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2-식인의 땅
김탁환
1.불타는 궁궐
어찌 옷이 없으리오마는
그대와 도포를 같이 입겠네.
임금께서 군사를 일으키시면
짧은 창 긴 창 날을 세워
그대와 함께 원수를 무찌르리.
임진년(1592년) 4월 17일 새벽.
눈을 떴다.
어둠이다. 풍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또 꿈을 꾼 것이다. 고개를 돌리
니 인빈 김씨가 코올콜 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다. 선조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며 빙
그레 웃는다. 전날 밤에도 그는 인빈 김씨의 처소인 영화당을 찾았다. 내시감 윤환시의 권고
가 아니더라도 요즈음 그의 관심은 온통 신성군에게 가 있었다.
어제는 모처럼 세 번이나 인빈을 즐겁게 해주었도다. 자정을 넘어서까지 시달렸으니 피곤
할 만도 하지.
허준이 지은 보약의 약효가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선조는 시
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악몽 때문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빈 김씨는 옥체를 보존하
시라며 보약 먹기를 권했다.
허준이 인빈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 강장을 북돋는 약을 만든 것이 틀림없다. 불혹을 넘긴
나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쳐야 할 때가 되었건만 인빈은 약의 힘을 빌려 나를 유혹하
는구나.
인빈의 마음 씀씀이가 싫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십 년만 더 용상에 앉았다가 신성군에게
양위(보위를 넘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늙어 죽을 때까지 국정에 시달릴 수는
없는 일. 인빈과 함께 팔도를 유람하며 삶을 즐기는 일도 멋있으리라. 생각해보니 보위에 오
른 지도 어언 이십사 년이 흘렀다.
열여섯 철부지로 궁궐에 들어온 뒤 많은 일을 겪었다. 첫 십 년간은 퇴계와 율곡의 도움
이 켰다. 두 사람은 군왕의 도와 덕치의 위대함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요순의 아름다움이여!
한고조의 인자함이여! 공맹의 올바름이여! 그들과 함께라면 조선을 삼황오제의 나라로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허나 군왕의 길이 어디 그렇게 쉬운가.
퇴계와 율곡이 세상을 버린 후로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동서로 나뉜 신하들은 하
루가 멀다 하고 두 사람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퇴계와 율곡이 이렇듯 소인배라면 그들
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역정을 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신하
들은 막무가내였다. 요순도 공맹도 모두 잊은 듯했다.
급기야는 정여립의 난까지 일어났다. 이씨 왕조를 멸망시키고 정씨 왕조를 세우계다는 것
이다. 음모가 미리 발각되지 않았다면 어지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제 내
켵에는 퇴계와 율곡처럼 신임할 만한 신하가 없다. 자기 당의 이익만 챙기려드는 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특히 함경도와 전라도의 장수들을 유념하여 살펴서, 조금이
라도 항심을 품는 자는 단칼에 베어버리리라.
지난밤의 악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며칠째 같은 꿈이 반복되고 있었다.
산발한 계집이 보였다.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머리에 볏단을 인 그녀는 북망산을 바라
보며 한없이 달렸다. 사람들이 막아섰지만, 그녀는 백 년 묵은 여우처럼
훌쩍훌쩍 공중제비를 돌며 그들을 뛰어넘었다. 어느 틈에 대궐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머
리에 인 볏단을 하늘높이 던지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그러자 볏단이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대궐을 휩쓸었고, 한양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어제 아침, 좌의정 유성룡을 불러 해몽을 시켰다. 유성룡은 파자점(글자를 풀어 치는 점)
으로 꿈을 풀었다.
"계집이 볏단을 머리에 이었으니 곧 왜가 되옵니다. 왜의 변란을 유념하라는 뜻이 아닐는
지요."
영의정 이산해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전하, 자고로 불은 번영을 뜻하는 바, 길몽이 틀림없사옵니다. 더군다나 대궐과 도성을
태워버릴 큰 불덩이였으니 아주 큰 복이 찾아들 것이옵니다."
변란과 변영이라!
선조는 가만히 비단이불을 걷고 앉았다.
공자는, 인간의 일도 다 모르는데 귀신의 일까지 알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꿈이란 의당
해괴한 것이며 귀신의 놀음에 불과하다. 일국의 군주가 악몽에 흔들려서야 쓰겠는가. 허
나... 왜 며칠 동안 그 불덩이가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일까?
"전하!"
인빈의 코맹맹이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어느 틈에 잠을 깬 것이다. 선조는 가만히 인빈
김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첫닭이 울기 전이오. 좀더 눈을 붙이도록 하오."
"또 악몽을 꾸셨는지요? 소첩은 전하의 옥체 상하실까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인빈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선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양볼을 어
루만졌다.
"신성군은 요즘 무슨 공부를 하오?"
"시경을 읽는다 하옵니다."
"호오, 기특한지고! 벌써 시경을 읽는단 말인가?"
선조가 흡족하게 웃으며 천천히 인빈의 손을 끌어당기자, 인빈은 고개를 숙인 채 못 이기
는 척 끌려왔다. 하룻밤 사이에 네 번씩이나 운우지락을 이루기는 처음이었다.
"전하의 자애하심이 바다와 같사옵니다."
선조는 인빈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졌고, 인빈은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부르르르 몸
을 떨었다. 선조는 그녀의 감칠맛 나는 몸부림이 좋았다. 그녀에게는 비록 숫처녀의 어리숙
함이나 수절하는 과부의 정숙함은 없었으나, 사내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노련함이
있었다.
창덕궁을 가득 덮은 안개가 살랑이는 봄바람을 따라 천천히 후원 쪽으로 움직였다. 차디
찬 겨울이 가고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온 것이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궁녀들의
얼굴에도 봄은 피어났다. 성은을 기다리며 한평생 늙어가는 그들도 봄내음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진시(오전 7시)가 갓 넘을 무렵, 내시감 윤환시는 도승지 이항복이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선정전을 가로질러 승정원으로 가는 도중에 이항복과 마주쳤다. 이항복이 인사도 건
네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
"전하께서는 기침하셨는가?"
"아직...!"
윤환시는 말꼬리를 흐리며 이항복의 표정을 살폈다. 지밀상궁의 귀띔에 따르자면, 전하께
서는 새벽녘에 잠깐 잠을 깨셨다가 다시 침수에 드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전에는 편전에
납시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항복은 혀를 쯧쯧 차며 하늘을 우러렀다.
"언제쯤 기침하실 것 같은가?"
"글쎄올습니다. 요즘엔 사시(오전 9시)를 넘기실 때가 많사옵니다."
"사시라... 그땐 너무 늦어. 지금 당장 가서 아뢰주시게."
"아니되옵니다."
이항복은 윤환시의 짝 갈라지는 쇳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아니된다?"
그는 진작부터 내시감 윤환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환시가 선조를 인빈의 치마폭으로
밀어넣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기침하시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계셨사옵니다."
윤환시는 어명을 걸고 넘어졌다. 어명을 따르겠다는데 누가 막을 것인가? 침수 든 임금을
깨워서라도 알려야 할 위급한 일이 무엇인가를 캐내기 전에는 결코 이항복을 영화당으로 들
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급한 일일수록 내시감인 나 윤환시가 먼저 알아야 한다.
"고이헌!"
이항복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윤환시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고 이항복의 노여움
을 못 본 체했다. 그 사이 대청에서 십여 명의 신료들이 몰려나왔다. 좌의정 유성룡이 앞장
을 섰고 이산해, 이덕형, 홍여순 등이 뒤를 따랐다.
"도승지! 무엇하고 있는 겐가? 전하께 아뢰셨는가?"
유성룡의 목소리에도 여유가 없었다. 이항복이 윤환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기침하시지 않으셨다고 하옵니다."
유성룡이 다시 다그쳤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한시가 급하니 당장 전하계 아뢰시오."
대신들의 동태를 살피던 윤환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둘러 이항복을 영화
당으로 안내했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윤환시의 목소리가 유달리 작고 가늘었다.
"..."
대답이 없었다. 이항복이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신 도승지 이항복이옵니다."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이항복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하, 신 도승지...."
"물러가랏!"
짜증이 철철철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전하!"
"물러가지 못할까?"
윤환시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이항복은 받쳐들고 온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를 물끄러
미 쳐다보았다. 왜군이 4월 13일 새벽에 부산에 상륙하였음을 알리는 장계였다. 생각 같아서
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지만 지엄한 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께서 기침하시거든 대신들이 편전에 모두 모여 기다린다고 아뢰주시게."
"알겠사옵니다."
힘없이 물러가는 이항복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 윤환시는 선조가 편안히 늦잠
을 즐길 수 있도록 주위에서 얼쩡거리던 궁녀들까지 멀리 물리쳤다.
선조가 편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시(오전 11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도승지 이항복이 지체하지 않고 박홍의 징계를 올렸다.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선조
의 진노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전쟁,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선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말고 고요했다.
"도승지!"
"예, 전하!"
"고작 이 일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느냐? 왜구 몇 놈이 절영도 앞바다에 나타난 게 어쨌다
는 건가? 경상좌수사와 동래부사가 물리치면 그만인 일이다."
"저, 전하!"
이항복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선조는 변명을 용납하지 않고 이산해에게 눈길을 주었
다.
"영상! 영상도 이 장계 때문에 온 것인가?"
"그, 그게 말씀이옵니다...."
이산해도 제대로 답을 못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유성룡이 나섰다.
"전하! 절영도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저들의 군사가 만 명을
넘는다는 소문도 있고 이만 명을 넘는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속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옵니다."
"그러니까 좌상은 경상좌수사와 동래부사가 왜구에게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 아니옵니다. 신은 다만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
"만일은 무슨! 설령 경상좌수사와 동래부사가 패한다고 하더라도 경상도병마사가 막으면
된다. 도대체 이까짓 일로 조정을 어지럽힌 자가 누군가? 나서랏! 썩 나서지 못할까?"
대신들은 선조의 불호령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 도승지 이항복이 방금 도착한
박홍의 두 번째 장계를 올렸다.
"승전보이리라."
선조는 빙긋 웃으며 장계를 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놀람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었다.
선조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신하들도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부산첨사 정발이 어떤 놈이냐?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하다니! 에잇,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동래부사 송상현은 또 어떤 위인이야? 도대체 그곳 장수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나라 체면을 이렇게 구겨버릴 수가 있는가? 구
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놈들! 어찌 조선의 군대가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놈들에게 질 수 있단
말인가?"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전사.
신하들 역시 선조만큼이나 놀랐다. 먹고 살기 위해 남해안을 기웃거리던 좀도둑 무리에게
종삼품 동래부사가 목숨을 잃은 것은 치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선조의 분노는 장계
를 올린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쏟아졌다.
"장계만 올리면 그만인가? 왜선들이 건너오는 동안 경상좌수사는 어디 있었단 말인가? 한
심한 놈! 어찌 이런 자가 조선의 장수일 수 있겠는가?"
유성룡이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 끼여들었다.
"전하! 하루 빨리 방책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부산이 뚫렸으니 저들은 대구를 지나 곧장
한양으로 쳐들어올 것이옵니다."
"뭣이? 왜놈들이 이곳까지 온단 말이가?"
선조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지금까지 왜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을 침탈했을 뿐 내
륙까지 들어온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한성판윤 신립이 유성룡의 주장을 힐난하며 나섰
다.
"좌상!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들이 한양까지 쳐들어온다고 하시는 겝니까? 조선에는 장수
가 없는 줄 아시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다면 저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외다. 전하! 성심을 편히 하시옵소서. 차라리 잘된 일이옵니다. 저들이 겁도 없이 건너
왔으니, 이 참에 소장이 부산으로 내려가서 왜놈들을 쓸어버린 후 대마도와 본토로 건너가
겠사옵니다. 철저히 응징해서 다시는 이따위 헛된 짓을 못하도록 가르친 뒤 전하의 위엄과
덕을 저들의 가슴에 똑똑히 새겨놓겠사옵니다. 삭풍 몰아치는 육진에서의 전투에 비한다면
겁쟁이 왜구를 쫓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소장을 보내주시옵소서."
선조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신장군! 역시 신장군뿐이구려. 경들은 들어라! 우리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명나라와
함께 공맹의 도를 실천하는 나라가 아닌가? 예의를 아는 우리가 어찌 개백정만도 못한 왜놈
들에게 질 수 있겠는가? 부산포와 동래의 패전은 송상현과 정발이 제대로 대처를 못했기 때
문이다. 그러니 경상우병사에게 당장 나가 싸우라는……."
선조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듯했다.
경상우병사?
"좌상, 지금 경상우병사가 누구인가?"
"김성일이옵니다. 그저께 떠났으니 아직 부임지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김성일? 김성일이라면 왜구가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 장본인이 아닌가? 당장
불러들엿! 내 친히 국문하겠다."
유성룡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기어이 염려하던 일이 터진 것이다. 김성일이 한양
으로 끌려오면 죽음을 면키 어렵다. 아래로는 백성을 속이고 위로는 임금을 능멸한 죄를 받
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나서서 김성일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대마도로 건너갈 배는 준비되었는가?"
선조는 다른 대신들을 무시하고 신립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마련한 배가 칠십여 척이옵고, 나머지는 왜선을 빼앗아서 충당하면
될 것이옵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신립이 자신감을 피력하자 대신들도 마음을 놓았다. 두만강을 건너가서 여진족을 쓸어버
린 신립이라면 능히 왜군을 물리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새벽잠을 설치고 입궐할 필요까지
없었다. 부산에서 한양이 천리길이니 도중에 왜구는 틀림없이 격퇴될 것이다.
"전하! 개 돼지를 잡는 데 명검까지 휘두를 필요는 없사옵니다. 신장군은 조선의 기둥이니
만큼 한양에 머무르게 하시고 소장을 보내주옵소서."
대장군 이일이었다. 정여립의 잔당을 색출하지 못해 선조의 핀잔을 받은 후로 내내 침을
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였다. 왜군의 침입은 군왕의 마음을 붙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일이 콧김을 푸욱푸욱 내뿜으며 출정을 간청하자 선조와 대신들의 마음은 한층
더 밝아졌다. 왜군을 상대하는 데는 이일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선조는 잠시 신립의 표정을
살폈다. 신립 역시 이일이 나선 것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대마도까지 건너가겠다고 큰소
리는 쳤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 있는가?"
"전하, 소장을 믿어주시옵소서."
"신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립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장수들 중에는 손오의 병법을 읽고 도략(육도삼략)을 외워도 그 뜻을 취하지 못하거나
군사들을 부리지 못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허나 대장군 이일은 병법에도 밝으면서 능히 장
졸들을 거느릴 수 있는 양장이옵니다.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삼으시어 중도로 내려가게 하
고,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로 내려가게 하고,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우도로 내려
가게 하옵소서. 천군만마와 대적하더라도 물리칠 것이옵니다."
"윤(허락한다)!"
선조는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영화당으로 사라졌다. 도승지 이항복에게는 미열이 있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고 했지만 인빈 김씨의 살내음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회춘을 만끽
하는 기쁨이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대신들은 선정전 뜰로 나와서 신립과 이일을 삥 둘러쌌다. 새벽녘의 불안과 근심은 사라
진 지 오래였고 벌써 승전보라도 받은 듯 파안대소까지 터져나왔다.
유성룡은 도승지 이항복과 동지중추부사 이덕형을 데리고 선정문을 빠져나와 성정각으로
들어섰다. 성정각은 동궁(세자)이 학문을 익히는 곳이다. 아직까지 세자가 책봉되지 않았기
에 내의원들의 왕래만 있을 뿐 인적이 뜸했다.
오성 이형복과 한음 이덕형.
학문과 처세에 두루 능한 두 사람은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중
론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유성룡은 그들을 볼 때마다 이십여 년 전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곤 했다. 김성일, 허봉과 함께 홍문관에 파묻혀 학문을 익히던 시절, 붕당을 만
들려는 서인에게 정면으로 달려들던 시절, 의로운가 의롭지 못한가라는 잣대만으로 세상을
판별하던 시절이었다. 오십 줄에 들고보니 의라고 믿었던 것이 불의로 밝혀지기도 했고, 불
의라고 치를 떨었던 것이 의로 돌아오기도 했다.
유성룡은 특히 율곡을 탄핵하는 소를 올린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그는 동도 없고 서도 없으며, 동도 옳고 서도 옳다는 율곡의 주장을 미봉책으로만 받아들
였다. 어찌 하늘 아래 옳은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율곡의 주장은 천하를 속
이고 군왕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탄핵을 당한 후 율곡은 무엇이라고 했던가.
"무왕과 백이숙제는 둘다 옳은 것이라네. 주나라의 무왕은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쳐서 세
상을 평안하게 했으니 옳은 것이고, 백이숙제는 신하가 임금을 죽일 수 없다는 도를 따른
것이니 그 또한 옳지 않겠는가?"
그때는 율곡의 유연한 생각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젊은 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 세상을 읽는 눈이 부족했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저 두 사람은 무왕과 백이숙제가 동시에 옳다는 궤변을 이해할 수 있
을까? 힘들 것이다. 아직은 저들에게도 의를 따르려는 마음만 충만하겠지. 허나 곧 깨닫게
되리라. 전쟁에서의 승패는 세상의 도리로 가려지지 않는다.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적을 속
이기 위해서는 도가 아닌 길도 가야만 하고 예가 아닌 말도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저들
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서의 편가름에 익숙해 있는 대신들과는 전쟁의 간교함을
논할 수 없다. 의와 불의가 힘의 논리로 바뀌는 현실을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대
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장군은 패할 것이오."
이항복이 놀란 토끼 눈으로 되물었다.
"패하다니요? 천하의 용장이 아닙니까?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물러선 적이
없는……."
"천하의 용장? 바로 그 뜬구름 같은 명성과 자만심이 화를 부를 것이오. 이장군은 용기는
있으되 슬기가 없고, 자신의 능력만 과신하고 주위의 조언을 듣지 않는 장수라오. 나아가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지킨다면 능히 왜군과 대적할 수 있겠지만 속전속결로 승리를 재
촉한다면 단숨에 무너지고 말 것이오. 우린 아직도 왜군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정확하
게 모르오. 동래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걸 보면 그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 수 있
소. 쉽게 덤비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오."
그러나 이덕형 역시 유성룡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장군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입니다. 전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겠지
요."
"장수가 전투에서 패하는 데는 열 가지 잘못이 있는 법이오. 용기는 있으나 죽음을 가볍
게 여기고, 적군을 만나서 허둥대며, 욕심을 앞세워 이로움을 취하고, 마음이 약해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못하며, 지혜는 있으되 두려움을 모르고, 남을 함부로 믿고, 청렴을 내세워
서 부하를 보살피지 않고, 계책이 있다고 조심하지 않거나, 모든 일을 자기 혼자 꾸려나가려
하고, 게을러서 모든 일을 부하들에게 맡기는 것. 이 중에서 두 가지 잘못만 범해도 전투에
서 이길 수 없어요. 헌데 이일 장군은 어떻소? 내가 보기엔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잘못
을 범할 것 같소."
오성과 한음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용맹하기는 하나 덤벙대는 이일이 왜군과의 전투
에서 패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다음엔 한성판윤 신립이 나설 것이다. 신립은 이일과
는 달리 침착하고 사려 깊으며 병법에도 밝으니 왜군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유성룡은 두
사람의 마음을 넘겨짚었다.
"신립 장군이 왜군을 막는다면 다행이지만, 우리는 그 다음까지 대비해야 하오."
"다음이라시면……?"'
"몽진을 준비합시다."
이항복이 화들짝 놀랐다.
"몽진이라니요?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왜놈들을 피해 도성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싸
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왜놈들이 숭례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지요."
"한고조 유방은 치욕을 참으며 한중으로 물러났기에 천하를 쥘 수 있었고, 초패왕 항우는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오강을 건너지 않았기에 목숨을 잃었소. 살아남지 않는 자에게는 희망
도 없는 법. 자존심과 종묘사직을 맞바꿀 수는 없지 않소?"
이덕형은 고개를 들어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유성룡의 말을 처음부터 되새기는 듯했
다. 이일이 패하고 신립마저 지면 좌상의 말대로 도성까지 위태로워진다.
"대감의 말씀처럼 된다면 소생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유성룡은 그 물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 명약관화하게
드러난 일은 없다. 다만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왜군의 기세를 꺽어야 하는 것만은 확실하
다. 시간을 벌면 벌수록 방어하는 쪽이 유리해진다. 군대란 원정에 나서는 순간부터 도적떼
가 되는 법이다. 몇 년 동안 군량미를 준비하고 치밀한 수송 계획을 세우더라도 지리와 기
후의 변화 때문에 배를 주릴 수밖에 없다. 겨울까지만 시간을 끈다면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왜군들의 사기가 바닥에 다다를 것이다. 그때까지 전쟁을 질기게 이어가야 한다.
"도승지는 전하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시오. 주상전하께서는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유학에는 조예가 깊으시지만 병법이나 전투에는 밝지 못하시오. 그러니 언제
나 마음을 강건하게 지니시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시오. 그리고 지중추부사는 왜장들을 만나
야 할 것이오."
"왜장이라니요?"
"동지중추부사는 일찍이 선위사(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벼슬)로 왜인들을 여러 차례 만
난 적이 있지 않소? 듣자 하니, 왜인들 사에서 동지중추부사의 학덕이 주자에 비할 정도라
고 칭송이 자자하답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입니다. 소생이 어찌 감히……."
유성룡은 펄쩍 뛰는 이덕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허허, 어쨋든 도승지가 전하를 모시고, 동지중추부사가 왜장들을 맡고, 내가 명나라를 오
가면 틀림없이 승리할 길이 있을 게요."
"대감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공손히 유성룡에게 예를 표했다. 유성룡은 왜와의 전면전을 예상하며 대비책을
간구하고 있는 유일한 신하였다. 예전처럼 왜구가 변방만 어지럽히다가 돌아가면 다행이지
만, 그들이 경상도, 충청도를 지나 한양으로 들어온다면 유성룡의 계획을 따를 도리밖에 없
었다.
"허허허, 이 사람의 뜻을 헤아려주니 고맙구려. 자, 어떻소? 아무리 급해도 오늘 저녁엔
함께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내가 잘 아는 기방으로 가십시다. 꾀꼬리처럼 노래를 잘하는 아
이도 있다오."
성정각을 나온 세 사람은 봄 풍경을 완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색색가지 꽃과 나무
들이 시야를 어지럽혔고, 코끝을 간질이는 봄꽃 내음이 마음을 흔들었다. 어디에도 피냄새는
없었다. 졸졸졸 흘러가는 금천교의 시냇물이 유난히 맑았다. 전쟁이란 괴물은 이렇듯 평화로
운 풍경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철저히 짓밟고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허나 세상 일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다만 예측하고 준비할 따름이다.
임진년(1592년) 4월 28일 새벽.
유성룡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열흘 사이에 전황은 최악에 이르렀고, 피난을 떠나는 백성
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유난히 많은 별똥이 새벽마다 목멱산으로 떨어졌으며, 팔뚝만한
붕어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한강으로 떠올랐다. 점쟁이들은 너나없이 큰 화가 닥칠 조짐
이라고 했다.
4월 25일, 이일은 상주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진 것은 그의 전술 탓이었다.
그는 척후를 내보내는 법이 없었다. 북방의 여진족은 괴성을 지르며 들판을 가로질러 공격
해왔기 때문에 구태여 적의 동태를 살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군은 이일의 이런
습성을 간파하고, 조선군이 진을 친 상주 남쪽 장천리를 겹겹이 에워싼 채 기습 공격을 감
행하였다. 이일은 단신으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충주로 달아났으며 나머지 장졸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신립뿐이었다.
유성룡은 신립의 괄괄한 목소리와 짙은 눈썹, 그리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그려보았다.
그의 어깨에 조선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제수한 후 보검을 하사했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이다. 신립은 왜군을 전멸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한 수 충
주로 떠났다. 왜의 본토를 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선조도 차츰 전세의 불리함을 느끼
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을까?
유성룡은 대궐을 나서던 신립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대신들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빈청의 계단을 내려가던 신립의 사모가 툭 떨어졌던 것이다.
"웬 바람이……."
신립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사모를 고쳐 썼지만 유성룡은 그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
모가 떨어지면 목숨을 잃는다는 옛말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신립이 패하면 몽진해야 한다. 충주에서 한양은 지척이니 한시라도 늦추었다가는 모조리
생포될 위험이 크다. 우선 개성으로 가고 그 다음에 평양. 그리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
까? 굼벵이처럼 느린 어가행렬이 개성에 닿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한음 이덕형이
그 일을 해줄 수 있을까?
어제 아침,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역관 경응순이 왜장 소서행장의 서찰을 가져왔다. 4월
28일, 충주에서 이덕형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선조는 한사코 이덕형의 파견을 반대했으
나, 이덕형이 스스로 왜장을 만나 시간을 벌겠다고 자청하자 조정의 공론은 그를 보내는 쪽
으로 모아졌다.
유성룡은 지난밤 그의 집을 찾은 이덕형을 떠올렸다. 큰 키에 곧고 큰 코와 윤기 흐르는
턱수염이 품위를 돋우었다. 죽음의 땅으로 떠나는 사람답지 않게 침착하고 온화한 얼굴이었
다. 막상 필마단기로 떠나는 이덕형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별주를 권할 때는 눈물까
지 비쳤던 모양이다.
"대감, 소생이 비록 재주는 용렬하고 박덕하오나 누란의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위해 작
은 일 한 가지는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화씨의 벽을 들고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돌
아온 조나라의 인상여처럼 소생도 꼭 살아 돌아올 것이니 마음놓으십시오."
"그래야지. 내 그대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는가보오. 그대가 명나라를 맡고 내가 왜를
상대하면 좋았으련만."
"왜장과의 만남은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하나 명나라와 연통을 주고받음은 이 전쟁을 이
길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니, 대감이 응당 명나라를 맡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도
승지나 가끔씩 살펴주십시오."
관포지교라고 했던가? 죽음의 땅으로 떠나면서도 친구의 안위를 염려하는 이덕형의 마음
씀씀이는 포숙아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늙은 노복이 뒤뜰을 거닐던 유성룡에게 황급히 뛰어왔다. 귀엣말을 들은 유성룡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광해군께서?……속히 뫼시어라."
지금처럼 세상이 뒤숭숭한 판국에 광해군이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평복 차림의 광
해군은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냉수 한 사발을 청해 마셨다. 그리고 급히 오느라고 연통을
넣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유성룡은 말없이 웃으며 광해군이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배려했
다. 광해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월나라 왕 구천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오나라 왕 부차의 대변까지 핥아먹었습니다. 때를
기다린 것이지요."
광해군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유성룡은 광해군의 의중을 읽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근왕병을 모으는 문제가 논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대군들을 팔도로 보낸다지요?"
어제 오후, 근왕병을 언급한 것은 선조였다. 왕실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로운 군사들이 떨
쳐 일어나 군왕을 호위하는 것이 옳으며, 또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장성한 대군들이
앞장을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대신들의 동의를 얻은 선조는 논의를
한걸음 더 진전시켰다.
"만약을 대비해서 세자를 세우는 것이 어떠한가?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한 후, 세자가 책
임을 지고 전쟁을 총지휘하면 될 것이다."
유성룡은 선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 신성군을 몽진에 동행시키
고, 세자를 비롯한 장성한 대군들에게 도성을 사수하며 근왕병을 모으는 위험한 일을 떠넘
기려는 것이다. 인빈 김씨의 입김일까? 유성룡은 하루 동안 말미를 구한 후 편전에서 물러
났었다.
"그리고 오늘 세자를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유성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해군의 속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세자로 책봉될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는 것이겠지. 부차의 대변을 핥아먹던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갈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광해군을 돕는구나.
태평성대가 이어졌다면 왕위는 틀림없이 신성군에게 돌아갔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세자의
지위보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에도 바쁜 상황이다.
"구천에게는 범여라는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다지요?"
범여는 구천을 도와 오나라에게 복수를 한 월나라의 충신이었다. 범여처럼 도와달라는 뜻
이다.
왜군이 충주까지 밀어닥친 지금 이 판국에도, 세자가 되기 위해 새벽이슬을 맞으며 나를
찾아온 저 청년의 욕망은 무엇인가? 복수심인가? 권력욕인가?
"나으리, 죽음이 코앞에 있사옵니다. 먼저 보신할 계책부터 세우시지요."
광해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구천의 치욕도 맛보았으니 왜군과의 싸움이야 감당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요. 영상 대감
은 이미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좌상 대감만 도와주신다면 능히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
저는 꼭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청년 광해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뿜었다.
"주인이라……! 나으리께서는 조선의 현실을 아시옵니까?"
유성룡은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다고 해도 용상에 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전쟁중에 죽을 수도 있고,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세자의 위를 잃을 수도 있으며, 운이 좋아 승승장구하더라도 선조로부터 감시
를 당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운신하더라도 용상에 근접할 수 없다면 차라리 꼬리를 내리
고 숨는 편이 낫다. 그러나 저 빛나는 눈을 보라. 다른 대군이 세자로 뽑힌다면 혀라도 깨물
기세이다.
"알다마다요. 북쪽의 여진과 남쪽의 왜가 호시탐탐 조선을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을 물리
치기 위해서라도 천명을 다하는 군왕이 법을 엄정히 집행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아래로는
농부로부터 위로는 군왕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기회를 잡으려는 광해군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
지 이르렀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지요. 허나 소인의 청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광해군의 얼굴이 밝아졌다.
"말씀하시지요."
"목숨을 귀히 여기시옵소서. 또한 전공을 탐하지 마시옵소서. 전투에서 지면 자신의 잘못
으로 받아들이고, 전투에서 이기면 모든 공을 주상전하께 돌리시옵소서. 틈날 때마다 세세한
것까지 모두 서찰에 적어 전하께 보내시옵소서. 아직은 나으리께서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
란 걸 명심하시라는 뜻이옵니다."
"알겠소이다. 명심 또 명심하지요."
"위급한 일을 만나면 반드시 소인과 의논하셔야 하옵니다. 무릇 전쟁이란 전후가 없고 사
리분별이 어려울 때도 많은 법이옵니다."
"고맙소. 좌상대감!"
광해군이 돌아간 후 유성룡은 서둘러 입궐했다. 궐 안의 분위기도 살피고 경상도와 전라
도에서 올라온 장계도 읽을 생각이었다. 승정원에 들르니 도승지 이항복이 장계를 정리하느
라 여념이 없었다. 밤을 세운 모양이었다.
"건강에 유념하시게. 도승지가 쓰러지면 누가 전하를 보필하겠는가."
이항복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유성룡은 이미 탑전에 올라갔다
온 장계들을 서둘러 펼쳤다. 패전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이다지도 허망하게 진단 말인가?
조선에는 용맹한 장졸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이 지경이라면 신립으로부터도 승전보를
받기는 애당초 글렀다. 아무리 하늘이 낸 용장이라고 하더라도 욱일승천하는 적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하께서는 어떠하신가?"
"몽진의 뜻을 굳히신 듯하옵니다. 밤새 영화당 뜰을 거니시다가 묘시(새벽 5시)가 지나서
야 잠자리에 드셨사옵니다."
선조의 마음고생도 심한 듯했다. 대마도와 왜의 본토를 점령하겠노라며 큰소리를 친 마당
에 비오듯 쏟아지는 패전 장계를 용납하기 힘들리라. 진시(오전 7시~9시)가 지나기도 전에
편전으로 나온 것을 보면 지난밤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신하들은 피로와 분노,
슬픔과 공포에 찌든 용안을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선조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담담한
목소리로 이산해를 찾았다.
"영상! 몽진을 가야 한다는 상소와 도성을 지켜야 한다는 상소가 반반인데, 어찌 하면 좋
겠는가?"
이산해는 머리를 바닥에 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면 영의정의 죄가
가장 큰 것이다. 선조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이산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조판서 이원
익과 좌참찬 최홍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판은 예전에 안주를 다스릴 때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다고 들었다. 그대를 평
안도 도순찰사에 명한다. 지금 인심이 흉흉하여 토붕와해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서 군사들
을 모으고 그 마음을 단결시키도록 하라."
몽진의 길을 미리 살피기 위해 이원익과 최홍원을 보내는 것이다. 이산해는 그때까지도 울
음을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도성을 떠타 피난을 가게 되었으니 신하들의 죄는 하늘에 닿고
도 남았다.
"영상은 그만 울음을 그치라. 충주로 내려간 신립이 틀림없이 승전보를 전할 것이다. 이원
익과 최홍원을 보내는 것은 좌상의 말대로 만약을 대비하는 것뿐이니라. 신립이 승리하면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동원하여 당장에 왜를 칠 것이다."
이산해가 마지못해 울음을 그쳤다.
"어제 못다 한 논의를 계속하도록 하라. 바람이 잦을수록 뿌리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 세자를 책봉하여 백성들에게 왕실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 옳다. 누가 세자가 되어
야 하겠는가?"
유성룡은 이산해 쪽을 곁눈질했다. 광해군은 이산해와 이미 뜻을 합쳤다고 했다. 허나 이
산해는 손바닥으로 붉은 눈시울만 훔칠 뿐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들 하는 겐가?"
선조의 목소리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이산해가 유성룡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먼
저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바싹 마른 입술을 아래위로 핥으며 미
적거렸다.
"좌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참다못한 선조가 유성룡을 지목했다. 유성룡은 이산해의 안도하는 얼굴을 보고 마음이 언
짢았다.
지난번엔 송강을 함정에 빠뜨리더니 이번에는 나인가?
쉽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광해군과 약조를 했으나, 그 약조는 이산해가 먼저 논의
를 펴면 뒤를 받친다는 뜻이었다.
"세자 책봉은 신하들이 감히 아뢸 바가 아니옵니다. 마땅히 주상전하께서 스스로 택하실
일이옵니다."
유성룡은 화살을 선조에게 되돌렸다. 선조는 몇 차례 더 신하들을 지목하여 대답을 구했
으나 하나같이 유성룡의 대답을 흉내낼 뿐이었다. 그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에잇. 이다지도 과인의 마음을 몰라준단 말인가? 좌상만 남고 물러들 가라."
선조는 유성룡을 제외한 신하들을 편전에서 물리쳤다. 도승지 이항복과 사관 김형주까지
뜰에서 기다리게 했다. 덩그러니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선조가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
"앞으로 오란 말이다."
유성룡은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숙인 채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의 입김이 닿을 만큼 가까
운 거리에서 선조가 버럭 화를 냈다.
"송강처럼 내쫓길까봐 그렇게 말을 아끼는 게냐? 과인이 그대의 재주를 귀히 여겨 항상
곁에 두었거늘, 이제 보니 겁쟁이 중에서도 겁쟁이로다."
"저, 전하!"
선조는 신하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유성룡으로서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용서하시옵소서. 신이 잠시 딴마음을 품었나이다."
유성룡이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자 선조의 얼굴도 어느 정도 밝아졌다.
"좌상!"
"예, 전하!"
"과인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
"왜군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니야! 설령 한양을 버리고 개성, 더 나아가 평양까지 후퇴한다
해도 과인은 두렵지 않다. 눈앞의 적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지. 문제는 내부의 적이야. 이
혼란을 틈타 정여립과 같은 놈이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애지중지 기르던 개에
게 발뒤꿈치를 물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화근은 미리부터 잘라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세자
책봉을 서두르는 것이야. 과인의 말뜻 알겠는가?"
"예!"
그렇다면 전하께서 제일 염려하는 화근이 바로 광해군이란 말인가? 공론에 밀려 광해군을
세자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책임과 의무를
부여한 후 여차하면 약점을 물고늘어지겠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소름
이 돋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부자의 정을 끊고 화근의 싹을 과감히 도려내는 것. 그것
이 바로 군왕의 냉혹함이다.
선조는 이미 광해군이 세자가 되기 위해 대신들을 찾아다녔음을 알고 있었다. 광해군이
이번에만 자중했더라면, 선조는 두려워서라도 광해군에게 용상을 물려줄 마음을 먹었을 것
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선조는 광해군이 오직 세자로 책봉되기 위하여 두문불출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이상, 선조는 이제 광해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흔들며 즐길 것이다.
선조는 오늘 아침 광해군과 유성룡의 만남까지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선조는
이산해와 유성룡이 어서 빨리 광해군을 언급해서, 그가 정성껏 쳐놓은 덫에 광해군이 완벽
하게 걸려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과인은 아직도 세자를 정하지 않았다. 허나 과인은 오늘 세자를 정하려고 한다. 그러니
좌상은 과인을 도우라."
선조는 외환을 치유하기에 앞서 내우부터 손을 뻗친 것이다. 덫에 걸린 광해군은 살아남
을 수 있을까? 광해군이 세자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 것이다. 전하는
그들 모두를 죽이려 하겠지. 그때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
나?
오후에도 선조는 세자 책봉문제로 대신들을 추궁했다. 유성룡은 여러 번 선조로부터 의견
을 내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까지 대답을 회피했다. 광해군을 추천하여 사초에 증거를 남
기느니 차라리 비겁한 침묵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깔리자 선조도 대신들도 지쳐갔다. 누가 세자의 자리에 올라야 하는
가로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어서 퇴청하여 지친 육신을 뉘고 전쟁을 피할 궁리를 하고픈 심정
이다.
유성룡은 선조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대신들은 광해군이
든, 신성군이든 아니면 임해군이든, 선조가 지목하는 대군을 밀어줄 마음이었다. 그런데 선
조는 계속 신하들을 추궁하면서 세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특히 변란
중에는 세자가 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유성룡은 선조의 치밀함과 끈
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선조는 지금 신하들의 마음속에 오늘의 일을 영원히 새기기 위해
아까운 시간들을 흘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세자의 자리가 값진만큼 책임 또한 크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윽고 선조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신하들의 면면을 훑은 후, 하루종일 미뤄왔던 이야기
를 꺼냈다.
"광해가 총명하고 학문을 가까이하며, 사내다운 기상 또한 남다르니 세자로 삼는 것이 어
떻겠는가?"
이산해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종묘사직과 만백성의 복이옵니다."
유성룡은 광해군의감격스러워하는 얼굴을 그려보았다. 기쁨이 넘치면 경계심이 사라지고
그만큼 실수할 가능성도 커진다.
군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군왕은 사자와 여우의 속성을 함께 지녀야 한다. 함저에 빠져서는 여우처럼 굴어야 하며,
토끼를 만나면 사자처럼 달려들어야 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우처럼 굴기에는 너무 곧고
정직하다. 전쟁을 통해 그 고지식함을 고치면 다행이겠으나, 계속 대나무처럼 올곧게 군다면
사자의 갈기를 드러내기도 전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산해는 퇴청길에 함께 광해군을 찾아가자고 했다. 유성룡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개성에 머무르고 있는 석봉 한호에게 서찰을
띄웠다. 명나라나 왜와 공문을 주고받으려면 조선 제일의 명필 한석봉이 곁에 있어야만 했
다. 글의 내용을 살피기에 앞서 글씨의 기풍으로 상대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술시(오후 7시)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의 밤샘과 며칠 동안 누적된 피로가 그
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다음날 정오 무렵, 충주로부터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신립을 비롯한 삼천 명의 기병이 모두 전사한 것이다. 달래강을 뒤에 두고 탄금대에서 배
수의 진으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선조는 점심도 물리치고 눈물을 쏟았다. 신립이 대승을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완패였다.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 동궁으로 맞아들인 기쁨마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왜의 대군이 한양으로 밀어닥칠 것이고 임금은 몽진을 떠나야 한다. 선조의 목
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갈가리 찢어졌다.
"오늘부터 그대들은 모두 융복을 입도록 하라. 그리고 해원부원군 윤두수로 하여금 어가
를 호종토록 하라."
선조는 신립의 빈자리를 메우고자 건저문제로 삭탈관직을 당했던 윤두수를 불러들였다.
젊은 시절, 윤두수는 연안부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북삼도(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백
성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서인의 핵심인 윤두수의 중용은 동인에 대한 문책의 뜻도 포함되
어 있었다. 전쟁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했던 쪽은 황윤길을 비롯한 서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전쟁이 격화되면 격화될수록 관직을 잃고 유배를 떠났던 서인들이 속속 조정으로 귀환
할 것이다. 그리고 선조는 내우의 근원이 되는 대군들을 외지로 내몰았다.
"근왕병을 시급히 모아야 한다. 임해군은 영중충부사 김귀영, 칠계부원군 윤탁연과 함께
함경도로 가고, 순화군은 장계부원군 황정욱과 함께 강원도로 지금 당장 떠나도록 하라."
저녁부터 부슬부슬 빗방울이 흩날렸다. 무섭도록 캄캄한 그믐이었다. 임금이 몽진한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도성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궁궐을 호위하던 군사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술
판이 벌어지던 저잣거리도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궐문에는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고, 금루
(궁궐의 물시계)는 시간을 알리지도 않았다.
몽진은 빗방울이 굵어진 새벽녘에 시작되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앞장을 서고, 융복을 입고 말을 탄 선조와 교자를 탄 중전, 그리고수십
명의 궁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은 세자인 광해군이 받들었고, 인빈 김
씨와 신성군도 몽진 대열에 합류했다. 검은 갓에 철릭을 입고 소매가 넓은 옷에 실띠를 두
른 채 칼을 찬 신하들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칠흑 같은 밤길을 걸었다. 그들의 수는 백 명
을 넘지 않았다.
몽진 행렬은 돈의문을 지나 인화문을 통과하여 임진강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
졌다. 선조는 못내 아쉬운 듯 자꾸 고개를 돌렸다. 길을 막고 울부짖던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렸다.
"으으읏!"
선조는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백성을 남겨두고 난을 피하여 달아나는
군왕. 그가 바랐던 군왕의 모습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무제에 버금가는 정복자이고 싶
었다. 대마도를 치고 왜를 정벌한 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오롯하게 새기고 싶었다. 그 바람을
완성시키겠다던 신립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갔고, 이일은 왜군을 피해 산으로 숨었다. 선조는
이제 양 날개를 모두 잃은 독수리였다.
나는 지금 지친 육신을 질질 끌면서 오랑캐의 추격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의 피눈물이 대지를 적시고,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어떻게 오늘의
상처를 씻을 것인가? 무엇으로 복수의 칼날을 세울 것인가?
갑자기 등뒤가 환해졌다. 어깨를 웅크리고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
았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경복궁 쪽이었다.
"무, 무슨 일인가? 저것이 무엇이야?"
선조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에서 떨어졌다. 도승지 이항복이 황급히 달려와서 부축했다.
"내의원! 내의원은 어디 있나?"
행렬의 끝에서 내의원 허준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선조는 융복에 묻은 진흙을 털어낼 생
각도 하지 않고 왕방울만한 눈으로 불타는 궁궐을 응시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도성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경복궁에 이어 창덕궁과 창경궁도 불길에 휩싸였다. 몽진 소식을 뒤늦게 듣고 분노한 백
성들이 일으킨 방화였다. 그들은 더 이상 선조를 임금으로 떠받들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씨
왕조의 찬란한 보물과 서적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갔다. 궁녀와 후궁들이 눈물을 쏟았고 대
신들은 고개를 떨군 채 할 말을 잃었다.
선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눈동자에서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가
삶의 의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돌아온다. 돌아와서 반드시 새로운 궁궐을 세우리라. 그리고 오늘 밤 나의 궁궐을 짓
밟은 저 간악한 무리들을 모조리색출해서 거열형에 처하리라. 구족을 멸하리라. 기다려라.
목멱산이여! 나는 돌아온다. 이 치욕을 말끔히 씻기 위해서라도 저 거대한 불기둥을 잊지
않으리라. 천 배 만 배로 갚으리.
2.출정
이때 퇴재상 이순신이 이런 변고를 당할 줄 알고 거북선 수천 척을 물에 띄우고 그 안에
수만여 군사를 용납케하고 배 위로 구멍을 무수히 뚫고 배 안에서 밥을 지어먹게 하고 연기
는 배 입으로 나오게 하니, 완연한 큰 거북이 물에서 떠다니며 흡사한 안개를 토하게 하였
거늘, 왜장 등이 바라보고 대경하여 활과 총으로 무수히 쏘니 거북 등에 살이 무수히 박혔
으되, 안은 뚫지 못하는지라.
『임진록』
임진년(1592년) 4월 29일 아침.
장창을 비껴 든 방답첨사 이순신이 긴 턱수염을 좌우로 흩날리며 진해루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판옥선에 실은 화약과 유황을 감찰하던 중 좌수사께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전라좌수군은 내일 아침 경상우수군을 구하기 위해 출정할 예정이었다.
군사들의 사기는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왜군들이 포로로 잡은 조선 수군의
코와 귀를 베고 있다는 흉문이 돌았고,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이 패한 마당에
전라도의 수군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는 절망감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래서
인지 열흘 전부터는 탈영병이 속출했다. 포망장(탈영병을 잡는 군관)에게 잡혀온 탈영병들을
엄벌에 처했지만 죽음의 바다를 벗어나려는 군사들의 노력 또한 필사적이었다. 급기야 탈영
병은 군율에 따라 무조건 참한다는 방까지 나붙었다.
키가 작고 들창코인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순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순천부 소
속의 영진무(하사관) 이언호였다. 이순신은 오늘 그를 처음 만났다. 무예가 출중하지도 않고
남다른 재주도 없어서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이언호는 왜 찾으시는 걸까?
이순신은 참았던 숨을 슬슬슬 내쉬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오라고 한 것을 보면 무엇인가 맡길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저 사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발이라면 날발이나 변존서에게 시키면 될 일이고, 척후라면 김완이나
배흥립이 있지 않은가? 혹 권부사가 전라감영으로 가면서 저 사내를 좌수사께 천거한 것이
아닐까? 권부사의 지략이야 놀라울 정도지만 저 사내는 아니다.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군관 나대용이 정문까지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장군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대용보다 두 살이 더 위인 이순신이 턱수염을 쓸며 숨을 골랐다. 아무리 바쁘더라더 거
친 숨을 몰아쉬며 좌수사를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며칠 전, 이순신은 나대용과 이순신에게
술을 부어주며 의형제를 맺도록 권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남을 공경하면 남도 나를 공경한다고 했
네. 그 동안 그대들을 지켜보니 쟁총의 마음이 도를 넘어 상대를 비웃고 욕하는 지경에 이
르렀더군. 그대 둘은 나의 오른팔이며 왼팔이야. 둘 중 하나라도 좌수영을 떠나면 나는 불구
자가 되는 거지. 그러니 그대 둘은 오늘부터 형제의 의를 맺는 것이 좋겠어."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생각에 잠긴 채 진해루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경상좌수사 박홍
도 부산첨사 정발도 동래부사 송상현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완패했으며, 아직 어디에서도
승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4월 27일에 좌부승지의 공문을 들고 온 선전관 조민의 말에 따
르자면, 한양에서는 몽진을 떠나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었다.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한양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질 판이다. 몽진을 떠난다면 어디로 갈까? 왜군이 험한 바다를 건너왔다
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화도는 위험천만이다. 결국 개성이나 평양을 선택하지 않을까? 여차
하면 명나라로 건너갈 수도 있으니까. 왜군들도 몽진의 행로를 짐작하고 있겠지. 저들이 전
라도를 끼고 돌아 황해를 타고 곧바로 북진한다면 조선 조정은 독안에 든 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바다와 육지에서 협공을 당한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전라좌우 수군이 패하면 이 전쟁
은 진다. 전쟁에서 지면……?
"방답첨사 일행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순신은 상념에서 깨어나 세 사람을 맞이했다. 나대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척후의 보고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벌써 적이 남해 근처에 다다랐다는 연통도 있고, 아직
거제에 머무른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내일 새벽 출정에 앞서 남해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순신은 머리를 바닥에 닿을 만큼 숙이고 있는 이언호에게 물었다.
"고향이 남해라지?"
"남해에서 오대째 살고 있습니다요."
"그렇다면 그곳 지리와 사정을 훤히 알겠구나."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습죠."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냈다.
"권부사가 특별히 너를 추천했느니라. 너는 지금 곧 남해현령 기효근에게 이것을 전해주
도록 해라. 답장을 받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그곳의 분위기를 소상히 살펴야 한다. 알겠는
냐?"
"알겠습니다요."
"그럼 떠나도록 해라. 늦어도 신시(오후 3시~5시)까지는 돌아오너라."
이언호가 공손히 서찰을 받아들고 자리를 떴다.
"차나 한 잔씩 들지."
날발이 결명차 석 잔을 내왔다. 나대용과 이순신은 후후 입김을 불면서 차를 마시는 좌수
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좌의정 유성룡이 이순신의 몸을 생각하여 특별히 보내온 결명차였
다.
"왜 들지들 않고? 지자는 혹하지 않고, 인자는 걱정하지 않으며,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는
다고 했네. 참 좋은 말씀이지. 오늘까지 탈영병이 몇이라고 했는가?"
"열둘이옵니다."
"열둘이라…… 너무 많구먼. 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면 적군 천명을 공포에 떨게 할 수
도 있다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군. 열두 명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니 우리 군사 천이백 명이
전의를 잃었겠어. 아무래도 안 되겠군. 시망(나대용의 자)!"
"예, 장군."
"전의를 잃은 군사들을 데리고 배에 오를 수는 없겠지?"
"하오시면……?"
"굿판이 필요할 거야.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군령의 위엄을 보여야지. 찾아보도록
하게나. 그리고 입부(이순신의 자)! 화약과 유황은 다 실었는가?"
"그러하옵니다, 장군!"
"방답의 판옥선은 몇 척인가?"
"네 척이옵니다."
"화약과 유황을 조금씩 더 싣도록 하게. 기효근에게도 빌려줘야 할거니까. 미조목첨사, 상
주포만호, 평산포권관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미조항에서 기다리리고 했다네."
이순신은 좌수사의 느릿느릿한 말트가 마음에 걸렸다. 좌수사는 상처나 고민을 안으로 삭이
며 웃음과 여유를 내비치는 인간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늘
무엇인가에 짓눌려 있었다. 벼락출세의 자괴감이라고까지 말하는 장수도 있었다. 이순신은
새벽까지 항상 병법서를 읽었고, 병적으로 활쏘기를 즐겼으며, 장수들과의 대화에서는 상대
의 기를 누를 만큼 잡다한 문헌들을 인용했다. 식도를 타고 핏덩이가 올라올 정도로 폭주를
한 후에도 기를 쓰고 새벽부터 공무를 보았다.
과잉은 결핍의 다른 모습이었다. 약점을 메우기 위해 끝없이 자아를 부풀리는 것이다. 그
는 태산을 짊어지고 뒤뚱대는 한이 있더라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 부자연스러움을 허
위와 가식이라며 역겨워하는 장수도 있고, 철두철미하게 만사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두둔하는 장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모습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인간
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남해가 심상치 않으면 어쩌시려는지요?"
나대용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부터 그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이순신은 차를 다 마
신 수 다기에 물을 따랐다.
"역시 결명차는 중탕이 제맛이야. 아니 그런가?"
"기효근과 남해의 장졸들이 벌써 도망쳤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군자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지."
"……."
나대용과 이순신은 잠시 그 말뜻을 새겼다. 최선을 다한다? 남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최
선이란 말인가?
"입부! 내 것이 아닐 바에야 적의 것이 되도록 둘 수는 없지. 자네의 뜻도 나와 같지 않았
던가?"
"하지만 장군! 남해는 경상우수영 관할이옵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이기고 싶네. 자네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가보이."
나대용이 끼여들었다.
"장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원장군으로부터 벌써 세 차례나 구원 요청이 있사옵니다. 헌데 어찌하여 전령을 번번이
되돌려보내기만 하고 출정하지 않으시는지요? 경상우수군이 궤멸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
까?"
"궤멸? 허허허."
이순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주상전하의 출정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은 누구나 다 좌수사가 늑장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전황이 위급하면 좌
수사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군선을 움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좌수사의 미적거림이 원균
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추측이 쏟아졌다. 나대용을 비롯한 젊은 장수들은 그 풍
문에 코웃음을 쳤지만 못내 찜찜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순신이 지도 한 장을 꺼내 펼쳤다. 나대용과 이순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라도 해안
의 지형지세와 수심뿐만 아니라 각 관과 포의 장수 명단과 군사들의 수, 그리고 군선의 수
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작년 가을 허균이 이순신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 지도였
다.
"잘 살펴보게. 누가 이것을 그린 것 같은가?"
광양현감 어영담이라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순간 쇠공처럼 묵직한 것
이 두 사람의 머리를 동시에 두들겼다.
왜의 간자!
이순신이 빙긋 웃으며 그들의 추측이 옳음을 확인시켜줬다.
"왜놈들은 자네들의 잠버릇까지 알고 있을 걸세. 적은 우리를 아는데 우리는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단번에 승패가 결정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맞설 수도 있겠지. 허나 이 전쟁
은 단판 승부가 아닐 듯 싶네. 경상도와 충청도가 초토화되면 전라도만 남지. 생각해보게.
이제 우리는 군량미도 군사도 모두 자급자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야. 우리 군졸 하나의
목숨을 왜군 열 명의 목숨과도 바꾸어서는 안 돼. 나는 지금 이 짙은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
리는 걸세. 경상우수군을 돕지 않는 것은 값싼 승리를 다투다가 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싫어
서라네. 생각해보게. 원수사는 지금 복수를 하려고 몸이 달아 있어. 이때 내가 좌수영의 수
군들을 이끌고 가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원수사의 체면을 망가뜨렸던 것이네. 현
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말이지. 원수사도 서너 차례 왜군들과 맞섰으니 허황된 꿈만을 꾸지
는 않을 걸세. 때가 온 것이야. 이제는 자네들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내가 나서서 싸우겠어.
알겠는가?"
이순신은 마지막 군중회의를 정오 무렵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 열 번이 넘는 진법훈련의
결과, 5관 5포의 장수들은 그물질을 오랫동안 함께 한 어부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들어갔다.
어영담이 열흘이 넘도록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의 날씨와 해류의 특징을 설명한 덕분에, 장
수들은 웬만한 기후 변화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을 몇 척 더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지금 당장 전투에 나설 수 있는 것은 영귀선 한 척뿐이었고,
방답과 순천의 거북선은 아직 바다에 띄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준비가 완벽한 상황에서 벌
어지는 전투가 어디 있는가.
이순신은 나대용과 이순신을 이끌고 진해루로 나섰다. 낙안군수 신호를 비롯한 장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권부사는 언제쯤 오실까요?"
나대용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거북선을 제작하고 판옥선을 개량하는 데는 권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에 나대용과 이언량, 그리고 이순신 등 젊은 장수들은 아니든 장수들과는 달리
권준과 자주 어울렸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고민을 털어놓고 자문을 구하는 형편이었지만 권
준은 흔쾌히 그들에게 값진 충고를 해주었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마음을 헤아린 듯 차분하
고 따뜻한 어조로 대답했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 좌수영의 수군을 육군으로 차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갔으니 쉽지
만은 않을 걸세. 육지와 바다 중에서 어느 곳도 버릴 수 없음을 왜들 모르는지."
조선군을 육군으로만 편성하자는 주장은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작년에는 한성판윤 신립이 수군의 역할을 조운과 군사 수송에만 국한시키자는 의견을 내놓
았다. 군선을 만드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해안에 성을 쌓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신립은 자
신이 육진에서 목숨을 걸고 여진과 맞서는 동안, 수장들이 남도 바닷가에서 음풍농월로 세
울을 보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이순신은 왜구가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격침
시키는 것이 상책이라며 오히려 수군의 화력을 증강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했었다.
수군을 없애면 왜구는 조선의 바다를 제 집 마당처럼 드나들 것이다. 조선의 어부들은 마
음 편히 그물을 던지지 못할 것이며, 섬에서 삶의 터전을 닦은 백성들ㅇ느 사시사철 왜구에
게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나 독도 같은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섬이 되고 말 것이다. 거제도와 남해도도 안심할 수 없다. 왜구들이 육
지로 통하는 항로를 모조리 가로막고 으르렁댄다면 어느 누가 돛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려고
할 것인가. 아무리 해안에 성을 높이 쌓는다고 해도 동해, 서해, 남해를 물샐틈없이 지키기
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수군을 없애자는 주장은 이 나라를 고스란히 왜구에게 넘겨주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수군 폐지 문제는 왜국을 정벌하려는 선조의 욕망과 맞물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수군이 부역이나 육군에 차출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
었다. 그만큼 수군의 지위가 육군에 비해 미약했던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후, 여러 차례 전라감영에서 지원 요청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순신은 싸
늘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군령 불복종과 상관모독으로 잡아들이겠다는 최후통첩이 날아들었
다. 그때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이가 순천부사 권준이었다.
"왜군은 우리의 자중지란을 즐길 것입니다. 구태여 우리끼리 흠집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
까? 장군께서는 일단 발을 빼시지요. 소생이 가서 분위기를 살핀 후 적절히 대처하겠습니
다."
이영남이 네 번째로 좌수영에 도착한 것은 군중회의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경상우수영의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와서 원균의 서찰을 전한 다음 뜰 가운데 꼼작도
않고 서 있었다. 나대용이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지만 이영남은 인사도 받지 않았다.
닷새 전에도 이영남은 무릎을 꿇고 읍소하며 구원병을 청했었다. 이순신은 한나절이나 그
를 뙤약볕 아래 내버려두었다가 냉정하게 거절의 뜻을 전했다.
"아직 어명이 내리지 않았음이니라.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일 수 없으니 돌아가라."
그때 이영남은 다짐했었다. 다시는 좌수영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차라리 마지막 한 사
람까지 왜군과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
그러나 전황은 계속 악화되었고, 이영남은 다시 좌수영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왜군은 거제도를 완전히 점령한 수 한산도와 미륵도 쪽에서부터 경상우수영 함대를 압박
해왔다. 육지로 몸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조금도 물러설 마음이 없
었다.
"장수가 전쟁터를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이냐? 내가 맡은 바다에서 뼈를 묻으리라."
원균으로부터 전라좌수영으로 가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을 때, 이영남은 한사코 다른 사람
을 보내라며 도리질을 쳤다.
"왜 그러는가?"
"더 이상 거렁뱅이 취급을 당하기 싫습니다."
"거렁뱅이?"
원균의 양볼이 실룩거리고 수염이 밤송이처럼 뻣뻣하게 섰다. 이순신에 대한 분노는 이영
남보다도 원균이 더했다. 동향 선배이자 육진에서 목숨을 살려준 생명의 이게 무슨 짓인가?
의리도 용기도 없는 인간!
"그 동안…… 견디기 힘들었느냐?"
"차라리 혈혈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들라시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기는 하겠군. 이번에는 이 서찰을 주고 답을 들은 후 그냥 물러나도록 해. 돕
기 싫다는 사람에게 자꾸 매달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이영남은 이순신이 서찰을 읽는 동안 천천히 칼을 빼어들었다. 섬돌 옆에 서 있던 날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라좌수영의 장수들도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짓이요?"
나대용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영남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칼끝을 돌려 자신의 목에 갖
다대었다.
"장군, 확답을 주십시오. 오늘도 구원병을 허락지 않으시면 소장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
겠습니다."
"……."
이순신은 아무 말 없이 햇빛에 번뜩이는 칼날을 응시했다.
대장부다운 죽음을 택하겠단 말이렷다? 스물일곱. 죽음을 논하기엔 아직 이른, 삶의 단맛
과 쓴맛을 좀더 느껴야만 하는 나이. 그대는 무엇을 위해 죽으려는가? 나에 대한 분노? 자
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 경상우수사에 대한 충성심? 허나 어느 것도 죽음과 맞바꿀 만한
값어치는 없지. 칼을 쥔 그대의 오른손을 보게. 부들부들 떨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대처럼
말하고 행동하던 때가 있었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이 소멸되는 것보차도 마다하지
않던 나날들. 허나 그 완성은 그대의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야. 그대가 아무리 발버둥
을 쳐도, 설령 그대가 그대의 말처럼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는다 해도 구원병을 보내고 말
고는 내 소관이라네. 타인의 판단과 행동까지 그대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를 뽀
드득뽀드득 갈면서 복수를 꿈꿀 수는 있네만 부디 책임지진 말게. 자멸을 택하진 말란 말이
야. 몸을 지키고 기르는 것은 곧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네. 살아있어야지만 그대의
뜻도 펼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어찌 이렇듯 사사로이 목숨을 버리려 하는고? 어서 그 칼 내려
놓지 못할까. 당장 내려놓앗!"
이순신은 침착하게 뜰로 내려섰다. 이영남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지지 않고 소리쳤다.
"확답을 주시옵소서!"
이순신은 오른손으로 진해루의 장수들을 가리켰다.
"그대 눈엔 저 장수들이 보이지도 않는가? 저들이 왜 모였다고 생각하는가? 그 칼 당장
내려놓게. 그리고 원장군께 가서 전하게. 내일 새벽에 출정하겠다고. 알겠는가?"
"저, 정말이시옵니까, 장군?"
이영남의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방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이순신은 빙
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영남은 칼을 내리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좌수영
이 떠나갈 듯 울음을 터뜨렸다. 이순신이 어깨를 어루만지자 이영남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다음엔 나와 함께 술이라도 하세. 지금은 어서어서 가보도록 해."
