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지평선 일권
윤대녕
일식
이십세기의 마지막 일식이 있던 날 한 여자와 헤어졌다. 다음날 신문은 그날 하늘에서 벌
어진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달이 해 삼키려 든 휴일 우주 쇼 - 어제 두시간 이십여 분 이십세기 마지막 부분일식"
어제는 달이 해를 삼키려 든 날. 구일 오전 여덟시 사십분께부터 전국적으로 달이 태양의
일부를 가리는 부분일식 현상이 두시간 이십여 분 간 진행됐다. 여덟시 삼십육분 제주도를
시작으로 광주 여덟시 삽십팔분. 대전 여덟시 사십분. 서울 여덟시 사십일분. 강릉 여덟시
사십삼분 등 북쪽 지방으로 서서히 진행됐다. 지역별로 아홉시 오십분을 전후해 태양이 가
장 많이 가려지는 최대 식분을 기록한 뒤 제주 열시 오십오분. 서울 열한시 삼분에 이어
열한시 구분 울릉도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번 일식에서 태양이 제일 많이 가려진 모습이 관측된 것은 아홉시 사십구분 인천과 아
홉시 오십분 서울, 아홉시 오십이분 강릉인데 태양 전체의 칠십육 퍼센트가 가려졌다. 가장
적게 가려진 곳은 제주도(아홉시 사십이분)로 전체의 육십구 퍼센트만 달에 가려졌다.
우리 나라와 동남 아시아 태평양 북부 등지에서 부분일식으로 관측된 이번 일식은 북위
칠십도 정도의 아시아 북부, 몽골, 러시아 중부 지방에서는 태양이 모두 가려지는 개기일식
으로 진행됐다.
나는 그날 아침 아홉시쯤 선글라스를 끼고 밖에 나가 고개를 꺾고 약 두시간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은 잘 깎아 놓은 사과를 웬 나쁜 피를 가진 짐승이 소리 없이 베어
먹는 모양으로 사라졌다가는 겨우 하늘로 다시 비져 나왔다.
그리고 열한시 정각에 그녀가 왔다.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으니 일식이 막 끝나던 순간에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그녀가 나와 헤어지기 위해 왔다는 것을. 그래,
사람은 누군가와 헤어지기 위해 상대를 찾아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왜. 상대가 포기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고 또 도장을 받기 위해서겠지. 사람이란 동식물과 달라서 얼
마든지 그럴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
고 단호하게 말했다. "왜 이러세요"
관계가 깊어진 다음에 알았지만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에게는 오래 사귀어 온 남자가
있었다. 일 년 전 그녀는 근 남자를 버리고 기어이 내게로 왔었다. 기어이, 란 말은 되레 이
쪽에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고 망설였다는 뜻이다. 그러더니 지금은 또 나와 기어이 헤어지
려 하고 있는 참이었다. 다른 남자가 생겼는가, 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녀는 아니라
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그 남자에게 돌아가려는 것이로군"
이 말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한번 헤어
진 사람에게는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그녀를 조용히 만류했다. 거기엔 그녀가 불행해질 것
같은 마음도 있었다. 차라리 다른 남자가 생겼다면 포기할 수도 있을 성싶었다. 아니라고 해
도 이건 진심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 남자를 두 번 기만하게 되는 거야"
그녀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나와 잠자리를 같이하던 침대 모서리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잠자듯 움직이지 않았다.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와 헤어질 때도 이처럼 단
호했던 것일까. 나는 그 동안 그녀에게 품었던 애정이 서서히 애증으로 변하고 있음을 감지
하고 있었다. 그날의 부분일식 현상처럼. 그리하여 나는 그녀의 엎어진 등에다 얼결에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이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러자 그녀가 몸을 똑바로 곧추세우더
니 히뜩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그 남자한테 돌아간다고 한 것도 아닌데요"
그러고는 도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는 소리로 나와 함께 있으면 정말 불행해질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더듬더듬 담배를 찾아 불을 붙여 물었다. 손끝이 감각 없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가장 잔인한 사랑의 복수가 용서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 순간엔 좀처럼 그녀를
용서하는 마음이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섹스를 나누며 신부처럼 웃
었던 것이다. "용서받지 못해도 좋으니까 보내 주세요. 제가 창우 씨를 아직 좋아하고 있을
때 말예요."
나는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사리 그녀의 말에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싱크대의 닦아 놓지 않은 그릇 같은 시간들이 자
꾸 흘러갔다. 나는 약 오 분 간격으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생각으로 이런 저런 말들을 나
오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나는 그러는 내가 싫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방안이 매음굴처럼 뿌연 담배 연기와 냄새로 가득 찼다. 사이사이 격
한 흥분의 상태가 찾아와서 나는 그녀를 몰아세우기도 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협박조의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도대체 행복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지.
어떤 경우엔 자신의 행복이 곧 남의 불행이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또 그런
사실을 교묘히 심지어는 자신한테까지 속이면서 남의 영혼을 훔치고 다니는 족속들 말이
지." "창우 씨 지금 저한테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화병에 꽂혀 있는 프리지어가 탁
한 공기 속에서 소리없이 노란 기침을 하고 있었다.
"혹은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얼마 전까지 사실혼의 관계였음을 말해 두고 싶은거
야. 잘 알다시피 영화관이나 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또 어쩌다 우발적으로 한 번쯤 여
관이나 호텔에 갔던 정도의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지." "저 아직도 창우 씨 좋아하고 있어
요."
그때 전화 벨이 울렸고 나는 발작적으로 자리예서 일어나 코드를 뽑아 버렸다. 이런 순간
에 웬 전화란 말인가.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을 알려 오는 것이라 해도 지금은 받을 기분이
아니다. 나는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가 한 말을 되받았다. "그 말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그녀는 갑자기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창
우 씨는 저에게 더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솔직히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기도 해요." 나는 누
가 봐도 그렇게 무섭거나 두려운 사람이 아니다. 혹시 그렇다면 상대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
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미련이 없단 말이지."
하나마나 한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나는 되풀이해서 물었다. 나는 그녀가 헤어지는
순간까지 내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도대체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헤어지자
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사
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또 만약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또 만약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택하되 좋아하는 사람의 영
혼도 몰수해 가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까지는 굳이 하고 싶지가 않았다. 왜냐
하면 이미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일식이 끝나고 약 두 시간이 지난 오후 한시 정각에 그녀와 나는 헤어졌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전에 헤어졌던 남자와 이미 결혼 날짜까지 잡아
두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다고 미리 얘기해 줬더라면 혼란스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왜 자
신도 힘들었을 게임에 그렇듯 열중해 있었던 것일까. 나중에 저울 장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말인가.
어쨌든 그녀는 벌써부터 나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화점에 진열된 수입
상품처럼 잘 포장된 이별의 형식을 원했다. 요컨대 이제는 쇼핑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겠
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이제는 쇼핑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내용을 살펴보
면 이쪽에서 자기 진심을 대신 말해 주고 헤어지기에 필요한 빌미를 제공해 주기를 기다리
며. 하지만 어째서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불행해진 것 같아서가 아니라 보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나와 헤어지고 싶다고 왜 솔직히 얘기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떤 경우에도 진실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법이다.
한시 십분에 그녀가 기어이 서둘러 갔다.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그녀를 바래다 주었다. 정
류장 앞에서 그녀는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그러지 않
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왜 내게 미련을 심어 주려는지 알 수 없었
다. 버스가 오자 그녀는 뒤꿈치를 들고 내게 입술을 맞춰 달라고 했다. 어리둥절했지만 그게
그녀에게 편할 것 같아 나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내세에서 다시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
다.
내세. 하지만 그것은 광막한 시간의 소용돌이가 굽어지고 맞물린 다음일 것이고 또 어쩌
다 만난다고 해도 도저히 서로 알아볼 수 없는 존재들이 돼 있을 터이었다. 가령 나는 시청
앞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서 있는 가로수로 태어날 것이고 그녀는 무궁화 다섯 개짜리
호텔이 예쁜 접시로 태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어떻게 서로 알아보겠는가.
그리고 그녀를 태운 버스가 갔다. 외로운 지구 한편에 나는 다시금 큰 접시 위에 누군가
골라 먹다 남긴 딸기 하나처럼 남겨졌다. 혹은 텅 빈 매미 껍질처럼 살아오면서 가끔 연애
에 실패해 보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
를 이 지상에서 만나는 마지막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헤어질 때가 되어 그녀는 그것을
두고 간단히 집착이라고 불렀지만 집착이든 사랑이든 나는 이 불안하고 어두운 세기말의 날
들을 그녀와 함께 살아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껍질만 남겨 둔 채 영혼을
맡겨 버렸던 것이다. 한번 맡긴 영혼은 돌려 받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녀가 가고 나니 나는
사람이란 존재가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아직 오후 두시도 되지 않았는데 오직 잠들고 싶어 양주 한 병을 비
웠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신경이 파들파들 살아 온더록스 잔에
서 얼음이 녹으며 안으로 내려않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밤이 와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나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 가서 마구잡이로 몇 개를 빌려다 놓고 붉은 눈의 원숭이인 양 밤새
모니터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날 아침 벽에 붙어 있던 그녀의 사진을 떼어 베린다에다 내놓고 편지
몇 장을 찢어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창문 밖에 어둠이 내리는 시
각이 되면 깊은 지층에 갇혀 버리는 느낌이 들어 여지없이 나는 독주를 마셨다. 나는 하루
에 알을 두 개씩 낳아야만 하는 양계장의 닭처럼 스물네 시간 온 집안의 불을 켜놓고 묵은
시간이 어서 내 몸에서 빠져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 와 위로를 한답시고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변하지 않는 건 역시 음악뿐이야. 귀기울여 음악을 들어 봐." 음악이라는 것도 정신이 온
전할 때 귀에 들리는 법이다. 그것이 슬픔의 중심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혼란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세상에 어디 여자가 하나 둘이냐." 물론 세상엔 여자들이 많다. 하지만 만나서 사랑이 되
는 사람은 십 년에 하면 만날까말까 한 것이다. 지금부터 십 년 후면 나는 마흔 다섯 살이
된다. 마흔다섯이면 새삼스럽게 사랑에 빠져 절규하고 싶은 나이가 결코 아니다.
또 이렇게 핀잔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밖에 나가 봐. 당장 시장에 가서 사람들 사는 걸
유심히 보라구. 왜 너만 그렇게 고상하게 살려고 들어. 이 사치스런 자슥아. 사랑 좋아하시
네. 차라리 불우 이웃 돕기나 할 것이지."
사치? 누굴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이 과연 사치란 말인가?
그날 오후에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간신히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며칠 묵었던 빛
이 먼지를 가득 일으키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에 타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건너편
으로 도시의 형물이 벽장에 처박아 둔 액자 속의 그림처럼 희게 바래 보였다. 나는 과거를
반추하는 기분에 사로잡혀 얼마간 삼십도쯤 비껴 있는 문틈에 끼여 서 있었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나는 오후의 햇빛 속을 느릿느릿 걸어 보았다. 나무, 집, 자
동차, 식당, 치과, 슈퍼마켓, 꽃집 하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문득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느낌에 빠져 안경점의 쇼윈도 앞에 지팡이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봄날엔가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초라한 노인네로 변해 있
을 것이다. 저 아득한 유년의 날에 어딘지도 모르고 먼지를 일으키며 털털거리고 달려가는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보았던 검은 처마 밑의 노인네. 그는 손끝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쥐고 하얗게 꽃이 핀 부추밭을 죽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먼 훗날의 내 모습인 것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꽃집 앞에 와 있었다. 늘 보아 왔던 꽃집 아주머니가 밖을 살피
다가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혼자 왔네요?" 나는 대꾸를 않고 봄이 되어 쏟아져 나
오기 시작한 비닐 화분 속의 꽃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중 세 개를 골라 흰 울타리처럼
돼있는 화분집 속에 넣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봄꽃을 어깨에 메고 가는 젊
은 노인네를 분명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며칠 더 지나갔다. 의식적으로 음악을 틀
어 놓기도 하고 속을 채울 작정으로 우유와 빵 따위를 사다 놓기도 했지만 전혀 식도로 넘
어가지 않았다. 나는 잠에서 깨면 베란다 문을 열고 햇빛이 틀어지는 방향으로 화분들을 옮
겨 놓는 일로 하루하루를 지새고 있었다. 그러다 베란다로 나가 햇빛을 뒤집어쓰고 이런 말
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꽃들은 되게 아름다워. 아직도 이런 것들이 지구에 남아 있다니.
그럼 코끼리나 악어나 돌고래나 펭귄들도 여태 남아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오래 잊고 지내던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맥박이 희미
해져 가고 있군." 그가 수화기를 통해 불쑥 이런 말을 전해 왔다. 아침녘에 잠깐 흐리긴 했
으나 이미 삼월 하순인데 창 밖에서는 눈발이 햇살 속으로 풀풀 날려 가고 있었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실밥처럼 닳은 신경을 한데 모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라는 것은 이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금 전화선 저쪽에서 희
미한 소리가 당도했다. "그런 상태로 며칠만 더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게 돼. 물론
베란다의 꽃들도 다 말라 버리겠지." 나는 침대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강 선
생님이시군요. 미처 연락 못 드리고 살았습니다." "연락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게 더 좋
은 일이지. 하지만 꼭 해야 될 때라면 역시 하는 편이 낫겠지. 그런데 이번에도 내가 먼저
자네를 찾게 되는군. 가끔은 그 반대가 돼도 좋을 텐데 말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상관은
없어 찾는 쪽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에너지? 그 말을 들자 나는 내가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는 빈 링거병 같다는 느낌이 들었
다. "자네의 상태를 알아내는 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단 말이지 가령 일주일 치의 에너지
가 몽땅 말이야. 그런 일은 육체의 모든 주파수들을 다 동원해야 되는 일이니까."
나는 눈을 돌려 베란다의 화분들을 내다보았다. 웬일인지 어째 물을 주었는데도 잎사귀가
시들시들 말라 가고 있었다.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낭비하지는 말게. 베란다에 화분이 있다
는 것 아파트면 어느 집이나 그렇다는 것이고 그게 시들고 있다는 건 집주인의 목소리를 들
으면 금방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제 목소리가 어떤데요?" "그건 나중에 만나 차차 얘기하
세. 그래, 언제쯤 올 텐가? 속히 치료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몇 배의 에너지가 더 필요할 텐
데." "저는 아무때나 상관없습니다." "때는 자네가 정하도록 하게. 뭐든지 상대의 결정에 맡
겨 둔다면 서로 만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간 망설이다가 그럼 내일 오후
두시에 찾아뵙죠, 라고 마른 소리로 받았다. 그는 얼마 전에 사무실을 옮겼다며 내게 전화
번호와 약도를 알려 주었다. 사무실? 아무래도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으나 뭐라 물어 볼 새
도 없이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를 만난 것은 삼년 전 여의도에 있는 학이란 일식집에서였다. 그는 그 집의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이던가. 주말 연속극의 촬영을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우연
히 그와 말문이 트여 알게 된 사이였다. 그는 바다낚시를 몇 년 하다 회 뜨는 일을 하게 됐
다고 내게 말했다. 말투와 표정에서 사이사이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사십대 중반의 턱수
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는 내가 출연하는 드라마를 주말마다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데 그
말이 내 귀에는 어쩐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식으로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첫눈에 그닥
호감이 가는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회 뜨는 솜씨만큼은 분명 일급의 수준이었다.
나는 사내의 칼 솜씨에 홀려 심상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자정께까지 스탠드에 앉아 있었
다. 칼날이 얼마나 민감하고 예리하게 움직이는지 하얗게 살이 발린 생선뼈가 접시 위에서
한참을 꿈틀거렸다. 손 끝에 칼이 달려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줄곧 지
켜보면서 사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사적인 관심이라뇨?"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당신의 실제적인 모습 말입니다." 나는 차
츰 그에게 끌려들고 있었다." "왜 그런 관심을 갖게 됐죠?" "어느 날부턴가 당신의 표정이
두 개로 겹쳐 보이더군요. 화면에 떠 있는 당신 표정 뒤에 숨어 있는 또다른 얼굴이 보이더
란 말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말 저녁 시간마다 당신을 유심히 지켜보게 됐죠. 화면 뒤쪽에
서 춤추고 있는 당신의 그림자를 말이죠." "그런 게 보인단 말입니까?" "보인다는 건 정확한
말이 아닐 겁니다. 오감의 집중을 통해 가까스로 형상이 감지되고 눈앞에 투사되는 거죠."
"그렇지만 텔레비전에 나온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하얗게 닦은 칼을 선반 위에 올려 놓고는 매실주 한 병을 가지고 내 앞에 와 앉았
다. 자정이 지났으므로 안에는 더 이상 손님이 없었다. 밖에 비가 내리는지 축축한 공기가
무릎께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차갑게 몸을 싸안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 술기운이 올라있는
상태였다.
기모노를 입은 액자 속의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부연 안개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건 당신의 집중력이 약화돼 있기 때문에 타인의 눈에 보다 쉽게 드러나 보였을 겁니
다. 그 정도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한테나 보입니다. 특별한 능력이나 훈련을 필요
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집중력이 약화돼 있다고 그는 말했다. 딴전을 피우듯 나는 슬
쩍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붙어 있던 검은 그림자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뭘 보았죠?" 나는 도미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의 턱수염을 훔쳐보며 물었다.
"균형이 무너져 있음을 보았죠. 오래 전에 폭격을 맞은 건물이 곧 땅바닥으로 주저앉을 듯
이 그렇게 위태롭게 보였다는 겁니다."
폭격을 맞은 건물. 나는 무채 위에 몇 점 남아 있던 농어회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아
닌게 아니라 나는 농어처럼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당신과 폐허의 거리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뜬 파란빛의 차가운 거리에 말입니다." 나는 술잔을 든 채 보름달
이 뜬 폐허의 거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당신을 틀림없이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나는 아내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결혼한 지 햇수로는 오 년, 만으로는
사 년만의 파국이었다. 나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럼 그 고통의 정체도 아셨겠군요? 라
고 되물었다. "그것까지야 어떻게 제가 알겠습니까? 그건 정말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겁니다. 다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무게와 결을 통해 중심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은 알 수 있겠더군요. 노른자 없는 달걀처럼 껍질은 멀쩡하지만 중심이 소거된 공동 상태
말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당신의 그런 모습이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드라마를 망치고 있단 말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지루하고 짜
임새가 없는 연속극이죠. 대사나 동작이 서로 어긋나다 보니 장면의 밀도라든가 깊이가 느
껴지지 않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당신의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당신은 대사를 주고받을 때
극본대로 하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텔레비전 밖의 누군가와 줄곧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제
귀에 자주 그 소리가 들렸던 겁니다."
나는 일식집 주방장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와 마주앉아 있는 이 사내는 어떤 사람일까. 부러 묻지도 않았으나 그는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 주일 뒤에 나는 법원에 가서 정식으로 이혼을 했고 한 달 후 아내는 서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녀는 일 년에 내 편 정도 그림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였다. 그러나 인
생이 바뀌어도 그림만은 놓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녀가 내 노른자를 가져 갔는지 아니면 장
롱 깊숙이 감춰 두고 갔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분리수거가 불가능한 물건이어서 아
마도 비 내리는 밤에 몰래 어딘가에 버리고 갔을 것이다.
아내가 떠나고 나서 한 달쯤 뒤에 내가 출연하고 있던 드라마는 앞당겨 막을 내렸다. 시
청률에 따른 결과였다. 당분간은 출연 교섭이 없을 듯해 나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에 가서
열흘 간 햇빛 속을 돌아다니다 얼굴에 화상을 입고 돌아왔다.
가루다 항공편으로 서울로 돌아온 날 밤 나는 우연히 생각이 나서 다시 그 여의도에 있는
그 일식집을 찾아갔다. 주방에서 회를 뜨고 있던 그는 무심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나는 구
석 자리에 앉아 광어회에 청하를 마시며 여태 몸에 눅눅하게 배어 있는 열대의 냄새를 킁킁
거리고 있었다. 그가 말을 걸어 온 것은 전처럼 자정이 되어 일을 끝낸 다음이었다. 그는 내
가 출연한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았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한동안 자네를 못 볼 거라고
생각했네." "......" "열대 지방에 다녀온 모양이군." "일 년 내내 일출과 월몰 시각이 같은 곳
에 다녀왔습니다. 가끔 강 선생님 생각이 나더군요."
처음 만난 날 나는 그를 강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었다. 그는 나보다 열한 살이 많은 마
흔여섯이었다.
"그래 거긴 괜찮었니?" "지루한 천국이었습니다. 변화라는 게 없는 땅입니다. 아침마다 양
동이를 든 처녀가 정원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 꽃을 땁니다. 왜냐하면 일 년 내내 나무에서
꽃이 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곰곰히 듣고 있다가 그런데 그게 왜 변화가 아니란 말이
지? 하고 선문답식의 말을 툭 내뱉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김추자의 노래를 틀고 튀김이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칠십 연대풍으로 마시지. 김추자는 자네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맥없이 웃어 보였다. "좋아. 그렇게 한번 공허하게 웃어 보기도 하는 거야. 이제 최
초의 자네는 웃고 있는 웬 멋없는 사내일세. 당장은 그런 자네가 낯설고 혼란스럽겠지만 시
간이 지나면 저절로 균형이 잡히고 마침내 중심이 보일 거야. 노른자 말이야. 이제 자네는
더 이상 인기 없는 주말 연속극의 주인공도 아니고 이혼한 남자도 아닐세. 열대 지방에서
돌아온 오늘 자네는 사실상 딴사람이 된 거야. 그걸 받아들이는 데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
게. 앞으로도 자네는 지난 일 때문에 몇 번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될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
런 순간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겠지."
그날 밤 나는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늦기 전에", "나뭇잎이 떨어져서", "왜 아니올까",
"무인도" 하는 식으로 고즈넉이 취해 새벽 두시쯤에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가끔 강 선생으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열대 지방에서 돌아온 그날처럼 더 이상 심각한 얘기들은 나누지 않았다. 대개는 좋은 횟감
이 들어왔으니 와보라는 식의 연락이었고 나 또한 새로 시작한 일일 연속극에 출연하고 있
었으므로 시간을 정해 놓고 그를 찾아갈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비롯된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이따금씩 그가 떠오르곤 했다. 꼭이 그에게 위무받
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은 일 년 전쯤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먼저 걸어 온 전
화였다. 새벽 두신가 세시쯤 되는 시각에 걸려 온 그 전화는 매우 기묘한 느낌을 가져다 주
었다. 그는 최면에 걸린 소리로 내가 그리워서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그립다니. 몇 번 만난
일은 있지만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조심스럽
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수화기 속에서는 술에 취한 여자들이 깔깔대는 소리와 반주에 맞춰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박인수의 "봄비"를 부르는 소리가 뒤섞여 나오고 있었다. 한데 그의 목소리는 그 난잡
한 소음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귓속으로 뚜렷이 흘러 들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전화를 걸
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내 말이 왜 내 말이 잘못됐나?" 나는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긴 그런 말은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지" 취한 듯 횡설수설이었다. "아침엔 따끈한 생두부를 먹고 싶네."
그거야 출근해서 일본식 두부를 먹으면 되리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도 두부
는 두부인 것이다. 아무래도 한마디 대꾸는 해얄 것 같아 나는 의례적인 물음을 던졌다. "거
기가 도대체 어디죠?" 물어 보나마나 불법으로 새벽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룸살롱 같은 곳
일 터였다. 내가 알고 있던 강 선생과의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는 여간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실크 벽지로 장식한 지하 공중 변소 같은 곳이지. 나는 지
금 보고 있네. 뿔 달린 돼지와 빨간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 까만 염소 새끼들을 말이야.
아, 저기 구석에 앉아 똥을 누고 있는 늙은 하마도 보이는군." "왜 이 시각에 그런 곳에 있
는 겁니까?" 나는 친형님에게 하듯 부러 탓하는 소리로 목청을 돋웠다. "과거의 동업자들과
만나고 있는 중일세. 자네는 모르겠지만 동업자는 또 동업자들끼리 어울리는 방식이 있는
걸세. 말이 나온 김에 오늘 자네에게 한 가지만 알려 주지. 처음 뒤에서 만난 사람은 영영
뒤에서 만나게 되는 법일세. 언젠가 자네도 나에 대해 알게 되겠지. 그리고 손가락질을 하며
침을 뱉고 돌아서겠지. 그래, 그때까지는 만나기로 하지. 어쨌든 내가 자네를 만난 건 우연
치고는 참 묘한 우연일세. 자네가 처음 학에 들렀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나? 마치 미납
된 공과금을 징수하러 온 공무원 같더란 말씀야." "......" "잠을 깨워 미안하네. 목소리를 들
었으니 이만 끊겠네."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나는 어둠 속에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동업자는 뭐고
미납 공과금은 뭐고 공무원은 또 뭔가. 만약에 그렇다면 이 새벽에 내가 그리울 리도 없지
않은가. 그래, 처음 만날 때부터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강남에 있는 오층 빌딩의 이층에 조그만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있었다. 나는 약속 시
간보다 십 분이 빠른 한시 오십분에 사무실에 도착했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황색 점무
늬가 박힌 하얀 애완견이 달겨들어 사납게 짖어댔다.
그는 자리를 비워 놓고 있었다. 찻잔을 들고 온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발의 무표정한
여자가 곧바로 강 선생에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 다음 십 분 뒤에 도착할 거라고 내게 메
시지를 전해 주고는 개를 안고 사라졌다.
사무실 문 앞에 "빠삐 커뮤니케이션"이란 손바닥만한 아크릴 간판이 붙어 있었으나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직원이라 봐야 고작 네댓 명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인형 같은 얼굴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거나 어딘가로 부지런히 팩시밀리
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수족관 모양의 유리관 속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초록색의 이구아
나에 눈을 박은 채 옆방에서 들려 오는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저 발칙하게 생긴 애
완견은 아직도 나를 보고 짖고 있음이 분명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저렇게 짖을 리는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나는 왠지 취조실에 앉아 있는 기분에 막막히 사로잡혀 있었다.
정확히 두시에 그가 문을 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눈에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
다. 감색 양복에 검은 넥타이 차림이었고 턱수염이 없어진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눈에서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빛은 여전했으나 회칼을 든 일식집 주방장의 모습은 찾
아보기 어려웠다. 서먹한 느낌으로 악수를 나누고 도로 소파에 앉아 옆방에 있던 애완견이
낑낑거리며 머리로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품안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그는 또 잔
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벌벌 떨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정나미가 떨어지는 동물
이었다.
"이 개는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일세. 스페인의 원산인데 귀가 나비처럼 생겼다고 해서 빠
삐라고 부르지. 작년에 친구 집에 갔다가 데리고 온 것인데 사람으로 치자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상태야. 그 친구가 애완견을 지독하게 혐오스러워하거든." "......" "부인은 그런데 개한
테만 정을 붙이고 사는 여자야. 자식이 없거든. 그래서 이 개는 낮에는 브리지트 바르도 같
은 동물 애호가 손에 있다가 밤만 되면 그 친구한테 온갖 학대를 당하며 산 거야. 그래서
두 번이나 유산을 한 경험이 있고 지금도 낯선 사람을 보면 곧잘 분열 증세를 일으키고 있
네." "회사 이름도 그럼 개 이름에서 따온 겁니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개가 내 직
업을 바꿔 놨네."
그 참에 나는 이 회사가 무얼 하는 곳인지 알고 싶었으나 참고 입을 다물었다. 애초부터
그에게 무얼 물어 보는 것은 금기처럼 돼버린 터였다. 그런데 이 눈치 빠른 사람은 그새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곧 알게 될 걸세.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이를테면 신종 사업에 속하는
일일세. 일종의 치료 센터지." "치료 센터요?" "관리도 포함하고 있지." "관리는 또 뭐죠?"
"치료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말일세. 또 재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지. 요컨대 자네는 오늘
내 고객으로 온 걸세." "......" "비용이 드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니까 당장은 염두에 두지
말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한 시간 뒤부터 자네는 나와 내일 아침까지 함께 보내게 될 걸세. 이번에 자넨 삼 년 전
처럼 텅 빈 게 아니라 너무 가득 차 있어. 어쩐지 묵은 엔진 오일 같은 것으로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니까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지."
그러는 사이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짧은 통화를 하는 동안에 나는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난감한 빛을 훔쳐보고 있었다.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그는 이건 좀 심
한데, 하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그저 그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주파수의 범위가 쓸데없이 자꾸 넓어지고 있어." 주파수, 어제 그와 통화할 때 들었던 말
이다. "방금 후배의 어머니가 아침에 병원에서 작고했다는 연락이 왔네." 그래서요? 라고 묻
다가 나는 그의 가슴에 내려와 있는 검은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침에 옷을 입는데
자꾸 검은 넥타이로 손이 가더라구. 시간이 갈수록 주위의 일들이 점점 선명하게 감지되고
있어. 후배의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은 진작에 듣고 있었지만 말일세."
그는 이구아나가 들어 있는 유리관에 양배추를 넣어주면 그럼 오후 세시부터 시작하지, 라
고 내게 말했다.
강 선생이 나를 데려간 곳은 사무실에서 그닥 멀지 않은 허름한 호텔이었다. 그가 운전하
는 차에서 내려 호텔 방에 들어설 때까지 나는 연행돼 가는 사람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
었다. 대낮부터 이런 장소에 와서 무얼 하려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어쩌니 질문의
때가 늦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나를 맡겨 놓고 있다는 야릇한 안도감
이 느껴졌다. 빠삐라는 스페인산 애완견도 그때는 가만히 그의 무릎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
었다.
방으로 들어와 그는 커튼을 닫고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건 다음 소파에 앉아 담배부터 피
워 물었다. 문득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한 느낌에 빠져 나는 무르춤한 동작으로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고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세시군, 하고 그가 손목시계를 내
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긴장할 건 없네. 우선 잃어버린 육체의 리듬부터 되찾아야 하
겠지. 그런 다음 하나씩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거야. 자네는 지금부터 열다섯 시간쯤 긴긴 잠
을 자게 될 걸세. 하지만 명현 반응이 일어나 의식은 점점 투명해질 거야. 아마 주기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걸세. 육체라는 건 물질처럼 아주 구체적인 거야. 바이오 리듬이 망가지면 모
든 기관의 프로그램도 뒤죽박죽이 되게 마련이지."
그는 가방에서 향수병처럼 생긴 은도금의 병을 꺼내더니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컵에 따라
부었다. 나는 생뚱한 표정으로 우리잔에 길게 내려앉고 있는 갈색의 진득한 액체를 바라보
고 있었다.
"살다보면 별별 사람들을 다 알게 되지. 사업차 네팔 왕실에 드나드는 친구가 가져 온 히
말라야 석청이라고 하는 건데 실제적인 효과가 있을 걸세. 내일쯤이면 적어도 몸은 가벼워
질 거야. 그리고 열다섯 시간쯤 육체가 고통스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안 자네는 무섭도록
명료한 상태로 사고를 하게 될 걸세."
히말라야 석청이라면 언제가 "지오"라는 잡지에서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현지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바위 틈에서 백 년 혹은 이백 년 된 벌꿀을 채취하는 장면을 "내셔널 지오그래
픽"의 기자가 찍은 사진이 기사와 함께 실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연한 생각부터 들었다.
"이게 강 선생님이 하고 있는 사업이란 겁니까?" 암만해도 석연찮은 느낌이 들어 나는 더
듬거리며 물었다. 그는 흘끗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때 나는 잠깐 엉
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헤일-밥 혜성이 근일점을 통과하는 날이야. 그 동안 매일 새벽 네시쯤이면 북쪽
지평선에 푸른색 이온 꼬리와 흰색 먼지 꼬리를 단 채 부시게 나타나곤 했던 너. 내일부터
는 해가 지고 난 뒤 서북쪽 하늘로 옮겨 간다지? 올해가 가고 나면 무려 이천삼백팔십년 후
에나 다시 볼 수 있다는데. 오늘 밤 나는 쌍안경을 들고 나가 네 브이자 모양의 황홀한 장
관을 엿볼 생각이었어.
태양에 일억삼천만킬로미터까지 접근, 오늘 근일점은 통과하는 헤일-밥 혜성의 아름다운
환영을 눈앞에 보며 나는 속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일식이 있던 날 헤어진 너도
이제 이천 삼백팔십년 후에나 보게 될 테지. 그 머나먼 시간의 회오리 뒤에.
강 선생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뭔가 나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럼 어디 사업 얘기부터 할까?" "......" "사업에는 시스템이 있고 그걸 관리하고 운영하는
방식이 있네. 또 시장 정보와 형성된 고객이 있고 거기에 따른 나름의 유동 방식이 있단 말
일세. 좋아, 말이 나온 김에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해두지. 반복해서 말
하지만 나는 분명 사업이란 걸 하고 있네. 서로 성질이 다른 여러 가지 장치들을 동원하는
사업이지.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정보를 수집하네. 고객으로부터 의뢰가 들
어오면 우선 그 사람의 성장 조건이나 배경, 그리고 현재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를 체크해
파일로 만들어 놓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서 구체적으로 치료 작업에 들어가네. 우
리가 하지 못하는 일은 주변 장치를 이용하지. 가령 신경정신과 상담을 대신해 주기도 하고
그 사람 주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기도 하네. 또 특별한 경우엔 사람을 보내 고
객의 정보를 청취하고 수집하기도 하지. 포괄적으로 말해 우리는 고객의 정신적 환경을 관
리해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걸세."
그렇다면 사람을 상대로 한 환경 관리 사업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요즘
처럼 복잡한 구조를 가진 사회에선 대부분 자기 환경을 관리하며 살아가기가 어렵네. 알 만
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지.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보통 품위 있는 돼지가 되려는 사람
들 말이야. 얼마 전에 정신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드라마 치료법이라고 하는 새로운 방
법이 생겼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과는 성격이 달라. 무엇보다도 이들은 환자가 아니고
고객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일세. 그러니까 우린 병원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해 주고
있는 셈이지. 보다 쉽게 말하면 아침에 문밖으로 나가 밤에 돌아올 때까지 모든 행동 샘플
을 당사자의 환경과 유형에 맞게 제공한다 이 말일세. 물론 고객의 신분과 비밀을 보장한다
는 조건에서지."
"그런 사업에 시장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엄연히 존재하고 있네. 되풀이하지만 그중엔
이름을 대면 금방 알 만한 사람들도 있네. 오늘만큼은 자네도 그중의 하나가 되겠지. 이제
알겠나? 물론 지금 내가 자네에게 하고 있는 일은 순전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는 걸세.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에너지의 효과를 제공하고 있단 말이지. 사업에서야 이런 민간
요법은 쓰지 않지."
그는 넥타이를 풀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마셨다. 정확히 오후 세시 사십분에 나는
히말라야 석청을 먹고 병원 대기실의 환자 같은 몰골로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제 자네 몸 속에 있는 불균형한 에너지가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갈 걸세. 그 동안 자네
가 만들어 놓은 시커먼 덩어리들 말이야.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네. 한 가
지 덧붙이자면 자네가 방금 마신 석청 안에는 일정한 양의 다른 물질이 섞여 있네. 약효를
배가하기 위한 것이니 그냥 환각제 정도라고만 알고 있게."
나는 탁자 밑에 웅크리고 앉아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개와 일식
집 주방장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환경 관리 사업(?)으로 직업을 바꾼 선생과 대낮부터 두
터운 커튼이 쳐진 호텔 방에 단둘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
데 여긴 오랫동안 쓰지 않고 닫아 둔 방송국의 분장실처럼 어딘가 모르게 칙칙하고 음습하
지 않은가.
호텔은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서 모로 쓰러져 가는 집처럼 인기척 하나 없이 사방이 적막했
다. 강 선생은 내 옆에 앉아 입을 다물고 팔짱을 낀 채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있었다. 왕가
위 감독의 "아비정전"이었다. 화면 속으로 블루 톤의 종려나무 숲이 일긋거리며 떠가고 있
었다. 나는 발리에 갔다가 어느날 새벽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나가 본 해변의 종려나무 숲
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그 감람빛의 서글픈 새벽 해변. 나도 모르게 바다로 걸어 들어
가다 일순 놀라 돌아보았을 때 마침 종려 나무 숲 뒤편에서 흐리게 그믐달이 내려앉고 있
었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의,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호텔처럼
사방이 적막한 사내였다.
그 동안 내가 안에서 키워 온 시커먼 힘들, 이라고 치매인 양 되뇌며 나는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 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묵은 에너지가 다 빠져 나가면 머지않아 다른 힘
이 들어찰 걸세. 자넨 그때부터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해. 어떻게 그 힘을 받아들여야 할지 생
각해 두게. 무엇보다도 비례와 균형을 염두에 두게. 그것이 잘 맞으면 주파수가 작동할 걸
세. 자네와 자네 주변의 흐름을 감시할 수 있는 극도로 집중된 힘 말이야."
극도로 집중된 힘. 그 말을 기억해 두기 위해 나는 마비가 시작된 턱을 억지로 움직여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급기야 의식 전면에 뿌연 안개가 들어차며 뼈 마디마디로 둔한 통증
이 몰려와 엉켜 붙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이마와 겨드랑이에 진득한 땀이 배어 나오며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은 탈진 상태가 온몸으로 닥쳐왔다. 그것은 내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일식 현상이었다. 그리하여 내 어두워 오는 둘레엔 그날 근일점을 통과하는 헤일-
밥 혜성의 푸른색 이온 꼬리와 흰색 먼지 꼬리가 겹쳐 차라리 내 안의 우주가 온통 분분하
였다.
나는 침대에 널브러진 채 위액을 포함한 몸 안의 진득한 액체를 쉼없이 게워 내고 있었
다. 그것은 연둣빛이기도 하고 때론 커피빛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였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침대 패드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런 나를 강 선생이 옆
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거들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야 둘째치고 나는 타인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짐짓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네. 누구나 쌓아 둔 독이 있게 마련이니까." 내 중얼거림을 엿들었는지 그가
건조한 소리로 말했다. 뒤미처 텔레비전에서 난사돼 나오는 총소리가 귓전에 멍멍했다. 나는
항거할 수 없이 차츰차츰 검은 그늘에 가려지고 있었다.
그 뒤로도 약 한 시간쯤 더 간헐적으로 게우고 난 뒤 나는 완전히 탈진해 축축한 패드에
죽은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러한데 시간이 갈수록 의식은 점점 투명해져 가고 있었
다. 기이한 일이었다. 몸 속에서 환한 불덩이 같은 것이 쉼없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전
류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밖에 주름주름 어둠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 방안 공기의 무게로 감지될 즈음 줄곧 입을 다
물고 있던 그가 지친 소리로 말했다. 소리의 반향으로 보아 소파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은 이미 꺼져 있었고 빠삐도 어느 구석에 숨어 잠이 들었는지 잠잠했다.
"괴로워하고 있군. 그게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래,
이번에 자네는 뭔가 너무 가득 차 있었던거야." 나는 달 그림자가 어서 나를 비껴 지나가
온전한 나를 다시 보고 싶었다. "아니, 이제 겨우 밤 9시네. 자넨 내일 아침이 돼야만 자리
에서 일어날 수 있을 걸세. 그땐 적어도 부분적으로 변해 있겠지." 부분적, 이라고 반사적으
로 되뇌고 싶었으나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만 희한하게도 환하게 비어 있는 상태의
계속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양쪽 귀를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에게 주
파수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으나 테이프로 입을 봉한 듯 역시 한마디의 소리도 낼 수가 없
었다.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은 찾아오진 않았지만 그때부터는 눈꺼풀조차 밀어 올릴 수 없
는 무기력한 상태가 오히려 의식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차라리 잠이 들었으면 좋으련만 좀
처럼 그럴 기미도 없었다.
어림짐작으로 10시가 가까워졌다고 생각될 즈음 그가 부스스 소파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육 개월 전 자네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난 이미 두 사람이 헤어지리란 사
실을 알고 있었네." 무슨 소린가. 겨우 따뜻해졌던 등짝의 느낌이 순식간에 차디찬 느낌으로
변해 버렸다. "가을 비가 내리던 날 저녁에 말일세. 그날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왔
지." 육 개월 전 비가 내리던 날 저녁이라니. 내가 강 선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을 일 년 전
의 일이다. 나는 아니라고, 짐짓 고개를 내두르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왔었네. 유령처럼 슬그머니 와서 삼십 분쯤 스탠드에 앉아 술을 마시다 갔네. 잘 생
각해 보면 기억이 날 걸세."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높낮이가 없는
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마 11시쯤 됐을 걸세. 자넨 술이 취해 있었지. 하지만 기억을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던 건 아니야.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더군. 그날 자넨 무의식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던 거야. 그 순간이 지나면 동시에 현실감도 사라져 나중에 기억에 남지 않을
상태로 말이야."
가을 비가 몹시 내리던 날 저녁. 그런 날이 내 인생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 비 내리는 쓸쓸한 저녁나절이 내게도 몇 번인가는 찾아왔을 것이다. "그 여자와 함께
왔었네. 자네는 카키색 바바리를, 그 여자는 금빛 벨트가 있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왔네.
이쯤이면 기억이 나겠지." 기억할 수 없노라고 나는 그에게 복화술을 흉내내어 대꾸했다. 그
러한 사이에 나는 비를 맞고 창 밖으로 서성이는 내 모습을 언뜻 목격한 듯싶었다. "사람이
란 의외로 많은 기억들을 지우며 사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수록 지우고 살려고 애쓰
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사람의 몸은 금고와도 같아서
온갖 것을 다 쓸어 담고 있지. 그날 나는 보았네. 자네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도 그토록
완고한 태도를 보이던 여자를 말일세."
"......"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둘만이 알고 있는 이유 말이야. 혹시 그게 처음
부터 서로 어긋나 있던 그 무엇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남들 눈에는 쉽게 보이지만 두 사람
은 미처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 말이야. 자네는 비로소 그날 그걸 알게 된 거야. "......" "
그 여자와 헤어지고 싶어하고 있었네."
그후로도 그녀와 나는 육 개월을 더 만나왔다.
"알다시피 만나는 일보다 헤어지는 일이 더 어렵네. 시간도 꽤 걸리지. 내가 알기론 그때
부터 그 여자는 자네와 헤어지고 있는 중이었네. 그럼 결국 그렇게 되지." "......" 그 여자는
자네에게 차마 보여 주기 힘든 마음이 있었던 것 같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또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던 거야. 그럴수록 집착하겠지. 그런 식으로 상대에 대해 안심하
고 싶어했겠지. 그게 흔히 연애의 속성이니까."
잠들어 있던 개가 깨어나 그의 품으로 기어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는 통에 잠시 말
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그때 나는 빗물을 뚝뚝 흘리며 일식집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녀와 나의 모습을 뚜렷이 목도하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그녀와 함께 강 선생을 찾아갔던 모양이다. 아니, 찾아갔었다. 이제야 그날
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그녀가 전에 사귀던 남자와 함께 속초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
는 그 일을 두고 변명도 부정도 하지 않고 요지부동으로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속초에
가기 바로 전날 그녀는 나와 함께 밤을 보낸 터였다. 그러고 나서 아침에 태연히 내방을 나
가 그 남자와 바닷가에서 하루를 묵고 온 것이다.
또 그녀가 전화를 걸어 와 약속을 하고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적도 몇 번
인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도 번번이 이쪽에서 먼저 찾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녀는 또 결혼식
장에 가는 신부 같은 모습으로 급히 나를 만나러 오곤 했다.
비를 맞고 "학"에 갔던 날 밤도 그녀는 내 아파트에 왔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 또한 물을 기
분이 아니었다. 밤에 그녀는 잠자리에 누워 내 귀에 대고 이런 말을 속삭였다.
"창우 씨. 제가 가겠다면 보내 줄래요? 창우 씨가 저를 미워하기 전에 떠나는 게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가야만 한다면 가야겠지. 하지만 왜,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얘기해
줬으면 좋겠군."
미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며칠 후엔가 느닷없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 방금 사나운 꿈을 꿨
다며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점퍼만 걸친 채 택시로 새벽길을 달려 불광동 지하철역
근처의 야식집에서 그녀는 만났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그저
횟배 앓은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후로도 비슷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천성적으로 잘 웃는 여자였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쩌면 자신조차 모를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상대가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도 냉정하고 태연하기만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육체의 위
기를 느끼지 시작하는 중년 여자처럼 섹스에 맵게 집착했다. 별다른 정념도 없이 그저 헛발
질로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도 아슬아슬하게 관계가 이어졌던 것은 알게
모르게 그녀가 내 덜미를 완강하게 쥐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혼란에 빠져 내가 지쳐 가는
기미를 드러낼 양이면 그녀는 여지없는 내게 매달리곤 했다.
"그 여자는 자네와 헤어지고 나서 미련이 남는 게 싫었던 걸세." 버리기가 아까우니까 옷
장에 헌 옷을 걸어 놓은 식으로 말이야.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지.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것까지 나는 환하게 감
지하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눈조차 뜰 수 없는 지경에서 그같이 미세한 움직임들
이 육체에 세세히 각인되고 있었다. "앞으론 어떤 경우에도 상대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지
말게.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의 칼날에 매달려 피를 흘리게 되는 법이니까. 여자들에겐 사랑
이란 것도 흔히 생존의 한 전략일세 그 시작인 정념만이 순수한 걸세. 그러니 정념엔 속되
사랑엔 속지 말게."
11시가 되었다고 그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제사장의 꼬임에 넘어간 것처럼 어이없이 히
말라야 석청인지 환각제인지를 먹고 나서 일곱 시간 이십 분이 지난 셈이었다. 하지만 앞으
로도 나는 아홉 시간을 더 이런 가사 상태로 누워 있어야 할 터이었다.
"상가에 가봐야겠네. 세 시간 후에 돌아올 걸세. 밤새 옆에서 거들어 줘야겠지만 사정이
그러니 어쩌겠나. 내가 없는 동안 누가 대신 와 있어 줄 걸세.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 만약
잠이 온다면 푹 자두는 게 좋겠지." 그럼 이따가 보세, 라며 그는 애완견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딱! 하고 출입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럼 내일 새벽 두시에나 돌아오겠
군,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그 사이에 누가 여기에 와 있는다고? 왜 미리 그런 말
을 하지 않았는가. 그게 간호사라고 한 대도 밤 열한시에 호텔 방으로 찾아온다면 좀 으스
스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당장 관 속에 처넣는다 해도 뭐 어째 볼 수 없는 완전 마비
상태다.
나는 먼지에 두텁게 싸인 미라가 되어 멀리서 들려 오는 웬 남녀의 흐느낌 혹은 기묘한
웃음 소리에 귀를 던져 두고 있었다. 이 호텔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걸까. 그리고 나
는 왜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는 걸까.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를 들은 것은 강 선생이 상가에 가고 나서 약 삼십 분이 지난 후였
다. 문이 열리는 순간 희미하게 계속되고 있던 남녀의 기묘한 흐느낌이 귀에서 감쪽같이 사
라졌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귀를 열어 놓고 발자국이 다가오는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바
닥에 카펫이 깔려 있었으므로 발자국의 무게와 탄력은 감지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미세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한 공기의 흔들림...... 고요히 켜를 이루고 내려앉아 있던 방안의 공기가 이
내 맞은 편 창문 쪽으로 떠밀리며 파, 하고 흐트러졌다. 그 진동 속에서 얼굴께로 몇 가닥의
냄새가 풀어져 왔다. 장미 같기도 하고 라일락 같기도 한 가늘고 긴 냄새의 주름이 코끝에
잠깐 머물렀다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느린 하프 소리인 양. 또한 그가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떨어져 나오는 옷깃의 구겨짐 혹은 스적임.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 모서리로 그
가 다가왔을 때 후유, 하고 얇게 토해 내는 숨소리의 반향. 거기에 감겨 있는 입술 비린내.
그것은 루주 냄새였다. 그러니 실은 웬 낯 모르는 여자가 지금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
다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서 있더니 조용조용 침대 밑에 있던 쓰레기통과 빈
맥주캔과 재떨이를 치우고 수건으로 탁자를 닦아 냈다. 그런 다음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
고 나왔다. 누구일까. 웬 여자가 남자 혼자 누워 있는 방에 들어와 샤워를 한단 말인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점멸하는 등불의 그림자가 눈꺼풀 위에서 아른거리다가 그녀
의 실루엣에 캄캄히 가려졌다. 어디서 온 여자일까. 나는 모르는 이를 만나면 그 사람이 비
롯된 곳(고유한 시간과 장소)이 알고 싶어진다. 호텔에서 부르면 지갑을 들고 와 한두 시간
머물다 가는 여자? 아니, 강 선생과 관계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있으니 아
무것도 알 수가 없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볼륨을 낮추고 아까 강 선생이 프런트에서 빌려
온 "아비정전"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내 눈에 다시금 블루 톤의 종려나무 숲이 떠올랐다.
발리.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눈이 멀어 버릴 듯이 밝은 햇빛과 울트라 마린 블루의 바
다. 비가 내린 뒤에 남는 사방의 붉은 꽃잎. 그렇게 한번 키 큰 사랑을 해봤으면 좋겠을 사
방의 종려나무 혹은 야자수. 보들레드 "상응"이란 시가 생각나는 이끼로 뒤덮인 힌두의 사
원과 탑들. 지친 밤의 테라스 카페에서 혼자 마시던 맥주. 끈적한 잠. 아, 그리고 내 잠시잠
시의 적막과 고요를 틈타 여지없이 되살아나는 열대 우림의 그 향기! 마리화나를 팔던 열일
곱 살의 작고 불행한 여자. 그리고 나는 저녁이 되어 맨발의 그녀가 호주에서 온 키 큰 사
내를 따라 호텔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햇빛에 화상을 입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눈만 하얀 안경 원숭이가 되어 밤바다에 떠 있는 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여자의 움직임이 산만해지고 있
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또한 그녀의 시선이 이따금씩 내 몸을 훑어 지나간다는 느낌이 전해
오면서 나는 숨결이 점점 불규칙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조바심과 흥분에 사로잡힌 맨발의
처녀가 나를 보고 있다, 라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어둠의 칠판에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냉
장고 여는 소리와 캔맥주 뚜껑 따는 소리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거의 사이를 두지
않고 이어졌다. 이윽고 맥주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멈칫멈칫 침대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상태를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알고 있었으리라. 겨드
랑이에 그새 끈적한 땀이 배어 나와 있었고 나는 숨기듯 재빨리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서서 가만가만 옷을 벗었다. 여자가 옷을 벗고 있다, 라고 나는 일
러주듯 나를 향해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일식이 있던 날 헤어진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백오십칠 센티미터의 키에 오십오
킬로그램이 나갔으니 통통(뚱뚱)하다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불가
사의한 매력이 숨어 있었다. 마약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묘한 눈웃음, 한국인치고는 유
난히 맵시 있고 불룩한 가슴, 길쭉한 분홍빛의 손톱, 키가 작은데도 매끈하게 길어 보이는
다리, 게다가 그녀는 생리 주기가 단 하루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잠자는 시간과 식사의 양
과 목욕 습관을 틀림없이 조절하는 여자였다. 대학에 다닐 때 어쩌다 한번 데모에 참가했다
가 최루탄 냄새를 맡고 생리 주기가 어긋난 후 당장 시대로부터 눈을 돌릴 정도로 그녀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큼은 남이 뭐라든 철두철미한 여자였다.
여자는 자연스럽고 용의주도한 동작으로 내 가슴을 쓸어 내리며 불규칙에게 뛰는 맥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길고 마른 손이었다. 피부의 감촉만으로 나는 그녀가 남자 경험이 별
로 없는, 그러나 이미 서른이 넘은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손은 열에 들떠 있었으나
남의 물건을 훔치려 들 때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수고비를 받기 위해 들어온 직업 여성
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난마처럼 엉키는 의식 속에서 나는 아니라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는 치료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의 손이 집요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는 사이 먼데서 예의 남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
려 왔다. 접속 불량처럼 끊어졌다 이어지곤 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여자가 하는 대로
맡겨 두고 있을 밖에 없었다. 여자는 숨소리를 죽인 채 내 이마와 귀와 목덜미를 서툴게 쓸
어 내리며 서서히 손을 아래로 가져 갔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이윽고 여자가 침대로 올라와 내게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와 동시에 아, 하고 여자가 찰
나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뒤미처 여자의 긴 팔이 힘없이 내 가슴에 감겨 왔다. 그녀의 메
마른 젖가슴이 오른쪽 어깨를 스쳐 물렁하게 턱에 와닿았다. 나는 주파수란 말을 떠올리며
그녀의 몸을 기억해 두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자는 다리를 들어 내 아랫도리에
슬그머니 겹쳐 놓으며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누군가 여자의 허벅지를 두고 봄볕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렇다면 그녀는 퇴락하는 가을의 저녁빛이었다. 마음 고생을 많이 한 여
자의 몸이었다.
목덜미로 쏟아져 오는 머리칼의 감촉, 단발 머리. 백육십삼 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몸무게
는 사십오 킬로그램쯤, 피부는 탄력을 잃을 지 이미 오래였고 몸에선 마른 수건처럼 생동감
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힘겹게 내 위로 기어올라오며 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 목청의 꺼끌한 울림과 반향도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런 다음 여자는 내 몸을 부둥켜안
고 미동 없이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여자는 나와의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위 행위 정도에 지나
지 않는 일이었다. 여자가 혀를 내밀어 내 귀와 목덜미를 핥아댔지만 그쯤에서 나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몸 곳곳에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축축한 땀방울. 사타구니를 간헐
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미끈거림. 간간이 어깨를 깨무는 그녀의 고르지 못한 이빨. 한번은 몹
시도 아프게 가슴팍을 깨물었는데 그때 그녀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내 몸에 남기고 있었
다. 그렇게 외롭게 몸부림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녀는 제풀에 지쳐 내 가슴 위에 털썩
엎어졌다. 엎어지면서 얼결에 이런 말을 뇌까렸다.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어."
