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3
김탁환 장편소설
제3부 해상왕 천하
1. 동상이몽
명나라 대장 이제독이 여러 십만 날랜 군사들을 거느리고방금 평양의 적을 소
탕 평정하려고 계획하니 황해도와 서울이 차례로 수복될 것이다. 큰 군사들이
마구 무찌르면서 진군하면 남은 왜적들은 모두 도망해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불가불 적의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고 모조리 죽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대는 수군을 거느리고 나가 기회를 따라 길목을 잡아 누르고 적을 무찔러 죽
이기에 협력하라.
계사년, 1월 22일 전라좌수영에 도착한 유서
명나라 장수 제독부의 제독 이여송이 오시 명 장령과 여러 십만 날랜 군사들
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을 두들겨, 이달 초팔일에 적의 소굴을 소탕해 엎어버리
고 왜장을 사로잡고 목을 베어 우레같이 소리치며 바람같이 달려, 그 형세가 마
치 대를 쪼갬과도 같이 장차 차례차례로 진군하며 토발하여 수레바퀴 하나도 돌
아가지 못하도록 기약하는 바이니, 그대는 수군을 정비하여 기운을 가다듬고 기
회를 기다려서 그들의 돌아가는 길을 맞아 해전으로 모조리 무찔러서 나라의 치
욕을 크게 씻도록 하라.
계사년, 1월 25일 전라좌수영에 도착한 유서
계사년(1593년) 1월 26일 저녁.
벌써 보름이 넘도록 얼음 알갱이가 섞인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총통과
염초, 그리고 유황을 비에 젖지 않도록 간수하라는 엄명이 각 군선에 내려졌다.
귀찮은 날씨였지만 도롱이를 쓰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군졸들과 그들을 독려하
는 장수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소식이 어제 아
침 전해졌기 때문이다. 십만 명이 넘는 조명연합군이 밀물처럼 남하하고 있었다.
왜국으로 도망치는 적을 바다에서 섬멸하라!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유서의 내용을 전해들은 장졸들은 너나없이 부둥켜
안고 웃었다.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남해안까지 밀어붙이고 삼도의 수군이 패잔
병들을 쓸어버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 나는 것이다. 장졸들은 때이른
봄비가 하루 빨리 그치고 패잔병을 잡으러 출정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순신은 순천부사 권준과 겸상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군관 이봉수를 불러
들였다. 둥글넓적한 양볼이 온통 곰보 자국으로 얽은 이봉수는 화약 제조에 특
기를 지닌 군관이었다.
"염초는 얼마나 준비했는가?"
이순신은 그에게 석 달 동안의 말미를 주었었다.
"허나 장군! 석유황이 없으면 염초는 있으나마납죠."
염초는 유황과 혼합되어야지만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다. 전쟁 전까지는 대부
분의 유황을 왜국에서 들여왔는데, 전쟁이 시작되면서 공급이 뚝 끊긴 것이다.
"천 근의 염초와 구색이 맞으려면 석유황이 얼마나 있어야 되지?"
"적어도 백 근은 있어야지요."
"백 근!......백 근이라."
이순신은 이봉수가 물러간 후에도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두 장
의 유서가 연달아 좌수영으로 내려온 직후부터 더욱 어두워졌다. 당장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어명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지난 겨울 동안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여덟 척의 판옥선을 증선했다. 그러나 배만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은 아니었다.
먼저 여덟 척의 판옥선에 승선할 수군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는 판옥선 한 척당 최소한 백오십 명의 수군이 필요했다. 그러니
까 판옥선 여덟 척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천 명이 넘는 수군이 새로 충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군의 숫자는 지난 겨울을 고비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전라감영
소속의 소모사(군사를 징발하는 관리)들이 전라도 해안을 돌면서 수군들을 징발
하는 바람에, 오백여 명의 수군들이 하루아침에 육군으로 탈바꿈했다. 전라감영
에 항의 공문을 아무리 보내도 이 병폐는 개선되지 않았다. 연전 연승을 거두는
수군을 견제하기 위한 육군의 술책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다음으로 부족한 것은 총통이었다. 판옥선 한 척당 적어도 열 문의 총통이 필
요했고, 총통 한 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백오십 근이 넘는 강철이 필요했다. 그러
니까 여덟 척의 판옥선을 움직이려면 모두 만이천 근의 강철이 모여야 한다. 강
철을 구해오도록 군사들을 풀었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강철을 내놓지 않았다.
벼슬을 주든지, 천한 신분을 면제해주든지, 병역을 면제해주지 않는 이상 제 발
로 강철을 가져올 사람은 없었다.
군사와 강철과 석유황의 부족, 그리고 세찬 비바람과 손발이 꽁꽁 어는 추운
날씨. 이런 상황에서 부산을 치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승리에 대한 갈
망은 전투를 망치기 십상이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거쳐 필승의 조건이 성립
할 때 싸워야지만 승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조선 수군은 작년 부산해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 반면 왜 수군은
훨씬 강해졌다. 우선 그들은 더 이상 경상도의 뱃길에 어둡지 않다. 지난 일 년
동안 경상도 전역에 주둔하면서 해류의 변화까지 파악했으며, 부산으로 가는 길
목길목마다 복병선들을 배치했다. 지금 이대로 출정하면 조선 수군은 부산에 닿
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된다. 더구나 이 어명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 않은
가. 평양성을 탈환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원군이 십만 명을 넘는다는 것은 과장
인 듯하고, 왜군이 한꺼번에 무너져 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 역시 지나
치게 낙관적이다. 들뜨지 말고 기다릴 일이다. 쉽게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된
다.
"권부사의 생각은 어더시오?"
권준의 의견을 구했다. 전황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짚어내는 권준이 이번에
도 묘책을 내놓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부산을 치는 것은 절대 불가합니다. 평양에서 부산까지는 천릿길이니 지금 부
산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들은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지요."
"허나 어명이 내려오지 않았소?"
권준의 얼굴에 웃음이 맴돌았다.
"유서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군은 결코 그렇
게 맥없이 환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겨울 추위가 접히기를 기다리며
잠시 움츠렸다가 경칩을 맞은 개구리처럼 튀어 오를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 수
군이 서둘러 출정할 이유는 없지요. 마음 급한 조정 대신들의 호들갑에 놀아나
서는 아니됩니다. 장군! 조명 연합구이 한양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천
천히 출정 채비를 갖추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도 유서에는 당장 군사들을 일으키라고 되어 있지 않소?"
이순신은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질문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의 화법에 익숙한
권준이 차분하게 대비책을 꺼내놓았다.
"그렇다면 먼저 응포를 치시지요."
"응포?"
"낙동강의 끝이지요. 왜선들은 응포에서 출항하여 남강을 타고 진주로 들어가
거나 그 지류를 타고 안동, 고려, 거창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으니, 응포를 공
격하는 것은 곧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군의 손발을 묶는 것입니다. 그리만 되
면 전라감영에 조선 수군의 체면도 서는 것이고, 소모사들이 함부로 우리 수군
들을 빼내가는 것도 막을 수 있겠지요. 또한 부산의 왜 선단을 멀리서나마 살펴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유서를 받들어 출정한 것이니 어명을 어겼다는 비난
은 면하겠지요? 응포를 치면 이렇게 일석사조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응포는 너무 깊숙한 곳이 아니오? 자칫 잘못해서 퇴로를 차단당할 가
능성도 있고."
권준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장군께선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순신은 내심 거제도까지만 진격하고 싶었다. 거제도를 지나면 배를 숨길 수
있는 섬도 줄어들고 해안에 설치되어 있는 왜의 대포도 훨씬 많아진다. 권준은
머뭇거리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자문자답했다.
"조금 위험하긴 합니다만 부산 근처까지는 가야 합니다. 장군! 유서가 전라좌
수영에만 내려왔다고 보시나요? 아닙니다. 유서는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에도
내려갔을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지요? 세 명의 수사에게 동시에 출정 명
령을 내린 다음, 과연 누가 어명을 충실히 따르는가를 지켜보려는 의도가 아닐
는지요? 따라서 우리는 거제도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로 만족해서는 아니됩니다.
전라좌수영이 어명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해요. 어찌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작년에 거둔 승전들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유념하세요."
웅포까지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권부사!"
"예."
권준의 유난히 흰 얼굴을 응시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권준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앞으로 전황이 어찌 될 것 같소? 유서에 따르자면 곧 전쟁이 끝날 것 같소
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가 조선을 칠 때는 당연히 명나라의 개입을
예상했을 테지요. 가도입명을 주장한 것 자체가 명나라와의 한판 승부를 각오한
것입니다. 십육만 명이 넘는 조총수들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제 아무리 천자의
군대라 해도 십육만 명의 조총수와 싸워서 단숨에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왜군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어떻게든 견뎌낸 후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려고 하겠
지요. 의외로 장기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대비를 해야지요."
"무엇을 대비한단 말이요?"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부가 끊임없이 창출되어야 합니다. 조선 팔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지금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는 곳은 전라도뿐입니다. 전라도에
서 만든 의복과 곡물에 힘입어 조선의 장졸들이 전투를 벌여나가는 형국입니다.
장기전은 전투와 일상적 삶이 병행되는 법이지요. 즉 죽고 죽이는 것과 먹고 사
는 일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장군께서는 전쟁터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텆ㅎ
아울러 살피셔야 합니다. 우선 전라도 해안과 해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교역을 직접 관장하세요. 거기서 산출되는 막대한 부를 장기전에 대비해서 비축
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나 장사치들을 단속하는 것은 장수의 본분이 아니지 않소?"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었죠. 허나 지금은 새로운 유형의 장수가 필요합
니다. 문관들이 도맡아 하던 목민관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병행해야지만 승리를
거둘 수 있지요. 장군께서는 군권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권까
지 가지셔야 합니다."
이순신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권부사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허나 그것은 월권이오.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
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권준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전라도의 백성들은 장군의 군령에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다스릴 것인가, 아니면 은밀하게 다스릴 것인가의 문제만 남았지요. 조정에서는
장군께 끊임없이 부산을 치라는 유서를 보내올 것입니다. 그 압력에 맞서기 위
해서는 장군께서 전라도 백성의 신망을 얻어야 하고 또 직접 그들의 삶을 관장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장군과 좌수영, 나아가서 조선 수군 전체를 소생시키는 길
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급히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나대
용이 문 앞에서 고했다.
"장군! 경상우수사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이순신과 권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원균도 유서를 받은 것이다.
원균은 기효근과 함께 어둠이 완전히 깔린 좌수영으로 들어왔다. 이슬비 사이
로 내비치는 두 사람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기효근은 남해 방화의
앙금이 아직도 남았는지 이순신을 보고도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과
권준, 원균과 기효근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를 잡았다. 기효근이 먼저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
"좌수영이 너무나도 평화롭소이다. 이 모두가 좌수사의 공덕이 아닐는지요?"
이순신이 기효근을 노려보았다. 기효근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벙글벙글 웃었
다. 원균이 본론을 꺼냈다.
"당장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어명이 내렸는데 왜 아직 출정 채비를 갖추지 않
았소? 때를 놓치면 도망가는 왜놈들을 잡을 수 없소이다."
권군이 막아섰다.
"아직 조명연합군은 한양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서두르다간 일을 망치는 법
이지요."
원균이 도끼눈을 뜨고 권준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권부사! 어명을 거역할 셈이오? 왜군이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소문을 듣지도 못했소? 지금 당장 출정해야 하오. 정만호의 원수
를 갚을 절호의 기회가 왔소."
이순신은 권준의 의견애 동조했다.
"우선 전라우수영에 연통을 넣고 척후를 보내 왜선들의 동태를 살피고 나서
출정해도 늦지 않소이다."
기효근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장군께서 그렇게 나오실 줄 짐작했소이다. 허나 이영남이 벌써 전라우
수영으로 갔고 척후도 우리가 미리 띄웠으니, 변명 말고 속히 출정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순신이 아래턱이 파르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부, 부산을 칠 수는...... 없소."
"부산을 치지 않겠다? 어명을 거역할 셈이로군.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는가?"
원균이 당장이라도 허리에 찬 장검을 빼어들 기세였다. 권준이 이순신의 얼굴
을 살피며 재빨리 덧붙였다.
"먼저 웅포를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곧장 부산까지 진격할
군사도 군선도 부족합니다. 우선 웅포를 친 다음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부산을
칠 계획을 짜는 것이......."
기효근이 권준의 말을 잘랐다.
"또 변죽을 울리며 생색만 낼 작정이구려. 권부사! 그대가 좌수영을 망치고 있
음이야."
이순신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 냈다.
"닥치시오! 망치기는 뭘 망친단 말인가?"
원균이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권부사와 기현령은 나가 있으시오. 당장!"
권준과 기효근이 자리를 떴다. 원균은 이순신이 평상심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
렸다.
"기현령의 무례함은 내 사과하리다. 우국충정에서 나온 말이니 널리 헤아리시
오. 권부사의 생각처럼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미 어명이 내렸
소. 장수된 자가 어찌 군왕의 명을 받고 지체할 수 있겠소. 평양을 탈환했으니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소. 이 기세를 몰아 주저하지 말고 적을 쳐야 할 것이오.
무릇 장수는 군사들의 사기를 다스리고(치기), 마음을 다스리고(치심), 힘을 다스
리고(치력), 전세의 변화를 다스린다(치변) 했소이다. 출정하도록 합시다. 부산까
진 내가 앞장을 서겠소."
이순신은 원균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산을 칠 수는 없소이다."
어제 아침 원균은 부산을 치라는 유서와 함께 대장군 이일의 서찰을 받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갈 터이니 부산에서 해후하여 술판을 벌이자는 내용이었
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이일이 이렇게까지 큰소리를 칠 정도라면 조명연합
군의 위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사코 부산을 치지 않겠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가? 이제 이순신은 어명조차 무시한다. 무엇을 믿기에 저다지도 도도하단 말인
가?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부산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렇다면 일단 웅포를 쳐서 분위기를 띄운 연후에 부산으로 몰아가는 수밖에 없
다.
"좋소. 함께 웅포를 치도록 합시다. 언제 출정할 계획이시오?"
원균이 선선히 응낙하자 이순신의 얼굴이 또다시 묘하게 일그러졌다. 빗방울
이 점점 굵어져서 장대비로 바뀌었다.
"나흘 뒤로 정했소이다. 허나 비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면 연기될 수도 있소."
대화는 그쯤에서 끝이 났다. 원균은 기효근이 난동이라도 부릴 것을 염려해서
인지 술자리도 마다하고 자리를 떴다.
이순신은 배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주안상을 내오도록 했다. 기와에 부딪
히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연거푸 넉 잔을
혼자 부어 마셨다 옆에 앉은 권준과 나대용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윽고 권준이 입을 열었다.
"원수사는 결코 장군게 숙이고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더 힘을 얻기 전
에 장군께서 으뜸 장수가 되셔야 합니다. 서애 대감께 다시 한 번 서찰을 올리
는 것이 어떨는지요?"
나대용도 맞장구를 쳤다.
"원수사만 없으면 경상우수영의 장졸들도 모두 장군을 따를 것입니다. 시일을
늦추다가는 그들 모두가 기현령처럼 개망나니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순신은 즉답을 피한 채 나대용과 권준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술잔을 비웠다. 향기가 은은한 머루주였다. 이순신의 혀가 조금
씩 말려올라갔다.
"나 원수사를 아오. 나만큼 그를 아는 사람도 드물지. 권부사의 말이 맞소. 그
는 지금 부산을 치고픈 생각뿐이고 그 때문에 우리는 큰 낭패를 겪을 것이오.
그에게 목민관의 자질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
로지 장수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구하고 싶소. 그와 함께
이 전쟁을 승리로 이글고 싶소. 그를 설득하고 싶소."
권준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이순신은 푹푹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낮게 웃었다.
"후후훗! ......육진 시절, 그는 나의 우상이었소. 백전불패의 용장, 적의 독화살
을 두려워 않는 맹장, 부하들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덕장. 참으로 넘기 힘든 산
이었소."
"장군!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옵니다."
이순신은 눈을 부라리며 나대용을 쏘아보았다.
"네가 내 마음을 아느냐? 원수사가 있는 것만으로도 여진족이 압록강을 건너
지 못하던 때도 있었느니라. 나는 그를 칠 수 없다....... 결코 나는 그를 치지 않
을 것이야."
권준이 눈짓으로 나대용을 만류했다. 아무런 대꾸도 말라는 뜻이었다. 이순신
은 머루주 한 통을 모두 마신 후 갑옷을 입은 채 골아 떨어졌다. 두 사람은 이
부자리를 살핀 다음 뜰로 나섰다. 어느새 퍼붓던 장대비도 멎고 시원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 올라왔다. 나대용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왜 말리셨소이까? 이번 기회에 좌수사의 낡은 감상을 깨고 싶었는데......."
권준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그대가 몇 마디 한다고 마음을 돌릴 좌수사가 아니지."
"하지만 저런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나까지도 원수사에게 주눅이 드는 것
이....... 에잇! 군선도 우리가 많고 군사도 우리가 많은데 뭐가 그리 걱정인지 모
르겠소이다."
"정녕 모르시겠소? 방금 좌수사는 우리를 시험한 것이오."
"시험이라고 하셨소이까?"
권준은 나대용의 놀란 눈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좌수사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아요. 나군관이나 나 권준도 말이오. 우리가 한
목소리로 원수사를 쫓아내자고 했을 때 좌수사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지요? 아
마 그대나 내가 원수사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좌수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가 보오. 그래서 일방적으로 원수사의 칭찬을 늘어놓은 게지. 자
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가를 곁들여 보여주면서 마이오."
"어찌 좌수사가 우릴 의심할 수 있단 말이오이까? 믿을 수 없소이다."
나대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권준은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우러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쓴웃음을 삼키며 흘러가듯 뇌까렸다.
"그래...... 나도 처음엔 믿을 수 없었지요. 허나 믿는 편이 좋을 거요. 그래야
좌수사를 좀더 신뢰하게 될 테니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오. 여기까지 좌수
사가 버텨온 것도 바로 저 어두움 때문이 아닐까....... 언제나 타인의 눈을 의식
하고, 타인에게 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타인에게 뒤져 있는 자신을 인정
하지 않는 마음, 얼기설기 뒤엉키고 꼬여 제대로 밝은 빛을 보지 못하는 마음!
그렇다면 구태여 그 어두움을 들춰낼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냥 지켜보면 되겠
지....... 그것이 이순신이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고......."
계사년(1593년) 4월 21일 새벽.
한양에서의 첫밤, 두 사람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성룡이 자꾸 몸을 뒤
치자 이덕형은 끝내 이부자리를 걷었다. 근 일 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양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조선의 도읍지가 아니었다. 궁궐들은 불
에 탔고 백성들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거리에는 썩어가는 시체들로 인산인
해를 이루었다.
이덕형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여송의 접반사로 명군과 함
께 제일 먼저 무악재를 넘는 동안 거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어두운
방에 숨어 퀭한 눈으로 거리를 주시하고 있을 백성들의 파리한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 잃어버린 가족과 친지에 대한 그
리움! 그들은 떨고 있었다.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까지 그들은 나서기보다는
물러서야 하고, 웃거나 울기보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견뎌야 함을 이미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왜 벌써 기침하셨소?"
유성룡이 인기척을 느끼고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2월에 전라, 경상, 충청 삼
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그는 조선군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였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잡념도 많고."
"그래도 눈을 좀 붙이시오. 내일부터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려면 힘이 많이
들 것이오."
이덕형이 고개를 돌렸다. 유성룡의 웃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대감의 공이 크옵니다. 대감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듯 빨리 한양을 되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명군이 먹을 군량미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간자를 미리 보내 각 성읍의 지
도를 구한 것은 모두 유성룡의 공이었다.
"전쟁은 이제부터요. 왜군을 바다 건너로 몰아내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되오. 왜군은 물론이거니와 명군의 움직임도 면밀히 살펴야 하오."
"대감께서도 그 뜬소문을...... 믿으시는군요."
이덕형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문밖을 살폈지만 별다른 인기척은 없는 듯했다.
유성룡 역시 주위를 경계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뜬소문이 아니오. 명군이 평양성의 조선 백성들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에요."
유성룡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용주가 전한 소식
은 참으로 믿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다.
평양성에서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준 명군은 패잔병을 추격하지 않고 딴전만 피
워댔다. 그들 사이에 어떤 밀약이 오고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서도 전공을
거둘 필요가 있을 때면, 명군은 조선인과 왜인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도륙했다. 여러번 항의했지만 이여송은 완전히 오리발을 내밀었다. 명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조선 백성이 누구누구인지 적어 오라는 것이다. 백성들의 신원을
밝혀줄 문서는 이미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이제독이 철석같이 약조를 했으니 오늘부턴 달라지겠지요. 어쨌든 예의를 아
는 대국이 아닙니까?"
이덕형 역시 명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양에서 떠도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구원병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어제도 해가 질 무렵 이여송을 찾아갔었다. 한양을 되찾은 데 안주
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왜군을 추적하자고 재촉하기 위해서였다. 이여송은 너
털웃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맞이했고 녹차를 내오도록 했다.
유성룡은 찾아온 용건부터 꺼내놓았다.
"이제독! 여기서 지체해서는 아니됩니다."
이여송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빙그레 웃었다.
"역시 조선의 차는 맛이 좋소이다. 우리네 차보다 단맛은 덜하지만 향이 은은
하고 그 운치가 입안에서 오래오래 맴도는군요. 허허, 두 분께서도 어서 드시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조선의 속담도 있지 않소이까?"
이덕형이 유성룡을 거들었다.
"하삼도의 의병들에게도 연통을 넣었습니다. 이제독의 군대가 위에서 누르고
우리의 의병들이 뒤에서 공격하면 왜군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이여송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이덕형을 곁눈질했다.
"허허허, 그래요? 그렇게 조선 의병이 대단하답니까? 그럼 우린 이쯤에서 물
러갈까 합니다만......."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성룡의 놀란 눈으로 말꼬리를 붙들었다. 지금 명군이 철수하면 다 잡은 승
기를 놓치게 된다.
"대감도 생각을 해보시오. 평양을 탈환했을 때는 천자의 정병들을 학살자로 몰
더니 한양을 되찾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합지졸 농사꾼들과 비교하고 있지 않
소이까? 이것은 귀국이 명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이에요.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
다면 나는 경략조선군무 송응창 대감께 사정을 아뢰고 철군하겠소."
송응창은 원병의 진군과 철군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유성룡이 이덕형
에게 어서 사과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덕형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독! 용서하시오. 저의 짧은 소견이 제독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나 봅니
다. 지금 이제독이 떠나면 우리 조선은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휩싸이고 말 것이
오. 부디 조선을 지켜주시오.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여송이 계면쩍게 양손을 비벼댔다.
"됐소이다. 접반사를 꾸짖으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유대감!"
"예."
"내 몸에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시오. 나 역시 그 누
구보다도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소. 그러니 나를 믿고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도록 해요. 오늘 대감들이 이곳을 찾은 것은 패잔병을 추격할 계획을 듣기 위
해서라고 생각하오만."
"그렇소이다."
"그래서 나도 대감들을 찾아갈까 고민중이었소. 우리도 왜군을 뒤쫓고 싶으나
불행하게도 한강을 건너갈 배가 없소이다. 대감들께서 그 배를 마련해주실 수
있겠소? 한 백여 척이면 충분하리라 생각되오만."
이여송은 강을 건널 배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 구원병이 먹을 군량미와 입을
옷, 거주할 집, 그리고 기타 물품들을 챙기는 일은 모두 유성룡의 책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명군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여송의 탓이 아니라 유성룡의 준
비 부족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그 배를 구하도록 하지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물러나온 유성룡은 군사들을 풀어 강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모두 징발했다. 어부들이 몰려와서 밥주이 끊긴다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지
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훗날 열 배로 갚겠다는 약속을 해가
면서 인시(새벽 3시)까지 동분서주했다. 드디어 팔십여 척이 넘는 크고 작은 배
가 노량 나무에 모였다. 이 정도면 부족하나마 원군을 실어나를 수 있을 것이다.
유성룡과 이덕형은 강나루 근처의 민가에 지친 몸을 뉘었다. 명군의 도강을
도우려면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끝내 잠이 오지 않을 것
만 같았다. 이덕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평양을 수복하자마자 전하께서는 하삼도의 수사들에게 부산을 치라는 유서를
보내셨습니다. 헌데 우리가 예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으니 그들의 목숨만 위태롭
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역시 잠들기를 포기한 유성룡이 벗어두었던 의복을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찾
아 입으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이순신은 경거망동할 위인이 아니라오."
"허나 어명이 이미 내려갔지 않았습니까?"
유성룡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덕형은 아직까지도 원칙을 부여잡고 있었다. 결
코 어명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원칙, 예의범절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 명
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원칙.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오. 이순신을 비롯한 우리의 장수들이 충실하게 어
명을 따랐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무릇
군자는 굳고 곧아야 하지만 맹목적으로 완고해서는 아니된다 하셨소. 전하께서
는 지금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에서 승리할 마음뿐이시오. 허나 평양에서 여수
나 거제도의 일을 알 수는 없는 법. 이순신은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여야 하오."
"그것은...... 역심을 품은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역심? 후후후!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지금은 이순신을 믿는 도리밖에 없소.
어쨌든 전라도를 지켜낸 것은 그이 공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제 우리도 명군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추격군을 편성하는 것이 어떻겠
소?"
"독자적인 추격군이라시면?"
"동과 서로 나누어서 적을 공격합시다. 동도군은 경기방어사 고언백, 삼도방어
사 이시언, 평안우도병사 김응서, 이천부사 변응성 등이 이끌고, 서도군은 전라
관찰사 권율, 전라병사 선거이가 맡으면 될 것이오. 그들 관군이 남하하면서 각
지역의 의병과 합세하면 우리 힘만으로도 능히 왜군을 공격할 수 있소."
유성룡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덕형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아시옵니까?"
"아니오. 허나 내게 군권을 주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 만약 동서 추격
군이 패한다면 책임을 지면 될 것이고."
"이제독에게 귀띔은 하셨는지요?"
"아니오. 만약 그가 우리의 계획을 알면 당장 회군하겠다고 노발대발할 것이
오. 군사들을 내려보낸 후에 천천히 수습할 작정이라오. 서도군은 이미 한강 이
남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동도군만 무사히 도강하면 합동작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오."
그제야 이덕형은 장수란 어명에 의하지 않고서도, 때론 어명에 반하면서까지
도 군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유성룡의 주장을 이해했다. 그 말은 이순신을 두둔
하는 것이면서, 또한 도체찰사 유성룡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동안 유성룡은 대표적인 주화론자로 지목되어 왔다. 평양을 탈환한 후 윤
두수나 정철 같은 주전론자들이 명군보다 앞서서 왜군을 치자고 했을 때도 유성
룡은 한사코 반대했다. 이여송이 유성룡에게 전적인 신뢰감을 나타낸 것도 명군
의 지휘하에 조선군을 배치시키라는 명령을 그가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지금 목숨을 내결고 조선군만의 독자적인 진공책을 모색하고 있다.
내 진작부터 서애대감이 외유내강을 짐작했으나 이렇게까지 용의주도할 줄이
야!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게요? 자, 잠자기는 틀렸으니 서둘러 나루로 나가도
록 합시다. 일단 명군의 태도를 살핀 다음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하오."
"예, 대감!"
두 사람은 자욱하게 깔린 새벽 안개를 뚫고 노량 나루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
여백의 군대는 사시(아침 9시)가 넘어서야 나루에 도착했다. 이여백은 팔십여 척
의 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가 준비되지 못했을 터
이니 엄히 꾸짖고 돌아오라는 이여송의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역시 유성룡은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군.
유성룡과 이덕형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 헌데 제독께서는 아니 오셨는지요?"
이여백이 적당히 둘러댔다.
"천자께 올릴 장계를 마무리 하시느라 늦으신다고 하셨소. 헌데 배가 죄다 낡
은 것 같소이다. 저 배를 타고 도강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오."
유성룡이 대답 대산 각 배의 선장들을 빈 터로 불러 모았다.
"이 사람들은 평생을 한강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수천 번도 넘게 강을 건넜
지요. 비록 배가 좀 낡고 작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저들을 믿고 배에 오르
십시오. 새벽엔 안개가 짙어 걱정을 했는데 해가 뜨니 바람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씹니다. 하늘도 조명연합군의 도강을 축복하는 듯하오이다. 자, 어서 앞장을
서시지요.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이여백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유성룡의 주장을 꺾을 만한 핑계거
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성룡이 이끄는 대로 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무
슨 일이 있더라도 군사들이 한강을 건너는 것을 막으라고 이여송이 신신당부를
했던 것이다.
"아, 아니오. 나는 우리 군사들이 모두 강을 건넌 후에 가도록 하겠소."
"그러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나중에 가지요."
이윽고 강을 건너라는 군령이 내려졌다. 명군들이 색색가지 깃발을 앞세운 채
차례차례 배에 올랐다.
아침부터 시작된 도강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밤만 지내
면 명군이 모두 한강을 건널 수 있을 듯했다. 이여백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
졌다. 군령을 어길 상황이었다. 그는 분로로 일그러진 이여송의 얼굴을 그려보았
다. 이여송은 형제간의 우애보다도 군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대
로 강을 건넜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장군!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어디 몸이라도 아프신가요?"
이여백은 벌떡 일어서며 유성룡의 인사말을 되받아쳤다.
"대감은 내가 죽을 병이라도 걸렸으면 좋겠소? ......아악!"
이여백이 갑자기 오른발을 감싸 쥐고 나뒹굴었다. 명군의 호위병들이 재빠르
게 유성룡과 이덕형을 에워쌌다.
이여백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절뚝거리며 가마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병이
위중하여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며 퇴각 명령을 내린 다음 황급히 돌아가버렸
다. 군령이 떨어지자마자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에 늘어섰던 명군이 순식간에
어선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강 건너편에 내렸던 군사들을 되실어오기 시
작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군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오. 어서 강을 건너도록 하
시오. 어서!"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야.
분을 참지 못한 유성룡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처음부터 명군
은 강을 건널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늑대를 물리치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로다. 저들은 싸우지 않기로 왜
군과 밀약을 맺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패주하는 적을 선선히 보내
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젠 명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
들이 싸우지 않겠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리.
유성룡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되돌렸다. 그리고 도성으로 들어가자마
자 이여송의 숙소로 향했다. 그러나 이여송은 몸이 아프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그래도 물러가지 않고 계속 연통을 넣자 아무렇게나
휘갈겨쓴 짧은 서찰 한 장이 날아들었다.
송경략(송응창)의 공문이 도착했소이다. 왜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엄명이오. 나
도 대감과 함께 왜군을 공격하고 싶으나 이 일은 내 손을 벗어난 듯하오. 물러
가시오.
유성룡은 그 밤에 은밀히 유용주를 불렀다. 그리고 경기방어사 고언백에게 지
금 당장 노량 나루로 가서 도강하라는 군령을 전했다. 도강을 방해하는 자는 명
군이라 하더라도 지나가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조선군은 길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자정 무렵부터 도둑고양이와도 같은 이동
이 시작되었다. 명군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것이므로 더욱 입조심을 했다. 고언
백이 이끄는 조선군은 인시(새벽 3시)가 가까울 무렵 노량 나루에 무사히 도착
했다. 고언백은 먼저 십여 명의 척후를 내려보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더니 칼을 빼어든 명군들이 나타나서 척후의 목을
베어버렸다. 순식간에 목없는 시체들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여송이 이런 일
을 짐작하고 군사들을 잠복시켰던 것이다. 명군의 숫자가 천 명이 넘을 뿐만 아
니라 명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 자체가 천자에 대한 도전이기에, 고언백은 다시
한양으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노량 나루에서의 도강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유성룡은 다른 나루를 찾아
보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헛수고였다. 이미 명군이 도강이 가능한 나루를 모
두 점령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조선군의 동정을 은밀히 살폈음이 분명했
다.
그 밤부터 유성룡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운 것이 원인이었지만 조선군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
는 억울함이 병을 더했다. 이덕형이 병문안을 오고 이여송까지 귀한 약재를 보
내왔다. 단순한 몸살이겠거니 생각한 병은 쉽게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
이 침침해지고 온몸이 퉁퉁 부을 뿐만 아니라 오줌에서 피까지 섞여 나왔다. 병
석을 지키는 유용주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찾아오는 의원들도 처방
전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서 올 여름을 못 넘길지도 모
른다는 암울한 추측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꼬박 보름이 흘렀다.
"요...... 용주야!"
유성룡의 음성이 입천장까지 이르지 못하고 턱턱 끊어졌다.
"예, 대감!"
유용주가 몸을 숙여 귀를 갖다댔다.
"명군은...... 어, 어디에......."
혼절을 거듭하면서도 조명연합군의 근황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여송의 군대
는 보름 동안 한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용주는 차마 사실대로 아뢸 수가
없었다.
"대감! 모든 걸 잊고 몸 생각만 하십시오."
"이, 이놈들!"
유성룡의 두 손이 허공을 쭉 뻗어올라갔다. 무엇인가를 움켜쥐려는 듯 열 손
가락이 마디마디 뒤틀렸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턱과 뺨에 경련이 일었다.
검은 동자가 자꾸 위로 올라가더니 이윽고 핏발 선 흰 동자만이 남았다. 그르렁
그르렁 식도를 긁어대는 가래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유성룡이 다시 정신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혼절은 온몸이 뻗뻗하게 굳어오고 얼굴이 심하게 떨
리는 것이 지난번과는 달랐다. 검은 동자가 완전히 넘어간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유용주는 황급히 의원을 부르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둠이 이어졌다.
티끌 하나 없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생각도 공간이 움직인
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어둠. 그 어둠의 끝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똑
바로 응시할 수 없을 만큼 밝고 거대한 빛이었다. 차츰차츰 그의 몸뚱아리가 어
둠에서 벗어나더니 빛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빛 속에서 행복과 평화가 느껴졌다. 어둠이 완전히 사
라지고 사방이 빛으로만 가득 찼을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서애!"
주위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나 눈부신 빛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
을 수 없었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빛 속에서
두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팔목을 붙었었다.
"나요. 율곡이오."
빛 속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한 사내의 얼굴 윤곽이 점점 또렷하게 드러났다.
짙은 눈썹, 약간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튀어나온 광대뼈, 길고 윤기 나는 흰 턱
수염. 율곡 이이가 분명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성룡의 입술이 떨어졌다.
"대감! 어디에 계셨습니까? 왜군의 침입을 알고 계시는지요? 대감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율곡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맴돌았다.
"그것이 어찌 나의 예언대로라고 할 수 있겠소. 나는 다만, 스스로 생각해서
의로우면 비록 수천만 명의 반대가 있더라도 그 길을 가겠다던, 공자의 대용에
관한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오. 그대 역시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너무 자
책하진 마시오."
"하오니 그때 대감의 뜻을 따랐다면 오늘 같은 치욕은 없었을 터입니다. 소생
의 어리석음을 꾸짖어주십시오."
율곡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허어, 서애! 누가 누구를 꾸짖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의 재앙은 피할 수 있
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는 법이오. 이제라도 잘못됨이 없도록 언행
에 조심하면 되는 것이라오. 오늘 내가 서애를 찾은 것은 한 가지 충고할 것이
있어서요. 서애! 지금 서애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은 그대의 단견에서부터 비롯
된 게요. 좀더 넓게 멀리까지 내다보도록 하시구려. 좁고 짧게 보면 불의와 부덕
이 앞서가는 것 같지만 넓게 길게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정의와 덕으로 귀속
되는 것이라오. 공자께서 <춘추>를 지으신 것도 바로 역사가 대의에 있음을 드
러내기 위함이지 않소? 왕조는 창업, 수성, 경장, 멸망의 길을 가지만 역사는 오
로지 대의에만 속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구려. 지금의 혼란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오직 천리의 뜻을 좇아 대도를 찾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모든 더럽고 추악한
세상 일들을 기억하였다가 필주를 행사하는 것이 어떻겠소? 서애라면 대의에 합
당한 글을 남길 수 있을 것이오. 부디 사마천의 궁핍했던 삶을 기억하시오 공자
께서도 평생을 멸시와 천대 속에서 지내시지 않으셨소? 서애! 역사의 자리에 서
시오. 사사로운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역사의 장강에 몸을 담그시구려. 그곳이
그대와 내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일 것이오. 힘을 내시오. 서애!"
2. 삼도수군통제사
상이 빈청에 전교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양남이 만약 적에게 점거당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
제여서 이로 인해 천하에 일이 많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장량과 소정방의 고사
대로 크게 수군을 일으켜 군량을 함께 싣고 천진에서 발선하든지 혹은 등주나
내주에서 출항하여 돛대를 높이 올리고 곧바로 우리나라의 평안도나 황해도 등
지에 도착한 다음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향도를 삼
아 웅천, 부산 등지에 이르러 우리의 수군과 협력, 진격하여 적의 소굴을 무찌르
고 수군과 육군이 협공하면 일거에 적의 무리를 섬멸하게 되어 천위가 멀리까지
퍼져서 만백성이 아무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다'라고 극력 진달하고 싶다. 그러
나 이는 너무 큰일이어서 서로 의견이 맞기가 어려우므로 명조에서 따르지 않을
까 염려된다. 그러나 우리의입장에서는 진주를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하다. 나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해하며 이 적을 토멸하지 않고서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같
아 한순간도 마음에서 잊을 수가 없으나 다른 좋은 방책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
이 진주하려는 것이다. 경들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가? 반복하여 자세히 참작
하여 곡절을 헤아려 아뢰라."
[선조실록], 26년 7월 15일 정묘조
계사년(1593년) 7월 15일 밤.
한양이 수복된 지 석 달이 흘렀지만 조선 조정은 아직도 환도하지 않았다. 왜
군이 그렇게 쉽게 물러간 것을 믿을 수 없어서였기도 했고, 다시 전황이 불리해
져 야반도주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선조는 평안도 영유를 거쳐
강서에서 여름을 지낼 생각이었다. 좌의정 윤두수나 좌찬성 정탁이 나서서 속히
환궁할 것을 아뢰었지만 긑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교량인 진주로 향했다는 장계가
7월 4일 밤부터 날아들었다. 왜군들이 전라도 침공을 시작했다면, 한양으로 내려
갈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한양에서 유성룡이 은밀히 전한, 명군이 전의를
상실했다는 서찰도 선조의 환궁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유난히 시원한 여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낮에는 불볕이 내리쫘다가도 밤만 되
면 늦가을처럼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일교차가 지나치게 커서 감환에 걸린 환자
들이 속출했다. 이번 감환은 극심한 두통과 열을 동반하면서 쉽게 떨어지지 않
았다. 세자인 광해군도 벌써 열흘째 쿨럭쿨럭거리며 자리보전을 한 채 앓고 있
었다.
기온의 급강하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농작물이었다. 벼는 채 익
기도 전에 시들어갔고, 과일들도 새벽의 된서리를 견디지 못해 잘고 병든 열매
만을 맺었다.
"전하! 밤바람이 차옵니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등뒤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던 내시감 윤환시가 돌아갈 것을 권했다. 군
왕이 감환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대신들의 탄핵이 내시감에게 쏟아질 것이다.
선조는 눈을 들어 뒤뜰을 쓰윽 한 번 훑었다.
황량하도다. 생명의 온기라고는 어디에도 없구나. 저 풀과 나무들은 모두 고사
하기 직전의 형상이 아닌가. 위위위, 바람이 불 때마다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생
명줄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아! 나의 백성들도 이와 같으리.
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영원하다지만, 그 도는 지난 일 년 동안
나의 백성들에게 전혀 미치지 못했다. 왜가 팔도를 유린하는 것이 도는 아닐 것
이다. 내가 의주까지 몽진을 떠난 것도 도는 아닐 것이다. 백성들이 굶주려 죽고
조총에 맞아 죽고 병들어 죽는 것도 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
자식이 부모를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며, 신하가 임금을 위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이십 년이 넘도록 노력해왔다. 어려서는 퇴계와 율곡의 가르침에 따랐
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들이 제자들을 중용해서 도학이 성행하는 나라, 선비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조강(아침 강의)과 석강(저녁 강의)에도 바짐없이 참여했
고, 사서오경을 신물나도록 읽었으며, 명나라에 철마다 문안사를 보내는 것도 게
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이 나라 조선이 짐승만도 못한 왜인들에게 유린
당해야 하는가? 이것은 도가 아니다. 천지의 도는 정녕 어디에 있는가?
선조는 윤환시에게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윤환시는 궁녀들을 물리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돌아들 왔는가?"
"그러하옵니다."
주위를 살피며 윤환시가 답했다.
"진주성은 어찌 되었는가?"
윤환시가 시선을 내리깔고 머뭇거렸다. 선조의 얼굴에 노여움이 서렸다.
"빨리 고하지 못할까?"
"진주에 급파되었던 화, 뇌, 운이 오늘 새벽에 도착하였사옵니다. 그들의 보고
에 따르자면, 십만 명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한 채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
었다고 하옵니다. 지난달 스무이튿날부터 전투가 시작되었사온데 경상우병사 최
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김준민, 남포현령 송제, 진주목
사 서예원, 진해현령 조경형......."
"그만! 과인이 어디 장수들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느냐?"
"의병장으로는 창의사 김천일, 북수대장 고종후, 우의병부장 고득뢰, 좌의병부
장 장윤......."
"이노옴! 죽고 싶으냐? 그곳 전투가 어찌 되었는지 속히 아뢰지 못할까?"
윤환시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전하! 지난달 스무아흐렛날에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뭣이? 그 말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실이렷다?"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풍문은 전라도에서 평안도로 뱃길을 오가는 장사치들을
통해 열흘 전부터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선조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작년
10월에는 김시민 혼자서도 진주성을 지켜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또한 진주성을 지키던 만여 명의 장졸들과 백성들이 왜적들의
손에 무참히 도륙당했다고 하옵니다."
"도륙당했다? 그 많은 장졸과 백성들을 모두 죽였단 말인가?"
윤환시는 머리를 아예 땅에다 박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러하옵니다.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살햇했다 하옵니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
선조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명연합군이 부산까지 왜군을 밀어붙이고
수군이 그 배후를 치면 전쟁이 모두 끝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왜군은 진
주성을 함락시킬 만큼 아직 건재하다. 백성과 장졸들을 몰살시킨 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리라.
"도대체 권율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이냐?"
"화를 따르자면, 도체찰사 권율의 군대는 이번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하옵니
다."
"그 말이 사실이렷다? 만여 명의 장졸과 백성들이 몰살당하는 판인데도 도체
찰사가 원병을 보내지 않았단 말이냐?"
"장수들간에 이견이 있었다 하옵니다. 도체찰사 권율은 진주성을 비우고 일단
후퇴하였다가 왜군과 맞서기를 바랐는데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충청병사 황진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 같사옵니다. 왜군은 이 틈을 타서 진주성을 완전히 포위
하고 원병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차단한 연후에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옵
니다."
"몰려오는 적을 앞에다 두고 자기들끼리 싸웠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런, 고이헌!"
장수들의 갈등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시의 최고기관인
비변사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전투들을 통괄하지 못하는 데 근본적이 원인
이 있었다. 몽진에 나선 조정이 오랫동안 평안도에만 머무는 데 반해 대부분의
교전은 하삼도에서 벌어졌다. 하삼도에서 평안도까지는 아무리 빨리 연통을 넣
어도 나흘이 넘게 걸렸다. 따라서 비변사의 결정에 따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사
실상 불가능했다. 그 결과 더 많은 권한이 하삼도의 장수들에게 옮겨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전투의 승리를 위해 도체찰사를 비롯한 각 지역의 병사와 수사들에
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비변사
의 개입과 중재가 사라지자 장수들의 갈등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문신들끼
리의 다툼은 기껏해야 언쟁으로 그치지만 장수들의 쟁공은 전투의 승패와 직결
되었다. 진주성의 패전도 따지고 보면 도체찰사 권율과 휘하 장수들의 갈등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다.
오랫동안 무장들의 쟁공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특히 선조는 이름난 장수들을 계속 변방으로 돌려 전공을 세우도록 유도했고,
군권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수들을 한 자리에 이 년 이상
두지 않았다. 어명을 어기거나 전투에서 패한 장수는 지체없이 삭탈관직을 당했
고 사약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 선조는 거듭 어명을 내리더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군왕이
내린 어명을 하삼도의 장수들이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도 확인하기 힘들 뿐만 아
니라 그들에게 부여한 군권이 항상 골칫덩이였다. 특히 도체찰사 권율과 전라좌
수사 이순신은 아직 전면전을 벌일 때가 아니라는 장계를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올렸다.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그들의 장계를 읽을 때면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물론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만, 장수들이 계속 이따위 장계만 올린다면 군
왕의 권위는 바닥을 기게 될 것이다.
하늘의 도가 항상 옳듯이 군왕의 영도 틀린 데가 없는 법.
군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장수는 군권을 빼앗고 목을 베는 도리밖에 없다. 그
런데도 신하들은 육군의 권율과 수군의 이순신에게 큰 상을 주라 한다. 어명을
따르지 않는 장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이 나라의 주인은 권율이나 이순신
이 아니라 바로 나다.
"이순신과 원균은 어떻게 하고 있던가?"
장수의 쟁공은 이제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각자 장계를 올리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같이 참전한 해전에서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
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순신이 조총을 바치면 원균도 곧 조총을 보내왔고, 원
균이 수급을 바치면 이순신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쟁공은 계사년에도 사그
라질 줄을 몰랐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신이 으뜸 장수가 되어서 연합함대를
통솔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달라고까
지 했다. 그들은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를 모두 총괄하는 수군통제사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 자리는 조선의 바다를 모두 책임지는 것이기에 신중에 신중
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서너 달이 넘도록 결정을 미뤄왔던 것은 그 막강한 군
권을 한 장수에게 집중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는 자중지란을 막아야 할 때가 된 듯했다. 조선 수군마저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로 무너진다면 전세는 역전되고 만다.
"천과 지는 전라좌수영에 다녀왔고 풍과 해는 경상우수영을 살피고 돌아왔사
옵니다. 지난 5월부터 두 달간 경상우도 지역을 돌면서 왜적과 맞서 싸웠던 연
합함대는 완전히 와해된 상태이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도로 좌수영을
옮기느리 분주하다 하옵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남해도와 거제도에서 매일 크고
작은 해전을 치르고 있다 하옵니다."
"부산을 칠 준비는 하고 있다더냐?"
"그게...... 군량미를 모으고 활과 화살을 다듬는 데 열심인 것은 사실이나 당장
출정할 뜻은 없는 듯하옵니다. 게다가 두 수사 사이에 주먹다짐까지 벌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어서 당분간은 연합함대를 꾸리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
옵니다."
"주먹다짐? 수사들이 돼지처럼 뒤엉켜 싸웠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예상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듯했다. 수사들끼리 주먹을 휘두를 정도라면
휘하 장졸들의 대립과 반목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둘
일이 아니었다. 군권이 집중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지만 으뜸 장수를 서둘러
뽑아서 수군이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궁에게 갈 것이니라. 앞서거라!"
"전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선조가 고개를 획 돌렸다.
"이노옴! 주둥아릴 닥치거라. 아비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데 가릴게 무엇이란
말이냐? 썩 앞서지 못할까?"
윤환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선조는 병을 앓는 광해
군에게 열흘이 넘도록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밤에 동궁의 처소로
가겠다고 나섰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마침 세자빈은 중전 박씨의 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중전 박씨까지 감환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옵소서, 아바마마!"
미리 연통을 받은 광해군이 마당까지 내려와서 선조를 맞이했다. 입술이 쩍쩍
갈라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목까지 심하게 부어올라 병색이 완연했다. 생
기가 도는 곳이라곤 깊고 그윽한 검은 눈동자 뿐이었다.
"밤바람이 차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선조가 광해군의 어깨를 감싸안듯이 아우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아
들은 예의를 갖춘 후 마주 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하는 자리였다. 광해군
이 세자에 오른 후 선조가 직접 그의 처소를 찾은 것은 처음인 듯했다. 몽진중
에는 왜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느라 바빴고, 분조를 정한 후에는 아예 떨어져
지냈다. 평양이 탈환되자마자 원조와 분조가 곧바로 합쳤지만, 1월 20일 정주에
서 상봉한 부자는 따뜻한 덕담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마
음만 먹었다면 함께 자리를 마련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작년까지
선조의 마음은 신성군에게 가 있었고, 신성군이 죽은 다음에는 슬픔을 달래느라
광해군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몸은 어떠하냐?"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들의 병을 걱정하여 병문안을 온 것처럼 물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결코 탐탁지 않은 아들의 병문안을 다닐 만큼
따사롭지 않다는 것을.
"다 나았사옵니다. 괜한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기 그지 없사옵니다."
"세자는 이 나라의 중심이다. 특별히 몸을 아껴야만 되느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약은 먹었고?"
"내의원 허준이 지어준 약을 먹었더니 한결 감환이 가셨사옵니다."
형식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광해군은 완화한 표정을 짓고 음성을 한껏 낮춘
채 선조가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조가 턱을 조금 치켜
들며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주성이 함락된 것 같구나."
"예에!"
광해군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소서행장의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 진주성의 함락은 참으로
놀랍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통처럼 구축했던 전라도의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이다. 광해군은 당황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아버지의 기세에 눌리고 만다.
선조는 논의를 비약시켰다.
"세자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보느냐?"
광해군은 바짝 마른 아랫입술에 침을 약간 발랐다. 벌써 넉 달이 넘도록 삼도
의 수사들을 총지휘할 새 벼슬 자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수군통제사를 두는
데는 이견이 없었으나, 문제는 누가 초대 수군통제사에 오르는가 하는 것이었다.
유성룡과 이덕형, 정탁 등은 이순신을 추천했고 윤두수와 정철, 이일 등은 원균
을 지지했다.
"수군은 연합함대로써 왜적과 맞서왔사옵니다. 그 함대에 으뜸 장수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세자의 생각도 비변사의 중론과 같구나. 그렇다면 누가 그 자리에 올라야 하
겠느냐?"
"......."
광해군은 침묵을 지켰다.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순신
과 원균의 승전보만 접했을 뿐 두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을 비교할 객관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오래 전부터
지원한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까지 파
격적인 승진을 거듭한 것도 전적으로 그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다. 유성룡의 품
성으로 비춰보건데 이순신이 뛰어난 장수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원균 역시
이순신과 비교해서 결코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그는 신립, 이일을 도와 함경도
육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경상도가 초토화되었을 때도 결코 경상우도의 바
다를 떠나지 않은 맹장이다.
그들 두 사람이 뜻을 합치지 못하고 심하게 쟁공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말해보거라. 원균과 이순신 중 누가 적합하겠는가?"
광해군이 말머리를 돌렸다.
"이순신이 좌수영을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사실이옵니까?"
"그렇다. 한산도로 옮겼느니라. 군선들의 정박과 군량미의 비축, 그리고 척후의
활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수보다 한산도가 더 적당하다는 장계를 보내
왔느니라."
"원균의 장계도 도착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어제 읽어보았느니라. 장졸들이 심한 기근으로 죽어 나가고 있다며 군량미를
보내달라는 장계였다."
광해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순신과 원균은 둘 다 천하의 명장이옵니다. 천 리나 떨어진 이 곳에서 두
장수 중 누가 더 뛰어난지를 가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소
자는 그들의 인물됨보다 그들의 자리를 중심에 두고 살필가 하옵니다."
"그들의 자리를 중심으로 살핀다?"
"그러하옵니다. 전라도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사옵니다. 조명연합군이 평
양과 한양을 수복한 것도 군량미와 무기, 그리고 군졸들이 전라도에서 끊임없이
보충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옵니다. 전라도가 조선 팔도를 먹여 살렸다는 속언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을 살피시옵소서. 전라좌수영은 군량
미를 더욱 안전하게 지키려고 수영을 옮겼으며, 경상우수영은 군량미가 부족해
서 조정에 도움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물론 원균보다 이순신이 더 낫다
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이 군량미를 모을 틈도
없이 인접한 왜선들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겠지요. 허나 어쨌든 경
상도의 군사들은 굶주리고 전라도의 군사들은 허기를 면하고 있는 것만은 엄연
한 사실이옵니다. 그러므로 소자는 왜군을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는 전라도를 중
심에 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권율을 도체찰사로 삼았듯이 수군의 으뜸
장수도 전라도에서 나와야 할 것이옵니다. 그것이 민심을 잡는 길이기도 하옵니
다."
선조가 헛헛 헛기침을 했다.
"결국 세자는 이순신을 통제사에 앉히자는 것이구나."
"이순신이 아니오라 전라도의 수사를 택해야 한다는 뜻이옵니다. 이억기나 이
순신 중 누가 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보옵니다."
"이억기는 아직 어리다. 삼도의 수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어."
선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해군의 마음을 알았으니 더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광해군은 다소곳이 뒤따라 일어나서 마당까지 선조를 배웅
했다. 마당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선조가 갑자기 휙 돌아섰다.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뚫어져라 광해군의 얼굴을 살핀 다음 낮고 굵은 어투로
다짐하듯 말했다.
"자고로 무는 나라의 화근이다. 장수가 신망을 얻으면 나라를 어지럽히게 되느
니라. 장수에게 전권을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터이나 어쩔 수 없는 경
우를 당하면 군왕은 쉬지 않고 장수를 감찰해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세자는
과인의 말을 가슴에 꼭 새기도록 하라!"
계사년(1593년) 10월 10일 오후.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거제도 가배량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작년 가을 부산
을 공격한 후 원균은 다시 가배량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산성을 보수하여 경상우
수영을 세웠다. 왜 선단이 있는 가덕도와 너무 가깝지 않느냐는 반대도 있었지
만 거제도를 지키는 것이 경상우수사의 가장 큰 임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거제도로 복영(수영을 다시 세움)한 것은 7월에 한산도로 전라좌수영을 옮긴 이
순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다.
한산도는 엄연히 경상우수영에 속하는 섬이므로 한산도에 전라좌수영을 둔다
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경상우수사인 그
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한산도로 군량미와 무기들을
옮긴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의리를 아는 장수가 할 짓인가.
원균은 이영남을 한산도로 보내 당장 여수로 되돌아가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덕도의 왜선과 맞서려면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을 좀더 가까이에 두는 것이
원수사에게도 이로울 것이니라. 좌수영을 옮겨도 좋다는 어명이 이미 내려왔으
니, 괜한 트집 잡지말라고 가서 전하라."
참다못한 원균이 경상우수영의 판옥선들을 이끌고 한산도로 달려왔다. 한산도
의 두억리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던 이순신이 정중히 원균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장군!"
원균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어들었다. 태양이
칼날에 부딪혀 푸른빛을 뿜으며 눈부시게 흩어졌다. 양손으로 칼을 세워 들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나대용과 이언량이 동시에 튀어나와 막아섰다.
"물러섯!"
이순신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명령했다. 나대용과 이언량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순신이 눈을 부릅뜨고 다시 말했다.
"물러서지 못할까!"
나대용과 이언량이 좌우로 두 걸음쯤 벌려 섰다. 이번에는 이영남이 뛰어나와
원균의 오른팔을 붙들었다. 원균은 고개를 돌려 이영남을 노려보았다. 이영남의
두 눈에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장군! 칼을 거두십시오."
"놓아라. 네가 지금 좌수사를 두둔하는 게냐?"
"장군!"
"비켜!"
원균은 이영남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속 나아갔다. 이순신은 어둠을 기다리는
황혼녘의 고목처럼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불안한 침묵이
섬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원균의 그림자가 이순신의 몸을 완전히 덮을 만큼 가까워졌다. 원균은 장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순신의 양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원균은 장검을 사선으로 쭈
욱 내리긋다가 칼날이 이순신의 목에 닿기 직전에 딱 멈추었다.
"아악!"
주위에 늘어선 장졸들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대용과 이언량이 튀어나와 원
균의 양어깨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순신의 몸이 뒤로 휘청 흔들리자 권준과 신
호가 재빨리 다가와서 부축했다. 원균은 장검을 칼집에 천천히 꽂은 다음 몸을
휙 돌렸다. 원균의 웃음은 한산도를 떠난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하하하, 하하하하핫!"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긴 지도 벌써 석 달이나 지났다.
"모두 모였습니다."
이영남이 군막을 젖히고 들어왔다. 갑옷과 투구를 차려 입은 원균이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소비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나 원균이 아니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어명으로 정한 일이오이다."
"어명? 네놈도 이순신을 닮아가는 것이냐? 말끝마다 어명, 어명 타령이구나.
남해를 불태운 것도 어명이고, 한산도로 진을 옮긴 것도 어명이고, 삼도수군통제
사가 된 것도 어명이란 말이렷다? 그러나 소비포!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이 세
상에는 어명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있어.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되
었다고 하나 결코 내게 군령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경상우수영의 장
졸들도 함부로 부리지 못해."
원균은 장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군막으로 건너갔다. 장수들이 굳은 얼굴로 자
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그가 상성에 앉자마자 기효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밤부터 한산도에서 잔치가 열린다고 하오. 삼도의 장수들은 모두 참석하
라는 통제사의 전갈이 왔소이다."
우치적이말을 이었다.
"소장도 어제 연통을 받았으나 소장은 결코 가지 않을 것이외다. 여기 계신 원
장군께서 통제사가 되셨다면 춤이라도 출 터이지만 전라좌수영의 잔치판에 들러
리를 서고 싶지는 않소."
이운룡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허나 이 역시 군령이오이다.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모두 가지 않는다면 문제
가 클 것이오. 장수의 몸으로 군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효근이 이눙룡을 향해 핏대를 세웠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수사가 원장군을 제치고 통제사가 된 것이 옳은 일이라
이 말씀이시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따질 문제가 아니오이다. 소장은 다만 군령을 지키자는
뜻을......."
우치적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군령도 내리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외다. 장수가 변변치 못한데 제대로 된
군령을 내릴 수 있겠소? 우리가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운 것은 이수사를 통제사
에 앉히기 위해서가 아니오이다. 가덕도까지 나아가는 데도 겁을 먹고 벌벌 떠
는 위인이 어찌 수군의 으뜸 장수가 될 수 있겠소. 그의 군령을 따를 수 없소이
다. 소장은 오직 원장군의 뜻에만 따르겠소."
이영남이 떨리는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우리는 원장군의 사병이 아니라 어명에 따라 군령으로 움직이는 관군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임명한 삼도수군통제사의 군령을 어기는 것은 곧 어명을 따
르지 않는 것과 같소이다. 그러므로 일단은 모두 한산도로 가서 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수사를 축하하고 앞으로의 일을 함게 논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기효근이 박달나무 탁자를 건너뛰어 이영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한산도로 가서 축하를 하라니. 불을 싸
질러도 시원찮을 판에 꽃다발을 안겨주자는 말인가? 그러고도 네가 경상우수영
의 장수냐? 의리 없는 새끼! 이순신의 개!"
기효근의 주먹이 이영남의 오른쪽 눈두덩이를 강타했다. 이영남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널브러졌다. 이운룡이 황급히 다가와서 이영남을 일으켜 세웠다.
"다들 앉으시오!"
원균이 눈을 내리깐 채 장수들을 진정시켰다. 기효근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이영남을 쏘아보며 씩씩거렸다.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른 이영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비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오. 장수가 어명을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허나 우리는 그 동안 천 리나 떨어진 평안도에서 내려오는 여러 유서와 교지들
이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란 걸 경험했소. 어제 도착한 어명 역시 올바르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오. 기현령이나 우만호의 지적대로 조정은 경상우수영의 전공
을 너무나도 무시하고 있소. 물론 그것도 다 경상우수사인 나 원균의 무능함 때
문이오. 장수들의 전공을 챙겨 조정에 아뢰는 것보다도 왜적을 한 놈이라도 더
베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나의 잘못이 크고. 진심으로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낯
이 없구려. 허나 앞으로도 나 원균은 전공과 벼슬 자리를 탐하기보다는 왜적을
무찌르는 데 힘을 쏟을 것이오. 나라를 잃는다면 벼슬도 전공도 한갓 물거품이
라오. 그대들도 계속해서 나 원균을 믿고 따라주길 바라오. 누가 뭐래도 우리 경
상우수영의 장졸들은 삼도 수군의 으뜸이라오. 한산도로 가고 싶은 장수는 다녀
오도록 하시오. 나는 가지 않겠으나 가려는 사람까지 붙들지는 않겠소. 다만 가
더라도 경상우수영의 장수로서 품위를 지켜주기 바라오. 자, 오늘 회의는 이것으
로 마치겠소."
