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10
나관중
가을장마와 서촉으로 군사를 낸 사마의
때는 건흥 8년 7월, 그때, 위 도독 조진도 병이 다 나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위
주에게 표문을 올렸다. 촉병이 여러 차례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니 중원이 편안
한 날이 없었습니다.만약 내버려두면 반드시 뒷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때는 서늘한 가을이라 군마가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없으니 바야흐로 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만하옵니다. 신이 바라건대 사마의와 대군을 이끌고 한중
으로 나아가 역적을 쳐없애 변경의 걱정거리를 쓸어 없애고자 하옵니다.
위주는 그 표문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조진의 말대로 촉은 여러해 동안 괴
로움을 준 나라의 근심거리가 아닌가. 조예는 우선 시중 유엽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자단(조진의 자)이 촉을 치자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 유엽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쳐없애지 않으면 뒷날의 근심거리를 남기게
됩니다."
위주 조예는 그 말을 흡족히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이었다. 유
엽이 어전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 있는데 조정의 무인이며 대관들이 찾아
와서 그에게 물었다.
"듣기로 천자께서 공을 부르시어 촉을 칠 논의를 하셨다 하는데 시중께서는
뭐라고 상주하셨소이까?"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일은 없었소이다. 촉 땅은 산천이 험해서 쉽사리 칠
수 있는 땅이 아니오. 부질없이 군마만 잃을 뿐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오. "
유엽은 조예에게 했던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고 반대로 엉뚱한 말만 늘어놓
았다. 유엽이 말도 못 붙이게 딱 잡아떼니 모두들 할 말을 잊은 채 돌아갔다.
그러자 양기라는 한 관원이 집적 위주 조예를 찾아가 물었다.
" 어제 듣기로 유 시중은 폐하께 촉을 치도록 상주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
늘 신 등과 이야기할 때에는 촉을 쳐서는 아니 된다 했습니다. 이는 폐하를 속
이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시중을 부르셔서 다시 물어 보심이 좋을 듯하옵니
다."
조예도 그 말을 듣자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즉시 유엽을 불러 들이고 물었다.
"경은 짐에게 촉을 쳐야 한다고 권하고는 이제 다른 말을 하니 무슨 까닭인
가?"
유엽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조예는 어이없다는 듯 껄
걸 웃었다. 잠시 후에 양기가 물러나자 유엽이 조예에게 가만히 말했다.
"신은 어제 폐하께 촉을 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라의 큰 일인
만큼 어찌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군사를 부리는 일은
속고 속이는 일이므로 일을 벌이기 전에는 깊이 숨겨 두고 내지 말아야 하는 법
입니다."
조예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경의 말이 참으로 옳소!"
조예가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그때부터 유엽을 정중히 대ㅎ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열흘 만에 사마의가 돌아왔다. 조예는 조진으로부터 이러
저러한 표문이 올라왔음을 알려 주고 의견을 물었다.
"어찌 했으면 좋겠소?'"
"신은 이번에 형주에 가서 동오의 움직임을 살피고 왔습니다. 신이 보는 바로
는 동오에서는 아직 군사를 낼 조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촉을 쳐없앨 좋은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마의가 주저없이 그렇게 말하자 조예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곧 조진을
대사마 정서대도독으로 삼고, 사마의를 대장군 정서부도독, 유엽을 군사로 삼았
다. 세 사람은 위중게 하직 인사를 하고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거쳐 검
각을 빼앗기 위해 한중으로 밀고 나갔다. 곽희와 손례는 일종의 별동대가 되
어 다른 길로 한중으로 갔다. 한중을 지키던 장수에 의해 이 소식이 성도에
전해졌다. 그때 공명은 이미 병이 나아 평소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명
은 매일같이 조련장에 나가서 장졸들에게 팔진법을 가르치고 있던 중이었다.
공명은 위의 대군이 한중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장의와 왕평
을 불러 명을 내렸다.
"그대들은 각기 1천 기를 이끌고 진창으로 가서 위병을 막도록 하라. 내가 곧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갈 것이다."
두 장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달라지더니 공명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위군은 40만이나 되며 심지어는 80만이라고까지 부풀리기
도 합니다. 그런데 고작 1천의 군사로 어떻게 그런 대군을 맞아 길목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위의 대병이 한꺼번에 밀려든다면 무슨 수로 버텨 낼 수
가 있겠습니까?"
"내가 군사를 많이 주고 싶어도 부질없이 군사들만 고달프게 할 것 같아 그러
는 것이다."
점점 모를 소리였다. 두 장수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머뭇거리고 있을 뿐
선뜻 나서려 하지 않자 공명이 좋은 말로 두 사람을 재촉했다.
"설령 일이 잘못 되어도 그대들의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서 떠나도록 하라."
그러나 두 사람은 공명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후방을 위해 대군이 밀
고 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여 시간이나 벌어 보려는 것쯤으로 여긴 장의가 목소
리를 가다듬고 애원했다.
"승상께서 저희 두 사람을 죽이시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십시오. 저
희들은 아무래도 못 가겠습니다."
그제야 공명이 껄걸 웃으며 참뜻을 밝혔다.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내가 가라고 할 때에는 그만한 생각이 있어서임을 어
찌 모르는가? 어젯밤에 천문을 보았더니 필성(28수의 열두번째 별이름)이 태
음 사이에 있으므로 이 달에는 틀림없이 큰 비가 쏟아질 것이다. 위의 군사가
40만이라 하지만 그 대병이 어찌 진창의 좁고 험한 산 속에 들어설 수 있겠
는가?
그러니 적은 군사로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군을 한중에 두
고 한 달동안 편안히 쉬게 하여 위군이 물러가기 시작하면 지체없이 대군을
몰아 그들을 뒤쫓으려는 것이다. 편히 쉬다가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치는 것
이니 우리 10만 군사가 능히 40만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제야 공명의 뜻을 알고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떠나갔다. 이어
공명은 대군을 거느리고 한중으로 나아가 각처의 길목을 지키는 장수들에게 마
른 나무의 말먹이풀과 인삼을 인마가 한 달 동안 쓰고 남을만치 준비하여 장마
철을 지낼 채비를 하게 했다. 한편, 조진과 사마의는 40만 대병을 거느리고 진
창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 안에는 집이 한 채도 없었다. 집은커녕
곡물 한 톨, 닭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고장의 토박이를 찾아 까닭을 물
어 본 즉, 공명이 물러날 때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없앴다는 것이었다. 조진은
하는 수 없이 진창길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깨우쳐 주었다.
"함부로 나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간밤에 천문을 보았더니 필성이 태성음 사이
에 걸쳐 있었으므로 틀림없이 이 달 안에 큰 장마가 질 것입니다. 만약 적진
깊이 들어갔다가 이기면 좋겠지만, 혹시 실수가 있게 되면 인마의 수고스러움을
말 할 수 없이 클 뿐만 아니라 그때는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나지 못하게 될 것
입니다. 한동안 성 안에 집을 지어 장마철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진은 사마의의 말을 듣고는 그의 말에 따랐다. 나무를 베어 와서 움막을 짓
고 열흘쯤 머물러 있으려니까 과연 오늘도 비, 다음 날도 비, 낮이고 밤이고 비
만 쏟아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 우량은 놀라울 정도였다. 장대 같은 비가 잠시
도 쉬자 않고 퍼부었다. 쏟아붓듯 매일 그렇게 비가 내리더니 나중에 무기도
식량도 모두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갈 정도였다. 급히 지어 놓은 움막도 물
속에 잠겨 산 위로 옮겨야 할 판이었다. 길은 격류로 휩싸였다. 절벽은 폭포가
되고 골짜기 아래는 이미 호수로 변해 있었다. 이러나 밤에 잠도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장마가 30여 일이나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에 빠져 죽거
나 떠내려가는 자도 있었다. 말은 풀이 떨어져 굶어 죽고, 군량도 바닥이 나
군사들의 불평이 그치지 않았다. 후진과의 연락도 끊겨 버렸다. 40만의 군사는
촉병과 싸우기도 전에 물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사실이 낙양에 전해지자
위주 조예는 제단을 쌓아 놓고 비가 그치기를 빌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때 황문시랑 왕숙이 위주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옛 글에 이르기를 '천리 밖에서 양식을 실어다 먹이면 군사의 얼굴에 굶주
린 빛을 띠고, 금방 벤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지으면 군사들은 배불리 먹지도
못하며 잠자리도 편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군사가 평탄한 길을 나아갈
때를 이른 말인데 좁고 험한 길을 뚫고 나아갈 때는 그 수고로움이 몇 갑절이
나 될것입니다. 하물며 요즈음 같은 장마철은 산언덕이 미끄럽고 험하며 군사
들은 걷기조차 힘든 터에 멀리서 군량마저 싣고 가야 하니 이는 모두가 군사를
움직이는 데 있어 꺼리는 일입니다. 듣기로, 조진이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 가야할 길의 절반밖에 이르지 못한 채 길을 닦고 는 데에만 모든 군사들
의 힘을 쓰게 하고 있다 합니다. 이는 곧 적에게 편안히 있으면서 지친 사람들
을 기다리는 이로움을 주게 되는 것이니 병가에서 크게 꺼리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옛 무왕은 주를 치러 관을 나섰다가 바로 그런 까닭에 되돌아왔
고, 가까이는 무왕과 문왕께서도 손권을 치러 대강까지 가셨다가 군사를 되돌리
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는 모두가 하늘의 뜻을 따름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의 때
를 알아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데 폐하께서도 군사들이 장마철에 겪는
어려움을 살피시어 잠시 그들을 쉬게 하셨다가 훗날 적에게 빈틈이 있을 때를
노려 다시 싸우게 하십시오. 그러면 군사들도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장마철에 나가 있는 군사를 거두어들이라는 표문을 보고 위주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그곳에 나가 있는 조진과 사마의의 뜻을 몰라 얼른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있는데 양부와 화흠이 다시 상소를 올려 군사를 불러들이도록 권했
다. 위주도 마침내 왕숙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조진과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물리도록 했다. 그 무렵, 조진과 사마의도 이미 군사들이 싸울 맘이 없
이 돌아갈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조진이 사마의에게 물었다.
"비가 한 달이나 계속해서 쏟아지니 군사들은 싸울 맘이 없이 돌아갈 것만 생
각만 하고 있소.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사마의가 조진에게 권했다.
"싸울래야 싸울 수도 없으니 돌아가느니만 못하겠습니다."
"만약 촉병이 뒤쫓으면 어떻게 물리치겠소?"
조진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묻자 사마의가 대답했다.
"군사를 나누어 숨겨 두고 뒤를 막게 하여 물러나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논을 하고 있을 때 위주의 조서가 진창에 이르렀다. 위군은 드디어
전대를 후대로 삼고 후대를 전대로 삼아 서서히 회군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
명은 가을 장마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어 가자 비가 개지 않았는데도 몸소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성고로 나아갔다. 이어 다른 군사들이 모두 적파에 모이도
록 명령을 내린 후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건대, 위주가 필시 조진과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회군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뒤쫓지 않겠다. 차라리 그냥 가게 내버려 두고 다
음 기회에 이길 계책을 꾸미도록 해야겠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왕평이 보낸 사람이 와서 알렸다.
"위병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위병이 물러나고 있는데도 공명이 뒤쫓지 않자 여러 장수들이 물었다.
"위병이 비에 견디다 못해 물러나는 이 기회를 이용해 등 뒤를 덮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뒤좇지 않으십니까?"
공명이 그 까닭을 깨우쳐 주었다.
"사마의는 용병에 능하다. 대병이 몰릴 때는 반드시 군사들을 숨겨 두었을 것
이니 그 뒤를 쫓는 것은 곧 그 계책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멀리 달아나
는 동안 나는 군사를 나누어 야곡으로 나아가리라. 거기서 기산을 빼앗은 뒤
위병들을 들이치겠다."
"장안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승상께서는 왜 빈번히 기산으로만
나아가려 하십니까?"
장수들은 여전히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기산은 장안의 문턱이다. 농서 여러 고을에서 장안으로 오려면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 한다. 또 그 앞은 위수를 끼고 뒤로는 야곡을 등에 지고 있어서 나가
고 들어오기가 자유롭고 군사를 매복시키기에 편리하니 가히 복병을 쓰기에
좋은 땅이라 하겠다. 때문에 나는 한 걸음 먼저 그곳을 차지하여 지세의 이로
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 장수들은 그 말을 듣고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공명이 장수
들에게 영을 내렸다.
"위연,장의,두견,진식은 기곡으로 나아가라. 그리고 마대,왕평,장익,마충은 야곡
으로 나가되 모두 기산에서 만나도록 하라."
각 군이 모두 영을 받고 떠나자 공명은 광흥과 요화를 선봉으로 삼아 몸소 대
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조진과 사마의는 회군하는 위병의 후방에게
군마를 감독하게 하며 물러나면서 사람을 시켜 진창의 옛 길을 살피게 했다.
그 후 다시 열흘쯤 행군하니까 뒤에 남아 매복하고 있었던 장수들이 모두 돌아
와서 하는 말이 촉군은 전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조진이
말했다.
"이번에 내린 비로 잔도(계곡의 벼량에 만든 나무로 된 길)도 다 끊어졌을 것
이다. 또 벼량길도 산사태로 허물어져 촉병도 뒤쫓을 수가 없을테니 어찌 우리
가 물러나는 걸 알 수 있겠는가?"
그러자 사마의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촉군은 반드시 우리들이 지나간 갈일 밟고 따라올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시오?"
조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다.
"지금 공명이 뒤쫓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복병을 숨겨 둔 걸 짐작했기 때문입니
다. 헤아리건대 그는 날씨가 맑아지면 기산 방면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의견에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소이다."
조진은 여전히 사마의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공명은 우리가 멀리 나가고 나면 아마도 전군을 둘로 나누어서 기곡, 양곡의
양쪽 길로 군사를 낼 것입니다."
조진은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을 뿐이었다. 사마
의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이라도 기곡과 야곡으로 가는 길목에 급히 군사를 보내어 매복시키면 그
들의 선봉을 두들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마의가 그렇게 말했으나 조진은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만약 공명이 뒤
쫓는다면 오랜 비로 지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는 자기들을 급히 들이치지 않
고 먼길에 군사를 보낼 리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자단은 어찌하여 제 말을 그토록 믿지 않으십니까?"
조진이 끝내 믿으려 하지 않자 사마의가 목소리를 한층 높이더니 또 다른 의
견을 내었다.
"자단과 내가 군사를 둘로 나누어 기곡과 야곡으로 나아가 골짜기의 입구를
지키되 열흘 동안 기한을 정하고, 그 사이에 촉군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
한 죄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어떻게 죄를 받겠다는 것이오?"
"이 얼굴에 붉은 분을 바르고 치마를 두르고 자단에게 큰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거 재미있겠군."
"그러나 만일 자단의 생각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폐하께서 하사하신 옥대와 병마 한 팔을 중달에게 주겠소이다."
사마의의 말에 조진도 자신 있게 그렇게 대꾸했다. 그날 해질녘이 되자, 사마
의는 기산의 동편에 위치한 기곡으로 향하고 조진도 일군을 거느리고 기산의 서
편, 야곡의 골짜기 입구에 가서 매복했다. 사마의는 한 떼의 군사를 매복시키고
나머지 군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자신의 졸개의 옷으로 바꾸어 입은 후 군사
들틈에 섞여 영채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매복을 하는 임무는 실제로 적군과
맞붙어 싸울 때보다도 훨씬 고달플 경우가 많다.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적군에 대비해 밤이고 낮이고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불을 사
용할 수 없으니 겨울에는 추위를 견뎌 내야 하고 날음식을 먹어야 했다. 여름
에는 모기, 해충, 독사 등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꼼짝 못하는 임무가 바로 매복이
었다.
"그처럼 지독한 장마에 시달렸건만 어찌하여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적군이 오지도 않는데 엉뚱한 내기를 하려고 매복을 시키다니, 그 동안
애꿎은 군사들만 고생시키는구나."
한 편장이 부하들 앞에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진지를 순초 중
이던 사마의의 귀에 그 불평이 들렸다. 사마의는 장막에 돌아오자마자 가까운
신하를 시켜 모든 장수들을 불러들이고 그 편장을 불러 오게 했다. 편장이 들
어오자 사마의는 안색을 바꾸며 꾸짖었다.
"내기를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고 너는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다만, 만일 적군
에게 이기면 너희들의 공도 다 폐하께 아뢰어 크게 상을 내릴 생각으로 있었다.
조정에서 천일을 두고 군사를 기른 것은 한 때의 쓸모를 위해서이다. 너는 함
부로 상장의 명을 원망했을 뿐아니라 그 말을 군사들 앞에서 지껄여 사기를 떨
어뜨렸으니 참으로 괘씸한 일이다."
그러나 편장은 얼른 죄를 빌지 않고 변명했다. 사마의가 함께 있던 군사들
을 불러 마주 대하게 하자 그제야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받아들이
지 안고 좌우를 돌아보며 엄명을 내렸다.
"저 자의 목을 쳐라!"
편장의 목이 진문에 효수된 것을 보자, 그 편장과 같은 마음으로 불평하고 있
던 다른 장수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져 입을 다물었다. 사마의가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장수들은 힘을 다해 촉병을 막되 포 소리가 나거든 모두 달려나가도록
하라."
한편, 위연,장의,진식,두경 네 장수는 2만 군사를 거느리고 기곡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행군하고 있었는데, 문득 참모 등지가 이르렀다는 전갈에 즉시 맞아들
인 후 온 까닭을 물었다.
"어쩐 일로 이렇게 급히 오시었소?"
"승상께서 영을 내리시되, 기곡으로 나갈 때는 위병의 매복에 대비하여 가벼이
나아가지 말라 하시었소." 등지의 말에 진식이 그 말을 받았다.
"승상께서는 군사를 부림에 왜 그리 의심이 많으시오? 내가 보기로는 위군들
은 오랜 장마에 시달려 상한 자도 많고 옷고 갑옷도 모두 쓸모 없게 되어 돌아
가기에 바쁜 형편이오. 어찌 매복까지 할 여력이 있겠소? 우리가 이렇게 내친
걸음에 밤낮으로 길을 서둘러 적군을 뒤쫓으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인데 어
찌하여 나아가지 말라 하시오?"
그러자 등지가 정색을 하며 진식을 타일렀다.
"승상의 헤아림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장군들도 잘 아시지 않소. 장군
들은 어찌 영을 어기려 하시오?"
"승상께 깊은 계책이 있었다면 가정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거요."
진식이 빈정대듯 말했다. 위연도 전에 공명이 자기의 계책을 들어 주지 않았
던 일을 생각하고 껄걸 웃고 나서 말했다.
"전에 만약 승상께서 내 말대로 곧장 자오곡으로 나갔더라면 지금쯤은 장안은
말할 것도 없고 낙양까지 얻었을 것이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다만 기산으로만
나가려 하니 무슨 이로움이 있단 말이오? 그리고 나아가라 했다가 다시 나아가
지 말라고 하니 종잡을 수 없는 군령이 아니겠소?"
그 말에 힘을 얻은 진식이 다시 위연의 말을 받았다.
"나는 따로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이길로 단숩에 기곡을 빠져 나가 기산에 가
서 진을 치겠소. 승상께서 부끄러워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한번 두고 보겠소."
그 말을 남기고 진식은 등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천 기를 이끌고 기
곡의 골짜기로 향했다. 진식이 기세도 드높게 기곡으로 나아가는데 몇 리를 달
리지 않아 홀연 호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사방에서 복병이 달려나왔다. 진
식이 깜짝 놀라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위병은 이미 골짜기 어귀까지 들어 차
있었다. 진식이 닥치는 대로 위병을 후리며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촉병은 위병에게 크게 꺾이니 지식도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사가 달려왔다. 바로 위연이 거느린 군사였
다. 거기다가 장의와 두경까지 촉병을 이끌고 나오자 그제야 위병을 쫓을 수가
있었다. 진식의 5천 기 중 겨우 4,5백의 군사만 뒤따를 뿐이었다. 진식과 위
연은 그제야 공명의 헤아림이 귀신 같음을 알고 또 한번 감탄했다. 한편 등지
는 미리 돌아가 서둘러 공명에게 그러한 말들을 보고했다. 등지로부터 자세한
말을 들은 공명은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홀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예전에 선제께서도 말씀하셨소. 위연은 용맹한 장수이긴 하나 반역의 상이라
고 말이오. 나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용맹이 아까워서 쓰고 있소.
뒷날에 반드시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오."
그렇게 말한 공명이 씁쓰레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홀연 유성마가 달려와 보
고했다.
"지난 밤에 진식 장군은 매복한 위병에게 군사 4천을 잃었습니다 . 남은 군사는
겨우 4,5백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연 장군도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 않
았을까 걱정됩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다시 등지로 하여금 기곡으로 가서
진식이 모반할 마음을 품지 않게끔 부드러운 말로 어루만지라 하고, 이어 마대
와 왕평을 불러 영을 내렸다.
"만약 야곡도 위병이 지키고 있거든 그대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을 넘어가라.
낮에는 숨고 밤에만 군사를 이끌되, 기산의 왼편으로 나가서 군호로 불길을 올
리도록 하라."
다음에 공명은 마충과 장익을 불렀다.
"너희들은 산중의 샛길을 따라 나아가되,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나아가 기산의
오른편으로 돌라. 그런 다음 군호로 봉화를 올려 마대 왕평과 합세해서 조진
의 본진으로 돌진하여 위병을 쳐라. 나는 골짜기로 나아가겠다. 세 갈래로 치고
들어가면 반드시 위병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을 받은 네 사람은 각기 수하 군사를 거느리고 떠났다. 공명은 관흥과 요
화를 불러 가만히 계책을 주었다. 두 사람은 계책을 받고 급히 어디론가 떠
나갔다. 이렇게 군사를 낸 공명은 자신도 정병을 거느리고 길을 서둘렀는데, 가
는 길에 오반과 오의를 불러 가만히 밀계를 주어 군사를 거느리고 앞서 가게
했다. 한편, 위의 대도독 조진은 야곡의 길목에 나가서 7일간을 매복하여 촉병
이 이르기를 기다렸으나 나타나지를 않았다.
'흠, 사마의하고 건 내기는 내가 이겼구나.'
그렇게 생각한 조진은 군사들도 마음껏 쉬게 내버려 둔 채 열흘 동안 아무 일
도 없으면 사마의에게 무안을 줄 생각으로 있었다. 그런데 여드레가 되는 날
이었다. 골짜기 안에 촉병이 보인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진은 부장 진량에
게군사 5천을 주어 순초를 시키면서 촉병이 나타나도 진영 가까이 들어오게 해
서는 안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진량이 군사를 거느리고 골짜기 어귀에 이르렀
을 때 문득 앞쪽에 물러가고 있는 촉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말을 채쳐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진량이 5,60리쯤을 뒤쫓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달아나던 촉
병의 모습이 홀연 시야에서 사라졌다. 괴이쩍게 여긴 그는 군사들을 말에서 내
리게 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척후병이 달려와서 알렸다.
"앞쪽에 복병이 있는 듯 합니다."
진량이 황망히 말 등에 올라 고개를 길게 빼고 바라보고 있자니까 산 속에서
갑자기 뿌옇게 흙먼지가 일어났다.
"빨리 말에 오르라. 앞쪽에 적이 있으니 방심하지 말라!"
그가 목청껏 외치고 있을 때였다. 사방에서 요란스런 함성이 일었다. 그와 함
께 앞쪽에서는 오반, 오의가 거느린 촉병이 치고 들어오고, 등 뒤에서는 관흥과
요화의 군사가 짓쳐들었다. 왼쪽과 오른쪽은 가파른 산이라 달아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산 위에서 촉병이 큰 소리고 외쳤다.
"말에서 내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이 소리를 들은 위병들은 이미 적의 매복에 걸려 든 것을 알고 태반이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량은 차마 항복할 수 없어 죽기로 싸웠으나 요
화가 휘두른 한칼에 맞아 말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공명은 항복한 군사
들의 갑옷을 벗겨 촉군 5천명에게 입혔다. 거짓 위병을 만든 것이었다. 공명은
거짓 위병을 관흥,요화,오반,오의 등에게 이끌게 했다. 한편으로 위병의 갑옷을
입은 촉병을 조진의 본진으로 보내 알리게 했다.
"얼마되지 않은 촉병이 남아 있었으나 모조리 쫓아 버렸습니다."
거짓 보고를 받은 조진은 촉병을 쫓은데다 사마의와의 내기에서도 이겼다고
여겨 크게 기뻐했다. 그때, 사마의의 심복 장수가 달려와서 조진에게 급한 소식
을 전했다.
"촉병의 선봉 진식이 복병을 써서 우리 군사를 4천 명이나 꺾었습니다. 이제
조 장군께서는 내기 따위는 잊으시고 촉병과의 싸움에만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러나 조진은 공명이 보낸 거짓 위병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터라 도리
어 의기양양하게 사마의의 심복장수에게 큰소리쳤다.
"이쪽에는 촉병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내기는 내가 이겼노라고 중달게
여쭈어라."
사마의의 심복장수가 돌아가자 진량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온다는 보고가 조
진에게 들어왔다. 조진은 그들이 위병으로 꾸민 촉병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
조진은 촉병을 쫓고 돌아오는 진량을 몸소 마중하려고 말에 올랐다. 그런데 군
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영채 뒤의 두 곳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진은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급히 말을 돌려 영채의 뒤편으
로 달려가 보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촉병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지 않는
가. 조진은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채 앞쪽으로는 관흥,요화,오반,오
의 네 장수가 촉병을 휘몰아 쳐들어오고, 마대와 왕평은 뒤쪽에서, 마충과 장
익은 그 뒤를 이어 성난 물결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싸울 채
비도 않은 채 맞은 적이었다. 감당해 낼 수 가 없어 위군은 제각기 앞을 다투
어 달아났다. 조진도 여러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동쪽으로 달아났으나 촉병
은 줄기차게 뒤쫓아오고 있었다. 조진이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말의 궁둥이에
서 피가 나도록 채찍질하며 달아나고 있는데 홀연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한 떼
의 군사가 몰려오고 있었다. 조진이 소스라치게 놀라 앞선 장수를 보니 그는
바로 사마의였다. 사마의가 휘하 군사를 이끌며 조진을 뒤쫓는 촉병과 함께
힘껏 싸웠다. 촉병은 사마의의 대군이 가로막으니 잠시 물러났다. 그 틈에 조진
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마의가 말을 몰고 조진 가까이에 이르렀
다. 조진은 얼굴 가득히 부끄러운 빛을 띠고는 몸둘 곳을 몰라했다. 사마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갈량이 기산을 빼앗아 지세의이로움을 차지한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는 없습니다. 위빈으로 가서 영채를 내린 후 다시 좋은 방책을 강구해야 하겠
습니다."
그제야 조진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마의에게 물었다.
"중달은 내가 크게 패할 것을 어떻게 알았소?" 사마의가 가만히 말했다.
"도독께 보냈던 사자가 돌아와 촉병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대도독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공명이 필시 자단의 영채에 기습을 꾀하리
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와 보니 생각한 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은 우리가 내기를 앞세울 때가 아니니 부디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나라의 은혜
에 보답하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들은 조진은 더욱 부끄러워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
어 위병은 위수 가로 영채를 옮겼으나 조진은 공명에게 패한 분함과 부끄러움으
로 마침내 나았던 병이 도져 자리에 눕더니 얼른 일어나지를 못했다. 사마의
는 군사들이 마음이 어지러워질 까 조진에게 얼른 군사를 물리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날짜만 보내고 있었다. 그럴 동안 조진의 병은 깊어만 갔다.
한편 공명은 예정대로 기산에 영채를 세웠다. 각처의 장수에게 잔치를 베풀
어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런 다음에야 이번 싸움에서 영을 어긴 장수
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먼저 진식과 위연이 불려 와 무릎을 꿇자 공명은 그들
을 바라보며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군사를 다 잃고 온 자가 대체 누구인가?" 위연이 슬며시 진식의 핑
계를 대었다.
"진식이 승상의 영을 거스르며 골짜기 어귀로 들어갔다가 그와 같은 참패를
당했습니다."그러자 진식이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 일은 위연이 저를 시켜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들의 말을 듣고 공명은 발연히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위연이 구해 줘서 목숨을 건졌는데 도리어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느냐? 너는 이미 장령을 어기고도 어찌하여 변명을 하려 드느냐?"
말을 마친 공명은 무사들에게 호령하여 진식을 끌어 내어 목을 베개하고, 그
의 목을 높이 내걸어 여러 장수들에게 본보기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공명은
진식과 함께 군령을 어긴 위연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위연이 마음으로 그를
따르고 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를 살려 둔 것은 큰 싸움을 앞두고 장수로서의
그의 용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위나 동오에 비해 촉나라는 그 영토나 군
세에 있어서도 열세였다. 게다가 장수 또한 그 두 나라에 비해 적으니 공명으
로서는 언제나 어려움이 많은 싸움이었다. 때문에 위연과 같은 용맹을 지닌
상장이 아쉬운 터였기에 그를 목베지 않고 살려 둔 것이었다. 공명이 진식의 목
을 벤 뒤, 다시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이고 군사를 움직일 일을 의논하는데 홀연
세작이 달려와 알렸다.
"조진이 병이 나 일어니자 못하고 지금 영채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합니
다."
공명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상념에 잠기다 기쁜 낯빛으로 혼자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조진의 병이 가볍다면 반드시 장안으로 돌아갔을 텐데, 위병이 돌아가지 않는
것은 병이 깊기 때문에 군중에 머물면서 군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
다. 내가 글 한 통을 써 진량의 군사에게 주어 조진에게 보내리라. 조진이 그 글
을 보게 되면 반드시 숨을 거두고 말 것이다."
그렇게 말한 공명이 항복한 위병들을 불러들인 후 타일렀다.
"너희들은 위의 군사들이므로 부모와 처자가 모두 중원에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낼까 하는데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가?"
그 말에 위병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공명의 너그러움
에 절을 올리며 감사했다. 공명이 그들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조자단과 나와는 서로 약조한 바가 있어 내가 글 한 통을 써 두었으니 그대
들은 가지고 가서 전하라. 이 글을 전하면 반드시 상을 내릴 것이다."
그 글이 어떤 내용인지 위병이 알 리 없었다. 공명의 말만 믿고 위의 영채
로 달려가 조진에게 그 글을 바쳤다. 조진은 그대 병세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
었다. 문득 공명이 보낸 글을 받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글을 잃어 보앗
다. 그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승상 무향후 제갈량이 대사마 조진에게 글을 보내 이르노라. 무릇 장수된
자는 나아감과 물러섬, 굳세고 부드러움, 강하고 약함에 능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과 같고, 드러내지 않기를 음양의 이치와 같이해야 한다. 또한, 천지와
같이 간 데를 모르며, 태창(나라와 곡식을 쌓아 두는 창고)과 같이 가득해야 하
며 아득하기로는 바다와 같이, 그 빛남은 삼광(해,달,별)과 같아야 할 것이다. 미
리 천문을 살펴 가뭄과 궂음을 헤아려야 하며, 또한 지리를 살펴 이로움과 해
로움을 가릴 줄 알며 적의 진세와 때를 살피고 적의 허실을 헤아려 그 잘못을
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가. 슬프게도 배움이 얕은 젊은
그대는 위로는 하늘을 거스른 역적을 도와 낙양에서 함부로 제호를 일컫게 하
고, 나아가 군사를 야곡으로 이끌어 진창에서는 큰 비에 시달리게 하였다. 물과
뭍에서 아울러 고초를 당하니 어찌 사람과 말이 함께 미쳐 날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들은 버린 옷과 갑옷으로 뒤덮이고, 땅에 두이구는 것은 모두 내팽
개쳐진 칼과 창이로구나. 그리하여 도둑이란 자가 가슴이 무너지고 담이 찢어진
듯 놀라고 장수들은 쥐처럼 머리를 싸매고 달아나 버렸다. 무슨 낯으로 고향집
의 부로를 대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의 대청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사관(역
사를 기록하는 관리)들은 붓을 들어 이 일을 적을 것이며 백성들은 입을 모아
이 일을 퍼뜨리게 될 것이다. 즉 '사마의는 싸움터에만 나가면 떨고 조진은 싸우
기도 전에 멀리 적진만 보고도 황망히 달아났다고......' 이제 우리 촉국의 군
사는 날랜데다 말들은 튼튼하며 장수들은 한결같이 범이나 용처럼 용맹스럽다.
진천을 짓밟아 평지로 바꾸고 너희 위국을 쳐서 황폐한 땅으로 만들리라.
조진이 그 글을 보자 분노와 원한이 가슴에 가득 치밀었다. 오랜 병중에 그
러지 않아도 약해진 심기에 울화로 가슴을 끓이더니 마침내 그날밤에 숨을 거두
고 말았다. 공명이 조진의 분기를 돋우기 위해 일부러 그런 글을 보낸 것이
었다. 조진이 죽자 사마의는 그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낙양으로 보내고 그곳에
서 장사를 지내게 했다. 위주 조예는 조진이 죽게 된 경위를 듣자 몹시 노하
여 조서를 내려 사마의에게 촉병을 치도록 했다. 사마의는 위주의 조서를 받들
어 곧 공명에게 전서(도전장)을 써서 보냈다.
"조진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
사마의가 보낸 전서를 받아 든 공명은 장수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사자에게 싸
우자는 답을 주어 돌려 보냈다. 그날 밤이 되자 공명은 강유를 불러 은밀히
계책을 주어 내보내고 다시 관흥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린 뒤 어디론가 떠나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공명은 전군을 이끌고 위수가로 나아갔다. 이 지역
은 한쪽이 강이요, 한쪽은 산이었는데 그 가운데가 넓은 벌판이라 싸움터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양군은 서로 마주 보며 진을 벌이기가 무섭게 한바탕
화살을 날리는데 문득 북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러자 위병의 진중에 문기가
열리며 사마의가 말을 타고 나서니 모든 장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맞은편에도
때를 같이하여 깃털 부채를 든 공명이 네 바퀴 수레 위에 앉아 앞으로 나왔다.
사마의가 공명을 보자 입을 열었다.
"우리 주상께서는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위를 물리신 걸 본받으시어 한의 제
위를 이어 받으셨다. 이미 2대에 걸쳐 중원을 다스리고 있으면서 서촉과 동오
를 치지 않은 것은 우리 주상께서 인자하시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신
때문이었다. 너는 한낱 남양에서 밭이나 갈던 농부로서 하늘이 정한 운수를
알지 못하고 이렇듯 감히 군사를 내어 쳐들어왔으니 쳐없애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 잘못을 깨닫고 마음을 돌려 군사를 물린다면 그 땅에서 우리 위
와 더불어 솔발 같은 형세를 이루어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고 너희들의 목숨도
이어가게 할 것이다."
그러자 공명이 껄걸 웃으며 그 말에 대꾸했다.
" 나는 선제로부터 지금의 주상을 돌보라는 무거운 명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
니 어찌 힘을 다하여 역적을 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머지 않아 조씨는 우리 한
에게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너의 할아비와 아비는 원래 모두 한의 신하로 대
대로 녹을 먹었다. 그런데도 한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아니 하고 도리어 역
적을 돕고 있으나 그러고도 네 어찌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말이냐?"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사마의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이 가득했다. 사마의는
더 이상 길게 말싸움을 하는 것이 이롭지 않음을 알고 먼저 싸움을 걸었다.
"오늘 한번 너와 내가 싸워 누가 센지 가리려 한다. 만약 네가 이기면 나는 앞
으로 대장 노릇을 아니 할 것이다. 너 또한 내게 지면 아예 말머리를 돌려 고
향에나 돌아가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해치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너는 장수로 싸우고 싶은가? 아니면 진법을 펼쳐 싸우고 싶은가?"
공명이 사마의에게 물었다. 사마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꾸했다.
"먼저 진법으로 겨뤄 보자."
"그럼 네가 먼저 진을 펼쳐 보도록 하라. 내가 너의 재주를 한번 보고 싶구
나."
공명이 껄걸 웃으며 사마의에게 말했다. 그러자 사마의가 중군의 장막으로
달려가더니 손에 누런 깃발을 들고 나와 좌우로 흔들어 군호를 보냈다. 군사들
이 그 깃발을 보고 움직여 진세를 펼쳤다. 사마의가 말을 달려나와 공명에게 물
었다.
"그대는 내가 친 진법을 알겠느냐?"
공명이 껄걸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런 진쯤은 우리 장수 중에서는 밀장이라도 벌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혼원
일기진이라는 것이다."
공명이 한눈에 그 진을 알아보자 사마의는 속으로 감탄했으나 드러내지 않은
채 얼른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네가 진을 쳐 봐라. 내가 한번 보리라."
공명이 자기 진충으로 들어가 깃털 부채를 들어 다시 진 앞으로 와서 사마의
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가 친 진을 알아보겠는가?"
"그건 팔괘진이 아닌가? 내가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자 공명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마의에게 얼른 되물었다.
"네가 알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내 진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공명이 묻자 사마의는 화가 치밀었다. 목소리를 높여 대꾸했다.
"내가 이미 그 진을 알아 보았는데 어찌 그 진을 깨지 못하겠는가?"
공명이 빙긋 웃으며 사마의를 부추겼다.
"그렇다면 어디 네 재주껏 한번 깨뜨려 보아라."
사마의는 은근히 자기를 조롱하는 듯한 공명의 말투에 발끈하여 곧 자기의
진으로 달려가 장호,대릉, 약침 세 장수를 불러 일렀다.
"지금 공명이 벌인 진에는 여덟 문이 있다. 곧 휴,생,상,두,경,사,경,개의 문을
배치한 것이다. 너의 셋이 동쪽의 생문으로 들어가 서남의 휴문으로 나간 후 다
시 북쪽의 개문으로 밀고 들어오면 이 진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이른 대로 잘 살펴 나아가되 실수가 없도록 하라."
사마의는 세 장수에게 군사를 떼어 주며 나가게 했다. 장호는 앞장을 서고
대릉은 가운데에, 약침은 뒤를 맡아 각기 30기를 거느리고 생문으로 밀고 들어
갔다. 양군이 함성을 지르며 각기 자기 진을 응원했다. 세 장수가 생문을 짓쳐
들었을 때였다. 사마의가 일러 준 대로 곧 휴문을 찾아 서남쪽으로 말을 달렸
으나 진이 마치 성과 같이 이어져 있을 뿐 문이 없어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크게 당황했다. 무작정 서남쪽을 향해 들부수고 나가려는데 촉병이
화살을 비 오듯 쏟아부었다. 세 사람은 이리저리 내달으며 진을 뚫으려 했으나
날아오는 화살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럴 동안 촉진이 겹겹이 두꺼워지
는데 이번에는 진마다 문이 있어 동서남북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치 회오리바
람 속에 뛰어든 듯 앞은 안개가 앞을 가리는데 위병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
살에 맞아 아우성치며 허둥댈 뿐이었다. 그런 지경에 이르니 세 사람은 서로
를 돌돌 겨를이 없었다. 앞뒤없이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는 가운데 촉병의 함
성만 크게 일더니 위병은 한 사람씩 차례대로 촉병에 묶이는 꼴이 되고 말았
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병은 모두 촉병에게 묶여 촉의 군중으로 끌려 갔다. 공
명은 장막 위에 높이 앉아 묶여 온 장호,대릉,약침과 90여 명의 졸개들을 내려
다보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다 사로잡았으나 그게 무어 대수로울 게 있겠느냐? 내가 너
희들을 풀어 줄 터인즉 너희들은 돌아가서 사마의에게 일러라. 병서를 좀 더 읽
어 진법을 익힌 뒤에 다시 와서 승부를 가리자고 하라. 다만 너희들은 돌아갈
때 말이나 병장기, 갑옷은 모두 두고 가도록 하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좌우에게 명을 내려 위병의 갑옷을 벗기고 창칼과 말을
거두어들인 뒤 얼굴에 먹칠을 한 채 돌려 보냈다. 공명이 돌려 보낸 위군을 본
사마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공명이 너무나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것
에 화가 난 사마의는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렇게 예기가 꺽이고서야 내 무슨 낯으로 돌아가 중원의 대신들을 마주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외친 사마의는 칼을 빼들고 날랜 장수 1백여 명과 삼군을 뒤따르게
하고 몸소 앞장 서 촉진을 휩쓸기 위해 달려갔다. 이에 촉군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양군이 한바탕 큰 싸움이 일어나려 할 때였다. 돌연 위군의 뒤쪽에서
북 소리, 피리소리가 크게 울리며 한 떼의 군사가 내달아왔다. 바로 관흥이 이끄
는 군사들이었다.
사마의가 황급히 후군을 나누어 관흥을 막게 하고 자신은 다시 군사를 몰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홀연 선봉쪽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촉장 강유가 군사를 이끌고
옆쪽에서 달려나왔기 때문이다. 앞쪽의 촉병과 뒤쪽의 관흥, 옆쪽의 강유가 한
꺼번에 밀고 들어오자 사마의는 크게 놀랐다. 공명의 계교를 살피며 맞서 왔던
자신이 무작정 군사를 이끈 것을 뉘우치며 급히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촉군이 삼면에서 짓쳐든 터라 위군은 크게 꺾이고 말았다. 에워싸는 촉병을 뚫
는 가운데 열에 여섯, 일곱은 상한 채 위수 남쪽으로 물러나서야 겨우 영채를
세웠다. 사마의는 영채 안에 머물면서 싸울 생각을 버리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사마의가 나오지 않으니 공명도 군사를 돌려 기산으로 돌아갔다. 공명은 싸움
에 이기고 기산의 영채로 돌아온 후 전군에 영을 내려 다시 싸울 일에 대비하
여 채비를 해 두라고 엄명을 내렸다,
자칫 이번 싸움에 이긴 것만을 기뻐해 군사들의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마침 영안에 있는 이엄이 보낸 도위 구안이 군량을 가지
고 왔다. 원래 그는 술을 좋아야 오는 도중에 적잖은 날을 술타령으로 보낸 터
라 기한이 열흘이 지나서야 이르렀다. 공명이 그를 보자 몹시 화를 내며 호통
을 쳤다.
"군중에서 군량을 제때에 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사흘
만 늦어도 그 죄로 목을 베는데 열흘이나 늦었으니 너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
가!"
그 말과 함께 공명이 좌우를 돌아보며 영을 내렸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자 장사 양의가 나서며 공명에게 말했다.
"구안은 이엄의 사람입니다. 게다가 군량과 돈은 모두 서천에서 보낸 것입니
다. 그런데 구안을 죽이면 앞으로 누가 양식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겠습니까?"
공명이 그 말을 듣고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그를 목베는 대신 곤장 80대를 때
려 쫓아 보냈다. 그러나 매를 맞고 쫓겨난 구안은 자기 잘못은 생각지도 않은
채 공명에게 원한만을 품었다. 구안은 서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느린 군사 5,6
기를 이끌고 위군의 영채로 달려갔다. 사마의는 구안이 투항해 오자 그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항복하게 된 까닭을 물었다. 구안은 공명에게 매맞고 쫓겨
난 일을 그럴 듯하게 자기 변명을 섞어 가며 들려 주고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사마의가 넌지시 구안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명은 원래 꾀가 많은 자라 네가 온 것 또한 공명의 계
교인지 모르니 네 말을 어찌 그대로 다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나를
위해 한 가지 공을 세운다면 내가 천자께 아뢰어 너를 대장으로 삼겠다."
"무슨 일이든 힘을 다해 하겠습니다."
투항하러 온구안이 사마의의 말을 마다할 수 없었다. 구안이 그렇게 대답하
자 사마의가 가만히 일렀다.
"그렇다면 너는 성도로 가서, 공명이 후주룰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어 머지
않아 황제의위에 오르리라는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일을 꾸며라. 그리하여 그
말이 네 주인의 귀에 들어가 공명을 불러들이도록 하라. 그렇게만 되면 너는
큰 공을 세운 것이된다. "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구안은 선뜻 응낙하고 그 길로 성도로 향했다. 성도에 이르른 구인은 환관들
에게 공명이 자기가 세운 공을 내세워 천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고 귀띔했
다.환관들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 길로 후주에게 달려가 그 말을 일러
바쳤다. 아직 나이 어린 후주도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라기부터 했다. 얼굴빛이
달라지며 곧바로 환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겠소?"
"조서를 내려 공명을 성도로 불러들이고 그에게 빼앗아 모반을 일으킬 수 없
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환관들이 입을 모아 후주에게 권했다. 후주는 앞 뒤를 가려 볼 생각은 하지
도 않은 채 환관들의 말을 따랐다. 곧 기산에 있는 공명에게 급히 군사를 이
끌고 돌아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장완이 나
서 후주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싸움에 나가신 이래 여러 차례 공을 세우셨는데 무슨 일로 이렇게
돌아오라 하십니까?"
후주는 환관에게서 들은 말을 들려 주지 않고 딴 말로 둘러댔다.
"반드시 승상과 더불어 의논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후주는 사신을 재촉해 밤을 새워 달려가게 했다. 이윽고 사신이 기산에 이
르자 공명을 그를 맞아들인 후 조서를 맏들고 문득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마지
않았다.
"주상께서 아직 어리시니 반드시 가까이에 아첨하는 신하가 있구나. 내가 이제
공을 이루려고 하는데 무슨 일로 돌아오라고 하는가? 돌아가지 않으려니 주상께
거스름이요, 명을 받들어 물러나려 하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다시 얻기 어려
울것 같아 그것이 안타깝구나."
공명이 그렇게 탄식하는데 곁에 있던 강유가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일을 걱정
했다.
"만약 우리가 전군을 물리면 사마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쫓아와 칠 것
입니다.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후주의 영이라 군사를 돌리기로 작정한 공명이 강유에게 말했다.
"내가 군사를 물리되 다섯 갈래로 군사를 나눌 것이다. 오늘은 먼저 대채의 군
사부터 물리되, 영채 안의 군사가 1천이면 아궁이는 2천개를 쌓게 하고 다시
내일은 3천, 모레는 4천개로 늘릴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아궁이의 수를 늘려 가
며 군사를 물릴 것이다."
그러자 양의가 의아스런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예전에 손빈(전국시대의 병가)이 방연을 사로잡을 때는 날마다 군사의 수
효를 늘렸으나 반대로 아궁이의 수효는 줄였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군사를
물리시면서 손빈의 예와는 달리 어째서 아궁이 수효를 늘리려 하십니까?"
공명이 양의의 물음에 그 까닭을 밝혀 주었다.
"사마의는 용병에 능한 사람이다. 우리가 물러나는 것을 알면 반드시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함부로 나아감을 삼가니 반드시 우리가 군사를 숨길
까 의심할 것이다. 사마의가 우리를 뒤쫓으며 우리가 머물렀던 영채의 아궁이
수를 헤아릴 때 매일 아궁이 수가 늘어나면 군사가 정말로 물러가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니 함부로 뒤쫓지 못할 것이다. 그 틈에
우리가 서서히 물러나면 군사를 꺽이지 않은채 물러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공명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않는 가운데 네 번째로 기산으로
나온 공명은 후주의 영에 따라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리기 시작했다.
오출기산과 공명의 팔문둔갑 축지법
사마의가 구안에게 일렀던 계책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공명
이 성도로 불려 간 것을 확인한 군사가 달려와 일렀다.