"......" "이젠 개라도 키울 거야." "......"
더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데 여자가 슬그머니 일어나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상체를 곧
추세우고 있었다. 식은땀이 내 가슴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나, 두울, 셋 하는 식
으로 나는 쓸데 없이 땀방울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 개라도 키울 것이라고? 외로워지면
마침내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내 몸에 누우라고 복
화술로 그녀에게 말했다.
여자가 천천히 내 위에 엎드렸다. 곧이어 찾아온 질기디 질긴 적막. 비가 온 뒤에 남는 사
방의 붉은 꽃잎. 창 밖에 차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숨죽인 흐느낌. 언제 헐릴지 모
를 허름한 호텔. 거기 걸려 있는 생의 환각. 열대 우림의 꽃잎 썩는 냄새. 마리화나. 맨발로
키 큰 노랑머리를 따라 호텔로 들어가는 열일곱 살 처녀의 뒷모습. 한편 생은 그러한 것.
"이럴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그랬을 것이다. 힘들고 외로웠겠지. 사람이야말로 외로움
하나는 못 견뎌 별별 짓을 다 저지르고 사는 유일한 동물인 것이다.
"용서하세요." 용서. 그래, 용서하지. 하지만 그것은 네가 누군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
한 일일 것이다. 때로 낯 모르는 타인의 육체도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바로 문밖에 감당 못할 허망이 수갑을 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도 그토록 짧은 한순간의 위안에 지금껏 살아온 생을 내맡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고통
을 받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지금 나는 내 공막한 육체나마 네게 일순의
위안이라도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렇듯 서로 눈감고 만나 오직 한
순간만 뜨거운 종족이 되었다 헤어지기도 하는 그래, 사람이란 야릇한 존재인 것이다.
거웃에 남은 미끈하고 차디찬 수분. 그 여자가 내 몸에 남긴 마지막 느낌. 여자는 몸서리
를 치듯 캑 밭은기침을 하고는 슬금슬금 침대에서 빠져 나갔다.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
워를 하고 더운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 와 내 몸을 닦아 냈다.
옷을 입기 전에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이불을 걷고 도로 침대로 들어와 얼마간 내
몸을 보듬고 있었다. 젊었을 적엔 아름다운 몸이었을 게다. 고통이라는 것이 그녀의 몸을 일
찍 나이 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내상 없이 산다는 것은 백치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아니 백치도 내상을 입고 사는 존재들일 것이다. 다만 타인에게 제 상처를 드러낼 줄 모르
는 것이리라.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곧 참을 수 없는 피로가 밀려
와 나는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여자가 옷을 꿰입고 차
분하게 안을 정돈하고 환기를 시킨 다음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그때껏
강 선생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속에서 추워 떨고 있었다. 웬일인지 나는 북극해가 바라다보이는 노르드곶의 전진
기지에 와 있었다. 그 사이에 열대에서 한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밤이었다. 사방이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나는 추워서 허우적허우적 무릎 밑의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몸 안에 떠돌던 호두알만한 빛의 덩어리, 곧 헤일-밥 혜성
은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그와 함께 마비되었던 손발 끝으로 서서히 피가 몰리고 있다는
느낌이 찾아왔다. 나는 슬그머니 힘을 넣어 주먹을 쥐어 보기도 하고 발가락을 움직여 보기
도 했다. 아직 온전한 지경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몸이 차츰 깨어나는 동안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고 한순간 번쩍 눈을 떴다.
그제도 사방은 앎둑앎둑했다. 하지만 갸웃이 열린 커튼 사이로 빛의 미립자가 다퉈 기웃
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까맣게 흔들리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침대에 주저앉
았다. 그 통에 커튼의 까만 골주름이 동공에서 부챗살처럼 퍼지면 흔들렸다.
"좀더 누워 있게. 아직 이른 시각이야." 언제 왔는지 강 선생이 소파에 수척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반벙어리 소리로 언제
돌아왔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또 지금이 몇 시인지도. "새벽 세시. 그리고 지금은 아침 여섯
시 삼십분일세." 나는 벽을 더듬더듬 짚으며 화장실에 다녀와 도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러나 잠이 올 성싶지는 않았다. 나는 소파 쪽을 향해 고개를 비틀었다. "이런 곳에서 강
선생님과 함께 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제오늘
의 일로 오히려 그가 더욱 낯설게 느껴져 해본 소리였다. 방은 아직도 북극 호텔처럼 추웠
다. 새벽에 이곳을 나간 여자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랬다면 잠이 들어 있을 게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침묵 속에서 나는 벽시계의 초침이 열 개의 눈금을 차례로 지나쳐
가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 꼭 정면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
겠지." 난로 속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석탄 같은 목소리였다. 아침의 어둠 때문인가. "비껴
만난 사람은 언젠가 비껴 헤어지겠죠." 염두에 두었던 바 아닌데 이런 말이 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렇겠지. 텔레비전에서 자네를 봤으니 마지막 모습도 아마 텔레비전이 되겠
지?" "......" "자네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세상엔 이름붙일 수 없는
하고많은 관계가 있게 마련이지." 나는 여의도에서 그를 만나던 날이 생각나 문득 되물었다.
"이제 실제적인 제 모습을 보신 셈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그제나이제나 자네는
내게 뒤를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 요컨대 자네는 과거를 얘기하지 않지. 그건 그만큼 자네가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지. 아직까지는 텔레비전 속에 숨어 사는 게 가능
하겠지만 자네도 언젠간 밖으로 나와야 할 거야."
그런가. 그러나 나 역시 강 선생의 뒤는 본 적이 없다. 그와 나는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
간 필름에서 만난 사이 같다. 말하자면 네거티브한 관계.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 관계가
다 그러할 터이다. 아무리 목욕탕에서 만난 사이라도 우린 서로 다 벗고 있지 않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와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의 눈금을 다시 지나쳤다. 그 삼십 초가 매
우 길게 느껴졌다. 커튼의 골주름이 좀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7시. "자네가 그 여자를 데리
고 나를 찾아왔던 날." 몇 개의 프레임이 빠져 나간 영화를 볼 때처럼 나는 얼른 의식을 환
기시켰다. 비가 내리던 날. 여의도의 "학". 1996년의 가을. 카키색 바바리와 검은 원피스 속
초 그리고 혼란.
"그날 난 그 여자의 얼굴에서 두 개의 표정을 보았네. 하나는 자네에 대한 질긴 미련." 미
련. 그럼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살의였네." 살의? "집착에 항거하는 살의 말일세. 그렇게
양면이 선명하게 겹쳐 있는 얼굴은 나도 처음 보았네."
혹 하니 등짝으로 냉기가 훑고 지나갔다. "용의주도하고 면밀한 여자였던 것 같네. 그러고
나서 헤어지기 위해 육 개월이나 시간을 썼으니 말일세. 거꾸로 말하면 육 개월 동안 자네
를 마음대로 이용한 셈이 되겠지. 그 얼굴처럼 마음도 두 개였을 거야. 한데 그걸 모르겠어.
그 살의의 동기 말이야. 이건 상가에 갔다가 생각한 일인데 그 여자가 혹시 자네를 만나 오
는 과정에서 뭔가 돌연한 감정이 생겼던 게 아닐까. 나중에라도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어쨌
든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일세."
미련과 살의 사이에서 발생한 돌연한 감정.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후로 텔레비
전에서 자네는 볼 수 없었네. 현실에서 사라져 버린 거야. 그러다 얼마 전에 불현듯 자네 생
각을 하게 됐네." "주파수 말인가요?"
7시30분. 허나 시계를 보고 있어도 아무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현실에 없어,
라고 누군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있는 묵은 신문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어떤 기
사를 보게 되었네." 묵은 신문. 낡은 필름. 그런 데서 가끔 잊고 있던 현실이 불쑥 튀어나오
기도 한다. "일식에 관한 기사였네." "네? 방금 일식이라고 했나요?" 반사적으로 그 말을 되
받으며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일식." 머릿속이 다시금 실타래처럼 엉키고 있었다.
"비 내리던 그날...... 자네가 술에 취해 있는 동안 그 여자는 잠꼬대를 하듯 줄곧 무슨 얘긴
가를 하고 있었네. 언뜻 보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소곤소곤 말일세. 고의는 아니었네만
나는 스탠드 안쪽에서 회를 뜨며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네. 한데, 그 여자 직업이
뭐라고 했더라?" "케이블 티비에서 피제이을 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자키라고 해서 방송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일이죠. 리포터를 겸해 그 일을 몇 달 간 했습니다. 그걸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고 탤런트나 배우 지망생들이 전 단계로 흔히 거치는 일이죠." "프로그램을 예보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기상 예보를 한 적은 없나?" 기상 예보라니. "그건 얼마간의 전문성
이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건 왜요?" 아니, 잠깐만, 하고 그가 이마에 손
을 대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올 봄에 일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게 무
슨 말입니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는 일식이 진행되는 날 자네와 헤어질
거란 말을 했네." "......!"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네." 온몸이 마구 떨려 와 나는 침대에 모로
쓰러져 이불을 이마 끝까지 끌어 덮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틈을 두지 않고 그
가 덧붙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틈을 두지 않고 그가 덧붙였다. "이십육 년 전.
일식이 있던 날 우물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네." "뭐가 말입니까?" "그 여자 말일세. 기억이
나지 않나?" 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섭다는 느낌이 켜켜이 온몸이
조여 들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지. 그런데 일식이 있던 날 어머
니가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했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용케 건져 올렸다고 하더군. 우물에서
끌려 나온 여자는 난산 끝에 돼지띠의 여자 아이를 낳았네. 그러니까 자네가 데리고 온 그
여자가 되는 셈이지." 그녀에게서 우물에 몸을 던진 어머니 얘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한데 그게 그날이었던 말인가. 나는 이불깃을 잡고 떨리는 소리로 간신히 되물었
다. "그 얘기를 한 게 틀림없이 그날이 맞습니까?" "자네는 듣고 있었지만, 무엇 때문에, 듣
지 않고 있었네. 하지만 기억 어딘가엔 희미하게 남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일식이 있던 날 그녀와 헤어졌다는 사실도 역시 말할 수도 없었
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더는 못 들었네. 나머지는 자네가 기억해 내야겠지." "......"
"잘 듣게. 어쨌거나 이제 일식은 끝났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아침의 거리는 변함없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네. 우린 잠시 비껴 서서 다만 어제를 얘기하고 있는 거.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네. 곧 체크아웃을 하고 나가야 한다 이 말일세." 그는 재떨이에 가래를
뱉어 내고는 씻어야겠다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에 왔건만 나는 눈을 뜨기가 못내 두려웠다. 지난 일 년동안 내겐 과연 어떤 일이 생
겼던 것일까.
색 바랜 퍼플 스크린에 만삭의 여자가 둥둥 떠가고 눈알이 데굴데굴한 산적 같은 사람들
이 몰려와 우물에 밧줄을 풀어 넣고 갓난 돼지새끼 하나가 탯줄인지 밧줄인지를 끌로 화면
밖으로 꿀꿀꿀 달아나고 있다.
아홉시에 강 선생과 나는 호텔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어젯밤 방에 들
어왔던 여자가 생각났으나 나는 강 선생의 얼굴만 슬쩍 돌아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월의 거리엔 그새 목련이 지고 밤새 북상해 온 벚꽃이 도처에서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
다. 어질어질한 몸을 이끌고 나는 강 선생을 따라 회사 근처까지 와서 아침을 먹기 위해 식
당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온몸에 확 미쳤다. 이때껏 경험해 보지 못한
그야말로 맹렬한 배고픔이었다.
주문한 국밥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식당 문을 열고 어제 회사에서 보았던 여자
가 가슴에 빠삐를 안고 들어왔다. 파리한 얼굴에 겁먹은 듯 눈망울만 유난히 크고 깊었다.
나는 앉은 채로 그 여자와 무덤덤하게 인사를 나눴다. "남창웁니다. 어제 사무실에서 만났
죠." "이쪽은 김혜정 씨, 나와 함께 일하고 있네." 여자는 고개만 까닥하고는 눈길을 돌리며
밥상에 수저를 한 벌씩 늘어놓았다. 어눌해 보이는데다 얼굴에 빛이라곤 한 점도 없는 창백
한 여자였다. 밥이 왔다. 어이없는 식욕이었다. 하루를 굶었다고 하지만 국밥 한 그릇을 비
우는 데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닥 눈치를 볼 일도 아니어서 나는 한 그릇을 더 주문
해 오는 것이 오 분 만에 냉큼 비워 버리고는 그들이 식사를 끝낼 때까지 젓가락을 손에 들
고 있었다. 입맛과 식욕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뱃속이 갑자기 아귀로 변했는지 그만 수저를
내려놓고 싶었으나 속에서 사납게 음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고약한 허기에 몸서리를
치며 나는 짐짓 헛구역질을 해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자네 몸이 에너지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러니 그렇게 억지를
떨 필요는 없네. 몸과 마음의 그 낯선 느낌은 차츰 회복될 걸세. 물론 알아서 잘 조절해야겠
지. 당장은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게. 그러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부터 균형이 생길 걸세.
그때는 식욕도 정상으로 돌아올 걸세."
그렇다면 내가 반수반인 식으로 심신이 분리된 상태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몸에 에너지
만 생겨 버리면 기형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자네 몸이 여자로 변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여자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남자도 아
닌 것 같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곧 익숙해질 걸세. 되풀이하지만 이제부터는 균형
을 찾는 일에 몰두하게. 그거야말로 순전히 자네 몫이니까."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어 나는
그저 멀뚱한 얼굴로 여자 옆에 앉아 있는 애완견만 맹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문 밖으로
개 한 마리가 봄의 서글픈 햇빛을 끌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식당을 나와 나는 강 선생
일행과 헤어졌다. 사무실에 들러 차라도 하고 가라고 강 선생이 권했지만 나는 이대로 돌아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더 지체하게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초초
감이 아까부터 뒤통수에 몰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여기 이 거리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
이 헤어지세. 또 연락하세. 그땐 자네가 먼저 전화하겠지."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고개
를 끄덕거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애완견을 안고 있는 여자의 무심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정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허수아비처럼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 상자 속의 토끼
그들과 헤어져 푸른 하늘 밑을 비트적거리며 전철역까지 오는데 까닭 없이 한순간 코가
매워 왔다. 길을 가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남의 장소
따위에 넋을 잃고 앉아 있다 보면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려 온다. 넌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팔다리엔 탄력이 붙어 있었으나 마음엔 더없이 투명하고 커다란 구멍이 생겨 버린 성싶었
다. 아무리 사방을 휘저어 봐도 그 넓이와 깊이의 끝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 물고기가 한 마
리도 살지 않는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주춤주춤 지하도로 내려갔다.
전철에 앉아 나는 신문을 펴들고 한보 사태와 두 전직 대통령의 선고 공판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었다. 천구백구십칠년 봄의 한국은 마치 거리의 모든 신호들이 고장난 나라 같다. 그
리고 나는 연료통에 기름만 잔뜩 채운 엔진 없는 자동차.
배앓이를 하는 얼굴로 신문을 노려보고 있다가 나는 지하철 삼호선과 사호선이 교차하는
충무로 역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가 불고기 백반을 주문해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알다가
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 걷잡을 수 없는 식욕이 거북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한 달 후에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지만 나는 짐승이 된 기분에 사로잡혀 어디 굴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 함부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차를 탔다가는 신고를 받고 달려온
포수에게 생포돼 동물원으로 보내질 것만 같았다.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나는 슈퍼
마켓에서 빵과 우유를 사가지고 찻집으로 들어가려다, 그 옆에 보이는 지하 전화방으로 내
려갔다.
전화방. 들어 보긴 했지만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전화 통신법에 위배된다 하여 한창 매스
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가 요금
을 받고는 자수하러 온 것도 아닌데 대뜸 내 나이와 이름과 직업을 물었다. 서른다섯살, 남
창석, 회사원이라고 나는 이름과 직업을 바꿔 적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통화하고 싶은 상대
를 물어 왔다. 잠시 꾸무럭거리다 나는 뭐 아무나, 라고 얼버무렸다. "아무나요?" 어차피 불
특정 다수 중의 하나가 아닐 것인가.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빵 봉지를 석연찮은 표정으
로 (폭발물은 아니오니 부디 염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흘겨보고는 9번 방에 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하여 나는 9번 방으로 갔다. 방에는 탁자와 재떨이와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아니, 탁
자 밑에 음란 서적으로 분류되는 잡지들이 몇 권 속옷을 걷어쥐고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있
었다. 전화가 걸려 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빵과 우유를 낡은 창고에 사는 늙은 쥐처럼 성
급히 먹어 치웠다. 그러고 나서 어둑한 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아닌게아니라 갑자
기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바람이 불어 가는 새벽이나 비 내리
는 저녁나절에 등짝이 춥게 깨어나 가슴으로 밀려드는 외로움을 목도하고 있을 때면 여지없
이 그 같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받을까말까 하는 동작을 두 번 반복하다 나는 낚시대를 잡아채듯 냉큼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떤 사람일까. 일단은 여자겠지. 내가 말을 않고 있자 저쪽도 숨
을 죽이고 있었다. 재떨이에서 회청색의 연기가 가늘게 밀려 올라가는 것을 골똘히 지켜보
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을 아니
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턱없이 반가울 리가 있겠는가. "저도 반갑네요. 근데 회사
다니신다면서 점심때도 아닌데 웬 전화방예요? 혹시." 혹시 회사원을 사칭한 제비나 족제비
가 아니냐는 투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네, 오늘은 월차 휴가여서 혼자 빵 봉지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던 중이올시다." 그러자 여자가 빵 봉지요? 하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삼
십대 중반쯤 된 결혼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슬하에 자녀도 둘쯤 있으리라. "말씀 참 재밌게
하시네요. 한편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구요. 빵 봉지를 들고 평일의 거리를 활보하는 삼십대
중반의 남자. 도시의 보헤미안 같잖아요." 보헤미안 좋아하시네. 하지만 나는 상대를 실망시
키고 싶지 않아 들러리를 서는 기분으로 말을 열심히 맞춰 나갔다. "맞습니다. 그룹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즐겨 듣는 저는 일명 빵 봉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가 웃었다. "근
데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죠? 설마 진짜 빵은 아니겠죠?" 빵이 아니라니. 나는 구겨진 빈 봉
지 안을 들여다보며 다음 말을 곰곰히 생각했다 (이봐, 리듬이 끊기면 안 되니까 빨리빨리
다음 말을 생각해 내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필요한 건 뭐든지 들어 있습니다. 필요
하신 것 말씀하세요." 여자가 또 웃었다. 내가 저질러 놓긴 했으나 참으로 아연한 일이었다.
"삼십대 중반의 어느 날 정오에 한 여자가 전화방을 통해 구하고자 하는 게 뭐겠어요? 예수
겠어요? 부처겠어요? 엉큼한 사람." 뭐라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봉지 안의 물건이 쓸 만한
지 어떤지 이쪽에서 알아보도록 하죠. 띠가 뭐예요?" 갑자기 띠는 왜 묻는 것인가 하지만
대답해야 하리라 빈 봉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이제는 내가 궁금하다 마술을 하는 여자인
가 보다. "십이지의 네 번째 벨트입니다." "벨트요? 아, 벨트. 그럼 그게 무슨 띠죠?" 토끼라
고 내가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얼른 목소리를 바꾸더니 말
머리를 돌렸다. "저와 같네요. 실례지만 82학번인가요?"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가 81학
번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색한 침묵이 얼마간 탁자 위에 고여 있었다. 딱히 할말이 없어 나는 그럼
토끼 얘기나 할까요? 하고 여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있더니, 그래요 그럼, 하고
넌지시 대꾸해왔다. "토끼가 달을 쳐다보고 새끼를 밴다는 소리 들어 보셨나요?" "어머, 그
래요?" "그런 다음에 입으로 새끼를 낳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또 세 마리 하는 식으로
말이죠." "짓궂은 사람이군요. 하지만 재밌어요." "무려 열 살 때까지 저는 그 말을 믿고 자
랐습니다." "열 살이면 조숙하신 편이었네요. 그럼 달의 거무스레한 부분에서 토끼가 떡방아
를 찧고 있다는 얘긴 몇 살 때까지 믿었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역시 엉큼하시군요.
하지만 좀더 재밌어요."
그런가. "일본 서해에 가면 곳곳에 우사기나미라고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토끼
파도라는 말이죠. 바다가 거칠어질 즈음 몰려오는 파도를 그렇게들 부른답니다." "파워풀하
네요."
접입가경이다. 이런 데 돈을 내고 들어와 있는 내가 잘못이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궁
리하다 못해 이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번에는 그쪽에서 계속하십시오. 임부 교댑니
다." 왜 그런지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수습하듯 서둘러 덧붙였다. "뭐, 말이 잘못됐나
요?" "아뇨, 잠시 당황했어요. 남편이 침대에서 자주 쓰던 말이라서, 하긴 그 말을 들어 본
지도 꽤 오래됐습니다." "그래. 그래"
그녀의 남편은 무역 회사에 다니는 차장 대우 과장이었다. 정식 차장을 거쳐 마흔다섯 살
이 되기 전에 부장으로 승진하고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정 전에 들어오는 날이 단 하
루도 없다고 했다. 물론 계속되는 음주가무의 나날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엔 스물네 시간을
내리 잠만 잔다고 투덜거렸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의 파워에 대해서 몇 년째 심각하게 고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한테는 적어도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저도 가끔 달에 올라가 앉아 첫사랑과 어여쁜 얘기를 나누고 싶
을 때가 있습니다." "한 쌍의 토끼처럼 말이죠? 그럼 지금부터 아무 얘기나 편하게 해도 돼
요? 둘이서 달나라에 와 있다고 생각하고 말예요." 그러라고 나는 흔쾌히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말하면 섹스에 관해 얘기하고 싶거든요." 섹스. 그런 아까부터 계속하던 얘기가 아
닌가. "얼마 전부터 폰섹스에 관심을 갖게 됐죠."
말은 들어 봤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나는 더듬거렸다. 사실인 것이다. 여자가 본드
냄새처럼 아리송하게 웃었다. "저 지금 침대에 누워 있거든요." 재떨이에 있는 담배가 고스
란히 구부러진 재를 남긴 채 꺼져 있었다. "정말 폰섹스를 해본 적이 없단 말예요?" "영화
는 본 적이 있습니다. 로버트 앨트먼 감독의 '숏컷'과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걸씩스'를 보면
폰섹스 하는 장면이 나오죠. 부업으로 말입니다." "부업요?" "네. '숏컷'을 보면 아이를 안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고객과 폰섹스를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말
이죠." "그런 좀 그런데요. 다른 장면은 없나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좀 착잡한
얘기를 꺼냈다. 역시 영화 '숏컷'에서. "세 사람의 남자가 낚시를 갑니다. 그중 한 사람이 물
속에 떠 있는 여자의 벌거벗은 시체를 발견하죠. 하지만 그들은 시체를 묶어놓고 그 옆에서
태연히 밤새 송어 낚시를 합니다." 어리둥절해하다가 여자가 마지못해 되물었다. "왜, 신고
부터 하지 않구요?" "한갓 시체 때문에 낚시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던 겁니다."
이쯤 되자 여자는 기가 질린 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너무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대
낮부터 구겨진 빵 봉지를 들고 폰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날이 흐려지면 가랑비가 슬슬 흩뿌리기 시작했다. 거리 한 모퉁이에 서서 주위를 두
리번거리다 나는 지나는 택시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대한극장 근처에 있는 기획사에
들러 볼까 싶기도 했지만 특별히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일할 준비가 돼 있지 않
았으므로 담당 매니저를 만나 나눌 얘기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방송에 나가지
않는 여섯 달 사이 나는 두 번의 광고 제의까지 거절해 그들에게 얼마간의 복잡한 손해를
끼친 터였다. 연예인이나 이들을 관리해주는 기획사나 대개는 광고 출연을 통해 나오는 수
입으로 공생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루 반나절 동안 외출했다 돌아오니 우편함에 태국
에서 날아온 두 통의 엽서가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송 크란 축제가 열리고 있는 파타야라는
곳에서, 또 한 장은 야자나무가 무성한 카라비 해안에서 부쳐온 것이다. 그러나 이년 째 내
게 엽서를 보내오고 있는 여자에 대해 나는 아는바가 전혀 없었다. 엽서가 부쳐져 오는 것
도 그때마다 지명이 다른 외국에서였다. 세상에는 그렇게 제 신분을 감추고 돌아다니면 살
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양복을 꺼내 입는 경우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초반이라고 짐작되는 여자였다. 나는 전화기에 녹음돼 있는 그녀
의 목소리를 세 번째 되풀이해서 듣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겨 놓고 있
었다. "남창우 씨 댁이죠. 뵐까 싶어 "페드라"라는 찻집에 와 있습니다." 메시지가 남겨진 시
각은 어제 오후 6시였다. 그리고 "페드라"는 아파트 단지 건너편 상가에 있는 카페였다. 그
로부터 한 시간 뒤에 남겨진 메시지. "오늘은 이만 돌아갑니다. 이내 또 찾아뵙겠습니다."
간혹 텔레비젼을 보고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오는 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화기예서 흘
러 나오는 목소리는 그런 식으로 찾아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매우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인
데다 거기엔 무엇보다 용건이란 게 느껴졌다.
나는 메시지를 저장시켜 놓고 욕실에 들어가 목욕부터 했다. 물 속에 누워 나는 어제오늘
내게 일어났던 일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고 있었다. 일 년이 아니고 육 개월 만에 만난 강
선생의 낯선 모습, 낡은 호텔에서의 하룻밤, 방에 들어와 몰래 내 몸을 훔치고 새벽에 사라
진 여자. 멀리서 밤새 들려 오던 남녀의 기묘한 웃음 소리,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애완견, 대
낮부터 침대에 벌거벗고 누워 전화방의 외간남자와 폰섹스를 하고 싶어하던 권태기의 여자,
그리고 태국에서 부쳐 온 엽서.
그녀는 언젠가 노르웨이에서 부쳐 온 엽서에다 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썼다. 토마토를 좋
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늘 한 쌍의 남녀가 찍힌 사진 엽서를 보내 오고 있었다. 한 번쯤 만
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녀는 그 말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국
내 주소는 물론 전화 번호도 알리지 않고 외국 여행 중에만 간간이 엽서를 보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작년 여름엔가 덴마크에서 부쳐 온 엽서를
받고 나서였다.
비가 와요. 안데르센 생가의 처마 밑에서 어디선가 한없이 몰려드는 젖은 시멘트 냄새를
맡으며 벌써 세 시간째 꼬리를 접고 앉아 있습니다. 제 옆에는 비에 흠뻑 젖은 남녀가 한
시간째 떨며 입을 맞추고 있구요. 사랑이 고단하지도 않은지 하지만 당장은 가까운 슈퍼마
켓에 가서 외상으로도 잠깐의 사랑을 사고 싶군요. 지금, 시멘트 냄새에 혼자 발이 젖고 있
는 나수연. 그럼 이만 총총.
비에 젖은 시멘트 냄새가 스멀스멀 거실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며 바
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틀어 놓고 베란다의 시들은 꽃들에게 물을 주었다. 일식이
끝난 봄날 내내 나는 바흐와 꽃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괴테가 그랬다던가. 바흐의 음악은
하느님이 천지 창조 이전에 자신과 나눈 대화들이라고.
베란다의 문을 닫고 들어와 나는 소파에 앉아 토마토를 좋아하는 여자가 보내 온 카라비
해안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초록의 바다, 야자수, 그리고 수영복을 입은
남녀가 손을 잡고 멀리 수평선 끝을 바라보고 있다. 송 크란 축제임을 알리는 다른 한 장의
엽서도 역시 한 남자가 노란 꽃을 단 여자의 머리에 물을 뿌려 주는 사진이 박혀 있다.
아, 나도 지금 카라비 해안으로 갈 수 있다면. 이런 몽상에 잠겨 있는 터에 띠이! 띠이!
하고 경비실과 연결된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나는 오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현관에 어떤 부인이 찾아와 있습니다, 라고 경비가 말했다. "누
군가 물어 봐 주시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두런두런 오가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어제 '페
드라'에서 전화했던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뭐라고 할까요?" 메시지에 녹음된 그 여자다. 멍
한 상태에서 대꾸를 못하고 있다가 나는 콱 잠긴 소리로 말했다. "삼십 분 후에 그곳으로
가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나는 왠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바흐 에이면이 끝날 때까지 막 읽으려던 엽서를 손에
쥔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누군데 급기야 집까지 찾아온 것일까.
나는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노란 새털 무늬가 있는 회색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맸다. 순전히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른 것이지만 가끔 양복을 입고 싶은 때가 있었
다. 꼭이 누굴 만날 때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걸어서 십 분밖에 안 되는 백화점 지
하의 식료품점에 가기 위해 양복을 꺼내 입은 적이 있었다. 남들이 들으면 틀림없이 웃겠지
만 아무튼 내게는 그런 때라는 게 있다.
약속 시간 오 분을 남겨 놓고 나는 신발장에서 잘 닦아 놓은 구두를 꺼내 신은 다음 우산
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오후 여섯시에 가랑비가 내리는 봄날 거리는 외진 바닷가의 저녁
처럼 축축하고 적막했다. 카라비 해안에서 내게 엽서를 부친 연인은 어디로 옮겨 갔을까. 테
라스 카페 의자에 실루엣을 고정시키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엽서를 쓰고 있을까. 노란 우산
을 쓴 젊은 남녀가 좁은 골목으로 일긋일긋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인생이란 어쩌면 그런
쓸쓸한 구경의 한때이리라.
우산을 접어 빗물을 털어 내고 나는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하고 좁은 실내엔 장식
용 촛불 몇 개가 정물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손님이라곤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절
은 여자 둘과 맞은편 자리에 기울게 검은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여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녀는 커피잔은 손에 들고 있다 흘끗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플라스틱 통에 우산
을 꽂고 기웃기웃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직면하게 된 놀람의 순간을 어떻게 말해야 좋은지. 나는 갸웃이 모자 안에 드러나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붙박여 섰다. 그때 스피커에서는 레오나
드 코헨의 '누가 불 옆에'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내 일단의 놀람을 더욱 효
과적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삼월 구일. 그러니까 일식이 있던 날 나와 헤어진 여자가 그곳에
도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모자 밑에 하얗게 드러난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다시금 기가 질
려 마음을 수습하느라 허둥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커피잔은 내려놓으며 재빠른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대뜸 찾아와서 죄송합
니다. 아파트까지 갔던 건 집에 계시면서도 전화를 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 그랬던 겁니다."
그래. 전화는 대개 받지 않고 산다. 자동 응답기를 틀어 놓고 필요한 때만 이쪽에서 전화를
건다. 일 년쯤 전부터 생긴 습관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의 앞자리에 주섬주섬 가
앉았다. "저는 주미의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빼닮을 수가 있는가. 가까이에서 보니 나이 든 여자의 티
가 역력했지만 언뜻 보면 착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매화 무늬가 수놓인 엷은 분홍빛
투피스 차림에 장미 모양으로 착착 접힌 스카프가 목에 잠겨 있었다. 투피스는 내가 주미를
처음 만날 날 그녀가 입고 있던 것이었다. 유행을 타지 않는 꽤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모녀
가 옷까지 바꿔 입고 사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대번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차림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만나러 오다니.
나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난감하고 불안한 느
낌이 정수리께로 몰려들고 있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우
마주앉아 무슨 얘길 한단 말인가. 괜히 피의자가 된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중심을 잃지 않
으려고 숨을 배꼽께로 끌어 모았다. "서먹한 만남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흐
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찬찬히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화에 녹음된 것처럼 단정하고 바
른 말투였다. 나는 찻집 유리에 "페드라"란 글자가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을 곁눈질로 흘겨보
고 있었다. 그러하듯 나는 어딘가의 반대이거나 안팎이 어긋난 공간에 들어와 있는 성싶었
다. "엉뚱한 얘기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모녀는 좀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특별한 관계. 날이 어두어지며 실내의 촛불 빛이 환해졌다. "꼭 자매처럼 살아왔습니다."
가끔 거리에서 딸의 손을 잡고 정답게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어머니들은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게 좋아 보였었다. 말하자면 그런 정도를 말하고 있음인가. 주미를 통해 어머니 얘기
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어머니와 백화점에 갔다가 약속 시간에 늦게 됐다, 미
장원과 목욕탕에 함께 갔었다, 하는 정도였는데 그것 가지고는 어머니에 대한 설명이 될 수
가 없었다. 언젠가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는 얘기를 듣고부터 나는 거기에도 필시 사연이 있
으려니 싶어 굳이 묻지 않았다. 주미를 임신하고 있을 때 우물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도 강
선생이 일깨워 줘 간신히 기억해 낸 일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작년 여름에 주미와 함께 성산포에
갔을 때 그녀에게서 들은 갈치, 우물, 뭐 어쩌구 하는 얘기. 그러나 그것은 당최 실감이 나
지 않는 얘기여서 나는 흘려 듣고 있었고 또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주미는 아비 없이 태어난 앱니다. 그래서 서로 닮아 가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걸 확인할 때마다 아직도 놀라곤 합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익숙
한 동작으로 불을 붙였다. 촛불 안으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빨려 들어갔다. 칵테일을 마시
던 창가의 여자 둘이 나가고 비에 젖은 남녀 한 쌍이 교대하듯 들어왔다. 일순 그들에게서
정액처럼 비릿한 봄비 냄새가 화아 풍겨왔다.
나는 비에 젖은 시멘트 냄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면 목에 더운 먼지나 텁
텁한 안개가 들어차 있는 것만 같지. 코펜하겐 인어공주의 목울대도 오늘은 텁텁하겠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니까 닮는다는 것이 처음엔 그저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애가 커가면서
부터 가끔 섬뜩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듯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을 것일까. 닮을 수도 있
고 안 닮을 수도 있고 그런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따지고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미가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거꾸로 제가 그애를 닮아 간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애한테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생기면서 말입니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자연스런 계기
를 통해 그런 식으로 변하게 마련이죠."
그게 또한 의식의 변성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딸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한
다는 것은 왠지 생소하게 들린다. "저는 주미가 남창우 씨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주미는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습관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소한 얘기까지 저한테 모두 털어놓곤 했습니다. 저 역시 주미에게 생기는 일은 뭐
든지 알고 싶어했구요." 아무리 모녀지간이라도 할 수 없는 얘기가 있는 법이다. 아니, 상대
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얘기도 있게 마련이다. 거북한 느낌이 들어
나는 조심스럽게 울타리를 쳤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비에 젖은 남녀가 아까부터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중년의 부인과 앉아 있는 젊은 남
자의 모습이 수상쩍어 보여서 그러는가. "저는 주미가 남창우 씨와 헤어지는 걸 원치 않았
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건 순전히 주미와 나 사이의 문제다. "주미가 남창우 씨를
좋아한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창가의 남녀가 귓속말을 하는 척하며 벽에 기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주미에게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지만 나는 새삼스럽게 바둑 복기하듯이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어머니한테 말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내가 그들의 결혼 생활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드리울까 싶어 확인을
받으러 온 것이라면 한시 바삐 도장을 눌러 주고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 따위
짓은 안 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주미는 지지난 토요일에 결혼을 했습니다. 걸리는 바가 없지 않아 반대한 결
혼이었지만 아무튼 식은 올렸죠." "그렇다면 잘된 일입니다." "아닙니다. 다음날 괌으로 출발
한 예정이던 신혼 여행을 주미가 느닷없이 취소해 버렸으니까요."
식을 올리고 나서 신부가 신혼 여행을 취소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이런 저런 사정으
로 신혼 여행을 나중에 가는 경우는 있다. 내 주위의 동료들도 촬영 일정 때문에 마지못해
그러는 걸 종종 봐왔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여유를 갖지
않고 지나치게 일을 서둘렀기 때문이었을까.
"주미는 지금 혼자 여행 중입니다. 방송국도 며칠 전에 그만뒀죠.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힘
들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제 탓도 있으니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왜 뒤늦게 와서 내게 이 같은 양해를 구하고 있는 몰라 나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
져 들고 있었다. 나는 어둠에 갇힌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와서 밖의 불빛들
이 수채화처럼 빗물에 번져 내리고 있었다. 혹시, 하고 그녀가 넌지시 목쉰 소리로 물어 왔
다.
"주미가 돌아온다면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녀를 히뜩 마주 보았다. 뜻을 알 수
도 없으려니와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결혼은 취소된 거와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미를 저대로 놔두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쩍 마른입으로 되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주미는 저
에게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또 이제와서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얼굴에 일순 낙담을 뜻하는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냉정한 사람이군요." 이들
모녀는 한결같이 나를 무섭고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번 끊어졌던 것을 다
시 묶어 놓으면 추한 매듭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다 주미와 저는 이미 모서리까지 보
아 버렸습니다." "모서리라뇨?" "서로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부분 말입니다. 바꿔 말씀드리
면 평생을 함께 살아도 보여 주지 말아야 할 것 말이죠. 주미와 저는 극구 그것까지 보고
나서 헤어졌던 겁니다."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둘 사이엔 아이까지 있었지 않
습니까."
그녀와 나는 자리를 옮겨 근처의 "브레인 워시"라는 지하 재즈바에 앉아 있었다. 언제 와
도 늘 한산하고 조용한 집이었다. 나는 레드 락이라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는 마티니를 앞에
놓고 있었다. 그녀는 중년의 부인이었지만 재즈 바에 앉아 있는 것이 그닥 어색하게 여겨지
지는 않았다. 금방 분위기를 몸으로 감지하고 주위의 공기를 고스란히 독점할 줄 아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주미와 가끔 이런 데를 다니곤 했습니다. 홍대 앞에 있는 '언더그라운드'나 신촌 기차역
근처에 있는 '오래된 정거장' 같은 데 말이죠."
'언더그라운드'는 대학생과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록 카페고 '오래된 정거장'은 일반
가옥을 개조해서 만든 미니 이태리 식당이었다. 입구에 꽃이 많이 피어 있어 늘 초대받아
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집이었다. 어쨌거나 두 군데 모두 주미와 내가 자주 가던 곳이었는
데 그런 데를 그녀는 제 어머니와도 함께 다닌 것이다. 그러하고 나는 지금 그녀의 어머니
를 만나 재즈 바에 나란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입술에 대고 있던 마티니 잔을 스탠드에 내려놓았다.
"정말 모르고 있었나요?"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았다면 혼자 병원에 가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저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수상쩍은 느
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작년 가을에 제주도에 며칠 쉬러 간다기에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일만큼은 저한테도 얘기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작년 가을, 그녀는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일주일 동안 제주도에 다녀왔었다. 그렇다면 그
녀는 제주도에 있는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를 지웠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학'에 들르
기 얼마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남창우 씨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머리 위에서 빌 에반스의 트럼펫 연주 '이런 꿈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 이런 사나운
꿈들, 이라고 입엣말로 속삭이며 나는 점점 내 안으로 가라앉아 갔다.
'돌이켜보니 그때 제주도에 다녀와서 주미는 그 남자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
다.'
"그 남자요." "알고 계시겠지요." 몰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핸드백 속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렇습니다." 담배 연기가 내 얼굴 앞으로 꿈들대며 가로로 흘러갔다.
"주미는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흔들렸던 거예요." "확신이라뇨." 그녀는 마티니 한
잔을 더 주문하면서 콤팩트를 꺼내 얼른 제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자신에 관한 확신 말입니다." "아이가 생겨 있는데도 그런 게 필요합니까?"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다릅니다. 비록 아이가 있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확신을 더 필요로 하는 게 여자
들의 생리고 본능입니다." "남녀 사이에 아이보다 더한 진실의 증거가 또 있습니까." "여자
에겐 때로 어제의 진실보다 오늘의 확신이 우선하는 법입니다." 나는 세 병째의 맥주를 마
시고 있었다. "주미는 남창우 씨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다만 좋아하고 있는 건지 그걸 모르
고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다른 겁니까" "아까 남창우 씨가 마침 그 남자 얘기를 하셨지
만 주미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었을 겁니다. 주미는 그 사람에 대해 심각한 죄책
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그녀 또한 어딘가로 깊게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사
람이란 순간의 감정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미에게 남자가 있다
는 사실이 알고 나서 저는 그녀에게 돌아갈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담배가 비벼 끄고 나서 그녀는 위스키를 주문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시작했다. 밖엔 상
기도 어둠 섞인 봄비가 내리고 있을 터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불길한 느낌이 몰려오고 있습
니다." "......." "맞습니다. 주미는 몇 번이나 남창우 씨와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가 그애를 말리곤 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고 물으면 대답이 무척 힘듭니다. 아마 나이 든
여자의 직감이나 판단이 그래도 옳다고 믿었던 걸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 남자에게 돌아간
다 해도 염려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주미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워했
죠. 차라리 그냥 놔뒀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봄의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제주도는 지금 일 년중 가장 아름다운 때일 터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이제 그 섬은 내 죽은 아이의 무덤이기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꿈꿔오길. 나중 아이를 낳게 되면 유채라고 이름 지으러 했는데 하필 내 두 번째
아이의 무덤이 제주도가 될 줄이야.
조만간 나는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켜서서 주위를 살필 때가
온 것 같았다. 제주 모슬포엔 관광 가이드를 하며 육 년째 혼자 살고 있는 대학 때의 친구
가 있었다.
빈 술병이 스탠드 위에 하나씩 자꾸 늘어났다. 그 사이에 노란 우산 하나가 부옇게 떠 있
는 게 보였다. 환간...... 노란 우산을 보면 나는 왠지 마음이 아프다. 술기운에 젖어 돌아가는
오늘 밤에도 누가 쓰다 버린 우산 하나가 거리에 나뒹굴도 있겠지.
"주미가 돌아오면 그땐 자기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겠죠."
자기 감정의 정체. 그러나 나는 이제 봄볕 푸른 마당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세상 어
딘가엔 그런 사람이 하나쯤 남아 있을 것이다.
"돌아오면 만나 주길 바랍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군데군데 술기운이 묻어 났다. "......."
"주미는 남창우 씨를 다시 찾게 될 겁니다." "그건 누구의 믿음입니까?"
술잔 안으로 툭 떨어져 내린 담뱃재가 풀려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을 그녀는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다. 재가 다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나는 말문을 열었다. "그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그 동안 여러모로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인사로군요." "주미는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겁
니다. 이제 와서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거군요." "그녀와 만났던 정류장도
이젠 사라졌습니다." "사라졌군요." 표정이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그녀가 나는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남창우 씨는 곧 저를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설마 싶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나오는 여자처럼 눈동자
가 지워져 있었다. 빈 맥주병 같은 얼굴. 나는 얼른 고개를 외틀었다. "사방에서 불길한 느
낌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네, 아주 불길합니다." 텅 빈 재즈 바에 누군가 밤 열한시에 바
깥바람을 몰고 들어왔다. 아랫도리에 찬바람이 슥 휘감겼다. 아무 눈먼 여자와 밤 열한시 오
십오분에서 다음날 영시 오분까지만 편의점 안의 뜨거운 물통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그때 나는 유리창에 몰려와 붙는 깨알같은 빗방울들은 바라본다. 빗방울 사이로
밤의 나그네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래, 이런 재즈풍의 추운 꿈들.
"비가 내리고 있는데 그애가 지붕 위에 앉아 있습니다." "......." "가엽기도 해라. 옷도 하나
걸치지 않았군요." 그녀는 술에 취해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산을 들고 나가 봐야겠
어요. 바로 이 집 지붕입니다." 그만 돌아갈 양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내처집으로 가려다 나는 그녀가 나올 때까지 지하 계단 입구에 서서 기다렸다. 불과 두 시
간 만에 날은 신기할 정도로 맑게 개어 있었다.
얼마 후 계단 아래에서 검은 모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거기서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이
쪽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새 날이 갰습니다." 그녀가 젖은 우산을 들고 비틀비틀 계단
을 올라왔다. 그러고 나서 그녀와 나는 잠시 고개를 꺾고 지붕 위를 살피는 시늉을 하고 있
었다. 지붕엔 물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 그녀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
었다. 나는 별뜻 없이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가죠." 그
녀가 멈칫멈칫 내 뒤를 따라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나는 온수통 앞에 서서 유리
창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밤의 노인네 하나가 날이
개자 여섯시 오분 전의 시계 바늘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어디론가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
다. 저이는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일까. 신호등 위에 걸려 있던 달이 언뜻 제 몸을 비껴 그의
뒤를 좇고 있었다.
"달이예요." 그녀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은 구름 사이에서 비져 나온 달은 유독 노
랗고 컸다. "당신이 그새 노인네로 변해 저기 걸어가고 있군요." 종이컵을 든 채 옆으로 그
녀가 꿈결처럼 읊조렸다. 한데 누구 말인가.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녀는 자꾸
내뱉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저는 달의 지붕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는데요." 달의 지붕. 먼데 달의 지붕에
서 한 여자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비뚜름히 선 채 그 아득한 풍
경을 시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춥군요." 한순간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자정이 지났
습니다. 이젠 돌아가셔야죠."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그녀가 고개를 맥없이 주억거렸다. 얼
굴이 파리하게 굳어 있었다.
정류장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빈 맥주병 같은 얼굴로 또 나를 무연히 돌아
보았다. 바람도 자서 그녀와 나는 고요한 물속 바위 곁에 단둘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나중
어느 날엔가 나는 저리 늙어 있는 옛사랑의 환영과 아주 돌연한 장소에서 불현듯 마주치게
되리라. 마주쳐 한숨짓게 되리라.
택시가 무릎 가까이에 와서 멈췄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하자 그녀가 내게 다시금 불길
한 느낌을 일깨워 줬다. 절박함이 배어 있는 소리였다. "확실히 주미에게 좋지 않을 일이 생
겨 있습니다. 어미로서의 직감입니다." 나는 택시에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을 망연히 지켜보
고 있다가 곧 어딘가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동문서답을 하고는 이윽고 슬로 모션으로 돌아섰
다. 뒤에서 택시가 갔다.
안개 바다 저편
집으로 돌아와 나는 라면을 끊여 먹고 배부른 역겨움에 짐짓 치를 떨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부터 나는 앓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어 병원에 가야 했지만 그럴 마음도 기력도
없었다. 온몸이 단풍처럼 붉게 달아 목구멍에서 탄내가 다 넘어왔다. 귀가 멀어 버릴 듯한
열이었다. 이따금 자동 응답 버튼이 풀어진 전화통에서 집요하게 벨이 울려댔지만 도대체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을 열에 쫓기며 나는 생으로 앓고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
오고 있는 이 수염처럼 굵고 끈끈한 거미줄들.
제주도로 출발하던 날 오후에 나는 페낭에서 부쳐 온 엽서를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남녀
의 모습이 환하게 박혀 있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나는 여행 가방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새
네 귀가 닳은 엽서를 읽었다.
어제 또 충동적으로 말레이시아로 왔어요. 사람이 그리워 옮겨 왔는데 여기도 모든 지붕
과 처마 밑이 햇빛만 교교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적막하군요. 거리를 걷다가 마침 모퉁이
에 예쁜 공중 전화 부스가 있어 살그머니 들어가 오래 망설여 온 전화를 걸어 봅니다. 하지
만 없군요. 당신은, 엽서는 제대로 받고 있는 건지요. 그냥 돌아 나오기가 뭣해 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오월 삼일부터 세계꽃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
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왠지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면 믿겠어요? 그렇다면 박람회가 끝
나기 전에 하필 맞춰 돌아갈 거예요. 기대하지는 않지만, 혹시 저와 함께 박람회에 갈 수 있
을는지요. 유혹하고 있는 게 아니고 진심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 또한 마음이 변해 이내
귀국하지 않을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당연 패착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돌을 던질 생
각을 하니 마구 즐거워지는군요. 오늘 중에 빨간 우체통을 찾아내 이 엽서를 집어 넣을 작
정입니다.
더불어 이왕에 저와 함께 꽃을 보러 가실 생각이 있다면 십일(토요일예요) 오후 두시에
국제선 이청사로 마중 나와 주시겠어요? 안 보이면 공항에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
다. 바람을 맞고 난 다음에야 비루먹은 꽃들이 새삼 다 무어겠어요. 페낭의 저문 거리에서.
나흘째 머리를 못 감고 있는 수연.
CD 몇 장과 책 두어 권을 여행 가방에 마저 챙겨 넣고 나는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
다. 밖엔 며칠 쉬었던 비가 을씨년스럽게 뿌려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다 나는 책상에 놓고 온 엽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쩌다
그걸 빠뜨리고 나왔을까? 나는 별 생각 없이 수첩을 꺼내 '십일(토) 오후 두시 국제선 이청
사'라고 적어 놓아보았다. 변동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녀가 내게 만나자는 뜻을 전
해 온 건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하듯 사람이 당연 패착을 각오하고 만나 잠깐 동안 꽃
구경이나 하고 담담하게 헤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오래 만났더라도 결국 헤
어지고 나면 다만 그뿐인 것을.
나는 디스커버리 총서 중의 하나인 "바흐-천상의 선율"이란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
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기의 바퀴가 파박!하고 활주로에 닿는 순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제
주엔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서귀포의 사무실로 전화를 건 다음 도르래가 달린 여행 가
방을 끌고 청사를 나오자 금세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달겨들었다. 아무리 남쪽이라지만
제주는 그새 초여름 같은 날씨였다. "서울에서 왔수까? 몹쓸 곳은 지금도 날씨가 엉망이우
다." 서부고속화도로로 접어들며 택시 운전사가 무뚝뚝한 억양으로 제주의 날씨를 알려 주
었다. 모슬포는 제주도에서도 날씨가 가장 변덕스러운 곳이어서 주민들이 '몹쓸 곳'으로 부
른다는 말이었다. 또한 제주도 전역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는데 이쪽만 맑다. 그래서 습하고
더운 기류가 공항 부근으로 몰려와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습하고 더운 기류가 공항 부근
으로 몰려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냐고 사이사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도로 주변의 풍경
만 아슴히 내다보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주미와 성산포에 다녀간 뒤 팔 개월만에 와보는
제주였다.
도로 양쪽엔 하얀 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감자밭, 당근밭, 마늘밭, 밀밭, 양파밭들이
현무암 담을 넘어 융단처럼 아름답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차가 이십여 분을 달려갔을 때
그것들은 시야에서 차츰 사라지고 말았다. 사방 시정 거리 불과 십여 미터 안팎의 두터운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운전사가 전조들을 켜며 뜬금없이 김영삼 정권이 어떻고
국회의원이 어떻고 하면 거친 말을 내뱉는 사이 급기야 앞 유리창에 비까지 흩뿌리기 시작
했다. 안개비였다.
나는 작년 팔월 주미와 함께 성산포에서 보내 삼 일을 달려오고 있는 안개비 속에 앉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성산 호텔에 묵었는데 아마 거기서 아이가 생겼을 터이었
다. 그러고 나서 두달 후 그녀는 제주도에 돌아와 아이를 지운 것이다.
모슬포 대정읍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와서 서림해안도로로 꺾어들자 안개는 더욱 짙어졌
다. 운전사는 시속 이십킬로미터 정도로 속도를 줄이며 괜스레 짜증을 냈다. 이윽고 멀리 붉
은빛의 희미한 덩어리가 시야에 들어와 나는 거기다 차를 세워 달라고 하고 요금을 지불했
다. 그 붉은빛의 덩어리는 "해미"라는 횟집의 입간판이었다. 어차피 저녁 참이어서 나는 가
방을 끌고 횟집 안으로 들어가 서귀포 사무실에서 돌아온 그를 전화로 불러냈다. 노부부가
하는 썰렁한 음식점 의자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자리라는 생선을 안주로 찔끔
찔끔 소주부터 마셨다. 안개는 문밖까지 바투 몰려와 무엄하게 안을 넘보고 있었다. 그리하
여 지척인데도 바다는 눈에 보일 리 없었고 환청인 듯 파도 소리만 어디선가 틈입해 들어와
무딘 마음의 언저리에서 철썩거렸다.
그가 도착한 것은 소주 반 병을 비웠을 때였다. 낡은 랜드로바에 청바지 차림, 삼 년 전
보았을 때와 달라진 모습은 쉬 찾아볼 수 없었다. 발리에서 돌아와 일일 연속극 촬영을 앞
두고 일주일쯤 내려와 있던 게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 장소에 정지해 있다 보면 삶
에 대한 해석은 늘어도 변화라는 건 쉽게 찾아오질 않지." 점퍼를 벗고 내가 건네 준 소주
잔을 받으며 그가 말했다. "중년의 나이까지 혼자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그 무변화의 정
체 말이야." "그렇군. 서른여섯이면 어느덧 중년의 나이군. 어쩐지 요즘 들어 부쩍 시간의
밀도가 느껴진다 싶더니만." "시간의 밀도?" "이를테면 시간이 나를 여과해 지나간다는 느낌
말이지. 전엔 많은 시간들이 내게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가 않아. 아침에 일어
날 때마다 마치 상자 속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하나씩 꺼내 쓰는 기분이 든단 말
야. 하긴 중년이면 뭐든 밀도가 느껴질 나이긴 하지." 이런 식의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으
며 그와 나는 방어회를 안주로 잔을 돌려 가며 거푸 소주를 마셨다. 어둠 속의 안개가 침침
한 빛으로 밀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은빈이 소식은 가끔 듣고 있나?" 식탁을 내려다본 채
그가 우회적인 말투로 물어 왔다. 헤어진 아내의 소식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딴
데 던져두고 대꾸했다. "로마에 간 후론 서로 연락이 없어. 아마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런
다음 두어 순배가 더 이어질 때까지 그와 나는 말을 잃고 회접시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고
개 숙인 그의 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돋아 있는 게 보였다. 몇 달 전에, 하고 그가 젓가락
을 상에 따락 내려놓으며 밭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은빈이한테 전화가 왔더군." "......." "로
마에 가서 일 년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날마다 스페인 광장에 나가 종일 넋을 읽고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그 광장 말이야." 오드리 헵번이 아
이스크림 들고 그레고리 펙을 만난 곳이 스페인 광장이던가? 그건 그렇다치고. "이혼의 충
격이 컸던 모양이야. 마음의 윤곽과 무늬를 잃어버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하더
군. 재작년에야 어학 연수를 끝내고 피렌체로 옮겨 간 모양이야." 피렌체? "그래 지금 거기
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 밖에 자주 나가는 편이니까 기회가 되면 한번 들러 봐. 가끔 전화라
도 해주든지."
