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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윤대녕 외 98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by Casey,Riley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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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윤대녕 외



    작품에 대하여  안규철
  책은 양면적인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물건이다. 책에는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있고, 보이는 앞면과 보이지 않는 뒷면이 있다. 안과 밖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흰 종이와 검은 잉크가 있고,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이 
있으며, 저자와 독자가 있다. 서로 상반되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이런 
요소들은 책이 닫혀져 있을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책은 상자와 같아서, 
책장이 펼쳐지기 전에 그것은 무뚝뚝한한 한 덩이 종이뭉치에 불고하다. 책을 
열면 이렇게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된다. 왼쪽과 오른쪽이, 안과 밖이, 저자와 
독자가 거기서 생겨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낯선 한 세계의 지평선이 
떠오른다. 마술사의 손바닥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작은 책갈피 속에서 세계 
하나가 온전한 윤곽을 드러낸다. 문학작품 앞에서는 늘 그것이 경이롭다. 
'현대문학상'의 상패를 겸한 작은 조각을 생각하다가 문득, 언어의 모래알들로 
이루어진 책의 지평선 위에서 두 개의 빈 의자가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98 제 4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윤대녕 빛의 걸음걸이 외
  현대문학

  차례
  수상작
  윤대녕 빛의 걸음걸이
  수상작가 자선작
  윤대녕 지나가는 자의 초상
  수상후보작
  고종석 서유기
  김병언 저 바람 속 어디엔가
  김영하 베를 가르다
  성석제 조동관 약전
  이윤기 사람의 성분
  이혜경 젖은 골짜기
  역대수상작가 최근작
  이제하 대산
  박완서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윤후명 소금 굽는 남자
  심사평
  김윤식 빛 속에 드러난 삶과 죽음의 현장성
  김화영 시간과 빛의 흐름
  박완서 빛의 갈피에 숨어 있는 어둠
  수상소감
  윤대녕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수상작
  빛의 걸음걸이
  윤대녕
  수상작가 자선작
  지나가는 자의 초상

  빛의 걸음걸이
  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단국대 불문과 졸업
  1990년'문학사상'신인상에 단편 '어머니의 숲'이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은 '은어낚시통신' '남쪽 계단을 보라'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곳'등.

  빛의 걸음걸이
  내가 열할 살 때니까 1972년 지어진 집이다. 집의 나이도 그새 만 스물다섯 
살이 된 셈이다. 대지 오십 평에 건평이 삼십 평인 작은 남향 집.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나 발해의 집터 발굴 현장 도면처럼 그리고 싶었는데 누가 그렇게 
봐주기나 할는지. 마루 공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각개 배치가 약간 
허술하더라도 전체 균형을 이루도록 그렸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질 때까지 빛이 어디서 어떤 각도로 지나가는지를 어느 방 
창문에서든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오염된 지구도 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색색깔로 아직 아름답듯 이 오래된 
집도 경비행기나 기구를 타고 보면 그렇듯 잘 차려놓은 밥상처럼 보일까? 
혹시라도 그래 보이면 좋을 텐데. 거기엔 이십오 년간 내 일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 가족이란 것도 하나의 소우주며 외로운 
행성에 속한다는 걸 이즘 와서 깨달았다.
  가계도를 보면 현재 부모(64세, 62세)가 있고 큰딸(38세)과 막내딸(33세)이 
있고 중간에 독자인 내(36세)가 있으니 모두 다섯 식구다. 아버지가 스물일곱  
어머니가 스물다섯에 첫애를 낳은 셈이다. 집을 지어 이사할 때 누나는 어여쁜 
사춘기의 중학생이었고 나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초등학교 
오학년이었으며 여동생은 흰 운동화만 세 켤레인 좀처럼 말이 없는 아이였다. 
그때 넌 이학년이었어.

  해바라기 방
  처음엔 방이 세 개인 집이었다. 그러다 십 년 전 누나가 결혼을 할 당시 
마당 한쪽에 약 육칠 평 정도의 문간방을 새로 들여 네 개가 되었다. 아무리 
예식장에서 식을 올린다고 해도 큰일을 치르다 보면 시골에서 올라온 집안 
어른들이 묶고 내려갈 방이 하나쯤 필요하다는 게 아버지의 오랜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큰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닥칠 터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집안 
대소사는 잦아지게 마련이니까.
  그 막사 같은 큰방이 지어짐으로 해서 우리 가족은 아쉽게도 하나 잃어버린 
게 있었다. 그 자리에 우리는 해마다 해바라기를 심었던 것이다. 그곳은 또한 
철조망 없는 닭장이기도 했다. 봄에 해바라기 밭에다 병아리들을 풀어놓으면 
가을에 저마다 장닭이 되어 굵은 대궁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 후 집안에 큰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시골에서 올라온 수염 흰 
사람들이 거기서 해바라기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다 누워서 
잠을 자고 갔다.
  어느 여름날 어머니가 대문 앞을 지나던 사진사를 불러 누나와 여동생과 
나를 일렬 횡대로 세워놓고 해바라기 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던가? 안 그래도 빛에 그을려 시커먼 데다 렌즈에 익숙지 않아 
저마다 찡그린 얼굴들을 하고 있어 우리는 마치 유엔 식량기구에서 각국에 
배포하기 위해 찍은 자료 사진처럼 나왔다. 게다가 나는 맨발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몇 시쯤였던가? 해바라기 대궁의 그림자가 이십 도쯤 일제히 서쪽으로 
쏠려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오전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거나 국경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진을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다락 사진첩 속에다 
소중히 보관했다. 비록 흑백이나마 거기엔 잃어버린 내 유년의 해바라기 밭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때 외롭게 렌즈를 투과해 들어간 빛이 우리 셋을 
필름에 음각해 놓았으므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인화를 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며칠 후 집으로 찾아온 사진사는 우리에게 필름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장 인화된 그 사진도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다락에 올라가 찾아보니 사진첩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누나 혹은 
여동생이 가져갔을까? 일부러 버리지만 않았다면 누군가의 사진첩에 아직 
꽂혀 있겠지.
  가끔 집에 내려와 새로 들인 방에 누워 있게 도면 나는 영락없이 그 누런 
사진 속에 맨발로 서 있는 꿈을 꾸곤 했다. 그 방은 아침볕이 그 중 먼저 
찾아드는 열대 온실 같아서 해바라기 꿈을 꾸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때 내 발등을 모로 밟고 종종 지나가던 병아리의 간지러운 발자국 몇 점. 아 
그리고 네 붉은 입술!
  집도 별수없이 나이를 먹는지 블록에다 슬레이트를 얹어놓은 허술한 건물은 
세월이 갈수록 눈에 띄게 허물어져갔다. 무엇이든 고장나거나 부서진 것은 못 
봐넘기는 성격의 아버지는 일요일만 되면 집 수리를 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리고 그동안 아마 다섯 번쯤? 페인트 통을 들고 올라가 지붕의 색을 
바꿔 칠했다. 하늘 색, 감색, 노란색, 주황색, 엷은 쑥색의 차례로. 하지만 
대문만큼은 줄곧 탁한 빨강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을 빨간 대문 집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간 대문 집의 해바라기 방.
  스물여섯 살 이후 그곳이 내게는 일 년에 그저 서너 번쯤 내려와 묵고 가는 
허름한 호텔 방이었다. 나는 부모형제와도 어쩔 수 없이 반쯤은 타인인 나이가 
돼버려 안방은 물론이고 동쪽 건넌방이거나 서쪽 건넌방에 있으면 몹시도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털어놓수 없는 비밀들이 
터무니없이 잔뜩 생겨 있었던 것이다.

  6월 7일 토요일 정오
  안방엔 오늘 아침 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누워 있고 동쪽 건넌방에는 
작년에 늦결혼을 한 여동생이 첫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기 위해 내려와 있다. 
서쪽 건넌방에는 올 2월에 이혼을 한 누나가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6월이건만 지금 안채의 방 세 개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참이다. 동쪽 방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여동생 때문이다. 뒤꼍에 설치돼 있는 보일러 선이 
안방과 양쪽 건넌방으로 연결돼 있어, 안방에 불을 넣으면 동쪽 방이나 서쪽 
방에 한꺼번에 불이 들이게 돼 있다. 각 방에 열을 차단할 잠금 장치가 따로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그리 지어놨으니 구들장을 다 들어내지 않는 
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나는 어젯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병원에 들렀다가 자정께 
집으로 왔다. 어머니에게 몸살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지난달에 외조모 상을 치르느라 무리한 탓이라 믿고 가까운 
보건소에서 주사를 맞고 돌아왔지만 발열이 계속되자 평소 협심증과 
위경련으로 고생하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회사 근처의 내과에 데리고 갔다. 
검사 결과 신장염이었으나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전 늑막염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가치 않겠다고 생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염증 치료만 끝내고 어머니는 한의원에 들러 엉뚱한 보약을 
지어 가지고 기어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병원에 있는 게 왜 그렇게 
힘들고 징그러운지 모르겠다며 어머니는 어젯밤 퀭한 눈으로 나를 붙잡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안 그래도 다음주 화요일이 어머니의 생신이어서 내일 앞당겨 차리기로 한 
아침상에 앉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내려와야 할 사정이었다. 하지만 몸져누워 
있는 이에게 무슨 생일상을 들이민단 말인가.
  누나는 부역하는 죄수처럼 동생의 산후조리와 어머니의 병 수발을 함께 
들고 있다.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방 네 개가 모두 찼지만 분위기는 
아무래도 어수선하다. 동생은 하필이면 이런 때 어머니가 아프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지만 시댁으로 갈 형편도 못 된다. 시어머니란 사람이 심한 
당뇨에 합병증까지 있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탓인지 아까부터 되려 된소리나 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마루엔 괴괴한 적막이 빈 항아리처럼 도사리고 앉았다 
사라지곤 한다. 어머니를 퇴원시키고 회사에 나간 아버지는 오후 3시쯤에나 
돌아올 터이다. 
  나는 지금 해바라기 방의 창문을  통해 거의 수직으로 화단에 내리붓고 
있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다. 화단엔 철 늦은 민들레 서너 송이와 석류, 
대추나무와 패랭이와 용담과 작약과 달리아와 맥문동과 양귀비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자라고 있다. 하단 한가운데엔 장독에 올라다닐 수 있도록 
디딤돌이 몇 개 박혀 있다. 여름날에 선혈처럼 낭자하게 피어나는 양귀비는 
어머니가 남몰래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식물이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만 되면 
어머니는 대문 빗장을 굳게 닫아걸고 산다. 
  이윽고 정오가 되자 화단엔 검불만한 그림자만 몇 올 남고 크레파스를 마구 
분질러놓은 것처럼 빛들이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킨다. 일순 귀에서 낮의 
소란이 멎는다.

  연탄
  어머니가 다시금 된소리를 낸 건 누나가 안방으로 죽그릇을 들고 들어간 
직후였다. 아니 된소리가 아니라 그건 차라리 상소리라고 해야 옳았다. 이 
육실헌 년이! 하고 돌연 마루에 튀어나온 소리를 듣고 나는 화닥 창 밖으로 
목을 빼고 귀를 곧추세웠다. 전에는 결코 들어본 일이 없는 거친 소리였던 
것이다. 매양 깔끔하고 단정한 말만 골라 쓰는 양반으로 어머니는 동네에 
소문이 나 있었다. 도로 죽그릇을 들고 나오는 누나의 눈자위엔 실고추빛 핏발 
몇 올이 금세 선연했다. 
  "그렇게 되게 쑤면 목구녕으로 넘어가 이년아!"
  동쪽 방의 누이도 부옇게 뜬 얼굴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갸웃이 마루를 
내다보다 슬그머니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가스레인지에다 
솥을 올려놓고 있는 누나의 등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편찮아서 그러려니 하고 속에 담아두지 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누나가 시큼한 소리로 되받았다. 
  "하긴 소박맞은 딸년까지 내려와 있으니 오죽 속이 끓겠어."
  "..."
  "어려서부터 엄만 나한테만 유독 저러셨어. 식구들이 모르게 감쪽같이 
말이야."
  "그건 무슨 소리야?"
  부엌은 천장이 낮고(안방 벽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다락이다) 비좁아서 
가스레인지 하나만 켜도 목에서 땀이 났다. 누나의 등은 벌써 축축이 젖어 
있었다. 
  "우리 여기로 이사오기 전 사글세 방에 살던 때 기억나?"
  무척 오래된 일이다. 적어도 이십오 년 전의 얘기다. 
  "하루는 엄마가 시장에 간다고 나한테 국수를 삶으라고 시키더라. 근데 
국수라는 게 그렇잖아. 아무리 부엌 살림으로 오래 한 사람이라도 삶고 나면 
딱 맞지가 않고 항상 조금 남거든. 그래서 다섯 사람분을 삶는다고  삶았는데  
이게 양동이로 반이 돼버린 거야. 남자 열이 먹어도 될 만큼 불어난 거지. 
기가 질려서 그만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떨고 있는데 엄마가 왔어. 엄마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부엌 문간에 한참을 서 계셨지. 하지만 웬일인지 혼내지는 
않는 거야"
  나도 지금까지 어머니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나이 먹어왔다. 적어도 스물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날 밤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어머니가 나를 깨워 
부엌으로 데리고 가더니 양동이에 남아 있는 국수를 먹으라고 시키는 거야. 
우리 집엔 개도 없고 돼지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엄마가 뒤에 서 있는데 그럼 어떡해. 양동이째로 퉁퉁 불은 
국수를 손으로 다 건져 먹었지. 기억나? 그땐 또 부엌에 맨땅이었잖니. 결국 
먹은 걸 다 토하고 들어와 울면서 잠이 들었어. 그러고 나니 지금까지 난 
국수를 못 먹어."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물론 뜻은 다르지만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가끔 
어머니의 손에 깨워져 새벽에 밖으로 불려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얼굴을 씻게 하고 북어 대가리와 초가 꽂혀 있는 떡시루를 
장독대 앞에 갖다놓고는 절을 시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졸음에 겨워 되는 
대로 마당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나 밖에는 모르고 있는 사실일 게다.
  누나가 맏딸이었던 때문일까. 명문 여고를 나와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가세가 
기울어 이학년도 다 마치지 못하고 누나는 자퇴서를 낸 다음 공무원 시험을 
봐서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또 졸업할 때까지 묵묵히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면서도 싫다는 소리 한마디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어머니는 왜 고약한 
시어머니나 편모처럼 대했던 것일까. 그것도 다른 식구들이 모르게 말이다.
  되쑤어진 죽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마루에 차려진 밥상에 막 
둘러앉았을 때 삐꺽 하고 대문 소리가 나더니 연탄집 박씨 아저씨가 리어카를 
밀고 들어왔다.
  "아직도 우리 집에 연탄 때는 방 있어?"
  숟가락을 들다 말고 나는 누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원래부터 연탄 보일러잖니. 새로 들인 문간방만 기름 때지."
  그는 두 장을 겹쳐들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집게를 양손에 들고 한 번에 네 
장씩 뒤꼍 처마 밑으로 연탄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빛을 빨아들인 
연탄은 무두질을 한 가족처럼 번들거렸다. 유독이나 야윈 몸매에 머리까지 흰 
데다 그는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엔 포도밭을 여러 개 
부리던 사람이었다.
  "형편이 어떻길래 저 나이까지 연탄 배달을 하지?"
  그가 뒤꼍으로 돌아간 사이 누나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원체 부자였으니까 형편이야 지금도 웬만해."
  "그런데?"
  "우리가 중학교 땐가 동네 이발소 여자하고 바람이 났었잖니. 그 때 아줌마 
몰래 포도밭을 팔아 그 여자한테 집까지 사줬단 얘기가 있었어. 나중에 그 
여잔 집을 되팔아 면데로 도망갔지."
  그 때문에 한동안 동네가 시끌벅적했었다. 그가 연탄을 가지러 마당으로 
나올 때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그때부터 아줌마가 아저씨한테 연탄 배달을 시키고 있는 거야."
  "이십 년 동안이나 말이야?"
  그렇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저 일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겠냐고 
하며 누나는 시커먼 연탄 수레로 눈길을 던졌다. 조금 서둘러 수저를 밥상에 
내려놓고 나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불콰한 얼굴에 술내를 풍기며 뒤꼍에서 
걸어나온 그는 대뜸 집게를 휘휘 내두르며 연탄으로 내 손이 가는 것을 
막았다.
  "냅둬. 껌댕이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안응게."
  리어카가 대문을 빠져나가고 난 다음 나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연탄 가루를 
쓸어내고 누나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뒤꼍으로 돌아가 보았다. 
뒤꼍으로 돌아가는 담벼락 모서리엔 가마솥과 장작 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때 
햇빛은 부엌 하늘께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시멘트 담벼락에선 매운 열기가 
확확 반사되고 있었다. 바깥 창에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가슴을 벌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뒤란은 지붕 처마에서부터 담장까지 비받이 차양이 드리워져 있어 서늘했다. 
연탄은 집의 서쪽 끝 차양 밑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옆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담벼락에 바투 선 채 지붕을 모로 비껴 하늘로 뻗어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환갑을 넘기고부터는 내가 해마다 추석 대 내려와 감을 따곤 했다. 
지금은 절구대처럼 굵어 있지만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감나무는 겨우 
손가락만한 굵기였다. 어머니가 외조모 환갑 때 외가에 갔다가 캐온 것이었다. 
그 감나무 아래서 나는 어느 여름날에 엉거주춤 바지를 내리고 서서 첫 
수음을 했고 같은 날에 첫 담배를 피우며 담벼락에 기대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담배 이름이 은하수였던가 비둘기였던가 남대문였던가 아니면 
명승이었던가? 아마도 불국사 사진이 박혀 있는 명승이었던 것 같다. 아무려나 
나는 반쯤 피운 담배 꽁초를 버릴 데가 없어 제대로 끄지도 않은 채 그만 
옆에 쌓여 있는 연탄 구명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불이 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맨발로 나가 보니 
뒤꼍 처마 밑에 첩첩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연탄이 잉걸불처럼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감나무 푸른 잎새를 말리며 옆집으로 옮겨붙고 
잠에서 깨어난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물동이를 들고 달려오는 소리가 담 
밖에서 요란했다.
  그러고 나서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한 가닥씩 징그런 털이 솟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눈비 내리는 밤이 오면 자정이 넘은 
시각에 슬그머니 뒤꼍으로 돌아가 여전히 연탄 더미 옆에 서서 수음을 하거나 
감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하다가 맥없이 흐느껴 울기도 
했다.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내가 몹시 서글펐던 것이다.

  귀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오후의 농익은 햇살이 장독으로 몰려가며 구름 한 
자락이 마당과 화단 한쪽을 덮고 있을 때였다. 세 송이? 네 송이쯤 벌어져 
있는 석류의 붉은 주둥이에서 염염한 빛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을 해바라기 
방에서  훔쳐보고 있을 때 대문을 들어선 아버지는 대뜸 연탄 들였냐?라며 
성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일껏 쓸어냈는데도 마당에 연탄 가루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통에 마루에 나와 앉아 있던 여동생의 품에서 갓난애가 
자지러지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어머니가 깨어난 것도 그때였다.
  "저 냥반이 요즘 걸핏하면 왜 소리를 질러댄댜?"
  어머니가 칼칼한 소리로 핀잔인지 푸념인지를 늘어놓았으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않고 수도에서 손을 씻은 다음 불쑥 내 방으로 건너왔다. 나는 얼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기관지도 안 좋다면서 그가짓 담배를 여태 못 끊고 있남?"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여전 성이 안 풀린 목소리였다.
  "그래 넌 언제 올라갈겨?"
  "내일 오후 차를 탈 생각예요.?
  "뭐라고?"
  "내일 간다구요!"
  얼결에 목줄을 세우며 나는 뒷짐을 지고 문간에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를 
히뜩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키며 
잘 안들려! 하고 또 성난 소리를 했다. 협심증에 위경련말고도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중이염을 앓고 있었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런 소린 없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된 성싶었다. 몇 년 전인가 귀에서 피고름이 심하게 나와 
병원에 다녀온 후 그는 평생 즐기던 술담배를 단 하루 만에 끊어버렸다. 
한데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 귀뿐인감? 이젠 눈도 먼덴 아예 못 봐!"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그가 손님인 듯 방으로 들어왔다.
  "되게 어수선하지?"
  집안 분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두 억지를 부려 일단 집으로 데려오긴 했다만 곧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거 같어."
  "..."
  "니 에미 말이여. 봄부터 승질만 느는 게 어째 심상찮어."
  "..."
  "게다가 큰년 소박맞아 내려와 있지. 넌 또 변변찮게 어디 한군데 주저앉아 
있질 못하지. 작은년은 귀신도 속을 모를 테니 말한 건덕지도 없고."
  하지만 그 완강한 자기 속엔 또 얼마나 괴로운 비밀들이 많을텐가.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안방에서 마루로 또 어머니의 목소리가 냅다 
튀어나왔다.
  "누가 가서 저녁 참까지 연탄 좀 빼놓거라! 누굴 삶아죽일 작정이면 
몰라두."
  서쪽 방에서 나온 누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루에 서있는 꼴이 
안봐도 눈에 선했다. 헛헛, 마른기침을 하며 아버지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못 끊겠으면 은단이라도 써봐."
  아직도 은단을 파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담장에 올라앉아 장독을 
기웃거리고 있는 도둑고양이를 쫓아낼 양으로 손에 쥐고 있던 성냥갑을 
집어던졌다. 성냥갑은 화단과 장독대 사이에 날아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 눈치 
빠른 동물은 냐옹! 소리를 내며 곧 담 너머로 사라졌다. 뒤미처 아비지가 
뒤란에서 파란 불이 이글대는 연탄을 빼내 대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동쪽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여동생에게 해바락 방으로 옮기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낮부터 안방에 불을 넣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녀는 화닥 젖을 가리고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쪽 방은 여동생이 출가해 집을 떠날 때까지 줄곧 혼자 쓰던 방이었다. 
벽에는 그녀가 중학교 때 걸어놓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복제 
그림이 오랜 세월 문장처럼 걸려 있었다. 여동생은 집을 떠날 때까지 서쪽 
방이나 해바라기 방에는 좀체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누에고치처럼 늘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저 
모네의 그림 속에 안개 서린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속에.
  여동생은 집이라는 곳을 그저 잠깐 머물러 있다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잠깐은 무려 삼십이 년의 긴 세월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중학교 미술선생이었다. 어머니의 친구 중매로 우기던 끝에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동생은 꼭이 입양되는 아이처럼 결혼에 응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하루만 더 있다 내일 아침에 올라갈 거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한국전력공사에 다니는 남편과 청주에 살고 있었다. 더 있으란 말을 할 처지도 
못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마루로 나왔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옆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연탄을 버리고 들어온 아버지가 마루에 
걸터앉자 어머니가 등을 좀 비켜 앉으라고 또 지청구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치매처럼 뜻 모를 소리를 웅얼웅얼 내뱉기 시작한 건 멀리서 웬 낮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였다.
  "석류꽃이 네 개 폈고 패랭인 곧 진다. 달리아 양귀비 피면 장독 뚜껑을 
열어야 하는데 여름내 또 얼마나 귀찮게 비가 올는지."
  "..."
  "그때 돌쩌귀의 개미들은 비를 맞고 다 어디로 갔지?"
  "..."
  "킬킬, 채송화 속에 숨었네. 난 부처손 밑에 앉아 분홍바늘꽃 보고 있지."
  화단은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화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어, 저기 내 귀가 지나가네."
  그 말에 언뜻 놀라 화단을 쏘아보니 바람 한 자락이 슬쩍 화단머리를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 원 참, 꽃들이 귀가 멍멍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이 기묘한 화답은 조금 더 계속됐다.
  "신발 신고 가우?"
  "맨발에 짚신을 머리에 였는걸."
  "고봐요. 큰애 낳고 안 사준 신발이니 여태 맨발이지. 요새 누가 짚신 
신어요, 그냥 들고 다니다 팔 떨어져서 머리에 였지."
  "그럼 당신도 방금 저기 지나갔나?"
  "내가 먼저 갔더이다."
  "하면 어디 좋은 데로 갔나?"
  "조금 더 여기 등뒤에 누워 있다우."

  처녀 할머니
  그때 누군가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다락방의 묵은 사진첩 속에서 웬 여인이 하나 걸어나오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아랫마을에서 두부집을 하던 언청이 노파였다. 
윗입술이 쭉 찢어져 코까지 올라붙은 데다 한쪽 눈까지 멀어 평생 시집을 못 
가고 있는 여자였다. 아무도 이름과 나이를 몰라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두부집 
노파, 언청이, 처녀 할머니로 불렀다. 여간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어서 벌써 
오래 전에 그녀는 두부집을 그만두고 텃밭에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 겨울을 
나거나 봄여름엔 나물 따위를 뜯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쌀과 바꿔 먹었다.
  그녀는 까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마당 한중간에 우두커니 서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명저고리에다 통치마 그리고 매양 신고 다니던 
검은 고무신 차림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년 전의 일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완전히 잊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방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발작적으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너 이 년 왜 
벌써 왔어! 하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을 때 그리고 아까 옆집으로 사라졌던 
고양이가 다시 담장 위에 나타났다. 고함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처녀 할머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담에 올라와 있는 고양이한테 눈을 돌렸다. 석연찮은 
느낌이 등짝에 몰려와 얼핏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귀신을 본 듯 검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처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그네에게 새로 밥을 해먹이고 뒤주의 쌀까지 퍼줘 보내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웬 구박에 상소리일까?
  "미란아! 쌀 한 됫박 퍼서 빨리 저년 내쫓아 버려!"
  부엌에서 급히 노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나와 마루에 있던 뒤주 뚜껑을 
여는 누나의 손은 보기 흉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얼결에 내 눈과 마주친 
아버지의 눈에도 분명 불길한 기운이 한꺼풀 덮여 있었다. 깔깔한 공기의 
버성김 속에서 나는 무얼 하려는지 화단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처녀 
할머니의 등으로 눈을 돌렸다. 되는 대로 슬리퍼를 꿰신고 마당으로 내려간 
누나가 여기 있어요, 하고 바가지를 내미는데도 그녀는 들은 숭 만 숭이었다.
  "저년이 뭘 하려는지 다 알어! 뭘 해, 빨리 내쫓고 마당에 소금 뿌리지 
않고!"
  처녀 할머니가 석류나무 밑의 양귀비 모가지 하나를 똑! 부러뜨려 들고 
안방을 슬쩍 흘겨본 것은 화단에 쏟아지고 있던 빛이 슬그머니 장독으로 
올라붙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숫제 오갈이 든 것처럼 뒤틀려 
있었다.
  "접땐 아무 소리 없었잖어."
  담장의 고양이도 꼼짝하지 않고 처녀 할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나더러 그새 가라고?"
  어머니가 거듭 내쏘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암만해도 대꾸가 없었다. 그러더니 
누나가 엉거주춤 내밀고 있는 바가지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다가 오늘밤 니 
에미 입에나 너줘, 하고는 돌아서 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그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다. 양귀비 모가지가 
떨어지던 순간에 반사적으로 마당으로 내려섰던 아버지도 그 소리는 미처 못 
알아들은 성싶었다. 누나가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도 뭘 어쩌지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양이가 담에서 사라지고 나서 뒤에서 
안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류나무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서서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양귀비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던 아버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해바라기 방으로 
들어와 하오의 나른한 빛이 장독대를 적시며 뱀처럼 꾸물꾸물 담을 타넘어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얼핏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낯선 흐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가.
  누나가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 아버지는 뒤꼍에서 부채를 흔들며 
연탄을 피우고 있었고 여동생은 동쪽 방에서 문을 닫고 여전히 혼자만 
조용했다. 그리고 식구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아 있는 동안 서서히 마당의 빛이 
걷히고  이불보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젓가락을 든 손으로 아버지가 마루 등을 켰다.
  상을 물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고 낫 나는 마루에 앉아 있는 아버지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해바라기 방에서 가만히 엿듣고 있었다.
  고양이 담 넘어오고
  마당엔 검은 보따리
  그리고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양귀비 떨어지니
  마루엔 연탄 냄새

  피와 두부
  하루 일을 끝낸 누나가 내 방으로 온 건 동쪽 방의 아기가 잠투정을 하늘 
끈덕지게 제 어미를 보채고 있을 때였다. 누나는 사 개월 전에 이혼을 했고 
아이 둘은 전남편이 맡아 키우고 있었다. 수입 양주 유통업을 하고 있는 그는 
곧 재혼할 거라고 했다. 아직 젊은 나이이므로 누나도 누군가를 만나야 할 
터이었다.
  "낼모레면 마흔인데 젊다고 할 수 있니? 그냥 엄마 아버지 수발이나 들며 
살래."
  "아이들 보고 싶지 않아?"
  큰애는 초등학교 사학년 딸애고 작은애는 이학년 아들애다. 가슴에 깊이 
묻고 아예 잊으려 한다고 누나는 말했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휴일의 공원에서 웬 낯 모르는 사람이 쥐어주고 간 고무풍선을 얼결에 
받아들고 무려 십 년이나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누나는 
지나온 세월을 단순하게 요약했다. 한데 공원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어디선가 
불쑥 주인이 나타나 풍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녀의 눈엔 다시금 핏발이 도져 올라와 있었다.
  "작년 봄에 나 무척 힘들었어."
  작년 철쭉꽃이 필 즈음에 누나는 많은 피를 토했다고 했다.
  "철쭉꽃 필 때 피?"
  나는 담배를 비벼 그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동쪽 방 갓난아기의 
울음도 문득 그쳐 있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뭔가 자꾸 목울대로 올라와. 그냥 속이 안 좋은 
탓이려니 하고 몇 번이나 도로 삼켰지. 근데 입에서 이상한 비린내가 나는 
거야. 그러더니 곧 울컥 하고 끈적한 게 마구 입에서 쏟아져 나오더라. 불을 
켜고 보니 요며 이불에 핏덩어리가 그야말로 낭자한 거야."
  "!..."
  "그걸 하필 남편이 봤어. 그러더니 대뜸 당신 폐병쟁이야? 하며 기겁을 하고 
돌아앉더라."
  폐병.
  "병원에 가서 찍어보니 허파에 동전만한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더라. 
집으로 돌아와 날두부를 얼마나 먹었는지 몰라. 근데 두부를 먹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니."
  눈물이야 날수도 있겠지만 두부라니. 
  "두부처럼 깨끗한 음식이 없잖니 왜."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병에 두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려서 우리는 
처녀 할머니가 만든 두부를 참 많이도 먹었었다. 이른 아침마다 그녀가 
바가지에 담아 한 모 씩 들고 오던 그 부드럽고 따뜻한 두부.
  그래. 인생이란 어쩌면 한갓 고무풍선과 두부의 추억 같은 것이리라. 
  "그러고 나서 아침 공복에 알약을 일곱 알씩 일 년이나 먹었어. 저녁엔 계속 
두부를 한 모씩 먹고 말이야."
  "..."
  "평소에도 그리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어느 날 불쑥 남편이 이혼을 
하자는데 막상 왜냐고 묻기가 싫대. 그냥 맥이 빠지더라. 막상 울음이 나온 건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내려오는 기찻간에서였어. 근데 어릴 때 불렀던 
'오빠생각'이란 동여가 왜 그렇게 생각나니. 비다안 구우두 사가지고 오오신 
다아더니, 하는 노래 말이야. 너도 알지?"
  알다뿐인가. 초등학교 몇 학년 때던가. 셋방 쪽마루에 앉아 처마 사이로 
붉은 노을을 올려다보며 함께 부르기도 했잖은가 왜.
  "넌 아는지 몰라도 엄마도 한때 폐병을 앓았어. 아마 네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일 거야. 아버지가 밤마다 엄마 궁둥이에다가 주사를 놓아줘서 
겨우 나았지."
  두 살 차이인데 누나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폐병을 앓았다는 사실도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만 늘 모질게 날 대했지만 이상하게 원망을 해본 적은 없어. 정말 
이상하지? 근데 요즘 와서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애."
  거기에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긴 이유가 있겠지.
  "엄마한테는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였던 거야. 살기가 좀 어려웠니. 그래서 
속이 상할 때면 날 가지고 괜히 구박하고 그랬던 거야."
  어머니가 죽고 나면 이 사람이 내 마음속 어머니가 되리라. 따뜻한 두부 
같은 사람.
  "넌 앞으로 어떡할 거니?"
  "뭘?"
  "언제까지 그렇게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살 거야. 적당한 사람 
있으면 그만 살림 차려. 너도 이젠 서른여섯이잖아."
  적당한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겐 없다. 하지만 그리운 사람이 하나쿠다에 
있기는 하다. 일주일 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장래의 내 어머니에게 그곳에 그리운 
이가 있다고 고백했다. 
  "쿠타가 어디야?"
  발리에 있는 관광 해변이다. 올 1월에 나는 십이 일 간 발리에 가 있었다. 
서울은 너무 추웠으므로 그냥 따뜻한 곳에 가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인도네시아 여자란 말이야?"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마주보았다. 그렇다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아연한 빛으로 변했다. 
  "그럼 이름은 뭐고 몇 살이니?"
  그럼이라니.
  "수잔이란 영어 이름을 쓰고 있어서 발리 이름은 몰라. 나이는 스물둘."   
  "너무 어리구나. 그래... 그럼, 그 여자와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던 거야?"
  누나는 쓸데없이 진지해지고 있었다. 괜한 얘기를 했나보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지."
  스물여섯 살 이후 내게는 집이 늘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었다. 
  "그 약속 지킬 거야?"
  "그리우니까 아마 저절로 지키겠지?"
  이번에 가면 발리 이름부터 알아놓으리라. 누나는 그새 뭔가를 체념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여자들은 굉장히 체념이 빠르다. 
  "뭐 하는 여자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여고 나와 호텔 식당에서 일해."
  "호텔 이름은?" 
  별걸 다 묻는다. 
  "발리 서머 호텔."
  발리 서머 호텔. 이라고 우물우물 되받으며 누나는 사뭇 미덥잖고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넌 나이를 먹어도 왜 그렇게 꿈처럼 사니."
  내게는 꿈이 생시오. 생시가 곧 또 꿈이다. 난들 어쩌겠는가. 어쨌든 그리운 
이가 지금 쿠타에 있다는 것이다. 
  쿠타의 발리 서머 호텔 식당에서 도미구이를 먹다가 나는 그녀와 멀리서 
눈이 맞았다. 샤롱(발리 치마)이 잘 어울리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키가 작고 
귀여운 여자였다. 떠나오기 전 나는 그녀에게 졸탄 코다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가 들어 있는 CD와 플레이어을 주고 왔다. 
  돌아와서 가끔 꿈을 꾸곤 한다. 그녀와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빈땅이란 발리 
맥주를 마시며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를 듣는 꿈을. 
  그때 안방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누나가 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며 그녀가 말했다. 
  "엄마한테 그 여자 얘기 했어?"
  어찌 그런 얘길 하겠는가.
  "혹시 상처라도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 너희 둘 다 말이야."
  상처. 어차피 모든 그리움은 상처의 원인이다. 나중에 상처로 변해 그리웠던 
만큼 가슴에 남게 된다. 그걸 떠안고 누구나 살아가게 된다. 
  안방에 갔던 누나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약 오 분 후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올 생각을 않고 문밖에서 암만해도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왜?
  "갑자기 뒤꼍에 맷돌이 있나 보고 오래. 그걸 쓰지 않은 지가 벌써 언젠데."
  "...있긴 있어?"
  "있어"
  "그럼 됐잖아. 이제 누나도 그만 들어가 쉬어.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뭐? 하고 그녀가 외등 불빛에 일긋거리며 물어왔다. 
  "혹시 우리 어렸을 때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 가지고 있어?"
  유감스럽게도 누나는 그 일만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나가 서쪽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이 문득 고요해졌다. 
  
  발리 서머 호텔
  그녀는 끈 달린 하얀 신을 신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내려갈 때마다 
그녀가 내게로 왔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에 나는 그녀가 도미구이를 식탁에 
갖다놓은 사이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밤새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노라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식탁 밑의 하얀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그 말에 여자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쟁반을 들고 왔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엔 지금 눈이 많이 온다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눈, 
이라고 가까스로 되받았다. 당신 신발처럼 하얀 눈, 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멀리서 나를 바라보았다. 
  발리 서머 호텔에서 닷새째 머물던 날 아침에 나는 과일과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온 그녀에게 저녁에 와텔(사설 전화국)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야외 
카페가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그녀와 밤새 빈땅을 마시며 그저 
아무 얘기나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먼데서 또 나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 밤 그녀가 내방으로 왔다. 와서 서먹하게 한 시간이나 코다이를 
되풀이해서 듣다가 서로 입이 마를 즈음 슬그머니 옷을 벗었다. 그녀는 
아기처럼 내 품에 안겨들며 서툰 영어로 말했다.
  "눈 보고 싶어요."
  "그래, 눈이로군."
  웃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대꾸했다. 하늘에서 흰 신발들이 마구마구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어로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너를 사랑했어. 이 말없는 애야."
  뜻을 알리 없을  텐데 그녀는 묵묵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는 지금도 모네의 붓질 속에 숨어 있겠지. 그 기묘한 빛의 그림자 속에. 
이 벙어리 여자야."
  그녀는 가슴과 엉덩이의 선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창 
밖에선 외등 불빛 속에서 야자수 잎이 쉼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니 야자수 잎이 저마다 커다란 물고기로 변해 이마위로 천천히 떠가는 
것이었다. 
  다음날엔 정오에 그녀가 왔다. 그날도 그녀는 내게 눈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나는 그곳을 떠났다. 흰 신발과 코다이를 남겨두고. 다시 
돌아오리란 약속을 던져두고.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울루와트에 가서 사흘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날 뜻밖에 그녀가 덴파사 
우랄라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내가 눈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며 불현 
눈시울을 붉히고 말했다. 

  신발
  자정이 지나 잠자리에 들려고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아버지가 밖으로 
따라나왔다. 아니, 나를 따라나왔던 게 아니다. 오줌을 누고 도로 방으로 
들어가는데 아버지가 마루 앞에서 손에 무얼 들고 시커멓게 서 있었다. 다가가 
보니 어머니의 신발이었다. 감히 왜냐고 묻지를 못하고 나는 아버지의 얼굴만 
그저 뜨악하게 마주보고 있었다. 
  "어째 이걸 가지고 들어오란다. "
  아버지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발을 든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집 안의 모든 불이 다 꺼졌다.
 
  밤의 걸음걸이
  얘야, 오늘 난 우리 집의 평면도를 그려놨어. 언젠가는 햇빛을 받아 누렇게 
색이 바래고 두루마리처럼 안으로 말려버릴 테지. 우리들 인해지겠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왠지 너만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 해바라기 밭에서 
찍은 사진도 네가 가지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어느 여름날 우리는 해바라기 
푸른 대궁 사이에 숨어 겁 없이 입을 맞췄지. 너는 그 큰 눈으로 일생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혹은 내가 너를. 
  며칠 후 난 또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아주 먼 열대의 섬이지. 그래. 열대. 
거기서 내 서른여섯 살에 다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신발도 없이 밖에서 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바라기 지붕을 
밟고지나 마당과 화단을 밟고지나 장독대를 밟고지나 상기는 ㅇ르 타넘어 
가고 있다. 
  밤의 발자국 소리가 도로 돌아와. 내 머리맡에 바투 와서 어깨를 혼든 건 
아마 새벽3시나 4시쯤이 됐을 시각이었다. 그녀와 열대 안락의자에 앉아 
코다이를 듣다가 한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밤이 내 귀에다 대고 하는 소리를 캄캄히 엿듣고 있었다. 
  "갔어!"
  조용히 말해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외쳐 말하고 있었다. 이토록 고요한 
밤에도 귀가 어두운가. 일어나서 내가 불을 켜라고 하자 그가 내 손목을  
차갑게 거머쥐었다. 
  "냅두고 나와!"
  나는 그에게 손목이 붙들려 방 밖으로 나갔다. 마루로 막 올라서려다 말고 
그가 해바라기 방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네 에미가 갔다고!"
  그제야 나는 안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퍼뜩 깨달았다. 서쪽방과 동쪽 
방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고 
안방으로 들어섰을 때 맨 먼저 내눈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흰 고무신이었다. 


  지나가는 자의 초상
  서른다섯 살인 지금의 나는 일 년에 단 몇 시간도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그 괴물 상자에 완전히 홀려 있던 아이였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었지.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만 소리를 죽여놓고 말이야. 나는 초등학교 때 이미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어.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동물의 왕국'이었지. 물론 그때는 
흑백 텔레비전이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하얗고 까만 빛이 아니었어. 파란 분필 가루 같은 미묘한 색깔이었지. 오후 
다섯시에 시작하는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으면 어느결에 문틈으로 슬슬 
어둠이 스며들어와 방안이 온통 물 속처럼 변해버리곤 했지. 그래서였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곧잘 잠이 들곤 했어. 화면 속에서 
왔다갔다하는 야생 동물이나 물고기들을 보고 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서는 
거기서 메마른 꿈을 꾸곤 했던 거야. 무슨 꿈이었냐구?
  텔레비전 수상기 속에 있던 동물들이 슬그머니 방안으로 걸어나와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곤 하는 꿈이었어. 콧김을 쉭쉭 
내뿜기도 하고 털이 북슬북슬한 머리를 내 잠든 얼굴에 부벼대기도 하고 혹은 
방귀를 뀌기도 하면서 말이야. 아, 그 꿈은 얼마나 황홀했던지. 
  깨고 나면 매양 캄캄한 밤이었어. 코뿔소, 호랑이, 표범, 코끼리, 악어, 
원숭이, 북극곰, 고래, 상어, 나비... 들은 도로 브라운관 속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어디 다른 곳으로 갔는지 감쪽같이 없어지고 어둑한 방 한구석에서 
텔레비전만이 해저의 탐조등처럼 외롭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어. 그들은 내가 
잠든 동안에만 그렇게 찾아왔다가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곤 
했던 거야. 그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누가 얘기해주련?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었어. 시력이 굉장히 
나빠져 어머니가 내 방에서 그놈의 전기 상자를 치워버렸거든. 사실 그때부턴 
공부라는 것도 해야만 했지. 하지만 삼 년이란 기나긴 시간을 견뎌 마침내 
교복에서 해방됐을 때 텔레비전은 다시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어. 난 이미 
어렸을 적의 내가 아니었던 거야. 어쨌든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동물의 
왕국'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없었던 거지. 그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독한 텔레비전 중독자였다는 사실조차 
이제는 실감이 나지 않아. 
  
  1
  1988년? 아니면 1989년?
  과거의 흔적들을 뒤적이다 보면 내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기억의 정확한 
생성 연도를 산출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기 따위의 연대기를 
기록해두는 인간은 아니며 더욱이 삶의 사실에 관계된 것들에 그닥 집착하며 
살아가는 타입의 사람도 아니다. 사실이란 문득 또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어서 사소한 기억들은 때로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공간은 무너져 있기가 일쑤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란 내게 있어선 
대개가 그렇게 새벽녘의 창에 형체 없이 어른거리는 물상처럼 보일 뿐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물론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앞으로 생길 일도 
내겐 모두가 그렇게 생각된다. 때로는 무엇에 집착하고 매달려도 보았지만 
오직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왔던 것들조차 얼마 후면 한결같이 나를 
외면하고 멀어져갔으며 곧이어 또 다른 일이 밀어닥치곤 했다. 나는 당장에 
내게 일어나는 일을 추스르는 데 급급하여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닥이 뚫린 배에서 정신없이 물을 퍼내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내 가난한 젊은 
날의 책상 위에는 매양 밀린 숙제들이 잔뜩 쌓여 있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으면 아무도 내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잠깐의 휴지기처럼 아무 돌출적인 사건도 없는 그야말로 조용한 내 
인생의 짧은 한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 적막한 시기의 한가운데서 나는 
누군가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곧 초등학교를 몇 년도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몇년 몇월 며칠 무슨 요일에 입학했는가 하는 식의 산술적인 계산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 따위 짓을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그때 
생겼던 일들은 세월이 지나다 보면 그 생성 연대와 함께 소멸하게 마련이다. 
다만 그 부스러기들만이 강물 속의 모래처럼 쓸려내려가 기억의 하구에 
무덤처럼 쌓일 뿐이다. 고고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거기 모래톱의 연대를 
측정하는 식의 번거로운 일을 시도할 필요는 없으리라. 실제로 나는 내 자신이 
나 누군가의 과거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의 어떤 일들은 왜 그때마다 우연인 양 내게 다가와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남긴 채 달아나버리고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어쨌든 1988년이라면 내가 스물여덟 살일 때고 1989년이라면 스물 아홉 
살일 때가 된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때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막 사서 노릇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스물여섯?) 나는 모든 일들이 다만 어리둥절하고 불가해하기만 
해서(적어도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우둔하고 나약한 
자였다) 때없이 삶으로부터 뜻하지 아니한 상처를 받고 비틀거리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만의 감방 같은 생활을 원하게 되었고 이삼 
년 간 무역 회사에서 통역 업무를 하다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비록 준사서였지만 그 일은 대체적으로 내 적성에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나는 그때까지 내내 추스르기 힘들어했던 이 정체불명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 겨우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세상은 내게 있어선 한갓 
도서관의 먼지 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흐린 풍경화에 불과했다. 나는 거친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가 육지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항상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떨고 있던 나침반의 바늘도 이윽고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가만히 멈춰 있었다.
  시립도서관엔 쉰다섯 살의 관장 외에 스물세 명의 상근 직원이 있었다. 그 
중 사서는 셋이었는데 남자 직원은 나 하나뿐이었다. 모두가 조용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다. 사서직은 격주로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지만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 오후 다섯시만 되면 어김없이 퇴근을 했기 때문에 일반 
기업체보다 근무 조건은 물론이고 부대낌도 한결 덜한 편이었다.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나는 내가 하는 일에 곧 익숙해졌다. 아직 전산화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일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도서를 분야별로 
정리해 카드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짜서 전산화시키는 데 금방 솜씨를 
발휘했다. 또한 열람자들이 신청한 카드나 신문을 보고 새로 구입할 책의 
목록을 작성한다거나 신경이 많이 소모되게 마련인 자료조사표를 만든다거나 
심지어는 낡은 책의 장정을 새롭게 하는 일에 조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닥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함께 근무하는 여직원들은 그런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었다. 나는 가끔 그녀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도 하고 
찻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학 어떤 때는 퇴근 후에 약간의 술을 마시면서 
서로를 자극할 리 없는 심상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지루하고 
단조롭게만 보였을 이런 생활에 그러나 나는 꽤 만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내 집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남들이 다 퇴근한 후에 
서가 한쪽 구석에 물끄러미 앉아 있노라면 산사의 뒤란에 나와 앉아 혼자 
풍경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들은, 아무 조바심도 없이 제 이름표를 
등처럼 들고 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동자승과도 같았다.
  나는 도서관을 왕래하는 일말고는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에겐 
별다른 취미가 없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때나 전화를 걸어올 만한 친구도 없는 편에 속했다. 나는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는 식사를 하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 없이 자정에 잠이 들어 아침 일곱시면 일어나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을 했다. 도서관에 나가지 않는 일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엔 자전거로 강변 공원을 한바퀴 돌고와서는 목욕을 한 
다음 밀린 세탁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가까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찻집에 앉아 책을 읽거나 구경 삼아 남대문 시장에 가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시골에 계신 홀어머니가 몇 달 
올라와 있었지만 아무래도 서울 생활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도로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슬그머니 꺼냈을 때 나는 
그동안 어머니에게 무심했던 나를 탓하며 얼른 그 말에 동의했다. 어머니는 
외아들 옆에 있기보다는 남편의 무덤 가까이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활에 불편을 겪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혼을 했다면 모를까 나이가 들어 어머니(특히 홀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도 어쩐지 거북한 일이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결혼이라는 말이 내 귀에 심심찮게 들려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미숙아처럼 무관심하기만 했다. 아마도 타자를 받아들일 마음의 넓이와 깊이가 
부족한 탓이었을 터이고 무엇보다도 여자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었을 
터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여자와의 사랑이란 도대체 상상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2
  시립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다섯 달쯤이 지났을 때(무려 오 개월 
동안이나 나는 그렇게 대기 혹은 지연의 상태를 방심한 채 즐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내게 예기치 않은 일이 조심스럽게 발생했다. 삶이란 아무리 낮게 
엎드려 있어도 때로 조사관처럼 어떤 응답을 요구해오게 마련인가보다. 비록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닐지라도 서둘러 무슨 신호인가를 보내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인가보다. 한데 이런 종류의 일은 대개가 무표정하게. 뒤에서 허를 찌르며 
무슨 전조처럼 다가오곤 한다. 
  토요일이었다. 퇴근 무렵이 되었을 때 함께 근무하는 사서 중의 한 여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늘 그랬듯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반환해 들어온 책 정리를 하고 있던 내 옆에 소리없이 의자를 끌어당기고 
앉았다(얼마나 자주 그런 식으로 내 옆에 와 앉았던고).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 일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그녀는 상대방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기다리는 여자였다. 얼마 후 
내가 일을 정리하고 일어나 옷걸이에서 외투를 집어드는데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게 이런 말을 던져왔다. 
  "오후에 별일 없으면 저와 데이트 좀 해요."
  데이트? 하고 반사적으로 되받으며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상대의 의향을 
묻는 것도 동의를 구하는 것도 그렇다고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닌 묘한 
말투였다. 표정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내가 이내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녀의 
눈빛이 초점을 잃고 잠시 흔들렸다. 
  "놀라셨어요?"
  놀랐다기보다는 상대방의 진심을 헤아리고 있는 중이었다. 데이트란 말 
자체가 어쩐지 생소하게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 엿보이는 부끄러움이나 떨림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 표정이 없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얼마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그랬듯이 함께 
식사나 하자는 거겠지.
  그녀와 나는 시내로 나가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둘이서만 
만나 시내까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나 장소만 옮겨졌을 뿐으로 
여느 날과 달리 느껴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얼마간 
곤두서 있던 신경도 한 시간쯤이 지나서는 토요일 오후처럼 느슨하게 
풀어져버렸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돼 있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고 있던 그녀의 손동작 하나하나, 귀고리는 그만두고 
이미테이션 목걸이 하나 걸려있지 않아 사뭇 썰렁해 보이는 목덜미, 
화장기조차 없는 밋밋한 얼굴, 담뱃불에 한쪽 모서리가 지져진 붉은 식탁보, 
대나무 모양의 커피잔, 접시에 깔끔하게 반쯤 남긴 비프 커틀릿, 그녀가 
입었던 단색의 회색 재킷,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옆자리에서 입을 맞추고 있던 
이십대 초반의 남녀, 그들의 소곤거림 혹은 숨죽인 웃음 소리... 왜 이런 먼지 
같은 기억들이 내 무의식의 점막에 그토록 완강히 달라붙어 있는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속에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 도사리고 있어 나를 
흡인하고 있었던 걸까. 사이사이 나는 등이 가려운 사람처럼 몸을 비틀어대고 
있었다. 말로는 미처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빛깔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을 나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열심히 전달하려 애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게 뭐라고 
하는가는 뚜렷이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만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이 
어떻다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혹 상대의 마음이 어떻다 
하더라도 그 다음엔 또 내 마음이라는 게 남아 있었다. 나는 한번도 그녀에 
대해 직장 동료 이상의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김은애...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어쩐지 새삼스럽다. 훗날 나는 이 여자에 
대해 아주 각별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때 내 어찌 그런 것을 짐작인들 
했으랴.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여자였다. 노처녀라곤 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녀의 주변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쌍둥이 자매로 태어나 다른 한쪽에 자신의 
반을 빼앗기고 사는 여자 같았다. 그것이 외아들인 나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론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얼마간 권태로워 보였고 왠지 지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새는 언제나 깔끔했으나 매일 이것저것 바꿔 입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밝은 계통의 단색은 피해 입었다. 안 그래도 
식당에 가는 일이 있으면 그녀는 메뉴판을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매번 
설렁탕요, 김치찌개요, 하고 귀찮은 듯 내뱉곤 했다. 노숙한 것인지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몇 살이나 더 많이 들어 보였다. 어떤 땐 남몰래 애까지 낳고 
사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켰다. 무슨 일에 싫증을 내거나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는 없었으나 그 이면에는 벌써부터 사람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권태로움이 굳은 살처럼 박혀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벽에 걸려 있는 철 지난 달력이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을 
완벽하리만치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나이 때문에 눈가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잔주름(하지만 화장으로 얼마든지 감출 수 있는)을 감안하더라도 잘 뜯어보면 
확실히 미인에 속하는 여자라는 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외모야말로 나이를 상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아닌가.
  오후 세시가 되어 그녀와 다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시시한 할리우드 
영화였다. 그리고 다섯시경에 백화점에 가서 일층부터 십층까지 순례했다. 
무얼 사는 줄 알고 따라왔더니 두 시간 동안 구두 매장, 숙녀복 매장, 화장품 
매장, 심지어는 가구 그릇 매장까지 죄 훑어보고는 빈손으로 도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렇다고 구경 삼아 온 것만도 아닌 듯했다. 참으로 맥빠진 토요일 
오후였다. 일층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녀가 넥타이를 하나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아무래도 건성으로 들려 나는 사양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만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도 답답하길래 
저녁 대신 생맥주를 한잔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외한 것도 분명 나였다. 
  그녀와 나는 백화점 지하에 있는 맥주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빈자리를 
찾느라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 저쪽 어딘가에서 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우리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김은애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우연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들과 합석해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이미 
그들과 거기서 약속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김은애를 알아보고 또한 
김은애가 그들을 알아보는 순간에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자리를 모면하고 
집으로 돌아갈 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는 존재의 출현까지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김은애에게 동행이 있다는 사실까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자리가 두 개 비어 있었고 빈 맥주잔도 또한 두 개였고 
포크와 젓가락도 두 개씩이 냅킨에 싸인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흘끗 
김은애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왜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일까. 미리 양해를 구하는 일도 없이.
  그들이라고 해봐야 셋이 전부였다. 내 앞에는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까맣게 
기른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외모와 복장을 
한 역시 비슷한 나이의 야윈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악수를 하면서도 제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귀금속 
세공사라는 좀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건축가 오른쪽 자리에 
싸구려 인형처럼 앉아 있는 이십대 중반의 여자는 귀금속 세공사보다 더 
독특하고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그녀는 
분명 그들 일행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켜놓긴 했으되 볼륨을 줄여놓고는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흑백 
텔레비전처럼 그녀는 완전히 소외된 채로 안장 있었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말을 거는 일이 없었으며 그녀 또한 그들의 대화에 애써 
끼여들려는 의사조차 없어 보였다. 김은애도 그녀와는 초면인 듯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게 될 때가지도 나는 그들이 만나 술을 마시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로 겉돌기만 하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수화를 나누고 있는 벙어리들 틈에 끼여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기껏해야 숙맥인 나까지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진부한 음담패설이거나 
시내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맙소사, 아까 김은애와 본 영화도 있었다) 
얘기나 시시껄렁한 소설과 대중음악에 관한 일반적인 담론 그리고 얼마 전에 
외국 어디를 다녀왔는데 하는 식의 껌 같은 얘기가 전부였다. 어째서 토요일 
오후에 그것도 백화점 지하의 비싼 맥주집에 앉아 날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을 나누고 있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서로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만나기도 하는 것인가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 말투에서 하나의 유사한 점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말하자면 그렇게 겉도는 대화를 통해 각자의 의사를 
전달하고 모종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들은 
차마 입 밖에 꺼내기 힘든 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대각선 방향에 마주앉아 있는 흑백 텔레비전과 나는 그저 무의미한 방관자로 
이따금씩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김은애와 건축가 그리고 귀금속 세공사가 
그런저런 분위기의 틀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동안에 영락없이 나도 볼륨을 
꺼버린 텔레비전 신세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김은애도 그런 나를 
수수방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내가 이런 자리에 끼게 되었는지 
한심스럽기조차 했다. 아무려나 그 답답한 술자리는 또 그런대로의 분위기를 
형성해가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리 양수리로 자리를 
옮겨서 마실까?라고 먼저 툭 내뱉은 것은 수염만 빼놓고는 온통 얼굴이 
불그죽죽하게 변한 건축가였다.
  "재작년에 거기 무드리라는 데서 한 달 간 술 마시며 지냈거든. 배타고 
들어가는 데라 지금 거기까지는 못 가겠지만 근처에 민박을 얻어놓고 마시면 
되잖겠어? 술 마시다 새벽에 강으로 안개나 보러 나가자구. 양떼처럼 몰려드는 
저 도원의 젖빛 안개!"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그는 여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흑백 
텔레비전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그녀는 몽롱한 얼굴로 목에 
스프링이 달린 인형처럼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이 밤에 양수리라니. 
승용차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릴 텐데. 그런 데다 지금은 음주 상태가 아닌가. 
아무려면 농담이겠지. 그러나 곧바로 김은애가 장단을 맞추고 들었다.
  "그거 괜찮겠네요. 하지만 토요일이라 민박인들 어디 남아 있겠어요? 러브 
호텔은 평일에도 예약이 아니면 꿈도 못 꾼대요."
  내 귀에 수은처럼 흘러들던 그녀의 저 낯설었던 말투. 항상 무미건조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내면 그 어디에 저런 구석이 도사리고 있었던 걸까.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해본 소리겠지. 나는 짐짓 고개를 외틀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가? 그런가? 하고 구레나룻이 맥빠진 소리로 되받자 귀금속 
세공사가 슬쩍 끼여들었다. 그는 꽤 마셨다고 생각되는데도 술기운이 전혀 
얼굴에 그러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말 발음이 틀니에서 새나오는 소리처럼 
어딘가 모르게 굳어 있었다.
  "내친김에 경포대로 해서 대포리에 가서 오징어회나 한 접시 먹고 
내설악으로 빠지든지. 아침에 미시령으로 넘어오면 되잖아."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은애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어때요? 라고 충혈된 
눈으로 물어왔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안 돼, 라는 말을 못하고 
글쎄...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부터 알고 싶었다. 
  "왜요, 싫으세요?"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싫다기보다는 자리도 비좁을 텐데 초면에 염치가 없다는 거죠. 그렇잖아도 
불청객 신세인데."
  이렇게 틈을 보인 것이 또 실수라면 실수였다. 당장엔 판이 깨지더라도 내 
감정에 솔직해야 결국엔 상대방도 편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라도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구레나룻이 걸쭉한 입담으로 나를 몰아 세웠다. 
  "그런 이유라면 접수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남정네끼리가 아니니까 
자리는 비좁을수록 화기애애할 것이고 둘째, 여기엔 초면인 사람이 셋이나 
있으니 상관없고 셋째, 불청객에게도 트렁크는 임대해 주는 게 우리 관례니까 
말입니다."
  "에브리씽 오케이. 위 해브 투 고우."
  "그럼 나가서 뭘 좀 먹어두자구. 강릉까지 운전하고 갈려면 듬뿍 
먹어놔야지. 휴게소에서 가락국수 먹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어."
  그들은 건축가가 가지고 온 승용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섰다. 귀금속 세공사가 교대로 운전을 하기로 했다. 아차 싶었지만 누굴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어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꾸물꾸물 
일어섰다.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는 것이로구나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들과 동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와 동행하고 
싶은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으려니와 계획도 없이 강릉까지 가서 술타령을 
한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들을 따라 
음식점에 들어가 삼겹살과 소주 몇 잔을 더 마셨고 그동안에 손목시계를 두어 
번 훔쳐보았다. 얼추 열한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음울한 소리를 
내며 가을비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도주자들 틈에 끼여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나는 내 바로 맞은편에 앉아 맹한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흑백 텔레비젼을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그들 일행과 동행하지 못했다. 강릉까지 가는 일을 어쨌든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탓도 있었으나 따지고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중간에 그들 일행을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차로 
간 음식점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주차장도 아닌 어디 주택가 골목에 세워놓은 
승용차를 찾으러 가는 도중에 건축가가 여기들 있어, 내가 찾아서 몰고 나올게 
하며 나머지 일행을 떨어뜨려 놓았고 귀금속 세공사와 김은애가 카세트 
테이프와 음료수라도 사야겠다고 하며 편의점을 찾아 잠깐 사라진 다음, 흑백 
텔레비전과 나는 그 돌연한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멀뚱하게 서 있다가 
머쓱한 기분이 들어 골목 입구로 주춤주춤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이십 분을 기다려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차를 가지러 갔던 사람 편의점에 갔던 사람들 모두가 
훌쩍 증발이라도 된 것 같았다. 비를 긋기 위해 화강암 건물의 차가운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도둑처럼 서 있던 흑백 텔레비전과 나는 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 나서 아까 그들과 갈라졌던 골목 안으로 슬금슬금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일행이 산개했던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술자리의 끝이 대게 이렇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이내 마음을 추스리고 집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미련 없이 
골목을 돌아왔다. 비에 젖은 추레한 몰골로 유흥업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도로로 나와서 나는 문득 두고 온 여자가 생각나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서너 걸음 떨어진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기하학적 무늬가 
수놓인 모직 윗도리가 헐렁하게 둔부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어깨에 걸린 
것도 손에 든 것도 없는 단출한 낡은 청바지 차림이었다. 꼭이 재수생처럼 
보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춘 채 퀭한 눈으로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비껴가거나 하는 일도 없이 그저 그렇게. 술자리 동행이긴 했으나 나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선뜻 말을 건넬 형편도 아니었다.

  그 흑백 텔레비전은 아무도 보아줄 리 없는데 왜 아직까지 푸른빛을 발하며 
낯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있었을까.

  어떤 말도 없이 나는 발걸음을 조금 늦춰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녀는 내가 
늦춘 속도만큼 걸음을 빨리해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나는 우산도 
없이 나란히 빗속을 걸어갔다. 단지 헤어지기 위해 만난 연인들처럼. 약 백 
미터쯤. 멀리 흐린 빛으로 명멸하고 있는 교외의 불빛들이 약간의 흥분으로 
몽롱하게 풀어진 내 눈동자에 비쳐들고 있었다. 내 전에 누구와 이렇게 비 
내리는 밤길을 걸어봤던가. 그래. 거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지. 어쨌든 조금은 
달콤하고 또 조금은 춥고 서글픈 마음...

  그녀와 나는 야식집에 앉아 닭도리탕을 버너에 올려놓고 차디찬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첫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에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일깨워지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내게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아주 엉뚱하고 새삼스런 기억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비스듬히 내려앉은 기와지붕, 페인트 칠이 벗겨져 나간 간판, 삐걱거리는 대문, 
마당의 사철나무 한 그루...
  그녀는 서하숙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사람의 성격이란 제 
이름과 외모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바꿔 말하면 이름이나 
외모가 그 사람의 인상 자체를 규정 짓기도 한다는 얘기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남도 여행을 하는 도중 '기러기 하숙'이란 간판을 
본적이 있었죠. 요즘엔 하숙집 간판을 본다는 것도 드문 일 아닙니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숙이란 말 그대로 하숙집이 아니라 여행객을 위한 
싸구려 여인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름만 가지고는 물론 이렇게까지 싸구려 
여인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름만 가지고는 물론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안된 얘기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게 나로 하여금 영락없이 낡은 하숙집 
풍경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말을 그녀는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끄덕끄덕 졸다 부지불식간에 깨어 차창 밖을 내다봤는데 그 하숙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던 겁니다."
  그녀는 여전히 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응큼하네요."
  나도 얼른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숙녀한테 할 소리가 따로 있지. 
어쨌든 변명 따위를 못하고 나는 응큼한 사내인 채로 닭도리탕만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뼈를 골라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까 누구와 함께 왔던 겁니까?"  꼭 물어볼 필요는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데면한 느낌이 들어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젓가락으로 닭 모가지의 살을 
발라 먹고 있던 그녀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큼 대꾸했다. 
  "누구와 함께라뇨? 그냥 묻어서 온 거죠. 술자리라는 게 다 서로 묻어서 
오고 그러는 거 안녜요?"
  대답을 피하고 싶었던지 그녀는 요리조리 말머리를 돌렸다. 
  "도서관에 있으면 책은 실컷 읽겠네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죠. 농부라고 해서 어부라고 해서 쌀과 고기를 실컷 
먹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하긴 술장사를 한다고 해서 술을 실컷 먹는 것도 아니겠죠."
  맹랑한 것인지 영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 해요?"  
  "무슨 일 하다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령 직장 같은 거 말입니다."
  "아아 그거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눈을 반짝 뜨며 사뭇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녀가 반문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정 궁금하시면 다음에 말해줄게요. 지금은 어중간한 상태라 놔서."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이렇게 밤늦게까지 여자와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이른바 연애라는 것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나는 연애에 대해 별 흥미를 갖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나름대로 방식이라는 것도 터득하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생각하면 역시 혼자인 상태가 그래도 나을 듯싶었다. 결혼? 그거라면 
맞선이라는 편리한 방법이 있다. 연애라는 걸 하기 위해 자정이 넘게까지 
마주앉아 이런 흰소리나 지껄이며 닭뼈를 바르는 일은 체질 개선을 하지 않는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 할 말은 턱없이 부족한데 그렇다고 줄곧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그럼 집은 어느쪽이죠?"
  "댁은 어디신데요?"
  "마포에요. 여기서 택시 타면 기본 요금밖에 안 나오는 거리죠."
  "저도 비슷해요."
  "마포란 말입니까?"
  "아뇨. 저도 택시 타면 금방이라구요."
  나는 세 병밖에 시키지 않은 맥주가 반이 넘게 남았는데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여러 가지가 고역이었다. 그런 데다 소변이 
마려운데도 맛있게 안주를 먹고 있는 그녀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단 말을 할 
수가 없어 나는 아까부터 참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 같이 왔던 여자, 애인예요?"
  두루마리 하장지를 풀어 양념 묻은 입술을 닦으며 이번에는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목 빠진 닭처럼 고개를 흔들어댔다. 
  "아니란 말예요?"  
  "직장 동료일 뿐예요. 누군가 몰라도 아마 애인이 있겠죠."
  "그런데 왜 같이 다녀요?"
  "네?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그 중에 애인이 있었어요?"
  "솔직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녜요."
  "무슨 뜻이죠?" 
  "애인 노릇을 한다고 해서 진짜 애인인 건 아니잖아요."
  그게 또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암만해도 모르겠는 사람이었다. 
  한시가 돼서야 그녀와 나는 야식집에서 나왔다. 이내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밖에 나와서도 그녀는 좀체 그러겠단 말이 없었다. 그녀와 나는 도로를 
오른쪽에 두고 보도를 따라 마포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 내려갔다. 비는 자정이 
지나면서부터 더욱 거세게 퍼붓고 있었다. 보도 왼쪽엔 공사 중인지 거대한 
콘크리트 원통이 여기저기 굴러 있었다. 비가 내리는 깊은 밤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라고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녀가 내 옆에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빈 도로와 공사장의 캄캄한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아, 갔구나. 가령 애인이 아닌 사이는 이런 식으로 
헤어지는 것이로구나.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는 공사장에 쌓여 있는 원통 하수관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긴가민가하는 심정으로 하수관 앞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그녀는 그 안에서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란 말도 없이. 
내머리 위로 빗방울이 사선을 그으며 거침없이 듣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그 원통 안에 서 있었다. 거기다 그녀를 놔두고 갈 수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녀와 나는 오래오래 입을 다물고 다만 눈앞에 쏟아져 
내리고 있는 유령 같은 빗발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원형의 습한 
공간은 퀴퀴한 시멘트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발 밑에 물줄기를 내며 
소리 없이 공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도로 저쪽에서, 우산을 받지 않은 사내 하나가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아득히 바라보며 서툰 걸음세로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밤, 비는 서쪽 하숙집 기와지붕에도 내리고 있는 것일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는 담배를 찾아 불을 켜자, 빛이 둥그렇게 휘말리며 
콘크리트 안쪽의 미세한 기포 구멍을 드러냈다. 그녀의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내 옆에서 마구 흔들렸다. 성냥불을 끄자 그제야 그녀가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담배 피우면 들켜요.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나는 담뱃불을 빗속에 던져 껐다.
  강물이 흘러가듯 또 일 분, 이 분, 삼 분이 지나갔다. 이런 추운 꿈은 
처음이야,라고 나는 입엣말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의외로 아늑하네요. 기러기 하숙같이 말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원통 속에서 기묘하게 꿈틀거리며 울려퍼졌다. 나는 옆으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정념 아니 성욕이 한 순간 애타게 
나를 몰아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손목시계의 형광 바늘이 정각 
두시를 가리키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왔다.
  빗속으로 나서는 내 등에다 대고 그녀가 목아픈 소리를 내뱉었다.
  "이럴려고 한 시간 동안이나 여기 서 있었던 거예요?"
  "!..."
  못 들은 척 나는 내처 빗속으로 갔다.
  "관둬요, 치사하게. 하지만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거예요. 분명히 그럴 거니까 
기억해두시라구요."
  나는 뒤에 남겨진 그녀의 어둑한 모습을 눈앞에 보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3
  월요일 아침에 김은애는 지각을 했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동안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김은애뿐만 아니라 시립도서관 직원 누구도 연장 근무나 
야근을 안 하는 대신 지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전 내내 비어 있는 
왼쪽 건너편 의자를 문득문득 바라보면서 나는 차츰 불편한 마음이 되어갔다.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만큼은 어쨌든 
사실이었다. 
  정오가 다 돼서야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로 출근해 관장실에 먼저 들어갔다 
나왔다. 그녀가 거기서 나오기까지 약 오 분 동안 나는 희디흰 공백 상태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바바리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제자리에 가 앉았다. 그녀가 조금 흐트러진 동작으로 커피잔을 들고 일을 하는 
척하며 내 옆에 와 앉을 때서야 나는 그녀가 집에서 출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요일에 입었던 그 옷차림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은 
구겼던 종이를 다시 펴놓았을 때처럼 여기저기에 비일상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방금 자판기에서 빼온 종이컵 표면에 커피가 한 줄기 흘러 넘쳐 
유리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토요일엔 먼저 가셨대요?"
  혼자말인 듯 그녀가 노란 도서 목록 카드를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도로 자리에서 
일어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대답을 못하고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잊었던 듯 핸드백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손질하고 있을 때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릉에서 오는 길예요. 아침 여덟시 비행기를 탔구요. 구름 위에 앉아 
끄덕끄덕 졸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아세요?"
  "..."
  나머지 일행은 일요일 저녁에 먼저 서울로 올라오고 그녀는 속초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녀가 구름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가을 휴가를 다녀온 셈이군요."
  그녀는 내 말에는 대꾸가 없었다. 
  "가는 동안에 앞자리 앉아 줄곧 백미러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뒷전으로 
떠밀려 가고 있는 어둠을 말예요. 그러면서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고 있구나 
생각했죠.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없는 세상 말예요."
  그 시간에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그래, 재수생 같은 여자를 만나 하수관 
안에 서 있었다. 아마도 김은애는 그걸 묻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다른 말이 없었다. 그날 강릉까지 함께 갔던 일행에 관해서도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그날 강릉까지 함께 갔던 
일행에 관해서도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물론 내게 
그럴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에도 내게는 풀 길 없는 의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지난 토요일 그들을 만나는 자리에 왜 나를 데려갔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허나 그런 의문도 그냥 의문인 채로 남겨두어야만 했다. 
  그녀의 저 굳게 닫혀진 문 안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있었거나, 혹은 없었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날의 일은 내게 비현실적인 
기억만을 남긴 채 사라져갔다. 예전처럼 김은애와 나는 사심없는 동료로 
서로를 대했으며 가끔은 함께 점심을 먹거나 복도에 앉아 창틀로 흐릿하게 
건너가고 있는 햇살을 쳐다보며 커피를 마시거나 혹은 직장 일에 관한 건조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녀는 일 년에 한 번도 대출이 되지 않는 책과도 
같았다.  문득 먼지를 털어내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빛바랜 
백지.