원균은 휭하니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버렸다. 기효근과 우치적을 비롯한 대
부분의 장수들은 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통을 지고 뒷산으로 향했다. 군막
에 남은 사람은 이운룡과 이영남뿐이었다. 이운룡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의원에게 보여야 하지 않겠소?"
"괜찮습니다. 이까짓 일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요."
"그럼...... 서두르도록 합시다. 해가 지기 전에 한산도에 닿으려면 시간이 없
소."
두 사람은 경쾌선에 몸을 실었다. 순풍을 만난 배는 돌고래보다도 빠르게 전
진했다. 고물에 선 이운룡이 차츰차츰 멀어져가는 가배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수사는 이수사에게 굽히지 않을 것이오."
"소장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허나 비변사의 이번 결정은 잘한 일이오. 만약 원수사가 통제사에 올랐다면
이수사는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오. 군령을 어겼을 것이
다 이 말씀이외다. 그런 일이 닥친다면 원수사가 군령을 앞세워 이수사를 베어
버릴 수도 있고."
"원수사가 이수사를요?"
"허나 이수사는 그렇게까지 원수사를 잡으려들지는 않을 것이오. 마찰은 있겠
으나 당분간 조선 수군은 원수사의 칼과 이수사의 방패로 그럭저럭 버텨나갈 게
요."
"하오나 소장은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난동이라도 피울까 걱정이오이다."
이운룡이 이영남을 바라보며 웃었다.
"허허, 난동까지야....... 이수사도 알아서 몸조심을 하겠지. 왜선의 움직임까지
미리미리 헤아리는 위인이니 원수사나 경상우수영 장수들의 마음쯤은 손바닥 보
듯 할 것이오. 부득이 마찰이 생긴다면 소비포와 내가 말려야만 해요. 어차피 칼
자루를 쥔 쪽은 이수사니까. 이제부턴 더욱더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에게 힘이 붙
을 것이오. 군량미도 더 많이 쌓이고 장졸들의 벼슬도 오르고."
"이만호는 이수사의 군령을 따를 작정이십니까?"
"경상우수영이 단독으로 벌이는 전투라면 당연히 원수사의 뜻에 따라야 하겠
지. 허나 연합함대의 전투라면 이수사의 군령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오. 이제 누
가 주장이고 누가 부장인지가 분명히 정해졌으니까. 그러나 이런 걱정도 머지않
아 사라질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다고 했소. 풀 위로 바람이 불
면, 풀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쓸리게 마련이지. 허나 원수사는 결코 이수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 결국 이수사는 원수사를 멀리 두려 할 것이오."
"내쫓는다 이 말씀입니까?"
"소비포도 생각을 해보구려. 군령에 따르지 않고 분란만 조장하는 장수, 나이
로 보나 명상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모두 자기보다 위인 장수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이수사가 아니지 않소? 이수사는 반드시 원수사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킨
다음 자신의 수족을 경상우수사로 앉히려들 게요. 길어야 일 년, 어쩌면 그보다
도 더 빨리 경상우수사가 바뀔게 분명하오. 허허,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시오.
이것이 세상 사는 이치가 아니겠소?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시구려. 만약 원수사
가 통제사에 올랐다면 이수사를 좌수사에 그냥 두었겠소?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한 집안에 두 지아비가 있을 수 없듯이, 한 군대에 으뜸 장수가
둘일 수는 없는 일이라오."
"하오나 원수사는 조선 수군의 중심이오이다."
"허허허! 이제는 그 중심도 좌수영으로 넘어갔소. 삼도수군통제사가 조선 수군
의 중심이라오. 원수사가 상황을 너무 낙관했던 것이 화근이었소. 장계를 겨우
네 번밖에, 그것도 소략하게 올려서는 아니될 일이었다오. 이수사가 통제사가 오
른 데는 좌수영의 전공을 꼼꼼하게 적어올린 그의 장계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
을 것이오. 생각해보시오. 비변사의 대신들은 결국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올린 장계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을 테고, 아무리 원수사의 공이 크다고 하더라
도 그 자리에서는 이수사의 장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오. 원수사가 이수사의
반에 반만큼만 정치에 밝았더라면 이렇게 당하지만은 않았겠지. 허나 이미 지나
간 일을 어찌하겠소. 조선 수군을 지휘할 장수는 용맹함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하오이다. 그래야지 만 사흘이 멀다 않고 내려오는 어명에 적
절히 대처할 것이 아니겠소? 이수사가 갖지 못한 미덕을 원수사가 가진 것도 사
실이지만, 원수사에게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장점들이 이수사에게 있다오. 그
것이 체질적인 것이든 서책을 통해 획득된 것이든, 지금은 원수사처럼 우직한
장수보다 이수사처럼 사리분별이 빠른 장수가 필요하다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
오."
용맹함과 정치력을 동시에 갖춘 장수!
이영남은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오른쪽 눈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붉게 타오
르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거제도의 하늘에는 벌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경쾌선 한산도로 접근하자 협선 두 척이 재빨리 다가왔다. 이물에 서 있던 나
대용이 환하게 웃으며 깃발을 흔들었고 이영남도 왼손을 들어 화답했다. 눈두덩
이가 흉측하게 부어오른 채 통제사를 만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산도에는 이미 많은 장수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감축드리옵니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어 예의를 갖추었다. 이순신이 버선발로 뛰어 나와 그들
을 일으켜 세웠다.
"어서 오시오, 이만호! 이권관! 그렇지 않아도 그대들이 오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다오. 자. 어서 오르십시다."
이순신의 손에 이끌린 그들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한 주안상 앞에 자
리를 잡고 앉았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하여 순천부사 권준, 방답첨사 이순
신, 낙안군수 신호, 광양현감 어영담, 사도첨사 김완 등 전라좌우수영의 장수들
이 모두 거나하게 술에취해 있었다. 이운룡이 거듭 축하의 말을 건넸다.
"감축드리옵니다, 통제사 어른! 앞으로도 조선 수군을 연전연승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이순신이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이 이만호의 도움에 힘입음이오. 자, 오늘은 마음껏 취하도록 하세
요. 술과 안주는 얼마든지 있소이다."
이순신은 원균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경상우수영에서는 이운룡과 이영남 정
도가 참석하리라고 미리 짐작했던 것이다. 이운룡에게 술을 권하고 이영남에게
잔을 건네던 이순신의 음성이 갑자기 커졌다.
"그 상처는 무엇이오?"
이영남은 얼른 오른쪽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
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운룡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낙전을 하는 통에 양냥고자(활의 맨 끝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가 눈 밑
을 찔렀습지요."
"저런! 조심하지 않고."
이순신은 상처 입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혀를 쯧쯧 찼다.
"그렇다면 오늘 이권관은 술을 하지 마시오.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겠
소?"
이순신은 이영남에게 내밀었던 술잔을 거두었다. 오른편에 앉은 이억기가 이
운룡에게 물었다.
"원수사께서는 아니 오시오?"
갑자기 침묵이 찾아들었다. 질문을 던진 이억기도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헛헛 헛기침을 했다. 이운룡이 흔들림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원수사께서는 몸이 불편하셔서 오시기 어려울 듯합니다."
"저런! 어디가 크게 아프시오?"
이억기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아니옵니다. 가벼운 감환인데, 미열이 오르내리는 통에 판옥선에 오르기가 힘
드신 것 같습니다. 소장에게 대신 축하하는 마음을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사
옵니다."
이순신이 밝은 음성으로 화답했다.
"고마운 일이오. 내 곧 시간을 내서 찾아가 뵙겠다고 전해주시오. 내가 이 자
리에 오르게 된 데는 원수사의 도움이 가장 컸어요. 내 그 신세를 꼭 갚을 것이
오. 자, 이렇게 조선 수군의 명장들이 다 모였으니 앞으로 수군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그에 앞서 그 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몇몇 방안들을 밝히기로 하지요. 권부사!"
이순신의 호명을 받은 권준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순
신의 강요에 못 이겨 입에도 대지 못하던 술을 두 잔이나 연거푸 마셔서인지,
그의 양볼이 부끄러움을 타는 동자승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
는 여전히 낭랑했고 이야기의 맺고 끊음에는 빈틈이 없었다.
"부산까지 후퇴한 왜군은 경상도의 전 해안에 왜성을 쌓으며 장기전에 대비하
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부산에 웅거한 적을 궤멸시킬 만한 힘이 없어요.
삼도 수군도 장기전에 대비하여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선 저 언덕 위
에 삼도의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군중회의를 할 수 있도록 운주당을 지을 것
입니다. 언제든지 전황을 숙지하고 전략을 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이지요.
또한 둔전을 광범위하게 경작할 계획입니다. 부상병이나 노병들을 중심으로 해
안의 백성들과 함께 밭을 일구고 곡물을 거두어 군량미를 비축하기 위함이지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전투를 치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장사치들이 드나
드는 뱃길과 장터를 중심으로 세금을 거둘까 합니다. 다소 반발을 있겠으나 부
족한 무기들을 보충하고 석유황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요. 마지막으
로 무과를 치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나랏님의 허락이 내려야 하는 일이
지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장수들을 선발하는 길이 막혔
습니다. 수군만 하더라도 군사들을 이끌 젊은 장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
에요. 한양에서 과거를 치를 수 없다면 여기서라도 조선 수군을 이끌어갈 인재
들을 선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억기가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대단하십니다. 수군통제사에 오를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그렇
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듯 치밀한 준비를 하실 수 있소이까? 허허허, 이제부터
조선 수군은 통제사의 주도면밀하고 탁월한 준비로 말미암아 강병 중의 강병이
되겠소이다."
이운룡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 모두를 통제영에서 도맡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소이까? 자칫 전투는
하지 않고 곡물과 돈만 챙긴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장사치들에
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장수가 할 일이 아닌 듯 합니다만......."
권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이다. 이만호 말씀대로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니지요. 허나 이미 각 고을
의 수령들은 신망을 잃었고, 조정도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보살필 여력이 없어
요. 결국 조선 수군이라도 먼저 나서서 하삼도의 백성을 살피는 도리밖에 없습
니다. 전투란 장졸들의 힘만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지요. 백성들의 후원이 없다면
장졸들은 곧 지치고 말아요. 장기전에서는 민심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에 합당한 요구를 해야지요. 월권이라...... 그렇습니
다, 월권이겠지요. 허나 지금은 그 정도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삼도
수군통제사란 직책도 현재의 전황 때문에 새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통제
사의 역할이나 권한 또한 기존의 수사와는 크게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는 굶고
병들고 지쳐가는 경상우수영의 장졸들을 배불리 먹여야 합니다. 그럴려면 앞서
말씀드린 일들이 먼저 시행되어야지요. 이것은 월권이 아니라 조선 수군의 생존
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자구책입니다."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은 이미 합의가 된 듯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빠른 시일 안에 부산을 치기보다는 현재의 전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력을 극
대화시킬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의 무거운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관기들이 풍악을 울리며 등장하자
모든 걱정근심은 춤사위에 파묻혀 어지럽게 흐트러져갔다. 나대용과 이언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고, 배흥립과 김완은 기생들의 치맛자
락에 얼굴을 파묻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순신은 장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술을
권하며 대취했다. 혀가 점점 말려들더니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해 주안상 위
로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그때마다 장수들은 박수를 쳐댔고 이순신도 껄껄껄 웃
으며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승자만이 누리는 기쁨이었다.
이영남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만취해가는 장수들의 면면
을 살폈다. 지금쯤 원수사는 군막에 홀로 남아 한 잔 술로 울분을 달래고 있으
리라. 어쩌면 끝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여 장검을 빼어든 채 대숲으로 갔을지
도 모른다. 온몸의 기운을 모아 장검을 휘두르며 오늘의 패배를 곱씹을지도 모
른다. 통제사의 저 거동을 보라. 임진년에 대승을 거두었을 때도 저렇게까지 기
뻐하지는 않았다.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보다 원수사와의 쟁공에서 승리한
기쁨이 더 크단 말인가.
술판은 동이 터올 무렵에야 끝이 났다.
장수들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을 청했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느라 지친
관기들도 하나둘씩 기방으로 물러갔다. 이영남 역시 대청마루에 모로 누워 풋잠
이 들었다. 추위를 참으며 잠에 빠져드는 그이 어깨를 누군가가 흔들었다. 어느
새 새 갑옷으로 갈아입은 이순신이었다.
"산책이나 갈까?"
먼저 방향을 잡고 성큼성큼 앞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단정하고 힘이 넘쳤다.
지난밤 만취했던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영남은 아직 부기가 빠지
지 않은 오른쪽 눈을 쓸면서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언덕 위에 나란히 서서 넓게 펼쳐진 새벽 바다를 바라보았다. 공기 중
에 흩날리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얼굴을 훑고 지나쳤으며 초겨울의 서늘한 기운
이 온몸을 휘감았다.
"낙전 때문이 아니지?"
이순신이 반말로 물었다. 이영남은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갈매기들
이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떼지어 오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말게. 이제부터 내가 자네를 지키겠어. 누구도 자넬 함부로 대하지 못하
게 하겠네."
이순신의 시선은 날아오르는 갈매기떼를 쫓았다.
"장군! 소, 소장은 경상우수영의 장수오이다."
이영남이 말을 더듬었다.
"이제부턴 아닐세. 자넨 오늘부터 삼도수군통제영의 장수야....... 나도 자네처럼
당했던 적이 있었지. 그때는...... 무척이나 사람이 그리웠다네. 내 마음을 이해할
사람 말일세. 허나 그때 내 곁엔 아무도 없었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
더군. 내 눈앞에 절망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이는 거야....... 징그러운 삶의 흉터
들이 집채만한 바위로 확대되기도 하고, 한 걸음 세상을 향해 내디딜 때마다 땅
이 푹푹 꺼지는 거야.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밤들!
그런 밤을 아는가? 세상의 웅얼거림이 끝도 없이 귓바퀴 속으로 들이치는 거야.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기도 하고, 주먹으로 명치 끝을 쾅쾅 치면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지.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
기도는 사실, 천지신명께 올리는 기도가 아냐. 완전히 까무러치는 것이 두려워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마지막 썩은 동아줄 같은 거지. 이렇게라도 지껄이지 않
으면 살아있을 자신이 없는...... 그런 순간을 자넨 아는가? 허허허, 아무런 염려
말게. 이젠 내가 자네 곁에 있겠네. 저 갈매기떼 보이나? 자네도 저렇듯 높이 올
라가야 하네."
이영남의 눈시울이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해처럼 붉게 물들었다.
"장군! 원수사와 화해하십시오."
이순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 봉우리가 하나 있었지. 그 봉우리를 넘기 위해 십칠 년 동안이나 온
갖 노력을 다했다네. 그리고 마침내 그 봉우리를 넘었네. 그런데 내가 그 봉우리
를 넘자마자 방금 넘은 봉우리보다 더 크게 거대한 봉우리가 앞을 막고 있었어.
그리고 그 봉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도 넘은 사람이 없다는군. 사람뿐만이 아니라
저렇게 높이 날아오르는 갈매기도 그 봉우리를 넘지 못해. 나는, 나는 말일세......
확신이 서지 않네. 내가 과연 저 봉우리를 넘을 수 있을까?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봉우릴 넘을 수 있을까? ......원수사는 이제 날 넘어야 할 거야, 예전에 내
가 그랬던 것처럼. 후후, 인생이란 이렇듯 돌고 도는 게지. 허나, 허나 나는 그가
날 밟고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네. 그가 나를 넘는다면 나는 다시 십칠 년
전으로 돌아가고 마는 거야. 허나 내겐 새롭게 십칠 년을 시작할 여력이 없네.
그땐 정말 절망할 수밖에 없어. 화해라고 했는가? 후후후후, 화해라...... 참 좋은
말일세. 그러나 말이야 화해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지. 자넨
우리네 인생에서 화해란 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서로가 서로를 밟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야. 나도 원수사도 그걸 너무나 잘 알지. 엄살이나 피
울 나이가 아니란 것도, 서로 마주 보며 웃을 때가 아니란 것도. 그렇게 흘러가
는 거야. 한 번 지나간 강물이 다시 찾아오지 않듯이 우리의 만남도 다툼도 비
웃음도 시기도 질투도 끝까지 가는 거야. 둘 중 하나의 목숨이 다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말일세."
이영남은 끝 간 곳을 모르는 이순신의 절망을, 그에게서 뿜어 나오는 삶의 쓰
라림을 더듬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어두컴컴한 동굴에 홀로 갇혀 있던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한 줄기 작은 빛이었다. 이영남은 문득 자신의 몸 속에도 무수한
빛망울들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봉우리를 넘은 거인의 크고 넓고 따뜻한 손
이 매서운 비바람으로부터 그 빛망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동쪽 바다 끝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지금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3. 마리아와 아우구스티노
조선이 조공을 바치는 중국인들도 조선에 대한 식견이 별로 없어 보이며, 중
국의 광대한 제국을 기술한 책자는 매우 많지만 조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학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조선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조선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섬이라고 하였다. 잔, 후고, 링소펜과 윌리엄, 블로의
지도에도 나타나듯이, 오랫동안 이 근해를 왕래한 화란인들마저 해도에다 조선
을 섬으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이 오식은 상당히 오래 갔다. 캘리포니아에 관해
서도 똑같은 오해가 생겼다가 후에야 북미와 연결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듯이 조
선도 나중에야 중국과 동만주에 접경한 반도임이 밝혀졌다.
[16-17세기 조선 천주교에 관한 보고]
계사년(1593년) 12월 10일 오후.
겨울비가 흩날린 어젯밤부터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반도로 건너와
서 두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평양성의 겨울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살을 에는
바닷바람과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는 왜군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
다. 몸이 성한 군사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느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분주
하게 돌아다녔다.
겨울은 부상당한 군사들에게 더욱 혹독한 계절이었다.
평양에서 부산까지 후퇴하는 동안 많은 부상병들이 버려졌다. 홀로 남는 것이
두려워 할복하는 군사들도 있었고, 함께 데려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군사들
도 있었다. 부산에만 도착하면 귀국선에 오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조금
이라도 발을 뗄 수 있는 군사들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그러나 부산에 내려와서
여름과 가을을 보냈는데도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오면 모두 할복시
키겠다고 풍신수길이 노발대발했다는 풍문만이 들려왔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더
많은 부상병들이 죽어갔다. 변변한 약첩도, 꽁꽁 얼어 터진 몸뚱아리를 편히 누
일 침상도 없었다. 허기진 채 낯선 이국의 하늘을 우러러보다 생을 접은 전우의
시체들을 구덩이 속으로 한꺼번에 밀어넣는 것이 남아 있는 군사들의 중요한 하
루 일과였다.
이런 와중에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군사들은 그야말로 천행이 아닐 수 없었
다. 왜장 소서행장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삼백 여명의 부상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막사를 짓게 했다. 부상병들을 간호할 군사들이 차출되었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 의원들에게 임시로 치료를 맡겼다. 그리고 11월 15일, 본국에서 부상병들
을 치료할 의원들이 도착했다. 그중에는 파란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이방인도
끼여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세스페데스였고, 그와 동행한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중늙은이는 에이온이라고 불렸다. 왜인이 에이온이라고 불리는데 대해
몇몇 장수들이 의심을 품었지만, 소서행장의 묵인이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
었다.
세스페데스는 외출할 때 항상 삿갓을 깊게 눌러 썼다. 이방의 얼굴을 사람들
에게 내보이는 것이 어색했던 탓이다. 그가 군막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하는
일은 머리를 찍어 누르는 삿갓을 벗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
골 맺힌 땀을 닦아낸 후 흘러내린 모리카락을 추스렸다.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
해졌고 움푹 패인 파란 눈이 슬퍼 보였다.
에이온이 따라 들어왔다. 세스페데스이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기에 에이온은
주위의 인기척을 살핀 후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우구스티노가 뭐라던가요?"
아우그스티노는 소서행장의 세례명이었다. 소서행장은 십여 년 전부터 천주교
를 믿기 시작했으며, 부모 역시 입교시켜서 요아킴,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게
했다. 세스페데스가 능숙한 왜말로 대답했다.
"부상병들에게 줄 양식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가등청정은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군막을 아예 걷어버리자고 한다는군요. 군사들의 사기진작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그 이유랍니다. 병들고 다친 양떼들을 모두 굶겨 죽일 작정이지요. 오 천주
여!"
세스페데스는 로마 교황청이 왜국에 파견한 선교사였다. 소서행장의 믿음이
깊어진 것도 세스페데스 신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풍신수길이 천주교
를 탄압하기 시작한 후 세스페데스는 선교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서양 의사 행세
를 하며 돌아다녔다. 조선으로 들어오라는 소서행장의 초대를 받았을 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천주님의 뜻이라 믿고 신도회 회장 에이온과 함께 배에 올랐던 것
이다. 부산에서 만난 소서행장은 자신의 신세가 길 잃은 어린 양과 같음을 고백
하면서 올바른 길, 구원의 길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세스페데스는 당분간 서양
의사 행세를 하면서 전황을 살펴 천주님의 뜻을 소서행장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귀국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더 이상 승산이 없지 않습니까?"
에이온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이 장사치들로부터
서양 그림을 싼값에 구입하여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먹는 중간상
인이었다. 그가 이번에 조선으로 나온 것도 조선에 널려 있는 값비싼 서책과 도
자기들을 본국으로 가져가서 장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함경도와 평안도
까지 전진했던 군사들이 부산으로 썰물처럼 후퇴하기 시작하자 팔도를 돌며 물
건들을 챙기려는 그의 계획도 난관에 봉착했다. 이제 그는 피비린내 나는 이곳
을 하루라도 빨리 떠날 마음뿐이었다.
"귀국하라는 명령이내리기 전까지는 꼼짝할 수 없겠지요. 섣불리 돌아갈 뜻을
비쳤다가는 패전의 책임이 몽땅 아우구스티노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건 그렇
고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십여 명의 조선인 포로들이 미사에 참석하겠답니다. 이제 조선에서도 천주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신부님?"
"어허!"
세스페데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에이온에게 자신이 신부라는 사실을 끝
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다. 만약 소서행장의 군대에 신부가 있다
는 사실이 풍신수길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왜국의 천주교는 철퇴를 맞을
것이다. 에이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헤헤헤!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나서......."
"어떻게 그들로부터 미사에 참석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냈습니까? 조선인들은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마리의 도움이 컸지요. 그녀의 극진한 기도를 올려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갉
아먹는 병마들을 물리쳤더니 그들의 마음이 돌아선 게지요."
"호오, 그래요? 역시 마리아는 천주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것이 틀림없습니
다. 그녀의 착하디 착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이 나라에 천주
님의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천주여, 감사하옵니다!"
세스페데스는 눈을 감고 마리아를 처음 만났던 웅포의 산세를 그렸다. 어머니
의 젖가슴처럼 바다를 따라 유연하게 뻗은 굴곡들이 떠올랐다.
9월 5일, 세스페데스는 부산을 출발해서 거제도로 가던 중 웅포에서 잠시 짐
을 풀었다. 거제도에 진을 친 대마도주 종의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세
스페데스는 그곳에 가서 천주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이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수군을 만나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소서행장이 극
구 말렸으나, 그는 모든 것이 천주의 뜻이라며 거제도행을 고집했었다. 웅포에
도착하자마자 왜군 백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양식과 땔나무를 구하고 숨어 있
던 조선인들을 붙잡아 왔다. 군사들 대부분이 소서행장 휘하에서 천주교를 배웠
기에 결코 살생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세스페데스의 권고를 충실히 따랐다. 서른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끌려나왔다. 그들은 죽음에의 공포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세스페데스는 우선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천주여! 저 불쌍한 어린 양들을 품으소서.
그러나 자신의 서툰 왜말을 조선말로 옮겨줄 사람이 없었다. 조선인 포로들은
세스페데스의 흰 피부와 파란 눈동자를 흉측한 도깨비 보듯 힐끔힐끔 훔쳐볼 뿐
이었다. 그때 바싹 야위고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본말
을 또박또박 정확하게 구사했다.
"신뿌! 오테즈타이시마쇼까?"(신부님! 도와드릴까요?)
세스페데스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니홍고가 와카리마스까?"(일본말을 아시오?)
그녀는 대답 대신 손 안에 감추었던 묵주를 꺼내들었다.
"뎐슈사마노 꼬데스네. 센레이와 우케마시타? 센레이묘와 나니?"(천주님의 자
녀군요. 세례는 받았소? 세례명은 무엇이오?)
"마리아데스."(마리아예요.)
마리아의 도움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세스페데스
를 따라서 거제도로 갔다가 부산으로 왔다. 대마도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 전
쟁 직전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는 것, 전라도에 잠시 머무르다가 난을 피해 떠
돌기 시작했다는 것 외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세스페
데스는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부터 마리아는 세스페데스를 도와 부상병들을 돌보고 천주의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특히 그녀는 조선인들에게까지도 천주의 뜻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
다.
세스페데스와 에이온은 묵상 기도를 시작했다. 하루에 적어도 세번씩은 조선
에 복음을 무사히 전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밖에서 인기척
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재빨리 손바닥만한 성경을 소맷자락에 감추었다.
"누구시오?"
웃을 때마다 윗입술 밑으로 덧니가 삐져나오고 짙은 눈썹에 뱁새눈을 가진 사
내가 군막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헤헤? 절 모르시겠어요? 요시랍니다. 이거 서운한뎁쇼. 대마
도에서 여기까지 길 안내를 했지 않습니까?"
요시라는 소서행장이 세스페데스를 위해 특별히 대마도까지 마중을 보낸 사내
였다. 그는 소서행장의 사위이자 대마도의 도주인 종의지가 가장 아끼는 장수였
다. 볼품없는 생김새와는 달리 기억력이 비상하고 다급한 전황에서 전술을 짜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간자들을 조선 팔도에 풀어 지도를 작성한 실질
적인 책임자도 요시라였다. 에이온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기억나고말고요.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바람이 찹니다."
"그럴까요, 그럼."
요시라는 능글맞게 웃으며 군막으로 들어섰다. 귓불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세
스페데스가 온호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종의지 장군과 함께 거제도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전령으로 왔습죠."
세스페데스는 요시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 때나 히죽히죽 웃는 것이나
뱁새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꼭 상대방의 마음을 훔쳐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온이 물었다.
"조선 수군의 동태는 어떠한지요?"
요시라가 양손을 비비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겨울인데 함부로 군선을 움직이겠습니까? 싸워도 거제에서 싸울테니까 염려
푹 놓으십쇼. 그나저나 어디로 가면 박초희를 만날 수 있는지요?"
세스페데스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박초희는 왜 찾으십니까?"
요시라가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녀는 원리 우리 대마도 사람입죠. 곧 거제에서 대
마도로 출항하는 배가 있는데, 종장군께서는 그 배에 박초희를 태울 생각이신가
봅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녀를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만."
세스페데스와 에이온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그녀
를 보낼 수는 없어. 에이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그녀를 데려갈 수 없소이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요시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히히힛, 알겠습니다요, 벌써 대장군의 여자가 된 모양입죠? 허나 그녀를 조심
하는 편이 좋을 겝니다."
"말조심하시오."
세스페데스가 화를 버럭 냈다. 꽃같이 순결한 그녀를 창부처럼 천하게 여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잊지 마십쇼. 사화동을 죽음의 땅으로 밀어넣은 것은 바로 우리들이란 말입니
다. 박초희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다시 배신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여자가 남편의 복수를 꿈꾸고 있는지 누가 압니까? 그녀를 속히
우리에게 넘기십쇼. 그녀처럼 복잡한 여자가 부산에 있는 것은 어쨌든지 우리에
게 손해일 테니까요.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십쇼. 우린 그녀를 대마도로 데려가
려는 것뿐이니까요. 이래봬도 사화동과 난 대마도에서 꽤 친하게 지냈습죠. 친구
의 아내를 제가 도와야지 누가 거두겠습니까. 히히힛."
요시라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거제도로 돌아갔다.
세스페데스는 요시라가 전한 박초희, 아니 마리아의 지난날을 상상했다. 조선
과 일본을 넘나들며 살의 치욕을 모두 맛본 여인. 그 엄청난 상처들을 천주의
품에서 씻어내려는 여인. 그녀를 결단코 요시라 같은 놈에게 보낼 수는 없어.
"마리아를 데려오세요. 부상병들을 돌보고 있을 겁니다."
에이온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세스페데스는 옷소매에 감추었
던 검붉은 성경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 책을 꼭 감쌌다.
아우구스티노!
소서행장의 넓은 이마와 오뚝한 콧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전 내내 그와 나
눈 대화들이 귓전을 어지럽혔다.
"이건 성전이 아니에요. 한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전쟁은 속히 끝내
야 합니다."
소서행장은 세스페데스의 얼굴을 뚦어지게 쳐다보았다.
"저는 한 나라의 대장군입니다. 물론 저도 더 이상 무익한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허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이 년 동안 조선에서 우리
군사들이 뿌린 피의 대가는 받아야 합니다. 최소한 반도의 절반만이라도 우리가
차지해야지요."
"조선이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겠지요. 조선은 오랫동안 명나라의 속국이었습니다. 명
나라의 말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명나라는 우리가 계속 조선과
전쟁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조선반도를 차지한 후 요동을 치는 것
이 두렵기 때문이지요. 저는 우리가 충분한 이득을 취하면서 강화를 맺을 수 있
다고 봅니다."
"조선을 배제하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조선은 결코 우리에게 땅덩어리를 떼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명나
라와 협상을 끝낸 후 명나라는 명나라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저는 그 일을 성사시키려고 평양에서 이곳까지 철군한 것입
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명나라도 마땅히 보응을 하겠지요."
"장군의 의도대로 강화가 성사되면 귀국에서는 장군을 어찌할 것 같습니까?"
소서행장이 시선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 그도 그것이 걱정이었다.
"태합전하께서는 사분오열되었던 우리나라를 통일시킨 분이십니다. 그 누구보
다 전황에 밝으신 분이지요. 아마도 지금쯤이면 조명연합군과 정면으로 맞서서
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허나 조선의 반을 차지하고 전쟁을 끝
냈다고 해도 태합전하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겠지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원
나라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노라고 만백성과 약속을 하시지 않으셨습니
까? 전하께서는 누구보다도 체면을 중히 여기십니다. 아마도 전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기 위해 제가 할복을 할지도 모르지요."
"아우구스티노! 자살은 교리에 위배됩니다."
소서행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만은 피해야지요.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요즘 들어 딸아이의 얼굴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종의지와 결혼한 그의 딸 마리아는 대마도에서 애타게 아버지와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고 있었다. 소서행장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여수에서 이곳까지 걸어왔다는...... 사회동의 아내......."
"마리아 말씀이군요."
"그래요, 마리아! 그녀는 요즈음 어떻게 지냅니까?"
"천주님의 품에서 평안을 찾고 있습니다. 부상당한 군사들을 돌보며 천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장군의 따님과 세례명이 같군요."
소서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세스페데스는 소서행장이 박초희를 각별
히 배려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박초희를 볼 때마다 대마도에 있는 딸 생각이 났
던 것이다.
"신부님께서 책임지고 잘 보살펴주십시오. 어쨌든 그녀는 조선인 최초의 신도
니까요."
소서행장은 왜국의 장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맹장이었다. 그런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은 세스페데스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에게 큰 힘이 되
었다. 소서행장이 조선을 정벌하러 갈 때, 세스페데스는 소서행장이 천주교를 버
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 직접 만나보니 그의 신앙은 더
욱 크고 단단하게 자라 있었다. 참으로 천주님의 크나큰 역사하심이 아닐 수 없
었다.
"접니다."
에이온이 군막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들어오게."
성경책을 다시 옷소매에 감추고 고쳐 앉았다. 에이온을 뒤따라 핼쑥한 얼굴의
박초희가 들어왔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천 조각으로 얼기설기 기워 입은 옷에
는 검붉은 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군사들과 고통을 함
께 나눈 결과였다. 매일매일 죽어가는 군사들을 밤을 새워 간호하느라 그녀의
얼굴은 어둠기 그지없었다. 눈 밑의 검은 기미와 부르튼 입술은 그녀 역시 굶주
림에 지쳤음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세스페데스가 품속에서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을 내밀었다. 오전에 소서행장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박초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리아! 어서 먹어요. 마리아가 건강해야 군사들도 천주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것이 아니오? 천주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어서어서 받아요. 이 빵은 아우구
스티노가 직접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겁니다."
"대장군께서?"
에이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초희는 퀭한 눈을 끔벅이며 세스페데스를 바
라보았다.
"언제쯤...... 이 전쟁이...... 끝날까요?"
세스페데스는 조금 전에 요시라가 찾아왔던 사실을 숨겼다.
그녀는 아직 부산에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조선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
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우구스티노가 노력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이곳에서 부상
병들을 돌보고 가여운 조선인들에게 천주님의 말씀을 전하다보면 전쟁도 곧 끝
나겠지요. 자, 어서 이 빵을 받아요. 끝까지 거절하면 화를 낼 겁니다."
박초희가 하는 수 없이 빵을 받아 쥐었다.
"그게 언제죠?"
세스페데스가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곧 그날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 이 전쟁으로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을 위
해 기도드리도록 합시다. 그건 그렇고, 미사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조선인들을
전도했다고 전해들었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허억, 헉!"
갑자기 박초희가 딱딱한 빵을 삼키다가 헛구역질을 해댔다. 사흘만에 처음으
로 음식물이 들어가니 위장이 놀란 것이다. 박초희는 눈물을 찔끔찔끔 흘린 후
세스페데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되물었다.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으셨나요? 글쎄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
겠어요. 조선인 포로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들도 아는 거
죠. 이제...... 다시는 과거의 그 땅, 그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
러니까 그들의 고민은 똑같아요. 이곳에서 죽을까, 왜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될까
늘 걱정하고 있죠."
"참으로 천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군요."
세스페데스의 얼굴에 조금 감격하는 빛이 맴돌았다. 박초희가 고개를 숙인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요......, 그냥 그대로 절망하는 것보다는 천주님께 매달리는 편이 낫죠. 그
들은 이미 조선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왜군에게 몸과 마음을 더럽힌 그
들을 누가 받아주겠어요. ......그들은 결국 이곳에서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왜국
으로 건너가서 새 삶을 시작할 수 밖에 없답니다. 천주님께서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과거에 대한 미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해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겠죠?"
세스페데스가 흔쾌히 대답했다.
"오, 마리아!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 오늘부
터 철야 기도를 하겠어요. 천주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 다같
이 감사의 기도를 올립시다."
박초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낯선 이방의 신부가 뱉어내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구원, 평안, 아버지의 나라, 희망, 축복. 참으로 아름다운 말
들이 그의 기도 속에서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낯설기 그지없는 단
어들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여수에 있을
때보다 훨씬 춥고 허기가 졌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편안했다. 그녀에게 왜
놈의 앞잡이라고 손가락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녀가 아들을 죽인 죄인임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부상병들을 지켜보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다.
조선군이든 왜군이든,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는 모두 어머니와 가족을 그
리워했다. 그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남편
을 그리워하고 자식을 아낀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
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운명에 처한 수많은 조선인들을 만났다.
팔도에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이미 조선을 위해 자결하기보다는 가족을 위
해,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삶을 이어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다
가가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내
가 조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예의범절을 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죽음보다 삶에 더 집착했던 것뿐이다. 눈부시고 의로운 죽음보다
어둡고 칙칙한 삶을 선택한 대가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삶을 향한 갈망은 죽음의 충동을 누르게 마련이다.
세스페데스를 만난 후 그녀는 자신의 깨달음을 천주님의 가르침으로 용해시켰
다. 힘이 들 때마다 그녀와 생사고락을 함게 한 묵주를 쥐고 기도했다.
천주여!
비천한 저의 영육을 당신께 맡깁니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헐벗은 자들의
육신을 덮는 옷이 되게 하시고, 배고픈 자들의 배를 채우는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시고, 병든 자들의 아픔을 잊게 하는 약첩이 되게 하소서. 이 전쟁에서 상처받
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돌보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미움을 지우고 사랑
만 충만하게 하소서. 천주의 뜻이 조선의 산하를 가득 덮게 하시고, 이 땅의 백
성들이 천주의 넓은 품안에서 위로받고 새 삶을 꾸리도록 도우소서.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천주의 평안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뜻이 이 작은 묵주에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천주의 가르침대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보살피며 살아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스페데스 신부의 말처럼 지금 그녀에게 맡겨진 달란트였다.
계사년(1593년) 12월 16일 저녁.
왜군이 부산으로 물러갔다는 소식을 접한 피난민들은 너도나도 고향으로 밀려
들었다. 아직까지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간간이 교전이 벌어졌으나 피난민들의
발길은 벌써 공주까지 닿았다. 지난달에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공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순무하면서 군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이 맡겨졌다. 선조는 이참에 아예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노라며 또
다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으나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대신 광해군
이 하삼도의 전투를 책임지고, 선조는 한양에서 전쟁을 총괄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광해군이 공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접한 피난민들은 너도나도 남행
을 결정했다. 추운 겨울을 타향에서 보내기 싫은 마음도 그들의 귀향을 부추겼
다.
한양의 저잣거리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물론 전쟁 이전처럼 성시
는 아니었으나 닷새에 한 번씩 장도 서고 웬만큼 물물교환도 이루어졌다. 장이
서는 날이면 팔도의 거지떼가 부지기수로 몰려들었다. 군데군데 불을 피우고 몸
을 녹이는 그들의 몰골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기온이 내려가고 눈발이 흩날리
면서 얼어 죽은 시체들이 부쩍 늘어났다. 민심은 더욱 야박해졌고 떼강도가 극
성을 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닷새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장터로 모
였다.
시장과 함께 또 하나 문을 연 곳은 기방이었다. 서른 개가 넘던 장안의 기방
중에서 먼저 명월관이 손님을 받았고 월향관이 그 뒤를 이었다. 한쪽에서는 사
람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또다른 쪽에서는 풍악과 함께 산해진미가 즐비한 주
안상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기방을 없애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명월관과 월향
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기방을 출입하는 손님들이 바로 조정의 이름 높은 대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향락은 피비린내가 나는 자리에서 그 맛을 더했다. 대신들
은 기방에 가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고 전쟁통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꽃다운 기
생들의 이름을 마치 제 누이의 이름인양 외고 다녔다. 그들에게 전쟁은 태고의
신화처럼 잊혀지거나 터무니없는 무용담을 입증할 때만 간간이 언급될 따름이었
다.
밤새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거리는 빙판처럼 미끄러웠다.
정사품 의정부사인 허성은 눈을 내리깔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길가에 아
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젖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마른 땅을 찾는 그의 얼굴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 이윽고 명월관 앞에 도착한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문 앞을 서성거렸
다. 기방이 새로 문을 열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마음이 영 찜찜했다. 발길을 되돌릴까 망설였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기가 낯뜨거운지라 대문을 가만히 밀었다. 다행히 대문
은 잠겨 있지 않았다. 어둠이 채 깔리기 전인데도 흥겨운 풍악이 마당을 가로질
러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서 오시와요!"
열 살을 갓 넘겼을까? 마루에 앉아서 언 손을 호호 불던 새끼 기생이 버선발
로 뛰어내려왔다. 허성은 허리를 뒤로 젖힌 채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석봉 어른이 기거하는 데가 어디냐?"
새끼 기생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인걸요."
그가 다시 다그쳐 물었다.
"어허! 여기 있는 걸 다 알고 왔다. 어디서 거짓부렁을 하는 게냐? 좋다, 그럼
애랑이란 기생은 있느냐?"
"자, 잠시만 기다리셔요."
새끼 기생은 뒤뜰 별채로 쪼로록 뛰어갔다. 그는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
발들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들인가. 지금도 하삼도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가
고 있거늘 기생을 옆에 끼고 술타령이 웬말이더냐.
당장에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면박을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혹시 저
방안의 사람들과 면식이라도 있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치맛자락을 앞
으로 휙 감싸쥔 애랑이 살랑살랑 나아왔다.
"절 찾으셨다구요?"
눈가에 색기가 흘러넘쳤다.
"그대가 애랑인가? 조선 제일의 명필을 찾아왔다네. 설마 자네도 모른다고 하
진 않겠지?"
애랑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기생의 눈길을
정면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허성의 양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애랑이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혹시...... 교산 어른을 아시옵니까?"
"네가...... 어떻게?"
허성은 말문이 막혔다. 교산은 아우 허균의 호였다.
"그렇다면 나으리께옵서는 의정부사인 허성 대감이시군요."
"그렇네."
허성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애랑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
자 향긋한 살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으리!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씀하시지요. 저는 포도청에서 우리 대감을 잡
으러 온 게 아닐까 걱정했답니다. 자, 어서 따르시지요."
허성은 애랑을 따라서 뒤뜰로 갔다. 별채에서 남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흘
러나왔다. 허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애 대감! 왜 미리 귀뜀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허성은 유성룡의 부리부리한 눈을 떠올렸다. 정사품인 그에게 명월관으로 가
서 한석봉을 데려오라고 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전령을 보내면 그만인
일을 한사코 직접 가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듯이 이런 말도 했다.
"균도 이제 정시문과에 합격하였으니 벼슬 자리를 알아보아야겠구먼."
그때는 허균에게 시문을 가르친 유성룡이 제자의 앞길을 염려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기방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허균을 꾸짖
으라는 암시였다. 유성룡은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중을 빙빙 돌려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해 어리둥절하다가도 어느 순간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과 같은 충격을 준다.
애랑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석봉 한호가 황급히 뜰로 내려왔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악록(허성의 호)이아니신가? 어서어서 안으로 드시오."
석봉의 뒤를 이어 술에 취한 허균이 방에서 나왔다. 허성의 얼굴이 얼음장처
럼 차가워졌다. 그보다 스물두 살이나 어린 허균은 이복형제인 까닭에 가까이
두고 가르치지 못했다. 오십 줄을 넘긴 한호가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지 허성
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고 안으로 드십시다. 애랑아! 귀한 손님이 오셨으
니 특별히 주안상을 새로 마련하도록 해라. 애들 몸단장도 다시 시키고."
허성은 못 이기는 척 한호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다. 악기와 술병들이 어
지럽게 널려 있었고 여인네들의 짙은 살내음이 방안 여기저기서 풍겨나왔다. 병
풍 아래에서 거문고를 무릎에 얹고 다소곳이 앉아 있던 기생 하나가 일어서서
허성을 맞았다. 열네댓쯤 되었을까? 허성과 눈이 마주쳤지만 전혀 당황하는 기
색이 없었다. 뒤따라온 허균이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청향이라 하옵니다."
"으험!"
허성이 헛기침을 하는 틈에 허균이 재빨리 끼여들었다.
"조것의 머리를 올려주고 싶은데 죽어도 싫다는 겝니다. 홀아비한테 첫정을 주
기가 싫다나요. 형님께서 이 아울 좀 도와주십시오."
허성이 눈꼬리를 치켜뜨며 허균을 노려보았다.
가문의 위신을 깎아내려도 유분수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허균은 손뼉을 치면서 계속 낄낄거렸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뻗친 모양이었
다. 허성이 고개를 돌려 한호에게 언성을 높였다.
"기녀들을 물리쳐주세요. 술이나 먹자고 온 것이 아니오이다."
한호는 허성의 지나치게 근엄한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럽시다 까짓 거! 악록이 풍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 줄 내 진작부터 알고
있어요. 헌데 계집을 품으러 온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시러 온 것도 아니라면, 무
엇 때문에 정사품 의정부사인께서 이곳까지 찾아오셨나?"
허균이 꼬부라진 혀로 히죽거렸다.
"그것도 모르십니까? 꺼억! 의정부사인이야 의정부의 궃은일을 도맡아 하는
자리입죠. 일 벌이는 걸 좋아하는 서애 대감께서 영의정을 맡고 계시니 형님이
얼마나 바쁘시겠습니까? 그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이곳까지 오신 걸 보면 서애
대감이 심부름을 시키셨나보지요. 꺼어억! 아니 그렇습니까, 형님?"
허성이 도끼눈을 뜨고 허균을 노려보았다. 허균은 몸을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기댄 채 딸꾹질을 해댔다. 한호가 허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악록! 교산의 말이 사실이오? 서애 대감께서 보내셨나요?"
"급히 명나라로 보낼 문서가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입궐하시라는 영상 대감의
당부가 계셨습니다."
한호가 역정을 냈다.
"제기럴! 또 무슨 글을 써야 한다는 겝니까? 이백이나 두보의 시라면 백 번
베껴 써도 좋소만, 명나라에 거렁뱅이처럼 빌어먹는 글은 다시 옮기고 싶지 않
소이다. 내 마음만 더러워져요."
"거......렁뱅이라고 하셨습니까?"
허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호의 입이 거친 것은 소문이 나 있었지만 유성
룡의 글을 거렁뱅이에 비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허균이 끼여들었다.
"그 입조심 좀 하십시오, 꺼억. 형님께서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시는 분이세
요. 헌데 거렁뱅이가 뭡니까, 거렁뱅이가. 조선 제일의 명필이 그따위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겁니까, 꺼억."
한호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거렁뱅이 보고 거렁뱅이라는데 뭐가 어쨌다고 그래? 부산까지 쫓겨간 왜놈들
을 바다로 쓸어버리지 못해 다시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것이 거렁뱅이가 아니
고 뭐란 말인가? 도대체 이 나라 병조판서가 누구야?"
"천하의 이덕형 대감이시지요."
"그런가? 이덕형 대감이야 한양에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분조를 따라
하삼도를 진두지휘하러 간 분병조판서는 누구야?"
"천하의 이항복 대감이시지요."
한호가 앞이마를 탁 쳤다.
"아하! 그러고 보니 왕년의 악동들이 이 나라 군권을 쥐고 있군. 예전에 양반
님네들 골탕먹이던 용기의 반만 냈어도 벌써 왜군들을 몰아냈겠구먼. 사람은 변
하는 법이지. 나이를 먹으면 소심해진다니까. 자꾸 이웃나라에 기대려고만 하고
말이지."
"맞습니다! 병조판서가 둘 있으면 무엇합니까? 조정이 둘이면 뭣해요? 백성들
은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군사들은 총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으니, 어차피
죽는 건 매일반이죠."
허성은 더 이상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호야 기행으로 악명이 높으니 어쩔 수 없다손 치더
라도 하나뿐인 아우 허균이 저렇게 삐뚤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리를 잠시 피해주십시오."
한호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헝제들끼리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다 이 말이오? 좋아, 내 기꺼이 자리를 피
해드리리다. 헌데 악록, 내가 오늘 입궐하는 것은 힘들 듯하오. 이 손을 보시오.
낮술이 과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는구려. 내일 아침 일찍 입궐할 터이니
서애 대감께 악록이 잘 좀 말씀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될 수 있으면 빨리 한호를 데려오라고 했을 뿐 반드시 오늘 입
궐시키라고 못을 박지는 않았다. 그도 오랫동안 한호의 행동거지를 보아왔기에
이런 일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시간적 여유를 주었던 것이다.
한호가 자리를 뜨자마자 허성의 추궁이 시작되었다.
"기방 출입이 웬 말이냐? 너는 지금 우리 가문을 욕보이고 있어."
허균이 눈을 멀뚱멀뚱 뜬 채 허성을 바라보았다. 술기운 때문에 초점이 제대
로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암, 형님도! 나라가 오랑캐에게 욕을 보는 판국인데 욕을 보고 아니 보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홀아비가 계집 냄새 좀 맡으러 왔기로서니 그것이 어찌
가문을 욕보이는 일이겠습니까.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날아드는 법. 임 있으면
금수강산, 임 없으면 적막강산이란 말도 못 들어보셨나요?"
"이놈이 그래도 입은 살아서 재잘거리는구나. 어머님 모시고 설경을 다독거리
며 조용히 지내라고 몇 번이나 일렀거늘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닌 게야. 글공부는
아니하고 이렇듯 난봉을 부리다니 지하의 제수씨께 미안하지도 않으냐?"
허균이 킬킬거리며 엉덩이를 들썩들썩거렸다.
"정시문과에 합격하였으니 아내와의 약속은 지킨 셈입죠. 벼슬길이야 형님도
계시고 서애 대감도 계시니 차차 열리지 않겠습니까? 헌데 어쪄죠? 지금은 벼슬
자리를 주어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요."
"무에야? 벼슬에 나설 마음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허규느이 목소리가 점점 무거워졌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대신들이 물러나얍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입니다.
유성룡 대감과 윤두수 대감은 물론이고,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벼슬아치들이
모조리 한양에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형님께서도 전쟁 전에 서장관으로 왜국
에 다녀오셨으니 응당 그 책임을 지셔야죠."
허성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허균은 술에 취할수록 말끝에 날이서는 위인이
었다.
"또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신하들이 모두 새로운 인물로 바뀌어야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더 높은
분이 책임을 져야겠지요."
"닥치거라! 지금 무슨 망언을 지껄이는 게야?"
허귡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신하들이 아무리 바끤들 군왕이 그대로이면 나라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습니
다. 머지않아 지금보다 더 큰 전쟁을 겪을지도 모르죠. 전하께서 계속 양위할 뜻
을 비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이 기횝니다. 대신들이 뜻을 모아 광해군을 조선
의 새 임금으로 옹립하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려갈 테지요."
"어허, 그래도!"
허성은 눈을 부라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선조는 전쟁이 터지면서부터 줄곧
양위의 뜻을 밝혔다. 홍문관의 젊은 학자들 중에는 넌지시 임금의 뜻을 받아들
이자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허성도 그런 움직임이 마음에 걸려 어제 아침 유
성룡과 의논을 했다.
"전하께서 양위의 뜻을 굽히지 않으시니 큰일입니다."
유성룡은 이미 답을 갖고 있었다.
"설마 악록도 전하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충성심을 보이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아시겠소?"
허성은 패기만만한 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랑방탕하게 세월만 죽이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눈과 귀를 지니고 있는 것이 기특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아니된다. 그는 허균의 마음을 좀더
알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너는 세자저하가 왕위에 오르면 벼슬을 하겠다는 것이구나. 세자저
하를 그렇듯 흠모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허균은 직설을 쏟아냈다.
"흠모까지는 아닙니다. 그래도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친 군왕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작년에는 분조를 이끌고 강원도까지 내려가셨고 올해도 하삼도
를 살피러 가셨으니, 그 용기만은 높이 사야 할 줄 압니다. 허나 아직은 춘추 어
리시므로 좀더 세상을 배워야겠지요.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도 깨치셔
야 할 터이고......."
분조를 이끌고 조선 팔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광해군의 활약상은 허성도
익히 알고 있었다.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광해군이 장차 성군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세상을 좀더 배워야 한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군인가를
깨쳐야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허성은 작년 봄 왜란을 피하면서 미처 허균의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 함께 난
을 피하려고 사람을 보냈으나 허균은 이미 한양을 떠난 후였다. 올해 정월 한양
에서 다시 상봉했을 때 허균은 예전의 철부지가 아니었다. 아내인 김씨가 죽고,
핏덩이 아들마저 저 세상으로 갔다는 것을 허성은 그제야 전해 들었다. 허균의
눈에는 귀기가 흘러넘쳤다. 그것은 삶의 끝간 데를 보고 온 자의 눈빛이었다. 피
난살이의 고단함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허균은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고, 술
에 취해 세월을 보내면서 이상한 말들만 지껄여댔다. 인간은 원래부터 그 본성
이 악하다고도 했고 왜가 조선을 정복하지 않아도 이 나라는 곧 멸망할 것이라
는 끔찍한 추측도 거리낌없이 내놓았다. 그때마다 허성은 그를 따끔하게 야단쳤
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허균이 정시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망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참으로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허균
은 그 후로도 여전히 술과 계집에 젖어 살았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
다. 얄팍한 재주만 믿고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아니된다. 내말 명심하렷다."
허균은 허성의 충고가 지겹다는 듯이 검지손가락으로 귀를 후벼팠다.
"공맹의 가르침은 형님께서나 많이 따르십시오. 저는 요즘 노장이나 석씨(석가
모니의 허황된 말들에 더 끌립니다. 인생이란 때론 그렇게 허무맹랑하기도 하거
든요. 섬나라 오랑캐가 천자의 나라를 넘보는 세상 아닌가요?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고, 평안하게 삶을 마칠 수 있는 길이라면, 그 이름이 무엇이든 따를
작정입니다. 아무리 공맹이 좋아도 조선 백성을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면 내쳐야겠지요."
"정도를 가는데 어찌 사지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 모두가 너의 마음이 곧
지 못하여 길 아닌 곳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니라."
허균이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역시 형님은 다르십니다. 이렇게 지독한 전란중에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으시
군요. 이 아우, 형님의 그런 독야청청이부러울 따름입니다. 허나 제 몸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걸요. 아무리 씻어내도 악귀들이 살점을 뜯어먹지요. 속되
고 속된 저는 형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는 악귀의
편에 서겠습니다. 죄없이 죽어간 수많은 귀신들이 지금도 또렷하게 보인답니다.
참, 공맹은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지요? 형님은 응당 공맹의 가르침을 따르실 터
이니, 내세니 윤회니 하는 허황된 것들을 물리치고 현세에만 관심을 쏟으시겠지
요? 허나 이 아우는, 어리석은 균은 왠지 자꾸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저 피안의
세상에 관심이 가는군요. 망자들의 한을 풀어주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그들이 이렇게 힐책하는군요. 누가 나를 죽였는가? 나를 죽
인 자를 데리러 왔다. 누가 나를 죽였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법이다. 어느 역사에도 피를 흘
리지 않은 전쟁은 없느니라. 괜히 그들의 죽음을 네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아닙닏.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야지만 그들의 설움도 씻고 새로운 내일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시체는 산더미처럼 많은데 정작 그들을 죽인 자가 없
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죽음이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을 왜군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전쟁에서 내가 적을 죽이고 적이 나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당
연한 이치입니다. 제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런 당연한 죽음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만 하는 자들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너는 대신들에게...... 주상전하께......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냐?"
"사필귀정이 아닐는지요?"
"에잇, 발칙한!"
허성이 수염을 쓸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균은 무릎걸음으로 나와서 그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형니임! 벌써 가시게요? 형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허균이 병풍 뒤에서 서책 한 권을 가져왔다.
"이것이 무엇이냐?"
"심심함도 달랠 겸 강릉에서 쓴 [학산초담]이에요. 고래의 시들을 제 나름대로
평한 것이지요. 이 아우도 놀고먹는 것만은 아니랍니다."
허성은 허균이 건넨 서책을 손에 쥔 채 명월관을 나섰다. 풍악 소리가 여전히
집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끌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왠지 내키
지 않았다. 아내도 죽고 아들마저 세상을 버린 아우의 상실감이 손에 잡힐 듯했
다. 술과 계집에 빠져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급제하고 이렇
게 서책까지 편한 것을 보니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곡(허봉의 호)도 일찍이 균의 재주가 자기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나다고 했었
지.
허성은 [학산초담]의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손이
가는 대로 서책을 펼쳤다. 손곡 이달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눈에
쏙 들어왔다.
나상향진경생주 깁 방장엔 향내 가시고 거울엔 먼지
문엄도화적막춘 닫힌 문엔 복사꽃만 쓸쓸한 봄날
의구소누명월재 작은 누각엔 옛날처럼 달은 밝은데
부지수시권염인 발 걷고 달 즐길 이 그 누구런가
4. 종정도 놀이
자장이 공자께 묻기를 "어떠하여야 정사에 종사할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
께서 "다섯 가지 미덕을 높이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사에 종사할 수 있
다." 하고 대답하셨다. 자장이 "무엇을 다섯 가지 미덕이라고 합니까?" 하고 묻
자, 공자께서는 "군자는 은혜롭되 허비하지 않으며, 수고롭게 하되 원망을 받지
않으며, 하고자 하면서도 탐하지 않으며, 태연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스
러우면서도 사납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논어], [요왈편]
갑오년(1594년) 1월 15일 저녁.
전쟁이 시작된 지도 햇수로 벌써 이 년이 넘었다. 부산까지 후퇴한 왜군은 혹
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거대한 성을 쌓기 시작했다. 경상도 해안을 모두 감싸는
힘든 공사였다. 왜성을 쌓는다는 소문이 돌자 전쟁이 끝나리라는 기대는 점점
빛이 바랬다. 성을 쌓는 것은 귀국하지 않고 끝까지 경상도를 지키겠다는 의지
의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면서 왜선들과 간헐적으로 벌이던 해전도 뜸해졌다.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은 거제도를 기점으로 각자의 영해를 확실히 지키는 쪽을
택했다. 본격적인 전투는 겨울이 가고 개나리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쯤에
야 재개될 전망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순번을 정해 장졸들에게 열흘
간의 휴가를 주었다. 수영에서 음식만 축내기보다는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겨
하루라도 두 발 주욱 뻗고 자는 편이 나을 것이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부산을 칠 것을 계속 종용했지만 이순신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군사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군선의 보수와 부족한 무기가 확충되어야
왜선들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원균은 지금 마음을 풀어버
리면 영원히 승기를 잡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경상우수영 군사들을 단 한
명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름마다 실시하던 진법훈
련을 열흘에 한 번으로 늘렸다.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의 움직임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순신도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가족들의 안위를 살폈다. 전란을 피해 여천
의 고음천으로 내려와 있던 어머니를 뵈었을 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 울과 조카
들을 데리고 활을 쏘기도 했다. 특히 큰형 희신의 셋째 아들인 분의 글재주와
궁술 실력이 군계일학이었다. 아내 방씨와 큰아들 회, 막내 면, 그리고 부안댁과
서자들은 아산에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오늘 조카들끼리의 활쏘리 시합에서도 이분이 이겼다. 아직 변존서의 활솜씨
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활을 당기는 힘이나 버팅기는 줌손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순신은 기쁜 마음으로 조카들에게 술을 내렸다.
저녁 나절,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찾아왔다. 복어 송희립이 큰 배를 디밀며 뒤
따라 들어섰다.
"다 늦게 웬일들인가? 술 생각이 나서 온 것인가?"
"아닙니다, 장군!"
이영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순천부사 권준이 휘하 장수들에게 통제사
와 대작하지 말라는 엄명을 은밀히 내렸던 것이다. 이순신의 폭음은 겨울로 접
어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취하는 속도도 빨라졌고,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술자리에서 뱉은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벽이면 가끔씩
피를 쏟기도 했다. 권준은 통제영 내에 금주령을 내리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통
제사의 건강을 유심히 살피도록 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붉게 충혈된 눈동자, 흰 수염, 빨갛게 변한 콧잔등, 움푹
패인 볼, 갈라터진 입술.
당장이라도 실신할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하루 일과는 빈틈이 없
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으며, 권준이나 나대용에게
맡겨도 되는 시시콜콜한 일들도 꼼꼼하게 챙겼다. 그러면서 곧잘 농담처럼 뇌까
렸다.
"내세에는 목민관이나 되어볼까?"
그런데 그는 내세에의 꿈을 현세에서 이루기로 마음을 바꾼 듯했다. 피난길에
서 무일푼으로 돌아온 백성들을 보살피고, 돌림병 때문에 고생하는 군사들을 밤
낮으로 간병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유불급.
저렇듯 열심히 일하다가도 어느 순간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허나 통제사는 자신의 삶만은 항상 예외로 둔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기에, 장
수로서의 자질, 신하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기에 항상 지나치게 행동하고 지나치
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잠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순천부사 권준은 통제
사의 장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통제사는 자신이 누군지 잘 아는 사람이지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신은 결
코 속이지 않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자신을 질책할 줄 아는 그런 위인이
지요."
자기애와 자학.
권부사의 의견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형언하기 어려운 통제사의 인내와 사람
을 끄는 흡인력은 자기애와 자학 사이의 끝없는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벌써
이 년도 넘게 그 긴장을 이어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포! 자네도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야."
통제사는 무슨 근거로 나를 끌어들이는 걸까? 나는 아직 나 자신이 누군인지
알지 못하며, 자기애와 맞먹을 만큼의 자기 학대를 감당할 용기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비슷한 면이 있다면, 타인으로부터의 비난이나 질책을 안으로 삭이려 든다
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장검으로 타인을 베기보다는 비수를 들어 자신의 명치
를 스스로 찌르는 것을 마음 편하게 여긴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것도 순식간에
끝나는 일이기에 가능하다. 나는 결코 명치를 비수로 찔러대며 이 년이나 버틸
자신은 없다.
자꾸 통제사를 찾아가는 것은 나의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오늘도
여전히 명치를 찌르고 있는 비수의 섬뜩함을 구경하기 위함인가?