김철하. '81년 대학에 입학해서 나는 그를 알게 되었다. 무림-학림 논쟁이 한창이던 때 그
는 학생 운동을 선동하다가 이학년 이학기에 강제 징집되고 나는 삼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
대했다. 그리고 팔십칠년에 사학년에 복학해 나는 캠퍼스에서 그와 다시 해후하게 됐다. 은
빈은 당시 미대 삼학년생으로 총학에서 활동하던 그의 운동권 후배이자 연인이었다. 그러다
그가 팔십칠년 유월 항쟁 때 시국 사범으로 검거돼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은빈과 나는 우여
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됐다.
구십년 봄에 그녀는 감옥으로 철하를 찾아가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묵묵
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고 한다. 결혼식 전날엔 내가 교도소로 찾아갔지만 그는 끝내
나와의 면회를 거절했다. 그때 은빈과 나 사이에는 아이가 생겨 있었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낳으려 했다. 그녀는 누구의 아이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지울 수 없
다고 두 남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뱃속의 아이는 결혼 두 달째 임신 오 개월 만에
자연 유산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철하는 그래 팔일오특사로 풀려나 일 년쯤 인권 운동 단체에서 일하다 돌연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후 육 년 동안 나는 세번 혹은 네번쯤 그를 찾아가서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내게 은빈이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 또한 굳이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설명한다는 식으로 때늦은 변명 따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안개는 좀처럼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산에서 몰려 내려온 짐승처럼 고집스럽게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리에 얼비친 내 얼굴을 곁눈질로 흘겨보며 나는 시간의 밀도, 스페인 광
장, 피렌체, 사실과 진실의 차이 따위의 말 들을 곰곰히 되씹고 있었다.
꼭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첫아이를 유산하고 나서 은빈은 오래 마음에 담아 온 투로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고 어느날 잠자리에서 고백했다. 다만 아이를 낳게 되면
오래 세월 정체되었던 삶이 계속되리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고백
이 더불어 다음 세월의 정체를 가져왔던가. 결혼 후 이 년이 지나 이번에는 내 쪽에서 꼭이
그녀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가 갖고 싶어졌지만 그녀는 부득부득 임신을 거부했다. 그로
부터 구십사년 봄에 이혼을 할 때까지 그녀와 나는 크지도 않은 이십오평의 아파트에서 별
거하는 식으로 각자 방을 따로 썼다.
이내 소주 두 병이 바닥났다. 그런데도 좀처럼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매운탕과 공깃밥이
왔으나 입맛이 없어 나는 숟가락조차 들지 않았다. 며칠 앓고 난 뒤 아귀 같던 그 몹쓸 식
욕은 슬그머니 사라져 있었다.
그쯤에서 그가 제주도에 내려온 이유를 내게 넌지시 물어 왔다. 번거로운 대답이 될 것
같아 나는 비껴 말하고 있었다. "글쎄. 그렇게 대놓고 물으니 막상 할말이 떠오르지 않는군.
하지만 어데 좀 들러 볼 데가 있어." "자네 부지불식간에 이삿짐처럼 큰 가방을 끌고 내려
와서는 늘 그런 식으로 말하지. 이젠 짐을 좀 줄이고 살 때도 되지 않았어?" "한번 어긋나
면 늘 어긋나게 되는 것 같아. 나중엔 그게 굴레처럼 돼버려 좀처럼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지. 요컨대 굳게 문을 닫아 놓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어도 일정 주기가 되면 밖에서
뭔가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는 가시덤불 속으로 손목을 잡아 끌어. 거부하지만 거역할 수 없
는 힘으로 말이야." "그게 뭘까?" "글쎄. 그게 바로 운명이라고 한다면 객쩍은 소리가 될까."
그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그저 끄덕끄덕했다. "어쩐지 줄곧 남의 삶의 빌려 살고 있다는 느
낌이 들어. 하지만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운명이 또한 가만있을 리 없지. 그래서 또 어긋나
고 엉키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가 어긋난 사람들이 아닌가. 은빈이도 역시 마찬
가지고 말이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남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전에 자
신부터 품안으로 너그럽게 끌어 당겨 봐. 언제까지 그렇게 방금 출감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가방을 끌고 돌아다닐 셈이야.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차라리 새 여자를 만나보든지."
새 여자. 나는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이 년 뒤에 새 여자를 만났었다는 말을 그에게 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겼는데 인공 유산을 했고 그리고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말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자연 유산과 인공 유산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정
체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남들 같으면 벌써 학부형이 돼 있을 나이다. 비어 있는 그의
소주잔에 술을 따르며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여자라면 나보다 자네 쪽이 한결 늦었지. 일
테면 결혼 말이야." 은빈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그 동안에 내 입으로 먼저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다. 매운탕을 끊여 주고 나서 방으로 들어간 노부부는 그새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기
척이 없었다. 그들은 범접할 수 없는 방안의 저 고요함으로 오래 그리고 완강하게 함께 살
아왔을 것이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 가다 말고 그가 결혼? 하고 생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래, 결혼. 아니면 여자."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러자고 하는 사람이 당최
없어. 다만 여자라면 가끔 불러서 잠을 자기는 하지. 읍내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들 말이야.
결혼은 안 했지만 여편네들은 여럿 거느린 셈이지."
씁쓸한 얘기였지만 그는 아주 단순한 얼굴로 말했다. "언젠가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여자
가 왔어. 꼭 섹스를 하려고 부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오면 내 손으로 밥도 해주고
잠자리도 봐주고 그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덜그덕거리며 밥을 하고 있는데 잠에서 깨어
난 여자가 문지방에 앉아 그런 나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더군.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 여자
에게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느냐고 물어 봤지."
나는 낯 모르는 그 여자의 눈빛과 표정을 상상해 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아저씨 참
정나미 떨어지는 사람이네요. 되게 잘해 주는 척하고 있지만 실은 자물쇠를 채우고 있어 어
디 비집고 들어갈 데가 없는 남자라구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느낌이 왔지만 나는
부러 웃어넘겼다. "아침이 같은 사람은 분명 독재할 스타일에요. 그게 다 잘난 척이지 뭐예
요. 실은 밴댕이 소갈머리를 가졌으면서 말예요." "흠, 그럴듯해." "그때서야 내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았지. 그 여자말이 사실은 정답 같거든. 실은 은빈이도 내게 그 비슷
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 "......"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은빈이와 결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다만 동지로 생각하고 만났는데 은빈인 그걸 못 견뎌 했지."
세월이 흘러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서로 한 여자를 같이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르리라. "당시에 나는 사회 민중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 경우 결혼이란 탈당서를 제출하는 일과 같은 거야. 그
래서 나중에 은빈이가 자네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한편으론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지."
"단란주점 여자 말대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얘기군." "자네도 알다시피 그땐 시대가 사람을
요구하고 있었어. 누구라도 앞에 나서야만 했지." "그건 선후의 문제도 크고 작음의 문제도
아니야. 삶이란 늘 너에 관한 나, 나에 관한 너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돼야 해. 그중 하나를
버리고 나서 얻어지는 게 도대체 뭐야? 또 그렇게 따지면 지금은 포근한 요람의 시대여서
저마다 후세를 양육하며 살고 있는건가?" "난 지금도 그때의 내 신념과 이성이 유효했다고
생각해 비록 그후의 시대가 내 삶을 변호해 주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야." "매순간이 절박
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 하지만 자네와 나는 뭔가 더 큰 것을 놓치고 살아온지도 몰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이제 좀 말이 통하는 건가?" "그래. 더 늦기 전
에 다들 거듭나서 새 삶을 꾸려야지." "그럼 제주도에 내려온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나? 하
긴 가이드라는 것도 나쁘진 않지. 가이드가 없으면 관광도 유람도 제대로 안되지."
"그건 문책성 발언으로 들리는군. 어쨌든 자신을 보호하고 또 자신에게 보호받고 싶었어.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포스트모던한 시내에 투항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왜 진짜 투사
는 어느 시대에도 투사여야 한다더니 그럴수록 현장에 있지 않고." "감옥에 가 있는 사이
현장도 많이 변했더군.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그런지 발붙일 데도 마땅치 않았고 전엔 함
께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이나 권력 집단에서 나름대로 행세들을 하고 있더군. 문민
시대 운운하며 과거의 투쟁 전력이 무슨 팸플릿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내밀고 다닌
결과겠지. 그런 사람들은 구십 년대에 출세해 살기 위해 팔십 연대에 인생에 투자를 해놓은
셈이 됐지.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냐. 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 요령부득인 시대가 문제
라는 거지."
매운탕 국물이 냄비 바닥에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며 그와 나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노부
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카운터에 술값을 꺼내 놓고 우리는 발소리를 죽여 밖으로 나왔다.
검은 안개가 사방에서 화악 달겨들며 금세 온몸이 축축이 젖어 버렸다. 이리 줘봐, 하며 그
가 내 여행 가방을 빼앗아 들고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어찌나 안개가 짙은지 불과 이십여 미터 아래의 파도 소리조차 귀에 희미했다. 그가 덜덜
거리며 끌고 가는 여행 가방의 도르래 소리가 되레 더 선명하고 요란했다. 두어 발자국 앞
에서 걷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서른다섯 살의 내 굽은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
음을 서둘러 그와의 간격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까 그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여자 제법인 것 같은데?" "서울내기인데다 대졸
이더군." "벌써 다 알아 놨군. 근데 왜 제주도에서도 하필 뱃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모슬포로
왔대?" "안 물어 봤어. 그 처지가 또 내 처지겠지."
쿡쿡 기침이 나왔다. 전방에 불빛이 보여 그에게 물어 보니 해안 경비를 서고 있는 초소
라고 했다. 앳된 목소리의 병사가 부르는 노래가 안개를 뚫고 이쪽으로 건너왔다.
......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라는 구절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되풀
이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그 노래 옆을 비스듬히 지나쳤다. 그때 초소로부터 갑자기 랜턴
불빛이 팍 이쪽으로 쏟아졌다가는 사라졌다.
"그 여자 얘기 좀더 해봐. 단란주점 말이야." "며칠 전에 한 번 더 불렀지." 술기운 때문에
아니라 필시 쓸쓸함 때문에 혀가 굳어진 소리였다. "불러서?" "역시 밥해 주고 목욕물 받아
주고 잠자리에서도 잘해 줬지. 그리고 새벽에 잠들어 있는 여자를 깨워 술집 그만두고 나하
고 살림이나 하자고 꼬드겼지." "그랬더니." "하지만 보기 좋게 퇴짜맞았어." "대단하군. 오
늘 밤에 혹시 알현할 수 없을까? 이런 일을 모름지기 누군가 거들어야 하는 일이잖아." "그
럼 집에 가서 전화 넣어 볼까? 퇴근할 때가 얼추 됐으니 말이야.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어
쩐지 보고 싶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해안도로 옆의 바다가 곧장 내려다보이는 가건물식 별장이었다. 서
귀포시에 있는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살다 어찌어찌하여 작년에 이곳 모슬포로 옮겨 왔다는
얘기였다.
비록 가건물이지만 무료로 살고 있어. 주인은 서울 사람인데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아 농가
의 창고식으로 대충 지어 놓고 이제나저제나 시청에 알력을 넣고 있나 봐. 그나마 비워 놓
으면 동네 건달들이 문을 부수고 여관으로 쓰는 모양이어서 관리해 주는 명목으로 내가 대
신 살고 있는 거지.
하지만 내부 구조는 살림을 해도 별반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이 다 갖춰져 있었
다. 게다가 방도 두 개였다. 대충 짐을 풀고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 동안 그는 녹차를 달이고
단란주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온 것은 자정이 막 지나서였다.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 그와 나는 차를 마시며 오
랜만에 만나며 으레껏 주고받게 마련인 얘기들에 열중해 있었다. "요즘은 텔레비젼을 켜도
안 보이던데." "듣기 좋게 그냥 충전 중이라고 해두지." "지금도 난 자네가 딴따라라는 게
왠지 실감이 안 나."
은빈이와 결혼한 후 살길이 막연해 한동안 방송국에서 구성작가 노릇을 하다 우연찮게 드
라마 담담 피디의 권유로 주말 연속극에 단역으로 출연한 게 인연이 돼 탤런트가 됐지만 가
끔 실감이 나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대학 때 "아일랜드"나 "변신" 따위의
연극에 출연한 게 내 무대 경력의 전부였던 것인데 그 계통의 직업을 가질 줄은 나 자신도
전혀 예감하지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 산다는 게 때로는 얼마나 코미디 같은 것인가.
순전히 돈 때문에 비듬약이나 바퀴벌레약 광고 따위에 출연하고 있으니 말이다.
"관광에 해당하는 건지 유람에 해당하는 건지 모르지만 가이드란 것도 자네한테 어울리는
직업이랄 순 없지." "목하 망명 중이라고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 어차피 밥값은 해야
하니까. 일 년 내내 비릿한 냄새를 맡고 사는 게 좀 힘들어서 그렇지." "비릿하다니?" "신혼
부부들 말이야.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손에 묻은 생선 비린내를 맡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떤 땐 속이 더부룩해." "쯧쯧, 결혼하긴 다 틀렸군. 그게 남자 플러스 여자의 냄새
아닌가. 그 농한 냄새에 취해 얼떨결에 구청에 신고부터 해버려야 혼인이 가능한데 말이야."
이런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통유리창 밖으로 노란 불빛이 희번덕거리며 도
로를 질주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문 앞에 택시가 와 멎었다.
흘끗 밖을 보니 손에 검은 비닐 봉지를 든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 안개를 거두며 현무암의
담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미니스커트 차림에 등까지 내려온 긴 머리였다. 저 여자
야? 하고 내가 묻자 그는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그래, 하고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놓았다.
이어 계단을 올라오는 불규칙한 하이힐 소리가 들리고 나서 불콰한 얼굴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안으로 막 들어서려던 참에 여자가 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대뜸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라며 노한 표정으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영문을
몰라 나는 맹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여자의 뾰족구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건 그
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이를 두지 않고 날카로운 소리로 여자가 또 내뱉었다. "사람 어떻
게 보고 이러는 거예요? 차라리 여자를 하나 더 데려오라고 하든지요." 그제야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작에 말 안 했
어?" "뭐 꼭 그래야 하나 싶어 오면 설명하려고 했지." 그와 내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여
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사나왔던 표정도 얼마간 누그러져
있었다. "고함은 이따 잠자리에서 치고 문부터 닫어. 집에 안개 껴." "그래도 한마디쯤은 했
어야죠. 그래야 옷이라도 갈아입고 왔을거 아녜요." 여자가 구두를 벗고 올라오며 아직도 퉁
명스러운 소리로 되받았다. "왜, 미니스커트가 어때서? 내가 니 알다리에 반했다는 거 아직
도 몰랐어?" 자칫 분위기가 험상궂게 변할 것 같아 이번에는 내가 슬쩍 끼여들었다. "그만
하고 인사나 시켜 줘." 그러고는 내가 먼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여자는 뚱한 표정으로 나
를 바라보고 있다가 민이에요, 라고 술집에서 하는 버릇대로 제 이름을 댔다. 어디고 술집에
가면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이었다. 아무튼 발음대로 '민이'인지 아니면 '민'인지 '민희'인지가
궁금했지만 나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여자가 비닐 봉지를 내려놓고 자기에 앉으려고 하는
데 그가 칼칼한 소리로 괜히 그녀는 몰아세웠다. "술집 여자 취급당하고 싶지 않으면 호적
에 있는 이름에 대." 왜들 만나자마자 그렇게 앙앙거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그 앙앙거림 속에서 나는 서로에 대한 묘한 애증이 뒤섞여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닥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분위기여서 나는 여자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여자
는 창피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겨우 제 손을 내밀었다. 마디가 가늘고 찬 손이었
다. 이렇게 낯가림이 심한 여자가 어떻게 술집에서 거친 남자들을 상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탤런트 하는 남창우 씨 맞아요? 전 송해란예요." 새삼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나는 '혜
란'인지 '해란'인지 그녀에게 되물었다. 화장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 "바다 해 자에 난초 란 자요."
가운데가 바다 해 자. 그렇다면 매우 드문 이름에다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여자와 이렇게
복잡한 첫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그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술상을 보고 있었다. 아까
노부부가 하는 횟집에서 마신 술기운은 그새 어지간히 달아나 있었다. 여자는 가져 온 비닐
봉지에서 국산 양주 한 병을 내놓고는 땅콩, 오징어포, 김, 멸치 따위의 안주를 꺼내 접시에
담아 신문지 위에 올려 놓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오는지 궁금했지
만 그말만큼은 물어 보지 않았다.
술상을 다 보아 갈 즈음 그녀는 욕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얼굴의 화장기를 지우고 나왔
다. 아까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화장에 따라 여자의 얼굴은 실로 천태만상으로
변한다. 어쨌든 화장을 안 한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 여자였다. 민이라는 이름보다 해란이란
이름이 그렇듯이. 그래, 다 이유가 있어서 앙앙거리면서도 만나는 거겠지.
혼자만 손을 놓고 앉아 있기가 뭣해 나는 여행 가방에서 CD 몇 장을 꺼내 보지도 않고
그중 하나를 책상 위에 놓인 플레이어에 집어 넣었다. 그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여
자가 바흐네요, 하고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콱 막혀 들어간 어쩐지 슬피 들리는
소리였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였다. "왜요, 바꿀까요?" 암만
해도 그녀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나는 슬쩍 표정을 훔치며 물었다. "이왕에 틀은 거니 그
냥 놔두죠."
그거 얼음통과 컵을 들고 자리에 와 앉으며 무슨 말들이 그렇게 은근해? 하고 비아냥거
리는 투로 말했다. 물론 정말로 그렇다는 뜻은 아니었다. "불편하면 들어가서 내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아니면 수건으로라도 가리든지. 그렇게 요조숙녀 흉내를 내고 앉아
있으면 금방 다리에 쥐가 날 텐데."
송해란의 미니스커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딴에 염려를 해준다는 말도 내 귀에는 지청
구나 험담으로 들렸다. 왜 그가 송해란과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학대하고 타박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겨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대는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고 하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송해란의 얼굴에 바늘에 찔린
것처럼 찰나 아픈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역시 지체하지 않고 가시 돋친 말을
그에게 쏘아붙였다. "아니, 친구분 대접하는 셈치고 그냥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을래
요. 어디 의자 없나? 이따 막간을 이용해 샤론 스톤 흉내나 내게." 듣고 있기가 거북살스러
워 나는 그를 흘겨보며 그만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아직도 왜들 이렇게 상
처를 탐하고 사는지 싶어 마음 한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뜻을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그
가 미안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구, 하며 온더록스 잔을 만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쪽이 먼저예요, 하며 잔을 내 앞으로 갖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이가 들어 마음이 자꾸 약해지나? 요샌 부르주아들이나 듣는 저런 음악이 귀에 다 들
어오니 말이야." "음악도 어디까지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걸 만든 사
람들도 대개는 불행했고 말이야. 부르주아들이 그걸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비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거지.""그런가? 그게 정답이야?"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자네에게도 배타적인 면
이 있는 건 얼마쯤 사실이야." "흥. 자꾸 이런 식으로 건더기가 빠져 나가는군. 하긴 요즘은
마구 사치 한번 해보고 싶더라." "정작 하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소릴 왜 해." "진담이야. 농
담이 아니라구." "설마 졸부들 흉내를 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디 시도해 봐. 그
거 한번 할 정도는 벌어 놨을 거 아냐." "혹시 살림하자고 덤비는 여자가 나타날까 싶어 안
쓰고 모아 둔 게 약간 있기는 있지. 하지만 한번에 싹 쓰고 나면 좀 외로워질 거 같군." "거
봐, 괜한 소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거꾸로 외로워서 사치를 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사치하고
나서 외로워지면 그땐 어떻게 감당할 거야." "외로워서 사치를 한다고?" "돈말고는 가진 게
전무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잖아. 그래서 돈으로 횡포를 사는 거지." "자넨 언제부터 그렇게
중림 보수주의자가 됐어? 시청률 때문인가?"
묵묵히 앉아 이따금씩 어둠과 안개뿐인 창 밖을 훔쳐보며 술만 홀짝거리고 있던 여자가
슬그머니 끼여들었다. "그만 해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왜 또 시비예요." 여자의 목소리
엔 왠일인지 힘이 다 풀려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여자가 밖을 내다보는 척하며 아까부터
바흐에 귀기울이고 있음을 눈치챘다. 옆얼굴에 저 올챙이 같은 음표가 떠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매우 민감한 여자였다. 언뜻 보니 동공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파르티타"가
끝나고 나서 나는 "평균율"로 씨디를 갈아 끼웠다. 곧바로 제일곡 푸가가 하프시코드로 울
려 퍼졌다.
송해란이 울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제딴에는 울음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그
녀는 급기야 둑이 무너진 것처럼 마구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가 왜 그래? 벌써
취했어? 하고 여자를 달래는 동안 나 또한 요령부득인 상태가 되어 빈 술잔만 깰 듯이 내려
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던지 송해란은 미니스커트 차림에 되는대
로 슬리퍼를 꿰신고 밖으로 나갔다. 무르춤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저
여자 왜 저러지? 하면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도 그럴 때가 있잖아. 나가 봐." "그런가?" "더군다나 아름다운 여자야. 조금 전에 저
여자는 막 고통에서 깨어난 거 같아." "어떻게 말이야?" 나는 바흐, 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
다. 그는 못 알아들은 성싶었다. "뭐라고?" "나가서 저 여자한테 물어 봐. 본인이 알고 있을
테니까." 어수선한 표정으로 그가 나가고 나서 나는 음악을 틀어 놓은 채 방으로 들어가 불
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눕자 파도가 뭍으로 밀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지금 제주에 와 있어, 라고 나는 누군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과연 누
구인지는 밤새 떠오르지 않았다.
파도, 안개의 훈향, 멀리서 잦아들고 있는 여자의 울음 소리, 하프시코드 들에 취해 나는
애벌레처럼 몸을 잔뜩 구부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잠결에 옆방에서 들여 오는 남녀
의 흐느낌 아니 둘이 잔뜩 꼬부리고 사랑하는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사랑은 왜 이다지도
일생처럼 고된 것인지. 그것은 바닷물과도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탄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자는 가고 없었다. 벌써 출근했을 리는 없을텐데 그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책상 겸용으로 쓰이는 식탁에 밥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꿰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여전히 안개비에 덮여 있었고 사나운 바람마저 불어 방향을 분
간하기 힘들었다. 나는 손목에 힘을 줘 우산을 받쳐들고는 바다로 내려가기 위해 아스팔트
로 올라섰다. 감자밭의 흰 소 한 마리가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수확할
때가 다된 밀밭도 비에 눌려 땅바닥에 낮게 등을 보이고 엎드려 있었다.
현무암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내려가자 포말이 튀며 바다가 무릎께로 높게 몰려들었다.
몹쓸 곳, 모슬포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기침을 해댔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지독한 안개였다. 담배 한 대 피울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나는 도로 아스팔트
로 올라와 창고인지 별장인지로 돌아가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뒷전에 봉고차 한 대가 와 멈춰 섰다. 철하였다. 그가 유리를 내리고 밖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왜, 더 자지 않고." "밤새 운우지정을 나눈 이들도 벌써 일어났는데 뭐하러 여
태 누워 있겠어?" "그래도 화대는 다 받아 가더라." "말본새하고는. 자네가 덤벙덤벙 사치할
까 봐 대신 챙겨 간 거겠지. 잘만 되면 어차피 그 돈이 그 돈 아니야? 그런 정신이면 살림
솜씨도 여간 아니었네." "얘기는 가서 하고 어서 타." "몇 걸음이라고 차를 타. 먼저 가 있
어."
그는 송해란을 집까지 바래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식탁에 차려진 아침밥도 그녀가 먼저
일어나서 챙겨 놓은 것이었다. 단란주점이라면 어차피 저녁에나 출근할 텐데 왜 일찍 갔냐
고 묻자 아침에 내 얼굴을 보는 게 민망해서일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면 괜찮네. 어쨌듯
혼찮은 여자인 건 틀림없어." 그는 부지런히 수저질을 하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니라는 얼굴도 아니었다. "내 말이 뭐 잘못됐어?" "그건 아니지만 왠지 감개가 무량해서
그래" "무슨 감개?" "우리가 만나 온 세월. 그리고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자네와 내 모습."
그가 내뱉은 말에는 알게 모르게 지나간 십 년 세월의 연흔과 은빈의 그림자가 은밀히 도
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뭘 어째야 좋겠다는 거야." "어째야 한다는 게 아니야. 그냥 감회가
무량하다는 거지."
나 원 참. 식탁을 치우고 9시가 되자 그는 서귀포로 출근해야 한다며 옷을 갈아입었다. 문
을 나서며 그가 물었다. "종일 뭐할 거야? 어디 다니러 왔다면서 내 차로 데려다 줄까? 어
차피 이런 날은 관광객도 호텔에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 말이야." "나도 오늘은 움직이고 싶
지 않군. 안개가 걷히면 천천히 생각하지 뭐." "얼마나 있을 건데? 안개는 이삼 일 더 갈 거
야." "일주일쯤. 자네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말이야." "그야 몇 달이라고 상관없지만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해서 그렇지. 왜 내려왔는지 얘기해 줄 수 없어?" "천천히 천천히." 석연
찮은 얼굴로 그는 봉고차에 올라 부르릉거리며 안개 속으로 출근을 했다.
오후가 되자 안개는 여전했지만 서서히 비가 그치며 푸른 하늘 한뼘이 무슨 오로라처럼
수평선 끝에 잠깐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통유리창 밖의 해안도로로 이따금씩 관광객을 태
운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무료하게 에프엠 방송을 듣고 있다가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나
가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운전사에게 성산포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묻자 두 시간 반이라고 말해 주었다.
버스가 산방산을 지나 서귀포에 이르렀을 때는 오후 세시가 돼 있었다. 성산포에 도착하
면 좋이 네시 삼십분은 돼 있을 터이었다. 거기서 금세 모슬포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미
밤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언제 걷힐지도 모르는 이놈의 축축한 안개.
은빈이를 만난 것은 팔십칠년 사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호헌 조치가 발표된 얼마 후의 일
이었다. 학내 총학을 이끌던 김철하와 함께 호헌 철폐 시위를 주동하다 나는 집시법 위반으
로 수배돼 여기저기 몸을 숨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박종철 씨 고문 살인 은폐 규
탄 국민 대회와 진압 경찰의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 씨가 병원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는 와중이기도 했다. 태백의 탄광촌과 강원도의 몇몇 암자를 전전하다 나는 어찌어찌 연
락이 닿은 김철하에게서 은빈이의 자취방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 시국 때문에 탄광촌
이고 산사고 어디를 가나 몸둘 데가 마땅찮은 형편이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서교동
의 한 주택 차고에 세들어 살던 은빈이의 화실 겸 자취방을 찾아갔다. 육십 대회에 이어 명
동성당에서 농성이 한참 계속되던 때였고 철하 역시 시국 사범으로 수배 중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가 은빈이의 화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성공회 대성당으로 검거되고 말았다.
그날 밤 철하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은빈이에게서 나는 독침 같은 한마디를 들었다. "창
우 씨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죠?" 우리 둘 다 겁먹을 쥐새끼들처럼 말예요.
육이구 선언이 있는 직후 나 또한 자취방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때가 그랬는지 나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뒤 굴욕적인 각서를 쓰고 풀려 나왔다. 몇 달 뒤에 있은 공판에서 철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칠 년 구형에 항소심에서 오 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후 은빈
이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여전히 철하와 맺고 있던 인연의 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직 자리가 마땅치 않아 나는 영세 출판사를 전전하며 가끔 기업체의
입사 시험에 응모했지만 실력 때문인지 전력 때문인지 번번이 불합격 통보를 받곤했다. 은
빈인 사학년이 되어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알기론 그림 공부도 공부
지만 감옥에 있는 철하를 기다리기 위해 학생 신분을 유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
녀가 운동권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철하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것도 그때쯤에서 알게 되었
다.
가끔 은빈이와 함께 나는 철하를 면회 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은빈이에게 자신을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는 얘기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 말이 되레 그녀에게 족쇄가 된다는 사
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간혹 생에 대한 막막함에 빠져 밤을 지새울 때면 그녀에게서 전
화가 걸려 오는 순간이 있었다. 한숨 섞인 소리로 술 취한 소리로 때로는 울음 섞인 소리로.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많은 순간 내게 의지하고자 했다. 나 역시 철하와의 관계 때문에
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의 주변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만 삼년 만에 출감하긴 했
지만 그때 그녀와 내가 알고 있던 수감 세월 오년은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매우 긴 세월이
었다. 더군다나 은빈에게서 그 세월을 견딜 만한 하찮은 언약조차 없었다.
어느 날 철하를 면회하고 오던 길에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 와 나는 홍대 근처의 한 술
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팔십구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녀는 그때 대학원 이 학기에 다니고 있
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지만 피카소 거리에 있는 "바람 속의 먼지"란 침침한 지하카페
에서였다. 장식용 촛불이 흐리게 타고 있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말없이 맥주를 마시다
밤 열한시쯤이 됐을까. 그녀가 고개를 곧추세우고 내게 돌연 이런 말을 던져 왔다. 낯이 불
콰하긴 했지만 그닥 취한 기색은 아니었다. "철하 씨가 저 사이가 깊었다는 거 알아요?" 짐
작하고 있긴 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삼스러운 그 말에 나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얼
른 에둘러서 대꾸했다. "그래? 그러니까, 그랬었군." 내 말에 그녀는 묘하게 입술을 웃었다.
그러더니 이기죽거리는 투로 덧붙였다. "역시 피하고 싶은 거로군요."
뭘 말이야? 하고 되물으려다 나는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맹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마주보
았다. 여지껏 보지 못했던 맵고 서글픈 눈이었다. 어쩐지 벌거벗은 채로 곧 불속으로 들어가
야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쩐지 벌거벗은 채로 곧 불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의 표정
이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런 시간이 십 초? 아니 이십 초쯤 길게 이어졌다. 그때 둘 중
의 하나라도 먼저 용기를 내 상대의 눈을 피했더라면 오늘날 그녀와 나의 운명이 어떻게 달
라져 있을까. 그렇듯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때로 운명의 순간이라는 게 휘몰아쳐 오는
법인가.
"대학교 이 학년 때였어요. 철하 씨는 삼 학년이었구요. 그러니까 창우 씨가 아직 복학하
기 전이죠. 둘 다 꼭 남이 시켜서 하는 일처럼 조금 억지로 철하 씨의 자취방에서 관계를
가졌어요. 그게 뭘 뜻하는지도 미처 모르고 말예요." "그렇다면 지금은 뭘 뜻하는지 안단 얘
기로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어쩐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관자놀이에서 맥
박이 툭툭 튀는 소리에 고막이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뜻도 모르고 한참을 울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끊여 먹었어요. 그게
첫경험이었거든요." "그리고 나면 여자들은 다 라면을 끊여 먹나?"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나는 어째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괜스레 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다만 첫경
험, 라면이라고 속엣말로 웅얼거리며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나 춥고 막막했던지요." 돌이켜보니 나 또한 첫경험의 밤과 그 다음날의 새벽엔 얼
마간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한겨울 연탄불이 꺼진 방에서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그
렇지만 나로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가난한 자취생이었던 내게 어느 날
같은 과의 한 여학생이 느닷없이 쌀 한 말과 김치통을 들고 찾아왔었다. 그때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카뮈이거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였을 것이다. 밤이
늦도록 그녀는 갈 생각을 않고 책상 의자에 앉아 꾸무럭거리고 있었다. 조금은 답답하고 추
운 마음에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오라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치 나쁜 짓이
라고 하다 들킨 것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 처음인데요, 하고는 겁먹은 얼굴로 나
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이 그런 뜻이었나? 하고 나 또한 놀라는 사이 그녀는
외투를 벗고 주섬주섬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아무튼 그래서 그날 얼떨결에 난생처음 여자와 관계라는 걸 가져보았지만 그게 무얼 뜻하
는지도 지금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다음날이 되자 내가 더 이상 동정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종일 혼란스러웠던 기억은 난다. 이후 나와 관계를 가졌던 그녀의 소
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곧 휴학계를 내고 강원도로 입대했으며 삼 년 후 복
학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졸업을 한 다음이었다. 키가 작고 대학생답지 않게 늘 원피스에
긴 퍼머넌트를 하고 다니던 귀여운 여자였다. 아버지가 조그만 호텔 주인이랬든가 뭐랬든가.
"내 말 듣고 있어요?" 언뜻 정신이 돌아와 나는 그녀의 얼굴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듣
고 싶지 않은 거로군요?" 아니라고 나는 뜻도 생각지 않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후로도
물론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여지없이 막막했구요."
학생이었으나 오죽했겠는가. 요즘과는 썩이나 달라서 그때는 남녀 불문하고 그런 일이 종
종 인생사의 굴곡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그럼 내 원피스의 퍼머넌트도 그처럼 오래 막
막했던 것일까. 그 같은 생각이 들자 나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슬그머니 결혼 얘기를 꺼냈더니 철하 씨는 반대하더군요. 기대를 갖고 한 얘기는 아니었
어요. 그저 막막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요컨대 그 사람과의 결혼 생활이 어떨 거라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던 거예요. 이해하겠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흐
느끼는지 어깨를
구부렸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맥주잔만 거푸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어째
서 나는 여자가 우는 걸 봐도 속수무책인 사람인지 모른다. 암만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자정이 되어 그녀와 나는 밖으로 나와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더 마셨다.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나는 주인에게 라면을 끊여달라고 했지만 포장마차에 라면 따위가 있을 리 없
었다. 대신 우동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찔끔찔끔 소주를 마시는데 옆에서 한참 고개를 숙이
고 앉아 있던 그녀가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뭔지 모를 투로 중얼거렸다. "저 앞으로
철하 씨 면회 안 갈 거예요." 그건 아마도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정
도면 솔직한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진실이란 그런 감당 못할 상황의 여백의 문득
나타났다 또 흔적 없이 사라지곤 하는 것이리라. "그런 마음이라면 그렇게 해. 이제 와서 누
구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잖아. 혹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면 그것만큼 미련한 것도 없
겠지." "그래요?" "뭐가 말이야?" "창우 씨도 눈치 안 볼 자신 있어요?" 잘 알아듣지 못하겠
어서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문득 내 얼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늦가을
이었는데 포장마차 안은 한겨울인 듯 쌀쌀했다. 하얀 플라스틱 그릇 안의 우동 국물은 이미
다 식은 다음이었다. "창우 씨 저 좋아하고 있잖아요. 아녜요?" 거기서 나는 무릎 밑으로 팍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엔 신발에 죽도록 밟힌 담배꽁초와 가래침과 술병 마개 들이 어지
럽게 흩어져 있었다. "제작년에 제 화살에 와 있을 때부터 전 알고 있었어요. 아녜요?" 때로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걸 사랑하는 일로까지 삼은 적은 없었다. 중간에 철하가
있었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데 그녀가 내게 자신의 괴로움을 떠맡아 줄 수 없느냐고 묻
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서 왜 철하와의 관계를 고백했는지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녀
는 자신의 현재로부터 과거를 면제받고 싶었던 것이다. 한데 면제를 행해야 하는 사람이 하
필이면 어째서 나란 말인가.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도 나는 조금 전에
야 비로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런데다 실제 면제권을 가진 사람은 현재 영어의 상태가
아닌가.
"어째서 그 사람이란 거예요. 그건 마땅히 제가 선택한 사람에 의해 면제가 이뤄져야 하
는 사안이에요." 선택했다고?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포장마차 지붕을 핥고 지나가는 밤바
람 소리에 귀를 던져두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비록 틀린 건 아니지만 내 쪽에서 보면 온전
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필 그 부분까지 감당해 달란 뜻이기
도 했다. 화끈거리는 머리를 싸쥐고 있다가 나는 숫제 저능아라도 된 놈처럼 그럼 어째야
하지?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금부터 제 말에 솔직히 대답해요." "......" "창우 씨 저 사
랑하고 있죠? 당장 함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말예요." 사이를 두지 않고 그녀가 저
자신과 나를 함께 몰아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영원히 헤어져요. 이런 말까지 하고
나서 다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예요."
이번에는 담배 한 대 피울 시간만큼의 침묵이 절룩거리며 차디찬 우동 그릇 옆을 지나갔
다. 그러나 그게 영원을 가늠해 볼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릎께로 더듬
더듬 내 손을 잡아왔다.
그녀와 나는 쫓기는 심정으로 굳게 손을 마주잡고 여관을 찾아 홍대 앞 거리를 헤매고 다
녔다. 한데 그놈의 여관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방이 차서 집마다 네온사인을
다 꺼버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갈 데가 마땅치 않자 그녀가 내 앞으로 돌아서더니 다급하
게 꼭 여관이어야 해요? 라고 외쳤다. 여관이란 말을 꺼낸 것은 정작 그녀였다. 나는 목구멍
에 모래가 꽉찬 소리로 겨우 그럼 어디 따로 갈 데가 있나? 라며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제 방으로 가요. 그게 더 분명하고 좋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
고 한편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경계를 넘어선 다음이었다. 그
날 그녀의 방으로 갔던 게 과연 잘된 일이었던가? 얼마쯤의 유예가 있었어도 좋았으련만.
생의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을 그녀와 나는 왜 서둘러 질러갔던 것일까.
그 나이엔 남녀 사이의 관계가 무슨 뜻이라는 걸 대충 알 만한 나이들이었으므로 막상 당
황하고 있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군용 침대에 누워 그녀는 걷
잡을 수 없는 불안과 떨림에 항거라도 하듯 미처 단추를 끄를 사이도 없이 필사적으로 내게
달겨들었다. 그 석연찮은 서두름에 기가 질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 더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사
랑하고 있는지 그걸 말이야." 이 에두른 외침 속에는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뜻이 포함돼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와의 앞날이 염려스러웠다. 아무려나 그 정도를
못 알아들을 여자가 아니었다. "창우 씨가 저를 사랑하면 저도 그런 거예요."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지 않아? 우리한테 이 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게 어째서 꼭 오늘이고 지금이어
야 하지?" "창우 씬 어쩐지 몰라도 저는 지금이 열한시 오십구분이라고 해도 이제 열두시란
말을 안 믿게 됐어요. 이제 알겠어요?"
조명탄이 머리 위로 홱홱 날아가는 참호 속에 누워 있는 사람들처럼 떠들썩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사이 그녀와 나는 엉겁결에 접경 지대까지 이르러 있었다. 이제
느슨하게 풀린 철조망만 넘으면 서로 남이라고 우길 수 없는 순간이 그새 이마에 도래해 있
었던 것이다. 잠깐 사이 나는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어색하게 들춰져 있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누워 가만가만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만 몇 초의 시간이 그토록 고단하게 흘러
갔던가. 그녀가 돌연 내 귀를 아프게 잡다 쥐고 숨찬 소리로 내뱉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
거 왜 이래요. 돌아보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래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내 허리를 제 안쪽 깊숙이로 끌어당겼다. 순간 나는 축
축한 수풀 바로 너머의 더운 늪에 그만 전신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턱없이 부풀려진 아랫
도리는 숙주처럼 징그럽게 변해 끈적한 늪을 헤매고 있었으나 등짝은 살얼음이 앉은 듯이
점점 싸늘해져 갔다. 밖으로 나오기가 두려워 나는 그녀가 그만이라고 지쳐 말할 때까지 이
를 사려 물고 용을 써대고 있었다.
때로 상대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사랑과 인내와 심어지는 희생을 필
요로 할 때가 있는 법인가. 거꾸로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모르면서 어떤 정념의
시기에는 그 요구에 응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는 법인가. 선택에 따른 문제인지 하지만 이
쪽으로서는 그것이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에 대개는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은빈과 나와의 관계도 이런 등식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만큼
서로 평등한 마음으로 시작돼야 하는 일도 없는 것인데. 곧 높낮이의 순정한 균형 말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뭔가 어긋나거나 비틀려 시작된 정념은 끝내 파국에 이르게 마련이라는 것
이 지금의 내 뼈아픈 깨달음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음일까. 마구잡이 식의 정사가 끝나고 나서 그녀는 등을 돌리고 침
대 모서리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성숙한 여자의 벗은 등을 보고
있었다. 부조처럼 윤곽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러나 어쩐지 한없이 서글퍼 보이는 그녀의
등을. 그것은 하필 윤간을 당하고 난 여자의 뒷모습처럼 보였다. 내 느낌이 엇비슷하게 맞았
던 것일까. 그녀가 부르르 몸서리를 치더니 발작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제쳤다.
마치 불순한 공기라도 몰아내려는 듯이.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정사 후의 끈적하고 후텁한 기운이 빠져 나가는 동안 그녀는 주섬주
섬 속옷을 주워 입고 가늘게 손가락을 떨며 담배를 피우고 끈 다음 마른 얼굴로 나를 돌아
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요." 왜 그러고 있냐니. 나는 엉거주춤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그녀
를 마주보았다. "안 가고 밤새 거기 누워 있을 거예요?" 일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란 뜻이
었다. 하지만 내가 유곽에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말하자면 미아리나 청량리 같은 데 여자
의 몸을 사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참지를 못하고 나는 귀에 박히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니, 혼례를 치렀으니 이제 국수를 먹어야지. 국수가 없으면 라면이라고 끊여!" 그러자 그
녀의 낯빛이 여지없이 창백해졌다. "아까부터라면 되게 좋아하시네요." 이렇게 된 마당에 나
는 물러설 수 없었고 또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잘 들어,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낸 줄 알
았어?"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라면 먹고 배
꺼지면 한 번 더 동침하는 거야, 알았어?"
내가 들어도 이건 숫제 깡패나 기둥서방의 말투였다. 그땐 왜 그렇게 마음이 뒤틀어져 있
었는지 나도 모른다.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여도 좋았으련만. 그녀는 아예 질린 표정이 되
어 자신이 방금 뭔가를 잘못 말한 것 같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엔 전에
는 보기 못했던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일말의 공포가 깃들여 있었다.
하지만 라면은 끊여, 라고 나는 낮게 되풀이했다.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고 말한다면
억지일 테고 그러나 그녀는 하는 대로 놔두게 되면 곧 뒤죽박죽이 되어 둘 다 갈피를 잡지
못할 게 뻔했다. 뜻을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양은 냄비에다 물을 받고 휴대용 가스
레인지에 불을 켰다. 그 서먹한 꼴을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그녀에게 침대로 올라오라고 했
다. "그쯤이면 됐으니까 이리 와봐." 봉지째 라면을 부스러뜨리고 있던 그녀가 곧 울음이 터
질 듯한 얼굴로 나는 돌아보았다. "물은 끊게 내버려두고 이리 와. 이쯤에서 요점 정리를 해
야겠어." "그건 또 무슨 수작예요?" "오늘 발생했던 사태에 대한 전체의 대강과 요점을 정리
해야 또 내일부터 어찌어찌 살아 낼 거 아냐." "흥, 그래 봐야 동아전과 수준일 것 같은데
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그녀가 기가 살아난 목소리로 되받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사는
건 매순간 기말고사 같은 걸 테지. 돼먹지 않게 토플 붙들고 있다가 백지를 내느니 기본 영
어라도 충실히 암기하면 오십 점 정도는 나오겠지." "그래 봐야 재수강을 신청해야 할 점수
군요." "인생은 오십 점만 돼도 그럭저럭 괜찮은 거야."
그때껏 서먹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나는 뒤에서 그녀의 등을 안고 냄비의 물이 끊는 소
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쉭쉭 더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물이 다
끊고 나서 냄비가 붉어지기 시작하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간은 그리 많이 남
아 있지가 않았다.
"밖에 비가 와요. 이 가을의 마지막 비겠군요." 그러하고 총총 첫눈이 내리리라. 그녀의
목덜미로 세월이 점점이 지나가고 있는게 아슴히 눈에 비쳐 들었다. "처녀였을 때 무슨 생
각했는지 알아요?" 처녀. 불현듯 튀어나온 말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처녀이기도 하
고 또한 처녀가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어투엔 이미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싶은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어떤 여자들에겐 그게 중요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제 생일이 음력
칠월 초이레예요." "칠월칠석이로군. 그날 비가 내리면 견우 직녀도 춥겠군." 나는 아슬아슬
하게 까치들이 등으로 놓아준 다리를 밟고 양쪽 맞은편에서 비를 맞고 오는 견우와 직녀는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꼭 칠월칠석에 첫 남자에게 처녀를 줄 생각이었어요. 아주 어려서
부터 그렇게 생각했죠." 먼 태고의 시간을 거슬러 가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면 그때 아니
었나?" 이렇게 물어 주는 것이 그녀에게 편할 것 같아 나는 가래 섞인 소리로 나직이 되물
었다. "그런 줄 어떤 줄 알았겠어요?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생각이나서 하늘을 올려다
보니 칠월은 고사하고 달만 하나 멍하니 떠 있데요.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슬프고도
야릇한 존재예요." "그래, 그렇지."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씁쓸히 웃었다. 그러더니 뜬금없
이 창우씨 혹시 점이나 미신이란 거 믿어요? 하고 물었다. 일부러 보러 가진 않지만 거기에
도 뭔가 있기는 있겠지. 그러자 그녀는 싱거운 소리를 했다. "내일쯤 한번 보러 갈까 싶어서
요. 물릴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물리게요."
냄비의 물이 다 끊었는지 밑바닥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늘 숨이 차서 살았어요. 방바닥으로 내려올라치면 시퍼런 작둣날이 보
여서 그러지도 못하구요." "누구나 무당이 되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
럭저럭 오십 점만 해. 나머진 이쪽에서 어떻게 해보지 뭐."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저러단 냄비 다 타겠어요." "내버려둬." "네?"
"다 타서 시커메질 때까지 그냥 놔두라구." 뭐라구요? 하며 그녀가 목을 뒤로 비틀고 나를
바라보았다. "냄비에 한 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제 어떤 것도 물릴 수 없다는 말
이야."
은빈은 자신의 말대로 다시는 철하를 찾아가지 않았다. 나마저 그럴 수가 없어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그를 면회하러 갔다. 비록 터놓고 얘기를 나눈 건 아니었으
나 철하는 은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면회 시간이 끝나 갈 때
쯤 그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거어이 은빈의 소식을 물어왔다. "나를 위해서 너라도 솔직하
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전에 그러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이제 와서 미련이 있기 때
문인가?" "말씀 한번 고약하군."
물끄러미 그의 어두운 이마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부러 비껴 말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은빈인 앞으로 오지 않을 거야."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 한 번 더 나를 불러 세웠다. "쓸데없는
짓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물어 보지." 나는 그러라고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남
자가 생긴 건가? 아니라면 내가 후회스러워진 건가."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
렇군, 하고 그는 목 빠진 닭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도소 정문을 돌아나오며 나는 은빈이
에 대한 철하의 감정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그런
데다 그는 은빈이와 나 사이의 일은 짐작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철하를 찾아가 나와의 관계를 털어놓은 것은 은빈이었다. 아이가 생겨 있었기 때문
에 말리고 어쩌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 은빈과 나는 구십년 봄에 주위 사람들의 그렇고 그
런 비난을 들으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은빈이는 그때 카톨릭에 귀의해 있었다. 은빈
이에게 철하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이를 유산하고 철하가 출감한
후의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자책감이든 죄책감이든 혹은 변함없는 감정이든 간에 나
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런 식의 인생을 끌어안고 산다는 일이 힘
들게 여겨졌다. 철하에 대한 새삼스런 자격지심이 생긴 것도 은빈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다.
그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망명 처리한 때문이었을까.
서로 견딜 만큼 견뎠다고 생각하지만 결혼 오년 만에 은빈과 나는 이혼에 합의했다. 누가
먼저 요구한 이혼이랄 수도 없었다. 둘다 지칠 만큼 지쳐 있었던 것이다.
성산포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다섯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미리
작정한 일을 아니었으나 나는 프런트에서 이백삼호실에 체크인을 해두고 밖으로 나왔다. 성
산포도 안개는 마찬가지였다. 일출봉으로 올라가는 어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반주
를 하는 사이 일찌감치 일출봉에서 내려와 호텔로 돌아가려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안개 속에
서 꾸물꾸물 나타났다. 시간이 되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갔다 나올 생각이었
으나 안개와 폭풍 때문에 여객선 운항이 중지돼 있었다. 기껏해야 소주 한 병에 머릿속이
풀어져 나는 호텔로 돌아와 맥없이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팔 개월 전 주미와 나는 여
기 이 방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몸엔 내 아이가 생겼지. 이런 말을 꿈결에 웅
얼거리며 나는 줄곧 겨드랑이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미와 이 호텔에 와 머물던 밤엔 코발트빛 하늘에 노란 반달이 떠 있었다. 달은 우도 뒤
켠에서 아름답게 비집고 올라와 그녀와 내가 누워 있는 방을 아스라이 비추고 있었다. 달은
섬의 한중간에서 수소 풍선처럼 둥실 떠오른 것만 같았다. 그때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
였던 말이 이제야 선명히 기억난다.
"봐요, 우물에서 달이 올라와요." 우물에서라니, 나는 그녀의 살찐 등을 쓸어 내리다 말고
물었다. "저 섬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어요. 새벽이 되면 달이 들어와 잠자는 우물 말예
요. 그러고 날이 어두워질 때 도로 하늘로 올라가죠." "설마." "저 섬에서 엄만 바람난 아버
지를 만났죠. 그래요, 엄만 우도 사람이에요." "우도 처녀에 바람난 아버지로군." "그해 갈치
낚시를 하러 왔던 웬 남자가 섬에 살고 있는 아리따운 처녀를 꼬드겨 저를 만들어 놓고 도
망갔죠." "전설 같은 얘기로군." "아뇨, 사실이에요." "그럼 사생아란 말인가?" "낚시꾼한테는
서울에 아내는 아이들이 따로 있었죠. 엄만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갓난 저를 안고 올라왔어
요.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찾지 못했죠."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실눈을 뜨고 달 아래
파랗게 빛나고 있는 우도를 훔쳐보고 있었다. 옛날에는 어딜 가나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들
이 있었다. 뭇여인들이 달에서 태어나고 또 달을 쳐다보며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
잠에서 깨어나나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식은땀에 푹 젖은 몸을 일으켜 나는 커튼부터 열
었다. 허나 방금 꿈속에서 본 달은 온데간데가 없고 축축한 안개만이 창가에 몰려와 킬킬거
리며 다퉈 옷을 벗고 있었다.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다. 암암한 외로움에 진저리를 떨며 나는 모슬포로 전화
를 넣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택시를 불러 그제라도 돌아갈 수 있었지만
사방이 석탄광처럼 캄캄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거기 어디야? 하고 그가 애써 가라앉힌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제주도, 라고 나는 턱을 덜
덜 떨며 대꾸했다. 열병이 들려는지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려 왔다. "물론이지, 하지만 제
주도 어디." 나는 줄곧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귓속이 뜨거워 저쪽의 말을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웬일인지 되게 아프군." "그리로 갈 테니 어딘지 말해."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이
야." "나에겐 늘 명료한 답을 들이대면서 왜 자신에 관해선 그렇게 속수무책인 거야." "누구
나 그렇잖아. 그래서 서로 커닝을 하려고 만나는 거찮아." "농담을 하는 걸 보면 정신이 아
주 없진 없군." 내가 한 말이 농담이었나. 정말이지 귓속이 너무 뜨겁군. "왜 내 아이들은
다 죽는 거지? 내가 전생에 죄수여서 그런가. 그렇지. 어여쁜 사람들에게 상처도 줬지. 가령
너와 은빈이에게도 말이야. 그 업으로 인해 내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다 죽나 봐." "아
이가 죽었다고?" "난 지금 내 둘째 아이의 무덤에 들어와 있어. 달이 빠져 나간 캄캄한 우
물 속에 말이야."
뭐란 대꾸를 못하고 그는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몸은 점점 심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한참 후 그가 도대체 어디야? 라고 거푸 물어 온 듯했지만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빗
나간 대꾸를 하고 있었다. "자네도 은빈인 용서해야 돼. 더군다나 자네에겐 늘 어여쁜 사람
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은빈이와 자네한테 동시에 용서를 구해야만 할거야. 그러니 이
제 와서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꼭 그래야만 한다면 무엇보다도 자네 자신을 먼저
용서하도록 애써 봐." "커닝시켜 주는 건가?" 물론이지, 하고 그가 부러 웃는 소리를 냈다.
다음날이 돼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정오가 될 때까지 문밖도 못 나가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오후 두시경에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공복에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나는 우도와 모슬포를 놓고 가늠해 보다 프런트에다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
다. 이런 상태로는 우도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다 이런 안개 속에서 무슨 수로
달의 우물을 찾는단 말인가.