  4
  그렇게 시간이 백지인 양 흘러가고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안도감이 일종의 권태를 동반한 조바심으로 바뀌어갈 무렵 한 여자가 불현듯 
도서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야말로 '불현듯'이었다. 입동, 소설이 지나고 
대설이 찾아왔건만 두고두고 첫눈은 오지 않을 듯 매운 날만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의 오후였다. 책상에 고개를 박고 앉아 방금 들어온 
신간의 목록표를 만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맡의 대출 창구를 톡톡 쳤다. 
도서관 직원은 아니었다. 책을 대출받기 위해 찾아온 학생이라면 더군다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노크 소리는 바로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외래객이 
내 머리맡에 와 있다는 증거요 신호였다. 히뜩, 고개를 들다 말고 나는 대출 
창구의 유리창에 얼비치고 있는 옷자락부터 훔쳐보고 있었다. 여자였다. 
듬성듬성 피에로 무늬가 화려하게 박혀 있는 아이보리색 코트였다. 코트는 반 
뼘쯤의 사이를 두고 좌우로 열려 있었으며 코트 안으로는 붉은빛 스웨터가 
들여다보였다. 나는 코트 자락의 미세한 흔들림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반달형의 대출 창구 안으로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머리맡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딱, 딱!
  나는 그녀를 알아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은 찰나거나 순간이라고 봐야 옳다 그런데 나는 거의 일 분 
간이나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녀는 방글방글 웃으며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옆 건너편에 앉아 있는 김은애조차도 
그녀가 누구임을 끝내 알지 못했으니까.
  서하숙. 나는 그녀와 그렇게 두번째 만나게 된다. 전에도 그랬지만 어이없는 
만남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졸부를 만나 결혼한 어린 처자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암만 봐도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미장원에 막 다녀왔는지 머리도 
잔뜩 부풀려져 가발을 쓰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한껏 멋을 부린다고 
요란스럽게 찍어바른 얼굴의 화장도 남들이 보면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무대를 잘못 찾아온 피에로 꼴이었다. 맙소사, 라고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는 학생들 몇이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는 휴게실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녀가 신고 있는 부츠 밑바닥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나는 얼른 표정을 거두고 하루 세 개비만 피우기로 한 담배를 거기서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나는 담뱃불을 붙이는 척하면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왜, 저는 하수관 안에나 서 있어야 어울린단 거예요" 이렇게 하고 다니는 
게 역겹다는 거예요?"
  "그렇다는 게 아니고 느닷없이 만나게 되니 당혹스러워서..."
  "그럼 그냥 돌려보낼 건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퇴근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부러 시간을 
맞춰온 모양이었다. 별로 반가울 것도 싫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를 찾아온 
사람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이십 분 뒤에 도서관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퇴근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김은애가 내 옆을 슬그머니 스치고 지나가며 내가 들으라는 것이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한 취향을 갖고 계시네요. 그렇게 별난 사람을 좋아하시는 줄 미처 
몰랐어요."
  "... 글쎄요."
  서하숙은 도서관 앞에 택시를 잡아놓고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여섯시였지만 금세 날이 어두워지며 거리에 하나둘 네온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택시가 무지갯빛 도심을 향해 질주해 가는 동안에 나는 눈앞에 
달려드는 시린 풍경만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경한 의문이 들어 나는 허룩하게 느껴지는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내 반대편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고 
고개도 뒤로 삼십 도쯤 틀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새빨간 입술을 
갓난애처럼 열어놓고 졸고 있는 중이었다.
  택시는 여의도 63빌딩 앞에 가서 스르르 멈춰 섰다. 운전사가 다 왔어요 
내려요, 하는 소리를 할 때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흔들어 그녀를 깨웠다.
  "여기가 어디예요? ... 육삼빌딩 맞아요?"
  그녀는 택시에 내려서도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걸음걸이마저 똑바르지가 못했다. 그러더니 대뜸 내 손목을 거머쥐고 회전문을 
통해 아이맥스 영화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빨리 가요, 전망대 관람 시간이 몇 시까진지 모르겠네."
  "아니, 지금 전망대에 올라가려구요?"
  "왜 싫으세요?"
  싫고 좋고가 아니었다. 내둥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통에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꼭 전망대에 올라가야 하는 겁니까?"
  "그럼 뭐 해요? 벌써 저녁 먹어요? 아니면 초등학생이나 들어가는 아이맥스 
영화관에 들어가요?"
  더 대꾸해봐야 내 꼴만 우스웠다. 나는 표를 사는 그녀 뒤에 우두망찰 넋을 
잃고 서서 졸지에 납치돼 온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밤에, 이백사십구 미터나 되는 63빌딩 꼭대기에 올라와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것은 의외로 멋진 일이었다. 어두웠으므로 관망 범위 내에 
있는 인천 앞바다와 임진강 하류, 오두산, 강화도 마니산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곧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서울의 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얼마 전 도서관에서 미술서적을 정리하다 보게 된 제이 머슬러라는 
유리공예가의 '도시 풍경'이란 작품이 떠올랐다. 그것은 소위 커트 기법으로 
만들어진 노을빛의 둥그런 그릇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등립 위에 놓여진 듯 
신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도시의 야경을 형상화한 그 작품은 까만 
은이빨처럼 생긴 고층 빌딩들이 테두리를 따라 비죽비죽 솟아 있는 환상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노을빛 정적에 감싸여 있는 무섭도록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유리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서서 남산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갑자기 제이 머슬러의 '도시 풍경'을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면서 나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마음속에 그냥 간직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녀를 향한 
어떤 말 못할 진실이 그때 내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오랫동안 마음의 헛간에 처박아둬서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어 있었던 
열정이라는 것이 그렇듯 우연찮은 순간에 조용히 나를 흔들며 지나갔던 
것이다. 아, 인생이란 이런 덧없는 흥분의 한때를 가리키는 것이었구나.
  "며칠 동안 내내 케니 지의 색소폰 소리를 들으며 여기에 오고 싶어했어요. 
믿을 수 없겠지만 당신과 함께 말예요. 혹시 케니지 들어봤어요?"
  그녀의 얼굴에서 제이 머슬러의 밤풍경이 얼룩지고 있었다. 들어봤다고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자주 듣는 음악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색소폰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런 도시의 밤이 떠오르지 않아요? 
푸른 비단으로 둘러싸인 밤 말예요. 자동차 소리도 없고 싸우는 소리도 없고 
그래서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적막한 밤 말예요."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실이었다면 그녀는 지금 나에게 간절히 그것을 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가 말로 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것을 그렇듯 
또박또박 얘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란 말인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나란 말인가? 그러나 그걸 알게 되는 때는 늘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리라.
  전망대를 한바퀴 돌고 나서 그녀와 나는 이백사십구 미터 아래로 다시 
내려왔다. 이제는 또 어디로 가지?라는 얼굴로 내가 어물쩡거리고 있자 그녀가 
또 다짜고짜 내 팔소매를 잡아끌고는 63씨월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수족관엔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온 김에 거기까지 가봐요, 우리."
  내가 표를 사려 하자 그녀가 서둘러 핸드백을 열고는 절 비켜요, 라며 눈을 
흘겼다.
  "오늘은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저 돈 많아요. 지난번엔 제가 닭도리탕 
얻어먹었잖아요."
  나는 그녀가 하는 꼴만 쳐다보고 있다가 63씨월드로 빨려들어갔다. 나도 
서울에 살면서 이곳에 와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망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유리관 속에는 펭귄의 
무리가, 오른쪽 유리관 속에는 몇 백년을 묵었을 법한 거북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관람권 뒷면에 씌어진 설명을 보니 세계 각지에 
분포돼 있는 사백여 종 약 이만 마리의 물고기가 지상 일층과 지하 일층에 
걸쳐 전시돼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1990년 일월에 
경북 영일군 송나면 앞바다에서 김충록이란 어부가 잡았다는 산갈치란 
물고기였다. 몸통 폭이 약 삼십오 센티미터, 길이가 약 삼 미터나 되는 이 
거대한 은빛 물고기는 박제가 된 채로 유리관 속에서 아, 하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갈치란 말예요?"
  그녀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리관에다 바싹 눈을 들이댔다. 나는 유리관 
위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읽고 있었다.
  산갈치는 '황제의 허리띠'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용궁의 
사자', 러시아에서는 '청어의 여왕', 북구지방에서는 청어떼를 이끌고 다닌다고 
해서 '청어의 왕',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산 위의 별이 날아가서 물고기가 
되었다 하여 '산갈치'라고 부른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십오 일 간은 산에서, 
십오 일 간은 바다에서 서식하면서 산과 바다 사이를 날아다닌다고 하며 
경상도 지방에서는 나병에 약효가 있다고 전해지는 진귀한 심해어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와 나는 청줄돔, 검정등무늬나비고기, 노랑쥐치 등의 
산호초 어류와 바다의 원앙이라는 해마, 악어, 일본 남부해에 살고 있는 
드라큘라 물고기, 식인어, 고생대 말기 삼억만 년 전부터 공기로 숨을 쉬며 
살고 있다는 폐어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이 숱한 물고기가 햇빛도 없는 유리관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우울했다.
  지하 일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그녀가 목이 잠긴 소리로 
고래는 없나요? 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얀 돌고래 말예요. 실은 고래가 보고 싶어서 오자고 한 건데요."
  고래가 있는가 없는가는 나도 모르고 있었다. 듣고 보니 나도 덩달아 
궁금했다.
  "어쨌든 내려가 봅시다."
  그러나 돌고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내 풀죽은 
얼굴이 되어 골이 난 사람처럼 줄곧 입을 내밀고 있었다. 황소개구리를 
보아도, 붉은귀거북이와 바다가재를 보아도, 닭새우와 노랑색 댕기물고기를 
보고서도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얼마후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와 관람객에게 '인어공주 쇼'가 있으니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시시해요."
  그녀는 여전히 앵돌아진 얼굴로 풀썩 바닥에 앉아서는 어째 고래 한 마리가 
없어, 라며 초등학생처럼 툴툴거렸다. 나는 잠자코 입만 다물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서 본 수족관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엉겁결에 눈을 뜨고 
보았던 푸르스름한 강물 속과도 같았다. 아니, 텔레비전 속과도 같았다. 그때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이 내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가.
  '인어공주 쇼'라는 것은 산소호흡기를 쓴 여자가 유리관 속에 들어가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게 전부였다. 볼 만한 건 여자의 몸 주위로 
물고기떼가 달려드는 장면 정도였다. 참으로 시시했다. '인어공주 쇼'가 끝나고 
다음엔 '바다표범 쇼' 어쩌구 하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그녀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에이, 기분 잡쳤어요. 수족관엔 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고래만큼은 그래도 바다에 있어야 되잖겠어요? 모든 물고기가 저렇게 
컴컴한 지하에 수감돼 있다고 생각해봐요."
  "하긴 그 말도 맞네요. 우리 언제 여기 수족관에 들어와 물고기들을 전부 
바다로 돌려보내 줄까요?"
  "그럼 우리가 대신 유리관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할 텐데요. 하루에 열 
번씩이나 사람들에게 쇼를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물 속에서 미끄럼도 타고 
농구도 해야 하는 거죠."
  "끔찍하네요."
  63빌딩 일층에 있는 뷔페 식당에서 그녀와 나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포도주를 먹었다. 어지간한 뷔페 식당보다 훨씬 비싼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극구 그녀가 계산을 했다. 빳빳한 만원권 지폐가 핸드백 속에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세 번쯤 하품을 했고 포도주를 두 
잔 마시자 이내 눈이 충혈됐다. 피곤한 모습이었다. 정말 무얼 하며 사는 
여자인지 궁금했다. 내둥 참고 있다가 식사가 끝나갈 즈음 나는 결국 이렇게 
묻고야 말았다.
  "요즘은 뭐 하고 살아요?"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아직 특별한 직업 같은 거 없어요. 어쨌든 돈이 있으니까요. 전에는 식당 
체인점에서 일했어요. 그 후엔 친구 언니가 하는 카페에서 일을 도와주기도 
했구요."
  "그랬군요."
  "근데 요즘 뭐 하면 먹고 살 수 있어요? 디자인학원 같은 데 다니는 게 
유행인 모양인데 그쪽 일이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죠?"
  "글쎄요, 도서관에만 처박혀 있으니 잘 모르겠군."
  "실은 저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걱정예요."
  "..."
  포도주잔을 들다 말고 그녀는 다시 하품을 했다. 많이 늦었나 싶어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아홉시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그녀는 식당 앞에 
있는 쇼핑 센터에서 옷과 구두와 목도리와 반지와 화장품들을 한꺼번에 
사고는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내게 지갑을 선물했다. 그녀는 위조 지폐를 마구 
뿌리고 있는 성싶었다. 아무튼 쇼핑까지 끝낸 다음 아까 들어온 회전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느닷없이 그녀가 내게 작별의 말을 건네왔다. 여간 
당혹스럽지가 않았다. 하필이면 출입구 옆 공중전화 부스가 있는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이제 그만 가보세요."
  이쪽의 입장을 생각하고 하는 말인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내뱉고는 또 하품이 나오려는 입을 장갑 낀 손으로 가렸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러마고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나는 
아무래도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 도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다시 만나게 될까요?"
  나는 그때껏 그녀의 주소라든가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게 꼭 
알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우롱당한 기분이 들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쇼핑백을 몇 개나 겹쳐 든 불안한 자세로 내 말에 
대답해왔다.
  "그건 모르는 일예요. 실은 제게 남자가 있어요. 어쨌든 남자 하나 
없을라구요. 물론 엉터리 같은 남자지만 말예요. 하지만 명함이나 한 장 
줘보세요."
  내키지는 않았으나 나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던 사람들이 그녀와 나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아 묘한 수치감이 몰려왔다. 괜히 심사가 뒤틀려 나는 
비야냥거리는 조로 물었다.
  "그때 같이 만났던 사람인가보죠?"
  건축가와 귀금속 세공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 누구요? 집 짓는 놈 말예요?"
  그녀의 입에서 이내 앙칼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전화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치가 얼마나 저를 무시했는지나 아세요" 어쨌든 아녜요!"
  뾰로통해져 있는 그녀를 거기 세워두고 나는 회전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케니 지의 색소폰 연주를 듣다가 자정 넘어 한시에야 잠이 
들었다.
  서하숙. 떠다니는 섬. 안과 겉, 어제와 오늘이 어긋나 있는 여자. 가슴에 
젖빛 안개가 낀다.
  내가 그녀를 기다렸던가? 단지 명함 한 장에 기대를 걸고? 하지만 나 
자신도 내가 과연 그랬었는가는 잘 모르겠다. 어쩌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은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게 곧 그리움이라든가 간절함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애틋한 감정을 아니었으리라. 한 달쯤이 지나자 내가 그녀를 만나 63빌딩 
전망대와 씨월드에 갔었던 일조차 비현실적인 일로 생각됐다. 분명한 
사건이었으면서도 이렇게 현실적인 기억의 목록에 편입되지 않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어느덧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돌아가 있었다. 더 이상 기억할 만한 사건이 없는 가운데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일월 일일 저녁에 나는 63씨월드의 물고기들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5
  그 해의 일월 말경에 나는 내 집에 찾아든 한 마리의 겨울 짐승과 대면하게 
된다. 아마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을 것이다. 밖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굉장한 눈이어서 다음날 출근할 일마저 걱정스러웠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싶은 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나는 눈이 내리는 밤이면 잠을 못 이루는 
습관이 있다. 공연히 마음이 들떠 방안을 서성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슥슥 편지를 쓰기도 한다. 아무튼 눈을 잔뜩 맞고 퇴근을 해 집 근처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오니 일곱시 삼십분이었고 나는 곧바로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시사 월간지를 별 흥미 없이 뒤적이고 있었다. 오늘도 
쉽게 잠이 올 성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벽시계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신동아'를 반쯤 읽었을 때 참으로 기이한 느낌이 내게 
엄습해들었다.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다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요컨대 내 
마음 이슥한 곳에서 누가 아까부터 내게 수화를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일종의 부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함이 옳았다. 그리고 그 
기묘한 마음의 파장을 감지하고부터는 책의 글자조차 제대로 눈에 박혀들지 
않았다. 어째서 태연히 앉아만 있느냐고, 내 마음속의 그는 복화술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호소를 하고 있었다. 금방 싱숭생숭해져 나는 
담배만 뻑뻑 빨며 방안을 서성거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지금 밖에 누가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부터는 마당에 누가 찾아와 있다는 것이 
하나의 명백한 사실로 여겨졌다. 어려서 눈이 내리는 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자주자주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다. 밖에 누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스님이든 거지든 산에서 내려온 짐승이든. 물론 
문을 열어보면 번번이 텅빈 마당만 눈앞에 희끄무레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밖으로 나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당 한가운데 눈에 뒤덮여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을 하고 내 
방문 쪽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거기에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비록 상대가 누구임을 얼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것만큼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사람을 찾아와 놓고는 왜 눈을 맞고 서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맨발인 채 구두를 꿰신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서,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천천히 털어내고 어둠 속에 나타난 돌연한 얼굴에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말없이 내가 끓여준 
라면과 커피를 마시고 침대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비로소 내 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난한 방이었으므로 보여줄 것은 벽에 걸려 있는 새 달력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내 집에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걸 묻지 않았다. 
어째서 마당에 그토록 오래 서 있었는가 하는 것도 묻지 않았다. 때로 어떤 
것은 의미를 캐려 하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새로 한시 십분에 그녀는 침대에서 가만가만 일어나더니 돌아서서 옷을 
벗고 알몸인 채로 내게 다가와 이윽고 품에 안겼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렇게. 나는 내 전생인 듯 그녀를 맞이했다. 내 전생이, 가슴의 단추를 따고 
있는 것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긍휼한 시간이 흘러가고 
그녀와 나는 알몸인 채로 서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놀라워라, 기껏해야 내 몸보다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만 알았던 
여자의 몸이 이다지도 아프고 황홀한 것이었다니. 정확히 한시 삼십오분이 
되자 눈 내리는 소리가 귀에서 뚝 멎고 내 몸이 용암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자물쇠가 풀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녀만이 형형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어머니가 나를 낳고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는 처녀였고 나도 그게 처음인 여자와의 관계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녀의 얼굴에 나 있는 솜털 
하나하나, 우윳빛 따뜻한 목덜미, 오른쪽 어깨의 우두자국,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던 손가락, 지금 너와 내가 하나인 것을 두 눈처럼 똑바로 증거하고 있던 
젖가슴-유두, 아픔 혹은 극도의 흥분 때문에 틀어지곤 하던 잘록한 허리, 
그녀가 벗어놓았던 속옷의 색깔과 무늬, 내 귀밑에 와 닿던 뜨겁고 까끌까끌한 
혀의 질감, 어느 순간엔가 울음인지 뭔지 모르게 흑! 하고 떨던 목소리의 
기묘한 울림, 그러고 나서 내 목덜미를 끌어안을 때의 놀라운 팔의 완력... 
그녀의 몸은 나이보다 굉장히 젊었고 성기의 발달은 열여덟 살 정도에서 
성장을 중지한 것같이 미숙했다. 아주 잠깐 사이, 나는 밤하늘에 쏘아진 
불꽃의 환영을 보다가 아무 의식의 지침도 없이 조용히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나는 똑같이 새벽 다섯시에 깨어나 한 번 더 '사랑'을 하고는 
일곱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먹고 밖으로 나왔다. 세상엔 두 뼘쯤의 눈이 쌓여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앞에서까지 왔을 때 그녀가 내 손에 잡혀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말했다.
  "동우씨는 다음 차 타고 오세요.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요."
  제기랄, 이제 와서 그게무슨 상관이람. 하는 수 없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나는 그녀를 먼저 버스에 태워 보냈다. 십 분 뒤에 다음 차를 타고 도서관에 
도착하니 그녀는 어제 퇴근하기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태연하게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에 내 방에 다녀간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다른 직원이 없는 사이 말을 붙여도 좀체 대꾸를 하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차라리 교활하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초조한 마음이 되어갔다. 암만해도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서였다. 어제의 일은 이제 깨끗이 잊어버리자는 얘긴가?라는 생각이 
들어 짐짓 몸서리가 쳐졌다.
  지루한 하루가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었건만 그녀는 일어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거겠거니 싶어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나가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일종의 울분 상태가 되어 나는 혼자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와서 
일 년이 넘게 책장에 놓아두고도 뚜껑을 따지 않았던 양주를 물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열한시쯤에 나는 부엌에서 토하고 들어온 다음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의식은 팔팔하게 살아 시간이 갈수록 괴로운 마음이 더해갔다. 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 옆에 붙어 있는 욕실에 들어가 찬물을 뒤집어쓴 다음 파랗게 떨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오니 책상의자에 김은애가 앉아 있었다. 언제 왔는지 그녀는 
방바닥에 넘어져 있던 술병과 안주찌꺼기를 치우고 걸레질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문 닫는 것도 잊은 채 멀뚱하게 서 있자 그녀가 추워요, 빨리 문 
닫아요 하며 팔꿈치까지 걷어올렸던 소매를 끌어내렸다. 나는 얼이 빠져 아무 
말도 못하고 주섬주섬 속옷부터 주워 입었다.
  나는 그녀 옆에 비스듬히 누워 아직도 알알한 배를 문지르며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새삼스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제만 해도 
마침내 사랑이 시작됐다, 라고 어설프게 믿었던 마음 한구석에 어느덧 
의구심이 싹터 있었다. 나는 쉽사리 그녀에게 손을 가져가기가 힘들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나는 슬쩍 고개를 들고 
어둔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슬금슬금 내 앞자락을 
열고 들어와서는 어제 타고 남은 불씨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혼돈, 망설임, 
흥분의 상태를 차례로 겪으며 나는 아직도 의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그러나 나를 향한 상대의 감정이 진실일 거라는 믿음에 나를 맡기고 그녀의 
몸짓에 화답했다. 그녀의 몸은 단 하루 만에 서른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자란 
이런 것인가. 그녀가 꿈에 쫓기듯 숨가쁘게 내 안으로 달려들어와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멈칫멈칫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입을 통해 단 
한마디라도 속내에 있는 말을 듣고자 몸부림쳤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혀를 깨물고 있는 듯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저 자신도 미처 찾아내지 못한 어두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뭔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이 분명했다. 말을 하기에는 아직도 여러 가지가 
불투명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왜 앞뒤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다음날도 그녀와 나는 똑같은 방법으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한 다음에는 
내가 먼저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기다렸다. 월수금, 그리고 토요일 밤에 
그녀는 그렇게 내 방으로 왔다. 그러고는 여전히 말을 삼가며 육체만을 열심히 
나눴다. 어쩌다 새벽에 깨어나 등을 돌리고 잠들어 있는 그녀의 벗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한없이 서글픈 생각들이 몰려왔다. 그녀의 쳐녀와 나의 
동정을 예물처럼 맞바꾼 날로부터 나는 그녀와의 결혼을 거의 당연하게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해야 옳았다. 그래, 결혼. 이런 간첩 잡는 식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떳떳하게 사람들에게 알리고 남들처럼 신혼 여행도 
다녀오고 아침엔 출근도 같이 하는 거다. 아침뿐만이 아니라 저녁에도 함께 
집으로 돌아와 시장도 보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공휴일에는 일찍 일어나 
공원에서 하이킹도 하고 아닌게아니라 63빌딩 전망대에도 올라가 보고 
영화관에도 음악회에도 가보는 거다. 요컨대 구체적으로 살아보는 거다. 때가 
되면 아이도 낳고 말이다. 이런 갖은 생각에 휩싸여 있다가 나는 자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어보았다.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는 뒤에서 그녀를 껴안고는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 결혼해. 이제 그만 결혼하자구."
  그녀는 여전히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그녀는 정녕 잠이 들어 있었던 걸까? 
그렇게 무심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한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내가 스탠드의 불을 끄고 
이불을 끌어당기려는 참에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아까부터 
깨어 있었던 듯 목소리에도 잠기운이 가셔 있었다.
  "동우 씨, 제가 무슨 말인가를 할 때까지 기다려줘요. 자꾸 보채지 말구요."
  "..."
  "어쩐지 저는 누구의 상대도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선 그런 
마음에서 헤어나야잖아요.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상태 알아요? 어느 날 문득 저는 제 자신을 잃어버렸단 생각이 든단 
말예요. 늘 전생을 복습만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단 말예요. 그래서 끔찍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단 거예요."
  그렇다. 그녀는 끔찍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정열이 있겠어요. 저는 지금도 눈 내리는 밤길을 마냥 혼자 
걷고 있어요. 현실인 저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날인가 
밤늦게까지 불켜진 집이 보여 저는 그리로 들어가 봤던 거예요.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거기가 바로 동우 씨 집 마당이었구요. 우연하게도 
말예요."
  "..."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용서해줘요."
  "여기가 당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별로 아늑할 건 없지만 그래도 
당신을 원하고 늘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잖아."
  "전 당신에 대한 제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 기다려줘요."
  "기다리기야 하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어째서 그런 거지?"
  "..."
  "무슨 말을 하고 싶냐면, 그렇다면 은애가 왜 지금 나와 함께 있는냐 하는 
거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나는 가급적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어느 날 깨어 보니 제가 눈이 가득히 내린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거였어요. 교통 사고를 당해 뇌를 다친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 보였던 거죠. 제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어쨌든 캄캄한 데서 눈을 
뜨니 앞에 하얀 등성이만 첩첩이 가로놓여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 여기가 
세상의 끝이로구나, 죽음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죠. 안 그래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어제 저기서 죽은 내가 오늘 여기에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예요. 현실인 나로부터 격리된 채로 말이죠."
  알 듯도 했지만 나는 모르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녜요, 사람이란 분명 그럴 때라는 게 있는 거예요. 우선 자기 자신에 
관해서 실제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때가 말예요. 그러고 나선 죽곧 정령처럼 
떠돌게 되는 거예요. 그 대답을 구할 때까지 말예요. 동우 씬 아직 몰라요. 
일테면 저를 원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제가 누구라는 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저 자신을 제가 모르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긴 하지만요."
  "여기 있는 게 안심이 안 돼? 나와 함께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우니 
누구도 서로에 관해서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는거야. 그런 건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깨달아가는 거라구."
  "그게 아니에요. 지금의 저는 본래의 제가 아니란 데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 나를 두고두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더 말을 시키면 그녀나 지금 내 팔에 안겨 있는 그녀가 홀연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귀에 송곳처럼 꽂혀들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삼월이 끝나갈 때까지 그녀는 화목, 일요일을 제외한 날에 어김없이 
내 집에 찾아왔다. 손님 아닌 손님으로 매번 그렇게. 그때마다 라고 해야 
옳겠지만 그녀는 거의 매일 내게 섹스를 요구해왔다. 내 마음은 점점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결혼은 고사하고 속된 말로 동거도 아닌 이런 생활을 더는 
견딜 성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언제든 그녀가 
내게 닻을 내리기만 하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와 
사람들이 속해 있는 세계에 그녀를 끌어들이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토요일이면 그녀와 함께 영화관이나 예술의전당, 서초동 꽃시장, 서울대공원, 
남대문 시장, 잠실야구장, 심지어는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데를 부지런히 
데리고 다녔다.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매양 말이 없고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녀는 매사에 
무관심했고 도대체 어떤 일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다. 끔찍한 나날들이었다. 
어떤 때는 나를 의식하는지 부러 수다를 떨거나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남들이 봐도 다 눈치챌 정도였다. 그녀도 
그런 자신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육교를 건너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괴성을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경찰서에서 둘이 지문을 찍고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얼핏 그녀의 눈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보고 있었다. 인형의 눈에 고인 눈물. 죽은 나무에 삼 년 
동안 물을 줬더니 싹을 튀우더란 영화가 있다더니.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그녀는 서서히 내 집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쳤다고 해서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돌처럼 눈귀를 막고 앉아 매일 밤 늦게 까지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벽 속의 미라가 되어.

  6
  아무런 약속도 없이 어수선한 봄이 찾아오고 땅속이 부드럽게 풀어지기 
시작하는 사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된장과 고추장, 
밑반찬 등속을 보따리에 싸들고 한복 차림으로 올라왔다. 그날 저녁 방을 
치우다 어머니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루주와 분홍빛 머리빗을 발견했다. 
그때는 아무 말이 없던 어머니가 걸레질을 하다 말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방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올리면서 석연찮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어라 하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어머니는 방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 계셨다) 
형광등을 껐을 때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묘한 여수가 느껴졌다.
  "에미한테 보이지도 않고 여자를 방에 들이다니."
  "..."
  "어디서 그렇게 함부로 질러가는 법을 배웠더냐."
  "..."
  "다시는 예 오지 않으련다."
  그게 아니에요. 눈 오는 밤 마당에 나가보니 웬 나그네가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그럴 때는 서둘러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아랫목을 내줘야 
하잖아요. 그렇게 저한테 가르치셨잖아요.
  그러나 내 입에선 함부로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만 자거라."
  그 사람은 어쩌다 하룻밤 묵어가는 손님였나봐요. 우린 어떤 땐 엽전이나 
받는 주막이 되기도 하나봐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뒤란으로 돌아가 가마솥의 
물이나 끓이는 수밖에요.
  다음날 아침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도 어머니는 어떻다는 말 한 마디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엔 방바닥에 머리카락을 흘리고 간 여자와 헤어지게 되는 
날에는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뜻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짐을 챙기면서 어머니가 
지나가는 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한번 데리고 내려오든지."
  정오에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봄이 가기도 전에 땅바닥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목련과도 같았다.
  월요일 아침, 여느 날보다 일찍 출근해서 나는 김은애를 기다렸다. 출근 
시간 전에 그녀가 도착하면 휴게실로 불러 무슨 말인가를 한 작정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며 그녀를 기다리는 사이에 그런 금세 아홉시가 
돼버렸고 그녀는 복도의 괘종시계가 댕댕거리는 소리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점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렇게 눈치를 주며 틈을 
노렸건만 다른 사서와 함께 훌쩍 밖으로 나가버렸다. 퇴근 때에는 약속이 
있다면서 여섯시가 되기가 무섭게 핸드백을 들고 먼저 자리를 떴다. 창 밖의 
연둣빛 플라타너스 한 그루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다가 나는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실 요량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 내 손으로 밥을 챙겨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가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버스가 세 정류장쯤 갔을 때 나는 옆에서 누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낯 모르는 사람이 아닌 그 누군가가... 상대의 숨소리, 
서로 밀착해 있지 않아도 느끼게 마련인 공기의 익숙함, 괜히 부자연스런 
몸놀림, 말을 걸어올 듯 말 듯한 망설임의 한없는 지연... 얼마간을 버티다 
나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어쩐지 눈에 익은 여자의 얼굴이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아니, 서하숙이 거기 서 있었다. 전과 달리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작년 가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초라한 몰골이었다. 어쩐 
일이죠?라고 반사적으로 물으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눈을 옆으로 돌렸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다니 놀랍군요. 그것도 버스 안에서 말입니다."
  이제나저제나 별로 반가울 것은 없었으나 어쨌든 뜻밖인 만남이었다. 여전히 
대꾸를 않고 실실 웃고만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얼핏, 그녀가 나를 일부러 
찾아온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도서관 앞에서부터 줄곧 
버스를 함께 타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물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얄지 몰라 눈만 꿈벅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말을 건네왔다. 
  "저 밥 좀 사줘요. 실은 차비가 없어 며칠째 밖에도 나오지 못했어요. 
전화는 벌써 떼갔구요."
  뭐라고?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버스 안에 서 있단 말인가. 그 배추잎사귀 
같던 위조 지폐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되려 내 얼굴이 붉어져 나는 시내로 
나가는 중간쯤에서 그녀를 데리고 내렸다. 그러고는 식당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밥부터 먹였다. 허겁지겁 불고기 삼인분을 해치우고 냉면까지 한 그릇 다 
비우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이 돌아오는지 또 히죽 웃어 보였다. 
  "오래간만에 포식을 했더니 머리가 다 어지럽네요."
  "어째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대뜸 반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욕하고 있는 거예요? 겨우 밥 한끼 사주고선."
  "어쩌다 사정이 이렇게 까지 됐냐는 거지."
  "상관할 것 없잖아요? 그렇다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거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지만, 이젠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누가 그러고 싶지 않아 이러고 다니는 줄 알아요? 어디 받아주는 데가 
있어야 말이죠."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소주 세 잔을 거푸 들이켰다. 아닌 말로 술까지 
고팠던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근처 생맥주집에서 오백 시시를 약 열 잔 
정도(나는 세 잔 정도)를 마시고 나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마실 기세였다. 이미 
밤 열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손님이 별로 없던 썰렁한 술집 
한구석에 앉아 그녀는 한심한 소리만 내둥 지껄여댔다. 정자 표시가 늘어나는 
계산서를 들여다보며 이 돈이면 라면이 몇 개일 텐데, 전화를 몇 통 걸 수 
있을 텐데, 하는 식이었다. 알고 보니 차비도 공중전화를 거는 사람한테 
구걸한 것이었다. 어쨌든 나를 만나 할 소리는 아니었다. 정각 열한시가 되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하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이런 말을 
내 뱉었다. 
  "생각나요? 비 오는 날 우리 야식집에서 나와 공사장의 하수관 속에 들어가 
있던 일 말예요." 
  "...그래, 비가 많이 왔었지."
  "다시 하수관 속에 들어가 보고 싶지 않아요? 멋있었던 것 같지 않아요?"
  알면 알수록 요령부득인 여자였다.
  "그 하수관은 벌써 땅속에 파묻혔을 거야."
  "아, 그렇겠네요. 땅속에 들어가 있겠네요."
  푹 꺼져가는 소리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는 생뚱한 눈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피하며 나는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며 뒤미처 김은애 생각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중인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나는 다시 서하숙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했고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도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술집 계단을 올라가며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라며 우수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r 
말에 뒷덜미가 잡혀 나는 술집 앞에서 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도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술집 계단을 올라가며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 라며 우수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말에 뒷덜미가 잡혀 나는 술집 앞에서 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가야지. 택시비를 줄 테니까 곧장 들어가 잠부터 푹 자두라구. 
그리고 아침이 되면 벌떡 일어나 앞마당을 파고 거기다 발목을 묻는 거야.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다만 이렇게 사는 게 원칙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해요. 왠지 슬프다는 생각도 들구요."
  "누구나 슬픔의 힘으로 살아가는 거야."
  "멋있는 말이군요. 제가 사람을 제대로 보긴 봤던 거예요. 
  네온사인 불빛이 얼룩진 거리에 유리파편 같은 바람이 수평으로 낮게 
불어가고 있었다. 
  "지금 땅에 묻힌 하수관 속으로 하얀 돌고래들이 지나가고 있어요. 아마도 
바다로 가는 중인 모양이에요. 고래들은 참 좋겠어요."
  "..."
  벌써 술집 문닫는 소리가 아래서 들려왔다. 
  "저. 실은 할말이 있어서 왔는데요. 말해도 돼요?"
  "해봐. 나도 이제는 가봐야 하니까."
  "...혹시 애인 없으면 저를 애인으로 삼으면 안 돼요? 오늘부터 당장 
말예요."
  "..."
  "왜, 싫으세요?"
  "내겐 누군가가 있어.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여자가 말이야."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군."
  "그렇죠?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해야겠죠?"
  물론 이었다. 
  "이봐, 연애라는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감정이란 게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거야. 리트머스 시험지 처럼 말이야."
  나도 잘 알겠어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또한 그런 말을 할 처지도 못 됐다. 
  "그래요, 저는 누군가가 이미 사용하고 난 영화표 같은 여자예요. 그러니 
거기에 무슨 찬란한 색깔이 스미겠어요."
  집으로 돌아오니 김은애가 와 있었다. 어째서 일이 이런 식으로 되어가야 
하는 걸까. 방문 앞에 벗어놓은 검은색 구두의 반질한 머리가 바깥을 향해 
있는 것부터가 우선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도 신발을 벗으면 반드시 당신 
손으로 거꾸로 돌려놓은 다음에야 방을 들어가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참 
이상한 것도 다 닮았네,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동안 신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은애가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린 적이 없었으므로 방문을 
여는 손이 암만해도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찍 들어와 
있었어야 하는 건데,라고 생각해봐야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김은애는 노름판에서 주머니를 몽땅 털리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자격지심이지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엇다. 
확실히 그녀는 불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제 왔느냐,라는 
심상한 물음도 목에 걸려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거북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나의 태도 때문에 그녀는 더욱 도사린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못돼 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옷을 벗어 
못에 걸고는 그녀 앞에 서먹하게 마주 앉았다. 그녀는 바바리도 벗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십오 도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풀려 
내려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데면하게 마주앉아 내 입에서 겨우 
비져나온 소리도 그리하여 억양의 명료함을 잃고 기분 나쁜 느낌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로군, 그렇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에서 바늘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직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나는 한시바삐 미궁에서 빠져나오려고 고개를 내둘렀다.
  "나 때문이라면 사과할게."
  "동우 씨가 제게 뭘 잘못했는데요? 그것도 모르고 사과를 한단 말예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말예요? 그래요, 동우 씨가 집에 없어서 
화가 났어요. 제가 왜 이런 낯선 곳에서 누구를 기다려야 해요? 두 시간 동안 
여기 앉아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긴 해요?"
  그녀는 단지 내가 집에 없다는 이유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것만은 결코 아닐 거였다. 그런 
일을 가지고 화를 낼 만큼 분별력이 없는 여자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역시 제가 길을 잘못 들었던 거예요."
  "!..."
  "미안해요. 이런 말까지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이 아니란 건 아녜요. 물론 동우 씨 탓만도 
아니지만요."
  내 탓이 아니라고 강변할수록 나는 내게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얼핏, 그녀와 나 사이에 곧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싸늘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다급한 마음이 되어 나도 그녀에게 강변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냐, 내가 무심했던 탓이야. 하지만 때론 당신을 혼자 있게 놔두는 것이 
거꾸로 당신을 내게 붙잡아두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내 말이 억지라고 
해도 그건 진심이야."
  "하지만 그사이에 저는 마음을 다치고야 말았어요. 저 같은 여자는 한번 
마음을 다치게 되면 쉽게 회복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침착하려 애써도 내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려나오고 있었다. 불과 두 
시간 동안에 세상이 뒤죽박죽으로 변해버린 듯싶었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더 이상 남의 빈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예요. 
차라리 길에 앉아 밤을 새우는 게 나아요."
  "그렇지가 않아, 여기 내가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잖아. 당신 곁에 
말이야. 아직도 그걸 모르겠으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 내가 대신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보낼 수 없다는 마지막 강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곧바로 방문을 열고 나가더니 구두를 신고 천천히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나 나는 감히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삼 일, 그녀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는 억지이다시피 
도서관 옆에 있는 찻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거기서 나는 세상 한편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손도 대지 않고 놓아둔 그녀의 커피잔 안쪽 
가장자리로 덜 풀린 크림 가루가 엉겨붙고 있었다. 도서관 입구에 서 있는 
목련 한 주가 탐스런 꽃송이를 달고 바람에 떨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 오기 전에 그녀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가리라 생각했던 다짐이 
헛소문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 산다는 일이 헛소문 같은 것이었다니.
  "엊그제 동우 씨 집에 간 그날, 저 산부인과에 갔었어요."
  "!..."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안 것은 한 달 전이었어요.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니 이제는 더 말하지 말아요. 이런 
기억을 안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로를 대할 수는 없는 일예요."
  "감히..."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녀의 얼굴만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맨주먹으로 바위라도 치고 싶었지만 벌써 달아나버린 
일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생명의 비의와 섭리를 거역한 자가 
되었다니. 한 순결한 영혼을 무참히 짓밟은 자로 전락해버렸다니.
  이유야 어떻든 나는 그녀를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 말마따나 서로에 
대해 이미 자신을 잃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관계가 지속되길 바랄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날이 자괴심만 쌓여갈 뿐이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찻집에서 만나고 며칠인가 지나서부터 그녀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무단 결근이 삼 일째 계속되던 날 나는 그녀가 도서관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서한테서 전해들었다. 사월 중순도 끝나가는 
곡우였다.

  7
  입하가 지나고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가 또 덧없이 지나고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도 지나 상강을 이틀 앞둔 어느 늦가을 아침에 나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은 세상의 모든 등불이 꺼진 것만큼이나 
나를 캄캄하게 만들었다. 나도 흙을 파고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워낙에 깔끔하고 정정한 양반인데가 이제 환갑을 갓 넘겼을 뿐인 
나이였으므로 나는 몽매에도 어머니의 죽음 따위를 미리 염두에 두고 산 적이 
없었다. 내 살아 있음의 유일한 증거였던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그때는 그래도 어머니가 옆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단지 외롭다는 이유 때문에 어린 나를 방에다 가둬놓고 천천히 소주를 
들이키며 말없이 매질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섧게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내가 
완전한 무로 화해 세상에서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이제부터 증거도 
이유도 없는 삶을 어찌 살아낸단 말인가. 아, 다름아닌 어머니조차도 남들처럼 
한갓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나는 점점 더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열람실 
벽시계는 열심히 추를 흔들며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을 지나고 
입춘, 우수, 경칩을 거치면서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다시금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탓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으로 인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라졌던 
탓이었으리라. 우선 나는 내 녹내 나는 생활에 심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도서관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에 매일매일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몇 세기 
전에 죽은 동물의 빳빳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길므을 끼얹고 
몸에다 불을 그어대고  싶은 권태스런 날들이었다. 나는 구체적으로 
'변화'라는 걸 원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른바 변화라는 게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논바닥 한가운데 몇 백년이나 
박혀 있던 바위를 맨손으로 들어내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었다. 
  내가 직장을 옮긴 것은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논바닥의 바위를 빼내는 데 
상상도 못했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음이었다. 와중에 나는 체념을 하기도 
하고 준사서에서 사서로 승진하는 바람에 한동안 다른 생각은 접어둔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나는 도서관 일에 곧잘 게으름을 부리며 이 
수용소 같은 갑갑한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열심히 기회만 엿보고 이었다. 
평소에 소원했던 사람들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말이다. 어쨌든 나는 좀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은 복잡하고 구차스런 절차를 거쳐 나는 우여곡절 끝에 직원이 만 명도 
넘는 대그룹의 조사부에 입사했다. 도서관에 근무한 이력이 있었으므로 그닥 
낯선 일은 아니었다 주로 그룹 기조실이나 홍보실, 혹은 계열사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를 제공해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규 사업의 시장조사를 맡아 
해주는 부서였다. 나는 그 부서의 중간관리자급으로 채용됐다. 
  나는 세상 살아가는 방법과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빨리빨리 
터득해갔다. 때로 부하 직원에게 허튼 농담을 던져보기도 하고 계열사 
여사원들과 심심찮게 술자리를 같이하기도 하고 이른바 고급 술집이라는 데를 
출입하며 하루에 한 달 치의 월급을 날려보기도 하고 좀 늦은 나이긴 했지만 
결혼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는 일이 많아져서 이른바 맞선이라는 걸 
보기도 하고 턱없이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들까지도 함부로 눈여겨보곤 했다.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한 증거를 부지런히 늘려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뒤늦게 
인생이란 걸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술에 취해 들어와 
어둑한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서, 바위가 빠져나간 논바닥의 캄캄한 환영을 
목도하며 까닭 모를 적막감, 고독감에 사로잡혀 몸을 떨곤 했지만 말이다.
  
  8
  내가 서하숙을 만나게 된 것은 도서관을 그만두기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시사 저널사 건너편에 있는 '비스'란 이태리식 찻집 겸 술집에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경향신문사 앞 건널목에서였다. 그녀는 덕수궁 쪽으로 가던 
길이었고 나는 비스란 술집 옆에 있는 고려병원으로 누군가의 병문안을 가던 
길이었다. 오후 세시쯤이 아니었나 싶다. 전날 낼니 눈으로 기랍닥은 질펀하게 
변해 있었다. 아무튼 내가 경향신문사 앞을  막 지나가는데 정면에서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여자가 결어오고 있었다. 아는 얼굴, 이라고 퍼뜩 생각했지만 
그 순간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며 내처 그 여자 옆을 비껴 지나갔고 그때 그녀가 주춤하고는 내 
얼굴을 슬쩍 돌아봤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녀도 자신이 없었던지 곧바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상대가 생면부지인 경우라도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어쩌다 전에 만났던 사람이었다고 해도 사실 사정이 
달라질 건 없다. 막역한 사이가 아닌 이상 뒤를 쫓아가서 멋쩍게 아는 체를 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십중팔구 실없어 보일 게 뻔한 일 아닌가.
  한데 건널목을 건너려고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이 내 귀에 이런 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저어, 혹시 황동우 씨 아니세요?"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주저하는 모습이었지만 여자는 분명히 나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나도 그녀가 누군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에 
어디서 본 여자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쉽게 말해 
그녀의 이름 따위는 고사하고 성마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 
네... 하고 내가 어수선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녀가 입술만으로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저 모르시겠어요? 서하숙이에요, 라고 제 이름을 밝혔다.
  기러기 하숙 서하숙. 실로 몇 년 만인가. 
  오후 세시의 비스는 한산했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듯한 그 언덕 위의 하얀집 
일층 창가에 앉아 그녀와 나는 커피를 마셨다. 모두가 까마득한 옛날 일 
같았다. 그녀가 나를 알아봤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단발형의 
머리는 여전했지만 눈가의 잔주름과 기미? 혹은 주근깨가 귀밑에 까려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지만 표정이라든가 몸놀림,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기묘하게 변해 있었다. 세월이 흘렀단 뜻일 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눈 둘 
데가 마땅치 않아 나는 하얗게 기운 창 밖 풍경만 시린 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자리가 불편했던지 자주 몸을 꿈지럭거렸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이 그저 밋밋하기만 했다. 다소 미묘하단 느낌 정도가 
고작이었다. 오후 세시라는 어중간한 시각에 느닷없이 만나게 돼서 그런걸까? 
저녁이었다면 술이라도 한잔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필시 분위기도 
달라졌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오랜 
세월의 틈이라는 게 그렇게 일시에 메워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와 
나는 탁자 위에 떨어져 힘이 풀어져 있는 햇살을 손끝으로 먼지처럼 쓸어내며 
어쩔 수 없이 의례적인 말들을 나눴다. 
  "아직도 도서관에 근무하세요?"
  "어쩌면 다른곳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어디냐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슬쩍, 내 눈을 한번 쳐다보기만 했다. 
  "전 술병을 만들고 있어요. 술병 디자인하는 일 말이죠. 물론 국산 위스키 
병이짐나 말이죠."
  아, 위스키... 하고 되받으며 나도 그녀의 얼굴을 한번 스윽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해성사라도 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주섬주섬 위스키 병 얘기를 
늘어놓았다. 가령 브리타니아란 위스키가 있는데 이것은 구영국제국의 
별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영국 주화에 새겨진 여신상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는 '영국의 연인'이란 뜻이다. 스프링뱅크라는 위스키 병의 모양은 
책처럼 생겼다. 글렌피딕이란 위스키의 이름은 '사슴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런 얘기를 한동안 듣고 있자니 조금은 지루하고 답답하단 
느낌이 몰려왔다. 자꾸 말을 더듬는 걸 보면 그녀 또한 그간에 달라진 나를 
보고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먹한 마음은 더해갔고 그리하여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자꾸 굳어만 갔다.
  "결혼은 했어요? 이젠 그만한 나이가 됐을 텐데."
  다시금 그녀의 눈이 내 눈을 잠깐 스쳐갔다.
  "글쎄요. 저 같은 여자를 누가 데려가게요."
  "..."
  "못했다고 해야 맞아요. 어디 헌 거라도 있으면 찾아봐얄 텐데요."
  상스럽다고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헌 거라면 역시 나도 헌 것일 터였다. 오후 네시가 될 때까지 
이런 속절없는 얘기를 나누다 그녀와 나는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선을 보러 나왔다가 떨떠름하게 끝을 내는 
꼴이었다. 찻집을 나오면서 나는 그녀와 63빌딩에 갔던 일, 야식집에서 술을 
마시던 일, 하수관 안에 서 있던 일들을 속속들이 반추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모두가 때늦은 기억이었다.
  그녀와 나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고려병원 앞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녀는 망설이는 얼굴로 핸드백을 열고 내게 무언가를 꺼내주려 
하다가는 도로 닫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명함 같은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다시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전처럼 무턱대고 
나를 찾아오거나 어둔 처마 밑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인이 되자는 따위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빌딩숲 사이로 기우는 햇살이 그때 내 눈에 
쏟아져 들어왔으므로 나는 실눈을 뜨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다음 병원 건물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병원 외벽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이층에서 삼층으로 올라가다 말고 나는 홀연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녀는 아까 내가 지나왔던 경향신문사 앞을 거꾸로 짚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9
  나는 춥고 캄캄한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누가 나를 거기로 
불러들였는지 알지 못한 채. 사위는 바다 밑바닥인 듯 온통 코발트빛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내 손에는 불과 오 분 전에 읽다 만 잡지가 들려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가. 열람실에서 책을 보다 말고 나는 급한 전갈을 받은 사람처럼 
이곳 창고로 달려 내려왔던 것이다. 그곳엔 이제 곧 사라져야 할 것들. 아니 
이미 사라진 것들이 차곡차곡 잠들어 있었다. 나는 창고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내셔날 지오그래픽'이란 잡지를 다시 넘겨 보았다. 
그것은 '지구에 관한 진실'을 전하기 위해 미국 국립 지리학회가 1888년부터 
발간을 시작한 책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처음 증명하고 
바닷속이나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을 최초로 게재한 것으로 유명한 책이기도 
했다. 거기서 아까 나는 두 개의 사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북극해에 살고 있는 돌고래를 찍은 사진이다. 해안 가까이에 있는 
연초록의 바닷물 속에서 하얀 돌고래떼가 흰 무처럼 떠서 유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곧 이 지구의 주인이기나 한 양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 옐로스톤 지대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들소의 사진이다. 
벌판에 분필 가루처럼 내리고 있는 들소의 사진이다. 벌판에 분필 가루처럼 
내리고 있는 눈. 멀리 성냥개비를 꽂아놓은 것 같은 헐벗은 숲엔 가득히 눈이 
내리고 있다. 그 먼 곳으로부터 웬 들소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들소는 온통 눈에 뒤덮여 있다. 길을 잃은 듯, 들소는 내 방문 
앞까지 와서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윽고 그대로 멈춰 선다. 그러고는 
영원해... 움직일 줄을 모른다. 누가 문을 열고 나와주기를 기다리는 듯, 누가 
저를 스치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 
  도서관을 그만두던 그날 나는 오후 내내 지하 창고에 앉아 있다가 여섯시가 
돼서야 광부 같은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텔레비전 속은 너무 캄캄해, 라고 중얼거리며.

  수상후보작
  서유기
  고종석
  저 바람 속 어디엔가
  김병언
  베를 가르다
  김영하
  조동관 약전
  성석제
  사람의 성분
  이윤기
  젖은 골짜기
  이혜경

  서유기
  고종석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법학과 졸업. 현재 '시사 저널'파리 주재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작품 '기자들' '제망매'

