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잊을 날이
윤형두
차례
윤형두론/한승헌 11
연처럼 25
인고의 주름 28
동설란 33
병든 바다 36
콩과 액운 39
산 메아리 44
서리꾼 시절 49
10월의 바다 55
본 무실 59
꽃 새 64
회상 속의 아버지 67
비명 72
경마 76
가문 81
잊혀지지 않는 실수 85
나의 어머니 89
한 떨기 들국화 108
짝사랑 110
멋있는 여인상 113
변 117
망해 121
혼의 향수 125
추상 128
산의 침묵 132
내가 좋아하는 법구 135
얼룩진 동심 139
브라질로 띄우는 편지 143
연보 149
윤형두론
뜨겁고 정직한 고해
1
"나는 문학을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해석이 편협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밖에 풀이할 길이 없다."
일찍이 헤세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지만, 문학 중에서도 수필처럼
자기 고백적인 요소가 강한 글은 없을 것이다. 고백의 가치는 진실에 있고 정직에
있다 할진대, 글과 사람의 합일 여부야말로 고백이 주는 감동을 좌우한다.
윤형두의 수필 속에는 '고백의 정직성'이라는 강점이 언제나 버티고 있다.
수채화처럼 차분하고 겸손한 글이면서도 자석처럼 사람을 끄는 인력을 갖는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에는 글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도 좋을 만큼 우선
정직하게 써야 한다는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윤형두는 바로 이러한 요청을 잊지
않고 글을 쓴다. 글을 통한 위선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그만큼 담백한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글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성의 문제가 보다
크게 작용한다. 그는 온갖 격랑과 인고 속에서 한 시대를 보는 안목을 가꾸어
왔으며 그러면서도 거창한 소리 대신 겸허한 목소리로 일관해 왔다. 이 점이 그의
매력이요 강점이다.
2
실인즉 윤형두는 오래 전부터 문필과의 인연을 맺고 살아왔다. 일찍이 자유당 때
그가 <신세계>라는 종합지의 기자로서 일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가 문예부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욱이나
많지 않을 듯하다. 저 유명한 월간 <다리>지의 주간으로 일하면서 그가 옥고를
치른 것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창립한 '범우사'는 이미 13년의 연륜을
거듭하면서 문학적인 공헌에 앞장서 왔다.
이처럼 문화 매체 속에서 남의 글을 널리 펴 주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데는 신중과 겸양이 지나쳤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잡문 냄새를 배제하며
진지하게 글을 쓴다. 이미 여러 곳에 많은 글을 발표하여, 잠재된 역량을 확인
받았으며, 한국수필가협회의 이사로도 활약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문사로 자처하기를 싫어한다. 자기 이름 곁에 '수필가'라는 칭호를 넣기보다는
'범우사 대표'라고 표시해 주기를 바란다. 윤형두는 범우사 대표라는
출판인으로서의 비중 때문에 수필가로서는 오히려 좀 늦게 그리고 좀 덜 알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을 준다.
3
인간 윤형두--그는 어린 시절부터 처절한 현실과 맞부딪히며 살아온 사람이다.
침략자의 땅에서 국민학교에 들어가 마늘 냄새 때문에 수모를 겪어야 했고, B29의
폭음에 쫓기며 현해탄을 건너와야 했던 상처받은 소년이었다. 고국 땅 남쪽 하늘
밑 돌산 바닷가에서 그는 해일만큼이나 거센 현실의 광란을 체험하였고 6.25후의
무작정 상경 이후에는 더욱이나 황량한 세태와 싸워야 했다. 그의 괴로움은
대단했지만 결코 좌절하지는 않았고 또 야합하지도 않았다. 1971년의
'월간<다리>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갖가지 수난 속에서 그는 오히려
강인한 야인의 모습을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젊은 날의 고난은 훗날 그의 수필 세계에 비옥한 토질을 마련해
주었다. 산화된 토양에 화학 비료만 써 가며 거두어들인 쭉정이 같은 글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심장에서 우러난 참 글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는 콩과의 기연을 말하는 수필에서 일제 말엽의 콩깻묵밥, 군대생활 때의
도레미파탕, 그리고 교도소 식구 통의 콩밥 등을 회상하면서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그것들은 실로 나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의 메뉴들이며 수난의 증거인
것이다.
이제 콩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서 나를 찾아오든 도리어 나는 환대할 생각이다.
액운을 자초하여 액풀이를 한다는 미신 같은 생각에서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수난을 감내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순두부 백반으로 한 끼의 점심을 때우는
것이다. --<콩과 액운>에서
그는 자기 앞에 밀어닥치는 상황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이와 맞서고 극복하면서
기어코 자신을 견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성적인
의지를 거칠게 드러내는 일은 없고 오히려 그는 온유한 자세로서 경직을 우회할 줄
아는 성품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질기다는 점에서 마치 명주를 연상케 하는 바가
있다. 이 점은 그의 글에도 숨김없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4
윤형두의 수필은 회상을 축으로 삼아 씌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날을 반추하는
회상의 자세는 다분히 섬세하고 정경스러워 여성적인 잔잔함을 간직하기도 하는데,
글의 종착이 가까워지면 강렬한 열망의 배접이 자연스러이 남성다운 획으로 화하는
것이다.
회상이란 것은 자칫하면 감상과 사촌 간쯤으로 주저앉기 쉬운 법인데도 그의
수필에서는 오히려 현실을 보다 강렬히 투사하고 그 속의 자신을 관조하는
촉매로써 활용되고 있다. 그가 즐겨하는 '과거에의 여행'은 언제나 귀로의 가방을
가벼운 상태로 놔두지 않는다.
출발할 때는 당의정 같은 미문으로 동승자(독자)를 매혹시킨다.
줄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구봉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타고 높이높이 날다 줄이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갈뫼봉 너머로 날아가 버린 가오리연이 되고 싶다.
바다의 해 심을 헤엄쳐 가는 가오리처럼 현해탄을 지나, 거푸른 파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태평양 창공을 날아가는 연이 되고 싶다.
장군도의 썰물에 밀려 아기섬 쪽으로 밀려가는 쪽배에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서서히 하늘 위로 흘러가는 연이 되고 싶다. --<연처럼>에서
이렇게 낭만적인 듯이 출발한 그의 '회상 여행'은 어떤 모습으로 귀환하는가.
마음이 만들어 버린 속박, 눈으론 느낄 수 없는 질시와 모멸, 예기치 못했던
이별이나를 엄습할 때면 나는 줄 끊어진 연이 되어 훨훨 하늘 여행이 하고 파진다.
그 옛날 그 하늘에 깜박이던 연처럼...
그러나 나에겐 이제 가오리연을 띄울 푸른 보리밭도, 연 실을 훔쳐 낼 어머니의
반짇고리도 없다. --<연처럼>에서
결국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소중한 제 모습을 잃어버린 오늘 이 시대의 중세를
가차없이 경고하고 나선다.
한 바가지 풀 퍼 마시고 싶은 바다. 파래가 나풀거리는 밑창에는 깨끗한 자갈이
깔려 있다. 파도가 일면 수많은 포말이 밀려갔다 밀려온다. --<병든 바다>에서
이 글도 마침내는 '기름 덮인 해면 위에 모이는 찾아드는 한 마리의 갈매기마저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안타까워하고서,
넓고 푸른 꿈을 키워 주던 바다. 너와 내가 뒹굴던 바다. 한없이 너그럽게
포용해 주던 바다. 그렇게도 티없이 순수하던 바다. 이제 그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황량한 벌판. 그러나 나는 그 요람의
바다를 영원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병든 바다>에서
녹슬어 가는 세속을 두고도 반성과 비평을 주저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의
글 첫머리를 장식하는 정서라는 캡슐 속에 실인즉 효능 높은 약이 담겨져 있음을
뒤늦게 서야 알게 된다. 그의 투약은 설교냄새가 없어서 한층 긴 여운을 남긴다.
5
무릇 정신이나 의식이란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요소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의 수필다운 표현력이 또한
중요하다. 윤형두는 바로 이 점에서도 우리를 안심시켜 주고 있다.
문학적인 표현이 결여된 글은 논설이나 잡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상식을 되새겨
볼 때, 그의 수필은 문학적인 필치를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독자의 마음을
사기에 충분하다.
앞에서 인용한 <병든 바다>의 첫머리에서 이미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기회를
가졌지만, 한둘의 예문을 더 들어보자.
나는 이 배 위에서 노인을 본다. 바다는 고요히 불붙기 시작하고 그 붉은 빛깔은
바다 깊숙이 침잠한 다. --<10월의 바다>에서
넓적한 예상 표와 천 원짜리의 종합 권에서 백 원짜리의 보통 마권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지폐의 잔해들이 뒹굴기 시작한다.
이 많은 종이의 휘날림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읽는다. --<경마>에서
마치 한 편의 단편 소설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미문이 범하기 쉬운
공소에 빠지지 않는 결실 함을 보여준다.
윤형두의 회상에서는 바다와 어머니가 해류처럼 흘러가고 있다. 생각하면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모태이자 고향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사적인 회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다에 관한 글은 앞서 이미 예문으로 인용된 데에서도 단면이 드러나 있으니까
부연하지 않거니와, 그가 어머니를 두고서 밝힌 사모의 글들은 세대의 차가 어쩌고
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많은 가책을 자생시키기에 충분하다.
6
그의 어머님에 대한 효성은 생전뿐 아니라 타계하신 뒤에도 매우 뜨겁고 진하다.
나는 그가 요즈음도 쉬는 날이면 혼자서 자주 신세계 공원 묘지의 어머님 묘소를
다녀오곤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어머니를 향한 그의 마음이 저절로 글이
되고 있음을 눈여겨보며 삶과 글이 아울러 진지하고 거짓 없음에 우정 이상의
경의를 보내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좀 정직하지 못한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하나
옮겨 본다.
나는 번뇌와 욕심이 없는 무구삼매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고 위선과 가면의
무도장 같은 현세에 영합하며 무기력하게 어영부영 살아왔다. --<서리꾼
시절>에서
내가 알기에 그는 현세에 영합하거나 무기력하게 살아왔다기보다는 그 반대의
길을 걷다가 고생을 사서한 사람이다. 앞서 언급한 <다리>지 사건 이외에도 그는
60년대 초반부터 출판계에 투신한 뒤, 남이 내기를 주저하는 책들을 간행한 것이
화근이 되어 물. 심. 신 3면으로 곤욕과 피해를 입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입으로는 '업자'를 자처하면서도 외로운 시도를 버리지 못함이 그의 성품이다.
한 세대를 화려하게 풍미하지는 못할망정 비록 백두이나마 역사 앞에 떳떳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내 작은 소망이고, 그 소망이 욕심으로 넘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 오늘의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더욱 강렬해짐은 어인
일일까. -<가문>에서
이 같은 스스로의 다짐은 다른 글에서도 어렵지 않게 산견되고 있다. 가령
왜놈의 주구가 되지 않고 '조그만 지위이지만' 거절할 수 있었던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나도 죽을 때까지 권력이나 명예 때문에 불의와 부정에 영합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회상 속의 아버지>에서
라고 자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7
그는 외로운 인간이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을 고수하기 위하여 남들이
외면하는 괴로움을 경험하고 스스로의 다짐을 글로써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은 비판 정신은 항용 그냥 넘어갈 법한 일에도 지나치지를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 조상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을 정도이다.
그의 선조 한 분이 구한말에 감찰 겸 병조참의의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을
대하고도 그는 조상 자랑을 내세우는 대신,
한말의 매관매직이 심하던 때 혹시 논밭을 팔아서 벼슬을 사신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혹에 미치면 가승을 만들고 싶은 의욕이 삽시간에 사라진다.
국운이 기울고 나라를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차라리 조부님이 일개
무명의 의병이라도 되어... <복수가>를 목청껏 불러대는 정의의 투사이기라도
하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우리. --<가문>에서
나라가 기우는 때에 고관대작을 누리기보다는 의병이 되어 주었더라면 하고
선조를 아쉬워함은 확실히 이례적인 생각이다. 의의 저울로서 사람을 평가하는
마당에는 이미 30여 년 전에 작고하신 조부님까지도 '특례'의 대상으로 모시지를
않는다.
...내 딴엔 착한 일을 하였다고 한 다음의 뒷맛은 어쩐지 위선을 한 것 같은
어색함이 입안을 씁쓰름하게 하여 준다. --<서리꾼 시절>에서
통속적인 관념을 벗어나려는 그의 이 같은 고백은 자기 엄폐에 열중하는 우리
인간에게 겸허한 자기 성찰을 암시해 준다.
인간 윤형두는 바로 그러한 삶의 자세 때문에 손해도 많이 입었다. 하지만 그
'손해'의 의미를 세 속의 저울로 간단히 셈하는 것은 성급하다. 생의 참된 결산은
훗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 인간답게 살다 간 한 무덤이 있다'라는 비명을
스스로 희망하면서 '오늘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기약하는 그의 다짐을 우리는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수상 집을 넘어서, 독자 앞에 드리는 그의 고해요 정직한
각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한승헌(변호사. 시인)
연처럼
줄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구봉산 너머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타고 높이높이 날다 줄이 끊어진 연이
되고 싶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갈뫼봉 너머로 날아가 버린 가오리연이 되고 싶다.
바다의 해 심을 헤엄쳐 가는 가오리처럼 현해탄을 지나, 검푸른 파도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태평양 창공을 날아가는 연이 되고 싶다.
장군도의 썰물에 밀려 아기섬 쪽으로 밀려가는 쪽배에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서서히 하늘 위로 흘러가는 연이 되고 싶다.
나는 소년 시절에 연을 즐겨 띄웠다. 바닷바람이 휘몰아쳐 오는 갯가의 공터와
모래사장과 파란 보리밭 위에서 연퇴김과 연싸움을 즐겼다.
맞바람을 타고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연줄을 퇴기면 연 머리는 대지를
향하여 독수리처럼 세차게 내려오다간, 땅에 닿기 직전에 연줄을 풀어 주면 다시 연
머리는 하늘로 향한다. 그럴 때 연줄을 잡아당기면 또 연은 창공을 향하여
쏜살같이 치솟는다.
퇴김 중의 절묘는 바다 위에서 가오리연의 하얀 종이 꼬리가 물을 차고 달아나는
제비처럼 해표를 슬쩍 건드리곤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끄덕끄덕 힘겹게 올라가는
가슴 조임에서 맛볼 수 있다.
연싸움은 동갑 짜리 K군과 심하게 하였다. K군의 연은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견고하고 큰 장방형의 십자 살을 붙인 왕연이었고, 나의 연은 가오리를 닮은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을 만들기 위해서 뒷마을 대밭에서 대를 얻어다
빠개고 괭이를 친 다음, 몇 번이고 무릎 위에 놓고 칼날로 훑는다. 등살과 장살을
곱고 매끈하게 다듬은 다음, 등살은 촛불이나 숯불로 휘인 후 연체에 참종이를
바르고 양옆과 가운데에 꼬리를 단다.
K군의 연줄은 고기잡이에 쓰는 질긴 주낙 줄에다 유리가루와 사기가루를 민어
부레 풀에 섞어 발라서 날을 세운 것이고, 나의 것은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몰래
가져온 무명실, 그것도 군데군데 이음 자국이 있는 것이다.
연 실을 감는 얼레도 회전이 빠르고 묘기를 부리기 쉬운 6각이나 8각 얼레를
가진 K국에 비해 나의 것은 고작해야 조선소에서 주워온 막대기를 사다리 모양으로
못질한 2각에 얼레에 불과했다.
왕연은 문풍지 소리를 내며 얼레에서 풀리는 은빛 연줄을 타고 하늘로 늠름히
오르는데, 가오리연은 광대 춤을 추듯 양 날개를 번갈아 치켜들며 서서히 오른다.
한두 번의 퇴김으로 연줄이 얽히고 얼레가 감겼다 풀렸다 하는 소리가 몇 번나면
가오리연은 하늘로 우뚝 솟구쳤다가 백학처럼 멀리 사라져 간다.
짧은 겨울 해의 잔광을 받으며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 버린 연을 생각하며,
허공에서 서서히 당을 향해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연 실을 감는다.
바닷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 선창엔 범선의 돛대만이 잔물결에 흔들리고
죽음과 같은 고요와 어둠이 밀물과 같이 밀려왔다.
해변에 진 남색의 어둠이 깔리면, 붉은 불을 켠 아버지의 혼백이 집에서
뒷솔밭으로 가오리연처럼 사라지더란 마을 사람들의 말이 떠올라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희미하게 꺼져 가는 노을을 받으며 사라져 간 연, 그것은 나의 무한한 동경의
꿈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고독과 설움을 잊을 수 있고, 가난 때문에 받은 천대와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될 그런 세계로 날아갈 수 있는 연이 되고 싶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요즘 나는 조롱 속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자학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어릴 때의 고독과 수모, 그 무엇 하나도 털어 버리지 못한 채 더 많은 번민
속에서 살아간다.
마음이 만들어 버린 속박, 눈으론 느낄 수 없는 질시와 모멸, 예기치 못했던
이별이나를 엄습할 때면 나는 줄 끊어진 연이 되어 훨훨 하늘 여행이 하고 파진다.
그 옛날 그 하늘에 깜박이던 연처럼...
그러나 나에겐 이젠 가오리연을 띄울 푸른 보리밭도, 연 실을 훔쳐 낼 어머니의
반짇고리도 없다. 다만 K군만이 2,3일 후에 돌아오는 음력 설날에 띄울 막내아들의
연 살을 다듬으면서 혹시 나를 생각해 주려는지... (1997. 4,<수필문학>)
인고의 주름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정과 위패를 나의 서재에 모셨다.
여러 친지들은 마루방에다 영연을 만들어 모시는 것이 옳다고들 말했지만, 나는
우수에 찬 어머님의 얼굴과 인고의 주름을 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얘기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네 어머니 상이 의례 그렇듯이 나의 어머니도 가난한 어촌에서 어부의 딸로
태어나 그다지 길지도 못한 일생을 한 가닥의 여유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 채
고달픈 세월을 보내셨다.
현해탄을 건너온 사진 한 장을 보고 결혼을 하여야 했으며, 방랑벽에 젖은 남편을
따라 말 설고 낯선 일본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 고국에 돌아온 후 남편을 잃었다.
남편을 잃은 후 27년, 오직 아들 하나를 위하여 고생과 번뇌를 참으시며 쇠사슬에
묶인 숙명처럼 살아오셨다.
'외아들 버릇없다', '초년 고생 금으로 산다'는 말을 따라 열 두 살 난 아들을
고향에 있는 중학에 보내지 않고 1백 리나 떨어진 교육 도시로 보내어 약해지려는
나의 마음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주신 어머니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어머님을 얼마나 괴롭혔던가?
학자금이 조금만 늦어도 짜증 섞인 글발로 어머님을 채근하면 어머니는 내가 서
보낸 편지지 뒷면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연을 써 보냈으며, 편지 봉투도 항시 내가
보낸 편지 봉투를 뒤집어서 정성 어리게 봉한 봉투였다.
새벽 5시면 일어나셔서는 나룻배로 바다를 건너 Y시의 도매상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받아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보시면서 다지고 다져 생활하시던 분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내 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게 된 10여 년 전부터
어머님을 모시려고 직접 또는 친구나 친척을 앞세워 간곡히 권유해도 서울의 탁한
공기, 이웃이 없는 새장 안 같은 생활을 어찌하겠느냐고 발뺌을 하셨다. 그래도
간청하고 나서니 이번엔 자식의 생활이 좀더 안정될 때까지는 군식구가 될 수 없다
시며 그간이나마 어머님대로의 적은 벌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나를
설복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의 어머님 마음은 자식이 불안한 서울에 눌러
있기보다는 고향 땅 면장이라도 되어서 금의 환향하길 바라셨고, 그 가느다란
희원을 끝내 버리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홀로 고향을 지키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희망을 한 가지도 이루어 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감옥살이
등으로 당신의 애간장을 저미게 했고 종내 에는 병마를 끌어들이게 한 결정적인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작년 회갑 때는 간단한 잔치를 베푼 후 곧바로 서울로 모시고 왔다. 한 2,3일을
잠자코 묵으시더니 고향에 있는 돼지가 걱정이 되어 도저히 오래 계실 수
없으시다면서 하향하시고 말았다.
그래 나는 당신의 손자인 아이들을 통하여 어머님을 모셔오는 방안을 강구하고
방학이 되자마자 시골로 내려보냈다. 성공하게 되면 텔레비전을 사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하고---. 그러나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가서 갖은 재롱을 다 부리며
서울로 가시자고 해도, 어머님은 "너희들 대학 입학금을 마련해서 올라가겠으니
가서 아버지한테 텔레비전을 사달라 해라"고 하셨단다.