끈이 풀린 짐짝처럼 택시에 실려 모슬포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왜 그토록 주미와의 관계에 집착했던 것일까. 그녀를 만나 오면서 어쩌면 나는
은빈과의 가파르고 숨가빴던 시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여자에게는 각각
나를 만나기 전 관계를 맺어 오던 남자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나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
다. 경우는 다르다고 해도 주미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은빈의 화실에서
냄비를 태우던 그날의 일을 반추하고 있었다.
인내와 희생이 부족했던지 내게 첫사랑이었던 은빈은 결국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
것은 단순한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덧내는 일이기도 했
다. 그래서 나는 주미를 만나면서 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았고 실패를 거듭함으로 해서 또다
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일이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 낯 모르는 사람
중에는 엄밀히 얘기해서 태어나지 못한 내 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무릇 생명이란 그게 어떤
것이든 우주의 섭리와 영감에 의해 배태되는 신성한 존재들일 터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
부로 미물이라 부를 수 있는 생명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멀리 잘
안 보이는 별은 그토록 작은 물체인가? 우리는 길거리에서도 우연찮게 어깨가 부딪히는 식
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거기엔 곧 폭발할지도 모르는 운명의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고통 속에서 판단했겠지만 주미는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그게 내 신념과 다르더라도 이
제 와서는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전후 진행형의 시간 위에 아
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서 있다. 그것은 꺾이거나 접히지 않고 그러므로 과거 또한 소거되지
않는다. 소거되지 않는 과거는 미래에 있어서도 고단한 인내와 더불어 긴 회복의 과정을 요
구하게 마련이다.
모슬포로 돌아오니 철하는 회사에 나가고 없었다. 자물쇠가 열려있는 문을 밀고 들어와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는 도로 자리에 쓰러졌다.
오후 일곱시쯤인가 전화가 걸려 와 받아 보니 송해란이었다. 그녀는 무감한 소리로 그냥
걸어 봤다면서 철하가 돌아오면 연락해 달라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녁이 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후끈했던 몸도 슬슬 가벼워지고 있었다.
밤 아홉시가 돼서 돌아온 철하와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고 나서 우리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는 어젯밤의 일은 입에 올리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모서리에 앉아 철하와 나는 성산포 쪽에서 떠올라 가파도 쪽
으로 옮겨 보고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승달이었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은은한 훈향
이 몰려와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오데코롱처럼 기분 좋은 냄새였다. "풀꽃들 냄새
야.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주도의 봄은 참으로 아름다워. 솔직히 말하면 그 때문에 많은
치료 효과를 봤지." "치료 효과?" "창고에 자전거가 있으니 내일쯤엔 밖에 나가 투명한 공기
의 냄새와 결을 제대로 흠향토록 해봐."
투명한 공기의 냄새와 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나는 아까 송해란의 전화가
생각나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지 전에 저렴한 가격으로 사치 한번 할까 싶
은데 어때? 해란 씨도 함께 말이야." "저렴한 가격의 사치라는 것도 있어?" "갈비집에 가서
몇 인분씩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걸 사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 커피 한잔 값으로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겠단 말이야." "고작 커피 한잔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메뉴
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두 사람에게 주지." "혐의가 느껴지는 얘기지만 그럼 그래 보도
록 하지. 설마 밥을 굶기면서 새삼스럽게 쓴맛을 보여 줄 작정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이런 농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달은 기웃기웃 하늘 한가운데로 올라가 있었다. 지구가 자전
하고 있다는 게 실감날 정도로 매우 선명한 움직임이었다. 밤인데도 바다는 울트라 마린 블
루로 반사되고 있었다. 어선 몇 척이 집어등을 달고 달빛이 주름져 반사되고 있는 지점을
가로로 느리게 통과하고 있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 수도 서울에 있으니까 나보다 민감하게 느낄 텐데." 그가 회한 어
린 소리로 슬쩍 옆구리를 건드리며 물어 왔다. "세계가 변했지. 사상, 이념이란 게 새삼 무
색하고 무상할 정도로 말이야. 그건 자네가 더 뼈저리게 겪은 일이잖아." "실은 감옥에 있을
때도 혼란스러웠어. 특히 팔십 연대 말에서 구십 연대 초반에 말이야. 개인적으로는 억울하
기도 해서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와 있나 하는 생각조차 들더군. 세계의 진실이라는 것이 과
연 존재하나 그런 생각 때문에 말이야. 밤마다 누군가 군데군데 파놓은 함정에 발을 헛디디
는 꿈을 꿨지. 외롭고 고단했어." "이젠 그렇게 얘기해도 돼. 그땐 적이 분명했으니까 자네
도 온당했던 거야." "그럼 지금은 적이 없나?" "가면을 쓴 적들이 더 많이 생겼지. 이제는
우리 자신들마저도 적에 속해 있는 세상인 것 같아. 말하자면 그게 체제의 목표였던거야."
"자네 말대로라면 깨끗하게 당한 거로군." "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나쁜 체제로는 이제 더
이상 못 버티는 세상이 됐어. 나쁜 게 뭔지는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거든. 자기가 그렇다는
걸 잘 몰라서들 그렇지." "과연 그럴까. 제도만 변했지 내용 면에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잖아. 고통 분담은 여전히 기득권이 없는 사람에게만 전가되고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기껏 행세들이나 하려고 들지. 생각하기에 따라선 더욱 심각해." "세상
에 이바지하려는 사람들도 아직 남아 있어. 그 사람들한테 기대를 걸어야지.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어야겠지.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잖아." "쉬운 방법은 없
나?" "가까운 방법은 있겠지. 사람들마다 당장 너와 나의 관계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세계란 것도 결국은 너와 나의 관계 아니겠어?"
나는 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림자에 가려
진 부분은 보지 못하고 살아왔어. 우린 늘 밖에서만 보려고 했지. 자신마저도 말이야. 용기
를 가지고 안에서 보면 나머지 반이 또 보이는데 말이야. 그게 문제였던거야. 나도 아직은
뭐가 뭔지 확실치 않아. 다만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는 느껴." "시스템?" "그래, 다시
사랑을 하든 뭘 하든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방식으로 견디기에는 뭔가 부족해. 말하자면 새
로운 라이프 모델이 필요하다는 거지." "너무 전문적으로 들리는군." "그야말로 삶에 대해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늘 그랬듯이 말이야."
그와 나는 수평선 중간에 떠 있던 달이 포물선을 그리며 고산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새벽 다섯시가 돼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의 긴 문답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긴
얘기 끝에도 막상 착찹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지 나흘째가 되자 오월의 화사한 빛의 누리에 가득해서 눈이 멀어 버릴
지경이었다. 마치 거울에 반사되고 있는 무지개를 보고 있는 성싶었다. 이름을 죄 알 수 없
는 풀꽃들이 사방에 지천인데다 바다도 농염한 푸른 잉크빛을 띠고 끝간데 없이 너울거렸
다. 처음엔 착시였나 했는데 뭍에서 불과 이백여 미터 떨어진 바다에서 돌고래 떼가 가파도
쪽으로 헤엄쳐 가는 것을 본 것은 닷새째 되던 날 아침의 일이었다.
돌고래 떼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넋을 잃고 서 있다가 나는 창고에서 자전거
를 꺼내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차귀도와 눈섬이 바로 앞에 떠 있는 고산에 다녀왔다. 고산
엔 아는 이 하나 없고 이미 꽃이 져버린 유채밭과 항구에 쏘 다니는 고양이만 눈에 어른거
렸다. 한치에 소주를 먹고 거나하게 취해 나는 위험 천만하게도 저전거를 타고 밤이 이슥해
서야 해안도로를 달려 모슬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 나는 근처의 감자밭과 양파밭, 밀밭 들을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렇듯 며칠
을 섬의 풍광에 취해 있는 동안 나는 아닌게아니라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마음의
중심과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었다.
제주도에서 열흘째 머물던 날 나는 그만 올라가리라 마음먹고 철하의 봉고차에 송해란을
태워 서귀포에 있는 파라다이스 호텔로 갔다. 농 섞인 얘기이긴 했으나 며칠 전에 철하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호텔 입구에서 철하는 차를 세우고 우린 이런 데 들어가도
돼? 하고 짐짓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와봤어?" "오기야 숱하게 와봤지만 이번엔 사뭇 내
용이 다르잖아." "사치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알아서 해."
옆에서 배싯거리는 송해란을 돌아보며 그는 또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봉고차도 받아
주나?" "객쩍은 소리 작작하고 빨리 끌고 들어가. 뒤에서 빵빵거리잖아."
호텔 입구에서 차를 세워 놓고 그들과 나는 스페인풍의 허니문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레스토랑 아래로 오월의 제주 바다가 잔잔히 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처
럼 잔잔한 마음은 나로서도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또 어떤 마음일지 장담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쨌든 괜찮은 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망설임 끝에 송해란에게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꺼냈다. "내려와서 뜻밖의 대접을
받고 갑니다." "대접은 무슨 대접요. 설마 미니스커트 얘기를 하시는 건 아니겠죠?" 우스갯
소리를 하는 걸로 봐서 그날보다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니 해란 씨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군요. 주제넘은 소린 줄은 압니다."
"철하 씨 말예요?" "그래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구요." 송해란은 손에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눈을 먼 바다로 돌렸다. "자격이란 서로의 마음에 있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안
그런 게 또 있잖아요." 자신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철하도 해란 씨와 같은 소릴 하더군요." 그녀는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바다로 눈을
던지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도 저지만 철하 씨도 자신을 너무 날카롭게 찌르며 살아요.
그거 옆에서 보는 거 의외로 쉽지 않아요. 그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때론 낯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낫겠다 싶어요." "상처에 민감한 걸 보면 두 사람 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예요. 그렇
다면 정들고 낯익은 사람 쪽이 낫잖겠어요?" "저한테 선거 운동하고 있는 거예요? 서귀포까
지 데려온 것도 다 그런 이유였어요?"
버릇대로 톡 쏘는 말투였지만 기분이 상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직은 철하 씨 마
음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길게 가다 보면 괜한 자격지심만 늘 게 뻔해요. 저
도 언제까지 술집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안 그래요? 물론, 그래요. 그게 함부로
몸을 굴린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예요."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쯤은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철하도 바로 그 자격지심이란 것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는 대목이 있을 겁니
다. 커닝시켜 주는 겁니다." "커닝요?" 그녀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게 정답인 줄 어떻게 알아요?" "아직까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그렇다면 직감으로
알 수 있을텐데요." "알고 보니 엉터리 선거 운동원이군요. 아무래도 철하 씨가 친구를 잘못
둔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피식 웃어 버렸다. 화장실에 갔던 그가 돌아왔으므로
얘기는 거기서 끊어져 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포도주를 몇 잔 더 마셨다. 약간 취했던가? 분
홍색 꽃의 양란 화분이 놓여 있는 창가 자리에 앉아 사양이 깃들이기 시작하는 바다를 내려
다보고 있다 철하가 이런 말을 툭 내뱉었다. "집을 요상하게 지어 놔서 그런가? 여기 오니
까 미상불 신혼 여행이라도 온 기분일세." 그러더니 송해란에게 눈을 돌리며 우리 오늘 밤
여기서 묵고 갈까? 하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뜨악한 표정이 되어 송해란
은 나부터 쳐다보았다. "의외로 식순이 빨리 진행되는 것 같은데요." 진담 반 농담 반의 소
리였는데 송해란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버럭 소리부터 질러댔다.
"왜들 그렇게 사람을 갖고 놀아요? 누굴 까보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그가 정색을 하
고 그녀를 다그치고 들었다. "어째서 당신은 무슨 말만 하면 대뜸 발톱부터 세워? 못돼먹은
암코양이처럼 말이야." 뭐가 잘못됐는지 사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사내 둘이 고작 아녀자
하나를 가지고 희롱하다니!" 기세가 여간 험악한 게 아니었다. "얼씨구, 넌 그래 이때까지
청혼이란 말도 못 들어 봤냐? 세상에 이런 석녀가 따로 없구만. 그러니 맨날 그 모양 그 꼴
이지." 뭐, 청혼이라고?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송해란도 한 손으로 엉거주춤 탁자를 짚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
다. 맙소사!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자리를 비켜 줄 요량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 중대한
일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어둑한 길을 더듬어 허니문 하우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 두 대를 피우고 그리
고 커피를 한잔 더 시켜 먹은 다음 본관으로 돌아갔다. 얘기가 어떻게 됐는지 그들은 호텔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뭇머뭇 다가가 두 사람의 표정부터 살폈지만 도대체
아무것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낮에 여기 도착할 때처럼 그저 무덤덤한 얼굴들이었다. "어
디 갔었어?" "벌써 가려고?" "몇 신데 벌써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구. 두 끼씩이나 호텔에서
밥을 먹을 수는 없잖아. 거 술값 한번 징그럽게 비싸네."
모슬포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들은 내내 말이 없었다. 송해란이 뒤에 타고 내가 운전석 옆
에 앉은 탓도 있었지만 꼭이 그래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차 안에 떠도는 공기에서 무
언가를 감지해 내려 해도 별스럽게 느껴져 오는 바가 없었다. 땅거미가 깔린 길을 더듬어
오는 동안 나는 철하의 얼굴을 훔쳐보다 지쳐 앞에서 달려오는 길만 올빼미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읍내에 도착해 송해란이 먼저 차에서 내리며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내일 올라가신다구
요." "그래요, 부디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녀가 문을 닫다 말고 문득 내 눈을 마주보았
다. "언젠가 또 뵐 수 있겠죠?" 해장국집에서 쏟아져 나온 빛에 그녀의 모습이 기묘하게 일
긋거리고 있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랐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표정하게
운전대를 잡고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오늘 고마웠구요."
그녀는 핸드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보도 블록 위로 올라섰다. 차가 한 오십 미터쯤 앞으로
나아갔을 때 언뜻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
워 물며 그제야 철하를 돌아보았다. "싸웠나?" "아녀자하고 싸움은 무슨 싸움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빈말이라도 따뜻하게 하는 게 좋아. 괜히 쿡쿡 찌르면서 아프게 하지 말고."
"모르는 소리!" "뭐가 말이야?"
차가 해안도로로 들어서자 다시금 밤바다가 왼편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할 모슬포 대정의 밤바다였다. 언제 또 이렇게 속절없이 내려오게 될는지. 내려와 사랑에 목
말라 다투는 이들과 바다가 보이는 저녁 창가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 나누게 될는지. "가을
쯤의 다시 내려와 주면 좋겠어." 차는 이내 별장 앞에 도착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가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가을? 하고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래.
9월이나 10월쯤에 한 번 더 내려와." "그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어." "사정을 듣지
않고는 좀체 움직일 수 없겠는데."
나는 능청을 떨며 아예 숙맥처럼 굴고 있었다. 그저 그래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허청
웃음을 웃더니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 물고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자서 바다는
밤의 우주처럼 깊푸르고 적막했다. 하늘엔 하얀 쪽배 하나가 은하수로 외로이 떠가고 있었
다. 며칠 전에 본 돌고래 때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은하수 저편 영원으로 헤엄쳐 갔으
리라. "혼례를 올리기에 좋은 밤이군. 아무래도 너희는 파라다이스에 그냥 있을걸 그랬나
봐. 왜 얘기 좀 잘해 보지 그랬어?" "그런 식으론 하기 싫대. 남들 하는 식으로 예식장으로
웨딩 드레스 입고 하고 싶대." "하긴 예식장 결혼이 뭐 벽돌 공장 같긴 해도 남들 하는 대
로 평범하게 하는 게 좋은지도 모르지. 여자라서 그런지 역시 생각도 살림하듯이 하는군."
"내려올 거야? 간단하게 치를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와야지. 봉고차를 몰 사람이 필요
할 텐데." "사치하러 갔다가 정말 사치를 저지르고 말았네." "무슨 소리야?" "결혼이 내겐
이상하게 사치처럼 느끼네." "숙맥 같은 소리. 그렇게 마음이 가난해서야 어찌 한 여인을 거
느리고 살겠나. 그토록 장구한 세월을 말이야." "그런가?" "마구 사치를 부려 슬하에 아이도
몇 두면 금상첨화겠지." "그런가?" "너그러워지는 방법 중에 후세를 두는 게 그중 좋다는 생
각이 들어. 지금까진 너무 강파르고 각박하게 살아왔잖아." "아닌게아니라 아이도 갖고 싶
군. 가슴이 뛰는 일 같아." "아이들 보면 하얗고 예쁘잖아. 위대한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잘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들잖아. 말하자면 그것도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라는 거지." "그런가?"
"너무 늦기 전에 시작해야 돼. 이미 많이 늦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오래오래 바다
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철하가 봉고차로 나를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토요일이라는 걸 잊고 온 탓이었
다. 서울행 비행기는 오후 두시에나 있었다. 비행기가 뜰 때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 철하는
나는 공항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그는 송해란의 얘기를
꺼냈다. "음반까지 낸 가수였다나 봐." 가수, 그런데 어쩌다가 단란주점으로 추락하게 됐을
까. "음반을 냈지만 반응은 시원찮았지. 찍어서 방송국마다 돌렸는데 틀어 주는 데가 없었
어. 몇 달인가 지나 제주 엠비씨 라디오에서 첫 방송을 내보냈다지." 그나마 첫 방송이 단란
주점이 아니었길래 망정이다. "물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가
왠지 첫사랑처럼 느껴지더래. 동숭동에 있는 라이브 카페에서 일하다 학교를 졸업했는데 막
상 갈 데가 없어 기타 하나만 달랑 들고 무작정 제주도로 온 거야." 하지만 단란주점에 취
직하려고 그 먼데서 비행기를 타고 온 건 아닐 텐데. "제주시에 있는 야간 업소에서 일하다
재수 없게 모진 놈을 만났지. 그래서 몸 뺏기고 돈 뺏기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지내다 뱃사
람 상대나 한다고 여기까지 굴러 온 거야. 뱃사람들이 거칠긴 하지만 의외로 순박하거든."
"하지만 자학하듯이 너무 단란주점까지 고속으로 직행해 온 거 아냐?" "그 나이엔 한번 무
너지면 그걸로 전 인생이 다 무너진 것처럼 생각되잖아. 어쨌든 코스가 좋지 않았던 거지."
벌써부터 그는 송해란을 두둔하고 있었다. "그거야 이제부터라도 정 코스로 가면 되니까
문제가 될 건 없잖아." "그렇게 생각해?" "쓸데없는 자격지심 따위는 이제 버리고 살 때가
됐어." "그렇게 말해 주니 한결 마음이 가볍군." "결혼하기 전에 은빈이한테도 전화해 줘. 그
럼 은빈이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거야." "그러지." "그래. 다 그러고 사는 거야." "자네도
이제 정 코스를 찾아봐." "그러도록 노력하지."
보딩 시간이 되어 그와 나는 대기실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가을에 꼭 오겠다고 나는
게이트를 나서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잘 가라고 멀리서 내게 손을 흔
들어 보였다.
세계꽃박람회
무얼 잊었던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뭔가 빠뜨리고 왔다는 생각에 머릿
속을 헤적거려 보았으나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는 듯도 했으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윈도 시트에서 밖
을 내다보니 흰구름만 아득히 하늘에 깔려 있었다.
김포공항에 내린 것은 오후 세시였고 나는 가방을 끌고 청사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
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엔 희뿌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공항을 빠
져 나와 행주산성을 지날 때쯤 잊었던 그것이 불쑥 이마에 떠올랐다. "십일(토) 오후 두시
국제선 이청사" 나수연이란 여자가 페낭에서 부쳐 온 엽서에다 써놓은 말이었다. 대놓고 약
속해 둔 일이 아니어서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오늘이 하필 십일이고 토요일이었다.
세시 이십분. 그대로 집으로 갈까 아니면 공항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운전사에게 택시를 돌려 달라고 했다. 까
맣게 잊고 있었고 또한 그러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우연히 그 시각에 부근을
지나게 되면 문득 그곳에 가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나는 공항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실제로 그렇
게 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감정이었다. 만약에 지금이 오후 한시였다면 과연
내가 공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만약에 두시였다면? 오히려 약속 시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슬쩍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릇 이런 경우의 감정은
설명하기가 몹시 까다롭다.
아무려나 어긋난 것을 되맞추는 식으로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엽서에
썼던 대로 오늘 날짜로 귀국해서 지금껏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타임머신을 타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배낭을 가슴에 안은 채 국제선 이청사 입국 대기실 의자에 앉
아 있었다. 쇼트 커트한 머리에 고동색 재킷 그리고 뱅뱅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입국
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 있는 껑충한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나수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부쳐 온 엽서를 받아 오면서 나는 줄곧 어떠어
떠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그것과 일치된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
면 비쩍 마른 몸매에 해맑은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일 거란 생각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방을 끌고 머뭇머뭇 대기석 의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중에 그녀가 무슨 느낌을 받
았는지 슬로비디오로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른 척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어
쨌든 상대는 내 얼굴을 알고 있을 터이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며 그녀는 배낭을 안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짐작보다는 무척 큰 키였다. 그녀는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굳은 표정으로
약간 입술을 벌린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쑥스러워서 그런 거겠지 싶어 나는 그녀의 몇
미터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가 쇼윈도에서 걸어 나올 때까지 계속 딴청을
치우고 있었다. 동남아에서 방금 돌아온 탓인지 얼굴이 까무잡잡했다.
그녀가 어깨에 배낭을 둘러메고 내게로 다가왔다. 와서, 언제 봤다고 대뜸 핀잔부터 늘어
놓았다. "전 약속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이 너무 싫어요. 제 시각에 안 뜨는 비행기보다 훨
씬 싫단 말예요. 알겠어요?" 나는 그녀와 서로 약속이란 걸 한 일이 없었다. 엽서 한 장 받
은 게 곧 약속이라면 부담스러워서라도 공항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이었다. 세
상에 그런 일방적인 약속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거기 끌고 다니는 그 가방은 뭐예
요?" 나더러 어쩌라고 갈수록 막무가내였다. 아연한 생각이 들어 나는 멍하니 그녀의 당돌
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댓살밖에 안된 그것도 방금 만난 여자한테 혼쭐
이 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좀 심한 건가요? 그치만 무려 한 시간 사십
분씩이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다니요. 더군다나 저는 한 달 만에 바깥에 있다 돌아오
는 길인데요. 포기하고 돌아갈까 싶어 집으로 전화를 몇번이나 해봤는데 자동 응답조차 없
잖아요. 그러니 혹시나 싶어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요."
제주도로 출발할 때 자동 응답기의 버튼을 눌러 놓지 않았었나 보다. "하여튼 만나게 되
어 반갑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냉큼 손까지 내밀었다. 당돌한 것인지 해맑은 것인지 아
직까지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것까지야 사양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두어
번 흔들다 놓았다. 키에 비해 가늘고 작은 손이었다. 지난번 엽서엔 며칠째 머리를 못 감았
다고 썼는데 오늘은 몸에서 좋은 비누 냄새가 났다. "텔레비전에서 나온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 낫네요." 더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어 나는 헛기침을 하며 되받았다. "보기보단 발이
작군요." 그러자 그녀가 발이라뇨? 하더니 눈을 홉뜨고 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진짜 발
말예요?" 물론 발이었다. "보통은 키에 비례해서 손발 크기가 결정되는데 그보다는 한결작
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혀를 차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주 웃기는 사람이네요. 처음부터 남
의 발에나 관심을 두고 말예요."
웃기기로 한다면 그녀도 누구 못지않은 여자였다. 제 마음대로 약속 운운하며 앙앙대는
걸 보면 필시 귀여움만 받고 자란 외동딸이거나 아직 나잇값을 못하고 있는 철부지일 게 분
명했다. 아무튼 그녀와 나는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입국 청사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
는데 그때부터 왠지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그녀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쩌죠? 저야 괜찮지만 도르래가 달린 가방을 끌고 꽃박람회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요. 어디 다녀오는 길인 모양이죠?" 참 빨리도 묻는다. "하필 그렇게 됐군요." "고의적이었단
말예요?" "고의? 글쎄요. 그렇다면 반은 고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건 또 뭐예
요?" "마침 오늘 돌아오게 됐으니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약속 따위는 잊고 있어거든요."
또 냉큼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한참 대꾸가 없었다. 슬몃 옆을 돌아보니 그
녀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땅바닥을 깊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이를 두었다가 나는 조심스럽
게 뭐가 잘못됐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겨우 그랬나요? 하며 코가 매운 눈으
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큰 가방을 끌고 왔나요?
파토 놓으려고 말예요."
파토라니. "그 따위를 끌고는 어디도 갈 수가 없잖아요. 저는 정말로 꽃박람회에 가려고 오
늘 비행기 시간에 맞춰 축에서 돌아온 건데요." 축은 또 어딘가. 그 사이에 말레이시아말고
어딜 또 들렸다 온 모양이었다. 나중에 물으니 '축' 은 괌 옆에 있는 더 작은 섬으로 경비행
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든 저렇든 당장은 그녀를 좀 달래 놔야 할 형편이
었다.
"박람회장엔 내일 가는 게 어때요?" "그럼 오늘은 뭐예요." 이거야말로 키 큰 어린애가 아
닌가. 징징거리기까지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여자가 혼자 한 달씩이나 외국을 돌아다니는지
알아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죠. 조금 늦긴 했지만 말예요. 가
령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먹는 건 어때요? 외국 여행을 오래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게
먹고 싶을 텐데." 그러자 그녀가 떡볶이요? 하더니 갑자기 남자처럼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해도 그녀는 좀처럼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 바람에 정류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던 사람들이 흘끗흘끗 이쪽을 훔쳐보았다. 그중에는 제기랄, 나를 알아보는 시청자까지
있었다. 낭패스런 기분이 들어 나는 가방을 끌고 택시 승강장으로 가 서둘러 택시에 올라탔
다. 뒤따라 들어온 그녀가 후후거리며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어디로 갈 참예요? 떡볶이 집
으로 가나요?" 들은 척을 않고 나는 신촌으로 가자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신촌요? 저는 집
이 성북동인데요." 그렇다고 성북동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행 가
방을 택시에 싣고 서울 시내 관광을 해야 할 판이었다. 어디까지나 배낭을 가진 그녀가 양
보해야 하는 것이다. "좋아요. 하지만 저녁 값은 그쪽으로 내는 거예요."
대개 단서 없는 동의란 없는 법이다. 결국 그녀와 저녁까지 먹게 됐다. 딱히 할말이 없어
나는 고등학교 땐가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란 시를 떠올리며 그녀
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성북동엔 아직도 비둘기가 많은가요?" "아직도라뇨. 언제 거기서
살았나요?" 그제야 느꼈지만 그녀는 허스키한 중성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듣기만 하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묘한 톤의 소리였다. 야릇한 느낌에 빠
져 나는 차장에 어른거리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대답은 않고 왜 사람을 훔쳐봐요." ".......!" "변성기 때 목소리가 이렇게 굳어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성격도 어딘가 모르게 중성처럼 변해 버렸구요. 솔직히 생리도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아요. 그런 기분 알아요?" 알 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얘기였지
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생리 얘기
라니. 그것도 불순인 주제에.
"게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치마 한번 못 입어 봤어요. 일 미터 칠십에 사십오 킬
로밖에 안 나가는 몸매엔 치마가 절대 안 어울리거든요. 그래서 길 가다 키 작고 통통한 여
자 애들 보면 너무 예뻐 보이는 거 있죠." 그저 농담으로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
고 레즈비안이라고 생각하진 마시구요." 레즈비언이면 또 어떤가. 어차피 나와는 별 상관없
는 얘기다.
신촌 기차역 앞에 내려 그녀와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오래된 정거장'으로 갔다. 입구의
장미가 비를 맞으며 떨고 있었다. 얼마 만에 와 보는 곳인가. 페인트 껍질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폐허의 문앞에 당도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냉큼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잠시 장미
넝쿨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염두에 둔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왜 이곳으로 오게 됐을까.
어쩌다 신촌에 나오게 되면 주미와 나는 여기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촛불
에 흔들리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골목 입구에서부터 바라다보이는 아치형의 장미 넝쿨
이 여태도 아름다운 집이었다.
의자가 두 개밖에 없는 작은 창가다. 빨간 창틀 너머에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빨간 장
미. 장미는 비에 떨고 있고 식탁엔 야자수 모양의 양초가 타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오늘 공
항에서 만난 낯선 여자가 창 밖을 고양이처럼 내다보고 있다.
포도주 한 병을 시켜 놓고 그녀는 스테이크 덮밥을 나는 새우 그라탕을 저녁으로 먹었다.
포도주병이 비자 그녀는 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소란스러울 알았는데 의외로 말이 없는 여
자였다. 햇빛에 타지 않았더라면 하얬을 얼굴이었다. 간혹 방심할 적마다 그녀의 얼굴에 외
로운 여수의 그림자가 먼 불빛으로 희미하게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이 왔다. 장미는 이제 가로등 불빛 속에서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속에서 빗줄기
가 하얗게 거세지고 있었다. 여덟시가 되자 자명종의 벨이 울리듯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후텁하고 비릿한 열대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래, 열대에 다녀오면 저렇듯 며칠
씩 몸에서 빠져 나가지 않는 냄새가 있다. "무얼 그렇게 곰곰히 생각해요?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말예요." 얘길 해도 그녀는 모르리라. "늦은 밤 테라스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
시며 노란 우산 하나가 골목으로 일긋일긋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탁자에는 쓰다
만 엽서 한 장과 뚜껑이 열려 잉크가 말라 가고 있는 플러스 펜." 흐흥, 하고 그녀가 웃으며
말꼬리를 이었다. "엽서 뒷장엔 어여쁜 남녀가 언제나 한 쌍." "......" "그리고 여기 이 자리
엔 얼마 전까지 웬 여자가 앉아 있었죠?" 느닷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들고 있던 맥주
병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핥고 내려갔다. "아까부터 계
속 그쪽 표정을 살피고 있었는데요. 방금 어떤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
졌어요. 혹시 작고 통통한 여자 아닌가요?" 그녀가 냅킨을 뽑아 이마의 식은땀을 찍어냈다.
"지금 그쪽은 저에 대해 이중적으로 반응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저를 매개로 어떤 여자
를 줄곧 떠올리고 있단 말이죠. 그쪽은 아까부터 제 모습에 무의식적인 변화를 가하고 있어
요. 분명히 그렇게 느꼈어요. 그쪽이 떠올리고 있는 모습과 제 모습이 어긋나서 몹시 불편했
지만 그대로 참고 있었단 말이죠. 참고로 말하면 전혀 다른 두 개의 영상이 겹칠 때 실제
눈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받아 내야 하는 힘을 그만큼 커져요. 힘이 든다는 얘기죠.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땐 될 수 있으면 딴사람 생각하지 말아요. 그쪽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마
주앉아 있으면 그런 것쯤 누구나 다 눈치채게 마련이에요."
의외로 엉뚱한 데가 있는 여자였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지금 그쪽 표정에
나타난 영상의 해상도를 보니 그래요." 아니라는 말을 못하고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쩌다 저 나이에 사람을 이렇듯 깊숙이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을까. 그런데 그건 좋은 일만
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자기를 먼저 보아 버렸다는 얘기다. 그렇게 자기를 뚜렷이 목
격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 법이다. 한데 그런 일에는 대개 감당
키 힘든 고통이 뒤따르곤 한다. 가령 이 어린 여자에게 벌써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저 아득히 먼 자기 행성에서 등불 없이 혼자 지새우는 춥고 기나긴 밤. 가령 노르드곶. 그
런 시간과 대지에의 여행. 그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의 쓸쓸한 존재감을 배낭에 넣고
두려움에 한 여행을 하면서 어느 순간 자기라는 혹은 사람이라 불리기도 하는 우주의 낯선
괴물 하나를 일찌감치 보아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대학교 삼 학년 이 학기를 마치고 이 년째 휴학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공은 물리
학이었고 책과 음악도 꽤 읽고 듣는 편이어서 '사막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작가 르 클레지
오와 또 수염이 멋있어서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휴학계를 내기 얼마 전에 학교
운동장에서 이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기말고사를 치고 강의실에서 나와 운동장 계단을 내려오는데 문득 세상이 백지처럼 보이
는 거였어요. 늦가을이긴 했지만 눈이 내렸을 리는 없구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온
통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어요. 좀 무섭기도 했지만 저는 겨우겨우 정신을 가다듬
고 운동장까지 내려왔죠. 그때 또 멀리서 무언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걸 봤어요. 저는 그게
오로라라고 생각했죠. 물론 오로라는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거죠. 다시 실눈을 뜨고
가만히 보니 그건 자전거처럼 생긴 물체였죠. 저는 그것에 홀려서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지
나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어요. 아마 세 시간이나 네 시간쯤 그렇게 넋을 잃고 걸어갔
을 거예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던 책이며 강의 노트가 어디 갔는지 없
어요." "......"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앓았어요. 병원에도 가봤지만
소용이 없었구요. 밤마다 저는 계속해서 그 자전거 꿈만 꿨어요. 그러고 나서 생각했죠. 아,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아니로구나. 어쩌면 저 먼 미지에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여태까
지 여기에 있었구나 하고 말예요." "......" "아닌게아니라 그때부터 제가 사막의 인디언처럼
생각됐어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겨울 방학이 되자 배낭을
메고 먼저 유럽으로 갔어요. 파리, 암스테르담, 로마, 베테치아 그리고 지중해와 프라하를 거
쳐 노르웨이의 노르드곶까지 갔죠. 북극점 말예요. 하지만 지독하게 춥기만 하고 보이는 건
도대체 아무것도 없었어요. 실제로 거기엔 레이더 기지처럼 생긴 황량한 건물밖엔 없거든
요."
하얀 자전거를 타고 말인가. "근데 노르드곶에 갔는데 왜 하필 그쪽 생각이 났죠?" 유리
창엔 장미의 그림자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묻고 있는 겁니까?"
빈 맥주병들이 치워지고 새로 두 병이 더 왔다. 술을 잘 마시는 여자였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게요." "어떻게요?" "그쪽도 자기
라는 괴물을 본 적이 있나요? 또 은빛 자전거는요."
나라는 괴물, 이라고 되받으며 나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 어째서 텔레비전
에서 보면 늘 사냥꾼한테 잡혀 온 짐승처럼 그렇게 어리둥절해 보이는 거죠? 늘 어깨를 구
부리고 떨고 있거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잖아요."
남들 눈엔 다들 내가 그렇게 보이는 걸까. 헛기침을 하며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거야
배역이 그러니까 그렇겠지." "아까 공항에서도 영락없이 그래 보이던데요." "...... 하지만 은
빛 자전거를 본 적은 없습니다." "생각보단 말이 잘 안 통하네요. 전 그쪽이 어쩐지 저와 같
은 종속에 속해 있는 줄 알았는데요." 발음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좀 취한 모양이었
다. "아무튼 그래서 떠나 있게 되면 그쪽이 늘 그리운 사람이더라 그런 말씀이에요." "감사
합니다." "네? 감사라구요?" "그럼 뭐라고 합니까."
그녀는 아예 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부러 그러는지 끌끌 혀까지 찼다. "그렇게
맹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요. 하하하." 이거야 원 더 이상 뭐라 대꾸하기조차 민망스러웠
다.
어쨌든 그녀는 편의점이나 백화점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모은 돈을 가지고 일
년에 두 번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현실적으로는 이 년 동안이나 졸업을 유보하고 있
는 셈이었다. 세상엔 참으로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자신
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그녀와 나는 각자 가방과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데 그녀가
뒤에서 장미야 안녕! 하고 문득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되어 꽃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내 옆으로 따라와 오늘 무지 먹었네요, 하며 다시 남자의 목소리로 능청을 떨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새벽엔 꽤 춥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하고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머리칼이
그새 비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우산을 살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슈퍼마켓은 눈에 띄
지 않았다. "장미 말예요." "장미." "아무리 봐도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은 없는 거 같아요.
특히 사라반드 말예요."
그녀의 목소리도 금세 붉게 젖어 있었다. "사라반드?" "천구백육십팔년 메이양이란 프랑
스 사람이 작출한 종인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랍니다."
사라반드, 라고 나는 입엣말로 우물거려 보았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와
나를 흘끗거리는 가운데 덜덜거리는 가방을 끌고 그녀와 나는 신촌 로터리에 와서 헤어졌
다. 그녀는 성북동으로 가는 택시를 타야 했고 나는 현대 백화점 앞에서 수색으로 가는 좌
석버스를 타야 했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밤은 시나브로 춥게 깊어 갔다. 도로에
나가 택시를 잡던 그녀가 어깨를 덜덜 떨며 지친 표정으로 도로에 올라섰다. "어떻게든 우
산을 구해 볼걸 그랬나 봅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면 뭘 해요. 지금 우산을 쓰면 꼴
이 더 우스워 보일 거예요." 그렇기는 하다. "근데 우리 낼 어디서 만나요?" "정오에 박람회
장 입구에서 보죠." "일요일이라 사람이 어지간히도 많을 거예요."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참, 우리 오늘 맥주 마시며 친구가 된 건가요?" 비에 젖은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사라반드."
간신히 잡은 택시에 올라타며 그녀는 그 큰 키에 빠이빠이 하고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
다. 집으로 돌아오니 자정이었다. 열흘이나 비운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눅눅한 냄새가 휘
장처럼 온몸을 싸안았다. 그 축축한 공기에 휩싸여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현관에 잠시 우
두커니 서 있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군. 누가 다녀가기라고 한 듯 공기가 제멋대로 뒤엉
켜 있어. 그 사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느리게 손을 뻗어 나는 형광들을 켜고 젖은 구두를 벗고 여행 가방을 들고 거실로 올라섰
다.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들어설 때의 좋찮은 느낌은 여전
히 묵직하게 뒤통수에 매달려 있었다. 탁자 위에 있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며 나는 자동 응답
버튼을 눌러 놓지 않고 떠났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렇다면 흐트러져 있는 공기의
이 생생한 느낌은 조금 전까지 전화 벨이 울리고 있었단 뜻인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나는 새로 한시에 침대에 누웠다. 그와 동시에 머리맡에서 뚜
우, 뚜, 하고 전화 벨이 울렸다. 나는 스탠드의 불을 켜고 가만히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벌써 자고 있었어요?" 나수연이었다. 약간 뜻밖이었지만 잘 들어갔느냐고 나는 심상하게
되물었다.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돌연 긴장한 투로 그녀가 멀리 성북동에서 물어 왔
다. "목소리가 어때서?"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
응이 없었다. "아까는 안 그랬는데 어째 음정, 박자가 불안해져 있어요. 땅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웅웅거린다구요." "그거야 밤이니까 그렇겠지. 사라반드." "단지 그거예요? 다른 이유
는 없구요?" "대저 밤이 캄캄하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 이유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
겠지." "그래요? 그럼 끊을게요." "성북동 비둘기들은 안녕하신가?" "다들 자고 있어요. '오
래된 정거장' 앞의 장미도 지금은 다들 자고 있구요." "새벽엔 춥겠군." "아직도 지붕에 비가
많이 와요." "지붕에 비가 오는군. 그래, 지붕의 빗소리 들으며 나도 이제는 누에고치처럼
실크 둥지 속으로 기어들어가 깊이 잠들어야겠군. 사라반드." 그때 수화기에서 느닷없이 에
취!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뚝 끊겨버렸다. 그 사이 감기가 든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어디서도 나를 찾는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열한시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듣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 구백삼
번 좌석버스를 타고 '구십삼 고양세계꽃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일산 호수공원으로 갔다. 비
는 아침 일찍 그쳐 있었다. 열두시 정각에 매표소 앞에 나타난 그녀는 껑충한 키에 우스꽝
스럽게도 양산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감기에 들려 잦은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어제 비를
맞게 한 탓이려니 싶어 나는 그저 모른 척하고 있을 밖에 없었다. "아이구 차라리 사람 박
람회라고 해야 옳겠네요.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무슨 꽃인들 구경하겠어요?" 그녀와 나는
표를 사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입구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인공폭포 앞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꽝꽝거리며 음악이 흘러 나왔다. 동물 가죽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야외 무
대에서 어린이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는데 초입부터 고막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곧 양
산을 접을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꽃의 정거장에 온다고 아침부터 가슴 설레었더
니 시작부터 기분 꽝이네요."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이런 땐 한번 '한없니 투명에 가까운' 인내심을 발휘해 보는 거야." 일껏 농담을 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 또한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인파에 떠밀려 간신히 자생식물관까지
와서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에구머니나! 너희들이 그래 여기 있었네." 그녀는 남
들이 보거나 말거나 제멋대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이리 와서 얘들 좀 봐요. 우리 나라
풀꽃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꽃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그러고는 꽃이름을 줄줄이
외며 여기저기를 마구 헤집고 돌아다녔다. "둥근바위솔, 골무꽃, 하늘말나리, 우산나물, 설앵
초, 술패랭이, 돌단풍, 바위채송화, 좀비비추, 떡바위취, 목부작, 제주암매, 족도리, 쥐손이불,
양지꽃, 눈창포, 병아리난초, 애기별꽃, 백화등, 노루오줌, 나비패랭이, 연잎꿩의다리, 금마타
리, 금강봄맞이, 섬공작꼬리고사리, 나벌이난초, 숙은돌창포, 애기사철, 털머위, 좁쌀풀, 분홍
바늘꽃, 금낭화, 천남성, 구슬붕이, 복주머니, 돌솜방망이, 민바구니꽃, 털쥐손이, 자주꽃방망
이, 깽깽이풀...... 아, 여기 하늘매발톱 있네. 여기 봐요, 매의 발톱처럼 하늘색 꽃잎이 안으로
날카롭게 굽어 피지 않았어요?"
나는 그녀가 왜 꽃박람회에 맞춰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지 그제야 알 듯한 느낌이 들었
다. "여기다 우리 나라 산짐승이며 들짐승 들을 풀어 놓으면 얼마나 근사할까요." 비무장 지
대라면 몰라도 그게 어디 가능하기나 한 얘긴가. 하지만 꽃에 취해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가슴 한구석으로 묘한 감동을 받고 있었다. 효성카톨릭대 화훼과 학생들이 만든 압화 작품
들에 흘려 멍하니 서 있다가 나는 또 그녀가 잡아 끄는 대로 분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분재관 괴불나무 앞에서 그녀와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녀는 철창에 갇혔다 풀밭에 풀려 나온
들짐승처럼 카메라를 들고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뒤를 따라잡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
다 아니게아니라 그녀의 뒤를 놓쳐 버린 것은 분재관을 나와 주제관을 거쳐 메인 광장이 있
는 곳으로 막 빠져 나왔을 때였다.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서가던 그
녀의 모습이 반짝 눈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아무리 사
방을 둘러봐도 울긋불긋한 옷들을 입은 사람들만 모빌 플라워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릴 뿐 그
녀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뒤주에다 쌀 한 톨을 떨어뜨린 격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그새 두시가 돼 있었고 배까지 슬슬 고파 왔다.
하는 수없이 나는 애드벌룬이 떠 있는 메인 광장의 계단 꼭대기에 올라 앉아 그녀가 나타
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데서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자리에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게 상
책이다. 하지만 세시가 돼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애드벌룬 그림자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것만 내둥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정오에 그녀를 만났던 박람회장 입
구로 가볼 양으로 계단에서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그때 낯익은 여자의 모습이 눈에 비쳐 들었다. 광장의 끝, 그러니까 호수에 면한 통행로
앞에 몇몇 회사에서 자사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간이 판매대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가령
로즈버드 커피, 코닥필름, 칠성 사이다 따위의 코너 박스를 설치하고 각기 도우미를 배치해
홍보를 겸한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스킨라빈스 써티원 아이스크림'이란 박스 앞에 진한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도우미인지 관람객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니폼처럼 생긴 옷이었다. 허리춤의 하얀
띠 그리고 스커트 밑으로 흰 하이힐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허리 뒤로 돌려 잡을 자세로
박스 모서리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주미였다. 여행을 떠났다던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가누며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인파에 어깨가 떠밀리며 간신히 '베스킨라빈스 써티원 아이스크림' 코너 박스에 다다랐을
때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이 분 사이였을 텐데 그 사이에 어디로 갔는
지 눈에서 사라져 있었다. 풍선과 파라솔과 현수막이 현란하게 나부끼는 풍경 속에서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사방을 헤매기 시작했다. 백합과 튤립과 카네이션과 붓꽃 들을 가득 심어
놓은 광장 옆의 꽃밭을 지나 영화 '가위손'에서처럼 정원수를 다듬어 코끼리, 개, 하마, 사자
따위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토피어리 가든을 지나 장미원을 지나 팔각정까지 가보았지만 역
시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사이에 그녀가 팔각정까지 날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뭐가 어떻게 돼가는지도 모르고 나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털레털레 광장으로 돌아와 아이
스크림 코너 앞의 파라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네시가 돼도 다섯시가
돼도 그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때 코너 박스에는 흰 투피스 차림에 빨간 모
자를 쓴 도우미 한 명이 나와 서 있었다.
아무래도 헛것을 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나수연을 찾기 위해 광장 계단 꼭대기의
애드벌룬이 떠 있는 곳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한데 분홍색 투피스의 여자를 보고 나서부
터 마음을 욱죄고 있는 이 불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어제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받았던 그 불길한 느낌이 어쩌자고 이렇듯 온몸을 투텁게 싸안고 있는 걸까.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중인가보다.
나수연이 애드벌룬 뒤에서 나타난 것은 여섯시가 다 돼서였다. 그녀는 고개를 못 들고 숙
제를 안 해온 초등학생처럼 내 앞으로 슬쩍 돌아 나왔다. 누가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이어서 나는 그녀에게 옆에 와 앉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손에 김밥과 음료수가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다. "정말 옆에 앉아도 돼요?" 앉아도 된다고 나는 맥이 다 빠진 소
리로 되풀이했다. 완전히 맥이 빠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그런 것만도 아니었
다. "그래, 여기 앉아서 김밥으로 먹자구. 도시에서 소풍을 나오면 다 그런거야. 대공원이고
서울랜드고 일요일이면 어디서나 늘 미아가 발생하게 마련이지." "본부에 찾아가 방송까지
했는데 못 들었어요?"
그래도 할 만큼은 한 편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방송 멘트인들 귀에 들리
겠는가. 서쪽으로 기우는 하오의 햇살이 호수에 쏟아져 계단 꼭대기로 반사되고 있었다. 때
마침 바람까지 불어 고사분수에서 뻗쳐 오르는 물줄기처럼 물방울 몇 점이 그녀와 내가 앉
아 있는 자리까지 날려 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베스킨라빈스 서티원 아이스크림' 코
너 박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밥에서는 자주 모래알이 씹혔고 그러나 옆에 앉은 그녀를 더
이상 주눅들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음료수와 함께 그것을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폐장 시간은 여덟시였고 인파는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세계꽃박람회장이 내겐 모래알이 들어 있는 김밥과 잠깐 동안 눈에 나타났다 사라진 분홍
색 투피스의 여인이 전부였다. 아니, 어제 처음 만난 나수연이란 여자가 옆에 얌전한 강아지
처럼 앉아 있었다. 철없는 사람. 어느 날 그대는 하얀 자전거를 타고 당신 인생의 작은 코너
박스 안으로 돌아와야 하리라.
내가 애드벌룬 아래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장미원에 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까 나도
그곳에 들렀지만 주미를 찾느라고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라반드도 있던가?" 그녀의
목소리가 높낮이의 균형을 되찾으며 한껏 밝아졌다. "그러믄요." 변함없이 멍멍한 중성의 목
소리였다. 그녀는 밤이 와야만 기껏해야 여자 비슷한 목소리로 변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런 것인지 언젠가 한번 물어 봐야지. "콘체르트도 있고 친친도 있고 칵테일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장미원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술도 팔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하하거리고 웃더
니 노!하고 내 눈에도 팔랑개비처럼 손을 흔들어 보였다. 팔랑개비 속으로 저물녘의 호수가
사양에 몸을 떨고 있는 게 비쳐 들었다. 아, 어지러워라. "알 만한 분께서 어찌 그런 싱거운
말씀을. 메이양의 작출 작품들을 말하는 거예요." "메이양, 동화에 나오는 계집아이의 이름
같군. 아니지 영락없이 술집에서 비키니를 입고 칵테일을 파는 여자의 이름이로군." "하하
하, 비키니를 입고 칵테일을 파는 여자라. 그도 제법 그럴 듯하이."
그만 가자고 말하며 나는 주섬주섬 빈 음료수 캔과 김밥 찌꺼기를 비닐 봉투에 쓸어 담았
다. 더 이상 꽃을 구경할 기분도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녀도 그쯤에서는 더
이상 까불지 않고 내 눈치를 보며 따라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
는 그녀에게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사서 내밀었다. 뭐든지 끝이 달콤해야 그럭저럭 전
체가 나쁘지 낳게 마무리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낮에 들어왔던 길을 돌아나가는데 옆에 따라오던 그녀가 갑자
기 정색을 하며 어, 아이스크림이 마술을 부리네, 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 아이
스크림이 마술을 부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옆구리에 양산을 낀 채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박람회장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 모
양의 스피커에서는 때맞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까는 노란색이
었는데 지금은 분홍색이네."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안쪽을 얼른 들여다보았다. 내것도 아까는 노란색이었는
데 지금은 속이 분홍색이었다. 휴, 아이스크림이 마술을 부린 게 아니라 그녀가 또 익살을
떤 것이었다. 요즘은 얼마든지 색깔을 여러 가지로 비벼 넣어 파는 것이다. 짐짓 화가 난 얼
굴로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이며 그만 조용하란 뜻으로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
다. 알았어요, 하고 그녀는 얼마간 아이스크림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 어린 여자를 만나면 아무래도 감이 사나워 힘이 든다. 이러쿵저러쿵 매
사에 반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나이가 많은 쪽은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다
메울 지경이다. 대개 다 그렇다.
출구를 빠져 나와 그녀와 나는 마두 전철역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박람회장 근처에서는
도무지 차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마두역까지 가서 나는 좌석버스를 타면 될 테고 그녀는
전철을 타고 우선 시내로 나가야 할 터이었다. 도로엔 그새 땅거미가 슬슬 깔리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옆을 따라오던 그녀가 또 입이 근질근질한지 그런데요, 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까 김밥 잘 드시던데요. 바윗돌이 몇 개나 들어 있던데."
그렇다면 그녀가 먹은 김밥에도 모래알이 들어 있었단 얘기다. 그런데 왜 뱉지 않고 미련
하게 다 삼켰냐고 하자 그녀는 눈을 흘기며 되레 나를 타박하고 들었다. "그쪽도 그러고 있
는데 전들 어떡해요."
어둠이 내리자 그녀의 억양이 미묘한 여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땅바닥을 깊게 내려
다보며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저를 만나 왠지 힘들어하고 있는 거 같아요. 지금 그쪽 얼굴
이 어떤 줄 아세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씌어 있는 간판처럼 보인다구요." "......" "그
런 거예요?" "암, 그렇고말고, 새벽부터 밤까지 자갈밭을 갈고 나온 황소처럼 힘들어." 그녀
가 정말요? 하더니 내게로 다가와 대뜸 손을 거머쥐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키에 비해 무척
작은 손이었다. 팔랑개비나 돌려야 어울릴 그런 손. "손 놓고 떨어져 걸어!" 나도 모르게 튀
어나온 말에 놀랐는지, 그녀가 내 손을 툭 떨어뜨리며 냉큼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그
러고 나서 마두역까지 둘이 말없이 걸어왔는데 어느결엔가 옆에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 피곤해서 그랬을 뿐인데 내 말을 섭섭하게 들은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달래느라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솜씨가 부족한 탓인지 달래도 쉬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 분을 달래고 십 분을 달래
도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어두운 한쪽 면을 보아 버린
성싶었다. 이를테면 그녀에게는 어떤 특별한 상처로 인해 어려서부터 더 이상 성장하지 못
하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이미 다른 한쪽이 제 나이 이상으로 성숙하고 비대해
져 스스로 감당을 못하고 있는 경우 말이다.
겨우 그녀를 진정시켜 양산을 받아 든 다음 코를 풀게 하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몇 번 쳐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는지 그녀는 어깨로 내 손을 툭 쳐내며 양산을 냅다
빼앗아 들었다. "그 정도 가지곤 절대 안 돼요." "그럼 뭐 초콜릿이라도 사줄까? 아니면 떡
볶이?" "위스키요."
아연한 생각이 들어 나는 그건 안 되겠는데 하고 맞서는 시늉을 했다. "그럼 같이 좌석버
스 타고 나가요. 그쪽은 수색에서 내리고 전신촌까지 가서 어제처럼 택시 타면 되잖아요."
그것까지 마다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녀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다시금 밤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두운 창 밖만 내다보고 있던 그녀가 슬그머니 나를 돌아보며 혼자인
듯 중얼거렸다. "겨우 친구가 됐나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지는 모양이네요. 그야말로 일
장춘몽이군요."
요즘 이십대들은 다 이런 모양이었다. 열한 살 차이건만 생각의 각도와 차이가 완전히 다
른 것이다. 괜히 삭막한 생각이 들어 나도 그녀처럼 의고체로 받아넘겼다. "불가에서 흔히
쓰는 회자정리란 말이 있지 않은가. 대저 영화영락도 미구에 흔적 없이 쇠하는 법인데 더군
다나 사람의 일인 다음에랴. 그 동안 차마 즐거웠어." 그러자 그녀가 울먹울먹한 소리로 되
받았다. "고작해야 어제오늘인데 그 동안은 무슨 그 동안이에요."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밤늦도록 술도 마시고 함께 비도 맞았으며 꽃박람회까지 다녀왔으니 그 동안이라고 해도 당
연 가하지. 안 그래? 사라반드." "네? 근데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건 조금 전에 생각한
건데 그대가 하얀 자전거를 타고 '오래된 정거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친구로 있어 주기로 하
지. 그대가 원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는지도 모르는데요."