  서유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기의 신호음을 죽여놓는 것은 내 오랜 버릇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게 되는 것이 끔찍해서다. 전화 코드를 아예 빼어놓는 
것이 가장 탐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것은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을 준다. 이 세상 
안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동응답기를 통해서라도 바로 그 세상과 통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날 밤 엉망으로 취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몇 
시간 뒤에나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전날 밤에 엉망으로 취해 집엘 들어왔고, 
그래서 전화기의 신호음과 응답기 소리를 죽여놓는 것을 깜박 잊었다. 그것도 
운명이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을 때 나는 우선 짜증부터 났다. 그 전화를 건 
누군가에 대해서 살의까지 생겼다. 물론 나는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제발 
전화선 저쪽의 누군가가 마음을 바꿔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바라며, 전화벨이 
다섯 번째 울리자마자 응답기가 작동됐다: "봉주르, 주 부 르메르시 드 보트로 
아펠. 레세 앵 메사주. 실 부 플레. 안녕하세요. 전화 고맙습니다. 메모를 남겨 
주십시오."
  비몽사몽간에 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화기 저편의 누군가가 이제야말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과감히 수화기를 내려놔! 삐 소리가 
울렸음에도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래, 그래, 전화기를 내려놔. 그러나 그 
휴지는 잠시 동안의 망설임일 뿐이었다. "저, 내 목소리를 잊은 건 아니죠? 
지금 북역 안의 르보레라는 카페테리아에 있어요. 지금이 오전 아홉시 
십오분인데 열한시 반까지는 여기 있을 거예요. 한번 봤으면 해서 전화했어요. 
잠깐만이라도요. 사실 내가 시간이 없기도 하고요. 열한시 오십분 기차로 
파리를 떠날 참이에요. 이 메모를 듣게 되면 북역으로 나와줬으면 좋겠어요. 
끊어요오."
  여자는 수화기를 놓았고, 그 순간 나는 다시 잠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내가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4년 
만에 듣는 목소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살을 
맞대고 살았다. 우리는 '89년 6월에 결혼해서 '92년 8월에 이혼을 했다. 
이혼하기 전 6개월 정도는 따로 살았지만, 결혼하기 전 6개월 정도를 함께 
살았으니 세 해 너머를 함께 산 것이다.
  나는 윗몸을 일으켰다. 나무 덧창의 틈을 비집고 겨울 햇빛이 침대 위로 
세어들고 있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팠고, 목은 뭔가 차가운 액체를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하스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북역으로 
나갈까말까에 대해 잠시 망설였다.
  "르펜이 암살당했대?"
  내 쪽으로 몸을 돌린 하스나가 내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24년의 프랑스 체류가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그녀의 아랍어 악센트가 
그랬더라면 밍밍했을 그녀의 프랑스어에 돋을무늬를 새기며 내 욕정을 다시 
자극했다. 여느 때처럼. 그러나 나는 내 몸 속의 짐승을 을러대며 단지 그녀의 
왼쪽 귓불만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그 친구는 건재해. 하스나 아야타가 아니면 누가 르펜을 죽일 수 
있겠어?"
  "실은, 그 자식을 목 졸라 죽이는 꿈을 꾸다가 깼어."
  "거꾸로겠지. 아마?"
  "아냐, 그 늙은 도살에 비하면 난 아직 젊고 힘세."
  "그 늙은 도살자와 상관없이 넌 아직 젊고 힘세."
  "그대의 아부는 늘 날 기분 좋게 간지럽혀."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흥얼거렸다. 그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이 계속 
내 배를 간질이고 있었다.
  "나,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바닥과 등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내가 말했다.
  "늦을 거야?"
  "그렇지 않을 거야, 아마. 그저 잠깐 동안 내 영혼의 벗을 만나게 될거야"
  "그대 육체의 벗을 버려둔 채 말이지?"
  "같이 갈래? 내 영혼과 육체가 둘다 행복해지도록 말이야."
  나는 빈말로 물었다. 그 말에 하스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정녕 그러고 싶지만 내겐 잠이 더 필요해."
  나는 기지개를 한번 활짝 켠 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정오 이전에 
세면을 하지 않는 것도 내 오랜 버릇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굳이 거울 
갚에 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서른네 살 때까지 서울에서 나오는 한 영문 일간 
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나는 그 신문사에서 아내를, 아내가 될 여자를, 지금은 
전 아내가 된 여자를 만났다. 동료로서, 서울을 떠난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그녀와의 이혼이었다. 결혼했다가 이혼한 사람끼리 한 직장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즉시 직장을 떠났는데, 직장을 
떠난 김에 아예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아내가 있는 서울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꼭 그 이유만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서울을 떠난 것이. 
이혼이 그럴싸한 핑곗거리가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이혼 여부를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먼 곳에 대한 동경을 늘 키우고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좀더 밝은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밝은 삶이. 가난도 억압도 없는 삶이. 나 
자신의 가난과 억압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난과 억압 말이다. 다만 
얄ㄱ은 것은, 내가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 그 도시가 그 오랜 가난을 
말끔히 씻어내고 그 오랜 억압에서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한 뒤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서울의 가난과 억압이라는 것조차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회 전체의 가난이나 억압이라는 것을 떠나서 내게는 
개인적인 불행 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불행의 책임이 내게 있든 내가 
서울에서 알던 사람들에게 있든 말이다. 나는 어쨌든 내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이혼이라는 것은 그 과거를 지워버리는 계기로서 얼마나 
그럴듯한 것인가.
  굳이 파리로 오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이래 이 도시에 대해 지니고 있던 
막연한 선망 때문이었다. 대학에서의 내 전공도 불문학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프랑스로 유학을 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런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내 공부를 더 이상 뒷바라지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혹 다행스럽게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공부를 해서 뭐가 될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 그런 유혹을 물리치게 했다. 
그래서 나는 신문사엘 들어갔고, 결국 일곱 해 뒤에야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서였지만.
  일곱 해 동안 영어로 기사를 써서 밥을 먹고 살았으므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갔다면 먹고 살기는 지금보다 더 수월했을 것이다. 사실 파리에서 네 해를 산 
지금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은 내게 여전히 힘들다.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산다고 하더라도 내 프랑스어가 유창해 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네 해를 
영국이든 미국이든 호주든 영어가 쓰이는 나라에서 보냈더라면, 내 영어는 꽤 
쓸 만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아쉬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다지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케미 슈즈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인상깊게 보고 들은 
에펠탑과 파리의 하늘 밑이라는 노래가 떠올랐고,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과 
레지스탕스와, 앞에 신자나 반자가 덧붙은 사학^5,23^철학^5,23^소설^5,23^연극, 
그리고 구조주의^5,23^해체주의^5,23^탈근대주의 같은, 내가 그 실체를 전혀 
모르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개선문'이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같은 소설들에 대한 
기억도 외국인으로서 파리에 사는 것이 꽤 낭만적이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내게 그럴듯하게 생각된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은 대체로 파리를 
거쳐간 사람들이었다. 나탈리 바니와 에즈라 파운드를 시작으로 헨리 밀러,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토마스 스턴스 앨리엇, 제임스 조이스, 
맨 레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지드니 콕토니 콜레트니 발레리니 피카소니 
브라크니 아폴리네르니 막스 자콥 같은 사람들이 그 영미인들과 어울리며 
빚어냈다는 1910년대, 20년대 파리의 특히 몽파르나스의 국제적 분위기가 내 
상상 속에서 재구성되었다. 
  내 상상 속의 그 몽파르나스 풍경은 또 '말리서사'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시인 김수영이 아마도 다소 미화해 묘사한, 해방기 서울의 풍경과 포개졌다. 
김수영은 그 수필에서 해방기의 서울이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김수영이 파리엘 가보지 못한 만큼, 그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도, 내 
몽파르나스 풍경처럼, 김수영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것일 테지만 말이다.
  김수영이 상상한 몽마르트르 같은 분위기, 그가 겪은 해방기의 서울은 
'글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김수영의 그 문장 
속에서 레이맨은 내게 파리를 사랑하다가 파리에서 죽은 미국 화가 맨 레이를 
연상시켰고, 김수영의 그 문장 속에서 저널리스트들이 내게 헤밍웨이를, 
그리고 특히 재닛 플래너라는 미국 여자를 연상시켰다. 재닛 플래너라는 
이름의 여기자가 '뉴요커'지에 '파리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50년 간이나 연재했다는 얘기를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파리로 왔다. 헤밍웨이나 재닛 플래너처럼 파리의 영어 사용자가 되기 위해서.
  물론 내가 헤밍웨이도 재닛 플레너도 될 수 없다는 것으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았다. 노력해서 나도 그들만큼 다부진 기자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 노력해서, 그들만큼 다부진 기자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또 노력해서, 그들만큼이야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영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내가 노력한다면 미국 국적을 얻을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국적이 아니라 내 갈색 눈동자와 누런 피부였다. 
그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헤밍웨이도 재닛 
플래너도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그러나 물론 파리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소르본 대학 근처 라틴 쿼터에 스튜디오를 하나 얻어 거기다 컴퓨터와 
팩시밀리를 비롯한 각종 현대적 장비들을 비치해놓고 프리랜스 기자로 새 
출발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썼다. 영어와 한국어로. 정치에서 연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다 내 취재 대상이 되었고, 나는 그 
기사들을 주로 런던과 서울의 신문^5,23^잡지에 기고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주간 신문 '더 유러피언'과 서울에서 나오는 시사 주간지 '시사 저널'은 내가 
고정적으로 기고하는 매체지만, 그 이외에도 나는 여기저기 기사를 팔았다. 
기사 청탁을 내 쪽에서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그 결과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나는 혼자몸이므로,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법적으로는 말이다. 
  아내는, 그러니까 내 전 아내는, 본디 미인이었다. 내가 못 본 네 해 동안에 
그녀는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사이에 오히려 더 젊어졌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르보레에 앉아 있는 여행자들 가운데 그 누가 그녀의 얼굴에서 
서른다섯의 나이를 읽어내랴. 그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파이낸셜 
타임스'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바로 그 모습이었다. 편집국의 자기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기자의 모습. 나는 열덟 해 전에 
바로 그 모습에 홀렸었다. 무언가를 읽으며 담배를 피울 때의 그녀의 표정. 
그녀의 손 움직임에는 뭔가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있다. 그녀르 만나는 것이 어쩌면 어색할지도 
모른다는 내 마음 한구석의 걱정은 그녀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처녀였다. 내가 그녀를 허물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지금 뭘 
뽐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성적 봉건주의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섹스라는 것을 그저 
심심풀이를 위한 전자 오락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처녀와 잤다는 것은 내게 
뽐낼 일도 수치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처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그녀가 담배를 피우며 빚어내는 그 끈끈한 분위기 때문에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스물여덟 살 먹은 여자가 처녀일 거라고 기대할 만큼 
내가 엉뚱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와 처음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그녀가 처녀라는 걸 알고는 무척 놀랐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 역시 그 전까지는 여자를 몰랐다. 학교에 다닐 때든 
군대에 있을 때든 나는 여자를 살 수 있는 그 수많은 기회를 물리쳤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열 살 넘어서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자와 간음을 
했지만 말이다. 그것도 가장 전위적이고 불륜한 방식으로. 그렇지만 막상 
육체적으로는, 뭔가 사건을 벌일 모험심이랄까, 실험 정신이랄까 하는 것이 
내게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아내나 나나, 말하자면 일조으이 푼수였던 셈이다. 
나는 그것이 온전한 과거형이기를 바란다. 
  아내와의 그 첫 밤은 후텁지근한 여름밤이었고, 주말이었다. 속초의 한 
여관에서였다. 우리는 동해를 보기 위해서 속초로 내려갔고, 바다를 본 김에 
서로의 몸을 보기로 결정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방을 쓰기로 하고 옷을 벗기로 한 것이. 아마 말없이 느낌이 전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 밤, 우리들은 얼마나 서툴렀던지... 우리는 둘 다 그것을 원했지만, 
사실 둘 다 상대편한테 깔보일까봐 두려웠다. 처음이라는 걸 상대방이 알까봐 
말이다. 내가 아내의 마음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 서툰 의식이 끝난 뒤에 
그녀가 내게 그렇게 고백했으니까. 우리는 푼수답게 서로의 깔봄과 서로의 
수줍음을 에끼기로 했다. 
  우리는 근황을 주고받았다, 라기보다는 주로 그녀가 자기 얘기를 했다. 내가 
신문사를 그만둔 뒤 넉 달쯤 뒤에 자기도 신문사를 때려치웠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도 어지간히 강한 여자지만, 그 개새끼들의 눈초리를 
맞받아내기가 곧 힘들어지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차라리 내쪽이 신문사에 남아 
있었더라면 덜했을 거라고, 그 개새끼들이 이혼한 남자에 대해서 그런 
눈초리를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게 
사내새끼들만은 아니었다고, 계집애들도 마찬가지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니, 
계집애들이 더하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계집애들이 여자 동료로서 자기를 
감싸주기는커녕 사내새끼들이랑 어울려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얘기를 
하는 눈치를 보이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가 그런 눈치를 느낀 것은 절대로 
무슨 웃기는 자의식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되풀이 말했다. 군사 
파시즘보다 여자들한테 더 무서운 것이 열녀 파시즘이고 정실파시즘이고 
백년해로 파시즘이더라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신문에다가는 페미니즘이 
어떻구 성의 해방이 어떻구 긁어대는 년들이 알고 보니 죄다 서방 콤플렉스, 
순결 콤플렉스, 백년해로 콤플렉스, 열녀 콤플렉스, 정실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년들이더라고 그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년들이 그런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걸 보면 그년들도 행실이 그리 순결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그녀는 
비웃듯이 말했다. 자기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한 해쯤 
뒤에 한 보석 세공업자와 결혼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기의 지금 남편인 그 
보석 세공업자는 나보다 나이는 다섯 살이 위지만 나보다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고 나보다 훨씬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남편도 원하는 
일이고 자기도 원하는 일이어서 자기가 남편 사업을 거들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사업차 앤트워프에 갈 일이 생겨서 유럽엘 오게 됐는데 날 보기 
위해서 일부러 파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날 왜 보려고 
했는지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막상 파리에 
도착하자 내게 전화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서 이틀을 빈둥거렸다고 
그녀는 말했다. 기다란 망설임 끝에 전화를 했고 거래처 사람과의 약속이 
내일이어서, 아까 만일 내가 없어서 날 못 만나게 되었더라도 그냥 앤트워프로 
갈 생각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비행기는 암스테르담에서 
탈 터이므로 다시 파리에 올 일은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전화 메시지를 
듣고 역에 나온 건 자기한테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게 
내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그게 내게도 
다행스럽다고 나는 말했다. 
  "그냥 계속 여기서 살 거야?"
  그녀는 아까 전화에서와는 달리, 날 보자마자 우리가 함께 살았던 때의 
반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트니까, 그녀가 내 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일이지, 뭐.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운명이 결정하는 거니까."
  사실이 그랬다. 미래에 대해서 무슨 계획을 세우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충동에 이끌려서 세상을 더듬거리고 있을 뿐이다. 일 분 뒤에, 한 
시간 뒤에, 하루 뒤에 어떤 자극을 받아 내 신경이 거기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뭐랄 순 없지만, 그만 서울로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사람이 제 
나라에서 살아야지. 얼굴이 상한 것 같아."
  "그건 어제 술을 좀 마셔서 그래. 너랑 살 때도 늘상 그랬지 뭐. 술마신 
이튿날이면 얼굴이 반쪽이 됐다고 니가 핀잔을 주곤 했어. 발붙이고 살면 바로 
거기가 다 내 나라야. 사람들은 다 똑같아.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교활하다는 
점에서. 걸리버 여행기 생각나? 걸리버가 절망하고 혐오한 그 야후들이라구. 
불란서놈들이나 조선놈들이나."
  우리가 이혼하기 전 얼마 동안 우리는 언쟁이 잦았고, 언쟁을 할 때마다 
서로를 야후라고 불렀다. '걸리버 여행기'의 제4부 '말들의 나라'에 나오는 
야후 말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러나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탐욕스럽고 
사납고 불결한 동물. 우리는 서로에게 한 마리의 야후였다. 야후는 다른 
동물들보다 자기 종족을 더 싫어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아직도 염세주의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시는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가볍게 비아냥댄 뒤 웃음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장 세상을 버릴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야후들 틈새에서 살아야 
한다면, 조선 야후들이 같이 있기 더 편하지 않나? 나면서부터 함께 살아온 
익숙함이 있으니까 말이야."
  "나와 똑같은 악취를 풍긴다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 악취가 운명이라면 난 좀더 다양한 악취를 맡고 싶어."
  "말장난 좀 그만해. 여기서 아무리 아등바등대봐야 결국 외국인 아냐?" 
  말장난을 거두라는 그녀의 말은 내게 말장난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떤 말장난에도 진실이 스며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함량이 
문제이기는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외국인이야. 아니 그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나는 어디서나 외국인이야. 이곳 경찰들한테만 외국인인 게 아니라 너한테도, 
그러니까 한국인들한테도 외국인이구, 하느님한테도, 그런 게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 외국인이구, 그래, 나 자신한테도 외국인이야."
  나는 에밀 시오랑의 어떤 문장을 비틀어서 그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내 진실이 담뿍 담겨 있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내가 한민수 어록을 들으려고 파리에 온 셈이군. 정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안 변해? 그 청승은... 그렇다고 여기서 죽으 건 아니잖아?"
  "아니 그럴지도 몰라. 한 해쯤 전까지는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끔찍했어. 몸이 아플 때면 겁이 덜컥 들면서 서울 생각이 났지. 몸은 서울에 
묻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혹시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란서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울 
아닌 다른 데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야. 서울에서 죽어도 죽을 땐 결국 
혼자인 걸 뭐.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날 때도 그렇지."
  그녀가 약간 쓸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서울에 한 번도 안 들어왔었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생각 안 나?"
  "왜, 처음엔 생각이 났지. 고운 생각이든 미운 생각이든. 니 생각하면 미운 
생각이었구 다른 친구들 생각하면 고운 생각이었지. 그런데 이젠 별로 생각이 
안 나. 사실 서울 생각이라고 해도 그게 서울이라는 공간에 ㄷ나 생각이 
아니라 서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인 건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젠 그 사람들 
생각이 잘 안 나는 거지. 고운 기억이구 나쁜 기억이구 점점 희미해져. 그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나는 파리 시내와 근교의 묘지들을 생각했다. 어디쯤에 내 몸을 묻으면 가장 
그럴싸할까를 생각했다. 어디쯤에 내 몸을  묻으면 가장 그럴싸할까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내가 내 육신의 화장이라는 걸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장낸다는 걸. 죽음 뒤엔 
쾌락만이 아니라 고통도 사라진다는 걸. 희로애락애오욕이 그걸 느꼈던 내 
몸뚱어리와 함께 지워진다는 걸. 내 죽음과 함께 우주도 소멸한다는 걸. 
그런데도 내 죽은 몸뚱어리가 불에 태워진다는 건 왠지 찜찜하다.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할 텐데. 그것은 늘상 세상이 싫다싫다 하면서도 죽는 걸 
두려워하는 내 비겁한 당착과도 비슷하다. 그래, 내 염세는 진지한 염세가 
아닐지도 모른다. 행여 그것이 진지한 염세는 또 삶에 대한 징그러운 애착과 
등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싫으면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야후의 냄새를 저주하면서, 야후의 냄새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요컨대 
허무라는 걸 받아들일 만큼 내 마음은 크지도 비워지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이 몸뚱어리의 긴긴 존속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 몸뚱어리의. 
  "결혼은 안 하 거야?"
  그녀가 삶 쪽으로 나를 불러내며 물었다. 나는 안도하며 담배를 힘껏 
빨았다. 
  "야, 너한테 그렇게 질렸는데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  
  나는 웃으며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결혼 비슷한 상태에 있기는 해. 아마 결혼으로 이어지지야 않겠지만."
  하스나의 눈동자와 입술과 가슴과 엉덩이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 앞에 있는 
여자보다 확실히 덜 아름답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그러나 하스나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온 건 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녀 덕분에 나는 
파리에서, 아니 이 거대하고 고요한 우주 안에서 외로움을 눅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에게 끌릴 때, 그 끄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외모고 지성이고 재력이고 성격이고 뭐 그런 것들이겠지만, 결국 그런 것들은 
분위기로 수렴되는 것 아닐까? 그런 것들이 이리저리 조합돼 빚어내는 분위기 
말이다. 내 앞에 있는 여자에게 내가 오래 전에 반한 것, 재작년 가을에 
하스나에게 반한 것, 그런 것들은 다 내가 그 여자들의 분위기에 반한 것 
아닐까? 삶이란, 곧 그 분위기 아닐까?  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성격이든 지능이든, 결국은, 인간의 뇌일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반한다는 건 그 사람의 뇌에 반하는 것이리라. 그 뇌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진으로 본 인간의 뇌는 좀 끔찍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여자의 뇌도, 하스나의 뇌도 결코 보고 싶지 않다. 
  하기야 인간의 뼈라는 것도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의 내장이라는 것은 죄다 
보기에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결굴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육체를 탐할 
때 그가 또는 그녀가 몇 밀리미터의 살가죽뿐인 셈이다. 슬픈 일이다.
  결혼 비슷한 상태에 있다는 내 말에 아내는, 내 전 아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자신의 결혼에 
대해 내게 자상히 얘기를 해준 만큼 내가 거기서 입을 다무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외국 여자야."
  "불란서 여자?"  
  그녀가 용기를 얻은 듯 물었다. 
  "응, 말하자면 불란서 여자지. 국적은. 사실은 아랍 여자야, 알제리 여자. 
외국 여자라구 말해놓고 보니 정말 외국인이군. 나 같은. 너보다 두 살 어린데, 
불행하게도 너보다 더 늙어 보여. 더 불행한 건 너보다 이해심도 없고."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경제적으론 괜찮어?"
  "그걸 왜 니가 걱정하니?"  
  나는 가볍게 면박을 준 뒤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덧붙였다. 
  "응, 나 혼자 버는 걸로도 두사람 먹는 건 충분한데, 같이 사는 여자도 일을 
해. 나 같은 프리랜서야. 물론 보석 세공업자만큼이야 벌지 못하겠지만."
  나는 마지막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얼른 후회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괘념치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보석 세공업자 운운보다 두 사람 
먹는 건 운운이 더 인상적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렇게 말을  
이었으니까.
  "나 두 해 전에 딸아일 낳았어."
  "잘됐군."
  내가 시큰둥하게 받았다. 우리에게는, 나와 내 앞에 있는 여자 말이다, 
아이가 없었다. 특별히 피임을 한 것은 아닌데도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물론 
아내나 나나 그것 때문에 병원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둘 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으므로,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이혼을 하게 된 
것은 절대 아니다. 시실, 이혼 사우라는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말도 없다. 그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다는 것 말고 무슨 별다른 이혼 사유라는 게 있겠는가? 
나는 이 여자에게 싫증이 났고, 이 여자도 내게 싫증이 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싫증이 출구 없이 지속되자 증오로까지 변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혼이 간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이가 
있었다면 아내나 나나 헤어지기 전에 더 망설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망설임 끝에 결국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 사이의 
감정이라는 건 늘 변덕에 휘둘리게 마련이니까. 이 여자와 이혼까지 하게 된 
것은 길게 보아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불행한 일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당시에 이혼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내가 재혼해서 아이를 낳은 걸 보니 불임의 원인은 나한테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하스나에게도 아이가 생기질 않는다. 그녀가 피임을 하고 있는 
눈치도 아닌데. 
  "축하해."
  내가 정색을 하고 말투를 고쳤다. 그러고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며 
진심으로 말했다. 
  "넌 그런데 아직도 전혀 아이 엄마 같지가 않다."
  "아냐, 화장으로 지워서 그렇지 눈가에 벌써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걸."
  그녀는 짐짓 표정을 찡그리며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보였다. 내가 이 여자를 
왜 그리 싫어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이 여자는 날 왜 그리 지겨워했담? 
  "내가 왜 한민수를 만나고 싶어했는지 방금 깨달았어."
  나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이를 낳았다는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를 태운 기차는 북역을 떠났다. 그녀가 승강구에 오르기 전에 나는 
그녀의 두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럽식으로. 그 감촉은 누이의 
감촉이었다. 그녀가 승강구에 올라서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맞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은 의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탄 기차는 파리발 암스테르담행 열차다. 그 기차는 브뤼셀을 
지나 앤트워프에다 그녀를 내려놓을 것이다. 
  막 떠나보낸 그녀의 얼굴에 하스나의 얼굴이 겹쳤다. 내가 하스나를 처음 본 
것이 바로 이곳 북역에서다. 북역은 파리에 있는 여섯 개의 터미널 역 가운데 
하나다. 북역에서 떠나는 열차들은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나 독일로 
이어지거나 도버 해협의 유로 터널을 지나 런던의 워털투 역에 닿는다. 
  그날, 내가 하스나를 처음 본 날 말이다. 나는 파리에 들른 고등학교 
동기생을 런던으로 태워보내기 위해 북역에 있었고, 하스나는 앤트워프로 
취재를 갔다가 파리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때가 '95년 가을이었다. 당시 
파리에서는 연쇄 폭탄 테러가 있었던 터여서 시내 곳곳에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좀 과장하자면 그때의 파리는 전두환 시대의 서울 풍경을 닮아 
있었다. 물론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많았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두환 시대의 경찰이 검문하고 희롱한 것이 제 나라 대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었던 데 견주어, 그 당시 프랑스 경찰이 검문하고 때때로 굴욕감을 
준 것은 주로 외국인 남자들이었다는 것이 우선 겉보기에도 달랐다.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그 다름은 커진다. 전두환의 경찰들이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서 시내 곳곳에 서 있었다면, 시라크의 경찰은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내 곳곳에 서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금방 이 말을 후회한다.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그 다름이 더 커진다고 말한 것을 말이다. 그 말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정말 본질적인 
데까지 들어가면 전두환의 경찰과 시라크의 경찰이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어차피 체제의 유지를 위한 무력의 일부일 뿐이다. 어느 나라 
경찰이든 근본적으론 권력의 하수인일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닮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적, 범죄자들과도 닮았다. 그렇다, 경찰과 
범죄자란, 특히 조직 범죄자란, 본질적으로 같은 족속들이다. 단지 그들이 속한 
조직이 다를 뿐이다. 탐욕스러운 독재자와 견결한 혁명가가 본질적으로 같은 
족속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긴, 견결한 혁명가는 혁명이 성공하고 나면 흔히 
탐욕스러운 독재자로 변한다. 
  스탈린이라는 사람은 히틀러라는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희극 
배우 같은 경박함을 곁들여서 자신의 약을 거리낌없이 만천하에 드러냈던 
히틀러보다 동족과 이민족의 유혈-그 피는 대부분 프롤레타리아의 
피였는데-위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도 늘상 전세계 노동자의 구세주로 
자처한 스탈린이 오히려 내게는 더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히틀러가 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단박에 알수있지만 스탈린을 단죄하는 것은 뭔가 찜찜하다는 
점에서-모스크바 재판? 실제로 그들은 죄다 간첩이었어, 피고들이 다 
자백했잖아! 자기가 안한 짓을 했다고 하겠어? 설령 그렇더라도 죽이기까지 
한 건 너무했다구? 이런 순진하긴 쯧쯧,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돌이켜보라구,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에 맞서서 우선 러시아의 혁명만이라도 
보위했다구, 독소불가침 조약은 불가피한 것이었어, 우선 힘을 비축해놓아야 
싸울 수 있을 것 아냐. 폴란드 침략과 분할? 우선 폴란드의 반쪽 만이라도 
나치즘으로부터 구해놓고 봐야 할 것 아닌가?-스탈린의 악은 더 교활하고 
음험한 악이다. 
 스탈린은 정말로 노동자들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랑한 노동자는 그의 관념 속에 있는 노동자였지, 바로 그의 주변에서 숨쉬고 
일하고 핍박받는 노동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의 
비루한 노동자들은 죄다 그의 관념 속에 갈무리돼 있는 위대한 노동자 계급의 
적이었다. 얄ㄱ은 일이다. 그의 냉혹한 정치적 리얼리즘이 그의 덜 떨어진 
심리적 아이디얼리즘에서 나온 것이라면 말이다. 
  그의 국제주의는 소비에트 이기주의의 외피였고, 그의 소비에트 이기주의는 
그 자신의 이기주의의 외피였다. 소련을 혁명의 조국으로, 모스크바를 혁명의 
수도로 생각했던 그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 외국인 혁명가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짜증스럽다. 미국의 일본인들이 잠재적인 간첩으로서 집단 
수용되었듯이, 연해주의 조선인들도 잠재적인 간첩으로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외국인은 야만인이고, 외국인은 간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만인들과 간첩들을 처치할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 경찰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파리에서 폭탄 테러가 이어졌을 때, 경찰의 검문이 외국인에게 
쏠렸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당시 외국인 모두가 경찰의 검문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길거리에서 경찰의 경례를 받는 것은 대체로 아랍 사람들이었다. 수사 
당국에서 그 연쇄 테러 혐의를 무장 이슬람 그룹이라는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혐의는 사실 정당한 혐의이기도 
했다. 아무튼 '95년 가을에 프랑스 경찰이 주로 아랍인을 검문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하스나와 만나게 되었다. 
  역 한쪽이 소란스러워서 호기심으로 가보니 경찰과 두 사람이 아랍사람처럼 
보인느 남녀 둘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그남자는 경찰관과 이미 
드잡이라도 한 듯, 웃옷이 엉망이 돼 있었다. 여자는 새된 목소리로 
경찰관들에게 대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스나였다.
  사정은 이랬다. 경찰관들이 기차에서 내린 아랍 남자 한 사람을 검문하면서 
그의 가방을 너무 꼼꼼히 뒤지자 검문의 대상이 된 남자가 거기에 항의를 
했고, 그러자 경찰관들은 대뜸 그 남자에게 반말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경찰관이 계속 고압적인 태도에 욕설까지 하자 
남자가 거기 분개해 맞대들었고 경찰은 그를 공무 방해 혐의로 연행하기로 
했다. 남자가 연행을 거부하며 버텼고 그래서 소동이 커지게 되었는데,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하스나가 거기 끼어들어 경찰관들에게 거칠게 항의한 것이다.
  이 남자에게 테러와 관련된 혐의가 없다면 당신들이 그를 연행할 권리는 
없고 당신들이 그에게 반말과 욕설을 한 것은 당신들이 인종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며 하스나는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가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에게 그 말이 먹혀들 리 없었고, 그들은 하스나 역시 
연행하려던 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끼여들어 경찰관에게 항의하는 동안 역 
구내에 있던 다른 경찰관 네 명이 우리를 에워쌌고 결국 우리 셋은 모두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우리들이 연행될 즈음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경찰서로 가는 차 안에서 적어도 그들이 우리를 구타하지는 않았다. 그런 
우리 손목에는 어처구니없이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그들은 흥분한 상태로 
수틀리면 구타라도 할 기세였다. 그들은 계속 우리에게 반말을 사용했고 물론 
우리도 이판사판인 셈이어서 계속 반말로 응수했는데, 나는 실상 분위기를 
타고 반말로 대꾸는 하면서도 상당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이 친구들이 
예컨대 한국 경찰들보다 더 점잖을 거라고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스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조금도 겁을 
집어먹지 않은 것 같았고, 경찰이 한마디하면 서너 마디는 대꾸하곤 했다. 
설령 그 경찰관들 가운데 하나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여자인 하스나에게 
손찌검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즉시 그 값을 치렀을 것이다. 하스나는 아나 
수갑에 묶인 손을 가지고도 힘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는 그에게 물리적 
타격을 가했을 테니까.
  경찰서에서도 하스나의 태도는 조금도 누그러들 줄 몰랐다. 그녀는 우리를 
연행한 경찰관들에게 인종주의자라고 계속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고, 다른 
경찰관들에게도 그리 곱지 않은 소리들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을 고소해서 
철창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식으로 기소되지 않고 네 
시간 만에 풀려난 것이 하스나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던 
프레스 카드 덕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내가 프레스 카드를 꺼내자 그들의 
태도가 사뭇 부드러워졌다는 점이 그걸 증명한다.
  반말과 욕설을 먼저 한 것이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또 그 상황에서 수갑을 
채운 것이 인권 유린에 가까운 직원 남용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뭉개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기자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건 한국이고 
프랑스고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서 사건을 불편한 방향으로 키울 
수가 있으니 말이다 비록 프리랜서이기는 할망정 프랑스 외무부가 발급한 그 
프레스 카드가 경찰관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판단을 잘못했다. 그들이 잘못 건드린 것은 내가 아니라 하스나였던 것이다. 
경찰서에서의 네 시간은 내게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고,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여들어 하루를 완전히 망쳤다는 후회까지 겹쳤기 때문에, 나는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그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하스나는 나와는 달랐다. 풀려나자마자 그녀는 인권 단체나 변호사를 
찾아가는 대신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 
말이다-편집국으로 달려갔고, 그로부터 이틀 뒤에 하스나와 또 한사람의 
아랍인-사건의 처음 당사자였던 말레크라는 모로코 사람-은 '뤼마니테' 1면 
머릿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머릿기사의 표제는 '바캉스에서 돌아온 경찰. 
인종주의로 마수걸이'였고, 우리가 겪은 그 사건 외에도 비슷한 사건들을 
묶어서 보도하고 있었다. 왼쪽 하단에는 하스나와의 인터뷰가 따로 상자 
기사로 뽑혔다. 그날 치 '뤼마니테'의 사설은 프랑스가 테러를 구실 삼아 경찰 
국가로 변하고 있고 특히 경찰이 인종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꾸짖고 
있었다.
  이틀 뒤에는 '리베라시옹'과 '르 몽드'에도 비슷한 사례와 논조의 기사가 
실려, 하스나는 문제의 경찰관들에게 충분히 분풀이를 한 셈이 되었다. 그 
기사들이 그 경찰관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아팠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스나는 내가 '더 유러피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우리가 겪은 사건을 기사화하라고 내게 충동질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자신이 
당사자 가운데 하나인 사건을 기사로 쓰는 것이 좀 뭣해 그녀의 충동질을 
물리쳤다.
  하스나는 프리랜스 보도 사진 작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고향인 
알제리의 오랑에서 아홉 살 때까지 자랐고, 그 뒤 부모를 따라 니스로 왔으며, 
열세 살 때 파리 근교의 몽트뢰이유로 이사왔다. 하스나는 아랍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라고 그녀는 나중에 내게 일러주었는데, 실제로 그녀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 옛 아내에 견주면 그저 수수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이는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데도 나보다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러나 그 하스나라는 이름이 그녀의 몸매를 
지칭한 것이라면 그 이름은 정곡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젊기까지 하다. 특히 그 터질 듯 팽팽한 가슴이란. 
그녀의 벗은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그녀와 껴안고 있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어떨 때는 껴안는 것보다 보는 걸 더 좋아한다. 껴안고 있을 때는 
그녀의 몸 전체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의식을 행하지는 않았고, 또 모스크에도 한 해에 한두 차례 정도나 
얼굴을 비칠 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모슬렘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물론 그녀는 코란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남녀 평등주의자이기는 하지만.
  경찰서에서 보낸 네 시간 동안 하스나와 나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공범 
의식이 생겼고, 그래서 그 이후로 가끔씩 데이트를 했으며, 다섯 번째로 함께 
잠을 잔 날 아침에 우리는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내가 제안했고 그녀가 
받아들였다. 이곳 사람들식으로 얘기하자면 자유 결합이었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고, 내 스튜디오는 둘이 살기엔 너무 비좁았으므로, 우리는 
내가 살던 스튜디오 근처에 세 칸짜리 아파트를 새로 구해 실질적 부부가 
되었다.
  내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내게 자신의 이슬람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녀는 그것이 이슬람교의 관용주의라고 
말했다.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치하에 있었을 때도, 당시의 통치자들은 
기독교도를 비롯한 이교도들에게 세금을 매겼을 뿐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란이나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생각하면, 
그녀의 주장이 꼭 옳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모든 종교에는, 모든 이념에는 
근본주의적 속성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내가 종교에도 이념에도 몰두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니이기도 하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다소 모호했다. 그녀 자신은 결코 
근본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프랑스 언론의 근본주의 사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 언론이 정말 겨냥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 언론만이 
아니라 서방의 언론이 죄다 그렇지만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니라 이슬람교 
자체라는 것이었다. 특히 냉전이 끝나자 서방의 언론은 공격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됐는데, 예전의 공산권의 대타로 그들이 새로 설정하고 있는 적이 
기독교 이외의 문화권, 특히 이슬람권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미국에서 얼만 
전에 출간된 책 제목 덕분에 유명하게 된 지하드와 맥월드-지하드로 상징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말이다-의 이분법을 서방 언론이 전술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프랑스 경찰 내의 인종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방의 언론사를-비록 그 
신문이 공산당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찾아간 걸 보면 그녀의 그런 
주장이 꼭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프랑스 언론이 이슬람 근본주의 비판한다는 구실 아래 
이슬람교 자체에 대해서 문화 투쟁을 수행하고 있고, 그 문화 투쟁을 
밀어붙이는 동력은 이슬람교에 대한 문화적 적의만이 아니라 백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우월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와 
지지난해에 프랑스 교육부가 공립학교에서 베일을 쓰기를 고집하는 모슬렘 
여학생들을 단속하라는 지침을 내렸을 때, 공인된 극우파 신문말고도 다른 
일부 언론에서마저 교육부의 조처를 거들고 나온 데에 대해 그녀는 분개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성이 베일을 쓰는 데 결코 찬성하지는 않지만, 베일을 쓸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고 베일을 쓰는 것이 근본주의의 표징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또 프랑스 정부든 언론이든 그들이 
알제리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퍼붓는 비판의 반만이라도 알제리의 
군부 정권에 돌렸다면 알제리의 상황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여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살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게 그녀의 남녀 
평등주의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고, 정치적 맥락이야 어떻든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 군부 정권의 폭압 이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차별 테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입을 다물곤 했다.
  네 해 만에 만난 여자를 태운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손바닥 하나가 
내 등을 때렸다.
  "한 형 아니야, 여기 웬 일이야?"
  정태하 씨였다.
  "정 선배, 정 선배야말로 여기 웬일이세요?"
  "응, 민선이가 집에 왔다가 쾰른으로 되돌아갈 때가 돼서 배웅 나왔다가 막 
보낸 참이야."
  정태하 씨는 파리에서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파리에 정착하고 얼마 안 돼서였다. 파리 8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던 대학 후배를 통해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한 무역 회사의 파리 주재원으로 일하던 지난 '79년 한국에서 터진 
어떤 좌익 조직 사건에 연루된 뒤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망명은 강요된 망명이었고 내 망명은 자발적 망명이었으나, 
나는 그의 지쳐 보이는 얼굴과 서툴러 보이는 처세에서 어떤 동병상련을 
느꼈고, 단박 그와 친해졌다. 그는 버려진 자였고, 나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버려진 자였으므로.
  그가 한국 나이로 마흔아홉이 되던 '95년에 그는 오랜 가난으로부터 다소간 
해방되었다. 그가 자신의 대학 시절과 망명 생활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해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덕분이다. 그는 그 뒤로 
서울에서 나오는 몇몇 진보적 매체들의 단골 필자가 되었고, 내친김에 
몽파르나스에 스튜디오를 하나 얻어 그곳을 작업실로 이용하고 있다. 아예 
문필가의 길로 나선 것이다 민선은 그의 딸 이름이다. 그녀는 파리 7대학을 
졸업하고 쾰른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독일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근데 정말 한 형은 웬일이야?"
  "저도 누구 배웅 나왔다가 막 보낸 참이에요. 서울에서 알던 친구 하나가 
파리에 잠깐 들렀었어요."
  "그랬구면. 가만있자, 시간도 거진 다됐는데 점심이나 같이하지. 그러고 보니 
우리 같이 밥 먹은 지도 한 달 가까이 돼가네."
  사실 그랬다. 나와 정태하 씨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세상 욕하고 그랬었는데(물론 술을 주로 마시는 건 나다. 정태하 씨는 
술자리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술 자체는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 즈음엔 
나도 하스나와 함께 프랑스의 신문과 한국의 신문을 비교하는 책을 한 권 
써보겠다고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해 한 달 가까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물론 전화는 이따금씩 주고받았지만.
  나는 속이 느글거려 밥 생각이 없었지만, 그를 본 것이 오랜만이고 해서 
그의 제의에 응했다. 우리는 평소에 잘 가는 퐁피두 센터 근처의 일식집 
토오쿄오엘 자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정태하 씨는 사실 일식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원체 외식을 잘 하지도 않지만, 그는 굳이 외식을 
하더라도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주로 한국 식당엘 가고,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일식보다는 그리스 식당이나 터키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내가 
생선회를 워낙 좋아하는 걸 알고는 나와 만나선 대체로 그가 먼저 토오쿄오로 
가자고 제안하곤 했다. 토오쿄오는 내가 파리에서 가본 일식집 가운데 가장 
음식을 잘하는 집은 결코 아니지만, 가장 식대가 싼 집이다.
  나는 장국이나 몇 개 시켜서 마시고 말겠다고 했으나, 정태하 씨가 우겨서 
우리는 생선회 이인분과 정종을 시켰다. 술은 말자고 해도 그가 막무가내였다. 
내가 안 마시면 자기가 다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내게는 매일매일 술몫이 따로 있다는 비감 또는 희열에 빠져 
그에게 동의하고 말았는데, 정태하 씨는 정종이 오자마자 정말로 두 잔을 내리 
마셨다 . 나도 그에 질세라 한 잔 두 잔 마셨는데, 참 묘한 일이다. 
해장술이라는 것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종이 목구멍을 통해 
위로 흘러들어가면서 속이 오히려 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작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정태하 씨가 쓰고 있는 책은 프랑스의 주요 신문들과 한국의 몇 개 신문들의 
논조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한 가지일 
수는 없는 이상 신문이라는 것도 운명적으로 편파적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정태하 씨 생각으로는 프랑스의 신문들이 이념적 색채를 떠나서 적어도 
논조의 일관성은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데 견주어 한국의 신문들은 한 신문의 
논조가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프랑스에서는 '르 피가로' 같은 신문이 보수주의의 대변지이고 
'리베라시옹' 같은 신문이 좌파를 대표하는 신문이라는 것은 그 신문들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한국의 신문들은 그것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지면 안에서 정치적^5,23^사회적 
정황에 따라 정반대의 논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국 신문에 대한 정태하 
씨의 작업은 그러니까 어떤 신문이 보수적이고 어떤 신문이 진보적이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한 신문 안에서 논조가 얼마나 일관되고 얼마나 
변덕스러우냐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서 한 해 전부터 
한국의 중앙 일간 신문 다섯 개를 구독하고 있었다. 
  내가 하스나와 함께 만들고 있는 책은-사실은 하스나가 하는 일을 내가 
옆에서 거들고 있다고 해야겠지만-지금까지 하스나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유럽의 사회 운동에 관한 사진 아흔아홉 개를 추려내 사진마다 짤막한 단장을 
붙이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향한 아흔아홉 걸음'이라고 우리가 임시로 
표제를 붙여본 이 책에는 그러니까 주로 집회나 시위나 농성을 담은 사진들이 
실릴 것이었다. 그 사진들에 붙이는 단장들이 되도록 시적이고 잠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하스나의 생각이어서 우리들은 그 문장들을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었다. 
  "한 형, 우리, 보부르에 가서 한잔 더 하지."
  풍피두 센터의 별칭인 보부르는 퐁피두 센터 바로 옆에 있는 맥주집 
이름이기도 하다. 어느 그리스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그 집은 파리의 비좁은 
여느 카페들고는 달리 널찍한 독일풍의 맥주집이다. 서울의 대학로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맥주집들과 비슷하다. 
  "괜찮으시겠어요, 정 선배? 벌써 정 선배 정량은 넘어선 것 같은데." 
  나는 사실 정종 몇 잔에 이미 술 발동이 걸려버린 상태였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몇 시간 전 그렇게 물에 목말라하던 기억은 어느 때부터 
희미해져버리고 이제 술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나의 쾌락 추구는 뒷일에 대한 
계산을 모른다. 그렇지만 정태하 씨가 여느 때에 비해 너무 술을 급하게 드는 
것 같아 나는 예의로라도 그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냐, 오늘은 좀 마셔야겠어. 원고도 대충 마무리됐고 또 술 마셔본 지도 
너무 오래됐어. 그리구 한 형이랑 할 얘기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보부르로 자리를 옮겼다.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파리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노래가 
파리의 하늘 밑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이 다뉴브 가의 잔물결로 바뀌었다. 
다뉴브 강을 끼고 있는 동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한번도 들은 기억이 없는 
이 노래를 다뉴브 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파리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듣는다. 주로 거리의 악사를 통해서다. 지하철이나 광장 한 모퉁이에서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켜며 구걸을 하는 그 거리의 악사들 
말이다. 그들이 가장 즐겨 연주하는 곡이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다. 그 곡조가 
슬프기도 하지만, 그 슬픈 곡조가 걸인들의 이미지와도 포개져 내게는 다뉴브 
강이 꼭 가난을 상징하는 강처럼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악기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내가 파리에 정착한 두로도 걸인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기야 프랑스 정부의 통계로도 실업자가 계속 늘고 있으니-경제 
활동 인구 여덟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실업자다-, 걸인이 느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파리에는 풍요의 느낌이 없다, 적어도 서울에 견주면 말이다. 
쇠락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도시에선 정말 세기말의 냄새가 난다. 
  정태하 씨는 술이 들어가더니 그날따라 자꾸 서울 얘기를 꺼냈다. 
  "서울은 많이 변했겠지?"
  서울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서울 한복판 가회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를 종로구에서 다녔다. 
  "정말 많이 변했죠. 정 선배가 파리로 오신 게 '79년이니까 벌써 17년 전 
안녜요? 상전벽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아마 지난 4년 동안에도 많이 
변했을 거예요. 종로 쪽이야 변두리에 비해서 크게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울 전체로 보면 완전히 새로운 도시라고 말해도 될 거예요. 어떻게 보면 
과거가 없는 도시라고도 할 수 있죠, 파리오는 달리. 누구한테 들은 것 같은데 
파리는 19세기 그대루래며요."
  그렇다, 이 도시는 이미 19세기에 완성된 도시다. 우리가 지금 보는 파리는 
19세기의 파리다. 파리의 지리와 풍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파리를 배경으로 
한 19세기 또는 그 이전의 소설이나 그 당시의 지지를 들추며 그것들이 한 
세기도 훨씬 전에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좀체로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도시는 한 세기 이상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좋게 변한 건 아니군.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역사의 흔적을 다 
없애버린 거 아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제 생각엔. 물론 유럽의 도시들과는 다르죠. 
역사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브라질이나 호주의 어떤 
도시들처럼 세심한 도시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도 아니구요. 분명히 
어설프다는 느낌은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꼭 좋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왜 그렇지?"
  "전 개발론자는 아니지만, 어려서 보았던 서울의 가난한 풍경에 무슨 향수 
같은 건 없어요. 과거라는 건 대개 미화되게 마련이어서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는 안 그래요. 비만 오면 장화 없인 살 수 없었던 
도시, 천변에 판잣집들이 게딱지처럼 늘어서 있었던 도시가 사실 
서울이잖아요. 정 선배한테 차마 드릴 말씀이 아니긴 하지만, 전 때때로 
박정희 시대라는 게 전적으로 부정되어야만 할 시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박정희와  맞서 싸우다 30대 초에 국제 미아가 되어버린 뒤 50줄에 
이르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박정희 시대라는 걸 
긍정적 맥락에서 거론하는 것은 일견 잔인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내겐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라는 게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박정희는 박정희고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시대인 것이다. 박정희가 박정희 시대를 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지하의 시와 옥중 투쟁도, 정태하 씨의 반체제적 운동도 
박정희 시대의 한 얼굴인 것이다. 박정희의 시를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 정치사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라고 말해놓고 보니 묘한 감회가 생겼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이념적으로 무색무취했던 터여서 내게 그에 대한 
커다란 증오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이 일순 마음을 후련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해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그의 시대는 나같이 평범한 
주변인의 마음에까지도 뭔가 무거움을 얹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이승만 시대였지만, 나는 박정희가 죽고 나서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때까지 대통령이라는 직함 앞에 박정희라는 고유명사와 대통령이라는 
보통명사는 동의어였다. 80년대 초에 성장기에 진입한 프랑스인들에게 
미테랑이라는 이름과 대통령이라는 말이 동의어였듯이 말이다. 최규하 대통령, 
최 대통령이라는 말이 처음엔 얼마나 어색하게 들렸던지. 대통령은 
박정희이어야만 했고, 박 대통령이어야만 했다. 그 박정희가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결국 개발론자굼녀, 뭐. 결과적으로 서울의 외양이 변했으니까 다 잘된 
거라는 거 아냐. 그 개발의 과정에서 다친 사람들 생각을 해야지.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생겼을 거구. 그 아파트에 정작 
입주한 사람들은 그런 철거민들이 아니었을거 아냐. 철거민들만이 아니지. 
근대화라는 걸 한다구 박정희가 없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어? 
농촌은 피폐해졌고, 농민의 다수가 도시 변두리로 흘러들어와 저임금 노동자가 
됐고, 잔업 철야에 시달리는 그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노조를 만들 권리도 
없구. 지금 한국 경제가 외형적으로 그럴싸하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결국 그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그리 된 거 아냐? 그런데도 한 형 생각엔 
박정희한테도 사줄 만한 점이 있다 이거지?"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니에요, 정 선배. 전 생래적으로 군인 정치가들은 
찜찜해요. 이쪽 사람들이 숭배하는 드골 같은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요. 
그치들은 대게 애국심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죠. 더구나 박정희를 드골에 
비교할 수야 없죠. 무슨 애국심이구 개인적 이력이구 역사 의식이구를 떠나서 
박정희가 정적으로 박해했던 방식은 피에 주린 음모가 이상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정 선배도 말씀하셨듯이 박정희 시대라는 게 박정희 혼자서 만든 
시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경제 개발이라는 것도 결국 노동자들을 포함해서 
한국인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하면, 그게 또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가질 건 없을 것 같아요. 
박정희 시대라고 제가 말씀드린 게 잘못된 것 같은데, 그냥 그건 편의상 
그렇게 부른 거지. 그게 박정희가 만든 시대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건 궤변이야, 한 형.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 개발이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건 그걸 박정희가 이뤄서가 아니라구, 그게 낳은 부작용 때문이지. 
단지 박정희가 미워서 박정희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란 말이야. 박정희가 그 쿠데타 방식으로 내세운, 하면 된다는 그 성장 
제일주의가 지금에 와서는 백화점과 다리를 무너뜨리고 사회 전체를 부패의 
늪으로 빠트린 것 아니냔 말이지. 그러니까 박정희의 가장 큰 잘못은 한국 
사회를 윤리적 불감증 상태로 몰아넣은데 있는 것 아닐까?"
  "분명히 부작용은 있었죠.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60년대 이래 한국 경제의 확장 속도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니까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었겠죠. 농촌은 
피폐해졌고, 공동체적 유대는 옅어졌고, 사람들은 더 그악스러워졌겠죠.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부패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추세가 아닌가요? 이걸 패배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예요."
  "그게 패배주의라면 차라리 낫겠어, 한 형. 그렇지만 한 형의 그런 말투에선 
패배자의 자괴감이 아니라 승리자의 폭력이, 힘의 논리가 느껴진다구. 무슨 
말이냐 하면 도시화와 개인주의의 확산이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한 형이 
말할 때, 거기선 이게 대세다, 이 흐름을 거스르는 자는 파멸이다, 하는 협박 
같은 게 느껴진다구. 사회주의 체제의 파산 앞에서 맘에도 없이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는 자본주의 만세, 시장 만세를 
부르는 주류 이데올로그들이나 회심한 좌파의 협박 같은 거 말이야."
  "제 변명을 하자면 그 시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박정희 시대라고 부르든 
또 뭐라고 부르든 말이죠. 그 시기에 대해서 제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도 그리 
좋지는 않아요. 아니 사실은 끔찍하죠. 그래요, 저임금, 철야, 잔업, 전태일의 
분신, 일본인들의 기생 관광,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철거, 남산의 중앙정보부, 
빙고 호텔의 물 고문^5,23^전기 고문, 영화 상영 전의 애국가, 대한 뉴스, 
국기에 대한 맹세, 박정희의 이름과 함께 소문으로 떠돌던 모모 탤런트들의 
이름, 민방위 훈련, 학원 간첩단 소동, 남침 위협, 그래요, 전 중학교 때까지도 
이따금씩 전쟁이 터지는 꿈을 꾸곤 했어요. 북쪽 사람들의 전면 남침으로 
불바다가 된 서울의 꿈을요, 그것만이 아니죠. 야간 통금, 장발 단속, 치마 
단속, 금지곡, 군사 훈련 그저 죄다 그런 것들이에요. 사실 그런 것들을 
빼놓고는 저도 박정희 시대를 되돌아볼 수 없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좀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이었다.
  "위험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결과론에 불과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피노체트 시대의 칠레보다는 더 낫지 않았느냐는 거죠."
  나는 지금 너무 막 나가는 게 아닐까?
  "경제 개발 때문에?"
  "아니라고는 말씀 못드리겠어요. 사람들이 정말 가난할 때, 그러니까 거기서 
무슨 값싼 낭만을 느낄 정도의 그만그만한 가난이 아니라, 잠자리와 끼니에 
대한 걱정을 늘상 해야만 할 때 말예요. 그때도 과연 사람들 사이의 유대라는 
게 가능할까요?"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단지 가난하다고 불평을 하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가난하다고, 그러니까 불평등하다고 불평을 하는 거라구. 
예전에는,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했던 예전에는, 콩 한 쪽이라도 서로 
나눠먹는 인정이라는 게 있었다구. 그런 인간의 심성을 파괴해버린 거야, 
박정희는 경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인간다운 점을 말이야."
  "글쎄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더 그악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가난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 가난이라는 게 진짜 가난이라면 말이에요. 되풀이되는 얘기지만 그런 적빈 
속에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기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튼 한 형은 개발론자인 거 아냐. 처음부터 자백을 하지. 왜 
굳이 아니라구 하누? 자연은 파괴됐고, 공해 물질이 국토 전체를 뒤덮어버린 
거 아냐?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해서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하면 된다는 생각만 앞섰던 거지."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확실히 환경은 
오염되고 있고, 그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기주의, 그리고 다음에 올 
세대들에 대한 지금 세대의 이기주의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전 근본적 환경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별로 믿음이 안 가요. 그 
사람들은 전통사회의 공동체를 그리워하지만, 제가 그런 전통사회에서 
이끌어내는 이미지는 질병, 기아, 자연 재해, 노예 노동, 엄격한 신분질서, 
더러움, 억압된 욕망 그런 것들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과연 근대화된 사회의 
인간이 전근대적 사회의 인간보다 반드시 더 이기적인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요."
  "한 형의 서울은 아름다운 서울이군."
  정태하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정 선배. 그렇다면 제가 왜 파리로 도망 나왔겠어요? 
서울이 가난하지 않은 도시인 건 확실하지만 자유로운 도시도 아니거든요. 
가난하고서는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없지만, 다른 편으론 물질적 여유만 
가지고 그 존엄이 획득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야죠. 그래요, 풍요의 느낌은 서울이 파리보다 훨씬 더 있어요. 파리의 이 
촌녀석들을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라는 데 갖다놓으면 눈이 휘둥그래질 거예요. 
그렇지만 서울의 공기는 억압적인 공기예요. 요샌 길거리에 담배 꽁초도 못 
버리게 한다잖아요. 전 싱가포르 같은 도시는 딱 질색이에요. 파리에 막 와서 
지저분한 길거리와 신호등을 무시하는 보행자들을 보고 마음이 후련했어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타레가의 알함크라 궁전의 추억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알함브라 궁전을 생각했다. 지난해 5월에 하스나와 함께 찾았던 
그 아름다운 궁을. 그 궁전 안에 하스나가 있었다. 하스나를 바라보는 나도 
있었다. 나도 하스나도 알함브라 궁전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본궁의 
아라베스크 문양에 한동안 넋을 빼앗긴 뒤 헤네랄리페 별궁 앞의 정원을 
팔짱을 끼고 걸었다. 그 오월의꽃들과 나무들과 샘들 사이를. 그때 하스나는 
알카사바 성에서 그라나다 시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육백 년 전엔 저 
거리를 아랍 사람들이 걸었다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를 지닌 사람들이 말이야." 하스나의 그 말에는 아랍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8세기 이래 이베리아 반도에 지구 위의 가장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던 모로인의 자부심과 15세기 말 지구 위의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유럽 바깥으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던 모로인의 
아쉬움이.
  알함브라 궁전의 빼어난 아름다움이야 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지만, 
그라나다라는 도시 전체가 아름답기도 했다. 그리고 그 도시는 무엇보다도 
이국적이었다. 유럽풍의도시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알함브라 궁에서 
내려다보는 그라나다는 중세 아랍의 도시였다. 천일야화 속의 도시. 알라딘과 
신밧드가 걸었던 도시. 하스나의 말마따나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가 사고 
팔렸던 시장의 도시. 사랑과 미움과 탐욕과 술수와 보은과 지혜와 야심과 
기적이 배회하는 인간시장. 그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다시 알함브라로 가볼 수 있으련만. 하스나와 함께 그리고 정태하 
씨가 원한다면 그도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알함브라 옆에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을 수도 있으련만.
  실제로 알함브라에 다녀온 얼마 뒤 하스나와 나는 몽트뢰이유의 벼룩 
시장엘 가서 낡은 램프와 양탄자를 샀다. 그것이 나는 양탄자와 마법의 
램프라도 되는 듯이. 내 거실의 테이블 위에 노인 그 램프는 이따금씩 
하스나와 나 둘만의 오붓한 술자리를 밝히고, 거실 바닥에 놓인 그 양탄자는 
침실이 너무 멀 만큼 다급할 때 하스나의 나의 벗은 육체를 떠받친다.
  몽트뢰이유도 그라나다가 이국적이라는 의미에서 이국적이다. 즉 
아랍적이다. 그러나 몽트뢰이유는 그라나다처럼 단순히 건물들의 분위기가 
아랍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센트 강한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하긴 파리 주변에야 어디고 아랍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상인들과 고객들이 내지르는 프랑스어의 억센 아랍어 악센트 때문에, 
몽트뢰이유 벼룩 시장은 파리 교외의 시장이 아니라 마치 중세 바그다드의 
시장 같다. 즉 천일야화 속의 시장이다. 그러니 하스나와 내가 산 그 양탄자가 
나는 양탄자이고 그 램프가 마법의 램프라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시장은 어디나 비숫하다. 그것이 이야기 속의 시장이든 현실 
속의 시장이든. 그것이 아랍의 시장이든, 유럽의 시장이든, 서울의 시장이든, 
시장에서는 자유와 생명의 냄새가 난다.
  실제로 내 유년기의 조각난 기억들 가운데 가장 반짝거리는 부분은 시장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만 가면 왠지 신바람이 나곤 했다. 
그곳엔 세상의 온갖 보화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의 시끌벅적함은 풍요이고 
자유이고 활기였다. 바라보는 것 자체가 황홀이었다. 내게 서울은 기억은 
그러니까 시장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또 흔히 내 침샘을 자극한다. 신촌 
시장의 해장국이나 남대문 시장의 떡볶이 같은 것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늘상 
허기져 자란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양탄자가 있다면 그라나다를 들러 서울의 
신촌 시장과 남대문 시장엘 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떡볶이와 튀김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하스나와 함께. 그리고 정태하 씨가 원한다면 그도 
함께.
  "서울이 그리워."
  정태하 씨가 침묵을 깼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끝났다.
  "그라나다엘 들렀다 가는 거죠. 나는 양탄자를 타고 말이에요?"
  나는 얼결에 그렇게 말했으나 정태하 씨의 표정이 여전히 진지했으므로, 
즉시 내 몽상의 창을 닫고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그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언제고 서울이 그립지 않았던 때는 없었겠지만 오늘따라 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서울에 대해서 마땅치 않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엘 갈 수 없다. 그가 여권 대신 지니고 있는 
여행 증명서 행선지란에는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라는 문구가 선명히 박혀 
있는 것이다. 아니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적 분위기로 보아서 그가 귀국한다고 해서 큰 고초를 겪거나 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그의 글이 여기저기 나돌아 
다니는 곳이 서울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일단 서울로 들어가면 그의 망명자 
지위는 박탈된다. 그러면 그는 17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울에서 새롭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때 문득 그이 책이 서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그의 표정이 
오히려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사실 그 책의 출간은 그 
자신의 삶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그 책에다 망명 생활의 
설움과 외로움을 토해냈고,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됐을 것이다. 
책이 출간된 뒤 그는 수백 명의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그의 책을 
읽었든 그렇지 않든 서울의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가 나온 대학의 학보사는 지난해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동문들 가운데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묻는 앙케이트를 실시했는데, 그는 서울의 숱한 
명망가들을 제치고 4위에 기록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책을 통해서 그 
오랜 가난의 주름을 조금은 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환해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그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내 고질적인 
시니시즘을, 나에 대한 그의 불만의 가장 큰 이유였던 그 시니시즘을, 
예전처럼 그리 책망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은 나의 그 시니시즘에 
동의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것을 이념의 푯대가 부러져버린 시대에 대한 그의 실망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또는 쉰을 넘겨버린 나이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틀렸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서울이 
그립다고 얘기했을 때에야, 미욱한 나는 책 출간 이후에 그의 얼굴이 더 
어두워진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근본적 이유가 말세가 돼버린 세상에 
있든 천명을 알아버린 그의 나이에 있든, 그는 서울이 그리웠던 것이다. 
서울엘 가고 싶었던 것이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는 그는 서울에 돌아간다는 것을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욕망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꼭꼭 눌려 담겨 밖으로 
튀어나올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서울 사람들과의 연락이 아예 두절된 
터였으므로, 서울의 서울 사람들만이 아니라 파리의 서울 사람들과도 아예 
연락이 두절된 터였으므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깨어날 여지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의 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아 버린 것이다. 
그는 많은 서울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지만, 그래서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활짝 피어났지만, 그는 법적으로 여전히 망명자이고, 여전히 서울에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한 형, 나 말이야... 귀화하면 안 될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에서 그가 그 말을 얼마나 어렵게 
뗐는지를, 그 말을 꺼내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즉각 읽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귀화는 그와 가족이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어려운 질문에는 쉽고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침묵은, 그게 잠깐의 침묵일지라도 그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왜 안 되겠어요? 정 선배가 귀화한다고 정 선배한테 뭐랄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정 선배의 세월을 아무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말예요. 게다가 아이들은 어차피 불란서 사람으로 살아야 할 
텐데요 뭐."
  사실이 그렇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다. 정태하 씨가 북역에서 쾰른으로 
보낸 민선이고 파리 4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현선이라는 아이다. 
그 아이들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서울에 대한 기억은 두 아이 모두에게 
거의 없다. 정태하 씨의 부인이 그 아이들을 극성스레 한글 학교에 보낸 덕에 
한국어를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서울로 돌아가 
한국인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외국인인 그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역시 외국인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가 그리도 서툰 그 
아이들에게 외국인이라는 느낌은 여기보다 서울에서 훨씬 더 클 것이다. 
정태하 씨의 부인도 그렇다. 생활력이 강한 그녀는 서울에서 사건이 터지고 
가족의 망명이 결정된 뒤로 지금까지 줄곧 파리에서 직장 생활을 해오며 
살림의 큰 부분을 떠맡아왔다. 그녀가 맺어온 교우의 망은 파리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정태하 씨와 그의 가족 사이의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그의 아이들은 
국적이 한국으로 돼 있을지라도 정서적으론 이미 프랑스인이 돼버린 상태고, 
그의 아내 역시 반쯤은 프랑스인이 돼 있는 상태이지만, 정태하 씨 자신은 
아직까지 순순한 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정태하 씨가 
아이들처럼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내처럼 상근 직장엘 줄곧 
나간 것도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고려하더라도 정태하 씨는 17년 이상 외국에서 산 사람치고는 너무나 
한국인이다. 가족들이 육체는 한국인이되 정신은 프랑스화되었다면, 정태하 씨 
자신은 육체고 정신이고 고스란히 한국인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따금씩 가벼운 농담으로 그에게 친불주의자의 딱지를 붙이기도 하고, 
그 역시 그와 가족을 받아들인 프랑스 사회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거리낌없이 
얘기하는 편이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프랑스 사람이 될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식해서는 잘 재배가 안 되는  재래종 식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기는 힘들 터였다. 그는 17년 
동안 서울을 비웠고, 그러므로 서울에 대한 그의 기억은 17년 전에 멈춰져 
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 그 세월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서른세 
살의 그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서울의 그 17년이란 얼마나 현기증 나는 
17년인가? 결국 그도, 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다. 그렇다면 그가 서울을 방문할 수 있는 방법은 귀화밖에 없다. 
그것은 명확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내게 꺼내기 전에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 말을 꺼내기 
위해서 그에게는 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평소의 그가 잘 감당하지 못하는 
술이. 그게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지를 알아챈 내가 얼른 그리 대답은 
했으나, 그리고 나 역시 그가 여생을 추방된 한국인으로 살기보다는 귀화한 
프랑스인으로 살며 서울을 오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나, 내 마음 
한구석엔 뭔가 착잡한 것이 내려앉았다. 상징이라는 것이 늘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는 박정희 시절 이래 유럽으로 건너온 
한국인 망명자들 가운데서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보다는, 프랑스인으로서 정태하 씨의 삶이 그리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애국자여서,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유별난 애정이 
있어서 든 생각은 아니다. 사실 나는 어설픈 몽상가다. 그리고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별다른 애정도 없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러니까 이전 아내에게 말했듯, 아마 내 삶을 외국 어디에선가 
마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난 한국 국적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니 
한국 국적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면 포기하겠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을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 한번, 그것은 내가 애국자여서가 
아니다. 단지 그 절차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귀화라는 행위는 적극적인 국적 취득 행위다. 그것은 출생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세상에 막 태어나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적을 부여받는 것과는 
달리 성인이 되어서 자기 의사에 따라 어느 나라의 국적을 획득한다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충성의 선서를 전제한다. 내 막연한 짐작으로는 실제로 귀화 
과정에 그런 선서식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귀화자에게는 토착인들에게보다 더 큰 충성심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나라면 그것을 결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짐해본 적이 없는 내가 또 다른 나라에 대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어린 시절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걸 
외우며, 오후 다섯시의 국기 하강식 때 울려퍼지는 애국가 앞에서 몸을 
정지시키며, 나는 얼마나 굴욕감을 느꼈던가? 나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도 
충성을 맹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태하 씨는 나 같은 세계시민주의적 몽상가가 아니다. 그의 기나긴 
망명 생활의 원인이 된 조직은 통일 운동을 비밀 결사였다. 그가 그 조직에 
가담했다는 것은 나와 달리 그에겐 명백한 조국이 있고, 그 조국은 말할 나위 
없이 남과 북을 아우른 한국이라는 것을 뜻한다. 정태하 씨가 지금까지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 것은 그가 자기 삶의 그런 삶의 무게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충성을 선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공식적 방법으로 말이다. 그것은 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을까?
  때도 그리 좋지 않았다. 지금의 프랑스는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다. 1930년대 
이래 인종주의가 최악의 기승을 부리는 사회인 것이다. 그 인종주의는 
르펜이라는 자가 이끄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만의 것이 아니다. 국민전선의 
지지자든 아니든 반수에 가까운 토박이 프랑스인들이 적극적인 또는 소극적인 
인종주의를 고백하고 있다. 침체된 경제 사정이 큰 원인이기는 하겠지만 
외국인들의 체류 조건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불법 체류자들은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전세 비행기가 쉴새없이 뜨는 나라다.
  그 인종주의는 또 단순한 정치적^5,23^문화적 차원의 외국인 혐오가 아니라 
생물적 차원의 인종주의다. 예컨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20세기 내내 
프랑스인들이 품고 있던 독일인 혐오가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 단순한 
외국인 혐오였다면, 지금 프랑스에 만연하고 있는 것은 '인종은 평등하지 
않다'는 유사 나치즘 교의에 기초한 진짜 인종주의인 것이다. 즉 국적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인종주의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국적 여부를 
떠나서 백인 이외의 사람들이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외국 국적의 사람들 
이상으로 귀화한 비-유럽계 프랑스인들이 그 인종주의의 먹이가 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여론 조사 결과가 보여주고 있었다. 정태하 씨가 귀화를 한다고 
해도 그가 백인이 아닌이상 진짜 프랑스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하나의 변경에서 또 하나의 변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인데 그 자리 옮김을 
그가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그 전날 파리 시내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시작돼 강베타 
광장으로까지 이어진 시위에 하스나와 함께 참가했었다. 최근에 파리 제 
20구에 어렵사리 설립 허가가 난 이슬람 사원을 두고 국민전선이 며칠 전부터 
대대적인 반대 시위를 조직한 터여서 이에 맞서 일단의 이슬람 교도들과 인권 
운동 단체들이 역시위를 조직한 것이다. 세상만사에 시큰둥한 나는 그저 
하스나에 이끌려 그 시위에 참가했을 뿐인데, 시위가 끝난 뒤 몇몇 아랍계 
프랑스인 친구들과 밤늦도록 가진 술자리에서도 외국계 프랑스인이 이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한 얘기들이 나왔었다.
  그러나 사려를 가장한 내 이런 생각들은 한편으로 얼마나 사려 없는 
망상인가? 결국 나는 진정으로 정태하 씨를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처지를 내 처지로 완전히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을 만큼 사려가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내게 그런 사려가 있었다면, 내가 달콤한 환상에 젖어 
찾은 파리가 지난 17년 동안 그에겐 감옥과 다름없었다는 걸 실감할 만큼 
사려가 있었다면, 마땅히 그가 얘기하기 전에, 한 해 전이든 두 해 전이든, 내 
쪽에서 먼저 그에게 귀화를 권했어야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귀화란 게 뭐란 
말인가? 종이 쪽지 몇 장 만드는 일에 불과한 일 아닌가?
  "아니야, 한 형, 내가 술 탓에 괜한 소릴 한 모양이군. 귀화는 무슨 귀화야. 
지금처럼 살면 되지. 아이들이야 이젠 저희들 뜻에 맡겨야겠지만 나랑 
여편네랑은 이대로 살 거야."
  정태하 씨가 쓸쓸하게 말했다. 그의 눈이 젖어 있었고, 그 젖은 눈이 내 
입을 막았다. 
  짧은 겨울해가 어느새 뉘엿거렸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센 강을 향해 
걸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센 강에 거의 이르렀을 때 내가옆의 행인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게 센 강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물론이죠."
  그 역시 호기롭게 대답했다. 
  "우리 강 건너서 한잔 더 하지."  
  시테 섬을 걸으며 정태하 씨가 말했다. 
  "좋죠, 뭐 밤새 마십시다."  내가 기꺼이 약을 써서 받았고, 정태하 씨가 더 
큰 목소리로 맞받았다. 
  "하스나 좀 나오라구 해, 얼굴 본 지 오래됐어!"
  생미셸 다리를 건너 카페 데파르 생미셸에 자리를 잡은 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갔을 때, 내 목소리가 들렸다. 
  "봉주르, 주 부 르메르시 드 보트르 아펠, 레세 앵 메사주, 실 부 플레. 
안녕하세요, 전화 고맙습니다. 메모를 남겨주십시오."
 
  저 바람 속 어디엔가
  김병언
  1951년 대구출생.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1992년 '문학과사회'에 
'이삭줍기'가 추천되어 데뷔. 주요작품 '개를 소재로 한 세 가지 슬픈 사건' 
'천치의 사랑'

  저 바람 속 어디엔가 
  투명한 가을날의 저물 녘 먼 하늘빛 같기도 하고 어두운 산영이 드리운 
물빛 같기도 한, 화폭을 가득 메운 암청색의 한가로운데에 왼쪽 팔을 꺾어세워 
귀밑머리를 괸 여자가 이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다. 눈처럼 새하얘서 
기이한 느낌을 주는 긴 생머리도 그러려니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알몸 또한 밝은 담황색이기에 침침한 주변에 대조되어 무척 도드라져 
보인다. 화폭의 바깥 어디엔가 틈새가 난 구름장이 있고 그 배후에 해가 있어, 
영사기가 뿜어내는 빛줄기처럼 곧게 투사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를 괸 왼쪽 팔과는 달리, 아직 자유로운 오른쪽 팔은 앙상하기 짝이 
없는 어깻죽지로부터 양쪽 젖가슴과 배꼽 사이를 가로질러 맥없이 아래로 
늘어 뜨려졌지만 그 손만큼은, 온몸의 힘이 거기에 응축되기라도 한 듯 다섯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꼿꼿이 펴고 있다. 무엇인가를 움켜잡으려는 기세다. 
하지만 손아귀에 쥐어질 것이라곤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여자는 사각의 
틀 안에 갇힌 몸이고 무엇인지 불분명한 암청만이 여자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을 뿐이다. 무위로 끝낼게 뻔한 여자의 시도가 일견 안타까운 노릇이긴 하나 
여자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다소 위안을 준다. 검고 가느다란 선으로만 
그려진 두 눈으로 보아 여자는 영락없이 잠든 상태다. 나아가서 여자의 잠은 
꿈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자신이 갈구하는 그 무엇인가를 바야흐로 손아귀에 
낚아채려는 순간에 직면한 꿈이리라. 한껏 시위가 당겨진 활짱마냥 팽팽한 
엉덩이의 곡선이 매우 긴박한 느낌을 주는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혹은 여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기 위해 잠을 가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맞다 해도 무언가 강렬한 욕망이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들이 그렇게 말해준다. 
  