나는 순천부사 권준이 언급하지 않은 통제사의 장점을 한 가지 더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의 대상이 비
록 소수이지만 통제사는 몇몇 장수에게 혈육의 정을 쏟아붓고 있다. 부자지병이
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때는 통제사가 꼭 엄하고 빈틈없는 아버지 같다. 권부사
역시 통제사가 총애하는 사람이므로 그 사랑의 넓이를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권부사는 그것을 모른 척 덮어둔다.
사랑이라는 것, 아끼고 위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수들끼리 가장 피해야 할 일
일는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부하들을 지휘하는 것은 패전
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통제사는 개인적인 호감을 감추지 않는다. 호오가 명확한
것은 통제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다. 원균 장군과 기현령을
만나면 그들에 대한 통제사의 반감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난다. 반대로 나에 대
한 감정은...... 때때로 통제사의 이 지극한 사랑이 부담스럽다. 하지만 나는 통제
사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인내, 자기애, 자기학대, 그리고 좋고 싫음의 기
준까지도.
"그러지 말고 한 잔만 하세. 추위를 이기려면 몸이 따뜻해야지. 송군관, 자네가
가서 탁주 한 동이만 가져오게나. 자네도 하루 종일 독전의 불을 치느라 지쳤을
거야."
송희립이 이영남의 눈치를 살폈다. 통제사가 서두를 꺼낸 이상 술을 아예 마
시지 않는 것은 힘들었다. 이영남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소장들이 장군을 찾아뵈온 것은 종정도 놀이를 익히기 위해섭니다. 허나 장군
께서 술 생각이 간절하시다니 간단하게 한 잔만 하지요."
이영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희립이 뜰로 내달았다. 그 역시 술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송희립의 주량은 복어처럼 튀어나온 배를 술로 가득 채울 만
큼 대단했다. 이영남은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술자리를 파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순신이 술을 주욱 들이켜는 동안 이영남은 재빨리
종정도 놀이에 필요한 푸른 말과 윤목, 그리고 종정도판을 꺼내놓았다. 종정도판
은 말이 놀 수 있도록 직사각형의 작은 칸으로 빽빽이 들어찼는데, 각 칸은 문
관의 관직명과 무관의 관직명이 종구품에서 정일품까지 열여덟 등급으로 나란히
채워졌다. 그 관직명 아래에는 윤목을 던져 나올 도, 개, 걸, 윷, 모의 값에 따라
이동할 경로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도나 개의 경우에는 파직이나 강등을 당했
고, 윷이나 모가 나오면 승진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종정도는 종구품에서부터 윷을 놀아서 먼저 정일품에 도달하는 놀이였다. 문
관은 붉은 말, 무관은 푸른 말을 사용하였다. 종정도 놀이의 묘미는 관직의 부침
을 간접체험하는 데 있다. 앞서가던 말도 계속 도를 잡으면 하루아침에 외직으
로 좌천될 수 있으며, 말직에 머무르다가도 계속 윷이나 모를 잡으면 정일품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정도 놀이는 말이 오직 앞으로만 가는 기존의
윷놀이보다 훨씬 다양한 재미를 주었다.
예전에는 명나라의 관직을 적은 종정도판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조선의 관직을 놓고 겨루는 종정도판을 가져왔던 것이
다. 명나라의 관직을 따르면 아무래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조선의 관직을 사용하면서부터는 놀이에 박진감도 넘치고 말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남은 관직을 예측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순신이 단연 고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종사품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을 때 벌써 정일품 영의정에 이르곤 했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계속 윷
이나 모를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강점은 최소한 걸이나 윷 이상을 잡는
데 있었다. 도나 개를 피함으로써 파직이나 강등을 면하는 것이다. 이영남은 놀
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넌지시 물었다.
"장군! 조카 분들과 아드님들 중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이순신이 다시 술 한 잔을 부어 마신 후 빙긋 웃었다.
"갑자기 왜 그딴 걸 묻는 건가? ......맏이인 회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이지.
둘째인 울은 쾌활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끈기가 부족하네. 막내인 면은
이제 열여덟 살이니 좀더 지켜보아야 하겠으나, 날 가장 많이 닮은 것 같아."
"어떤 점이 말입니까?"
"면은 치밀하고 단단하지. 남에게 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고 늘 서책을 가까
이 하네. 나는 그 애가 서애 대감처럼 뛰어난 문관이 되었으면 좋겠어."
"원장군의 아들 사웅과 비교해서 어떠합니까?"
이순신이 잠시 말을 끊었다.
"......사웅이도 장수의 자질이 뛰어나네. 허나 면이도 마음만 먹는다면 사웅이
에게 뒤지지 않을 거야."
"장군의 뒤를 잇게 할 마음은 없으신지요?"
이순신이 고개를 저었다.
"없네. 장수의 길은 참으로 외롭고 힘들어. 아비된 마음으로는 자식들에게 그
고통을 강요하고 싶진 않네. 무장의 자질이야 조카인 분이 탁월하니까, 혹 그애
가 원한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
외롭고 힘든 길.
그 말이 이영남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무신에 대한 차별대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문신들이 편안하게 식솔을 거느리며 부와 명예를 취하는 동안
무신들은 배를 곯아가며 변방을 떠돌았다. 십오년이 넘게 변방에서 지낸 이순신
으로서는 그 힘든 장수의 길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장군! 어서 시작하시지요."
이순신을 따라 연거푸 술잔을 들이킨 송흐립이 상기된 얼굴로 보채었다. 이순
신이 윤목을 쥐며 제안을 했다.
"그냥 놀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나? 승자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는 걸로 하세."
"좋습니다."
세 사람의 말이 종구품 권관에 나란히 놓였다. 이순신이 먼저 윤목을 하늘 높
이 휙 던졌다. 윷이었다. 정칠품 참군으로의 특진이었다. 이영남과 송희립의 얼
굴이 일그러졌다. 이러다간 지난번처럼 또 맥없이 질 것이다. 이번에는 송희립의
차례였다. 하늘 높이 던진 윤목이 떼구르르 굴렀다. 걸이었고, 종팔품 봉사로 말
을 옮겼다. 끝으로 이영남이 윤목을 놀았다. 도가 나왔고, 종구품 권관에 그대로
발이 묶였다.
오늘따라 윤목을 놀리는 이순신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모를 던져 종오품
판관이 되더니, 다시 윷을 던져 종삼품 부사까지 곧장 올라갔다. 송희립은 종오
품 현령까지는 그럭저럭 나아갔으나 그 다음에 개를 던져 정칠품 참군으로 미끄
러졌다. 이영남의 경우는 더욱 가관이었다. 계속 도를 던져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더니, 겨우 걸을 잡아 종팔품 봉사에 머물렀다. 송희립이 볼멘 소리를 해댔
다.
"장군! 저희들도 좀 살피시고 천천히 던지십시오. 벌써 종삼품이시니 금방 놀
이가 끝나겠습니다."
이순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승부에서 경쟁자의 처지를 살펴서는 아니되는 법. 최선을 다할 뿐이네."
이순신이 윤목을 힘차게 던졌다. 이번에도 윷이었다. 종이품 수군통제사까지
말을 올린 이순신은 승리를 낙관하는 듯했다. 다음에 모가 나오면 곧바로 정일
품 영의정에 오르는 것이다. 송희립과 이영남도 뒤늦게 분발했다. 송희립은 모를
잡아 종사품 수군만호가 되었고, 이영남은 윷을 잡아 종육품 현감이 되었다. 그
러나 두 사람 모두 종이품 수군통제사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순신이 가볍게 윤목을 잡고 손목을 놀렸다. 하늘로 솟아오른 윤목이 사방으
로 흩어졌다. 윤목 세 개가 모두 등을 보이며 제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한 개만
더 등을 보이면 모인 것이다. 그런데 문지방까지 날아간 윤목이 허연 배를 드러
냈다. 도였다. 송희립이 손뼉을 쳐댔다.
"장군! 도이오이다. 종육품 주부로 좌천입니다."
이순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말을 종육품으로 내
려다놓았다. 송희립은 윷을 잡아 정삼품 병조참의로 승진했고, 이영남은 걸을 잡
아 종오품 도사가 되었다. 다시 이순신의 차레였다. 이영남의 그의 안색을 살피
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모를 던지십시오. 그럼 다시 종사품 군수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송희립이 눈치 없게 히죽거렸다.
"다시 도가나오면 파직이오이다. 그러면 한 판을 더 쉬고 권관에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니, 신경 써서 윤목을 놓으십시오."
이영남이 송희립을 째려보았으나 송희립은 벙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
이었다. 재미로 하는 놀이인데 뭐 어떠냐는 뜻이었다. 윤목을 모아 쥔 이순신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는 눈을 번쩍 뜨고 힘껏 윤목을 놀았다.
"도다!"
송희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순신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종이품 수군
통제사까지 올랐던 그가 연속해서 도를 잡아 삭탈관직을 당한 것이다. 다시 종
구품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백의종군을 하며 한 순번을 쉬어야 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놀이일 뿐입니다."
이영남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이순신은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었다.
"백의종군이라....... 그래, 놀이일 뿐이지. 헌데 오늘은 내가 지겠군. 자네들은
벌써 정삼품, 종오품이고 나는 백의종군을 당했으니....... 자, 어서 윤목을 놀게.
나는 괜찮아. 자네들을 잡고야 말겠네."
그러나 종정도 놀이는 이순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종오품에오르
기도 전에 송희립과 이영남의말이 종일품 좌찬성과 우찬성에 나란히 도달한 것
이다. 둘 다 모만 던지면 영의정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송희립이 먼저 윤목을 놀
았다. 개가 나와서 좌찬성에 머물렀다. 결국 오늘의 승자는 아슬아슬하게 모를
던져 정일품 영의정에 오른 이영남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송희립의 얼굴이 벌
겋게 상기되었다. 식식대는 콧소리가 한참 동안 들렸다. 이순신은 종오품 판관에
놓인 자신의 말을 손에 꼭 쥐었다. 이영남이 다시 이순신을 위로했다.
"백의종군엣 종오품까지 올라오셨으니 잘하신 것입니다."
이순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쉬운 일은 아니지. 허나 결국 자네가 이겼네그려. 자 어서 소원을 말해
보게."
송희립도 패배를 인정했다.
"무엇이든 말하시오. 따르겠소."
이영남은 먼저 송희립을 지목했다.
"송군관은 지금부터 열흘 동안 매일 새벽 묘시(3시)부터 진시(9시)까지 운주당
뜰로 나와 북을 치시오. 통제영이 떠나갈 듯이 크게 쳐야만 하오."
범인이라면 한식경만 북채를 잡아도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르므로, 이영남의
요구는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희립은 껄껄껄 웃어제꼈다.
"좋소이다. 까짓 거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치겠소."
"송군관이 북을 치는지 안 치는지는 내가 살핌세. 나에 대한 소원은 뭔가? 설
마 나도 묘시부터 진시까지 활을 쏘라는 것은 아닐 테지?"
이순신이 농담을 건넸다.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영남이 천천히 고개
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장군! 제가 장군께 원하는 것은 따로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그것이?"
이영남이 잠시 뜸을 들였다.
"경상우수영을 어찌하실 건지요?"
이순신이 차갑게 반문했다.
"어떻게 하다니?"
"원장군 말이옵니다."
통제영의 군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경상우수사 원균을 어떻게 처
리할 것인가. 벌써부터 통제영에는 원수사를 통제사 직권으로 파직시킨다거나
전출시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조정도 이순신의 뜻에 따르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말도 있었다. 이영남은 어떻게든지 원균을 우수사의 자리에 앉혀두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원균은 조선 수군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이다.
"장수가 들고나는 것은 어명으로 결정될 문제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지."
이순신이 슬쩍 발을 뺐다. 그러나 이영남은 알고 있었다. 유난히 자존심이 강
한 이순신이 군령을 무시하는 원균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래도 장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가르쳐주십시오."
이순신은 이영남과 송희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원균을 내치는 문제
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면서 일단 쟁공
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균의 명성은 여전히 조선군은 물론 부산의 왜군
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이순신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범한다면 원균에게
기회가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꼭 알고 싶은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원수사를 내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의 선배이며, 스승이며, 생명의 은
인이지 않는가? 원수사가 모든 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이영남이 재차 확인했다.
"진심이십니까?"
"어허, 내가 언제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있더냐?"
"그렇다면 정말 정말 안심입니다. 조선 수군은 영원히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에 북받친 이영남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이순신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이제 술이나 마시자꾸나. 송군관 부어보게."
"예, 장군!"
송희립이 술동이를 밀면서 앞으로 당겨 앉았다. 이영남이 눈짓으로 만류했으
나 송희립은 그의 눈길을 일부러 외면했다. 큰일났군. 이순신은 사소한 패배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간혹 활쏘기 시합에서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셔댔다.오늘은 종정도 놀이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원균의 이름까
지 입에 올렸으니 마음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이영남이 송희립에게서 술동이를
빼앗으려는 순간 나대용이 허겁지겁 달려들어왔다.
"장군! 공주의 분조에서 선전관 조청민이 방금 당도하였습니다. 세자저하의 서
찰을 직접 장군께 전해 올리겠답니다."
"가지!"
이영남이 서둘러 종정도판과 윤목을 치웠다. 공주와 전주를 오가며 군사들을
독려하던 광해군이 직접 서찰을 보내온 것이다. 이순신은 동헌 앞마당에서 임금
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한 후 선전관 조청민으로부터 서찰을 건네받았다. 일
렁거리는 횃불에 으지하여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
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보라.
대명의 도움으로 왜적을 부산까지 몰아냈으니 이제 하늘의 도리가 바로 드러
나고 있음이다. 허나 아직 왜적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으며 진주성을 비롯한
몇몇 성을 잃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산에 왜적들이 머물러
있는 한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전라, 경상, 충청
의 수군들을 이끌고 가서 부산을 쳐라. 그대는 이미 부산을 치라는 어명을 두
차례나 어겼다. 만약 나의 명까지 거스른다면 무군지죄를 면치 못할 것이고 능
지처참을 당하리라. 속히 출정토록 하라.
갑오년(1594년) 3월 15일 아침.
충청도 홍주에 자리를 잡은 분조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분병조판서 이항복은 벌써 사흘 밤을 꼬박 새워 포병수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짜
고 있었다. 궁수를 지원하는 군사들은 많았으나 화약과 무거운 총통을 직접 만
져야만 하는 포병수는 지원자가 적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좌의정 윤두수는 거제
도에 있는 왜 수군을 몰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덕령, 곽재우 등 전라좌도
와 경상우도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하나로 묶어 거제로 진격하는 것이 그의
복안이었다.
신하들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정작 광해군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고 하루
하루 소일하며 지냈다.
재작년의 분조는 그가 원한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선조도 그도
분조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세가 유리하고 장졸들이 속속 모여
들고 있는 판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 분
조를 요청한 것은 명나라였다. 하삼도의 장졸들을 이끌 정신적 지주가 필요하다
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일을 도원수 권율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버텼고, 만약 권율 혼자서 힘들다면 조정 대신들 중 한 사람이 책임자로
내려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명군의 최고 책임자인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
송은 광해군을 보내라고 고집했다. 몇 달을 버티다 결국 그들의 청을 따르기로
했다.
저들의 속셈이 무엇일까?
광해군은 작년 동짓달에 한양을 떠나면서부터 의문에 휩싸였고, 명군의 이율
배반적인 행동들을 보면서 그 의문은 증폭되었다. 왜군을 몰아붙이기 위해 분조
가 필요하다고 했으나 막상 그들은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을 전혀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여송의 휘하 장군 담종인은 왜군 진영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왜선을 공격하지 말라는 '금토왜적사패문'까지 보냈
다.
이 와중에도 심유경은 계속 부산의 왜군 진영과 명나라 조정을 오갔다. 도대
체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여송도 작년에 명나라로 돌아
갔고, 새해 들어 경략마저 송응창에서 고양겸으로 바뀌었다. 명나라와의 의사소
통이 더더욱 단절되는 느낌이었다.
한양을 떠날 때 영의정 유성룡이 다음과 같이 귀뜀했다.
"좌상은 틀림없이 부산을 치자족 나설 것이옵니다. 허나 쉽사리 군사를 일으켰
다가는 명나라와의 우의가 깨어질 뿐만 아니라, 그나마 모이고 있는 관군과 의
병들도 한꺼번에 잃을 염려가 있사옵니다. 부디 자중하시옵소서. 군사들을 저하
의 품에 모으시면서 때를 기다리시옵소서. 급한 일이 닥치면 권율과 이순신을
불러 대책을 간구하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육군과 수군의 기둥
이오니 그들의 의견을 좇으시면 결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세
자저하, 신에게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오라 주상전
하와 세자저하께옵서 뜻을 달리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옵니다. 만
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사옵니다. 명나라
는 어쩌면 이것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옵니다. 하오니 저하! 결코 주상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마시옵소서. 어떠한 경우라도 먼저 어명을 따른 후에 후일을 기
약하시옵소서."
광해군은 유성룡의 충고대로 지금까지 선조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 도원수 권
율과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부산을 치라는 명령을 가감없이 전달했을 뿐만 아
니라, 직접 분조의 대신들을 이끌고 진주 근처까지 내려갔다 오기도 했다. 그러
나 선조가 종용하는 것처럼 전면전을 벌일 의도는 없었다. 명나라도 광해군의
모나지 않는 행동을 그대로 묵인할 따름이었다.
"세자저하! 좌의정과 병조판서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방문 앞에서 들고나는 신하들을 고하는 내시감 윤환시가 마음에 걸렸다. 내시
감이라면 당연히 한양에 남아 군왕을 모셔야 할 터인데 선조가 특별히 그를 분
조에 딸려 보낸 것이다. 광해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뿐만 아니라 대신들의
동정도 파악하겠다는 의도였다.
윤두수와 이항복이 나란히 들어왔다. 하삼도의 군정은 지금 이 방에 모이 stp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항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분조에서 훈련중인 군사의 수를 조사하여 보낸 지 닷새도 채 지나지 않았사
온데 다시 증원된 군사의 수를 파악하여 올리라는 전갈이 왔사옵니다. 이는 너
무 지나치고 번거로운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아바마마께서 나를 믿지 못하시는 게야.
광해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는 광해군이 군사라도 숨겨두지 않을
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포병수들은 어느 정도나 모였소?"
"아직 쉰 명을 넘지 못하옵니다."
"권도원수는 전라도를 지키기 위해서 족히 이백 명은 필요하다고 했는데......."
좌의정 윤두수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포병수들을 모으는 것은 화급한 문제가 아니옵니다. 세자저하! 나무만 살피지
마시고 숲을 보시옵소서."
광해군의 양볼이 실룩거렸다. 그는 윤두수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떨 때는 왕실을 능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유연하
고 자상한 유성룡에 비한다면 윤두수는 한없이 직선적이고 날카로웠다. 피끓는
청년 광해는 아직 그 비수를 능숙하게 받아내는 법을 몰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숲을 보라?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사소한 일에만 집착하고 있었단 말인가?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구나. 윤두수! 언젠가 내 꼭 그대에게 왕실의 위엄을
가르쳐주겠노라.
"좌상! 허면 무엇이 더 급하단 말이오?"
윤두수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산을 치는 일이옵니다. 권율이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을 통솔하고 이순신이
삼도의 수군을 출정시켜 수륙으로 협공하면 왜군들을 전멸시킬 수 있사옵니다."
이항복이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명나라의 사신이 부산을 왕래하고 있사옵니다. 헌데 지금 부산을 치면 우리
입장만 곤란해지옵니다."
윤두수가 이항복의 말을 잘랐다.
"곤란해지기는 뭐가 곤란해진다는 말이오? 우리가 왜군을 전멸시키면 자연히
이 전쟁도 끝이 나오. 지금으로서는 부산을 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소이다.
주상전하께서도 속히 부산을 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광해군이 끼여들었다.
"권율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고 했고, 이순신도 같은 입장이에요. 좌상
은 그들의 의견이 틀렸다고 보오?"
"그들은 지금 왕실과 조정을 업신여기고 있사옵니다. 도원수 권율은 행주에서
자그마한 승리를 거둔 이후 한 번도 나가 싸운 적이 없사옵니다. 진주에서 수만
명의 백성들이 죽어갈 때 곁에서 구경만 한 장수가 바로 도원수 권율이옵니다.
또한 이순신은 임진년에 거둔 몇 번의 승리 외에는 이렇다 할 공이 없사옵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로는 왜 선단과 싸우는 척 잔꾀만 부릴 뿐 정작 수군을
이끌고 부산을 치는 데는 주저하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왜군과 맞서기를 두려워
한다면 마땅히 장수를 바꾸어야 할 것이옵니다. 조선에는 그들을 대신할 장수들
이 얼마든지 있사옵니다."
광해군이 집요하게 윤두수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하오? 좌상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장수들이 있는가 보지요? 그들이 누구인
지 궁금해지는군요."
윤두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우선 대장군 이일이 있사옵니다. 비록 임진년에 패한 적은 있으나, 그 후로
군사들을 이끌고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음은 세자저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
옵니다. 특히 평양성을 탈환할 때는 조선의 관군과 의병, 승병들을 훌륭히 통솔
하여 왜군들을 일시에 몰아내었사옵니다. 임진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남행을 자
천한다고 하니 권율대신 불러 쓰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수군에서는 경상우수사
원균이 으뜸 가는 장수이옵니다. 그는 임진년 이후 단 한 차례도 경상우수영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원균
이 경상도 바다를 확실히 지키고 앞장서서 싸웠기에 가능했사옵니다. 원균 역시
죽기를 각오하고 부산을 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신에게 전하였사온즉, 이 두
장수를 앞세우면 단숨에 승전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광해군은 잠시 윤두수의 주장을 정리해보았다.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중
용하도록 충고했고, 윤두수는 이일과 원균을 새롭게 내세우라고 권했다. 유성룡
은 민심이 회복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임에 반해, 윤두수는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짓는 것이 급선무이고 민심을 다독거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의 입장이 옳은 것일까? 솔직히 광해군은 명백하게 어
느 쪽이 옳은지를 가리기가 힘들었다. 부산의 왜군을 쳐서 전멸시킬 수만 있다
면 마땅히 그 길을 가야 하리라. 그러나 만에 하나 왜군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
어서 별다른 수확을 거두지 못한다면 전세가 역전되는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주
는 꼴이다.
광해군은 일단 윤두수의 주장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기로 했다. 며칠 더
여유를 가지고 전황을 살핀 뒤에 마지막 결심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좌상의 뜻을 깊이 헤아려보겠소."
윤두수와 이항복이 물러간 후 광해군은 김덕령의 서찰을 받았다. 광주를 중심
으로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은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백성들의 사
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구척 거구인 데다가 사람들을 휘어잡는 솜씨가 남달
랐던 것이다. 광해군도 김덕령의 용맹함을 높이 사서 여러 차례 분조로 불러 칭
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덕령 역시 윤두수처럼 지금 당장 부산을 치자고 주장해
왔다.
"세자저하! 도원수와 순천부사 입시이옵니다."
순천부사? 전라좌수영의 장수가 홍주가지 무슨 일일까?
"들라 하라."
권율이 앞서고 권준이 그 뒤를 따랐다. 광해군은 권준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
다. 피부가 희고 몸이 여읜 그는 장수라기보다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서생에 가
까웠다.
"순천부사 권준이옵니다."
권율이 그를 광해군에게 소개했다. 광해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소. 통제사를 도와 임진년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
니, 참으로 장하오."
"감사하옵니다, 세자저하!"
광해군이 권율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헌데 순천부사가 이 먼 곳까지 어인 일이오? 또 내게 데려온 까닭은 무엇이
고?"
권율이 고개를 들어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광해군이 내시감 윤환시
를 불렀다.
"윤내관! 밖에 있는가?"
"예! 저하."
윤환시가 약간 굳은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금 즉시 전주로 가서 좌찬성 정탁을 데려오도록 하라."
윤환시가 허리를 굽힌 채 잠시 머뭇거렸다. 윤환시의 책무는 밤낮 구별 없이
세자 곁에 머물면서 시중을 드는 것이다. 전주에는 선전관이나 다른 내시를 보
내도 무방한데 굳이 윤환시를 지목한 것은 잠시 그를 멀리 두겠다는 뜻이다. 눈
치 빠른 윤환시가 이 점을 깨닫고 즉답을 피한 것이다. 광해군이 윤환시의 찢어
진 눈매를 쏘아보며 매섭게 몰아붙였다.
"당장 떠나거라!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라. 내 그대를 믿고 보내는 것이니 내일
아침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탁을 데려오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저하!"
윤환시는 광해군의 불호령에 하는 수 없이 전주로 떠났다. 윤환시가 자리를
비우자 광해군은 곧 다른 내시와 궁녀들도 멀리 물리쳤다. 이윽고 광해군이 다
시 권율과 권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권준이 소매에서 서찰을 꺼냈다.
"통제사의 비밀 서찰을 가지고 왔사옵니다."
광해군이 손수 받아서 펼쳤다. 지난 정월, 부산으로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이순신은 결코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밝혀왔었다. 처음에는 어명을 거역하는
불충한 장수라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유성룡의 당부도 있고 해서
다시 전령을 보내면서, 공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일이라면 밀서를 부치도록 했다.
그에 대한 답장을 순천부사 권준이 가져온 것이다. 이순신과 서찰을 주고받는다
는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만약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는 날에
는 광해군이 이순신과 권율을 거느리고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신 이순신 삼가 아뢰옵나이다.
왜적을 몰아내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신에겐들 없겠사옵니까. 허나 명군은 철
군할 생각뿐이며, 관군과 의병도 지치고 병들었나이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부산
에 있는 십만 왜군과 싸워 결코 승리할 수 없사옵니다. 우선 군사들과 백성들을
먹이는 일이 급선무이옵니다. 양식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일 뿐만 아니라 그나
마 있는 양식도 명군에게 모두 돌아갈 뿐이옵니다. 돌림병에 시달리고 허기진
군사들은 군선을 저을 기운도 활을 쏠 힘도 남아 있지 않사옵니다. 이런 상황에
서 전면전을 벌이면 패전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세자저하, 왜적들은 산성을 쌓으
며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사옵니다. 웅크리고 지키려는 자들과 맞서 이기기는 참
으로 힘든 일이옵니다. 성급한 출정은 잠시 접어두고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정비
하는 것이 옳사옵니다. 출정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백성들을 어루만져주시옵소
서. 저들의 상처를 살피시고 저들에게 왕실의 자애로움을 보여주시옵소서.
광해군은 서찰을 쥔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순신은 앵무새처럼 유성룡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백성들을 먼저 살핀 후에 왜적을
공격하자. 광해군은 권율의 의견을 물었다.
"통제사는 잠시 전쟁을 멈추고 목민을 하겠다고 하오. 도원수의 뜻도 그러합니
까?"
권율이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옵니다."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군.
광해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권준에게 물었다.
"권부사의 뜻은 어떻소?"
권준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싸우지 않고서는 왜적을 물리칠 수 없사옵니다."
광해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권율과 권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권율은 싸우
지 않고 이기는 쪽을 택하자고 했는데, 권준은 싸워야지만 이길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계속 이야기하여 보오."
"조선은 싸우겠다고 나서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와 왜의 말놀
음에 앉아서 당할 뿐이옵니다. 왜가 종전을 조건으로 하삼도를 요구한다는 것이
헛소문만은 아닌 듯하옵니다. 이때 조선 역시 싸울 의사가 없다면 명나라는 주
저하지 않고 왜에 하삼도를 떼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명나라가 왜에게 하삼도를 준단 말이오?"
"명나라는 저울질을 할 것이옵니다. 조선의 땅덩어리를 떼어주고 전쟁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천자의 군사들이 피 흘리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선과의 의리
를 지킬 것인가. 세자저하! 지금 조선은 명나라가 그런 저울질을 하지 못하도록
강경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그래야지만 명나라가 왜와 협상에서 우
위에 설 수 있사옵고, 조선 조정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옵니다."
"그것은 좌상의 뜻과 같지 않소?"
"하오나 결코 왜적을 먼저 공격하여서는 아니되옵니다. 왜적은 지금 배수진을
친 것과 다름없사옵니다. 설령 우리가 작은 숭리를 거두더라도 우리 역시 치명
적인 피해를 입게 되옵니다. 자고로 궁지에 몰린 쥐는 단번에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므로 저하께서는 공식적으로는 육군과 수군의 장수들
에게 부산을 치라는 명령을 계속 내리시옵소서. 장졸들로 하여금 곧 전투를 시
작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엄히 군율을 세우시옵소서. 이렇게 장졸들의 사기를 진
작시켜 놓은 후, 도원수와 수군통제사가 서로 연통을 취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
이 최선이옵니다."
"통제사도 그대와 생각이 같소?"
"그러하옵니다."
광해군은 권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전쟁의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가
면서도 선공의 모험은 피하자! 참으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원조
와 분좌가 각기 다른 의견을 낼 가능성이 없으며, 또한 패전의 책임을 질 위험
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적을 부산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을 공문으
로 남길 수 있으니, 광해군으로서도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었다
"도원수의 생각은 어떻소?"
"신의 생각도 통제사와 같사옵니다. 지금으로서는 전라도를 지키면서 왜적에게
간헐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이 적당하옵니다."
광해군은 권율과 이순신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윤두수의 의견이 명쾌하
기는 하나 옥좌를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관계는 어떻소? 원균이 만에 하나 출병하면 통제사가
제지할 수 있겠소?"
권준이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마시옵소서. 그 누가 삼도수군통제사의 군령을 어길 수 있겠사옵니까. 원
수사가 군령을 어긴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광해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나는 조선 수군이 왜 연전연승을 거두는지 참으로 궁금했었소. 헌데
오늘 그대를 만나니 그 의문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군요. 그대처럼 사리에 밝은
장수가 전라좌수영에 있으니, 어찌 이순신의 함대가 패할 수 있었겠소. 그대들은
돌아가서 통제사에게 전하오. 세자인 나 광해도 그대들의 우국충정을 깊이 헤아
리고 있으며 그대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5. 죽음을 만나면 죽음과 놀고
문왕이 물었다. "민심을 어떻게 거두어들여야 천하가 나에게 돌아옵니까?" 태
공이 대답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만민의 천하입니다. 천하의 이
득을 만민과 함께 하는 자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득을 독점하는 자는 천하를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때가 있고 땅에는 재물이 있으니, 이를 사람들과 함께 나
누어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인이라고 합니다. 인이 있는 곳에 천하가 돌아가
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을 면하게 하고, 사람의 어려움을 풀어주며, 사람의 근
심을 구해주고, 사람의 급함을 건져주는 것은 덕입니다. 덕이 있는 곳에 천하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 하고 즐거움을 함께 하며, 그
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의입니다. 의가 있
는 곳에 천하가 돌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
며, 덕을 좋아하고 이를 따릅니다. 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 도이니, 도가 있는
곳에 천하가 귀의하는 것입니다."
[육도] [문도편]
갑오년(1594년) 4월 5일 저녁.
한바탕 소나기라도 뿌릴 듯 지뿌드드한 하늘이었다. 낮게 내려앉은 먹구름은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고, 날렵한 제비는 지면에 닿을 만큼 저공비행을 하며 간
간이 몸을 뒤치었다. 이영남은 채찍으로 흑마의 엉덩이를 더욱 세게 후려쳤다.
전주를 출발한 후부터 점심도 거른채 한달음에 달리고는 있지만 오늘 중으로 한
산도에 닿으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울긋불긋한 원경들이 휙휙 등뒤로 사라져갔
다. 말을 타고 이렇듯 신나게 달린 적은 드물었다. 수군에 배속된 후로는 늘 좁
은 군선에서 탁한 공기를 마시며 지내왔던 것이다.
이영남은 왼속을 돌려 허리춤에 감춘 도원수 권율의 밀서를 다시 한 번 확인
했다. 이순신이 세 사람의 녹명관(과거시험을 관장하는 관리) 중에서 이영남을
도원수에게 보낸 데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한산도에서의 별시 준비 현황을
보고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밀서를 교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영남은 마
음이 훈훈하고 뿌듯해졌다. 그를 분신처럼 믿는 통제사의 마음이 다시 한번 입
증된 것이다. 검붉은 빛이 도는 권율의 두툼한 입술이 떠올랐다.
"활쏘기만으로는 부족하니 병법을 묻게 해달라? 허허허, 역시 이 통제사는 빈
틈이 없구먼. 장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마당에도 격식을 갖추겠다 이 말
이렸다? 좋지 좋아! 세자저하께서도 새로 뽑힌 무과 급제자들이 제 이름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한탄을 하셨어. 허나 과제(과거 문제)에 병법까지 넣는다
면, 백 명의 합격자를 낼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전란중에 누가 병서를 제대로
읽겠는가? 어쨌든 수군 장수의 선발은 이통제사에게 전권을 주겠다. 다만 너무
엄격하게 봐서 급제자를 적게 내는 일이 없도록 유념하라고 전하라."
이영남 역시 권율과 같은 생각이었다. 수장을 뽑는 시험이므로 말을 타고 달
리면서 활을 쏘는 과제는 없애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과거를 나흘간이나 치른다
거나 마지막 날에 병법을 묻는 것은 지나친 듯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요
지부동이었다.
"올해만 해도 벌써 천여 명에 이르는 무과 급제자를 냈다. 천 명이나 한꺼번에
등과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장수의 자질이 부
족할 터. 그런 자들에게 군졸을 맡기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 특히 수군은
장수 한 사람의 잘못으로 군선 한 척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이백 여명에 이르는
장졸들이 한꺼번에 수장되는 것이지. 나는 통제영에 꼭 필요한 사람들만 뽑겠다.
그러니 녹명관들은 일체의 부정이 없도록 특별히 감찰하라. 내 말뜻 알아듣겠는
가?"
장수를 뽑는 과거에서는 특히 부정 행위가 많았다. 시험을 대신 치른다든가,
녹명관과 짜고 성적을 올려서 등재한다든가, 과제를 미리 알아내는 방법으로 많
은 이들이 합격했던 것이다. 이순신도 이영남도 그런 소문을 진작부터 듣고 있
었다.
백 명을 선발하는 이번 별시에는 이천여 명이 넘는 장정들이 모여 들었다. 임
진년에 수군이 거둔 연전연승의 신화가 널리 퍼졌던 까닭이다. 더군다나 이순신
이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을 직접 순시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자상하게 보살핀
결과 지원자가 예상 외로 늘어났다.
이영남은 비가 조금씩 흩뿌릴 즈음 고성 앞바다에 도착했다. 나대용이 판옥선
한 척을 이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의 어깨를 맞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도 못 오시나 했소이다."
"내일부터 과거가 시작되는데 녹명관이 빠져서야 쓰냐요?"
두 사람을 실은 판옥선이 높은 물살을 헤치며 한산도로 나아갔다. 굵은 빗방
울이 후드득후드득 상갑판을 두드렸지만 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통제사께서는 환후가 어떠하시오?"
이순신은 벌써 보름이 넘도록 시름시름 병을 앓았고, 공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돌림병은 아닌 듯하오만......."
나대용이 말끝을 흐렸다. 올해 정월부터 돌림병이 한산도를 완전히 뒤덮었다.
벌써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삼백여 명이 병마와 싸우느라 신음하고 있었다.
처음 이순신이 몸져 누웠을 때 장수들은 돌림병이 아닌가 염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방장으로 자기를 옮기자마자 돌림병에 걸려 석 달이 넘도록 고생하고
있는 어영담의 간병을, 이순신이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손수 하였던 것이다.
"어조방장께서는?"
나대용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달을 넘기기가 힘들 듯하오. 워낙 고령인 데다가 몸에 핏기가 하나도 없다
오.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소. 우리가 지금까지 승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조
방장이 미리 뱃길을 살폈기 때문인데......."
어영담은 경험이 얼마나 삶을 살찌우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
는 하삼도의 뱃길은 물론이고 해류의 흐름과 해저의 깊이, 철에 따라 바뀌는 어
류들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장수들은 출정하기에 앞서 어영담의 설명만
으로 전투를 벌일 바다를 완전히 이해했고, 그만큼 자신감에 넘쳐 왜선과 맞설
수 있었다. 특히 어영담은 걸쭉한 농담과 구수한 이야기로 장수들의 긴장된 마
음을 쉽게쉽게 풀어주었다. 장졸들은 이순신에게서 치밀함을, 원균에게서 용맹스
러움을, 이억기에게서 날카로움을, 권중에게서 총명함을, 신호에게서 엄격함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어영담에게서 삶의 여유와 넉넉함을 배웠던 것이다. 어영담
을 잃는 것은 삼도 수군의 두 눈이 뽑히는 것과도 같았다.
이영남은 자정이 가까워서야 운주당에 당도했다. 횃불을 밝힌 운주당에는 늦
은 시각인데도 장수들로 가득했다. 시험관인 통제사 이순신을 비롯하여, 전라우
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구사직이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참시관인 장흥부사 황세
득, 고성현감 조응도, 삼가현감 고상안, 옥포만호에서 웅천현감으로 자리를 옮긴
이운룡, 녹명관인 여도만호 김인영, 남도만호 강응표 등이 좌우에 앉아 있었다.
이들 중 먼저 권율의 공문을 내밀었다. 이순신은 단숨에 공문을 읽어내려 갔다.
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서렸다. 곁에 앉은 이억기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이까?"
이순신이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도원수께서 우리의 뜻을 받아들이셨소. 마지막 날에 병법을 물어도 좋다고 하
셨소."
장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 도원수가 통제사의 청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
까 걱정을 했던 것이다. 고상안이 헛기침을 하며 끼여들었다.
"수군만을 위해 특별히 별시를 응낙하신 도원수이십니다. 어찌 통제사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소이까? 이 달 초에는 수군들을 위해 탁주를 오백 동이나 보내지
않았소이까? 허허허."
수군을 위로하기 위해 분조에서 술이 전달된 것은 4월 3일 새벽이었다. 그날
삼도의 수군들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만취했다. 나대용의 보고에 의하면 장졸
들이 천 동이가 넘는 탁주를 마셨다고 한다. 이운룡이 맞장구를 쳤다.
"맞소이다.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육군과 수군이 서로를 믿는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외다."
고상안이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는 발걸음이 가볍고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인물로 소문이 자자했다.
"헌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소이다."
이순신이 고상안과 눈을 맞추었다.
"말씀해보시오."
"수군의 장수를 뽑는 별시의 시험관에 어찌하여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께서 빠
지셨소이까? 통제사를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충청수사, 경상우수사가 함께 시험
관이 되어야 구색이 맞는 것이 아닐는지......."
운주당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장수들도 진작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
다. 그러나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가 없었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는 고상안이 정면으로 그 일을 거론한 것이다. 이
억기가 수염을 쓸면서 고상안을 거들었다. 그 역시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현감의 말이 옳소. 마땅히 원장군도 시험관이 되어야 하오이다. 원장군이
이 자리에 참석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해하고 있었소. 자초지종을
듣고 싶소이다."
이영남이 목소리를 깔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러 장수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장이 자세히 말씀드리겠소이다. 애초에
별시를 준비할 때부터 통제사께서는 여기 계신 이장군, 구장군과 함께 당연히
원장군도 시험관으로 정하셨고, 소장이 지난달에 원장군을 뵙고 통제사의 뜻을
전했소이다. 헌데 원장군께서는 한사코 시험관을 맡는 것을 거절하셨소이다."
구사직이 물었다.
"거절했다? 그 까닭이 무엇이오?"
"원장군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소. 경상우수영은 왜 선단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형국이므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수군의 장수들이 모두 한산도에
모인다면 왜 선단은 이때를 노려 급습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경상우수영을
떠나지 않겠다. 원장군의 결심이 워낙 확고해서 어쩔 수 없었소이다. 여러 장수
들께서 널리 이해하시기 바라오."
이억기가 이영남의 설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장군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허나 지금은 왜 선단의 움직임이 미미하다고
들었소이다. 전라좌도의 판옥선단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한 후 원장군이 통제영
으로 온다면 큰일이야 있겠소? 지금이라도 원장군을 모시고 옵시다."
이영남이 이순신과 이억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미 도원수께 시험관과 참시관, 그리고 녹명관이 보고되었소이다. 과거가 바
로 내일인데 지금 다시 시험관을 추가함은 불가하오이다. 더구나 원장군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지금 이대로 별시를 치르고 나
서, 따로 원장군을 만나 그 동안의 자세한 경과를 설명하면 될 것이오이다."
이억기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내일부터 별시가 열린다는 것을 원장군이알긴 아는 것이오?"
"그...... 그것이 정확히는......."
이억기가 말꼬리를 잡아챘다.
"아니, 그럼 원장군께 별시를 치르는 일시도 알려주지 않았단 말이오? 참석하
지는 못하더라도 통제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오? 이렇
게 연통이 되지 않아서야 어디 함께 전투를 치를 수 있겠소?"
잠자코 장수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순신이 나섰다.
"우리 모두 원수사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하십시다. 별시에 불참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믿겠다는 뜻이 아니겠소? 물론 내일부터 과거를 시작한다는 사실
을 알리지 않은 것은 녹명관들의 실수일 것이오. 허나 다들 알다시피 세 명의
녹명관이 이천 명이 넘는 장정들을 일일이 챙겨야 했으니 그 일이 얼마나 힘들
었겠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십시다. 자, 그 문제는 이쯤에서 접고 나흘 동안의
일정이나 잡아보도록 합시다. 이현감! 준비는 되었는가?"
"예, 장군!"
이운룡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번 별시는 지난번 홍주의 분조에서 시행된 무과에 삼도
수군이 참여하지 못했기에 특별히 시행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수군 장수만을
뽑는 시험이오이다. 따라서 그 과제도 기존의 과제와는 차등을 두어야 하겠소이
다. 첫째 날에는 철전을 쏘고 둘째 날에는 편전을 쏘겠소이다. 셋째 날에는 판옥
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기와 바다 속에서 오래 버티기를 시험할 계획이오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무경칠서] 중에서 한 대목씩을 뽑아 병법을 묻는 것이외
다. 초아흐레 오후쯤이면 급제자가 가려질 것입니다."
이억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전이나 편전을 쏘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이니 별문제가 아닐 것이고, 판옥
선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것과 오랫동안 헤엄을 치는 것, 그리고 병법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등락을 결정짓겠군. 이 사실을 장정들에게도 널리 알렸
소?"
"헤엄을 못 치는 장정들과 까막눈인 장정들은 이미 귀향시켰습니다."
이순신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이대로 별시를 시행토록 합시다. 내일 진시(아침 7시)부터 시작할 터이니 모
두 편히 눈을 붙이도록 하시오. 소비포는 나를 따르게."
이순신은 운주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숙소인 별채로 향했다. 비는 더 이
상 내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영남이 물었다.
"소장이 지금이라도 원장군께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순신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오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청하고 싶진 않아. 지금 갔다
가는 괜히 자네 입장만 난처해질 수도 있고."
"그래도 내일부터 과거가 시작된다는 것은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차차 알게 되겠지. 자넨 내일부터 며칠 동안 밤을 꼬박 새워야 할거야. 정 그
일이 마음에걸리면 별시를 모두 치르고 나서원수사를 찾아가도록 하게. 지금은
내 곁에 있어. 알겠는가?"
"예, 장군!"
이순신의 따사로운 정이 느껴졌다. 이영남은 재빨리 허리춤에 숨겨왔던 도원
수의 밀서를 꺼냈다.
"도원수께서는 안녕하시고?"
"장군의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특히 중병을 앓으면 아니된다고 신신당부하셨습
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어조방장이 큰일이지......."
이순신은 권율의 서찰을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좋지 않은 소식이 적힌
듯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서찰을 다 읽고서는 무의식중에 끄응끙 하는 신음
소리까지 내뱉었다.
"무슨 일이온지요?"
"좌상 대감과 원수사가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군."
"일을 꾸민다고 하면?"
"부산을 치려는 것이겠지."
"좌상 대감이 도체찰사까지 겸하고 계시니, 세자저하의 응낙만 있으면 곧바로
군령이 떨어질 것이 아닙니까?"
"도원수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고 세자저하께서도 도원수에게 힘을 실어주고
계시니 쉽게 일을 벌이지는 못할 거야. 허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이
소식을 서애 대감께 아뢰는 편이 좋겠어."
"제가 다녀올까요?"
"아니야. 녹명관이 어딜 움직인다는 겐가. 날발을 보내면 돼. 자넨 걱정 말고
어서 가서 잠이나 청하게. 내일부터는 눈코 뜰 새도 없을거야."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보낼 서찰을 쓰기 위해 붓을 들 즈음, 이영남은 자리에
서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라 전주에서 한달음에 달려오느라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정신이 너무나도 맑아서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런저
런 생각을 하면서 어두컴컴한 운주당 뒤뜰을 잠시 거닐기로 했다. 원균이 내일
별시에 불참한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원장군은 별시에 불참함으로써 이통제사의 권위를 다시 한 번 깔아뭉개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삼고초려를 했다면 원장군이 시험관으로 참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조정에서도 원균
이 시험관에서 빠진 것을 알면 두 사람의 갈등을 공식적으로 거론할 것이다.
결국 원장군은 전출될 것인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구부정하게 어깨를 내린 사내가 뒤뜰
로 곧장 들어섰다. 왜놈의 간자인가? 이영남이 칼을 빼어 들며 소리쳤다.
"누구냐?"
검은 사내가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이영남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사내의
얼굴의 유심히 살폈다. 사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가서 자라고 일렀거늘 왜 여기 있느냐?"
끝이 갈라지면서 탁한 목소리. 통제사 이순신의 음성이 분명했다.
"아니, 통제사께서 어인 일이시옵니까?"
"어조방장에게 가는 길이다. 함께 가겠는가?"
이영남이 더욱 놀란 눈으로 만류했다.
"장군! 그곳에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장군께서는 삼도 수군의 중심이십니다."
이순신이 낮게 속삭였다.
"조용히 하게. 장졸들이 모두 깨겠네."
"장군!"
"어조방장이 오늘내일 하는데 나만 편히 몸을 누일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막아서는 이영남을 밀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돌림병에 걸린 군사
들만을 따로 모아 격리시킨 군막이 산 중턱에 있었다. 이영남은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의 뒤를 따랐다. 어영담의 숙소는 군막들 중에서 제일 앞에 자리잡고 있
었다. 이순신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군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희미한 촛불
아래 뼈만 앙상하게 드러낸 어영담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상체를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한 채 기침을 쏟아댔다.
"그대로 누우시오."
이순신이 가만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어영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장, 장군! 어찌 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이...... 늙은이, 여기서 죽으면 그
만인 것을. 돌아가십시오."
이순신이 보자기에 싼 것을 풀었다. 국화주 한 동이가 들어 있었다.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어주였다. 이순신은 은빛 잔
에 국화주를 따르며 정답게 말을 건넸다.
"어조방장, 언젠가 나랑 국화주 한 잔 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자, 이렇게
내 가져왔어요. 우리 이 밤이 새도록 국화주를 마십시다."
이순신은 어영담의 말라터진 입술로 술잔을 가져갔다. 어영담의 두 눈에서 눈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순신이 왼손으로 어영담의 머리를 안아 올렸다.
"자, 어서 입을 벌려요. 주상전하께서 조선 수군을 위해 특별히 내리신 술이라
오. 어조방장은 당연히 이 술을 마실 권리가 있소."
이순신은 잔을 기울여 어영담의 입에 술을 부었다. 국화주가 어영담의 헝클어
진 흰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순신은 술잔을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어영담의
수염을 닦아냈다.
"장군! 그만 하십시오. 돌림병이 옮습니다."
이영남이 뒤에서 이순신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이것 놔!"
갑자기 이순신이 팔을 휙 뿌리쳤다. 이영남은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순신의 두 눈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영담도 이순신을 만류했다.
"소...... 소비포의 말이 옳습니다. 이, 이제 가세요. 이 늙은이, 어주까지 마셨으
니 여......한이 없습니다."
이순신이 다시 자리에 앉아 어영담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까칠까칠한 손등이
마른 모래와도 같았다. 그 위로 이순신의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조방장, 그대가 내 곁에 있어야 해요. 그대가 없으면 나는 눈 먼 장님에 불
과하오. 남쪽 바다의 뱃길마다 묻혀 있는 슬픈 사연들을 모두 일러준 후에 눈을
감겠다고 하지 않았소? 아직 반도 듣지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세상을 버려서야
스겠소? 어조방장! 그대는 꼭 살아야 하오. 정만호가 죽은 지 몇 해나 되었다고
그대마저 내 곁을 떠나려는 것이오?"
"자...... 장군!"
어영담의 고개가 모로 떨어졌다. 잠시 혼절한 것이다. 이순신의 두 눈에서 눈
물이 철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영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이순신의 울
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울음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굵어지
다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보았느냐? 어영담은 곧 죽을 것이야, 죽는단 말이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군막에서 골골거리다가 맥없이 픽 쓰러진단
말이다. 아, 어디에서 어떻게 죽든 죽음이란 영영 이별이 아닌가. 이제 어영담의
넉살도 보지 못하게 되겠구나. 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과연 몇 명이나 내 곁에
남아 있을까?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아, 내 곁에 사신
이라도 앉아 있는 것인가. 내가 마음을 준 사람들은 모두 제 명을 누리지 못했
어. 회신 형, 요신 형, 녹둔도의 사랑스런 부하들, 임경번, 오형, 그리고 정운, 이
제 어영담까지. 다음엔 누구의 차례일까? 놔라. 소비포, 다음엔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어서 내려가라. 내게 붙은 죽음의 귀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랏, 어서 가!"
"장군, 진정하십시오.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맹세합니다."
"맹세? 함부로 내 앞에서 맹세하지 마라. 네가 죽음의 공포를 몰라서 하는 소
리이다. 누군가 네 목에 비수를 들이댄 적이 있느냐? 누군가 네 심장에 창을 겨
눈 적이 있느냐? 누군가 네 이름 석 자를 먹물로 지워버린 적이 있느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 쉽게 맹세를 하는 것이지. 나는 안다. 지금 어영담이 가
고 있는 그 어둡고 침침하고 외로운 길을,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길을. 아!
언제라도 되돌아 나오고 싶은 그 길. 나는 어영담을 빼내고 싶다. 영원한 절망의
늪에서 건져내고 싶어. 허나 나 역시 어리석은 인간이다. 내 몸 하나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나약한 인간이다. 기껏해야 국화주 한 잔 입술에 부어주는 것이 전부
로구나. 함께 보낸 그 많은 시간들의 값이 고작 국화주 한 잔이란 말이더냐. 허
나 나는 그에게 줄 것이 없구나. 없어, 이제는......"
이순신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간이 어영담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
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이순신은 생쥐처럼 다가가서 어영담의 가슴에 귀를 대곤
했다.
이제 이영남도 이순신을 만류하지 않았다. 돌림병에 옮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을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그는 다만 어영담을 조금이라도 이승에 붙들어매려는
이순신의 노력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순신은 은잔에 국화주를 따라서 어영담
의 입술에 붓는 것을 열 번도 더 반복했다. 마치 이승의 행복이 그 작은 술잔
하나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순신은 술잔을 기울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영담도
역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참으로 골이 깊게 패인 웃음이었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현재와 과거를 가로지르는 웃음이었다. 어느새 이영남의 두 눈
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이순신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바닥으로 눈
자위를 재빨리 훔쳤다. 그리고 이순신처럼, 어영담처럼 입술을 벌리고 씨익 웃어
보았다.
죽음 앞에서의 웃음. 이것이야말로 사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특권이었
다.
별시는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4월 6일과 7일의 활쏘기 시험은 이순신의 통솔 아래 엄정하게 치러졌다. 시험
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순신이 직접 철전과 편전을 한 순(다섯 발)씩 쏘았는데,
조금도 오차도 없이 모두 과녁에 꽂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모범을 보이자 장정
들도 마음을 굳게 먹고 더욱 열심히 시험에 응했다. 이천여 명의 응시자 중에서
천오백여 명이 탈락했다. 4월 8일에는 판옥선에서 뛰어내리기와 오랫동안 바다
에서 버티는 시험이 있었다. 판옥선에 오르자마자 멀미를 하는 이십여 명의 장
정들이 먼저 탈락되었고, 판옥선에서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십여 명의 장정들이
그 뒤를 이었다. 바다에서 버티기는 경쾌선 네 척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사방을
막아선 가운데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저마다 자신 있다며 바다로 뛰어든
장정들은 한식경도 지나지 않아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정오부터
신시(3시-5시)가 끝날 때까지 견딘 이백여 명에게 병법 문답 시험을 치를 수 있
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문답 시험은 4월 9일 오전부터 운주당 앞뜰에서 시작되었다. 시험관인 이순신
과 이억기, 구사직이 장정들을 상대로 각각 한 문제씩을 묻고 답을 들어 점수를
기록했다. 병서를 전혀 읽은 적이 없는 백면서생들이 먼저 추려졌고, 왜적에 대
한 불타는 적개심만 있을 뿐 군사들을 다룰 줄 모르는 장정들도 탈락되었다. 탈
락자 중 상당수는 전주에서 이미 한 번 고배를 마신 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주에
서보다 훨씬 시험이 까다롭다면서 녹명관에게 돈을 건네려고 했다. 그때마다 이
영남은 군령을 앞세워 그들을 잡아들인 다음 본보기로 곤장 열 대씩을 쳤다.
정오 무렵, 백 명의 합격자가 가려졌다. 이영남은 그들을 성적 순으로 갑.을.병
세 등급으로 나눈 다음 이름과 나이.직업.부명 등을 자세히 적었다. 장정들은 나
흘 동안 고된 시험을 치르느라 탈진한 상태였다. 지치기는 시험관이나 참시관,
녹명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흘 밤낮을 별시에만 매달리느라 제대로 쉬거나 잠
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히 맡은 바 소임을 끝마쳤다고 생각하니 흡족한 마
음이 들기도 했다. 장정들은 운주당 앞뜰에 옹기종기 모여서 최종 결과가 나오
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이영남이 장원을 발표했다.
"이번 별시의 장원은 거제 사람 강덕수!"
뜰 가장자리에 서 있던 수염부리 사내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구 척이 넘는 키
에 힘이 철철 넘치는 장사였다. 이영남이 계속해서 등과자를 호명하려는데 갑자
기 뒤뜰에서 나대용이 뛰어내려왔다.
"장군! 어조방장이......."
이순신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곁에 있던 이억기가 확인하듯 물었다.
"병사하였소?"
"그, 그러하옵니다."
이순신의 몸이 뒤로 휘청거렸다. 이억기와 나대용이 양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녹명관! 계속 읽게."
이억기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영남은 다시 등과자 명단을 읽어내려 갔다. 그러
나 이영남의 마음은 장수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이순신에게로 쏠려 있었다.
마침내 이영남은 함께 녹명관으로 일한 여도만호 김인영에게 등과자 명단을 넘
긴 후 득달같이 별채로 달려갔다. 그러나 섬돌 위에서 나대용이 그를 막아섰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라는 의원의 권고가 있었던 것이다. 이운용이 다가와서 귓
속말을 건넸다.
"통제사께서는 어젯밤에도 어조방장에게 갔었다는군. 혹시 병이나 옮지 않았는
지 걱정이오. 만약 통제사까지 몸져 눕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니겠는가?"
이영남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이렇게 덧없이 쓰러지실 분이 아닙니다. 통제사는 하늘이 내셨어요."
이운룡은 차가움을 잃지 않았다.
"허나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소. 방금 다녀간 의원도 돌림병일 가
능성이 크다고 했고."
"그놈이 누굽니까? 누가 그런 허튼 소릴 해요?"
이운룡이 눈을 부라리며 이영남을 나무랐다.
"조용히 하오! 우선은 이 소식을 원장군께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오. 이억기 장
군이나 구사직 장군도 원장군에게 파발을 보내라고 방금 은밀히 내게 말씀하셨
소. 그러하니 소비포, 그대가 가줘야겠소."
"왜 소장이 가야 합니까? 이현감께서 직접 가십시오."
이운룡이 이영남을 노려보았다.
"통제영에서 거제까지의 뱃길은 누구보다도 소비포 그대가 잘 알고 있지 않
소? 그대가 늘 원장군과 통제사의 연통을 담당했으니 이번에도 수고를 해주시
오. 제장들도 모두 그대를 추천했다오. 지금 곧 떠나도록 하오."
섬돌 위에 서 있는 나대용과 눈길이 마주쳤다. 나대용 역시 속히 다녀오라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조방장 어영담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
가는 삼도 수군의 군권을 쥐고 있는 통제사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뒷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통제사가 유고일 때
는 삼도의 수사들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영남은 마음을 고쳐먹고 곧 경쾌선에 몸을 실어 거제도 가배량으로 향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파도가 거세어졌다. 산달도와 추원도 사이를 지나
자마자 날랜 군졸 둘을 먼저 가배량으로 보냈다. 심상치 않은 바다의 기운이 그
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고 조급하게 했다.
가배량 앞바다에 이르니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한 척이 빠르게 접근해왔다. 이
물에서 원사웅이 크게 손을 흔들어댔다.
"형님!"
이영남의 경쾌선으로 건너온 원사웅이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원균이 경상우
수사로 내려온 후부터 원상웅은 줄곧 이영남을 친형처럼 믿고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원사웅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여유가 없었다.
"원장군께서는 우수영에 계시느냐?"
"그렇습니다. 허나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속히 원장군을 모시고 통제영으로 가야 한다."
"형님! 형님께서 미리 보낸 전령들도 제가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님께서
는 아직 형님께서 가배량으로 오신 것을 모르시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통제영의
소식이야 이억기 장군의 명을 받은 전령만 하나 남겨두면 그만일 것입니다. 지
금 형님이 가배량에 내리면 아버님의 칼에 죽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매우 진노하
고 계십니다."
"원장군께서 날 죽인다고? 그 이유가 무엇이냐?"
원사웅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거야...... 형님께서 더 잘 아시는 일 아닙니까? 어쨌든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잠시 몸을 피하셨다가 다른 날에 다시 오십시오."
그러나 이영남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삼도의 수군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판국이야. 원장군과 나의 사사로운 앙금 때
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 나는 꼭 원장군을 만나야겠다."
원사웅은 여러 말로 이영남을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순풍을 등에 업은
경쾌선은 더욱 빠르게 가배량으로 접근했다. 배에서 내린 이영남은 경상우수영
의 깃발이 펄럭이는 원균의 막사로 지체없이 달려갔다. 막사 앞에 서 있던 호위
병들이 이영남을 막아 섰다.
"비켜랏! 내가 누군 줄 모르느냐? 소비포권관 이영남이니라."
호위병 중 하나가 이죽거렸다.
"장군이 누군 줄 잘 알고 있습죠. 원장군을 배신하고 통제영에 붙어먹은 소비
포권관 이영남 장군이 아니오이까?"
"이놈이!"
이영남이 순식간에 호위병의 턱을 갈겼다. 주위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이영남
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따라온 원사웅이 싸움을 뜯어말렸다.
"물러서! 이게 무슨 짓들인가?"
그제야 원균이 군막을 걷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이영남을 발견하고 도끼눈을 떴다. 이영남은 그의 앞으로 두세 걸음 다
가온 후 무릎을 꿇고 인사를 건넸다.
"소비포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사옵니까?"
원균이 벼락같이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묶어랏! 곤장을 칠 것이니라."
호위병들이 달려들어 이영남을 포박했다.
"원장군! 소장의 말을 먼저 들어보십시오. 촌각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그러나 원균은 들은 체도 않고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이영남은 양팔을 큰 대
자로 벌리고 엉덩이를 깐 채 형틀에 묶였다. 원균이 갑옷에 투구까지 차려 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핏빛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
다. 원균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통제영에서 별시가 있었다지?"
이영남이 고개를 치켜들며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지난 초엿새부터 오늘까지 과거를 치렀습니다."
"네놈도 물론 참여했으렷다?"
"녹명관으로 뽑혔습니다."
"호오, 녹명관이라! 허면 별시를 치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겠구먼."
"장군! 지금은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옵고......."
"닥쳐랏! 묻는 말에 대답만 하렷다! 날 제껴두고 과거는 잘 치렀느냐?"
"장군을 제껴둔 것이 아닙니다. 장군께서 스스로 시험관 맡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내 분명히 시험관을 맡지 않겠다고 네게 일렀느니라. 허나 그것은 한
가하게 삼도의 수사들이 한산도에 모여 술잔치나 벌일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어.
왜놈들에게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 헌
데도 이억기와 구사직은 열흘 전부터 통제영에 모여 술판을 벌였다지?"
"그것은 권도원수께서 특별히 수군을 생각하셔서......."
원균이 코웃음을 쳤다.