그녀는 내게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아픔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운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엔 돌아오겠지. 그대도 그때까지는 돌아오도록 애써야만 되겠지." 그녀는 조
용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손수건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언젠가 나는 이 외로운 영혼의 긴 얘기를 듣게 되리라. 그리고 나 역시도
그녀에게 사무친 내 옛날을 털어놓게 되리라. "사라반드는 바흐의 '파르티타' 일번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듣는 트랙이야. 사라반드란 장미 이름을 들었을 때 그래서 난 우리가 친구
가 되리란 걸 예감하고 있었지. 그래, 지금부터는 혼자 밤길을 서성대지 않아도 돼. 그런 땐
언제든 날 찾도록 해." "그쪽도 그럴 거예요?" "때로 밤늦게 전화를 걸어 귀먹은 노인네처럼
훌쩍거릴지도 모르지. 그럴 땐 술 한잔 같이 해주겠어?" "그러믄요." "그럼 여기서 악수하고
서로 빙긋이 웃어 보는 거야."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그녀가 희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제 당사자 간 우호 조약을 맺은 거야, 하고 말했다. "다시는 손 놓
고 옆으로 떨어져 걸어! 란 말은 하지 말아요. 새벽에 얼음집에서 쫓겨난 어린 에스키모도
그때처럼 무섭고 슬프진 않을 거예요." 그러마고 나는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버스
가 수색까지 올 동안 나는 낮에 박람회장에서 보았던 분홍색 투피스의 여인을 떠올리고 있
었다. 그 여자가 주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모습이 그때 내
눈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헤어진 사람의 모습이 어째서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켜켜이
조여 드는 어둠 속의 이 불길한 기운. 어제 제주도에서 돌아와서부터 좀처럼 되맞춰지지 않
고 있는 마음의 불균형. 상기도 빈집에서 울려대고 있는 긴 전화 벨의 환청.
수색에서 나는 그녀에게 잘 가란 말을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때 그녀가 나를 올려다
보며 저 이따 밤늦게 전화해도 돼요? 실은 할말이 있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녀와 통화가 된 것은 열한시였다. 그날은 밤이 깊었는데도 그녀의 목소리가 예의 묘한
중성으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퍼뜩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나는 물병과 담배 재떨이를
가지고 침대에서 거실 소파로 나와 앉았다. 통화가 길어질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시
간 정도면 될 거예요, 라고 종합병원의 수간호사처럼 그녀가 말했다. 응, 그래 한 시간, 이라
고 무의미하게 되받으며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
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단지 낱말 풀이나 글자 맞추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요."
낱말 풀이 내지는 글자 맞추기, 이 어린 에스키모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말
이 끊긴 사이에 저쪽에서 탁!하고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담배도 피우는군." "혼자
있을 때만 피워요. 경우에 따라선 아주 많이 피우기도 하죠." "경우에 따라서라니?" "가령
글자 맞추기를 할 때 말이죠."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얼마나 많이 말인가." "이 미터 혹
은 삼 미터까지 피우죠."
두 갑 혹은 세 갑이다.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백칠십 센티미터에 사십오 킬로그램
일 수 밖에. "그쪽은 그쪽이 자기라서 모르겠지만......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나는 나라
서 모르겠지만, 계속해." "좋아요. 어제도 말했지만 먼 저쪽 어디에선가 이쪽으로 억지로 끌
려 온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아요?"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멀리 떠 있는 비행접
시와 교신을 하려고 하는데 좀처럼 그게 안되니까 마구 안달을 하고 있는 사람 같아요. 도
대체 비행접시 안에 누가 있는 거죠?" "......"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재떨이를
수화기 가까이로 옮겨 놓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혹시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 아녜요? 비행
접시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말예요." "......!" "그러니까 어제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있던 여
자 말예요."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물컵이 어디 있더라. 잠깐만 하고 나는 찬장에서 유리컵을
꺼내 와 병의 물을 따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나는 그녀에게 잠시 음악을 듣고 계속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선선히 동의하며 바흐의 사라반드를 듣고 싶다고 대꾸
해 왔다. 나는 늘 듣던 리디아 모르드코비치가 연주한 엘피를 턴테이블에 올려 놓고 앰프의
볼륨 스위치를 세 번째 눈금에 맞췄다.
연주 시간은 오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동안 나는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 화장실에서 소
변을 보고 나왔다. 그런 다음 심호흡을 하고 그녀에게. 자 미확인 비행 물체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 볼까? 라고 메마른 음성 신호를 전송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화가 나 있는 목소리
예요?" 내가 그랬던가? "마침내 나를 알아본 지구인이 나타났으니 불안해서 그렇겠지. 내일
쯤엔 미항공우주국에서 나온 사람들한테 잡혀 가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초조한 거야."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농담을 하는데도 그녀는 진지한 태도였다. "솔직히 말
하면 화가 나 있는 게 사실이야.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내가 그처럼 속속들이 파악되고 있다
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거든.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게 됐지?"
얼마간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되받았다. "화가 났다면 미안하다고
생각해요." 미안하면 미안한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또 뭔가.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
겠단 거예요." 그녀가 오히려 신경이 날카로워진 말투였다. 예민해서 그런지 까탈스럽게 느
껴지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얘기를 들어 보면 별 게
아니란 걸 금방 알 텐데요. 원래 그렇게 여유가 없는 사람이에요?"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
아 나는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건넸다. 밤늦게 누구와 다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내 쪽이었다. "좋아. 그럼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차
원에서 한 곡 더 듣고 계속할까?" "자꾸 맥이 끊기긴 하지만 그래요. 저도 화장실에 다녀오
고 물 좀 마셔야겠어요."
그녀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모베다 블루스'를 틀어 놓고 비좁은 거실을 세 바퀴
돈 다음 도로 소파에 가 앉았다. 이렇게 하면 대개는 흥분이 가라앉는 것이다. "사실은 아까
저도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를 봤어요. 아이스크림 코너 박스 앞에 서 있던 그 여자 말예
요." 여전히 목이 안 풀린 소리로 내가 되물었다. "어떻게 봤지?" "그쪽을 찾느라고 돌아다
니다가 메인 광장 계단 꼭대기에 원숭이처럼 앉아 있는 걸 봤어요. 에드벌룬 밑에 말예요.
그래서 막 거기로 올라가려는데 그쪽이 계단을 내려왔죠. 그런데 저 때문에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요. 다른 누군가를 보았던 거예요. 저는 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그쪽이 아이스크
림 코너 박스로 가고 있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죠. 거기에 그 여자가 서 있었던 거예
요." "당신을 그때 장미원에 가 있었다고 했지." 나도 모르게 당신이라는 무뚝뚝한 말이 튀
어나왔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은 없었다. "장미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랬었군.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금세 없어져 버렸어요." "뭐가 말인가?" "분홍색 옷을
입은 그 여자 말예요."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는 그쪽까지 또 놓쳐 버렸어요. 인파
에 쓸려 뒤를 따라잡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있어야죠. 결국 사 킬로미터가 넘는 호수 한 바
퀴를 돌고 나서 메인 광장으로 돌아왔더니 다시 천연덕스럽게 애드벌룬 아래 앉아 있데요."
그녀는 잔기침을 하며 오늘은 담배가 힘들다고 말했다. 말이 뚝끊겨 손댈 수 없는 침묵이
성북동과 수색 사이에 얼마간 무겁게 고여 있었다. 자정이었다. 자정을 틈타 그녀가 목소리
를 허스키로 바꿨다. "방금 하루가 지났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게 모두 어제 일이 된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됐군."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실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
부터예요. 박람회장에 다녀온 소감이랄까 뭐 그런 거 말예요. 실은 어제 당신 모습을 보고
느낀 소감을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녀가 나를 당신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묵묵히 있었다.
"당신은 뭔가 좋잖은 예감에 짓눌려 있어요. 그러나 그게 뭐라는 건 확실히 모르고 있어요.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여자에 관한 일이라는 거죠." "......" "당신은 그 때문에 불안하고 초
조한 거예요. 그 여자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고 짐작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
게 된 거죠? 역시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렇게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건가요?" 나는 듣고만 있었다. "대답해 봐요. 그렇게
거북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잖아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내 목소리는 어느덧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 여자를 미워하고 있나요? 혹시 단순히 미워
하는 정도 이상의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닌가요.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두려운
건가요? 맞아요, 이쪽에서 증오를 품고 있으면 저쪽에 심각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
해요." "......" "당신은 또 그것을 염려하고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듯 종종 이율 배반
자이니까요." "마음에 창을 품고 있으면 실제로 저쪽을 찌르게 된다고 했다." "방문을 닫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결국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무거운 침묵이 다시금 그녀와 나 사이에 모래주머니처럼 걸려 있었다. "그쪽이 지금 떨고
있다는 거 알아요?" 수화기에서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는 사위를 가만가만 돌아보며 빨갛게 담배만 죽이고 있었다. 내게 아직도 그녀를 증오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가. 아니게 아니라 그래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잘 들어요.
이런 경우엔 저쪽의 문제라는 것도 있으니까 자신만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쪽 탓만도 아닐 거예요. 그런데 우린 지금 이쪽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거잖아요." 여기까
지 말하고 나서 그녀는 숨을 몰아 쉬었다.
그새 새벽 한시였다. 그녀는 내가 걱정된다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혹시라도 내가 어떤
이에게 품고 있을지 모를 증오가 염려된다고 풀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저도 그 여자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까 봐 겁나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틀림없이 자책하게 될 거예요. 비록 이
쪽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예요.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해요."
"나로 인해 누구한테든 나쁜 일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아." "그 말은 진심이어야 해요." "진심
이야." "그럼 됐어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니군요. 다만 염려가 돼서 한 소리였는데 어
딘가 모르게 으스스하게 됐네요." "묘한 사람."
그녀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성싶었다. "뭐라고 했어요?" "박람회장에 다녀온 소감을 말
해 달라고 했어." "그게 아니잖아요." "담배 좀 줄여 피우라는 말이었어. 도대체 이 미터 삼
미터라니, 행여 앞으로라도 치마 입고 싶으면 확실히 줄여 피우든지 끊든지 해야겠어." "치
마 입는 거 포기한 지 오래됐어요." "그렇다면 웨딩 드레스도 바지로 맞춰 입을 텐가?" "아
이구 참, 웨딩 드레스라는 게 있었네. 실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놔서." "이제 박람
회에 다녀온 소감을 말하고 그만 자야지."
나는 바흐의 사라반드를 다시 작게 틀어 놓았다. "가끔 꿈을 꿔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울창한 숲이 자라고 어여쁜 동물들이 뛰어 다니는 꿈을 말예요. 그러나 그런 세상은
앞으로 오지 않을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 "이제는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나 백화점 같은
데서 아니면 무엇이든 구경할 수도 살 수도 없는 세상이에요. 우리가 어제 그런 곳에 입장
료를 내고 다녀온 거예요. 점점 무서운 속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황폐하게 변해
가고 있어요. 곧 다른 별을 찾아내 이사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거예요. 많은 곳을 돌
아다녀 봐서 전 알아요." "그래, 마침내 황폐한 세기말이지." "자요, 저도 담배나 한 대 더
피우고 그만 쉬어야겠어요." 이렇게 고즈넉이 말하고 그녀는 딸깍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꽃박람회장에 다시 왔다. 사막에서 열리고 있는 꽃잔치에 초대된 외계인 같은 모습
으로. 왜 왔던가. 나는 그날처럼 메인 광장의 계단 꼭대기 애드벌룬 아래 앉아 '베스킨라빈
스 서티원 아이스크림' 코너 박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스 뒤에 누워 있는 호수 위로 비
행기 하나가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꽃의 정거장 위로 지
금 비행기가 날아가, 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분홍색 투피스의 여인이 나타나기를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그렇게.
그날 내가 본 것은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한갓 유령이었을 것이다. 한낮의 분홍색 유령.
한데 그것이 내 눈에 보였을 때 나는 먼데서 난데없이 날아온 웬 여자의 비명을 듣고 있었
다. 그 소리를 더듬어 나는 토피어리 가든을 지나 장미원을 지나 팔각정까지 갔었다. 그러나
비명 소리는 어느결엔가 내 귀에서 사라져 있었다.
나는 광장 계단을 내려가 아이스크림 코너 박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팔각정까지 느
릿느릿 걸어가 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하는 식으로 아주 천천히. 비명이 사라진 지점을 찾
기 위해서, 귀를 활짝 열어 놓고 철제 무지개 아치 너머로 또다시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나는 장미원에 들어와 있었다. 온갖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 흰 철책으로 둘러
싸인 정원 안에. 소리는 암만해도 그쯤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장미들의 착착 접힌
귓속으로. 칵테일과 친친과 콘체르토 사라반드 속으로.
사라반드. 나는 공중 전화 부스에 들어가 사라반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가 꽃박
람회장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지?" "한 번쯤 더 그곳에 가리라 짐
작하고 있었어요. 범인은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나게 마련이잖아요." 범인? 하는 수 없이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나는 내 인생의 범인이지." "근데요. 비명이 들려 온 곳은 의외
의 장소였을지도 몰라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의외의 장소라니." "그쪽이 알고 있는
장소일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알고 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박람회장에서 배
회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거의 일 분 동
안이나 대꾸가 없었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란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한참 후 수음을 하고 난 소년의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지금 그쪽 상태를 보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저야 그 여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요." "내
상태를 보면 안다고 방금 말했지." "그렇게 다그치지 말아요. 저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으니까요." 아이스크림 코너 박스엔 그때도 본홍색 투피스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뒤편
호수의 분수에서 튀어 오르는 물줄기만 눈에 요란했다. "우선 그곳에서 빠져 나와요. 박람회
장엔 아무도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여잔 전혀 엉뚱한 장소에 있어요." "내가 알고 있
는 장소에 말이지?" "저한테 정답을 요구하진 말아요. 모든 건 그쪽한테 달려 있으니까요.
저는 단지 느낌만 가지로 말하고 있을 뿐이예요."
그러나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조심스런 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
다. "아마 오래된 장소일 거예요." "가령 '오래된 정거장' 같은 데 말인가." "사람들은 가끔
자신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장소를 찾아가잖아요. 말하자면 자기 존재가 비롯된 곳 말예요.
일테면 어머니의 자궁같은 곳."
존재가 시작된 곳, 이라고 되받다가 나도 모르게 전화에다 대고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
다. "그렇다면 거긴 달의 우물인데." 그녀가 일순 숨을 멈추더니 잠시 후 또박또박 내 말을
되풀이했다. "달, 의, 우, 물 거기가 어딘데요?" "그 여자의 존재가 비롯된 장소지."
나는 무의식중에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수화기 속에서 그녀가 숨을 몰아 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 또한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한시 바삐 공중 전화 부스에서 나와요. 그리
고 서둘러 그곳으로 가보도록 해요. 그런데 달의 우물이란 게 어디 있죠. 그런데가 있기는
한 건가요?"
어떻게 말해야 죽을지 몰라 나는 부스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튤립의 무리만 멍하니 바라보
고 있었다. 튤립 위에 눈이 움푹 파인 내 면상이 또한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서 나오라고 재차 그녀가 속삭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암호를 전달받은 스파이처럼 같은 표
정을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다리 위에서
"구십칠 고양세계꽃박람회"가 끝나고 나서 며칠 뒤에 나는 주미의 어머니를 만났다. 만나
서 그녀로부터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모 기업체 기
획조정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
다. 그것도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의한 것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자살. 그것은 지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황망한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또한 다른 이들로 하
여금 자기 죽음에의 예감에 몰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사람들과 맺고 있
던 인연의 생생한 끈이 불현듯 뚝 하고 끊어졌을 때 우리는 과연 무얼 보게 되는가. 하늘에
떠 있는 낮달? 그야말로 낡은 잡지의 색 바랜 표지? 오래벽장에 처박아 두었던 빈 술병 혹
은 한 뼘쯤 남은 술? 봄날 아침 거울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검은 머리 속의 흰 머리칼
몇 올? 정전이 된 아무도 없는 방에서 멈춰지고 있는 선풍기의 있는 선풍기의 먼지 낀 날
개?
그녀와 나는 여의도 엠비씨 건물 앞에서 만나 한강고수부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죽
었다는 소식을 그녀가 내게 전한 것은 마포대교가 보이는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곧바로 파
란 불리 들어왔으므로 나는 남들이 보기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
녀는 뒤미처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면서 나는 넋이 빠진 소리고 뇌까리
고 있었다. "그렇군, 결국 누군가 죽었다는 말이로군."
길을 다 건너와서야 나는 아랫도리를 후들후들 떨며 뒤따라온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보도 블록 위에 올라서서 어두운 얼굴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고
얼굴엔 두터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 달리 모자도 스카프도 없었다.
꽃박람회가 끝나던 날 밤늦게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누가 죽었
다느니 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었다. 내가 제주도에 가 있는 동안 그녀는 여러 번 내게
전화를 했었다고 말했다. 왜냐고 물어도 그녀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며칠 후에 한번
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닥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는 방
송국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애써 피하더라고 다시 부딪히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때문
이었다.
그 다음날 나는 방송국으로부터 곧 촬영에 들어가는 삼부작 미니시리즈의 출연 제의를 받
았다. 약 보름 간의 해외 로케가 끼여 있는 드라마였다. 공백이 계속된 탓에 내심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으므로 나는 출연에 응하기로 했다.
그녀와 나는 계단에 따라 어둠이 내리고 있는 한강고수부지로 내려갔다. 색동 터번을 두
른 유람선이 잠실 쪽에서 여의도 선착장으로 떠내려오고 있었다. 왕의 주검을 실은 장송선
인 듯. 방송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으므로 주미와 나는 자주 이곳에 와서 밤의 유람선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배에 올라 잠실에 가서 석촌 호수나 롯데 호텔 근처를
쏘다니기도 했다. 그러한 일 년 뒤 나는 예기찮게도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같은 장송에 와
있었다. 주미는 지금 제주도에 있다고 그녀가 알려 주었다.
제주도. "외가가 있는 우도에 들어가 있어요. 저도 며칠 전에야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렇
다면 내가 모슬포에 있는 동안 그녀는 우도에 있었다는 말이다. 맙소사. 그때 나는 성산포까
지 갔었고 안개만 아니었더라면 그곳에 들어가 볼 생각이 아니었던가.
선착장에서 올라온 불빛에 흔들리며 그녀가 소리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머릿속
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바람에 쫓겨 어둠 속에서 이내이내 사라지고 있
었다. "주미한테도 우도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며 그녀는 옆에서 내 얼
굴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나는 제주도에 다녀온 사실은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꽃박람회장
에서 보았던 분홍색 투피스의 여인은 역시 허깨비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주미도 알고 있습니까?" 얼마 전 주미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 여행도 가지 못한
채 자살한 그 남자. "차마 얘기 못하겠더군요." "어쨌든 주미도 알아야 할 게 아닙니까." "서
울로 돌아오면 때를 봐서 말할 생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얘기했다가는 또 무슨 일이 일어
날 지 알 수 없습니다. 남창우 씨도 알고 있겠지만 아직 문제가 끝난 게 아닙니다." 그 말을
듣자 또다시 가슴 한켠으로 차디찬 불안이 엄습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와도 상관없단 수
없는 사람이 얼마 전에 죽었고 이제는 주미에게도 그 비슷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이었
다.
그녀와 나는 선착장까지 내려갔다가 마포대교로 방향을 바꿔 결어갔다. 무릎 아래도 오월
하순의 밤바람이 불어 가고 있었다. 강둑에는 젊은 남녀들이 나와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멀리 한강철교 1호선 전철이 철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있
었다. 사방이 죽음의 실루엣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나는 선착장으로 막 떠나려는 배에 뛰어
올라 어딘가로 빠져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신분증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지만 오히려 그
것 때문에 이렇듯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남창우 씨가 그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또 그래서 찾아
온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이 진심이라고 해도 이제 그로부터 빠져 나가기는 힘들게 됐다. 그
녀가 내게 그의 죽음을 알려 온 순간 어쩔 수 없이 나도 그 사건에 연루돼 버린 것이다.
"여러모로 안타깝게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일을 걱정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주미의 일이 걱정입니다. 주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뭘 어째야 한단 말인가. "경우가 아닌 건 알지만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무얼 어떻게 말인가. "우리가 그 사람을 죽게 했어요. 여럿이 함께 말입니다." 우리, 라는 말
에 나는 금세 신경이 파들하게 곤두섰다. 내가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과 상대가 공범이 아니
냐고 물어 오는 것과는 엄연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다리 밑에 와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강물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강물 위에서 오렌지빛으로 일렁이고 있
었다. 나는 한 발자국 뒤에 멀뚱히 서서 그녀의 굽은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말씀을 잘못 드린 건가요? 그런 모양이군요."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가 나를 빗대
서 중얼거렸다. "듣기에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그렇죠? 누가 이런 일에 끼여들고 싶겠
어요."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못을 박아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강물에 시선을 던져둔
채 듣고 있었다. "각자 경우가 다른 일입니다." "그쪽엔 책임이 없다는 뜻이군요. 물론 없습
니다. 하지만 남창우씨도 조만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면 퍽이나 놀라실 겁니다." "협박하고 계신 겁니까?" "그렇게 느끼신다면 남창우 씨는
이미 덫에 걸려든 셈입니다." "그게 누가 놓은 덫입니까."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시
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 "남창우 씨 마음에 주미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다는 걸 잘 압
니다. 저는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러니 거래를 하잔 말인가요?" 그녀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늘어놓았다. "안된 얘기지만 죽은 사람은 이미 어
쩔 수 없게 돼버린 겁니다. 하지만 남창우 씨가 주미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않는 한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무슨 뜻인지 대충 아시겠죠."
그녀가 몸을 돌려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압니다. 미움이란 억지로 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어떠한 계기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빠져 나가야 하는 거죠." 그쯤에서 나는 영락
없이 올가미에 걸려든 기분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계기를 찾아보면 어떻겠
습니까? 방심하고 있다 자칫 때를 놓치게 될까 염려돼서 하는 소립니다." 나는 계단을 따라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그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뒤따라 올
라온 그녀의 표정이 묵지근하게 내 뒤를 잡아 끌고 있었다. 그녀는 서두는 기색 없이 내 옆
으로 다가와 잠시 걸으면서 얘기를 더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와 수갑
한 짝씩을 나눠 찬 심정으로 마포대교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한시 바삐 여의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아까부터 지레 마음이 눌려 있던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주미와 이 다리를 건넌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메마른 소리
고 되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건너서 홍대 앞까지 갔죠. 남창우 씨와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만나 온 사람처럼 느껴지더란 얘기를 하더군요." 아무리 낯선 사
람이라도 다리를 함께 건너고 나면 둘 사이의 거리가 문득 좁혀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돌
이켜보면 둘 다 잘못 건너간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건너갔죠. 그러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
게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남창우 씨가 그 앞에서 많이 망설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험의 무게 말입니다. 주미는 그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미는 정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깟 위험이 문제 되
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 나이에 품게 되는 정념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란 아니, 남자란 미지에 현혹돼 있을 나이니까요."
거기서 나는 그 동안 궁금했던 사실 하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저와의 관계를 왜 말
리지 않으셨죠? 주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짐작했던
대로 답은 이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수수께끼를 풀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 어떤 태도도 취
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다리가 꽤 높군요." 높기도 하고 보기보다 꽤 길기도
한 다리였다. 난간에 대고 허리를 구부린 채 그녀가 에둘러서 대꾸해 왔다. "남창우 씨를 만
나고 돌아온 날 전 주미의 얼굴에서 광휘라는 걸 보았습니다. 그애를 키우면서 처음 발견한
빛입니다."
광휘라니. "여자의 얼굴에 떠 있는 오로라 말입니다. 그건 한 여자에게 있어서 일생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는 나타나지 않는 그야말로 눈부신 정념의 빛입니다. 남자들은 그게 무엇
인지 모릅니다."
오로라. "거기에 깃들인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막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미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젊어서 그런 경험을 했긴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념이든 광휘든 오로라든 그게 한 죽음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말이었다.
또한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만으로 작용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평소의 내 믿음이었
다. 삶이란 단지 사랑만을 하기 위해 잠시 올라탔다 내리는 유람선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누추함 속에 깃들여 있는 생의 거룩한 비의들은 너무 하찮아지는 것이다. 저 어둔
강물 속엔 이 순간에도 얼마나 격한 생의 소용돌이가 굽이치며 먼 바다로 흘러가고 있는가.
다리의 중간께에 와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쯤에서 이야기를 맺고 싶어서였다.
"주미에게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장에 제가 도울 일이 없
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저에게 주미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고 그래서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면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주미의 옆에 모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른 사람들도 매순간 고통을 받으며 저마다 몸을 낮춰 그것과 외
롭게 맞서고 삽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언뜻 차가운 검은 그
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게 엿보였다. 마음이 착잡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말
을 잃고 서 있는 그녀를 거기 세워 두고 나는 마저 다리를 건너갔다. 얼마를 걷다가 뒤가
허룩해 돌아보니 그녀는 난간에 허리를 구부린 채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위험하
다, 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 있었다. 마포로 들
어가는 다리의 끝에 와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새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목을 길게 빼고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으나 다리로 밀려들어오는 차들만 눈에 가득했다. 여의도로 도로
건너간 것일까. 그랬겠지. 설마, 하면서도 나는 막상 마포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는 수 없이 나는 여의도 쪽으로 되돌아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더
니 이윽고 나는 다리 위를 마구 뛰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위협적으로 오른
쪽 옆구리께를 스치고 지나가며 사정없이 경적을 울려댔다.
그때 나는 왜 쫓기는 닭처럼 다리 위를 뒤뚱거리며 뛰고 있었던걸까. 그녀는 다리가 시작
되는 지점에서 이쪽을 보고 모로 비껴 서 있었다. 내가 마포 쪽에서 뛰어오는 것을 태연하
게 지켜보면서. 육상코치처럼 손목시계까지 내려다보면서. 내가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서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었다. "돌아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남창우 씨 자신
도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된 겁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때였다. "남창우 씨도 주미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미련
이나 애정 때문이 아니라 독한 미움 때문에 말입니다."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내며 그
녀의 무표정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덫에 걸려든 것일까. 그
렇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하죠. 하지만 주미가 돌아오기 전에 저를 꼭 다시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남창우 씨가 먼저
연락을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욱 좋겠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때는 제가 알
아서 정하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밀어내기 위해 우정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는 야릇한 웃
음을 웃으며, 하지만 주미가 돌아오기 전이라고 되풀이해서 못을 박았다. "그래도 때는 제가
정합니다. 또한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선은 스스로 계기라는 걸 찾아보도록 할 겁니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눌러 물었다. "주미가 남창우 씨한테 그렇게 몹쓸 짓을 저질렀나
요?" 대답하기 싫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
나 죽었지 않습니까. 어디 남녀간의 일이 늘 토요일 밤의 축제 같은 겁니까. 주미는 남의 손
에 쥐어진 풍선을 터뜨리고 다니는 일로 그깟 사랑을 일삼고 살아온 겁니다. 나이가 어리다
곤 하지만 주미는 세상을 무료로 개장하고 있는 백화점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백화점이란 말입니까?" "자기 포장을 대신해 주고 있는 곳 말입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
다." "저는 또 기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역시 한번 기만을 저지른 사람은 일삼아
그런 일을 벌이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빌미로 인생에 대한 사치와 허영을 남에
게서 채우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 대가로 아까운 청년 하나가 결국 목
숨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휘청, 하더니 난간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몸을 가눴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송국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밤의 파라솔
그녀는 편의점 안에서 쪽빛 에이프런을 앞에 두르고 손님에게 담배를 팔고 있었다. 나는 안
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놓여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유리창을 통해 그녀를 지켜보고 있
었다. 손님이 나가자 그녀는 간이 식대 위에 흩어져 있던 빈 라면 그릇과 종이컵을 치우고
온수통 밑을 닦았다. 그런 다음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또 얼른 일어
나 물건을 팔고 거스름돈을 건네 주었다.
일 년에 삼 개월 동안 여행을 하기 위해 그녀는 저렇듯 밤늦게 편의점이나 백화점이나 화
장품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언제까지 그럴는지는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녀 자
신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생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나
자기 삶을 살아가는 고유한 방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해서 자꾸 옆
으로 쳐다보면 오히려 이쪽이 사팔뜨기라 되기 십상이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 야무지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둘레를 넓혀 가
는 일은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코스를 그녀는 스스로
택해 밟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새벽 한시가 막 지나고 있을 참에 그녀가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밖으로
호들갑스럽게 뛰어나왔다. "아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엔 반가워하더니 이내
걱정하는 낯빛이 되어 그녀가 팔짱을 끼고 앞에 와 앉았다. "물구나무서기 하다 배가 고파
밤참 먹으로 나왔지." "거짓말 말아요." "천만에, 어떤 땐 박쥐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기도 하
는걸. 하루 종일 말이야."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녀가 주의 깊게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
니. "피고가 극구 진실을 밝히지 않겠다면 당장 폐정 조치하겠어요." "폐정이라니." "파라솔
을 철거해 버리겠다구요. 땅땅!" "가끔은 모른 척 넘어가도 되잖아." "그치만 그쪽 얼굴을
보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걸요." "내 얼굴이 어떤데." "솔직히 말해요?" 웬일인지 그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어째서 그런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는 거죠? 도대체 무슨 일
이 있는 건데요."
민감한 사람이었다. 나도 덩달아 몸에서 더운 피가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얼 말해야 될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무서운 얼굴은 처음 봐요. 어디서 드라큘라를 만나
고 왔어요?" 나는 퀭한 눈으로 이따금씩 도로를 질주해 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가지고 나왔다. "그 쪽빛 에이프런 되게 잘 어울리는데. 쪽
빛이 아니라 울트라 마린 블루인가? 화가들 얘기를 들으면 그건 코발트 블루와 달리 물감으
로는 재현해 낼 수 없는 상상의 색깔이라는데 아디서 용케도 구했군. 뿐만 아니라 오늘따라
제법 신통하고 예뻐 보여." 그녀는 물끄러미 내 이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도 아닌 이마
를. "사라반드. 어쩌면 그대가 생이라는 걸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몰라. 순수해서
자신한테 상처를 자주 받긴 하지만 그걸 피하거나 숨기려 들진 않잖아.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혼자 있을때
만 피운다는 담배를 그녀는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꺼내 솜씨 좋게 성냥불을 붙였다. 나는 드
라이브인 시어터의 맨 앞쪽에 자동차를 대고 그녀가 등장한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
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영화에서나 봄 직한 화면 포즈를 발견해내고 잠시나마 감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제풀에 지쳐 본론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죠." 나도 담배
에 불을 붙였다. "그런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란 걸 알아요. 틀림없이
중대한 일이 발생한 거예요."
담뱃재가 손가락 사이로 툭 떨어져 내렸다. 이렇듯 미처 손쓸 사이 없이 맥이 툭 끊기는
듯한, 그래서 만상이 절멸하는 듯한 순간이 온몸으로 밀려들 때가 있다. 그야말로 잠시 잠깐
죽음의 그림자가 눈썹 밑을 획 핥고 지나가는 순간 말이다. 그래, 언젠가는 내게도 절멸의
때가 불현듯 등 두드리며 찾아올 터인데 나는 어디를 이토록 헤매고 다니는 것일까. "그쪽
을 안심시켜 줬으면 좋겠는데요." 사람을 안심시킨다는 것은 말만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
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일에 매우 서툰 사람이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가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대학을 휴학하고 나서 저는 한 달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좀처럼
밖에 나가기가 싫었고 또 갈 데도 없었죠. 그러다 어느날 체코를 여행하고 온 친구한테 전
화를 받았어요. 그애는 프라하의 어느 낡은 대리석 집 앞에 앉아 있던 늙은 맹인에 대해 얘
기해 주더군요. 옆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개도 눈 한 짝을
잃었더라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어요. 그러고 나
서 아, 이제는 떠나야겠다! 라고 생각했죠. 언제까지 저 또한 눈먼 사람처럼 거미줄이 내려
온 낡은 집 앞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 "그날로 짐을 꾸리고 다음날
마루 밑에서 신발을 꺼내 신는데 그새 거미줄이 하얗게 덮여 있었어요. 마음 아파라, 기특해
라, 글세 거미가 신발 속에다 집을 지은 거예요. 차마 그걸 신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버
리려고 전에 처박아 두었던 헌 신발을 꺼내 신고 저는 집을 떠났죠."
오래 전에 나도 헌 신발을 신고 집을 떠나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을 파라
솔 아래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열한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 춥게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파리드골 공항에 내렸는데 막상 갈 데가 없었어요. 아는 사람도 물론 하나 없었죠. 그래서
저는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고 파리 시내로 나갔죠. 그때가 현지 시각으로 오후 일곱시쯤이
었을 거예요. 그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엔 을씨년스런 비까지 내리고 있었죠. 전 배낭
을 메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쳐 여행 안내 책자에 나오는 '프로코프'라는 카페로 찾아갔어
요. 비 맞은 거미꼴을 하고 말예요. 그리고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모르니까 영어로 더듬더듬
스테이크를 시켜 놓고 맥주를 마셨죠. '프로코프'는 천육백팔십육년 문을 연 세계 최초의 카
페였어요. 무대에서는 뚱뚱한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죠. 아주 구슬픈 소리로 말예
요. 얼마나 사방이 외롭던지요.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와 앉아 있는 거지? 라는 생각만 자꾸
몰려왔어요. 흑인 가수의 노래는 밤늦도록 계속됐죠. 카페 안에 이방인은 그녀와 저밖엔 없
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결국 먼 아프리카에서 왔을 테고 저는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바로 그날 파리에 도착한 낯선 사람이었죠."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가 이렇듯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지 몰랐지만 나는 골똘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밤의 그림자가 슬픈 피에로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조금
의 나쁜 생각도 없어 보이는 깨끗한 이마였다. "그 여자가 제게 다가온 것은 밤 열한시시쯤
이었어요. 그 큰 카페엔 그때 예닐곱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죠." "그때 누가 다가왔단 말이
지?" 나는 그녀의 이마를 쏘아보며 물었다. 슬쩍 만져보고 싶었지만 손자국이 남을까 봐 그
럴 수가 없었다. 저처럼 순결해 보이는 사람의 이마를 어디 가서 또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뚱뚱한 흑인 가수 말예요. 그녀는 저에게 멈칫멈칫 다가와 식탁 옆에 멈춰 서더니 노
래를 부르기 시작했죠. 그 유명한 'Coming through the Rye'라는 노래 말예요. 아시겠지만
그건 채 이분도 안 되는 짧은 노래예요." 일 분 삼십 초쯤 될 터이다. 천구백육십사년 마리
안 앤더슨이 미국에서 녹음한 모노 엘피를 나도 한 장 가지고 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저는 그만 주책없이 울고 말았죠. 흑인 가수는 카페에 들어올 때부
터 저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갈 데가 없어 혼자 떨고 앉아 있다는 것도 알
고 있었던 거예요." 그 해 늦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만나 한쪽은 노
래부르고 다른 한쪽은 울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한 외로움이 다른 외로움의 얼굴을 알아보
고. "그건 일종의 구원이었어요. 울고 났더니 그때부터 차츰 안심이 되더군요. 두려운 마음
도 외로움도 조용히 사라져 버리고 주위가 은은한 밝은 빛으로 변하는 거였어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이 보이고 접시에 부딪히는 나이프와 포크 소리가 들리고 유리창 밖으로 개를 끌
고 지나가는 멋진 신사의 모습도 보였어요. 어때요, 이해하겠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고개를 주억거렸
다. "그리고 이제는 안심이 돼요?"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듯 긴 얘기를 하고 있
었던 것이다. 편의점으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손님 둘이 들어가자 그녀는 잠깐만요,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거리에 하나 둘씩 꺼져 가는 네온 사인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며 주미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말들을 곱씹고 있었다.
그녀가 캔맥주 두 개를 들고 파라솔 밑으로 돌아왔다. 자정에 교대하기로 돼 있는 아르바
이트 학생이 아직 오지 않는다며 그녀는 벌써 열 시간째 근무를 하고 있다고 투덜거렸다.
"하루만 일해도 다리가 퉁퉁 부어 올라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고 자야 해요. 자다 보면
목발 두 개가 툭 하고 방바닥으로 떨어져요."
어느덧 눈두덩에 피곤이 검게 맺혀 있었다. 그녀는 캔맥주의 뚜껑 꼭지를 따서 그중 하나
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예요?" 글세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혹
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인가. "자 어서 말해 봐
요. 키 큰 아기."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나는 편의점의 빈 카운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한 남자가 죽었어. 말하자면 나와도 상관이 있는 사람이야." 그녀는 별반응을 보이지
않고 커다란 곰인형처럼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아직 스물아홉 살밖에 안 된 청년이 자
살했어. 어쩌면 예감하고 있던 일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거야. 비록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지만 말이야." "......" "그리고 나 지금, 내가 굉장히 두려워." 그때서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바로 에취! 하고 밭은기침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이 또 생길
지도 모른다는 거야. 만약에 그렇게 되면 이번엔 나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아니
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난감한 일이로군요, 하고 그녀가
남저음의 목청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한가지 더..... 그 동안은 잘 모르고 있었는데 내 마음
속에 어떤 사람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걸 버리려고 애를 쓰기는 하겠
지만 잘될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야." "어려운 얘기군요." "숨기고 싶지만 이것이 지
금의 내 모습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주인을 잃은 개 한 마리가
편의점 앞 가로등 주변을 아까부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전에도 얘기했죠, 그건 그쪽만의 문제가 아닐 거예요. 문제란 늘
상대적이게 마련이에요. 또 세상엔 분명 용서가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예요. 어떤 잘못이든
무조건 다 용서해야 한다면 그건 용서를 해야 하는 쪽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가 되는 거예
요. 그러니 괜히 혼자 함정을 파고들어갈 생각은 말아요. 그 역시 위험한 생각이에요."
말을 주고받을수록 답답한 느낌만 더해 갔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통조림처럼 돼버린 거
지? "그럴수록 자신에게 마구 대들지 말고 차근차근 따져 봐요. 생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급적 움직임을 줄이고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 우선 미움이란 걸 지워 내
도록 노력해 봐요. 문제는 그게 안 되고 있다는 거잖아요." "......" "그런데다 해여 다른 사람
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쯤에선 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용서가 되는 일이기도 할 텐데요. 자기
마음에다 대고 되풀이해서 잘 물어 봐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결국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건 한갓 우려
에서 하는 소린데 무모한 책임까지 느끼려 들지는 말아요. 막무가내로 아무데나 끼여들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의 둘레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어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에요."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는 것이다. 한참을 잊
고 있다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니 가로등 밑의 개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그녀와 교대할 아르바이트 학생이 온 것은 새벽 두시 삼십분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하게 그에게 인수 인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왜 두 시간 삼십 분이나 늦
게 왔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 거죠? 마치 세시에 올 사람이 삼십 분 일찍 온
것처럼 말예요." "미안해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말하면 의례적인 걸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내일쯤에는 전후 사정을 말하고 아마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을까."
그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제발 그래 주면 좋겠는데요, 라고 그새 목이 쉰 소리로 중얼거
렸다. 그녀는 일주일 전부터 편의점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삼 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가을
학기엔 복학할 거냐고 묻자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긴
하지만 지금의 자기 상태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제 주위의 친구들을
봐요. 그중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 친구
들은 열심히 일해서 은행마다 적금 통장을 만들고 또 일요일이면 남편과 함께 할인 매장에
가서 쇼핑도 하고 공원이나 야외로 소풍을 나가기도해요. 어떤 땐 그들이 행복해 보이는 것
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왠지 그런 모습들이 낯설어 보여요. 솔직히 말하면 어딘가 모르
게 위태위태해 보여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삶의 스타일에 자신들을 솜씨 좋게 끼워 맞춰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고층 아파트의 네모난 창들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예요.
그래서 밤에 불 꺼진 아파트촌을 지날 때면 자주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요.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도 역시 말예요. 그런데도 악다구니를 쓰며 그 속에 섞이지 못해 다들 안달이잖
아요. 뭐가 사람들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을 걸까요?" "추방에 대한 두려움이겠지." "추방
요?" "요즘은 개인의 삶이라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시스템에 속해 있잖아. 그러니까 거기에
같이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소외된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시스템이라는 건 한군데
에러가 나면 전체가 고장이잖아. 그래서 서로를 감시하고 어떤 위협적인 요소가 발견되면
일시에 단합들을 해서 가차없이 밖으로 몰아내지. 평소에는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얼굴도 모
른 채 살면서 말이야." "착잡한 얘기로군." "더 씁쓸한 건 이제는 사랑도 그런 식으로들 해.
문에 붙어 있는 어안 렌즈 구멍을 통해 상대를 살피면서 유리한 판단이 설 때만 슬쩍 문을
열어 주지. 절대 손해는 안 보겠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게 단지 시스템의 문제 때문일까
요?"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그녀는 심야 좌석버스까지 놓쳐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야겠다며 혼자 가는 게 무섭다고
했다. 외국을 여행할 때는 모르겠는데 되레 한국에 들어오면 택시 타는 일이 무섭다며 그녀
는 파란 눈의 외국인처럼 말했다. 바래다 주겠다고 하며 나는 승강장 쪽으로 그녀와 나란히
걸어갔다. "그럼 너무 늦지 않아요?" "그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좋겠는데." 청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비뚜름하게 내 옆을 따라오던 그녀가 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머
리칼이 목덜미 뒤로 쏟아져 내리며 언뜻 그녀의 하얀 목이 드러났다. 옆에서 보니 기린처럼
긴 목이었다. "뭔데요?" "목이 그렇게 긴 줄은 미처 몰랐네." 그녀가 네? 하며 미간을 잔뜩
오므렸다. "네 이마를 보면 유년의 향수가 떠오른다구. 또한 여로의 지친 향수." "무슨 부탁
이 그렇게 에로틱해요? 혹시." "혹시라니?" "저한테 엉큼한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
죠?"
이번에는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누가 먼저 잘못 말했든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
의 이마가 문득 내 얼굴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불 꺼진 가로등처럼 서 있었다. 그녀도 나를 마주보고 가만히 서 있
었다. 그런 채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일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다. 옆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불들은 모두 꺼져 있었다.
그대로 있기가 거북스러웠던지 그녀가 키스해 본 적 있어요? 라고 쩍 마른 소리로 물어
왔다. 물론 그런 적이 있다고 하려다, 나는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그
녀가 소리 없이 잠깐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서 석류 냄새가 묻어 났다. 웃다가, 그녀는 눈을
감고 아기 기린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다 살며시 키스하고 뒤로 얼른 물러섰다.
택시가 올 때까지 그녀와 나는 서로 모르는 이들처럼 나란히 서서 도로 건너편의 어둠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택시가 비행접시처럼 다가와 무릎 앞에 멈췄다. 그녀는 나를 돌아
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택시에 올라타며 이따가 전화할게요, 라고 외쳤다. 나는 택시의 꽁무
니를 눈으로 좇으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벽 세시 삼십분에 지나도록 그녀에게선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벌써 집에 들어가고
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은근히 걱정이 됐지만 나는 소파에 앉아 삼십 분을 더 기다렸다. 오
디오의 턴테이블 위에는 그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아까부터 마리안 앤더슨이 올려져 있었다.
네시 정각이 되자 나는 마침내 불안해져서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세 번
울리고 저쪽에서 송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고 있었는가. 어쨌든 무사히 들어가
기는 한 모양이었다. "왜 이제야 전화해요. 벌써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예요." 언
뜻 야릇한 느낌이 몰려와 나는 그냥 그렇게 됐다고 얼버무렸다. "실은 그쪽에서 걸어 온 전
화를 바도 싶었어요." 그 말을 듣자 아까 택시 승강장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녀
가 그 일을 무겁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어 나는 마음 한편으로 염려가 됐다. "천만에요.
그 나이면 고작 키스뿐만이 아닐 텐데 서슴지 않고 거짓말을 하며 입술을 내미는 남자를 제
가 조금이라도 순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텐데 역시 영리한 여자였다. "하지만 부탁은 들어주겠어요. 어쨌든 대
가는 미리 받은 셈이니까요." 대가. 좀 지나치다 싶어 나도 한마디 질러 넣었다. "그대는 처
음이 아닌 듯 아주아주 능숙하더군."
민감한 그녀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흥!" "좋아, 그럼 마리안 앤더슨부터 듣고 시작하지.
파리 카페의 그 뚱뚱한 흑인 여가수를 떠올려 보면서 말이야."
좋아요, 하며 그녀는 귀를 열었다고 준비 신호를 보내 왔다. 곧 부드러운 음의 켜로 영혼
의 가장 여린 곳을 깊이 어루만져 주는 마리안 앤더슨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그 검은 목소리는 파리로 첫 여행을 떠났던 한 아시아 여행자의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가 오늘 서울의 새벽에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노래가 끝난 뒤 그녀는 여운을 삭이려는지
담배에 불을 붙여야겠다고 하며 수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다시 들었다. "근사한 목
소리군요. 밤의 푸른 해저에 흰수염 고래가 신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느낌이에요." 그녀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것일까. 밤의 푸른 해저. 흰수염 고래.
자, 이제 그 부탁이란 걸 해봐요, 라고 그녀가 새벽 네시 삼십분의 목소리로 말해 왔다.
비가 오려는지 창문으로 습한 바람이 거실 바닥으로 낮게 깔려 들고 있었다. 어려운 부탁이
라고 나는 창문에 주름져 내리는 비 그림자를 훔쳐보며 속삭였다. 편의점 앞의 파라솔 밑에
앉아 그녀와 맥주를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잠깐, 키스말고 더 이상은 안 돼요, 라며 그녀가 또 너스레를 떨었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하는지 나도 몰라." "그럼 불능이란 말예요? 잘 모르겠지만 그럼 문제가 심각한 거 아녜
요?" 부탁은커녕 이러다간 통화를 그만둬야 할 판이었다. 우멍한 얼굴로 유리창에 점점이
묻어 나는 빗방울을 흘겨보며 나는 얼마간 말을 잃고 있었다.
"화났어요?" "불이 난 게 아니라 비가 와 또한 그 정도를 가지고 화를 내지는 않지." 그녀
가 잠옷 바람에 전화통을 들고 창문으로 다가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파라솔이 비에 젖고
있겠군요. 새벽 네시 반에 말예요." 제법 쓸쓸해진 투로 그녀가 낮게 소곤거렸다. "그렇게
외롭진 않아. 우리가 아직 거기 앉아 있는걸. 밤의 파라솔 밑에 말이야. 아이구, 옆으로 자꾸
빗물이 튀어 들어오는군. 궁둥이가 그새 척척해." "후후, 그렇군요." "물론 그렇지." "그나마
가끔 멋있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참 다행이에요. 그럴 때마다 황금빛 마스크 속에
서 들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아요." "그대도 가끔 그래. 빼빼 마른 몸매에 볼륨이
있나 그렇다고 치열이 고른가. 어쩌다 어여쁜 소리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삼진 아웃이
지." "삼진 아웃. 그렇군요. 잠실 야구장에도 비가 오고 있겠군요. 거긴 정말 아무도 없을 텐
데요." "그렇군, 밤의 야구장처럼 적막한 장소도 별로 없겠군." "우리 야구장 스탠드로 자리
를 옮겨 얘기할까요? 황금 마스크. 그런 다음 밤의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파라솔을 빼들고 그녀와 함께 스탠드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두 마리의 밤 짐승이 비 내리는 야구장 스탠드 꼭대기에 각자 전화통을 붙들고 앉아 있
다.
흩뿌려 들어오는 비에 베란다에 깔아 놓은 녹색 카펫이 젖고 있었다. 창문을 닫아야 했지
만 나는 멀뚱하게 검푸르게 색이 변해 가는 카펫을 바라보고 있었다.
"편의점이란 데가 어떤 데지?" 그녀는 얼른 숨소리를 낮추고 고슴도치처럼 몸을 도사렸
다. 조심스럽게 나는 덧붙였다. "가령 거기서 일하는 사람한테도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의가 뒤따르는 곳인가?" 애써 말을 고른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효과적으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사방을 더듬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도대체 그게 문
법에 맞는 말예요?"
그렇군, 내가 지팡이를 들고 사방을 더듬거리고 있군. "참고로 말하자면 저 그런 식의 말
투 싫어해요. 단서를 두고 하는 식의 찜찜한 말투 말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봐요. 황금
마스크답게 말예요."
나는 슬그머니 황금빛 마스크를 주워 썼다. 파라솔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멀리서 혹은 가
까이에서 사이사이 들려 오고 있었다. "내일부터 나한테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안 될까?
물론 그렇게 되면 편의점은 그만둬야겠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예요?" 짐작했던 대로 그
녀는 뒤로 물러나며 방어적으로 되받았다. 잘못 들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화가 난 건가?" 얼마간 생각한 후에 그녀가 대꾸해 왔다. "불이 난 게 아니라 비가 오고
있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방금 확인해 봤는데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천만
다행이군." "다시 얘기해 봐요. 이제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아요." "내가 뭘 잘못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마저 끝을 내도록 하지."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강 선생이 '빠삐 커뮤니케이션'에서 하고 있는 일을 들은 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런 업체가 있어요? 실제로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
요?" "쉽게 말해 시스템을 점검해 주는 일이지." "어느 정도 느낌이 오긴 하네요. 하지만 그
렇게 복잡한 일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전문 업체에 맡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텐데요."
"왠지 거기다 의뢰하고 싶지는 않군.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과 그쪽에서 하는 일이 꼭 들어
맞는 것도 아니야. 나한테 필요한 건 내 얘기를 들어 주고 그때그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야 해. 사무적인 사람과 책상에 마주앉아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커다란 항아리 속에 빠져 버린 것 같아. 아무리 발버둥쳐도 밖으로 나가지지가 않아." "아까
파라솔 밑에 앉아 얘기했던 그 죽은 사람과 관련된 일인가요?" "우린 지금도 파라솔 밑에
앉아 있지. 장소만 잠깐 야구장 스탠드로 옮겼지." 아 참, 그렇군요, 하며 그녀가 잠에서 깨
어난 소리로 되받았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역시 그 얘기로군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그래서 누군가 응대가 가능한 사람한테 내 얘기를 하
다 보면 그게 뭔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은 거야. 그런데다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곧 촬영
스케줄 때문에 파리로 가야 해. 갔다 오면 뭔가 늦어져 있을 거란 예감이 들어."
그러나 그녀는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다섯시였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초조
하게 그녀의 응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가 음악 좀 듣고 계속하면 안 될까요? 라고 침
착하게 전해 왔다. "마리안 앤더슨?" "아뇨." "바흐?" 역시 아니라고 그녀가 말했다. "'죽음
과 소녀' 있어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이럴 때 하필 그런 곡을 듣겠다는 걸까. 음악이 흘러 나오는 동
안 나는 베란다에 나가 팔짱을 끼고 새벽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날이 곧 밝아
올 터이었다.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의 연주가 다 끝나 갈 때쯤 나는 소파로 돌아왔다. "피곤
할 텐데 잠을 못 자게 해서 미안해. 빼빼로 공주." "키스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인 줄 미
처 몰랐어요. 내 입술에 그쪽 입술이 와서 머문 시간은 고작해야 영점오초밖에는 안 됐을
텐데요. 그런데다 대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구요."
그녀는 이쪽으로 끌려들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저쪽으로 가져 가는 것 같았
다. 나도 거기에 맞출 밖에 없었다. "그러길래 늘 조심해야지. 알겠지만 '죽음과 소녀'는 뭉
크의 그림 제목이기도 해. 그림 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지. '사랑하는 딸들이여, 정
욕은 곧 죽음의 키스일지니 조신할지어다.'" "그쪽이 그만큼 굉장하지는 않았어요." 말씨름
을 해봐야 번번이 몰리는 건 이쪽이었다.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솔직하게 대
답해야만 해요." "그래야겠지." "한 번 더 약속해요." "약속하지." "정말 그 여자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단지 두려움을 모면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요?" "우선 납
득하고 싶다고 아까 내가 말했지." "끝내 납득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할 작정인데요? 그리고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거죠? 그게 안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진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떤 상황을 뜻하는 거지 실제로 말로 설명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고 보니 이제야 내가 알고 싶은 게 뭔가를 깨달았군." "뭔데요?" "진
실이라고 방금 그대가 말했지."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묵음의 시간이 길어져 내가 여보세요? 라고 불러
보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죽은 듯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답도 없이 찰칵!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나수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바가 없지 않았다. 후회스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받아 온 대본이나 뒤적거리며 나는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주미의 어머니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주미가 돌아왔는지 궁금해 전
화를 걸고자 하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기도 했지만 갈고리처럼 마음을 붙잡는 게 있어 쉽사
리 그래지지가 않았다.
캐스팅이 끝나고 수정된 대본이 나오고 방송국에 모여 리딩 작업에 들어갈 무렵부터 나는
차츰 불안한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 피디가 구내 매점으로 나를 불러 이
쪽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며 괜찮은 거요? 라고 은근히 중간 점검을 하기도 했다. 괜찮다
고 대답을 했지만 이런 상태로 막상 카메라 앞에 설 생각을 하니 지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이번 미니 시리즈의 주연으로 발탁된 것도 사실은 소속 기획사가 방송국에
손을 쓴 일이었다. 나로서는 이러고저러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방송
국이든 기획사든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는 게 이쪽의 현실인 것이다.