  *
  막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대뜸 "너 좀 올 수 있겠니?"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간단한 
한마디에도 후렴처럼 잔기침이 따랐다. 콜록, 콜록... 나는 아버지의 기침이 
멈출 때까지 안쓰러운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되물었다. 
  "몸이 또 안 좋으세요?"  
  "아니다. 너한테 머 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아버지의 목소리가 왠지 
좀 침울했다. 
  "무슨 일인데요?"
  "와보면 안다. 바쁘지 않으면 지금 좀 봤으면 좋겠다."
  나는 곧 가겠다고 대답했고 아버지가 통화를 끊는 소리를 듣고 나서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건강 문제가 아니라니 일단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의 
천식은 최근 두 해 사이에 약 보름간씩 네 차례나 입원을 요했을 만큼 
고질이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중 두 차례의 입원은 '기흉'이 원인이었다. 
나는 물론, 당사자인 아버지도 발병이 되고 나서야 그런 질환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그건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외기가 늑막강에 들어가 
바깥에서 폐를 압박하는 병이었다. 이를테면 사정없이 가슴을 눌러대는 
형국이니 숨이 가빠지는 게 당연했다. 천식이 심해서 그러려니 하고 
미적미적하고 있다가 증세가 극도로 악화됐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식은땀이 났다. 한밤중에 비상벨을 누르는 듯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침대 모서리에 손을 짚은 
아버지가 어찌나 숨을 헐떡이는지 임종 직전인 줄로만 알았다. 의사에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초상을 치를 뻔했다는 핀잔을 들을 만도 했다. 의사는 
아버지의 가슴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공기를 빼내기 위한 호스를 꽂아 넣었다. 
그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호스는 빨대처럼 가느다란 합성 수지에 지나지 
않았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지도 않은 채 응급실 한쪽 구석에서 의사 
단독으로 불과 십 분 안팎에 끝냈을 정도로 수술은 간단했다. 무슨 수술이 
그러할까 의심스럽기도 한데다 공기압이 과도한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것과도 
진배없는 수술 방법이 너무나 원시적인 듯하여 나는 은근히 불만이었는데 
의사의 얘기론 그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가슴에 눈곱만한 
상처자국 하나를 새로 붙이는 대가로 목숨을 건졌다. 퇴원 무렵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으니 앞으로 큰일을 해야겠다는 농담을 던질 만큼 아버지의 
기분은 호전됐다. 하지만 천식증은 매양 그대로였다. 게다가 기흉은 재발하기 
쉽다는 의사의 예언대로 아버지는 불과 몇 달 후 다시 가슴에 구멍을 뚫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따라서 천식으로건 기흉으로건 아버지는 
내게 늘 조마조마한 대상이었다. 나를 호출하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으면 우선 
가슴부터 울렁 내려앉는 건 그 때문이었다. 
  대관절 무슨 부탁일까... 아버지에게 가기 위해 겉옷을 꿰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는 누구에게선가 천식에 좋다는 약을 소개받았는데 동네 
약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 나를 종로 5가의 약국 거리로 심부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미리 용건을 밝히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슨 고민거리가 생기신 것일까 여겨지기도 했지만 꼭히 그럴 거란 
확신은 서지 않았다. 방금 전화기를 통해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묻어나긴 했어도 마음에 걸릴 정도로 심각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전세를 사는 여덟 평짜리 독신자 아파트까진 버스로 세 정류장에 
불과 했으므로 나는 여느 때처럼 금방 도착했다. 막상 아버지를 대했을 때, 
나는 조금 긴장하여 기색을 살폈는데 겉보기엔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껑충한 키에 늘상 봐왔던 회색 운동복을 평상복처럼 걸친 아버지는 
보름 전보다 살찌거나 야위지 않았으며 그다지 혈색이 좋지 않은 낯빛이긴 
했어도 더 나빠짐이 없이 내 눈에 익은 그대로였다. 
  "앉아라. 춥지 않더냐? 일기예보가 오늘 아침에 첫 얼음이 언댔는데."
  "별로요. 추위야 이제 시작인걸요 뭐.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셔야 겠어요. 
천식엔 감기가 독이라잖아요."
  나는 의사한테서 함께 들었던 말을 아버지에게 상기시켰다. 
  "그건 나도 신경 쓴다. 요전에 독감 예방 주사도 맞았고."
  나는 문쪽에 놓인 소파위에 걸터앉았다. 방문객이 누가 됐건 아버지의 
방에서 제대로 엉덩이를 붙일 만한 곳이라곤 그 낡아빠진 이인용 소파밖에 
없었다 . 원룸형이라 넉넉하진 못해도 혼자 쓰기에 그다지 협소하지 않은 
방이었건만 침대며 장롱, 책장 따위의 가구들이 잔뜩 들어차 있어 남은 공간은 
비좁기 이를 데 없었다. 장롱과 책장은 너무 크기도 한 데다 십수 년 전 내가 
결혼하여 집을 나오기 전부터 있던 구닥다리들이라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줄여 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사오게 됐을 때, 보다 작고 아담한 것들로 
바꿔드리려 했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벽에 부딪혀 실행에 올믹지 못했었다. 
그래도 침대가 없던 땐 형편이 나았는데 지난해 이불을 올리고 내리게도 힘에 
부칠 만큼 쇠약해진 아버지가 침대를 들이고 나서부터 우리 형제가 식솔들을 
데리고 오기조차 곤란해졌다. 더욱이 가구들이 차지하고 남은 그 조붓한 
공간마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29인치 텔레비전과 두 대의 비디오 테이프 
리코더, 그리고 무더기로 쌓인 비디오테이프들에 의해 태반을 저령당한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비디오테이프에 거의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대본소에서 빌린 테이프를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두 대의 리코더를 
이용하여 줄기차게 복사를 해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덜했지만 
홀로 된 후로 아버지는 여생에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주야장천 
비디오기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길 벌써 다섯 해였다. 그동안 
복사한 비디오테이프들이 책들을 죄다 몰아낸 채 책장 안을 가득 에우고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을 
점점 더 비좁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애초 한다해 지나면 시들해지리라 
예상했던 건 분명한 나의 억측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그런 집착에 대해 
내가 심각하게 생각한다거나 어떤병의 징후쯤으로 여기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러다 무리해서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일 따름이었다. 좋게 보면 
바람직한 취미 생활일 수도 있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통해 늘상 호구지택이 
급선무여서 그럴 테지만 잡기라곤 뭐 한 가지 할 줄 아는 게 없으며 노인정 
같은 데 나가 다른 늙은이들과 어울리기도 싫어하는 아버지가 
비디오테이프라도 만지작거리며 소일하지 않는 다면 무엇으로 매일매일의 
무료를 달랠 수 있을까! 
  "널 보자 했던 건 다름이아니라... 네가 오늘, 시간을 좀 낼 수 있었을까 
해서..."
  침대 위에 앉은 아버지가 왠지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무언가 곤란한 
얘기를 끄집어낼 듯한 어조로 물었다. 
  "예. 요즘 좀 한가해요. 쓰고 있던 작품도 끝냈고."
  "그럼 말이다. 나 대신 대구에 좀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구에요? 거긴 왜요?"
  전혀 뜻밖이었다. 대구는 내 출생지이자 초등학교 시절을 거의 보냈던 
곳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아니, 벌써 십여 년 전에 두 외삼촌네가 한 
해를 사이에 두고 연달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이래로 우리와는 아무런 
연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내가 직접 내려가야 도리겠짐나 너도 알다시피 몸이 시원찮으니... 
콜록,콜록,콜록..."
  갑자기 아버지는 한동안 기침을 뱉어냈다. 도리라고? 그건 아무데나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한층 의아스러워진 채 물끄러미 아버지를 지켜보고만 
었다. 
  "콜록,콜록... 엊저녁에 연락을 받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할머니라뇨?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라니까. 네 아버진 나고 나한테 어머니니까 너한텐 할머니 아니냐. 
왜, 기억이 잘 안 나? 우회는 몰라도 너는 할머니를 기억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알아차렸다. 나는 내 입이 다물려 
있지 않음을 한참 만에야 의식할 만큼 놀랐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생존했었다는 사실도 예삿일이 아니지만 이제 와서 할머니의 소식을 다시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내겐 충격이자 경이였다. 아버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할머니 얘기를 단 한번도 입에 올렸던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할머니와 
연락을 유지해왔다는 얘기였다. 아버지는 아마도 생전에 어머니에게조차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을 게 틀림었다. 
  "대관절 할머니 연세가 몇이셨어요?"
  "보자. 네 할머니가 형님을 열여덟에 낳았고 세 살 밑으로, 그러니까 
스물하나에 나를 낳았고 내가 올해 일흔 다섯이니까..."
  "아흔여섯!"
  "장수하신 거지. 뭘 그리 놀래?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마라."
  아버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곤 침대 머리맡에 얹혀 
있던 흰색 편지 봉투를 집어들더니 내게 건넸다. 돈이 든 것 같았는데 제법 
두툼했다. 
  "부조다. 가서 전해라. 내가 못 가는 사정도 얘기해주고. 전화번호를 뒤에다 
연필로 적어놨다. 대구 도착해서 어딘지 물어보고 찾아가면 될 거다."
  그렇다면 부조를 내 돈으로 충당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부득부득 내 
상의 호주머니에 봉투를 쑤셔넣었다. 다른 수입이 없는 아버지로선 우리 
형제에게서 받은 생활비를 축내어 부조금을 마련했을 게 뻔했다. 나는 어쩐지 
무렴한 감이 들어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구김살이 가지 않게 봉투를 
안주머니에 옮겨넣곤 아버지의 거처를 떠났다. 
  예정에도 없었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역을 출발하는 새마을호 
열차에 승차하여 좌석을 찾아 앉고 난 직후부터 꿈을 꾸듯 내가 흠뻑 빠져든 
아득한 과거로의 긴 여행이 말이다. 그리고 그 여행은 망각의 뻘 속에 묻혀 
있던 한 폭의 그림을 되살려내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
  초겨울의 어느 날, 땅거미가 짙어가던 무렵이었다.
  우회와 나는 흙투성이가 된 채 어둡고 싸늘한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구슬치기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삼학년, 동생은 일학년이었다. 상대방의 
구슬을 겨냥하느라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든가 혹은 일어설 때마다 우리의 
바지 주머니에선 유리구슬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기분 좋게 흘러나왔다. 
구슬치기는 어머니가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 늘상 반복하는 우리의 
일과였다.
  "형, 저거 봐라. 아버지가 뭘 갖고 나온다."
  동생이 속삭이는 소리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과연 헛간에서 
큼지막한 판때기 같은 걸 들고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까지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헛간의 문틈과 벽 사이로 새어나오던 불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는 그 즈음 자주 헛간에 틀어박혀 지냈다. 평소에도 
아버지는 우리가 톱이나 대패같이 위험한 연장을 건드리다 다칠까봐 헛간 
문에 자물통을 채워놓기 일쑤였지만 그 며칠 동안 아예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혼자 몇 시간이고 있다 나오곤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꽤나 궁금하게 여기던 차였다. 나무때기로 책꽂이나 선반 따위를 
뚝딱뚝딱 만드는게 취미인 아버지는 그런 작업을 할 때 헛간 문을 잠그긴커녕 
우리가 곁에서 구경하는 걸 더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이번엔 달랐던 것이다.
  아버지가 헛간에서 들고 나온 판때기는 내 앉은뱅이책상의 면적보다 조금 
더 넓음직했다. 너무 어두워지기도 했고 아버지가 만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으므로 우리는 구슬치기를 집어치우고 현관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꽁무니에 줄레줄레 따라붙었다.
  아직 불은 켜지 않은 집 안은 바깥보다도 한층 어두웠다. 아버지는 들고 
들어온 판때기를 조심스레 마루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휘발유 냄새 같은 
것이 싸하니 코를 찔렀다. 판때기 위에 어떤 형상이 어렴풋이 보였으나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두웠다.
  "밤이 됐으면 불이라도 좀 켜둘 일이지..."
  마루 위로 올라서며 아버지가 투덜거렸다. 그때 마루 위에 매달린 백열등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전기값 아깝게 사람도 없는데 왜 불을 켜놔요?"
  어머니가 부엌방에서 걸어나왔다. 어머니는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른 차림새였다. 다음 순간,
  "아니, 그게 도대체 뭐예요?"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래 떠졌다. 어머니는 몇 걸음 더 다가와 마룻바닥에 
놓인 것을 굽어보았다. 아직 신발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서 있던 우리도 
그제야 마루 끝에 바짝 다가섰다.
  "뭐긴 뭐야, 그림이지."
  아버지의 대꾸가 아니더라도 그게 그림인 줄은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난생 처음 보는 이상야릇한 그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기묘한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게 만든 최초의 그림이었다. 
여자의 알몸-내겐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 
환한 불빛 아래 노출됐던 것이다.
  "원 세상에, 애들 앞에서... 이거 빨리 치우지 못해요!"
  어머니는 무슨 끔찍한 상황에라도 직면한 양 오만상을 지으며 팩 내쐈다. 
나는 어머니의 화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까만 덧칠이 유난하여 입체감마저 
느끼게 하는 여자의 양 가랑이 사이는 바로 쳐다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참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이까짓 그림을 갖고 뭘 그래?"
  아버지는 그러나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그게 그림이유? 빨리 빨리 치우라니까 뭘 꾸물거려요!"
  "치우긴 왜 자꾸 치우라는 거야? 이게 어때서? 모처럼 그림 하나 
그려봤더니만, 별소릴 다 듣겠네."
  "차암, 누가 별소릴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림도 그림 나름이라구요. 없는 
돈에 붓이랑 물감이랑 사오길래 또 뭘 하려고 그러시나 했더니 그 따위 
남세스런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구려. 자기가 무슨 화가라도 되는 줄 아나봐."
  "아 그림은 화가만 그리나?"
  "영화가 잘 안되니까 이제 화가로 나설 셈이우? 안 그래도 걱정이 태산 
같은데 쪽박 찰 날이 빨리 안 와서 그래요?"
  "허, 이사람이 본데없이 강짜는..."
  아버지는 우리들을 흘긋 쳐다보며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우회가 
갑자기 헤헤거렸다. 저 가시내 발가벗었다. 철딱서니없는 녀석은 어머니의 
사나운 눈총을 맞고 금세 찔끔, 수그러졌다.
  "그런데 이 숭한 걸 왜 갖고 나왔어요? 설마 얻다 걸어둘 요량은 
아니시겠죠?"
  미리 못을 박아두겠다는 투로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걸 데야 미리 내가 봐뒀지. 응접실 벽이 허전하다 싶어 일부러 내가 그린 
거니까."
  "맙소사! 이 양반이 미쳤나봐. 그건 절대 안 돼요. 누굴 우세시키려고..."
  "우세는 무슨 우세? 집주인이 자기 그림을 집에다 거는데 누가 뭐랄 거야? 
원 사람도... 저렇게 예술을 이해 못해서야..."
  "또 그 지겨운 예술 타령이에요? 신물 나는 얘기는 이제 그만 작작해요!"
  어머니는 한치도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경황에도 나는 힐끔힐끔 그림을 곁눈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금역으로만 여겼던 성의 거리낌없는 노출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노르스름한 여자의 몸을 제외한 화폭은 검푸른 색으로만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의 몸은 불빛 아래 너무나 밝게 떠올라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자는 지금 깊은 물의 수면에 떠 있거나 까마득한 수면 아래 
빠진 상태여야 마땅할 터이지만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어느쪽이 옳은지 종잡기 어려웠다. 여자는 전혀 허우적거리지도 않았고 깊은 
휴식에 몰입한 나머지 깜박 잠이 든 거처럼 지극히 편안한 모습이었다. 다만 
갈퀴처럼 활짝 편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손은 그림의 중심부에 위치했으므로 화폭의 
가장자리를 향해 눈에 보이지 않는 파문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잠시 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입에서 난데없는 
일본말이 흘러나오고 난 다음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 히죽히죽 웃으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몇마디 던졌는데 씨도 먹힐 것 같이 안던 
어머니의 기세를 단번에 허물어뜨렸던 것이다.
  "키 큰 사람이 싱겁다더니..."
  어머니는 고양이가 가르랑거릴 때처럼 목을 움츠리며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내게 득의 양양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장회야, 너 얼른 가서 망치하고 대못 좀 찾아 갖고 와라."
  내가 헛간에 가서 나무자루가 달린 망치와 못통을 들고 왔을 땐 아버지는 
벌써 그림을 응접실 안에다 옮겨놓고 흰 회벽과 마주서서 그림을 걸 위치를 
잡느라 눈대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  키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거리낌없이 쾅쾅 대못을 박아넣었다.
  그림이 자리를 잡은 곳은 마당과 그 한켠 구석에 위치한 우물이 내다보이는 
조붓한 장방형의 창문 곁이었다. 다른 방과는 달리 목재로 바닥을 깐 
응접실에는 탁자 하나를 에워싸고 소파 세트가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긴 
소파에 앉으면 저절로 눈길이 맞은편 벽 위의 그림에 닿았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림이 걸린 후로,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깨어났을 때, 소파 위에 모로 누운 채 한동안 그림 속의 
여자를 멀거니 올려다보는 버릇이 내게 추가되었다.
  나는 알몸인 여자를 그리고 또 그것을 뻔질나게 손님들이 드나드는 
응접실의 벽에다 태연히 걸어두는 아버지의 취미랄까, 기질에 대해서 나 
나름의 어렴풋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해 봄의 어느 날에도 아버지는 꽤나 
우스꽝스런 짓을 해서 나를 난처하고 꺼림칙한 처지에 빠뜨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었는데 다른 반 아이 하나가 교실에 찾아와서 우리 반 
담임선생이 교무실에서 나를 부른다고 전했다. 그냥 오라는 것도 아니고 
책가방을 싸서 오란다는 거였다. 게다가 그 아이는 담임 선생 곁에 웬 수상한 
사람이 앉아 있더라고 덧붙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내 작이 교문 앞 만화가게 영감이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쳐들어왔을 거라고 겁을 주었다. 아닌게아니라 약간의 외상이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 만화가게 영감이 쉬는 시간에 교실에 나타나 
외상이 많은 아이들을 족치는 건 드문 일이 아닌 걸로 미루어 직접 
담임선생께 찾아가지 말란 법도 없었다. 나는 책가방을 싸들고 잔뜩 주눅이 든 
채 어기적어기적 교무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담임선생과 함께 나를 기다리던 
사람은 가당찮게도 아버지였다. 나는 안심이 되기에 앞서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철 지난 쥐색 오버코트를 꾀죄죄하게 걸쳐입은 아버지는 수염이 
숭숭 자라나고 부석부석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되게 점잔을 빼는 데다 전에 
보지 못했던 수상쩍은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회야,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신단다. 어머닐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집 볼 사람이 없다고 아버지께서 오셨다. 오늘은 그만 집에 가도 된다."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땡그랑 땡그랑 울렸다. 담임선생은 그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침까지도 멀쩡하던 어머니가 불과 몇 시간 사이에 큰 
탈이 났다니. 교정을 가로질러 나오면서 까닭을 물었지만 왠지 아버지는 
자세한 내막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가보면 알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아버지는 그러나 교문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태도를 돌변시켰다. 배를 잡고 
키득키득 웃어젖히는 게 아닌가!
  "아, 재밌다. 재밌어..."
  "뭐예요? 왜 그래요?"
  "걱정 마, 인마. 다 쇼야. 쇼라구."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렇다면 학교에 도로 가겠다고 버텼다.
  "가서 어떡할래?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선생님한테 일러바칠 
셈이냐?"
  짐짓 화난 얼굴로 윽박지르고 나서 이내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나를 구슬렸다.
  "이제 진짜 쇼를 보러 가는 거야. 아버지가 너한테 좋은 구경 한 가지 
시켜주겠다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심통은... 자. 빨리 가자. 오늘이 마지막 
날이거든."
  아버지와 나는 합승 버스를 타고 시내 번화가로 나갔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길모퉁이에 있는 어느 극장 앞이었다. 매표구 앞엔 표를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출입구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 일러놓곤 
극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극장 안의 누군가를 만나고 나오기만 하면 표를 끊지 않아도 
되었다. 대다수의 극장들에서 그렇게 통했다.
  극장 안으로부터 한바탕 굿판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한 소란스러움이 
길거리로 범람해 나오고 있었다. 높고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어딘지 
흐느적거리는 색소폰 소리, 신나게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 휘파람, 기성, 
박수소리. 극장의 커다란 간판엔, '춤과 노래의 향연' '국내 최대의 호화 쇼' 
등의 선전 문구와 함께 열을 지어 한쪽 다리를 높게 치켜든 수영복 차림의 
무희들과 화려한 드레스나 연미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가수들의 모습이 
울긋불긋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다지 숙맥이 아니었으므로 훤한 대낮에 학교에도 가지 않은 채 그런 
간판 아래 서 있기가 여간 낯뜨거운 노릇이 아니었다. 출입구에 다시 나타난 
아버지가 손짓으로 나를 부를 때까지 걸린 시간이 실제로는 오 분이 채 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무척 지루하게 나는 느꼈다.
  그날 내가 난생 처음으로 관람했던 쇼는 아버지의 허풍만큼 재미있었던 건 
아니었다. 뚜렷한 줄거리가 없이 출연자가 금방금방 바뀌었고 바깥에서 들을 
대보다 몇 곱절이나 더한 소란스러움에 고막이 다 아팠다. 하지만 나는 쇼를 
보면서 전에 없는 야릇한 경험을 했다. 전라에 가까운 무희들의 쭉 빠진 
알몸과 선정적인 율동에 심한 자극을 받은 내 고추가 돌처럼 야물어진 채 
자꾸만 바지의 앞섶을 뚫고 나오겠다고 기승을 부렸던 것이다. 나중에는 입 
안의 침이 죄다 말라버려 단내가 났다.
  자리를 찾아 나를 앉혔던 아버지는, 금방 갔다 오겠다고 해놓고 곧장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쇼가 한바퀴 돌아 처음에 봤던 장면이 다시 지나갈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근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아버지가 몰래 
나를 관찰하고 있을 것만 같은 의혹에 사로잡혀 이따금 주변을 슬며시 
훑어보곤 했다.
  "재밌지?"
  극장문을 나서며 아버지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이 궁해 어물어물거리다 
말았다. 오늘 일은 엄마에겐 절대 비밀로 해야 돼. 극장 옆골목에 위치한 
다방으로 나를 데려가면서 아버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는 내게 
칼피스를 사주었다. 아버지는 커피 한 잔을 마셨고 담배 두 대를 피웠는데 
내내 잠자코 있다가 일어설 때쯤, 요즘은 사업이 잘 되지 않아 큰일이다라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나도 피부로 느끼는 사실이었다. 영사기사며 
변사, 극장의 상영일자를 따내러 다니는 연락책들로 응접실과 사랑방 문턱이 
닳을 지경이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그들의 그림자를 보기조차 뜸해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허전한 응접실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함이라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림은 내걸리자마자 우리 집의 명물처럼 되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응당 응접실에서 머물다 가곤 했는데 가훈이라도 
걸어놓음직하 자리를 난데없이 차고 앉은 나체화를 보곤 저마다 한마디씩 
논평을 가했다. 대체로 너무 야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방문객의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아버지의 도움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야유하는 것은 
삼갔다.
  그 무렵,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으론 큰아버지와 할머니, 하나같이 
가난뱅이들인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 몇 분, 그리고 여고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새침데기 이모를 꼽을 수 있겠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발걸음을 하는 일이 드물었고 두 외삼촌들도 그랬다. 
그 중에서 그림에 대해 악의에 찬 욕설과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분노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일한 동기이자 
형님인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는 오른쪽 다리가 허벅지의 중간에서 뭉떵 잘려나간 상이 
군인이었다. 늘상 명찰도 계급장도 없이 때가 꼬질꼬질하고 볼썽사납게 구겨진 
쑥색 군복 차림에 목발을 짚으며 다녔다. 밝은 곳에 있어도 그늘이 진 듯한 
표정도 그랬지만 퀭하니 팬 눈매에서 이상한 광채가 휘번뜩이는 큰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겐 공연히 두렵기만 한 존재였다. 언젠가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춰 
우리들에게 일러준 얘기에 의하면 큰아버진 낙동강 전투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고 그 자신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기 때문에 표정이 무섭게 
변해버렸다는 거였다.
  "이런 추접스러운 걸 그림이라고 붙여놓은 거야, 우라질 새끼!"
  그림이 내걸린 다음날인가 연 때처럼 응접실 안에까지 짚고 들어온 목발을 
벽에다 세워놓곤 외발로 껑충 뛰어 짐을 부리듯 소파 위에 털썩 몸을 
내던졌던 큰아버지는 못 보던 그림이 눈길에 닿자 다짜고짜 이를 갈았다. 그 
다음에도 앉기만 하면 그림을 노려보면서 욕설이 분명한 말을 입 안으로 
응얼거리기 일쑤였다.
  큰아버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간혹 낮술에 만취가 된 
채 우리 집을 온통 소란에 빠트리는가 하면 소파 위에 널브러져 
곯아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 부모는 안방으로 건너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었다.
  "형님이 또 도망갔대요?"
  "그런 모양이야."
  "저걸 어째! 이번엔 또 어디 가 숨었을까요?"
  "낸들 알 수 있나, 어휴..."
  큰어머니가 아무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춘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불구로 돌아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처음 그런 일을 당했을 땐, 아버지가 
큰아버지를 대신하여 형수의 친정이 있는 영덕에까지 찾아가서 간곡한 설득 
끝에 데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큰어머니의 가출벽은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큰어머니가 우리 집에 모습을 비치는 경우란 연중 딱 한 차례. 할아버지의 
제삿날뿐이었다. 큰어머니는 어머니보다 세 살 위라고 들었지만 십 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까만 몸빼를 입은 모습이 시장에서 나물 파는 아낙네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큰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칠성시장이란 데에서 
나물을 팔기도 한다고 했다. 큰어머니가 우리 집에 올 때면 나보다 두 살 위인 
용숙이누나를 동반했는데 그 누나는 첫돌 무렵에 포격 소리에 놀라 귀가 
먹어버린 나머지 말도 하니 못하게 돼버린 농아였다. 모녀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들처럼 눈길을 떨군 채 쥐죽은 듯 앉아 있다가 어머니가 손에 쥐어주는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돌아가곤 했다. 큰집에서 모셔야 할 제사를 우리가 
떠맡은 데 대해 야코죽어 그럴 거라고 어머니가 말했다.
  "차암, 형님도 딱하지... 용숙인 어떡하구요."
  "내가 접때 얘기 안 했던가? 딴 집에 맡겼다고."
  "그런 애를 누가 맡아요? 요즘 널린 게 식모 애들인데."
  "그래도 빨래 같은 건 곧잘 하나봐, 심성도 착하고."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어린걸 남의 집에... 귀머거리에다 벙어리라고 구박은 
또 얼마나 받을지..."
  어머니는 그러나 내 사촌누나의 문제에 관한 한 깊이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언젠가 손버릇이 나쁘고 불결하다는 점 때문에 '부뜰이'라는 
식모누나를 내보내게 됐을 당시, 아버지가 용숙이누나를 데려다 놓자고 했는데 
어머니가 펄쩍 뛰며 반대했었던 것이다. 다시 식모를 들일 형편이 못 되는 
데다 그러잖아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큰아버지가 딸의 입주를 기화로 더욱 
귀찮게 굴 거라는 게 어머니의 핑계였다. 꼭히 용숙이누나가 마음에 걸렸던 
탓이라기보단 점차 어려워지던 형편이 더욱 큰 원인이었겠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그 후, 식모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집안일을 꾸려나갔다.
  큰아버지는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엔 금방 다녀가기도 했지만 간혹 
아버지의 부재시엔 응접실의 긴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동생이 귀가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어머니는 우리가 큰아버지 곁에 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으므로 큰아버지가 응접실에 있을 땐 우리는 그 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도 우리를 여간 무뚝뚝하게 대하는 게 아니었다. 한번도 
웃는 낯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렇긴 했지만 이따금 나는, 몇 시간이고 바스락 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응접실의 내부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 응접실의 
문과 맞보는 세 개의 창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발돋움을 하면 안이 
들여다보였다. 긴 소파는 창문과 직각 방향으로 놓여 있었기에 내가 훔쳐볼 수 
있는 건 큰아버지의 옆얼굴이었다. 벽 위에 걸린 그림은 비스듬한 방향으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큰아버지의 주위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큰아버지는 지긋한 시선을 그림에 고정시킨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일 때를 제외하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큰아버지의 
그런 자세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물 앞에서 혼자 
묵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그림 속의 여자와 무언의 대화는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어쩐지 남의 치부를 엿보는 것인 양 죄스러움이 느껴져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우리를 대하는 큰아버지의 태도나 밥때가 되면 따로 상을 차려 응접실로 
디밀곤 하던 어머니의 꺼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큰아버지가 안에 있을 땐 
함부로 응접실의 문을 열지 못했던 건 그 방의 문을 별 생각 없이 벌컥 
열어젖혔던 할머니가 낭패를 당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탓이기도 했다. 그때도 큰아버지는 낮술에 취해 얼굴이 시뻘갰었다. 평소에도 
큰아버지는 왠지 자신의 생모인 할머니와 맞닥뜨려도 인사는 고사하고 
알은체를 하는 법이 없었다. 큰아들을 대하는 할머니의 태도 또한 쌀쌀맞기 
그지없어 외면으로 일관했는데 좀 소리가 나게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고 해서 
트집잡힐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도 안에 있던 큰아버지가 냅다 소리를 
지른 게 시비의 발단이었다.
  "시끄럽게 굴기는... 보소! 이 집엔 뭣 하러 자꾸 들락거려요? 누가 반갑다 
합디까?"
  "쟈가 뭐라 카노?"
  뜻밖의 질책을 당한 할머니가 생감을 씹은 얼굴로 대꾸했다.
  "여긴 뭐 하러 뻔질나게 오느냔 말이오."
  "이눔 자식, 말하는 거 보래이. 에미가 그라믄 자식 집에도 오면 안된단 
말이가?"
  "누구보고 자식이라 했소? 난 당신 자식 아니란 말이오!"
  단순히 비아냥거리는 투로 시작했던 큰아버지의 말투가 갑자기 그 대목에서 
거칠어졌다. 금방이라도 찍어누를 듯이 할머니를 쏘아보는 두 눈은 멀찍이 
지켜보던 내가 다 소름끼쳤다. 할머니는 잠시 질린 얼굴이다가 돌연 
어디서그런 기운이 솟아난 건지 있는 대로 목청을 돋워 맞대거리로 나왔다.
  "이 천하에 못된 놈! 니가 내 배에서 안 나왔으믄 어데서 나왔단 말이고? 
니는 니 혼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아나?"
  "씨팔, 이놈의 할망구.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네. 입을 확 찢어버릴라."
  큰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없다는 사실도 잊은 듯 벌떡 일어서다가 마룻바닥 
위에 꽈당 모로 쓰러졌다. 어머니가 달려가서 큰아버지를 일으켜 소파에 다시 
앉혔다.
  "아주버님, 왜 이러세요? 진정하세요."
  마침 우리 집에 왔던 이모도 응접실 안을 기웃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수씨는 몰라요. 모릅니다! 내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용숙이 에미하고 
용숙이년 교대로 들쳐업고 안동에서 몇 날 며칠을 걸어 고향이라는 데로 
피난왔는데 어머니라는 사람이 만나기조차 꺼려합디다. 어린것한테 물 한 모금 
안 주고 내쫓더라구요. 그게 어머닙니까?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알겠다, 이놈아. 니가 그때 일을 갖고 여태꺼정 섭섭한 맘을 품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에미한테 불상놈처럼 덤빈단 말이가? 그래, 니는 니 사정만 알았지 
남의 사정은 쪼매도 모르는구나. 니가 무조건 날 찾아오믄 우째란 말이었노? 
전처 자식들이 득실득실한 집에 날 찾아댕기믄 내 입장이 뭐가 되노? 그라고 
집이 크다 보니 니 딴에는 방 하나쯤 남아 있을 기다 여겼는 줄 모르겠다마는 
서울에서 내려왔던 그 집 일가친척들도 방을 못 구해 쩔쩔맸다. 니는 그때 
사정이나 좀 알아보고 떠들어라."
  "야, 이거 사람 환장하겠네. 거지 쫓듯 내몰던 주제에 되려 큰소리를 쳐? 
당신이 그날 하룻밤만 재워줬어도 내가 요 모양 요 꼴은 되지 않았을 거야. 
그날 길거리에 누웠다 헌병한테 끌려가지만 않았어도..."
  "그기 우예 내 잘못이고? 지가 재수가 없어 그랬던 걸 갖고. 그라고 나이 
지난 사람 중에 군대 끌려간 게 니 혼자만 당한 일이가? 그때는 길에서 
아무나 막 잡아가던 판이었는데 인자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자빠졌노."
  "다 듣기 싫소! 당신이 날 자식으로 생각했으면 그때 그렇게 못해! 그건 
그렇고, 그래. 전처 자식들도 득실득실하다면서 왜 이 집에 찾아와? 누가 당신 
오랬어?"
  "이놈이 벨소릴 다하네. 여기가 니 집이가? 니 집도 아니믄서 니가 와 
큰소리고?"
  "누구 집이건! 당신은 우리한테 어머니 대접받을 생각 말어. 아버지가 남긴 
재산 탈탈 털어 혼자 챙겨갖고 재가할 땐 우릴 다시 안 볼 것처럼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낯짝을 들고 다녀."
  "보자보자하니까 이놈 자식이! 내가 니한테 오는 기가? 내가 니한테 밥을 
달라 카더나, 떡을 달라 카더나?"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보다못한 어머니가 당사자들 못지않게 큰 소리를 치며 나섰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응접실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구, 남세스럽어라. 며느리 보기도 그렇고 사돈 처녀 보기도 그렇고, 
내가 이 나이 묵도록 이런 봉변당하긴 첨이다."
  할머니는 늘 콧등에 걸고 다니는 돋보기를 벗어든 채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훔치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
  아버지가 영화를 만든 건 내가 세 살 때였다고 했다. 학년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할 때면 아버지의 직업란이 으레 '영화감독'으로 
메워졌는데, 그건 내가 아버지께 물어봐서 그랬을 뿐, 정작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일생을 통해 그 한 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것도 이미 
35밀리, 토키가 일반화된 시대에 고작 16밀리, 무성인 영화였다. 다만 당시의 
국산 영화가 거의 흑백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세 엄마'라는 제명의 그 
영화는 빛깔도 선명한 색채 필름이었다. 그 점이, 그 영화의 비극적인 
줄거리와 함께,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던 두 가지 요소 중의 하나였던 
게 틀림없었다. 그 영화가 분에 넘치게도 색채로 화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큰아버지와는 달리 운좋게도 현역 입대를 피해 군속으로 근무했던 아버지가, 
그때 사귀어둔 어느 미군 장교에 부탁, 하와이에 있다는 미군 현상소에다 
필름의 현상을 의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색채라곤 했지만 무성이라는 점이 그 영화의 결정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어떻게든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아버지의 집념과 궁핍한 제작 여건이 타협하여 빚어낸, 어쩔 수 없었던 결과인 
듯했다. 제작비에 얼마나 쪼들렸던가는 그 영화의 스태프나 출연진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영화의 첫머리에 소개되는 제작 아무개, 촬영 아무개, 각본 아무개, 감독 
아무개 등등이 각각 다른 이름이었으나 실은 그들의 본명이 하나같이 
'김장호'-바로 아버지 자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본명은 그 여러 가지 역할 
가운데에서 유독 감독에게만 부여돼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에겐 그 역할이 
가장 마음에 들었으며 그래서 가정환경조사서의 직업란에도 그렇게 적어넣길 
원했을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쳐서 만든 영화라 하더라도 관객들이야 
그 내막을 알 턱이 없을 테지만 형편없는 출연진의 면모만큼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더 많은 빚을 내서라도 진짜 배우들을 썼더라면 정말 
돈방석에 앉았을 거라고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한탄했던 바대로 김승호나 
문정숙 같은 일류 배우는커녕 이^5,23^삼류 배우도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연들조차 연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아마추어들이었다. 남자 
주연은 허우대가 그럴듯하고 약간 미남형으로 생긴 대학생을 뽑아 썼으며 
여자 주연은 얼굴이 반반하다는 것밖엔 따로 내세울 게 없는 어느 회사의 
여비서를 스카우트했다는 거였다. 남녀 주연이 그 지경이니 다른 배우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으랴마는 그 중에서도 내가 이학년 때 우리 집에 홀연 
나타났던 한 조연 여배우의 경우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다 나온다. 한마디로 
'육체파'의 미인형이었던 그 여자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영화를 두고 당시 출연료를 너무 적게 받은 것 같으니까 지금이라도 좀더 
내놓으라며 한참 소란을 피우다가 돌아갔던 것이다. 그 여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눈에 
띄어 영화에 출연했던 양공주 출신이라고 했다.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까지 그 
여자가 옛 직업을 고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영화에서 맡았던 역할은 
어울리지 않게도 순박한 시골 아낙이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배우들의 연기가 그럴듯했더라면 되려 이상한 일일 
거였다. 일제치하에 일본에 유학 가서 전공했던 영화 연출 지식과 귀국 후에 
잠시 몸을 담았던 극단에서 습득했던 실무 경험이 고작인 아버지에게서 
단기간의 연기 지도를 받았던 그들의 연기가 시종 뻣뻣함과 어색함으로 
일관했음은 당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투 장면은 아이들의 유희나 
다름없었고 웃는 연기를 한다는 게 얼굴을 볼썽사납게 일그러뜨리는 걸로 
대신했다.
  그렇긴 해도, 처음 이삼 년 동안엔 그 영화가 예상 밖의 큰 성공을 거뒀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집이 확고한 증거였다. 내가 
취학하기 전해에 순전히 그 영화가 벌어다준 돈으로 지었다는 그 집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양옥집이었다. 특히나 응접실의 양철지붕은 교회당의 
첨탑처럼 뾰족한 형태인 데다 샛노란 페인트로 곱게 단장했으므로 호기심에 
끌린 사람들이 집의 내부를 좀 구경하겠다고 이따금 찾아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 기억의 시발점인 취학 무렵에만 해도 그 영화의 전성기는 이미 
지난 상태로서 주로 시골 극장의 흥행에만 매달려 있었다. 웬만한 중소도시의 
극장에서 취할 수 있던 단물도 거의 다 빨아먹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꽤나 여러 사람들이 우리 집에 북적거렸다. 지방 흥행을 나갈 때, 
아버지를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에 먼 지방에 연고를 둔 
사람들은 우리 집의 사랑방에 머물면서 식객 노릇을 했다. 식객이 많을 땐 
어머니는 그들을 수발하기에 늘 바빴다. 우리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부뜰이누나를 내보내고 나서부턴 주로 이모가 어머니를 거들었다.
  이모는 여고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지만 이화여대를 낙방한 이후로 주위의 
진학 권유를 왠지 외면한 채 주로 외가와 우리 집을 왔다갔다하는 일로만 
소일하고 있었다. 성당에 열심인 이모는 늘 두툼한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약간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인 어머니에 비해 이모는 중키에 날씬했으며 
예쁘장했다. 그래서인지 식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작은사모님이 차려주는 밥이 더 맛있당께."
  이모가 밥상을 들고 사랑방에 들어갈 때면 영사기를 돌리는 늙다리 기사 
아저씨가 늘상 그런 말로 사람들을 웃겼다. 정작 전라도 청년인 변사 
강군아저씨는 가만있는데도 경상도 토박이인 그가 전라도 사투리를 흉내냈다. 
그럴 때마다 이모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오곤 했다.
  이모와 강군아저씨의 서글픈 연애 사건으로 인해 잠시 집안이 떠들썩하게 
된 건 어떻게 보면 우리 형제의 치기 탓이었다. 결과가 그렇게 귀착될 수밖에 
없었는진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그 사건은 우리에겐 마지막 식객을 잃게 했고 
이모의 생애엔 지울 길 없는 그늘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영화가 벙어리임은 이미 말했다. 따라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선 
당연히 변사가 있어야만 했다. 녹음기를 사용하면 될 텐데 왜 변사가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당시의 내게도 떠올랐다. 아닌게아니라 그 시절에도, 
요즘의 작고 간편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녹음기란 게 있긴 했다. 
멋대가리 없이 크기만 한 데다 단순히 녹음과 재생의 기능만 갖춘 것이었다. 
아무튼 거기에다 대사를 미리 녹음해두고 영화에 맞춰 테이프를 작동시키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런 가정은 이론상으론 무리가 없겠지만 단 몇 초라도 
화면에 등장하는 배우의 입놀림과 녹음기의 재생음이 어긋날 경우, 영화는 
엉망이 될 게 틀림없다. 까딱하면 남자의 입에서 상대방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아버지의 영화는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필름은 자주 끊어졌다. 한 세대 
전에 영화관에 가본 사람이라면 쉽게 기억할 것이다. 갑자기 화면이 뚝 소리와 
함께 어둠에 잠겨버리고 야유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무하던 영화관 안의 
풍경을 끊긴 필름은 당연히 이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잘려나가는 부분이 생긴다. 그게 비록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해도 약간의 시차가 발생함은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화면과 소리가 제각각이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일 
분이다. 더욱이 녹음 테이프 자체도 결함이 발생한다. 그것 또한 끊어지기 
쉬운데다 오래 사용하다 보면 길이가 늘어나거나 음질의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법이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의 영화는 음악이 삽입되는 부분에만 녹음기를 사용했고 
대사는 변사 혼자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들려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무대의 
한켠에 불을 밝히고 앉아 '...것이었던 것이었다'를 연발하던 초창기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와는 판이했다. 멀찍이 영사실에서 화면을 내려다보며 잔뜩 감정을 
잡아 대사를 읽어 내려가는 방식이었다. 요컨대 변사라기보단 성우에 
가까웠다. 그것도 일인 십역, 일인 백역을 감당해내야만 했으니 이만저만한 
재주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강군아저씨가 다름아닌 바로 그런 변사였다. 스물대여섯 살에 불과한 
청년이었으나 어릴 적부터 악극단을 딸라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했다. 
변사로서의 자질도 그때의 연마를 통해 개발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를 '강군'리라 불렀으므로 그는 자연 우리에겐 '강군아저씨'로 통했다.
  강군아저씨는 전라도가 고향이라고 했지만 별로 그쪽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간혹 "나는 뽀뽀귀신이랑께!"하고 소리치며 덥석 입을 맞추곤 해서 우리를 
질겁하게 만들 때를 제외하곤 늘 서울말에 가까운 말씨를 구사했다. 또한 그의 
사내답게 걸걸한 음성은 변사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실로 그는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만들어 붙인 듯이 우뚝 솟은 
콧잔등, 그리고 두툼하고 커다란 입술은 알맞게 탄 얼굴 위에서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몸매 또한 얼굴 생김새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역삼각이 뚜렷한 상체는 우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우리 집의 유일한 장기 식객이었다. 일이 없을 때도 한 식구처럼 
사랑방에 머물 때가 많았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집이 워낙 
멀어서라기보다 우리 가족 누구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밥을 더 달라는 말도 잘 끄집어내지 못해 눈만 끔벅거릴 만큼 순진한 면도 
있었던 그는 아침이면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마당을 말끔히 쓸곤 했다. 
게다가 우리와는 허물없는 친구처럼 장난치길 좋아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강군아저씨와 이모의 철딱서니없는 불장난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자신의 둔감을 자인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마당의 빨랫줄에 깨끗이 세탁된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고 빨래는 시키지 않아도 이모가 잘하는 일이라 무심히 보아넘길 
뻔했는데 문득 낯선 성인 남자의 속옷들이 섞여 있음을 발견하곤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거였다. 때마침 이모가 현관문 밖으로 나오길래 어머니가 물었다.
  "이거 누구 빨래야?"
  "...왜?"
  "이 팬티하고 러닝은 우리 게 아닌데?"
  "언니가 더 잘 알지 내가 알아? 형부 거 아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이모가 시침을 뗐다.
  "이게 어디 있었더랬어?"
  "...저어기."
  "저어기 어디?"
  "...사랑방 구석에. 난 이게 형부 것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혀를 찼다. 무언가 미심쩍긴 했지만 마음씨 착한 동생이 기왕 
빨래를 하는 김에 강군의 것도 함께 빨래통에 집어넣었을 거라 짐작했다. 
그렇더라도 동생의 그런 마음 씀씀이를 크게 비난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사내 속옷에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다. 
앞으론 형부 거라도 일절 손대지 마라'라는 요지의 충고에 그쳐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모와 강군아저씨의 관계가 드러남으로써 집안, 특히 외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데에는 겉으론 우회의 고자질이 발단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배후에 나의 교묘한 충동질이 숨어 있었는 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밀애는 어느 일요일에 우연히 발각됐다. 그날 우리 형제는 
이모를보호자 삼아 모처럼 영화관에 갈 채비를 서둘렀다. 시내의 한 
개봉관에서 '타잔'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대개는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백설공주'라든가 '쉐인'과 같은 영화를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바쁜 일이 있다며 역할을 이모에게 미뤘던 것이다. 이모도 
영화가 보고 싶다며 기꺼이 그러마 했다. 그런데 이모와 우리 형제가 집을 
나서려는 참에 아버지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곤,
  "너네들끼리만 가면 표를 사야 되잖아?"
  옷장수가 돈이 아까워서 옷을 못 사 입는다는 식으로 영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말했다. 하긴 아버지가 동행할 땐 표를 사본 적이 벌로 없었다. 
아버지는 잠시 궁리를 하더니 강군아저씨를 불렀다.
  "그래, 강군이 같이 가면 되겠다. 극장에 가서 박 상무한테 얘기해. 내가 
보냈다고. 박 상무 없으면 김 지배인을 찾아봐."
  그래서 우리 일행은 넷이 되었다.
  영화관은 무척이나 혼잡했다. 도중에 입장한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서 보다가 휴식 시간이 돼서야 간신히 좌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둘씩 따로 떨어져 앉아야만 했다. 커다란 화면을 좋아하는 우리 형제는 당연히 
무대 가까운 쪽을 택했고 그 결과 이모와 강군아저씨는 그보다 일고여덟 줄 
뒤에 나란히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금방 흥미진진한 화면으로 빨려들었다. 하지만 
우회 녀석은 무슨 오줌이 그리 자주 마려운지 수시로 좌석을 들락날락했다. 
게다가 부스럭거리며 화장실에 다녀왔으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형 아까 그 
코끼리는 어디 갔어? 하고 묻곤 해서 나를 신경질 나게 만들었다. 나는 차츰 
동생이 성가셔서 대꾸도 잘 안 해주게 됐는데 영화가 중간쯤 흘렀을 때 또 
자리를 비웠다 되돌아와 내 귀에 대고 속달거리는 녀석의 말이 어쩐지 
흘려들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 같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큰일났다니까 그러네, 저것들이 빠구리 붙을라고 그런다니까."
  이 녀석이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나 싶었다. '빠구리'란 내가 
알기론 남자 여자가 한 이불 속에서 흘레붙는 짓이었다. 길거리에서 미군과 
양색시들의 보기 민망한 어울림을 예사로 목격하는 우리 동네 아이들이 가장 
빈번히 입에 담는 낱말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진 채,
  "누가?"
  하고 다시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이모하고 강군아저씨지. 난 다 봤단 말이야."
  나는 한층 의아했다. 녀석이 분명 무얼 보고 하는 소린 모양인데 사람들이 
가득 찬 극장 안에서 어떻게 그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필경 녀석에게 무슨 
엉뚱한 오해가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녀석의 말을 묵살한 채 가만있기엔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게다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지껄이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여기 꼼짝 말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 인마. 나도 오줌 누고 올테니까."
  나는 눈치 없는 녀석이 엄벙덤벙 따라나설까봐 자못 위협적으로 말하곤 
허리를 굽힌 자세를 유지하며 살금살금 벽쪽의 통로로 빠져나왔다. 어두운데다 
통로에도 사람들이 빼곡해서 뒷좌석의 두 사람에게 들키리란 염려는 없었지만 
적진을 염탐하는 척후병이라도 된 듯 여간 마음이 조마조마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좌석들의 가장자리에 빈틈없이 늘어선 사람들의 검은 벽이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여기쯤이라 여겨지는 장소에서 벽의 틈새를 비집어 
머리를 디밀었다. 화면의 빛을 받은 관객들의 얼굴이 죄다 물오징어 빛깔로 
허옇게 떠올라 비슷비슷했다. 이모와 강군아저씨를 식별해내기까지 나는 
한참이나 눈망울을 굴려야만 했다.
  놀랍게도 강군아저씨의 굵직한 팔 하나가 이모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이모는 남자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채 곁눈으로만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군아저씨의 코가 이모의 머리카락 안에 숨어 있는 걸로 
미루어 유난히 이모에게서만 풍겨오는 향긋한 비누 냄새를 즐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내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벌렁거렸다. 긴장과 흥분이 교차하는 가운데 덜컥 
겁이 났다. 형언할 수 없이 미묘한 기분이었다. 오래 지켜보기조차 
부담스러웠다.
  좌석으로 되돌아온 나는 우선 우회의 입부터 막아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빠구리 운운하며 헤픈 입을 놀리는 걸 방치해서야 크게 일을 그르칠 
노릇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랬다간 나한테 죽을 줄 알어."
  "왜? 엄마한테만 살짝 얘기할 거야, 나는."
  녀석은 벌써부터 어머니에게 그 귀중한 정보를 전해줄 게 즐거운지 
헤벌쭉이 웃었다.
  " 안 돼! 엄마한테 말해두."
  옆좌석의 어른이 다소 높아진 내 목소리에 인상을 썼기 때문에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동생의 무릎을 가볍게 쥐어박는 데 그쳤다. 동생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동생의 입을 막아놓긴 했지만 그 순간 이후로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돌이켜보건대, 내 생애 최초의 '고뇌'가 그 무렵에 겪었던 
마음고생이 아니었나 싶다. 내 눈으로 목격했던 장면을 그냥 덮어두어선 안 
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떤 
방법으로 고백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내가 
고자질쟁이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털어놓고픈 마음에 지지 않고 맞섰다. 
나는 이 분명한 모순 앞에서 끝없는 절망에 빠져 헤어날 줄 몰랐다.
  사나흘이 지나도 사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입맛도 없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숨어 외치고 말았다는 동화 
속의 이발사처럼 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가 너무나 괴롭고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다,
  "형, 이모가 왔어. 우린 왜 왔는지 다 알지 헤헤..."
  학교를 파하고 귀가했던 나를 마당에서 붙잡고 은밀히 속삭이는 동생의 
말이 귓전에 닿았을 때, 문득 한 줄기 불순한 바람이 소리 없이 마음을 
스쳤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동생보다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 엄마한테 일러바쳤지? 난 다 안다."
  "난 안 그랬다. 자기가 말하면 죽인다고 했잖아, 씨이..."
  동생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도 난 네가 엄마한테 얘기해버릴 줄 알았는데... 빠구리는 틀린 
말이지만 말야."
  "그럼 얘기해도 돼? 그래도 형이 안 때릴 거야?"
  갑자기 동생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나는 일부러 대답을 유보한 채 동생이 
안심하도록 교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날이 지나지 않아 동생의 고자질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어머니는 길길이 뛰었다. 안방에다 이모를 꿇어앉혀 놓고 
칼을 들이대듯 강군아저씨와의 관계를 따져 물었다. 죽을 죄를 지은 죄인처럼 
사색이 된 이모는 흑흑 느껴 울기만 할 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굳게 
문이 닫힌 응접실에선 "허어 자네가 차암..."하는 탄식 소리에 섞여 때때로 
아버지의 고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고자질이 상상 외로 커다란 소동을 불러일으키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동생은 내 등뒤에서만 맴돌았다. 나도 사태의 추이가 이 지경에 
이르자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이모는 그날 밤으로 어머니의 손에 덜미를 잡힌 채 
외가로 끌려갔다. 강군아저씨는 이모가 떠난 직후, 낯익은 손가방 하나만을 
달랑 챙겨들고 힘없이 대문을 나섰다. 어두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지척지척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우리 형제는 대문간에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그토록 사내답게 여겨지던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쓸쓸하고 왜소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을 보였다.
  "강군아저씨! 이제 우리 집에 안 와요?"
  맹추 같은 동생 녀석이 울먹울먹 소리쳤다. 나는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강군아저씨는 멈춰 서서 일그러진 얼굴로 한 차례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곧장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강군아저씨는 나보다 어린 동생을 유난히 
귀여워했었다. 녀석은 스스로 뽀뽀귀신을 다시 못 보게 만든 자책감이 들어 
울먹였을 거였다.
  이모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우리 집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강군아저씨가 떠난 이후, 사랑방에 손님이 묵는 일이 거의 없어졌으므로 
어머니도 이모가 오지 않는 걸 별로 아쉽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는 곧 강군아저씨를 잊어버렸다. 다만 외가에 들렀을 때, 이따금 
외할머니가, 그 변사놈 인자 너거 집에 안 오제? 하고 묻곤 해서 문득 그를 
떠올릴 뿐이었다.
  "지가 올라갈 낭구를 쳐다봐야지. 근본도 하나 없는 딴따라 놈이 언감생심 
뉘 집 딸을 넘본단 말이고. 딸 하나 딴따라놈이 꼬여간 것만도 생각할수록 
억울해 죽겠는데..."
  외할아버지도 곁에서 뼈 있는 말을 한마디씩 내뱉곤 했다.
  *
  아버지의 영화가 상영해줄 극장을 잡지 못해 쉬는 날이 점점 많아지게 된 
건 강군아저씨가 우리 집에 머물 때도 이미 그랬었지만 그가 떠나고부턴 더욱 
한심한 지경이었다. 영화 관계롤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한두 해 동안은 아버지의 영화가 간간이 지방 나들이를 하곤 했었는데 
아버지가 그 벌거벗은 여자의 그림을 응접실의 벽에 내다걸던 무렵에 
이르러선 아예 발이 묶여 있었다. 생전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가 며칠씩이나 헛간에 틀어박혀 화가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할 일이 없고 무료했다는 증거일 터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자 우리 집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할 때가 많았다. 
삐걱삐걱, 응접실의 마룻바닥이 내는 소리가 전에 없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소파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이따금 영문 모를 고적감마저 
괴어들었다. 특히나 해질녘, 꺼져가는 햇살 속에서 창문에 비친 나무들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면 물 속 같은 정적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까닭 없이 
진저리가 쳐지곤 했다. 그럴 때면 어슴푸레한 벽 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새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눈을 뜰 때면 
방안이 완전한 어둠에 잠길 때까지 소파에 모로 누워 마주 바라보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할머니와 큰아버지만은 방문의 빈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서 한층 더 냉랭해진 두 사람이었지만 우리 
집을 드나듦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집안이 적막해짐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에는 서서히 변화가 나타났다.
  친구의 급한 사정을 외면하지 못한 아버지가 응접실의 한켠 구석에 놓여 
있던 전축을 냉큼 팔아 돈을 빌려주었다고 격분했던 어머니가, 그 일이 
불러일으킨 화증을 미처 삭이지 못해서인지, 아버지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큰아버지가 다녀가고 나자 부리나케 응접실로 달려간 어머니는 
그날따라 모든 참문들을 왈카닥달카닥 열어젖혔다. 외벽에 부딪힌 창문들이 
부서진다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휴, 지겨워! 담배를 피워도 꼭 '파랑새'만 피워대니, 이 냄새는 어떡하란 
거야. 사람이 염치라곤 진짜 눈곱만큼도 없어."
  어머니는 목덜미까지 벌겋게 상기된 채 치를 떨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깔아 나와 동생을 안방으로 몰아넣곤 빨리 자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가는 기척이 들린 
다음에 나는 잠을 이루려고 했지만 자꾸만 그쪽의 소리에 신경이 갔다.
  "아주버님은 언제까지 우리한테 와서 그러실 건가요?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속 터져서 못 살겠어요."
  어머니의 성마른 목소리는 처음부터 또렷하게 들렸다. 아버지는 잠자코 
담배나 피우고 있는 건지 대답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못 지나가요. 당신 생각을 들어야겠다구요. 당신 말마따나 
남한테도 그럴 수 있는데 당신 형님 도와주는 걸 누가 탓하겠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고 우리가 넉넉할 때 얘기죠. 당신은 지금 우리 형편이 
어떻게 돼가는지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
  "아주버님만이면 또 몰라요. 어머님도 있잖아요. 대관절 나더러 어떻게 
살라는 건가요?"
  "..."
  할머니를 두고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끓이는가는 나도 익히 아는 일이었다. 
폐가 나빴던 할아버지는 해방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그 두 해 뒤에 마흔다섯의 나이로 개가했다는 
할머니의 입장에선 여가 낯가죽이 두껍지 않고서야 우리 집에 그렇게 자주 
오지 못한다는 거였다. 술도가를 경영하던 새영감과 떵떵거리며 살 땐 코끝도 
보이지 않던 할머니가 노쇠한 영감이 장사에서 손을 떼고 난 후 전처의 
자식들이 재산을 죄다 흩어버리고 나자 궁상을 떨며 희떱게도 시어머니 
노릇을 하려 덤빈다고도 했다.
  내가 팔자가 사납아놔서 늘그막에 재취로 들어갔다마는, 핏줄이야 어데 
가겠노. 다 내 배 아프믄서 논 자식인데... 우리 작은아들이 에미를 쪼매 
봉양하는 기야 당연한 거라. 늙은 에미가 사정이 딱한데 우짤 기고. 안방의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잘도 주워섬기는 할머니를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대했다. 에잇, 쓰레기 같은 인간들. 허구한 날 우리 집에 와서 손을 벌릴 
게 뭐람. 아버지의 가난한 친구들이 찾아와 무언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할머니더러 들으라는 듯이 유독 큰 소리로 내뱉곤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짐짓 걱정스런 표정으로, 갸가 어릴 적부터 친구를 워낙 
좋아해 갖고선... 하고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할머니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데로 가서 앙가슴을 쥐어뜯는 시늉을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아이구 속 답답해! 말이내 좀 해봐요. 내가 지금 등신하고 살고 있나?"
  그래도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엿듣고 있는 나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요? 내 말대로 돈 좀 모았을 때 서울로 올라갔더라면 
일류 배우들 사서 영화 하나쯤은 찍고도 남았을 거예요. 당신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 영화 말이에요. 이런 껍데기만 그럴싸한 집이나 짓고 들어앉아 
있으면 밥이 그냥 생긴답디까? 소리도 안나오는 영화 하나 갖고 십 년, 이십 
년 먹고 살 줄 알았어요?"
  "그 뭘 모르는 소리 작작해! 영화를 찍기만 하면 돈을 펑펑 버는 줄 알아? 
집도 그렇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당신네 집에서 날 하도 우습게 
여기니까 보란 듯이 지은 거잖아. 잘 알면서 왜 그래?"
  드디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꾹꾹 누르다 터져나온 소리이기 때문인지 
처음부터 어조가 곱지 않았다. 이번엔 어머니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렇다더라도 우리가 아예 서울로 떠나버렸더라면 적어도 어머님이나 
아주버님이 찍자 붙진 못하겠죠. 아휴, 내가 미쳐..."
  "그 사람들은 내 부모고 형제야. 좀 귀찮더라도 어떡하겠어?"
  "그럼 언제까지고 그 사람들한테 시달려야 옳단 말이에요? 난 그렇게 
못해요, 못한다구요!"
  "당신이 좀 이해해. 내 모르는 건 아냐."
  "나한테만 이해하란 소리 말고 당신 형님이나 좀 이해시키세요. 왜 딱 
부러지게 얘길 못해요. 그만큼 도와줬으면 이제 그만 손 벌리라고 말이에요. 
자기도 인간이면 알아듣겠죠."
  "아 형님도 좋아서 그러겠어? 몸이나 성하면 모르지만..."
  "당신은 우리 집에 상이군인들이 찾아와서 귀찮게 구는 걸 보지도 
못했어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발버둥치는데 아주버님은 뭐 특별한 사람이에요?"
  "아니 이 사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래, 전쟁만 아니었다면 아무 탈 없이 
교편을 잡고 있어야 할 우리 형님이 구걸이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거야?"
  "그래요. 우리까지 굶어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릴 못해요?"
  "이 여편네가 미쳤나? 말이면 다 하는 줄 알아? 다 하느냐구!"
  빨리 조용해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나의 기대와는 반대로 말다툼은 
본격적인 국면으로 치달았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감정의 억제가 불가능해진 
듯 서로에게 마구 고함을 질렀다. 이웃집 개들이 다함께 컹컹 짖어댔다.
  굶어죽게 생겼다는 어머니의 말은 공연한 엄살이나 엄포가 아니었다. 
사학년에 올라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를 통해 매달 받아 읽던 
'어린이' 잡지의 정기구독을 끊어야만 했다. 어머니께 말만 하면 사주던 
크레파스나 연필과 같은 학용품도 가격을 따져 등급을 낮추거나 구입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잦아졌다.
  바깥 나들이를 못하는 자신의 영화와 보조를 맞추겠다는 야, 아버지는 
소파에 길게 누워 낮잠만 잤다. 점차 말이 없어진 어머니의 얼굴엔 우울한 
표정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아버지가 전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치 그림 속의 
여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소파에 누워 꿈지럭거리던 아버지가 
갑자기 후닥닥 일어나 우물로 달려가서 부리나케 세수며 면도를 마치고 
휑하니 집을 나섰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단 집을 나간 아버지는 
하루이틀씩 소식이 없기가 예사였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아버지가 극장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개 밤이 깊어 귀가했는데 나갈 때와는 
달리 맥이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엔 비듬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기 일쑤였고 가뜩이나 긴 얼굴은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져 더욱 
길어 보였다.
  "이번엔 어딜 갔다 오셨어요?"
  저녁상을 내오고 나서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리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조심스레 묻곤 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 없었다.
  "응, 뭐 별로..."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씀으로써 더 
이상 어머니가 캐묻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긴 한숨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드물긴 했지만 요행히 어느 시골 극장에 영화 상영 날짜가 잡힐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또 변사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변사의 시대가 
지난 지 오래였던 것이다. 강군아저씨를 다시 불러오면 손쉬울 터였지만 
아버지는 감히 그렇게 하잔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한때 
고용했던 배불뚝이 영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최 변사님'이라고 불러야만 
대답하는데다 저녁에 약주 한잔을 따로 대접해야 일을 제대로 한다는 그 
영감은 여간한 능구렁이가 아니었다.
  "요새 변사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돈 받고 선뜻 나설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갔소? 하지만 김 사장과는 과거 의리도 있고 해서 가설라믄 내 딱 
잘라 거절 못합소마는..."
  응접실의 소파 위에 배를 내밀고 앉아 거드름을 피는 영감을 보고 있자니 
내 밸이 다 꼴렸다. 아버지도 그런 느낌이었는지 딱 한 번 쓰곤 그 영감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진 아버지는 그 이후로, 영사기가 없는 시골 극장에선 영사기를 
돌려가면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변사 노릇까지 한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변사를 한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 어려웠다. 사랑방 벽을 화면 삼아 영화를 
비춰놓고 혼자 연습을 해쌓던 강군아저씨를 이따금 지켜보았던 적이 있는 
그게 얼마나 '끼'가 있어야 하는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길수야! 이제 이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야만 해. (길수가 
흐느끼는 소리) 부디 새엄마 말씀 잘 듣고 행복하게 살아다오.
  이런 여자의 목소리가 어떻게 아버지처럼 숫기없는 사람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올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다급해지면 못할 일도 없는 법이야."
  나와 같은 생각일 게 뻔한 어머니가, 변사 노릇을 잘 해내겠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다소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며칠 동안 시골에 머물다 귀가한 다음엔 아버지는 목이 잠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수시로 날달걀을 깨어 마셔도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진 오래 
걸렸다. 그럴 즈음엔 아침엔 윗목에 놓인 놋쇠 요강을 들여다보면 밤새 고인 
오줌 위에 핏물이 섞인 가래침이 떠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렵사리 아버지가 지방 흥행을 다녀와도 어머니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이 예전에 비하면 쥐꼬리나 다름없다는 거였다. 같은 
극장에서 재탕, 삼탕 우려먹으니 관객이 몰려들길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일 
터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귀가하는 날에 맞춰, 어떻게 알았는지 할머니가 미리 
와서 기다리곤 해서 어머니를 화나게 만들었다. 큰아버지는 아무때나 대중없이 
찾아왔지만 할머니는 헛걸음을 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이 
비치는 날이면 어머니가, 장회야 할머니가 오신 걸 보니 아버지가 오늘 오실 
모양이다 하고 푸념하곤 했다.
  그 무렵, 할머니는 나에게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다. 특히나 
그림에 관련된 일이어서인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여느 때처럼 응접실의 긴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왠지 잠머리가 뒤숭숭해져 반쯤 잠이 깼다. 심신이 
온통 안타까움과 초조함에 먹혀버린 듯했다. 차츰 의식이 돌아올수록 그런 
느낌이 사라지긴커녕 점점 기승을 부렸다. 더욱이 이상한 진동이 가세하여 
몸이 저절로 움찔움찔했다. 가수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도무지 
손쓸 방도를 찾지 못한 채 한동안 흐느적거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움과 초조함 그리고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진도, 그 모든 
것들의 진원지가 내 아랫도리임을 어렴풋이, 그러다 곧 확연히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잠이 저만치 달아났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주름투성이인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워왔다. 그 얼굴은 흉물스런 웃음을 띠고 있었다. 왠지 
아랫도리가 서늘했다.
  "영걸스럽기도 하지..."
  할머니는 내가 잠을 깬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신 내 부자기를 갈퀴 
같은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이미 성난 코브라의 대가리처럼 빳빳하게 
세워진 내 고추는 할머니의 손이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끄덕끄덕 요동을 
쳐댔다.
  나는 용수철에 튕겨지듯 벌떡 일어나 급하게 바지춤을 치켜올리다가 
소파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당황하고 화가 나서 아픈 줄도 몰랐다.
  "뭐, 뭐예요? 왜 이래요?"
  할머니에게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그 경황에도 나는 내가 당한 
수모가 남들에게 알려질까봐 큰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가 
허둥지둥 허리띠를 여미는 모습이 무슨 재미난 일이기나 한 듯 히쭉 웃으며 
지켜보았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니 화났나? 할무이가 니 고추 좀 만져봤다고 기분 나쁘다 이 말이가?"
  할머니는 되려 뻔뻔스럽게 이죽거렸다. 하도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했다.
  "너거 아부지가 내 속에서 나왔으니까 따지고 보믄 니도 내 속에서 나온 
거나 마찬가진 기라. 그런데 니가 고만한 일 갖고 할무이를 잡아 묵겠다고 
꼬나보면 우짤 기고? 니, 버릇없다 카는 소리 들을라 카나?"
  샐쭉한 표정으로 변한 할머니가 훈계조로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눈에 모인 
힘을 풀지 않다가 더 상대하기 싫어 홱 등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분노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좀 무안해진 탓인지 내 등에다 대고 우스갯소리인 양 할머니가 말했다.
  "장회야, 보래이. 니 저 그림 보고 있으믄 자지가 안 커지더나? 니 나이믄 
고래야 되는 긴데. 너거 할부지는 니만할 때 내한테 장가꺼정 들어서 사내 할 
짓 다 했는 거를."
  나는 걸음을 빨리 하여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누구에게도 할머니에게 당한 외설적인 수모를 얘기하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참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엇비슷한 때에 그림 속의 여자도 일차 수모를 겪었다.
  "저런 낯뜨거운 여자 그림이나 붙여놓고 있으니 집안에 재수가 있을 게 
뭐람. 저걸 안에 들여다놓고부터 되는 일이 없어. 떼다가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릴까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응접실의 소파를 차지하고 있을 때를 골라 그렇게 
뇌까렸다. 어머니의 말은 수 억지였다. 우리 집 형편이 기운 건 그림이 걸리기 
오래 전부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팽배해져가는 자신의 불만을 그림을 
빌미 삼아 표출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그림을 그냥 
놔둔 채 손을 댈 기미가 전혀 없었던 어머니의 실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당한 어이없는 수모가 단 한 번에 그친 데 비해 그림 
속의 여자는 그 후로도 툭하면 어머니에게 욕을 먹어야 했다는 점이 달랐다.

  *
  "이제 우리 영화는 돈이 되기 글렀어."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한번씩, 그것도 벽지의 극장만을 골라 찾아 
다니는 자신의 영화를 두고 이따금 아버지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을 에워싼 짙고 어두운 안개의 층이 한겹씩 두터움을 더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사학년 때의 가을이 되자 급기야 쌀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것은 가속도가 붙는다던가. 
일단 양식을 걱정할 단계에 이르자 어머니가 매일매일의 호구지책을 걱정할 
지경으로 사정이 급변했다.
  우리 집의 외양도 함께 급속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샛노란 자태가 
눈부셨던 응접실의 지붕은 버짐이 옮은 듯 너덜너덜 칠이 벗겨지거나 
군데군데 들떴고 우물가의 시멘트 바닥도 거북의 등처럼 흉한 금이 생겨났다. 
헛간에 들어가보면 나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다 바닥엔 빗물이 고여 
질벅질벅했다. 집의 구조물들은 서서히 곰삭아왔을 게 분명한데도 그 무렵, 
갑자기 눈에 띄게 된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결함들은 방치된 채로 경쟁하듯 
제각각 도를 더해갔다.
  큰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차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예전 같으면, "며눌아가, 오늘은 아침부터 니가 을매나 생각나던지... 
토깡이 같은 손주들도 눈에 삼삼해 못 견디겠더라. 늙으믄 다 고래지는 기라." 
하는 변죽을 앞세우기 일쑤였으나 그 빈말도 통 입에 담지 않았다. 게다가 
안방에 눌러앉던 습성을 잊어 버린 듯 할끔할끔 살피는 고양이 눈을 한 채 집 
안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한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심지어 뒤란의 장독대 
위에 올라가 된장 항아리며 김칫독을 열어보기도 했다. 행여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은 어머니에게 쌍심지를 돋웠다.
  "며눌아가, 보거래이. 니가 이만한 집을 지니고 살믄서 죽는 소릴 하믄 누가 
믿겠노? 내가 개가를 했다 캐도 시어무이는 시어무인데 니가 고래 날 
박정하게 대하믄 안 되는 기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는 애꿎은 나를 붙잡고 생트집을 부린 적도 있었다.
  "너거 아부지는 돈은 안 벌고 왜 밤낮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기고? 전에 
벌었던 돈을 아무도 모르는 데다 숨카놨다 카더나?"
  나는 할머니가 했던 말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는데, 아버지는 잠자코 듣기만 
했을 뿐 별무반응이었다. 나는 늘쩍지근한 아버지의 태도가 적이 
실망스러웠다. 진한 무력감이 느껴지면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답답함이 
이런 건가 싶었다.
  사람에게도 임종이 임박하면 의식이 또렷해지는 한 순간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아버지의 영화가 짧은 기간이나마 우리 가족을 
기쁘게 만들어준 건 그런 이치와 비슷할지 모른다.
  우리 가족에겐 유난히 춥고도 긴 겨울이 지나가고 마당가에 선 나무마다 
연초록 빛깔이 자욱하던 봄날이었다. 해거름 녘, 한동안 뜸하던 목발 소리가 
대문을 넘어왔다. 그늘이 진 마당으로 들어오는 큰아버지는 전보다 한층 
초췌했다. 쏘아보는 듯한 눈초리는 여전했지만 광대뼈는 불거질 대로 
불거졌으며 가뜩이나 움푹 들어갔던 눈자위도 한치는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날 오후 내내 평상 위에 펼쳐진 필름을 손질하던 참이었다. 
기름칠을 한 탈지면으로 필름의 표면을 닦아가는 작업은 세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필름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이 지극했으므로 그때까지도 그 영화는 
비가 오거나 부자연스럽게 건너뛰는 화면이 거의 없었다.
  "요즘도 사업이 시원찮냐?"
  평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아버지의 작업을 지켜보던 큰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다 지나간 얘깁니다. 이젠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어요."
  "그럴 만도 하지. 벌써 몇 년이냐. 그래도 영화가 아깝다. 너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참 잘 된 영화인데..."
  큰아버지는 후줄근한 군복 윗도리의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동생에게 무슨 
얘기건 시켜보고 싶었던 건지 큰아버지가 또 말을 붙였다.
  "극장을 잡기 힘들면 바깥에서 영화를 돌리면 될 텐데..."
  "바깥에서 돌려요?"
  "가설극장 말야. 기억 안 나? 우리 어릴 적엔 그런 거 많았잖아. 요즘도 
벽지엔 가설극장이 다닌다더라."
  "그야 그렇죠. 하지만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녜요. 깡패들이 얼마나 
행패가심한데요. 경우가 없기론 촌애들이 더해요. 텃세가 말도 못한다니까요. 
극장에 와서도 뜯어가는 판인데 가설극장이 오면 밥이라고 덤벼들 겁니다. 
그걸 무슨 수로 당해내요?"
  하지만 필름을 건사하던 아버지의 손이 어느새 멈춰져 있었다. 큰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넌 나보다도 더 소식이 깡통이로구나. 혁명 나고 군인들이 깡패들을 싹 
쓸어버린 것도 몰라. 신문에도 다 났잖았어? 전국적으로 치안국에서 잡아들인 
깡패가 몇 명이라더라... 4200명이지 아마."
  "...글쎄요."
  "깡패가 이제 씨가 말랐대두 그러네. 그놈들 죄다 토목공사 하는 데로 
보냈대. 이정재, 임화수 같은 웃대가리들도 벌벌 기며 콩밥 먹고 앉았는데 
무슨 소리야. 혁명재판소에서 사형 언도가 내려질 거라고 그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이 표정에 나타났다. 큰아버지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할 맘만 먹으면 일은 다 된 거야. 넌 천막이나 구해주고 
가만있기만 하면 돼. 장소 잡고, 천막 치고, 동네 건달들 막는 일은 내가 다 
맡을 테니까. 쓸 만한 놈, 몇만 데리고 다니면 문제없어. 표검사는 내가 할게. 
상이군인이 인상 쓰고 앉아 있으면 감히 공짜로 들어 올 생각을 못하겠지."
  미적미적하던 아버지가 마침내 수긍의 기색으로 돌아서자 가설극장에 관한 
일은 다음날부터 숨가쁘게 진행됐다. 모처럼 활력을 되찾은 아버지는 사업의 
청사진을 꾸미느라 밤잠을 설쳤다. 역할이 생긴 큰아버지도 수시로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숙의했다. 낯익은 영사기사 
아저씨도 다시 나타났다. 동면에 빠져 있던 우리 집이 활짝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형국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 집은 진풍경을 이루었다. 헌 밀가루 포대들이 방마다 
쌓였고 낯선 아줌마들이 저마다 재봉틀 하나씩을 끼고 앉아 솔기를 뜯어낸 
포대들을 연결해 천막을 만드느라 북새통이었다. 그 틈에 큰어머니의 모습도 
눈에 띄었는데, 쉴새없이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 가운데 유독 큰어머니만 별로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슬픈 소식 한 가지가 전해졌다. 변사 문제로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아버지가 강군아저씨에게 전보를 보내고 나서 며칠이 지나서였다. 
왠지 강군아저씨는 오지 않고 웬 낯선 청년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지는 강문식이라는 놈인디유. 사장님이 보내신 전보를 진즉 받긴 
받았는디,,, 우리 성이 죽어버렸으니 나가 대신 왔지라우."
  강군아저씨와는 판이하게 왜소한 체구에 흑인처럼 새카만 피붓빛을 한 
청년은 응접실에 안내되어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뭐? 강군이 죽었어?"
  아버지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안 믿어지실랑가 모르겠지만유, 참말로 그러코름 돼버렸당께요."
  "원, 세상에... 그래, 어떡하다 강군이 그렇게 됐소?"
  "집에 돌아와서 성은 겁나게 퍼마셨지라우. 전에는 쬐금밖에 못 마시던 
술인디... 그랑께, 무슨 말못할 고민이라도 있는가부다 짐작은 했지라우. 
그라다가 한 달쯤 지났을 때 성이 글씨, 약을 먹어버렸당께요. 약만 
먹었더라면 안 죽었을 터인디... 의사선생님 야그가, 성이 죽은 거는 약 때문이 
아니고 화상 때문이라 했지라우. 약기운이 빨리 퍼지게 할라고 군불을 엄청 
때버렸는지 어쨌는지 등짝이 방바닥처럼 시커멓게 타버렸으니 말 다했지요이."
  "저런!"
  아버지는 탄식하고 혀를 찼다. 그러길 몇 차례나 되풀이했다. 강군아저씨의 
동생이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따지자면 우리 식구는 모두 그 죽음의원인 
제공자인 셈이었다. 아버지는 그 점이 몹시 켕겼을 거였다. 나는 아버지와 
공범 의식이 들어, 아니 강군아저씨의 불행이 나에게서 기인한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저절로 아래로 쳐졌다.
  그런데 우리가 '작은강군아저씨'라고 부르게 된 그 청년이 변사로 
인정받기까진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변사가 뭐, 아무나 할 수 있는 줄 알아? 형이 변사였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돼. 멀리서 찾아와 준 건 고맙지만 그냥 돌아가게. 차비는 
주겠네."
  지갑에서 돈까지 꺼내주며 아버지가 타일렀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자기 
실력이 결코 형에 못지않다는 거였다. 형의 생전에는 물론, 죽은 다음에도 
형이 남긴 대본을 들고 혼자 연습을 했기 때문에 모든 대사를 대본을 보지 
않고도 달달 외운다고 말했다. 그 얘기마저 일소에 부친 아버지가 자꾸만 
돌아가라고 하자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목청을 돋우었다.
  "영호 씨! 이제가면 언제 와요? 기다려, 순이. 당신을 두고 떠나는 내 마음도 
찢어질 듯 아프다오. 아기를 낳으면 뭐라고 이름을 지을까요? 사내아일 낳으면 
길수라고 불러주오. 길할 길자, 빼어날 수자... 영호 씨이! 순이이이!"
  시큰둥하니 듣고 있던 아버지의 눈이 차츰 빛을 띠었다. 청년은 계속 대사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일단 멈추게 하고 몇 개의 다른 대목을 연거푸 주문했다. 
강군아저씨를 빼닮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이윽고 아버지는 희색이 
만면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가설극장 팀이 첫 행보를 딛기 직전의 열흘 남짓. 작은강군아저씨는 우리 집 
사랑방에 묵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무척 경계했다. 어머니가우리의 입에 
단단히 재갈을 물린 건 두 가지에 관해서였다. 그 하나는 작은강군아저씨에게 
형이 우리 집에서 쫓겨난 이유에 대해서 무조건 모른 체하라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이모에게 강군아저씨가 약을 먹고 죽었다는 얘기를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거였다. 작은강군아저씨가 우리 집에 머물 동안, 이모가 딱 한 번 
왔다갔는데 어머니는 새로 온 식객이 누구인지 이모에게 소개조차 시키지 
않았다. 나 또한 혹시 이모가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볼까 겁이 나서 동생을 
데리고 슬금슬금 이모를 피해다녔다.
  한 달에 가까운 준지 기간이 지나 가설극장 팀이 떠나는 날이 되자 
신새벽부터 우리 집 앞길이 시끌벅적했다. 크고 작은 짐들을 커다란 트럭의 
적재함에 옮겨 싣는 일은 큰아버지가 데려온 서너 명의 인부들이 맡아서 했다. 
영사기며 확성기 따위의 기자재, 그리고 어머니가 새로 빚을 낸 돈으로 
마련했다는 발전기가 적재함의 맨 안쪽에 실리고 나자 천막 대용인 
광목꾸러미들과 그것의 지주로 사용될 길다란 통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작은 
산을 이루었다.
  인부들은 죄다 더러운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차림새였는데 일을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들을 예사로 내뱉었다. 그런 다리 병신인 
큰아버지에게만은 형님, 형님 하며 굽실거렸다. 나는 큰아버지가 양복을 입은 
모습을 그날 처음 보았다. 산뜻하게 이발과 면도를 한 탓으로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는 큰아버지는 목발을 짚었으면서도 바짓가랑이 한쪽이 펄럭거리도록 
바삐 움직였다. 아버지는 적재함 주위만 맴돌면서, 조심들 해요, 무거운 걸 그 
위에 얹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하고 어눌한 소리나 질러댔다. 하지만 
인부들은 아버지의 지시에 대해선 그다지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것 같지 
않았다.
  쌓인 짐 위를 덮개로 감싸고 여러 가닥의 동앗줄로 묶는 작업이 완료되자 
큰아버지와 인부 하나가 운전석 옆좌석으로 올라탔다. 나머지 인부들은 짐 
위로 기어올라갔다.
  "자, 간다. 걱정 말고 천천히 와라."
  큰아버지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트럭은 금방 
한길로 꽁무니를 감추었다. 트럭이 남긴 매연 속에 서 있던 세 사람도 서둘러 
떠났다. 아버지와 작은강군아저씨, 그리고 영사기사는 시외버스를 타고 간다는 
거였다.
  "참, 학교 늦겠다. 너도 빨리 가봐."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갑자기 생각난 듯이 어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왠지 어머니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시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그 큰 천막을 치고 걷으려면 사람 손이 많이 들겠지. 경비도 서야 할 
테고... 그렇잖음 못된 놈들이 천막을 북북 찢고 들어온다잖아."
  떠난 지 일주일쯤 지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아버지에게서 인편이 
도착했다. 첫 기별은 퍽이나 고무적이었다.
  "포항, 안강 방면을 돌고 있는데 매일 사람들로 미어집니다요. 시골 
사람들이라 그런지 울고불고 난리를 쳐대는 통에 변사 소리조차 잘 안 
들린다니까요. 그저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기둥 하나가 쓰러져 버렸지 
뭡니까."
  아버지는 세탁물과 함께 작은 꾸러미 하나를 보냈다. 어머니가 신문지로 
포장된 그것을 펼치자 꼬깃꼬깃 구겨지거나 모서리가 닳은 지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이따금 돈을 보내왔다. 돈 구경이 잦아지면서 축 
처졌던 어머니의 어깨도 기운을 되찾았다. 외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나와 우회의 담임선생에게 밀린 인사를 치르기 위해 학교를 찾아왔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서너 달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오는 인편이 뜸해졌다. 
바야흐로 장마철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아버지 일행이 시골의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날이 많아졌다는 전언이었다. 영화를 돌리는 도중에 
폭우가 쏟아져 환불해준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헌 밀가루 포대들로 
만든 천막이었으니 바람막이에 지나지 않음이 당연할 거였다. 그 때문에 눈만 
뜨면 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게 어머니의 첫 일과가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들렀다. 어머니가 돌아가는 형편을 
물어볼 적마다 아버지는 밥이야 먹을 거라고만 대답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내가 눈을 떠보면 언제나 가고 없었다.
  한데, 다녀간 지 불과 며칠 만에 아버지가 되돌아온 건 지루하던 장마가 
끝머리에 다가선 듯 오랜만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던 밤이었다.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깼던 내가 무릎걸음으로 요강으로 다가가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딴전 부리지 말고 어서 바른 대로 말해요. 무슨 일이 있었죠? 당신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다구요."
  듣자하니 어머니였다. 아마도 응접실인 모양이었다. 어둠 속을 더듬어 보니 
과연 웅크린 채 잠이 든 동생만 있을 뿐 그 건너 어머니의 자리는 빈 채였다.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꾸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나 
불분명해서 귀를 세워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암, 기가 막혀서... 아주버님이 뭔데 자기 마음대로 해요? 대관절 주인이 
누구예요?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왔어요? 화난다고 그냥 와버리신 
거예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믿어요?"
  어머니는 앙칼지게 아버지를 몰아붙였다. 아버지의 대꾸는 여전히 멀리서 
듣는 갓난애의 가벼운 칭얼거림 같을 뿐이었다.
  "당신은 그럼 바보예요? 우리 식구가 누굴 믿고 살아요?"
  잠시 후, 감정이 북받친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상스럽기 짝이 없던 인부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가만 생각하니 내게도 
일말의 불길한 느낌이 그들을 처음 봤던 순간부터 잠재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이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날까 두렵기 짝이 없어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딱히 꼬집어낼 수 없이 막연하게만 존재하던 불길함이 이내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도 상상을 불허할 만치 참담한 모습이었다.
  귀가한 지 사흘이 지난 아버지가 가설극장으로 복귀할 각오를 어머니에게 
얘기하던 밤이었다. 홀연 큰아버지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나타났다. 우리 
부모는 반색을 하지 않았을망정 그다지 적대시하지 않는 태도로 큰아버지를 
맞아들였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저간의 불화를 사과하고 아버지를 다시 
데리고 가기 위해 큰아버지가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땅이 꺼지란 듯이 
한숨을 짓고 난 다음에 끄집어낸 큰아버지의 첫마디부터가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면목없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진 아버지는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 
곁에 앉아 있던 어머니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재수가 옴 붙은 거지, 씨팔...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게 어디 손탈 
물건들이냐? 밤에 도둑이 들었지 뭐야."
  "예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이 동시에 튀어나올 듯이 커졌고 핏기가 싹 가셨다. 
큰아버지가 외면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필름이고 영사기고 돈 될 만한 것은 싹 다 가져가 버렸다. 발전기 하나는 
무거워서 그랬는지 손을 못 댔더라. 어떤 놈이 그랬는지 잡히기만 하면 내가 
그냥..."
  "한 방에 자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죄다 잠귀신이 씌었던 건지...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안 
짖는다고..."
  "술 마셨더랬어요?"
  "...솔직히 말해서 좀 마시긴 마셨다. 여긴 어땠는지 몰라도 너 가고 난 
다음날 거긴 비가 좀 왔었다. 여관방에서 죽치고들 앉았으니 생각나는 게 
뭐겠노? 너 있을 때도 그랬잖아."
  사색이 된 아버지는 안절부절한 채 담배를 피워 물곤 뻑뻑 빨아댔다. 금세 
길게 자란 담뱃재가 부들부들 떨리는 담배의 끄트머리로부터 함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담배가 거의 꽁초로 변했을 때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경찰에 신고는 했겠죠?"
  "신고?" 시큰둥하니 큰아버지가 대꾸했다. "그 생각은 못해봤다. 
우리가허가받고 터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 시골 구석에 경찰이래 봐야 순경 
한두 명 있는 지서밖에 없는데 신고해봤자 뭐 뾰족한 수가 있겠나. 그 대신 
우리 모두가 종일 쫄쫄 굶으면서 동네방네 다 뒤지고 다녔다. 그래도 못 
찾았다. 씨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더니..."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 예컨대 필름은 남들에게 보여줘야 돈이 
나옵니다. 그 영화를 어디선가 돌렸다는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도둑놈은 잡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경찰에 미리 신고를 해놔야 해요. 다른 물건들도 
조만간 시중에 흘러나올 텐데 신고를 해놓지 않으면 경찰이 찾아줄 리 
있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구나. 지금이라도 네가 직접 서에 가서 신고해라. ...아무튼 
너한테 볼 낯이 없다. 그리고 내 생각엔 아직 거기 있는 애들을 데리고 
올라와서 일단 해산시키는 게 낫겠다. 기왕 엎질러진 물인데 어떡하겠노."
  형제간의 대화가 거기까지 왔을 때, 백지장 같은 얼굴로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버럭 악을 썼다.
  "엎질러진 물인데 어떡하냐구요? 그렇게 말하면 다예요? 당장 찾아내세요! 
그게 어떤 물건들인데요? 우리 집 밥줄이라구욧!"
  기습을 당한 큰아버지는 한 순간 찔끔했다. 하지만 금방 험상궂은 눈을 들어 
어머니를 쏴봤다.
  "이봐요, 제수씨!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랬으면 됐지 얻다대고 큰 
소리요, 큰 소리는! 니미랄. 내가 병신이라고 업신여기는 거야?"
  "남의 물건을 잃어버렸으면 책임을 지세요. 찾아내든지 물어내든지 
하라구요!"
  "내가 어떻게 책임져? 요는 훔쳐간 놈이 나쁜 놈이고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런 일을 당한 건데 그게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왜 이래, 이거!"
  어머니가 할딱거리는 가슴을 내밀며 다시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눈을 
부릅뜬 아버지가, 당신은 좀 가만 있어! 이러는 게 아니라고 하고 완강히 
가로막았다. 다음 순간, 어머니는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버렸다.
  "있어 봐야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거니까 난 그만 갈란다. 남아 있는 애들은 
네가 알아서 해라. 제수씨한테서 저런 소릴 들어가며 신경 쓸 맘 없다. 난 
이제 모르겠다. "
  아직도 무엇엔가 홀린 듯 어리벙벙한 우리들을 남겨놓은 채 큰아버지는 
훌쩍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보았던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큰아버지가 다시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서너 달이 지난 다음. 밀짚모자를 푹 눌러써서 자세히 얼굴을 관찰하기 
어려웠지만 학교 부근에서 사과 궤짝을 놓고 앉아 뽑기장사를 하는 다리 
병신이 꼭 큰아버지 같더라는 동생의 얘기를 전해듣고 다음날 일부러 그 
장소에 찾아갔던 내가 뽑기장수를 발견하지 못해 허탕친 일이 한번 있었을 
뿐이었다.

