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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by Casey,Riley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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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유우제 장편소설

         ----- 차 례 -----

          1. 프롤로그
          2. 입양
          3. 유년기
          4. 사춘기
          5. 18세의 자유
          6. 열아홉살의 미혼모
          7. 어두운 터널을 지나
          8. 부활하는 새
          9. 기적처럼 다가온 일
         10. 23년 만의 해후
         11. 에필로그


  1.프롤로그

  귀국

  십 분 후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아나운스먼트를 듣고 수잔은 어렴풋한
잠에서 깨어났다.
  엘레노라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아이의 몸에
좌석 벨트를 매어주고 나서 수잔은 자신의
벨트에도 클립을 끼웠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저녁 노을 빛
속에서 검붉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스톡홀름 공항을 출발하여 만 이틀 만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의 하늘. 오랫동안
그리던 고국의 하늘은 보라빛 노을 아래
  수잔은 왠지 그 빛깔이 친숙히 여겨졌다.
어둠과 가장 가까운 빛깔, 슬픔을 담뿍
머금은 듯한 보라색. 만일 자신의 영혼을
빛깔로 우려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보라빛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녀
자신이 견뎌온 어둡고 암울했던 생애.
  그처럼.
  수잔이 한국을 떠난 것은 '66년 가을,
그녀의 나이 네 살 때였다. 겨우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었을 무렵, 네 살짜리
소녀는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했다.
  그녀가 간 곳은, 머나먼 나라 스웨덴의
항구도시 노르쉐핑이었다.
  그때부터 소녀 유숙은 그곳에서 험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하고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이에서 느껴야 했던 끊임없는 소외감,
친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갈등과 고통 속의
나날들.
  어느덧 23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녀는 스물일곱 살의 여인 수잔
브링크로 성장했고 그때의 자신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일곱 살짜리 딸을 가진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
버림받은 모국을 23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길이었다.
  엘레노라.
  엘레노라는 평범치 못했던 27년 생애가
그녀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열매이다.
쌔근거리며 들려오는 숨소리를 들으며
수잔은 그 아이의 갈색 머리에 자신의 뺨을
지나온 생애가 흐릿한 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갑자기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져 낯선
환경 속으로 격리되어 버린 이후 겪었던
모든 체험들, 그 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생활을 해왔을까?
  외모가 주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이런 의문점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해외로 입양되어 온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 것은 아홉
살나던 무렵이었다.
  브링크가의 양녀로 입적되며 지참한
신상소개서, 그것만이 자기의 뿌리를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거기엔 몇 가지 사실들과 함께 이름과
나이가 적힌 종이를 가슴에 들고 있는
통통하고 조그만 네 살짜리 여아의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성명: 신유숙
  생년월일: 1963년 12월 20일생
  친부: 사망
  친모: 이옥수

  신유숙은 1남 4녀 중 막내로서 친부모는
6.25때 부산에서 결혼했음. 인쇄소
직공이었던 친부가 1965년 한강에서 수영중
심장마비로 익사한 후 친모는 삯바느질로
연명하다 막내인 신유숙을 입양기관에
  상담원 소견: 친모는 친딸처럼 키우며
교육을 시켜줄 양부모를 원함.
  신유숙은 건강하고 예쁜 아이이며
영리해서 좋은 가정을 만나면 훌륭하게
성장할 것으로 판단됨.

  그녀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메모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잔은 궁금했다...... 이옥수란 이름을
가진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오빠와 세 명의 언니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또 어떤 사람들이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왜 함께 살지
못하고 자신을 이 먼 나라로 보내야만
관련이 있을까?
  수잔은 스웨덴으로 입양되기 전 3년
동안을 그들과 함께 살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친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의 얼굴이나 이름, 그리고 살았던
집, 그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가 입양되기 1년 전 한강에서
수영중 사망했다고 했다.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너무 어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입양의 충격이 어린 영혼에게
너무 가혹했던 탓일까?
  마치 파도가 덮치며 지나간 후의
모래사장처럼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느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말았다.
  다만 친모와 가족들로부터 자신이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만이 그녀의 의식을
무겁게 지배했다. 그녀에게 있어 지난
23년의 생애는 뿌리가 끊긴 나무처럼
자기가 비롯된 근원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삶이었따.
  그러나 이제 그녀는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 후면 오빠와 언니들,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해낼 수 없는 형제들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원망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 보고 싶던
사람들, 갈망하던 곳으로 마침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회의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왠지 수잔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불안감마저도 느껴졌다. 오랫동안 그리던
가족들을 곧 만나게 된다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기쁨보다 슬픔이, 행복감보다
불안감이 앞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수잔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완연히
어두워져 있었고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공항의 상공을 하강하는
중이었다.
  보라빛 구름이 기류에 흩어지며, 그
사이로 한국의 산하가 눈 아래 펼쳐졌다.
마치 어두운 바다 위에 떠 있는 어선들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
활주로의 안내등들이 찬란한
진주목걸이처럼 가지런히 시야 가득
다가오고 있었다.
  수잔은 점점 초조해지는 기분을 가누려는
듯, 한국의 표준시간에 맞추어 자신의 시계
바늘을 조절했다.
  동그란 자판 위에서 돌아가는 두 개의
바늘이, 23년의 시간과 12만 킬로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듯한 기분이 문득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2. 입양

  어느 아침

  이불을 들추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네 살박이 유숙은 잠에서 깨어났다.
  들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소녀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안아 일으키는
대로 가만히 몸을 맡겼다.
  "아직 졸리니, 아가?"
  어머니의 말에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눈을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일어나. 밥 먹고 어여 가야지.
오늘 꼬까옷 입고 어야 간다고 엄마가
말했지?"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엄마품에서
빠져나와 웃목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옷이
담긴 트렁크의 뚜껑을 열었다.
  아이는 트렁크에서 종이로 포장된
꾸러미를 꺼내와서는 어머니 앞에 가만히
내밀었다. 어머니가 그 애에게서 받아든
꾸러미의 끈을 풀고 포장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곳은 두 평이 채 못되는 남루한
방이었다. 벽지는 빛이 바래 있었고,
가구라고는 이불을 얹은 옷 트렁크 하나와,
키 작은 나무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벽에는
낡은 괘종시계 하나가 째깍거리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남자의 흑백사진이 담긴 액자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사주를 보라캤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액자 아래에 여섯 살과 여덟 살, 열한
살의 세 자매가 벌이라도 서고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아이들을 등진 자세로 포장지를
벗겨내고 있었다.
  포장지 속에서 레이스가 달린 흰 원피스
한 벌과 색동 고무신 한 켤레가 나왔다.
어머니가 포장을 푸는 동안 아이는 입고
있던 헌 스웨터와 치마를 벗어 한옆에
가지런히 개켜놓고, 팬티만 입은 알몸으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리 온."
  어머니가 부르자, 아이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얌전히 멈추어섰다.
  어머니는 아이의 몸에 원피스를
고 그 탁자 양 옆에는 역시
긴 편이엇지만 옷은 아이의 몸에 아주 잘
어울렸다. 등 뒤의 단추를 채워주자
기쁨때문에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모습으로 아이는 나풀나풀 방 안을
거닐었다.
  "엄마, 신...... 신."
  아이가 소리쳤다.
  그 말에 포장지 꾸러미를 치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신은 나중에. 방 안에서 신을 신으면 못
써."
  "못 써?...... 방에서 신으면, 못 써?"
  아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웃목에 나란히 앉아
있는 언니들 앞으로 걸어가 살그머니 돌며
새옷을 뽐냈다. 아이는 틀림없이 언니들이
이상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부러워 샘을
낼 터인데, 이때만큼은 언니들이 그저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리 와, 아가. 어서 맘마 먹어야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돌아서서
어머니에게로 시무룩히 다가왔다. 언니들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아, 새옷을 입은 기쁨도
조금은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맘마 먹자."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 위엔 기름이
흐르는 흰 쌀밥과, 갓 구운 조기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김도 보였다. 얼굴에 환한 생기가
떠오르며 아이는 밥상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자, 어서."
쌀밥을 숟가락에 떴다. 그 위에 김 한 장을
얹어 아이의 입에 가져다주고 나서 물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김에 싼 밥을 꼭꼭 씹으며 아이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구운
조기를 냉큼 가리켜 보였다. 어머니가
수저에 밥을 떠서, 그 위에 저분으로
집어낸 조기 살점을 얹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어느새 입 안에 든 것을 삼키고
다시 또 그것을 받아 먹었다.
  "체할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지."
  아이는 좋아서 생긋 웃어보였다.
  어머니가 수저로 물을 떠 입 안에
넣어주고, 아이가 삼키기를 기다렸다 다시
한 숟갈을 떠서, 또 입에 넣어주었다.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이가 물었다.
  어머니는 매일 커다란 간장병들을 머리에
이고서 새벽마다 장사를 나갔다. 언니들이
학교에 안 가는 일요일은 그렇지 않았지만
다른 날은 매일 아이를 업고 다녔다.
  어머니의 장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걸르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그러지 않은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어머니의 대답이 없자 아이는
말끄러미 올려다보면서 다시 물었다.
  "오늘 왜, 장사 안가는 거야?"
  "음...... 그냥."
  어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아이가 다시
물으려 하자, 마치 말을 막으려는 듯 밥을
떠 입 안에 넣어주었다. 아이는 그것을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밥을 삼킨 뒤 이내 재우쳐 물어댔다.
  "오늘 내 생일이야?"
  어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숙이 생일은 아직도 한참 더 있어야
돼."
  "그럼, 왜 그래?"
  "뭐가......?"
  "왜 장사두 안 가구, 나 새옷두 사주구,
고기 반찬두 해주구, 그러는 거야?"
  대접에 담긴 물을 숟가락으로 떠올리던
어머니의 손길이 문득 멈추었다. 숟가락
위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금세 상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엄마......."
  어머니는 가만히 숟가락을 놓았다.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그래......."
  아이가 놀라며 물었다.
  그 기색에 웃목에 앉아 있던 언니들이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영문을
몰라 언니들과 어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덩달아 훌쩍거리며
어머니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매서운 음성으로 언니들을 꾸짖었다.
  "왜들 징징거리고 야단이야? 모두 밖에
나가! 어서!"
  어머니의 호통에 언니들이 시무룩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훌쩍거리며 차례차례
  언니들이 나가고 난 후 어머니는 아이의
몸을 감쌌다. 복받치는 슬픔을 참을 수
없었던지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들먹거렸다.
  "엄마...... 나, 안 갈테야."
  바짝 몸을 파고들며 아이는 울음섞인
어조로 떠듬떠듬 말했다.
  "그럼 못 써. 어제 엄마하고 약속했잖아.
우리 유숙이...... 공부도 많이 하고
이담에 훌륭한 사람 되려면 ...... 가야
해."
  "왜 언니들은 안 가는데, 난 혼자만 가야
해?"
  "그건 유숙이가 언니들보다 예쁘고......
똑똑하기 때문이야."
  아이의 따뜻한 몸을 어루만지며 어머니가
달랬다.
  "우리 유숙인, 엄마 말이면 뭐든디 잘
듣지?"
  아이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어머니의
젖가슴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훌쩍이면서 다시 물었다.
  "갔다가 그럼 언제 오는데......."
  어머니는 대꾸가 없었다.
  어머니의 대꾸가 없자, 아이는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나, 금방 올래. 세 밤만 자구 나서
엄마한테 올테야."
  "그래....... 그러렴."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새끼손가락에 자기의
손가락을 걸었다. 어머니는 소매 끝으로 뺨
위에 묻은 눈물자국을 닦고 나서 아이를
내려놓았다. 밥을 더 먹이려 했지만 아이는
입을 꼭 다문 채 도리질쳤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시름에 겨운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정적을 흐트리며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시간을 보았다. 시간을 보며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옷걸이
앞으로 다가가 맥없는 손길로 스웨터를
꺼내어 몸에 걸쳤다.

  집을 나서며

  초가을 오전 나절의 날씨치고는 몹시
따스했다.
청명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마당가
빨랫줄엔 깨끗한 이불 호청이 널려 있었고,
담장 옆에 서 있는 치자나무의 앙상한
가지가,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이불 호청 앞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던
언니들이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공기돌을 감추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니들은 막내의 발에 색동 고무신을
신기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았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김장 고추를 다듬고
있던 호리호리한 이웃방 여인네가 손을
털며 일어나서는 쪼르르 다가왔다.
  "데려가나 보지예?"
짐짓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웃짜믄 좋노, 유숙이 이래 차려 입으니
꼭 공주님 같네!"
  그녀의 몸에서는 맵싸한 고추 냄새가
풍겨왔다. 마침, 빨래 광주리를 들고
마당을 들어서던 주인집 여자도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광주리를 내려놓고 머리수건으로 코를
훔쳐내며 그녀가 참견했다.
  "아이고, 이래 채레 입으니 도통 뉘긴지
몰라 보겠구나!"
  "인자부텀 우리 유숙인 호강하매
살기라예."
  "그럼, 그럼! 이자 비행기도 탈게구, 또
외국 구경도 원없이 실컷 하게 생겼지,
뭐가!"
좋겠노?"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려주며 이웃
아주머니들의 말참견이 계속되는 동안
아이는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기뻐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서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을 번갈아가며 올려다보았다.
  "가자."
  잠시 후 어머니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이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떼자
둘러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옆으로 비켜
주었다. 손을 잡고 마당을 지나면서
어머니가 언니들에게 물었다.
  "수영이 오빤 어디 있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맏딸 영숙이 손가락으로 담장 너머를
대꾸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거려 금방이라도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금세 다녀올 거니까 동생들 점심
차려주고 공부해."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어머니가
당부했다. 걸음을 옮기자 모녀의 뒤를
언니들과 이웃 아주머니들이 줄줄이
뒤따라왔다.
  수영은 검은색 학생 동복을 입고, 집밖
응달진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못보고 말았다.
  소년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빡빡 깎은 머리에
학생모를 깊숙히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어서 가자."
  막내의 손을 쥐고 몸뻬 차림으로 재게
걸음을 내딛는 어머니의 뒤를, 소년이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느릿느릿 뒤따라
걸었다. 등 뒤에서는 작별인사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가라, 유숙아!"
  "잘 가래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뒤돌아보며, 대문 앞에서 훌쩍이고 있는
언니들과 아주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비스듬히 경사진 길이었다. 아이의
걸음이 위태로웠다. 뒤따라 가던 소년이 그
모습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모여서 있던 언니들과 아줌마들의 모습도
차츰 작아져 보였다. 아이는 가끔씩
뒤돌아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비탈진 길을 내려와 길목 모퉁이를
돌아섰을 땐, 그 모습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아이는 어머니와 오빠에게 한 손씩을
잡힌 채 촐랑촐랑 따라 걸었다.
  일본식 목조 가옥들이 모여 있는 모자원
근방의 동네를 지나서 얼마쯤 걷자, 뚝길이
나왔다. 그곳엔 버드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뚝길 아래로는 반짝이는
햇살을 받으며 개천물이 흐르고 있었다.
개천 옆 빨래터에서 여인네들이 둘러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 되겠다. 업어야겠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걱정스러웠던가
보다. 홍파국민학교 앞을 지날 무렵,
어머니가 아이를 세워서는 자신의 등에
업었다.
  국민학교의 기다란 회색빛 담장 옆을
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앞서 가고, 그 뒤를
몇 걸음 떨어져 소년이 걸었다.
  어디선가 정오 예배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바람결에 섞이며 아련히 들려오고
있었다.

  장난감 나팔

  일행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쯤
늦어서야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입구를 들어서는 일행을 알아보고
부리나케 나왔다.
  "아니,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버스가 더뎌서요."
  "에구, 그러게 좀 일찌감치 나오지
않구서! 난 또 행여 안 올까봐 걱정했지
뭐예요."
  아동복지회의 최여사는 키가 크고 뚱뚱한
40대 여인이었다. 남자처럼 억세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몹시 조바심을 치고 있었던
듯 표정 속에서는 짜증스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엿보였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덥썩 움켜쥐며 말했다.
  "저리루 갑시다."
  최여사는 대합실 구석진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마흔 살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갓난아이를 포대기에 싸안고 그곳 벤취에
  그 양쪽으로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와
말꼬리처럼 머리를 꼭대기에 묶은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내아이는 얼이 빠진 듯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고,
계집아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구 얘야, 이제 그만 좀 그쳐라."
  최여사가 계집아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쿡
찌르고 나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여인을 소개했다.
  "우리 김여사께서 얘들을 스웨덴
양부모한테 데려다줄 거예요."
  갓난아이를 안은 여인이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방금 도착한 계집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요. 예쁘게 생겼지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최여사가
말했다.
  "얘, 네 이름이 유숙이지?"
  한복 차림의 여인이 묻자 아이는 놀란
눈으로 말끄러미 여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한 번 고개를 끄떡거렸다.
  "네 어머니가 널 아줌마한테 맡기셨어.
그러니 이제 유숙인 아줌마랑 비행기 타고
멀리 어여 가야 돼....... 좋지?"
  여인이 다시 묻자, 아이는 얼굴이
상기되어 약간 입술을 움직였으나 대답은
없었다.
  "참, 점심은 멕였나요?"
  "많이 먹이진 못했어요. 절반쯤 먹고는
안 먹으려 하더군요."
말했다.
  "됐어요. 비행기에서도 간식을 줄
거예요. 그리구 김여사는 애들을
데려다주구 사흘 후면 돌아올 거예요. 그럼
그때 지가 자세한 소식을 알아다가 집으루
연락해 드릴게요. 아무튼지 조금두 걱정할
게 없어요. 이 앤 거기 가면 잘 먹구 잘
입구 대학까지 일사천리루다 공부시킬 수
있다구요. 이제 남아 있는 애들이나 잘
간수해서 키우시면 돼요."
  최여사의 위로에, 이옥수 씨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은 3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는 아직도 50분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최여사가 서류 문제로
김여인과 상의하고 있는 동안 이옥수 씨는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하자
아이는 눈치를 보며 한참이나 망설이던
끝에 방울이 달린 조그만 장난감 나팔
하나를 집어들었다.
  "먹을 것을 사지 그러니?"
  어머니의 말에 아이는 나팔을 제자리에
가만히 내려놓고 대신 사탕 한  지를
집어들었다. 아이가 가난 탓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여, 어머니는 콧날이 시큰해
왔따. 그녀는 아이가 놓아둔 장난감을 다시
집어 손에 쥐어준 뒤 값을 치렀다.
  시간이 되어 탑승해야 할 비행기편
번호가 방송되며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게이트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스웨덴까지 데리고 갈 김여인도
한 팔로 갓난아이를 안고, 다른 손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일본 하네다 공항까지 가면 거기
애들을 태우고 갈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어요. 그걸 타고 출발하면 내일 밤엔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울먹이던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일으켜
세워 뒤따라 보내며, 최여사가 설명했다.
  "유숙이도 이제 가야지? 자, 어서
엄마한테 인사하고 아줌마 뒤따라 가라."
  그러나 정작 작별의 순간이 오자 아이는
어머니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온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눈망울 속에 짙은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그럼 못 써! 어서 아줌마 따라 비행기
타구서 가야지. 저 봐라, 저기 함께 갈
동무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싫어. 나 안 갈테야."
  아이는 고집을 부렸다. 이옥수 씨가
어르고 달랬지만 막무가내였다. 갑자기
쏟아져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니 목이
메었다. 무슨 말로 아이를 달래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 들어 차라리 아이의
소원대로 입양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엇다.
  갈등 끝에, 그녀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제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어서, 아줌마 따라 가....... 어서."
  "싫어, 안 갈테야. 엄마랑 도루 집에
갈래."
  아이는 보채며 어머니의 품 안으로
느껴졌지만 이옥수 씨는 매달리는 아이를
매정하게 뿌리쳐 버렸다. 그 바람에 아이는
손에 든 장난감과 사탕봉지를 떨어뜨리고
훌쩍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에구, 고집두 황소 고집이네."
  난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최여사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들고 아이의
등을 다독이며 서둘러 돌려세웠다.
  "어서 가자. 말을 안 들으면 엄마가 막
화내고 네 종아릴 피가 나도록 때리리
거야."
  자기에게 보인 어머니의 매정한 태도가
서러워서였을까. 아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울먹이고 있었지만,
최여사가 이끄는 대로 출발 게이트를 향해
머뭇머뭇 걸음을 옮겨갔다.
김여인이 사내아이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넌, 저기 누나한테 가서 손 잡고 와라."
  그 말에 사내아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레둘레 보며 걸어갔다. 그리고
멋적은 듯 계집아이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나란히 서 있었다. 김여인이 다가온 유숙의
손을 쥐며 인사했다.
  "그럼 다녀오겠어요."
  "예, 잘 좀 부탁해요."
  최여사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김여인은
팔에 안긴 갓난아이를 추스리며 걸음을
내딛었고, 손을 잡힌 유숙도 몸을 돌리며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어서 따라 가!"
  최여사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소리쳤다.
계집아이가 놀라며 손을 꼭 맞잡은 채
촐랑촐랑 뛰어갔다.
  출발 게이트를 불과 몇 걸음 남겨두지
않은 곳을 지날 무렵, 김여인이 유숙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댔다. 뺨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가 울음기 배인 음성으로
말했다.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뭐라고 답변할 틈도 없이 아이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그 작은 몸은 이내
뒤따르는 승객들에 휩쓸리며 출발 게이트
  막내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이옥수
씨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텅빈 게이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엔 슬픔의 눈물이 그득했다. 1년 전,
잠깐 목물을 하고 오겠다고 나갔던 남편이
익사체로 떠오른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이처럼 가슴이 찢기는 슬픔을
느끼진 못했었다.
  "전, 바삐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안 가실 거예요?"
  최여사가 서두르는 기색으로 물어보자,
이옥수 씨는 눈물을 감추며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저희도 가야지요....... 바쁘시면 상관
말고, 어서 먼저 가보세요."
  "너무 심려 마시라구요. 당장은
있을 거예요. 아무튼지 소식이 오는 대로
곧 연락을 드릴게요....... 그럼."
  짧은 작별인사를 던지고 나서 최여사는
발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다시 또 텅 빈 게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썰렁한
정적만이 감돌 뿐....... 축축히 젖은
시야엔 차가운 불빛만이 처연했다.
  잠시 후, 이옥수 씨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 걷는 어머니의 뒤를 줄곧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장남 수영이 숨죽여 훌쩍이기 시작하며
느릿느릿 뒤따랐다.
  공항 청사를 나왔을 때 밖에는 화사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가로수 이파리들이
평온한 가을날 오후의 햇빛 속에서
어른거리는 보도 위를 나른한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모자는 그 길을, 얼마쯤
사이를 두고 천천히 걸어갔다.
  버스 정거장은 공항 청사가 바라보이는
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거장에 도착한 후에도, 모자는
금방 버스를 타지는 않았다. 차도변의
가로수 옆에 나란히 서서, 공항 청사 위의
하늘만을 한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고,
그 사이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여러 대째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이윽고 폭음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비행기의 동체가 공항 건물 위로 서서히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비행기는 은빛 날개를 번쩍이며
떠오르더니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저편으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옥수 씨는 폭음 소리가 사라지고
비행기가 희미한 은빛 점으로 작아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침내 그 희미한 점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 자리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만이 투명한 슬픔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나긴 행로

  어머니와 헤어진 뒤에도 유숙은 훌쩍이며
쉽사리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손을
잡힌 채 이끌려 가면서도 아이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트랩을 오르기 전 여승무원이
상냥한 말로 달랬을 땐 울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예쁘게 생긴 여승무원은 방울을 딸랑딸랑
흔들어 보이며 유숙에게 나팔을 불어보라고
했다. 유숙은 눈물이 범벅진 얼굴로 장난감
나팔을 불면서 여승무원의 팔에 안긴 채
비행기 트랩을 올라갔다.
  "여기선 얌전히 굴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아저씨가 잡아간다."
  김여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2등석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아이들은 기가 죽은 듯 더
이상 울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승객들은 장사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꺼번에 네 명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슬금슬금 훔쳐보고
있었다.
  기체가 이륙하고 나서 얼마쯤 지났을 때,
옆자리에 앉은 신사가 실례가 되지 않도록
말을 조심하며 물어왔다.
  "어디까지 가시는 건가요?"
  신사는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여인은 혹시 이 신사가 자신을 이
아이들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저흰 스웨덴까지 가는 길이에요."
  초면의 신사는 무역상담을 위해 일본에
가는 길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궁금증을 느꼈던지 이것저것 물어대기
시작했다.
하는 일에 대해 신사에게 설명해 주며
지금은 아이들을 양부모에게 인계해 주기
위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스웨덴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못 동정적인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김포에서 동경까지 가는 데 두 시간
가량이 소요된 후, 비행기가 하네다 공항의
활주로에 기착하여 승객들이 트랩을
내려왔울 무렵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왔던 신사는
라운지까지 따라나와, 매점에서 과자를
한아름 사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가버렸다.
  다음에 타야 할 프랑스행 비행기편은 두
사무소를 오가며 통관 수속을 밟은 뒤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아이들을
데리고 에어 프랑스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여객기는 이튿날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중간 기착지인 오를리 공항에 착륙했다.
열네 시간 동안을 날아왔지만 동경과
파리의 시차 때문에 날짜는 같았고,
아이들은 지루한 여행에 피곤했던지 그
사이 대부분의 시간을 잠에 골아떨어져
있었다. 김여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비행기를 갈아 타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6시.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경과 파리를
경유하는 멀고도 지루한 여행 끝에 일행을
태운 보잉 707기는 스웨덴 상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보이며 10만여
개의 호수가 산재해 있는 스웨덴 땅이
아스라히 내려다보였다.
  선명한 푸른색 천조각을 찢어 놓은 듯한
호수들, 그 오른편으로 북구의 태양이
찬란한 빛살을 흩뿌리는 아래로 발틱해가
동유럽 대륙을 사이에 두고 투명한
코발트빛으로 망망히 펼쳐져 있었다.
  얼마 후,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여 멀리로 스톡홀름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멀리 공항 관제탑과 함께
길게 뻗어 있는 활주로가 점점 시야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톡홀름 공항

양부모들이 몇 시간 전부터 비행기가
도착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합실 한편에서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스웨덴의 해외 양자회에서 나온 관계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아이들은 어느 나라에서 오고 있는
겁니까?"
  텔레비전 기자의 질문에 입양 관계
책임을 맡고 있는 중년 여인이 대답했다.
  "한국에서 오고 있어요. 여자아이 셋에
남자아이 하나, 모두 넷이에요. 나이는 한
살, 세 살, 네 살, 여섯 살이고요."
  "어째서 한국의 아동들을 데려오게
됐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왜냐하면 국내의 입양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반면에 동양엔
고아들이 많이 있어요. 아이를 원하는
가정에 그처럼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입양해 주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불행에 처해 있는
아이들에게 가정의 따뜻함과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으니까요."
  "이번에 데려오는 아이들은 모두 한국
어린이들 뿐입니까?"
  "그래요, 모두 한국 어린이들이에요."
  "아시겠지만, 한국은 얼마 전 전쟁을
치룬 나라예요.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어요. 어느 경우에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인데,
지금도 한국에선 연간 5천 내지 6천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어요.
  이렇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되면 경찰이 고아원에 데려다 줍니다.
그런데 여건이 좋은 고아원은 한국에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따라서 올바른 교육의 기회를 못 얻고
따뜻한 가정의 행복도 모르는 환경에서
자라게 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져들 위험도 훨씬 크지요. 사내아이는
자라서 불량배가 되고 여자아이의 경우엔
매춘부로 전락하는 수가 많아요."
  그녀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텔레비전
기자는 우유병과 기저귀 가방이 담긴
유모차 뒤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서 있는 20대의 젊은 부부에게로
다가갔다.
  "어째서 동양의 아이를 입양하게 됐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쁨으로 상기된 표정으로 여자가
대답했다.
  "우린 정말 몹시 아이를 원했지만, 낳을
수가 없었어요. 동양의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 것은 인종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에요. 저는 오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너무
기뻐요. 이런 은혜를 베풀어준 한국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겠어요."
  젊은 부인은 말을 마친 뒤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아내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텔레비전 기자는 그 옆에 서 있는 20대
후반의 부인에게로 마이크를 옮겼다.
  "이름이 뭡니까?"
  "제 이름은 마그리뜨 브링크예요."
  "미세스 브링크.왜 아이를 입양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에겐 세 살난 사내아이가 있지만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를 하나 더 기르고
싶어서예요. 되도록 깜찍하고, 예쁜 동양의
여자아이로 말이에요."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는가요?"
  "그럼요, 언젠가 길에서 조그만 한국의
여자아이를 만났는데 그때 그 아이의
귀엽고 깜찍한 인상이 제 머리에 단단히
박혔거든요."
  "부인께선 아이를 입양하기 위해 어떤
과정들을 거쳐야 했는가요."
  기자의 질문에 브링크 부인이 대답했다.
  "처음에 아동원호협회를 찾아가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상담을 했어요. 그리고 세
  "가정조사란 어떤 것이지요?"
  "일종의 여러 가지 테스트예요.
아동원호협회에서 나온 소시얼워커가
집으로 찾아와 면접을 하는 거죠. 우리의
가정 환경이 새로운 아이를 받아들여
양육하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보는 까다로운
과정이에요."
  "부인처럼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경제상태라든가 직업......,
그리고 교제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성생활에 관한 질문까지 하고 부모와
형제와의 관계가 원만한지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을 통해 적격 여부를 판단한
다음,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평점을 받으면
그때 비로소 입양이 허락되는 거예요.
하지만 입양 허가가 난 뒤에도 적당한
아이가 나설 때까지는 상당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만 했었어요."
  "부인의 경우엔 얼마를 기다렸나요?"
  "거의 일년을 기다려서야 우린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거예요."
  "아이를 입양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드는가요? 모두 해서 얼마의 비용이
들었나요?"
  "비용은 대개 20만 크라운에서 60만
크라운까지인데 입양하는 가정의 수입에
따라서 차이가 있어요. 물론 이건 아이의
비행기 비용과 비자를 얻는 데 필요한
법정비용이 포함된 가격이지요."
  "끝으로 한마디만 더 묻겠스빈다.
부인께선 새로 맞게 될 자녀를 어떤 식으로
키우실 작정이십니까?"
  "물론 아주 멋진 숙녀로 키워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발레와 그림을
배우도록 할 작정이에요."
  "그럼 부인의 소망대로 따님이 멋지고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마워요. 우린 틀림없이 아주 다정한
모녀 사이가 될 거예요."

  푸른 눈의 부모

  인터뷰를 마쳤을 때 스피커에서 비행기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양부모들은 기쁨에 들뜬 모습으로 게이트를
  잠시 후 승객들이 게이트를 나서는
모습이 보이며 그 틈으로 갓난아이를 품은
한복 차림의 자그마한 여인이 나타났다. 세
명의 조그마한 동양 아이들이 서로 손을
마주쥔 채 여인의 뒤를 마치 어미닭을
뒤쫓는 세 마리의 병아리처럼 겁먹은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양부모들이 사진을 통해 익혀둔 자기
아이의 모습을 알아보고 몸을 굽혀
껴안거나 두 팔로 안아올리며 키스를 했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움직이며 그 모습을
필름에 담아가고 있었다.
  젊은 부인은 한국 여인에게서 갓난아이를
받아 안으며 금방 감격에 겨운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 예쁜 아기예요!...... 이젠 저도
  40대 부부의 따뜻한 마중을 받은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는 번쩍 치켜안아 올려지자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는 60대
노부부의 애정어린 포옹을 받으며
당혹스러운 듯 굳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이들은 그때까지도 그들이 누구이고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듯했다.
운명이 자신에게 점지해 준 새로운
부모였지만, 아이의 눈에 그들은 다만
낯설고 무섭게만 보이는 푸른 눈의
어른들이었을 따름이었다.
  유숙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브링크 씨
부부는 두 사람 모두 금발에 푸른
느껴지는 신사였으며, 부인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살갗이 매우 깨끗한 미인이었다.
  "정말 귀여운 아이로구나."
  부인이 유숙의 앞에 앉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따뜨샅게; 보옹하며 아이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유숙은 흰색
원피스에 코끝이 올라온 색동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손에서 값싼 플라스틱 나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도톰한
입술, 우수가 깃든 검은 눈망울엔 아직도
친어머니의 품을 떠나오면서 받은 충격과
슬픔이 앙금처럼 괴어 있었다.
  "이분이 이제 네 엄마야. 유숙인 이제 이
아줌마를 마마라고 불러야 해."
  김여인이 유숙에게 말하며 한번 그렇게
불러보라고 시켰다.
  하지만 유숙은 낯선 여인을 잠자코
올려다볼 뿐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경황이 없을 거예요.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바뀌었으니까요."
  브링크 부인이 이해심 있는 미소를
보이며 아이를 도닥거려 주었다.
  "이분은 한국 입양기관에서 일하시는
김부인이에요."
  스웨덴의 입양기관 책임자인 미스
베네딕슨이 작은 키에 한복을 곱게 입고
있는 한국 여인을 소개했다. 한국 여인이
영어로 인사를 하며 핸드백에서 두툼한
서류들을 꺼냈다.
  아이의 신상소개서와 건강진단서, 그리고
인수증이 첨부된 몇 장의  류들이었다.
  신상소개서에는 간단한 아이의 가족
수면 습관, 그리고 성격과 능력에 대한
소견이 기재되어 있었다.
  미스 베네딕슨이 김부인에게서 그
서류들과 아이들의 여권을 받아들고
말했다.
  "이 서류를 받으시고 인수증에 사인을
해주시면 그때부터 아이는 정식으로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미스 베네딕슨이 서류와 인수증을 나누어
주었다.
  남자들이 서류들을 받고 인수증에 사인을
한 뒤, 그것을 다시 미스 베네딕슨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인수증들을 모아서
팔랑팔랑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자, 이제 복잡한 절차는 모두 끝난
거로군요! 여러분은 오랫동안 기다린
가지게 되셨군요. 우린 모두 마침내 이
날이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보내준 이 귀여운 천사들이
여러분 가정에 틀림없이 기쁨과 즐거움이
될 거예요. 여러분! 우리도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래요. 그럼 여러분 가정에 행복이
깃들기를 빌겠어요!"
  그녀는 보람있는 임무를 마치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양부모들과 개별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김여인도 손수건을 꺼내
글썽해진 눈물을 닦아내며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막상 김여인이 떠나려 하자 일곱
살짜리 계집애가 양부모의 손을 뿌리치고
쪼르르 달려와서 김여인의 치마를
때문인지 계집아이는 치마를 붙잡고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종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억제되고 있던 슬픔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요란스런 울음이었다.
  그러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가 덩달아 울어댔다.
  봇불이 터지듯 한꺼번에 울어대는 두
아이들 때문에 양부모들은 당황하며
달래느라 경황이 없었다. 유숙은 입을 꼬옥
다문 채 오도카니 서 있었지만, 그 애의
눈빛 속에도 진한 슬픔의 그늘이 드리워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공항 입구까지 함께 나온 입양 가족들은
서둘러 작별인사를 하고 서로의 자동차를
향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타고 온 루른색 볼보 승용차로 다가갔다.
  "수잔은 아주 침착한 아이예요. 다른
애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는데 이 애는
슬픔을 꾹 참고 내색을 않는 것을 보아요."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브링크 부인이
만족스런 얼굴로 남편에게 말했다.