이영남이 떠난 후 이순신은 원균의 서찰을 장수들에게 회람시켰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
두워졌다. 왜선이 오백 척을 넘고 부산, 김해, 양산강, 명지도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뿐
만 아니라, 거제도 가배량에 있는 경상우수영의 산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왜선 십여 척
을 불태운 전과도 있었으나 왜선의 위용에 비하자면 하찮은 승리였다.
낙안군수 신호가 흰 수염을 쓸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이나 인품으로 보자면, 그의 영
향력은 전라좌수사와 맞먹을 정도였다.
"내일 새벽에 출정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소이다. 여기 적힌대로 왜선이 오백 척을
헤아린다면 전라좌수군 단독으로 전투를 벌여서는 아니될 것이외다. 승산 없는 전투가 아니
겠소? 차라리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가는 것이 좋을 듯싶소."
신호를 형님처럼 믿고 따르는 녹도만호 정운이 시커먼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대며 콧김을
푹푹 내뿜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에잇! 언제까지 이러고 허송세월만 할 겝니까? 경상도가 왜놈들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아
직 우리는 왜놈들 이마빡도 구경하지 못했소이다. 병법에도 이르기를, 군세가 열세인 상황에
서 군사들이 자신감을 잃고 의혹에 빠져들면 장수가 진두에 나서서 승리의 신념을 불어 넣
어줘야 한다고 했소이다. 왜놈들이 좌수영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우리가 면저 나서야 하오.
경상도의 왜군을 치는 것이 전라좌수영을 지키는 길임을 왜들 모르시오."
방답첨사 이순신이 신호를 두둔했다.
"성급히 나설 필요는 없겠지요. 척후를 더 보내서 철저하게 적의 동정을 살핀 후 출정하
여도 늦지 않소이다."
군관 송희립이 북채를 흔들듯이 오른손을 휘돌리며 이순신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성난
복어처럼 아랫배를 디밀며 따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겝니까? 왜놈들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출정 시기를 늦추다니요.
일단 맞붙어봐야 적을 알 수 있지 않겠소이까? 이대로 미적거리다간 싸우기도 전에 군사들
의 마음이 전쟁터에서 달아날까 심히 두렵소이다."
의견은 팽팽하게 둘로 갈렸다. 정운·송희립·나대용·김완·배흥립 등은 예정대로 내일
새벽에 출정하기를 바랐고, 신호·이순신·어영담 등은 조금 더 사정을 살피자는 신중론을
폈다.
장수들이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는 동안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서찰이 도착했다. 내일 아
침까지는 좌수영에 닿을 수 있다는 전갈이었다. 정운과 송희립은 활짝 웃으며 이제 연합함
대를 구성하게 되었으니 늦출 이유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신호와 어영담도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이 온다면 출정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순신은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켰다. 대세가 결정되었건만 정운과 송희립의 손을 쉽게 들
어주지 않았다. 원균이 당포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이억기가 내일 도착한다면 전투를 벌이기
엔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장수들의 말다툼을 경청했
다. 시간은 어느덧 신시(오후 3시)가 가까웠다.
"장군, 남해에 갔던 이언호가 돌아왔사옵니다."
"그래? 어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라."
이언호를 남해로 보낸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장수들은 주위를 살피며 어리둥절해했다. 나
대용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이언호가 들창코를 실룩이며 들어왔다. 이순신은 말
석에 그를 앉혔다.
"그래 어떻던가?"
이언호가 혀를 쏙 내밀고 여우 같은 웃음을 흘렸다.
"엉망이었습죠. 창고 문이 훤히 열렸고 곡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병기고
의 무기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침 무기고 행랑채에 늙은이가 있기에 자초지종을 물었더
니, 적이 코앞까지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 성 안의 장졸들이 도망쳤으며 현령과 첨사도
뒤따라서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요."
"남해현령 기효근을 만나지 못했단 말이지?"
이순신이 재차 확인하자 이언호는 아침에 그에게서 받았던 서찰을 도로 내놓았다.
"눈을 씻고 찾아도 갑옷 입은 장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요."
"왜군은 보았는가?"
"글쎄올습니다요. 피난 가는 백성들의 말을 들으니 이미 남해에 상륙했다고도 하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요."
"알겠다. 수고했다. 물러가 쉬도록 하여라."
이언호를 돌려보낸 후 이순신은 아침에 자신이 썼던 서찰을 펴서 곰곰이 살펴보았다. 왜군
이 남해 근처까지 왔다는 소문에 장수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라좌수영도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시선이 나대용의 옆에 앉은 군관 송한련에게
미쳤다. 키가 크고 턱이 긴 그는 눈썰미가 있고 매사에 착실한 남해 출신의 장수였다.
"송군관! 그대가 다녀오지. 이번에는 미조목, 평산포, 상주포, 등을 모두 살피고 오게. 왜군
을 발견하면 즉시 귀영하게. 알겠는가?"
"예, 장군!"
송한련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한 후 자리를 떴다. 녹도만호 정운이 성난 얼굴로 재촉했다.
"장군, 왜놈들이 남해까지 왔다면 오늘 당장 출정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이렇게 진해루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이순신은 낙안군수 신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해에 왜군이 숨어들었다면 군선을 몰고 경상우수영으로 갈 수는 없소. 우리가 한산도
나 거제도로 출정한 사이에 매복했던 적들이 좌수영을 치면 어떻게 되겠소? 송군관이 올 때
까지 기다리도록 합시다. 사나흘만 참으면 마음 편히 출정할 수 있을 게요. 그 사이에 전라
우수영의 군선들이 합류하면 더욱 좋고. 아니 그렇소?"
신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과 신호의 뜻이 분명해지자 대세는 송한련을 기다
리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정운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럴 수는 없소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닥거리는 사이에도 경상도의 수군들은 목숨을 잃
고 있소. 어찌 지체할 수 있단 말이오?"
장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운에게 쏠렸다. 이순신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왼손으로 오른
주먹을 감쌌다.
"앉으시오!"
이순신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그러나 정윤은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자, 어서들 일어나시오. 갑시다."
"앉지 못할까!"
이순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운이 입을 벌린 채 잠시 주춤했다.이순신은 지체없이 탁자
에 올려놓았던 장검을 빼어들었다.
"군령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참하리라. 적과 맞서기도 전에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어찌
서로를 믿고 전투를 치를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여기서 베고 가겠다. 정운, 그대는 나의 군
령을 거역할 텐가?"
"자, 장군!"
정운은 이순신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라면 능히 베고도 남음이 있다. 누구보다도 자
신의 판단을 신뢰하며, 그 판단에 대한 도전을 용서치 않는 위인이 아닌가.
낙안군수 신호가 어서 앉으라며 정운에게 턱짓을 했다. 괜히 버티다가는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정운은 달아오른 양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순신이 장
검을 제자리에 꽂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들으시오. 그대들이 좌수영에 속한 이상 나 이순신을 믿고 따르시오. 그대들의 목숨을 헛
되이 버리게 두지는 않겠소. 누군들 왜놈과 싸우고 싶지 않겠소. 허나 작은 승리를 탐하다가
큰 승리를 놓치는 누를 범해서는 아니되오. 일찍이 공자께서는 '노한 마음을 남에게 옮기
지
않고,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며 안회를 칭찬하셨소. 녹도만호는 이 말씀을 늘 가슴에
아로새겨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하시오. 오늘은 이쯤에서 회의를 끝내고 간단하
게 술이나 들도록 합시다. 내 이날을 위해 특별히 청주를 준비했다오. 자, 모두들 안으로 드
십시다."
임진년(1592년) 5월 3일 새벽.
이순신은 해질 무렵 돌아온 송한련과 함께 밤을 꼬박 새웠다.
송한련의 보고 역시 나흘 전 이언호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남해의 각 고을 수령들이 모
두 육지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남해에 있는 1관 4포의 무기고와 전라좌수영의 수
군들이 한 달은 족히 먹을 군량미가 쌓여 있는 곡물창고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했다. 여유가
있다면 백성들을 동원해서 군량미를 전라좌수영으로 나르겠지만 지금은 언제 왜군들이 기습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동이 트기도 전에 이순신, 나대용, 변존서, 날발을 은밀
히 불렀다.
"아무래도…… 남해를 그냥 지나칠 순 없겠어."
이순신과 나대용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남해를 방화하기로 마
음을 굳힌 것이다. 진작부터 논의된 일이었지만 여러 모로 걱정이 앞섰다.
"한 번 더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순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일 새벽의 출정을 미룰 수는 없어. 때를 놓치면 좌수영 앞바다에서 왜군과 맞설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남해를 미리 훑고 지나가자. 은밀히 신속하게, 오후까진 해치워야 해."
"제가 가겠습니다."
이순신이 자청하고 나섰다.
"안돼. 전라좌수영의 5관 5포 장수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
운 후 왜군들의 방화로 위장해야 하니 방답은 나서지 말게. 변존서와 날발! 그대들이 맏도
록 해. 송한련이 길을 안내하고 척후를 보고 존서가 불화살을 쏴. 만에 하나 이 일이 발각되
면 그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적어도 오늘 자정까진 돌아와야해. 자신 있는가?"
"맡겨주십시오, 장군."
이순신은 변존서의 여섯 손가락을 눌러 잡으며 건투를 빌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광양현감 어영담과 홍양현감 배흥립을 불렀다. 어영담은 자신이 직접 그
린 경상우도의 해도를 펼쳐놓았다. 가로 세로 한 자가 넘는 대형 지도였다. 어영담이 각 해
로를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왜군들이 가까이 왔다고 하니 철저한 수색이 필요합니다. 우선 전라좌수군을 둘로 나누
어, 한쪽은 남해도와 창선도를 살피고 다른 쪽은 개이도, 하사량도, 상사량도를 뒤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비포 앞바다에서 좌우 수색대가 만나 이상 유무를 확인한 후 미륵도의 당포
에서 경상우수영의 군선들과 합류하기까지는 외길입니다. 헌데 그곳에서부터 거제도까지 가
는 데는 다시 두 길이 있습니다."
배흥립이 큰 머리를 흔들며 끼여들었다.
"두 길이라?"
어영담은 주먹코를 오른손으로 쓰윽 문지른 다음 수수께끼를 풀듯이 경쾌하게 말을 이었
다.
"하나는 내해에서 외해로 도는 방법. 즉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를 지나 적진포, 남포를 살
핀 다음 율포, 옥포, 송미포로 돌아나오는 것입니다. 또다른 길은 외해에서 내해로 들어가는
방법. 즉 송미포, 옥포, 율포를 먼저 살피고 나서 해안 지역을 도는 것이지요."
"썅, 아무러면 어때요? 결국 거제도를 한 바퀴 도는 거구먼."
"허허, 배현감 눈에는 이 두 길이 모두 같아 보인단 거요?"
어영담은 헛웃음을 토하며 배흥립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어현감, 전투를 벌일 바다들은 살펴두었소?"
이순신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묻자 어영담은 곧 거제도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배
흥립이 또 분위기를 깼다.
"헛참! 해전에서 미리 싸울 곳을 정하다니요? 귀신이 아닌 마당에야 어찌 싸울 바다를 미
리 점칠 수 있겠소이까? 왜놈들이 성에 갇혀 있다면야 그 성을 박살내면 그만이지만, 배는
성과 달라서 항상 움직인다 이 말씀입니다. 배를 저어 가다가 적을 만나면 니미럴, 정면으로
붙을 따름이지요."
이순신이 배흥립을 꾸짖었다.
"잘 들으시오.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싸운다
고 했소이다. 전라좌수영의 군선을 모두 합쳐봐야 오십 척이 넘지 않는데 왜선은 오백 척이
넘는다고 하오. 열배나 많은 적과 싸우려면, 우리에게는 가장 유리하고 적에게는 가장 불리
한 곳, 즉 양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하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싸우다
가는 적의 군선 백 척을 수장시키는 대가로 우리 군선 오십 척을 모두 잃고 말 것이오. 그
렇다면 적들의 군선은 아직 사백 척이나 남아 있는데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은 모두 수장될
것이니,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나는 우리 군선 한 척을 적의 군선 열 척과도 맞
바꾸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승리가 완전히 보장되는 장소를 찾아야 하오. 나는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만 싸우겠소. 알아듣겠소?"
"예, 예엣, 장군.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고 싸가
지 없는 놈들이 어디 숨었는지도 모르는 판인데."
어영담이 배흥립의 말을 잘랐다. 횡설수설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는 불호령만 더 당할 것
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지도를 살피는 것이 아니겠소? 왜선들이 정박할 만한 해안과 전투
를 벌일 바다를 가늠도 할 겸."
배흥립이 사족을 붙이려다가 어영담이 눈을 흘기자 입을 다물었다. 어영담이 가는 붓을
들어 몇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에 왜선들이 머무르고 있을 겝니다. 섬에 가려 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음식
을 조달할 민가가 근처에 있지요."
어영담은 다시 붓을 잡고 이번에는 가위표를 그어나갔다.
"이곳들은 전투를 벌이기에 합당한 곳이 못 됩니다. 썰물과 밀물의 차가 심하고 수심이
앝아서 잘못하다가는 암초에 걸려 꼼짝없이 당할 위험이 있지요. 전투를 벌이자면 배가 마
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 이순신의 눈동자가 빛났다.
"잠깐! 배가 마음대로 들고나는 곳은 우리에게도 유리하겠지만 적에게도 또한 불리함이
없는 곳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차라리 방금 어현감이 제외시켰던 해협이나 만들이 어떻겠
소? 밀물이 드는 시간을 잘 이용한다면 손쉽게 적을 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눈치 빠른 어영담이 금방 이순신의 마음을 읽어냈다.
"밀물 때 기습을 했다가 썰물 때 빠져나오면 적의 군선들은 뻘밭에 갇혀 꼼짝도 못하겠지
요."
"그래, 바로 그거요! 어현감은 물이 들고나는 것을 예측할 수 있겠지요?"
어영담의 얼굴이 밝아졌다.
"소장이 누굽니까요? 딴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점쟁이 뺨치듯이 맞출 자신이 있습니
다."
이순신은 어영담이 가위표를 친 곳을 유심히 살폈다.
"옥포, 합포, 적진포 이 세 곳 중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작고 수심이 깊은 곳이 어디
요?"
"옥포이옵니다."
"옥포! 그렇다면 외해에서 내해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도록 합시다. 당포에서 힘을 모아 옥
포를 친 연후에 나머지 두 곳을 마저 칩시다. 전황이 여의치 않으면 한 곳만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좁은 곳으로 급히 들어가 싸움을 벌이는 것이니 척후와 전령의 책임이 막중할
것이오. 아니 그렇소, 배현감?"
배흥립의 짙은 눈썹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좌수영의 척후는 사도첨사 김완이 총괄하고 있
었고, 각 군선의 연락은 배흥립의 몫이었다. 책임이 크다는 말에 기분이 한껏 우쭐해졌다.
"맡겨만 주십시오. 바람처럼 왜놈들을 치고 빠질 수 있도록 방책을 세우겠소이다. 하지
만……."
배흥립이 또다시 머뭇거렸다. 이순신보다 딱 한 살이 적은 그는 군령에 흔쾌히 따르는 법
이 없었고 항상 습관처럼 사족을 달았다. 비슷한 연배에게 가지는 묘한 경쟁심 때문이었다.
이순신보도 무과 급제를 사 년이나 먼저 했다는 사실도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장
수들끼리 사사롭게 위아래를 가릴 때에는 나이보다도 무과에 급제한 연도를 먼저 따지는 것
이 오랜 관례였다. 그러니까 배흥립은 이순신에게 선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순
신이 정운과의 궁술 대결에서 승리한 후에도 배흥립은 나대용이나 이언량처럼 좌수사의 군
령에 맹종하지는 않았다.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고, 그 바람에 늘 욕설과 불평불만으로 드러
났다.
"하지만 무엇인가?"
이순신이 말꼬리를 물고늘어졌다. 어영담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배
흥립은 분위기 파악도 못한 채 속에 담긴 말을 그대로 꺼내놓았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소이다. 대장부가 할짓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짓!"
이순신의 얼굴이 종잇장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그때 나대용이 문밖에서 큰소리로 아뢰었
다.
"여도권관 황옥천을 잡아왔사옵니다."
열흘 전에 탈영한 황옥천을 포망장들이 잡아온 것이다. 종구품 여도권관 황옥천은 종육품
흥양현감 배흥립의 휘하 장수였다. 지난 2월 19일 이순신이 5관 5포를 감찰할 때도 기생을
대동한 채 나란히 마중 나올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다.
이순신은 황급히 동헌으로 나섰고, 어영담과 배흥립이 뒤를 따랐다.
포망장들과 난투극을 벌였던 탓인지 황옥천의 눈두덩에는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의 몰골을 본 배흥립의 양볼이 뿌루퉁해졌다. 아무리 탈영을 했다손 쳐도 여도권관을 개
패듯이 두들겨서 끌고 오다니. 이순신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황옥천이 피울음을 토했다.
"장군! 이 몸 좌수영에서 잔뼈가 굵었사옵니다. 어찌 왜놈들과의 전투가 두려워 군영을 떠
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노모와 자식놈이 돌림병에 걸려 다 죽어간다기에 어쩔 수 없이 찾
아간 것입니다. 얼굴만 보고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노모와 자식놈이 연이어 세상을 버
리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느라 곧바로 귀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돌림병에 걸린 사
람을 묻어주겠습니까? 장군! 이제 소인은 매인 곳이 없사옵니다. 아내는 굶주림에 지쳐 집
을 나갔고 자식놈과 노모는 세상을 버렸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장군, 이 몸을 선봉에
세워주시옵소서. 죽음으로써 장군의 은혜에 값하겠습니다."
배흥립이 황옥천을 거들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지금 황권관의 운명은 장군에게 달려 있소이다. 전쟁
터에서 공을 세워 죄를 씻도록 선처하여주십시오. 황권관은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울 것이
외다."
이순신은 가만히 황옥천을 노려보았다. 출정을 위해 모여든 군선들이 좌수영 앞바다를 새
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가랑비가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점차 거세어지더니
커다란 파도들이 몰려와 뱃전을 때렸다.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이순신이 명령을 내렸다.
"목을 베어 군문에 효수하라."
"자, 장군!"
배흥립이 놀란 눈을 뜬 채 황급히 소리쳤다. 이순신이 싸늘하게 그를 몰아세웠다.
"왜 그러는가? 탈영병은 참형에 처한다는 군령을 이미 내렸다. 예외는 있을 수 없는 일.
군령에 이의를 다는 자는 탈영에 준하는 법으로 다스리겠다. 할 말이 있는가?"
침묵이 이어졌다. 배흥립이 이순신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답했다.
"없……소이다."
황옥천이 이마를 땅바닥에 찧었다.
"장군,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 몸을 헛되이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순신이 나대용에게 명령했다.
"무엇하는가? 군령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속히 죄인을 참하라!"
나대용은 울부짖는 황옥천을 끌고 처형장으로 향했다. 동헌에 늘어섰던 장수들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냉혹함이 가슴을 싸늘하게 얼린 것이다. 세상 일이란 항상 예외가
있고 정상이 참작되는 법이지 않는가. 노모와 자식을 묻으려고 탈영한 황옥천의 목을 베는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배흥립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출정에 앞서 군율을 엄히 정하고 싶은 것이겠지. 전투에서 물러서거나 패하는 자는 황옥
천을 참한 것처럼 지체없이 베겠다는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 수족을 잘라 희생양
으로 삼다니! 좌수사는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구나.
황옥천의 수급이 군문에 매달렸다. 이순신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급을 바라보며 배흥립
을 다랬다.
"배현감! 그대가 황옥천과 친하게 지낸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하나 공과 사는 엄격히 가
려야 하지 않겠소? 손무(『손자병법』의 저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리다. 어느 날 손무
는 오왕 합려에게서 그 능력을 시험받게 되었소. 손무는 군율의 공명정대함을 보이겠다며
후궁과 시녀들을 장졸로 임명하여 군령을 내렸소. 그것을 장난으로 여긴 후궁이 웃음을 터
뜨리자 손무는 군율을 모독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여 그 후궁의 목을 베었다오. 군율이란 왕
이 아끼는 후궁의 목을 칠만큼 엄한 것이오. 지금 나의 심정도 배현감과 다르지 않소. 허나
읍참마속이 아니겠소? 이제부터 배현감이 황옥천의 몫까지 도맡아 싸워주시오. 그것만이 황
옥천의 명예를 되찾는 길일 게요."
배흥립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황옥천의 죽음이 억울하기도 했고, 이순신의 차돌
같은 마음이 두렵기도 했다.
이순신은 동헌에서 물러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함이었다. 사흘 동안
밀렸던 잠이 한꺼번에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신호, 정운, 배흥립, 김완.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그려보았다. 좌수사로 부임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들의 가슴에는 무언가 앙금이 남아 있었다.
자격지심일까?
그 동안 나는 그드을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지나치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들과의 침묵이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의 조그마한 잘못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만날 때
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제와는 다른 어제, 어제와는 다른 오늘. 전
라좌수사 이순신은 쉼없이 생각하고 쉼없이 일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정운과의 마찰이 있었지만 실력과 명분으로 압도했다. 문제
는 지금부터이다.
전쟁터에 나가서도 그들은 변함없이 나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신호는 믿을 만하다. 아무
리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는 군율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길 위인이다. 정운, 배흥립,
김완은 물가에 내놓은 아기처럼 위태롭다. 제멋대로 전공을 다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러므로 그들의 기를 완전히 꺾을 필요가 있다. 원수사와 연합함대를 구성하면 그들은 틀림
없이 흔들릴 것이다. 아니, 아무런 흔들림 없이 원수사의 휘하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배흥립
은 치고 빠지는 나의 전술을 비웃지 않았던가? 황옥천의 목을 벤 것이 효과가 있을까? 배
흥립이 마음을 돌이키면 좋으련만 내게 앙심을 품고 원수사에게 달려간다 해도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명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정운이나 배흥립이 배신하더라도 다른 장수들의 동요는 막
아야 한다. 편법을 이용해서는 아니된다. 죽음까지 함께 한다는 의리와 누구나 수긍할 수 있
는 원칙을 강조해야 한다.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삶! 설령 그런 삶에 다가설 수 없다손치
더라도, 완전함을 꿈꾸는 것 자체가 방패막이일 수도 있다. 지금, 조선 수군의 대의명분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왜를 몰아내고 조선의 바다를 지키는 것이다. 나도 원수사도,
이 지상명령 앞에서는 힘을 합칠 수밖에 없다. 나는 계속 큰 길만을 걸어야 한다. 작은 길로
빠지는 휘하 장수들의 사사로운 움직임에 분노하거나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
권준, 나대용, 이순신, 이언량, 송희립 형제.
그들은 내 사람이다. 그들과의 결속을 다져야 한다. 만에 하나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자
기들끼리 힘을 합쳐 전라좌수영을 꾸려나갈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대용과 송희립은 성
미를 좀더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고, 이언량은 병법서를 읽어야 하며, 이순신은 대인 관계를
넓혀야 한다. 또…… 할 수만 있다면 원수사 진영의 뛰어난 장수들을 내 사람으로 끌어들이
고 싶다. 구원병을 청하러 와서 자결하려 했던 이영남의 용기는 가상하고 가상하다. 우선 그
의 마음을 얻은 연후에 그를 통해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을 살피자.
초희를 찾지 않은 지도 보름이 넘었구나.
그녀는 여전히 웃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한다. 그녀를 품으면
꼭 목석을 안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희망을 포기한 여자. 그녀는 내게 무엇
인가? 계집이라면 기생도 있고 고향에 두고 온 처첩도 있지 않은가?
초희는 나를 어머니처럼 다독거린다. 그러나 그녀의 아기는 이미 죽었고 누구도 그녀에게
서 어머니의 냄새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
조선에 와서 모든 것을 잃었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어느 누가 자신이 태어
난 나라를 행해 침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나라에 대한 나의 자긍심도 그녀의
몸서리쳐지는 경험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내가 아무리 왜를 비난하느라 핏대를 세워도그
녀가 툭툭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압도당해버린다.
"그래도 그곳에서 살의를 느낀 적은 없어요."
초희를 잃을 수 없다. 그녀를 잃는 것은 이 나라 모두를 잃는 것이다. 그녀가 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야지만 이 땅은 그녀에게 진정한 모국이 될 수 있다. 그때쯤
이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를까. 나는 꼭 그 미소를 마주 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
다. 박초희! 오늘따라 그대가 더욱 그립다.
"장군, 변존서와 날발이 돌아왔습니다."
자시(밤 11시)가 가까웠다. 주위는 깜깜했고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만 문틈으로 들려왔다.
저녁도 건너뛰고 정신없이 잠들었던 모양이다.
"들어오게."
송한련과 변존서, 그리고 날발이 바람처럼 들어섰다. 이순신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맞았
다. 변존서가 짤막하게 경과보고를 했다.
"남김없이 해치웠습니다."
"수고했네. 왜군은 보았는가?"
"피난을 나서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왜군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갑옷을 챙겨 입고 부두로 나섰다. 이제 때가 온 것이다. 녹도
만호 정운이 껄껄걸 웃으며 다가왔다.
"비도 그쳤으니 왜놈들 때려잡기는 더없이 좋은 날씹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게지요. 왜
놈들의 본거지가 부산이라지요? 이참에 그곳까지 치고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순간만큼은 정운의 너스레가 싫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운
같은 장수도 반드시 필요하다.
"정만호를 지켜보겠소. 으뜸 공을 세우지 못하면 각오하시오."
이순신은 웃는 얼굴로 농담까지 건넸다.
"좋습니다. 소장의 목을 걸지요."
이십여 척이 넘는 판옥선과 사십여 척의 협선, 경쾌선이 바다를 가득 메웠다. 분주히 움직
이는 군사들과 장수들이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워우우 워우우. 멀리서 승냥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송희립 삼형제가 북채를 휘돌리며 배에 올랐고, 장창을 비껴든 이순신과
나대용도 나란히 얼굴을 드러냈다. 흑각궁을 든 변존서와 표창을 뽑아든 김완은 당장이라도
솜씨를 보일 듯이 눈초리가 매서웠다. 축시(밤 1시)가 가까울수록 북소리가 크고 빨라졌다.
그 사이에 군사들의 이얏, 야압, 기합 넣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각 군선에는 좌수영의
붉은 깃발과 함께 각 관과 포를 상징하는 깃발이 내걸렸다.
이순신은 이물에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겼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고 점괘 역시 대승의 기운
이 넘쳐났건만 그는 결코 들뜨지 않았다. 검푸른 바다의 심연에 천고의 신비가 묻혀 있듯이,
그는 앞으로 닥칠 운명의 표징들을 희미하게나마 읽고 있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들짐
승 소리, 그 숱한 소리들이 전하는 예언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어느 틈에 남쪽 하늘에서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등뒤에서 산바람이 불었다. 격군들의 지친 어깨를 어루
만지는 데는 더없이 고마운 바람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우러렀다. 양팔을 활짝 펴
고 천명을 따르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출정 명령을 내렸다.
"출항하라!"
출항 명령이 메아리처럼 각 군선에 전해졌다. 날발이 뿔피리를 길게 불었고, 그와 동시에
송희립이 온 힘을 다하여 북을 두드려댔다. 그러자 긴 낮잠에서 깨어난 호랑이처럼 전라좌
수영의 군선들이 천천히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경쾌선과 협선들이 먼저 달려나갔고 육중한
판옥선들이 뒤를 따랐다.
이순신 함대의 첫 출정이었다.
3. 너는 장수가 아니다
장수는 인애로운 마음으로 병사들의 어려운 점을 도와주어야 함, 대의에 입각해 병사들을
격려하여 전투에 나서도록 해야 하고, 지모를 가지고 부하들을 지휘해야 하며, 전투에 임할
때는 용맹한 자세로 부하들을 통솔해야 한다. 평소부터 의리와 성실한 태도로 부하들을 복
종시키고, 이득과 재물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장하고, 공훈과 포상을 내세워 병
사들이 적군과 싸워 이기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수의 마음은 인애에서 떠나지 않고, 행
위는 대의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을 깊이 이해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며,
강적을 물리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오랫동안 변함없이 병사들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는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부대를 지휘해야 한다.
『사마병법』, 「엄위편」
임진년(1592년) 5월 7일.
달빛이 은은하게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나란히 선 판옥선 두 척이 스거
득스거득 옆구리를 비비며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갑판에 나온 군사들은 포구의 불빛을 담아
내기에 바빴다. 그들은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경상도가 이미 왜군의 수중에 들
어갔다는 비보를 접한 후로는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기다가 당
장 내일이라도 왜 선단과 부딪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겹쳐서, 가족과
함께 보낸 구질구질한 지난 세월이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다시 한 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느 것 하나도 장담하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동시에 도착한 두 장의 서찰을 들고 이물 쪽으로 갔다. 뒤따르던 남해
현령 기효근과 소비포권관 이영남을 저만치 세워둔 채 그는 먼저 투구를 벗었다. 이마를 묶
은 붉은 비단이 그의 눈매를 더욱 비장하게 만들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고 들었
지만 오늘만큼은 온몸이 떨린 적은 없었다.
전사.
이일의 서찰을 가져온 선전관은 분명히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전사했다고 말했다. 조선
제일의 명장이 죽은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병법에 밝기는 손오를 능가하고, 용맹
하기는 초패왕과 어깨를 겨루던 대장군 신립이 왜군과의 단 한 차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
단 말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무는데 전령 하나가 더 도착했다. 신립의 집에서 몇 번 마
주쳐서 낯이 익은 군졸이었다.
"네가 이곳까지 어쩐 일이냐?"
"대감께서 한양을 떠나시며 이 서찰을 장군께 전해 올리라 하셨사옵니다."
"뭣이라고?"
하늘을 우러렀다. 은하수가 동서로 길게 흘러가고 있었다. 신립, 이일과 함께 육진을 호령
하던 시절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전공을 다투면서도 기꺼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던 나날들. 신립이 이일의 목숨을 구한 적이 두 번, 이일이 원균의 목숨을 구한 적이 한
번, 원균이 신립과 이일의 목숨을 구한 적이 세 번이었다. 왜군과 맞서면서 백전백승의 신화
가 깨어지더니, 급기야는 셋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판옥선 두 척과 협선 두 척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저 배들만 남았다. 칠십 척이 넘
는 그 많던 군선들이 남해바다에 가라앉은 것이다. 적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지만 적
은 수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에 틀어박혀 보름이
넘도록 꾸물대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이 다섯 차례였다. 기효근과 우치적이 온몸으
로 그를 보호했고 이영남과 이운룡 역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판옥선
두 척과 협선 두척.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해현령 기효근에 따르자면 판옥선 세
척이 곧 전투에 투입될 수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또 얼마간은 맨
주먹으로 왜선과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원균은 먼저 신립의 서찰을 폈다. 곧고 단정하게 힘껏 찍어내린 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원장군 보시오.
그곳은 어떻소? 늦봄에는 이일 장군과 함께 거제도로 유람을 갈 참이었는데 일이 여의치
않게 되었구려.
어리석은 왜가 감히 조선을 치겠다고 덤비니 마땅히 그들의 죄를 물어야 하겠소. 함경도
와 평안도의 군사들과는 달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사들은 약골에 겁쟁이들이오. 엄히 다스
려 죽음을 불사하는 강병들로 바꾸어야 하는데 왜란이 먼저 터지고 말았구려.
허나 괜스레 걱정하지는 마시오. 이일 장군이 먼저 내려갔고 나도 곧 그 뒤를 받칠 것이
니, 저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오. 이참에 왜놈들을 쓸어버리고 대마도를 치겠다고 주상전
하께 아뢰었다오. 지난번 약조대로 군선을 만들기 시작했으리라 믿소. 다만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겨야 할 것 같소. 빠르면 가을, 늦어도 겨울에는 대마도로 건너갑시다.
원장군.
그대가 그립구려. 두만강을 건너기 전 화살을 꺾어 임전무퇴를 맹세하던 그대가 눈에 선
하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라던 그대의 연설은 참으로 가슴 뭉클했었소. 장졸들
은 기꺼이 배수진을 치고 여진의 대군과 맞섰으며, 우리는 승리했소. 믿어지지 않는 대승이
었소. 나는 경상도의 군사들에게 삶이 곧 죽음이라던 그대의 연설을 되풀이해서 들려줄 작
정이오. 물론 왜군을 막는 일이야 어린애 손목 비틀 듯이 쉽겠지만 조선의 군사들을 강병으
로 만드는 것 또한 우리 장수들의 할 일이 아니겠소? 좌의정 유성룡 대감은 어리석게도 산
성을 지키는 데 진력하라지만, 어찌 우리가 오랑캐 앞에서 몸을 움츠릴 수 있단 말이오. 본
시 문신들이란 입만 살아 나불댈 뿐 여인네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족속이라오.
원장군.
이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그대에게 가리다. 좋은 술과 맛있는 계집들이나 준비해두시구려.
그럼 이만 줄이겠소.
무운장구.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산성을 지키며 목숨을 부지하기 보다 들판을 내달려 죽음을 택하라.
이것이 신립과 이일, 그리고 원균의 신념이었다.
죽음이 나를 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음을 삼키리라.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리고 처자
식을 버리고 나를 버려라. 승리의 환희만을 기억하라. 패배의 쓰라림을 떠올리지 마라. 그
쓰라림을 맛보기 전에 우리는 저 들판에 주검으로 길게 누우리라. 죽고 싶은가? 그렇다면
뒷걸음질을 쳐라.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달려라. 적의 심장을 찌르고, 적의 깃발을 빼앗으
면 사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뜻이 우리와 함께 하리라.
원균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친 후 이일의 서찰을 마저 폈다. 좌우로 흩어진 필체가 전황
의 위급함을 드러냈다. 자리를 옮겨가며 서로 다른 붓으로 쓴 탓인지, 글씨의 농도와 크기도
뒤죽박죽이었다.
평중(원균의 자) 보게나.
신립 장군이 전사했네.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싸우다가 강에 투신했다고 하네. 왜군이 예
상외로 강하다고 경고했네만 신장군은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새재를 막고 지켰다면 이렇게
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을. 적에게 시체를 넘기지 않으려고 물에 뛰어들다니, 신장군의
최후에 어찌 눈물을 아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신장군의 마지막 충고를 따르기로 했네. 바다
에는 원균 자네가 있으니 어떻게든지 싸워나가겠지만, 육지에서는 신장군과 나 이일이 둘
다 목숨을 잃을 경우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네. 신장군은 만약 자기가 전사하거
들랑 나 혼자만이라도 한양으로 되돌아가 주상전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네. 신장군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야. 지금 전하 곁에 누가 있나? 겁많은 문신들밖에 더 있겠는가? 해서
패군지장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머리를 되돌렸다네.
평중.
호되게 나를 질책하는 자네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구먼. 허나 자네도 이미 왜 수군롸 맞
닥뜨렸을 테니 이 전쟁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 테지? 지금 당장 나를 이해해달라고 하지
않겠네. 다만 이 전쟁이 모두 끝난 후 우리의 전공과 중죄를 따지도록 하세. 그때 함께 탄금
대로 가서 신장군을 위해 향을 피우고 술을 뿌리세.
평중.
나를 믿어주게. 나 이일은 결코 목숨이 아까워서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야. 이 전쟁을 승
리로 이끎으로써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싶네. 결코 적을 얕잡아보지 말게. 알겠는가? 지금
저들은 지난날 육진을 침탈하던 여진족보다 백 배는 강하다네. 그러니 섣불리 목숨을 내던
지지 말고 전황을 관망하며 길게 계획하도록 하게. 그럼 또 소식 전하겠네.
부디 서기치인(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다스림)하시게.
이일의 서찰을 갈기갈기 찢었다.
신립을 남겨두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한양으로 도망을 치다니! 패군지장에게 무슨 내일이
있단 말인가. 마땅히 죽음으로써 값할 일이다. 대장군 이일이 이다지도 옹졸한 인간이었는
가?
이영남과 기효근이 황급히 달려와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장군! 고정하십시오. 대장군의 편지를 찢으시다니요?"
원균이 손을 뿌리치며 휙 뒤돌아섰다.
"대장군? 도대체 누가 대장군이란 말이더냐? 제 목숨 하나 구하겠다고 말머리를 되돌린
놈은 장수가 아니라 개돼지이니라."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영남과 기효근은 원균의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입을 다물
었다. 괜히 이일을 편들었다가는 바다에 거꾸로 처박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균은 지난 전
투에서도 고개를 숙인 채 허공으로 활을 쏜 군사 셋을 꽁꽁 묶어 바다에 빠뜨리지 않았던
가.
원균은 한밤중에 급히 군중회의를 소집했다. 기효근, 이영남을 비롯하여 영등포만호 우치
적, 미조목첨사 김승룡, 평산포권관 김축, 사량만호 이여념, 지세포만호 한백록 등이 모였다.
제장들을 살피던 원균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옥포만호는 어디로 갔는가?"
옥포만호 이운룡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운룡과 같은 판옥선에 머물던 영등포만
호 우치적이 컬컬한 목청으로 대답했다.
"지난밤 전라좌수사의 전갈을 받고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이다."
"전라좌수사가 왜 이운룡을 찾는단 말이더냐? 이순신에게 가려면 우선 나의 허락부터 받
아야 도리가 아닌가?"
원균은 경상우수영 장수들의 근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할 이영남을 호되게 꾸짖었다.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는가? 이운룡이 밤새도록 이순신과 어울리는 걸 몰랐단 말인가?"
이영남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에게도 이순신으로부터 연통이 왔던 것이다. 오늘따라
원균이 자정을 넘겨 군중회의를 소집했기에 좌수영으로 가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원균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면 그도 역시 이운룡처럼 이순신에게 갔으리라.
어느덧 이영남의 마음은 이순신에게 끌리고 있었다. 앞 뒤 재지 않고 적을 쫓는 원균에
비해, 이순신은 철두철미하게 모든 가능성을 곱씹어 살피는 장수였다. 이미 옥포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마음을 굳힌 이순신으로서는 옥포에서 싸우기 위해 옥포만호 이운룡의 도움이 절
대적으로 필요했다. 연합함대를 구성한 마당에 내 편, 네 편을 가려서 무엇한단 말인가? 그
러나 조금 귀찮더라도 이순신이 원균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원
균이 지나치게 이순신을 업신여기듯이 이순신도 원균을 무시하는 것이다. 누구든 먼저 마음
을 열고 상대를 포용하는 자만이 연합함대의 참다운 으뜸 장수가 될 수 있다. 지금처럼 아
웅다웅 다투다가는 적과 대면하기도 전에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만다.
"당장 가서 이운룡을 잡아오라."
이영남은 서둘러 물러난 후 경쾌선을 타고 이순신의 지휘선으로 향했다. 이영남은 경상우
수영이 초토화된 후 종사품 율호만호에서 종구품 소비포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리 임
시직이라고 하더라도강등을 당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좌수영의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겨우 다섯 척에 불과한 경상우수영 함대에 비해, 오십여
척을 헤아리는 전라좌수영 함대의 위용은 참으로 대단했다. 높은 파도 들이치는 바다 위에
서 보름이 넘도록 버텨온 경상우수군의 인내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우수영의 장졸
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왜군의 총탄에 전우들이 픽픽 쓰러져갔
고, 이제 곧 내 차례라는 공포심이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혔다. 장졸의 수가 줄어들수록 상벌
은 더욱 엄격해졌다. 평시라면 곤장이나 하옥으로 처리할 사건들도 곧바로 목을 베어버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상우수군이 전멸하는 수밖에 남은 길이 없었다. 장수의
본분을 지켜 장렬히 전사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바다를 지키는 것이 최우
선의 목표가 되어야 하리라.
이순신 역시 장수들과 함께 선상회의를 하고 있었다. 황급히 들어서는 이영남을 보자 회
의를 이끌던 이순신이 웃는 낯으로 반겼다.
"어허 이게 누구신가? 이만호가 이 시각에 웬일이오? 오지 못한다는 연통을 받았는데
……."
이순신은 그를 예전처럼 만호라고 불렀다. 따뜻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이 도끼눈을 뜨고 이영남을 노려보았다. 이영남은 어색한 침묵을 깨며 단도직입적으
로 찾아온 dydan를 밝혔다.
"원수사께서 옥포만호를 급히 찾으십니다."
이순신의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운룡이 벌떡 일어섰다.
"이 야심한 시각에 왜 날 찾으시는 게요?"
이운룡의 각진 턱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원균의 분노를 좌수영의 장수들에게까지 전
할 필요는 없었다.
"곧 회의가 시작됩니다. 참석하셔야지요?"
나대용이 끼여들었다.
"회의는 이곳에서 먼저 시작했으니 경상우수사께서 이쪽으로 오시는 것이 어떻겠소? 이왕
연합함대를 꾸렸으니 회의도 함께 해야지요."
이영남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댔다. 원균에게 이순신의 지휘선으로 오라고 했다가
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낙안군수 신호가 나대용의 입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는 지금 경상우수영의 관할 지역에 와 있소. 경상우수군을 도우러 왔으니 주장은 원
장군이외다. 원장군이 양해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나서서 원장군을 오라 가라 할 수
는 없소이다. 옥포만호가 원장군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으로 온 듯한데, 이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에요. 속히 돌아가서 우수영의 군중회의에 참석한 후 이곳으로 다시 와도 늦지 않
을 것이외다."
군관 이언량이 신호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원수사가 주장이라니요? 경상우수군은 고작해야 판옥선 두 척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당
연히 전라좌수사인 이장군께서 연합함대의 주장이 되셔야 하오이다."
신호의 옆자리에서 한숨을 푹푹푹푹 내쉬던 정운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장수의 지위와 역량은 군사들의 숫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오. 한신이 초패왕 항우를 칠
때나 제갈량이 조조의 십만 대군을 적벽에서 쓸어버릴 때도 그들의 군사는 미미하기 그지없
었소. 허나 그들은 승리했소.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수의 탁월한 용병술이 있었기
때문이오. 뛰어난 장수 한 사람이 군사 만 명의 몫을 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지금은 비
록 원장군이 두 척의 판옥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를
패장으로 취급할 수 있겠소. 원장군은 육진에서 수많은 여진족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적
은 군선으로 보름이 넘도록 왜의 대선단과 맞서 싸웠소. 헌데 그런 원장군이 어찌 주장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원장군은 우리의 주장이 되기에 조금
도 부족함이 없소이다."
"옥포만호께서는 속히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방답첨사 이순신이 말머리를 돌렸다. 이운룡의 귀환 문제가 뜻하지 않게 연합함대의 주장
을 정하는 문제로 변질됐던 것이다. 이순신도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래, 오늘은 이만 합시다. 어서 우수사께 가도록 하시오. 가서 방금 우리가 의논한 일들
을 소상히 전해주시오. 그리고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만호, 또 만납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운룡이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이순신에게 예의를 표했다. 이영남이 한 발 앞서 군막을
걷자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바람을 타고 송골매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부리가 유난히 붉은
김완의 송골매였다. 이순신은 속히 송골매의 발에 묶여 있는 무명천을 풀었다. '일'이라는
글
씨가 선명했다. '삼'이면 적이 삼십 리 밖에 출현한 것이고, '이'면 십 리 밖에 나타난 것
이
며, '일'은 적과 전투중임을 의미했다. 척후를 이끌고 옥포로 갔던 사도첨사 김완이 왜 선
단
을 발견한 것이다.
"출정의 북을 울리시오!"
나대용이 복명했다.
"출정! 출정의 북을 울려랏!"
송희립이 사정없이 북을 치자 잠에서 깨어난 격군들이 어기영차 구령에 맞춰 배를 젓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갑판으로 나가 이운룡과 이영남을 불러 세웠다.
"전황이 급하니 우선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소? 우수영의 군선들도 곧 합류할 터이니 걱
정 마시오."
우수사에게 돌아갔다가 다시 출정하는 것은 시간 낭비임에 틀림없었다. 먼저 눈앞의 적을
물리친 후 이 순간의 급박함을 설명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이 옥포 앞바다로 접근하자 하늘 높이 신기전(꼬리에 불을 붙인 화
살)이 날았고, 사도첨사 김완의 척후선이 팔량포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걷히면서
쾌청한 하늘이 바다를 안을 듯이 펼쳐졌다. 이순신이 군령을 내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고요하고 무겁기를 태산같이 하라."
함대는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왜선 오십 척이 부두에 정박해 있으며, 왜군들은
산중턱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는 척후의 보고가 잇달았다. 곧이어 왜선들의 모습이 어
렴풋이 나타났다. 사방으로 장막을 두르고 형형색색으로 흉측한 무늬를 그린 왜선은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더했다. 붉고 흰 작은 깃발들이 갑판 위에서 쉴 새 없이 나부꼈다.
"어떤가?"
이순신이 나대용에게 물었다.
"지금이 기회인 듯싶습니다. 왜군들의 상당수가 상륙했으니 지금 치고 들어가면 능히 왜
선들을 당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경상우수영의 푸른 깃발이 나타났다. 상갑판에 높
이 서서 장검을 휘두르는 원균의 모습이 보였다. 나대용이 연통을 넣을 사이도 없이, 원균의
군선은 이순신의 곁을 지나 쏜살같이 부두로 돌진했다. 경상우수영의 판옥선과 협선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이런!"
이순신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갔고 장검을 든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습 공격을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경상우수영 군선들의 함성에 놀란 왜군들이 허둥지둥
산중턱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장군, 더 이상 지체하시면 아니되오이다. 원장군을 도웁시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다급한 목소리를 접으며 옥포의 하늘을 빙빙 돌고 있는 김완의 송골매
들을 응시했다. 둥근 원을 그리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적을 치기에 가장 좋은
때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공격하랏!"
나대용이 복창했다.
"공격! 총공격하랏!"
송희립 형제의 북소리가 소나기처럼 빨라졌다. 이순신의 시선은 부두에 이른 원균의 판옥
선을 쫓고 있었다. 원균의 판옥선은 눈을 가린 멧돼지처럼 곧장 앞만 보고 달려가더니 왜
대선을 정면에서 들이 받았다. 왜선이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리면서 수많은 깃발들이 바다로
곤두박질쳤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적의 대장선이 침
몰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쿠응 쿵쿵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쏘며 좌수영의 군선들도 앞다투어 내달렸다. 대장군전, 차
대전, 피령전, 수철연의환, 연환, 단석들이 비오듯이 왜 선단으로 날아들었다. 화염이 치솟고
수많은 왜군들이 하늘로 퉁겼다가 바다로 떨어졌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판옥선들이 왜선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격군들의 품이 많이 들긴 해도 강하고 튼튼하기로
는 판옥선을 당해낼 배가 없었다. 부두로 내려오던 왜군들은 그들의 배가 침몰되는 것을 보
고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성과 야유를 내지르며 조총을 쏘아
댔다. 소리는 요란했으나 총탄이 닿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녹도만호 정운의 배가 빠르게 이순신의 지휘선으로 다가왔다.
"장군, 상륙을 명하십시오. 어찌 저놈들을 살려둘 수 있겠소이까. 소장이 앞장을 서겠소이
다."
이순신은 눈을 들어 산중턱을 쳐다보았다. 삼백 명을 헤아리는 왜군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나대용과 송희립도 상륙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순신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정운에게 말했다.
"상륙은 안 되오. 우린 해전에 대비해서 나왔을 뿐이오. 거제도는 산이 험준하고 수목이
울창하니 어디에 적의 복병이 숨었을지 모르오."
정운이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잔뜩 넣고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장군, 저놈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상륙하면 단칼에 요절낼 수 있소이다. 우리의 기
습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저들에게 어찌 복병 따위가 있겠소이까? 장군, 상륙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늘이 주신 기회오이다."
이순신이 장검을 들어 정운의 아마를 똑바로 가리켰다.
"잘 들으시오. 내 명을 어기고 상륙하는 자는 군율로 다스리겠소. 목숨을 부지하고 싶거든
군령을 따르시오."
"장군!"
이순신이 장검을 빼어들었다. 당장이라도 정운의 목을 칠 기세였다. 정운은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물러섰다. 나대용과 송희립도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갑자기 왜선 다섯 척이 쏜살같이 부두에서 튀어나왔다. 집중적인 포격에도 용케 타
격을 입지 않은 배들이었다. 배흥립의 판옥선이 수철연의환을 쏘며 그들을 추격했다. 원균을
비롯한 경상우수영의 군선들 역시 추격에 합류했다. 그때 이순신이 군령을 내렸다.
"회군하라!"
나대용은 제 귀를 의심했다. 맹렬히 적을 쫓는 배흥립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다.
"무엇하는 건가? 당장 회군시켜!"
나대용은 곧 노란 깃발을 올렸고, 송희립이 회군의 북을 쳤으며, 날발 역시 뿔피리를 길고
탁하게 불어 그 뜻을 전했다. 한참을 더 추격하던 배흥립의 판옥선이 좌우로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함대로 돌아왔다.
"개 같은…… 이게 무슨 일입니까? 썅!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
하다니요?"
배흥립은 손에 든 철퇴를 빙빙 돌려대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이순신은 뒷짐을 진 채 차
분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해가 질 것이오. 큰 바다로 나갔다가 왜 선단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죽음을 면키
힘드오. 아직도 싸울 날이 깃털처럼 많으니 이쯤에서 전투를 접는 것이 좋겠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배흥립은 계속 이마를 치며 한탄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옥포 선창은 불 붙
은 왜선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유황과 시체타는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코를 찔렀다. 장병
겸(손잡이가 긴 낫 모양의 무기로 바다에 빠진 적의 머리를 자르거나 침입을 막는 데 사용
했음)으로 왜군의 목을 따는 군졸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수급의 수에 따라 전공이 정해지
기 때문에 장수들이 서둘러 왜군의 시체에 접근했던 것이다. 전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수급
을 자르기 시작한 군졸들도 있었고, 서로 자신이 죽인 왜군이라며 싸우는 군졸들까지 있었
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순신이 화를 벌컥 냈다.
"저게 무슨 짓이냐? 중지시켜라!"
나대용의 다시 이순신의 표정을 살폈다. 전투가 끝난 후 수급을 거두는 것은 통과의례와
도 같은 것이다. 헌데 그 일을 중지시키라니. 이순신은 더욱 짜증을 냈다.
"여긴 아직 적지다. 언제 기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수급이나 거두며 공을 다툴
시간이 없어. 당장 장수들을 불러들여라."
전라좌수영 소속의 5관5포 장수들과 이영남, 이운룡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경상우수영의 군
선들은 왜선을 뒤쫓아서 옥포만을 벗어난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장수들을 차갑게 꾸짖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공은 우리 모두의 것이오. 어떻게 수급의 많고 적음으로 전공을
가리겠소. 적이 눈앞에 있는데 수급을 다투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병법에도 이르기를, 칼
날 앞에서 승리를 다투는 자나 패배한 뒤에 후회하는 자는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고 했소이
다."
사도첨사 김완이 볼멘 소리를 했다.
"허나 장군, 쟁공은 장수의 본성이 아닐는지요? 목숨을 다해 싸운 후 누리는 작은 기쁨이
아닐는지요?"
이순신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김완은 입을 다물었다. 장수들의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제부터는 격침한 왜선의 크기와 수로 전공을 가릴 것이오. 아무리 군사가 많더라도 군
선이 없으면 해전은 불가능하오. 그러므로 우리가 일심분발하여 공격할 것은 왜군의 목이
아니라 왜선이오. 알겠소? 만약 이를 어기고 또다시 수급을 거둘 때는 군율로 엄히 다스리
겠소."
이순신 함대는 합포 앞바다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물을 길어 저녁밥을 짓고 야영을 할 계획이었다. 합포만으로 들어서려는데 왜
대선 다섯 척이 나타났다. 척후를 맡은 사도첨사 김완이 천자총통을 발사하자 왜군들은 합
포 선창에 배를 댄 후 육지로 달아나버렸다. 오십여 척이 넘는 좌수영 함대의 위용에 눌린
것이다. 김완, 이순신, 어영담, 변존서 등이 텅 빈 왜 대선 다섯 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 함
대는 불길에 휩싸인 합포를 떠나 창원 남포 앞바다를 새로운 야영지로 정했다.
전투에 대한 총평을 마칠 때까지도 원균의 군선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영남과 이운룡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가덕도까지 왜선들을 쫓다가 적의 주력부대와 마주쳤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또다시 함정에 빠진다면 제 아무리 원균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면키 어려우리라.
그러나 원균은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정 무렵 힘찬 북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그
의 군선이 남포 선창에 닿자마자 팔십 개의 수급이 내려졌다. 왜 대선 다섯 척을 모두 수장
시켰던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배흥립이 이를 부드드득 갈았다. 이순신이 말리지만 않
았어도 저 수급들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원균은 떡 벌어진 어깨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이순
신의 군막으로 들어섰다. 우치적, 기효근, 김승룡이 그를 호위했다.
"하하핫! 좌수사, 완벽한 승리요."
이순신이 상석을 원균에게 내어주었다. 원균은 당연한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좌우로 벌려 서 있던 나대용, 이언량, 송희립 등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이순신은 원균의 오
른편으로 옮겨 앉아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장들도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배흥립이
큰소리로 원균에게 물었다.
"원장군, 다섯 척을 모두 침몰시켰다지요? 복병이나 왜 선단과 마주치지는 않으셨는지
요?"
이순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배흥립의 질문은 곧 그가 내린 퇴각 명령을 비꼬는 것
이다. 원균 역시 그 질문의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하핫. 그까짓 복병을 걱정해서야 어디 왜놈들을 때려잡을 수 있겠소? 그놈들도 우리의
기습에 당황했던지 복병은커녕 척후선 하나 없었소. 설령 왜 선단을 만났대도 그게 무슨 대
수겠소? 총통을 쏘아서 격침시키면 그만인 것을."
정운이 원균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지당하신 말씀이오이다. 옥포에 상륙했더라면 왜놈들을 섬멸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외다."
이순신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낙안군수 신호가 장
검을 오른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전투를 치르고 나면 꼭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외다. 허나 일어나
지도 않은 일을 가상해서는 안 되겠지요. 어쨌든 오늘의 전투는 우리의 완승이외다. 속히 장
졸들을 격려하고 내일의 전투를 대비함이 옳을 것이오."
역시 신호는 흔들림이 없었다. 들뜸과 아쉬움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자는 그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원균 역시 흔쾌히 신호의 주장을 따랐다.
"좋소. 군사들을 모두 불러모으시오. 좌수사와 나는 의논할 일이 있으니 곧 뒤따라가리
다."
제장들이 우르르 군막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원균은 팔을 쓰윽 내밀어 이순신의 손을
쥐었다. 이순신이 흠칫 놀라며 손을 뒤로 뺐다. 원균이 이순신의 황망한 표정을 보며 빙긋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시오? 이수사 그대의 도움으로 모처럼 왜선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소. 우
리 앞으로도 이렇게만 합시다. 전라우수사까지 합류하면 조선 수군은 천하무적이 될 것이오.
아니 그렇소?"
"그렇습니다. 힘을 모아야지요."
"내 한 가지 알려줄 일이 있소. 이일 장군이 상주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신립 장군마저
탄금대에서 전사하였소."
"신장군께서?"
이순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산과 동래가 맥없이 함락된 후 왜군들의 기세가 자못 놀
라웠지만, 그래도 신립과 이일이 대구쯤에서 왜군들을 막아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들
이 모두 패했다면 이제 한양마저도 무사하지 못한 것이다. 원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제 한양도 위태로워졌소. 서둘러 장계를 올리도록 합시다. 주상전하께서 얼마나
승전보를 기다리고 계시겠소. 오늘 전투를 소상이 적고 내가 거둔 수급을 함께 보내면 전하
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오. 이수사의 글솜씨는 정언신 대감께서도 알아주실 정도였으니 장계
는 이수사가 쓰도록 하시오. 그 대신 반드시 연명을 하도록 하십시다. 내 공, 네 공 따지지
말고 공평하게 말이오."
"소장이 바라던 바를 장군께서 말씀하시는군요. 좋습니다. 마땅히 연명 장계를 올려야겠지
요. 허나 주상전하께서 우리가 오늘 거둔 승전에 흡족해하실지 그것이 걱정이오이다. 오늘의
승리는 기습으로 얻어낸 작은 전과가 아니겠는지요? 그러니 좀더 큰 전투를 치른 후 연명
장계를 올리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하루이틀 만에 끝날 전쟁이 아니라면 좀더 큰 승전보를
조정에 전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만."
원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옳은 말씀이오. 그렇다면 저 수급들을 어떻게 한다……? 대승을 거두려면
시일이 꽤 걸릴 텐데."
"전라감영으로 보내시지요. 그곳에 마침 순천부사 권준이 가 있으니, 우리의 사정을 설명
하고 수급의 수와 전투의 개요를 전라감영에 공문서를 남기는 것입니다."
"좋소. 그렇게 하십시다."
원균은 선선히 그의 의견을 따랐다. 이순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양마저…… 빼앗길까요?"
원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도 그것이 걱정이오. 허나 한강을 따라서 진을 친다면 쉽게 함락되지는 않을 것이오.
신장군이 전사할 정도라면 조정에서도 어떤 방책을 세우겠지. 아마도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
도의 군사들을 근왕병으로 불러들였을 것이오. 비변사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원균은 전세를 낙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이순신은 몽진 가능성을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신호의 말대로 가상을 현실처럼 살피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순신은 원균의 얼굴과 몸을 찬
찬히 뜯어보았다. 이마와 콧잔등에 불에 데인 흔적이 역력했고, 갑옷의 오른쪽 어깨가 한 뼘
쯤 찢어져 있었다.
"상처가 깊군요."
"허허, 대수롭지 않소. 스쳤을 뿐이니까. 여하튼 왜놈들의 조총은 경계해야 하오. 원거리에
서는 우리들의 총통이 빛을 발하지만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정도면 조총에 목숨을 잃기 십
상이라오. 이수사!"
"예!"
"옥포에 상륙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오. 도망가는 왜선들이야 총포로 맞히면 그만이지
만, 조선 수군이 육지에 내렸다면 왜놈들의 총에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이오. 내가 만약 이
수사라도 정운에게 상륙 불가 명령을 내렸겠지."
원균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순신은 배흥립과 정운의 반발에 적잖게 마음이 상했으리라. 수사가 마음을 잡지 못하면
휘하 장수들은 제멋대로 공을 탐하게 되고, 그 결과는 참패로 이어진다. 어떻게든지 이순신
의 마음을 다독거려 다음 전투에서도 군선을 통솔하도록 해야 한다. 배흥립을 불러들인 것
은 잘못된 판단이지만 정운의 청을 물리친 것은 합당한 조치였다. 왜군과의 첫 전투였으니
이순신으로서는 조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순신은 원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후 그의 말에 사심이 없음을 알고 감사의 인사를 건
넸다.
"원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용기백배합니다. 헌데 한 가지 사과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옥포만호 이운룡에 관한 일이오이다. 옥포를 치기 위해서는 지형지세에 밝은 이가 필요
한데, 좌수영의 광양현감 어영담이나 흥양현감 배흥립으로는 한계가 있었소이다. 그래서 급
히 이운룡을 찾은 것이지요. 장군께 미리 허락을 받지 않은 점 널리 양해해주십시오. 이영남
으로부터 장군께서 이운룡을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보내려했지만 마침 그때 왜
선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는 바람에 함께 출전하게 되었소이다. 잘못이 있다면 모두 소
장에게 있으니 두 사람을 탓하진 말아 주십시오."
원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시오. 우린 연합함대를 꾸리지 않았소? 이수사가 필요
하면 당연히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을 부를 수 있고, 또 내가 필요하면 전라좌수영의 장수들
을 찾을 수도 있소. 다만 이제부터 그럴 때는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도록 합시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나대용이 뛰어들어왔다.
"가서 이운룡과 이영남을 데려오시오. 내가 급히 찾는다고."
두 사람이 뒤이어 막사로 들어왔다.
"앉으시오!"
두 사람은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자리에 앉았다. 원균의 낮고 걸쭉한 목소리가 이어졌
다.
"그대들에게는 내가 그렇게 옹졸한 놈으로 보였소? 이수사를 도운 것이 무에 그리 큰 잘
못이라고 가지도 않고 밖에서 기다렸소. 또 설령 잘못이 있다면 장수답게 용서를 구하면 그
만이오. 왜 이수사의 입을 통해 내게 변명하려 드는가? 그대들처럼 겁 많고 눈치나 살피는
인간들이 경상우수영의 장수란 사실이 부끄럽소. 옥포만호!"
"예!"
"소비포권관!"
"예."
"다음부턴 얼마든지 이수사를 돕도록 하오. 우린 이미 한배를 탄 몸이니까. 이수사가 곧
나고 내고 곧 이수사라오. 다만 나고 들 때는 꼭 내게 보고를 하시오. 그래야 그대들이 탈영
하지 않았음을 알 게 아니오? 명심하시오!"
"예, 장군!"
두 사람은 제대로 변명조차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원균이 막사를 나오며 이순신에게
속삭였다.