  *
  한때 가설극장에서 한몫을 했던 밀가루 포대들과 버팀목들이 우리 집 
아궁이에서 재로 변해갔다. 마구잡이로 뒤란에 쌓인 채 오는 대로 비를 맞은 
통나무들은 도끼의 날이 제대로 먹히지 안았다. 게다가 손에 익지 않은 
도끼질이었으므로 어머니와 내 손바닥은 물집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매서운 눈을 한 채 안간힘을 써대며 나무를 뻐갰다. 어머니에겐 
장작을 만듦으로써 연료비를 절약하는 것만이 힘들여 도끼질을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작업이 너무 힘에 
겨웠던 내가, 코끝 한번 비치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을 때, 어머니는 '일없다!' 
하고 쌀쌀맞게 대꾸하곤 악에 받친 듯이 나무를 내리찍었던 것이다.
  한동안 경찰서다 중고시장이다 도둑맞은 물건들을 찾기 위해 바삐 
돌아다니느라 소득도 없이 여름과 가을을 헌납해버린 아버지는 실어증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 없어졌고 밤낮 잠만 잤다. 자지 않으면 초점없는 눈을 한 채 
멍청히 앉아 있는 때가 많았다.
  어머니 또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예전에 비해 아버지를 들볶는 
일도 드물었다. 밥때가 되어도 부엌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아 
이상해서 들여다보면 어둑어둑한 부뚜막 위에 귀신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머니가 눈에 띄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밤 늦게야 돌아와서 저녁상을 차였다. 나는 어머니가 말 안 해도 
외가에 다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외가는 내 걸음으로 반시간쯤 걸리는 동네에 있었다. 때가 되면 갖가지 
꽃나무들과 푸성귀가 자라는 널찍한 안마당을 가졌고 좀 퇴락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덩그런 고가였다. 외가에 가면 도무지 바쁜 것이라곤 없는 항상 
넉넉함이 느껴진다. 그런 분위기는 대물림 한의사라는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을 터였다. 외할아버지는 약전골목에서도 손곱히는 한의원을 내고 
있었고 큰외삼촌도 가업을 잇기 위해 부친의 일을 돕고 있었다. 철이 든 
이후로 나는 외가에 가길 그대지 좋아하지 않았다. 외손자인 우리 형제들이야 
귀여움을 받았지만 이모를 제외한 외가 식구들이 아버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외할머니는 이따금 아버지를 두고 불한당이며, 
도둑놈이며, 광대라고 욕을 했다. 내가 우리 부모의 결혼에 얽힌, 그 해묵은 
사연을 알게 된 것도 외할머니의 사설에 의해서였다.
  아버지가 이미 다른 사람과 약혼했던 어머니를 꾀어내 파혼까지 시키고 
결혼을 했다는 거였다. 어머니의 약혼자는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키가 좀 
작다는 흠 외엔, 착실하고 집안도 좋아 외가측에서 크게 환영했던 
신랑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맏딸이 하루는 친구와 
쓸데없이 연극 구경을 갔다가 무대감독인가 뭔가 하는 놈팽이에게 홀딱 
넘어가 버렸다는 게 외할머니의 회한이었다. 파혼을 당한 억울함을 읍소해 
마지않던 그 의사는 지금 시내에 번듯한 병원을 경영하면서 아들 딸 잘 낳고 
보란 듯이 살고 있다며 외할머니는 앙상한 가슴을 쳐댔었다.
 "그렇게라고 결혼했으면 잘 살면 다행일 텐데 진숙이년이 자기만 똑똑한 줄 
알더니 제 눈깔 제가 쩔렀던 거지 뭐. 그게 다 팔잔데 이제 와서 그래 봐야 뭐 
한다고 자꾸 떠들어쌓노."
  외할아버지는 체념한 듯 말했지만 양의를 사위로 맞을 뻔 했다가 막판에 
놓쳐버린 데 따른 분함이 그때까지도 말끔히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그런 외가였으니 친정이라고 찾아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어머니는 
죽기보다도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말없는 외출은 더욱 
잦아지기만 했다.
  말이 없어지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면한 핍박을 혼자 감당하느라 우리 
형제에게 신경 쓸겨를이 거의이 없을 어머니에게서마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질문을 당하게 될 때면 문득 나 자신을 
되돌아보곤 했다. 잘 떠들고 까불던 우회 녀석도 눈에 띄게 기가 죽고 눈치만 
늘어갔다.  
  우리 집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은 응접실의 회벽에 걸린 
그림 속의 여자였따. 그림 속에서만은 우리 집의 모든 것을 짓누르고 있는 
추락의 분위기가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 여자의 견고한 짐속엔 우리가 
회복해야만 하고 또 목표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간직된 듯했다. 주위가 
정적에 잠기눈 해질녘, 어둑어둑한 응접실의 긴 소파 위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어느 틈에 나는 그림 속의 여자가 꾸는 꿈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초록색 융단 
같은 풀밭 위에서 우리 가족은 흥겨운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에겐 지친 기색이 없었고 화사한 어머니의 
얼굴은 행복으로 빛났다. 우회와 나는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곳엔 
시간의 흐름이 현실과 달랐다. 우리 형제는 시간을 거슬러가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젊은 모습이었다. 그렇더라고 그 
불을치가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었다.
  잠을 깨고 나면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하지만 그지없이 충만했던 
평화로움과 안락함이 한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채 감미로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 여자가 내게 은밀히 베풀어주는 위무이거나 나의 
내부에 항존해온 그 무엇에 대한 묵시처럼 생각되었다.

  그 겨울의 초입에 할머니가 우리 집에 발걸음을 끊게 된 일이 발생했다. 
큰아버지의 경우가 불행한 사건의 돌발에 따른 피치 못할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데 비해 할머니의 경우는 순전히 자의에 의했고 다소 엉뚱한 측면이 
있었다.
  그날 오후.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우회가 현관문 바깥에 
잔뜩 웅크리고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어머니는 왠지 안절부절못한 채 초조하기 
짝이 없는 기색이었으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동생도 덩달아 울상이었다. 
내가 의아하게 여기며 다가가자 어머니는 황급히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워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닌게아니라 빠끔히 열린 
현관문 틈으로 격한 말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게 말이나 돼요? 그분이 어떻게 제 아버지라는 겁니까?" 하고 소리치는 
사람은 아버지였고. "야가 에미 말을 밑구녕으로 듣나. 내가 언제 아버지라 
카더노 '아버지뻘'이라 캤지." 하고 지분거리는 사람은 할머니였다.
 "그 소리가 그 소리 아녜요? 아버지건 아버지뻘이건 그렇겐 못해요. 거기다 
지금 내 형편이 말이 아니라구요."
 "고까짓 비워논 방 하나 갖고 니가 고래 유세하나? 누가 안방을 내놓으라 
캤나? 오래 있겠다는 거도 아니고 소낙비나 좀 피하자는 긴데."
 "좌우지간 안 돼요!"
 "에미가 지금 그 사람하고 사니까 그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거 같고 니가 
이래 펄펄 뛸 줄 몰랐다. 그라면 니는 에미가 당장 거리에 나앉게 됐는데도 
눈도 깜짝 안 할 거란 말이가?"
 "정 사정이 그러면 어머니 혼자 오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분까지 
오시겠다면 절대로 못 받아들입니다. 절대로요!"
 "그 말이 내보고 오지 말라는 말이지 뭐고? 기집이 우째 서방 버리고 뿔뿔 
오노? 더럽어라. 방 한 칸 갖고"
"방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가 눈물을 찍어내는지 팽!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바스락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현관문에 
바짝 다가 섰다. 이윽고 착 가라앉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하소연조였다.
 "저엉 안 되겠다는 말이가? 니는 어릴 적부터 이넝도 참 많더라마는" 
  왠지 아버지의 대답이 막바로 터져나오지 않았다. 대신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아진 할머니의 말소리가 웅얼웅얼 이어졌다. 어머니의 낯빛이 차츰 
하얗게 변해갔다.
 "내가 지금 공치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니가 일본에 유학 갈 때 내가 반지 
빼준 거 기억 안 나나? 고래 공을 들여 키워나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를"
 ""
 "한번만 사정을 좀 봐도고. 늙은 에미가 자식한테 이만큼 통사정을 하는데 
니가 거절하믄 죄받을 기다."
""
  아버지의 침묵이 길어지자 어머니는 경련이 일어난 듯 몸을 떨었다. 실제로 
할머니와 맞서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가 위태롭게 여겨져 몹시 조마조마했다. 지겹도록 긴 
침묵이 흐른 다음이긴 했지만 마침내 아버지 입에서 대답이 떨어진 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안 ㄷ니다."
  그러자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더니 할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턱에 복숭아 씨를 박아넣은 듯한 얼굴인 할머니는 현관문 안에 대고 
저주와도 흡사한 소리를 질렀다. 
 "이 불효막심한 놈! 다시는 에미 얼굴 볼 생각 마라. 내가 죽었다캐도 오지 
마라. 니가 앞으로 올매나 잘사는지 내 두고 볼 기다."
  할머니는 지척에 서 있는 우리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횡하니 대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소파의 등받이에 맥없이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버지는 우리가 우르르 몰려들어 가자 갑자기 화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그날 오랫동안 화단에서 말라죽어 가는 
꽃나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도둑맞은 영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필름은 위험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도둑이 
다른 기자재들을 그리 오래 묵혀두진 않을 거란 아버지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선 해가 바뀌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경찰서에 가서 
수사를 계속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모양이었지만 늘 기운이 빠져 돌아왔다.
  영화를 되찾을 가망이 거의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나 큰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된 것만도 어쨌거나 속이 
시원하다는 거였다. 말이야 그랬지만 어머니는 허탈한 기색을 감추지 모했다.
  어머니가 돌발적으로 서울로 이사가자는 말을 터뜨린 건 그해 늦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내지른 비명처럼도 들렸다.
  여름에 접어들고부터 아버지가 난데없는 밀짚모자들을 한 아름씩 안아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곤 곧장 응접실에 틀어박혀 모자의 테두리를 하나씩 
뜯어내어 불빛에 비춰보는 것이었다. 모자의 테두리는 서너뼘쯤인 필름 
조각들이었다. 단박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필름 조각 하나를 들여다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답답하리만치 길었다. 게다가 
일단 눈을 거쳐간 것들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처음과 다름없는 
신중한 자세로 되돌아가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두어 번 되풀이될 때까진 어머니는 모른 체 방관했다. 이따금 
연민이 묻어나는 착잡한 눈길로 멀찍이 지켜보긴 했지만 드러내놓고 질책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밀짚모자 수집이 한때로 그치지 않자 어머니의 눈은 
분노와 우려의 빛을 띠어갔다.
 "제발 그만두세요! 대체 모슨 짓이에요. 이게?"
  급기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돌진했다.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필름을 홱 
낚아채어 내팽개쳤다.
  "다 산 것처럼 굴지 말아요. 그까짓 다 써먹은 영화 하나 잃어버린게 그렇게 
원통해요? 당신 혼자 살려면 이 짓 계속해요. 난 더 이상 못봐줘요. 나도 
살아야하잖아요. 또 재들은 어떡하구요!"
  물불 안 가릴 기세였다. 맥놓고 있다가 별안간 밀어닥친 격한 감정의 분류에 
얼이 반쯤은 빠져나간 얼굴인 아버지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정말 이제라도 서울로 올라갑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자구요. 돈만 있으면 까짓 영화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가요. 
서울로 가자구요!"
  어머니는 꺼이꺼이 울었다. 우리 앞에서 어머니가 펑펑 솟아나는 눈물을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기야 서울에 간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 처지가 서러웠을 거였다.
  며칠 후부터 복덕방 영감을 앞세운 사람들이 심심찮게 우리 집을 보러왔다. 
집 안 구석구석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응접실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림 앞에 
멈춰서서 오래 머물곤 했다. 그들은 우리 집의 치부를 발견한 양 은근히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림 속의 여자가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는 것 같기도  그 여자의 알몸 위에 낯선 사람들의 눈매가 
끼얹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보러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사겠다는 사람이 좀체 나서지 않던 우리 
집은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완연하져서야 팔렸다. 구입자는 양키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는데 특히나 널찍한 응접실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했다. 한데 그 
이유가 상품을 보관할 창고로 쓰기 위함이란 소리를 들었을 땐 어쩐지 우리 
집이 새 주인을 잘못 만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을 비워주기까진 한 달 이상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이사갈 데를 
알아보느라 두 번 서울을 다녀왔다. 그동안 어머니는 수시로 고물장수를 불러 
살림살이를 줄여 나갔다. 응접실에 놓였던 소파들이 가장 먼저 팔렸다. 
사랑방의 장롱이며 신발장같이 덩치 큰 물건들이 그 뒤를 이었고 나중엔 입던 
옷가지들도 고물장수의 대바구니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싸움과도 흡사한 
입씨름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인지 늘상 밀고 당기는 흥정을 벌였다. 
고물장수들은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어머니의 끈질김에 혀를 내둘렀다. 
헐값에도 팔아넘기지 못한 잡동사니들은 마당 구석에 쌓아 불태웠다. 물건들이 
떠나갈수록 우리 집은 해묵은 먼지가 날리고 어수선함을 더해갔다.
  이사하기 전날 밤, 짐이 다 꾸려진 걸 확인한 아버지가 그제야 벽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을 내렸다. 그림이 걸렸던 자리엔 하얀 사각형 하나가 남았다.
 "이건 어떻게 할까?"
  아버지는 특별히 누구를 지목하지 않은 채 무덤덤히 말했다.
 "그 재수 없는 그림을 어떡하긴요? 아무데나 던져놔요. 이사오는 사람이 
알아서 치우겠죠 뭐."
  어머니가 대뜸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깜짝 놀란 나는 
잽싸게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절 주세요. 제가 가질래요."
 "이 녀석아. 거추장스럽게 그걸 어떻게 가져가겠다고 그래?"
  어머니가 눈을 흘겨뜨며 퉁바리를 먹였다. 그래도 내가 그림을 갖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꼭 그래야만 할 이유를 대보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어머니를 
납득시킬 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쩔쩔매면서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뭐랄까 반드시 회복해야만 할 그 무엇이 담긴 그림, 결코 망각해ㅓ 안 
될 소중한 꿈을 간직한 여자를 함부로 버림받게 해선 안 된다는 책임감 
비슷한 느낌 그걸 어머니께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나 사이에 조성된 때아닌 실랑이가 
길어지자 다소 쑥스러운 듯 비켜서 있던 아버지가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버지는 내 연필 깎는 칼로 그림의 가장자리를 빙둘러 도려냈다. 화판에서 
분리된 그림은 보자기만한 너덜너덜한 천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걸 
둘둘 말아 했다. 하며 내가 던저 주었다.
  이사하던 날은 아침부터 찬바람이 씽씽 불어댔다. 찌뿌둥한 하늘엔 해가 
보이지 않았다. 되도록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다른 일꾼이라곤 트럭을 
몰고 온 운전사밖에 없었으므로 짐을 모두 트럭의 적재함에 쟁였을 땐 어느덧 
정오에 가까웠다. 어머니가 줄이고 또 줄였건만 짐은 적재함이 넘칠 만큼 
빽빽했다. 아버지가 담요 한 장을 들고 적재함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운전석 
뒤쪽의 조그만 창문이 있는 곳에 간신히 몸을 쑤셔넣어 앉았다. 우리 가족 
넷이 함께 타기엔 조수석이 너무 비좁았던 것이다. 그나마 조수석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좌석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운전사의 양해를 구한 나머지 
조수를 동승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보, 괜찮겠어요? 열 시간도 넘게 걸릴지 모른다는데."
  담요를 뒤집어쓴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어머니가 말하자. 난 
괜찮아, 애들이 멀미를 안 해야 될 텐데, 하고 아버지가 대꾸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모가 차창을 따라 종종걸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를 전송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고구마를 삶아 갖고온 
이모뿐이었다. 웃는지 찡그리는지 분간이 안 가는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는 
이모의 모습은 금세 차창뒤로 물러나 보이지 않았다. 
  차가 달리는 길 위엔 암갈색의 마른 잎들이 무수히 나뒹굴고 있었다. 짐을 
가득 실은 차는 끊임없이 헉헉대는데다 굼벵이처럼 느렸다. 하지만 잠간 
사이에 도시의 외곽을 벗어나 황량한 산야를 가로질러 끝없이 뻗은 국도로 
접어들었다. 그 무렵부터 간간이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어머니는 자주 고개를 
뒤로 돌려 낡은 담요의 한 자락이 보일뿐인 창을 힐끔거렸다. 
  두 시간쯤 가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도로 변의 음식점 앞에 차가 멈췄다.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아버지가 어기적어기적 차에서 내려왔다. 아버지는 
담요가 젖을까봐 조금 신경이 쓰일 뿐 다른 건 괜찮다고 말했다.
  우회와 나는 설렁탕 몇 숟갈을 뜨다 말고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뛰어나가 
웩웩 게워냈다. 따라나와 등을 두드려주던 어머니가 차라리 먹지 말라고 
일렀다. 우리는 바람을 쐬느라 밖에 서 있다가 견디기 힘든 추위에 다시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날씨가 이래서 걱정이에요. 제발 눈은 우지 말아야 될텐데."
  우리처럼 속이 메스꺼워진 탓인지 밥을 절반도 더 남긴 어머니가 말하자,
 "그래도 우짭니꺼, 기왕 떠난 길인데 뭐 벨로 걱정하지 마이소. 이 정도 오는 
기야 어데 눈이라 카겠는교."
  국물을 훌훌 들이키며 늙다리 운전사가 태평스레 대꾸했다.
 "첫눈은 서설이랬는데 무슨 일이야 있을라구."
  조금 풀린 안색으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아버지도 눈을 끔벅이며 
운전사의 말에 맞장구쳤다. 어머니는 그러나 그다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 차에 오르기까지 잔뜩 찌푸른 하늘에만 정신을 팔았다.
  어머니의 우려는 이내 현실로 다가왔다. 차가 추풍령을 넘어서자 갑자기 
퍼붓는 듯한 함박눈이 차창을 가렸다. 그쪽은 벌써 온 천지가 눈밭이었다. 
사정이 달랐더라면 탄성을 자아낼 법한 설경이었건만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금방 어둠이 차창에 달라붙어 왔으며 눈길을 
헤치며 힘겹게 굴러가던 차가 언제부터인가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차의 속도는 더욱 떨어졌다. 차의 속도는 더욱 떨어졌다 이따금 마주치던 
차량들의 불빛도 만나기 어려웠다. 보이는 것이라곤 전조등 불빛 안으로 
까맣게 달려오는 눈송이들과 끊임없이 다가오는 눈길뿐이었다. 세상에 우리만 
동떨어진 것 같아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아예 뒤창에 얼굴을 
붙이고 있었다.
  불안한 조짐을 보이던 차의 숨통이 덜컥 끊어져버린 건 적요하기 짝이 없는 
어느 야산 기슭이었다. 어디에도 불빛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무어리 
씨부렁거리며 운전사가 내리자 어머니도 부리나케 따라 내렸다. 운전사가 눈을 
맞으며 트럭의 앞덮개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머니는 뒤쪽으로 
사라졌다. 조금 있으니깐 운전사가 라이터 불을 켜들고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여보, 장히 아버지! 뒤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한참 
만에 운전사가 허리를 폈다. 운전사가 어머니를 부르는가 싶더니 어머니가 
눈을 밟으며 운  전사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차문을 조금 열었다. 찬바람이 
확 끼쳤다.
 "부속이 하나 나간 거 같습니더. 이거 조져뿌렀는데"
 "그럼 어떻개요? 못 고쳐요?"
 "부속만 구해오면 금방 고칩니더. 가만있자. 여가 어데쯤 되노?"
  그때, 갑자기 두 사람의 모습이 불빛 속에 드러났다. 그러자 운전사가 길 
가운데로 뛰어나가 손짓을 했다. 우리가 왔던 길을 굴러오던 트럭 한 대가 
반대편 차선에서 끼익, 멈춰 섰다. 운전사는 그쪽 차의 발 디딤판에 올라서서 
창을 반쯤 내리고 내다보는 상대방과 잠시 쑥덕거렸다. 그러더니 쪼매만 
기다리소, 금방 갔다 오겠습니더 하고 외치곤 그 차에 올라탔다.
 "얼마나 기다려요? 우리 집 양반이 아무래도"
 "추운데 안에 들어가 있으라 카이소. 길어봐야 한 시간입니더."
  어머니가 무어라 소리쳤으나 그 소리는 출발하는 차의 소음에 묻혀 버렸다. 
차의 꽁무니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어머니는 다시 적재함 곁으로 
다려갔다. 나는 동생에게 나오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여보! 자는 거예요? 다답 좀 해봐요!"
  어머니의 초조한 외침에 그제야 끄응, 하는 소리가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담요 속에서 새어나왔다. 어머니는 빨리 내려오라고 다그쳤다. 느릿느릿 
담요를 걷어낸 아버지가 비치적거리며 적재함에서 내려왔다. 왠지 아버지는 눈 
위에 발을 딛자 비틀거렸다. 어머니와 내가 얼른 양쪽에서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나둥그러졌을 게 틀림없었다. 내 몸에 닿은 아버지의 감촉이 
돌덩이처럼 차고 뻣뻣했다. 게다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어머니도 어째 
이상하다 느꼈는지 아버지의 귀에 입을 대고 여보, 여보, 불렀다.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힘들여 아버지를 조수석에 앉히긴 했어도 시동이 꺼진 차 안은 벌써 한기가 
느껴졌다. 몇 차례 더 아버지를 불러보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양쪽 뺨을 찰싹찰싹 소리나게 때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장희야, 큰일났다. 아버지가 좀 이상해졌다."
  어머니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도 아버지를 부르며 무르팍을 
흔들어보았건만 아버지는 더욱 축 처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 판국에 우회 
녀석마저 추워 죽겠다며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안 되겠다! 이러다 애 어른 다 죽이겠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어머니가 다시 차에서 뒤어내렸다. 그러더니 곧 
차문을 열고 나에게 좀 나와보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적재함 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그 위를 기웃거렸다.
 "너 올라가서 옷보퉁이 하나 찾아봐라. 아무거나. 저기 저게 옷보퉁이 같은데 
맞나 봐라. 눈에 덮여버려서 뭐가 뭔지 알 수 있어야지. 에이 빌어먹을!"
  나는 타이어를 발로 밀어내며 적재함 위로 기어올라갔다. 어머니가 가리킨 
것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보니 과연 옷보퉁이 같았다. 하지만 그 위로 지나간 
고무 로프가 너무나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보퉁이를 끄집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하도 낑낑거리고만 있으니까 답답해진 어머니가 용케도 
타이어 위에 올라서서 힘을 합쳐주었다. 그래도 여의치 않았지만 내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둘이서 용을 쓴 끝에 이불보만큼이나 커다란 옷보퉁이를 트럭 
아래로 굴러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머니가 보인 행동은 뜻밖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두텁게 
껴입을 옷을 찾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옷보퉁이를 풀어헤치면서 
내게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꺼내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성냥엔 내용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 
옷더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머니는 얇은 속옷 하나를 골라 불붙인 성냥을 
갖다 댔다. 성냥불은 금세 꺼져버렸다. 대여섯 개의 성냥개비들이 거푸 
허비됐다.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시도는 무리였다. 옷이 습기를 머금은데다 
그치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성냥만 다 써버리겠네. 어디 불쏘시개 할 만한 게 없을까"
  어머니는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보이는 것도 없는 주위를 황황히 
둘러보던 어머니의 눈길이 문득 나에게로 향했다.
 "참! 그 그림 갖고 와라. 네 책가방 속에 있지? 빨리!"
  나는 멈칫했다. 내 손으로 챙겨넣었으니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내 가방은 어머니의 손가방과 함께 조수석의 발을 두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어머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뭐 해? 빨리 갖고 오라니까!"
 "엄마. 차라리 책이 더 낫잖아? 공책도 괜찮고"
 "이놈 새끼가 뭐라는 거야! 공부하는 책을 왜 태우니? 내 말 어서 안 들을 
거야? 너 아버지 죽일래?"
 "그렇지만"
 "이 새끼를 그냥!"
  잡아먹을 듯이 불끈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서슬에 나는 그만 허겁지겁 
어머니의 지시를 다르고야 말았다.
  어머니의 추측대로 그림이 담긴 천조각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불쏘시개였다. 불을 붙이기가 무섭게 훅, 하는 소리르 내며 맹렬히 타 
들어갔다. 매운 연기가 주위로 퍼지면서 역겨운 기름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윽고 옷더미 위로 불이 옮겨붙었다.
  흩뿌려지는 눈발을 거슬러 제대로 자리르 잡은 불길이 너울너울 타 올랐다. 
간신히 차 밖으로 나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허벅지를 베고 불 가까이 펼쳐논 
옷가지들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동생은 신이 나서 불 주위를 
뛰어다녔다.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한 순간 그 여자의 환영을 보았다. 
날름거리는 불의 혓바닥 속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림 속의 여자는 누운 
자세 그대로 불길에 치받쳐 천천히 위로 치솟았다. 여자의 두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고 여자의 알몸은 훅훅 끼치는 화염 속에서도 머리카락 한 올 
까딱없이 온전했다. 차가운 눈발도 여자를 비껴갔다. 여자의 몸은 불길을 
벗어나 연이 떠오르듯 차츰차츰 높이 올라갔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 멀리 
희미해져가는 여자의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 마음속이 
얼레로부터 여자를 따라 풀려가던 한 가닥 여린 줄이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소리 없이 끊어졌다. 문득 차디찬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려내렸다.

  *
  희끗희끗한 것들이 먹지처럼 깜나 차창 밖에 비친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눈을 슴벅이며 차창에 이마를 댔다. 푸근함이 지나쳐 다소 
더위가 느껴지는 실내 온도 탓인지 딱딱한 유리에서 묻어나는 서늘한 축감이 
오히려 기분 좋게 전해왔다.
  차창에 바짝 붙인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칙칙한 어둠에 가라앉았던 좀 
전의 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흰 부분이 듬성듬성 생겨났고 먼 불빛들이 
물에 번진 듯 몽롱한 원형으로 부풀어 있었다. 차창을 비껴가는 눈발의 기세로 
판단건대 꽤나 푸짐한 강설인 모양이었다. 서울에도 눈이 오고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내겐 첫눈이 틀림없었다. 첫눈을 만나면 으레 그래왔듯이, 차창에 
눈을 대고 있는 동안, 나의 내부에서 일어난 어떤 국면의 전환이 물결처럼 
스쳐감을 느꼈다. 때가 한 겹 벗겨진 듯 머리가 맑았다.
  나는 잠이 든 옆좌석의 승객에게 신경을 쓰며 소리나지 않게 기지개를 켰다. 
짤막하게나마 단잠을 잔 뒤끝이긴 했지만 몸 속의 피로는 여진처럼 남아 
있었다. 하루에 오르내리기엔 어쨌거나 좀 긴 여행인 셈이었다.
  부스에서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은 쪽지에 적힌 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었었다. 
상가는 봉덕동에 위치한 그 집안 큰아들네였는데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할머니의 시신은 안방에 안치되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난 그 집 
식구들이 할머니의 시신을 보여주겠다며 병풍을 걷으려 했지만 나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만두게 했다. 예상보다도 윤택한 집이었고 예상보다도 
훨씬 친절하고 예의바른 집안이었다. 문상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나를 
위해 따로 상을 차려 내놓는 음식을 굳이 마다하지 못해 한 시간쯤 미루다 
뒤통수에 근지러움을 묻힌 채 그 집을 떠났다. 찾아갈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상머리에 앉았던 맏상주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애써 질책의 빛을 감추었지만 뼈가 느껴지던 말이었다.
 "아드님이 두 분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한번도 어머니를 찾아볼 
생각을 않는지 우리로선 좀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워낙 조신하신 분이라 별 
탈 없이 모시긴 했어도 따지고 보면 우리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아니겠어요? 어머닌 자식들을 못 봐 섭섭해하면서도 잘살아가고 있는지 늘 
걱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년에는 더 그랬어요. 하기야 살기 바쁜 세상이라 
찾아 뵙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과거지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무튼 우리 이제 
서로 안부나 물으며 지냅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디 이게 보통 
인연인가요. 아버님이 편잖아서 못 오셨다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고 
이렇게 손자분이라도 멀리서 오셨으니 떠나는 고인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우실 
겁니다."
  한량없이 너른 마음 앞에서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었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정말로 그 긴 세월 동안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지냈을까 의심이 갔다. 
게다가 워낙 조신하신 분이라니 내 기억 속에 각인된 할머니 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라 얼떨떨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토록 긴 수를 
다할 때까지 할머니가 피붙이고 아닌 자식에게서 내몰림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기억이 커다란 오류를 범해썬 게 아니었나 되짚어봐야 
하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 오류가 우리 가족 전체의 협량 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도 쉽게 떨치치 못했다.
  나는 객차와 객차 사이의 연결 통로로 나갔다. 바깥으로 통하는 계단 근처는 
삐걱거리는 소음이 유난히 심한데다 춥고 어둡고 아무도 없었다. 찬바람에 
섞여 들어온 눈발들만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계단 위에 
발을 딛고 걸터앉았다. 맨 아랫계단 위엔 목적지를 잘못 내린 눈발들이 뒤엉켜 
있다가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한움큼씩 탈출하고 있었다.
  머리를 식히러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많은 사념에 사로잡혔다. 
거기 바깥에 까맣게 먼 옛일들이 꼴이 꼬리를 몰고 아우성을 치며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할머니를 생각하고, 큰아버지를 생각하고, 
큰어머니와 용숙이 누나를 생각했다. 할머니와 연락을 유지해왔던 
아버지만큼은 어쩌면 큰집네의 거주지와 생사 여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녘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서글픔을 금치 못했다. 가난은 나도 누구 못지않게 숱하게 겪은 거라 
여겨왔다. 우리 가족의 서툰 서울 생활이 지나온 길은, 특히나 우리 형제가 
돈을 벌기까진, 어머니의 눈물로 점철된 몸부림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럴싸하던 우리 집은 서울의 콧구멍한 집과도 바꾸기 어려웠다. 
게다가 무언가 해볼 자금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허름한 집과 문간방 두 개를 
구하고 약간의 돈을 남겼는데 그 돈마저 사기꾼에게 걸려 몽땅 털려버렸다. 
영화를 만들기커녕 아버지는 충무로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어쩌다 이름도 
없는 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했던 때도 없진 않았지만 가슴 졸이며 신문의 
구인란을 들여다보는 일로 반평생을 거의 다 흘려보냈다. 몸이나 남들만큼 
건강했더라면 막노동판도 마다하지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의 
가난을 아무리 부풀릴지라도 가장이 불구인 데다 딸마저 정상이 아니었던 
큰아버지네의 그것과는 견줄 수 없을 거였다.
  나는 또, 강군아저씨와  이모를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달동네에 세 들었던 우리 집을 소식도 없이 찾아왔던 이모는 새카만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이모가 강군아저씨의 죽음을 진작 알아버렸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낯설게만 여겨지는 제복 차림임에도 한층 예뻐보이던 이모는 그런 
얘기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담담한 이모를 제쳐둔 채 되려 어머니가 검은 
제복을 두고 눈물짓다가 간곡한 수녀의 위로를 받아야 했다. 외조모 내외가 
돌아가신 이래, 두 오빠들이 이민을 떠나버린 데다 언니마저 잃어 외톨이가 된 
지금, 해가 갈수록 소식이 뜸해진 이모는 언젠가 나와 동생이 함께 찾아가 본 
적이 있는 부산 근처의 어느 수도원에서 늙는 만큼 경건함을 더해가고 
있을거였다. 언젠가 작은 강군아저씨, 강문식 씨의 소식을 접했을 땐 기적 
같았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신문의 기사 내용을 전화로 가르쳐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ㅇㅇ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고. 신문을 다시 찾아보니 옛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반가움에 
앞서 그 소식을 전해주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엔 
쓸쓸함과 회한이 짙게 묻어 났었다.
  아버지는 이 밤도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필경 이 
순간에도 콜록콜록 잔기침을 해대며 그 일에 몰두하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에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했다. 혹시나 아버지는 여지껏 밀짚모자의 
테를들려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그것이지만 잃어버린 영화의 운명은 
대관절 어떻게 귀결되었을까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내 얼굴에도 찬 알갱이들이 핑핑 날아와 얹혔다. 
이따금 지나가던 불빛들도 자욱한 눈보라의 장막이 지워버리고 없었다. 이런 
밤엔 도로 위의 차량 통행도 어려울 거였다. 하물며 외딴 길 위에서 덜컥 차가 
고장나버린 사람의 심정이 어떠할까는 말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나는 
누구인지 모르는 그 사람들을 걱정했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나는 추위를 무릅쓴 채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 버리고 나면 
누군가가 나를 찾다 실망해 돌아갈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에 잠시도 그 
길목을 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메나 왔을까. 열차는 굉음을 울리며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베를 가르다
    김영하
  1968년 경북 고령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1995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여 데뷔.
  주요작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호출
    베를 가르다
  중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다. 사막에서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호수의 소금기는 점점 더 진해져간다. 언젠가 호수는 
염전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호수에 수십만 마리의 홍학떼가 해마다 찾아온다. 
유럽에서 여름으 난 홍학떼들이 지중해를 건너 사하라를 지나 아프리카 
중남부의 보츠와나까지 회귀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홍학떼들은 알을 낳는다. 
알이 다 부화할 즘이면 건기가 찾아오고 호수의 곳곳은 소금 웅덩이로 
변해버린다. 홍학떼들은 그곳에서 25Km나 떨어진 작은 담수호까지 갓 태어난 
새끼들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다. 날 수 없는 새끼들 때문에 홍학들은 
걸어서 간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사막 속을 무연히 걷고 또 걷는다. 그 
죽음의행진에서 1/4 가량의 홍학이 모래 더미위에 긴 다리를 꺾으며 쓰러진다. 
비로소 담수호에 이른 홍학들은 그곳에서 물과 먹이를 섭취한 후에 새끼들이 
날갯짓을 시작하는 대로 다시 북쪽으로 날아간다. 
  다른 새끼들이 어미 새들을 따라 죽음을 호수를 떠났을 무렵에야 알에서 
깨어나 두리번거리는 것들.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북쪽을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걸어가면 갈수록 족쇄는 
두꺼워져간다. 나중에는 몸통보다 더 두꺼운 소금 덩이가 발목에 감긴다. 그 
소금 덩이의 접착 강도는 놀라울만큼 강해서 톱으로도 쉽게 체거하지 못할 
정도이다. 눈도 채 뜨지 못한 홍학 새끼는 제 몸보다 무거운 소금 덩이를 발에 
차고 북쪽으로 향하다 하나둘 쓰러져간다. 아마 그들은 썩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먹히지도 않을 것이므로 어쩌면 영원히 절여진 채 남아 있을 것이다.


  1
  - 생각보다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 그러니? 고맙다.
  벌써 사위는 어둑해져 있다.
  - 네가 무당이 될 줄은 몰랐어.
  - 나도 몰랐어.
  나는 수연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준다. 수연은 맥주를 들이켠다. 주위는 
여전히 소란스럽다. 신내림굿의 여운이 수락산 어귀를 떠나지 않는다. 
수연이는 유쾌해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작두춤의 여운이 
나마 있다.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고 입은 열려 있다. 나는 잔을 비우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다.
  - 사람이 작두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게 난 아직도 신기해.
  - 신기할 것 없어. 사람은 더한 것에서 올라설 수 있어.
  그녀의 말투는 무당의 그것을 닮아 있다.
  - 사진을 몇 컷 더 찍어야 해.
  - 아까 굿할 때 안 찍었어?
  - 찍었는데, 이런 장면도 하나 찍어 둬야지. 무당이 맥주 마시는거.
  - 찍어.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만지작거린다.

  2
  베가르기라는 춤이 있다. 내가 베가르기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87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날이 무척이나 더웠고 사람들은 봄을 
탓하며 거리를 거어다녔다. 낮잠이 그리운,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맥주나 한잔 할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그렇게 
제안했고 아마 세 명쯤 되는 친구들이 의기투합하여 학교 앞 맥주집으로 
향하던 참이었을 게다. 그렇게 걸어나오다 교문 앞쯤에서 우리는 긴 행렬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행렬 중에는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시위 
때면 언제나 마주치는 면면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그 해열 뒤를 졸졸 
따라가게 되었고 행렬은 교문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 집회가 있나? 우리 중 한 
친구가 물어왔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은 행렬의 
선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문 앞에서 멈춘 행렬은 둥굴고 긴 타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태양은 더 뜨거워진다. 모두들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행렬 사이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흰 광목 천으로 만든 홑옷을 걸친 
그녀 , 머리는 질끈 동여맸지만 여러 가닥이 풀어져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북과 장고들이 그 
여자의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몇몇의 사내들이 30미터는 좋이 됨직한 긴 베를 
가지고 그녀 앞에 섰다.
  그 여자가 수연이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그녀에 대하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나와 같은 과라는 것, 그러나 
수업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풍물을 하는 동아리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눈을 가졌고 호리호리한 몸매, 
화장이나 몸치장을 전혀 하지 않는 여자. 하지만 그날 우윳빛 소복을 입은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귀기까지 느껴지는 모습으로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직입해 있었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길 건너편에 전경들이 도열해 있는 게 보였다. 
언제라도 최루탄을 쏘며 달려들 것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반면에 학생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전경과 학생, 모두가 하얀 소복의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북소리에 맞춰 그녀의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그때쯤 누군가 이 집회가 얼마 
전에 고문으로 죽은 학생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열렸으며 이 춤의 이름이 
베가르기라는 것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베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 앞에 놓인 베는네 사람의 건장한 학생들이 팽팽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로 향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스팔트 바닥에 널브러지기도 하면서 그녀의 춤은 계속되었다. 허리 높이에서 
땅과 평행하게 펼쳐져 있는 베는 그녀가 다가오자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찢어진 틈으로 그녀의 몸이 들어섰다. 그때부터 그녀의 춤이 베를 가르며 
진행되었다.
  춤이 계속될수록 베는 점차 두 갈래로 벌어져갔다.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질펀했고 머리카락은 모두 풀려 흘러내렸다. 춤은 점차 격렬해져갔다. 그에 
따라 북과 장고의 소리도 높아지고 빨라져갔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찢어져가는 베, 그녀는 그 베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였다. 그녀가 몸을 숙일 
때면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서 속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치의 베마저 갈라져 베는 드디어 두 
조각이 되었지만 그녀는 몰아지경에 빠져 베가 모두 갈라진 후에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을 풀렸고 몸은 유연하게 흐느적거렸다. 그 장면은, 집회를 
기획한 이들에게는 미안   하지만, 참으로 색정적이었다.
  이상한 얘기지만, 그때 나는 그녀의 발을 보고 있었다. 몸의 다른 모든 
부분은 이완되었지만 그녀의 발만은 그렇지 않았다 뒤꿈치를 먼저 땅에 대고 
흘러가듯이 스텝을 밟는 한국 무용 특유의 발동작만큼은 생생하기 긴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싶다.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저 
뜨거운 아스팔트에 달궈진 그녀의 발을 차가운 물로 깨끗하고 시원하게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관중들 사이로 스르르 사라져버렸고 그제야 나는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눈부셨고 땅이 뜨거웠다. 춤이 끝나자 누군가의 선창으로 
구호가 터져나왔고 대열은 불어나기 시작했다. 전경들은 SY44 최루탄 
발사기를 하늘로 향했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한동안 그녀의 춤, 
그리고 벌거벗은 발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그녀의 
발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3
  사진을 찍은 수연은 동료 무당들에게 이끌려 잠시 자리를 뜬다. 여기저기 
질펀한 술자리가 펄쳐져 있다. 나는 굿음식을 집어 먹으며 필름을 되감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왜 바로 이런 때 그 여자가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대학가의 한 오피스텔에서 기거하던 시절의 여자다. 열세 평짜리 
방들이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형태. 문밖에는 쓰레기만이 
놓여 있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쓰레기를 통해 밖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쓰레기 봉투를 문밖에 내어놓지 않았으므로 잘 노출되지 
않았다.
  그녀의 방에는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튼이라기보다는 하얀 
천이라고 말해두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 슈퍼마켓을 
끼고 돌면 내가 살고 있던 그 오피스텔이 보였는데 그녀는 내 바로 옆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슈퍼마켓을 끼고 돌던 나는 내 방 쪽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형광등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스탠드의 불빛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불빛은 희미했고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촛불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발길을 멈추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흰 카ㅓ튼에 어른거리던 검은 그림자였다. 한 손을 
둥글게 구부려 머리 위로 올리고 다리는 곧게 올려 뻗은 여자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게 여자라고 믿었던 까닭은 우산처럼 펼쳐진 짧은 치마의 
윤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여자의 춤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반복되던 회전. 인간이라면 저럴 수가 있나? 한 
발을 든 채로 저토록 천천히. 그러면서 저렇게 많은 회전을 할 수는 없다. 
기괴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에 한없이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열쇠를 꺼내 들고 오피스텔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내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 한번 그녀의 방쪽을 힐끔거렸으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피스텔 주차장 옆 정원에 심어놓은 철쭉이 피었던 걸로 
보아 4월 언제쯤이 아닐까 싶은 날. 그녀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그날따라 취재가 오후에 있어 느지막이 방을 나서려는데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걸 처음 목격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의 집 문을 잠그듯 서툰 동작으로 
열쇠를 끼워 돌리고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함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어딘가 이생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뿐사뿐 출렁이며 걸어갔다. 아니 걸어갔다기보다는 흘러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녀가 계단에 이르러서야 그 걸음걸이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녀의 뒤꿈치는 땅에 떨어진 채 살짝 들려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몸 전체에 탄성을 추었던 게다.
  흰 커튼에 비친 그림자가 저 여자였을까? 방안에서는 믿을 수 없이 긴 
회전을 반복하던 여자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여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오피스텔의 현관 앞에 내려서자 그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오피스텔에서 슈퍼마켓을 지나 좀더 내려오면 길가이 연한 카페가 하나있다. 
퓨어(Pure), 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였는데 이름 그대로 내부에는 아무런 
그림도 장식도 걸려 있지 않은 다소 삭막해 보이는 곳이었다. 좁은 방안이 
지겨워지면 가끔 그 카페에 들러 술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가끔은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카페의 바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어떻게 그녀의 옆에 앉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가 전화기 옆에 앉아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몇 마디쯤 말을 
붙여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내가 건넨 말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으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이 집에 처음 오시나요? 이 음악 아세요? 따위의 질문들 
말이다.
  대화를 포기하고 앉아서 계속 술을 마시던 나는 그녀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의 출렁거리는 발걸음. 그런데도 어딘가 불균형한, 그 
걸음걸이 말이다. 그건 무용수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안자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말을 붙여보았다.
  - 혹시, 누레예프의 발을 본 적이 있나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은 조심스레 밝아졌다. 루돌프 누레예프, 전설적인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 1928년에 바이칼호에 면한 아름다운 호반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태어나 1993년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나의 아버지와 출생 
연도가 같은 그가 죽던 해에 나는 집을 떠나 독립했다.
  - 당신은 보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사진이 누레예프의 움직임을 기록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모두 
정지 화면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었다.
  - 누레예프와 공연할 수만 있었다면, 아니 그의 공연을 볼 수만 있었더라면.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리고 어깨는 한껏 올려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슬쩍 곁눈질 해 보았다. 허벅지와 90도를 이룬 
채 꺾인 무릎.그리고 그 무릎에서부터 엄지발가락까지는 일직선을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발레리나의 포즈였다.
  - 발레를 하시나보죠?
  - 네?
  몽환적인 표정으로 하얀 벽 쪽을 응시하던 그녀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반문을 해왔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자신이 취한 자세의 변화를 모르고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원래대로 돌아가버렸다. 바에 엎어질 
듯한 자세로 팔을 괴고 맥주를 드리켜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 옛날에, 아주 옛날에 했었지요. 지금은 하지 않아요. 아.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었지요?
  - 누레예프의 발이요.
  - 맞아요. 누레예프의 발. 그의 발은 완벽해요. 토슈즈 따위가 필요 없는 발. 
두 개의 점으로 전신을 지탱하죠. 완벽하게. 그의 모든 근육은 발레를 위해 
바쳐졌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누레예프의 그 멋진 발. 그 발만 찍은 
흑백사진을 그년도 본 것이다. 그 흑백사진은 누레예프의 발 곳곳에 배어 있는 
긴장감을 빛과 그늘로 표현해냈다. 주름 하나하나가 모두 생생하다. 발에 
새겨진 그 주름과 근육들만큼 누레예프를 잘 표현하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옆방 여자는 계속 주저리주저리 누레예프 이야기를 했다. 에이즈로 죽어도 
좋아. 그렇게 춤출 수만 있다면. 그녀는 여전히 꿈꾸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사도라 던켠과 최승희와 최근에 드라마에서 최승희 역을 했던 
채시라 이야기까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무용 이외의 화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 왜 지금은 무용을 안 하세요?
  내 질문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 다리를 다쳤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저는 예중을 다녔더랬는데 
선생님께서 절더러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절 지명한 
이유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콩쿠르를 휩쓸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저는 열심히 연습했어요. 선생님이 퇴근하신 뒤에도 집에 가지 않고 밤늦도록 
춤을 추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때였지요. 하지만 
연습이 과했던 모양이에요. 콩쿠르를 이틀 앞둔 어느 날, 무릎의 인대가 
끊어져버렸어요. 저야 물론이고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낙담이 대단했어요. 
의사는 무용을 더 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미칠 것 같았어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몸은 조금 전의 무용을 하는 
듯한 긴장된 자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저보다 훨씬 못하던 애들이 지금은 미국이나 러시아에 가서 프리마돈나가 
돼 있는 걸 보면 화가 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끔 신문지상에 이름이 나오는 몇몇 사람의 이름을 댔다. 
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보스턴과 페테르부르크, 키로프 같은 도시의 이름들이 술술술 튀어나왔다.
  - 제 인생은 그때 끝난 거에요. 전 지금도 꿈만 꾸면 춤을 추고 있어요. 
제가 가장 연기하고 싶었던 역이 뭔지 아세요? 지젤이에요. 지젤 아세요? 
지젤이라는 여자가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는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지요. 
혹시 그 공연 보셨어요? 강수진이라고 있잖아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돈나. 그 여자가 작년에 한국에서 올린 공연이 바로 지젤이에요. 거기서 
강수진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듯이 춤을 추어대다가 자결하는 1막의 
결말부는 정말 압권이었어요. 강수진이 제 중학교 때 동기였어요. 그땐 저보다 
훨씬 못햇었는데. 그리고 2막이 되면 그 여자 지젤이 요정이 되어 호숫가에서 
춤을 추어요. 그러면 지나가던 남자들이 지젤에 홀려 밤새도록 함께 춤을 
추다가 죽어버리거나 실성해버리죠. 지젤 역은 모든 발레리나들이 꿈꾸는 
역이에요. 왠지 아세요? 지젤 역을 맡은 배우는 1막에서는 아주 촌스러운 
여자를 연기해야 하고 2막에서는 반대로 요염하고 고혹적이면서 화려한 
연기를 구사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어려워요.
  그녀의 발은 꼿꼿해져 있었다. 그녀의 발을 보며 나는 
베르니니(1598--1680)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황홀경(Ecstast of St. 
Therese)'이라는 작품을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잇는 이 작품은 성 테레사가 정령을 접하여 황홀경에 빠지는 장면을 
조각하여 놓았다. 아빌랴의 성 테레사(1512--1582)는 성령을 통해 계시를 받아 
신비주의적인 까멜 수녀회를 창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르니니의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묘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조각 속에 묘사된 성 
테레사의 표정이 오르가슴에 오른 여인의 모습과 흡사하여 별반 구별이 되질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 테레사 위쪽에는 한 어린 천사가 화살을 들고 
그녀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그건 사랑의 신 큐피트이다. 
그러니 이 조각가가 정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성녀 테레사가 아니라 
오르가슴에 도달한 여인이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을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조각 속의 성 테레사는 탈진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늘어져 있고 주름이 많은 
옷자락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다. 눈은 지그시 감고 입은 약간 벌려져 있으며 
손은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처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비밀은 발에 있다. 
옷자락 사이로 비어져 나온 테레사의 발은 발등이 아닌 발바닥 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 긴장된 발가락들은 테레사가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극도의 
흥분 상태에 도달해 있음을 알려준다. 베르니니의 천재성은 그 발가락을 통해 
드러난다.

  4
  수연은 돌아오자마자 제 잔을 내게 넘기며 술을 따른다. 잔을 권하는 동작에 
옛날 수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술 마셔.
  - 발이 예뻐졌더군.
  나는 작두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발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ㅇ게 날이 서 
태양빛을 퉁겨내던 작두와 그 위에 올라선 그녀의 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을까. 한없이 무거워지면 또한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
  - 또 발을 씻겨주고 싶나보지?
  수연이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버선발을 흘끗 살펴본다.
  - 너희 신문사는 별걸 다 취채하는구나.
  수연이 화제를 돌린다.
  - 요새 지면이 늘어났잖아. 매일매일 신기한 사람들을 구해서 대문짝만하게 
싣는 게 우리 임무지. 신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기하게 만들어야 하고 신기한 
사람들은 더 신기하게 만들어야 해.
  - 기사 타이틀은 뭐야?
  - 글쎄. 내가 정할 건 아니지만 신세대 무당 어쩌구로 나가겠지. 우리 
데스크는 신세대란 말에 중독돼 있거든.
  나와 수연은 한참을 침묵 속에 앉아 있다. 수락산의 어둠이 더 깊어 가는 
걸느낀다.
  - 손님이 왔구먼.
  등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가 대뜸 말을 던져 나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크게 놀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수연은 자리에서 성큼 일어서며 
고개를 숙인다.
  - 인사드려. 우리 선생님이셔. 이쪽은 제 대학 때 친구예요.
  나도 얼결에 일어나 그녀의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아까 굿을 
주재하던 수연의 신어머니가 검은 어둠을 등지고 우뚝 서 있다. 키는 작지만 
어딘가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다.
  - 귀한 손님 겉으니 잘 채려서 대접하더라고.
  - 예, 쉬세요.
  수연의 신어머니가 허위적허위적 지나쳐 간다. 그녀의 옷자락이 스치며 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 인간문화재시라며?
  - 응.
  -그럼 넌 전수자가 되는 거야?
  - 그런 셈이지.
  - 무병을 앓지 않고도 내림굿을 받을 수 있구나.
  수연의 대답은 않고 그저 웃는다. 머릿속으로는 연신 작두를 타던 그녀의 
하얀 발이 명멸한다.

  5
  대학원에서 수연을 다시 만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게 과에서도 화제였다. 4년 내내 수업 한번 제대로 듣지 않고 
아스팔트 위에서 생활하던 그녀였다. 그녀가 왜 대학원에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마 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연애도 유명했다. 그녀의 상대는 한 학번 위의 총학생회장 이었다. 
인물이 수려했고 달변이었다. 그러나 수배가 떨어졌고 일찍 검거되었다. 
총학생회장이 구치소와 교도소를 전전하는 동안 그녀가 부지런히 뒷바라지를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동안 그녀는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편지 쓰기와 면회 날짜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사이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무렵 정권이 바뀌었다. 
특사가 있었고 그 남자가 풀려났다. 남자는 살이 많이 쪄 있었다 한다. 다시 
자유의 맛을 본 남자가 수연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그녀는 울며 매달렸다 한다. 
친구들이 모두 그 남자를 비난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후 정치에 
투신한 그 남자는 지금 야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되어 있다.
  어쨌거나 내가 수연과 잠시나마 연애 비슷한 걸 했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이다. 공동 연구실에 그녀와 나만이 남아 늦게까지 책을 
뒤적이고 있었던 그 여름밤. 그녀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창가에 
면한 그녀의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머리 뒤로 스탠드의 불빛이 
역광으로 번지고 있었다.
  - 술 마시자. 그녀가 짧게 말했다.
  - 내일 발표는 어쩌고? 너 내일 발표잖아? 준비 다 했어?
  - 발표는 발표고 술은 술이니까 마시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시계를 보았다.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 술 사올 테니 기다려.
  - 아니, 같이 가.
  우리는 같이 걸었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채 식지 않아서 더운 숨을 
불어올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유난히 힘들어하며 학교를 내려갔다. 교내의 
가로등도 하나둘 꺼지고 수위들의 플래시 불빛만이 여기저기서 반딧불처럼 
움직였다. 학교 앞 슈펴에서 맥주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서 도아오니 
1시쯤이었다.
  그녀는 빨리 취했다. 나는 취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밤새도록 들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나는 
계속 그녀의 발을 씻겨주고 싶다는 생각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그녀가 맥주병을 타고 그녀의 가슴께로 한참 동안 주르르 흘러내렸다. 
시원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져버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깨어났다. 지펀하게 널려 있는 술병들을 치우는 
소리에 나도 소파에서 이렁났다.
  - 집에 갈 거야?
  - 응.
  - 바래다줄게.
  그녀는 대답하지 안았다. 우리 둘은 안개가 깔린 새벽 교정을 걸어 교문 
건너편에 밀집한 주택가로 휘적거리며 걸어갔다. 어떻게 그녀의 방까지 
들어가게 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가 권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처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억나는 한 가지는 그날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이다.
  - 기분이 참 좋아.
  문턱에 앉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 나도 그래.
  가스 온수기에서 나오는 물은 쉬이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 미지근한 물에 
그녀의 발을 담그고 나는 정성스레 비누질을 했다. 엄지발가락에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었다. 물이 뜨거워질수록 그녀는 더 간지럼을 탔다. 내 손이 
그녀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발톱과 발가락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어루만지는 동안 그녀는 두 손을 등뒤로 짚고 나를 굽어보았다.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닦고 나서 우리는 합성 수지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약속이나 하 듯이 갑자기 서로 껴안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혀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핥다가 그녀의 발에 
이르렀고 뒤꿈치와 앞꿈치 사이의 부드러운 부분에 오래 머물렀다. 
엄지발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나는 그녀의 발에 박인 굳은살들이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그 굳은살엔 그녀가 사 년 동안 달려갔던 아스팔트 위의 삶이 
아로새겨 있었다.

  6
  옆집 여자는 그 뒤로 그 카페에 나타났다. 나는 커튼에 비친 그림자의 
비밀이 궁금했다.
  - 발레리나들이 최대 몇 회전을 할 수 있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6회전 반.
  그녀는 아주 자신 없는 어조로 말하며 내 쪽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나는 
재차 물었다.
  -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도는 거겠죠?
  - 그렇겠죠.
  - 아주 이상한 걸 봤어요.
  - 뭔데요? 
  - 당신의 창 커튼에 수십 회의 회전을 아주 천천히 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요. 그거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닐 테고.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비웃는 듯한. 그러면서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안면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문을 열자 
옷걸이에 걸려 있는 발레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빈 벽에 걸려 있는 하얀 
옷은 어딘가 음침해 보였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소파에 나를 
앉혔다.
  - 조금만 기다리세요. 커피를 가져올게요.
  소파 앞 다탁 위에 보석함처럼 생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 열어보세요.
  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커피를 만들면서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를 열자 작은 인형이 튀어나오며 음악이 흘렀다. 
오르골이었다. 인형은 흰 발레복을 입고 있었고 한 손은 머리 위로 둥굴게 
올리고 왼쪽 다리를 곧게 펴 올린 채로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띵띵띵띵. 오르골 특유의 단조로운 음악이 계속 반복되었다.
  커피를 가져온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은 촛대에 불을 붙이고 중앙 조명을 
껐다.
  - 이걸 보신 거지요?
  촛불의 불빛이 오르골을 비춰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오르골 속의 
발레리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회전을 거듭했다. 나는 멍하니 그 오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 지젤이에요. 예쁘죠?
  촛불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 전 발톱이 없어요. 한두 번 빠지더니만 아예 나질 않아요.
  그녀가 자신의 발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는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정신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그녀의 
엄지발가락엔 발톱에 없었다. 발톱에 있어야 할 부분에는 검게 죽은 피부만이 
어둡게 그림자져 있었다. 따뜻한 물로 오래오래 그녀의 발을 씻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발레를 그만둔 지가 오래됐는데 새로 나지 않아요?
  - 요즘도 하는 걸요.
  - 어디서요?
  - 여기서요.
  그녀는 손을 들어 침대와 소파 사이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 네에.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커피 잘 마셨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오래도록 오르골 소리의 환청에 시달렸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기계음이 이명처럼 남아 있었다.

  7
  수연은 예전만큼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동료 
무당들이 청바지 차림으로 오가면서 그녀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녀는 다 받아 
마시지 않는다.
  - 요새 무당들은 참 세련됐구나.
  - 삐삐하고 핸드폰도 있어. 참 내 명함 한 장 줄까?
  그녀가 건네준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호출기 번호 등속이 적혀 있다. 
인간문화재 전수자 이수연. 나는 그녀의 명함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봐?
  - 재미있잖아. 인생이라는 게.
  - 난 재미없어.
  그녀가 웃는다.
  - 작두에 올라설 때 기분이 어땠어?
  - 그땐 잘 기억나지 않고 올라서기 전은 기억나. 죽는다는 기분이 들었어. 
어머니가 비단을 작두 위에 비비다가 올려놓을 때, 그래서 그 비단이 뚜 
쪽으로 갈라질 때 말야. 단절이랄까. 그런 느낌.
  아까 그 비단이 날 선 작두 위에서 스르르 두 쪽으로 갈라질 때. 나는 
대학교 1학년 때의 베가르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5월, 뜨거운 햇살, 지열, 
군중들, 전경들과 학생들, 그녀를 사이에 두고 감돌던 긴장감. 그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베를 온몸으로 찢으며 춤추던 그녀의 모습 따위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 혹시 지젤이라는 발레 알아?
  - 아니. 왜?
  - 그냥. 모르면 됐어.
  어쩌자고 지젤 이야기를 꺼낸 걸까. 나는 자신을 책망했다.
  - 춤을 추니 좋아.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니까.
  - 다행이다. 나이 서른에 좋은 것도 있고.
  - 심심하면 호출해. 술이나 마시자. 난 그만 가봐야 해. 장군님 맞아야지.
  그녀의 마지막 농담이 너무 쓸쓸해서 우리는 크게 웃는다. 장군님 오신다. 
그녀의 신어머니는 작두춤 끝에 땅에 널브러진 그녀의 몸 위에 삼전불이 
그려진 부채를 휘두르며 외쳤었다. 장군님 오신다. 무병도 앓지 않고 신내림을 
받은 그녀에게 어떤 장군이 찾아올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가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멀어져간다. 어둠 속이어서 그녀의 발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발이 있어야 할 부분을 계속 응시한다. 어쩌면 이게 그녀를 보는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울긋불긋 단청이 그려진 사당의 치마 밑에서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수연과는 왜 연애를 할 수 없었을까. 나는 수연의 발을 씻어주던 나날을 
생각한다.
  - 넌 날 매혹시킨 첫 여자야.
  기억 속의 내가 옷을 벗은 채 수연에게 말하고 있다.
  - 매혹 따윈 필요 없어. 어서 나를 안아줘.
  기억 속의 나는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한 번 말한다.
  - 그건 내게 아주 중요한 얘기야. 난 너의 베가르기를 보는 순간 너에게 
매혹됐어.
  - 그게 어쨌다는 거야?
  기억 속의 수연이 화를 내고 있다. 나와 수연은 섹스를 시작한다. 수연의 
모든 몸짓에 그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익숙해진 
모든 동작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등뒤에서 나를 짓누르는 그 남자의 
그림자를 느낀다. 수연은 눈을 뜨지 않는다.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한다. 나는 
오래도록 사정하지 못한다.
  그 무렵, 오직 발을 씻어주는 순간만큼만 나는 그 남자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웠다. 발에는 그 남자의 손길도, 정액도, 입술도 닿질 않았다고 나는 
믿었다. 발을 씻어줄 때면 그녀의 하루가 느껴진다. 나는 그녀의 자취방에 
누워 하루종일 책과 비디오를 보면서 그녀의 귀가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말한다.
  - 이제 내 발에 손대지 마.
  - 왜?
  - 난 네가 필요해. 왜 그걸 모르지? 기억 속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겁이 나. 두려워. 그러나 입 밖에 내어 말하지 못한다. 더 이상 발을 만지지 
못하게 된 나는 그녀를 떠난다. 그게 전부였다.

  수락산에는 어느덧 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다. 천천히 수락산 어귀에 있는 
주차장까지 내려오면서 어느새 나는 다시 옆집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그해 가을, 오피스텔에서 투신자살했다. 옆방은 경찰과 구경꾼들로 붐볐다. 
경찰은 내게도 찾아왔다. 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경찰은 별반 신통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눈치로 물었다. 뭐 이상한 점 없었나요?
  - 발레를 무척 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지요.
  - 발레요?
  - 어렸을 적 사고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프리마돈나가 되어 무대에 섰을 
거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어요. 
  그녀의 언니는 멍하니 서 있었다.
  - 그 애는 발레를 한 적이 없어요. 발레를 한 건 저였지요. 사고를 당한 
것도 저였구요. 그 애는 집에서는 단 한번도 발레를 하고 싶다거나 하지 
않았어요. 늘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했어요. 집에서 가라는 간호학과로 
순순히 진학했고 서울에 와서 간호사가 됐지요. 그게 전부예요.
  그녀의 언니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그녀의 
발을 씻겨주지 않았던 일을 후회했다.
  - 왜 죽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전부예요.'라고 말하는 이가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발레를 하고 싶어서 죽었다고 믿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언니를 따라 사건 현장인 방안으로 들어가보았다. 그 때 나는 
보았다. 그녀가 몸을 던진 창가에 놓여진 하얀 발레 슈즈 한 켤레. 그건 
그녀가 t상에 던진 마지막 퀴즈였을지도 모른다. 후일 경찰은 그녀가 남자 
문제로 고민하다가 투신자살했다고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사망 당시 
그녀는 임신  5개월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자살자들은 왜 
신발을 벗을까?

  차에 시동을 걸면서 뒤를 돌아다본다. 수락산의 그림자가 깊다.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들려온다. 홍학들이 떼지어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뒤늦게 
태어난 홍학 새끼들이 저마다 발에 소금 족쇄를 차고 그들의 뒤를 따라 염전 
속을 걸어간다. 한없이 가벼워져 작두날 위에서 춤추는 수연과 역시 무한히 
가볍게 생애 마지막 춤을 추어버린 옆방 여자와 한없이 무거운 다리를 지닌 
홍학떼 들이 사막 속에서 어울려 논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뿐이다.