나는 4월 중순 아버님의 제일도 있고 또 6일 간격으로 어머님의 생신이며
진갑이기도 하여 조그만 선물을 사 들고 내려갔다. 가보니 뜻밖에도 어머님의
얼굴이 너무나 수척해 보였다.
당신의 말씀은, 병원에 다니는데 심장이 좀 나쁠 뿐 치료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셨다. 또 요즘은 한약을 복용했더니 좀 나은 듯하다면서 염려 말라고 하셨다.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는 아버님의 제사만 지내고 한사코 뿌리치는
어머님을 자식의 소원이라고 간청하여 서울로 모시고 왔다.
그 당장 E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시도록 했으나 곧 의식을 잃으시고 이윽고는 5일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사망 진단서에 기록된 사인은 위암이었다.
임종시에 곁에 계셨던 이모 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버님 제삿날 이틀 전에
들렀더니 어머님이 "동생, 우린 삼 남매로 태어나 편모 밑에서 자라다가 오빠는
일찍 돌아가시고 나도 이제 얼마 살지 못할 터인데, 돌아오는 내 생일에는 상이나
한 상 차려 놓고 지난 이야기나 하세" 하셔서 두 분이 부둥켜안고 우셨다는 것이다.
또 이웃 분에게는 "내가 유월이 못 가서 죽을 것일세"하고 무심결에 말씀하셨단다.
어머님은 당신이 위암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식에게는 한 마디의 말씀도 비추지 않으시고 그 아픔과 고통을
안으로만 삭이시며 조용히 임종의 날을 기다리신 것이다.
오늘, 어머님이 계시던 시골집에 간 아내로부터 편지가 왔다.
어머님의 농 안에는 시골집 문서와 또 여러 곳에서 받을 돈 기십만 원에 대한
증서가 고이 간직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현실에 적응할 줄 모르고 항시 가난을 벗지 못하는 자식을 믿을 수 없어 손자의
학자금을 만드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
돌아오는 한식날에는 어머님 무덤 앞에,
"여기 외아들을 위하여 홀로 강하게 살다 가신 한 어머님의 무덤이 있다"고
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우리라. (1973.5,<수필문예>)
동설란
봄이 오는 모양이다.
담장에 늘어져 있는 개나리의 꽃망울이 강아지의 젖꼭지 마냥 돋아났다. 한두 번
함박눈이 와 주었으면 했는데...
재작년 눈 오는 초겨울이었다. 광화문 지하도를 막 빠져 나와 층계를 오르는데
층계참에다 화초를 놓고 동설란을 사라고 외치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등에는 어린아이를 업었는데 외모로 보아 시골에서 온 아낙네 같았다.
난에는 건란, 한란, 춘란, 풍란 등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이제껏 가까이 놓아두고
완상하지는 못했었다.
2,3년 전 꽃집 앞을 지나다가 사슴 목같이 긴 꽃대에 하얀 꽃망울이 맺혀 있는
난을 보고, 하도 청아로와 꽃집 안으로 빨려들다시피 들어갔다. 양란인데 세
촉짜리 한 분에 2만원을 달라고 했다.
내 형편으로는 난초 기를 처지가 못 되는 구나 하고 도망치듯 돌아서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항시 청조의 상징처럼 여겨 왔던 난을 한 번 길러 보았으면 하던 터라,
그날 지하도 층계참에 놓인 난 묶음을 보자, 계단을 오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값을 물어 보았다. 세 촉짜리 한 묶음에 2백 원이라고 했다. 두 묶음에 3백원
하자고 흥정을 하고 천원권 한 장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가까운 서점에 들러
잡지 한 권을 들고 돈을 꺼내 보니 방금 받은 거스름돈이 8백원이 아닌가!
아뿔싸, 쫓아가서 백원이 더 왔다고 돌려주고 남은 세 묶음도 떨이로 사 왔다.
지금 심어 두면 봄눈이 내릴 때쯤 해서는 꼭 꽃이 필 거라는 아낙네의 말까지
덤으로 안고 돌아왔다.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정성스럽게 화분에다 난을 심었다.
맨 밑에 굵은 돌을 깔고 그 위로 잔돌을 놓고, 파뿌리처럼 생긴 난 근이 묻히는
부분부터는 퇴비 섞인 부드러운 흙으로 덮었다.
이후, 줄곧 지성을 다했으나 웬일인지 잎이 모두 말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봄이 오자 다시 파릇한 새잎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는 동안, 혹점이나
백견 같은 병앓이도 없이 잘 잘 주었다. 한 분은 집으로 옮겼다. 곧 뾰조록하게
꽃대가 솟아오를 것 같은 희망 속에서 첫눈을 맞았다. 지난겨울에도 몇 차례의
눈이 내렸다. 그러나 꽃은 영영 피어 주지 않았다. 그래도 혹 춘 설이라도 내리면
꽃이 피지 않을까 하고 기대가 다른 해보다 봄을 일찍 맞게 했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겨울, 사무실을 옮길 때 친구가 군자란 한 분을 선물로 가져온 적이 있다.
다른 여러 화분과 마찬가지로, 그 난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지하실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면 일주일에 한 번쯤 물을 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종려나무 뒤로 아무렇게나 놓아둔 그 군자란 잎 사이에서 믿음직스런
꽃대가 솟아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군자란은 별로
가꾸지도 않고 마음도 쏟지 않았는데 그 예쁘장한 꽃망울이 방긋이 웃음을 뿜어
탐스런 자색 꽃을 며칠후면 감상케 해줄 것 같다.
그 동안 소홀히 다루었던 이 군자란을 응접실로 옮겨 놓고 먼지 낀 잎을
닦아주고 화분 가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이제야 반겨 대하며 손질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어쩐지 계면쩍기만 하다. 그 동안 방치하다시피 하였던 군자란은
아무 불평 없이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기 위해 긴 엄동을 연탄 가스가 배어 나오는
지하실에서 모질게 참고 견디어 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토록 정과 성을 다해서 매만지고 가꾸었는데도 동설란은 끝내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지 않고 말았다. 꽃은커녕 꽃대도 솟지 않았다. 내가 난을 제대로
가꿀 줄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 동설란을 팔던 아주머니에게 속은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덜 익은 살구를 씹은 뒷맛처럼 개운치가
않고 떨떠름하기만 하다. (1997.4,<소설문예>)
병든 바다
한 바가지 푹 퍼 마시고 싶은 바다. 파래가 나풀거리는 밑창에는 깨끗한 자갈이
깔려 있다. 잔잔한 파도가 일면 수많은 포말이 밀려갔다 밀려온다.
옷을 훌렁 벗고 툼벙 뛰어든다. 수영에 익숙한 해동은 자맥질을 해야 성이
풀린다. 물구나무를 하듯이 다리를 쭉 뻗고 해 심을 향하여 팔다리를 놀린다.
팔은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나비처럼 원을 그리고 발은 오리처럼 물장구를
친다.
얼마쯤 가면 해저에 닿는다. 그곳엔 소름이 돋을 만큼 고요가 깔려 있다.
해초들이 숨소리 없이 해면을 향하여 하늘거리고 있다. 바닷말은 녹갈색으로 키가
크고 숱이 많고 잎이 작다. 청각은 자홍색 빛깔에 사슴뿔 모양으로 주먹만한 돌에
정교하게 붙어 있다. 좀 깊은 곳에 자리잡은 미역은 흑갈색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해동의 숨결을 가쁘게 한다. 미역 한 폭을 캐 오는 날이면 저녁상이 푸짐하다.
식초와 깨소금을 넣어 무치기도 하고 조개를 넣어 국을 끓이기도 한다. 나는
바다의 그 신선한 해조와 패류와 생선을 먹으며 자랐다. 바다는 또한 나의
곡창이며 구멍가게이기도 했다. 썰물이 밀려나면 긴 모래사장 밑으로 개펄이
나타난다. 호미를 들고 개펄을 파면 조개가 나오고 낙지도 잡히며, 운이 좋은 날은
개불도 잡힌다. 황갈색에 원통 상으로 생긴 개불은 익히지 않고도 먹을 수 있으며
짜릿하고도 달착지근한 맛은 천하일미다.
간조가 심하지 않은 날은 뒷논에 가서 미꾸라지나 논 새우를 잡아 가지고
아침부터 낚시질을 떠난다.
바위틈이 많은 곳에서는 미꾸라지 먹이로 노래 미를 낚고, 바다 바닥에 자갈이
많이 깔린 곳에서는 새우를 미끼로 볼락을 낚는다.
이렇게 나는 바다와 더불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그 검푸르고 맑은
동심의 바다를 잊고 살아온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난가을 부산에서 도서전시회가 열려 바쁜 틈을 내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참으로 바다가보고 싶었다. 20년 전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잠깐이지만 정이 들었던
그 부산의 바다가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태종대의 기암절벽과 그 밑으로 깔려 있는 티없이 푸르른 물빛도 보고 싶었다.
영도다리의 오르내림과 그 아래로 흰 돛단배가 오가는 그림 같은 풍경도 보고
싶었다. 자갈치 시장이 있는 부두 가에 떼지어 달려들던 갈매기들도 보고 싶었다.
고향인 여수로 떠나는 연락선의 고동 소리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던
그 항구와 그 바다가 아니었다.
나는 부산탑 위에 올라 모든 것이 시들어 가고 있는 병든 바다를 보았다. 범선과
전마선이 쫓겨 가버린 바다를 보았다. 어릴 때 갈바람에 돛깃을 날리며 세차게
달리던 '우다시배'도 보이지 않는다.
우람한 유조선의 매연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산과 오륙 도의 형태만이 지난날의
바다와 섬들의 전설을 이야기해 줄뿐이었다.
기름 덮인 해면 위에 모이를 찾아드는 한 마리의 갈매기마저도 보이지 않는 바다.
뚝딱 소리와 고동 소리의 여음도 사라지고 탱크가 지축을 울리며 굴러가는 것 같은
전율의 소리가 온 항구를 뒤덮어 버린 바다. 질피 껍질이 해변으로 밀려오고,
밀물과 파도에 섞여 정어리가 모래사장에 뒹굴며 허연 배를 드러내 놓던 그런
해변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바닷가에 널려 있던 고운 모래들도 도시로 운반되어 크나큰 빌딩으로 변해 가고,
현대인은 비릿한 갯내음의 향수도 잊은 채 그 건물의 층계참에 멋없는 발자국을
남기며 살아간다.
여수로 떠나는 연락선이 콘크리트로 굳혀져 버린 영도다리 밑으로 고동 소리도
잊은 채 오염된 물결을 가르며 소리 없이 지나간다.
그 정겨운 유행가의 가사에서처럼 난간에 기대어 손수건을 흔들어 주던 여인의
모습도 사라져 버린 선창에서 나는 아름다운 과거를 빼앗겨 버린 것 같은 허탈감에
젖었다.
넓고 푸른 꿈을 키워 주던 바다. 너와 내가 뒹굴던 바다. 한없이 너그럽게
포용해 주던 바다. 그렇게도 티없이 순수하던 바다. 이제 그 바다는 예전의 그
바다가 아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황량한 벌판. 그러나 나는 그 요람의
바다를 영원히 버릴 수 없을 것이다. (1977.3,<독서생활>)
콩과 액운
콩의 뿌리엔 뿌리혹박테리아라는 것이 있어서 공기중의 질소를 빨아들여
암모니아 염을 생산, 환자 질을 합성한다. 이것이 다른 식물과 크게 다른 점의
하나일 것이다.
콩을 재배하게 되면 땅이 비옥해진다. 그러므로 다른 식물의 연작으로 인해
생기는 땅의 박토 화를 막을 수 있다. 다른 작물을 심고 나서 다음해에 콩을 심는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 콩의 뿌리에 있는 뿌리혹박테리아가 땅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콩에는 또한 단백질이 많은데, 단백질은 동식물 세포의 원형질의 주성분으로
생명의 기본적 구성 물질이며 인체 형성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콩과 인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인간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식물이며 또 타식물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하여 은혜로운
식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은혜로운 콩이 나에게는 마냥 액운을 수반하는 상수로서 어떤 함수관계로
이어져 왔으니 생각하면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방되던 한 해 전, 열 살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1944년 4월 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완고하신 고집 때문에 우리 가족(3인)은
꿈에도 그리던 모국에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도 "조센징 닌니꾸 구사이(조선사람 마늘 냄새 고약하다)"라고
그렇게도 경멸받던 일본 땅을 버리고 내 조국, 내 고향으로 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찾아간 고향의 큰댁, 반겨 주는 조부모 님과 백부모님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생후 처음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콩깻묵밥. 농사를 지어 놓은 쌀과 보리는 모두 왜놈들에게
강제로 공출 당하고 소나무껍질 안에 있는 하얀 안 껍질을 벗겨 와 조나 수수를
조금 섞어서 지은 송기밥, 쑥에다 잡곡을 섞어서 지은 쑥밥, 그 중에서도 영양가가
있다고 콩기름을 짜고 내버린, 지금은 가축의 사료로도 쓰지 않고 거름으로 쓰는
콩깻묵에다 잡곡을 섞어 지은 콩깻묵 밥을 나는 몇 달인가 먹으면서 몇 번이나
밥숟갈을 멈추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자유당 말기 어느 날, 공군에 지원하기 위하여 공군 병원의 영관급 되는 분에게
추천을 받으려고 노량진 역에서 기차를 타려다가 불심검문을 당하였다.
병역기피자라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인원수만 채우려는 그들에게 조회를
해달라는 등 순리에 맞는 설득과 요구가 통할 리 없다.
노량진 역전 파출소, 영등포 경찰서를 경유하여 집결지인 수송국민학교에 집합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병사구사령부에서 나온 심사관들에 의해 병역기피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아는 친구들도 있고 육군이 타군보다 단기 복무이며 또
내친걸음이니 가자 하고 지원해 버렸다.
곳간 차에 시달리며 첫 번째 닿은 곳이 논산 수용연대, 거기서부터 나는 복무
생활을 마친 때까지 머리는 작고 발은 20센티가 넘는 '도레미파탕'을 타의에 의하여
식탁의 고정 메뉴로 정하고 말았다.
이유 없는 멸시, 반항할 수 없는 기합, 염치없는 요구, 그 혼란의 합주 속에서
콩나물국의 도레미파탕은 음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또 하나의 콩과의 기연인 식구 통의 콩밥. 나는 지난해 늦겨울에 월간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어두운 밤에 서대문 국립 호텔의 철상 신세가 되었다.
아홉 자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15촉짜리 불빛에 비친 사방 벽에는 무수한
달력들이 그려져 있었다.
죄수들이 출옥의 날을 기다리며 손톱이나 나무젓가락으로 그려놓은 혈흔인
것이다. 그 사이사이로 복수에 찬 글귀와 사랑의 시가 씌어져 있는가 하면 유독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구절이 희미한 불빛에 돋보였다.
얼마 후 나팔 소리가 들려 왔다. 외기러기 단장의 애소 같은 기상 나팔 소리의
여운은 나로 하여금 먼 옛날을 회상케 하여 주었다.
아직 칠흑 같은 밤인데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리자 교도관의 점검이 있고 이어
사방 20센티의 식구 통이 열리면서 콩밥 한 그릇이 들어왔다.
나는 이 콩밥과 날이 갈수록 친숙도를 더해가면서 백여 일간이나 먹었다. 그
회한 많은 지난날을 되씹듯이 말이다.
이렇게 보면 내게 있어서 콩은 은혜의 식물이라기보다는 액운과 너무나 깊은
상관관계를 맺어 온 식물인 셈이다. 액운을 뿌리혹박테리아가 흡수, 새로운 고통의
암모니아 염으로 바꾸어 두었다가 내게로 전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콩깻묵으로부터 인연을 맺어 온 콩을 이제 와서 버리고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콩깻묵 밥과 도레미파탕, 식구 통의 콩밥, 그것들은 실로 나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의 메뉴들이며 수난의 증거인 것이다.
이제 콩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서 나를 찾아오든 도리어 나는 환대할 생각이다.
액운을 자초하여 액풀이를 한다는 미신 같은 생각에서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수난을 감내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순두부 백반으로 한 끼의 점심을 때우는
것이다. (1972.7,<수필문학>)
산 메아리
새벽길을 걷는다. 막 통금이 해제된 시간,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다. 가끔
지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잠든 도시가 곧 깨어날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 밤새껏 가라앉은 매연이 코를 찌른다. 호흡의
빈도를 줄이고 걸음을 빨리 한다. 남부순환도로에 접어든다. 신호등도 켜져 있지
않다. 육중한 화물 트럭이 지나가고 있다. 어느 항구에서 싱싱한 생선을 가득
싣고 오는 것인지 힘겹게 지나간다. 머나먼 길을 달려와 지쳐서인지 속도도 느리고
불빛도 희미하다. 버스 정류장 푯말 밑에 코트 깃을 추켜세운 한 사내가 서 있다.
새벽 차를 타러 가는 나그네인지...
낙성대 입구에 접어들었다. 한결 공기의 맛이 달라진다. 하늘을 우러러본다.
많은 별들이 깜박거림을 잃고 잠들어 있다. 걸음을 늦추고 심호흡을 해본다.
코끝에 맴돌고 있던 오염의 냄새가 가시는 것 같다. 마지막인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산바람에 휩싸여 오는 산내음을 맡게 된다. 물통을 어깨에 메고 가벼운
뜀박질을 한다. 하늘빛에 반사된 산등성이의 회색빛 잔 설이 눈에 들어온다.
대학촌 동구 앞의 다리를 지나면 발바닥의 감촉을 상쾌하게 해 주는 땅을 밟는다.
땅은 인간의 고향이다. 고향을 밟는다. 양탄자의 촉감이 이러하랴. 꽁꽁 얼어붙어
요철이 심한 이 길이 왜 이렇게 마음을 설레게 할까?
나는 어릴 때 운동회의 달리기 경주에서 출발신호의 딱총이 터졌을 때처럼 4백여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달린다. 맥박이 소리치면서 땀이 온몸에 수액처럼 번진다.
숨을 입으로 몰아 쉬면서 산등성이를 오른다. 가볍게 "야호" 하고 소리내어 본다.
정적이 얇게 깨어진다. 다복솔 사잇길로 산에 오른다. 나뭇가지가 옷소매를
스치는 소리, 가랑잎이 실바람에 구르는 소리가 자연과 인간의 삶을 일깨워 준다.
돌부리가 발끝에 와 닿는다. 잔돌이 발바닥 밑을 빠져 스르르 구른다. 차츰
산길이 가파라진다. 눈으로 덮인 관악산 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그러다간 어느 사진첩에서 본 북구의 산처럼 멀리 느껴지기도 한다. 고요한 숲
속의 새벽길은 희미하게 사라졌던 지난날의 일들을 되살린다.
3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야간중학을 다녔다. 낮에는 조선소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밤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야간을 택한 것이다. 야간중학은 내가 사는
섬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 여수에 있었다.
교사는 충무공의 노량해전 대첩시 승리를 알리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연 3일
내었다고 하여 이순신 장군이 종고산이라 이름하였다는 진 산의 산기슭에 있는
진남관이었다.
국보 480호인 진남관은 충무공 다음으로 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건축한
것이다. 그 후 개축, 전소, 신축 등의 긴 역사를 거친 대건 물로서는 한국 최고의
것으로 둘레 8척의 기둥이 70여주이며, 건평이 3백 40평, 높이가 무려 40여 척이나
된다. 비록 허술한 칸막이로 칸을 막아 만든 교실이고 전기 사정이 나빠 가스등
밑에서 공부를 했지만 유서 깊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나룻배가 떨어진 후라 같이 통학한 K 군의 고모 댁에서 잠을
잤다. 그 집은 시내 서편 끝에 위치한 종포란 포구 가에 있었는데, 해조 음이
들리는 조용한 곳이었다.
K군과 나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이 되면 시내로 청과와 낙지와 조개를 팔러
오는 섬사람들을 가득 실은 나룻배가 오기 때문에 그 집을 가만히 나선다.
그날도 우리는 좀 쌀쌀해져 가는 바닷바람을 쐬며 부두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는 거리 저편 종포 파출소 앞에서 무엇인가가 훨훨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곳을 지켜보았다. 정장을 하지 않은, 순경인 듯한
사람이 많은 서류를 소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급박한 상황에 쫓기는 듯,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체념한 침울한 얼굴이었다.