"촉병의 영채에 있던 인마가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얼른 촉병을 뒤쫓지 않았다. 지략이 많은 공명이 물러나
며 반드시 군사를 매복시켰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촉병을 뒤쫓는 대신
몸소 1백여 기를 거느리고 촉의 영채로 가서 군사들로 하여금 아궁이 수를 살
펴보게했다. 사마의는 다음 날도 군사를 보내 촉병이 물러난 다음 영채로 가서
아궁이의 수효를 알아 오게 했다.
"영채 안의 아궁이가 지난번 영채에 비해 갑절이나 늘었습니다."
촉의 영채를 살피고 온 군사가 말했다. 사마의가 그 말을 듣더니 여러 장수들
에게 말했다.
"공명이 지략이 많다고 여긴 바 그대로이다. 군사를 늘리고 아궁이도 늘리는
계책을 쓰고 있구나. 아궁이를 줄이는 것은 옛적에 손빈이 쓴 계책 첨병감조
법이라 그 계책을 거꾸로 써서 우리를 속이려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뒤쫓았
다면 반드시 그 계략에 말려들고 말았을 것이다. 잠시 군사를 물렸다가 다시
좋은 방책을 세우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군사를 물리도록 영을 내렸다. 사마의가
군사를 물리니 공명은 군사 하나 죽이지 않고 편안히 성도로 돌아갈 수 있었
다. 사마의가 공명의 계책에 떨어진 것을 안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서ㄹ천
어귀에 사는 늙은이가 사마의를 찾아와 공명이 물러날 때를 본 대로 알려 주었
다.
"공명이 물러날 때 군사를 늘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군사를 시켜 아궁이를
파게 하여 그 숫자만을 늘였습니다."
사마의가 그 말을 듣고 길게 탄식해 마지않았다.
"공명이 우후를 본떠 나를 속였구나. 그의 모략을 내가 따를 수가 없구나."
우후는 동한시대 오랑캐와 싸울 때 아궁이를 늘리는 수를 써서 적을 뒤쫓지
못하게 했던 무도의 장수였다. 공명이 군사를 물리니 사마의도 하는수 없이
군사를 이끌어 장안으로 돌아갔다. 성도에 이르기 전에 한중에 돌아간 공명은
삼군에게 상을 내린 후에야 성도로 향했다. 성동에 이른 공명이 후주에게 아뢰
었다.
"이 늙은 신하는 기산으로 나가 장안을 빼앗으던 차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
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듯 갑자기 신을 부르셨습니까?"
후주는 공명의 물음에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반을 꾀했다면
자산의 부름에 이토록 황급히 군사를 이끌어 돌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후주
가 할 말이 없는 가운데 궁색한 변명으로 둘러대었다.
"짐이 오래도록 승상을 보지 못해 몹시 그리운 나머지 조서를 내려 불렀을 뿐
이오. 별다른 일은 없었소이다."
공명이 그 말을 듣자 정색을 하고 물었다.
"신을 부르신 것이 폐하의 본마음이 아니라면 이는 필시 간신배의 무리가 있
어 신이 딴 마음을 품었다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후주는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공명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후주에게 깨우쳐 주듯 물었다.
"이 늙은 신하는 선제의 크신 은혜를 입은 몸으로 죽음으로 보답할 것을 다짐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안에 간신이 있으면 신이 어떻게 역적을 쳐 없앨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후주가 문득 뉘우치는 빛을 띠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짐이 환관의 말만을 믿고 승상을 불렀소. 이제 어두웠던 눈앞이 밝아져 뉘우
쳐보니 소용이 없구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즉시 궁중 내관들로부터 그 말이 나오게 된 까닭을 알아
보았다. 곧 구안이란 자가 제일 먼저 소문을 퍼뜨린 것이 드러났다. 공명이 구안
을 잡아 들이게 했다. 그러나 이미 구안은 위나라로 달아난 뒤였다. 공명은 구안
의 말을 가볍게 믿고 후주에게 일러 바친 환관들을 잡아들이게 하여 그 죄가 무
거운 자는 목을 베고 나머지는 전부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공명은 이어 장
안과 비위를 부러 꾸짖었다.
"내가 떠날 때 모든 일을 그대들에게 맡기고 떠났다.그런데 어이하여 환관들의
거짓 참소를 헤아려 폐하를 말리지 않았는가?"
"그 죄 죽어 마땅합니다."
두 사람은 공명 앞에 엎드려 죄를 빌었다. 공명은 두 사람을 엄하게 꾸짖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했다. 공명은 성도의 일이 안정되자 다시 한중으로
나아갔다. 한중에 이른 공명은 이엄에게 사람을 보내 양초를 가져오게 하고 장
수들을 모은 후 다시 위를 칠 의논을 했다. 양의가 의견을 내었다.
"우리가 여러 차례 진병안 이래 군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게다가 군량도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석 달을 기한으로 서로 교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즉 20만의 군사를 10만씩 나누어 기산으로 보내고 석 달 뒤
에는 다시 한중에 머물려 편히 쉰 군사와 교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
시면 군사들을 부려도 힘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서서히 밀고 나아가면 중원
을 차지하는 것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대의 생각이 바로 나의 뜻과 같소. 중원을 얻는 것은 급히 되는 일은 아니
니 마땅한 장구한 계책을 써야 할 것이오."
그렇게 말한 공명이 곧 영을 내려 군사를 반으로 나누게 하고 백일을기한으로
하여 서로 교대하게 했다. 이 해 촉한 건흥 9년 2월 봄, 공명은 위를 치기 위해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위로 보면 태와 6년이었다. 공명이 군사를 일으키자
위주 조예는 사마의를 불러 물었다.
"공명이 다시 군사를 내었다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조예의 물음에 사마의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자단이 이미 죽었으니 신이 혼자서 적과 맞서겠습니다. 힘을 다해 적을 깨뜨
려 폐하께 보답하겠습니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자 조예는 몹시 기뻐했다. 잔치를 열어 사마의의 높
은 기개를 치하했다. 다음 날이 되자 촉병이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급보가 궁궐
로 전해졌다. 조예는 곧 사마의로 하여금 진병하여 적을 막게 하고 몸소 성 밖
까지 나가 전송했다. 사마의는 즉시 장안으로 달려가 장수들과 함께 적과 싸울
의논을 했다. 그러자 먼저 장합이 나서며 청했다.
"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 옹,미 두 성을 지키며 촉병을 막겠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허락하지 않았다.
"전군만으로는 촉병을 당해 내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의 군사를 두로 나누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 그보다는 군사를 상규 땅에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기산
으로 나아가게 하려 하는데 그대가 선봉을 맡아 주어야겠다."
사마의가 자기에게 선봉을 맡기자 장합은 몹시 기뻐했다. 기쁨에 찬 목소리로
사마의의 말을 받았다.
"제가 평소부터 충의의 마음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알아 주는
사람이 없어 한스러웠습니다. 이제 도독께서 중한 일을 맡기시니 비록 만 번
을 죽는다 해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사마의는 곧 좌장군 사마의를 선봉으로 삼아대군을 거느리게 하고 곽회에게
농서의 여러 고을을 맡아 지키게했다.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하고 나
머지 장수들에게 명해 각기 길을 나누어 장합을 뒤따르게 하였다. 그 때 적진
을 살피러 갔던 군사가 달려와 말했다.
"지금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오는데 선봉 대장은 왕평이며 장의는 진창을 거
쳐 검각과 산관을 지난 뒤 야곡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마의가 장합을 보고 말했다.
"이제 공명이 대군을 이끌어 급히 온 까닭은 반드시 농서의 보리를 베어다 군
량으로 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기산에다 영채를 세우고 굳게 지
키도록 해라. 나와 곽희는 천수의 모든 고을을 순초하며 촉병이 보리 베어 가
는 것을 막겠다."
사마의는 영을 받은 장합은 곧 4만의 군사를 거느려 기산으로 가 영채를 세웠
다. 장합이 떠나자 사마의는 대군을 거느리고 농서를 향해서 떠났다. 사마의의
헤아림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그때 공명은 군사를 이끌어 기산에 이르렀다. 진
을 세운 공명이멀리 살펴보니 위군이 위빈에 영채를 세워 방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명이 그걸 보고 장수들에게 말했다.
"저 영채는 반드시 사마의가 우리를 방비하기 위해 세운 영채일 것이다. 그렇
다면 마침 잘 되었다. 군량이 부족해 이엄에게 양식을 보내라고 재촉해도 아직
이르지 않고 있다. 사마의가 이곳을 방비하고 있는 틈을 타 우리가 농서의 보
리를 거두어야겠다. 은밀히 군사를 이끌어 가 보리를 베어 와야겠다."
그렇게 말한 공명은 왕평,장의,오반,오의 네 장수를 남겨 두어 기산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노성에 이르렀다. 공명이 강유와 위연 등의 장수와 함께 노성에 이
르러 성을 에워싸자 노성 태수는 이전부터 공명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감히 싸울
생각도 못 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공명은 뜻밖에 싸우지도 않고 성을 얻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그곳 사람들을 위로한 후 태수에게 물었다.
"지금어느 지방의 보리가 잘 익었는가?"
"올해는 농상의 보리가 잘 익었습니다."
노성 태수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장익과 마충을 노
성에 남겨 두고 스스로 나머지 군사를 이끌어 농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선봉 군사라 달려와 알렸다.
"농상에 위의 군마가 가득 차 있으며 중군을 보니 사마의의 기가 보입니다."
공명이 그 말을 듣자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토록 감쪽같이 기산을 빠져 나왔는데 사마의는 벌써 내가 보리를 거둬들
이려는 것을 짐작했구나."
공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곧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항상 타고 다니
던 수레와 똑같은 수레를 셋이나 끌어오게 했다. 세 대의 수레는 장식 하나
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모양의 수레라, 어느 것이 공명이 타고 다니던 수레인
지 알 수 없었다. 그 수레들은 공명이 서촉에 있을때 미리 만들어 온 것이었
다. 수레 한 대는 강유로 하여금 1천 군사를 거느리며 따르게 하고 5백 군사는
북을 울리며 상규 뒤에 매복하게 했다. 또 위연과 마대에게도 수레 한 대씩에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북치는 군사 5백과 함께 각각 상규의 오른쪽과 왼쪽에 매
복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수레를 미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스물네
사람이 한 수레를 미는데 검은 옷에 맨발이었다. 거기다 머리를 풀고 칼을 짚
었고 한 손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진 검은 깃발을 들게했는데, 사람인지 귀신인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을 괴이하게 꾸며 보는 이로 하여금 질리게 만
들 지경이었다. 강유,마대, 위연 세 장수도 각기 수레 한 대씩을 이끌고 나아갔
다. 이어 공명도 군사 3만을 거느리되 모두 낫과 칼을 들게 하여 보리를 벨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었다. 공명이 타고 갈 수레를 미는 군사들의 차림도 앞서
떠난 수레를 미는 군사들과 다름이 없었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머리를 푼데
다 맨발에 칼을 든 군사들이었다. 또 관흥에게 천봉모양으로 머리를 묶에 한
후에 칠성을 수놓은 검은 기를 들게 하여 앞세웠고, 공명 스스로는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위병의 영채를 향해 나아갔다. 촉병을 살피던 위병이 그런 촉병을
보자 깜짝 놀랐다.
'저들이 도대체 사람인가, 귀신인가.......?"
위병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겁에 질린 얼굴로 급히 사마의에게 달려가 알렸
다. 사마의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급히 영채 밖으,로 나가 촉병을 바라
보았다. 촉병을 보니, 공명이 흰 학창의에 윤견을 쓰고 깃털 부채를 흔들면서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좌우에는 스물네 명의 군사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에 칼을 들었는데 앞선 한 장수는 손에 칠성을 수놓은 검
은 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얼른 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업
을 정도로 괴이쩍었다.
"공명이 또 요사스런 짓을 꾸미고 있구나."
사마의가 그렇게 중얼거린 후 급히 군사 2천을 뽑아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급히 가서 수레를 밀고 있는 자들을 잡아 오도록 하라."
사마의의 영이 떨어지자 위병들은 두려운 가운데 하는 수 없이 수레를 향해
덤벼들었다. 공명은 위병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곧 수레를 되돌려 영채를
향해 천천히 이끌게 했다. 공명이 수레를 돌리자 위병이 급히 뒤쫓기 시작하
는데 문득 으스스한 바람이 불어 오고 습기찬 안개가 주위를 가득 뒤덮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위병이 뒤쫓은 지 30리나 되었으나 도무지 수레를 따라잡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토록 급히 수레를 뒤쫓아 30리나 달렸건만 조
금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가? 어찌해야 저 수레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꺼림칙하던 위병은 더욱 괴어쩍어 뒤쫓기를 멈추고 그렇게 떠
들며 서로의 놀란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명은 위병이 뒤쫓지 않
자 다시 수레를 돌려 위병 쪽으로 다가왔다. 공명이 다가오자 위병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수레를 향해 달려갔다. 위병이 뒤쫓자 공명은 또다시
수레를 되돌렸다. 위병들이 되돌려 달리는 수레를 20여 리나 뒤쫓았지만, 그 수
레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위병들이 다시 말을 세우고 멍하니 공명
의 수레를 바라다보고 있는데 사마의가 몸소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오더니 영
을 내렸다.
"공명은 팔문둔갑(소의 귀신을 부려서 행한다는 술법)에 밝고 육정육갑지신(귀
신들의 이름)을 잘 부린다. 저것은 공명이 <육갑전서>에 있는 축지법을 쓰고 있
음이니 군사들은 더 이상 뒤쫓지 마라."
사마의의 영에 따라 군사들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 왼쪽에서 돌연 싸웁을
돋우는 북 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한 떼의 군사가 내달아왔다.
"모든 군사들은 물러나지 말고 막도록 하라."
사마의가 급히 영을 내렸다. 그런데 촉병의 대열 속에서 스물네 명의 장정이
검은 옷에다 맨발로 칼을 들고 수레를 밀고 나왔다. 그 수레를 바라보던 위병
들은 한결같이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레 위에도 윤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은 공명이 단정히 안자 깃털 부채를 부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조금 전 뒤쫓다 만 공명이 틀림없었다.
"아니 여기에도 공명이....? 공명을 뒤쫓아 50리나 달려갔다가 붙잡지 못했다
는데 이제 또 공명이 나타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사마의가 크게 놀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요란한
북 소리가 일며 한 떼의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
한떼의 인마 속에도 스물네 명의 장정이 맨발에다 거은 옷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칼을 든 채 수레를 밀고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수레 위에도 또 한 사람
의 공명이 깃털 부채를 부치며 단정히 않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마의가 그걸
보자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저것들은 분명 사람이 아니라 고명이 부리는 신병이다."
사마의가 그렇게 놀라며 소리치니 그렇지 않아도 그 괴이쩍은 군사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장졸들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감히 맞서 싸울 생각도
못하고 무기를 내던지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사마의가 뿔뿔이 흩어지는 군사를
수습해 한동안 정신 없이 달아나는데 또다시 북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한 떼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맨 앞쪽에는 공명이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데 스물
네 명의 장정들이 앞서 나타난 모양과 똑같은 모습 그대로 수레를 밀고 나왔다.
위병은 그걸 보자 이제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야할지 멍
해 손과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마의도 이들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헤
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정신이 흐려질 뿐이었다. 그렇게 되니 나타난 촉병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다만 말을 채찍질해 정신 없
이 달릴 뿐이었다. 사마의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말을 달려 상규성으로 뛰어
든 후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할 뿐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명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느리고 왔던 3만의 군사들에게 농상의 보리를 모두 베
어 노성으로 실어 가게 했다. 사마의는 문을 걸어잠근 후 사흘이 되었으나 감
히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촉병이 물러난 걸 보고서야 척후병을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척후로 나갔던 군사들이 들판에서 촉병 하나를
사로잡아 사마의에게 끌고 왔다.
"너는 거기서 무얼 하다 잡혀 왔느냐?"
사마의는 물음에 촉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곡식을 베러 왔다가 말이 도망치는 바람에 그만 뒤떨어져 가다가 사로
잡혀 왔습니다."
"그렇다면 며칠 전 너희들의 군사들 중에 수레를 밀던 그 귀신 같은 무리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마의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을 물었다.
"나중에 세 길로 공명이 이끌고 나온 복병은 실은 거짓 공명이었습니다. 강유,
마대,위연이 공명처럼 꾸미고, 각기 1천 명이 수레를 지키며, 5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북을 루리게 하여 속였던 것입니다. 맨 먼저 수레를 타고 뒤쫓게 했던
사람이 바로 진짜 공명이었습니다."
촉병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가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공명은 과연 신출귀몰하는 재주를 지녔구나"
사마의가 그렇게 탄식하며 공명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부도독 곽회가 찾아왔다. 사마의가 그를 맞아들이자 곽회가 예를 올린 후 입
을 열었다.
"촉병은 지금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노성에서 한창 보리 타
작을 하고 있다니 촉병을 칠 더없이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사마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겪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곽회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때 공명이 그런 짓거리로 우리를 속였을 뿐입니다. 이제그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뒤를 칠
터이니 도독께서는 쳐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노성을 어렵지 않게 빼앗을 수 있
으며 공명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끝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기운을
내어 곽회의 말을 좇기로 하고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노성으로 향했다. 노
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위병이 길을 재촉해 가면 밤중이면 이를
수 있는 거리였다. 노성으로 가는 도중에 갯벌과 강 이외에에는 모두 한항 무르
익은 보리밭뿐이었다. 그때 노성에 있는 촉병들은 보리 타작이 한창이었다. 그런
데 공명이 문득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영을 내렸다.
"오늘 밤에 반드시 적이 올 것이다. 내가 살펴보니 노성 동서쪽 보리밭이 군사
들을 숨겨 둘 만한 곳이다. 누가 가서 매복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강유와 마대,위연,마충이 한꺼번에 나섰다. 네 장수가 앞을 다투며 나서자
공명은 몹시 기뻐했다. 공명은 곧 강유와 위연에게 군사 2천을 주며 동남과
서북쪽에 숨어 있게 하고 마대와 마충에게도 각기 군사 2천을 주며 서남과 동
북쪽에 숨어 있게 했다.
"호포 소리가 울리거든 네 방향에서 일제히 내닫도록 하라!"
공명이 네 장수에게 그렇게 이른 뒤 제각기 군사를 거느린 채 화포를 지니고
나아가 보리밭 속에 숨었다. 이윽고 사마의가 해가 저물녘이 되자 노성 아래
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날이 밝을 때 공격하면 성 안에서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니 밤이 늦기를 기
다려 갑자기 치고 들어가야겠다. 이 성은 성벽이 낮은데다 해자도 그리 깊지
않으니 깨뜨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사마의의 말에 따라 성 밖에서 숨을 죽이 채 밤이 되기를 기다
렸다. 그때 곽회도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 사마의의 군사에 함세했다. 날이
어두워진 초경쯤이 되자 위군은 크게 북소리를 울리며 노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자 촉병들이 성벽 위에서 활과 쇠뇌를 위병들의 머리 위에 쏘아붙였다. 위
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돌 때문에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홀연 포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포 소리를 군호삼아 군사들이 몰려
오고 있는 듯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어느 쪽 군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위병들은 크게 당황하는 가운데 대오고 뭐고 할 것 없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곽회가 의심이 들어 얼른 뒤쪽의 보리밭을 살펴보
게 했다. 이에 위병이 모두 보리밭으로 달려가는데 그때 홀연 사방에서 불길
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촉병이 달려나왔다. 사방의 보리밭이 모두 촉병으
로 변한 듯 일시에 쏟아져 나와 위병을 향해 덮쳐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맞춰 노성의 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성 안의 촉병들도 성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과 밖에서 호응해 위군을 향해 짓쳐드니 이미 어지러워져 있던 위병
들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촉병의 창칼에 의해 위
군의 시체가 얕은 해자를 메웠다. 곽회의 말을 듣고 단번에 노성을 깨칠 기세
로 달려왔던 사마의였으나 일이 그 지경이 도니 별수 없었다. 황망히 패한 군
사를 수습해 겹겹이 둘러싼 적을 뚫고 산마루로 달아났다. 곽회 또한 패잔병을
이끌고 산 뒤쪽으로 달아났다. 위병이 수많은 시체만을 남긴 채 썰물처럼 빠
져 나가자 공명은 성 안으로 들어가 네 장수로 하여금 성의 사방을 굳게 지키게
했다. 한편, 한바탕 크게 패한 싸움 끝에 겨우 숨을 돌린 곽회가 사마의를 찾
아와 말했다.
"촉병과 싸운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더 이상 쳐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리칠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3천여 군마를 잃었습
니다. 무슨 방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일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별달리 계책이 떠오르지 않
아 답답한 얼굴로 곽회에게 물었다.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회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격문을 옹주와 양주로 보내 그곳의 두 인마를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저는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 적이 돌아갈 길을 끊겠습니다. 적의 양초를 실어나르는
길을 끊으면 절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적을 치면 그들도 별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마의가 곽회의 말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곧 격문을 써서 옹,양 두 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하루를넘기지 않아 손례가 옹주,양주의 인마를 이끌어 왔
다. 손례가 인마를 이끌어 오자 사마의도 꺾였던 기세가 되살아났다. 즉시 손례
로 하여금 곽회와 더불어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게 했다. 그때 공명은 노성에 머
물면서 위군이 성을 치러 오지 않자, 강유와 마대를 불러들이고 말했다.
"위병이 험한 상을 등지고 우리와 싸우려 하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 첫째로는 우리가 거두어들인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로
는 군사를 검각으로 돌려 우리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고자 함이다. 그대들
은 각기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그곳의 험한 길목을 지키고 있도록 하
라. 위병은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보고도 절로 물러날 것이다."
공명의 영을 받은 두 장수는 즉시 군사를 이끌어 검각으로 떠났다. 그 때 장
사 양의가 들어와 공명에게 말했다.
"지난번 승상께서 이르시기를 백일마다 한 차례씩 군사를 교대하기로 하셨습
니다. 이제 그 기한이 되었습니다. 한중에 있는 군사들이 이미 천구에 이르렀다
는 공문이 왔습니다. 이곳에 있는 군사 8만 중에 4만은 한중으로 돌려 보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렀다.
"이미 정한 일이니 곧 실행하라."
이에 만 군사들이 한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손례가 옹주와 양주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 곽회와 함께 검각을 치러 간
다고 합니다.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어 노성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뜻밖에 위병이 대군을 이끌어 노성의 앞과 뒤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양의도
생각이 달라졌다. 급히 공명에게 말했다.
"위병이 급한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승상께서는 군사를 교대하시는 것
을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십시오. 그 군사들로 하여금 우선 적을 물리치게 한
후 한중의 군사들이 이곳에 이르른 다음에 돌려 보내도록 하십시오."
양의의 말에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그건 아니 된다. 내가 장수와 군사를 부림에 있어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 왔
다. 이미 내가 영을 내린 터에 어찌 믿음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군사는 모두 채비를 마쳤을 터이고 그 부모와 처자는 사립문에 기대
서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큰 곤경에 빠지
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을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곧 영을 내려 한중으로 돌아갈 군사들을 그날로 떠나게
했다. 공명의 영을 받은 군사들은 모두 감격해 소리쳤다.
"승상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들이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
습니까? 바라건대 저희로 하여금 힘을 다해 위병을 깨뜨려 승상의 은혜에 보
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사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차례이다. 어찌하여 여기 머물러 싸우려
하는가? 모두들 돌아가도록 하라."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싸워 위병을 무찌르고 가겠습니다."
공명의 타이름을 듣고 군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공명이 고집을
부리는 군사들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성에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위병이 이르
거든 틈을 주지 말고 급히 치도록 하라. 그것이 바로 편이 앉아 있다가 먼길
을 와 피로한 적을 쳐부수는 병법이다."
군사들은 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성 밖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위병이 이
르기를 기다렸다. 그때, 사마의를 돕기 위해 달려온 옹주,양주의 군사가 길을
재촉해 성 가까이에 이르렀다. 막 영채를 세우고 쉬려고 할 때였다. 성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촉병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들을 덮쳤다. 촉병들은 날
래기 이를 데 없었고 장수들의 용맹 또한 하늘을 찔렀다. 공명의 은혜에 보답
하기 위해 편히 쉬다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니 옹주와 양주의 지친 군사들이
당해 낼수가 없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지며 달아나자 촉병들이 그
뒤를 쫓아서 죽이니 시체가 들에 널려 가득하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다
시 위병을 크게 깨뜨리자 공명은 군사들을 서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고 치하했
다. 그런데 공명이 옹주,양주의 군사를 크게 물리쳐 이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영안성의 이엄으로부터 뜻밖에 전갈이 날아왔다. 공명은 이엄이 보낸 급보를 뜯
어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요사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오는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위와 화친을 청했
다 합니다. 또 위는 촉을 치자고 선동하고 있으나 다행이 오는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엄이 미리 이 일을 알아 냈기로 승상께 알려 드
리는 바이며 급히 좋은 계책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명은 그 글을 읽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글대로 위와 동오
가 힘을 합해 밀려든다면 성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급한 지경에 이를 것이
었다. 공명이 여러 장수를 급히 불러들이고 말했다.
"만약 동오에서 촉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큰일이다. 내가 급히 돌아
가야 하리라."
공명은 기산에 있는 전군에게 영을 내려 대채의 인마를 서천으로 물러나게 했
다.
"사마의는 내가 이곳에서 군사들과 함께 있는 줄 알 테니 함부로 뒤쫓지는 않
을 것이다."
이에 왕평,장의,오반,오의는 길을 나누어 서서히 서천으로 물러났다. 공명과 그
곳에서 맞서던 장합은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자 의아해했다. 급히 뒤쫓아 촉
병을 칠까 했으나 공명의 속임수에 하도 여러 번 속아왔던 터라 감히 뒤쫓지 못
하고 사마의에게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장합이 상규에 이르러 사마의를 보
자 물었다.
"지금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촉병이 물러나는 것입니
까?"
그러나 사마의 역시 조심스럽기는 장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명이 속임수가 많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될 것
이오. 굳게 지키면서 그들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대장 위평이 나서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촉병이 기산의 영채까지 거두어 가지고 물러난다 하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뒤쫓아 덮쳐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에 도독께서는 군사를 묶어 두고
촉병을 범처럼 무서워만 하시니 천하의 비웃음을 어떻게 감당하실 작정이십니
까?"
그러나 사마의는 그 말을 듣고도 함부로 군사를 내려 하지 않았다. 물러나는
공명을 뒤쫓다 크게 낭패를 당했던 지난날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
문이었다. 그때 공명은 기산의 군사를 다 물리고 나자 양의와 마충을 장막 안
으로 불러들여 가만히 계책을 주며 영을 내렸다.
"그대들은 먼저 1만 궁노수를 거느리고 검각과 목문도 양편에 가서 매복해 있
으라. 만약 위병이 뒤쫓거든 호포 소리를 군호로 삼아 통나무와 바위를 굴려 돌
아갈 길을 끊어라. 그런 다음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쏟아붓도록 하라."
마충과 양의가 영을 받고 나가자 공명은 위연과 관흥을 불러들였다.
"그대들은 군사를 이끌고 가 적의 뒤편을 후려쳐라."
위연과 관흥이 영을 받들어 물러났다. 공명은 성벽 위의 여기저기에 기를 가
듯 꽂고, 성 안에 마른 풀과 나무를 쌓아올려 불을 지르고 연기를 피워올려 군
사들이 있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공명이 노성에서 군사를 물리자 그걸 본 위
의 순시병이 사마의에게 나는 듯이 달려가 알렸다.
"촉병의 많은 인마가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성 안에 남은 군사가 얼마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벽 위에 많은 정기가 꽃혀 있고 연기가 오르고 있는 걸 본 순시병이 군사가
머무르고 있는 줄로 알고 그렇게 말했다. 사마의는 그 말을 듣자 몸소 높은 곳
에 올라가 노성을 살펴보았다. 성위에는 많은 깃발이 꽂혀 있는데 안에는 불길
이 일고 있었다. 한동안 성을 살피던 사마의가 어이없다는 듯 껄걸 웃더니 말했
다.
"성은 비어 있다. 들어가 보아라."
군사들이 사마의의 말을 듣고 성 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 성 안은 텅 비어 있
었다. 공명이 물러난 걸 확인하자 사마의는 이번에는 정말 뒤쫓아 쳐부수겠다는
기세로 물었다.
"공명이 달아나고 있다. 누가 그를 뒤쫓아 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장합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은 너무 성미가 급하니 이 일을 맡기에는 적당치가 않소."
사마의의 말에 장합이 얼굴을 붉히며 따지듯 물었다.
"도독께서는 이곳으로 나오실 때 저를 선봉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는데, 어찌 저를 써 주시지 않으십니까?"
"촉병이 물러났다 하나 험한 길목에는 반드시 군사를 숨겨 두었을 것이오. 군
사를 이끌어 나아감에 자셰히 살피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사마의가 장합에게 그렇게 깨우쳐 주자. 장합이 분기 탱천하여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장합이 워낙 고집을 부리고 나서자 사마의도 더 이상은 말릴 수 없다고 여겼
음인지 다시 다짐을 두었다.
"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구려. 그러나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데 설령 만 번을 죽을지언정 무슨 여한
이 있겠습니까?"
장합이 그렇게 서슴없이 말하자 사마의도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
다.
"공이 기어이 가시겠다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떠나시오. 공에 이어 위평에게 2
만을 주어 뒤따르게 하면서 적의 복병을 방비케 하겠소. 나도 곧 3천 군마를 이
끌어 뒤를 받치겠소."
사마의가 장합에게 군사를 떼어 주자 장합은 군사를 이끌어 나아갔다. 장합이
급한 기세로 20여 리를 달려갔을 때이다. 홀연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
의 군사가 내달아왔다. 앞선 장수가 칼을 비켜든 채 말을 세우더니 소리쳤다.
"적장은 군사를 이끌어 어디로 가려 하느냐?"
"장합이 그를 보니 바로 촉장 위연이었다. 위연을 보자 장합도 칼을 빼들고 한
칼에 벨 기세로 달려들었다. 위연이 장합을 맞아 한바탕 불을 뿜을 듯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싸운지 10여합이 어우러지는가 했더니 위연이 말머리를 돌려 달
아났다. 장합이 달아나는 위연을 무턱대고 뒤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30여리를
뒤쫓아간 장합이 갑자기 말을 멈춰 세우고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그제야 매복
을 조심하라던 사마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위를 휘둘러 보아
도 복병이 있을 만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장합이 다시 위연을 뒤쫓아 산언
덕을 돌아 나갔다. 그때였다. 홀련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달려나
온느데 보니 앞선 장수는 관흥이었다.
"장합은 도망가지 말라."
관흥이 큰 칼을 비껴든 채 말을 세우며 소리쳤다. 관흥이 나타나자 장합은 말
을 채쳐 곧장 그쪽으로 내달았다. 관흥이 달려오는 장합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관흥도 위연처럼 10여 합을 어우르자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
났다. 장합이 그 뒤를 급하게 쫓았다. 관흥은 산 속으로 달아났다. 장합이 관흥
을 뒤쫓아 산 속으로 뛰어들다가 문득 말을 세웠다. 나무가 빽빽한 숲 속이라
능히 군사들이 숨을 만했다. 장합이 의심스러워 말을 세우고 군사들을 풀어 숲
속을 살펴보게 했으나 복병은 보이지 않았다. 장합은 의심을 풀고 마음놓고 관
흥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연이 지름길로 달려와 앞을 가로
막았다. 장합은 위연이든 관흥이든 가릴 바가 아니었다. 위연을 보자 칼을 휘두
르며 한칼에 벨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위연은 장합을 맞아 10여합을
싸우다가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뿐만 아니었다. 촉병은 군기와 투구, 창
칼 등을 모두 길에 버리고 달아났다. 뒤쫓던 위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촉병
들이 버린 물건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되니 대오고 뭐고 가릴 겨를
이 없이 어지러워졌다. 위병들이 어지러워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연과 관흥이
번갈아 가며 장합에게 덤벼들었다. 장합은 울화가 치밀어 번갈아 싸움을 걸어
오는 위연과 관흥을 맞아 싸우며 뒤쫓았다. 그러나 위연과 관흥은 한동안 창칼
을 맞대다가는 달아나고 이어 차례로 덤벼들었다간 다시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장합의 화만 머리끝까지 치밀 뿐이었다. 그런데 목문도 어귀에까지 쫓겨가던
위연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더니 뒤쫓는 장합을 보고 소리쳤다.
"역적 장합아! 내가 너 따위와는 겨루지 않으려 했거늘 너는 어찌 끝까지 뒤
를 따라오느냐? 네가 끝까지 나와 맞서 보려 한다면 좋다. 어디 한 번 덤벼 보
아라. 내가 너와 결판을 내리라!"
위연이 그렇게 비아냥거리자 장합은 더욱 화가 났다. 곧바로 말을 몰아 위연
에게 덮쳐들었다. 두 사람이 맞붙어 또 한 차례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10여합을
부딪자 위연은 아무래도 당해 낼 수가 없다는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위연이 달
아나자 장합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욱 분기가 치솟아 이를 갈며 위연을 뒤쫓
았다. 그럴 동안 날은 점점 어두워 오는데다 산 속이라 마음대로 달릴 수도 없
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어두운 산 속에서 포성이 울리더니 산 위
에서 하늘이 찌를 듯한 불길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산 위에서 바위와 통나무들
이 굴러 떨어지더니 장합이 돌아갈 길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아차, 내가 적의 계책에 빠지고 말았구나.'
장합이 그제야 크게 놀라며 앞뒤를 살피지 않고 뒤쫓기만 한 것을 알고 뉘우
쳤으나 때는 늦었다. 이미 쏟아져 내린 통나무와 바위로 돌아갈 길이 끊긴 것이
다. 장합이 사방을 살펴보니 앞쪽에만 약간의 빈터가 있을 뿐 양쪽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치솟아 있는 절벽이었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어 장합이 크
게 당황해하고 있는데 홀연 딱딱이 소리가 한 뻔 크게 울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메뚜기 떼가 날아들 듯 수많은 화살과 쇠뇌가 쏟아져 내려왔다. 이미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장합은 말 위에서 화살을 온몸에 맞은 채 1백여 명의 부장과
더불어 목문도에서 죽고 말았다. 그때 장합보다 한 발 뒤늦게 쫓아온 위병들은
앞길이 끊긴 것을 보고 장합이 적의 계교에 빠졌음을 알았다. 급히 말을 돌려
사마의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가는데 산꼭대기에서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려
왔다.
"게 섰거라. 제갈 승상께서 여기 계시다.!"
위병들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산 위를 올려다보니 대낮처럼 밝은 횃불 아래
공명이 앉아 있다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오늘 활을 쏜 것은 말(사마의를 가리킴)_을 쏘고자 한 것인데 잘못되어
(노루:장합을 가리킴)을 맞히고 말았구나. 너희들은 돌아가서 사마의에게 이르도
록 하라. 머지않아 나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위병들은 그 말을 듣고 우선 목숨만을 구할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대채로 도망쳐 간 위병들은 보고 들은 대로 사마의에
게 전했다. 위병들로부터 장합이 적의 계교에 빠져 목숨을 잃은 사실을 전해
들은 사마의는 하늘을 우러러 통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장준의(장합)을 죽게 했구나!"
사마의는 그제야 공명의 계책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군사를 물리며 안전한
곳에 머물게하고 적을 험한 길목으로 꾀어들이는 계책이었다. 그렇다면 위수로
부터 규성, 규성으로부터 이 검각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느 때에 공명의 계책이
미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사마의는 이미 장합마저 잃고 나 뒤로 더
는 싸울 마음이 없었다. 장수들에게 험한 길목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은 급히 군
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주 조예는 장합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뿌리며 슬퍼하고 그의 시신을 거두어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 그 무렵 한중으로
돌아간 공명이 성도로 가 후주를 뵈려 하고 있는데 이에 앞서 이엄이 후주에게
글을 올렸다.
신이 군량을 마련하여 승상의 군전에 보내려 하고 있는데 승상이 돌연 군사를
돌리셨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군사를 돌리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후주는 이엄의 글을 보자 공명이 돌아온 까닭이 의아스러웠다. 상서 비위를 보
내 공명에게 돌아온 까닭을 물어보게 했다. 비위는 한중에 이르러 공명을 찾아
보고 후주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깜짝 놀랐다.
"이엄이 나에게 글을 보내기를 동오의 손권이 조예와 손을 잡고 서천으로 밀
고 들어온다고 하였소. 그래서 급히 군사를 돌린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비위도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엄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군량이 이미 마련되었는데 승상께서 아무 까닭도
없이 군사를 돌리셨다 하였소. 그 때문에 천자께서는 특별히 저를 보내 까닭을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원래 이엄은 군량이 마련되지 않자. 그 죄를 물을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공명
에게 거짓으로 글을 보내 성도로 돌아오게 하고 후주에게 역시 엉뚱한 거짓글을
고해 바쳐 자신의 죄를 면해 보려 했던 것이었다. 공명이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알아보게 하자 모든 일이 밝혀졌다. 공명이 크게 노해 소리쳤다.
"그 하찮은 것이 제 죄를 얼버무리기 위해 나라의 큰 일을 그르치려 하였구
나! 그 놈을 잡아다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자 비위가 나서서 펄펄 뛰는 공명을 말렸다.
"이엄은 선제께서 폐화의 뒷일을 당부한 신하중의 한 사람입니다. 너그러이 용
서하시기 바랍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고는 노기를 가라앉혔다. 비위는 후주 유선에게 표문을 올
려 이엄의 일을 자세히 밝혔다. 표문을 읽은 후주 역시 크게 노하며 당장 이엄
의 목을 베게 했다. 그러자 참군 장완이 나서 후주를 말렸다.
"이엄은 선제께서 뒷일을 당부하신 신하 중의 한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너그
러이 용서하시옵소서."
후주도 그 말을 듣자 그를 함부로 목벨 수가 없었다. 그를 목베는 대신 벼슬
을 빼앗아 서민으로 만들고 재동군으로 쫓아 버렸다. 그리하여 공명이 다섯 번
째로 기산으로 나아갔으나 이번에도 성도의 이엄으로 인해 다시 천하 평정의 큰
꿈이 꺾이게 된 셈이었다.
공명의 목우유마
공명은 성도로 돌아오자 선제의 당부를 생각해 이엄의 아들 이풍에게 장사의
벼슬을 물려 주었다. 공명은 다섯 차례나 군사를 이끌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결코 중원 도모의 큰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3년 뒤에 출정할 작정으로 양초
를 비축하게 했다. 또한 군사들에게 병기를 다루고 진을 치는 법을 조련시키는
한편 싸움에 소용되는 모든 것을 갖추게 했다. 공명은 장졸들을 따뜻이 대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피니 동서 양천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모두 공명의 은덕을 우러
렀다.
새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어느덧 3년이 지나 건흥 12년 2월이 되었다. 공명
이 어느 날 조회때 후주에게 아뢰었다.
"신이 군사들을 조련하며 출정을 준비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양초가 넉넉하
고 병장기도 다 갖추었으며 군사들도 모두 튼튼하고 용맹스러우니 이제 위를 치
러 나설 때입니다. 만약 이번에도 간사한 무리를 쓸어 없애고 중원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신은 맹세코 다시는 폐하를 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주 유선은 공명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솔밭과 같은 형세를 취한 채 서로 싸우려 들지 않고 있소. 그런
데 상부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군사를 일으켜 이 태평스러움을 깨려 하십니까?"
후주의 물음에 공명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답했다.
"신은 선제의 크나큰 은혜를 입은 몸으로 꿈에도 위의 정벌을 잊은 적이 없습
니다. 힘을 다하고 참마음을 다하여, 폐하께 중원을 되찾아드리고 아울러 한실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때였다. 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나서 소리쳤다.
"아니됩니다. 승상께서는 군사를 일으켜서는 아니됩니다."
모두들 그 소리에 놀라 보니 그는 다름 아닌 태사 초주였다. 그는 천문에 매
우 밝았는데 모두 궁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은 사천대를 맡아 보고 있으니 화복의 징조를 아뢸 책임을 진 몸입니다. 요
사이 수만 마리의 새가 떼를 지어 날아와 한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는 실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입니다. 또 신이 천문을 보니 규성이 태백의 궤도에 걸쳐 있
으며 성대한 기운이 북방에 서려 있으니 아직은 북쪽의 위를 칠 때가 아닙니다.
거기다가 성도에서는 오래 묵은 잣나무가 밤에 우는 소리를 내는 걸 백성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는 삼가며 지
키고 출병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공명은 초주의 말을 한마디로 물리치고 말았다.
"나는 선제께서 남기신 주한 당부를 받들어 위를 치려는 것이오. 어찌 하찮은
변고 따위로 인해 나라의 큰 일을 미룰 수 있겠소?"
그렇게 말한 공명은 유사에게 명하여 소열 황제(유비)의 묘에 태뢰(나라의 제
사에 올리는 제물)를 차리게 한 뒤 몸소 엎드려 울며 고했다.
"신 양은 이미 다섯 차례나 기산으로 나아갔으나 아직 한치의 땅도 얻지 못했
으니 실로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이제 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기산으로
나가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맹세코 한적을 없애고 중원을 되찾겠습니다. 몸
과 마음을 다 바친 후 이 몸이 죽은 뒤에야 그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공명이 묘 앞에 엎드려 그렇게 고하니 더 이상 출정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제사를 끝낸 공명은 곧 후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말을 달려 한중으로 갔다. 공명
이 여러 장수를 불러모아 군사 낼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문득 사람이 달려와 알
렸다.
"관흥이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목을 놓아 울다가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 후
공명이 깨어나자 여러 장수들이 공명을 위로했다. 공명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하늘은 어찌하여 충의로운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는단 말인가? 아직 싸우
기도 전에 또 장수 한 사람을 읽다니...... 참으로 애달프구나."
공명은 관흥의 죽음을 슬펴하며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관흥의 죽음만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공명은 34
만의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기산으로 향하게 했다. 위연과 강유를 선봉으
로 삼아 기산으로 나가게 하여 지을 치고 이회에게는 군량과 마초를 날라다 야
곡 어귀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 무렵, 위나라는 그 전 해에 청룡이 마파정이라
는 우물에서 나왔다고 하여 연호를 청룡 원년으로 고쳤다. 청룡 2년, 봄 2월 어
느 날 신하 한 사람이 달려와 조예에게 아뢰었다.
"변방의 관원이 알려 오기를 30여만의 촉군이 다섯 길로 나뉘어 기산으로 다
시 밀고 들어오고 있다 합니다."
조예는 그 뜻밖의 전갈에 크게 놀랐다. 급히 사마의를 불러들이게 한 뒤 물었
다.
"3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느데 이번에 다시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온다
고 하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조예가 놀란 가슴을 달래지 못하고 그렇게 물었으나 자못 태연했다.
"신이 밤에 천문을 보니 중원에는 왕성한 기운이 넘쳐 흘렀으며 규성이 태백
을 범하고 있어 서천은 이롭지 못한 조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명이 제 재주
만을 믿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군사를 내었으니 이는 패망을 스스로 불러들이
는 것입니다. 신은 폐하의 크신 복에 의지해 군사를 이끌어 역적을 쳐부수겠습
니다. 바라건대 신을 도와 줄 네 사람을 데려가려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경은 누구를 데려가고 싶소?"
위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죽은 하후연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그들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맏아들이 패,
자는 중권이고, 둘째가 이름이 위, 자는 계권이며, 셋째가 이름이 혜요, 자는 야
권이고, 넷째는 이름이 화이고 자는 의권입니다. 그 중 패와 위는 말타기와 활쏘
기를 잘 하고 혜와 화는 병법에 밝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 아비의 원수를 갚겠
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하후패, 하후위를 좌우 선봉으로 하고 하후혜와 하후화는
행군사마로 삼아 군기를 의논하여 촉병을 쳐부술 작정입니다."
사마의의 말에 조예가 문득 생각난 듯 정색을 하며 물었다.
"지난날 하후무는 군기를 그르쳐 수많은 인마를 잃게 한 적이 있소. 이후 그는
지금까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그 네 사람도 하후무
꼴이 되지 않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하후연의 네 아들은 하후무와 비교할 인물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니 조예도 주저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조예는 사마의를 대도독으로 삼아 모든 장졸들을 부리도록 하고
각처의 병마도 모두 대도독의 권한 아래 두게 하니 사마의는 위나라의 병권을
한 손에 쥐게 된 셈이었다. 이윽고 사마의가 명을 받들어 성을 나서는데 조예
가 사마의를 다시 불러들여 몸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경은 위수에 이르거든 성의 방비를 든든히 하고 굳게 지키기만 하며 싸움을
서두르지 않도록 하라. 촉병이 뜻을 이루지 못할 때 거짓으로 물러나는 체하며
우리 군사를 꾀어 내려 할 것이니 경은 삼가고 가벼이 뒤쫓지 않도록 하라. 그
들은 군량이 바닥나면 절로 물러날 터이니 그때를 기다려 빈틈을 노려 덮쳐들도
록 하라. 그렇게 하면 어렵지 않게 적을 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을
상하지 않게 하고 이길 수 있으리라.
사마의는 머리를 조아려 그 조서를 받들고 급히 군사를 재촉해 장안에 이르기
가 바쁘게 각처의 인마를 끌어들이니 그 수가 40만이나 되었다. 사마의는 군사
를 이끌어 위수에 이르자 영채를 세우고 따로 5만의 군사를 떼어 내 위수에 아
홉 개의 부교를 놓게 했다. 또한 선봉 하후패와 하후위에게는 그 부교를 건너
영채를 세우게 했다. 사마의는 적에 대비하여 굳게 지키기 위한 채비를 끝낸
뒤에 장수들을 불러들이고 촉병을 막을 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때 곽회와
손례가 찾아왔다. 사마의가 급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서로 예를 나누자 곽회가
입을 열었다.
"촉병이 지금 기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위수를 건너 들판을 지
난 다음 북쪽 산으로 가 농서쪽의 길을 끊는다면 실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사마의도 그 말을 듣자 얼굴색이 달라졌다.
"그렇소. 그렇다면 공은 농서의 군사를 이끌어 북원에 영채를 세우도록 하시
오. 도랑을 깊게 파고 벽을 높게 쌓아 방비를 굳게 한 다음 군사를 함부로 움직
이지 않도록 하시오. 그러다 적의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그들이 물러날 때
덮치도록 하시오."