      조동관 약전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연세대 법학과 졸업.
  198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시 '유리 닦는 사람'이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왕을 찾아서" "새가 되었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등.
    조동관 약전
  똥깐의 본명은 동관이며 성은 조이다. 그럴싸한 자호가 있을 리 없고 이름난 
조상도, 남긴 후손도 없다. 동관이라는 이름이 똥깐으로 변한 데는 수다한 
사연이 있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똥깐이와 한 시대를 산 사람들이 
똥깐이를 낳고 똥깐이를 만들고 똥깐이를 죽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일부로 
평범한 사람 조동관을, 자신들과는 다른 비범한 인간 똥깐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똥깐이 살다간 은척읍에서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먹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동관을 칭할 때 똥깐이라고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똥깐이 보고 듣는 데서는 아무도 그를 
동관으로도, 똥깐으로도 부를 수 없었다.
  똥깐은 이란성 쌍둥이의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죽을 때까지 형 은관과 대략 
일천 회 이상의 드잡이질을 벌였다. 그 드잡이질은 똥깐의 타고난 체격에 
담력과 기술. 자잘한 흉터를 안겨주며 그가 은척 역사상 불세출의 깡패로 우뚝 
서는 바탕이 되었다. 은관은 성격이 비교적 온건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걸 좋아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합기도 삼 단, 유도 사 단, 태권도 삼 
단의 면장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조십단'이었다. 
나쁘게 발음하면 그대로 욕이 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은관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 그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고 없는 데서도 혹시 신출귀몰하는 그들 형제가 
주변에 없나 살피고 나서 '똥깐이가 조씹다니하고 술 먹다가 전당포 주인을 
깔고 앉은 사연' 등을 즐겼다.
  그런 이야기가 은척읍 사람들에게 재밋거리가 된 것은 그때 은척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라디오를 보거나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 둔돈 없었고 볼 생각도 없었으며 볼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은관 
형제의 이야기는 그들의 뉴스였고 연재소설이자 연속극이며 스포츠였고, 
무엇보다 신화였다.
  똥깐은 성장함에 따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개망나니짓으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는데 열다섯 살 때부터 외상 안 주는 집 깨부수는 일은 
다반사요, 외상으로 밥 먹고 외상으로 반찬 먹고 외상으로 오입하고 외상으로 
차 마시고 게트림하고 외상을 만화 보고 외상으로 다른 아이들을 두들겨팬 뒤 
외상으로 약을 사주었다. 그 와중에서 읍내 사람들의 뇌리에 동관을 
결정적으로 똥깐으로 각인시킨 일은 이른바 '역전파출소 단독 점거 사건'이다.
  똥깐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태를 묻고 터를 잡은 곳이 좁다고 느끼게 되면서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기차였다. 
똥깐의 집은 은척의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만한 기차역 바로 앞에 있었다. 
기차역 주변은 은척에서 가장 번화하고 시설이 잘된 곳인데도 불구하고 
사시장철 수챗물이 질질 흐르는 도랑이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었고 바지도 
입지 않은 새카만 아이들이 누런 똥을 뻐득뻐득 싸대곤 했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도로 옆에 야트막이 처마를 잇닿아아 지은 가게들에선 매일 
먼지와 파리가 날아다녔고 그 뒤 가난의 꿀물이 졸졸 흐르는 골목골목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이놈아, 날 죽여라, 살려라 하는 고함과 악다구니, 배곯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똥깐은 기차역 앞 석탄하치장 한구석을 본거지로 삼아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 화투도 치고 윷도 놀고 술추렴도 하다가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면 
허리를 쭉 펴고 하품을 한 다음 어슬렁어슬렁 기차를 타러 갔다. 똥깐은 
태어나서 한 번도 표를 산 적이 없었고 표를 살 줄도 몰랐으며 역무원들 
누구도 감히 똥깐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역무원이 은척에 살고 
있고 처자와 함께 다만 며칠이라도 더 살아야 하는 한. 기차를 타면 똥깐은 
일단 기차 통로를 오가는 행상에게서 외상으로 삶은 계란을 한 줄 받아들고 
첫 번째 칸에서 마지막 칸까지 천천히 시찰했다. 가끔 가난한 소매치기가 역시 
가난한 승객의 주머니를 털다가 들켜서 조그만 주머니칼을 휘두르는 일이 
있었고 술 취한 승객끼리 힘없는 주먹질로 서로의 코피를 터뜨리는 일도 
있었지만 똥깐의 관심은 그런 데에 있지 않았다. 똥깐은 이미 여자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는 제 또래의 여학생들이 
한동안 좋은 표적이 되었다. 생애를 통틀어 학교를 다닌 기간이 세달도 안 
되는 똥깐은 뒤로 머리를 질끈 땋고 풀을 먹여 빳빳하고 새하얀 칼라에 검정 
교복을 입은 새침한 여학생들을 신기한 애완동물처럼 생각했다. 똥깐은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들고 통로를 지나가며 쥐구멍을 찾는 여학생들의 
턱을 일일이 들어 감상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중 유난히 새침하고 
도도하고 제 꼴값을 하려던 몇몇은 냄새 나는 기차 변소에 끌려가 난행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문뿐, 누가 사실을 확인해보랴. 그러나 똥깐은 곧 
풋내 나는 여학생들에게서 공단이 있는 인근 도시의 제사 공장, 신발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스무 살 남짓의 성숙한 처녀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옮겨갔다. 
처녀들은 주말이나 명절에 집에 다니러 왔다가 휴일 늦은 오후에 기차를 타고 
도시의 기숙사며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그런 처녀들로만 주말 오후의 
기찻간이 꽉 차곤 했다. 도시풍의 번쩍이는 나일론 옷에 슬슬 화장을 하기 
시작한 처녀들을 사냥하기 위해 똥깐은 주말이면 은척을 비웠다. 똥깐이 없는 
주말에는 그의 형 조십단이 오토바이를 붕붕거리며 은척 읍내를 휩쓸고 
다녔다. 하여튼 똥깐이 이 년 이상 주말을 기차에서 보내는 동안 정복한 진짜 
처녀만 해도, 호적상 처녀의 수는 훨씬 많았을 테지만, 백 명을 넘는다는 
전설을 낳았다.
  그러나 하늘이 무십치 않아 천하의 처녀 사냥꾼 똥깐에게도 천적이 
나타났다. 그런데 처녀 사냥꾼의 천적은 처녀가 아니었다. 언뜻 보아도 스무 
살은 훌쩍 넘어 보이고 떠꺼머리 총각 백 명은 능히 그의 치맛속에 돌돌 말아 
다닐 것처럼 보이는 그 여인은 은척 사람들이 구경도 못한 알록달록한 양산을 
쓰고 촌놈 가슴을 활랑거리게 하는 요란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똥깐의 팔에 
매달려 한들한들 은척에 나타났다. 도시에서 뭇사내깨나 홀렸을 듯, 그러고서 
뭇사내의 손길에 농락당하여 골병이 들은 듯, 닳고 때묻었으나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약해 보이고 앙칼져 보이면서도 수심이 깃들인 눈초리의 그 여인이 
왜 똥깐을 따라 은척까지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똥깐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 여인과 다정히 팔짱을 끼고 늙은 홀어머니와 덩치가 남산만한 제 
형 은관이 사는 단칸짜리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그 골목 특유의 악다구니 
소리와 한숨소리가 울려퍼진 후 똥깐은 들창이 달린 조그만 방에 신방을 
차렸다. 홀어머니와 은관은 비루먹은 나귀를 팔아 나귀가 들어 있던 마구간에 
방을 들여 살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달이나 했을까. 주말이고 주중이고 기찻간이고 읍내고 간에 
똥깐을 본 사람은 없었다. 매일 간장종지만큼의 코피를 쏟아가며 방안에서만 
지낸다는 소문이었다. 똥깐이 보이지를 않으니 그 전에는 그렇게도 똥깐을 
꺼림칙해하던 읍내 사람들 사이엔 어쩐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변소를 하루에 한 번은 가는 게 정상이듯 하루 한 번 똥깐이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은척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조십단이 부지런히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나름대로 
맹활약을 했지만 똥깐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날파리와 벌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고대하던 대로, 몇 달 동안의 고요와 평화가 
모이고 썩어 부글부글 끓어오른 가스가 한꺼번에 활화산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똥깐이 포효하며 방안에서 뛰어나왔는데 그 전말은 이렇다. 시어머니가 
될 뻔한 똥깐의 홀어머니가 똥깐이 낮잠을 자는 사이 며느리가 될 뻔한 
여인에게 빗자루를 거꾸로 내민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얘야. 너는 메주 냄새나는 어두운 방에서 매일 먹고 자고 놀고 하는 게 
지겹지도 않니. 이리 나와서 빗자루질이라도 해보거라. 얼마나 몸이 
상쾌해지는지 모른단다. 그러고도 미진하면 걸레라도 빨아보렴. 공기에서 
깨소금 냄새가 날 테니. 네 속옷은 네가 빨고 네 남편인지 뭔지 하는 거지 
같은 자식 옷도 네가 좀 빨아서 탁탁 털어 말렸다가 입으려무나. 혹시 시간이 
있으면 부엌에도 들어가서 맛있는 것도 네 손으로 직접 해먹고 네 서방인지 
개자식인지한테도 좀 먹이고.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젊은 너희들의 갖가지 
식성을 맞출 수가 없구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설거지를 한번 해보아라. 네가 
여자라는 느낌이 소르르 오면서 인생의 오묘한 맛을 알게 될 게다. 그리고 
얘야. 밥벌레도 밥이 있어야 밥벌레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니. 빈 쌀독이며 
썩은 김칫독. 말라빠진 간장독도 조금 채우는 게 어떨까. 그러고 난 다음에 
너희가 서로 끼고 자빠져서 낮이나 밤이나 흥흥대면 누가 뭐라겠니. 이 
늙은이가 뭘 알랴마는 너희가 한가지 일에 너무 몰두해서 세상의 다른 재미를 
못 볼까 걱정이 되는구나. 그러니까 늙은이인 게지."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르게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 이 호랑말코 같은 년아. 빈대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매일 그렇게 자빠져서 
구멍 하나로 먹고 살려드는 게야. 몇 달이 되도록 빗자루질을 한번 하나, 
걸레질을 한번 하나, 손에 물 한번 묻히나. 아, 내가 이 나이에 내 한 몸 
건사기도 힘든 판에 젊으나 젊은 년 놔두고 밥상차려, 빨래해, 요강 부셔, 
설거지해 아이고 내 팔자야. 팔자 사나운 년이 무슨 덕을 보고 영화를 
누리랴마는 이젠 망조 든 집안에 별 백여우 같은 년까지 끼어들어서 
기둥뿌리를 썩게 만드네. 아, 이년아. 냉큼 못 나와!"
  그때 며느리가 될 뻔한 여자는 화장을 하고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아, 어머니. 걱정 마셔요. 제가 단장을 마치고 나면 나무도 해오고 쌀도 
얻어오고 밥도 차리지요. 청소도 할 거예요. 빨래는 물론이고요. 돈도 
벌어올게요. 이젠 제가 며느리로서 이 집안을 훌륭히 건사하겠어요. 어머니는 
그저 마음 푹 놓고 쉬셔요. 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셔요?"
  그런데 그 말을 다르게 들은 사람도 있으니.
  "아이, 씨팔. 안 그래도 구들장만 지고 누워 있으니 몸에 좀이 슬 지경인데 
저 노인네가 노망을 했나, 뭘 잘못 처먹었나. 오냐, 잘됐다. 내가 이런 집구석  
아니면 갈 데가 없어서 있는 줄 아나보지. 야, 똥깐아, 빨리 일어나! 누나 
간다잉?"
  그때 잠에 취해 있던 똥깐의 대답인즉.
 "그래? 누나, 잘 가아. 그동안 즐거웠어. 또 만나."
  그런데 그걸 달리 들은 사람이 또 있으니.
 "이년이 오냐오냐 했더니 어디를 기어오르고 있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다리몽댕이를 확 분질러버릴라. 엄마, 한쪽에 좀 찌그러져 있어. 둘 다 
입다물어. 안 다물어! 다시 또 낮잠 깨워봐. 그땐 줄초상 날 줄 알어."
  그러고선 다시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던가. 그러나 고부 사이가 될 뻔한 두 
여인 사이의 전운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될 뻔한 사람은 소리도 없이 
방에 들어와 여인을 꼬집고 할퀴고 머리를 쥐어뜯었고 며느리가 될 뻔한 
사람도지지 않고 마주 손톱을 세워 덤벼들었다는데, 경험이라는 면에서는 
시어머니 편이, 날카로움과 힘에서는 며느리 쪽이 각각 우세를 차지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고요한 싸움이 몇 십 분은 계속되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얼굴에 멍이 들고 삼단 같이 긴 머리카락이 한줌은 뜯겨나갔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이가 세 대 흔들리고 한동안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드세게 팔목을 비틀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고 나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짐을 싸서 짐이라야 기껏 가방 하나만큼도 안 되었지만, 양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시어머니는 목을 매달 끈을 찾아 밖으로 나가 한동안 똥깐의 
집에서는 똥깐이 코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다. 그 난리가 나도 
모르고 잠을 자던 천하의 잠보 똥깐이 얼핏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들창으로 
그 여자가 구슬픈 눈길로 오래오래 똥깐의 방안을 들여다보는 그 여자의 꿈을 
꾸웠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잠에서 깬 똥깐, 언제나 옆에 있어야 할 허벅지를 
더듬으려다가 손이 허전해서. 또 혀처럼 심부름을 시켜대던 노모를 몇 번 
불러보고는 대답이 없으니 허전해하며 하는 말.
 "어어, 잘 잤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어?"
  그리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오니 눈이 부시고 어지럼증이 
나서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때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아른아른 양산을 든 여인이 기차를 타고 있었더란다. 이상하다. 
은척에서 내 허락받고 저런 양산쓰는 여자는 하나밖에 없는데? 맞다. 똥깐이. 
그대의 마누라가 도망친다!
  똥깐은 그제야 사태를 짐작하고 전속력으로 기차를 향해 달려갔다. 뛰어가는 
도중 평소에는 눈을 감고도 건너다닐 수 있던 수챗물 도랑에 발이 빠졌고 
새로 역에 근무하게 된 신참이 똥깐이를 몰라보고 개찰구로 달려나가는 
똥깐을 잡으려다가 그 냄새나는 발에 턱을 얻어 맞고 한 방에 뻗어 버리는 
사소한 일이 있기도 했다. 서두른다고 서둘었지만 똥깐이 기차에 당도했을 때 
이미 문은 닫히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똥깐이 환장을 하게 된 것은 
달리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한 여인을 보고 난 다음부터다. 
똥깐은 젖먹던 힘을 다해 뛰어갔지만 기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필생의 
사랑을 잃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똥깐은 대합실로 돌아오면서 역장이 
애지중지하는 화분을 박살냈고 이어서, 대합실로 돌아와 긴 의자 두어 개를 
보기 좋게 뒤집어버렸고 이어서, 매점에 들어가 제가 찾는 술이 나올 때까지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이어서, 술을 마시며 제가 왕년에 깨다 못한 성한 유리를 
한 장씩 깨기 시작해 결국은 몽땅 다 깨버렸고 더 깰 유리창이 없자 거리로 
진출했다. 늘 하듯이 웃통을 훌떡 벗고 '다 나와! 개애애애새끼들!'외지면서 
길거리에 납작 엎드린 가게 유리창을 발로 차기 시작해서, 몇 달 동안 걸렀던 
일과를 하루 만에 한꺼번에 해치우려는 듯 큰길까지 가는 동안 가게란 
가게에서 유리란 유리는 몽땅 깨뜨렸다. 그 여인이 그냥 곱게 갔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련만. 그 여인은 어디서 배운 인사법인지 들창과 기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든 게 유리가 횡액을 만나고 
유리가게 주인이 횡재를 만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똥깐이가 드디어 나타났다!"
 "더욱더 용맹스럽고 늠름해진 것 같군. 우리의 똥깐이."
  남의 유리가 깨졌을 때 가장 덕을 보게 될 유리가게 주인과 늘상 파리를 
날리던 철물가게 주인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고, 가게 유리가 깨진 
사람들끼리는 한숨과 눈물을 지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내 유리 누가 물어주나. 응? 어쩌면 좋아"
 "지나가는 강아지한테 물어달라고 해. 강아지한테 물리는 게 똥깐이하테 
먹히는 것 보다는 훨씬 덜 아플걸?"
 "그런데 신고를 한 게 언젠데 아직 출동을 안 하는 거야. 이 망할 놈들은."
 "오면 뭘 해. 누가 똥깐이를 당하겠어. 무적의 똥깐이를."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 당시 경찰은 골치 
아픈 신고가 들어오면 전혀 엉뚱한 데로 가서 '어라, 여기가 거기가 아닌가? 
신고를 똑바로 해야지.' 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어슬렁어슬렁 파출소로 
돌아와서 월급을 타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 역전파출소 경찰들은 불운했다. 
똥깐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 늑장부리며 준비를 하고 엉뚱한 데로 출동하기도 
전에 역전파출소에 유리가 많은 것을 알고는 바로 그 안으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똥깐이 등장하자 늙은 경찰들은 몽땅 밖으로 도망쳐버렸고 철없는 
젊은 친구들이 방망이를 들고 몇 번 아래위로 흔들다가 곧바로 똥깐의 강력한 
주먹과 발길질에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미리 밖에 나와 있던 나이 든 경찰이 
젊은 경찰을 위로하며 하는 말.
 "그러게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우니 피하는 게지. 진작 나왔으면 공매도 
안 맞고 얼마나 좋아. 유리야 나중에 본서에 신청하면 안 끼워주겠어? 아이구, 
저거 경비 전환데 저걸 그냥 한 주먹에 박잘을 내 버리네. 괜찮아. 저것도 
신ㅈㅇ하면 돼. 그렇지?"
  드디어 본서에서 기동타격대 출동. 기동타격대는 긴급 사태를 대비해 젊고 
유능한 경찰들을 오분대기조로 편성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분대기조가 출동한 
것은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오십 분도 넘어서였다. 그나마 파출소 가까이로는 
오지 못하고 마이크를 쥐고 "조똥깐! 좋은 말 할 때 밖으로 나와라! 안 나오면 
몸에 해로운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한 소리가 오분대기조 기동타격 출동 
조치의 전부였다. 그러나 똥깐은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그 소리마저 듣기 
싫었는지 자신이 깬 유리창의 삐죽삐죽한 구멍에 목을 들이밀고는, "오냐, 한 
발짝만 더 가까이 와바. 목을 확 돌려버릴 거야!" 하고 ㅎ박인지 예언인지 
단호한 의사 표시를 했다.
  오분대기조 지휘관은 옆에 있던 경찰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라고 부탁해볼까?"
 "그러면 더 안 합니다. 똥깐이가 누굽니까. 잘못 말했다가 찍히면 제 제명에 
못 죽을걸요. 말한 사람을 봐뒀다가 나중에 그 사람 목을 저기다 싸악, 
돌릴지도 몰라요."
  지휘관은 자신의 목 주위를 만지며 떨리는 소리로 말하기를.
 "그럼 어떡해. 마냥 기다리는 거야?"
  그 경찰의 대답.
 "그게 최선의 전략입니다. 이제 두고보세요. 술 취했지, 피 흘렸지, 금방 잠이 
들걸요. 오늘 낮잠을 덜 잤다는 첩보도 들어와 있습니다."
 "맞아. 내가 이때까지 들어본 건의 가운데 최고의 건의를 들었어. 당신은 
정말 우리 기동타격대의 보배야."
 "저야 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려할 
뿐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서로를 아껴주는 동안 과연 똥깐에게는 잠의 여신이 
빗자루를 타고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똥깐은 은척에서 최초로 조직된 
기동탁격대에 코를 골며 체포된 최초의 범죄자였다.
  똥깐이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갔을 때 읍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은척이 낳은 유사 이래 최고의 깡패, 천재 외상꾼, 싸움꾼, 호색한, 
트집잡기의귀재가 은척 읍내에 군림한 지가 수십 수백 년은 되는 것 같았는데 
똥깐은 소년범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갔던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은척을 열 번은 들었다 놓은 
장사가 아직 소년이었단 말인가. 이제 똥깐이가 어른이 되면 은척에 유리는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네."
  어떤 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똥깐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길거리의 유리들은 발악처럼 매일 반짝이고 번쩍였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나서 똥깐은 보무도 당당하게 은척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똥깐의 
일거수일투족에 숨을 죽였지만 똥깐은 더 이상 은척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감옥에서 수백 수천 번 맹세한 대로 그 여인을 찾아 동에 번쩍 서에 
반짝 전국을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몇 년, 똥깐의 순애보가 은척 
사람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적셨다. 똥깐은 그 여인의 고향이라는 절해고도에서 
그 여인을 기다리는 어부가 되었다 똥깐은 그 여인을 보았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역전 창녀촌에서 여관 조바를 하며 그 여인을 기다렸다 
똥깐은 또 그 영인을 보았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역전 
창녀촌에서 여관 조바를 하며 그 여인을 기다렸다 똥깐은 또 그 여인의 육촌 
언니가 하는가게 일을 거들며 일 년을 기다렸다 무보수나 다름없이 묵묵하고 
성실히 일을 하며 오로지 한 여자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똥깐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육촌언니가 정식으로 청혼을 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똥깐은 도 그 여인과 닮은 여인이 몇 년 전에 다녀갔다던 나이트클럽에 
취직을 했다 낮에는 잠도 자지 않고 그 여인이 올지도 모르는 공원에 나가 
앉아 있었다 건강과 잠버릇을 해치고는 홀연히 은척에 내려와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플랫폼에 나가서 그 여인을 기다렸다 이만하면 하늘이 감동하고 
땅이 울 지경인데 그 여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 여인으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문득 똥깐이 제정신을 
차리는 날이 왔다. 그 순간 읍내의 유리들은 빛을잃었고 은척 사람들은 한동안 
발뻗고 자던 시절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의 형 은관이 그 무렵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여자가 지겨울 정도의 잔소리꾼에 한시도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은관은 노름에 빠졌는데 은관과 
노름을 해서 딸 생각을 하는 노름꾼이 은척에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었던 고로 그는 늘 이기기만 했다. 상승의 싱거움을 견디기 위해서 은관은 
노름판에 차 배달을 나오는 다방 아가씨 가운데 말을 닮은 아가씨를 
올라탔는데 하필이면 은관의 엉덩이가 들썩이던 그 시간에 그의 부인이 
들이닥쳤다. 은관의 머리칼을 잡아챈 그의 부인은 은관의 신체의 일부가 다른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 뿌리를 잡고 늘어져 어디까지 갔다더라? 
그 건물 옥상까지 가서 온 읍내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쳤는데, 
그 내용인 즉 '어허, 읍내 사람들이오. 여기 좀 보소. 이게 내 서방물건인데 
쥐불알만하지요? 이것도 잘못 놀리다가는 이렇게 죽습니다이.' 하고는 옥상 
난간에 제 서방 머리를 박아서 피칠갑을 하게 만들며 노름판에서 돈 잃은 
읍내 사람들에게 며칠은 입에 올리고도 남을 이야깃거리를 안겨주었다. 순전히 
공짜로. 그 다음부터는 은관은 그 좋은 노름도 여자 올라타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똥깐이 거기서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세상에는 그 여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누군가 똥깐에게 해주었다는 말도 있다. 어쩌면, 세상에는 서른 살 넘은 도시 
술집 출신의 병든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곁들였을 것이다. 그 
다음, 그녀가 떠나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던 끝에 똥깐의 시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똥깐이 똥깐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다음, 똥깐이 자기에게 남은 시간과 힘, 
어거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자연적인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똥깐을 똥깐으로 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하여간 
똥깐은 언제부터인가 과거의 천재적인 행각을 능가하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랑 때문에 허비한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하루도 쉬지 않고 
도둑질, 외상, 싸움, 강탈, 폭언, 협박, 부녀자 희롱, 고성방가, 노상방뇨, 흥정 
떼고 싸움 붙이기 가운데 두세 가지를 실천에 옮겼다. 똥깐은 잠깐 사이에 
다시 읍내 최고의 깡패, 백수건달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의 그림자만 비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는 명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도대체 경찰은 뭘 했고 뭘 하고 뭘 하려 했는가.,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똥깐이 당대의 깡패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뛰어넘는 
명성과 위엄을 획득하게 한 그 사건, 조똥깐의 생애 마지막을 불꽃처럼 장식한 
그 사건에 대하여.
  무능하고 게으른 경찰을 비난하는 읍민들의 원성이 하늘까지 닿았을 때 
문득 새로운 경찰서장이 부임해왔다. 경찰서장은 부임 일성으로 '읍 전체에 
만연한 공권력 불신 풍조를 불식하고 사회 기강을 문란케 하는 악질 폭력 
범죄를 적발, 단호히 조치하는 동시, 공권력의 권위를 회복하여 새 시대의 
새로운 경찰상을 구현하고'고 역설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은척 출신의 경찰들 
가운데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경찰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알아들은 사람 
중에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말겠지, 
하고 남몰래 고개를 살랑살랑 젓고 말았다. 어쨌든 유식한 신임 경찰서장은 
부임을 기념하는 거창한 행사가 끝난 뒤, 관할 지역 내의 경찰 간부를 
대동하고 민정 시찰 겸 근무 기강 점검에 나섰다. 경찰서장은 정복에 
번쩍거리는 견장과 훈장인지 뭔가를 찰랑거리는 뭔가를 달고 있었는데 하여간 
그는 번쩍거리고 찰랑거리는 걸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던가보다.
  똥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역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와 술을 
대작하는 사람은 쌍둥이 형 은관이었는데 그 무렵 은관은 부인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뒤라 의기소침해 있었다. 형제는 '여자란 백해무익한 
존재'라는 주제에 관해 오랜만에 의견 일치를 본 참이었다. 거기다가 낮부터 
마신 술이 오르자 두 사람은 거나한 기분으로 자신들 나름의 시찰을 나갔다. 
은관은 늘 하던 대로 오토바이를 탔고 똥깐은 뒤에 태워주겠다는 형의 제안을 
가볍게 일축하고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팔자걸음으로 역전파출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역전파출소 앞은 기차역으로 가는 길과 읍내를 관통하는 주도로가 만나는 
삼거리였다. 신임 경찰서장은 검은 승용차에 탄 채 주도로에서 역전파출소 
쪽으로 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 뒤로는 정복을 입은 간부들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온 읍내에 신임 서장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워낙 천천히 움직였던 
까닭에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가 착각을 했다. 역전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과 파출소장이 파출소 앞에 도열한 채 신임 경찰서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은관의 눈에 먼저, 그리고 약간 
나중에 근시인 똥깐의 눈에 들어왔다. 은관과 똥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을 의아하게 여기며 파출소 앞으로 접근했다. 그날 그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반면 역전 파출소장은 은관과 똥깐이 
자신들을 향해 오는 걸 알아채고는 사색이 되었다. 하필 전임지에서 철없는 
호랑이로 소문난 신임 경찰서장이 시찰을 하러 오는 이때에 천하무적의 
똥깐이 그의 쌍둥이 형 은관까지 대동하고 오고 있다니. 파출소장은 바람처럼 
빠르게 똥깐형제에게 달려갔다. 살기 위해서라면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야 
하는 법. 너무 빨리 뛴 탓에 막상 형제 앞에 선 파출소장은 헐떡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형제는 의아한 누으로 헐떡거리는 파출소장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러슈?"
 "저, 저, 저, 거시기"
 "아, 왜 그러냐구? 뒷집 돼지가 알을 낳았소?"
 "하, 하, 하, 자, 네, 들"
  파출소장은 멀리 떨어진 부하들의 몸짓에서 신임 경찰서장이 거의 
당도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초조해져서 '자네들 농담 솜씨는 날로 
발전하는구만. 심심한 경의를 표하는 바일세.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날 
살려주는 셈치고 잠깐만 어디 가서 공짜술을 먹던가 노름을 하는 게 어떤가. 
지금 눈이 오려고 하잖아. 이런 날은 그저 뜨뜻한 구들장 지고 육백이나 치는 
게 최곤데 말이야. 내 생각이 어때요? 그렇게 해주실래요?'하고 늘어놓을려는 
말의 십만분의 일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헐떡이다가 말았다. 그러는 동안 
경찰서장의 검은 승용차의 앞부분이 유서 깊은 역전파출소 앞에 당도했다. 
파출소장은 다시 두 주먹을 지고 전력을 다해 파출소 앞으로 달려갔고 똥깐과 
은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차출소장의 뒤를 따라 천천히 역전 파출소 쪽으로 
향했다.
 "전체 차렷! 서장님께 경례!"
  파출소장이 파출소에 당도하기 전에 눈치 빠른 차석이 구령을 내렸고 
도열한 경찰들은 딱, 소리가 나도록 거수 경례를 했다. 경찰서장은 유리문을 
내리면서 물었다.
 "소장은 어디갔나?"
  평소 돋보기 없이도 신문을 볼 수 있다는 걸 잘아 삼던 차석은 폭풍처럼 
달려오고 있는 늙은 소장 쪽으로 눈을 돌리며 우렁찬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오시고 계십니닷!"
 "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어떻게 상관이 시찰을 온다는데 자리를 비울 
수 있나?"
  아무리 눈치 빠른 차석이라도 대답할 수 없는 건 대답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때 브레이크 파열음이 나며, 아니 구두 밑창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파출소장이 당도했다. 그러나 파출소장은 형제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장 
앞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파출소장을 바라보던 
신임 경찰서장은 지휘봉을 꺼내 자신보다 몇 해는 더 살았을 파출소장의 살찐 
배를 꾸욱, 찔렀다. 파출소장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가 경찰서장이 다시 
배를 편하게 찌를 수 있도록 앞으로 다가서곤 했다. 그러면서 제발 그 배 
덕분에 뒤에서 다가오고 있을 똥깐형제가 신임 서장의 눈에 뛰지 않기를 
바랐다. 동시에 서장도 똥깐과 은관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파출소장의 바람이야 어떻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왜, 짐승들 가운데 
수컷들은 자신의 영역에 오줌 똥을 갈긴다거나 나무 등치에 자국을 내서 
자신이 지배자임을 표시하지 않는가. 그 안에 다른 수컷이 들어오면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본능적으로 공격한다. 서장도 똥깐도 한 지역의 
지배자로서의 자각이 강했다. 이미 다른 수컷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경계심을 돋우고 있었다.
 "야, 저 아저씨들 뭐 하는 것 같냐? 재미있겠는데."
  은고나이 오토바이를 멈추며 경찰 아저씨들이 다 듣고도 남을 정도로 
우렁차게 외쳤다. 똥깐은 코를 벌름 거리면서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다른 
수컷이 누구인가를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서 있던 경찰. 배를 찔리고 
있는 파출소장 모두 은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던 사람은 눈을 질끈 감았고 
어떤 사람은 처마 밑 그늘 속으로 물러섰고 어떤 사람은 자다 말고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어떤 사람은 눈을 반짝였고 어떤 사람은 귀를 
쫑긋ㄷ거렸다. 신임 경찰서장은 누가를 찡그렸다.
 "저놈이 지금 뭐라 하는가?"
  파출소장은 눈을 감았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을 불렀다. 그러나 그때까지 파출소장의 
기도를 들어주었던 모든 신과 성인이 그때만은 그의 기도를 못 들은 척했다. 
똥깐이 게슴츠레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경찰서장이 타고 있는 검고 
커다란 승용차 앞에 멈췄다.
 "야, 차 좋은데. 음, 아주 좋아."
  똥깐은 진정으로 감격한 듯 차의 지붕을 툭툭 두드렸다. 그 차는 은척에서는 
보기 드문 최고급 관용차로 자존심 강한 서장이 손수 매일 닦고 손보고 
조이고 기름 치는 차였다. 그 우아한 몸에 똥깐의 곰 발바닥 같은 손바닥이 
닿더니 쓰윽 훑고는 움푹한 자리까지 만들었으니, 그 차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절을 했을 것이나 차는 사람이 아니니까 기절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장이 유리문이로 고개를 빼고 호령을 했다.
 "네 이노옴, 이 무엄한 놈! 감히 본관의 관용차에 손을 대다니."
  '여봐라, 이놈을 당장 무릎을 꿇리고 주리를 틀어라'하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서장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파출소장이 마지막 남은 충성심을 짜내 
서장의 얼굴을 자신의 축축하고 살찐 배로 가렸기 때문이었다.
 "서장님, 위험합니다. 자리를 피하십시."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똥깐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고 코에서 거센 콧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눈치 빠른 차석은 기동타격대를 부르러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른 경찰들은 추운 바람 맞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온다 
만다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게 한 서장에 대한 원망에다 '쉬어'라는 명령을 
들은 바 없었던 까닭에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비교적 자유로운 눈알만 
굴리면서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똥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이 파출소장의 허리를 
돌아들어가 신임 서장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 이거 왜 이래. 놔! 놔!"
  똥깐에게 멱살을 잡힌 다음에야, 경찰서장 아니라 그의 할아비라도 읍내 
사람들이 똥깐에게 멱살을 잡힌 뒤에 보이는 의례적인 반항밖에 더하겠는가. 
서장은 목을 캑캑거리며 차에서 끌려나왔고 훈장을 찰랑거리며 똥깐의 
아래위로 들어올려졌다 말았다 했다. 그제야 경찰들이 부동자세를 풀었다.
 "놔요. 놔! 놓고 얘기해요."
 "참게. 이사람. 새로 온 서장님이시라네."
  그 순간에도 경찰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침착한 경찰도 물론 있었다.
 "읍민 여러분! 어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새 구름처럼 불어난 읍민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 점심은 먹었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걸음을 했어?"
 "우리는 구경을 원하거든. 우리에게 오락을 주면 좋겠어."
  눈치 빠른 장사치들도 한몫했다.
 "엿사요. 엿. 고소한 깨엿, 짝짝 붙는 찹쌀엿.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호박엿!"
  일단 발동을 건 이상 싸움기계 똥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떤 충고도 만류도 처세훈도 소용이 없었다. 
똥깐은 서장의 넥타이를 잡고 멧돼지처럼 다리기 시작했다. 서장은 목이 졸려 
죽지 않으려면 충직한 사냥개처럼 똥깐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를 
은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따랐고 경찰들이 뒤를 이었고 읍민들이 뒤를 따랐다. 
따라서 역전파출소에서 기차역까지 수백 명이 다리기로 이동하난, 은척읍 사상 
최대의 장관이 연출되었다.
  선두에 선 똥깐과 서장, 그리고 은관이 탄 오토바이가 철로를 넘어 갔을 때 
하필 하루 두 번 운행하는 열차가 눈치도 없이 달려들어와 경찰을 포함한 
군중을 가로막았다. 군중들은 발을 구르며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안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차 끝을 돌아 현장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던가.
  똥깐은 서장을 수챗물이 흐르는 도랑에 처박았다가 수챗물이 얼어붙어 
자신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도랑 위에서 
힘차게 날아오른 다음 서장의 가슴을 엉덩이로 깔고 앉음으로써 서장에게 
평생 처음 겪는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이어서, 형 은관에게 함께 도약과 
착지의 즐거움을 누리자고 권유, 두 사람은 도랑 밖에서 손에 손을 잡고 
공중으로 도약, 나란히 서장의 몸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게 서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돋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흰 연기를 뿜으며 사라졌다. 물론 도망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치운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자신을 
몰라보는, 도시에서 온 건방진 녀석, 차가 좀 괜찮다고 재는 인간을 혼내준 
것으로 생각했다. 그 길로 경치 좋은 강가에 있는 조그만 할머니의 조그만 
가겟방으로 가서 '집 나간 여자와 집 안 나가는 여자가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대화를 태연하고 심도 있게 나누고는 한밤이 되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던 은관은 즉시 체포되었다. 너무 취해서 반항할 수도 
없었고 반항할 마음도 먹지 않았다. '왜 이러는데?' 한마디 묻고는 자신을 
체포한 경찰의 품에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똥깐은 쌍둥이 형보다 힘이 
센 만큼이나 술도 더 셌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형에 비할 수 없이 높았다. 
자신을 향해 머뭇머뭇 다가오는 일개 분대의 경찰 가운데 몇 명은 때려눕히고 
몇 명은 어깨를 짚고 뛰어넘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후에 '똥깐이 바위'로 명명되고 '똥깐이 굴'로 이름지어지는 굴이 잇는 
바위는 읍내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남산의 중턱에 있었다. 뭉툭히 
솟아올랐다는 점 말고는 전혀 특별한 게 없어 이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그 
바위에 있는 굴 역시 공식적으로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그 굴은 여관이 없는 
시대에 여관이 없는 읍내에 살면서 여관에 갈 돈은 없으되 여관 가기를 
갈망하는 무수한 청춘남녀들의 밀회 장소였다. 올라가는 데 밥 한께 먹을 
시간이 걸리고 뾰족구도 신고서 올라기가에는 제법 가팔랐지만 그들, 연인들의 
열화와 같은 정열을 누를 수는 없었다. 그곳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모포를 가져다 놓은 다음부터 연인들 사이에서는 '모포굴'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똥깐이 한밤중에 그 바위까지 한달음에 달려 올라갔을 때는 누구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무수한 남녀가 깔고 깔리는 동안 닳아빠지게 된 
더럽고 얇은 모포는 있었다. 경찰은 한밤중에 범인을 추적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다. 아군끼리 오인할 수 있다. 부상자가 속출한다. 다른 일도 많은데 모든 
경찰이 다 거기로 몰려가면 은척은 누가 지키나 등등의 갖가지 이유를 들어 
추적을 포기했다. 똥깐은 주위의 나무 부스러기를 끌어모아 불을 피운 다음 
모포를 돌돌 감고 굴 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이웃 도시에서 빌려온 경찰견에 빌려온 기동타격대까지 동원된 
대규모 추격전이 전개되었다. 추격대는 삼십 분에 걸친 수색 끝에 똥깐의 
흔적을 발견했다. 똥깐이 있던 동굴에서 연기가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바위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 좁아서 두 사람도 같이 지나갈 수 없었다. 한 
사람씩 가면 되겠지만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가겠다는 게 모든 경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지휘관은 빌려온 핸드마이크에 입을 대고 이렇게 외쳐야 
했다.
 "똥간이, 잘 잤나? 너는 지금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어서 두 
손 들고 나와라."
  잠보 똥깐은 버릇대로라면 열시까지는 자야 하는데 삼십분이나 일찍 잠을 
깨는 바람에 성이 날 대로 났다. 댓바람에 굴 밖으로 뛰어나오며 돌을 
집어던졌는데 그게 마침 등을 돌리고 오줌을 누던 기동타격대 가운데 한 
사람의 머리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아이고메. 나 죽네에!"
 "전방 두시 방향 적 출현, 소대 포복!"
  그때 남산은 물론 온 읍내에 다 들리도록 우렁찬 똥깐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야, 이놈들아! 용기가 있으면 올라와 바라! 올라와서 일 대 일로 붙어ㅂ나 
말이다!"
  기동타격대는 부상자를 후송하네, 구르네, 엎어지네 하면서 소동을 벌인 
다음 작전을 변경했다. 잠과 술에서 덜 깬 은관을 데려온 것이다. 은관은 
경찰이 적어준 종이를 보면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똥깐이. 엄마가 걱정한다. 나도 걱정이다. 우리는 네, 여염려 
덕분에 무사히 잘 있다 아저씨, 이 글자가 뭐야?"
 "빨자다, 빨!"
  포승을 쥐고 있던 경찰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은관은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빨리 내려와서 자수해라. 우리도 언젠가는 오순도순, 아이 씨. 안 보여! 손도 
시려워. 난 몰라!"
  그래서 혈육을 동원한 눈물겨운 설득 작전도 수포로 끝났다. 똥깐은 오 분에 
한 번씩 온 읍내가 떠나가라 욕을 했다.
 "야, 이 o물에 밥 말아먹을 놈들아 니 에미하고 o해서 o새끼 낳아서 다시 o할 
놈들아 오오, 이 o만 하는 놈들아 o물에 튀겨서 o물에 식혔다가 o물을 채워서 
o순대 만들어먹을 놈들아"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처절한 욕이었고 욕이 끝나는 순간마다 돌을 
집어던졌다. 따라서 욕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경찰 가운데 며 
명의 부상자가 더 나왔는데 다행히 맨 처음 부상당한 사람들과는 달리 
들것으로 수송할 것까지는 없었다. 다시 밤이 왔고 기동 타격대는 야간 장비가 
없어 dirks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작전 계획을 짜고 내려왔다. 사흘째 되는 날, 
춥고 허기진 똥깐의 상태를 짐작한 기동타격대는 바위 아래쪽 움푹한 곳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어대며 똥깐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했다. 똥깐이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때쯤에는 온 읍내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남산 위의 못생긴 바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집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똥깐이가 대단하기는 대단해. 나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저렇게 웅장하고 
다양한 욕을 들어보긴는 처음일세."
 "얼마 못 버틸걸. 사람이 욕만 잘한다고 살 수 있나. 입고 있는 것도 변변치 
못하대. 거기 먹을 게 있겠나, 덮을게 있겠나."
 "나는 똥깐이가 절대 그냥 내려오지는 않을 거라고 믿네."
 "그냥 내려오지 않으면? 호랑이라도 잡아올까?"
 "꼴뚜기 사려. 꽁치 사려어. 밴댕이젓 사려."
 "여봐요. 거 왜 남 장사하는 집 문전에서 비린내를 풍기고 그래?"
 "맞아. 하도 욕을 퍼부으니 온 읍내에서 욕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애들 
교육은 어떻게 할지. 원."
 "그런데 말야. 희한해. 난 하루라도 똥깐이 욕을 듣지 않으면 잠이 안 와. 
몸도 찌뿌드드하고. 버릇이 됐나봐. 그 욕을 듣고 있으면 꼭 안마를 받는 
것같이 시원해."
  병원에 누워 있던 서장은 삼십 분마다 사람을 보내 당장 체포해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로서는 공직 생활 수십 년에 처음 겪는 망신이었고 
똥깐인지 변소인지를 못 잡으면 수챗물에 내동댕이쳐진 체면이며 훈장이 평생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따라서 똥깐이가 산에서 버틴 지 사흘째 되는 날 
밤에는 핑계를 대는 데는 선수인 경찰들도 밤새 잠복 근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똥깐은 굳세게 잘 버텼다. 잠옷이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누더기나 다름없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원시적인 무기인 돌로만 무장하고 
타고난 욕설과 독기로. 마침내 그의 욕설이 그치자 읍내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되어 하나씩 둘씩 남산으로 눈길과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발이 희끗희끗 비치는가 했더니 삽시간에 폭설로 변했다. 눈은 그동안 
똥깐이 퍼부어 댔던 욕이 퍼진 대기를 정화하고 욕이 내려앉은 땅을 덮으려는 
듯 쉬지 않고 내렸다. 눈사람인지 진짜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되는 행렬이 남산 
입구에서 바위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인 좁은 산길을 메웠다.
  한없이 내리퍼붓던 눈이 문득 그치고, 느닷없이 침묵과 고요가 은척을 
엄습했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바람도 소리를 죽이던 바로 그 그때, 그 
순간, 아뿔싸, 오호라, 슬프도다, 어쩔 것인가, 똥깐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는 얼어죽었다. 자신말고는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쥐뼈인지 비둘기뼈인지 
작고 메마른 뼈 몇 개가 그의 발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아주 가는 뼈 하나가 
그의 입에서 멧돼지의 어금니 모양 튀어나와 있었다. 뻣뻣한 똥깐의 시체를 
모포에 말아 들것에 싣고 내려오던 기동타격대 행렬은 말없이 눈을 맞으며 
자신을 지켜보는 눈사람의 행렬과 마주쳤다. 이 행렬은 저 행렬을 무언으로 
비난했고 저 행렬은 이 행렬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을 무언으로 전하며 
한동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어쨌든 은척에서 태어나 은척에서 살다가 
은척에서 죽을 사람들은 모두 한패였다.
  아무것도 이해 못한 사람은 은척에서 나지 않았고 은척에서 살아본 적도 
없으며 은척에서 죽을 일도 없는 신임 경찰서장이었다. 그는 똥깐의 돌에 맞은 
사람이 그 상처와 관계없이 몇 주 뒤 교통 사고로 죽자 그 경찰을 기리는 
비석을 남산의 바위 앞에 건립토록 했다. 비석 앞면에는 '경찰충령비'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졌고 뒷면에는 아무개 서장이 은척의 치안을 위협하는 
불량 도배를 소탕하여 정의와 질서를 구현한 경위, 그 소탕작전에 참여했다 
장렬히 산화한 경찰 아무개를 기려 비를 세우는 데 읍내 유리가게, 철물점, 
어물전, 양복점, 술집, 기타의 주인장들을 얼마나 고심하여 건립위원으로 
위촉했는가 등등의 사연이 국한문 혼용체로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경찰서장은 
그 비가 세워지던 날,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놓은 유지들과 경찰 전원을 
참석시킨 가운데 거창한 제막식까지 지냈다. 그가 은척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룩했던 최고의 업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똥깐이 화장터에서 한줌 연기로 사라지고 얼마 뒤 누군가 순직 경찰을 
기리는 비석의 뒷면에 있는 경찰서장의 이름을 정으로 까서 지우고 
'똥깐이가'라고 쓰고 난 다음부터 생겨난 일들을 적어본다.
  경찰서장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부패와 독직 혐의를 받아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그 혐희 가운데 하나는 아무개의 비를 오석으로 건립한다면서 
주민들에게 돈을 걷은 뒤, 조잡한 화강암으로 바꿔쳐 성금을 횡령한 것이었다. 
남산의 못생긴 바위에는 '똥깐이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 아래의 굴에는 
'똥깐이 굴'이라는 이름이 보태졌고, 그 앞의 비석은 '똥깐이 비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훌륭한 깡패가 되려는 소년은 모름지기 그 바위, 그 
굴, 그 비석으로 순례를 떠나야 한다는 전통이 생겨났다.
  멋모르는 사람은 그 신성한 장소에서 똥깐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보다가 방뇨나 방분의 충동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걸 실천에 옮기다가 
벼락에 맞아 제가 싼 똥을 깔고 죽은 사람이 생긴 이후에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동식 화장실이 생긴 것은 
똥깐이 죽은 뒤 이십 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경찰서장이 오고 갔다. 그들은 조동관 사건의 전말을 듣고 가슴에 
새겨 몸가짐을 바로했다. 경찰들역시 가끔 남산에 있는 바위를 오려볼 때마다 
똥깐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에 수준이 점차 향상되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모범 경찰이 은척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똥깐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달구어지고 이야기 속에서 다듬어져 
마침내 그의 짧고 치열한 인생이 전으로 남기에 이른다. 그 이름은 조동관 
약전이다.

      사람의 성분
    이윤기
  1947년 경북 군위 출생.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 '하얀 헬리콥터' '하늘의 門' '햇빛과 달빛' 등.
  사람의 성분
  생각난다.
  강지우, 우리가 미숙했던 시절의 소란스러운 세상이 안긴 적막을 참느라고 
너는 퍽 고단했겠다. 알고 있거라. 그 시절 그 까마귀는 지금 썩은 쥐를 
포식하고 있다. 앞서가는 네가 이렇게 나타나 서울에다 먼 나라 화단의 생소한 
소문을 뿌리고 다니면 그 까마귀는 네가 썩은 쥐를 빼앗으로 온 줄 알고 
무시로 까악거릴 터이나 괘념치 말 일이다.

 "현대미술관에서 설명회라는 걸 기획한 모양이고 나는 거기에 나가 
관람객들에게 설명이라는 것을 해야 할 모양인데 보고 느끼면 되는 것을, 굳이 
설명하란다. 하지만 하라니까 해야지.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일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벌어진다. 굉장히 심심한 설명회가 될 것 같은데 
내일,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 세시다."
  사무실로 전화를 건 강지우가 그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설명회라는 것에 나를 초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너무 늦게 연락한 감이 없지 않다만, 가마, 알려줘서 고맙다."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강지우가 나에게 그런 전화를 건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치사하게도 저 아는 시 한 수 아는 척했다고 이러는 
것인가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응어리가 녹아 내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런데 그런 기분으로 퇴근하려는데 직원이 봉투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다른 직원이 받아만 놓았지 마음이 바빠 전해드리는 걸 깜박 잊고 휴가 
떠난 모양입니다."
  배달된 지 근 한 주일이 된 그 봉투를 열어보고 나는 두 번 놀라고 말았다.
  또 하나의 동기동창 한국화가 이장환의 화려한 개인전 개막 리셉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비교적 자주 있는 일인 만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토요일 오후 3시라는 그 ㄱ교롭게도 겹치는 날짜와 
정확하게 겹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우리들의 은사 안영세 선생의 
격려사 순서가 그 초대장에 번듯하게 찍혀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재벌 
화가'라고 부르는 이장환의 리셉션 현장은, 대구 근교의 소도시 경산에 
은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안영세 선생에게는 도무지 어울리는 자리가 
나이었다. 우리가 두루 아는 한 안 선생은 그런 일로 상경할 분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를 나서려다 말고 선생 댁에 시회 전화를 넣었다.
  마침 은사께서 전화를 바으셨다.
  정말로 상경하시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새벽 기차로 상경한다. 결혼식 주례하러 상경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우리 은상이 장가들 때 경산에까지 내려와서 주례 서준 양반이 빚 갚으라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내가 졌다."
 "이장환 개인전 개막식에서 격려사를 하시기 위해 상경하시는 게 아니고요?"
 "그 녀석은 내가 격려하지 않아도 그림 잘 그리고 그림 잘 팔고 ehsa 잘 
벌고 있지 않은가?"
 "초대장에 선생님 함자를 찍었던 걸요?"
 "그랬어? 그 녀석답게 염치가 흥등네 뭐 짝이로구나. 내가 말매듭을 지어 
약속한 것은 아니다만 결혼식장으로 차 가지고 와서 실어가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우리 은상이 말로는 내 상경 계획을 미리 알아내어 일정을 짜맞춘 
모양"
 "선생님, 이장환이가 먹고 있는 마음이 곱게 안 보입니다. 선생님 가시는 
가시는 걸 빌미로 손님 모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시면 동기동창 
선후배들이 구름처럼 모이기는 할 것입니다만 선생님께는 참 잘 안 어울리는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만"
 "가다니 자네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
 "저에게는 다른 사정이 좀 있습니다. 선생님 가시기에도 적당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나?"
 "저 혼자서 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장환이는 어쩌면 선생님 안면을 앞세우고 
정부 기관이나 금융 기관 같은 데 초대형 진경산수를 넘기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 바람벽에도 걸려 있는 것, 돈장사로 떼돈 번금융 기관에 못 걸릴 것 
없지 않나?"
 "선생님께 아무래도 누가 될 것 같아서지요."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다만 노구가 이미 남루한데. 까짓 것,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내가 속으면 몇 번 더 속겠느냐?"
  나는,선생님 상경하셔도 가서 뵙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그 까닭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설명회라는 것이 열리기 한 주일 전의 일이다.
  느지막이 출근하니 내 방에 묵향이 진동했다.
  강지우는 내 방의 보조 책상 앞에 앉아 붓으로 연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에이포 용지 크기로 자른 화선지 한 장에 붓질을 한두 번씩만 하는, 꽤 
단조로워 보이는 작업이었다. 보조 책상은 물론이고 내 책상 위에도 그가 한두 
번의 붓질로 그려낸 그림이 무수히 널린 채로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었다.
  잎을 그린 것, 꽃봉오리를 그린 것, 돌돌 말린 잎이 채 펴지지 못한 
입자루를 그린 것, 연실을 그린 것도 있었다. 단 한번의 붓질로 소시지 같은 
연근을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연잎에서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듯한 
물방울을 그린 것도 있었다. 단 한차례의 붓질로 동그라미를 그렸는데도 
붓질이 성긴 부분이 물방울의 하이라이트를 이루게 하는 솜씨가 절묘했다.
  다만 활짝 핀 연꽃만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냄새야 묵향이라는 것이 정말 있네?"
  사람을 쌀쌀맞게 대하는 그의 성미를 알고 내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굴었다.
 ""
 "나는 이렇게 센 줄 몰랐다."
 "옛날 사람들이 없는 걸 있다고 했겠어?"
 "싫지 않은데?"
 "향이 강한 묵즙에 좋은 묵즙 없다."
 "서양화가도 이런 그림 그리네?"
 ""
 "못 그릴 거 없지."
  두 번째 질문을 받고서야 첫 번째 질문에 대꾸하는 묘한 버릇은 여전했다. 
그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 몹시 더뎠다.
 "미국에도 연꽃이 있느냐고?"
 "서울에도 선인장이 있는데"
  그는 이러면서, 먹물이 다 마른 그림을 한 장씩 거두어들여 귀를 대충 
맞추면서 차례로 포갰다. 포개 쌓은 것을 보니 높이가 한 자가 실히 될 것 
같았다. 그는 무거운 국어사전을 두 손으로 들어 포갠 그림 뭉치 위에다 
가만히 올려놓았다. 먹물이 마르면서 쭈글쭈글해졌던 화선지 더미는 묵직한 
사전에 눌리면서 부피가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2백여 장은 되지 싶었다.
 "몇 시에 왔는데 이렇게 많아?"
 "그리고 보니 묵즙이 너무 진해."
 "몇 시에 왔느냐니까?"
 "서너 시간 했나"
  나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그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건 또 뭐냐?"
  연꽃 그림 대신 한시가 쓰인 화선지 한 장 역시 먹물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한 먹으로 어찌나 힘을 주어 썼던지 한 자 한 자 한 자가 마르면서 
화선지 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종이가 형편없이 쭈그러져 있었다.
 "한번 써봤다"
 "별일이네? 서양화가께서 유심필로 연꽃을 안 그리시나. 한시를 안 쓰시나"
 "유심필이 아니라 무심필인데 너, 붓을 아나?"
 "그는 나를, 붓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인가?
 "읽어봐도 돼?"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시가 씌어져 있는 화선지를 집어들었다.
  다행히도 어려운 한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낯이 익은 한시였다.

    공산불견인
    단문인어향
    반영입심림
    복조천태상
    (빈 산에 사람은 안 보이고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리는 구나
    석양은 짙은 숲을 뚫고 들어오더니
    다시 파란 이끼를 비추는구나)

 "참 고요하고 아늑하구나. 자네가 지은 거?
 "에이, 내가 무슨 수로?"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왕유의 냄새가 좀 나는구나."
 ""
 "글자 스무 자 안에다 참 많이도 들어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빛과 
소리가 고루 들어 있으니"
  눈길을 그 한시 씌어진 화선지에다 박고 있는데 문득 그의 심상치 않은 
눈빛이 느껴졌다. 바로 눈길을 그에게로 돌리려다 어쩌는가 보려고 잠시 
모르는 체하고 있다가가 오래 그러고 있을 일이 아니어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재빨리 눈길을 거두면서 중얼거렸다.
 "'녹시'라는 신데, 좋지?"
 "좋다."
 "왕유, 맞다."
  나는 '당시전접' 교정 보면서 왕유의 시를 알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기분이었다.
 "다 그린 셈인가?"
  내가 물었다.
 "응 그런데 조금 미안해지네?"
 "뭐가?"
 "2백만 원을 너무 빨리 벌어서 쓱싹쓱싹"
 "타국살이 20년이다. 원가를 생각해봐라, 그게 너무 빨리 버는 것인가"
 "너 오래간만에 말을 좀 되게 하는구나."
  기분이 좋았다. 그가 나를 이런 식으로나마 칭찬해준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그렇다.
  당시 한 수가 부린 조화라고 할 수밖에, 앎을 나눔으로써 지기
가 되는 것은 천박한 일이다 싶었는데도 그랬다.

  설명회 있기 두 주일 전의 일이다. 전람회 일로 귀국했다는 소식 듣고, 그가 
묵는 여관을 내가 찾아내었다.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오랜 친구 사이인데도 길고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예술가, 나는 가난하지 안은 
편집자여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꽤 공을 들여가면서 어느 시인의 산문집 한 권을 만들고 있다. 
시원시원한 볼 거리가 좀 들어갔으면 싶은데, 마침 자네가 이렇게 귀국했다.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한다. 그림이 몇 장이 되었든 우리는 2백만 원쯤 
사례비를 지불할 수 있을 것 같다."
 "와우" 많이? 그런데 그럴 만한 책이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만"
 "번번히 페를 끼쳐서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책을 잘 꾸미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
  그것은 그랬다.
  나는 그가 묵고 있는 여관방을 둘러보았다. 그 흔하디 흔한, 바퀴 달린 
'샘소나이트' 여행 가방 하나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것은 구형 카메라 
가방 하나뿐, 그는 그 가방에다 여벌 바지 하나, 속옷 두어장, 티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 자동 카메라 하나까지 빵빵하게 넣어 어깨에 메고 온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가 차지하는 여관방에는 전날 밤에 그가 빨아서 말리고 있는 중인 속옷 
등속이 널려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좋은 그림이 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좋겠다고 생각했을 분, 회사가 2백만 원을 지불해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그림을 빌미로 편집자의 특권을 빌려 
사사로이 자기의 서울 나들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귀국할 대면 
이런 일이 자주 이루어지고 했다. 그는 나의 제안을 대체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gms쾌하게 주고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가 나를 다소 거칠게 다루는 
것은 배려에 대한 미안풀이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것은 그 
배려를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약간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기는 하겠다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뭔데?"
 "우리 지금 교지만들고 있는 거 아니지?"
"아무려면 자네 같은 화가에게 컷 그려넣으라고 할까봐?"
 "그리기는 그리겠지만 내 그림이 들어갈 책의 내용은 읽지 않겠다. 삽화를 
그리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내 마음대로 일련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겠다. 그 
이미지가 글의 내용과 충돌해서 새로운 긴장을 조성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좋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마. 틀림없이 새로운 어떤 긴장을 조성하기는 할 것이다. 
문제는 너에게 그걸 보는 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너의 편집자적 
안목에는 약간 한심한 구석이 없지 않으니까."
 "빌어먹을 내게도 그걸 알아보는 눈이 있었으면 좋겠다만. 좋을 대로 하자."
  이것이 그가 내 방에서 무수한 연꽃을 그리고 있게 된 경위다.

  설명회가 있기 20년 전의 일ㅇ.
  강지우의 도미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 인사도 어느 화랑에서 받았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서양화가로만 알려져 있던 그가 엉뚱하게도 사진전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은 아니다.
  작품으로 내걸린 그의 사진 대부분은 잔디 위에, 차도의 중앙선 위에, 
보도의 네모난 블록 위에다 유리판을 깔고, 카메라의 각도를 바꾸어가면서 
찍은 것들이었다. 그늘진 계단, 그늘진 창고, 유리창문, 잘려버린 나무의 
그루터기에 거울로 반사광을 비추고 그것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의 작품 해설이 담긴 팸플릿은 아직도 이따금씩 들추어보는 소중한 
기념품인데, 강지우의 대학교 선배화가가 쓴 해설 중에는 이런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유리판 시리즈는 지각 공간을, 거울 반사 시리즈는 사물의 지각 대상화 
차원을 각각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매몰되어가는 
세계의 실상을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 다시 말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 세계를 되돌려받기 위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내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도로의 중앙선 위에다 
유리판을 여러 장 한 줄이 되게 깔고 시작을 바꾸어가면서 찍은 일련의 
사진이다.
  도로의 중앙선은, 유리판이 깔리지 않았을 때는 어느 중앙선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중앙선을 그린 페인트가 존재하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가 깔아놓고 촬영한 사진의 유리판 위로는 가로수, 하늘, 구름 
같은 사물이 비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중앙선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암묵적으로 승인하던 가로수, 하늘, 구름이 유리판이나 거울의 
개입을 통해 새롭게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나는 카메라를 대는 각도에 따라, 즉 
우리의 시각이 바뀌는 데 따라 유리판이나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가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 발견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난 
세계의 발견에 속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당시 나는 주부를 독자층으로 하는 잡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열등감 같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 기자를 대동하고 전시회장으로 
갔던 나는 강지우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뭣이냐?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우리가 시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존재하게 된다. 혹은 존재하는 것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인가?"
  잡지 기자 동창생에게, 도미를 앞둔 예술가는 친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확대 해석할 일은 아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간추리자면 이렇다. 나는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사진이 무엇이냐? 사진은 
빛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시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절대암흑 속에서는 사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거, 
역설 아니냐. 빛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진이 어둠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빛의 환경은 인공 환경과 자연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일정하지만 후자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문제는 자연 환경에 대한 
우리의 시력이 감퇴하고 있는 현상이다. 햇빛, 달빛, 별빛, 번개 같은 빛을 
자연 환경이 문학의 어휘로만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빛을, 
더위나 추위처럼 피부 감각을 통해서 인지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각은 인공 
조명을 향해서만 열려져 있는 셈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 불변하는 
빛으로만 열려 있는 시각은 사물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글씨, 될까? 
너희 잡지의 주부 독자들은 네가 설명해도 이해를 잘 못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가 따귀라도 맞은 심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내가 이로써 그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전람회의 감동은 내게 오래 머물렀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나는 
하숙집 마당에다 거울을 놓고는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그 거울에 비치는 
사물을 관찰하는 놀이를 해본 적도 있다. 그의 이 사진전에서 경험한 놀라움은 
한동안 사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 전반으로 파급되고 있었으니 대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반조'라는 제목을 달아 그가 한 일련의 작업을 주부 
독자들에게 설명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강지우가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그 잡지에다 내가 쓴 해설을 읽었던 
모양이다.
  그 해의 어는 날 미국에서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매우 투박하고 조잡한 
해설이지만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설명회 있기 한 주일 전 그가 붓으로 낙서한 왕유의 시에 '반조', 이 
두자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몹시 놀랐던 소이연이다.

  강지우가 도미와 함께 20년 간에 걸치게 되는 대장정에 나서기 직전에, 벌써 
이장환은 일치감치 진경산수로 국전을 거치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동기들이 
대학과 군대살이를 마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청첩장을 돌리던 
시절이었다. 생활 기반이 반듯하게들 닦일 나이가 아니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개인전 리셉션 자리는 모교의 
재경동창회자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같은 대학의 미대 동기동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그 자리에 나왔어야 자연스러울 터인데도 불구하고, 
강지우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장환의 산수화에 대한 강지우의 단칼 촌평을 들은 일이 있다.

  '이장환의 산수화는 머리가 지독하게 나쁜 대학교수의 논문 같다. 대고 
덕지덕지 칠하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줄 알고 그린 그림과, 여기서 베끼고 
저기서 인용해서 짜맞추면 되는 줄 알고 쓴 엉터리 논문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작품이나 논문은 미적 감각이나 이성적인 논리가 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제작하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 관한 한 인정사정이 없었다.
  이장환이 개인전을 끝냈을 때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끝낼 
일이 아니어서 이장환이 낀 저녁 술자리에 강지우를 부른 적이 있다. 그는 
이장환이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고는 
다리를 떴다.
 "너는 30년 전부터 편집자였다. 네가 어떤 편집자냐? 책의 편집은, 네가 만든 
책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술자리의 편집으로 말하자면 너는 최악의 
편집자다. 너는 내가 도둑맞는 현장을 방조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작품을 
도둑맞는 것을 방조했고 시간을 도둑맞는 것을 방조하고 있다."

  그의 말이 옳다.
  30년 전부터 나는 편집자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둥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우리 학교의 교지 편집 책임자였다. 강지우와 이장환은 각각 
서양화풍의 삽화와 동양화풍의 삽화로 나의 허술한 편집 화면을 메워준 꼬마 
화가들이었다.
  우리들의 이상한 인연이 시작된 것은 그 어름,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미술 시간이면 우리는 교정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 한 시간 동안 수채화를 
그리고는 했다. 파스텔로도 그리고 과슈로도 그렸는데 내 기억에는 수채화 
그리던 일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두 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를 처음 만나던, 2학년 2학기의 첫 미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날 강지우는 내 옆에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그리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물감 다루는 데 서툴렀던 우리는 
모두 스케치북을 땅바닥에다 펴놓고 밑그림에다 붓질을 했다. 스케치북을 
세워놓고 붓질하면 물감이 주루룩 흘러내리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지우는 스케치북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붓질을 했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그 붓질의 효과였다.
  강지우에게는 밑그림을 약간 진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스케치북을 
반듯이 세운 체 붓에다 붉게 갠 물감을 찍어 위에서 아래로 긋고는 했는데, 
절묘한 것은 밑그림이 진하게 그려진 자리에 못 미쳐 가만히 붓을 
멈추었다가는 살며시 떼었다는 점이다. 물감은 그의 붓질을 따라 밑그림이 
진하게 그려진 자리까지 흘러내려갔다가는 그 자리에 방울진 채 맺힐 뿐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 효과는 나무를 그릴 때 아주 돋보였다.
  우리는 나뭇가지 아래의 어둡게 그늘진 부분에는 덧칠을 했다. 그러나 
강지우는 덧칠하는 대신 물감이 흘러내리다가 바로 그 어두운 부분에 방울진 
채로 멈루게 했다. 물감은 그의 붓 끝에 묻어 정확하게 그가 의도하는 
부분에서 맺힐 뿐 아래로 더 이상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로써 굵기가 
거의 같은 세로 선만으로 수채화를 그려내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좋아보였던 것은, 가까이서만 보면 위에서 아래로 붓질한 무수한 세로 선의 
집합으로 보여도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각 세로 선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무수한 붓자국이 굉장히 사실적인 화면을 만들고는 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나도 몇 차례 흉내를 내어보았다. 하지만 붓에다 물감을 적게 찍어서 
선을 그리면 방울이 생기지 않았고 조금 많이 찍어 그리면 쪼르르 흘러내려 
버리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스케치북을 여러 장 넘기면서 번번이 새로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강지우의 화면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붓에다 
묻히는 물감의 양은 거의 일정하기도 했으려니와 물감이 조금 과하게 묻어 
흘러내리겠다 싶으면 수직으로 세웠던 스케치북을 뒤로 조금 기울여 물감이 
원하던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양손 움직임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기민했다.
  우리는 미술 시간이 끝나자 스케치북을 미술교사에게 제출했다. 스케치북을 
되돌려받은 것은 그 다음 미술 시간이었다. 전 시간에 그린 그림의 대한 
평가의 결과는 그림 위쪽에 오른쪽 귀에 '수우미양가'로 쓰여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미'를 받은 것은, 그것이 나의 평균 미술 성적이었던 만큼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장환이 '수'를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강지우가 '미'를 바았다는 점, 이장환의 그림이 강지우의 
그ㅡ림과 복사라도 한 듯이 아주 똑같았다는 점이다. 이장환은 강지우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이장환이 그린 
화면은 무수한 세로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개개의 선 끝에 물감이 
방울진 채 말라 있는 것이나 강지우의 것과는 아주 똑같았다.
  미술교사는, 강지우가 항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그림에서 취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모방하는 행위는ㄴ, 특히 
친구의 독창적인 붓질을 모방하는 행위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다. 강지우가 
누구냐, 앞으로 나와!"
  새로 부임한 교사가 이장환에게는 '수'를, 강지우에게는 '미'를 준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강지우가 이장환을 모방했다고 단정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는, 당시에는 분명히 제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기억에는 탈색되어버리고 남아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날, 미술부의 총아 
노릇하던 강지우가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로부터 참혹하고도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강지우를 변호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는 
어느 하나를 변호하면 다른 하나가 다친다는 생각 때문에 우물쭈물 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사건은 오래지 않아 이장환이 미술부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고 강지우가 
문예부로 옮겨오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발전했다. 강지우가 나의 교지 편집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이장환의 개인전 개막 리셉션이 열리는 토요일, 강지우의 설명회가 열리는 
바로 그 토요일 오후 두시에 나는 집을 나섰다. 지하에 갤러리를 거느리고 
있는 특급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대신 현대미술관이 있는 과천으로 
향한 것은 스무 해째 타향살이하는 강지우의, 보나마나 썰렁할 터인 그 
설명회가 안쓰러웠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그의 작품이 어떤 변모의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가 사진가가 아니었던 만큼 여느 사진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처음부터 아니다. 20년 전에 이미 눈의 확장으로서로서의 카메라 기능을 
저만치 뛰어넘고 인식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카메라에 부여하던 그가 
아니던가? 나는 긴장한 채로 미술관 계단을 올랐다.
  인화된 천연색의 사진을 띠 모양으로 잘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붙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부채꼴, 물결 모양으로 이어 붙인 것도 있고. 뫼비우스의 
띠 모양, 바늘 귀 모양으로 이어 붙인 것도 있었다. 나는 그가 사진의 
평면성에 도전하고 있다는 인상밖에는 어떤 인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작품을 불러보고 있자니 곤혹스러웠다. 당혹스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그의 작품 자체에서 느낀 당혹감이라기보다는 벌써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업섹 된 나 자신의 감각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내가 즐길 수 
없는 작품이라면 물러서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20년 전 그의 
도미 사진전에서 받았던 감동의 여신이 그 자리에서 물러설 수 없게 했다.
  그가 우리 인식의 지평이나 시지각의 세계를 확장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확장시킨 세계는 이미 나의 인식이나 시지각은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세계로 보였다. 나는, 20년 전의 감동을 배반할 수 없어서도 그가 그런 세계에 
이른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시집인 줄 알고 게송집을 편 그런 참담한 
기분이었다.
  내가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룬 사진의 상당 부분이 
연꽃이나 사찰이나 탑이나 부도의 사진에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가 인식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게으르게 상상했다.
  강의실에 '뷔티아르'나 '슬라이더'나 '오버헤드 프로젝터'가 준비 되고 
작가가 정장하고 나와 자신의 작품을 강의식으로 해설하는 그런 설명회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미리 설명문을 인쇄한 '에이포' 용지를 
발치에 쌓아두고 다가오는 관람객에게 한 장씩 손수 나누어주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미술관이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않은, 좋게 말하면 소박해서 
자연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작가에 대한 대접이 지나치게 소홀한 초라한 
설명회였다.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작품 앞으로 모이는 관람객은 열 명도 채 
디지 않았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아주 느린 말투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가로 70센ㅌ, 세로 50센티 정도 크기로 인화한 사진에다 자를 대고 
3밀리 혹은 5밀리 폭으로 칼로 자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토막난 조각들을 
판지 위에다 배치해 봅니다. 잘린 사진은 갓 건져낸 물고기들처럼 판지위에서 
펄떡거리지요. 나는 기하 구조 혹은 기하 형태를 통해서 이 토막난 사진을 
보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빛과 기운이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쏟아지도록 이 
토막난 사진들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간곡히 모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불이며 미사이며 제사인 것이지요 마침내 사진의 토막들을 뒤집어 풀을 
칠합니다. 이것은 이전 단계에 견주면 쉬운 작업이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지요. 잘못하면 풀칠이나 하고 앉아 있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풀칠이 끝난, 가죽 같은 사진의 표피를 판지에 다 붙이면 나의 
작업은 일단 완료됩니다 요컨대 나의 작업은 사진을 찍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진 프로세스가 완료된 지점에서 나의 작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로써 사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또 하나의 긴장을 
조성해내는 것입니다."