"이 정도는 해둬야 다음부터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다오. 오늘 밤 장졸들을 격려하는 연
설은 이수사가 하시구려. 장졸들은 자고로 인자한 장수보다는 강하고 용맹한 장수를 따르는
법이니 힘들더라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시오. 장수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자질 중에서 세
번째가 바로 유창한 언변임을 이수사도 알 게요. 장졸들의 마음을 한 번 뒤흔들어보시오. 나
는 좀 피곤하구려. 탁자나 한 동이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소."
"장군께서 하시지요?"
"허어, 이렇게 사양만 해서야…… 전라좌수영의 군사들이 대부분이니 마땅히 이수사가 그
들을 격려하는 것이 옳아요. 나는 다음 기회에 하리라."
원균이 길게 하품을 쏟으며 어둠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순신은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가시지요. 모두 모였습니다."
횃불을 든 나대용과 이언량이 앞장을 섰다. 이순신은 험험 목청을 가다듬고 웅성거림의
진원지를 찾아갔다. 이순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창과 방패를 높이 든 장졸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군데군데 피어오른 횃불이 그들의 움직임을 좀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첫 승리
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군사도 있었고 왜군들에게서 빼앗은 투구며 옷, 장신구를 갑옷
에 주렁주렁 매단 군사도 있었다. 장졸들이 좌우로 갈라지자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도드라
진 둔덕이 나타났다. 신호, 배흥립, 어영담을 비롯한 전라좌수영의 장수들과 우치적, 이운룡,
기효근을 비롯한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둔덕에
올랐다. 끼룩 끼루룩. 형체가 보이지 않는 갈매기떼의 시끄러운 울음소리만 쟁쟁 울렸다. 승
리를 축하하는 하늘의 뜻이었다. 군사들만큼이나 많은 갈매기들이 하늘을 오르내리고 있으
리라.
장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장졸들의 함성이 거대한 해일처럼 치솟았다. 장검을 휘돌리자 그
함성은 성난 파도처럼 천지사방으로 소용돌이쳤다. 그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가만히
장검을 내렸다.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장졸들은 연설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찰싹대는 파도 소리가 간간이 어둠을 찢었다. 가슴을 한껏 펴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랑스런 부하들,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른 장졸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승장이
되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어둠 속에서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자꾸 목소리가 떨리고 흩어졌다. 당당하고 용맹한 장수의 모습을 보여야 된다던
원균의 충고가 뇌리를 스쳤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승장의 연설
을 시작했다.
"모두들 잘 싸웠다. 오늘 그대들은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 기뻐했으며, 후퇴를 명령
하는 징소리에 분한 마음을 누르지 못했다. 나 또한 그대들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적은 이미
바다를 건너왔고 우리는 이 바다를 죽음으로써 지켜내야 한다. 정의의 군대가 불의의 군대
를 공격하는 것은 강물을 터서 조그마한 모닥불을 끄는 것과 같다. 허나 군공을 탐하여 헛
되이 자신의 힘만을 믿고 덤벼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병서에도 이르기를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후 전투를 시작하고,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전투를 벌인
후에 승리를 추구한다고 했다. 오늘의 승리를 가슴에 깊이 묻어두라.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승리가 쌓일 것인가를 생각하라. 군졸은 장수에 의지하고 장수는 군졸을 올바르게 인
솔하라. 군대를 이끌고 전투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장수의 몫이고, 적과 싸워 승리를 취하
는 것은 군사들의 용맹에 달려 있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장졸들은 오늘부터 이 전
쟁이 끝날 때까지, 아니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도 피를 나눈 전우임을 명심하라. 우리가 하
나일 때 우리는 계속 승리할 것이다. 나 이순신을 믿어달라. 그대들에게 명예와 영광을 가져
다주겠다. 눈부신 새날이 우리를 기다린다. 가자, 힘차게 진군 또 진군하자!"
4.배신
손바닥을 위로 펴면 구름이 되고
아래로 엎으면 비가 되나니
이런 경박한 사람
어찌 다 이루 세리
그대는 못 보았는가
관포의 가난한 시절의 사귐을
그런 도를 지금 사람은
흙덩이처럼 다 버린다
두보, 「빈교행」
임진년(1592년) 5월 15일 오후.
날발은 대숲 사이로 바삐 움직이는 산토끼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 뭉
게구름은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좌수영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엿새가 지났다. 출전을 독
촉하는 원균의 공문이 줄을 이었지만 이순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투에 지친 격군들에
게 열흘 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며, 장수들에게도 왜선의 장잔점을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 있
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어제부터는 아예 좌수영을 나와 박초희의 주막에 머물렀다. 날발만이
이순신의 곁에 머물러 시중을 들었고 좌수영의 나머지 장수들은 얼씬도 못했다. 전라감영에
서 돌아온 권준이 장수들을 다독거렸다.
"좌수사도 인간입니다. 열흘을 넘게 밤을 세웠으니 쉬는 게 당연하지요. 한 이틀 푹 쉬고
나면 우리가 찾지 않더라도 한걸음에 달려오실겝니다. 그때까지 제장들은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세요. 나군관과 이군관은 거북선의 성능을 시험하고, 배현감과 어현감은 경상도 해안
을 좀더 정확하게 지도에 옮기도록 하세요. 김첨사와 정만호는 척후를 계속 하는 것이 좋겠
군요. 신군수는 무기와 판옥선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주세요. 좌수사께서 오시면 각자 한 일
을 보고하도록 합시다. 그동안 우린 너무 좌수사께 의지해왔어요. 이번 기회에 좌수사를 기
쁘게 해드립시다. 자, 어서들 나가서 일들 보세요."
바닷바람이 불었다 대숲이 자지러지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냈으며, 꿩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날발은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뿔피리를 꺼내들었다. 피냄새가 나는 전쟁의 소
리가 아니라 안온하고 유장한 평화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순신은 피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돌아누웠다. 밤새 끙끙 알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인 것이다. 젖은 수건을 든 박초희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그의 얼굴과 등을 조용히
닦아냈다.
지난밤에는 운우지락을 나누지도 못했다.
눈빛은 간절히 그녀의 몸을 원했지만 그의 몸은 꺼지기 직전의 횃불과도 같았다. 가쁜 숨
을 몰아쉬며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가도 이내 눈썹을 움찔거리며 물러섰
다. 아무리 밤은 지새고 술을 마셔도 아랫도리의 힘만은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계집 하
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박초희가 손을 뻗어 그의 하초(아랫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
길이 만드는 쾌감에 젖어들었다. 바위를 뚫고 파도를 헤쳤으며,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속으
로 빠져들었다가 소나기를 뿌리는 먹구름 속으로 솟구쳐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가슴과 배를
지나 하초로 내려갔다. 그는 강궁을 쥐듯 그녀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그녀의 입김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파고들었다. 시위를 당기기 직전에 파르르 떨리는 줌손처럼 그의 몸이 경련
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 절정의 흔적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쾌락이 지나간 자리로 텅 빈 허무가 찾아들었다.
새 삶을 열어주기 위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아닌가. 헌데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
도 주지 못하는구나. 몸으로라도 그녀에게 기쁨을 주고 싶건만 이제 오히려 그녀의 손과 입
에 내 몸을 맡기는 꼴이 되었구나. 이런 짓을 할 작정이었다면 차라리 기생을 품었어야 했
다. 내 말 한 마디면 더한 짓이라도 할 관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부터 이순신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갔다. 열이 오르면서 온몸이 근질거렸고 식은땀이
흘렀으며 뼈마디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박초희는 옷매무시를 고친 후 그의 곁에서 밤을 새
웠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으앵, 으애앵!"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려니 생각하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너무나도
또렷한 소리였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박초희가 그의 몸을 닦으면서 아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아기를 달래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래, 착하지, 아가! 이제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이 엄마가 너 주려고 먹을 걸 많이 가져
왔단다. 착하지?"
날발의 피리 소리가 멎었다. 이제 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순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
다. 방금까지 옆에 있던 박초희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할 뿐 아니라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눈을 끔벅거리며 비볐지만, 눈앞의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흰 지팡이 하나가 나타나서 그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윽!"
어깨를 감싸 쥐고 앞으로 뒹굴었다. 도끼에 찍힌 것처럼 아팠다.
"대관절 노인장은 뉘시기에 저를 이렇듯 때리십니까?"
노인은 지팡이를 높이 들어 다시 그의 왼쪽 어깨를 겨누었다. 지팡이질을 피해 몸을 뒤로
젖혔지만 소용없었다. 지팡이는 고무처럼 길게 늘어나 그의 어깨를 정확히 맞추었다.
"으윽!"
이순신은 다시 어깨를 감싸 쥔 채 비명을 내지르며 뒹굴었다. 노인이 노기 띤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놈아! 저승사자가 잡으로 올 건데 계집이나 끼고 누웠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 너는 죽
는 게 두렵지도 않아? 냉큼 일어나지 못해?"
이순신은 시퍼렇게 멍이 든 어깨를 흘끔흘끔 살폈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산산조각났으
리라.
"뉘신데 이러십니까? 존함이라도 가르쳐주십시오."
노인이 되물었다.
"이놈아! 네가 나를 모른단 말이냐? 어제 아침에도 내 글을 읽은 놈이 날 몰라봐? 다 집
어치워라, 집어치워.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장졸들을 이끌 수 있겠느냐?"
이순신은 어제 온종일 『삼략』을 읽었다. 『삼략』은 진나라 말엽, 장자방이 다리 위에서
황석공이라는 노인을 만나서 얻은 병법서였다. 이순신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노인께서 황석공이십니까?"
"허허, 세상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지.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보이."
노인은 한참 동안 껄껄껄 웃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왜 절 데리러오는지요?"
노인이 웃음을 뚝 멈추었다. 지팡이를 높이 들고 당장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이놈아! 저승에 가는데 무슨 이유가 있다더냐? 염라대왕이 네 낮짝을 보고 싶은가보지.
이만큼 알려줬으니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황석공이 돌아서자 백발이 앞으로 쏠려 양볼과 이마를 휘감았다. 손을 뻗어 황석공의 흰
지팡이를 붙들었다. 감추어진 운명을 살피기 위해서는 황석공과 좀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그러나 황석공이 사라지자 이순신이 움켜쥔 지팡이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
만이 사방을 뒤덮을 때 날발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컥! 저……정신 차리세요. 소, 소녀……를 알아보시겠어요?"
박초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눈을 번쩍 떴다. 지팡이를 쥐었던 양손이 그녀의 목
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해 쏟아질 듯 튀어나온 그녀의 충혈된 흰자위에 놀로
얼른 손을 풀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쇠붙이가 빛을 발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아래로 길게 뻗은 열 십자 모양의 구리 목걸이였다. 그 십자가에는 발가벗은 남자가 양팔
을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마도를 떠날 때 받은 선물이랍니다."
"선물이라? 헌데 괴이하게도 생겼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아, 아니에요. 조선 사람들이 석 삼자를 좋게 생각하듯이 대마도 사람들은 열 십자를 귀
하게 여긴답니다."
"매달려 있는 사람은 뭔가? 그들의 신인가?"
"마, 맞아요. 뱃길을 관장하는 해룡의 아들이지요."
그녀는 목걸이를 벗어서 소맷자락에 감추었다.
"웬 땀을 그렇게 흘리세요? 잠꼬대도 심하시고."
"잠꼬대? 무어라고 하던가?"
"저승사자를 두 번이나 찾아셨답니다. 악몽을 꾸셨나요?"
황석공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박초희는 숨을 고른 후 부엌에서 꿀물을 만들
어 왔다. 벌컥벌컥 꿀물을 들이켜니 타는 듯한 갈증이 단숨에 씻겨내려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걸린 봄날 늦은 오후였다.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나 좌수영을 비
운 것이다. 저승사자가 오리라는 황석공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마음이 급했다.
돌아가야 한다. 죽더라도 좌수영에서 죽어야 한다. 이곳에서 세상을 버린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할 것인가? 청사에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
박초희가 빈 그릇을 받아서 저만치 밀어두고 돌아앉았다. 오늘도 그녀는 웃지 않는다. 미
소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문 밖에서 날발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장군, 소비포권관과 옥포만호가 도착했다는 전갈이옵니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라."
이순신은 서둘러 갑옷을 입고 칼을 들었다. 박초희는 잠자코 그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
다. 황석공에게 맞은 왼쪽 어깨가 자꾸 욱신거렸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도닥거렸
다. 이제 좌수영으로 돌아가면 여름의 끝 무렵에야 돌아올 수 있으리라. 그때까지 그녀는 홀
로 이 주막에 머물러야 한다. 행여 삶을 비관하고 목숨을 끊지나 않을까? 틈이 나는 대로
날발을 시켜 둘러보게 할 터이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미덥지 못한가? 나의 그늘 아래서 한평생 보내는 꿈을 꿀 수는 없는가? 내
아무리 가진 것 없는 일개 장수일지라도 그대하나 건사할 여력은 있다네. 나 그대의 옷이
되고 집이 되고 땅이 되고 바다가 되려네. 행복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려네. 모진 비바람에도
꿈쩍하지 않고, 그대의 머리맡에 머무르겠네. 하여 우리의 사랑을 초봄의 진달래처럼 붉게
피우려네.
"어서 나서세요."
"달아날 생각은 말아라. 어디로 가도 찾아낼 것이야."
이순신은 갑옷을 입고 휭하니 마당으로 내려섰다. 날발이 말고삐를 쥐고 넙죽 절을 했다.
차고 짭짜름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박초희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앞마당까지도 나서지 못했다. 그녀가 전라좌수사의 사랑을
입는다는 사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면 그들의 운명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
이 터진 마당에 전라좌도의 바다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좌수사가 군영을 벗아나 사랑놀음을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고, 박초희는 과거의 이력이 들춰져서 십중팔고 감옥에 갇
힐 것이다. 그녀는 이순신과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는 만큼 그가 다치는 것을 결
코 바라지 않았다.
이순신과 날발이 언덕을 끼고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박초희는 급히 주위를 살피며
방문을 닫아걸었다. 운우지락을 나누지도 못할 만큼 허약해진 그를 위해 오늘부터 금식기도
를 올릴 결심이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었다.
"계십니까?"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맞잡았던 두 손을 푼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에 아무도 안 계시오?"
사내는 그녀가 방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정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보건대 불한
당은 아닌 듯했다. 호리호리한 몸에 융복을 깔끔하게 입은 사내가 섬돌 앞에 서 있었다.
"뉘시온지요? 오늘은 국밥을 팔지 않으니 다른 주막으로 가셔요."
사내는 야윈 두 볼에 미소를 가득 담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국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좌수영에서 이수사를 뫼시고 있는 사람이지
요."
박초희는 여전히 사내를 경계했다. 지금까지 날발 외에 좌수영에서 좌수사의 뜻을 전하러
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방금 좌수사께서 다녀가셨지요? 허허, 아직도 이 몸을 믿지 못하시는 겝니까? 날발에게
그간 일은 모두 들었어요. 남들의 이목도 있는데 이 몸을 여기 이렇게 세워둘 작성이신지
요?"
날발까지 아는 것을 보니 왜의 간자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드시어요."
"고맙습니다."
사내는 아랫목에 자리를 잡았고, 초희는 방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갈 심산이었다. 사내는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신분부터 밝혔다.
"순천부사 권준이라고 합니다."
"……."
순천부사라면 전라좌수영에서 좌수사 다음가는 벼슬이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놀라셨지요? 허나 반드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괜찮
겠지요?"
권준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이 나라가 건국된 이
래 가장 큰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지요. 전황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군과 맞서 승리를 거
두고 있는 장수는 현재 이수사뿐이니까요. 이수사가 무너지면 조선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힘들답니다. 좌수영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장졸들의 사기도 높고 군량미와 무기도 충분하
고, 지형과 날씨에도 잘 대처하고 있지요. 아무리 왜 수군이 막강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겁
니다. 하지만 전쟁은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지요.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유능한 적장을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책략과 술수를 쓰는 것 또한 전쟁의 한 부
분이랍니다. 왜군들은 이수사의 손톱만한 약점도 태산처럼 부풀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요.
지금도 수많은 간자들이 이수사의 주변을 맴돌며 약점을 찾고 있습니다. 자, 생각을 해봅시
다. 지금과 같은 전쟁중에 이수사가 아산의 처첩 외에 또다른 여자를 몰래 만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
"그리고 그 여자가 자신이 낳은 아기를 돌로 쳐죽인 살인자라면?"
"……."
"또한 그녀가 왜군의 선봉대가 머물렀던 대마도에서 건너온 여자란 것이 밝혀진다면 이수
사는 어떻게 될까요?"
"그만!"
박초희가 두 귀를 막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준은 마지막 남은 고삐를 힘껏 틀어
쥐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마도에서 사화동과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이 적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수
사는 관직을 잃고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지요. 세상에 비밀이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대마도 출신의 왜군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고 있는데, 당신의 과거가 완전히 묻힐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초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었다. 결국 이런 일이 닥친 것이다. 남편을 둘
씩이나 잡아먹은 년이 새로운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과욕이었다. 한 번 저지른 죄는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권준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울음을 삼키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죠?"
권준은 소매에서 엽전꾸러미를 꺼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이곳을 떠나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수사와 만나면 안 됩니다. 아무도 당신의 과거를 모르
는 곳으로 가세요. 부족하지만 이 돈이 도움이 될 겁니다."
박초희는 엽전꾸러미를 다시 권준 앞으로 되돌렸다.
"권부사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지금 당장 떠나죠. 이 돈은 가져가셔요. 저 같은 죄인에게
무슨 돈이 필요하겠어요? 부디 그분을 잘 보필해주셔요."
권준은 눈물이 가득 고인 그녀의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엽전꾸러미를 다시 소맷
자락에 넣고 일어섰다.
"그럼……."
그는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주막을 떠났다. 그녀는 이순신과 날발과 권준이 사라진 길을
망연자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사랑을 위해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네. 내가 그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을수록, 그이의 입
술에 입맞춤할수록, 그이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내 것인 양 감쌀수록 그이는 죽음의 나락으
로 떨어질 것이네. 나는 그이에게 독약 같은 존재. 그이는 결코 우리의 감미로운 사랑을 버
리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내가 먼저 사랑을 떠나, 내 사랑이 무참히 짓이겨지는 것을 피해
야 하리. 이번만은 내 사랑을 잃고 싶지 않네. 사랑이 나를 떠나기 전에 내 먼저 사랑을 가
슴에 품고 떠나려네.
임진년(1592년) 5월 15일 저물 무렵.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섬 사이에서 농염한 자태를 뽐내었다. 채색 비단
처럼 불그레해진 양털 구름들이 해가 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영남과 이운룡, 그리고 나대용이 진해루에서 이순신을 맞았다. 다른 장수들은 권준이 정
해준 일을 하느라 좌수영을 떠나 있었고, 권준 역시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거북선을
살피기 위해 순천으로 떠난 뒤였다. 이순신은 반갑게 두 사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소이다."
"장군,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출타중이신지라 뵙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줄 알았사옵니다."
"그대들이 왔는데 내 어찌 대접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소? 자, 앉읍시다."
나대용이 전라감영에서 보내온 공문과 서찰 하나를 함께 내밀었다.
"의령에 사는 유생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돌린 격문이옵니다."
이순신은 황급히 격문을 펼쳐들었다.
들어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포악한 군왕을 몰아내는 것을 의병이라 하며, 천명을 거스르고
침입해온 오랑캐를 몰아내는 군사를 응병이라 한다. 의병과 응병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하늘의 이치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왜란을 평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우리는 의
병이 동시에 응병인 것이다. 우리는 죽기로 싸워, 위로는 주상전하를 받들고 아래로는 만백
성을 도탄으로부터 구할 것이다.
청사에 영원히 빛날 위대한 대의의 길에 동참하라.
이순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앉아서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의병들이 나선다면
전쟁은 다른 국면으로 바뀔 수 있다. 곽재우의 격문에 힘을 얻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 구렁이처럼 길게 늘어서서 북으로 진격하는 왜군의 허리와 꼬리를 겁없이
찔러댈 의병들이 필요하다.
"곽재우를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렸는데 모르셨습니까?"
"경상감사 김수지요. 곽재우가 허락도 없이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관가의 무기고를 털
고 곡물창고를 개방했으니, 도둑에다가 역적이라는 것입니다."
의병과 역적!
이순신은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곱씹었다. 이영남이 이운룡의 말을 받았다.
"왜군이 부산에서부터 치고 올라오자 경상도의 수령들은 지레 겁을 먹고 관할지역을 벗어
났습니다. 경상감사 김수 역시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고, 관군들도 식솔을 거느리고 수령의
뒤를 따랐죠. 자연히 무기고와 곡물창고는 지키는 군사 하나 없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
다. 도둑떼와 의병들이 앞다투어 그곳을 털었죠. 도둑질을 하든, 왜군들과 싸우든 무기와 식
량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이 소식을 접한 수령들이 도둑과 의병을 구분하지도 않고
몽땅 역적으로 몰아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 이 와중에 곽재우도 의병과 도둑 사이를 오락가
락하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곽재우는 직접 조정에 장계를 올려 김수의 비겁한 행적을 낱낱
이 밝힌 다음, '김수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불효하며 패전을 기뻐하고
왜
적을 맞아들였다'고 아뢰었답니다. 조정에서는 김수와 곽재우의 장계를 놓고 옥신각신하다
가
결정을 보류한 채 우선 곽재우를 의병장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왜놈들은 붉은
두루마리를 입은 곽재우를 '홍의장군'이라 부르며 피한다고들 합니다. 하여튼 여차 잘못하다
가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을 판이니, 누가 선뜻 대의에 동참하겠습니까?"
지방 수령들은 왜군을 피해 산으로 들로 도망을 치면서도 책임을 면하려고 쉴 새 없이 장
계를 올렸다. 왜군의 수를 부풀렸을 뿐만 아니라 패전의 책임을 의병장에게 뒤집어씌우기
일쑤였고, 의병들이 왜군과 내통을 일삼는다고까지 했다.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
정으로서는 지방 수령과 의병 어느 쪽에도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전공을 세워 성은
에 보답하라는 독전문만 계속 내려보낼 따름이었다.
갑진년(1604년)에 책정된 열여덟 명의 선무공신에는 의병장이 한 사람도 없었다. 장계에
의거하여 관군의 활약상만을 주목한 결과였다.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의 전
공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 일어난 군사는 언제라도 역심을 품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일까? 많은 의병들이 역적으로 몰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
졌다. 곽재우에게 쏟아진 김수의 비난은 의병장들의 슬픈 운명을 암시하는 전주곡과도 같았
다.
"시망(나대용의 자)! 술을 가져오게.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어찌 이대로 있겠는가?"
그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안상을 앞에
두고 이순신은 먼저 이운룡에게 술을 권했다.
"이만호, 지난 옥포해전에서는 나를 참으로 많이 도와주었소.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오
늘은 마음껏 들다 가시구려. 헌데 이만호는 고향이 어디요?"
"재령에서 났으나 지금은 청도에 본가가 있사옵니다."
"호오, 청도!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고장이 아니오? 지난번에 보니 글도 꽤
읽은 것 같소만 좋아하는 서책은 무엇이오?"
"부끄럽사오이다. 별다르게 좋아하는 것은 없고, 시간이 나면 공맹의 말씀을 살필 따름이
지요."
"그 역시 좋은 일이오. 『논어』를 읽는 장수가 어디 흔하답니까? 이만호가 평소에 좋아
하는 글귀 하나만 들려주시구려."
"장군!"
이운룡이 난처한 듯 얼굴을 붉혔다.
"세 사람만 모여도 그 안에 스승이 있다고 했소. 망설이지 말고 가르침을 주시구려."
"그럼, 외람되지만 옮겨보겠습니다. 소장은 '강의목눌근인'이란 글귀를 늘 마음속에 새기
고
지내옵니다."
이순신이 그 뜻을 풀었다.
"강의목눌근인이라! 강직하고 과감하고 질박하고 입이 무거우면 인에 가깝느니라. 참 좋은
말씀이오. 「자로편」에 있지요. 아마?"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공맹을 논했다. 주위에 갑옷과 장검이 없었다면 문인들이 시문을 논
하는 자리로 착각될 정도였다. 나대용과 이영남은 두 사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
서와 사서삼경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운룡은 자신을 알
아주는 이순신의 술잔을 받으며 대취했다. 나머지 장수들도 갑옷을 벗고 장검을 아주 멀리
밀어놓았다. 술에 취하고 풍경에 취해 잠시 시절을 잊은 듯했다. 이영남이 꼬부라진 혀를 날
름거렸다.
"원수사께서는 부산을 칠 생각만 하십니다. 이러다가 또다시 큰 낭패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나대용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가 나서서 말려보지 그랬소?"
"후훗. 말려요? 누가 그 황소고집을 꺾는답니까? 여기 이만호와 소장이 열 번도 넘게 설
득했으나 소용없었소이다. 출정하지 말라는 어명이 내릴지라도 원수사는 부산으로 가고야
말 것이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좌수영을 찾은 것입니다. 장군! 원수사를 설득할 사람은
장군뿐이오이다. 저희들의 깊은 뜻을 원수사께 전해주십시오."
이순신이 한탄하며 발을 뺐다.
"허어, 그대들의 충정도 헤아리지 않는데 내 말을 들을 리 있겠소? 원수사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바꾸지 않는 위인이오. 더구나 지금 그는 패장의 멍에를 벗기 위해 온갖 노
력을 다하고 있지 않소? 주위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을 게요."
이운룡은 술기운을 누르지 못해 코를 골며 잠이 들었고 이순신도 뒤로 벌렁 드러누워ㅓ
그르렁그르렁 불규칙한 숨을 토해냈다.
그때 호리호리한 사내가 오솔길을 가볍게 걸어올라왔다. 순천부사 권준이었다. 술판에 널
브러져 있는 장수들을 살피는 권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먼저 나대용에게 가서 옆
구리를 힘껏 내질렀다.
"욱!"
나대용이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아픔을 호소했다. 이순신과 이영남은 겨우 몸을 추스렸으
나 이운룡은 그때까지도 잠에서 깨지 못했다.
"오, 권부사! 순천에 갔다더니 언제 돌아왔소? 헌데 안색이 왜 그렇소? 경상우수영에서
제일 용맹한 두 장수가 와서 한 잔 했소이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소? 그렇다고 나대용을
꾸짖지는 마시오. 나의 군령에 따랐을 뿐이니."
이순신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침을 질질 흘리며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몸과 마음을 완전
히 풀어놓은 것이다. 권준이 이순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원수사께서 오셨습니다."
"뭣이라고?"
이순신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영남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수사가 이 시각에 전라좌수영을 왜 찾아왔단 말인가? 혹시 이만호와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알고 뒤쫓아온 것이 아닐까?
언덕을 뛰어오르는 무리들이 보였다. 맨 앞에 서서 콧김을 푹푹 내쉬는 이는 경상우수사
원균이 분명했다. 이영남은 서둘러 이운룡을 흔들어 깨웠고, 이순신은 벗어놓은 갑옷과 장검
을 찾았다.
정자에 오른 원균은 이영남과 이운룡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너, 너희들이 여기에 웬일이냐?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어디 갔나 했더니, 이, 이 죽일 놈
들! 지금이 어느 땐데 좌수영에 숨어서 술판을 벌여? 쥐새끼 같은 놈들!"
원균은 곧장 두 사람에게 몸을 날렸다. 턱을 맞은 이영남은 뒤로 벌렁 자빠졌고, 명치를
걷어채인 이운룡은 숨을 턱턱 끊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주안상이 뒤집힌 정자는 완전히
난장판으로 변했다. 원균은 이영남과 이운룡이 좌수영으로 온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람들이 삽시간에 불어났다. 원균을 호위한 기효근과 우치적은 물론이고 정운, 신호, 배
흥립, 이언량, 이순신, 김완, 변존서, 송한련 등 좌수영의 장수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원수사의 놀림감이 될 수는 없어.
이순신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중심을 잡으려 해도 머리끝까지
오른 술기운에 양 무릎이 자꾸 후들거렸다. 권준이 다가와서 안색을 살피며 속삭였다.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권준은 이순신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군관과 이만호가 너무 많이 취했나보오. 자, 모두들 두 사람을 좌수영으로 옮깁시다.
모처럼 우수사께서 오셨는데 보시다시피 여기선 술을 더 마실 형편이 못 되는군요. 진해루
아래에 여기보다 더 넓은 정자가 있으니 그곳으로들 가십시다."
눈치 빠른 신호가 원균을 막아서며 권준을 거들었다.
"소장이 길을 안내하겠소이다. 따르시지요."
원균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신호를 따라 성큼성큼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정운이 이
운룡을 업고, 이언량이 이영남을 부축해서 그 뒤를 따랐다. 권준은 장졸들이 모두 사라진 것
을 거듭 확인한 후 이순신을 일으켰다.
"어쩌자고 이렇게나 과음하신 겝니까? 천천히 내려가시지요. 보아둔 샘물이 있으니 그곳
에 들러 목도 축이고 세안도 하십시오. 오늘은 밤새도록 술판이 벌어질 터인즉 이언량을 옆
자리에 앉히세요. 먹는 시늉만 하시고 술잔을 이언량에게 넘기셔야 합니다."
이순신은 힘겹게 내리막길을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지! 그나저나 원수사가 온 이유가 뭔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남해현령 기효근이 몹시 화가 난 걸로 봐서는 그 일 때문
이 아닌가 합니다."
그 일?
권준은 남해 방화의 진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전라좌수영이나
경상우수영의 장졸들은 그 방화를 왜군 간자들의 짓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기효근의 눈치챘단 말인가?
두 사람이 진해루 아래 목민정에 도착할 무렵, 원균은 부산진격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
었다. 맞장구를 치는 정운과 배흥립, 김완의 고함 소리가 정자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순신이
정자에 오르자 대화는 중단되었다. 원균의 앞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순신이 먼저 잔을 권했
다.
"손님 대접이 변변찮아서 죄송하오이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원균이 잔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무슨 소리! 사내대장부가 흥에 겨우면 취할 수도 있는 법이라오. 허나 우수영의 장수들을
꼬드기는 것은 사내다운 일이 아니라고 보오만."
이순신의 옆에 앉은 이언량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꼬드기다니요? 좌수사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당장 취소하십시
오."
원균의 오른편에 앉은 기효근이 맞상대를 하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대가 낄 자리가 아니야."
불끈 쥔 이언량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순신이 팔을 뻗어 이언량을 제자리에 앉
혔다. 좌우를 살피니 이운룡과 이영남이 보이지 않았다. 원균에게 꾸지람을 듣고 먼저 경상
우수영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이언량이 자리에 앉은 후에도 기효근은 여전히 일어선 채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며 푸우푸푸푸 한숨을 토해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천벌을 받소이다, 장군. 그렇게 덮어버리면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소이까? 한 사람을 오
랫동안 속이거나 만인을 짧은 시간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만인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일이오이다. 하늘이 두렵지 않소이까?"
"쌍! 죽인다."
이언량이 고개를 디밀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가만 있어."
이순신이 차갑게 명령했다.
"장군,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앉아만 있으라고 하십니까?"
"앉으라니까!"
이순신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기효근이 정자 아래에서 군졸 하나를 불러 올
렸다.
"하하핫. 장군,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나봅니다. 소장은 장군께서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실 줄 알고 이렇게 증인까지 데려왔소이다. 여봐라, 네게 무기고와 곡물창고의 위치를
물은 놈이 여기에 있느냐?"
뱁새눈의 군졸이 대답했다.
"있사옵니다."
"누구냐? 지목해보거라."
"저 군관이옵니다."
뱁새눈은 말석에 앉은 송한련을 가리켰다.
"방화가 있던 날, 성문 옆 대숲에 숨어 있던 사내가 여기에 있느냐?"
"있사옵니다. 두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누구냐? 지목해보거라."
뱁새눈은 변존서와 그 옆에 서 있는 날발을 정확히 가리켰다. 기효근은 득의에 찬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아, 이로써 남해를 불바다로 만들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군지 분명해졌소이다."
기효근은 술잔을 이순신 앞에 내팽개치며 물었다.
"장군! 나와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다고 내 고을을 불태운 것이오? 왜놈들에게 향해야 할
비수로 내 옆구리를 찌른 까닭이 무엇이오? 아무리 좌수사라 하더라도 경상우수영에 속한
남해를 불바다로 만들 권리는 없소이다. 이는 마땅히 군율로 엄히 다스려야 할 중죄요, 중
죄! 원수사를 호위하러 사천에 잠시 다녀온 동안 천 명을 먹일 군량미와 오백 명을 무장시
킬 무기가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했소이다. 그리고 간악하게도 장군은 그 일을 은폐하기 위
해 왜놈 간자의 짓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렸고, 지난 옥포해전에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으셨소.
장군! 하늘이 무섭지 않소?"
이순신이 기효근의 말을 잘랐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좌수사께서는 사후에 보고를 받으셨을 뿐이오. 모든 일은 소장이 했
소이다."
기효근이 이순신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노옴!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하는 게냐? 좌수사의 허락 없이 어찌 방답첨사 단독
으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이순신도지지 않고 대꾸했다.
"왜군이 남해까지 내려왔다는 전갈이 왔었소. 그때 마침 소장이 척후를 보고 있었는데 워
낙 다급한 상황인지라 우선 남해에 상륙했었소. 성은 텅 비어 있었고, 무기고와 곡물창고를
지키는 군사는 이미 달아난 뒤였소. 그냥 두고 후퇴하면 전라도를 치는 왜적의 전진기지가
될 것 같아 부득이 불을 질렀으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이 일을 왜군 간자의 소행으로 돌
린 것이외다. 『손자병법』에도 이르기를 전투란 적을 속이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소이다. 비록 수많은 군량미와 무기를 잃었지만 어찌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에 비할 수 있겠소이까."
기효근은 이순신의 가슴을 밀면서 긴 수염을 획 잡아당겼다. 이순신은 몸의 군형을 잃고
술상으로 꼬꾸라졌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냐? 그때 왜선들은 거제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내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사천으로 갔던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되레 큰소리를 치다니!
네가 그러고도 조선의 장수라고 할 수 있느냐? 네놈은 왜놈보다도 더 비열해!"
송희립이 성난 코뿔소처럼 튀어나왔다.
"닥치시오. 어찌 좌수영의 장수를 왜놈에 비긴단 말이오."
기효근에게 달려드는 송희립의 발을 우치적이 걸어 넘어뜨렸다.
"말꼬리를 잡는 놈보다 더 한심한 놈은 없지!"
좌수영의 장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있는 사람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
상우수사 원균, 그리고 순천부사 권준뿐이었다. 주먹다짐을 시작하려는 순간 순천부사 권준
의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멈추시오! 부끄럽지도 않소? 이렇게 아귀다툼을 하는 꼴을 왜군들이 보면 뭐라 하겠소?
주상전하께서는 몽진중이심에도 불구하고 조선 장수들의 용맹을 믿겠다는 비망기까지 내려
보내셨소. 헌데 지금 그대들은 누구를 향해 주먹질을 하려는 게요? 차라리 자기 얼굴에 침
을 뱉는 편이 낫겠소."
장수들의 흥분이 차츰 가라앉았다. 임금의 비망기를 들먹인 것이 효과가 있었다. 권준은
장수들의 직선적인 마음, 즉 의리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을 군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교묘하게
바꿔치기했다. 쉽게 흥분도 잘하지만 또 쉽게 마음을 열고 뭉치는 것이 장수들인 것이다. 그
래도 기효근은 서운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토를 달았다.
"권부사 말이 맞소. 우리끼리 다투어서 피를 보아서는 결코 안 되지. 허나 내 고을을 불지
른 행위에 대해서는 합당한 조처가 있어야 하오. 적어도 송한련, 변존서 저 두 놈에게만은
엄벌이 내려져야 할 것이오."
권준은 기효근의 네모난 얼굴과 끝이 굽은 코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기효근의 맺힌 마음
을 푸는 데는 원균의 설득 외에는 딴 방도가 없는 듯했다. 권준은 사건의 마무리를 원균과
이순신 두 사람에게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마찰은 결국 두 수사가 맡아서 해결할 수밖
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설왕설래하다가는 어느 순간에 주먹이 오고갈지 모르는 일이니 두 분 수사께서
의논하여 정하시는 대로 따르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권준의 시선이 원균과 이순신에게 향했다. 원균은 빙긋
웃으며 권준의 청을 받아들였고, 이순신도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자, 앉으시오. 장수들은 여기에 남아 계속 술을 마시도록 합시다. 두 분 수사께서는 조용
히 말씀을 나누셔야 할 터이니 좌수사의 숙소로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안
내를 하지요."
이순신이 먼저 목민정을 내려왔다. 원균은 잠시 우치적과 귀엣말을 나눈 후 기효근의어깨
를 꾸욱 눌렀다. 나를 믿고 기다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두 수사가 사라지자 장수들은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켰다. 이미 서먹서먹해진 사이인지라 별다른 대화도 없었고 호탕한 웃음
도 사라졌다. 관기들의 춤과 노래도 호수에 비친 달 보듯 했다. 이언량과 기효근은 술잔을
들면서도 서로 으르렁댔고, 송희립과 우치적도 순간순간 상대를 쏘아보며 눈싸움을 했다. 이
순신은 긴 수염을 고르면서 흘끔흘끔 좌수영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좌수사가 원수사의 비
난을 어떻게 막아낼지 참으로 걱정이었다.
권준이 돌아가자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만이 남았다. 원균은 우선 이곳까지 그들을 안내
한 권준을 칭찬했다.
"이수사는 좋겠소. 권부사처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을 곁에 두고 있으니 말이오. 능히 장자
방이나 제갈량에 버금갈 위인입디다."
활터에서 시간을 번 것이나 목민정에서 장수들의 흥분을 누르고 모든 문제를 두 수사의
담판으로 돌린 것은 실로 놀라운 순발력과 판단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병법을 모르는 일개 문관일 뿐이지요."
원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가 않소. 전쟁이 어디 창과 칼만으로 한답디까? 군량미를 챙기고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오. 권부사의 재주는 그 모두를 책임지
고도 남음이 있어요. 내 말이 틀렸소?"
이순신은 이야기를 이운룡과 이영남 쪽으로 돌렸다.
"원장군께서도 휘하에 좋은 장수를 두셨더군요. 이만호의 지략은 권부사에 버금가고, 이권
관의 용맹함 역시 우리 좌수영의 정만호나 배현감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런 장수들이 우
수영에 있으니 왜놈들이 함부로 우수영을 넘보지 못하는 것이오이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원균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핫! 그런가요? 이수사가 탐낼 만한 장수들이라면 재목임에 틀림이 없겠지. 허나 좌수
영으로 데려갈 생각은 마시오. 나 역시 권부사나 정만호에게 손을 뻗치지 않을 터이니."
"그들이 좌수영으로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원균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됐소. 그 문제는 그만 접어둡시다. 따지고보면 장수들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한 내 잘
못도 있으니."
원균은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이순신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술이 깨면서
위장이 뒤틀렸고 편두통까지 시작되었다. 한숨 푹 자고 나면 이 모든 아픔이 해결되겠지만
지금은 그저 밀려오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원균이 긴 한숨과 함께 속마음을 털어놓았
다.
"이수사! 무릇 전쟁에 나가는 장수는 지나친 자신감과 지나친 공포심을 경계해야 하오. 내
가 보기에 이수사는 왜군과의 전투에 앞서 너무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소. 내 이수사의 마
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남해에 척후를 보내고 불을 지른 것
이겠지. 허나 그 일은 명백히 이수사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되었소. 장수라면 누구나 적에
게 배후를 기습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오. 정말로 남해에 왜군이 있었다면 나라도 출정을
늦추고 그들을 먼저 쳤을 것이오. 하지만 아니었소. 이수사의 염려가 엉뚱한 곳에 불을 질러
버린 게요. 여기까진 그래도 좋소. 누구나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 옥포에서의 승리
로 이수사의 판단 착오는 어느 정도 만회되었소이다. 허나 왜 내게 그 사실을 귀띔해주지
않았소? 기효근이야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르는 불 같은 성격이니 말하기 어려웠다손 치더
라도 나에게만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만은 진실을 알려줬어야 하지 않소? 이수사는 결국
내 오른팔에 불을 지른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소. 나는 이수사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섭섭하오. 이수사! 우리가 알고 지낸 지도 반백년이 가깝소. 건천동 시
절에는 함께 전쟁놀이도 했고, 또한 육진에서 이수사의 뒤를 살핀 사람도 바로 나 원균이오.
헌데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소? 나는 이수사를 친동생처럼 아꼈는데 이수사는 그렇지 않은
가보오."
원균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기효근보다 더 화를 내도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이순신
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균
의 말에는 분노보다도 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이순신은 고개를 들어 원균의 두
눈을 응시했다.
"소장이…… 원장군을…… 배신했다는 말씀이오이까?"
이순신의 목소리가 요동을 치면서 턱턱 꺾였다. 원균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담담
하게 대답했다.
"이수사, 난 당신을 아오. 날 밟고 지나가고 싶겠지. 지금 이수사는 전공에 굶주린 이리와
도 같아요."
"원장군!"
원균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 말 잘들으시오. 옛 인연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요. 다시는 날 의식하
지 마시오. 그대의 적은 나 원균이 아니라 부산에 웅크리고 있는 왜군들이오. 나의 전공을
훔치는 것은 용납하겠으나 내 앞에서 함께 연명 장계를 올리자느니 하는 수작은 부리진 마
시오. 또 한 번 그런 속임수를 쓴다면 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오."
"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원균은 술 한 잔을 스스로 따른 후 가볍게 비웠다.
"그대가 더 잘 알 것이 아니오? 그대가 단독으로 장계를 올린 일 말이외다. 왜 그렇게 놀
라시오? 세상에 비밀이 있을 줄 알았소? 남해 방화를 숨긴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그대는
날 기만했소. 아니라면 어디 변명을 해보시오."
이순신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순신은 옥포에서 돌아온 5월 10일, 연명 장계를 올
리기로 한 원균과의 약조를 어기고 단독 장계를 올렸다. 쥐도 새도 모르게 파발을 띄웠건만
어느새 원균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원균은 어둡고 습한 절벽 끝으로 이순신을 밀어 붙
였다.
"자, 어서 장계의 초본을 보여주시오. 그댄 무엇이든지 기록으로 남기는 위인이 아니오?
녹둔도의 패전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군졸들을 증강해달라는 서찰의 초본을 들이민 그대요.
전공을 논한 장계처럼 중요한 글을 남겨두지 않았을 리가 없소. 어서 보여주시오. 보여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틴다면 오늘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겠으나. 그대가 쓴 장계는 한 달
안에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오. 조정 대신들을 거치면 한 달 안에 그대가 쓴 장계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말이오.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소. 그러니 어서 초본을 가져오시오. 남해 방
화를 묻어두는 것처럼 그대의 장계는 나만 알고 있겠소. 자, 가져오시오, 어서!"
"초본은 없소이다."
"하늘이 무섭지 않소?"
이순신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었다.
"초본따윈 없소이다. 그것이 왜군의 손에 들어가는 날이면 조선수군의 사정이 속속들이
알려지게 될 터인데 어찌 소장이 장계의 초본 따위를 감추고 있겠소이까?"
원균이 병풍 아래 쌓여 있는 서책들을 눈으로 휘이 살폈다.
"정녕 그러하오?"
"그렇소이다."
원균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어차피 장계의 내용은 전공을 포상하는 유서를 살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경상우
수영의 장수들이 모두 이순신의 농간을 눈치챌 것이니,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
게 된다. 틀림없이 이순신의 장계에는 전라좌수영의 전공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경
상우수영의 전공은 축소되거나 아예 생략되었으리라, 그렇게 되면 당연히 좌수영의 장수들
에게 대부분의 포상이 돌아갈 것이며, 기효근과 우치적을 비롯한 우수영의 장수들은 다시
한번 이순신을 죽이겠노라고 날뛰게 되리라. 그날이 오면 모처럼 단단하게 구축된 연합함대
는 산산이 흩어지고 말리라.
원균은 투구와 장검을 들고 일어섰다.
"좋소. 한 번만 더 이수사를 믿기로 하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함께 전투를 하더라도 각자
장계를 올리도록 합시다. 그 편이 서로에게 오해를 사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오, 그럼 나는
돌아가겠소."
원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좌수영을 벗어났다. 이순신은 정문까지 나가서 멀어지는 원균
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서 멀어지는 원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
고 방으로 돌아와서 사지를 쭉 뻗고 누웠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
었다.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배신자!
원균은 이순신의 가슴에 배신자의 낙인을 찍어두고 간 것이다. 이순신은 제대로 반박도
못한 채 쩔쩔맸다. 그는 원균처럼 언변에 능하지도 않았고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
다. 그는 원균과 둘만 있는 자리가 두려웠다. 원균과 마주 앉으면 숨이 막혀왔고, 스스럼없
이 내뱉는 말에도 쉽게 대꾸를 못했다. 수많은 단어들이 혀끝에서 뱅뱅 맴돌 따름이었다.
그랬다. 원균은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난처해하거나 당혹해한 적이 없다. 왜군에게 군선
을 격침당하고 경상우수영까지 잃게 되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
군 것이 아니라 칼을 빼어들고 자결을 하려 했던 이영남은 원균의 당당함을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인지 옥포에서의 승리도 왠지 원균의 몫인 것처럼 느껴졌다. 장졸들 역시 선두에 섰
던 원균, 달아나는 왜선들을 격침시킨 원균의 무용담만을 나눌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준비
하고 계획한 후 장졸들을 이끌고 나간 장수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연합함대의 으뜸 장수는 당연히 나 이순신이 되어야 한다.
원균은 겨우 다섯 척의 배로 좌충우돌하는 철부지일 뿐이다. 형세를 읽고 장졸을 지휘한
장수는 나다. 그러므로 옥포의 승리는 당연히 나의 몫이다. 전투는 감정놀음이 아니다. 냉혹
하게 적군과 아군의 형세를 헤아려야만 승리할 수 있다. 권준과 함께 전략을 짜고, 어영담과
함께 지형지세를 살피고, 나대용·이언량과 함께 판옥선을 개량했으며, 변존서와 함께 군사
들에게 궁술을 가르치고, 김완·배흥립과 더불어 척후와 연통의 방법을 고안한 장수는 바로
나 이순신이다. 옥포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 승리는 원균이 앞장을
섰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듯 치밀하게 준비를 마쳤기에 가능한 것이다. 옥
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은 당연히 나 이순신이다. 내가 장졸들을 대표해서 장계를 올
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사실이 이러한데 누가 누구의 공을 빼앗았단 말인가? 원균 혼
자서 거제도의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용맹도 내가 거느린 좌수영의 군선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그는 나의 후광을 업고 재주를 뽐내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꼭두각시가 어찌 주인의 자리를 넘볼 수 있으리요. 꼭두각시가 어찌 주인을 배신자
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으리요.
이순신은 쌓여 있는 서책들의 맨 아래에서 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끼워놓은
서찰 한 장을 조심스레 폈다. 옥포해전의 전후사정을 상세히 적은 장계의 초본이었다. 이순
신은 그것을 천천히 눈으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신 이. 삼가 아뢰옴은 적을 쳐서 무찌른 데 관한 일이옵니다. 전일
공경히 받지온 전지 내용에 의거하여 경상우수사와 합력하여 적선을 쳐부술 예정으로 지난
5월 4일 새벽에 출항하였사옵니다…….
5. 죽음과의 재회
우리나라 사람들은 높은 관원이나 무거운 품질을 좋아하지 않고, 무장이 되기를 낚시질한
다. 그리하여 무장이 된 자는 이미 욕망을 만족시키고 나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
지않고 오직 자기의 몸을 사랑하여 자중하기에 힘쓰므로, 거의 모두가 적병과 맞서게 되면
먼저 달아나서 사졸들의 앞장을 선다. 통분함을 참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갑자기 귀하게 된
무식한 사람이란 교만하고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쉽고,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고, 기는 높아져서 지휘해 부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수광, 『지봉유설』, 「관직부」
임진년(1592년) 5월 29일 새벽.
전라좌수영 앞바다에는 출정 준비를 마친 스물세 척의 판옥선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군사들을 독려하는 정운, 김완 등의 구령 소리가 산과 바다를 깨웠고, 송희립 삼형제의 낮고
진중한 북소리가 안개에 묻힌 좌수영을 휘감았다. 개판 중앙에서는 이언량이 거북선의 등을
마른 짚으로 덮고 있었고, 용머리 쪽에서는 나대용이 얇게 편 철판을 개판에 붙이느라 분주
했다. 옥포해전에서 탄환 중 몇 개가 개판을 뚫고 격군들이 노를 젓는 갑판 안까지 들어왔
던 것이다. 적의 표적이 될 만한 곳에 철판을 대면 인명 피해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이언량
은 옥포해전에서 원균의 경상우수군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이 못내 억울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적장의 머리를 베리라!
그들과 함께 거북선을 지휘할 총포 전문가 이기남의 얼굴에서도 전의가 불타올랐다. 어젯
밤, 이기남은 지자총통 두 대를 빼내고 대완구를 좌우에 각각 배치하자고 제안했다.
"비책이라도 있소?"
이언량의 물음에 이기남은 검은 쇠공들을 가리켰다.
"저것들로 왜놈들의 얼을 빼놓는 거지요."
그 쇠공들은 군기시(무기를 만드는 관청)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였다. 쇠공
속에 철편과 화약을 넣어 심지를 꽂고 불을 붙이면 심지가 타들어가 철편이 사방으로 흩어
지는 것이다. 왜선의 갑판에 일단 얹히기만 하면 여지없이 왜군들을 몰살시킬 가공할 만한
시한폭탄이었다. 그러나 원거리의 목표물을 맞출 때는 명중률이 낮기 때문에 해전에서는 극
히 사용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왜선과 맞부딪쳐 싸우는 거북선에서 비격진천뢰는 더없이 훌
륭한 무기였다.
"칼끝이 보이지 않도록 잘 덮어라. 필시 왜놈들이 여기로 뛰어내릴 것이다."
순천부사 권준이 급히 좌수영의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차분한 말투와 몸짓 때문에 샌님 소리까지 듣는 그가
아닌가. 이순신 역시 권준의 행동거지에서 이상한 낌새를 읽고 좌우의 군관들을 물리쳤다.
두 사람만이 남았을 때 권준은 그 큰 눈을 끔벅거리며 입을 열었다.
"출정을 늦추셔야 합니다. 오늘 나가서는 아니됩니다."
이순신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무슨 일이오?"
"방금 천문(별자리)을 살폈습니다. 한 줄기 검은빛이 동쪽에서부터 등등한 살기를 뿜어 광
휘당당한 장군의 주성을 침범하였습니다. 이는 분명히 장군께 화가 미칠 조짐이옵니다. 출정
을 내일로 미루셔야 합니다."
권준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불길한 천운을 전했다. 이순신은 양손으로 입 주위를 문지르
더니 권준에게 물었다.
"내 주성이 떨어지지는 않았소?"
"장군께서 며칠째 꾸시는 악몽과 어젯밤에 살핀 주역, 그리고 방금전의 천문에 이르기까
지 모두 출정의 불길함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며칠만이라도 시일을 늦추면 전라우수군이 올
것이고 그러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바삐 서두를 일이 아니지요."
"황석공께서도 말씀하셨다오, 저승사자가 내 코앞까지 와 있다고. 허나 쉽게 잡아가지는
않을 모양이오. 벌써 보름 가까이 겁만 줄 뿐 죽이지는 않고 있잖소? 권부사! 지금 우리에
겐 시간이 없소.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원수사의 목숨이 위태롭소."
탁자 위에는 이틀 전 이영남이 가지고 온 원균의 서찰이 놓여 있었다. 권준은 서찰을 재
빨리 읽어내려갔다.
적선 십여 척이 벌써 사천·곤양 등지로 들어오고 있고, 그 뒤에는 얼마나 많은 적이 있
는지 짐작할 수 없소. 나는 우수영의 군사들을 이끌고 노량으로 이동중이오. 속히 와주시오.
왜선들이 사천까지 들어왔으니 원균의 경상우수군은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러나 원균은 결코 자존심을 버린 채 전라좌수영으로 후퇴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균은 왜선
들과 정면으로 맞붙을테고, 한 차례 피비린내가 지나간 다음에는 사천 앞바다도 경상우수영
의 바다가 아니라 왜국의 바다가 될 것이다.
"원수사가 전사하기라도 하면 내 죄는 씻을 수 없게 되오. 다행히 원수사가 목숨을 부지
하더라도 나는 겁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니겠소? 나는 가겠소. 가서 원수사를
구하고 나 이순신이 결코 방책 뒤에 숨어서 적의 동태나 살피는 장수가 아니란 걸 보여주겠
소."
권준이 마지막으로 설득했다.
"장군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자진해서 죽음의 바다로 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전쟁이란 누구의 자존심을 세우거나 누구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말
씀하시지 않았는지요? 지금 전라좌수영의 군선은 전라우수영의 군선과 합류하는 것을 전제
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헌데 이대로 왜 선단과 맞서는 것은 한쪽 팔이 잘린 채 싸우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억기 장군을 기다리셔야 합니다."
이순신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전라우수사가 오리라고 보오? 그는 지난번 옥포해전에도 참전하지 않았소. 격군이 부족
하고 판옥선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라고 핑계를 댔으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오는 6월
3일 좌수영에서 만나기로 약조를 했지만 나는 그 약조 또한 믿지 않소. 물론 전라우수사가
총명하고 용맹한 장수란 걸 알고 있소. 허나 지금이 어떤 상황이오? 부산포에 웅크리고 있
는 왜선 오백 척과 맞서기보다는 전라우수영을 철통같이 지키겠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일이
오. 전라좌수영을 지나 경상도 앞바다까지 나가서 싸우는 건 전라우수사에게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소. 더군다나 아직 조정에서는 이 연합함대의 주장이 누구인지도 정해주지 않았
소.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전라우수영 군선들이 옥포해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것이오. 그때
나 지금이나 상황은 마찬가지요.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열악하오. 왜선들이 사천까지 압박
해 들어오고 있으니까. 권부사!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오. 오지 않는다
고 생각하고 해전에 임해야 할 것이오. 자 이야기는 이쯤 해둡시다. 나는 원수사를 구하러
가겠소. 나군관, 밖에 있는가?"
"예, 장군!"
나대용이 군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출정할 것이니라! 지금 당장 노량으로 가자."
"알겠사옵니다, 장군!"
잠시 후 송희립 형제의 북소리가 다급해지더니 날발의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우척후장 김완과 좌척후장 정운의 배가 앞장을 서고, 전부장 이순신이 판옥선단을 지휘해서
좌수영을 벗어났다. 때마침 불어온 순풍이 격군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붉은 대장기가
높이높이 펄럭이는 좌수영의 지휘선으로 거북선이 재빨리 접근해왔다. 이물에 서 있던 이순
신이 빙그레 웃으며 권준에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방답귀선과 순천귀선이 저 영귀선과 함께 출정할 수 있겠소?"
"방답귀선은 다음 해전부터 출정이 가능하고, 순천귀선도 해를 넘기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영귀선이 믿음직해 보이오. 돌격장 이언량에게는 단단히 일러두었겠지?"
"이번에는 결코 경상우수영에게 선공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겠다는군요."
"그래요? 이기남까지 가세했으니 뭔가 소득이 있겠지. 믿어봅시다."
사시(오전 9시)가 되기 전에 이순신 함대는 노량에 닿았다. 김완을 척후로 내보낸 후 원균
이 오기까지 노량 앞바다에 머물렀다. 바람이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어지면서 점점 더
많은 구름이 동쪽으로 몰려들었다. 사방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만 해도 노량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가는 상선들과 어선들로 사시사철
붐볐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어업이 완전히 중단되고 상거래가 끊기면서 돈의 흐름이 막혔
으니 해안의 백성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사내들이 대부분 군졸로 차출된 후 식솔을 책
임지는 일은 눈물 많고 힘없는 여인네들의 몫이었다. 해안에 매어놓은 배들은 고철덩이와
다름없었다. 삶의 보고이자 생존의 텃밭이었던 생명의 바다는 이제 죽음의 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일찌감치 산으로 숨어들어 초근목피로 생명을 연장하거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강
도짓을 일삼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아직까지 전라도 내륙 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
다는 소문이 나고부터 더더욱 그랬다. 이제 전라도 해안도 죽음과 폐허의 그림자에 서서히
휩싸이리라.
장졸들이야 적을 맞아 힘껏 싸우다 죽는다 치더라도 백성들은 억울한 개죽음을 면치 못했
다. 점령군치고 예의를 갖춘 자들이 있었는가? 춘추시대에 중원으로 쳐들어온 흉노는 성 하
나를 함락시킬 때마다 그 안의 백성들을 몰살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 복수의 씨앗을 지우는 것이다. 전쟁이란 그렇게 모든 행동들을 극단으
로 이끈다.
아군인가 적군인가.
점령지의 백성들은 적군의 아내이거나 아비, 혹은 자식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든지 적
과 내통할 수 있고 반란을 꾀할 수 있다. 어찌 그런 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한다는 말인가. 철
저하게 짓밟아 점령자의 힘을 확인시키고 반항의 기운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은밀히
백성들의 동정을 보고하는 자도 나오고, 길 안내를 자처하는 자도 나오며, 곡물과 무기를 숨
겨둔 곳을 알려주는 자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는 죽여라. 그
자의 가족과 이웃 역시 죽여라. 여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도록 하라. 살려달라고 빌때
까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칠 때까지 죽인 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비를 베풀어라. 죽음
직전에서 맛보는 자비는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그 행복은 얼마나 가슴을 찌르겠는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일어나는 백성들의 개죽음은 무시하라. 그 죽음들 역시 넓게 보면 전략인 것
이다. 아군을 유리하게 하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참으로 훌륭한 전략!
전쟁이 길어질수록 백성들의 헛된 죽음도 늘어만 갔다.
설령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백성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 몰살당한
군졸에게 전쟁의 승리가 어떤 삶의 희망을 가져다줄 것인가. 전투에 나서기 전에 군졸들의
가족을 먼저 살필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돌려야 하며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전투는 순간이지만 그 전투력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는 백성들의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경상우수사께서 오십니다."
하동쪽에서 판옥선 세 척이 나타났다. 사천으로 왜군이 밀려오자 급히 하동으로 몸을 피
했던 것이다. 퀭한 눈의 원균이 이순신의 손을 굳게 잡았다.
"오늘까지 기다려도 안 오면 진주로 후퇴할 작정이었소."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던 모양이다. 협선 두 척이 좌초되었고, 군졸 열일곱 명이 전사했으
며, 미조목첨사 김승룡이 오른쪽 다리에 총탄을 맞아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전라우수사는?"
원균은 이억기의 행방을 물었다.
"6월 3일에 만나기로 약조했는데 급히 오느라 합류하지 못했소이다. 곧 뒤따라오겠지요.
왜선들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원균이 코를 벌렁벌렁대며 물을 한 잔 청해 마셨다. 이틀 동안 주먹밥 하나 먹을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훨씬 빠르고 조직적이오. 소수정예를 뽑아서 출동시켰음이 분명하오. 총통이 발사할 틈도
없이 다가와서 조총을 쏘고 불화살을 날렸소. 죽기살기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소."
"왜선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급히 나오느라 사천에 군량미와 화약을 두고 왔다오. 아마 왜놈들은 그걸 옮기려고 사천
으로 들어갔을 게요. 사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폭이 좁은 곳이니, 우리가 길목을 막으
면 저들은 독안에 든 생쥐 꼴이오. 서두르도록 합시다."
이순신은 즉답을 피하고 권준 쪽을 돌아보았다. 권준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군, 싸워서는 아니됩니다. 정 싸우시겠다면 내일 하십시오. 고성이나 당포에서도 능히
적을 칠 수 있지요.
그때 우척후장 김완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왜의 소선 한 척이 사천 입구에서 함대
를 염탐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균이 지체 없이 명령을 내렸다.
"뒤쫓아라. 왜의 척후임이 분명하다. 살려둘 수 없다."
기효근이 지휘하는 판옥선 한 척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이순신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나대
용에게 명령했다.
"당장 전부장에게 왜 척후를 추격하라고 전하라. 그리고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합
함대는 사천으로 간다."
날발의 뿔피리가 두 번 짧게 울리자 전부장 이순신의 군선이 기효근의 군선과 어깨를 나
란히 하며 사천 쪽으로 나아갔다. 김완의 송골매들이 창공을 맴돌면서 왜선의 항로를 정확
히 알려주었다. 그 광경을 보며 원균이 히죽거렸다.
"방답첨사가 기현령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기현령은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긴 맹장이
라오."
순천부사 권준이 온화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이첨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왜선은 사천으로 향하다가 항로를 오른쪽으로 바꾸어 곤양으로 도주했다. 기효근과 이순
신의 기세에 눌린 왜군들은 배를 비우고 상륙해서 산으로 달아나버렸고, 두 장수가 왜선에
이르렀을 때에는 빈 배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기효근의 군졸 하나가 먼저 불화살을 날렸
다. 그러자 이순신의 배에서도 천자총통이 불을 뿜었다. 두 장수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왜
선 주위를 빙빙 돌았다. 텅 빈 배였으므로 불화살 두어 개로 격침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균과 이순신이 다가와서 말릴 때까지 포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이 광경을 확인한
두 수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순천부사 권준도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쯔쯧, 개미를 잡는 데 쌍도끼를 쓴 격이군요."
