 좌우에 늘어선 군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일제히 함성이 터져나왔다 부리부리한
눈과 꺼칠꺼칠한 밤송이 수염, 멧돼지 같은체구에서 뿜어나오는 기세가 장졸들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원글은 주위를 삥 둘러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장졸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이것이오? 그대가 만든 귀선이라는 것이 ."
거북선 안에서 천자총통을 설치하고 있던 나대용과 이언량이 황급히 배에서 내려 원균 일
행을 맞이했다. 원균은 귀두에서 선미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걸었다. 나대용이 거북선에 관한
설명을 하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원균은 손을 내저으며 나대용의 말문을 막았
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원균은 고개를 돌려 이억기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장군, 어떻소? 죽기 싫어 아등바등하는 꼴이지 않소? 상판을 완전히 씌웠으니 화살에
맞아 죽을 염려는 없겠지. 하지만 저래 가지고서야 어찌 전투를 할 수 있단 말이오. 고슴도
치처럼 웅크린 채 화살을 쏘아서 날다람쥐 같은 왜선들을 맞힐 수 있겠소? 귀선이 소멸했던
이유를 내 이제야 알 것 같소이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
이억기가 장단을 맞추었다.
"이, 이런 !"
백돼지 이언량의 양볼이 표나게 실룩거렸다. 온몸의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보니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어영담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어 이언량을 말렸다. 나대용이
분노를 삼키며 끼여들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총통을 쏘거나 당파를 하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수 있사옵니다 "
원균이 기가 막힌 듯 눈살을 찌푸렸다.
"허허, 귀선을 젓는 격군들이 불쌍하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몸져 눕고 말걸. 보기만
해도 저렇게 무거운데 어찌 왜선에 가까이 접근한단 말인가? 또한 당파라면 판옥선으로도
가능한데 구태여 귀선을 쓸 이유가 없지 "
원균은 다시 성큼성큼 진해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어영담은 나대용과 이언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그들을 위로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수사들끼리만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장졸들을 물리쳐달라고 했다.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원균과 이억기, 이순신만이 남았다. 세 사람은 우선 탁주 세 동이를
급히 비웠다. 육진의 장수들에게는 안주를 집기 전에 거나하게 취할 만큼 술을 마시는 독특
한 술버릇이 있었다. 삭풍이 갑옷을 뚫는 북방에서 긴 시간 동안 회의를 하자면 우선 몸을
데워야만 했다. 끼니를 거르며 회의를 할 때는 한 잔의 술이 곧 한 공기의 밥이었다.
술기운이 머리로 뻗치자 왼쪽 눈씨 쿡쿡 쑤셔왔다. 수건을 꺼내 눈을 훔치고 싶었지만 이
를 악물고 참았다. 원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였다. 진작부터 버린 위장이 울렁
거렸고 신물이 목 끝까지 차올라왔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넣어 먹은 것을 죄다 토하고
픈 심정이었다.
"허허 . 이렇게 마주 앉으니 꼭 육진에 다시 온 기분이오그려 ."
원균이 분위기를 녹이려는 듯 이순신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장군이 준비를 참 많이 한 것 같소. 군졸들도 사기가 높고 장수들도 쓸 만한 것 같고."
"과찬이십니다. "
"이일 장군께서도 특별히 이장군의 안부를 물으셨소. 과거지사는 모두 잊고 명장이 되라
는 덕담도 하셨지. 종성에서의 일은 이장군이 이해하시오. 누구라도 북병사였다면 이일 장군
처럼 했을 것이오. 나라도 말이오."
이억기가 끼여들었다.
"원장군님도 참, 그때 일이야 이장군의 백의종군으로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새삼스레 되
풀이해서 논할 이유가 없지요. 이장군도 그 때문에 고초를 겪었고, 이제 능력을 인정받아 수
사가 되었으니 이일 장군과의 앙금도 사라졌을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두 소장의 불찰이니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일 장군과 신립
장군께서 순변(변방을 둘러봄)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장군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신장군이 경기도와 황해도를 둘러보고 계시오. 평안도와 함
경도의 군사들이야 강군이 되었지만, 다른곳이야 어디 제대로 훈련치나 했겠소? 이참에 확
실히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하셨으니 두고 봅시다. 그건 그렇고, 요즘 상황을 어떻게들 보시
오?"
이순신과 이억기가 서로 눈을 맞추었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감싸고 돌았다. 이억기가
되물었다
"상황이라시면?"
"왜놈들 말이오. 곧 난리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지 않소?"
이억기의 목청이 높아졌다.
"역시 원장군이십니다. 저희들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
원균이 앞가슴을 쓰윽 내밀었다.
"골머리 앓을게 뭐 있겠소? 모조리 가라앉혀버리면 그만인 것을"
이순신은 원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경상우수사
로 부임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원균은 이순신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단 왜놈들이 준동하면 전라좌우 수군들을 모두 이끌고 부산으로 오시오. 그곳에서 연
합 함대를 만들어 왜놈들을 박살내고 곧바로 대마도로 건너갑시다. "
"대마도? 바다를 건넌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신립 장군, 이일 장군과도 이미 이야기를 끝냈소. 어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
리는 경상, 전라의 수군들을 이끌고 대마도는 물론 왜국의 본토를 치는 것이오. 전하께서도
이미 우리의 뜻을 헤아리고 계시다오. 나 원균이 앞장을설 터이니 그대들은 보좌해 주기만
하오."
이억기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생각처럼 쉽겠습니까? 사로잡은 왜의 간자에 따르자면 적지 않은 군선과 군사들이 대마
도에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
원균이 토끼눈을 뜨며 이억기를 몰아세웠다.
"백 마리 토끼가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낼 수 있겠소? 이건 강존부락을 공격하는 것보다
도 더 간단한 일이오. 이번에도 이장군은 전공을 내게 양보하고 구경만 하실 작정이시오?"
원균의 추궁에 이억기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 아닙니다. 이번에는 소장도 장군과 함께 공을 세우고 싶소이다. "
원균이 빙그레 웃으며 이순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장군은 어쩌시겠소?"
원균은 이미 승장이라도 된 듯이 의기양양했다.
누, 눈이 !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고 신경질적으로 눈을 껌벅거렸다. 앞에 앉은 원균의 덩치가 곰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으로 보였다.
"휴우우"
아픔을 삭이느라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답을 기다리던 원균의 얼굴이 일그러
졌다. 이순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국으로 원정을 가기 위해서는 오랜 준비가 필요합니다. 군량미는 물론이고 그곳 기후
와 풍토병을 먼저 알아야지요. 간자들을 보내 일 년은 족히 염탐을 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의 군선들로는 왜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예로부터 왜국은 무서운 폭
풍이 자주 부는 땅입니다. 고려 때도 몽고의 대군을 실은 수백 척의 배가 수장된 적이 있지
요."
원균이 그의 말을 잘랐다.
"알아요, 내 다 알아! 그러니 바람에 잘 놀면서도 재빨리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군선을 만
들어야 하오. 좌수영의 판옥선이나 귀선은 지나치게 무겁고 느린 것이 큰 문제요. 잘못하다
간 바다를 반도 건너지못하고 폭풍에 횝싸이기 십상이지 않소? 이왕 만든 것은 어쩔 수 없
다손 치더라도 앞으로는 좀더 가볍고 빠른 군선을 만들도록 하시오."
좌수영의 판옥선은 우수영의 판옥선보다 두껍고 무거웠다. 근해를 방비하는 데는 별문제
가 없었지만 망망대해에서 몸을 놀리기에는 확실히 둔한 구석이 있었다. 전라좌도를 방어하
는 데만 중점을 둔 이순신에게는 가볍고 빠른 배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친 원균은 선선히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육진에서의 관례대로라면 밤을 새워
술을 마셔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원균과 이억기는 이순신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처음부
터 눈치채고 있었다.
장수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우면 군사들은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사족을못 쓰게 된다. 이
순신도 구태여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자칫 잘못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
이억기는 이순신의 손을 굳게 잡으며 몸조리를 잘하라는 뜻을 전했고, 원균은 양팔을 전
쩍 들어 이순신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장군, 건천동 시절, 내 명령을 어긴 그 깡다구를 보여주시오."
이순신의 두눈이 휘등그레졌다 기억의 강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휘감았다. 죽도를 든 낮
익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멧돼지 대장‥‥ 싸움에서 패한 아이들의 옷을 벗기기로 소문난 대장이 바로 당신이었
소?
그제서야 이순신은 종성에서 스스럼없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용기를 북돋워주던 원균을 이
해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모멸감이 밀려왔다.
원균은 포옹을 풀고 주위에 둘러선 좌수영의 군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말을 들으라. 나 원균은 그대들의 늠름한 모습과 불타는 눈동자를 믿는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저 쥐새끼 같은 왜구들을 쓸어버릴텐가?"
"와아!"
원균은 열광하는 군사들을 거칠게 눈으로 훑었다.
"내 말을 들으라. 나 원균은 여기 이순신 장군, 이억기 장군과 함께 왜구의 싹을 뽑아버릴
것이니라. 그대들은 나를 믿고 목숨을 맡길 수있는가?"
"와아!"
군졸들의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원균은 군졸들의 마음을 하나로모으는 법을 알고 있었다.
"좋다. 나 원균이 앞장을 서겠다. 그대들 앞에 있는 부와 명예와 영광이 보이지 않느냐?
하늘도 땅도 우리들의 전진을 막지 못하리라. 진군하자! 가서, 승리의 깃발을 움켜쥐자!"