"사마의의 말에 곽회에 손례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다. 그 무렵, 기산에
이르른 공명은 사방으로 다섯 개의 영채를 벌여 세우고, 야곡에서 검각에 이르
는 길에도 열네 개의 대채를 세웠다. 각 영채에 군사들을 머무르게 하며 날마다
장수들이 채를 순초하게 했다. 사마의가 전처럼 지키기만 하고 나와 싸우지 않
더라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곽회와 손례가 북쪽 들판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그런 어느 날 군사 하나가 달려와 이렇게 아뢰었다. 그러자 공명이 기다렸다
는 듯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위병이 북원에 진을 친 것은 우리가 농서로 가는 길을 끊을까 두려워하기 때
문이다. 나는 이제 북원을 치는 체하다 슬며시 위수 남쪽을 빼앗을 작정이다. 그
대들은 뗏목 1백여 척을 급히 만들어 그 위에 마른 풀을 싣고 헤엄 잘 치는 군
사 5천 명을 태우도록 하라. 내가 오늘 밤에 북쪽진을 공격하는 체하면 사마의
는 틀림없이 곽회와 손례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쳐부수다가
적이 어지러워지는 틈을 타 후군에게 물을 건너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전군을
태운 뗏목을 곧장 강줄기를 타고 내려가게 하여 뗏목에 실었던 풀에다 불을 질
러 적이 만든 부교를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때 강을 건너간 후군이 위군의 뒷
덜미를 후려치도록 하라. 나는 또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적의 앞쪽에 있는 영
채로 밀고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위수 남쪽만 우리 손안에 넣으면 우리
군사가 나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명이 그렇게 이르자 모든 장수들이 그 말에 따라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뗏목을 만드는 등 촉병들의 바쁜 움직임은 위의 세작에 의해 곧 사마의의 귀에
도 들어갔다. 사마의는 촉병의 그런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 헤아렸다. 장
수들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이고 말했다.
"공명이 그렇게 군사를 부리고 있는 것은 반드시 계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쪽을 치는 것처럼 꾸미고 뗏목을 흘려 보내 불을 질러 부교를 불태우고 우리
등 뒤를 어지럽게 만들려는 것이다. 공명은 그 틈을 노려 우리의 앞쪽으로 치고
들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곧 하후패와 하후위에게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북쪽 진에서 함성이 일어나거든, 곧장 위수 남쪽으로 달려가 산 속
에 숨어 있으라. 그러다가 촉병이 나오거든 일시에 들이치도록 하라."
이어 장호와 악침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궁노수 2천을 거느리고 가서 부교 북쪽 언덕에 숨어 있으라. 촉병이
뗏목을 타고 물을 따라 내려오거든 그들이 부교에 이르지 못하도록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도록 하라."
사마의는 또 곽회와 손례에게도 사람을 보내 알리게 했다.
"공명은 북쪽 진을 치는 체하며 군사들에게 위수를 건너게 할 것이오. 그대들
은 이제 영채를 세운데다 군사들도 많지 않으니 군사들을 모두 도중에 매복시키
도록 하시오. 촉병들은 오후에 위수를 건너면 틀림없이 해가 떨어질 때쯤 밀고
나올 것이오. 촉병이 나오거든 패한 척하고 달아나도록 하시오. 그러면 촉병은
급한 기세로 뒤쫓을 것이오. 그때 촉병들에게 활과 쇠뇌를 쏘아 뒤쫓는 것을 막
도록 하시오. 나는 수륙 두 길로 나누어 나아가 구원할 터인즉, 그때 가서 내 말
을 따르도록 하시오."
공명의 계책을 훤히 내다본 듯한 사마의의 대비였다. 사마의는 그렇게 장수들
에게 영을 내려 군사를 배치한 다음,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에게는 앞쪽의 영
채를 응원케 하여 촉병에 대비하게 했다. 사마의는 스스로 한 떼의 군사를 이
끌어 북원으로 나아갔다. 그때 고명도 뗏목이 만들어지자 다시 장수들을 배치
했다. 위연과 마대에게는 위수를 건너 북원으로 짓쳐들게 하고 오반과 오의에ㄱ
는 뗏목에 군사를 태우고 가서 부교를 불태우게 했다. 또한 왕평과 장의에게는
전대를 맡게 하고 강유와 마충에게는 중대를, 그리고 요화와 장악에게 후대를
마겨 위수의 영채를 치게 했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공명의 영을 받든 장수들
은 군사를 거느리고 위수를 건너 공명이 이른 대로 각각 진세를 벌이며 나아갔
다. 위연과 마대가 북쪽 진 가까이에 이른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을 때
였다. 사마의가 이른 대로 해질녘이 되자 촉병이 몰려오는 걸 본 순례는 영채를
버린 채 달아났다. 위연은 적병이 싸울 생각도 않고 당황하는 낌새도 없이 달
아나기만 하자 부쩍 의심이 들었다. 적의 매복이 있을 줄로 알고 급히 군사를
되돌리려는데 홀연 사방에서 크게 함성이 울리며 왼쪽에서는 사마의, 오른쪽에
서는 곽회가 군사를 휘몰아왔다. 꼼짝없이 양쪽에서 위병을 맞게 된 위연과 마
대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반이 군사를 거느리
고 달려와 구원해 주어 가까스로 언덕으로 달아났으나 거느렸던 군사들의 태반
이 위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위연과 마대를 구한 오반은 급히 군사를 나누어
뗏목에 올랐다. 공명의 명대로 부교를 불사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강물 위로
뗏목을 밀고 가려 할 때 이미 매복해 있던 장호와 악침이 2천 궁노수에게 명해
활과 쇠뇌를 쏘게 했다. 뗏목 위의 촉병들은 갑작스럽게 비 오듯 날아오는 화
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날아온 화살에 오반이 맞아 강물에 떨어져 죽고 말았
다. 뗏목 위의 촉병들도 대부분 화살에 맞아 죽거나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달아
나고 말았다. 그때 북쪽 진으로 간 촉의 군사들이 위병에게 산산조각이 난 걸
모르고 있던 왕평과 장의는 기세 좋게 위군의 진으로 밀려갔다. 밤은 이미 깊었
는데 촉병이 달려가자 사방에서 크게 함성이 일어났다. 왕평이 황급히 말을 멈
춰 세우며 장의에게 말했다.
"우리 마군들이 북원으로 나아갔는데 형세가 어떠한지 알 수 없고, 게다가 위
남의 영채에 위병이 눈에 띄지 않고 있소. 혹시 사마의가 미리 대비하여 준비하
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소. 그러니 우리들은 부교가 불타는 것을 지켜 보았다가
나아가는 것이 좋겠소."
왕평이 그렇게 말하자 장의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두 장수는 군사를 그곳에
머무르게 한 채 부교에 불길이 타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
아 등 뒤에서 군사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급한 소식을 전했다.
"승상께서 빨리 군사를 돌리라고 하십니다. 북쪽 진을 치러 갔던 군사와 부교
를 태우러 갔던 군사들이 모두 적에게 패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이 들던 왕평과 장의는 그 말을 듣자 급히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이미 위병의 준비가 있었다. 포성이 크게 일더니 불길이 하늘
로 치솟는 가운데 위병이 등 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왕평과 장의는 기세가 드
높은 위병을 맞아 한바탕 혼전을 벌인 끝에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기는 했으나
많은 군사가 꺾여 버렸다. 공명은 이번 싸움에 패한 채 기산의 대채로 군사를
물렸다. 대채로 몰려든 장졸들을 수습해 보니 이번 싸움에 꺾인군사가 1만여 명
이었다. 여섯 번째로 기산으로 나와 이번에야말로 위병을 깨뜨리고 중원으로 짓
쳐들려던 공명이었다. 자신의 계책도 아무 소용 없이 첫 싸움에 지자 공명은 심
기가 몹시 불편하고 우울해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 성도에서
비위가 공명을 찾아왔다. 공명은 비위를 보자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오시었소. 내가 서한 한 통을 써 줄 터이니 수고롭지만 동오의 손권
에게 좀 전해 주시겠소?"
"승상께서 명하시는 일인데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비위가 서슴없이 말했다. 그러자 공명은 비위에게 글 한 통을 써 주며 동오로
가게 했다. 이에 비위는 공명의 글을 가지고 동오의 건업으로 가서 오주 손권을
만났다. 비위가 예를 마치고 손권에게 글을 바치자 손권이 글을 읽어 보았다.
한실이 불행한 틈을 타 조정이 기강을 잃으니 역적 조조가 제위를 빼앗아 오
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양은 소열 황제(유비)의 남기신 명을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병을 기산으
로 내몰았으며 미친 역적의 무리들은 오래잖아 위수에서 그 마지막을 맞이하고
야 말 것입니다. 이에 엎드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동맹의 의리를 생각하시어
북방 정벌을 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중원을 빼앗아 천하를 나누도록 하옵
소서. 글로써는 다 아뢰지 못합니다만 아무쪼록 폐하의 밝은 헤아림이 있으시기
만을 바랄 뿐입니다.
손권은 공명의 글을 읽자 마음이 흡족했다.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
어 비위에게 일렀다.
"짐이 오래전부터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려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
소.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승상이 보내 왔으나 더 미룰 까닭이 없소. 오늘로 짐이
몸소 군사를 일으켜 거소문으로 나갈 것이오. 그곳으로 가 위의 신성을 빼앗을
것이오. 또한 육손과 제갈근에게는 강하와 면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여 양양을
빼앗게 하겠소. 이렇듯 세 갈래로 30만의 군사를 일시에 낼 것이며 지체하지 않
고 당장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겠소."
손권이 머뭇거림 없이 후련히 말하자 비위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자리
에 엎드려 손권에게 절하며 말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니 이제 위가 무너지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합니다."
손권도 마음이 흡족했던 터라 비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술잔이 오고 가
는 가운데 문득 손권이 비위에게 물었다.
"승상의 군중에는 누구를 선봉으로 삼았소?"
"위연을 선봉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비위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용맹은 넘치지만 마음이 바르지 않소. 만약 승상만 없어지면 그는
반드시 하루 아침에 화근이 될 사람이오. 어찌하여 승상이 그걸 모른단 말이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돌아가면 반드시 승상께 전해 드려 화를 면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위가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다. 다른 나라 장수를 그토록 훤히 살피고 있
는 손권의 날카로운 헤아림이 놀라웠다. 잔치가 끝나자 비위는 손권에게 절하며
물러난 후 한중으로 돌아갔다. 비위는 공명에게 손권이 30만 대군을 일으켜 세
길로 나누어 위를 치러 가기로 한일을 전했다. 공명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
하더니 다시 비위에게 물었다.
"오주가 그 밖에 다른 말을 한 것은 없소?"
그러자 비위가 생각난 듯 위연에 대한 손권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공명
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과연 총명한 임금이로구나! 내가 위연의 사람됨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용
맹을 아껴 쓰고 있을 뿐이오."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일찌감치 조치하도록 하십시오."
비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공명에게 채근했다.
"나도 생각해 둔 바가 있소."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비위도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고 공명과 작별하고 성
도로 돌아갔다. 비위가 돌아가자 공명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 움직일
일을 의논했다. 그때 홀연 군사 하나가 들어와 전했다.
"위나라 장수 한 사람이 투항해 왔습니다."
공명이 그 장수를 불러들이게 하고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적군에게 투항하려 하는가?"
"저는 위나라의 편장군 정문입니다. 진랑과 더불어 사마의 밑에 있는데, 사마
의가 뜻밖에도 사사로운 정으로 진랑을 전장군으로 삼고 저는 지푸라기 보듯 하
니 분을 이기지 못하여 승상께 투항했습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이 몸을 거두
어 주십시오."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사 하나가 급히 달려와 알렸다.
"지금 위나라의 진랑이란 자가 군사를 이끌어 와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정문에게 물었다.
"진랑의 무예가 너와 비하여 어떤가?"
"제가 한칼에 그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정문이 서슴없이 말했다. 그러자 공명이 그에게 일렀다.
"그렇다면 네가 나가 진랑의 목을 베어 오라. 그러면 너를 의심치 않을 것이
다."
공명의 말에 저문이 홀연히 영문 밖으로 나가 말 위에 올랐다. 정문이 진랑
과 싸우기 위해 말을 몰아 나가자 공명은 몸소 영채 밖으로 나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때 진랑이 창을 비켜든 채 정문을 크게 꾸짖고 있었다.
"이 역적놈아, 네 어찌 감히 내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나느냐? 어서 내 말을 내
놓아라."
진랑이 그렇게 외치더니 곧장 말을 박차 정문에게로 달려갔다. 정문도 피하지
않고 달려오는 진랑을 맞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단 한 번 부딪친 순간, 정문의
칼에 맞은 진랑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진랑이 말 아래로 떨어지자 졸개들
은 기가 꺾인 듯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다. 정문이 진랑의 목을 꿰어 들고 영
문 안으로 기세를 드높이며 돌아왔다. 한칼에 진랑의 목을 베었으니 정문을 거
두어들일 뿐 아니라 상이라도 내릴 줄 알았던 촉병들이었다. 그러나 장중에 앉
아 정문을 불러들인 공명은 발연히 노하며 소리쳐 꾸짖었다.
"이놈, 네 어찌 가히 나를 속이려 드느냐?"
공명의 호통에 정문이 얼굴색이 달라지며 물었다.
"승상께서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하여 속인다고 하십니까?"
그러나 공명은 여전히 무서운 얼굴로 정문을 꾸짖었다.
"나는 진작부터 진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네가 베어 죽인 것은 진랑이
아니다. 내가 네놈의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았느냐?"
공명이 그렇게 말하자 정문도 갑자기 몸을 떨며 땅바닥에 엎드리며 빌었다.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제가 죽인 건 진랑이 아니라 그의 아우 진명이었습니
다."
그러자 공명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사마의가 너를 시켜 거짓으로 항복하게 한 것이리라. 그러나 어찌 나를 속일
수가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밝히지 않는다면 당장에 목을 베겠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니 정문은 거짓 항복이었음을 고하고 한 목숨 살려 주기만
을 바랄 뿐이었다. 공명이 그런 정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그렇다면 내가 이르는 대로 글을 써서, 사마의로 하여금 우리 본진을 치러 나
오게 하라. 그리하여 사마의를 사로잡게 되면 너의 목숨을 살려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네 공으로 여겨 높이 쓰리라."
거짓 항복해 온 정문을 거꾸로 이용해 사마의를 끌어 내자는 것이었다. 정문
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니 하는 수 없이 사마의를 꾀어 내는 글을 써서 공명
에게 바쳤다. 공명은 그 글을 받은 뒤 정문을 옥에 가두게 했다. 그러자 변견이
궁금한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저놈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을 알았습니까?"
공명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사마의는 원래 사람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만약 진랑을 전장군으로 썼다면
그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정문과 싸워 단 1합에 목숨
을 잃었으니 그건 분명 진랑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걸 보고 정문의
항복이 거짓임을 알았다."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공명은 군사들 중에 말 잘
하는 사람을 뽑아 가만히 무슨 말인가를 일러 준 뒤 정문이 쓴 글을 주어 사마
의에게 가게 했다. 위군의 영채에 이른 군사가 사마의 뵙기를 청했다. 사마의가
그를 불러들이고 정문의 글을 읽어 본 뒤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저는 원래 중원 사람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다 촉에 머물게 되었는데 정문과
한 고향에서 자랐습니다. 이번에 정문이 공을 세우니 공명은 그 공으로 정문을
선봉으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정문이 제게 은밀히 이 글을 도독께 전해 올리라
고 당부했습니다. 정문은 내일밤 군호로 불길을 올리겠다고 하여습니다. 그때 도
독께서 대병을 이끌어 촉의 영채로 밀고 들어오시면 정문이 안에서 호응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공명이 보낸 군사가 막힘 없이 그렇게 꾸며대었다. 사마의는 그 자가 촉에 살
았다는 말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수상 쩍은 점을 찾아
보려 했다. 그러나 그 군사의 말이 앞뒤 막힘이 없는데다 의심을 가질 만한 데
가 없었다. 사마의가 다시 글을 펼쳐 보며 자세히 살폈으나 틀림없는 정문의 필
체였다. 사마의도 그제야 자기의 계책에 공명이 떨어진 것으로 알고 의심을 거
두고 그 군사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말했다.
"오늘 밤 이경에, 내가 몸소 군사를 이끌어 적진을 치러 가겠다. 만약 네가 가
져온 글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너를 높이 써 주리라."
그 군사는 사마의의 말에 절을 올리며 하직 인사를 고한 후 돌아갔다. 촉의
영채로 돌아온 군사는 공명에게 사마의를 만난 일을 빠뜨리지 않고 전했다. 공
명이 사마의가 속았음을 알고 칼을 짚은 채 하늘에 빌고 난 뒤 황평과 장의를
불러 은밀히 무엇인가 영을 내렸다. 이어 마충과 마대를 불러 계책을 일러 주고
떠나게 했다. 위연에게도 계책을 일러 보낸 공명은 스스로 산 위에 올라가 전군
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마의는 정문이 보낸 글을 믿고 촉의 영채를 덮
치기 위해 군사를 낼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맏아들 사마사가 나서서 말
했다.
"글 한 통을 믿고 아버님께서 몸소 적진으로 뛰어드신다는 것은 실로 위험하
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 일에 무슨 계교라도 있게 되면 그땐 어쩌시렵
니까? 아무래도 아버님은 다른 장수 한 사람을 내세워 먼저 군사를 이끌게 하시
고 뒤에서 받쳐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마의가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이에 진랑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게 하여 먼저 촉군의 영채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그 뒤를 접응해 주기
로 했다. 그날 밤은 초저녁에는 바람도 자고 하늘도 맑았다. 그런데 밤이 깊어
갈수록 비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검은 구름이 잔뜩 하늘을 뒤덮었다. 사방이
먹물을 뿌린 듯 어두워지더니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지
경이었다. 사마의는 밤하늘이 그렇게 캄캄해진 걸 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촉진
을 급습할 수 있게 된 걸 기뻐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공을 이루게 도와 주시는구나!"
사마의는 군사들에게 하무를 물리고 말에게는 재갈을 물리게 하여 소리 없이
촉군의 영채로 나아갔다. 촉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자 진랑이 먼저 군사 1만을
내몰며 영채를 급습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촉의 영채 안에는 촉병은커녕
군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섬뜩해진 진랑이 그제야 적의 계책에 빠졌음을
알고 소리쳤다.
"물러나라. 적의 계책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진랑의 외침과 함께 사바에서 불길이 크게 일며 함
성이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가운데 촉병들이 밀려들었다. 왕평, 장의, 마대, 마충
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군사를 이끌어 영채 안에 있는 진랑의 군사를 덮쳤다.
독 안에 든 쥐 꼴이던 진랑이 죽기 살기로 싸웠으나 이미 빠져 나갈 길을 끊
고 있는 촉병을 뚫을 수는 없었다. 다만 뒤따르는 사마의가 구원해 주기를 기
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계책을 편 공명이 사마의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때 뒤따르던 사마의는 촉병의 영채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고 함성
이 요란히 일자 급히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위병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형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불길이 일고 있는 곳으로만 무
작정 치닫고 있는데 갑자기 포 소리가 땅을 뒤흔들더니 북소리와 함성이 일며
왼쪽과 오른쪽에서 촉병이 내달아왔다. 위연과 강유가 거느린 촉병이었다. 캄
캄한 밤중인데다 숨어 있던 촉병에게 도리어 기습을 당한 위병들은 싸우기도 전
에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촉병의 창칼에 찔려 죽거나 상하니 그 수가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다. 살아 남은 자도 제 갈길을 찾아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날 뿐이
었다. 사마의가 구원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진랑은 사마의도 그 지경이 되
고 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수없이 날아드는 촉병의 화살에 맞아 졸개들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가까스로 촉병의 화살을 피해 목숨을 건진 사마의는
뒤따르는 군사만을 이끌고 본채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던 어둠도 삼경 무렵이 되자 이윽고 하늘이 맑아지며 밝은 달이 나타나
촉병의 영채를 밝혔다. 공명은 산 위에서 징을 쳐 군사를 거두었다. 이경 무렵
갑자기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은 공명이 둔갑술을 써 불러모은 것이었다. 삼경
때쯤 하늘이 맑아진 것은 위병이 물러나자 공명이 육정육갑신을 써 구름을 흩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명은 위병을 크게 깨뜨리고 본채로 돌아가자 정문을 끌
어 내 목을 베게 하고, 장수들을 불러모아 다시 위수 남방을 칠 것을 의논했다.
그런 다음 공명은 매일 군사를 풀어 위병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야
말로 촉병을 쓸어 버리려다 거꾸로 많은 군사들만 꺾인 사마의가 성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공명은 수레를 타고 기
산을 내려와 위수의 동쪽과 서쪽의 지리를 살펴봤다. 지세를 이용해서라도 싸움
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는 것이었다. 공명이 수레를 타고 어느 골짜기의 어귀에
이르렀다. 그런데 땅의 형세가 마치 표주박처럼 생겨 군사 1천 명은 넉넉히머무
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양편 골짜기에도 4,5백 명의 군사를 숨길 수 있을 듯
했다. 게다가 뒤에 있는 산은 고리 모양으로 서로 껴안고 있는데 뻗어 있는 가
는 외줄기 길에는 말 탄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공명이 그곳 지세를 살펴보다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기쁜 빛을 감추지 못
하며 길잡이 군사에게 물었다.
"이 곳 골짜기를 무어라고 부르는가?"
"이곳은 상방곡인데, 호로곡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길잡이 군사가 그렇게 대답하자 공명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레를 돌리게했다.
장막으로 돌아온 공명은 비장 두예와 호충을 부르더니 가만히 계책을 일러 주었
다. 이어 군중에 있는 장작 1천여 명을 부러 호로곡으로 들어가게 하여 목우유
마를 만들게 했다. 목우유마란 공명이 발명한 소와 말을 본떠 만든 수레로, 군량
과 무기를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공명은 이어 마대에게 군사 5백을 주어 호로
곡을 지키도록 일렀다.
"장작들을 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외부 사람들도 절대로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하라. 내가 자주 점검하러 갈 것이다. 사마의를 사로잡을 길은 이
계략밖에 없으니 결코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라."
마대가 공명의 영을 받들고 물러났다. 그때 두예와 호충은 호로곡에 이르러
목우유마를 만들고 있었다. 공명은 매일 호로곡으로 나가 그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 보며 작업을 재촉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사 양의가 공명을 찾아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지금 우리의 양초가 모두 검각에 있어 사람과 마소를 옮겨 오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공명이 웃으며 양의를 안심시켰다.
"내가 그 일에 관해서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전에 모아 두었던 목재와 서천에서 구해 들인 목재를 사용하여 지금 목우, 유
마를 만들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게 만들어지면 양초를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된다. 거기다가 그 마소는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되는데다 밤낮으로
지치는 일 없이 양초를 실어나를 수 있다."
곁에 있던 장수들은 공명의 말을 들을수록 더욱 의아스럽고 놀라웠다.
"일찍이 목우, 유마란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나무로 만들 말과 소가
어찌 절로 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승상께서는 어떤 묘법으로 그런 기이한 물건
을 만드실 수 있겠습니까?"
공명이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내가 이미 장작들을 시켜 만들도록 해 두었다. 그러나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
았으니 먼저 목우,유마를 만드는법을 이러 주겠다. 그 크기와 둘레와 길이, 폭
그리고 짜는 법을 여기 그려 줄 터이니 보도록 하라."
공명의 말에 장수들은 모두 기쁨과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공명이 곧 종이
에다 도면을 그리며 목우 만드는 방법부터 설명했다.
"배는 모가 지고 정강이는 굽으며 배에 달린 발이 넷, 머리는 목덜미에 달려
있되 혀는 배에 달려 있다. 많이 실으면 빨리 가지 못하고 홀로 가면 몇십 리를
갈 수 있으나 함께 떼를 지어 가면 30리 정도를 갈 수있다. 구부러진 것은 소
멀리에 해당되고 두 개 나란히 있는 것이 발이며, 가로지른 것이 목, 굴러가는
것이 다리다. 위에 덮은 것은 잔등, 네모난 것은 배, 늘어난 것이 혀이며 울퉁불
퉁한 것이 소의 갈비이다. 새겨진 것이 이빨이고, 삐죽 뻗친 것이 뿔이며 가는
것이 쇠굴레요, 가느다란 것이 소의 꼬리이고 그 위게 볼기짝이다. 이 소에다 끌
채를 두 개 달고 사람이 끄는데 여섯 자를 나가면 소는 네 걸음을 나간다. 사람
은 끄는 데 힘이 들지 않고 소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한 공명은 다시 유마의 모양을 적어 나갔다.
"갈빗대의 길이는 석 자 닷 치에 너비는 세 치이며, 그 두껍기는 두 치 닷 푼
이며 좌우가 모두 같다. 앞 굴대의 구멍은 머리에서 네 치가 떨어져 있으며 지
름이 두 치, 앞다리 구멍의 지름은 네 치 닷 푼이다. 앞에 가로 지른 나무도 이
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무 함이 둘이며, 널반지 두께가 여덟 푼, 길이 두 자 일
곱 치, 높이가 한 자 여섯 치 닷 푼이며, 넓이는 한 자 여섯 치이다. 그리고 유
마의 함 안에는 두 섬 서 말의 양식을 실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네 다리 넓이는
두 치, 두께는 한 치 닷 푼이되 그 만드는 법은 여기 이 그림을 보면 알게 되리
라."
모든 장수들은 공명이 글로 적고 그림을 그려 가며 설명해 주자 한결같이 감
탄해 마지않았다.
"승상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그로부터 며칠 되였다. 드디어 목우,유마가 만들어졌다. 여러 사람들이 보니
살아 있는 소나 말의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산에 오르고 내리는 것을 힘들
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모두들 이 신기한 목우,유마를 보고 기뻐해
마지 않았다. 공명은 우장군 고상에게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목우와 유마를 이
끌어 검각에 있는 군량을 실어 나르게 했다. 목우,유마가 군량을 나르게 되자
조고 험한 검각 야곡 땅에서도 촉병은 군량 나르는 일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 무렵, 촉병과의 싸움에 지고 온 사마의는 근심에 싸여 있었다. 함부로 나가싸
울 수도 없는데다 촉병을 물리칠 만한 계책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런 어느 날 촉진을 살피러 갔던 군사가 달려와 고했다.
"촉군이 목우,유마란수레를 만들어 양초를 실어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은 힘들이지 않고도 그 수레를 끌 수 있는데다 먹이를 주지 않고도 양초를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사마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기대
하고 있던 것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굳게 지키고 있을 뿐 나아가지 않을 것은 적이 양초를 댈 수 없는 지경
에 이르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걸 만들어 쓰고 있으니 물
러나기는커녕 공명은 싸움을 오래 끌 생각으로 계책을 세우고 있는 듯하다. 적
이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제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탄식하던 사마의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장호와 악
침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각기 군사 5백을 거느리고 가 야곡 오솔길에 숨어 있다가 촉병이
목우,유마를 몰고 지나가거든 다 지나가게 놓아 두었다가 뒤에서 덮쳐들라. 그런
다음 네댓 대만 끌고 오도록 하라."
사마의는 공명이 만든 목우,유마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해 그걸 한번 볼
양으로 장호와 악침을 보낸 것이었다. 장호와 악침은 사마의의 영을 받아 군사
들을 모두 촉병으로 꾸미게하여 밤중에 오솔길로 나아가 길 양쪽에 숨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촉장 고상이 목우,유마를 몰고 왔다. 사마의가 이른 대로
그들을 지나가게 한 뒤 갑자기 양쪽에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뒤로부터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내닫는 위병을 보자 뒤처져 가던 촉병들은 크게 당황
해 이끌어 가던 목우,유마 몇 필을 내팽개친 채 황망히 달아났다. 장호와 악침
은 그 목우,유마 몇 필을 이끌고 본채로 돌아왔다. 사마의는 장호와 악침이 끌
어온 목우,유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자유
자래로 움직여 정말 살아있는 말이나 소와 다름없었다. 사마의는 몹시 기뻐하
며 말했다.
"공명이 이런 수법을 쓴다면 나라고 쓰지 못할 게 무엇이겠느냐?"
사마의는 곧 1백여 명의 목공들을 불러모아 목우,유마를 뜯어보고 그대로 만
들게 했다. 목공들은 공명이 만든 목우,유마를 뜯어보고 나무의 길이와 넓이,
두께 등을 똑같이 깎아 맞추었다. 보름쯤이 되자 공명이 만든 것과 똑같은 목우
유마 2천여 개가 만들어졌다. 이에 사마의는 진원장군 잠위에게 명을 내려 1천
군사를 거느리고 목우,유마를 이용하여 농서로부터 군량을 실어나르게 했다. 위
병 또한 군량 나르는 걱정을 덜게 되자 장졸들은 모두 기뻐해 마지 않았다. 한
편, 목우,유마를 위병들에게 빼앗기고 본채로 돌아간 고상은 공명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공명은 목우,유마를 빼앗긴 고상을 꾸짖기는커녕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위병이 그걸 빼앗아 갈 걸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몇 필
의 목우와 유마를 잃었으나 곧 머지않아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
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공명의 말을 들은 여러 장수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위병에게 목우,유마를 빼앗겼는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는다 하십니까?"
공명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마의가 그걸 빼앗아 갔으면 반드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 것이다. 그때 내
가 좋은 계책을 베풀리라."
공명이 그렇게 말했지만 장수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
칠 후였다. 위의 영채를 살피고 있던 군사가 급히 뛰어들더니 공명에게 알렸다.
"위병들이 우리와 똑같은 목우와 유마를 만들어 농서에서 군량과 마초를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과연 내가 짐작했던 대로구나!"
공명은 곧 왕평을 불렀다.
"그대는 군사 1천을 이끌고 위병으로 꾸며 밤을 도와 북쪽 진으로 가도록 하
라. 위병을 만나거든 군량을 나르는 군사라고 거짓말을 하고 군량을 나르는 군
사들 틈에 끼여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그들을 죽여 버리거나 쫓아 버려라. 그런
다음 목우,유마를 끌고 돌아오도록 하라. 북쪽진을 거쳐 오게 되면 틀림없이 위
병이 뒤쫓을 것이다. 그러면 목우와 유마의 몸 속에 있는 혀를 비틀어 두라. 그
러면 그것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그대로 내버리고 달아나도록 하라. 목우와
유마가 움직이지 않으니 위병들은 그것들은 뒤찾는다 해도 다시 끌어갈 수가 없
을 것이다. 위병들이 목우와 유마를 끌어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때 내가 다시
군사를 내보낼 테니 너희들은 그때 함께 힘을 합해 위병들을 물리치도록 하라.
그런 뒤 목우와 유마의 혀를 제자리로 돌려 끌어오도록 하라. 그러면 적은 틀림
없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함부로 뒤쫓지도 못하고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왕평이 명을 받고 나가자 공명은 장의를 불러 명했다.
"그대는 5백의 군사를 육정육갑의 신병처럼 꾸미도록 하라. 귀신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몸은 짐승의 모양을 하고 다섯 가지 물감을 써서 얼굴을 여러 가지
괴이한 모습으로 칠하도록 하라. 한 손에는 수놓은 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칼
을 잡게 하라. 허리에는 화약을 담은 호리병을 차고 산길 옆에 숨어 있다가 목
우와 유마가 오거든 호리병에 불을 붙어 터뜨리며 일제히 내달아 목우와 유마를
빼앗도록 하라. 적은 우리 군사의 귀신 같은 모습에 놀라 감히 뒤쫓지 못할 것
이다."
장의가 공명의 명을 받고 떠나자 또 위연과 강유를 불렀다.
"그대들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북원으로 나가 목우와 유마를 빼앗아 오는 우
리 군사들을 지켜라."
공명은 또한 요화와 장익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5천 인마를 거느려 사마의가 뒤쫓아오는 길을 막도록 하라."
공명은 또한 요화와 장익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5천 인마를 거느려 사마의가 뒤쫓아오는 길을 막도록 하라."
공명은 마충과 마대에게도 명을 내렸다.
"그대들은 2천 명의 인마를 이끌어 위수 남쪽으로 가서 싸움을 돋우도록 하라."
공명은 두 사람을 끝으로 그렇게 명을 내려 모두 떠나가게 했다.
공명이 이런 계책을 베풀고 있는 줄을 알 리 없는 위의 장수 잠위는 군사들을
이끌어 목우와 유마를 군량을 나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앞쪽의 군사가 달려와
전했다.
"우리의 순시병이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잠위가 그들을 살펴보니 틀림없는 위병이었으므로 안심하고 그대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하여 순시병과 합쳐 다시 길을 갈 때였다. 홀연 함성이 크게 터지더니
앞쪽에서 크게 혼란이 일어났다. 위병으로 꾸몄던 촉병들이 갑자기 위병을 덮치
는가 했더니 앞쪽에서도 촉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촉병을 거느리고 나타난 장수
가 소리쳤다.
"촉의 대장 왕평이 여기 있다. 칼을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만을 살려두겠다."
난데없는 촉병의 기습에 위병은 크게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제대로 싸워 볼 겨
를도 없이 촉병의 칼날에 쓰러졌다. 잠위는 왕평과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왕평
의 칼을 맞아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잠위의 목이 떨어지고 보니 그나마 몇 남
지 않은 졸개들은 뿔뿔이 흩어지기에 바빴다. 왕평은 달아나는 위병을 쫓는 대
신 목우와 유마를 빼앗아 본채로 향했다. 그때 목숨을 건진 잠위의 졸개들이 곽
회에게 달려가 목우와 유마를 빼앗긴 사실을 알렸다. 목우와 유마를 빼앗겼다
는 말에 곽회는 깜짝 놀라며 급히 군사를 수습해 빼앗긴 군량을 도로 찾으러 갔
다. 곽회가 뒤쫓아오는 걸 알게 된 왕평은 공명이 일러준 대로 얼른 목우와 유
마의 혀를 돌려 놓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빼앗긴 목우,유마를 되찾게 된 곽회
는 달아나는 촉병을 뒤쫓지 않은채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되찾은 목우,유마를 끌고 오라."
군사들은 곽회의 명에 따라 우르르 달려가 목우,유마를 끌어가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밀고당겨도 목우,유마는 옴짝달짝도 하지 않았다. 그토
록 잘 굴러가던 목우,유마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자 위병들은 몹시 놀라며
이상스럽게 여겼다. 서로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 뒤
쪽에서 북 소리와 함성이 크게 일며 촉병이 밀려 나왔다. 위연과 강유가 거느
린 군사들이었다. 달아나던 왕평도 갑자기 군사를 되돌려 달려들었다. 앞과 뒤로
촉병을 맞은 곽회는 계책에 빠졌음을 깨닫고 급히 산 속으로 길을 찾아 달아나
버렸다. 곽회가 달아나자 왕평의 군사들은 목우,유마의 혀를 반대로 비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꼼짝도 않던 목우,유마가 바람같이 달렸다. 왕평은 목우,유마를
이끌며 군사들을 재촉해 촉진으로 달려갔다. 달아나던 곽회가 그걸 보자, 다시
군사를 되돌려 왕평을 뒤쫓았다. 그러나 뒤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홀연 산 뒤
쪽에서 연기가 자욱이 일며 한떼의 신병이 쏟아져 나왔다. 손에는 각기 깃발과
칼을 들었는데 그 모습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기괴했다. 그들은 나는 듯
이 달려와 목우, 유마를 호위해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귀신이 촉병을 돕고 있음이 아닌가."
곽회는 놀랍고 두려워 얼굴색이 달라지며 중얼거렸다. 곽회가 그러니 졸개들
은 감히 그 뒤를 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콩을 심는 육손과 호로곡의 지뢰밭
육손은 위주 조예를 꾀어내기 위해 계략을 쓴다. 한편 호로곡으로 사마의를
끌어들인 공명은 큰 승리를 기대했으나 사마의는 하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
아난다. 장기전으로 사마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공명은 군무를 돌보느라 몸이
쇠약해진다. 한편 사마의는 북쪽진에 있던 군사들이 싸움에 져서 ㅉ기고 있다
는 소식을 듣자 급히 군사를 거느려 구원하러 갔다. 한동안 말을 달리는데 홀연
한 소리 포향이 크게 일더니 산골짜기에서 두 갈래의 군사가 달려 나왔다. 사
마의가 깜짝 놀라 보니 앞세운 깃발에는 '한장 장익,요화'라고 씌어 있었다. 사
마의가 졸개들을 호령하여 싸우려 했으나 군사들은 뜻밖의 기습에 이미 겁을 먹
고 싸우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되니 촉병들의 말발굽에 밟히거나
창칼에 짤려 죽는 군사가 헤아릴 수 없었다. 사마의는 하는 수 없이 장수 하나
거느리지 못한채 혼자 나무가 빽빽이 늘어선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요화가 그
런 사마의를 뒤ㅉ는 가운데 장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사마의는 요화가
사로잡을 기세로 급하게 뒤ㅉ아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무 사이를 빠져 달아
났으나 마음만 급할 뿐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요화는 어
느새 등뒤로 바싹 다가오고 있었다. 요화가 칼을 쳐들어 사마의를 한칼에 쳐죽
일 듯이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사마의를 향해 내리친 칼은 나무를 안고 도는
사마의의 어깨를 벗어나 나무 등걸에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요화가 너무 힘차
게 내리쳤기 때문에 그 칼을 뽑을 동안 사마의는 말을 박차 저만치 숲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요화는 손안에 들었던 큰 고기를 놓친 듯한 안타까움에 다시
사마의의 뒤를 ㅉ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사마의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다
만 사마의의 황금투구만이 땅위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요화는 그 투구를 말
에 매달고 투구가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요화는 그 투구를 말에 매달고 투구가
떨어져 있던 동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러나 사마의는 그 투구를 일부러 떨
어뜨린 것이었다. 요화가 투구 떨어진 곳으로 뒤ㅉ을 것을 알고 사마의는 짐짓
투구를 동쪽 방향에 떨어뜨려 놓고 그 반대쪽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요화에게
있어, 아니 촉에 있어서도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친 격이었다. 만약 이때 요화가
그 반대쪽으로 사마의를 뒤ㅉ았더라면 그 후의 촉이나 또 위의 역사도 달라졌으
리라. 요화는 30여리나 사마의를 찾아 달렸으나 이미 반대쪽으로 달아난 사마
의는 찾을수 없었다. 사마의를 찾아 이리저리 내닫다 산골짜기를 빠져 나오는데
강유를 만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함께 본채로 돌아갔다.
요화가 본체에 이르자 이미 장의는 목우,유마를 몰아 본채로 돌아와 있었다.
위병의 목우,유마에 있던 1만석이 넘는 군량을 거두어 들인 셈이 있었다. 공명
은 사마의의 황금투구를 빼앗아 온 요화에게 이번 싸움의 으뜸가는 공을 돌렸
다. 그런 공명의 처사에 위연이 불평을 했으나 공명은 못 들은척 하고 입을 열
지 않았다. 그런 공명의 얼굴에 한가닥 쓸쓸한 그림자가 스치는 듯했다.
'아, 지금은 관운장도 가고 익덕도 없구나. 그 수많던 장수도 어느새 다 떠나고
없단 말인가.'
공명은 문득 속으로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무렵,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사마
의는 영채로 돌아왔으나 몹시 괴로웠다. 공명의 계책에 빠져 많은 군량과 군사
를 잃고 그야말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돌아온 셈이 아닌가. 사마의가 무거운
얼굴로 괴로움에 싸여 있는데 문득 위주 조예로 하여금 그들을 막게 하라. 이때
에 만약 촉의 계략에 말려들어 싸움을 벌이게 되면 위에 이로움이 없을 터인즉
싸우지는 말고 굳게 지키도록 하라. 위주의 조서는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사마
의로서는 지금 촉과 다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위주의 조서를
받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며 구덩이를 깊이 파고 성을 높이 쌓아 방비만을 굳게
할 뿐 나가 싸우지 않았다. 그때 위주 조예는 손권이 세갈래로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맞서 세 갈래로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에 맞서 세갈래로 군사를 내기로 하였다. 유소에게 군사를 거느려 강하로 가게
하고, 전예를 양양으로 보내고, 조예는 스스로 대군을 거느려 만총과 더불어 합
비로 향했다. 조예와 함께 떠난 만총은 선봉이 되어 소호어귀에 이르러 장강의
동쪽 기슭을 살펴 보았다. 수많은 전선이 늘어서 있고 오색 깃발이 열을 지어
펄럭이고 있는 것이 보기에도 자못 대오가 정연했다. 만총이 조예를 찾아 아뢰
었다.
"오병이 멀리서 온 우리를 가볍게 여겨 아직 아무런 대비가 없을 듯 합니다.
오늘 밤 그 틈을 노려 그들의 수채를 급히 들이친다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총이 서슴없이 말하자 조예는 그 기개가 미덥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경의 말이 바로 짐의 뜻과 같소."
조예는 만총의 말에 찬동하며 곧 용맹이 뛰어난 장구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나가되 각기 불을 붙일 기구를 갖추어 소호 어
귀를 치도록 하라."
이어 만총에게도 5천의 인마를 이끌어 동쪽 언덕을 따라 적을 치도록 했다.
그날 밤이 되자 장구와 만총은 각기 군사를 거느려 소호 어귀로 나아갔다. 소
호의 물결은 잔잔하고 달빛은 밝은데 들리는 소리라고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뿐이
었다. 오병은 그날 밤, 위병이 기습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듯 방비가 없
었다. 위병은 오병의 수채 가까이에 이르자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영채를 급습
했다. 뜻밖의 기습에 아무런 준비가 없던 오병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져 싸워 볼
생각도 못하고 뭉그려졌다. 우왕좌왕하며 저희 편끼리 부딪다 달아나기에 바빴
다. 위병은 지니고 간 불지르는 기구들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순
식간에 오병의 전선과 군량과 군기기 불에 타고 그 불은 다음배로 옮겨 붙었다.
많은 전선이 불에 타 재로 변해 버렸다. 그때 오병을 거느린 대장을 제갈근이
었다.
적벽 싸움 당시 전선에서 화공을 베풀어 크게 위병을 깨뜨린 이래 이제 그 화
공에 의해 크게 패한 것이다. 제갈근은 마침내 패군을 거느린채 면구로 달아나
고 위병은 첫 싸움에서 오병을 크게 이기고 돌아갔다. 그 다음 날이었다. 제갈
근이 위병과의 싸움에 크게 패한 소식은 대도독 육손에게 전해졌다. 육손은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주상께 표를 올려 신성을 에워싸고 있는 우리 군사로 하여금 위병이 돌
아갈 길을 끊게 하겠다. 내가 따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 앞을 치면 적은 일시
에 앞뒤로 적을 맞게 되니 크게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우리는 북 소리 한번으로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장수들도 모두 육손의 계책에 찬동했다. 육손은 곧 손권에게 올릴 표문을 써
서 젊을 장수를 뽑아 은밀히 신성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그 젊은 장수는 나루
터를 건너다가 숨어서 살피고 있던 위병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위병이 그를 군
중으로 끌고 가 위주 조예 앞으로 데리고 갔다. 위병이 그의 몸을 뒤져보니 품
속에서 표문이 나왔다. 조예가 그 표문을 읽어 보더니 문득 감탄해 마지 않았
다.
"동오의 육손이 참 놀라운 지략을 가졌구나."
조예는 그 장수를 옥에 가두게 하고 유소에게 명을 내려 손권이 이끌어 오는
군사를 단단히 방비하게 했다.
한편, 첫 싸움에 크게 진 이래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하던 제갈근에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마침 여름철이라 군사들과 말
이 날아 갈수록 줄어들자 제갈근이 하는 수 없이 육손에게 글 한통을 보내 군사
들을 물릴 뜻을 전했다. 그러자 육손은 그 글을 가져온 사자에게 일렀다.
"내게 따로 좋은 방책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전하라."
제갈근의 사자는 그 길로 돌아가 육손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제갈근은 그 말
만 듣고는 육손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사자에게 물
어 보았다.
"지금 육 도독은 무엇을 하고 계시던가?"
"군사들에게 영채밖에 콩과 팥을 심게 하고 도독께서는 장수들과 더불어 원문
밖에서 활쏘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자가 본대로 대답했다. 그 뜻밖의 대답에 제갈근은 몹시 놀랐다. 제갈근은 육
손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그 길로 육손에게 달려가 물었다.
"지금 조예가 몸소 나와 그 형세가 큰데다 위병들의 사기가 드높습니다. 도독
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막으실 작정이십니까?"
제갈근이 의아스런 얼굴로 그렇게 묻자 육손이 가만히 대답했다.
"내가 얼마전 사람을 보내어 폐하께 표를 바들어 올렸소이다. 그런데 그 사람
이 위병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꾸며놓았던 계책이 모두 적에게 알려
지고 말았소. 이미 우리의 계책을 적이 알게 되었으니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싸워 보았자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군사를 물리느니
만 못할 것이오. 이미 주상께 표문을 다시 올려 천천히 군사를 물리기로 했소이
다."
육손의 말에 제갈근은 더욱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도독께서 그렇게 작성하셨다면 빨리 군사를 물리시는 것이 좋을 텐데 이렇게
늑장을 부리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서둘러 군사를 물려서는 아니되오. 지금 서둘러 물러나면 위병이 반드시 기세
가 올라 뒤ㅉ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가 싸움에 지는 길을 만드는 격이 되
오. 그러니 공께서도 배를 재촉해 적에게 맞설듯 하며 천천히 물러나시오. 나도
양양으로 밀고 나갈 것처럼 꾸미어 적으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도록 하면서 물
러나겠소. 그러면 적은 함부로 우리를 뒤ㅉ지 못할 것이오."
육손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제갈근도 그제야 그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따랐다. 제갈근은 영채로 돌아오자 곧 전선에 명하여 떠날 채비를 갖추
게 했다. 육손도 대오를 정돈하고 위세를 부리며 양양으로 나아갔다. 동오군을
살피던 세작이 그런 육손의 움직임을 곧 조예에게 알렸다.
"동오군이 군사를 내었습니다. 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미 한 차례 동오군을 크게 깨뜨렸던 장수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했다.
그러나 조예는 육손의 재주를 잘 알고 있는 터라 허락치 않았다.
"육손은 계략이 뛰어난 자이다. 우리를 꾀어내기 위한 수작일지도 모르니 함부
로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오병을 살피던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동오의 세 갈래 인마가 모두 물러가고 없습니다."
위주 조예는 얼른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
니 오래지 않아 돌아와 과연 모두 물러났다는 것이었다.
"육손의 군사 부림이 손자,오자에게 뒤지지 않는구나! 그가 있는 한 동오를 쳐서
빼앗기는 쉽지 않겠구나!"
순식간에 그물에서 벗어난 새떼를 바라보듯이 조예는 분함을 참지 못하면서도
육손의 군사 부리는 솜씨에 그저 놀라며 감탄했다. 위주 조예는 그날로 영을
내려 장수들에게 험한 길목을 굳게 지키도록 하고 스스로는 대군을 거느리고 합
비에 머물면서 동오군의 형세를 자세히 살폈다. 그무렵, 공명은 기산에서 위군
이 움직이지 않자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러 싸울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군량
을 성도에서 실어오지 않고도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둔전을 일궈 농사를
짓게 했다. 공명은 그곳의 논밭을 거두어 촉병이 그 중 하나를 가꾸고 그곳 백
성들이 나머지 둘을 가꾸는 식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거두어들인 곡식을 나눌
때는 촉병 하나에 백성 두 사람의 비율로 나누니 백성들도 공명의 너그러움에
감사해하며 안심하고 농사를 지었다. 한편 촉병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위의
세작이 그 소식을 급히 위의 영채로 전했다. 사마사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대도
독 사마의를 찾아가 말했다.