  설명이 무르익어가면서 그의 얼굴도 서서히 상기되기 시작했다. 얼굴만 
상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씩 심하기 무안당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 쪽을 향해 목례를 보내고는 했다. 나에게 그런 목례를 보낼 
까닭이 없다 싶어서 나는 뒤를 돌아다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안영세 선생을 비롯, 이장환의 개막식 리셉션에 가 있어야 할 우리 동창 
30여 명이 내 뒤에 웅긋쭝긋 서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동창 중 하나가 다른 동창 귀에다 입술을 대고 소곤거렸다.
 "전문 용어로는 뭐라고 하냐? 나는 이렇게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는데 우와, 
작품의 성분이 다르다 달라"

      젖은 골짜기
    이혜경
  1960 충남 보령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우리들의 떨켜'를 발표하여 데뷔.
  주요작품 길 위의 집'
  젖은 골짜기
  산에 가시나보죠? 아 전 또 등산하러 가시는 줄 알았지요.
  그럼 어디 여행 중이신가보죠? 가야산 근처요? 성주, 고령, 합천, 어느쪽으로 
가십니까? 예, 제 고향이 고령입니다. 가야산 자락이지요.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입니다. 한식 때는 사람들로 붐비고 하니 벌초도 미리 할 겸 나섰어요. 제 
직장이 미8군이라서요. 토요일에도 쉬거든요. 고령요? 네, 좋은 곳이에요. 
산들이 죽 둘어싸고 있지요. 그래봬도 옛날 도읍지 아닙니까. 네, 대가야의 
수도였지요. 볼 만한 게 꽤 있어요. 읍내 주산 능선엔 아직도 능들이 남아 
있고 시내에서 한 십리쯤 덜어진 곳에 알터라고, 암벽에 그린 그림이 있는데 
청동기 시대 거라던가 우륵 선생 비도 있고요. 그런데 말씨 들어보니 여기 
분이 아니신가본데, 가야엔 무슨 일로? 혹시 도자기 연구를 하시나요? 거기 
도자기 공장이 많잖아요. 잘 알지요. 중학교 땐 걸어서 해인사까지 소풍을 
가곤 했는데요. 자동차 길로는 멀지만 골짜기 지름길로 가면 절까지 삼십오 
리밖에 안 돼요. 그럼. 걸어갔지요. 여럿이 한꺼번에 움직이니까 앞 사람 뒤만 
보고 쫓다 보면 먼 길이라도 걷게 되지요.
  전 처음엔 등산하러 가시는 분인 줄 알았어요. 배낭을 지셨길래요. 제가 
산을 좋아하거든요. 지리산 종주만 해도 일곱 번쯤 했으니까요. 삼 년 쯤 
전부터 산엘 못 갔더니 이렇게 배가 다 나오는군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관악산에 오르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네, 그렇게 바쁘게 살아Tdjdt.
  저런, 아니 아니, 고개 돌리지 마세요. 멀쩡한 화장실이 저기 있던데 역에서 
자다 나온 사람 같지요? 그래도 용케들 겨울 넘기고 저렇게 살아가고들 
있군요.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새 몇 사람쯤은 지상에서 사라졌을지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그전엔 그런 걸 생각하면 오싹했는데, 한동안은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직장을 옮긴 지 3주 되었어요. 제가 원한 
직종도 아니고, 일단 들어가고 나면 언제든 마음에 드는 자리가 나지 않을까 
해서 들어갔는데, 마음이 영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려고 
영등포역까지 왔는데, 직장은 평택이고 집은 개봉동이거든요. 네, 고되긴 해요. 
차차 익숙해지겠죠. 영등포역에서 도무지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욱하는 마음에 무작정 밤열차를 탔는데, 밤열차 그거, 탈거 아니더군요. 좌석도 
세 자리가 붙어 있는데 하필 가운뎃자리고, 옆자리 사람이 하도 코를 요란하게 
골아서 잠도 못 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똥차긴 하지만 제 차를 끌고 새벽에 
나설걸 그랬다 싶어요.
  사실은 이렇게 낯선 분에게 말을 거는 것도 처음입니다. 차에서 내리니까 
어디 들어가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고 이 시간이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저렇게 안개까지 끼니 더 그렇더군요. 혹시 제게서 술 
냄새가 나지 않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이 근처를 다 
돌았거든요. 저쪽 계단으로 내려갔더니 이 시간에도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더라고요. 거기서 오뎅 국물 좀 마시고, 어떤 사람이 소주 반 병 
달라고 하기에 남은 걸 달라고 해서 마셨어요. 새벽부터 혼자 소주 마신 일도 
처음입니다.
  이쪽으로 나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면서도 괜히 무안당하는 거나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래요. 세상이 워낙 
험하니까 당연하긴 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요, 여긴 
남자인 제게도 음산하게 느껴지는데요.
  아까 대합실에서 책을 읽으시는 것 같던데,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셨나요? 아, 그 책요? 가야 가는 버스는 일곱시나 되어서야 있을걸요? 
첫차가 여섯시 반이라구요? 가만있자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있군요.
  시각표, 그 책은 저도 한 권 가지고 있습니다. 산에 갈 때 이용하곤 했지요. 
거기 보면 참 아름다운 이름도 많지요? 혹시 이런 곳 가보셨어요? 고사리, 
자미원, 청령, 청령, 정동진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설레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곳이 더 많아요. 그냥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라고나 할까요. 전에는 아름다운 곳을 보면 언제 
다시 와야지 싶었는데, 이제 늙으면 이곳에 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군요. 허허.
  예? 이거 부끄럽지만, 한땐 글을 쓰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땐, 
신라백일장이라고 영남권에서는 아랑주는 백일장인데, 거기서 입선을 하기도 
했지요. 글쎄요.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한창 마음에 두었던 여학생을 꽃에 
비유한 시였을 겁니다. 에이 무슨, 저 같은 사람 차지가 되기엔 너무 
아름다웠어요. 웃으면 주변이 다 환해졌으니까요. 가볍게 튀어오르는 웃음 
소리만 들으면 온몸에 거품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어요. 어땠냐면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작았어요. 가느스름한 눈이 웃으면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는데 
혹시 조팝나무꽃 아십니까? 네, 봄에 산 어귀에 피는. 그래요, 꿈결 같지요. 꼭 
그 조팝나무꽃 같았어요. 실바람에도 흩어질 것처럼 아슬하지요. 은희, 라는 
이름에 그토록 어울리는 여자를 다시 본 적이 없습니다.
  네, 알지요.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집안 아들과 결혼해서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산다더군요. 요즘 같은 때 아이 다섯 키우는 게 보통 힘으로 되나요. 
그만큼 경제력이 있으니 다섯씩이나 낳을 수 있었겠죠. 잘된 일이지요. 글쎄요. 
한번쯤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야 없지 않지만, 제꼴이 워낙 
초라해서요. 아니, 아닙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현실은 인정해야죠.
  사실은 저도 요즘 말하는 명예 퇴직자입니다. 의류 회사였어요. 규모는 
작았지만 백화점에 직영 매장도 가지고 있고, 바느질이 꼼꼼하다고 업계에서는 
알아줬죠.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서서 열두시가 다 되어 들어가는 생활을 십수 
년 했습니다. 네, 한 번도 안 옮겼어요. 성실한 게 아니라 재주가 없는 거겠죠. 
월급 봉투 받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데요. 상무까지 올랐습니다. 자리란 
게 뭔지, 상무가 되고 나서는 산에도 못 갔어요.
  석 달 전에요. 상무 단 지 삼년 만에요.
  불황도 불황이었고 물론 그 때문이었겠죠. 여기저기 나자빠지는 걸 보니 
오너도 겁이 났을 테고. 그래선지 대충대충 넘어가자주의로 바뀌더군요. 
그동안 품질 하나로 버텨왔는데. 그냥 넘어가지지 않더군요. 마찰이 생길 
수밖에요. 게다가 여대 의류 직물학과를 갓 나온 오너의 딸이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데, 못 견디겠더군요. 그동안 보낸 세월이 무언가 싶기도 하고, 6개월 
정도 부대끼는데 머리가 다 셌습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요즘 성냥은 이 모양입니다. 성냥골에 금분 은분을 
칠해 치장하지만 정작 그으면 힘없이 미끄러지기 일쑤입니다. 성냥이 할 일은 
불 피우는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이런 걸 보면 그냥 넘어가지질 않아서요.  
안 피우던 담배도 그때 피우기 시작했어요. 하루에 두 갑씩 피우게 되더군요. 
지금은 그래도 조금 줄었습니다.
  아니오. 저도 그렇게 마음 약한 사람은 아닙니다. 조직에 몸담고 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이 질겨지지요. 내키지 않는 일도 하게 되고, 능률을 
앞세우느라 남의 가슴에 못박는 일도 더러 있었겠지요. 중간 관리자라는 게, 
그렇지요, 오너 쪽에선 제대로 밀고 나가지 못한다고 욕먹고, 부하 직원들에겐 
잘해 봐야 본전치기 십상이고, 심지어는 어용이라는 소리나 듣게 되고.
  네, 그런 적도 있어요. 제 어떤 면이 그렇게 비쳤는지 모르지만, 저로선 
몸담고 있는 곳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성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런데 거기에다 어떤 사람이 충성이라고 이름붙이고 나면 
그 나머지는 모두 충성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보게 되는 거죠. 말이 
무섭지요.
  중학교 땐가, 저희 반에 '꿈 깨'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저도 과히 큰 편은 못 
되지만 그 친구, 저보다 더 작고 말랐어요. 자랄 때 못 먹어서 그럴 겁니다. 
어느 날인가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 친구가 자기 처지완 엉뚱한 
포부를 말했어요. 그래서 얻은 별명인데, 한번 별명이 붙으니까 그 사람의 
다른 특성이나 그 밖의 다른 진실은 다 그 안에 빨려들어 없어지고 별명만 
뎅그마니 남게 되더군요. 저만 해도, 그때 그 친구가 이야기한 장래 희망은 
기억 못하면서 별명만 기억하니까요. 사람에게 이름붙인다는 거,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한번 붙은 이름은, 이를테면, 블랙홀 같은 거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가 어용이 되었더군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아무 재주도 없이 태어난 사람이 그나마 살아갈 길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는데요.
  그래요, 장남입니다. 동생들이야 저 살기 바빠서 산소 같은 데 신경 쓰기 
어렵죠. 실례되는 질문인 줄 알지만 형제분이 어떻게 되세요? 네, 부모님께서 
고생 많으셨겠어요.
  맏이라는 거, 그것도 가난한 집 맏이라는 거, 원죄 같은 겁니다. 혼자 있어도 
왠지 발치에 묵지근한 추를 달고 있는 듯한 기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에서 잡아 끄는 추를 의식하면서, 재게 걷는 남들을 쫓아가는 겁니다. 
마음은 남들과 나란히, 아니죠. 출발선에서부터 뒤로 물려진 것 같으니까 
오히려 급해서 앞지르는데, 발은 한정 없이 무거워 제자리에서 동동거린다 
말입니다. 예,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인데, 남동생들은 다 학교 마쳤습니다. 
집사람이 고생했지요. 그래도 가르쳐놓았으니 다들 제 앞가림은 하고 삽니다. 
웬걸요. 다들 지 복으로 공부한 거라고 생각하지, 그런 생각할 줄 알면 어디 
동생이겠어요. 형이지.
  부친은 제가 대학 마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네, 조금 이른 편이었지요. 더 
사실 수도 있었는데.
  아니오. 그라 다정한 부자지간은 못 되었어요. 저기, 저 선로 보세요. 저렇게 
나란히 이어지다가 서로 닿는 순간 엇갈리잖아요? 아버지랑 저도 저랬어요. 
아주 가끔, 마음이 닿는 듯하다가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곤 
하는 그런 사이였어요.
  말씀도 통 없으신 데다가 대신 술을 즐기셨지요. 즐겼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거의 알코올 중독에 가까웠엉. 조그만 밭뙈기 겨우 부치고 사는 양반이 비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술을 드셨지요. 장마철에 집 안에 잇노라면 죽죽 긋는 
비에서도 술 냄새가 맡아질 정도였어요. 웬 술을 그리 드셔야 했는지 끝내 못 
여쭤봤어요. 언제던가, 학교에서 막 돌아오는데, 비가 오니까 이틀째 밭에 못 
나가고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흘끗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시는데, 그 눈. 그 
눈을 잊을 수 없어요. 글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겨우내 묵혔던 밭을 
갈아서 파헤치면 뭉클, 빛깔 짙은 흙이 나오지요. 그걸 볼 때의 철렁함 같은 
것. 어린 마음에도 문득 깨달았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혹이구나, 아버지는 나를 
혹으로 여기고 있구나.
  이제 생각하면 제 아버진, 역마살이 낀 사람이 아니었나 싶어요. 특별히 
배운 양반도 아니었고 풍류를 즐기는 양반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발을 못 
붙이셨는지, 술친구 한두 명 빼고는 친구도 없이 지내셨어요. 그래요, 참 
외롭게 산 양반이었지요. 아뇨, 농사지어야 하니까 늘 집에 계셨지요. 그런데도 
흥건히 취해서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은 아버질 보면,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가는 사람으로 보였으니까요. 그럴 때 막연히 허공을 보던 아버지의 눈, 
제가 잠적하고 싶다고. 난생 처음 생심을 내던 때 그 눈빛이 떠오른 걸 
보면요.
  네, 우습지만 살다 보니 그런 마음을 먹을 때도 생기더군요.
  새 직원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나더러 그만두라는 소리인가, 고민하던 
때였어요. 누가 뒤에서 잡아 끄는 것처럼 출근 길이 무거웠어요. 사람이란 게 
무언지, 그땐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게 되더군요. 난생처음이었지요. 집이 언덕 
위에 있어서 출근 때면 언덕을 내려오는데, 언덕 아래 집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고물거릴 사람들이 왜 그리 안쓰럽고 정답던지.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오늘 하루 제가 하는 일이, 제 판단이 정대하도록 
해주십사고요. 왜 하필 정대라는 거창한 말이 떠올랐는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그때 우리 회사에 임정대라는 직원이 잇었거든요. 출근 길에 그 
친구와 마주치면 그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나오더라구요. 그 친구, 아침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그럼요. 기도하고 나면 무언가, 가슴속에 든든한 기둥 하나 들어선 듯했어요. 
누가 까딱만 해도 금방 바스러질 모래 기둥 같은 거였지만요. 그렇게 바스러져 
내릴 때면, 그만 그 자리에서 존재도 없이 사라지고 싶어지데요.
  전에 거래처에서 알던 사람인데,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그만두었어요. 
나중에 듣자 하니 출장차 몇 번 갔던 LA에 눌러앉아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다더군요. 학벌도 짱짱하고 그만큼 능력도 있던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보았다는 사람 말로는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술자리에서 그 
소리를 듣는데 귀가 열리는 느낌이더군요. 어디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가서,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 뭐랄까, 제가 옮겨야만 한다고 믿어서 
낑낑거리며 짐을 지고 다녔는데, 그걸 슬쩍, 지나가는 수레에 얹어놓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집사람이나 아이들이 들으면 서운해하겠지만, 집에서 나만 기다리며 
목매다는 식구들이 있다는 거, 어떤 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순종하고 살림 잘하는 아내와 살고 싶어서 그런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이즈막엔 나가서 돈 버는 부인 둔 친구들이 부러워요, 솔직히.
  집사람요? 글쎄요. 무단한 편이죠.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려고 하고. 이거, 
워낙 바삐 몰아치다 보니 집사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군요. 
그냥, 느티나무 같다고나 할까요. 먼저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다가 언제든 와서 
그 그늘에서 발 뻗고 쉴 수 있는 느티나무. 네? 느티나무의 고독이라뇨? 
사람이 머물다 떠난 뒤의 느티나무? 그건 솔직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군요. 
그나마 집사람에 대해 생각이란 걸 한 것도, 회사 그만둘 무렵이었죠. 만일 
내가 사라진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살까 하고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사라질 
걸 염두에 두자 비로소 곁에 있던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는 거. 어쩌다 
집사람의 머리에서 흰머리카락이 눈에 띄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요.
  둘입니다. 큰애는 고3이고, 작은애가 고 1이죠. 그래요. 한창 돈 들어갈 
때입니다. 네, 잘하는 편이에요. 작은애는 전국에서 뽑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는데 모의고사 점수가 320점대예요. 에이, 그래도 결과를 봐야 알지요. 
중학교 때도 전교에서 1, 2등을 하긴 했지만요. 그 애 앞으로 들어가는 돈이 
한 달에 한 80만 원쯤 됩니다. 그래도 기숙 학교라서 과외비는 안 드니 
다행이다 싶어요. 큰애는 글쎄요. 제 자식이지만 잘 모르겠어요. 격세 
유전이라는 거, 곰곰이 생각하면 유전형질의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윗세대 사는 걸 보고, 달리 살아보려는 마음이 작용하고, 거기에 대한 
그 다음 세대의 마음이 또 작용해서, 격세해 닮은 거나 아닌지. 어떤 때, 
큰애가 절 보는 눈에서 아버지의 눈을 느끼게 되더군요. 모르죠, 그 애쪽에서 
그렇게 느낄지. 공부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데 대학엔 안 가겠다더군요. 제 
말로는 그림을 그리겠다는데, 그림이라는 것도 학교에서 제대로 배워야지, 
그러고도 배곯기 십상일 텐데 그래요? 하긴 요즘엔 그런 쪽으로도 많이 
나간다고 큰애도 저를 안심시키긴 하더만요. 따지고 보면, 천년만년 버틸 
것같이 보이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나가떨어지는 요즘 같은 세상을 보면, 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그게 행복이다 싶을 때도 있어요. 우리 세대나 
아등바등,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고 곁눈질하며 똑같은 모양새로 
살려 했지, 요즘은 거 뭐라나. 개성대로 산다니까요. 그래도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제일 무난하다 싶은데, 모르죠. 작으애와 달리 속을 좀 썩이는 
편입니다. 잊을 만하면 속 시끄러울 일을 만들곤 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더라 그래요, 직장 그만두던 무렵. 그러다 
결국 그만두고 두 달 놀고 나서 다시 직장에 들어갔어요. 지금 하는 일은 뭐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일은 못 됩니다. 어쨌든 아침이면 남들처럼 출근할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워요. 전철 속에서 부대끼는 것도 전보다는 괴롭지 않고요.
  아까 열차에서 내렸을 때, 개찰구에서 나와 잠깐 앉으려고 벤치로 갔어요. 
밤열차 그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좀 
앉으려고 비교적 멀쑥해 보이는 남자 옆에 빈자리가 많기에 거기로 갔지요. 
처음엔 그냥 열차 타고 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다가가니까, 그 
남자, 갑자기 발을 쳐들어 아, 발 아프다, 하더니 옆자리에 척 올려놓더군요. 
나를 빤히 보면서요. 할 수 없이 다른 자리에 앉았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생각하기엔, 혼자몸이니 사람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싶은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해요. 밀림, 의 법칙이겠지요. 각자의 영역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거, 
남이 들어서려 하면 목숨 걸고 싸우는 거, 저만큼씩 떨어져 앉은 채 한기를 
감당하는 거.
  춥지 않으세요? 커피 한잔 뽑아드릴까요? 아니, 아닙니다. 자판기 커피지만 
제가 대접하고 싶어서요. 이거 뜨겁지가 않군요. 많이 추우시면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시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저기 들어오는 기차를 보세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에 저런 대목이 있지 않았던가요. 네, 그런 내용인 것 같군요. 
가끔, 오래 전에 읽었던 글귀가 불쑥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런 글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요. 진공, 속에 던져졌다가 
겨우 빠져나온 기분이에요.
 이상하지요. 제가 물러나 들어앉은 집안, 그것도 세상일 텐데 왜 그리 세상 
금 밖으로 나앉았다는 느낌이 들던지. 어떤 날은 그냥 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알지 못하는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어요. 내가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고요. 웃기는 이야기지요. 그냥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할 분을 만났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머리가 세도록 부대끼던 것들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일더라고요. 그게 더 무섭지요. 그나마 작은 집 한 채라도 
장만해놓았고, 퇴직금으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는데 왜 그리 막막하던지 
안개가 빈틈없이 둘러싼 골짜기에 갇힌 것 같았어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덮어버리고 시치미 떼는 안개요. 그럴 땐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안개의 무게도 만민치 않아요.
  여자분이라서 그런 경험은 없으셨겠군요. 군대 시절, 예, 전방에서 
지냈습니다. 낮선 데로 파견나간 적이 있지요. 저녁 무렵에 낯선 곳에 
떨궈졌는데, 누가 마중 나와 있으려니 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그래 막연히 
길을 잡아 걸어갔죠. 저 산모퉁이만 지나면 뭐가 보이려니, 그러면서 한 
산모퉁이를 지나도 아무것도 안 보이고, 여전히 막막한 첩첩산중이 자꾸만 
물러날 때, 그 풍경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을 때 그럴 때의 무서움 같은 거요.
  아니오, 이런 이야기 못합니다. 회사일 집안까지 끌고 들어와 이야기하는 것, 
저희 같은 사람에겐 잘 안되는 일이더군요. 요즘 젊은 사람 보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그래서 서로 이해가 넓어지는 부분도 있다고 하더만요. 집사람도 
어떤 땐 서운해하는 것 같은데, 이야기해봤자 답답하기만 하지 뾰족한 수도 
없을 텐데 뭐 하러 하나 싶고.
  그래도 회사 그만두는 문제는 아무래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는데, 
괜히 말했다 싶더군요. 어느 날인가, 집 근처 거래처에 왔다가 집에 잠깐 
들렀는데, 집사람이 문을 열어주면서 당황한 표정이더라구요. 소파에 앉는데 
뭐가 발바닥을 찌르더군요. 보니까 구슬이에요. 소파 밑에 구슬을 가득 담은 
바구니가 있더군요. 감춘다고 감췄겠지요. 왜 여자애들 머리 묶는 구슬 방울 
있잖아요. 제 집사람, 안압이 높거든요. 눈도 약한 사람이 나 몰래 낚싯줄에 
그걸 꿰고 있었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된다고 네, 그랬겠지요. 불안해서 
그랬겟지요. 한창 돈 들어갈 때인데다 제 융통성 없는 성격을 아니까. 지금도 
제가 미8군에 다닌다는 것만 알지, 거기서 무얼 하는지는 모릅니다. 
허드렛일을 맡아 합니다. 잡역부죠. 사실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군요. 어제 퇴근할 땐 그만두겠다라고 마음먹고 나섰는데, 막상 
그만두자니 악몽 같던 실업 기간이 생각나고 멀쩡했던 친구들이 턱턱 
쓰러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일손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할 것 같고, 
마음이 영 그러네요. 네, 이 나이쯤 되니까 순서도 예고도 없이 데려가더군요.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입니다. 노인들이 흉한 일 안 보고 
싶어하는 마음, 벌써 이해가 되니까요. 언제 내 차례가 닥칠지 모른다 
싶어서겠지요.
  네, 얼마 전에 친구가 죽었어요. 고향 친구지요. 아까 말씀드린 '꿈 깨', 그 
친구요. 그 친구,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더니 숨돌릴 만하니까 
가버리더라구요. 중학교 때 그 친구 꿈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아니오. 장래 
희망 말구요. 그 친구 꿈은 자가용 타고 고향에 오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꿈이죠. 지금이야 시골길도 차로 막히니까요. 하지만 그땐 마을에 
자가용이 들어오는 것도 일이었으니까요. 그런 마을길로 자가용이 들어옵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네 집에 오는 찬가. 목을 빼고 본단 말입니다. 그럴 때, 
차가 천천히 멎고. 거기서 그 친구가 내립니다. 아니, 아무개네 아들 아니니가 
거기까지가 그 친구 꿈이었어요. 그 말을 할 때 그 친구 표정이 눈에 
선하군요. 남자치고는 눈이 큰 편이었어요. 소처럼 선량해 보였어요.
  네, 몇 해 전인가 사긴 했는데, 그땐 늦어버렸죠. 자가용이 흔해진 
뒤였거든요. 결국 그놈의 차 때문에
  교통사고였어요. 음주 운전이었죠. 사고가 나던 날 저와 통화했어요. 
미국에서 살다 온 중학교 동창생을 며칠 전에 만났다더군요. 예, 제 
동창이기도 해요. 죽은 그 친구 아버지가, 그 동창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어요. 
부농이었죠. 나중엔 그 땅 팔아 부동산 부자가 되었고. 왜 어렸을 적부터 
양지만 딛고 자라게 된 사람이 있더군요. 사람마다 살아가다 보면 거센 
계곡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만날 때가 있잖아요. 다들 바짓자락을 둥둥 
걷어올리고 휩쓸리지 않으려 애써 가누며 건너는 그런 골짜기요. 그런데 그 
동창이 건너려 하면 누군가 자기 등을 들이대어 발을 적시지 않고 급류를 
건너게 해준다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런 사람이었어요. 부모 유산 받아서 
건물 짓고 놀고먹더니, 사업한다고 미국에 가서 말아먹고 들어왔던가 봐요. 
며칠 전에 그 친구를 찾아왔기에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그날 낮에 전화가 
왔더라구요. 강남의 사우나인데 손님 접대하다 보니 돈이 모자란다고. 오십만 
원만 해다 달라더래요. 아뇨, 거절했대요. 잘했다고 그랬어요. 그냥, 말이 
그렇게 나와지더군요. 그날, 통화 끝에 술이라도 한잔 하자는데 제가 피곤해서 
다음으로 미루었거든요. 혼자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던 길이었대요. 그날, 저와 
술을 마셨으면, 어쩌면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람마다 타고난 명이며 운이라는 게 있다고 
하긴 하더군요. 기억도 못하는 전생이 그걸 좌우한다지요? 그래도 사람의 
노력으로 조금 비껴갈 수 있는 부분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거지요. 
그 친구 가고 나서 다른 친구가 웃지도 않고 말하더군요.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다같이 공증인 세워서 유언장 써두자고요. 시간이 남아돌 때라서 
한번 따져보았죠.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나,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았나, 톡톡 
털어보았더니 허망하더군요. 유언장이라고 작성할 것도 없고. 그동안 그렇게 
아등바등 산 끝이 고작 이건가 싶기도 하고. 겨우 집 한 칸과 얼마 안 든 
저금통장. 이걸 털어내고 나면, 아까 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그래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요. 사실은 저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저렇게 작은 보퉁이 하나만으로 이 생을 견딘다는 것. 생각하면 
어떤 거룩함마저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 장터에 나가면 늘 있던 
미친년, 죄송합니다, 미친 사람들처럼요. 보퉁이 하나뿐 나머지는 있는 그대로 
노출된 삶. 지붕도 담도 없이 몸에 걸친 옷만으로 한기를 감당하는 삶
  아까 대합실에서 곁에 앉아 있던 할머니, 보셨죠. 잠든 거? 머리에 쓴 
수건이 얼굴을 가려 잘 모르겠지만 칠순도 넘은 것 같더군요. 빈자리도 많은데 
왜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들었는지, 잠결에 고개가 옆으로 기울면 퍼뜩 
추스르고. 그러다 나쁜 꿈을 꾸는지 고개를 세차게 내두르는데, 때 전 
코고무신 하며 보나마나 퉁퉁 부었을 다리 하며 왜 눕지도 못하고 잠들었는지.
  이십대엔 저런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왔지요. 서른 중반을 넘어서니까 저런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데요. 왜 겨울에 남산 같은 데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오그리고 앉은 노인들, 몇 번이고 피다 끈 담배꽁초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이는 노인들, 내 앞날이 그렇게 될까봐 겁났나봐요. 참 열심히 
일했지요. 왜 눈을 가린 채, 옆에서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리는 기분 자칫 속도를 늦췄다가는 바닥 모를 
어둠 속으로 나동그라질 것 같은 기분.
  춥지 않으세요? 이제 곧 날이 밝아오긴 할 텐데. 안개가 낀 걸 보니 날이 
제법 풀렸나봅니다. 그래요. 가셔도 될 시간이군요. 가시다보면 날이 밝아올 
겁니다. 저도 내려가야겠습니다. 산에 일찍 가봤자 할 일도 없고 하니 가다가 
사우나나 하고 천천히 떠나야죠. 아까 돌아다닐 때 보아두었습니다. 불도 
켜져있고 사람도 있던데 여섯시부터라고 그때 오라더군요. 정류장은 
저쪽입니다. 멀지 않아요. 차 타시는 거 보고 가죠. 아닙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고령에 들를 일 있으시면, 읍내 뒤에 주산이라고 있는데, 거기 고분들 한번 
구경해보세요. 능선 따라 죽 고분들이 늘어서 있어요. 거기, 순장묘가 있어요. 
왕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했던 생목숨들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죠. 그 
사람들, 왕이 앓아누우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들 중의 누군가가 산 채로 
파묻혀야 하는데, 왕은 시시각각 죽어간다 말입니다. 그럴 때에요. 덩달아 묻힌 
그 사람들도 귀한 목걸이 같은 걸 하고 있었다더군요. 살아생전에 못 해봤을 
귀금속을, 목숨의 대가로 걸고 묻힌 사람들, 회사 그만두었을 때, 잠깐 
내려왔다 들른 적이 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씩 쌓아가는 것들, 직책이며 높아지는 봉급이며, 이런 것들이 순장하는 
시종들에게 걸어주는 화려한 목걸이 같은 거나 아니었나 하고요.  그런데, 
정말 저승에서 그 사람들이 왕의 시중을 다시 들었을까요? 살아생전 시중만 
들다가 죽고 나서까지 시중을 들어야 한다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거기 서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뇨. 고령 읍내는 아니고, 고령에서 백운동 들어가는 산자락이에요. 비석 
하나 없는 초라한 무덤이지만 볕 바르고 아늑한 곳이에요. 안개가 짖게 끼긴 
하지만요. 그래도 가야 쪽보다는 낫다더군요. 거긴 합천 댐이 생긴 뒤로 
안개가 자욱하다지요? 안개 낀 산 풍경, 보셨나요? 능선이고 산비탈 
밭자락이고 다 뒤덮으며 다 쓸어내리는 안개요. 자주 내려오진 않지만 어쩌다 
안개 낀 날 거기에 가면,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골짜기며 숲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능선을 넘어서면, 바로 구름이 되어 몰려가더군요. 어쩌면 제 
아버지에게 딱 알맞은 자리라는 생각도 들어요. 바람 한 자락 불면 흩어질 
안개처럼, 그렇게 살려 했던 부닝거든요. 제 아버지. 그래요. 어머니 고생 
하셨죠.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지요. 이 생이 이 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돌고 
도는 고리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고. 전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무책임한 현실 도피거나 우리를 틀어쥐고 있는 손이 강요하는 
목소리로만 여겼는데, 그렇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더군요. 그래요. 그런 
식으로라도 지난날들을 용서하며 살아내야 하는 거, 그게 사는 거겠지요. 안 
그러면 지난날의 잘못이, 못다한 일들이 우우 되살아나서 거기에 발목 잡혀 한 
발짝도 못 나가겠지요. 어찌 맨정신으로 살아나가겠어요.
  아, 길 건너지 마시고 이쪽으로요. 택시 타시게요? 지금 시간엔 길 안 
막히니 버스 타셔도 될 것 같은데요. 정류장이 저기예요. 고맙긴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제가 고맙지요.
  왜 산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사람들이 그러지 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하지만 정작 걸어보면 그 조금이 한 시간도 되고 
한나절도 되지요. 젊었을 땐 그런 식으로 가르쳐주는게 답답했었는데, 나이를 
좀더 먹으니까 그게 참 지혜로운 말 같군요. 멀든 가깝든 그곳을 물은 
사람에겐 그곳이 목적지일 테니, 조금만조금만 하면서 걷는 게 차라리, 
까마득하다고 지레 가위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허허, 지금 잠깐 든 생각입니다. 어차피 걸어야할 길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걸으라는 마음이었겠죠. 길 바깥으로 뚜이ㅓ내릴 용기도 없으면 그저, 그 길을 
끝나면 무언가 다른 풍경이 나오려니 하면서 걸을 수밖에요. 그래도 끝내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저 그랬나보다. 그러고 마는 거지요.
  아, 저기 저 버스. 앞에 서부 정류장이라고 쓰여 있네요. 네, 그러세요. 그럼 
안녕히.

      역대수상작가 최근작
    대산
  이제하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박완서
    소금 굽는 남자
  윤후명
      대산
    이제하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 조소과 수학.
  1958년 '신태양'으로 데뷔.
  주요작품 '초식' '용' '진눈깨비 결혼' '수녀 유자' '열망' 등.
  대산
  영북대 음대 강사 강금자가 지철우 화백의 혼에 감응된 사건을 두고 
로코코적 지성과 바로크적 감성의 격돌이라고 단정을 내린 인물은, 내가 
알기로는 시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혹은 다른 장소에서 또 누군가가 그 
비슷한 소리를 했을는지는 모른다. 지 화백이 고연이라는 기이한 아호를 얻기 
한참 전의 일이다.
  그런 현학적인 소리를 시작한 예의 그 '동서일보' 주필 B씨는, 그러므로 
그의 화력상의 경계가 그 부근에서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풍이 변질을 보였다는 것인데, 예의 지 화백의 '산 시리즈'에 언제 그렇게 
우아하고 센티멘틀한 그림자가 드리운 적이 었었는가고 그는 반문했다. 물론 
철우 선생이 파스텔 발색의 대가란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량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량도 중도를 일고 색이 과하면 만에 하나 
병들 수 있다는 사실을 왜 계산에 넣지 않았단 말인가. 근력이 예와 같을 줄로 
알고 일거에 산을 끌어안겠다고 덤빈 그 우매한 고집도 차질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과학적인 입증이고 자시고 육안으로만 봐도 파스텔의 수명이 얼마나 
가는가. 크레용, 크레파스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원래 초등학교 아이들의 
기초적인 감각을 위해 개발된 재료가 아니었던가. 습도니 뭐니 퇴색과 부식 
관리를 철저히 하고. 아무리 온전히 보존한다고 해봤자 백년 안팎이다. 몰라, 
드가라카는 인상파 화가가 불란서에 있긴 했지만서도 그 작자 그림도 지금ㅉ 
변색이 시작해 미술관에서는 아마 똥줄이 빠져 있을 거다. 길어야 겨우 몇 
백년 정도 가는 재료가 수백만 년 묵은 산을 정복해? 달걀이 바위를 끌어안고 
겁간을 하려 드는 꼴 아닌가. 말이 안 되는 소린기라. 산이란 뭐냐.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긴 하지만서도. 내사 마 최소한 산이 우아한기 아니란 
사실만은 만천하에 장담할 수 있다고.
 "실제로 산에 올라가서 한번 느껴보거래이. 오백미터 이하는 안 된다. 해발 
오백 미터 이하는 언덕이지. 그거 산이 앙이다. 잘 봐줘야 동산이고. 
지리산이고 치악산이고 그 이상을 한번 올라가 봐라. 몇 십번이고 올라가서 
한번 느껴보래이. 기분이야 좋다카지만서도 그 좋은 기분이 우아하단 말인가? 
우아하다는 거는 색깔이 곱든가 자태가 아름다워 기품이 쪼곰 있다는 소리 
앙이가. 하지만 산을 두고 아무리 아름답다 기품이 있다 해싸도 그거는 그런 
소리하고는 내용이 달라. 천양지판인기라. 얼마 안 남은 근력 웬 공룡알 같은 
여자한테 다 빨리고 인제는 산이 우아하다고 해싸니. 내 참"
 "금자는 자네도 침을 흘렸잖아?"
  식은 커피잔을 앞에 놓고 검정 두루마기 차림으로 마주앉아 반쯤 졸고 있던 
시인 허수돈이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열에 뜬 
눈으로 시인을 한번 바라보고, B씨는 로코코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상이점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로코코적 지성의 강금자와 바로크적 감성의 
지 화백이 어째서 물과 기름처럼 겉돌면서 화조를 변질시키고 말았는지를 
재삼 역서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요약하면 강금자 이후 지 화백의 '산 
시리즈'를 폄하하는 소리였는데 5개 국어를 한다는 소문으로 그녀를 지성 
운운하는 것은 어떨지 몰라도, 바로크적 감성에다 철우 선생을 연관시킨 
처사는 아무래도 근거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은 지 화백의 땅딸막한 키를 
빗댄 소리였을지 모른다. B씨가 건축학을 전공했다거나 미학과 출신이라는 
풍문을 들은 바도 없어 나는 긴가민가 묵묵히 듣고만 있었어나, 이때WEma 
시인은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간밤에 어디서 코가 비뚤어지게 퍼마셨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구두 한 짝이 없다

  그런 시구를 근자에 발표했던 것이다.
  B씨가 드디어 일반론으로 들어가더니 남녀간의 정욕과 그 정욕이 예술에 
미치는 차질을 역설하기 시작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언제쯤서부터 삿대질이 거기 가세했는지는 정확치가 않다. 자신의 
해박을 유일하게 경청해줄 줄 알았던 상대가 뜻밖에도 졸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더욱 결이 나 삿대질의 횟수가 맹렬해졌을 수도 있다. 뒤에 밝혀진 
바로는, 비몽사몽간을 해매던 시인에게 그 간단없이 오르내리는 손가락은 
영락없이 외상 술값 갚으라는 아귀의 채근으로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 순간 
시인의 입으로 끌려들어가 물어 뜯긴 손가락에서는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피가 낭자했고, 뒤로 넘어져 고소를 하겠다고 펄펄 뛰던 그 B씨가 다음날 
실제로 법원까지 달려갔다는 후문도 있었다.
  이상이 세칭 저 '전원 다방 단지 사건'의 전말이다. 때로 아연할 지경의 
황당하고 싱거운 기사가 예사로 오르내리는 '동서일보'의 가십란 같은 데조차 
일절 언급이 없이 지나갔던 사건이긴 하지만, 이날 밤의 그 소동은 어떤 
의미로건 내게는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국면처럼 여겨졌다. 지지리 
사방이 막혀 희망이 있을 리 없는 한 소도시의 회화적이고도 상징적인 
국면이라는 점에서도 그랬고, 그런 삭막한 공간에서 그나마 사랑을 받던 한 
예술가도 예외 없이 어느 분기점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구나, 하는 몽롱한 
자각의 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지 화백의 '산'을 의심하는 소리가 처음으로 
발설됐던 것이다.
  '산이 왜 저리 밋밋해?'라든가, '기백이 약하군. 이 산은 별로야'라든가, 
전람회장 모서리에서 이따금 은밀히 속삭여져 오던 애호가들의 그 수많은 
비판에 비하면 하긴 이런 사태는 약과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B씨의 
그런 폄하란 것도 강금자라는 한 여인이 끼여들면서 일어난 질시와 착종의 
횡성수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구 15만 남짓의 오갈 데 없는 도시에서 
치레로나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방면으로 눈을 돌리고 소위 그 지방 
문화란 것의 공론 구실을 자처해온 유일한 언론이 '동아일보'이고, 지 화백의 
오늘을 계속 뒤쫓아온 것이 그 신문이며, 남의 눈에야 해괴해 보이건 말건 
B씨가 수년래 차고 앉아 있는 편집국장 겸 주필이란 그 도그마적 위치가 
앞으로 다시 수년간은 요지부동이라는 사실과,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근래 장난처럼 경영권이 넘어간 신문의 실질적인 주인이 군사 정권 
경호책임자 아무개며 그와는 먼 인척뻘이 된다는 자각에까지 이르자, 기미쩍은 
예감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금자의 J시 출현은, 지 화백이 단짝과 함께 해방 이듬해 상해에서 인근 
M항으로 귀국하던 때의 모습만큼이나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다. 철우 선생의 
그 단짝은 주헨리) 씨로, 물론 그들이 귀국했을 때의 정경을 직접 본 사람이 
없어 와전되는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키가 팔 척에 헨리 밀러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얼굴을 하고 짐이라고는 멘델스존의 에스피 디스크 한 장을 달랑 
손에 든 헨리 씨와, 그 절반이 약간 넘는 키로 곱슬머리와 노란 륙색에 
키보다도 긴 노르웨이제 스키 한 쌍을 비끄러맨 채 던힐 파이프를 꼬나든 지 
화백의 모습은, 아닌게아니라 기름 범벅의 선창에서는 특히 두드러지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두드러진다는 소리가 유독 튄다는 뜻이라면, 강금자의 첫 
모습에도 역시 유사한 데가 있다. 그보다도 중앙지의 정치 면을 다음날 다시 
고스란히 그대로 베껴서 찍어내야 하는 신문이 그나마 하나밖에 없는 이런 
도시는, 어딘지 낯이 익지 않은 사람을 도대체 용납하는 법이란 없다. 아무리 
태연자약한 행동거지로 천연덕스런 얼굴을 하고서 몰래 스며들더라도, 이 
주변머리 없는 도시는 일거에 숨을 죽이고 키를 낮추면서 곧바로 이방인을 
들통내버린다. 더구나 하이 소프라노에 라나 터너를 닮은 얼굴을 하고서 5개 
국어까지 구사하는 여자임에랴.
  그녀의 유창한 5개 국어 구사를 지켜본 사람은 실로 아무도 없다. 그해 
초가을이었던가. '강금자 솔로 페스티벌'이란 이상한 제목의 공연 포스터가 
갑자기 거리 여기저기에 나붙어 구경들이나 갔을 뿐이다. 그 공연 레퍼토리로 
나온 네댓 나라 오페라의 유명 아리아들을 그녀가 요상한 원어로 불러젖혔기 
때문에 설마 그런 유언비어가 나돈 것은 아니겠지만, 페스티벌을 주선한 것이 
포스터에 찍힌 대로 '동서 일보'였다면 그런 발설의 진원지가 B씨였을 수도 
있다. 혹은 어떻게 우연히 B씨만이 운 좋게 그녀의 5개 국어 구사 현장을 
접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강금자는 B씨가 제일 먼저 발견했던 것이다.
  단 하루 한 번뿐인 공연에 서른 명도 안 되는 청중을 앞에 놓고 핼쑥한 
표정으로 무대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클래식이 대세가 아닌 
시대에 더구나 그것과는 아무리 인연이 먼 지방 도시라고는 하나, 진작부터 
내려와 은거하면서 은근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 두 명 인근 출신 원로 
작곡가라든가, 여남은 개가 되는 중고교의 지나치게 열성적인 음악 교육이나 
거기 따른 피아노 레슨 붐이라든가, 티브이의 지방 채널에 이따금 얼굴들을 
내밀면서 폼을 잡는 주부 동호회라든가. 아직은 바닥이 든든한 그런 보수적 
풍토 같은 것을 감안하면 어쨌든 그녀의 J시에서의 공연 참패는 특별한 
이변이라고 할밖에는 없다. 더구나 공연 참패는 특별한 이변이라고 할밖에는 
없다. 더구나 공연 팸플릿에도 나와 잇던 그 화려한 무대 경력을 절반 정도나 
감안한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고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늦가을 어느 날 밤, 천부의 목소리를 
앞세우고 그녀는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시민들은, 해발 오백 미터가 안 되는 인근 야산 
어디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미미의 노래'를 들었다. 차량들이나 거리의 
잡답이 아니었다면 그 노랫소리는 아마 15만 시민이 똑같이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누가 그러는지 짐작이 가지도 않는 오밤중이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페부라도 찢어발길 듯이 그만큼 높고 날카로웠다. 어떤 사람은 그 고음의 
영역과 성량을 릴리 폰스에 비교하고. 어떤 이는 스테인리스나 무슨 특이한 
금속의 지속적인 절단음에 그것을 비교했다. 귀신 울음과 흡사하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다. '오, 그대였던가'든 '하바네라'든 혹은 '라 트라비아타'든 닥치는 
대로 그녀는 목청을 뽑았다. 오페라 아리아 아니면 까다로운 예술 가곡들이 
주종인 그 심야 독창회는 오늘은 동쪽 동산에서, 하루 걸러 다음 날은 서쪽 
언덕에서 하는 식으로 보름이나 계속이 됐다. 가슴 바닥에서 미어지듯 끓어 
올라오는 혼의 목소리에 지 화백이나 B씨가 아무리 둔감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그 괴이한 사태가 전하는 메시지가 '이래도 날 못 알아주오'쯤 
된다는 것은 감이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B씨가 어둠 속의 강금자한테서 
로코코적 지성이나 그런 건축양식을 보았다면 지 화백은 우아한 색채를 
보았다는 것이 다른 점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 특별 공연이 끝나 드디어 언덕에서 내려온 강금자가 소위 저 문화 
중산층에 해당되는 보통 사람들과 멀쩡하게 잘 어울려 들면서 그렇고 그런 
일상적 얼굴로 변하고 있을 때, 그녀의 이혼 사유가 풍문으로 알려졌다. 
그녀와는 달리 팝 뮤지션인 남편은 대구 어느 관광 호텔의 베이스 기타 
주자였는데, 어느 날 세탁물 주머니에서 대마초 잎이 나와 지검에 밀고를 
당했던 것이다. 저녁 공연 준비를 하느라 나이트 바에서 현을 퉁기고 잇던 
남편은 그녀가 대도하고 온 검찰에 바로 연행됐다. 그것은 3년 전의 일로, 한 
해 남짓 남편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제풀에 이혼 문제가 결판나고 그 여파로 
음대 강사 자리도 흐지부지 돼버렸던 모양이다. 세상에, 대마초 이파리 하나 
나왔다고 남편을 찌르고 손수 감옥으로 끌고가? 무슨 여자가 그리 몰상식하고 
비도덕적이고 사납지? 하는 생각은, 풍문을 들었을 때 우리가 느낀 공통의 
감정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틈바구니에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었다. 저간의 세부 사정이야 가늠할 길이 없지만 그녀가 지 화백의 
혼에 감응한 것이 분명 그 어간의 일이고, 모르긴 해도 '그 무엇'이 아마 
틀림없이 그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아무튼 그녀와 지 화백 접혼은 굉장했다. 중앙통 네거리에 있던 파초장 삼층 
객실에서 한밤중에 울부짖고 격투하는 소리가 터져나와 이웃 사람들이 구경 
삼아 몰려나왔을 정도다. 창문 두 짝이 베개에 맞아 떨어져 깨지고 그리로 
킬킬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모습에 보였다. 한겨울인데도 두 사람은 
벌거벗은 상체들을 개의치 않았다. 뒤에 세세하게 풍문으로 전해지진 바로는, 
며칠분의 수육과 술과 음식들을 미리 배달시키고 외부인에게 그 앙앙불락하는 
하체들이 눈에 띄건 말건 상관조차 않았다고 한다. 먼 빛으로도 눈 밑의 
시커먼 기미들이 확인될 정도로 두 사람은 사흘 동안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맞수의 남녀가 벗은 몸에 기름칠을 하고 대결에 임하는 장면 같은 
것은 나도 어느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지만, 두 사람의 투혼은 그런 성격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홀연히 둘 다 시에서 사라져버렸는데, 
애비와 딸뻘이나 되는 어른들이 남사시럽게 이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다, 내 
이놈의 영감탱이 목을 뿐질러놓아야 분통이 풀릴끼다고 떠들며 예의 신문사 
주필이 유독 열성스럽게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닌 일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석 달 전 대구 폭동으로 죽은 빨갱이다. 군사 
정권 앞잡이야. 다음에 한판 붙자.

  사라지기 전 그녀가 남긴 이상한 쪽지 때문에 B씨가 그토록 열불을 냈다는 
유언비어도 잇지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보다는 지난 가을 공연 비용 
문제가 해결이 나지 않아 그 같은 소동이 일어났다는 풍문이 훨씬 신빙성이 
있다. 어쨌든 그러고 두어 달여도 더 지난 춘삼월 무렵에서야 무심한 얼굴로 
철우 선생은 홀로 J시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의례적인 인사인 듯이 
그 열한번째 '澈宇의 山-新春展'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동서일보'를 장식하고 
있었다.

  철우 선생이 언제부터 산에 집착하기 시작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 있지 
않다. 그러나 언제부터 산을 그리기 시작했느냐고 할 때는, '54년에 있었던 첫 
관람회 때의 빈한한 카탈로그와 '81년에 상재된 최근자의 회고전 화집이 그 
좋은 증빙 자료가 된다. 그 자료들은 동란 이태 전부터 형상을 이루며서 
줄기차게 모여들기 시작한 산들이 도도한 수백의 봉우리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화백의 내심 깊은 곳에서 그 동안 수없이 솟아났다 
가뭇없이 사라져갔을 영묘한 봉우리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벌써 기만을 
넘어섰으리라는 추측도 어렵지가 않다. 집착이 있었기에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시체말로 '거기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소리는, 동기의 목적이 
맞물리는 조화를 가장 절묘하게 표현한 방법이 잠언이지 모른다. 어느 정도나 
되는 정신의 높이가 그 소리에 스며 있는지는 알 바 아니나, 평생을 
그것밖에는 그리지 않은 지 ㅎ개의 '산'에 예의 그 조화와 생동감, 혹은 소위 
그 생명력이란 것이 조금이라도 깃들여 있지 않은 경우를 나는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애매하고 사심 없는 독단에마저 '보는 이 나름으로 
눈에 안 띄는 미미한 저항감을 일으키면서'라는 단서가 붙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오른다'와 '그린다'가 한통속이란 것을 새삼 따질 한가한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도시락이라도 싸들고 요행히 주말이건 월말이건 자주 산을 
만나는 이들은, 그 초입에 발을 디딜 때 저도 모르게 마음이 그리는 그림을 
내려왔을 때의 그 산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지 않는다. 
실제감이라든가 시공간상의 미미한 차이라든가 그 밖의 그 모든 작은 
현혹들은 실은 모두가 마음의 문제일 것이다.
  중구난방으로나마 이미 B주필도 지적했듯이, 그럼에도 감히 또다시 
단언하건대. 사람들이 철우 선생의 '산'에서 느꼈을 그 조화와 생명감이란 
것도 사실은 적절하게 절제된 색감의 호흡에서 주로 기인하고 있었던 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당신이 택한 파스텔이란 재료의 유한한 숙명이기도 하다. 
문외한의 얕은 소견일지는 모른다. 형태라든가 구두라든가 혹은 필세나 질감 
따위, 물론 그 밖에도 중대하고 미묘한 여러 요소가 보는 이들의 심미안과 그 
촉수에 필연적으로 작용하고는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다른 요소들은 
해괴하게도 어쩐지 사소한 자격지심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지배적이다. 이 무슨 자격지심일까. 나는 철우 선생의 산의 세계를 보다 
세밀하게 따지려거나 그 왜곡 부분을 바로잡아 기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철우 선생과 사람들 사이의 그 불가해할 정도의 아연스러움이나 
질투가 느껴질 정도의 친숙함이 어째서 종내는 불길한 우려로 남곤했는지, 그 
까닭을 가늠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대. 사람들은 '산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지 화백을 찾았던 것이다.
  어찌 된 셈인지 J시에는 사방 오십여 이를 나가도 산다운 산이 없었다. 
B씨의 언급대로 오백 미터가 아니라, 해발 삼백 미터에도 못 미치는 몇 개의 
야산과 둔덕들은 그러므로 여기서는 언외의 일이다. 곡창지대 한복판의 
시민들은 진짜 산을 원했다. 그것도 철따라 운무뇌우를 거느리고 다채롭게 
변색하는 높고 우람한 산을,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지 
화백의 천업에, 이 눈에 띄지 않는 시민들의 염원이 어느 정도나 동기로써 
간여했는지는 짐작할 바가 아니다.

  여름철은 에메랄드 그린으로, 조락철에는 서서히 브라운 계통으로.
  철우 선생이 그들의 염원을 최소한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그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단순소박한 하나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간을 
모은 애호가도 몇 사람쯤은 있었을지 모른다. 상식도 못 되는 이 평범한 
법칙의 오의를 깨듣고 그들은 해탈의 기쁨을 은밀히 맛보기도 했으리라. 
당신이 화폭에 발현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 그루의 수목들, 철마다 거기 
매달리는 수많은 열매들, 굽이치고 휘도는 능선이 찾아들며 골을 이루고 있고 
그 깊고 절묘한 계곡마다에서 사랑 올라오는 싱싱한 몰소기 같은 것은, 엄밀히 
그들의 것이었다고 할밖에는 없다. 하지만 선택이라도 받은 듯한 이 극소수의 
사람들이라면 무엇이었겠는가, 그림을 떠드는 사람들, 혜안과 심미안을 
자처하는 사람들, 상충하는 공간의 접점에다 아름다움의 근원을 매기는 
사람들, 곪아터진 열사의 갈피에나 진실을 우겨넣는 위인들, 비평가들, 사가들, 
따지는 선생들 철우 선생은 그들을 위해서 '산'을 그리지는 않았다. 당신은 
이를테면 그들이 특권층에 불과하고, 화포에서 흐르는 땀이나 피와도 아무 
상관이 없으며, 종당에는 화가의 숨통이 끊어지기나 집요하게 기다리는 
철면피들이란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던 듯하다. 
그리고 오직 그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당신은 그림을 그렸다. 그냥 관객들, 
아이들, 전람회는 으레 보아야 하는 것이라 여기고 쭈뼛쭈뼛 문화회관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그 보통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진실된 사람들, 
말하자면 대중들.
  다시 말하면 철우 선생이 그린 그 수많은 '산'들은 당신이 건강하게 숨을 쉴 
동안은 그들과 함께 의연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겹쳐감에 따라 당신의 
그 '산'도 차츰 그들처럼 호흡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건실한 화가에게서라면 당연히 일어나야 할 증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륜이 더해감에 따라 그 세계가 더욱 원숙해졌다느니, 
천의무봉으로 정신이 활달해졌다느니, 귀기가 서릴 정도로 기량이 다양하고 
오묘해졌다느니 그 따위 소리를 도대체 나는 믿어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어느 
정도 연륜의 한계까지이다. 그 이후에도 그렇다고 하는 것은 비평가들의 
겸손에 찬 야유거나, 세상의 낯뜨거운 연민 아니면 그 말미의 예우에 
불과하다. 김밥에는 단무지 곁들임이 제격의 반찬이라고 못을 박아놓은 세상의 
저 고정관념과 익살과 지혜를 보라. 화가는 자신의 테크닉을 또렷이 의식했을 
때 결단성 있게 붓을 꺾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종당에는 자기 발로 자신을 
차는 사캐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침을 밭는 격이란 말이다.
  그러나 철우 선생은 근원적으로 어딘가 달랐다. 예순을 넘어서자 
줄어들기는커녕 말 뒷발굽처럼 확실하게 박차를 더해가는 듯한 그 근력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동그랗게 미어진 배꼽 위에 도시락을 잡아매고 
일본의 가고시마라든가에서 삼십여 리나 상거한 어느 섬까지 배영을 해 
갔는데 당도하고 보니 도시락에 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더라는 식의, 당신이 
노상 거느리고 다니던 그런 기이한 몇몇 에피소드나 허풍기 같은 것이 말끔히 
가시고, 어딘가 정색을 한 듯한 그 얼굴의 근엄함을 두고 이르는 소리도 물론 
아니다. 그리는 일이 생업이라면 거기 합당한 답례가 있어야 천직이 된다는, 
일견 아무것도 아닌 인식에까지 드디어 당신은 도달해 있었던 듯하다.
  철우의 '산'은 누가 보러오는가, 물론 시민들이다.
  철우의 '산'은 누가 가져가는가, 시의 유지들이다.
  시민들은 그림을 사겠다는 배짱도 돈도 처음부터 없었다. 시의 유지들은 더 
높고 험한 산을 원했다.  특별히 고려된 닥종이나 색지 아니면 전주한지로 
고아하게 접어진 봉투에 정중히 몸을 눕힌 카탈로그를 받고, 어느 산자락으로 
마지못한 나들이라도 오듯이 시의 유지들이 인사차 나타나면 지 화백의 
얼굴은 근엄하게 무료하고 근엄하게 무심한 그런 것으로 돌아간다.
 "조오습니다."
  열 명이 오고 스무 명이 낯짝을 내밀어 봤자, 유지들의 인사는 한결 같다.
  어디가 좋으냐고 지 화백은 그렇게는 묻지 않는다. 이 값을 도리 없는 
사람들은 피카소를 추상화가쯤으로 아직도 여기고, 그림값은 어마어마하더라도 
이중섭은 색골이라고 알고 있다. 말문을 열어주었다가는 무슨 해괴한 소리가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어떤 게 그렇게 보여?"
  산을 두고., 이보다 더 확실하고 단호한 지칭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떤 산은 
골이 깊고, 어떤 산은 홍엽이 인상적이다. 어떤 산에서는 꿩이 푸득이며 
날아오를 것도 같고 어떤 산은 멧돼지가 수풀 뒤에 숨어 있는 것도 같다. 
유지는 숨을 들이마시고 배에 힘을 넣으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웬일로 풀이 꺾이면서 유지가 고분고분해지는 경우라도, 화백의 무심하고 
헛헛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고객은 마지못해 주뼛거리면서 한 액자 
앞으로 다가간다. 철우 선생이 짬을 두고 그 뒤에 대어 선다.
 '이것이 좋아 보이는데' 하는 소리가 어쩌다 나오기라도 하면, 철우 선생은 
그제야 은밀한 해방감을 본인에게 되돌린다. 그 부근에서는 무슨 소리가 
나와도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하마나 기린을 맞닥뜨린 것처럼 유지는 갑자기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신의 탁견과 심미안을 횡설수설 
늘어놓기 시작하고, 화백은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머금는다.
 "가져가, 그냥"
  몇 살이나 터울이 져서 그럴 만한 처지가 아니라도 상대에게 철우 선생이 
방만한 경어를 함부로 쓰는 예를 본 적이 없다. 유가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한테 붙잡혀 언젠가 희귀하게도 그런 시비를 당하고 정중한 사과를 올려 
본 결과, 손댈 도리 없이 더 비굴한 혼란에 사대가 빠져 당신이 이만저만한 
난처를 겪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다.
  유지가 손으로 지적한 그 만산홍엽은, 어김없이 내심으로 당신이 점찍어 
놓았던 바로 그것이다.
  전람회가 끝나 열흘이고 보름이고 여유를 준 날짜가 지나도록 포장해 
보냈던 그림의 값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두고두고 비축해 두었던 당신의 
근력이 발동을 시작한다. 예의 한지에 장중하게 갈겨쓴 붓글씨와 낙관의 항의 
서신이 가고,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대취한 당신의 분노가 그제야 폭발한다.
  '산'을 기리는 고객이라고 해봤자 상공회의 소장이라든가 농협 조합장, 
신문사의 논설위원, 경찰서장, 아니면 중고 교장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값이래야 고작 몇 십만 원 안팎이다. 당신의 근력을 당할 인물이 
주변에 아무도 업다는 것은 도 경계 너머까지 이미 퍼져 있는 구문이어서, 그 
불손한 구매자의 집은 그날로 경찰서건 파출소건 담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박살난다. 처음 유지들은 이런 지 화백을 오히려 애써 귀엽게 여기는 
눈치들이어서, 벌벌 떠는 시늉까지 했다. 그들의 신축 가옥 내실이거나 탁 
트인 아파트 거실 벽에 한두 점씩 걸려 낙조에 물들고 있던 당신의 '산'들의 
그 창창한 면면들이 그 증좌이리라. 그 산들이 마약 우줄우줄 액자 밖으로 
정말로 걸어나와 줄이라도 늘어섰더라면 그들은 또 어떤 반응들을 보였을까. 
열 손가락 이상으로 헤어야 할 '시리즈展'의 중반 무렵까지도, 어딘가 
석연찮은 기미가 나타나기는 했어도 그들과 당신의 그런 관계는 무난하고 
견딜 만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마다 서너 점씩이나 남아돌 
지경으로 '산'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떠맡아놓고 
한번쯤이나 눈을 주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한들, 산이 고객에게 등을 돌리는 
법이란 없다.
  그림값을 받아내면 당신은 그 이반하는 감정의 울혈을 추스르기 위해서러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작업실을 비웠다. 지 화백이 실제의 산을 만나는 때가 
아마 그런 기간이었을 것이다. 지리산이고 해남이고, 충청도의 무슨 골짜기고 
강원도의 어느 봉우리고, 당신이 직접 토파가지 않은 산들이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철우 선생의 그 '산'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냥 '산'이었을 뿐이다. 
일련 번호도 그림을 설명하는 어떤 덜 떨어진 제목도 당신은 거기 달지 
않았다. 실제의 설악산도 백운대도 엄연히 그 산들 속에 있기는 했으나, 어느 
발붙일 데 없는 일각을 그렸거나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그 뒤를 그린 듯이 
낯이 익으면서 한편으로는 또 생소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엄격히 그냥 
'환상의 산'들이었다고 할밖에 없다. 골의 깊음과 등마루의 중량감 같은, 
더듬는 기억만으로는 화판에 나타나지 않는다. 혹은 엇갈리는 비탈과 저마다 
같을 수가 없는 수엽들의 해조는, 더구나 착실한 모사 없이는 이루어지지도 
안는다. 당신이 평생이 걸쳐 산만을 득의롭게 내세운 까닭도, 본인이야 우정 
부정할지 모르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 자신만만한 기량의 자유로움에 기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달리는 동물의 다리에 필세가 이르고 그 손놀림의 절도가 베틀의 북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붓을 잡고 제 이름을 쓴다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그런 
무명, 무제, 그냥 '산'으로 일관하려는 당신의 그 고집도, 실은 이 기초적인 
정지의 자신감이나 소신에서 출발했으리라. 당신은 그런 자유로음이 그제야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경의 실사를 골백번 해봐야 대상은 노상 거기 
머물러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순간순간 마모하는 
유한한 실체만을 수퉁맞게 언제까지나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젊은 산주름, 
노숙한 산세의 웅휘한 법칙 같은 것은 어쨌거나 개인의 심상이 쥐어자듯 그 
속에서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편이 사실은훨씬 실경에 가깝다
  산이 무언지 알 리가 없는 무리들은 그것을 유린하고, 진실로 산을 믿고 
사랑하면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은 고개나 떨구고 있다. 그 떨구어졌던 
고개들이 들리고 구경이나 하는 것이 산이 아니라, 거기 다가가 사버릴 수도 
있는 것이 산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한 무렵을 당신은 
어렴풋이나마 인지라도 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그림값이 더 낮춰지고 이번에는 경찰서장이 아니라, 변두리 중학교의 어느 
여선생 하나가 '색감 좋은데요.' 하면서 우물우물 액자 앞으로 다가서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철우 선생은 예의 무연한 얼굴로 회관 바닥을 내려본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얼마예요?"
 "십오만 원이지., 아마?"
 "이만 원만 깎아요 십삼만 원에 안 돼요?"
  지 화백은 이쪽을 한번 돌아보더니, 그제야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뭐"
  그 비슷한 정경은 그 뒤 심심찮게 눈에 띄어왔다.
 "이번에는 꼭 다섯 점만을 넣었거든. 가져갈 만한 것으루 말야 그런데 어떻게 
귀신같이들 알고 그것만을 가져가
  새로 생긴 다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쪽에 대고, 파이프 필트용의 작은 
가죽 지갑을 안주머니에서 꺼내면서 지 화백은 생전 본 적이 없는 득의만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거둡되면서 '가져가가기 위한 것'과 '남기 위한 것'의 비율이 
요량 없이 동요하고 급기야 그것은 '팔기 ㄱ한 것'과 '팔지 못할 종류'로 
지칭까지 바뀌었다. 시의 번화가 어디쯤에도 모양새를 갖춘 화랑들이 한둘 
생겨나고, 주먹들을 쥔 아이들의 떼거리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틀리에라기보다 아지트라고나 해야 할 지 화백의 거처 겸 작업실은 
M항과 J시 사이, 선창 쪽 개펄이 꼬리를 흐지부지 감추는 그 어니 부근에 
있었다. 단 한 번 숙취를 빌미로 거기 이끌려간 기억밖에 없어 어느 
부근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폐창을 개조한 그런 데였을 것이다. 거처 
보여주기를 극도로 꺼린 화가는 철우 선생이 처음이 아니다. 어떤 화가는 
마다해도 내부 사정 관람을 강요하는 반면, 어떤 화가는 수제자한테도 구두를 
감춘다.
  구멍 뚫리고 썰렁한 건물의 한쪽을 차단해 목제를 두르고, 여남은 평 남짓 
견고하게 사방을 둘러친 그 공간 속의 분위기는, 그러나 의외로 단출하고 
화려했다. 방 하나에서 모든 것을 치른다는 식으로, 한쪽 벽 모서리에 세워져 
이것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나 싶던 예의 그 퇴색한 노르웨이제 스키 외에도 
수십 종류나 됨직한 갖가지 빈 술병이 어느 귀퉁이엔가 골동장처럼 오밀조밀 
정리돼 있어 그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드보드를 사용해 그림에 효과를 본 
것은 박수근 根)이 효지가 아니겠지만, 마티엘을 따질 때는 파스텔에서도 
그보다 더 제격인 재료가 없다. 그런 하드보드가 여기저기 잘라져 흩어져 
있었다. '산'들은 거기 없었다. 그리다 중단한 것들, 완성된 것들이 예닐곱 
점도 넘게 벽 여기저기를 장식은 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바깥에 나왔을 때의 
그 '산'들과 닮지도 않았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이 몽롱한 느낌은 어쩐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몇 백년도 못 가는 재료의 수명을 처음부터 받아들이고, 그 화려하면서도 
담백한 파스텔의 물기 없는 색감이 보는 이의 마음에만 오로지 늘어붙어 
견디기를 당신은 바랐을지도 모른다.
  좋은 음식과 좋은 여자와 좋은 그림-평생을 그 세 가지 덕목에 
주력했다고는 하나, 세간의 당신에 대한 그런 중평은 도대체 어이없고 비속한 
것이다. 그럴 양이면 어느 영웅 열녀에게서도 비슷한 근거는 끌어낼 수가 
있다. 일상적으로 이성과 음식을 옆에 두고 누워서 떡 먹듯이 열락에 빠져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를테면 그런 덕목들과 화력상의 주기라는 상관관계가 
이해되고 납득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강금자 사건을 끝으로, 
이른바 여자에 대한 당신의 그 덕목은 그것으로 완전히 연이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의 어떤 그런 기미나 소문을 접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보다 십여 년도 더 전 이곳에 티브이 지국이 생겼을 때, 무슨 방송의 
아나운서를 한 번 보고 거의 강제로 데려와 아내로 삼아버렸다는 소문이나, 그 
여인이 어디에선가 아들을 키우며 아직도 살고 있다는 그런 소문 같은 것도 
이쪽이 추급할 바가 못 된다. 더구나 상해 시절에 같이 산 폴란드 여인의 
일화라든가 주헨리 씨도 같이 출강한 그쪽 무슨 공예과 대학의 그런 이력 
같은 것은 그야말로 전설이거나 세월 저편의 것들이다.
  에스피 디스크 한 장이 전재산이었던 그 주헨리 씨는, 그렇게 이 땅에 
돌아온 이래 일흔의 그 나머지 여상을 J시에서만 지내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거름 때쯤이면 동호인들의 명곡 감상 모임 같은 데서 어줍잖은 해설이라도 
끝났는지 시금치 다발을 한쪽 손에 묶어 든 채, 단칸방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곧잘 눈에 띄고곤 했다. 헨리 밀러를 빼닮았다고는 했지만, 그야말로 
그는 색과는 상관없는 생애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 근거와 소문이 사실일진대, 
한 남자가 일흔이 넘어서도 총각을 임종을 맞는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귀국 때 선창에서 그때까지 여로가 같았던 일본 여인 하나를 
본국으로 더나보내고, 그 이후 몇 달을 짬짬이 부두에 나가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헨리 씨의 그런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앙리 주, 혹은 헨리 
주로도 불리던 이 인물은 지철우 화백 외에도 그림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더 깊이 각인이 되어 있으리라 믿어진다. 예의 음악 
해설 외에 지방 대학 출강도 어쩌다 했으나 몇 안 되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주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걸로 알고 있다. 냉전 체제 때의 적국어를 
배우려는 아이들이 그래도 한둘이나마 있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만 들린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더 바싹 그는 키를 줄인 셈이다.
  그리고 '산' 외에 아직도 끄트머리가 남아 있던 그 '좋은 음식' 덕목은, 
당신에게는 도대체 필요도 없고 소용에도 닿지 않았던 아호 '고연'을 얻은 
내력과도 바로 직결돼 있어 새삼스러운 바가 있다.
  어디서 얻었는지 희귀한 술 한 병을 내보이고 철우 선생은 죽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하는 기세로, 단짝에게 그것을 맛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럴 
양이면 보여주지나 말지 싶어, 헨리 씨는 또 달포 여를 두고 내색을 마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주당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환장할 지경으로 
헨리 씨는 결이 올랐고, 그것은 또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경색으로 번지면서 
급기야 의절의 국면으로까지 치달았던 모양이다.
 "고얀 놈 고얀 놈 고얀 놈"
  차이코프스키의 해설 도중에 넋 나간 듯이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헨리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런 혼자 소리는 한동안 헨리 
씨의 입에 그대로 붙어버렸다. 줄어들고 있는 술의 양감을 따라 그 소리의 
빈도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 전언이 지 화백의 귀에 안 들어갔을 리가 없다. 
친구를 잃든가 아니면 술맛을 반감시키든가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궁지에 
철우선생은 몰렸다. 그래서 아호를 그렇게 짓고 만 것이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표면적인 사정들은 그랬지만, 여기에도 심상찮은 뭔가가 있었다. 
감옥에서의 친구가 밖에 나와서도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따위 문제나, 
고흐적인 성격과 고갱적인 성격의 위화는 과연 필연적인 위화 환계인가 하는 
식의 해명으로는 씨도 안 먹힐 그 무엇이다. 그리고는 한시름 놓은 듯 둘 
사이가 의절됐다.
  그 의절은 단짝이 작고했을 때야 매듭이 풀렸다.
  당신밖에는 그렇게 해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장례를 맡아 
치르고 수습을 서두르고 예의 삼백 미터도 못 되는 야산 일각에 친구의 뼈를 
뿌리고, 지 화백은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아마도 그 무렵쯤에서야 당신은 몸과 마음이 온전히 분리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무릅쓰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산과 그렇지 않은 산을 엄격하게 
구분짓기 시작하지 않았었나 싶다.
 "이번엔 잘 봐야 돼 진짜가 반드시 서너 점은 있으니까."
  열 몇 번째의 '시리즈' 때부터였든가, 당신은 공공연한 그런 소리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심 없는 웃음과 함께 그것도 고객의 어깨를 툭툭 
쳐주기까지 하면서.
  기이한 탈속이었다. 당신의 작은 키는 어쩐지 소슬한 풍모르 변하면서 
생기에 넘치고, 표정은 부드러워지고, 뺨은 분홍빛을 띠었다. 한 겨울에도 전혀 
내의를 입지 않고 지내게 되었으며 때로 방만하게 터뜨리는 너털웃음에서도 
마음을 온전히 털어버린 대가의 면모 같은 것이 스며나왔다. 거기 압도도 당해 
보지 않고 도대체 누가 그 많은 당신의 헐값의 '산'들을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그제야 지 화백이 파스텔이란 여의치 않은 재료로 수천 
장의 산을, 그리고 수만 개의 봉우리를 만들어낸 지방 원로의 하나란 것을 
눈치채고, 때로 외경스런 눈길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내 이번엔 꼭 한 점만 낼 테야. 진짜를 꼭 한 점만 말이지 여태 그린 놈들이 
다 합쳐져도 못 따라갈 그런 진짜 나머지 거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맘대로들 
하라지."
  '81년의 그 회고전 얼마 전에, 자비로 만드는 화집의 편집을 거들면서 
들었던 소리가 새삼스럽다. 성성한 백발을 어깨 너머로 기울이고 마치 절대로 
오를 수 없는 피안의 산과 절대로 이해할 길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벽 
한쪽에다 무연히 눈길을 주면서, 당신은 거듭 그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목욕 재계하고 정좌하고 심지를 모으고, 다가갔다 쫓겨나고 다시 내침을 
당하고, 개펄에 엎들고, 토하고, 새로 피를 말리고, 열흘리고 보름이고 잠마저 
앗기는 그 절치부심의 산고를 일일이 설명해서 무엇 하랴.
  십 호 남짓도 안 되는 크기의 그 '산'은, 과연 여지껏 봉우리를 과시해온 그 
수만은 산들의 허위를 압살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감동이 왔다고는 해도, 
이런 경우 그것도 마음의 문제이다. 우정 졸아드는 심사로라기보다 어쩐지 
헛헛해지는 기분이 어색해서, 나는 그 하드보드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예닐곱 점 팔려나간 그 회고전의 성과 중에 그날 유독 그것만을 골라잡고 
흥정을 벌인 임자가 누구였던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눈에 띄지 않는 서너 
차례의 줄다리기 끝에 그 흥정은 낙착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월여 뒤에, 모처럼 초대를 받고 간 B씨 댁 거실에서 그 물건이 
다시 눈에 띄었다. 강금자 사건 이후 몇 년을 피차 소원하게 지낼밖에 없던 
화백의 심기라도 풀어줄 심산이었는지 B주필은, 이쪽을 통해 두어 번씩이나 
초대의 언질을 비치고 다시 간청까지 해왔던 터여서, 그런 처사로 보면 이 
양반의 마음의 도량이란 것도 좁아터진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실 
한 구석에 아무렇게 내걸린 그 마지막 당신의 혼신의 결집력을 새삼 다시 
대하자 화백은 어딘가 찔금한 기색으로, 곧 딴 데로 눈을 돌려버렸다.
 "역시 자넨가 알아보고 있었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든 당신의 그때 안색이 양분한 것이었는지 어딘가 
안도한 듯한 그런 것이었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갓난아기처럼 반듯하게 침상에 엎딘 채 당신의 작고하기 석 달 전의 일이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박완서
  1931년 경기 개풍 출생.
  서울대 국문과 중퇴.
  1970년 "영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오빠한테 아버지 얘기를 끝내자 오빠는 갑자기 앉은 자리가 불편한지 몸을 
비비틀면서 하품을 해댔다. 빨리 결론부터 말하라는 소리 같아서 아버지의 
근황은 생략하기로 했다.
 "아버질 우리 집 근처로 모셔올까 해서 마침 옆 라인에 마땅한 전세가 
나왔거든. 몇 년 외국에 나가 있게 되는데 세간을 맡길 데가 마땅찮아 다 
두고가고 싶대. 안방하고 거실만 비워주고. 그래서 아주 싸."
  나는 나도 모르게 죄지은 것처럼 위축되어 오빠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버지 동네 그린벨트라도 해제된다던? 아니면 정서방이 부도라도 내게 
생겼던지."
  오빠가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물었다. 매사가 귀찮다는 듯 늘 피곤해 보이는 
오빠의 시선이 일순 짓궂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제야 나도 저자세로 나온 걸 
후회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오빠하고 
다투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좀 그런 데가 있었다.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빈정거리길 잘했고 남한테 고약하게 보이고 싶은 
객기를 애꿎은 나에게 발산할 적이 많았다.
 "친정집 그린벨트 해제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장손이 이렇게 
시퍼렇게 건재하신데. 그리고 우리 그이, 큰돈은 못 벌어도 착실하게 사업 
자리고 있어요. 내가 설마 아버지 집이 욕심 나서 그러겠수. 가보면 사시는 게 
말이 아니고 자주 가뵐 수는 없고 오죽 멀어야 말이죠. 그래서 가까이 
계셨으면 하는 거야.d 왜 있잖아요? 서양 속담에도 그런 말이 스프가 식지 
않는 거리가 자식네하고 가장 적절한 거리라는 아버지도 팔십이 내일 모레유. 
돌아가신 지 며칠 만에 시신이 발견되는 일 우리라고 당하지 말란 법 없잖우."
 "알아, 나도 다 알아, 네가 천사푠 거. 그렇지만 천사 옆에 서면 보통 사람도 
나쁜 새끼밖에 해먹을 게 없이 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너, 어머니 때 
그만큼 이 오래비 망신시켰으면 됐지. 이번엔 또 무슨 망신을 시키려고"
 "그때 오빠가 무슨 망신을 했다고 또 그 소리야. 약속대로 임종 즉시 
영안실로 모셨잖아. 딸네서 죽은 시신은 관에 그렇게 써 붙이기라도 한대?"
  내가 할 수 없이 언성을 높이며 세게 나오자 오빠는 단박 풀이 죽으면서 
심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있잖냐?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는 거. 그리고 젤 죽겠는 게 정서방 
앞에서 기죽는 거야, 너.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하고 같이 벌어야 사냐 하고 
속으로 얼마나 날 무시하겠냐?"
 "오빠, 정서방이 그런 사람이면 내가 엄말 모셔갔겠수."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돌아가시게 한 걸 오빠는 늘 그런 식으로 
못마땅해했다. 위암 수술을 했지만 개복해 보니 암이 모든 장기로 번져 육 
개월을 못 넘길 거라고 했을 때 나도 중환자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싶지 
안았다. 맞벌이하는 올케한테 모셔가라는 건, 말을 안 꺼내니만도 못할 게 
뻔해서 내가 모신 거였다. 그때도 오빠는 자기네만 못 모시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모시는 것도 반대했다. 딸이 모셔간 줄 알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냐면서 간병비나 서로 분담하자고 했다.
  오빠는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고 올케는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남 보기에 
부부가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남매 기르는 게 넉넉할 건 없어도 그다지 
궁상을 떨진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오빠는 안 그랬다. 직접 아쉬운 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삶을 짜증스러워하는 태도 때문에 늘 찌들어 보였다. 대학원도 
가고 유학고 가고 싶었는데 난봉 피는 아버지 때문에 그게 여의치 않았다는 
게 지금까지도 오빠에게 자기 직업에 대한 비하가 되어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육 개월이 보통 간병인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됐더라도 
아마 오빠의 뜻대로 댔을 것이다. 암 환자의 말기가 거의 다 그렇다지만 
어머니도 숨을 거두시는 날까지 의식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명료했다. 
그러나 뒤를 가리지 못했다. 수술 후 어떻게 된 게 항문에 관약근이 고무줄 
빠진 것처럼 열린 채 오므라드는 작용을 못하니 아무리 깔끔한 어머니도 
속수무책이었다. 처음엔 일시적인 현상이려니 했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셨다. 자기가 거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 걸 너무도 기운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 뭐든지 주는 대로 열심히 잡수셔서 몸을 보하려드셨다.
  그때만 해도 간병인이 어머니를 돌보고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잡술 것만 
해 나를 적이었는데 경험 많은 간병인은 그런 나를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 회복된 환자를 본 일이 없다, 이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약은 덜 먹이는 것밖에 없으니 먹을 것 좀 작작 해 나르라는 거였다. 내가 안 
볼 때 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잡술 걸 제대로 드릴 리 만무했다. 그걸 안 이상 
어머니를 그 여자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내가 설사 그 여자보다 어머니를 더 
구박하게 될지라도.
  내가 떠맡고 싶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똥구멍이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하필 항문의 고무줄이 빠질 건 뭐였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에게 그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대가로라도 그 치욕을 다소나마 가려주는 일을 
맡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회갑을 앞두고 비로소 시부모 봉양에서 놓여나고 아버지도 마지막 소실이 
떨어져나가 집에 들어와 계시게 되어 어머니도 노후에 비로소 삶의 구색을 
갖추고 사시는가 싶을 때였다. 친정집은 낡을 대로 낡은 구옥이었지만 터가 
넓고 마당을 잘 가꿔서 여름이면 어머니 연세의 동네 노인들의 쉼터가 되곤 
했다. 노인네들만 남아서 그린벨트 해제나 기다리며 소일하는 퇴락한 
마을이었다. 아버지가 들어와 계시고부터 오빠네는 더욱 부모와 최소한도의 
의무적 관계 이상은 기피하는지라 나라도 자주 찾아뵐려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별러서 간 날이 마침 동네 노인네들이 마당에 모여 낮아 
수박과 부추 부침 따위를 나누며 잡담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가자 
어머니가 여봐란 듯이 나에게 노인네들 시중을 맡겼다. 그때, 부추에다 깻잎을 
더 썰어 넣고 고추장을 약간 푼 내 식의 지짐질도 부쳐보고 사가지고 간 
과일과 케이크를 모양 있게  썰어서 느티나무 밑 평상으로 내가기도 하면서 
들은 노인네들 얘기는 주로 죽을 걱정이었다.
  오샌 왜 생전 안 보이던 친정 어머니가 자꾸 꿈에 보이나 모르겠어. 우리 
기택이 대학 붙는 것까지는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아이고 듣기 싫소. 또 그 소리. 기택이가 효손이요. 저의 할매 죽지 말라고 
남 안 하는 삼수꺼정 했으니.
  자네 손주 첫 번에 척 대학 붙었다고 기택이 할매 너무 구박 말거라. 
기택이가 그게 보통 손준가, 맏며느리가 딸만 내리 낳고 단산한 줄 알았다가 
그게 생겨났으니 자네라면 안 그렇겠나.
  중한 자식일수록 그렇게 자꾸 입초사에 오르내리는 게 아니란 소리 아닌감. 
아들 손주 하나만 보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고 저 마누라 얼마나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녔는지 생각들 안 나우? 오죽해야 저 마누라 아들 손주 본 날, 
아마 곧 초상도 날 거라고 수군거렸잖우? 초상이 뭐야. 손자 본 날부터 그 애 
가방 메고 소학교 가는 건 보고 죽어야 한다더니, 소학교 가니까 또 중학교 
가는 것까지만 봐야 한다고 글강 외듯 하다가 이젠 딱 대학 가는 것까지만 
보겠다니 타고난 명은 길고, 기택이가 대학을 자꾸 떨어질 수밖에.
  요 할망구가 악담을 하네 그려.
  악담이 아녀, 우리덜 다 과히 박복한 팔자는 아니지만 지금 죽어도 누가 
그렇게 애통해할 것도 아닌데, 천금 같은 손주한테 잘난 명을 빌붙지 말자 
이거지.
  증말 그래. 아직꺼정은 수족이 성해 파 한 뿌리라도 다듬어주면 주었지 
저희들한테 양말 한 짝, 사루마다 빨래 한 번 내놓은 적이 없건만도 툭하면 
며느리가 시집살이하는 유세를 떠니, 만약 죽치고 들어 앉았게 되면 무슨 꼴을 
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답답하면 이렇게 훌쩍 동네 마실도 다니고, 더 
속상하는 일이 생기면 훨훨 딸네라도 다녀올 근력이 있을 때꺼정만 살아야 할 
텐데.
  무슨 복에 그렇게까지 바라겠소. 난 내 발로 변소 출입할 수 있을 때꺼정만 
살게 해달라고 조상님한테도 빌고, 부처님한테도 빌고, 예배당 앞을 지날 때도 
빌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비는데. 글쎄, 어떤 귀신이든 신령이든 
들어주셨으면 좋으련만.
  난 뒷간 출입보담은 망령인지 치맨지 그게 더 걱정입니다. 그놈의 건 안 
걸리고 죽었으면 쓰겄는데.
  난 아냐. 변소 출입만 할 수 있으면 그까짓 망령 좀 들면 어때?
  아이고 그게 따로따로가 아니라니까. 망령이 드니까 똥오줌을 못 가리게 
되는 거지 정신만 멀쩡하면 기어서라도 뒷간에 못 가겠수.
  아이고, 그렇지도 않아요. 늙어서도 젤로 서러운게 몸 따로 마음 따롭디다. 
난 우리 집 제삿날, 생일날뿐 아니라 일가친척의 이름 붙은 날도 안 
잊어버려서 정신 좋기로 소문났잖우. 우리 며느리한테는 그것도 흉이긴 
하지만. 글쎄 그렇게 똑독한 내가 툭하면 오줌을 지린다니까요. 자다가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한번 마렵다 생각이 들면 못 참아요.
  어머, 집이도 그래? 나도 그런데.
  그건 약과예요. 난 서울서 변소 찾다 말고 그냥 절절 다 싸벌니 적도 
있다우. 망신도 망신이지만 어떡허든지 며느리한테 숨겨야 한다는게 더 
서러웁디다. 영감만 있어 봐요. 젊어서 고생한 탓을 해가며 보약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앙탈을 부리련만.
  그러구 보니 여기서 민영이 할머니 팔자가 제일이구랴. 과부 아닌 이는 저 
마누라 밖에 없잖아? 그러게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후분이 좋아야 한다니까.
  민영이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들며나며 
신바림이 나서 노인네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죽는 문제만 남겨놓고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해버린 노인네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나는 사십대라는 내 
나이에 울렁거리는 기쁨을 느꼈다. 춤추듯이 경쾌하게 깡총거리며, 느티나무 
잎을 흔들고 난 푸른 바람에 주름치마가 부풀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갓 스물 같은 싱그러운 젊음에 흠뻑 도취해 있었다. 고작 배설이 주제인 
노인네들의 넋두리에 동정어린 경멸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아직도 성적인 
상상력에 충만해있고. 성적인 화제가 가장 즐거운 내 나이에 새삼 황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난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싶다우.
  처음으로 그 화제에 끼여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노인네들이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아마 방귀처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루 웃길 수 있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방귀는 뀌는 소리 그 자체도 하나의 완성된 유머였다. 애 
업은 젊은 엄마의 방귀, 시아버지 진지상 드리다가 뀌는 새 며느리의 방귀, 
맞선 보는 자리에서 누가 뀐 건지 아리숭한 방귀등은 또 얼마나 꾸준하게 
사람들의 유머 감각을 자극하고 웃음을 재 생산해왔던가.
  그러나 나는 느닷없이 끼어든 그 말이 마치 순조로운 차의 흐름 속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면서 진저리게 쳐졌다. 
우습기는커녕 여지껏의 즐거운 기분이 일시에 깨어나는 듯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나 웃기자고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다. 깔끔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늙어갈수록 생리 
현상을 c참는 기능이 헐거워지는 건 사실이나 어머니가 못 참아낼까봐 
두려워하는 건 단지 그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체면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온갖 것들이 포함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믿는 
딸의 감상 이상의 것, 연민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게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 어머니에게 늘 따라 
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 좀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ㄴ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있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철저하게 어머니를 무시했다. 구박하거나 
아웅다웅 다투는 것하고는 달랐다. 옛말에도 있는 소 닭 보듯 한다는 표현이 
아마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런 재미없는 사이는 맞선 볼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 양가 어른까지 합석한 거창한 맞선자리였는데, 
소학교밖에 안 나온 어머니는 수줍어서 신랑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신랑 쪽어선 다들 마음에 있어 한다는 통고를 받게 되었다. 박색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한참 꽃다운 나이에도 예쁘단 소리 한번을 못 들어 봐서 
용모에 자신이 없는 어머니는 맞선자리처럼 위축되는 자리가 없었다.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자기 생각은 내색도 못한 채, 신랑집 마음에 들었다는 것만을 
감지덕지해하는 부모님 뜻에 순ㅈ종할 수밖에 없었다. 세라복 입은 여고생을 
동경하던 멋쟁이 아버지에게 투덕투덕 복스럽다는 것 외엔 볼 게 없는 
어머니가처음부터 마음에 안 찼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몇 번째 맏아들의 
연애질에 속을 썩어온 부모는 그 듬직한 색시감이 마음에 쏙 든다고 바싹 
아들을 조이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부모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코찡찡이나 
곰보가 아닌 이상 승복하는 게 자식된 도리였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부모한테 순종하고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장남이란 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교육받아온 터였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내가 된 게 아니라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됐을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첫날밤부터였다고 한다. 당신이 할 일은 시부모를 극진히 받들 
고 시동생, 시누이들하고 우애있게 지내는 거라는 걸 엄숙하게 선언했을 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어도 시집 문지방을 베고 죽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남편이 소 닭 보듯 하는 
아내가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은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을 낳고 시부모님의 
눈에 드는 거였다. 어머니는 그걸 해냈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가 갈아들이는 
소실에 대해 전혀 투기하지 안음으로써 마치 성군의 중전마마처럼 품위 있고 
당당해졌다.
  아버지도 어머니에 대한 조강지처 대접 하나만은 깍듯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부터 다니던 경전을 해방 후 한전에 된 후에도 눌러서 다녔는데, 
당시로서는 안정되고 대우도 괜찮고 가욋돈도 생기는 꽤 좋은 직장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직장 근처에 딴살림을 차리고도 월급 봉투 하나만은 한푼도 안 
건드리고 큰집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실하고 아버지가 무슨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월급 봉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오래 누리진 못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사회를 정화한답시고, 
관청이나 국영기업체에서 축첩한 자는 자신해서 사표를 쓰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었다. 상습적인 바람둥이들도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그럭저럭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는데 아버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소실을 두고 있다는 건 
사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엄포가 내린 
이상 실적을 올려야 하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당연히 최초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딨다냐?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로 인하야 돌아가시는 
날까지 박정희를 미워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후 다시는 아버지 월급 
봉투를 받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해 원망도 고소해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삼촌, 고모들을 다 결혼시킨 후라 생활비 걱정도 훨씬 덜 됐고, 
마침 서울 근교의 도시화에 힘입어 농토를 야금야금 팔아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마을에 방앗간을 열었고, 그게 꽤 잘 
됐기 때문에 땅 팔 일이 생기는 건 주로 이것저것 사업에 손댔다가 조금 돈을 
만져보기도 하고 실패하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마 사업하면서 돈 좀 만질 적이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할머니 환갑 
잔칫날 어머니나 어른들에게 미리 아무런 연통도 안 하고 꽃같이 야들야들  
예쁜 소실을 대동하고 나타나 큰절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맏며느리다운 체통을 지켜냈다. 여고생이던 내가, 
어머니처럼 저 여자의 존재를 무시해버릴 것인가 덤벼들어 머리채를 쥐어뜯을 
것인가, 어떤 것이 어머니를 더 위하는 길인지 몰라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한 
가닥 위안이 됐던 건, 미남에다 멋쟁이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연세가 
들수록 경박하고 볼품없어지는 반면 어머니는 그 정반대라는 걸 발견한 
거였다. 어머니는 젊어서는 별로였지만 늙어가면서 점점 더 보기 좋아지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버지한테는 고소하면서도 내 나름으로는 가슴이 뭉클하니 
슬펐다. 사십세 후의 얼굴은 본인 책임이라지만 양귀비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배알을 빼놓지 않는 이상 어머니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욕망이나 분노를 
감추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알면 뭘 알기나 알았겠는가, 어머니의 비장하다 못해 
결사적인 자존심에 대해 어렴풋이 짚이기 시작한 것은 나 역시 시집갈 날을 
앞두고였다.
  넌 연애 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 파토 치고 나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를 교훈이라고 듣고 시집간 딸은 이 땅에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또한 당신이 견디어온 굴욕에 대해 그 정도의 원성이나마 
외부에 발산한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인간적인 추태라 
할지라도 그렇게 철저히 갈무리해온 어머니였다.
  방귀를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던 어머니가 하필 말년에 관약근이 
열린 채 다물 줄 모르게 될 건 또 뭘까. 나는 도저히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난해한 아이러니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어머니의 발병과 
수술과 항문이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가 
역시 팔아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안 남은 집으로 들어와 계시게 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기 때문에 암이라는 것도 내가 
가장 먼저 알았다. 어머니가 당신이 암이라는 걸 알고 나서 제일 먼저 한 말은 
아버지한테는 알리지 말아달라는 거였다.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들어와 
있긴 해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소 닭 보듯 데면데면하게 굴기는 소실 두고 
살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어머니가 속으로 
불쌍하기도 하고 조금은 가소롭기도 했다. 마나님이 곧 죽게 될 걸 
알아봤댔자, 부리던 하녀가 죽게 됐다는 것만큼도 충격을 받을 아버지가 
아닌데 뭘 숨기자는 걸까. 텔레비전 극 같은 데서 본 금실 좋은 노부부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곧 죽을 마누라한테도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 
영감 꼴을 보게 될 것을 피하려는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로서는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자식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 했어도 분위기를 봐서 대수술이라는 것쯤은 
눈치챘으련만, 입원하러 들어가는 날 아침까지 아버지는 태연하게 어머니가 
사력을 다해 손수 차린 밥상을 받았고, 근심하는 말 한 마디 없이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수술하는 날에도, 그 후의 입원 기간에도 어머니가 와보실 것 
없대요. 라는 우리의 전갈 한마디로 그대로 한 아버지였다. 퇴원할 때도, 
싸우고 친정으로 갔다가 제풀에 걸어들어오는 마누라 대하듯 평소보다 더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때부터는 어머니 부탁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하나도 
안 놀랄 것이 두렵다기보다는 너무도 뻔해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다는 게 어찌 
어머니에게만 고통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자식한테도 못할 노릇이었다.
  입원하기 직전가지 당신 시중을 들던 어머니가 퇴원하고는 뒤도 못 가리게 
된 것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기는커녕 병원 
욕만 했다. 멀쩡한 사람 병신 만든 의사를 그냥 놔두냐는 거였다. 어머니에 
대한 근심은 조금도 안 하면서 괜히 길길이 뛰는 게 마치 의사를 걸어서 돈 
뜯어낼 빌미라도 생긴 깡패 같아서 가뜩이나 낯설기만 한 아버지가 더욱 
정떨어졌다. 한약이나 몇 첩 쓰면 나을 병을 가지고 괜히 자식들한테 엄살을 
부려서 몸에 칼을 대게 하더니 꼴 좋다고 우리까지 싸잡아 비꼬기도 했다. 
우린 그저 기운이 떨어져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아버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소원이라지만 주인 앞에 병든 
동료를 숨기고 감싸야 하는 종년 심정과도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한테 절로 
앙심이 품어졌다.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갈 때고 우리 모녀를 같잖아 하는 아버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동안 혼자서 불편해 할 걱정조차 안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얼마나 철저한 무시인가.
  그래도 어머니는 뒤도 못 가리는 주제에 온종일 똥구덩이에 빠지다시피 
해서 허덕이는 딸에게 아버지 밑반찬을 해 나르지 않는다고 성화를 했다. 그럴 
경황도 없었지만 내 손으로 아버지 밑반찬을 만든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사해서 시장에서 파는 걸 몇 가지 사고 어머니 옷가지도 좀 가져올 겸 해서 
친정집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추레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놈의 똥구멍은 언제 아문다 더냐고, 항문 걱정만 함으로써 어머니 
안부는 생략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아버지 진지상을 봐드리고 나서 
어머니 옷장을 뒤졌다. 속옷이 무진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건지 흔히 향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 
갈피마당서 지폐가 쏟아져 나왔다고 하더니 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 향수병도 몇 개 마개가 헐겁게 잠긴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 관리였다.
  그런 어머니가 지금 딸네 집에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희롱해도 된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 
어머니를. 나는 천방지축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조화를 부리는 인간살이에 
분노를 걷잡을 수가 없었고. 그건 곧바로 아버지를 향해 폭발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한테 당해 싸게 굴었다. 어머니 반찬 솜씨를 한번도 칭찬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시장 반찬은 도무지 먹어주겠다는 얼굴로 그놈의 똥구멍 
때문에 언제까지 이 고생을 시킬 작정이냐고 투덜거렸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지금 말기 암 환자고, 남은 명이 다섯 달도 안 될 거라고 
말해버리고 나서 아버지의 반응 같은 건 살피지도 않고 친정집을 뒤로했다. 
말해버리고 나니 허망했다. 뭐가 허망한 건지 잘 모르겠으나 길거리만 아니면 
목놓아 울고 싶게 산다는 것 자체가 허망했다. 어머니에게는 간단하게 이제 
아버지도 아시게 됐다고만 말했다. 어머니는 왜 그랬냐고 야단도 안 치셨지만, 
그 소릴 듣고 뭐라시던? 하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날 밤이었다.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엔 누군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목쉰 소리로 어머니를 바꾸라고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직접 
통화를 하고 싶어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콧물을 들이마시는 것도 같고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여서, 나는 어머니에게는 
무선전화기를 갖다드리고 계속해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엿들을 작정이었다. 
어머니의 전화 바꿨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도 뜻밖인지 약간 
어눌하고 떨리는 소리였다. 저쪽에선 아직도 짓눌린 딸꾹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전화 바꿨어요. 전 괜찮아요. 많이 나았어요. 참다 못해 어머니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그 흐느끼는 음성을 통해 여지껏 들리던 그 이상한 잡음도 복받치는 울음을 
참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나는 웃음이 폭발할 것 같아 얼른 
전화통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방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나중에 보니까 통화가 
끝난 어머니도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렇게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의사가 
예언한 생존기간도 미처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칠십에 처음 들은 
사랑의 고백 때문에 그동안을 즐겁게 보내셨다. 똥구덩이에 빠져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도 말로만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를 문병했고 똥도 
치우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어서 그 꼴만은 안 보이고 싶었나보다. 어머니 묏자리를 잡는 데도 
정성을 다하셨고, 장례 때도 수시로 그 딸꾹질을 참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려서 우리를 민망하게 했다. 아버지에 비해 자식들은 솔직히 
슬픔보다 시원한 쪽이 더했을 것이다. 상주인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길고 지루한 영화가 끝났을 때의 관객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나는 
지쳐 있기라도 하지. 오빠는 장남된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제나저제나 임종 소식만 기다리기가 얼마나 지루했을까.