10. 일본 정벌
임금이 진실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보답할 뜻을 품어 속마음을 꺼내 참된 뜻을 보여주
며, 간담을 털어 덕을 두터이 베풀고 기쁨과 어려움을 선비와 함께 하고 선비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으면, 포악한 걸왕의 개라도 요임금에게 짖어대게 할수 있고, 그의 명에 따라 도척의
식객들로 하여금 허유를 찔러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만승의 권세를 잡고 성왕의
자질을 갖추신 분의 명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사마천, 사기, 노중련추양열전)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아침.
유성룡은 혈허증으로 꼬박 열흘을 누워 있었다. 훈(어지러움)이 워낙 심해서 뜰을 산책하
기도 힘들 정도였다. 선조는 직접 내의원에 명하여 유성룡의 병을 살피게 하였다. 격무에 시
달려 몸의 기가 많이 쇠하였을 뿐 큰 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모를 모
시고 싶다는 그의 청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루한 봄비가 닷새를 꼬박 내렸다.
급히 입귈하라는 어명을 받고 주섬주섬 입은 관복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사모를
쓴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관대를 하니 몸이 자꾸 뒤로 젖혀졌다.
목화(나무신발)가 천근이겠구나.
그는 쌍학흥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칭병하고 입귈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지금은 그
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어젯밤 다녀간 허균은 보름 안에 전쟁이 터진다고 했다.
"스승님, 저잣거리를 활보하던 왜의 간자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온
것이지요."
허균은 피난 채비를 이미 다 마쳤다고 했고, 함께 난을 피하기를 권했다. 풍이 세긴 하지
만 이런 일로 농담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
"대감마님, 우찬성 정탁 대감과 대제학 이덕형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
"뫼시어라!"
일흔 살에 가까운 정탁과 이제 갓 서른 살을 넘긴 이덕형이 나란히 들어왔다. 두 사람 모
두 입궐하던 길이었기에 관복 차림이었다.
"어허, 벌써 입궐하시게요?"
정탁이 놀란 눈으로 관복을 입은 유성룡을 살폈다. 같은 퇴계의 문하라고 하더라도 이십
년 가까운 나이 차이 때문에 서먹서먹함을 감추기 어려웠으나, 작년에 함께 축성 계획을 짜
면서 급속히 가까워졌다. 유성룡은 그가 정언신에 버금갈 만큼 무술에 조예가 깊고, 두 차례
나 명나라에 다녀온 덕분에 명나라와 왜국의 실정에 밝은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이순신
과 권율, 김시민 등을 아끼고 후원하는 데도 정탁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어명이 내렸습니다. "
"저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신립, 이일 두 장군이 순변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전하께서 두 장군만 따로 부르셨기에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긴 합니다. "
"심상찮은 기운이 라면?"
유성룡은 그때까지 침묵을지키던 이덕형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서른 살의 나이에 대제학
에 오른 이덕형은 매사에 신중하고 말을 아끼는 위인이었다. 이항복과 함께 장난꾸러기로
온 장안을 떠들썩하게했던 어린 시절의 풍문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덕형은 너무 일
찍 정이품 대제학에 오른 탓에 사소한 실수에도 곧장 입방아질을 당했다. 유성룡이나 정탁
처럼 연배가 한참 위인 대신들 앞에서는 더욱 말조심을 했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
이덕형이 먼저 예의를 차렸다. 유성룡은 모든 걸 이해한다며 고개틀 끄덕였다. 선조는 훤
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능숙한 언변을 지닌 유성룡과 이덕형에게 외교를 거의 일임하고 있
었다. 유성룡이 병석에 누웠으니 외교를 총괄하는 것은 당연히 이덕형의 몫이었다 유성룡이
이덕형에게 물었다.
"신립 장군이 군졸들을 처형했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몇이나 죽였답니까?"
이덕형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열 명입니다 명령 불복종이 다섯, 군량미 유용이 셋, 군역 도피가 둘이라더군요."
"허엇 참. 군량미 유용이나 군역 도피는 그렇다쳐도 명령 불복종이 뭡니까?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군졸들의 목을 베었단 말입니까?"
유성룡이 혀를 끌끌 찼다. 이덕형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모두 군율에 의해 벌을내린 것입니다. 장수의 명령을 어긴 자는 참수할 수도 있는 일이
지요."
정탁이 이덕형의 말을 잘랐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허나 신립 장군과 이일 장군은 매번 그럽니다. 일단 죽여놓고 시작
한다 이 말입니다. 사람 목숨 귀중한걸 알아야지."
이덕형이 정탁의 말에 이의를 달았다.
"신립, 이일은 조선의 명장입니다. 육진을 철통같이 지낸 용장이지요. 장수가 현인처럼 인
자하고 자애로우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때론 잔인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군율을 엄격히 적
용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애롭게 병사들을 감싸다가 전투에서 패하는 것보다는
몇 명을 본보기로 처형시키더라도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장수는 군졸들
에에 어느정도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하며, 신립 장군이나 이일 장군은 바로 그 두려움
으로부터 승리를 이끌어내는 장수들입니다. "
"그래서? 지금 군졸들을 죽인 걸 잘했다고 두둔하는 게요?"
정탁이 언성을 높였다 유성룡은 신립과 이일을 편드는 이덕형의 각진 턱을 쳐다보았다.
이덕형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녕하는 것도 반대했었다. 아무런 전공도 없는 사람을 정
삼품 수사에 올려놓을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때 유성룡은 이덕형의 손을 잡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이순신은 곧 나의 분신일세. 만약 이순신이 제대로 수사 노릇을 못하면 내가 물러나지.
제발 나의 지인지감(사람을 알아보는 감식력)을 믿어주시게."
유성룡과 이덕형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극과 극이었다. 유성룡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말과 표정을 바꾸는 임기응변에 능하다면, 이덕형은 먼저 원칙을 제시하여 상대의 기를 꺾
고 대세를 장악하는 수순을 밟았다.
능구렁이 !
이덕형은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말을 아끼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최적의 순간을 기
다렸다가 단칼에 승부를 결정짓는 검객의 과묵함을 닳았다. 유성룡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
꾸려고 노력했다.
"허허, 병문안 오신 분들이 환자에게 덕담 한 마디 없으십니까? 몸에 좋은 선약이나 양기
를 보충할 기방이라도 일러주십시오. 조정 일은 입궐해서 잘잘못을 가리면 되겠지요. 전하께
서 부르시는 것도 아마 두 쌍수의 순변과 연관이 있을 겝니다. 자, 어서들 일어나시지요."
유성룡은 정탁과 이덕형의 부축을 받으며 입궐했다.
봄비가 거쳐간 뒤여서인지 열흘 만에 찾은 대궐은 청아하고 화사했다. 여기저기 피어난
봄꽃들이 시심을 절로 불러일으켰다. 유성룡은 대청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열흘동안 또 정을 비웠지만 별다른 일은 없는 듯했다. 영의정 이산해와 한성판윤
신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전회의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유성룡은 서둘러 선정전으로
향했다.
"그래, 몸은 좀 어떤가?"
"다 나았사옵니다. 보잘것없는 몸을 추스리지 못해 성심에 누를 끼친 죄가 크옵니다. 벌하
여 주시옵소서."
유성룡은 머리를 조아리며 좌우를 슬쩍 훔쳐보았다.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신
립, 이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만하니 다행이야. 이제부턴 대제학 이덕형과 일을 나누어서 하도록 하라. 좌상이 없으
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이제 다시는 과인의 곁을 떠나지 말라. 알겠는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조정에는 선조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대처하는 신하가 드물었다. 아무리 총명한 이덕형이
라도 법 위에 서고픈 군왕의 바람을 살필 만큼 노련하지는 못했다. 류성룡은 어좌 앞에 펼
쳐져 있는 지도를 보았다. 제목도 없고 네 모서리가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지도에 그려진 땅
은 왜국이었다.
"좌상 이 지도를 보라. 범옹(신숙주의 자)의 문집에서 우연히 찾은 왜국전도 이니라. 농사
를 짓고 가축을 키울 만큼 크고 비옥한 땅이 아닌가?"
"그, 그렇사옵니다. "
"왜가 이렇게 큰 땅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세월을 허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니 그렇소, 신장군?"
선조는 신성군의 장인인 신립의 동의를 구했다. 신립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전하, 아직도 늦지 않았사옵니다. 일 년만 말미를 주십시오. 대장군 이일과 함께 왜국 정
벌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왜국 정벌.
유성룡은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대마도에서 왜군이 몰려온다지 않는가. 방비책을 마련해
야 할 판에 정벌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장군이 선봉에 서겠다니 과인의 마음이 든든하오. 헌데 왜국을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할 것이 아니오?"
신립이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신이 미리 경상부수사 원균에게 언질을 주었사옵니다. 언제든지
왜를 칠 수 있도록 군선을 준비하라고 일렀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채비가 끝날 것이옵니
다."
"잘했소. 역시 신장군은 선견지명이 있으시오. 헌데 원균은 장수인가?"
이일이 대답했다.
"원균은 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용장 중의 용장이옵니다. 일찍이 두만강을 건너 강존부
락과 시전부락을 공격하여 여진족의 항복을 받아낸 적이 있사옵니다. "
선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허나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군졸을 다섯이나 죄 없이 참했다고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지
않았는가?"
선조의 갑작스런 역공에 이일이 쭈뼛쭈뼛 대답을 못했다. 따사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
해졌다. 수백 장의 장소문을 줄줄 외워대는 선조의 기억력에 당한 것이다. 신립이 이일을 도
와주었다.