"촉병은 우리에게서 많은 군량을 빼앗아 갔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군사들로 하
여금 우리 백성들과 함께 위수 가에서 농사를 짓게 하며 오래 머물러 싸울 계책
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는 곧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아버님께서
는 어찌하여 보고만 계십니까? 영채 안에만 계실 것이 아니라 공명과 한바탕 싸
워 승패를 가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마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폐하의 명을 받들고 굳게 지키고 있는 몸이다. 가볍게 나아가서는 아니
된다."
그때 장수 한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촉의 장수 위연이 전에 도독께서 잃어버린 황금투구를 칼에 꿰어 들고 나와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장수들이 모두 분함을 참지 못하며 뛰어나가 싸우려 했
다. 그러자 사마의가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말렸다.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작은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 하였다. 굳게
지키고만 하고 함부로 나가 싸우지 않도록 하라."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니 장수들도 하는 수 없이 분한 마음을 달래며 나가지
않았다. 위연은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위병이 나오지 않자 하릴없이 돌아가
고 말았다. 공명은 사마의가 나오지 않았으나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 것을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공명은 마대에게 명하
여 호로곡에 은밀히 나무 울타리를 세우게 한후, 그안에 구덩이를 파게 했다. 그
구덩이에는 불 잘붙는 장작과 마른 풀, 유황등을 뿌려 쌓아 놓은 뒤에 그 둘레
의 산위에는 마른 풀과 나무로 초가집들을 지어 놓게 했다. 그 초가집 안팎에는
모두 지뢰를 묻게 하여 불만 붙으면 주변이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게 했다. 모
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공명은 다시 마대에게 가만히 일렀다.
"호로곡 뒤쪽으로 나가는 길을 모두 막고 골짜기 속에 군사를 매복시켜라. 그
리고 사마의가 그곳으로 ㅉ아 들어오거든 즉시 지뢰와 풀더미에 불을 지르도록
하라."
사마의를 불구덩이 속으로 물아넣으려는 공명의 계책이었다. 공명은 골짜기
어귀에 군사들을 세우되 낮에는 칠성기를 지니게 하고, 밤에는 등불 일곱 개를
밝혀 군호로 삼게 했다. 마대가 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자 공명은 이
번에는 위연을 불러 명을 내렸다.
"군사 5백을 이끌어 가서 적의 영채를 치고 들어가라. 그러나 싸우다 지쳐 달
아나는 척하기를 거듭하며 사마의를 꾀어 내도록 하라. 사마의는 반드시 뒤ㅉ을
것이니, 그때가 낮이면 칠성기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라. 그러나 만약 밤이면 일
곱 개의 등불이 반짝거리는 쪽으로 달려가도록 하라. 사마의를 호로곡으로 꾀어
내면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그를 사로잡겠다."
위연도 공명의 명을 받자 곧 군사를 이끌며 떠났다. 공명은 다시 고상을 불렀
다.
"그대는 목우,유마 2,30마리나 4,50마리씩 떼를 지어 이끌되, 거기에 곡식을 싣
고 산길을 오락가락하라. 만일 적이 나타나면 목우,유마를 짐짓 빼앗기는 척하며
넘겨 주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가 공을 세우는 것이다."
고상은 까닭은 알 수 없는 명이었으나 두말 않고 공명의 명에 따라 목우,유마
를 이끌어 갔다. 공명은 그렇게 군사들을 일일이 배치시켜 떠나 보냈다. 그렇게
되니 남은 군사는 한낱 농사를 짓는 군사들뿐이었다. 공명은 그들에게도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위병들이 오거든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달아나도록 하라. 그러다가
사마의가 나오거든 그때는 모두 힘을 합해 위수 남쪽을 쳐서 그가 돌아갈 길을
끊도록 하라."
공명은 장졸들에게 명을 내린 후에 몸소 군사 한 떼를 이끌어 호로곡 가까이에
진을 쳤다. 이때 위군에서는 하후혜,하후화가 영채로 들어가 사마의에게 말했다.
"촉병이 사방에 영채를 세우고 농사를 짓는 걸 보니 오래 머무를 계책을 펴고
있는 듯 합니다. 이때 그들을 들이치지 않는다면 적은 뿌리를 깊이 박고 말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뿌리뽑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그 말을 듣고도 담담한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공명의 계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도독께서는 항상 의심만 하고 계시니 언제 적을 쳐 없앨 수 있겠습니까? 저
희 형제가 힘을 다해 죽기로 싸워 나라를 위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요."
사마의가 끝내 움직을 기색이 없자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마의
도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말릴 수가 없는지 그들에게 나가 싸울 것
을 허락했다.
"정히 그렇다면 너희 둘이 길을 나누어 나가 싸우도록 하라."
사마의가 하후형제에게 각기 군사 5천씩을 주자 그들은 그 길로 길을 나누어
나아갔다. 두 사람이 두 갈래로 나누어 한동안 나아가는데, 맞은편에서 목우,유
마를 이끌어 오는 촉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촉병을 보자 크게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 서슬에 깜짝 놀란 듯 촉병은 목우,유마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
다. 두 사람은 달아나는 촉병을 뒤ㅉ는 대신 두고 간 목우,유마를 거둘어들여 영
채로 끌고 갔다.
다음 날이 되자 영채를 나선 하후혜와 하후화는 이번에는 1백여 명의 촉병을
사로잡았다. 사마의가 두 사람의 공을 차하한 뒤 잡혀 온 촉병들에게 물었다.
"공명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잡혀온 촉병들이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했다.
"제갈 승상께서는 도독께서 나와 싸우려 하지 않자 저희들에게 논밭을 갈게하
며 오랫동안 머무를 계책을 세우셨습니다. 저희들은 논밭을 갈고 있다가 사로잡
힌 것입니다."
사마의가 그 말을 듣더니 잡아온 촉병들을 모두 놓아주게 했다. 그러자 하후
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여 그들을 모두 돌려 보내려 하십니까?"
"저따위 졸개들을 죽인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살려서 돌려 보내면 저들
의 입에서 위나라 장수들이 너그럽고 어질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자연히 촉병은 우리와 싸울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적의 마음을
흐트러 놓은 것이 옛 여몽이 지난날 형주를 뺏을 때 쓴 계교였다."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앞으로도 촉병을 사로잡더라도 모두 돌려
보내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적병을 사로잡아 온 장졸들에게도 두터운 상을
내리겠다고 일렀다. 한편 공명은 사마의를 꾀어 내기 위한 계책을 쉬지 않고
베풀고 있었다. 고상에게 명하여 군량을 나르는 척하고 목우,유마를 이끌어 호로
곡을 오르내리게 했다. 하후혜와 하후화는 그런 고상을 쳐서 보름 동안에 몇 차
례나 목우,유마를 빼앗고 촉병을 사로잡았다.
목우,유마를 여러차례 빼앗고 촉병을 사로잡아 오자 사마의도 문득 마음이 달
라졌다. 어쩌면 공명도 마음이 초조해져 목우,유마를 빼앗겨 가면서까지 싸움을
서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마의가 촉진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잡혀 온 촉병에게 물었다.
"공명은 지금 어디 있는가?"
"승상께선 기산에 머무르시지 않고 호로곡에서 서쪽 10리쯤 되는 곳에다 영채
를 세우고 계십니다."
촉병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마의는 촉병의 움직임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본 다음 그들을 놓아주게 했다. 지난날 여몽이 베푼 계책을 쓰기 위
해서였다. 촉병들이 모두 돌아가자 사마의도 마음을 정한듯 장수들을 불러들인
후 명을 내렸다.
"지금 공명은 기산을 비워두고 샌퉴?맕4촉병은 지금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노성에서 한창 보리 타
작을 하고 있다니 촉병을 칠 더없이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사마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겪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곽회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때 공명이 그런 짓거리로 우리를 속였을 뿐입니다. 이제그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뒤를 칠
터이니 도독께서는 쳐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노성을 어렵지 않게 빼앗을 수 있
으며 공명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끝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기운을
내어 곽회의 말을 좇기로 하고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노성으로 향했다. 노
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위병이 길을 재촉해 가면 밤중이면 이를
수 있는 거리였다. 노성으로 가는 도중에 갯벌과 강 이외에에는 모두 한항 무르
익은 보리밭뿐이었다. 그때 노성에 있는 촉병들은 보리 타작이 한창이었다. 그런
데 공명이 문득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영을 내렸다.
"오늘 밤에 반드시 적이 올 것이다. 내가 살펴보니 노성 동서쪽 보리밭이 군사
들을 숨겨 둘 만한 곳이다. 누가 가서 매복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강유와 마대,위연,마충이 한꺼번에 나섰다. 네 장수가 앞을 다투며 나서자
공명은 몹시 기뻐했다. 공명은 곧 강유와 위연에게 군사 2천을 주며 동남과
서북쪽에 숨어 있게 하고 마대와 마충에게도 각기 군사 2천을 주며 서남과 동
북쪽에 숨어 있게 했다.
"호포 소리가 울리거든 네 방향에서 일제히 내닫도록 하라!"
공명이 네 장수에게 그렇게 이른 뒤 제각기 군사를 거느린 채 화포를 지니고
나아가 보리밭 속에 숨었다. 이윽고 사마의가 해가 저물녘이 되자 노성 아래
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날이 밝을 때 공격하면 성 안에서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니 밤이 늦기를 기
다려 갑자기 치고 들어가야겠다. 이 성은 성벽이 낮은데다 해자도 그리 깊지
않으니 깨뜨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사마의의 말에 따라 성 밖에서 숨을 죽이 채 밤이 되기를 기다
렸다. 그때 곽회도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 사마의의 군사에 함세했다. 날이
어두워진 초경쯤이 되자 위군은 크게 북소리를 울리며 노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자 촉병들이 성벽 위에서 활과 쇠뇌를 위병들의 머리 위에 쏘아붙였다. 위
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돌 때문에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홀연 포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포 소리를 군호삼아 군사들이 몰려
오고 있는 듯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어느 쪽 군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위병들은 크게 당황하는 가운데 대오고 뭐고 할 것 없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곽회가 의심이 들어 얼른 뒤쪽의 보리밭을 살펴보
게 했다. 이에 위병이 모두 보리밭으로 달려가는데 그때 홀연 사방에서 불길
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촉병이 달려나왔다. 사방의 보리밭이 모두 촉병으
로 변한 듯 일시에 쏟아져 나와 위병을 향해 덮쳐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맞춰 노성의 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성 안의 촉병들도 성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과 밖에서 호응해 위군을 향해 짓쳐드니 이미 어지러워져 있던 위병
들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촉병의 창칼에 의해 위
군의 시체가 얕은 해자를 메웠다. 곽회의 말을 듣고 단번에 노성을 깨칠 기세
로 달려왔던 사마의였으나 일이 그 지경이 도니 별수 없었다. 황망히 패한 군
사를 수습해 겹겹이 둘러싼 적을 뚫고 산마루로 달아났다. 곽회 또한 패잔병을
이끌고 산 뒤쪽으로 달아났다. 위병이 수많은 시체만을 남긴 채 썰물처럼 빠
져 나가자 공명은 성 안으로 들어가 네 장수로 하여금 성의 사방을 굳게 지키게
했다. 한편, 한바탕 크게 패한 싸움 끝에 겨우 숨을 돌린 곽회가 사마의를 찾
아와 말했다.
"촉병과 싸운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더 이상 쳐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리칠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3천여 군마를 잃었습
니다. 무슨 방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일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별달리 계책이 떠오르지 않
아 답답한 얼굴로 곽회에게 물었다.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회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격문을 옹주와 양주로 보내 그곳의 두 인마를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저는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 적이 돌아갈 길을 끊겠습니다. 적의 양초를 실어나르는
길을 끊으면 절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적을 치면 그들도 별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마의가 곽회의 말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곧 격문을 써서 옹,양 두 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하루를넘기지 않아 손례가 옹주,양주의 인마를 이끌어 왔
다. 손례가 인마를 이끌어 오자 사마의도 꺾였던 기세가 되살아났다. 즉시 손례
로 하여금 곽회와 더불어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게 했다. 그때 공명은 노성에 머
물면서 위군이 성을 치러 오지 않자, 강유와 마대를 불러들이고 말했다.
"위병이 험한 상을 등지고 우리와 싸우려 하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 첫째로는 우리가 거두어들인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로
는 군사를 검각으로 돌려 우리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고자 함이다. 그대들
은 각기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그곳의 험한 길목을 지키고 있도록 하
라. 위병은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보고도 절로 물러날 것이다."
공명의 영을 받은 두 장수는 즉시 군사를 이끌어 검각으로 떠났다. 그 때 장
사 양의가 들어와 공명에게 말했다.
"지난번 승상께서 이르시기를 백일마다 한 차례씩 군사를 교대하기로 하셨습
니다. 이제 그 기한이 되었습니다. 한중에 있는 군사들이 이미 천구에 이르렀다
는 공문이 왔습니다. 이곳에 있는 군사 8만 중에 4만은 한중으로 돌려 보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렀다.
"이미 정한 일이니 곧 실행하라."
이에 만 군사들이 한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손례가 옹주와 양주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 곽회와 함께 검각을 치러 간
다고 합니다.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어 노성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뜻밖에 위병이 대군을 이끌어 노성의 앞과 뒤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양의도
생각이 달라졌다. 급히 공명에게 말했다.
"위병이 급한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승상께서는 군사를 교대하시는 것
을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십시오. 그 군사들로 하여금 우선 적을 물리치게 한
후 한중의 군사들이 이곳에 이르른 다음에 돌려 보내도록 하십시오."
양의의 말에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그건 아니 된다. 내가 장수와 군사를 부림에 있어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 왔
다. 이미 내가 영을 내린 터에 어찌 믿음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군사는 모두 채비를 마쳤을 터이고 그 부모와 처자는 사립문에 기대
서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큰 곤경에 빠지
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을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곧 영을 내려 한중으로 돌아갈 군사들을 그날로 떠나게
했다. 공명의 영을 받은 군사들은 모두 감격해 소리쳤다.
"승상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들이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
습니까? 바라건대 저희로 하여금 힘을 다해 위병을 깨뜨려 승상의 은혜에 보
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사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차례이다. 어찌하여 여기 머물러 싸우려
하는가? 모두들 돌아가도록 하라."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싸워 위병을 무찌르고 가겠습니다."
공명의 타이름을 듣고 군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공명이 고집을
부리는 군사들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성에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위병이 이르
거든 틈을 주지 말고 급히 치도록 하라. 그것이 바로 편이 앉아 있다가 먼길
을 와 피로한 적을 쳐부수는 병법이다."
군사들은 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성 밖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위병이 이
르기를 기다렸다. 그때, 사마의를 돕기 위해 달려온 옹주,양주의 군사가 길을
재촉해 성 가까이에 이르렀다. 막 영채를 세우고 쉬려고 할 때였다. 성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촉병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들을 덮쳤다. 촉병들은 날
래기 이를 데 없었고 장수들의 용맹 또한 하늘을 찔렀다. 공명의 은혜에 보답
하기 위해 편히 쉬다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니 옹주와 양주의 지친 군사들이
당해 낼수가 없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지며 달아나자 촉병들이 그
뒤를 쫓아서 죽이니 시체가 들에 널려 가득하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다
시 위병을 크게 깨뜨리자 공명은 군사들을 서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고 치하했
다. 그런데 공명이 옹주,양주의 군사를 크게 물리쳐 이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영안성의 이엄으로부터 뜻밖에 전갈이 날아왔다. 공명은 이엄이 보낸 급보를 뜯
어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요사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오는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위와 화친을 청했
다 합니다. 또 위는 촉을 치자고 선동하고 있으나 다행이 오는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엄이 미리 이 일을 알아 냈기로 승상께 알려 드
리는 바이며 급히 좋은 계책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명은 그 글을 읽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글대로 위와 동오
가 힘을 합해 밀려든다면 성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급한 지경에 이를 것이
었다. 공명이 여러 장수를 급히 불러들이고 말했다.
"만약 동오에서 촉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큰일이다. 내가 급히 돌아
가야 하리라."
공명은 기산에 있는 전군에게 영을 내려 대채의 인마를 서천으로 물러나게 했
다.
"사마의는 내가 이곳에서 군사들과 함께 있는 줄 알 테니 함부로 뒤쫓지는 않
을 것이다."
이에 왕평,장의,오반,오의는 길을 나누어 서서히 서천으로 물러났다. 공명과 그
곳에서 맞서던 장합은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자 의아해했다. 급히 뒤쫓아 촉
병을 칠까 했으나 공명의 속임수에 하도 여러 번 속아왔던 터라 감히 뒤쫓지 못
하고 사마의에게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장합이 상규에 이르러 사마의를 보
자 물었다.
"지금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촉병이 물러나는 것입니
까?"
그러나 사마의 역시 조심스럽기는 장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명이 속임수가 많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될 것
이오. 굳게 지키면서 그들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대장 위평이 나서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촉병이 기산의 영채까지 거두어 가지고 물러난다 하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뒤쫓아 덮쳐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에 도독께서는 군사를 묶어 두고
촉병을 범처럼 뭏?것입니다. 이는
주인이 종놈이나 종년보다 재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도리
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도를 논하는 사람들을 일러 삼공이라 하고
짓고 행하는 사람을 사대부라 했습니다. 또 옛날 병길은 소가 헐떡이는 것을 보
고 걱정을 하면서도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
습니다. 또 한나라의 승상 진평은 황제가 나라의 돈과 곡식의 수량을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하며, '그런 거라면 따로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있다' 라고 대답했
다 합니다. 지금 승상께
공명의 병세는 이때부터 더욱 깊어져 이제는 회복될 가망이 전혀 없어지고 말
았다. 강유가 그런 공명에게 문안을 드리러 오자 공명이 조용히 일렀다.
"나는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모아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
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해도 하늘이 그것을 허락지 않으니 이제 내 목숨도 여기
서 끊기게 되었다. 내가 오늘까지 배워 얻은 바를 책으로 엮은 것이 그럭저럭
스물네 편으로, 10만 4천 1백 12자로 되어 있다. 그 안에는 여덟 가지 행해야 할
것과 경계해아 할 입곱가지와 여섯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과 다섯 가지 겁낼 일
들이 적혀 있다. 내가 그 책을 전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 여러 장수를 살펴보았
으나 그대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 여겨진다. 그대에게 이 책을 물려줄 터이니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하라."
공명이 마치 마지막 말을 남기듯 그렇게 말하자 강유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받았다. 공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연노' 란 걸 고안해 만들기는 하였으나 아직 한 번도 써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쇠뇌와 원리는 같으나 화살의 길이는 여덟 치에다, 한 번 쏘아 화살 열
개를 한꺼번에 날릴 수가 있다. 그 또한 도본으로 그려 놓았으니 그대가 그걸
보고 한번 만들어 써 보라."
강유가 그 도본을 받아 들자 공명은 함부로 적군이 들 수 없을 만치 험해 크
게 걱정되는 곳은 없다. 그러나 다만 음평만은 비록 다른 곳과 같이 험준하다
해도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잃기 쉬운 곳임을 가슴에 새겨 두도록 하라."
강유에게 당부할 말을 마친 공명은 이어 마대를 부르게 하여 일렀다.
"내가 죽은 후에는 위연이 반드시 모반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가 되거든 이 주
머니를 열어 보라. 그러면 위연을 벨 사람을 얻을 수 있으리라."
공명은 자기가 죽은 뒤의 일까지도 모두 대비한 다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공명은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깨어났다. 공명은 자신이 위독함을 밤을 도
와 후주에게 알리게 했다. 공명의 글을 받아 본 후주는 정신이 아뜩했다. 급히
상서 이복을 보내 공명의 병세를 살펴보게 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뒷일을
물어 오게 했다. 이복은 그 길로 오장원으로 달려가 공명을 찾아보고 후주의
당부를 전했다. 그러자 공명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나라의 큰 일을 이루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실로 천
하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소. 내가 죽은 후에도 공들은 마땅히 충성을
다해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여 나라를 보살펴야 할 것이오. 나라에서 예부터 내
려오던 제도를 함부로 고쳐서도 아니 될 것이며 내가 쓰던 사람도 가볍게 내쳐
서는 아닐 될 것이오. 나의 병법은 모두 강유에게 물려주었으니 그는 내 뜻을
이어 힘써 나라를 지킬 것이오. 내 목숨이 이제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터라 마땅히 표문을 올려 천자께 모든 걸 아뢸 것이오."
공명의 당부를 들은 이복은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다시 길을 재촉해 성도로
돌아갔다. 이복이 돌아가자 공명은 병든 몸은 가까스로 일으키더니 좌우의 부
축을 받으며 수레에 올랐다. 공명은 대채를 나와 각 영채를 돌아보았다. 목숨이
위중한 가운데도 여전히 군무에 마음을 쓰고 있는 공명을 보며 시의와 장수들은
눈물로 옷소매를 적셨다. 공명이 수레를 타고 영채를 돌아보는데 불어오는 차
가운 가을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냉기가 뼈에 사무쳐 몸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공명이 몸을 떨며 길게 탄식하듯 말했다.
"아, 이제 나는 다시는 싸움터에 나가 적을 칠 수 없겠구나! 하늘은 이렇듯 멀
고도 끝이 없건만, 사람의 생은 어찌 이다지도 짧다는 말인가!"
공명은 혼자말로 그렇게 길게 탄식해 마지않더니 수레를 돌려 본채로 돌아왔
다. 장막 안으로 돌아온 공명은 곧 침상에 드러누었는데 말소리까지 줄어들고
그 얼굴에는 점차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공명이 자신의 위중함을 안 듯 양의를 불러 오게 한 후 일렀다.
"마대,왕평,요화,장익,장의는 모두 충성스런 신하들이다. 오래도록 싸움터를 달
렸으며 수고로움이 많았으니 가히 쓸 만한 사람들이다. 내가 죽은 뒤라도 모든
일은 예전에 정한 대로 지켜 나가도록 하라. 또 이번에 군사를 물릴 때에도 서
둘러 급히 행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 그대는 모략에 능통하니 더 이상은 당부하
지 않아도 되리라. 다만 강백약은 지모와 용맹을 두루 갖추었으니 뒤ㅉ아오는
적을 그에게 맡겨 막게 하라."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공명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건
흥 12년(234년) 가을 8월 23일,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사람의 수명이 쉰이면
그 당시로서는 짧은 생애라고는 볼 수 없을지 모르나 공명의 경우는 실로 요절
이었다 할 만큼 그의 죽음은 촉나라 사람들이나 위나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애
통함을 느끼게 했고 그만큼 그 충격도 컸다. 이 점은 원서 삼국지에서도 공명
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공명의 죽음을 갖가지로 시화하거나 미화하
고 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원서의 저자도 차마 공명을 죽이기 애석히 여
긴 대목이 여기 저기 역력히 엿보인다. 그 중에 하나가 공명이 마지막으로 묵두
성을 우러러보며 자기의 장성을 가리킨 후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 다음 이
복이 이르렀을 때 공명이 다시 눈을 뜨고 뒤를 이을 사람을 일러 준 대목 등도
저자가 공명의 죽음을 더욱 신비화시키고 미화시킨 것이라 여겨진다.
공명이 죽자 뒷날 시인 두공부가 시를 지어 탄식했다.
지난 밤 진문 앞에 별 하나 길게 떨어지니
이 아침 선생이 돌아가신 소식이 전해졌네.
드 높은 호령 소리 진지에서 들을 수 없고
누가 다시 기린대에서 공과 이름 남길 수 있을까.
문하의 3천 객 할 바를 모르고
가슴 속의 10만 대병도 이제는 부질 없다.
날도 맑고 녹음도 우거졌건만
다시는 반겨 맞는 노랫소리 들리지 않네.
같은 당나라 시인 백낙천도 공명을 기리는 시를 읊었다.
선생은 자취 감추어 숲속에 누웠더니
어진 주인이 삼고초려로 찾았네.
고기는 남양에 이르러 물을 얻고,
용이 하늘 밖에 날자 장마가 쏟아지네.
주인이 어린 자식 당부하며 예절 다하니
그 신하는 충의를 다해 나라를 위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두 번의 출사표
읽는 이는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그 무렵, 촉에 요립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늘상 자기의 재주가 공명과 버금
간다고 여기며 자신의 벼슬이 낮음에 불만을 가지고 공명을 원망했다. 공명이
그것을 알고 요립의 벼슬을 빼았고 문산으로 쫓아 버렸다. 그런데 요립이 공명
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알고 써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공명이 죽자 또 한 사람, 죄를 짓고 쫓겨났던 이엄도 목을
놓아 울었다. 언젠가는 공명이 다시 거두어 줄 것을 바라고 있던 그는 공명이
죽어 다시 거두어 줄 사람이 없게 되자 끝내 울화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난세를 다스려 위태로운 임금을 돕고
주인의 당부 예를 다해 받들었다.
뛰어난 재주 관중과 악의보다 낫고,
신묘한 계책은 손자와 오자를 앞질렀다.
늠름하구나 출사표,
당당하구나 팔진도
공과 같은 큰 덕 갖춘 이
예와 지금을 통틀어 찾을 수 없네.
당나라 시인 원미지도 이러한 시를 지어 공명을 기렸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그런 공명을 소설 속에서 미화된 인물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한왕
조를 되살리려는 반동집단의 야심가' 였을 뿐이라고 비방하는 이도 있다. 또한
소설에 씌어진 공명의 신기에 가까운 전략전술도 적을 농락하는 기략일 뿐 사실
과는 달리 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2대째 황제인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북정군을 내었을 때 한중으로부터 곧바로 적령인 장안으로 가려면 먼저 험중한
전령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이ㄸ 촉의 장수 위연은 적이 방심한 틈을 타 그 허
를 찔러 정면으로 급습하자고 주장했으며 또한 이길 수도 있는 계책이었다. 그
러나 공명은 의연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삼분천하론만 해도 이미
공명보다 먼저 노숙이 손권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그 당시의 선비들에게 간혹
오고 갔던 지론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공명의 용병을 평하면서,
"해마다 군사를 내어 적을 치러 나갔으나 공을 이루지는 못했다. 어쩌면 임기
응변의 계략이 그에겐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공명의 용병이 반드시 뛰어난 전략적 재능만이 번뜩
인 것이 아닌 경우는 그것말고도 여러 예에서 찾을 수 있다. 가정같은 전략적
으로 중요한 지역을 자신의 믿음만으로 경험이 없는 마속 같은 젊은 장수에게
맡겨 끝내 크게 패하는 경우 등이 공명의 용병에 대한 의문과 비판의 요소가 된
다. 그러나 공명은 언제나 정면 승부를 거는 싸움을 피했다. 위연이 적의 허를
틈타 기습을 하자고 주장했을 ㄸ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ㄸ문이었다. 공명은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나 위험성이 많은 싸움으로 보았기 ㄸ문이었다. 그리하
여 공명은 몰리 서쪽으로 돌아가 평탄한 길을 책해 군사를 움직였으며 그래야만
더욱 안전하게 싸움에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공명의 용병법은 단번에 싸워
승패를 가리는 것보다 언제나 군사의 일부를 먼저 내보내 싸우게 한 다음 그때
의 상황을 보아 가며 신중하고 빈틈없는 용병을 꾀한 것이었다. 공명이 오장원
에서 싸우다가 진중에서 병들어 죽게 되자 촉군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렸다.
그 이후 적장 사마의가 촉군이 두고 간 진영을 울러보고 그 포진의 교묘함에
놀라 감탄했다.
"실로 공명은 천하의 기재였다."
공명이 장수로서 단번에 승패를 가리지 않는 소극적인 전법을 썼다고 하나 그
가 용병에 뛰어났음을 엿보게 하는 말이다. 공명이 이렇듯 소극적인 용병을 꾀
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위와 촉과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무려
4,5배 가까운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단번에 이기는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오
장원에서 죽었으나 그렇다고 싸움에 진 장수는 아니었다. 이점이 범용한 장수와
다른 점이었다. 공명은 국력이 몇 배나 강한 위와 싸우면서도 언제나 먼저 공세
를 취했으며 이기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지지도 않았다. 공명은 결국 자기의
기략대로 싸운 장수였으며 역시 뛰어난 장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또 공명
에게 죽임을 당했던 진식의 아들이며 정사 '삼국지' 의 저자 진수는 공명의 용병
에 관해서는 의심과 비판을 했으면서도 정치가로서의 공명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정치를 아는 재사였으며 관중과 소하에 견줄 만하다."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제갈량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으며 실로 다스림
이 무엇인지를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가히 사람을 다스리는 이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의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지도자는 그리 흔하게 찾
아볼 수 있는 경우가 아니다. 그러나 공명은 그 두 가지를 한몸에 지니고 있었
다. 그렇다면 공명이 그같이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사랑을 받았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상벌의 적용에 사사로움이 없이 공평무사하고 적당히 처리하
는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이로움을 가져다 준 자는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상
을 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육친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지었으되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비는 자는 그 죄가 무겁도라도 용서했으
며, 간사한 말로 죄를 면하려 하는 자는 그 죄가 가벼워도 벌을 무겁게 주었다.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반드시 포상했으며 나쁜 짓을 하
였을 때는 엄히 꾸짖었다. 명분을 따르되 실리도 놓치지 않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따랐다."
뿐만 아니라 공명을 다스림이 무엇인지 아는 뛰어난 인물이라고 말한 원인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공명이 첫번째 기산으로 나갔을 때 그가 아끼던 마속을 선봉 장군에 지목했다
가 그의 말을 거역하여 싸움에 지자 울며 그의 목을 베었던 이야기는 너무나 유
명하다. 그러나 공명이 그토록 엄히 법을 시행하여 마속의 목을 베었지만 그의
가족에 대해서만은 예전처럼 예우하고 돌보았다. 이처럼 법에 엄했으나 깊은 인
정미를 지녔던 공명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공명에
게 있어 촉한의 2대째 황제인 유선은 선제 유비와는 달리 암울했던 주인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선제의 무서운 당부를 받들어 국정의 실권을 집행하면서 유선을
받드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사생활도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나
라의 승상 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도 그는 성도에 겨우 뽕나무 8백 그루와 밭
쉰 마지기가 있었을 뿐이며 출사표를 올린 후 출진에 앞서 그 사실을 표문을 올
려 알렸다. 나라를 위해 몸을 굽혀 힘을 다하면서도 결코 사사로운 재산을 탐하
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한 공명은 승상으로서의 나라일을 돌봄에 세밀히 장부
에까지도 일일이 눈을 돌리는 열성을 보였다.
"재상은 사소함과는 거리가 멀다."
[십팔사략]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로써 재상은 그저 높은 데 앉아 큰 일에만
눈을 돌리면 된다는 것이 그 당시의 군도였다. 그런 시대였으나 공명의 자세는
그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렇듯 밤낮 없는 격무가 그의 몸을 해려 병을 얻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그 증세로 보아 오늘날의 폐병으로 짐작된다. 공명에게는
아주 사소한 데까지 눈을 돌려야만 되는 까닭이 있었다.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
해 작은 나라였던 촉에 있어서는 모든 책임이 공명에게 있었으며 그런 상황 아
래서 작은 일까지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2대 황제인 유선이 암
우했으나 정성을 다해 받들며 힘을 다해 나라일을 돌보았던 공명을 모든 사람들
이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재상으로 기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물리치고.....
공명이 홀연 꿈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날 밤은 천지가 시름에 잠긴 듯 슬픔에
겨워 달빛마저 흐렸다. 강유와 양의는 남긴 말을 좇아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공명의 죽음을 일체 입 밖에 내지를 않았다. 다만 공명이 이른 대로 시신을 염
하여 농에 안치한 후 믿을 만한 장졸 3백 명에게 엄중히 지키게 했다. 그런 다
음 위연에게 은밀히 영을 내려 적의 추격을 막게 하고 진지를 거두어 차례로 군
사를 물렸다. 사마의는 그때 굳게 영채만을 지키고 있었으나 촉병의 동정이 궁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가만히 천문을 보고 있는데 문득 큰 별 하나
가 붉은 빛을 뿜으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사마
의가 자세히 살펴보니 서남쪽에 떨어졌던 그 별은 두세 번이나 촉군의 영채 위
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데 은은한 소리까지 들렸다. 사마의는 놀라운 가운데도
기쁨에 차 소리쳤다.
"공명이 마침내 죽었구나!"
사마의가 별이 떨어져 솟는 걸 보고 공명의 죽음을 짐작한 것이었다. 이에
사마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게 영을 내려 물러나는 촉군을 뒤쫓게 했
다. 그러나 사마의는 말 위에 올라 진문을 나서려다 말고 문득 의심이 들었다.
'원래 공명은 육정육갑신을 잘 부린다. 내가 나가 싸우지 않으니 이런 술법을
부려 죽은 체하며 나를 끌어 내려닌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함부로 뒤쫓다간 또
그의 계책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의심이 들자 사마의는 다시 군사를 거두어 진을 지키기만 할 뿐 좀처럼
나설 생각이 없어졌다. 다만 촉진의 동정이 궁금해 하후패에게 수십 기를 주어
오장원을 살펴보도록 했다. 한편 그날 밤 공명이 죽은 걸 모르고 있는 위연은
자기 영채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꿈을 꾸었는데, 문득 자기 머리에 두 개의 뿔
이 돋아나는 꿈이었다. 날이 밝자 위연은 아무래도 그 꿈이 의아스러워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행군사마 조직이 들어오자 물었다.
"그대가 주역의 이치에 밝으니 물어 보겠소. 실은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
데 내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돋아나는 것이었소. 수고롭지만 그 꿈이 길한지 흉
한지를 말해 주오."
"매우 좋은 꿈입니다. 기린도 뿔이 있으며 푸른 용도 머리에 불이 있습니다.
그 꿈은 곧 장군이 변화하여 용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를 징조를 뜻합니다."
조직이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 그렇게 말했다. 위연은 그 말을 듣자 어둡던 눈
앞이 밝게 트인 듯이 기뻐했다.
"공의 말대로 된다면 그때는 크게 사례하겠소."
조직은 위연이 기뻐하는 걸 보고도 별 내색 없이 앞을 물러났다. 조직이 몇
마장을 걸어가다 마주 오는 상서 비위를 만났다. 비위가 조직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오?"
조직이 비위의 물음에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마침 위문장의 영채에 갔다가 꿈풀이를 해 주고 오는 길입니다. 위문장은 지
난 밤에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돋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그 꿈이 본래 좋은
뜻이 아니나 바른대로 말했다가는 뒷일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기린과 푸른 용에
빗대어 좋은 꿈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게 어째서 나쁜 꿈이라는 걸 아시오?"
비위가 궁금하다는 듯 그렇게 묻자 조직이 그 까닭을 말해 주었다.
"뿔이라는 뜻의 각자는 칼 도자 아래 쓸 용이 아닙니까? 머리 위에 칼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그 꿈이 좋은 꿈일 리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비위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직에게 가만히 일렀다.
"공은 결코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제가 어찌 그 말을 함부로 누설할 수 있겠습니까?"
조직이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이 죽었음을 위연에게 알리러 가던 비위는 위
연의 영채에 이르자 좌우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지난 밤 삼경 무렵에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셨소. 돌아가실 때 몇 번이나 이르
시기를 장군이 뒤를 끊어 사마의가 뒤쫓는 걸 막게 하라 하셨소. 군사를 천천히
물리되 결코 발상을 하지 말라 하셨소. 내가 병부를 가지고 왔으니 장군은 어서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시오."
비위의 말에 깜짝 놀라던 위연이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승상이 하던 일을 맡았소?"
위연이 비위를 노려보면서 묻자 비위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승상께서는 큰 일을 모두 양의에게 맡기셨소. 또한 군사를 부리는 은밀한 법
은 모두 강백약에게 넘겨 주셨소. 내가 가지고 온 병부도 곧 양의가 내린 영이
외다."
그 말을 들은 위연이 벌컥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승상은 비록 죽었으나 내가 아직 살아 있지 않소? 양의로 말하면 한낱 장사
에 지나지 않는데 그가 어찌 그런 중한 일을 해낼 수가 있겠소? 양의는 영구를
가지고 서천으로 가서장례나 치르라 하시오. 나는 이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
사마의와 싸워 공을 이루겠소. 어찌 승상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나라의 큰
일을 그만둘 수 있겠소?"
그러자 비위가 얼른 위연을 말렸다.
"그러나 승상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긴 밀이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소. 승상
의 뜻을 그르쳐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나 위연은 더욱 화를 돋울 뿐이었다.
"승상이 일찍이 나의 계책을 받아들였더라면 벌써 장안은 우리 손에 떨어졌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나의 벼슬이 전장군 정서대 장군 남정후이오. 어찌 장사 따
위의 명을받아 뒤나 끊어 주고 있으라는 말이오?"
위연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비위는 하는 수 없이 좋은 말로 그를 달랬다.
"비록 장군의 말이 그릇됨이 없으나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움직여 적의 웃음
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내가 이제 양의를 찾아가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져 양의를 달래 병권을 장군에게 양도하는게 어떠냐고 물어 보겠소.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비위가 그렇게 말하자 위연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위는 위연과 헤
어지고 본진을 찾아가 위연의 뜻을 전했다. 양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승상께서 돌아가실 때 '위연은 반드시 딴 뜻을 품을 것'이라 하셨소. 이제 내
가 병부를 그에게 보낸 것도 실은 그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한 것이었소. 과연 승
상의 말씀이 어김없이 들어맞았소. 그렇다면 나는 강유에게 뒤를 방비하도록 이
르겠소."
양의는 곧 공명의 영구를 받들어 먼저 떠나고 강유로 하여금 후군으로 돌려
위군을 막게 했다. 공명이 죽기 전에 이른 대로 군사를 물리되, 결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물러났다. 그 무렵, 위연은 비위의 말을 듣고 영채에 머물면서 소
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기별이 없었다. 이에 문득
의심이 든 위연이 마대에게 수십 기를 이끌고 가서 대채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대가 돌아와 위연에게 알렸다.
"후군은 강유가 맡아 거느리고 전군은 이미 태반이나 산골짜기로 물러났습니
다."
그제야 위연은 비위에게 속았음을 알고 크게 노해 소리쳤다.
"되지 못한 선비놈이 어찌 감히 이렇듯이 나를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반드시 그놈을 죽이고 말리라."
그렇게 외친 위연이 마대에게 물었다.
"어떻소? 공도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겠소?"
"저 도한 일찍부터 양의에게 품은 한이 있는 터입니다. 장군과 함께 그를 치겠
습니다."
마대가 주저하지 않고 위연의 말에 따랐다. 위연은 마대의 말에 몹시 기뻐하
며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향했다. 그 무렵, 사마의가 보낸 하후패도 오장원에
이르렀는데 보니 촉병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하후패는 급히돌
아가 사마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촉병은 이미 물러나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마의가 발을 구르며 분함을 참지 못해 소리쳤다.
"그렇다면 공명이 틀림없이 죽었구나. 어서 빨리 뒤쫓아야겠다."
사마의가 말 위에 올라 군사를 재촉하자 하후패가 권했다.
"도독께서는 가볍게 뒤쫓지 마시고 편장을 시켜 먼저 진병토록 하십시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사마의는 하후패의 말을 물리쳤다.
"아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가야 하리라."
사마의는 그 말과 함께 몸소 군사를 이끌어 두 아들과 함께 일제히 오장원으
로 짓쳐들었다. 그러나 영채는 텅 비어 있을 뿐 촉병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이가 두 아들을 돌아보며 일렀다.
"내가 먼저 군사를 이끌어 촉병을 뒤쫓을 터이니 너희들은 뒤에서 나를 따르
도록 하라."
이에 사마사,사마소 두 형제는 영을 좇아 앞서 가는 부친의 뒤를 따랐다. 사마
의가 군사를 재촉하여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멀지 않을 곳에 촉병이 물러나고 있
는 것이 보였다.
"빨리 저들을 뒤쫓아라!"
사마의가 채찍을 높이 들어 외치며 군사를 급히 몰았다. 그때였다. 홀연 한
방의 포 소리가 들리더니 산 뒤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그와 함께 물러나던
촉병도 깃발을 돌려 세우고 북 소리를 드높게 울리며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가 나무 그늘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촉병의 큰기에는 한 줄로 크게 글씨
가 씌어 있었다.
'한승상 무향후 제갈량'
사마의가 그걸 보자 대번에 얼굴빛이 달라졌다. 사마의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
고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촉병의 중군 속에서
수십 명의 상장이 수레를 밀고 나오는데 그 수레위에는 검은 띠를 두른 학창의
에 윤건을 쓰고 깃털 부채를 든 채 공명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마의는
정신이 아뜩했다.
"공명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내가 가볍게 위태로운 곳으로 들어와 스스로 화
를 불렀구나."
그 말고 함께 사마의는 황망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달
아나는 사마의를 향해 강유가 뒤쫓으며 소리쳤다.
"역적의 장수는 달아나지 말라. 너는 우리 승상의 계책에 빠졌음을 모르는가?"
그 소리에 위군은 당황하여 제대로 정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모두 얼
이 바진 듯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지고 창칼도 내던진 채 목숨을 구해 달아날
뿐이었다. 우왕좌왕하며 제 살 길만을 찾아 달아나느라 서로 짓밟고 밝혀 목숨
을 잃는 자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얼이 빠진 것은 졸개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의도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말을 돌려 달아났다. 사마의가 정신
없이 50여 리를 달렸을 때 위의 장수 두 사람이 따라와 사마의가 탄 말의 고삐
를 잡으며 외쳤다.
"도독께서는 이제 진정하십시오."
사마의는 그제야 두 장수를 알아보고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 목이 제대로 붙어 잇느냐?"
두 장수가 사마의를 안심시켰다.
"도독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촉병은 이미 멀리 물러갔습니다."
사마의는 그들 두 장수가 바로 하후패와 하후혜임을 알아보고는 그제야 마음
을 가라앉힐수 있었다. 사마의는 두 장수와 함께 지름길을 따라 본채로 돌아온
후 장수들을 내보내 촉병의 동정부터 살피게 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때
였다. 그 고장 토박이 백성 한 사람이 달려와 사마의에게 말했다.
"촉병은 살골짜기로 들어가며 물러날 때 슬피 우는소리가 골짜기를 메웠으며
군중에는 흰 깃발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걸 보아도 공명이 정말 죽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제가 듣기로 강유의 1천 군사가 마지막으로 물런며 뒤를 끊
었다 합니다 그날 수레 위에 앉아 았던 공명은 나무로 깎아 만든 거짓 공명이었
다 합니다."
그말을 듣자 사마의가 길게 탄식했다.
"나는 공명이 살아 있다는 것만을 헤아렸을 뿐, 죽었다는 것은 미처 헤아리지
도 못했구나!"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촉 사람들 사이에는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쫓아 버렸다'는 말이 퍼졌다. 뒷날 사람들도 이 일을 시로 지어 남겼다.
밤중에 장성이 떨어지자 사마의가 뒤쫓았건만
홀연 공명이 살아 있나 의심이 들었네.
지금도 사람들이 그 일이 우스워하는 말
아직도 내 머리가 붙어 있느냐
사마의는 공명이 정말 죽었음을 알게 되자 다시 군사를 휘몰아 촉병을 뒤좇았
다. 그리하여 적안파까지 달려갔으나 촉병은 보이지 않았다. 촉병이 이미 멀리
물러난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명이 죽었으니 이제부터는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겠다.
그만 군사를 돌리도록 하자."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군사를 거두어 낙양으로 향했다. 사마의는 돌아가는
도중에 공명이 영채를 세웠던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 곳도 빈틈없이 배치가 뚜렷하고 법도가 정연했다. 사마의가 그걸 보자
감탄했다.
"공명은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였다."
이윽고 장안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각 요해처를 지키게 한 뒤 자신
은 낙양으로 위주 조예를 뵈러 갔다.
그 무렵, 양의와 강유는 가지런히 군사를 이끌며 천천히 서천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윽고 서천으로 도는 잔각도에 이르자 비로소 전군에게 알리고 상복
으로 갈아압게 한 후 흰 기를 내걸어 공명의 죽음을 마음껏 슬펴하며 통곡했다.
촉병 중에는 심지어 공명의 죽음을 슬펴해 몸추림을 치며 머리와 몸을 바윗돌에
부딪쳐 목숨을 끊은 자도 있었다. 촉병은 다시 서천으로 향했다. 전대가 잔각도
를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함성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뒤흔들며 한 떼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장수들이 깜짝 놀라며 급히 양의에
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양의도 뜻밖의 전갈에 놀라며 누가 거느린 군사인지를
급히 알아오게 했다.
"위연이 잔도를 불태워 버린 다음 군사를 거느리고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정탐 보냈던 군사가 달려와 양의에게 아뢰었다. 양의가 크
게 놀라며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승상께서 살아 계실 때 위연이 언젠가는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이제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그가 이제 우리가 돌아갈 잔도를
끊었으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비위가 나서며 양의에게 권했다.
"그 자는 틀림없이 폐하께 우리들이 모반하였다고 거짓으로 아뢴 후에 불을
질러 잔도를 끊고 우리가 돌아갈 길을 막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폐하
께 상주하여 위연이 모반했음을 아뢴 후에 그 자를 쳐야 할 것입니다."
곁에 있던 강유가 비위의 말에 찬동했다.
"자도가 끊겼다고 하나 다른 샛길이 있습니다. 차산이란 곳인데, 길이 매우 험
하지만 그 곳으로 향하면 잔도 뒤로 빠져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양의는 곧 표문을 써 후주에게 보내는 동시에 군사들을 이끌어 차산의 샛길로
나아갔다. 한편 성도의 후주 유선은 그 무렵 웬일인지 침식이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이상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밤, 깜박 잠이 들
었는데 금병산이 무너지는 괴이쩍은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한밤
중이었다. 후주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문무백관을 불러모으고 꿈풀이를 시켜 보
았다. 그러자 태사 초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후주에게 아뢰었다.
"어젯밤 신이 천문을 보니, 붉은 별 하나가 동북에서 서남으로 꼬리를 끌며 서
남방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분명히 승상께 크게 흉한 일이 있을 징조입니다.
또한 폐하께서도 산이 무너지는 꿈을 꾸셨으니 역시 같은 징조를 나타낸 것입니
다."
그 말을 들은 후주 유선은 놀라 어쩔 줄 몰라하는데 가까이 받드는 신하 하나
가 들어와 오장원으로 보냈던 이복이 돌아왔다고 알렸다. 유선은 급히 그를 불
러들이게 했다. 이복이 들어와 먼저 울음부터 터뜨리며 엎드려 아뢰었다.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어 이복은 공명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낱낱이 아뢰었다. 후주 유선은 그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알더니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용상위에 쓰러지며 한탄했다.
"하늘이 짐을 버리시는구나!"
신하들이 쓰러진 후주를 부축하여 후궁으로 모셨다. 공명이 죽은 사실은 곧
오 태후에게도 전해졌다. 오 태후 역시 목을 놓아 울었으며 모든 문무백관들도
슬펴 통곡해 마지않았다. 백성들도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천자가 되기
전부터 의지하며 누구보다 믿고 있었던 공명이 죽자 후주는 슬픔에 잠겨 며칠동
안 조회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 홀연 위연이 양의의 모반을 알리는 표
문을 보내 왔다. 깜짝 놀란 문무백관들이 후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표문을 바
쳤다. 후주는 가까이 부리는 신하에게 표문을 읽게 했다.