"수군을 생각해서 술을 내렸다? 이영남, 이노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권도원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는 결코 수군을
위해 술을 내릴 위인이 아니다. 제 휘하의 장졸들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좀생이
지. 진주성이 무너질 때도 뒷짐만 지고 있었느니라. 그렇다면 왜 술을 내렸겠는
가? 그것은 왜군을 치지 않으려고 이통제사와 뜻을 합치려는 수작이다. 나 원균
을 막으려는 음모야. 허나 제깟 놈들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부산을 친다. 나는
꼭 부산에서 왜놈들의 피맛을 봐야겠다. 도원수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내 뜻을 꺾
진 못해."
"아닙니다, 장군. 오해이십니다."
"오해? 아직도 이통제사를 편드는 것이냐? 이영남! 내가 너를 좌수영에 보낸
까닭을 아느냐?"
"......."
"이통제사에게 내 마음을 분명하게 전하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너를 보낸 것
이다. 헌데 오히려 이통제사에게 설득 당해 나를 배신하고 경상우수영을 배신했
어.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삼도의 수사들이 모두 시험관에 뽑혔다면 응당 나
원균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네가 왜 몰랐겠느냐? 이통제사와 너는 고의로
나를 따돌린 것이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별시를 치르는지 일언반구도 귀띔해주
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하느니라. 너는 이통제사의 간자가 분명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살피려고 이곳으로 왔느냐? 이통제사가 시킨 일이 무엇이냐? 이실직
고하렷다!"
이영남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장군! 장군께서 어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사옵니까? 간자라니요? 장군을 위
해 목숨까지 걸었던 제가 이통제사의 간자라니요?
원균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검
법을 배웠고, 육진에서의 무용담을 밤을 꼬박 새우면서 들었고, 남해바다를 함께
누비며 맹장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이제는 끝이다. 원균은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영남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니 눈물이 양볼
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장군! 차라리 저의 목을 베십시오. 허나 먼저 제 말부터 들으십시오. 이통제
사의 병환이 중하십니다. 오늘 오후에 조방장 어영담이 돌림병으로 죽었사온데,
그 직후 이통제사께서 혼절하셨습니다. 급히 통제영으로 가셔야만 합니다."
"닥쳐랏! 저놈이 또 나를 기망하려 드는구나. 매우 쳐랏!"
"예이!"
퍼억퍽,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곤장을 치는 군졸들의 양손에 더욱 힘이
실렸다. 이영남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악!"
비명을 듣고 원균이 짧게 명령했다.
"그만!"
벌써 스무 대도 넘게 곤장을 맞고 축 늘어진 이영남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
다. 원균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지친 육신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이통제사를 잘 알아. 육진에서도 약골인 것처럼 행세했지만 전쟁터에서
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싸우곤 했지. 이통제사는 또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야.
백 명의 새로운 장수들을 거느리고 부산을 치자는 제안을 하기도 전에 앓아누워
버린 것이지. 한 열흘만 지나보면 모든 게 확실해질 게야. 이통제사는 아무렇지
도 않게 툴툴 털고 일어날 것이고 그땐 또 내게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청하겠지.
이영남, 이놈아! 제발 정신을 차려라, 이젠 이통제사의 꼭두각시 노릇은 그만두
란 말이다. 아직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 줄 모르겠느냐? 누가 너를 지켜줄 장
수이고 누가 너를 이용할 장수인 줄 구별하지 못하겠어? 바보같은 놈!"
이영남이 힘에 겨운 듯 겨우 고개를 들었다.
"통제사를 향한...... 노, 노여움을 푸십시오. 장군! ......통제사의 마음,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통제사께서는 늘...... 장군을 위하고 계십니다."
"도저히 안 되겠구나. 옛정을 생각해서 곱게 다루려 했는데 끝까지 이통제사의
편을 들다니. 오늘로 너와 나의 인연은 끝이니라. 또다시 경상우수영을 넘본다면
왜놈의 간자와 똑같이 취급하여 목을 베겠다. 에잇! 저놈이 잘못을 인정할 때까
지 매우 쳐랏!"
"예이!"
곤장이 엉덩이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이영남은 고통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르
고 몸부림을 쳤다. 이순신과 원균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지나쳤다.
멀리서 끼룩끼루룩 대는 갈매기 떼가 보였다.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대한
파도가 갈매기 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색색가지 물고기들이 동시에 수면 위
로 튀어올랐다. 겹겹이 늘어선 섬들 사이로 고기잡이배들이 숨바꼭질을 했다. 어
느새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머리를 풀
어헤친 사내가 동쪽 하늘 끝에 나타났다. 사내는 서쪽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동쪽 하늘로 달려가기를 반복했다. 헝클어진 머리카
락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정신없는 질주에 넋을 잃고 있을 때 누군
가가 그의 왼쪽 어깨를 짚었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왼쪽 어깨를 짚으며 이야기를 푸는 사람은 어영담뿐이었
다. 이영남은 손을 들어 그때까지도 질주하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누구죠?"
어영담이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린 뒤 대답했다.
"허허허허! 미친놈이지, 뭐긴 뭐야. 어떤 날은 제 마누라를 잃어버렸다고 달리
고, 그 다음날은 제 이름을 잃어버렸다고 달리고, 또 그 다음날은 제 나이를 잃
어버렸다고 달린다네. 매일 달려도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없는데도 말이야. 나
같으면 그냥 자빠져서 잠이나 자겠네. 아등바등 오간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
가 있겠는가? 자네도 이 참에 마음을 정하게. 왔다갔다할수록 자네만 미친놈 취
급을 받는 거야. 지금까지 자네가 공들여 쌓아온 탑들이 다 무너지는 게지. 아무
도 자넬 붙잡지 못하네. 설령 자네의 어머니라고 해도 말일세. 더 이상 질주하지
말고 자네도 한 자리에 정착하도록 해. 그게 우리네 인생이지, 알겠는가?"
"차라리...... 어조방장을 따르면 안 될까요?"
어영담이 그의 등을 툭 쳤다.
"늙은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죽음을 만나 그놈들과 어울려 놀 마음이
생기면 그때 오게나. 죽는 게 두려울 땐 열심히 살아야지, 안 그런가? 허허허허."
6. 겁장에 대하여
경상우수사 원균이 장계하였다.
"10월 3일 진시에 주사를 동원하여 적진이 있는 장문포와 강어귀에 줄지어 세
워놓고 먼저 선봉을 시켜 성에 육박하여 도전하게 하니 적의 무리가 시석을 피
하여 성안에 숨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서 몸을 숨기기도 하였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적이 총을 쏘고 대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
가 주먹만하였고 삼백여 보나 멀리 날아왔으며, 화력이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했
고 설비는 매우 흉험하였습니다. 적진 근처에 마초가 무수히 쌓여 있었으므로
신은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직하는 왜병을 쏘아 쫓고 불을 질렀는데 타는 불꽃이
밤새도록 하늘에 닿았습니다. 문제는 육병이 아니기 때문에 육지에 있는 적을
주사로써는 다시 어떻게 끌어낼 방법이 없어 매우 통분스러웠습니다. 신은 다시
통제사 이순신, 육병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에게 상의하여 수륙으로 합동 공격
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 출신 사수 열다섯 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
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서른한 명을 선발해
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7년 10월 8일 임자조
갑오년(1594년) 10월 1일 아침.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는 칠십여 척의 판옥선과 칠십여 척의 협선이 깔려 있
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합함대였다. 그들은 장문포에
정박하고 있는 왜 선단을 치라는 도체찰사 윤두수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왔다.
왜적은 장문포 모래사장에 군선을 정박하고 그 앞에 뗏목으로 방책을 친 후 꼼
짝도 하지 않았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바다 건너 칠천도로 물러났지만 원
균은 끝까지 장문포 앞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날이 밝자마자 이억기가 원균의
지휘선으로 찾아왔다.
"원장군! 적을 치는 일이 쉽지 않겠소이다. 도대체가 바다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놈들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상륙을 하면 되어."
원균이 잘라 말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명나라와 왜의 강화회담을 지켜보자던 조선의 방침이 바뀐 것은 지난 8월 홍
주에 있던 분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면서부터였다. 도원수 권율을 지지하던
광해군이 상경한 후 하삼도의 실질적인 군권은 도체찰사 윤두수의 수중으로 들
어갔다. 그때부터 윤두수는 원균에게 밀서를 보내 결전을 준비시켰고, 김덕령.곽
재우 등 의병장들에게 수군과 합동으로 거제도에 상륙할 채비를 갖추라고 일렀
다. 도원수 권율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출정할 수 없다는 공문을 보내며
계속 버텼다. 조정에서도 강화회담을 좀더 지켜보자는 입장이 우세했다. 윤두수
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징계를 올린 결과 드디어 9월 초 도
첼찰사의 책임 아래 왜선을 격퇴시키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원균은 고개를 돌려 칠천도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순신의 함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놈들은 오합지졸일 뿐이야. 문제는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이다. 고성
에서 꼼짝도 않는 권율은 옆집 불구경 하듯 지켜만 볼 것이고, 이순신은 거제도
에 결코 상륙할 수 없다면서 언제라도 칠천량으로 달아날 궁리만 하겠지. 그들
의 소극적인 태도가 은연중에 장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 속전속결로 일
을 끝마쳐야 한다. 충청병사 선거이는 이순신과 교분이 두터우니 나를 돕지 않
을 터이고, 의령에 있는 경상순변사 이빈이나 전라병사 이시언도 권율의 명을
따를 것이다. 새로 충청수사가 된 이순신은 통제사의 수족과 같으니 제외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남는가? 우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가 있다. 비록 이순신에게도 호감을 보이고 있으나 눈앞의 왜적을 보고 물러설
위인이 아니다. 이억기와 단단하게 연합함대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으
로 도체찰사의 명령을 받자마자 단숨에 칠천량으로 달려온 김덕령과 곽재우가
있다. 그들이 이끄는 팔백 명의 의병은 거제도의 왜군과 죽기살기로 싸울 각오
가 이미 섰다. 이순신과 함께 칠천량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밤을 지낸 것
만 해도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살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팔백 명의 의병만으
로는 거제도에 상륙하여 왜군과 맞설 수 없다.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의 장졸
들이 마땅히 함께 상륙해야 하리라.
"이수사! 좀이 쑤시지 않소? 우리가 왜선을 통쾌하게 격파한 적이 언제였소?"
이억기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통제사와 원장군을 모시고 함께 싸웠던
임진년의 해전들도 벌써 희미한 옛 기억이 되어가는군요."
원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허나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대첩을 이룰 것이오. 거제도의 왜군을
몰아내고 나면 곧 가덕도의 왜군을 칠 수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부산으로
진격하는 일만 남소. 왜장들의 수급을 거두어 주상전하의 한과 설움을 씻어드립
시다. 육진에서처럼만 싸우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땐 여진족 백 명과
우리 군사 한 명의 싸움이 아니었소? 그래도 우린 이겼소."
감회에 어린 듯 이억기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랬지요. 그땐 정말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이기겠다는 일념만으로 싸웠소이
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나날들이지요."
원균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통제사는 장문포의 왜적들을 몰아낼 생각이 없는 듯하오. 권도원수도 마찬가
지인 것 같고. 자칫 시간을 끌다가는 적의 내습을 받을지도 모르오. 그러니 우리
만이라도 김덕령, 곽재우와 힘을 합쳐 적을 밀어붙이는 것이 어떻겠소?"
"하지만 이번 전투의 주장은 권도원수이십니다. 또한 해전은 이통제사의 군령
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끼리 임의로 처결할 수 없소이다."
원균이 바짝 당혀 앉으며 이억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원균의 눈은
육진에서 종종 출몰하던 백두산 호랑이의 바로 그 눈이었다. 이억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 원균이 목숨을 걸겠소. 이수사는 뒤를 따르기만 하시오. 도와주시오."
"아니됩니다. 소장은 통제사의 군령을 따르겠소이다."
"이수사!"
"원장군께서 먼저 이통제사께 화해를 청하십시오. 조선 수군을 대표하는 두 장
수가 다투어서야 어찌 승리를 거둘 수 있겠소이까? 통제사의 인품이야 원장군도
잘 알지 않습니까? 결코 먼저 손을 내밀 위인이 아니니, 원장군께서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신다는 마음으로 먼저 굽히십시오. 지는 것이 이
기는 것이오이다."
원균이 혀를 끌끌 찼다.
"이제 보니 이수사 그대도 싸우기를 원치 않는구려. 그렇다면 좋소. 지금이라
도 당장 통제사에게 돌아가시오. 나 혼자서라도 왜놈들과 대적하겠소. 거제도는
경상우수영 관할이니 전라우수사가 끼여들 까닭이 없지. 이곳까지 와서 죽을 이
유가 없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이까?"
이억기가 화를 벌컥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휭하니 자신의 지휘선으
로 돌아갈 분위기였다. 그 순간 기효근이 급히 달려와서 아뢰었다.
"통제사의 전령이 오고 있사옵니다."
"통제사가 오면 될 일이지 전령은 또 무슨 전령이야?"
원균이 짜증을 냈다. 전령을 실은 통제영의 경쾌선이 빠르게 원균의 판옥선으
로 접근했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이물에 서 있었다.
소비포!
원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영남은 지난번에 맞은 곤장으로 두 달이 넘
게 병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이순신이 전령으로 보낸 것은 아직
도 불편한 그의 걸음걸이를 보고 지난 일을 반성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몰라
보게 야윈 이영남이 지휘선으로 건너왔다. 이억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소? 아직 누워 있어야 할 터인데."
"원장군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시길, 장수가 있을 곳은 전쟁터라고 하셨지요.
소장은 그 말씀을 따른 것뿐입니다."
원균은 숨이 턱 막혀왔다. 이영남은 그가 가장 아끼고 위하던 경상우수영의
장수가 아니었던가? 헌데 이제 이순신의 전령이 되어 이순신의 말투까지 흉내내
고 있는 것이다. 이따위 비아냥거림도 이순신에게 배운 것이더냐?
원균은 이영남이 내민 서찰을 낚아챘다.
전라우수사와 경상우수사 보시오.
나는 충청수사와 함께 영등포로 가겠소. 우리가 그곳 상황을 알려올 때까지는
선공하지 마시오. 의병들을 상륙시켜서는 결코 아니되오.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먼저 언급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군 경력으로 보나 당연히 원균이 이억기보다는 선배였다. 어쨌든전라좌수영과
충청수영의 군선들이 영등포로 이동한 것은 원균에게 다시없는 기회였다. 서찰
을 읽은 이억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군령을 따르겠다고 전하라!"
이영남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휭하니 돌아섰다. 원균은 표표히 멀어지는
경쾌선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
들을 잃은 기분이었다.
원균은 다시 한 번 이억기를 설득하고 나섰다.
"임기응변이 없으면 군사들을 부릴 수 없고, 용맹이 없으면 적과 맞서 싸울 수
없으며, 진법을 모르면 군사들을 제대로 배치할 수 없다고 했소이다. 이수사! 어
차피 통제사의 함대는 오늘 밤 늦게야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오. 내 이미 장문포
에 간자를 넣어 그곳 지리를 소상히 알아냈으니 공격을 하도록 합시다."
이억기는 요지부동이었다.
"통제사는 먼저 공격하지 말라 하셨소이다."
"어허! 먼저 치지도 말라, 상륙하지도 말라, 허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
엇이오? 여기 이대로 떠서 왜군들이 영등포로 몰려가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
가?"
"방금 왜군들이 영등포로 몰려간다고 하셨소이까?"
"그렇소.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왜군들은 산을 넘어 영등포로 달려갈 게요.
그럼 통제사의 군선들이 위태로울 수도 있소이다. 저들은 지난 겨울부터 거제도
에 은거했으니 지름길을 모두 익혔을 것이고 칼 한 자루만 들고 냅다 뛰면 금방
영등포에 당도할 게요. 그러니 우리가 장문포를 치는 것이 통제사에게도 이롭소
이다."
이억기는 탁자에 펼쳐져 있는 거제 근방의 해도를 유심히 살폈다. 원균이 지
휘봉으로 장문포와 영등포를 짚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통제사와 그대, 그리고 나는 모두 육진에서 피 흘리며 싸운 전우가 아니오?
통제사와 나의 쟁공은 여인네들의 쟁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우리는 모두 주
상전하의 어명의 받들어 저 섬나라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 이곳에 왔소이다.
통제사나 그대가 조선의 장수이듯이, 나 원균도 마찬가지라오. 모르긴 해도 이수
사 그대가 통제사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통제사를 아끼고 있소이다. 지
금쯤 통제사의 함대가 영등포로 향했다는 것을 왜군의 척후가 알아냈을 것이오.
시간이 없소. 이 전투는 통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나 원균을 위한 것도 아니
오. 우리는 모두 주상전하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들이고. 저들에게 주상전하의 위
엄을 보입시다."
"알겠습니다. 허나 조금이라도 패색이 보이면 지체없이 군사를 물려야 하오이
다."
원균이 이억기의 양어깨를 꽉 붙들었다.
"물론이오!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장졸들을 아끼고 사랑하오."
원균이 큰 소리로 기효근에게 군령을 내렸다.
"출정 준비를 하라. 그리고 호익장군 김덕령과 홍의장군 곽재우를 속히불러들
여라."
둥둥둥둥, 결전의 북이 울렸다. 김덕령과 곽재우를 태운 판옥선이 원균의 지휘
선으로 다가왔다. 원균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들였다. 김덕령은 스물여덟 살의 동
안이었지만 키가 구척이고 힘이 장사였다. 분조에 가서 광해군으로부터 직접 호
익장군이란 군호까지 받은 그는 이번 전투에 참여하는 의병의 주장이었다. 부장
으로 참가한 곽재우는 홍의장군이란 별명답게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
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달릴 수 있는 체력을 지
녔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짙은 눈썹 아래의 안광이 남달리 빛을 뿜었다.
원균이 미리 마련한 전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때가 왔소이다. 의로운 군사들이 섬나라 오랑캐를 싹 쓸어버릴 절호
의 기회이니 하늘의 뜻을 좇아 반드시 왜적을 섬멸하도록 합시다. 우선 판옥선
과 협선들이 좌우로 벌려 서서 이곳, 뗏목으로 방책을 세운 곳까지 접근하겠소.
군선들을 뗏목과 최대한 가까운 양쪽만에 정박시킬 테니 김장군과 곽장군은 즉
시 의병을 이끌고 상륙하시오."
곽재우가 침착하게 물었다.
"왜놈들이 조총이나 대포를 쏘지는 않겠소이까?"
곽재우는 수기치인과 출처의리를 중시하는 남명 조식의 외손서로 문무에 두루
능한 위인이었다 그는 전투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녔고, 각 전
투마다 왜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전술이 있었다. 섣불리 나아가
적을 치기보다 물러나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나 필승의 확신이 서고서야 군사들
을 이끄는 성품이 통제사 이순신과 흡사했다.
"걱정 마시오. 전라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이 총통들을 모조리 발사하여 엄호하겠
소."
원균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김덕령이 거들먹거리며 원균을 거들었다.
"곽장군, 너무 걱정 마시오. 내가 선봉에 설 터이니 곽장군은 내 뒤만 따르시
오."
"이것이 지금 누가 선봉에 서고 누가 뒤를 따를 것인가를 가르는 문제요? 잘
못하면 언덕에서 쏘아대는 조총에 우리 군사들이 전멸할 수도 있소이다."
곽재우가 화를 버럭 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전투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나
이가 한참이나 아래인 김덕령이 주장이고, 자신이 그 휘하의 부장이라는 것부터
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원균이 곽재우를 다독거렸다.
"곽장군의 말씀이 옳아요. 신중함을 잃어서는 아니되오. 허나 너무 걱정 마시
오. 그대들이 상륙하면 나도 곧 뒤를 따르겠소."
"우수사께서 직접 상륙하시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곽재우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소.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이수사도 상륙할 것이오. 또한 판옥선의 궁
수들도 남김없이 장문포에 내릴 것이오. 그러면 병력에서도 우리가 결코 뒤지지
않소."
"선봉은 소장이오이다. 기억해두시오."
김덕령이 주먹을 치켜든 후 자리를 떴다. 그러나 곽재우는 다시 한번 해도를
꼼꼼히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퇴로는 어딥니까?"
원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퇴로라니? 우리가 패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허나 만약을 대비해서......."
원균이 핀잔을 주었다.
"배에서 내려 왜놈들과 맞서다가 만에 하나 물러설 일이 있으면 다시 배로 돌
아오면 그만이오. 장군은 그것도 모르시오?"
곽재우가 원균을 쏘아보았다.
"곧이곧대로 물러서서는 아니되오이다. 조총은 가공할 무기요. 우와좌앙 후퇴
하다가는 쏟아지는 탄환에 몰살당하기 십상이오이다."
이억기가 곽재우의 편을 들었다.
"그것은 곽장군의 말씀이 옳소. 둔덕을 끼고 배를 비스듬히 대어 부챗살을 펴
듯 군사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원균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어차피 오늘 해가 넘어가기 전에 장문포는 우리 차지가 될
테니까."
마침내 출정의 북소리가 드높게 울려퍼졌다.
김덕령의 의병을 실은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이 앞장을 서고, 곽재우의 의병을
실은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장문포 입구에 쳐놓은 뗏목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하늘을 뚫을 듯한 괴성이 터져나오면서 천자총통, 현자총
통, 지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양쪽 언덕에 날
아가 박혔고, 곧이어 궁수들이 화살을 비오듯이 쏘아댔다.
의병들은 구척 장신의 김덕령을 필두로 판옥선이 해안에 닿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의 기운을 북돋웠다. 곽재우의 의병
들도 그 뒤를 따랐다. 모래사장을 달려 솔숲으로 뛰어들 때까지 왜군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오이다. 장군! 아무런 저항도 없습니다."
기효근과 우치적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원균은 그들의 염려를 간단히
무시했다.
"겁을 먹은 모양이지. 자, 우리도 상륙한다. 상륙!"
갑옷과 투구를 고쳐 쓴 원균이 배에서 내렸고, 활을 어깨에 두른 궁수들이 우
르르 뒤를 따랐다. 원균이 이끄는 오백여 명이 궁수들이 솔숲으로 들어서는 것
과 동시에 장문포의 왼쪽 언덕에서부터 총성이 들려왔다. 그곳은 소나무로 완전
히 뒤덮인 데다가 천자총통에서 발사된 포탄도 미치지 못할 만큼 거리가 멀었
다. 조총의 탄환도 원균이 상륙한 곳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겁먹지 마라. 저 총탄은 참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느니라. 돌격!"
원균은 총성을 듣고 뒷걸음질치는 군사들을 독려했다. 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장문포의 오른쪽 언덕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연달아 터져나왔다. 왼
쪽에서 조총으로 시선을 끈 후 오른쪽에 숨겨두었던 대포를 발사한 것이다. 순
식간에 솔숲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조선의 장졸들이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
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놀리는 사이, 칼을 빼어든 왜군들이 수풀에서 불쑥 모습
을 드러냈다. 활로 맞서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왜군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지 의병과 궁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퇴각, 퇴각하라!"
곽재우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원균이 달아나는 의병들의 목을 베며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두려워 마라!"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우치적과 기효근이 원균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
다.
"장군! 속히 배에 오르십시오. 이대로 있다간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우선 이 솔숲을 벗어나야 하오이다. 곳곳에 왜놈들이 암수가 가득해요.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원균은 눈을 크게 뜨고 솔숲을 훑어보았다. 기효근의 말대로 솔숲은 적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함정이었다. 곳곳에 웅덩이가 패어 있었고 곰이나 노루를 잡
는 덫이 깔려 있었다. 의병과 궁수들은 웅덩이에 빠져 작살에 심장을 찔렸고 덫
에 걸려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채 목이 잘렸다. 왜군들은 공중 그네를 즐기는
원숭이 무리처럼 칼을 휘돌리며 자유롭게 솔숲을 휙휙 옮겨다녔다.
원균은 하는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정신없이 솔숲을 벗어나서 모래사
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왜군은 솔숲에 숨어 계속 조총을 쏘아댔다.
완패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전라좌수영과 충청수영의 함대가 장문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냇다. 영등포 근해를 맴돌면서 왜군의 동정을 살피다가 돌아오는 길
이었다. 장문포의 패전을 눈치챈 이순신이 원균과 이억기, 그리고 김덕령, 곽재
우 등을 통제영의 지휘선으로 불러들였다.
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충청병사 선거이가 오른편, 충청수사 이순신이 왼
편에 자리잡고 앉았으며 그 뒤에 순천부사 권준, 소비포권관 이영남, 군관 나대
용, 이언량 등이 나란히 섰다. 이순신은 원균을 비롯한 네 사람이 앉을 자리를
치우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휘선에 옮겨 타기가 무섭게 나대용과 이언량에
게 포박을 명했다. 원균은 나대용의 손길을 뿌리치고 눈을 부릅뜬 채 이순신에
게 따지고 들었다.
"이것이 무슨 짓이오? 한 나라의 수군절도사를 이렇게 다루어도 된단 말이
오?"
이순신은 흥분한 원균을 무시하고 이억기에게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내가 꼼짝 말고 장문포 앞바다에 있으라고 군령을 내리지
않았소?"
이억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군령을 어기고 전투에서 패한
장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순신은 김덕령과 곽재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누가 그대들에게 장문포 상륙을 명하였소? 권도원수이시오?"
"아니오이다."
곽재우가 대답했다.
"권도원수도 아니고 통제사인 나도 군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그대
들을 죽음의 땅을 몰아넣었단 말인가?"
원균이 참다못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시오. 나 원균이 오늘 전투를 이끌었다는 것은 통제사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것이 아니오? 괜히 다른 사람들을 문책하여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일
랑 마시오. 그리고 나는 의병들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지 않았소. 왜군을 몰아
내고 장문포를 탈환하기 위해 하늘이 주신 기회를 잡으려 했을 뿐이오. 복병을
살피지 못해 작은 패배를 당했지만 전투를 벌인 것은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
오."
이순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작은 패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감히 군령을 어기고 군사들을 함부
로 내몰다니, 그러고도 그대가 조선의 수군절도사인가?"
원균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통제사처럼 싸우지도 않고 돌아온 것보다는 백 배 낫소. 그대가 통제사의 자
리에 오른 뒤 제대로 왜군과 맞선 적이 있소? 주상전하께서는 왜군과 싸우라고
그대를 통제사에 임명한 것이오. 헌데 그대는 어명을 어기고 개인의 안위에만
급급하고 있소. 그러고도 그대가 조선 수군을 책임지는 장수라 하겠소?"
"군령을 어기고도 할 말이 남았는가? 여봐라! 당장 저 죄인을 포박하라!"
나대용과 이언량이 다가서자 김덕령이 그들을 밀치며 막아섰다. 원균이 장검
을 빼어들고 소리쳤다.
"함정을 판 건 왜놈들만이 아니었어. 통제사! 이 모든 게 그대가 판 함정이었
군.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덫에 걸려들 줄 알았는가?"
"어서 포박하지 않고 무엇하는 게야?"
김덕령이 이순신과 원균을 번갈아 노려보며 싸움을 말렸다.
"이게 무엇하는 짓이오이까? 언쟁은 겁쟁이 문신드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제 보니 수군 장수들도 좀생원처럼 굴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려. 전투에서 질 때
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것이지, 한 번 패했다고 죽이려 든다면 이 나라에 남아
날 장수가 어디 있겠소?"
이억기도 나서서 이순신을 설득했다.
"아직은 전투중이오이다. 오늘 일은 통제영으로 돌아가서 가려도 늦지 않소이
다. 소장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두렵소이다. 통제사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
번 한 번만 원수사의 일을 눈감아주세요."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하던 곽재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통제사는 군령을 어긴 원수사를 벌해야 한
다는 입장이고 원수사는 만회할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니, 통제사께서 원수사에
게 벌을 내리되 다음 해전에서 원수사가 얼마나 전공을 거두는가로 그 벌의 경
중을 가립시다."
맞고함질을 해대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모두 곽재우의 제안이 합
당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순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소. 앞으로 남은 전투는 원수사가 책임지고 치르도록 하시오. 승리하면 오
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지만, 만약 또다시 패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오."
원균이 오른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나 원균은 결코 그대처럼 변죽만 울려대는 겁장이 아니라오. 내일부터 벌어지
는 전투에서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후퇴한다면 내 목을 가져도 좋소. 장문포를
탈환하지 못하면 바다에 쳐넣어도 좋소. 허나 통제사! 오늘 일을 잊지 마시오.
내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백 배 천 배 갚아주리다.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그대의
죄상을 만천하에 낱낱이 밝히리다."
갑오년(1594년) 10월 29일 밤.
대청에서 퇴궐 준비를 서두르던 영의정 유성룡은 편전과 동궁으로부터 의논할
일이 있으니 퇴궐하지 말고 속히 오라는 전갈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먼저 편전으로 향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조정이 환도한 직후에는 불타버린 궁궐을 대신하여 월산대군과 양천도정 이성
의 옛집을 중심으로 선조가 묵을 행궁을 꾸미느라 바빴다. 곧이어 군사들을 체
계적으로 양성할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장정들과 그들을 훈련시킬 장수들을 직접
선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의 강화 내용을 알아내기 위
해 지속적으로 간자를 부산에 파견했으며, 명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군량미와
옷, 때로는 무기까지 구하러 뛰어다녔다. 거기다가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대신들도 공공연하게 두 사람 모두 전출시키고 새로운
인물로 수군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유성룡은 이 모든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
하고 있었다. 새벽에 등청하자마자 시작된 공무는 밤이 늦도록 끝날 줄을 몰랐
다.
"아뢰어주게."
내시감 윤환시가 유성룡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영의정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선조는 읽고 있던 서책을 덮고 옥잔에 담긴 냉수로 목을 축였다. 몸에 열이
있는지 밤만 되면 갈증이 더했다.
"좌상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영상을 불렀다."
선조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성룡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사헌
부, 사간원, 홍문관의 대간들은 장문포 패전의 책임을 물어 윤두수를 파직시키라
는 상소를 10월 21일부터 하루가 멀다 않고 올리고 있었다. 유성룡은 10월 23일
비변사에서 이 상소들을 검토한 후, 패전의 책임을 좌의정 윤두수에게만 물을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대간들은 윤두수의 독단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거제도에서 크게 패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일이라면 오늘 오시에 이미 살피지 않으셨나이까?"
점심을 먹기 전에 오랫동안 윤두수에 고나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
에서 유성룡은 문관 출신의 도체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도원수 권율 혼
자서는 하삼도의 관군과 의병들을 적절하게 지휘할 수 없다는 것 등을 지적했
다.
"그때 영상은 제대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과인은 영상의 속마음을 듣고 싶다.
말해보라. 좌상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
전하께서 내게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유성룡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조는 답답
한 듯 고개를 약간 들며 눈을 꾸욱 감았다.
"왜 장문포 전투에 대한 장계를 경상우수사 원균이 올렸는지 영상은 아는가?
응당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장계를 보내와야 하지 않는가? 틈만 나면 장계를
올리던 이순신이 이번에는 왜 침묵을 지키는지......."
유성룡도 그것이 의문이었다. 장문포 전투는 윤두수의 명령에 따라 도원수 권
율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수륙 합공으로 벌인 것이므로, 당연히 이순신이
수군을 대표해서 장계를 보내와야 했다. 그런데 10월 8일에 올라온 장계는 경상
우수사 원균의 것이었고, 10월 13일 권율의 장계가 도착한 후에도 이순신의 장
계는 끝내 오지 않았다.
"경상우수사의 장계에 따르자면, 이순신과 권율이 장졸들을 제대로 통솔한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처음부터 장문포 공격을 반대했다지?"
"그러하옵니다. 허나 어찌 장수된 자가 전쟁터에서 딴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
니까? 곧 이순신의 장계가 도착할 터인즉 그때가 되면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영상은 원균의 장계를 읽고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그동안 올라온
이순신의 장계에는, 원균이 늘 전공을 탐내면서도 연합 함대의 후미에서 전투를
관망만 하였다고 되어 있다. 헌데 이번에 원균의 장계를 보니, 원균이 선봉에서
싸웠고 오히려 이순신이 미적거린 듯하다. 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
인가? 만약 원균의 장계대로 이순신이 이렇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어명을 어긴
것이다. 어명을 무시하는 장수는 결단코 살려둘 수 없다."
유성룡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살려둘 수 없다? 허면 이순신을 잡아
들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것인가?
"이순신과 원균 둘 다 조선 수군에 꼭 필요한 장수이옵니다."
"영상! 다시 한 번 말해보라. 장문포를 친 것 자체가 잘못인가? 지난 23일 1비
변사에서 낸 글을 보니, 육지에 둔거하고 있는 적은 쉽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거제의 왜적부터 번갈아 교란시켜 물리친 후에 부산까지 해로를 뚫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하옵니다. 장문포를 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사옵니다. 다만
대를 살피지 못한 것이 패인이옵니다."
선조의 질문이 집요해졌다.
"때를 살피지 못했다? 누가 때를 살피지 못했단 말인가? 윤두수인가?"
"좌상은 명령만 내렸을 뿐 구체적인 전황은 몰랐을 것이옵니다."
"허면 고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권율인가? 칠천도로 물러나기만 한 이순
신인가? 장문포에 상륙 작전을 편 원균, 이억기, 김덕령, 곽재우인가?"
"전투를 관장한 장수는 도원수 권율이니 그가 가장 책임이 크옵니다. 다음으로
는 군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못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도 책임이 있사
옵니다."
"원균은?"
"도원수와 통제사의 군령을 어기고 무리하게 상륙 작전을 편 경상우수사 원균
에게도 책임이 있사옵니다."
"나서서 싸운 자에게도 책임이 있고 물러나서 때를 살핀 자에게도 책임이 있
다면, 영상이 말하는 그 때는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유성룡은 할 말을 잃었다. 쏟아지는 선조의 질문은 그를 미궁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윤두수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권율이나 이순신도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하시
는 것일까? 아니될 일이다. 권율과 이순신이 물러나면 전라도의 방어선은 무너
지고 만다.
"전하! 지금까지 수군이 거둔 승첩에 비하자면 이번 패전은 지극히 작은 일이
옵니다. 중벌을 기다리는 저들을 격려하여 주시옵소서."
"그냥 묻어두고 지나가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선조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잘잘못을 가리기 힘들 때는 감싸고 지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나 이미 장문포의 패전은 명나라에까지 소식
이 전해졌으니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간들이 벌써 아흐레나 계속 상소를 올리고 있다. 이를 그냥 덮어둔다는 것
은 불가능하다. 좌상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좌상을 내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좌상은 몽진을 이끌었고 조정의 흩어진 공
론을 하나로 모은 공이 크옵니다."
유성룡은 윤두수의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을 그렸다.
환도를 마친 조정은 분란의 조짐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동서의 갈등뿐만
아니라, 동인이 다시 남북으로 갈라졌다. 이산해를 중심으로 뭉친 북인은 서인을
조정에서 몰아낸 후 당장 부산을 치자는 입장이었고, 유성룡을 중심으로 모인
남인은 서인과 협력하고 국정을 안정시킨 다음 왜와 명나라의 강화 회담을 천천
히 살피면서 앞날을 계획하자는 입장이었다. 만약 윤두수가 삭탈관직을 당해 귀
양이라도 떠난다면 서인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명분
을 앞세우는 부인의 세력이 강해져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다.
"내치지 말라? 허면 그대로 좌의정에 앉혀 두란 말인가?"
"아니옵니다. 마땅히 좌의정과 도체찰사의 직은 거두셔야 하옵니다. 허나 비변
사에 참여할 수 있고 조정의 대소사를 살필 수 있는 벼슬을 새로 제수하시옵소
서."
"품계를 낮추어서 과인의 가까이에 두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도체찰사의 경험을 살려 군정과 군기를 관장할 수 있는 종일품
판중추부사가 적당할 듯하옵니다."
선조도 윤두수를 내칠 뜻은 없었다. 유성룡이 일을 부지런히 찾아서 하는 신
하라면, 굵직굵직한 일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신하는 윤두수였다. 두 사람 중 하
나라도 없으면 조정이 제대로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정일품 좌의정에서 종일
품 판중추부사로 품계를 낮추면 패전의 책임을 묻는 것도 되고 여전히 군정을
살피게 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씻을 기회를 주는 것이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
었다.
"권율은 어떻게 한다?"
"부족한 점이 많사오나 지금 그만한 장수가 우리에겐 없사옵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그들 역시 꼭 필요한 장수들이옵니다."
"이순신과 원균도 그냥 두란 말인가? 참, 영상은 두 사람과 어릴적부터 함께
어울렸다고 했던가?"
"그,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겠구나. 세상의 소문처럼 둘은 모
순의 관계인가?"
"둘의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전하에 대한 충성심은 모두 바위
처럼 단단하고 바다처럼 깊사옵니다."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보낸 것은 영상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
이다. 과연 이순신은 임진년에 힘써 싸웠다. 허나 지금은 수군통제사가 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작은 승리 하나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혹 벼슬에 만족하여 전의
를 상실한 것은 아닌가? 원균이 이순신에 버금간다고 하니 한 번 그 자리를 바
꾸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유성룡이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전하! 원균은 군령을 어기고 장문포에 상륙한 죄가 크옵니다. 어찌 그를 수군
통제사로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닌 줄 아옵니다."
"영상은 또 때를 살피라고 하는구나. 과인이 보기에 원균의 잘못은 크다 할 수
없다. 오히려 장문포 패전의 책임은 원균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은 권율과 이순
신이 더 크도다. 만약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다면 이렇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났겠는가? 지난날, 육진에서 원균은 후퇴를 모르는 맹장이었다. 이제
그가 경상우수사로 세운 전공도 크니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가 어찌 아깝겠는
가. 과인은 글 잘하고 말 잘하는 이순신보다 과묵한 원균이 더 믿음직스럽다. 영
상의 생각은 과인과 다른가?"
"다, 다르지 않사옵니다. 전공이 있는 장수의 벼슬을 높이는 것은 마땅한 이치
이옵니다. 허나 지금은 패전의 아픔을 지울 때이옵니다. 좌상으로 본보기를 삼으
시고 도원수와 수군통제사에 대한 질책은 다음 기회로 미루시옵소서."
"지도(알았다)!"
편전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잠시 뜰에서 서서 숨을 골랐다. 선조의 날카로운
물음에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긴장이 풀리면서 조금 어지럽기까지 했
다.
"영상 대감! 몸이 불편하시옵니까?"
내시감 윤환시가 어느새 달려와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유성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빙긋 웃어 보였다.
"괜찮네. 바람이 찬데 자네나 몸조심하게."
유성룡은 말을 덧붙이려는 윤환시를 물리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광해군의 처
소로 갔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것을 보니 자시(밤 11시)는 족히 넘은 듯했다.
광해군과의 만남은 내일 아침으로 미룰 수도 있지만 왠지 오늘 꼭 만나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녹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시와 궁녀들을 멀리 물리친 후였
다. 8월에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상경한 후 둘만의 대면은 처음이었다. 유성룡
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도 있지만 광해군이 선조의 눈을 의식하여 몸조심
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보내 그를 찾은 것은 뭔가 긴히 의논할 일이 생
긴 것이 분명했다.
"좌상의 일은 어찌하기로 했습니까?"
광해군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유성룡이 편전으로 불려갔다는 소식을 접한 순
간, 그는 그 일이 장문포의 패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유성룡이 간명하게 답했다.
"판중추부사로 옮기기로 했사옵니다."
"잘되었군요. 좌상처럼 신료들의 마음을 묶을 수 있는 분이 조정에 있어야 하
오. 또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 그리고 경상우수사 원균에 대한 논의도 하였사
옵니다. 허나 그들에 대한 문책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사옵니다."
광해군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영상 대감! 아바마마께서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소?"
"걱정하셨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어떻게 두 장수의 불화를 그리도 소상히 알고 계실까요?"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들의 불화는 편전에서도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사옵고, 각자 올라온 장계를 통해서도......."
"영상 대감! 어찌 그리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오늘 아침 문안을 여
쭈었을 때 아바마마께서는 장문포 패전의 책임이 이순신에게 있다 하시었소."
"......."
"아바마마는 원균과 권율의 장계보다도, 대신들이 편전에서 논의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오. 두 장수의 불화를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하오면?"
"그렇소. 아바마마는 장문포의 패전을 다른 경로를 통해 살피셨음이 분명하오.
누군가 직접 거제에 다녀온 것이지요."
"누가 장문포에 다녀왔단 말이옵니까?"
광해군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이마를 두드렸다.
"어허! 정말 모르신단 말씀이오? 내시감 윤환시가 진작부터 사람을 풀어 장수
들을 은밀히 감찰하고 있어요. 권율이나 이순신에겐들 사람이 가지 않았겠소?"
"아아!"
유성룡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선조가 지나치게 자신감을 갖고 이
순신과 원균의 쟁공을 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러나 그 먼 곳까지 사람
을 보내 그들을 감시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바마마께서는 권율이나 이순신이 천하의 민심을 얻는 것을 경계하고 계시
오. 민심을 얻는다는 것은 곧 힘이 생기는 것이며, 힘이 생기면 딴마음을 먹을
수 있다 이 말씀이오. 만약 권율과 이순신이 힘을 합쳐 반역을 꾀한다면 조정으
로서도 속수무책이 아니겠소?"
"저, 저하! 도원수와 통제사는 역심을 품을 인물이 아니옵니다."
"알아요. 나도 두 사람을 믿소. 허나 아바마마께서는 그 누구도 믿지 않으시오.
특히 전라도를 관장하는 장수들을 늘 의심하고 계시다오. 정여립의 잔당이 남아
있다고 믿으시는 게지. 그리고 아바마마께서는 권율과 이순신이 영상 대감과 서
찰을 은밀히 주고받는다는 사실도 감지하셨을 것이오. 밤늦게 영상 대감을 청한
것은 아바마마의 진노를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기 위함이오."
"알겠사옵니다. 세자저하!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나이다."
유성룡의 목소리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자신을 위하는 광해군의 진심이 느껴
졌던 것이다. 광해군은 이제 세상을 읽는 눈을 지녔다. 호기만 앞세우며 감정에
좌지우지되던 임진년의 광해군이 아닌 것이다.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분석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으니, 당장 보위에 오르더라도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지난 4일에 순천부사 권준을 삭탈관직시키라는 사간원의 상소가 있었고, 권준
은 곧 벼슬에서 쫓겨났고. 기억하시오?"
"알고 있사옵니다.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영상 대감! 순천부사 권준은 통제사 이순신의 심복 중의 심복이오. 나도 그를
만나보았지만 결코 재물이나 탐할 위인이 아니오. 창녀까지 거느리고 음탕한 짓
을 했다는 말을 대감은 그대로 믿으십니까? 이 일은 단순히 권준을 탄핵한 게
아니오. 아바마마께서 이순신의 수족을 치기 시작하신 것이라오. 아마도 분조까
지 찾아왔던 권준을 첫 재물로 삼도록 내시감 윤환시가 나불거렸을 테지."
"......."
"영상 대감! 이참에 잠시 이순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앉
히는 것이 어떻겠소? 아바마마의 의심도 풀고 또 원균에게도 기회를 주는 편이
좋을 듯하오. 사실 그 동안 대감께선 지나치게 이순신만 감싸셨소. 그것이 대간
들의 눈에 곱게 미칠 리도 만무하고, 무엇보다 이순신에게도 몸을 추스르고 마
음을 닦을 여유를 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순신을 위해서라도 잠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바꾸자는 의견이었다. 그것은 광
해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요즈음 부쩍 원균에게 기회를 주자는 대신들이 늘어
났다. 윤두수의 입김이 작용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이 지나치게 몸을 사린
다는 비난이 점점 거세어진 것이다. 여수에서 한산도로 영을 옮긴 것은 왜진과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오히려 길
목만을 지킬 뿐 부산으로 진격할 채비를 갖추지 않았다. 분조를 따라 홍주까지
다녀온 이항복도 수군의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분위기를 바꾸
자는 것은 곧 통제사를 교체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순신 외에는 그 누구도 지금의 형세를 유지할 수 없사옵니다."
유성룡은 끝까지 이순신을 두둔했다. 광해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래요? 허나 영상 대감! 이것만은 명심하세요. 이순신이 통제사의 자리에 오
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아바마마의 눈밖에 날 것이오. 표적이 된다 이 말씀입
니다. 눈앞의 작은 일에 집착하다가 정작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요. 아바마마는
권율과 이순신, 둘 중 하나를 쳐서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려 하실 것이오. 말하자
면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금으로선 이순신이 권율보다 더 위험합니다. 권
율을 치면 대안이 없지만 이순신에게는 원균이라는 대안이 있지 않소?"
"원균을 전출시키면 되옵니다."
광해군이 가볍게 웃어넘겼다.
"허헛! 그렇군요. 그것도 한 방법이겠소. 허나 원균을 죽이지 않는 이상 언제
나 아바마마의 가슴속에는 이순신과 원균이 함께 들어가 있어요. 이순신도 사람
인 이상 언젠가는 실수를 범하겠지. 그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범하는 날이 곧 그
이 제삿날이 될 것이오. 나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유성룡도 광해군과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수군통제사의
자리가 바뀐다면 조선군의 지휘체계는 순식간에 붕괴된다. 권율과 원균의 사이
는 이순신과 원균만큼이나 나쁘지 않은가? 원균이 통제사가 되면 수군과 육군은
견원지간이 될 것이다. 전하의 의심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으로서는 이 길
밖에 없다. 권율과 이순신이 물러나는 날, 나도 관직에서 물러나면 그만이다. 내
가 조정에 말을 붙이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수군통제사를 바꾸지 못한다.
유성룡은 자정을 넘어서야 행궁을 벗어났다. 남쪽 하늘을 우러렀다. 많은 별들
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별똥별이 눈부신 빛을 발하
며 북동쪽 하늘을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 별이 떨어지는 자리
를 눈으로 가늠하며 이순신의 깡마른 얼굴을 떠올렸다.
7. 석별
북쪽에 갔을 때고 같이 일하고
남쪽에 와서 사생결단 같이 하였소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들고는
내일이면 우리 서로 나뉘겠구려
이순신, [증별선수사거이]
을미년(1595년) 5월 1일 아침.
비바람이 불었다. 이순신은 군선의 출항을 금지시킨 채 새벽부터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급히 처결한 공문도 없었다. 서애 유성룡이 보내온 한 잔의 녹
차를 마시며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동안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의 방향이 수시
로 바뀌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그의 자세는 조금도 동요도 없이 호수처럼 잔잔
하고 고요했다. 쉴새 없이 찾아오던 삼도의 수장들도 오늘따라 발길이 뜸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특히 사서를 가까이에 두었다. 공자의 [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는 수십 번을 읽어도 물리지 않았다.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인생은 유한하지만 그 삶의 향기는 수천 년을 이어온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도 그는 [사기]를 읽고 있다.
열전 중에서 노자와 공자가 만나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두 성인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자의 인간됨을 묻는 제자들의 질
문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달리는 들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낚을 수
있고, 날아가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다.그러나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
로 올라가니, 나는 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가 없구나. 오늘 내가 노자를 만
나보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용과 같은 사람!
잠시 서책에서 눈을 떼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처럼
물고기처럼 들짐승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도 있으리라. 공
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요순의 도를 설파할 때 노자는 주나라의 장서실에 틀어박
혀 그 나름의 도를 깨우쳤다. 공자에게는 공자의 길이 있고 노자에게는 노자의
길이 있듯이, 백면서생의 길이 따로 있고 장수의 길이 따로 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 길로 들어서기까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
나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가 아니던
가? 공자는 결코 노자의 삶을 따를 수 없고, 새나 물고기가 용의 승천무를 배울
수 없다. 청운의 길과 백운의 길이 있다지만 나의 생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노자와 공자의 만남과 헤어짐처럼 [사기]에는 수많은 위인들이 서로 만나 우
애를 나누거나 어깨를 겨룬 후, 쓸쓸하게 때론 잔혹하게 헤어진다. 유방과 항우
의 겨룸은 유방이 항우를 죽임으로써 끝이 나고, 소진과 장의의 겨룸은 장의가
소진의 합종책을 붕괴시킴으로써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나 이순신과 원균의 겨
룸은 어떤 종말을 맞을 것인가?
2월 29일, 이순신은 원균을 통제영으로 불렀다.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배설에게
우수영의 업무를 인계하기 위함이었다. 충청병사로 옮겨가게 된 원균은 눈물까
지 내비쳤다. 울분을 삭일 수 없었던 것이다. 기효근과 우치적을 비롯한 경상우
수영의 장수들은 눈을 부릅뜨고 이순신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난투극이 벌
어질 분위기였다. 이순신이 원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원장군! 눈물을 거두시오. 정삼품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서 종이품 충청도 병
마절도사로 옮기는 것이니 승진이오이다."
원균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울분을 토했다.
"통제사! 그대가 드디어 날 몰아내는군. 허나 이것이 끝이라고 착각하진 마시
오. 나는 돌아오겠소. 반드시 돌아와서 그대가 얼마나 추악한 인간인가를 만천하
에 밝히리다."
원균은 이순신이 마련한 주안상에 앉지도 않고 협선에 의지하여 쓸쓸히 통제
영을 떠났다.
결국 나와 원균의 다툼은 유방과 항우의 다툼처럼 한 사람의 삶이 끝날 때까
지 이어질 것인가? 나는 원균을 죽이고 싶지 않다. 내가 수군통제사가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의 겨룸은 끝이 났다. 장의가 소진을 누르듯이 나는 그를 전공
과 민심으로 눌러 이겼다. 허나 어리석게도 원균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충
청병사로의 전출은 그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이제 그와의 질긴 악연도 끝이
었으면 좋겠다.
회음후 한신의 열전을 찾아서 펼쳤다. 한신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손에 넣은
일등공신이면서도 끝내 유방에게 버림받았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
지면 훌륭한 활도 치워버린다. 적국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가 있는 신하를 죽인
다고 하였으니......."
지난밤에 도착한 서찰에서 서애 대감은 이 대목을 인용하였다.
전하께서 언젠가는 나 이순신을 버릴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간자들을
조심하라? 왜의 간자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사람을 보내 나를 은밀히 살피고
있다고?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어명을 따르지 않았으니 전
하께서 나를 믿지 못하시는 게다. 그러나 섣불리 나섰다가는 장문포에서처럼 낭
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도원수도 나와 뜻이 같고 서애 대감께서 조정 중론을 이
끌고 계시니 함부로 나를 내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군왕이 의심하는 장수의
최후는 비참하게 마련이다. 나는 한신처럼 죽고 싶지 않다. 이 전쟁이 끝나면 어
머니와 아내, 그리고 조카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아버지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싶
다.
끝내 전하께서 전황을 바로 살피지 않으신다면 어찌 될까? 왜군과 싸우는 것
보다도, 원균과 다투는 것보다도 더욱 힘든 것은 군왕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만
약 군왕이 마음을 바꾸어 장수에게 채찍을 휘두른다면 그 장수의 미래는 어찌
될까?
아! 나는 삶기는 줄 알면서도 뜨거운 솥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을까? 군왕과
장수가 서로 대립하면 십중팔구 장수의 목이 달아난다. 전하께서는 나의 목을
원하실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장수가 어찌 군왕과
겨룰 수 있겠는가.
"장군! 유용주이옵니다."
"들어오게."
이순신은 유용주에게 답장과 비단 보자기를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이것이?"
유용주가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물었다. 간혹 과일이나 생선을 함께 내어주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비단 보자기를 내민 적은 없었다.
"산삼이라네. 반드시 영상 대감이 드시도록 자네가 신경을 좀 써주게."
"알겠습니다."
유용주는 선선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격무에 시달리는 유성
룡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비바람이 심한데 꼭 오늘 가야만 하겠는가?"
"도원수께도 들러야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지요."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유용주의 손에 쥐어주었
다. 금반지였다.
"가지고 가게. 급히 쓸 때가 있을 거야. 천릿길을 오르내리느라 힘들 테니 그
걸 팔아 약첩이나 지어도 좋고......."
"아닙니다, 장군! 지난번에 주신 노잣돈도 많이 남았는걸요."
"가져가라니까. 내 마음일세."
유용주는 금반지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순신은 서애 유성룡의 건
강을 살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유용주는 배웅하고 다시 서책을 잡으려는데 낙안군수에서 조방장으로 자리를
옮긴 신호가 찾아왔다. 어영담이 죽은 후로는 항상 신호와 조선 수군의 제반 문
제를 의논했다. 환갑이 가까운 신호는 풍부한 경륜과 대쪽 같은 인품으로 이순
신을 충직하게 보좌했다. 어영담처럼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거나 여유롭게 하는
재주는 없었으나, 공무의 처리나 장졸들에게 상벌을 내리는 일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꼼꼼하고 명확했다. 그의 검무는 여전히 삼도 수군에서 제일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영남에게서 작별 인사차 오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소비포가 왜? 이별주는 초아흐렛날에 마시기로 했지 않소?"
"충청병영으로부터 당장 부임하라는 전갈이 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순신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그 동안의 전공을 인정받아 종사품 충청도 태안군수로
옮겨가게 되었다. 종구품 권관에서 종사품 군수로의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순
신은 그를 보내는 것이 못내 섭섭했으나 그의 앞날을 위해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 어디서든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면 재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
는 일이 있었다. 태안군수라면 충청병영에 배속되는 것인데, 충청병사 원균은 이
영남의 곤장까지 치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이영남이 다시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
까 걱정이었다.
조짐이 심상치 않아. 원균이 처음부터 이영남의 기세를 꺾으려는 것 같군.
"송별연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우리끼리라도 한 잔 해야 하지 않겠소? 술은 그것으로 합
시다."
폭우를 뚫고 이영남의 판옥선이 통제영에 닿았다. 정오가 가까웠지만 주위는
일몰 무렵처럼 어두컴컴했다. 이순신은 대청마루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수
이영남의 젖은 갑옷을 닦아주었다.
"장군!"
이영남이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가만 있게. 이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듯하이."
이영남은 고개를 숙인 채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이순신은 천천히
그의 손과 발, 배와 등을 훔쳐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조방장 신호가 술상을 내왔다. 이영남은 상 위에
놓여 있는 국화주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조방장 어영담의 입에
흘려넣어주던 어주, 바로 그 국화주였다. 이순신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자, 한 잔 하지."
이순신이 잔에 그득 술을 따랐고 이영남은 단순에 술잔을 비웠다. 침묵 속으
로 기와지붕을 두드리는 굵은 빗방울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이영남이 먼
저 입을 열었다.
"기현령을 참하실 것인지요?"
원균이 충청병사로 떠난 후 남해현령 기효근은 사사건건 새 수사 배설의 명령
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과 도원수 권율을 비방하는 장계를 조정
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었다. 배설은 이를 직접 도원수 권율에게 알렸고, 권율은
기효근을 엄히 벌해달라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보냈다. 이순신 역시 그 동안 기
효근이 범한 잘못들을 낱낱이 장계에 적었는데,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이영남이
직접 그 장계를 몸에 지니고 한양까지 다녀왔던 것이다. 기효근을 참하라는 조
정의 회답을 가지고 돌아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이순신은 그 회답을
극비에 부친 채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현령은 임진년의 남해 방화사건 때문에 장군께 앙금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허나 왜적을 만나면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는 장수이니 참형을 잠
시 늦추고 목숨을 구할 방도를 찾으십시오. 원장군이 떠난 마당에 기현령마저
목숨을 잃는다면 경상우수영 장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염려 말게. 기효근을 죽일 생각은 없어. 곧 그에 대한 처벌을 재고해달라는
장계를 올리겠네."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의 장졸들을 모두 포용할 작정이었다. 원균이 떠난 후 경
상우수영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새 수사 배설은 경상우수영의
억센 장수들을 휘어잡기에는 사람이 너무 여렸다. 더군다나 그는 전쟁터에서 지
나치게 몸을 사려 물불을 가리지 않던 원균과 대조를 이루었다. 원균의 공백을
메울 사람은 수군통제사 이순신뿐이었다. 그는 아량을 베풀 첫 번째 대상으로
기효근을 점찍었다. 기효근만 머리를 숙인다면 경상우수영의 장수들도 순순히
복종할 것이다.
신호가 이영남에게 술을 권했다.
"이제 그대의 나이도 서른이구려.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찾게 되었으니, 부디
이곳에서 세운 뜻을 만천하에 펴도록 하오. 특히 군수라는 직책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도 살펴야 하는 자리인즉, 늘 눈을 크게 뜨고 백성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오."
"감사합니다."
이영남은 신호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순신이 쌓여 있는 서책들 중에서
한 권을 꺼내왔다.
"이걸 가져가게. [유협열전]이야. 늘 머리맡에 두면서 읽도록 하게. 태안에서의
생활도 쉽지 않을 거야. 힘들 때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조선 수군을 생각해
주게. 강호읨 도리가 땅에 떨어졌어도 우리들의 의리는 영원하네.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이영남은 그 서책을 갑옷 속에 쑥 집어넣었다.
"장군! 떠나기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무엇이든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앞에 우상을 둔다고 합니다. 원장군께서는 늘 항우를 당
신의 귀감으로 삼으신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셨지요. 헌데 장군은 단 한 차례도
그런 말씀을 아니 하셨습니다. 장군의 우상은 누구인지요?"
이순신은 술잔을 비우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우상이라......! 맞는 말이야. 누구나 자신만의 우상을 갖게 마련이지. 지금은
비록 장수의 길을 가고 있지만 다시 생을 살 수 있다면 문신이 되겠다는 말을
언젠가 자네에게도 했던 것 같군. 문신 중에서도 사관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사마천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네."
"왜 하필 사마천이옵니까? 죽음 대신 치욕적인 궁형을 선택한 사람을."
이영남은 뜻밖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둥거렸다. 장수가 아니라 문신이라는 것
만 해도 예상을 벗어난 일인데, 궁형을 당한 사관이 자신의 우상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신호 역시 그 대답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
절한 표정이었다.
"치욕은 말일세......, 치욕은 일평생을 살면서 누구나 맛보게 마련이네. 문제는
그 치욕을 얼마나 훌륭하게 참고 일어서는가에 달렸지. 사마천의 심정을 헤아려
보게. 궁형을 당하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했겠지. 허나 사마천은 당당하게 [사기]를 쓴 후 자신의 이름
을 후대에 전했네. [사기]의 작가로서뿐만이 아니라 궁형을 당한 치욕도 고스란
히 후대에 전해졌어. 나는 가끔씩 치욕을 곱씹으며 골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사
마천을 상상한다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그의 눈물, 그의 의지, 그의
부끄러움, 그의 분노, 그의 사랑이 고스란히 [사기]에 녹아있지. 나도 사마천처
럼 나의 결핍과 불행을 극복하고 싶네."
"허나 사마천은 평생 그 결핍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장군께서
도 그런 삶을 원하시오이까?"
신호가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나도 행복을 원하오. 허나 장수의 길은 고통의 연속이 아니겠소? 내가
장수그이 길을 걷는 동안에는 결코 범부의 행복이 찾아들지 않을 것이오. 어찌
보면 다행한 일이지. 나는 글이 짧아 [사기]와 같은 탁월한 책을 쓰지 못하니,
대신 나의 삶 자체로 책을 쓸 작정이라오. 나 같은 장수가 하나쯤 있는 것도 재
미있지 않겠소? 허허허."
이영남은 이순신의 웃음이 공허하게 들렸다. 결핍과 불행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궁형을 당한 사람처럼 평생을 사는 것. 그것이 어찌 인간의 삶이라
고 할 수 있는가? 아무리 [사기]가 칭송을 받더라도 그것은 이미 사마천이 세상
을 떠난 후의 일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낼 수는 없다. 일부
러 해를 등지고 어둠만을 주시하는 인간. 이순신의 얼굴이 더욱 핼쑥하게 보였
다.
술자리는 무거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신호도 이영남도 이순신의 우상이 사
마천이라는 데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빗방울이 잦아들고 서쪽 하늘이 붉
게 물들 즈음, 이영남은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국화주는 이미 바닥이 났
고 세 사람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이순신은 이영남의 만류도 뿌리치고 부두
까지 배웅을 나왔다. 높은 파도가 부두에 묶인 판옥선들을 좌우로 심하게 흔들
어댔다.
이순신이 이영남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못 견디겠거든 언제든지 돌아오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너는 내 아들이
니까."
"장군!"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영남은 서둘러 배에 오른 후,
통제영이 아스라이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
는 눈물을 차마 이순신에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소비포로 돌아온 이영남은 간단하게 행장을 차린 후 충청병영이 있는 청주로
떠났다. 5월 2일 자정까지 원균이 거처하고 있는 청주산성에 도착하라는 군령이
내렸다. 삼가, 초계, 고령, 성주를 지나 상주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고령에서 왜
군 척후와 부딪쳤으나 왜군 둘을 베고 재빨리 자리를 피해 화를 면할 수 있었
다.