"전하, 장수는 군율에 따라 엄하게 군사들을 다스려야 하옵니다. 젊은 서생들은 육진의 장
수들이 호의호식하며 여진족과 활쏘기 시합이나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지만, 육진의 장수들
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목숨을 걸고 사경을 넘나들고 있사옵니다. 그곳에서 군령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만약 군령을 어기고도 살아남는 군졸이 있다면 아무도 화살이 빗발치
는 여진족 진영으로 돌진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원균이 죽인 군졸 다섯은 돌진하라는 장수
의 명을 어기고 비겁하게 됫걸음질 쳤을 뿐만 아니라 여진의 포로를 마음대로 석방시킨 자
들이옵니다 참형이 당연하지요."
"허면 신장군이 군졸 열 명을, 이장군이 군졸 다섯 명을 아무 이유도 없이 참했다고 벌주
라는 대간들의 상소도 세상물정을 모르는 서생들의 투정이겠구려. 아니 그렇소?"
선조는 유성룡을 흘끔 보며 간접적으로 신립을 옹호했다. 선조는 홍문관에서 평생을 보낸
유성룡이 소를 올린 젊은 내간들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런 군졸들은 백이면 백 모조리 참수해야 하옵니다. 또한 그런 군졸들을
불쌍히 여기는 서생들 역시 버릇을 고쳐놓아야지요."
"버릇을 고친다?"
"소를 올린 자들을 일 년만 육진으로 보내시옵소서. 장수들의 고통을 직접 겪게 한 후에
복직시키시옵소서 ."
"호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좌상의 생각은 어떤가?"
선조는 칼날을 유성룡에게 돌렸다. 그가 승낙하면 당장이라도 홍문관의 학사들을 육진으
로 보낼 기세였다 유성룡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육진의 장수들을 위해 술과 음식을 보내시옵소서 문신들을 변방으로 보내는 것은 고금에
도 없는 일인 바, 애청에서 논의를 한 후 다시 아뢰겠사옵니다"
가타부타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일단 발을 뺀 것이다. 선조는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는 유
성룡의 녹슬지 않은 수완에 흡족해하며 다시 이일에게 시선을 옳겼다.
"전라도는 어떻던가?"
이일은 눈에 띄게 허둥댔다.
"벼, 별다른 일은 없었사옵니다"
선조는 곤룡포로 가리고 있던 상보문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뭔지 아는가?"
"모르옵니다. "
"정여립의 잔당들이 황해안과 남해안에 숨어 살고 있음을 알리는 상소이니라. 헌데 그대
는 전라도를 순변하면서 해안까지는 가지 않았다던데, 사실인가?"
"..."
선조의 입에서 정여립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이일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역도들이 숨어 있는곳을 암행하지 않은 죄는 하늘에 닿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경기도와 황해도를 순변하러 떠난 신립 장군과 한양에서 해후하기로 약조
한 날짜를 맞추기 위해 남해안 고을 몇 군데를 둘러보지 못했나이다. "
이일은 신립을 물귀신처럼 끌어들였다. 그러나 선조의 질책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그대의 부하였다지?"
"그렇사옵니다. 신이 함경북병사로 있을 때 휘하에 거느렸사옵니다. "
"이억기와 이순신은 어떤가? 자네를 도와 반역을 도모할 만한 장수들인가?"
반역? 이일이 코를 박고 울부짖었다.
"바, 반역이라니요? 전하! 신 이일, 전하를 위해 평생토록 목숨 바쳐 싸웠사옵니다. 전하께
러 죽으라시면 혀를 깨물고 죽겠사옵니다. 허나 반역이라니요? 당치 않사옵니다 통촉하시옵
소서."
선조는 익선관이 흔들릴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여립의 잔당들이 이순신과 이억기 휘하로 숨어들어 수군이 된 까닭이 무엇인
가? 그리고 네놈이 그곳을 눈감아준 것은 또 무슨 이유인가? 이실직고 하렷다. 네놈들의 역
적모의를 모를 줄 알았더냐?"
이일은 피가 날 만큼 이마를 바닥에 쾅쾅 찧으며 소리쳤다.
"억울하옵니다. 전하 차라리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선조는 피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이일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신림도 이번에는 아
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함께 역적으로 몰릴 상황인 것이다. 이일의 울
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선조가 짧게 명령했다
"물러가라. 그간의 죄를 낱낱이 적어 올리도록 하라."
이일이 뒤뚱대며 편전에서 물러났다.
선조는 이일의 피멍이 맺힌 이마를 떠올리며 흡족해했다. 정여립의 난이 있은 후부터 선
조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정언신을 비롯하여 충성을 맹세한 그 많은 신하들이 정여립과
내통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군졸과 무기만 있으면 언제라도 왕위를 노릴 위인들이다.
병기는 흉기라고 했던가?
군사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필요악이었다. 선조는 장수들을 한자리에 이 년 이상 머
물지 못하게 하고, 한양에 있는 동안에는 수시로 그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름이 높은 장
수일수록 더욱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일처럼 팔도에 이름난 장수가 만에 하나 반역을 모의
한다면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의리를 앞세우며 편가르기를 즐기는 것은 삼황오제 때
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장수들의 속성이다. 원균, 이억기, 이순신이 모두 이일 휘하의
장수들이었다면 이일의 버릇을 고쳐놓을 필요가 있다. 인간이란 본래 은혜를 쉽게 망각하고
변덕이 심하며 염치를 모르는 동물이 아닌가.
"신장군, 군사는 어느 정도면 되겠소? 또 며칠이면 왜국을 점령할수 있겠소?'
한결 부드러워진 선조의 목소리를 듣고 신립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일을 당장 벌주시려는
것은 아니구나. 신립은 지도를 쓰윽 훑은후 자신있게 대답했다.
"사만 명만 있으면 충분하옵니다. 경상, 전라 양도의 군졸들만 모아도 그 정도는 족히 됩
니다. 소장에게 한 달만 주시옵소서. 왜왕의 머리를 바치겠나이다. "
"사만 명에 한 달이라‥‥ 과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 좋소, 이 일은 신장군이 책임지
고 추진하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영상!"
선조가 이산해를 찾았다.
"예 , 전하."
"신장군이 왜왕의 머리를 벤 후에 우리가 그 땅을 어떻게 통치하는것이 좋겠는가?"
선조는 벌써 왜국의 본토를 점령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전하께서 직접 다스릴 수도 있사옵고 제후국으로 다스릴 수도 있사옵니다. "
이산해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며 몸을 사렸다. 선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만족할 만
한 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성룡이 대답할 차례였다
"전하께서는 한양을 떠나시면 아니되옵니다. 한 차례 둘러보시는것은 고려할 수 있사오나
그곳에서 통치하실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왜인으로 제후를 삼아서도 아니되옵니다. 말과 풍
습이 비슷한 춘추시대에도 황실의 명을 어기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하물며 말과 풍습이 다
른 저들에게 힘을 준다면 반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대군들로 하여금 그 땅을 다스리게 하시옵소서. 그곳에 분조(또 하나의 조정)를 두어 모
든 힘과 권위를 왕실에 귀속시키고, 일년에 두어 번 대군들을 한양으로 불러 공과를 가리시
면 될 것이옵니다. "
선조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역시 좌상은 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도다. 장성한 대군들이 음풍농월로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내면 될 것이야. 신립 장군의 왜국 정벌에 대군들을 종군시키는 것이 좋겠
군. 어차피 그들이 다스려야 할 땅이라면 미리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임해와 광해가
전쟁터로 나갈 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우선 그들을 선발대에 포함시키도록 하겠다. 좌상의
생각은 어떤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멀리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유성룡은 그의 손을 잡고
도움을 구하던 광해군의 또렷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다
면 또다른 피바람이 밀려올 것이다. 태종대왕이나 세조대왕 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아니된
다.
"대군들을 선발대에 포함시키는 것은 차후에 논의하시옵소서. 다만 신의 생각으로는 신립
장군이 승전보를 몇 차례 전한 후에 왕실에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원나라에게
도 끝까지 항거한 왜인들인지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 "
신립이 유성룡을 향해 히죽 웃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옵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단 달랜 후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모조리 베어버릴 따름이옵니다. "
선조가 신립 편을 들었다.
"역시 신장군이시오. 함경도나 평안도의 군사들에 비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군사들은 허약
하다고 들었는데, 정벌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을 육진의 군사들처럼 강하게 만들 자신이 있
소?"
유성룡은 혀끝에 침을 발라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기회는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든다고 했던가?
선조는 정여립의 난을 격은 후 군사들을 양성하는 것 자체에 과민반응을 보여왔다. 축성
은 군사 양성을 직접 아뢰지 못해 부득불 택한 우회로였다. 헌데 왜국 정벌을 거론하면서
자연스럽게 군사를 기르는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유성룡은 이 기회를 틀어쥐었다.
"지당하신 분부이시옵니다. 강병을 육성하는 것과 아울러 제승방략을 진관법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일찍이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하면서 만든 제승방략은 장졸들이 약속
된 장소로 물러난 후 조정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적을 물리치는 방어체제이옵니
다. 몇몇 고을로 몰려와서 노략질만 하고 물러가는 오랑캐라면 능히 제승방략으로 물리칠
수 있겠으나, 대군이 쉼없이 치고 올라온다면 장수가 도착하기도 전에 장졸들을 모두 잃을
위험이 크옵니다. 단 한번의 패배가 곧 전부를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사옵니다. 차라리
각진관의 장수들에게 지휘권을 부여한 후 그 고을의 지형과 특색을 살려 맞서게 한다면, 적
어도 적의 침략을 늦출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경상도를 예로 든다면 김해, 대구, 상주, 경
주, 안동 진주 등 여섯 고을을 진관으로 삼으면 될 것이옵니다. 한 진의 군사가 비록 패하더
라도 다른 진이 군사를 엄중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킨다면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낭패를 면할
구 있사옵니다 "
선조는 아무 말 없이 신림에게 시선을 옳겼다. 작년 겨울에 이미 여진이나 왜를 막는 데
는 제승방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었다. 그때 유성룡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제승방략이지닌 치명적인 단점을 지적했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졸들
의 사기인데, 제승방략은 패배를 자인하며 계속 뒤로 후퇴하는 전법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다. 약속된 후방에 군사들이 모이면 다행이지만, 잇달은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이
달아나거나 조정에서 파견한 장수가 늦게 내려온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적은 군사로라도 결사항전하는 진관법이 더 나은 방
비책이다. 그러나 신립은 작년처럼 코웃음만 칠 따름이었다.