정사대장군 남정후 신 위연이 실로 황공함을 어찌할 줄 몰라 다만 머리 조아
려 아룁니다. 승상이 세상을 떠나자 양의는 제 스스로 병권을 움켜쥔 뒤에 군
사를 거느리며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승상의 영구를 빼앗은 뒤 적병을 우리의
경계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먼저 잔도를 불살라 끊은 뒤에
그들을 굳게 막고 있습니다. 삼가 표문을 올려 이 사실을 아뢰는 바입니다.
표문을 읽고 나자 후주가 의심스런 얼굴로 신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위연은 이 촉 땅에서도 용맹이 가장 뛰어난 장수이다. 양의쯤은 얼마든지 싸
워 이길 수가 있을 텐데 어찌하여 잔도까지 불태워 가며 길을 끊었다는 말인
가?"
그러자 곁에 있던 오 태후가 입을 열었다.
"선제께서는 일찍이 위연의 머리 뒤에 반골이 있다고 했소. 승상이 그걸 알면
서도 그의 용맹이 아까워 쓰고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소. 그런 위연이 이런
표문을 올려 왔으니 경솔히 믿을 수는 없는 일이오. 승상이 양의가 비록 문사인
데도 장사의 벼슬을 내린 것은 그가 믿고 쓸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오.
그런데 지금 어느 한쪽의 말만을 듣는다면 양의는 오갈 데가 없어져 위로 투항
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깊이 헤아리셔야 하며 결코 가볍게 이 일을 정해서는 아
니 될 것이오."
다른 관원들도 제각기 의견을 말하며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때마침 양의로
부터 표문이 올라왔다. 신하 하나가 그 표문을 후주에게 읽어 드리니 그 내용을
대강 이러했다.
장사 유군장군 신 양의는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를 조아려 삼가 표문을
올려 아룁니다. 승상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큰 일을 제게맡기시며 '옛 제도를 잘
지키고 함부로 바꾸지 말라'하시었습니다. 또한 위연으로 하여금 뒤를 끊게 하고
강유에게 뒷일을 맡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위연은 승상께서 이르신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본부 군사를 거느려 먼저 한중 땅으로 들어와서 잔도를 불태우고
길을 끊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상의 영구를 빼앗고 불칙한 짓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고라 황급히 표문을 올리나이다.
표문을 읽고 나자 오 태후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오 태후의 물음에 장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양의가 성미가 급하고 너그럽지 못하나, 군량과 마
초를 잘 관리하였으며 군사 기밀을 보살피는 일로 오랫동안 승상의 일을 도왔습
니다. 때문에 승상께서 그의 재주를 보고 돌아가시기 전에 큰 일을 맡기신 듯하
니 결코 반역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연은 평소부터 제 공이 큼을 내세웠으
며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받들었으나 다만 양의만은 머리를 숙이지 않아 늘 마
땅치 않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다 이제 양의가 병권을 맡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잔도를 불태워 그가 돌아갈 길을 끊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폐하께
표문을 올려 거짓으로 양의가 반역을 일으켰다고 모함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신은 전 가솔의 목숨을 걸고 양의가 반역하지 않았음을 보증할 수 있으나 위연
이라면 보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동윤이 나서 장원과 같은 의견을 내었다.
"위연은 스스로 공이 큰 것만을 자랑하며 항상 불평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그
러나 이제까지 반역하지 않았던 것은 승상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승
상께서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반역을 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양의는
재주가 뛰어나 승상께서 높이 쓰셨으니 무엇 때문에 반역을 일으키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후주가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승상은 원래부터 위연을 의심했으니 반드시 양의에게 어떤 계책을 일러 주었
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양의가 군사를 물려 골짜기 안으
로 들어갔겠습니까? 위연은 필연코 승상께서 일러 주신 계책에 빠지고 말 것이
니 폐하께서는 부디 안심하십시오."
장완이 얼른 후주에게 그렇게 아뢰었다. 후주도 장완의 말을 듣고서야 걱정스
런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위연이 보낸 두 번째 표문이 이르렀다. 첫번째 표문
과 같이 양의가 모반을 일으켰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양의에게서도
위연의 모반을 알리는 표문이 전해졌다. 두 사람이 이렇듯 제각기 표문을 올리
니 조정에서는 얼른 뜻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 비위가 돌아왔다. 비위는
위연이 반역했음을 소상히 아뢰었다. 후주가 비위의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 이윽고 동윤에게 명을 내렸다.
"경은 짐의 절을 주고 위연에게 마음을 돌리도록 좋은 말로 권해보라."
후주의 명을 받자 동윤은 그 길로 위연에게 달려갔다. 그때 위연은 잔도를 불
사른 뒤 군사들로 하여금 남곡 산골짜기에 영채를 세우게 하고 험한 길목들을
지키게 했다. 그렇게 길목을 막고서는 양의가 성도로 갈 길이 없다고 흐뭇해하
고 있는데 놀라운 전갈이 전해졌다.
"양의와 강유가 밤을 이용하여 샛길로 남곡 뒤로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양의는 그때 위연한테 한중이 떨어질까 근심이 되어 먼저 선봉 하평에게 군사
3천을 주어 앞서게 하고 자신은 강유와 함께 공명의 영구를 모시고 한중으로 들
어갔다. 한편 하평은 군사를 이끌어 남곡 뒤쪽에 이르자 일제히 북을 울리며
함성을 울렸다. 위연의 명을 받고 정탐하고 있던 군사가 급히 달려가 이 사실을
위연에게알렸다.
"양의의 선봉인 하평이 군사를 거느리고 차산 샛길로 돌아와 싸움을 걸고 있
습니다."
뜻밖에도 남곡 뒷길로 빠져 나온 양의의 군사가 싸움을 걸어 왔다는 말에 위
연은 몹시 화가 났다. 급히 갑옷을 꿰입고 투구를 쓰고 군사를 거느려 칼을 빼
들고 말을 박찼다. 위연이 말을 달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평이 나서며 호통
을 쳤다.
"반적 위연은 어서 나오너라!"
위연도 하평을 향해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양의의 역적질을 돕는 주제에 감히 나를 꾸짖는단 말인가?"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아직 그 몸이 채 식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네가 감
히 모반을 하다니, 이 무슨 짓이냐?"
하평은 위연을 그렇게 꾸짖더니 다시 위연의 군사들을 향해 채찍으로 가리키
며 더욱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너희들은 모두 서천 사람들이 아니더냐? 서천에는 부모 처자와 형제와 벗들
이 있으며 승상께서 살아 계실 때 일찍이 한 번도 박하게 대접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역적 짓을 돕고 있는가? 그대들은 각기 고향집으로 돌아가 상
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나 하라"
하평의 말이 떨어지자 군사들은 크게 혼란이 일더니 순식간에 태반이나 흩어
져 달아났다. 위연이 그걸 보자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곧장 말을 몰아
하평에게 덮쳐들었다. 하평도 창을 치켜들고 위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불과
2,3합을 싸우더니 못 당하겠다는 듯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위연이 말을 채
찍질하며 급하게 그 뒤를 쫓자, 하평의 군사들이 화살과 쇠뇌를 비 오듯 쏟아댔
다. 위연은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영채로 돌아오
고 있던 위연이 보니 자기 편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위연이
말을 달려 달아나는 군사들의 목을 베어 나갔으나,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흩어
지는 군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대가 거느린 3백의 군사들만은 꿈
쩍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위연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마대에게
말했다.
"공만은 진정으로 나를 도와 주는구려. 일이 이루어진 후에 이 공을 결코 저버
리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말한 위연은 마대와 함께 다시 하평의 뒤를 쫓았다. 하평은 급히 말을
몰아 달아났다. 멀리 달아나기만 하는 하평을 따라잡지 못하자 위연은 남은 군
사를 수습하여 마대에게 물었다.
"이 길로 아예 위나라에 투항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마대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치않은 말씀이오. 대장부로 태어나 스스로 패업을 이루려 하지 않고 가벼이
남에게 무릎이나 꿇으려 하십니까? 장군은 지략과 용맹을 아울러 갖춘 분인데
서천,동천의 어느 누가 감히 장군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맹세코 장군과
함께 한중을 빼앗은 다음 양천으로 밀고 들어가겠습니다."
마대의 말을 들으니 위연도 다시 용기가 치솟았다. 곧 마대와 함께 군사를 거
느리고 남정으로 말을 몰았다. 그때 양의와 강유는 나정성 안에 있었는데 강유
가 성 위에서 살펴보니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앞선 장수는 바로 위
연과 마대였는데 칼과 창을 번쩍이며 드높은 기세로 바람처럼 내달아오는 걸 보
고 급히 군사들에게 적교를 끌어올리게 했다. 그럴 동안 성 밖에 이르른 위연
과 마대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성문을 열고 어서 항복하라!"
강유가 황급히 양의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위연이 용맹스러운데다 마대까지 돕고 있습니다. 비록 군사가 적다하나 가볍
게 맞설 수 없습니다. 무슨 좋은 계책이 없을까요?"
그러자 양의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 돌아가실 때 비단주머니를 하나 주시면서 '만약 위연이 반역하여 서
로 맞서게 되거든 그때 열어보라'고 하셨소. 지금이 그 주머니를 열어 볼 때인
것 같소이다."
양의가 품 속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는 봉해진 서신이 있었는
데 겉봉에는 '위연과 싸울 때 말 위에서 뜯어보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공명
이 글로 써 계책을 남긴 걸 본 강유는 몹시 기뻐하며 힘이 솟는 듯 양의에게 말
했다.
"승상께서 이렇듯 계책을 남기셨으니 장사는 잘 맡아 두도록 하시오. 내가 먼
저 군사를 이끌어 성 밖에 나가 진세를 벌여 세우거든 그때 뒤따르도록 하시오."
강유는 곧 투구에 갑옷을 입고 창을 들자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북을 울리며 달려나갔다. 강유는 위연을 마주 보며 진을 벌여 세운 후 진문의
기 아래 말을 세우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역적 위연은 듣거라. 승상께서는 일찍이 너를 한 번도 소홀히 대접한 적이 없
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감히 배반하느냐?"
위연이 강유의 꾸짖음을 듣더니 칼을 비껴들고 말을 세우며 외쳤다.
"백약은 이 일에 나서지말고 양의더러 나오라고 일러라."
그때 강유를 뒤따라 나온 양의는 문기 뒤에서 비단주머니를 열어 공명이 남긴
글귀를 읽어 보고 있었다. 양의는 글을 읽어 보고 빙그레 웃더니 말을 달려나가
진 앞에 서서는 손가락으로 위연을 가리키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승상께서 살아 계실 적에 네가 반드시 모반할 것이라고 나더러 경계하라고
하셨다. 이ㅔ 보니 과연 승상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구나. 그럼 네가 말 위에서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고 세 번 외쳐보라. 그렇게 한다면 너를 참
대장부로 알고 나는 두말 않고 이곳 한중의 성을 네게 바치겠다."
양의가 뜻밖에도 그렇게 말하자 위연도 가소롭다는 듯 껄걸 웃으며 말했다.
"필부 양의는 듣거라. 공명이 살아 있었을 때는 내가 조금은 너를 두려워했지
만 그가 죽은 지금 천하에 감히 누가 나와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세번이 아니
라 3만 번이라 한들 외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위연은 그 말과 함께 말고삐를 잡은 채 큰 소리로 외쳤다.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위연이 큰 소리로 외쳤을 때였다. 그의 등뒤에서 불쑥 나서며 버럭 소리를 지
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너를 죽여 주마!"
그 외침과 함께 칼날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 새 위연의 목이 땅에 떨어졌
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니 위연의 목을 벤 사람은 다름아닌 마대였다.
원래 공명은 숨을 거두기 전에 은밀히 마대에게 계교를 주어 위연이 그렇게 외
칠 때를 기다려 뒤에서 갑자기 목을 베게 했던 것이었다. 양의 또한 비단주머
니를 열어 보고서야 마대가 위연과 한무리가 된 까닭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
리하여 공명이 글로 이른 대로 위연에게 그런 말을 외치게 했던 것이었다. 뒷
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위연을 비웃었다.
제갈량은 이미 위연을 알아보고
뒷날 서천에서 반역할 것을 꿰뚫어보았네.
비단주머니 속에 남긴 계책 그 누가 알랴.
이제 보니 공 이룸이 바로 말 앞이었네.
위연이 마대의 한칼에 목이 떨어진 것은 후주가 보내 동윤이 남정에 이르기
전이었다. 위연이 죽자 마대는 강유의 군사와 한데 합쳤다. 양의는 성도로 사람
을 보내 후주에게 위연이 죽은 사실을 알렸다. 후주는 양의가 올린 표문을 읽
어 본 뒤 관을 내리며 양의에게 영을 전하게 했다.
"위연의 죄가 밝혀졌으나 죽음으로 그 죄를 씻었다. 지난날 그가 세운 많은 공
을 생각해서라도 관곽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도록 하라."
양의는 후주의 명대로 위연을 장사지내 주고 공명이 영구를 모시고 성도에 이
르렀다. 후주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은 채 성 밖 20리까지 마중을 나
갔다. 후주는 공명의 영구를 보자 목을 놓아 울었다. 후주가 그렇게 슬피 우니
위로는 공경 대부로부터 아래로는 농민과 나무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슬피 울어 그 울음소리가 온 나라를 메웠다. 후주는 공명의 영구
를 성 안 승상부에 모시게 하고, 아들 제갈첨으로 하여금 정성껏 장례를 치르게
했다. 후주가 궁궐로 돌아가자 양의는 스스로 몸을 묶고 후주를 찾아가 허락도
없이 군사를 물린 죄를 청했다. 후주가 신하들에게 명해 양의의 몸을 풀어 주게
하며 말했다.
"만약 경이 승상이 죽기 전에 이른 말대로 따르지 않았다면 영구는 어느 날에
야 돌아올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한 위연을 어떻게 죽일 수 있었겠는가. 이번
에 큰 일을 아무런 변고 없이 넘기게 한 것이 모두 공의 덕이로다."
후주는 또 마대의 공도 치하했다.
"마대가 위연을 죽여 없앤 공도 가볍지 않다."
그렇게 말한 후주는 죄를 청한 양의에게 벼슬을 높여 중군사로 삼고 마대에
게는 위연의 벼슬을 그대로 잇게 했다. 양의가 그제야 공명이 죽기 전에 후주
에게 올린 표문을 바쳤다. 후주가 그 표문을 읽고 나자 다시 한 번 목놓아 울더
니 좋은 땅을 골라 편안히 장사를 모시도록 영을 내렸다. 그제야 비위가 나서
며 죽기 전에 공명이 남긴 말을 아뢰었다.
"승상께서는 돌아가시지 전에 정군산에 묻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울타리
도 치지 말고 석물도 세우지 말며 제물도 쓰지 말라고 하시었습니다."
후주는 공명이 남긴 말에 그대로 따랐다. 그 해 시월 길일을 골라 몸소 영구
를 모셔 정군산으로 가 묻은 다음 조서를 내려 장례를 치렀다. 또한 공명에게
충무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면양 땅에 사당을 세우게 한 뒤 사철 빠뜨리지 않고
제사를 올리게 했다. 뒷날 당나라 시인 두공부가 공명의 사당을 시로 ㅇ었다.
승상의 사당이 어드메뇨?
금관성(성도)밖 잣나무 우거진 곳이네.
섬돌에 비친 푸른 풀이 봄기운 머금고,
나뭇잎 사이 꾀꼬리 울음소리만 맑구나.
삼고초려의 은혜에 보답한 천하의 계략
두 대를 섬기는 늙은 신하의 충성
출전 도중 이기기도 전에 쓰러지시니,
뒷날 영웅들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는구나.
후주가 공명의 장례를 치르고 성도로 돌아오자 시하가 놀라운 소식을 아뢰었
다.
"변방에서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동오에서 전종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을 거느
리고 파구 경계에 영채를 세웠다 하는데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합니다."
후주가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얼굴로 신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승상께서 이제 막 세상을 떠나셨는데 동오가 동맹을 저버리고 우리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장완이 나서서 아뢰었다.
"신이 왕평과 장의에게 군사 수만을 주어 영안으로 가서 만일의 일에 대비토
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뽑아 동오로 보내 승상의 죽음을 알리게 하
며 그들의 움직임을 엿보게 하십시오."
후주도 장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 하는 사람을 뽑아 사신으로 보내야겠구려."
"바라건대 신을 보내 주십시오."
모두 그를 보니 그는 남양군 안중 땅 태생으로 이름은 종예, 자는 덕염인데
참군우중랑장일나 벼슬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종예가 자청하며 나서자 후
주는 기뻐하며 그 길로 동오로 가 공명의 죽음을 알리는 대신 그들의 속셈을 살
펴 오게 했다. 종예는 길을 재촉해 금릉으로 달려가 오주 손권을 뵈었다. 손권
에게 절을 올리고 좌우를 보니 모두 상복 차림이었다. 손권이 이미 공명의 죽
음을 알고 상복으로 공명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예를 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거기다 손권이 오히려 언짢은 얼굴로 종예에게 물었다.
"우리 오와 촉은 이미 한 집안이나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경의 주인은 백제
성에 군사를 늘리고 있는가?"
종예가 손권의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동오가 파구 땅으로 군사를 늘리니 촉에서도 백제성으로 군사를 더 내어 지
키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조금도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경은 이전에 사신으로 왔던 등지에 못지않은 사신이오."
손권은 그렇게 종예를 칭하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짐은 제갈 승상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
이 없었소. 또한 모든 관원들에게도 상복을 입게 하였거니와 제갈 승상이 돌아
가신 틈을 타서 위나라에서 촉을 노릴까 염려했소. 그래서 파구에 군사 1만을
더 보내 만일의 경우에 경의 주인을 돕게 하였던 것이오. 결코 다른 뜻이 있었
던 것은 아니외다."
그 말을 듣자 종예는 부질없이 동오를 의심했던 것임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려 감사를 표했다. 손권이 종예의 의심을 씻어 주기 위해 다시 힘주어
말했다.
"짐이 이미 동맹을 맺은 터에 어찌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소?"
종예가 그런 손권에게 말을 둘러댔다.
"저희 천자께서는 이번에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특별히 신을 보내 알
려 드리라 하셨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촉이 만에 하나라도 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는지 문득
황금 장식이 달린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아 꺾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짐이 만약 지난날 맺은 동맹을 저버린다면 내 자손은 대를 잊지 못하고 끊
길 것이다!"
손권은 이어 향과 비단과 여러 가지 애물을 가지고 오게 하고 사신을 뽑아 종
예와 함께 서천으로 가게 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에 종예는 오주 손권에
게 절을 올려 하직을 고하고 동오의 사신과 함께 성도로 돌아와 후주에게 아뢰
었다.
"오주는 승상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래 매일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다 하옵니
다. 또한 모든 관원들에게 상복을 입게 하셨습니다. 파구 땅에 군사를 늘린 것은
혹시 위나라가 이 틈을 노려 촉으로 쳐들어가지 않을까 염려되어 대비한 것일
뿐 딴 뜻은 없었다 합니다. 특히 오주는 몸소 화살을 꺾어 동맹을 저버리지 않
을 것임을 다짐하였습니다."
후주는 그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종예의 노고를 치하한 후 동오의 사신을
불러 후히 대접했다. 동오의 사신이 돌아가자 후주는 공명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좇아 문무백관들의 작위를 새롭게 내렸다. 장완을 승상으로 삼는 한편 대
장군에다 상서라는 벼슬을 겸하도록 했다. 비위는 상서령으로 삼아 승상의 일을
돕게 했다. 또 오의는 거기장군으로 삼고 절을 주어 한중 땅을 지키게 했다. 강
유는 보한장군 평양후로 삼아 모든 곳의 군사를 다스리게 하여 오의와 함께 한
중에 머물며 위나라의 침범에 대비케 했다. 그 밖의 다른 장수들은 지난날의
벼슬 그대로 두어 각기 맡았던 일을 보게 했다. 양의 또한 지난날 지녔던 벼슬
그대로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른 지는 장완보다 앞섰으나 그 밑에 있게 된데
다, 스스로 자신의 공을 높이 여기고 있었으나 상이 없자 불만이 일었다. 양의는
비위를 보자 마음 속의 불평을 털어놓았다.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전군을 이끌고 위나라에 투항했더라면 오늘날 이
토록 박대를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비위는 양의가 거리낌없이 그렇게 말하자 은밀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그 사
실을 고했다. 후주는 비위의 표문을 읽자 크게 노해 양의를 옥에 가두고 엄히
문초한 뒤 목을 베려 했다. 그러자 장완이 나서 후주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양의의 죄가 죽어 마땅하나, 지난날 승상을 받들며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그
러니 그를 죽이는 대신 벼슬을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어 몰아 내시는 것만으르도
족할 것입니다."
장완의 청에 후주도 그 말에 따랐다. 이에 양의는 평민이 되어 한중의 가군으
로 쫓겨나고 말았다. 가군으로 쫓겨난 양의는 한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더니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향락에 빠진 위주 조예
공명의 죽음으로 사마의도 위로 군사를 물리자 세 나라가 싸움을 그친 것은
촉한 건흥 13년, 오나라는 가회 4년이요, 위나라는 청룡 3년이었다. 이 해에는
세 나라 사이에 서로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으니, 오랜만에 평화로운 세월을 보
내고 있었다. 위주 조예는 사마의를 태위로 삼아 모든 군사를 이끌어 변방을
지키게 했다. 평화로운 날이 이어지자 위주 조예는 허도에 대규모의 궁궐과 전
각을 짓도록 했다. 뒤이어 낙양에도 조양전,태극전,총장관이란 궁전을 지었는데
그 높이가 모두 열 길이 넘는 화려하고 움장한 궁궐이었다. 뿐만 아니라 승화전,
청소각, 봉황루를 세우는가 하면 구룡지를 팠다. 박사 마균에게 모든 공사를 맡
기니 용이 꿈틀거리듯 조각한 대들보에다 꽃무늬를 수놓은 마루와 청기와와 금
빛 벽돌을 붙인 기둥이 보는 이의 눈을 현란케 했다. 이 큰 공사를 위해 뽑혀
온 천하의 이름난 공장들만 해도 3만여명이요, 백성 30십만 명이 동원되었다.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시키니 지친 백성들의 원망 소리가 드높았다. 조예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방림원에 토목 공사를 벌여 공경대부까지 흙을 져나르
게 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보다못해 표문을 올렸다. 이미 그 동안의 싸움으로
들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이 많은 터라 늙고 병든 백성들이 많으니 궁궐을 짓더
라도 농사철을 피해 적당한 때를 택해야 한다는 표문이었다. 또한 공경대부까지
궁궐 짓는 일에 내몰아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림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그 표
문을 본 조예는 크게 노해 동심의 벼슬을 빼앗고 내쫓게 했다. 동심이 하루 아
침에 벼슬을 빼앗긴채 쫓겨났으나 조정에는 충의 있는 신하들이 또 있었다. 태
자사인 장무가 다시 표문을 올려 공사를 중지하라고 간했다. 그러나 조예는 또
다시 그를 목베어 죽여 버렸다. 조예의 사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 마균
을 불러들였다.
"짐은 좀더 높고 화려한 궁전을 짓고 신선과 왕래하며 늙지 않는 처방을 얻고
자 하오."
그러자 마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한나라 스물네 분의 황제 중 무제만이 가장 오래 사셨습니다. 그 까닭은 하늘
의 해와 달의 정기를 잡수셨기 때문입니다. 무제께서는 장안의 궁중에 백양대를
세우시고 그 대 위에 구리로 사람을 만들어 세우셨습니다. 이 구리로 만든 사람
의 손에 쟁반을 받들게 하였는데 이 쟁반을 승로반이라 하였습니다. 이 승로반
으로 밤 삼경 때 북두칠성의 정기가 서린 이슬을 받게 하셨는데 그 이슬을 천장
또는 감로라 하였습니다. 무제께서는 아름다운 옥을 갈아 가루로 만든 후 그 일
슬에 섞어 젊어지는 약으로 마셨습니다."
조예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 동인을 옮겨 오게 했다. 마균은 곧
인부 1만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가서 백양대에 오르기 위해 나무를 얽어 발판을
만들었다. 백양대는 그 높이가 이십 길에, 대를 바치고 있는 구리 기둥의 둘레
가 열 아름이었다. 마균이 인부들에게 동상을 뽑아 내게 하자 많은 인부들이 힘
을 합해 동상을 쓰러뜨리려 했다. 그러자 동상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몹시 놀라고 있는데 돌연 회오리바람이 일
며 모래와 돌멩이를 말아 올리더니 소나기 퍼붓듯 내리쳤다. 그러고는 하늘이
무너지듯 땅이 꺼지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리 기둥이 인부 1천 명이 그 밑에
깔려 죽었다. 마균이 동인과 승로반만을 낙양으로 옮겨 오자 조예가 물었다.
"구리 기둥은 어디 있는가?"
"무게가 1백만 근이나 나가 도저히 운반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조예는 그것으로 두 개의 동인을 만들었는데 이름하여 옹중이라 했다. 조예는
그 옹중을 사마문 밖에 세우고, 또 구리로 용과 봉황을 한 쌍씩 만들어 궁정 앞
에 세웠다. 용의 높이는 네길이요, 봉황의 높이는 세 길이었다. 또한 상림원에는
진기한 꽃과 새들을 기르게 했다. 소부 양부가 보다못해 상소를 올려 간했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꾸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다가 그 재앙이 아들에게 미쳐 2
세에 멸망했음을 깨우쳤다. 그러나 조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예
는 영을 내려 방림원에 천하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뽑아 두고 향락에 흠뻑 취해
들었다. 조예는 제위에 오르자 모씨를 황후로 삼았으나 후궁인 곽 부인을 보자
황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곽 부인은 예쁘고 영리했다. 조예는 곽 부인에게
빠져 지내다 마침내 모황후에게 사약을 내리고 말았다. 조예가 곽 부인을 황후
로 삼았으나신하들은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조예가 사치와 향락에 빠지
고 조정에는 간신들만이 들끓는데다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아지니 이런한 때는
자연히 변고가 일게 마련이었다. 어느 날 유주자사 관구검으로부터 요동의 공
손연이 스스로 연왕이라 일컬으며 난을 일으켰다는 표문이 올라왔다. 공손연은
건안 12년, 조조가 원상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향했을때 미리 원상의 목을 베어
바쳤던 공손강의 둘째 아들이었다. 조조가 그 공을 기특히 여거 양평후로 봉했
다. 공손강이 죽자 그의 아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아우인 공손공이 그 뒤를 이었
다. 태화 2년이 되자 이제 성인이 된 공손연은 문무에 능한데다 야심에 차있던
중 숙부인 공손공을 몰아 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조예는 하는 수 없이
공손연을 양렬장군 요동태수로 봉했다. 그 후 오나라의 손권이 사신을 요동으로
보내 공손연에게 금은 보석을 주며 그를 연왕에 봉하려 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중원의 조예가 두려워 그 사신들을 목베어 조예에게 바쳤다. 이에 조예는 크게
기뻐하며 공손연에게 대사마 낙랑공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공손연은 조예가
내린 벼슬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연왕이라 칭하며 군사를 일으킨 것이었다. 부
장 가범과 참군 윤직이 말렸으나 공손연은 그들을 목베고 15만의 군사를 휘몰아
중원으로 달려갔다. 조예가 전갈을 받고 크게 놀라 사마의를 불렀다.
"신에게 보병과 기병 4만이 있습니다. 역적을 토벌하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오
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며 조예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예는 여전히 마음
이 놓이지 않는 듯 사마의에게 물었다.
"길이 멀고 험한데다 군사가 너무 적어 많은 적을 쳐서 무찌르기가 어려울까
걱정이오."
사마의가 걱정하는 조예에게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장수는 계책과 지혜로 군사를 부릴 줄 알아야 하며 결코 군사가 많아야만 이
기는 것은 아닙니다. 공손연이 만일 성을 버리고 달아나면 그로서는 상책이요,
그렇지 않고 요동을 지키며 맞선다면 중책입니다. 또한 앉아서 양평 땅을 지키
려 든다면 이는 하책이니 그가 이 계책을 쓴다면 반드시 공손연을 사로잡고야
말겠습니다."
"그러면 언제 싸움을 끝내고 돌아오겠소?"
조예가 사마의에게 물었다.
"여기서 4천 리 길이니, 가는데 백 일이 걸리며 적을 치는 데 백 일, 돌아오는
데 백 일이 걸리며 쉬는데 60일 정도 걸립니다. 아마 늦어도 1년이면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예가 다시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 동안 오나 촉에서 쳐들어오면 어찌하겠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신이 그에 대한 방비책을 세워 놓고 떠나겠습니
다."
사마의가 그렇게 대답하자 조예는 그제야 크게 기뻐하며 사마의가 출병하도록
명했다. 막상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어 요동으로 향하자 공손연은 선뜻 맞서 싸
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마의의 용병이 뛰어난데다 공컖? 저
희 형제가 힘을 다해 죽기로 싸워 나라를 위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요."
사마의가 끝내 움직을 기색이 없자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마의
도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나오니 더는 말릴 수가 없는지 그들에게 나가 싸울 것
을 허락했다.
"정히 그렇다면 너희 둘이 길을 나누어 나가 싸우도록 하라."
사마의가 하후형제에게 각기 군사 5천씩을 주자 그들은 그 길로 길을 나누어
나아갔다. 두 사람이 두 갈래로 나누어 한동안 나아가는데, 맞은편에서 목우,유
마를 이끌어 오는 촉병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촉병을 보자 크게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그 서슬에 깜짝 놀란 듯 촉병은 목우,유마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
다. 두 사람은 달아나는 촉병을 뒤ㅉ는 대신 두고 간 목우,유마를 거둘어들여 영
채로 끌고 갔다.
다음 날이 되자 영채를 나선 하후혜와 하후화는 이번에는 1백여 명의 촉병을
사로잡았다. 사마의가 두 사람의 공을 차하한 뒤 잡혀 온 촉병들에게 물었다.
"공명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잡혀온 촉병들이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했다.
"제갈 승상께서는 도독께서 나와 싸우려 하지 않자 저희들에게 논밭을 갈게하
며 오랫동안 머무를 계책을 세우셨습니다. 저희들은 논밭을 갈고 있다가 사로잡
힌 것입니다."
사마의가 그 말을 듣더니 잡아온 촉병들을 모두 놓아주게 했다. 그러자 하후
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여 그들을 모두 돌려 보내려 하십니까?"
"저따위 졸개들을 죽인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살려서 돌려 보내면 저들
의 입에서 위나라 장수들이 너그럽고 어질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자연히 촉병은 우리와 싸울 마음이 풀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적의 마음을
흐트러 놓은 것이 옛 여몽이 지난날 형주를 뺏을 때 쓴 계교였다."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장수들에게 앞으로도 촉병을 사로잡더라도 모두 돌려
보내라고 명을 내렸다. 그리고 적병을 사로잡아 온 장졸들에게도 두터운 상을
내리겠다고 일렀다. 한편 공명은 사마의를 꾀어 내기 위한 계책을 쉬지 않고
베풀고 있었다. 고상에게 명하여 군량을 나르는 척하고 목우,유마를 이끌어 호로
곡을 오르내리게 했다. 하후혜와 하후화는 그런 고상을 쳐서 보름 동안에 몇 차
례나 목우,유마를 빼앗고 촉병을 사로잡았다.
목우,유마를 여러차례 빼앗고 촉병을 사로잡아 오자 사마의도 문득 마음이 달
라졌다. 어쩌면 공명도 마음이 초조해져 목우,유마를 빼앗겨 가면서까지 싸움을
서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마의가 촉진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잡혀 온 촉병에게 물었다.
"공명은 지금 어디 있는가?"
"승상께선 기산에 머무르시지 않고 호로곡에서 서쪽 10리쯤 되는 곳에다 영채
를 세우고 계십니다."
촉병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마의는 촉병의 움직임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본 다음 그들을 놓아주게 했다. 지난날 여몽이 베푼 계책을 쓰기 위
해서였다. 촉병들이 모두 돌아가자 사마의도 마음을 정한듯 장수들을 불러들인
후 명을 내렸다.
"지금 공명은 기산을 비워두고 샌퉴?맕4촉병은 지금 그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노성에서 한창 보리 타
작을 하고 있다니 촉병을 칠 더없이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사마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겪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곽회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때 공명이 그런 짓거리로 우리를 속였을 뿐입니다. 이제그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뒤를 칠
터이니 도독께서는 쳐들어가십시오. 그러면 노성을 어렵지 않게 빼앗을 수 있
으며 공명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끝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기운을
내어 곽회의 말을 좇기로 하고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노성으로 향했다. 노
성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위병이 길을 재촉해 가면 밤중이면 이를
수 있는 거리였다. 노성으로 가는 도중에 갯벌과 강 이외에에는 모두 한항 무르
익은 보리밭뿐이었다. 그때 노성에 있는 촉병들은 보리 타작이 한창이었다. 그런
데 공명이 문득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영을 내렸다.
"오늘 밤에 반드시 적이 올 것이다. 내가 살펴보니 노성 동서쪽 보리밭이 군사
들을 숨겨 둘 만한 곳이다. 누가 가서 매복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강유와 마대,위연,마충이 한꺼번에 나섰다. 네 장수가 앞을 다투며 나서자
공명은 몹시 기뻐했다. 공명은 곧 강유와 위연에게 군사 2천을 주며 동남과
서북쪽에 숨어 있게 하고 마대와 마충에게도 각기 군사 2천을 주며 서남과 동
북쪽에 숨어 있게 했다.
"호포 소리가 울리거든 네 방향에서 일제히 내닫도록 하라!"
공명이 네 장수에게 그렇게 이른 뒤 제각기 군사를 거느린 채 화포를 지니고
나아가 보리밭 속에 숨었다. 이윽고 사마의가 해가 저물녘이 되자 노성 아래
에 이르렀다. 사마의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날이 밝을 때 공격하면 성 안에서 반드시 대비를 할 것이니 밤이 늦기를 기
다려 갑자기 치고 들어가야겠다. 이 성은 성벽이 낮은데다 해자도 그리 깊지
않으니 깨뜨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사마의의 말에 따라 성 밖에서 숨을 죽이 채 밤이 되기를 기다
렸다. 그때 곽회도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 사마의의 군사에 함세했다. 날이
어두워진 초경쯤이 되자 위군은 크게 북소리를 울리며 노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러자 촉병들이 성벽 위에서 활과 쇠뇌를 위병들의 머리 위에 쏘아붙였다. 위
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돌 때문에 성벽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홀연 포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포 소리를 군호삼아 군사들이 몰려
오고 있는 듯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어느 쪽 군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위병들은 크게 당황하는 가운데 대오고 뭐고 할 것 없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곽회가 의심이 들어 얼른 뒤쪽의 보리밭을 살펴보
게 했다. 이에 위병이 모두 보리밭으로 달려가는데 그때 홀연 사방에서 불길
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촉병이 달려나왔다. 사방의 보리밭이 모두 촉병으
로 변한 듯 일시에 쏟아져 나와 위병을 향해 덮쳐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때를 맞춰 노성의 네 문이 활짝 열리면서 성 안의 촉병들도 성 밖으로 밀려
나왔다. 안과 밖에서 호응해 위군을 향해 짓쳐드니 이미 어지러워져 있던 위병
들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촉병의 창칼에 의해 위
군의 시체가 얕은 해자를 메웠다. 곽회의 말을 듣고 단번에 노성을 깨칠 기세
로 달려왔던 사마의였으나 일이 그 지경이 도니 별수 없었다. 황망히 패한 군
사를 수습해 겹겹이 둘러싼 적을 뚫고 산마루로 달아났다. 곽회 또한 패잔병을
이끌고 산 뒤쪽으로 달아났다. 위병이 수많은 시체만을 남긴 채 썰물처럼 빠
져 나가자 공명은 성 안으로 들어가 네 장수로 하여금 성의 사방을 굳게 지키게
했다. 한편, 한바탕 크게 패한 싸움 끝에 겨우 숨을 돌린 곽회가 사마의를 찾
아와 말했다.
"촉병과 싸운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더 이상 쳐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리칠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3천여 군마를 잃었습
니다. 무슨 방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일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곽회의 말에 사마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별달리 계책이 떠오르지 않
아 답답한 얼굴로 곽회에게 물었다.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회가 생각해 둔 바가 있는 듯 서슴없이 말했다.
"격문을 옹주와 양주로 보내 그곳의 두 인마를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저는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 적이 돌아갈 길을 끊겠습니다. 적의 양초를 실어나르는
길을 끊으면 절로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적을 치면 그들도 별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마의가 곽회의 말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곧 격문을 써서 옹,양 두 주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하루를넘기지 않아 손례가 옹주,양주의 인마를 이끌어 왔
다. 손례가 인마를 이끌어 오자 사마의도 꺾였던 기세가 되살아났다. 즉시 손례
로 하여금 곽회와 더불어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게 했다. 그때 공명은 노성에 머
물면서 위군이 성을 치러 오지 않자, 강유와 마대를 불러들이고 말했다.
"위병이 험한 상을 등지고 우리와 싸우려 하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 첫째로는 우리가 거두어들인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로
는 군사를 검각으로 돌려 우리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고자 함이다. 그대들
은 각기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그곳의 험한 길목을 지키고 있도록 하
라. 위병은 우리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보고도 절로 물러날 것이다."
공명의 영을 받은 두 장수는 즉시 군사를 이끌어 검각으로 떠났다. 그 때 장
사 양의가 들어와 공명에게 말했다.
"지난번 승상께서 이르시기를 백일마다 한 차례씩 군사를 교대하기로 하셨습
니다. 이제 그 기한이 되었습니다. 한중에 있는 군사들이 이미 천구에 이르렀다
는 공문이 왔습니다. 이곳에 있는 군사 8만 중에 4만은 한중으로 돌려 보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공명이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일렀다.
"이미 정한 일이니 곧 실행하라."
이에 만 군사들이 한중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데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손례가 옹주와 양주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 곽회와 함께 검각을 치러 간
다고 합니다.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어 노성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뜻밖에 위병이 대군을 이끌어 노성의 앞과 뒤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양의도
생각이 달라졌다. 급히 공명에게 말했다.
"위병이 급한 기세로 밀고 들어온다 하니 승상께서는 군사를 교대하시는 것
을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십시오. 그 군사들로 하여금 우선 적을 물리치게 한
후 한중의 군사들이 이곳에 이르른 다음에 돌려 보내도록 하십시오."
양의의 말에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
"그건 아니 된다. 내가 장수와 군사를 부림에 있어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 왔
다. 이미 내가 영을 내린 터에 어찌 믿음을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군사는 모두 채비를 마쳤을 터이고 그 부모와 처자는 사립문에 기대
서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큰 곤경에 빠지
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그들을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말한 공명은 곧 영을 내려 한중으로 돌아갈 군사들을 그날로 떠나게
했다. 공명의 영을 받은 군사들은 모두 감격해 소리쳤다.
"승상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들이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
습니까? 바라건대 저희로 하여금 힘을 다해 위병을 깨뜨려 승상의 은혜에 보
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공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사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은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차례이다. 어찌하여 여기 머물러 싸우려
하는가? 모두들 돌아가도록 하라."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싸워 위병을 무찌르고 가겠습니다."
공명의 타이름을 듣고 군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공명이 고집을
부리는 군사들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성에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위병이 이르
거든 틈을 주지 말고 급히 치도록 하라. 그것이 바로 편이 앉아 있다가 먼길
을 와 피로한 적을 쳐부수는 병법이다."
군사들은 공명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성 밖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위병이 이
르기를 기다렸다. 그때, 사마의를 돕기 위해 달려온 옹주,양주의 군사가 길을
재촉해 성 가까이에 이르렀다. 막 영채를 세우고 쉬려고 할 때였다. 성 밖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촉병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들을 덮쳤다. 촉병들은 날
래기 이를 데 없었고 장수들의 용맹 또한 하늘을 찔렀다. 공명의 은혜에 보답
하기 위해 편히 쉬다가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니 옹주와 양주의 지친 군사들이
당해 낼수가 없었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지며 달아나자 촉병들이 그
뒤를 쫓아서 죽이니 시체가 들에 널려 가득하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다. 다
시 위병을 크게 깨뜨리자 공명은 군사들을 서로 불러들여 상을 내리고 치하했
다. 그런데 공명이 옹주,양주의 군사를 크게 물리쳐 이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영안성의 이엄으로부터 뜻밖에 전갈이 날아왔다. 공명은 이엄이 보낸 급보를 뜯
어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요사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오는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위와 화친을 청했
다 합니다. 또 위는 촉을 치자고 선동하고 있으나 다행이 오는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엄이 미리 이 일을 알아 냈기로 승상께 알려 드
리는 바이며 급히 좋은 계책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명은 그 글을 읽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글대로 위와 동오
가 힘을 합해 밀려든다면 성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급한 지경에 이를 것이
었다. 공명이 여러 장수를 급히 불러들이고 말했다.
"만약 동오에서 촉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큰일이다. 내가 급히 돌아
가야 하리라."
공명은 기산에 있는 전군에게 영을 내려 대채의 인마를 서천으로 물러나게 했
다.
"사마의는 내가 이곳에서 군사들과 함께 있는 줄 알 테니 함부로 뒤쫓지는 않
을 것이다."
이에 왕평,장의,오반,오의는 길을 나누어 서서히 서천으로 물러났다. 공명과 그
곳에서 맞서던 장합은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자 의아해했다. 급히 뒤쫓아 촉
병을 칠까 했으나 공명의 속임수에 하도 여러 번 속아왔던 터라 감히 뒤쫓지 못
하고 사마의에게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장합이 상규에 이르러 사마의를 보
자 물었다.
"지금 뜻밖에도 촉병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촉병이 물러나는 것입니
까?"
그러나 사마의 역시 조심스럽기는 장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명이 속임수가 많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될 것
이오. 굳게 지키면서 그들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오."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대장 위평이 나서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촉병이 기산의 영채까지 거두어 가지고 물러난다 하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을
뒤쫓아 덮쳐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에 도독께서는 군사를 묶어 두고
촉병을 범처럼 뭅? 잠시 후 환범
이 달려왔다. 신창과 사마노지와는 달리 환범만은 조상에게 사마의와 싸울 것을
권했다.
"사마의가 반역을 했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천자를 허도로 모시지 않습니
까? 우선 이곳에 머무르며 외방의 군사를 모아 사마의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가족들을 모두 성 안에 두고 온 조상은 망설이기만 할 뿐 어쩔줄 몰랐
다. 그런 조상은 환범이 다그쳤다.
"여기서 허도까지는 한달음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성 안에 두어 해를 지낼
수 있는 양식도 있습니다. 게다가 주공의 별영병마가 바로 가까운
분별없는 후주 어진 사람 떠나고
천자 조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마소는 조환을 새로운 천자로 내세운다. 강
유가 위를 치기 위해 여덟 번씩이나 기산에 나아갔으나, 주색에 빠져 나라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던 후주는 환관의 말만 믿고 매번 강유를 불러들여 일을 그르
친다.
조모가 죽자 가충은 사마소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사마소는 주
의 문왕과 위 무제를 본받으려 했다.
그리하여 사마소는 조조의 손자이며 연왕 조우의 아들인 조환을 황제로 삼았다.
조환은 사마소를 승상에다 진공으로 삼고 돈 10만냥과 비단 1만필을 내렸다.
조환은 연호를 경원 원년이라 고쳤으니 이가 곧 위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원제였
다.
사마소가 조모를 죽이고 다시 조환을 천자로 세웠다는 소식은 촉으로 전해졌다.
강유는 크게 기뻐했다.
"내가 다시 위를 칠 명분을 얻게 되었다."
강유는 곧 동오에 사신을 보내 사마소가 임금을 죽인 죄를 물어 함께 위를 치자
는 뜻을 전하게 한 뒤 군사 15만을 일으켰다. 요화와 장익에게 선봉을 맡게 하
여 요화는 자오곡으로, 장익은 낙곡으로 나아가게 했다. 강유 스스로는 야곡으
로 군사를 이끄니 세 갈래 군마는 길을 나누어 일제히 기산으로 나아갔다.
등애가 기산을 지키고 있다가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장수들을 모아 의논했다.
그때 참군 왕관이 한 가지 계책을 내었다.
왕관은 전에 위주 조모를 받들다 끝내 죽음을 맞은 왕경의 조카라고 스스로를
밝힌 뒤 그것을 기화로 왕경의 원수를 갚겠다며 강유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기
회를 보아 안에서 내응하여 강유를 사로잡자는 계책이었다.
등애는 왕관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강유에게로 가 거짓으로 항복하게 했다. 그러
나 강유는 처음부터 왕관의 투항이 거짓임을 알았다. 사마소가 이미 왕경은 물
론 그 삼족까지 멸한 터에 그의 조카를 죽이지 않고 군사를 다스리는 장수로 놓
아 둘 리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유는 짐짓 왕관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체하
며 그가 이끌고 온 군사들을 나누어 배치시켰다.
그런 다음 왕관이 몰래 등애에게 보내는 첩자를 사로잡았다. 강유는 그 첩자의
몸에서 나온 글을 고쳐 다시 등애에게 보냈다. 그걸 알 리 없는 등애는 그 글에
적힌 날 군사를 이끌어 나아갔다. 그러나 산골짜기에서 불쑥 달려나온 장수는
촉장 부첨이었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불길이 일며 사방에서 촉군이 쏟아져
나와 위병을 짓밟았다.
등애는 거꾸로 촉군의 계책에 걸려든 것을 알고 급히 갑옷과 투구를 벗어 버리
고 보졸 속에 뒤섞여 산으로 달아났다.
왕관은 그때서야 자기의 거짓 항복이 탄로났음을 알았다. 왕관은 촉병의 군량과
마초를 불태우게 한 뒤 위병 쪽으로 가는 길에는 매복이 있을 것으로 여겨 한중
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모든 군사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싸워라."
왕관이 그렇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한중 땅으로 달려가니 당황한 것은 오히려 강
유였다.
왕관이 한중으로 향하자 강유는 한중을 잃을까 두려웠다. 급히 군사를 되돌려
왕관을 뒤쫓아 위병을 송두리째 흑룡강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강유는 등애와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량과 마초를 모두 잃고 잔도를 훼손당하니
헛되이 싸운 격이 되고 말았다.
한편, 등애는 싸움에 졌음을 천자께 고하고 스스로 벼슬을 깎아내리며 죄를 청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던 등애에게 오히려 상을 내렸다. 그리고
강유가 또 군사를 낼까 두려워 군사 5만을 더 보내 촉병의 공격에 대비케 했다.
왕관 때문에 군사를 되돌렸던 강유는 다시 위를 정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촉한 경요 5년 10월, 그 동안 군량을 비축하고 군마를 조련한 강유는 위를 치기
위해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고 다시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요화를 한중에 남겨 두고 지키게 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조양으로 나아갔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사마망은 등애에게 물었다.
"강유가 짐짓 조양을 취하려는 체하고 실상은 기산을 취하려 나오는 것이 아니
오?"
그러나 등애는 강유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지난날 강유는 여러 번 우리 양초 쌓아 둔 곳을 쳤소. 이제 조양에는 양초가
없으므로, 우리가 기산만을 지키고 조양은 방비가 없으리라 여긴 것 입니다. 조
양을 취한 다음 그곳에 양초를 쌓아 놓고 강인들과 손잡고 오래 싸울 계책을 세
울 것이오."