기효근과 이순신이 지휘선으로 올라왔다. 원균은 그때까지도 눈싸움을 하며 으르렁대는
두 장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군졸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그대들이 이러고도 조선의 장수라고 할 텐가? 화살 하
나 유황 한 통이 아까운 마당에 이 무슨 짓인가? 그대들에게 왜선을 잡으라고 했지, 활과
총포를 허공에 쏘라고 했는가? 이 일은 귀영한 후 군율로 다스리겠다. 다시 이따위 짓을 하
면 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야. 오늘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전공을 세우도록 하라."
사천 선창이 가까워지자 왜 대선 열두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판옥선과 맞먹을 만큼 크고
단단한 군선들이었다. 병풍처럼 사천을 감싸고 있는 산중턱에서 왜군 사백여 명이 장사진을
치고 색색가지 깃발을 흔들어댔다. 마침 썰물 때인지라 왜선들은 뻘밭에 묻혀 꼼짝도 못했
다. 사천으로 접근하기 힘든 것은 연합함대도 마찬가지였다. 총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렸지만
미치지 못했다. 결국 눈앞에 뻔히 보이는 적을 향해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고
나발을 불 도리밖에 없었다. 산중턱에서는 간간이 흰옷도 눈에 띄었다. 왜군들에 의해 강제
로 끌려나온 사천의 백성들이었다.
"죽일 놈들!"
가족을 떠나온 장졸들의 얼굴에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동포를 향해 활과 총통을 쏠 수
는 없는 일이었다. 이순신의 지휘선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밀물이 되면 무조건 돌진합시다. 옥포에서처럼 말이오."
녹도만호 정운은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순천부사 권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그때는 기습공격이었으므로 승리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적들도 우리가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충분히 방비를 할 테지요. 정면돌파는 마른 볏단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우리가 접근하면 왜군들은 양쪽 산중턱에 숨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총을 쏠 겁니다. 이제 곧 해가 질 터인데 숲에 숨어 조총을 쏘는 적을 어떻게 당하겠어요.
설령 우리의 공격이 성공한다고 해도 왜군들은 모두 산으로 숨을 것이니 전공을 세우기 힘
든 것은 마찬가집니다."
둘러앉은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장수들은 왜선을 침몰시키는 것보
다 적의 수급을 거두는 데 마음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정운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권준
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전술이 있소?"
권준이 웃어 보였다.
"글쎄요. 그 전술을 찾자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게 아니던가요? 좌수사께서는 미리
생각하신 방책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권준은 화살을 이순신에게 넘겼다. 이순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대용에게 대형 지도를 가
져오도록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권부사의 말대로 곧장 돌진하면 적이나 우리나 사상자가 많이 날것이오. 그럴 바에야 차
라리 후퇴하는 척하며 왜선을 끌어내는 편이 좋겠소. 곤양 쪽에 영귀선과 좌부장 신호, 좌척
후장 정운, 그리고 경상우수영의 판옥선이 숨어 있다가 왜선들이 나오면 치는 것이오."
"그렇게 합시다."
원균이 선선히 응낙하였으므로 장수들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산그림자가 길게 동북쪽으로 늘어지기 시작하자 산중턱 여기저기에서 모닥불이 피어올랐
다. 전부장 이순신의 군선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섰고 그 뒤를 판옥선 서너 척이 따랐다. 조
총 소리가 콩을 볶듯이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퇴각하라!"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군선들은 순식간에 뱃머리를 돌렸다. 조총 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산중턱에 은거해 있던 왜군들이 정신없이 왜선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연합함대가 오 리
쯤 후퇴했을 때 밀물이 시작되었다. 열두 척의 왜선 중에서 여섯 척이 연합함대를 추적하며
바다로 나왔고, 나머지 여섯 척도 곧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주위는 어두
워져서 바로 옆에 있는 배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반격하라!"
흥양현감 배흥립이 이순신의 군령을 이어받았다. 호랑이가 그려진 거대한 방패연이 판옥
선 갑판에 놓여 있었다. 배흥립이 횃불을 든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이제 저, 썅! 쥐새끼들을 쓸어버리는 거다. 호연을 올려라."
군사들이 횃불을 기울여 방패연에 불을 붙이는 것과 동시에 판옥선은 백팔십도 회전을 했
다. 그 힘을 받은 방패연이 똑바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불꽃이 뚝뚝 떨어지는 연을 발견
한 연합함대의 판옥선들은 일제히 배를 돌려 쫓아오던 왜선과 정면으로 맞섰다.
"돌격!"
이언량의 돌격 명령과 함께 거북선이 물살을 헤치며 총통을 쏘기 시작했다. 김완과 신호,
그리고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세 척도 곧장 사천으로 나아갔다. 밤하늘에 난데없이 불덩이가
날고 흉측하게 생긴 요물이 미친 듯이 돌진해오자 사천의 왜군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뒷걸음
질을 쳤다. 거북선이 가장 화려한 왜 대선을 먼저 들이받았고, 김완과 신호, 그리고 원균, 기
효근, 우치적의 판옥선 역시 차례차례 왜선과 충돌했다. 용감한 왜군 몇몇이 거북선을 공격
하기 위해 개판으로 뛰어내리다가 숨겨둔 칼날에 찔려 즉사했고, 또 몇몇은 잠수하여 거북
선 후미로 접근하다가 꼬리 아래 포혈로 쏟아진 철환 세례를 받고 목숨을 잃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군선들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배를 돌린 판옥선들이 순식간에 횡으로 벌려 서서 왜선 여섯 척을 포위했다. 그리고 천자
총통과 지자총통으로 철환, 장군전, 피령전을 비바람처럼 발사하였다.
왜선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판옥선이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왜군들은 원숭이처럼
날아서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백병전에서는 왜군의 칼솜씨가 빛을 발했다.
"안 되겠다. 배후를 쳐라!"
"배후를 쳐랏!"
나대용이 이순신의 명령에 복창했다.
좌수영의 지휘선이 천천히 뒤로 빠지더니 왜 대선의 후미를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쿵 소
리와 함께 왜선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했다. 그순간 수많은 왜군들이 지휘선의 상갑판으로 날
아올랐고 상갑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날발이 구원의 뿔피리를 불자마자 배흥
립과 이순신의 판옥선이 달려왔다. 장군기를 움켜쥔 나대용이 이순신을 호위하며 이물 쪽으
로 물러났다. 왜군의 조총과 조선군의 불화살이 맞대결을 벌였지만 왜군의 우세로 끝나가고
있었다. 적을 너무 얕잡아본 것이 잘못이었다. 왜선은 좌수영의 지휘선이 접근하기만을 기다
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권준의 예언이 들이맞는 것일까?
이순신은 자신의 성급함을 탓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장수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한심한 일은 없지 않는가. 나대용이 뒤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장군! 어서 뛰어내리십시오. 곧 왜놈들이 들이칠 것입니다. 으윽!"
나대용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지더니 왼쪽 허벅지를 움켜쥔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총
탄을 맞은 것이다.
"나대용!"
이순신은 황급히 나대용을 끌어안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아랫입술을 얼마나 힘껏 깨
물었는지 피가 배어나왔다.
"악!"
그순간 왼쪽 어깨가 쇠꼬챙이로 뚫리는 것처럼 아파왔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면
서 눈앞이 가물거렸다. 스무 걸음 앞까지 왜군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 기절하면 죽는 거다. 정신 차렷! 이순신,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
렇게 죽으려고 그 고생을 했는가? 이순신, 넌 여기서 죽을 사람이 아냐. 이순신. 이순신. 이
순신.
그가 앞으로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밤하늘에서 거대한 호연이 불꽃을 뿌리며 왜군들의 머
리 위로 떨어졌다. 상황의 급박함을 알고 배흥립이 직접 얼레를 조종해서 연을 떨어뜨린 것
이다. 날벼락을 맞은 왜군들은 하늘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혼비백산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지휘선으로 뛰어오른 이순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순신을 끌어안고 마구 흔들
어댔다. 새파랗게 질린 권준도 이순신의 안색을 살폈다. 나대용은 허벅지를 부여잡고 끙끙
앓는 신음 소리를 냈지만, 이순신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말렸거늘…… 장군! 정녕 이렇게 헛되이 가시는 겁니까?
권준은 좀더 강력하게 출정을 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으응……윽!"
이순신의 눈가에 가늘게 경련이 일었다. 벌써 시뻘건 피가 등을 타고 발뒤꿈치까지 흘러
내렸다. 권준을 알아보고 오른손을 들어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권준이 다가가서 고개
를 숙이자 농담을 건넸다.
"이, 이것이었소? 이제…… 지나갔으니, 당분간 죽을 일은 없겠구려."
"장군!"
"호……들갑들 떨지 마시오. 전투가 끄, 끝날 때까지 내가 다쳤다는 소린 일체 마시오. 이,
이첨사!"
"예, 장군!"
방답첨사 이순신이 허리를 숙였다.
"자, 자네가 내 대신…… 지휘를 하게."
그리고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권준은 이순신과 나대용을 황급히 방답첨사 이순신의 판옥
선으로 옮겼고, 이순신은 지휘선을 이끌고 왜 선단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다. 사천의 왜선
을 모두 격침시킨 이언량과 정운, 신호가 합류하자 여섯 척의 왜선도 곧 화염에 휩싸였다.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은 산으로 피한 왜군을 쫓아 사천에 내렸다고 했다. 왜선의 잔해
가 모두 가라앉고 불꽃마저 완전히 스러질 때까지 이순신은 좌수사가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숨겼다.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으로 이동하여 야영한다는 군령만이 내려졌을 뿐이다.
궁수들은 활을 놓고 땔감을 모았으며 격군들은 노를 던지고 밥을 지을 채비를 했다. 피와
땀에 전 장졸들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비록 지친 육신이지만 마음만은 하늘
을 날 것처럼 가벼웠던 것이다. 옥포에서의 승리에 뒤이어 사천에서까지 적을 궤멸시킨 그
들의 가슴에는 점점 자신감이 차올랐다. 적어도 배와 배가 부딪치는 해전에서는 이길 수 있
다는 확신이 섰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려고 지휘선으로 몰려들었던 장수들은 그제야 좌수사의 부상 소식을
접하고 황급히 방답첨사의 판옥선으로 옮겨 탔다. 등을 보이며 돌아누워 있던 이순신은 장
수들의 다급한 발소리를 듣고 권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았다. 상체를 움직을 때마다
뼛조각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낙안군수 신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군, 어인 일입니까? 장군은 연합함대의 중심이십니다. 헌데 부상이라니요?"
권준이 돌아가기를 청했다.
"상처가 깊습니다. 좌수영으로 돌아가시지요.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에요. 시간을
지체해서는 아니됩니다. 독이 온몸으로 퍼지기 전에 속히 철환을 제거해야지요."
녹도만호 정운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출정한 지 하루 만에 함대 전체가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외다. 좌수사와 나군관은 부상
이 심하니 먼저 귀영하고, 우리는 원장군의 지휘를 받아 계속 싸우는 것이 어떻겠소? 왜놈
들에게 본때를 보여야 하오이다."
사도첨사 김완이 거들었다.
"그렇게 합시다. 모처럼 출정했는데 이렇게 맥없이 돌아갈 수는 없소."
이순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밀려오는 통증으로 말을 뱉기도 힘겨웠다. 그러나 지휘권
을 원균에게 넘겨야 한다는 정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지휘권을 넘기면 다시
찾기 힘들다. 내 군선들을 원균에게 넘길 수는 없다.
"궈, 권부사!"
"예, 장군."
"수술 주, 준비를 해주시게. 철환을 뽑아야지."
권준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안 됩니다. 이곳엔 의원도 없고 약재도 없어요. 좌수영으로 돌아가서 상처를 돌보셔야 합
니다."
이순신의 시선이 정운에게 향했다.
"정만호!"
"예, 장군!"
"그, 그대가 해주시게."
뜻밖의 부탁을 받은 정운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좌수사는 지금 생살을 찢고 뼈에 박힌 철환을 꺼내려는 것이다. 그가 수술을 집도할 사람
으로 나를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순신은 희미하게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한번 마음을 굳힌 이상 아무도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었다. 정운은 거절하라는 권준의 눈짓을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좋습니다. 소장이 하지요."
"소장도 돕겠소이다."
낙안군수 신호가 재빠르게 끼여들었다. 그는 부상당한 군사들을 치료한 경험이 많았다. 독
이 만약 뼈까지 스며들었다면 뼈를 깎고 독을 발라내야지만 불구를 면할 수 있다.
"좋소. 신군수도 도와주오."
이순신은 정운과 신호를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을 모두 밖으로 물리쳤다. 이언량과 송희립
이 곁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
기 싫어서였다. 낙안군수 신호는 차분하고 꼼꼼하게 수술 준비를 했다. 독주와 화로를 준비
하고 예리한 단도와 지혈에 필요한 무명끈을 가져왔다. 이순신은 눈을 감고 차분히 앉아서
준비가 모두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운은 막사 안을 서성이며 양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
다.
신호가 먼저 독주를 내밀었다.
"들이켜십시오. 참기 힘든 아픔일 것입니다."
이순신은 독주와 신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신호는 다시
돌돌 만 무명천을 내밀었다.
"혀를 깨물 수도 있고 어금니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을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자해를 막고, 비명을 질러 위신이 깎이는 것을 피하자는 배려였다. 이순신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정운에게 말했다.
"정만호! 그대가 명의 화타일 수 없듯이 나 또한 관운장은 아니오. 허나 구차하게 독주나
무명천에 의지하고 싶지는 않소. 내 오늘 그대의 손에 죽더라도 후회는 않으리다. 장수가 전
쟁터에서 죽는 것은 영광이 아니겠소?"
단도를 불에 달구며 정운이 대답했다.
"이깟 일로 죽음을 논하다니 지나치십니다. 팔을 보존하기 위해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자르
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운의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기는 이순신의 어깨 역시 마찬가지였
다. 총에 맞은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곧 닥칠 또다른 고통에 대한 예감이 그의 육체
를 전율시켰다.
"시작할까?"
이순신의 목소리는 물수제비를 넘는 차돌멩이처럼 가볍고 맑았다. 맨 처음 그는 이언량이
나 권준, 송희립 등에게 이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고, 어미가 제 새끼를 챙
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병법서에도 이르기를 '친하면 떼어
놓는다'고 했다. 물론 권준이나 이언량도 최선을 다해서 상처를 치료하겠지만, 그것은 그들
의 마음을 재삼 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상대를 제압하는 데는 때가 있는 법이다.
이순신은 비탈길에 박혀 있는 바위처럼 정운이 늘 마음에 걸렸다. 언제라도 굴러떨어져
그의 뒤통수를 갈길 것만 같았다. 궁술 대결에서 승리한 후 정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지기
는 했다.
그러나 정운은 원균을 만난 다음부터 공공연하게 좌수영의 전략을 비난하고 나섰다. 정운
은 조선 수군의 힘을 총집결하여 단번에 부산을 공격하기를 원했고, 이순신은 소탐대실해서
는 아니된다며 정운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느끼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정운
은 원균의 사람이 될 것이다. 원균의 말을 듣고 좌수영의 질서를 어지럽힐 것이다.
정운의 눈동자는 백호의 그것처럼 크고 푸른빛이 흘렀다.
백호가 사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노루나 사슴 같은 들짐승들은 백호가 달려들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쓰러져버린다. 충분히 달아날 시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짐승들은 백
호의 눈빛에 압도당해 죽음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백호의 눈
동자를 똑바로 맞받아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백호의 어슬렁거림을 참고 견뎌야 한다.
오늘 정운에게 그 용기와 인내를 보여주겠다. 삶의 의지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겠다. 이
수술은 권준의 말처럼 위험천만이다. 피를 많이 흘려 죽을 수도 있고, 혈도가 막혀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점괘와 천문이 나쁘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위험부담이 클수록 상
황은 더 극적이고,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감동 역시 큰 법이다. 이 수술에서 살아남는다면 조
선 수군의 신망을 단번에 얻으리라.
신호의 명에 따라 군졸 셋이 달려들어 이순신의 어깨와 두 팔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었
다. 벌겋게 달아오른 단도를 이순신의 눈앞에 내보인 후 정운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이라
도 늦지 않았으니 수술을 연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무언의 권유였다.
정운의 짙은 눈썹이 조금씩 떨렸다. 이순신이 단도를 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탓
이다. 은근히 오기도 생겼다.
정운은 처음부터 좌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릇 장수라면 힘으로 겨루고 술로 겨루
고 기예로 겨루다가도 서로 마음이 통한 후에는 호형호제하게 마련이다.
좌수사는 달랐다. 겉으로는 상대를 예우하고 치켜세우면서도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좌
수사가 웃을 때, 대취할 때 그는 살기를 느꼈다.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좌수사는 늘 깨
어 있었다. 장수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좌수사는 홀로 깨어 무엇인가를 되짚어보고 있었다.
정운은 좌수사의 그 결벽증이 싫었다.
원수사와의 관계를 살피기만 해도 좌수사의 옹졸함을 알 수 있다. 좌수사는 원수사와 마
주 앉기만 해도 돌처럼 굳어진다. 결코 약점을 잡히지 않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연합함대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두 장수의 몸과 마음이 하나로 합치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내가 만약 좌수사라면?
정운은 요즘 들어 부쩍 그런 공상을 자주 했다. 내가 좌수사라면 벌써 원균과 호형호제하
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도 위고 과거에 급제한 시기도 빠르며 전공도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라났다면, 마음을 열고 형으로 모시는 것이 당연하
다. 그러나 좌수사는 결코 원수사를 개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정삼품 수사로 격식에 맞게
응대하다보니 원수사도 심기가 상한 것이다. 아랫사람이 허리를 굽히기는 쉽지만 윗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기는 힘든 법이다.
정운은 오늘 좌수사의 얼굴을 인간의 얼굴로 되돌릴 작정이다. 인간의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까무라치기를 바랐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좌수사에게 원수사와 화해하기를 청하리
라. 조선 수군의 앞날을 위해서는 두 수사의 관계가 형제보다 더 돈독해져야 한다.
"시작하겠소이다."
정운은 왼손으로 이순신의 팔뚝을 움켜잡고 시커멓게 색이 변한 어깨에 단도를 갖다댔다.
"으윽!"
그순간 이순신의 몸이 움찔했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살이 타는 냄새가 방안을 채웠다. 비
명을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정운은 사정없이 살점을
좌우로 찢어 후벼 팠다. 이순신의 몸이 좌우로 요동을 쳤고 군사들은 그를 제지했다. 이번에
도 비명만은 지르지 않았다. 정운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제 뼈
에 박힌 철환과 그 독을 긁어내는 일만 남았다.
좌수사!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당신의 아픔을 세상에 토하시오. 당신은 인간이오.
살점이 타는 고통은 공맹이라도 이기지 못해.
정운의 눈길을 받은 이순신은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정만호, 단숨에 찢어주니 고맙소. 견딜만 하고려. 사지가 떨리고 심장이 벌떡벌떡대는 것
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자, 고통이 삶이란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
오.
이순신의 미소를 확인한 정운의 두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설명할 수 없는 역겨움과 분
노가 확 밀려왔다. 좌수사에게 농락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침착하게!"
신호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운은 독주를 이순신의 어깨에 콸콸콸 내리부었다.
살점이 씻겨 내려가면서 이순신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가슴을 베인 듯한 서늘함이 턱
밑까지 차올라왔던 것이다. 예리하게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 칼끝이 어깨뼈를 송곳처럼 찔러
댔다. 그때마다 그의 몸이 퉁퉁 위로 튕겨올랐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흘러나
오는 눈물을 삼켰다. 이제까지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창
으로 찔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이 아픔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불구덩이에라도 당장 뛰
어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장이 뚝 멎는 것을 느꼈다. 정운의 칼끝이 엄지손톱만한
철환에 닿은 것이다.
"이거닷!"
정운의 외침과 함께 이순신은 온몸에서 힘이란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리고 정운의 칼끝이 어깨뼈에 박혀 있는 철환을 뽑아내는 동안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귀가 멍해지더니 눈꺼풀이 스스로 감겼다. 거대한 별 하나가 땅으로 곤두박질치
는 것이 보였고 곧 어둠이었다. 혀가 뻣뻣하게 굳었고 손끝이 오므라들지 않았다. 아랫도리
의 묵직함도 사라졌고 코의 훈기도 맡을 수 없었다.
아, 죽음!
죽음이란 단어만이 주위를 맴돌았다. 점점 자신이 알던 사람들과 장소들, 그리고 사물들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망각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눈앞에 거대한 서책이
펼쳐졌다. 그 서책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되기로 결정된 것처럼 이리저리 펼쳐지다가
한곳에 멈추었다. 그는 그 책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거대한 강이 나타났다. 그 강에는 흰 돛배가 한 척 매여 있었다. 사람들이 말없이 배에 올
랐다. 건너편 강둑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하며 노래를 불렀
다. 거리가 멀어서 노랫가락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입모양을 똑같이 맞추어 계속 합
창을 했다. 그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희신 형! 요신 형!
두 사람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어서 배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그 뒤를 따라서 갑옷을 입은 장수들이 나타났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
는 그들 중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그들을 알
고 있었다. 그들은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었다. 걸음을 멈추었다.
배를 타서는 아니된다. 저곳은 죽음의 땅이다. 망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도대체 그대가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힐책은 바람을 타고 건너편 강둑으로부터 던져진 것이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나라가
있고 보살펴야 할 부하들이 있으며 나를 울타리처럼 믿고 따르는 처첩이 있고 자식들이 있
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있다. 아직 나는 그들을 위해 내 할 일의 백분의 일도 행
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의 발걸음은 느리고 나의 어깨는 힘겹다. 그러나 너무 쉽게, 너무 빨
리 안락의 땅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핑계대지 말라. 그깟 것들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대는 아직도 그대의 욕망을 붙들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명예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의 운명을 뛰어넘으
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중과부적임을 인정하라. 누가 그대처럼 살고 싶지 않으랴마는 아무
도 그대처럼 살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대의 삶은 그저 영광
된 죽음을 찾는 여정에 불과하다. 그대는 오늘의 기쁨을 누려야 하고, 오늘의 허무를 맛보아
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죽이는 그대에게 돌덩이 같은 삶이란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돛배를 기다려왔다. 그대만큼 이 배를 타기에
적합한 이는 없다. 그대는 매일매일 죽음 이후의 광경을 그려보지 않았는가? 세인들의 시선
을 그대의 죽음 뒤까지 확장시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가장 칭송받고 존경받는 순간들을
위해 그대의 하루를 죽이지 않았는가? 불멸을 꿈꾸지 않았는가? 두려워 말고 어서 배에 오
르라. 이 배는 그대의 집이자 거울이요, 몸이자 옷이다."
이순신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끝까지 버텼다. 거대한 힘이 그의 두 팔을 사정없이 끌어당
겼다. 배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돌아가겠다고 발버둥
을 쳤다. 그럴수록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그의 몸이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불화살처럼 갑판으로 튕겨올랐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자욱한 안개가 배를 감쌌다.
둥.
출항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이제 죽음의 땅으로 가는 것이다. 파도는 잔잔하고 바람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둥.
그런데…… 이것은 귀에 익은 북소리다. 낮고 은은하면서도 힘이 실린 소리, 송희립의 북
소리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인가?
"하하핫. 이제 정신이 드시오? 정만호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구려. 이렇게 감쪽같이 철환을
뽑아내다니. 의원으로 나서도 되겠소이다."
"과찬이시옵니다, 장군!"
검게 그은 펑퍼짐한 밤송이 얼굴, 원균이었다. 그 옆에 순천부사 권준과 녹도만호 신호가
앉아 있었다. 따가운 한 줄기 봄햇살이 군막 틈으로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원균이
그의 가슴을 가만히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움직이지 마시오. 오늘 하루는 송장처럼 누워 있어야 하오. 함부로 움직였다간 상처가 덧
나서 다시 피가 흐를 것이오."
"괘, 괜찮소이다."
이순신은 뒤에 서 있던 이언량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얼
굴을 찡그리거나 신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이언량에게 팔을 맡기고 기대어 앉은 그에게
원균이 농담을 건넸다.
"하핫, 역시 이수사는 대단하오. 벌써 두 차례나 이런 수술을 받았구려. 종성에서는 허벅
지였는데 이번엔 어깨라……. 보아하니 이수사는 쉬이 죽지는 않을 성싶소. 화살이든 철환이
든 모두 비껴 맞으니 말이오."
"전황은 어떻습니까?"
이순신의 원균의 농담을 무시하고 사천해전의 경과를 물었다. 순천부사 권준이 대답했다.
"왜 대선 열세 척과 소선 열 척을 격침시켰고, 적의 수급 열 개를 거두었습니다."
"수급이라니? 내가 수급을 거두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소? 도대체 누가 군령을 어겼소?"
군막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정수들의 시선이 모두 원균에게 향했다. 그가 바로
오늘 아침 왜 소선 두 척을 불사르고 수급을 거둔 장본인이었다.
"허어, 이수사,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시오? 왜선을 불태우고 나니 왜놈들의 시체가
떠오르기에 취했을 뿐이오. 과히 신경 쓰지 마시오. 정 마음에 걸린다면, 우리 공평하게 반
씩 나누어 가지십시다."
"공을 다투는 것이 아니오이다. 수급 하나를 거둘 시간에 살아 있는 적의 심장을 한 번
더 겨누는 편이 낫습니다. 소장과 약조를 하시지 않았소이까?"
원균이 어금니를 깨물며 대답했다.
"전투중에 수급을 베지 말자는 데 동의한 것이지 수급 자체를 거두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
었소. 에잇! 병문안 온 사람을 이렇듯 박하게 대할 수 있소?"
원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라좌수영 장수들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좌
수영을 방문한 손님이 아닌가? 겨우 수급 열 개를 거둔 것 가지고 장수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 장군!"
이순신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원균은 이미 지휘선을 떠난 뒤였다. 녹도만호 정운의 얼굴에
는 불만의 빛이 역력했다. 앞 뒤 재지 않고 군령부터 따진 것이 잘못이었다.
"정만호!"
이순신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정운을 택했다.
"예, 장군!"
"그대가 가시오. 가서 내 뜻을 전하도록 하오."
"뜻이라시면?"
정운은 곧바로 복명하지 않고 되물었다. 방금 벌어진 일을 똑똑히 보고도 이순신의 뜻을
되묻는 것은 그의 속좁음을 비웃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젯밤, 목숨을 맡겼음에도 정운의
태도는 변함이 없단 말인가? 순천부사 권준이 대신 대답했다.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전하셔야 합니다. 마침 소장의 배에 국화주가 한 병 있으니 가져
가시오. 신군수께서도 동행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분위기를 살펴 원수사와 술을 드셔도
좋겠고."
정운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두 사람이 나간 후 이순신의 주위의 장졸들을 물리치고 권
준과 둘만 남았다.
"나군관은 어떻소?"
"철환이 허벅지를 스쳤을 뿐이에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다행이군."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팔꿈치 아래로 감각이 없었고 어깨는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계속 치료를 해야 합니다. 좌수영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임시방편으로 뽕나무를 태운 잿
물과 바닷물로 소독을 하세요. 철환은 빼냈지만 독이 뼛속까지 깊이 스며들어 그것을 다 긁
어내지는 못했답니다. 당분간 장검이나 강궁을 쓰시면 아니됩니다. 잘못하다간 왼팔을 영영
읽을 수도 있어요."
"알겠소."
"장군! 청이 하나 있습니다."
권준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무엇이오!"
"원수사와 정면으로 맞서지 마십시오. 조선 천지에 힘이나 기세로 원수사를 당할 사람은
없어요. 맹획을 칠종칠금(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잡음)한 제갈량처럼 전쟁에서의 승리는
신이한 전략으로 얻는 것입니다. 말다툼이나 힘자랑은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어쨌든
이렇게 회생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저의 점괘가 틀리고도 기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순신은 손을 뻗어 권준의 양손을 움켜잡았다. 권준은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
음의 도리는 혼자 깨친다 하더라도 삶의 이치는 권준, 이 사람과 함께 짚어나가리라. 몸이
자꾸 뒤로 넘어가서 온전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연합함대는 천천히 고성땅 사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전투를 쉬고 그곳에서 진을
친 후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이순신은 침상에 몸을 뉘면서 권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군막을 조금 걷어주겠소? 햇볕을 쬐고 싶구려."
6. 빛나는 청년, 광해
"세자 이혼은 뛰어난 자질로 숙성한 데다가 평소 인효로 알려졌다. 군하가 사랑하며 떠받
드니 중흥하는 공을 돕기에 충분하고, 사방에서 은덕을 노래하며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
이라고 말을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이 오래 전에 결정되었으니 이제 군사를 총괄하는 명
을 상고할 때이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여 모든 관작의 임명과
상벌 등의 일은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도록 하노라. 영무에서의 의기를 드니 건곤이 다
시 열리는 것을 보겠고, 미앙궁에서 헌수하는 술을 마련하여 부자가 다시 즐길 때를 기대하
노라. 각자 추대하는 마음을 가져 함께 태평의 업적을 이루도록 하라. 정부에서는 중외에 유
시하여 모두 듣고서 알도록 하라. 이에 교시한다."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기축조
임진년(1592년) 6월 13일.
장대비가 꽤나 질기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선조는 안주에서 하루더 머물며 날씨를 살피자
는 승정원의 의견을 묵살했다. 대동강까지 이른 왜군의 추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4월 30
일, 한양을 떠나 몽진을 나설 때만 해도 개성쯤에서 한 열흘 버티다가 다시 환궁할 수 있으
리라 여겼다. 그러나 전황은 점점 불리해졌고 패전을 알리는 장계만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급기야는 5월 7일부터 머무르던 평양마저 위태로워져서 다시 더 북쪽으로 길을 나선 것이
다. 한양, 개성에 이어 평양까지 빼앗겼으니 이제는 조선 팔도를 모두 잃은 것이나 진배없었
다. 명나라에 원군을 청한 지도 한 달이 가까웠으나 아직 일언반구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러다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나라를 잃을 판이었다.
"영변은 진달래로 유명하다고 들었사옵니다만 늦봄 정취도 그에 못지 않군요."
세자빈 유씨가 낙수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녀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먼저
함흥으로 출발한 중전의 행렬을 따르지 않고 광해군과 함께 남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피난
살이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처음 길을 나설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대열에서 곧잘 뒤처
지던 세자빈이었는데, 이제는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옮겨가는 데도 이력이 붙었다. 개성에
머물 때는 선죽교를 찾고 평양에 들어가서는 모란봉을 오르고 싶어하더니, 이제 영변으로
간다니 뒤늦은 진달래 타령인 것이다.
그래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않고 묵묵히 자신을 따라온 세자빈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이
제 제법 코밑으로 수염이 흩어지고 구레나룻이 어렴풋하게 잡히는 열여덟 살의 광해군으로
서는 세자빈을 좀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작년에는 건저문제로 근심
이 많았고 왜란이 터지자마자 세자빈이 되어 궁중 법도를 익히느라 진땀을 빼더니 이제는
정처없는 피난살이인 것이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함께 피난길에 오른 인빈 김씨로부
터 음으로 양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중전과 후궁들, 그리고 세자빈은 하루
세끼, 상궁과 궁녀들은 하루 두 끼를 먹으라는 어명이 내렸으나 세자빈은 예사로 끼니를 걸
렀다. 처음에는 상궁과 궁녀들이 안쓰러워 자진해서 한 끼를 굶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허나
곧 자신에게 돌아오는 음식을 아껴 상궁과 궁녀들을 먹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자빈
을 모시는 상궁과 궁녀들 앞으로 음식이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광해군이 몇 번이나
중전 박씨에게 이 일을 아뢰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중전 박씨의 힘이 미치지 못할
만큼 인빈 김씨의 기세가 막강했던 탓이다.
"문을 닫으십시오, 빈궁. 평안도는 늦봄이라도 바람이 여간 쌀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오
늘처럼 비가 흩뿌리는 날엔 더하다오."
"예, 저하!"
세자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문을 닫았다. 섬돌에 서 있던 궁녀들이 황급히 뛰어올라
왔지만 그녀는 손을 휘이휘이 내저으며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 세웠다. 누란의 세월을 함께
지내는 마당에 구차한 궁중의 법도를 따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조선의 군왕이 왜군을 피해
몽진을 떠나는 것부터가 어차피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평양에 머물 때도 세자빈은
병들고 부상당한 군사들을 하루가 멀다 않고 보살폈다. 멀리서나마 따뜻한 말 한마디를 잊
지 않았고, 상궁과 궁녀들로 하여금 군사들을 정성껏 간호하도록 재삼 당부했다.
광해군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생각해보니 몽진을 떠나고부터는 단 하루도 동침한 적
이 없었다. 선조의 분노에 주눅 든 신료들을 다독거리고, 장계를 살펴 전황을 파악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팔청춘.
운우지락의 참맛을 알기 시작할 나이에 한 달 보름 동안의 독수공방이 얼마나 힘겨웠을
까. 어전회의가 길어지는 틈을 타서 세자빈을 찾은 것도 그녀의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은근히 장난기가 동했다.
"빈궁!"
그는 세자빈을 안고 모로 쓰러졌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발목을 잡고 버선을 벗겼다. 작
고 앙증맞은 하얀 발이 드러났다. 세자빈은 상기된 표정으로 황급히 발을 감추었다.
"저, 저하!"
광해군이 버선을 저만치 던지고 넉넉하게 웃었다.
"허어, 빈궁. 뭘 그렇게 놀라시오? 자 어서 이리 오시구려. 가까이 앉아야 정도 두터워진
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오나 저하! 해가 중천에 있사와요."
그가 그녀의 발을 획 잡아채며 속삭였다.
"빈궁, 이렇게 봄비가 내리는데 해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더구나 북녘에서는
해가 아주 일찍 진답니다. 부끄러워 말고 고개를 드시오. 사사롭게는 평생을 함께 할 부부가
아니오? 부부 사이에 감출 게 무엇이 있겠소."
그는 세자빈의 두 발을 높이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세자빈은 엉거주춤 엎드린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왼쪽 검지발톱이 빠지고 오른쪽 뒤꿈치에 피명이 들어 있었다. 때때로
가마가 들지 못하는 산등성이를 따라 강행군을 한 상흔이었다.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평양을 떠나면서부터 절뚝거리는 빈궁의 걸음걸이가 마음에 걸
렸다오. 아프면 내의원을 부를 일이지, 어째 발이 이렇게 덧나도록 놔두었습니까? 오늘이라
도 늦지 않았으니 나중에 내의원 허준을 찾으시오. 그 사람의 의술은 조선에서 으뜸이니 잘
치료해줄 겝니다. 쯔즛. 얼마나 아팠을꼬."
광해군은 양손으로 그녀의 왼발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종아리를 쓸고 복사뼈를
둥글게 감싼 후 발가락들을 하나씩 위아래로 젖혔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발등과 발바닥
을 정성스레 꾹꾹 눌러댔다. 세자빈은 발을 내맡긴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플 때나 편안
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 때나, 양손으로 입을 꼭꼭 틀어막은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발을 충분히 어루만진 다음 이번에는 세자빈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녀도 몸을 빼거나
사양의 말을 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따스한 보살핌에 감동한 그녀는 아까부터 눈물을 찔끔
찔끔 흘리고 있었다. 광해군은 말없이 그녀의 볼을 토닥거렸다. 얼마나 힘들고 무섭고 슬픈
나날이었을까? 남편의 품에 안겨 한바탕 울고 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고 깨끗해지리라.
실컷 우시오, 빈궁! 그대의 슬픔을 함께 나누리다.
세자빈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그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태산과도 같은 피로가 어깨와
눈꺼풀을 천근만근 짓눌러왔던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
다. 흐리멍덩하게 시간을 버려서는 아니된다. 이곳이 어디인가. 조선 팔도의 끝 영변이다. 이
제 이곳에서 물러나면 압록강이고 그 너머는 요동 땅이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라를 잃지
않을 대책, 왜군을 물리치고 개성과 한양을 다시 찾을 대책.
서애 대감이라도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그렸다.
5월 3일, 유성룡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지고 영의정 이산해에 뒤이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동인의 예측이 어긋남에 따라 윤두수, 정철 서인의 핵심 인
물들이 귀양에서 풀려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정계로 복귀했다. 몽진의 와중에도 선조는
당근과 채찍의 묘법을 잊지 않았다.
6월 5일, 명나라의 차관 임세록 일행이 전황을 탐지하기 위해 평양으로 왔을 때, 유성룡은
그들을 안내하여 왜군의 사정을 설명하는 소임을 맡았다. 유성룡은 임세록에게 중점적으로
알린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결코 조선이 왜와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이며, 또다른 하나는 전황이 불리하긴 하지만 조선의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왜적과
싸우고 있으므로 명군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
고 그는 조선군의 전의를 드러내기 위해 끝까지 평양을 사수하겠노라며 호언장담까지 했고,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몽진 대열에서 뒤쳐진 것이다.
"한음을 찾으십시오.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유성룡은 광해군에게 이덕형을 여러 차례 천거했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자신의 분신
과도 다름없다고까지 했다. 평양에서 몇 차례 만나보니 과연 이덕형은 인물 중에 인물이었
다. 큰 키와 번뜩이는 눈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하며, 거침없이 사서를 인용해가며 논리를
펴는 것이 유성룡에 버금갔다. 박식함만큼이나 세상을 읽는 눈이 밝았고 사고가 유연했다.
그런 이덕형이었기에 왜장 소서행장도 대화상대로 택한 것이리라.
이덕형은 지금까지 두 차례나 소서행장을 만나러 혈혈단신으로 적지에 뛰어들었다. 4월
28일에는 충주로 가다가 신립의 패전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고, 6월 9일에는 대동강을 건너
가서 소서행장과 협상을 벌였다. 소서행장이 끝까지 가도입명을 주장하였기에 협상은 결렬
되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덕형의 용기는 칭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은 이덕형도 영변에 없다. 이틀 전 평양을 떠나면서 명나라에 청원사로 간 것이다. 명
나라와의 교섭은 유성룡이 책임져왔지만 지금 그는 벼슬도 없고 평양에 남아서 싸우기를 고
집하므로 부득이 이덕형이 떠난 것이다.
명나라로 떠나기 전날 밤, 이덕형은 광해군을 찾아왔다. 자정이 훨씬 넘은 야심한 시각이
었다.
"세자저하! 주상전하께서는 내부(명나라로 들어감)할 마음을 굳히신 듯하옵니다."
이덕형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놓았다.
"뭣이라고? 아바마마께서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하셨단 말이오?"
"몽진을 떠나면서부터 계속 생각해오신 일이지요."
이덕형은 잠시 뜸을 들였다. 광해군의 화들짝 놀라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평양
을 빼앗긴 다음에는 당연히 요동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거론되리라는 것을 총명한 세자가 모
를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저렇듯 놀라는 척하는 것은 나 이덕형을 믿지 못해서이다.
"청원사로 가신다고 들었소."
"그러하옵니다. 왜군이 평양을 치기 전에 원군을 데리고 오라는 어명을 받았사옵니다. 하
오나 원군이 오기 전에 평양은 왜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옵니다."
"평양성이 함락된다?"
광해군은 이덕형의 막힘 없는 주장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든지 평양을 지키려고 중론을
모으는 마당에 함락을 단언하는 것은 역적으로 몰리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이덕형은 다시
침묵을 이어갔다. 광해군은 타인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면서 자신의 의사표시는 늘 뒤로
미루어두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광해군의 마음의 행로를 정확히 앞서 짚고 있었다.
"준비를 튼튼히 하셔야 되옵니다."
"준비라니? 무슨 말씀이오?"
광해군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었다. 평양이 함락되고 임금이 요동으로들어간다면 세자는
어찌 할 것인가? 이덕형은 바로 그 일을 묻고 있었다. 물론 광해군도 그 일이 닥쳤을 때를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발설해서는 아니된다. 사방
에 인빈 김씨의 눈과 귀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으며, 선조의 인빈 김씨에 대한 총애
가 여전하고 신성군에 대한 자애가 한결같으니 언제 트집을 잡아 세자를 갈아치울지도 모를
일이다. 약점을 잡혀서는 아니된다. 내부 이후의 계획을 말하는 것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길
이다. 이덕형 역시 그러한 사정을 모를 위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은
청원사로 가 있는 동안 조정이 요동으로 들어와버릴 수도 있으므로 미리 광해군에게 언질을
주려는 것이다. 광해군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는 했지만 섣불리 먼저 입을 열지는 않
았다. 무릇 군왕은 어떤 신하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덕형은 잠시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광해군이 질문을 되돌렸으니 그가 먼저 이야
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덕형은 무릎걸음으로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가서는 귀엣말로
속삭이듯 물었다.
"저하! 영무의 옛일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광해군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영무의 옛일이라면, 당나라 명황이 안녹산의 난을
만나 서촉으로 쫓겨갈 때 보위를 태자에게 전하여 태자가 영무에서 즉위한 사건을 말한다.
이덕형은 지금 양위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갈 때 광해군은
조선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 부자가 함께 요동으로 가면 이 나라는 주인 없는 나라가 될 것
이므로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세자가 끝까지 조선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광해군도 여
기까지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위는 생각지도 못했다. 결코 용상을 양보할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소?"
광해군이 근엄하게 꾸짖었다. 이덕형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광해군의 가슴을 찔러댔다.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면 이 한 목숨 끊어진들 무슨 후회가 있겠나이까. 세자저하! 주상전
하께서는 곧 저하의 의향을 물어오실 것이옵니다. 그때는 물리치지 마시옵고 적극적으로 어
명을 받잡도록 하시옵소서. 지금은 앞뒤를 가릴 때가 아니옵니다. 광영이 보이면 그 광영을
움켜쥐시옵소서. 왜군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저하께서 힘과 권세를 가지셔야 하옵니다. 저하!
저하께서는 이 망국의 위기가 다시없는 기회이옵니다."
광해군은 이덕형을 쏘아보았다. 무서운 사람이로다. 내 마음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자가 만일 나의 정적이라면 어찌 할 뻔했던고.
"알겠소. 그만 물러가도록 하오."
광해군은 서둘러 이덕형의 입을 막았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읽었으니 대화를 더 나눌 필
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어전에서는 내부 문제를 의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면서부터
공공연하게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주장했고 신하들은 선조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느라 진땀을
뺐다. 영변에 들어서면서 그의 주장은 힘을 더했다. 영변을 지키고 있어야 할 군사들이 한명
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군사들이 줄행랑을 친 마당에 무슨 수로 왜군을 막는
단 말인가? 선조는 평양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눈을 부
라리며 호통을 쳐댔다. 신하들도 선조를 설득하는 대신 요동으로 건너간 이후의 대책을 세
우는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세자저하! 병조판서 이항복 입시이옵니다."
세자빈이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광해군도 자리를
고쳐 앉았다.
"드시라 하여라!"
목이 짧고 코가 뭉툭한 이항복이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인물됨은 이덕형에 못 미
치지만 강직함과 충성심은 조선에서 제일 가는 신하였다. 한양을 떠나올 때는 도승지였는데
지금은 벼슬이 높아져서 병조판서였다. 전쟁중에 병조판서를 맡았으니 나라의 흥망이 그의
두 어깨에 달린 것이다.
광해군은 그의 반짝이는 두 눈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항복은 성격이 낙천적이고 농담을
잘해서 몽진의 힘겨움을 잘 감당해냈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얼굴은 웃고 있었으
며 기복이 심한 선조의 비위를 어렵사리 맞추었다. 그 많은 후궁과 상궁, 궁녀들을 별탈 없
이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도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의 얼굴도 어둡기 그지없
었다.
"회의는 끝이 났소?"
"그러하옵니다."
"평양에서는 소식이 없고?"
"아직 없사옵니다."
이항복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광해군은 그 침묵의 의미를 곁에 앉은 세자
빈을 물리쳐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눈치 빠른 세자빈이 자리를 비키자 이항복은 꾸부정
한 허리를 곧게 펴며 얼굴을 들었다.
"의주로 갔다가 전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부하기로 정하였사옵니다."
광해군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차갑게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정하신 일이오?"
이항복이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선조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편이 낫겠다는 판
단이 선 듯했다.
"주상전하께서는…… 안남국의 일을 예로 드셨사옵니다. 안남국이 멸망당하고 스스로 국
경을 넘어 입조하니 명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안남을 회복시킨 일이 있다. 과인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한다……하셨사옵니다."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광해군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바마마와 함께 내부하기로 한 대신은 누구누구입니까?"
"주상전하께서는…… 과인은 왜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요동으로 들어가서 죽겠노라. 과
인이 조선을 떠나 지극정성으로 대국을 받들면 명나라가 반드시 우리를 포용하여 받아들일
것이다. 경들 모두가 요동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병들고 지친 자들은 이곳에 남아서 서북
의 강계로 피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 이항복은 병이 없고 나이
젊으며 부모 또한 없으니 끝까지 전하를 뫼실 것이옵니다."
광해군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인 이항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웃음이 많고
고난을 즐기기까지 하는 충신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치솟는 눈물을 되삼키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전혀 없단 말인가?
광해군은 북풍 몰아치는 압록강을 연상하며 이항복의 울음을 잘랐다.
"다른 하교는 없으셨소?"
광해군은 자신의 이후 행로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 답답함을 곧바로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항복은 천천히 소매로 눈물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급히 세자저하를 뫼셔오라고 하셨사옵니다. 가시지요. 신이 앞장을 서겠사옵니다."
결국 이항복은 광해군이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세자의 신변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쉽게 언급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광해군은 그의 뒤를 따르면서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
다.
아버지!
그는 선조의 칭찬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갓 태어났을 때는 선조의 무릎에서 낮잠
도 곧잘 잤다지만,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생모인 공빈 김씨가 세상을 버린 후부터는 용안을
가까이에서 뵌 적도 드물었다. 아버지 선조의 마음은 인빈 김씨에게 옮겨갔고 임해와 광해
는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였다. 자식이 없던 중전 박씨가 그들을 돌보았지만 친어미의
손길처럼 따사롭지는 않았다. 임해가 계집을 탐하며 빗나가는 것과 광해가 대망을 가슴에
품고 두문불출하는데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형제는 결코 타인을 믿지 않았다. 친형제간이
나 부자간에도 그랬다.
철이 들기 시작한 여덟 살부터 세자가 된 열여덟 살까지 광해는 아버지의 변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죽은 아내와의 정리를 기억하며 그 자식들을 살필 만큼 가슴이
넓은 사내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들 형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특히 광해가 사서오경을
열독할 즈음 그의 노여움은 점점 커졌다. 사람됨이 무겁고 학식이 두터우며 예지가 눈부시
도록 빛난다고 신하들이 광해를 칭찬할수록 그는 광해를 멀리했다. 개천에 내다버린 자식이
어느 날 이무기가 되어 용트림을 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앞서간 선인들의 길을 모방하게 마련이다. 서책을 통해 선현의길, 용장의
길을 배우지만 범부들은 차라리 그런 길보다 제 아비의 길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
비의 식성을 닮고, 걸음걸이를 닮고, 눈매를 닮다가 어느덧 아비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것이
다. 그러나 광해는 늘 눈을 조금 더 높이 치켜떴다. 그는 아버지가 앉아 있는 용상, 아버지
가 웃고 화내고 어명을 내리는 그 자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앉기를 바랐다. 그는 아버지
처럼 변심이 잦은 사내가 아니라 가슴이 돌처럼 단단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
내가 되고 싶었다. 따라서 지금 아버지의 행적은 흠모하며 추종할 대상이 아니라 밟고 넘어
서야 할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적이자 내가 가장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생채기와도 같다.
왜란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일, 왜군을 피해 몽진을 떠난 일, 그리고 내부를 결정한 일.
광해는 이 모두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가슴에 깊이깊이 새겼다. 그러면서도 한입에 노
루 한 마리를 꿀꺽 삼킨 능구렁이처럼 침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총명함을 칭송했지만,
단 한 사람 그의 검게 그은 마음을 살피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 선조였다.
선조는 광해가 아무리 눈부시게 움직여도 그의 어두운 그림자를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작
년에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거론했을 때도 선조는 단칼에 그것을 물리쳤었다.
"자식은 그 아비가 가장 잘 아는 법. 광해는 세상을 바꿀 꿈으로 가득할 뿐 덕이 없다. 그
가 용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과인이 만든 제도와 과인이 내린 어명과 사랑한 후궁과 자식들
을 없앨 것이다. 아비를 존경하지 않는 자식에게 후사를 맡길 수는 없음이다."
그 후 광해는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며 선조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어명이 아니고는 용안을 뵙는 것도 극히 자제했다. 그렇게 하자
니 자연스럽게 군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신들과 답답하게 탁상공론을 하느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 패잔병이라도 붙들고 전황을 듣는 편이 나았다. 유성룡이나 이덕형처럼
사리에 밝은 대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료들이 하나같이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
의일을 들먹이면서, 옳은 덕이 사악한 기세를 제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죽어 쓰러지는
패잔병들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조총은 가하고 활은 약하다. 왜군은 빠
르고 조선군은 느리다. 덕과 예의를 논하는 군사는 아무도 없었다.
왜는 강하고 조선은 약하다.
전쟁에서 통하는 논리는 단 하나, 약육강깃뿐이었다. 약한 군사로 강한 적을 치면 패하게
마련인 것이다.
"어서 오시옵소서, 세자저하!"
내시감 윤환시가 서너 걸음 앞으로 뛰어나왔다. 광해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인빈의 개! 아바마마의 성총을 흐리게 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버러지!
"빈궁마마의 처소에 드셨다고 들었사옵니다. 혹 빈궁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윤환시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내가 빈궁의 다리를 주무른 것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광해군은 언제나 감시의 시선을 느꼈다. 물론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내금위에서 은밀히
따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체를 알수 없는 시선들이었다. 광해군은 그것이 선조의
명을 받아 윤환시가 부리는 내시들의 짓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몽진을 떠난 후로는 감시
의 그물망이 더욱더 촘촘해졌다. 어느 날은 지붕 위에서 인기척을 듣기도 했고, 어떤 날은
마루 밑에서 바삐 사라지는 그림자를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알몸을 내보인 것처럼 불쾌했
다. 마음만 먹는다면 놈들은 세자빈과 그가 동침하는 장면까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별일 아니오. 빈궁은 내시감이 여러 모로 보살펴줘서 고맙다고 그러더군. 내 그대의 후의
를 잊지 않겠소. 자, 어서 아뢰주시게."
윤환시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종종걸음을 쳤다.
"주상전하! 세자저하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감환 때문에 먹먹해진 선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해군은 자신만만하게 섬돌 위에 서
서 신발을 벗고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섰다. 절을 하는 동안 선조는 읽고 있던 서책을 뒤
적거리며 딴전을 피웠다.
"아바마마, 소자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병환은 차도가 있으신지요?"
"내의원에서 끓여주는 탕재를 먹었더니 기침이 좀 덜하고나. 그래, 세자는 어떠한가? 어제
오늘 계속 비를 맞았으니 감환에 걸리기 십상이다. 각별히 몸을 아끼도록 하거라."
"소자는 아무렇지도 않사오니 심려 마시옵소서."
광해군의 목젖이 뜨거워졌다. 난생 처음으로 선조가 다정하게 안부를 물은 것이다.
"좌의정 윤두수의 장계를 평안도 위험한 것 같다. 함경도를 벌써 왜군들이 점령했다는구
나. 남족으로부터 근왕병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명나라의 원군 또한 출정했다는 기별이
없다.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어리석고 무능한 임금의 탓이라고들
한다지?"
"아, 아니옵니다. 누가 감히 그따위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있겠사옵니까? 천운이 따르지 않
아서일 뿐이옵니다."
선조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천운? 그 천운이 조선이 아닌 왜에 내린 것은 누구의 탓인가?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고
가뭄이 이어지는 것은 누구의 탓인가? 궁궐이 화염에 휩싸이고 수만 권의 서책이 잿더미로
변한 것은 누구의 탓인가? 모두 과인의 잘못인가? 허허허, 그렇지. 과인의 잘못일 수도 있겠
지."
광해군은 마른침을 거듭 삼켰다. 선조는 타인에 대한 불만을 자학을 통해 극대화시키는
화법을 즐겨 썼다. 만인지상인 군왕이 먼저 상처를 입음으로써 그 아래 신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려는 것이다.
"대신들이 그러더구나. 과인은 걸주만도 못하니 용상에서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그리고 명나라로 도망쳐야 한다고 말이다."
"아바마마!"
광해군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대신들이 어찌 그런 대역부도한 주장을 폈겠는가? 선조
는 지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조는 방금 열거한 비판들을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다. 걸주에 비교되기는커녕 한고조 유
방과 같은 성군임을 자부하며 그 어느 군왕보다 용상을 튼튼히 지킬 자신이 있는 것이다.
벌써 보위에 오른 지 이십오 년이나 되지 않았는가. 그의 나이가 마흔을 갓 넘겼음을 염두
에 둔다면 아직도 이십 년은 족히 더 군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명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인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 허나 과인은 업신여기고 무군지죄(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범
한 자들의 잘못 또한 적다고 할 수 없다. 과인은 그들을 결단코 용서치 않겠다. 세자! 이곳
까지 어가를 호종한 신하가 몇이나 되는 줄 아는가? 서른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나머
지는 모두 어디에 있는가? 과인이 오랑캐의 검극을 피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때에
국록을 받아온 그 많은 신료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단 말인가? 그들 사림은 일찍이 공맹의 제
자라고 칭하며 과인까지도 가르치려고 들었다. 허나 그들은 지금 저 밖에 있는 내관과 궁녀
들만도 못하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던 충절은 어디서 코를 박고 있는 것인가? 좌의정과
송강은 과인이 부르자마자 밤을 지새워 달려왔다. 서애와 한음은 과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
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들이야말로 충신이다. 충신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 그러나 과인을
버리고 개인의 안일을 좇은 이들은 모두 엄벌로 다스리겠다. 그들을 벌하기 전까지 과인은
결코 용상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세자는 과인의 뜻을 알겠는가?"
"예, 아바마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몽진 행렬의 초라함은 선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한양을 벗어날 때는 제법 긴
행렬이 이어졌으나 개성에서 평양으로 올 때에는 반으로 줄어들었고, 다시 평양을 떠나 이
곳 영변에 도착하고 보니 그 수는 일개 현감이나 군수의 행렬에도 미치지 못했다. 든 자리
는 난 자리는 눈에 띈다는 옛말처럼, 선조의 외로움은 곧장 신하들을 향한 분노로 탈바꿈했
다. 광해군 역시 호종하는 신하들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 가슴을 쳤다.
유자들의 이율배반을 논한 한비자의 견해는 정녕 옳다. 군왕이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행
사할 수 있을 때에만 신하들은 신하된 도리와 충절로써 군왕을 섬기는 것이다. 변란을 만나
군왕이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의 신하들은 제 이익만을 챙겨 뿔뿔이 흩어
진 것이 아닌가. 한 나라의 군왕을 짚신 팽개치듯 버린 것이다. 유자들의 감언이설과 탁상공
론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세 치 혀가 만들어내는 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행동 자체를
살필 일이다.
"이런 신하들을 믿고 이곳에 눌러앉을 수는 없다. 생각해보아라. 우리가 평양에 그대로 머
물렀다면 군신이 왜적의 칼날 아래 어육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리라. 세자! 과인은 이 전
쟁을 이길 것이다. 이 전쟁을 이겨 과인에게 덧씌워진 잘못을 벗고 군왕을 업신여긴 자들의
목을 칠 것이다. 허나 조선의 군사로는 전황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과인은 내부하기로
결심했느니라. 승리를 위해서,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가를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
선조는 잠시 말을 끊었다. 광해군의 호응이 미미하다고 느낀 것이다.
"세자는 어찌 하겠는가?"
선조는 몽진중에 광해군이 많은 일을 하였으며, 그만큼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
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광해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동서로
나뉜 신하들 중에서 세자를 비난하는 자는 없었다. 유성룡과 이산해, 그리고 이덕형은 알현
할 때마다 꼭 한 마디씩 세자의 인품을 칭찬했다.
만약 이 전쟁이 시일을 오래 끌면 신하들이 나서서 양위를 주청할지도 모른다. 독초는 밑
뿌리까지 완전히 잘라버려야 한다.
"아바마마의뜻에 따르겠나이다."
광해군의 대답은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다. 지금 당장 어떤 입장을 내세웠다가는 선
조가 쳐놓은 덫에 단번에 걸리고 만다. 차라리 몸과 마음을 상대에게 내주는 편이 낫다. 어
차피 그의 행로는 어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과인의 뜻에 따르겠다?"
선조의 말꼬리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광해군의 의중을 읽기 위해 질문을 던졌는데 그 물
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것이다. 광해군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응시했다.
함께 압록강을 건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바마마는 요동으로 가고 나는 여기에
남는다. 군왕이 국경 밖으로 나갔으니 모든 권력은 나에게 위임되리라. 이덕형이 말한 기회
가 찾아오는 것이다.
"세자는 종묘위패를 받들고 근왕병이 올 때까지 버티도록 하여라. 오늘 이후로 세자는 국
사를 임시로 다스려 관작의 제배나 상벌등의 일을 다 편의에 따라 스스로 처결하도록 하
라."
드디어 분조가 결정된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압록강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대의를 잃지 않겠나이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충고를 덧붙였다.
"모름지기 군왕은 위엄이 있어야 한다. 신하들을 벌할 때는 동정이나 연민을 조금도 품어
서는 아니될 것이야.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 어
디에 분조를 둘 것인가?"
"일단 강계로 향했다가 강원도로 들어가겠나이다."
광해군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강원도? 적지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냐? 왜군이 평양과 함흥까지 밀고 올라온 마당에 강원
도로 내려간다는 것은 호구를 향해 제발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역시 광해는 독한 놈이다.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원병을 기다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강원도로 가겠다? 분조를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겠다? 광
해는 이 아비를 어두운 그늘로 밀어넣고 혼자만 양지에서 빛나고 싶은 것이다. 저런 흑심을
품은 놈에게 이 조정을 반으로 갈라줘도 괜찮을까? 내가 요동에 있는 틈을 타서 반정을 일
으키지는 않을까? 설마 전쟁중인데 이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을까? 아니다. 광해라면 능히 그
러고도 남을 놈이다.
"아바마마, 왜군은 동래, 대구, 상주, 충주, 한양, 개성과 같은 큰 고을을 점령하면서 곧장
북상하고 있사옵니다. 적의 선봉은 일당백의 강병이오나 적의 후방은 뱀의 꼬리처럼 허약한
구석이 많을 것이옵니다. 특히 강원도의 금강과 설악은 산세가 험하여 왜군의 발길이 미치
지 못한 곳이 많으니, 소자 그곳에 자리를 잡고 근왕병을 모으고 싶사옵니다. 그곳이라면 한
양과도 가깝고 산맥을 타면 영남과 호남에도 교서를 내릴 수 있사옵니다. 강원도에 근왕병
이 모이면 평양과 함흥까지 올라갔던 적도 보급로가 차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병법에도 이르기를, 적이 깊이 침입하여 여러 성읍을 통과했을 때에는
그 성읍을 중심으로 배후에서 적을 치라고 하였사옵니다."
"세자를 잃는 것은 이 나라 절반을 잃는 것이다. 명심하렷다."
선조는 광해군을 말릴 수 없었다. 이미 분조를 허락하였으니 그 분조를 꾸려나가는 것은
세자의 몫이었다. 또한 선조가 광해군의 청을 받아들인 것은 근왕병이 쉽게 모이지 않으리
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직접 교시를 내려도 군사들이 모이지 않는데, 광해군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으랴. 전공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죽는다면 화려한 장례를 치러주마. 네 무덤 앞에서 소리내어 통곡도 하마. 허나 네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환대도 기대하지 마라.
"중전과 비빈들, 그리고 빈궁은 과인과 함께 요동으로 갈 것이다. 전쟁터는 여자가 있을
곳이 못 되느니! 이틀간의 말미를 줄 터인즉 빈궁의 마음을 잘 다독거리도록 하여라."