  맛있는 쇠고기스프

  오후 일곱 시에 스톡홀름을 출발한
브링크씨의 푸른색 볼보 승용차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 두 시간
뒤엔 스웨덴에서 다섯번째로 규모가 큰
산업도시인 노르쉐핑에 도착했다.
  유숙은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차가
달리는 동안 줄곧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풍경에 시선을 뺏긴 채 긴장한 눈빛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브링크씨의 집은 노르쉐핑의 중심가에서
일 킬로 가량 떨어진 전원주택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근방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매우 한적했다.
  반듯하게 구획된 주택단지 도로변에는
밝고 큰 수은등들이 멀리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창문의 불빛들이 나뭇잎
사이에서 아련히 흘러나왔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지나 있었다.
  브링크씨 부부는 커다란 떡갈나무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널따란 정원을 지나
아이를 2층 주택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풍족한 살림의 여유가 고풍스런 가구며
반짝이는 집기들 사이에서 엿보였다.
벽에는 부부의 고상한 취미를 반영하듯
금박 액자의 그림들이 걸려 있고 거실엔
정성껏 가꾸어진 화초들이 놓여 있었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대한 몸집에 수염을 기른
양할아버지와 장난스럽게 생긴 네 살짜리
금발머리의 사내아이였다. 양할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사내아이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동양에서 온
작은 계집아이를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애가 수잔이에요, 아버님."
  하고 브링크 부인이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양할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굽혀 앞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며
포옹했다.
  유숙은 몸을 움추리며 달아날 구석을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린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어른들이 흔히
하는 태도였지만 아이는 체구가 우람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양할아버지가
두렵기만 했다.
  "아주 예쁜 아이로구나. 네가 우리 집에
온 것을 몹시 기쁘게 생각한다."
  "호깐, 너도 여동생에게 인사해야지?"
  브링크 부인의 말에 호깐이라는
사내아이가 냉큼 의자에서 뛰어내려와
유숙의 앞에 섰다.
  두 아이는 잠자코 서로를 관찰했다.
유숙은 이 아이 역시 자기 부모들처럼 눈과
그 새파란 눈동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호깐도 낯선 여자아이의 새까만 눈동자를
비슷한 관점에서 이해하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되었던지 서로가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마주선 채로 가만히 상대를
탐색하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호깐, 인사를 해야지 뭘하고 있어?"
  브링크 부인의 말에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호깐이 얼굴을 내밀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불시의 기습에 놀란 유숙은 금방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손등으로 살그머니 입술을
닦아냈다.
물을 받아놨다."
  양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럴까요? 자, 그럼 수잔. 귀여운
아가씨, 먼길을 오느라고 피곤할 테니
목욕부터 하실까요?"
  브링크 부인이 유숙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호깐이 촐랑거리며 뒤따라왔다.
욕조엔 따뜻한 김을 올리며 물이 가득차
있었다. 부인은 유숙의 손에서 플라스틱
나팔을 받아 세면기 위에 놓은 뒤 흰
원피스를 벗겨냈다.
  다시 속옷마저 벗기려 하자 아이가 깜짝
놀라며 몸을 사리었다.
  "숙녀께서 부끄러워하시니 넌 나가
있어."
  부인이 호깐을 밖으로 쫓아낸 뒤 문을
모습이었다. 가까스로 달래어 속옷마저
벗겨냈을 땐 조그만 알몸을 두 손으로
감추며 부끄러워했다.
  '몹시 수줍어하는군.'
  부인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를 안아
따뜻한 물 속에 담그었다. 그러자 아이는
기겁을 하며 발버둥질 치더니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달아나려는 것을 붙잡아 다시 물 속에
담그자 종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힘겹게 목욕을 마쳤을 때 아이의 살갗은
청결해지고, 새까만 머리에서는 윤이 났다.
물기로 반들거리는 몸을 커다란 타올로
닦아준 뒤엔 준비해 둔 잠옷을 입혔다.
훌쩍이고 있었지만 아이는 정말로 예쁘고
  "보세요. 정말 예쁜 아이지요?"
  부인의 말에 브링크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오너라, 이층으로 올라가 보자."
  그는 아내가 음식 준비를 하는 동안
구경을 시켜줄 생각으로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층에는 모두 네 개의 방이 있었다.
발코니가 있는 동편의 방을 부부가
사용하고, 맞은편에 있는 두 개의 방이
아이들 방이었다.
  브링크씨는 유숙을 조그마한 침실로
데리고 갔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창문엔 연두빛 커튼이 쳐져 있고
그 아래로 꽃무늬가 수놓인 침대가 놓여
옷장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털이
복슬거리는 강아지 인형이 머리를 삐쯤히
내밀고 있는 장난감 상자도 있었다.
  브링크씨는 유숙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아 잠시동안 고요한
시선으로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따스한 애정의 감정이 배어
있었다. 아이도 그것을 느꼈든지
이때만큼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서
말끄러미 양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두
볼을 크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아래층에서 식사 준비가 됐다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브링크씨가 아이를 안고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유숙에겐 의자가 너무 낮았다. 쿠션
하나를 더 깔아주어야 했다. 브링크 부인이
국자로 뜬 쇠고기 스프를 접시에 담아주자
유숙은 조심스럽게 한 숟갈씩 떠올려
국물을 입가로 가져갔다. 가족들이 그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았고 아이는 솜씨가
서툴러 국물을 코끝에 묻히면서도 시장했던
탓인지 자기 몫의 음식을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를 닦아야지."
  식사가 끝나고 나서 부인이 유숙을 다시
욕실로 데리고 갔다.
  "이빨을 잘 닦아야 건강한 치아를 가질
수 있단다."
  부인이 치약을 묻힌 칫솔을 유숙의 손에
모르는 듯했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부인이 이닦는 시늉을 해보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이 닦는 법을 모르는 것 같구나. 호깐,
네가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주어라."
  호깐이 제 칫솔을 꺼내더니 익숙한
솜씨로 치약을 묻혔다. 그리고 거품을
내면서 열심히 칫솔질 시범을 보였다.
그제야 의도를 알아채고 유숙도 머뭇머뭇
그 시늉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맛이 이상했던지 아이는
금방 얼굴을 지푸리며 입 안에 든 것을
뱉아냈다. 그 모습을 보고 호깐이 따라서
시늉을 내자, 부인은 호깐을 나무랬다.
  긴 여행 끝에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너무도 커다란 변화들을 한꺼번에 겪은
둘러앉아 가족들이 얘기를 나누던 중
아이는 까무룩히 졸고 있었다. 브링크씨가
안고 계단으로 오를 무렵엔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 뉘였을 땐 가늘게 코까지
골아댔다. 브링크씨는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잠 속에 빠져 있는 아이의 뺨에
키스를 하고 방을 나왔다.

  엄마! 엄마!

  ......유숙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창백한 달빛이 비치는 산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에 커다란 간장
보따리를 이고 있었고, 어깨 너머로는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붕긋이 솟아 있는
무덤들이 보였다.
달빛이 가라앉더니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유숙을 불쑥 등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겨두고는
간장병이 담긴 커다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서 흐릿한 달빛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유숙은 어머니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은 고요하고 스산했다.
달빛이 사라지고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차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는 다시 어머니가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아이는 겁에 질린 음성으로 되풀이해서

  자기의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어둠이 장막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의 집에서처럼
어머니의 품 안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까칠하게 뺨에 와닿는 어머니의 모시
적삼 웃저고리 앞섶엔 조금씩 흘러내린
간장방울이 묻어 있어 언제나 매콤한
냄새가 맡아졌다. 그런데 왠지 그 냄새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무덤을 만지려던 손이
허전했다. 유숙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나 방 안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던 언니들과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이는 자신이 낯선 방 안에
  갑자기 조그만 가슴이 공포로 졸아드는
것만 같았다. 모두들 자기만 버려두고
어디로 달아나 버린 거라는 생각에 슬픔이
가슴 가득 치밀어 올랐다.
  유숙은 눈물을 삼키며 어머니를 찾았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그 말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이 깊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좀더 앙칼진 음성으로
불러댔다.
  바람을 맞은 유리창이 간간히
덜그덕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며 방
안엔 썰렁한 냉기가 느껴졌다. 커튼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흐느적거렸다. 유숙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되풀이해서 어머니를 불러대고 있었다.

들었다. 잠에서 깨어 스탠드의 불을 켜고
보니 새벽 세 시였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를 신고
방문을 나서자 유숙이 어두운 복도 가운데
오도카니 선 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브링크씨가 다가가 안아올리자 아이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몸을 바짝 밀착해
왔다. 심한 공포 속에서 조그만 심장이
가쁘게 고동치고 있었다.
  "울지 마라! ......무서워할 것 없다."
  그는 아이를 달래며 맞은편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들여보내고 안정이 될 때까지
쓰다듬어 주며 침착한 음성으로 얘기를
들려주었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공포심을 잊게 해줄 거라는 생각
  누가 자기 곁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차츰 울음이 누그러들더니 아이는
거짓말처럼 사르르 잠이 들었다.
  브링크씨는 아이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왔다.
  그런데 침대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막 잠이 들려는데 다시 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예요?"
  잠에서 깨며 부인이 물었다.
  "수잔이 울고 있소."
  남편이 이불을 들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왜요? 뭣 때문에 우는 거예요?"
  "아마 나쁜 꿈을 꾼 모양이오."
가보았다. 문을 열자 유숙이 침대에 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부인이 다가가 아이를
달래었다.
  그래도 울음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아무래도 쉽사리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유숙은 울면서 끊임없이 엄마를 부르고
있었지만 부부는 아이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뭐라고 그러는 걸까요? 누굴 부르는 것
같은데."
  "모르겠소. 아마, 무섭다는 소리인 것
같소."
  남편이 곁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인이 계속해서 등을
쓸어주며 달랬다.
  엄마를 찾던 끝에 아이는 먹은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 이를 어째! 토하고 있어요!"
  부인이 당혹스러운 듯 일어서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흔들어댔다.
  "대체 왜 이런 난리를 피울까요?"
  "틀림없이 무서워서 그럴거요."
  브링크씨가 유숙을 안았다.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부인이 중얼거렸다.
  "아마, 첫날 밤이라 그러겠지. 차차
나아질 거요."
  아이는 비로소 울음을 그치었다.
  부인이 더럽혀진 시트를 걷어내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왔다. 젖은 옷을
벗기고 시트를 걷어내는 것을 브링크씨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울음소리에 잠이
깨어 올라온 할아버지가 하품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브링크시가 출근하고 난 후
두 시간쯤 지나서 부인이 유숙을 깨우러
2층으로 올라가보니 아이는 그때까지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헝겊 인형을 가슴에
꼭 부둥켜안고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은
지난 밤 가족들의 잠을 깨우며 울부짖던
일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로 평온스러워
보였다.
  부인은 유숙을 깨울까 말까 잠시
머뭇거리다 좀더 재우는 편이 좋겠다고
긍내고 지난 밤에 아이가 토해서 더럽힌
침대 시트와 잠옷을 가지고 그녀는
지하층에 있는 세탁실로 내려갔다.
  세탁을 마치고 부인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보았을 때 언제 잠에서 깨었는지
유숙은 계단 귀퉁이에 서 있었다.
  아이는 한국에서 올 때의 차림
그대로였다. 잠옷 대신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엔 색동 고무신을 쥐고, 다른
손에 장난감 나팔을 들고 있었다.
  "달아날 생각이었구나?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기가 무서웠던가 보지?"
  브링크 부인이 미소지으며 손을 잡자
아직도 양어머니가 낯선 듯 유숙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려워할 것 없어. 이젠 네 집이니
어디 한번 내려와 보렴."
  손을 잡고 천천히 한 계단씩
뒷걸음질치자 아이는 계단에 익숙치 않은
듯 겁먹은 얼굴로 그녀를 따라 조심조심
발을 내려딛었다. 맨 아래칸까지 내려왔을
때 부인이 기쁜 표정으로 뺨에 키스를
했다.
  "귀여운 내 딸, 배고프겠구나!"
  부인은 유숙을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의자에 앉힌 뒤 스프를 가스 오븐에 데워서
접시에 담아주고 계란 후라이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어제 먹은 것마저
토해 버려 몹시 시장할 터인데도 아이는
접시에 담긴 음식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컵에 우유를 따라서 가져다
주었어도 입을 꼭 다문 채 도리질칠
  "배고프지 않아?"
  부인이 묻자, 아이가 말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떼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엄마 보고싶어.......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부인은 아이가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니?"
  "집에 가고 싶어....... 엄마한테 갈래."
  아이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혹 용변을 보고 싶다는 말은
아닐까 짐작되어 손을 잡자 순순히
의자에서 내려섰지만 화장실 쪽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때 금세 걸음을 멈추며
도리질을 쳤다.
갈래."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그녀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손짓과 몸짓을 섞어가며 뜻을 이해해보려
했다. 잘 되지가 않았다. 그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이에겐
굉장히 간절한 요구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아이에게 묻고 싶은 얘기는 많았으나
의사를 소통해볼 방법이 없어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 역시 자기의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졌던지 고통을 호소하는 수단으로
나지막히 울먹이기 시작했다. 말을 못
죄스럽게 생각되어 부인은 아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고 사과를
했다.
  "수잔, 미안하다. 난 네가 하는 말을
도무지 모르겠어. 하지만, 우린 곧 서로
대화가 통하게 될거야."
  유숙은 그 말에 대꾸도 않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부인은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싶어
가만히 두고 보았다.
  유숙은 현관까지 다가가서 걸음을 멈추고
잠깐 돌아보더니 무거운 문을 온몸으로
밀치고 슬며시 나가버렸다.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고무신을 신고
타박타박 정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부인이 불렀지만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제야 부인은 아이가 한국에 있는
제 집으로 가고 싶어 그런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뒤따라가 아이를 달래어 데리고
들어오면서 그녀는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나 혼자

  브링크가에 온 지도 사흘이 지났다.
  두 해 남짓이었지만 그래도 유숙은
한국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있었던 듯
새롭게 바뀌어 버린 환경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의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유숙은 의자에 앉아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는 것이 서툴렀고 음식도 식성에 맞지
특별히 조리를 해주어야만 했다.
  칫솔질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목욕을
시키려 하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려고
했고 양변기 사용법은 아무래도 어색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또한 가족들이 키스를
해주면 싫은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몰래
입술을 닦아내는 버릇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아직도 한국에서 길들여진
습관들이 남아 있어, 유숙은 의자에 앉는
것보다도 바닥에 앉는 것을 더 편안해했다.
스프를 먹을 때는 스푼을 사용해서 한
숟갈씩 떠마시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그릇을 쥐고 한꺼번에 마시곤 했다.
한국에서 신고 온 고무신에 대해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어서 방 안에선 절대로
신발을 신지 않았고, 안으로 들어갈 때는
버릇도 있었다.
  브링크씨 부부는 아이의 이런 태도들이
난처하기만 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점은 바로 수면 문제에서
야기됐다.
  급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며 받은 심적
충격이 나쁜 꿈으로 나타나는지 아이는
사흘 동안을 줄곧 밤중에 깨어나 울어대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언제나 어머니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깊이
잠들 수가 있었다. 한밤중에 깨어나도 방
안에 가득히 누워 있는 언니들과
오빠때문에 무서운 생각 없이 다시 잠들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에서
혼자뿐이었기에 유숙은 그때마다 공포
속에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브링크씨 부부는 밤중에 자다가 깨어서
울어대는 아이때문에 꼬박 사흘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한번 잠에서 깨어난 아이를
다시 재우려면 무척 힘이 들었다. 부부는
평온한 수면이 방해받는 것이 무척
괴로웠으며 잠을 설치게 되면 이튿날
하루를 개운치 못한 가운데 보내야 했기에
생활의 일상적인 리듬이 개어지고 말았다.
  나흘째 밤이 되어서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성격이 직선적인 부인은
짜증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제보니 얜 형편없이 고집스럽고
버릇이 나쁜 아인가 봐요. 대체 우리보고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어서
그럴 거요. 이삼일만 더 있으면 차차
나아지겠지."
  이해심을 보이는 남편의 말에 부인은
화를 내며 반문했다.
  "이삼일을 더 참으라는 말인가요? 난
이젠 하루도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녹초가
되어버렸다구요. 그리고 이삼일 후에
나아진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그럴 때마다 브링크씨는 울먹이고 있는
아이와 함께 그녀를 다독여 주어야 했다.
  "내가 옆에서 달랠테니 당신은 가서
자도록 하시오. 난 아이를 재운 뒤에
자리다."
  "정말이지 남의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대해 가지고 있던 애정도 급격히 식어진
모양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녀가 행복하게
상상해 오던 것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양녀와 다정히 지내는 것만을 꿈꾸어왔을
뿐, 갑자기 친부모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아이가 겪는 고통과 함께, 그 아이 때문에
자신들이 겪어야 하는 고충에 대해서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부부는 식사를 마친 뒤
자신들의 고민을 상의해 보았다.
  "뭐가 불만일까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해요."
  "답답하긴 그 애도 마찬가질 거요.
우리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불안하고
고통스럽겠지."
자는 것을 무서워하다니....... 아이를
도로 보냈으면 좋겠어요!"
  부인이 중얼거렸다.
  "이제 겨우 나흘밖에 안 됐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남편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우린 수잔을 데려오기 위해 일 년
가까이나 기다려 왔어요. 그런데 겨우 나흘
지나서 아일 도로 보낸다는 게 말이나
되오?"
  "알아요, 저도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구요! 하지만 이 애 하나 때문에
우리 생활이 엉망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당신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쨌든
그건 옳은 해결책이 아니오! 시간을 두고
좀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브링크씨는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부인은 자신이 좀
심한 말을 했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중간에 깨는 일 없이
재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궁리해
보았다.

  엄마 어디 계세요?

  이튿날 정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브링크 부인이 부엌에서 나왔을 때
유숙은 호깐과 거실 융단 위에 앉아
나무조각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모처럼 흐뭇한 기분을
느끼면서 부인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것이었다.
  30분쯤 누워 있다가 부인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거실 바닥엔 나무조각들이 무너진 채
흩어져 있었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안
보였다. 부인이 부엌과 욕실을 차례로
둘러보았지만 거기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그녀는 지하에 있는 놀이방으로
가보았다. 지하층에는 세탁실과 건조실,
식품저장실이 있고, 가족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널찍한 방이 있었다.
호깐이 혼자 그곳에서 텔레비전의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호깐, 수잔은 어디 있지?"
  부인이 물었다.
  "몰라."
저어댔다.
  "모른다니? 조금 전까지도 함께 놀았었지
않아?"
  "아마 이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간
모양이야."
  호깐은 만화영화에 열중해 있었다.
  "여긴 너 혼자 내려왔니?"
  "응, 나 혼자서 내려왔어."
  부인은 취미실을 나와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이의 방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방에도 유숙은 없었다. 이층 욕실과
나머지 방들을 둘러보고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은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가 않았다.
  부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할아버지에게 간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뒤쪽 정원으로
통하는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정원 뒤쪽 별채에서 할아버지가 딸의
집에 들르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련해 둔
공작실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그곳으로 가서 커다란 나무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형상의 조각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인이 빗속을 뛰어가 공작실 문을
열었을 때 마침 할아버지는 일손을 놓고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님, 수잔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모르세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
  의자에서 비대한 몸집을 일으키며
  "이 애가 어디로 간 걸까요?"
  "지금 집 안에 없단 말이냐?"
  "없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실에서
호깐과 놀았는데."
  "호깐은 뭐라든?"
  "그앤 만화영화에 정신이 팔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는지 파이프를 끄고 모자를
집어들었다.
  "함께 가서 찾아보자."
  두 사람은 나란히 우산을 받쳐 쓰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빠짐없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유숙의 모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같아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말이냐?"
  "어떡할까요? 그이에게 먼저 전화로
알릴까요?"
  "우선 우리 둘이 나가서 찾아보도록
하자꾸나. 그러는 것이 일의 순서지."

  브링크부인이 당황해서 서두르는 동안
할아버지는 현관 입구의 벽장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기다렸다. 부인도 자기의 비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현관 문을
나섰다.
  빗줄기는 제법 거칠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집을 나온 부녀는 물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도로 위를 서두르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궂은 날씨여선지 길가엔 인적이
  "나간 지 얼마나 됐지?"
  "두통이 있어 잠깐 누워 있던 사이에
그랬으니 삼십 분쯤 됐을 거예요."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부녀는 말을 나누면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십 분 가량을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차량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 길까지 도착했다.
  이렇게 되고보니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위험한 골목이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큰일 났네! 어떡해야 하지요?"
  "난 철도역 쪽으로 가볼 테니 넌 저쪽
편으로 가보아라. 아이가 갈 만한 거리까지
가보다 찾을 수 없으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버님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난 쭉 가보다 찾을 수 없으면 경찰서로
가서 신고를 하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동양 아이니 외모가 특이해서 쉽게
찾을 수 있을게야."
  딸에게 안심시켜 주는 말을 남긴 뒤
할아버지는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부인도
돌아서서 반대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브링크 부인은 초조한 심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빗줄기는 거칠고 거리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10월 하순의 오후였다.
  한 시간 가량 헤매던 끝에 브링크 부인은
아이가 그새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집
안에는 괴괴한 정적만이 괴어 있을
뿐이었다.
  우비를 벗고 지하층으로 내려가 보니
호깐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부인은 회사로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렸다.
  "아버님이 경찰서로 찾으러 갔어요. 조금
더 기다리면 무슨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조금 더
기다려 보시겠어요?"
  "아니오. 내 곧 집으로 가리다."
  남편의 말이 그침과 동시에 통화가
끊겼다.
주저앉았다.
  갑자기 탈진감이 몰려왔다. 지난 나흘
동안 겪은 일들이 회상되자 너무도 힘든
며칠간을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데려온 일들이 후회되며 공연히 커다란
골치거리를 떠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일이 이처럼 힘들 줄은 몰랐다.
  차라리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집에서 데려가도록 양자회에
연락해 볼까?
  온갖 상념들이 머리에서 들끓었다.
  만일 누가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서면
줘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그 애때문에 겪어야 할 고생은
키워도 나중에 그 은덕이나 알아줄지도
의문이었다. 이런저런 걱정들을 생각하면
아이를 데려온 건 아무래도 잘못된
일이었다는 판단밖에 안 들었다. 차라리
강아지를 한마리 사다가 키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가 있는
걸까?
  대체 여기서 한국까지가 어딘데 가겠다고
무작정 집을 나선 거람.......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측은한 기분도 들었다.
그 어린 것이 집으로 가고 싶어 비를
맞으며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기도 했다.
  걱정때문에 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마음이 불안해 몇 번이나 창문 밖을
내다보고 초인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부인이 수화기를 들었을 때 묵직한
노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다. 여기 경찰선데 수잔을
찾았다."
  "어쩌다 거기까지 가게 됐대요?"
  "자세한 얘긴 가서 해주마. 어쨌든 이젠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곧 함께
가마."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놓으며 부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 분쯤 지나서 할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아이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젖은 옷을 갈아입히자
아이는 오한이 들린 듯 몹시 몸을
떨어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울면서 거리를 헤매는 걸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경찰서에 데려다
주었다는구나."
  "저런....... 가여워라!"
  부인이 유숙을 침대에 누이고 두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유숙은 이불에 파묻힌
채 얼굴만을 내밀고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있었다.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내가 전화하마. 넌 여기서 보살펴 주고
있어라."
  할아버지가 방을 나간 후 브링크 부인은
  유숙은 뚝뚝한 눈길로 양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인은 그 시선 속에서
커다란 슬픔의 그늘을 엿본 것 같았다.
그러자 조금 전에 느꼈던 미움이 가시며
뭉클한 심정이 들어 손을 잡아주자 아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 의사가
도착했다.
  모두들 유숙의 주위에 둘러서서 의사가
진찰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유숙은 자기를 진찰하고 있는 의사를
올려다보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가 아이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며
살그머니 주사를 놓았을 때 아이는 아픈
기색도 없이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됐다! 이젠 눈 감고 콜콜 자야 해."
안경을 쓴 의사가 이불 위로 드러난 팔을
약솜으로 문질러 주며 말했다.
  "한잠 푹 자고 나면 아픈 것도 다 나을
거야."
  의사는 팔을 덮어주었다. 청진기와
주사기를 챙겨 진료 가방에 넣는 모습을
보고 부인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는 의사를 뒤따라
나왔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열이 좀 있지만
이삼일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폐렴에 걸릴 염려는 없을까요?"
  "잘 돌봐주고 음식만 잘 먹으면 폐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인이 감사함을 표시하며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의사는 사양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파! 파파!

  토요일 아침이 됐을 때 사흘 동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정원엔 밝은 햇살이 가득히 비쳐들고
새들이 지저귀는 화창한 날씨였다.
  그날 아침, 유숙은 쇠고기 스프를 한
그릇 말끔히 비우고 점심때는 우유 한 컵에
크래커 한 봉지를 먹었다. 한 차례의
열병에 시달린 후 기력을 찾아서인지
식욕이 놀랄 만큼 왕성했다.
  식사를 마친 뒤엔 마치 그 집에 방금
도착한 아이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연방 무언가를
뺨에는 발그레한 생기마저 감돌았다.
  낯가림도 한결 덜해진 기색이었다.
  부인이 목욕을 시켜주었을 땐 저항하지도
않고 얌전한 모습으로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정원에서 양아버지와
호깐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유숙은
햇살이 따스한 현관 입구의 계단에 앉아 그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서 아이는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한 칸씩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브링크씨는 등을 돌린 자세로 호깐이
던져주는 공을 되돌려 주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유숙은 마치 작은 새끼 고양이처럼
양아버지의 뒤로 한 걸음씩 살금살금
돌아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유숙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양아버지의 등을 힘껏 밀치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브링크씨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달아나던 아이가 저만큼에 멈추며
돌아서더니 이쪽을 향해 생긋 미소짓는
모습을 보았다.
  브링크씨는 아이의 웃음에서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 그것은 유숙이 스뤠덴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보인 웃음이었다.
일부러 과장된 제스추어로 바닥에 넘어지는
시늉을 내보이며 양아버지는 익살스런
신음소리를 외쳐댔다. 그리고 잠시 후엔
신음소리도 그치고 그대로 잔디 위에
엎드려 꼼짝도 않고 있었다.
  호깐이 공을 들고 다가왔다.
  브링크씨가 실눈을 뜨고 호깐에게
물었다.
  "호깐, 수잔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유숙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고 나서
호깐이 속삭였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
  "웃고 있니?"
  "아니, 웃지 않아."
  "웃지 않아?"
  "응, 그대로 서 있기만 해."
  그리고 약간 침묵이 흘렀을 때 갑자기
호깐이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빠, 수잔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어."
  "알았으니 모른 척해."
  브링크씨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다가오고 있었다. 브링크씨는 기절한 척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얼굴을
살피기 위해 유숙이 살며시 들여다보았을
때에야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브링크씨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팔을 잡으며 잔디 위에 벌렁 누운 채 두
손으로 번쩍 치켜들자 유숙이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파파!"
  아이의 까만 눈망울이 맑게 빛났다. 그
속에 담겨 있던 슬픈 기억들은 모두 깨끗이
사라져버린 듯했다. 그늘이 걷힌 입가엔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가 감돌았고,
아이다운 순수함이 우유빛 살결 위에
가득했다.
  "파파! 파파!"
  아이는 자기가 배운 최초의 스췌덴 말을
자랑스럽게 반복했다. 그 음성은 고요한 샘
위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브링크씨의
가슴에 기쁨의 파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해봐라! 다시 한번!"
  브링크씨가 아이의 작은 몸을 공중에서
흔들어대며 말했다.
  "파파! 파파!"
  그러자 아이가 또 외쳐대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이 유숙이 달라지기 시작한 첫
모습이었다.
  이때부터 아이는 가족들과 쉽게 어울리며
곧잘 애정을 표시했다. 틈만 나면
좋아했다.
  유숙은 특별히 브링크씨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냄새맡기를 즐겨했는데 그의
손에서는 언제나 기분좋은 화장수 냄새가
풍겨왔다. 아이가 자신의 손에 묻은 화장수
냄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브링크씨는 일부러 듬뿍 화장수를 손에
바르고서 유숙을 부르고는 했다.
  "여보, 다음 주말엔 수잔을 데리고
동물원에 갑시다."
  "수잔, 이리 와서 식사해라!"
  "엄마, 나 수잔하고 놀테야!"
  "이제보니 수잔과 호깐은 아주 잘
어울리는 남매로구나."
  가족들은 모두들 유숙을 수잔이라고
불렀다. 아이도 그것이 제 이름이며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아듣고 그때마다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 간의
고통스런 일들이 지나고 난 뒤 한국에서 온
소녀 신유숙은 마침내 새로운 가족들의
품에서 수잔 브링크로 적응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3. 유년기

  제 이름은 수잔 브링크예요

  1969년 8월 말경의 어느 날 아침, 브링크
부인은 입학 적령기가 된 수잔과 호깐을
학교로 데리고 가기 위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그날의 날씨는 포근했고, 하늘은 코발트
블루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집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엔, 마을에서
뻗어온 세 개의 길이 화살표처럼 대로를
향해 모여드는 지점에 스쿨 버스가
거쳐가는 정거장이 있었다.
  수잔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자, 스쿨 버스를 기다리고
눈길로 동양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잔은 양어머니와 쇼핑을 가거나 시내로
외출했을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
그때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싫어 일부러 외면해 버리고는 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까만 눈동자에
까만 머리를 가진 자신의 특이한 외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 이상한
동물을 바라보듯 하는 아이들의 눈길에
화가 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쏘아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양어머니는 그런
눈길로 누굴 빤히 바라보지 말라며 수잔을
꾸짖고는 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먼저 날 빤히
바라보는데요?"
  수잔이 시무룩히 말하면 양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건 당연한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 애들이
널 싫어해서 그러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지."
  "그럼 아이들이 날 빤히 바라볼 땐
어떻게 해야 돼요?"
  "그땐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대신
예쁘게 웃어주면 돼. 그럼 누구나 널
좋아하게 될 게다."
  그러나 양어머니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왠지 수잔에겐 그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서 거울을 보며 여러 차례
연습해 본 적도 있었지만, 막상 누가
자기를 쳐다볼 땐 아무래도 화가 나서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때도 수잔은 줄곧 시선을 외면하고
버스가 도착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양어머니의 등 뒤에서 아이들을 흘겨주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동리 어귀를 돌아나와 큰길로
나설 무렵, 수잔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살며시 자기만의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째서 내 눈동자는 호깐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푸른 빛이 아닐가? 눈은
푸른색으로, 머리는 금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는 되지
않을 텐데.......'
  수잔은 푸른 눈에 금빛 머리칼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사이
버스는 울창한 가로수가 뻗어 있는 길을
지나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의 단층 벽돌건물이었다.
  아담한 붉은 지붕 너머로는 뾰족한
교회의 첨탑이 보이고, 흰 페인트로 칠해진
낡은 울타리 안쪽엔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
있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 앞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동그란
운동장이었다.
  "몹시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물이지요?"
  "그렇군요. 학교가 무척 마음에 들어요."
  스쿨 버스에서 내린 학부모들이 학교를
둘러보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면서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에 마중나와 있던 교장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창을 통해 햇살이 비쳐드는
복도를 지나서, 그들이 안내된 곳은 교장실
  크림색으로 칠해진 벽가엔 기다란
장의자가 빙 둘러 놓여 있고, 창문
밖으로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그네며
시이소오 등 놀이기구들이 내다보였다.
  이윽고 이 학교의 교장인 하이머씨가
입학을 축하하며 학교 소개를 했다.
  그는 거인처럼 큼직한 키에 어깨가
넓었고, 커다란 손과 붉은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부드럽고,
얼굴엔 수줍어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러분의 담임을 맡게 될 미스
안드레아스를 소개하겠어요."
  하이머 교장 선생이 말하자, 옆에 서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눈웃음을 보내고 있던
젊은 여성이 두 손을 모아쥐고 춤추듯
앞으로 나섰다.
생각에 선생님은 지난 밤에 한잠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미스 안드레아스는 탐스러운 금발을 뒤로
묶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실로폰처럼
맑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하게 될 친구들이 모두
여기에 모였어요, 그렇죠?"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친구들에게 각자 자기 소개를
하는 순서를 먼저 갖기로 해요! 그 다음
모두 선생님을 따라서 학교 구경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실로 가서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교과서를
나눠 드리도록 하겠어요!"
  처치 스쿨은 3년 동안의 초등교육 하급반
과정만을 이수시키는 국민학교 저학년
아동들은 모두해서 열두 명이었다. 앞으로
한 학급을 이루게 될 그 열두 명의
아이들이, 왼쪽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일어서며 자기의 이름을 말해나갔다.
  수잔은 맨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자기의 차례가 가까워 오는 것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일어섰을 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며 침묵이 감돌았다.
  동양의 아이는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물론 학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수잔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수잔
브링크예요."
  수잔이 얌전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약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비교적
침착한 음성이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해요. 기쁘고 정말
즐거워요. 앞으로 저랑 다정한 친구가 되어
사이좋게 생활하기를 바라겠어요."
  소개를 마치고 나서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을 때, 그 모습이 기특히 여겨졌던지
교장 선생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신에 대한
특별한 대우에 수잔은 잘 익은 홍시처럼
귀뿌리까지 빨갛게 물들이면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세요."
  미스 안드레아스가 착착 박수를 쳤다.
  그 말에 따라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안내하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 부속실을 나왔다.
  일행은 복도를 지나면서 여러 개의
교실들을 둘러보았다. 식당과 화장실을
지났다. 교무실과 놀이터도 차례로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1학년 교실에서 다시 모였을
땐 어느새 친해진 아이들까지 생겼다.
  교실에서는 키의 순서에 따라 자리를
배정했는데, 열두 명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작은 수잔이 맨 앞의 자리에
앉혀졌다. 안드레아스 선생님이 교과서를
나눠주었을 때는 그래서 제일 먼저 받을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모든 일정을
끝내겠어요. 내일부터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날이에요. 모두들 내일 아침 활짝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요!"

  미스 안드레아스가 실로폰처럼 울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다시 또 착착 박수를
쳤다.
  아이들은 교과서가 든 가방을 흔들어대며
기쁜 표정으로 교실을 나왔다. 그 틈에
끼어 수잔도 깡충거리며 운동장으로
나왔다. 방금 전 박수를 받은 일이 너무도
기뻐 수잔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담임 선생님인 미스 안드레아스가
운동장까지 따라나와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
모두에게 다정한 키스를 해주었다.
아이들은 스쿨 버스의 차창에 붙어서서
운동장에 서 있는 예쁜 선생님을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수잔, 학교가 마음에 드니?"
  스쿨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브링크 부인이 물었다.
  "네. 무척 마음에 들어요."
  수잔이 대답했다.
  "호깐, 넌 어때?"
  호깐도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무척 학교가 좋아요, 엄마."