불길은 높아지는데 섬뜩한 한기가 살갗에 와 닿는 것 같았다. 걸음을 빨리 하여
그곳을 떠났다. 시내는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어 있었다. 경찰서 앞을
지날 무렵이다. 그 넓은 광장에 무수한 필름들이 풀어져 널려 있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한밤중 돌무덤 위에 걸쳐진 천조각의 펄럭임 속에서 머리를 푼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가슴에 차 올랐다. K군의 손을 끌어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담 밑에서 가느다란 사람의 소리가 들려 왔다. "물, 물"하는 신음
섞인 소리였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검은 정복을 입은 경찰이었다. 거의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물, 물" 하고 또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눈짓으로
말했다. 같이 물을 구해 주자고. 몇 발짝인가 인가 쪽으로 발을 떼었을 때 고요를
찢는 총소리와 함께 붉은 총알이 머리 위로 날아왔다. 여수역쪽에서 검은 트럭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다. 가파른 큰 고갯길을
어떻게 뛰어 내려갔는지 나룻터에 와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고서야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날이 1948년 10월 20일 새벽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동족이 많은
동족을 죽였다. 9월에 입학을 하여 부푼 꿈이 자라기도 전에 나는 동족상잔의 짙은
피내 음을 맡았다.
그때 물을 갈구하던 그 경찰에게 내 목숨의 안위 때문에 물을 갖다 주지 못한
일이 요사이도 갈매기가 한유로이 날고 있는 바닷가에 있을 때나 새벽 산길을 혼자
거닐 때면 문득문득 생각난다.
관악산 중턱에 있는 천지 약수터에서 인기척이 난다. 벌써 선주자가 두세 명 와
있었다. "야호"하고 짧은 인사를 한다. 어느 쪽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가 통한다. 산과 어둠과 짧은 음성이 서로를 이어준다. 큰 컵에다
약수를 가득 받아서는 단숨에 마신다. 창자에 끼어 있는 공해의 그을음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또 한 컵을 받아 마신다. 꼭 생기를 마시는 것 같다. 물통을
받쳐 놓고 가벼운 운동을 한다. 서울대학교 쪽의 왕방울 같은 외등 몇 개가 가까이
도시가 있음을 알려 줄 뿐 속세를 등진 심산계곡이다.
간단한 몸풀기 도수체조를 한 후 새벽등산 동호인들이 세워 놓은 평행봉에
매달려 전신을 흔들어 본다. 그리고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 두서너 번을 해본다.
마음은 철봉을 잡고 큰 원을 그림 멋있게 대차륜이라도 할 것 같은데 마음뿐이다.
물통을 어깨에 메고 하산을 한다. 내장은 말끔히 씻긴 것 같은데 마음엔 앙금이
가득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웬일인지 개운하게 씻기지 않는다. 불안, 초조, 회의
무엇 때문일까? 그려 놓은 설계에 미치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나이바퀴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현실이 따르지 못한, 높이 설정된 이상 때문일까?
나는 고함을 지른다. "야호, 야호, 야호---" 하고 목청이 떨어져 나갈 듯 악을
쓴다. 산이 울린다. 산과 산과의 울림이 부딪쳐 또 메아리 되어 이어 간다.
그래도 속이 후련치가 않다.
또 악을 쓴다.
"야호, 야호, 야호, 야호..."목이 터지도록. (1978.4, <신동아>)
서리꾼 시절
사람이란 나면서부터 선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악한 것이었느냐는 것 때문에
성선설과 성악설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볼래 나면서부터 선하였다기보다
악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을 지닐 때가 많다.
선하다기보다 좀 장난스럽고 남이 싫어하는 짓을 하고 난 다음에는 통쾌감 같은
것이 온몸을 짜릿하게 하여 주지만, 내 딴엔 착한 일을 하였다고 한 다음의 뒷맛은
어쩐지 위선을 한 것 같은 어색함이 입안을 씁쓰름하게 하여 준다.
내가 장난기 섞인 서리꾼의 한패가 되어 밀밭과 고구마 밭과 과일나무 사이를
누비던 시절도 이젠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이 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해방 전해 4월 일본에서 귀국하자 순천시에서 20킬로쯤 떨어진
승주군 별량면 가동이란 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일본 아이들과 전쟁놀이로 날을 보내며 지내던 10여 살의 나에겐
돌아온 고국이 어쩐지 정다웠다.
이른 아침에 새벽밥을 먹고 구룡이란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벌교남국민학교로
통학을 했다. 공부래야 일제 말엽이라 소나무 관솔을 따거나 풀을 베어 퇴비증산을
하는 짓들이었는데, 그보단 나는 하학길에 몇 친구들과 어울려 신 바람나는 일을
가끔 했다.
학교가 있는 벌교에서 집까지는 20리쯤 되었는데 도중에 기차를 타고 오자면 긴
굴이 있고 걸어오자면 고개가 하나 있었다. 그 산 고개를 막 넘으면 양지 바른
비탈진 밭에 잘 가꾸어진 보리와 고구마가 우리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잔디가 깔려
있는 묘터 가장자리에 책보자기를 풀어 자리를 잡고 한두 놈은 산으로 올라가
가래나무를 해오고 나머지는 밭으로 내려간다. 밀 서리 때는 밀을, 보리 서리 때는
보리를 꺾어 오는데 완전히 익은 것은 맛이 없기 때문에 좀 덜 익은 것을 꺾어
온다. 꺾어 온 밀보리를 지피어 놓은 불에 구워서 고사리 손으로 비벼 후후 껍질을
불어 버리고 먹는 그 맛은 참으로 구수하다. 그 당시는 공출에 시달려 식량난에
허덕이듯 때라 더욱 맛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인기척이 드문 그 고개를 넘나들며
해방이 되던 때까지 고구마 서리 때면 고구마를, 그리고 목화 꽃이 떨어지면
조그마한 목화열매가 맺혀 작은 호도 알만큼 커지면 그것을 따 껍질을 벗기고 그
속의 하얀 속을 씹으면 단무이 나온다. 이 목화다래의 맛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갈증을 달래어 준다.
해방이 된 후 우리 집은 여수항의 나루 건너에 있는 돌산이란 섬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갖가지 과수원과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고장이어서
꼬마서리꾼들이 서숙하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의 낙토였다.
그해 여름 배 서리로부터 시작된 서리꾼들의 작전은 그때그때의 미각에 따라
항시 유동적이고 계획적이었다. 낮에 주낙배를 타고 나가 고기 마리라도 낚은
날이면 배에다 솥을 걸어 놓고 서리해 온 고구마를 쪄서 곁들여 먹는 생선국
맛이란 천하일미다.
그리고 복숭아 서리만은 비바람 치는 날이나 과수원 주인 할아버지가 출타한
날을 택했다. 복숭아집은 여간 감시가 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네 개들은
모두 우리들과 친한 바가 되어 암만 밤중에라도 짖지 않는데, 진도에서 가져왔다는
그 집 개만은 요란하게 짖어댔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우리는 딸기 서리부터 시작한다. 어느 해 딸기가 거의 익어 갈 무렵,
보리 마당에서 공을 차고 난 다음 딸기 서리 계획을 세우고 저녁을 먹은 후 우리
집에 모이기로 하였다.
초저녁달이 갈뫼봉에 떠오를 때쯤, 딸기집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그분은
머리에서 큰 광주리를 마루에다 내려놓고 공부하면서 심심할 터이니 딸기나
먹으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그날 밤 우리는 서리꾼의 한패인 임 군을 '기밀누설죄'란 죄목으로 제명처분을
시켰는데 , 그는 울면서 잘못했노라고 애원을 했다.
서릭꾼 패거리들은 거의 동년배였으며 그리고 거의 과수원이나 토마토 밭이나
참외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 과수원을 습격한 날에는 오히려 습격을
손쉽게끔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 군은 자기가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딸기밭이 서리꾼들의 무자비한
발끝에 짓밟혀 3년 동안이나 힘들였던 농사를 망쳐 버릴 것을 염려하여 자기 딴엔
묘안을 강구한 것이다.
다른 과일 등은 좀 덜 익은 것도 먹을 수 있고 또 피해가 덜 하지만, 딸기만은 선
것은 버리게 되고 또 서리꾼이 한 번 스쳐 가면 짓밟혀서 그해 농사는 온통 버리게
된다.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머니에게 고자질하였을 것이라는 이유로 해서 그 후 임
군은 복권이 되었다.
서리꾼들에겐 겨울이란 지루할 정도로 무료한 계절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자 옛날부터 어울렸던
서리꾼들이 집으로 몰려 왔다.
하늬바람이 몰아치는 섬머슴애들의 겨울은 아침에 바다에 나가 문어단지나
들어올려 몇 마리의 문어를 잡아 시장에 보낸 다음에는 할 일이 없다. 저녁이
되어서도 서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화투놀이나 윷놀이를 가끔 하지만 밤이 깊어
가면 입이 궁금해진다.
그럴 때 어느 친구가 닭서리를 하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여학교에 다니는
K양의 부모들은 친척집 결혼식에 가고 오누이만 있으니 문제없다고 K양의
육촌오빠가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최일 선 행동대원으론 내가 적격이라고
중론이 모아졌다. K양이 나를 좋아한다는 뜬소문 때문에 장난기 섞인 친구들이
나의 반응을 보기 위한 짓궂은 심술 같은 것이 작용한 거다.
나는 칠흑 같은 야밤에 대밭 길을 지나 K양의 집 닭장 문을 살그머니 열고 횃대
위에 앉은 큰 수탉을 안았다. 방안에서 부르던 노랫소리가 뚝 그치고 "누나,
꼬꼬꼬 하고 닭소리가 나"하곤 창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나는 '걸음아 날 살려라'고
내리막길을 힘껏 내달렸다.
그후 "**가 K양의 집 닭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고, 얼마 있지 않아
K양네 집은 이사를 갔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K양의 남동생을 만나 K양이
결혼해서 강원도 어느 어촌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 몇 년 전 와우 아파트 사고의
사망자 명단에 나온 그 이름이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딸기가 담긴 광주리를 가져다주시던 임 군의 어머님도, 아끼던 장닭은 훔쳐간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K양의 아버님도 이젠 다 어디론지 가버리고
계시지 않는다.
원양어선을 탄다는 순원이, 목수가 되었다는 종남이와 종진이, 그리고 장사를
한다고 부산행 여객선을 타고 떠나갔다는 일태, 그 천진스러웠던 친구들,
탐욕보다는 양보를 앞세우고 자신의 희생 속에서라도 친구의 성공을 빌어 주던 그
우정 어린 서리꾼들이 몹시도 보고 싶다.
이제 인정도 메말라 짓궂은 장난으로 이유 없는 반항심을 발산하는 서리꾼들에
대한 관용의 관습도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번뇌와 욕심이 없는 무구삼매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고 위선과 가면의
무도장 같은 현세에 영합하며 무기력하게 어영부영 살아왔다.
유독 밀도 짙은 고독이 나를 엄습할 때면 서리꾼 시절의 그 친구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1975.6,<자유공론>)
10월의 바다
나는 계절의 변화를 바다에서 느끼면서 자랐다.
하늬바람에 밀려온 군함 같은 파도가 기암에 부서지며 하얀 비말을 '똠박끝'에
뿌리면 겨울이 깊어 가는 것이다.
봄은 성난 파도가 가라앉은 잔물결 위에 자장가처럼 내리는 실비의 달램으로
깊어 가며, 여름은 먹구름이 몰고 온 취우 로 바다가 고동치기 시작한다. 태양이
작렬하기 시작하면 해수욕장 주변은 광란의 도시로 변하고 만다.
그러나 가을의 바다는 쓸쓸하게 한 계절을 보낸다.
풀숲에서 들려 오는 벌레 소리가 더욱 쓸쓸하게 들리고, 검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범선의 돛이 소복한 여인의 치마폭인 양 나부낀다.
내가 살던 마을 너머에는 돌산 해수욕장이란 조그마한 모래사장이 있다. 관광용
지도에도 표시가 없어서 먼 곳에선 찾는 이가 드물지만, 성하의 한철에는 인근
도시에서 몰려드는 피서객으로 제법 붐빈 다.
그 바람에 여름이면 이곳 아이들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늦봄부터 굴 껍데기와 돌멩이들을 치우고 가꾸어 놓은 모래사장과,
수영을 한 뒤 바닷물을 헹구기 위해 파 놓은 우물을 빼앗긴다.
또한 야외용 텐트나 호화스러운 수영복들의 위세 때문에 아이들의 마음도 한없이
위축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다른 장소를 물색한다. 조선소 돌담 위에다 옷을 벗어 놓고 바다에
뛰어들어 놀이터를 빼앗긴 분노를 달랜다.
입추가 지나고 나면 텐트도 수영 객도 어디론지 밀려가고 발가벗은 해동들이
자기네의 왕국을 다시 찾은 듯 해수욕장으로 몰려든다.
이때가 되어야 우리들은 간신히 옛것을 되찾기 시작한다. 마을의 뒷동산고
오솔길과 해안 등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지금까지 눈에 잘 띄지
않던 마을 삶들의 모습도 대하게 된다.
바다 빛깔은 하늘빛을 닮아 맑다. 그 맑은 물 속에서 오랜 시간 숨바꼭질도 하고
잠수도 하며 청각, 미역 등의 해초도 뜯고 해삼, 게 등을 잡는다.
이렇게 오래도록 물 속에서 지내다 나오면 몸이 떨린다. 으스스 추워 오는
한기를 땡볕에 달구어진 바위에 엎디어 녹인다. 그리고 한 유객들이 모래찜질을
하느라 파 놓고 간 모래구덩이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눈으로 잡는다.
한동안 위세를 떨치던 폭양도 쇠잔해지고 해초의 잔해들이 물결에 쓸려 해변으로
밀려오면 9월도 깊어 간다. 한여름 동안 광분에 휩싸였던 열기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난여름의 미련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은 젊은 남녀의 모래 발자국도
하나하나 모래톱을 핥는 파도에 지워진다. 모래사장에 버려진 납작한 돌멩이를
주워 해면 위에 힘껏 던지면 수면을 차며 날아가는 제비처럼 파문을 그리며 멀리
뻗쳐 간다.
10월이 되면 동네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널려졌던 한여름의 잔흔인 쓰레기마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곳저곳에 파 놓았던 모래구동이도 메워지고 간조선에 널려 있는 자갈에는
파릇파릇한 파래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10월의 모래사장은 어느 때보다도 깨끗하여 그 위에 말못할 사연을 썼다가 지워
버리기도 하고 모래집을 지어 놓고 달콤한 꿈에 잠기기도 한다.
동네 앞 선창에는 한여름 동안 놀이 배로 전락해 버렸던 주낙배들이 다가올 낙지
주낙 준비를 위해 돌아오고, 멀리 해면 위를 오가던 갈매기 소리도 가깝게 들리기
시작한다.
10월에 듣는 해조 음은 칸소네의 <사랑의 노래>처럼 애절한 곡이라 할까,
<소녀의 기도>처럼 희원의 리듬이라 할까!
나는 이 조수의 흐름소리를 들으며 바다 가운데로 밀려나 '돔박끝 바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다. 수심 깊이 바닷말, 미역, 청각 등의 해처가 나풀거리고 그
사이로 고기가 노닌다.
눈이 큰 볼락, 은빛을 발하는 병어, 고운 옷을 입은 각시고기, 날쌔게 돌 틈으로
숨는 노래미, 낚싯밥만 따먹어 치우는 복장이... 내 앞 바닷물 속은 곧 용궁의
수족관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수평선 위로 눈을 돌린다. 끝없는 바다 위에 몇 척의
똑딱선과 무산으로 떠나는 연락선이 크고 작은 물 이랑을 일구며 지나간다.
그 너머 남해 섬도 이때면 훨씬 가까워 보인다. 소리쳐서 부르면 누구인가
싸리문을 열고 나올 것같이 30리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
훌쩍 뛰면 안길 듯싶은 녹음이 뒤덮인 오동도, 손쉽게 잡힐 것 같은 자산공원,
모두가 10월의 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눅눅하고 습기에 찬 동남풍도 어느덧 상쾌한 서북풍으로 바뀌고 여름 동안
소나기를 담아 오던 먹구름도 한여름의 햇볕에 마전되었는지 하얀 솜털처럼 바다
위를 흘러간다.
10월의 바다는 나 홀로 즐기는 바다다. 선창에 매어 놓은 조그마한 돛배를 타고
조류 따라 바람 따라 흘러간다. 썰물에 밀리면 오동도 앞을 지나 아기섬이 보이는
동해 쪽으로 흘럭고 밀물에 밀리면 장군도 목을 지나 경도를 거쳐 황해 쪽으로
밀려간다.
나는 이 배 위에서 노을을 본다. 바다는 고요히 불붙기 시작하고 그 붉은 빛깔은
바다 깊숙이 침잠한 다.
그러나 오동도의 등대 불이 해면 위에 드리우면 10월의 바다도 저 무어 가고
한결 영롱해진 밤하늘의 별들이 바다와 밀어를 속삭이게 된다.
(1975.10,<여성동아>)
본 무실
석간신문을 펴 드니 내일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기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둘러 앞뜰에 있는 화분들을 집안으로 옮겨야겠다는 걱정이 생긴다.
가장 아끼는 매분은 첫서리를 맞혀야 꽃을 맺는다고 하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지만,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얼마 전 선물로 받은 20년생이 넘는다는 소철나무와 양란은 모두가 영하의
기온에는 얼어죽는 식물들이다. 꽃망울이 맺혀 있는 천리향나무와 수액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활엽의 고무나무도 추위에는 약하다.
얼마 전에 구한 연 초록색의 '블루버드'라는 나무는 소나무처럼 침엽수라
추위에는 강할 것 같지만 혹시 얼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몇 해 전만 해도 집에 있는 꽃나무라고는 유도화 한 그루였는데, 이사를 다닐
때는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가지고 다녔다. 마당이 없는 집에서는 질 화분에
심었다가 화단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 땅에 옮겨 흙냄새를 맡게 했다.
그러다가 눈보라치는 강추위가 닥쳐오면 다시 화분에 옮겨 부뚜막 위에서 긴
겨울을 넘겼다. 특별한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유도 화는 초여름부터 10월이 될
때까지 연분홍 꽃을 계속해서 피워 주었다.
내가 자란 고향집에도 탱자나무 울밑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 겨울엔 장독대 옆에
갈뫼봉에서 파다 심은 노송 한 그루가 눈을 맞고 외롭게 서있었지만 봄, 여름, 가을,
에는 풀꽃들이 다투듯이 많이 피어댔다. 나팔꽃과 봉선화 같은 일년생 꽃들은
전해에 땅에 떨어졌던 씨에서 싹이 돋아 제 스스로 꽃을 피웠으며, 줄기가 말랐다가
새순이 돋는 작약, 창포, 국화는 한 돌이 되면 꼭 같은 색과 모양의 꽃을
자랑스럽게 피워 주었다.
나는 20여 년간의 서울 생활을 하면서 항시 소박한 마음가짐으로 더도 말고
고향집의 화단 만한 작은 꽃밭을 갖고 싶었다.
그런 좀처럼 그 꿈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10여 년 전에 마당 한 평 없는
오두막집을 겨우 마련한 후 두세 번 이사를 했지만 모두 화단이라곤 한 뼘도 없는
집이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정원이 좋은 값싼 집이 한 채 났다고 누가 소개를 해서 정원만
보고 얼른 그 집을 샀다. 고지대라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높은 뒷축대에 금까지
가서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잔디가 쭉 깔린 정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내 소박한 욕구에 비하면 너무 분수에 넘치는 집이었다.
담장은 넝쿨장미와 개나리로 둘러쳐 있고 오래된 목백일홍과 잘 전지된 향나무,
그리고 대추, 감, 배, 은행, 모과 등의 유실수만도 10여 종이나 되었다.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꽃들도 많았다. 설하, 상사화 등 슬픈 전설을 안고 있는
꽃과 여러 가지 빛깔의 장미와 목련, 라일락 등도 정원에 조화 있게 심어져 있었다.
나는 겨울맞이를 위해 온실도 만들었다. 거기에다 사무실 이전 때 친구들이 보내
준 파인애플, 귤나무 등도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아무런 화훼원예에 대한 지식도
없이 보기 좋은 호초를 이것저것 사다 놓고 난로불도 지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정성껏 탄불을 갈아주고 바람도 막아 주었지만
값비싼 화초는 겨울이 지날 무렵 거의 얼어죽고 말았다. 뜰에 있는 과실수와
꽃나무에도 볏집을 사다 감아 주고 가마니로 덮어주는 등 월동태세를 갖추어
주었지만, 목백일홍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가 아깝게도 동사하고 말았다. 죽은
나무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뽑아 내면서 문득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되는 것이 무소유의
역리"라고 한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글을 생각했다.