"아바마마!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광해군은 목청을 돋우고 넙죽 엎드렸다. 조건 없이 권력을 넘기지는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세자빈을 끌어들인 것은 참기 힘든 치욕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털끝만큼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빈궁의 목숨을 담보로 내게 권력을 떼어
주며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틀 만에 분조를 꾸리기란 불가능하다. 신하들의 숫자가 절
대적으로 부족하고 분조를 호위할 군사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의
은혜가 강과 바다처럼 깊고 넓다고 말해야 한다. 이다지도 좁고 흙탕물 튀는 하해도 있단
말인가? 내 오늘은 이대로 물러가지만 다시는 이런 치욕을 감내하지 않으리라. 전쟁이 끝나
는 날, 조선의 주인은 바로 나 광해일 것이다. 민심을 끌어모아 천명을 받들리라.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여! 아무 염려 마시고 압록강을 철퍽철퍽 건너가소서.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이
나라 조선은 이 천덕꾸러기 아들 광해 혼자서 지키겠습니다.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치부,
이십오 년 동안의 군왕 노릇이 끝난 바로 그 압록강가에서 해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겠습니
다. 그러니 아버지여! 이 아들을 믿고 훠이훠이 가소서. 가시거든 쉽게 고개 돌리지 마시고
오랫동안 머무소서. 이 아들이 마지막 승전보를 전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선조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광해군의 흐트러짐 없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흡사
오늘을 학수고대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깊은 숨을 몰아쉰 후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야. 과인이 명나라의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다는 전갈을 받으면 세자는 지체 없이 의주로 오도록 해라. 승리의 길을 함께 달려보자꾸
나."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광해군은 침착하게 작별의 예를 차렸다. 선조는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서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절을 하는 아들도 절을 받는 아버지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이 모든 일
이 서로 다른 두 곳에서 따로따로 행해지는 것만 같았다. 광해군이 물러간 후에도 미묘한
긴장감은 황혼의 불그레한 어두움에 휩싸여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밤이 왔고, 그 밤에도 평
양전투의 결과는 전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구할의 절망 대신 일할의 희망을 붙들고 잠자
리에 들었다. 그 일할의 희망은 완벽한 절망보다도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끈끈하고 칙칙하게,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씨가 하마 꺼질까봐 잠을 설치는 이들
도 적지 않았다.
임진년(1592년) 6월 15일 오후.
암갈색 파발마 두 마리가 갈기를 휘날리며 나란히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중후한 사내
는 쉰이 훨씬 넘어 보였고, 장검을 어깨에 맨 사내는 서른 안쪽으로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
리했다. 나흘째 평안도를 뒤덮고 있는 먹구름은 오늘도 여전히 불쪽 하늘에 머물렀고, 간간
이 쏟아지는 빗방울은 그들의 붉은 융복을 흥건히 적셨다. 속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진
흙탕과 진배없는 언덕길 때문이었다.
"영상 대감! 쉬었다 가시지요?"
젊은 사내가 먼저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푸두둥, 울음소리와 함께 소나무숲 아래에 멈추어
섰다. 그제야 나이든 사내는 오른손으로 뒤목을 두덕거리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말을 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관은 아닌 듯했다. 사내는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제까지는 전투를 막는 고마운 비였건만 오늘은 퇴로를 막는 몹쓸 비로구나.
사내는 말에서 내려 뒷짐을 진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밥 짓는 흰 연기가 올라오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평양이 위태롭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이미 피난을 떠난 것이다.
"용주야!"
"예."
선전관 유용주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다가섰다.
"자발적인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유용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로운 죽음, 영웅적인 죽음을 떠올린 적은 있어도 자발적인
죽음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언덕 위에 서 있는 지하여장군을
바라보았다.
"어찌 할 수 없어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죽고만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더 이상 살아서 하늘을 우러를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죽음만이 전부인 순간, 그럴 때
가 있느냐?"
"없사옵니다, 영상 대감!"
사내는 시선을 확 앞으로 당겨 유용주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흰머리가 가득하고
수염도 반백이었지만, 사내의 각진 턱과 오뚝한 콧날은 세월의 부침을 이겨내고 있었다. 누
가 보더라도 당장 호감이 가는 얼굴, 세상을 읽는 지혜와 맑은 단심이 담겼을 것만 같은 얼
굴, 유용주는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래두 왜 고집을 피우는 게냐? 그리고 영상 대감은
또 무슨 말인고? 벼슬길에서 쫓겨난 지가 언젠데……."
유용주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비록 유성룡의 조카뻘이지만 함부로 친근감을 표현할
수 없었다. 서애 유성룡이 누군가.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한 후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가 아닌가.
그러나 오늘 유성룡은 자꾸 유용주의 말투를 걸고넘어진다. 자발적인 죽음과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권고. 그 사이에서 유용주는 유성룡의 마음을 읽으려고 애써본다. 하지만 유성룡의
표정에서 그 속마음을 읽기란 불가능하다. 그만큼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계속하시지요."
유용주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웅크렸다. 더운 김이 그의 양어깨 위로 어질어질 피
어올랐다. 빗방울이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무엇 말이더냐?"
유성룡은 유용주에게 되물었다. 아내가 죽고 쉰 살 고비를 넘기고 부터는 종종 약속시간
이나 물건을 놓아둔 곳도 깜박깜박 잊었다. 약관 스무 살 때는 사서삼경을 줄줄 읊던 비상
한 기억의 소유자였건만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그마저도 차츰 흐릿해지는 모양이다. 문득
퇴계 선생을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열아홉 살에 관악산으로 들어가 『맹자』를
재독했고, 스무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춘추』를 익혔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도산의 퇴계
문하에서 『근사록』을 익혔다. 그때 퇴계의 나이, 예순둘이었다. 퇴계는 준수한 외모만큼이
나 박학한 유성룡을 처음부터 아꼈다. 그리고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 젊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곤 했다.
"네 자신을 너무 믿지 말라. 도를 깨치는 공부는 천재와 둔재가 벌이는 놀이가 아니니라."
건망증이 심해질수록 스승의 말씀이 새록새록 새롭다. 예전 같으면 한 번 읽고 버릴 책도
두 번 세 번 거듭 읽는다. 그래서 요즈음은 책을 읽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니라 책에 손때를
묻혀 더럽히기 위해서 본다는 것이 더 옳다. 그러자 행간에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 시간의
무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열함, 삼라만상의 오묘함, 군신 관계의 변화무쌍함, 그리고 생사
고락의 단순함이 자주 손에 잡혔다.
"자발적인 죽음 말이옵니다."
유용주가 기다리다 못해 답을 재촉했다.
"아아, 그래…… 자발적인 죽음!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그런 충동을 느낀다지만 내게는
그딴 것이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지. 허나 인생살이에서 예외는 없나보구나."
"대, 대감!"
유용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양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이라도 하시겠다
는 겐가? 안 된다. 결코 아니될 일이다.
유성룡은 고개를 돌려 달려온 길을 어림짐작해보았다. 지금쯤은 평양이 완전히 왜군의 수
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남아 있던 장졸들은 어찌 되었을까?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평양
의 백성들은 어떻게 죽음의 땅을 벗어났을까? 윤두수가 대동강을 건너 왜적을 기습하겠다고
했을 때 왜 말리지 못했던가? 그의 눈에는 회한의 눈물이 어리었다.
6월 14일 자정, 좌의정 윤두수는 고언백에게 사백 명이 넘는 군사를 맡겨 은밀히 능라도
에서 대동강을 건너 왜진을 치도록 했다. 처음에는 기습을 당한 왜군들이 허둥지둥대며 자
멸하는 양상을 띠었지만 동이 트자 전세는 곧 역전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삼백 명이 넘
는 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백여 명의 군사들만이 왜군의 칼날을 피해 대동강 상
류로 냅다 달아나서 왕성탄을 건너 무사히 돌아왔다. 그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
어졌다. 대동강 물이 불어 제대로 강을 건너지 못하던 왜군들이 왕성탄의 수심이 얕다는 사
실을 알고 밀물처럼 몰려든 것이다. 적군을 위해 길 안내를 해준 꼴이었다.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전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유용주만을 데리고 허겁지겁 평양성을 떠났다. 영변 근방에 이르자 몽진 대열이 이미 박천
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분조가 결정되었으며 선조 일행은 의주로, 광해군 일
행은 강계로 향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광해군은 선조를 배웅한 후 종묘사직을 받들고 출
발하였기에 아직 영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유성룡은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광해군을 먼저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이 나라 조선에 태양이 둘이 된 것이다.
"대감! 조선 수군이 계속 승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좌악 퍼졌습니다. 전라도 쪽
에서 장사치들이 배를 타고 올라오는 것만 봐도 아직 그쪽은 안전한가봅니다. 의병들도 곳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낙담하지 마십시오."
유용주는 유성룡의 울적한 기분을 바꾸기 위해 수군과 의병의 승전 소식을 전했다. 유성
룡도 그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승전 장계는 5월 23일에 도착한 것 하나뿐이
었다. 나머지는 순전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이므로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수군이 잘 싸우고 영남과 호남에서 의병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임금이 전의를 잃고 압록강
을 건너버리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 머리가 잘려나갔는데 꼬리와 팔다리만 튼튼하다
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전하를 뵙고 나면 자네는 곧바로 배편을 이용해서 전라좌수영으로 가도록 해. 알겠
는가?"
"예, 대감!"
조정에서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가자는 의견과 함께, 황해를 통해 전라도로 내려가자
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전라도의 사정을 좀더 확실히 검토해서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되면
압록강을 건너는 것보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선의 임금이 국경을 넘
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의병을 일으키는 버팀목이 될 수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이미 의주로 가고 있다. 의주로 간다는 것을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겠다는 뜻이다. 백성들도 그런 임금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세자를 앞세워 아무리 민심
을 수습하려 해도 백성은 자기 나라를 버리고 떠나려는 군왕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
게 해서든지 압록강 근처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의주로 가느니 차라리 배를 타고 전라
도로 내려가자고 설득하리라.
"저, 저길 보십시오."
유용주가 갑자기 손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켰다. 피난 행렬이었다. 붉은 갑옷을 입고 대열
을 이끄는 사내는 광해군이 분명했다. 분조를 맡은 날부터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어던진
것이다.
유성룡과 유용주는 황급히 말에 올라 언덕을 내려갔다. 그들의 말발굽 소리에 놀란 피난
민들이 우왕좌왕대며 숲으로 뛰어들었다. 광해군이 말에서 내려 유성룡의 손을 마주잡았다.
"반갑소이다, 대감. 대감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
다."
유성룡이 길바닥에 꿇어 엎드려 중벌을 청했다.
"세자저하, 신 유성룡 평양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도망쳐 나왔사옵니다. 엄히 벌하여 주
시오소서."
광해군이 유성룡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일행과 떨어져 숲으로 들어갔다.
주안상을 차리고 회포를 풀 여유가 없었다. 광해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분조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유성룡은 입맛이 썼다. 그는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했었다. 둘로 나눌 조
정도, 둘로 나눌 신하나 군사도 없지 않은가? 하나로 똘똘 뭉쳐도 왜적과 맞서기 힘든 판에
그나마 있는 조정을 둘로 쪼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전쟁 전부터 소리소문 없이 퍼진
선조와 광해군의 불화는 이제 웬만한 백성이라면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마
당에 분조하여 임금과 세자가 각기 다른 길을 간다면, 이는 두 사람의 불화를 확인시키는
것이면서 결별로까지 비칠 수 있다. 두 개의 교지, 두 개의 어명 앞에서 장수들은 어리둥절
할 것이다. 광해군이 유성룡의 물기 어린 눈을 응시했다.
"아바마마께서는 내부를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순간 유성룡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황급히 무엇인가를 물으려다 말고 소매로
눈물을 쓰윽 훔친 다음 목청을 가다듬었다.
"왜 만류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원군과 함께 돌아오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지 못해 왜군의 칼날에 쓰러지느
니보다 차라리 안전하게 요동으로 피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유성룡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말라붙은 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세자저하! 저하께서는 명나라를 믿으시옵니까?"
광해군이 조금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명나라는 예와 도를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천자의 나라가 조선을 배반할 리 있겠습니
까?"
유성룡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명나라가 우릴 배신하고 왜를 돕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명나라는
쉽게 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들은 결코 예와 도에 따라 우리를 돕지는 않사옵니
다. 저들이 조선을 도울 때는 저들의 안위가 위태롭다고 판단되는 순간이옵니다. 지난 두 달
을 돌이켜보시옵소서. 저들이 공맹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벌써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였을 것
이옵니다. 하오나 저들은 임세록을 보내 우리를 살피고만 있사옵니다. 이런 와중에 주상전하
께서 압록강을 건너시면 저들은 전하를 볼모로 잡을 것이옵니다."
"볼모라고요?"
광해군의 목소리가 커졌다. 영특한 청년 광해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세자저하! 생각해보시옵소서. 저들이 만약 원군을 보내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당
연히 전리품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그때 조선의 임금이 저들 손에 있다면 더 많은 전리품을
취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원군을 보내지 않아서 조선이 왜의 수중으로 들어간다면 명군은
요동에서 왜군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그때 왜군의 군량미와 무기를 지원하거나 직접 군사
로 끌려나온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조선의 임금을 내세우는 것 이상 좋
은 방책이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조선의 임금을 요동에 잡아두는 편이 어느 모
로 보나 득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늑대의 발톱을 피하기 위해 호랑
이굴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또한 저들은 주상전하와 세자저하를 두고 끊임없
이 저울질을 할 것이옵니다. 결국 조선의 앞날이 저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니 전쟁에서
이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유성룡의 주장은 한 치도 틀린 바가 없었다. 그때까지 광해군은 유성룡이 명나라에 끊임
없이 문서를 보내는 것을 보고, 그가 명나라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것은 큰 착각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우! 역시 서애 대감이십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그렇지만 이미 분조가 꾸려졌고
아바마마도 의주로 떠나셨으니 앞으로 이 일을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신이 우선 주상전하를 뵈옵고 압록강을 건너서는 아니되는 까닭을 주청드릴 것이옵니
다."
"그래도 기어이 가시겠다고 하면?"
"신이 압록강에 몸을 던지겠나이다."
유성룡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유성룡이 목수믈 걸고 붙든다면 아바마마
께서 마음을 되돌릴 가능성도 있다.
광해군은 선조가 국경을 넘지 않은 상황에서 분조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선조를
대신해서 이 나라를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호랑이가
여전히 산에 머문다면 여우가 나서서 힘자랑을 할 틈이 없어진다.
"대감의 충정은 알겠어요. 허나 아바마마께서는 압록강을 건너가실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명나라를 믿으시니까요."
"저하!"
유성룡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침묵했다. 멎었던 빗
방울이 다시금 흩뿌리기 시작했다. 유성룡은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기어이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광해군의 마음을 다독일 기회가 없는 것이다.
"세자저하! 주상전하께서 내부하시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사옵니다. 저하 혼
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지금의 전세를 뒤집을 수 없사옵니다. 주상전하께서 압록강을 건너셨
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백성들은 주저앉고 말 것이옵니다. 굽어살피소서."
유성룡은 광해군이 은근히 분조를 바라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조 곁에서 뒤치다꺼
리를 하는 것보다 자신의 세력을 지니고 전쟁터로 나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아바마마의 뜻입니다."
광해군은 모든 것을 어명으로 돌렸다. 유성룡은 물러서지 않고 광해군의 아픈 곳을 찌르
기 시작했다.
"분조의 행로를 어디로 정하고 계시온지요?"
"강계를 거쳐 강원도로 들어갈 생각입니다만……."
유성룡이 말을 잘랐다.
"아니되옵니다. 강원도는 이미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사옵니다.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올
라오는 왜군은 난폭하기가 이를 데 없사옵니다. 특히 적장 가등청정은 간자들을 풀어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조정 중신들과 왕실 족친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사옵니다. 헌데 그곳
으로 가시다니요. 절대로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광해군은 유성룡의 만류를 뿌리쳤다.
"이런저런 사정을 따지다가는 아무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왜군이 이미 함경도로
진입했다고 하니 오히려 강원도는 안전할 것입니다. 나는 강원도로 가겠소. 거기서 죽는 한
이 있더라도 말이오."
유성룡은 광해군의 불끈 쥔 두 주먹을 바라보았다.
"저하!"
선조와 광해군은 무척 다른 성품을 지녔다. 선조는 인간을 중요시하며 순간순간의 임기응
변에 능한 반면, 광해군은 원칙을 지키면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역시 한핏줄인지라 공통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중 하나가 평상시에는 신하들
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수의 뜻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중요한 사안은 반드시 혼저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군왕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가기
를 고집했고 세자는 강원도행을 굳혔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만
약 선조가 요동에 가서 명나라의 볼모가 되고, 광해군이 강원도로 가서 왜군의 포로가 된다
면 이 전쟁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빠져든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니 이마에서
진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저하! 강원도는 죽음의 땅이옵니다. 차라리 신과 함께 박천으로 가시옵소서. 가서 함께
주상전하의 요동행을 만류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이미 어명을 받았습니다. 분조를 이끌고 돌아가면 어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지요. 아바마
마를 설득하는 일은 대감이 수고해주십시오. 만약 요동으로 들어가겠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
으시면 대감이 아바마마를 호종해야 할 것입니다. 대감이 아바마마의 곁에 계시면 저도 마
음놓고 강원도로 내려갈 수 있겠습니다. 자,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요. 어서 박천으
로 가십시오."
광해군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유성룡은 이 젊은이의 호기가 기특하면서도 불안한 마
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선의 세자가 왜군의 포로가 된다면 장차 그 일을 어찌 할 것인
가? 하지만 지금은 천운을 빌 도리밖에 없었다.
"저하, 그럼 저와 한 가지 약조를 해주십시오."
"말씀해보세요."
"강원도로 가시되,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거든 지체하지 마시고 주상전하 곁으로 돌아오
셔야 하옵니다. 저하를 잃는 것은 이 나라 전부를 잃는 것과 다름없음을 유념하소서."
"그렇다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갈 순 없습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심려 마시옵소서. 주상전하와 세자저하께서 한곳에 거하시
면서, 세자저하가 앞장을 서시고 주상전하께서 뒤를 받치신다면 백성들의 마음도 돌아설 것
이옵니다. 어리석은 신의 말을 잊지 마시옵소서."
"알겠습니다. 꼭 그리 하리다. 부디 아바마마를 잘 보필해주세요. 그리고 중전마마와 빈궁
도 살펴주시구요."
"알겠사옵니다, 저하!"
유성룡은 질퍽질퍽한 땅에 이마를 묻으며 절을 올렸다. 광해군은 노신의 차디찬 손을 잡
고 건강에 각별히 유념하기를 당부했다.
유성룡과 유용주는 분조와 헤어져 북으로 말을 달렸다.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더니 뇌성벽
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맞바람에 실려 온몸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
나갔다. 까마귀떼가 까악까악 울음을 토하며 남쪽으로 내려갔고,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늑대
들의 긴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여해!
유성룡은 이순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승전 장계를 올려준다면 선조의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으리라. 의병의 승첩 소식도 간간이 들려오지만 선조는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왜군과 싸우기에 의병일 터이지만 언제 마음을 바꾸어 조정을 공격할
지 모른다고 여겼다. 특히 선조는 전라도 근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정여립의 잔당이 아닌
가 의심했다. 그들의 승리가 보고될 때마다 어떻게 유독 그곳에서만 승리할 수 있느냐, 그들
이 미리부터 군사들을 모으고 전쟁 준비를 했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 일쑤였다. 그러므
로 의병이 아닌 관군의 승전 장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관군은 상주와 충주
의 방어선이 뚫리고 한양, 개성, 평양을 차례로 잃으면서 후퇴에 후퇴만 거듭하는 실정이었
다. 믿을 곳은 수군뿐이었다.
박천이 가까웠다. 임금을 따라 피난을 나선 행렬이 눈에 띄었다. 백성들의 모습은 비참 그
자체였다. 끼니를 잇지 못해 앙상한 얼굴,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어깨, 병자와 노인들, 패잔병
들의 신음이 갓난아기들의 울음과 뒤섞였다. 유성룡은 그 광경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는지, 고
개를 돌린 채 말채찍을 더욱 세게 휘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갑자기 갓을 쓰고 술병을
옆구리에 낀 사내가 유성룡의 앞을 막아 섰다.
"워어어!"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앞발을 허공으로 짓차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따라오
던 유용주가 장검을 빼어 들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웬 놈이냐?"
사내는 번뜩이는 칼날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술병을 들고 탁주를 두어 모
금 들이켠 후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허허허! 대감, 오래간만이오이다."
유성룡은 눈을 찡그리며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광대뼈가 툭
불거졌지만 그는 틀림없는 조선 제일의 명필 석봉 한호였다. 유성룡은 급히 말에서 내려 한
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경홍(한호의 자), 이 사람아!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게야? 자네를 얼마나 찾았다고."
유성룡은 왜군의 침입 소식을 듣자마자 사람을 보내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한호를 찾았었
다. 명나라에 전황을 알리고 원군을 청하기 위해서는 공문을 맡아서 쓸 사람이 필요했던 것
이다. 그때 이미 한호의 글씨는 명나라 조정에까지 이름이 드높았다. 그러나 한호는 유성룡
에게 달려오지 않았는데, 연통을 넣은 지 근 두 달 만에 낯선 박천땅에서 마주친 것이다.
"허허, 천하의 서애 대감께서 왜 소인 같은 놈을 찾으십니까? 거참 재미있소이다그려."
한호의 입에서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불콰한 얼굴을 보니 낮술에 대취했음이 분명했다. 나
라가 망하는 판에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유성룡은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분노
를 감추고 한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허헛. 조선 제일의 명필이 별말씀을 다 하는구먼. 자네가 나랄ㄹ 위해 큰일을 할 때가 왔
다네."
한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딸꾹질을 해댔다.
"꺼어억. 『황정경』이라도 한 권 써드리오리까? 명나라 사신들과 음풍농월하는 것도 나
쁘진 않습죠. 허나 우선은 늘어지게 눈을 붙일 방이 필요합니다. 한 열흘 노숙을 했더니 뼈
마디가 쑤시고 손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요. 이래가지고는 하늘 천자도 제대로 쓸 수 없겠
습니다. 계집이 있다면 더욱 좋겠습죠. 얼어붙은 몸뚱아리가 슬렁슬렁 더 빨리 녹지 않겠습
니까?"
유성룡은 유용주가 타고 온 말을 가리켰다.
"어서 오르시게. 나와 함께 가시게나. 자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들어줌세."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습니다그려. 대감께서 소인에게 말을 다 권하시고. 좋습니다, 까짓
거. 대감 곁에서 며칠 묵도록 하지요. 전하를 뵈온 지도 꽤 되었습니다그려."
한호가 비틀대며 말에 오르자, 유용주가 그 앞에서 말고삐를 잡았다. 유성룡은 내심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호가 왔으니 일은 한결 쉽게 진행될 것이다. 유성룡이 밤낮 없이 글
을 쓰고 한호가 일필휘지로 그것을 옮겨 적는다면, 명나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
의깊게 살필 것이다. 전쟁중에도 격을 잃지 않고 정성스럽게 공문을 보냈다는 인상을 주면
그것으로 일단 반쯤은 접고 들어가는 것이다. 말에 오른 한호는 계속해서 술병을 높이 치켜
들고 술을 마셔댔다. 그 술이 전부 떨어질 즈음 그들은 마중 나온 병조판서 이항복을 만났
다. 이항복의 얼굴은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대감, 어서 오시옵소서.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유성룡은 고개를 끄덕인 후 옆에서 비틀대는 한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이항복은
한호의 존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유성룡이 한호의 대답을 막아섰다. 한호가 대취한 것을 알면 대쪽같은 이항복이 그냥 있
을 리가 만무했다.
"석봉이 지치고 피곤한가보이. 병판이 온돌방 하나만 마련해주시게. 관기도 있으면 붙여주
고."
7. 식인
사헌부가 아뢰기를,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
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
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도성 안에 이와 같은 경악스런 변이
있는데도 형조에서는 무뢰한 기민이라 하여 전혀 체포하거나 금하지 않고 있으며 발각되어
체포된 자도 또한 엄히 다스리지 않고 있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포도대장
으로 하여금 협동하여 단속해서 일체 통렬히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27년 1월 17일 병신조
임진년(1592년) 7월 7일 저녁.
허균은 어린 딸 설경의 손을 잡고 초가집 앞마당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함흥, 북청을 지나
이곳 단천까지 오는 데 꼬박 두달이 걸렸다. 몸이 무거운 부인 김씨 때문이었다. 소달구지에
어머니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어린 딸을 싣고 험한 산길을 넘다보니 왜군이 바로 발뒤꿈치
까지 쫓아왔다. 처음에는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몸을 피할 작정이었으나 왜선이 강릉에 정
박한다는 소문을 들은 후 피난길을 함경도 쪽으로 바꾸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근왕병을
모은다는 소식과 함께 평양에 머무르던 조정도 곧 함경도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임금과 대군들이 머무는 곳이라면 다른 곳보다 더 안전하리라는 것이 피난민들의 공통된 생
각이었다.
이제 다섯 살을 갓 넘긴 설경은 높은 산과 푸른 강을 지나는 소달구지 여행을 즐거워했
다. 호기심 많은 병아리처럼 눈을 반짝반짝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면, 그도 피난살이의
피곤함을 잠시 잊고 딸아이의 웃음에 젖어들곤 했다.
설경이 단천에서 관심을 쏟은 대상은 온몸이 까만 털로 뒤덮인 삽살개였다. 초가집 주인
강노수는 삽살개가 열흘 전 새끼를 네 마리나 나았기에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며 신
신당부를 했다. 허균은 강아지를 한 번만 안아보자고 보채는 설경을 번쩍 들고 마루턱에 걸
터앉았다.
"설경아! 이제 곧 네 동생이 태어날 거란다."
"동생? 강아지보다 이뻐?"
설경은 눈을 깜박이며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그러엄! 천 배 만 배 이쁘지. 이제 우리 딸도 동생이 생기니 좀더 의젓해야겠지?"
"초희 고모처럼?"
허균은 삼 년 전에 죽은 누이의 삶을 입버릇처럼 딸에게 들려줬을뿐만 아니라, 누이의 호
인 난설헌에서 가운데 글자로 딸의 아명을 지었다. 그래서일까? 설경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
고 할 때마다 초희 고모를 입에 올렸다.
"그래, 초희 고모처럼!"
허균은 설경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꺼칠꺼칠한 수염이 싫은지 설경이 좌우로 고개를 돌
려댔다. 설경의 콧김이 그의 뺨에 와 닿았다. 이 어린 것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내
가 없으면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의 피난살이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쌀 대신 보리나 수수
따위를 먹는 것이 힘겨울 따름이었다. 인심이 점점 야박해져갔지만 아직 왜군과의 전투를
치르지 않은 곳이라서 사람들의 말투나 걸음걸이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에는 아무리
왜군이 날고 긴다고 할지라도 이곳 함경도까지 올라올 수 있겠느냐는 자만심이 섞여 있었
다. 허균은 금강산 언저리에서부터 친형인 허봉과 스승 이달의 문우들을 많이 만났다. 시문
으로 이름이 높은 선비들의 집에는 대부분 두 사람의 시가 대청마루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허균이 허봉의 하나뿐인 아우이자 이달의 수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각별히 뒤를 봐주었다.
죽은 형과 행방불명이 된 스승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기분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
다. 허균 역시 몇 편의 시를 지어 밥값에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북청을 지나면서부터는 이
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금강산에서 출발한 허봉과 이달의 산천구경도 함흥에서 끝을 맺
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노잣돈으로 이 집을 빌렸다. 이제 또다시 돈이 필요할 때는 달구지에 매어
있는 황소를 파는 수밖에 없다.
"무엇하는 게냐?"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머니 김씨가 뛰어나왔다. 아버지 하엽의 후처로 들어와서
허봉과 허균, 그리고 허난설현을 낳은 어머니. 그녀는 막내 허균이 못미더웠던지 항상 그를
싸고돌았다. 허봉과 허난설헌이 먼저 갔으므로 피붙이라고는 허균뿐이다.
"그렇게 앉아 있지만 마라. 솥이라도 들고 마당을 돌렴."
난산이었다. 어젯밤부터 몸을 틀기 시작한 아내는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출산을 못했다.
어머니도 답답한 나머지 미신처럼 전해오는 습속을 따르라고 한 것이다. 허균은 부엌으로
뛰어가서는 검게 그은 무쇠솥을 머리에 이고 나왔다. 그리고 팔랑개비처럼 마당을 맴맴 돌
았다.
"하하하, 아빠! 하하하."
설경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도 따라 웃으며 아내가 어서 몸을 풀기를 천지신명
께 빌고 또 빌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 시원한 동풍이 불어왔다. 설경은 마루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고 맴을 도는 허균의 걸음걸이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머리에 인 무쇠
솥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한번 인 솥을 아내가 출산하기도 전에 내려놓으면 부정을 타
기 때문에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비오듯 흘러내린 땀이 목과 허리를 타고 사타구니를 적셨
다. 이슬비라도 흩뿌리기를 바랐지만 장마가 끝나면서부터는 여름 가뭄이 계속 이어졌다. 집
앞을 지나는 피난민의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 보따리를 한 짐씩 지고 북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은 솥을 인 허균을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응애, 응, 응애."
드디어 기다리던 아기 울음시가 터져나왔다. 허균은 무쇠솥을 마당에 휙 내던지고 마루로
달려갔다. 설경도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머니 김씨가 문을 열고 소리쳤
다.
"고추다, 고추!"
아들이었다. 허균은 잠이 덜 깬 설경을 번쩍 안아들고 볼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이제 가
업을 이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붉은 고추를 매단 금줄을 처마에 내걸었다. 어머니가 탯줄
을 자르고 따뜻한 물로 아기를 씻긴 후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땀에 절어 수척해진 아내
김씨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부인, 그냥 누워 있으오. 장하시오. 이제 우리도 아들을 두게 되었습니다그려."
김씨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김씨는 오른편에 누워 있는 아기 쪽으
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새 생명이 늘었으니 대과에 합격하셔서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하세요."
"허어, 오늘같이 경사스런 날에 무슨 소릴 하는 겝니까?"
허균은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화를 내는 척했다. 기축년(1589년)에 소과인 생원시에 합격
한 이후 아직까지 대과에 응시하지 않은 것이다. 김씨는 그가 스승인 이달 등과 어울려 술
과 시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과거를 치르라고 종용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도
아내의 역성을 들었다.
"이제 네 나이도 스물넷이다. 네 형 봉은 그 나이에 벌써 대궐에 들어가 있었느니라."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딴전을 피웠다. 김씨는 확답을 받아내려는 듯 다시 한 번 간청했다.
"어머님과 저는 당신만 바라보고 산답니다. 사내 대장부는 마땅히 과거에 급제해서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을 이롭게 하여야지요. 재주만 믿고 세월을 죽이
지 마셔요. 세월은 쏜살과도 같으니 뒤늦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알았어요. 내 부인을 꼭 숙부인으로 만들어드리리다."
숙부인은 정삼품 당상관의 부인에게 내리는 직첩이었다. 김씨는 힘에 겨운지 더 이상 말
을 잇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허균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들고는 앙증맞은 손가락
을 하나씩 펴보았다.
설경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빨리 남동생을 보고 싶었지만 할머니 앞인지라 행동을 조심
했다. 그는 몸을 반쯤 돌려 설경에게 아기를 보여주었다. 설경의 맑은 두 눈에 아기의 불그
스름한 양볼이 쏙 들어갔다.
"얘가 내 동생이야?"
"그렇단다. 너도 오늘부터 누나가 되었구나. 동생을 네 몸처럼 아끼고 보살펴야 한단다,
알겠지?"
"응!"
설경은 조막만한 아기의 손을 슬쩍 잡으며 속삭였다.
"누나야, 누나!"
그 순간 아기가 입술을 우물우물거렸다. 옹알이를 보면서 허균은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웃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려도 좋을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구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사롭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
꿈도 포기하고 조국마저 외면할 수 있는 존재. 멀리멀리 떠나더라도 반드시 되돌아와서 감
싸고픈 존재.
"계심둥?"
싼 값에 안방을 내준 집주인 강노수였다. 허균은 아기를 제자리에 누이고 마당으로 나섰
다. 새까만 얼굴에 등이 굽은 중늙은이 강노수는 안절부절못한 채 섬돌 아래에서 양손을 비
벼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허균은 허리를 뒤로 젖히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주인을 청해서 술이라도 한 잔 낼
작정이었다. 강노수가 안방을 기웃거리며 숨넘어가듯 답했다.
"날래날래 피하셔야하지배이오. 왜놈들이 올라오고 있음둥. 북청을 지났다고 하니 곧 들이
칠 것이오우다."
"정말인가?"
"보는 족족 작살낸다고 함둥. 날래 피하시라요!"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진격하는 가등청정의 포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도륙할 뿐만 아니라 마을을 불지르고 우물과 개천에는 독을 풀었다.
"균아!"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그를 찾았다. 허균은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이제 막 몸을 푼
아내와 세상에 태어난 핏덩이를 데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쁜 소식이냐?"
어머니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머무르면 몰살당하고 만다. 앉아서 죽느니
이를 악물고서라도 피난을 떠나는 것이 옳다. 가다가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실날 같은 희망
을 품고 서광이 비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그리고 부인! 잘 들으세요. 왜놈들이 북청에 당도했답니다. 여기서 밤을 지새다간
저들의 선발대에 목숨을 잃고 말아요. 그러니 지금 당장 떠나야 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설경
과 아기를 챙겨주세요. 부인! 힘을 내시오. 아들까지 점지해주신 하늘이 설마 우리를 버리겠
소. 자, 내 등에 업히시오."
어머니 김씨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 몸을 해가지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산후조리를 못하면 큰일난다. 하늘이 두
동강이 나도 누워 있어야 해."
허균은 강제로 아내를 들쳐업었다. 그녀는 양손을 축 늘어뜨린 채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달구지에 이불을 깔고 아기와 산모를 누인 후 어머니와 설경을 빈자리에 태웠다.
경성으로 행로를 정했다. 함경도 북병영이 있는 곳이니 거기까지만 가면 마음을 놓을 수
있으리라. 북쪽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으며 떨어졌다. 설경이 손뼉을 치며 즐
거워했다. 허균은 황소를 끌고 앞서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와 아들의 몸을 덮은
이불이 아무래도 얇아 보였다. 낮에는 불볕더위가 이어지다가 해만 떨어지면 기온이 급강하
했다. 지금은 그저 아내와 아들이 잘 이겨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음날 저녁, 마천령을 넘어 길천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내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전혀 삼키지 못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려댔다. 이불을 두 겹이나 덮고 누워
도 자꾸 오한이 들었고 사지가 떨면서 정신을 깜박깜박 잃었다.
산욕열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허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의 선발대가 이미 북청으로 들이닥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흘 밤을 꼬박 새워 겨우 산성에 다다랐다. 장검과 강궁을 든 군사들이 앞을 다투
어 남하하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 이곳에서 산후조리를 하면 되리라.
그러나 7월 10일 아침, 아내 김씨는 기어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산욕열에 시달린 데다가
제대로 음식과 약을 먹지 못해 완전히 탈진한 것이다. 급히 수소문을 해서 침을 놓을 줄 아
는 무당을 불러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곁에서 눈물만 흘렸고 설경도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덩달아 찔끔거렸다. 허균은 끙끙 신음 소리를 내는 아내의 손을 꼭 쥐고 깊
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여보!
열다섯에 시집와서 당신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둘. 세상의 행복을 만끽할 꽃다운 나이 스
물둘. 나의 허물을 말없이 덮어주며, 어머니 섬기기를 제 몸같이 하고, 인자함과 정숙함으로
아랫사람을 부린 당신. 가을하늘처럼 맑고 봄바람처럼 상그러운 당신에게 이렇게 일찍 죽음
의 고비가 찾아들 줄이야. 나와 설경을 두고, 저 어린 핏덩이를 두고 당신 혼자 어찌 먼저
갈 수 있단 말이오. 당신에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지 않소? 태산처럼 남아 있는 내 사랑의
임자는 누구란 말이오? 제발 제발 눈을 뜨고 웃어주오. 숙부인도 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당신이 그러지 않았소? 남편이란 우러러보고 평생을 같이할 사람이라고.
아직 우리에겐 누려야 할 생이 반백 년이나 남아 있다오. 내 곁에서 한 번만 더 나를 지켜
주오. 여보. 내 사랑!
황혼 무렵 아내 김씨의 정신이 잠깐 돌아왔다. 그는 급히 그녀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
였다. 그녀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듯 그녀는 필사적으로 입
을 열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우, 우리…… 아……들."
아내 김씨는 유언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눈을 뜬 채 세상을 버렸다. 아내의 눈동자와 입술
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려 했
다. 희미하게 뛰던 심장박동도 이내 멈추고 말았다.
아내를 품에 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녀의 몸에는 아직까지 따사로운 체온이 남아 있었
다. 그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그는 그녀의 몸을 이불로 둘둘 감싸고 힘껏 끌어안았
다. 그의 낯선 행동에 놀란 설경이 울음을 터뜨렸고 어머니는 방바닥을 두드리며 실성한 사
람처럼 통곡을 시작했다.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그는 아내 곁에 머물렀다. 따가운 햇살이 방으로 들이치자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먼저 아내의 눈을 감기고 머리를 곱게 빗겼다. 아내의 얼굴은 깜박
잠이 든 것처럼 맑고 고왔다. 범은 아름다운 가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했던가? 남부럽
지 않은 행복이 찾아오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을 버렸다.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님의 부재가 님의 존재를 더욱 크고 아름답게 했다.
"얘야! 정신을 차리거라. 빨리 염을 하자. 이 더위에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길 수는 없어.
아기한테도 좋지 않고."
보다못한 어머니 김씨가 다그쳤다. 그녀의 말대로 작렬하는 태양아래에서 시체는 곧 부패
할 것이다. 그러나 허균은 아내의 시신을 감싸안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씨는 넋이 나간
아들과 며느리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핏덩이를 등에 업고 설경과 함께 마당으로 나섰다. 그
녀는 우선 황소를 팔아 관을 사고 염을 할 늙은이도 두 사람 구했다. 해가 기울어 되돌아오
니, 허균은 그때까지도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김씨는 눈을 부라리
며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네 눈에는 아내만 보이고 어미와 자식은 보이지도 않느냐? 왜군이 곧 저 아래 성진창을
친다고 하는데 여기서 죽을 셈이야? 여기서 죽으려면 왜 단천을 떠났느냐? 차라리 그곳에
있었다면 이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그래 죽자. 죽자꾸나! 내 죽기는 섧지 않으
나 이 어린것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며늘아가를 생각해서라도 이 애들을 잘 키워야 되지
않겠느냐? 이놈아, 정신을 차려라! 볻도 죽고 초희도 잃었는데, 너까지 죽는 꼴은 차마 못
보겠다. 내 먼저 이 자리에서 자진할 것인즉 죽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김씨가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들었다. 그는 황급히 은장도를 빼앗은 후 꿇어 엎드려 사죄
했다.
"어머님!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아기와 설경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뒤에 서 있던 늙은이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김씨는 아들의 등을 도닥거리며 좋은 말로 달랬다.
"마음을 굳게 먹어라.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단다."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늙은이들이 들어와 염을 하고, 허균과 김씨가 약식으로 곡
을 마친 후, 입관을 해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매장을 하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아내
의 무덤 앞에서 눈물로 맹세했다.
여보! 잠시만 기다려주오. 낯설고 물 선 이곳에 그대를 오래 두지 않으리다. 대과에 급제
하여 당당하게 그대를 다시 찾아오리다. 그때 먼 훗날 그대와 내가 함께 묻힐 땅으로 이장
하겠소. 그대가 내게 남긴 두 보물은 소중히 키우리다. 언제나 그대의 짧지만 아름다웠던 삶
을 들려주리다. 안녕히!
허균의 가족은 그 밤에 다시 길을 나섰다.
그들은 북병영이 있는 경성에 머무르지 않고 반나절을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수성으로 갔
다. 애초에 목적지는 임해군이 있는 회령이었지만 그들은 수성에서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에 나온 지 열흘도 안 된 아기의 온몸에 열꽃이 피었던 것이다.
홍역이었다.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가 피난민 틈에 섞여 이동하다보니 덜컥 병이 옮은 것이다.
'제 것', '제 구실'이라고도 불리면서 늦봄에서 초가을까지 발병하는 홍역은 태어난 지 일
년
미만의 유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아기를 안고 젖을 구걸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녔지만 열꽃
이 핀 아기에게 선뜻 모유를 나누어주는 산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자기네 아
기들까지 병이 옮는다며 소금을 뿌리고 침을 뱉기 일쑤였다. 배고픔과 고통에 시달린 아기
는 더 이상 울지도 못하고 숨을 할딱거렸다.
허균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아내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아들까지 잃을 상황이었다.
왜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제 몸같이 사랑하는 가족을 둘씩이나 북망산으로 보낼 수
는 없었다. 의원을 찾아갔으나 제대로 구비된 약재가 없었다. 침이라도 맞히려고 피난민들
사이를 돌아다녔으나 그것도 헛고생이었다.
돌림병은 허균의 가족만을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피난민 중에는 돌림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부기지수였다. 계곡마다 썩어가는 시체들이 즐
비했고, 열에 들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는 환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굶
주림과 함께 심한 일교차가 사람들의 면역 기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고, 더러운 식수와 이
가 들끓는 옷, 산등성이나 수풀에서의 불편한 잠자리, 밤낮 없이 다려드는 모기떼로 인해 여
러 가지 돌림병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면역 기능이 약한 유아들의 경우, 장티푸
스나 이질, 홍역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열에 아홉은 목숨을 잃었다. 아기들의 죽음에 낙담한
산모 역시 돌림병에 걸려 뒤를 따랐다. 돌림병으로 목숨을 잃을 경우, 가족이더라도 접근하
기를 꺼렸다. 돌림병으로 죽은 시체들, 그것들은 더 이상 깨끗이 염을 해서 묻어야 하는 혈
육이 아니라 병균이 우글대는 썩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왜군의 조총보다 무섭고, 빠르고, 치명적인 것이 바로 이 돌림병이었다. 전쟁의 발발과 함
께 팔도가 돌림병의 회오리에 말려들었고 특히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의 피해가 컸다. 돌림
병은 왜군보다 앞서 피난민의 행렬에 찾아들었다가 왜군이 다 지나간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기승을 부렸다. 예방할 수 있는 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치료약도 전무한 상황에서 백성들은
두 눈 벌겋게 뜨고 죽어갔다. 시체를 뜯어먹던 까마귀들도 점점 대담해져서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눈알까지 쪼아대기 시작했다. 갓난아기의 시체를 움켜쥐고 둥지로 돌아가는 솔개
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피난민들에게는 당장 넘어서야 할 죽음의 산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굶주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돌림병이었다. 굶주림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다같이 굶주렸기에 타인들의 퀭한
눈과 움푹 패인 볼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돌림병은 전혀 다른 문제였
다. 돌림병에 걸린 사람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병의 고통보다 더 지독한 것이 바로 이 고립
감이었다. 돌림병에 걸린 바로 그 순간부터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당했다. 타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며 타인과 말을 하거나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조차 몽둥이
찜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었다. 간혹 병든 사람끼리 마주쳐서 이
야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삶의 의지를 갖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할수록 자괴감만 커졌다. 그래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병이 온몸으로 퍼지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었지만 아무도
그 처절한 고통과 힘든 결단을 지켜보지 않았다. 돌림병 환자의 운명은 죽기를 결심할 때도
혼자이며, 죽음의 아가리로 들어갈 때도 혼자이고, 죽고 나서도 혼자인 것이다.
허균은 이 모든 과정을 똑똑히 보았다. 돌림병 환자를 향해 날아가는 무수한 돌팔매가 그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과연 인간이란 착한 존재인가? 공맹이 이 광경을 본다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때려죽이고 들
짐승과 날짐승의 먹이로 내어주는 저들을 그 누가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 인간은 더러
운 짐승이다. 속되고 속된 짐승이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짐승이다.
아들은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여명이 밝아올 때, 허균은 낡고 녹슨 호미 하나만 들고 아기의 시체를 보자기에 싸서 뒷
산으로 올라갔다. 아내가 죽었을 때처럼 울거나 넋을 잃거나 통곡하지 않았다. 이미 슬픔이
나 괴로움 같은 감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밥을 구걸하는 병자를 만나거나 버려진 아이
들의 시체가 있어도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는 양지맡에 편편한 땅을 고른 후 호미로 묵묵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푸석푸석한 흙먼
지가 일어나도 기침 한 번 하는 법이 없었다. 아기의 시체를 누일 만한 구덩이가 생기자 보
자기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파묻었다. 들짐승들의 발길을 피하기 위해 힘껏 땅을 다지
며 흙을 쓸어담았다. 봉긋한 무덤도 만들지 않았고 나무 팻말도 꽂지 않았다. 말라버린 나뭇
가지와 풀들을 흩어놓자 그곳은 곧 다시 양지바른 산등성이로 바뀌었다. 아무도 그 안에 핏
덩어리의 시체가 있으리라고 추측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지고 갔던 호미를
힘껏 수풀 속으로 던져버린 후 터벅터벅 마을로 내려왔다.
어머니 김씨가 칡죽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에게서 무슨 신신당부를 들었는
지 설경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묵묵히 숟가락질만 했다. 그는 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다음 한 그릇을 더 청해 먹었다. 어머니도 설경도 못 먹어 굶어 죽은 귀신처럼 아귀아귀 죽
을 들이켰다.
다시 길 떠날 채비를 마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회령으로 가진 않겠습니다. 이대로 올라가다간 어머님도 설경이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차라리 이 지긋지긋한 피난민들 대열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갑시다. 죽더라도 고향 근처에서
죽고 싶습니다."
설경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 죽음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의 충혈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내를 묻고 아들을 묻은
사내의 결심이었다. 회령으로 가는 편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컸지만 아들의 의견을 따르
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 하나씩 죽는 것은 차라리 다 함께 죽느니만도 못하다.
"강릉으로 가자. 이 어미의 고향이지. 강릉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사촌이란 마을이
있다. 그 마을 동쪽에는 교산이 있는데, 네 외조부께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다가
애일이라는 당을 지으셨다. 그곳이라면 산세가 깊고 인적이 드무니 왜군의 발길이 닿지 않
을 성싶구나. 남쪽으로 가고 싶다면 그곳으로 가자꾸나. 그리고 육로로는 막혀서 내려갈 수
가 없으니 배를 타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서 배를 타면 하루 만에 강릉 앞바다에 닿을
수 있지."
"어머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뱃삯이 없으니 어떻게 배를 탈 수 있을까요?"
김씨가 속치맛단에서 엄지손가락만한 금덩이를 한 꺼냈다.
"널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단다. 이것을 주면 강릉까진 갈 수 있을 게다."
수성 앞바다에는 피난민들을 전문적으로 실어나르는 배가 있었다. 전쟁중에 생겨난 새로
운 돈벌이였다. 어민들은 활로가 막혀 물고기를 잡아도 팔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이와 같은
편법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남쪽으로 가다가 왜선을 만나면 죽음을 면키 어려웠기에 그만
큼 뱃삯이 비쌌다. 어머니 김씨의 금덩이로 세 사람이 탈 자리를 겨우 얻을 수 있었다.
다음날 샛별을 보며 출항을 했다.
파도가 높고 맞바람이 불었지만 어부도 피난민도 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어부의 입장
에서는 하루를 쉬면 그만큼 돈을 벌지 못하게 되고, 피난민의 입장에서는 저승사자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웅크리고 앉을 만큼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작은 배에 근 오십
명이 승선한 것이다. 파도와 바람에 배가 좌우로 흔들리 때마다 여자들의 비명과 남자들의
욕설, 그리고 아이들의 울음이 뒤범벅으로 터져나왔다. 그때마다 수성 출신의 늙은 어부가
화를 버럭 냈다.
"조용히 안하겠슴둥. 저기 보이는 산등성이에 왜놈들이 개미 새끼들처럼 쫘악 깔려 있슴
매. 지금부터 고함을 치는 사람은 바다에 쑤셔박고 가겠슴둥. 알아들었지비?"
소리는 아까보다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배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아이들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어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욕지거리를 해댔지만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리지는 않았
다. 노련한 어부는 섬과 섬 사이로 배를 몰면서 되도록 육지에서 먼 항로를 택했다. 해가 완
전히 진 후에 배는 강릉 앞바다에 닿았다. 어부는 배를 육지로 몰아가는 대신 얼굴을 찡그
리며 말했다.
"다섯 사람만 앞으로 나오기오. 해안에 왜놈 새끼들이 없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겠슴둥?
자, 날래날래 나오기오."
왜군 감시병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척후룰 보내겠다는 것이다. 피난민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선뜻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화가 난 어부가 삿대질을 하며 배를 되돌리려 했
다.
"좋슴매. 지원자가 없으면 돌아가겠슴둥."
"내가 가지."
허균이 손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부의 얼굴에서 금방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가
지원을 하지 나머지 네 사람도 손을 들었다. 어부가 허균에게 다가와서 자그마한 뿔피리를
내밀었다.
"상륙해도 될 것 같으면 그걸 부시구래. 자정까지 기다리겠슴매."
허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뿔피리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설경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
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설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그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는
천천히 갓고 도포를 벗었다.
다섯 사내가 차례차례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물살을 갈랐다. 빨리 육지에
닿는 것보다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내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이십 보
정도 거리를 둔 채 해안의 용바위를 목적지로 삼고 나아갔다. 전부 무사히 바위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사내들에게 각기 흩어져서 주위를 정탐하고 돌아오도록 했다. 옅은 구
름 때문에 달빛이 흐리고 별빛은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오랜만에 헤엄을 쳤기 때문일까? 머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손발
이 저려왔다. 양손으로 볼을 탁탁 두드린 후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솔숲으로 접근해갔다. 바
닷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우수수수 흔들어댔다.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칼날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섬뜩한 살기가 심장을 쑤셔댔다.
왜군이닷!
하마터면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몸을 돌려 모래사장을 달리
기 시작했다. 바다로만 뛰어들면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와아아앗!"
기괴한 고함 소리와 함께 하나같이 누더기를 걸치고 산발을 한 십여 명의 사내가 솔숲에
서 뛰어나왔다. 그들의 눈은 독수리처럼 밝았고, 그들의 걸음은 노루보다 빨랐다. 문명을 모
르는 야만의 얼굴이었다. 그는 모래사장을 절반도 달리기 전에 야만의 손에 발목이 잡혀 앞
으로 고꾸라졌다. 손에 쥔 뿔피리가 저만치 날아갔다. 양발을 붙든 야만이 소리쳤다.
"잡았다아! 내가, 내가 잡았어."
허균은 두 귀를 의심했다. 그를 잡은 야만은 왜군이 아니라 동포였다. 사로잡힌 다섯 사내
는 손발을 묶인 채 한 명씩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야만의 무리는 그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처럼 의기양양하게 휘파람을 불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야만의 무리는
금방 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산길을 따라 능선을 한참 오르내려 움막촌에 당도했다. 머리에 쪽을 찐 아낙네와 더벅머
리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 허균이 고개를 들어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게. 나는 단천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강릉으로 내려온 허균이라는 사람이오."
그들이 갑자기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손도끼를 든 사내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침을
뱉었다.
"넌 사람이 아냐. 어딜 함부로 맞먹으려고 들어!"
그리고 그들은 다섯 사내를 허름하고 낡은 움막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었다. 무엇이 그렇게
흥에 겨운지 웃음소리, 춤추는 소리, 박수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섯 사내는 어둠 속에
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궁금증을 토해냈다.
"저들은 누구요?"
"내가 알겄소, 당신이 알겄소? 하여튼 왜놈이 아닌 건 확실한 것 같소이."
"보아하니 화적떼들 같은데 통 우리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소."
"우린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는 알거지 신세가 아닙니까? 헌데 왜 우릴 여기까지 잡아온
것일까요? 화적떼의 소굴로 끌려가면 목이 달아나든지, 화적떼가 되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하
던데."
허균은 그들의 대화에 끼여들지 않았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
서 목이 탔다. 소리를 질러 물을 청하고 싶었지만 숨을 쉴 힘조차 없었다. 등을 맞대고 있던
사내가 물었다.
"왜 말씀이 없으시우?"
"겁먹었나보지, 뭐."
"형씨. 아까는 제일 먼저 나서더니 왜 잠자코 있수?"
움막의 천장이 어질어질 춤을 추더니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이명
처럼 귓바퀴를 때리며 메아리쳤다. 자신을 겁쟁이로 모는 사내들에게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
니라 지독한 열병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만약 내일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제일 먼저
칼을 받으리라. 하지만 그런 생각마저 차츰 희미해져갔다. 설경의 뽀오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위로 아내의 환환 웃음과 핏덩이의 칭얼거림과 어머니의 깊게 패인 주름이 차례차례 겹
쳤다.
이제 그 모든 것들과 작별할 때가 온 것일까? 화적떼의 소굴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내 몸
에 깃들인 열병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제는 혼자서 죽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조국도 잊
고, 가족도 잊고, 내 자신의 이름과 나이와 꿈과 야망도 모두 잊고, 모래사장에 버려진 뿔피
리처럼 그저 그렇게 하나의 사물로 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어도 그만이겠으나 설경
과 어머니는 무사할까? 혹시 화적떼와 어부가 서로 짜고 우리들을 그 해안에 내려놓은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제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안 돼! 살려주세요, 제발! 노모와 어린 자식이 셋이나 있답니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세
요."
비명과 절규에 눈을 떴다 어느덧 아침 햇살이 움막 지붕의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
었다. 눈을 끔벅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이 조금 내린 듯했다. 움막에 남아 있는 사내들
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자, 장작불에 커다란 무쇠솥을 거, 걸었어."
"우린 죽었다. 저놈들은 식인을 하려는 거야."
"시, 식인?"
"우릴 잡아먹을 작정이라고."
사실이었다. 그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아침 식사 준비를 마쳤다. 어디에도 끼니를
이을 양식이나 고기는 없었다. 장작불 위에 거대한 무쇠솥에서는 부글부글 물이 끓었고, 그
곁에 사지가 묶인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목을 쳐!"
"예이!"
장검을 든 사내가 양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더니 단칼에 사내의 목을 베었다. 목이 잘리
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들은 괘념치 않았다. 손도끼와 식칼을 든 아낙네들이 달려
들어 목이 잘린 시체으 살갗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배를 갈라 내장을 훑어낸 다음 사지를
마디마디 자르고 몸통을 제일 마지막으로 솥에 넣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입맛을 쩝쩝 다
셨다.
"한 놈 더 끌어내랏!"
"예이!"
두 명의 사내가 날렵하게 움막으로 들어왔다. 네 사람은 두 눈을 꼭 감고 쥐죽은 듯이 숨
을 죽였다. 자신이 선택당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일단 이 순간만 무사히 넘기면 점심
때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이다. 허균 역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기가 힘겨웠다. 죽
더라도 저렇게 갈기갈기 찢겨져서 야만의 아가리로 던져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덤에
편안히 누울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가 싶더니 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내들이 그를 묶은 나뭇가지를 메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야만의
박수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했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숟가락을 높이 든 화
적들이 그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이놈들! 나는 인간이야, 인간이란 말이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열이 뻗치는가 싶더니 땅이 울렁울렁 아래
위로 움직였다.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목을 쳐!"
"예이!"
명령이 떨어졌다. 장검을 든 사내가 다시 양손에 침을 탁탁 뱉었다. 그때 두목의 곁에 앉
아 있던 사내가 손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잠깐! 저놈 얼굴을 자세히 봐. 돌림병에 걸렸어. 먹으면 안 돼. 먹으면 우리도 죽어."
돌림병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화적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네댓 걸음 뒤로 물러섰
다. 그러나 사내는 오히려 허균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계속 소리쳤다.
"틀림없어. 초점 없는 눈, 흐르는 땀, 제멋대로 떨리는 팔과 다리,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
나오는 침. 돌림병이야. 돌림병! 저들은 모두 돌림병에 걸렸어. 먹으면 안 돼."
화적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움막으로 숨었다. 돌림병 환자는 먹지 않는 것이 이곳의 규칙
이었다. 그만큼 돌림병은 그들에게도 두려움 그 자체였다.
두목이 용기를 내어 사내에게 다가왔다.
"선생! 어떻게 하면 좋겠수?"
"생매장이 최고지. 깊숙이 파고 묻어버리면 알게 뭔가?"
"그럽시다. 선생이 이 일을 맡아주시우. 알다시피 우리 식구들은 원체 겁이 많아놔서. 선
생은 문둥이들하고도 함께 지내지 않았소?"
"그래, 그러지. 저 산등성이 너머 용두리 계곡까지만 옮겨줘. 솥 안에 있는 살점들도 내가
몽땅 챙겨갈 테니."
"고맙수!"
"대신 다음에 한 건 올리면 내 앞으로 두둑이 떼어줘야 하네."
"두 말 하면 잔소리!"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돌림병을 외친 사내의 목소리에 귀에 익었다. 누굴까? 어디
서 만났던 사람일까? 기억을 더듬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열이 치솟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목에 의해 강제로 지명된 여덟 명의 화적이 사내들을 용두리 계곡으로 옮겼다. 그곳으
로 가는 동안 허균은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차리고 또다시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멧돼지를
사냥할 목적으로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 앞에 멈추어섰다. 화적들을 몸서리를 치며 네 명의
사내를 그 구덩이에 패대기쳤다. 그리고 서너 걸음 물러서서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
은 곧 작은 망태를 등에 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그들에게로 왔다.
"뭐유 그게?"
화적 중 하나가 물었다.
"뭐긴 뭐야, 염병할 놈의 고기지. 먹고 싶으냐, 주랴?"
선생이 망태를 앞으로 돌리자 화적은 뒤로 물러서며 양손을 흔들어댔다.
"관두슈.차라리 굼벵이를 삶아먹는 편이 낫겠수. 어서 파묻어버리고 갑시다."
선생은 구덩이 쪽으로 다가가서 망태를 휘익 내던졌다. 구덩이 속에서 마지막 절규가 터
져나왔다.
"사람살려!"
"으악!"
허균은 실눈을 뜨고 선생의 얼굴을 살폈다. 그늘이 져서 정확히 분별할 수 없었으나 선생
은 얼굴을 살폈다. 그늘이 져서 정확히 분별할 수는 없었으나 선생은 웃고 있었다. 그는 그
웃음이 꼭 자기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고 죽음보다 더한
무엇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네모진 푸른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정말 눈이 부신 푸르름이었다.
"시작하게."
선생의 명령에 따라 사내들이 흙을 쓸어붓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일며서 온몸으로 흙더미
가 쏟아져내렸다. 커억커억. 기침을 하며 도리질을 쳤지만 쏟아지는 흙더미를 피할 수는 없
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죽음!
암흑에 대한 공포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심장 박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
나 살아 있다. 아직까지, 아직까지 나는 살아 있다. 허나 저 흙더미가 내 육신을 모두 덮은
후에도 나는 살아 있을 것인가?
여덟 명의 화적이 번갈아 흙을 쓸어내리자 구덩이는 곧 매워졌다. 그들은 액땜을 하기 위
해 그 위에 둥글게 서서 오줌을 갈겼다. 빙긋이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생이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긴 대나무 지팡이를 들어 힘껏 내리꽂았다.
"뭐유 그게?"
"이곳에 접근하지 말란 표식이지. 돌림병자들이 누워 있는 곳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허헛! 역시 선생이시구려. 모르는 게 없으니."
선생은 사내들의 웃음에 미소로 화답하며 내리꽂은 지팡이를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렸다.
선생은 솔가지 두 개를 꺾어 횡으로 지팡이에 묶었다.
"자, 그만 가세. 아침을 굶었더니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프네그려. 헌데 오늘 점심땐 뭘 먹
지?"
"지천에 널린 게 사람인데, 뭘 그딴 걸 걱정하고 그럽니까?"
"히힛, 내 선생을 위해 특별히 살갗이 보오얗고 쫄깃쫄깃한 처녀를 하나 잡아다드리리다."
"고맙네. 고마우이!"
그들은 맘껏 웃으며 계곡을 내려갔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하나둘씩 용두리
계곡으로 날아들었다. 늑대의 긴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었고, 귀를 쫑긋 세
운 토끼 한 마리가 선생이 세운 대나무를 툭 치고 달아났다. 그리고 끝없는 적막과 평화로
운 풍경이 이어졌다. 마치 이곳에 아무것도 묻혀 있지 않는 것처럼 식인의 땅은 자신의 음
부를 스스로 감추었다.
8. 학은 날개를 펴고
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내려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한 번의 싸움
에 힘입어 드디어는 그 한 팔이 끊어져버렸다. 그래서 소서행장은 비록 평양을 배앗았다고
하더라도 그 형세가 외로워서 감히 다시는 전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나라에서는 전라
도와 충청도를 확보할 수 있었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일대도 보전할 수 있었고,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어서 나라의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동의
금, 복, 해, 개주와 천진 등지도 적의 침해로 놀림을 당하지 않고, 명군으로 하여금 육로를
도와 왜적을 물리치게 된 것이니, 이는 다 이순신이 이 한 번 싸움에 승리한 공이었다.
유성룡, 『징비록』
임진년(1592년) 7월 4일 2 저녁.