  사랑스런 아이

  이튿날부터 단조롭기는 하나 즐거운
나날이 흘러갔다.
  매일의 일과는 어느 날이나 비슷했다.
하고, 혼자서 거울을 보며 꼼꼼히 머리를
빗은 뒤엔 손수 책가방을 챙겼다.
  7시 15분엔 식사를 마치고 호깐과 나란히
집을 나섰다.
  학교는 아침 7시 30분에 시작됐는데,
늦어도 20분까지는 동리 어귀에 도착해야만
스쿨 버스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가족들은 수잔이 동양에서 온
아이여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브링크 부인이 얼마 후
개인면담차 학교로 찾아갔을 때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수잔을 평가했다.
  "아이들은 누구나 수잔을 좋아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수잔은 모두에게
따뜨샅고 애정넘치는 마음씨를 가진 훌륭한
아이예요.
사실이 담임인 저로서는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걸요? 아무 걱정도 마세요.
수잔은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안심이로군요. 그런데
호깐은 어떤가요?"
  브링크 부인이 묻자, 미스 안드레아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깐 같은 개구장이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호깐은 여자아이들
치마를 들춰보는 데 독특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어요. 수업시간에 다른 짓을
하고 있는 데는 일등이고요. 그런데 공부를
잘 하는 걸 보면 신기해요. 아마 머리가
아주 영리한 아인가 봐요."
  "호깐이 무척 선생님 골치를 썩혀 드리는
  "아니예요. 그렇지는 않아요. 호깐
또래의 사내아이라면 그 정도의 장난이야
귀엽게 봐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얌전한 사내아이보다 호깐같은 개구장이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
  미스 안드레아스의 좋은 평가에 브링크
부인은 흡족한 기분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그녀가 남편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브링크씨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거요. 비록 이 나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수잔은 아마 성장해서도 훌륭히
사회에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거요."
  수잔은 사실 특별한 아이는 아니었다.
  성격이 몹시 내성적이어서 언제나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잘 탔으며, 꼭 해야
붉히며 가까스로 꺼낼 수 있을 만큼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그런가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하거나 눈길을 끌 만큼 깜찍한
행동을 해서 어른들을 기쁘게 해준 일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수잔은 특별한
아이였다.
  수잔에겐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지 못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이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즐겨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일을 도와주고
아침마다 아버지의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
놓는 따위의 자그마한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었다.
  브링크씨는 수잔의 이런 점들에 대해 늘
  "수잔은 참으로 사랑스런 아이요!
어디서도 이처럼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 거요! 수잔은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더
생각하는 훌륭한 마음씨를 갖고 있지
않소?"
  그러나 부인은 수잔의 그런 점을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좋은 성품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요즘같은 세상에 수잔 같은 아이는
절대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할 거라구요.
자기 의견을 용기있게 말하지 못하는 건
장점이 아니라 고쳐야 될 결점이에요."
  "당신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건 세상의
잘못이지 그 애의 잘못이 아니란 말이오.
머리가 좋거나 창의성이 풍부한 것보다
훨씬 고귀하고 중요한 미덕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느니까 말이오!"
  부부는 이렇듯 아이에 대해 상반된
의견을 보이며 논쟁을 하고는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루하루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 소리없이 흘러갔다.

  데려온 아이!

  수잔은 하루가 다르게 알찬 성장을
계속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 아이의 소박한 행복을 시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후 이 어린 소녀가 견뎌야
했던 모든 불행의 발단은 몹시 단순하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비롯됐다.
수잔이 여덟 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브링크 부인은 계단을 올라오던 중
호깐의 방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놀라서 방문을
열어보니 호깐이 침대에 엎드려 몹시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었다.
  부인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호깐은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 어깨를 들먹이며 한층 더 큰
소리로 울어댔다.
  "호깐, 무슨 일이냐? 왜 우는 거지?"
  "아빠가 싫어!"
  "뭐? 아니,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왜
아빠가 싫다는 거지?"
  "내가 공놀이를 하자는데도 듣지 않고
수잔하고만 있잖아!"
  "그래! 난 수잔땜에 약이 올라! 수잔이
온 뒤로 아빤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구! 전에는 귀여워해 줬는데 이젠
내가 차에 치어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부인은 기가 막혔다.
  "호깐, 왜 그런 심한 말을 함부로 하니?
아빠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니?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바보같은
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 마! 아빤 절대로 나같은 건
사랑하지 않아! 그건 엄마도 잘 알거야!
아빠가 사랑하는 건 수잔밖에 없다구! 아빤
엄마도 사랑하지 않는단 말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인은 숨이 막혔다.
아이의 말투가 너무 거칠어 대꾸할 말을
공감대를 무섭게 자극해 왔다. 그것은
그녀가 혼자서 막연히 느껴오던 사실을
확신케 해준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호깐, 내가 아빠에게 얘기하마.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주마. 앞으로
다시는 너를 슬프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부인은 흐느끼는 호깐을 달랬다.
  "수잔 같은 건 당장 쫓아버려야 해!
그래야 엄마나 난 행복해질 수 있다구!"
  "알았으니 이제 그만 그쳐."
  브링크 부인은 호깐을 달랜 뒤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무거운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와
취미실 앞을 지나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그녀는 격한 충동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남편이 수잔을 무릎 위에 앉힌 자세로
다정스레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은
분노가 갑자기 부인의 가슴 속에 치솟았다.
그녀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커다란 문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동시에 말소리가 그치고 브링크씨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부인은 꼼짝도 않고 한 자리에 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서늘한 차가움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브링크씨는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며
어색하게 수잔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았다.
다가왔다.
  "마마."
  손을 잡으려 하자 부인이 뿌리쳤다.
수잔은 양어머니의 태도에 놀라며 서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굳은 모습으로
남편을 향해 똑바로 다가갔다.
  "왜 그러오? 무슨 일이오?"
  남편이 아내의 매서운 표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감정을 알아채며 묻자, 그녀가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라니? 왜 그러오? 당신 몹시
화가 난 것 같은데?"
  부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수잔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밖에 나가 있어!"
  갑작스런 어머니의 태도에 수잔은 기가
죽은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슬며시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안에서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친자식과 데려온 자식도
구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호깐에게 어떻게 대했어요?
  -어떻게 대하다니?
  -지금 호깐이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알아요? 아이가 숨이 끊어질 것처럼 울고
있단 말이에요.
  -영문을 모르겠군. 그 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있고 말고요. 왜 자기 친아들은
무시하고 저 계집애만 싸고 도느냔

  말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기를 두고 양부모가 다툰다고 생각하니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수잔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 건 뒤 등을
기댄 채 서 있으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러자 잊고 있던 사실이 생각났다.
심장이 팔딱이는 소리를 들으며 수잔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 집의 친딸이 아니야!
......어머니도 아버지도 친부모가 아니야!
......모두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구! 그래, 나와는 눈 빛깔도
들지 않으면 이 집에서 날 내쫓아 버릴 게
틀림없어!'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수잔은 더럽혀진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이집저집 구걸을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서러운 기분이 들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얼마동안 꼼짝도 않고
있으려니 자꾸만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친자식과 데려온 아이도 구별할
줄 모르세요!
  양어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전에서
맴돌았다.
  -데려온 아이!
  자신의 처치를 깨닫게 하는 이 말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들려왔다. 입양된 지도
4년이 흘렀지만 한번도 이런 슬픔을 느꼈던
일은 없었다. 수잔은 더 이상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숨죽여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호깐의 심술

  -아버지는 나보다 수잔을 더 사랑하고
있어!
  호깐은 이런 생각 때문에 수잔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수잔을
괴롭히며 심술을 부려댔다.
  "넌, 네 엄마가 버려서 우리 지벵 데려온
거야, 알아 이것아?"
  집을 나와 학교로 가는 동안 호깐은 이런
시선이 마주치면 심술스럽게 혀를 삐쭘히
내밀어 보이거나 험상궂은 얼굴로 주먹을
흔들어댔다.
  수잔은 호깐이 싫어졌다. 그래서 되도록
마주치는 것마저 피하려 했다. 하지만 한
지붕 밑에 살며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처지이기에 그러기는 쉽지가 않았다.
더욱이 수잔이 피하려 하면 호깐은 그것을
구실삼아 다시 또 괴롭히곤 했다.
  호깐의 심술을 모른 척 외면해 버렸지만
가끔은 견딜 수 없어 다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뻔했다. 몸이 약한
수잔은 호깐의 사정없는 주먹질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걸까!
  수잔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집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집을 나가면 대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용돈을 아껴서 소중한 선물을 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다정한 척 마음을
맞춰주느라 애써본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은 그때뿐이었고 그때가
지나고 나면 호깐의 심술은 여전했다.
  수잔은 견딜 수가 없어 아버지에게
이러한 고통을 호소했다.
  "아빠, 호깐이 나를 너무 괴롭혀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가만두지 않고 공연히
때리고 놀려대요! 어째서 호깐은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밤 양아버지는 호깐을 불러서 혼을
  "호깐! 너 왜 걸핏하면 수잔을 못살게
구는 거냐! 어째서 네 동생을 때리는 거지!
너 다시 한번 더 수잔을 괴롭혔다가는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
  이 일을 울면서 호깐이 일러바치자
브링크 부인이 남편에게 화를 냈다.
  "당신은 왜 저 애 말만 듣고 호깐을
나무라는 거예요? 이게 다 당신
잘못이라구요! 당신이 수잔만 감싸고 도니
서운해서 그러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몹시 분개해서 수잔을
야단쳤다.
  "앙큼스러운 것!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고자질을 하다니! 대체 호깐이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엄살을
부려대는 거냐!"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층
더 기고만장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네까짓게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어!
엄만 항상 내 편이고 아빤 엄마 말이라면
꼼짝도 못한다구! 그러니 이를테면
얼마든지 일러보란 말야, 이것아!"
  양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은 드물었다.
할아버지마저 스톡홀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부터는 언제나 양어머니와
호깐과 수잔 세 사람뿐이었다. 수잔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도 힘겹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양아버지에게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아무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웃집에 있는 헬렌이라는
아이는 학교로 가는 길에 호깐이 수잔을
괴롭히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담임 선생님이 수잔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을 알고 물었을 때 헬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나름대로 선생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안드레아스 선생님이
호깐을 꾸짖었다.
  "호깐, 이제보니 넌 참 못된 아이로구나.
너 저번에 소피의 가방에 개구리를 몰래
넣었을 때 선생님에게 뭐라 그랬니? 다신
그런 장난 하지 않고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어제는 말을
더듬는 트라우트 흉내를 내서 그 애를
울리더니 이번엔 또 뭐지? 어째서 착하고
귀여운 수잔을 못살게 구는 건지 말해 봐!"
날 호깐은 이 일마저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고 말았다. 이때문에 수잔은 다시
집에서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호깐은 이것도 모자라서
수잔에게 기가 막힌 보복을 해주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별러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화요일 오후였다.
  아이들이 매일 점심때마다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빵과 우유를 먹고, 식당에서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 소동이 벌어졌다.
  "내 지우개가 없어졌어! 누구 내 지우개
못 보았니?"
  열두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주목했을 때, 쥴리는 막 울음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쥴리, 무슨 지우개가 없어졌다는 거야?"
  "파파가 덴마크에서 사다주신 비싼
지우개야. 틀림없이 필통에 넣었는데 누가
꺼내갔단 말야!"
  쥴리는 지우개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아이였다. 자기의 집에는 셔츠 상자에
가득히 온갖 모양의 지우개가 차곡차곡
담겨져 있었다. 만일 다른 아이가 색다른
지우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쥴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것을 얻으려고
안달을 부릴 만큼 지우개에 매혹되어
있었다.
  "필통에 넣어둔 쥴리의 지우개를 누가
가져간 건지 어서 자백해라!"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전 시간에 쥴리가 자랑했을 때
그 지우개를 본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짙은 바나나향 냄새가 맡아졌어!"
  "쥴리는 그 지우개를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랑하기 위해 가지고 온
거라는 건 우리들 모두가 잘 알거야!"
  "누가 쥴리의 지우개를 잘못 알고 가져간
사람 있으면 어서 돌려줘."
  아이들이 떠드는 속에서 급장인
스크빌라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것을 가지고 있어."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난 아예 지우개가 없는 아이라구."
  모두들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한마디씩
했다.
  "혹시 교실 바닥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자!"
  한 아이의 제안에 따라 아이들은
엉금엉금 기면서 이곳저곳 교실 바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잔은 쥴리와 몹시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 아이의
안타까움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우개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지우개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모두 각자 필통을
열어보도록 하자."
  급장이 말했을 때 아무도 반대하는
아이는 없었다. 모두들 필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안에 담을 것들을 내보이는 동안 교실
안이 조용했다.
  그리고 무심히 뚜껑을 열어보다가 그만
소스라칠듯 놀라고 말았다.
  쥴리의 잃어버린 지우개가 자신의 필통
안에 들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쥴리의 지우개가 수잔의 필통
속에 있어!"
  한 아이가 그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더니 다투어 수잔의 필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얘 참 못 쓰겠다! 그러고도 안 가져간
것처럼 시침떼고 있었으니!"
  "수잔이 가져갔으리라고는 아무도
  아이들이 왁자지껄 쑤군거렸다.
베레나라는 아이가 냉큼 지우개를 꺼내
쥴리에게 주었다. 수잔은 너무 큰 당혹감에
놀라며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중에서도 쥴리의
시선과 마주쳤을 땐 그만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새끼 사슴을 닮은 쥴리의 눈
속에서는 성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수잔?"
  스크빌라가 물었다.
  "모르겠어....... 내가 가져온 기억이
없는걸!"
  수잔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모두들 그 말에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는 듯 분개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얌전한 아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거짓말하는
것 좀 보라구."
  "이젠 저런 애랑은 안 놀테야."
  "수잔, 쥴리에게 어서 사과해라!"
  아이들이 내뱉는 말들이 무수한 가시처럼
수잔의 가슴을 찔러댔다.
  수잔은 그나마 변명할 기운도 잊은 채
책상에 머리를 묻고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온몸에 느껴졌고 쑤군거리는
비난의 말들이 끊임없이 귓가에 들려왔다.
  '누군가 내 필통에 쥴리의 지우개를
집어넣은 게 틀림없어.......'
  수잔은 호깐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딴청을 부리며 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소동이 그처럼 커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던지 저도 당황해하는
기색이었다.
  수업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수잔은 눈물을 닦고 자세를 바로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왔다.
  혹시 선생님이 이 사실을 눈치채지나
않을까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선생님이 사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눈길은
칠판을 향하고 있었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수업은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됐고,
이윽고 방과 시간이 되었다.
스쿨 버스를 탈 기분이 아니었다.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혼자서 걸으며 어떤
것이라도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수잔이 상급반 아이들 틈에 섞여 교문을
나섰을 때, 같은 반의 트라우트라는 아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수잔....... 잠깐, 할 말이 있어."
  트라우트는 내성적인 아이였고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수잔이 걸음을
멈추고 말끄러미 바라보자 그 아이가
말했다.
  "......실은 쥴리 지우개...... 네
가방에 넣은 사람, 알고 있거든."
  "그게 누구지?"
  트라우트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먼저 말야....... 내가 알려줬다는
  "알았어. 아무에게도 안할 테니 말해봐."
  "약속할 수 있지?"
  "물론 약속해. 그게 누군지 어서
말해봐."
  "식당에서 오다...... 호깐이 교실에서
네 가방 속에, 뭘 넣는 것을 보았어."
  "정말이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구."
  "그럼 어째서 모두 있는 데서 그 말을
안해 준 거지?"
  그 말에 트라우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땐...... 깜박, 잊어버렸지......
뭐야."
  트라우트는 호깐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때 그 말을 했더라면 나중에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하여튼 알려줘서 고마워."
  "천만에......."
  "그럼 잘 가."
  "너도."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트라우트와
헤어지고 나서 수잔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호깐에 대한 분개심이 머리 끝까지 올라와
걸음이 빨라졌다.
  어떤 식으로 복수할까!
  집으로 향하는 동안 오직 이 생각만이
온통 들끓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빈틈없이 물어뜯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잠시 후 수잔은 집에 도착하여 현관을
들어섰다. 긴장이 고조되어 숨이 막힐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자기
방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대로 호깐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먼저 와서
침대에 엎드려 있던 호깐이 놀라며
일어섰다.
  수잔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한마디도
않고 노려보았다. 찔리는 것이 있었던지
호깐은 고개를 돌리고 딴짓을 하고 있었다.
수잔이 다가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호깐, 고개 좀 들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단 말야!"
  호깐이 고개를 들었다.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호깐이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몰라서 물어? 쥴리의 지우개를 내 필통
  호깐은 우물쭈물 대꾸를 못했다.
  "어서 자백해! 네 짓이라는 걸 다 알고
있어!"
  "그건 오해야."
  호깐이 점잖게 한마디 했다.
  "대체 누가 그딴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그랬건 상관없잖아? 그랬으면
그랬다고 어서 솔직히 자백해!"
  계속 다그쳐댔다. 그러자 호깐은 태도를
바꾸더니 능글맞은 표정으로 태연스레
반문했다.
  "네가 봤어? 훔친 건 너잖아.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데 어째서 제
허물을 엉뚱하게 나한테 뒤집어 씌우려는
거야?"
  "뻔뻔스러운 자식!"
올랐다. 수잔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호깐의 앞머리를 잡고 입을
한 대 갈겨주었다.
  "아이쿠! 이 계집애 봐라!"
  호깐이 한 손으로 입을 감싸쥐고 남아
있는 주먹으로 수잔의 가슴을 때렸다.
수잔은 마루바닥에 넘어졌으나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번개처럼 돌진해서
호깐의 당나귀 귀를 잡아 비틀어댔다.
  호깐도 지지 않고 수잔의 귀를
움켜쥐었다. 두 아이는 서로 할퀴고
때렸다. 호깐이 버럭버럭 악을 써댔다.
간간히 고통스런 비명소리도 섞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귀를 찢을듯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무슨 짓들이지!"
떼어놓았다. 서로 떨어진 뒤에도 호깐은
수잔을 때리기 위해 씩씩대며 발버둥쳤다.
  "너 오빠한테 무슨 짓이야!"
  부인이 수잔의 따귀를 갈기며 소리쳤다.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수잔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오늘 학교에서 창피를 당했어요. 호깐이
쥴리의 지우개를 훔쳐서 내 필통 속에 몰래
넣어놨기 때문에 모두들 내가 지우개를
훔친 걸로 믿고 나를 나쁜 아이로 알고
있어요!"
  "호깐, 그게 사실이냐?"
  브링크 부인이 묻자 호깐이 딱 잡아뗐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저 계집앤 제가
훔치고 망신스러우니까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라구!"
  수잔이 울먹이며 호소했다.
  "호깐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어머니."
  "그럼 넌 어떻게 호깐이 그런 짓을 한 걸
알게 됐지?"
  양어머니가 물었다.
  "트라우트가 얘기해 줬어요."
  "트라우트가 누구냐?"
  "우리 반......."
  "우리 반 말더듬이 자식이야!"
  호깐이 앞질러 소리쳤다.
  양어머니가 수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수잔, 넌 어째서 트라우트라는
말더듬이 아이의 말은 믿으면서 오빠인
호깐의 말은 못 믿는 거지?"
  수잔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호깐이
고소하다는 듯 멸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들려왔다.
  "다음부터 지우개가 가지고 싶으면 내게
사달라고 말해라! 절대로 다른 아이의
물건에 손대지 말고 말이야! 알겠니?"
  "어머니, 저는 지우개를 훔치지
않았어요!"
  "닥쳐! 그럼 호깐이 훔쳐서 네 필통에
넣어뒀단 말이냐? 너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니!"
  그녀가 악을 썼다. 수잔은 대답을 못하고
입을 꼭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서 있었다.
그러자 부인이 불그락 푸르락해진 얼굴로
다그치듯 물어댔다.
  "어서 말해 봐라! 아직도 오빠가 훔쳐서
네 필통 속에 넣었다고 생각하는지 어서
말해보란 말이다!"
  "......."
  "어서 말해!"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수잔이 겁에 질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며 양어머니가 물었다.
  "너 이 일을 또 네 아버지에게 고자질할
생각이니?"
  "말하지 않겠어요."
  "그것 참 다행이구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고자질이 무서워서가 아니야! 너 하나
때문에 집안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참을 수
없기 때문이지. 알겠니?"
  "네."
  "그럼 됐다."
  어머니가 등을 떼밀며 말했다.
  "어서 넌 네 방으로 가거라."
  수잔은 호깐의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다시 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등 뒤에서는 호깐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우트 자식, 내일 만나면 뒈지도록
패줘야지!"

  양어머니의 발미용

  호깐과 다투고 나서부터 양어머니의
태도가 변했다.
  수잔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걸핏하면 꾸짖으며
구박했다. 그리고 어느 날 수잔은
양어머니에게서 매질까지 당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수잔은 배가
고파 남비에 담긴 고기스프를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통화에만
열중할 뿐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 남비에 있는 스프를 데워서
먹겠어요."
  아무래도 통화가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수잔은 그렇게 말하고 난 뒤
식당으로 가 스프를 데웠다.
  식탁에 앉아 스프를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녀는 먹고 있는 스프
남비를 뺏더니 뚜껑을 덮었다. 수잔이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갑자기 그녀는
지독히 화를 내며 수잔의 뺨을 때렸다.
  코피가 흘렀다.
  하지만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째서 화를 내는지 까닭도 모른 채
수잔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맞았는지 모르겠지?"
  "모르겠어요."
  "몰라?"
  "네."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그녀의 멸시하는 시선 속에서 수잔은
허락없이 스프를 먹은 일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잔이 물었다.
  "허락 없이 스프를 먹어서요?"
  "그것도 그렇지만 너 아까 날 노려봤지?"
  그녀가 말했다.
  "제가 노려봤다구요?"
  "그래, 내가 스프 남비르 뺏자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잖아!"
  "그러지 않았어요....... 어머니!"
  "안 그랬다고? ......앙큼스러운 것
같으니!"
  그녀는 개수대로 가더니 남비에 담긴
스프를 쏟아버리고 물을 틀었다. 그리고
돌아서며 수잔을 향해 소리쳤다.
  "냉큼 이리 와서 네가 먹은 남비를
설거지하지 못해!"
  그 말에 수잔은 울컥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잠자코 일어나 개수대로 갔다.
  "이젠 너도 나이가 들었으니 빈둥거리며
지내서는 안 되지."
  그때 수잔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설거지를 해보았다. 설거지를
마쳤을 때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양어머니는 다시 청소를 시켰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수잔을 집안 일을
거들어야 했다. 양어머니는 수잔이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미였다.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해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그녀의
불호령은 언제나 수잔을 질책했고, 감시의
눈초리도 끊임이 없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메니큐어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잊고 그대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다그쳐대기 시작했다.
  "왜 사오라는 물건을 안 사왔지?"
  "깜박 잊었어요."
  "뭐? 깜빡 잊었다구? 어떻게 깜빡 잊을
수가 있었지?"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말대답은 곧잘 하는구나. 나는 한번도
깜빡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럼 네
말대로라면 난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냐?"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으로 한 얘기니?"
  "아무 뜻도 없었어요."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어서 솔직히
털어놔 봐. 너 날 골탕먹일 작정으로
일부러 안 사온 거지? 그렇지?"
  "아니에요!"
  "아니라구? 아니면 어서 가서 사오도록
해. 이번엔 절대로 깜빡 잊지 말고
말이다!"
  수잔은 별 수 없이 먼길을 걸어가서
메니큐어를 사와야 했다.
미용을 시켰다. 매주 금요일 오후마다
수잔은 그녀의 발을 깨끗이 씻어주고 나서
메니큐어를 발톱에 바르는 일을 도맡아
해왔다.
  "가장자리에 묻지 않도록 조심해라.
대충대충 하지 말고 좀 성의껏 바르란
말이다."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며 그녀가 말했다.
  "성의껏 바르고 있어요."
  "참, 너 말대답은 착실하게 잘 하는구나.
내 말은 네가 말대답하는 것처럼 발톱도
착실하게 좀 바르라는 말이다."
  "이 정도면 착실해요. 더 이상 어떻게
착실하게 바르란 말이에요?"
  그래도 그녀가 조그마한 아량이나마
말대답쯤은 너그러이 용서했다.
  "아무튼 넌 우리 집의 골치덩어리야. 넌
내 발소제나 하는 것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다. 얘, 너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니?"
  "알고 있어요."
  "그래, 어떻게 알고 있지?"
  "모두들 나를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법 알긴 아는구나."
  브링크 부인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수잔이
버릇없고 못된 아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때문에 수잔은 친척들로부터 제발 어머니
속 좀 썩이지 말라고 당부하는 충고를
  수잔은 그렇게 비난받을 만큼 말썽을
부렸던 기억이 없기에 이런 충고가 너무도
억울했다. 하지만 변명도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스스로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 안타까운
마음만 드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욕하더라고 말을 해주어 수잔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런 말을 할 때
그녀는 특유의 조롱과 멸시가 담긴
음성으로 즐거운 듯 얘기하고는 했다.
  "헬렌네 할머니가 너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아니?"
  "뭐라고 그랬어요?"
  "말해 주랴?"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집에는 수잔
애의 외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수잔은 곧잘
그 집에 놀러 갔다. 그때마다 브릭스뜨이
외할머니는 '네 엄마가 호깐과 너를
차별대우하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꿋꿋이
살아야 한다'며 수잔을 격려해 주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브링크 부인이 그
집을 다녀온 이후엔 태도가 달라져 수잔이
놀러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브링크 부인은 수잔이 누구와 친하게
지내거나 다른 사람이 좋게 얘기해 주는
것조차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때문에 좋아하던 사람들마저 차츰 등을
돌리고 멀어져가는 것이 수잔은 무척
안타깝고 슬펐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두 양어머니의 말에
실망감을 느끼고는 했다.
  "헬렌네 할머니가 네 눈에 대해 한마디
하더구나."
  "제 눈이 어때서요?"
  "네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는
거야."
  "그 말은 어머니 말이 아닌가요? 내 눈이
노려보는 것 같다는 말은 어머니가 늘상
저에게 했던 말이잖아요."
  "내 생각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너를 그렇게 보고 있더구나.
그러니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게 저절로
확증된 셈이 아니겠니?"
  사실, 양어머니는 타인을 설득시키는
특유의 재능을 타고난 여자였다. 그녀의
듣다 보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수잔마저도 때로는 그녀의 말에
설득당해 자신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아이라고 스스로 믿은 적도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어린 수잔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꺾어놓는
데서 이상한 쾌감을 얻는 것 같았다.
  이런 영향 탓에, 수잔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보다 지능 향상이나 적성 발달 과정이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차츰 학교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외톨이처럼 겉도는 음울한 아이가 되고
말았다.

  양어머니의 학대는 간혹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수잔이 몹시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브링크 부인은 수잔이 혼자 방
안에 있을 때 불쑥 창문 밖에서 얼굴을
나타내 안을 들여다보거나 야릇한 귀신
소리를 내서 수잔을 소스라치듯 놀라게
했다.
  그러면 그녀는 굉장히 만족스런 웃음을
터뜨리며 얼이 빠져 있는 수잔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넌 행복한 아이다. 네가 만약에 다른
집에 양녀로 들어갔다면 이렇게 재미있는
장난을 칠 줄 아는 어머니와는 살지 못했을
게 아니냐? 그럼 넌 따분해서 어쩔
뻔했니?"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초급반 3학년이 되었을 때 마리안이라는
  수잔은 그 파티에 참석해도 좋다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예쁜
축하카드를 쓰고 들뜬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막 방을 나서려는데
양어머니가 들어오더니 오늘은 아무도
집에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수잔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다. 네가 집을
나가면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야."
  수잔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공연히
변덕이 나서 생일파티에 못가도록 꾸며댄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어머니가 완강하게 허락하지
않으니 파티에 가려던 예정은 아쉽지만
  "어딜 가는 거냐?"
  방을 나가려 하자 그녀가 팔을 붙들며
물었다.
  "못가게 됐다고 전화나 해주어야지요."
  수잔이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어디에도 전화하면 안 된다."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다고 알려줘야
해요. 그래야 기다리지 않아요."
  "쓸데없는 걱정할 거 없다. 네가 안오면
어련히 약속을 못 지키는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전화는 해줘야 도리잖아요."
  "글쎄, 안 돼."
  "어째서 전화를 걸어선 안 된다는 거죠?"
  "이유는 말할 수 없다."
터뜨리며 그녀가 말했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전화를 걸려고
방을 나가려 하자 그녀가 팔을 펼치며 길을
가로막아 섰다. 수잔이 빠져나가려 하자
몸을 움직이며 막아댔다. 그리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들뜬 음성으로
어린애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어디 빠져나갈 수 있으면 한번 나가
봐라!"
  "그러지 말고 좀 비켜줘요."
  "빠져나갈 수 있으면 네 힘으로 나가
보란 말이다."
  양어머니는 아무래도 지독한 쌔디스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수잔은 우뚝
막아선 모습으로 팔을 활짝 벌린 채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렸을 때 받은 이런 영향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나중에 집을 나와
살게 됐을 때도 수잔은 어머니가 형성해
놓은 이런 인식에서 해방되기 위해 꽤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수잔이
가장 서글펐던 일은 어머니의 간섭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서먹해지고 말았던
사실이었다.
  브링크 부인은 남편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종일 수잔이 무진장 말썽을
부렸다고 이르고는 했다.
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은 회사에 나가
있으니 모르겠지만 저 애가 얼마나 집에서
난잡하게 구는지 아시기나 하세요?"
  처음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고 수잔을 두둔해 주었다.
  "난 네 어머니 말을 믿지 않는다. 누가
뭐라건 네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라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가정적인
남자였다. 딸인 수잔을 몹시 좋아했지만
아내 역시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이해심 많던 양아버지마저도 차차 어머니의
설득에 의해 변해가기 시작했다.
  수잔의 가슴 속엔 자신을 두고 양부모가
다퉜던 일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처럼 남아
가족들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중 양어머니는 무슨 일인가로 남편과
말다툼을 하던 끝에 수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모두 저 애 탓이에요! 난 저 애를
데려온 걸 후회해요. 저 애는 내 딸이
아니란 말예요!"
  그러자 말다툼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버지도 그 말을 되받아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이제와서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이젠 나도 지긋지긋해! 그러니 당신이
재주껏 돌려보낼 수 있으면 보내라구! 저
앤 당신 딸도 아니지만 내 딸도 아니란
말야!"
  수잔은 갑자기 자신을 중간에 두고 서로
소리치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너무 서글픈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용서를
빌며 아버지에게로 다가가 포옹하려 했다.
  아버지는 냉정하게 수잔을 떼밀었다.
  수잔은 다시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을까봐
겁이라도 내는 것처럼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저리 가! 가까이 오지 말란 말야!"
  어머니야 워낙 그런 사람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동안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말 못할 고충을 이해하면서도 수잔은
이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이 없었다.
  수잔은 어서 어른이 되기만을 바랬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어디론가 멀리로
달아나고만 싶었다. 만일 하룻밤만 자고
사이 손해보게 되는 그 많은 시간마저도
조금도 아까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이 밤마다 어린
소녀의 베갯잇을 적시게 했다.
  수잔은 잠자리에 들면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고국과 친가족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가족과 헤어진 지도 어느덧 5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릴 적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살던 곳과 가족들에 대해 무언가
떠오를 듯 어른거리면서도,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수잔은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외톨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느 곳에도 기댈 곳이 없고, 위안받고
싶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어린 소녀는
이대로 잠든 채 다시는 깨어나는 일 없이
죽어버리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며 흐느껴
울었다.


  4. 사춘기

  여름 별장

  수잔은 열 살이 되던 해에 처치 스쿨을
마치고 노르쉐핑에 있는 소년 음악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동들을
위해 설립된 일종의 특수학교였다.
모두해서 6년간의 과정으로 되어 있었는데,
음악에 관한 학과목들이 많다는 점이 보통
학교와 다른 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악보 보는 법을 익히는 한편
피아노와 플룻 연주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매 학기가 끝나는 여름마다 각
관공서의 강당에서 많은 학부모와 시민들이
발사야?
  군의관이 물었다.
  또한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고전 발레
교습 시간이 있었는데, 수잔은 다른
정규적인 교과목보다도 이런 특별한
시간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수잔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외따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중급반 5학년 땐
부모가 배우인 한나라는 친구와 사귀어
가깝게 지내고 있을 뿐 다른 친구는
없었다.
  친구와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는 그 애
집에도 놀러가고 또한 자기 집으로도
초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양어머니는
수잔이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언젠가 한나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땐 그
우울하고 창피스러운 기분만 들었다.
호깐이 친구를 데리고 오면 과자와 쥬스를
내주며 친절히 대하는 것에 비하면 영
형편없는 대접이었다.