"전하, 신은 제승방략으로 육진을 지켰사옵니다. 녹둔도를 비롯한 몇몇 고을의 패전은 진
관법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사옵니다. 섣불리 성문을 닫아걸고 지키다가는 몰살당하기
십상이옵니다. 신이 축성을 반대한 것도 군사들이 성에 의지해서 목숨을 지키려는 나약한
마음을 먹을까 염려하기 때문이옵니다. 왜구가 노략질을 하러 오면 피해를 최소화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질풍처럼 왜구를 공격하면 그만이옵니다. 신을 믿으시옵소서 ."
평소라면 이쯤에서 논의를 그쳤을 것이다. 유성룡은 결코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정도
까지 나아까지 않았다. 과유불급, 이것이 그의 처세의 근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열
흘 동안의 자리보전으로 아직 미열이 남아 있는 데다가 피난을 떠나는 허균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종묘사직을 지키고 만백성의 목숨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유성룡이 떨리는 음성으로 아뢰었다.
"전하, 대마도에 수많은 왜군들이 집결해 있다 하옵니다. 그들은 곧 경상도와 전라도를 침
탈할 것이며 그때 제승방략은 무용지물이 될것이옵니다. 속히 영을 내리시어 작년에 쌓은
성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모으고 진을 튼튼히 지키도록 하시옵소서 ."
"불윤(허락할 수 없다) !"
선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왜국 정벌을 논의하는 마당에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하자는 주장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좌상, 그대는 점점 율곡을 닮아가는구나. 예전에 율곡이 양병을 주장할 때는 앞장 서서
비난하더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것이냐? 왜구의 노략질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설령
왜구가 바다를 건너온다손 치더라도 선례를 따라 막으면 된아. 더군다나 좌상의 청에 따라
축성도 했고 신장군이 순변까지 마쳤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전하,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해 올리는 말씀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
"듣기 싫다. 병석에 있는 동안 못된 생각만 늘었구나."
유성룡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불호령을 내리던 선조도 유성룡의 눈물을 보
고 말을 끊었다. 선조는 지금껏 유성룡이 이렇게 통곡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서 눈물을 거두시게."
이산해가 황망히 유성룡을 질책했다. 유성룡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며 감히 얼굴을 들
지 못했다. 이제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할 나이가 되었는가 새삼 자신의 몰골이 한심스러웠
다.
"전하, 신을 벌나여 주시옵소서. 본디 신은 공부가 얕고 됨됨이가 간교하여 정승의 자리에
오를 위인이 아니었나이다. 성은을 입어 지금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몸은 병들고 정신도 혼
미하여 더 이상 국가의 대사를 논할 수 없사옵니다. 또한 신에게는 늙고 병든 노모가 있사
옵니다. 못다 한 효를 다할 수 있도록 널리 살펴주시옵소서 ."
"불윤 !"
선조는 결코 유성룡을 내칠 마음이 없었다 눈물까지 흘리며 직언을 하는 신하를 버릴 수
는 없다. 신립처럼 힘이 되는 신하와 함께, 끊임없이 정도를 아뢰는 유성룡과 같은 신하도
곁에 있어야 한다.
유성룡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허나 정치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조정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있게 마련이며, 군왕은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군왕은
귀신이 아니므로 언제나 옳고 그름을 정확히 가릴 수는 없다. 군왕은 다만 신하들의 말을
듣고 그 책임을 물을 따름이다. 훗날 신립의 주장이 틀렸다면 유성룡을 칭찬하면 되고, 신립
이 옳았다면 유성룡을 벌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군왕은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 신의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결단코 피해야 한다. 군왕은 신의를 지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다. 법을 고치거나 신하들을 내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군왕이 드러내놓고 신의를 어길 수는 없다. 군왕은 끝까지 도와 예를 강조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따르는 척은 해야 한다. 넓디넓은 세
상에서 군왕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백성들은 단지 소문으로 군왕의 자
질을 논할 뿐이다. 그들을 속이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사서삼경에 적힌 대로 몇 차례 요순
의 흉내를 내면 소문은 삽시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군왕은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아니되며, 고독을 두려워해서도 아니된다. 군왕을 속이거나 농
락할 수 없음을 신하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하들을 수시로 시험
할 필요가 있다. 옛군왕들이 때때로 법을 어기거나 예절을 무너뜨린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였다. 백성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미색을 탐하며, 원방까지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신
하들의 태도를 살피는 것이다. 이때 법이나 예절보다 군왕을 위하는 신하는 끝까지 살아남
지만, 군왕보다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들은 반 이상 죽음을 당하며, 군왕을 비난하는 신하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군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를 참형에 처해야지만 신하들은 법보다 군
왕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군왕을 사랑하는 것은 백성의 뜻이지만 군왕을 두려워하게 만드
는 것은 군왕의 의지이다.
때때로 군왕이 넓은 아량을 베푸는 것은 두려움에 떠는 신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함이다.
신하들의 원망이 하나로 뭉치기 전에 흩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사돈인 신립에게 경칭을
쓰거나 나이 어린 이덕형을 중용하여 자주 어주를 내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군왕의 길, 이 얼마나 힘겨운 고난의 길인가.
선조는 어전회의를 끝마친 후 모처럼 후원 산책에 나섰다. 십 년전까지만 해도 신하들과
함께 시도 짓고 술도 마시느라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율곡이 죽고 사림이 동서로 나뉜
후로는 후원 출입을 자제했다. 퇴계, 율곡 등 마음을 드러내도 좋을 노신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제자들은 스승보다 그릇이 작았다.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쉴새 없이 신하들
을 몰아치느라 한가로이 꽃 구경, 연못 구경을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봄꽃들
을 두루 살피며 그간의 시름을 잊고 싶었다.
선조는 희정당을 둘러보고 내의원 동쪽 담장을 따라서 북로로 향했다. 왼쪽문으로 들어서
니 창경궁과 창덕궁의 담장사이로 야트막한 언덕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고갯마루로 올
라서니 후원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경치를 둘
러보았다. 색색가지 꽃들이 후원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부용지 앞에서 뒤따르던 내시와 궁
녀들을 물리쳤다.
"번거롭게 따를 필요 없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윤내관! 목이 마르구나. 옥정의 물
맛은 여전하겠지?"
내시감 윤환시가 앞장을 섰다. 옥정은 부용지 왼편에 있는 우물로 세종대왕 시절에 판 것
이다. 그곳에는 마니, 파리, 유리, 옥정등 두쌍의 우물이 있는데, 그중에서 옥정의 물맛이 으
뜸이었다. 윤환시는 정성껏 옥정의 물을 길어 선조에게 바쳤다. 언덕을 넘어오느라 목이 말
랐던 선조는 단숨에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좋구나. 오장육부가 다 시원하다. 너도 한 잔 하려느냐?"
"아니옵니다, 전하."
선조는 입맛을 다시며 은잔을 윤환시에게 돌려주었다. 이미 예순을 넘긴 윤환시는 공손하
게 은잔을 받았다. 선조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천, 지, 풍, 해는 돌아왔겠지?"
선조는 감찰을 나간 내시들의 행방이 궁금했던 것이다. 윤환시는 부용지 앞에 서서 별운
검을 들고 있는 화, 뇌, 운의 모습을 잠시 살폈다. 선조는 무예가 뛰어난 일곱 명의 젊은 내
시들에게 각각 열명을 지어주었다. 그들은 임금의 보이지 않는 수족이었다. 그들이 궁 밖에
서 은밀히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선조와 내시감 윤환시 둘뿐이었다.
"천, 지, 풍은 어제, 해는 오늘 아침에 돌아왔사옵니다.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이 있사온데.."
윤환시의 족제비 같은 눈이 더 가늘게 찢어졌다
"무엇인가?"
"해에 따르자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귀선을 만들었다 하옵니다. "
"귀선이 무엇인가?"
"태종대왕 때 왜구와 노략질을 막기 위해 만든 배이옵니다. 과선을 변형시켜 상갑판을 완
전히 덮은 모양이 거북을 닳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옵니다. "
"헌데 왜 귀선을 만드는고? 병부에 보고되었는가?"
"아니옵니다. 귀선뿐만 아니라 대대적으로 판옥선을 늘리고 무기들을 점검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진법훈련을 한다 하옵니다. 또한 좌의정 유성룡과 계속 연락을 취할 뿐만 아니라 전
라 우수사 이억기와도 여러 번 서찰을 주고받은 모양이옵니다. "
선조의 신경이 다시 팽팽해졌다 군왕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역모의 조짐은? 정여립의 잔당들은 확인했는가?"
"아직까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사옵고 정여립와 잔당으로 확인된자도 없사옵니다. 하오나
군사들과 무기, 군선을 확충하는 움직임은 경계해야 하옵니다 적당한 때를 봐서 내치시옵소
서."