등애는 그렇게 말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사마망에게 말했다.
"이곳의 군사를 이끌어 가 조양부터 구해야 합니다. 조양성 25리 밖에 후하라는
성이 하나 있는데 바로 조양의 목구멍과 같은 곳입니다. 공은 군사 한 떼를 이
끌어 조양성으로 들어가되 , 깃발을 누이고 북 소리를 내지 말며 네 문을 활짝
열어 놓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등애는 각 요해처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사마망에게는 계책을 일러
주어 떠나게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유는 하후패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조양을 뺏게
했다. 하후패가 군사를 이끌어 조양성에 이르러 바라보니 성문은 열려 있는데다
성 위에는 깃발 하나 꽂혀 있지 않았다. 하후패가 의심쩍어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데 장수들이 말했다.
"장군께서 군사를 이끌어 오자 남아 있던 백성들이 전부 성을 빠져 나가 버린
듯 합니다. "
하후패가 성 남쪽으로 가서 살펴보니, 과연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이 달아나고 있
었다.
그제야 하후패는 성이 비었음을 알고 군사를 성 안으로 내몰았다. 그때였다. 홀
연 포 소리가 울리더니 성 위에서 북 소리 피리 소리가 일제히 일어나고 깃발이
오르더니 어느 새 적교가 걷혀 버렸다.
하후패가 계교에 걸려든 것을 깨닫고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성 위
헤서 화살과 돌이 소나기 퍼붓듯 쏟아져 내렸다. 하후패는 거느리고 온 5백 군
사와 더불어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강유 또한 등애가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들이치는 바람에 죽기로 싸워 길을
열어 20여 리나 쫓겨난 뒤에 영채를 세웠다.
그러자 장익이 계책을 내었다.
"위병이 이곳에만 몰려 있으니 기산은 분명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수습하여 조양과 후하를 치십시오. 저는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가 기산
을 친 후 장안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강유도 가만히 영채를 지키고 있을 수만
은 없었다. 곧 장익이 낸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장익에게 군사 한 갈래를 주어
기산을 빼앗게 했다. 장익이 군사를 이끌어 가자 강유는 후하로 가서 등애에게
싸움을 돋우었다. 싸움은 결판이 나지 않고 다음 날로 이어졌다. 이렇게 며칠을
싸우던 등애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촉병이 크게 한 번 패하고도 급하게 싸움을 걸고 있으니, 이는 틀림없이 기산
을 빼앗으려는 계교이리라.'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그곳을 맡겨 지키게 한 후 자신은 기산을 구원하러 갔다.
등애가 떠나가자 이번에는 밤 이경이 되기를 기다려 위군쪽에서 촉군에게 싸움
을 걸었다. 등애가 기산으로 간 것을 감추기 위한 기습이었다.
강유는 돌연한 위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강유는 틀림없이 위군의
한 갈래가 기산의 영채를 구하러 갔음을 알고 자신도 군사를 이끌어 기산으로
향했다.
그 무렵, 장익은 기산을 들이치다가 난데없이 등애가 군사를 이끌어 오자 위기
에 몰렸다. 등애는 장익을 산 뒤로 몰아넣고 물러날 길을 끊으니 촉군은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강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
났다. 강유가 등애의 등 뒤에서 휘몰아치자 장익도 군사를 몰아 등애에게 맞섰
다. 뜻밖에 강유가 나타나자 등애는 크게 놀랐다. 곧 이어 많은 군사를 잃은 둥
애는 급히 물러나 영채 안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유는 군사들에게 성을 에
워싸고 들이치게 했다. 그럴 즈음 뜻밖에도 성도에서 강유에게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그 무렵 성도의 후주는 환관의 말만 믿고 주색에 빠져 나라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어진 사람은 점점 후주 곁에서 멀어져 가고 아첨배들
만 들끓게 되었다.
그때 우장군으로 염우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별다른 공이 없으면서도 환관 황
호에게 뇌물을 써서 벼슬에 오른 사람이었다.
염우는 강유가 기산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자 황호를 부추켜 후주에게 상주하게
했다.
"강유는 여러 차례 위와 싸웠으나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염우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게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황호의 말에 후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에 황호는 세 번이나 강유를 불러들이는 조서를 내린 것이었다. 강유는 후주
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한중으로 돌아갔
다. 등애는 강유가 군사를 물리는 것을 보고 무슨 속임수나 있지 않을까하여 감
히 뒤쫓지 못했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그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한 뒤 후주를 뵈러 성도로 갔
다. 그러나 후주는 열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으니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
강유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아하게 여기는 가운데, 하루는 동화문으로 갔다가
비서랑 극정을 만나자 그에게 물었다.
"공은 천자께서 나를 불러들이신 이유를 알고 있소?"
그러자 극정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아지 까닭을 모르고 계십니까? 그건 황호가 염우로 하여금 공을
이루게 하려고 천자께 상주하여 장군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황호는 등애
가 워낙 군사를 잘 부린다 하여 선뜻 염우를 보내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다 합니
다."
강유가 그 말을 듣자 몹시 화가 나 소리쳤다.
"내가 반드시 그 내시놈을 죽여 버리고 말 것이오."
강유가 몹시 놀라자 극정이 가만히 강유를 깨우쳤다.
"대장군께서는 제갈 무후의 뒤를 이으시어 그 소임이 무거우신데 어찌 가벼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만약 천자께서 오해라도 하신다면 일을 크게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선생의 말씀이 과연 옳소이다."
다음 날이었다. 후주는 그날도 황호와 함께 후원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강유가 후주를 뵙기 위해 부하 몇을 거느리고 후원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후원으로 들자 누군가가 황호에게 급히 알렸다. 황호는 그말을 듣자 몹
시 놀라며 얼른 호산 뒤의 산 기슭에 몸을 숨겼다.
그때 강유가 정자 아래에 이르러 절을 올린 후 울며 아뢰었다.
"신은 기상에서 등애를 에워싸고 위급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세 번이나 조서를 내리시어 신을 불러들이셨습니다. 어찌하여 신을 불
러들이셨는지 그 까닭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후주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강유가 다시 아
뢰었다.
"간교한 황호가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음은 바로 지난날 영제 때
의 십상시와 같은 형국입니다. 폐하께서는 가까이로는 장양을 돌이키시고 멀리
로는 조고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황호를 빨리 죽여 없애 조정을 밝게 하십시
오. 그래야만 중원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후주가 웃으며 말했다.
"황호는 다만 내 심부름이나 해 주는 하잘것없는 신하에 지나지 않소.그런 그가
권세를 받는다 해도 그걸 맡을 만한 능력이나 있겠소? 지난날 동윤이 항상 황호
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을 괴이쩍게 여겼소. 그런데 이제 경까지 어찌 그런 하찮
은 자를 죽이려 하오?"
강유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후주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황호를 죽이지 않으신다면 오래지 않아 화를 입으실 지도 모릅니다."
강유가 간곡히 후주에게 청했으나 후주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황호에게 빠져있는 후주는 강유에게 꾸짖듯 말했다.
"좋아하는 이는 살리기를 애쓰고, 미운 사람은 죽이려 애쓴다더니 과연 그렇소
이다. 그려. 경은 어찌 한낱 환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후주는 그 말과 함께 숨어 있는 황호를 불러들이게 한 후 강유에게 잘못을 빌라
고 일렀다.
황호는 강유에게 절을 올린 후 눈물을 흘리며 죄를 빌었다.
"이제부터 폐하만 받들어 모실 뿐 나라일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남의 말만을 듣고 소인을 죽이려 하지 마십시오. 소인의 목숨이 장
군의 손에 달렸으니 부디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황호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조아려 눈물을 뿌렸다.
강유는 후주가 황호더러 자신에게 빌게 한 터라 그 자리에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밖으로 나와 극정을 찾아갔다.
강유가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극정에게 자세히 들려 주자 극정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군께 곧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장군이 위태롭게 된다면 이 나라
도 흘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말을 들은 강유가 굳은 얼굴로 극정에게 청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선생께서는 부디 나라도 지키고 이 몸도 보존
할 수 있는 계책을 내어 주시오."
극정이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농소에 답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데 땅이 기름진 곳입니다. 장군께서는 이전
에 제갈 무후께서 둔전하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천자께 말씀드려 답중으로 가
서 무후를 본받아 둔정하겠다고 청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첫째는 보리를 거
두어 군량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둘쩨로는 농우의 여러 고을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셋쩨 위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한중을 넘보지 못할 것이며,
넷쩨로는 장군께서 밖에서 병권을 쥐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감히 일을 꾸미지
못하니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화를 면하고 나라와 장군의 몸을 안전
하게 지키는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급히 이 계책을 행하도록 하십시
오."
실로 뒷날까지를 훤히 살핀 현명한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강유는 기쁜 얼굴로
극정에게 사례했다.
"선생께서는 참으로 금은보화보다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강유는 다음 날이 되자 지체하지 않고 후주에게 표문을 올렸다. 제갈무후를 좇
아 답중에 가서 둔정하겠다고 아뢰었다. 후주는 황호와 사이가 나쁜 강유가 조
정을 떠나겠다고 하자 쾌히 그 청을 허락했다. 후주가 허락하자 강유는 한중으
로 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일렀다.
"우린 여러 번 군사를 움직였으나 언제나 군량이 모자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나는 8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에 가서 보리씨를 뿌려 둔전하며 천천히 군사
낼일을 준비하겠다. 그대들은 오랫동안 싸움터를 누벼 괴로움이 컸을 것이니 군
사를 수습해 돌아가 한중을 지키도록 하라. 만약 위병이 쳐들어오다 하더라도
천 리 먼길을 험한 산과 고개를 넘어왔으므로 상당히 지쳐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해 절로 물러날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등 뒤를 들이친
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호제에게는 한수성을 지키게 하고, 왕함은 낙성을 장빈에게는 한성을,
장서와 부첨은 함께 관문을 지키게 했다.
장수들이 강유의 말에 따라 각기 맡은 곳으로 떠나가자 강유도 몸소 8만 군사를
거느리고 답중으로갔다. 그곳에서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먼 뒤날의 싸움을 위
한 채비에 들어갔다.
한편, 등애는 강유가 답중에서 둔전하며 길에다 영채 40여개를 길게 늘여 세웠
다는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등애는 곧 세작을 풀어 그곳의 지형을 살펴보게
했다.
등애는 세작이 지형을 살피고 오자 그걸 도본으로 그려 표문과 함께 조정에 바
쳤다. 강유가 답중에서 둔전하며 세운 영채를 도본으로보고 그 속뜻을 헤아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등애의 표문과 도분을 본 사마소가 몹시 노해 소리쳤다.
"강유가 여러 번 중원을 침범했는데도 그를 없애지 못하더니 실로 가슴앓이 같
은 큰 우환거리로구나."
그렇게 외친 사마소는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촉을 칠 의논을 했다.
종사중랑 순욱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자 사마소가 물었다.
"누구를 장수로 보내면 좋겠소?"
"등애가 뛰어난 장수이니 종회를 부장으로 삼는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
니다."
순욱이 종회를 천거하자 사마소가 쾌히 응낙하고 종회를 불러 물었다.
"그대가 가서 촉을 친다면 이떤 계책을 낼 것인가?"
"주공께서 촉을 칠 것이라 짐작하여 도본을 그려 둔 것이 있습니다."
종회가 그렇게 대답하며 그려 둔 도본을 내놓았다. 사마소가 도본을 보니, 영채
를 세울 곳과 양초를 세운 둘 곳, 군사들이 나아갈 길과 물러날 곳이 그려져 있
어 빈틈이 없고 법도가 정연했다.
사마소가 몹시 기뻐하며 종회를 진서장군으로 삼고 관중의 군마와 함께 청주,연
주,예주,양주 다섯 주의 인마를 모아 촉으로 나아가게 했다.
또한 등애를 정서장군으로 삼아 관외와 농상의 모든 군마를 거느리고 두 길로
나누어 나가 촉을 치게 했다.
그러자 전장군 등돈이 출병을 반대하고 나섰다. 사마소는 크게 노해 등돈의 목
을 베게 했다. 그 일이 있자 여러 백관들은 감히 사마소가 군사 내는 일을 말
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종회는 촉으로 군사를 거느려 가다 축에 이 사실이 알려질까 염려되어 거
짓으로 동오를 친다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릴 다섯 지
방에 큰 배를 만들게 하고 당자를 보내 그 배를 등주, 내주의 해변에 모아들이
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사마소가 까닭을 알 수 없어 종회를 불러들여 물었
다.
"그대는 육로로 서촉을 치러 가면서 무슨 연유로 배를 만드는가?"
종회가 사마소의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촉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촉은 반드시 동오에 구원을 청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동오를 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오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서촉을 쳐 1년안에 무너뜨릴 동안 배가
완성되면 그때는 동오마저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종회의 거침없는 대답에 사마소는 크게 기뻐했다. 종회가 다시 출정하자 사마소
는 몸소 10리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그때가 위나라 경원 4년 7월 초사흗날이었다.
종회가 떠나고 나자 서조연 소제가 가만히 사마소에게 물었다.
"종회가 큰 뜻을 품었는데다 야심이 크니 그에게 많은 군사를 맡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사마소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미 헤아린 바이다."
"주공께서 이미 알고 계셨다면 왜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 병권을 함께 나누어
맡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소제의 물음에 사마소가 가만히 깨우쳐 주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촉을 치지 못한다 했으니 그건 겁을 먹은 탓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싸우게 한다면 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종회가 홀로 서촉을 칠 계책을
세웠으니 그건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두령움이 없다면 능히 촉을 칠 수 있을
것이고, 촉이 무너지면 촉 사람들은 간담이 다 찢어지고 말 것이다. '싸움에 패
한 장수는 용맹을 말하지 못하며, 나라를 빼앗긴 대장부는 살기를 꾀하지 않는
다'하였다. 그러니 설령 종회가 다른 마음을 품었더라도 어찌 그를 도울 수 있
겠는가? 뿐만 아니라 위병이 이기면 마땅히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랄 터이니, 종
회가 모반을 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터인즉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일은 그대와 나만이 알고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해서는 아니 되리라."
사마소의 말을 듣고 소제는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종회 휘하의 장수
들로는 위관, 호열, 전속, 방회, 전장, 구건, 하후함, 왕가, 황보개, 구안 등
여든 명이나 되었다.
종회가 이들 장수 중 허저의 아들 허의에게 선봉을 맡겨 신중히 명했다.
"너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부자가 다 이름 있는 장수이며 여러 장수들이 모두 너
를 선봉으로 천거하였으니 마군 5천과 보병 1천을 거느려 한중으로 나아가라.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나가되, 너는 중로군이 되어 야곡으로 나아가고 좌군은
낙곡으로, 우군은 자오곡으로 나아가게 하라, 네가 가는 길은 험하고 거친 길이
니 군사들로 하여금 길을 닦고 다리를 고치며 바위를 깨뜨려 길이 끊어지지 않
도록 하라. 만약 소홀히 하여 영을 어기는 날에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
다."
허의가 군령장을 써 두고 군사를 이끌어 가자 종회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밤
을 새워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무렵, 등애도 서촉을 치라는 조칙을 받들었다.
사마망에게는 강인을 막게 하고, 한편으로는 옹주자사 제갈서와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을 불러 군령을 받게 했다. 등애가 군령을 내리자
사방에서 군마가 구름 일 듯 모여들었다. 그때 종회로부터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한중에서 군사를 합치자는 격문이 왔다. 등애는 모여든 각처의 군마에게 각각
진병할 곳을 정해 주고 일제히 나아가게 했다.
한편 위병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은 강유에게도 전해졌다. 강유는 급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렸다.
좌거기장군 장익에게 양평관을 지키게 하고 우거기장군 요화는 음평교를 지키도
록 조서를 내리십시오. 그 두 곳은 가장 요긴한 곳이며, 만약 그곳을 잃는 날이
면 한중을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을 동오로 보내 구원을 청
하도록 하십시오. 저는 답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적과 맞서겠습니다.
그때 후주는 매일 황호와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다가 강유의 표문을 받았다. 후
주는 놀란 얼굴로 ㄱ에 있는 황호에게 그 일을 의논했다.
"지금 위나라의 종회와 등애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두 길로 나누어 온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강유라면 벌레 씹은 얼굴이 되는 황호가 후주에게 아뢰었다.
"그것은 강유가 공을 세우고자 올린 표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신이 듣건대 성 안에 한 무당이 있는데 길흉을 잘 맞힌
다 하니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오."
후주는 황호으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처지라 어뚱하게도 황호에
게 그 무당을 불러들이게 했다. 무당이 한동안 푸닥거리를 하며 신이 내린 듯
전상 위에서 맨발로 길길이 뛰다가 외쳤다.
"나는 서천의 토신이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걱정 말고 태평하게 즐기시오. 몇
년 뒤에는 반다시 위나라 땅까지 모두 폐하께 돌아 올 것이오."
무당의 푸념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후주였다. 후주는 무당에게 후한 상금까지
내릴 뿐 아니라 더욱 황호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황호는 강유가 거듭 올리
표문을 가로채고 후주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럴 동안 종회는 대군을 이끌고 한
주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전군 선봉인 허의가 먼저 남정관에 이르자 공을 세우
고 싶은 생각에 군사를 휘몰아 남정관으로 짓쳐들었다.
그러나 그때쯤 남정관을 지키던 촉장 노손도 위병이 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번에 화살 열 대를 쏘는 제갈 무후가 전해 준 십시연노을 관 앞에 있는 나무 다
리의 좌우에 늘어놓고 군사들을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허의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딱딱이 소리를 군호로 삼아 화살과 돌이 메뚜기처럼
날아들었다. 허의가 깜짝 놀라며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촉병
이 연뇌를 쏘아붙이자 한꺼번에 수십 명의 군사가 쓰러졌다. 허의는 크게 패한
채 허겁지겁 돌아가서 종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종회는 그 말을 듣고는 갑사 1백여 기를 이끌어 남정관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화살과 쇠뇌가 비 오듯 쏟아지니 종회도 그 화살에는 배겨 내지 못했다. 황망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날 때였다. 촉장 노손이 5백여 기를 거느리고 급히 종회를
뒤쫓았다. 종회가 말을 채찍질해 다리 위를 달리는데 다리 위의 흙더미가 뭉그
러지면서 말다리가 나무토막 사이로 빠졌다. 종회는 황급히 말을 버린 채 달아
났다. 종회가 말까지 잃고 달아나자 노손이 급히 뒤ㅉ아가 창을 들어 찌르려했
다. 그걸 본 위병 하나가 몰을 돌려 활을 쏘았다. 노손이 그 화살에 맞아 말 아
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대장 노손이 죽자 촉병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종회가 그 기세를 몰아 군사를
이끌어 남정관을 덮쳤다. 촉병과 위병이 함께 어우러져 싸우니 성 위의 촉병도
화살을 날릴 수 없었다. 그 틈을 노려 종회가 성 안으로 군사를 휘몰아가자 촉
병들도 마침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종회는 남정관을 빼았자 허의를 장하로
불러 꾸짖었다.
"너는 선봉이 되어 산이 있으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일렸지 않느냐? 나는 다리 위에서 말굽이 빠져 하
마터면 죽을 뻔했다. 너는 내 영을 거스르고 군법을 어겼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
야 할 것이다."
종회가 허의의 목을 베게 하자 그의 아비 허저의 공을 내세우며 여러 장수들이
말렸다. 그러나 종회는 끝내 듣지 않고 군법을 시행했다. 그때 낙성과 한중을
지키고 있던 촉장은 왕함과 장빈이었다. 위병의 형세가 너무 큰 것을 보고 감히
싸우러 나서지 못하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군사를 부림에 신속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머뭇거려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종회는 전군 이보에게 낙성을 , 호군 순개에게 산성을 치게 한후 스스로는 대군
을 거느려 양평관을 빼앗으러 나갔다. 그때 양평관을 지키고 있던 촉의 장수는
장서와 부첨이었다. 위병이 오는 걸 알자 관을 나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지키
기만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는데 벌써 종회는 관 앞에 이르렀다.
종회가 관 앞에서 채찍을 들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10만 대군을 거느려 이곳에 왔다. 일찍 나와 항복한다면 벼슬을 높여 거
두어 줄 것이나, 그렇지 않고 버틴다면 관문을 부수고 들어가 모두 죽이리라!"
그 소리를 듣자 부첨은 화가 치솟았다.
부첨은 장서에게 관을 지키게 하고 군사 3천을 이끌어 관을 나섰다. 부첨이 칼
을 휘두르며 나오자 종회는 어찌 된 일인지 부첨과 싸우려 들지 않고 슬쩍 말머
리를 돌려 달아났다.
부첨은 앞뒤를 가릴 새 없이 달아나는 종회를 급하게 뒤쫓았다. 그런데 한동안
종회를 뒤쫓다 보니 매복해 있던 위병과 종회가 한데 나와 부첨을 에워쌌다.
그제야 종회의 속임수였음을 알게 돈 부첨은 위병의 포위를 뚫어 관으로 돌아갔
다. 그런데 관 위에는 뜻밖에도 위나라 깃발이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첨
이 깜짝 놀라 관 위를 쳐다보니 장서가 부첨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나는 이미 위나라에 항복했소."
부첨이 크게 노해 소리를 높여 장서를 꾸짖었다.
"천자의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역적놈아, 네가 무슨 낯으로 천자를 뵙겠느
냐?"
그렇게 외친 부첨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위병에게 달려가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
다. 힘을 다해 싸웠으나 위병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치니 마침내 촉병을 열에 아
홉은 죽거나 상했다. 부첨도 수많은 창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달리던 말마저
쓰러지자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나는 촉의 신하로 살았으니 죽어서도 촉의 귀신이 되리라!"
부첨은 마침내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양평관을 차지한 종회는 3군
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크게 위로했다. 그날 밤이었다. 종회가 잠을 자려는데
홀연 서남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 깜짝 놀라 군사들을 내보내 살피게 했다. 살
피러 간 군사가 돌아와 말했다.
"10여 리 밖까지 나가 살펴봤으나 어쩐지 군사는커녕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
습니다."
종회가 놀랍고도 의아스러워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다시 서남쪽으로 가서 살펴
보는데 어느 산 앞에 이르자 주위에 살기가 서리는 것이 아닌가. 종회가 길잡이
에게 물었다.
"이 산 이름이 무엇인가?"
"정군산이라고 하오며, 지난날 이 산에서 하후연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종회가 무거운 마음으로 말머리를 돌리는데 홀연 미친듯한 바람이
불며 등 뒤에서 수천 기병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종회가 깜짝 놀라 달아나는
데 거느린 장수들 중에서 바람에 떠밀며 말 위에서 떨어지는 자가 많았다. 그러
나 양평관으로 급히 달려가 군사들을 점고해 보니 말에서 떨어진 장수들은 조금
상하기만 했을 뿐 죽은 자는 없었다. 종회가 괴이쩍어 항복한 장수 장서를 불러
물었다.
"정군산에 혹시 신을 모신 사당이라도 있는가?"
"사당은 없으나 제갈 무후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종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는 반드시 제갈 무후께서 신령을 나타낸 것이리라. 내가 마땅히 무덤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리라."
다음 날, 종회는 소와 염소를 잡아 공명의 무덤 앞에 가서 정성스레 제사를 지
냈다. 그러자 그때까지 불어오던 바람이 가라앉고 회색 구름이 흩어지더니 하늘
은 맑고 푸르게 개었다. 위병들은 모두 기뻐하며 무덤에 절하고 영채로 돌아갔
다.
그날 밤, 종회가 장중의 책상 앞에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문득 맑은 바람이 일
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윤건에 학의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깃털 부채를 들
었는데 얼굴은 관옥처럼 희고 키가 여덟 자는 됨직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누구시오?"
종회가 놀란 눈으로 물으니 그 사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나를 찾아 주어 감사하오. 이미 한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하늘의 뜻을 거
스를 수는 없으나, 양천의 백성들이 난리에 죽는 것이 참으로 가엾소. 그대는
촉 땅에서는 결코 백성들을 죽이지 않도록 하시오."
종회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종회는 다음 날 전군에게 명
을 내려 흰 기에다 보국안민의 글을 써 두게 하고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지 못하
게 했다.
촉한의 꿈 하루 아침에 재로 변했네
위장 등애는 강유성을 함락시키고, 부성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후주 유선은 제
갈첨에게 부성을 구할 것을 간곡히 청한다. 그러나 이미 군세는 기울어져 위병
속에 갇히고 제갈첨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후주도 등애에게 항복하여 촉한의
2대 50년 막이 내린다.
한편 답중에 있던 강유는 위의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요화, 장익, 동궐에게 격문을 보내 위군을 막게 하는 한편, 자신도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위병을 맞았다.
촉병이 군사들을 거느려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위장 천수태수 왕기가 말을 달
려나와 외쳤다.
"우리는 백만 대군에다 용맹스런 장수만도 1천 명에, 스무 갈래로 나누어 밀고
들어오는 중이다. 선봉은 이미 성도로 들어갔는데, 너는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
지 않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며 맞서려 하는가?"
그 소리를 듣고 성이 난 강유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창을 끼고 말을 박차 왕기
에게 덤벼들었다. 강유와 왕기가 맞부딪친 지 2합이 되자 왕기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강유는 달아나는 왕기를 급히 뒤쫓다가 마주 오던 등애와 맞부딪쳤
다. 강유가 등애를 만나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데 뒤에서 징소리, 북소리가 크게
일었다. 등애가 매복시켜 둔 위병이었다. 강유가 앞뒤로 몰려드는 위병을 당할
수 없어 급히 물러나는데 후군에 있던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감송에 있는 우리의 모든 영채를 금성태수양흔이 와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강유는 깜짝 놀랐다. 장수들에게 깃발을 늘여 세워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꾸미게 하고 군사 한 갈래를 이끌어 감송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감송을 불태우고 오던 양흔과 맞닥뜨렸다. 강유를 본 양흔이 산길로 달아나자
강유가 뒤쫓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 통나무와 바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려와
더는 뒤쫓을 수가 없었다. 강유가 다시 남겨 둔 군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데 한 떼의 위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등애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등애는 촉군이 갑자기 깃발을 늘여 세우는 것을 보고 적은 군세로 허장성세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군사를 휘몰아 촉군을 전부 쳐 없앤 뒤 군사를 이끌고 오
는 중이었다.
강유는 에워싸는 위병을 뚫어 간신히 본채로 달려가 굳게 지키며 구원군이 오기
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원군 대신 홀연 파발마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종회가 양평곤을 무너뜨리자 장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부첨이 싸우다 죽으
니 한중은 적의 손안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낙성을 지
키던 왕함과 한성을 지키던 장빈도 성문을 열어 위에 항복했습니다. 또한 호제
는 원병을 청하러 성도로 갔습니다."
강유가 들으니 기막힌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강유는 그곳 영채를 거두어 한중
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강천 가에 이르러 금성태수 양은을 만났다. 강유는
말을 박차 양흔과 맞서자 야흔이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강유가 양흔을 뒤쫓고 있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등애가 또 군사를 밀고 들어왔
다. 달아나던 양흔도 말을 돌려 강유에게 덤벼들었다. 강유는 한중을 되찾으려
고 말머리를 돌려 한중 쪽으로 달렸다.
그때 또다시 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위의 옹주자사 제갈서가 이미 음평교에 머무르며 우리의 앞길을 끊었습니다."
강유는 하는 수 없이 험한 산 밑으로 물러나 영채를 세우고 길게 탄식해 마지
않았다.
"하늘이 끝내 나를 저버리는구나."
그러자 부장 영수가 간했다.
"위병이 음평교를 끊었다면, 필시 옹주에는 군사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께
서 공함곡으로 나아가 옹주를 치시면 제갈서는 군사를 이끌어 옹주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때 장군께서는 군사를 거두어 검각으로 빠져 나가 굳게 지키신다
면 한중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강유가 들으니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영수의 말에 좇아 용수 땅을 빼앗으려는
것처럼 군사를 거느려 공함곡으로 나아갔다. 제갈서가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
라 황급히 대군을 거두어 옹주 땅을 구원하러 남쪽으로 향했다. 그걸 안 강유는
갑자기 군사를 되돌려 얼마남아 있지 않은 위병을 쳐없앤 뒤 음평교를 건넜다.
옹주 땅으로 군사를 휘몰아가던 제갈서는 음평교 쪽에서 불길이 일어난다는 전
갈을 받고 나서야 강유에게 속은 줄을 알았다. 다시 군사를 되돌려 음평교에 오
니 이미 영채는 모두 불탄데다 위병은 모두죽고 없었다. 강유가 그곳을 휩쓸고
떠난 지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강유가 검각으로 향하고 있는데 앞쪽에 한 떼
의 군사가 몰려오고 있었다. 앞선 장수를 보니 바로 성도에서 달려온 장익과 요
화였다. 환관 황호가 후주께 올리는 표문을 가로막고 있어 군사를 이끌어 오지
못하다가 한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른 지금에야 장익이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달
려 온 것이었다. 군사를 합친 후 요화가 걱정스런 얼굴로 강유에게 말했다.
"이제 사면으로 적을 맞게 되었습니다. 군량을 실어나를 길이 끊겼으니 차라리
검각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따로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중을 되찾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있던 강유는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때 다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종회와 등애가 열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쳐들어오는 중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듣더니 요화가 강유에게 재촉했다.
"이곳 백수 땅은 좁은데다 길리 여러 곳으로 나 있어 싸우기가 불리합니다. 차
라리 물러나 검각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검각마저 잃는다면 우리는 돌아갈 길
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강유는 그제야 요화의 말에 따랐다. 검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 그 곳을 지키
고 있던 보국장군 동궐과 군사를 합친 후 계책을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위병의
추격도 빨랐다. 강유가 장수들을 함께 싸울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급한 전갈이
왔다.
"제갈서가 군사를 이끌고 와 관을 치려고 합니다."
강유는 그 말을 듣고 군사 5천을 이끌어 관 아래로 달려가 곧장 위의 진을 덮쳤
다. 강유의 재빠른 움직임에 당황한 건 오히려 제갈서였다.강유가 사나운 기세
로 달려와 위병을 닥치는 대로 쳐죽이자 위병은 여지없이 패했다. 제갈서가 가
까스로 10여 리나 달아나 영채를 세우고 군사를 점고해 보니 살아 남은 군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제갈서가 음평교를 지키지 못한데다 이번 싸움에서도 크게
패해 돌아오자 종회는 그 죄를 물어 목을 베게 했다. 그러자 감군 위관이 말렸
다.
"제갈서가 비록 싸움에 진 죄가 있으나 그는 정서도독 등애의 수하입니다. 그를
죽여 두 장군 사이에 의를 해칠까 걱정됩니다."
그러자 종회가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천자의 조서와 진공의 명을 받들어 촉을 치러 온 몽이다. 만약 죄가 있다
면 정서도독 등애도 목을 베야 할 것이다."
여러장수들이 나서 말리자 종회는 제갈서를 죽이지는 않고 함거에 거두어 낙양
으로 보냈다. 그런데 종회가 한 말이 등애의 귀에 들어갔다.
"나는 종회 제놈과 벼슬이 같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며 많은 공을
세웠다.그런데도 어찌 감히 나보다 높은 체하며 함부로 지껄일 수 있다는 말인
가!"
등애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기병 수십을 거느려 종회를 만나러 갔다. 종회는 등
애가 온다는 말을 듣자 주위에 군사 수백을 늘여 세웠다. 등애는 장막안으로 들
어서 주위에 수백 군사가 험한 얼굴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보자 기가 꺾였다. 종
회에게 따지려던 생각을 버리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장군이 한중 땅을 빼앗았으니 실로 조정의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급히 검각 땅을 빼앗도록 계책을 세워야겠소."
등애가 그렇게 말하자 종회도 어찌할 수 없어 물었다.
"장군께서 좋은 계책이 있으면 일러 주시오,"
등애는 자기의 재주가 짧음을 말하며 겸사했으나 종회가 굳이 계책을 물었다.
등애가 마지못한 듯 계책을 내었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한 떼의 군사를 거느려 음평 땅 지름길로 나가 한중
덕양정으로 빠져 성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유는 성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올 것이니 그 틈을 노려 장군은 검각을 뺏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종회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실로 묘한 계책이오, 나는 이곳에다 장군이 공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기다리겠
소."
이에 등애와 종회는 계책을 정하고 헤어졌다. 등애가 돌아가자 종회는 장수들에
게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등애는 뛰어난 장수라 하였으나 오늘 보니 한낱 어리석은
장수에 지나지 않구나. 음평 땅은 길이 좁은데다 산은 높고 험하다. 만약 촉군
이 1백여 명만 험한 길목을 지킨다면 등애의 군사는 오도가도 못하게 될 것이
다. 그러나 나는 큰길로 나아가 칠 것인즉 어찌 촉병을 깨뜨리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등애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반드시 그 험한 길을 지나 성도를
빼앗아 종회보다 더 큰 공을 이루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종회는 곧 구름사다
리를 만들고 돌 날리는 기굴를 설치하여 검각 관문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한편 등애도 그날 밤에 영채를 뽑아 음평 좁은 길로 향하고 낙양의 사마소에게
글을 올려 성도를 치러 가는 걸 알렸다.
등에는 음평으로 떠나기 전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이제 내가 촉병이 없는 곳을 지나 성도를 치려 한다. 그대들과 함께 새나라를
세우려 하니 그대들은 기꺼이 나를 따르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군령을 받들어 만 번을 죽는다해도 사양하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등애는 크게 기뻐하며 먼저 아들 등충에게 군사 5천을 주며 일렀다.
"군사들에게 도끼와 끌을 가지게 하여 앞서 가라. 험준한 산이 나타나면 바위를
깨뜨리고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있으면 다리를 놓아 따르는 군사들이 나아감에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하라."
이어 등애는 군사 6ㅁ을 뽑아 마른 양식과 노끈이나 새끼를 가지고 가게 하되 1
백 리마다 군사 3천씩을 뽑아 영채를 세우게 했다. 그리하여 스무 날에 걸쳐 7
백여 리를 나아가니 나중에 남는 군사는 2천이었다. 등애는 2천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다 마침내 마천령이란 높은 고개 앞에 이르렀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험준한 고개라 말을 타고 갈 수 없게 되자 모두 고개를 기어올랐다. 등애가 고
개 위에 오르자 등충이 길을 닦고 있는데 거느린 군사들이 일손을 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등애가 그들이 울고 있는 까닭을 묻자 등충이 대답했다.
"이 영마루 서쪽은 모두가 단단한 바위로 된 절벽이어서 길을 낼 수가 없습니
다. 아무리 끌로 파고 정으로 뚫으려 해도 헛되이 힘만 쏟게 되고 길을 뚫을 수
가 없으니 군사들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등애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우리 군사가 여기까지 7백 여리를 왔다. 여기만 지나면 곧 강유 땅인데 어찌
다시 군사를 물리 수가 있겠는가?"
등애는 이어 장수들을 불러모아 소리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겠는가? 내가 너희
들과 함께 공을 이룬다면 부귀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힘을 다해
공을 이루겠는가?"
그러자 장수들이 힘껏 소리쳤다.
"장군께서 이르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등애는 군사들이 가지고 있던 병기 등을 먼저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등애는 담요로 몸을 감싸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 아래로 굴렀다. 부장
들 중 담요가 있는 자는 등애를 따라 몸을 감싸 굴러 내려 갔다. 담요가 없는
자는 밧줄로 허리를 동여 나무에 매고 나무와 돌을 잡으며 관목 엮듯이 벼랑을
내려갔다. 등애와 2천 군사는 마침내 마쳔령을 넘자 의갑과 병기들을 수습하는
데 문득 길가에 서 있는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는 '승상 제갈 무후가 쓰다'라는
머리글이 보이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두 불꽃이 처음 일어날 때
이곳을 넘는 이가 있으리.
두사람이 공을 다투다
머지않아 저절로 죽으리라.
등애가 그 글을 보다 글뜻을 깨치고 깜짝 놀랐다. 두 불은 바로 불꽃 염자가 아
닌가. 그 처음이란 곧 후주가 세운 염흥 원년을 뜻했다. 이사는 등애 자신의 자
가 사재요, 종회의 자가 사계이니 곧 두사람의 이름이 아닌가. 공명은 이미 몇
십 년 정에 이 절벽을 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도 미리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
다. 등애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는데 얼마 가지 않아 비어 있는 영채 하나가
있었다. 등애가 괴이쩍게 여겨 물어 보니 좌우의 군사가 대답했다.
"듣자오니, 지난날 제갈 무후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영채에다 군사 1천을 머무르
게 하며 이곳을 지키게 했다 합니다. 그런데 촉주 유선이 이곳에 군사를 두어
지킬 필요가 없다 하여 군사를 불러들였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등애는 온몸에 땀이 흘렀다. 만약 공명의 말대로 이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했다면 어찌 감히 고개를 넘어 살아 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무후는 참으로 신인이로구나."
등애는 길게 탄식하더니 다시 장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일렀다.
"우리들은 이제 앞으로 나아갈 길은 있으나 돌아갈 길은 없다. 앞에 있는 강유
성은 양곡이 넉넉한 곳으로 너희들은 나아가면 살 것이요, 물러나며 죽을 것이
다. 힘을 다하여 적을 치는 길밖에 없다."
그러자 장수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죽기로 작저ㅇ고 싸우겠습니다."
이에 등애는 지체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어 밤을 틈타 강유성으로 밀고 들어갔
다.
강유성을 지키고 있던 촉의 장수는 마막이었다. 동천이 이미 적의 손에 떨어졌
다는 소식을 듣고 방비를 하고 있었으나 큰길만을 지키고 있었다. 큰길의 제방
이 튼튼한데다 강유가 검각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믿고 엄히 경계하지 않
았다. 그날도 마막은 군마를 조련하고 집으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홀연 집안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위장 등애가 어느 길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2천여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마막은 그 뜻밖의 소식에 놀라서 황망히 등애 앞에 달려가 엎드려 울면서 고했
다.
"저는 이미 항복할 마음을 먹은 지 오래입니다. 성 안의 백성과 군사를 이끌어
장군께 항복하겠습니다."
그걸 본 그의 아내 이씨는 남편의 불충 불의함을 부끄럽게 여겨 목을 매 죽고
말았다.
등애는 마막이 항복해 오자 강유성를 거두어들인후, 그를 길잡이로 삼아 부성으
로 밀고 들어갔다. 등애가 부성으로 쳐들어가자 그곳의 장수와 군사들은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등애의 군사들을 보며 깜
짝놀라 성문을 열고 항복해 버렸다. 이 소식은 급히 후주 유선에게도 전해졌다.
강유성에 이어 부성이 위병의 손에 떨어졌다는 말에 후주는 황급히 황호를 불러
물었다.
"위병이 쳐들어오고 있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나 황호는 그 자리를 모면하기에만 바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잘못 전해진 말일 것입니다. 하늘은 결코 폐하를 저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후주는 아무래도 불안하여 급히 지난날의 무당을 불러 오게 했다. 그러나 노파
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이미 찾을 깃이 없었다. 그럴 동안 멀고 가까운 것에서
급보를 전하는 표문이 눈ㅂ 흩날리듯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변고를 알리는 전령
들의 말발굽 소리가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촉나라는 벌집을 쑤셔 놓
은 듯했다. 그제야 후주도 얼굴색이 달라져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대책을 물었
다. 그러나 서로 돌아보기만 할 뿐 선뜻 입을 여는 자가 없는 가운데 극정이 아
뢰었다.
"일이 매우 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갈 무후의 아드님을 불러
계책을 의논하심이 좋겠습니다."
원래 공명에게는 제갈첨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자는 사원이며, 그의 어머니 황씨
는 그 당시의 이름난 선비 황승언의 딸이었다. 얼굴은 못생겼으나 그 재주가 뛰
어날 뿐 아니라 성품이 어질어 공명이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제갈첨은 그
런 부모의 재주를 이어받아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후주는 그런 제갈첨을 사위
로 삼고 부마도위로 봉했으며 그 뒤 무후의 벼슬에다 행군 호위장군을 겸하게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황호가 나라일을 제 마음대로 하고 어지럽히자 제갈첨은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 후주가 극정의 말을 쫓아 제갈첨에게 연달아 조
서를 세 번이나 내리자 그때서야 후주 앞에 나타났다. 후주가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등애의 군사가 이미 부성에 이르렀다 하니 성도가 실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
소. 경은 선군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짐을 구해 주기 바라오."
그러자 제갈첨도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신의 부자는 선제의 두터우신 은혜와 폐하의 각별하신 은덕을 받았습니다. 비
록 간과 뇌를 쏟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바
라건대 폐하께서 성도에 있는 모든 군사를 거두어 저에게 주신다면 그들과 한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다."
제갈첨이 그렇게 청하자 후주는 곧 성도의 군사 7만을 제갈첨에게 주었다. 제갈
첨은 후주를 하직하고 물러나와 아들 제갈상을 선봉으로 삼고 군사를 이끌어 위
병을 맞으러 떠났다. 한편 등애에게 항복했던 마막이 지도 한 장을 등애에게 바
쳤다. 부성에서 성도에 이르는 160리 길의 산천과 길을 그린 지도였다. 그걸 본
등애가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부성만을 지키고 있고 촉병이 앞에 있는 산에 둔병하면 공을 이룰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는 위급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등애는 곧 아들 등충과 장수 사찬에게 면죽으로 가게 했다. 그곳으
로 촉군이 밀려오면 자기가 있는 부성도 위급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를 방비
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오래지 않아 제갈첨이 거느린 촉병이 면죽에 이르렀다.
사찬,등충 두 장수가 문기 아래서 바라보니 촉병은 팔진을 펼치고 있는데 북 소
리가 세 번 울리고 문기가 양쪽으로 나누어졌다. 그 가운데로 수십 명의 장수들
이 수레를 호위해 나오는데 그걸 본 사찬과 등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레
위에는 한 사람이 윤건을 쓰고,깃털 부채를 들고 학창의를 입고 단정히 앉아 있
는데 수레 곁에 날리고 있는 한 폭의 누런 기에는 '한승상 제갈 무후'라고 씌어
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찬,등충 두 장수는 온몽에 땀을 흘리며 군사들을 돌아
보며 말했다.
"공명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놀란 위병들은 감히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촉병이 달아나는
위병을 치며 뒤쫓았다. 위병은 20리나 달아났다. 그때 등애가 거느린 후군이 이
르렀다. 등애는 공명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오
래지 않아 군사가 돌아와 수레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은 공명의 목상이었으며 그
아들 제갈첨이 대장이요,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이 선봉이라는 것이었다. 등애는
다시 사찬, 등충 두 장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제갈첨을 치게 했다. 위병이 다
시 몰려오자 제갈상은 창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사찬, 등충 두장수는 죽기를
작정하고 덤벼드는 제갈상의 욤맹을 당해 내지 못했다. 승세를 타고 제갈첨이
촉병을 휘몰자 등충과 사찬이 창에 찔려 상한 채 위병들은 크게 패해 달아났다.
등애는 이번에는 두 장수가 상처까지 입고 쫓겨오자 마음이 급했다. 그때 감군
구본이 고했다.
"글을 보내 제갈첨을 달래는 것이 어떻습니까?이미 성도도 일이 정해짐이 아침
저녁에 달렸음을 말하고, 투항한다면 낭야왕으로 삼겠다고 하면 그도 투항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등애는구본의 말에 좇았다. 곧 글 한통을 써서 촉진으로 보냈다. 어질고 재주
있는 공명이 죽은 이래 후주가 암우하여 이미 촉의 천수가 다했음을 말하고 항
복을 권하는 글이었다. 그글을 본 제갈첨은 크게 노했다. 곧 글을 가지고 온 사
자를 목베어 등애에게로 보내고 군사를 움직였다. 등애는 제갈첨을 끌어들인 뒤
일거에 치기로 하고 복병을 매복시켰다. 그걸 알 리 없는 제갈첨이 군사를 이끌
어 오자, 등애는 달아나는 척 말을 채쳐 달리니 제갈첨이 급한 기세로 그 뒤를
쫓았다. 그러자 홀연 양편에서 복병이 달려나오니 제갈첨은 위병을 당해 내지
못하고 군사만 꺾인 채 면죽으로 달아났다. 등애는 제갈첨을 뒤쫓아 면죽성을
에워쌌다 면죽성에 갖혀 외롭게 된 제갈첨은 성도에 있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나온 터라 사람을 보내 동오의 손휴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동오의 손휴는 제
갈첨이 보낸 글을 보고 곧 늙은 장수 정봉에게 5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 제갈첨
을 구하게 했다. 이에 정봉은 정봉,손이 두 부장에게 각각 군사 1만을 주어 면
죽으로 향하게 하고 스스로는 3만 군사를 이끌어 수춘으로 나아갔다. 한편, 면
죽성에 갇혀 있던 제갈첨은 구원병이 오지를 않자 싸움을 서둘렀다.
"오래 지키기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제갈첨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들 제갈상에게 성을 맡기고 군사를 거느려 성 밖으
로 달려나갔다. 제갈첨이 성밖으로 싸우러 나오자 등애는 매복 작전을 폈다. 등
애가 촉병을 맞아 싸우는 대신 급히 군사를 물리자 제갈첨은 성급히 그들을 뒤
쫓았다. 제갈첨이 한동안 기세를 올리며 뒤ㅉ고 있는데 홀연 포향이 울리더니
사명에서 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갈첨은 순식간에 위병이 포위 속에 갇혀
버렸다. 제갈첨은 촉병들을 호령하며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위병 수백을 베었다.
등애가 그걸 보고 제갈첨을 사로잡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소리쳤다.
"활을 쏘아라."
그 소리와 함께 화살이 비 오듯이 촉병에게 쏟아졌다. 촉병이 바람 앞에 풀잎처
럼 쓰러지는 가운데 제갈첨도 화살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이제 스스로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말 아래로 떨어진 제갈첨이 그렇게 소리치며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찔렀다. 제
갈첨의 아들 제갈상도 아버지가 죽는광경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수들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말을 재우쳐 적진으로 달려가 위병 수백 명을 죽인 뒤에
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등애는 제갈 부자의 죽음을 의롭게 여겨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다. 등애가 다시 군사를 휘몰아 면죽성을 공격하니 장준, 황숭,
이구 세사람은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으나 위병에 비해 군세가 너무 적었다. 마
침내 세 장수도 죽고 면죽성도 등애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면죽성을 깨뜨린
등애는 곧 성도로 군사를 이끌었다. 이 소식은 후주 유선의 귀에도 들어갔다.
제갈첨 부자가 주곡 면죽성도 빼앗겼다는 말에 크게 놀라 급히 문무백관을 불러
의논했다. 후주를 가까이 모셨던 한 신하가 성 밖의 동정을 고했다.
"백성들은 늙은이와 어린 것을 이끌고 목숨을 구해 달아나니 그 울음소리가 하
늘을 찌를 듯합니다."
후주는 그말에 더 한층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 때 유성마가 달려와 알렸다.
"위병들이 이미 성 아래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여러 관원들이 입을 모아 고했다.
"군사는 적고 장수마저 죽어 적과 맞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성도를 버리고 남
중칠군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곳은 지형이 험준해 지키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만병에게 구원을 청해 다시 성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자 광록대부 초주가 나서서 말렸다.