  어둡고 우울했던 어린 시절을 통해서
그래도 수잔이 가장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일은 카이사와의
교분이었다.
  수잔이 열한 살이 되어 5학년에 진학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브링크씨는
노르쉐핑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아담한
별장 하나를 구입했다.
  가족들은 그 후 매년 여름이 오면
그곳으로 가서 몇 주일 동안 휴가를
즐겼다.
위에 서 있었으며, 맞은편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면 멀리로 들판이 내려다보이고 그
들판 너머로는 울창한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양아버지가 호깐과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동안 수잔은 들판을 다니며 꽃과 산딸기를
따오고는 했다. 때로 숲까지 혼자 들어가
버섯과 부루베리를 소쿠리에 한아름
담아오는 적도 있었다.
  양어머니는 처녀 시절 스웨덴의 전통
요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쳤을 만큼 음식
솜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호수에서
잡아온 물고기에 수잔이 숲에서 따온
산딸기와 버섯을 곁들여 근사한 요리를
만들어 주고는 했다.
수잔을 혹독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낮엔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밤이 되면
벽난로 앞에서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별장 거실에는 오래된 벽난로가 있었다.
양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엔 으레
그곳에 불을 지피고는 했다. 그곳 기온은
여름이라 하여도 밤이 되면 쉐타를 입어야
할 만큼 서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가족들은 그 앞에 둘러앉아 책을
읽거나 얘기를 나누었다. 방 안이 따뜻해질
무렵 수잔은 종일 들판을 쏘다닌 탓에
졸음이 와서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면
양아버지는 수잔을 안아서 침대에
뉘어주셨다.
  불행한 생활 속에서도 수잔이 모처럼
있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뒤뜰에서 마른
참나무 장작을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날은 불을
지펴도 장작이 잘 타지를 안았다. 연기가
거실로 흘러나와 자욱해지기만 했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모두들 재채기를 하고
훌쩍거리는데 어디선가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새소리가 들려요, 아빠!"
  호깐이 제일 먼저 그 소리를 알아듣고
소리쳤다.
  "새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거지?"
  "굴뚝 속에서 들려요."
     ?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수잔이
대답했다.
  "굴뚝 속에서?"
  "이제 보니 새가 빠져서 굴뚝이 막힌
모양이에요."
  브링크 부인이 방석으로 연기를 몰아내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
  "새가 굴뚝에 빠졌으면 어떻게
꺼내지요?"
  "호깐, 손전등을 가져와라."
  브링크씨가 불쑤시개를 놓으며 말했다.
  호깐이 안방으로 달려가더니 잠시 후
손전등을 찾아가지고 나왔다. 브링크씨는
손전등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브링크씨는 창고에서 사다리를 찾아다
벽에 기대 세워놓고 그 위를 오르기
나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다리를 다 오른
브링크씨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붕을
조심스럽게 딛으며 굴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굴뚝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전등 붐빛을 비추자
굴뚝 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잔
나무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새둥우리가
보였다. 그 안에서 조그맣고 새까만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이며 가냘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있어요?"
  아내가 거실에서 묻는 말소리가 굴뚝을
통해 울려왔다.
  "새가 있소."
  브링크씨가 굴뚝을 통해 말했다.
  "정말이오."
  "그럼 어쩌지요?"
  "선반에 낚시대가 있을 거요. 그걸 좀
가져다 줘요!"
  "낚시대로 어쩌시게요?"
  "새를 꺼내야 할 것 아니오!"
  부인은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선반 위에 놓아둔 낚시대를 꺼내
창문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호깐! 이 낚시대를 지붕에 있는 네
아빠한테 갖다 드려라!"
  호깐이 달려와 낚시대를 받아들고
번개처럼 뛰어갔다. 그리고 지붕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사다리 위를 기어올라갔다.
  "호깐! 올라오지 마, 위험해!"
마지막 칸에서 멈춰섰다. 브링크씨가 지붕
위를 걸어와 낚시대를 받아들고는 다시
굴뚝 있는 데로 돌아갔다. 호깐은 엉금엉금
뒤로 내려와서는 줄기차게 지붕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수잔의 옆에 나란히
붙어섰다.
  밤하늘엔 별빛이 총총했다.
  두 아이는 가벼운 흥분과 기대감을
가지고 지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하늘으르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굴뚝 부근에서 손전등
불빛이 번쩍였다. 브링크 부인이
조심하라고 외쳐대는 소리가 굴뚝을 통해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여름날 밤의 훈훈한 미풍 속에서
나뭇잎들이 가볍게 살랑이는 가운데 지루한
  기대감도 시들해져 갈 무렵, 브링크씨가
지붕을 조심조심 걸어오더니 낚시대를
늘어뜨리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호깐, 미끼통에 가보면 갯지렁이가 있을
거다. 그걸 한마리 꺼내다 낚시 바늘에
끼우거라."
  호깐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느릿느릿
돌아섰다. 재촉하는 소리가 두 번 들리고
나서야 호깐이 손가락에 꿈틀거리는
갯지렁이 한 마리를 들고 모습을 나타냈다.
브링크씨는 호깐이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끼운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낚시대를 높이
들고 지붕 위를 거슬러 올라갔다.
  또 한번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며 손전등 불빛이
번쩍거렸다. 그 사이 호깐은 하품을 하며
오도카니 웅크리고 앉아서 턱을 고인
모습으로 지붕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이 더 지났다.
  이윽고 양아버지가 사다리를 내려오는
것을 보고 수잔이 슬며시 일어나 다가갔다.
  "넌, 아직 안 들어가고 있었구나."
  "새는 못 꺼냈어요?"
  "꺼냈다....... 보여 주랴?"
  "정말이요?"
  "그래. 이것 봐라."
  브링크씨는 자기의 커다란 주먹에 손전등
불빛을 비추었다. 수잔이 고개를 내밀어
보니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조그만 새끼새
한 마리가 머리를 삐쭘히 내밀고 새까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라졌다. 수잔은 양아버지를 따라 마당을
지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동그란
손전등 불빛 속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새끼새를 들여다보았다.
  "입에서 피가 나요."
  낚시 바늘을 뽑아낸 부리 안쪽 자리에
검붉은 핏방울이 몇 점이 묻어 있었다.
입안이 아파서인지 새끼새는 지저귀지도
못하고 부리를 벌린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수잔이 약상자에서 꺼내 온
머큐롬을 브링크 부인이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 사이 브링크씨는 다시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벽난로 바닥에 새둥우리가 부서져내려
장작 위로 옮겨 붙었다. 둥우리 속에서
부화되지 못한 채 깨져 버린 알이 두 개 더
있었지만 브링크씨가 아이들 모르게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새는 말하면 일종의 들까치류에
속하는 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를 무렵 아버지가 두
아이에게 말했다.
  "날지를 못하는 걸 보니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되는 것 같다."
  "어미새는 왜 굴뚝 속에 집을 지은
거예요?"
  "아마 굴뚝인 줄 모르고 그랬겠지."
  "연기가 나니까 새끼를 버리고 도망간
거예요?"
  "버렸다기보다는 데리고 갈 수가 없었을
  "처음엔 굴뚝 끝 가장자리에 지었던 집이
굴뚝 속으로 빠지는 바람에."
  "어미새가 곧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겠으니 어미새가 오면
물어봐라."
  그때 수잔이 어렵사리 입을 떼어
양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이 새 제게 줄 수 없어요?"
  수잔은 이 새끼새가 너무 귀엽고 마음에
들었다. 이 새를 보는 순간부터 갖고 싶은
생각에 줄곧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엄연히
호깐도 있는데 자기가 갖겠다고 나서는
것이 너무 당돌할 것 같아 말을 못 꺼내고
가슴만 졸이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말을
했던 것이다.
  "호깐만 좋다면 나는 허락하겠다."
살폈다.
  갑자기 호깐은 입을 다물고 얼굴을
새끼새에게로 바짝 디밀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잔은 숨이 막힐 것처럼 조마조마햇다.
제발 호깐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
않기만을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브링크씨가 물었다.
  "호깐, 뭐하고 있니? 어서 대답해야지.
수잔은 이 새를 갖고 싶어서 네 허락을
받고 싶다는구나."
  호깐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새끼새에게
시선을 박은 채 우물쭈물 말했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묻는 거지? 나는
상관없으니 수잔 너나 가져."
  호깐은 열한 살이 되면서부터 부쩍 어른
티를 내려고 했다. 수잔보다는 불과 생일이
네 달 빨랐지만 때로는 수잔을 훈계하는 듯
건방진 태도로 허세를 부리는 적도 있었다.
  이것은 브링크 부인 탓이었다. 부인이
그럴 적마다 대견스러운 듯 칭찬을 하는
통에 더 그렇게 버릇이 든 것이다. 그래도
뜨개질을 하며 호깐이 뭐라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부인은 그 말을 듣자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더낙 보다.
  "보세요. 우리 호깐은 이젠 아주
어른이라구요.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대견스럽지 않아요? 수잔, 넌 참
훌륭한 오빠를 가진 걸 자랑으로 여겨야
해. 뭐하고 있니? 어서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고서."
  "고마워요, 오빠."
  "고맙기는. 나한테 고마워할 게 아니라
새를 잘 돌보기나 하라구."
  "어머나, 저것 좀 봐요! 당신 방금
호깐이 하는 말 들었어요?"
  무릎 위에 놓인 뜨개질감을 떨어뜨리며
브링크 부인이 기쁨에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나의 친구 카이사

  수잔은 새까만 아기새에게 카이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굴뚝 속에서 놀란 공포를 치유해
주기 위해 대단히 정성들여 새를 돌보았다.
창고에서 찾아낸 헌 새장을 정성껏 손질해
집도 마련해 주었다. 낚시 바늘에 찔린 입
재재거리며 지저귀기 시작했다.
  수잔은 낮동안 새먹이를 찾아 들판을
쏘다녔다. 메뚜기와 갯지렁이 따위를
잡아와 충분한 식량거리와 간식거리를
마련해서 카이사가 배고픔을 모르고 자랄
수 있도록 마음을 써주었다.
  때로는 카이사를 직접 데리고 메뚜기
사냥을 나가는 일도 있었다. 수잔이 키가
크고 무성한 풀밭으로 쪼그리고 메뚜기를
향해 접근해 가는 동안 카이사는 그 뒤를
깡충거리며 따라왔다. 그리고 수잔이
메뚜기를 잡으면 냉큼 달려와서는 얼른
먹어치웠다.
  카이사는 오래지 않아 날개를 사용하여
하늘을 날아다닐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도
수잔이 부르면 날아와서는 어깨에 앉아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여름 휴가가 끝나던 날 수잔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카이사를 집으로 데려가도
좋아요?"
  "새를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이냐?"
  "네. 이제 카이사는 혼자 힘으로 먹이도
구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순하게 길들여져
있어서 집에 데려가도 잘 키울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새가 집 안 아무데나 똥을
갈기면 어떡하지?"
  "집 안엔 못 들어가도록 하고 창고에서만
키우겠어요."
  "네가 책임지겠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마침내 양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카이사를
아버지가 연장들을 보관하고 있는 지하
창고에다 카이사의 둥우리를 마련해
주었다.
  카이사는 낯선 도시에서도 잘 적응했고,
어느새 수잔은 새의 태도만을 보고도
기분을 알아맞출 정도로 친밀감이 생겼다.
  카이사는 기분좋을 때는 깃을 세우고
목을 길게 뽑으면서 날개를 펼쳐 보였고,
반대로 무섭거나 언짢을 때는 목을 잔뜩
움추리고 깃털에 제 머리를 박은 채 꼼짝도
않고 토라진 모습을 보였다.
  세 달이 지났을 때 수잔은 카이사를
흉내내어 새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와 정원을 들어서면서부터는
언제나 새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그러면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카이사가
것이었다. 그리고 때로 수잔은 카이사가
다른 종류의 새들과 함께 가로등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이듬해 여름, 다시 별장으로 갔을 때
수잔은 카이사도 함께 데리고 갔다.
  언제나 여름 별장에서의 생활은
비슷했는데, 어머니는 거실이나 풀밭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와
호깐은 호수로 나가 낚시질을 했다. 그
사이 수잔은 카이사를 데리고 들판을
다니며 산딸기를 따거나 숲으로 들어가
버섯을 찾으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오후가 되면 언덕 위에 올라갔다. 석양이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는
시간이었다. 그럴 땐 카이사도 가만히 곁에
앉아서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이 구슬픈
  '카이사, 너도 어미새가 보고 싶어
그러는 거니?'
  수잔은 카이사가 어릴 때 헤어진
어미새가 보고 싶어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이 새에 대해 한층 더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와의 슬픈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 오후, 가족들은 호수가 바라보이는
풀밭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무리의 새들이 떼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요란스레 퍼덕이며
주변의 나무들 위에 앉았다.
  거의 쉰 마리는 될 만큼 많은
새들이었다. 그처럼 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공포감에 빠졌다.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도 시끄럽게
깍깍 짖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풀밭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먹고 있던
카이사가 갑자기 훌쩍 날아올라 새들이
있는 곳을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공중에 날아오르더니 무리를 지어
호수 위를 맴돌며 무섭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대낮의 하늘은 먹구름이라도
뒤엉킨 것처럼 새까맣게 보였고, 거울처럼
푸른 호수의 수면 위로는 검은 새떼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어른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란을 피우던 새떼들이
호수의 수면이 다시 고요해지고 하늘엔
밝은 태양이 비쳤다.
  넋을 놓고 있던 가족들은 정신이 들었다.
  가족들은 어쩌면 새들이 카이사를
데려가고 싶어서 그 소란을 피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날 저녁이 되었다.
  모두들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수잔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카이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호수의 물빛이 어둠에 덮여
사라지고 하늘엔 별빛이 총총히 빛나고
있을 때까지도 카이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잔은 깜깜한 풀밭에 혼자 앉아 흐느껴
울었다.
  카이사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소중한 것을 잃은 슬픔이 가슴 속 깊이
사무쳐 왔다.

  먹구름

  브링크씨는 텔레비전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에서 15년 동안 근무해 왔다. 그러다
수잔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와 스스로 공장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공장은
적자를 내며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됐다.
그러자 풍족하던 살림이 단번에 기울고
말았다.
외출도 삼간 채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집 안엔
무겁고 음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1975년 3월의 일이었다.
  양어머니는 그때부터 요리강습소에
일자리를 얻어 부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살림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면서부터 한결
더 히스테릭해져 갔고, 마음 속에 축적된
갈등과 불만들을 수잔에 대한 분풀이로
한꺼번에 퍼부어대고는 했다.
  이처럼 수잔의 사춘기는 몹시 힘든
시련의 시간과 함께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양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며 수잔을 괴롭혔다. 그녀는
수잔이 견딜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려야만
모양이었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우리 집에 온 뒤부터는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넌 불행한 별자리를
타고난 게 틀림없어! 그래서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결국 불행하게 만드는
거라구!"
  양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의 원인이
마치 수잔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댔고 어느 것이나 수잔을 꾸짖을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다.
  그녀는 한참 수잔을 야단치다가도 불쑥
명령했다.
  "고개를 들고 날 똑바로 쳐다보란
말이다!"
금세 되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거지?"
  수잔은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면
들라고 소리쳤고, 쳐다보면 노려보는
까닭이 뭐냐고 다그쳐댔다.
  "노려보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아니긴 뭐가 아냐!"
  변명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욕설을 퍼부어댈 때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현명했다. 만일 한마디라도
말대답을 했다가는 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수잔은 단지 겁에 질려 있었을 뿐이지
녀를 노려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별수없는 일이었다. 하도 그런
식으로 질책해대는 바람에 수잔은 혹시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되어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내가 널 볼 때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니?"
  "뭐?"
  "널 볼 때 내 눈이 노려보는 것 같지
않느냔 말야."
  그 질문에 친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다.
  "네 눈이 뭐가 어떻다는 거니? 까맣기는
하지만 사슴처럼 착해 보이는데. 내가
  친구들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다며 어리둥절해 했다.
  그런 말을 듣고서야 수잔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아무도 내 눈이 노려보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하던데요?"
  그래서 수잔이 이렇게 말했을 때
양어머니는 다짜고짜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수잔을 욕해댈 때의 그녀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악을 써가며
욕할 때의 모습이 아주 끔찍할 정도로
흉칙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수잔은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와
갈기갈기 물어뜯을 것처럼 공포감을
느꼈다.
몰라 늘 마음이 무겁고 겁에 질린 채
살아야 했다. 양어머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경과민에 걸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이처럼 나쁜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나타났다.
  "별 이상한 아이도 다 보겠군! 왜 날
그렇게 겁내는 거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는 거냐?"
  처음 보는 사람들은 기분나쁜 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양어머니의 꾸짖음
때문에 생활의 활력소를 잃고 의기소침해
있는 수잔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싫어하는 이상한 소녀로 비쳐졌던 것이다.
  아마, 이런 영향 탓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들어 수잔은 깊은 밤중에 현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그곳까지 온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에 의아하고
덜컥 겁이 났다.
  일상에서 받은 여러 가지 압박감들이
그처럼 몽유병 증세로서 나타났던 것일까?

  동전 5크로나

  수잔은 중급반 시절부터 고전 발레를
익히고 피아노 교습을 받았던 탓에
자연스레 율동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1975년 12월 초부터 재즈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지도하는
선생은 수잔의 솜씨를 칭찬했다.
  한바탕 춤을 추다보면 번잡한 생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수잔은 그즈음 댄스를
있었다.
  오후 네 시 반에 학과가 끝나면 수잔은
전철을 타고 시내로 갔다. 그리고 두 시간
가량 연습을 하고 여섯 시 반에 출발하여
일곱 시경엔 집까지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 일과가 한 달 가량 계속되어 새해가
시작된 지도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후였다.
  그날도 수잔은 여느 때처럼 댄스
교습소에서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에 들어섰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후라 몸이 으슬으슬 춥고 나른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오후 일곱 시가 가까워지자 거리엔
어둠이 깔렸다.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승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는데
그날따라 전동차의 도착시간이 늦어지고
있어 수잔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양어머니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오후
일곱 시까지는 귀가하도록 엄격히 일러왔기
때문에 시간을 넘기면 혼날 것이 걱정됐던
까닭이다.
  수잔은 추위와 조바심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전동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저쪽 편에서 남루한 차림새의
노인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슬며시 수잔의 곁에서 멈춰섰다.
  그러더니 노인이 말을 거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느
나라에서 이곳까지 온 거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 취한 모습으로 술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가끔씩 몸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중국 아가씨 아니면...... 틀림없이
일본 아가씨일 테지."
  노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수잔에게로 다가왔다. 주름진 눈두덩은
게슴츠레 풍리고, 와이셔츠 깃이 바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수잔은 겁이 나서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노인이 추근추근
따라오며 말했다.
  "날 겁내지 말아....... 난 나쁜 사람이
아니란 말야!"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무슨
있었다. 수잔은 당황한 모습으로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때 노인이
주섬주섬 양복 주머니를 뒤지더니 5크로나
동전 하나를 내밀며 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선물이나 받으라구....... 내가
아가씨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이 5크로나
동전이 전부니까!"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몸을 피하려
하자 노인이 계속 따라오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내 선물을 받아주지 않으면 못 가게
하겠어....... 그러니 어서 이걸 받아!"

  겁에 질려 몸을 움추리고 달아날 틈만
보고 있는데, 노인이 불쑥 손목을
손목을 빼내려 했으나 노인은 완강히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또 강요했다.
  "이걸 받기 전엔 절대 놔주지 않을
테야!"
  수잔은 엉겁결에 동전을 받았다.
  그제야 노인이 손목을 풀어주며 말했다.
  "그 동전이 아가씨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구....... 그럼, 안녕히 잘 가시오!"
  노인은 공중에 치켜든 두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며 비틀비틀 멀어져 갔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잔은 받아든 동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전동차가 도착한 것을
보고 되도록 멀리 떨어진 칸을 향해

  수잔은 동전을 서랍 속에 넣었다.
  왜 노인이 까닭도 없이 동전을 주었는지
자꾸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술취한 노인이 취중에 장난을
친 것이라는 판단밖에 안섰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난 뒤에도
양어머니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연
여배우를 헐뜯어 댔을 뿐 수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안 보였다.
  수잔은 얼마쯤 맞장구를 쳐주다가 방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데 쿵꽝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깜짝 놀라며 침대에서
  그때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며 양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섰다.
  놀라서 서 있는 수잔에게 그녀가 몹시
격노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오후에 어디 갔다 왔는지 어디 말
좀 해봐라!"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십 분쯤 귀가시간이 늦은 것 때문일까?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수잔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학교 끝나고 무용학원에 다녀왔어요."
  "닥쳐! 무용학원에 안 가고 다른 데 갔다
왔지?"
  "어딜요?"
  "내게 묻지 말고 네 입으로 대답해 봐!
너 오늘 다른 데 갔다 온 데가 있어 없어?"
  "학교 끝나고 무용학원 갔다 곧장 집으로
왔단 말이냐?"
  "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하며 대답했다.
양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스런 눈길을 던졌다. 그녀가 조용히
명령했다.
  "어디 네 지갑 좀 보자꾸나."
  "지갑은 왜요?"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수잔은 서랍에서 지갑을 꺼내다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녀가 지갑의 쟈크를
열고 안에 든 것을 살펴보았다. 지갑 안엔
돈이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이게 다 웬 돈이냐? 어디서 났지?"
  돈을 보자 양어머니의 눈빛이 무섭도록
없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대꾸했다.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둔 거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갑 안엔
열흘 전 생일날에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준
돈도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얘기를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나 양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너 또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어서
솔직히 자백해라! 너 이돈 어디서 난
거지?"
  아버지가 말해 주어 어머니는 이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사실을 알고서
묻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 주었다.
  "생일날 아버지가 주신 돈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끔찍스런 말을 했다.
  "거짓말 마! 너 이거 몸을 팔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이지?"
  "무슨 돈이요?"
  "몸을 판 대가 말이다! 몸을 판 대가로
받은 돈이란 말이다!"
  그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통에
수잔은 낯이 화끈거렸다. 그 말을 듣자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입술만 깨물고
있으려니 양어머니는 혐오스런 말로써
다그쳐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자백하지 못하겠니? 어서 말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구? 네가 몸을
팔고 돈을 받는 것을 본 증인이 있는데도
그렇게 딱 잡아뗄 거냐?"
  비로소 고개를 들고 놀라며 물었다.
  "증인이 누구예요?"
  "호깐이다! 네가 오늘도 어떤 남자에게
몸을 팔고 전철역에서 돈을 받는 걸 마침
그 애가 보았단 말이다. 이래도 잡아뗄
셈이냐?"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난 그래도 네가 얌전한 줄 알았었다!"
  양어머니가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설마 내 집에서 갈보년을 기를
  순간 몸이 뻣뻣이 굳어져 왔다. 치욕스런
감정이 뜨거운 덩어리처럼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오르며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녀가 자기
몸을 팔아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수잔은 반문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말해 보라! 말 못하겠니?"
  말하지 않았다. 변명해봐야 소용없을 게
뻔했다. 어머니는 지금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신의 가학성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이 일을 가지고 괴롭힐 게
틀림없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수잔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억센 손바닥이 뺨 위로
날아왔다.

  자살 미수

  사는 것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활이 끝없이 지속될 것 같아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수잔은 이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흐느껴 울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양어머니를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학대를 받을 때마다 칼로 그녀를 찌르는
속으로 양어머니를 찌르는 장면이 연상되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를 드린 적도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자신이 이 다음에
자라서 반드시 잔인한 복수를 해주겠다고
혼자서 다짐하고는 했다.
  수잔은 이러한 심정들을 일기에 적었다.
절망적인 심정을 일기에 적는 가운데
슬픔과 분노를 발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어머니로부터 받는
고통을 솔직히 기록해 나가면서 그녀에
대한 증오심과 보복의 결심마저도 적었다.
  수잔은 그 일기장을 눈에 띄지 않게 책상
서랍 밑에 잘 감추어 두었다. 만일
양어머니가 그걸 보게 된다면 끔찍한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
일기장이 안 보였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수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죽인 채 가슴만 두근거리고 있는데
브링크 부인이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시뻘겋게 격노한 얼굴이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계집애
같으니!"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수잔의 일기장을
북북 찢기 시작했다. 그것을 얼굴에 힘껏
집어던지고 나서 당장 다가와 뺨을
후려갈겼다.
  "발칙한 년! 뭐가 어쩌고 어째!"
  머리채를 잡아쥐며 마구 흔들어대면서
  "이제까지 키워온 공도 모르고 나를
어쩌겠다구? 그래, 자 어서 내게 복수를
해봐라! 어서 날 죽여보란 말이다!"
  브링크 부인은 수잔의 뺨을 사정없이
철썩철썩 갈겨대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녀의 억센 손바닥이
뺨에 닿을 때마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덩이로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수잔은
얼굴을 감싸쥐고 무릎을 구부렸다.
  이내 머리칼이 뽑혀 나갈 듯한 통증이
왔다.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둔탁한 물건이 몇 차례인가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멍멍해진 귓전엔
사정없는 욕설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끔찍한 욕설!
  호된 매질!
고통을 견뎌야 했다.
  욕설과 매질은 얼마 동안이나 쉴 틈도
없이 계속됐다.
  이윽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욕설이 그치고 매질이 멈추어졌다.
  세차게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쥐죽은 듯 정적이 찾아왔다.
  수잔은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눈물에 섞이며 붉은
핏방울이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물기로
젖어 있는 시야엔 발기발기 찢겨진 채
흩어져 있는 일기장 조각들이 보였다.
  음울하게 감도는 정적 속에서 수잔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있었다.
  노란 안개가 낀 것처럼 어렴풋한 시야에
텅 빈 방 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한동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고, 머리 속엔
커다란 빈 구멍이 뚫린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잠 속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점점 불투명했던 혼수상태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 속엔 미소를 짓고 있는
양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몹시 흐릿한 가운데 두 겹으로 보였다가
다시 세 겹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호깐과
양아버지의 얼굴도 보였다. 수잔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단편적인 얘기를 통해 자신이
빠져 있었고, 병원에서 위세척을 받은 뒤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모든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거실 장롱 속의 갈색 약병이
먼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쵸코렛 사탕처럼 알록달록한 스물 몇 알의
수면제들. 양어머니에게 매를 맞은 날 밤
거실로 내려가서 가져온 수면제들을
한꺼번에 삼킨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몸이 좀 어떠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나니?"
  양어머니가 침대 곁에 붙어 앉아 물었다.
이때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음성이
다정했고, 힐난한다기보다는 걱정하는
투였다.
  "하여간 넌 대단한 짓을 저질렀다만,
어리석은 짓이다. 한두 차례 매 좀
맞았다고 해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면
세상엔 남아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게야."
  수잔은 눈을 감은 채 그녀가 하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일부러 다정한
척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깨어나게
된 것에 슬픈 기분만 더했다.
  "호깐이 너 때문에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니? 네가 의식을 잃자
호깐이 너를 떠메업소 병원까지 줄곧
쉬지도 않고 달려갔다. 한번도 쉬지 않고
줄곧 말이다. 아무튼 네가 목숨을 구한
것은 호깐 덕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또 다시 지긋지긋한 생활이 이어질 것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랬었다.
  그래도 죽음의고통이 살아가면서 겪는
괴로움보다 훨씬 덜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으니 바보짓을 했을
뿐이라는 자괴감만이 남았다.
  "쉬도록 내버려두고 그만 내려갑시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가 말하자
양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는 수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일어섰다.
  그들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몸이 나른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처럼 무감각한 상태 속에서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때 불현듯 친어머니 생각이
났다.
  자기를 이처럼 불행하게 살도록 만든 게
다 친어머니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너무도 미웠다. 그리고 너무도 그리웠다.
  어머니는 왜 나를 버렸을까......?
  내가 나쁜 아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버렸던 것일까......?
  그리움과 원망이 뒤엉킨 착잡한 심정으로
가만히 친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다만 확실한 점은
그녀도 자신처럼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동양 여인일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지금 어떤 모습을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도 친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갈망에 가슴이
메어왔다.
  언제쯤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내가 어른이 되면, 그때는 만나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너무 어렸을 때 떠나와 그토록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온 탓에 아무것도
기억되는 점이 없었다.
  설혹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서로 알아볼
수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니, 아무래도 그들을 만나는 기적 같은
것은 두고두고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동안 자신이 딸을 입양시킨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생각만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양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녀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손을 수잔에게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네게 아주 좋은 선물을 주마."
  그녀는 리본으로 묶인 조그만 선물
상자를 내밀어 보였다. 끈을 풀어보자
안에서는 눈화장품 세트가 나왔다.
  "몸이 회복되면 이걸로 네 눈을 예쁘게
그리거라. 그리고 함께 쇼핑을 가자꾸나."
  브링크 부인은 수잔의 부어오른 눈을
만져주면서 건강이 회복되면 백화점에 가서
새옷을 한 벌 맞춰추겠다고 약속했다.
학대만 해오던 그녀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오후가 되어서야,
수잔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지내서 그런지
현기증이 일며, 조금만 움직여도 곧 피로를
느꼈다.
  수잔은 그날 밤엔 다시 또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



  5. 18세의 자유

  집을 나오다

  1981년 봄.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수잔은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대로 집을 나와 혼자서의 힘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
  하루라도 빨리 양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을 나와 혼자 살려면 거처할
곳이 있어야 했는데 방을 마련할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 고민하는 차에, 마침
학교 기숙사에 빈 자리가 나게 된다는
  수잔은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아이들에
앞서서 먼저 신청해 두었는데, 두 주일이
지나서 마침내 입주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남은
문제는 양부모를 설득하는 일뿐이었다.
물론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수잔은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집을 나올 결심이었다.
  수잔을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고백했다.
  "느닷없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언제나 그렇듯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양어머니는 물어왔다.
없는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도 묵묵히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학교 기숙사에 자리가 나왔어요. 거기에
기거하게 될 거예요. 이젠 저도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됐잖아요."
  수잔이 말하자 금방 어머니가 반박했다.
  "물론 너도 열여덟 살이 됐으니 이젠 한
사람의 성인이다. 하지만 그 열여덟 살이
가장 위험한 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야 요조숙녀처럼 처신할지 모르지만
나가서 혼자 살게 되면 세상 남자들이 널
가만 놔둘 줄 아니! 이건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이 집에서
지내거라!"
  물론 허락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양어머니의 반대는 생각보다도
완강했다.
  수잔은 난감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나서
양어머니가 떠보는 것처럼 물었다.
  "너 혹시 집안 일을 시켰다고 삐쳐서
그러니? 이제 다시는 네게 집안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널 아주
여왕님처럼 대우해 줄 테니 잠자코 집에서
눌러 있도록 해!"
  "일을 시켜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는
혼자서 살아갈 나이가 됐다고 생각해서
결정한 거예요."
  "글쎄, 고집 좀 부리지 말아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허락하지 않아도 나가겠어요."
  과감히 말해 버렸다.
  "아니,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허락도
없이 나가겠다는 거냐?"
  "저도 이젠 열여덟 살이에요. 이건 제
문제니까 제가 알아서 결정하겠어요."
  "만일 집을 나가 살겠다면 한푼도
생활비를 보태주지 않겠다! 그래도
나가겠단 말이냐?"
  "그래도 나가겠어요."
  "그럼 나가라! 네가 정 못된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다!"
  야어머니는 몹시 분개한 모습으로 홱
돌아앉았다.
  "죄송해요, 아빠."
  조그만 소리로 말하며 수잔은 조용히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 무거운 심정으로
닫고 털썩 침대에 주저앉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침내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내일이면 어머니의 간섭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먹구름 속에서
햇살이 비쳐드는 느낌이었다.
  기쁨이 간지럼처럼 가슴을 자극해 왔다.
  수잔은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서 팔짝
일어나서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만큼
가벼운 심정으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갈
작정으로 가져갈 물건들과 두고 갈
물건들을 분류하며 정신이 없는 중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양어머니가 팔짱낀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고약한 심정이
들어 견딜 수 없었던지 그녀가 입을
삐쭉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말 배은망덕한 계집애로구나.
이제까지 키워준 은공도 모르고 제멋대로
집을 나가겠다고? 네가 애시당초
버르장머리 없는 애라는 건 알아봤다만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굴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죄송해요."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죄송하다고 말하는 거냐? 그래 언제 나갈
셈이지?"
  "내일 아침 일찍 가겠어요."
  "왜 내일 아침이냐? 이왕이면 오늘
나가지. 말이 나온 김에 당장 나가거라!"
  "그래, 더 얼쩡거릴 것 없이 당장 나가란
말이다!"
  갑자기 귀청이 울릴 만큼 세차게 문이
닫혔다.
  그러나 문은 금세 다시 열렸다. 그리고
양어머니의 험악한 얼굴이 미처 못다한
말을 마저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한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걸로 우리 관계도 끝났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넌 이제부터 우리 가족이
아니야. 그러니 다신 이 집 안에 발들여
놓을 생각일랑 말아야 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방문이 닫혔다.

  수잔은 가방을 꾸린 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호깐의 방을 찾아갔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호깐은 침대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운
자세로 담배를 피우며 방으로 들어서는
수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담뱃재를 털며 호깐이 물었다.
  "나 오늘 집을 나가기로 했어."
  "무슨 소리니, 그게?"
  "학교 기숙사에서 당분간 생활하게
될거야."
  호깐이 담배를 끄고 반듯한 자세로 침대
위에 앉았다.
  "그 사실을 부모님도 알고 계셔?"
  "방금 말씀 드렸어."
  "그래서 시끄러웠구나? 그런데 뭐래?
허락했단 말야?"
  그러자 호깐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잠자코
미소지을 뿐이었다.
  "아직도 팔목이 아프니?"
  "괜찮아. 거진 다 나았어."
  호깐은 두 주일 전 부모의 허락도 없이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고를 낸 후
근신처분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가로수를
들이받아 차는 망가지고 자신은 팔에
골절상을 입었다. 호깐은 아직도 그때 다친
팔이 완쾌되지 않았는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어색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호깐과도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문득 어릴
적의 일들이 떠올랐다. 호깐은 제 어머니의
두둔을 받으며 몹시 수잔을 괴롭혀댔다.
열서너 살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앙숙처럼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철이
그런대로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대해 왔다.
  "호깐, 한가지 물어도 돼?"
  "뭔데?"
  "너 국민학교 이학년 때 쥴리 지우개를
내 필통 속에 넣어서 날 골탕먹였던 일
기억나?"
  유년시절을 통해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즐거운 추억처럼 생각나서 수잔은
가벼운 기분으로 물었다. 그러자 호깐이
말끔히 바라보며 웃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끝까지 잡아뗄 작정이구나?"
  "끝까지 잡아떼면 어떡할래?"
  "까불면 멀쩡한 팔목도 마저 부러뜨려
놓을 거야."
  호깐이 어설프게 한 손으로 팔목을
붙들더니 웃음띤 얼굴로 일어나며 물었다.
  "아주 싹 발길을 끊어버릴 작정은
아니겠지? 자주 놀러 오는 거지?"
  "네 엄마가 다신 발들여 놓을 생각일랑
말랬어."
  "엄만 원래 변덕장이잖아. 금방 또
마음이 바뀔 거야."
  "그럼 그때 올게. 잘 있어, 나오지 마.
네 엄만 옛날 같지 않아서 요즘은 널
감싸고 돌지도 않는다구."
  그 말에 호깐이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안 나갈게. 그럼 잘 가."
  수잔은 손을 흔들어준 뒤 호깐의 방을
나왔다. 복도에 놓아 둔 가방을 들고
거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왔다. 양부모가
내려놓고 오도카니 서자 양아버지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 갈 셈이니?"
  "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대신 토요일 오후엔 집으로 와서 함께
지내도록 하자."
  "네, 그러겠어요."
  대답을 하고 나서 수잔은 양어머니를
살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꾸도 없었고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걱정만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양어머니가 반응을 안 보이자 아버지가
슬며시 눈짓을 해보였다. 수잔은 가방을
딛는 듯한 기분으로 현관을 향해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갔다.
  브링크씨가 뒤따라 나오더니 수잔에게
말했다.
  "기숙사까지 차로 데려다 주마."
  "아니에요. 그냥 저 혼자 가겠어요.
그러는 게 더 편해요."
  "그래."
  "그럼 교차로까지 짐을 들어다 주마."
  그는 차고로 가려던 걸음을 돌리더니
수잔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정원을 지나 집의 입구를 나섰을 때 그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네 생각은 가상하다만, 혼자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알고 있어요."
전화해라. 네 어머니 몰래 당분간 내가
생활비를 대어 주마."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곧 파트
타임 일자리를 찾아볼 작정이에요."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구나. 알겠다.
아무쪼록 네가 잘해 나가기를 바라겠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나란히 보도 위를
걸어갔다.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침묵을
깨며 수잔이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 보세요."
  브링크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보도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수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은 뒤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직한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미안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잔은 가슴이
뭉클했다. 어깨에 와 닿는 그의 손길이
무척 따스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양아버지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회사로 전화해."
  "그러겠어요."
  브링크씨는 어깨에서 손을 거두며 웃음
띤 얼굴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길을 건너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걷고 있는 그의 등 뒤 저편으로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집이 보였다.
  수잔은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고개를
들어 이층에 나 있는 자기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밤들을 고통과 슬픔 속에서
보냈던 그 방을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문득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은 자신의 슬픔이 배어 있는 하나의
알이었다.
  네 살 무렵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14년간에 걸친 추억과 슬픔들이 그 방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제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운
생활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수잔은 길 위에 놓여 있는 무거운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새로운 생활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꿈꾸는 자유

  집을 나온 날부터 수잔의 인생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또 어느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 그 자유가
갑자기 주어진 것이었다. 수잔은 마치 오랜
수형생활에서 풀려난 듯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신의 자유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활발하게 열매맺게 하는 고귀한
토양이었다. 수잔은 양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압박감에서 벗어남에 따라 빠른
속도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점이었다.
  수잔은 오래 전부터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열등감 때문에 언제나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겉도는
쓸쓸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사람의 당당한
성인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됨에 따라 끊임없이 내면을 괴롭혀오던
열등감을 극복하고 친구들과도 꺼리낌없이
어울리는 밝은 성격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얼굴엔 언제나 수심의
그늘이 드리운 채 말이 없는 소녀였다.
그러나 이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무한한 기쁨이 얻어질 수 있다는
  수잔은 친구들과 밤을 지새우며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카드놀이도 하고, 기숙사의 홀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행복했다.
  자신의 힘으로 혼자 살아야 했던 까닭에
경제적인 곤란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내면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된 나날이
되었다.