협선에 몸을 실은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전라좌도와 우도의 판옥선 오십여 척이 즐비하게 늘
어선 좌수영 앞바다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물에 서 있는 그의 표정은 저문 하늘처럼 어둡고
칙칙했다. 그는 벌써 석 달이 넘도록 원균과 이순신 사이를 오가며 전령 노릇을 해왔다. 사
천해전 때는 전라좌수영에 속해서 왜적과 맞서기까지 했다. 두 수영을 오가면서, 그는 원균
과 이순신이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원균이 먹잇감을 보면 눈 깜
짝할 사이에 달려드는 용맹한 호랑이라면, 이순신은 먹잇감이 어두컴컴한 동굴까지 제 발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의심 많은 반달곰이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전략을 굼벵이처럼 느리고
답답하다며 불평했고, 이순신은 원균의 전략을 감정적이고 마음만 앞선다고 힐책했다. 물론
이영남은 두 사람의 불평불만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먼
저 그들 스스로가 상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출정 약속을 받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 이억기도 온다고 하니 이번에는 꼭 부산을 쳐야
해. 뿌리를 없애지 않으면 아무리 잔가지를 쳐내도 소용없는 일이야. 알겠어?"
원균은 이영남의 어깨를 맞잡으며 단단히 당부했다. 열흘 사이에 벌써 세 번이나 전라좌
수영을 방문하는 것이다. 왜선이 가덕과 거제 등지를 안방 드나들 듯 한다고 보고했지만 이
순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함정인 줄 알면서도 걸려들 수는 없어. 때를 기다려야 해. 하늘이 내린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장수가 할 일이지."
이순신은 부산을 치자는 원균의 주장을 망상으로 치부했다.
이영남은 횃불로 둘러싸인 진해루를 바라보았다. 부정한 기운을 쫓는다며 세운 앞마당의
석인들과 그 주위를 어지럽게 뛰어 다니는 장졸들이 보였다.
전라순찰사 이광, 충청순찰사 윤국형, 경상순찰사 김수의 연합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다가
용인에서 전멸하였고, 왜군에 의해 평양성까지 함락되었다.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는 의주로
피한 임금이 압록강을 건널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고스란히 왜국의 땅이 되는
것이다. 전라도만 안전하면 무엇하는가? 머리 잘린 팔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는가? 왜군들
이 평양까지 밀고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원수사의 말대로 왜의 본토에서 군량미와 무기가
끊임없이 부산으로 수송되었기 때문이다. 사천이나 당항포에서 아무리 전과를 올리더라도
왜 수군은 부산으로 물러가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부산 앞바다만 봉
쇄하면, 보급로를 잃은 적은 자멸할 것이다.
이순신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그는 부산을 봉쇄한다 하더라도 왜군의 사기를 꺾기 어렵다
고 했다. 본토와의 연락이 두절되면 그들은 더욱더 필사적으로 전라도를 삼키려들 것이고,
요동을 건너가서 명나라를 치려는 계획을 잠시 유보하고서라도 전라도를 점령하여 겨울을
지내려고 하리라. 그러므로 왜군이 부산에서 평양까지 종대로 늘어서 있는 지금이 전투를
벌이기엔 훨씬 유리하며, 전라도를 굳건하게 지키는 가운데, 의병과 관군이 합심하여 부산에
서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과연 팔도에서 얼마만큼의 의병이 일어나
적의 뒤통수를 때릴지는 미지수였다. 지금까지는 겨우 곽재우와 고경명을 비롯한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의병들만이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방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왔는가?"
전라좌수영 장수들에게 둘러싸인 채 방답귀선을 올려다보던 이순신이 이영남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이영남은 왼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춘 후 원수사의 서찰을 전했다. 이순신은
그 서찰을 훑은 다음 순천부사 권준에게 내밀었다. 권준이 찬찬히 서찰을 읽는 동안 이순신
이 물었다.
"어떤가? 영귀선만큼이나 단단하고 화력이 뛰어나다네. 귀선 두척이 나란히 적진으로 돌
진하면 적은 혼비백산할 거야."
이순신의 목소리는 들더 있었다. 그의 자랑대로 방답귀선은 영귀선보다 더 크고 흉측했다.
새벽 안개 속에서나 저녁 으스름에 방답귀선을 만나면 누구라도 무서운 해룡으로 착각하리
라. 방답첨사 이순신이 수염을 쓸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번에야말로 학익진을 제대로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귀선과 방답귀선이 각각 두 날개
의 선두에 서서 적선을 에워싸는 것이지요. 천지현황 총통을 쉼없이 쏘면서 당파해나간다면
적을 몰살시킬 수 있습니다."
"방답귀선의 돌격장은 누군가?"
왼쪽 눈이 찌부러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순신이 차분히 그 사내를 소개했다.
"작년에 무과에 급제한 박이량이옵니다. 제 휘하의 장수들 중에서는 가장 용맹하고 통솔
력이 뛰어납니다. 영귀선 돌격장 이언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옵니다."
제장들은 방답귀선의 용머리와 닮은 박이량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이
박이량의 손을 잡고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했다.
"방답귀선이 곧 그대고, 그대가 곧 방답귀선이야. 저 배가 침몰하면 그대에게도 죽음이 있
을 뿐이지. 만약 군령을 어기거나 방답귀선을 잃는다면 그대의 목을 베어 방답귀선을 위한
제물로 쓰겠네. 알겠는가?"
"믿어주십시오, 장군! 피가 뚝뚝 흐르는 적장의 검붉은 심장을 바치겠습니다."
박이량은 맹약의 징표로 단도를 꺼내 팔꿈치를 쿡쿡 찔렀다. 떨어지는 붉은 피를 사발에
받아 방답귀선을 향해 높이 치켜든 후 단숨에 들이켰다.
서찰을 끝까지 읽은 권준이 조용한 어조로 이영남에게 물었다.
"원수사께서는 아직도 주장이기를 고집하시는가요?"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다.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왜군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원균은 자연스
럽게 주장으로 행동했고, 이순신 역시 원균의 명령을 물리치면서 주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제 전라우수사 이억기까지 왔으니 주장이 셋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권준은 바로 이
사분오열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하오이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원균이 결코 상석을 양보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삼도의 수군이
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권준이 다시 목소리를 깔면서 말을 이어갔다.
"전라좌수영의 장졸들은 원수사의 군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또한 경상우수군이 왜군의
수급을 거두는 것도 용납할 수 없지요. 좌수영은 이미 수급의 개수가 아니라 격침시킨 배의
크기와 수로 전공을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원수사께서도 이런 우리의 방침을 받아들여야해
요. 만약 끝까지 독선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경상우수영을 배제하고 전라 좌우수영의 연합
함대만으로 왜 수군과 맞서겠습니다."
"경상우수영을 배제한다고 하셨소이까?"
이영남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식의 최후통첩을 받은 적은 없
었다. 이순신은 미우나 고우나 깍듯하게 원균을 선배로 대접했고, 그런 위계질서 속에서 서
로의 갈등도 어느 정도 무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권준의 말은 이 모든 위계를 무시
하겠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경상우수영을 배제하겠다는 것은 경상우수영을 관할하고
있는 원균의 권한을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이것은 어명으로 정한 각 장수의 관할지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도 그것을 바라진 않습니다. 허나 최악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지요."
이순신은 이영남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잠시 회의를 중단했다. 성큼성큼 언덕을 올
라가더니 앞마당이 넓은 주막집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게. 저녁을 겸해서 술이나 한 잔 하세나."
"지난번 총상이 채 아물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술은 삼가시지요."
이순신이 쓸쓸하게 웃었다.
"꼭 마누라 같은 소릴 하는구먼. 내 몸 걱정은 말게. 술 몇 잔에 쓰러질 내가 아니야. 그
보다 아까 권부사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순신은 먼저 나온 탁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이영남은 탁주 사발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어려워 말게. 나는 영남이 자네를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어."
이순신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따뜻했다. 어쨌든 지금 조선 팔도에서 유일하게 왜군을 격파
하고 승리를 거두고 있는 장수들이 아닌가. 원균이 선이 굵고 털털하게 애정을 표시한다면,
이순신은 좀더 다정다감하고 곰살궂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원수사께서는 몹시 화를 내실 것입니다."
"어허, 원수사의 입장 말고 자네 생각 말이야."
"제 생각으로는 두 분께서 마음을 터놓으시는 게 나을 성싶습니다만……."
이순신이 탁주 사발을 들이켠 후 수염을 쓸었다.
"잘 듣게.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한 집안에 두 지아비가 있을 수 없듯이, 한
함대에 두 주장이 있을 수 없는 법이지. 이건 원수사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군대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주장은 부하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대신 모든 전투를 책임져야 해.
몇 차례의 승전으로 군사들이 늘어나고 군량미와 무기가 많아질수록 내분은 심해지는 법.
그 때문에 권부사는 연합함대를 총지휘할 장수를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한 걸세. 자네도 알
다시피 세 명의 수사가 군권을 똑같이 나눠 가지고 있으면 그 힘은 삼분되고 말지. 전투에
서 졌을 경우를 상정해보세. 누가 선뜻 패전의 책임을 지려고 하겠는가?"
"삼도 수근을 전체적으로 통제할 으뜸 장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누가 그 자리를 맡을 것인가가 문제란 말이지? 그래, 그건 정말 중대하고 힘든 문제야."
이순신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저만치 밀어두고 계속 탁주를 비워나갔다.
"자네를 아들처럼 믿고 내 생각을 말해보겠네. 우선 우리가 서천해전을 치르고 나서야 은
근슬쩍 나타난 전라우수사는 어렵겠지? 아직 왜 수군과 전면전을 치른 경험도 없고 경상도
지리에 밝지도 않으니 당분간은 형세 파악에 치중해야 할 거야. 그렇다면 원수사와 나만 남
는군. 나는 원수사도 어렵다고 보네. 물론 용맹하고 죽음과도 당당히 맞서는 장수란 걸 누구
보다도 잘 알아. 하지만 그는 이미 패전의 경험이 있지. 경상우수영의 그 많던 군선들을 잃
지 않았는가? 내가 보기에 원수사는 패전의 앙갚음을 하려고만 들 뿐 그 패전을 반성하지는
않는 것 같네. 만약 그가 삼도 수군의 으뜸 장수가 된다면, 몇 차례 전투에서 화려하게 승리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대패하고 말 걸세. 이 점이 중요해. 우리에게 단 한 번의 패배는 곧
삼도 수군의 전멸을 뜻하네.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는 나 이순신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
나는 화려한 승리보다 단 한 번의 패배를 걱정하고 있네. 필승의 확신이 서지 않고서는 결
코 군선을 움직이지 않을 걸세. 이제부터 나와 원수사의 입장이 상반된다면 힘으로라도 원
수사를 꺾을 수밖에 없어. 자네가 지난 4월에 처음 구원병을 청할 때부터 권부사를 비롯한
전라좌수영의 장수들은 원수사를 견제하자고 했었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선배에 대한 존경심, 용장에 대한 애정, 육진에서 함께 고생한 기억들, 군의 위계
따위가 그를 예우하게 된 이유들이겠지. 허나 이제는 아니야. 계속 원수사의 돌출 행동을 지
켜볼 수만은 없네. 원수사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장졸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지 아는가? 남
해현령 기효근이 안하무인으로 내게 달려든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나는 결심했네. 이
제부터는 경상우수영의 장수들도 내가 직접 관장하겠네. 옥포만호 이운룡은 벌써 내 뜻에
동의했어. 자네도 내 마음을 헤아릴 것이라고 믿네."
이영남은 이순신의 조근조근한 설명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가슴에 담았다. 비록 낮고
조용한 어투였지만 단호한 입장 정리를 그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나의 편에 선다면 전라좌
수영 장수들과 똑같이 대우할 것이지만 원균의 편에 선다면 원균과 함께 배제의 대상이 되
리라.
이장군, 당신께선 이다지도 무서운 분이셨습니까?
이영남은 이순신의 주도면밀함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부산으로 진격하기만을 염원하는
원균에 비해 이순신은 얼마나 고단수인가. 겨우 다섯 척의 판옥선밖에 남지 않은 원균을 완
전히 무력화시키기 위해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을 각개격파하고 있지 않은가.
"원수사가 자넬 아낀다는 소릴 들었네. 하지만 이건 나라를 구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야.
다시 한 번 말하네만 원수사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변함이 없어. 허나 승리를 위해서는 사
사로운 마음은 접아야 하네."
이영남은 원균이 삼도 수군이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았다.
호쾌하게 적을 칠 수는 있겠지만 끈질기게 오랫동안 싸우지는 못하리라. 대승 아니면 대
패.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지금은 용기보다 인내가 필요한 때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허나 과연 이순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 원수사에 대한 애정
은 변함이 없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두 사람이 앙숙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
실이다. 그는 처음부터 원수사를 무력화시키고 배제할 작정이었던 것이 아닐까? 두뇌 회전
이 빠른 권준, 그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나대용, 이순신, 이언량 등과 처음부터 모의했
던 것이 아닐까? 이 일을 내게 발설할 정도라면 이미 평안도에 있는 조정에도 사람을 보냈
을 것이다. 아! 원수사만 앉아서 당하는 형국이구나.
"지금 꼭 대답할 필요는 없으이. 다음에 만날 때 언질을 주게나. 다만 자네를 아끼는 내
마음은 받아주었으면 좋겠어."
"생각해보지요."
이영남을 보낸 후 이순신은 날발을 데리고 진해루 뒤뜰 우물로 갔다. 갑옷을 벗으려는데
권준이 조용히 다가왔다.
"이영남은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이순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준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이순신의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누런 진물이 등에 엉겨붙었던 것이다.
"장군! 또 술을 드셨습니까? 상처가 아물기 전까진 술은 곧 독입니다."
"알겠네."
권준은 이순신이 지난 십수년간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백의 종군을 당했을 때나 면직되었을 때, 원균에게 자존심을 짓밟혔을 때 이순신
은 말술을 마셨다. 술에 전 위장은 새벽마다 사지를 뒤틀었다. 그 고통을 알면서도 그는 술
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틈만 나면 부하 장수들과 어울려 폭주를 했다. 권준은 그가 술에 중
독되었음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서서 말리지는 않았다. 권준에게는 그것이 이순
신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면모로 받아들여졌다. 좌절과 죽음의 문턱을 그토록 넘나든 자
가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리라.
"전라우수사를 만나겠습니까?"
날발이 고름을 닦아낼 때마다 이순신은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을 삼
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물론! 권부사가 알아서 준비를 해주시게. 정사준은 왔는가?"
"진작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천의 이름난 갑부 정사준이 군량미 삼백 석을 보내온 것은 지난 6월 그믐이었다. 형 사
익, 동생 사횡·사정과 함께 좌수영을 찾은 정사준은 들창코에 두 눈이 밑으로 처져서 보기
흉한 얼굴이었다. 들창코를 가리기 위해 자주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러나 정사준은 외모와
는 어울리지 않게 비상한 재주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미 무과에 급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총포에 관심을 가져 집안에 직접 대장간을 설치하고 승자총통과 쌍혈총통을 만
들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정사준을 훈련주부로 삼고 왜군으로부터 빼앗은 조총을 연구하도
록 시켰다. 조총의 유효 사거리와 성능을 안다면 왜군을 좀더 쉽게 격멸시킬 수 있기 때뭉
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로 가기에 앞서 이억기에게 조총의 위력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이억기가
원균의 말만 믿고 무턱대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과오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억기가 원균
과 힘을 합친다면 이순신으로서는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삼도 수군
의 지휘권이 원균에게 넘어갈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억기의 마음을 얻으려면, 왜군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이순신은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갑옷을 입고 진해루 앞뜰로 나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라우수영의 군선들은 사천해전이 끝나고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함대가 진해 앞바다에 도착한 6월 4일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스물다섯 첫의 판옥
선이었다. 진작부터 전라우수영의 판옥선들이 합류했다면 사천해전에서 이순신과 나대용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억기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던지 자주 이순신에게 전
령을 보내 병세를 물었고 귀한 녹용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이억기의 나이 이제 서른둘. 오십
을 내다보는 이순신과 나란히 앉으니 더욱 젊고 당당해 보였다. 이순신은 뜰에 엎드린 군졸
들을 곁눈질 한 후 섬돌 옆에 서 있는 정사준에게 물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훈련주부 정사준이 들창코를 실룩이며 답했다.
"대장장이 출신인 낙안의 수군 이필종과 순천의 사삿집 종안성, 김해의 사노 동지, 거제의
사노 언복이옵니다. 모두 저를 도와 조총을 만들었습니다."
이억기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순신이 조총을 시험한다는 사실을 미리 귀띔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총이라고 했는가? 그대가 조총을 만들었다고?"
정사준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좌수사 어른의 명령을 받들어 두 자루를 가져왔습니다. 보시지요."
정사준이 눈짓을 하자 이필종이 보자기에 싼 것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과연 정사준의 말
대로 조총 두 자루가 있었다.
"사격 방법을 설명하라."
정사준이 뜰로 내려가서 조총을 꺼내들었다.
"조총은 일종의 화승총이지요. 먼저 화약을 총구로 밀어넣고 그 다음 탄환을 넣은 다음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총탄이 발사됩니다. 사격을 한 후에는 화약과 탄환을 다시 총구로 넣
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꽤 걸리는 약점이 있지요. 따라서 왜군들은 횡열을 지어 앞줄이
사격을 한 연후에 그 다음 줄이 이어서 사격을 합니다. 그 틈에 앞줄이 다시 장전을 마치기
위해서지요."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만큼이나 되는가?"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직접 보시는 것이 낳을 성싶네요."
정사준의 손짓에 따라 안성과 동지가 수를 세며 큰 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예순까지 셈한
후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은 그 곳에 과녁을 세웠다. 정사준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똑바로 서
서 조총을 겨누었다. 언복이 도화선 심지에 불을 놓자 곧 굉음과 함께 탄환이 발사되었다.
정사준은 반동을 견디지 못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성이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외쳤다.
"명중이오!"
정사준이 조총을 언복에게 건넨 후 그 동안의 시험 결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보셨다시피 예순 걸음 안쪽이면 큰 어려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또한 백이십 보
이내의 사람에게도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습죠. 탄환에 맞으면 죽거나 불구가 되기 십상
입니다. 활이 바람이 영향을 많이 받는 데 비해 조총은 조준한 대로 탄환이 정확하게 날아
갑니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전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며, 고지
를 점령하고 있는 왜적과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지요."
"어떻소?"
이순신의 물음에 이억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과연 조총은 대단한 무기입니다. 저들이 한양까지 단숨에 밀고 올라간 것이 우연이 아니
었군요. 육십 보 이내로 접근해서 싸우면 죽음을 면키 어렵다는 얘기인데…… 쉽지 않은 전
투가 되겠군요."
이순신이 맞장구를 쳤다.
"옳으신 말씀이오. 육십 보 이내로 근접하기 전에 총통으로 확실히 적선을 침몰시켜야만
하오. 정면 돌격은 조총을 방어할 수 있는 귀선 두 척이 맡으면 되고, 우리는 백 보 정도 거
리를 두고 총통을 쏘도록 합시다. 섣불리 접근하다가는 몰살당하고 말 것이오."
이억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들에게 조총이 있다면 우리에겐 총통이 있소이다. 적의 강한 곳을 피하고 우
리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지요. 장군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이순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사준과 군졸들을 위로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그대들의 공은 왜군 백 명을 살상한 것보다도 더 크다. 마땅히
큰 보상이 뒤따를 것이다. 조총에 대한 연구에 좀더 진력하도록 하라. 내 곧 조정에 그대들
의 노력을 포상해달라는 장계를 올리도록 하겠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장군! 보여드릴 것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정사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아뢰었다.
"저쪽을 보시오소서."
제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과녁으로 쏠렸다. 동지가 과녁에 갑옷을 걸었다.
"좌수사께서 지금 입고 계신 갑옷과 똑같은 것이옵니다."
정사준은 다시 과녁을 조준해서 조총을 쏘았고, 동지는 갑옷을 들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오른쪽 가슴 부위에 크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갑옷으로는 왜적의 총탄을 막을 수가 없지요. 지난번 사천전투에서의 부상이 그 점을
입증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특별히 조총 탄환을 막을 수 있는 갑옷을 지었습니다. 다시 과
녁을 보시오소서."
이번에는 안성이 황금갑옷을 과녁에 걸었다. 정사준이 다시 조총을 발사한 후 갑옷을 이
순신과 이억기에게 내보였다. 과연 탄환이 갑옷을 꿰뚫지 못하고 그대로 박혀 있었다.
"갑옷 안에 환삼을 부착하여 입기에 편하도록 하였고, 갑옷과 환삼의 강도와 두께를 겹으
로 배가시켜 총탄을 막도록 했지요. 이 역시 십 보 내에서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 있으
나 관통상을 입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두 분 수사께 드리려고 두 벌을 지었습니다. 전투
에 나가기 전에 꼭 입도록 하십시오. 다른 장수들에게도 곧 이 갑옷을 나눠주도록 하겠습니
다."
이억기가 황금갑옷을 받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좌수영에는 어찌 이다지도 인재가 많소이까. 귀선을 만든 나대용과 명궁 변존서만
해도 대단한데 훈련주부 정사준은 그보다 더한 인물입니다그려. 이제 방탄복까지 생겼으니
마음놓고 군선들을 지휘할 수 있게 생겼습니다."
이순신 역시 방탄갑옷을 만든 정사준을 칭찬했다. 그리고 이억기의 들뜬 마음을 누르기
위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허나 저격수를 항상 조심해야 하오. 이 갑옷이 머리까지 보호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소?"
임진년(1592년) 7월 7일 저녁.
견내량으로 향하던 연합함대는 당포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선두에서 함대를 이끌던 전
라좌수사 이순신의 결정이었다. 배가 항구에 닿자마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직접 판옥선을 몰
고 이순신을 찾아왔다. 어제 경상우수영의 판옥선 일곱 척을 이끌고 노량에서 전라좌우 군
선과 합류한 순간부터, 그곳까지 들어온 왜 선단을 놓칠 수 없다는 것이다.
"굼벵이처럼 이곳에서 뒹굴겠다는 것이오? 이러다간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모두 놓치고
마오. 어서 출정합시다."
이순신은 전령을 띄워 이억기를 불렀다. 세 장수는 탁자 위에 경상우도의 해도를 펼쳐놓
고 둘러앉았다.
"동풍이 심하고 비까지 내리고 있소. 격군들도 맞바람과 싸워가며 이곳까지 오느라 지쳤
소이다. 이 상태로 왜 선단과 맞선다면 패할 것이외다."
이순신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사준이 만든 황금갑옷을 입은 이억기가 이순신의
의견에 동조했다.
"지독한 바람입니다. 전투를 벌이더라도 이 바람이 잦아든 후에나 시작하시지요."
"그 무슨 소리인가? 지금 기습하면 적은 방심한 허를 찔리는 것이고 바람 때문에 쉽게 도
망가지도 못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소? 바람이 잦아들면 적은 순풍을
타고 자유자재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오. 지금이 기회요. 때를 놓치지 맙시다. 내가 선봉에
서리다."
이순신이 그의 말을 잘랐다.
"견내량의 왜군은 우릴 기다리고 있소이다. 사방에 매복이 깔렸을 것이오. 좌우에서 협공
을 당한다면 큰 피해를 입습니다. 견내량으로 무작정 몰려가서는 안 될 일이오이다."
원균의 언성도 높아졌다.
"우린 계속 연전연승하고 있소. 왜놈들은 연합함대의 깃발만 보아도 꽁무니를 뺄 것이 틀
림없소. 주저할 까닭이 없소. 어서 출정의 북을 울리도록 합시다."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외다. 정 출정하고 싶다면 장군 혼자 가십시
오."
"뭣이? 나 혼자 가라?"
원균의 두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이순신을 내리칠 기
세였다. 이순신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억기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끼여들었
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아직 왜선과 싸우기도 전에 이렇게 우리끼리 다투면 어찌 합니까?"
"이장군, 장군도 방금 좌수사의 말을 들었지 않소? 나더러 혼자 견내량으로 가라니, 이것
이 연합함대의 주장에게 할 말인가?"
주장? 이순신의 눈꼬리가 치켜올랐다. 원균의 속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세 명의
수사가 동등한 지위흘 갖기로 약조를 했지만 원균은 늘 자신이 이 연합함대의 실질적인 지
휘관임을 자처해왔다. 원균이 이번에는 이억게에게 출정을 독촉했다.
"전라좌수군이 움직일 수 없다면, 좋소, 이장군. 그대와 나 둘이서 왜적을 쓸어버립시다.
내가 앞장을 설 터인즉 이장군은 따르기만 하시오."
이억기는 선뜻 확답을 주지 않았다. 이순신이 원균의 주장을 반박했다.
"종으로 길게 대열을 이루어 견내량으로 들어가면 아니되오이다. 그곳은 육지에서도 대포
를 쏠 수 있을 만큼 협소한 곳이에요. 전멸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소이까?"
"닥치시오.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먼. 도대체 전멸당하긴 누가 전멸당한단 말
이오? 이 원균이 군사들을 전멸시킬 장수로 보이는가? 겁이 나면 빠지시오.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만으로도 능히 적을 칠 수 있소."
격양된 원균의 목소리와는 달리 이억기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
면서 끼루끼루룩 대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
다. 강한 바람은 여전히 배를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윽고 이억기가 말했다.
"이번만큼은 이수사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겠소이다. 하늘을 보니 소나기라도 한 줄기 쏟
아질 모양이고, 견내량으로 갔던 척후도 새벽이나 되야 돌아올 것인즉 원수사께서 조금만
양보하시지요."
이억기 그대마저…….
원균의 얼굴에 분노와 놀람이 함께 서렸다.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이 움직이
지 않는다면 그 혼자 견내량의 왜선과 맞설수는 없는 것이다. 원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소. 허나 만약 왜선들이 모두 달아나고 없다면 이수사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이수
사는 적을 섬멸할 비책이라도 있으시오?"
원균이 노골적으로 이순신을 비웃었다.
"있소이다."
오늘따라 이순신은 자신에 차 있었다. 원균은 과묵하기로 소문난 이순신의 흔쾌한 대답에
놀랐다. 이순신이 지휘봉을 들어 견내량과 한산도 사이를 짚었다.
"먼저 왜 선단을 이곳까지 유인하고 학익진을 펴는 것이외다."
"학익진?"
"그렇소이다. 왜선들을 몰아놓고 둘러싸면 저들의 조총도 무용지물이외다. 함부로 총을 쏘
다가는 바로 옆 왜선의 왜군들만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왜선을 유인할 후 순식간에 배를 돌려야 하지 않소?"
"그 일은 전라좌수영의 군선들이 맡아서 하겠소이다. 몇 번 진법훈련을 한 적이 있지요.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은 좌우 날개를 맡아주시오. 날개의 선봉에는 영귀선과 방답귀선을
두어 당파 전술을 쓰도록 합시다. 어떻소이까?"
이억기가 먼저 대답했다.
"참으로 놀라운 계책입니다. 따르겠소이다."
원균도 마지못해 답했다.
"좋소. 일단 이수사의 말대로 하지. 좌수영의 군선들이 제때 뒤돌아서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우수영의 돌격선들이 그대의 목숨을 구할 터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건 그렇고, 몽진
중인 조정은 어떠한지 걱정이오."
이억기가 맞장구를 쳤다.
"이러다가 요동까지 밀리는 것이 아닐까요?"
원균이 단정짓듯 말했다.
"무슨 소리!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압록강을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는데 내부라니, 당치도 않소."
이순신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서애 유성룡에게 보내는 장문의 서찰을 썼던 것이다. 연
락이 끊긴 지도 두 달이 넘었다. 소식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리리 먼저 전령을 보내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여명 무렵, 날발을 불러 서찰을 건넨 후 전라좌수군에 출정 명령을 내렸다. 모처럼의 단잠
에 기운을 얻었던지 장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힘이 넘쳤다. 녹도만호 정운과 방답첨사 이
순신을 은밀히 불렀다.
"그대들이 앞장을 서서 견내량으로 들어가오. 그리고 적을 유인해서 방화도 앞까지 끌어
내시오. 거기서 학익진을 펴는 것이오. 알겠소?"
두 장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인 후 각자 판옥선 한 척씩을 건느리고 먼저 한산도로 돌아
들어갔다. 거세게 불던 바람도 어느덧 잦아들었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갔다. 순
천부사 권준이 웃으며 이순신에게 다가왔다.
"괘가 아주 좋습니다. 필승의 기운이 가득하군요. 반드시 적을 몰살시킬 수 있을 것입니
다."
연합함대는 조용히 노를 저어 한산도를 지났다. 왜의 척후선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정운
과 이순신의 배를 발견하고 견내량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순신은 좌귀선돌격장 이언량과
우귀선돌격장 박이량에게 각각 좌우로 넓게 벌려설 것을 명했다. 적을 맞을 준비가 모두 끝
났다.
이윽고 명에 따라 전라좌수영 군선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칠십여 척의 왜선들이 조
총을 쏘며 앞을 다투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운의 판옥선이 거의 왜선들에게 포위당하기
직전이었다. 지휘선에서 전세를 살피던 이순신이 용단을 내렸다.
"지금이다. 공격! 학의 날개를 펴랏!"
그와 동시에 후퇴하던 좌수영의 군선들이 뱃머리를 일제히 획 돌렸고, 경상우수영과 전라
우수영의 군선들이 원을 그리며 왜선들을 포위했다. 영귀선과 방답귀선은 총통을 쏘면서 미
친 듯이 돌진했으며, 학의 양 날개에서 비오듯 불화살이 쏟아졌다. 뒤늦게 함정임을 깨달은
왜선들이 배를 돌려 견내량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이미 학의 날개 안에 완전히 갇힌 뒤였다.
조선의 군선들은 학의 날개를 휘젓듯이 가볍게 포위망을 좁혔다 넓혔다 하며 왜선들을 차례
차례 격침시켜나갔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춤사위가 커질수록 격침되는 왜선들의 숫
자가 늘었고, 좌우로 밀리고 앞뒤로 협공당한 왜군들은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음을 재
촉했다. 쿵쿵 소리가 날 때마다 왜선들은 두 동강이 나거나 화염에 휩싸였다. 이순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침몰하는 왜선들을 바라보았다.
완전한 승리였다. 이순신은 이 한판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겁장이라는 오명도 벗고 원
균의 기세도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삼도 수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이 되기 위해서는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어영담과 함께 지도를 펴놓고 며칠 밤을 숙의한 것이나 이순신을
독려하여 기한보다 빨리 방답귀선을 만든 것도 왜선을 몰살시키기 위함이었다. 옥포나 사천
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졸들은 아직까지 이순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달아나는
왜선을 적극적으로 뒤쫓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오늘 왜선 칠십 척을 몰살시켰다. 이제 누구도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없으리라. 이 한판의 싸움으로 그는 완전히 장졸들의 신망을 얻을 것이고 조정으로부터
도 그에 상응하는 벼슬을 제수받을 것이다.
"감축드리옵니다. 대승을 거두셨습니다."
권준이 어느 틈에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이순신은 그의 손을 반겨 잡았다. 권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저들은 함부로 이곳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안심하고 조정에 곡물과 의복을 바쳐
도 되겠어요."
권준은 이순신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켰
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직접 곡물을 조정으로 실어나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순신은 은밀
히 정사준으로 하여금 그 일을 부탁해두었는데, 눈치 빠른 권준이 이미 그 일을 미루어 짐
작한 것이다.
"그리고 조정 중신들에게도 얼마간의 곡물과 의복을 따로 준비해 두는 것이 어떻겠는지
요? 굶주리고 지치기는 그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때 도움을 받는다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테지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이순신은 짐짓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권준은 영귀선과 방답귀선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
며 답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원수사와 입씨름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장군께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여 원수사를 딴 곳으로 전출시켜야 합니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정치이지요. 원수사와
끝까지 함께 갈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기회를 잡으세
요."
이순신은 학의 오른쪽 날개에서 원균의 판옥선을 어림짐작으로 찾았다. 귀선에게 돌격의
임무를 맡기라고 설득했지만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왜선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학의 오른쪽 날개가 무너지면서 왜선들이 생쥐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에 원수사는 틀림없이 부산을 치자고 할 것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판옥선들이 달아나는 왜선을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총통 소리가 차츰 잦아들면서 그을
음이 하늘을 뒤덮었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한 권준이 다시 물었다.
"부산에는 왜선 칠백여 척이 정박해 있지요. 우리 판옥선은 모두 합쳐봐야 육십 척 정돕
니다. 백전백패죠. 하지만 원수사는 한산도의 승전을 등에 엎고 부산을 치자고 할 것입니
다."
이순신이 지나가는 말투로 답했다.
"불나방이 될 수는 없겠지."
권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렸다.
"부산을 치라는 어명이 내리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어명?"
이순신은 고개를 돌려 권준을 응시했다. 몽진에 동행하고 있는 대신들에게 따로 곡물과
의복을 보내자는 권준의 주장은 승전보에 들떠 부산을 치라는 어명이 내리지 않도록 미리
입막음을 하자는 의미였다. 이미 원균은 조정에 전령을 보내 부산을 치고 싶다는 뜻을 여러
번 전달한 바 있다. 한산도의 승리가 전해지면 조정에서는 십중팔구 원균의 뜻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순신이 거둔 성과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다시 원균의 위상만 올
라가리라.
막아야 해. 내 장졸들을 헛되이 죽일 순 없어.
전투가 모두 끝이 났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왜군들과 난파한 왜선들이 어지럽게 널
려 있었다. 끝까지 항전하는 왜군들의 목을 치고 항복하는 왜군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결
박했다. 이억기와 원균은 승리를 기뻐하며 천자총통을 한 방씩 번갈아 쏘았다. 이순신 역시
천자총통으로 오늘의 기쁨을 함께 했다.
영귀선과 방답귀선에서는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순신은 부상병들을 좌수영으로 보
내 상처를 치료하도록 했고, 적의 복병선이 견내량에 숨어 있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정운으
로 하여금 살피게 했다. 밤이 으슥해서야 정운은 좌수영의 군선에 합류했다. 그는 이순신의
지휘선에 오르자마자 호탕하게 웃어제끼며 큰소리를 쳤다.
"하하핫!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더이다. 모두 부산으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오. 이제 부산만
치면 됩니다. 부산만 쓸어버리면 왜놈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는 것이외다. 아니 그렇
소, 장군? 하하핫. 부산으로 갑시다. 가서 왜놈들을 몰살시킵시다. 하하하핫!"
이순신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지만 정운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음산한 동풍
이 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9. 도제천하
천하의 군자로서 의로움을 행하려 하는 사람이라면 곧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
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며, 하늘의 뜻에 반한다는 것은
차별을 두는 것이다. 모두를 아우르는 도는 의로운 다스림이며, 차별을 두는 도는 힘에 의한
다스림인 것이다.
『묵자』, 「천지편」
임진년(1592년) 7월 22일 오후.
오색 무지개가 산자락에 걸렸다.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둥근 반원속으로 날아갔고, 흰 소
복에 산발한 여인네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뒤를 따랐다. 부스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
이로 그들의 희고 창백한 눈망울이 보였다. 검은 동자가 사라진 그네들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북녘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
다. 여인네들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아기들이 뭉게구름처럼 두둥실 떠서 무지개 속으로 날아
갔다. 그들의 눈망울 역시 검은 동자가 없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들은 배가 고픈지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뒤를 쫓아 서남쪽에서 온몸이 털투성이인 사내가 등장했다. 사내는 머리
위에 피가 뚝뚝 흐르는 돼지를 뒤집어썼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제 팔뚝을 물어뜯었다. 큰 눈
을 끔벅이며 강보에 싸인 아기들을 하나씩 집어들고는 부드득부드득 씹어 삼켰다. 아기들의
짖어진 손과 발이 사내의 이빨 사이에 끼여 밖으로 삐져나왔다. 사내가 마지막 아기를 송곳
니로 찍어 누르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해졌다.
흑! 저, 저놈은 도철이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을 번쩍 떴다. 빛 바랜 단청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때마침 불어온 바
람이 흘러내린 땀을 씻어주었다.
"정신이 드는가? 이레 만에 정신을 차렸구먼."
작은 키에 깡마른 얼굴, 술독에 젖었다가 나온 붉은 콧잔등의 사내는 틀림없이 손곡 이달
이었다.
"……스승님! 어떻게……."
허균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척추뼈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온몸이 흐물거렸다. 이달은 허리에 찬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킬킬킬 웃어댔다.
"염라대왕 앞은 아니니까 걱정 말게. 자넨 용케 내가 박은 대나무 지팡이를 입에 물고 있
더군. 흙이 들어가서 막힐까봐 기를 꽤 불어넣었지."
아! 온몸을 찍어누르던 흙의 무게…… 희끄무레한 빛도 없는 절대 어둠의 순간!
식인으로 연명하는 화적들에게 잡혀 생매장당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서늘한 냉기와 함께
숨이 턱턱 막혀왔고, 겹쳐 있던 사내들이 몸을 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그때마다 더
많은 흙이 그의 얼굴을 덮쳤다. 이제 이것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그 누구
도 낯선 땅에서 낯선 사내들과 함께 파묻힌 그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곤 한껏 숨을 참고 열
손가락으로 흙을 움켜쥔 채 게거품을 물고 죽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그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입으로 물었다. 찐득하고
썩어들어가는 대나무 냄새가 났다. 갑자기 찬 기운이 얼굴로 확 밀어닥치며 대나무 안에 차
있던 흙이 그의 양볼을 사정없이 때리며 빠져나왔다. 그는 다시 대나무를 물었다. 목까지 차
올랐던 죽음의 기운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렇다면 손곡 이달도 그 야만의 무리에 있었단 말인가?
"이제 알겠나? 내가 아무리 눈짓을 해도 자넨 날 몰라보더군. 하긴 산발을 하고 누더기를
걸쳤으며 얼굴에 검댕이를 칠한 나를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겠지. 허나 내 목소릴 잊다
니…… 섭섭한 일이야. 자네가 저승으로 가도록 내버려둘까도 생각해보았지만 하나뿐인 제
자를 죽일 수가 없었지. 허허허허."
"그럼 스승님께서 바로?"
"그래, 화적들도 날 선생이라고 부른다네. 그래도 몇 자 배운 게 있다고 이것저것 아는 체
를 했더니 붙여진 별명이지."
식인의 무리 중에 이달이 끼여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정 많고 눈물 많은 시인이
어찌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게 되었을까?
시를 버리고 야만을 택한 까닭이 무엇일까?
"허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그들도 처음부터 사람 고기를 먹은 것은 아니라네. 금강산
깊숙한 자락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샘물 같은 사람들이었지. 나도 그네들의 맑은 심
성이 좋아 그들의 곁에서 생을 마칠 작정을 했어. 헌데 아마 작년부터일 게야.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더니 벌레들이 들끓고 우박이 내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
었다네. 그 동안 모아둔 양식으로 겨울까지는 어떻게 해서 넘겼는데 보릿고개가 그렇게 높
을 수가 없더군. 하는 수 없이 화적질을 시작했네. 금강산에 유람 온 양반님네들의 돈과 재
물을 조금 나눠 쓰는 것이었어. 금강산이야 내가 훤히 알고 있으니 길목 좋은 곳 서넛만 택
해 덫을 쳤지. 그때도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네. 칼이며 도끼를 들었어도 그걸 제대로 휘두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인걸. 헌데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네. 전쟁이 터진 마당에
금강산 유람을 다닌 양반이 어디 있겠는가? 화적질을 못하게 되자 우린 강릉 쪽으로 거처를
옮겼지. 그래도 그곳은 큰 고을이니 먹을 것이 있으리라 여겼어. 허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네.
집은 텅텅 비었고 마을로 잘못 내려갔다가는 왜놈들의 조총에 황천행을 재촉하기 십상이었
다네."
"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먹을 수 있습니까?"
이달은 술병을 거꾸로 들어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짜내듯이 마셨다. 얼굴이 불쾌해지
고 몸이 점점 뒤로 젖혀졌다.
"공자님 같은 말씀만 하는구먼. 굶주림의 고통을 아는가? 세상이 온통 아비규환인데 나
혼자만 의젓하고 고결하게 굶어 죽으란 말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도 결국 짐승일 뿐
이야. 도를 알고 예의를 논하는 건 속이 차고 등이 따뜻할 때나 하는 거지. 나는 그들에게서
살아남겠다는 본능을 보았네. 아무도 그 몸부림을 막을 수 없어. 생각해보게나. 들판에 개미
처럼 널려 있는 것이 사람들의 시체라네. 까마귀와 늑대들은 숲에서 내려와 포식을 했지. 우
리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그 시체들은 들짐승, 날짐승들의 하루 먹이로 사라질 판이었어. 그
래서 차라리 그 시체들을 우리가 취하기로 한 것이야. 삶이란 그렇게 더럽고 추악하며 또한
질기고 지독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고하게 굶어 죽어 들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인가, 추악한
삶을 위해 인육을 뜯어 먹을 것인가의 갈림길이었네.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공맹이라
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었을 테지만 범부들이야 어디 그럴 수 있겠나? 장사 지내는 기분
으로 시체를 골라 삶아 먹었다네."
허균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인육을 뜯어먹는 이달의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뒤집혔
다.
"헌데……돌림병이 돌았네. 병에 걸린 시체를 먹고 여남은 명이 급사를 했지. 더 이상 시
체를 먹을 수 없는 노릇이었네. 그래서……."
"사람사냥을 시작했다는 말씀입니까?"
허균의 목소리는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라고 했
다. 그러나 지금 이달은 인과 의를 모두 내팽개친 것이다. 화적들의 사정이야 그렇다손 치더
라도 이달, 당신만은 그 야만의 길에서 벗어났어야 했다. 세상이 야만스럽고 사람들이 야만
스럽다는 것이 어찌 나 자신도 야만스러울 수 있는 이유가 되겠는가?
"시가 무엇인가?"
이달이 난데없이 시를 끄집어냈다. 식인과 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둠과 빛인가.
"자넨 무엇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인가? 동방의 이백이 되려
는 게야?"
이달의 말투에 점점 물기가 스며들었다. 술에 취해 우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의
횡설수설이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시란 인간을 담는 그릇이야. 이백과 두보가 왜 그렇게 천지사방으로 돌아다닌 줄 아는
가? 인간이란 족속을 좀더 잘 알기 위해서였어. 평생 장안에 머무르면 고작 그 동네 인간들
만 담아낼 수 있을 뿐이거든. 성스러우면서도 한없이 속되고, 착하면서도 악하며, 비굴하면
서도 용감하고, 슬프면서도 기쁜 인간의 본성. 이백과 두보는 그게 궁금했던 거야. 어물쩡
세상을 사는 놈들은 시에 담을 필요가 없지. 그깟 인간들이야 이 세상에 차고 넘치니까. 필
요하면 언제든지 가져와서 쓸 수 있어. 그러나 극단은 달라. 우린 서책을 통해 극단까지 갔
던 사람들을 만나지. 원대하기로는 진시황이 있고, 총명하기로는 제갈공명이 있어. 즉흥으로
는 이백을 따를 자가 없고, 끈기로는 사마천이 첫손가락일 게야. 그러나 그들은 오래 전에
죽었고 세상에 너무 많이 알려 졌지. 물론 그들처럼 다시 살기는 힘들겠지만 그들이 서고자
했던 곳이 어디인가를 짐작할 수는 있다는 뜻이야. 나는 늘 그런 극단의 사람들을 그리워했
네. 또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극단에 나 스스로 서고 싶었어. 서얼 출신인 내가 진시황이나
공명, 사마천을 닮을 수는 없겠지. 이백 흉내도 곧잘 냈지만 내 재능은 그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해. 헌데 전쟁이 터지고 화적떼에 끼면서 나는 새로운 극단을 찾았다네. 인간이 얼
마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목겨한 것아애. 인간이란 결국 자기애에 갇힌 짐승일 따름
이지. 시든, 문명이든, 가족이든, 국가든 이 모두는 결국 자기애의 정당화에 다름 아니야. 전
쟁이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주었다네. 각자의 자기애를 조절하고 중화시키던 여러 수단
들이 왜놈들의 조총 앞에서 일순간에 사라져버렸지. 그 후 모든 말과 행동이 순수해졌네. 아
무런 도덕적 제재나 죄의식이 없는 가운데, 평범한 인간들이 훌쩍훌쩍 자기애의 진수를 보
여주기 시작한 것이야. 이백이 서역에서 찾아해맸던 인간이 바로 이곳에 있었어. 인간의 갈
비뼈를 빨고 내장을 게걸스럽게 꺼내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인간들, 삶의 활력을 찾는 인간
들! 완전히 다른 인간이지. 결코 전쟁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야. 한계를 넘어서 저
쪽으로 가버린 인간들이지. 나는 요즘에야 비로소 다시 시를 쓸 생각을 한다네. 지금까지의
내 시가 그저 서책에 있는 인간들을 향한 그리움이자 갈망이었다면, 지금부텆는 내가 서 있
는 이곳에 관한 시를 쓰겠네. 알겠는가?……알 턱이 없지. 자네가 어찌 그 끔찍하고 아름다
운 나날을 이해하리. 부디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이애하도록 힘쓰게나."
이달의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 방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워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기
시작했다.
극단? 자기애?
스승이 뱉은 말들을 되새김질하였다. 야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
이 죽었을 때 허균은 끝없는 추락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한 상실감일 뿐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분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달은 그 상실감을 넘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곳
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태평성대의 꿈을 버리고 지옥 같은 현실을 직시하라?
허균은 우선 스승에 대한 혐오를 지웠다. 이달은 제 흥에 취해 앞 뒤 가리지 않고 인육을
먹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당나라의 시들을 가르치면서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 떠올랐다.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다. 몸이 채워지지 않고는 아무런 말도 만들어질 수 없느니. 비유
를 버려라. 직접 부딪쳐 익힌 것이 아니라면 비유는 한갓 뜬구름이거나 빛 좋은 개살구이니
라."
전쟁이 시풍마저 변화시키는구나. 아내와 아들이 죽은 나나 인육을 먹은 스승의 붓끝에서
어찌 맑고 밝은 시흥이 나올 수 있으리. 어두운 시대는 어두운 시를 부르고, 탁한 마음은 탁
한 노래를 뱉어낼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았다. 졸음이 눈꺼풀을 한없이 무겁게 했다. 오색 무지개가 펼쳐지더니 곧 수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꼭 한 번 본듯한 무지개였다.
"균아! 정신이 드니? 어미다. 어미를 알아보겠어?"
어머니 김씨가 손을 꼭 붙들고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고 있었다.
"……어미니!"
허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달을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뒤에 앉은 사내는 스승이
아니었다. 설경이 토끼처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스승님은 어디 계신가요?"
김씨가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훔치며 반문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스승이라니?"
"손곡 선생 말씀이에요."
김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헛것이 보였던 모양이구나. 손곡 선생을 만나고도 싶겠지. 형처럼 널 위해주신 분이 아니
더냐. 그분도 이 난리를 피해 무사하셔야 할 터인데. 균아! 넌 이레 만에 정신을 차린 거란
다. 나는 네가 꼭 죽는 줄만 알았어. 모든 것이 다 여기 있는 최의원 덕분이다."
김씨가 고개를 돌려 윗목에 앉은 사내를 가리켰다.
"최중화라고 합니다. 고비를 넘기고 깨어나셨으니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최중화는 앞으로 다가앉아서 허균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허균이 고개를 돌려 어머니에
게 물었다.
"어디서 절 찾았나요?"
김씨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가 먼저 해안으로 떠난 후 아무리 기다려도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지 않더구나. 하는
수 없이 수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왔단다. 다행히 그때는 해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
어 상륙할 수 있었지. 넌 용바위의 꼬리 부근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더구나. 열이 얼마나
높았던지 불덩이가 따로 없었어."
"그때…… 제 몰골은 어땠죠?"
"그게 참, 이상한 일이었어. 꼭 땅에 파묻혔다.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흙투성이였단다. 눈
과 귀, 코와 입, 며칠을 씻어내도 계속 흙이 나왔지."
꿈이 아니었어.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속이 메슥거리고 온몸이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근질거렸다. 이
달은 다시 화적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과 함
께 머물 것이다. 인간성의 극단을 체험하며 극단의 시를 짓고, 그리고 남몰래 눈물 흘릴 것
이다.
"열도 내렸고, 뭉쳤던 혈도 제대로 운행하는군요. 제가 드린 탕재를 이틀만 더 드시면 일
어서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마님. 오히려 절 믿어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
니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안찰(눈으로 환자를 살핌)을 더 하지요."
김씨는 마당까지 최중화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설경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허균의 귀 밑
에 난 사마귀를 만지고서야 아버지의 존재를 새삼 실감하는 모양이었다.
"아빠! 많이 아파?"
그는 딸의 곱게 빗은 꽁지머리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드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
다. 어머니가 호박죽을 가지고 들어왔다.
"돈이 어디 있어서 탕제를 구하셨습니까?"
허균은 수성을 벗어나가 위해 노잣돈을 모두 써버렸음을 기억해냈다.
"돈을 받지 않더구나."
"탕제를 거저 주었단 말씀입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최의원은 조선 백성을 위해 하늘이 내리신 명의란다. 병을 고쳐주고도 돈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돌림병에 걸리지 않는 신기한 약초까지 나눠주고 있어."
"최중화라고 했지요? 이 고장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다. 말투를 보아하니 전라도 사람인 것 같구나. 워낙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서 고향이
따로 없다고 하더라만."
전라도? 전라도라면 아직 이 지독한 전쟁으로부터 어느 정도 비껴나 있는 곳이 아닌가?
전염병도 덜하고 굶어 죽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왜 이 먼 강릉까지 왔단 말인가? 돈이 목
적이라면 약을 팔아 한 밑천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약을 공짜로 나눠준다지 않는가?
호박죽 한 그릇을 비웠다. 설경은 그 사이 모로 누워 풋잠이 들었다. 그제야 낯익은 가구
들이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예조참판을 지낸 외조부 김광철이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허
균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이곳 애일당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한없이 크
고 귀중해 보이던 가구들이 이제는 낡고 녹이 슬어 허깨비가 나올 것만 같았다. 김씨가 담
담하게 애일당의 주변 풍경을 들려주었다.
"담이 무너지고, 지붕과 벽도 금이 가도, 창문도 썩어 문드러졌더구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게지. 들풀이 허리까지 자라고 잡목이 집을 삥 둘러서고, 쥐와 토끼들이 마루와 안방
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어. 현판은 '애'자만 겨우 남고 나머지는 온데간데없더구나. 네 외조부
가 세상을 뜨신 지 삼십삼 년이나 지났으니 세월이 무상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게야. 하
지만 이곳에 오니 자꾸 죄스럽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곳은 한때 네 외조부께서 팔도의 이
름난 선비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역사를 논하던 곳이었지. 이 집 구석구석에 네 외주부의
손때가 묻어 있단다. 자식된 도리로 마땅히 아끼고 가꾸어야 했는데 이렇게 흉가로 버려두
었어. 부끄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는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모든 것이 소자의 불찰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이곳을 가꾸겠
습니다. 그래야 구원(저승)에서라도 외조부를 떳떳하게 뵐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날 허균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보다 한결 몸이 가벼웠다. 창공
을 나는 갈매기들의 끼루루룩 대는 울음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다에서부터
밀려올라온 바람의 내음을 맡았다.
낡은 도포에 중갓을 쓴 사내가 마루로 올라섰다. 직감적으로 최중화임을 알았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보였다. 쉰 살 이쪽 저쪽일 것이다. 최중화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눈인사를 했다.
"모처럼 파도가 높습니다. 이 세상 티끌과 먼지들을 모두 씻어낼 것처럼 해풍이 부는군
요."
허균은 최중화의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살폈다. 세상살이의 곤함과 힘겨움이 배어나
왔다. 최중화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체하고 다시 진맥을 했다. 오른손을 내맡긴 허균이 물었
다.
"돌림병이 아니었는가?"
"이질과 학질이 함께 왔습죠. 물을 가려먹지 않은 데다 모기떼가 극성일 때 많이 걸리는
병입니다. 특히 노숙을 하거나 공동 취식을 하는 경우에는 발병할 가능성이 높지요."
"십중팔구는 죽는 병이 아닌가? 헌데……."
최중화가 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밀어넣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약을 쓰지 않으면 발병 후 열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몸의
기가 약해서는 세상을 버릴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 고치지 못할 병은 없는 법
입니다. 다행히 강원도에는 돌림병에 잘 듣는 약초가 많이 있지요."
"그대는 돈도 받지 않고 병자들을 치료해준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최중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까닭이 뭇엇인가?"
최중화는 대답 대신 말머리를 돌렸다.
"나으리께서는 서애 유성룡 대감으로부터 시문을 익혔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렇네."
"소인에게 청이 하나 있습죠. 들어주시겠습니까?"
"청이라? 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그대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지. 말해보시게."
"훗날 나으리께서 한양으로 돌아가시면 소인을 서애 대감께 소개시켜주십시오."
"서애 대감을 만나게 해달라? 이유가 뭔가? 그 까닭을 알아야 다리를 놔줄 게 아닌가?"
최중화는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허균
은 최중화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최중화는 반백의 수염을 쓸면서 이야
기를 시작했다.
"꼭 이유를 아셔야겠다면 말씀드립죠. 이야기가 길더라도 참고 들어주십시오. 소인은 병오
년(1546년) 생이니 올해 마흔일곱입니다. 조실부모한 후 약초를 캐는 사람들을 따라서 지리
산을 떠돌았습죠. 열일곱 살부터 한양에 올라가 의술을 익혔으나 의과에는 다섯 번 응시하
여 모두 떨어졌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뒷돈을 댈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죠. 세상을 떠돌
다가 서른 살에 모든 걸 정리하고 낙향하여 정읍에서 계속 환자들을 치료해왔습니다. 그 근
방에서는 꽤나 이름을 얻었지요. 소인은 그 동안 환자들은 치료하면서 각 환자의 증상과 치
료법, 예방법 등을 기록해두었습죠. 물론 금원사대가의 의서도 있고,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책이 있기는 합니다만, 새로운 병이 자꾸 생겨나고 여전히 불치로 남아
있는 병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돌림병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속수무책이지요. 소
인이 정읍을 떠나 이곳까지 오게된 것도 창궐하는 돌림병을 살펴 새로운 처방을 하기 위함
입니다. 다행히 신기한 약초를 발견하여 이렇듯 약효를 보게 되었습죠. 소인의 마지막 소원
이 있다면 지금까지 소인이 깨달은 바를 서책으로 묶는 것입니다. 헌데 책을 엮기 위해서는
유의, 즉 유학자이면서도 의학에 해박한 당상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소인같이
뿌리도 없는 사람에게 누가 선뜻 책을 내도록 허락하겠습니까? 서애 대감께서는 침술과 맥
법에 능한 당대 제일의 유의이시니 도와만 주신다면 소인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허균도 유성룡의 신묘한 침술을 직접 경험했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을 자다가 입
이 반쯤 오른쪽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유성룡이 침 두 방으로 간단히 제자리로 돌려놓
은 것이다. 유성룡의 관심은 병법에서부터 의술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고 깊었다.
"돌림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병이 옮아 죽을
수 있는데도."
"그렇습죠."
허균은 최중화의 진지한 얼굴을 응시했다.
웃기는 세상이로다. 한편에서는 산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고, 또 한편에서는 죽어가
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구나.
"돌림병을 어느 정도까지 치료할 수 있는가?"
"아직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돌림병 환자들이 피난민들과 뒤섞여 움직이기 때문에
병의 증상 역시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몇 가지 약초를 동시에 써야 할 경우가 허다하죠. 허
나 이 삼 년 내에 그 가닥이 잡힐 것입니다. 환자들이 저잣거리마다 가득하니 약초를 얼마
든지 시험할 수 있지요."
최중화에게는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이 모두 시험대상이었다. 약 한 첩 지어먹지 못
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들은 그가 내미는 약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받아먹었다. 더러
약을 잘못 써서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최중화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미 치료할 시기
를 놓쳤거나 병세가 기운 사람들이었다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병이 낫는 경우에는 그
소문이 삽시간에 팔도로 퍼져나갔다. 최중화는 명의 화타보다도 더 뛰어난 의사로 칭송되었
다.
허균은 최중화가 죽음을 무릎쓰고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
을 접하기 위해 화적떼에게로 돌아간 손곡 이달의 욕망과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상황
이 극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한쪽은 사람을 잡아먹고 다른 쪽은 사람을 살
리는 상반된 길을 걷지만,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살고 죽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는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의 현실도, 죽어가는 사람들도, 자신의 안위도 관심 밖이다. 그들은
다만 극단까지 치달아가서 아무도 보지 못한 장관을 최초로 목도하고 싶은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의 빛, 찰나의 깨달음을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일생은 그 깨달음의 몇몇 흔적으로 끝을 맺으리라. 이달은 몇 편의 시를 남길 것이고, 최중
화는 몇 권의 의서를 전하리라.
이제 이 병이 낫고 나면 이달과 최중화가 가고 있는 그 길로 나아가리라. 허면 내게도 삶
을 바꿀 기회가 찾아오리.
임진년(1592년) 7월 27일 아침.
광해군은 갑옷을 고쳐 입고 대장검을 빼어든 채 군막을 나왔다. 탈영병들을 벌하기 위해
서였다. 강계에서 곡산을 지나 이곳 강원도 이천까지 이동하는 동안 수많은 군사들이 목숨
을 잃었다. 더러는 돌림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왜의 척후를 만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부족
한 군졸들은 그때그때 현지에서 충원했다. 그들 대부분은 피난을 나선 백성들이었다. 백정도
있었고, 농사꾼도 있었으며 어부도 있었다. 평생 칼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
다. 광해군은 어명으로 그들을 징발하여 군율로 엄히 다스렸다.
관복을 입은 영의정 최흥원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의주로 가자는 임금의 권유를
뿌리치고 분조를 택한 위인이었다. 처음에는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각별히 존중하였지만 곧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최흥원은 워낙 겁이 많아서 매사에 우유부
단했던 것이다. 그가 선조 대신 광해군을 택한 것도 좀더 안전한 길을 도모한 결과가 아니
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강계에서 남행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앞장 서서 반대한 사람
이 바로 최흥원이었다. 그러나 원체 성품이 둥글둥글해서 광해군이 강하게 밀어붙이자 곧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순종했다. 최흥원은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 때문에 며칠째 콜
록대고 있었다.
"영상 대감, 몸은 좀 어떠신가요?"
"다 나았사옵니다."
광해군은 오랏줄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은 탈영병들을 노려보았다.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을 잡아온 참의 정윤우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앞으로 나섰다.
"죄인들을 대령하였사옵니다."
광해군이 힐끗 정윤우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도망친 자가 모두 몇인가?"
"스물이옵니다."
정윤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스무 명의 탈영병 중에서 일곱이 잡혔으니 열셋을 놓친 것이
다.
광해군은 오른편에 엎드린 군졸을 노려보았다. 그의 이름은 박오정이었다. 다섯 가지 바르
고 큰일을 하라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박오정은 들짐승을 사냥해서 생계를 꾸
려가는 전형적인 사냥꾼이었다. 강계를 빠져나오려는 분조의 길 안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호위군에 편입되었다. 힘이 좋고 담대한 그가 탈영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라."
박오정이 산발한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붙잡혀 오다가 다쳤는지 턱과 양볼에
온통 피명이 들어 있었다.
"왜 탈영을 했는가?"
"세자저하, 탈영이 아니옵니다. 저는 본디 황해도 곡산까지만 길 안내를 맡았사옵니다. 이
제 그 일을 마쳤으니 돌아가려 했을 뿐이옵니다."
사실이었다. 박오정은 이천에 도착한 7월 9일 저녁부터 계속 돌아가기를 청했다. 강계에
늙은 어머니와 갓 결혼한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군졸도 아쉬운 판에 박
오정처럼 유능한 군졸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어명으로 나를 호위하라 일렀거늘 네가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광해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박오정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탈영을
감행했다가 잡혀온 군사의 최후가 어떠한가는 박오정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왕 죽을
바에야 가슴에 담아둔 말이라도 모두 풀어낼 작정이었다.
"세자저하, 굽어살피소서. 회령으로 피하셨던 임해군과 순화군께서 왜적들에게 사로잡히셨
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회령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강계인들 무사하오리까. 노모와
처의 생사라도 살필 수 있도록 보내주시옵소서."
어제 아침, 두 대군이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에게 포박당해 가등청정에게 인계되었다는 비
보가 날아들었다. 회령이 점령당했다면 의주 역시 무사하지 못하다.
소식을 접한 함경도 출신 군졸들의 동요는 대단했다. 한 집안의 가장인 그들이 식솔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지금 광해군 앞에 무릎을 꿇은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함경도 출신이었다.
광해군의 눈썹이 푸르르르 떨렸다.
대군들이 사로잡힌 마당에 함경도로 돌아가려던 군졸들까지 용서하면 더 이상 분조를 지
탱할 수 없다. 함경도는 조선 왕가가 들어서고부터 줄곧 냉대받던 지역이 아닌가. 함경도에
는 국경인처럼 조선을 배신할 자가 더 있으리라. 이때 군졸들이 그곳으로 돌아가서 왕실에
등을 돌린다면 두 대군이 사로잡혔던 과오를 반복하게 되리라. 지금은 자애를 베풀 때가 아
니라 위엄을 세울 시기이다. 장졸들이 나의 군령을 왜적보다도 더 두려워하여 분조를 떠나
지 못하게 해야 한다.