"아니 됩니다. 남만은 이미 오랫동안 우리에게 거역해 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 그들에게 혜택을 준 일도 없습니다. 지금 만약 그곳으로 간다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초주가 그렇게 말하자 군신들이 다시 후주에게 아뢰었다.
"우리 서촉과 동오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맹을 맺은 사이입니다. 이제 일이 급
하니 동오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자가 이번에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예로부터 남의 나라에 몸을 의지했다가 다시 천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위는 오를 삼킬 수 있어도 오는 위를 삼킬 수 없다고 봅니다. 만약
위가 오를 삼킨다면 폐하께서는 다시 위에 항복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곧 두 번
이나 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오로 가는 것은 위에 항복하시느니만 못
할 것입니다. 위는 반드시 폐하께 땅을 나눠 주어 왕으로 봉할 것입니다. 그렇
게 되면 위로는 종묘를 지킬 수 있고, 아래로는백성들을 편안케 할 수 있습니
다. 폐하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십시오."
위에 항복하라는 초주의 말이었다. 일이 그 정도로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후주는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그길로 궁궐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다음 날
이 되자, 초준는 형세가 급한 것을 알고 상소를 올려 후주에게 항복하기를 권했
다. 후주도 일이 급한 것을 알고 마침내 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곧 사람을
시켜 항서를 짓게 할 때였다. 홀연 병풍 뒤에서 한 사람이 달려나와 소리쳐 초
주를 꾸짖었다.
"살기만을 바라는 썩은 선비놈이 어찌 망령되게 나라의 큰 일을 말하려는 거냐?
예로부터 항복하는 천자가 어디 있더란 말이냐?"
후주가 놀라 보니, 바로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었다. 후주는일곱 아들을 두
었는데 그 중 가장 총명하고 영민한 아들이었다. 후주는 그런 유심을 질책했다.
"지금 대신들이 모두 항복함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너만이 혈기를 믿고 반대하는
구나. 만약 싸움에 지면 성 안은 백성들의 피로 채워질 것이다, 그래도 마다하
겠느냐?"
그러자 유심은 조금도 움츠러듦이 없었다.
"지난날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초주는 감히 나라일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데 이제 함부로 망령되게 나라일을 말하니 이는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신이 보
건대 아직도 성도에 수만 명의 군사가 있고 또한 강유가 굳건히 검각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 위병이 궁궐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강유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와 구원할 것입니다. 그때 안에서 호응하여 안팎에서 위병을 친
다면 큰 공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어찌 한낱 썩은 선ㅂ의 말만을 듣고 선제께서
일으킨 기업을 가벼이 폐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후주 유선은 아들 유심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기개 있는 아비가 아니었
다. 유심이 공연스레 일을 그르치는 것 같아 꾸짖을 뿐이었다.
"너 같은 어린아이가 어떻게 천시를 알겠느냐?"
후주가 꾸짖자 유심은 눈물을 쏟으며 다시 후주를 말렸다.
"만약 힘을 다해 화가 발 등에 떨어지려 한다면,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함
께 싸우다 죽어 선제의 혼령을 뵙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하여 스스로 욕을 청해
항복하려 하십니까?
유심이 울며 그렇게 말했으나 후주는 끝애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심이 소
리내어 울며 외쳤다.
"선제께서 이 나라를 쉽게 세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아침에 이
나라를 적에게 넘기려 하시니 저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유심의 슬픈 통곡 소리는 대궐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후주는 군신을 시켜
유심을 궁문 밖으로 내쫓게 한 뒤 초주에게 명해 항서를 짓도록 했다. 항서를
짓자 초주는 사서시중 장소와 부마도위 등량과 함께 항서와 옥새를 받들고 낙성
으로 갔다. 등애는 성문위에 항복을 뜻하는 흰 기가 꽃히고 세 사람이 와서 항
서를 바치자 크게 기뻐했다. 옥새를 받은 후에 항복을 받아들이는 답서를 써 주
며 세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성도로 돌아가 민심을 편안케 하라."
세 사람이 성도로 돌아가 후주에게 등애의 답서를 바쳤다. 후주는 답서를 뜯어
보고 등애가 순순히 항복을 받아 주어 목숨을 건지게 된 걸 다행히 여겨 기뻐했
다. 곧 강유에게 사람을 보내 위나라에 항복하라는 조서를 전하게 했다. 한편으
로는 상서랑 이호를 등애에게 보내 서촉의 문서와 장부를 바치게 했다. 그때 서
촉의 호수는 28만이요, 인구는 남녀를 합해 94만이었다.갑옷 입은 장수가 10만
2천이요, 관리가 4만에다, 창고의 곡식은 40여만 섬이었다. 또한 금은이 3천 근
에다, 비단이 20만 필이었다. 후주는 12월 초하루를 항복하는 예를 올리는 날로
잡았다. 북지왕 유심은 그 소식을 듣자, 치솟는 울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칼을
빼들고
궁으로 달려가 아내 최씨에게 말했다.
"부황은 위에 항서를 바치고 임금과 신하가 다 함께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한다
하오. 이 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소. 나는 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먼저
죽어 땅 밑의 선제 폐하를 만나겠소."
그 말을 들은 아내 최씨도 남편의 뜻을 받들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하고
말았다. 유심은 눈물을 머금은 채 아내의 시신을 거둔 후에 어린 세 아들을 죽
였다.
유심은 아내와 세 아들의 머리를 베어 들고 소열묘 안으로 들어갔다. 유심은 아
내와 아들의 머리를 위패 앞에 놓은 후 향을 사르고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신은 백년 기업을 남에게 바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먼저 아내와 자식을 죽여
분한 마을을 없애고 한 목숨 할아버지께 바칩니다. 할아버지의 영혼이 계시다면
이 손자의 마음을 살펴 주옵소서."
유심은 위패를 향해 향을 사르고 그렇게 외친 후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촉 사람들은 이 소문을 듣고 그 늠름함과 충성스런 기상을 우러르며 슬
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음 날, 후주 유선은 성문을 열고 항복하러 나섰
다. 태자와 왕들인 아들과 문무관원들을 거느린 채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 몸을
묶은 뒤 관을 실은 들 것을 메고 북문 10리 밖에 나가 등애에게 항복했다. 후주
가 항복해 오자 등애는 패자답게 넓은 도량을 베풀었다. 후주를 친히 붙들어 일
으키고 묶은 몸을 풀어 주며, 관과 들 것을 불태운 후 후주와 수레를 가지런히
하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소열 황제가 나라를 세운 뒤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촉
한은 위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 일을 한탄했다.
위병 수만이 서천으로 들어가니
후주는 목훔 아까워 항복했네.
황호가 끝내 나라일을 속이려 들었으니
강유의 재주도 부질없을 뿐,
충의 다한 선비의 얼은 뜨겁고
절개 지킨 왕손의 뜻 애절하구나.
소열 황제의 기업이 쉬운 일 아니건만
하루 아침에 그 공업 재로 변했네.
등애가 성 안으로 들자 성도의 백성들은 향불을 피워 들거나 꽃을 들고 나와 위
병을 맞았다. 등애는 후주에게 표기장군을 내린 뒤에 그 밖의 관원들에게도 각
기 그 직위에 따라 벼슬을 내렸다. 등애는 후주를 궁궐로 다시 돌려 보내고 백
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창고를 넘겨받았다. 등애는 또 촉의 태상 장준과
익주별가 장소에게 각 군민을 안돈시키게 하는 한편, 강유에게도 사람을 보내
후주에게 항복받았음을 알렸다. 등애는 황호가 간특하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그
를 잡아 목베려 했다. 그러나 간교한 황호는 어느 새 금은으로 등애와 가까운
이들을 매수해 목숨만은 건졌다. 이로써 촉한은 2대 50년 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만 것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한실을 일으켜 세우기 우해 도원에서
결의하여 의를 맺은 이래 80년, 서기 262년의 일이었다. 한편, 태복 장현이 검
각에 이르러 후주의 칙명을 전하며 항복하라고 이르자 강유는 너무 놀라 할 말
을 잃었다. 강유의 막하에 있던 장수들도 이 기막힌 소식을 듣자 모두 원한이
치솟아 눈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이를 갈며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우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려 하는데 무슨 까닭에 먼저 항복을 했단 말이냐!"
그렇게 외친 장수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니 그 울음소리가 수십 리 밖에까지
들렸다. 강유는 장수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미 그토록 깊음을 보고 한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좋은 말로 달랬다.
"장수들은 너무 근심하지 말라. 내게 한 계교가 있으니 반드시 한실을 다시 일
으켜세울 것이다."
"어떤 계책입니까?"
장수들이 입을 모아 묻자 강유는 귀엣말로 계책을 일러 주었다. 그 말을 듣고서
야 장수들은 비로소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다음 날, 강유는 검각관 위에 항복
하는 흰 기를 꽂고 먼저 사람을 위방 종회에게 보냈다.
유선과 조위도 막을 내리고
촉한 후주 유선은 강유의 끈질건 광복 운동에도 불구하고 황음무도하여 나라를
바치고 조위마저 막을 내린다. 곧 위는 한을 빼앗고 진이 위를 빼앗으니 돌고
도는 하늘의 이치 패업도 부질없어라.
종회는 강유가 장익과 요화,동궐 등 세 장수를 거느리고 항복하러 온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그들을 맞아들이게 했다. 강유가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종회가 물었다.
"강백약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소?"
강유가 굳은 얼굴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나라의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몸,오늘 이렇게 온 것도 오히려 빠르다 할
것이오."
강유가 서슴없이 그렇게 대답하자 종회는 그 기개를 마음 속으로 감탄하며 자리
에서 내려와 맞절을 하고 상빈의 예로 대했다. 강유는 짐짓 좋은 말로 종회를
치하했다.
"듣건대 장군은 회남에서 싸운 이래 계책을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마씨가 오늘날 저토록 융성하게 된 것도 실은 모두 장군 덕분이 아닐 수 없으
니 이 강유도 마음으로 머리를 숙ㅇ는 것입니다. 장군이 아니고 만약 등애였다
면 나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지 이렇게 항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종회는 더욱 흡족했다. 등애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강유가 미덥
기조차 해 화살을 꺾어 맹세하는 가운데 의형제를 맺음과 아울러 더욱 가까이
사귀었다. 종회는 강유와 친밀해지자 거느렸던 군사를 내어 주며 이전처럼 다
스리도록 했다. 강유는 마음 속으로 기뻐했으나 겉으로는 마지못한 듯 종회의
뜻에 따랐다. 강유는 종회가 그렇게 나오니 떠오르는 바가 있어 장현을 성도로
돌려 보내 뒷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한편 등애는 사찬을 익주자사로 삼고, 견
흥,왕기 등에게 각 주와 군을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고 면죽에 전공을 기리는
대를 쌓고 항복한 촉의 여러 관원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해지
자 등애는 관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다행히 나를 만나 오늘이 있게 되었다. 만약 다른 장군을 만나게 되
었더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촉의 여러 관원들은 등애의 말에 모두 절을 올려 감사했다. 그때 검각에서 장
현이 돌아와 알렸다.
"강유가 스스로 종회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등애는 몹시 언짢았다. 모든 공이 종회에게로 돌아갈까 봐 걱정
이 되었다. 이에 글을 한 통 써서 사람을 시켜 낙양의 진공 사마소에게 올리게
했다. 등애로부터 글이 올라오자 사마소는 그 글을 펼쳐 보았다.
신 등애는 생각건대 싸움은 먼저 적의 잘못을 나무란 뒤에 힘으로 쳐야 할 것
입니다. 이제 촉을 평정한 기세를 몰아 곧바로 오를 쳐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큰 싸움을 치른 뒤라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함께 지쳐 있어 내쳐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농우의 군사 2만 명과 촉군 2만을 남겨 두어 소
금을 굽고 쇠를 달구며 배를 만들게 하여 오를 칠 채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
다. 그런 다음에 사신을 보내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따져가며 저들을 달랜다면
오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절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후주 유선을 잘 대접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유선을 묶어
낙양으로 끌어 가면 오주 손휴는 물론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게 될 것입
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로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선을 그
대로 촉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내년 겨울에 낙양으로 불러들이도록 하십시오. 그
동안은 부풍왕으로 봉하여 재물을 내리고, 그 아들에게도 공경 벼슬을 내려 은
총을 베푸시는 것처럼 하십시오. 그러면 오나라 사람들은 위엄에 눌리고 너그러
움에 이끌려 모두 우리 이에 귀순할 것입니다.
등애의 글을 읽고 난 사마소는 나라의 큰 일을 마음대로 정하는 등애에게 슬
며시 의심이 일었다. 사마소는 글을 써서 위관을 보내 등애에게 전하게 했다. 그
글은 모든 일은 천자께 아뢰어 허락을 받아야 하니 마음대로 나라일을 결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위관에게 글을 주어 보낸 사마소는 다시 천자에게 아뢰어
등애에게 조서를 내리게 했다.
정서장군 등애는 위엄을 떨쳐 보이고 뛰어난 용맹으로 적의 땅에 들어가 스스
로 천자라 일컫는 적의 임금을 묶어 항복을 받았다. 군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힘껏 싸워 하루를 넘기지 않고도 구름을 걷듯, 자리를 말 듯 촉을 평정했다. 이
는 옛적의 백기가 초를 치고 한신이 조를 이긴 공으로도 견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등애를 태위로 올리고 식읍 2만 호를 더하며, 두 아들도 정후로 삼고 각각
1천호를 다스리게 하노라.
등애는 그 조서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군인 위관이 전한 사마소의
글을 받았다. 그 글을 읽고 난 등애가 못마땅한 듯 볼멘소리로 내뱉었다.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가 있다고 했다. 내가 이
미 조서를 받들어 멀리서 군사를 부리고 있는데 어찌하여 나의 일을 막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한 등애는 다시 글을 써서 그 사자에게 주었다. 그 무렵, 조정에서
는 등애가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사마소는 등애에 대한 의심이
부쩍 깊어지고 있었다. 그런 터에 등애가 다시 글을 올리자 사마소는 그 교만함
이 더욱 마땅치 않았다. 사마소는 등애의 글을 펼쳐 보았다.
이 등애가 명을 받들어 서촉을쳐서 그 우두머리는 이미 항복을 했습니다. 그
러니 마땅히 권도로 일을 처리하여 항복해 온 자들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할 것
입니다. 만약 나라의 명을 기다려 처리하면 오고 가는 데 여러 시일이 걸려 날
짜만 허비할 것입니다. '춘추'에 이르기를, '대부는 밖에 나가 있을 때는 나라를
편안케 하고 나라에 이로움이 있는 일이라면 임금께 아뢰지 않더라도 처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동오가 아직 항복하지 않은데다 촉과 맞물려 있는 형세
인데 항상 해 오던 예에 붙들려 기회를 잃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또한 병법
에도 이르기를 '나아갈 때는 공명심을 버리고 물러날 때는 죄 입는 것을 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등애가 비록 옛 사람에 비길 만한 절도는 없으나 결코 나
라에 해를 끼칠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먼저 글을 올리고 제가 하
고자 하는 바대로 행할 것이니 이를 헤아려 주십시오.
등애의 글을 읽어 본 사마소는 깜짝 놀랐다. 급히 가충을 불러 물었다.
"등애가 자기 공을 믿고 교만해져 일을 마음대로 처결하려 하오. 반역의 마음
을 드러낸 것이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가충이 의견을 내었다.
"주공께서는 종회로 하여금 등애를 견제하도록 하십시오."
사마소도 그 말을 듣자 머리를 끄덕였다. 곧 종회를 사도로 높였다. 이어 위관
에게 조서를 내리고 양로군마를 감독하게 하는 벼슬을 내려 등애의 움직임을 살
피게 했다. 한편 종회는 위관으로부터 조서를 받들고 펼쳐 보았다.
진서장군 종회는 나아가는 곳마다 당할 자가 없으니 그 앞에 가로막을 장벽이
없었다. 많은 성을 거두어들이고 달아나는 적을 모조리 쓸어 없애니 촉의 장수
들이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했다. 책을 씀에 어긋남이 없었고, 군사를 부려 적을
칠 때는 이루지 못한 공이 없었다. 이에 장군을 사도로 삼고 현후로 봉하며, 읍
1만 호를 더한다. 또한 두 아들도 정후로 봉하며 읍 1천호를 내린다.
종회는 조서를 읽고 나자 강유를 청해 물었다.
"등애는 공이 나보다 크다 하여 태위의 높은 벼슬을 내렸으나, 이제 사마공은
등애에게 의심을 품고 있소. 위관을 감군으로 삼아 나에게 따로 글을 내려 등애
를 견제하라 하는데 백약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 물음에 강유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등애는 출신이 하잘것없어 어려서는 농가에서 송아지를 기
르며 자랐다 했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음평의 비탈길로 해서 나무를 휘어잡
고 절벽을 뛰어내려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지모가 뛰어나 이룬 공이 아니라
실은 나라의 홍복을입었을 따름없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검각에다 이 강유를 잡
아 두지 않으셨다면 그가 어찌 그런 공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그가 촉
주를 부풍왕으로 삼고 촉 땅의 인심을 거두려 하니, 그가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공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종회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강유가 그런 종회에게 가만히 말
을 이었다.
"바라건대 잠시 좌우 사람을 물려 주십시오. 은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종회는 곧 강유의 말을 좇아 좌우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그러자 강유가 소매
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며 종회에게 말했다.
"지난날 제갈 무후께서 초려를 나오실 때 선제께 바친 지도가 바로 이것입니
다. 무후께서는 '익주는 기름진 들이 천 리에다 백성은 많고 나라가 부강하니 가
히 패업을 이룰 만한 곳'이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선제께서는 성도에다 나라의
기업을 닦으셨습니다. 지금 등애가 그 곳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찌 들썩이지 않
을 수 있겠습니까?"
강유가 등애를 역적으로 몰자 종회는 몹시 기뻐했다. 손으로 강유가 건네 준
지도를 짚어 가며 산천의 지세를 물었다. 강유는 자세히 종회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강유가 촉의 지세를 살피니 종회가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계책으로 등애를 쳐없애야 하겠소?"
"진공이 등애를 의심하고 있는 이때, 급히 조정에 표문을 올려 등애가 반역하
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진공은 반드시 장군께 등애를 치
게 할 것입니다. 그때 한 번 싸움으로 등애를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강유가 종회를 바라보며 가만히 일러 주었다. 실로 좋은 계책이 어닐 수 없었
다. 종회는 곧 강유의 말에 따라 표문을 써서 사자를 낙양으로 보냈다. 등애가
모든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며 촉의 인심을 거두어들여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다
는 내용이었다. 표문이 조정에 이르자 문무백관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종회는
다시 사람을 풀어 등애가 조정에 올리는 표문을 가로채어 그의 글을 흉내내 오
만한 내용으로 바꾸어 썼다. 그걸 알 리 없는 사마소는 등애의 글을 보자 크게
노했다. 곧 사람을 종회에게 보내 등애를 없애게 했다. 한편으로는 가충에게도
군사 3만을 주어 야곡으로 나가게 하고 스스로는 위주 조환의 어가를 이끌어 등
애를 치러 나서기로 했다. 그러자 서조연 소제가 사마소에게 나서는 것을 말렸
다.
"종회의 군사가 등애의 군사보다 여섯 배나 많습니다. 종회에게 등애를 치게
하시면 될 것인즉, 어찌하여 명공께서 몸소 가시려 하십니까?"
사마소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전에 나에게 한 말을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대는 종회가 반드시
반역할 것이라고 내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번에 몸소 나서는 것은 등애를
치기 위함이 아니라 종회를 치기 위함이다."
그 말에 소제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저는 혹시 명공께서 그걸 잊으셨을까 봐 한번 여쭈어 본 것입니다. 이제 그러
한 뜻이 계시니 다행입니다만 그 일이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아니 될 것입
니다."
사마소가 대군을 일으켜 나아가는데 가충도 문득 종회가 반역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가만히 사마소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소제를 대할 때와는 달리 짐
짓 가충의 말을 물리쳤다.
"내가 너에게 군사를 주며 등애를 막게 했다. 만약 그대를 보내 놓고 내가 그
대를 의심하면 그때는 어찌하겠느냐? 장안에 이르게 되면 절로 밝혀질 일이니
그대는 미리 의심하지 말라."
사마소는 종회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사마
소가 몸소 군사를 이끌어 등애를 치러 나선다는 소식은 종회에게도 전해졌다.
종회는 급히 강유를 불러 등애를 쳐 없앨 계책을 물었다. 강유가 이번에도 주저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먼저 감군 위관을 보내 등애 부자를 잡아들이게 하십시오. 그때 만약 등애가
위관을 죽이려 한다면 반역할 마음이 있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됩니다.
그때 장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치시면 됩니다."
종회가 들으니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위관에게 수십 기를 이끌고 가 등
애를 사로잡아 오도록 했다. 종회로부터 그런 명이 내리자 위관의 졸개들이 위
관을 말렸다.
"이는 바로 종 사도가 정서장군으로 하여금 장군을 죽이게 하고 그의 반역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대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위관은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태연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나에게도 따로 계책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그렇게 말한 위관은 곧 격문 30여장을 띄웠다.
조서를 받들어 등애를 사로잡으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추호도 물을 죄가
없다. 만약 빨리 조서를 받들면 상을 주고 벼슬을 올릴 것이되, 등애를 도와 나
오지 않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다.
위관은 그렇게 격문을 띄운 후 함지 두 대를 이끌어 밤을 새워 성도로 나아갔
다. 새벽이 되어 그 격문을 보게 된 등애의 부장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모두 달
려나와 위관의 발 아래에 엎드렸다. 그때 등애는 부중에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위관이 수십여 무사를 거느려 부중으로 뛰어들어가 소리쳤다.
"조서를 받들어 등애 부자를 사로잡으러 왔다."
그 소리에 등애가 깜짝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왔다. 위관은 무사
들에게 명해 등애를 묶어 함거에 싣게 했다. 그때 아들 등충이 놀란 얼굴로 달
려왔으나 그 역시 무사들에게 묶이고 말았다. 부중에 있던 등애의 장수들이 그
제야 등애 부자를 구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때 종회가 먼지를 자욱이
일으켜 대군을 휘몰아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등애 휘하의 장졸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말에서 내려 등애의 부중
으로 들어갔다. 종회가 묶여 있는 등애 부자를 보자 채찍을 들어 등애의 머리를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송아지나 기르던 놈이 어찌 감히 이 같은 일을 저질렀느냐!"
강유도 성도를 빼앗은 등애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찮은 놈이 산중에 굴러 큰 공을 세우더니 끝내 묶이는 꼴이 되었구나."
등애도 종회를 보자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미 몸이 묶여 수레에 실
린 등애였다. 욕설만을 퍼부을 뿐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종회는 그런
등애 부자를 함거에 실어 낙양으로 보냈다. 종회는 성도로 들어가 등애의 군사
를 거두어 들이고 그 위세를 더하게 되자 크게 기뻐하며 강유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에야 평생의 원을 풀었소."
그러나 강유는 무거운 얼굴로 종회의 말을 받았다.
"지난날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듣지 않다가 미앙궁에서 화를 당했소이다. 대부
종은 범려의 말을 좇아 오호로 떠나지 않다가 칼 위에 엎드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두사람이 이룬 공이 어찌 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롭고 해로운 걸 밝게
헤아리지 못하고 그 살핌이 늦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장군도 이미 큰 공을
세워 위세가 주상을 덮을 정도입니다. 어찌하여 배를 강호에 띄워 발자국을 감
추고 아미산에 올라 적송자를 따라 노니려 하지 않으십니까?"
옛 장량이 공을 이룬 뒤 유방의 시기를 피하여 부귀공명을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도를 닦으려 했던 일을 종회에게 빗대어 한 말이었다. 종회가 그 말을 듣
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공의 말씀은 옳지 않소이다. 내 나이 아직 마흔을 넘기지 못했거늘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데 어찌 한가로이 물러나 앉는 일을 본받을 수 있겠
소?"
종회가 그렇게 대답하자 강유는 속으로 기뻐했다. 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어른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한가로이 물러나지 않으시려거든 빨리 좋은 계책을 세우십시오. 명공의
지모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니 이 늙은이는 번거롭게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
을 것입니다."
종회는 그 말을 듣자 몹시 흡족한 듯 두 손을 비비면서 껄걸 웃더니 말했다.
"백약이 실로 나의 마음을 아는구려."
종회는 이후부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강유와 의논했다. 강
유는 종회가 자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마음을 터놓자 이제야 자기가 노린
바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강유는 은밀히 후주에게 글을 올렸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며칠 동안만 욕을 참고 계십시오. 신이 다시 사직을 편
안케 하고 가렸던 달과 해를 다시 밝게 하며, 한실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겠
습니다.
한편 종회는 등애 부자를 사로잡아 낙양으로 보낸 후 강유와 더불어 모반할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홀연 사마소로부터 글이 전해졌다. 종회가
그 글을 읽어 보았다.
나는 사도가 등애를 사로잡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몸소 군사를 거느려 장안에
와 있다. 내가 가까이 있기로 먼저 글로 알리노라.
그걸 본 종회는 슬며시 의심이 들었다.
'내가 거느린 군사는 등애의 군사보다도 몇 배나 더 많지 않은가. 내게 맡겨두
면 될 일을 진공은 혼자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까 봐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틀림없이 나를 의심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여긴 종회는 곧 그 일을 강유에게 말하며 의논했다. 종회가 사마소를
의심하자 강유는 마음 속으로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종회의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예부터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면 그 신하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마련입니
다. 등애가 당한 꼴을 보지 못했습니까?"
강유의 말을 듣자 종회가 분연히 말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소. 일이 이루어지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이루지 못할
지라도 서촉에 눌러앉아 유비가 만들어 놓은 이곳을 지키며 내가 유비가 될 것
이오."
일이 점점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어 가자 강유는 이제 드러내 놓고 사마소와
맞설 것을 권했다.
"요즈음 들으니 곽 태후가 죽었다고 합니다. '임금을 죽인 죄를 물어 사마소의
죄를 밝히라'는 곽 태후의 거짓 조서를 써서 사마소를 치도록 하십시오. 명공의
위세라면 중원도 자리 말 듯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종회도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강유에게 말했다.
"백약께선 마땅히 선봉이 되어 주시오. 일을 이룬 후에는 함께 부귀를 누릴 것
이오."
"적은 힘이나마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
정이 됩니다."
강유의 걱정을 종회가 안심시켜 주었다.
"백약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니 옛 궁궐에 많은 등
불을 밝히고 모든 장수를 불러 잔치를 벌이겠소. 그때 만약 내뜻에 따르지 않는
장수가 있다면 목을 벨 것이오."
강유는 종회에게 그런 다짐까지 받자 몹시 기뻤다. 이제 종회가 거느린 장수
까지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 속으로 꾸민 계책이 이루어질 날도 머지않았
다고 여겼다. 다음 날이 되자 종회는 모든 장수들을 잔치 자리에 청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였다. 종회가 갑자기 술잔을 든 채 소리내어 울었다. 장수들이
깜짝 놀라며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만들어 두었던 곽 태후의 거짓 조서를
내보이며 말했다.
"곽 태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남기신 조서가 여기 있다. 사마소는 남궐에서
임금을 죽인 큰 역적놈으로 이제 머잖아 위마저도 빼앗을 것이니 나에게 그를
없애라는 조서를 내리신 것이다. 너희들은 각기 여기에 이름을 적고 나와 함께
힘을 합애 이 일을 이루도록 하자."
그러나 너무 뜻밖의 일이나 장수들은 놀란 얼굴로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자 종회가 칼집에서 싶런 장검을 쑥 뽑아들며 외쳤다.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목을 베리라. 누가 명을 거스를 텐가?"
종회가 그렇게 나오니 여러 장수들은 하는 수 없었다. 마지못해 종호가 시키
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이 모두 서명했으나 종회는 그들을 믿지 못
해 궁궐에 가두고 군사들을 시켜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강유가 종회에게 다가
가 권했다.
"내가 보기에는 장수들이 모두 명공의 명에 따르지 않는 듯합니다. 모조리 구
덩이에 묻어 버리십시오."
강유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종회는 강유가 그렇게 권하자 서슴없이 말했
다.
"나는 이미 궁궐 한쪽에다 구덩이 하나를 파게 하고 큰 몽둥이 수천개를 만들
어 두라고 일렀소.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몽둥이로 쳐죽여 묻어 버리
겠소."
그런데 종회가 강유가 주고받는 말을 종회의 심복인 구건이 엿듣게 되었다.
구건은 이전에 호군 호열 밑에 있었던 부하였다. 호열은 그때 여러 장수들과 함
께 궁궐에 갇혀 있었으므로 구건이 호열에게 그 말을 전했다. 호열은 구건과 짜
고 밀서 한 통을 쓴 후 몰래 그걸 밖에 있는 그의 아들 호연에게 전하게 했다.
호연은 아버지의 밀서를 받자 깜짝 놀라며 바깥에 있는 모든 영채에 그 밀서를
돌렸다. 그걸 본 장수들은 발연히 노했다. 모두 호연의 영채로 달려가서 그 일을
의논했다.
"우리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역적을 따를 수가 있겠소?"
그러자 호연이 여러 장수들에게 외쳤다.
"정월 열여드렛날 우리가 모두 성으로 밀고 들어갑시다."
호연이 그렇게 외치며 계책을내었다. 감군 위관은 호연의 계책에 찬동했다. 군
사를 수습하는 한편 구건을 시켜 궁궐 안에 있는 호열에게 그 일을 알리게했다.
호열이 그걸 전해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갇혀 있는 여러 장수들에게 귀엣말로 전
했다. 종회가 그런 걸 알 리 없었으나 언짢은느낌이 들었던지 어느 날 강유에
게 불러 물었다.
"어젯밤 꿈에 수천 마리의 큰 뱀이 나타나 나를 물었소. 이게 좋은 꿈이오. 나
쁜 꿈이오?"
"꿈에 용이나 뱀을 보면 그건 다 좋은 징조일시다."
강유 역시 호연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 없었다. 빨리 종회의 장수들을 죽
여 그 군세를 줄이자는 데에만 생각이 사로잡혀 있었다. 강유가 그렇게 말하자
종회는 마음놓고 강유에게 말했다.
"이제 구덩이도 팠고 몽둥이도 다 준비되었으니 하나씩 끌어 내어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나 강유는 원래 종회의 뜻과는 다르니 모두 급히 죽여 버리기만 바랄 뿐
이었다.
"그들은 모두 속으로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두면 우리에게 큰 해ㄱ 될
것이니 빨리 죽여 버리십시오."
강유가 재촉하자 종회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무사들을 거느려 가서 장수들을 죽여 버리도록 하시오."
바로 강유가 기다린 대답이었다. 강유가 곧 무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위나라
장수들을 하나씩 죽여 없애려 할 때였다. 갑자기 가슴이 쑤시고 아파 강유는 가
슴을 부둥켜안고 그만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좌우 사람들이 급히 부축해
일으켰으나 반나절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강유가 급히 몸을 일으켜 다
시 무사들을 이끌어 가려는데 홀연 궁궐밖에서 함성이 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종회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저건 분명 갇혀 있는 장수들이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먼저 그들부터 죽여야
합니다."
강유가 조회에게 그렇게 말할 때였다. 함성이 더욱 크게 울리며 사방에서 수
많은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군사들이 이미 궁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서 알렸다. 종회는 그 군사가 어느 쪽의 군사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먼저 전각 문을 닫게 하고 군사들을 지붕 위로 올려 보내 기왓
장을 던지게 했다. 그렇게 싸우다 보니 어느 새 서로 수십명이나 죽었다. 그때
궁궐 사방에서 불길이 일더니 전각문을 부수고 바깥 군사들이 몰려들었다. 종
회가 칼을 빼들고 몰려드는 군사들을 쳐죽였다. 그러나 메뚜기 떼처럼 날아드는
화살에는 어쩔 수 없어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 쓰러졌다. 여러장수들이 종회의
목을 베어 들고 전각 위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강유에게 덤벼들었다. 강유가
닥치는대로 쳐죽이는데 점점 가슴이 쑤시고 아파 왔다. 강유는 마침내 더 싸울
수 없음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외쳤다.
"내 마지막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바로 하늘의 뜻이로구나."
그 외침과 함께 강유는 자신의 칼로 자기의 목을 찔렀다. 그의 나이 쉰 아홉
이었다. 그때까지 궁궐에서 죽은 자가 수백이나 되었다. 모반을 일으킨 종회와
강유가 죽자 위관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이제 각기 영채로 돌아가 왕명을 받도록 하라."
그러나 궁궐에 갇혀 있던 여러 장수들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종회에게
모반을 일으키게 하고 자기들을 가두어 죽이려고 계책을 꾸몄던 강유의 배를 갈
랐다. 계란덩이만큼이나 큰 쓸개를 빼어들고는 군사들에게 그 가솔까지 모두 죽
이게 했다. 종회와 강유가 죽자 등애의 부하들은 등애를 구하기 위해 밤을 세
워 면죽성으로 달려갔다. 그걸 알게 된 감군 위관이 크게 놀랐다.
"등애를 사로잡은건 바로 나다. 그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나는 죽어도 묻힐 땅
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자 호군 전속이 나서 말했다.
"전에 강유성을 칠 때 등애는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말려 목숨
을 구했는데 이제 내가 그 원한을 씻어야겠습니다."
위관은 크게 기뻐하며 곧 전속에게 군사 5백을 주어 그 원수를 갚게 했다. 전
속은 군사를 재촉해 면죽 땅에 이르렀다. 그때 먼저 갔던 등애의 군사들이 등애
를 구해 성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전속이 말을 달려오자 등애는 그들이 지난날
거느렸던 부하들인지라 마음놓고 있다가 궁금한 걸 물어 보려 했다. 그러자 전
속이 갑자기 칼을 빼들어 등애를 내리쳤다. 등애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떨어졌다. 그의 아들 등충도 제대로 손 한 번 놀릴 겨를이 없이 군사들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한편 위병들은 강유가 죽자 그 칼끝을 촉으로 돌렸다. 그렇게 되니 강유의 수
하였던 장익을 비롯한 몇몇 장수와 태자 유선, 한수정후 관이도 난군 속에서 죽
고 말았다. 그런 난리통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혼란을 일으켜 우왕좌옹하다 치
고 밟혀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성도의 성 안에 이런 난리는
열흘이나 이어졌다. 그러다 가충이 천자의 명을 받아 방을 내걸어 백성들을 안
심시키자 그제야 소동이 가라앉았다. 가충은 위관에게 성도를 지키도록 하고
후주를 낙양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후주를 따른 촉의 신하는 상서령 번건과 시
중 장소, 광록대부 초조, 비서랑 극정을 비롯한 몇 사람뿐이었다. 요화와 동궐이
성도에 있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대고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라를 빼
앗긴 울분을 달래지 못해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때가 위의 경원 5년이었
는데, 촉이 망하자 군사를 거두어 동오로 돌아갔다. 그 해 봄 3월, 오나라 장수
정봉은 촉이 망하자 군사를 거두어 동오로 돌아갔다. 중서승 화핵이 오주 손휴
에게 아뢰었다.
"우리 오와 촉은 이와 입술과 같은 사이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이니, 신이 생ㄱ건데 사마소가 오래지 않아 우리 오를 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미리 방비를 하도록 하십시오."
이에 손휴는 육손의 아들인 육항을 진동대장군으로 삼아 강구를 굳건히 지키
게 했다. 그리고 좌장군 손이에게는 남서 여러 고을의 헌한 길목을 지키게 했
다. 또한 장강 여러 곳에는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영채 수백 개를 세우게 하고
정봉에게 그곳을 다스리게 하여 위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때 촉의 신하인 건
녕태수 곽과만은 성도가 위나라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항복하지 않았
다. 3일간이나 통곡을 하다가 모든 장수가 항복하지 않은 까닭을 묻자 말했다.
"길은 먼데다 그 길마저 끊어졌으니 우리 주인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만약
위주의 우리 주인을 예로써 대한다면 이 성문을 열어 항복할 것이다. 그러나 우
리 주인을 위험한 지경에 몰아넣고 핍박한다면 주인이 욕을 당하는데 어찌 신하
가 살기를 바라겠느냐? 마땅히 이 성을 지키다 죽어야 할 것이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 충절에 감복해 몰래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후주의 소
식을 염탐케 했다. 그 무렵, 후주는 낙양에 이르렀는데 사마소도 이미 조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마소는 후주가 이끌려 오자 큰 소리로 꾸짖었다.
"공은 황음무도하여 어진 이를 내치고 다스림을 그르ㅊ으니 마땅히 목을 늘여
칼을 받아야 할 것이오."
그 말에 후주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위나라의 여러 관
원들이 사마소에게 아뢰었다.
"촉주가 나라의 기강을 잃었으나, 다행이 일찍 항복했습니다. 그걸 보아서라도
죄를 면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사마소는 마지못한 듯 그 말을 받아들
여 유선을 안락공에 봉했다. 또한 살 집을 내리고 매달 쓰이는 물건과 양식은
물론 비단 1만 필과 남녀 종 백 명을 주었다. 유선의 아들 유요와 유선의 신하
인 변건, 초주, 극정도 모두 후에 봉했다. 그러나 황호는 촉을 좀먹고 백성을
해쳤으므로 무사들에게 명해 사지를 찢어 죽이게 했다.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
고 후주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던 곽과는 후주가 편안히 지낼 뿐 아니라 안락공
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게되었다. 관과는 그제야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와 위에
항복했다. 관과마저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 후주는 다음 날, 사마소를 찾아 후히
대해 준 것에 대해 절을 올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에 사마소도 잔치를 열어
후주를 대접했다. 사마소는 위나라 음악을 들려 주며 넌지시 후주를 더 보았다.
위나라 음악이 흘러 나오자 촉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서글픈 얼굴로 슬픔을 감추
지 못했다. 그러나 후주는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기뻐하고 있었다. 사마소는 다
시 촉나라 사람들을 시켜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자 촉의 신하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으나 유신은 여전히 얼굴에 기쁜 빛을 띤채 즐거워만 할 뿐이
었다. 모두가 술이 얼큰해졌을 때 사마소가 가충에게 말했다.
"사람이 생각이 없다 해도 어찌 저토록 될수 있겠는가? 만약 제갈공명이 살아
있었다 해도 저런 인품으로는 끝내 나라를 지켜 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
니 강유 따위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게 말한 사마소가 후주를 가까이 불러 물었다.
"서촉이 그립지 않으시오?"
"이토록 즐겁게 지내니 고향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유선이 그렇게 대답했다. 도저히 한 나라의 임금이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
지 않는 언행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후주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밖
으로 나가자 극정이 따라나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촉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만약 다시 묻거든
눈물을 흘리며 '선친의 묘소가 먼 촉 땅에 있으니 서쪽 하늘만 보아도 슬퍼집니
다. 하루도 그립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진공은 틀림
없이 폐하를 촉으로 돌려 보낼 것입니다."
후주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잔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술이 몇 순
배 돌고 얼큰하게 취했을 때였다. 사마소가 다시 후주에게 물었다.
"촉 땅이 생각나지 않는다니 정말이시오?"
후주는 극정이 이른 대로 눈물을 흘리려 했으나 눈물이 나오지 않아 눈을감고
극정이 시킨 말을 더듬거렸다.
".......하루도 그립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그런 유선을보자 사마소가 다시금 물었다.
"어찌하여 극정이 한 말과 똑같소? 극정이 그렇게 말하라고 일렀소?"
그 말에 유선이 깜짝 놀랐다. 사마소가 후주와 극정이 별실이 들어갔을 때 가
만히 사람을 보내 엿듣게 한 것이었다. 후주 유선이 황망이 몸을 굽히며 사마소
에게 대답했다.
"네, 실은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 말에 사마소와 좌우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후주 유
선이 암우함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을 보고 비웃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
이 있고 난 후부터는 사마소는 후주를 의심하지 않은 채 내쳐 두었으니 유선은
그 뒤로는 평안히 남은 생을 마칠 수 있었다. 사마소가 서촉을 거두어들이자
조정 대신들은 그 공을 내세워 왕으로 높이려고 위주 조환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때 이미 조환은 이름뿐인 천자였다. 정사는 사마씨의 손에 있으니그 표문에
좇지 않을 수 없어 사마소를 진왕으로 삼고 사마소의 아버지 사마의에게 선왕,
그의 형 사마사에게는 경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마소의 아낸느 왕숙의 딸
로서 아내 왕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사마염이요, 둘째 아들
은 사마유였다. 사마염은 원래 기상이나 풍채가 기이한 호걸이었다. 머리칼이
땅에 늘어졌으며, 두 손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팔이 긴데다 총명하고 담이 뛰
어났다. 사마유는 그런 형과는 달리 성정이 부드럽고 따뜻할 뿐 아니라, 몸가짐
이 공손하며 효성 또한 지극했다. 게다가 형제간의 우애도 깊어 사마소는 그 둘
째 아들을 더욱 귀히 여겼다. 그러나 형인 사마사에게 아들이 없어 사마유로 하
여금 양자로 삼게 하고 그 뒤를 잇게 했다. 사마소는 평소 신하들에게 입버릇
처럼 말해 왔다.
"천하는 곧 우리 형님의 천하다."
그런 사마소가 진왕이 된 후에 둘째 사마유를 세자로 세우려 함은 당연한 일
이었다. 그러자 산도가 나서며 말렸다.
"맏이가 있는데 그 아우를 세자로 세움은 예에도 어긋날 뿐 아닐 상서로운 일
이 되지 못합니다."
이어 가충, 하증, 배수 등의 신하들도 산도와 뜻을 같이 하여 사마소에게 간했
다.
"맏이 되는 분은 총명하고 신무하시어 세상에서 드문 재질을 지니셨는데다 인
심이 이미 그 분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타고나신 자태도 제왕의 의용을 갖추었
으니 신하로 머무르실 분이 아닙니다."
신하들이 그렇게 말했으나 사마소는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태위 왕상, 사공 순의가 말했다.
"전에도 작은아들을 세웠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진 예가 많았습니다. 깊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간하니 사마소도 마음을 바꾸어 마침내 사마염을 세
자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간했다.
"올해 양무현에 하늘에서 한 사람을 내려보냈는데 키가 두 길이나 되고, 발자
국이 석 자두 치나 되는데다 머리는 희고 수염은 푸른데 누런 홑옷을 이복 머리
에 누런 띠를 두르고 있었다. 합니다. 그 사람은 손에 명아주지팡이를 지포돌아
다니며 이르기를 '나는 민왕으로 너희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왔다'하며 '천하는
임금이 바뀌어야 태평함을 누릴 수 있다'고 외치며 사흘을 떠돌아다니다 홀연
사라졌다 했습니다. 이 일은 전하에게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전
하께서는 머리에 열두 줄 황금 면류관을 쓰시고 천자의 기를 앞에 세우신 후에
천자의 위엄을 보이시도록 하옵소서. 또한 금으로 짠 수레에 여섯 마리 말을 매
어 나가게 하시고 왕비를 황후로 세우시고 아울러 세자는 태자로 높여 세우셔야
할 것입니다.."
사마소는 그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던 바라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기쁜 마음으로 부중에 돌아와 밥을 먹던 도중 그만 중풍을맞아 쓰러지
고 말았다. 그런 다음 날이었다. 사마소의 병이 무겁다느 말을 듣고 태위 왕상
을 비롯한 사도 하중, 사마순의와 여러 대신들이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그때 사
마소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신묘일이었다. 사마소가 죽자 하증이 세
자 세울 일부터 서둘렀다.
"천하 대사가 모두 진왕에게 달려 있소이다. 먼저 태자를 세워 진왕으로 받든
후에 장레를 치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증의 말에 조정 대신들은 이의가 없었다. 그날로 사마염을 진왕으로 세웠다.
진왕에 오른 사마염은 하증을 승상으로 삼고, 사마망을 사도로, 석포를 표기장
군, 진건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그의 아비 사마소에게는 문왕이란 시호를 올렸
다. 사마염은 아비 사마소를 장사지낸 뒤 가충과 배수를 궁 안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지난날 조조가 말하기를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말했다. 과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가?"
가충이 그 물음에 대답했다.
"조조는 대대로 한의 녹을 먹었는데 역적이라는 이름을 면하려 그렇게 말했습
니다. 그러나 실은 그의 아들 조비로 하여금 천자를 삼으려고 그렇게 말한 것입
니다."
그러자 사마염이 넌지시 물었다.
"고의 부왕은 조조에 비하여 어떻다 보는가?"
사마염이 그렇게 물으니 가충이 그 속마음을 알아채지 못할리 없었다. 듣기
좋은 말로 사마염의 부왕을 치켜세웠다.
"조조는 비록 공이 화하를 뒤덮었다 하나 백성들은 그 위엄에 눌려 두려워할
뿐 그 덕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뒹 ㅔ조비가 그 뒤를 이었을 때 백성들을
끌어다 부려 고초를 겪게 했으며 밖으로 군사를 내어 싸움을 벌이니 하루도 편
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선왕, 경왕께서 여러 번 공을 이루시고 천하
에 은덕을 베푸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두 분께 기운 지 오래입니다. 문왕께
서는 서촉을 거두어 그 공이 온 땅을 뒤덮었는데 조조가 어찌 문왕께 비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염은 그 말에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조비가 한나라의 대통을 이었는데 어찌 고는 위의 대통을 잊지 못하겠는가!"
사마염이 그렇게 속마음을 밝히자 가충과 배수가 임금을 대하는 예로 두 번
절을 올린 후 권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비가 한을 이어받은 옛 일을 본받도록 하십시오. 수선대
를 쌓아 천하에 알리시고 대위에 나아가십시오."
사마의는 신하들이 그렇게 권하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
자, 사마염은 칼을 찬 채 궁궐로 들어갔다. 그 무렵, 위주 조환은 매일 조회도
열지 않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마음이 어지럽고 몸마저 편안치 못했다. 그때
사마염이 칼을 찬 채 성큼성큼 들어왔다. 조환은 황망히 용상에서 내려와 사마
염을 맞았다. 사망ㅁ은 조환을 보자 대뜸 물었다.
"위의 천하는 누구의 힘으로 이룩되었다고 보시오?"
심상치않은 그 물음에 조환이 두려움에 떨며 대답했다.
"모두 진왕의 부친과 조부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까닭 없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보건대 폐하의 문도 도를 말할 만한정도가 되지 못하며, 무도 나라를 이
끌어 갈 만큼 밝지가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슬기롭고 덕 있는 이에게 자
리를 물려주지 않으시오?"
실로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사마염이 천자의 자리를 자기에게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니 조환은 몹시 놀라 몸만 떨 분 감히 입을 여지 못하고 있
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황문시랑 장절이 보다못해 사마염을 만류했다.
"진왕의 말씀은 옳지 못합니다. 옛날 위무 황제께서 동,서,남을 평정하고 이어
북쪽을 쳐서 이 나라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천하가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지금의 천자께서는 오로지 덕이 있을 뿐 아무런 허
물이 없으신데 어찌하여 자리를 물려주라 하십니까?"
사마염은 크게 노한 얼굴로 장절에게 소리쳤다.