충청도로 넘어서자 군데군데 산성을 짓느라 분주한 백성들이 눈에 띄었다. 다
음달 말까지 기존 산성의 보수와 증축을 완료하라는 충청병사의 군령이 내렸던
것이다. 고된 노역을 피해 청주산성에서 도망친 일가족 다섯 명을 충청병사가
직접 붙잡아서 참했다는 풍문도 돌았다. 그 중에는 아홉 살 먹은 계집애도 끼여
있었다. 백성들은 충청병사의 잔혹한 형벌에 혀를 내둘렀다.
5월 2일 해시(밤 9시)가 되기 전에 청주산성에 닿았다.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에게 사령장을 보이며 충청병사가 있는 곳을 물었다. 문
지기는 퉁명스럽게 횃불 하나를 쥐어주고 왼편에 불쑥 솟아난 언덕을 가리켰다.
"저기를 넘어가보시유."
이영남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주위가 어두컴컴해
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산성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주성과 맞먹을 만큼 크고 넓은 성이었다. 언덕을 넘었
으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진흙과 돌무더기가 황량하게 쌓여 있을 뿐이
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을 발견했다. 반딧불이 만큼이나
작고 흐릿한 불빛이었다. 그 빛을 향해 열 걸음쯤 걸어 들어갔다. 거기 사람 하
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토굴이 있었다. 소나무와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것
을 보니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원장군이 이곳에 계신단 말인가?
토굴에서 육중한 체구의 사내가 휙 나섰다. 그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다.
"누구냐?"
이영남이 횃불을 앞으로 디밀며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넓고 둥근 얼굴, 밤송
이 수염, 눈 밑의 흉터, 그리고 한없이 무거운 저 장검. 틀림없는 원균이었다. 원
균 역시 이영남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왔는가? 하하핫, 그렇지 않아도 자넬 기다리고 있었어. 자 어서 안으로 듦세."
"이곳은......?"
이영남이 머뭇거리며 토굴 입구를 살폈다.
"내가 기거하는 곳이야. 왜? 멋진 군막이 아니라서 실망했는가? 백성들이 굶
어 죽는 판인데 그따위 호사를 부릴 수는 없지. 난 이게 편해. 육진에서도 이렇
게 이 년을 버텼다네. 산성이 완성될 때까지는 나와 함께 묵도록 하세. 자, 무엇
하는가, 어서 들어오지 않고."
이영남은 원균을 따라서 허리를 숙이고 좁은 토굴로 들어갔다. 입구는 좁았지
만 토굴 안은 의외로 넓고 아늑했다. 장정 열 명이 족히 들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낡은 탁자 위에 지도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지도
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성의 축성도려니 생각하며 흘낏 탁자 위를 훔쳐보
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것은?"
원균은 그가 앉을 수 있도록 마른 볏단을 내어주며 반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는가? 해도를 처음 보나?"
"장군께서 왜 해도를......?"
"보느냐고?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부산의 왜적을 쓸어버리지 않는 한 이 전
쟁은 계속될 것이야. 종전을 위해서는 삼도의 수군이 움직여야 하는데, 이통제사
는 결코 그 일을 맡을 위인이 못돼. 허면 누가 남는가? 바로 나 원균이 아니겠
는가? 머지않아 조정에서는 다시 나를 찾을 걸세.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좀 보
아두는 게야."
이영남은 원균과 해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원균은 언제라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할 수 있도록 만반의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굴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해도
를 살피며 장문포의 패배를 반성했던 것이다.
원장군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구나. 오히려 더욱 치밀해졌어.
불 같은 용맹함과 더불어 얼음같이 차가운 냉정함이 돋보였다. 당장 멱살을
쥐고 불호령이라도 내릴 줄 알았는데, 함께 해도를 분석하자며 그를 회유하고
있었다. 그는 원균의 변신이 놀랍고 두려웠다. 저 변신의 밑바닥에는 이순신을
향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으리라.
"시장하지? 우선 이걸로 요기나 하게."
원균이 탁자 밑에 놓아둔 바구니를 꺼냈다. 시커멓게 그은 고기가 반쯤 담겨
있었다. 바구니로 손을 가져가던 이영남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것이 무슨 고기입니까?"
원균이 바구니에서 고기 한 점을 입에 툭 던져넣으며 대답했다.
"쥐고길세. 이래봬도 주린 배를 채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육진에서 쥐고기
는 쇠고기만큼이나 귀한 거야. 자, 어서 먹어보게. 배고프지 않나?"
"쥐고길 먹을 만큼 군량미가 부족합니까?"
"아닐세. 쥐고기만 먹고 어찌 힘을 쓰겠는가. 보리밥이긴 하지만 그래도 곡기
를 끊지는 않고 있지."
"허면 왜 장군께서는 쥐고기를 드십니까?"
원균은 딱딱하게 굳은 살점을 씹어대며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난 이게 좋아. 내 입맛에 딱 맞거든. 육진에서는 하루가 멀다 않고 쥐고기 맛
을 보았는데, 경상우수사로 옮겨가서는 제대로 이 맛을 즐기지 못했어. 그래서
몸도 마음도 많이 약해졌던 게 사실이고."
이영남은 원균이 권하는 쥐고기를 끝내 먹지 못했다. 쥐고기를 씹는 원균의
얼굴에서 꼭 이순신을 이렇게 씹어 삼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읽어냈다.
누구보다도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를 좋아하던 원장군이 아닌가? 그런 그가
시커먼 토굴에서 홀로 지내며 쥐고기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결
핍과 불행의 테두리에 집어넣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통제
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이다. 충청병사의 자리에 안주하며 대충대충 삶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통제사에게 당한 삶의 첫 굴욕을, 치욕을 되갚아주기 위함
이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가.
그날 밤, 이영남은 토굴에서 원균과 나란히 누웠다. 새벽가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그는 이순신과 원균이 나란히 끌려나가 궁형을 당하는 꿈을 꾸
었다. 그리고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원균이 점점 이순신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했
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을미년(1595년) 9월 14일 아침.
새벽까지 내리던 비가 뚝 그친 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졌다. 군사들은
비를 피해 무기고로 옮겨두었던 활과 화살, 그리고 총통들을 상갑판에 올려놓느
라 분주했다. 습기를 제거하고 곰팡이를 죽이는 데는 따가운 가을볕이 최고였다.
이제 곧 가을걷이에 들어갈 터이고, 그러면 햅쌀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으리라.
군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새벽 어둠을 쫓으며 육지로 떠났던 경쾌선 한 척이 다시 한산도로 되돌아왔
다. 이물에는 조방장 신호가 서 있었고, 갑판에는 송별연에 쓰일 음식들이 그득
했다. 술은 물론이거니와 통째로 구워 먹을 새끼 돼지가 네 발이 꽁꽁 묶인 채
널브러져 있었고, 길게 벼슬을 늘인 수탉과 귀를 쫑긋 세운 토끼도 있었다.
어젯밤, 이순신은 돈을 아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영남이 태안으로 떠
났을 때도 며칠 동안 침울함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도가 지나쳐 벌
써 달포가 넘도록 술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아무리 만류를 해도 듣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급기야 구토를 하다가 피가지 쏟았다.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키다가도
술만 마시면 감상에 젖어들었고 넋두리도 심해졌다. 신호는 이순신의 과장된 웃
음과 울음들을 받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놀라운 사실은 통제사가 밤새 술
을 마시고도 새벽부터 공무를 보는 것이다. 통제사는 몸이 허락하는 한 늘 단정
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어제 쏟은 피 때문인지 이순신은 잠에 취해 깨어나
지 못했다.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그 누구도 그의 침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신
호는 경쾌선을 타러 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무엇이 통제사를 저다지도 힘들게 하는 것일까? 조선 수군은 통제사의 의도대
로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믿음직스럽게 뒤를 받
치고 있고, 충청수사 선거이는 통제사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고, 배설의 뒤를
이어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권준은 통제사의 오른팔이 아닌가? 비록 선수사가 병
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충청수사의 역할이야 왜군과의 해전에
서 지극히 미미하다. 이억기와 권준을 동시에 둔 통제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
일까? 도한 기효근, 우치적, 이운룡 같은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통제사의 군령
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맹세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통제사는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술 마시고 만취하고 눈물 비친다. 정녕 그의 문인 기질 때문일까?
부두에 닿으니 경상우수사 권준이 벌써 도착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순천부사에서 파직되어 근 여덟 달을 야인으로
지내던 권준은 이순신의 배려로 단숨에 정삼품 경상우수사의 자리에 올랐다. 이
순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원균에 대한 향수를 떨치지 못한 장졸들을 휘
어잡고 이순신 특유의 용병술을 충실히 따를 장수는 권준뿐이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권준은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비록 벼슬은 권준이 윗자리이지만 조방장 신호
는 여전히 통제사 이순신에 버금가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닷가를 걸었다. 신호는 권준에게 이순신의 근황을 자세히
알리고 대책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어제도 과음하셨소이다. 피까지 쏟으셨소."
권준이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요? 이제 자제하실 때도 되었는데......."
"어조방장이 죽었을 때도 그랬고, 이권관이 떠났을 때도 그랬고, 이제 선수사
때문에 또 저러시니 이러다간 큰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외다. 권수사께서
잘 좀 말씀드려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도 권수사의 충고는 들으시는 편이 아
니오?"
"원래부터 정이 많은 분이니 그렇기도 하겠지요. 허나 석별의 정 때문만은 아
닌 듯하군요."
"그렇다면 무슨 딴 이유라도 있단 말이오?"
권준이 고개를 돌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바다 건너 육지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조정에서 선전관들은 계속 오고 있나요?"
"그렇소이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오고 있소."
"물론 부산을 치라는 어명을 가지고 오는 것이겠지요?"
"그것 외에 또 무슨 일이 있겠소이까?"
"신장군! 장군은 조방장의 직무를 끝내면 어디로 옮겨갈 것 같나요?"
신호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난데없이 그딴 건 왜 물으시오? 낸들 알겠소? 나라에서 가라는 데로 갈 뿐이
지. 그것이 우리네 장수들의 운명이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장도 순천부사에서 경상우수사로 자리를 옮겼고, 신
장군도 낙안군수에서 조방장이 되었지요. 그리고 또 언젠가는 다른 벼슬 자리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허면 통제사께서는 어찌 되실까요? 어떤 자리로 옮겨갈
수 있겠는가 이 말씀입니다."
"통제사께서 가시긴 어디로 가신단 말이오? 통제사가 아니 계신 삼도 수군을
생각해본 적이 없소이다."
권준이 여전히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지요.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들의 생각
일 뿐이라 이 말씀입니다. 주상전하와 조정 대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볼까요?
수많은 장수들이 임지를 옮기고 있지요. 하물며 경상우수사였던 원장군도 충청
병사로 가 있지 않습니까? 헌데 전혀 자리를 바꾸지 않고 붙박이처럼 박혀 있는
장수가 둘 있지요. 바로 권도원수와 이통제사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면서
부산의 왜군을 쓸어내지 않으면 조정에서도 한 번쯤 의논을 하겠지요.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테고, 그 비판의 화살이 이통제사에게까지 미친다면
이통제사는 어떻게 될까요? 다른 자리를 얻어갈 수 있을까요?"
"음!"
신호는 침묵을 지켰다. 권준의 날카로운 지적이 폐부를 찌른 것이다. 권준의
설명이 이어졌다.
"통제사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답니다. 하늘과
힘겨루기를 하는데 몸과 마음이 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과 힘겨루기라......?"
신호가 메아리처럼 권준의 말을 따라 했다.
"통제사도 알고 계신 겁니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단 한
번의 추락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방금 죽음이라고 했소?"
"조선이 개국한 이래 통제사만큼 군권을 장악한 장수는 일찍이 없었어요. 통제
사만큼 민심을 얻은 장수도 없었고, 통제사만큼 어명을 거역한 장수도 없었지요.
그러니 시간을 끌면 끌수록 통제사의 추락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주상전하가
어떤 분이십니까? 정여립이 난을 일으켰을 때 전라도 사람의 반 이상을 잡아들
여 참형에 처한 냉혹한 분이십니다. 통제사께서 전라도의 민심을 얻고 있는 것
이 어쩌면 주상전하의 결심을 재촉할 수도 있을 테고......."
신호가 언성을 높였다.
"그만하시오. 우린 지금까지 우리보다 수십 배나 많은 왜선들과 맞서서 훌륭히
싸워왔소이다. 그런 우리가 어찌 버림을 받는단 말이오?"
"그렇지요. 장수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해왔지요. 허나 주상전하와 조정 대
신들이 통제사와 우리를 충직한 장수로만 봐줄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정치가들
은 곧잘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재만 따지지요. 삼 년 전에 우리가 거둔 빛나는
전과보다는 통제사가 삼도의 수군을 총괄한 지 벌서 이 년이 흘렀다는 점을 주
목한다 이 말씀이지요."
"정치를 하는 데도 도의가 있지 않겠소?"
"공맹은 그렇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정치의 도의는 요순 시절에나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공맹이 직접 천하를 주유하실 때도 정치의 도의는 땅에 떨어져
있었답니다. 지금 우리 조선에, 글쎄요, 우리 조선의 정치에 도의가 있을까요?
제 눈에는 이전투구로 보일 따름입니다. 조선은 결국 문신들이 법으로 장수들의
힘을 누르며 지금까지 버텨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한 장수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따지고 보면 위화도 회군도 고려의 조정이 장수를
너무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통제사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조정 대신들은 당연히 옛일을 떠올릴 것이에요. 권도원수야 문신 출신이니 어느
정도까지는 보호하려 들 터이고, 결국 표적은 이통제사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이것은 어명을 앞세운 문신들과 이통제사로 대표되는 장수들의 힘겨
루기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지금으로서는 주상전하를 감싸고 도는 저들이 백
번 유리하지요."
"그렇다면 속히 부산을 치는 것이 좋겠소이다. 부산을 쳐서 왜군을 싹 쓸어버
리고 나면 저들도 통제사의 전공을 인정할 게 아니겠소?"
권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설령 그럴 기회가 온다고 해도
선뜻 내키지 않는군요. 부산까지 쓸어버리면 통제사는 정말 이 나라를 구한 영
웅이 됩니다. 저들의 두려움도 그만큼 커지겠지요."
"그렇다면 어찌해야겠소?"
"지금으로선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단 한 번의 패전
이 그대로 치명타가 될 수 있으니까요. 통제사께서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삼도의 수군들이 통제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지요. 딴소
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사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전라우
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선거이, 경상우수사 권준. 이 체제를 일 년만 더 끈다면
통제사께서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선수사가 물러난다니 아쉽군요.누가
새로 충청수사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나 어디 선수사만큼이나 하겠습니까? 특히
충청수사는 충청병사 원장군과 자주 대면해야 하는 터, 그곳에서부터 균열이 생
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
충청병사 원균이 복귀의 꿈을 버리지 않은 것은 태안군수 이영남의 서찰을 통
해 신호도 잘 알고 있었다. 토굴에서 지내며 부산을 치게 해달라는 장계를 한양
으로 쉴 새 없이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 오는 충청수사 원균의 편을 든다
면 사태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권준이 운주당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조금만 더 지켜보도록 하지요. 독한 술은 그저 한순간의 위안일 뿐이지 않습
니까? 통제사께서도 곧 그 이치를 깨달으시고 예전의 자리로 돌아오실 겝니다.
다시 하늘과 힘겨루기를 시작하시겠지요. 그땐 신장군이나 제가 적극적으로 도
와야 합니다."
"그래야지요."
송별연은 유시(오후 5시)부터 운주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순신과 이억기, 선거
이, 권준 등이 푸짐한 주안상을 마주하며 삥 둘러앉았다. 다른 장수들의 술자리
는 운주당 앞뜰에 따로 마련되었다. 선거이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며 수사들
만의 자리를 부탁했던 것이다.
"몸은 어떠하시오?"
이억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괜찮소이다. 물러나 쉬면 곧 나을 테지요."
선거이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
았다. 전라병사였던 작년 초봄, 선거이는 합천 근처에서 왼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았다. 그 후로 치료를 소홀히 해서 지금은 다리를 심하게 절었고, 제대로 활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오른손까지 떨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풍이 이미 한 차례
지나갔다는 것이다. 긴장을 풀고 몸과 마음을 편히 해야지만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최전방의 장수로 지낸다는 것은 자살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올해
나이 마흔여섯. 세상을 버리기에는 아까운 나이였다.
"돌아오면 문전박대나 마시구려."
선거이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도 따라 웃었다. 권준이 말했다.
"충분히 푹 쉬시다가 돌아오십시오. 선수사께서 돌아오시면 그땐 소장이 휴가
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웃었다. 그러나 맥이 빠진 웃음이었다. 선거이가 안색을 고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나라에서 풍신수길을 왜왕으로 봉하는 책봉사가 온 것은 다들 알고 계시겠
지요? 유격대장 심유경은 여전히 부산에 머물고 있고, 책봉부사 양방형은 거창
까지 왔다고 하오. 한양에 머물고 있는 책봉정사 이종성도 곧 부산으로 내려올
것이오."
이억기가 물었다.
"소문대로 명나라의 사신들이 왜국으로 가겠군요. 허면 이 전쟁도 끝나는 것이
오이까?"
권준이 대답했다.
"풍신수길은 명나라의 책봉서나 받으려고 조선을 친 것이 아닙니다."
선거이가 술잔을 들이켰다.
"바로 보셨소. 최소한 조선 영토의 반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공주와 조선의 세
자를 볼모로 잡아야지만 풍신수길은 이 전쟁을 끝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전
쟁을 일으킨 풍신수길 스스로 명분이 서지 않을 테니까. 명나라의 사신들이 왜
국으로 건너가면 강화 회담이 결렬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이억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이 말씀이시오?"
선거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또다시 전쟁의 피비린내가 조선의 산하를 뒤덮을 것이외다. 저들은
지난 임진년보다 더욱 매섭게 몰아칠 것이오. 왜 수군은 몰라보게 강해졌소. 군
선도 우리의 판옥선만큼이나 늘리고, 해안의 왜성에 대포를 배치하여 수륙 협공
의 전술도 마련했소. 다시 해전을 벌인다면 지난 임진년처럼 우리가 쉽게 대승
을 거둘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므로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만 하오이다. 소장의
당부를 잊지 마시오."
이억기와 권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이순신은 거의 습관적
으로 술잔을 들이켤 뿐 침묵을 지켰다.
어느덧 둥근 달이 중천으로 떠올랐다. 권준과 이억기는 어색한 침묵을 피해
휘하 장수들이 있는 앞뜰로 가만히 내려갔다. 선거이와 이순신만이 덩그러니 남
았다.
"형님! 이 아우 그렇게 쉽게 죽진 않아요. 걱정 마십시오."
선거이가 이순신을 위로했다. 이윽고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녹둔도에서 함께 낚시하자던 약속 기억나는가?"
선거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형님도 참, 기억력도 좋으십니다그려. 그때가 언젠데 아직......."
이순신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전쟁이 끝나면 너랑 꼭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어. 임경번이랑 오형의 무덤
에도 가고."
"형님! 그때 일은 잊으십시오. 남해바다에서 거둔 수많은 승리는 그 작은 패배
를 깨끗이 씻고도 남습니다."
"나는 네가 부럽다!"
"허어, 삼도수군통제사인 형님이 제게 부러울 게 무엇이 있단 말씀입니까?"
"넌 물러나고 싶을 때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지 않느냐? 허나 나는 꼼짝달싹
못하고 이 전쟁에 매인 몸이다. 죽어서야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선거이가 눈을 부라렸다.
"형님! 무슨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형님의 어깨에 이 나라의 존망이 달
려 있습니다. 다시 그딴 말씀을 하시면 형제의 연을 끊겠어요."
"아, 알았다. 내가 실없는 소릴 했구나.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이번에 헤어
지면 다시는 널 보지 못할 것만 같다."
"사람 목숨이 어디 그렇게 쉽게 끊어집니까? 죽더라도 왜놈들을 모두 몰아낸
후에 죽어야죠. 그때까진 억울해서라도 이 아우, 눈을 감을 수 없답니다. 형님도
마찬가지시겠죠?"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이순신은 순순히 선거이의 말에 동의했다.
"형님! 떠나는 아우에게 술이나 한 잔 주십시오."
"그러자꾸나!"
선거이는 무심결에 풍을 맞은 오른손으로 술잔을 쥐었다. 역풍과 싸우는 돛단
배처럼 술잔이 좌우로 흔들렸고 가슴께로 술이 마구 튀었다.
"저런!"
선거이의 융복을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훔쳐내는 이순신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
렁했다. 선거이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형님! 그만두세요."
이순신이 그를 왈칵 껴안았다.
아, 너는 아프구나. 아우야! 너는 죽어가고 있구나.
"아니, 형니임! 체통을 지키십시오. 장졸들이 봅니다."
"죽으면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순신은 주문처럼 안 된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희신과 요신이 일찍 세상을
버린 후, 이순신은 선거이에게 친형제보다 더한 정을 쏟아왔다. 그런데 이제 선
거이마저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그의 눈물이 선거이의 어깨를 촉촉하게 적
셨다. 멋쩍어하던 선거이도 천천히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
들은 오랫동안 포옹을 했다. 북풍 몰아치는 육진에서부터 바닷바람 매서운 한산
도까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곁에 없을 때라도
그들은 늘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언젠가 꼭 만나리라는 믿
음도 잃지 않았다. 그런데오늘은 왠지 기약 없는 이별이란 생각이 들었다. 달빛
아래 빛나는 그의 눈물은 이런 참회를 담고 있었다.
아우야! 너는 아프구나. 네가 아픈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구나. 그리고
지금도 네게 해줄 것이 없구나. 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참으로 못난 형이로구
나. 못난 인간이로구나.
8. 잔인한 운명
성인이 병의 징후를 예견하여 명의로 하여금 일찍 치료하게 할 수 있다면 병
도 고칠 수 있고 몸도 구할 수 있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은 병이 많은 것이고
의원이 걱정하는 것은 치료방법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불치의 병이
있는 것이다. 교만하여 도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불치의 병이고, 몸을
가벼이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기는 것이 두 번째 불치병이다. 의식을 적절히 하
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불치병이며, 음과 양이 오장에 함께 있어 기가 안정되지
않는 것이 네 번째 불치병이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 불치병이며, 무당의 말을 믿고 의원을 믿지 않는 것이 여섯 번
째 불치병이다. 이러한 것 중 하나라도 있다면 좀처럼 낫기 어려운 것이다.
[사기], [편작창공열전]
병신년(1596년) 2월 5일 아침.
허균은 어제도 명월관에서 한호와 함께 밤새 술을 마셨다. 한호가 조정에서
그 동안의 글품으로 주먹만한 금덩이를 받아왔기에 돈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인시(새벽 3시)에 한호는 애랑을 끼고 별채로 나가면서 허균에게 의미심장한 눈
길을 보냈다. 그때까지 가야금을 뜯고 있던 청향을 여차하면 덮치라는 듯이었다.
허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듯 말듯 한 웃음을 흘렸다.
허균은 벌써 일 년 가까이 청향에게 정성을 쏟고 있었다. 다른 기생들은 그가
원하기도 전에 속곳을 벗어던졌지만 청향은 눈길 한 번 허투루 주지 않았다. 그
가 다른 기생들과 동침을 할수록 청향의 태도는 더욱 싸늘해져갔다. 돈이나 패
물로도 그녀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콧방귀를 뀌며 딴 여자를
찾아갈 터이지만 그는 청향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내음 탓이로다.
이제 갓 열여섯 살이 된 청향에게는 여인네의 어지러운 살내음이 아니라 꽃
내음, 나무 내음, 풀 내음이 났다. 그 내음은 그녀가 뜯는 가야금 가락에 얹혀
그의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또한 청향은 맑은 눈을 지녔다. 그녀는 그 큰 눈을 똑바로 뜨고 허균의 말에
또박또박 반박을 했다. 말씨름이라면 조선에서 제일 간다고 자부하는 허균이지
만 청향 앞에서는 할 말을 잃기 십상이었다.
청향은 허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부르면 낮이든 밤이든 나아와서 가야금을
듣고 춤을 추고 술을 따랐다. 그러나 마음만은 결코 열지 않았다.
"날 마다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물음에 청향은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해는 마세요. 나으리가 싫은 게 아니랍니다. 다만 저는 제가 사랑하는 분에
게 첫정을 드리고 싶사와요."
"그 첫정을 내가 받을 수는 없느냐?"
"글쎄요. 나으리 주위엔 꽃들이 너무 많아서 두렵답니다. 한 번 꺾인 후론 다
시 나비를 못 볼 것도 같고."
한호는 그런 허균이 측은했던지 애랑을 불러 청향을 강제로라도 허균에게 넘
기라고 독촉했다. 그러나 애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재작년 그애가 처음 왔을 때 밤골 김판서가 눈독을 들였죠. 흥정을 끝내고 머
리를 올리는 일만 남았는데, 청향이가 머리를 올리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뭐예요. 목을 매서 죽으려는 년을 겨우 살려냈죠. 그 후론 아무도 그애에
게 함부로 못한답니다."
가야금 소리가 멎었다. 허균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청향은 가야금을 저
만치 밀어두고 물러가려는 듯했다.
"벌서 가려고?"
청향이 다시 방긋 웃으며 주안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고목처럼 꼼짝 않고 계실 건 또 뭐예요? 남은 힘들여
가야금을 뜯는데 정성을 봐서라도 칭찬 몇 마디 해주실 수 있잖아요?"
"보고 있었느니라, 네가 뜯는 가야금 소리를! 눈을 감고서야 볼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
"나는 눈을 감고 많은 것을 보느니라. 핏덩이 아들, 가여운 아내, 병든 이웃,
까마귀밥으로 떠도는 시신들, 그들의 원통한 울음소리, 칼바람 소리, 나는 이런
것들을 모두 눈을 감고 보느니라."
허균이 한숨을 푸욱 내쉬는 것과 동시에 청향의 눈가에도 이술이 맺혔다. 그
녀는 웃기도 잘하지만 슬픔의 강에도 곧잘 바지는 영혼이었다.
청향은 전쟁이 나던 임진년 봄에 명월관으로 왔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부
모가 막내딸을 팔아 넘긴 것이다. 생존 앞에서는 하늘이 정한 인륜도 무용지물
이었다. 애랑의 말에 따르자면, 청향은 명월관으로 올 때부터 곧잘 시를 외웠다
고 한다. 양반의 피가 흐르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청향은 끝까지 자신의 성씨와
고향, 부모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제 기생이 되었으니 그깐 뿌리가 무슨 소
용이 있겠느냐고 했다.
"나으리! 마음의 병이 되는 기억일랑은 빨리 잊는 편이 낫지요."
"허허허, 그래서 이렇게 명월관에 오는 게아니냐?"
청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나으리께선 오히려 이곳에서 망부인의 그림자를 찾고 계신 것이 아닌
지요? 허나 명월관의 기생 중 그 누가 나으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릴 수 있
겠어요? 나으리는 조선 팔도의 기생을 모두 품더라도 아쉬움을 채우지 못한답니
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결을 하시지요? 부인의 무덤 앞에서 말이에요."
참으로 당돌한 주장이었다.
"나보고 자살을 하라 이 말이냐?"
청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균은 아내 김씨의 무덤을 작년 가을에 강릉으로
이장했다. 넘실대는 동해의 푸른 물결이 훤히 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이었다.
"그럴 순 없다."
"......."
"내겐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딸아이가 있어. 그앨 고아로 만들 순 없지. 설
경을 두고 나만 먼저 저 세상으로 가면 아내가 날 용서치 않을 게야."
청향은 잠시 말을 잊고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
치였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신다고 하셨더이까?"
허균이 머리를 끄덕였다.
"백정과도 벗할 수 있고 거렁뱅이와도 술잔을 나눌 수 있다고 하셨더이까?"
허균이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청향을 바라보았다. 청향은 시선을 내린 채
계속 앙증맞은 술잔을 검지손가락으로 돌려대고 있었다.
"허면 나으리께서는 기생을 아내로 맞아들여 백년고락을 함께 하실 수 있으신
지요?"
"......."
"설경의 새엄마가 기생이 되어도 괘념치 않으시는지요?"
허균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청향의 물음이 그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왔다.
일 년 동안 그는 청향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없어
지고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없는 세상, 군왕도 잘못하면 벌을 받고 노비도 훌륭
한 일을 하면 상을 타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청향
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분노, 그의 자신감, 그의 희망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지금에야 허균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의 신념을 보여주세요. 만백성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우선 제게 베풀어주
세요. 그럴 용기가 없다면 당신이 들려주신 미래는 공염불에 불과해요. 제 몸을
노리는 많은 사내들의 감언이설처럼 당신도 절 속이신 건가요? 어서 당신의 진
심을 보여주세요. 어서요.
허균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혼자라면 문제될 것이없지만 그에게는 어린
딸 설경과 완고한 어머니, 가문의 명예를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는 형 허성이 있
었다. 어머니와 허성을 결코 청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침묵을 깨고 청향이 말했다.
"알겠어요. 나으리께서도 양반일 뿐이군요. 기생과의 하룻밤 사랑은 가능하지
만 영원한 사랑은 두려운 거예요. 자책하진 마세요. 헛된 망상을 품은 소첩의 잘
못이니까요."
"청...... 청향아!"
청향이 다소곳이 자리에 물러갔다. 부끄러움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이 나라
를 바꾸고 천하를 바꾸기 위해 그가 품었던 생각들이 이다지도 나약한 것들이었
단 말인가? 당신도 결국 양반일 뿐이라는 청향의 질책이 들려왔다. 만백성을 위
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주장도 결국 몇몇 양반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에
불과했다. 인간과 인간의 진실한 만남을 갈구하엿지만 그에게는 청향을 품을 용
기조차 없었던 것이다.
가족이란 얼마나 질긴 끈인가. 아무리 타향을 떠돌며 자유롭게 삶을 영위하려
고 해도 그에게는 가족의 굴레가 어김없이 덧씌워져 있었다. 이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는 내 가족부터 바꾸어야 하고, 내 가족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들을 설득
할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가족도 바꾸지 못하면서 어찌 이 나라를 바꿀 수
있겠는가.
허균은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울었다. 죽은 아내 김씨의 얼굴과 핏덩이 아들의
얼굴과 길바닥에 개처럼 버려져 죽음을 맞은 조선 백성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
고 지나갔다.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세자인 광해군을 찾아가서 몇 마디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겁쟁이, 바보 같은 새끼,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허균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술동이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
지 깨어나지 못했다.
"나으리! 누가 찾아왔어요."
꿀물을 받아들고 온 청향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어제 일은 모두 잊은 듯 다
시 방긋방긋 웃어댔다. 그는 꿀물을 들이켠 후 물었다.
"누구라더냐?"
"강릉에서 온 최의원이라는군요."
최의원? 강릉에서 그의 병을 고쳐준 최중화가 틀림없었다.
"안으로 모셨느냐?"
청향이 말을 더듬으며 머뭇머뭇거렸다.
"여, 영판...... 거렁뱅이 몰골에...... 병색이 완연해서 들이지 않았어요. 문 밖에
있다니...... 나가보시겠어요?"
허균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청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하는 게야? 어서 이리로 모시고 오게. 내가 언제 말해준 적이 있지 않느
냐? 강릉 땅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한 명의 중의 명의, 바로 그 사람이야. 내 생
명의 은인!"
"아, 알겠어요."
그제야 청향도 바삐 뜰로 나가 문지기를 불렀다. 허균의 생명을 구해준 의원
이라면 마땅히 안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그가 옷을 다 입을 즈음 청향이 다
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으리! 한사코 들어오지 않겠다고 해요. 나으리께서 직접 나가 보셔야겠어
요."
"알겠다."
허균은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고치고 대문을 나섰다. 길 건너 아름드리 참나
무 아래에 온몸을 흰 천으로 둘둘 감은 사내가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시선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그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어제 먹은 술이 완전히 깨지 않
은 것이다. 걸음을 재촉해서 참나무 아래로 갔다. 몰라보게 야위었고 시커먼 땟
국물이 양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사 년 전 강릉에서 만난 최중화가 틀림없었
다. 환자들에게 약을 거저 나눠줬기에 돈을 모으지는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
게까지 형편없는 몰골로 지낼 처지는 아니었다.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누구보다
도 먼저 입을 옷과 먹을 밥을 챙겼던 것이다. 허균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앞으
로 썩 나섰다.
"이게 얼마 만이오? 내가 얼마나 최의원을 찾은 줄 아시오? 그래, 그 동안 어
찌 지내셨소?"
최중화가 뒤로 물러서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잘 지내고 있습죠."
허균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자, 예서 이럴 것이아니라 안으로 드십시다. 주안상이라도 앞에 놓고 지난 얘
기를 해봅시다."
허균이 손목을 잡아끌자 최중화가 기겁을 하며 뿌리쳤다. 그제야 최중화의 얼
굴과 양팔에 둘둘 감긴 흰 천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걸친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최중화의 손목을 쥐는 순간 서늘한
냉기가 전해졌고 흰 천 사이로 시커먼 오른손이 보였다. 검지와 중지가 없었다.
"최, 최의원!"
"소인의 몸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몹쓸 병에 걸렸답니다. 잘못하면 나으리도
옮을지 몰라요.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지십쇼. 지금도 너무 가까이에 서 계십니
다. 어서 걸음을 물리세요. 어서요!"
허균은 망연자실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최중화, 천하의 명의 최
중화가 문둥병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조선의 모든 돌림병을 치료할 약을 만
들겠노라며, 백성들을 내 몸같이 아끼면서 팔도를 주유하던 최중화가 아닌가. 헌
데 문둥병이라니. 천형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다니. 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다. 어찌하여 의와 인을 몸소 실천한 인간에게 저다지도 가혹한 불행이 찾아
든단 말인가.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만 명이 상처를 받더라도 최중화는 아니
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죄도 없다. 아, 하늘은 정녕 눈이 멀었구나.
어느새 허균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중화사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이러지 마세요. 자꾸 이러시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쉰을 넘긴 최중화는 이마에 주름을 한껏 잡았다. 문둥병자라는 사실이 들통나
면 몽둥이 찜질은 물론이고 개처럼 질질 끌려 도성 밖으로 내쫓길 것이다.
"청이 있어서 이렇게 몹쓸 병을 무릅쓰고 찾아왔습죠."
"무엇이오?"
"강릉에서의 약조를 기억하시는지요? 서애 대감께 소개시켜주시겠다던......."
"물론 잊지 않았소. 그 일 때문에 왔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서애 대감을 뵈
러 갑십시다. 가서 그대가 공들여 모은 것들을 서책을 내도록 하십시다."
허균은 당장 유성룡에게 사자며 몸을 돌렸다. 최중화가 황급히 만류했다.
"아닙니다. 어찌 이런 몸으로 영의정 대감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소인은 서
애 대감을 뵈려는 것이 아니라 서애 대감께 말씀드려 내의원 허준을 만날 수는
없는지......."
"내의원 허준을 만나고 싶다 이 말이오?"
"그렇습죠."
허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허준을 만나려는 것일까? 의서를 내려면 서
애 유성룡처럼 의학에 밝은 유의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지금 서애의 지위는 신
하 중에 으뜸인 영의정이 아닌가. 문둥병으로 세상을 마치기 전에 의서를 펴내
려고 상경한 것이라면 응당 서애 대감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왜 그를 제쳐두
고 허준을 만나려는 것일까?
"아니되겠습니까?"
허균이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최중화는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피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털썩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입죠. 이 불쌍한 놈,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입니
다."
최중화의 비굴한 태도가 허균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만약 그가 거절한
다면 최중화는 참나무에 목을 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소. 헌데 내의원 허준은 무척 바쁜 사람이라오. 더구나 요즈음은 동궁......."
최중화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소인도 다 알고 있습죠. 당장 내일 만나자는 게 아닙니다. 열흘 정도 기한을
두고 잠깐 만나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되도록이면 늦은 밤이 좋을 듯
합니다."
"좋소. 마침 오늘 서애 대감을 뵈올 일이 있으니 그대의 이야기를 하겠소. 허
면 열흘 후에 어디서 허의원을 만나겠소?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서 번잡
할 듯하니 명월관 뒤에 있는 저 대숲이 어떻겠소? 대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주인
을 알 수 없는 무덤 다섯 개가 나란히 자리잡은 빈 터가 나온다오. 거기서 자시
(밤 11시)에 만나는 걸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합죠. 헌데 그땐 동행이 없었으면 합니다."
"나도 따라오지 말라?"
최중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균은 무슨 사연인지 더욱 궁금했으나 당
장 따질 수는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살폈던 것이다.
"알겠소. 허나 대신 오늘은 나랑 함께 지내야 하오. 우리들의 재회를 이렇게
끝마칠 수야 없지 않겠소?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갚아야 하고."
최중화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으리! 말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소인은 나으리를 조금 압죠. 여느
양반님네들보다는 훨씬 마음도 넓고 정도 많은 분이란 걸. 허나 괜히 소인을 잡
아두실 생각은 마십쇼.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소인도 있어야 할 자리와 없어
야 할 자리. 가야 할 길과 아니 가야 할 길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답니다. 소인이
어찌 나으리 생명의 은인이겠습니까. 소인은 다만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살렸
을 뿐입죠. 보잘것없는 재주의 값은 이미 나으리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나으리!
눈물을 거두십쇼. 나으리께선 이 나라 조선을 짊어질 동량이십니다. 문둥이를 위
해서까지 눈물을 흘리지는 마십시오. 나으리! 소인이 강릉에 있을 때의 모습만
기억해주십쇼. 그땐 참으로 열심히 환자들의 병을 살폈고, 약초를 얻으려고 산천
을 누볐지요. 어떤 병과도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더랬습죠. 불과 사 년이 지났는
데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지는군요. 나으리! 부디 요순의 덕을 베푸는 천하의 명
신이 되십시오. 소인도 이 목숨 남아 있는 날까지 나으리를 위해 기도드립죠. 안
녕히!"
몸을 돌린 최중화가 남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허균이 팔을 뻗어 그의 머
리를 둘둘 감은 천을 잡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누런 진물이 찐득찐득 묻어
있는 흰 천과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는 최중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기, 잔인
한 운명을 짊어진 위대한 인간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허균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득 손곡 이달의 얼굴이 떠올랐다. 허균은 스승이 왜 그렇게 술을 마시면 밤
낮없이 울어제끼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이 서럽고 더럽다면 팔을 걷어붙
이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눈물로밖에 표현할 수 없
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은 운명이란 놈이 인간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가를
목도하는 순간에 쏟아지는 슬픔이었다.
허균은 최중화의 머리를 감았던 흰 천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최중화의 고
통을, 그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
도 느낄 수 없었다. 참나무 아래까지 나온 청향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들어가세요. 여기서 왜 혼자 이러고 계시는 거죠?"
허균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횡설수설 소리치기 시작했다.
"인간이야! 인간인 것이다. 문제는 이 빌어먹을 인간인 거싱야. 인간이 도대체
뭐냐? 인간은 이렇게 처참하게 짓이겨져도 인간이냐? 청향아! 네 말이 맞다. 차
라리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 아내의 무덤 앞에서 목숨을 끊는 것이 옳다.
인간이 뭐냐? 도대체 인간이 뭐야?"
병신년(1596년) 2월 15일 밤.
허준은 내의원 정예남과 김응탁에게 동궁을 각별히 살피라고 당부한 후 대궐
을 나섰다. 작년 가을부터 세자인 광해군이 시름시름 앓고 있었기에 그는 한시
도 대궐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도 새벽부터 광해군이 담음(체약이 위
장에 쌓여 있는 상태)을 호소해와서 밤을 꼬박 새워 약을 지었다. 오후 늦게 겨
우 미음을 뜨면서, 광해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준에게 물었다.
"영상이 은밀히 그대를 찾는다지?"
"세자저하의 환후가 극심하신데 신이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염려마시옵소서."
광해군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가보도록 해. 영상이 괜히 자넬 청할 리가 있겠나?"
퇴청할 무렵, 허준은 유성룡을 찾아갔다. 그는 자리를 비울 수 없음을 거듭 강
조했다.
"소생이 있어야 하옵니다."
유성룡이 충혈된 허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책임을 느끼겠지. 이제 자네도 내의원에서 첫손에 꼽히는 자리에 있으니까.
허나 자네가 자리를 지킨다고 세자저하의 환후가 낫는 것은 아니지 않나?"
"대감!"
"자넬 책하려는 게 아닐세. 허나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를 가지고는 도
저히 세자저하의 병을 고칠 수가 없을 듯허이. 처음에는 이질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저하께서 어떤 병을 앓고 계신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내 자네
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야. 오늘 밤, 명월관 뒤의 대숲으로 가보게나. 자넬 도
와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보름달이 천하를 훤히 비추고 있어서인지 밤길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약초를 구하기 위해 홀로 지리산을 누비며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추위에 몸을 떨던 것에 비하자면, 도성안 야트막한 언덕의 대숲으로 들
어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허준은 언덕을 오르며 이제 칠십 고개를 접어든 양예수를 떠올렸다. 무진년
(1568년), 스무 살을 갓 넘긴 허준이 전라도에서 상경했을 때 그를 제자로 받아
준 이가 바로 양예수였다. 그때 이미 내의원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양예수는 허
준을 자신의 수제자로 삼았고, 장치 어의로서 살아갈 때 필요한 마음가짐과 행
동거지들을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어의는 왕실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야. 주상전하나 세자저하의 옥체에 병이
깃들이면 어의는 결코 살아서 궐을 나서지 못한다. 알겠느냐?"
양예수는 명종대왕이 승하한 정묘년(1567년)에 의금부까지 끌려가서 모진 고
초를 당했다. 다섯 명의 내의원이 고문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잃었는데, 다행히
양예수는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항상 자중해야 한다. 의원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임이므로 삼세를 업으
로 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고 했느니라. 벼슬이 올라간다고 기뻐하지도 말 것
이며, 벌을 내린다고 슬퍼하지도 말거라. 어의는 오직 왕실에 병이 들지 않도록
자나깨나 살필 것이며, 혹 병이 들면 최선을 다해 그 병을 물리쳐야 한다. 알겠
느냐?"
허준은 스승의 말씀을 다시금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는 이제 광해군과 생사를
함께 해야 할 운명이었다. 잘못해서 광해군에게 큰 화가 생기면 그는 자신의 목
숨을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
스승님!
허준은 큰 숨을 내쉬며 둥근 달을 쳐다보았다. 스승인 양예수의 병이 심각했
던 것이다. 임진년(1592년)의 몽진을 따라나서지 못할 때부터 스승의 몸이 심상
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있었다. 스승은 유음(관절통)을 앓으면서 불편해하시더니,
지금은 폐허증과 현훈(어지럼증) 때문에 제대로 거동조차 못했다. 유성룡이 광해
군의 병세를 의논하기 위해 몇 차례나 사람을 보냈으나 양예수는 모든 것을 내
의원 허준과 의논하라는 답장만을 보내왔다.
허준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양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지도 벌써 삼십 년이 가
까웠다. 그 동안 스승은 제자 앞에서 조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다. 항상 제자보
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잠들었으며, 그날그날 읽은 의서들을 빠짐없이 정리했고,
새로 발견한 증상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꼼꼼히 적어두었다. 허준의 나이 올
해로 쉰하나. 명성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제 제자를 둘 시기가 지났건만 아직
까지 그는 제자를 받지 않았다. 스승인 양예수만큼 제자들을 다독거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대숲이 나타났다. 스산한 겨울 바람이 대나무 사이를 휘이이잉 때리며 지나쳤
다. 그는 잠시 좌우를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입금을 호호 불어 언 손을 녹였
다. 아직 이 겨울이 다 가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봄이 오면 세자저하의 환후에도 차도가 있을까?
허준은 광해군이 그토록 오랫동안 병을 앓는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
다. 분조를 이끌고 강원도와 전라도를 종횡으로 누비던 광해군이 아니었던가. 며
칠 밤을 지새워도 눈 하나 꿈쩍 않던 그가 지난 여름부터 줄곧 병석에서 일어나
지 못했다. 여름에는 지독한 설사와 함께 열이 심하게 오르내려서 이질에 합당
한 약을 썼다. 가을 찬바람이 불자 설사는 멎었지만, 이번에는 오한이 들면서 천
명(가래 끓는 소리)이 심해졌다. 감환이라 생각하여 그에 맞는 약이 썼다. 그러
자 이번에는 흉협고만(명치부터 옆구리까지의 답답한 증상)을 느끼면서 온몸에
열꽃이 피었던 것이다.
수만 가지 병마가 몸 속에 숨었다가 틈만 나면 이리저리 들쑤시고 나오는 형
국이었다. 여러 가지 병을 전전하면서 광해군은 몰라보게 야위어갔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양볼에 검은 기미가 피었으며, 입술은 바싹 마른 채 항상 갈라져
있었다. 젊음의 패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눈뿐이었다. 광채를 발하는 그
눈은 여전히 마주 앉은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대나무를 헤치고 들어가니 봉긋한 무덤들이 눈에 띄었다. 무덤 주위를 한 바
퀴 돌았다. 봉분이 내려앉고 그 위에 마른풀이 제멋대로 솟아나 있는 것을 봐서
적어도 십 년이 넘게 벌초를 하지 않은 무덤이었다. 무덤 다섯 개가 횡으로 나
란히 있는 것도 유난스러웠다.
"오랜만이군."
소나무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달빛을 등지고 섰기에 얼굴이
더욱 어둡게 보였다. 허준은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섰다.
"무얼 그리 놀라는가? 옛날엔 추위를 피해 무덤을 파고 그 속에서 밤을 지새
우기도 했으면서......."
허준의 두 눈이 갑자기 커졌다. 무덤 속에서 밤이슬을 피한 것을 아는 사람이
라면?
"날세, 중화!"
"정말 자네가 최중화인가?"
허준이 성큼 앞으로 내달았다. 이번에는 최중화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는 흰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소리쳤다.
"멈추게!"
허준은 네댓 걸음 앞에서 멈춰선 후 최중화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흰
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짓물러진 눈, 콧구멍이 보일만큼 내려앉은 코, 그리
고 입술이 떨어져나가 다물어지지 않는 입.
"자, 자네......."
"그래, 나는 몹쓸 병에 걸렸다네. 근 삼십 년 만에 자넬 만나는데 이런 몰골이
라서 미안허이. 후후후."
최중화는 김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어쩌다가 그리 되었는가?"
허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최중화는 잠시 대답을 미루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이 둥근 하늘에 달려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편찮으시다네. 그 동안 자넬 얼마나 찾았는지 아는가? 도대체 어쩌다가 그
몹쓸 병에 걸렸나?"
"천벌을 받은 게지, 후후후!"
허준이 무진년(1568년)에 상경하기 전까지, 최중화는 양예수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다. 허준이 전라도에 머물면서 산천을 헤매며 약초를 캐는 동안, 최중화는
일찍 상경하여 양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최중화는 처음부터 동갑내기 허준이 마
음에 들지 않았다. 의서를 읽고 환자를 살피는 실력은 최중화가 월등히 나았지
만 허준은 조금도 최중화를 선배로 대접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자넬 얼마나 아끼셨는 줄 아는가? 헌데 야반도주를 하다니."
"후후후, 그랬던가? 난 스승님께서 허준 자네만을 위하신다고 생각했지. 어차
피 나는 어의가 될 수 없지 않았는가? 스승님께서는 제자 중 오직 한 사람만을
어의로 데려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니까. 허준 자네가 어의로 추천되었
으니, 내가 그 집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던 게야."
"하지만 꼭 어의가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 세상에는 우리의 인술
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다네."
최중화가 다시 낮게 웃었다.
"후후후, 그래, 자넨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애.
늘 그렇게 여유를 부리면서 이야길 하지. 하지만 언제나 실속을 차린 건 자네였
어. 자넨 어의가 되었으니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 자넨 승자니까. 그
러나 단 한 번이라도 패자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난 열 살 때부터 어의
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네. 적어도 자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스승
님은 날 당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셨어. 궁중 법도까지도 소상히 가르쳐주셨으니
까 말일세. 헌데 자네가 오고 나서 스승님의 마음은 흔들리셨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스승님께서는 자네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셔
야 했어."
"스승님의 선택이 정당했다는 뜻인가? 내가 아니라 자네를 택한 것이 옳았다
고? 후후후후훗!"
최중화는 검지와 중지가 떨어져나간 오른손으로 허준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참
을 웃어제꼈다. 허준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미, 미안허이. 이보게, 허준! 스승님께서 왜 자넬 택하셨는지 아는가? 의서도
내가 훨씬 많이 읽었고, 스승님의 독특한 맥법도 내가 소상히 다 배웠는데 왜
스승님은 서둘러 자넬 택하신 걸까? 그때 자넨 열정만 넘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에 불과했어. 제대로 환자들을 치료할 실력도 없었지. 헌데 스승님은 자넬
택하셨네.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줄 수 있겠나?"
"그, 그거야......."
허준은 말끝을 흐렸다. 그도 역시 양예수가 유난히 그만을 아낀 이유를 정확
히 알지 못했다. 그때 일을 물어도 양예수는 이렇게 적당히 얼버무릴 뿐이었다.
"자네한텐 재능이 넘쳤어. 참으로 눈부신 재능이었네."
최중화는 허준의 머뭇거리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어허, 자넨 끝까지 옛 친구를 속이려 드는군."
"아닐세. 나도 그 까닭을 모른다네."
"좋아, 그럼 내가 말하지. 자넨 전라도에서 상경할 때 희귀한 약초들을 꽤 많
이 가져왔었지. 자네가 십여 년 동안 지리산을 누비며 직접 캔 것이라고 했어.
기억나는가?"
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중화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참으로 귀중한 약초들이었어. 어떤 의서에도 나오지 않는, 오직 우리 동국에
서만 자생하는 것들이었지. 스승님은 젊어서부터 동국의 의술을 드높일 서책을
쓰고자 하셨어. 허나 스승님은 어의시니까 궁중에 매인 몸이셨지. 동국에서 나는
약초를 살피기 위해 몸소 발로 뛰실 수는 없었단 말일세.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그래서 스승님은 나를 버리고 자넬 택하신 거지."
"스승님과 내가 흥정을 했단 말인가?"
허준이 격앙된 목소리로 따졌다.
"그럼 아닌가? 그때 자네가 가져왔던 약초들을 어떻게 했나? 말해보게."
"그거야...... 스승님께 드렸지."
"자네가 자진해서 드린 것인가? 아닐걸? 내 기억으론 자넨 무엇보다도 그 약
초들을 아끼지 않았는가?"
"스승님께서 서책을 쓰는 데 필요하니 달라고 하셨네. 하지만 그건 내가 어의
가 된 후의 일이네. 오해하지 말게."
"오해? 후후후, 오해라고 그랬나?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세. 만약 스승님
께서 자네 대신 날 택했다면 어찌 되었겠나? 자넨 모든 걸 체념하고 그 집에 머
물러 있었겠는가? 아니지. 자네도 패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
을 거야. 그럼 그 약초들도 자네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걸세. 스승님은
그걸 걱정하셨던 게야."
"닥쳐! 감히 스승님을 욕보이려 들다니......"
"진정하게. 나는 스승님을 욕보이려는 게 아니야. 인간이란 게 도대체 뭔가?
평생 동안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 바로 인간이야. 스승
님께서도 동국에서 제일 가는 의서를 남기고 싶으셨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의
약초가 꼭 필요했던 것이지. 자네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꼈을 걸세. 아! 아니
라고 부인하진 말게. 어쨌든 자넨 스승님의 눈에 들 만한 구석이 있었고, 나는
아니었어. 이게 진실이네. 그러니 제발, 스승님이 자네와 나의 실력을 공정하게
비교해서 자녀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말아주게. 자넨 한 번도 나보다 뛰어났던
적이 없네. 지금까지도."
"그 일을 따지려고 나를 만나러 왔는가?"
"물론 아닐세. 처음엔 스승님과 자네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때 내게 그토록 희귀한 약초가 있었다면 나도 응당 스승님의 배려에
못 이기는 척 끌려갔을 것이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굴러 들어온 복을
애써 찰 필요는 없는 게지."
허준은 양손을 앞으로 모아 쥐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삼십 년 전의 일들이 어
제 일처럼 눈앞에 선했다. 최중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허준이 막 상경했을 때 최
중화는 이미 스승을 대신해서 환자들을 진찰할 수 있을 만큼 쟁쟁한 실력을 갖
추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스승의 가르침에도 충실하게 따랐다.
"스승님께서는 서책을 다 쓰셨는가?"
"거의 다 되어간다네."
"후후후후훗!"
갑자기 최중화가 고개를 치켜들고 큰소리로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헛수고를 하셨네그려."
"그게 무슨 소린가?"
최중호가 반색을 하고 되물었다.
"세자저하의 환후가 아직 차도가 없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
"허준, 자네도 진땀깨나 흘리고 있겠구먼. 세자저하께서 혹 잘못되시면 자네의
목숨도 온전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 그런가?"
허준은 최중화의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계속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 난 돌아가겠네."
최중화가 한 걸음 다가서며 만류했다.
"잠깐! 이 사람, 성질하곤....... 자넨 세자저하의 병을 고치지 못하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이 망할 놈의 전쟁 때문이지."
"전쟁...... 때문이라고?"
허준이 되물었다. 세자저하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왜 전쟁 때문이라는
것일까?
"자네의 몰골을 보게나. 자넨 어느새 스승님을 꼭 닮아버렸네그려. 신의 소리
까지 듣고 있겠지만, 자네 스스로 눈과 귀가 무뎌지는 걸 느끼고 있을 걸세. 스
승님과 자네가 지금껏 살펴온 조선은 이제 사라져버렸어. 하삼도와 북삼도, 그리
고 경기도와 강원도로 선명하게 나누어져 있던 병의 근원들이 뒤섞여버린 걸세.
다 이 망할 놈의 전쟁 때문이지. 백성들이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다 보니 산수에
의해 구획되었던 병의 근원들이 서로 부딪쳐서 새로운 병을 만들었던 게야. 이
제 모든 것이 새로워졌어. 백성들의 몸도 조선의 산수도. 그러니 우리들의 의술
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터지기 전, 태평성대 호시절의 의술로는 아
무것도 치료할 수 없게 되었네. 헌데 자넨 이것들을 알고는 있는가? 몽진길에
나선 조정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느라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갔는지를
보지 못했겠구먼. 세자저하의 병환도 마찬가질세. 세자저하께서는 경기도, 전라
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를 지나치시면서 완전히 새로운 병을 얻으신 게지. 아
직 이름도 정하지 않은 병이라네. 물론 스승님의 서책에도 전혀 나오지 않네. 이
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사람, 나 최중화뿐이지."
"허면 자넨 그 동안......?"
"그래, 팔도를 주유하며 병과 씨름했네. 금수강산을 누비며 약초를 캤지. 자네
가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약초를 구해 새로운 병을 치료했다네. 그러다가 태백
산에서 문둥이들을 만났지. 그들의 짓물러터진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까 부딪쳐
보고 싶더군. 저 문둥병만 고치면 이제 이 나라에서 내가 치료하지 못하는 병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 헌데 그들을 치료하며 한 달쯤 함게 지낸 후에 덜컥
나도 몹쓸 병에 걸려버렸다네. 하늘이 내 오만함을 벌하셨던 게야."
"중화!"
허준은 저도 모르게 최중화의 뭉툭한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가 보낸 고난의
세월이 가슴을 쳤다.
"팔도를 돌며 백성들을 치료하는 신의가 있다더니 자네였구먼."
"이것 놓게나. 자네도 몹쓸 병에 걸리고 싶나? 후후훗. 기분은 좋네그려. 한때
는 자네에게 복수하고 싶었지. 자네보다 더 나은 실력을 쌓아서 자네의 코를 납
작하게 해주고 싶었다네. 정읍에 있을 때는 코피를 쏟아가며 의서를 파고들었어.
헌데 자네가 내 손을, 이 문둥이의 손을 잡아주다니, 내 마음의 앙금이 눈 녹듯
사라지네그려. 몹쓸 병만 아니라면 자네와 함께 며칠 밤을 새우며 술잔을 기울
이고 싶어. 스승님을 뵙고도 싶고."
"가세. 자넨 응당 상을 받아야 하네. 자네는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어."
"허어, 의원인 자네도 그딴 소릴 하나? 누가 상을 바라고 이런 짓을 한 줄 알
아? 지금 난 흉측한 병에 걸린 환자일 뿐이네. 이 병을 치료할 약초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문둥이답게 살아야 하는 걸세. 어쨌든 고마우이. 역시 옛 친구밖에 없
구먼."
최중화는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자네도 서책을 쓰고 있겠지?"
"으응?"
"숨기려 들지 말게. 자네는 나나 스승님보다도 더 욕심이 많아. 스승님께서 서
책을 쓰시는 걸 지며보면서 자네도 서책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을 거야. 어
때, 내 말이 틀렸는가?"
"준비는 하고 있다네."
허준은 마지못해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자신의 욕망을 내보였다. 최중화가 빙
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답구먼. 허면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겠는가?"
"......."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허준의 가슴을 찔러댔다.
"젊어 한때 이 나라의 의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옛 친구의 부탁이라
네."
"말해보게나."
최중화는 소나무 뒤에서 두툼한 보자기 네 개를 꺼내왔다.
"그 동안 내가 끄적거렸던 것들이야. 이 회색 보자기엔 내가 채취한 약초들이
들어 있어. 자네가 가져가게."
"중화! 이것은 자네의 목숨과 바꾼 소중한 것들일세."
"후후훗. 그러니까 허준, 자네에게 주는 것이야. 부디 이것들을 가져가서 자네
의 서책을 쓸 때 참조해주게나. 그리고 가끔씩 내 생각을 해주게. 이 나라의 의
술을 위해 목숨 바친 친구가 있었노라고 말일세. 내 이름 따위를 남길 생각은
아예 거두시게. 이 비참한 몰골을 역사에 남기고 싶지 않아. 허준! 자네와 나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던 걸세. 자네는 늘 양지를 차지했고 음지는 끝까
지 나의 몫이군. 허나 자넨 날 인정해주겠지? 떠돌이 의원 최중화의 일생이 헛
되지 않았다고 말이야."
"자, 자넨 참으로 무서운 복수를 하는군."
허준이 고개를 숙이며 뇌까렸다. 최중화가 이마 위로 흩날리는 흰천을 쓸어올
리며 말했다.
"후후훗, 그런가? 들켰네그려. 역시 자넬 속이지는 못하겠구먼. 저 황색 보자기
에 든 것을 오늘부터 읽어보게나. 그러면 세자저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걸세.
왕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의서를 편찬할 수 없음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세자저하를 꼭 완쾌시키도록 하게. 그래서 왕실의 신임을 더욱 돈독하게 받도록
해. 임진년의 몽진에도 동행했었고, 세자저하까지 살려낸다면 자네의 앞날에 서
광이 비칠 것이야. 아니 그런가? 후후훗 후후후훗!"
최중화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할 일을 모두 마친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다. 짓이겨지고 물러터지 살점들이 어떻게 저런 웃음을
만들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어디로 갈 텐가?"
"금강산으로 갈까 하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그래도 이 몹쓸 병과 싸워
봐야 하지 않겠는가? 허준, 난 자넬 믿네. 꼭 천하 제일의 의서를 남기도록 하
게. 그럼, 잘 있게나."
최중화는 머뭇거림 없이 뒤돌아서서 대숲으로 사라졌다. 허준은 그 자리에 꼼
짝도 않고 서서 다시 병마와 싸우기 위해 길을 떠나는 옛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어느새 멀리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허준은 보자기 네 개를 가슴
에 품고 비틀비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언덕을 내려왔다.
광해군의 병은 3월이 가기 전에 말끔히 나았다. 모두들 허준의 신묘한 의술에
혀를 내둘렀다. 3월 3일, 선조는 허준을 비롯한 내의원들에게 광해군의 병을 낫
게 한 공을 다음과 같이 포상했다.
"동궁이 미령했을 때의 내의원 도제조 김응남과 제조 홍진에게 각각 숙마 한
필을, 부제조 오억령, 조인득에게는 각각 아마 한 필을 사급하라. 허준은 가자하
고, 김응탁, 정예남은 모두 승직시켜라."