  양부모의 집을 나오고 나서 수잔이 제일
처음 한 일은 한국에 있는 친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수잔은 자신의 출생과 입양에 관한
사실을 알기 위해 먼저 스톡홀름에 있는
조회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입양 센터의
직원들은 그에 관한 사실들을 밝히기를
꺼리며 일체 알려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별수없이 스웨덴의 관청에 연락해
보았다. 그리고 스톡홀름에 있는
한국대사관에도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답변은 똑같았다. 자신들은 입양에 관한
업무를 취급하지 않으므로 해당 관청을
통해 알아보라는 것뿐이었다.
  수잔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국의
보사부 당국에 편지를 띄웠다. 두 달
가량이 지나 한국에서 보내온 답신은 더욱
허망한 것이었다.
  그들은 1966년 수잔이 입양될 당시의
주소에 조회를 해보았지만, 지금 그곳엔
가족들이 살고 있지 않고 그들이 어느 곳에
답신만을 보내왔다.
  친어머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서 이렇듯 여러모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그러자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와서 친어머니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설혹 운이 좋아 친어머니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녀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의심스러웠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나를 친딸로서 반겨
맞이해 줄 것인가?
  어쩌면 친어머니는 오래 전에 입양시킨
딸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쓰라린 기억을 잊고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헤어졌던 딸이 불쑥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적인 생각은 점점 어떤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만일 찾을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 사이
무슨 연락이라도 있었어야 당연했다.
하지만 그 후 한번도 친어머니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은 바로
그녀가 찾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반증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슬픔을 감당해낼
자신이 있을까?
  생각이 거듭될수록 어머니를 찾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현명하지 못한다는 판단만이
들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문제에
힘으로 헤치고 나가야 할 뿐이지, 생모를
찾았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 수야 없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어머니를 찾는다 하여
대체 무엇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잔은 슬펐지만, 어머니를 찾으려는
노력을 중단하기로 작정했다. 더 이상
친어머니를 찾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꿈에
젖어 살아가다가는 그리움으로 온통 말라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한결같은 소망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대처해 나갈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미깐과 에리까

  기숙사에 들어온 지 2개월이 지났을 때
수잔은 에리까라는 여자 친구를 사귀게
  에리까는 인도네시아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새까만 머리칼에 슬픔이 깃든
듯한 눈망울을 가진 아름다운 에리까에게서
수잔은 특별한 친밀감을 느꼈다.
  에리까는 간호원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둘은 동양적인 외모를 가졌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쉽게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잔은 그
아이의 어둡고 슬펐던 어린 시절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난 아버지의 누이인 고모님 집에서
자라났어. 그녀는 성격이 괄괄하고
우악스런 여자였지. 내 사촌 형제인 자기
친딸은 끔찍하게 위하면서 내게는 걸핏하면
  어찌나 욕을 잘 하는지 난 정말 그녀가
나를 펄펄 끓는 물에 넣어서 죽일까봐 겁을
먹었었지. 한마디로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구. 그래서 난 어서 자립할 수
있는 나이인 열여덟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어.
  그 집에서 그녀와 함께 사느니 차라리
거리로 나와 몸을 팔며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에리까의 얘기를 듣는 동안 수잔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마치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자립할
수 있는 나이인 열여덟 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점마저도 너무도
비슷했다.
  수잔은 에리까와 자신의 공통적인 운명이
보냈다는 단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도
에리까에게는 무조건 잘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둘은 금방 친해져서 서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돕는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에리까에겐 수잔에게 결여되어 있는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었다. 그녀는 곧잘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진실을 아는 자에게 있어서 인생은
허망한 거야.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구. 후회 없는
인생을 즐길 것! 이게 바로 나의
좌우명이란 말야!"
  "수잔, 너나 나나 아주 비참했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신나게 사는 거야! 못된 어른들
앞으로는 무조건 신나게 우리의 젊음을
즐겨야 해, 알겠니?"
  수잔은 어느 면에서 에리까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이제껏 살아오며 겪은
과거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까닭에
에리까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지금부터라도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조급한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이번 주말엔 뭘할 거니?"
  3월의 첫째주 화요일에 에리까가
스케줄을 물어왔다. 별로 할 일이 없다고
말하자 그녀가 제안했다.
  "그럼 이번 주말엔 나랑 스톡홀름에 안
갈래?"
  "무슨 일인데?"
  "남자 친구들과 함께 주말에 스톡홀름에
라이브 쇼를 보기로 했다구. 만일 원한다면
너도 데려가 줄게. 어때?"
  "물론 나도 가고 싶어."
  "좋아, 그럼 이번 주말엔 우리와 함께
스톡홀름에 가는 거다!"
  수잔은 3월 첫주의 주말이 되었을 때
에리까의 친구들과 어울려 스톡홀름에 가서
헤비메탈 가수의 라이브 쇼를 보았다.
공연장 안은 십대의 청소년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가운데 열광의 도가니였다.
  번쩍이는 조명과 환호성 속에서 세
시간에 걸쳐 무대 위를 분방하게 누비는
장면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격렬하고
요란스레 튕겨대는 기타의 선율에 흠뻑
젖어 있노라니 불행으로 얼룩진 과거의
흔적들마저도 깨끗이 해소되어 버리는
  수잔은 그때 들었던 잉위 맘스틴의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테이프를
구입해서 밤새 에리까와 들었다.
  그리고 휴일이 되면 일생중 처음으로
얻은 자유를 기뻐하며 에리까와 함께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나다니고,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둘이서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메탈
사운드를 연주하는 클럽에 가서 춤을
추었고, 수잔은 에리까에게 재즈 댄스의
스텝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춤과 음악에
젖어 그동안 억눌림 속에서 살아오며
누적된 감정의 찌꺼기들을 마음껏 발산해
버리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에리까 외에
여자아이가 있었다. 에리까가 다소
성급하고 불같이 격렬한 성격이었는 데
반해 미깐은 항상 부드럽고 조용한
친구였다.
  그 아이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손에는 늘
조그만 성경책을 지니고 다녔다.
  한번은 수잔이 에리까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있는데 미깐이 다가와서 기독교와
성경에 관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원래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에리까는 당장에 멸시하는 투로
이렇게 반박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조리 너절한
얘기들에 불과해. 어리석은 사람들이
혹해서 빠져들게 만드는 꾸며낸 얘기라구.
  어디 한번 네 빈약한 머리로 진지하게
배었다는 말이 믿어지니? 그리고 보리개떡
다섯 개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은 것이 몇 광주리나 된단 말이냐?
  만일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제발 좀 에지간히 해둬라. 우린
그런 엉터리 얘기보다 이렇게 피부에
와닿는 솔직한 음악에 더 끌린다구.
  그러니 미깐, 우리 앞에서 건방진 설굘랑
그만둬!"
  "에리까, 그건 네가 영혼의 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야."
  미깐이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진실한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 성경에 나오는
얘기들에 대해 불신감을 느끼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에만 길들여지도록 교육받은
탓일 거야.
  물론 세상의 온갖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과학 지식의 힘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해.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다른 힘은 그런 합리적인
사고로는 불가능하고 그보다는 원초적인
우리들 내면의 신앙심을 통해서만이 이해될
수 있는 거야."
  "미깐, 그러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건방지게 날 설교할 생각이야? 경고해
두겠는데 난 네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러니 여기 있을 생각이면 얌전히 입을
닫고 있어. 그렇지 않고 지껄이고 싶다면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야."
  에리까는 참으로 거북할 정도로 혹독하게
기분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웃고만 있었다.
수잔은 두 친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색한 기분으로 말했다.
  "에리까, 네가 종교를 가지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지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적어도 건전한
비판과 야비한 비난은 구별괴어야 하는데
지금 네 말은 비난에 가깝거든."
  "난 기독교인들이 끔찍하게 싫어.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영 딴판이야. 자기의 개인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곧잘 기독교를 믿더라구.
아마 나쁜 짓을 실컷 하고라도 기도를 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에리까, 제발 그만해."
들은 척 흥분해서 자기의 말을 계속했다.
  "날 끔찍이 사랑했던 우리 고모도 아주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어. 그녀는
일요일이 되면 빠뜨리지 않고 교회를
나갔지.
  하지만 교회에 가기 전에 나를 코피가
터지도록 두드려 패고 또 돌아와서는 내게
밥을 굶긴 채 욕설을 퍼부어댔지. 그녀는
나를 마귀새끼라고 욕하면서 자기의 소중한
성경책으로 내 쓸모없는 머리를 마구
때려댔다구!"
  에리까의 말을 듣는 동안 수잔은 자신의
경우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도 비슷한
학대를 받으면서 자라왔다. 하지만
양어머니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종교에 대해서는 눈꼽만치도 관심이
  "에리까,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자신이 기독교인에게 구박받으며
자랐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이야.
  너는 자기의 특별한 경험을 일반적인
경우로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는 거란 말야.
  그건 옳지 못해. 세상엔 종교와 관계없이
나쁜 사람들이 있겠지. 마찬가지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선량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겠니?"
  "하지만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
악독하게 군다는 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위선적이고 나쁘다고 생각해.
미깐, 어때? 내 말이 틀렸니?"
  에리까가 톡 쏘듯이 묻자 미깐이 웃으며
대답했다.
  "에리까, 나도 네 말에 동감이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학대한다는 건 훨씬 더 나쁜 경우라고
생각해."
  "그럼 됐으니 어서 네 방으로 가보지
그래?"
  에리까가 콧방귀를 뀌듯 내뱉았다.
그리고 거만스레 일어나서는 라디오의
볼륨을 최고로 높였다.
  현기증나는 기타 소리가 금세 방 안 가득
울려댔다. 그러자 얌전한 표정으로 웃고만
있던 미깐이 시끄러운지 얼굴을 찌푸렸다.
  요란한 음악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수잔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종교란 무엇일까?

  한국 선원들

  기숙사에 들어온 지 2개월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전에 수잔은 자전거를 타고
에리까와 함께 노르쉐핑에 있는 바닷가로
놀러갔다.
  해안 도로를 따라 페달을 밟으며 한껏
달리고 나자 기분이 상쾌했다.
  얼마 후, 둘은 항만까지 도착하여 가쁜
숨을 가누며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때 가까운 도크 근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던 동양인 선원 세
사람이 수잔을 보고 다가왔다.
  모두들 햇살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서투른 영어로 수잔에게 물었다.
  "아가씬, 동양인 같은데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수잔이 대답을 않고 있자, 에리까가
말했다.
  "얜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하지만 아주
어릴 적에 떠나와서 자기의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정말 한국 사람이에요?"
  선원들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군요. 우린 모두 한국에서 온
선원들이에요."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수잔은
왠지 모르게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요?"
  그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이고 말고요."
?후 그는 그가
말한 구절을 찾아낸 듯 그 부분을 한차례
  수잔은 스웨덴에 와서 열네 해를
살아오면서 개인적으로 가깝게 알고 있는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거리를
지나면서 지나치는 동양인들을 보면 문득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공연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러워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다. 다만 한국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수효가 훨씬
적다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일 거라고 혼자서 생각하고는
했다.
  "한국은 어떤 나라예요?"
  모국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수잔은
성급한 질문을 했다. 지도에서만 보아온 그
배웠던 사실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한국이 아주 역사가 오랜 나라며
지금은 경제가 발달하여 세계유수의
무역국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왜 그렇게 조국에 대해 모르는 게
많지요? 부모님들이 얘기해 주지
않던가요?"
  그 말을 듣자 조국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입양되어 살아왔다는
사실은 밝히기가 꺼려졌다. 왠지
창피스러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얜, 아주 어릴 때 한국에서 입양되어
왔어요."
  그때 입이 가벼운 에리까가 그만 그
비밀을 알려주고 말았다.
자신들을 소개했다.
  "우린 한국에 있는 커다란 해운회사에
소속되어 있어요. 한국에서 생산된
자동차들을 세계의 여러 지역에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지요. 보세요, 저기
보이는 게 우리 배예요!"
  그가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곳엔 초대형
운반선 한 척이 도크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수에는 해운회사 이름이
영문으로 적혀 있고 한국의 국기가 마스트
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어때요, 아가씨들에게 배를 구경시켜
드릴까요?"
  선원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그래도 돼요?"
  "사실은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 동포인
말씀드려 보겠어요."
  그 말이 몹시 애틋하게 들려왔다.
  수잔은 흥분을 느끼며 에리까와 함께
선원들을 따라갔다. 도크 옆에 자전거를
기대 놓고 잠시 기다리자 먼저 올라갔던
선원 중 한 사람이 웃으며 내려왔다.
  "올라오세요. 선장님의 특별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그 선원을 따라 브릿지를 오르자
운동장만큼 널따란 갑판이 나왔다.
갑판에선 건장한 선원들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배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경기를 멈추고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바람에 수잔은 낯이
뜨거웠다.
  "먼저 선장님께 인사부터 드리세요."
게임의 심판을 보고 있던 선장에게로
다가갔다. 셔츠 차림에 호루루기를 목에
걸고 있는 수염이 더부룩한 선장이
물끄러미 수잔을 보며 말했다.
  "이건 정말 특별한 경우요. 만일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허락할 수가
없었을 거요. 그러니 조국을 생각하며 배를
잘 구경하도록 하시오."
  수잔은 젊은 선원의 안내를 받으며 배
안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체력 단련기구가 구비되어
있는 헬스 룸, 소형 영사시설이 갖춰져
있는 휴게실, 그리고 당직 근무자가 없이도
자동 항해가 가능하게끔 최첨단의 장비로
설치되어 있는 기관실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수천 대의 신제품 승용차들이
수잔은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자동차를 만적했을 때는 모두해서 4천
대까지 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4천
대의 자동차를 하역하는 데는 불과 대여섯
시간도 안 걸리죠."
  안내해 준 젊은 선원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구경을 마쳤을 때 선원이 찾아와서
알려주었다.
  "선장님께서 아가씨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하셨어요."
  수잔과 에리까가 환대에 기뻐하며 식당에
갔을 때 그곳엔 선장을 비롯하여 열일곱
명의 선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어요?"
  선장의 질문에 수잔이 대답했다.
  "그럼, 한국 음식을 대접해 드릴 테니
오늘 실컷 맛보세요."
  잠시 후, 선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밥과
반찬이 담긴 납작한 식기를 받아왔다.
수잔과 에리까의 앞에도 똑같은 음식이
담긴 식기가 놓여졌다. 그리고 네 사람에
하나 꼴로 뜨거운 김을 올리고 있는 불고기
접시가 배분됐다.
  선원들은 모두 식욕이 왕성했다.
  "맛이 어때요?"
  "좋은데요."
  수잔은 처음 먹어보는 한국 음식이 조금
어색했지만 불고기만은 맛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나서 차를
수잔이 생각나는 대로 한국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자 그들이 번갈아
가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우린 내일 오후면 서독에 있는
브레머하벤 항구로 출발해요. 여기서는
선박 점검을 위해 이틀간 머물렀는데, 좀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저녁이 되어 작별을 해야 했을 때 선장이
말했다. 그는 선원들과 함께 갑판까지 나와
수잔을 배웅해 주었다.
  수잔은 처음 선박으로 안내해 주었던
젊은 선원과 함께 브릿지를 내려왔다. 비록
만난 지는 불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수잔은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이상하게
서운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났던 다정한 친오빠와
     藉팀向쓸涌“獨?헤어지는 기분이랄까.
  에리까와 함께 황혼이 깃드는 해안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수잔은 묘한
심정이 들었다.
  오랫동안 아무런 상관도 없이 지내왔던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따뜻한 인정과 친절함에
대해 같은 한국인으로서 뿌듯한 자부심
같은 것을 느꼈다.

  아리랑 아리랑

  한국인 선원들을 만난 지 꼭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는 전갈이 왔다. 수잔은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궁금해하며
  수잔이 수화기를 들었을 때 독일
악센트가 섞여 있는 영어가 들려왔다.
  "수잔 브링크 양입니까?"
  "그런데요?"
  "여긴 독일의 함부르크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장재영이라는 한국인 목사입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수잔은
의하해하며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잔 양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 때문이지요?"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겠어요."
  수잔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전화 속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그때 시간을 내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만나자는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잔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어디서 만나지요?"
  "내일 정오에 나는 스웨덴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면 그때 수잔
양에게 다시 전화를 하겠어요. 아셨죠?
내일 열두 십니다!"
  상대가 통화를 끊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얼마쯤 지나서야 수잔은 수화기를
놓았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만나자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듯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튿날 정오 무렵 약속대로 장재영
목사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방금 스톡홀름 공항에 내렸다며 시간을
내어 나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수잔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수잔이 기차를 타고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 시였다. 미리 지정해
두었던 장소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 잠바
차림에 밤색 숄더 백을 메고 있는 40대의
동양인 남자가 다가왔다.
  "미스 수잔 브링크?"
  "네, 저예요."
  "난 장재영 목삽니다. 유럽 지역에서
한국의 해외 입양아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요."
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수잔은 가장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보았다.
  "그 점이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군요."
  그가 대답했다.
  "실은 지난 화요일에 교민 소개로 한국인
선원들을 만났어요. 그들이 수잔 양의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당신이 양부모의
집에서 나와 기숙사에서 살고 있더라고
말해 주엇어요."
  수잔은 비로소 장목사가 자신을 알게 된
사실을 납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해하는 기색을 알았던지
장목사가 계속해서 설명해 주었다.
유럽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의 해외
입양아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 활동의 일환으로 해외
입양아 실태에 관한 선교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지요. 내 생각엔 수잔
양의 경우가 이 작업에 무척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일도
있지만 겸사겸사 찾아온 거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는 것이 없는데요?"
  수잔이 당황해서 대답하자 장목사가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염려 마세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저 내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솔직히
대답만 해주면 돼요. 어때요? 대답은 해줄
  "물론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지만......."
  "그럼 됐어요. 지금부터 스톡홀름을
관광하며 얘기를 좀 나눠 볼까요?"

  그날 수잔은 스톡홀름 주변의 섬들을
순회하는 유람선을 타고 오후의 시간을
장목사와 함께 보냈다. 장목사는 인자한
태도로 수잔을 대해 주었다. 그래서 금방
서먹했던 감정에서 벗어나 수잔은 그에게서
따뜻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날 수잔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
비밀을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일들을 감추지 않고 얘기해 주었다.
얘기를 하는 동안 눈물이 흐르기도 했지만
가슴 속에 묵혀 있던 응어리가 씻겨나가는
듯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저녁이 되어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땐 고해성사를 마친
신자처럼 영혼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스톡홀름역에서 노르쉐핑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장목사는
한국의 전통 민요 중의 하나라며 수잔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장목사를 따라 그 노래를 부르며 수잔은
몹시 아름답고 애절한 가락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우울했다. 장목사는 이튿날
했다. 막 열차가 도착하여 수잔이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장목사가
손을 쥐어주며 말했다.
  "수잔 양을 서독으로 초청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정말이세요?"
  "정말이야. 목사는 일요일에는 되도록
거짓말을 안한단 말야."
  "오늘이 일요일인가요? 그렇군요. 그런데
방금 하신 말씀 진심이세요?"
  "그럼. 진심이고 말고. 서독엔 우리
교포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으니 수잔 양이
오면 틀림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저도 한국인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요."
항공표를 부쳐줄게."
  "어머, 열차가 출발해요!"
  수잔이 급히 들어서자 문이 닫히며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장목사는
수잔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
자리에 선 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수잔도
차창에 붙어서서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열차가 플랫홈을 빠져나와서야 수잔은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차륜 소리가 일정하게
덜컹거리는 것이 기쁜 음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수잔은 이 일주일 동안 만난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스웨덴 사람들과는 달리
한결같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일까?
  한국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도 한결 더
따뜻한 심장을 가진 민족은 아닐까?
  수잔은 자신의 몸에도 그처럼 따뜻한
한국인의 피가 돌고 있다는 사실에서
행복한 기분에 젖었다.

  엘그레코를 그리며

  장목사를 만나고 돌아온 이튿날 수잔은
문득 자신의 지나온 생활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덧 집을 나와 기숙사에서 생활해 온
지도 3개월이 지나 졸업을 1개월 남겨두고
있었다. 그 사이 에리까와 함께 놀러다니다
보내버린 지난 3개월의 시간들이 몹시
후회됐다.
  그때그때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런
시간들을 지나고 나면 왠지 아깝게
살아서는 소중한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부터 학교 성적은
계속 떨어져가고 있었다.
  수잔이 다니는 학교는 상경계열의
학교였다. 3년 과정의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사무관리인이나 회계인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가 있어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었다. 이처럼 졸업 후 자립이
수월하다느 이점 때문에 수잔은 일부러 이
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3년 가까이 공부해 왔지만 수잔은
수학과 상업부기 등 수치를 다루는
과목에는 여전히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단지 직업을 얻는 데 수월할
거라는 단순한 생각에 상업학교에 입학했던
사실마저 뒤늦게 후회됐다.
  어떡해야 좋을까!
  수잔은 지금이라도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 진로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취향은 아무래도
미술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 계통이 맞을 것
같았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사무원이 되어
평생을 고역 속에 사느니보다는 소질을
살려 화가가 되는 편이 훨씬 멋진 일은
아닐까?
  하루하루 졸업이 코 앞에 가까워오면서
수잔은 부쩍 자기의 장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장목사는 약속을 지켯다.
  수잔은 닷새가 지났을 때 서독행 항공
금요일 오후 일찍 출발하여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을 장목사 댁에 머무르며
그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목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구의 한국인 교민들과 유학생들을
수잔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일요일엔 한국의 전통 무용을 관람했는데
공연장의 로비에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것을 보고 그만 깜짝
놀랄 정도였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일요일 오후 아쉬운 작별을 하고
스웨덴을 향해 출발할 때 장목사는
수잔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사실 그가
수잔을 서독에 초청한 것도 나름대로의
  장목사는 진지한 음성으로 수잔에게
말했다.
  "수잔, 너에 관해 알고부터 나는 네게서
어떤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너를
미국으로 보내 신학 공부를 시켜줄 생각을
혼자서 해봤어. 그곳엔 내가 잘 아는
학교가 있으니 힘써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물론 이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스스로 원한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얘
기다만, 어디 네 의향이 어떤지 한번 말해
봐라."
  수잔은 그의 갑작스런 제의에 당황했다.
  "하지만 목사님, 전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간 교회를 다닌 일도 없어요. 그리고
성경에 관해서도 전혀 모르는 편이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신학을 공부할 수
  "그야 지금부터 성경도 읽고 교회도
다니면 되지 않니?"
  자신을 지켜보는 장목사의 시선을 보며
수잔은 망설였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안심하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일이 없는 자신이 어떻게
그런 제의만으로 무턱대고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 저는 사실은 화가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학원에 다니며 뎃상
고웁를 하고 있고 이번 주 안으로
미술대학에 입학원서를 보낼 예정이에요.
  하지만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제가
신학을 공부한다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저의 장래를 염려해
고마웁지만 말이에요."
  그 말에 장목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지."
  수잔은 그 후 장목사와 헤어져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의 답변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송구스런
생각이 들어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

  졸업파티

  그로부터 두 주일이 지나 1982년 6월이
  졸업 전날 함께 생활해 온 친구들과
식당에서 기념 파티를 열었다.
자작나무잎과 풍선으로 방 안을 장식하고
식탁 위엔 과자와 케이크를 차려 놓은 뒤
샴페인을 터트렸다.
  파티는 밤 늦도록 계속됐고 방 안에
장식해 두었던 수백 개의 풍선을 남김없이
터트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튿날 졸업식장에는 양부모와 호깐이
찾아와서 축하해 주었다.
  수잔은 그들이 건네준 꽃다발을 들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직도 양어머니는 감정이 풀리지 않는
듯 냉랭한 태도로 수잔을 대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수잔은 기숙사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졸업을 했으니 방을
  그동안 기숙사에서 지내며 짬짬이 그려둔
그림들이 제법 되었다. 수잔은 그 중에서
가장 애써 그린 그림으로 스페인의
인상주의 화가 엘 그레꼬의 작품
'베로니까가 씻어준 땀수건'을 모사한 세
점의 유화만을 챙겼다.
  오후엔 기숙사 시절 알게 된 부딜이라는
친구가 이삿짐을 옮겨주기 위해 차를
가져왔다. 수잔은 닷새 전 은행에서 대출해
주는 융자금으로 노르쉐핑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 거처를 얻었고 그날 그곳으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부딜의 차에 짐들을 옮겨 실은 뒤 사감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3년간 정들었던
학교를 나왔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불편이 없었지만 철로변이 가까운 곳이어서
조금 시끄러운 것이 흠이었다.
  짐을 옮긴 뒤 청소를 하고 정리를 모두
끝냈을 때는 새벽 한 시가 가까워 있었다.
부딜이 가버리고 난 뒤 썰렁한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수잔은 문득 허전하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에서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몰랐지만 이렇게 혼자 나와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자니 두려움과 함께
여러 가지 걱정들이 앞섰던 것이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릴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그 불안감 속에서 이젠 정말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수잔은 창가로 다가가서 활짝 창문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해보았다.
  덜커덕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의 차륜
소리에 섞여서 여러 가지 상념들이
일어났다. 얼마 전 장목사님과 만났을 때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에리까와 만났던
한국 선원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리고 양부모의 집에서 매를 맞고 혼자
방에서 울던 기억이며 여름 별장에서
카이사와 함께 들판을 쏘다니던 추억도
문득문득 스쳐갔다.
  그런가 하면 훨씬 더 오래된 아주 사소한
일들, 국민학교 시절 한나를 모처럼 집에
초대해서 데리고 왔을 때 어머니가 몹시
냉대를 해서 창피스럽던 기억 등이 또 다른
무수한 추억들에 섞이며 흘러갔다.
  수잔은 상념에서 깨어나 아득히 펼쳐진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을 보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깃들여
살고 있는 이방의 도시에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녀는 그 15년 동안 뼈저린 슬픔 속에서
수많은 밤들을 견뎌왔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의 15년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망연한 시선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6월의 밤하늘엔 무수한 별빛들이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그 무수한 별빛들 중에서 생명을 다한 별
하나가 기다란 꼬리를 끌며 막 어둠 속으로
스러져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6. 열아홉 살의 미혼모

  작은 생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수잔은
스톡홀름에 있는 미술대학에 입학 신청서를
보냈다. 그리고 통지를 기다리는 동안
국민학교의 음악 대리선생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화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몹시 가슴이 부풀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얼마 후 미술대학에서 보내온
통지서에는 입학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수잔은 실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른 대학에 신청해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은 의욕마저
  결국 미술대학에 진학하려던 꿈이 허사가
되자, 화가가 되려던 희망을 포기하고
그녀는 다시 또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몸에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기숙사를 나와 노르쉐핑에 있는 개인
아파트로 이사한 후 한 달 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생리가 정상이 아니고, 가끔씩
구토증세가 있었다.
  처음엔 몸이 피로해서 그럴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점차
입덧까지 생기게 되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기숙사 시절 에리까와 함께
춤을 추러 가서 만났던 크리스터란 남자와
잠을 잔 일이 생각났다.
  임신이 아닐까 불안했다. 하지만 이런
초조해하며 혼자서 고민하는 가운데 두
달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인 구드른이라는 친구가 아파트로
놀러왔다가 꺼칠해진 수잔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수자느 너 어디 아픈 모양이로구나."
  "조금 그래."
  "어디가 아픈데?"
  "모르겠어. 구토를 해. 아마 몸살인가
봐."
  "생리는 정상이니?"
  구드른의 물음에 수잔은 찔끔했다.
갑자기 그녀가 수잔의 겉옷을 들추며
아랫배를 살펴보았다. 무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수잔은 가만히 있었다. 혼자만의
고민을 상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틀림없이 임신이야!"
  겉옷을 내려주며 구드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수잔은 가슴이 덜컥했다.
  "병원엔 가봤니?"
  "아니, 안 가봤어."
  "아이고, 너 속 한번 편한 애구나!
임신이 틀림없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니 참
태평스럽기도 하다! 뭐? 몸살 같다구?
하기야 처녀가 임신을 했으니 몸살날 만도
할 일이지!"
  구드른이 킬킬거리며 물었다.
  "내숭 좀 떨지 말고 솔직히 좀 말해
봐라, 요것아. 그래 이 지경인데도 정말
임신인 줄 몰랐단 말야?"
  "사실은 용기가 안 났어. 만일 병원에
갔다가 임신이라고 하면 그땐 어떡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잔의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이런 일은 늦출수록 더 큰 문제가 되는
거야. 자, 어서 일어나서 가자!"
  "어딜?"
  "어딘? 병원이지. 당장 가서 검사를
받아보잔 말야."
  "가만 있어봐. 옷은 갈아입어야 할 거
아냐."
  "어서 서두르라구. 단추 끼는 동안
아기가 불쑥 나올지도 모르니까!"
  수잔이 머뭇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구드른은 에리까와 마가레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일 났어! 수잔이 심상치 않아! 뭐?
많이 아프냐구? 야 이년아, 많이 아픈
왠 중병이 들었냐구? 그건 나도 모르겠고,
아무튼 담당 의사 말이 오늘을 못 넘길지도
모른대! 그너니까 당장 병원으로 달려오란
말야, 알았지?"
  전화를 끊고 나서 구드른이 다시 또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구드른은 웃음이 헤픈 아이였다. 성격이
남자 같고, 나이는 수잔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리고 미국의 컨츄리 가수 돌리
파튼을 닮아 키는 작지만 아주 큰 젖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웃을 때마다 커다란
젖가슴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한 시간 후 천천히 병원에 도착했을 땐,
에리까와 마가레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기숙사 시절 함께 어울려
클럽에 가서 밤새 춤을 추던 일행이었다.
수잔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고 두 처녀가
구드른을 다그쳐대는 동안 병원 대기실
안이 소란스러웠다.
  "임신한 게 뭐 죽을 일이라고 그 수선을
피운 거야?"
  "에리까, 너에겐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수잔에겐 아주 큰 일이라구. 수잔은 이런
일이 처음이잖아."
  "상대는 누구지? 크리스터 녀석인가?"
  "맞아. 크리스터야. 그놈은 콘돔을
사용하는 예의도 모르더라구."
  수잔이 지친 모습으로 진료실을 나왔을
때, 세 처녀들이 부축해서 대기실 의자에
앉힌 뒤 둥그렇게 둘러쌌다. 임신 테스트
결과는 양성반응으로 나왔다. 수잔은
모니터를 통해 작은 태아의 맥박이
팔딱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화면을
지켜보며 그녀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태아는 벌써 4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맞지? 임신이라지?"
  구드른의 질문에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거야?"
  마가레타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당연히 지워
버려야지."
  에리까가 당연하다는 투로 내뱉았다.
스웨덴에서는 임신부가 원할 경우 얼마든지
유산이 가능하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래. 지금 당장 지워 버리도록 해."
  구드른이 말했다.

  아기를 낳겠어요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막상 임신이
확인되자 수잔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은 당연히 유산시켜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과연 그러는 것이 옳은 일인지
망설여졌다.
  어쨌거나 아이는 이제 갓 생명을 받아서
태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기의 편의에 의해
마음대로 한 아이의 생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처녀들의 경우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수잔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 깃든 생명을 마음대로
지워버리는 일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악처럼 여겨져 아이를 유산시키는 일이
겁이 났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작은 생명체가 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운 기적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수잔은 현명한 판단에 따라 이 문제를
결정하고 싶었다.
  문득 양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야 좋을지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믿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1년 후
양어머니는 노르쉐핑 시내의 번화가에서
보석상점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꽤 번창하고
있었다. 수잔은 두 주일 동안 고민하다
  수잔이 찾아갔을 때는 오후 일곱 시였다.
마침 양어머니는 상점 문을 닫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수잔이 임신 사실을 고백했을 때 그녀가
한 첫마디는 냉랭했다.
  "그것 봐라. 그러게 내가 뭐래더냐? 집을
나가면 네가 아무리 요조숙녀처럼 군다고
해도 세상 남자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 내 경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더니 결과는 뻔하구나.
그래, 이제 내게 수술 비용을 빌리러 온
거냐?"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니?"
  "아이를 유산시키기가 두려워서요.
그래서 어머니와 상의해 보려고 왔어요."
비용을 달라는 것보다 상의라도 몇 마디 한
다음에 돈을 빌리는 편이 수월하지."
  양어머니는 여전히 가혹했다.
  "그래, 애 아버지는 누구냐?"
  "클럽에서 만난 남학생이에요."
  "지금도 만나고 있니?"
  "지금은 안 마난요. 몇 번 만나다가
싫어져서 안 만난 지 오래돼요."
  "네가 그놈을 걷어찬 거냐 아니면 그놈이
널 걷어찬 거냐?"
  "그냥 서로 헤어졌을 뿐이에요."
  그녀는 비웃음이 깃든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지금은 한푼도 돈이 없다. 수술 비용이
필요하다면 그놈한테 가서 내라 그래라."
  "수술 비용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야 할지
  "뭐? 아이를 낳겠다니?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그놈하고는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니? 근데 아이를
낳겠다고? 애비도 없는 자식을 낳아 어떻게
하겠다고 그런 소릴 하는 게냐?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떼어 버리라는 말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너란 아이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좀 이상한 아이라는
건 예전에 알아봤다만 그래도 이렇게
바보인 줄은 몰랐다. 여러 말 할 거 없으니
당장 유산시켜라!"
  그 말에 수잔은 슬픈 기분이 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따스한 충고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던 것이 어리석었다.
설득했더라면 유산에 따르는 죄책감이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보스러웠다.
  그런다고 해서 자신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음의
위안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모든 기대는 물거품처럼
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양어머니의 가혹한 말은 묘한 반발심만을
자극했고, 그녀의 상점을 울음 속에서
뛰쳐나오며 수잔은 마음 속에 확고한
결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책임을
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다.
  비록 지금의 결정이 어리석고, 이후로 그
아이를 낳아 한 명의 떳떳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충고에
귀기울이며 망설일 필요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수잔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동기를 단순히 양어머니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의 싹을 지워버려야 하는
두려움이나 죄의식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동기가 그녀의 마음 속
근저에는 있엇다.
  그것은 자신의 혈육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수잔은 언제나 자신과 핏줄의 기다란
끈으로 이어진 누군가를 그리워해 왔고,
그것은 뿌리칠 수 없는 간절한 욕구이기도
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한 위안.
  그런 위안이 돼줄 수 있는 자신의 혈육
말이다.