방송국에서 동료 연기자들과 마무리 리딩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 나는 나
수연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으로 찾아갔다. 아무래도 전에 내가 한 말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해 그거라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밤 아홉시쯤이 된 시각이었고 전날과 마찬가지
로 그녀는 파란 에이프런을 두르고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책장을 덮고 자리
에서 일어나다 낼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오랜만이야."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출석부처럼 들어 보이며 나는 짐짓 웃는 낯을 했다.
카운터에 놓인 책표지를 내려다보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돌의 정원'이란 소설이었다. 언젠
가 내가 그녀에게 권한 책이었다. 제주 중문에 있는 '여미지'란 식물원에 가면 돌의 정원이
있다는 그런 얘기를 하며. "왜 그렇게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해요?"
손님이 없어 그녀와 나는 전에 앉았던 파라솔 밑으로 갔다. 막상 할말이 없었던지 그녀는
어색하게 농담부터 건넸다. "황금 마스크는 어디다 벗어 두고 왔어요?" "그건 밤에 그대와
통화할 때만 꺼내 쓰지." 하긴 그렇군요, 하며 그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밤이었다. 이제 여름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 앓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얼
굴엔 빛이 걷혀 있었다.
"며칠 아팠어요. 그래서 여기도 며칠 결근했구요." 꽉 찬 행주처럼 마른 소리였다. 그녀는
실밥처럼 풀어진 눈으로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더운 밤이군요. 속
이 두엄처럼 뜨겁게 썩고 있어요. 그래서 종일 노르드곶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거기 있으면
적어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을 텐데요."
생각보단 상태가 심각했다. 마스카라를 칠한 듯 눈자위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이도 그새 두어 살이나 더 들어 보였다. 나는 까만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그녀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주지 않겠어?" 그녀가 헬쓱한 얼굴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렇듯 맥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었다. "얘기를 해도 잘 모를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긴 게 사실이지만 설명하기는 무척 곤란해
요."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있다고 그녀가 전에 말했었다. "말하자면 은빛 자전거가
며칠 전부터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요. 늘 눈에 띄는 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번엔 아무
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요. 이제 전 무얼 타고 그 먼 곳들을 여행하죠?" 나는 손수건을 꺼
내 그녀의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찍어냈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는 눈을 감고 그대
로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누가 잠깐 끌고 갔는지 모르지만 곧
제자리에 갖다 놓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돌연 허리를 구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십 분 이상을
길게 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우리가 입을 맞춘
건 잘못한 일이었어요. 사실은 그쪽과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은빛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
단 말예요. 알겠어요? 어떻게든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놓도록 해요." 그리고 그녀는 십 분 이
상을 또 파라솔 아래 둥근 철판에 엎드려 울었다. 말이 되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러겠다고 약속하며 간신히 그녀를 달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아직 그런 거 할 준비가
안 돼 있나 봐요. 제가 이렇게 멍청한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스물네 살이나 된 여자가
왜 이렇게 병신 같은 거죠?"
병신 같은 게 아니라 영혼이 하얗고 투명해서 스스로 또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에야 나는 어렴풋이 그녀가 가슴에 늘 품고 다니는 은빛 자전거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
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그녀가 반쪽인 얼굴로 파라솔 밖을 비스듬히 내다보았다.
"곧 열대야가 시작되려나 봐요. 전 더운 게 너무 싫은데요. 어서 길가에 코스모스 점점이 피
는 날들이 왔으면 좋겠어요. 자전거를 몰고 굽이굽이 그 길을 따라 바다로 가게요."
열대야의 코스모스 사이에는 아직 많은 시간과 숱한 불확정선의 순간들이 가로놓여 있었
다. 그때까지 골방에서 줄곧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잔다 해도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예기
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래, 저것 봐, 밤의 나뭇가지 위에 숨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집채만한 짐승의 그림
자.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검은 입 혹은 빨갛게 늘어진 혀. 삶이란 매순간 그 얼마나 사방이
부주의한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앞에서 늘 어린아이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
다.
그 때 유성 하나가 긴 꼬리를 끌며 대각선으로 도회의 공제선(빌딩 지붕선) 아래로 떨어
져 내렸다. 아주 금세의 일이어서 그녀에게 얘기해 줄 틈조차 없었다. 두통이 심한지 양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꼭꼭 누르고 있던 그녀는 그 찰나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한 성
싶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방금 하늘에 별똥별이 나타났다 사라졌
어." 그녀는 미처 내 말을 못 알아듣고 이마를 찡그렸다. "뭐라고 했어요?" "열대야의 바다
에 방금 별이 하나 떨어졌어. 흰수염 고래의 등에 말이야. 혹시 조금 전에 등이 잠깐 따갑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눈 깊숙한 데를 들여다보았다. 가을 물빛인 양 더없이 맑고
투명한 눈이었다. 그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흰수염 고래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전후 사
정을 말하자 그녀는 그제야 입을 멍하니 벌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군요. 안타깝
게도 일대의 장관을 놓쳐 버리고 말았군요. 하지만 바로 앞에서 대신 봐준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녀는 서운한 빛이 역력했다. "그래, 코스모스는
우주란 뜻이지. 우린 지금껏 우주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어. 파라솔 밑에 말이야." "그럴
땐 정말 황금 마스크를 쓰고 중얼거리는 거 같아요." 그럴 리야 없지만 나는 잠시나마 기분
이 좋아졌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런 말을 듣고 살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근사한 인생일 텐데.
그녀가 가져다 준 영화 잡지를 건성으로 뒤적이며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파라솔의 흰 의
자에 앉아 있었다. 비라도 한 줄기 쏟아져 주었으면 좋을 성싶은 무더운 밤이었다. 그녀가
왜 퇴근 시간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며 나는 열한시쯤 그녀가 가져 온 컵라
면까지 비웠다.
자정이 지나 그녀와 나는 함께 밤길을 걸었다. 삼십 분쯤 말없이 걸어갔을 때 그녀가 허
리 밑으로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 왔다. 어쩐지 걱정이 됐지만 나는 그대로 있었다. "천구백
구십칠년 열대야의 서울에서 가장 근사한 곳은 어딘지 생각해 봐요. 그리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거기서 함께 다정하게 얘기하다 새벽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
결 깨끗해진 거예요."
이 밤 서울의 어디에 근사한 장소가 있단 말인가. 한강 선착장,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시
청 분수대가 보이는 덕수궁 앞, 프라자 호텔 이십이층 스카이라운지, 세종문화회관 계단, 남
산의 서울타워, 아니면 잠실의 석촌 호수? 하지만 뭐 그리 근사하기까지 한 장소들은 아니
었다. 서울처럼 마땅히 갈 데가 없는 도시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새벽 세시 정도까지 영
업을 하는 술집 정도일 터이다. 맥이 쭉빠진 소리로 그녀가 그래도 세종문화회관 계단이 그
중 낫겠네요, 하며 광화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죠?" 새삼스런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생뚱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한 일 년은 된 듯싶어요.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게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예요. 그치 않아요?" "손이야 만난 지 이틀 만에
냉큼 잡았으니 따질 바는 아니고 지금은 여름이고 우리가 만난 건 봄이었으니 굳이 짧다고
만 할 수는 없겠지." "그렇게 됐나요?" "그렇게 됐고 기억에 남을 순간들도 많았지. 세월이
길다고 해서 추억이 많아지는 법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근사하게 만나 온 셈이지." "그렇
게 생각해요?" "그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푸른 분필 가루처럼 부드럽게 바닥으로 가라앉
아. 누구든 빼빼로 공주 옆에 있으면 틀림없이 행복한 추억에의 예감에 사로잡히게 될 거
야."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정말요? 하고 되물었다. "암, 그렇고말고. 그대는 십 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참으로 기분 좋은 사람이야." "제가 지금까지 들은 말 가장 마음에 드는 소
리네요. 고마워요. 빈말이라도 애써 그렇게 얘기해 줘서."
그녀와 나는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옆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가 앉았다. 분수대의 불은 이
미 꺼져 있었지만 등나무 줄기가 말려 올라간 둥그런 벤치 주변엔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
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저마다 심각한 얼굴로 무슨 얘기들을 그리 열심히 나누고 있는지. 나
는 공중 전화 부스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두 개 꺼내 와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 주
었다. 그녀는 뚜껑을 따지 않고 그것을 한참이나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저는 따뜻한 느낌
보다 차가운 느낌이 좋아요. 사람도 그래요. 솔직히 따뜻해 보이는 사람보다 냉정한 사람한
테 마음이 더 끌려요. 억지스런 말인지 모르지만 냉정한 사람이 어쩐지 자기한테도 강한 사
람 같고 그런 사람이 결국 상대한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말이 맞는
건가요?" "일 리가 있는 말이로군." "그쪽을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냉
정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한데요."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자신을 어떤 사람으
로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냉정하지만 그만큼 강하지는 못해.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
는 편이지. 그대도 이미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았나." "키스 말예요?" "뭐 키스랄 것까지
는 없었지. 하지만 나를 만나 부분적으로 상태가 악화된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아닌게아니
라 이쯤에서 그만 해어질까 늘 생각하곤 하지." 놀랐는지 그녀가 고개를 홱 내게로 돌렸다.
그러고는 색색 거친 숨소리를 내뱉다 이런 말을 던져 왔다. "진심이에요?" "더 이상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 때문에 내가 또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 "제가 그쪽을
힘들게 했나요?" "굳이 따지자면 그 반대겠지. 그대와 나는 관계의 선이 어딘가 분명치가
않아." "그렇다고 제가 연인이 돼달란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대가 나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만 같아.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풀어서 분명하게 얘기해 봐요." "이쯤이면 그쪽도 알아
들었을 텐데 그만 하지."
기나긴 침묵이 그녀와 나 사이에 끼어 앉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닦아 냈다. 그런 채로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가 캔커피를 쥐고 있던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왔
다. 그녀의 손에서 차디찬 느낌이 전해져 왔다. 달래는 말투로 그녀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
다. "왜, 제가 그쪽을 좋아하면 안 되나요?" "설명하기가 까다롭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
해. 나는 지금 생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어. 비무장 지대 같은 곳에 말이야. 사방에 지뢰
가 잔뜩 매설돼 있어서 누가 들어오게 되면 언제 어디서 터질는지 나도 몰라. 그러니 그 위
험한 곳에 발을 들여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진심을 얘기하고 있는 거니까 새겨들어."
"기껏 어린애의 손에 솜사탕을 쥐어 줬다가 도로 빼앗아 가는 건 뭐예요.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 사람 관계를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가 있어요. 그쪽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에요?
누가 그쪽하고 호텔이라도 가자고 그랬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저를 두고 줄곧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단 건가요?"
나는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이를 두지 않고 그녀가 맵게 달
겨들었다. "그래요. 저도 가끔 희한한 감정에 빠질 때가 있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호텔에
함께 가는 꿈도 꿔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거기엔 서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누굴 정말 숙맥이나 바
보로 알아요?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뭐든지 그쪽에서 하자는 대로 다 따라할 줄 알았어요?"
"그만 하지." "아뇨, 이참에 아닌게아니라 관계의 선을 선명히 해야겠어요. 기껏해야 성처받
은 짐승처럼 밤이면 혼자 몸부림치는 주제에 아무한테나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늘 상처의 주인공인 것처럼 굴고 다니는 것도 사실을 흉해 보여요. 그게 다 자업자득이란
걸 자신도 뻔히 알면서 말해요." "그만 하라고 내가 말했지. "세련된 사람이라면 아픈 곳도
스스로 꿰맬 줄 아는 사람이어야해요." "......" "그리고 관계의 선이라도 것도 나이가 몇 살
더 먹은 그쪽에서 먼저 노력해서 분명히 해줘야 되는 거잖아요. 그것도 못해서 고작 어린
여자에게 한다는 말이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거예요? 도대체 만난 지 얼마나 됐고 서로에
대해서 뭘 안다구요. 왜 그렇게 사람이 옹졸하고 앞뒤가 꽉꽉 막혀 있어요." "계속할 텐가?"
"물론이어요.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이 제 귀에는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요?" "계속해."
"나와 계속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오늘 밤 호텔로 가야한다고 협박하는 소리로 들
려요. 내지는 투정하는 소리처럼 들린단 말예요. 남자들 왜 보통 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좋
게 얘기해도 그쪽은 사람 사귈 줄을 모르는 지진아예요." "이제 다 됐어?" "나머지는 생각나
는 대로 나중에 할게요." "나머지가 또 있단 말인가?" 흥분해서 마구 떠들어댄 다음 제풀에
기가 꺾인 표정으로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섭섭해서 한 소리니까 전부 다 그렇다고 생
각하진 말구요." "대개가 다 맞는 소리야. 아주 용한 점쟁이 같아. 언제 그렇게 사주팔자를
배웠지? 그래, 이제 속이 좀 시원해졌어?"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기웃거렸다. 이미 찬
기운이 가셨을텐데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캔커피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사람을 사귈 줄
모르는 지진아였군. 그래, 이제는 좀 세련되질 필요가 있겠지. 늘 전후 좌우의 거리를 살피
고 때로 균형을 맞추기도 하면서 말이야." "왜 사람들은 누굴 사랑하면 상대한테 그 말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걸까요? 외로워서 그래요?"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랑할 줄 몰라서겠
지." "사람에게는 나쁘고 어리석은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알면서도 아니라고 끝내 우
기죠. 왜 그래요?" "나쁘고 어리석어서라고 그대가 방금 말했지." "우리 공부 잘하는 학생들
같아요." "하나를 배우면 부디 둘을 알아야 할 텐데. 그렇지만 산다는 일이 어디 매번 그런
가?" "그래도 서로 솔직하면 점점 배워지는 거예요."
분수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자리를 뜨고 가로등 하나만이 공중 전화 부스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와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구 떠들고 나니 이상하게 그쪽한테
말려든 것 같아요. 맞아요?" "아시다시피 난 그렇게 세련되고 똑똑한 사람이 못 돼." "솔직
히 그 동안 좀 힘들었어요. 이상한 얘기를 하나 하자면 그동안 애정 영화를 수십 편이나 보
았어요. 특히 배드신 장면이 나오면 눈알에 힘을 주고 말이죠. 지저분하게 말예요." "사춘기
에 접어든 걸 축하해. 성숙한 여인이 되려면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일이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그녀는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섹스 말예요."
세종로를 아래에 두고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계단에 죽 늘
어놓은 귀리며 옥수수며 해바라기 들이 때맞춰 불어 가는 한 줄기 바람에 일제히 강당 복도
쪽으로 쓸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무르춤하게 서서 나는 뒤따라 내려오던 그녀를 돌아보았
다.
"요 며칠 꿈자리가 되게 뒤숭숭해요."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내처 계단을 짚어 내
려갔다. 그녀가 얼른 바투 따라 내려오며 내 팔소매 끝을 붙잡았다. "저 어떻게 하죠? 이러
다 결국 참지를 못해 여자들이 업소에 취직하나 보죠?" 어째 농으로 하는 소리 같지만도 않
았다. 하긴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얼마든지 성에 무지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속히 결혼하는 거겠지. 그럼 그런 문제는 저절
로 해결될 테니까. 또 업소에 취직할 필요도 없겠지. 물론 바지 차림으론 취직도 불가능하고
말이야." "저는 독신주의자란 말예요." "그럼 참고 살아야겠지." "그 수밖엔 없나요? 그게 지
금 저한테 솔직히 말해 주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남녀가 그러는 것도 꽤나 멋있는 일 같은
데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알몸으로 그러는 거 보니까 실은 예뻐 보이던데요. 그치 않아요?"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이면 독신주의자로 살기는 이미 틀려 먹은거야." "하지만 전 홀연히
독신으로 깨끗하게 살 건데요." "그렇다면 속히 정욕을 버려 . 그것은 곧 죽음의 키스일테
니." "농담 말아요." "아니면 과일만 따먹고 사는 연애주의자가 되든지." "그쪽은 어때요? 어
쨌든 지금은 독신이잖아요. 독신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닐 거잖아요." "기억
조차 희미해." "참을 만해요? 가끔 힘들 텐데요." "누구나 힘들게 살고 있잖아." "그럼 옛날
엔 어땠어요. 멋있었어요? 황금빛 마스크를 쓰고 했나요? 눈빛이 섬세한 사람이라 제법 그
럴듯한 텐데요." 그만 물어 봐 달라고 하며 나는 그녀를 꾸짖는 시늉을 했다. 한동안 아무
소리가 없어 돌아보니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한 계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내려서 그녀가 따라 내려오길 기다렸다. 손바닥으로 보리의 머리 끝을
쓸며 그녀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왔다. 그녀가 세종로 한가운데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저이도 무척 덥겠군요. 무거운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 있으니 말
예요."
새벽 세시의 그녀는 열대야의 밤에 길가에 단 한 송이 피어 있는 코스모스 같았다. 청바
지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흰 목을 아래로 구부리고 랜드로바 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그녀
가 반벙어리 소리로 들어 왔다. "그건 그렇구요.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늦었으니 이제
속히 집으로들 돌아가야지." "여기서 영영 헤어지는 건가요?" "그건 내일쯤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그렇게 말할 땐 여지없이 냉정해 보여요." "어차피 우리는 모두가 종이갑 속에 누
워 있는 크레파스처럼 저마다 색깔들이 다른 남남이 아닌가." "그래도 잘 비비면 더 좋은
색이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무튼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관계의 종점이 어딘지를
알게 되겠지."
관계의 종점, 이라고 그녀가 입엣말로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서 도둑들처럼 소리 없이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자동 응답기에 제주도에서 걸려 온 철하의 전화 녹음이 돼 있었다. 그는
얼마간 상기된 소리로 시월의 첫 번째 토요일에 송해란과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 소식을 남
겨 놓고 있었다. 전화 끝에다가 그는 피렌체에 있는 은빈에게도 오늘 소식을 전했다고 덧붙
이고 있었다.
캄캄한 외로움에 몸을 떨며 나는 여섯시까지 소파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살아온 내 서
른다섯 해를 묵연히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피렌체로 전화를 넣어 볼까 망설이다 결국 그
만두고 말았다. 그쪽은 여기보다 하루 늦은 밤 열한시일 터였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직도 어둔 방구석에 앉아 종일 거울을 들여다보
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그러면 눈이 멀어 버린다고 나는 말했었지. 그래, 나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긴 나무 다리를 매일 건너고 있는 것만 같아. 발 밑에서 삐걱이는 위태로
운 소리를 들으며. 하지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다리를 건너야만 하지. 조금만 지체하면 곧
바로 무너져 내려 영영 건너갈 수 없으니 말이야. 그래, 우리는 내남없이 모두가 그렇게 아
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걸 알아. 돌아보지 마. 뒤에서 둔중하게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
이더라도 태연히 앞만 보고 있는 거요.
베란다의 불을 켜다
긴긴 열대야의 시작이었다. 어둠이 내려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를 않고 문을 열어
놓으면 어디선가 늘 사람들이 모여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 촬영은 보름 앞으로 다
가와 있었다. 이주 후면 나는 촬영 팀과 당분간 파리에 가 있어야 할 터이었다. 기웃거리지
말고 앞만 보고 태연히 걸어, 그래야만 해, 라고 아침마다 중얼거리며 나는 방송국과 집만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마음 한구석에선 차가운 불안의 켜가 두텁게 쌓여 가
고 있었다.
그래, 내가 방금 지나온 다리에서 누군가 떨어져 죽었지. 그리고 또 누군가 뒤따가 건너오
고 있는 중이야. 들리잖아, 저 나무 판자의 삐걱이는 소리. 자주 헛디디는 그대 발자국 소리.
그러던 어느 날 일찍 뜻밖에도 나수연이 내 집으로 찾아왔다. 그 동안 연락이 없던 터였
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헤어지고 나서 약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려 열어 보니
마치 졸업식장에서 금방 돌아온 모습을 한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는 장비 다발까
리 들려 있었다.
"느닷없이 아침 일찍 웬일이지?" 그녀도 제 꼴이 서먹한지 얼굴을 붉히며 대꾸는 못하고
있다가 들어가도 돼요? 라며 안을 기웃거렸다. "나야 상관없지만 과년한 처녀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이렇듯 신새벽부터 발을 들여놔도 되겠나." "덫을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엉뚱한 소릴 해요?" 툭 내 어깨는 밀치며 그녀는 구두를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조금
전엔 몰랐는데 다른 한 손에는 제과점에서 들고 온 종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아무려나 무
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투피스 정장의 윗도리를 벗어 거실 옷걸이에 걸고는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보낸 사람처럼 집안 이곳 저곳을 요모조모 살폈다. "제법 깔끔하게 해
놓고 사네요. 주방도 그럭저럭 밥은 해먹을 수 있겠고 음반과 책도 의외로 많아요. 게다가
화분이 스무 개나 되구요. 나중에 어떤 여자가 들어올지 모르지만 빈손으로 와도 당장 살림
은 문제없겠어요." "행여 그런 일이 생기겠나. 나 또한 홀연히 깨끗하게 늙고 싶어." "그쪽은
독신으로 살 사람이 못 돼요. 두고 봐요. 한쪽 귀로 그 말을 흘려 들으며 나는 브람스를 틀
어 놓고 화병을 꺼내 꽃을 꽂고 주방에서 커피를 끊였다. "그런데 어쩐 일이지. 어디 이민이
라도 가나?"
그녀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내가 읽다 놓은 드라마 대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근데
뭘 해야 하죠? 첫 출근이라 어리둥절하네요."
첫 출근. 나는 즉각적인 반응을 미루고 커피잔을 들고 그녀가 있는 소파 맞은편에 가 앉
았다.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동안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었으므로 걸리는 바가 없지 않아
서였다. 그렇다면 편의점은 그만두고 온 것인가. 어쨌든 나는 그것부터 물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구해지지 않아 며칠 더 나가 봐야 해요." "괜찮겠어?" "뭐가요?" "얼마간 집에서 쉰
다음 가을 학기에 복학하는 게 좋지 않은가하는 말이야."
그녀는 돌연 표정을 흐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한테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
아요." 그렇게 말할 때는 아주 단호한 데가 있었다. 자신의 일에 관해서는 누구의 간섭이나
참견 없니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겠다는 태도였다.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내 해외 로케 일
정에 대해 다시 물었고 그간에 별다른 일이 없었냐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
다. "그대 가르침대로 가능한 움직임을 줄이고 익숙한 길만 왕래하고 있는 중이야." "여전히
항아리 속이로군요. 근데 거기서 뭐 먹고 살았어요." "실은 까먹을 대로 다 까먹었지. 그래,
나는 언제나 잔고가 바닥난 통장이야. 빈 항아리 속의 빈 통장." 그녀는 배싯거리면서 커피
잔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정색을 하고 아까 출근 운운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마음만 바뀌었
다면 얘기하세요. 그래야 저도 주변을 수습하잖아요." "이쪽 정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그러나 또 그쪽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누가 취직시켜 준다는데 딱히 마
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업종 변경을 해보는 것도 경험상 나쁜 일 같지 않구요. 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녜요." "그렇다면 신원 보증부터 해야겠는데." "이력서와 주민등
록등본 따위가 필요하단 말인가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마땅히 알고 있어
야겠지." 때로 그녀를 보호할 일이 생기거나 대신 책임을 질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이쯤
은 전부터 알아 두려고 했었다. 어쨌든 이쪽이 어른인 것이다.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안
심이 됐는지 데면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진 중학교 때 돌아가셨구요. 어머니는 강남에서 웨
딩숍을 해요. 그리고 오빠가 하나 있는데 작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프랑스에 유학 중
예요." 오빠가 있었군. "전공은?" "국제정치학. 거북처럼 엉거주춤하게 생긴 사람이지만 한편
완벽주의자죠. 파리에 가게 되면 연락해서 한번 만나 보세요. 뭔가 통하는 바가 있을 거예
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군." "대학 부설 미술관 관장을 하셨는데 느닷없이 간경화로
돌아가셨죠. 이상한 건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평생 대리석에 빠져 있던
분이었죠. 생전의 반은 아마 유럽에서 보내셨을 걸요. 그리고 나머지 반을 다행히 석굴암에
서 보내셨구요. 이제 됐어요?"
더 이상 물어 보면 어쩐지 화를 낼 태세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만 준수하면 돼요." "그야 물론이지. 이 주일 동안 하루에 세
시간. 대가는 편의점에서 한 달 일한 보수. 장소는 그쪽이 정하도록 해." "토요일과 일요일
은 휴무로 하고 보수는 제 실직 수당을 고려해서 곱으로 해요. 그리고 장소는 여러모로 생
각해 봤는데 여기로 하는 게 좋겠어요. 커피숍이나 술집 같은 데서 세 시간씩이나 앉아 있
을 수는 없는 노릇예요. 그 대신 제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에어컨을 끄고 베란다의 불을
켜놓도록 해요. 퇴근 시간까지 말예요. 됐어요?" "이 찌는 더위에 에어컨을 꺼놓으면 그쪽도
괴로울 텐데." "천 에어컨 알레르기예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하지만 피부가 예민한 사람들한테는 그런 증상도 있다는 얘기
다.
"인정하지." "의외로 면접이 간단하게 끝났네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나는 식탁 위에 놓
인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나 자신도
잊고 있던 사실이다.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생일은 물론이고 크리스마스나 기타 공휴
일에 대하여 불감증에 가까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요일 구분이 없이 살다 보니 저절로 그렇
게 된 것일 터이다. 그렇긴 해도 아무튼 고마운 일이었다. 내 주소도, 전화 번호도, 생일도
"티비 저널" 따위의 잡지를 보고 알아낸 것이었다.
케이크를 몇 쪽 집어먹고 그녀는 한 시간 만에 돌아갔다. 내일부터 저녁 일곱시에 와서
열시까지 내 얘기를 들어 주기로 하고. 편의점이 정리되는 대로 그녀는 낮 시간 동안 어머
니 일을 도울 생각이라고 했다. 나 또한 촬영 스케줄에 따라 매일 방송국에 나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저녁마다 내 집으로 오게 됐다. 그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그렇게 끊어
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이어 놓으면서, 그녀가 오던 날 나는 집안을 대
청소하고 거실의 가구 배치를 약간 바꿔 놓았다. 그리고 가까운 백화점에 가서 과일과 음료
수와 브람스의 씨디를 몇 장 더 사다 놓았다.
다음날 저녁 여섯시 오십분에 그녀가 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전날 입고 왔던
감색 투피스 정장에 핸드백 차림이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 그녀를 보니 전날보다 더욱 서
먹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 너머로 베란다를 바라본 다음 구두를 벗고 올라와 소파에
앉았다. 저녁을 먹었는가 묻자 그녀는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왔다고 했다. 맞선을 보러
나온 듯한 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긴장을 풀도록 낮게 음악을 틀어 놓았다.
베란다 창틀로 기웃기웃 저녁 햇살이 각도를 틀며 지나가고 있는 게 엿보였다. "참 제가
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쩌다 이런 일을 다 하게 됐죠? 촌색시처럼 얌전히 앉아 포터블
녹음기처럼 일방적으로 그쪽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다니요." 눈여겨보니 그야말로 회사에
첫 출근한 사원처럼 엷은 화장에 물방울 스카프까지 목에 두르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
는다고 제멋대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지. 표정을 풀고 전에 하던 식으로 자연스럽게 대해
봐." "그게 그렇게 돼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어디 마음대로 들락거리겠어요?"
듣고 보니 사정이 딱했다. 뾰로통하게 있다가 그녀가 판 다 돌아갔어요, 라며 자리에서 일
어나 모차르트를 뒤집에 놓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탤런트가 사는 집이란 말이죠?" 어지간
히도 할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탤런트와 직업이 뭔지 얘기 좀 해봐요. 가령 그게 그쪽한
테 어울리는 일인가 하는 따위 말예요." "늘 사람 많은 정거장의 대합실에 앉아 있는 기분
이지. 모두가 나를 쳐다보지만 정작 나에 대해 알거나 질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
까 실제적인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가능해. 관계를 맺고 싶으면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
해야 해. 화면에서 보여주던 그래도 말이야. 그래서 본의 아니게 늘 가면을 쓴 채로 사람을
만나게 되지.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내가 껍데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지. 그게 대중 사회에서 광대들이 겪어야만 하는 소외감의 정체야."
이번에는 그녀가 딱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시 바삐 익명의 생활인으로 돌아
가서 실제적인 삶을 살고 싶어. 이 일을 하면서는 도대체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늘 어설
픈 세트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늘 낯선 장소에 늘 어둠침침하고 텅 빈 공간에."
무릎 위에 있던 핸드백을 탁자에 올려 놓고 그녀가 손으로 비스듬히 턱을 굈다. 머리칼이
왼쪽 뺨을 가리며 쏟아져 내렸다. 거실이 점점 밝아지는 걸로 봐서 어둠이 내리고 있음이었
다. 놀이터에서 들려 오던 아이들의 소리가 귀에서 사라져 있었다.
바삐 밤이 오고 그리하여 다시 열대야의 시작이었다. 에어컨을 켤 수 없었으므로 거실은
무더웠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그녀는 스카프와 윗도리를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흰
블라우스 안으로 그녀의 납작한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순간 그녀도 당황한 듯했지만 곧 천
연덕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일부터는 하고 올게요. 가슴이 워낙 작은데다 그걸 하고 있
으면 갑갑해서 숨통이 조여 들거든요." "복장 문제야 그쪽이 알아서 해야겠지. 참고로 말하
면 굳이 정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마른기침을 하고 나서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바로 그런 텅 빈 느낌 때문에 가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나 장소에 발을 들여놓게
되지. 거의 몽유의 상태로 어딘가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게 돼." "그게 어딘가요?" "공사
중인 빌딩의 옥상. 또 전에 한번 갔다 인상적으로 기억해 둔, 하늘색 타일로 된 깨끗한 술집
화장실. 거기에 들어가면 생화가 있고 방향제가 고 바삭바삭 마른 큰 수건이 걸려 있어서
마치 아늑한 침실 같거든." "술집이라면 여자들이 나오는 그런 데는 말하는 거겠군요." "그
런 경우도 있지..... 사람 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지." "저번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솔직하게 얘
기하지 않았던 거네요." "그 여자들과 잠도 자나요?" 진지한 태도로 물어 오는 말이었으므
로 정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 그런 적두 한두 번 있었지." "그렇군요. 그러
기도 하는군요." "몽유의 연장에서 그러기도 하지. 요컨대 마취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을 때
가 있어. 오히려 그런 상태에서 언뜻언뜻 존재감이 몰려오는 때가 있어. 물론 그게 곧바로
함정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야." "그 존재감이란 게 뭔데요?" "저쪽에 있던 내가
설레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느낌. 그런 순간이면 투명한 내 모습이 보여.
그래. 나의 소리. 나의 노래." "그렇다면 생으로 힘겨운 꿈을 꿀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사람과
만나면 되잖아요. 이를테면 사랑 말예요." "능동적인 관계가 좀처럼 불가능하다고 아까 말했
지. 그런데다 술집에 있는 여자들이 다 나쁜 것도 아니야. 그야말로 절차 없이 존재와 존재
로 직접 만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런 데 있는 여자들은 구태여 뭘 숨기거나 거추장
스럽게 치장을 하려 들지는 않거든. 거기서 비롯되는 낯선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해와 연
민이란 게 서로 감지될 때가 있어. 바닥을 본 사람들은 알아. 생의 반은 한갓 포즈라는
걸." "알고 보니 그쪽 전문가로군요."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야. 나쁘지 않으면 사람은 다 같은 거야."
그녀의 눈 밑이 리트머스 시험지인 양 붉은빛으로 젖어 오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사랑은 아니잖아요." "사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과 상대를 솜씨 좋게 속이는 하나
의 의식에 불과해. 하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권태로워 살지 못하지." "심각하
네요." "문제는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 그러니까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내가 서
로 별개로 나누어져 있어 그쯤 되면 내가 의식하는 상대도 그렇게 보이게 마련이지. 그런
상태에서 소통은 역시 불가능하고 말이야." "아주 불가능하단 말인가요?" "부분적으로야 가
능하겠지. 순간적으로 서로에게 주어지는 각도의 겹침 속에서 그 사각의 틈바구니에서" "믿
지 않는구요. 사랑을." "그래, 사랑이군요. 그토록 지독한 자기에의 배려 말이여. 그걸 두고
차라리 찰나적 공조라고 하면 어떨까?"
어안이벙벙해진 얼굴로 그녀가 물컵을 집어 들었다. "문제가 있긴 있군요." "사랑이란 어
느 순간을 통해 잠깐 제 살을 드러내고 도로 가면을 뒤집어쓰지." "큰일이에요. 그쪽." "생각
해 봐 계약이나 공조에 의하지 않고는 타인끼리 만나지는지. 우리는 점점 타인에 대한 절대
적인 믿음을 상실해 가고 있는 중이야." 그녀는 말을 잃고 있다가 아기처럼 작은 소리로 헛
기침을 했다. 도로를 질주해 가는 자동차 소리가 귀에 들려 오고 있었다. 여덟시. 그녀는 앞
으로 두 시간을 더 내 말을 들어야 했다. 모차르트 최후의 교향곡 '사십일번'이 끝났다. 그새
지친 기색으로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씻고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어수선
하고 힘겨운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실은 머리가 굉장히 아파요. 평소에 편두통 증세가
있거든요." "편두통 증세가 있군." "때로는 아주 심해요." "때로 아주 심하군." 돌연 그녀가
발작적으로 쏘아붙였다. "그 복제 인간 같은 말투 고치면 안 돼요? 그러잖아도 속이 메슥거
려 죽겠는데 말예요." 나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그럴 땐 그쪽이 어떤 줄 알아요? 마치 피
가 한 방울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단 말예요. 사람이 왜 그렇게 차가워요." 무의식중에 차갑
군, 이라고 되받으려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베란다로 나갔다. 검은 솥 안에 뚜껑을 닫고
들어앉아 있는 듯한 무더운 밤이었다. 답답한 느낌이 욱죄 들어 나는 소파에 머리를 쥐고
앉아 있는 나수연에게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녀는 미동 없이 있다
맥없이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전에 주미의 어머니를 만났던 '페드라'라는 카페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근처에 마땅
히 갈 만한 데가 없었던 것이다. 저녁을 먹자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
이스 티를 들고 앉아 그녀는 흐린 눈으로 어두운 거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오나드 코헨
의 '수잔'이 들려 오고 잇는 사이 나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록색 스타킹을 신은 여자들이 오늘도 거리에 나와 서 있겠네.
그녀가 입을 연 건 찻잔이 비워지고 엔야의 '아프리카의 폭풍'으로 노래가 막 바뀌었을 때
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겠죠? 라며 그녀가 성냥개비를 똑똑 부러뜨리며 고개를 숙
였다. 그때까지 초록색 종아리를 떠올리고 있다가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별별 생각이
다 겹치고 왔어요." "힘들면 그만둬도 좋아. 사업자 등록 번호도 없는 회사에 취직했다고 어
디 가서 말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게 아녜요. 사람을
어느 선에서 만나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누굴 만나면 그 사람을 깊이 알고
싶거든요. 그런데 너무 깊숙이 상대를 안다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렇다면 과연 얼마쯤의 거리를 두고 사람들을 만나야죠. 그리고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것이 상대의 진짜 모습인 거죠?
그건 나로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요. 마음 같아선 당장 내일부터 오
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앞으로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이지." "그런데 여기서 그만두면 또 안 될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 대한 답을
당분간 찾지 못할 게 뻔해요. 그러니 저는 내일도 와야만 하겠고 또 무슨 얘기를 들어야 할
지 긴장하고 있어야 할 거예요. 그러니 너무 사용자처럼 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몰
랐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절 수 없는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쪽에서
도와 주고 배려해 줘요. 저에게도 고유한 사이클과 시스템이라 게 있는데 그게 한꺼번에 에
러가 발생하면 어떻겠어요."
곰곰이 듣고 있다가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마음이 삭막한 밤이었다. 고단한 얼굴로 그
녀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 갔다. 그 사이에도 어둠은 무더위 속에서 깊게깊게 무리져 내리
고 있었다. "그 동안 마음을 많이 다친 모양이에요. 그쪽 말예요." "......" "힘이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어요." "힘이 되고 있어." "우리 이 대목에서 뜻 없이 악수나 한번 할까요?"
나는 탁자 위로 손을 내밀었다. "남자 손이 길쭉하고 가늘군요. 저는 손이 예쁜 남자가 좋아
요." "그리고 또 어떤 남자가 좋지? 어디 이참에 한번 죄 들어 보지." "여행을 좋아하는 남
자, 목소리가 좋은 남자, 키가 크고 마른 남자, 옷을 잘 입는 남자, 글씨를 잘 쓰는 남자, 눈
빛이 깊은 남자, 밥을 잘 먹는 남자, 담배를 멋있게 피우는 남자, 음악을 아는 남자, 책을 읽
는 남자, 술이 취해도 혀가 안 돌아가는 남자, 아르마니 향수를 좋아하는 남자, 블랙 커피를
좋아하는 나자,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남자." "그런 남자는 어떤 여자도 다 좋아해." "겨우
그런가요?"
열시가 되어 그녀와 나는 "페드라"에서 나왔다. 그때껏 풀리지 않고 있는 후텁하고 갑갑
한 느낌에 갇혀 있다가 나는 버스가 오길 기다리고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비가 오려
는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의 달과 별을 까맣게 가려 놓고 있었다. "이건 염려가 돼서 하는
소린데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가령 방법을 바꿔 볼 수도 있잖아." 신문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다가 그녀가 뭘 어떻게요? 라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왜 재택 근무라는 게 있
잖아." 전에 전화방에 갔던 생각이 떠올라 나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말했다. 이내 알아듣
고 그녀는 오 분쯤 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사이 버스가 왔고 그녀는 다음 차를 타겠다
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저녁에 다시 올게요. 전화는 표정이란 게 없잖아요. 얼
굴없는 말에서 무얼 알아내겠어요. 이것도 하나의 계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계기라니." "사
람에 대해서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계기 말예요. 기회라고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피하게 되면 똑같은 상황이 나중에 제 앞에 더 큰 몸집으로 나타날 거예
요. 항상 그랬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가끔 놀라운 직관
으로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인 어린아이로 돌변해 버리
는 자신에 관해서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그쪽도 저를 도와 준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그녀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여자라서 불편하면 그냥 여자로 봐요. 일부러 배려는 하려고 애쓰지 말란 뜻예요. 그게 더
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어쨌든 저도 자신을 감당 못할 정도의 나이는 아니
잖아요. 전 제 나이가 좋아요.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예요." 그녀의 말 속에 뭔가 간곡한 진
실이 스며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지만 그것은 선명하게 감지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때로 상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써 진실을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저 편의대로 받아
들이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저 함부로 꿈틀대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가.
매화 무늬가 있는 2월 아침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외틀고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에 기대어 콜
라를 마시며 오 분 간격으로 나를 돌아보며 이제 시작하라고 한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됐으
며 더 이상 지체하게 되면 어쩌면 영영 항아리 안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가래 끊는 소리로 웅얼거린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얘기한다는 빈 뜰에 내리는 빗
줄기를 쳐다보는 일과 같아." "겨울엔 빈 뜰에 가득히 내리는 눈이로군요." 빈 뜰에 가득히
내리는 눈과 비. 그 뒷전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의 그림자가 희끗희끗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네가 만들어 놓은 풍경 뒤에 누군가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는
왠 낯 모르는 사람의 껍질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뒤에는 과연 누가 있는 걸까.
그녀는 스피커 위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 인형에 눈을 맞추고 있다. 어제 듣던 "아프리카
의 폭풍", 들판의 북소리. 오늘 그녀는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내게 맨발로 왔다.
양쪽 엄지발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발. 그녀는 내가 이따금씩 제 발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아프리카 인형에게 필사적으로 시선을 붙들어매고 있다.
혼자 있는 공간에 사람이 하나 더 들어온다는 것은 우선 공기의 변화를 뜻한다. 그것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뀌는 것만큼이나 일가구의 정세가 변하는 일이다. 그 미묘한 공기의
변화 속에서 사물들은 다시 제 위치를 찾으려고 부산을 떤다.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
깨어나 빛을 발하거나 서로 슬그머니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그 각도의 뒤틀림 속에서 빈틈
없이 조여 들었다가 풀어지곤 하는 고조된 공기의 밀도, 그러한 때면 저만치 앉아 있는 네
사소한 움직임이거나 숨소리가 생생히 귀에 들려 온다. 이 거리의 가까움 혹은 가까운 먼
곳.
꽃들이 시원해, 라고 그녀가 중얼거린다. 베란다 창에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로 언뜻 눈을
돌리며, 비가 화분까지 튀어 들어오고 있다. "냉장고도 빗소리 때문에 시원해요. 속을 차갑
게 하기 위해 딴에는 무척 애쓰고 있지만 말예요." 그녀가 어느새 냉장고로 변한 모양이다.
"그 여자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얘기해 봐요. 그날도 비가 왔나요." "작년 이월의 일이었
으니 왔다면 눈이었겠지." "겨울에도 비는 내리죠." "안개 낀 날이었어. 안개 너머 빨간 불빛
들이 보이고 눈앞엔 유령선 같은 배들이 이따금씩 지나가고 있었지." "이월의 안개. 유령
선." "강에 갔었지." "좋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지나간 사랑은 무얼 뜻
하는 걸까요?" 잠이 들어 가는 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사 랑 이 지 나 가 고 있다, 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머릿속으로 텅 빈 버스가 지나가는 풍경을 그려 보고 있었다. "마음의 유
곽을 뜻하는 거겠지. 술에 취해 가끔 드나들게 되는, 깨고 나면 늘 눅눅한 땅바닥이었어."
"폐쇄된 염전의 소금 창고." "가끔 동물원의 여우들이 모여 우는 밤이 오면 거기 들어가 남
은 소금을 퍼먹고 나오기도 하지." "지나간 사랑도 그렇게 짜고 독한 건가요." "다음에 오
는 사랑도 아마 그러하겠지." "사람 몸의 구할 이상이 짠물로 이뤄진 까닭이 있군요." "지구
의 칠할도 소금물이지. 그러니까 폐쇄된 염전 창고인지 뭔지가 맞아." 이렇듯 잠꼬대 식의
말을 주고받으며 나는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언제부터인지 삼십 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하
는 버릇이 생겼다. 생이 초초해진 거다. "안개 낀 밤의 데이트에 대해 계속 얘기해 봐요."
"캄캄한 안개 속 물살에 흔들리는 나루에 앉아 있었지. 새벽이었어. 그러니까 전날 저녁에
그녀와 나는 처음 만났어. 방송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그렇고 그런 모임이 있었지. 그 자
리에 뒤늦게 그녀가 왔어. 매화 무늬가 수놓인 투피스를 입은 키 작은 여자였지.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으로 와 앉는 그녀에게 내가, 그새 매화로군, 했던 게 자연스
럽게 다음 순간으로 이어졌지." "아마도 일부러 옆에 와 앉았을 거예요." 그랬을는지도 모른
다. 누가 알랴. 그때 그녀 마음에 있던 생각을. "그래서 그날 기어이 매화를 봤나요?"
그건 어른들이나 쓰는 말이다. "회식이 끝난 새벽 한시쯤 다들 얼큰하게 취해 신발이 찾
아 신고 식당을 나오는데 뒤에서 그녀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나를 불러 세웠지.
돌아보니 흐린 형광빛 속에 밤 매화가 부옇게 한 송이 떠 있더군.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이렇
게 말했지. 아마, 남쪽엔 그새 폈어요, 라고 말이야. 매화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 그래서 내
가 남쪽 어디? 했더니 북쪽 중심으로 여기가 바로 그 남쪽이라고 하더군." "가관이네요. 그
런 우중충한 밤에 하필 기녀를 만나다니요." 그날 주미와 나는 강나루에 앉아 덜덜 떨고 있
다가 하늘로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를 보고 일어나 홍대 앞까지 걸어갔다. 그러고나서 새
벽 세시경에 헤어졌다. "처음 만난 남녀가 다리는 왜 함께 건너요." 그렇다. 돌이켜보면 거
기엔 이미 운명의 전조 같은 게 깔려 있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마포대교를 건너 서교 호
텔 앞까지 왔을 때 문득 구면인 사람들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때는 애써 돌
아가더라도 이미 전 상태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러길래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는 절대
뜻 없이 다리를 함께 건너거나 비행기를 타서는 아니된다. 그곳은 땅처럼 제멋대로 발을 디
딜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다리가 무너져 내리거나 비행기가 폭발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곧
바로 지상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 된다. 세계는 물과 불과 공기와 흙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비상시 삶의 유동성이 존재하는 곳은 오직 그대가 태어난 대지 뿐이다. 혼자 죽는다 해도
그곳이 대지일 때 그대는 가까스로 안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게 물이거나 불이거
나 시퍼런 창공일 때, 비상시 혼겁하여 옆을 돌아볼 때 거기 낯선 이가 앉아 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 인생이 무효란 생각이 들이 않겠는가.
"홍대 앞에 가선 뭐했어요?" 이미 밤이 늦었으므로 어디 갈 데가 없어 그녀와 나는 지하
철역 근처에 있는 먹자골목을 헤매다 소위 삐끼가 안내하는 지하 술집에 앉아 있었다. 그곳
에 들어가자 비로소 여의도에서 마신 술이 깨기 시작했다. 그녀는 쉴새없이 눈을 반짝이며
마치 무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
씩 푹 한숨을 몰아 쉬기도 했다. 술을 마셨지만 몸에 밴 경계심 때문에 그녀는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왜 나를 따라왔을까. 어쩐지 자리가 거북스러워 나는 그만 가자는
뜻으로 그녀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가도 돼요? 라고 반문했다. 가도 되
냐니. 무슨 말인가 싶어 나는 불안스레 떠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진작에 말씀이 없으
셔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었습니다." 나 원 참. 별스런 사람도 다 있었다. 더군다나 어디선
가 베낀 듯한 말투가 귀에 이상스럽게 거슬렸다. "늘 누군가의 결재가 있어야 집에 갑니
까?" 말을 해놓고 나서도 내가 다 한심스러웠다. "아까부터 둘뿐인데 하나 가고 나면 하나
만 남질 않습니까. 그게 제법 마음에 쓰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모를 사람이었다. 차림새하며 어디 인사동 골목의 병풍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야
릇한 여자였다. 그녀는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돼 일주일에 한 번 방송국에 나와 녹화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여의도 식당에서 프로그램 자키라고 소개할 때만 해도 나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루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방송국에 들
락거리는 것이다. 그녀 또한 그저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술김이라고 해도 할말은 없지만 여
의도에서 그녀가 매화, 남쪽 하며 뒤를 잡아 끌었을 때 나는 그저 술이나 한잔 더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포대교를 건너 홍대 앞까지 걸어온 것도 그쪽에서 먼저 그러자고 해서 응한
일이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매스컴에 대한 혐오증에 걸려 있
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해서 집요하게 사생활을 들춰내 여기저기 내보내는
그 파렴치하고 야비한 상업적 속성 때문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
가 연예인이란 직업에 대해 갖고 있을 환상을 깨주기 위해 방송 드라마의 미래와 탤런트란
직업이 갖고 있는 불투명한 장래 등에 대해 늘어놓았던 거 같다. 제작비와 광고 수입의 채
산 불균형으로 거시적으로 보면 드라마는 점점 텔레비전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드라마가 사라졌거나 제작을 극도로 꺼리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은 대학까지 나온 그녀가 현실도 모른 채 방송국에 드나드는 게 안돼 보였던
이유도 있었다. 알고 보면 형편없는 사정에 자칫하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가 십상인 것이다.
그녀는 미동 없니 눈빛을 빛내며 내 얘기를 듣고 있더니 아연하게도 동문서답을 했다. "이
제 그럼 집에 가나요?" 머쓱한 기분으로 코를 긁고 있다가 나는 그녀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맹한 것인지 속내가 깊은 것인지 모를 사람이었다. 그리고 술집을 나와 컴컴한 골목을
앞서 걷고 있는데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옆으로 따각따각 다가왔다. "그런데 그냥 가나요?"
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신경이 다소 곤두서 나도 일껏 흰소리를 지껄였다. "왜요, 어디
가서 한잔 더 할까요?" 거기서도 그녀도 주춤했다. "그럼 약주가 너무 과하신 것 아녜요?"
약주. 매화꽃 피는 밤이니 좀 과해도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술이 깨고 나서 견딜 수 없이
몸이 추웠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면서 늦었으니 속히 집으로 돌
아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떴다.
내 손이 등에 닿을 때의 느낌이 좋았다고 그녀는 택시에 올라타며 나를 보고 말했다. 그
냥 하는 소리겠지 싶었지만 왠지 뼈가 들어있는 말처럼 들렸다. 그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
만 그녀는 오직 사랑받기 위해 살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 자신도 남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그 말에는 실로 그
녀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도대체가 안절부절못했다.
엔진 오일이 떨어진 자동차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온갖 푸념을 다 늘어놓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녹화를 하고 있는 스튜디오로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스트
레이트 퍼머넌트에 위아래 하얀 캐주얼과 붉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입술에도 카디건과
잘 어울리는 루주를 칠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선명하게 눈에 띄는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한
여자의 아름다움엔 무릇 옷맵시, 말투, 습관, 머리 모양새 따위의 외적인 것들이 포함돼 있
다. 그녀는 여느 모델이나 연기자들보다 맵시 감각이 뛰어났다. 얼굴 미인을 아니었지만 다
른 기타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해 그때마다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
었다.
오래 혼자 지내 오던 터라 나는 그녀와 차츰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부지런하게
사람을 대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별스런 이유가 없는 한 애써 밀어낼 이유도 없었다. 이쩌
면 내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녀가 세 번인가 네 번 거푸 나
를 찾아왔을 때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내가 저를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
을. 내가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는 이런저런 치장과 무장이 덜 된 사람을, 어른보다는
아이를 고양이보다는 개를 더 믿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맞는가? 충혈된 눈으로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나수연이 제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나를
건너다보았다. "맞는지 안 맞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쪽 스타일이 상처를 받기
쉬운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사랑을 하는 일에 정치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상대를 위한다는 뜻에선 그게 전적으로 틀린 거도 아녜요." "그 발언이야말로 정치적으로
들리는군." "아무튼 쌍봉낙타로 태어나지 않으면 어디 사랑인들 목이 타서 하겠어요?" "그래
도 일단 사막에 들어서면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지." 비는 줄기차게
베란다 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빗소리에 냉장고 우는 소리가 지워지고 그녀의 기침 소리
도 지워지고 있었다. 도로에서 뻗쳐 올라온 전조등 불빛이 간헐적으로 거실 천장을 비췄다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거실은 텅 빈 강당처럼 생각됐고 그녀와 떨어져 있는 거리도
매우 멀게 느껴졌다. 베란다의 불빛도 빗소리에 젖어 자꾸만 흐려지고 있었다.
강당 저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연애는 그런 식으로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매
화, 안개, 뜻 없이 등을 툭툭 두드리는 손. 붉은 카디건. 이를테면 그런 연루에 의해서 말예
요." 그래, 그렇지, 그러하겠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부지
불식간에 마음에서 불똥이 튀는 순간이 도래한다. 같은 순간 저 낯선 상대의 마음에도. 우리
는 알게 모르게 대개 그런 식으로 만나게 된다. 필연과 우연을 잇는 가느다란 줄 위에서.
"그 여자가 필요하다고 느낀 때가 있었다고 했죠." 눈을 뜨니 천장에 매화가 어른거렸던
날 아침이었다. 그날 여의도에는 벚꽃이 부시게 난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우선 자격지심이라는 게 있었고 어쩐지 끝이 선명
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왜 응했어요?" "때론 산 위에 앉아 있어도 물이
쳐들어오지. 노아의 방주를 타고 누가 뉘엿뉘엿 노 저어 온단 말이야. 그런 다음 둘이 민둥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걸 운명이라 받아들이게 되지. 자신을 애써 속
이는 한이 있더라고 말이야. 그게 한편 사람살이의 드라마가 아닌가." "민둥산에서의 하룻
밤. 그에 대해 진술하세요." 법대생의 목소리를 흉내내 그녀가 말했다.
여의도에 벚꽃이 피던 날 저녁 그녀와 나는 광화문에 있는 "파하"란 스탠드바에 앉아 있
었다. 단골인데다 비교적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곳이었다. 그녀와 두 번째 만나서도
들렀던 곳인데 그녀도 깔끔한 실내 장식과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발렌타인을 시켜 놓
고 드문드문 온더록스 전에 얼음을 떨어뜨리며 그녀와 나는 여의도에 핀 벚꽃 얘기를 하고
있었다. "벚꽃 중에도 밤 벚꽃이 그중 으뜸이야. 유년의 봄밤에 숱하게 나가 봤지. 검은 기
와 지붕들이 골목을 덮고 있는 곳에 벚꽃들이 무지하게 피어 있었어. 밤이 은은히 환했지.
검은 물이 흐르는 다리 밑에선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남녀들이 킬킬거리고 있었고 말이
야. 아직도 그때의 영상이 목판화처럼 마음에 남아 있어." "우리도 그런 사랑 하면 되잖아
요." "벚꽃은 피지만 검은 지붕도 돌다리도 웃음 소리도 사라졌어. 서울에서는 왠지 사랑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저 알아요. 검은 지붕 있는 데 말예요. 거기도 지금쯤 벚꽃이 폈
을 거예요. 다리 옆에 말씀이죠." "그게 어딘데?" "있다니까요." 그때 말이 옆으로 흐르고 있
다는 느낌이 관자놀이로 몰려들었다. 옆에서 그녀가 색색 숨을 몰아 쉬는 소리가 귓전에 아
른거렸다. "아무튼 그런 데가 있는데 안 가볼래요? 언젠간 결국 우리도 사랑을 해야잖아요."