9. 전쟁 그리고 평화
오늘날의 일로 말씀드리면, 피눈물을 흘리며 침과하면서 종묘와 사직을 위하
여 복수를 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구하여 주며, 맹세코 적들과는 함께 하
지 않겠다는 것은 내수하는 정성이고, 그 주위를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
지 않고, 충심을 가진 군사는 밖에서 죽기를 각오하여 충성을 다하고, 시대에 이
익이 되는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취하며,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아무리
친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서, 여러 신하들이 협동하여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단
결하여 인재를 발굴하며 유민을 보살피고 성을 수리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며, 농
사를 장려하여 곡식을 비축하며, 날마다 분촌이라도 끌어올리기에 여념이 없이
먼저 적이 이길 수 없는 태세를 갖추어놓고, 이길 수 있는 적을 기다리는 것은
내수의 일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적이 물러가지 않고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운에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성룡], [사직차자]
병신년(1596년) 6월 3일 새벽.
봄이 지나고 초여름의 따뜻한 기운이 밀려왔다. 저잣거리에는 이제 제법 장사
치들이 그럴싸한 판을 벌였으며, 소금이나 쌀을 기준으로 매매가 이루어졌다. 명
나라의 책봉사가 왜국으로 가서 풍신수길을 왜왕으로 봉하면 이 전쟁도 완전히
끝이 날 것이라는 소문이 작년 겨울부터 떠돌았다. 대명이 나서서 안 되는 일이
있겠느냐는 사족도 따라다녔다. 요행히 돈푼깨나 숨겨놓은 양반들은 전쟁 통에
불타버린 집을 다시 짓느라 장정들을 구하러 다녔고, 마음 급한 농부들은 종묘
를 사기에 바빴다. 왜군들이 아직 경상도에 남아 있었으나 명군이 호통만 쳐도
곧 물러갈 오합지졸들이라고 했다. 전쟁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는 듯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돌림
병은 아직도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디밀었고 부모 잃은 자식,
아내 잃은 남편, 남편 잃은 아내, 자식 잃은 부모들이 통곡하며 팔도를 헤매고
다녔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몰려다니며 떼강도 노릇을 했고 관아를
직접 습격하기까지 했다.
가장 심각하게 바뀐 것은 인심이었다.
길손들에게 사랑방을 내어주는 것은 물론이고 따뜻한 밥과 찬으로 대접하기를
즐겼던 이 나라 백성들은 이제 눈을 부릅뜨고 타인들을 노려보게 되었다. 사랑
방으로 안내하면 안방까지 차지하려 들고, 밥을 주며 쌀가마까지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인간 쓰레기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었다. 이제 자기 자신 외에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해
가 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후에도 길손을 맞아들이는 집은 사라졌다. 한양
은 낮에만 숨을 쉬는 반쪽 도읍지로 변해갔다.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깊게 패
인 불신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의관을 정제한 유성룡은 대청마루에 서서 불그스름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 이 피비린내 나는 시간들을 접고 태평성대를 새롭게 열어가고 싶었다. 그
러나 전쟁의 발발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전쟁을 끝내는 것도 바람만으로 되
는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와 왜의 강화 회담은 작년 봄, 명나라가 왜국에 직접 책봉사를 파견한
다는 합의를 이끌어내고 일단락되었다. 심유경은 전쟁을 끝맺은 자신의 공을 잊
지 말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곧 시작될 것 같은 평화의 시간들은 벌써 일 년 반
이 넘었는데도 찾아오지 않았다.
작년 11월 부산으로 들어간 책봉정사 이종성은 여섯 달을 미적미적거리더니,
올해 4월 단신으로 부산을 탈출하여 명나라로 돌아가버렸다. 책봉정사의 야반도
주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종성의 탈출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군에게 철군할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명나
라 사신을 당장 참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이 내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떤 소
문이든 왜군이 쉽게 부산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명나라가
이 일에 분노하여 강화 회담을 결렬시키면 조선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
이게 될 것이다. 유성룡은 책봉부사 양방형의 접반사로 의령까지 내려가 있던
이항복에게 일의 전말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했다. 이항복의 답장에도
역시 왜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명나라 조정은 이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다. 양방형을 책봉정사로, 심유
경을 책봉부사로 다시 임명하면서 책봉을 마치고 속히 귀국하라는 전갈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일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뒤틀렸다. 소서행장이 명나라의 책봉사
와 함께 갈 사신을 조선 조정이 보내지 않는다면 철군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
던 것이다.
정월에도 사신을 보내라는 그들의 요구를 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철천지원수의 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조정 중신 모두가 반대
했었다. 그런데 다섯 달이 지난 지금 그들은 또다시 통신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
이다.
유성룡은 방으로 돌아와서 서안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서책들을 눈으로 휘이
살폈다. 밤이 늦도록 살폈던 공문들이었다. 허리를 숙여 제일 위에 놓인 서찰을
집었다. 두 번 세 번 읽어내렸던 구절이 쉽게 눈에 띄었다. 왜군 진영의 현소라
는 중이 보낸 서찰이었다. 그 글에는 조선과 강화를 바라는 왜인들의 입장이 선
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조선 병력이 만일 우리 군사를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수 있다면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겠으나, 지금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의
처지로 보면 우선 사신을 보내 우리 군사를 모두 물러가게 하여 각각 자기 나라
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아는 조선의 이, 호, 예, 병, 형, 공의 육조
의 관리 중 양조의 판서를 차임하거나 또는 총병을 차임하여 보낸다면 군사를
다 철수할 수 있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철병은 요원하다. 이후 사건 완결의 지속
은 전적으로 조선에 달렸다. 조선이 이번에 사신을 교류하고 나서 만약 천교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천정으로 보답할 것이며, 만약 후교를 원한다면 우리 역시
후정으로 보답할 것이다. 만약에 다시 우호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이에
대해 조처할 것이다. 훗날 반드시 이 노승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현소는 강화의 책임을 조선에 떠넘기고 있었다. 사신을 보내지 않아도 강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다른 문제이겠으나, 만약 강화가 결렬될 경우에는 조선
이 그 책임을 고스란히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팔도강산을 유린한 적국에 사
신을 보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유성룡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관자놀이
를 엄지손가락으로 꾸욱꾹 눌러댔다. 어젯밤, 허균이 장난처럼 내뱉은 말이 떠올
랐다.
"스승님께서 아무리 이 나라를 예전처럼 만들려고 해도 불가능할 겁니다. 왠지
아십니까? 백성들의 가슴에 맹수가 한 마리씩 들어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정
의 관리만 보면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어하는 아주 못된 짐승이죠. 그러니까 이
전쟁을 적당히 끝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들짐승이 물러가고 나면 우리 가슴속
에 있는 짐승이 슬슬 활개를 치기 시작할 테니까요. 가슴속의 짐승들을 먹일 자
신이 없다면 차라리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금
의 들짐승들은 창을 거구로 쥐고 제 주인을 찌르지는 않았으니까요. 제 생각으
로는 가슴속의 짐승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적어도 삼 년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
아요. 그 안에 뛰쳐나오는 놈들도 물론 있겠죠. 항상 선봉에 서는 용감한 놈들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스승님! 이제 더 이상 백성들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
을 겁니다. 이 전쟁, 이 흉측한 전쟁이 백성들을 단련시켰거든요. 웬만한 협박에
는 눈도 꿈쩍 안 할 겁니다. 이 전쟁이 백성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었거든요.
한 번 무기를 잡아본 인간은, 왜군의 심장에 창을 꽂아본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잊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짐승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말씀입니다."
허튼 소리 말라며 꾸짖기는 했지만 유성룡도 전후의 복구가 쉽지 않음을 진작
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허균의 말처럼 조정과 백성들간의 신뢰에 금이 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짐승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다. 공자께
서도 본디 선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진시(아침 7시)에 병조판서 이덕형이 찾아왔다. 역시 그는 약속을 정확하게 지
키는 사람이었다. 서안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문서들을 살피며 이덕형이 먼
저 입을 열었다.
"마음을 정하셨는지요?"
오늘이 비변사의 당상관이 모두 모여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를 매듭짓
기로 한 날이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명나라와 왜국 양측의 비난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양방형은 6월 7일까지 연락이 오지 않으면 명나라의 사신
들만이라도 먼저 왜국으로 건너가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밤새 생각은 했네만...... 병판의 뜻은 어떠신가?"
유성룡은 슬쩍 대답을 피하며 이덕형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이덕형은 이미 마
음을 굳힌 듯 곧바로 답했다.
"사신을 보내야 하겠지요. 명나라와 왜의 강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우리
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면 역관들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건 한계가 있고....... 공식 직함을 가진 누군가가 간다면 강화의 과정과
그들끼리 오가는 이야기들을 훨씬 상세히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화가 결렬
된다면 그건 곧 전쟁이 터진다는 것이니, 조선 조정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일
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처음부터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대의를 저버린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나 더욱 가야지요. 왜는 명나라에게 조선의 반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명나라가 거부의 뜻을 밝혔겠지만 우리도 왜국에 우리의 입장
을 명확히 전해야겠지요. 만약 한사코 하삼도를 가지겠다고 우기면 결사항전으
로 맞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사지로 선뜻 가려 하겠소?"
이덕형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성룡이 그 웃음의 의미를 곧 알아차렸
다.
"아니되오. 임진년부터 그대가 겪은 고생만으로 충분해요. 결단코 아니되오."
"허허허, 영상 대감! 나라를 위한 일인데 고생의 많고 적음이 무슨 문제가 되
겠습니까? 소생은 왜장 소서행장과도 안면이 있고 또 조선의 병조판서이니, 이
일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오성 이항복도 접반사로
명나라 사신들과 낯을 익혔으니 그와 함께 가도록 해주십시오. 오랜만에 친구끼
리 왜국 구경을 하고 싶네요."
이덕형은 농담까지 곁들여 여유를 부렸다. 유성룡은 이덕형의 짙은 눈썹을 뚫
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실은 유성룡 역시 어젯밤 내내 같은 생각을 했다. 사신을
보낸다면 누굴 보낼 것인가? 이덕형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담대하고 이
치에 밝으며, 어떻게든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러나 유성룡은 차마
이덕형을 보낼 수가 없었다. 왜국이 어떤 나라인가? 중원을 주름잡던 원나라의
사신들을 모조리 참형에 처했던 나라가 아닌가? 일이 잘못되면 그들은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을 단칼에 벨 것이다. 이덕형에게 그런 개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
다.
"시간을 갖고 차차 궁리를 더 해봅시다."
유성룡은 그쯤에서 말머리를 돌리고 싶었다. 더 이야기를 해보았자 이덕형의
결심만 굳혀주는 꼴이 된다.
"영상 대감, 이 까짓 목숨 하나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
이라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대감과 전 무사하지 못합니다. 대감
도 아시지 않습니까?"
"......."
"명분을 앞세웠던 대신들이 우리를 비난하겠지요. 왜장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
누었다는 것만으로도, 부산의 왜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기보다는 왜와 명나라의
강화 회담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주장한 것만으로도, 나라의 위신을 깎아내렸다
하여 파직될 것이 분명합니다.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요."
"조선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명나라의 도움이 사라질 것이고, 그럼 왜군
은 또다시 밀고 올라올 것이 틀림업소. 우린 삼국의 사정을 살펴 신중하게움직
여야 하오."
이덕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지요. 허나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평화를 유지하
려고 애쓴 우리의 노력은 비굴함으로 간주되겠지요. 역사를 살펴보아도 평화를
주장한 대신들, 창이 되기보다 방패를 자임한 장수들은 언제나 목숨을 잃었습니
다. 영상 대감! 요즈음 전하의 하교가 달라졌음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어떤 변화 말이오?"
"정탁 대감이나 윤두수 대감을 칭찬하시면서, 무력으로 부산의 왜군을 몰아낼
준비를 하라시는 말씀 말입니다."
"그거야 전하께서 예전부터 주장하시던 게 아니오?"
"하지만 부쩍 힘을 더 많이 싣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몇 달만 더 간다면 전하
께서도 어떤 결단을 내리실 테지요. 예를 들어 부산 공격에 소극적인 권율과 이
순신을 파직시킨다든지......."
"막아야지요. 어떻게든 평화를 좀더 유지하면서 내치에 힘써야 할 것이오. 백
성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든 연후에야 왜군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은 그 즈음에서 이야기를 접고 서둘러 행궁으로 향했다.
어전회의는 오시(오전 11시)부터 시작되었다. 용상에 앉은 선조가 대신들을 둘
러본 후 먼저 영의정 유성룡에게 물었다.
"가등청정도 왜국으로 돌아갔다 하고 나머지 왜군들도 철군할 조짐이 보인다
고 한다. 사신을 보내라는 저들의 요구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유성룡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판중추부사 윤두수를 힐끔 살피며 대답했다.
"지난 정월 저들이 사신을 요구한 것은 심유경과 소서행장간의 사적인 약속으
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따라서 그 요구를 거부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옵니다.
헌데 지금은 심유경이 책봉부사의 자리에 올랐고, 책봉정사 양방형 또한 사신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신중히 이 문제를 재론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유성룡의 옆에 앉은 지중추부사 정탁이 소리 높여 아뢰었다.
"천조(명나라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라는 공식적인 명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
사옵니다. 이러한 때에 저들의 요구대로 신사(통신사)를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만세의 원수에게 화친의 사절을 보내는 것은 결단코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시옵
소서."
병조판서 이덕형이 정탁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신을 차출하여 보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듯하옵니다. 지금 명나라의 책봉
사와 함께 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옵니다. 천조에 이 일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사신을 보내야 하옵니다.
지금 때를 놓치면 조선의 운명은 또다시 우리가 뜻하지 않은 곳으로 갈 수도 있
사옵니다."
선조가 세 대신의 말을 정리했다.
"영상과 병판은 사신을 보내자는 것이고, 지중추부사는 좀더 지켜보자는 입장
이구나. 판중추부사의 생각은 어떠한가? 정월에 논의할 때 그대는 지중추부사와
같은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가?"
천천히 고개를 든 윤두수는 유성룡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만약
윤두수가 정탁의 주장에 동조한다면 오늘도 결론을 이끌어내기는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린 아직 명나라의 도움 없이 전쟁을 치르고 전화를 치유할 능력이 없사옵
니다. 헌데 명나라의 책봉사가 두 번 세 번 사신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그 처이
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선조가 윤두수의 말을 잘랐다.
"판중추부사가 생각을 바꿨군. 그대가 말을 바꾸기는 조정에 발을 들인 후 처
음인지? 과인은 그대가 그 누구보다도 과인과 왕실의 위신을 중히 여긴다고 생
각했다. 헌데 아니었군. 그대 역시 저 오랑캐와 화친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인
가?"
"......."
선조는 윤두수를 책망하듯 노려보았지만 윤두수는 고개를 든 채 바위처럼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이덕형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아뢰었다.
"신을 보내주시옵소서."
"병판이 직접 가겠다고?"
선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윤두수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병판은 아니되옵니다."
이덕형에게 향했던 선조의 시선이 다시 윤두수에게 되돌아왔다.
"판중추부사는 사신을 보내자고 하고선 왜 병판은 아니된다고 그러는 것인
가?"
윤두수가 거침없이 답했다.
"소서행장과 심유경이 육조의 판서 중 두 사람을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하였으
나 결코 그에 응해서는 아니되옵니다. 신이 사신을 보내자고 한 것은 와신상담
의 심정으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아뢴 것이지 결코 왜적과 화친을 맺자
는 뜻은 아니옵니다. 육조의 판서를 보내는 것은 곧 조선이 왜와 화친할 마음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사신을 보내긴 보내되,
정식으로 통신사의 격식을 갖추어 보내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오히려 조선이 영
원히 왜와 싸우겠다는 의지를 은연중에 드러낼 수 있도록 사신의 품계를 당하관
으로 낮추어야 할 것이옵니다."
유성룡과 윤두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윤두수의 입가에 이상야릇한 웃음
이 맴돌았고 유성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윤두수는 큰 인물이다. 명분을 세우되 실리를 잃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저렇듯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정적만 있다면 정쟁을 하는 것도 나쁘지
만은 않으리라. 당당하게 어전에서 입장을 개진하고, 치열하고 논의하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은 사림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윤두수, 그는 지금
그 힘든 덕목을 직접 실천하고 있다.
선조의 시선이 다시 유성룡에게 향했다. 유성룡은 틈을 보이지 않고 윤두수의
뜻을 지지했다.
"지금으로선 판중추부사의 의견이 최선일 듯하옵니다. 책봉정사의 접반사로 작
년부터 부산에 머물고 있는 문학(세자시강원의 정오품 벼슬) 황신을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황신? 그는 어떤 사람인가?"
"경신년(1560년) 생이옵고, 무자년(1588년)에 등과하였사옵니다. 몽진에 참여하
여 의주까지 갔사옵고, 분조를 따라 전라도와 경상도를 널리 살폈사옵니다. 사람
됨이 신중하고 마음 씀씀이가 담대하여 왜군과 맞서도 결코 뜻을 굽히지 않을
위인이옵니다."
선조가 유성룡의 대답을 비꼬았다.
"조선에는 참으로 훌륭한 장수가 많구나. 헌데 영상은 언제 그들을 모두 살폈
는가? 권율과 이순신의 됨됨이를 소상히 아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황신과 같은
신진사류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유성룡은 가슴이 뜨끔했다. 영의정이 부산에 가 있는 신료들의 출신과 사람됨
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그런데 선조는 그 일을 원균과 이순신에게
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전하의 덕이 사해에 미치심이옵니다."
유성룡은 선조와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기에 일방적으로 꼬리를 내리며 물러
났다. 선조는 화살을 윤두수에게 돌렸다.
"판중추부사! 심유경이 장담한 대로 왜군이 부산에서 물러가고 나면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천추의 원한을 풀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윤두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군사를 기른 다음 바다를 건너가서 왜국을 치면 되옵니다."
"그대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다. 전에는 천조에서 책봉사를 파견하더라도 그것
의 옳지 않음을 지적하며 왜적을 당장 토벌하자고 주장하더니, 이제는 군사를
기르는 동안은 왜적과 화친하자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저 간악한 오랑캐의 요
구대로 사신을 보낸다면, 왜적들은 더욱더 기가 살아 예의에 어긋나는 요구를
해올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왜적을 치려고 해도 시일이 걸리는
데, 군사를 기른 후에 생각해보자는 것은 왜적을 치지 말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
가? 과인은 결코 풍신수길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노라. 그대들은 이쯤에
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허나 생각해보라. 땅에 떨어진 천하의 도의
는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에 유야무야 전쟁을 끝내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지금까지는 조총을 피해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급했다
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먼저 저 오랑캐의 무리를 쳐야 한다. 헌데 사신을 보내
라? 과인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치욕을 과인에게 씌우지 말라. 차
라리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노라."
"전하, 그것만은 거두어주시옵소서. 양우는 불가하옵니다."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
윤두수의 주청에 이어 대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과인과 그대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는가? 그대들을 모두 벌하기보다는 과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순리이다. 마침 세자가 총명하고 그대들의 뜻
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니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양위를 하겠노라."
"아니되옵니다, 전하!"
"신들을 벌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유성룡과 윤두수가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에잇!"
선조가 얼굴을 찡그린 채 용상을 박차고 일어나 큰 걸음걸이로 편전을 나가버
렸다. 신하들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계속 양위의 불가함을 소리 높여 외쳤다. 유
성룡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선조의 마음을 헤아렸다.
전하께서도 사신을 보낼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부산을 먼저 치자고 하신다.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기보다는 먼 훗날을 내다보
고 명분을 쌓으시려는 것이다. 대신들 모두가 명분에 흠집을 내었으니, 언젠가
때가 오면 그 죄를 물으시겠지. 전하를 제외하곤 아무도 그 올가미로부터 자유
로울 수 없다. 처음부터 전하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계셨다. 양위로까지 밀어
붙여 대신들의 입을 막고 당신의 입장을 더욱 선명하게 세우시려는 것이다.
"그만들 두시게!"
윤두수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대신들을 만류했다. 갑자기 편전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윤두수의 눈초리에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과 무게가 실려 있
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덕형이 침착하게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한단 말이오? 빨리 사신으로 보낼 사람을 찾아봐야지."
윤두수가 단정적으로 답했다.
"허가 전하께서 저렇듯 완강하시니......."
"어허, 병판. 그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릴 하시는 게요? 전하께서 지금 사신을
보내지 말라고 저러시는 겝니까?"
"허면......."
윤두수도 이미 전하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만약 지금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가는 그야말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을 취해도 벌을 받기는
마찬가지라면 우선 실속을 차리는 편이 급선무였다.
유성룡은 윤두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수많은 조정 중신들 중에서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혜안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하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사람은 윤두
수 단 한 사람뿐이었다. 편전을 물러나는데 윤두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영상 대감! 오늘 밤 저의 집에서 저녁을 드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러지요. 마침 집에 좋은 술이 있으니 가지고 가겠소이다."
윤두수가 유성룡의 두 손을 꼭 쥐며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모든 걸 제게 맡겨주시오.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 동안 서
로에게 품었던 오해들을 씻어보십시다."
유성룡도 선선히 응낙했다.
"허허허, 그럽시다. 오늘은 웬지 대취하고 싶소이다그려."
병신년(1596년) 7월 13일 아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권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부두로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7월 11일 늦은 밤, 사신들을 왜국까지
실어 나를 판옥선 세 척을 부산으로 보내라는 군령이 내려왔다. 판옥선뿐 아니
라 노를 저을 격군들과 사신 일행이 먹을 양식도 통제사가 직접 준비해야만 했
다. 황신이 정삼품 돈령도정으로 승진하여 정사가 되고, 대구부사 박홍장이 부사
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나대용을 싴 판옥선 세척을 정비하게 했고, 정사준으로
하여금 군량미를 조달하도록 시켰다.
판옥선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격군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어제까지 창을 겨누던 적진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꺼림칙했고, 사신들을 싣
고 바다 건너 왜국까지 다녀와야 한다는 것도 불안했다. 풍신수길이 마음을 바
꾸어 사신들을 감금하기라도 하면 격군들 역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다. 불안하기는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판옥선 세 척을 고스란히 왜군에게
강탈당할 수도 있고, 격군들을 억류하여 조선 수군의 근황을 캐낼 수도 있다. 그
러나 조정에서 결정된 일을 함부로 어길 수는 없었다.
이순신은 군량미를 옮겨 싣던 정사준을 불렀다. 정사준은 콧구멍이 훤히 내비
치는 것을 싫어해서 버릇처럼 고개를 조금씩 숙이고 다녔다. 형 사익이나 동생
사횡, 사정에 비해 외모는 많이 뒤떨어졌으나 군량미를 관리하고 세금을 거두는
일과 총포를 개량하고 제작하는 일에는 특출난 재주를 지녔다.
"얼마나 실었는가?"
"어제 상등미 이십 섬, 중등미 사십 섬을 미리 부산으로 보냈고, 오늘 또 만약
을 대비해서 상등미 사십 섬을 실었습니다."
"최대한 많이 싣도록 하게. 타국에서 굶을 수는 없는 일이니."
"알겠습니다. 장군!"
이순신과 권준과 이억기를 번갈아 쳐다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 동안 우리가 모은 군량미가 얼마나 되지? 삼도에 흩어져 있는 군량미를
합친다면?"
정사준이 곧바로 대답했다.
"오천 섬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경상우수군에 천 섬이 있고, 전라좌우수군에
각 천팔백 섬, 그리고 충청수군에 사백 섬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성들로부터 강탈한 것은 없겠지?"
정사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 제 값을 치르고 가져온 것이옵니다. 경상우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를 오가는 상선들로부터 순이익의 일 할씩을 세금으로 받았고, 장이 서는 고을
에서도 얼마간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전라우도 몇몇 섬에수군들을 동원
해서 일군 염전에서도 상당한 소금을 거두었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합쳐 권수사
와 제가 적당한 값을 치르고 곡식과 바꾸었지요. 강탈이라거나 기타 부당한 일
은 일체 없었습니다."
권준이 정사준을 지원하고 나섰다.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허나 우리 군사들이 뱃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까지도 엄하게 살피니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에게
도 이익입니다. 조선 수군이 없다면 당장 왜군에게 노략질을 당하리라는 것을
백성들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요. 군량미와 유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 수군이 늘 백성들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를 취할 작정이라면 염전을 늘리는 것만
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러나 조선 수군은 백성들과 늘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민
심을 얻어야지만 장기전을 치를 수 있지요."
이억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량미와 유황은 이제 충분히 모인 것 같소이다. 그런데 너무 시일을 끄는 것
이 아닌가요? 왜군들이 점점 더 많이 귀국하고 있지 않소이까? 이러다간 군량미
를 그대로 썩힐 판이외다."
권준이 웃으며 이억기의 말을 받았다.
"이수사의 마음을 소장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허나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어요. 전쟁이 어디 군량미와 무기, 그리고 군사들만 있다고 되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백성들의 마음가짐이지요. 여인네들에게 횃
불을 들려 강강수월래를 놀게 하는 것도 그들의 남편 혹은 자식들과 마음을 합
치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길목마다 노적봉을 쌓은 것도 같은 이치이지요. 전쟁에
서 승리하려면 군사들은 물론이고 이 땅의 백성과 산수까지도 일사불란하게 통
제사의 군령을 따라야만 합니다.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지요."
이억기 역시 밝게 웃으며 권준에게 농담을 건넸다.
"어허, 권수사는 욕심이 지나치시오. 지금이라도 군령이 내리면 전라도의 백성
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눈 깜짝할 사이에 통제영으로 몰려올 것이오. 세상에 이
처럼 전쟁을 치를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곳이 어디 있겠소?"
"그런가요?"
장수들이 서로의 우애를 다지는 동안에도 격군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차라리
싸우다 죽을망정 개죽음을 당하기는 싫은 얼굴들이었다. 눈치 빠른 권준이 분위
기를 읽고 이순신에게 권했다.
"사기를 높여주시지요. 저들은 지금 장군의 힘이 되는 말씀 한 마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순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삼백 명 남짓한 격군들
을 향해 위로의 연설을 시작하려는 순간 조방장 신호가 황급히 달려왔다.
"장군, 선전관이 오고 있사옵니다."
이순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칼바람이 일 만큼 몸을 휙 돌리며 짧
게 명령했다
"운주당으로 가자!"
나대용이 물었다.
"군사들은 어찌하옵니까?"
이순신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 뒤 답했다.
"출항하지 말고 군령을 기다리도록!"
이순신은 운주당 앞마당에서 공손히 사배를 하고 유서를 펼쳐 읽었다. 눈꼬리
가 점점 올라가면서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를 참을 수 없는 듯 고개를
쳐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곁에 서 있던 이억기가 다가섰다.
"무엇이라고 적혀 있소이까?"
이순신은 대답 대신 유서를 이억기에게 내밀었다. 이억기가 잽싸게 그것을 받
아들고 처음부터 주욱 훑어내렸다. 그이 양볼이 뿌루퉁해졌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립니까? 지금 당장 부산으로 진격하라? 부산으로
판옥선 세 척을 보내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부산에 남아 있는 왜적을 당장 공
격하라니요.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합니까? 이건 완전히 모순이외다. 앞
뒤가 맞지 않아요."
권준이 선전관 김유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 유서를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하기 전에 받았느냐, 아니면 사신을
보내기로 결론을 내린 후에 받았느냐?"
김유수가 대답했다.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이 되고 보름이나 지난 연후에 받은 것입죠."
이억기가 다시 끼여들었다.
"허면 명나라의 책봉사와 조선의사신인 황신 일행이 부산에 있는 걸 알면서도
이런 어명이 내려졌단 말인가? 지금 우리가 부산으로 진격하면 책봉사와 사신은
죽음을 면치 못해. 그런데도 부산을 치라?"
권준이 이억기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언성을 낮추시지요. 장졸들이 보고 있습니다. 자, 안으로 일단 드십시다. 우리
끼리 이 어명의 진의가 무엇인지 의논하도록 합시다."
이억기와 권준은 이순신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조방장 신호와 군관 정사준,
나대용도 회의에 참석했다. 이억기가 답답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도체찰사의 군령과 전하의 어명이 서로 모순되니, 둘 중 하나는 거짓이거나
취소되었음이 분명하오. 전령을 보내 어느 것이 진짜인지 확인하도록 합시다."
정사준이 코를 벌렁벌렁거리며 말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취소되거나 거짓으로 작성된 것은 없는 듯합니다."
이억기가 볼멘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다면 그댄 앞뒤가 맞지 않는 명령이 둘 다 진짜라고
생각하오?"
정사준이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명나라와 왜의 강화를 남의 집 불구경 하듯이 할 수는 없는 일입
니다.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은밀히 감추고, 조선 수군이 왜군을 공격하는 것은 세
상에 널리 알려서 후일을 대비하려는 것이지요. 대신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하
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유서를 보낸 주상전하께옵서는 그런 깊은 뜻
을 품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나대용이 분통을 터뜨렸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조선 수군이 부산을 칠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서 다
시 부산을 치라고 하다니요? 이건 조정 대신들이 완전히 우릴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닙니까? 사신들을 위해 판옥선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싣고 격군들까지 뽑아놓
았는데, 부산을 공격하라는 어명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만약 이 어명이 육
군의 장수들에게도 전해졌다면,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경상좌도를 향해
진격한다면 부산으로 떠나는 우리 격군들은 어찌 됩니까? 당장 목이 달아날 것
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격군들과 판옥선을 부산으로 보낼 수 없습니
다."
이순신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군령과 어명 양쪽 다 진짜라면 우린 둘 다를 따라야만 하오."
이억기가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오이까? 나군관의 말처럼 이대로 격군들을 보내어서
는 아니됩니다. 일단 며칠 동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시지요."
권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군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일을 늦추었다가는 중
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소장의 생각으로는 조정 중신들의 합의와 전하의 뜻
이 약간씩 다른 것 같군요. 서애 대감을 비롯한 중신들은 명나라와 왜의 회담이
끝날 때까지는 조선 수군이나 육군이 독자적인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
었습니다. 도체찰사의 군령은 아마도 조정 중신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허나 여러분도 다들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지난 사 년 동안 계속 부산을 치라
는 어명을 통제영에 보내셨습니다. 이번에도 전하께서는 명나라와 왜가 완전한
합의를 이루어 왜군이 철수하기 전에 어떻게든지 부산을 쳐야한다고 생각하시는
듯해요. 그게 한 나라의 군왕으로 위엄을 갖추는 일이기도 하고."
조방장 신호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큰일이 아니오이까? 서로 모순된 명령이 이렇듯 계속 내려
온다면 어떻게 장수가 전쟁을 치를 수 있겠소. 머리가 둘인 짐승은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게 마련이외다. 뜻을 하나로 합쳐도 이길까 말까 하는 판에 전하와 조
정 중신들의 불화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이억기가 이순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까 둘 다를 따르겠다고 하셨는데, 방책이 있소이까?"
이순신이 권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권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
이에는 이런 일을 당했을 때의 대비책이 진작부터 마련되어 있는 듯했다.
"우리는 넷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는 두 명령을 모두 유보하고 상황
을 더 관망하는 것입니다. 허나 이건 군령과 어명을 어겼다는 추궁을 면치 못하
겠지요? 둘째는 어명에 따라 부산을 치고 판옥선과 격군을 보내라는 군령을 무
시하는 것이지요. 허나 이 경우에도 사신이 왜국으로 가지 못해 강화 회담이 결
렬되기라도 하면 그 죄가 고스란히 조선 수군에 덧씌워질 것입니다. 셋째는 군
령을 따르고 어명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허나 이것 역시 출정하라는 어명을 어
겼다는 추궁을 받아 무군지죄로 몰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셋은 모두
적당한 방책이 될 수 없지요."
이억기가 황급히 물었다.
"마지막 넷째는 무엇이오?"
"통제사의 말씀처럼 두 가지를 모두 따르는 것입니다. 우선 지금 당장 준비된
판옥선과 격군, 그리고 군량미를 부산으로 보냅니다. 그럼 일단 군령을 지킨 것
이 되겠지요? 그 다음에 내일쯤 소장이 군선들을 이끌고 왜선들이 모여 있는 칠
천량 근처로 나가는 것입니다."
나대용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다가 왜선들을 격침시키기라도 하면 우리 군사들은 되돌아오지 못하오이
다."
권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게 문제지요. 허나 우리가 왜선들과 맞서기는 하되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닌가요?"
신호가 물었다.
"허나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이 출정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트집을 잡을
것이외다."
권준이 말을 탁탁 끊어 치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오늘 격군들을 보내면서 황신에게 은밀히 서찰 한 장을 건네는 것
이지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왜장에게 넌지시 알려달라고 말입니다."
이억기가 물었다.
"황신이 우리 부탁을 듣겠소?"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조선 수군이 거제를 지나부산 근처로 진격한다
면 황신 자신의 목이 달아날 테니까요."
권준이 말을 맺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이 길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이억기도 정산준도 나대용도 권준도 알
고 있었다. 이것ㄷ 결국에는 어명을 어기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된다면 그
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드러내놓고 어명을 거스를 수 없었
다. 그 동안 이순신은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어명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따르지
않았다.
육군이 먼저 경상도로 진격하면 소장도 삼도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겠나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변명도 먹혀들지 않았다.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면 당장에
부산으로 진격하겠노라고, 원균이 쉴 새 없이 장계를 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토굴에서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원균의 성격으로 볼 때 그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이순신이 어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장계를 다시 올린다면 당장에
수군통제사가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직접 부산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치러 가는
흉내는 내야 한다. 이순신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회의를 끝맺었다.
"권수사의 의견대로 합시다. 나군관! 그대는 격군들과 판옥선을 당장 부산으로
보내시오. 신조방장은 내일 아침 일찍 권수사를 도와 칠천량 쪽으로 나가도록
하오. 이수사는 만일을 대비해서 전라우수군의 판옥선들을 한산도 근처까지 전
진배치시키시오. 그리고 정군관이 황신에게 보내는 서찰의 초안을 잡아보도록
하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우린 지금까지 훌륭하게 바다를 지켰고 앞으로
도 계속 그러할 것이오. 우리가 서로 믿고 의지한다면 그 누구도 조선 수군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외다. 그 누구도!"
이순신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장수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장수
가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은 그 만큼 힘든 일이었
다.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이순신은 자개함에 고이 모아둔 유서들을 꺼내었다. 열
두 장. 그는 벌써 열두 번이나 어명을 어긴 것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는 그 글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언젠가 그는 저 유서들 때문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숨이 막혀왔다. 첩첩산중이나 심해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때이른 안식이나 속된 행복을 탐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범부의 안락을 포기하고 택한 장수의 길이 아니었더냐.
그러나 전쟁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느낌이 어떠한 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로부터 뜬구름 같은 명령을 받을 때면 울화가 치밀어오른다. 그것이
어명으로 탈바꿈해서 내려올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잘못을 바로잡고 싶
다. 그러나 나에게는 힘이 없다. 권력이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이용만 당한 채
죽을 수는 없다. 적어도 내 인생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이순신이다.
그들에게도 이 사실을 똑똑히 알려야 한다.
10. 능지처참
맹자가 제선왕에게 말씀하셨다. "임금이 신하 보기를 자기의 수족과 같이 하면
신하는 임금 대하기를 자기의 심복같이 하고, 임금이 신하 보기를 견마같이 하
면 신하는 임금 대하기를 나랏사람(국인)같이 하고, 임금이 신하를 흙이나 풀같
이 여긴즉 신하는 임금 대하기를 원수같이 하게 됩니다."
[맹자], [이루편]
병신년(1596년) 8월 20일 밤.
술에 취한 사내가 부엉이 우는 밤길을 걷고 있었다. 사내는 대취한 듯 달을
손가락질하며 웃기도 하고 소나무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뒤
가 급한 강아지처럼 담벼락으로 쪼르르르 달려가 구토를 했다. 청석교를 오르다
가 다리 난간에 서서 달빛에 어린 개천을 내려다보았다. 둥근 달이 흐물흐물 형
체를 바꾸더니, 방긋웃는 어린 소녀의 얼굴이 물 위에 어렸다.
"설경아!"
그는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어린 딸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 집으로 달려가 어
린 딸을 가슴에 품고 볼을 부비고 싶었다. 소녀의 얼굴이 지워지더니, 이번에는
갸름한 턱에 오똑한 콧날이 인상적인 여인이 떠올랐다.
"부, 부인!"
사별한 아내 김씨가 웃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아내의 불그레한 양볼을
쓰다듬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손을 내밀자 달빛에 휩싸인 아내 김씨도
미소로 화답했다.
"나요, 나!"
그의 몸이 난간에서 스르르 밀리는가 싶더니 곧 개천으로 곤두박질쳤다. 풍덩
소리와 함께 개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내의 미소가 어둠 속으로 아득히
사라졌다.
"미친놈! 자기가 무슨 이태백이라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마를 둘둘 만 무명천의 꽉 죄
는 느낌이 불쾌감을 더했다. 반짝이는 사내의 두 눈이 보였다. 겨우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살피니 좔좔좔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개천이 드러났다. 조금 전에 자
신이 곤두박질쳤던 곳을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가 누워 있는
곳은 청석교의 다리 밑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사내는 여기서 노숙하던 거렁
뱅이인가?
"자네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었으니 평생 술을 사야 할 걸세."
말끝이 조금씩 칙올라가다가 떨어지는 낯익은 억양이었다.
"스, 스승님!"
"허어, 이제야 날 알아보는구먼. 목뼈라도 부러지지 않았나 걱정했지."
거렁뱅이 사내는 강릉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바람처럼 사라진 손곡 이달
이 분명했다. 허균은 예의를 갖추려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허리가 삐긋
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가만있게.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성할 리가 있겠나? 우선 젖은 몸
을 뉠 수 있는 곳으로 가세. 자네 집은 예서 한참이니, 어디가 좋겠는가?"
"괜......찮습니다."
"단보! 괜한 고집 부리지 말게. 내가 이래봬도 그 동안 힘깨나 길렀다네. 자네
하나 업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자, 어서 업히게."
이달은 허균을 조심조심 일으켜 세운 후 거뜬하게 업었다. 술과 여자에 취해
비실대던 약골의 젖은 눈동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풀어헤친 가슴과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검붉은 근육은 차돌멩이처럼 단단했다. 웃통을 벗고 나서면 농사
일에 이력이 붙은 농사꾼으로 영락없이 오해받을 정도였다. 누가 그를 당채 최
고의 시인, 눈물의 시인이라고 하겠는가?
"나으리, 이게 무슨 일이에요?"
청향이 버선발로 마당까지 달려나왔다. 이달이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난초로다!"
청향은 그들을 풍악 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별채로 안내했다. 허균은 아랫목에
편안히 누우라는 이달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고 비스듬히 베개에 등을 기대고
서 앉았다. 청향이 피투성이 허균과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이달을 번갈아 쳐다
보았다. 허균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는 겐가? 어서 가서 술상이나 봐오게."
"상처가 깊어요. 우선 치료부터 해야......."
"난 아무렇지도 않아. 밤길이 어두워 낙상한 것뿐이니 걱정 말게."
청향이 이달의 눈치를 살폈다. 이달은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향이 술상을 내오고 허균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이달은 윗목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청향은 정성을 다해 허균의 얼굴과 목덜미에 난 상처
를 닦아내고 깨끗한 천으로 머리를 다시 동여맸다. 그리고 귓속말로 물었다.
"뉘신지요?"
허균이 대답했다.
"손곡 선생이시네."
"아! 그럼 저분이 바로......."
청향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허균으로부터 손곡 이달의 눈부신
시를 전해 들었다. 한없이 애잔하고 더할 나위 없이 촉촉한, 그러면서도 가슴 깊
이 불의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숨어 있는 시들. 청향은 옷매무시를 고친 후 이
달 앞으로 가서 큰절을 했다.
"청향이옵니다."
이달이 술잔을 비운 후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난초에 맑은 향기라! 좋구나, 좋아."
"존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오늘 그 소원을
이루었군요."
"그런가? 단보가 내 이야기를 했는가 보군. 자, 그럼 우선 술부터 한 잔 따르
게."
이달이 술잔을 청향의 가슴팍까지 쭉 디밀었다.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였
고 갈라진 손등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청향이 정성껏 술을 따랐다.
"단보가 날 뭐라고 하던가?"
"이백, 두보와 견주어도 아깝지 않은 당대 제일의 시인이라 하셨어요."
이달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청향에게 건네주었다.
"또 뭐라 하던가?"
청향이 술잔을 받은 후 고개를 돌려 입술에 갖다댔다. 그리고 다시 이달에게
술을 다르며 답했다.
"문에도 밝으시고 도의와 풍류를 아시는 분이라 하셨어요."
"식인을 즐기는 놈이란 소린 하지 않던가?"
"예?"
"허허허!"
술을 따르던 청향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이달은 땀 냄새가 풀풀 풍기는
몸을 앞으로 디밀며 다시 물었다.
"이래봬도 난 사람을 열아홉이나 먹었다네. 알겠는가?"
"......."
청향은 이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보통 여자 같으면 벌써 기겁을 해서
뒤로 물러났을 터인데 청향은 숨을 고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첩에게 시를 가르쳐주실 수 없사옵니까?"
이달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게 시를 가르쳐달라? 그러다가 내가 널 잡아먹으면 어찌하려고?"
"소첩은 그리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옵니다."
"허허, 참으로 당돌한 계집이로고."
눈을 감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허균이 끼여들었다.
"그만 나가 있게."
청향이 술상을 허균 앞으로 옮겨놓은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취기가 오른 이
달의 몸이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렸다.
"계집 보는 눈은 여전하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어."
허균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 동안 어디에 계셨습니까? 강릉으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는가? 괜한 수고를 했군. 산천구경이나 하며 떠도는 폐인을 찾긴 왜 찾
아?"
허균은 자기 앞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충청동 구경을 좀 했지. 홍산에서 어제 올라왔네."
"홍산이라구요?"
허균의 음성이 커졌다. 이달이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이몽학을 따라다닌 건 아니시겠죠?"
이달의 얼굴에 웃음이 맴돌았다.
"왜 아니겠는가. 나 같은 놈은 역적질도 못하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몽학을
따라다녔다네. 지난달 6일 홍산서 궐기한 후, 7일 정산, 8일 청양, 9일 대흥을 휩
쓸 때도 함께 있었지. 그리고 10일 홍주를 에워쌌을 때도 함께 했고, 덕산 근처
서 이몽학이 자살할 때에도 곁에 있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역적질을 했지. 믿어
지지 않는가? 이런 놀음이야 나보다 단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수호지연
의]를 수도 없이 읽었으니 그들의 절실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걸세. 자네
도 이와 같은 일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승님! 역적은 능지처참할 뿐만 아니라 삼족을 멸합니다. 신중하셔야지요.
겨우 닷새 만에 끝날 일에 몸을 던져서는 아니됩니다."
"허허허, 속 편한 소리만 하는구먼. 처음엔 누구나 작은 불씨로 시작하는 법이
야. 작은 불씨들이 모여 순식간에 벌판을 태우리라 믿으며 말일세. 이몽학의 기
세는 대단했지. 단숨에 오천 명도 넘는 장정들이 모여들었으니까. 한현이 약속대
로 내포에서 밀고 내려왔다면, 그래서 홍주를 함락시키기만 했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대되었을 거야. 물론 거사도 성공할 가능성이 컸지."
이달은 눈을 감고 홍주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역적들이 관군들의 수급을 취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목 없는 시체들이 정
산, 청양, 대흥에 즐비하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달이 쓴웃음을 삼켰다.
"우릴 완전히 오랑캐 취급하는군. 난을 일으킨 이몽학과 한현,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대부분 관군이나 의병들이었네. 정산, 청양, 대흥이 하루 만
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뭘 뜻하겠나? 내 장담하네만, 전투다운 전투는 홍주에 이
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네. 이미 서로 안면이 있고 마음도 통하는데 무엇하
러 구태여 싸우겠는가? 이몽학이 일성 연설을 하면 방금까지 관군이었던 장정들
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합류했다네. 우리가 손을 본 사람들은 악명 높은 몇몇 벼
슬아치들뿐이야. 오히려 이몽학이 죽고, 반란을 진압한 관군들이 각 고을로 들어
가면서 살육이 자행되었지. 애매한 백성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매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고, 때로는 반병신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
"도대체 왜 이몽학의 편에 서신 겁니까?"
이달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단보! 그 동안 난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상흔을 똑똑히 보았다네.
왜군들로부터 당한 일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는 번번이
이 나라 조정이 임명한 각 지방의 수령들이 입힌 것이었어. 수많은 백성들이 의
병이 되어 변변한 무기도 하나 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동안 각 고을의 수령들은
대부분 산 속에 숨어 있었지. 헌데 왜군이 부산까지 물러나고 전쟁이 소강 상태
로 접어들면서 가당치도 않은 일들이 벌어진 게야. 피흘려 싸운 백성들은 끼니
를 잇지 못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데, 고을 수령들은 어명을 등에 업고 나타
나서 백성들의 마지막 남은 피와 살까지 빼앗아 갔지. 선봉에서 피흘려 싸운 군
졸들에게 돌아갈 상도 모조리 수령들의 몫이었어. 벼슬아치들은 전쟁 전보다 더
욱 악독하게 이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네. 거리에는 이런 말까지 떠돌고 있
어. 고을 수령이나 왜군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아, 이 나라 조선에는 절망
뿐이네. 한숨과 비탄과 좌절뿐이야. 왜군이 물러간다손 쳐도 이 나라는 오래 가
지 못할 걸세.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리고 있음이야. 이몽학의 거병은 이 절망을
뛰어넘으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네."
이달은 쉼없이 뜨거운 말들을 쏟아놓았다. 허균은 스승에게 이토록 뜨거운 분
노가 숨어 있는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이몽학은 홍산의 군졸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도 나처럼 서출이라네. 자넨 이 나라에서 서출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아는
가? 서출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네.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숨죽이며 살
아야 하지. 양반님네들의 눈에 잘못 띄었다간 의심을 받고 치도곤을 당하기 십
상이야. 허나 이몽학은 나처럼 술과 계집질로 인생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곧은
인간이었어. 무수한 전공을 세웠지만 그는 끝내 장수로 임명되지 못했네. 천첩의
자식이 거둔 전공은 고스란히 양처의 자식에게 돌아가게0 마련이지. 이몽학은
그걸 견디지 못했던 게야."
천첩의 자식!
그제야 허균은 이달이 이몽학의 반란에 동참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달이
방랑으로 평생을 보낸 것도 서출인 그를 이 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부호형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서출의 운명. 이달은 이몽학을 자신
의 분신으로 여겼으리라. 전쟁의 상흔조차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는 나라를 뒤집
어엎고 백성들을 위한 나라, 개인의 장래를 출신성분으로 가로막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으리라.
"요행히 목숨을 건지셨군요."
"단보! 자네가 무슨 소릴 하려는 줄 알고 있네. 인육을 먹은 놈이 무슨 반란이
냐고 따지고 싶겠지. 괜한 자격지심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고. 허나 이보게. 강
릉에서 함께 살았던 그 화전민들도 모두 이번 거사에 참여했다네. 양식을 찾아
팔도를 떠돌다가 그때 마침 충청도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지만 이몽학을 따른 것
은 결코 우연이 아니네.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인육을 먹었기에 이 세상을 바꾸려
는 것이다. 다시는 자기와 같이 추한 인간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일세.
절망도 단단해지면 힘이 되는 법이야."
"시는 어찌하셨습니까?"
허균은 전쟁을 겪으며 이달이 지은 시들을 알고 싶었다. 식인에서 반역까지,
삶의 극단을 모두 체험한 그이기에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시들이 나올 것만 같
았다. 이달은 허균의 마음을 넘겨짚은 듯 낮게 읊조렸다.
"몇 편 끄적거리기는 했지. 강릉에 있을 땐 꼭 이 모든 일들을 시에 담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네. 후후후, 참으로 끈질긴 집착이었지. 생명을 이어가는 것만큼이
나 지독한 바람, 끊을 수 없는 족쇄와도 같은 바람. 허나 식인의 무리가 반란에
동참하는 걸 보면서 그 바람들을 끊어버렸다네. 시란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었어. 바로 거사에 참가한 식인의 무리들 각자가 한 편의 시였네. 그들의 몸뚱
어리 하나하나에 무수한 감정과 다짐과 역사가 쌓여 있었지. 그리고 그들은 매
순간 전혀 새로운 시를 짓고 있었어. 그것들은 결코 글로 옮길 수 없었어. 꺼칠
꺼칠한 손, 칼에 찔린 어깨의 상처,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발가락 하나하나가
모두 시라네. 자 눈을 크게 뜨고 날 자세히 보게. 자넨 지금 내가 만든 시를 고
스란히 보고 있어. 알겠는가? 이게 바로 시야."
"이몽학을 비롯한 반란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
찌 되었나요?"
"뿔뿔히 흩어졌다네. 나와 함께 움직였던 화전민들도 절반은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라도 쪽으로 내려갔지."
"왜 함께 가시지 않으셨는지요?"
허균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자신의 몸이 곧 시요, 식인의 무리들이 곧 시
라고 주장하는 스승의 앞날을 알고 싶었다. 스승은 아직도 반란을 꿈꾸고 있는
가? 아니면 허무에 휩싸여 다시 예전의 그 자리로, 방랑의 시인으로 돌아왔는
가? 이달은 농담처럼 받아넘겼다.
"단보, 자넬 보러 왔다네."
"......."
허균은 뚫어지게 이달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확인하고 싶어서였네. 그들의 절망이 사실인가를 마지막으로 살피기 위함이
야. 삶에 미련이 남아서라고 해야겠군.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그 빛을 움켜
쥐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겠나? ;허나 강릉에서 홍주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내
가 본 절망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라면 그땐......."
"그땐 어쩌시렵니까?"
이달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자네 형의 뒤를 따르는 수도 있지. 금강산의 신선 노릇도 나쁘지는 않으이."
자살하겠다는 뜻! 막아야만 한다.
허균은 이달의 초췌한 얼굴과 가슴, 배와 두 다리를 차례차례 읽어 내렸다.
"그 절망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달은 남아 있는 술은 완전히 비운 다음 선선히 답을 주었다.
"아주 쉬운 일이야. 누가 전쟁의 책임을 지는가를 보면 돼. 그 책임을 백성들
이 지면 백성들의 절망은 사실인 걸세. 만약 그 책임을 왕실과 조정에서 지겠다
고 나선다면 희망이 있는 게지."
"아직도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달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그딴 걸 끝까지 봐야 아는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항상 조짐이란 게
있는 법.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가만 확인하면 돼. 오래 전부터 하삼도에는 이런
소문이 돌고 있네. 한양의 조정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들과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장수들을 죄다 죽일 거라고 말일세. 저렇게 공이 큰 사람도
벌을 받는데 이름 없는 민초들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이런 식의 공포를 백성
들의 마음에 심어두고 책임전가를 하려는 게지. 벌써 그 덫에 한 사람이 걸려들
었더구먼."
"김......덕령을 말씀하시는 겝니까?"
의병장 김덕령은 이몽학과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추궁을 받고 있었다. 한양으
로 끌려온 한현이 함께 거병하기로 모의한 장수들을 대라는 추궁에 김덕령을 제
일 먼저 언급했던 것이다. 8월 1일, 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된 김덕령은 아직까
지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론 자신의 죄를 극구 부인한
다고 했다.
"그래, 자네도 잘 아는군. 우선 김덕령이겠지. 그 다음엔 곽재우일 것이고, 또
그 다음엔 도원수 권율과 수군통제사 이순신도 무사하지 못할 걸세. 만약 지금
의금옥에 갇혀 있는 김덕령이 처형된다면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 이
나라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세. 그 어떤 희망도 없지. 백성들은
아무 말도 않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네. 이 전쟁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그리고 이건 나라도 아니고 뭣도 아니란 것을. 내 말, 알아듣겠는가?"
병신년(1596년) 8월 21일 아침.
선조는 영의정 유성룡을 편전으로 불렀다. 죄인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고 시
일만 끄는 것을 추궁하기 위함이었다. 추국청을 설치하고 죄인을 신문한 지도
벌써 스무 날이나 지났다.
8월 4일에는 선조가 직접 나서서 김덕령을 친국(임금이 직접 신문함)했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었다. 용상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의 얼굴을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감히 누가 용안을 함부
로 노려본단 말인가. 그러나 김덕령은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두 눈을 번뜩이
며 선조의 힐책에 빠짐없이 반발했다.
"너는 언제부터 이몽학, 한현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느냐?"
"그런 적 없사옵니다."
"이미 한현이 모든 것을 이실직고했느니라. 역적들의 문서에서 거명되고 있는
김, 최, 홍은 너 김덕령과 너의 부장 최담령, 그리고 홍계남을 가리키는 것이 아
니냐?"
"아니옵니다. 신은 억울하옵니다. 풍전등화에 처한 이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
으킨 지 사 년이옵니다. 그 동안 신은 이 나라에서 오랑캐를 완전히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만을 염원하였사옵니다. 반란이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선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치도 않다? 과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
"역도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과장하여 사람들을 규합하려고 신의 이름을 판 것
이옵니다. 신뿐만 아니라 저들은 의병장 곽재우, 경상좌병사 고언백, 병조판서
이덕형까지 끌어넣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역도라면 이 나라에서 역도가 아
닌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통촉하시옵소서."
인두로 허벅지를 지지고 무거운 돌로 무릎 위를 짓이겨도 김덕령은 끝까지 눈
을 치켜뜬 채 자신의 죄를 부인했다. 친국을 하기 전까지는 선조도 김덕령이 반
란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직접 그의 걸걸한 음성과 짙은
눈썹, 그리고 도끼눈에서 뿜어나오는 광채를 보는 순간 순순히 그를 무죄방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건이 조정의 경솔한 판단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진다면 김덕령은 고난받는 민중의 영웅이 될 것이고, 선조 자신은 그 영웅
을 핍박한 무능한 군왕이 되는 것이다. 하삼도의 의병장들 중에서 민심을 가장
많이 얻고 있는 장수가 김덕령과 곽재우라고 하지 않는가? 곽재우가 신출귀몰한
전술로 왜군들에게 타격을 가한다면, 김덕령은 담력과 힘으로 왜군들을 정면에
서 쳐부수었다. 따라서 장정들은 곽재우보다 김덕령을 더 많이 믿고 따랐다. 아
무런 죄도 밝히지 못하고 방면시킨다면 김덕령이 마음을 고쳐먹고 정말 반란을
일츠킬 가능성도 있었다. 의금부까지 압송한 이상, 최소한 역도들과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자백받아야 한다. 풀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양 날개를 모두 부러뜨려
다시는 전투에 나설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왕실의 위엄을 만천하에 알려야 하
는 것이다.
"영의정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유성룡은 보름이 넘도록 위관(조사관)으로 김덕령을 심문해서인지 무척 피곤
해 보였다. 윤두수, 정탁 등과 번갈아 위관을 맡았지만 아직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김덕령의 힘과 패기에 맞서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선조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는 유성룡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죄인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스무
날 이상이 걸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백성들의 의심만 살
뿐이다. 선조는 위관들을 호되게 꾸짖어 며칠 내에 결판을 낼 작정이었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는가?"
유성룡이 단정하게 대답했다.
"어제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죄인을 심문하였사오나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사옵니다."
선조가 말머리를 돌렸다.
"영상!"
"예, 전하!"
"송강이 죽은 지 얼마나 됐지?"
유성룡은 눈을 끔벅끔벅거리며 잠시 시간을 벌었다. 송강 정철은 왜 갑자기
찾으시는 걸까?
"햇수로 삼 년이옵니다."
"삼 년이라? 벌써 그렇게나 세월이 지났는가? 송강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
지. 정여립이 난을 일으켰을 때 단숨에 역도들을 잡아들이고 죄를 추궁하여 자
복을 받아내지 않았는가? 그때 송강은 하삼도에 역심을 품은 자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 마저 색출하자고 했지. 참으로 혜안이 아닐 수 없었어. 송강은 오늘과 같
은 일이 터질 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게야. 그때 송강의 주장을 앞장서서 반
대한 이가 바로 영상이지?"
유성룡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때 송강 정철은 전라도의 사림을
잡아들이는 것도 모자라서, 숨어 있는 역도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이황의 학통
을 이어받은 영남 사림 전체를 들쑤시려 했다. 유성룡으로서는 스승을 욕보이려
는 송강의 주장을 앞장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송강의 뜻에 따랐다면 도학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사옵니다."
"사림을 키우는 것보다는 왕실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율곡과 퇴계가 아무리
뛰어나도 과인의 신하들이 아닌가? 영상은 과인보다 퇴계의 말을 더 따르는구
나."
"전하!"
"송강이 그립다. 송강이 이 일을 맡았다면 지금처럼 차일피일 미루지는 않았으
리라. 벌써 역도들을 가려내고 사건을 마무리했을 것이야."
유성룡이 머리를 조아렸다.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역도들은 단 한 놈도 살려둘 수 없다. 김덕령은 물론이고 곽재우에게도 죄를
물을 것이야. 말이 좋아 의병이지, 그들은 언제라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무
기가 있고 군사들이 있고 군량미가 있지 않느냐? 그들은 도원수나 병마사의 군
령도 제멋대로 무시해왔다. 특히 김덕령은 그 오만방자함이 하늘에 닿았어. 결단
코 과인은 김덕령을 살려두지 않겠다. 그를 죽여, 지금도 역심을 품고 있는 정여
립과 이몽학의 잔당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리라. 도대체 도원수 권율과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진작 부산을 쳤더라면 의병장들이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하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데는 권율과 이순신의
책임도 크다."
"그들은 모두 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장수들이옵니다."
"자고로 병기는 흉기라고 했다. 장수들은 바로 그 흉기를 다루는 자들이다. 아
무리 큰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반역을 도모하면 능지처참을 면할 길이 없다. 혹
위관들이 김덕령의 지난 전공을 참작하여 형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옵니다, 전하."
선조가 유성룡을 매섭게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여라. 만약 내일까지 자복을 받아내지 못하면 위관들에게
엄히 죄를 묻겠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김덕령은 결코 살려둘 수 없다. 역모
에 가담한 의병장들이 누구누구인지 소상히 밝히도록 하라."
유성룡은 굳은 얼굴로 편전에서 물러났다. 선조는 이번 일을 빌미로 삼아 전
라도의 의병장들을 다스리려는 것이다. 선조는 사신들의 왜국 파견에 반대했으
며 오랑캐와의 강화는 용납할 수 없고 오직 전쟁을 통해 치욕을 갚겠다고 공언
했다. 선조의 주장이 완강해질수록 이순신과 권율, 그리고 그 휘하 장수들과 의
병장들이 위태롭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 왕실과 조정에 등을
돌린 민심을 되돌리는 데도 힘이 부족한 상황이 아닌가. 전쟁은 말로만 하는 것
이 아니다. 군량미가 있어야 하고, 군사들의 싸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무엇
보다도 조정과 장수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마자 오천여 명의 백성들이 합세한 것은 조정이 민심을 잃었음을 반증한다. 그
래도 전라도는 권율과 이순신 덕분에 안정을 찾고 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김덕령이나 곽재우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모두 바꾼다
면, 그래서 전라도에서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이 나라는 회생하기 어렵다.
"영상 대감!"
병조판서 이덕형이 편저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성룡은 천천히 그에
게 다가갔다. 이몽학의 난으로 마음 고생이 가장 심한 사람이 바로 이덕형이었
다. 한현을 비롯한 반란군의 수괴들은 하나같이 조정의 공모자로 이덕형을 지목
했다. 선조는 물론이고 조정 중신들 중에서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덕형에게는 역적들의 자백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만으로도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지난달에는 사직상소와 함께 석고대죄를 했으
며, 이 달 들어서도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도 사직을
아뢰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 게요? 지금 병판이 자리를 비우면 누가 이 난국을 타
개할 수 있겠소?"
유성룡은 여러 차례 이덕형을 타일렀다. 강화 회담이 마무리될 때까지 전투를
미룬 데는 병조판서 이덕형의 힘이 컸다. 영상과 병조판서, 도원수와 삼도수군통
제사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선조와 윤두수를 비롯한 서인 측에서 함
부로 전면전을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덕형이 병조판서에서 물러난다
면 터져나오는 조정의 불만을 유성룡 혼자만의 힘으로 가라앉히는 것은 불가능
하다. 유성룡으로서는 이덕형을 놓칠 수가 없었다.
"영상 대감! 공모자로 지목된 김덕령은 지금 의금부에 잡혀와서 신문을 받고
있습니다. 헌데 함께 거명된 소생이 어찌 병무를 계속 볼 수가 있겠습니까?"
"어허, 병판이 죄가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오."