나는 한 겨울을 꽃나무에 너무 집착하며 지냈던 것 같다. 몇 해 전 쥐약을 먹고
죽은 애견을 보고 다신 동물을 키우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을 때처럼 앞으로는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건 얽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련꽃이 탐스럽게 필 무렵 몇 개 남은 화분을 차에 싣고 나무 한 그루 심겨져
있지 않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날부터 새벽마다 관악산 중턱에 있는 법륜사
약수터로 등산을 시작하였다. 산에 깔린 기암괴석들을 내 뜰의 정원 석으로
생각하고, 그 많은 풀과 나무와 꽃이 피고 지는 산을 내 집 화단으로 생각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산을 올랐다. 그러다가 금년 초여름 뜻하지 않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실에 쾌유를 비는 친지들이 보낸 화분이 몇 개 들어왔다. 10여 일 후 퇴원을
하면서 그 화분들을 집에다 옮겨 놓고 또 꽃나무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아침 등산은 자연 소홀해지면서 꽃가꾸기에 다시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꽃집 앞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꽃나무가 있으면 사들여 오기까지
한다. 사과 분재, 문주란, 종려나무 그리고 J형에게서 매분과 금송분도 얻어 왔다.
이러다간 내 자신이 순수한 공유의 자연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이 갖고
즐기겠다는 못된 사유 욕에나 사로잡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만이 진실로 삶과 죽음의 고뇌에서 벗어난다"는
원효대사의 <무애가>처럼 얽매임에서 해탈할 수 있는 용단이 필요할 터인데 그런
용단을 갖지 못함은 일개 범속한 필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걷히는
것이다. 본래 뜬구름이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옛글과 같이 인생이란 공수
거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조그만 일과 사물에 얽매이면서 연연해하는지 모르겠다.
내일은 마침 단풍이 한창인 휴일이기도 하니 어머님묘소가 있는 공원 묘지에나
가보리라.
그리고 많은 중생들이 쉬고있는 묘지의 잔디에 앉아 붉게 물든 산너머로
뭉게뭉게 흘러가는 뜬구름을 보며 술 한잔에 <본 무실>타령이나 해보아야겠다.
(1978.11,<은행계>)
꽃 새
며칠 전 둘째 놈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지금 막 큰 꽃새 한 마리가
정원으로 날아 들어와 온실에 잡아 가두었다는 것이다.
맹랑한 데가 있어서 온 집안을 곧잘 웃기는 아이의 전화라 좀 과장스러운 느낌도
들었지만 그 음성의 진지함으로 미루어 보아 보통 새는 아니고 분명 희귀조인 것
같았다. 퇴근을 하여 대문에 들어서자 마자 곧바로 온실 문을 열어 보았다.
유도화 나무에 앉아 있는 새는 무지개 빛깔로 잘 조화된 아름다운 새였다. 그 새는
몹시 불안한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밖엔 어둠이 내렸는데도 먼 허공을
응시하기도 하고,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향하는 눈길은 매섭고 차갑게만 보였다.
나는 그만 눈길을 떨구었다.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옴을 느껴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현관에 들어서자 당장 새를 날려보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온몸에 오한이
엄습해 왔다. 벌써 5,6년이 지나 버린 그때의 터질 것 같던 동계와 오한이 증세가
어찌 이렇게도 같을 수 있을까 하고 느껴졌다.
그때도 2월이라지 만 늦추위를 하느라 몹시 추운 날씨였다. 취침 후인지 긴
복도에 연해 있는 수많은 방에서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양말
바람으로 영하 10도의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걸어가면서도 차가움을 느끼지 못하고
한참 걸었다. 벽이 맞닿은 곳에 접한 방에 갇혔다. 감방 문을 잠그고 말 한 마디
없이 돌아가는 교도관의 발소리가 멀리 사라질 때 나는 소름끼치는 오한을 느꼈다.
눈앞에 가려 있는 철창 살을 붙잡고 힘껏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사방이 막혀 있는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벽 위에 조그맣게 나 있는 창문으로 별이 한두 개 보였다.
그때서야 나는 저 별이 바로 자유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때 바닷가 있는 시골에서 자랐다. 늦여름과 가을이 되면 해변이나 뒷
야산에 올라가 여치, 베짱이, 귀뚜라미 등을 잡아서는 수숫대로 만든 상자에 가두어
놓았다. 그리곤 호박꽃을 따다 주기도 하고 가지와 배춧잎을 갖다 주기도 하였다.
낮에는 여치 소리로 낮잠을 청했고 밤에는 귀뚜라미 소리로 긴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여치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어린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께서 모든 생물은 가두어 놓으면
죽는다고 일러주셨다.
지난 추석 때 아우가 수탉 한 마리를 가져 왔다. 잡을 사람도 없어 놓아서
길렀더니 호초밭을 망쳐 놓기도 하고 우물가에 가서 그릇을 깨기도 하여 여간
귀찮지 않았다. 개집을 했던 자리에 철망을 치고 가두어 키우자고 하였지만 내가
극구 반대하였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닭이 없어졌다. 서울 근교에 사시는
친척이 고구마를 한 광주리 가져오셨기에 그분에게 그 닭을 주어 버렸단다. 그
무렵 꽃새 한 마리가 집으로 날아 들어온 것이다. 당장 날려보내라고는 하였으나
온 집안 사람들이 지금 날려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 추위에 가면
어디로 갈 것이며 어디서 먹이를 구할 수 있겠느냐면서 날이 밝는 이튿날 주인을
찾아 주자는 것이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인가 온실 가까이에 가서
동정을 살폈다. 모두들 걱정이 되는지 들락날락하더니 모이를 먹는다고 좋아들
했다. 온실 안에 막대기를 하나 걸쳐서 만들어 놓은 횃대 위에 앉아 잠자고 있는
꽃새를 본 연후에야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꽃새 때문에 온실 안에 연탄난로도 피웠다. 아이들도 정성껏
물과 모이를 갖다 준다. 나도 퇴근하면 꽃새 주인이 나타났느냐고 다그쳐 묻는다.
아내는 4,5일이 지나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새 파는 집에 가서 짝을 지어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서 주인이 나타나 주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이보다 넓고 친구들도 많은 곳에서 훨훨 날라주었으면 했다. 왜
이 새는 구관조처럼 말을 하지 못할까? 떠나온 곳의 주소나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준다면 좋으련마는...
어서 봄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봄이 돌아와서 넓고 높은
창공으로라도 날아가 주었으면 한다. (1977.1,<주부생활>)
회상 속의 아버지
얼마 전에 아버님의 30주기를 보냈다. 매년 돌아오는 기일이면 나는 젯상 앞에
앉아 담담히 그날을 보낸다. 어머님의 제삿날처럼 며칠 전부터 육식조차 금하고
그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의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어머님을 향한 것만 못한
것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여한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님께선 미처 '부자의 정'도 영글기 전인 내 나이 열 한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날은 마침 아랫마을 친구들과 집 앞 보리 마당에서 축구시합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얼마간을 벼르던 시합을 나로 인해 망쳤다고 투덜거리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설 만큼 철부지의 나이였다.
장례식 날은 비바람이 억세게 몰아쳤고 심한 뇌성은 어린 마음을 더욱 놀라게
해주었다. 아버님의 영구를 선산으로 모시기 위하여 발동선으로 운 구를 하였다.
그날 따라 왜 파도는 그렇게 뱃전을 사납게 치며 겁에 질린 나를 더욱 떨게
하였는지, 운구선이 다도해를 두 시간쯤 지나 아버님이 태어나신 마을 동구의
선창에 닿자 꽃상여가 와서 관을 옮겨 올렸다. 어머님의 울음소리와 상여꾼의
구슬픈 곡성의 화음은 나를 소름 돋는 두려움의 심연 속으로 휘몰아갔다. 꽃상여의
종이 연꽃이 하나하나 세찬 비바람에 떨어지고 앙상한 상여의 형태가 드러날
무렵에야 '논 건너' 장지에 닿았다.
어린 나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혼자서 잔을 올리고 절을 몇 번인가
되풀이하였다. 관이 묻히고 산신제를 지낸 후 비에 흠뻑 젖은 상복을 질질 끌며
큰댁으로 내려온 나는 곧 잠이 들고 말았다.
이제 아버님에 관하여 이야기하여 주실 분도 거의 돌아가시고 몇 분 남아 계시지
않는다. 가끔 내가 경마장엘 갔다오든지 화투놀이를 하고 있으면,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아 그렇게 노름을 좋아하느냐"고 꾸중하시며 지난날을 회상하시던
어머님도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어느 날 마을 앞을 지나던 동냥 승이 냇가에 앉아 발을 닦고 있는 아버님을
보시고는 "이 아이는 단명하겠다"는 말을 해서 할아버지는 그 당장 아버님을
스님에게 딸려 보냈다고 한다.
그 후 군 내리 뒷절이라는 암자에서 얼마간 공부를 하시다가 뛰쳐나오신 후 줄곧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하셨다.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방랑하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메리야스 공장 견습공 노릇도 하고 자전거포 점원
노릇도 하다가 돈이 생기면 정처 없이 떠나는 것이었다.
훗까이도에서 시고꾸까지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면서 아버님은 여자를 사귀고
도박을 즐겼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 할아버지의 성화로 고향의 열 살 아래인 어머님과 결혼을
했다.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된 아버님은 이제 정착을 해보려 하였다. 그래서 일본
고오 베 역전에 자전거포를 겸한 선반공장인 '다나 까 철공소'를 사들였다.
얼마간은 열심히 일했다. 그런 20여 년간 몸에 밴 방랑벽과 마작, 포커, 경마, 화투
등의 도박 재미를 쉽게 버릴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님은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는 아버님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는 한편 혼자
손으로 공장을 운영하셨다.
그러는 사이에 형과 누나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그러나 형은 태어나자마자 죽고
아버님이 제일 귀여워하던 누나도 여섯 살 때 죽었다. 그때부터 아버님은 긴
방랑에서 새삼스레 가정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 집은 도쿄 근처에 있는 사가미하라란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청소 도구 일체를 만들어 일본 제 2육군병원에 납품을
하였다. 공장의 직공으로 많은 한국 사람이 몰려들었다. 나에게도 친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초등 학교도 다녔다.
그 무렵 아버님은 오랜 불규칙적인 생활에서 얻은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셨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의 패색이 짙어져 갈 때, 아버님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강경히 주장하셨다.
어머님은 정기 연락선이 끊어졌으니 가재 도구는 어떻게 운반하며 집 등 재산의
미련 때문에 갈 수 없다고 고집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죽어도 고향 선산에
묻혀야 한다면서 간단한 이삿짐을 챙겨 요꼬하마에서 부정기 선박을 타고 우리 세
식구는 한국으로 왔다.
고국에 돌아와서의 가난은 어머님으로 하여금 아버님의 처사를 꾸짖기에
충분하였다.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고국에 돌아온
것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으셨다. 2,30마지기의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공출로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하루는 단고 즈봉을 입은, 왜놈들의 관리인 듯한 사람이 다녀간 후 아버님은
병색이 더욱 짙어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구장인가 면장을 하지 않으면 보국대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면장이나 구장이란 왜놈들의 앞잡이로
공출독려나 하고 죽창으로 땅을 쑤시고 다니면서 연명하기 위해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숨겨 놓은 곡식을 찾는 짓들이나 하는 자들이었다.
아버님은 얼마 후 보국대로 끌려나가다가 가는 도중에서 해방을 맞고 돌아오셨다.
해방되던 해 겨울 우리는 아버님이 태어나신 돌산의 북단에 있는 백초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꿈을 펴보지도 못하시고 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나는 여느 사람과 같이 아버님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쯤 밥상머리에서 음식을 소리내어 씹는다고 꾸지람을 하셨을 뿐
매 한 번 때리신 적이 없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인가, 설날 큰댁에서 조청 한단 지를 주셔서 아버님과 같이
들고 오다가 나의 실수로 해풍이 매섭던 동릉고개에서 깨뜨리고 말았다. 깨어진
사기 조각을 만지작거리는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해가 저물겠으니 빨리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끄시던 기억이 난다.
냉엄하도록 무관심한 것 같은 아버님의 차가운 인 상속에서 그때 마지막
아버님이 베푼 따뜻한 정이 나로 하여금 가끔 아버님의 상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또한 왜놈들의 주구가 되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조그마한 지위이지만
거절할 수 있었던 아버님이 양식을 나는 존경하며 자신을 돌이켜 본다.
나도 죽을 때까지 권력이나 명예 때문에 불의와 부정에 영합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비굴하고 치사스럽게라도 치부하고 향락하려는 이 크나큰
흐름 속에서 나만은 가난하고 무력하나마 돌아가신 아버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정녕 나이
탓인 모양이다. (1976.8, <월간문학>)
비명
지난 일요일에는 꼭 가보려고 하였는데 가지 못하고 말았다.
3주 전 어머님 2주기 날 산소에 심은 향나무 두 그루가 죽지 않았는지 무척
궁금하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양주군 장흥면에 있는 신세계 공원 묘지를 찾는다.
아침 일찍 서부 역에서 출발하는 교외선을 타고 철따라 변하는 수많은 경치를
보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다.
수색 역을 지나 능곡쯤 가면 그곳부터는 풍진을 등진 한촌이 내 마음을 끈다.
나는 차창 밖을 스쳐 가는 대자연고 대화를 한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초가삼간이
내 고향집이 되기도 하고 오솔길을 지나는 노파가 내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조그마한 간이역 역사가 30여 년 전 기차통학시절을 회상케 하며 쟁기질하는
농부의 모습은 짙은 향수를 일깨운다.
이러한 상념 속에 나는 수없이 지나간 중생들이 쉬고 있는 무덤을 바라본다.
그리고 산록에 띄엄띄엄 보이는 무덤들이 한눈에 확 들어오는 곳에서 차를
내린다.
그곳이 신세계 공원 묘지가 있는 장흥역이다. 산허리를 어느 날은 인파에 휩쓸려
오르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나 혼자 카네이션 꽃송이를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기도 한다.
으레 경내에 있는 매점에 들러 포도주 한 병과 건 어포 한 봉지를 들고 무덤들
사이로 오른다.
나는 이 무덤 사이를 지날 때면 인생의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추악한 욕심이
잠들어 버리며 나 자신을 조용히 반성하게 한다.
어느 무덤 앞에는 싱싱한 생화가 활짝 피어 있는가 하면, 어느 무덤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 된 듯 마른 꽃가지가 뒹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무덤 하나 나와 무관한 것 같지가 않다. 바다는 물의 고향, 무덤은
인간의 고향이라는 뇌까림과 "귀향이란 근원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말 때문인지?
그리고 나는 그 무덤들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들의 비명을 읽는다.
예부터 내려온 틀에 박힌 "김해김공**지묘"라 쓰인 비문과 "** 여기 잠들다"의
간략한 비명으로부터 대리석에다 가첨석을 얹고 밑에는 농대 석으로 받친 벼슬도
하고 돈푼이나 있는 자손을 둔 분의 장황한 공적이 적힌 비명도 또한 본다.
근대 교육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는 페스탈로치는 그의 비망록에 "인생은
비명을 남기기 위하여 살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기록해서 후세인은 이 말을
그의 비명으로 삼았다.
인생이란 짧은 생애를 마치는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하기도 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다가 여한 없이 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요절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간 이의 공적과 선행을 남아 있는 친구나 자녀가 기려 비명을 새겨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죽기전 자기의 비명을 새겨 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죽기전 자기의 비문을 미리 써 놓는 사람도 있다.
시인 워즈워드는 그의 친구인 세계적인 수필가 찰스 램의 무덤 앞에 "선한
사람으로 불러 줄만큼 착한 사람이었다"고 쓴 묘비를 세워 주었으며,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의 묘비에는 "이처럼 위대한 명성에 대한 찬사란 한낱 사족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새겨 그의 험난했던 일생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명성의 그늘에는 그의 유자가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오직
빈곤뿐"이라고 개탄할 정도의 쓰라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머님의 산소를 오르는 길에 으레 들러 보는 묘소가 있다. 그 고인이 나완
생시에 일면식도 없고 동향인도 아닌데, 나는 그 무덤 앞에 세워진 비문을 읽으면서
머리 숙여 나를 투시해 보기 위함에서이다.
"두터운 신의와 따뜻한 우정을 삶의 보람으로 생애를 마치신 님의 고운 넋이
여기 잠드시다---친구 몇 사람이."
이 비문을 읽을 때마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 이 무명의 고인 앞에 세워진 비명의 어느 한 뜻에라도 합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비석을 세워 줄 단 한 사람의 친구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도 어느 곳을 향해서 가야 하느냐는 것보다 어느 곳에 도착할 것인가를
측정해야 할 나이에 달한 것 같다.
당신이 살아온 그 피나는 노정을 한 마디 유언으로도 표하지 못하시고 갑자기
운명하신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포도주 잔을 비우면서 생각의 심연에 빠진다.
그리곤 백운대 쪽에서 소나기를 몰고 오는 동남풍에 하느작거리는 향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다짐해 보는 것이다.
오늘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보자. 그리고 페스탈로찌의 비망록에 씌어진
대로 항시 내 무덤 앞에 새겨질 비명을 의식하면서 보람있는 생을 영위하여 보자.
그리하여 많은 벗과 친지들이 "여기 인간답게 살다간 한 무덤이 있다'고 비명을
새겨 주면서 못내 죽음을 아쉬워하는 내가 되어 보자고, (1975.9,<월간문학>)
경마
요사이도 가끔 오후면 뚝섬에 있는 경마장을 찾는다.
일요일이면 곧잘 다니던 등산도 사무실 일이 바빠지면서 다니지 못한 지 꽤 오래
된 듯하다. 산정에 오르기에는 너무나 가파른 천마산, 기암괴석에 항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도봉, 어느 곳 하나 추상이 깃들이지 않은 곳이 없는 수락, 그 많은
산과 가지가지로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대하지 못한 지도 몇 년이 지난 것 같다.
가고 싶은 곳엘 가지 못하게 되면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야 되는 줄을 알면서도
대강 일을 마치면 좀이 쑤신다.
도심의 빌딩 속을 빠져나와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며 도박을 한 번 해보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친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택시의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가도로를 타고 뚝섬을 향해 달리면 시원하지만 마음은 초조해진다.
마지막 레이스가 끝나 버렸을 것 같은 생각, 앞에 달리는 차 번호 판의 첫째와
둘째 숫자의 마권을 사면 많은 배당을 받을 것 같은 생각이 더욱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경마장 입구에 달하면 일렬 횡대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예상표 판매소에서
예상표 한 장을 산다. 아직 11경주 중에서 8경주의 경기만 끝나고 3경주가 남았다.
150원을 내면 입장권과 출마표가 나온다. 마장에는 다음 경주에 뛸 마필 예닐곱
마리가 경마꾼에게 선을 보이면서 타원형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른편 게시판에는 출전할 기수의 이름이 씌어진 현판이 붙어 있고 많은
사람들은 마장에 둘러서서 눈과 입으로 다음에 뛸 말에 도박을 건다.
매표소 앞에서 나는 잠시 망설이게 된다. 단승식 마권을 살 것인가, 복승식
마권을 살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확률이 적으면서도 배당이 많은 쌍승식
마권을 살 것인가.
기분이 좋고 주머니 사정이 괜찮으면 쌍승식 매표소 앞에서 서성거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안전성이 있는 복승식 매표소에 가서 마권을 산다.
단승식이 가장 맞추기는 쉽지만 그것은 초보자나 서투른 사람들이 하는 게임
같아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돈이 좀 있는 날이면 한 장에 천 원하는 종합 권을 사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으레 백 원짜리 마권을 몇 장 사 놓고 요행을 꿈꾼다.
마감 3분 전, 1분 전 하고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면 공연스레 마음이 급해진다.
마감이 되어 매표소 앞을 지나쳐 나오자면 어쩐지 꼭 사야만 할 마권을 사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모든 사람들이 스탠드로 몰려든다. 그리고 말이 발주 대를 떠나는 시간까지 많은
예상들이 풍성하게 입에서 귀를 거치며 한없이 맴돌기 시작한다. J기수가 말 체를
높이 들었으니 꼭 1착이 될 것이라느니, H기수가 '부르진'을 탔으니 적어도 2착은
할 것이라느니 억측과 예상은 한없이 번져 간다.
매상고가 기재된 게시판이 높이 치솟고 나면 또 한 번 경마꾼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총매상이 3백만 원이니 4백만 원이니, 1,2가 2천 장 팔렸느니 3,4가
아나라 들어오기만 하면 배당이 좋겠다느니 하는 사이에 벌써 경주마들은 발주
대를 떠나 달리기 시작한다.
선주 마라 출발이 빠르지만 뒤에 가선 처지는 말이 있고 추입마라 뒤쳐져 달리다
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신 바람나게 골인하는 말도 있으며 선주를 그대로 고수하는
말도 있다.
천 8백 미터를 1분 56초에 달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2분 3총에 달리지 못하고
중간에서부터 맥이 빠져 터벅터벅 들어오는 말도 있다.