"지도(알았다) !"
윤환시는 숨을 돌린 후 선조의 일그러진 표정을 살폈다.
"한성판윤 신립, 대장군 이일과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내왕도 눈에띄게 늘고 있사옵니다.
천에 따르자면 특히 그들은 정철, 윤두수, 윤근수 등 건저문제로 삭탈관직된 자들의 복직을
도모하고 있다 하옵니다. 하오나 군사와 무기들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사옵니다."
"대장군 이일을 좀더 유념하여 살피도록 하라. 임해와 광해는?"
"지에 따르자면 임해군의 행적이 날로 기괴해지고 있다 하옵니다. 지난달에는 제대로 수
청을 들지 않았다 하여 기생 둘을 칼로 찔러 죽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꾸짖는 성균관 유생
들과 저잣거리에서 말다툼까지 벌였다 하옵니다. "
"저 런 !"
선조는 당장이라도 임해군을 불러 엄히 꾸짖고 싶었다. 그러나 자멸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임해는 절대로 세자가 될 추 없는 것이다
"풍에 따르자면 광해군은 별다른 움직임 없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다 하옵니다. 사냥이나
기방 출입도 일체 없고 내왕하는 사람도 없다 하옵니다. "
역시 광해는 때를 기다리는 호랑이다. 불만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함부로 정치에 관여하
지 않는 자세가 늘 마음에 걸린다. 한동안은 세상을 잘못 만난 답답함을 풀려는 듯 자주 사
냥에 나서더니만, 이제는 그마저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는 돌처럼 차고 단단하다. 그리고 원칙과 법을 항상 앞세우며 군왕의 위엄을 그속에
서 찾으려 한다. 광해! 너의 눈에는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내치는 이 아비의 행동들이 조삼
모사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광해야! 너는 아느냐? 군왕이란 항상 거대해야 한다는 것을, 깊
고 넓고 끝간 데 없어야 한다는 것을! 군왕이 무엇인가에 얽매이고 의지하는 순간부터, 자
신의 한계를 솔직히 드러내는 순간부터 신하들은 역심을 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아비는
광풍처림 이 옥좌를 지킬것이다. 군왕인 나 자신조차도 어떤 용단을 내릴지 모르게 할 것이
다. 광해야, 너는 아느냐? 평화로운 호시절에는 누구나 군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처럼 알
랑방귀를 뀌지만 그들이 정말 필요할 때는 아무도 군왕의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군신의 의
리, 부자의 정을 논하지 마라. 군왕에게는 의리도 정도 헛될 뿐이다. 광해야, 알겠느냐?
"화, 뇌, 운을 보내 정여립의 잔당을 찾아라. 마지막 한 놈까지 샅샅이 찾아. 이순신에 대
한 감시도 소홀히 말고. 알겠느냐?"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
선조는 옥정의 물을 한 잔 더 마신 후 후원을 벗어났다.
윤환시는 선조의 표정을 살피며 중전 박씨가 머무르고 있는 대조전이 아닌 별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년부터 선조는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부쩍 가까이 대했다. 신성군에게 세
자의 지위가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선조도 구태여 그 소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윤환시는 선조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난잡한 임해군이나 강직한 광해군보다는 감정이 풍부하고 시서에 능한 신성군이 더 눈에
드는 것이다. 더구나 신성군은 그 이목구비가 빼다 박은 것처럼 선조와 흡사했다. 별궁에 이
르렀을 때 선조는 윤환시에게 명을 내렸다.
"이곳에 머무르겠다. "
내일 아침까지 더 이상 국사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신성군의 글솜씨와 인빈 김씨의 웃
음에 싸여 잠시 세월을 잊고 싶은 것이리라.
윤환시는 전하께서 오후에 편전으로 드시지 않는다는 소식을 대청에 전한 후 화, 뇌, 운을
이끌고 별궁 뒤뜰로 갔다. 화는 왕방울만한 눈이 인상적이었고, 뇌는 떡 벌어진 어깨에 목이
짧고 굵었다. 운은 키가 크고 얼굴이 검었다. 윤환시는 소매에서 노잣돈을 꺼내 그들에게 내
밀었다. 세 사람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돈을 몸 속에 감추었다. 윤환시의 찢어진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오늘 당장 전라도로 가라. 화와 뇌, 너희들은 이 잡듯이 고을을 뒤쳐서 역적들을 찾아.
운, 너는 여수로 가라, 좌수사의 동정을 살피는거다. 석 달 말미를 주마. 이번에도 빈손이면
너희들은 궁에 남지 못한다. 알겠느냐?"
그들은 바람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선조와 인빈 김씨의 웃음소리가 뒤뜰까지 흘러나왔
다. 윤환시는 어젯밤 인빈 김씨로부터 받은 금부채를 소맷자락에서 꺼냈다. 인신은 선조가
별궁을 찾을 때마다 윤환시에게 선물을 주겠노라고 했고, 신성군이 세자가 되면 그 공을 결
코 잊지 않겠다고도 했다. 윤환시는 허리를 주욱 펴고 하늘을 우러렀다.
예순을 넘긴 나이, 때늦은 광영이 찾아오고 있음이야.
이제 서서히 광해의 목을 조르고, 광해와 내통하고 있는 유성룡과 그의 도움을 입은 이순
신을 내치는 일만 남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선조의 마음을 움
직여야 한다. 신성군이 왕위에 오르면 세상은 나 윤환시의 것이 된다. 그는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무릉도원이옵니다. 마음껏 웃으시옵소서, 전하 마음껏 즐기시옵소서, 전하.
11. 폭풍 속으로
오호라, 임진의 화는 참혹하였도다! 십여 일 사이에 삼도가 떨어지고 팔도가 무너져 임금
께서 피난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에게 오늘이 있음은 하늘이 도운 까닭이다. 조종
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백성들 속에 굳게 맺어져서, 그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성룡, 징비록, 자서)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저녁 .
경상우수영이 있는 거제도 가배량으로 8관 16포의 판옥선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옥
포만호 이운룡의 군선들이 제일 먼저 도착했고, 영등포만호 우치적과 율포만호 이영남의 군
선이 그 뒤를 따랐다. 막사로 들어서는 장수들의 눈빛은 쇳덩이라도 녹일 만큼 뜨거웠다. 상
석에 앉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뒤에는 이마에 여드름이 더덕더덕 난 앳된 얼굴의 원사웅이
칼을 찬 채 서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어깨가 떡 벌어지고 눈이 날카로웠다.
"모두 왔는가?"
옥포만호 이운룡이 대답했다.
"아직 남해현령 기효근이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우수영에서 제일 먼 곳이라 내일 아침에
나 당도할 것입니다. "
"한시가 급해. 남해현령은 빼고 회의를 시작하지. 대충 전해 들었겠지만 오늘 아침 왜군들
이 부산 앞바다 절영도에 상륙했소.
경상좌수사 박홍 장군에 따르자면 왜군은 족히 십만 명이 넘는다고 하오."
십만!
장수들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가득했다. 선발대가 십만이라면 본대는 이십만이 넘을 것이
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노략질이 아니라 전면전이다. 왜놈들이 조선과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좌수사는 왜놈들이 부산에 내리는 걸 보고만 있었단 말입니까?"
영등포만호 우치적이 코를 실룩이며 물었다. 그는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을 만큼 담이
크고 힘이 셌다. 놋쇠 솥뚜껑을 주먹으로 쳐서 박살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원균이 우치적
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답했다.
"공문에 쓰지는 않았지만 경상좌수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듯하오. 겁을 집어먹었던
게지. 아마 지금쯤 경상좌수영의 군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오."
"에잇!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치다니. 병신 같은 놈들! 우치적이 이를 갈았나 이운룡
이 침착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경상좌수군이 무너졌다면 부산도 곧 적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을 도와야 합니다. "
원균이 품에서 피묻은 서찰 하나를 내놓았다. 검붉은 핏자국이 전황의 다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받았소. 우리는 지금 곧장 그들을 구하러 부산으로
갈 것이오. 가서 왜놈들을 싸그리 쳐죽입시다."
원균이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장수들은 너나없이 원균의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는 흡
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우수영의 장졸들은 그야말
로 오합지졸이었다. 군사들은 어떻게든지 진법훈련에서 빠지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댔고,
장수들도 한양 근처의 더 나은 보직으로 옳겨가기 위해 혈안이었다. 원균은 군역을 기피한
경상우수영 소속 군졸 열둘을 참형에 처했고, 군량미를 횡령하여 식솔을 먹인 군관에게 곤
장 백 대를 쳤다. 그 후로는 어느 누구도 진법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원균은 진법훈련
이 끝날 때가다 씨름 대회를 열고 푸짐한 상을 내렸다. 어떤 날은 원균 자신이 직접 웃통을
벗어붙이고 샅바를 잡기도 했다. 장졸들의 사기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에게 물었다.
"군선은 몇이나 되지?"
원균은 스물일곱에 종사품 만호까지 오른 이영남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이영남 역시 원균
의 삶에 대한 불굴의 자세를 흠모했다. 원균이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후 이영남은 율포에 있
는 날보다 가배량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았다. 원균은 원사웅에게 이영남을 형이라 부르며 따
르도록 했으며, 경상우수영의 군선과 군량미의 관리를 모두 이영남에게 맡겼다.