"관군이었던 이몽학과 한현이 반란을 일으킨 것 자체가 장졸들을 제대로 다스
리지 못한 병판의 책임입니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평생 씻을 수 없는 부끄러
움을 지게 됩니다. 흉악한 역적의 혀에 더럽힘을 받았으니 어찌 벼슬 자리를 지
키고 있겠습니까? 소생이 오늘까지 몸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성은의 지극하심으
로 말미암음이옵니다."
"따르시오!"
유성룡은 이덕형을 데리고 편전을 벗어났다. 내시와 궁녀들의 눈과 귀를 피하
기 위함이었다. 돌담을 끼고 한참을 걸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로 나란히
서 있는 후원에 당도했다. 주위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유성룡이 정색을
하며 이덕형을 나무랐다.
"병판,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지금 그대가 병조판서에서 물러나면 곧바로
전쟁이 터지오. 왜 그걸 모르는가?"
이덕형이 잠시 허공을 우러른 후 대답했다.
"어차피 전쟁은 다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화 회담이 결렬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지요? 풍신수길은 조선 땅의 반을 주겠다고 해도 흡족하게 여기
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군사들과 군량미를 모으고 성을 쌓기 위한 시
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책봉사들이 돌아오면 곧바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래
서 소생이 물러나려는 것이지요."
강화 회담이 결렬되리라는 것은 유성룡 역시 예측하고 있었다.
"전쟁이 재개된다면 더욱 그대가 병판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
겠는가?"
"영상 대감!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이옵니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전쟁이 터
진 후에 문책을 당할 것이 분명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오랑캐에게 전쟁을 벌일
여유를 주었다는 비난이 누구에게 쏟아지겠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그 책임을
고스란히 병조판서인 소생이 지게 됩니다. 허면 소생은 물러날 수밖에 없지요."
이덕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유성룡은 그가 그렇게 멀리가지 내다보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허면 어찌할 생각이오?"
"이몽학의 반란에 책임을 지고 병조판서에서 물러난 후 당장 부산을 치자는
소를 올릴 작정입니다."
"부산을 친다?"
"전하께서는 계속 선공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어차피 책봉사가 돌아오
기 전까지는 전쟁을 벌일 수 없지요. 섣불리 군사를 움직였다가 왜국에 있는 책
봉사들이 목숨을 잃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명나라에 그야말로 큰 죄를 짓게 됩니
다. 소생이 소를 올린다고 해도 군사를 움직일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전
하의 뜻에 동조함으로써 그 동안 영상 대감과 소생에게 쏟아졌던 비난들을 무마
할 수 있겠지요. 일단 뒤로 한 발 물러섰다가 책봉사가 돌아온 직후에 다시 실
권을 쥐면 됩니다. 대감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유성룡은 이덕형이 말할 수 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좋아. 그렇게 함세."
유성룡이 발길을 돌려 의금부로 향하려는 순간, 이덕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덕령은 어찌하실 겁니까?"
"전하께선 김덕령을 살려둘 수 없다고 하교하셨소."
"그가 죽으면 의병들과 백성들의 동요가 매우 클 것이옵니다. 죄를 자복했다면
모를까,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받고서도 무죄를 주장한다면 급하게 죽여서는 아
니되옵니다."
"누가 그걸 모르오? 허나 김덕령을 살리려고 애쓰다가는 이 땅의 사람들이 위
태로울 판이오. 전하께선 정여립의 난을 신속하게 처결한 송강까지 언급하셨다
오."
"송강을요?"
"시일을 끌면 소문만 무성해질 분이오. 우리에게 전혀 이롭지 않아요. 이미 몸
도 마음도 모두 처참하게 상한 김덕령을 살리기 위해 모험을 할 수는 없소."
이덕형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유성룡의 말뜻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이덕형과 헤어진 유성룡은 서둘러 의금부로 향했다. 위관으로 뽑힌 윤두수와
정탁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유성룡을 보자마자 임금의 의중
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유성룡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젓는 것으로 편전에서 주
고받은 대화를 요약했다. 김덕령을 살려둘 수 없다는 전하의 뜻이 확고하다는
뜻이었다.
정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그는 김덕령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고로 조정에서 의병장을 처형시킨 예가 없으며, 지금 김덕령을 죽이
면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궐기했던 모든 의병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덕령을 죽이는 것은 국가에 전혀 이로움이 없으며, 그를 잘 타일러 방면한다
면 조정의 위엄과 포용력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전하께서는 왜군을 부산까지 내쫓은 것이 명군의 전공이라고 하시지만, 실상
하삼도의 의병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가 오늘날 이 곳에 이렇게 서 있을 수
있겠소이까? 김덕령과 곽재우는 의병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살아 있는 신화오이
다. 설령 그들에게 죄가 있더라도 지금은 그들을 살려두어야만 해요."
윤두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정탁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윤두수가 차
갑게 입을 열었다.
"권율의 장계에 따르자면, 김덕령은 역도들을 진압하러 가는 길에 나흘이나 머
뭇거리며 사태를 관망했다고 하였소이다. 김덕령과 그 휘하 병력이 반란을 진압
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사실이오. 그러니까 백성들의 눈에는 김
덕령 역시 난을 일으킨 이몽학은 은근히 지원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소. 몇
년 전부터 김덕령은 자신의 힘과 패기만 믿고 지방 수령들을 업신여기며 의병들
을 임으로 처벌해서 물의를 빚었음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설령 이몽학과 역적모
의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동안 김덕령이 조정을 업신여기고 어명을 무시하
며 태만하게 행동한 것은 따끔하게 추궁해야만 하오. 김덕령이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연히 국법에 따라 처결해야 하리라고 보오. 어명을
어긴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중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하
오."
어명을 어긴 자라고 했겠다?
유성룡은 입맛이 썼다. 윤두수의 말에는 참으로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판중추부사! 허면 중벌을 내릴 장수가 더 있다 이 말씀이오?"
윤두수가 목청을 돋우며 대답했다.
"영상 대감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충청병사에서 전라병사로 자리를 옮긴 원
균의 장계에 따르자면, 어명에 따라 군사들을 경상좌도로 인솔하려고 해도 다른
장수들과 손발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하오. 도원수 권율과 수군통제
사 이순신이 쥐구멍으로 숨은 쥐새끼마냥 꼼짝도 않는다 이 말씀이오. 이렇게
장수들끼리 서로 협조가 되지 않아서야 어떻게 왜군을 몰아낼 수 있겠소이까?
이 점은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외다."
정탁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의 다툼을 중재했다.
"그만들 하시오. 지금은 김덕령을 추국하여 죄를 자복받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자, 어서들 가십시다."
세 사람은 의금부 앞뜰에 마련된 추국장으로 갔다. 양발에 요(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쇠뭉치)를 찬 김덕령이 나무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고개를 축 늘이고
퉁퉁 부어오른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입에서는 쉬지 않고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내렸고 고통을 참지 못해 물어뜯은 입술은 살점이 반이나 떨어져 나갔다.
인두로 지진 가슴과 등은 군데군데 흉측한 낙인을 드러냈고 곤장으로 터져버린
엉덩이는 피와 살과 옷이 뒤엉킨 채 굳어버렸다. 천하를 호령하던 장부의 기개
는 온데간데 없었고 죽음을 기다리는 고깃덩이가 겨우 숨을 헐떡거릴 뿐이었다.
지금 방면하더라도 평생 후유증에 시다리며 반병신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문사낭청(위관을 도와 죄인을 추국하는 관리) 윤
방이 큰 소리로 외쳤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김덕령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두 눈은 퉁퉁 부은
눈두덩이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유성룡과 먼저 눈을 맞춘 김덕령이 히죽 웃었
다.
"대감! 밤새 평안하셨소이까?"
윤방이 호통을 쳤다.
"죄인은 묻는 말에만 답하라!"
김덕령의 시선이 왼쪽으로 옮겨갔다.
"오, 윤대감과 정대감도 나오셨군요. 이렇게 세 분이 나란히 추국장으로 오시
기는 지난 초하룻날 이후로 처음인 듯하오이다."
그 동안 세 사람은 돌아가며 하루씩 의금부로 나왔다. 육체는 비록 만신창이
가 되었지만 그 정신은 위관들이 동정을 살필 만큼 멀쩡한 것이다. 윤두수가 불
쾌한 얼굴로 신문을 시작했다.
"오늘도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살아서 의금부를 나갈 수 없느니라. 마지막
기회란 걸 명심하렷다. 너와 함께 반란을 도모한 전라도의 의병장들과 장수들이
누구누구냐?"
김덕령이 고개를 치며들고 당당하게 답했다.
"잡소리 더 듣고 싶지 않소이다. 어서 죽이시오."
윤두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위관의 물음을 무시하는 것은 곧 이 나라
조정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광주에서 네가 거병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너를 어여삐 여겨 호익과 충용라는
군호가지 내려주었다. 네가 도원수나 도체찰사의 군령을 어기고 함부로 휘하 장
졸들을 죽였을 때도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 헌데 너는 배은망덕하게도 대의에
어긋나는 짓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였으니, 그 죄가 어찌 적다 하겠는가?"
김덕령은 윤두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유성룡을 노려보았다.
"유대감! 대감께서도 소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시오이까? 대감께서는 전라
도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살피고 계신 줄 알았소이다. 이통제사나 권도원수께서
는 대감과 같은 분이 이 나라에 한 분만 더 계셨더라면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
었으리라고 늘 말씀하셨지요. 대감! 소장의 목숨이 여기서 끝나리라는 걸 잘 알
고 있소이다. 후회는 없소이다. 다만 소장의 뒤를 이어 수많은 장수들이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을 것이 안타까울 뿐이외다. 전하께서는 소장이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소장에게 쏠리는 민심이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
요?"
윤두수가 고함을 내질렀다.
"닥쳐라, 이놈!"
김덕령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군왕이 장수를 믿지 못하면 장수는 목숨을 잃는 법이오이다. 허나 장수가 죽
은 다음에는 군왕도 곧 나라를 잃을 것이외다. 김덕령을 죽인 다음에는 곽재우
를 죽이겠지요? 그 다음에는 이순신과 권율이 위험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어쩌
면 유대감께서도 전하의 눈 밖에 날 것이오. 전하의 마음이 이렇듯 좁은 줄 알
았다면 순순히 오라를 받아 이곳까지 끌려오지 않았을 것을. 대감! 소장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부디 곽장군과 권도원수, 이통제사의 목숨은 구해주시구려. 그
들이 무슨 죄를 범했겠소? 다만 전황도 제대로 모르고 목소리만 높이는 난신들
의 뜻에 따르지 않았을 뿐이외다."
윤두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무엇 하는 것이냐? 당장 저 주둥아릴 찢어놓지 못할까?"
문사낭청 윤방이 복명했다.
"주리를 틀어랏."
건장한 나졸들이 김덕령의 양다리에 주장 두 개를 가위 벌리듯이 끼워넣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꺾어 눌렀다.
"으윽!"
김덕령의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고, 흰자위에 실핏줄들이 소곳소곳 돋아
났다. 김덕령이 갑자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대감, 이렇게 해서 어디 소장이 죽겠소이까? 하하, 하하
하!"
윤방이 다시 큰 소리로 명령했다.
"압슬하랏!"
네 명의 군사들이 정육면체로 자른 거대한 바위를 낑낑대며 들고 나왔다. 주
장을 빼는 것과 동시에 김덕령의 허벅지 위로 바위가 올려졌다. 뼈를 모두 바스
러뜨릴 만한 바위가 순식간에 허벅지를 짓눌렀고, 김덕령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혼절하고 말았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태산
같은 바위의 무게를 감당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만! 멈추어라."
정탁이 소리쳤다. 바위를 내려놓았지만 김덕령은 좀체로 깨어나지 못했다. 축
늘어진 죄인을 쳐다보며 정탁이 애원조로 말했다.
"김덕령을 죽여서는 아니되오. 대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킨 그를 이렇듯 어처구
니없이 죽일 수는 없소이다. 그가 죽으면 이 나라에는 더이상 의병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윤두수가 단호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지중추부사! 대감께서도 방금 듣지 않았습니까? 지금 죄인은 이 나라 왕실과
조정을 업신여기고 있소이다. 추국장에서 말한 것만으로도 사약을 받아 마땅하
오. 이런 자가 군사와 무기와 군량미를 취한다면 언제 역심을 품을지 모르는 일
이외다. 설사 사약이 내려와도 기쁘게 마셔야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거늘 감
히 하늘을 원망하고 이 나라 조정을 비웃다니, 능지처참하여 본보기를 삼아야
하오이다."
"김덕령을 죽이면 전라도의 민심이 돌아서게 되오."
"국법은 지엄한 것이오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눈치를 살펴서는 아니되오이
다."
유성룡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윤
두수와 정탁의 목소리가 차츰 흐려진다.
이제 김덕령은 방면되더라도 앉은뱅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그가 비참
한 몰골로 전라도로 내려간다면 백성들은 그 참혹함에 더욱 분노하리라. 그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허나 정탁의 주장대로 이 일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하
께서 의병장들과 장수들을 엄하게 다스리신다면 그 역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전쟁터로 나간 장수들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결
코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장수는 철저하게 정치로부터 물러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김덕령이 죽게 되면 모든 장수는 왕실과 조정의 움직임에만 관심을 쏟으
리라.
아, 길이 보이지 않는구나. 김덕령을 어찌할 것인가? 전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거릴 것인가? 권율, 이순신, 곽재우가 계속 군무를 맡을 수 있도록
어떻게 전하의 마음을 돌릴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정녕 길이 보이지 않는구나.
"대감, 영상 대감!"
유성룡은 윤방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무슨 일인가?"
윤방이 안절부절못하며 형틀에 묶인 김덕령을 가리켰다.
"호, 혼절한 죄인이 깨어나지 않습니다. 물을 들이붓고 인두로 등을 지져도 꿈
쩍 않고......."
"무, 무엇이야?"
유성룡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김덕령에게 뛰어 내려갔다. 비릿한
피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형틀도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대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지금 의원이 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유성룡은 만류하는 윤방을 밀치고 김덕령의 오른 손목을 잡아끌었다. 윤두수
와 정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유성룡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이런!"
맥이 뛰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유성룡은 서둘러 소매에서 중침을 꺼냈다.
만약을 대비해서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혈맥을 짚어
나갔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유언을 남길 시간이라
도 벌어야 했다. 머리에서부터 장딴지가지 침을 놓은 후에야 겨우 맥이 돌아왔
다. 유성룡은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낸 후 고개를 돌려 윤두수와 정탁에게 말
했다.
"더 이상 싸우지들 마시오. 죄인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전
하의 뜻대로 되겠구려."
11. 함정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
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
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서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또 수전에 익숙하
여 적을 보는 대로 나아가 이기기만 하고 지는 일이 없으므로 군졸이 믿어서 두
려워하지 않는데, 이제 주사를 버리고 기보를 거느리니, 병사가 수사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그 잘하는 것을 버려두고 그 재주를 못 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다섯 적장과 큰 군사가 겨울이나 봄에 올 것이라
는 신보를 들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서둘러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죽일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조금이라도 늦추어서 적이 뭍에 내릴 수 있게 한다면, 뒤
에 기보 수만 명이 있더라도 어찌 선풍처럼 빨리 오는 예봉을 막을 수 있겠습니
까. 임진년의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죽여서 적이 감히 언
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적을 막는 첫째 방책이라면, 주사의 장수
는 본디 과거에 싸워서 여러 번 이긴 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원균이 수군
을 거느리면 반드시 이길 도리가 있음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마땅하지 않은 사
람으로 담당하게 하여 적에게 대항하지 못함으로써 적이 혹 호남으로 가는 길을
한번 범하면 원균이 한 도의 기보 군졸을 거느려 대장이 되더라도 결코 수전에
서처럼 뜻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니, 다시 수사를 삼아서 전일에 싸웠던 장기를
쓰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육군의 장수로 말하면 마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어찌 원균을 대신하여 감당할 자가 없겠습니까."
[선조실록], 29년 11월 9일 신축조
병신년(1596년) 11월 9일 저녁.
먹구름이 낮게 드리우더니 어스름이 깔리면서 기어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
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유난히도 가깝게 들렸고, 눈을 맞으며 이리저리 움직
이는 궁녀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했다. 낙엽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뭇가지에서 탐스러운 눈꽃이 피어났고, 초겨울 바람이 담벼락을 타고 넘
어올 때마다 처마에 쌓인 눈들이 부스스 몸을 뒤채며 떨어져 내렸다.
편전을 나온 동부승지 허성은 허리를 주욱 펴고 암회색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은 하늘 빛깔과 닮아 있었다. 첫눈을 맞이하는 기쁨 대신 흉흉한 소문
이 사실로 밝혀진 데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이 달 들어 편전에서는 쉴 새
없이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왜국으로 건너간 황신으로부터 강화 회담이 결
렬되었다는 밀서가 날아들었다. 강화 회담이 결렬되었으니 곧 다시 전쟁이 시작
되리라. 설마설마 하던 일이 순식간에 코앞으로 밀어닥쳤다.
"이 위급한 때에 기생을 들이겠다고? 얼빠진 놈!"
허성은 동궁전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젯밤, 허균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형님! 설경에게는 엄마가 필요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혼자 늙어갈 수도 없구
요."
청향이라고 했던가?
허성도 그녀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유성룡의 부탁으로 석봉 한호를 찾으러
명월관에 갔을 때 별채에 있던 앳된 얼굴의 기생. 겨우 열여섯 살이 될까 말까
한 계집을, 근본도 모르는 계집을, 뭇 사내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던 계집을 안방
마님으로 들이겠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가문의 수치야, 수치!
출사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줄 알았다. 그러나 늘 좋지 않은 소문이 아
우를 따라다녔다. 기생집을 드나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서얼들과 어울려 저잣
거리에서 술을 마신다는 말도 있었고, 중들과 함께 사냥을 다녀왔다는 해괴망측
한 소문까지 돌았다. 처음에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일 년이 넘도록 방탕을 즐기는 아우를 보고 허성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형님! 태어날 때부터 양반의 씨와 기생의 씨가 따로 있답니까? 나라가 이 모
양 이 꼴이 된 마당에 양반 상놈 따져서 무엇 하겠어요. 저잣거리로 나가보십시
오. 양반이라고 하면 침을 뱉고, 출사했다고 하면 몰매를 맞기 십상입니다. 나라
를 망쳐 먹은 양반님네들을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곧 큰 난리가 터질 거라는
소문이 좌악 퍼졌어요. 이몽학의 난은 맛보기에 불가합니다. 이대로 거드름만 피
우다가는 나라가 제풀에 쓰러지고 말 거예요."
"닥쳐라, 이놈! 그딴 소릴 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백성들의 원성을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체면이나 따질 때가 아니지요. 하
긴, 죄없는 김덕령도 고문해서 죽이는 세상이니, 저 같은 놈 하나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겠죠? 허나 이런 식으로 자꾸 백성들의 입을 막아서는 아니됩니
다."
딴마음을 먹고 있는 것일까? 역적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몽학의 난
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전하의 귀에 허균의 철없는 주장이 흘러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우의 마음을 돌려야 해.
광해군은 웃는 얼굴로 허성을 맞이했다. 방금 전까지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던
지 서안에는 손때가 묻은 서책들이 쌓여 있었다. 허성이 예를 갖춘 후 선조의
뜻을 전했다.
"세자저하! 편전으로 납시라는 주상전하의 하교가 있으셨사옵니다."
광해군은 고개를 끄덕인 후 허성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허승지! 방금 책을 읽다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을 찾았네. 들어보겠는
가?"
"예, 저하!"
얼떨결에 허성은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 겨울, 중병을 앓은 후로 광해군은 두
문불출하고 책읽기에만 전념했다. 사서오경은 물론이고 노장이나 불경에까지 관
심을 보인다는 풍문을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라는 존립하는 것이 상도이다. 나라가 존립하고 나서야 패자도 될 수 있고
왕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몸을 생존하는 것이 상도이다. 몸이 생존해야 부귀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하기를, '만족함을 아는 것이 만족이 된다'고
하였다....... 허승지, 어떤가? 참으로 옳은 말이 아닌가?"
허성은 광해군이 이 대목을 끄집어낸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저하! 지금 이 나라의 존립을 걱정할 때가 아니옵니다. 어찌 우리가 한낱 오
랑캐로부터 나라의 존립을 위협받겠사옵니까?"
"내 생각이 지나치다 이 말인가?"
"그런 게 아니오라......."
허성이 말끝을 흐렸다.
"임진년에도 방심하다가 의주까지 몽진을 갔었어. 그때도 대신들은 왜군들을
한낱 오랑캐라고 했었지. 허나 저들은 강했고 우린 약했네. 강자가 약자를 취하
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야. 춘추전국시대를 끝낸 것도 결국 진시황이 아니었는가.
전쟁터에서는 오랑캐의 군대도 없고 천자의 군대도 없네. 오직 강한 군대와 약
한 군대. 이 둘뿐! 지금 조선의 군대는 왜의 군대보다 강한가? 나는 이것이 궁금
할 따름이네."
"천하의 모든 일은 도의를 따르는 법이옵니다. 임진년에는 왜적이 우리를 속이
고 급습을 하였기에잠시 물러나야 했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이미 왜적들이 군사
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대신들이 합당한 대비책을 세울 것이오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광해군이 허성의 말을 곱씹었다.
"그때는 대비를 못했고 지금은 충분히 준비를 할 여유가 있다? 그렇군. 허승
지 말에도 일리가 있어. 허나 수월하기는 왜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들도 이
미 한 차례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한 경험이 있어. 낯선 길을 처음 갈 때는
힘들지만 두 번째부터는 한결 쉬운 법이지. 아니 그런가?"
"그, 그러하옵니다."
광해군은 허성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
"또다시 몽진을 떠나자는 말이 들리던데, 사실인가?"
"아니옵니다.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겠사옵니까?"
허성은 시선을 내리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정 대신들 중에는 황해도 해
주 쪽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임진년 때처럼 허둥지둥 몽
진을 나서기보다는 미리 준비를 해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망극한 일이었다.
"알겠다."
광해군은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사이에 어둠이 완전히 깔려 있었다. 동궁전에서 편전까지 가는 동안 광해
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난 겨울 이후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그였다. 허준
이 지은 보약을 먹었지만 분조를 이끌고 산야를 누비던 예전의 건강을 되찾지는
못했다.
선조는 편전에서 <팔도총도>를 살피는 중이었다. 널따란 방안에 홀로 남아
지도를 살피는 군왕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을씨년스러웠다.
"왔는가? 이리, 이리 가까이 와서 앉으라."
광해군은 지도를 살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 붓으로 점을 찍은
곳이 눈에 띄었다. 임진년 이후 새롭게 고쳐 쌓은 성들이었다.
"세자! 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 과인의 나라이니라. 과인이 떠나고 나면 세자
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 누구도 이 땅을 빼앗지는 못한다. 과인으로부터 이
땅을 넘보는 자는 오직 죽음뿐이지."
선조의 음성은 비장하기조차 했다. 광해군은 하삼도의 산성들을 눈으로 훑으
며 말했다.
"아바마마, 마음을 편히 하시옵소서. 누가 감히 아바마마의 나라를 넘볼 수 있
겠사옵니까?"
선조는 고개를 돌려 광해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광해군도 선조의 시선
을 피하지 않았다. 선조의 긴 침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광해! 너는 이 나라
를 하루라도 빨리 넘겨받고 싶어 안달이로구나. 네가 분조를 이끌고 강원도로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전라도에 내려가서 김덕령을 비롯한 의병장들을 만났을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지로 뛰어든 세자, 의병장들의 전
공을 앞장서서 챙기는 세자여! 백성들의 민심을 돌려 전쟁의 잘못을 군왕에게
덮어씌우려는 너의 의도를 나는 안다.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
면 시름시름 앓던 너의 병도 깨끗이 나을 것이고, 또다시 하삼도로 내려가겠다
고 고집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광해! 너는 모르고 있다. 아무리 민심을 얻어도
아무나 군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군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의로움도 용기도 아니란 사실을.
"세자,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곧 다시 전쟁이 터질 것이니라."
광해군이 전혀 몰랐다는 듯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선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풍신수길이 기어이 조선팔도를 빼앗아야 되겠다고 했다는구나. 과인은 결코
풍신수길을 용서할 수 없다. 그놈을 능지처참시킨 후에라야 이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
"물러갔던 왜군들이 언제쯤 다시 바다를 건너온다고 하였사옵니까?"
"내년 봄이라고 황신이 적어 보냈지만 오랑캐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만
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이번에는 소서행장보다 가등청정이 선봉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구나."
"가등청정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맹한 자이옵니다. 그 자가 다시 군사를 이
끌고 상륙하면 싸워 물리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과인도 세자와 같은 생각이다. 가등청정이 경상도에 발을 딛기 전에 쳐야 한
다."
선조는 잠시 말을 끊고 지도를 살폈다. 거제도와 부산 사이에 검은 줄이 그어
져 있었다.
"헌데 세자는 이순신을 어찌 생각하는가?"
광해군은 그 물음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갑오년(1594년)에 홍주까지 내려간 세자는 이순신에게 부산으로 출정하라는
영을 여러 차례 내리지 않았는가?"
"그러하옵니다."
"과인 역시 선전관을 수도 없이 보냈느니라. 그러나 이순신은 한산도에 드러누
워 꼼짝도 않고 있다. 세자는 이순신이 경상도로 나아가서 가등청정을 섬멸하리
라고 보는가?"
"......."
광해군은 즉답을 피했다. 선조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칠천량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꺼리는 이순신이니, 결코 가등청정과
맞서 싸우지 않을 것이다. 갖은 핑계를 댈 것이 분명해."
"하오나 이순신은 임진년 이후 큰 잘못 없이 조선 수군을 이끌어 왔사옵니다."
선조의 언성이 높아졌다.
"세자도 임진년의 승리를 거론하여 이순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인가? 그때
의 승리가 어디 이순신 혼자 힘으로 된 것인가?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있었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있었다. 이순신이 두 사람의 공을 가로채서 휘하 장수인 권
준이나 이순신에게 돌렸다는 소문도 있다."
"......."
"또한 이순신은 제멋대로 군선을 늘리고, 군량미를 비축하고, 유황을 사 모으
고 있다."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온지요?"
광해군은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그의 편을 들
었다가는 선조가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아바마마는 이순신을 버리시려는 것인가?
"세자! 세자는 이순신을 믿는가?"
"아바마마! 순신은 조선 수군의 으뜸 장수이옵니다."
으뜸 장수!
선조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순신을 변호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나서
서 비난하지도 않는 광해군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광해! 너는 이순신과 뜻을 같이하는가? 네가 분조를 이끌고 하삼도로 내려갔
을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 권준을 은밀히 만났음을 알고 있다. 이순신이 네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여기는가? 그러나 너는 모르고 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장수가 아니라 언제나 군왕인 것을. 어명을 거역하는 장수는 그 누구
를 막론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 이순신이 수군의 으뜸 장수인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는 가등청정을 치
지 못한다. 세자는 군사들을 이끌고 경상좌도로 가서 가등청정을 급습할 장수가
누구라고 보는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어떠하온지요?"
광해군은 슬쯕 화살을 이억기에게 돌렸다.
"임진년에 이억기는 참으로 용맹하였으나 지금은 이순신의 그늘에서 움츠리고
있을 뿐이다. 해평부원군 윤근수는 전라병사 원균을 천거했다."
"하오나 원균은 이순신과의 쟁공 때문에 육군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았사옵니
까?"
"그깟 사소한 다툼은 문제될 것이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가등청정을 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가서 여진족을 급습하고, 경상우도의
바다를 결사항전으로 지켜낸 원균이라면 가등청정과 맞설 수 있지 않겠는가?"
광해군은 선조의 마음이 이미 원균에게 기울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이순
신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전쟁을 목전에 둔 마당에 수군의 으뜸 장수
를 바꾸는 것은 장졸들의 동요를 부채질하는 처사이다.
"참으로 원균은 맹장이옵니다. 허나 이순신의 전공도 가벼운 것이 아니니, 원
균에게 경상우도만을 우선 맡기는 편이 어떻겠사옵니까?"
"원균을 수사로 보낼 수는 없다. 그가 수사로 가면 통제사인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원균이 이순신의 군령을 받지 않아야지만 자유롭게 가등청정과
싸울 수 있느니라."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하온지요?"
선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분오열, 다들 제 정신이 아니다. 영상과 판중추부사는 이순신과 원균 둘 다
훌륭한 장수라고 하였다. 과인도 이순신을 쉽게 내쳐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다. 이번에도 어명을 거역한다면
과인은 결단코 이순신을 용서치 않겠다. 김덕령처럼 무군지죄로 다스리리라."
"아바마마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광해군은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선조의 뜻이 정해졌다면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선조는 <팔도총도>를 거두며 잊었던 것을 막 기억해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자! 군왕은 북풍 몰아치는 언덕의 푸른 소나무와도 같다. 군왕은 누구에게
도 도움을 구해서는 아니된다. 군왕이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면 그 순간 신하
들은 딴마음을 먹고 매서운 북풍처럼 군왕을 쥐고 흔들게 된다. 군왕은 언제나
마음을 숨기고 위엄을 유지해야 한다. 그 길만이 왕실의 만만세세 평안케 한다.
세자! 특히 장수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그들을 믿는 것은 곧 제 손으로 역적을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장수들이 큰 공을 세워도 작은 상을 내릴 것이며, 작
은 잘못을 범해도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 명심하라. 장수들은 필요악이다. 왕실
의 안위를 위협할 때는 가차없이 내쳐야 한다. 세자! 그 동안 과인에게 실망도
많이 했고, 때론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왕은 왕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짐승의 마음을 먹을 때도 있고 아녀자의 계교를 취할
때도 있다. 세자! 과인은 권율도 이순신도 이일도 원균도 그 어느 장수도 편애하
지 않는다. 다만 누가 왕실을 위협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필 뿐이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장수, 과인의 명을 어기는 장수는 지체없이 내칠 것이다.
세자는 과인의 말을 명심하도록 하라!"
"예, 아바마마!"
선조의 충고가 심장을 때렸다. 광해군의 마음을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이
다. 그 순간 얼핏 선조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맴돌았다.
"세자, 과인은 사사롭게는 세자의 아비니라. 아비와 아들만큼 가까운 사이가
어디 있겠는가. 허허허허, 과인은 언제나 아비의 심정으로 세자에게 이 변화무쌍
한 삶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싶노라. 그러니 세자! 멀리서 삶의 스승이나 동반자
를 찾지 말고 이 아비에게 오도록 해라. 과인이 세자의 아비란 걸 한시도 잊어
서는 아니된다. 알겠느냐?"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정유년(1597년) 1월 14일 오후.
고성을 떠난 판옥선 두 척이 물살을 가르며 통제영이 있는 한산도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모여 있던 양털구름이 천천히 동쪽으로 움직였고,
갈매기떼는 수면에 배를 부딪힐 만큼 낮게 날았다. 역풍이 불었지만 겨울 바람
치고는 차갑지 않았다. 만선의 고깃배들이 벌써 흥청흥청대며 육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한산도가 가까워지자 바삐 움직이는 군선들이 보였다. 능선을 타고 활과 화살,
그리고 군량미를 옮기는 군사들도 여럿 있었다. 강화 회담이 결렬되었다는 소식
과 함께 조선 수군도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이 한산도로
전진 배치되었고, 경상우수영에는 하루에는 두세 번씩 통제영의 전령이 오갔다.
그러나 군사들의 표정은 딱딱하거나 어둡지 않았고, 언제든지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조선 수군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있는 이순신과 이억기, 권준이 부두에 나란히
서 있었다. 판옥선이 닿자마자 이순신이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권도원수께서 친히 이곳까지 오시니 참으로 기쁨이 크옵니
다."
권율이 이순신과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야 오게 되었구려. 오면서 보니 군선들이 참으로 정
비가 잘 되어 있소이다."
"과찬이십니다. 자, 가시지요."
이순신은 권율 일행을 운주당으로 안내했다. 그곳까지 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의 안부를 물었다. 권율은 통제영에서 아직까지 발생하고 있는 돌림병을 염려했
고, 이순신은 충청도 일대 산성의 개축과 보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운주당 앞뜰에는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이 도열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
이 그들을 한 사람씩 권율에게 소개했다.
"조방장 배흥립입니다. 조방장이었던 신호가 남원의 교룡산성으로 파견된 뒤
통제영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쪽은 장흥부사 이영남. 태안군
수를 거쳐 강계부판관으로 있다가 한 달 전에 다시 제 휘하로 돌아왔습니다."
권율은 배흥립과 이영남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한 후 곧바로 별채에 마련된
회의장으로 향했다. 권율은 뭔가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권
율을 중심으로 이순신과 이억기, 권준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권율이 곧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가등청정이 온다고 하오."
이억기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사실이오이까?"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생포로 온다 하니 왜군이 상륙하기 전에 마땅히 바다에서 공격하여 수장시
켜야 할 것이오. 이것은 두 달 전부터 전하께서 어명으로 누누이 당부하신 바요.
상벌을 엄히 하시겠다고 하셨소."
이억기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당연히 선공을 해야지요. 이번에야말로 놈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 합
니다."
권준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토록 중요한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얻으셨는지요?"
권율이 권준을 쏘아보았다. 권준은 온화한 웃음을 흘리며 조용히 대답을 기다
렸다.
"지난 11일 밤, 경상우병사 김응서 대감이 알려왔소."
권준이 말꼬리를 쥐고 다시 꼬치꼬치 캐물었다.
"경상우병사께서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내셨는지요? 부산에 간 자를 보내셨
나요?"
권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소서행장이 보낸 요시라로부터 얻은 것이오. 그에 따르면 가등청정이
칠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에 와 있는데 정동풍이 불면 서생포로 향한다고
했소. 마땅히 미리 서생포로 가서 가등청정을 공격해야 할 것이오."
권준이 거듭 물었다.
"가등청정이 서생포로 온다는 사실을 소서행장이 알려주었다는 건가요? 거참,
이상하군요. 세상에 아군의 움직임을 적극에게 미리 알려주는 장수도 있습니까?
아물리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나 그들은 둘 다 풍신수길
의 장수들입니다. 소서행장이 조선에 귀화할 생각이 없는 이상 어찌 그런 터무
니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이건 함정입니다. 도원수께서는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으셨나요?"
권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역시 12일 아침 일찍 초계를 떠나 의령에
서 김응서를 만나고 13일 밤늦게 고성에 당도할 때까지 요시라의 말이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김응서가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고 재촉했
고, 소서행장에게 사람을 보내 알아볼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우선 이순신에게
통보하여 수군을 내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겼다. 재작년 홍주의 분조에서 마
주쳤을 때부터 권준의 날카로움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속마음을 훤히 꿰
뚫는 질문을 받고 보니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권율은 권준에게 즉답을 피하
고 시선을 이순신에게 돌렸다.
{"통제사! 나 역시 요시라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오. 그놈도 결국은
왜놈이고, 제 나라를 위해 우리측에 정보를 흘리는 것이 아니겠소? 허나 그 말
을 무시했다가 정말 가등청정이 서생포로 들어온다면 그대는 중벌을 면할 수가
없소. 더군다나 지난달 부산의 왜군 군영을 방화한 전공을 그대가 빼돌렸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니, 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어떻소이까?"
권율은 의도적으로 이순신의 약점을 건드렸다. 작년 12월 12일, 부산 왜군 군
영에서 큰 불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그 방화를 주도한 것이 자신의 휘하 장졸
인 거제현령 안위와 군관 김난서, 군관 신명학이라며 그들에게 상을 내려달라는
장계를 올린 것이다. 그런데 도체찰사 이원익 역시 그의 조방장 정희현과 군졸
허수석이 부산에 불을 질렀다고 보고를 해왔다.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이원익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쪽이 거짓을 아뢰었다고 보고, 과연 누가 거짓을 아뢰었는
지 은밀히 조사하였다. 권율이 책임을 지고 그 사건을 살폈는데, 이원익의 조방
장 정희현과 군졸 허수석이 불을 지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결국 이순신이
거짓 장계를 올린 것이다. 권준이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일은 거제현령 안위와 군관 김난서가 전공을 탐내어 거짓 보고를 올렸기
에 일어난 사건이오이다. 통제사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전공을 칭찬하는
장계를 올리신 것이구요. 확인을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이겠으나, 잘못이 있다
면 안위나 김난서에게 있지 통제사께서는 이 일과 무관합니다."
권율이 허리를 뒤로 주욱 젖히며 권준을 향해 웃었다.
"허허허, 휘하 장졸들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 것도 장수에게는 큰 죄가 아니
겠소? 또한 왕실과 조정 대신들은 이 일을 권수사의 말처럼 그리 간단히 여기지
는 않는 듯하오. 그 동안 수도 없이 올라온 통제사의 장계 중에서 이번과 같은
거짓 장계가 몇 번 더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소이다. 원균에게 돌아가야 할
전공을 권수사에게 빼돌렸다는 상소도 있었고. 이런 마당에 조선 수군이 움직이
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 오해를 받게 될 것이오. 통제사! 내 말뜻을 아시겠소?"
이순신은 시선을 내리고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조용한 음
성으로 이억기와 권준에게 말했다.
"이수사와 권수사!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소?"
이억기는 더 앉아 있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권준이 선선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따라나왔다.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권율이 이순신을
위로했다.
"서애 대감께서도 통제사가 무사하길 바라실 것이오."
이순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생각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임진년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빠져들면서부터 전라도의바다와 육지를
굳건히 지켜왔다. 사 년이 넘도록 부산을 치라는 어명을 어길 수 있었던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권율이 군사를 일으
켜 경상좌도로 향했다면 이순신은 군선을 이끌고 부산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
으리라. 그러나 두 사람은 나라의 운명을 건 모험을 결코 감행하지 않았다. 시간
이 걸리더라도 안전하게 지금의 영토와 백성들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강화 회담이 결렬되었고, 수십 만의 왜군이 다시 대마도로 건너와 있는
상황이다.
이순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수사의 말처럼 이것은 소서행장이 파놓은 함정이오이다. 정동풍이 불면 서
생포로 온다고 했으니, 만약 정동풍이 불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는
일이아니오이까? 또한 언제 오는지도 밝히지 않았소. 소장의 생각으로는, 소서행
장이 이런 정보를 흘림으로써 오히려 가등청정을 무사히 상륙시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소이다. 우리의 시선을 딴 곳으로 몰아놓고 적당한 때를 봐서 상륙하
려는 것이지요."
"허나 만에 하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소서행장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이오이다. 출정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
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우린 이미 소서행장의 함정에 걸려들었소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질 것이오."
"누가 더 이 일에 연루된단 말씀이오?"
권율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가등청정을 바다에서 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소이다. 허나 어명은
계속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라고 강요하고 있어요.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
은 가등청정의 수급이 아니라 소장의 수급이외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전하께서 통제사의 목을 원하다니."
이순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서행장의 함정도 문제이지만, 소장에게는 전하의 함정이 더욱 넓게만 보입
니다. 함정이 겹겹으로 놓여 있으니 소장의 운도 이것으로 끝인가 하오이다."
권율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순신은 어금니에 쓴웃음을 물었다.
"곧 전쟁이 재개되오이다. 이몽학의 난을 이용해서 김덕령을 죽였듯이, 전하께
서는 정유년의 전쟁을 틈타 나를 죽이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조선
의 장수들 중에서 역심을 품는다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자가 누구인 것 같소이
까?"
"그거야 당연히......."
"바로 도원수와 소장이오이다. 전하께서는 우리 둘 중 하나만이라도 전쟁이 터
지기 전에 도려낼 작정이시지요. 하나가 물러나면 나머지 하나도 겁을 먹고 함
부로 나서지 못할 테니까 일석이조가 아니겠소이까?"
"당치도 않아요. 통제사가 없으면 조선 수군은 오합지졸일 뿐이오. 내 상소를
올려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아뢰겠소이다. 통제사의 죄 없음을 주청하겠소. 또한
서애 대감께도 이 일을 급히 알리도록 하십시다.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일
아니오?"
이순신은 권율의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양쪽에서 파놓은 함정에 빠져 허우
적거릴 줄은 몰랐다.
장수로서의 명예를 지키며 담담하게 물러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하단 말인가?
수없이 많은 장계를 올려 충성심을 보여드렸건만, 전하는 끝내 나를 믿지 못하
시는구나.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이곳까지 와서 소장을 살펴주시는 마음은 고맙기 이를
데 없으나, 전하께 상소를 올리거나 서애 대감께 구원을 청해서는 결단코 아니
되오이다. 만약 그랬다간 소장뿐만 아니라 도원수와 서애 대감까지도 무사할 수
없소이다. 생각해보시오. 소장과 권도원수, 서애 대감이 한 목소리를 내면 전하
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혹 우리들이 담합하여 왕실과 맞설지도 모른다
면 두려워하실 것이 분명하오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마십시다. 전하께서 파
놓은 함정에 소장이 빠지면 그만이외다."
"이통제사!"
권율이 당겨 앉으며 이순신의 손을 맞잡았다. 차갑고 야윈 손이었다. 이순신이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하하, 도원수! 소장에게 청이 하나 있소이다."
권율이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무엇이오?"
"소장이 물러나면 전라병사 원균이 소장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원
균은 성격이 불과 같아서 군선을 몰고 지체없이 부산으로 달려갈지도 모르오이
다. 그때가 오면 도원수께서 잘 타일러주십시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약
점만 제외한다면 그 역시 뛰어난 조선의 장수오이다."
"허나 통제사가 지금처럼 어려움에 처한 것은 원균의 장계 때문이 아니오? 자
기에게 맡겨주면 당장 부산 왜영을 불바다로 만들겠노라고 허풍을 떨었기 때문
에......."
이순신이 그의 말을 잘랐다.
"아마도 부산을 치겠다는 것은 원병사의 진심일 것입니다. 그를 탓할 이유가
없지요. 모든 것은 군왕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소장의 잘못이오이다. 장수가 군
왕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버림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요. 차라리 원병사가 통제
사로 오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통제사는 삼도의 수군을 손아귀에 넣어야
하는데, 이억기나 권준은 그만한 그릇이 못 되오이다. 오직 원병사만이 그 모두
를 감당할 위인이지요."
권율이 목소리를 깔았다.
"통제사! 마음에도 없는 말씀 마시오. 원균이 한산도의 주인이 되면 어찌 이
나라 수군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겠소. 통제사가 모든 것을 만들었으니 이것
들을 제대로 활용할 이도 통제사뿐이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원균이 온다면 내
기필코 그를 용서치 않겠소."
이순신이 권율을 만류했다.
"사사로이 원병사를 대해서는 아니됩니다. 물론 소장도 원병사에게 앙금이 남
아 있으나 그것 때문에 전쟁을 그르칠 수는 없소이다. 육군의 으뜸 장수와 수군
의 으뜸 장수가 서로 불화한다면 어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소이까. 소장은
원병사를 압니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벌판을 질주하던 그를, 적의 선단을 향해
돌진하던 그를,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를 소장은 흠모하고 존경하외
다. 그러하니 도원수께서도 소장을 아끼시듯 원병사를 아껴주십시오. 소장의 진
심이옵니다."
권율은 입맛이 썼다. 만약 요시라의 전언이 거짓이라면 그는 지금 이순신을
함정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여름, 권율은 어명에 따라 김덕령을 잡아들인 후 다시는 조선의 장수들
을 죄없이 희생시키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결심이 너무나
도 빨리 무너지게 생겼다. 그는 이순신을 잡아들이는 일만은 피하고 싶으나 어
명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권율을 부두까지 배웅했다. 권율의 발걸음은 운주당으로 향할 때와
는 달리 한없이 느렸다.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싫어 뒷걸음질치는 황소를
닮았다. 배에 오르기 전 권율은 이순신의 손을 굳게 잡고 마지막 당부를 했다.
"살아남아야 하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오. 내 말 명심하
시오. 개죽음을 당하려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아니지 않소? 이통제사, 내 힘닿
는 데까지 도우리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하늘도 통제사를 버리지 않
을 것이오."
이순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권율의 배가 고성으로 출발하자마자 이순신은 출정 명령을 내렸다.
"서생포로 간다."
많은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군선에 올랐다. 날발의 뿔피리 소리와 송희립 형
제의 북소리가 한산도를 온통 뒤흔들었다. 백여 척이 넘는 군선들이 일제히 한
산도를 빠져나와 거제도 쪽으로 향했다. 지휘선에 남았던 권준이 걱정스런 얼굴
로 이순신에게 물었다.
"함정입니다. 장군! 가서는 아니됩니다."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허나 가지 않으면 중죄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오. 죽더라도 가야
지. 내 운의 마지막을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권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장 뱃멀미를 일으켜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이순
신은 권준에게 다가와서 투구를 벗겨주었다. 권준은 이순신의 다정다감한 배려
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순신이 지나가는 말로 읊조렸다.
"내가 없으면...... 권수사가 장수들을 챙겨주시오. 이언량, 나대용, 이기남, 송희
립 같은 사람들은 혈기만 믿고 일을 저지를 수도 있으니....... 관직에서 물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를 원망해선 아니되오. 김완이나 배흥립도 권수사가 다독거
려주오. 그리고 이영남을 아껴주오. 내게 와서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오. 보기와
는 달리 여리고 생각이 많으니, 특별히 술이라도 자주 사주도록 하오."
"자, 장군! 어찌 그런 불길한 말씀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습니다.
가등청정만 잡으면......."
이순신이 입으로만 웃었다.
"권수사! 아무리 그대가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지혜를 지녔다 해도 미꾸라지처
럼 기어 들어오는 가등청정을 잡을 수는 없는 법.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소.
더 이상 미련두지 맙시다."
"서애 대감께 서찰을 올리시는 것이......."
"어허, 이미 끝난 일이래두!"
산달도를 오른편으로 끼고 거제도로 빠져들려는 순간 척후로 나갔던 사도첨사
김완의 경쾌선이 돌아왔다. 지휘선으로 옮겨 탄 김완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순신
을 찾았다.
"장군! 이미 늦었소이다. 지난 12일에 왜선 백오십여 척이 이미 서생포로 들어
왔고, 13일에는 왜선 백삼십여 척이 가덕도로 상륙하였소이다."
결국!
이순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
난 것이다. 이미 상륙한 왜군을 바다에서 잡으라고 하다니.
곁에 있던 권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 우릴 묶어두고 그 틈을 이용해서 왜선들을 상륙시킬 작정이었군요.
역시 함정이었습니다. 속히 이 일을 도원수께 알리시지요."
이순신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그, 그럽시다. 권수사가...... 대신 좀 해주구려."
연합함대에 회군령이 떨어졌다. 왜군과의 일대 결전을 기대하며 출정했던 장
졸들의 눈에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순신은 차고있던 장검을 풀어 탁자
위에 놓은 채 천천히 이물 쪽으로 걸어갔다.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하늘을
우러렀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서녘 하늘은 이순신의 눈시울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
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근근이 참았다. 전라좌수사로 내려온 후 겪은 수많은 일
들이 떠올랐다. 정윈과의 궁술 시합, 원균의 횡포, 네 차례의 큰 승리, 정운의 죽
음, 이영남과의 교분, 박초희와의 이별, 충청병사로 떠난 원균, 통제사의 영광. 그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가등청정이 무사히 조선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응분의 처벌이 내릴 것이다. 통제사의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은 불을 보
듯 뻔하다. 삭탈관직을 당할 것이고, 어쩌면 김덕령처럼 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전하!
제게 어떤 치욕을 안기실는지요?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사라져가는 붉은 기운의 끝자리를 잡으려는 듯 서녘 하
늘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그 치욕을 모두 감내할 수 있을까? 권도원수는 어쨌든 살아남는 것이 중
요하다고 했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군왕의 마음에 들지 못한 장수에게
여분의 삶이 있을까? 나로 인해 서애 대감과 권도원수까지, 권준을 비롯한 휘하
장수들까지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멈
춰 서야 할 때를 놓친 것인가? 아니, 멈춰 서기를 애써 외면했던 것이 아닐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어명을 어기도록 만들었을까?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나의 이름, 나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12. 희생제의
"신이 병법에서 들은 바로는, '공격하기에는 힘이 부족한 자라 하더라도 지키
는 데는 넉넉함이 있다'라고 했고, 또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을 불러들이고 적
에게 끌려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이 돈황군과 주천군을 침략하고자
하므로 우리는 병마를 정비하고 전사를 훈련시키며 적이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
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적을 불러들이는 술책을 사용하고 푹 쉬고 있는 군사로
하여금 피로에 지친 적을 공격하게 하는 것, 이것이 승리를 얻는 길입니다. 지금
두 개 군의 병사는 그 수가 적어서 수비하기에도 충분하지 않는데 하물며 출동
시켜 적을 공격하게 한다면 이것은 적을 불러들이는 술책을 폐기한 채 적들에게
이끌림을 당하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그것은 적당하
지 않습니다."
반고, [한서], [조충국열전]
정유년(1597년) 1월 26일 저녁.
퇴궐하는 유성룡의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가등청정이 벌써 군사들을
이끌고 경상도에 상륙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리 귀띔을 했는데도 가등청정을 잡
지 못했다며 조정을 비웃는 소서행장의 서찰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
제사 이순신이 고의적으로 가등청정을 잡지 않았다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경상
도위무사 황신의 장계가 잇달아 올라왔다. 선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선조는 내일 아침부터 수군을 강화하는 문제를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겠다고
했다. 그 말은 곧 이순신에게 중벌을 내리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유성룡은
동부승지 허성을 퇴궐 전에 잠시 만났다.
"최악이옵니다. 어젯밤에는 이순신을 당장 잡아들여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역적?"
유성룡은 끔찍한 단어를 씹어 삼켰다. 수군의 으뜸 장수를 역적으로 다스리겠
다는 말인가?
"김응서나 황신의 장계도 문제지만, 지난 22일에 올라온 전라병사 원균의 서찰
이 더 큰 골칫거리이옵니다. 전하께서 그 글을 읽으신 후 완전히 뜻을 굳히신
듯합니다. 군선을 거느리고 절영도 앞바다까지 가서 위무(무력시위)를 하겠다는
데, 누군들 귀가 솔깃하지 않겠습니까?"
"이순신을 버리고 원균을 취하기로 하셨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이순신이 조정을 업신여기고 제멋대로 수군을 통솔
한다고 생각하시옵니다."
이순신에 대한 비판은 서인뿐만 아니라 동인 내부에서도 적잖이 제기되고 있
었다. 특히 의병장들을 많이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분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북인은 이순신이 전투를 고의적으로 회피한다며 공공하게 비난했다. 유성룡과
이덕형이 영의정과 병조판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에 그들의 불만이 공식
화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두 사람의 힘으로도 조정 중론을 무마하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동부승지!"
"예, 영상 대감! 말씀하시지요."
유성룡은 알고 있었다. 획기적인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고는 이순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선조는 예전부터 이순신과 권율을 노리고 있지 않았는가.
"통제사가 바뀌면 나도 영의정에서 물러나야 하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사람이 누군가? 바로 나 유성룡이오. 이순신
이 역적으로 몰린다면 당연히 나도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게지. 어디 나뿐
이겠소? 그 동안 나를 도와 왜군과 전면전을 반대한 이덕형, 이항복 등도 무사
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동부승지! 그대가 전하의 심기를 잘 살펴주시게. 물러
날 땐 물러나더라도 최대한 우리의 충심을 전하께 전해야 하지 않겠소?"
그제야 허성은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단순히 장수 하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조정을 이끌던 남인 정권의 존재자체가 위협받는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허나 사면초가가 아닐는지요?"
유성룡도 이순신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산의 왜영을
방화했다는 거짓 장계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로 상륙한 가등청정의 군선
들을 단 한 척도 침몰시키지 못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럴 땐 서찰이라도 보내올 만한데 한산도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기다
리기에 지친 유성룡은 사흘 전 유용주를 급히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유용주로부터 그곳 상황을 들은 뒤 전하를 뵈면 좋으련만....... 내일 아침의 어
전회의는 이순신과 남인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조선의 흥망성쇠를 결정
하는 중요한 회의가 될 것이다. 헌데 나는 아는 것이 너무도 적구나. 들려오는
풍문은 모두 이순신에게 불리한 것들뿐. 너무나도 오랫동안 최고의 지위를 누렸
기 때문일까. 뜻하지 않는 방향에서 급소를 찔러오는 칼날을 피하기엔 이순신이
앉은 자리가 너무나도 좁고 좁도다.
이순신의 몰락.
그것은 어쩌면 나 유성룡이 겪게 될 몹쓸 시련의 징조인지도 모른다. 영의정
이라는 자리. 조정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고 신하와 임금의 중개 역할을 하는
자리. 나 역시 이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 노탐이라는 비판마저 홍문관의 젊은
서생들로부터 들려오지 않는가. 물러날 때가 되었어. 이제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 그곳에서 스승님의 단단하고 명철한 글들을 조
용히 읽으며 도학을 공부하고 싶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 역시 선비의 도리인
것이다.
허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전쟁이 재개되었고 왜군들이 다시 코앞까지 밀려왔
다. 한가로이 물러나 책을 읽던 선비들도 칼과 활을 들고 전쟁터로 나서야 할
판에 내 어찌 안빈낙도만을 꿈꾸랴. 허나 이순신이 없으면 이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전라도의 백성들은 불안에 휩싸일 것이며 그 불안은 곧 패전으로 이어
질 것이다. 이순신을 구해야 한다. 나 유성룡이 부산으로의 출정을 강력히 막은
장본인이 아닌가. 그의 불행은 곧 내가 만든 것이다. 천 리나 떨어진 작은 섬에
서 어찌 전하의 마음을 살필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은 나의 불찰이다. 내가 그
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어찌할거나. 아, 이 일을 정녕 어찌할거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덕형과 둘이
앉아 골머리를 썩여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결국 이순신을 구하는 길은 어전
회의에 앞서 대신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것뿐이었다. 유성룡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영돈령부사 이산해, 판중추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부사 정탁,
병조판서 이덕형을 집으로 청했다. 선조의 귀에 들어가면 중벌을 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벼랑까지 매몰린 이순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약속시간인 해시(저녁 9시)가 되기 전에 이산해, 정탁, 이덕형이 왔고, 윤두수
와 김응남도 곧 대문을 두드렸다. 여섯 명의 대신들은 상석에 앉은 이산해를 중
심으로 길다랗게 타원 모양으로 둘러앉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전회
의를 제외하곤 이토록 어두운 밤에 사적인 자리에서 합석한 예가 드물었던 것이
다. 병을 사칭하고 어전에도 자주 나오지 않던 북인의 지도자 이산해는 물론이
고, 서인인 윤두수와 김응남, 남인으로 유성룡과 가까운 이덕형, 북인과 가까운
정탁 등도 끼리끼리 어울리며 자신들의 당인을 관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유성룡이 그들을 청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유성룡이 손님을 맞는 주인의
입장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아침, 수군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겝니
다. 고견을 미리 듣고 싶어 외람됨을 무릅쓰고 청하였습니다."
좌의정 김응남이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그 일이야 내일 의논하면 될 터인데 구태여 야밤에 이렇듯 모일 필요가 있습
니까?"
먼저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더 이상 말을 돌려서는 안 되겠
다고 느꼈다. 어차피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여는 편
이 옳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윤두수가 유성룡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속마음을 곧바로 드러내는 모양이 유
성룡답지 않았다.
"국법에 따라 다스리면 될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의논한다고 무엇이 달
라지겠소?"
윤두수는 원칙론에 머물렀다. 지금으로선 원칙론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원
칙대로 하자면 어명을 어긴 장수는 살아 남지 못한다. 정탁이 윤두수의 말에 이
의를 제기했다.
"이순신을 벌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는 왜군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장수요. 그를
한산도에서 끌어내는 것은 스스로 허벅지를 찌름과 다르지 않소이다."
김응남이 언성을 높였다.
"이순신은 그런 허명을 믿고 전하를 능멸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을 업신여겼소
이다. 결코 살려두어서는 아니되오이다."
정탁이 말꼬리를 붙들며 반박했다.
"대장군 이일은 임진년에 크게 패하여도 용서하였소. 수십 척의 군선을 잃은
원균도 충청병사를 거쳐 전라병사로 중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겐 단
한 명의 장수라도 필요합니다. 헌데 눈부신 전공을 쌓은 이순신을 죽이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 서로 간의 이견은 너무나도 골이 넓고 깊었다. 잠
자코 대화를 듣던 이산해가 흠흠흠 헛기침을 했다.
"지난 여름 김덕령을 죽이고 이번에 이순신마저 죽인다면 전라도의 민심이 크
게 흔들릴 것이오. 정여립과 이몽학의 난 때문에 전라도를 못미더워하는 전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계속 그곳 출신의 장수들만을 벌해서는
곤란할 것이오. 따지고 보면 이번 전쟁에서 왜군에게 완패한 곳은 경상도입니다.
죄가 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 또한 형평이 맞아야 한다 이 말씀
이지요."
이산해는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물러나도록 하되 중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절충론을 편 것이다. 김덕령과 이순신이 죽음을 당하면 그 다음엔 전라도의 이
름난 의병장들 역시 무사하지 못하다. 유성룡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북
인은 이순신을 죽이자는 청을 적극적으로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
는 역시 김응남과 윤두수, 그리고 그의 아우 해평부원군 윤근수였다.
유성룡은 대각선에 앉은 이덕형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덕형이 고개를 끄덕였
다.
"전하께서는 이순신을 벌할 마음도 있으시지만 그보다 전라병사로 있는 원균
을 다시 수군으로 돌리려는 생각이 더 크십니다."
윤두수가 맞장구를 쳤다.
"당연한 일 아니겠소? 임진년에 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절반은 원균의 몫이오.
그가 다만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고, 전공을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이순신에
게 공이 모두 돌아갔을 뿐이지."
이덕형이 윤두수의 말이 물고 들어갔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이순신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힐 것이 아니라 두 장수를 나란히 수군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도 조정에서 임의로 만든 것이고 또 모든 권력이 통제
사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폐단도 크니, 수군통제사를 전라도와 경상도로 각기
나눈 후 원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이산해가 무릎을 딱 쳤다.
"옮커니! 그것 참 묘안이오. 역시 병판의 책략은 대단하오이다. 그렇게만 된다
면 전하께서도 듯을 이루시는 것이고, 이순신을 잡아들이지 않아도 되겠구먼."
유성룡과 이산해가 잔잔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때 김응서가 화를 버럭 내며
분위기를 깼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벌써 잊으셨소이까?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으뜸 장수가 두 명이라서 연합함대를 구성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오이다. 헌데 지금 와서 다시 원균을 경사도통제사로 보내면 임
진년의 분란이 틀림없이 재발할 것이에요. 이순신을 끌어내고 원균을 앉히든지,
원균의 청을 물리치고 이순신으로 계속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지 다른
길은 없소이다."
이덕형이 침착하게 대응했다.
"좌상의 말씀이 물론 지당하십니다. 허나 지금은 임진년과는 다르지요. 그땐
연합함대를 처음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던 겁니다. 군선
과 군사, 군량미와 무기들을 균형 있게 나눈다면 서로 간에 오해와 불신도 줄어
들겠지요."
그래도 김응남은 수긍하지 않았다.
"미봉책일 뿐이오."
유성룡이 둘 사이에 끼여들었다.
"좌상의 말씀대로 미봉책이긴 합니다. 허나 지금 당장 이순신을 잡아들인다면,
김덕령의 예에서 보듯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삼도 수군의 으뜸 장수
였던 사람을 개죽음 당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한 후 상황을 더 살피다가 이순신을 면직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몇 달만 시간을 끌면 될 듯도 합니다. 전투가 본격화되면 전하께서 이순신
을 다시 찾으실 수도 있지요. 판중추부사의 뜻은 어떠시오?"
유성룡의 시선은 윤두수에게 향했다. 윤두수가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김응
남도 스스로 고집을 꺾을 것이다. 윤두수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에 잠
겼다. 유성룡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벌어질 일들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유성룡의 제안은 삼도 수군의 으뜸 장수를 이순신에서 원균에게 넘기
겠다는 것이다. 원균이 수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 윤두수를 비롯한 서인의
발언권도 그만큼 강화된다. 그러나 윤두수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
다. 지난 사 년 동안 유성룡과 이덕형은 온갖 감언이설로 왜군과의 전투를 가로
막아왔다. 진작 부산으로 진격했더라면, 그래서 왜군을 쓸어버렸다면 이렇게 다
시 전쟁을 벌일 일도 없었으리라.