  "크리스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아이를 낳을 작정이야."
  아이의 아버지인 크리스터를 찾아가서
임신 사실을 알려주며, 수잔은 결심을
고백했다.
  그러자 크리스터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됐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었다.
  "수잔, 설마...... 농담이겠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작정이란 말이야?"
  "난 한번 한 말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난 겨우 열여덟 살이야.
너보다도 삼개월이 어리고 아직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한 능력도 없다구."
  "네게 결혼해 달라는 말은 안했어.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아이를 낳겠다는
뜻이지. 다만 네가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말해 줬을 뿐이야. 이건 순전히 내 결심일
뿐이니 네겐 아이를 양육할 의무도 없고 이
아이만큼은 앞으로 내 힘으로 키울
작정이라구."
  너무 엄청난 고백에 충격을 느꼈던지,
크리스터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횡설수설 뜻도 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수잔을 설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런
설득이 통하지 않을 만큼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크리스터는 다시 또 큰 키를
잔뜩 웅크리고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네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난 더 이상 모르겠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구."
  "어쨌든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구.
어쩌다 우린 잠을 같이 잤을 뿐이지 무슨
애정이나 사랑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너는 물론,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 혼자의 힘으로
키울 작정이니 안심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 책임지고 키울 수
있을 만큼 나는 철이 들었을까?
  그리고 아버지도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운명은 장차 어찌될 것이란 말인가?
  크리스터와 헤어져 아파트로 돌아오며,
수잔은 망설임 속에서 고민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양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딜 쏘다니는 거냐? 줄곧 전화를 해도
안 받더구나."
  수잔은 며칠 전 그녀로부터 받은 감정의
앙금이 가시지 않아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네 문제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더구나. 뱃속에 생긴 생명을 없애는 건
죄악이라는 네 말이 어떤 면에선
지당하다는 말이다....... 듣고 있니?"
  "듣고 있어요."
  "난 또 대꾸가 없기에 안 듣는 줄
알았다....... 아무튼 그래서 얘긴데 네
결심이 정 그렇다면 네 아버지나 나나 더
이상 아이 낳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네?"
  뜻밖의 말에 놀라서 수잔이 물었다.
  그러자 양어머지가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했다.
  "우린 네가 아이 낳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수잔은 그 말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처럼 중요한 결정은 자신이 결정해야
되는 법이다. 아무도 당사자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지.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이 모르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 자신이 알아서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겠니?
  아무튼 다시 하넌 더 심사숙고해 보고
나서 최종 결정을 내려라. 이건 전적으로
네가 판단할 문제니까. 그래도 만일 결심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땐 아이를 낳아라.
  그럼 나나 네 아버지는 기뻐할 것이다.
우리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그리 나쁘지는 않구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낳겠어요!"
  "그럼 더 말해 뭣하겠니. 망설이지 말고
낳아라!"
  수잔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녀의
충고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에 대한 오랜
미움마저 잊고 난생 처음으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리석기는! 네가 아이를 낳아봐야
혼자서는 잘 기를 수도 없을 뿐더러 여러
가지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이 따를 거란
말야. 그 애가 네 장래에 큰 짐이 될
거라는 사실을 왜 모르지?"
  구드른과 에리까와 마가레타는
이구동성으로 수잔의 결심을 반대했다.
그때문에 수잔과는 서로 말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되어 주고 체스를 두어주는 좋은
친구들이기는 했지만, 수잔은 이때만큼은
이 아이들이 싫었다. 그 애들이 말린다고
해서 결심을 번복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 후로는 크리스터가 수잔의 건강을
염려하는 전화를 이따금씩 걸어오기는
했지만, 여자애들이 아파트로 놀러오는
일은 뜸해졌다.
  임신 6개월 무렵부터 수잔은 정기적으로
건강 체크를 위해 병원을 다녔다. 진단
결과 모든 상태는 정상적이어서 출산에
따르는 문제점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따금 찾아오는 진통 속에서도 출산일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수잔에겐,
자신이 낳을 아기는 여자아이가 틀림없을
거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예쁜 여자의 이름들을 여러모로
생각하던 끝에 엘레노라라는 이름을 마음
속에 생각해 두고 있었다.
  스웨덴의 달력엔 매일 날짜 아래에
이름이 하나씩 적혀져 있다.
  어느 날 수잔은 의사가 말해준 출산
예정일을 보다가 그날의 해당 이름이
엘레노라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몹시
야릇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수잔은 그때 열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머지않아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신이 부쩍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의 아가 엘레노라

수잔은 진통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즈음 경험했던 진통보다 한결 심한
통증이 하복부에 지속적으로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수잔은 곧 아기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오후 두 시에는 병원으로 가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병동의 침대에 누워
출산의 마지막 진통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임 속에서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다 마지막 진통이 왔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신음을 하고 눈물을 흘렸더니,
의사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척추
마취제를 놓아 주고 다시 출산을
촉진시키기 위한 조처로써 링게르를 팔에
꽂아 주었다.
시 반경이었다. 얼마 후 수잔은 작은
동산만하던 자신의 배가 거짓말처럼
꺼져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갓난아이의 숨가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1982년 11월 7일 오후 8시였다.
  수잔은 흠뻑 땀에 젖은 몸으로 자신이
방금 낳은 갓난아이를 보았다.
  "여자아이예요."
  간호원이 작고 통통하고 귀여운 아기를
배 위에 올려놓아 주며 말했다. 그 깜찍한
아이를 보는 순간, 수잔은 믿을 수가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에 잠겨 아기의 몸을
어루만지고 냄새도 맡아보았다.
  서류에 기록하기 위해 아기의 키를 재고
몸무게를 달아보고 나서, 간호원은 모두가
양호하다고 알려주었다.
  '엘레노라!'
  수잔은 새로 태어난 딸의 이름을 입
속으로 여러 차례 불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이름 중에서도 이 이름만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이름인 것처럼 그녀에겐
들려왔다. 수잔은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 지쳐서 까무룩히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입원실로 옮겨져
있었다. 자신의 바로 옆에 시트에 잘 싸여
뉘여져 있는 아기가 보였다. 아기는 엄마
곁에 누워 있는 것이 마음에 드는지
윗입술을 쪽쪽 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익살스러웠다.
  이튿날 오전 10시경에 연락을 받고
  "아주 예쁘고 귀여운 아기를 낳았구나."
  "아기가 널 닮아서 동양적으로 생겼어."
  "수잔, 너도 이제 어머니가 된 거야."
  "얘야, 우린 와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된
사실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모두들 환히 웃는 얼굴로 키스를 해주며
한마디씩 말했다. 수잔은 그들이 가져온
꽃다발 속에 파묻혀서 그런 말들을 들으며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한 시간 가량 머물다 돌아가고 난
후 간호원이 수레를 가져왔다.
  "어쩌시게요?"
  "아기를 데려가야 해요."
  "그냥 옆에 놔두면 안 되나요?"
  "걱정 마세요. 내일 아침 여섯시에 다시
  수잔은 벌써부터 아이와 잠시라도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러는 편이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좋다며
간호원은 수레에 엘레노라를 담은 뒤
신생아실로 데려갔다.
  수잔은 이튿날 새벽 네 시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전부터 아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여섯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간호원이 수레에 누워 있는
엘레노라를 데려왔다.
  "안아보아도 좋을까요?"
  수잔이 묻자, 간호원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조심해서 천천히 일어나 보세요."
  침대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간호원이 거들어 주었다.
  당장 아랫배 부분에 통증이 왔다. 허리를
곧추세우기가 힘들었다. 가까스로 허리를
폈을 때 간호원이 말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가 수레 속에서 따뜻한 포대기에
싸여 잠들어 있는 엘레노라를 안아올려
수잔에게 살며시 안겨주었다. 수잔은
어색하게 아기를 받아들었다. 예전에
이처럼 작은 아이를 품에 안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아기의 머리를 조심하세요."
  간호원이 갓난아기의 머리를 한 손으로
받쳐주며 서투른 자세를 고쳐주었다.
  출산 나흘째 되는 날 오전에 수잔은
아기를 갓 낳은 여성들을 위해 시에서
그곳에서는 전문지식을 갖춘 간호원들이
주변에서 늘 도와줬기 때문에 안심하고
산후조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육아와 수유 방법을
지도하는 담당자가 상주하고 있어 신생아를
다루는 방법부터 출산 후의 몸 관리 등에
관한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요양실엔 산모의 침대 옆에 아기의
조그만 침대가 있었다. 수잔은 항상
엘레노라와 함께 있을 수가 있어서 기뻤다.
  그때부터 젖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잔은 엘레노라를 가슴에 안고, 아기의
입에 자신의 젖꼭지를 물리고, 조그만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매일 오후 여덟시엔
양부모가 다녀갔고, 한번은 크리스터도
  수잔은 앞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 틈틈이 육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픈 영혼의 기도

  일주일 간의 요양을 마친 뒤 엘레노라를
데리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뒤부터,
수잔은 아이를 돌보는 일이 몹시 힘겹게만
느껴졌다.
  요양원에 있을 때는 다른 산모들과
간호원들이 주변에서 늘 도와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없었지만, 썰렁한 아파트에
아기와 단 둘만이 남겨지고부터는 왠지
견딜 수 없이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수잔은 갑자기 이제까지의 기쁨이
  출산 후 산모에게 닥치는 정상적인
변화들에 대해서 그녀는 무지했던 것이다.
아이를 낳은 후 산모는 심신이 피곤하고
감수성이 몹시 예민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녀는 때때로 아주 심한 감정상의
기복을 겪어야 했다.
  재롱을 부리는 엘레노라의 모습을 보며
희열에 들떠 있다가도, 갑자기 까닭도 없이
슬픈 기분이 들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흐느껴 울고는 했다.
  문득문득 어릴 적의 고통스런 일들이
회상되며, 이 아이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드는가 하면,
아기를 낳기로 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가책에 시달리기도 했다.
스쳐가서 무척 당혹스러운 적도 있었다.
  사랑스런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가도
갑자기 그 아이를 몹시 학대하고 싶은
끔찍한 충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수잔은
이런 생각에 소름이 끼쳤고, 부끄러움과
함께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마치 자신이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내지 못해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탓에 그런 잔혹한
생각이 드는 것만 같았다.
  수잔은 이런 일들이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와
같은 심정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젖은 자꾸만 줄어들어가고 엄마의
심정을 알아채서인지 아이는 자주 울어대며
보채기 일쑤였다.
  엘레노라는 젖을 먹고 난 다음 곧
띄게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이러다 혹시 아이가 죽는 것은 아닌가 덜컥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오왕좌왕했다.
  몇 번인가는 아이가 울어대는 것에
신경이 거슬려 손바닥으로 때려주고는
가책때문에 망연한 모습으로 몇 시간씩
기운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마구 악을 쓰며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 속에서 그녀는 혼자 흐느껴
울기도 했다.
  대체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 절망적인 기분만이 들었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아기를 누구에게
주어버리고 좀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도 무섭게 자신을 반성해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친어머니와
헤어져서 이 먼 나라에까지 흘러들어온
자신의 운명을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루하루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실의의 날들이 이어지던 끝에
수잔은 비로소 절망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낼 수 있었다.
  어느 날 무심히 집어든 성경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은 뒤엔 마음이
가벼워져 아이에 대한 애정이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수잔은 특별히 종교에 대해 관심을
행위 속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자신도 종교를
가지고 싶다는 은연한 소망이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수잔은 그때부터 틈틈이 성경을 읽으면서
불안정한 마음을 다스렸다.
  그녀가 마음의 안정을 얻을수록
엘레노라도 보채는 일이 적어졌다. 그리고
부족해진 젖을 분유로 대신하자 그때부터는
몸무게가 늘어나면서 건강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엘레노라는 오래지 않아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수잔은 아이의 몸에서 나는 아주
향그러운 냄새를 좋아했고, 한동안은 이
냄새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여겨졌다.
설계가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수잔은
자신이 못 받은 사랑을 대신해서
엘레노라를 아주 많은 사랑과 애정으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 없이 키워야 할 아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무거운 심정이 드는
적도 있었지만, 결국 아이가 자신을 낳아준
것에 대해 고마운 심정을 갖게끔 잘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엘레노라를 극진히 돌보며,
되도록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책을 읽어주고, 짝맞추기
놀이도 하면서, 아이가 귀여운 태도를 보일
때는 너무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방 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혼자서도 의자에 앉을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수잔은 헝겊으로 만든 고양이 인형을
아이에게 사다주었다.
  그리고 아기가 보는 앞에서 매번
고양이에게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자 하루는 엘레노라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입을 벌려 인형에 입을 맞춘 뒤
방긋이 웃는 것이었다.
  그때도 수잔은 자신의 기쁨을 아기에게
알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어 보였다.
  엘레노라는 자신이 장난감 고양이의 입에
뽀뽀를 하면 엄마가 기분좋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시로 인형에 입을 맞추는
흉내를 내며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잔은 비로소 아기를
있었다. 그녀는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눈빛 속에서도 형언할 수
없이 따뜻한 감동을 받았다.
  엘레노라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가고 있었다.
  수잔은 그 애의 건강하고 행복한 장래를
위해 잠들어 있는 아이의 옆에서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리고는 했다.
  이런 정성의 덕분으로, 두 살 되던 해에
어린이 건강보호소에서 아이의 운동성과
지능발달에 관한 테스트를 했을 때는,
그곳의 직원들을 놀라게 할 만큼 아이가
영리해서 수잔은 몹시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1983년 가을에 엘레노라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날은 수잔에게 다시없이 커다란
축제일처럼 여겨졌다.



  7. 어두운 터널을 지나

  윌리암과의 만남

  수잔은 국가에서 미혼모를 위해 보조해
주는 돈으로 생활해 오다가 엘레노라가 두
살이 되던 해부터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84년의 여름은 식품점의 점원으로
일했고, 가을이 되고서부터는 국민학교의
미술 보조선생으로 일하며 한가해진 시간을
엘레노라와 함께 지냈다.
  매일 저녁때가 되면 수잔은 엘레노라를
데리고 공원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네며
시이소오를 태워주면서 낮동안 헤어져 있던
아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서 즐거워하는
엘레노라를 돌보고 있던 수잔은 아이가
문득 웃음을 그치고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표정을 보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키가 큰 청년이 벤치에 앉아 이쪽을
지켜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수잔은 시선을 피했다. 그 청년은 수잔이
사는 아파트에서 두 건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길에서 오가며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말을 나눈 일은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의 기다란 그림자가 모래밭
위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부드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아주 귀여운 아이로군요."
  수잔은 고개를 도려 그를 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청년이 말했다.
  윌리암은 키가 크고 약간 말랐으며 몹시
유순해 보이는 푸른 눈의 청년이었다. 그가
아이를 좀 안아보아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수잔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엘레노라를 안고 몇 번 어루더니 다시 묻는
것이었다.
  "몇 살이나 됐나요?"
  수잔은 머뭇거리다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올해...... 세 살이에요."
  그가 말했다.
  "히야, 그럼 상당히 큰 편이군요.
그렇죠?"
  수잔은 대꾸하지 않고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뒤편 벤치 위엔 언제나 그가
가지고 다니는 기타가 놓여 있었다.
밤에는 클럽에서 기타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윌리암이 마치 기타줄을 튀기듯
엘레노라의 귀를 건드리며 자기 소개를
했다.
  "신통치는 않지만 제가 일하는 클럽으로
오시면...... 형편없는 연주 솜씨를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윌리암은 계속 엘레노라의 귀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엘레노라가
성가신 표정을 지으며, 문득 울먹이기
시작했다. 수잔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에서 엘레노라를 뺏듯이 받아 안았다.
그리고 쏘아주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형편없는 솜씨라면 제가
찾아갔을 때쯤에 당신은 해고되어 있을 게
  어째서 그토록 지나친 말을 했는지 말을
하고 나서 수잔은 금세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별로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보이지 않고 잠자코
미소를 지었다.
  대신 슬며시 돌아서서 벤치로 가더니
기타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케이스
뚜껑을 열고 기타를 꺼낸 뒤에 가볍게 줄을
튕기며 조율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조율을
마친 뒤엔 잠깐 움직임을 멈추고 앉아
있다가, 그는 천천히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면서부터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황혼이 깃든 저녁 공원의 훈훈한 공기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러운 기타의 선율이
  그는 조금의 흐트러지도 없었고, 조용한
손놀림만이 움직임을 알아채게 해줄
뿐이었다. 수잔은 그네 옆에서 엘레노라를
안고 선 채 그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하의 짧은 미뉴에트 한 곡이
나직히 세상의 공기 속에 녹아들며,
아름다운 융화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를 끝냈을 땐 다시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수잔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엘레노라를
안고 한 자리에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윌리암이 기타를 케이스에 담고
조용히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기타를 울러메고 사라져갔다.

주었다.
  문득문득 그 청년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때 들었던 바하의 선율이 자꾸만 뇌리에
감돌았다. 수잔은 그 선율을 입 안에서
나직히 흥얼거려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어째서 그처럼 차갑게 대했을까 후회스런
심정도 들었다.
  수잔은 다시 한번 그 청년을 만나보고
싶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어떤
안타까움처럼 그런 마음이 들었다. 만나서
그때의 일을 사과하고, 가능하다면 한번 더
그의 연주를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이튿날 물건을 사러 상점에 갔을
때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왠지 허전한
  그녀는 저녁이 되면 슬며시 엘레노라를
데리고 공원에 나가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이에게 그네를 태워주며 마음
속으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쑥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사흘 후의 황혼녘이었다.
  마침내 수잔은 큰 키에 유순한 모습의
그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모르는 척 시선을
외면한 채 그녀는 가슴만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기다란 그림자가 멈추더니 등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도 제 연주솜씨를 형편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후 수잔은 윌리암과 가깝게 지내며
그와 노래도 부르고, 음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윌리암은
수잔의 처지를 깊이 이해했으며, 수잔은
그런 윌리암과 함께 있는 시간이 몹시
행복했다.
  이렇게 만난 지도 네 달이 지났을 무렵
어느 날.
  하루는 그가 정장 차림에 장미꽃 다발을
들고 수잔을 찾아와서 말했다.
  "수잔, 난 엘레노라를 좋아해."
  "엘레노라도 당신을 좋아해요."
  수잔이 말하자 그는 살짝 윙크를 하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지."
              ? "그게 뭔데요?"
  "나 윌리암이, 수잔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야."
  그가 갑자기 포옹하며 키스를 했다.
수잔은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그가 포옹을 풀고 수잔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부모님께 수잔에 관한 얘기를 드렸어.
그들이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하셔. 오늘
함께 집으로 가기로 했는데 거절하진
않겟지?"
  "하지만 저는 엘레노라를 두고 갈 수가
없어요."
  "무슨 상관이야? 엘레노라도 함께 갈
건데."
  "그럼 당신 부모도 내가 한 아이를
기르는 미혼모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또 무슨 말씀을 드렸지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씀도
드렸지."
  수잔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에 몹시
당황스럽기만 했다. 엘레노라까지 딸린
자신에게 미혼인 그가 청혼한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이것을 청혼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그녀는 윌리암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비록 미혼모라는 사실을 그가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수잔도
사실은 윌리암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사랑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는
  "뭐하고 있어? 어서 부모님을 만나러
가보자구. 당신도 곱게 얼굴을 단장하고
엘레노라에게도 새 옷을 입혀야 할 거
아냐?"
  "오늘은 안 되겠어요. 좀더 생각해 보고
다음에 가도록 해요."
  "그건 곤란한데? 어머니가 당신을 맞기
위해 지금 근사한 요리를 준비해 두고
계셔. 만일 오늘 못 온다도 하면 어머닌
내게 손을 들고 벌을 서라고 호통을 칠 게
틀림없어. 그러니 나를 봐서 오늘 꼭 좀
가달라구."
  그가 유머스럽게 설득했다.
  "정말 가도 괜찮을까요?"
  "괜찮구 말구."
  "그럼 별수없이 가야겠군요."
  수잔은 엘레노라를 데리고 윌리암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모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식탁의 분위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친밀감이 넘쳤다. 그의 부모들은 수잔이
미혼모라는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부담감 없이 대해주었다. 특히 윌리암의
어머니인 발부루 부인은 엘레노라를 무척
귀여워해 주어서 수잔은 몹시 그녀가
고마웠다.
  "우리 윌리가 수잔 양에 대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서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대체 어떤 여자길래 이 애가 그토록 반했나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만나보니
윌리가 바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윌리가 나하고는 다르다는 사실을
  윌리암의 아버지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점잖게 참견했다. 그러자 발부루 부인이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 나서 수잔에게
일렀다.
  "이 양반은 나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자기가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 양반은 나하고
결혼하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는 걸 자신도
부정하지 않을 거예요. 윌리 네 생각은
어떠냐?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니?"
  발부루 부인이 묻자 윌리암이 대답했다.
  "어머니 말이 맞아요. 아버지는 지금
바보예요.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많이
나아졌다는 어머니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아버지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젊었을 때
하던데요."
  수잔은 이처럼 부모와 자식간에 오가는
격의 없는 농담에도 조금도 익숙치가
않아서 어색했다. 혹시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아들의
농담을 재미있어하며 껄껄거리고 웃는
것이어서 금세 수잔은 안심이 되었다.
  "이젠 이렇게 서로 알게 됐으니 자주
집에 놀러 와요. 수잔 양과 엘레노라가
오겠다면 우린 언제든지 대환영을 할
거예요."
  밤이 깊어 헤어져야 했을 때, 윌리암의
어머니가 말했다.
  "잘 가라, 엘레노라. 엄마랑 자주
놀러와야 해?"
주었다. 집까지 가는 동안 엘레노라는
어머니와 윌리암에게 한 손씩을 잡힌 채
깡충거리며 마냥 즐거워했다.
  그때부터 수잔은 엘레노라를 데리고
이따금씩 윌리암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의 부모들과 부담없이 저녁 식사를 했다.
그동안 그들 사이에 오가는 유쾌한 농담
속에서 수잔은 가정의 따스한 행복감에
함께 젖어들 수 있었다.
  엘레노라는 발부루 부인은 물론 윌리암을
몹시 따르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 애는
윌리암에게 마치 친아버지의 정을 느끼는
듯 자주 달려가 품에 안겼고, 윌리암은
엘레노라와 놀아주기 위해 매일 수잔의
아파트에 들렀다.

  떠나고

  윌리암이 수잔의 아파트에 있을 때
이따금씩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인
구드른과 에리까가 찾아왔다. 윌리암과는
모두들 뜻이 잘 통하는 것 같아 수잔은
흐뭇했다. 함께 포커 게임도 하고 윌리암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자주
어울렸다.
  그런데 윌리암과 만난 지도 어느덧
일년이 가까워 오는 어느 날이었다.
  클럽에서 일이 끝나면 거의 매일 밤
수잔을 찾아오던 윌리암의 발길이
그즈음들어 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귀가하는 시간에 맞추어
수잔은 공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았다.
  윌리암과 에리까가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윌리암의
집 앞에서 서로 포옹하며 오랜 키스를
나누고 작별하는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의 그런
모습에서 수잔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과 이튿날 낮 동안을 고민하던 끝에
수잔은 윌리암에게 전화를 걸었고, 밤이
되어 윌리암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분한
마음을 가누며 질문했다.
  "윌리, 에리까와 어떤 관계인지 내게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어."
  "어떤 관계라니? 에리까는 당신
친구잖아."
  "나와의 관계를 묻는 게 아냐. 너와
  "나와 에리까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나에게 에리까는
연인의 친구일 뿐이라구. 반대로
에리까에게 나는 친구의 연인인 셈이고,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잡아떼지 말고 솔직히 말해 줘. 난 어제
너희들이 서로 포옹하고 키스하는 걸 봤단
말야."
  그제야 시침떼던 윌리암의 얼굴에 변화가
엿보였다. 그리고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야. 실은 어제 에리까가
클럽으로 찾아왔어. 그래서 함께 집으로
와서 헤어지려는데, 그애가 갑자기 키스를
하는 통에 난 당황했어. 정말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구."
속삭였다.
  "수잔, 믿어 줘.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너밖에 없다구."
  의심이 씻긴 것은 아니지만 수잔은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잘못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에리까에게 있었던 것이니까.
  그런데 이튿날 오전에 구드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를 통해 그녀는
수잔의 기대를 저버리게 하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네게 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전화했어. 실은 에리까 말야, 그년이 요즘
매일 밤 클럽에 가서 윌리암을 만나고
있어. 내가 아무리 뭐래도 듣지 않는 거야.
아무래도 둘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
해."
  수화기를 내려놓는 수잔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윌리암은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구드른의
전화를 받고 보니 어젯밤의 일이 처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수잔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윌리암이
안 오면 그의 집으로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그 전날의 일도 있어서인지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각에 윌리암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윌리, 일은 아홉 시면 끝나잖아? 그런데
요즘은 매일 자정이 가까워져야 오는데 그
사이 어딜 다니다 오는 거지?"
  "학기 시험을 준비해야 하잖아.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느라고 그래."
  "오늘도 도서관에 갔어?"
  "그럼."
  "에리까와 함께?"
  그 말에 윌리암이 고개를 들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또 의심하는 거야, 수잔? 그러지 말고
제발 날 좀 믿어 줘. 졸업하고 나서 너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잖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수잔은 확신을 갖고 묻다가도 그가
잡아떼면 더 이상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진실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거짓말을 더
믿어주고 싶었다. 더욱이 그럴 때마다
자신이 질투심에 빠진 못난 여인이라는
기분이 드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그러나 이런 일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반복되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여전히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수잔은 에리까에게 직접
물어볼 결심을 했다. 에리까는 두 달이
넘도록 수잔을 찾아오지 않고 있어서
자신이 직접 그녀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노르쉐핑 시내에 있는 병원에서 보조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는 에리까르 수잔은
그곳 병원 대기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반갑게 수잔을
맞아주었지만 수잔은 그녀의 표정 속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눈치챘다. 에리까가
자동판매기에서 꺼내 온 음료수를 거절하며
수잔은 머뭇거리지 않고 물었다.
  "에리까, 난 네가 윌리와 함께 밤늦게
며칠 전엔 구드른이 전화를 걸어 네가 매일
클럽으로 찾아가서 윌리와 함께 나간다는
사실도 말해 줬어.
  설혹 네가 잡아뗀다 해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작정이야.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줘. 그래야 나도 스스로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거 아니겠니?"
  차갑게 묻는 수잔의 말에 에리까는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어지간히도 많이 알고 있구나. 좋아, 뭐
어차피 사실인데 좀더 일찍 알게 된다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네 말은 사실이야.
윌리와 나는 서로 사랑해. 네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윌리는 너보다도 나를 더
사랑한다고 말해 줬어. 그리고 윌리가
졸업하고 나면 나는 그와 결혼할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을
찢어대며 들려왔다. 더욱이 윌리암이
에리까를 더 사랑한다고 고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온통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수잔은 힘껏 두 손을 움켜쥔 채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나 역시 이 문제를 두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 네 충격이 클까 봐
망설이며 입을 다문 채 지내왔던 거야.
사람들은 내가 친구의 애인을 가로챈
거라고 욕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네가 그 점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에리까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수잔은 기숙사 시절의 어느 날 밤이

  집을 나와 기숙하 생활을 시작하던
열여덟 살 무렵, 불을 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신이 구박받으며 살아온 일들을
서로 얘기해 주며 깊은 공감 속에서 이
아이와 함께 눈물을 흘리던 밤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처럼 절친했던 친구가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가버리고
만 것이다.
  수잔은 그 기묘한 운명의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마침내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안녕 엘레노라

  에리까의 행위는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친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뼈아픈 상실감은 오래도록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수잔은 에리까는 물론이고 더 이상
윌리암도 만나지 않았다.
  윌리암을 포기하는 것이 그녀에겐 몹시
커다란 고통이었지만 그의 위선적인 모습을
알게 된 이상 그와의 관계는 이미 에전처럼
원만해질 수가 없었다.
  그처럼 수잔이 냉정한 태도로 대한 이후
윌리암 역시 그녀를 찾아오는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얼마
후부터 수잔에겐 실연의 열병이 찾아왔다.
머리가 불같이 뜨거웁고 사지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며칠간이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일까?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일까?
  그녀는 몹시 외로웠고, 인간의 위선에
절망했다.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만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 거칠고 힘겨운 세상을
한순간 한순간 견뎌나가야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두렵기만 하였다.
  그녀는 가혹한 투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됐고, 슬픔과 비탄과
고통만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육신이 문득
혐오스럽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만일 이 육신을 훌훌
벗어던진다면....... 훌훌 벗어던진다면
거기엔 따스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잔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다시 한번
자살을 꿈꾸고 있었다.

  어머니 없이 자라야 하는 아이의 운명.
  자살을 결심하고부터 수잔은 곰곰이
엘레노라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다. 이
아이는 어머니 없이도 잘 살아갈 수가
있을까?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하는 아이의 운명이
어떻다는 것을 수잔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딸에게마저 그런
슬픔의 굴레를 씌워주는 일이 그래서
두려웠다.
  하지만 엘레노라는 어머니의 심정에
것을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빤히 어머니를
바라보며 천천히 도리질치는 그 모습을
보며 수잔은 차마 아이에게마저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입 안에
넣어준 우유를 뱉아내며 자꾸만 도리질치는
모습에 참을 수 없는 가책이 왔다.
  어머니의 편의에 의해서 뱃속에 든
생명을 없앨 수 없다며 만들어낸
생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생명을 다시 죽음의
세계로 되돌리려 애쓰고 있는 심정을
어떻게 합리화시킬 수 있을까.
  수잔은 자신의 행위가 파렴치하기만
했다.
  그렇다.
  강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를 세상에 버려둔 채 혼자서 죽음을
택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럼 이 아이는 어디서 누구의 손으로
키워지게 될까?
  수잔은 적어도 양부모의 집에서
엘레노라가 자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친아버지인 크리스터에게 아이를
떠맡기는 것도 싫었다. 그 어느 편도 진정
내키지는 않았으면서도 그래도 발부루
부인에게 아이를 맡기는 편이 제일 나을
듯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윌리암의 어머니라는 사실만
아니라면.
  그녀 이상 엘레노라를 잘 보살펴 줄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엘레노라는 발부루
부인과 아주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었고
어느 땐 친엄마로서 질투심을 느끼는 적도
있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발부루 부인에게
맡긴다면 엘레노라는 잘 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엘레노라를 발부루 부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수잔은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를 나왔다.

  깨고 싶지 않은 꿈

  양부모의 집에 다녀오겠다며 엘레노라를
맡기는 수잔의 태도에서부터 발부루 부인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세 살짜리
소녀인 엘레노라 역시 내내 침울해 있는
것이 평소의 태도와는 달랐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예감에 그녀는
무렵 아파트로 가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고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수잔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관리인의 말을 들었던 탓에 한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관리실에 얘기를
하고 빌려온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을 때 수잔은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앰뷸런스를 부르기 위해 발부루 부인이
수화기를 들었을 때가 오후 여덟 시
무렵이었다.
  이튿날 새벽 네 시경 수잔은 의식이
깨어났다. 처음엔 머리 속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어지럽고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다시 잠 속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사이 차츰 불투명했던
  그녀는 자신이 병원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의식이 드는가 보구나. 수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겠니?"
  발부루 부인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럴수록 악착같이
살아야지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 해서야
되겠니? 엘레노라를 생각해서 악착같이
살아야지. 네가 죽어버리면 이 앤 어떻게
하라는 거냐? 넌 앞으로 너 자신보다 이
애를 생각해서 열심히 살아야 해."
  수잔은 눈을 감은 채 발부루 부인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음성은 다정했고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여 있었다. 하지만 수잔은
슬픈 기분만이 들었다.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세요. 지금은
쉬도록 내버려 두시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호원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발부루 부인이 눈을 감고
있는 수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일어섰다. 수잔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조심히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은 온종일 잠이 쏟아져 내리며,
무서운 악몽에 시달리다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깨어나고는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탈진 상태가 계속되고 머리
속은 납덩이가 들어차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이튿날 수잔은 누운 채 대부분의 시간을
  사흘째 되는 날엔 흐릿하게 가물거리던
시야가 다시 선명하게 보이고 울적했던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비로소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는 흡사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서 걸음을 옮기는 데도 온 힘을 다
써야만 했다.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지내서 그런지
일어서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곧 피로가 느껴졌다. 그날 오후엔
양어머니가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다가
돌아갔다.
  나흘째가 되어서야 그녀는 혼자서 거동할
수 있었고, 처음으로 병실을 나와 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피부에 와
닿았다. 태양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이파리를 뽐내듯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두운 죽음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평소처럼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잔은 매점에서 사온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햇살 속에서 파릿하게 타오르는
연기가 너무도 고요하고 평온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연기를 폐부 깊숙히 삼켰다가
천천히 토해내며 어째서 이처럼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세상에서 자신만이
고통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스물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두 번
자살을 시도했고, 두 번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죽음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운명.
  부여된 생애에 담겨진 고통의 한
조각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운명이란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피동적인 생의 의지가 씁쓸한
담배연기에 섞이며 자신의 가슴속을 느리게
휘저어대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가 있었다.