"참하라!"
"세자저하!"
최흥원이 놀란 눈으로 광해군을 바라보았다. 군졸이 부족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극형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윤우도 눈치를 살피며 그 자리에서 미적거렸다.
"무엇하는 게야? 군율에 따라 참하지 못할까?"
탈영병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세자저하! 살려주시옵소서. 죽기로 싸우겠나이다. 저하! 저하!"
광해군은 박오정을 비롯한 죄수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노려보았다. 주위가 일순간에 침묵
으로 빠져들었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광해군에게 쏠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광해군의 양볼이 조금씩 씰룩거렸다. 대장검을 높이 들고 소리쳤다.
"어명을 거역하는 자 내 집접 참형으로 다스리겠다. 누구냐? 당장 앞으로 나서라. 내 말을
어기는 자는 죽음뿐이다."
장졸들의 고개가 일제히 아래로 숙여졌다.
"끌어내랏!"
정윤우의 명령에 따라 죄수들은 솔숲에 마련된 형장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쳤다. 눈을 꾹 감거나 손으로 귀를 막는 장졸들도 있었다. 광해군은 칼
을 내리고 군막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후 정윤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왔다.
"죄인들을 참하여 효수하였나이다."
그 뒤를 최흥원이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그는 아직도 참형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했다. 군막 밖에서 내시 조인량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세자저하, 강릉에서 생원 허균이 왔사옵니다."
광해군이 최흥원을 보며 물었다.
"허균이라면 허엽 대감의 자제가 아닌가요?"
최흥원이 허리 숙여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일찍이 손곡 이달과 서애 유성룡에게서 수학하여 그 학문이 심원하다고
들었사옵니다. 난을 피해 강릉으로 갔던가보옵니다."
광해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생각이 나는군요. 서애 대감이 말씀하신 적이 있소.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
군. 들라 하라."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눈이 퀭한 허균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
전체가 왼쪽으로 기울었으며 오른쪽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병색이 완연했다. 허균은
예의를 표한 후 광해군 앞에 엎드렸다.
"세자저하, 미천한 허균 문안 인사 드리옵니다."
광해군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서애 대감께서 그대를 무척 칭찬하였지. 헌데 어디가 불편한가?"
"아, 아니옵니다. 피난살이에 육신이 조금 지쳤나보옵니다."
허균은 눈을 들어 광해군을 쳐다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준수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을 지
니고 있었다.
"날 속일 생각일랑 말라. 보아하니 중병을 앓은 것 같은데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허균은 수건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몇 번 잔기침을 했다.
"함경도 수성까지 갔다가 배를 타고 강릉으로 내려왔사옵니다. 그 와중에 몹쓸 돌림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나이다."
"돌림병이라고? 여봐라. 밖에 아무도 없는가?"
최흥원은 사색이 되어 내시 조인량을 찾았다. 조인량이 놀란 눈으로 바삐 군막으로 들어
왔다.
"웬 호들갑들인가?"
광해군이 성난 얼굴로 물었다.
"저하, 옥체를 보전하셔야 하옵니다. 돌림병에 걸린 자는 멀리 내쳐야 하옵니다."
"영상 대감, 나는 지금 허생원과 대화중이오. 돌림병이 두렵거든 영상 대감이나 자리를 피
하시오."
"저하, 아니되옵니다."
"어허! 물러들 가시오."
최흥원과 정윤우는 하는 수 없이 군막을 나왔다. 광해군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허균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 지금은 어떤가?"
"다행히 명의 최중화를 만나 좋은 약을 써서 말끔히 나았사옵니다."
"최중화! 나도 그 사람 소문은 들었지. 돈도 받지 않고 백성들의 병을 보살핀다지? 어명으
로 몇 번 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어. 그 사람이 그대의 목숨을 구했군. 그래, 아직도 병
중인 듯한데 강릉에서 이곳까지 날 찾아온 이유가 뭔가?"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격문을 읽고 근왕병이 되기 위해 찾아
온 사람도 있었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패장도 있었으며, 선뜻 군량미를 내어놓
는 부자도 있었다. 그리고 한양을 떠나서 피난살이를 시작한 대신도 있었다. 광해군에게 허
균의 방문은 수많은 일상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가 서애 유성룡의 제자르는 점이 좀더 마
음을 끄는 정도였다.
"군문을 들어오다가 효수된 자들을 보았사옵니다. 탈영했던 군졸들이라고 들었사옵니다.
그들을 참하신 것은 지나치셨습니다."
"무엇이라고?"
광해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군왕은 용맹해서도 아니되고 나약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사옵니다. 군왕이 용맹하면 아
랫사람을 가벼이 처형하게 되고 군왕이 나약하면 사형을 미루게 되옵니다. 지금 세자저하께
서는 용맹이 너무나도 지나치시옵니다. 수백 장의 격문을 띄웠지만 군사들이 모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바로 저하께서 덕으로써 군사들을 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옵
니다."
"닥쳐라!"
"도제천하의 참뜻을 새기시오소서. 도로써 천하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잘
잘못을 모두 헤아리고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옵니다. 지금 저하께서는 단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고 계시옵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군사들이 모이지 않사옵니
다. 민심을 헤아리시옵소어."
광해군은 문득 서애 유성룡의 넓은 이마를 떠올렸다. 서애는 언제나 비유나 상징으로 자
신의 속마음을 감추는데, 그의 제자 허균은 대못처럼 심장을 곧바로 찔러대는구나. 스승과
제자의 성품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는가?
광해군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분조의 신하들은 모두 그의 기세에 눌
려 제대로 의사표시를 못했다. 이덕형이나 이항복처럼 직언하는 신하가 그리웠는데 때마침
허균을 만난 것이다. 광해군은 비위에 거슬리더라도 허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로 마음먹
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물었다.
"그대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치는가?"
"이대로 가신다면 진주가 되실 것이옵니다."
진주!
광해군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진주는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드
는 군왕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민심은 곧 천심이옵니다. 항상 백성의 편에 서서 생각하시옵소서.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들을 풍족하게 만드시며, 그들의 이익을 챙기시고, 그들의 삶이 평안하도록 헤아리시옵소서.
세자라는 존귀한 자리에 연연하지 마시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읶르었다는 명성에 대한 집착
을 버리시옵소서. 요순처럼 백성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 틀림없이 민심을 얻으실 것이옵니
다."
"나는 군율에 따라 죄인들을 참했을 따름이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군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전하께서 세 가지 약속을 저들에게 하셔야 하옵니다. 첫
째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다시 찾겠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들의 땅과 집과 지위를 보
장하겠다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들의 처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것이옵니다.
저하께서는 이 셋 중에서 몇 가지나 백성들에게 약속을 하셨는지요? 하나도 없사옵니다. 저
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시고 어찌 저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시옵니까? 듣자하니 군문
에 효수된 군졸들은 대부분 함경도에 남겨둔 처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군영을 벗어났다
고 들었사옵니다. 저들이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지요? 저하께서는 저
하의 잘못은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모두를 백성들의 잘못으로만 돌리신 것이옵니다."
광해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까지 참으며 들어왔지만 더 이상은 감당하기 힘들
었다.
내가 누군가? 명나라로 달아나려는 아바마마와는 달리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내려
온 세자가 아닌가? 내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던져 왜적과 맞서는데 어찌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 군량미와 무기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어
찌 백성들에게 이익을 약속하고 나눠줄 수 있겠는가?"
허균이 광해군의 말을 잘랐다.
"그렇사옵니다. 우리는 지금 저 무지막지한 왜놈들과 전쟁을 하고 있사옵니다. 허나 우리
의 적은 왜놈들만이 아니옵니다."
"왜놈들만이 아니다?"
"백성들을 살피시옵소서. 왜놈들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서로 죽이고 죽는 세상이
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굶어 죽고, 돌림병에 걸려 버림받아 죽고, 화적떼를 만나
맞아서 죽사옵니다. 왜놈들의 손에 죽는 숫자보다 몇 배나 많은 백성들이 동포의 손에 죽어
가고 있사옵니다. 이제 백성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사옵니다. 명궁 예나 승마
의 명인 조부, 수레를 만든 해중등은 재능만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
에 도를 깨쳤기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것이옵니다. 저하께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취할 좀
더 근원적인 도를 깨치시옵소서."
광해군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 전쟁을 이겨야지만 백성들에게도 행복이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패하면 무엇이 남겠
는가? 왜놈들에게 짓밟히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싸워야 한다. 사랑이나 자비는 그때 가서
생각할 것들이다."
"저하,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백성들이옵니다. 백성들이 왕실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전쟁
에서 승리할 수 있겠사옵니까? 군막에 앉아 군사들의 목을 칠 시간이 있다면 백성들을 살피
시옵소서, 그들에게 충직한 군졸이 되라고 윽박지르지 마시옵고 그들의 고민을 들으시옵소
서. 지금 때를 놓치시면, 저들은 영원히 불목지민(다스리기 힘든 백성)으로 남을 것이옵니다.
설령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저들은 더 이상 저하의 백성들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저하
도 더 이상 저들의 저하가 아닐 것이옵니다. 법을 버리시고 인을 취하시옵소서. 저하!"
허균은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광해군은 마음 한켠이 서늘해저옴을 느꼈다. 허균의 말투
에서 삶의 고단함과 절망, 슬픔과 분노가 묻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허균의 뜻을 받
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누군들 그렇게 하
고 싶지 않으랴. 허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허균의 말대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지쳐 있다. 이때 그가 손을 내밀면 백성들은 아귀처럼 그 손을 물어뜯을 것이다. 백성들 속
으로 들어가면 그도 역시 그들처럼 절망할 뿐이다.
지금은 백성들을 믿을 수 없다. 이 전쟁의 책임을 왕실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 나는 그들에게까지 양팔을 벌리고 미소짓지 않겠다. 이 나라는 곧 나의 나라가 될 것이
다. 나는 나의 권위를 지키면서 백성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리라. 나를 따를 것인가? 나를
다른다면 그대들에게는 새 삶의 희망이 있다.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설령 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나는 그대들을 벌하리라. 기회는 한 번뿐! 택일하라. 그리고 그 선택
의 책임을 져라.
"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다. 허나 그대처럼 전후 사정을 살피다가는 적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나의 형님 임해군 역시 백성들을 믿었다가 사로잡히지 않았는가? 백성을 위
하는 그대의 마음은 기특하고 기특하다. 그러나 나는 조선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그대와
다른 길을 가겠다."
허균은 고개를 들고 입을 굳게 다문 채 광해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광해군 역시 그의
앙상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이윽고 허균은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광
해군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처자는 강릉에 함께 있는가?"
허균이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아내도 아들도 돌림병으로 잃었나이다."
그순간 이 왜소한 사내의 아픔이 광해군의 얼굴을 덛쳤다. 그러나 광해군은 아무런 위로
의 말도 던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허균 역시 법대로 다스려야 할 백성 중의 하나인 것이다.
허균이 나간 후 광해군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꾸욱꾹 눌렀다. 허균의 직언이 박쥐처럼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광해군도 피난민들의 참상을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인육까지 먹
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은 더욱더 원칙을 지키고 법을 강조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법의 원칙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곧바로 야만의 길로 들어서리라.
"저하, 여진의 사신이 왔사옵니다."
내시 조인량이 찢어지는 듯한 목청으로 아뢰었다.
"여진의 사신? 들라 하라."
감았던 눈을 떴다. 여진의 사신이 여기까지 웬일인가?
황색 통옷에 매의 깃털을 허리에 촘촘히 꽂은 여진족 두 명이 조인량의 뒤를 따라 들어왔
다. 그들은 서툰 동작으로 큰절을 했다. 그들 중 키가 작고 팔자 수염이 난 자가 능숙한 조
선말로 예의를 차렸다.
"세자저하, 문안 여쭈옵니다. 그간 얼마나 노고가 크셨사옵니까?"
"그대들이 여기까지 웬일인가?"
광해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흥원과 정윤우가 어느새 들어와서 좌우로 벌려 섰다.
키가 크고 뺨에 칼을 맞은 흉터가 남아 있는 사내가 여진말을 하자 키 작은 사내가 곧바로
통역했다.
"조선이 어려움에 처했음을 알고 대추장께서 원군을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저희들은 건
주위(누르하치)의 명에 따라 의주라 가서 주상전하를 뵈온 후에 세자저하께 왔사옵니다. 조
선은 오랫동안 저희와 화친을 맺어왔고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에 건주위께서
는 이번 기회에 꼭 그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당치 않는 소리. 어찌 우리가 너희 같은 오랑캐의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최흥원이 턱을 치켜들고 큰소리를 쳤다. 광해군이 성난 눈길로 최흥원을 쏘아본 후 침착
하게 물었다.
"의주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여진의 사신은 입꼬리를 올리며 삐쭉 웃었다.
"방금 저 대감처럼 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예의지국을 천명한 조선이 어찌 여진 따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대신들은 조선을 도울 나라는 오직 천자의 나라 명나라뿐이라고 침을 튀기며 주장했을 것이
다. 광해군은 여진의 사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선과 왜국의 전쟁에 여진이 왜 끼여들려는 것인가? 가만히 앉아서 싸움 구경을 해도 무
방하지 않은가? 원군을 보내겠다는 저들의 속셈이 무엇인가? 어쨌든 이이제이(오랑캐로 오
랑캐를 제압한다)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진의 기병으로 왜의 보명을 친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최근 이삼 년 동안 여진족이 큰 무리를 이루어 압록강 저편에서 말을 달리는 것은 여러
번 목격되었으나, 그들이 압록강을 넘어 육진을 노략질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적게
는 천 명, 많게는 만 명이 넘는 여진의 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강변을 따라 말을 달렸다.
부족과 부족간의 전투와 병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병합을 이룰수록 그들
의 힘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노략질이 중단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의주에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곧 이 나라 만백성의 뜻이다. 냉큼 돌아갈 일이지 이
곳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건주위께서는 주상전하뿐만 아니라 세자저하의 뜻도 알알오라고 하셨습니다."
"내 뜻을 알아오라?"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의주가 아니라 이곳으로 원군을 보내겠다
고 하셨사옵니다."
"내게 원군을 보내겠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조선 조정이 둘로 나뉘었음을 알고 있단 말이
더냐?"
사신은 대답 대신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광해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우
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사방에 널려 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국은 물론이고 원군을 보내지
않는 명나라, 그리고 자진해서 원군을 보내겠다는 여진까지.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간자를 보
내 조선을 염탐해왔던 것이다.
"확답을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지금 곧 돌아가야 하옵니다."
광해군은 그들의 느물느물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부사나 현령앞에서도 얼굴을 들지 못
했던 저들이 조선의 세자 앞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무언인가 믿는 구석이 없다면
저렇게까지 마음을 풀 수는 없다. 그들은 깍듯이 예를 갖추는 것 같으면서도 왜군에게 혼쭐
이 나는 조선을 은근히 비웃고 있다.
"나 역시 아바마마와 같은 생각이다. 이제 곧 요동의 명군이 우리를 도우러 올 것이다. 여
진의 도움은 필요치 않다."
사신은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곧바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돌아가겠사옵니다. 훅 마음이 바뀌시면 연통을 주시옵
소서. 건주위께서는 요동벌판보다도 마음이 더 넓으신 분이옵니다. 세자저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압록강을 넘어와서 조선을 구하실 것이옵니다. 저희들에게도 옛 은혜를 갚을 기회
를 주시옵소서."
10. 합종의 길, 연횡의 길
연나라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충성스럽지 못하였을 뿐인데 어찌 충신이면서 죄를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소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듣건데, 어떤
사람이 관리가 되어 멀리 떠나갔는데 그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통하였다고 합니다. 그 남
편이 돌아올 때가 되자 그 사통한 자가 그것을 걱정하자 아내가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십시
오. 나는 이미 독약을 탄 술을 만들어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흘이
지
나자 그 남편이 과연 돌아왔는데, 아내는 첩으로 하여금 독주를 들고 그에게 권하게 하였습
니다. 첩은 술에 독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하게 되면 주모가 내쫓기게 될까봐 두
려웠고, 말을 안 하자니 그 주인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쓰러지면서
술을 엎질러버렸습니다. 주인은 크게 화를 내며 그녀에게 채찍을 오십 대나 쳤습니다. 고로
첩은 한 번 쓰러져서 술을 엎어 위로는 주인을 살게 하고 아래로는 주모를 살게 하였으나
채찍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충신이면서도 죄가 없겠습니까? 무릇 신의 과실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과 비슷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천, 『사기』, 「소진열전」
임진년(1592년) 8월 21일 새벽.
짧은 가을이 지나고 계절은 어느덧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양보다 한 달이나 일직
서리가 내렸고 압록강에도 살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난리를 피해 함경도나 평안도로 왔던
남도의 백성들은 때이른 추위를 견디지 못해 병이 들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었다. 지난 7월
중순, 요동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명나라 기병 사천 명이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완패한 후
로는 백성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명나라의 원군이 와도 평양을 탈환하지 못했으니
따뜻한 남쪽 고향에서 겨울을 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패장 조승훈이 명나라 조정
에 올린 장계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백성들은 더 이상 승전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 조승훈
은 명나라 기병의 패배가 조선군과 왜군의 내통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돌림병 환자도 급증했다. 강원도와 함경도에 퍼졌던 돌림병이 서늘한 바람을 타고 평안도
로 밀어닥쳤던 것이다.
풍원부원군 유성룡은 벌써 한 달이 넘게 안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명나라
원군에게 필요한 군량미를 모으는 책임을 맡았다. 방을 붙이고 군사들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설득한 결과,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꽤 많은 곡물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조승훈
이 돌아간 후로 명나라의 원군이 다시 온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조정이 곧 요
동을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며칠째 유성룡은 책상머리에서 앉은 채로 밤을 지
새웠다.
오음(윤두수의 호), 그대만 믿겠소.
좌의정 윤두수의 찢어진 눈매를 떠올렸다. 유성룡보다 열 살이나 연상인 윤두수는 타고난
체력과 담력을 앞세워 흔들리는 조정을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의주까지 물러난 선조의 내부
하려는 마음을 돌린데는 윤두수의 공이 컸다.
유성룡은 눈을 지그시 감고 젊은 날의 윤두수를 그려보았다. 그를 알고 지낸 지도 벌서
삼십 년, 청년 윤두수는 학봉 김성일보다도 더 직언을 쏟아내는 강직한 신하였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마는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때로는 화를 불러 여러 차례 유배를
당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안호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퇴계와 율곡이 세상을 떠난 이후 유성룡과 윤두수는 각각 동인과 서인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십여 년이 넘도록 정적으로 지내온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
했으며 서로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윤두수의 목청이 올라가면
유성룡의 발걸음이 기민해졌고, 유성룡의 문장이 빛을 발하면 윤두수의 호방함이 조정을 뒤
흔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결은 유성룡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건저문제에
연루되어 정철, 윤근수 등과 함께 귀양을 떠난 윤두수의 나이가 쉰여덟이 넘었던 것이다. 유
배지인 회령에서 가슴앓이를 심하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유성룡은 평생의 라이벌이 이제 흙
으로 돌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회령으로 약첩을 지어 보낸 것은 정적에 대한 마지
막 예우였다.
그러나 윤두수는 거뜬히 병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이 충주를 지나자마자 임금의 부
름을 받고 화려하게 조정으로 복귀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어 영의정까지 올랐던 유성
룡은 면직되었고, 윤두수는 단숨에 좌의정이 되어 조정을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의주까지의
몽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계획한 것도 윤두수였다. 유성룡은 아무런 관직도 받지 못한
채 몽진 대열에 끼였다. 삶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맛보기 직전, 유성룡을 다시 조정을 부르도
록 임금을 설득한 이도 바로 윤두수였다. 윤두수는 유성룡을 내치자는 동생 윤근수를 이렇
게 꾸짖었다고 한다.
"조선이 온전하게 나라꼴을 갖추어야 동인도 있고 서인도 있는 법이다. 서애가 비록 잘못
이 크지만 이 나라엔 그만한 인물도 드물다. 그를 버리는 것은 군사 만 명을 잃는 것이야."
그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 회령으로 약첩을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만은 아니었다. 윤두수
는 파당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몇 안 되는 대신이었다. 그 후부터 유성룡은 비
변사의 회의에도 참가하고, 어전에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할 기회도 얻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합친 때는 선조가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가겠노라고 공언한 순
간이었다. 윤두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평양 사수를 천명했으나 이항복과 이덕형은 평양을 지
킬 수도 있고 의주로 갈 수도 있다는 양비론을 폈다. 화살은 유성룡에게 날아들었다. 동인들
은 당연히 유성룡이 의주로 후퇴하자는 뜻을 피력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유성룡은 윤두수
의 손을 들어주었다.
"평양이 밀리면 의주라고 해서 안전하시겠사옵니까? 요동으로 들어가시면 이 나라 전체를
잃는 것이옵니다. 어떻게든지 평양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모을 대라고 사료되옵니다. 서둘
러 의주행을 결정하지는 마시옵소서."
그때 유성룡은 윤두수의 입가로 흐르는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유성룡 역시 그를 향해 가
볍게 웃어주었다.
대동강을 넘어 왜군이 밀어닥쳤을 때 유성룡에게 파발마를 구해준 이도 윤두수였다. 윤두
수는 탄환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유성룡은 성을 빠져나가지 않겠노
라며, 후퇴하더라도 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좌의정 대감과 함께 가겠노라며 버티었다.
"서애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소? 허나 지금은 이곳의 패배를 수습하는 것보다 의주에
있는 조정 대신들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더 급하오. 서애, 그대가 이 일을
맡아주구려. 내 믿고 그대를 보내는 것이오."
"적은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소이다. 함께 가십시다."
윤두수는 찢어진 실눈을 보이지 않을 만큼 소리내어 웃었다.
"허허허, 내가 그리 쉽게 죽을 사람으로 보이오? 죽을 팔자였다면 서애가 보낸 약첩을 먹
기도 전에 북망산을 올랐겠지. 아무 걱정 마시고 의주에 가서 술상이나 차려놓고 기다리시
오. 내 곧 뒤따라갈 터이니."
윤두수는 그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유성룡이 박천에서 조정에 합류한 지 나흘 만인 6
월19일, 윤두수는 무사히 선천 근처 거련관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함께 어전에 나아가 요동
으로 가려는 선조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선조의 마음은 요동벌판을 달리고 있었
다. 그 순간부터 윤두수의 뚝심이 힘을 발휘했다.
"선천과 용천을 지나서 의주에 잠시 머물렀다가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전하의 계획이시옵
니까?"
"그렇다."
선조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전하께서 그런 뜻을 굳히신 것은 평양을 왜적에게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우선 요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패전의 책임을 묻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
선조의 반문에 윤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우선 신 윤두수와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목을 치시옵소서. 그리고 죄인들의
수급을 압록강가에 내걸어 전하와 왕실의 위엄을 보이시옵소서."
유성룡의 두 눈니 커지는 것과 동시에 선조가 손바닥으로 용상을 내리쳤다.
"지금 과인을 협박하는 것인가? 그러고도 살기를 원하는가?"
윤두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조선의 군왕이 압록강을 건너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나이다. 속히 신들
의 목을 치시옵소서."
"과인을 걸주 같은 폭군으로 만들고 그대들만 충신 소리르 듣겠다는 것인가? 부원군의 생
각도 좌의정과 같은가?"
선조의 추상 같은 물음에 유성룡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유성룡은 단 한 번도 선조
와 정면대응한 적이 없었다. 그 유연함은 선조 역시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선조는 윤두수와
유성룡을 갈라놓은 후 윤두수의 죄를 물을 작정이었다. 눈치 빠른 유성룡이 선조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윤두수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라도 하면 선조는 당장 압록강을 건널 것이고
그때는 모든 일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유성룡은 힐끗 옆에 앉은 윤두수를 살폈다. 윤두수
는 실눈을 꼭 감고 유성룡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당장 불호령을 내리기 위해 눈을 부릅떴던 선조가 끄응 신음을 뱉으며 몸을 뒤로 늦추었
다. 유성룡이 윤두수의 편을 들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조의 얼굴이 차츰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입을 맞춘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도 내 의향을 떠보다니, 괘씸한
일이다. 이는 군왕을 기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좌상!"
"예, 전하."
"풍원부원군."
"예."
"그대들은 언제부터 지음(서로를 잘 아는 친구)하게 되었는가? 그대들 두 사람은 조선 팔
도에 소문난 앙숙이 아니었는가? 그대들이 파당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도 없었을 것
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힘을 합쳐 과인의 뜻을 거역하겠다? 과인이 의주에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과인이 요동으로 들어가면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전쟁의 승패가 과인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뜻이 아닌가? 되풀이해서 새기자면, 이 전쟁의 책임은 곧 과인이
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대 둘은 마치 도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척하면서 기실 과인에
게 패전의 책임을 돌리고 있다. 과인이 양위하기를 바라는가? 내부하려면 분조의 동궁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가르는 뜻인가? 좋다. 오늘이라도 당장 동궁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하겠
다."
윤두수가 황급히 선조의 말을 끊었다.
"전하, 양위를 논한 것이 아니옵니다. 자식은 제 아비의 옆구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법이옵
니다. 동궁께서 아무리 총명하신들 어찌 전하께 미치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양위하신다면 신
들도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힐 것이옵니다."
"좌상! 또 그런 식으로 과인의 말을 비트는구나. 송강도 그렇고, 좌상도 그렇고, 그대가 이
끄는 서인들은 하나같이 고지식하기가 만년설과 같다. 때로는 흐르거나 맴돌 줄도 알아야
하건만 언제나 홀로 옳고 홀로 고상한 척은 다 하지. 좌상! 풍원부원군이나 대제학 이덕형
을 본받도록 하라.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명나라의 원군을 제대로 맞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선조는 요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잠시 유보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왜군이 영변까지 올라오면 그땐 지체 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
"압록강을 건너시면 아니되옵니다."
윤두수가 또다시 반대하고 나섰다.
"영변에서 의주는 지척이다. 앉아서 죽으란 소린가?"
"아니옵니다. 영변까지 왜적이 올라오면 그땐 군선을 타고 전라도로 내려가셔야 하옵니다.
원균과 이순신이 해로를 완전히 장악했사오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전라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유성룡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이순신으로부터 수군의 활동을 은밀히 전해 듣는 것처럼,
윤두수는 원균과 연통을 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전라도의 안전함을 공언하며 전
라도로 내려갈 것을 주청하는 것이다.
"수군의 승전보는 이미 전해 들었다. 허나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심하지 않는가? 그런
장수들을 믿고 전라도로 내려갈 수는 없다."
유성룡이 다시금 놀랐다. 그와 윤두수처럼 선조도 수군의 활동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비
밀스럽게 사람을 풀어 조선 수군을 감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을
눈치챌 정도라면 보통 연락망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도행을 고집하는 것은 선조가
파놓은 덫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영변까지 왜적이 올라오면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신은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나이
다."
회의는 그 정도에서 끝이 났다. 윤두수는 유성룡의 마지막 발언이 못내 섭섭한 듯 눈을
흘겼다. 그러나 일단 요동행을 연기한 것을 큰 수확이라고 여겼던지 유성룡에게 감사의 인
사를 했다.
"고맙소."
"고마운 건 오히려 접니다. 좌상의 용기에 탄복했소이다."
"앞으로도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합시다."
"이르다 뿐입니까."
그러나 그 후로 두 사람이 뜻을 맞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윤두수는 의주에서 임금을
호종했고 유성룡은 어명을 받들어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를 돌면서 군량미를 모았다.
안주는 평양에서 의주로 가는 길목이자 상권의 중심지이기에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
다. 무엇보다도 물물교환이 성행해서 곡물을 구하기가 쉬웠다.
오늘따라 윤두수가 못내 그립다. 그와 나는 왜 동서로 나뉘어 아둥바둥 다퉜을까? 그의
용기에 나의 균형감각을 합쳤더라면 이렇게 맥없이 왜군에게 한양을 내어주지는 않았으리
라. 전하의 말씀대로 지금부터 그와 나는 지음의 사이가 될 것인가?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도 그는 내게, 나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세
상 일이란 게 어디 원하는 대로 된다더냐. 그가 머무는 자리와 내가 서 있는 곳은 참으로
가까우면서도 멀다. 결국 우리는 어려울 때 잠시 만났다가 또다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걸어
가리라.
"대감, 주무시옵니까?"
환청인가? 유성룡은 눈을 비비며 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이 있었다.
"소인 용주이옵니다."
전라좌수영에 갔던 유용주가 달포 만에 돌아온 것이다. 한 달은 족히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른 귀환이었다.
"들어오게."
유용주가 앞장을 서고 삿갓을 눌러쓴 사내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유
성룡에게 큰절을 했다.
"좌수사 막하에 있는 군졸이옵니다. 이곳 사정을 살피라는 좌수사의 명을 받고 함께 왔습
죠."
유성룡은 삿갓을 벗은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강한 눈빛과 두툼한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날발이라 하옵니다."
"잘 왔네. 좌수사는 안녕하신가?"
"연전연승의 기운이 넘치십니다."
날발은 말조심을 했다. 유성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용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용주가 품
속에서 이순신의 서찰을 꺼냈다. 수군의 상황을 알려면 좌수사의 서찰을 직접 읽는 편이 나
을 것이다. 유성룡은 서찰을 펼쳐 양 손바닥 위에 올리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전세가 위급하여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대감께서 먼저 소식을 보내시니 몸둘 바를 모
르겠습니다. 원수사와 저의 불화가 의주까지 알려졌다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모든 것이
저의 부족함 때문이겠지요. 나무 한 그루로는 큰 집을 지을 수 없고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모든 일을 덕과 예로써 이끄는 것이 군자의 도리인 줄은 압니다만, 전쟁을 치르는 데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순응하는 자는 덕으로써 임용하고, 거역
하는 자는 힘으로써 끊어라'는 글귀가 자꾸만 마음에 와 닿는군요.
대감께서 염려하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연합함대는 으뜸 장수가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왜군이 저와 원수사, 그리고 이수사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면, 연합함대
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될 가능성마저 있지요. 누가 주장이 될 것인가는 이곳에
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어명으로 주장이 결정되면 모두가 따를 것입니다. 대감께서 힘이 되
어주십시오.
우선 쌀 오백 섬을 보냅니다. 왕실은 물론 조정 중신들이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지요. 한 나라의 체면이 걸린 문제입니다. 곧 좀더 많은 곡물을 다시 보내도록 하겠습
니다.
명나라의 원군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곧 겨울이 닥칠 텐
데 어찌 그 추운 안주 땅에서 겨울을 나실는지요. 인편에 솜옷과 솜이불을 보냅니다. 제게
베풀어 주신 대감의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부디 의복을 두텁게
하시어 북풍을 물리치십시오.
분조에서 수군을 치하하는 서찰이 끊이질 않습니다. 세자저하께서는 과연 삼남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계십니다. 명나라의 원군이 오고, 의병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계속
승리한다면, 새봄이 오기 전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감.
호시절이 오면 대감을 모시고 좌수영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싶습니다. 아, 얼마나
깊고 푸른 바다입니까. 얼마나 순박한 백성들입니까. 저들의 손에 피를 묻히고, 저들의 가슴
에 슬픔을 채우는 전쟁은 하루 빨리 끝나야 하겠습니다.
그럼 다시 글을 올릴 때까지 내내 건강하십시오.
담백한 문장 속에 이순신의 고민이 모두 담겨 있었다. 승전을 계속하고는 있으나 자중지
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내부의 적이 생기면 그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이순신은 하루 빨리 수군의 으뜸 장수가 뽑혀야 하며, 당연히 그 자리는 자신의 차지라고
여겼다. 의견을 달리하는 원균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전권을 달라는 것이다.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구나.
"며칠이나 머물 생각인가?"
유성룡은 날발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뿔피리를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열흘 안에 군량미를 실은 좌수영의 배가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소인은 그 배에 동승하
라는 군령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진 대감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럭해주시옵소서."
이순신이 저 군졸을 보낸 뜻은 사사로이 내 건강을 살피기 위함인가? 고마운 사람이로세.
"좋도록 하게."
유용주와 날발이 공손히 절을 하고 자리를 물러갔다.
어느새 동녘이 훤히 밝았다. 세수를 하고 관복으로 갈아입었다. 의주를 출발한 유격대장
심유경 일행이 도착할 때가 된 것이다. 심유경은 6월 29일에도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의
밀사를 자처하며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조선과 명나라는 이와 잇몸의 관
계에 있으므로 곧 대군을 보내겠다며 큰소리를 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
지 않았다.
심유경이 이번에는 평양에 갓 소서행장과 담판을 짓겠다며 나흘 전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의주에서 평양까지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심유경을 극진히 모시라는 어명이 내려졌다.안주
는 심유경이 거쳐갈 첫 번째 고을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저녁 무렵 심유경 일행이 안주
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러나 산천구경, 술구경, 여자구경에 넋을 잃은 심유경의 걸음걸이는
느리기 그지없었다.
동헌 앞마당을 서성이며 심유경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유성룡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영
의정까지 지낸 그가 하찮은 일개 유격대장을 밤새 기다린 것이다. 허나 어쩌랴. 심유경이 입
이라도 잘못 놀리는 날에는 명나라의 원군이 오던 길을 되돌릴지도 모른다. 조승훈의 거짓
장계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어떤 수모라도 끝까지 참아내겠다고 다짐했다. 나 하나의 체면보다는 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심유경을 잘 구슬려서 속마음을 캐면 명나라 조정의 내부 사정도 알아낼 수
있으리라.
동헌 대청마루에는 잔칫상을 차리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곱게 몸단장을 한 관기
들도 귀한 손님을 모시기 위해 서둘러 상 주위로 모였다.
"어허, 이게 다 뭡니까?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가는데 잔칫상이라! 그래도 그렇지, 청렴하
기로 소문난 서애 대감께서 이런 짓을 하시다니요? 어렵쇼. 관기에다 악사까지 부르셨네. 대
감! 정신이 어찌 되신게 아닙니까?"
눈을 비비며 동헌으로 들어서던 석봉 한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힐난했다. 누가 보
더라도 한호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유성룡은 그 비난을 무시하고 한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듯이 잡아 펼쳤다. 힘이 넘치는 한호의 행서체가 눈앞에 불쑥 다가섰다.
불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지
한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시키는시는 대로 쓰기는 했습니다만, 대체 누구한테 이걸 주실 작정이십니까? 싸우지 않
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전쟁이 터진 마당에 이깟 글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지나가는 개도 웃을 글귀지요."
유성룡은 한호의 물음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만 군졸을 불러 정성을 다해 족자를 만
들도록 시켰다.
"수고했네. 보상으로 탁주 세 동이를 달라고 했던가? 방에 가서 기다리게. 내 곧 술과 안
주를 보내줌세."
한호는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술과 여자, 그리고 조선 제일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 이정도면 명나라 유격대장을 맞을 준
비는 대충 끝이 났다.
심유경 일행이 도착한 것은 정오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쥐수염에 이마가 유난히 좁은
심유경은 어디서 벌써 낮술을 걸쳤는지 코끝이 불그스름했다. 유성룡은 정문 앞까지 나가서
정중히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풍원부원군 유성룡입니다."
"아, 그대가 서애 대감이시오? 우리 조정에서도 대감의 문장을 칭찬하는 대신들이 몇몇
있습디다. 구류를 두루 섭렵하셨다고 들었소만."
"과찬이십니다 그저 풍월이 조금 많을 따름이지요. 자, 먼길에 피로하실 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심유경이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풍악이 울렸다. 앞마당에 좌우로 벌려 서서 기다리던 십여
명의 관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심유경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무얼 이렇게나 많이 준비하셨소?"
"대국의 장군을 맞이하는 일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가요? 허허허."
관기들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며 심유경은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의주에서보다도 더 융숭
한 대접이었다. 유성룡은 분위기를 살피다가 한석봉의 글씨가 담긴 족자를 공손히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이것이?"
"한호라고 조선에서는 첫손에 꼽는 명필의 글씨입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한호라면, 석봉 한호 말인가요? 그 사람의 글씨가 왕희지에 버금간다는 소릴 듣긴 했소
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과연, 천하의 명필이로다. 호랑이의 기세가 느껴
지는군. 감사히 받겠소이다. 헌데 이를 어쩌나…… 나는 서애 대감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조선을 구하기 위해 찾아주신 것만 해도 큰 은혜를 베푸시는 것
입니다."
심유경이 술 한 잔을 쭉 들이켜며 잠시 뜸을 들였다. 공치사는 그쯤에서 접을 듯한 분위
기였다.
"헌데 이 글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됐어. 미끼를 물었다.
유성룡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유경의 속내를 살피려고 『손자병법』의 낯익은 글귀
를 선택했던 것이다.
"외람되게도 생각이 짧은 제가 장군의 마음을 미리 살핀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일을
도모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것이 아니신지요?"
"당치 않으신 말씀! 원군을 보내겠다는 명나라의 뜻은 확고하오이다."
"그렇다면 왜 서둘러 원군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까? 귀국의 군사가 오지 않는 동안, 보시
다시피 조선 조정은 이렇게 의주까지 밀려났습니다. 혹 원군을 보내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
정이라도 있습니까?"
"천자의 군대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오? 조승훈의 기병이 패했다고 우리를 깔보
는 것입니까? 요동의 군사들만 압록강을 건너와도 왜군을 쓸어버릴 수 있소이다. 내가 온
것은 이러한 명명백백한 사실을 왜장에게 깨우쳐주려는 것이오. 물러가지 않으면 죽음뿐이
라는 걸 똑똑히 아릴 것이오."
유성룡이 잠시뜸을 들였다. 심유경은 평양에서 왜장 소서행장을 만나 후퇴를 종용할 작정
인 듯했다.
"장군은 가도입명이란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왜군들은 애초에 명나라와 싸우기를 학수고
대하며 바다를 건넜습니다. 조승훈의 기병까지 물리쳐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장
군의 말 몇 마디에 군사를 물리겠습니까? 말이 아니라 실체를 보여야지만 왜군은 겁을 먹고
후퇴할 것입니다."
심유경은 유성룡의 질문에 짜증을 냈다. 의주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
며 비위를 맞추었는데, 유성룡은 은근히 그의 자존심을 긁어대고 있었다. 진수성찬에 한석봉
의 글씨까지 준비하여 예의를 갖춘 유성룡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걱정 마시오. 내 말 한 마디면 명나라의 백만 대군이 즉시 압록강을 건널 것이오. 대국의
위엄을 가르쳐보고, 그래도 안 되면 힘으로 다스리겠소."
"저들이 조선에 상륙한 것 자체가 이미 도의를 무시한 것이지요. 저들은 조선을 삼킨 후
에 귀국으로 쳐들어갈 생각뿐입니다. 낭패를 겪기 전에 시급히 막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조
선과 왜의 문제가 아니라 귀국과 왜의 문제이기도 하오이다. 원군을 보낼 수도 있고 아니
보낼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란 뜻입니다."
"어허! 왜 이렇게 보채시오? 그렇게 사정에 밝은 분이 왜의 침략을 막지 못한 이유가 무
엇인지 궁금합니다그려."
심유경은 유성룡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천하의 일을 손바닥 보듯 한다면 왜의 침입을 막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아무리 아
는 체를 해도 결국 너희 조선은 지금 우리에게 구걸을 하고 있다. 군사들을 빌려달라고 떼
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자국의 땅덩어리를 구할이나 잃은 자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우리
가 군사를 보내든 말든, 우리가 왜장을 만나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명나라가 결정할
문제이다. 조선을 쉽게 구해줄 수는 없다.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너희 조선은 우리에게 목
을 맬 것이고, 그때 가서 몇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천천히 군사들을 움직이면 된다. 그래야지
만 원군이 오지 않아도 이길 수 있었다는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조승훈의 예에서도
보았지만, 왜군은 그리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조선에서의 전투는 타국에서 벌이는 전투
이기에 왜국이나 명나라 모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조선을 위해 명군의 목숨을 헛되이 버
릴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작은 희생으로 가장 큰 전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
다. 무턱대고 압록강을 건너 남하해서는 아니된다. 왜군이 정말 요동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지, 아니면 조선만 점령하고 전쟁을 종결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주에 흩어져 있
는 여진족들이 하나둘 힘을 합치는 것도 심상치 않다. 명군이 조선을 돕는 사이에 여진이
뒤통수를 치기라도 하는 날이며 참으로 큰일이다.
"여진이 조선에 원군을 보낸다는 소문을 들었소만……."
"뜬소문이오다. 건주위가 원군을 보내겠다고 연통을 주었으나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하였
소. 여우를 잡으려고 집안에 늑대를 들여놓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나 여진은 강상의 도
를 모르는 오랑캐입니다 조선에 원군을 보낼 나라는 귀국뿐이지요."
"그런가요? 허허허."
심유경은 쥐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을 뚝 멈추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나는조선과 왜, 그리고 여진의 힘을 합쳐 명나라를 치지나 않을까 걱정했소이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뭘 그렇게 놀라시오? 농담입니다. 농담! 헌데 마음에 찔리시는 게라도 있나봅니다. 나는
그저 소진이 만들었던 합종의 길과 장의가 만들었던 연횡의 길을 잠시 생각한 것뿐이오. 혹
조선에서 소진과 맞먹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오늘 대감을 만나
니, 대감이야말로 소진을 능가할 만큼 박식함과 혜안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소이다. 그래서
농을 한 번 해본 것이외다."
유성룡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유경의 말을 통해 명나라가 품고 있는 의심의 실체
를 파악했다. 명나라는 조선과 여진과 왜가 힘을 합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삼국이 힘을
합치면 명나라와도 맞설 수 있는 거대한 세력이 된다. 조선의 임금이 의주까지 올라오고, 왜
군이 평야에 머물면서 만주의 여진족과 연통을 자주 가지는 것을 연합군을 형성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일이자만 만리 밖에
있는 명나라의 입장으로서는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다. 유성룡은 다시 한 번 조선의 입장을
못 박아둘 필요성을 느꼈다.
"장군께서는 당나라 시절 안녹산과 사사명이 난을 일으켰을 때 회홀과 토번에게 원병을
청했던 일을 아시겠지요? 난이 평정된 후 당나라가 얼마나 두 오랑캐에게 고생을 겪었습니
까? 조선은 결코 그 같은 일을 감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런가요? 유대감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지요."
심유경은 해가 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더니 밤이 으슥해지자 다시 길을 나섰다. 동헌에
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록 권했지만 심유경은 한사코 그 밤에 떠나겠다고 고
집했다. 유성룡은 하는 수 없이 다음 도착지인 숙천에 파발을 띄운 후 심유경 일행을 배웅
했다.
"유대감의 후의를 잊지 않으리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조선의 운명이 장군의 두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심유경 일행이 달빛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살피는 유성룡의 허리가 유난히
구부정해 보였다.
타인의 도움을 받기란 이렇게 힘든 법이다. 속된 말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젓가락 한 짝도 빌려주지 않는 세상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이보다 백배는 더한 것이다. 겉으로는 도를 논하고 예의를 강조하며 의리를 칭송하고 맹약
을 남발하지만 속내는 전혀 다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하고, 받는 것이 있
으면 또한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또 조선은 명
나라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한 신라 역시 동맹국
인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던가. 그 넓은 만주벌판을 완전히 강탈
한 후에야 당나라는 마지못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했다. 역사는 돌고 도는 법. 당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명나라도 조선을 구한 후 조선의 국토를 탐내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십
중팔구 저들은 조선의 국토와 왕실의 세자를 볼모로 요구하리라. 그때 조선은 어떻게 그 치
욕에 맞설까? 신라는 용감하게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지만 우리 조선은 그럴 힘조차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타국의 군사를 끌어들이는 일은 정말 피해야 한다. 승전을 거두
더라도 한 나라가 다시 올곧게 서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구원병을 파견한
나라에 의해 멸망할 가능성도 크며 제후국으로 전략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원군의 도움을
받되 늘 경계의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세가 유리해지고 조선의 군사들이 많아
지면 서서히 원군과의 거리를 두고 그들을 되돌아가게끔 해야 한다. 멍청하게 전쟁의 끝날
까지 원군을 믿고 의지하다가는 그대로 나라를 잃고 만다. 명나라에 심유경처럼 약삭빠르고
세상 흐름에 밝은 이가 한둘이겠는가.
심유경만 홀로 왜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심유경과 소서행장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
는지, 어떠한 약조를 하는지를 살펴야만 했다. 이제 전쟁의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채, 명
과 왜가 이 강토와 백성들의 운명을 논하게 된 것이다. 이덕형이라도 심유경과 동행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번에는 그대로 심유경만 보냈지만 다음부터는 반드시
선전관을 동행시켜야겠다. 윤두수가 대범하기는 하지만 이런 사소한 데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구나. 이덕형과 이항복은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저렇게 음흉한 심유경에게 이 나
라의 운명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안 될 일이다. 정녕코 안 될 일이
다.
지필묵을 꺼내 이덕형에게 보내는 서찰을 써내려갔다. 왜와 명의 대화에 반드시 조선의
대신도 동석해야 함을 역설하는 글이었다. 아닌 말로 저들이 지금의 전쟁터를 기준으로 정
하고 강화라도 맺어버리는 날에는 그야말로 큰일이다. 조선은 하루아침에 한반도를 잃고 약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명나라가 그렇게 쉽게 조선을 배신하지는 않을 테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그런가? 사실 명나라와 왜국은 우리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전혀 다른
말과 글, 풍습을 지닌 이민족이 아닌가? 조선의 운명이 그들의 회담으로 결정된다는 것 자
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조선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왜국에는 물론 명나라에도 알려야 한다. 조선이 아직 패망한 것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대감, 의주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유성룡은 붓을 놓고 급히 방문을 열었다.
"대감, 소인 허준이옵니다."
"아니, 이 사람아! 이곳까지 웬일인가? 어서 안으로 들게."
이제 오십 줄을 바라보는 내의원 허준이 뭉툭한 코를 실룩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한양에
서 의주까지 가는 동안 잠시도 몽진 대열에서 이탈한 적이 없는 허준이었다. 그 동안 허준
은 임금을 비롯하여 대군과 중전, 그리고 후궁들의 잔병치레를 돌보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
다. 급히 한양을 떠났기에 약첩을 챙기지도 못했고, 난리통에 약초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선 허준은 유성룡에게 큰절을 올렸다. 일찍부터 유성룡은 과묵하고 총명한 허
준을 아꼈다. 허준은 금원사대가의 의학에 밝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생산되는 약초들에
달통했고, 각 지방별로 유행하는 돌림병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젊은 시절, 직접 팔도를
돌며 약초를 캔 결과라고 했다. 허준 역시 유성룡을 남달리 존경했다. 침술에 관한 유성룡의
지식이나 실력은 허준을 능가했고, 또한 내의원에 대한 자상한 배려와 의술 전반에 대한 깊
은 이해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술을 함께 마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 네 살 연상인 유성룡은 늘 허준의 어려움을 살폈고 허준도 그를 친형
처럼 믿고 의지했다. 의술에 대한 논의로 밤을 지새운 날도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이제 허준의 얼굴에도 노년의 빛이 역력했다. 이십대에 의과에 합격하여 이름을 드높인
청년이 아닌 것이다. 이 전쟁이 그들의 나이를 더 빨리 먹게 만든 듯했다.
"전하께서는 평안하신가?"
"옥체 강건하시어 큰 병은 없사오나 두통은 여전하시옵니다."
"증후를 더 자세히 말해보시게."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시옵고, 왼쪽 손등에 부기가 있사와 손가락을 당기면 통증이 심하
고, 왼쪽 무릎이 시려서 오랫동안 거동을 못하시옵니다. 왼쪽 겨드랑이에도 기류증이 있사옵
니다."
유성룡이 눈을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는 오른쪽이 불편하지 않으셨던가?"
"그러하옵니다. 예전에는 오른뺨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증상이 있으셨고, 오른쪽 겨드랑
이에서만 유독 땀이 흐르지 않으셨사옵니다. 또한 오른 수족의 냉기가 심하셨사옵니다. 몽진
의 힘겨움으로 인하여 오른쪽에 막혔던 혈맥이 왼쪽으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만."
"치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도제조 윤두수 대감과 충분히 의논을 하는가?"
"좌상께서도 염려를 많이 하십니다만 대감처럼 의술에 전문적인 학식을 가진 것은 아니시
라서 소인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기시는 편입니다. 또한 제대로 약첩을 구할 길이 없어서 부
득이 침으로 병을 다스리고 있지요."
의관이 임금의 병을 치료하거나 침을 놓기 위해서는 도제조의 승인과 감찰이 반드시 필요
한 법인데, 윤두수는 그 방면에 무지했던 것이다.
"처방을 말해보시게."
"예, 우선 이명증을 치료하기 위해 면부의 청궁·예풍, 수부의 외관·중저·후계·완골·
합곡, 족부의 태계·협계 등 각 각 두 혈에 침을 놓았습니다. 또한 편허증을 치료하기 위해
서 수부의 곡지·통리와 족부의 삼리 등 각각 두 혈에 침을 놓았고, 또한 겨드랑이 밑 기류
증을 다스리기 위해 족부의 곤륜·양릉천·승산 등 각각 두 혈에 침을 놓았습니다."
유성룡은 눈을 지그시 감고 허준이 불러주는 위치를 마음속으로 그렸다. 역시 명의답게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잘했네. 곧 차도가 있으시겠지. 헌데 예까지 웬일인가?"
내의원은 전하의 곁을 한시도 떠나서는 아니된다. 특히 지금처럼 전시에는 더더욱 왕실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허준은 유성룡의 물음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일인가?"
궁금중이 더욱 커져갔다. 옥체 평안하시다면 의관을 이곳까지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허
준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대답했다.
"신성군의 병환이 예사롭지 않사옵니다."
"무엇이라고? 신성군께서 병중이시란 말인가?"
신성군은 인빈 김씨의 소생으로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다툴 만큼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
는 왕자였다. 의주까지 무사히 옮겨가서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만 중병에 걸린 것
이다. 왕자가 병을 앓으면 조정에서는 며칠 동안 정사를 미루고 그 책임을 따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왕자의 병을 살펴야 하는 내의원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비로소 유성룡은
허준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온몸에 창(종기)이 가득하옵니다. 오풍이 심하시고 한열왕래가 잦사옵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사옵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헛소리가 심하옵니다."
"당독역(성홍열)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소인도 당독역으로 보고 약을 쓰며 침을 놓았습니다만 전혀 차도가 없었
사옵니다. 근자에는 고열 때문에 자주 정신을 놓고 계시옵니다. 전하께서 소인에게 대감의
의견을 받아오라고 명하셨사옵니다."
유성룡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당독역은 초가을부터 겨울 내내 어린아이에게 생기
기 쉬운 돌림병이다. 특히 여름이 서늘하고 비가 잦으면 당독역에 걸리는 환자가 늘어났다.
당독역이 고치기 힘든 병이기는 하나 허준과 같은 명의가 치료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돌림병들이 한꺼번에 창궐
하여 지역과 성별을 무시하고 뒤섞여버린 것이다. 그러자 기존의 처방으로는 실타래처럼 뒤
엉킨 병마들을 동시에 퇴치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를 치료하면 다른 병세가 악화되고, 그것
을 치료하면 또다른 병마가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신성군 역시 그런 경우이리라. 당독역은
겉으로만 드러난 병이고, 그의 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병마들이 서로 힘을 합쳐 발
버둥을 치고 있으리라.
"절망적인가?"
유성룡 역시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의원 허준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어찌 그가 다스
릴 수 있겠는가. 답답한 마음에 허준을 보내기는 했지만 선조 역시 유성룡에게 별다른 방책
이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언제까지 치료를 계속할 수 있겠나?"
"올 겨울을 넘기기 힘들 듯하옵니다."
그렇다면 겨우 서너 달밖에 남지 않았단 말인가? 유성룡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상심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절망은 임금이나 평민이나 마찬가지이
다.
"미안허이. 내게도 비방이 없네그려. 돌림병이 어전까지 침범치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시
게."
유성룡은 좋은 말로 허준을 위로했다.
"대감!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말해보시게."
"팔도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돌림병으로 죽어간다고 들었사옵니다. 새로운 병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고 있사옵니다. 소인은 그 병마들과 직접 부딪치고 싶사옵니다. 원컨대 소인이
함경도와 강원도로 갈 수 있도록 전하께 아뢰어주시옵소서."
허준은 신성군의 병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
과 실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리라. 더 이상 몽진 대열에 끼여 탁상공론을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돌림병 환자들과 부딪쳐 병마를 물리치고 싶으리라. 그러나 유성룡은 허준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안 될 말이야. 자네의 심정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허나 자네마저 가버리면 누가 전하와
왕실을 보살피겠는가? 답답하더라도 참고 기다리게. 신성군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자
네 탓이 아니야. 이 세상 누구라도 그 병을 고칠 수 없을 걸세. 마음을 편히 가지고 돌아가
게. 가서 전하를 더욱 극진히 모셔주시게. 자네가 전하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으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만백성이 그러할 게야. 신성군의 병
을 치료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게. 나도 이곳에서 약초를 구해보도록 함세."
"대감!"
"돌아가래두!"
유성룡의 목소리가 커졌다. 허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눈물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무기가 개발되고 새로운 병마가 국토를 휩쓸면서 백성들은 완전히 낯선 고통으로 빠져
들었다. 그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의원들의 소임이지만 그들은 병마를 꺾지 못했다. 병마가
생기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병마를 연구하여 처방을 내리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한 것이다.
전쟁이 팔도를 휩쓴 지금, 허준의 눈에는 망망한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허준은 마음이 급했다. 왜국에서 들어온 병마와 팔도의 피난민들 틈에서 이리저리 섞인
병마들이 백성들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창궐하는 병마들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성룡은 붕붕 떠다니는 허준의 마음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를 능가하는 의서를 편찬하는 것이 자네의 소원이랬
지?"
"그러하옵니다."
"그런 방대한 의서를 편찬하려면 반드시 왕실과 조정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네. 만약 지금
자네가 내의원 자리를 박차고 떠나보게. 자네는 영원히 내의원으로 복직하지 못할 걸세. 의
서의 편찬도 물거품이 되는 것이야. 반대로 끝까지 자네가 몽진 대열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자넬 공신으로 책봉하실 걸세."
"공신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네. 전하께서 자네를 잊으실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돌아가게. 가서 이 전쟁이 끝
날 때까지만 참아. 전쟁이 끝나면 팔도에 사람을 보내 새로운 돌림병을 살피도록 하겠네. 그
땐 자네도 팔도를 둘러볼 수 있겠지. 내 약속하지."
유성룡의 설득에 허준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선조가 가장 신임하고 있는 유성룡이 도
와준다면 의서의 편찬이 한결 쉬워질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허준은 황급히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유성룡은 정문 밖까지 배웅을 나갔다. 붉디
붉은 해가 동쪽 산자락을 떠오르고 있었다. 유성룡은 병마가 들끓어도 전쟁이 터져도 어김
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둠이 가면 밝음이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
건만 우리는 이 전쟁에서 언제쯤 승세를 잡을 수 있을까? 두 팔을 쭈욱 위로 뻗었다. 며칠
밤을 연거푸 새운 탓인지 양어깨가 무겁고 뻐근했다. 심유경이 떠난 남쪽 길과 허준이 떠난
북쪽 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가고 오는 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길게 하품을
한 후 뒷목을 탁탁 두드렸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정오 무렵까지 정신없이 잠을 잤다. 천
지가 개벽해도 깨어날 줄을 모르는 곤한 잠이었다.
11. 맹장, 사라지다
나라가 불행하여 섬오랑캐가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들 바람 앞에 무너지자 몰아치는 그
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이 우리 한양 하루 저녁 적의 소굴 되었도다 천리 관서로 남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 하늘 바라보면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
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
고 앞장 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근심 구름 동쪽 하늘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고 종사를 회복함도 기약할 만하옵더니 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탄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이순신, 「제증참판정운문」
임진년(1592년) 8월 22일 밤.
스산한 바람이 대숲을 흔들었다. 좌수영 앞바다에는 전라좌우 수영의 군선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유황과 화살을 옮겨 싣는 군사들의 바쁜 발걸음에서 출정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
었다. 전라좌우 수군들은 이제 한가족처럼 손발이 척척 들어맞았다. 군호와 복색을 통일시켜
함께 훈련한 지도 한 달이 가까웠다. 한산도에서 대첩을 거둔 후 이억기는 이순신의 전략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숲을 가로지르는 이순신의 발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무거웠다. 바위를 인 것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고개를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밤손님을 닮았다. 느즈막이 잠
자리에 들었다가 문득 박초희의 얼굴이 아른거려 군영을 빠져나온 것이다. 평상시라면 날발
을 앞장세울 터이지만, 지금 날발은 평안도의 유성룡 대감 곁에 있다.
느닷없는 방문도 나쁘지만은 않다. 박초희의 꾸밈 없는 모습을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볼
수도 있고, 잠든 얼굴을 머리맡에 앉아서 살필수도 있으니까.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늦추었다. 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잠자리에 든 듯
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섬돌에 작고 아담한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가만히 신발을 벗고 고양이걸음으로 마루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방문 옆에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빙긋 웃으며 검지손가락으로 문풍지에 구멍을 냈다. 어둠 속에 이부자리가 보이고 간단한
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초희의 작고 따뜻한 몸을 상상했다. 해풍 몰아치는 군영과는 전
혀 다른 행복이 저 이부자리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 온기는 상상에 불과했다. 그는 곧 얼음장 같은 냉기를 느꼈다. 방안은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초희!
그는 힘껏 방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비호처럼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을 휙 젖혔다. 거기에
는 아무도 없었다. 부엌에도 헛간에도 뒷마당에도 박초희는 없었다.
그녀는 한 마디 작별인사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가지를 뒤
졌다. 그러나 흔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숨도 눈물도 화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밀어젖힌 이불 속에서 곱게 접은 서찰이 눈에 띄었다. 황급히 서찰을
펼쳐들었다.
고마움을 간직하고 떠납니다.
금수만도 못한 소첩을 잊으시고 부디 이 나라, 이 백성만을 생각하셔요. 그 동안의 따뜻한
보살핌만으로도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다시 한 번 머리 조아려 감사드려요. 당신께서는 소
첩을 계속 곁에 두려 하시지만, 소첩은 안답니다. 더 이상 당신 곁에 머물러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당신이 이미 알고 계셨죠? 소첩을 찾지 마세요. 당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곳을 떠
나니까요. 당신을 위해 기도드리겠어요. 당신의 사랑을 간직하고 떠나게 되어 무척 행복해
요.
이순신은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이윽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서찰 위로 뚝 떨어졌다. 박초희는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사랑
을 간직한 채 떠난 것이다.
초희! 어찌 그대가 내게 짐이 될 수 있겠소. 아, 당신은 참으로 무정한 사람이구려.
몇 달 전, 권준이 조심스럽게 박초희에 관해 물어왔었다. 박초희와의 과거지사를 있는 그
대로 말해주었지만 권준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장군!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있듯이 장군이 여인을 탐하는 것은 전
혀 허물이 아니지요. 허나 박초희를 가까이 두는 것은 삼가세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
고."
"오해라니?"
"박초희는 대마도에서 돌아온 여인입니다. 또한 제 자식을 죽인 비정한 어미이고, 관가의
추적을 받고 있는 죄인이기도 하지요. 그런 여자와 만나시면 아니됩니다. 이 사실을 왜군이
나 경상우수영에서 아는 날에는 참으로 큰일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녈 보살피려는 것이오. 대마도까지 끌려간 것이 그녀의 죄
요? 굶주림에 지쳐 제 자식을 죽인 것이 그녀의 죄요?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 죄인 아닌
자가 어디 있겠소? 국토의 대부분이 왜놈들 손에 들어갔고, 심성 고운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화적떼로 돌변하고 있소. 권부사는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다고 생각
하시오?"
"장군의 뜻을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허나 적에게 약점을 잡혀서는 아니됩니다. 박초희를
언제까지나 위하실 수는 없습니다. 일을 당하기 전에 장군께서 먼저 그녀를 떠나보내십시
오."
권준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던가?
이순신은 품으로 날아든 상처 입은 새를 잃어버린 심정이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박초희보다 더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궐기하는 의병만큼이나 화적떼의 숫자도 늘어났고, 화적떼의 숫작만큼이나 왜군의 앞잡이
가 되는 백성도 늘었다. 처음에는 강요에 못이겨 길 안내를 하거나 관군의 위치를 알려주던
백성들이 이제는 자진해서 왜군의 충실한 종으로 변해갔다. 왜군처럼 머리를 깎거나 옷을
입는 백성들도 생겼고, 조선 수군의 현황을 염탐하여 알려주는 이들도 있었다.