"......" "내년 봄까지 또 기다려요?"
나는 큼큼 기침을 하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사랑을 구하는 여자도 있었다. 어여쁘
기도 하고 수상쩍기도 하고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뒷전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어떤 사람에겐 여러 곳에 출입할 수 있는 열쇠 꾸러미가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겐 딱 하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어. 어쩌면 죽을 때까지 손에 움켜쥐고 있어야만 하는 열쇠인지도 모르
지. 종점의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니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녀가 되받았다. 하지만 또
목울대에서 선명하게 떨려 나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구요? 그런데요?" "그래서 그 열
쇠마저 잃어버리면 막바로 전시 체제로 돌입해야 하지. 그리고 밤낮없이 지레 겁에 질려 대
포를 쏘아대야만 해." 알아듣는 것인지 못 알아듣는 것인지 그녀는 또 그러구요? 라고 반문
했다. "매일 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면 열쇠가 없어 문밖에 앉아 밤을 새워야만 하지." "앞
으로도 혼자 있을 생각인가요. 둘이면 열쇠는 하나만 갖고 있어도 되지 않아요?" "그럴 수
도 있겠지." "근데 왜 겁쟁이처럼 그런 말을 하나요. 사실이 겁을 내고 있는 건가요?" 나는
그때 내가 인생에 대해 겁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위스키가 묽게 풀어져
있는 것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내잔에 술을 따랐다. "드세요." "기회가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제대로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해.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그녀는 스탠드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기웃거리듯 나를 돌아보고는 도로
고개를 바로잡았다. "제가 기회가 많은가요?"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저도 얘기하고
있잖아요." 귓바퀴로 침묵이 간지럽게 한바퀴 돌아 달아나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나요? 저 혼자 가나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웅웅거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하나 남은 열쇠를 지키는 것이 그나마 무승부의 결과가 되겠지." 그녀가 몸을 내
게로 기울이며 속삭여 왔다. "그렇다고 무승부가 되지는 않아요. 무승부가 목표일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상대와 승부해야 되는 거 아직도 모르나요?" 그래. 무승부가 목표일수록 필사적
으로 대항해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확인하려는 심정으로 한 번 더 그녀를 밀어내는 몸짓을
했다. "내가 당신과 승부를 하겠다고 했던가?"
그녀의 얼굴에 찰나 기묘한 빛깔의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때마침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기 힘들었을 희미한 웃음기였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피어 오르고 있는 담배 연기
를 내려다보며 초조하게 몸을 부스럭거렸다. 그 사이에 그녀는 전화를 걸고 화장을 고치고
돌아왔다. 채점을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그녀는 각도를 비스듬히 틀고 내 옆에 바투 앉아 있
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유니폼을 입고 이미 그라운드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게임
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벌써 울렸다는 것도. 그녀는 그 사실을 "파하"에 들어올 때
부터 알고 단단히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승부의 주
도권을 잡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경험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여의도의 식당에서 나를 만난 순간부터 그녀는
나와의 관계를 이렇게 가져 갈 심산이었던 것이다.
나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태연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 보
고 있었다. 어느 세계에 머물다 이렇듯 불쑥 내 앞에 나타났는가를. 여자란 다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저마다 다른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쉽게 말해 혈액형이 저마다 다
르다는 얘기다. 이 불가사의한 속성 때문에 그때마다 또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승부를 되풀
이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걸 즐기는 남녀들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나는 게임을 좋아
하는 성격이 아니다. 또한 별로 이기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래 봐야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서 우승했을 때처럼 누가 월계관을 씌워 주는 것도 아니다. 남녀간의 승부는 그래서 승패와
상관없이 그다지 내세울 게 못된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깊은가요?" "......" "그러니 마침 저
조차도 아득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득한 생각. "'오카방고'라는 데를 아나요? 아마 그런 곳이에요." 아마 그런 곳이라니.
"정확한 어디라는 것은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데죠." 어법이 맞지 않는 말에 나는 머릿
속이 갈수록 흐트러졌다. 술기운이 혈관으로 탁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오카방고'라고 했
나. 아무튼 그녀는 그곳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취한 듯 안으로 혀가 말려 있었다. "지금
은 없어진 곳인데 종로 이가에 '오카방고'란 찻집이 있었어요. 이름 참 예쁘지 않나요?" 무
슨 곡물 창고 같았지만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막 말을 배운 계집아이의
말투로 그녀가 계속해서 종알거렸다. "그렇습니다. 그게 지금은 없어졌는데요. 작년엔가 종
로 이가를 걷다가 퍼뜩 이름이 떠올라서 열심히 알아봤거든요. 알아내는 데 한참 걸렸단 말
이죠."
답답해라.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오카방고는 보츠와나 공화국 북부에 있는 거대한 습지
대였다. 파피루스와 우산갈대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조금 전에 그곳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산갈대가 자꾸 쌓여 호수 안에 푹신한 섬이 생겼답니다. 거길
맨발로 걷는 상상을 하면 이상하게 흥분이 되곤 합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남자 생각이 납니
다. 그렇군. 우산갈대와 파피루스와 물에 뒤덮여 있는 늪의 나라. 밤이면 많은 벌레들이 그
속에서 저마다 꼬리에 불을 켜고 사랑을 나누겠네. 그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희미한 소리인데 이상하게 고막에 착 달라붙었다. "오늘 밤 당신 등을 맨발로 밟고 싶습니
다. 물렁물렁한 섬처럼 밝고 서서 키 큰 우산갈대와 파피루스 구경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취해 있었다. 내 흐려진 동공에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이 물 속의 전신주처럼 흔들리
고 있었다. 밤이 늦었으므로 전신주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무슨 말인지 여직도 모르나요?"
뜻을 알아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외틀었다. 그녀는 내 부두에 뱃전을 대고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갈대 서걱이는 소리가 귓전에 쳐들어오고 있었다. 문전에 폭풍이 몰려와
떨어져 나갈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무릎이 많이 저려요. 창우 씨는 괜찮은가요?" 점자책
을 읽듯이 자정이라고 더듬거리며 나는 남은 술을 들이켰다. 사위의 모든 것들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쭈글쭈글 녹아내리고 있었다. 술집 밖에 탱크와 장갑차가 몰려와 있다는
전시감에 사로잡혀 나는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스탠드 아래로 허리를 구부리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 상을 당한 여장처럼 섧
게섧게 울고 있었다. 까닭을 물었으나 사람에게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
아 내다 못해 나는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복도에 있는 하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그녀는 힘없이 내 어깨에
무너지더니 이내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업다시피 하여 택시에 그녀를 태우고 간 곳은
북한산 입구의 구기동이었다. 그녀를 흔들어 깨워 물으니 집이 그쪽 어디라는 얘기였다. 난
감한 일이었다. 구기터널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유령처럼 스르륵 몸을 일으키더니 운전
사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해요. 바래다 주세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북한산 길로 접어들었다. 전에 와본 적이 있어서 산문 어귀에 주택 단지가 있
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 어디려니 하고 나는 그녀가 끄는 대로 밤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수상쩍다는 느낌이 시시각각 정수리께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흥얼흥얼 내뱉는 말에서 그 느낌은 좀더 분명해졌다. "검은 지붕, 밤 벚꽃이라고 했죠."
이윽고 주택 단지를 비껴 올라가자 산장의 붉은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서 그
녀는 걸음을 멈추고 불현듯 내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기어이 벚꽃을 보여
드릴 작정입니다. 어른 사내가 여기까지 와서 어린 아녀자를 버리고 가진 않으시겠죠." 산장
아래로 개울물 흘러가는 소리가 귀에서 철철 부서지고 있었다. 저만치 다리께에 뭔가 꽃들
이 점점이 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나는 피우다 만 담배를 어둠 속에 집어 던
지고 그녀의 팔을 잡고 산장인지 여관인지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내 가
슴에 풀썩 넘어지며 옷을 벗겨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 냄새를 맡으며 어두컴컴한
꼴로 방 한가운데 붙박여 있었다.
새벽 두시쯤이 되어 그녀와 나는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봄비라도 내리려는지 아까 오던
길이 흐려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깨물었다. 그녀도 그런 식으로
응대를 하며 내 등을 어루만졌다. "여기를 밤새 걷겠다니까요. 떠다니는 우산갈대 섬." 나는
섬이 되어 천천히 호수 한중간으로 떠가고 있었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나는 잠시 눈을 뜨고
넋이 빠진 얼굴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그녀의 등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
녀의 살찐 등은 가을의 풀밭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는 어제 자란 내 턱의 꺼끌한 수
염을 손바닥으로 쓸며 혀로 가슴을 핥아댔다.
징용에 끌려갔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처럼 나는 실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
거리다 불쑥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녀의 목이 뒤로 급히 꺾이며 입술이 크게 벌
어졌다. 우산갈대 속이 너무 뜨겁군. 밤이면 어디서 그렇게 썰물과 밀물이 깊게 쳐들어오는
것인지. 나는 학학거리며 그렇게 늪에 빠져 드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갈대들 사이로 별이
돋기 시작할 즈음 나는 진저리를 치며 깊숙이 사정하고 눈을 감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
고 갈대 서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곧바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녀는 언제 일어났는지 깨끗이 옷을 입고 화장까지 마친 뒤 옷장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묘한 얼굴을 하고서. 아침에 몰래 방으로
숨어 들어온 여자 도둑의 모습을 하고서. "밖에 꽃들이 많이 폈어요. 밤새 말예요." 그녀가
신부처럼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미 성안으로 들어온 뒤라 나는 어제까지 밖으로 일어
난 일은 잊기로 했다. 이제는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따위를 생각할 사이는 아니었다. 이
쯤되면 형식적으로 남자 쪽에서 여자를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가 원하는 바 매사에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식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살을 섞으면 그걸로 곧 동족 혈연이 된다.
아니라고 해도 우주 만물의 법칙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렇다. 어쩌면 인간에게 섹스가 유희
로 전락하면서 인류의 비극이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처녀가 아니라서 기분이 나빴던가요?"
당황하여 나는 창가에 기대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누가 처녀이고 아닌지
를 솔직히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기분이 좋고 나쁠 건덕지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걸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나는 이런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려는 기이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런
나를 주시하고 있더니 팔짱을 낀 자세로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건
밤새 내린 눈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과 없는 거처럼 퍽이나 다른 일 아닌 가요?" "하
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 말인가?" "......." "보기에 따라서는 그게 더 풍경스러운 거 아닐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모습 반쪽이 빛에 묻어 뿌옇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저를 모독하고 있는 건가요? 아무래도 기분이 몹시 상해서 말이죠." 어
째서 자꾸 기분 운운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침대 밑에 그녀가 개켜 놓은 옷
을 주섬주섬 꿰입으며 무슨 말로 대꾸를 해야 할까를 궁리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바보 같은 사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요."
숫제 불쌍하다는 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또한 그게 지청구처럼 들려 나는 점점 목이 막
혔다. 하지만 우린 누구나 한 번쯤 다치고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오카방고를 나오니 햇빛이 세상을 지워 버릴 듯이 환했다. 새벽에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다시는 아래로 내려오지 못할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나는 속
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지금껏 누군가 이미 다닌 길로만 걸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
게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이제는 그런 일로 더 이상 마음 아프고 싶지 않다. 그 따위말고
도 이미 마음이 상처의 껍질로 두껍게 덮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내
가 가는 길에 들어서지 마라. 산으로 갔으면 모쪼록 산에 머물도록 해라.
종로로 나와 아침을 먹고 그녀를 보낸 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생각했다.
남녀의 불가해한 만남에 대해서. 때로 자행되는 일체의 과속에 대해서, 또한 처녀라는 것에
대해서.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쓰고 누워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또 누구와 인연을 맺은
것인가 하고.
저녁 참까지 나는 눈을 뜬 채로 그렇게 멀뚱히 누워 있었다.
일주일 후에 만나 그녀와 나는 북한산 아래의 그 산장에서 또 밤을 보냈다. 남녀가 만나
그녀와 나는 북한산 아래의 그 산장에서 또 밤을 보냈다. 남녀가 만나 서로 육체를 알고 나
면 그때부터는 달리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한번 그리고 나면 이내 길들여져 영화
관이나 음악당에 앉아 있으면 차라리 서먹하고 까닭 모를 조바심 때문에 좀이 쑤시게 마련
이다. 한데 날이 갈수록 마음 한편에서 그녀에 대한 묘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가
어디 먼 나라에서 내게 보내 온 비밀 첩보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그럴듯한 맥락이 없었던 때문이었을까. 단지 섹스가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앞뒤
가 맞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서둘러 일을 치르고 사라져 여간해서는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오래 만나길 원하는 관계일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마련이다.
여자인 경우엔 더욱더 그렇다.
아무려나 주미와 몇 번 더 북한산을 드나드는 사이 어느덧 창가에 봄이 무르익어 여의도
의 벚꽃이 시나브로 져버렸고 강둑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유람선을 타거나 밤새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계절로 빨리빨리 시간이 지나갔다.
그녀가 심심찮게 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건 아마 오월경부터였을 것이다. 심지어는 나
와 함께 시장을 보고 밥을 짓고 커튼이나 가구를 바꾸기도 했다. 모두가 그녀가 그렇게 원
해서 한 일이었고 가끔 뒷전에 앉아 나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그녀로
인하여 마침내 새로운 생이 시작된 건지, 아니면 두고두고 쓸 항아리 안의 조선간장을 함부
로 퍼내고 있는 건지 웬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정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앞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미
단순 교제 차원을 넘어서 있었으므로 나는 그쯤에서 그렇게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그녀가 불안하거나 초조해질 때까지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믿었던 그녀는 그러나 덜컥 놀라며 슬그머니 나를 외
면했다. 이른가 싶기도 했지만 관계의 깊이를 생각해 보면 꼭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채근하
지 않았지만 나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또 다른 마음이 숨어 있다는 느낌을 받
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앞날 운운했던 그날 이후로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전처럼 주기적
으로 섹스를 나눴지만 그새 오래 살아 버린 부부처럼 건조한 단절감이 정사 후에 차갑게 가
슴 안짝으로 엄습하곤 했다.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한 느낌은 소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법이다.
가면 속의 얼굴
나수연이 내 집으로 출근한 것도 그새 닷새째가 되어 있었다. 열대야는 아직 계속되고 있
었고 간간이 내려 주는 소나기가 아니라면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그런데다 그녀가 찾아
오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미묘한 긴장의 타래가 두 사람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 차
츰 뚜렷하게 감지됐다. 둘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주보기가 차츰 거북스러
웠다.
하루는 저녁을 해주겠다고 그녀가 출근길에 시장을 봐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은 일
이 있었다. 기껏해야 고기를 굽고 채소를 뒤섞어 사라다를 만들고 포도주를 한 병 마신 게
전부였지만 그게 겉으로 보는 것만큼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놓고 함
께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제의에 속하는 일이다. 가족 관계에서는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일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게 타인인 경우엔 종종 의식임을 뜻하게 된다.
상대가 낯익은 타인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렇다. 뜻을 미처 모르고 저지른 일이었겠지만 식
탁에 마주앉아 포크로 사라다를 찍어 먹다가 그녀가 이런 말을 툭 내뱉었다. "다들 면사포
를 쓰고 결혼들을 하는 이유가 있군여." 언뜻 묘한 느낌이 들어 나는 못 들은 척 포도주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밥을 함께 해먹는다는 것은 남녀가 밤마다 살을 섞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런 말을 무심히 내뱉고 나서 그녀도 언뜻 당황
한 듯싶었다. 나는 농담조로 되받으며 그녀의 말을 옆으로 밀어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
면 식탁에 마주앉는 것이 형장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들 하더군. 생각해 봐, 올
가미가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데 도대체 무슨 밥맛이 나겠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짐짓 몸서리를 치는 시늉을 했지만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한 다음 차를 끊여 거실 소파
에 마주앉을 때까지 그 미묘한 느낌은 채 가시지 않았다. 하루살이 떼처럼 확확 얼굴에 몰
려드는 더위를 부채로 쫓으며 그녀와 나는 더듬더듬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식
으로 방심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그녀와 나는 얼굴을 외면하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하루쯤 야외 근무를 나가는 게 어떻겠나요 제안했다.
다음날 나는 차를 빌려 나수연을 태우고 오후 일찍 강화도로 향했다. 그날도 무더위가 기
승을 부려 아스팔트가 끈적하게 녹아 붙고 있었다. "운전할 줄 알면서 왜 차를 안 갖고 다
녀요?" 은빈이 이탈리아로 떠난 직후 나는 타고 다니던 프린스를 중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옆자리에 그녀가 타고 있다는 생각에 운전이 늘 불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차를
사지 않은 건 걷는 일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마음에서였다. 또한 새 차를 사면
이번엔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내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을 거란 일종의 강박이 생겨 있었다.
상상해 보라. 문이 잠긴 차고의 자동차 안에 옛날 헤어진 그녀가 머리를 풀고 앉아 있는 모
습을. 이런 얘기를 꼬치꼬치 늘어놓으면 그녀가 불안해할 것 같아 나는 일껏 에둘러서 설명
했다. "차를 갖고 있으면 아무때나 또 아무데로나 가고 싶어져.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몇 날 며칠이고 한없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지구를 몇 바퀴
돌아 이윽고 폐차가 될 때까지.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말이야." 과장해서 한 소리였는데 그
녀는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이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일이었
으므로 앞에서 달려오는 길은 잘 트여 있었다.
김포에서 강화로 진입해 통진을 거쳐 석모도로 들어가는 선착장 근처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시였다. 전등사를 갈 요량으로 차를 몰다 나수연의 말에 이끌려 내처 끝까지 와버린 것이
었다. 산타 루치아 모텔이 서 있는 선착장 근처 횟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그녀는 연신
밖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어째 베네치아에 온 기분이 드네요. 거기 역 이름도 산타 루치아
잖아요. 역에서 나오면 바로 눈앞에 물이 넘실대구요." 듣고 보니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다.
뿌연 횟집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베네치아. "우리 뱃시간 봐서 석모도에 들어갔다 올까
요? 배로 일이십 분밖엔 안 걸릴 것 같은데요. 거기도 보문사란 절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입에 안 맞는지 산낙지를 젓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그녀가 은근한 소리를 던져 왔다. 이
왕에 나왔으니 들어주는 게 좋겠다 싶어 석모도에서 강화로 나오는 막배 시간을 물으니 오
후 여덟시였다. 이리저리 계산해 보니 시간은 넉넉했다. 점심을 마치고 나와 그녀와 나는 표
를 사서 배 안으로 차를 끌고 들어갔다.
배가 뜨자 갈매기 떼가 이물 쪽으로 달겨들어 삽시간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선글라스
를 끼고 간간에 붙어 서서 환호하는 그녀를 보니 어쨌든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었다. 갈매기 떼는 석모도까지 우리를 쫓아왔다. 부둣간엔 몇몇 카페와 노점상 들이 줄을 지
어 서 있었고 얼굴이 새까맣게 탄 낚시꾼들이 강화도로 나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그녀와 나는 보문사 가는 길을 물어 또 차를 달려갔다. 차는 긴 산곡을 오르
락내리락하며 줄창 삼십여 분을 달려갔고 얼결에 절로 접어드는 표지판을 놓쳐 버리고 나니
느닷없이 앞에 염전이 보였다. 나 또한 석모도는 초행이어서 길을 알 리 없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돌아 나가려고 하는데 그녀가 염전 구경을 하고 가자며 벌컥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언제 가지고 왔는지 그녀는 카메라까지 꺼내 들고 있었다. 필시 외근을
야유회로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못 쓰게 된 경운기가 함부로 버려져 있는 창고 옆을 지나
염전으로 들어가니 타일 바닥에 소금이 하얗게 엉겨붙어 있었다. 염전 건너편으론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어 그야말로 가관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이었다. "염전에 처음 와봤어요."
"머리가 하얘도 아직 염전 구경을 못한 사람들이 세상엔 많지." 그놈의 영감 같은 소리, 하
며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거기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오는데 그녀가 소금 창고를 가리
키며 또 언젠가 내가 한 말에 토를 달았다. "밤이면 저 안에서 털 없는 원숭인지 여우가 소
금을 퍼먹는다고 그랬나요?" "목이 짜서 빨갛게 몸부림을 치기도 하지." "정념 때문에?" "생
의 한가운데서 누추해진 목숨 때문에."
때마침 지나던 촌부에게 보문사 가는 길을 물으니 한 십여 분 가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나수연은 더불어 그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묻고 있었다. "바다까지 보고 가게?" "이
왕 여기까지 왔으니 휴전선 아래 바다를 관람하고 가면 좋잖겠어요?" 보문사보다 바다가 더
가까이에 있었다. 시퍼렇게 드러누워 있는 논배미 바로 뒤편이라는 얘기였다. 그 정도야 싶
어 나는 또 차를 굴려 바다로 직진했다. 논배미가 끝나는 곳에 이르자 느닷없이 무성한 갈
대밭의 시작이었다. 일차선 도로를 옆에 두고 키 높은 갈대 길이 끝없이 차의 속도도 저절
로 시속 십킬로미터 쯤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 "일대 장관이었어요." 목이 콱 막힌 소리로
그녀가 이렇게 반벙어리 소리를 내뱉은 건 갈대 길 중간에서 차가 아예 멈춰 버렸을 때였
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으므로 갈대는 길을 덮고 내려와 방게만하게 서 있는 승용차를 아
내 삼켜 버릴 듯했다.
"여기가 혹시 오카방고 아녜요?" 오카방고. "빽빽히 우거진 갈대들과 저마다 무릎이 소금
물에 잠긴 풀밭들, 밤이면 철새 떼와 풀벌레들이 저 속에서 얼마나 정신없이 사랑들을 나누
겠어요."
차 안에서 돌아보니 그녀와 내가 버리고 온 염전의 소금 창고 지붕이 햇빛에 희게 부서지
고 있었다. 그 옆으로 등대처럼 서 있는 전봇대의 행렬과 잡초 우거진 도랑이 한껏 이국적
인 쓸쓸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때는 해가 서편으로 옮겨 가기 시작해 풍경의 각도가 묘한
기울기를 보여 주고 있는 참이었다.
갈대밭이 끝나는 곳에서 시커먼 모래 언덕을 기어올라가자 썰물에 드러난 개펄이 햇빛에
은반처럼 빛나고 있었다. 차 소리가 나자 붉은 풀이 자라고 있는 개펄에서 기어다니던 꽃게
떼가 순식간에 저마다의 구멍으로 사라지고 적막한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는 배 한 척만
눈에 어른거렸다. "봐요, 우린 지금 보츠와나 공화국에 와 있어요." 그녀는 사방에 흩어져
있는 게딱지를 밟으며 붉은 개펄을 한동안 휘젓고 다녔다. 마을 아이 두엇이 리어카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빠끔히 훔쳐보고 있었다. 이러다 보문사까지 갈 수 있으려나 하는 생
각에 나는 나수연을 재촉해 차에 올라탔다. "뭐가 그리 급해요. 꼭 절간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골이 났는지 그녀가 토라진 얼굴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리하여 다시금 갈대밭 옆을 느리게 지나면서 그녀와 나는 싸우고 난 사람들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 반드시 절에 들를 이유는 없겠지. 석모도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그저
절에나 들러 보자고 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들을 마녀 나는 슬슬 나수연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갈대밭이 끝나는 곳에 와서 나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도대체 어찌해야
그대의 그 사나워진 마음이 풀어지겠나." 꾸무럭거리며 그녀 또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아까 오다가 본 산 아래 카페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주문해 왔다. 염전 입구를 얼마간 지나
쳐 물가 옆에 있던 카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카페엔 손님이 없었고 중년의 사내가 카운터에 앉아 조지 윈스턴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이내 물가에 있던 산 그림자가 지워지더니 느닷없이 소나기가 뿌려대기 시작했
다. 그녀와 나는 비를 피해 급히 달아나는 마당의 닭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닭들
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그녀의 몽롱한 중얼거림이 내 귀에 흘러 들어왔다. "어쩌죠? 염전
에 비가 내리고 있어요. 소금 창고 지붕에도 말예요." "......" "그리고 그때 닭들은 다 어디로
갔죠?" 그때 닭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가끔 사람을 희한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여자였다. 맥주 두 병과 마른안주를 시켜 놓고 때 이르게 조지 위스턴의 "가을"을 듣
고 있는 동안 멀리 오카방고의 갈대들 머리가 일제히 북쪽으로 쏠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
다. 비가 내리고 밖엔 바람까지 불어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후 다섯시쯤이었지만 비가 내
려 사방이 일시에 어둑어둑한 빛에 싸여 갔다.
사이사이 밖을 흘끗거리며 여태도 닭들을 찾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하다 만 이야기를 계
속해야겠다고 말했다. 습자지 모양으로 반투명의 우울에 젖어 있던 그녀가 퍼뜩 놀라는 척
을 하며 내 이마를 아득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귀에서 처마 밑의 푸른 외등처럼 귀고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표정을 가다듬으며 근데 어디까지 했죠? 라고 그녀가 물어 왔다. 그러나
조금도 내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아닌 얼굴이었다.
나는 어벙벙한 얼굴로 물에 떨어져 일긋거리고 있는 오렌지빛 도로등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황금 용수철처럼 보였다가 금세마제형 동검으로 모양새가 꿈틀꿈틀 변해 가고 있었
다. 물결이 자며 밤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매화, 벚꽃, 오카방고, 우산갈대, 북한산 산장. 이런 말들을 두서 없이 떠올리며 나는 헝클
어진 기억 속에서 빠져 들어갔다. 나수연은 마치 졸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
면 비가 그치고 나서도 마당에 나타나지 않는 닭들의 행방을 좇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미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수선하게 봄이 물러가고 여름이 시작되려
는 무렵이었다. 때와 장소가 좋지 않았던 게 야외 촬영을 마치고 밤늦게 마포에 있는 소란
스러운 생맥주집에서 만나 이내 피곤해져 어서 집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날따라 그녀
의 눈빛이 산만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
던 터였으므로 나는 무척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무섭도록 태연한 얼굴로, 하지만 필시 오랜 망설임 끝에 하는 말로 이렇게 내뱉었다. "저 실
은 사귀는 사람 있어요." 말을 알아들었지만 뜻을 몰라 나는 더위에 지친 개처럼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사위가 어수선해 신경은 더욱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부
러 인구 밀도가 높은 번잡한 장소와 시간을 택했는가, 어째서 하필 저자 거리에 사람을 태
워 놓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정신을 가다듬고 어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서 이대로 헤어지잔 말인가?" 무엇이 어떻게 돼가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있다는 말만 꺼내놓고 더 이상은
일언반구가 없었다. 아직 뜻을 충분히 몰라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마디 한마디 침
착하게 되물었다. "새로 남자가 생겼다는 뜻인가." 아니라고 그녀는 고개를 내둘렀다. 답답
한 노릇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에 대한 체념을 무척이나 잘하는 편이지만 이런
식으로 뜻도 모르고 간단하게 끝을 낼 수는 없었다. 집착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적어도 납득
이나 수긍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가리라 마음먹은 사람은 잡을 수 없다는 게 서른 몇 해
를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깨달음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제나이제나 이유만큼은 알고 싶
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함부로 와서 앉았다 가도 되는 공원벤치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
래서 나는 다시 묻고 있었다. "남자가 생긴 게 아니라면 전부터 있었단 말인가." 무릎 위에
올려 놓은 핸드백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그러나 분명 침착하고 태연
한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제야 나는 앞뒤를 대충 감지할 수 있었다. "나를 만
나기 전부터 말인가." 끄덕끄덕. "확실히 나를 만나기 전부터 남자 가 있었단 말인가." 끄덕
끄덕.
아무리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려도 그 대목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또다시 고
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빈틈없이 도사리고 앉아 반을 묵비권으로 내게 저항하고
있었다. 헤어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만났지? 남자가
있었으면서 말이지." 그녀는 수면제에 취한 사람처럼 내 이마께만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
고 있었다. 이내 제풀에 지쳐 나는 결론적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가겠다는 말인가." 그녀
는 역시 요지부동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럼 내가 가면 되는 것인가." 거기서도 대답
이 없어 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생맥주집 밖으로 나왔다. 대답이 없는 경우는 대개
그렇다는 뜻으므로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머지는 이제부터 각자 알
아서 정리들을 해야 할 터이었다. 한데 그녀가 뒤미처 나를 따라 나오더니 슬쩍 소매를 잡
아 끌었다. "그런데 꼭 이런 식으로 가야 하나요?"
그런데 꼭 이런 식으로 가야 하다니. 나는 번요한 거리 한복판에 우두망찰 넋을 잃고 서
서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자문해 보고 있었다. 그쯤 되니 과연 어느쪽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 옆에 따라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다그칠 엄두도 나지 않
았다. 얼마나 힘들게 버티다 한 사람을 만났는데 고작 이런 식으란 말인가. 한때는 혼자 살
아 내기도 작정하고 숱한 밤들을 컴컴한 거울 속에 들어가 앉아 얼마나 마음을 숫돌에 갈아
댔던가. 어떤 경우든 타인에게 기대지 말고 그때마다 나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우리 좀 걸어요." 그예 울먹이는 투로 그녀가 이런 소리를 해왔지만 막상 나란히 밤길을
걸을 기분이 아니었다. 미련 때문이라기보다는 여태도 납득하기가 힘든 데가 있어 나는 아
예 타이르는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할말이 남아 있는가." 주저주저하다가 그녀가 모르겠어
요, 라고 또 답답한 소리를 했다. 발목 근처로 낮게 바람이 불어 가면서 구겨진 신문지와 과
자 봉지와 담뱃갑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날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도로에 내려
가 고함을 지르며 택시를 잡고 있는 꼴을 보며 나는 그녀를 데리고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곧 헤어질 사람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소주
와 제육볶음 따위를 시켜 놓고 술을 따라 마셨다. 그녀는 사이다 한잔을 앞에 놓고 그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얘기하란 말이군." 그러자 그녀가 흠칫 놀라는 척
을 하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까와는 달리 어깨를 떨고 있었다.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나는 또 아니 물을 수 없었다. "우리가 '파하'에서 나눴던 얘기 생각나겠지. 그녀가
사이다 잔을 턱까지 들었다 도로 내려놓으며 가만가만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열쇠
얘기도 기억나겠지." 그제야 기어들어가는 투로 그녀가 입엣소리를 냈다. "네." "이제 와서
내가 그걸 돌려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겠군. 아니 그게 돌려줄 수 없는 물건이라는 걸 알
고나 있는지 궁금하군." "......."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녀가 훌쩍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무릎
위로 건너왔다. 그러나 나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서른이 훌쩍 넘
은 나이까지 포장마차에 앉아 여자와 이런 출구 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내가 나는 낯설었
다. 비록 바늘구멍만 하더라도 이제는 자기 하늘을 마련해 놓고 올려다보고 살 나이가 아닌
가. 그것을 옆에 앉아 있는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당신이 왜 내게로 왔던
가는 묻지 않기로 하지. 생각해 보니 어리석은 질문인 것 같아. 하지만 현재 어떤 상황인지
는 되도록 정확히 내게 알려 줘야겠어. 어느덧 나도 내게로 돌아가 대포를 쏘아야 할 시간
이니 말이야." 그러자 그녀가 모기만한 소리로 아연한 말을 속삭여 왔다. "가지 말아요." 반
사적으로 옆을 돌아보려다 나는 도로 고개를 바로잡았다. 이게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가지
말라니. "그 남자는 아직 창우 씨에 대해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다. 그게 그렇다는 말이
군. 한 달에 한두 번쯤 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모르고 있다 그 말이
지." "네" "네, 란 말이지." "네에." 차라리 초등학교 1학년 반장되고 얘기를 나누는 게 보
다 나을 성싶었다. "그럼 계속해서 두 남자들 동시에 거느리겠단 요지의 발언인가." "아뇨."
"아니라면."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네."
이럴 땐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그녀는 지금 와서 왜 그 남자의 존재를
내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일까. 그야말로 간단히 내가 싫어졌다고 하면 그대로 상황이 종료되
는 일 아닌가. 난마처럼 얽힌 머리를 휘휘 내두르며 나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어
쩔 수 없이 침침한 질곡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그냥 놔두고 가자니 그 동안 그녀와 맺어
왔던 인연이 뒷덜미를 자꾸 잡아 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게서 뭔가를 원하고 있다
는 뜻일까. "아까 나더러 가지 말라고 했는가." 말하고 나니 어쩐지 뭔가 더욱 잘못돼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감기약을 과다 복용한 애완견처럼 그녀가 또 네, 하고 꺼져 가는 소리
를 냈다. "그럼 장차 그 남자와는 헤어져야 되겠군.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
쯤 알고 있겠지." 어떤 경우에도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묻는 게 아니다. 그래봐야 이런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말이 맞아요." "아직 결정하지 못했군." "사 년 동안이나
만나 온 남자예요. 그리고 좋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돌아가면 되겠군. 이봐,
당신도 대학에 들어가 봐서 알겠지만 복수 지원을 한다고 해서 두 군데 대학에 모두 합격할
수 있는 건 아냐. 또 합격한다 하더라도 두 군데를 한꺼번에 다닐 수도 없는 거야. 강의 시
간도 겹칠뿐더러 그렇게 되면 고삼때 쓰던 책가방을 들고 다녀야 해. 무슨 얘긴지 알아?"
"알아요." "알았으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 나더러 물러서라면 물러서지." "열쇠는 어떻게
하구요." "무슨 방법이 있겠지. 방법이 없으면 도끼나 망치를 들고 다녀야겠지. 하지만 그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게 그래도 고 3가방보다는 한결 나은 편이야."
들어올 때부터 이쪽을 관전하고 있던 포장마차 여주인이 눈을 하얗게 흘기고 나를 바라보
았다. 멜로드라마를 시청하는 얼굴로 말이다. 연애, 말해 무엇하랴. 그게 누가 하는 것이든
화면을 보듯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영락없이 흔해 빠진 삼류 신파에 불과한 일이다. 고추잠
자리가 수놓인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닦아 내며 그녀가 어째 원망조의 말을 던져 왔다. "왜
제가 창우 씨를 만났는지 이유는 묻지 않겠다고 아까 그랬죠. 하지만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냥 좋아하죠. 그리고 그동안 정도 들었을텐데 무슨 남자가 여자한테 그렇게 냉정
한가요." "......." "도대체 왜 그렇게 차가운 건데요." 아예 몹쓸 남자가 되어 나는 더 이상 거
기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인지 눈치를 보니 포장마차
주인도 어디까지나 그녀가 안됐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 승강장으로 걸어가며 나는 마음을 애써 수습하고 차분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
도 이쪽으로 먼저 정리를 해줘야 저쪽도 혼란이 그칠 분위기였다. "사 년 동안 만나 왔다면
장래까지 약속했겠군. 좋은 사람이라고 그랬지. 그랬다면 그쪽으로 한시 바삐 돌아가도록
해. 나한테도 당신과 비슷한 역사가 있길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잖은가 왜." 손수건으로 코를 훔치며 그녀가 춘향이풍으로 되받았다.
"그런 말밖에는 못하나요. 저는 그럼 뭐예요. 고작해야 기생인가요?"
무릇 기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네들한테도 엄연히 생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는 법이
고 자칫하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누가 권번에 앉아 술을 따르며
취한 작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택시가 왔지만 그녀는 괜한 앙탈을 부리며 타지 않았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앞으
로 당신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먼저 택시에 올라탔다. 언뜻 마지막
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자 했으나 나는 앞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엉겁결에 실수를 했다손 쳐도 그 실수가 되풀이 될 때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니며 그때는
진실이 어느쪽에 있는지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하게 마련이다. 그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나날의 또 매사의 선택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쩐
일인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문을 굳게 잠그고 자리에 누웠다. 다
시 홀로맞게 될 긴긴 생의 날들이 막막했지만 그 밤만큼은 고요히 잠들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벽에 나는 식은땀에 젖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
다. 누가 아까부터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맡의 형광 시계를 보니 새벽 네시였
다. 아직도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술기운 탓인지 뒤통수에 둔한 통증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불을 켜고 생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다시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새벽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지만 꿈일 리도 없
는 상황이었다. 잠옷 바람에 나는 비틀비틀 거실로 나가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초인종이 한번 더 울릴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벨이 울렸다. 나는 신발을 끌고
나가 갸웃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 아까 마포에서 헤어진 그녀가 몸을 움츠리고 서 있었다.
비낀 문틈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나는 한동안 그저 마주보고 있었다. 손에 편의점에서 사온
과일 봉지가 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싶군. 왜냐하면 나는 지금 너를 여기로
데려온 게 누구인지 몰라." 핏발 선 눈으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
뜨렸다. "그게 나여야 한단 말이죠." 말해 무엇하랴. "전처럼 그냥 문답 없이 통과하면 안
되나요?" "이러다가는 둘 다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를 타고 형장으로 가야 돼." 문간에 기
대서서 그녀는 어깨를 흔들며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디로도 갈 데가 없는 여자처럼. 막막
하고 답답한 시간이 그녀와 나 사이에 탁한 안개처럼 고여 있었다. 쉽게 돌아갈 태세가 아
니었다. 언제까지 그녀를 문밖에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정답을 가르쳐 주는
지친 선생님처럼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쨌든 거기 서 있는 게
바로 당신이어야 한단 말이지." "저예요." 다 타들어간 소리로 그녀가 냉큼 대꾸해 왔다. 그
게 대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 밤새 문밖에서 벌을 서고 있던 아이
를 불러들이는 심정으로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나만 묻지. 이 순간 당신 이름과
주소를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말이야." "기억해요." 역시 물어 보나마나 한 소리였다. 그녀
는 죄값을 다하지 못한 아이처럼 거실 한가운데 엉거주춤 서서 내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핸드백을 받아 탁자에 올려놓고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고 얼굴을 씻게 한 다
음 침대까지 데리고 가서 눕게 했다. 잠을 자두라고 말하고 나는 머리맡의 불을 껐다. 그새
밖이 희부윰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을 못 이루고 내 뒤에서 몸을 재게 뒤척이고
있었다. 나 또한 쉽게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러한 어느 순간에 그녀의 메마른 소리가 귓전에
감겨 왔다. "자나요?" 나는 커튼 사이로 틈입해 들어오는 실날 같은 빛줄기는 목도하고 있
는 중이었다. 대꾸를 안 하고 있자 그녀의 손이 내 어깨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녀는 그 손으
로 내게 무얼 말하려는 것인가. "안아 줘요."
젊었던 날에는 실연을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무사인 듯 새벽의 고요 속에서 맑게 숨을 거
두고 싶을 때가 있었다. 삶이란 고작해야 살덩어리를 뜻하는 것일 텐데 어째서 사람이란 숨
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질긴 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만주에서 입적한 수월 스님은
마침내 그 살의 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신발까지 올려놓고 산속에 앉아 홀로 입망했다는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그저 사람 짐승에 불과한 모양인가 보다. "안아 줘요." 나는 몸을
돌려 누워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허황
된 생각에 그처럼 허황된 몸짓으로. "그렇게 너무 다그치지 말아요. 창우 씨가 모르는 것도
있는 거예요."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바위로 튼튼히 구멍을 막고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동굴 속에 순정한 네가 막상 부재 중이라는 것이다. 피곤에
지쳤던지 그녀는 삼십 분쯤 뒤에 깊이 잠들어 버렸다. 나는 소리 없이 방을 빠져 나와 거실
한구석에 앉아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내 지상에서의 시간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게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그때 내가 있던 곳에서 얼마나 멀리 떨
어져 와 있는 걸까. 이제부터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들어 그곳까지 돌아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이제 거기 남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
이다. 폐허의 자취 속에서 굶주린 새 한 마리만 허공을 맴돌고 있을 터이다.
나는 벽 쪽으로 한껏 몸을 말아 붙이고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두 손으로
귀를 힘껏 눌러 막았다. 그러한 때에 누군가의 차디찬 손이 내 이마에 와 닿았다. 나는 몸을
사려 붙이고 눈을 뜨지 않으려 용을 써대고 있었다. 그러자 그 손이 귀를 막고 있는 내 손
등에 와닿았다. "바보 같은 사람. 언제나 그렇게 목숨을 걸어 놓고 사랑을 하나요. 그래서
늘 상대의 목숨도 원하는 그런 사랑을 하나요." 나는 아무것에나 부질없이 목숨을 걸고 싶
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거기에 목숨이 빨갛게 걸려 있음을 보
게 된다. 거실 한구석에 앉아 그녀와 나는 커튼 아래를 적시고 들어오는 아침 햇빛만 두 마
리의 지친 고양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그녀와 나는 여의도 한강고수부지로 나갔다. 이월의 어느 날 밤에 그녀와 앉
아 있던 곳이었다. 그로부터 계절이 그새 두 번 바뀌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선상 카페에 앉
아 여의도와 마포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햇빛만 강물에 찬란한
토요일 오후였다. 오히려 빛이 독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온몸이 바
삭하고 내려앉을 듯한 투명한 피로에 사로잡혀 나는 치매에 걸린 노인네마냥 이런 이 빠진
말을 내둥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듯 내 등에 머리를 기대로 있었다. "어차피 혼혈
의 세상이고 서로 눈만 맞으면 간단하게 흘레를 붙었다 떨어지곤 하는데 나는 뭐가 이렇게
심각하지, 두 남자 중의 하나로 그저 있어도 될 텐데 말이야. 이봐, 매사를 간단간단하고 심
플하게 생각하라구. 상대도 그런 탄력적인 스타일의 사람을 원한단 말이야. 요즘은 누구나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생을 알뜰하게 소비하려구 한다구. 당신처럼 독일 병정
흉내를 내고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개도 피해 가게 마련이야." 그러다가 나는 정신을 차리
고 이렇게 그녀가 들으라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셋이서 한 방을 쓰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혼자 남아서 마당이나 쓸고 있는 게 나아. 오늘은 하느님이 보우하
사 사방에 햇빛이 창창하지만 언제 지진이 발생하고 폭풍우가 몰려오고 해상 전역에 출항
금지령이 내릴지 몰라. 그렇게 되면 당신이 타고 떠날 배는 없어. 그러니 속히 그 남자와 함
께 떠나도록 해. 그래, 사방에 페스트가 창궐하고 있어. 나는 여기 남아서 오랑의 의사처럼
쥐들과 싸우고 싶어. 그런데다 나는 이미 페스트에 전염돼 있는 것 같다. 마지막 기회니까
알아서 해." 곰곰이 듣고 있던 그녀가 등뒤에서 쉰소리를 냈다. "제가 창우 씨한테 남아 있
겠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요?" "돌아가도록 해." "그 남자와 헤어질 거예요." 전혀 그럴
각오가 안 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나와 헤어질 각오도 해야 할 거야." "안 받아 줄 거란
얘긴가요?" "하나의 길을 가란 말이지. 비록 나중에 다른 길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옳
은 거야. 사람의 감정이란 게 항상 선명할 수야 없겠지. 그건 흔히 모서리과 모서리 사이에
희미하게 걸려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게 거미줄이 돼서는 안 돼. 그건 그 옛날 아프리카
에서 선교사들을 앞세워 흑인을 사냥하던 미개한 노랑머리의 노예상인들이나 하던 짓이야."
"어제오늘 말씀이 지나쳐요." "계엄 전야에서 사회에서 쓰던 달콤한 미사여구를 동원할 촌
각의 여유도 없으니 이해 바람. 통신 끝."
나수연과 카페에서 나온 것은 저녁 일곱시였다. 선착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녀는 꿈을
꾸는 표정으로 앞에서 달려오는 밤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전 공항에서 그녀를 만나
신촌의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있을 때 보았던 혼이 빠져 나간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그녀의 입에서 앞뒤가 닿지 않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닭들은 지금 우산갈
대 속에 들어가 있어요. 하지만 빗방울이 갈댓잎 사이사이에서 흘러내리고 있어요." 춥겠구
나 닭들은. "우리도 그 우산갈대 속을 지나가고 있어요."
갈대 서걱이는 소리가 귓전에 가득히 몰려왔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통에 빗방
울이 몇 개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선착장에 얼추 도착할 무렵 정신이 돌아온 듯 그녀가
얼굴을 스윽 내게로 돌리더니 깊게 가라앉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파리엔 언제 간다고 했
죠?" 벌써 몇 번째 묻고 있는지 모른다. 밤기운에 여수에 잠겨 있는 얼굴이었다. 머리칼이
앞으로 쓸려 내려와 왼쪽 뺨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비행기
를 타야 해." "시간이 별로 없군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이든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
었다. 파리로 떠나기 전에 나는 주미가 서울로 돌아왔는지 정도는 알아봐야 할 터이었다. 켜
켜이 조여드는 어둠 속에서 나는 퀭한 눈으로 차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굳게 입을 다물
고 있었다.
배가 뜰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포장마차에서 산 국화빵을 우물거리며 좌판 여기저
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철없는 여자 같았으나 그녀는 그때 또 무슨 생각을 하
고 있었을 것이다. 아까 선착장으로 오는 차 안에서부터 그녀는 수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
다.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모습이 홀연했다. 강화도로 나오는 배 난간에 기대 서서 그
녀가 말했다. "서주미란 여자 암만해도 이해가 안 되요. 아무래도 남파 간첩같단 말예요."
남파 간첩. 나는 되묻지 않고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여자의 뒤에 누가 있
지 않았나 싶어요. 서주미의 가면을 빌려 쓴 누군가가 말예요. 알겠어요? 어쩌면 당신은 그
동안 두 여자를 만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 "그 여자는 그때 돌아가야만 했어요. 그
남자한테 말예요."
그때라면. "마포의 그 생맥주집 앞에서 말예요. 틀림없이 그럴 마음으로 당신한테 다른 남
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 거예요. 당신한테 올 여자라면 절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요. 조
용히 저쪽 남자와 헤어지고 이쪽으로 오죠. 그러는 편이 훨씬 간단할 테니 말예요. 안 그래
요? 마포에서 헤어지고 왜 새벽 네시에 당신 집으로 찾아왔을까요. 그 사이에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할말이 없었다. "내 짐작으론 당신과 헤
어지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뒤에 있었을 거예요. 그 여자의 의지대로라면 저쪽으로 냉큼 돌
아가야 했는데 말예요. 아무튼 가면을 쓰고 뒤에 숨어 있는 존재에 대해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는 중이에요." 머릿속이 뿌옇게 변하며 무릎이 후들거렸다. 서주미의 뒤에 숨어있는 존재.
"한편 당신의 동침까지 시켜 쉽게 헤어질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존재."
내가 과연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걸까. "사 년이나 만나 결혼 약속까지 한 여자가 어떻게
다른 남자와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겠어요.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기 인생을 그렇게 함부로 실험하거나 낭비하지 않아요. 전보다 영악해
진 건 사실이지만 누구나 제 인생에 대해서 다들 심각하게 고민하고 사랑도 한다는 거예요.
텔레비젼이나 광고 매스컴에서 신세대니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운운하며 무책임하게 부추켜
대고 있어서 그렇지 영리한 젊은 사람들은 진실이 뭐라는 것도 알고 그것에 대한 순정도 갖
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일이 내용상 몹시 복잡하다는 거예요. 당신
이 내내 항아리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이제 저도 알겠어
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당신이 왜 그렇게 이 일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지 말예요.
적어도 당신 잘못이나 실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석모도의 갈매기도 배를 따라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되풀이하지만 서주미라는 여자를
통해 어떤 존재가 당신한테 감정을 투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수연의 목은 그새 쉬어 있
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 달아나는 차디찬 느낌이 엄습해 와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상
기도 배를 따라오고 있는 어둠 속의 갈매기 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당신이 그 여
자한테 돌아가라고 한 건 잘한 일이에요.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나를 확
실히 깨달았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어쩌니 무섭군요."
갈수록 앞뒤가 캄캄했다. 배가 강화도에 도착해 도선장으로 차를 끌고 나왔으나 운전석에
앉을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금 무면허가 된 듯한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치받아 오르고 있었
던 것이다. 나수연에게 물으니 그녀는 운전 면허가 없었다. 내 상태를 눈치챈 그녀가 염려스
런 낯빛으로 일부러 그러는지 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제가
괜한 말을 했는가 봐요. 이러지 말고 근처에 있는 찻집에 앉았다 가요." 그러는 게 좋겠다
싶어 나는 산타 루치아 모텔이 마주보이는 허름한 카페로 들어갔다. 바다엔 이미 어둠이 내
려앉고 노을진 하늘로 밤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도선장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백열
등만 외로이 멍한 눈을 뜨고 적막한 사위를 살피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
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수연의 직감만큼은 간과할 수 없는 데가 있었다. 노랗게 얼굴
이 떠 있는 나를 흘끗거리며 그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이러다 서울까지 돌아가기나 하
겠어요?"
하지만 견인 차량을 불러서라도 돌아가야 하리라. "지쳐 보여요." 온몸의 맥이 풀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창틀에 모로 머리를 기댔다. 찻잔을 탁자에 올려 놓는 소리가 먼데 도요
지에서 사기그릇을 깨는 소리인 듯 들여 왔다. 혹은 옛적 어딘가의 벌판에서 창칼을 들고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소리인 듯. 나는 생각지 않으려던 주미와의 일들을 처음부터 차
례로 떠올리며 줄곧 마음을 떨고 있었다. 나의 사랑은 아침마다 이슬을 머금고 늘 수줍게
고개 쳐드는 제비꽃 같으면 좋으련만 어째서 매번 임시 보관소를 찾아오는 여행객이거나 가
면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것일까.
"저기 산타 루치아 모텔에서 머물고 갈까요?"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가 맞은편 의
자에서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고 밀물 지는
소리만이 아득히 안으로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질곡의 세월. 더 이상 기대 없는 인생. 구원의 그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날들. 나는
도로 눈을 감고 점점 심해지는 한기를 쫓으려고 숨을 멈췄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곧 수감될 사람처럼 보여요. 염려하지 말고 쉬었다 가요. 억지로 차를
끌고 서울로 들어가 봐야 상태는 더욱 나빠질 거예요." 진심을 말하기가 힘들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그 말을 오해하게 되면 곧바로 깊은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
이다. 사람이란 말로써 늘 위험천만한 곤경에 처하게 되는 존재다. "밤새 각자 전원 코드를
빼놓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게 안 된다면 오히려 슬픈 일이예요." 나는 도선장 앞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승용차를 내다보았다. 그것은 먼길을 달려와 방금 오아시스에 도착한 낙타처럼
지쳐 보였다. 나수연은 진작부터 내 얼굴에서 그걸 읽어 내고 있었다. "쌍봉낙타도 하루쯤은
쉬고 싶대요." "......" "여행을 다니면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낯선 이들과도 많이 잤어요. 각자
여로에 지친 이방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런 경험 때문에 제가 이런 말을 쉽게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산타 루치아 모텔. 몇 년 전 로마로 가던 길에 베네치아의 호텔에서 하루를 머문 적이 있
었다. "저도 이틀인가를 베네치아의 물가 호텔에서 묵었죠. 밤에 아치형의 리얄토 다리에서
배낭 여행을 온 영국 학생들과 캔맥주를 마시며 얘기도 나눴죠. 지금 생각해도 근사한 곳이
에요." 전화를 하고 오겠다며 나수연이 밖으로 나간 사이 나는 카페 옆에 있는 약국에서 신
경안정제와 몸살약을 사가지고 왔다. 한여름의 날씨에 어서 이불을 쓰고 누웠으면 좋겠을
지경이었다. 눈이 감기며 이마에서 진득한 식은땀이 쉼없이 베어 나왔다. 카페에 들어올 때
부터 뒷전에 가면을 쓴 존재가 내게 창을 겨누고 서 있다는 환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돌아왔다. "거짓말을 하고 왔겠군." 그녀가 눈을 홉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거짓말은 하지 않아요. 세상에 진실과 거짓말밖에는 없는 줄 알아요?" 나는 그녀가 하는 말
을 믿고 싶었다. "나중에 야근비 챙겨 주는 거나 잊지 말아요."
그녀는 저녁으로 비프 커틀릿을 나는 야채 수프만 조금 먹었다. 혼몽한 상태에 밤이 깊어
갈수록 베네치아의 정경이 자꾸만 눈앞에 왔다갔다했다. 그때 나는 왜 그곳에 가 있었던 걸
까. 혼자였는데 어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너무 뜨거워.
어둠이 내린 거리엔 가끔 다리가 풀린 사람들이 게걸음으로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밤안개가 차오르고 있는 길을 더듬어 나수연과 나는 산타 루치아 모텔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이층으로 들어가자 서치라이트에 간혹 물결을 드러내는 밤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수평선 끝에 축축한 불빛 몇 점이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허나 아까 그녀와
들어갔다 나온 석모도의 어둠에 싸여 눈에 잡혀 들지 않았다. 욕실에서 씻고 나와 탁자에
마주앉으니 그새 열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어둠을 내다보며 나는 갈매기들은 다 어디로 가
고 이렇게 조용할까, 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점오리터나 되는 플라스
틱 오렌지 주스병을 손에 들고 몇 분 간격으로 마셔대고 있었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늘
비타민 씨가 필요해요. 이렇게 사는 것도 실은 힘들어요." 그래, 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도 때로 힘든 일이다.