경주가 시작되면 전광판에 달리는 말의 번호가 기재된다. 5번 마가 앞서는
듯하다간 또 3번 마가 앞서고, 다시 2번 마가 앞서는가 하면 1번 마가 추월하는
시소는 곧 생존경쟁의 인간사를 방불케 한다.
어느 말은 1,2 마신 씩 앞서서 골인하기도 하고 어느 말은 코를 걸고 1,2차나
2,3차를 다투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산 마필이 승자가 되면 좋아서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발한다.
"야, 1,2다, 1,2다!" 부끄러움도 잊은 듯 광기 섞인 음성으로 고함을 지른다.
드디어 환급금판에 배당금이 기재된다. 적을 때는 맞배당이라 하여 백 원권
마권에 2백 원 정도가 배당되지만 많은 때는 백 원권 배당에 3천 원이 나 5천 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총매상액에서 마사회 운영비, 세금, 방위세 등 30퍼센트를
공제한 70퍼센트를 가지고 이긴 사람에게 환급해 주는 것이다.
중간에 돈이 떨어져 쓸쓸히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레이스에까지 기대를 건다. <마사신보>나 <경마 다이제스트> 등의 예상표를
참작하고 전회의 기록 등을 통계 내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기수가 말을 타고
나가는 모습 등을 보며 살 마권의 번호를 결정한다.
3,4년 전만 해도 나는 경주마의 이름을 곧잘 외웠다. 묘향산, 관악산, 물레방아,
나폴레옹 등. 그리고 그 말들의 최고 기록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말 이름도 부르진, 링고, 샤레이드 등 외기도 힘든 외국어로 바뀌어서
친근감도 덜하며 기록도 아주 저조한 것 같다.
들뜬 마음으로 어영부영 마지막 레이스까지 보고 나면 해도 서산으로 기운다.
경마장 앞 골프장 여기저기에 깔려 있던 골퍼나 캐디의 모습도 사라지고 싸늘한
밤바람이 넓은 벌판을 휩쓸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작고 큰 종이들이 바람 따라
이곳저곳으로 휘날린다. 넓적한 예상 표와 천 원짜리의 종합 권에서 백 원짜리의
보통 마권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지폐의 잔해들이 뒹굴기 시작한다.
이 많은 종이의 휘날림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읽는다.
아침에 아내에게서 몇 푼의 돈을 타 가지고 나온 사람, 직장에서 가불을 해 나온
사람, 퇴직금을 탄 돈을 가지고 나온 사람, 집 판돈을 가지고 나온 사람. 2,3년
전에는 그렇게도 말쑥하던 신사가 왜 저렇게 초라해졌을까 하고 느껴질 정도로
초췌해진 사람을 보며 나는 인생이란 것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출마표도 예상 표도 없이 달리고 있는 말과 같다고, 그리고 또한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경마장의 마권이라고... (1975.12, <수필문학>)
가문
열 서너 살 되던 해인 것 같다. 우리가 살던 곳은 땔나무가 귀한 곳이라서,
겨울방학 동안만이라도 따뜻하게 지낼 요량으로, 50리 길도 멀다 않고 산간벽촌에
있는 큰집을 걸어서 찾아간 일이 있다. 그날 밤은 생각한 대로 따뜻하게 편히
쉬었다.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부터는 할아버지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대나무로 엮어 만든 고리짝 속에 담겨져 있는 <파평윤씨세보>의 중요한 부분을
읽고서 옮겨 써야 했다.
빛깔이 바랜 세보를 뒤적이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37세손이란 것과 숭정대부 이조판서를 지낸 소정공의 22세손이란 것을 알았으며,
선조들의 고향이 경기도 파주와 양주군 청송이었는데 전라도로 내려와 살게 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이조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도 보성군수로 부임했던 윤익명 25세손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 좌수군 별장으로 참전하셨다가 여수 나진 포 전투에서
전사하시어 그 곳에 묻히셨다.
그분의 외아드님이신 봉징님이 삼남수군도독초령으로 계시다가 큰집이 있는 돌산
작은 복골 선산에 안장되신 후 12대가 그곳으로 살아오고 있다. 직계 37대를
내려오면서 5세손인 윤관 님은 여진을 쳐서 9성을 쌓은 장군이며 한림학사이고, 그
아드님인 언이님은 칭제북벌론의 영수이며 김부식의 사대사상을 배격하고 낭가의
독립사상을 고취하신 사상가로 역사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할아버지의 선조 서른 네 분 중엔 과거에 급제한 분만도 열
분이요, 대제학을 지내신 학자, 이조판조를 지낸 고관, 한성부윤을 역임한 행정가도
계신다.
여러 권으로 된 두툼한 한 적의 세보와 중종때 왕비며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를
비롯한 왕후가 된 세 분 할머니의 기록이 담긴 왕비 록과 부마록, 효자록, 열녀록
등을 들추어보면서 중요한 부분은 서투른 한자로 기입해 두기도 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는 방대한 세보를 다시 만들어 집안들이 나누어 갖지는
못하더라도, 네가 자란 후 직계의 업적과 사적을 기재한 가승만이라도 인쇄를 해서
문중 여러 집에 나누어주라고 당부하셨다.
그렇게도 가문을 중요시하고 양반을 찾으시던 조부님이 타계하신 지도 퍽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요즘 들어 틈만 생기면 그것도 나이 탓인지 가끔 가승 록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원고를 매만지다가도 34세손인 증조부 님이 광서 18년 7월
25일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는 기록과 35세손인 조부님이 임인 7월 25일에 감찰
겸 병조참의의 벼슬을 하셨다는 기록을 대하면 웬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한말 매관매직이 심하던 때 혹시 논밭을 팔아서 벼슬을 사신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혹에 미치면 가승을 만들고 싶은 의욕이 삽시간에 사라진다.
국운이 기울고 나라를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차라리 조부님이 일개
무명의 의병이라도 되어,
나라 없는 우리 동포 살아 있기 부끄럽다.
땀 흘리고 피 흘려서 나라 수치 씻어 놓고
뼈와 살은 거름되어 논과 밭에 유익 되네
부모 친척 다 버리고 고향 떠난 동지들아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갓' 하는 소리에 승전고 높이 올려 둥둥 만세 만세
하고 <복수가>를 목청껏 불러대는 정의의 투사이기라도 하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우리.
고려 건국공신이었던 우리 가문의 시조로부터 천년을 살아오는 동안 선조들은
얼마나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오신 것일까?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는 생애를 마치신 분은 과연 몇 분이나 될까?
어려운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그저 안일하게만 살아가는 오늘의 나를 가리켜
천년 후의 후손들은 또 무엇이라고 말들 할까?
한 세대를 화려하게 풍미하지는 못할망정 비록 백두이나마 역사 앞에 떳떳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내 작은 소망이고, 그 소망이 욕심으로 넘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 오늘의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더욱 강렬해짐은 어인
일일까. (1978.8, <한국문학>)
잊혀지지 않는 실수
그때 그 일만은 왜 이렇게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벌써 20년이 지났고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지라 더욱
잊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도 잊혀지지 않으니 말이다.
서울 환도 직후 대학을 휴학하고 시험용을 겸한 법률잡지사인 <고시계>사에
근무를 하였다.
명동과 충무로 쪽은 6.25의 전화로 허허벌판같이 쓸쓸하였지만 조선일보사 뒤켠인
방송회관 근처는 지금과 별다름없이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원자력병원 자리에 KBS가 있었고 당시만 해도 서울 시내에 몇 개 되지
않던 다방 중에서도 제법 깨끗한 노벨 다방이 삼거리에 있었다. 내가 다니던
잡지사는 노벨 다방 뒤켠, KBS 건너편에 있는 일본식 2층집이었다.
삼거리 주변에는 대폿집이 몇 개 있었는데, 어둠이 깔리면 그 집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때는 모두들 말로라도 애국자였다. 기탄없이 정부와 특정인을 비판할
수 있었고 소신껏 자신들의 의견을 토로할 수 있었다. 말이 풍요한 세상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그 당시 문학을 지망하는 친구들은 문인들을 찾아 명동의 '갈채'나 '돌체' 다방을
드나들었고, 정치인이 되어 보겠다는 꿈에 찬 친구들은 국회의원의 왕래가 잦은
무교동의 '상록수'나 광화문의 '여심'다방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날이 저물고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내가 단골로 정해 놓은 노벨 다방으로 몰려들었다. 나의 월급이래야 하숙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친구들이 학생이거나 실업자투성이였던 그 당시로는
제법 뽐낼 수 있는 물주노릇을 하였다.
그날도 몇 친구가 나를 찾아와 누가 술을 사겠다는 약속도 없이 다방 앞에 있는
빈대떡집으로 몰려갔다. 저녁이 늦도록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꿈 많던 그 시절에
각자 앞날의 설계를 그렸다.
그러나 그들 호주머니에는 집에 돌아갈 전차표 한 장 변변히 없는 처지인지라
할수 없이 내가 다음날 B교수에게 갖다 줄 원고료로 술값을 지불했다.
B교수는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민법과 민사소송법 강의를 맡으신 착실한
크리스찬이었다. 가깝게 접하기 에는 너무나 근엄하시고 멀리하기에는 너무 정이
넘치시는 그런 분이었다. 그분의 강의 시간은 항시 진지한 분위기여서 학생들은
감히 강의에 빠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분에게 갖다 드려야 할 원고료를
잠시나마 유용한 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직장을 가진 친구라고
찾아왔는데 푸대접할 수가 없다는 의협심 같은 것이나를 자극한 것 같다.
그 당시 원고료라는 것은 2백 자 원고지 한 장에 8백 원이나 천 원을 주는
지금과는 달랐다. 글을 써 주셔서 고맙다는 사례조로 원고료 봉투에 '박사'라고
써서 갖다 드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더욱 문예지도 아니고 법률지인지라 필자들이
원고료 때문에 글을 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등고시 합격기를 써 주시는
분이나 고시 출제위원이 아닌 분의 원고료는 지불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를 가져가면 봉투째 기자에게 주는 풍조가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그때 B교수에게 청탁한 원고는 <민법초안의 친족론에 관한 개관>이란,
무척 힘들여 쓰신 글에 대한 원고료였던 만큼, 치기스런 호기를 부리느라 술값으로
쓰기는 썼지만 여간 마음이 초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신입사원들이 월급을 인상해 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세우고 스트라이크를 시도했다. 나는 중간에서 새로 입사한 사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 뜻이 관철되지 않아 총사직하는 데 행동을 같이 했다. 며칠
후, 그 동안 유용한 원고료를 마련해 가지고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분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지만 이미 내가 원고료를 유용한 사실을 알고 계셨다.
자신들의 월급 인상을 위해 희생도 마다 않고 사직한 나를 배신한 K군이 이틀
전에 B교수를 찾아가서 원고료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말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때 교수실을 어떻게 뛰쳐나왔는지 그 악몽과 같은 기억을 또렷이
되살릴 수는 없다. 그 교수님의 인자함이 오히려 모멸로, 그 부드러운 음성이
악인에게 행하는 설교로 나에게 휘몰아쳐 왔다.
그 후 나는 군에 입대를 하였다. 제대하면 복교를 하여 그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가시지 않은, 마음에 멍든 오욕을 씻어 보리라고 했는데 교수님은 S대로 옮겨 가고
계시지 않았다.
얼마 있다 그분이 대법원 판사가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2,3년 전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약 한달 전에 나는 신문로 노상에서 변호사님을 뵙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띄우고 답하시면서 지나가셨다. 그분의 웃음은 못된
제자를 타이르며 염려하시던 스승의 웃음이 아니라 많은 풍상을 겪고 인생을
달관하신 듯한 그런 무념의 웃음이었다.
아마도 그분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의 나를 기억하시지는 못하리라. 혹
기억하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벌써 나의 과오는 용서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분을 노상에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마음이 석연치 못했을까! 매연에
가리워진 도시의 달빛처럼 울적하고 해일이 일기 전의 먹구름처럼 불안해 하는
것은 아직도 인생을 덜 살아 본 애숭이여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대범하지 못한
천성 때문일까? (1977.11,12, <대한변호사협회>)
나의 어머니
불가에서는 현세에서 옷깃을 한 번 스치는 것도 천겁의 전생 연분이 있었다고
하거늘 그렇다면 어머님과의 인연은 전생에 몇억 겁의 인연이 있었는지 모른다.
곱게 빗질하여 쪽진 머리에 흰 눈과 같은 행주치마를 허리에 동여맨 어머니를
어머니로서 의식한 것은 어느 때 부터였을까?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닥쳐오는 운명에 부닥치면서 한 아들을 위해 일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의 탄압이 악마의 손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갈
때, 한 어버의 큰딸로 태어나셨다.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다도해를 끼고 두어시간 발동선을 타고가면 돌산이라는
섬의 군내리라는 한산한 어촌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일찍 아버님을 여읜 3남매
중 위로 오빠 한 분과 아래로 한여동생을 돌보며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석화를
까면서 폐쇄된 섬생활을 해오셨다. 열 여덟 되던 해, 중매장이가 일본에서 왔다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방랑벽이 심한 나의 어머님과의 혼약이 결정된
것이다.
나의 아버님은 몰락해 버린 윤 감찰 댁 셋째 아들로, 어머니의 고향마을에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양 옆에 서 있는 벅수골이라는 고개를 하나
넘어 10리쯤 가면 작은 복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성장하셨다. 어릴 때
지나가는 동냥 승이 " 이 아이는 필시 단명하리라"고 한 단명론 때문에 아버님은
이 사찰에서 저 암자로 전전하다가 철이 들 무렵에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셨다.
그 후 돈을 좀 벌어서 고향 처녀에게 장가가겠다고 세비로 양복에 넥타이를
비스듬히 매고 중절모를 쓴 사진 한 장을 보낸 것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어머님의 일생을 결정짓고 만 것이다.
이국의 국제항인 일본의 고오 베에 내린 어머님, 태어난 후 자전거 한 번 보지
못하고 육지에 발 한 번 디뎌 보지 못하였던 어머니에게는 닥쳐오는 시간과 옮기는
장소마다 죄어오는 시련뿐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님은 체념과 인내를 배우셨으니라.
이역만리 낯선 곳으로 단 한 사람만 믿고 찾아온 남편이 '다나 까 철공소'라는
간판을 걸고 선반 한 대와 자전거포를 겸한 조그마한 가게를 보면서 백만장자의
아들인양 포커, 경마 등 온갖 도박에 빠져 몇 날 며칠이고 나타나지 않으셨을 때도
한없는 고독을 안으로 삼켜 가며 가정을 지켜 오셨다.
나는 그 고오 베 산노미야 역전 다나 까 철공소 2층 돗자리방에서 추운 겨울날
아침에 태어났다. 나에겐 형이 하나 있었으나 돌 전에 죽고 누나도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항시 "나는 부모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으니 너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살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2차대전이 시작된 후 일본 제2육군병원이 있는 사가미하라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병원에 청소 도구 납품업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청소 도구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많은 손이 필요했으며 그 숱하게 소비되는 걸레를 깁기 위해서
수십 명의 종업원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방랑벽 때문에 후지야마, 오야마, 하꼬네,
규우슈우, 훗까이도 등으로 주유천하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2킬로쯤 떨어져 있는 오오노 제일국민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
가는 도중엔 도꾸야마라는 노인 내외분이 사는 집 뒤뜰에 큰 계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동네 꼬마들이 떨어지는 계피잎을 주워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학길에 일본 아이들과 계피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잎을 막
주우려고 하는데 도꾸야마 노이니 뛰어나오더니 "이놈의 조센징 새끼가 무엇하러
왔느냐?"며 마구 쫓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이 되어 집으로 도망쳐 와서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여쭈었더니 "그런 건 무엇하러 주우러 갔다가 그런 봉변을
당하느냐?"고 하시면서도 "그놈의 영감이 어린아이까지도 조선 사람이라고 경멸을
하는군"하고 언짢아하시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때 노을이 한없이 붉게 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 나는 성냥 한 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낮에 조센징 새끼라고 욕하던 도꾸야마 노인의 농가로 달려갔다.
집 근처에 가선 슬금슬금 기어가 그 집 앞마당에 겨울땔감으로 준비해 놓은
나뭇단에다가 불을 지르곤 "불이야, 불이야!" 하고 소리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하늘로 치솟았고 마을 사람들이 손에손에 물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 틈을 타서
뒤뜰에 있는 계피나무에 올라가 큰 가지 몇 개를 꺾어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도꾸야마 영감이 쫓아와선 온갖 욕을 다
퍼붓자 한참 후 어머님은 "모든 것을 다 변상하지요. 얼만지 청구를 하십시오.
그런데 영감님, 그렇게 조선 사람을 천시하면 못쓰는 거예요"하고 한마디하시는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그날도 그 훗날도 어머님은 나를 잘못했다고 한 번도 꾸짖는 일이
없으셨다.
그해 겨울이었다. 급우였던 다께야마라는 신사지기 아들하고 무엇 때문엔가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놈들은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이 한국인이면 "조선놈
바보새끼", '조선놈은 다 죽어로"하는 식으로 조센징이란 민족을 버러지처럼
천시하며 경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멸을 당한 것이 분해 그놈의 멱살을 잡고
실켯 두들겨 주었더니 코피가 터지고 얼굴에 상처가 나기도 하였다.
그런 얼마 후 신사로 동백꽃 떨어진 것을 주우러 갔었다. 떨어진 동백꽃을 모아
꽃술을 떼어 버리고 거기에다 실을 꿰어서 화환을 만들어 목에 걸기 위해서다.
다른 때는 반갑게 맞아 주며 "교오또짱, 많이 만들어라"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던
다께야마의 아버지가 그날은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욕을 하며 쫓아내는 것이었다.
쫓겨온 후 하도 분해서 심술이라도 부리려고 다시 신사를 찾아갔더니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아 신사 지붕옆으로 뻗은 동백나무에 올라가선 신사 지붕에다 오줌을
갈겼다. 처마를 통하여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신사당 안에 있던 다께야마의
아버지가 비가 오는가 하고 뛰어나왔다가 신사 지붕에다 오줌을 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대경실색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일약 유명해지고 말았다. 일본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는
신사당, 신성불가침의 신역이 지붕에 오줌을 쌌으니 오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다는
것이었다. 매일 마을 유지회의가 계속되었고 학교에다간 퇴학을 시켜야 한다고
압력을 넣고 우리 공장은 몰수하고 가족은 추방하여야 한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런데 이 야단이 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왜 신사당 지붕에다 오줌을 쌌지?"
하고 물으시기에,
"신사 뜰에서 동백꽃을 줍는데 다께야마의 아버지가 더러운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나가라고 쫓아내기에 그만 화가 나서..."
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알았어"하시고는 그 북새통에서도 한 마디의 꾸지람도
없으셨던 어머니다.
그 후 아버님이 몇 곳을 다녀오셨고 육군병원의 계급깨나 있는 분이 몇 번
왔다갔다한 후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아들의 사기를 돋우고 불의의 반항엔 묵시적인 동조를 하시던
어머님이시지만 나쁜 일에는 누구보다도 엄격하고 단호하셨다.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라 기억된다. 우리 집 앞에 다로오라는
나보다 서너 살 더 먹은 한국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 부모들이 모두 우리 공장에
다녔기 때문에 더욱 친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다오로만 앞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으면서 읍에 곡마단이 들어왔는데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
가자"고 하였더니 "너 돈 있어?"하고 말하는 투가 네가 어디 돈 있느냐고 깔보는 것
같았다. 그래 안방에 들어가서 장롱 안에 있는 금고를 열고 다오로에게 자랑도 할
겸 돈을 듬뿍 가지고 나와서는 읍으로 향하였다.
재미있는 서커스 구경도 하고 남은 돈으로 고무풍선과 연도 사고 권총, 칼 등
십여 가지의 장난감과 먹을 것을 사가지고 어둑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님이 성난 음성으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때 어머님은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셨을까? 얼굴엔 경련이 일고
이와 이가 부딪치는 소리, 그 무서운 눈, 그렇게 실망과 노함이 얽힌 표정을 예전엔
한 번도 본일이 없었다.
내가 입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에다 내가 사가지고 들어온 연과 고무풍선을 목에다 매고, 총과 칼은
허리에다 달아매더니 빵과 과자를 입에다 물리고는 팽이, 자동차 등 장난감을
양손에 들려놓고 회초리로 볼기짝과 종아리를 힘껏 때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픔에 견디다 못해 밖으로 뛰쳐 달아났다. 엄동설한 추운 강풍이 몰아치는
언덕길을 한없이 도망쳐 달아났다. 연과 고무풍선은 뒤에서 훨훨 날고 허리에 찬
칼과 총은 금속성을 내며 딸랑거리는 그 장면을 보신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상하셨을까?