"판옥선이 스무 척이고, 그외 협선이 오십여 척입니다. "
"됐어. 그 정도면 왜놈들을 모조리 수장시킬 수 있겠군. 내가 앞장을 설 터인즉 그대들은
뒤를 따르시오. 곧장 옥포 쪽으로 돌아서 가덕도를 지나 부산으로 갑시다. "
가배량에서 부산으로 가는 뱃길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내해를 따라 한산도를 왼쪽으로
끼고 칠천량의 좁은 해협을 지나서 가덕도로 빠지는 것이고, 또하나는 율포, 지세초를 돌아
외해로 나가서 곧장 가덕도로 향하는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므로 원균은 지름길인
후자를 택했다. 바람만 등뒤에서 불어준다면 내일 오전중으로 부산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
다.
십만 대군 앞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장수.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은 원균이 한없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뒤를따른다면 죽음조차도 비
켜갈 것만 같았다. 냉정한 이운룡이 토를 달았다.
"전라좌수영에도 알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럴 필요 없소. 우수영의 군선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궤멸시킬 수있소. 괜히 알렸다가 지
레 겁을 먹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하하하핫!"
원균이 웃음을 터뜨리자 장수들도 너나없이 따라웃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소심함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얼마나 겁이 많으면 바다 밑에 철쇄를 박고 군선에 덮개를 씌워 칼까
지 꽂을까.
원균은 함경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군졸 스무 명을 가배량으로 데리고 왔다.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녹둔도의 패전이 흘러나왔고, 그 후로 이순신은 부하들과 함께 죽지 않
고 혼자만 살겠다며 도망친 장수로 낙인찍혔다.
"유비무환이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
"이만호! 만약은 없소. 그대는 천하무적 경상우수영의 장졸들이 패하리라고 보는가?"
원균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운룡은 주춤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옵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전할 것입니다. 허나 적은 십만이넘소이다. 단번에 몰살시
킬 숫자가 아니지요. 장기전이 될 경우, 전라좌우수사의 군선과 합칠 수밖에 없습니다. 군율
에도 전황을 가까운 장수에게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
원균의 얼굴에 짜증이 배어났다.
망할놈의 군율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지, 군율 따위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운룡, 저놈은
사리분별이 분명하고 궁술에 능한 것까지는 좋은데, 왜 사사건건 군율을 따지는 거지? 내가
군졸들과 뒤엉켜 씨름을 하건 말건, 술을 먹건 말건, 이순신에게 전령을 보내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내 원균은 호탕한 웃음 뒤로 불쾌한 감정을 숨겼다. 우수영의 젊은 장수들이 이운룡을
누구보다도 믿고 따랐던 것이다.
"허허허, 좋소. 이만호의 뜻대로 합시다. 율포만호! 그대가 가도록하오. 가서 전라좌수사에
게 내 서찰을 전하고, 마음 단단히 먹고 기다리라고 하시오. 너무 겁주지는 말고, 경상우수
영의 군선들이 이미 왜선을 치기 시작했다며 힘을 북돋우도록! 알겠소?"
이영남은 내키지 않았다. 스물일곱, 전공을 갈망할 나이였다.
"장군, 첫 출전인데 소장도 데려가 주시옵노서 . 선봉에 서고 싶사옵니다. "
원균이 허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하하핫. 내 어찌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대를 위해 마지막 전투는 참고 기다릴 터
인즉 휭하니 다녀오라. 경상우수영의 위용을 알릴 적임자는 그대뿐이다. "
자정 무렵, 율포만호 이영남을 태운 경쾌선이 여수를 향해 떠났다.
저녁부터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총통과 활을 가득 실은 판옥
선들이 가볍게 좌우로 흔들렸다. 먼 바다에까지 나갔던 척후로부터 파도가 점점 높게 인다
는 보고를 받았다.
파도쯤이야! 맨몸으로 두만강을 헤엄쳐 건넌 내가 아니더냐.
원균은 척후의 보고를 무시했다. 출정 준비를 마치고 군막을 나서려는데 옥포만호 이운룡
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뭔가?"
"역풍이옵니다, 장군. 파도도 높고, 역풍에 맞서 외해로 나섰다가는 표류하기 십상이외다.
차라리 칠천량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어헛! 이만호는 어찌 그리 약한 소릴 하는가? 그깟 파도와 바람이 무서워서 뱃길을 바꿀
수는 없소. 꾸물대는 동안 부산의 우리 군사들이 얼마나 목숨을 잃을 건지 생각해보시오. 하
늘이 우리의 지극한 뜻을 안다면 파도도 가라앉고 바람도 순풍으로 다시 바뀔 것이오. 어서
출정의 북을 울리시오."
"장군! 수전은 육전과 달리 교전하기 전에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소이다. 격군들이 파
도나 맞바람과 싸우느라 지쳐 쓰러지면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것이 수전이오이다"
원균이 어깨를 흔들어댔다.
"닥쳐랏. 감히 네가 뉘 앞에서 병법을 논하는 것이냐? 수전이든 육전이든 전투는 때가 있
는 법이다. 왜군들이 모두 상륙한 후에 부산에 닿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잘 듣거라. 나는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나 유리하고 편한 전투를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전투, 싸우면 전멸할 것이라는 전투만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
어. 왠 줄 아는가? 전투는 기와 기의 싸움이며, 기세를 올리는 자가 바로 장수이기 때문이
다. 장수가 앞장 서서 칼을 뽑으면 군사들은 목숨을 건다. 병법에도 이르기를, 한 사람이 죽
기를 각오하면 적군 백 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느니라. 때를 기다려 기회를 엿보려거든
남아라. 내 구태여 너 같은 겁장을 휘하에 두고 싶지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두어라.
전투에서 제일 먼저 죽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두려움이 없으면 죽음은 결코 우
리를 쓰러뜨리지 못해.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이뿐이다. 알겠는가?"
경상우수영 함대가 폭우를 헤치며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둥둥, 북소리에 맞춰 격군들이
힘차게 노를 저을 때마다 배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율포를 지나자 가라산의 봉화가 어
렴풋이 보였다. 경상우수영의 출정을 경상도와 전라도 전역에 알리는 봉화였다. 지세포 근처
에 이르자 폭우와 함께 강풍이 몰아쳤다. 북소리가 빨라지고 격군들의 팔놀림에도 힘이 숱
었지만 배는 좌우로 흔들리기만 할 뿐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원균의 선단은 새벽이 올 때
까지 지세포 앞바다에서 맴을 돌다가 날이 밝자 가덕도로 방향을 잡았다. 지세포에 정박해
서 잠시 숨을 돌리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가억을 지나면서 비가 멎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입을 맞추었다. 순풍을 만난 군선은 자석에 끌리듯 속력을 냈다. 이 속도만
유지하면 정오가 되기 전에 다대포 앞바다에 도착하리라. 그럼 잠시 닻을 내리고 지친 군사
들을 쉬게 한 후 마지막 작전을 숙의하리라.
"북채를 다오!"
원균은 원사웅으로부터 북채를 넘겨받아 직접 격군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밤새 폭풍우
와 싸운 격군들의 눈알이 붉게 충혈되었다. 더러 몸이 약한 이들은 뱃멀미를 앓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찢어져라 북을 쳐대는 원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도 전황이 얼마나
급박한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닷!"
그때 고물과 이물에서 망을 보던 군졸들이 함께 소리쳤다. 가덕과 다대포에저 동시에 왜
선단이 나타난 것이다. 왜군들은 가덕도에 숨어 원균의 함대가 지나치기를 기다렸다가 앞뒤
에서 협공을 시작했다. 옥포만호 이운룡의 배가 황급히 다가왔다
"장군, 배를 돌리시지요. 옥포로 피신한 후 후일을 기약합시다. "
원균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죽을지언정 물러설수 없다. 다시 그딴 소릴 지껄이면 네놈의 목부터 치겠다. 사웅아!"
"예 , 아버님 !"
"돌격 깃발을 올려라! 진군의 북을 쳐 !"
비호가 좌우로 그려진 붉은 깃발이 올랐다. 심장더 크고 급박한 북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수평선에 개미처럼 꼬물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낸 왜선들은 좌우로 넓게 퍼져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스무 척 남짓했던 왜전들이 오십 척으로 불어났고, 이내 백 척을 넘었
다. 바다를 뒤덮고도 남을 숫자였다. 갈매기떼가 끼룩끼루룩 울며 왜 선단 주위를 빙빙 돌았
다
고막을 찢는 악기 소리와 웅얼거림이 해풍을 타고 전해졌다. 원균은 이번 싸움이 쉽지 않
으리란 걸 깨달았다. 벌써 몇몇 군선들은 왜선의 숫자에 놀라 속력을 늦추고 있었다. 경상우
수영의 장졸들은 실전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작해볼까.
원균은 장검을 뽑아들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처참한 패배보다 용기있는
죽음이 몇백 배 더 낫다는 것을. 편안한 삶을 갈망했다면 구태여 장수가 되지도 않았을 것
이다. 장수에게는 단 두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치욕. 죽음은 영광스
러움을 더욱더 빛내주는 작은 횃불일 따름이다.
"쳐 랏!"
원균의 명령에 따라 배는 쏜살같이 왜 선단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쿵 쿵 쿠릉.
포성과 함께 상갑판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정면으로 부딪힌 왜선 한 척이 맥
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좌우에 있던 서너척의 왜선도 불화살을 맞아 화염에 휩싸였다.
이운룡과 우치적의 군선 역시 왜선들을 격침시키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세 장수의 배가 전
진하자, 꽁무니를 빼고 물러서 있던 열일곱 척의 판옥선과 오십여 척의 협선들도 물보라를
헤치며 내달렸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군사들의 함성 속에 곧묻혔다.
탕탕 탕탕탕.
상갑판의 궁수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난생 처음 듣는 요상한 소리였다.