방은 세 평 남짓으로 비좁았으나 그나마 이불보를 새로 갈아 놔서 눅눅한 느낌만은 덜했
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천장이 빙 돌면서 일시에 현기증이 덮쳐 왔다. 쳇 베이커의 노래
가 듣고 싶은 밤이었다. 베네치아의 허름한 호텔 방에서 새벽에 깨어나 듣던 음악이다. 그
여행길에 나는 그가 투신 자살한 암스테르담까지 기차를 타고 갔었다. 어떤 땐 자살이 달콤
할 수도 있다는 망상에 턱없이 빠지기도 한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면
서 개미 떼처럼 까맣게 찾아오는 영원한 잠.
어둠에 성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죽지 말아요. 생은 저 문 밖에 아직 많은 것들
을 남겨 놨어요. 그걸 그대로 놓고 가버리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 떠맡아야 해요. 그게
혹시 사랑이라고 해도 자기 것의 두 배가 될 때는 누구한테나 힘겨운 법이에요. 우정이란
게 느껴져서 하는 소리니 건방지다고 하진 말구요." "......" "밖에 누군가 지나가고 있어요.
구분의 팔 박자로 느리게 말예요." 뜨거운 귀를 모로 틀고 기울여 보니 과연 누군가 지나가
고 있었다. 이 시작에 누가 바닷가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나는 아픔을 감추고 잠꼬대를 하
듯 그저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여름날의 흰 집들과 창틀의 붉은 장미, 그리고 파라솔 밑
에 앉아 있는 남녀 한 쌍의 남녀. 그 옆을 지나가는 늙은 목발의 사내. 이윽고 저녁이 오자
멀리 카페의 문 앞에 붉은 등불이 내걸리고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아득히 보여."
"어딜 떠올리며 그런 말을 하나요. 황금 마스크." "시르미오네. 이탈리아의 가르다 호수에
있는 작은 마을. 바다만큼 큰 호수 안으로 성냥골처럼 패어 들어간 곳이야. 거기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어. 지도만 보고 찾아간 곳인데 오래된 성과 여름철에만 문을 여는 호텔들이
있지.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카페들에 저녁이 되어 드문드문 불이 켜지면 어디선가 사람
들이 몰려나와 술을 마시러 가지. 그럼 나는 단 하나의 외로운 이방인이 되어 구석 자리가
남아 있는 카페를 기웃거리고 다니지. 마을에 동양인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런
곳이군요." "내세엔 그곳으로 신혼 여행을 떠나고 싶어." 신혼 여행, 이라고 그녀가 잠에 겨
운 소리로 되받았다. 그 소리에 섞여 썰물 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낮에 본 석모도 개
펄의 붉은 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는 저마다 컴컴한 제 집 구멍으로 돌아갈 시각이었
다.
나수연이 몸을 부스럭거리며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직도 외로운가요." 그 소리에 나는
어둠 속에서 살며시 눈을 떴다. 내가 외로운가? 라고 짐짓 자문해 보며. 불 꺼진 천장 위에
간헐적으로 바다를 핥고 지나가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이 사라지자 그 먼 나
라의 호수가 눈에 잡혀 들었다. 내 언제 거기를 다녀왔더라? 산부도 없이 말이다. 그러하고
언뜻 잠에서 깨어난 지금은 내 인생의 전인가 후인가 아니면 그 한가운데인가. "외로워하고
있군요." 나는 생의 한가운데서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정이 옆에 있으니 그다지
외롭진 않아. 그래, 이런 인생의 밤엔 앞으로도 누군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
는군. 하지만 눈을 뜨면 또 갑옷을 챙겨 입고 창칼을 들고 나가야만 하겠지." "결국은 누구
나 다 다툴만한 상대를 찾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일도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 싸
움이 부디 어여쁘면 좋으련만." "그만 자요, 자다가 적막하면 깨우구요."
깨워서 무슨 소리를 하랴. 어쩌다 추운 새벽잠에서 깨어나 희미한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옆 사람을 내려다볼라치면 마음은 더욱 더 막막하고 외로웠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을 보면
안다. 내 인생만큼 그의 인생도 힘겹다고 것을. 그러니 그대라도 아침까지 편히 주무시길 바
란다.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은 인생에 대해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래요." 알 듯 모를 듯한 그
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신발을 벗고 천천히 잠의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꿈에 나는 나수연과 호숫가의 외진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호수를 일주하는
관광 유람선이 화려한 빛을 발하며 유유히 떠가고 있는 저녁. 탁자 위의 빈 맥주잔에는 말
할 수 없이 달콤한 향수의 시간이 고이고 저만치서 들려 오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에 한쪽 귀
를 세우고 서로 은밀한 눈빛들은 주고받는데 신부인 그녀는 아까부터 호텔로 돌아가자고 떼
를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채 카페의 문을 나서는데 올리브 나무에서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웨딩 드레스가 펄럭여 내
얼굴을 휘감는 것이었다. 그래서 밤이 문득 하얗게 변하는 찰나 그녀의 웃음 소리가 가랑비
처럼 머리에 쏟아져 내리고 호텔 앞에서 신랑 신부를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가 빗방울을 피
해 정원으로 숨어 버리고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나선형으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갈수록 빛은 침침
해져 갔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걸어올라가도 도무지 객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호텔로 왔나 봐요." "......." "열쇠도 카페에 두고 온 것 같아요." 프런
트에 있을 거야, 라고 말하며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처럼 가벼웠지
만 나는 어느덧 무릎에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귀에다 대고 뭐라 또 속삭이는 순간,
나는 발을 헛디뎌 계단 사이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 잤다. 자다가 나는 바닥에 떨어져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녀가 방 한가운데 종
이학처럼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새 아침인가? 희부윰한 빛이 창틀에 기웃거리고
있었다. "새벽 여섯시예요. 무슨 꿈은 그렇게 꿔요."
그녀는 이 새벽에 왜 일어나 앉아 있는 걸까. "오렌지 주스를 너무 마셨나 봐요. 속이 쓰
려요." 그녀가 옆에 모로 누우며 내 손을 더듬어 잡았다. 나는 잠깐 사이 그 신부 꿈을 떠올
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귀에다 소곤거렸다.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하면 안 되나요?" 가슴
안쪽으로 나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밤새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병이라도 든 걸까.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래, 그렇지, 그러하겠지.
아침이 올 때까지 그녀와 나는 고요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누워있었다. 파도가 쳐들어오는
소리가 밖에서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파도가 쳐들어오는 소리가 밖에서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캄캄한 브라운관이 그때껏 그녀와 나를 그 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
다. 그래, 코드를 빼놓고 얌전하게 잘들 잤어. "한데 그 여자가 왜 내게 돌아왔다고?" 불현
듯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나수연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고 내 손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이왕에 뱉어 놓은 말이려니 싶어 나는 덧붙였다. "그것도 가면이 시킨 일이
었다고?"
밖에서 마당을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환청인가.
"그래요." "역시 후위에 다른 존재가 있었단 말이지." "글쎄, 그렇다고 제가 여러 번 말했
죠."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잠시 후 그녀가 이불 속에서 빠져 나가 욕
실로 들어갔다.
나는 첫배가 뜨고 있는 도선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낚시를 하러 아침부터 석모도로 들어
가려는 사람들로 항구는 붐비고 있었다. 여덟시쯤 산타루치아 모텔을 떠나 그녀와 나는 서
울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녀는 핼쑥한 얼굴로 줄곧 입을 닫고 있었다. 차장을 내리고
연신 담배를 피우며 에프엠 방송만 듣고 있었다. 아홉시쯤 서울에 도착해 맛없는 아침밥을
먹고 헤어지려고 할 때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오늘은 쉬고 싶어요." 어제오늘 많은 일들
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러라고 했다. 무척 피로한 낯빛이었다. 아니, 다른 무엇이 또 있는 듯
도 해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서두르는 게 좋겠단 예감이 들어요. 파리로 가기 전에 말예
요."
뜻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수
연은 그때 내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걸까. 그녀를 보내고 나서 나는 차를 돌려주기 위
해 방송국에 갔다가 오후 두시쯤에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졌다.
마포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주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반쯤은 이미 체념하
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결별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일주일에 나흘 녹화
를 위해 방송국에 드나드는 일마저 없었다면 매순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녹화 중인 스튜디오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동안 어디에 가
있었는지 파리하게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화장도 하지 않는 얼굴에 단출한 청바지 차림이
었다. 그때쯤엔 방송국 내에서도 주미와의 관계가 알려져 이래저래 행동거지가 거북할 때였
다. 그녀는 스튜디오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촬영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내가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갈 데가 있다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방송국을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네온사인 빛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언뜻언뜻 이마의 어두운 그
림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포를 지나 광화문 국립중앙박물관 앞에서 유턴한 다음 택시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길을 더듬어 "파하"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녀와 북한
산에서 관계를 갔던 날 함께 와서 술을 마신 곳이었다. 그녀는 스탠드에 앉아 커티샥을 주
문하고 스트레이트로 급히 몇잔 들이켰다. 나는 그녀가 하는대로 무르춤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대형 선풍기가 느리게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녀와 관계의 끝에 와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그녀에게 고
통을 주고 싶지 않아 나는 술병이 삼분의 일쯤 비워졌을 때 그만 마시라고 하며 술잔은 내
앞으로 갖다 놓았다. "굳이 절차가 필요한 것은 아니야." 그녀가 술잔을 제 앞으로 도로 끌
어당겼다. "무슨 뜻인가요." "곧장 송환선을 타면 된다 이 말이지." 그녀가 핏기 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화장을 안 한 그녀의 얼굴이 그날따라 몹시 낯설어 보였다. "고작 그 말밖
엔 할말이 없나요?"
전화 한 통 없다 이 주일 만에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 앞에서 그럼 내가 어찌해야 옳단 말
인가. 언제까지 나도 그네를 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지금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오
는 길이에요." "헤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나는 전과 같은 마음이 될 것 같지
는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그녀는 부채를 들고 외줄타기를 하며 또 저쪽으로 건너가
려 할 것이었다. 그러니 나라도 먼저 잡고 있던 줄에서 손을 떼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현명
한 일이 될 터이었다.
한데 그 순간 그녀에게서 일종의 절박한 위험이 감지되고 있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절박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 진부해질지 모를 물음을 되풀이하기에 이르렀다. 기
대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잘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상대로 그 말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당신과 만나고 있다고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절대 받아들일 수 없대요."
그녀는 본인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이내 맥이
풀려 나는 그녀와의 지루한 복습을 다시 시작했다. 이왕 말이 마당이니 어쩔 수도 없는 일
이었다.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게 또 그 지긋지긋한
공부라는 거 아닌가. "그 말의 뜻은." "그건 사랑이 아니래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
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저를 두고 하는 말이잖아요." "그게 사실인가." "......"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이런 말놀음에서 나는 그만 놓여 나고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를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허니문 하우스까지 데려다 주고 오고 싶었다. 그쯤이나 돼야
그녀의 방황도 끝나고 관계도 일단락될 성싶었다. 단순한 사람이니 그렇게 하고 나서도 세
월이 조금만 흐르면 별 특별한 상처 없이 잘 살아갈 터이었다. 내가 호박색의 술잔만 내려
다보고 있자 무엇이 복받쳤던지 그녀는 또 제풀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어쨌든 헤어지자
고 했으면 이제 된 거 아닌가요. 그건 어디 쉬운 일이었는 줄 아나요. 그 사람이 얼마나 불
행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니 나머지는 이쪽에서 알아서 수습하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렸
다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봐,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제 와서 그게 어떻다는 거야. 상대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믿고 있을
때 돌아가도록 해." 이것이 이제 와서 내가 제안할 수 있는 유일한 수습책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또 그렇게 됐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방송에서도 통하지
않을 이놈의 멜로가 또 지루하게 반복될 게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
았다. "이미 다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전처럼 만날 수 있
을 것 같은가요."
참으로 요령부득인 사람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몇십 년대풍의 낡은 아코디언 소리가 나는
신파조 연애란 말인가. 술에 취한 그녀를 택시에 태우고 나는 불광동 어디라는 그녀의 집으
로 갔다. "파하"를 나오면서 그녀는 이제부터는 나를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그 말이 진심이라 해도 언제 또 시소
놀이를 할지 모를 사람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는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약간의 말다툼을 하며 나는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녀는 내 팔을 뿌리치고 앞
장을 서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두어 걸음 떨어져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비틀거
리며 걷던 그녀가 한순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웬일인가 싶어 나는 그녀의 모습을 눈여
겨보며 어둠 속에 멈춰 섰다. "대문 앞에 엄마가 나와 있어요." 그녀의 어깨 너머로 키 작은
부인네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게 눈에 들어 왔다.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팔짱을 낀 자세로 대문 앞에서 이쪽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인사
를 할 처지도 아니어서 난감한 꼴로 우멍하게 서 있자 그녀가 내 앞으로 바투 다가왔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요." 이쯤이면 돌아가도 될 상황이었다. 골목을 막 돌아 나가려는데 그
리고 그녀가 불쑥 이런 말을 던져 왔다. "어머니도 창우 씨와의 관계를 알고 있어요." "......."
"그러니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얘기해 줘요. 그런 다음에 돌아가세요."
대문 앞에 아직도 그녀의 어머니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무너지기 쉬운 다리는 건너
는 않는 게 좋아. 지금까지 당신과 나는 운이 좋아 그마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거야.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속히 뒤로 물러나는 게 좋아. 도대체 몇 번이나 말을 해야 알아듣겠
어." "제가 확실히 다리를 잘못 건너고 있는 건가요?"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럼 제가 이렇게 말하면 되나요? 뒤에서 다리가 무너져 내려도 이제 후회하
지 않겠다고 말예요." 다리가 무너져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내 앞자락을 붙들고 말했다. 나는 등뒤의 어둠을 돌아보고 나서 이윽고 그녀를 마주보았다.
"알다시피 우리 나라는 다리뿐만 아니라 백화점도 무너져 내리는 나라야. 물론 예고 따위는
없지. 그런데 나와 함께 하필 제이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에 가겠다는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네." 대답이야 늘 유치원생처럼 잘한다는 걸 알고 있다. "마침 사고가
나서 나는 죽고 당신만 살았어.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오락가락하는 얼굴로 그녀가 자동
인형처럼 또 네, 라고 했다. 또 다시 미혹에 빠지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나는 거듭
확인해 묻고 있었다. "반대로 당신은 죽고 나만 살았어. 그래도 괜찮다는 건가?" "네." 그쯤
에서 나는 몸을 돌려 골목을 돌아 나왔다. 자칫하면 상대에 대한 경고나 위협의 말이 될 수
있었으므로 더 이상 묻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날로부터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쪽에 와서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가끔
저쪽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려니 싶
어 나는 굳이 따져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혼란에 빠진 모습을 자주 내
게 보여 주곤 했다. 저쪽도 어지간한 사람이어서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점점 무서워진다며 좀처럼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와 헤어지지 못하
는 이유가 여전히 그녀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잘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강남에 있는 레스
토랑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저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나 봐요." 그 말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차
라리 침착하게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원하는 바를 말해 봐." "간다면 보내 줄 건가요?"
"간다면 보내 주는 게 아니라 잡을 수가 없겠지. 하지만 당신은 이미 늦었어. 그러니 그만
부채를 접고 땅으로 내려와. 이미 양자택일의 선택은 끝난 지 오래야." "그 말은 보내 줄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한편 그렇기도 하지. 왜냐하면 내게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삶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야. 이제는 당신의 삶만큼 내 삶도 중요하게 생각된단 말이지." "이
제 와서도 당신과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런 나를 당신이 언제까지 사랑해 주겠
어요."
이러한 와중에도 그녀는 행복과 사랑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호주산 바닷
가재와 캐비어와 또 곰발바닥과 제비집 요리를 놓고 프랑스산 마고 포도주와 대나무 이슬주
를 마시고 싶다는 말과 다름없는 얘기였다. 지금은 각자 뜬눈으로 최소한의 자기 윤리를 진
지처럼 사수해야 할 때였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한강의 유람선이라도 타고 맥주를 마시며
저녁노을이라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저에 대한 복수를 하려 들 거예요." "복수라니? 아니, 그런 일은 절대 하
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엔 남북 관계하며 동서 관계하며 골칫거리인 일들이 너
무 많아. 사안의 중요성을 따져 봐도 그쪽 일이 훨씬 중요해. 그러니 쓸데없이 일에 힘을 낭
비하지는 않을 거야." "왜 그렇게 기계처럼 말해요." "이런 때일수록 감정을 자제하는 게 좋
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건 맞는 말이예요." 그렇든 저렇든 그녀는 이쪽에 머물러 있
었다. 그 초조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그녀에게 꺼내놓
았다. 내 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저쪽과 이쪽을 한꺼번
에 다 떠나는 거야. 그러고 나서 얼마간 자기 삶에 휴식을 준 다음 다시 시작하는 거지. 아
직 나이가 있으니까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거야. 만약에 그럴 작정이라면 기꺼이 가도록
해."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되는데요?"
"중원으로 돌아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형사제들을 만나 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 비록
강호를 떠날 때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이야." "지금 저를 조롱하고 있나요?" "진심
을 말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제가 당신이란 사람을 버리겠어요."
그런가. 뭐 그래도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
다. 그것은 곧 내가 그녀를 저버린다는 말이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금이라고 전후좌
우만 선명해지면 얼마든지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마음 한켠에 담다 두고 있
지 때문이기도 있다. 전생이야 누구한테나 있는 법이고 그걸 문제삼아 봐야 아무 소용도 없
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더군다나 새로 사람을 만나서 그
곤혹스런 기승전결의 곡예를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주미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녀는 우도에 대해서 거의 맹목적인
귀소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이 다 끝나 갈 무렵 녹화가 비어 있는 날을 잡아 그녀가
나는 제주공항에 내려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버스를 타고 성산 호텔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때 나는 그녀가 왜 슬그머니 그곳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침에 일출봉에 올라갔다 오니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메모
가 탁자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상대가 말하기 싫어하면 묻지 않는 성격이므로 나는 오
후 다섯시쯤 그녀가 돌아왔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는 아까 낮에 전생에 다녀왔어요. 아득한 전생
에 말예요." 그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털어 놓았다. 이십여 년 전 한 낚
시꾼이 우도로 갈치 낚시를 하러 왔다. 달 밝은 어느 날 밤에 그는 바다에 떠 있다 둥그런
모양의 은빛 광채가 마을 한가운데 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비행접시가 내려 와
있는 것처럼 홀연해 보였다. 그 빛에 홀려 낚시꾼은 저도 모르게 물에다 배를 대고 그쪽으
로 발걸음을 옮겼다. 깊은 밤이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골목에서는 간
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려 오고 있었다. 이윽고 낚시꾼 사내는 그 빛이 어느 집 돌담 안에
서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빛을 보려고 사내는 깨금발을 하고 돌담안을 기웃거
렸다. 그리고 사내는 마당에 널려 있는 갈치들을 보았다. 멀리서 본 그 은은한 광채는 바로
갈치에 내려와 있는 달빛이었던 것이다.
집 안에 사람이 없는지 적막한 기운에 싸여 있었다. 사내는 슬그머니 대문 안으로 들어섰
다. 그때 옆집에 마실을 갔던 처녀가 돌아오다 제집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는 낚시꾼을 발견
했다. 그녀는 홀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는 고산에 있는 큰댁에 제사를
지내러 간 터였다. 낚시꾼은 뒤에서 누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이 남
의 집 마당을 훔쳐보고 있듯이, 두 사람은 거기서 눈이 맞았다. 눈이 맞아 그 밤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그 낚시꾼과 우도 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계집애였다.
낚시꾼은 우도에서 며칠을 더 머물며 그녀를 데려가리란 약속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아비는 딸을 마을에 둘 수가 없었다. 처녀는 보따
리를 꾸려 서울로 올라와 먼 친척뻘 되는 집에서 눈칫밥을 먹다가 일 년인가 뒤에 방을 얻
어 나왔다. 동네 한 모퉁이에 화장품 가게를 냈던 게 잘돼 나중에는 백화점에 옷가게를 차
렸고 몇 년이 지나서는 집을 팔고 사는 형식으로 돈을 불려 주택 임대 사업에 손을 대 만만
찮은 재산을 모았다. 그러면서 주미와 아버지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았으나 끝내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제주와 우도에 대해 품고 있는 곡진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 버린 성
싶었다. 그녀에게는 그곳이 자신의 삶이 비롯된 곳이면서 동시에 원초적인 상실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려서부터 누군가 늘 자신을 버리고 떠나리라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사 년 동안 깊이 정든 그 남자도 언젠가는 자신을 버리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상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우도가 내다보이는 곳에서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도의 그 둥그런
은빛은 그날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글자 그대로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하고 바다 위에
뚜렷이 떠 있었다. 비록 반달이었으나 밝은 밤이었다. "저를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영원. 나는 오래 생각한 뒤 대답했다. "그것은 자칫 거짓말이 될 수 있어." "그
래도 약속해요." 영원에다 대고 감히 약속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달이 막 수평선 뒤로 넘어갈 무렵 그녀가 내 귀
를 아프게 잡고 속삭여 왔다. "저를 떠나면 찾아내서 꼭 복수를 하고야 말 거예요."
복수. 그녀의 입에서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그날 밤 그녀와 나는 여의도의 식당에서 만
난 이래 가장 더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다음날 그녀와 나는 신혼 여행을 온 신랑 신부처럼 일출봉 아래 바다를 거닐다가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헤어지던 며칠 전까지 그녀는 전에 만나 오던 남자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았
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다시 저쪽으로 돌아가리란 생각은 서서히 잊어 가고 있었다. 성산
에 다녀온 두 달 후에 그녀가 제주도에 갔을 때도 다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
한 시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그러했으리라. 하지
만 내가 그녀에게 말했듯 돌아가기에는 때가 늦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끝에 가서 내가
집착한다고 그녀가 느꼈던 건 훗날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한 내 막연한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삼월의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와서 느닷없이 나와의 결별을 얘기했
을 때 나는 그녀와 만나 오던 그 어느 순간보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한 여자와의 이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남녀들이 만나고 헤어지
지만 거기엔 남들이 듣기에도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이유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진부
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끝내 한 사람의 죽음을 불러온 귀환을 감행했다. 내게 그러했듯이 그녀는
그 동안 저쪽과도 힘겨운 낱말 맞추거나 미로찾기 게임을 했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사랑해
서 만나 온 게 아니라는 깨달음도 그녀와 헤어진 뒤에 확연하게 찾아왔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파리로 떠나기 이틀 전 나는 나수연과 함께 "오래된 정거장"에 들렀다. 딱히 무슨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를 당분간 만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고
한편 그녀와 이주일 간 함께 지냈던 시간을 정리하기에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
문이었다.
그녀를 공항에서 만났던 날처럼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입구에 피어 있는 장
미도 만개하여 꽃잎에 듣는 빗줄기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어깨가 빠진 쓸쓸한 표정으로 그
녀는 창가에 앉아 촛불만 어둡게 지켜보고 있었다. 맥주도 저녁으로 시킨 그라탕도 그녀는
좀처럼 입에 대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며 왜냐고 물어 봤으나 암만해도 그럴듯한 대꾸가 없
었다. 한 시간쯤이 지나서야 그나마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희미한 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불쑥 늙어 버린 느낌이에요. 불과 몇 달 전에 여기 앉아 있던 나
와 지금의 내가 전혀 딴사람 같아요. 그래도 그게 괜찮은 것이지 아니면 뭐가 잘못된 것인
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또 어긋난 때문에 힘겨워지고 있었다. 거기엔 나라를 존재가 보이지 않게 개입돼
있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 그 동안 그녀를 가까이에서 에워싸
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녀를 적극적으로 배려하지 않았다는 묘한 자책감이 꿈틀
꿈틀 몰려왔다. 그녀가 잃어버린 하얀 자전거를 찾는 일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것이
다. "알아야 할 것은 결국 알아야겠지요. 그 동안 저는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했
고 또 앞으로 사랑이란 걸 하게 되리란 것도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런 사실이 왜 반갑지가
않고 이토록 힘들게 느껴질까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
녀는 서서히 제 나이를 되찾아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못내 두려운 모양이었다. "피하려
고 해서 피했던 게 아닌데 줄곧 딴 세상에 있다 초라하게 붙잡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에요.
다만 제 기분이었다고 해도 그때가 아름다웠는데요." "빼빼로 공주, 철든 그대도 여전히 어
여뻐." 내 말에 그녀는 쓸쓸히 웃기만 했다. "그쪽은 제 기분을 충분히 몰라요. 지금의 제가
진짜가 아니고 가까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심각한 일인 거예요. 아직도 저는 하얀
자전거를 타고 얼마든지 지구를 빙빙 떠돌고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른 여자가 되고 사랑
과 욕정이란 걸 알게 됐으니 그게 이제는 다 못 쓰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 말대로 어른 여자(혹은 남자)가 되고 사랑과 욕정이란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인생이
컬러 텔레비전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저축한 돈을 다 써버린 빈 통장처럼 돼버려 그때부터
는 백 원씩 이 백원 씩 하는 식으로 자신과 거래를 시작해야 되고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 있
어서도 적당한 요령을 발휘하지 않으면 늘 코가 깨지게 마련이다. 요컨대 사는 일이 더 이
상 추억 만들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세발 자전거이든 두발 자전거
이든 이제 그만 창고에 집어 넣어 버리고 대문 앞에 까맣게 몰려와 있는 삶이란 도적 떼와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나수연도 곧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가끔은 수
면 위에 고개를 내밀고 자신이 어디에 있나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대는 지금
까지 많은 곳을 다녔으니 인생을 다채롭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놓은 거야." "그
럴까요?" 오랜만에 물을 먹은 화병의 꽃처럼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알고 보니 삶은 해
석학인 것 같아. 해석의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 말이지." "일체유
심조?" "그래,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 빼빼로 공주." 그녀는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잡아 묶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내 잔에다 쨍 하고 부딪
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키만 멀쩡하게 컸지 아직도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이었다.
나이라는 건 아무래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힘든 순간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잘 넘겨줬어요."
아마 그런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미혹에 빠져 있을 때는 절대로 칼을 빼
들지 말아야 한다. 상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칼이 나를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돌아오면 저는 그때 서울에 없을지도 몰라요." 구체적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을 이미 그렇게 정했다면 지체한들 다른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
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몇 가지 정리하고 넘어갈 게 있어요. 우선 파리로 떠나기 전
에 해야 할 일을 아직도 빠뜨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렇다 여의도에서 주미의 어머니를 만나고 나서 지금껏 나는 아무 움직임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파리로 가기 전 그녀를 만나 볼 생각이었으나 아직 연락조차 못
하고 있다. 주미의 상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기 때문일까.
"더 이상 멈칫거리지 말아요. 황금 마스크. 횃불을 켜들고 한 발자국씩 동굴 안으로 들어
가 보는 거예요. 그쪽은 그 안에 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중
성의 묘한 음조로 바뀌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몹시 긴장하곤 했었다. 말하자면 지금도 그런 상태였다. 타고난 것인지 그녀에게는 사
람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능력이었다.
어느덧 초점이 풀린 그녀의 눈자위에 기묘한 빛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전에도 보
았듯이 얼굴에서 표정이 걷히면서 몸의 움직임이 서서히 사라졌다. "당신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 거예요." "......" "가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말예요. 그렇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거예요." "......" "그 사람을 만나세요. 안 그러면 또 사람이 다칠지 모르니까
요. 당신은 그 여자와 헤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걸 끝내고 싶겠지만 아직 문제가 진행
중인 걸 알아야 해요. 어쩌면 당신보다 더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이 두렵게 느껴졌다. "피하면 안 돼요. 언젠가 반드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날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을 온통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게 될 거예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녀는 툭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긴 숨을 몰아 쉬었다. 목덜미에 땀이 번질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숨을 고르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갈증을 삭이려고
맥주를 한잔 들이켜고 나서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숨을 죽인 채 그녀를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브레인 워시"에서 주미의 어머니와 만날 때 들었던 빌 에반스의 "이런 꿈
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곡이 흘러 나오는 동안 나수연은 손을 씻고 오겠다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주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굴 속 저
편으로 신호를 보낸 것처럼 한참 만에야 희미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언뜻 번호를 잘못 눌
렀나 싶었던 것은 저쪽에서 전달돼 오는 목소리의 느낌이 낯설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때에 따라 잘도 칠면조처럼 변하는 것이다. 부러 그럴 리 없을
텐데 그녀의 응답은 줄곧 냉랭하고 마디마디가 끊어져 있었다. 내 이름을 대자 고작 네, 라
고 되받고 나서 그녀는 입을 봉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나 싶어 나는 정중하게 되물었다.
"주미 어머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 "말씀을 하시면 됩니다."
암만해도 전에 두 번이나 만나 나를 대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특유의 정중함은 그대로였
으나 나와 통화를 할 의사가 그닥 없는 듯 싶었다. 나는 그 사이에 주미에게 무슨 일이 일
어났음을 깨달았다. 나수연의 말대로라면 이미 때가 늦어 있는 걸까. 어쨋든 나는 주미의 소
식을 물었다. "제주도에서는 돌아왔나요?"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소리로 그녀가 짧게 끊어서
대답했다. 나는 소식이 늦어졌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소식이 늦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대뜸 뭘 물어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착
잡한 기분에 빠져 비가 내리고 있는 아치형의 입구를 초점 없는 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철 지난 어느 날 그녀는 저 문을 들어서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왔었다. 그때 나는 그
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직 문이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러나 그때 내게는 이미 밀고 들어갈 문이 사라진 뒤였다. "주미는
잘 있나요." "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목소리였다. "집에 있나요." "곧 어딘가로
보낼 생각입니다." 돌아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상태가 좋
지 않은 모양이군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짐을
챙기는 대로 적당한 데로 요양을 보낼 생각입다니. 제주도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곳을
함부로 돌아다녀 몸이 많이 상해 있습니다." "주미도 그 일을 알고 있었군요." "네, 그런 모
양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틀 후 파리에 가서 보름 후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며 내일쯤 시간을 내
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얘기를 듣고 나서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고 글쎄요,
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한동안 진공 상자 속에서 앉아 있는 듯한 갑갑한 순간들이 지나갔다.
"일찍 연락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그녀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
가 들려 왔다. 타버린 종이 마냥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해져 있었다.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
까." 창가에 앉아 있는 나수연이 아까부터 나를 골똘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있다
면 오늘이라도 뵙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나수연이 두 손으로
탁자를 내리누르며 침착하라는 신호를 보내 왔다. "오늘내일 만나야 할 일은 없을 것 같습
니다. 그러니 마음쓰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도록 하세요." "그렇더라도 뵙고 싶습니다." "지
금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그러니 이제 돌아가세요. 그럴 일이 생기면 나중에 이쪽에서 연
락드리겠습니다. 주미가 제주도에 있을 때였다면 몰라도 이미 늦었습니다. 자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나수연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리를 가누고 자리로 돌아와 나는 나수연에게 이런 말을 내
뱉고 있었다. "다 듣고 있었어?" "그래요." 그녀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그
녀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아 왔다. 웬일인지 온몸이 슬금슬금 떨려 오고 있었다. 이 팔월
의 한여름에. 비가 와서 그런가.
"늦었다고 하는군." 마침내 목덜미로 차디찬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무엇
이 또 잘못된 것일까. 나는 김이 서린 유리창을 냅킨으로 닦아내고 비가 내리고 있는 주차
장을 기웃거렸다. 오월에 여기 앉아 보았던 장미는 이제 꽃잎이 툭툭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요, 라고 그녀가 나를 깨운 건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그 동안 그
녀와 나는 말을 잃고 팔월의 시든 장미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을 나서며 그녀가 여
선생님처럼 툭툭 내등을 두드렸다. "그렇다고 다 늦은 건 아니에요. 틀림없이 할 일이 남아
있을 거예요. 다만 시간이 좀더 필요할 거라는 사실은 염두에 둬야겠죠. 누구나 한 번쯤 지
각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당장 퇴학을 당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수연이 일
껏 나를 두둔하고 있었지만 나는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방향을 생각지 않고 무심
코 횡단보도를 건넜을 때 나수연과 나는 신촌 기차역 광장에 서 있었다. 이화여대 정문 쪽
에서 우산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디로 가지? 라고 맥없이 우물
거렸다. "기차역에 앉아서 얘기 좀 할까요? 허구한 날 사람들은 어둠침침한 술집이나 카페
같은 데서 만나잖아요. 이럴 때 한번 공간과 장소를 바꿔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사람들
이 모여 있는 대합실에 앉아 있으면 혹시 쓸 만한 생각이 떠오를지 누가 알아요."
나는 그녀가 끄는 대로 좁은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때에 절어 번들거리는 긴 나무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막차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짐을 끌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
었다. 여름이었으므로 대합실에서는 퀴퀴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우산을 들고 앉아 나수연과 나는 방금 지나온 광장을 내다보았
다. 기차역 안에서 본 신촌의 거리는 번요하고 낯설었다. 나는 그녀와 둘이 커다란 자동 카
메라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 들어오니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로군. 그렇다면 술
래가 곧 우리를 찾아내겠군." "아뇨, 꼭꼭 숨어 있으면 못 찾아요." 나는 머리가 보이지 않
게 몸을 웅크리는 시늉을 했다. 그녀도 따라서 그렇게 했다. "이런 데 비를 맞고 숨어 있으
면 어디선가 시멘트 냄새가 몰려든다고 했던가." 그녀가 소리 죽여 웃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밤새 코펜하겐으로 가고 싶군, 가서 슈퍼마켓으로 외상으로라도 한줌의 사랑을 사고
싶군." 그녀가 먼 듯 가까이에서 속삭여 왔다. "이럴 때면 생이라는 걸 생각해 보게 되요.
누구 말마따나 자기 앞의 생. 그래요, 생은 약간 춥고 달콤하고 쌉쌀한 거예요. 그렇게 이
순간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예요." 나도 마침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단 파리에 다녀오세요.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다녀와요. 시간이 답을 가져다 줄 거예요.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마음을 충분히 열어 놓고 말예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쓸데없
는 자책 같은 건 말아요. 그쪽도 많은 고민을 한 셈이에요. 필요한 때라는 게 저쪽과 어긋났
을 뿐예요."
젖은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고 나는 무심코 그녀의 신발로 눈을 가져 갔다. 그녀는 청바
지에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 길고 마른 다리였다. 그런 사람과 나는 오래된 정거장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가 듣고 싶은 저녁이었다. 그래, 생의 어느 날,
생의 한가운데.
그녀가 내 등을 둥그렇게 팔로 끌어안았다.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항상 서두르고 있
기 때문이에요. 지금부터라고 지나가고 있는 시간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아 보는 거예요.
그래요. 이미 뭔가 하나는 손을 쓸 수도 없이 돼버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나머지라는
게 있잖아요.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한지도 몰라요. 안 그래요? 황금 마스크."
대합실엔 여전히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고 우리들 인생을 위해서인 듯
아주 커다란 시계가 벽에 붙어 재깍재깍 초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막차가 떠나고 나서도 그녀와 나는 빈 대합실에 한 시간쯤 더 앉아 있었다. 언제 또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만나리라 믿고 있지만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 지 모르
는 것이다. "다시 보게 되면 처음보다 더 반가울 거예요. 사람이란 가끔 떨어졌다 만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변함없이 관계 말예요." 나는 뜻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도 늘 붙어 있어야만 되는 사람이 인생엔 필요한 건가요?" "......" "그럼 아이를 낳게 되고
매일 밥을 함께 먹고 잠도 자는 건가요." 그렇겠지. "그게 그런 건가요?" 그게 그런 거냐니.
"누추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거야. 아직 그대는 젊고 어여뻐서
잘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누구나 점점 누추해지기 마련이야. 그게 사람이란 거고 그
래서 또 살림이란 게 필요한 거야. 삶이 누추하지 않다면 왜 그깟 살림이 필요하겠어. 지금
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대도 곧 알게 될 거야. 누추함이 가져다 조는 거룩함에 대해서
또한 행복에 대해서 말이야. 물론 때로 아프지." "......" "가장 누추한 삶이란 혼자 살아가는
일인지도 몰라.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삶 말이야. 나는 그렇게 살아 봐서 알아." "그
럴듯해요." "그렇고말고"
밤이 늦어 그녀와 나는 오래된 정거장에서 나왔다. 많은 말들을 나눴지만 그래서 더욱 허
전한 밤이었다. 그녀와 나는 우산을 쓰고 신촌을 빠져 나와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둘인 듯 하나인 듯 간혹 서로를 기웃거리며.
열한시에 그녀와 나는 경북궁 앞에 와서 헤어졌다. 참 많이도 걸어왔던 것이다. 행복하라
고 서로에게 말해 주고 그녀와 나는 불현 듯 남이 된 듯 돌아섰다. 아니 처음부터 남이었는
데 그때는 남이 아니었던 것처럼.
작품론
하얀 자전거를 타고 새벽의 연꽃에게 가다 - 팔십년대와 구십년대가 만난, 그후로도 오랫
동안
최성실 문학평론가
내게는 비가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광선 속에서 한순간 고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서로 꼬리를 물며 사라지는 이미지. 사고한다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 아름답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혼잡스런 이 세계의 외부로 향하는 흐름,
중얼거림이다. 사고를 정지시켜 밝은 빛 속에서 그 내용을 훑어보려 한다면, 가만있자. 어떻
게 말해야 하나, 포착할 수 없는 사고의 외곽선을 보존하려 한다면 물은 손가락 사이로 흘
러 버려 남은 것은 광선에 의해 뜨거워진 매력을 상실한 몇 개의 물방울뿐이리라. 그리하여
인간은 서서히 산다는 것의 어려움 속에서 존재의 절망으로 이전하게 된다. - 장 필립 투생
의 "사진기" 중에서
1 "웬 나쁜 피를 가진 짐승이 사과를 베어먹듯"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야금야금 파먹고
있는 월식의 이미지와 팔십년대라는 "오래 전 신었던 신발"을 신고 구십년대 몸뚱이를 빼앗
긴 어눌한 삶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그리고 영혼의 하얗고 투명한 사람이 타고 있을 은
빛 자전거와 이를 그리워하는 구십년대 불특정 다수 중의 한 사람을 조용히 불러내 보라.
서서히 마음 한구석에서 서걱거리며 아프게 영혼의 심연을 건드리는 산란한 은어의 몸짓과
영혼이 느껴질 것이다.
루카치는 "삶에 부딪혀 발생한 형식의 파열"에서 키에르케고르와 레기네 올젠의 사랑을
통해 어떤 몸짓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냈던 그의 몸짓
과 그 몸짓이 숨기고 있던 진실이라는 다른 이름을 키에르케고르 인생을 통해서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사랑과 허울 좋은 변명
이, 진실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몸짓의 허무함이 비극적인 어조로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
면 몸짓은 분명한 것을 명백하게 표현하는 움직임이며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유일한 것
이며, 어떤 현실적 실체이며 단순한 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몸짓만이 삶을 표현할 수 있다.
허공에 뜬 가능성들로부터 현실을 만들어 내려는, 그것이 몸짓이다. 그리고 몸짓은 현실과
가능성, 물질과 공기, 유한과 무한 등이 나누어지는 경계선에 위치하며 한편으로 삶의 위대
한 역설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에 있어 몸짓, 많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것
으로 자신 속에 감추어진, 자신만의 몸짓이 존재하는가, 라는 그의 물음에 있다. 자신의 가
면을 대변해 주면서 원하는 것을 위해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몸짓, 그 몸짓은 많
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사랑을 유예한다. 그리고 원치 않는 배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
나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은 배신 뒤에 감추어진 더 큰 사랑, 믿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
림으로써 더 큰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어느 날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은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절대적인 것, 확실한 것에 대한 불변의 몸짓은 부질없는 노력이었고
죽음이라는 우연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감옥이었다는 것이다.
몸짓은 다양한 근거에서 생겨나 점차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던 힘든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그러나 몸짓, 눈에 보이는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경직성은 순결한 영혼에 의해 흔들리
게 아이러니컬하게 영혼은 그 몸짓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연한 동작이나 아무런 의미
없는 부주의한 말이 인생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몸짓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반작용을 일으켜 이미 선택된 상황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에게 보여진 나의 몸짓 때문에 한순간의 오해로 맥없이 사랑이 떠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때 나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과 사랑 때문에 나는
너를 보내는 거야.", 혹은 "사랑하는 때문에 헤어진다" 등과 같은 위로의 말들만이 윙윙거리
겠지만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말처럼 배신을 정당화시켜 주는 말이 있을
까. 몸짓은 나오자마자 동시에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오해의 상태에 놓이게도 한
다. 그래서 루카치는 시인의 삶이 가장 몸짓이 없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영혼으로 형식을 빚
는 존재들의 가치는 그래서, 빛난다.
2 윤대녕은 삶의 형식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탁월한 상징적 묘사와 특유의 서사적 이미
지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 문학에서 '서사'의 언어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언어, 혹은 삶이
라는 형식의 이면을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피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
이다. 그런 그가 이년 만에 장편소설 '달의 지평선'을 우리 앞에 게워 놓았다. '달의 지평선'
은 그가 이전 소설에서 고민했던 삶의 문제들이 실그물로 촘촘하게 짜여 있으며, 그 미세한
엉킴으로 몸짓과 영혼의 문제를 섬세하게 천착해 나간다. 몸짓이 허물어져 가는 과정을 통
해 상처가 치유되고 영혼의 하얀 자전거도 분명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선택한 몸짓과 그 이면의 영혼의 어떻게 길항 작용을 하며 삶의 의미를 밝혀 나
가는가 하는 소설적 물음인 것이다. 윤대녕은 왜 몸짓의 문제를 소설적 화두로 삼았는가. 이
는 이전 소설 속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그가 포착해낸 몸짓들이 사실은 얼마나 영혼의 깊은
앙금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몸짓이 영혼의 순수
함에 의해 가면이 벗겨지고 그 순간 혼돈으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윤대녕 소설에 '상징'이 생
겨난다. 즉 몸짓을 힘들게 빠져 나온 영혼이 순수한 시간의 정점에서 상징을 만든다. 이때
우리의 물음이 윤대녕이 선택한 몸짓에 닿아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윤대
녕 소설에 나타나는 몸짓을 주시할 것이다.
3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호들은 선명하게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기표와 기의들의 안
정된 코드가 아니라 여러 차원을 가진 비의미 작용의 코드로 되어 있다. 이들이 어떤 이미
지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라는 문맥을 통해서 반추해 보면 동일성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끝없는 흐름과 중단의 반복. 하나의 흐름은 다른 하나의 흐름과 관계 맺게 되며 그
결과 처음의 것은 내용을, 두 번째 것은 표현은 정의한다. 내용, 표현의 단위들은 비의미 작
용을 하는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흐름은 내용이거나 표현이며 각 흐름의 단위들
은 그 흐름이 다른 흐름에 연결되면서 구조를 바꾼다. 거기서 말의 흐름, 이미지의 흐름, 음
악의 흐름들이 생겨난다. 달의 '지평선'은 인물들의 웅크리고 있는 영혼을 뒤로한 몸짓과 이
율배반적인 흐름들을 통해서 서사적 획일성을 극복하고 한편으로 제도권 내에 있는 사회의
권력 체계를 변화시켜 보고자 한다. 몸짓과 다르게 심연에 흐르고 있는 말, 이미지, 음악과
같은 무정형의 것들은 한참 멀리 와버린 삶의 간극을 메워 준다. 그 간극은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근대적인 속도전과 상품 미학의 논리
속에서 '빠름' 이전의 문제로 돌아가 탈근대적 문제 의식을 새롭게 반추해 내기도 한다.
'달의 지평선'은 팔십년대를 넘어 구십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연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면서 천박한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구십년대가 사실은 군부 독재하의 팔십년대가 낳은 자
식임을 말하고 있다. 구십년대의 아비인 팔십년대, 그 팔십년대에 감옥에서 수인 생활을 한
사람과 그리고 밖에 남겨졌던 사람들,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에게 구십년대는 "제도
만 변했지 내용 면에서 보면 지금이나 마찬가지잖아. 고통 분담은 여전히 기득권이 없는 사
람에게만 전가되고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기껏 행세들이나 하려고 들지.
생각하기엔 따라선 더욱 심각해"라고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구십년대는 팔십년대의 창백해
진 고통의 변종일 뿐이라는 것이다. 고통은 단지 특별한 길로 전달되는 자극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형태로 주어지는 자극의 일종이 된 것이다. 고통의 본질은 자극의 강렬함 뿐만 아니
라 그것을 경험하게 한 상황에도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상황, 팔십년대라는 상황과 구십년대
라는 상황에. 그렇다면 더 힘들게, 인간으로 살기에 더 힘들게 싸워야 할 적들이 많아진 이
세상에서 반추해 보는 80년대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팔십년대에 치열하게 자신의 인
생을 걸어 맞부딪쳤던 것들을 이제는 몸짓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내상은 누가 보
상해 줄 것인가. 역사 속에 미리 정해진 패배자들을 재현하는 문제. 윤대녕이 젊어진 소설의
화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팔십년대를 아비로 태어난 구십년대에 살고 있는 "달의 지평선"에 나오는 인물의 특성을
범벅하게 말한다면 아마도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의 인물군은 운동권 출신의 남창우와 그와 결혼했다가 지금은 헤어진 운동권 여인이었던 은
빈, 그리고 학내 총학의 주동이었으며 은빈이 운동권 시절 사귀었던 옛 남자 철하, 하얀 자
전거의 이미지 나수연, 남창우 옆에서 전생의 업보로 복수의 길을 택한 주미 - 사실 그녀는
자아 중심에 몰입하여 파시스트적인 편집증을 보이는 인물로, 그녀 어머니의 대리 복수자다
- 로 짜여 있다. 그 사이에서 남차우는 시대의 화두도 재대로 풀지 못한 채 분자적, 비체계
적인 자아로 남는다. 이런 남창우에게 팔십년대는 뭐라고 이름붙일 수도 빠져 나올 통로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 오로지 '있다는 사실' 자체로 너무나 무겁게 그를 짓누르는 부조리, 그
자체다. 그에게 팔십년대의 '나'는 구십년대의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다. 바로 '달의 지평선'
은 이 두 존재의 의사 소통의 문제로 직결된다.
남창우는 은빈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게는 아직도 고난의 시절을 함께했던 철하에 대한 미
련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피워 보기도 전에 그녀와 헤어진다. 피렌
체로 떠나 버린 은빈을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온갖 몸짓으로 떨쳐 버린 것이다. 그 몸짓 뒤
로 남은 것은 우연하게 마주치는 것들에서 느끼는, 역설적인 은빈에 대한 사랑이다. 은빈을
사랑하지 못하고 몸짓으로 남은 '나'는 시대적인 질곡에서 받은 내상과 사랑의 상처로 타인
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결벽증 환자다. 그 결벽증 때문에 남창우가 보여 준 몸짓은 좀처럼
사람이 다가서지 못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자의 초상이며 은빈에게서 "난 이탈리아로 돌아
갈 생각이에요. 그러나 당신도 이것은 알아야 해요. 결국 또 당신이란 사람이 나는 그곳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말예요."라는 말을 듣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그가 혼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그 몸짓은 철저히 '배타적'인 자유일 뿐인 것이다. 이 배타적인 자유로 선택한 길은
가면의 몸짓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텔레비전의 배우가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배우로 살아
가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로 팽배해져 익명성을 '요구'라는 시대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들이밀고 사는 것이 무섭고 이물스러운 자가, 구십년대라는 소위 후기 자본
주의 시대에서 소외된 자가 선택한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바로 그 때 그에게 하얀
자전거를 그리워하는 여인, 나수연이 나타난다. 그녀는 남창우에게 일종의 영혼 같은 존재
다. 그는 나수연을 만나면서 그녀가 우연히 던지는 화두로 자신의 몸짓, 가면을 벗겨 나간
다. 그녀를 통해서 남창우는 남녀의 만남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나와 너라는 존재가 만나는
방식에, 즉 소외 없는 인간 관계를 넘어서 나와 너라는 존재가 만나는 방식에, 즉 소외 없는
인간 관계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관계 속에서 윤대녕이 '육체를
문제 삼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으면서 동
시에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넝마처럼 찢긴 또 다른 나를 꺼내는 일이며 유아론적인 명령으
로부터 벗어나 타자와 맺게되는 진정한 인간 관계, 즉 소외를 극복하는 인간 관계를 의미하
는 것이다. 따라서 윤대녕에게 육체의 문제는 주제 형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하여 "육체적
사랑이라는 것은 접영으로 사백미터를 나아갈 때 혼잡스럽고 남성적인 에너지보다는 평영에
서 팔을 내저을 때의 관능적 평온 상태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특히 육체적 사랑은 내게
커다란 내적 안정을 준다"라는 점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길가에 핀 코스모스의 광시곡 속에서, 검은 지붕 위에 은은하게 피어 있는
벚꽃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수연은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를 열어
주고 지배 관계를 벗어나 서로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닫힌 내면 세계 밖으로의 초
월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 진정한 의미의 타자인 것이다. 주미와 주미 어머니가 타인에게
다가각는 일그러진 방식이 나수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더 반성적인 회고를 하게 한다. 물론
이 두 인물도 자신들이 돌아갈 시원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시원이란 애시당초 의미 없는 자맥질에 불과한 것이다. 주미와의
관계를 통해서 남창우가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상호 모순적인 이질적인 것들, 자신의 과거, 자신의 행위,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는 것이다. 그는 그 결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나수연을 통
해서, 그녀가 찾고 싶어하는 하얀 자전거를 통해서 깨달아 간다. 따라서 그 하얀 자전거는
순결과 순정한 이미지로 다가오면서 한편으로는 그 모든 고통을 품고 견디어 낸 자만이 볼
수 있는, 우주라는 거대한 자장 안에서 차고 기우는 것을 반복하는 달의 이미지와도 통하며
이 이미지는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벗은 얼굴로 김혜정을 만난다. 그 만남
으로 그가 찾던 화두의 끝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김혜정은 팔십년대 온갖 형
태의 고문으로 피폐한 삶을 껴안고 살아가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진정한 용서로 치
욕스러운 팔십년대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자신을 고문한 자를 용서로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환간에 시달리는 강익수를 구원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진실로 환각에 시달리는
강익수를 구원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녀는 진실로 주체가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조건을 터득한 존재다. 그것은 한 주체가 고통받는 모습으로, 호소할 때 수용하고 받
아들이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자신 안에서 치유하려고 발버둥친 상처는 역설적이게도 타인
에 의해서 치유된다. 그 치유의 결과로 남창우가 탤런트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은빈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여정은, 그 힘겨움만큼 중요한 무게를 갖는 것이다.
4 바로 이러한 다양한 삶의 곡선들 속에서 내가 발견한 규칙적인 선들은 그 숱한 배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인간에 대한 신뢰감, 믿음, 사랑, 바로 그것이다. 그 사랑이 아픈 것은
아마도 이를 확인하기 위한 무수한 흔들림과 모반이 갖는 순수함인 것이다. 거기에 닿는 여
정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윤대녕이 몸을 누이는 곳은 매번 번화된 상태로 상이한 리듬하에
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동반한 채 돌아오는 '순수 시간'이다. 이 순수 시간에 대한 희원이
윤대녕의 글쓰기 방식, 문체를 형성한다. 그 문체는 자본주의가 배태한 음울한 논리의 이면
을 거칠지 않게 드러내면서 서사 문학이 잉태한 환유적 글쓰기의 장점을 보여 준다. 바로
여기서 그의 소설이 구체적인 이미지가 배어 나오는 것이다. 낡은 호텔에서의 하룻밤/밤에
몰래 들어와 내 몸을 훔치고 달아난 여자/기묘한 웃음 소리/정신병을 앓고 있는 애완견/폰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권태기의 여자/대중 사회의 광대인 나/백화점에 진열된 수입품/개기
월식의 이미지와, 바흐의 음악/카바리 해안/대나무 이슬주/타인인 동시에 전혀 새로운 나/새
벽의 연꽃처럼 순결한 여자/그리고 무엇보다 차오르는 달의 이미지의 병치적인 묘사는 구십
년대 후기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 부속물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 속에 감추어진 순수한
삶의 열망을 깊게 새기게 한다. 그것은 불온한 권력이 지배하고 전혀 엉뚱한 일로 사람이
죽는, 그 질곡의 시대에 더 먼 길을 우회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서는 방식을 묻는 고통스
러운 질문이다. 구십년대 말에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작가의 뒷모습에서 영원히 우리를
짓누르고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팔십년대'가 느껴진다. 이렇게 윤대녕은 팔십년대가 구십년
대의 아비임을 치밀하고 진중한 언어로 모색해 가는 드물고 귀한 작가인 것이다.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더 이상 '역사'와 '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쉽게 호들갑떨
지 말자고, 그 무게가 가벼워진만큼 더 도도하게 우리 옆에 얼굴을 디밀고 있는 그 실체에
대해서 직시하자고. 윤대녕의 '달의 지평선'은 그 호들갑스러움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그
는 누구보다 겸허하게 구십년대의 아비인 팔십년대를, 전체 속에 있는 개인의 순결한 존재
를 서사적 이미지로 응축시키면서 재현의 정치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생을 스치고 들
어오는 반동적인 힘들, 분열시키고 나누고 분리하는 권력, 타인에게 깊게 다가서지 못하는
개인의 내상이 지나가 버린, 지나가고 있는 시간의 몸짓으로 표현되어 있다. 분분히 날리는
벚꽃의 이미지가 우주의 이미지로 포문을 여는 순간이 바로 그 몸짓이 삶의 형식이라는 의
미를 갖게 되는 그 자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진정 사랑이 고단하다고 느껴진다면 창문을 열고 내다보다. 견딘 자만이 안
을 수 있는 삶의 절정, 고독의 절정을 처연하게 그리고 있는 자. '생성'을 꿈꾸는 자가 '하얀
자전거'를 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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