그런 후 어머님은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시며 식음을 전폐하셔서 쇠약하실 대로
쇠약하셨다. 사람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유일한 기대를 걸었던 아들
하나가 금고를 털어 가지고 구경이나 다니고 못된 짓을 하고 다니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며 그 동안 쌓고 쌓으신 크나큰 꿈이 남가일몽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오죽이나 어머님은 분하셨겠는가?
일본의 패색이 점점 짙어 가던 때,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는 아버님의
주장으로 우리 세 식구는 그저 간단한 트렁크 몇 개를 꾸려 가지고 한국으로
나왔다. 공습이 시작되어 정기 관부 연락선은 끊기고 군수물자를 싣고 다니는
부정기적인 화물선인지라 미난인들의 짐은 거의 실어 주지 않았다. 모두들
살림살이를 가져가지 못하는 서운함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였은 일단
남편을 따라 고향으로 가기를 결심한 어머님은 "쓸데없는 소리들 마시오. 폭격을
맞으면 모두 재가 되어 버릴 터인데 목숨만이라도 살아서 부모형제와 같이 고향
땅에 가 사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하고 그들을 조용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촌뜨기 새댁이 멀고 낯선 이역에 가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15년 만에, 그것도 피난이라는 형식으로 고향을 찾아오는 그 심정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었으리라. 고향에 와 보니 모든 농가들은 극심한 공출로 쌀이나
보리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고구마나 조밥, 심지어는 콩깻묵 밥과 소나무 속껍질에
쑥이나 잡곡을 섞어 지은 송기밥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찾아간 큰집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하루는 어머님이 외가댁에
다녀오겠다고 떠난 지 3일 만에 돌아오셨는데, 버선 속과 허리춤에 쌀을 차고
오셔서 며칠동안 쌀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위장이 몹시 나쁘신 아버지와 어린
외아들을 위해 얼마 후에 어머님은 또 쌀을 구하러 가신다고 떠나셨는데, 며칠 후
핏기없는 얼굴로 돌아오셨다. 여수까지 다 와 객선을 타려는 선창가에서 그만
순사에게 쌀이 든 륙색을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륙색 안에다 작은 자루를
만들어 쌀을 넣고 그 위에다 감자를 넣어 감쪽같이 위장을 하였는데도 어떻게
그놈이 알았는지 모르겠다고 분해 하시며 잠을 못 주무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어제
본 듯 뚜렷이 떠오른다.
그런 얼마 후 해방이 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가시기 전에 아버님은 오랫 동안
앓아 오시던 병이 악화되어 그 이듬해 봄에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어머님은 오직 한
아들을 위하여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강하게 살아오신 것이다.
일본에서 나올 때 좀 가져오셨던 돈으로 농토를 사서 농사를 지어 보았으나
아버님의 병환이 심하여지자 여의치 않아 농토를 팔아 어선을 샀는데 그것마져도
남을 시키니 마냥 손해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도 팔고 해방 후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조선소 하나를 이모부와 같이
인수하였는데 그것도 불행하게 이모부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누구 하나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 법률적인 쟁소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빼앗기고 말았다.
어머님에게 이제 남은 재산이라고는 짐스러운 아들과 손재봉틀 하나뿐이었다. 그
손재봉틀 하나에 생계를 맡기고 한 아들의 성장에 기대를 거시며 어머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신 것이다.
그러자 내가 중학 1학년 때인 10월에 동족상잔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이웃 청년들이 죽었다.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가 배에 실려 여수 종포에
있는 국민학교 교정으로 끌려갔고 그 중에서 일곱 청년이 일제시대에 헌병
상등병이었다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사나이의 일본도에 목이 달아났다.
그것을 보고 오신 어머님은 강력하게 나의 등교를 막으시는 것이었다. 공부해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다. 어머님 앞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간 청년들도 무식하였던들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어머님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아는 새로 생긴 서당에서 저녁이면 천자문을
배우며 2개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에게 "어머님이 학교에 보내 주지
않으시면 제가 고학이라도 하여 다니겠습니다. 고향에선 고학하기가 힘들 것
같으니 객지로 가게 전학금만 좀 만들어 주십시오"하고 연 10여 일을 졸라대었다.
그랬더니 그러면 갈퀴나무 30짐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큰댁에서 맞추어 온 꼬마지게를 지고 도시락을 허리춤에 달고
나무꾼을 따라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는 워낙 도벌들을 하여 나무가 없을뿐만 아니라 여순반란사건 후
반란군들이 산속에 숨어 있다가 저녁이면 민가로 내려와 괴롭힌다고 나무가 좀
무성한 곳은 모두 벌목을 해 버려 갈퀴나무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동네는 여수시와 가까워서 새벽부터
나룻배를 타고 나무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건너왔다.
그래 우리 동네 나무꾼들은 새벽밥을 먹고 마을에서 약 8킬로가 넘는 굴앞이라는
곳으로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로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으나
비 오는 날 이틀을 빼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하여 어머님이 분부하신
갈퀴나무 30짐을 해내고 말았다.
그날 밤 어머님은 어린 나를 불러 놓고 그만한 인내심이면 객지에 가더라도
여간한 고생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며 장한 아들이 되라고 격려해
주셨다.
1개월 후 나는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학자금으로 여수에서 40킬로 떨어진 교육
도시인 순천의 농림 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당숙이 주지로 계시는 용화사라는 절에서 법당 청소와 심부름을 하며 얼마간
지내기도 하고 학교 매점에서 점원 노릇도 해 가며 학교를 다녔다.
여름방학 때면 어머님과 같이 고향집 산너머에 있는 돌산 해수욕장에 가서
사과궤짝을 놓고 과일과 과자를 팔기도 하고 6,25동란 중에는 어머님과 나는
이집저집 친척 농가를 찾아다니며 논김도 매고 며루잡이도 하며 지내는 동안
육체적으로는 고되었으나 어머님과 같이 있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 왜놈에게서 매입하였던 조선소의 사택에서 살던 우리는 법률적인
수 속의 미비로 조선소를 빼앗겨 버린 후, 그곳에 딸려 있는 조그마한 두 칸 집에
살다가 조선소를 확장하는 바람에 그 집에서마저도 쫓겨나게 되었다.
그 딱한 사정을 알고 동네 어른 두분이 20여 평씩 땅을 주어 어머니와 나는 그
땅에 삼 칸 겹집을 짓기 시작했다. 밤새워 어머님과 같이 설계를 했다.
길가집이라 두 칸은 가게, 그리고 큰 방과 건넌방은 나의 공부방으로 정하고 방
하나를 더 들여서 어머님의 적적함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마음 착한 분에게 주기로
하였다. 공사를 맡은 목수 영감님은 착한 분이었다. 나는 큰 댁에 가서
서까래감과 잔나무들을 구해 오고 어머님의 삯바느질로 모으신 돈으로는 기와와
기둥감 나무 등을 사 왔다.
잡역은 동네분들이 노임도 받지 않고 십시일반으로 도와 주셨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어머님이 뿌려 놓은 씨를 거두신 것이었으리라.
산파조차 없는 동네, 나룻배로 건너 여수에 가면 병원이 있기는 했으나
가난하기만 한 그들은 병원이란 이상향인 엘 도라도의 사람들이나 가는 것으로
알았고, 그런 마을에서 어머님은 산파이며 외과의사였다.
그리고 받아 낸 아이에게 작명까지 해주신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명이 길라고
'판돌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다음에는 남아를 낳으라고 '두리'라는 식으로. 그리고
초상이 나면 그 어려운 사이복을 격식에 맞추어 짓는 사람도 어머니였으며 결혼,
회갑 등 큰 잔치상은 으레 어머니의 손에 의하여 다듬어진다. 그래서 다재박복한
어머님의 별명은 여이장이었으며, 외로운 당신을 사내다운 음성으로 억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또 하나의 별명은 '양철'이었다.
그런데다 어머님의 음식 솜씨는 동네에서 예찬을 받을 정도로 특출하였다. 양념
한 넣지 않은 것 같은데도 새큼한 김치맛, 젓갈 몇 숟갈만으로 감칠맛 나는 겉절이,
된장에 풋고추 몇 개와 마늘 두어 개 다져 넣고 만든 가오리 된장백이, 고추장에
식초 몇 방울 넣고 만들어 놓은 군침이 도는 숭어회, 그 어느 것도 요사이 요리책
몇 권씩을 뒤적거리며 만들어 놓은 음식보다 맛있었다.
잿물을 내어 빨아 놓은 빨래는 표백제가 난무하는 요즈음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만큼 희디희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는 내 육신의 고향이라는 관념때문일까.
어머님은 집을 지으신 후로는 길가집이라 구멍가게를 보기 시작하셨다. 새벽
일찍 나룻배를 타고 여수로 건너가셔서 과자, 음료수 등을 가득 머리에다 이고
돌아오셔선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시곤 점포를 벌이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곧 거지의 근성과 통하는 것이며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운명을 개척하는 데
있다."는 것이 어머님의 신조이셨다. 게으른 사람을 제일 싫어하셨다. 때문에
운수불길하여 망한 사람에게는 동정하여도 게을러서 못사는 사람에게는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한푼의 동정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순리에 역행하면서까지
재물을 얻는다든지 지위를 얻는 것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나는 고생 끝에 농림고등학교 축산과와 광주에서 축산갑종강습소를 마치고
애당초의 꿈은 목장이라도 하며 어머님을 지성껏 봉양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세상은 꿈대로만 되지 않았다. 당장 종축과 축사아 사료 등 그 어느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전문학교나 가 볼까 하여 어머님에게 여쭈었더니,
밥을 굶고 네가 초부가 되어 지게목발을 치며 농사를 지을망정 경찰과
세무직원만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순반란 때 경찰고 세무서원의
희생이 커서였을 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 눌러 있으면서 병아리를 좀 사다가
양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성계가 되어 이제 땅을 빌어 본격적인 양계업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있던 어느날 어머님이 오셔서 대학입학금을 마련하였으니 서울로 가서
내년 봄에는 대학에 진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지 오래여서
인문과목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입시에 자신도 없었을 뿐만 아닐
입학금은 마련되었다지만 하숙비, 4년간의 등록금 등이 참으로 막연하여 "어머님,
제 형편에 어떻게 대학을 갑니까? 돈이나 벌어서 어머님이나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4년간 등록금도 그렇고 객지에서 있을 곳도 없고..."했더니 어머님은
노기 띤 음성으로 "사내놈이 왜 그렇게 대범하지 못하냐. 너의 아버님은 돈 한푼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에 건너가 그 나름대로 기반을 잡지 않았더냐. 아직
꿈으로 가득 차야 할 젊은 놈이 현실에 만족하고 안일한 생각만 하며 살겠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고 예부터 하지 않았더냐. 잠잘 곳은 정거장 대합실이면 되고 먹을 것은
산입에 거미줄 치겠느냐. 용기를 내어서 한 번 해봐라. 가겠다고 마음이 정해지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남이다. 그리 알아라"는 말씀을 남기시곤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이듬해 봄 서울로 올라와서 9년 만에 대학을 마쳤다. 참으로 잘 곳이
없으면 서울역 삼등대합실을 찾았다. 그리고 삼각지 파출소의 숙직실 신세도 졌다.
여름이면 파고다 공원의 팔각정과 벤치, 아는 친구들의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하며
기식도 하고, 남대문시장 안의 꿀꿀이죽, 지금 삼일로 고가도로 밑 공지에 있던
포장마차 행렬이 수제비국수를 먹으며 어느 때는 굶는 고역 속에서도 나는
어머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용기를 살리곤 하였다.
한두 달마다 어머님으로부터 얼마의 돈이 올라오면 그것은 전차표값과 책대금
그리고 최소한의 식대로 충당하는 것이다. 이 돈이 오기까지는 몇 번에 걸쳐 곧
죽어가는 딱한 사연의 편지를 어머님에게 보내는 것이다. 답장은 내가 보낸 편지지
뒷면에 늦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글월과 돈 액수가 명기된 보통위체환을 역시
내가 보낸 편지봉투를 뒤집어 만든 봉투에 동봉하여 등기로 보내시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12대가 살아온 고향의 군수나 면장이라도 되어 금의 환향하기를
얼마나 바라시던 어머니였던가! 그러나 나는 불혹이 다 되도록 돌산 면장은커녕
동장 한 번 되어 보지 못하고 3,4년 전부터는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형무소다,
재판이다, 얼마나 어머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으며 어느 때는 미끈한 양반들이
찾아와서 아들이 어디 있는지 행방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집에 오면 곧 연락을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을 때의 어머님 심정은 오죽하였으랴...
그래도 우리 어머님은 내 아들은 죄 지은 일이 없는데 세상을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몇 번이고 노여워하셨는데, 이웃 어른 한 분이 "세상되어 가는 대로 살지,
집의 아들이 무엇 잘못한 일이 있는 것 아니오?"하셨다가 그분하고는 그 후 상종도
안하시더라는 것이다.
그 어느 땐가 어머님은 "네가 좀 잘되기 위해서 친한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고될망정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른길을 걸어가라. 혹시 처자식
때문에 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든 고향으로 내려 보내라. 밥이면 밥, 죽이면 죽
같이 먹고, 또 아이들 교육이야 못 시키게쓴냐"고 하시던 어머님이시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님을 서울로 모시려고 내가 간곡히 청하고 손자들이 재롱을
부리며 할머니의 상경을 졸라대고 하여도, 어머님은 "아직 활동할 나이이니 내가
활동 능력이 없으면 너희들이 오지 말라 하여도 내가 올라갈 것이다. 너는 네가
계획한 일이나 열심히 하여라. 사람이란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꼭 성취한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성취하려고 노력하였느냐가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고향을 떠나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지난해 어머님 회갑도 자식된 도리로, 아직 동장 한 번 해본 일은 없지만 친지와
친구를 동원해서라도 서울에서 한 번 떠들썩하게 하여 "어머님 자식이 그래도
이렇소"하고 허장성세를 부려 보려고 하였더니, 어머님께서 "회갑연을 하는 것은
반대다. 굳이 하려면 고향집에서 가까운 친지 어른이나 모셔서 해라"고 하시기에
그 바보스러운 허장성세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날 수십 장의 추전이
날아오고 서울에서 여러분이 내려오시고 아들 손자들이 큰절을 드리고 하였더니,
미소 띈 얼굴에 눈물을 흘리시며 "너희 아버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느냐"고 하시던 어머님, 그 동안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엄하셨던 어머니냐.
나룻배에서 내려 집에 가는 동안 생면부지의 어른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으면
혼을 내시던 어머니다.
금년 봄 어머님의 제삿날 겸 어머님의 진갑이라 고향에 내려갔다가 어머님이
하도 수척하셔서 아버님의 기일제만 모시고 어머님과 같이 서울로 올라왔다. 2,3년
전부터 신경성 위궤양으로 몸이 편안치가 못하셨지만 가게도 보시고 나들이에도
불편이 없다고 하시기에 종합진찰이라도 받아 보시게 하려고 모시고 온 것이다.
오시던 날은 집 근처 유명하다는 한의사에게 진찰을 받으셨는데, 위궤양 증세가
심하지만 약을 복용하면 완쾌되시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아내에게 종합병원에
모시고 가서 종합진찰 수속을 밟고 있으라 하고 나는 그날 친구의 재판이 있어서
아침 일찍 변호사에게 들렀다 법원에 갔었다. 조금 후 사람이 쫓아와선 종합병원에
가는 도중 졸도를 하시어 J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계시다 하기에 부리나케
J병원에서 E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최선을 다하였으나, 5일 만에 어머님은 한
마디의 유언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한 아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오신
어지신 어머님이 운명하신 것이다.
나는 그 후 일요일이나 휴일이면 서울 서부역발 8시 15분 교외선을 타고 장흥에
있는 코스모스가 만발한 신세계 공원 묘지에 고이 잠들어 계시는 어머님의 묘소를
찾는다.
그러나 어머님은 꼭 살아 계시는 것만 같고 지금이라도 곧 나타나셔서 어린
손자들의 손을 잡고 "넓고 넓은 바닷가에"하고 목청껏 클레멘타인을 불러 주실 것
같다. 돌아오는 추석에도 막차로 내려가는 아들을 기다리며 선창가에 나룻배를
매어 두고 여수역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어머니.
어머님은 정말 억겁의 인연을 끊고 돌아가셨단 말인가. (1973.12, <여성동아>)
한 떨기 들국화
저물어 가는 육교 위에
황망한 한줄기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단 화물차가 지나간다.
갈매기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잠드는 고향
산도 바다도 포플란무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사람들.
고향사람들의 한줌의 희망도
진달래빛 놀과 함께
한 번 가고 다시 못 오니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한숨 짓고 눈물 흘림은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이 시를 암송한 지도 스무 해가 넘었나 보다.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난 긴 세월을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는 이 시를 애송해 왔다. "큰 꿈을 꾸는
자는 앞날이 유망하다. 좀더 큰 마음을 가지고 생의 앞길에 힘있는 행진을 하라"는
문호 키프링의 경구에 힘입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이듬해인 1955년 초봄에
호남선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설마 먹고 잘 곳이야 있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올라왔지만 서울역에 내리자 갈
곳이 막막했다. 그 후 어느 때는 서울역 삼등대합실에서, 또 어느때는 삼각지
파출소 숙직실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그럴 때 고향이 그리워지면 염천교
돌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화물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이 <향수>란 시를
마음속으로 되뇌었고, 가난한 자신이 죽도록 미워질 때면 한강가로 뛰쳐나가 이
시를 소리 높여 읊조리기도 하였다.
그때 이 시는 이름 모를 독립투사가 어느 이국의 빌딩 옥상에 서서, 압박받는
고향사람들을 그리며 지은 시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를 읊게 되면 목맺혀 오는 향수를 달랠 수도 있었지만, 조국을
생각하는 사나이라면 이쯤의 고생은 감내하여야 한다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전에야 이 시가 김광균 시인의 시이며, 1940년 4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실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암송하고 있는 <향수>는 원문에서 두
줄이나 빠져 있고, 몇 곳이 틀린다는 것도 이번에 발간된 김광균 시전집
<와사등>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이제 염천교 돌다리도 시멘트 다리로 바뀌고, 한줄기 기적을 뿌리고 떠나가던
화물차도 디젤차로 바뀐지 오래며, 그 지독하던 가난마저도 면한 내가 그래도
술이라도 한잔 마시는 날이면 원문과는 틀린 <향수>를 요사이도 읊조림은 나의
현실이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퍼서일까! (1978.6.4, <주간여성>)
짝사랑
<짝사랑>이란 노래를 나는 즐겨 부른다. 이 유행가의 작사자나 작곡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술이 거나해지면 신나게 한 곡 뽑는다. 그래서 우리들이
모이는 모임의 이름도 <짝사랑>의 첫 구절에 나오는 '으악새'로 명명하였다.
아직 이지러진 조각달과 같은 나이는 아니지만, 짝사랑이란 현실에서 찾기보다
지난날의 추억에서 찾는다. 누구인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그 심사를 나는
곧잘 이 <짝사랑>이란 노래로 달랜다.
사랑은, 서로 어울려 좋아하는 공동애인 필리아와, 남녀간에 주고받는 이성간의
상대애인 에로스와,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절대애인 아가페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짝사랑은 아가페다. 그리고 짝사랑은 한이며 영원이다. 그래서 가슴
깊이 서려 있고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상이다. 또한 짝사랑이란
맹목이며 희생이다. 그래서 짝사랑이 아닌 사랑은 타산이며 상거래처럼 이루어지는
치사스러운 장사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한 소녀를 사랑하였다. 나와는 너무나 성장과정이 달랐던
그녀가 졸업하던 날 기나긴 축하의 편지를 보냈으며, 그녀가 대학에 입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척 기뻐했다. 해심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나 낚는 신세가
되어버린 나와는 영영 만날 수도 없을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10여 년 전에 모종의 필화사건으로 나는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인간이 극한
상황에 달하면 제일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갈망을 달래
보려고 성서의 산상수훈을 하루에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다. 그러나 어느 한
인간에게 보내어지는 짙은 상념은 지울 수가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금계산 돌바위 너머로 사라지고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면,
육체적인 고통보다 몇 배가 되는 그리움이 밀물처럼 가슴에 밀어닥쳤다. 그럴 때면
나는 차가운 마룻방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한용운 선생의 <선사의 설법>
이란 시를 외웠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에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아홉 자 벽돌담 위로 아무런 받음도 없이 보내는 사랑, 이런 순수한 사랑을 또
한번 가져 볼 수 있을까? (1978.4, <여성동아>)
멋있는 여인상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차창에 기대어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는 듯한, 그 애수 띤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
호숫가에 다정한 연인과 나란히 앉아 밀어를 속삭이는 귀여운 여인을 우리는
본다.
싸이클을 타고 통일로 아스팔트 위를 파란 머풀러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젊고
발랄한 여인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남이섬을 돌아가는 모터 보트
위에서 젊음의 찬가를 합창하는 그 명쾌하고 생동하는 여인을 우리는 본다.