그 순간 궁수 서넛이 벌렁 나자빠졌고 가슴과 목에서 피가 퍼엄펌 뿜어나왔다. 왜군들의 함
성과 함께 이번에는 다대포에서 출항한 왜 선단에서 일제히 조총을 발사했다. 이제 바다에
는 총성만이 가득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다대포의 왜선은 원균과 이운룡 우치적의 군선을 포위했고, 가덕의 왜선은 우수영의 나머
지 군선들을 둘러쌌다. 왜선은 조총을 쏘며 판옥선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칼을 빼든 왜군들
이 괴성을 지르며 원숭이처럼 판옥선의 상갑판으로 건너뛰었다. 우수영의 장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맥없이 쓰러졌다
조선의 자랑이 활이라면 일본의 자존심은 칼이었다
거리를 두고 맞선다면 일본의 칼이 조선의 활을 당해낼 수 없지만, 일단 백병전이 붙으면
일본 무사의 칼에 조선의 군사들이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왜선과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서는 격군들이 배를 전후좌우로 빠르게 이동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밤을 새워 노를 저은 격
군들의 팔놀림은 눈에 띄게 둔했다. 판옥선의 움직임은 뭍으로 나온 거북과도 같았고, 판옥
선 한 척에 왜선 서너 척이 달라붙어 전투를 벌이는 형국이었다.
원균의 지휘선은 그럭저럭 왜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함경도에서 함께 내려온 군사들 덕분
이었다. 그들은 모두 원군으로부터 검술을 배웠기에 왜군과의 백병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운룡과 우치적은 곧 왜군에게 배를 빼앗길 상황이었다.
"이 , 이럴 수가!"
원균은 상갑판으로 뛰어드는 왜군들을 베면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후미로 뒤처져 있던
우수영의 군선들이 모조리 격침된 것이다.
왜군이 이다지도 강하단 말인가.
원균은 피묻은 수염을 쓸었다. 분노와 모멸감을 참기 어려웠다. 왼쪽 어깨에 상처를 입은
원사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버님, 퇴각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대로는 몰살당하옵니다. "
원균은 눈을 부라리며 원사웅을 꾸짖었다.
"어림없는 소리. 퇴각이란 있을 수 없다. 싸우다 죽으면 그뿐이지 어디로 물러나서 더러운
삶을 도모한단 말이냐. 오늘, 여기가 내 무덤이니라. 불화살을 쏴랏! 노를 더 빨리 젓지 못
할까!"
적장의 생포를 포기하고 수급을 취하기로 생각을 바꾼 듯 왜군들은 원균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용맹한 육진의 군사들이 몸을 날려, 원균을 대신해서 쓰러져갔다. 원균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사랑스런 나의 부하들! 여진족에 맞서 이십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들
이 이곳에서 물귀신이 되는구나. 아, 이곳은 정녕 죽음의 바다란 말인가.
온몸이 피와 땀으로 물든 원사웅이 이물 쪽에서 소리쳤다.
"아버님 , 원군이 옵니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군선들입니다. "
가덕의 왜 선단을 향해 대포를 쏘며 돌진하는 배는 과연 기효근이 지휘하는 판옥선이었
다. 뒤늦게 연락을 받든 기효근이 가배량을 거쳐 원균의 항로를 따라온 것이다. 기효근의 역
습에 왜선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성난 황소처럼 밀고 오는 남해의 군선들을 피해 왜선들
은 대나무가 쪼개지듯 좌우로 벌려 섰다. 원사웅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퇴각 명령을 내렸
다.
"퇴각하라! 모두 퇴각하라."
왜군이 손 쓸 사이도 없이 원균의 지휘선은 미꾸라지처림 적진을 통과했다. 난파 직전에
놓인 이운룡과 우치적의 군선이 뒤를 따랐다. 기효근은 계속 대포를 쏘면서 왜 선단의 추격
을 막았다 십여 척 남짓한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은 동풍을 타고 가배량까지 단숨에 달아났
다. 일단 죽음의 바다에사 벗어난 것이다.
잠잠하던 하늘에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군막을 칠 사이도 없이 부두에서 곧바로 군중회의가 열렸다. 장수들은 비를 맞은 채 원균
을 중심으로 삥 둘러섰다.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원균의 두 눈은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
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치적은 제 분을 참지 못하여 머리를 쥐어뜯었고, 기효근은 거
친 숨을 몰아쉬며 늦게 도착한 것의 용서를 빌었다 모두 침통한 얼굴이었다. 이운룡이 이번
해전에서의 피해를 보고했다.
"적선 삼십여 척을 격침시켰습니다만 아군 역시 판옥선 열일곱 척과 협선 오십여 척을 잃
었습니다. "
"몇척 이나 남았소?"
원균이 이운룡의 말을 잘랐다. 이미 침몰되거나 빼앗긴 군선의 숫자를 알아서 무엇하리.
복수를 하려면 당장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군선이 필요했다.
"반파된 판옥선이 세 척, 남해현령 소속 판옥선이 세 척 , 협선이 열두 척이옵니다. "
판옥선이 여섯, 협선이 열둘.
이것으로는 전투를 할 수 없다. 백여 척의 왜선과 맞서려면 적어도 판옥선이 스무 척은
넘어야 한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군선을 구한단 말인가.
남해현령 기효근이 나섰다.
"장군, 남해로 옮기시지요. 이곳에서는 왜선들의 기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사옵니다. 남해
에는 소장이 축적해둔 군량미와 무기들, 그리고 이십여 척의 협선이 있사옵니다. 또한 한 달
뒤면 판옥선 다섯 척이 더 전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
"판옥선을 만들고 있단 말인가?"
원균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매사에 꼼꼼하고 숫마에 밝은 기효근이 아니던가. 원
균을 비롯한 장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운룡이 말했다.
"남해로 갈 바에야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수영의 군사들
과 힘을 합쳐 왜선들을 막는 것이지요."
원균이 버럭 화를 냈다
"안 돼 ! 이런 몰골을 이순신에게 보여주잔 말인가? 죽더라도 경상우수영을 벗어날 수 없
어. 임지를 벗어난 장수가 어찌 장수일 수 있겠는가. 남해는 여수와 지척이니 내가 남해로
가면 곧 소문이 좌수영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니 남해로도 가지 않겠다. "
기효근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사천으로 가시지요. 남해에서도 가깝고, 여차하면 진주나 곤양의 군사들과도 연
락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한산도에 척후를 보내고 창선도에 선봉대를 배치한 후, 사천에서 군
선을 지원하면 능히 버틸 수 있을 것이옵니다. "
기효근의 뜻에 따라 사천에 경상우수영을 설치하기로 결정되었다.
기효근은 휘하 군선과 군졸들을 경상우수영 직할로 재배치하고, 만약을 대비해서 경쾌선
두 척으로 남해를 순찰시켰다. 원균은 기효근을 부장으로 삼아 그림자처럼 자신을 보좌하도
록 했다.
지난밤, 위풍도 당당하게 부산을 향해 떠났던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이 초라한 몰골로 사천
으로 들어섰다. 진군의 북소리도 없었다. 대부분의 군졸들은 죽음과 손을 맞잡기 직전에 돌
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처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최후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원균은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무옥과 함께 술을 마셨다.
풍악도 웃음도 없었다. 남장한 무옥의 이국적인 아름다움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술을
치는 무옥의 양손이 유난히 떨렸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원균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
다. 처음 맛보는 패장의 비애였다. 술을 한 잔 들이켤 때마다 상처는 덧나고 피가 튀었다.
이런 날이 올줄 어찌 알았으랴. 그는 한평생을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무경칠
서를 깨치기는 했지만 책에 적힌 병법보다 몸에 익은 경험들을 믿었다. 구차하게 수백 년
전의 전투를 파헤치며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얼마 전에 거둔 승리의 비결을 되돌아보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어린 시절, 글공부를 열심히 않는다고 꾸짖는 어머니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었다.
"소자는 작은 깨달음보다 큰 승리를 원합니다 만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만백성을 이롭게
하는 길을 걷고 싶습니다. 이깟 책 몇 권에 헛되이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
원균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적잖은 잘못을 범했다. 성급하게 적을 쫓다가 복병
을 만나 혼쭐이 나기도 하고, 군사들을 좁은 협곡이나 늪으로 내몰다가 화살 세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사소한 잘못들을 딛고 서서 큰 승리를 이끌어냈다. 승리의 영광 속에
작은 실수들은 쉽게 묻혔다. 장수는 사소한 과오나 잘못이 있더라도 한번 내린 명령을 바꾸
지 말아야 하며, 의심이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완벽하게 지고 말았다.
해전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패배로 이어졌다. 육전에서처럼 후퇴하였다가 힘을 모
으고 실수를 만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격군들을 충분히 활용했
어야 했다. 해전에서 격군의 팔놀림은 육전에서 군사들의 발놀림과도 같았다.
겪으면 겪을수록 변화무창한 것이 전투로구나.
원균은 이 치명적인 패배로부터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선 이운룡이나 기효근처럼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기로 마음을 굳혔다.
문 밖에서는 피투성이의 원사웅이 두 눈을 부라리며 오늘의 치욕을 곱씹고 있었다. 갑판
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그들 부자의 마음을 따갑게 채찍질했다.
임진년(1592년) 4월 15일 오후
율포만호 이영남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진해루 앞마당에 서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두
뺨을 벌겋게 달구었다. 진시(오전 7시)가 되기도 전에 좌수영에 닿았건만, 좌수사 이순신은
성종 공혜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므로 공무를 쉬겠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전쟁이 터진 마당에 무슨 얼어죽을 제삿날을 챙긴단 말이오?"