유성룡은 언제나 외유내강을 따른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타협이나 양보를
한 적이 없다. 늘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전하와 대신들의 말을 수용하지만,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확실하게 챙기는 위인이다. 이번에 유성룡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이순신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틀림없
이 유성룡은 나의 심장에 찌를 비수를 등뒤에 숨겨두고 있으리라.
"판중추부사!"
유성룡이 대답을 독촉했다. 윤두수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그들과 눈을 맞
추었다. 김응남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이윽고 윤두수가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김덕령처럼 이순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소. 영상께서 이순신을 아
끼는 마음이야 우리가 다들 아는 것이고. 전라도 내륙은 도원수 권율에게 맡겨
도 되니, 원균을 우선 경상우도로 옮겨 수군을 지휘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
소이다. 허나 원균을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한다고 해서 이순신에 대한 전하의 분
노가 사라질까요? 전하께서는 누차 왕실과 조정을 깔보는 장수는 지위고하를 막
론하고 참하겠다 하시었소. 이순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 사실을 천조에
글로 아뢰기까지 했으니, 전하께서는 무조건 이순신을 잡아들이시려 할 것이오.
전하의 뜻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소?"
유성룡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 일은 제가 책임을 지지요."
윤두수가 차갑게 웃었다.
"허허! 영상 대감. 오늘은 참으로 영상 대감답지 않으십니다. 어전에서 늘 전
하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던 대감께서 전하의 하교에 불복하는 말씀을 올리시겠
다구요? 허허허허, 대감! 왜 무덤을 손수 파시려는 겝니까? 대감께선 아직도 조
정에서 하실 일이 많소이다. 생각을 해보세요. 대감이 이순신을 살려달라고 매달
리면 매달릴수록 전하께선 그를 죽이려 할 것이에요. 차라리 아무 말씀 마시고
가만 있는 편이 백 번 낫소이다."
유성룡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윤두수의 지적대로 그는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
람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윤두수의 목소리가 낮고 진중해졌다.
"전하께서 사약을 내리면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은 죽는 것이오. 그를 잡아들여
추궁을 하라시면 그에 따르는 것이 신하된 도리외다. 허나 풍문에 기대어 그를
벌할 생각은 없소. 샅샅이 조사하여 잘잘못을 따져야 할 겝니다. 물론 임진년의
전공도 참작될 것이구요. 어떻소, 영상 대감! 이 정도면 답이 되겠소?"
"내 뜻을 받아주시니 참으로 고맙소이다."
그 정도가 윤두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고의 양보였다. 이산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윤두수와 유성룡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김응남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순신의 죄는 태산보다도 더 크오이다. 나는 결코 그의 죄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오."
정탁이 은근히 비꼬았다.
"전라도의 의병장들과 장수들을 모두 죽이시구랴. 그래도 속이 불편하시면 이
몸의 목도 치시고."
"무엇이?"
김응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정탁도 이에 질세라 당장이라도 멱살을 쥘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윤두수가 시선을 아래로 고정시킨 채 양쪽 모두를 엄히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그러고도 그대들이 이 나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겠
소?"
김응남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뇌까렸다.
"율곡의 양병설만 따랐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외다."
정탁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누가 임진년의 전쟁에서 이 나라를 구했소이까? 바로 하삼도의 의병이오이
다. 그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율곡
은 말로만 양병을 주장했지만 남명은 몸과 마음으로 이 나라를 지키도록 가르치
셨소. 일의 전후가 이러한데도 케케묵은 양병설만 강조할 작성이시오? 좌상!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마시오."
김응남이 비꼬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
이덕형이 온화한 얼굴로 둘 사이를 중재했다. 이미 윤두수로부터 돕겠다는 언
질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좌상의 말씀도 옳고 지중추부사의 말씀도 옳습니다. 율곡과 남명, 그리고 퇴
계의 가르침으로 인해 이 땅에 사람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지요. 지난 시절 훈
척들의 터무니없는 모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화로 목숨을 잃었습니
까. 이제 이 나라는 대대손손 정주학의 나라, 사림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퇴계
와 율곡, 남명 같은 분들이 기반을 다졌다면 여기 모이신 분들이 대들보를 세우
고 지붕을 얹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겠지요. 우리가 비록 조금씩 이견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정주학 속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습니다. 잊지 말아
야 할 것은 우리들의 언쟁이 결코 훈척들과의 언쟁처럼 서로가 서로를 죽고 죽
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이덕형이 고개를 돌려 윤두수를 쳐다보았다. 윤두수는 빙그레 웃으며 선선히
답했다.
"물론이오. 병판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이다."
정유년(1597sus) 1월 27일 새벽.
긴 겨울밤의 마지막 자락이 아직도 행궁을 덮고 있었다. 남녘에서는 간간이
봄꽃 소식도 전해왔지만 이곳은 여전히 차디찬 겨울이었다. 처마를 따라 곧게
뻗어가던 겨울 바람이 담벼락에 머리를 부딛혀 튀어올라서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만나 위위위 울음을 울었다. 정적을 깨고 종종걸음으로 황량한 뜰을 가로지르는
사내는 꾸부정한 허리에 백발이 성성한 내시감 윤환시가 틀림없었다. 그는 찢어
진 눈을 번뜩이며 어둠에 묻힌 길을 잘도 찾아냈다. 그의 발걸음은 별전으로 향
하고 있었다.
선조는 그곳에서 밤이 새도록 책을 읽겠다고 했다. 전쟁이 터진 마당에 한가
로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동부승지 허성이 옥체를 보
존하시라며 극구 만류했으나 선조는 [주역]을 들고 편전에서 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허성이 몸과 마음을 편히하시기를 주청드리자 선조는 귀찮다는 듯
이 승지들을 모두 밖으로 내몰았다. 승지가 군왕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성은 편전에서 선조의 부르심을 기다렸으나 끝내 선조는 승지
들을 찾지 않았다.
별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윤환시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
다. 그는 소맷자락에서 서찰 한 통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한산도까지 다녀온
풍과 해의 보고서였다. 윤환시는 이미 그것을 읽어보았다. 선조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소식들, 이순신의 행정과 삼도 수군이 보유한 군선들의 크기와 숫자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이 서찰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선조의 은애를 입을 것이다.
웃음을 삼키고 주의를 삐잉 둘러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시들을 살피던
동부승지 허성도 보이지 않았다. 윤환시는 서찰을 다시 소매에 감추고 별전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전하, 윤내관이옵니다."
"안으로 들라!"
윤환시는 별전으로 들어서면서 흘낏 곁눈길로 선조의 용안을 살폈다. [주역]
을 펼쳐놓긴 했으나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선조는 손을 들어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윤환시는 정중히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나아갔다. 군왕과 이렇듯 가까이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내는 내관뿐이리
라. 윤환시는 고개를 숙인 채 하명을 기다렸다.
"돌아왔느냐?"
"그러하옵니다."
윤환시는 소매에서 둥글게 말린 서찰을 다시 꺼냈다. 선조는 팔을 쭉 뻗어 그
것을 빼앗아 펼쳤다. 선조의 시선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쯤이면 권율과 이순신이 만나는 대목을 읽고 계시겠군.
윤환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군왕에게 가는 비밀 서찰을 미리 읽어
볼 때 느끼는 그 두려움과 설레임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른다.
특히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서찰일 경우에는 더욱더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선조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가등청정을 놓친 대목이구나.
윤환시는 입술에 침을 묻혔다. 이제 슬슬 군왕의 비위를 맞추며 이득을 취하
는 내시의 본분을 행할 때가 되었다.
"음...... 가등청정이 상륙한 후에 권율이 한산도에 도착했다? ......연합함대가
출정한 것도 사실이며...... 군사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다고....... 윤내관!"
선조가 서찰을 곱씹으며 윤환시를 노려보았다.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윤환시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전하!"
"풍과 해를 대신할 내관들은 있겠지?"
윤환시는 눈알을 돌리며 잠시 머뭇거렸다. 선조의 물음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 있사옵니다."
"허면 오늘 당장 풍과 해를 지워라. 그리고 이 서찰도 없애도록. 알겠느냐?"
윤환시는 깜짝 놀랐다. 지우라는 것은 제거하라는 뜻, 수족처럼 부리던 두 내
관을 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윤환시는 감히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선조가
내민 서찰을 받아 소맷자락에 다시 넣었다.
"아, 알겠사옵니다."
선조가 다그치듯 물었다.
"화, 뇌, 운은 돌아왔는가?"
선조는 대신들의 동정을 살피도록 보낸 내관들을 찾았다.
"방금 돌아왔사옵니다."
"누구누구라더냐?"
윤환시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영의정 유성룡의 집에 모인 대신은 영돈령부사 이산해, 판중추부사 윤두수,
좌의정 김응남, 지중추부사 정탁, 병조판서 이덕형이라 하옵니다."
선조의 짙은 눈썹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군왕인 내가 불러도 병을 사칭하며 오지 않던 자들이 야밤에 모여서 무엇을
의논했을까? 심중팔구는 내일 있을 이순신의 문책에 대비해서 미리 입을 맞추었
으리라. 배은망덕한 놈들! 감히 함께 모여 이순신을 도울 작정을 하다니. 이런
짓들 때문에 옛말에도 군왕이 신하를 믿으면 나라를 잃는다고 했다.
"어떤 얘기가 오갔는가?"
윤환시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거기까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단 말인가?"
"벼, 병판이 군사들을 은밀히 풀어 지키는 바람에......."
용의주도한 이덕형이 간자들을 의식해서 유성룡의 집 주위에 군사들을 배치했
던 것이다. 군사들과 칼부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문으로 들어서는 대신
들의 면면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덮어두었던 [주역]을
다시 펴며 짧게 말했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윤환시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틈도 없이 허둥지둥 별전을 빠져 나왔다. 마
당으로 나서자 찬바람이 양볼을 때렸다. 윤환시는 허리를 주욱 펴고 하늘을 우
러렀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윤내관!"
누군가 등뒤 어둠 속에서 그를 찾았다. 윤환시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뒤돌
아섰다. 편전에서 당직을 서던 동부승지 허성이었다. 윤환시는 조금씩 허리를 펴
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허성이 심각하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아직 서책을 읽고 게신가?"
윤환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침수 드시라고 여쭈었는가?"
"그렇습니다. 허나 전하께서는 밤새 서책을 읽으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
허성은 별전을 힐끔 쳐다보았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윤환시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허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러시다가 혹 옥체라도 상하실까 참으로 걱정이야. 윤내관! 전하께서 날 찾
으시면 곧바로 편전으로 알려주게."
"알겠습니다."
허성은 지나치게 딱딱한 윤내관의 표정과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전하
께서 계속 독서에 열중하고 계시니 이곳에서 그가 할 일이 없었다. 윤환시는 허
성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 전하와 나눈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닐까? 조심해야겠어.
윤환시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행궁을 벗어났다. 풍과 해를 죽이라는 어명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풍과 해의 입까지 막으려드는 것을 보면 전하께서는 이순신을 죽일 결심을 굳
히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균의 세상이 오는 것인가?
윤환시는 소매에 넣어둔 미혼단 환약을 확인했다. 명나라 사신에게서 백 냥이
나 주고 구입한 약이었다. 그는 풍과 해를 고통 없이 죽일 작정이었다. 어주에
미혼단을 섞어 잠을 재운 다음 장검으로 단숨에 목을 찌르리라.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그대들의 운명인 것을.
진시(아침 7시)에 광해군이 아침 문안을 여쭈기 위해 별전으로 왔다. 선조는
충혈된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광해군은 동부승지 허성으로부터 선조가 밤새 책
을 읽었다는 귀띔을 받았다. 광해군이 예를 갖춘 후 조심스레 여쭈었다.
"아바마마, 밤새 평안하셨사옵니까? 독서삼매에 빠지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선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세자!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벗삼아 밤을 새웠구나."
"아바마마......."
광해군이 미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선조가 말을 잘랐다.
"과인의 몸은 아무렇지도 않다. 잠을 하루 안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승지
들은 아침부터 저렇게 요란을 떠는구나."
"하오나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옥체를 강건하게 하셔야 하옵니다."
선조는 책장을 넘기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과인이 지치면 세자가 맡으면 된다."
광해군이 목청을 높여 아뢰었다.
"어찌 또 그런 말씀을...... 소자는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선조는 광해군의 컬컬한 음성이 마음에 걸렸다. 어서 왕위를 물려받고 싶다고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세자는 두 차례나 분조를 이끈 경험이 있다. 군왕에게 지나친 겸손은 금물이
다. 군왕은 만인의 지아비가 아닌가."
광해군 역시 선조가 결코 쉽게 양위하지는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은 때가 아니다. 광해군이 침착하게 또박또박 질문을 던졌다.
"아바마마, 오늘 아침에 수군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대신들과 회의를 하신다
고 들었사옵니다. 사실이온지요?"
"그렇다."
선조가 짧게 대답했다.
"장수를 바꿀 생각이시옵니까?"
몇 달 동안 광해군은 의도적으로 국정을 외면해왔다. 몸이 완쾌되지 않아서이
기도 했지만 선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유성룡이나 이덕형
도 광해군에게 잠시 물러나 군왕의 학문을 닦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나라의 운명이 뒤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대신들과 의논한 후 결정할 일이다."
선조는 짧은 답으로 일관했다. 속마음을 보이기 싫다는 의지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선조가 되물었다.
"세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광해군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아버지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시는구나.
"아바마마의 뜻에 따를 뿐이옵니다. 하오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승패가
결정될 수도 있사옵니다."
광해군은 만약에 내세우며 올가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사람을 다루는
데 도를 통한 선조가 고삐를 놓지 않았다.
"알고 있다. 헌데 세자는 전쟁의 승패가 중요하다고 보는가, 왕실의 흥망이 중
요하다고 보는가?"
"그 둘이 어찌 나뉠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지 않다. 세자! 전쟁에서 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왕실이 망해서는 아니된
다. 왕실이 굳건하면 다시 복수를 꿈꿀 수 있으나 왕실이 망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 무엇도 왕실의 안녕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신하들을 믿지 말
라. 그들 중 몇몇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실의 위엄을 깎
아내리려고 할 것이다. 도대체 사림이 무엇이냐? 겉으로는 공맹의 가르침을 따
르는 학인으로 자처하지만 조정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학연, 지연으로 얽힌 무
리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군왕을 질타한다. 만약 군
왕이 그들의 학연과 지연을 송두리째 뽑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조선의 걸주를 몰
아낸다며 반란을 일으킬 위인들이다. 정여립을 보아라. 그 역시 퇴계와 율곡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은 사림이었다. 세자! 사림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자신들의
세를 확장시키려 한다. 군왕은 결코 사림의 허황된 말에 흔들려서는 아니된다.
알겠는가?"
"명심하겠사옵니다."
선조는 갈증을 식히고자 냉수를 두어 모금 마셨다. 밤새 생각이 많았던 것이
다.
"임진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은 의병이나 수군이 아니라 천병(명나라
의군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왕실의 뜻을 어기는 자가 있
으면 신상필벌로 다스릴 일이다. 사림의 오만방자한 입을 틀어막고, 장수들의 손
에서 무기를 모두 빼앗아야지만 왕실의 평안을 지킬 수 있다. 이순신을 벌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신권이 결코 군권과 맞먹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그
같은 주장에는 이견이 없었다.
"분조를 이끌고 홍주로 내려갔을 때 이순신이 재주 많고 침착한 장수라는 소
문을 들었사옵니다."
"세자! 과인도 이순신의 전공을 알고 있다. 그를 비난하는 수많은 상소들 중
대부분이 터무니없다는 것도 안다. 허나 왜 그 많은 신하들이 이순신을 삭탈관
직시키라고 요구하는지를 생각해보아라. 그것은 이순신으 힘과 권력이 눈덩이처
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전라도 백성들은 그를 영웅으로 받든다는 풍문이다. 과인
이 임명한 관리들의 명은 어기더라도 이순신의 군령은 틀림없이 지킨다는 것이
다. 세자! 이제 이순신은 개인의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왕실의 안녕을 위협하
는 화근이 되었다. 화근은 뿌리를 잘라버려야 한다. 군왕에게 이런 불안을 안긴
것도 장수의 도리가 아니다. 아니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이순신을 죽일 생각이시군.
광해군은 선조의 뜻이 이미 확고해졌음을 눈치챘다. 이순신이 없는 수군! 생각
만 해도 태풍을 만난 고깃배처럼 마음 한켠이 일렁일렁거렸다.
서애도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을까?
별전에서 물러난 광해군은 회의가 열릴 편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이른
시각인지라 대신들은 입궐하지 않았다. 겨울 바람만 밀려드는 편전이 오늘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이순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워야 할 왕실의 권위가 무엇일까? 죄를 범했으
면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나 전쟁에서 패할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왜군
에게 땅덩어리를 떼어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이순신을 죽여야 하는가? 내가 군
왕이더라도 아버지처럼 했을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라면 다른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뛰어난 장수를 죽이는 것이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이순신은 유성룡과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묶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좀더 명확하게 일을 마무리지으려 한다.
물론 이순신을 죽임으로써 군왕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나겠지만, 만에 하나 이
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패한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되
돌아올 것이다.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아실까? 아신다면 왜 지금 아버지는 이순신
의 목을 베려 하시는가? 이순신이 또 다른 정여립으로 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
까? 그가 해상왕이 되고자 한다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으시는 것일까? 허나 소
문에 다른 희생치고는 너무나도 큰 희생이다.
까악까악, 까마귀 울음소리에 광해군은 고개를 들어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까마귀 두 마리가 검은 날개를 파닥이며 편전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편
전 대들보에 이마를 부딪히려는 순간, 놈들은 몸을 휙 젖히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아래위로 흩어져 날더니 서쪽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까마귀들이 사라진
뒤에도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오랫동안 귓가를 울렸다. 그는 고개를 두어 번 세
차게 가로저으며 불길한 징조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들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어명뿐이었다.
13. 치욕
신하는 임금과 골육의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매여서 부득불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하는 임금의 마음을 엿보아 틈을 노리려고 잠깐도 쉬
지 않는데 임금은 태만하게 그 윗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것이 세상에서 신하가
임금을 협박하거나 죽이는 까닭이다.
[한비자], [비내편]
정유년(1597년) 2월 26일.
새벽부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군
사들이 해안에 벌여놓은 아름드리 적송을 군막으로 옮겼다. 왜선을 당파하기 위
해서는 비틀리지 않고 곧게 자란 크고 단단한 소나무들이 필요했다. 겨울 사이
에 스무 척이 넘는 판옥선을 만들었지만 부산이 왜군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아
직도 역부족이었다. 또다른 군사들은 대섬에서 꺾어온 대나무들을 쉰 개씩 묶어
등에 지고 종종걸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적의 심장에 내리꽂힐 소중한 화살들이
었다. 등허리에서 더운 김이 짬 없이 피어오르고굵은 빗방울이 이마와 어깨를
때렸지만 그들은 나무꾼의 노랫가락을 맛있게 흥얼거리며 지칠 줄을 몰랐다.
운주당 옆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시야가 탁 트이면서 차가운 해풍이
그들의 볼을 사정없이 때렸다. 용머리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늘어선 세 척의 귀
선과 삼십여 척의 판옥선이 선창을 메우고 있었다. 오 년이 넘도록 이어온 신화
의 참모습이었다. 선두에 섰던 수염부리가 통제영귀선의 좌우에 있는 방답귀선
과 순천귀선을 가리켰다.
"죄다 몰려왔구먼. 무슨 일이람?"
뒤를 따르던 뱁새눈이 핀잔을 주었다.
"그것도 몰러? 부산을 박살낼 날이 오늘내일 한다는 소문도 못 들었는감? 이
참에 완전히 끝장을 내부린다고 하대."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참나무숲에 가려진 운주당으로 향했다.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두 손을 모아 쥐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은 화약과 총포, 화
살을 숨겨둔 언덕 너머 동굴까지 한걸음에 내달았다.
"장군!"
이순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갑옷을 입은 장흥부사 이영남이 마당 한가운
데 서 있었다. 거제의 뱃길을 탐문하라고 보냈는데 하루만에 되돌아온 것이다.
천천히 흰 수염을 쓸면서 읽고 있던 [송사]를 덮었다. 이영남의 눈동자는 분
노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이 가까왔음을 알았는가. 삶의 의지가 꺾인 채 끌려가는 초라한
몰골을 감추고 싶었건만. 좋은 기억만 간직하고 떠나기가 이다지도 힘들단 말인
가.
"올라오게."
"장군!"
이영남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참아냈다.
"올라오래두."
이영남은 하는 수 없이 투구를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이순신은 인사를 받는 동안에도 잔기침을 쏟았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미열
에 시달린 몸이었다. 푹 패인 볼과 충혈된 눈, 곧게 뻗은 등이 어딘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훔쳤다. 난이 터진 후로 안질이 더욱 심
해졌다. 진법 훈련을 준비하느라 밤이라도 지새우는 날이면 아침나절 몇 시간은
아예 눈을 뜨지도 못했다. 지난 가을 이후로는 과녁이 흐릿하게 보여서 활터로
나가 시위를 당길 수도 없었다. 왜군과 싸우기도 전에 그의 육신이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이영남은 통제사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아침에는 칠천도에 가서 안
질에 좋다는 흑염소라도 두어 마리 잡아올 작정을 했었다. 급보를 듣지 않았더
라면 지금쯤 놓아 기른 흑염소를 잡느라고 돌산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이영남은 벽에 걸린 장검 한 쌍을 힐끗 쳐다보았다. 통제사의 붉은 마음이 검
에 새겨져 있었다.
삼척서천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동색 산하가 떨고,
일휘휘소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혈염산하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성미대로라면 당장에 통제사를
모시고 길을 나설 터이지만, 운주당을 감싸고 도는 음흉하고 무거운 기운이 그
의 어깨를 한없이 눌러댔다.
"피하시지요. 한시가 급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순신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다.
"우선 목숨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시간을 번 다음에 저희들이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겠습니다."
이순신은 이영남의 유난히 깊고 차가운 눈망울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다.
시간을 벌면 해결될 문제였던가?
전하께서는 삼도수군통제사 나 이순신이 두려운 것이다. 이제 양자택일을 해
야 한다. 참형이냐 반역이냐. 부하 장수들은 앉아서 당하느니 싸우다 죽자고 하
겠지. 그러나 나는 정치를 모른다. 장수의 길 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포악
한 주인의 목덜미를 무는 미친개가 될 수 없다. 허나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
어 올라오는 이 욕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터로 나설 때마다 수없이 마주쳤던 공포. 오늘로써 나의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모두를 누르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힐책했던가.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연극을 시작하려 한다. 개죽음을 택할지도 모르는 사랑스
런 나의 부하 장수들을 위하여.
"무릇 신하된 자가 임금을 섬길 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법. 이강이라는 송
나라의 재상이 있었지. 그는 금나라를 징벌하자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
자 속세를 떠나려고 했다네. 하지만 어디로 숨는단 말인가? 내가 만약 그라면
자결을 해서라도 금나라와의 화친을 막았을 것이네. 임금이 사약을 내린다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야. 몸을 피해 임금의 뜻을 거역하고 시간을 임의로
쓰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지."
이영남은 어금니를 깨물며 한 무릎 앞으로 당겨 앉았다.
"김덕령 장군의 죽음을 잊으셨습니까? 이대로 끌려가면 판결이 나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저깟 놈들이 어떻게 알
겠습니까?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피를 뿌리며 싸울 때 평안도 의주까지 줄행
랑을 친 놈들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곡식 한 톨 보내온 적이 있습니까? 화약
한 통 보내온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벌써 오 년이나 장군의 군령만을 따라왔습
니다. 대역죄인으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저들을 베고......."
"그만!"
이순신이 이영남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녕 역적이 되자는 말이냐?
이영남은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고 낮게 흐느꼈다. 폭풍전야의 바다가 계속
끓어오르고 있었다. 빗방울이 차차 잦아들더니 사천 쪽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눈부신 오색 무지개였다. 까치 세 마리가 운주당을 휘 돌더니 무지개를 향해 날
아갔다.
이순신은 오색 비단보자기로 곱게 싼 서책을 자개장에서 꺼내 왔다. 이영남은
첫눈에 그것이 통제사가 밤을 아껴 쓰던 일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맡아두게. 둘 데도 없고...... 서둘러 읽진 말게. 아직은 부끄러운 인생
일 뿐이야. 혹 일이 잘못되면 없애도록 해. 알겠나?"
"장군!"
이순신은 가만히 보자기를 건넸다. 그리고 이영남의 어깨를 움켜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렇게 오랫동안 무거운 시간
들이 흘러갔다. 이윽고 이순신이 요대에 맨 환도를 푼 후 큰 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곧 거제로 가라. 가서 왜놈들을 베어라. 이 칼을 너에게 주마. 이무생이
십 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든 칼이다. 한 번 빛을 뿜을 때마다 왜놈의 목을 하나
씩 취하거라. 네가 가지고 있던 칼은 내게 다오. 네 마음을 기억하는 증표로 삼
겠다."
환도를 건네받은 이영남의 손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장군. 정녕 그토록 터무니없는 치욕을 감내하시겠다는 말입니까?
"떠나라, 당장!"
이순신은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이영남은 천천히 투구를 쓰고, 이순신의 환도
를 허리에 찬 후 고개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이영남을 태운 배가 완전히 사라
질 때까지 이순신은 벽에 걸린 한 쌍의 장검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순신은 잔기침을 몇 번 뱉은 후 송희립을 불렀다. 송희립은 늘하던 것처럼
표범가죽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었다. 송희립은 목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두건을 벗지 않겠다고 했고, 지금까지 그 약속을 잘 지
키고 있었다.
송희립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이 없었다. 한문에도 밝
아 군량미와 군수품을 관리하기에는 적격이었다. 이순신은 송희립이 내민 문서
를 받아서 처음부터 쭉 훑어보았다.
"군량미 구천구백 석, 화약 사천 근, 총통 삼백 자루라...... 이게 단가?"
"각 배에 실린 총통과 미처 통제영으로 옮겨오지 못한 군량미는 제외하였습니
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부산을 치기에는 충분합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여수에서 만들고 있는 총포는 이게 전부인가? 내 생각으론
쉰 자루 정도가 비네만......."
"아닙니다. 쇠가 부족해서 목표량을 낮추기로 지난달에 결정하지 않으셨습니
까?"
한 치의 빈틈도 없군.
송희립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한산도 밖
으로 내보내야 한다. 송희립은 조정에서 보낸 의금부의 군관들을 번쩍 들어 바
다에 처박을 위인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군. 안 되겠어. 자네가 가서 쇠가 이렇게나 부족한 까닭을
조사하고 오게. 누가 가운데서 빼돌린 것 같아."
"지금...... 말입니까?"
이순신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후 송희립이 건넨 문서를 서책들 위에 얹었
다. 송희립은 꼬리를 내린 삽살개처럼 뭉그적거렸다. 자기가 없는 틈에 혹 부산
으로 출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그 의심을 풀어주
었다.
"자네 없인 어디로도 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자네가 아니고서야 누가 출정
의 북을 울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대신 여수에 가서 철저히 조사해오게. 알겠는
가?"
"예, 장군!"
이순신은 송희립을 보내고 오후 한나절을 독서로 소일했다. 염전을 둘러보는
일과 격군들과의 대화는 다른 날로 미루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왜군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사표를 던진 지도 벌서 오 년이 지났다. 왜는 조선
을 정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정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있는 무리가
힘없는 무리의 재산을 노략질하고 아녀자를 겁탈하며 장정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삼강도 오륜도 소용없는 나날들.
생존만이 유일한 이념이었고, 그 이념 앞에서는 부끄러움도 슬픔도 분노도 고
통도 사그라졌다. 살기 위해 임금은 몽진을 떠났고 백성들은 고향을 등졌다. 나
는 군사드을 전쟁터로 내몰기 전에 그들과 약조를 해야만 했다.
목숨을 아껴라. 그것은 비겁이 아니라 너희들이 칼과 활과 노를 잡아야만 하
는 가장 큰 이유이니라. 너희들을 결코 죽음의 바다로 내몰지 않겠다. 살아서 복
수하고, 살아서 승리하고, 살아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하리라. 그러니 너희들
은 자중하라. 진천뢰처럼 날아가 자폭할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이기는 싸움, 죽
지 않는 싸움을 하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려라. 적에 대한 두려움, 장수에
대한 두려움,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넘실대는 파도 속으로 던져버려라.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나의 신념 때문에 군사들이 한없이 나약하고 게을러졌으며 헛되이 군량
미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승전의 축배에만 정신이 팔린 멍청이들. 그들은 적
선과 마주칠 때마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공포와 광기를 털끝만큼도 알지 못한다.
열 걸음 뒤로 물러서기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
들은 모른다, 모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수루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원히 스러지는
오늘을 아쉬워하기라도 하듯 석양의 붉은 기운이 섬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꿀을
그득 모은 벌떼처럼 어선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해안으로 돌아왔고, 별무리를
닮은 모닥불 서넛이 추위와 어둠을 쫓으며 피어올랐다. 구슬픈 뿔피리 소리가
어둠을 끌고 산자락을 내려왔다.
정헌대부(정이품)라는 벼슬, 삼도수군통제사라는 권력, 불패지장이라는 명예보
다도 이 장엄하고 평화로운 정적이 좋았다.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더러
운 욕망, 야비한 음모, 그릇된 명령과도 싸워나갈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사후선(척후선)을 이끌고 나간 나대용이 망골의 초병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
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경쾌선 한 척이 한산도를 향해 곧장 나아온다는 것이다.
적의 내습이 아닐까 염려했지만, 경쾌선 고물에 경상우수영의 깃발이 꽂혀 있다
는 말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환영의 깃발을 올린 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고물에 서 있었지만 어둠이 짙게 깔린 탓에 얼굴을 분간할 수 없
었다. 그때 탁주 사발처럼 낮고 걸쭉한 목소리가 밤바다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하핫. 이놈, 나대용아! 어서 배를 가까이 대지 못할까?"
"원...... 원수사."
목소리의 주인공은 얼마 전 전라병사에서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자리
를 옮긴 원균이었다.
연락없이 갑자기 무슨 일일까?
나대용은 원균이 경상도로 내려온 후 아직까지 한산도를 찾지 않은 것을 내심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호탕한 웃음과 끝없는 침묵. 그 뒤에 놓인 이순신과 원
균의 앙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과 호랑이는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뱃놀이 나왔느냐? 에잇, 어찌 그리 느리단 말인가? 자, 어서 앞장을 서라. 이
밤이 가기 전에 역적 이순신을 포박해야 하느니라. 하하핫핫."
원균은 그 큰 몸을 사정없이 흔들며 웃어댔다.
역적? 역적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허풍이겠지, 원수사는 원래 이런 식으
로 상대방의 기를 꺾으려 들지 않는가?
나대용은 격군들을 독려하며 운주당을 향해 곧바로 배를 몰았다. 오늘 밤 내
내 통제사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결심을 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칼을 뽑아야 하리.
경쾌선은 나대용의 배를 앞질러 나는 듯이 부두에 닿았다.
갑옷을 입은 금부도사 이결과 조복을 입은 선전관 김현진이 원균의 안내를 받
으며 배에서 내렸다. 호기심이 발동한 군사들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사방을
둘러보던 원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슴을 한껏 디밀고 고개를 치켜
들었다.
"썩 비키지 못할까? 어명을 전하러 가는 길이니라."
대나무가 갈라지듯 길이 만들어졌다. 원균은 콧김을 푸푸 내품으며 앞장을 섰
다. 방금 도착한 나대용이 웅성거리는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횃불을 든 군사들
을 이끌고 원균의 뒤를 쫓았다.
이순신은 운주당 앞마당에서 돌비석처럼 꿈쩍도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어 걸음 물러난 곳에 키가 큰 종사관 황정철이 서책을 옆구리에 끼고 꾸부정하
게 서 있었고,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그 뒤를 지켰다.
"하하하핫. 이공, 이게 얼마 만이오?"
성큼 앞으로 나선 원균이 이순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분이 칼자루를 쥐며 내달았다. 이순신은 오른손을 들어 조카의 행동을 막았
다. 나대용을 비롯한 횃불을 든 군사들이 주위를 삥 둘러쌌다.
"이공, 내가 돌아왔소. 원균이 왔단 말이오. 왜 아무 말씀이 없는 게요? 어서
예전처럼 날 꾸짖어보시오, 내치란 말이오."
원균은 허리에 찬 칼을 꺼내들었다. 옥을 입힌 칼집이 푸른빛을 쏟아냈다.
"이게 무언지 아시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베라는
뜻으로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상방참마검이오. 이제 나는 그대의 머리쯤은 아
무렇지도 않게 벨 수 있소."
이순신은 기세등등한 원균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이순신은 황정
철에게서 건네받은 문서를 원균에게 내밀었다.
"영에 따라 군량미와 화약, 총포의 수량을 미리 조사해두었소. 가소 확인하시
오."
원균은 치켜든 상방참마검을 천천히 내리며 이순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보
았다. 짧은 침묵 사이로 파도 소리가 불규칙하게 지나쳤다. 겨울바람에 횃불을
흔들자 두 사람의 그림자도 덩달아 좌우로 움직였다. 원균이 시선을 그대로 고
정시킨 채 명령을 내렸다.
"확인해. 하나도 남김 없이."
원균의 오른팔인 우치적이 앞으로 썩 나섰다. 그리고 이분과 황정철의 뒤를
따라 어두운 숲길로 사라졌다.
모처럼 입은 투구와 갑옷이 몸을 죄어오는 것일까?
원균은 고개를 자주 흔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수영을 떠났던 이 년 전보다도
몸이 많이 불어났던 것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장수가 되고 변방에서 보낸 시간
들 중에서, 지난 이 년은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의 세월이었다. 이순신의 명성이
조선 팔도에 퍼질수록 그의 자괴감은 커져만 갔다. 임진년에 바다에서 거둔 승
리의 공이 모두 이순신의 신출귀몰한 작전과 용병술로 돌아가는 듯했다. 전라병
사로 옮겨간 후로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을 때면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하루가 다르게 살점이 더덕더덕 붙었고 장졸들이 뒷전에서 손가락질
을 해댔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나 원균을 버리지 않으셨다. 나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리시
고 이순신의 간교함을 벌하시려는 것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임진년의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내가 조선 수군의 으뜸 장수가 되었어야 했어.
"이공, 마지막으로 내 하나만 충고하리다. 그대는 늘 중용의 도를 강조해왔소.
불편부당의 마음으로 적군과 아군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이오. 하지만 그대는 결
코 그대의 본심을 말한 적이 없소. 그대는 그대의 막하에 있는 장수들과도 거리
를 두었소. 통음난무의 시간이 와도 그대는 자세를 고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단
말이오. 그대는 나를 속이고 장졸들을 속이고 천하를 속였소.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 자신을 속였소. '도단'의 뜻을 그대도 알 것이오. 속으로는 탐욕스러우면서
도 겉으로는 청렴결백을 내세우고,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빌려 윗사람과 아랫
사람을 기만하고, 타인의 전공을 빼앗는 장수. 도단은 바로 그대요. 지금이라도
그 더러운 가면을 벗으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 자신을 되돌아보시오. 추잡
한 욕망과 비굴한 마음, 지독한 공포와 두려움까지."
우치적이 운주당으로 돌아왔다. 원균은 선전관 김현진에게 길을 내어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순신은 아침에 이영남이 무릎을 꿇고 피신을 읍소하던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선전관 김현진은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선 뒤 추
위에 언 턱을 움직이느라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횃불을 든 군사들이 어명을 듣
기 위해 앞으로 다가섰다. 원이 작아질수록 꿇어앉은 이순신의 주위가 더 밝아
졌다. 군사들은 질퍽한 땅바닥에 양손과 양무릎을 대고 머리를 조아린 통제사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마침내 김현진이 굵
고 낭랑한 목소리로 임금의 뜻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남을 모함하여 공로를 빼앗았고, 경상도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를 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겼으니 그 죄는 사형
에 처해도 모자라지 않다. 이에 그 죄를 물어 삭탈관직하고 의금부로 압송하라.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노니 곧 왜구를 쳐
서 큰 공을 세우도록 하라."
김현진의 낭독이 끝나자 금부도사 이결이 오랏줄을 들고 나섰다. 원균이 이결
의 앞을 막아섰다.
"마땅히 역적의 갑옷과 칼, 서책을 먼저 압수해야만 하오. 서둘러라. 갈 길이
멀다."
우치적이 군사들을 이끌고 승냥이처럼 운주당으로 뛰어들었다. 그제야 이순신
은 고개를 들고 원균과 이결, 나대용과 이분, 그리고 군사들을 쳐다보았다. 흔들
리는 횃불 때문에 눈이 더 침침했다. 원균이 앞으로 성큼 걸어나오더니 이순신
의 투구를 확 잡아챘다. 턱이 얼얼하고 눈동자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
다. 옆구리가 으슬으슬 춥고 화살이 박혔던 허벅지가 끊어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잔기침을 쏟았다. 위액이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로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나대용이 원균의 앞을 막아섰다.
"너! 너......."
칼을 쥔 나대용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이 점점 더 작아지면서 군사
들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죽여라!"
"베어버렷!"
이순신은 사력을 다해 나대용의 팔목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건 개죽음일 뿐이야.
바로 그때 원균이 나대용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이순신
의 머리를 틀어쥐고 좌우로 흔들어댔다.
"꺼억꺼어억."
이순신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천하를 호령하던 통제사의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는 그냥 두어도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시골 촌부에 다
름 아니었다.
원균은 이순신을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섰다. 오른손에 상
방참마검을 쥐고 살이 두툼하게 오른 양볼을 실룩이며 주위를 노려보았다. 장졸
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요동하는 것이라곤 그들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작은 횃불뿐이었다. 원균은 상방참마검을 높이 들고 격문을
읽듯이 어둠에 묻힌 한산도 앞바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잘 봐라. 이놈은 임금을 속인 역적이다. 왜놈들이 두려워 삼 년이 넘도록 전
투를 기피한 겁쟁이다. 의금부로 글려가서 죽을 목숨이다. 자, 이놈을 동정하는
놈은 앞으로 나서라. 이놈을 따를 놈은 석 나서! 이놈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
내주마. 잘 듣거라. 이제부터 내가 삼도수군통제사이니라. 단숨에 부산을 치고
왜구를 대마도 밖으로 몰아낼 것이니라. 내가 선봉에 서마. 너희들은 내 뒤만 따
라오면 되느니라. 어허, 오늘 같은 날에 술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이 밤이 새도
록 마음껏 마시고 취하자꾸나. 하하핫, 풍악을 준비하라. 하하하핫, 관기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정유년(1597년) 3월 4일.
한산도를 떠난 지 이레 만에 한양에 닿은 이순신은 곧바로 의금옥에 갇혔다.
한양까지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순신은 하루에도 서너 번 씩 혼절하기를 거듭하더니 충주를 지나면서는 아
예 정신을 놓고 말았다. 피난민들 틈에서 끌려나온 당달봉사 침쟁이는 진맥을
짚자마자 초상 치를 준비나 하라며 처방전 쓰기를 거절했다. 금부도사 이결은
덜컥 겁이 났다. 죄인이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기도 전에 죽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이순신이 누군가? 무군지죄를 범한 역적이 아닌가? 그는 선전관
김현진과 의논한 후 근처 농가에서 송아지를 잡아 곰국을 끓였다. 그리고 침쟁
이를 위협하여 반강제로 대침을 놓게 했다. 온몸이 발갛게 부어오르며 하루 종
일 침몰삼을 앓은 후에야 이순신은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이결은 오라를 느슨
하게 풀고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마른 볏단을 더 많이 수레에 갈도록 명령한
후 길을 재촉했다.
이순신은 의금부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눈의 통증을 호소했다. 가래
에 피가 섞여 나온다고도 했고, 오른쪽 허벅지가 곪아터졌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런 조처도 없이 그는 곧바로 나장들에게 끌려 의금옥에 갇혔다. 나무 수갑
이 양손에 채워졌고 나무칼이 목과 어깨를 짓눌렀다.
그날 밤 위관으로 뽑힌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이결을 은밀히 집으로 불러들였
다.
눈매가 날카롭고 유난히 뾰족한 턱을 가진 윤근수는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
며 연거푸 술을 따랐다. 그는 친형인 판중추부사 윤두수와 함께 서인의 핵심 인
물이었다. 죄수를 무사히 압송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이결은 꽤 많은 양의 술
을 사양 않고 받아 마셨다.
"죄인은 어떠한가? 듣자 하니 몸이 많이 상했다던데......."
이결은 달아오른 코를 찡긋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송장 치우는 줄 알았습니다요. 그 몸으로 어떻게 왜군들을 물
리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 순신은 장골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거참 이상한 일이군. 혹 자네를 속
이려는 수작은 아닌가?"
"아닙니다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뎁쇼. 나
이보다 십 년은 늙어 보이는 데다가 오른쪽 다리를 약간씩 절고 쉴 새없이 기침
을 해댑니다. 안질 때문에 두어 걸음 앞에 있는 사람도 못 볼 정도입죠. 속병이
깊어 미음도 제대로 삼킬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동상까지 걸려서 옥에 가두기
만 해도 한 달 안에 명줄이 끊어질 것입니다요."
윤근수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전하께서는 이순신을 살려둘 수 없다고
몇 차례나 거듭 말씀하셨다. 전하께서 나를 위관으로 택하신 것도 인정을 베풀
지 않고 이순신의 대역죄를 묻기 위해서이다. 이순신이 그 정도로 쇠약하다면
난장을 몇 차례 치는 것만으로도 전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리라.
"원통제사는 어떻던가?"
술잔을 비운 이결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여전하시지요. 일장연설로 단숨에 통제영의 장졸들을 휘어잡으셨습니다. 곧
부산의 왜군을 치러 가겠다고 하셨습죠."
윤근수는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임진년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는 원균을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하여 부산을 치자는 것이 윤근
수의 오랜 지론이었다.
이제 승전보를 받는 일만 남았군.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어떻던가? 군량미는 어느 정도이고 판옥선은 몇 척이
나 더 만들었던가? 하긴...... 순신이 저 모양이니 제대로 군정이 행해졌을 리가
없지."
"웬걸요. 선전관으로 함께 간 김현진의 말에 따르자면 군량미가 산더미처럼 쌓
여 있고 화약이나 총포도 충분하답니다. 판옥선도 족히 스무 척은 넘게 증선했
고요."
윤근수는 이결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이순신의 하옥이 결정된 후, 서애 유성
룡이 푸념처럼 뇌까린 말이 떠올랐다.
"원균이 조선의 칼이라면 이순신은 조선의 방패라오. 내가 원균을 경상도통제
사로 보내자는 대감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은 것은 원균이 경상도에서 선봉을 서
고 이순신이 전라도에서 뒤를 받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해서였소. 쟁
공이야 장수들의 당연한 습성이니, 그둘의 다툼을 조정하는 것은 우리 문신들의
몫이지요. 하지만 이제 방패는 없고 칼만 남은 형국이 되어버렸소. 모든 것을 단
숨에 얻으려고 덤비다가 그나마 지키고 있던 땅마저 잃지 않을까 걱정이오."
다음날 진시(아침 7시)부터 추국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옥리 네 사람에게 사지가 들린 채 의금부 뜰로 끌려나왔다. 목에는
항쇄, 발목에는 족쇄가 각각 채워졌고 온몸이 오랏줄로 꽁꽁 묶인 채였다. 옷은
다 헤어졌고 동상에 걸린 맨발은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군데군데 붉은 반점
을 드러냈다. 이순신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반쯤 엎드린 상태로 이마
를 바닥에 대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뒤이어 시복(근무복)을 입은 윤근수가
형방승지를 대동하고 나타나서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뜰에 서서 하명
을 기다리던 금부도사 이결과 눈이 마주쳤다. 문사낭청(죄인을 신문하는 의금부
관리)으로 선택된 이결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병이 깊어 신문이 어렵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윤근수는 이결의 뜻을 무시하고 신문을 시작했다.
"대역죄인은 고개를 들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잔기침을 몇 번 뱉은 후 이순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
다. 부황으로 누렇게 뜬 볼과 산발한 머리카락, 초점 잃은 눈동자. 이결의 설명
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이순신이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딱딱 끊었다. 몰골과는 달리 맑고 낭랑한 음성
이었다.
귀와 입은 멀쩡하군.
윤근수는 빙긋 웃으며 신문에 참조하기 위해 사헌부에서 가져온 상소문의 초
안을 폈다. 그리고 마음내키는 대로 읽어 내려갔다.
......순신은 적을 막는 일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부질없이 남의
공로만 가로채 조정을 속이는 장계만을 올리고 있습니다. 마침내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도 화살 한 발 쏘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물러나 있던 적들도 이제는
거리낌없이 바다로 나와서 종횡으로 날뛰고 있습니다. 순신은 적을 치지 않고
내버려두었으니,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등진 죄가 크옵니다.......
윤근수는 이결이 준비해놓은 신문 도구들을 살폈다. 치도곤 열 개, 벌겋게 숯
불이 타고 있는 화덕, 기름에 달군 구리판과 직사각형으로 각이 지게 깎은 돌덩
이 따위가 눈에 띄었다. 죄인이 죄를 자복하지 않을 때 사용할 것들이었다. 내시
감 윤환시에 따르자면, 전하께서는 죄인의 죄상이 하루 빨리 밝혀져야 하며 만
약 시간을 끌 경우에는 위관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다. 윤근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저지른 죄는 하늘을 덮고 바다를 메울 만큼 크고 중하다. 그것을 다 헤
아리자면 끝이 없을 것인즉 크게 세 가지만 묻도록 하겠다. 이실직고를 하면 옥
으로 돌아가 이 밤을 편히 쉴 것이고, 거짓을 고하면 오늘이 곧 네 제삿날일 것
이니라. 먼저, 너는 지난 갑오년에 원균을 모함한 장계를 올린 적이 있느냐?"
이순신이 곧바로 대답했다.
"없소."
윤두수의 눈매가 더욱 가늘고 날카로워졌다.
"네가 지금 조정을 능멸하려 드는구나. 원통제사가 코흘리개 자식들에게까지
전공을 돌려 상을 받게 했다는 장계를 올리지 않았느냐? 원통제사에게는 아비를
닮아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사웅이란 외동아들이 있음을 너도 알고 있으렷다.
그 아이가 아비를 따라 큰 공을 세웠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런데도 거
짓부렁을 할 텐가?"
"사웅을 잘 알고 있소이다. 통제영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거제의 왜
구와 싸우러 나간다기에 전령을 보내 붙잡은 기억도 나오. 하지만 나는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 원수사의 측실과 그 소생들을 전쟁터에서 내치기 위해 장계를 올
린 것이었소.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젖비린내가 풀풀 나는 꼬마들이 판옥선을
이끌고 나가 왜장의 목을 거두어들였다고 자랑하는 것을 대감이라면 곧이들으시
겠소? 그런 허풍은 측실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을지언정 장졸들의 사기를
글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오. 아무리 강하고 용감한 군사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수가 주색에 빠지면 전투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소. 이를 '이군'이라 하오이
다."
"어허, 네가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게냐? 아직까지도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원통제사를 모함하는구나. 원통제사와 같은 용장을 '이군'의 장수에 비하다니. 안
되겠다, 저놈의 주리를 틀어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벌써 이런 일을 수천 번이나 해왔을 법한 험상궂은 나졸
들이 신속하게 죄인을 참나무 의자에 앉히고 양다리를 힘껏 결박했다. 그리고
다시 그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가위 버리듯이 끼워넣었다. 금부도사 이결이
오른손을 들었다 놓는 것과 동시에 좌우로 벌려서 나졸들이 숨을 멈추고 주리를
틀기 시작했다.
"으윽!"
어금니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윤근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이순신의 치켜든 턱을 똑바로 응시하였
다. 주릿대를 든 나졸들의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죄인이 정신을 잃고 물세례
를 받을 때까지, 한식경도 넘게 주리틀기는 계속되었다. 윤근수는 물에 빠진 생
쥐 꼴로 헛구역질을 해대는 이순신을 매섭게 몰아쳤다.
"바다에서 가등청정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적이 오는 것을 알고
서도 치지 않았으니 그것은 네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이니라."
욱 소리와 함께 이순신이 토악질을 시작했다. 옥에 갇힌 후로 맹물 외에는 아
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었다. 허연 위약과 핏덩이들이 뒤섞여 나왔다. 나졸들이
그를 부축해서 다시 일으켰다. 검게 변한 피딱지들이 턱수염에 떡고물처럼 매달
려 있었다.
윤근수의 명에 따라 물세례가 쏟아졌다. 온몸이 추위와 고통 때문에 사시나무
처럼 떨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결코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병법이란 적을 속이는 기만술에 다름 아니라고 했소. 요시라가 우리를 이롭게
한다고는 하나 근본이 왜인이며, 행장(소서행장)과 청정(가등청정)이 서로 다툰
다고 하나 그들은 모두 수길(풍신수길)의 장수들이오. 따라서 그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오. 또한 군선을 이끌고 나섰다가는 곧 거제에 숨어 있는 적의 척후
에게 발각되어 사면초가에 빠질 위험이 있소. 정월 열나흘에 한산도를 찾은 도
원수 권율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소. 하지만 나는 조정의 명에 따라 이튿날 새벽,
판옥선 열 척을 거느리고 통제영을 떠났소. 적진포와 흉도까지 나가서 적의 동
태를 살필 작정이었소. 그러나 이미 청정은 정월 열이튿날 밤부터 열사흘날 새
벽에 경상도로 들어온 뒤였소. 경상우병사 김응서 대감이 요시라와 만난 것이
열하룻날인데, 왜군은 벌써 그날 밤부터 상륙하기 시작했던 것이오. 그러니까 열
나흘날 새벽, 파발이 통제영에 도착했을 때는 청정이 안전하게 바다를 건넌 다
음이오.행장과 요시라는 쓸모 없는 정보를 흘려우리 수군의 동태를 살폈던 것이
오. 나는 그 즉시 통제영으로 돌아와 김우병사와 권도원수께 이 사실을 알렸소."
"닥치거라, 이놈! 너는 지금 네 죄를 덮기 위하여 도원수 권율과 우병사 김응
서까지 모함하고 있느니라. 조정 중신 모두가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갔고, 오직
너만이 그것을 간파했다는 말이냐? 권대감과 김대감뿐 아니라 경상도위무사 황
신의 장계에서도 네가 조정의 명을 어겼음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있느니라. 또
한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하여 규찰어사로 통제영에 파견한 성균관 사성 남이신
은, 청정이 적은 군사를 이끌고 일주일간이나 거제 장문포에 머물렀으며 이때
우리 수군이 기습을 했다면 능히 청정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어전에 아뢰었느
니라. 에잇, 더 이상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저놈이 바른 말을 할 때까지 단
근질을 계속하라."
나졸들은 화덕에서 꺼낸 커다란 인두로 이순신의 등을 지지기 시작했다. 허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살이 타는 냄새가 뜰 안에 가득했다. 윤근수가 점심
을 먹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단근질은 멈추지 않았다. 등이 짓물러진 후
에는 허벅지를 지졌고, 그 다음에는 엉덩이와 옆구리로 옮겨갔다. 비명이 잦아들
고 이순신이 정신을 놓은 후에도 단근질은 이어졌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윤근
수는 화덕의 숯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는다고 교체를 지시했다.
쉽게 걲이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황소고집일 줄은 몰랐다.
이순신의 변백(변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이 필요하리라. 허
나 선조의 인내는 열흘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이순신의
농간에 놀아난다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윤근수는 이순신의 육신을 완전히 짓이긴 후 자백을 받아내기로 마음을 굳혔
다. 그의 목소리는 오전보다도 훨씬 크고 우렁찼다.
"네가 뭐라고 변명을 해도 어명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너는 왜 삼
년이 넘도록 부산진을 치지 않았느냐? 갑오년에 그곳까지 찾아간 세자저하의 출
전 명령을 무시한 까닭이 무엇이냐? 그러고도 네가 살기를 바랐더냐?"
이순신의 갈라진 입술이 파르르르 떨렸다. 허나 워낙 고문을 심하게 당한 터
라 이빨 사이로 간신히 새어나오는 말들이 윤근수가 앉은 곳까지 들리지 않았
다.
"가까이 끌어내라."
나졸 둘이 이순신을 개처럼 질질 끌어 네댓 걸음 앞에 패대기를 쳤다.
"그래도 입은 살아서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구나. 내 일찍이 네놈의 입이 촉새
처럼 싸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는데 오늘에야 그것이 사실임을 알겠다. 그래,
어디 이번에는 어떤 사람을 모함하려느냐?"
이순신은 숨쉬기가 곤란한 듯 양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반벌거숭이 몽뚱
어리가 온통 단근질 자국 투성이였다. 윗입술도 불에 데인 듯 크게 부풀어올랐
다.
"수, 수륙합공을...... 오, 오...... 오랫동안 주청...... 드렸소. 수군만으로는...... 도
저히 이길 수...... 없소."
"무슨 소리! 전하께서는 부산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마도와 왜를 쳐서
풍신수길의 목을 효시하고서야 편히 침수를 드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 나
라의 군왕이 치욕을 씻기를 원하는데 장수된 자가 싸워보지도 않고 겁을 먹다
니! 이게 대역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이순신이 오른손을 들어 윤근수의 얼굴을 똑바로 가리켰다. 갑자기 당한 일이
라 윤근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곧게 뻗은 검지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닥쳐라! 무, 무릇 장수는....... 필승의 화, 확신이...... 서면 군주가 싸우...... 싸
우지 말라고 해도...... 싸우며, 확신이 서, 서지....... 않으면 임금이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더라도...... 싸우지 않는 법......."
그 순간 윤근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뭘 하느냐? 역적이 주둥아리를 마음대로 놀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테냐? 더
이상 신문할 것도 없다. 지금 당장 난장을 치도록 해라. 어서!"
뜰에 늘어선 장졸들이 모조리 붉은 곤과 장을 들고 이순신을 에워쌌다.
"죽여도 좋다. 사정 보지 말고 쳐라. 매우 쳐!"
난장질은 황혼이 찾아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순신의 몸은 참을 수 없는 고
통으로 흉측하게 뒤틀렸다. 이윽고 그의 사지는 백정이 휘두른 쇠망치에 정수리
를 맞은 황소처럼 축 늘어졌다.
윤근수는 힐끗힐끗 이순신의 몸뚱어리를 쳐다보며 오늘 신문한 결과를 쓰기
시작했다.
"신 해평부원군 윤근수 삼가 아뢰나이다. 역적 이순신은 그 죄를 극구 부인하
였으나, 엄히 문초한 결과 죄상이 차례로 드러나고 있사옵니다. 특히 전하의 뜻
을 어기고 삼 년이 넘도록 한산도에 숨어서 왜를 치지 않은 죄는 백 번 죽어도
그 벌이 과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쓰기를 마친 윤근수는 추안궤(신문한 내용을 보관하는 함)에 문서를 넣고 '신
윤근수 근봉'이라고 써서 봉한 다음 서명을 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승전색을 불
러 추안궤를 곧바로 탑전에 오리도록 하였다.
이레 동안 죄를 묻고 부인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반역을 꾀한 잔당의 이름과 그 수를 밝히라는 선조의 채
근이 심해졌고, 윤근수의 고문도 더욱 가혹해졌다. 무릎에 각진 바위를 얹는 압
슬형과 대나무 채찍을 휘둘러 등을 난타하는 태배형까지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순신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할 뿐이었다.
윤근수는 이순신을 죽이는 것 외에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일단 그를 죽이고 나서 자백을 받아냈다고 둘러대는 것이 상책이었다.
"비공입히수형을 준비하라."
지금까지 윤근수의 명령에 단 한 차례도 토를 달지 않은 이결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비공입회수라고 하셨습니까? 그걸 쓰면 몸이 성한 사람도 열 명 중 예닐곱은
죽어 나갑니다. 지금 죄인의 상태로는 백발백중 숨이 끊어질 것입니다."
비공입회수형은 죄수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코와 입에 잿물(회수)을 들이붓는
고문이었다. 잿물이 폐로 흘러들어 가거나 식도가 막혀 호흡을 못하는 날에는
그대로 황천길인 것이다. 이결은 윤근수의 차디찬 눈초리에서 살기를 느꼈다.
"닥쳐랏! 역적 하나 죽는 게 무슨 대수냐. 어서 거꾸로 매달지 못할까!"
나졸 하나가 벌써 잿물을들고 나왔다. 이결은 거꾸로 매달린 피투성이 이순신
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내렸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었다. 범인 같으면 숨이
끊어져도 벌써 몇 번은 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곧 생명이 다
할 것 같으면서도 실눈을 뜨고 가쁜 숨을 내뿜으며 삶에의 집착을 버리지 않았
다.
하지만 이 놀음도 오늘로써 끝이다. 잿물을 열 바가지쯤 들이부은 후에는 송
장을 치우는 일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위관이 마지막으로 문서를 작성하겠지.
'죄를 자복하고 고문에 못 이겨 숨을 거두었나이다.'
의병장 김덕령이 그렇게 갔고, 홍의장군 곽재우도 그 뒤를 따른 뻔하지 않았
는가? 역적의 시체는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히지는 못
하리라.
윤근수가 헛기침을 뱉어대며 계단을 내려섰다. 이결이 그 뒤를 따랐다. 윤근수
는 죄인과 두어 걸음 간격을 두고 멈춰섰다.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는
허리를 젖히고 배를 디밀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마지막 신문을 시작했다.
"대역죄인 이순신은 듣거라. 이제 너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며,
처첩과 자식들은 관노가 될 것이다. 너의 이름은 만고의 역적으로 길이 남을 것
이며, 너의 시신은 갈가리 찢겨 저잣거리에 버려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대역죄를 인정하는가?"
이순신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렸다. 윤근수가 혀를 차며 잿물을 든 나
졸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에잇, 고얀지고. 더 지켜볼 것도 없다. 어서 들이부어랏!"
"예이!"
나졸이 바가지를 기울이자 잿물이 이순신의 코로 콸콸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
다. 곧 이순신이 커억컥, 구역질을 하며 마구 도리질을 쳐댔다. 그 바람에 잿물
이 턱과 목, 가슴으로 흩어졌다. 다른 나졸이 그의 뒷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
껏 붙들었다. 숨이 막혀왔다. 출렁대는 물소리가 쉬지 않고 온몸을 흔들어댔다.
주위가 온통 캄캄해지더니, 그 위로 푸른빛 한 줄기가 내려앉았다. 푸른빛은
점점 자라기 시작했고 곧 푸른빛만 남게 되었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어느새 한
산도와 여수를 잇는 푸른 뱃길이 펼쳐졌다. 더위와 갈증을 단숨에 날려버린 해
풍이 섬과 섬 사이를 휘휘 돌며 갈매기 떼와 숨바꼭질을 했고, 만선의 기쁨을
자축하는 노랫가락이 넘쳐흘렀다. 전쟁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직접 성
을 쌓고 군선을 배치했던 해안들은 평화로운 어촌으로 변해 있었다. 어부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었다.
선거이, 정운, 이억기, 그리고 이영남. 그는 투구와 갑옷을 벗고 칼과 활을 내던
진 후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이 끝났다면 더 이상 장수로 남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제 부끄럽지 않은 죽음보다 행복한 삶을 생각한 때가 온
것이다.
평복으로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쳤다. 삶을 구걸
하는 조선인과 왜인들의 절규, 조총과 대포 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고 코와 귀
가 잘려나간 시체들이 움직이는 섬처럼 몰려다녔다.
그는 벗어둔 갑옷을 다시 입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러나 갑옷이 없었다. 그 대신 그곳에는 사지와 머리가 동아줄로 꽁꽁 묶인
죄수가 엎드려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죄수는 다름 아니라 바로 이순신 자
기 자신이었다. 주위에는 동아줄을 어깨에 걸고 코를 벌름거리며 사방으로 달려
갈 준비를 마친 다섯 마리의 늠름한 황소들이 힘차게 뒷발질을 해댔다. 파도가
흰 물보라를 튀기며 솟아오르는 것과 함께 황소들은 미친 듯이 붉은 바다를 향
해 달리기 시작했다. 몸통에서 찢겨져 나간 머리와 두 팔, 두 다리가 황소와 함
께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거대한 까마귀가 날카로운 발톱으
로 그의 몸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서 한산도 앞바다를
빙빙 맹돌았다.
바다는 어느새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어부들은 큰 소리로 태평가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몸통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시간의 바람을
견디며 천천히 썩어갈 따름이었다. 그 바람에 실려온 목소리 하나가 그이 육신
을 감싸며 속삭였다.
"왜 그대는 능지처참을 당했는가?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대의 심장을 보여주지
않으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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