우리는 거리에서, 다방에서, 비어 홀이나 레스토랑에서 그 많은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
그러나 그 많은 아름다운 여인들 속에서 나는 멋있는 여인을 접하기보다는 항시
멋있는 여인을 접하기보다는 항시 멋있는 여인을 동경해 왔다.
멋이란 인공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풍기는 교양과 인격과 개성 등이
조화된 극치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멋이란 생동하는 인간으로서 희구하는 최고의 것이며, 멋장이란 찬사를
듣기 위해선 마치 수도승의 참선처럼 오랜 수련을 요한다.
그러나 멋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성질의 것이므로 보고 느끼는 쪽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그 기준이 다소 달라질 수 있다.
즉 멋이란 어디까지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며, 어떤 전통적인 도덕관이나
인습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스럽게 변혁되는 것이므로 어떤 틀이 짜여져 있는 것은
아니다.
고요한 밤에 전기 스탠드 밑에 놓인 원고지의 칸을 메우며 글을 쓰는 여인.
호사스러운 친구들 모임에 수수한 한복을 입고 입가엔 조용히 미소를 담은 여인.
검은 베레모에 빨간 배낭을 메고 산정을 향하여 전력을 기울여 등반하는 여인.
열 두 쪽 병풍이 둘러 있는 방에 다소곳이 한복을 입고 사군자를 치는 여인.
번잡한 시내 버스나 간이철로를 달리는 차창에 기대어서 붉은 크로스로 장정된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여인.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선 너무나 이지적이고 근엄하여 벅찬 고뇌와 두려움을
수없이 겪어야만 할 것 같은 여인.
또한 남편이나 애인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거나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여인.
이러한 여인상에다가 인격과 교양의 세련미를 불어넣는다면 참으로 멋있는
여인상이 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바라고 동경하는 멋있는 여인상이라면 지난날의 멋있는 여인과
더불어 오늘도 그 어느 곳엔가 멋있는 여인이 있으리라…
이조 단종이 세조의 힘에 밀려난 뒤 세조의 그릇된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절개를
지키며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참살을 당항 사육신 속에 자기 남편이 끼여
있지 않았다 하여 대들보에 목을 매어죽었다고 전해지는 윤씨 부인의 죽음은
고귀한 죽음이며 그 부인이야말로 얼마나 멋있는 여인인가?
오늘날 남편의 부정이 아내의 바가지 때문에, 또한 남자 애인의 부패가 여성의
허영 때문에 자행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부정과 부패와 타락이 날로
팽배해 가고 있는 세태에서 남편의 월급액보다 많은 돈을 받고 즐거워하기보다는
남편의 부정을 책하는 여인. 그 얼마나 멋있는 여성인가! 그 여인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미모나 학벌이나 세련미를 따질 것없이 멋의 극치의 상태라고 일컬어도
손색 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이며 2차대전중 레지스땅스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르꼬르의 작품 <바다의 침묵>에서 또 하나의 멋있는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너라는 음악가 출신인 독일군 장교가 미모의 젊은 조카딸과 함께 살고 있는
프랑스인의 집에 숙소를 할당받고 입주한다.
금발의 베르너는 독불 협조의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예절 바르고 성실한
젊은이로서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며 그 조카딸에게 갖은 노력을 다하여 접근하지만,
그녀는 바다의 침묵을 연상하며 끝까지 침묵으로 저항한다. 그녀에게 조국을
지키는 일은 오직 굴하지 않는 침묵을 지키는 길뿐이었기 때문이다. 베르너는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침묵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되고 나찌의 의도가 프랑스
문명을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찌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안고 러시아 전선의 지옥행으로 떠나 버린다.
이 여인은 평범하면서도 얼마나 강인하고 지혜로운 여인인가? 그녀는 침묵으로
조국을 지켰고 불의에 항거했고 더 나아가 적을 동지로 만들었지 않은가? 이
여인이 바로 현대적인 의미의 멋있는 여인상이 아닐까? (1975.3, <한국수필>)
변
시인 S형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동기는 문예지인 S잡지를 보다가 내가 쓴 수필을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청탁에 의하여 쓰기는 썼지만 여간 자신이 없지 않아 내가 아는
사람만이라도 읽지않았으면 하고 내심 바라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친교가 잦지도
않은 분으로부터의 전화라 여간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문장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제가…"라는 머뭇거림에
S형은 위안과 용기를 겸한 듯 "문장이 별것입니까! 글이 진실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되는 게지요. 나는 윤 형의 글을 읽고 나에게도
무언지 가슴이 뭉클해 오는 것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언제 대포 한잔
합시다."하곤 전화가 끝났다.
나는 언제부처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동화책 한 권 변변히
읽은 기억이 없다. 기껏해야 국민학교 시절, 일본의 해군제독이었던 야마모도
이소로구의 전기와 희미하게 기억되는 이솝우화집 정도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려서 아버님을 여의었다. 그 후 해변가 바위에 '고독'이라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모래사장 위에 무엇이라고 써서는 지우고 또 쓰곤 지우기도 했으며
아버님을 여읜 얼마 후에는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하얀 종이 위에 나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박쥐가 날개 펴고 검은 장막 내리면
고독의 밤이라오
그 누가 추한 모습 야윈 얼굴
고독의 시간을 막고 흉보리
내 아버님도 일찍 이 밤에 돌아가시며
나에게 고독의 시간을 주셨으니
…….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시인지 무언지 모르는 글을 마냥 써 왔다.
고독했기 때문에 글을 썼다는 헤세처럼 나도 고독했기 때문에 글을 썼다. 그러나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다. 자위의 방편으로 썼기 때문에 나에게는
문장작법이나 문장의 기교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좋은 시나 문장을
표절하여 몇 마디의 어휘를 바꾸어 나의 것으로 만들어 보고 운을 빌어 읊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남의 것을 빌어 써 놓고 보면 내 것보다 나은 것 같은데도
내 육신과 같은 친근감이 가지 않고 몸에 맞지 않은 비단옷을 걸친 것 같아
어색하기만 하다.
내 자작은 좀 촌스럽고 유치하긴 하나 몸에 딱 맞는 남루한 코르덴 작업복처럼
볼수록 따뜻한 정이 간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나름대로 수십편의 시와 몇 편의 소설을
써 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건방지게 몇 개의
필명도 가져 보았다. 백초, 백사, 일민, 민암, 돌산……. 또 문학 서클도 만들어
<새얼>이라는 프린트본 잡지를 발간했다. 그런데 그 동인지에마저 문학 작품류의
시 한 편 골라 넣지 못하고 <삼대국회의 공과>라는 이상한 글을 격에 맞지도 않게
게재 할 정도로 문학 작품에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왜 그렇게 문학에 대한 공포증에 걸렸는지 모른다. 용기를 내어 좋지도
않은 목청으로 노래자랑이나 약한 담력에다 힘을 주어 웅변대회 등에는 서슴지
않고 나가면서 습작품을 남에게 보이는 것만은 무척이나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벌거벗은 나 자신을 보이는 것 같은 수치심, 내 무식한 치부의
핵이 노출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언제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독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엘리어트의 <황무지>, 찰스 램의 에세이
등을 접하면 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은 더욱 희박해질 뿐만 아니라 내가
그 동안 써 놓은 글들을 혹시 남이 훔쳐 볼지 모르니 소각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수백 년된 주화처럼 19**년 *월 *일 이라고 씌어진 그 말미의 날짜가
나로 하여금 못 버리도록 한다.
글이란 꼭 남을 위해 씌어져야 하고 주격이니 부사니 동사니 하는 문법에 꼭
맞아야만 되는 것인지…
나는 요사이 남에게 보일 만한 글을 써 보아야 되겠다는 충동 때문에 문장작법에
관한 글을 몇 편 뒤적여 보았으나 인수분해나 미적분의 공식처럼 시원스런
해설서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수필은 만인의 문학이다. 시는 시인이 쓰고 소설은 소설가가
쓰지만 수필은 수필가가 아니라도 쓸 수 있다. …자유로운 산문으로 관찰과 사색의
산책에서 얻은 알뜰한 내용을 담아 독자와 공감해 보는 것이 수필이며, 수필을
'시필'이라고 말한 <수필작법소고>라는 글에서 용기를 얻어 몇 편의 수필을 써서
발표해 보았다. 그러나 글 읽는 분에게 얼마나 공감을 주었으며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얼마만큼 솔직하고 용기있게 하였는지!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글답지 않은 글을 발표하는 것은 남에게
노고를 끼치는 악덕이라고는 말한 어느 친구의 말이 어쩐지 나를 두고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원래 인간은 고독한 것이며, 그 고독 속에서 타인과 공감하고 합일할 수
있다는 내 나름대로의 사유 때문에 나는 고집스럽게 또 한 편의 시필을 써 보는
것이다. (1974.9, <수필문예>)
망해
나는 항구에서 태어났다. 그 항구가 남의 나라 항구이긴 했지만 항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 큰 자랑이다.
1935년 음력 동지달 보름날 바닷물이 만조가 된 아침에 나는 일본 고오 베라는
항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 선창가를 거닐며 자랐고 굴뚝이 큰 화물선을 보며 꿈을
키웠다.
내 아버지의 고향도 바닷가이다. 여수항에서 두어 시간쯤 연락선을 타고 가서
종선을 갈아타고 내려야 하는 돌산이란 섬의 신복리 작은 복골이라는 마을이
12대가 살아온 나의 고향이다.
그리고 외가도 같은 돌산 군 내리 서편이라는 곳으로 해일이 일고 파도가 치면
마루밑까지 바닷물이 밀려오는 해변가에 있었다. 큰댁은 농사와 김 양식을 하였고
외삼촌은 범선 한 척에 생활을 걸고 사셨다.
내가 여덟 살 때 한국으로 건너와서 순천만에 접한 승주군 별양면 구룡이라는
곳에서 잠깐 산 적이 있다. 그곳엔 고막이 많은 갯벌이 있고 그 갯벌 위에 수많은
게가 기어다녔다. 그 게를 잡으려고 쫓아가면 재빠르게 옆걸음질쳐 뻘 굴속으로
숨어 버린다.
간조가되면 그 길고 넓은 갯벌에서 우리들은 넘어지고 빠지면서 온갖 놀이를
하며 신나게 시간을 보냈다.
멀리 조그마한 돛단배라도 보이면 어쩐지 마음이 설레고 그 누가 선물을 한아름
안고 올 것 같은 환상에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해방이 되어 나는 여수항 바로 건너에 있는 나리곶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통학을 하면서 노젓는 것을 배웠다.
나무 판자를 붙잡고 짠 물을 몇 모금씩 마시며 개헤엄부터 개구리헤엄 그리고
배영 등 갖가지 헤엄치기를 익혔다.
해풍이 일고 날이 저물어 나룻배가 떨어지면, 옷을 벗어 책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얹고 허리끈으로 질끈 매고서는 헤엄을 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책보를 펴 보면 책도 모두 흠뻑 젖어있지만, 그래도 바다를 건너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럽기만 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바다에서 배웠다. 숨바꼭질도 보물 찾기도 그리고 참을성과
노여움까지도 모두 바다에서 배웠다.
어둠 속에서 밝음이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도 등대불에서 배웠으며 인광에
대한 이치도 바다에서 배웠다.
그리고 식물명도 해초의 이름부터 배웠으며 동물명도 생선의 이름부터 배웠다.
원대한 꿈도 바다 저 멀리 보물섬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동경에서 키웠고 내
육신의 성장도 노 젓기와 고기잡이의 연속에서 자랐다.
아침 햇살에 잘 낚이는 은빛 나는 밀짱이, 오전 중에 낚이는 겁보같이 눈 큰
볼락, 뙤약볕을 피해 다니며 돌 틈 사이에서 날쌔게 나타나는 노래미, 황혼이
짙어질 때 잘 낚이는 쭉개미, 어두운 밤에 뱀같이 몸을 비비 꼬며 올라오는
바다장어… 이런 고기드의 먹이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떤 고기는
새우 먹이로, 어떤 고기는 지렁이로, 어떤 고기는 미꾸라지로 고기에 따라 다르게
먹이를 던져 주어야 한다.
바다는 또한 나의 사색의 고향이다. 수평선 위로 떠나가는 흰 돛단배엔 분명
미지의 연인이 타고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충동적으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항구를 떠나가는 객선에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계실 것
같은 착각에서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본다. 그러나 바다는 말이 없다.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결코 바다는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내 마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 이끼 낀 파래처럼 정들었던 바다를 떠난 지도 어언 20년이 되었다.
불현듯 바다가 그리워지면 가까운 인천엘 간다. 그러나 그바다는 내가 그리던
바다는 아니다. 가을 하늘과 같은 바다, 잔잔한 자장가와 같은 바다는 결코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똑딱선의 키를 잡고 황파를 가르며 떠나간 바다도 아니며
어머니가 김장거리를 씻던 바다도 아니다. 내가 게를 잡던 바다, 낚싯줄을 던져
넣던 바다도 아니다. 바다 위에 등대 불이 비쳐 주던 바다도 아니며 해변을 거니는
젊은이들의 노래가 들리던 바다도 아니다.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바다,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바다, 근대화의 폐수만이
뒤덮인 바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무엇을 추스릴 수 있을 것인가?
서투른 쌍고동 소리가 그리워진다. 똑딱선의 불규칙한 프로펠러 소리 그 모두가
그립기만 한 음향이다.
어떤 이는 현대인을 망향에 병든 무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망해에 병든
사람이 되고 싶다. 깃발을 높이 달고 오색 테이프를 휘날리며 징치고 떠나가는
이름없는 '나가시배'의 화장이라도 되고 싶다.
그리고 넓은 바다가 자유스런 나의 영역이 된다면, 나는 이 순간이라도 훨훨
춤추며 그바다로 떠나고 싶다.
끝도 없고 가도 없는 그 검푸른 바다 가운데에 서서 나는 목청을 돋우고 못다한
절규를 하고 싶다. 만세를 부르고 싶다. (1975. 11, <새어민>)
혼의 향수
부슬비가 내리는 이른 봄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 벳부에서
아침 일찍 구마모도행 열차를 탔다. 풍비본선 열차는 우리 나라의 장항선과 같이
오래된 열차였으나 차창 밖에 펼쳐진 고지대의 농촌은 모두 다 잘 사는 것 같이
보였다.
모든 농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잘 가꾸어진 정원 옆에는 어느 집이나
한두 대의 자가용 차가 서 있었다.
풍비본선의 중간지점인 다께다역에 닿으니 일제시대에 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나는 다끼 겐다로오의 히트곡인 <황성의 달>이라는 멜로디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일본은 가는 곳마다 그 고장의 추억이 서린 가곡이나 민요를
들려줌으로써 여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후 늦게야 이쑤인이라는 정거장에 내렸다. 그곳에서 20분쯤 가니 우리의
목적지가 있는 나에시로가와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집집마다에서 매향이 풍겨 나오고 전지가 잘된 정원수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마을 속에 수관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14대를 이어온 선대들의 작품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현 주인의 조부인 12대 심수관이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하였던
<대화명>은 참으로 수려한 대작이었다. 이 작품은 지난 1978년에 손자되는 14대
심수관이 이탈리아에서 3억원을 주고 되사왔다는 것이다.
10여 분이 지나니 출타중이었던 14대 심수관 씨가 돌아와 이채로운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임진왜란 후인 정유재침 때 전라도 남원에서 한을 품고 일본에 끌려간 심당길
씨로부터 14대째 이곳에서 도공명가를 이어오고 있는 그답게 차분함과 침착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380여 년 동안 일본 속에서 한국인임을 고집하며 가통을 세워 온 것을
자랑하면서도 고국에 가서 질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고 후진을 양성해보지
않겠느냐는 물음에는 한국은 한국적인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하여
계승되어야 하며, 자기와 같이 일본화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고국에 가는 것은
조국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때묻지 않은 한국 예술의 전통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시하였다.
짙은 고국에의 무한한 동경 때문에 개명하지 않고 같은 이름을 대대로 습명하고
있는 그에게서 나는 내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을 떠나오는 나에게 <심수관요전세품도록>에다 자기 집안의 가훈을
일본어로 한 구절 써 주었다.
"도자기를 빚어내는 물레는 움직이지만 물레 한가운데 있는 심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는데, 그 속에는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많은 것이 일본적인
것으로 변하였지만 한국인이라는 근본은 변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며 대문 앞까지 배웅을 해주며 고국에서 온 세 나그네를 보내는 그의
눈에는 혼의향수가 서려 있었다. (1984.9, <건강의 벗>)
추상
내 고향 돌산에 연륙교가 놓이고 읍으로 승격하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이 섬이 우리 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라느니 일곱 번째라느니 하고 어렸
을 때부터 들어 왔지만, 아직 그것을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이 섬이 내게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얼얼한 갖가지 지난날의 사연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금은 여수항에서 발동선으로 5,6분이면 갈 수 있고 밤에도 배의 내왕이
빈번하여 지척의 거리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노저어 다니는 조그마한 목선으로 통학을
했는데, 아침에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폭풍이 이는 바람에 나룻배가 끊겨 집에
돌아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해가 지고 선창가에 해등이 켜질 때까지
혹시 배가 없나 하고 부두를 서성거리곤 했었다. 그러다가 그냥 돌아설 때면 손에
잡힐 듯한 그 섬이 그렇게도 멀리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방학이 되거나 명절
때가 되면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여수행 열차를 탔다. 여수에
도착하면 나룻배가 떨어진 시간이라도 엎어지면 코가 닿을 듯한 곳이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집에 갈 수 있겠지 하는 기대로 나루터로 달려간다.
그러나 막상 어둠이 다 깔린 선창은 굵은 밧줄로 매달아 놓은 고깃배들이
한가로이 물결에 흔들릴 뿐 고요히 잠들어 있다. 혹시 조선소의 목수들이
영화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타고 온 보트라도 없나 하고 어선 사이를 기웃거리며
부두를 따라 종포쪽으로 걸어간다. 포구에 못미처 불쑥 나온 갑에 서서 바다
건너를 바라보면 조선소에 올려놓은 배들 사이로 우리 집의 호롱불 빛이 보인다.
바람이 일지 않고 바닷물이 잔잔한 밤이면 "형두야! 형두야!"하고 내 이름을
목청껏 불러댄다. 어느 때는 어머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동네 친구들을 노젓게
하여 건너오시기도 하였지만, 그런 요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3,4년간은 아버님 기일이나 명절 때면 으레 전마선을
나루터에 매어 놓으시고 어머님은 나를 기다려 주셨다.
이 돌산에 사업비 61억 원을 들여서 길이 4백 81미터, 너비 11.7미터의 연륙교를
놓는다는 것이다.
내가 자란 곳은 이 섬의 북쪽에 있는 백초란 곳이며 큰댁과 아버님의 산소와
선산이 있는 곳은 남쪽에 위치한 작은 복골이란 한촌이다.
난리가 날 때마다 나는 괴나리봇짐을 싸 짊어지고 50여 리나 되는 큰댁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밤중에
험한 자갈길과 산을 넘어 도망을 갔으며 6,25 동란 때는 큰댁에 피해 있으면서
낮에는 배를 타고 멀리 바다로 나가 조기 낚시를 했다.
그해 여름이었다. 금오도가 보이는 남해 바다 위에서 수십 척의 돛단배가 돛을
내리고 조기를 낚고 있었다. 거의가 공산당원들을 피해서 바다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날 따라 바람 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가끔 낚아 올린
조기가 뱃전에 떨어지면서 퍼덕이며 몸부림치는 소리와 노젓는 소리만이 귓전을
스칠 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같이 간 두 어른이 낚싯줄을 드리운 채 담배를
막 태우려는데 남쪽에서 호주기라 불리던 제트기 한 대가 장대처럼 뾰족뾰족 솟은
돛대를 스치듯 지나갔다.
모두들 일어나 손을 흔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막혀 있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비행기가 사라진 후까지도 만세를 부르며 서 있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다시 나타난 10여 대의 제트기가 번갈아 가며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배는 한두 척씩 침몰되고 사람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탄 벙어리 어부는 배 갑판을 막대로 치며 기성을
질러댔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편대의 비행기가 기총사격을 하며
다가오자 바닷물이 하얗게 튀어 올랐다. 비행기는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해 심을 향해 깊이깊이 무자맥질을 하였다. 비행기가
지나갔을 때쯤 해면으로 떠올라 심호흡을 하고는 비행기가 다가오면 또 무자맥질을
하였다. 그러면서 멀리 보이는 물을 향하여 헤엄쳐 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에 나는 잠이 깨었다. 모두들 횃불을 들고
있었다. 뭍에 닿자 기절을 한 모양이었다. 모래톱에 엎드린 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기저기서 곡성이 들려 왔다. 그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와 같이 간 J씨도
돌아가셨다.