"이 나라는 원래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조가 천자를 내세워 천자 제후들을
호령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위왕이 되어 황실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
버지, 할아버지는 3대에 걸쳐 위를 보좌하여 오늘이 있게 했다. 오늘날 위가 천
하를 얻게 된 것은 조씨의 힘이 아니라 실은 우리 사마씨의힘에 의한 것임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그런 위나라를 물려 받을 수 없
다는 말인가?"
사마염의 호통에도 장절이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
"그런 짓을 한다면 그건 바로 이 나라를 빼앗는 역적이 될 것이오."
사마염은 더욱 화를 내며 외쳤다.
"그렇다면 나는 한의 원수를 갚겠다. 그런데도 네가 어찌 나를 막을 수 있겠느
냐?"
그렇게 외친 사마염은 주위의 무사들에게 명해 장절을 죽이게 했다. 무사들은
사마염의 명을 받자 장절을 끌어 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그 모습을 본 조환은
몸을 떨며 사마염 앞에 무ㄹ을 꿇고 흐느껴 울며 빌었다. 그러자 사마염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전각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환은 그 자리
에 있던 가충과 배수를 보며 물었다.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소.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소?"
가충이 조환에게 권했다.
"이제 하늘이 내린 운이 다했으니 폐하께서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마십시오.
마땅히 한의 헌제가 그러했듯이 옛 일을 본받아 진왕에게 대위를 물려주십시오.
이는 곧 위로는 하날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뜻을 따름이요, 그것이
곧 폐하께서 앞으로 아무런 근심 없이 편안히 계실 수 있는 길입니다."
이미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조환이 아닌가. 조환은 가충의 말에 따를 수밖
에 없었다. 가충에게 수선대를 쌓게 하고, 12월 갑자일로 날을 잡아 대례를 갖춰
제위룰 진왕에게 물려주었다. 모든 문무백관들을 모아 놓고 수선대에 오른 위
주 조환이 몸소 전국의 옥새를 사마염에게 바쳤다. 이로써 선대 조비가 죽고 45
년 뒤에 그의 손자 조환마저도 마침내 조비처럼 제위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
다. 훗날 사람이 그 일을 시로 지어 탄식했다.
위는 한을 ㅃ앗고, 진이 위를 빼앗으니
돌고 도는 하늘의 이치 피할 길 없네.
가련하다. 장절이 충성을 바쳐 죽었으나
한 손으로 어찌 높은 태산을 막을 수 있으랴.
사마염에게 옥새를 바친 조환은 수선대를 내려와 대신들과 같은 옷차림으로
바꿔입고 문무백관들의 앞쪽에 섞여 서 있었다. 사마염이 수선대 위에 높이 앉
아 있는데 가충과 배수가 칼을 짚고 그 좌우에 서 있다가 사마염의 영을 받들게
했다.
"조환은 두 번 절하고 땅에 엎드려 폐하의 영을 받들라."
조환이 영에 따르자 가충이 다시 영을 전했다.
"한 건안 25년, 위가 한으로부터 천하를 이어받은 지 이미 45년이 지났다. 이
제 위는 하늘이 복록을 다하고 하늘의 뜻은 진으로 넘어왔다. 사마씨는 그 공덕
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여 가히 황제의 제위에 오를 만하니 이제 위를 물려받는
다. 너는 진류왕에 봉할 터인즉 금용성에 가서 살되 천자의 부름이 없으면 결코
도성에 들어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에 조환은 슬피 울며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태부 사마부가 떠나는 조환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통곡했다.
"신은 위의 신하였습니다. 끝내 위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사마염은 그를 보자 같은 사마씨가 그가 더욱 괘씸했다. 그러나 짐짓 천자의
너그러움을 베풀어 그를 안평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사마부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끝내 물리쳤다. 이날 문무백관들은 대 아래서 두 번 절하고 세
번 만세를 외쳐 위를 이은 진에 충성을 다짐했다. 사마염은 국호를 위 대신 대
진이라 바꾸고 연호를 태시 원년이라 삼고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마침내 종말을 고한 것이었다. 옛 사람들이 허망한 위나라의 종말과
조비에게 한의 헌제가 쫓겨난 일이 되풀이되는 일을 시로 지어 남겼다.
진나라 하는 짓 위와 같구나.
진류왕도 끝내 산양공 닮았네.
수선데 앞에서 물려줌이 되풀이되니
되돌아보며 그때의 무상함을 따르네.
진의 황제가 된 사마염은 사마의를 선제로 높이고 큰아버지인 사마사를 경제
로, 아버지 사마소에게는 문제로 시호를 올리고 사당 일곱을 지어 그 선대의 공
덕을 기렸다. 일곱 사당에 모신 신위는 한의 정서장군 사마균, 예장태수 사마량,
영천태수 사마전, 증조부인 경조윤 사마방과 그의 아들인 할아버지 선제 사마의
였다. 또한 큰아버지인 경제 사마사와 아버지인 문제 사마소를 모신 일곱 사당
은 6대조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의 신위를 모신 곳이었다. 진제 사마염은
새로운 진을 일으키자 날마다 문무백관들을 모다 동오를 치기 위해 의논했다.
사마염, 진의 천하통일
그 무렵, 사마염이 위의 제위를 빼앗앗다는 소문을 듣게 된 오주 손휴는 매일
근심으로 날을 지새웠다. 사마염이 곧 군사를 내어 오를 치러 올 것임을 짐작했
기 때문이었다. 손휴는 근심하던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이
깊어지자손휴는 승상 복양홍을 불러들였다. 복향홍이 궁으로 와 손휴르 ㄹ보았
으나 손휴는 이미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중병이었다. 손휴는 복양홍의
팔을 잡은채 다만 손가락으로 태자 손단을 가리키면서 입도 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복양홍은 모든 대신들과 함께 태자 손단을 임금으로 세울 논의
를 했다. 그때 좌전군 만욱이 나서 말렸다.
"태자 손단은 나이가 너무 어려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오정후 손
호를 임금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자 좌장군 장포도 만옥의 말에 찬동했다.
"그렇습니다. 손호는 그 재주와 식견과 결단력을 지닌 어른입니다. 능히 제왕
이 될 만합니다."
그러나 손휴로부터 당부를 받은 복양홍이었다.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
다가 후궁으로 들어가 주 태후를 찾아보고 이 일을 의논했다.
"나는 한낱 남편을 여윈 아낙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나라일에 관한 일을 알겠
소? 경들이 잘 의논해서 세우도록 하시오."
주 태후가 그렇게 말하니 복양홍은 하는 수 없이 여러 대신들의 뜻에 따라 마
침내 손호를 임금으로 세우기로 했다. 손호의 자는 원종으로, 손권의 태자인 손
화의 아들이었다. 그 해 7월 손호는 왕위에 오르자, 원흥 원년으로 연호를 고ㅊ
다. 손호는 태자 손단을 예장왕으로 봉하고 아버지 손화를 문황제로, 어머니 하
씨를 태후로 높였다. 그리고 늙은 장수 정봉을 좌우대사마로 삼았다. 손호는 다
음 해가 되자 다시 연호를 감로 원년으로 고쳤다. 그러나 제위에 오른 손호는
밝은 임금이 되지 못했다. 위에 오른 이후 날로 횡포해지더니 술과 여색만 탐닉
하며 중상시 잠혼을 가까이했다. 복양홍과 장포가 그런 손호의 잘못을 간하다
손호의 노여움을 샀다. 손호는 복양홍과 장포를 목베게 하고 그 삼족까지 끌어
내어 죽였다. 그렇게 되니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아무도 바른말을
아뢰는 자가 없었다. 손호는 다시 연호를 고쳐 보정 원년이라 하고 육개와 만
욱을 좌우의 승상으로 삼은 뒤 무창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호가 무창에 자리잡
자 양주 백셩들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곡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바치느라 온
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손호는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으니 백성들의 어
려움은 물론 나라 살림이 바닥날 판이었다. 이에 보다못한 육개가 손호에게 상
소문을 올렸다.
근자에 이르러 나라에 아무런 재앙이 없는데도 백성들은 목숨을 이어가기 어
렵고,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도 백성들과 나라 살림이
말랐으니 신은 한없이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일찍이 한 황실이 쇠약해지자 솔밭
처럼 세 나라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씨와 유씨는 다스림이 밝지 못하
여 모두 진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눈앞에서 밝혀진 일로써 신은 폐하
를 위하고 나라를 아껴 아뢰는 바입니다. 원래 무창은 땅이 메마르고 거칠어 왕
자가 도읍할 만한 곳이 아닙니다. 또한 이 땅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되고
있습니다.
건업의 물은 마실지언정
무창의 생선은 못 먹겠네.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무창에서는 살지 말라.
이 노래야말로 백성들의 마음과 하늘의 뜻을 밝힌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나라에는 일 년을 쓸 재물이 없어 밑바닥이 드러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런데도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을 쥐어짜기만 할 뿐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있
습니다. 대제때는 후궁에 궁녀가 백을 헤아리지도 못했는데 경제때는 수천을
헤아리니 그로 인해 나라 재물의 소모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또 폐하의 좌우 벼
슬아치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시기하고 어진 이를 해치며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우글거리니, 이는 다스림을 좀먹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느 ㄴ것입니다. 바
라건대 폐하께서는 부역을 줄이시고, 또한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을 줄
여 주십시오. 마땅히 궁녀의 수효를 줄여 낭비를 없애고 깨끗한 벼슬아치들을
뽑으시면 하늘은 백성들이 폐하를 우러르게 할 것이며 나라를 편안케 해 줄 것
입니다.
손호는 육개의 그 상소문을 보았으나 이미 몸과 마음이 향락에 빠져든 터라
이맛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오히려 손호는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켜 소명궁을
짓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어려 문무대신들을 산으로 내몰
아 나무를 베어 오게 했다. 한편으로는 상광이란 점쟁이를 불러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일을 점쳐 보게 했다. 상광이 점괘를 뽑아 보더니 손호에게 말했다.
"좋은 점괘가 나왔습니다. 경자년에 폐하께서는 푸른 일산을 받으신 채 낙양으
로 들어가실 점괘입니다."
경자년은 후에 그 자신이 진에게 항복하는 해였다. 그러나 손호는 낙양에 들
어간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며 중서승 화핵을 불러 물었다.
"선제께서는 경의 말을 좇아 강줄기에 수백 영채를 내리게하시고 군사를 머무
르게 하시며 정봉에게 그들을 다스리게 하셨소. 이제 짐은 옛 한나라의 땅을 모
두 되찾고 촉의 원한을 풀어 주려 하는데 먼저 어느 곳으로 들어가야겠소?"
화핵이 들으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촉주는 성도를 지키지 못해 나라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마염은 반드
시 우리 오를 차지하려 할 것인즉 폐하께서는 마땅히 덕을 닦아 백성들을 편안
케 하시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억지를 부려 군사를 내심은 곧 삼베옷 차림으
로 타오르는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 도리어 자기몸만 태울 뿐입니다. 폐하께서
는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화핵이 말리자 손호는 벌컥 화부터 냈다.
"지은 때를 놓치지 않고 큰 일을 이루려는데 내 어찌 그 따위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는가? 만약 그대가 원로임을 생각지 않았다면 당장 목을 치게 햇으리
라!"
손호는 그렇게 외치며 무사들에게 명해 그를 밖으로 내쫓게 했다. 화핵은 궁
궐 밖으로 쫓겨나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아깝구나. 이 아름다운 강산이 송두리째 남의 손에 들어가려 하니 어찌 아깝
지 않으라!"
화핵은 그길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래 숨어 살며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
았다. 손화는 화핵을 내쫓자 곧 진동장군 육항에게 명했다.
"군사들을 양강에 모은 후, 이들을 이끌고 곧바로 양양으로 쳐들어가도록 하
라."
그렇게 명을 내리니 손호는 마침내 스스로 오가 망할 날을 재촉하고 만 셈이
었다. 그 일은 세작에 의해 곧 낙양으로 전해졌다. 진주 사마염은 그 소식을
듣자 모든 대신들을 불러 모으고 의논했다. 그러자 가충이 먼저 나서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오주 손호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지 않고 황음무도한 짓
만 일삼는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도독 양호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군사를 이끌
어 막게 하십시오. 그러다 오나라에 변란이 일기를 기다려 짓쳐든다면 동오를
얻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것입니다."
사마염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의논할 것도 없이 곧바로 사자를 양호에게 보
내 조서를 전하게 했다. 조서를 받은 양호는 곧 군마를 수습하여 적을 맞을 준
비를 했다. 양양 땅을 지키던 양호는 이전부터 그 곳 백성들과 군사들로부터 인
심을 얻고 있었던 터였다. 오나라 사람으로 항복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는 사람들은 모두 돌려 보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경계를 지키는 군사들을 줄여
그들에게 밭 8백여 경을일궈 농사를 짓게 했다. 그렇게 하니 양호가 처음 이곳
임지로 왔을 때는 석 달 먹을 양식도 없었으나 땅을 일궈 농사를 지으니 다음
해에는 10년 먹을 양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 양호는 군중에 있을 때도 군
사들에게 늘 가벼운 옷차림에 품 넓은 띠를 두르게 하여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장막을 지키는 군사도 10여명으로 줄여 누구나 가까이하도록 했고
위엄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부장 하나가 장막으로 들어와 양호에게
의견을 내었다.
"정탐하러 갔던 군사의 말에 의하면 요즘 오군은 모두 마음이 느슨해져 있다
고 합니다. 이때를 틈타 적에게 덮쳐든다면 틀림없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양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들은 육항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구나. 그는 지혜가 남다르고 꾀가 많은
사람이다. 지난번 오주의 명을 받고 서릉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보천과 그 아래
장수 수십 명을 죽였을 대에도 나는 그들을 그로부터 구해 내지 못했다. 그러니
육항이 장수로 있는 한 우리는 굳게 지키기만 해야 한다. 그들 스스로 아에서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그때에 쳐들어가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함
부로 나섰다가는 크게 낭패만 볼 뿐이다."
양호가 그렇게 깨우쳐 주자 여러 장수들은 모두 그의 빈틈없는 헤아림에 감탄
했다. 모두 양호의 말에 따라 굳게 지키기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이었다. 양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역시 사냥을 나온 육항과
그 휘하 장수들을 보게 되었다. 양호는 거느리고 나온 장수들에게 일렀다.
"우리 군사는 절대로 적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라."
장수들은 양호의 말에 다라 모두 진나라 땅에서만 사냥을 했다.
"양호의 군사들은 기율이 저토록 정연하니 우리가 함부로 칠 수가 없겠구나."
육항이 양호의 군사들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날이 저물자 양쪽은 다 자
기들의 영역 안에서만 사냥하다 아무 탈 없이 영채로 돌아갔다. 양호는 영채로
돌아오자 사냥해서 잡은 짐승들을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오군의 화살에 맞은
승이 자기 편 군사 쪽으로 달려와 잡힌 것은 모두 오군에게 돌려 주게 했다.
뜻밖에 놓쳐 버린 짐승을 돌려받게 되자 오군은 기뻐하며 그 일을 육항에게 알
렸다. 육항은 심부름 온 양호의 군사를 불러 물었다.
"너희 장수는 술을 드시는가?"
"반드시 잘 빚은 술이라야만 드십니다."
육항이 그 말을 듣더니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내게 오래 전에 빚은 좋은 술이 있는데 네게줄 테니 너희 도독께 올려라. 이
술은 내가 손수 빚은 술로써 어제 함께 사냥을 했던 정표로 특별히 보낸다고 아
울러 아뢰도록 하라."
그 군사는 육항이 준 술을 메고 영채로 돌아갔다. 양호의 군사가 돌아가자 좌
우의 장수들이 육항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적의 장수에게 술을 보낸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덕으로 나를 대하는데, 내가 어찌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
육항이 여전히 웃으며 말하자 좌우 사람들은 모두 놀랄 뿐이었다. 한편, ,자
기 영채로 돌아온 군사는 양호에게 술을 바치며 육항이 했던 말을 자세히 전했
다. 양호도 그 말을 듣자 웃으며 말했다.
"그도 내가 술을 마시는 걸 알더란 말이지?"
양호는 술항아리를 열게 하여 따라 마시려 했다. 그걸 본 부장 진원이 황급히
말렸다.
"그 술 속에 독이라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살피시지도 않
고 마시려 하십니까?"
그러자 양호가 더욱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육항은 그런 간사한 짓거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라."
그렇게 말한 야호는 항아리의 술을 모두 마셨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 양
호와 육항은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육항은
그날도 사람을 보내 양호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양호가 심부름 온 사람에게
물었다.
"육 장군은 그간 편안하신가?"
"육 장군께서는 며칠 전부터 병환이 나시어 며칠째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심부름 온 군사가 그렇게 말하자 양호가 문득 고개를 끄덕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짐작건대 장군의 병도 아마 나와 같은 것일 것이다. 마침 내가 먹으려고
지어 놓은 약이 있으니 이 약을 갖다 드리도록 하라."
양호는 그렇게 말하며 지어 놓은 약을 그 군사에게 주었다. 오나라 군사가 약
을 가지고 육항에게 바치며 양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수
들이 육항에게 말했다.
"양호는 우리들의 적장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롭지 못한 약일 것입니다."
그러나 육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다. 양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마라."
육항은 서슴없이 그 약을 따라 마셨다. 그러자 병은 다음날 씻은 듯이 나았다.
여러 장수들이 병이 나은 육항을 보고 경하했다. 육항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
동안 양호와의 일을 타일러 주었다.
"그가 우리에게 덕으로 대하는데 내가 사납게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는 앞으로 싸우지 않고도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굳게 지킬 때이며 작은 이로움을 얻기 위해 급히 서둘 때가 아니다."
그 말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육항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때 홀연 오주가 보낸 칙사가 이르렀다. 육항이 사자를 맞아들이며 온 뜻을 물
었다.
"폐하께서는 장군께 빨리 군사를 움직여 진나라 군사가 먼저 쳐들어오지 못하
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사자가 그렇게 오주의 뜻을 전했다. 육항은 오주의 재촉을 받게 되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다가 사자에게 일렀다.
"그대는 먼저 돌아가시오. 내가 폐하께 표문을 지어 올리겠소."
사자가 돌아간 뒤 육항은 곧 표문을 써 오주엑게 바쳤다. 육항으로부터 표문
을 받은 오주는 곧 그 글을 읽어 보았다. 육항이 보낸 표문에는 아직 진을 칠
때가 아님을 고하고 폐하께서는 그 이전에 덕을 닦아 형벌을 삼가고 백성들을
편안히 보살피라고 권하고 있었다. 오주 손호는 크게 화를 내며 육항의 표문을
내던졌다.
"짐이 듣건대 육항은 변경에 있으면서 적과 내통한다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손호는 다시 육항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병권을 거둔 다음, 사마로 벼슬을 낮
추었다. 육항을 대신하여 좌장군 손기를 보내 그 곳을 지키게 했다. 여러 대신들
은 오주 손호가 거칠기만 해 아무도 말리지를 못했다. 오주는 그 이루로도 밝
은 헤아림이 없이 멋대로 정사를 다스렸다. 연호를 건형으로 고치더니 다시 봉
황으로 고치는가 하면 군사들을 변방으로 내몰며 들볶았다. 그러니 군사들은 지
위가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원망하지 않는가가 없었다. 이때 승상 만
욱, 장군 유평, 대사농 누형 등이 소호의 무도함을 보다못해 바른말을 하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앞뒤로 10년동안 오주가 죽인 충신은 40여 명을 헤아릴 지경
이었다. 그런 손호가 궁궐을 드나들 때마다 기병 5만을 좌우로 거느리니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할 뿐이었다. 한편, 양호는 육항이 파직을 당한데다 오주 손호
가 무도함을 일삼아 군민이 모두 원망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드디어 오를 칠 때
가 왔다고 여겼다. 곧 오를 치자는 표문을 써 진주 사마여에게 보냈다.
무릇 때와 운은 하늘이 내리시는것이라도 공은 반드시 사람이 이루는 것입니
다. 오늘날 강회 땅의 방비가 단단하다고 하나 이전 촉의 검각에는 미치지 모ㅅ
며 손호의 횡포는 유선보다 더 심합니다. 이에 오나라 사람들의 고초는 지난날
촉의 백성보다 더한 바 있습니다. 이때 천하를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지키고만
있다면 어느 때에 그 뜻을 이루겠습니까?
양호는 표문에서 그렇게 권하자 사마염은 몹시 기뻐했다. 곧 군사를 내렸는
데 가충, 순욱, 병순 등이 오를 칠때가 아님을 간곡히 간하며 말렸다. 사마염도
대신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리자 마침내 마음을 바꿨다. 양호는 그 소식을
전해 듣자 크게 탄식했다.
"세상일이 마음과 같이 되지 않으니 열에 아홉이구나. 지금 하늘이 내리는 것
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양호는 그렇게 탄식해 마지않다가 함년 4년, 마침내 낙양으로 가 병을 핑계대
고 벼슬 자리를 내놓았다. 그러나 사마염은 아끼는 장수가 벼슬을 내놓자 물었
다.
"경은 나라를 평안케 하는 좋은 계책이 있으면 부디 짐에게 일러 주기 바라
오."
그러자 양호가 다시 표문에서 썼던 말을 진주에게 아뢰었다.
"손호의 횡포가 더할 나위 없이 심하니 지금이라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
습니다. 그러나 만약 손호가 죽고 어진 이가 다스리는 날이 되면 오는 결코 폐
하께서 거두어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양호의 말에 사마염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가만히 말했다.
"경이 지금이라도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를 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나 양호는 조용히 사양했다.
"신은 이미 늙고 병든 몸이라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슬기롭
고 용맹스러운 장수를 뽑아 쓰도록 하십시오."
양호는 그 말을 남기고 한을 머금은 채 물러났다. 그 해 11월이 되자 양호는
마음속에 품은 한이 병이 되었던지 마침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사마염은 몸소
어가를 타고 양호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 사마염이 병상 앞에 이르르자 양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만 번을 죽는다 한들 어찌 폐하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사옵니까?"
사마염 또한 눈물을 흘리며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은 것을 탄식했다.
"짐은 지난날, 경이 말한 대로 오를 치지 않은 일이 한스럽기만 하오. 이제 누
가 경의 큰 뜻을 이어받을 수 있겠소?"
그러자 양호가 눈물을 머금은채 사마염에게 말했다.
"신은 이제 곧 죽을 것이니 어리석은 생각이나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
니다. 신이 보기에는 우장군 두예가 그 일을 맡을 만합니다. 오를 치시려거든 반
드시 그 사람에게 맡겨 보십시오."
양호가 두예를 천거하자 사마염이 물었다.
"어진 인물과 착한 자를 드러내는 일은 아름다운 것이오. 그런데 경은 어찌 조
정에 사람을 천거하면서도 그 천거하는 글을 불사르고, 이렇게 말로 하여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시오?"
"벼슬아치를 뽑아 쓰는 것은 조정의 일입니다. 천거받은 사람이 천거해 준 사
람의 집에 사사로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예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걸 원치
않습니다."
양호는 그렇게 말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그제야 양호의 참뜻을 알게된 사마염
은 소리내어 울더니 궁으로 돌아와 양호에게 태부에다 거평후의 벼슬을 더해 주
었다. 남주 땅 백성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지난날 그의 덕을 기려 문
을 닫고 소리내어 울며 슬퍼했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강남 땅 경계를 지키는 장
졸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양양 땅 백성들도 양호가 즐겨 거닐던
현산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워 사철마다 제사를 올렸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
람들은 그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보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양호가 죽고 나자 사
마염은 그의 말을 좇아 두예를 진남대장군으로 높여 형주 일대의 군마를 맡아
다스리게 했다. 두예는 사람됨이 듬직하면서도 무슨 일에서나 익숙하고 훤히
통해 있어 어려움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을 좋아해서 좌구명의 (춘추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밖으로 나갈 때도 반드시 사람을 시켜 좌전을 말안장에
걸어 두게 하여 사람들은 그를 '좌전벽'이라 불렀다. 두예는 진주 사마염의 명
을 받들어 양양으로 가 백성들을 돌보고 군사를 조련하며 동오를 칠 준비를 했
다. 그 무렵 오나라는 정봉, 육항 같은 원로들마저 이미 죽은 뒤라 오주 손호의
무도함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매일같이 잔치를 열어 신하들까지 정신을 잃도
록 술에 취하게 했다. 또한 황문랑이라고 불리는 열 사람에게 규탄관이란 직을
주었는데 규탄관은 일종의 사정 관청이었다. 규탄관에게 모든 관리들의 잘못을
일러 바치게 하고 술자리가 끝난 뒤 잘못이 드러난 과닐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
거나 또는 그 눈알을 뽑게 했다. 그로 인해 모든 오나라 사람들은 한결같이 두
려움에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나라의 그 같은 사정을 알게 된 진의 익주자
사 왕준이 상소를 올려 오를 치도록 했다.
오주 손호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니 하루빨리 치도록 하옵소서. 만약 손호가주
어 새로 어진 임금이 들어서기라도 하면 우리에게는 가볍지 않은 적이 될 것입
니다. 시이 동오를 치기 위해 배를 만들어 둔 지도 7년이 지나 이미 썩어 가는
중입니다. 거기다 신의 나이 이미 일흔이니 죽을 날도 머지 않았습니다. 이 세가
지중에 만약 하나라도 어긋나면 오를 치기 어려울 터익즉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그 상소문을 본 사마염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왕준의 사소문을 바로 지난날 양호의 뜻과 같다. 짐도 그 뜻과 같아 이제 동
오를 치고자 한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그러자 시중 왕혼이 일어나 만류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손호가 북으로 쳐올라올 작정으로 군사를 정돈하여 긴세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맞서 싸우느니보다는 차라리 다시 1년쯤 더 기다려
지치기를 기다리셨다가 쳐들어가면 쉽게 공을 이룰 것입니다."
진주 사마염이 그 말을 들으니 그 또한 옳게 여겨졌다. 이에 조서를 내려 군
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뒤에 비서승 장화와 바둑을두고 있었다. 그때 신하
한 사람이 들어와 변경에서 표문이 왔음을 알렸다. 진주가 그 표문을 받아 보니
바로 형주의 두예가 보낸 것이었다. 진주는 겉봉을 뜯고 읽어 보았다.
지나날, 양호 장군은 조정의 신하들을 제쳐두고 폐하께만 계책을 올렸던 탓에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여 뜻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던 듯합니다. 무릇 일이란 이
로움과 해로움을 서로 견주어 보고 행하거니와 이번에 오를 치면 반드시 열에
여덟, 아홉은 이로움만 있을 것입니다. 지난 가을 이래로 우리가 오를 치려는 뜻
을 여러 번 드러내 보였는데 만약 이번에 그만두게 하신다면, 손호가 겁을 먹고
무창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강남의 모든 성을 손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는 적의 성을 쉽게 우려뺄 수도 없을 것이며 들판의 곡식도 빼앗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내년이 아니라 몇 년이 흘러도 영영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두예의 표문은 사마염에게 오를 치도록 재촉하는 내용이었다. 진주가 표문을
다 읽고 난 뒤였다. 그 표문을 곁눈질해 본 장화가 바둑판을 옆으로 밀어 놓더
니 두 손을 모으고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신성신문하시고 나라는 넉넉하고 군사는 강합니다. 그러나 오주는
음란한데다 포악하여 백성들은 근심에 싸이고 나라는 황폐해 있습니다. 이때를
틈타 치시면 가볍게 오를 평정하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더 이상 주
저하지 마소서."
진주도 그 말을 듣자 결연히 말했다.
"경의 말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잘 헤아려서 한말이다. 짐이 더 이상 무엇을 걱
정하겠는가?"
그 말과 함께 곧 대전으로 나가 오를 치기 위해 영을 내렸다.
"진남대장군 두예는 대도독이 되어 군사 10만을 이끌고 강릉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진동대장군 낭왕 사마주는 제중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진동대장군 난왕 사
마주는 제중으로 나아가고, 정동대장군 왕혼은 황강으로, 그리고 건위장군 왕융
은 무창으로 나아가라. 또한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로 나아가되 각기 군사 5만을
거느려 모두 두예의 명을 받들도록 하라."
진주는 이어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에게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
가게 했는데 두 장수가 거느린 군사는 수군과 육군울 합쳐 20만이요, 전선도 수
만 척이었다. 그리고 관남장군 양제에게 군사를 주어 양양에 머물게 한 뒤 전군
의 인마에 호응케 했다. 진의 대군이 동오를 향하자 그 소식은 바람같이 오주
손호에게도 전해졌다. 손호는 크게 놀라며 승상 장제와 사도 하식, 사공 등수
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승상 장제가 나서 말했다.
"거기장군 오연을 도독으로 삼고 강릉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두예르 막게
하십시오. 또한 표기장군 순흠에게 하구로 나가 그쪽으로 오는 적을 막게 하십
시오. 신도 장수가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나가되 좌장군 심영과 우장군 제
갈정을 데리고 나가 우저에 머물며 우리의 여러 갈래 군마와 접응하겠습니다."
오주 손호는 형세가 급하니 장제의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곧 장제에게 군
사를 주어 떠나게 했다. 그러나 손호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얼굴에 근
심이 가득한 채 후궁으로 들어가는데 항상 총애하는 중상시 잠혼이 태연스런 얼
굴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슨 일로 용안에 근심이 가득하십니까?"
"진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온다 하니 각처로 군사를 내어 막게 했다. 그
러나 무엇보다 왕준이 걱정이다. 그는 군사 수만을 거느려 전선을 넉넉히 갖추
고 있는데 그 깃가 창끝보다 날카롭다. 그런데 짐이 어찌 근심이 되지 않겠는
가?"
그 말을 들은 잠혼이 손호에게 가만히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적장 왕준의 배를 모두 산산조각내어 버리
겠습니다."
오주가 그 말을 듣자 문득 얼굴이 밝아지며 계책을 물었다. 그러자 잠혼이 계
책을 밝혔다.
"우리 강남에는 철이 많이납니다. 그 철로 길이가 백 길, 무게가 30근이 되는
쇠고리를 만들게 합니다. 그 쇠고리들을 강을따라 긴요한 곳에 가로질러 펼쳐
놓게 합니다. 그리고 길이가 한 길 정도 되는 쇠말뚝 수만 개를 만들어 물 속에
박아 두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진나라 배가 물길을 타고 내려오다 쇠고리에
걸리거나 쇠말뚝에 부딪쳐 부서지고 말 것이니 그들이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
겠습니까?"
손호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잠혼의 계책을 따라 곧 나라안의 대
장장이들을 모아 강가에서 밤을 도와 쇠고리와 쇠말뚝을 만들도록 했따. 한편,
진장 두예는 강릉으로 나아가 아장 주지에게 가만히 명을 내렸다.
"그대는 수군 8백을 거느리고 작은 배에 싣고 가서 은밀히 장강을 건너 낙향
을 야습하라. 그리고 산의 숲 속에 많은 정기를 꽂아 두고 낮이면 호롤르 놓고
북을 치며 밤이면 여기저기에 횃불을 밝히도록 하라."
주지가 명을 받들자 수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파산에 가서 매복했다. 그런
다음 날, 두예가 수륙의 대군을 이끌어 진명하는데 정탐하러 갔던 군사가 돌아
와 고했다.
"오주 손호가 오연은 육로로, 육경은 수로로, 손흠을 선봉으로 삼아 세길로 나
오고 있습니다."
두예는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주저없이 군사를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는데 손
흠이 이끄는 배들이 앞에 몰려오고 있었다. 양쪽 군사가 맞닥뜨리자 한동안 싸
움이 이는데 두예는 슬며시 군사를 뒤로 물렸다. 손흠이 두예 군사들을 뒤쫓아
강언덕으로 올라갔다. 손흠이 두예 군사를 20여리즘 뒤쫓아갔을 떼였다. 홀연 포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사방에서 진나라 군사들이 뛰쳐나왔다. 오나라 군사들이
급히 물러가는데 두예가 군사를 되돌려 그 뒤를 덮쳤다. 오나라 군사들이 급히
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진의 주지가 거느린 8백 매복군이 오의 패잔병과
뒤섞여 성 안으로 뛰어든 뒤였다. 진군은 성에 올라 일제히 홰불을 흔들었다.
그걸 본 손흠이 깜짝 놀랐다.
"북에서 온 진나라 군사들이 벌써 강을 건너왔단 말인가?"
손흠이 그렇게 탄식하며 다시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어느새 성 안에서
달려나온 주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며 손흠의 머리를 베었다. 이때 오장의
육경이 강릉에 이르러 보니 강 남쪽 언덕 위에 크게 불길이 일고 있는데, 파산
위에는 큰 깃발 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걸 본 육경은 깜짝 놀랐다. 적이 어
느 새 강을 건넜다고 여기자 언덕 위로 배를 대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기다
리고 있었다는 듯 진나라 장수 장상이 달려와 육경의 목을 베었다. 이때 오연은
오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꺾이는 것을 보자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복병에게 사로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진나라 군사들은 적장 오연을 묶어 두예에게 데리고
갔다. 두예가 오연을 보자 호통을 쳤다.
"싸ㅇ도 않고 달아나는 장수이니 살려 두어도 쓸데없는 놈이다. 어서 목을 베
어라!"
두예가 오연의 목을 베게 하자 오연마저 죽고 말았다. 두예가 거침없이 군사
를 휘몰아 강릉을 뺏자 원,상 일대로부터 황주에 이르는 여러 고을은 절로 두예
의 손안에 들어왔다. 강릉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각 고을의 수령들은 인수
를 들고 와 저마다 두예에게 항복했다. 두예는 각 고을에 사람을 보내 백성들
을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한편,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백성들의 재물에 손을 대
지 못하게 했다. 두예가 그길로 달려가 무창까지 빼앗자 진군의 위세는 더욱 거
세어졌다. 두예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오주 손호가 있는 건업을 우려낼 의
논을 했다. 그러자 호분이 나서 말했다.
"백여 년이나 된 역적을 단숨에 치기는 어렵습니다. 거기다 봄물에 강물이 크
게 불어 군사를 오래 머무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년 봄을 기다려 다시 군사
를 일으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두예는 고개를 저의며 잘라 말했다.
"옛날 악의는 제서 땅, 한 싸움에서 강한 제나라를 평정했다. 지금은 우리 군
사의 위세가 크게 떨쳐 대쪽을 쪼개듯이 거침없는 기세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
나 날짜를 흘려 보내다 보면 다시 손대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두예는 격문을 돌려 여러 장수들에게 일제히 건업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때 진의 용양장군 왕준은 수군을 거느려 물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 정탐하러 갔던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오군이 쇠고리를 만들어 이어 만든 쇠줄을 강 일대에 가로질러 놓고 쇠말뚝
을 박아 우리 배가 이르면 깨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준은 껄걸 웃더니 큰 뗏목 수십만 개를 만들게 했다. 그 뗏목
위에 풀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막대기를 들리게 해 벌여 세운 후
하류로 띄워 보내게 했다. 오병들이 그걸 보자 싸워 보지도 않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뗏목이 하류로 떠내려가면서 물 속에 박아 두었던 쇠말뚝을 쓰러뜨리거
나 끌고 가버렸다. 뗏목 위에는 굵기가 열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열 길이나 되
는 마른 풀을쌓아 두고 마유를 부어 불을 붙이고 그 둘레에 횃불을 밝혀 두었
다. 뗏목이 떠내려가다 쇠줄에 걸리면 횃불이 풀더미 위에 쓰러져 불길이 치
솟아올랐다.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자 쇠고리에 이어진 쇠줄이 녹아 끊어졌다. 뗏
목이 불을 뿜으며 내려가자 오병들은 황망히 달아났다. 진병들이 그 뒤를 따라
두 길로 나누어 장강을 내려가며 오병들을 들이쳤다. 이때, 동오의 승상 장제는
좌장군 심영과 우장군 제갈정에게 명을 내려 강을 건너 진병들을 막게 했다. 그
러자 심영이 걱정스런 얼굴로 제갈정에게 말했다.
"상류에 있는 우리 군사들이 제대로 막지 못하니 진병이 이리로 내려올 것이
오. 여기서 힘껏 싸워 다행히 막는다면 강남은 편안하겠지만 만약 강을 건너가
싸우다 패한다면 모든 것이 결단나고 말 것이오."
"공의 말씀이 옳소이다."
제갈정이 그렇게 말할 때였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지금 진병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거침이 없어 당해내기가 어
려울 듯합니다."
두 장수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이미 강물에 쇠줄과 말뚝을 박아 방비
를 해 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심영과 제갈정이 장제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제 동오가 위태롭습니다. 차라리 달아나는게 어떻겠습니까?"
장제가 그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동오가 망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이나 슬기로운 이나 모두 짐작하고 있었소.
그러나 이제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항복하는 변란 속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
는 사람이 없다면 그 또한 욕스럽지 않겠소?"
장제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자 제갈정도 눈물을 흘리며 진
병을 막으러 나갔다. 장제는 심영과 함께 군사를 이끌어 적을 맞았다. 그러나
진의 대병이 그들을 둘러쌌다. 진나라 장수 주지가 오병의 영채로 짓쳐들었다.
장제가 그를 맞아 힘을 다해 싸웠으니 끝내 이리저리 얽혀 싸우는 군사들 틈에
서 죽고 말았다. 심영 또한 주지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수들을 잃은 오병
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날 뿐이었다. 우저마저 휩쓴 진나라 군사들은 물밀
듯이 동오의 경곌 밀고 들어갔다. 왕준이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진주 사마염에
게 알렸다. 사마염이 크게 기뻐하는데 가충이 아뢰었다.
"우리 군사가 오랫동안 밖에 나가 싸우고 있습니다.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병
이 나는 군사가 많을 것이니 불러들였다가 다시 진병케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
다."
그러자 장화가 가충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의 대병이 이미 적의 소굴에까지 이르렀으니 동오 사람들의 간이 말라불
었을 것입니다. 이제 한 달이 가기 전에 손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런데 가볍게 군사를 불러들여 지금까지 세운 공까지 없애려 하시니 실로 아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 말에 진주 사마염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가충이 장화를 꾸짖었다.
"너는 천시와 지리를 살피지도 못하면서 공만을 내세워 우리 군사들을 괴롭히
려고만 드느냐? 비록 네 목을 친다 해도 천하에 그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
다."
가충이 지나치게 장화를 몰아붙이자 사마염이 말렸다.
"그건 곧 짐의 뜻과 같다. 다만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뿐이니 다툴 것이 무엇
인가?"
그때 문득 두예에게서 표문이 왔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진주가 그걸 뜯어보니
왕준 또한 급히 군사를 휘몰아 동오를 들이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진주도 그
제야 마음을 정하고 동오를 빨리 정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두예와 왕준은 진주
의 명을 받들자 거칠 것이 없었다. 수륙으로 북 소리를 울리며 나아가니 진병들
의 앞길에는 막힘이 없었다.오병들이 진병의 깃발만 보고도 항복하니 진병들의
나아감이 바람처럼 빨랐다. 오주 손호는 그 소식을 듣자 낮빛이 변했다. 여러
신하들이그런 손호를 보고 물었다.
"북쪽 군사들이 내려오는데 강남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
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말인가?"
손호는 도준에게 어림군을 내어 주며 상류로 나아가 적을 막게 하고 전장군
장상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하류에서 적을 막게 했다. 두 사람이 각기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는데 뜻밖의 서북풍이 크게 일더니 오병의 정기가 모두 배
안으로 넘어졌다. 싸움을 앞두고 정기가 쓰러지는 걸 본 오병들은 모두 배를
타지 않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남은 건 장상이 거느
린 수십 명의 군사들뿐이었다. 한편, 진장 왕준은 돛대를 높이 올리고 삼산 앞
을 지나고 있었는데 뱃길을 잡는 군사가 왕준에게 다가와 말했다.
"풍랑이 몹시 심합니다. 배를 움직일 수 없으니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다 가시
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왕준이 크게 화를 내며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나는 지금 석두성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찌 한시인들 머물 수 있겠느냐?"
왕준이 더욱 크게 북을 울리며 나아가게 하자 그 기세를 보고 오의 장수 장상
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왕준이 항복한 장상에게 말했다.
"네가 참으로 항복했다면 선봉이 되어 공을 세우도록 하라."
그 말을 들은 장상은 자기의 배로 돌아가 석두성 아래에 이르러 소리를 질러
성문을 열게 했다. 장수가 성문을 열라고 하니 오병은 주저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장상은 열린 문으로 진병을 끌어들였다. 오주 손호는 진나라 군사
가 이미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 했다.
그러자 중서령 호충과 광록군 설영이 말렸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안락공 유선의 일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손호는 마침내 그 말에 좇았다.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진 다음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준에게 항복했다. 왕준은 그의 결박을 풀어 주고 관을 불사르며 왕
의 예로 손호를 대했다. 뒷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그때를 탄식했다.
왕준의 배가 익주로 내려가자
금릉의 왕기가 소리 없이 사라졌네.
천여 개의 쇠사슬 강 밑에 잠기고
항복의 한 조각 기 석두성에 나부꼈네.
인간 세상, 가슴아픈 일 몇 번이던가.
산만 변함 없이 찬 강물에 잠겨 있네.
이제, 사해가 한 집안 되는 날
옛 진터 갈대밭엔 가을 바람만 소슬하구나.
그리하여 동오의 4주 83군 3백 13현과 3만 2천병, 남녀노소 2백 3십만명, 그리
고 미곡 2백80만 섬, 배 5천여 척, 후궁 5천여명이 모두 대진에게 돌아갔다. 마
침내 대사가 정해지자 왕준은 방을 붙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창고를 봉해 버렸
다. 다음 날, 오나라 장수 도준의 군사도 오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
지도 않고 흩어졌다. 뒤이어 낭야왕 사마주와 왕융의 대병이 이르러 왕준이 큰
공을 세운 것을 보자 모두 기뻐했다. 다음 날, 두예가 이르러 잔치를 열고 3군을
위로하며 상을 내린 뒤,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자 백성들은비로소 안심했
다. 그때 오의 건평태수 오언만이 성을 지키며 진병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성문을 열어 항복해 버리고 말았다. 왕준
이 표를 올려 이 소식을 알리니 진의 신하들은 진주에게 경하해 마지않았다.
진주 사마염은 술잔을 높이 들고 너무나 기븐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모두가 양태부의 공이다. 그가 죽어 없는 것이 안타깝구나!"
그때 동오 손권의 종손으로 진의 표기장군이 되어 있던 손수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소리높여 울며 탄식했다.
"옛적 토역장군은 한낱 교위로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손호가 강남을
그대로 버리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넓고 푸른 하늘이여, 이제 어찌 된 노릇이
냐!"
한편, 왕준은 낙양으로 군사를 거두어 돌아오며 항복한 오주 손호를 데리고
와 진제를 뵙게 했다. 손호는 대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진제 사마염을 뵈었다.
진제가 손호에게 자리에 앉게 하고 말했다.
"짐은이 자리를 마련해 놓고 경이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이다."
"신도 남방에서 역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두고 오랫동안 폐하를 기다렸소이
다."
손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촉의 후주 유선과는 사뭇 다른
기개 있는 당당함이었다. 손호가 그렇게 대답하자 사마염은 껄걸 웃었다. 옆에
서 이를 지켜 보던 가충이 그런 손호의 도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따지듯 손호
에게 물었다.
"내가 들으니 공이 남쪽에 있을 때 사람의 눈알을 뽑고, 낯가죽을 벗겼다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악독한 형벌을 내렸소?"
손호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신하가 되어 임금을 해치려 하거나 가악하여 불충하는 자에게 내린 형벌이었
소."
손호가 그렇게 대답하자 가충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한 채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진제는 손호를 귀명후로 봉하고 아들 손봉에게는 중랑 벼슬을 내렸다.
또한 항복한 대신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오의 승상 장제는 의로운 죽음을 택
했다 하여 그 자손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이어 큰 공을 세운 왕준은 보국대장
군으로 높였고, 그 밖의 장수에게도 각각 공에 따라 벼슬을 높이고 상을 내렸다.
그렇게 되자 셋으로 나뉘었던 천하는 진주 사마염에게 돌아가 다시 하나로 아우
러졌다. 실로 천하 대세는 합한 지 오래 되면 반드시 나누어지고, 나뉜 지 오래
되면 다시 합해짐이 하늘의 이치인가. 그 이후 후한의 황제 유선은 진 태강 7
년에 죽었고, 위주 조환은 태강 원년에 죽었다. 또한 오주 손호는 태강 4년에 죽
으니 모두 수를 끝까지 누린 선종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천하를 놓고 다투며 나
누어지고 합해진 그때를 서사시로 남겼다.
고조가 칼 끌며 함양에 들어가니
이글거리는 붉은 해 동편 하늘 떴네.
광무제가 용처럼 일어나 대업 이으니
태양이 하늘 가운데 높이 솟았네.
슬프도다. 헌제가 천하를 이은 후에
붉은 해 함지로 떨어지네.
무모한 하진, 환관의 난에 방책 없어
양주의 동탁이 조당에 자리잡네.
왕윤이 계책 써 역적 없애니
이각, 곽사 다시 창칼을 잡았네
사방에서 도적 때들 개미처럼 모여들고
천하의 간웅들은 매처럼 날아드네.
손견과 손책이 강동에서 일어나고
원소, 원술은 하량에서 일어났네.
유언 부자는 파촉에 자리잡고
유표 군사는 형양에 머무네.
장수와 장로는 남정에 자리하고
마동과 한수는 서량을 지켰네.
도겸, 장수, 공손찬도
각기 웅재 떨쳐 한 곳씩 차지했네.
조조는 상부에서 권세 움켜쥐고
뛰어난 인제 모아 문무로 썼네.
그 위엄 천자를 떨게 하고 제후를 호령하며
범 같은 군사 거느려 중원을 진압했네.
누상촌 현덕은 본디 황실의 후손으로
관우, 장비와 의맺어 왕실 붙들려 했으나
동서로 다녀도 발붙일 땅 없고
장수 적고 군사 적어 나그네 몸이네.
남양 땅을 세 번 찾으니 그 정 깊어
와룡이 한 번 보고 삼분 천하 알았네.
ㅓ저 형주 거두고 서천 차지하니
패업과 임금의 길이 천부에 있었네.
슬프다. 임금된 지 3년 만에 죽으니
백제성에서 어린 자식 당부하는 슬픔이여.
공명 여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아가
목숨바쳐 천자 도우려 했으나
어이하리. 역수가 그곳에서 다했으니
한밤중에 별이 꼬리 물며 산언덕에 떨어졌네.
강유 홀로 제 기력 높음만 믿고
중원 치기 아홉 번도 헛되이 끝났네.
종회와 등애 군사 나눠 오니
한실의 강산 조씨 것이 되었네.
조비,조예,조방,조모에 이어 조한에 이르자
사마씨가 다시 천하를 차지하네.
수선대 앞에 구름과 안개 자욱하고
석두성 아래에는 물결도 일지 않는구나.
진류왕, 귀명후에 안락공도
그 왕후 공작이 그 뿌리에서 돋았네.
어지러운 세상 만사 끝을 모르는데
하늘 뜻 넓어 벗어날 수 없구나.
천하 솔밭처럼 나뉘었으나 꿈으로 돌아가고
후세 사람들 탄식하며 부질없이 소란 피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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