목청을 돋우웠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좌수영의 장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전쟁이 터졌다는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문지기를 구슬려 알아낸 진짜 이유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좌수사가 어
제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장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이영남은 원균의 서찰을 당직 군관에게 맡기고 돌아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순신이 그
서찰을 읽고 행여 도망이라도 칠 것이 염려되어 마음을 돌이켰다. 당직 군관 나대용이 옆문
을 통해 나왔다.
"좌수사께서 찾으시오. 따르시오."
이제야 기침한 겐가. 이영남은 가래침을 퉤엣 뱉은 후 나대용의 뒤를 쫓았다. 숙취에 시달
린다는 군졸의 귀띔과는 달리 이순신은 큰 창옷을 말끔하게 입고 정자관을 쓴 채 붓을 들어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깡마른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이영남은 예의를 갖춘 후 소
매에서 원균의 서찰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이순신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율포만호라고 했던가? 올해 몇이지?"
"스물일곱이 오이다. "
"스물일곱에 종사품 만호라... 빠르군. 난 스물일곱에 등과도 못했다네. 둘째 아들 울을 보
았을 따름이야. 몇 살에 등과했는가?"
"열아홉이오이다. "
"나는 서른둘에 겨우 벼슬길로 나아갔지.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어. 서른 살을 넘겨 무
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거나 무모한 도전일 테지. 더구나 이미 혼인을
해서 아내와 자식까지 있다면 말일세.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
다는 자책과 더 높이 올라가려는 갈망이 내 나이를 잊게 만드는 것을. 그렇지, 서른 살은 삶
을 달관하기에는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나이지. 미운 것은 미워해야만 하고 사랑스러운 것
은 사랑해야만 하는 나이야. 온갖 일에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세월의 풍파에 끼여들지.
그 아득한 갈망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네. 서른 살의 갈망이 말일세, 이것이 내 생의 마
지막 선택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건 겨우 첫 번째 선택일 뿐이었네. 돌이킬
수도 없는 치명적인 선택은 그 후부터 줄을 이었지. 아, 나는 왜 이다지도 어리석은지, 지나
고 나서야 그 서른 언저리의 울분들이 미망의 나날임을 깨닫는다네."
"장군!"
이영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이순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
추었다.
"한시가 급하오이다. 전쟁, 전쟁이 터졌사옵니다! 왜군들이 동래에 상륙했소이다. "
이순신은 이영남의 말을 무시하고 딴소리를 해댔다.
"십오 년을 떠돌았다네. 함경도와 전라도와 한양을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 몸은 점점 늙
고 병들었지. 후내년이면 내 나이도 쉰이네 그려 ."
"장군!"
이영남이 대들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제야 이순신은 원균의 서찰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
드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자네는 천명을 아는가?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한 인간에게 주는 명령 말일세. 난 천명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네. 인내를 배우는거야, 원수사의 출정을 전하러 왔지? 나아가지
않고 때를 기다려야했어. 사흘동안 똑같은 괘를 뽑았다네. '강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가서 이
기지 못한다. 해를 입는다. '"
"경상우수군이... 패한다는 말씀이오이까?"
이영남이 따져 물었다. 이순신은 대답을 피하고 어제 아침에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송골매가 수영에서 놓아 기르던 닭을 훔쳐갔다네. 병아리는 가끔씩 잡아가지만 어미닭을
잃기는 처음 있는 일이야. 집안의 재물을 도둑맞으면 만 하루 동안 외인을 들이지 않는 법
이라네."
"고작 그것 때문에 소장을 기다리게 하신 것이오이까? 어떻게 닭한 마리 때문에 전령을
기다리게 할 수 있사오이까?'
"자넨 나의 마음을 전혀 살피지 못하는군. 내 말이 우스운가? 우습기도 할 테지. 허나 이
세상에서 진정 우스운 것은 하늘의 이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을 과신하는 거라네.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는 지극히 작은 차이에서부터 비롯되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불길한 기운이 조금씩은 깃들이게 마련이지. 하지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하
늘의 뜻을 살필 수 있게 돼. 적어도 스스로 죽음의 바다를 향해 배를 몰지는 않는단 말일세.
깃털처럼 많은 날들 중에서 하루를 고르는 일이야. 결코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네,"
당직 군관 나대용이 문 밖에서 아뢰었다
"경상좌수사 박홍 장군과 경상도관찰사 김수 대감의 공문이 왔사옵니다. "
"내 기다리고 있었지. 어서 가지고 들어오게."
나대용으로부터 서찰을 넘겨받은 이순신은 이영남이 준 원균의 서찰과 함께 나란히 펼쳤
다. 그는 서찰 석 장을 훑어내린 후 담담한 어조로 이영남에게 물었다.
"경상우수영 휘하의 군선이 몇 척이나 되는가?"
"판옥선 이십 척, 협선 오십여 척, 해서 칠십 척이 조금 넘소이다. "
"원장군은 내해로 갔는가 외해로 갔는가?"
"외해로 질러 가겠다고 아셨소이다 "
이순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르 떨렸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
치였다.
"자넨 목숨을 건졌어 ."
"무슨 말씀이시온지 ‥‥‥?"
"박홍 장군과 김수 대감에 의하면 왜선은 삼백 척이 넘는다고 하네. 왜의 대선단과 외해
에서 마주쳤다면 필패가 아니겠는가? 지금쯤 우수영의 군선과 장졸들은 수장죄었을 거야."
이영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오이다! 우수영의 군사들은 패배를 모르는 강병이외다. 원장군을 도와 능히 왜군을
물리쳤을 것이오이다. 더 이상 장군의 헛된 말씀을 듣고 있을 수 없군요. 이만 물러가겠소이
다. "
"앉아!"
이순신의 명령은 짧고 힘이 넘쳤다. 돌아섰던 이영남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엉거
주춤 자리를 지켰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가배량으로 돌아가겠다고? 그곳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졌을 거
야. 자넨 송골매의 발톱을 피해 내 품으로 돌아온 씨암탉이네. 이곳이 오늘부터 자네의 새
보금자리야. 천명을 받아들이게 ."
이영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횡하니 마당으로 뛰어내려간 후 만류하는 나대용의 손길도
뿌리치고 해안 쪽으로 사라졌다. 나대용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순
신을 설명을 기다리며 문 가까이 섰다.
"구태여 붙들 필요는 없어. 곧 돌아을 터이니까.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5관 5포에 전령을
띄우게 이틀 후에 진법훈련을 한다고 말이야."
"출정이 아니고 진법훈련이옵니까?'
나대용은 제 귀를 의심했다. 십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마당에 싸우러 가지 않고
진법훈련이라니, 경상도가 궤멸되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앗?"
이순신의 시선이 나대용에게 박혔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파도처럼 천천히 밀려
왔지만, 나대용을 움찔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대용은 급히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전라도순찰사 이광, 전라병마사 최원에게 전황을 알리는 공
문을 썼다. 정성껏 글씨를 써내려 가면서 방금 나대용을 내몬 것을 후회했다. 가슴 한구석에
서 이글대던 불덩이가 저도 모르게 치솟았다. 변방을 전전하는 동안 생긴 나쁜 습관이었다.
고치려고 몇 번이나 애클 썼지만 뺏속까지 박혀 있는 활먹이는 좀처럼 사그라질 줄을 몰랐
다. 짧은 광기와 긴 후회. 이순신은 이 악순환의 원인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것은 삶을 향한 끝없는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녹둔도의 비극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겠
다는 결심이 하루 종일 그의 신경을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영원히 멈출 수는 있
지만 한순간도 쉴 수는 없었다. 여유를 가진다는 것, 마음을 푼다는 것은 곧 생의 의지를 포
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십오 년이 넘도록 변방을 떠돌면서 체득한 삶의 원칙을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서로 다른 방향을 동시에 응시했다. 타인의 심장을 바
라보는 눈과 타인처럼 내 심장을 훔쳐보는 눈. 그 둘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감기는 날엔
그가 가꾸어온 생명의 물푸레나무도 시들고 만다.
이순신은 며칠째 같은 괘를 뽑고 있었다. 길을 나섰다간 반드시 화를 당하니 조용한 곳에
칩거하여 바른 도를 지키는 것이 좋다는 점괘였다.
전쟁이 터졌고, 원균은 벌써 군선과 함께 전쟁터로 달려갔다. 허나 이순신은 쉽게 군사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적의 선봉이 십만 명이고 군선이 수백 척이라면 단숨에 끝날 전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신중하게 때를 기다려 완벽하게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 도의를 아
는 조선군이 어찌 오랑캐인 왜군에게 패할 수 있느냐는 주장은 이제 헛소리가 되었다. 힘과
힘이 부딪치는 전쟁에서 오랑캐의 더러움과 소중화의 올바름이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왜군
의 전략이 무엇인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지금은 그저 참고 기다릴 따름이다.
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강점과 약점을 보일 때까지 숨을 죽이고 쥐죽은 듯이
자중하면서, 경상도에서 조선의 군사들이 밀리는 까닭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해야 한다. 먼저
나서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며 천
명을 알 때까지 전라좌수영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내게 승리의 서광이 비칠 때까지, 살아남
음의 확신이 설 때까지 융복으로 갈이입고 활터로 향했다. 동쪽 하늘로부터 검은 먹구름이
밀려왔다. 임진년의 폭풍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폭풍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평생
지고 온 오욕과 부끄러움,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활 시위에 실었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세
월을 견딘 것이다. 이제 잃어버린 명예를 찾고, 사라진 자신감을 회복하고, 감당하기 힘들었
던 치욕을 세상에 되돌려줄 때가 왔다. 이순신은 최후의 승장이 되고 싶었다.(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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