이것은 돌산이란 섬과 나와의 사이에 얽힌 한 사건에 불과하다. 이렇듯 이 섬은
나에게 크고 작은 많은 이야기를 남겨 준 곳이다. 내가 거닐었던 오솔길에 보도
블록이 깔리고 몇십 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땅 주인이 아침저녁으로 바뀌며 인
구도 현재의 4배가되는 8만 명이 된다지만, 그 숱한 사람들의 분주한 발자국도 내
머리속에 담긴 이런 추상만은 지우지 못할 것이다. (1980.10.27, <약업신문>)
산의 침묵
가끔 나는 산에 오른다. 태고의 정적을 맛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사람의 발길이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때는 도시의 소음보다 더 시끄러운 산을 대하게 되고 어느 곳은 쓰레기
하치장보다 더 지저분하다.
내가 그리던 산은 어디로 가고 앙상한 산의 잔해만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린 시절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가면, 무덤가에 수줍게 피어 있는 봄의 할미꽃을
대하게 된다. 어느 한 손길도 닿지 않은 그 꽃에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곤했다.
여름이면 계곡의 시린 물에 발을 담그고 푸른 숲속에 누워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감나무 잎이 갈색으로 물드는 가을이면 초동의 마음은 설레인다. 산귀래 열매를
입에 물고 가끔 나룻배에서 만났던 교복을 입은 소녀를 생각한다.
겨울은 낮이 짧아 나무꾼에게는 바쁜 계절이다. 그러나 삭정이를 꺾어다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재미 때문에 겨울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고향 마을 뒤편에 길게 누워 있는 야트막한 산은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마당이요
동산이요 정원이었다.
솔방울 전쟁놀이도 숨바꼭질도 그곳에서 했다. 나는 그 산의 훈기로 자란
것이다.
해풍이 몰아치는 다복솔 사이를 거닐면서 먼나라처럼 생각되는 도시를 그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꽃이 피던 산, 어느 곳 하나 인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 솔바람 소리가 수평선 건너 멀리멀리 사라지던 그 고향의 산…
이제 그 산도 나무가 베이고 땅이 깎여 옛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엔 멋대가리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고 조선소의 발동기 소리와 시커먼
매연만이 근대화란 푯말을 감싸고 있다.
10여 년 전 J형이 중심이 되어 조그마한 등산동인회를 만들었다. 많을 때는
7,8명이, 어떤 때는 혼자서 서울 근교의 산을 찾아 오르곤 하였다.
가파른 천마산 등성이를 오르기도 하고 백운동 계곡을 따라 수락산 정봉에 올라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을 조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끔 북으로 뻗은 산의 맥이 끊긴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오한에 젖기도 하였다.
어둠이 깔린 조용한 하산길은 나를 번고하는 철인이 되게도 하고 망명지의
유랑민이 되게도 한다. 나는 산에서 묵시의 대화를 한다.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서,
민족의 영원성에 대해서, 사랑의 가변성에 대해서 묻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제 산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시장이요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다. 나만이
은밀하게 알았던 밀어의 장소도 모두 공개되었고, 나만이 거닐던 산책로도 이제는
공유의 것이 되어 버렸다.
산, 그러나 나는 정월과 8월의 산에서 산의 산다움을 잠시나마 맛본다.
실뿌리도 잠든 정월의 산, 산사에서 들려 오는 목탁 소리에 나뭇가지 이에 얹힌
흰눈이 떨어져 머리칼 위에 날리고, 하얀 눈 위에 찍힌 산새의 발자국이 원시의
산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벌레 소리도 지쳐 버린 무더운 8월의 산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사계가 단절된 깊은 숲속에서 나는 원색의 푸르름을 맛본다.
산은 수많은 비밀을 안고 있다. 그러나 결코 망각하지 않는 침묵으로 숱한
사연을 안으로 삭이고 있다.
산은 짓밟혀도 침묵한다. 그리고 조용히 서서 흰구름이 오고감을 지켜 볼
뿐이다. (1976.7, <주부생활>)
내가 좋아하는 법구
망각이라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세월 속에서 아름답고 즐거웠던 일들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데,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두껍게 가라앉은 앙금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성격을 창조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만들어낸다.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은
멍텅구리처럼 보이며, 삶의 표면 위를 날아다니고는 있지만 절대로 그 의미는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통받았던 그 시절에 고통을 가했던 그들에게 감사를 드리기보단 증오와
분노 같은 것이 솟구침은 이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벌써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0월 유산이란 미명 아래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었으며 모든 간행물은 계엄 사령부의 검열을 받던 때였다. 당시 나는
월간 <다리>라는 잡지사의 월급쟁이 사장 노릇을 하면서 현재 경영하고 있는
'범우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니, 운영한다기보다 출판사의 등록처를
잡지사에다 두고 일년에 고작 한두 권의 신간을 발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가까스로 모은 돈으로 연세대 김동길 교수의 첫 수필집 <길은 우리 앞에
있다>를 발행하기 위해 조판, 본문 인쇄 등을 마치고 그 인쇄물이 제본소에 가
있을 때 문제의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에 이미 발간되었을 터인데 김지하 시인이
표지 장정을 맡아 주기로 한 것이 그만 늦어지고 말았었다.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마침 김 시인이 표지화를 그려 주어 며칠 후 책은 완성되었다.
나는 그것을 계엄 사령부 간행물 검열실에다 납본하고 검열을 기다렸다. 그러나
납본증이 나오지 않자 그냥 그 책들을 시장에 배포해 버렸다. 당시 어떠한 제재가
오리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제작해 놓은 3천여 부의 책들을
팔지 못하면 일생을 걸고 키워 보려던 범우사가 그날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김동길 교수의 민주주의적 신념이 넘치는 글들을 많은
독자에게 얽혀야겠다는 생각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기업적인 측면이 더
강했었던 것 같다.
그 책을 배포한 2,3일 후 모 기관으로 출두하라는 통지가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나는 당분간 피신하기로 했다. 분명 출두하면 그 살벌한 분위기로 보아 신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책에 대한 포기 각서를 써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세 달 피해 다니는 동안 필자도 소환당했던 모양이고, 영업 담당자는 붙들려
가서 기관원들과 같이 서점을 찾아다니며 책을 수거했다고 한다. 그런 후 나를
찾는 기미가 뜸하다는 전갈을 받고는, 다른 책을 출간키 위해 교정을 보러 인쇄소에
들렀다가 기관원들에게 붙들려 심한 곤욕을 치렀다. 그때 수사 기관에서 보낸
5일간은 그 전에 <다리>지 필화사건으로 백여 일간 영어 생활을 하였던 때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 고통을 당하면서도, 또 당하고 나와서도 나는 언제나
불심이 강하셨던 어머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증오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떤 사건이 닥치면 문득 선심을 잃고 또 다른 나로 변신해
버리기도 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면 기상대의 일기
예보인 양 팔다리가 쑤시고 뼈마디가 부러진 것 같은 아픔이 나를 엄습한다.
이럴 때면 기도도 용서도 사라지고, 고통과 더불어 증오심이 불붙게 된다.
그런데 날씨가 차가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송년회를 겸해 몇 몇 선배 동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뼈마디의 아픔을 참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나는 무심코 고문당하던
이야기를 하고선, 고문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를 무척 괴롭힌다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듣고 계시던, 당시 동국대 교수였던 김운학 스님이
"윤사장, <숫타니파아타>라는 책 읽어 보셨소?" 하고 말을 건네 오는 것이었다.
읽은 적이 없다고 하였더니, "그 책은 부처님의 첫말씀을 모아 엮은 경집인데,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첫장인 <뱀의 장> 중 첫 대목 '뱀'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는다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오"하는 것이었다.
그날 스님과 헤어진 즉시 <숫타니파아타>란 책을 사려고 여러 서점에 들렀으나,
그런 책이 있기는 했지만 품절된 지가 오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 책을
출판하고 싶으니, 힘드시겠지만 번역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스님은 쾌히
승락하셨다. 두 달 반 만에 원고를 넘겨 받은 나는 첫장부터 조용히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수행자는
이승과 저승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마음속으로 노여움을 모르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승과 저승을
다 함께 버린다…"
"너무 빨리 달려가지도 않고 또 뒤늦은 일도 없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증오에서 떠난 수행자는 이승과 저승을 다 함께 버린다…"
"탐욕, 분노, 우울, 들뜸, 의심 등 다섯 가지 덮개를 버리고 번뇌 없고 의혹을
넘어 괴로움이 없는 수행자는 이승과 저승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나는 이 <숫타니파아타>를 항시 내 옆에 두고 지금도 그때 그때의 심정을 달래
줄 수 있는 부처님 말씀을 찾아 읽곤 한다. 이 한 권의 책 중에서도 거의 외다시피
한 항목은 '최상의 복'이란, 부처님과 제자와의 문답이다. 그 중 한 귀절을 들자면
이렇다.
"이득, 불이득, 명성, 칭찬, 낙, 고통 등 세속의 습관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으며, 악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 이것의 최상의
복이니라."
이런 조은 법구의 샘을 주신 김운학 스님은 이미 입적하셔서 지금은 내 옆에
계시지 않으나, 그분이 남기고 가신 이 한 권의 책은 나의 인생에 값진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1986.8, <금강>)
얼룩진 동심
이른 새벽에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들어 보니 고향에 사는 장남수 형의
음성이다. 지금 막 야간 열차에서 내려 서울역 앞에서 전화를 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따금 서울 나들이를 한다. 특별하게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1,2년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와선 나에게 고향 소식을 전하여 준다. 그리고 또 가끔
고향에서 나는 토산품을 정성 들여 포장을 해서 소포로 부치거나 소화물로 보내
준다.
지난 여름에도 풋풋한 매실을 라면 상자에 하나 가득 담아서 열차편으로
보내주어 매실주를 담갔다. 벌써 항아리의 뚜껑을 열면 향긋한 매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서울 바람 좀 쐬러 왔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 오면 2,3일 정도 우리 집에 머무르면서 그 토색적인 사투리로
풍성한 고향 소식을 나에게 전해 준다.
이번에도 고향인 돌산도에 곧 연륙교가 놓인다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 할 것이며 그로 인해 땅값이 올라가고 있다는 말도 또 한번쯤 더
할 것 같다.
전번에 와서 죽마 고우인 종진이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과, 우리가 뛰어
놀던 모래 사장의 모래를 모두 도시로 싣고 가버려 앙상한 자갈밭이 되어 버렸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남해섬을 바라보는 모래 사장이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들은 그곳을 '돌산 해수욕장'이라
불렀고 여름 한철에는 제법 수영객들로 붐볐다. 그 모래 사장은 결코 나에게
아름다운 회억만을 남긴 곳은 아니지만 밀물에 촉촉히 젖어 오는 물기마냥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6,25사변이 났다. 그해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아침
동이 틀 무렵 어머니께서 빨리 일어나라고 깨우셨다. 고개 너머 모래밭에 많은
시체가 밀려 왔다는데 가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덜 깬 잠을 쫓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해변을 향해 뛰었다. 모래 사장에는
많은 시체가 잔잔한 파도에 밀려와 반쯤 바닷물에 잠긴 채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시체들은 모두가 두꺼운 밧줄로 양 어깨와 팔이 묶여 있었다. 어머니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모래톱을 핥고 있는 시신의 얼굴들을 쳐들어 보시는
것이었다. 이상한 점은 여자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하늘을 향해 있는데 남자들의
얼굴은 모두가 밑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제법 높이 솟아
햇볕이 따가와질 무렵까지 어머님은 정신없이 시체들을 뒤적거리다 모래 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마셨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곤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시체들, 햇살에 비친 은빛 파도에 씻긴 그 창백한 얼굴들, 한없이
바닷물을 머금은 그 터질 것 같은 살결, 그 넓은 바닷물 한번 힘껏 휘저어 보지
못하고 꽁꽁 묶인 손과 손, 나는 가슴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심정을 억누르기
위해 모래밭에 묻힌 돌멩이를 찾아 바다 가운데를 향해 수없이 돌팔매질을 했다.
어머님에게는 친오빠 한 분이 계셨으나 일찍 돌아가시고, 어렸을 때부터 이웃하며
같이 자란 육촌 오빠 한 분이 계셨단다. 그런데 그분은 6,25동란이 터지자 어느날
그 고장 파출소를 거쳐 Y시의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후 행방 불명이 되어 버렸다.
사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생사를 알 길이 없었고 떠도는 소문으로는 보도 연맹에
가입한 사람들과 같이 경비정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그리고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모래 사장에 밀려 온 시체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내가 사는 백초라는 마을에도 인민국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나는 험한 밤길을
걸어 50리가 넘는 큰댁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다.
낮에는 산이나 바다에 나가 피신을 하고 밤에는 토굴 같은 골방에 숨는 그런
생활을 무려 한 달 남짓 계속하였다.
그러다 9월 초 우리 마을에 있는 조선소에 파견 나와 있던 인민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 왔다.
돌아온 즉시 나는 잔서의 뜨거움을 달래려 모래 사장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모래 사장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다. 얼마 전에 밀물에 밀려 왔던 시체의
잔해도, 매년 여름이면 과일이나 빵을 팔기 위해 쳐놓은 광목 천막도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한여름의 모래 사장을 도시에서 온 수영객들에게 빼앗긴 분함을 달래기
위해 9월의 모래 사장을 누비고 다니던 그 벌거숭이 꼬마동이들조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어제의 일마저 깨끗이 잊은 듯 맑은 바닷물에 하얗게 씻긴 조가비이 흰빛과
흔들리는 물결에 하느적 거리는 돌파래의 진초록색만이 유독 선명했다.
잔잔한 해면에는 꽁치 떼들이 은빛을 발하며 뛰노는 데 먼 하늘의 흰구름이 눈에
잡힐 뿐, 그 친근했던 여름의 바닷물이 자꾸만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이제 그 많은 모래성을 쌓고 또 그 숱한 사연들을 쓰고 지웠던 모래밭이
자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내 동심의 하얀 바탕 위에 지울 수 없이 짙게
수놓아 졌던 그 얼굴 무늬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말끔히 지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985.1, <한국문학>)
브라질로 띄우는 편지
치선아, 너와 내가 만난 지도 벌써 35년이 지났구나. 해방이 되자 많은 동포가
귀국선을 타고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었지. 그때 너도 한국에 돌아와 내가
다니고 있던 S농림중학교에 편입을 했었지. 한국말이 서투른 너를 처음 대했을
때부터 나는 옛날부터 사귀었던 친구처럼 너에게 정이 갔었다.
나도 해방되기 전해에 모국에 와서 말 때문에 무척 어려움을 겪었단다. 수업
시간에는 일본말을 쓰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지껄였지만 쉬는 시간이나 하학을
하고 동네에 와선 같은 동족인데도 내 나라 말이 서투르다고 쪽발이라고 놀림을
당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나인지라 너에게 연민 같은 것이 싹텄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점점 친숙해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기차 통학을 하던 우리가
같이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기 시작하지 않았니. 그때를 너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매일 밤 많은 친구들이 찾아 왔었지.
나는 그들과 어울려 시간을 허송했지만 너는 일본판 삼성당 영화 콘사이스의
단어를 모조리 외어 버리겠다고 담요를 둘러쓰고 부처처럼 옴쭉달싹도 하지 않고
공부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그해 어느 날 영어 시간에 영어
선생님이 너에게 많은 영어 단어를 물어 보았는데 모두를 알아맞히자, "그럼
김치국은 무엇이냐"고 묻자 "김치국은 김치국이지요"라고 대답을 해 너의 별명이
김치국이 된 적도 있었지. 그리고 너는 토요일이면 꼭 고향인 보성군 조성이라는
곳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곤 했지. 갔다 돌아올 때는 쟁반만한 팥빵을 싸 가지고
와선 허기져 있는 나를 즐겁게 해주었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너와 나는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치려고 같이 K시로 가서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실력이 있는 너는 신체 검사에서 떨어지고 나만 필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그곳에 남았는데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더구나. 그 이튿날 나는 첫
시간인 국어 시험 시간에 퇴장을 당하고 말았지. 지금도 그때의 상황은
잊혀지지 않은 채 가끔 떠오른다. J의과대학 계단식 강의실이었어. 시험지를
나누어 주기에 펼쳐 보고 있는데 뒤에서 같은 반에서 공부한 K군이 내 이름을
부르기에 뒤돌아보았더니 멀찍이서 시험지를 나누어 주던 시험감독관이 내 쪽으로
오더니 시험지를 빼앗고는 퇴장을 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그곳을 나오고 말았지. 나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그곳을 나오고
말았지. 맑은 늦가을 하늘인데도 그렇게 온 세상이 어둡고 추울 수가 없었단다.
그 후 너는 해병대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학교를 졸업하자 입대를 하고 나는
양계를 한다고 한 일년 시골에서 보내다 폐허가 된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입학한 즉시 너를 찾아갔었지. 저심때쯤 문산역에 내려 서부전선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너의 부대를 찾아가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모른다. 검문 검색을
몇 번인가 당한 것 같고 조금 가면 있다는 부대는 날이 저물어서야 찾았지.
배가 하도 고파 너의 연락사병이 갖다 주는 밥을 먹고서야 정신이 들어 너와 같이
벙커 속에서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그때 일 중에
기억나는 것은 사병들이 너에게 발 닦을 물도 떠다 주고 야식도 갖다 주면서 아주
어렵게 대하는 것을 보니 네가 군기를 잡기 위해 너무 엄하게 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또 너와 같이 근무하는 부대의 미군 장교 한 사람이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그에게 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외국어에 대한
열의가 역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 다음날 내가 그곳을 떠날 때
너는 레이션 박스에 들어 있는 많은 선물을 나에게 싸 주었지.
그런 2,3년 후 너는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로 전속을 와서 나하고는
자주 만났고, 만날 때마다 넌 서울 역전에 있는 한국회관인가 하는 곳에서 나에게
저녁을 사주었는데 그때 먹은 돈까스의 맛은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구나. 그리고
어느 해인가 등록금 마감날짜는 되었는데 돈이 없어 등록을 못 하고 있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는 나를 불러 사령부 장교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으며 내 손에다
돈을 꼭 쥐여 주던 일을 너는 벌써 잊었을 것이다.
선아, 그때 너도 야간 대학을 다니느라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인데…
그 무렵쯤 넌 군사교육을 받으러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브라질 친구를
알게 되어 브라질어 공부를 하고 돌아왔었지. 그때 내가 출판사를 주선하여
네가 쓴 <기초 브라질어 입문>이란 책을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했었는데 책이
나오던 날 어찌나 기뻤던지 술을 실컷 마시고는 너에게 꽤나 주정을 했던 것 같다.
네가 제대를 하고 너의 가족과 같이 브라질로 이민을 떠날 때 나는 너를 무척이나
원망했었다. 조국을 버리고 너만 안전하게 잘살기 위해 떠나느냐고. 너는
나에게 당시의 혼란한 정국, 불안한 지정학적 위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경제 등을 들면서 나더러 같이 이민을 가자고 몇 번인가 졸랐었지. 그때
나는 네가 그곳의 아름다운 코파카바나 해변가에 앉아 고급 양주를 마신다 해도
고국에서 너와 내가 같이 다녔던 무교동과 광화문의 대폿집에서 마셨던 막걸리와
빈대떡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었지.
선아, 그 후 많은 한국 사람이 그곳으로 이민을 갔고 또 내 주변에 있던 다정한
친구들이 미국, 캐나다 등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가까운 2,3년 동안에는 친구들의
아들딸들이 공부를 한다고 한국을 하나 둘 떠나고 있다. 그들이 공부를 하고 난
다음 선진국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고국에 돌아와서 활용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어쩐지 세태가 그 기대에 어울려지고 있는 것 같지 않구나.
선아, 나는 쇄국주의자이거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고명하신 목사님이나
내 나라의 은덕으로 고관을 지냈던 사람들까지도 외화를 해외로 도피시키면서
조국 을 배신하는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더구나.
5개월 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내 큰아들이 일선으로 배치받은 지 달포가
지났는데 편지가 오지 않는 구나. 오늘쯤은 신임 소대장이 되어 근무에 바쁘다
보니 안부 편지가 늦어 죄송하다는 간단한 편지가 오겠지.
선이 자네가 30여 년 전 서부전선을 지켜 주었던 조국, 그 조국의 동부전선을
지금은 내 아들이 지켜 주고 있다네. 멀지 않아 세계의 체육 제전이 이 나라에서
열린다니 그때는 꼭 다녀가게. 이번에는 그 옛날 자네에게 신세졌던 부채의 몇
분의 일이라도 갚겠네. 그럼 이만 줄이겠네. 안녕. (1985.8, <동아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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