 "아무튼 고맙다. 나도 아버지를 언제까지 거기서 그렇게 지내시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그럼 됐네, 뭐. 아직 정정하시겠다, 가끔 모셔가기도 하고 방문도 하고 
그러면 되잖아. 나도 가까운 데 계셨으면 하는 거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건 아냐."
 "그래 봤댔자 기죽는 건 마찬가지지 뭐."
 "기가 왜 주겅?"
 "네 따위가 장남 심정을 어떻게 아냐?"
 "그래, 난 참새구 오빠는 대붕이다."
 "참 나이가 무섭군. 그 능력은 다 어떡허구 이제 와서 자식 신세를 지게 
되다니. 당신이 생각해도 한심하실걸. 아마."
 "오빠는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서 새 장가를 못 든다고 생각해?"
 "그럼 수절이라도 하신다는 거냐? 웃기지마, 야. 그게 아버지한테 소리냐."
 "도 뭘 몰라. 지금도 중매가 꽤 쏠쏠히 들어와요. 내가 접수한 두어 건 
되는걸."
 "아직도 돈푼이나 있는 척하고 다니나보지, 자식들 고혈을 빨아서 연명하는 
주제에. 말년엔 그래도 개과천선한 줄 알았더니"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아버진 아직 집이 있잖아."
 "그까짓 것도 재산 축에 드나."
 "아까 오빠도 그랬잖아. 그린벨트라도 해제됐냐고. 해마다 될 듯 될 듯 
소문이 무성한 데가 거기잖아. 장래성을 보고 그러는지, 꽤 젊은 
여자들한테서도 프로포즈가 들어오나 보던데."
 "안 돼, 그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 여자 문제를 내가 
이러구저러구 할 입장이 못 됐지만, 이제부턴 아냐. 입적까지 시킬 수도 있는 
문젠데 어떻게 가만히 당하기만 하겠냐? 안 그러냐?"
 "오빠, 그렇게 무섭게 눈을 부라릴 것 없어. 그 문제는 벌써 아버지가 입장을 
분명히 하셨으니까. 재혼 문제는 입도 뻥긋 못하게 하셨어. 왠 줄 알아? 
장남한테 그 집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물려주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가까이 
모시겠다니까 나한테도, 너는 남부럽지 않게 사니까 그 집 욕심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는걸. 솔직히 나 그때 조금은 기분 나빴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도, 내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저 계집애 저의는 뭘까 그 
계산부터 하는 게 역력했으니까."
 "솔직히 말해 너 같은 딸이 어딨냐? 나도 좀 기분이 나쁘다, 야."
  나는 내가 효녀도 아니고 착한 여자도 아니란 것을 오빠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그냥 그런 척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도 
설명되어지지 않는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승낙도 받은 셈이겠다. 이제 아버지하고 몇 가지 최종적으로 의논할 
것만 남아 찾아뵙겠다는 연락을 했더니 매일 서울에 오니까 서울서 만나자는 
거였다. 아버지가 주로 나오시는 데는 롯데월드 들어가는 데 있는 지하 
광장이라고 했다. 전철을 한 번만 갈아타면 갈 수 있는 재미에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하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아무 때나 나와서 찾으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투는 마치 그 광장의 주인처럼 당당해서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차를 갖고 다니는 나에겐 교통 체증 때문에 자꾸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친정이 새로운 전철 노선 개통과 함께 훌쩍 수도권이 된 것도 
신기했다. 반사적으로 친정집의 삼백 평이 넘는 평수가 떠올랐다. 어느새 
일흔보다는 여든에 더 가까워진 아버지지만 살아 생전에 부자가 되는 것도 
아주 허황된 공상만은 아니다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는 아무도 마당을 가꾸지 않아 친정집은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게 퇴락한 모습을 그대로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무나 
꽃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추해진 집 모습을 가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마당을 
가꾸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일생 오로지 아무것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사진 분이니까.
  롯데월드 지하 광장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넓고 휘황하고 시끌시끌했다. 
마침 성탄절을 앞둔 연말이었다. 브래지어나 팬티를 세일하는 임시 매장을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해놓고 젊은 여자들을 물러모으고 있는가 
하면, 그 옆 폭포 앞에서는 볼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무명 보컬 그룹이 
불우이웃돕기 성금함을 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앉을 자리도 
많이 마련돼 있는데도 슈퍼로 통하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앉아서 통행에 
지장을 줄 만큼 광장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만나 잡담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우두커니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한 사람들 사이로 뭐가 그렇게 바쁜지 신경질적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급류를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혼잡 
속에서도 아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인네들끼리만 모여 앉아 있는 
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가 남자 노인들이고 여자 노인은 어쩌다 섞인 
한 떼의 노인들이 광장 한복판에 둥굴게 둘러 앉아 있었다.
  눈에 잘 띄게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한참 나이의 중년 남자 못지않게 끈적끈적 엉겨붙을 것 처럼 기름진 
목소리였다. 마이크가 있을 리 없는 기껏 육성이, 보컬 그룹이 부르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할 일이 도 하나 있지, 를 압도하고 훼방 놓는 것처럼 
들리는 건 피붙이로서의 민망함 때문이었을가, 아버지는 케케묵은 옛날 
유행가, 진주라 천릿길을 내 어이왔던가를 눈을 스르르 감아가며 한껏 기분을 
내 부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라는 가사를 슬쩍 
'남의 계집을 얼싸안고'라고 바꿔 부르면서 옆에 앉은 여자 노인네의 허리에다 
팔을 감는 것이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수적으로 단연 열세인 여자 노인의 옆자리를 아버지가 차지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닐 듯싶었다. 그 여자 노인도 아버지의 팔이 허리를 감는 게 싫지 
않은지 그때까지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얼른 비벼 끄고는 아버지의 노래에 
능숙하게 화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이라면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내 아버지가 그러는 건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질 법한데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떠오른 아버지 얼굴에 나는 피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그때도 아마 어쩔 수 없이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여학교 때, 부득이한 일로 
아버지 소실 집에 내가 심부름을 가야 할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때 내 
앞에서 아버지가 소실과 시시덕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소실 집에 있는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하고는 전혀 딴사람 같은게 이상했었다. 집에서는 
경직되고 근엄하고 불편해 보이던 아버지가 거기서는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롯데월드 광장에서 본 아버지도 그렇게 편안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롯데월드 광장에서 본 아버지도 그렇게 편안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장남 노릇이 몸을 옥죄는 걸 참지 못해 편안하게 펴질 자리를 찾아 
난봉을 핀 게 아니었을까. 소녀 적에 그렇게 풀린 아버지가 추악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난봉기도 도가 트니까 관록 같은 게 생가 멋있고 
풍류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늙을수록 괜찮아지는 타입이고 
아버지는 늙을수록 경박하고 추레해진다는 내 예상도 결국은 들어맞지 않았다.
  사람 팔자는 관 뚜껑 덮을 때까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해한 숙제로구나. 아버지는 어떻게 죽게 될지 그걸 
누가 알랴. 까딱하면 아버지의 임종을 책임지게 될지도 모를 나의 이번 결정을 
후회할지 안 할지는 더군다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생을 자기의 한숨 소리 
한번 제대로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잔뜩 오므리고만 사신 어머니가 자기 
항문도 못 오므리게 된 치욕적인 마지막을 보냈으니까. 식구들한테 못할 
노릇만 시키면서 너절하게 산 아버지는 혹시 우아하게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요행수를 바라는 건 아닐까? 그건 아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해드린 
은혜 갚음을 하고 싶은가? 그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어머니 편에만 
서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공식이 통하지 않는 그 난해함 때문에 그 
일을 한번 더 해보고 싶다는 게 조금은 더 맞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종일관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 노릇을 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나는 웃으면서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고, 아버지는 그제야 그 노파의 
허리에서 팔을 풀었다. 노파가 담배를 꼬나물자 아버지는 나에게 찡긋 윙크를 
하고는 찰카닥 라이터 불을 켜서 노파에게 불을 붙여주고 나서 일어섰다.

      소금 굽는 남자
    윤후명
  1946년 강원 강릉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1969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산역'이 당선되어 데뷔.
  주요작품 '돈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여우 사냥' '약속없는 세대' 
'협궤열차' 등.
  소금 굽는 남자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살아간다'라는 말의 수동형이 
되겠다 그렇다면 '사라진다'라는 말은 '살아진다'라는 말과 어느 정도 연관을 
갖는 걸까 나는 문득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헤어나기를 거듭한다. 이건 
마치 마른하늘에 자맥질을 하고 있는 꼴이군 얼마나 기막힌 삶이면 
살아진다고 표현되는 삶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사라진다고 
말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케이블 티브이의 교통관광방송(TTN)에서 새삼스럽게 수인선 협궤 열차에 
럭힌 이야기를 찍으러 가겠다고 내게 안내자 겸 해설자로 나와달라는 교섭이 
왔을 때, 퍼뜩 떠올렸다. 그 열차가 이마 1년 전에 운행을 중지하고 '사라진' 
열차라는 건 저희도 압니다만, 그러니까 더욱 같이 가주셔야 피디(PD)는 
'사라진'을 강조했었다. 물론 나는 그 열차가 지날 적이면 쇠바퀴가 철로를 
굴러가는 잘그락 소리마저 들리는 곳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었다. 그런 소문을 
어찌어찌 들은 피디가 그 언저리 장면을 담는 데 나를 곁들이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 열차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그곳을 떠나왔었다. 즉, 나 역시 
그곳으로부터 '사리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적격이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사라진 것을 회상하기 위해 사라진 사람을 초대한다? 나는 왠지 
아득하고도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열차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예고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지막 운행이 언제 
있으리라는 것도 정해져 있었다. 하루에 두 번밖에 오가지 않던 열차였다. 
거기에 맞춰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신문, 방송까지 보도들을 하고 
있었으니, 그 보잘 것 없는 실세에 비해 퇴역식은 자못 거창했다. 
아닌게아니라 내가 그 마지막 열차를 타보기 위해 집을 나섰던 것도 신문 
보도를 보고 나서였던 것이다.
  피디와 대충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마지막 열차를 타러 갔던 때를 
마치 아득한 먼 옛날을 회상하듯 돌아보았다. 그때 신문들은 '수인선 협궤열차 
역사 속으로'라거나 '추억의 협궤열차 마지막 경적'이라는 등의 제목을 달고 
'1937년 3월 처녀 운행을 한 지 5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상자 
기사를 제법 큼지큼직하게 싣고 있었다. '아듀'라는 표현을 쓴 신문도 있었다. 
1995년 12월 31일 저녁 8시에 마지막 출발을 함으로써 '아듀'였다.
  '아듀'라는 말에 이끌렸는지 나는 그 마지막 열차를 꼭 타야 한다고 마치 
쫓기듯 집을 나갔었다. 예전에 출판사에 다닐 무렵 학습 교재를 만들면서 떠날 
때의 인사말을 나라별로 예시하는 항목에서 왜 우리 나라에는 아듀니 
아디오스니 사요나라니 하다못해 굿바이니 하고 쌈빡한 이별의 말이 없었을까 
아쉬워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잘 가, 또 보자구, 안녕히 가십시오?
  전철을 타고 서울을 벗어나자 그 열차 가까이 살던 살던 날들에 나를 
스쳐간 물상들이 머리 곳곳에서 되살아났다. 그것들은 갈매기, 까마귀, 아기 
돌고래같이 가까운 동물에서부터 공룡, 코끼리새, 그리핀 같이 먼 동물까지 
이어지며, 또 엉뚱하게 늦가을의 빨간 나문재 잎이나 퉁퉁마디 줄기 등으로 
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물줄기들과 산언덕들이 갯벌 쪽으로 
나아가는 곳에 사자발쑥와 갈대와 엄나무가 자라는 내 영토가 있었다. 하기야 
내가 그곳을 떠난 다음에 바다를 막아 완성한 호수에 폐수가 흘러들어 온통 
썩어가고 있다고 신문마다 떠들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썩은 호수조차 내게는 예전 망둥이와 달랑게가 놀던 살아 있는 갯벌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실 그곳에 현실적으로 발을 딛어서는 안 되는 
몸인지도 몰랐다. 아니, 결코 그럴 수도 없는 몸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그곳에 관한 한 나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과거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괭이갈매기가 끼룩거리면서 날고 잇는 갯벌 옆에는 이상하게도 까마귀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섯무날 새우를 잡는 그물에 걸려드는 아기 
돌고래가 눈을 감고 죽은 채 배에 실려 오곤 했었다. 언젠가 한번은 그 열차를 
타고 가다가 입구 쪽 조금 넓은 공간에 놓여 있는 무슨 마대 자루 위에 
무심코 걸터앉았는데, 엉덩이에 물컹하고 닿는 느낌에 놀라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었다.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 바로 돌고래였던 것이다. 불고기를 해 
먹으면 기가 막히지요. 전골도 좋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앞에서는 
누군가는 예전엔 저건 먹지 못하는 거로 쳤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돌고래를 싣고 가는 그 열차는 어느새 과거와 환상으로 이어져 공룡의 
모습으로 변하고, 그 철길 옆으로는 코끼리새가 살고 있는 숲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새의 머리에 날개 달린 몸통은 짐승인 그리펀이라는 이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봉이나 황 같은 상상의 동물 그리핀이 실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음을 어떻게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풍경 속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더듬어야 했다. 나는 
현실적으로 마지막 열차의 전별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나그네라는 말이 이 시대에 잊어버린 
옛얘기처럼 들려온다. 길에 나서면 누구나 나그네가 되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정감어린 길이 그만큼 없기에 나그네도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밀밭길을 가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마치 투명한 추상화와 같은 길이다. 
푸르른 청록색의 빛살 사이에 아른히 어려 있는 감미로운 사연이 온몸을 
투명하게 감싼다. 그 빛살 사이로 누군가 내 마음 아실 이, 마음속 깊이 
애닯게 여며 삭여둔 그리움 아실 이 손짓하는 것만 같다. 그 해맑은 그리움 
켜켜이 쌓여, 마음 달뜬다. 그리하여 그것은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그리움에 
마음 가듯이' 하고 변용된다.
  길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길래 상상의 '나래'는 길을 따라가며 
그리움을 구체화한다.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길이 없으면 
구체화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를 가며 그리움의 
대상을 찾는다. 그리움이란 외로움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움은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어디론가 대상을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작로에 서서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까 망연히 바라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유난히도 하얀 신작로였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사람들이 
오가고 또 간혹 시골 버스가 지나간다. 큰 고개를 넘어 다시 바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상상으로 이어진다. 줄곧 
따라가면 무엇이 있을까 목이 마른다. 사람들도, 자동차도 사라진 빈 길에 
깔려 있는 정적은 저 화승작의 절명의 그리움을 읊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불과 몇 해 전, 고향의 읍사무소 앞 신작로가 사라진 곳을 
따라 멀리 갔었다. 읍이 시가 된 것처럼 옛날의 신작로는 물론 포장도로로 
변했으나 ,도시를 벗어나 얼마쯤 가자 그 옆으로 정겨운 흙길이 구부러지며 
뻗어 있었다. 아스라이 먼 산이 오히려 가깝고, 길가의 작은 또랑에서는 풀빛, 
모래빛이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리 가면 바닷가 언덕이 되지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딜 찾으시는데?"
  이웃 바닷가 동네의 풍어제가 아니면 산기슭 동네의 장승제에라도 다녀오는 
것일까, 그의 얼굴은 그렇게 기분 좋은 술기운이 스쳐 있었다.
  바닷가 언덕 그곳이 어디일까 나는 꼭 짚어 어디를 찾는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런 곳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비석이 있고"
  나는 더듬었다.
  비석이야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그 언덕으로 가는 
길은 논밭이 양옆으로 펼쳐지고 멀리 산모롱이에 당산나무 높이 솟아 있는 곳, 
그리하여 억새를 헤치고 고샅길로 접어들면 풀 냄새, 흙 냄새에 하늘을 맞는 
고향의 언덕이다. 오래 그리워하고 오래 기다려온 마음을 비로소 품어 안는, 
스스로[自] 그러할[然] 자연의 마음자리.
 "암튼 이리 가면 산으로 가오."
  그는 먼 산을 손으로 가리킨다. 나는 바닷가 언덕을 향해 간다면서 웬일로 
반대쪽 방향을 잡아 산길로, 산길로만 접어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 
길을 걷기 위해 나는 이미 다음과 같은 시를 써놓고도 있었다.

  너 가고 있는 길
  나도 간다.
  길 간느 사람은 많고 많으나,
  둘만이 아는 길은
  따로 있음을 믿는
  길이다, 믿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나는 나를 그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강원도의 산길로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먼 남해섬의 보리밭 
가, 마늘싹 파릇파릇 돋고 있는 향기 속일 수도 있으며, 엉뚱하게도 이국의 
풍경 속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내 고향 태백산맥 응달에 피어난 곰취 
여린 싹을 뜯으러 나귀를 타고 엉뚱하게 안달루시아 지방을 헤매다녀도 좋은 
것이다. 그렇게 시는 어렵사리 계속된다.

  머나먼 안달루시아 나귀를 타고
  머나먼 남해섬
  마늘싹과 보리싹 파아랗게 밟으며
  가고 있는 길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비린 술 한잔에 영혼을 달래면서
  세상 미련 죄다 떨쳐버리면서
  그러므로 사랑,
  신음 속에 삶을 확인한다.

  이렇게 길은 낭만적인 배경에서 자기 확인의 고통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하여 길은 시가 된다. 길은 예나제나 장돌뱅이들로 붐비지만, 결국은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놓여 있는 것이다. 그 길 위에 인생을 거느리고 
역사를 거느리는 한 그렇다. 누구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오가든 마침내 
기다림과 그리움과 만남과 떠남으로밖에는 그 과정과 목적이 한데 어울려 
설명될 방법이 없기 땜누이다. 시란 쉽게 말해서 과정과 목적을 같이 
노래하고자 태어난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떠남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 시인은 말했었다.
  그날 나는 마음에 두었던 바닷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간 목적을 달성한 것이었다. 내 고향 언저리의 시골길을 
내가 걸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또랑이 모인 개울에는 비록 징검다리도 
없고 외나무다리도 없었으나, 나는 내 마음속에 그 풍경들이 아로새겨졌으리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대관령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면 돌아오는 길은 가끔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택한다. 산세가 빼어나서 길은 굽이굽이. 그야말로 양의 창자 같다는 표현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 여름에는 후끈한 신록 속 칡꽃 향기, 겨울에는 씽씽 
소나무 가지에 불어오는 돌얼음바람.
  한번은 낙산에서 택시로 한계령을 넘는데,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면서 기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맘때는 차를 돌려 세어야지, 안 그러면 문이 떨어져나가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워낙 쎄서."
  멀리 바다는 연무에 가렸고 바람이 골안개를 양떼 몰 듯 등성이 너머로 
몰고 있었다. 길은, 바다와 산으로 이무기처럼 구불구불 살아나는 길은, 그 쎈 
바람을 맞아 한 마리 용으로 승천하여 무지개를 띄우려는가보았다. 바다와 
산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길인 것이다.
  산모롱이길 누가 밟아 저리 갔을까.
  쑥부쟁이, 여뀌, 망초, 패랭이, 엉겅퀴 우거지고,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가 그리움에 못 이겨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는 봄길. 나도 그 길에서 까닭 없이 가슴이 저민다. 만난 사람 어김없이 
헤어지며 살아 있는 우리 어김없이 죽는다는 말을 누가 굳이 하고 있는가. 
길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는데 그 만남 가운데 이미 
떠남이 깃들여 있다고 누가 굳이 일깨우는가

 '그리움으로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는 길'이라고 해놓고 금방 '만남 가운데 
이미 떠남이 깃들여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그만 멈춘다. 태어남 가운데 
죽음이 있다고 나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은 그렇게 말해져서는 안 
되었다.계절은 봄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열차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이었을까. 시간적으로 그런 데다가 
공간적으로는 아직 고향 땅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틀려먹었다, 하는 외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태어남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섣부른 철학을 그 누가 
말하지 못하랴.
  이래가지고는 코끼리새가 날고 공룡이 어슬렁거리는 곳으로 가서 그리핀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애시당초 글러버린 노릇이었다. 그러기는커녕 단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절망이 돌개바람처럼 나를 
휩쌌다. 뭣? 만남 가운데 이미 떠남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열차를 보러, 아니 보내러 가는 
나는 그 어딘가에 그리핀이 큰 날개를 펴고 날고 있을 듯한 환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그리핀이라는 괴어쩍은 상징이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그것이 내 정신의 어떤 결핍에서 탄생한 상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핀(griffin) : 독수리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고, 몸은 사자인 상상 
동물. 눕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많은데, 다른 동물을 덮치고 있는 모습도 있다. 
주로 고대 동방 여러 나라나 그리스의 장식 미술에서 즐겨 다룬 제재이다. 
신전이나 분묘의 장식 무늬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신성한 괴수임에는 
틀림없으나, 거기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내 빛바랜 낡은 수첩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전화번호들과 함께 
백과사전의 한 구절이 베껴져 있었다. 서울로 다시 돌아온 지 벌써 몇 년째, 
그런데도 나는 예전 수첩을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토록 빛바랜 수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해마다 수첩을 다시 
옮겨 적을 만큼 새로운 무엇이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고맙게도, 나는 늙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노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수첩을 펴든 나는  비로소 
그것이 너무도 낡은 것이라는 사살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형편없이 낡고 빛바랜 수첩이었다. 언젠가 전쟁기념관에 가서 
예전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죽은 젊은이의 수첩을 본 적이 있는데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왜 이제야 눈에 환하게 
드러나는가, 나는 당황했다. 그와 함께 내 모습도 확연히 늙게 부각된다고 
느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빛바랜 낡은 수첩 속에서 그 열차를 만나야 
한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열차가 바로 그날로서 
운행을 멈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철도 당국에서 그렇게 
정해서가 아니라 이마 내 수첩 속에서 그것은 운행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새 어둠이 짙은 겨울 밤에 마지막 열차를 배웅하러 간 나는 그야말로 
'배웅'하는 것만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었다. 마지막 열차를 타리라 했던 
생각이 그만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가리고 있는 이상, 빛바랜 
낡은 수첩만이 있는 이상, 내가 가야 할 길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열차는 어둠 속으로 떠났다. 그 열차 안 흐린 불빛에 
예전 헤어진 여자가 문득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수첩속에 잠들어 있는 사실일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 
빈자리로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물론 나는 적격이 못 된다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지만 피디는 막무가내였다. 결국은 자기가 학교 후배이기도 하다는 
말까지 꺼낼 때쯤에는 나도 거절하기에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그 
열차의 흔적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영상 매체에서 가장 눈독을 들이는 것은 소위 그림이 
되느냐 하는 말로 요약된다고 했다. 학교 후배라는 피디도 당연히 그랬다. 
전철역에서 만난 그는 다짜고짜 그림이 될 만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말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어도 나는 갑자기 막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그건 다 낡은 수첩 속에 있는데'하는 대답만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러자 1년 전 마지막 열차를 배웅하러 갈 때 가지고 있었던 수첩을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작은 열차는 논밭 사이를 달려 도시의 옆구리를 거친다. 군데군데 갈대가 
우거진 웅덩이가 스쳐가고 멀리 바닷가 갯벌이 바라보인다. 마치 태양이 
소금을 굽듯 땀방울이 맺힌다. 아니, 실제로 땀방울이 맺히는 것은 추억을 
위하여 우리들이 굽고 있는 스스로의 삶일 것이다. 이윽고 염전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고 어디선가 갯내에 묻혀 갯풀 꽃향기 같은 향기가 실려 온다. 
바닷속에서 동물들과 식물들이 내보내는 숨결인지도 모른다. 박제가 된 추억을 
아시나요? 그러나 그 박제에 생명을 불어넣는 숨결이 있는 것이다. 추억이 
되살아나지 않을 때, 삶은 아득한 타인의 것이 되고 만다.
 "먼저 어디든 철길 쪽으로 가봅시다."
  추억의 한 귀퉁이를 잡고 상념에 젖어 잇던 나는 앞장을 섰다. 아닌게아니라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나부터가 얼른 보고 싶기도 했다. 그 침목들을 지나 
봄길, 가을길을 헤매던 무렵이 아른아른 되살아났다. 봄에는 국거리 
소루쟁이를 베며 마치 요도에서 흘러나온 마알간 끈적이 분비물 같은 즙액을 
손에 묻혔고, 가을에는 논가의 마름 열매를 건지며 '마름 따는 저 처녀들' 
하고 제법 "시경"의 '국풍'까지 떠올리기도 했던 들녘이 거기 있었다. 그 길 
또한 '그리움으로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는' 길이었던 것이다.
  나는 촬영팀의 봉고차를 안내해 두 번의 유턴을 거치며, 거의 주차장으로 
변해 있는 옛 역 앞을 비집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보기에도 철길까지 차들이 
꽉 들어차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철길이랄 게 없어요. 그동안에 이렇게 변하다니."
  나는 봉고차에서 내려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엄연히 
열차가 다니던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뭉개져 있었다. 아니, 뭉개져 있다는 
표현은 어느 부분에서는 적절치 못하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짓밟지 않은 곳의 
레일도 벌써 몇 년인지도 모를 오래 전에 버려졌던 것처럼 마른 검불에 덮여 
검붉게 녹슬어 있었다. 민통선 안에 있는 경의선 철도를,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잇었다. 그곳 어디엔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고 
했었다. 전쟁으로 끊겨 오랜 세월 동안 버려진 철길이나 마찬가지로 불과 1년 
만에 페허로 변해버리다니, 나는 마지막 배웅을 하던 그 순간마저 배반당한 
느낌이었다.
 "여긴 안 되겠는데요."
  피디가 낭패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촬영기사가 허허 헛웃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예전에도 뭐 그리 매끄럽거나 훤한 철길은 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하루에 두 번일망정 어김없이 다니는 열차가 있었기에, 산속의 길 아닌 
길도 사람 다닌 흔적을 어떻게든 지니고 있듯이 레일이 쇠바퀴에 닦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레일은 바랭이풀 마디들이 말라 엉킨 아래 버려져 그냥 
나뒹굴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딴 데 또 없을까요?"
  그는 아이템 자체를 잘못 택했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글쎄, 사라진 것을 취재한다는 게"
  나는 공연히 부아가 나려 했다. 철도가 폐선이 되고 나서의 모습을 정말 
카메라에 담고자 한다면 녹슬고 뭉개진 저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하고도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림'이 되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아무리 황량해도 나름대로 어떤 구도가 잡혀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봐도 그 철길은 '그림'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송국이 교통 관광 
전문이니만치 시청자로 하여금 한번쯤 가봤으면 좋겠다는 유인 효과를 노리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잠깐 찍어나보고 가지요."
  그의 말에 촬영기사가 내키지 않는다든 듯 카메라를 돌렸다.
 "저쪽 벌판 건너편으로 가면 호수가 있는데, 거기서 열차 소리를 듣는 것도 
괜찮았지요. 낚짇 하고 데이트도 하던 덴데."
 "호수가요?"
 "오래된 저수진데 상당히 크죠."
  그 저수지에 바닷물고기인 농어가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갈매기도 몇 
마리씩 날곤 했었다. 때때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무리를 지어와서 사진을 
찍기도 했었다. 나는 어떤 여자와 함께 낚시터 매점 앞의 나무 탁자를 
차지하고 삶은 달걀과 라면을 안주로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는데, 그때 
노을에 젖은 여자의 실루엣이 내게 속삭이던 말이 내 귀에 왜 그렇게 
생생하게 들리는지 의아해하던 기억이 새로웠다. 실루엣의 속삭임이었으므로 
분명 현실의 소리는 아니었다. 당신의 영혼은 내겐 너무 무거워요. 그때 나는 
엉겁결에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고, 누군가의 유명한 말을 
웅얼거렸을 뿐이었다.
  저수지와 도심 사이로 마치 경계선을 긋듯 열차는 달려가곤 했었다. 
봉고차를 타고, 마로니에나무를 가로수로 택해 심은 길을 달려가는 동안 나는 
어떻게든 예전 모습을 복원해보려 애썼다 가물치를 잡겠다고 나뭇가지를 끊어 
낚싯줄을 매고 낚싯바늘에 미꾸라지 지느러미를 꿰어 수초 위에 낭창대게 
담그던 그 봄물 자리는 어디로 갔을까. 수초 위에 알을 낳아 옆에서 지키는 
가물치는 미꾸라지가 알을 먹으러 온 줄 알고 공격한다. 미꾸라지를 덥썩 무는 
순간, 날카로은 미늘이 놈의 목구멍을 채고 마는 것이다. 미꾸라지보다는 
개구리가 낫다는게 정설이었다. 그러나 가물치고 알이고 미꾸라지고 개구리고 
다 땅에 파묻은 채, 애기붓꽃이 앙증스레 피어나던 둔덕 위로 덩치 큰 덤프 
트럭들만 바삐 오가며 택지 닦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기야 그곳을 택지로 
바꾼다는 계획은 내가 살던 무렵에 이미 세워져 있던 것이었다.
  달맞이꽃에 박주가리 덩굴이 유난히 많이 우거져 있던 공터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을 지나 얼마쯤 달려가 포장도로를 벗어나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그곳 작은 포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물길을 타고 드나들어 
어시장까지 서던 곳이었으나, 바깥 바다 쪽으로 방조제가 쌓이면서 그저 썩은 
하천이 되어버렸음을 나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포구에서 고깃배를 
타고 가까운 무인도로 야유회를 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손님이 거의 끊겨 문을 닫은 횟집들과 엉뚱하게 남태평양에서 
수입한 조개, 고등껍데기들을 파는 가게와 낚시도구점을 지났다. 나는 다소 
마음이 들떴다. 지금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뭐 이런 지저분한 구석으로 
끌고가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단순히 그런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과거의 모습을 더듬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곧 
나타날 아름다운 '그림'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추한 장면을 먼저 
보여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었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성큼 저수지로 
접어들었다.
"여기예요 아니. 이런."
 나는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예기예요"라는 말은 이제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집니다. 하고 짐짓 자랑스럽게 내보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니, 
이런"이라는 전혀 반대의 말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깁니까."
 나는 뒤에서 누군가 혼자말처럼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등이 시린 
느낌이었다. 내가 "아니, 이런"이라고 한 말을 그는 들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두말할 것도 없이 저수지는 예전의 그 저수지가 아니었다.
 그냥 파랗다고 해서는 안 될, 굳이 말하자면 페르시안 블루에 가까운 염료가 
가득 차 찰랑이는 것 같다고 누군가 말했던 그 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저수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어지러운 검불들뿐이었다. 허허. 하는 
촬영기사의 혀 차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깁니까. 하고 말끝을 흐리는 
가운데 감출수 없이 틀렸구나 배어나오던 신음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엄청 변했군요. 보세요. 낚시 좌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여기까지 물이 
찼었는데."
  나는 낚시터 관리인이라도 되는 양 변명하고 있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좌대들  데군데 널빤지가 내려앉았거나 기우뚱 기울어 있었다. 저수지 
밑바닥이 풀밭이 되었었던 걸로 봐서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도 물은 
졸아붙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멀리 바라보니 구정물을 모아놓은 듯 얼마쯤의 
물이 가두어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농어가 뛰고 갈매기가 훨훨 날아 다니는, 
자 멋진 페르시안 블루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고는 나부터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곤란한데......" 
  디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렇겠죠?"
   는 어정쩡하게 말했다. 나 역시 낭패한 느낌이었으나. 그러나 순간적으로 
좀 전에 철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런 망가진 풍경이야말로 후일담에는 더 
걸맞은 게 아닌가 항변하는 마음이 뾰족하게 솟아나고 있었다. 젠장, 이 
친구들. 그럼 되는 걸 예쁜 걸로만 알고 있으니, 나는 갑자기 리얼리티가 
어쩌고 하며 한마디 불쑥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리얼리티랑 도대체 무엇일까. 나 자신이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하나의 의자가 있습니다. 플라톤과 러셀이 함께 의자를 
들고 나오는 데서 그들 철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웬 의자? 그런 근본적인 
원리를 끌어와 봤자 리얼리티까지 도달하려면 까마득할 뿐이었다.
 "어디 역 건물 같은 건 없을까요?"
  피디 다급하게 물어왔다. 내가 살던 무렵에도 역사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었고, 한둘 남아 있는 것도 말이 역사지 돌보지 않은 지 오래되어 
퇴락할 대로 퇴락해 있었다. 
 "그런게 있긴 있었는데"
  나는 도시 외곽을 벗어나 벌판을 향한 곳에 문짝도 없이 버려져 있는 낡은 
역사를 생각해냈다. 근처에 비슷한 형태로 민가들도 남아 있어서, 티브이에서 
박경리의 '토지'를 미니 시리즈로 찍을 때 그 세트장으로도 쓰였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들이 보게에 '그림'이 되는지는 나로서도 판단할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마른 저수지를 배경으로 또 한 장면을 찍고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그 역사 건물이 아직 그런대로나마 남아 있는지 
의문이 솟았다. 가게에 들러 담배를 사면서 그에 대해 묻자 주인은 "그야 
그대로 있겠지요"하고 당연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리 갑시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다시 봉고차에 올랐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서 도시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다 .늦가을의 도시는 무엇엔가 조바심을 치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예전 도로로 가는 길밖에 모른다고 혼잣말을 하자. 
일행 중의 누군가가 지도를 펴 들었다. 그 지도는 여전히 철도를 명확한 
선으로 그려놓고 있었다. 그곳도 공단이 들어서 있어서 큰 도로가 바둑판처럼 
새로 뚫려 있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에이디(AD)가 바로 가면 되겠군요. 
하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옛 도로는 기억에서보다 훨씬 초라하게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예전과 영판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차는 거칠 것 없이 
쌩쌩 달려갔다. 공장들이 번듯번듯 들어선 그 공단 자리는 전형적인 
시골마을들이 깃들여 있던 곳이었다. 정다운 언덕들과 공장들이 오히려 폐허의 
빈집들로 보여져, 나는 허깨비가 눈을 가리지 않나 머리를 흔들여보기까지 
했다.
 민통선 안의 모습도 폐허의 그것이었다. 전쟁 전에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은 여기저기 파괴되어 서 있는 건물들에 남아 있었으나, 왠지 
공소한 느낌이었다. 어떤 학교 자리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잡목숲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가운데서 특히 누에 들어와 박히는 것이 있었다. 
물가에 싱싱하게 잎사귀를 뽑아 올리고 있는 다란 목련 꽃송이처럼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있는 왜가리들이 그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 빛깔이 선명했다. 그야말로 '생명의 만남'을 운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삶의 흔적이 어딘가에서 안타까운 눈빛을 아직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 대신 절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 지도에 이런 길이 없는데" 
  갑자기 에이디가 차를 세웠다. 지도에 있는 대로 왔는데 다른 길이 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어느 공장의 경비원에게 역으로 가는 길을 물어 차를 
뒤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옛길로 들어서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길로 들어서자 나는 민통선 안에 다녀와서 만들었던 몇 개의 
문장으 떠올랐다.

  미나리아재비나 개구리자리는 양지바르고 습한 땅을 좋아한다.
  할미꽃이나 금낭화는 양지바르고 척박한 땅을 좋아한다.
  얼레지느 처녀지마는 반응달이고 비옥한 땅을 좋아한다.

  그뿐이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 '좋아한다'라는 제목 밑에 만들어진 
문장은 그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공단 길로 접어들고 나서부터 
내내 그 문장들은 내 머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이라고 말했지만, 
공단이 페허같다고 했던 말과 연관시켜 '좋아한다'의 뜻은 충분히 
감지되었으리라 믿는다.
  길이 드디어 왼쪽으로 구부러진 곳에서 나는 차를 멈추었다. 내게는 낯익은 
곳이었다. 예전에는 철도 건널목이 있던 곳이었다. 역이 있던 곳이었으므로 
집들도 여럿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그 집들을 돌아 나가면 역사가 
소금 창고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역은 제2차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소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철도라는 사실을 증언하며 염전의 한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저수지에서 그리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의 예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집 모퉁이를 돌아섰다.
 "틀렸어요. 여기도 없어졌어요"
  나는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그곳은 페허도 무엇도 아니었다. 붉은 
흙더미들이 높다랗게 쌓이고 돌들이 나뒹구는 공사 현장이었다. 그 옆으로 
반쯤 흙에 파묻힌 채 좁다란 철길이 초라하게 빠져나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뒤따라온 촬영팀들도 그저 한심한 표정들로 말이 없었다. 나는 내가 
마치 그 상황을 만든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민망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이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모두들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흙더미 사이로 사라져가는 철길을 바라보며 잠깐 엉뚱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간이역의 소년'

  열차가 바닷가를 지나가다가 멈추는 간이역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빨간 
유홍초 꽃이 덩굴 위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었다. 햇빛은 아직 눈부셨다. 
시커먼 화차들이 초가을의 눈부신 햇빛 속에도 어딘가 어둠이  실려 오고 
있다고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언제였던가. 나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여자가 있었다. 그 편지들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툰 사랑에 눈떠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주고받음 
가운데 우리는 왠지 이뤄질 수 없다는 절망감을 등짐처럼 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편지에는 밝음과 어두움의 감정이 그늘지곤 했다.
  편지는 전화보다 훨씬 더 고백적이어서 그 유혹은 더 길고 더 깊다. 편지 
글의 행간에 깃들여 있는, 아무도 모를 속삭임 소리를 나만이 듣게 될 무렵 
사랑은 싹트고, 싹트면 저 저잣거리를 징을 치며 지나가는 굴뚝 청소부가 둘둘 
말아 어깨에 짊어진 긴 장대보다도 더 길게 외로운 희열이 가을볕 사이로 
지나가는 것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고, 우리는 그 시골 
간이역에 도착했었다. 역의 반대편으로 철길을 건너가면 갯벌 사이에 도랑이 
흐르고 용담 꽃망울같이 함초롬한 바다로 열리는 길이 있었다. 도마뱀들이, 
재재바르며 가을볕에 마지막 해바라기로 찬 몸을 뎁혀, 겨울 동안 캄캄하고 
차디찬 겨울잠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는 그 길을 우리는 말없이 걸어갔다. 
바다가 더 가까워지면 달랑게들도 눈망울을 뭍으로 반짝이며 슬픔을 
견주려는가, 하얀 바닷길에 연두색 풀무치가 날아 그녀의 흰 옷깃을 스쳤다. 
그 날개빛에 바다도 연두색으로 눈을 열고 있었다.
  송장메뚜기가 길라잡이 노릇을 하며 날기 얼마쯤, 나무 한 그루가 滿場처럼 
꼿혀 있는 둔덕이 나타났다. 아닌게아니라 누구의 무덤도 하나 허물어져가며 
사람 발길이라곤 끊긴 갯벌을 지켜고 있었다. 그녀가 그 나무 옆을 손으로 
가리켰다. 비릿한 갯내음이 풀빛이 어려 마음은 이역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무거운 예감이 흘렀다. 먼데서 열차가 
잘가락거리며 레일을 밟는 소리가 해조음처럼 들려왔다. 이어서 그녀의 희고 
긴, 긴 손가락이 내게로 옮겨 들어왔다. 그 손에는 한 장의 편지가 접혀 
있었다. 그녀의 편지는 고독한 성채에서 날려보내는 비둘기의 발목에 감겨 
있는 것과 같이 늘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었었다. 나는 그 성채에 
들어갈 수 없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라고 그 새 발자국 같은 글씨는 말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편지들을 거쳐서 그녀가 내게 손수 전하고자 하는 편지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까. 나는 자뭇 긴장했고, 떨렸다. 나는 묵묵히 
종이 쪽지를 펼쳤다.

  우린 이제 더 이상 만나선 안 되겠어

  그런 다음, 우리는 그 바닷가를 떠났다. 나는 그날 그 편지를 손에 쥔 채로 
저녁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완행열차의 차창으로 달빛이 
유난히도 창백했다는 기억은 내내 나 자신조차 창백하게 만했다.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선 안 되겠어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거야 늘 행복을 비는 마음 변함없음을 약속하면서
  그 가을에 이별의 편지는 그렇게 직접 전달되었다. 사실 나는 그와 같은 
이별을 언제부터인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돌파구도 없어 
보였다. 왜였을까, 그러나 젊은 날엔 그 나름의 절망적인 예단이 또한 흔히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근거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느 늦은 가을날, 내게 
다시 나타난 그녀는 이제야 뒤늦게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25년 
만에 내미는 손은 여전히 희고 길었다.
  바닷가로 향한 그 길은 희고 길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열려 있다. 이별을 
향한 희디희고 길고 긴 여정이다. 이별을 향한 길이기에 나는 아직도 여기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근거가 어디 있는지 몰라도, 이별이란 우리 인생의 
떨쳐버릴 수 없는 그림자이기에

  그 시골 간이역에서처럼 흙더미 속에서 나온 철길은 바닷가를 향하고 
있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이젠 무엇이 있든 없든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서 
이리저리 찾아볼 수밖에 없다고 결연히 말했다. 안내자로서의 내 임무는 
끝났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그날 
촬영도 끝장인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달리 능동적으로 변해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림'을 찾아 바삐 차를 몰았다. 산 언덕의 당집도 거쳤고, 해안의 
철조망도 거쳤고, 본디 꽃우물[花井]이라고 이름지어졌으나 어느덧 곤우물로 
변한 마을의 우물도 거쳤고, 산등성이의 허물어진 돌성도 거쳤다. 그러다 보니 
몇 차례나 철길을 지나게도 되어 그 페허위에서도 카메라를 돌렸다. 모두들 
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마음이 혼연일체되어 우리들의 움직임에는 모종의 
비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었다. 마른 갈대들이 우거진 
수로 옆에서도, 동부 콩과 팥을 멍석에 널어 말리고 잇는 농가 앞에서도, 
철길과 바다가 함께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도, 까마귀가 많은 논밭 
앞에서도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이곳은 마치 상상 속의 새들이 어디선가 
날아와 날개칠 그런 곳 같아 보입니다. 보십시오, 저 까마귀들을 마이크를 
꽂고 말하는 내게 그 까마귀들이 또한 그리핀으로 보였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으리라 나는 믿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닿은 곳이 폐염전이었다. 그곳까지는, 염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차가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길을 지나야 했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나무다리가 반쯤 허물어져 있기도 했다. 값싼 수입 천일염에 밀려 염전들이 
하나둘 문을 닫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길으이 끊어진 
곳에 그나마 제대로 형체를 갖추고 있는 염전이 남아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계절은 계절이니 만큼 논 바닥은 물기 없이 바싹 말라 있었고, 
둑은 허물어진 곳도 있었다. 건너편 둔덕으로 어느새 빨갛게 물든 갯풀들이 
무리를 지어 늦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그림'앞에서는 피디의 얼굴에도 
비교적 안도감이 엿보였다.
  어디가 좋을까 이리저리 살피며 가고 있던 중에 나는 문득 그에게 제안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즉, 내가 소금 굽는 염부처럼 염전 
가운데 서서 '오프닝 멘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거 좋군요. 해주신다면야."
  그는 흔쾌히 받았다. 내 제안은 단순히 말만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 아직도 머물러 살고 있는 염부의 지붕으로 가서 고무장화를 
신고, 소금물을 끌고 미는 고무래까지 들겠다고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제안대로 진행되었다. 비록 복장은 내 입성 그대로였지만 나는 낡은 
고무장화를 신고 고무래를 들고 염전으로 행했다. 말 그대로 '오프닝 
멘트'니까 간단히 해도 된다고 피디는 나를 안심시켰다. 멀리 소금 창고가 
보이고 수차가 서 있는 곳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피디가 손짓으로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기 오래 전부터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공룡들이나 
오갔을 그런 무렵부터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며 여기까지 이어져온 길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 길이 이제 끊어지고 있다. 소금을 굽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이별이라는 말만 남은 풍경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열차도 이별을 
고한 지 어언 1년, 그러나  아득한 곳에서 우리는 다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난 사람 어김없이 헤어지며, 살아 있는 우리 어김없이 죽는 말을 
누가 굳이 하고 있는가, 길은 언제나 그리움으로 생명의 만남을 속삭이는데 그 
만남 가운데 이미 떠남이 깃들여 있다고 누가 굳이 일깨우는가 길 이별 나는 
어느덧 목이 메어 목소리에 마치 소금기가 배어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멀리서 피디인지 에이디인지 "됐어요, 그만하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고 있었다.

      심사평
    빛 속에 드러난 삶과 죽음의 현장성
  김윤식(서울대교수)
    시간과 빛의 흐름
  김화영(고려대교수)
    빛의 갈피에 숨어 있는 어둠
  박완서(소설가)

      수상소감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윤대녕

    제 43회 현대문학상 심사평
  빛속에 드러난 삶과 죽음의 현장성
  김윤식
  윤대녕 씨의 '빛의 걸음걸이'엔 주인공이 없다. 5인 가족이 살았던 건평 
30평의 평면도뿐이다. 이 평면도를 입체도로 바꾸기가 소설 쓰기의 일차 
작업이었다. 부(64세), 모(62세), 큰딸(38세), 막내(33세), 그리고 중간이 
'나'(36세)의 가족이 그것. 이 입체도 속에 5인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직은 무엇이었을까. 벽을 만들기가 그것. 벽을 만드는 질료는 
무엇이었을까. 작가 윤씨의 솜씨가 여기서 한 번 빛났다. 시멘트와 흙으로 된 
질료가 아니라 투명한 질료였다. 빛깔로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빛깔로 
된 벽에 둘러싸인 5인 가족이기에, 우주 속에 노출되면서 그 누구에게도 
차단되어 있지 않겠는가. 이만해도 놀라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빛깔로 에워싸인 이 30평의 입체도면에다 이번엔 시간을 
통과시키고 있지 않겠는가. 빛깔이 시간과 숨바꼭질하고 있는 장면이 은밀히 
연출되고 있었다. 사람이 있어, 이 30평짜리 입체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과연 
무엇과 만날 수 있을가. 삶과 죽음이 자리바꿈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할 
것이다. 36세에 귀신을 본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신발이 매우매우 
떨어진다'라고 혼자 중얼거려도 되지 않겠는가. 이만하면 언젠가 향기를 통해 
드러난 삶과 죽음의 현장성, 소리를 통해 드러나 삶과 죽음의 현장성, 그리고 
감촉을 통해 본 삶과 죽음의 현장성을 이 나라 문학에서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시간과 빛의 흐름
  김화영
  심사위원 전원의 합의에 의하여 수상작으로 선정된 윤대녕의 '빛의 
걸음걸이'는 무엇보다도 인상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매우 시적인 작품이다.
  처음부터 제목이 암시하고 잇듯이 작품 전편에 걸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사건 그 자체보다는 미묘한 빛의 흐름이다. 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고요한 서술이 독자의 마음속에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바로 '저 
고요한 빛의 잔주름' '한 자락의 바람' '공기의 버성김' '담을 타넘어 가는 밤' 
같은 아주 미세한 기미들의 변화와 '흐름'을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의미 
자체를 '흐르게'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흐름ㅇ르 통하여 우리는 일종의 
물화된 시간이 살같에 와 닿는 듯한 전율의 맛본다. 그 옅으나 어딘가 
위태로운 느낌인 흐름을 따라가면 무엇에 이르게 될까? 그것은 무^5.23^의미의 
완만한 춤, 억압된 사랑, 거기서 오는 결핍감, 혹은 '흰 고무신'으로 귀착되는 
죽음 같은 것이리라.
  이야기는 6월 7일 토요일, 아침부터 어머니가 운명하는 밤까지 하루 동안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변화하는 빛과 더불어 전개되고 있다. 무대는 화자가 
도면까지 그려 보이는 고향의 '남향집', 그리고 그 무대에 부모와 세 자녀, 
연탄집 박씨 아저씨, 처녀 할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 그 자체가 
등장한다. 그것도 봄이 끝나고 초여름으로 들어선 6월 초순, '크레파스를 마구 
분질러놓은 것처럼 화사하게 튀며 서로 엉키는' 빛이다. 여기서 화자의 
글쓰기는 빛의 화가인 모네의 붓질과 만난다. 과연 몇 차례에 걸쳐서 모네가 
암시된다. 여동생이 쓰던 동쪽방에는 '그녀가 중학교 때 걸어놓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복제 그림이 오랜 세월 문장처럼 걸려' 있는가 하면 
화단은 빛을 따라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리하여 실제로 모네의 붓질은 이 작품의 '문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모네에게처럼 윤대녕에게도 글쓰기 자체, 즉 형식이 곧 의미다. 아니 
모네에게 형식을 이루는 붓질의 운동이 곧 그림이듯이 이 작가에게도 
글쓰기에 의한 이미지의 흐름과 율동이 곧 의미의 궤적이다. 그뿐이 아니다. 
다소 동떨어진 듯한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이 병치되어 하나의 문학적 
반추상화를 이루는 것 또한 분산된 터치들의 병치를 통해 전체적 인상을 
만들어내는 모네의 화법을 연상시킨다. 이 분산된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시간과 빛의 흐름이다.
  그러나 빛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방의 
창문'과 화자의 시선, 그리고 화단, 부엌 장독대, 담벼락 같은 구상적 공간이 
있어야 하듯이 삶의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각기 하나씩의 방을 차지한 
인물들이 있어야 한다. 첫애를 낳고 동쪽 방에 내려와 있는 여동생, 페병에 
걸려 이혼한 누나, 안방에 누워 앓다가 운명하는 어머니, 정해진 방이 없는 듯 
마루와 마당을 서성이는 아버지는 각기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인간의 
행로를 보여준다. 이렇게 세 여성과 아버지가 드러내 보이는 생로병사의 
과정이란 어쩌면 아침빛으로부터 마침내 '이불보 같은 어둠이 내려앉는' 
밤까지의 덧없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과연 여동생에게 '그 잠깐은 
무려 삼십이 년의 긴 세월이었다'. 한편 이혼한 누나에게 지나온 긴 
결혼생활은 공원에 서 있던 잠깐 동안에 불과하다. '휴일의 공원에서 웬 낯 
모르는 사람이 쥐어주고 간 고무 풍선을 얼떨결에 받아들고 무려 십년이나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데 공원문을 닫을 때가 되자 어디선가 
불쑥 주인이 나타나 풍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어머니의 죽음은 
'해바라기 지붕을 밟고지나 마당과 화단을 밟고지나 장독대를 밟고지나 
상기는 담을 타넘고 가고 있는' 밤이 지나는 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화자는 
말하는 것일까, '내게는 꿈이 생시요 생시가 꿈이다'. 꿈도 빛나는 여름 
하룻날의 꿈이다.
  그러나 '빛의 걸음걸이'는 단순한 빛의 흐름을 그런 덧없음의 노래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마치 빛의 결정체인 양 '하얀 신발'이 신비스러운 광채를 
발한다. 그것은 비교적 담담한 객관적 서술체 속에서 마치 실수로 고삐가 풀린 
듯 간간이 삽입된 2인칭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때 넌 이학년이었어.'-'아 
그리고 네 붉은 입술!'-'너는 지금도 모네의 붓질 속에 숨어 잇겠지. 그 
기묘한 빛의 그림자 속에. 이 벙어리 여자야.'-'나는 그녀의 벗은 등 너머로 
열대 장미와 야자수를 훔쳐보며 줄곧 동쪽 방의 내 연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발리에서 만난 여자 수잔의 존재 뒤에는 '동쪽 방의 내 연인'에 대한 위험한 
사랑과 욕망이 꼭꼭 숨어 있다. 그 금지된 욕망의 물살은 마침내 수잔의 '하얀 
신발'로부터 여동생의 '흰 운동화'를 거쳐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은 '흰 
고무신'에 가 닿으면서 매혹적이고 두려운 꿈처럼 빛난다.
  이 짤막하고 아름답고 단정하게 슬픈 단편을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나는모네의 고즈넉한 그림 '점심'을 줄곧 연상했따. 대낮의 즐거운 식사가 끝나 
뒤 두여인이 아무도 없는 정원을 꿈속에서처럼 아주 느릿느릿하게 산책한다. 
그림 속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밀짚모자나 벤치 위에 
오두마니 놓은 양산처럼, 소설 속 '귀신도 속을 모를'(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여동생의 흰 운동화 세 켤레와 새벽에 죽은 어머니 머리맡의 흰 고무신이 
오래도록 남는다.

    빛의 갈피에 숨어 있는 어둠
  박완서
  윤대녕의 단편은 아름답다. 신인이었을 적에도 신인 특유의 멋 부리기나 
치기라는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게 아름다웠다. '빛의 걸음걸이'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작품의 무대인 작은 남향집의 평면도까지 그려놓고 그 집을 
지나가는 햇빛의 행방을 인상파 화가처럼 집요하게 뒤쫓고 있다. 평면도도 
독자로 하여금 그 집의 방방을 지나가는 햇빛의 각도뿐 아니라, 그 집이 새로 
생겨났을 때부터 다 낡아빠진 현재까지의 시간을 관통하는 의식의 섬광까지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와 더불어 뒤쫓게 하려는 용의주도한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정작 뒤쫓고 있는 것은 빛의 갈피에 숨어 있는 어둠(죽음)의 
예감이다. 그가 보여주는 죽음의 실체는 섬뜩하고 끔찍하다. 추악하기조차 
하다. 그가 돌연 드러내어 보여준 언챙이 노파처럼이나.
  이 작품 속에서 구태여 햇빛을 따라다니지 않고도 밝게 빛나는 부분은 아마 
'발리 서머 호텔'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데가 현실적으로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관념으로야 열대지방에 눈사람의 만들의 세워놓지 못할 것도 없다.
  윤대녕의 단편을 읽을 때마다 나는 60년대에 이제하의 단편을 읽을 때하고 
유사한 느낌을 맛보곤 했다. 그건 결코 윤대녕과 이제하의 소설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익명으로 딴 소설들하고 섞어놓아도 이 작가의 것은 정확하게 
골라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유니크함 때문이다.
  윤대녕의 소설을 좋게 읽긴 했지만 이번 심사에서 수상작으로 밀고 싶진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써온 중단편에 비해서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아서였다. 나는 고종석의 '서유기', 최인석의 '나를 사랑한 페인' 등을 
생각하고 심사에 임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딴 두 분 심사위원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다. 선입관이란, 그게 아무리 좋은 쪽으로 기운 선입관이라 해도 
공정한 판단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감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윤대녕
  겨울 여행길에 막 오르려던 날에 혼자 앉아 있는 방에서 수상을 뜻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방과 길. 중간 별 이음새 없이 이 두 단어 속에 자신을 
가두고 오래 흐린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던 터라 불쑥 당황했던 게 사실입니다.
  뜨을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저는 내처 짐을 꾸려 방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접도구역을 지나치면서 설천, 흰 고무신 한 짝이 
크게 걸려 있는 청천, 언제고 사무치게 마음을 부르는 먼데 첩첩 산, 부혹은 
모 혹은 자를 안개시정거리에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방과 길.
  그 사이에 아프고 팽팽하게 걸려 있는 풍경의 현재와 그 의미. 앞으로도 
내내 숨죽이고 사는 법을 배워야겠지만 그동안 어쩐지 저는 그 것들에 의지해 
살고 있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저 길바닥에 깔려 있는 발자국처럼 
무수한 사람들의 침묵과 상처. 그것을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글쓰기의 
이 비정. 그런데다 제 검은 등만 하나 보이는 내가 무서운 방.
  낙산사 홍련암, 법주사 대웅전 마룻바닥에 엎드려 몇 번이고 손바닥을 
오므렸다 펴면서 그래서 저는 빌었습니다. 제 글쓰기의 업을 사해주십사고 
말입니다. 엄살이 되어선 안 되겠지만 이 비정을 이겨내는 갱신의 글쓰기가 제 
앞에 놓여 있음을 이제 뚜렷이 알겠습니다. 유가에 나오는 이 한 말씀. 
수체해오유미변혜 비록 몸이 부서진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해주신 뜻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디 좋은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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