세 차례의 출정을 통해 숱하게 많은 조선인들이 해안의 언덕이나 나무 뒤에 숨어서 조총
을 쏘는 것을 목격했다. 대부분 강압에 의해 하는 수 없이 총을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조선을 버리고 왜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총을 쏜 자
들도 훗날 돌아올 중벌이 무서워 더욱더 왜에 충성하게 될 것이다.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
면 그들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고, 전쟁에서 왜가 승리하면 그들은 평생 왜
인의 흉내를 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들은
조선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조선인이었던 과거의 흔적들을 지우고 왜인으로서의 새
삶을 하루하루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박초희에게서 그들의 절망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을 향한 그들의 분노, 저주, 억
울함을 헤아릴 수 있었다. 조선은 그들의 가족과 희망과 삶을 송두리채 앗아갔다. 한번 발을
잘못 들여놓은 이상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어도 그들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서 그
들은 이 땅을 떠나려는 것이다. 이 땅을 떠나 왜국으로 들어가든지 이 땅을 왜국으로 만들
어버리려는 것이다. 그들의 가슴은 삶에 대한 깊은 절망과 회의,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슬픔
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초희, 살아 생전 그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디로 가든지 살아 있으라, 부디 살아 있
으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유황과 포탄들을 장막이나 갑판 아래로 감
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대용이 숙소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사천에서 총에
맞은 상처가 덧나 여름 내내 고생을 했다. 이제는 상처가 거의 아물었기에 그 동안 못다 이
룬 전공을 한꺼번에 만회하겠다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이순신은 그런 나대용의 호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이 장대비에 어딜 다녀오십니까?"
이순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고치며 나대용의 왼쪽 어깨를 힘껏 찍어 눌렀다.
"내가 도망이라도 친 줄 알았더냐?"
"그게 아니옵고……."
나대용의 얼굴이 금방 붉게 변했다. 갑자기 쏟아진 이순신의 시선이 당황스러웠던 탓이다.
이순신은 가끔씩 이렇게 나대용이나 이언량의 코끝까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걸어
왔다. 그들은 좌수사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는 것이 영 어색하고 내키지 않았다. 방안에서 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가 왔는가?"
"이억기 장군과 정만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순신은 나대용의 양볼을 손바닥으로 토닥토닥거린 후 휙 돌아섰다. 나대용은 그의 뒷모
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드신 겐가? 그러나 술냄새도 풍기
지 않고 걸음걸이도 흐트러짐이 없는 걸 보니 술을 마신 것은 아닌 듯했다.
"한참을 찾았습니다."
정운이 쀼루퉁한 얼굴로 볼멘 소리를 냈다.
"잠시 천문을 살피러 뒷산에 올라갔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는 통에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
했소이다."
이순신은 적당히 둘러댔다. 이억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이오?"
"출정을 독려하는 좌의정 윤두수 대감의 서찰입니다. 속히 부산을 치라는 것이지요. 장군
은 받지 않으셨소이까?"
"받았지요. 내게도 그저께 좌상 대감의 서찰이 왔었소. 허나 이미 부산을 치라는 어명이
내린 마당에 그런 서찰을 보낼 필요까지야……."
"아마도 두 분 장군이 못미더웠던가봅니다. 원장군께는 그런 서찰일랑 한 번도 온 적이
없다더군요."
정운은 노골적으로 전라도 수군의 수세적 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억기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좌상 대감의 서찰 때문에 오시었소?"
"그도 그렇고…….
이억기가 시선을 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참다 못한 정운이 큰소리로 말했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소이다."
"흉흉한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말이오?"
"장군께서 부산으로 출정하지 않으신다는 소문이오이다. 거제를 기점으로 남서쪽 바다만
을 지키기로 했다고 말입니다. 해명을 해주시지요."
이순신이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누가 그따위 소릴 지껄이는 게요? 장수된 자가 어찌 어명을 거역할 수 있겠소?"
정운 역시지지 않고 이순신과 맞섰다.
"허나 세 번의 출정을 통해 우리는 번번이 눈앞의 적을 놓쳤소이다. 한달음에 달려가서
쳐부술 수도 있었으나 장군께서 번번이 퇴각 명령을 내렸소이다. 그리고 부산은 적의 본거
지인만큼 위험부담이 크니, 아무 대책도 없이 쳐들어가고 싶지는 않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
셨지요. 헌데 지금은 흔쾌히 부산을 치겠다는 것입니까? 진정이십니까?"
"지난봄과 여름에는 우리 수군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지 않았기에 부득이 시일을 늦춘 것
이오. 병법에도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다고 하지 않았소? 허나
지금은 전라좌우 수군이 힘을 합치고 경상우도 수군이 길잡이 역할을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고 보오. 수륙병진으로 동시에 왜적을 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외다."
이억기와 정운은 순순히 부산을 치겠다는 이순신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난 넉 달 가
까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부산 진격을 연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완전히 그
말을 뒤엎고 출정의 북을 울리겠다는 것이다. 이억기가 약간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장군! 한 번만 더 신중히 생각하시지요. 부산에서의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오이다. 수많
은 사상자를 낼 거예요. 차라리 다음으로 미루는 편이 어떻겠소이까? 이곳 사정을 잘 아뢰
면 전하께서도 우리를 죽음의 바다로 내몰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운이 이억기를 쏘아보았다.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오? 정의로써 불의를 치는 것은 마치 큰 강둑을 터서 자그마
한 횃불을 끈 것과 같소이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의심하여 주저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오?"
이억기도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금 날 겁쟁이로 모는 것이오? 그대 혼자만 용맹하도고 생각지마시오. 나도 두만강을
달리며 수많은 여진족의 머리를 베었다오. 신중하자는 것과 도망가자는 것은 근본이 다르오.
아시겠소?"
이순신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참으시게. 난 이미 부산을 치기로 마음을 굳혔소. 아군의 피해가 크겠지만 한 번은 적의
본거지를 칠 필요도 있소."
정운이 가슴을 쫙 펴며 큰소리로 호응했다.
"오랜만에 장군께서 소장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군요. 이 몸이 앞장을 서지요. 믿고 맡겨
주십시오."
이순신이 정운의 손을 꼭 쥐었다.
"좌수영에 정운, 그대만한 장수가 하나만 더 있어도 이 전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
이오. 좋소! 정만호가 이번 전투에서 선봉을 맡으시오. 난 정만호가 누구보다도 큰 전공을
세우리라 믿소."
정운의 둥근 볼과 어깨에 딱 붙은 목덜미가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그는 이렇게까지 따뜻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정운과 이억기가 물러가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권준과 나대용이 들어왔다. 권준은 크고
맑은 눈을 아래로 내린 채 가만히 숨을 골랐으나 나대용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계속 식식거렸
다.
"정만호에게 선봉을 주시다니요. 다음 전투에서는 저와 이언량, 그리고 이순신에게 선봉을
맡기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산 앞받에 그대들을 선봉으로 세울 수는 없소."
이순신은 조용한 음성으로 나대용을 달랬다. 그러나 나대용은 좀체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
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부산은 안 된다는 것인지요?"
곁에 앉은 권준이 침착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나대용을 꾸짖었다.
"적선 칠백 척이 웅거한 곳으로 달려드는 것이오. 모닥불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다를 바
없지. 선봉에 선 군선들은 모조리 침몰당하고 말 것이오."
"장졸의 죽음은 전투에서 의당 따르는 일이오이다."
이순신이 차갑게 되물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더냐? 세상의 밝은 빛을 더 이상 보기 싫으냐?"
"그렇다면 정만호는……."
희생양이오니까? 적에게 던지는 미끼이오니까?
이순신이 시선을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권준은 방바닥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제야
나대용은 이순신이 평소처럼 정운을 만류하지 않은 까닭을 눈치챘다.
무서운 사람이다!
가슴이 칼로 베인 것처럼 섬뜩했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윽고 권준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좌상대감께서 어디까지 약조를 하셨는지요? 부산을 친 후에는 수군의 지휘권을 장군께
주시겠다고 하셨는지요? 원수사를 돕지 않는다면 좌수사 자리를 빼앗겠다고 하셨는지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구나.
이순신은 권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권준은 이미 윤두수에게서 온 서찰의 내용까지 미루
어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터놓고 의논할 도리밖에 없었다.
"서애 대감과 의논하겠다고 적혀 있었소."
"부산을 끝내 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소. 허나 어명을 어긴 죄는 역적과 같은 형량으로 다스린다고 했
소이다. 역적으로 취급된다면…… 좌수사 자라를 지킬 수 없겠지."
권준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부산을 치지 않을 수 없군요. 허나 이 일은 장군을 잡으려는 좌상 대감의 덫입
니다."
"덫이라니?"
"부산을 치지 않아도 책임을 물을 것이고 부산을 치다가 패해도 책임을 따질 것은 불을
보고 뻔하지 않은지요?"
이순신과 나대용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전투를 하되 전면전을 피하는 것이지요. 큰 공을 세
우기보다는지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왜선 칠백 척을 정면돌격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만은 왜군의 수급도 거두고 전리품도 되도록 충분하게 챙
기는 편이 좋겠어요. 이긴 싸움이라는 것을 표나게 내세우는 겁니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조정에서도 장군을 수군 으뜸 장수로 인정할 것입니다. 마지막 위기인 셈이지요. 그리고 사
족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원수사가 선봉에 서겠다고 우기면 나서서 만류하십시오. 원수
사가 선봉에 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부산해전의 전공은 모두 그의 몫이 됩
니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다면 장군을 밝고 으뜸 장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선봉에 서
지 않도록 좋은 말로 타이르든가 미끼를 던지십시오."
"미끼?"
"정만호가 선봉으로 돌진하는 틈을 타서 원수사의 정신을 잠시 딴 곳으로 돌리라는 말씀
입니다. 이번 전투는 순식간에 바람을 타면서 번져가는 들불과도 같지요. 불꽃을 튀기는 자
리에 원수사가 없으면 모든 전공은 전라좌수영의 몫입니다."
"알겠소."
권준과 나대용이 물러간 후 이순신은 이불도 펴지 않고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빗방
울이 점점 굵어지는지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원균의 밤송이 수염이 천
장 가득 그려졌다.
내가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기 위해서는 원균이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권준의 말대
로 섣불리 그를 제거하려고 덤비는 것은 금물이다. 잘못하면 그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줄
수도 있다.
천장의 그림이 밤송이 수염에서 박초희의 십자가 목걸이로 바뀌었다.
초희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혹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산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일 때 산마루에서 내 모습을 살피는 것은 아닐까? 눈앞에 없으면 마음마저 멀어진
다는 옛말은 거짓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리움이 나의 마음을 온통 채우는구나. 아산에
있는 나의 아내와 첩을 그리는 것과는 또 다르구나. 초희에게는 그녀만의 냄새가 난다. 절망
의 냄새, 슬픔의 냄새, 죽음의 냄새. 아, 오늘따라 그 냄새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임진년(1592년) 8월 29일 자정 무렵.
녹도만호 정운은 경쾌선을 타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배로 찾아들었다.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난 이래 엿새나 헛되이 흘려보낸 것은, 곧장 부산을 치지 않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을
훑으며 수색을 벌인 이순신의 고집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역풍으로 격군과 궁수들도 많이
지쳐 있었다. 이러다간 부산에 이르기도 전에 장졸들의 사기가 바닥에 닿을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산으로 들어가리라 작정을 했으나, 전라좌수군은 동래 장림포 앞바다까
지 접근했다가 다시 가덕도로 물러났다. 장림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은 원균이 도맡았다.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이 왜 대선 두 척과 수선 네 척을 당파시킨 것이다. 아군의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 정만호. 어서 오시오."
해도를 살피던 원균이 반갑게 정운을 맞이했다.
"오늘 거두신 전공을 경하드립니다."
정운이 먼저 장림포의 승리를 축하했다.
"뭐 그깟 일을 가지고, 그나저나 역풍이 멈추지를 않으니 큰일이오."
"몰운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것입니다. 몰운대에서 부산까지는 엎어지
면 코 닿을 거리이니 단숨에 적을 칠 수 있소이다."
"역시 정만호는 믿음직한 장수요. 내 어찌 그대의 마음을 모르겠소. 허나 부산에는 적선
칠백여 척이 정박해 있다고 들었소. 역풍을 받으며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오."
정운의 음성이 점점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무릇 전투는 속전속결로 해야 하는 법이오이다. 이미 왜적은 우리가 부산으로 향하고 있
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 장졸들은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고 있소이다. 하루를 지체하면 그만
큼 승산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헌데 어찌 바람 탓만 하신단 말씀이오?"
"진정하시게, 정만호. 이번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필승의 전략을 짜려는
것이오. 승병은 먼저 승리한 후에 싸우고, 패병은 일단 싸운 다음에 승리를 구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원균은 여전히 신중론을 고수했다. 평소의 원균답지 않은 태도였다.
"무례함을 범하는 줄 압니다만 마음을 열지 않으시니 소장이 몇 말씀 여쭙겠습니다. 장군
께서는 삼도 수군의 으뜸 장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원균이 눈을 부릎뜨고 정운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전라좌우 수군의 전략을 그대로 따르시면 아니되오이다. 이순신 장군과 이억기
장군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을 샅샅이 훑어오면서 벌써 수많은 전리품과 수급을 챙겼고 승
전의 장계도 이미 써둔 걸로 압니다. 날이 밝으면 연합함대가 부산으로 향할 것이지만, 전라
좌우 수군은 지난 엿새 동안에 해왔던 것처럼 부산 근처 해안들을 살피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할 것이외다. 왜군의 척후선들을 격침시키며 착실히 승리를 챙기겠지요. 이대로 간다면
경상우수군은 결국 전라좌우 수군의 들러리를 서는 것에 지나지 않소이다. 조정에서는 결코
장군의 전공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전라좌우 수군을 신뢰해서 그들 중 한 사람을
조선 수군의 으뜸 장수로 임명할 것이외다. 그때 장군의 운명을 생각해보셨소이까? 장군은
전라좌수사나 우수사 밑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겠소이까? 장군은 틀림없이 딴 곳으로 전출
되거나 아예 관직을 잃을 것이외다. 오늘 소장은 이 점을 염려하여 장군을 찾아뵈었건만 장
군께서는 소장을 믿지 않으시고 딴전만 피우십니다그려. 장군께서 정 소장이 미덥지 못하다
면 돌아가지요. 허나 차후의 일을 두고 보십시오. 방금 소장이 말한 대로 장군의 앞날이 비
참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오이다."
정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원균이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원균은 갑옷 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살펴보시오. 좌의정 윤두수 대감께서 보내신 것이라오."
정운은 서찰을 양손으로 펼쳐들고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
다.
"참으로 사리에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조목조목 소장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역
시 좌의정 대감은 소문대로 강건하고 곧은 분인 것 같소이다. 수군의 으뜸 장수를 이번 전
투로 정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군요."
"허나 내게는 군선이 부족하오. 전라좌수사나 우수사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독자
행동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정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는가요? 천하의 원장군께서 군선의 적음을 원망하시
다니요. 전투가 어디 군사나 군선들의 수로 하는 것이오이까? 그 동안 보여주신 일당백의
기개로 장수들을 압도하십시오. 내일도 전라좌우 수군들은 해안 수색에 주력할 것이니 그때
나서서 속전속결로 주장하시면 됩니다. 장군의 뜻이 받아들여져 승리를 거두면 그 공은 장
군의 것이 되옵고, 장군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늑장을 부린 끝에 전투에서 지면 그 책
임은 모두 전라좌우 수사에게 돌아갈 것이외다."
원균이 정운의 손을 맞잡았다.
"탁견이오. 내 꼭 그렇게 하리다."
축시(새벽 1시~3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출항 명령이 내려졌다. 선잠에서 깨어난 군사들은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 뛰어다녔고 진군을 알리는 송희립의 북소리가 어둠을 찢고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정운의 예상과는 달리 몰운대로 접근할수록 역풍은 점점 심해졌다.
진시(오전 7시~9시)에 겨우 몰운대를 지나자, 이순신은 군령을 내려 군선들의 속도를 늦추
고 척후선을 띄워 화준구말로 접근하도록 했다. 화준구말에서 왜 대선 다섯 척을 격침한 후,
이번에는 좀더 육지 쪽으로 접근하여 다대포 앞바다에서 왜 대선 여덟 척을 침몰시켰다. 그
다음에는 서평포 앞바다에서 왜 대선 아홉 척을 당파했고 절영도 앞바다에서 다시 왜 대선
두 척을 불태워 가라앉혔다. 정운의 예상대로 이순신은 해안을 빠짐없이 수색하면서 부산으
로 진격하는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이러다간 오늘도 부산을 치지 못할 것이다.
원균은 황급히 배를 몰아 이순신의 지휘선으로 갔다. 이순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원수사를 청하려던 참이었소이다. 이제 해안에는 적의 복병선이 없는 듯
합니다만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났으니 앞으로의 일을 어찌 할까 걱정하고 있었소이다. 나군
관!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이곳으로 모이도록 하라."
나대용이 전령을 풀자 곧 장수들이 이순신의 지휘관으로 모여들었다. 상석에 앉은 원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술시(저녁 7시)가 되기 전에 해가 질 것이오. 벌써 정오를 넘겼으니 지금 부산을 칠 것인
가 아니면 내일로 미룰 것인가,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뱃길에 밝은 어영담이 나섰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날이 어두워질 것이외다. 어둠 속에서 초량목으로 후퇴하다가는
몰살당하기 십상이오. 오늘은 가덕으로 물러갔다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오는 것이 좋
을 듯싶소이다."
경상우수영의 기효근과 우치적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수들의 의견이 가덕도로 물러나는
것으로 모아질 즈음 녹도만호 정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적이 코앞에 있는데 후퇴를 하디니요? 오늘 물러
가면 저들은 몰운대와 절영도 근처에 또 척후선을 배치할 것이오. 그러면 우린 내일 처음부
터 다시 저들과 맞서야하오이다. 적의 척후를 무시하고 곧바로 부산을 쳤더라면 벌써 승세
를 굳혔을 터이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나 정운이 앞장을 서겠으니 여러분들은 내 뒤
만 따르시오."
정운은 이야기를 마치며 원균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 당장 그의 말을 받아서 오늘 전투
를 벌이자고 고집하라는 뜻이었다. 원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운의 배려를 고마워했
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순신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나 역시 정만호와 같은 생각이오이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시간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적을 치도록 합시다."
아, 이런!
원균의 얼굴이 분노와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이순신이 약삭빠르게 정운의 주장을 등에
업은 것이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낙안군수 신호가 의견을 내놓았다.
"나 역시 정만호의 뜻을 따르겠소. 장수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리요."
돌격장 이언량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명령만 내리소서. 당장 영귀선으로 왜놈들을 박살내겠소이다."
마지막으로 권준이 휘파람을 불듯 가볍게 논의를 정리했다.
"방금 주역을 살피니 길운이 가득합니다. 오늘 적을 치면 반드시 승리할 거예요. 정만호를
따라 소장도 오랜만에 왜적을 치러 갈까 합니다."
잔라좌수영 장수들의 잇단 발언으로 분위기는 부산을 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때
신중론을 내놓은 장수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였다.
"하지만 아직도 역풍이 불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소이다."
원균은 이억기의 말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이순신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소.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소? 물러가서 대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오도록 합시다."
그 순간 이순신이 원균의 말을 자르며 전의를 불태웠다.
"전라좌수군 단독으로라도 싸우겠소. 정 걱정이 되면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은 빠지시
오. 정만호, 각오는 되었소?"
정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그대가 앞장을 서시오. 그리고 이돌격장, 이첨사, 권부사, 신군수가 그 뒤를 받
치도록 하오."
군중회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일방적인 출정 명령으로 막을 내렸다. 이억기는 이순신
과 함께 부산으로 갈 것을 선언했고 원균도 마지못해 연합함대에 동참하게 되었다. 각자의
배로 흩어지는 길에 정운이 원균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장군께서 전투를 반대하시다니."
원균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당했어. 이순신의 모략에 말려든 게야."
"어쨌든 지금은 죽기살기로 싸우는 수밖에 없소이다. 크나큰 전공을 세우고 다시 만납시
다."
정운이 배를 타고 사라진 후 경상우수영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선으로 모여들었다. 기효
근과 우치적, 이운룡과 이영남은 침묵을 지키며 원균의 출정 명령만을 기다렸다. 벌써 전라
좌수영의 군선들이 절영도의 초량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김완의 송골매가 어지럽
게 하늘을 날았고 송희립 형제의 북소리도 점점 더 크고 빨라졌다. 그 뒤를 이어 전라우수
영의 군선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경상우수영의 군선뿐이었다.
"장군, 어서 출정 명령을 내리소서. 전라좌우 수군에게 전공을 모두 빼앗기겠소이다."
이운룡이 다급한 목소리로 원균을 재촉했다. 원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늦었어. 이미 이순신에게 기선을 빼앗겼다.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싸운들 그 공은 모두 이
순신의 것이 된다. 왜 그때 정운의 말을 곧바로 받지 못했던가. 이순신이 당연히 전투를 반
대하리라 생각하여 잠시 뜸을 들인 것이 화근이었어. 이순신, 그도 이번 전투로 조선 수군의
으뜸 장수가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불
구경하듯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다.
"돌격 나발을 불어라!"
드디어 경상우수영의 군선들도 연합함대에 합류했다.
초량목은 부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협로였다. 소리를 죽이고 척후선에 접근하던 이전과
는 달리, 연합함대는 크게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면서 초량목에 머물러 있언 왜 대선 네척을
순식간에 격침시켰다. 좌우의 복병을 살피며 조심스레 접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초량
목을 지나면서 연합함대는 자연스럽게 장사진을 형성했다. 긴 뱀이 꿈틀대듯이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선 군선들은 일제히 깃발을 흔들며 총통을 쏘기 시작했다. 해안에 정박해 있던 칠
백여 척의 왜선들은 지레 겁을 먹은 듯 맞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군들은 해안의 언덕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조총과 대포, 그리고 불화살을 쏘았다. 모과만한 대철환과 주발덩이만한
수마석이 판옥선 위로 쏟아졌다.
"왜선만 공격하지 말고 언덕을 향해서도 천자총통을 쏘도록 하라."
이순신은 적의 저항이 주로 육지에서 비롯됨을 알아차렸다. 왜선들을 당파하고 불지르는
동안 언덕에서 발사된 왜군의 포탄이 날아들고 있었다.
펑, 퍼엉!
좌수영의 군선들이 일제히 천자총통을 발사하였다.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
다. 피 흘리며 절규하는 왜군들이 흙먼지 속에서 부옇게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의 수군들이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왜선 백여 척을 침몰시켰지만 아직도 육백여 척이나 남아 있었다. 주
위가 어둑어둑해지면서 왜군들의 저항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시야가 좁아지면서 날아드는
탄환을 놓치기 일쑤였다. 물러설 때가 된 것이다. 그때 녹도만호 정운은 상륙하여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전령을 보내왔다. 이순신은 절대 불가! 라는 군령을 내렸다. 이제 곧
칠흑 같은 밤이 찾아들 것인데 지금 부산에 상륙하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이번에는 정운이
직접 군선을 끌고 다가왔다.
"장군, 퇴각해서는 아니되오이다. 왜적은 조선 수군을 두려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
소. 저 건너편에 즐비하게 늘어선 왜선들이 보이지도 않소이까? 횃불을 들고 끝까지 싸우도
록 합시다. 장군, 지금은 하늘이 준 기회오이다."
이순신은 정운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군중회의의 약조대로 해가 질 때까지만 전투를 하겠소. 날이 저물면 적의 복병선들이 우
리의 퇴로를 봉쇄할 것이오. 그러면 우린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가 되고 마오. 자, 이제 군
선들을 거두어 돌아갑시다."
정운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회의 석상에서는 적을 전멸시킬 것처럼 소장의 뜻을 지지하시더니 그 사이에 마음이 바
뀌셨소이까? 장군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소장 혼자서라도 왜선들을 치겠소이다. 먼저 후퇴
하십시오. 군선들이 모두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연후에 소장도 그 뒤를 따르겠소이다."
정운은 이순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군선을 몰아 해안으로 돌진했다. 정운의 군선이 왜
선 두 척을 당파하고 해안으로 다가서는 순간 언덕 위에 설치된 왜군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
다. 포탄이 어지럽게 날아들었고, 이물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던 정운이 휘청대며 쓰러졌다.
"정만호!"
정운의 군선에 가장 근접해 있던 원균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배를 급히 몰아 정운의 군선
앞으로 나아간 후 천자총통을 있는 대로 쏘았다. 그제야 왜군들의 반격이 뜸해졌다. 원균은
나는 듯이 정운의 군선으로 옮겨 탔다.
"이럴수가!"
직격탄을 맞은 정운은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목에서는 붉은 피가 콸콸콸 흘러나왔
고 갑옷은 온통 피로 질척거렸다. 군사들은 감히 정운의 시신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원균은
성큼 앞으로 나아가서 머리 없는 정운의 시신을 품에 안았다.
"흐흐흐흐! 정만호! 이게 무슨 일인가?"
원균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뺑 둘러선 군사들도 그제야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
았다.
"무엇들 하는 게냐? 머리를 찾아라. 정만호의 머리를 찾아!"
그러나 직격탄을 맞은 머리가 온전히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미 갈가리 찢어져 바다 속
으로 떨어져버렸으리라.
"장군! 퇴각 명령이 내렸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시지요."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보니 과연 전라좌우 수영의 군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초량목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낙오할 판이었다. 원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양손과 얼굴, 가슴은 온통 정운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다.
"퇴각하랏!"
정운의 군선과 원균의 지휘선이 나란히 뱃머리를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부산해안을 훑
으며 굼벵이처럼 나아갔지만, 회군하는 길은 송골매처럼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이순신은 멀
찌감치 외해로 나간 후 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함대를 이끌었다. 원균이 전령을 띄워 정운의
전사를 알렸으나 이순신은 가덕이나 거제에 정박하지 않았다. 왜선의 추격이 두려웠기 때문
이다.
6월 2일 밤, 연합함대가 여수에 닿자마자 이순신은 원균의 지휘선으로 곧장 달려왔다. 그
때 원균은 임시로 만든 관에 정운의 시신을 안치한 후 그 앞에 향을 피우고 있었다. 이순신
이 나타나자 원균은 아랫 입술을 짓씹으며 걸어나가 멱살을 틀어쥐었다.
"정만호가 죽어었는데 왜 거제나 남해에 배를 정박시키지 않았는가?"
그의 의로운 죽음을 살핀 후에 좌수영으로 돌아와도 늦지 않는 일인데, 그대는 만 하루동
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도 그대가 정운을 휘하 장수로 거느린 전라좌수사라고
하겠는가?"
이순신은 아무런 대답없이 원균을 노려보았다.
이, 이런!
원균은 저도 모르게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이순신의 두눈에서 눈물이 철철철 흘러내리
기 시작한 것이다. 원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순신은 정운의 관 위에 쓰러지듯 엎어져서
길게 대성통곡을 했다. 시신의 손과 발을 손수 주무르고 가슴을 어루만지더니 머리가 없어
진 것을 알고 잠시 까무라치기까지 했다. 그런 이순신을 바라보며 장졸들은 눈시울을 붉혔
다.
이것인가? 이순신, 그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는가?
원균만이 눈을 부라리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이순신은 정운의 가슴위에 올려
진 장검을 빼어들었다.
"아니되옵니다."
이영남이 뛰어들어 이순신을 만류했다. 이언량이 함께 나서서 장검을 빼앗았다. 이순신은
몸부림을 치며 다시 혼절했다. 권준이 어깨와 가슴의 맥을 짚어 그를 깨어나게 했다. 이순신
은 망연자실 한참을 앉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대용을 찾았다.
"가져왔는가?"
나대용이 붉은 보자기에 싼 것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평소에 정운이 탐내던 각궁(뿔로 만
든 활)이었다. 이순신은 그 각궁을 정운의 가슴에 올려놓으며 일장 연설을 쏟아부었다.
"그대와 나 죽기로 맹세하고 이 전쟁에 나섰소. 그대의 충의심은 좌수영에서 으뜸이며 그
대의 기개는 조선 수군의 자랑이라오. 왜적을 칠 때는 언제나 선봉에 섰으며 죽음을 무릅쓰
고 돌진하기를 즐겼소. 내 그대를 의지하여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했건만 어찌 그대
먼저 북망산으로 갈 수 가 있단 말이오. 그대에게 줄 것이 아직도 뒤에 많이 남았는데, 이
각궁도 아직 그대에게 선서하지 못했는데, 그대 어찌 먼저 내 곁을 떠날 수가 있소. 정만호,
부디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하오. 내 그대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 그대의 몫까지 싸우리다. 그
대의 머리가 되고, 눈이 되고, 코와 입이 되어 왜선을 격침시키리다. 정만호, 부디 그곳에서
도 조선 수군의 앞날을 살펴주오. 정만호!"
12. 유혈입성
군사를 이끌고 밤새워 강가에 온 것은 삼한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라네 밝으신 임금께서는
날마다 전선의 소식 기다리는데 미약한 신하는 밤새도록 술잔 즐겨하네 봄인데도 살벌한 기
운 도는데 마음은 오히려 장쾌하니 이번엔 왜적들도 뼈가 벌써 저리겠네 담소엔들 감히 승
산 아님을 말하겠는가 꿈속에서도 언제나 출정의 안장 타기를 생각하네
이여송이 안주에서 지은 시
계사년(1593년) 1월 3일 오후.
유성룡은 이른 아침부터 청천강으로 나갔다. 살을 에는 강바람에 귓불이 얼얼했지만 한참
동안 군사들을 돌려하며 군영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했다. 바위와 돌을 치운 다음 땅을 평평
하게 골랐고 구원병들이 요기할 수 있도록 국과 밥을 마련했다.
"대감, 바람이 차옵니다. 동헌으로 드시지요. 명군이 오면 소인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용주가 상기된 얼굴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괜찮다. 이거서 역시 내가 맡은 직분이니라."
지난달에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유성룡은 평안도의 관군과 의병을 모두 총괄하고 있
었다. 구원병인 명군에게 군량미를 대고 병영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하며 길 안내를 하는 것
도 그가 맡은 일이었다. 군사들의 손놀림이 어딘지 모르게 가볍고 힘이 넘쳤다. 이제 곧 평
양 탈환이라는 희망에 추위도 잊은 듯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삼만 명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작년 12월 25일이었다. 선발대로 조
선에 건너와 있던 군사들과 합친 구원병은 사만 명이 훨씬 넘었고, 여기에 평안도의 관군과
의병 일만오천 명을 다시 더하니 육만 명에 육박했다. 조선에 들어온 왜군이 이십만 명이라
고는 하나 상당수가 한양에 남았고, 또한 가등청정의 군대는 함경도로 진격하고 있으니, 육
만과 이만의 싸움. 아군의 수적 우세 속에서 치르는 첫 번째 전투였다. 비록 왜군이 평양성
을 방패막이 삼아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명군 역시 성을 단숨에 파괴할수 있는 대포를
지니고 있었다.
심유경도 동행하고 있을까?
어쨌든 소서행장의 군대를 평양에 주저앉힌 것은 심유경의 공이었다. 그가 평양으로 가서
어떻게 사탕발림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장담처럼 왜군은 오십 일 동안이나 평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흘 안에 압록강 물을 마시겠다느니, 분조를 이끌고 있는 세자를 볼모
로 보내라는 등의 위협은 있었지만 통상적인 위협에 그쳤을 뿐이다.
유성룡은 조정이 있는 북쪽 하늘을 말없이 응시했다 올해 들면서부터 객성의 움직임이 예
사롭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객성이 천창성의 성좌 안에 나타났고, 또다른 날에는 왕랑성의
성좌에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객성의 움직임이 잦으면 큰 복이나 화를 입게 된다.
어느 쪽일까? 이여송 역시 조승훈처럼 크게 패할까, 아니면 왜군은 물리치고 평양을 탈환
할까?
"용주야!"
유성룡은 조명연합군이 승리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끝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만약
이여송이 패한다면 안주에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일만 남는다. 안주에서의 최후의 결전은 별
도의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허나 승리한다면 패주하는 왜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도
록 전략을 짜두어야 한다.
"지금 당장 이 서찰을 황해도방어사 이시언 대감께 전하도록 해라."
그 서찰에는 평양에서 물러나는 왜군을 급습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용주는 서찰을
받아서 소매 깊숙이 숨긴 다음 넙죽 절을 하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이여송, 이여송, 이여송이라!
유성룡은 이여송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읊조렸다. 이여송의 조부모가 조선인이
라는 소문이 벌써 평안도 일대에 좌악 퍼졌다. 그의 조부모가 이산의 독로강 부근에 살았는
데 살인죄를 범해 요동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여송의 형제들은 장수로서의 자질이 특출
나서 여송은 물론 그의 아우 여백, 여장, 여매, 여오, 여정의 벼슬이 모두 총병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이여송이 조선인의 후손이므로 더욱 힘써 조선을 도우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
다. 그 결과 백성들은 이여송의 조부모가 이땅에서 죄를 지어 요동을 도망쳤고 이여송의 형
제들이 조선에 대한 기억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애써 무시했다.
천자의 나라에서 대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니 사사로운 옛정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섣불
리 동족입네 하고 친근감을 드러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리라. 그들은 이 땅에 피를 뿌리러
왔다. 그 피의 대가는 얼마나 클 것인가.
유성룡은 문득 좌의정 윤두수가 작년 10월 보낸 서찰 중 한 구절을 떠올렸다 .문맥은 다
르지만 거기서도 윤두수는 피의 대가란 말을 썼다.
…… 우리는 피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오.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칼과 활에 맞
아서 죽어간 동포들의 저주가 들리지 않소? 이 전쟁이 모두 끝나면, 그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제일 먼저 우리들의 목을 바쳐야 할 것이오. 하늘 아래 우리 죄를 씻을 곳은 없
다오. 허나 이 하찮은 목숨 끊기 전에 반드시 저 잔악무도한 왜적들에게도 피의 대가가 무
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싶구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민족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고 짐승처럼 행동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싶소. 그 전까지는 질긴 목
숨 이어가면서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지내야 할까보오.
서애!
그대도 나와 같은 심정이리라 믿소. 다행히 그대가 추천한 이순신을 비롯하여 원균, 이억
기의 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기에, 우리들이 부끄럽게 삶을 연장하는 것도 그리 길지
는 않을듯하오. 아니 그렇소, 서애?
윤두수는 비장한 어조로 백성들의 피의 대가를 대신들이 치러야한다고 주장했다. 죄를 따
지자면 임란 직전 귀양을 떠났던 윤두수보다 좌의정의 자리를 지켰던 유성룡의 죄가 백배는
더하리라. 한양을 버렸으며 평양을 지키지 못한 것 역시 그가 책임질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
잘잘못을 따진다면 살아남을 신하가 몇이나 되겠는가? 사후약방문일지라도 이 전쟁을 승리
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그래도 윤두수가 있기에 전하께서 성심을 바로잡으시는 것이다. 작년 11월 5일, 신성군이
기어이 세상을 버렸을 때도 윤두수는 앞장서서 전하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랏일을 살피도록
주청했다. 내의원 허준에게 죄가 돌아가지 않은 것도, 전하께서 요동행을 고집하지 않은 것
도, 모두 그가 조정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내 나이 벌써
쉰둘, 아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붉은 깃발을 든 군졸 하나가 나타났
다. 접반사 한성부 판윤 이덕형이 보낸 전령이었다.
"명군이 재 너머에 도착했사옵니다 맞을 채비를 하시라는 한성부 판윤 대감의 전갈을 가
지고 왔사옵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삼만 명이 넘는 기병들이 언덕을 가득 매우며 위용
을 드러냈다. 유성룡을 비롯한 장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연 대국의 군사다웠다. 조
선의 군사들은 대부분 보병이었다. 산과 구릉지가 많고 벌판이 적은 한반도에서는 기병의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탓이다. 이에 비해 명군은 대부분 기병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요동벌판을 달리며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는 말을 타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은빛 투구를 쓴 이여송이 전두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명군을 청천
강가로 인솔하였다. 그 뒤를 기골이 장대한 명나라 장수 서넛과 접반사로 함께 온 이덕형이
따랐다. 안주의 장졸들이 길을 막아서자 이여송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돌려 통역관
에게 물었다.
"이자들은 누구인가?"
통역관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유성룡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능숙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젊은 시절, 허봉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잠시 익혀두었던 중국어였다.
"잘 오셨습니다. 이여송 장군. 이들은 귀국의 군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제 휘하의 군
졸들이오이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이여송은 유성룡의 침착한 답변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안도 도체찰사 유성룡이라 합니다. 장군의 높은 명성을 일찍부터 흠모하였는데, 이렇게
만나뵈니 무한한 영광이오이다."
이여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다.
"그대가 바로 유성룡이오? 유격대장 심유경으로부터 그대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이다. 우리 조정에서도 그대의 학식을 칭찬하는 대신들이 계시다오. 특히 문에 능통하시다고
들었소만."
"과찬이십니다. 잔재주일 따름이지요."
이여송은 요동에 머물면서 조선 조정을 이끌고 있는 대신들의 신상을 파악했다. 유성룡과
윤두수, 그리고 이덕형이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 흐름에 밝고 손익 계산이 분명한 위인, 과연 유성룡의 윤기 흐르는 볼과 잘 빠진 수염,
그리고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는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접반사로 따라온 이덕형에게는 아
직 딱딱하고 튀어나오는 맛이 있었는데 유성룡은 그 언행의 부드럽기가 청천강의 강물과도
같았다.
유성룡이 미리 닦아놓은 자리에 군영이 설치되었다. 군사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절도가 있
었으며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여송이 군영을 살피는 동안 유성룡은 이덕형과 함
께 먼저 동헌으로 돌아왔다. 대청마루에 준비된 음식과 관기들을 발견한 이덕형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대감, 저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여송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오이다. 의주에서도 전하께서
친히 어주를 권하셨다가, 전쟁중에 무슨 술이라며 핀잔만 받았습니다. 어서 치우시지요."
"그, 그러지."
유성룡은 지난번 심유경을 맞이할 때처럼 성대하게 준비를 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여송
이 어주마저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편으론 그 인품이 대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
로는 조선을 업신여기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도 했다.
"유격대장 심유경이 보이지 않던데 어찌 된 일이오? 함께 오지 않았는가?"
"의주까지는 같이 왔었는데 그 후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척후에 따르자면 미리 평양으
로 내려가고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밀명
을 받은 게 아닌가 합니다."
"밀명? 평양성을 탈환하러 가는 마당에 무슨 밀명이 따로 있단 말이오?"
"저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구원병을 이끌고 온 장수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이지요. 백만 대군을 이끌로 오겠노라 큰소리를 쳤지만 원군은 채 오만 명을 넘지 않습니다.
그나마 명나라 전역에서 차출된 군사들이라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이여송은 어떤 인물인 것 같소?"
이덕형이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야심이 큰 인물이옵니다.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으며 격식을 차리는 데 소홀함이 없습니
다. 필승을 장담하기는 하지만 그 동안의 전황과 왜군의 전력을 살피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워 확실한 입지를 굳힐 생각인 듯합니다."
"그러하오? 그렇다면 일단 안심이군. 공을 세우려면 성심껏 싸우지 않겠소?"
"헌데 대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말해보시게."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이여송은 의주에 도착하면서부터 유독 자신이 조선인
의 자손임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의도적으로 그 점을 내세우는 듯합
니다."
"우리 조정으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계산이 아니오?"
"병조판서 이항복도 대감과 같은 의견입니다만 소생은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이여송은
이번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 조정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려고 합니다. 조선인의 자손인 나
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달라는 식이지요."
"허나 이미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대장 이일의 관군이 평양성 근처에 모여 있지 않
소? 그들을 배제하고 전투를 할 수 있겠소?"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만 심유경이 먼저 평양으로 떠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만 빼고 자기들끼리 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 듯한데 그 내막을 알 수 없으
니 큰일이지요."
유성룡은 작년에 심유경을 만난 후부터 이덕형과 똑같은 고민을 해왔다.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천자의 나라를 믿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받을 것이고, 그대로 믿고 의지하자니 무언
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군영을 둘러본 이여송이 그의 아우 이여백과 함께 동헌으로 들어섰다. 유성룡과 이덕형은
대화를 멈추고 서둘러 뜰로 내려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영송이 먼저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유대감께서 미리 자리를 살펴주셔서 힘들이지 않고 군사들을 쉬게 할 수 있었소이다. 거
듭 감사를 드리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부족하나마 고깃국과 반찬들을 준비했는데
귀국 병사들의 입맛에 맞을지 걱정입니다."
"저런! 음식까지 준비하셨단 말씀이오? 역시 유대감은 손님을 예로써 맞이할 줄 아는 조
선의 명신이십니다. 내 오늘 일을 꼭 천자께 아뢰도록 하지요. 허허허."
이여송이 사람 좋게 웃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유성룡은 준비해두었던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평안성도>올시다. 간자를 보내 성 안에 왜군이 진을 친 곳을 상세히 살폈지요."
이여송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역시 평양성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삼 년 전에 만든 것이었다. 유성룡이 좌중을 둘러본 후 주필을 들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점을 찍어둔 곳이 평양성의 대문들입니다. 내성에는 칠성문이 있고, 외성에는 보통문, 정
양문, 함구문이 있습니다. 그 대문들에 각기 왜군들이 배치되어 있지요. 우선 이곳 칠성문에
왜군 사천 명이 있고, 외성의 세 문에는 각각 이천오백 명씩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나머지
왜군들은 이곳 대동강 쪽 성벽을 지키거나 여기 모란봉에 잠복해 있소이다. 특히 모란봉에
숨어 있는 왜군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특별히 선발된 정예병들로 칠성문이나 보통문
을 치려는 조명연합군의 배후를 급습할 수 있습니다."
이여백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여송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고개를 잠시 숙였
다가 들었다.
"놀랄 뿐이오. 조선에 유대감과 같은 신하가 있는 한 이 전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외다.
이렇듯 적의 형세를 손바닥 보듯 알았으니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오."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을 간파해야 한다는 속언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장군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없다면 이깟 지도가 수백 장 있다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부디 조선을 구해주
십시오. 우리는 이장군 만을 믿을 뿐입니다."
이여송이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오. 나 이여송도 조선인의 자손이외다. 따지고보면 조선은 나의 조국과 진배없
소. 죽기로 싸울 터이니 유대감은 지켜보시기만 하시오."
"쉽지 않은 싸움일 것입니다. 왜군들에겐 조총이 있어요."
곁에 있던 이여백이 따지듯이 말했다.
"하늘이 낸 군사들이 어찌 그깟 조총을 두려워하겠소. 그들에게 조총이 있다면 우리에겐
대포가 있소이다. 평양성의 네 군데 대문 앞에다가 대포를 설차하여 동시에 발사하면 전투
는 곧 끝이 날 것이오."
이덕형이 끼여들었다.
"평양성 안에는 조선 백성들도 많이 있소. 함부로 대포를 쏘아서 그들까지 상하게 만들어
서는 아니될 것이오."
이여송이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날아가는 포탄이 어찌 왜군과 조선 백성을 구별할 수 있겠소.
대감들께서 미리 연통을 넣어 평양성 안에 있는 조선 백성들을 성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하시
오."
유성룡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간자를 보내긴 하겠지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닐 듯합니다. 왜군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강
제로 왜복을 입혀 조총을 들도록 강요하고 있어요. 또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허드렛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성안의 조선 백성들이 마음대로 성 밖으로 나오기는 어
려울 터이지요."
이여송은 고개르 끄덕이며 차선책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조선 백성들이 모두 탈출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대문을 표적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대포를 쏠 것이니 조선 백성들이 대문 근처로 접근하지 않도록 조처해주시
오. 대동강 쪽 성벽으로 물러나 있으면 안전할 것이외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명나라의 대포가 대문과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면 성안의 백성들도 그 틈을 타서 밖으로
피할 수 있으리라. 물론 혼란중에 왜군으로 오해받아 죽음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성을 탈환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수세였던 국면을 단숨에 반전시키는 일이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 과업인 것이다.
이여송과 이여백이 돌아간 후 유성룡은 평양 출신의 날랜 군졸 열명을 선발했다. 평양성
에 몰래 침투시킬 군졸들이었다. 우선 이들을 먼조 보내고 유용주가 돌아오는 대로 다시 열
명을 잠입시킬 작정이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평양성으로 숨어들어가라. 만수대, 밀덕대, 창광산, 서기산에 각각 숨
어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할때까지 성안에 머물도록 하라. 조명연합군 평양에 도착하
기 전에 백성들을 되도록이면 대동강 쪽 성벽으로 이끌어라.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적극
적으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라. 나누어준 비표는 너희들의 신분을 보장해줄 것이다. 명군을
만나면 그 비표를 보이고 도움을 청해라.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성안에 있는 우리 백성
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 알겠는가?"
"예"
평복으로 갈아입은 군사들은 그 밤에 길을 나섰다. 유성룡은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의 어깨
를 어루만지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왜적의 형세도 알아냈고, 원병도 도착했고, 조선 백성들
을 구할 간자까지 보냈으니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 유성룡은 이덕형과 겸상으로 저녁을 먹었다. 명군에게 주려고
끓은 고깃국 냄새가 식욕을 돋우었다.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에게는 겨가 반쯤 섞인 보리나
밀을 먹이면서, 명구네게는 흰 쌀밥과 고깃국을 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전하께서는 어떠하신가?"
신성군의 죽음 이후 선조는 자주 눈물을 내비쳤다. 군왕이 슬퍼하니 대신들의 마음도 편
치 않았고 백성들의 얼굴에도 어둠이 가득했다. 유성룡은 직접 선조를 찾아가서 그 슬픔을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안주의 일이 너무나도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계시옵니다. 감정의 기복이 더욱 심해지셔서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는 형편이옵니다."
"큰일이구먼."
"저러시다가 옥체라도 상하실까 걱정이옵니다. 끼니를 예사로 거르시니 신하된 도리로 뵈
올 낯이 없지요."
"세자저하에 대해서는 별말씀이 없으신가?"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분조를 탓하는 말씀을 사흘이 멀다 하고 하셨는데 지금은 통 그쪽
으로도 아무런 말씀아 아니 계십니다. 다만 양위하겠노라는 말씀만 되풀이하시지요. 이번 전
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시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신 듯도 하고……."
유성룡은 묵묵히 숟가락을 놀리며 이덕형이 들려주는 의주의 분위기를 경청했다. 고슴도
치도 제 자식을 이뻐 보인다고 했던가? 전하께서는 지금 자식 잃은 아비로서의 슬픔을 가누
지 못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전쟁통에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디 전하뿐이겠는가? 귀기울여
보라. 자식을 잃은 수천 수만의 부모들이 통곡하고 있다.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
식들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버리리라. 이제 이 땅에는 아들을 묻은 아비, 딸을 찾아 헤매
는 어미, 아내를 버린 남편, 그 남편을 기다리다 목을 매는 아내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곳이
바로 유황불이 이글대는 지옥인 것이다.
눈물 한 방울이 밥상 위로 뚝 떨어졌다. 고깃국을 마시던 이덕형의 두 눈이 토끼 눈처럼
커졌다.
"대, 대감!"
조선의 참담한 현실을 헤아리니 슬픔이 북받쳤다. 유성룡은 고개를 떨군 채 흐르는 눈물
을 그대로 두었다. 몽진을 떠날 때도, 평양성을 물러날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러
나 오늘은 왠지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지난 반백 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에 응시했던 것이었다. 만백성이 태평가를 높
이 부르고, 공맹의 도로써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
했다. 젊은 날의 미망이었다. 결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공언했던 시절이 있었다. 죽을
자리를 평양에 정해두고도 홀로 살기 위해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사대부로서
부끄러운 행적이다. 백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큰죄이다. 군왕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만
들었으니 신하된 자는 오직 죽음으로써만 죄값을 치를 수 있다.
이윽고 유성룡은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바로 앞에 앉은 이덕형도 들
을 수 없을 만큼 작고 흐릿한 웅얼거림이었다.
"천하의 도리는 땅에 떨어졌는데, 내게는 그것을 돌이킬 만한 힘이 없네. 변방에서 자식을
잃은 임금은 하늘을 우러러 큰 울음을 터뜨리고, 나약한 신하는 이웃 장수의 도움으로 생명
을 부지하는구나. 밤은 깊고 길은 멀고 강물은 얼어붙고 백성들은 죽어가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리요. 모든 것은 나르를 망친 간신들 탓이라네. 내 탓이라네."
계사년(1593년) 1월 9일 새벽.
서기산에 숨어 있던 유용주는 동이 트기를 기다려 하산했다. 어젯밤 내내 천둥처럼 들려
오던 대포 소리가 순식간에 뚝 멎은 것이다. 매복병을 피해 길이 없는 산등성이를 타다보니
중심을 잃고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기 일쑤였다.
"괜찮은가?"
유용주가 짧게 물었다.
"내레 끄덕 읍슴네다."
밀덕대를 제집 앞마당처럼 누비고 다녔다던 강초웅이 옷을 툴툴 털며 비탈을 기어올랐다.
키가 작고 몸이 호리호리하며 표창을 잘 쓰는 군사였다. 가족의 생사가 궁금하다며 내성 쪽
으로 자꾸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애처로웠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다. 조실부
모하고 유성룡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왔던 유용주로서는 강초웅의 가족 걱정도 호사롭게
느껴졌다.
산을 거의 내려온 두 사람은 낮은 포복으로 바닥을 기었다. 왜진이 바로 코앞이었다. 한참
을 기어가던 강초웅이 갑자기 고개를 불쑥 들었다. 유용주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몸을 일으
켰다. 모닥불의 잔해들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왜군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시기 이런 일이 다 있슴매?"
강초웅이 혀를 끌끌 찼다. 유용주는 상황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왜진이 있던 곳으로 뛰어
내려갔다. 포탄을 맞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진해서 진을 옮겼다는 말이다.
어디로?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함구문이 위험하다. 따라서 이곳을 포기한다는 것은 조명연
합군에게 평양성을 내어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적
참으로 지독한 침묵이 평양성을 감싸고 있었다. 그 흔한 조총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까마
귀들만이 까악까아악 울음을 토하며 뜯어먹을 시체를 찾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도망쳤나보옴매."
강초웅이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침을 탁 뱉었다.
도망을 쳤다? 조명연합군이 성을 완전히 에워쌌는데 하룻밤 사이에 어디로 달아났단 말인
가? 그럴 리 없다. 위급한 일이 있어서 진을 옮긴 것이리라…… 아니다. 정말 왜군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성벽에 개미떼처럼 붙어 있던 놈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어염집에서 빼
앗은 도자기며 서책이며 보석들이 좋아서 낄낄거리던 놈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평양성에 왜군이 없다! 그렇다면 조명연합군이 승리한 것이다. 드
디어 평양성을 탈환한 것이다.
"저길 보아요."
강초웅이 함구문 쪽을 가리켰다. 조총을 아무렇게나 어깨에 맨 사내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를 나누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왜군은 아닌 듯했다. 그들도 강초웅과
유용주를 발견하고 잠시 경계하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역시 조선인임을 확인하고 긴장을
푸는 눈치였다. 강초웅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왜놈아들이 다 어디로 갔슴매?"
탄환에 맞았는지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는 사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얘대긴! 간밤에 다 도망갔지비. 대동강으로 난 소문들 있지 않소? 그 장경문과 대동문
으로 빠져나가 꽁공 언 대동강을 건넜슴네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왜군들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쥐새끼 같은 놈들!"
유용주는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헌데 생각해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군들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올 것을 염려하여 대장 이일이 군사들을 미리 대동강가에 매복시켰
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은 채 왜군들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그
곳에 심어두었던 복병들을 누가 미리 거두어들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콰르릉, 쾅!
갑자기 대포 소리가 진동하더니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왜군들이 모조리 달아난
평양성을 향해 명군이 대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저 대포에 맞을 사람은 성 안에 있
는 조선 백성뿐이다.
성 밖의 조명연합군은 왜군이 물러간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서둘러야 한다. 급
히 함구문으로 가서 왜군의 철수 사실을 알려야 한다.
"함구문으로 가자!"
유용주가 앞장을 서자 강초웅도 나는 듯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쏟아지는 포탄을 가까스
로 피하며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여기저기 포탄을 맞아 피흘리며 신음하는 조선 백성들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보살필 시간이 없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빨
리 성문을 열고 대포를 쏘는 것을 중단시켜야 한다.
멀리 함구문이 보였다. 유용주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허벅지에 힘을 실었다. 그때 대문이
열리더니 붉은 기를 앞세운 명군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조
선군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함구문 밖에는 김응서가 이끄는 관군이 있었다. 그러나 지
금 그들은 입성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사라진 왜군, 무작정 쏘는 대포,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조선군, 그
리고 저들, 저 명나라의 군사들!
유용주의 불길한 예감은 금방 현실로 드러났다. 명군은 성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
이는 조선 백성들을 다짜고짜 베기 시작했다.
"저, 저 떼놈들!"
강초웅이 발을 동동 굴렀다. 주변이 순식간에 피로 얼룩졌다. 머리없는 시체들이 아무렇게
나 널브러졌다.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물러서!"
유용주는 강초웅의 팔을 끌며 보통문 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칼날을 피해 우왕좌왕 떼를 지어 달아나는 백성들은 서로가 서로를 밟아뭉개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명나라의 군사들은 정확히 백성들의 목만 베었고, 다리를 자르거나 배를 찌르는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들은 지금 수급을 모으고 있었다. 조선인의 수급을.
유용주는 몸서리를 치며 뒤돌아섰다. 평양 백성들은 재성으로 피하기 위해 내성과 외성을
잇는 정해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해문도 이미 명군들이 점령한 후였다. 그들은 문을 굳게
닫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노루 몰 듯이 끌고 다니며 목을 베었다. 이러다간 평양성 안의
조선인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끝없는 비명과 울부짖음과 피흘림. 유용주는 손바닥
으로 양볼을 세차게 때렸다.
제발 꿈이길,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이길!
그러나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쌓여가는 주검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조선
을 돕기 위해, 왜를 물리치고 조선에게 승리를 알려주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의 군
사들이 조선인의 목을 베고 있었다. 삼강오륜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저들이 아닌가? 공맹
의 도를 이 땅에 전하고, 군신의 예와 인간된 도리를 자나깨나 가르친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아니었다. 저들은 지금 인간의 탈을 쓴 늑대, 피에 굶주린 이리였다. 조선인의 목
을 치기 위해 찾아온 도부수였다. 저들은 지금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에 박자
를 맞추고 아낙네들의 비명에 춤을 추면서 사냥감을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아무도 조선의 백성들에게 죽어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를 일러주지 않았다. 어제는 왜군에
게 살육을 당했던 백성들이 오늘은 명군에게 도륙을 당하고 있었다. 왜국은 처음부터 오랑
캐로 치부했기에 목숨을 잃어도 부끄럽거나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허나 명나라는 군자의 나
라이며 우방이 아니었던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다시 내성으로 통하는 주작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강초웅이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초웅!"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유용주는 잰걸음으로 강초웅의 뒤를 따랐다. 한
참을 달리다보니 대열과 흩어져서 둘만 남게 되었다. 강초웅이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러나 그는 멈취 서지 않았다 주작문에도 십여 명의 명군들이 칼을 빼어든 채 기다리고 있었
다. 본지에 앞서 선발대인 듯싶었다. 강초웅이 품에서 손바닥만한 나뭇조각을 꺼내들었다.
유성룡으로부터 받은 비표였다. 비표를 머리 위로 들고 명군들에게 접근했다. 열 걸음쯤 거
리를 두고 강초웅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표를 살피던 명군들이 자기들끼
리 무엇인가를 쑥덕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칼을 휘두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제는 비
표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강초웅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표창을 꺼내 땅에서 하
늘로 휘저으며 뿌렸다.
후이익!
앞서 달리던 군사 네 명이 썩은 고목처럼 쓰러졌다. 군사들이 머뭇대는 사이 박초웅은 다
시 표창을 빼어 들었다. 이번에는 양손을 모두 좌우로 흔들었고, 나머지 여섯 명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유용주가 주작문에 이르렀을 때는 강초웅이 이미 내성으로 들어간 후였다.
밀덕대로 가는구나.
그제야 유용주는 강초웅의 목적지를 짐작했다. 두고 온 가족의 생사가 못내 궁금했으리라.
아비규환 속에서 가족들을 구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평양성으로 들어온 것은 철저
하게 비밀에 부쳐야 한다. 사사로운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유용주는 주작문을 지나 밀덕대룰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강초웅보다 먼저 밀덕대에 닿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직 내성 깊숙한 곳까지는 명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외성의 백성들을 모
두 죽인 다음 내성으로 들어올 계획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
언도 있듯이, 백성들은 벌써 소문을 듣고 허둥지둥 길을 나서고 있었다. 어젯밤 왜군들이 빠
져나간 바로 그 대동문과 장경문이 그들의 유일한 활로였다.
그러나 상황은 급속하게 변해갔다. 명의 기병 천여 명이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오자마자
내성 역시 인간사냥터로 바뀌었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등뒤에서 불어왔다. 말을 탄 채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명의 기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용주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 깊숙이
감추었던 칼을 빼어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단칼에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갑작스런
반격에 명군은 제대로 응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안장에서 떨어졌다. 오른팔을 감싸고 울부
짖는 그에게 백성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괴성을 지르며 마구 밟
아댔다. 건너편 길목에서도 기병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표창이닷!
유용주는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까,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미친 듯이 표창을
던지는 강초웅이 거기 있었다. 유용주가 달려가서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이봐, 정신차려. 우린 지금 여길 빠져나가야 돼!"
강초웅이 팔을 획 뿌리치며 소리쳤다.
"가긴 어딜 간단 말임매? 저기 핏덩이가 보임매? 떼놈들이 한뿐인 내 아들을……."
강초웅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섯 살쯤 된 사내아이의 시신이 목이 잘린 채 소달구지에
얹혀 있었다.
"내레 아니 가겠슴매. 여기서 자식놈에 원쑬 갚겠슴매. 혼자 가기요."
"정신차렷!"
유용주는 강초웅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강초웅의 작은 몸이 부웅 떠서 저만치 나뒹
굴었다. 그는 다시 강초웅의 멱살을 잡고 일으킨 다음 가슴과 등을 내질렀다. 윽, 신음 소리
를 삼키며 강초웅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이곳 백성들은 전멸한다. 그래도 좋아?"
강초웅이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의 피를 닦아내는 강초웅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유용주가 휙 돌아서서 대동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초웅은 힐끔 목 없는 아들의 시신을 돌아본 후 결심을 굳힌 듯 유용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언덕길을 따라 달렸다.
"다른 가족들은?"
"모르겠슴매. 모두 죽었겠지비."
대동문에 이르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조선인들이 굴비 엮듯 묶인 채 문을 나서고 있
었다. 유용주와 강초웅은 잠시 솔숲에 몸을 숨겨 명군의 동태를 살폈다. 끌려가는 백성들은
사백 명이 넘었다. 갑자기 강초웅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왜 그러는가?"
"오마님네다. 아내도 있시오."
대열에 있던 가족을 발견한 것이다. 달려나가려는 강초웅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기다려. 군사들이 백 명은 넘네. 자네 혼자서 상대하기엔 무리야. 저들이 백성들을 어디
로 끌로 가는지 일단 따라가보세."
두 사람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대열의 후미로 슬쩍 끼여들었다. 대동문을 벗어나자
마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확 밀어닥쳤다.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군데군데
구멍을 파고 모닥불을 피운 명나라 군사들이 보였다. 역시 조선군은 없었다.
유용주는 잽싸게 주위를 살폈다. 참으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명군은 오
랏줄에 묶인 백성들을 일렬로 세운 후 한 사람씩 얼음 구멍에 밀어넣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발버둥을 치자 그 뒤에 서 있던 사람도 균형을 잃고 얼음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
무리 뒷걸음질을 쳐도 사람들의 몸은 점점 앞으로만 쏠렸다. 울음과 비명의 도가니 속에서
도 명나라 군사들은 히죽거리며 그들의 엉덩이를 발로 차고 얼굴을 짓밟았다.
갑자기 대열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제 이곳에서도 살육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참다 못한
강초웅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안돼."
유용주가 잡으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강초웅은 얼음 구멍으로 백성들을 밀어넣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명군들에게 표창을 날렸다. 세 사람이 맥없이 꼬꾸라졌다. 그가 다시 표창
을 날리자 그 뒤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두 사람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너무나도 순식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강초웅이 또다시 표창을 빼어드는 것과 동시에 이상한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주위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 군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용주는 재빨리 대열에서 이탈하여 대동강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강초웅이 던지
는 표창 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뒤돌아보니, 이미 강초웅의 머리가 깃대
에 높이 꽂혀 있었다. 표창을 모두 던진 후 곧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부디 용서를!
유용주는 함께 죽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증명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살아남아야만 했다. 서애 대감도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얼어붙은 대동강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을 그려보았다. 그리ㅏ고
그 강물과 함께 정처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조선 백성들의 주검을 떠올렸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이토록 참혹한 화를 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저들의 시신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던 대동강 깊은 곳에서 고기밥이 되리라. 그들 중 누구도 차가운 강물 속에서
고기밥이 되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단 하
나, 나라를 제 손으로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돌아갈 유일한 죄명이었다.
이민족에 의지해서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순진한 바람들의 피비린내 나는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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