  불씨

  병원에서 퇴원해서 아파트로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윌리암과의 관계는 깨끗이 청산된
상태였으나 수잔은 그때까지도 그의
어머니인 발부루 부인과는 계속 친분을
그녀는 병원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간병해
주었고, 퇴원한 후에도 거의 매일 오후엔
찾아와서 위로해 주었다.
  그 사이 엘레노라는 그녀가 데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후마다 엘레노라를
데리고 아파트로 찾아왔다. 얼마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엘레노라는 몰라보게 키가
크고 곧잘 말도 늘어 있었다. 발부루
부인이 매일 두세 시간씩 글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얘기했다.
  '엘레노라는 아주 똑똑한 아이야. 한 번
가르쳐준 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또
배우는 일에도 얼마나 열심인지 모른단다.'
  "애써줘서 고마워요, 발부루 부인."
  수잔이 눈물을 흘리자 얌전히 앉아 있던
엘레노라가 살며시 일어서더니 티슈를
발부루 부인의 말처럼 영리했다.
  그날도 엘레노라는 발부루 부인이 데리고
돌아갔다.
  혼자 남게 되자 수잔은 다시 또 적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아득한 절망감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즈음 발부루 부인이 찾아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수잔은 몹시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찾아오지 않았고, 그 사이 새로운 진로를
찾아 외국으로 떠나버린 아이들도 있었다.
양부모는 병원에 있을 때 한 번 다녀간
이후로는 어찌된 셈인지 찾아와 주지를
않았다.
버려진 듯한 고독감 속에서 틈만 나면 혼자
흐느껴 울면서 하루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혼자서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던 수잔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놀라며 눈을 뜨게 되었다.
  방 안에 불이 꺼져 있어 깜깜했고 갑자기
세상이 무거운 침묵의 수렁 속에 잠겨든
것처럼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수잔은
마치 자신의 몸이 아득한 우주의 한가운데
떠 있는 것처럼 공허한 기분에 잠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전신이
굳어짐과 동시에 강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엄숙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며 신비스런 영적
잠겼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이
사라지며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구체적인 확신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얼굴을 조심히 쓰다듬어 주는 것만 같았다.
  수잔은 신성한 존재가 자신의 옆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감동의
설레임 속에서 그것을 영혼으로 느낄 수가
있었고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눈물이 가슴의 샘에서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것은 고통의 눈물이
아닌 순수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와 함께 영혼의 창문을 흔드는
과거의 일들이 선명히 회상되기 시작했다.
그처럼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가 신의
영광스런 세계에 이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낱낱의 디딤돌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새로운 자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잔은 오랫동안 방황과 갈등 끝에 찾아
헤매던 안식처에 도달한 느낌 속에서
자신이 영적으로 새로이 생명을 얻어
태어나는 듯했다. 고통스럽던 과거마저
자신이 도달해야 할 안식처를 찾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평온이었고, 참된
기쁨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영혼의 세계에
접한 자만이 알 수 있는 확신에
함께 하는 나날이 될 거라는 기쁨의 감정
속에 젖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점점 사위어 가던 생의 의지가
작은 불씨처럼 밝은 불빛을 내며 타오르기
시작하며 신에 대한 열망이 벅찬 감동으로
그녀의 가슴 가득 다가왔다. 신은 고통받은
자의 슬픔을 항시 지켜보고 있었으며,
언제나 그런 이들을 자신의 품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 기다려 왔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전혀 새로운
감정으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날은
이제까지 살아온 수많은 아침들과는 다른
아침이었다. 마음은 가볍고, 부드러운
솜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따스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신성하고 거룩한 존재만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체험했던 자로서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갈구해야 할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8. 부활하는 새

  소생하는 영혼

  자살미수 후 겪은 신비스런 밤의 체험은
수잔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새로이 소생했다고 믿었고 그때부터
세상을 밝은 면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이유를 캐묻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삶의 문제들을 이해해 왔던
편이었다. 그러나 이젠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신앙의 힘을 통해서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때부터 삶에 대한 몇
가지 원칙들도 세웠다.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비록
타인이 자신에게 견딜 수 없은 고통을
주더라도 그때문에 그를 상처입게 하거나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잔은 첫번째 원칙에 의거해 자기의
장래를 계획해 보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는
열망에 따라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계속해 스웨덴에서 제일 큰 대학인 웁살라
대학에 진학하여 종교학을 전공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그 예비단계로 이듬해인 1985년 봄이
되었을 때 수잔은 린쉐핑 대학에서 일 년
과정의 문학과 종교학 코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공부를 안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더욱이 탁상의 스탠드를 살 돈이 없어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어야 할 정도로
생활은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이 길만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삶의 방향이라고
믿었기에 부단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던
까닭에 매일 밤 집으로 돌아오면 당장
쓰러져 버릴 것처럼 피로했다.
  그녀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기도를 통해
극복해 나갔다. 틈틈이 교회에게 다니며
항상 그리스도가 곁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애썼다.
  어느새 세 살이 된 엘레노라가 그녀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녀가 공부하는 동안 엘레노라는 차분히
혼자 놀아주는 독특한 기특함을 보였고,
때로는 밤을 새우고 늦은 잠을 자는 그녀를
위해 아침 식사를 침대에 가져다 주며
재롱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엔 탁아소에서 만든
공작물을 포장지에 담아와 수잔에게
선물이라며 내밀기도 했는데, 이 작은
아이가 하루종일 엄마에게 줄 선물을
만들기 위해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수잔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처럼 열심히 애쓴 덕분으로 마침내
  수잔은 그해 8월 종교학 과목에서 40점을
따내 합격 평가를 받음으로써, 좋은
성적으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들어서도 양어머니와의 관계는
서먹한 편이었으나, 때때로 틈을 내어
엘레노라를 데리고 어머니가 하는 보석
상점에 놀러가 상점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수잔이 린쉐핑 대학의 두 학기를 좋은
성적으로 마쳤을 때, 양아버지는 그것을
축하하는 뜻으로 일주일 간의 이태리 여행
비용을 대주며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그해 9월 수잔은 로마를 관광하며
일주일 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중세의 역사적 유물들과 여러
박물관을 다니며 세계적인 미술품을
사용되던 콜롯세움이며 카타콤브를
돌아보는 동안 기독교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는 갈망이 커져 갔다.
  카프리 섬을 끝으로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웁살라 대학에 입학 신청서를 보냈다.
웁살라 대학에 진학해서 종교학을 전공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까닭에 다시 또 일과 공부 사이를 맴도는
단조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녀는 상업학교 시절에 배우지 못한
철학과 심리학을 보충하기 위해 성인들을
위해 운영되는 4개월 과정의 학원을
다녔는데, 그 학원을 수료했을 때인 1986년
성탄 무렵엔 마침내 그처럼 꿈에 그리던
희망이 이루어져 웁살라 대학 종교학과에
      痼沌隙?허락한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학기가 시작되는 87년 3월까지는 몇
달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수잔은 그때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정신박약자 숙소에서 간호보조원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커다란 희망에
부풀어 입학철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신학의 본원이라 할 만큼 명망이
있는 웁살라 대학에서 종교 철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싶은 소망에 들떠
있었다.

  기도의 응답

  1987년 3월.
  수잔은 스물다섯 살의 웁살라 대학
1년생이 되었다.
할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얻는 것이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웁살라에는 학생들을 위해 많은
기숙사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입학철이어선지 모두 분양이 끝나 있는
상태였다. 분양을 받기 위해서는 몇 달
전부터 미리 신청을 해놓아야 했었는데
수잔은 미처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닷새 동안 아파트를 얻으러 다녔지만 빈
곳이 없어 수잔은 매우 지쳐 있었다. 한
군데 방이 난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잔뜩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곳도, 그녀가
도착했을 땐 이미 분양이 끝난 상태였다.
교무처 입구의 게시판엔 방이 없다는
공고문 한 장만이 달랑 나붙어 있었을
  만일 빈 아파트를 못 얻으면 다시
노르쉐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웁살라까지
통학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수잔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며 도움을 청하는 새로운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노르쉐핑에 돌아온 수잔은 그날 밤 어떻게
해서든지 아파트를 얻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기도중에 어렴풋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빈 방이 없어 돌아온 학교
교무처를 다시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수잔은 거의 기대를 안 가지면서도
다시 웁살라까지 가서 교무처를 찾아가
보았다.
  입구에는 여전히 빈 방이 없다는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무를 보고 있는 그곳의
여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잠깐 실례하겠어요.......
죄송하지만 빈 방 난 것이 없을까 해서
들어와 봤어요."
  그러자 여직원이 고개를 들고 안경을
추켜올리며 반문했다.
  "밖에 공고문이 붙어 있을 텐데요. 그걸
못 보셨나요?"
  "보았지만, 혹시나 해서 들어와 본
거예요....... 저, 남아 있는 빈 방이
없을까요?"
  수잔이 난처해서 묻자 여직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짧게 대꾸한 뒤 고개를 숙이고
중단했던 일을 계속했다.
  수잔은 곤혹스러운 심정으로 사정을
해보았다.
  "만일 빈 방이 없으면 우선 기거할 만한
창고라도 좋은데....... 그런 장소라도
없을까요? 한 주 후면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급히 방을 얻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러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성가신
듯 대답했다.
  "아가씨 사정이 딱한 줄을 알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빈 방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아가씨에게 방을 내드릴 수는
없지 않아요?"
힘없이 돌아섰다.
  그런데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요, 아가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잔이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니 뒤쪽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여직원이 그녀를 보며 손짓했다.
  이해심이 많아 보이는 뚱뚱한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잔의 사정이 딱해
보였던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류함을
한동안 뒤져보더니 잠시 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말해 주었다.
  "지금 당장 빈 방은 없어요. 하지만 세
주일만 기다리면 방 3개짜리 커다란
아파트가 비게 되는데 그 방을 얻을 수
있게끔 조처해 드릴 수는 있어요. 어떻게
  그녀의 말에 수잔은 귀가 번쩍 뜨였다.
  "고맙습니다! 물론 얻고 싶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신청을 해주세요. 당신에게 그
아파트가 돌아가도록 서류를 작성해 놓을
테니까요."
  수잔은 마냥 기쁜 마음으로 그녀가
내미는 신청서 양식의 빈 칸들을 메꾸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사인을 하고 나서
완성된 신청서를 제출하며 수잔은 그 중년
여직원에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시한 뒤 교무처를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하느님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걱정해 기도를 들어주신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흐를 것처럼 기뻤다.


  수잔은 노르쉐핑을 떠나 웁살라에 있는
유스 호스텔에서 엘레노라와 함께 두
주일을 보낸 뒤 플록스타베겐 거리에 있는
새로운 아파트로 이삿짐을 옮겼다.
  새로 얻은 아파트는 방이 3개나 있어
엘레노라와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며,
가까운 거리엔 결혼하여 아이를 기르는
학생들을 위하여 탁아소 등 각종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웁살라에 도착하여 수잔이 받은 첫인상은
학문의 완전한 자유로움에 대한
경탄이었다.
  웁살라의 공기 속에서는 스톡홀름이나
쾨터보그 같은 대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배움을 향한 열정과 진지함이 거리의
  이 도시는 학문 연구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완전히 기능화되어 있었고,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와서 공부를
마친 뒤에 다시 떠나가고는 했다.
  과거 웁살라는 옛 스웨덴 왕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주민들의
대부분이 대학교 학생들과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스웨덴의 대표적인 대학
도시였다.
  이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웁살라
대학교는 스웨덴에 있는 여섯 개의 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전통이 오래되어 1477년에
설립됐으며, 그 사이 일곱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해
냈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특히 카톨리나 레디비바로 불리우는 대학
학술 도서관으로서, 이곳에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약성서 필사본과 함께
11세기의 채색성서 필사본인 코덱스
캐사레우스가 소장되어 있고, 그밖에도
60만 권을 헤아리는 각종 논문과 잡지를
포함하여 2백만 권에 이르는 장서가
있었다.
  웁살라 대학에서의 수업과 연구 활동은
학장을 의장으로 하는 교수회의에서
계획되었다. 수업은 강의 위주의 교수 방식
대신 그룹식 토론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고
교수와 학생 간에 긴밀한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실에서의 학습을 중점적을로
활용하고 있었다.
  수잔이 입학한 종교학과의 학과목 범위는
다양해서 세계 종교학과 성경주해,
많았다. 그녀는 이러한 필수과목들
이외에도 선택과목으로 샤마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기 초가 되었을 때 수잔은 이슬람
종교를 전공하는 율리카와, 동양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은 프레데릭이라는 조용하고
사려깊은 청년을 새로운 친구들로 사귈
수가 있었고, 그들에게서 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밖에 웁살라에 입학하여 수잔이 공부
이외에 전념했던 것으로는 자신의 정신을
치료하기 위한 심리분석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인 학원을 다니는 동안 심리학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면서부터 유년기에 받은
정신적 상흔이 성인이 된 후에도 심각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자신도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해오고 있었다.
  정신 치료에 드는 비용은 비쌌지만
수잔은 무리를 해서라도 가까운 정신과의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자신이
유년기에 받은 심리적인 상처들을 말끔히
치유하여 완전한 정상인으로 생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받기 위해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동안 무척
고통스런 느낌이 들었으나, 치료가 끝난
뒤엔 한결 홀가분한 기분에 잠길 수가
있었기에 수잔은 이런 심리치료를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받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양의 참선을 연수해
주는 모임에 나가기도 했다. 선이나
모든 방법들을 통해 정신의 완전성을
회복하고 싶은 진지한 절망에 차 있었다.
  그녀가 2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일본의
무술인 공수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열망의 한 소산이었다. 강인한 체력을
단련함으로써 자신의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을 극복하고 싶었고, 아직도 내면 속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열등의식과
어두운 심성들을 말끔히 씻어내 한 명의
당당한 인간으로 세상를 살아가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뜨거운 눈물

  스웨덴 대학은 모두 공립이기 때문에
등록금이 면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생활비를 대여해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잔에게는 미혼모를 위해 국가에서 매달
일정액의 복지연금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생활을
해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 편이었다.
  다만 정부의 연금이 중지되는 여름 방학
동안에는 스스로 일해서 생활비를 충당해
나가야만 했다.
  수잔은 웁살라 대학 2학년 때인 1988년
여름 동안을 학생처에서 소개해 준
개인미술관에서 그림을 판매하는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양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다니러 오라는 전화가 노르쉐핑에서
  수잔은 이 소식을 듣고 가야 할지
망설였다. 방학이 끝나면 곧 시작되는 가을
학기의 바쁜 학과 일정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직도 양어머니에 대해 그다지
마음 깊은 애정을 못 느끼고 있던 터이어서
그런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웁살라에 오고부터 양부모를
만나는 일도 점점 드물었기에, 수잔은 크게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엘레노라를
데리고 양어머니가 입원해 있다는
스톡홀름의 카로린 병원에 문병을 가게
되었다.
  수잔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응급실을 들어서며 줄들이 얼기설기
설치된 침대 위에 누운 채 얼굴엔 산소
수잔은 가슴 속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가
수척하게 여위어 있는 얼굴을 확인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병상 옆에서 그녀를 보살피고 있던
양아버지가 핼쓱해진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정제를 주사해서 잠들어 있는
중이다."
  "어디가 아픈 거예요?"
  "심장이 안 좋다는구나. 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일분간이나
심장이 멎어서 죽는 줄로 알았었다."
  "심장이요?"
아무래도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구나."
  양어머니는 한때 담석증 때문에 치료를
받으러 다닌 적은 있었지만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은 그때 처음으로 듣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로 아픈 건가요? 상당히 심한
편이라던가요?"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수잔이 물었다.
  "모르겠다. 수술을 받아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거라는구나."
  양아버지가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수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얘야, 어머니가 너를 몹시 찾더구나.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기는 동안에도
그래서 네가 바쁜 줄 알면서도 이렇게
오라고 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슬픔이 북받쳐 오르며
잠시 멎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양어머니의 나이도 어느덧 쉰 살이 넘어
있었다.
  자신을 구박하며 심하게 학대하던 시절의
얼굴만을 생각하고 있던 수잔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양어머니의 얼굴에도 주름이
깊은 것을 보고 세월의 무섭고도 허망한
힘을 느꼈다. 네 살 때 만나 이루어진
그녀와의 악연, 그것도 어느덧 이십이 년의
세월 속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8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그녀의 심장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실 문이 닫히고 수술이 진행되는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토록
증오했었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반드시
잔인한 복수를 해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 그녀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마음 속으로 빌었던
것이다.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수술은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끝났다.
  "좀더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위험한 상황은 넘겼습니다. 수술 결과가
좋으니 이젠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수술을 끝낸 의사가 이렇게 말해 주었을
때 비로소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를 입원실로 옮긴 후 수잔은
양아버지와 함께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10시가
깨어나 의식을 회복했다.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잔에게
핼쓱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수잔, 네가 와주어 정말 기쁘고
고맙다....... 널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 해서 몹시 걱정했었다."
  그녀가 뻗어오는 손을 마주쥐며 수잔은
다시 또 흐느껴 울기 시작햇다. 뼈마디가
앙상해진 손이 나무 등걸을 쥐고 있는
것처럼 섬찝할 정도로 메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게 한번도 잘해 준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걱정하고 울어주기까지 하니
정말 고맙구나."
  그리고 잠시 후 브링크 부인이 생각난
  "그런데 엘레노라는 어떻게 하고 너 혼자
왔니?"
  "엘레노라도 같이 왔어요."
  그제야 양어머니가 힘겹게 시선을 돌려
엘레노라를 찾았다. 침대 발치에 서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조심히 바라보고
있던 엘레노라가 비로소 그녀들의 곁으로
머뭇머뭇 다가왔다.
  "이런 거기 있었구나. 얘 꼬마야, 너
할머니에게 키스도 안해 주는 거니?"
  엘레노라는 어렸을 때부터 그다지
외할머니를 따르지 않았었지만 그때는
얌전히 얼굴을 내밀고 따뜻한 입맞춤을
해주었다.
  "정말 착하구나. 꼬마야, 우린 비록 한
핏줄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넌
마라."
  그녀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가 사라지고
잠시 침묵이 있은 뒤 문득 브링크 부인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공부가 많아서 넌 아마 곧 돌아가야
하겠지? 난 네가 좀더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만....... 그래,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냐?"
  브링크 부인이 서운한 듯이 말끝을
흐리며 묻는 기색에 수잔은 마음이 약해져
사실대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 오후에 웁살라로 돌아가려던
자신의 일정을 바꾸었다.
  "사실은 오후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틀 동안만 더 어머니 곁에 머무르며
지내도록 하겠어요."
지키겠다고 내게 약속해라."
  그녀가 기쁜 듯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약속해요."
  수잔이 대답하자 그녀는 어린애처럼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보름 후 브링크 부인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수잔은 노르쉐핑으로 가서
이틀간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동안 수잔은 운신이 힘든 그녀를 도와
머리를 감아주고 용변 시중도 들어주었다.
그러자 한 번은 그녀가 수잔의 손을 조용히
움켜쥐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수잔, 내가 옛날에 네게 못되게 군 일이
생각나니? 아니라고 하지 마라. 내가
예전에 네게 몹시 가혹하게 굴었다는 걸 난
몹시 후회하고 있다. 가끔은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반성은 하면서도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가 않더구나. 왜
그랬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녀가 말끝을 흐렸을 때 주름진 눈가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수잔.......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한 감정의 전류가
수잔의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은 수잔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수잔은 가슴이 메었다. 자신의 손을 잡고
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어 입을 떼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보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동시에 오랜 세월 양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미움과 증오와 원망들이
한꺼번에 눈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수잔은 마침내 스스로의 감정을 가누지
못한 채 양어머니를 껴안을려 소리내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오랜 미움이 한꺼번에 씻겨내리는 기쁨과
화해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괴로움 속에서 증오해 왔다는 그 사실로
인해서 이제 수잔은 한결 더 깊은 애정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의 화해가 있은 다음 웁살라로
돌아오고 나서 수잔은 양어머니와 급격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브링크
부인은 종종 프록스타베겐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고 이따금씩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수잔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수시로
편지에 적어 보냈다.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내용이 적힌
것들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수잔은 자신이
감명을 받은 성경 귀절이나 아름다운
싯귀를 그 편지 속에 곁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이런 내용의 시를 적어서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여기에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당신과는 같지 않고,
  누구도 당신이 할 수 있는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랑받고 있는
존재지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언제나 신은 당신을 용납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의 유일한
피창조물이고,
  당신에게만이 주어진 특별한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주어져 있지요.
  당신 역시 이 점을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므로 당신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지요.
  아무도 당신과 똑같을 수는 없을 뿐더러,
  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곁들인 편지를 보내고 나서
양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어머니가 이 시를 읽은 후 아주
기뻐하면서 울었다고 말하며, 자신에게도
낭독해 주었는데 그녀는 중간에 눈물이
흘러서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내색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지만, 모녀가
서로 화해하여 다정히 지내고부터는 곧잘
농담을 하시며 밝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브링크 부인이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어왔을 때 수잔이 무심히
유년기 시절의 일때문에 요즈음 정신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정말 미안하구나.
그리고 그 비용은 의당히 내가 물어야 할
것 같구나. 얘야, 다시 한번 정말 진심으로
사과한다."
  "어머니, 그것 때문에 말했던 게
아니에요. 이제 그 일은 깨끗이 잊었어요.
그리고 치료도 완전히 끝났는데 무슨
비용을 물어준다는 거예요? 그 외에도 저를
  "아무튼 지난 날 내가 너무나 많은
과오를 저질렀구나. 난 그걸 도통 모르고
있다가 심장병이 악화되면서 알게 됐다.
한때는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마음밖에는 안 들더구나. 그리고 죽을 대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 기분에 지난 날들을
하나씩 회상해 보았더란다. 물론 여러 가지
잘못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걸렸던 일이 뭐였는지 아니?"
  "뭐였어요?"
  "물론 네게 몹시 가혹하게 대했던 일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었지. 그래서 너한테
용서받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더구나. 내가 병원에 실려가는동안
줄곧 네 이름만 부르더라는 얘기를 네
아버지가 안 해주더냐?"
잘하세요. 어머니가 다시 쓰러지신다면
그땐 저는 몹시 슬플 거예요."
  "고맙구나, 수잔. 이젠 수술로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네 말마따나 한번 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지. 그리고
남은 생애를 애착을 가지고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할 작정이다."
  양어머니와의 통화는 보통 삼십 분을
넘었고, 어떤 때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적도 있었다. 그러나 통화를
끝내고 나면 왠지 개운한 기분이 들면서
이제는 그녀가 마치 나이든 언니나
친구처럼 느껴졌다.
  양어머니 역시 수잔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며 언제든 곤란한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수잔은 기독교인이 된 후부터 자신에게
모질게 대했던 양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가 있었다.
  사실, 이처럼 험난하고 혹독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 대해 가혹해질 수
있는 소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단계 깊이 헤아려 보면, 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도 결국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 본래부터 악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생까이었다.
  양어머니와의 화해 이후 모처럼 마음편한
날들이 계속되는가운데서도 수잔이
유일하게 고충을 느끼는 일이 한가지
  그것은 친아버지에 대해서 묻는 일이
없었던 엘레노라가 네 살이 되면서부터
자기는 왜 아빠가 없느냐고 묻는 일
때문이었다.
  수잔은 아이가 자라면 언젠가 이 문제를
물을 것으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땐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사실대로 말해주는 편이 아이를 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솔직히 엘레노라에게
얘기를 들려주었다.
  "엘레노라, 사실은 너한테도 다른
애들처럼 아빠가 있어."
  그러자 엘레노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대처럼 물었다.
살지 않는 거지?"
  "그건 지금은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야."
  이 어린 아이가 이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수잔은 엘레노라가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 말해주기로 하고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생겼어? 아빠도 엄마처럼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어?"
  "아니야, 네 아빠는 금발이란다."
  "눈은?"
  "눈은 푸른 색이고."
  아이는 마음 속으로 아빠의 얼굴을
그려보는 눈치였다. 그러나 잘 생각이
것이었다.
  "아빤 지금 어디서 살고 있어? 누구랑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아빠를 만나고 싶니?"
  수잔의 물음에 엘레노라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눈빛
속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히
엿보였다.
  "지금은 안 돼. 네가 좀더 나이가 들면
그땐 네 아빠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줄게."
  "왜 안 돼? 왜 지금은 안 되고 나이가
들어서 만날 수 있다는 거지?"
  수잔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아빤 지금 다른 도시에서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야."
  엘레노라의 아버지 크리스터는 아이가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그 여자와
함께 아이 둘을 낳아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더 늦추는 것보다는
지금이라도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아 수잔이 머뭇머뭇 물었다.
  "엘레노라, 엄마가 연락을 해서 한번
아빠를 만나도록 해줄까?"
  "언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되도록 빨리 말야.
연락이 닿더라도 네 아빠가 시간이 나야
너를 만날 수 있지 않니?"
  수잔이 말하자 엘레노라는 눈길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쓸쓸히 대답했다.
  "어째서지? 금방 만나보고 싶다고
하잖았어?"
  수잔이 의아해서 묻자 아이가 차갑게
대답했다.
  "만나보고는 싶어. 하지만 엄마가
연락해서 만나는 건 싫어. 아빠가 나를
만나고 싶어 먼저 연락하고 찾아오기
전에는 절대로 안 만나겠어."
  수잔은 이 작은 아이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모두 보아버린 것 같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엘레노라가 몹시 처연해 보이며
다시 또 자신의 지난 일들이 반성됐다.
  아빠 없이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무작정
낳은 것이 무책임했던 행동처럼 여겨지며,
설혹 그것이 옳았다 해도 당시의 심정을
 엘레노라가 자란 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수잔의 슬픈 기색을 눈치채서였을까?
  엘레노라가 그녀의 품에 살그머니
안겨오며 속삭였다.
  "엄마, 괜찮아. 난 아빠 없이도 잘
자라왔잖아. 그리고 앞으로도 잘 자랄
자신이 있어. 내겐 엄마만 있으면 만족해."



  9. 기적처럼 다가온 일

  방송국 사람들

  그 이듬해인 1989년 5월 말경이었다.
  어느 날 밤늦게 공부를 하던 중 문득
장재영 목사의 얼굴이 떠올라 수잔은 잠시
손을 놓고 그와 보냈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동안 서로 소식이 없었다는
생각에 틈을 내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공부를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신기하게도 장목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목사님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난 잘 지내고 있어. 그런데 수잔,
한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그래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 뭔지
궁금한데요?"
  "응, 실은 말야. 한국에서 텔레비전
방송국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와 있거든.
새로운 기획물로 한국의 해외 입양아에
관한 특집 프로를 제작하고 있는
중이라는구나."
  "그런데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내게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문득
수잔이 생각나서 전화를 한 거거든."
  "어머, 저를 추천하셨다는 말인가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우선 수잔의
허락이 있어야지."
얼굴이 나가는 것이 싫은데요?"
  "이 바보야. 이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라구. 방송이 나가면 수잔과 같은
입양아들의 실상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잖아?"
  "물론 그런 프로가 만들어진다는 데는
저도 찬성이에요. 하지만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그래요. 저의 개인적인
얘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 정말 싫어서예요."
  "수잔, 몇 년 전에 친어머니를 찾으려고
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내게
했던 일 기억나니?"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자, 한번 너의 얘기가 한국에서 방영된다고
한번 생각해 보란 말이야."
  수잔은 자신의 얘기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 아주
창피스럽게 여겨졌다.
  "끔찍해요.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제
얘기를 알게 된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부끄럽다는 생각만 들고 다른 생각은 안
드니?"
  "무슨 생각이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수잔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혹시
친어머니가 직접 그 프로를 볼 수도 있고
말야.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어쩌면 친어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몰라."
  장목사의 말에 수잔은 금세 마음이
흔들렸다.
  "목사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확률은 반반이야. 괜스리 기대를
가졌다가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그저
고국의 방송국 사람들을 도운다는 생각으로
출연해 보란 말야. 어때? 해볼 생각이
있어?"
  수잔은 머뭇거리다 자신없는 어조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목사님이 결정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이건 스스로
결정할 문제지 내가 하란다고 해서는 안
돼. 수잔이 싫으면 그만이니까 염려말고
  "목사님이 결정하세요!"
  "네가 결정하래두!"
  "알았어요. 그럼...... 하겠어요. 하지만
친어머니를 만난다는 기대 따윈 안하고
그저 도우는 걸로 하겠어요."
  "좋아, 그럼 방송국 사람들에게 너를
추천하도록 하겠다....... 잘 지내라!
다음에 연락하마!"
  "네....... 안녕히 계세요."
  통화를 끝내고 나서부터는 번잡한
상념들이 떠올라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확률이 반반이라고 하지만,
친어머니를 만난다는 일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허락한 사실이 후회스러워지기도
  게다가 수잔은 이 문제에 다시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싫었다. 값비싼 정신치료와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극복해
냈다고 믿고 있는 과거의 사실에 다시
집착하게 된다면 그동안 애써온 것들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처럼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는
장목사님의 추천이고 보니 딱 잡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딱 잡아 거절할 만큼
성격이 모질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딱 잡아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
  우유부단한 자신의 성격을 자책하며,
수잔은 그 사람들이 대체 어떤 질문을 던질
들었다.

  장목사의 전화를 받은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6월 초순이었다. 한국의 MBC 텔레비전
프로듀서인 고장석 씨와 카메라맨 한
사람이 통역을 담당한 여인 한 사람을
동반하고 수잔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수잔의 얘기를 대강
들은 뒤, 그들은 이내 첫번째 촬영에
들어갔다. 수잔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책
사이에 앉아 타자기를 치며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과, 방석 위에 앉아 참선에
몰입해 있는 장면을 연기해야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치며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평소에 하는
  그들이 충고했지만, 수잔은 카메라의
앵글이 자시을 향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자꾸만 긴장이 됐다. 그 바람에 몇
번씩 N.G를 내고 다시 찍어야 했다.
  "다음은 인터뷰 장면을 찍도록 합시다.
그저 묻는 질문에 편안히 대답해 주시면
돼요."
  "무슨 질문을 할 건데요?"
  "모르는 질문은 안해요. 잘 알고 있는
질문만 할 거니까 안심하세요."
  담당 프로듀서가 웃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거실의 식탁에 통역을 맡은 여인과
프로듀서가 함께 앉았다. 그리고
프로듀서가 적어준 몇 가지 요점들을 살핀
뒤 통역을 맡은 여인이 수잔에게
  "엘레노라의 아빠를 만난 게 열여덟
살이었다고 했는데, 왜 헤어지게 됐는지
그때 얘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첫 질문부터 수잔은 머뭇거렸다. 늘상
사람들은 그 점을 알고 싶어했지만, 무슨
애틋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하기가 거북스러웠다.
  그저 철부지 시절의 불장난에 불과했고,
그 결과가 오늘에 이어졌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헤어졌을 뿐이었다.
  수잔은 약간 난처한 기분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남자를 사귈 순 없었지만.......
아이를 낳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혼 생각은
없었어요."
  통역을 맡은 여인이 손에 든 메모를 살핀
  "불행한 어린 시절의 영향 때문에
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정을 꾸린다는 게 겁이 났어요."
  그러자 프로듀서가 수잔에게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친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수잔이 역시 영어로 답변했다.
  "네, 제 가족들....... 언제나 어머니를
못 견디게 그리워해 왔어요....... 보고
싶어요."
  "만약 친어머니를 만난다면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모르겠어요....... 상상도 못한
일이라서......."
  대답은 했지만 옳은 답변이 아니었다는
  친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이라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물기로 흐려진 눈두덩을 손끝으로 누르며
수잔이 말을 이었다.
  "......이토록 먼 곳으로 왜 저를 보내야
했는....... 편한 마음으로 묻고 싶어요."
  입양을 보낸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느냐고
프로듀서가 다시 물었고, 수잔은 조금
망설이다가 울적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원망도 했어요. 왜냐하면......
잘 산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거든요....... 건강한 몸과 마음......
중요한 것이니까요."
  되도록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려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프로듀서가 기획안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브링크 양. 여기서는 이만
하고 밖으로 나갑시다. 엘레노라가 노는
모습을 계속하기로 하지요."
  수잔이 눈물을 닦고 일어서며 물었다.
  "제가 무척, 잘 못하지 않는가요?"
  "아닙니다. 염려 마세요. 아주 잘
했으니까요."
  프로듀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어쨌든 그
말이 고마웠다.
사람들과 함께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로 내려갔다. 프로듀서가 잠시 촬영
장면을 구상하는 듯하더니, 엘레노라에게
친구를 한 명 데려오라고 부탁하고
수잔에게는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 2층
베란다에 서서 놀이터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신호를 하면 내려오라고 말했다.
  수잔은 잠시 후 아파트 베란다로 나와서
놀이터를 내려다보았다.
  엘레노라가 이웃집에서 데려온 아이와
함께 그네를 타며 웃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각도를 잡아 그 모습을 찍는 중이었고,
통역자와 프로듀서가 화면에 안 잡히도록
카메라맨 뒤에서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웃으면서 손을 천천히 흔들어
보이세요."
때 PD의 말을 통역자가 알려주었다. 수잔은
어색했지만 천천히 아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곧 내려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잔은 베란다를 나와
다시 놀이터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그네를 밀어주는 장면을 찍어
볼까요?"
  수잔은 그 말에 따라 엘레노라가 타는
그네를 밀어주었으며 그날은 그것으로
마지막 촬영을 끝낼 수가 있었다.
  이튿날 오전에 다시 방송국 사람들이
찾아왔다.
  두번째 날의 촬영은 모두 그녀의 집
밖에서 이루어졌다. 수잔은 그들의
요구대로 장바구니를 들고 쇼핑센터에 들러
배추를 사기도 하고, 통역을 담당한 장혜남
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장면들을 필름에 담은
뒤 오후엔 함께 시내로 나가 그녀가
엘레노라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찍었다.
  이틀간의 촬영 작업을 하는 동안 방송국
사람들은 수잔에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
한국인 사이에 있을 때는 스웨덴 사람들과
있을 때 느끼는 소외감을 전혀 안 느꼈고,
촬영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편안한 기분에
잠길 수가 있었다.
  오후엔 장혜남 씨가 요리한 불고기에
수잔이 토마토케찹으로 담근 김치를 곁들여
식사를 했다.
  거의 그 김치에는 손을 안 대면서도
그들은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그들은 다음 촬영지인
덴마크를 향해 떠나갔다.

  한국의 입양아들

  방송국 사람들과 헤어진 후에도 수잔은
통역을 해주었던 장혜남 씨와 가깝게 사귈
수가 있었다.
  수잔은 가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고국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장혜남 씨는 웁살라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남편 오세훈 씨와 함께
수잔의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알게 된 수잔은 그들에게서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고 고국의 생활 풍습에
대해서도 조금씩 익숙해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인연을 통해
스웨덴에 와 있는 다른 입양아들과도
연락을 갖게끔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스톡홀름과 괴터보그에 한국 입양아
출신자의 친목 단체가 조직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모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수잔이 연락을 받고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날은 공교롭게도 열여섯 살의
한국인 입양 소녀가 양부모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건이 일어난 후였다.
  그때문에 모임의 분위기가 한껏 침울해져
  모두들 그 일을 화제로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으로 나누는 얘기에 수잔은 귀를
기울였다.
  -양부모와 입양아 자녀 사이엔 문제점이
많지요. 스웨덴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입양아들은 언제나 소외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번 장양의 경우처럼,
그걸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그러니 이건 정말 비극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양부모를 만나서 잘 된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 그런 경우가 전체 중의 몇
프로나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5프로?
아니면 10프로?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프로를 넘지 못할
거예요. 만 명 중에 기껏해야 천 명이
명은 불행한 경우란 말입니다.
  -유감이지만 우리들은 조국과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친부모들은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나라로
보냈겠지만, 우린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낯선 나라에 와서 온갖 어려움
속에 성장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린 얼굴도 이상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아이였고, 처음엔 주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었다구요.
  -한마디로 우린 완전한 스웨덴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한국인도 못
돼요. 구태여 말한다면 이들 중간에 있는
얼치기이니 셈이지요. 스웨덴 사람들은
고충을 이해해 주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날,회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잔은 참으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 낯선 나라에 와서 성장하며 겪은
자신의 체험이 그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금도 많은 어려움과 내면적인
문제점 때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고백도
들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도 입양된 사실을 불행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잔은 어쨌든 그들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녀 역시 이런
고통들을 견디지 못해 열세 살이 되던
무렵에 벌써 자살을 기도했던 일마저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극복해 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상흔의 잔재가 앙금처럼 남아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번 받은 마음의 상흔은 아마 평생을
두고도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양어머니와의
불화를 못 견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한
소녀의 절망이 수잔의 가슴에도 진한
슬픔으로 와 닿았다.

  기적의 전화벨

  한 해 전만 해도 여름 방학 때에는
대학촌의 탁아소가 문을 닫아 수잔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89년 봄에 대학촌 학부모들이 학교
탁아소가 운영돼서 수잔은 엘레노라를 맡긴
뒤 아르바이트를 할 수가 있었다.
  MBC TV에서 촬영을 하고 간 지 두 달이
지난 7월 30일 오후 6시경이었다.
  수잔이 탁아소에서 엘레노라를 데리고
집에 도착해서 막 식사를 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장혜남 씨의 들뜬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있어요,
수잔."
  "제게요?...... 그게 뭔데요?"
  장혜남 씨가 기쁨 때문인지 짧은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했다.
  "지금 하는 말을 듣고 절대 기절하지
마세요. 아시겠지요?"
  "정말 궁금하군요. 무슨 일 때문에
  "수잔, 당신의 생모를 찾았다는
국제전화가 방금 한국에서 걸려 왔어요."
  "네?"
  수잔은 그만 소스라치듯 놀라움에
빠져들고 말았다.
  자신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도무지 그
말이 실감나지 않아 수잔이 다시 한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지요? 제 친어머니를
찾았다는 전화를 받으셨단 말인가요?"
  "그래요! 당신 친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보고 방송국에 연락을 하셨다고 해요!
전번에 당신을 촬영해 간 미스터 고를
아시죠? 그 분이 자기 사무실로 전화를
해달라고 말했어요. 어때요? 전화해 보지
않겠어요?"
  수잔의 음성은 긴장과 놀라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그럼 곧 그에게
전화를 해보세요."
  "네, 그러겠어요.......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도 수잔은 한동안
이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나의
친어머니가 계시는 걸까? 또 그녀가 방송을
보고 나를 알아보았다는 게 사실일까?
한국의 방송국 사람들이 무슨 착오를
일으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연한 기분 속에서 우두커니
거울 앞에 서 있기도 하고, 갑자기
부산스레 움직이며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경황없이 몇 분간을
보냈다.
걸어달랬다는 장혜남 씨의 전갈이
생각났다. 서랍을 뒤져 방송국 프로듀서가
주고 간 명함을 찾아낸 뒤, 수잔은 번호를
보며 버튼을 눌렀다. 흥분된 마음에 몇
번이나 한국의 국제전화 호출번호를 잘못
누르다가 마침내 통화가 이어졌다.
  "실례합니다. 이곳은 스웨덴이고......
제 이름은 수잔 브링크라고 합니다.
교양제작2부에 근무하는 고장석 씨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수잔이 영어로 신분을 밝히고 고장석
PD를 찾자, 잠시 기다리라는 말이 들린 뒤
이윽고 그의 음성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브링크양, 당신의 친어머니를 찾았다는
건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세
보고 싶어하고 한시바삐 한국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의 오빠가 여행
비용을 보내준다고도 말했습니다."
  "제게 친어머니와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인 걸 어떻게 합니까?"
  그 기쁜 와중에서도 국제전화의 비싼
요금이 걱정되어 수잔은 오랜 통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고장석 씨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일어난 이 믿기지 않는
소식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놓고 나자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처럼
여겨졌다. 자신도 피를 나눈 가족과
생각됐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결점마저도
사랑해 줄 수 있는 가족들이 내게도 있는
것이다!
  너무 기쁜 탓이었을까? 수잔은 문득 너무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호리병 속에서
꺼내준 어부에게 복수를 했다는 동화 속의
거인처럼 원망스런 기분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있다가
이제서야 나타났단 말인가!
  어째서 내가 고통받고 있을 때, 그리고
따뜻한 정에 주려 있을 때 나타나 나를
위로해 주지 못했던가!
  너무도 행복에 겨워 하는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제라도 나타나서 서로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마웁고

  수잔은 그 후 한동안은 상당히 혼란스런
기분에 잠겨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들뜬
며칠간을 보냈다.
  오로지 친가족을 찾았다는 기쁨에 젖어,
이 소식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만 전념했을 뿐이었다.
  모든 친구들과 이웃들, 학교의 클라스
메이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 그녀는 한층 기쁨이 고조됐다.
  다만, 양어머니만이 이 전갈을 그다지
반겨하지 않았다. 물론 기뻐는 하면서도,
그녀의 말 속에는 짙은 불안과 우려가 배어
있었다.
  "수잔, 굉장히 놀랍고 반가운
한국으로 가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지만, 혹시 한국에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
  양어머니는 수잔이 한국에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 근심되었던지 몇
번씩이나 그 말을 되묻고는 했다.
  "돌아오겠어요. 가족들을 만나러
일시적으로 갔다 오는 것뿐이라구요."
  "그래, 꼭 돌아와야 한다. 이제 네가
없으면 난 살지 못할 거 같구나.
친어머니도 중요하다만 양어머니인 내
마음도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알았어요, 어머니.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고맙구나. 그럼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하는 거다. 알겠니?"
돌아올 수 있겠어요."

  수잔은 중요한 일들을 되도록 조속히
처리하고, 그밖의 일들은 미뤄둔 채 서둘로
여권부터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가지 망설여지는 점이 있었다.
엘레노라를 데리고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만일 함께 가게 된다면
아이에게 너무 큰 쇼크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거리를 지나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여 아이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나 않을까?
  아무래도 친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엘레노라를 제대로 돌보아 줄 겨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엘레노라가
혹시 가족들 앞에서 창피를 주면 어쩌나
  수잔은 이 문제를 한국의 가족들과
의논해 보기로 하고 장혜남 씨를 통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 후 그녀가 알려준
답변은 이러했다.
  "지금은 처음이니까 수잔 혼자만 가고
다음에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아이도 보고
싶으니 함께 오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럼, 함께 와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보다 강한 표현이 적절할 거예요.
그들은 엘레노라도 꼭 함께 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수잔은 엘레노라의 여권도 같이 신청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역시 이 결정이 옳았던 것으로
믿어졌다. 만일 엘레노라를 두고 혼자서만
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싶고 걱정이 돼서 마음 편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출국을 하루 앞둔 날에 양부모가
플록스타베겐에 있는 수잔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모처럼 오랜만에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낸 뒤에,
양부모는 한국에가게 되면 그때
친어머니에게 전하라며 영문으로 쓴 안부
편지와 함께 금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나절 동안 머무르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파트를 나섰다.
  "수잔, 한국에 갔다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내게 다시 한번 약속해라."
  양어머니는 떠나기 전 차창 문을 열고
우려와 강요가 담긴 음성으로 이 말을 하며
  "걱정 마세요.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도 왜 믿지 못하세요?"
  수잔은 웃으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날 밤 수잔이 친할머니를 만나러 함께
한국으로 가게 됐다고 말해 주었을 때 어린
엘레노라는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딸이 자기
어머니를 만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정말 일곱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이
어른스러운 말이 어떻게 작은 아이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 있을까! 수잔은 너무
당황스럽고 기뻐 아이를 꼭 안아들고 방
안을 빙빙 돌며 춤을 추었고 엘레노라는
손뼉을 짝짝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나의 엄마가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매일 울며 지냈지만
  지금은 기뻐서 웃고 있다.

  수잔은 내일이면 한국으로 떠난다는
설레임 속에서 짐을 꾸리고도 한잠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장혜남 씨와
그녀의 남편인 오세훈 씨가 수잔을
공항까지 태워다 주기 위해 차를 가지고
왔다.
  오후 5시 엘레노라와 함께
플로스타바겐의 집을 나온 수잔은 그들의
차를 타고 한 시간 후엔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했다.
  장혜남 씨와 오세훈 씨의 전송을 받고
공항 대기실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고
  "엄마, 나한테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뭔줄 알고 있어?"
  "그게 뭔데?"
  "알아맞춰 봐."
  수잔이 모르겠다고 하자 엘레노라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릴 적에 엄마와 길을 가다가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가는 걸 보았거든. 그때부터 난
비행기를 한번 꼭 좀 타보고 싶었어."
  "그게 언젠데?"
  "내가 다섯 살쯤 됐을 무렵이야.
그때부터 맨날 잠이 들면 내가 비행기를
타고서 구름 사이을 날아다니는 꿈을 아주
많이 꿨거든."
  "그랬니?"
  "응,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보는 게
 소원이었어. 엄마 소원은 한국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보는 거였지?"
  "그랬지."
  "그럼 이제 엄마와 내 소원이 모두
이루어진 셈이잖아!"



  10. 23년 만의 해후

  귀국길

  수잔의 여정은 스톡홀름을 출발하여
파리에서 일박한 다음, 이튿날 동경을
거쳐서 서울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20일 저녁 늦게 파리에 도착한 뒤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호텔을 나와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그녀에겐
곤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톡홀름 공항의 수하물 센터에서 여행
뒤늦게 접수증을 확인해 본 결과 도착지가
파리로 적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잔이 문의하자 공항 직원은 가방을
찾아서 탑승하는 비행기에 실으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그녀는 공항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수하물 탁송 창구까지 가보았다.
  그러나 그 많은 짐들 중에서 어떻게
자신의 가방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창구
직원의 협조를 얻어 짐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어디서도 자신의 가방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비행기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결국은
짐을 못찾은 채 대합실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수잔은 스톡홀름 공항 탁송 센터에
않았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곳 담당자는 가방은 부탁대로
한국을 향해 발송되었으니 접수증에
도착지가 잘못 기재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수잔은 그들의 실수에 화가 났지만,
어쨌든 가방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안심이 되었다.
  가방 때문에 애를 태운 뒤라 정신이
없었던지, 이번에는 그녀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만 비행기를 잘못 타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행 비행기 승객은 탑승하라는
아나운스먼트를 듣고 서둘러 타고서야
자신이 타야 할 비행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녀가 탄
비행기는 방콕을 경유하는 항로였다.
  그때문에 여행 시간이 무려 5시간이나 더
소요된다. 한시바삐 한국에 도착하고 싶은
조급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도 얼마동안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스러웠다. 비행기를 탄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던 엘레노라는 이륙하기도
전에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기체가 지중해 상공을 지날 무렵에야
수잔은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며 번거로운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자기에게 닥친 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로는 줄곧 기쁨과 흥분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조용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신이 선사한 향그럽고 희귀한 차를 한
모금씩 입 안에서 음미해 보는 마음으로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적과도 같은 행복감을 찬찬히 한 가지씩
떠올려 보았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
  발단은 물론 장재영 목사님의 전화벨
소리에서 시작된다. 그의 추천 권유에 따라
한국의 방송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의 얘기가 방송된 것을 보고
친어머니가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연유를 따져 올라가면
기숙사로 들어간 것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집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한국인 선원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을 통해 알게
된 장재영 목사와의 인연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한 가지씩 정리해 보니 이러하다.
  어느 날 가출했던 탓으로 한국인 선원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통해 장목사와의
인연이 닿았으며, 또한 목사님의 추천으로
한국의 방송국 사람들을 소개받는다.
그들이 방영한 프로그램을 보고 어머니는
방송국을 찾아오고 어머니의 얘기를 들은
MBC의 프로듀서는 장혜남 씨를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알려온다.
  수잔은 자신의 가출에서부터 비롯되어
어머니를 만나기까지의 이 기다란 인연의
사슬이 너무도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각이 드는 것이었다.
  수잔은 그들 모두에게 새삼스레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와 어머니 사이를 숙명처럼
가로지르는 시간의 시냇물 위에 징검다리가
되어 준 사람들이었다. 수잔은 그들이
놓아준 낱낱의 인연을 딛음으로써 어머니가
서 계신 저편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제 곧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에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서로 마음껏
얘기를 나누며 어린 시절의 회상에 잠겨들
수도 있을 것이다.
  수잔은 갈망 속에서 상상해 오던 일을
생생한 현실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감마저 느꼈다. 한국의 가족들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또 조국은
이제까지 살아온 스웨덴과는 어떤 점들이
다를까.
  생각할수록 어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픈
조급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역시 친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는 단 한가지의 사실에서 찾을
  어머니.
  그녀는 오랫동안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스스로 버림받은 기분에 한때는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부터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그 이후 아무것도 없는 홀몸으로
그녀에게는 다섯 남매들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다섯 자식 중의 하나라도 잘 되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라셨을 것이다.
  친어머니를 찾던 18세 무렵 받아든 입양
소견서에는 그러한 어머니의 소망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친자식처럼 잘
키워주며 대학 공부가지 시켜줄 수 있는
어머니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이 굶주림과 무지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입양을
택하는 편이 그래도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했을 것이다.
  비록 어떤 점에서 그런 판단이 현명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그처럼 자식의 장래를
염려해 입양을 결심한 것은 단순히 자식을
거리에 내다버리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어머니는 그 당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편을 선택했던 것이고,
그것은 참으로 어머니로서는 사랑이
충만했던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뼈아픈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자책하며 가난 때문에 먼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자식을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보다도 더 그리워해 왔을 것이
틀림없다.

  나의 한국 어머니

  1989년 10월 21일 오후 8시. 수잔은 23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의 땅을 밟아볼 수가
있었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와
김포공항의 청사를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온
탓이었을까.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에 몹시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어떤 식으로 그들을
대해야 할지 서먹한 감정이 느껴졌다.
  수잔은 통관 수속을 마친 뒤 우선 여행
가방을 찾으려 했다. 담당 직원과
살펴보았지만 가방이 도착하지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한국인 청년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수잔 브링크 양이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이 계속
말했다.
  "저는 MBC 텔레비전에서 나온 최진영
PD입니다. 지금 친어머니와 형제들이
대합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비행기를 잘못 타서 상당히 지체됐어요.
그들은 오래 기다렸는가요?"
무려 일곱 시간 가까이 지났군요."
  그 말을 듣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방을 찾느라고 가족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가 없었다. 수잔은 담당 직원에게 가방이
도착하면 보관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엘레노라의 손을 잡은 뒤 대합실로 통하는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긴장 속에서 몸이 뻣뻣이 굳은 채
자동문을 나섰을 때 강한 불빛이 비치며
텔레비전 카메라가 걸어나오는 그녀와
엘레노라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수잔이 당혹감 속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출영객들 사이에서 나이든
한 여인이 다가와서 포옹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루어졌다.
  수잔은 포옹을 받으며 그녀가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너무나 가슴이 두근거려 제대로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친어머니는 수잔을 어루만지며 통곡했고,
수잔 역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뺨 위로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녀는 서로 힘껏 포옹한 채 말을 잃고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대고 있었다.
  한마디도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혹 통한다 하더라도 말을 꺼낼 수 있는
심정이 아니었다. 23년간 가슴 속에
응결되어 있던 그리움은 눈물을
통해서밖에는 달리 표현해낼 방법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수잔은 어머니의 포옹을 받으며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갔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줄곧 두 사람을 따라오고 있었고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끈끈하게 온
몸에 와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출영구에서 얼마쯤 벗어난 곳에 정장
차림의 한 남자와 세 명의 여인들이 서
있었다. 어머니 이옥수 씨가 그대로
지나치려는 수잔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유숙아, 네 오빠와 언니들이다."
  그들이 다가왔다.
  수잔은 마중나와 준 오빠와 언니들의
얼굴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입양될 당시 열네 살의 중학교
소년이었던 오빠 신수영은 어느덧 서른여덟
명의 언니들도 삼십대에 접어든 여인들로
변해 있었다.
  "유숙아, 네 오빠와 언니들이야."
  망연히 서 있는 수잔에게 이옥수 씨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러자 오빠와 언니들이 눈물이 글썽해진
눈빛으로 가까이 둘러서며 손을 잡고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그처럼
성장한 형제들이, 그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른 채
공항을 나왔다.
  공항을 나왔을 때 오빠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유숙이
엘레노라와 함께 타자 오빠 신수영 씨는
경황없이 울먹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서 차에 오르세요."
  엘레노라를 사이에 두고 유숙은 어머니와
셋이서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유숙아, 용서해라."
  어머니는 줄곧 유숙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차가 어머니의 아파트가 있는 광명시를
향해 달리는 동안 그들은 여섯 개의 손을
꼭 움켜쥔 채 형언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오빠는 택시를 타고 뒤따라오는 언니들의
차를 확인하느라 이따금씩 백밀러를 살필
뿐 운전을 하는 동안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집
  30분 후 일행을 태운 승용차는 광명시에
있는 이옥수 씨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녀의 서민 아파트는 조금 비좁기는
했지만 유숙을 맞을 준비로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들
오남매는 한 방에 가득히 둘러앉아 비로소
마음껏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눈빛과
손짓으로 반가운 심정을 나누었다.
  유숙은 그들 형제들 틈에서 이전에는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따스한 혈육의
정을 느꼈다. 그들의 얼굴은 그녀에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친형제들 가운데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할 수 없이
포근한 심정이 들었다.
  그러자 어째서 이처럼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하고, 혼자만이 뚝 떨어져 고난에 찬
  "어렸을 때는...... 이런 흉터가
없었는데!"
  샅샅이 유숙의 얼굴을 살펴보던
어머니는, 어렸을 적 양어머니에게 매를
맞아서 생긴 이마의 조그만 흉터를 발견해
내고는 서운한 음성으로 말하셨다. 그처럼
자기의 몸을 알뜰히 염려해 주시는
어머니의 애정에, 유숙은 훈훈하게 마음이
덥혀오는 것을 느꼈다.
  "내 손 좀 한번 보자꾸나. 어디, 이리
내밀어 보렴."
  어머니는 자신의 손을 유숙의 손에
비교해 보셨다. 그리고 다시 발을 내밀어
유숙의 발에 비교해 보시더니, 이번에는
언니들에게도 손과 발을 내밀어 보라시며
차례로 모두의 것을 비교해 보셨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애처럼 웃으시며
말했다.
  "보려무나. 한 틀로 찍어낸 것처럼
모두들 꼭 같지 않니?"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모두들 손과 발의
모양이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게도
닮아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
가족들은 슬픔 속에서도 따뜻한 웃음들은
터뜨렸다.
  "참, 내 정신 좀 봐라. 먼 길을 오느라고
몹시 시장할 텐데 저녁부터 먹어야지."
  이옥수 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언니들이 말렸다.
  "상은 우리가 차릴게 엄만 유숙이하고
있어요."
  "음식은 다 장만해 놨다. 국만 데워서
기져오면 돼."
말하자 세 명의 언니들이 우르르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준비해둔
음식들이 가득히 담긴 밥상을 들고서
들어왔다.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구나."
  이옥수 씨는 그중 맛있는 반찬들을
유숙의 앞으로 돌려놓으며 걱정되는 듯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막내딸을 위해 23년
만에 차려준 동그란 밥상 위에는 그녀의
살뜰한 정성이 깃들여 있는 반찬들이
많았다.
  그 모두가 유숙에겐 처음 대하는 것들
뿐이었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배어선지
한결같이 맛이 있었다.
  가족들은 모처럼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저녁 식사를 했다. 서로의 코가
젓가락들이 한번도 부딪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한국인의
미덕은 이처럼 비좁은 밥상 위에서 저절로
배워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유숙은 혼자 마음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이 화목한 분위기를 엘레노라의
음식 투정이 흐려놓기 시작했다.
  유숙은 이 아이가 더 큰 심술을 부리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옥수 씨가
그걸 알아챘는지 지레 아이를 두둔해 주며
손수 음식을 떠먹였다.
  "우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그러는
게야."
  밥상 위의 반찬들을 한번 쓱하니
위에서 멎었다. 그녀가 김 한 장을 집어
엘레노라의 밥 위에 얹은 그것을 아이의
입에 가져다 주었다.
  엘레노라는 처음엔 천천히 도리질쳤다.
그래도 먹어보라고 하자 마지못한 듯
조심조심 씹어보는 시늉을 보였다. 그
다음엔 입 움직임이 매우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엔 입 안에 든
것을 꿀꺼덕 삼킨 다음 시선은 김 위로
향하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엘레노라는 이옥수 씨가
김에 싸준 밥만은 곧잘 받아 먹었다.
  엘레노라의 밥 시중을 들어주는 이옥수
시의 가슴 속에는 그때 아련한 감회가
스쳐가고 있었다.
  23년 전의 아침이 회상됐다.
안을 나풀나풀 거닐던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연히 떠오르고,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엄마, 싫어....... 나 안 갈테야.
  -그럼 못 써. 우리 유숙이 엄마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듣지? 오늘 꼬까옷 입고 어여
간다고 엄마랑 어제 약속했잖아.
  -언니들은 안 가는데 왜 나만 가야 해?
  -그건 우리 유숙이가 언니들보다 예쁘고
똑똑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 갔다가....... 세 밤만 자구서
도루 올테야.
  그처럼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떠나보내고 돌아와서 그날 밤 얼마나
흐느껴 울었던가.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던 아이가 가버리자
허전한 심정에 살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낮에는 등에 업고 온종일 행상을 다니고
밤이 되면 품에 보듬으며 한시도 떨어져
지낸 일이 없었던 아이....... 서로 소식도
모른 채 23년 동안이나 헤어져 살다가
스물일곱 살의 여인으로 변하여 오늘에야
집으로 돌아온 아이.
  이옥수 씨는 그 모두가 한순간의 꿈인 양
여겨졌다.

  그날도 밤은 깊어만 갔다.
  언니들이 어머니와 막내동생을 위해 다른
방으로 가버리고 난 후 유숙은 이옥수 씨와
함께 같은 이불을 덮고 나란히 잠자리에
  포근한 느낌 속에서 손을 꼬옥 움켜잡고,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에는
따뜻한 물이 고여드는 듯했다.
  유숙은 그 느낌이 너무 소중해서
어머니의 얼굴에서 잠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한마디도 말은 통하지
않으면서도 온화한 눈빛, 따스한 손의
감촉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숙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이 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이
들게 되면 지금의 행복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자신은 다시 또 낯선 나라의 침대
위에 버려져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아왔다.
  유숙은 새벽녘에 잠깐 선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햇살을 뺨에
느끼며 눈을 떴을 때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눈에 보이는 물건들이 모두 낯설었지만
그곳이 어머니의 집이라는 사실에서 그녀는
새삼스레 행복감을 느꼈다.
  창 밖을 내다보니 새파란 가을 하늘엔
밝은 햇살이 가득했다. 유숙이 서울에서
맞은 첫 아침은 눈이 시릴 만큼 청명한
날씨였다.
  창문을 활짝 열고 한국의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 들어온 듯 이옥수
씨는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웃고
있었다. 유숙이 사뿐히 다가가 그녀를
포옹했다.
  "물을 뎁혀 놨으니 세수부터 하거라."
  그녀가 유숙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세수를 하는 시늉을 해보이며
손가락으로 목욕탕 쪽을 가리켜 보였다.
  유숙이 고개를 끄떡이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엔 대야 가득히 따뜻한 김을 올리며
세숫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숙은 소매를
걷고 물 속에 담근 뒤 가만히 온기가 몸
전체로 퍼져오르는 것을 잔잔히 음미하고
있었다.
  세수를 마쳤을 때 문 옆에서 기다리고
건네주며 말했다.
  "미용실에 가서 예쁘게 머리를 하고 서울
나들이를 할 거란다."
  그녀가 다시 머리를 손질하는 시늉을
내보인 다음 팔짱끼고 걸어가는 모습을
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유숙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어도 어머니의 말이라면
뭐든 고개를 끄떡여 보이는 것이 그녀의
반응이었다.
  식사를 한 뒤엔 이옥수 씨의 게획대로
동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손질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엘레노라를 데리고 모두들
함께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처음에 가본 곳은 남대문 시장이었다.
그곳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시장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신수영 씨는 유숙에게
한국의 전통 인형과 민속공예품을
선물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는 값이 비사
엄두를 못냈던 봉제 곰 인형을 사서
엘레노라에게 주었다.
  시장을 나와 명동 거리를 거닐며 구경을
했다. 플록스타베겐 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사람과 차들이 많았다.
  유숙은 자신을 닮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거리를 지나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엘레노라만 아니라면 자기를 특별한
시선으로 주시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거리를 걷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서울타워에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빌딩들이 수도 없이 솟아
있었지만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서울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한강물이 가을의 햇살 속에서 무수한 금빛
비늘을 반짝이며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 바로 저기
어디쯤이란다."

  한 시간쯤 지나서 남산 타워를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얘한테 한복을 한벌 해 입혀야겠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딸을 예쁘게
치장하고픈 마음이 가득했던가 보다.
주더니 이제는 한복을 맞춰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실한 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오빠 신수영 씨는 차를 영등포 시장
방향으로 돌렸다.
  이옥수 씨가 알고 있다는 시장 안의 한복
가게에 들렀을 때는 아름답고 때깔 고운
옷감들이 상점 안에 가득해서 유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 네 마음에 드는 옷감을 골라봐라."
  한때 화가가 되려고 했을 만큼 색깔에
대한 감각이 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고운
색들이 많은 데서 마음에 꼭 드는 배색을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참을
궁리하며 고른 끝에 선택한 것이 진주황빛
저고리에 짙은 수박색 치맛감이었다.
고상한 색감을 골랐구나!"
  본인보다는 오히려 이옥수 씨가 더
만족해했다. 그녀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하며 딸의 색깔 고르는 안목을 칭찬했다.
몸매의 치수를 재기 위해 상점에 준비된
한복을 입은 유숙의 모습을 보고, 이옥수
씨는 고상하고 기품서린 자태에 매혹된 듯
잠시도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엘레노라에게도 기성품으로 팔고 있는
색동옷을 한 벌 사주고서 한복집을 나온
일행은 다음 코스로 이태원 상가에
가보기로 했다. 유숙은 스웨덴을 떠나올 때
아파트의 이웃 여자로부터 한국에 가면
값이 싼 모조 구찌 핸드백을 꼭 좀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이 핸드백을 고르고 값을 치르려
계산을 해버렸다.
  "이건 제가 쓰려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사는 거예요."
  난처해 하며 설명을 했지만 신수영 씨는
이유야 어떻든 자신이 모든 비용을 쓰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못다한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유숙은 그 많은 비용을
오빠 혼자 부담하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날 저녁은 한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엘레노라를 위한 배려로써 이태원에 있는
식당에서 양식 식사를 했다.
  엘레노라가 스파게티 일인분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이옥수 씨와 신수영
씨는 어쩔 수 없이 이 애의 몸 속에 흐르고
  이틀째 되는 날 유숙은 한국의 절과
고궁을 구경하고 싶었다. 오전에그녀는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엘레노라와 함께
서울의 유명한 사찰인 도선사를 방문했다.
  오래된 사찰의 신비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단풍이 물든 나무숲에 둘러싸여
한결 아름다웠고, 한국의 고궁은 너무도
단아해서 그곳을 떠나는 것이 아쉬웁고
다시 찾고픈 마음이 들었다.
  MBC 텔레비전 방송국의 <인간시대>
프로그램 제작팀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가족들과 함께 쇼핑을 하고 서울
시내로 관광하는 모습을 필름에 담으며
며칠간 함께 동행해 오고 있었다.
  경복궁 경내를 두러보던 중 그 팀의
일원인 최우철 PD가 유숙에게 물었다.
말해 보세요?"
  "글쎄요....... 좀더 한국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어요."
  "그럼 박물관이 가까이 있으니 그곳을
한번 가볼까요?"
  유숙이 동의하자 광화문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그들이 안내해 주었다.
유숙은 전시실 내부에 진열되어 있는 옛날
그림들과 도자기들을 보며 모국의 오랜
전통과 문화적 유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어째서 로마나 그리스처럼
인체조각상이 한 점도 없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도 여러 곳을 관광하는 사이
주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단란히 지내는
하루하루의 날들이 너무도 행복스럽기만
했다.
  엘레노라는 그 중에서도 용인 민속촌과
어린이 대공원에 갔을 때가 제일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엘레노라는 오빠의 딸인
지연이와 금방 친해져 사이좋게 놀았고,
할머니와 삼촌과 이모들로부터도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구경을 다니는 동안에 몇
번 곤란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스물두 살 때 실연의 아픔을 겪은 뒤
자살이 미수에 그치고 나서부터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고궁에서 담배를 피우면 지나던 행인들이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여러 번
느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자 어느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건방지다며 마구 꾸짖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어머니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며 그 남자에게 딸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남자가 비로소 이해하는 표정으로
가버렸지만 그 후로도 흡연 습관만큼은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유숙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면
되도록 행인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서 딸을
위해 주위를 살피며 초조히 기다려 주고는
  그처럼 어머니 이옥수 씨는 언제나
유숙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딸의 인격을 존중해 주었으며
스웨덴에서 길들여진 나쁜 습관마저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유숙이 연기가 차는 것이 미안해 방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언제나
따라나와 괜찮으니 방에서 피워도 좋다며
다독여 주고는 했다.
  온갖 일에 세심히 마음을 써주는 어머니.
  어머니와는 눈빛만으로도 의사가 통할 수
있어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유숙은
한국말로 마음껏 어머니와 다정히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었다.
  어머니와 마음껏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심정에 종로를 지나는 길에 그녀는
회화책을 구입했고, 다음번에 다시
어머니를 만났을 때는 몇 마디라도 그녀와
한국어를 사용해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이옥수 씨의 화장대 위에는 성경책이
있었다. 이옥수 씨는 틈틈이 그 성경책을
펼쳐 놓고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녀는 10여 년째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교회로 예배를 보러 다닐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유숙은 혼자서
내심으로 몹시 기쁜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8일째 되는
일요일 아침 이옥수 씨가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유숙은 어머니를
  그리고 그날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한국의 교회에서 어머니와 함께
정오 예배를 보았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기에 한층 더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이처럼 어머니와 뜻깊은 해후를
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이옥수 씨 또한 딸과의
해후를 은밀히 주선해 주신 하나님께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보름이 지난 후 유숙은 엘레노라와 함께
부산에서 살고 있는 막내 언니의 집에 놀러
가 일주일간 머물면서 지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국 중산층의 보편적인 생활
양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돌보면서 세탁과 음식 장만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 무렵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하루 일을 얘기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유숙은 만일 자신이 줄곧
한국에서 살아왔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마
언니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런 생활에
대한 부러운 심정이 되어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족들과의 행복 속에서 어느덧 귀국한
지도 한 달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스웨덴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사흘 앞으로
다가오게 되자 유숙은 서울을 떠나기가
  엘레노라는 할머니와 함께 한국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럼 엄마 혼자
돌아가도 좋으냐고 묻자 그건 싫다고 했다.
그러니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유숙은
어서 돌아가 그동안 밀린 공부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1월 21일이었다.
  다시 또 가족들과 헤어져야 할 날이 온
것이다.
  유숙은 한국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그랬던 것처럼, 언니와 오빠와 어머니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의
대합실에서 슬픈 기분에 잠긴 채 가만히
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스미는 듯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 느낌이
너무도 소중해서 유숙은 그들에게서 눈길을
떼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지게 되면, 다시
한동안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그 얼굴들을
자신의 뇌리 속에 선연히 아로새겨 두고
싶었다.
  "헤어지기가 서운한 모양이에요."
  "쯧쯧, 그래서 그렇게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거로구나."
  언니와 어머니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탑승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 시작됐을 때,
신수영 씨가 유숙에게 언제쯤 다시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유숙은 학위 논문 심사가 모두 끝나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빠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다며
내년 8월에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오빠는 유숙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언니들은 차례로 손을 잡으며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슬픔이 담긴
눈길로 지그시 바라보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수잔은 서투른 한국어로 작별의 인사말을
고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 위에
잠시동안 자신의 뺨을 포갰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을 놓고 엘레노라의 손을 잡으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국제선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수잔의 뺨 위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11. 에필로그

  현재의 생활

  스웨덴으로 돌아온 이후 수잔은 한국에서
가족들과 지냈던 일들이 회상되어 한동안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잔은 지금 웁살라 대학 종교학과
4학년이며 그녀는 90년 5월 말까지
전공분야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통과되어야만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웁살라 대학의 논문 완성 기간은 2년
반에서 3년 가까이 걸리는데 수잔은 이제
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는 셈이다.
  그녀의 일과는 대개 일정해서 아침 8시
30분이 되면 엘레노라를 탁아소에
  오후 5시가 되면 엘레노라를 데리고 와
저녁 식사를 한 뒤엔 TV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며 놀아주다가 그 애가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성경에 관한 공부를
하고, 일요일이 되면 한국인 가정에서 예배
시간을 가짐으로써 마음의 안정과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여가엔 틈틈이 피아노 연주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이따금 좋아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관람하기도 한다.
  그녀는 학업을 마치고 8월경에
일시적으로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친가족들과 함께 살게
될지는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 자신은 모국에서 살고 싶은 염원이
문제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으로 이주할 경우 자신이 겪은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정을 엘레노라가
그대로 답습해 가야 하고, 그녀는 바로 그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다시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다시 한국을
찾게 되는 8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그때에 대비해 바쁜 일정 속에서도 틈틈이
한국어 회화를 익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수잔의 이야기를 소개한 MBC 텔레비전의
<인간시대> 프로는 그 첫편이 11월 20일
저녁 8시 5분에, 후편이 일주일 후인 27일
같은 시각에 2회에 걸쳐서 방영됐다.
  21일 밤에 한국을 떠났던 탓에 그녀
방영된 이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요즘도 미국 지역에서 그 프로를 본
사람들로부터 격려 편지가 우송되어 오거나
전화가 걸려오는데, 그녀는 이런 것들에
의해 자신의 얘기가 사람들에게 던진
공감의 폭이 컸음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만큼은
겸연쩍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것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식을
외국에 입양시켜야 했던 한국의 부모들과
조국을 떠나 낯선 환경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성장한 입양아들의 입장을,
자족감에서이다.
  그리고 수잔은 어쨌든 친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우는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자기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또 자신의 자식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 있을지 모르면서 애태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슬픔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그들이 자신들의
혈육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조그만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기를, 또한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수잔은 자신이 살아온 지난 27년의
생애가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차라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하나의 뚜렷한 의도
아래서 이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졌던 이러한
시련들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녀는 그러한 시련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커다란 사랑을 깨우칠 수
있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적은 수기의 마지막
장에서 친부모를 만나는 기적을 일으켜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과거는 진실한 삶을
거침으로써 나는 그리스도에 가까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자신의
대지 위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데 소용되는
자그마한 하나의 연장으로, 나를 보다
쓸모있고 단단한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가혹한 불길 속에서 단련시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자신이 조금도 낯설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나는 완전히 한국인으로
새로이 태어난 자신을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반쪽의
스웨덴인도 반쪽의 한국인도 아닌 완전한
한국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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