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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윤대녕 달의 지평선 2

by Casey,Riley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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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지평선 2
    윤대녕
    
 

    12. 파리의 우울  
  나는 비가 내리는 베란다에 나가 새벽녘까지 서 있었다.  송두리째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
처럼, 사막 한가운데 버려져 있는 고장난 자동차처럼, 거기  가시만 한 그루 선인장처럼. 그
런데도 이상스레 고통이란 게 느껴졌다. 손톱 끝에서부터 발톱  끝까지 온몸 구석구석이 죄 
아파서 도무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움직인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눈동
자만 슬쩍 돌려도 안에서 지뢰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비안개 속에서 떨고 있는 나트륨 
등과 상가의 쇼윈도와 불꺼진 아파트의 창문과 이따금씩 물을 튀기며 과속으로 지나가고 있
는 도로의 차들을 멀뚱하게 내려다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
었다. 그게 낯선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까이 마주앉아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긴 얘기를 나
누고 싶었다. 나트륨등에게, 쇼윈도 속의 마네킹에게, 불  꺼진 창문에, 지나가는 차들에, 비
에, 그리고 너에게. 나는 넋이 나간 채 거실로 들어와 여행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가지
와 세면 도구와 CD와 두어 권의 책과 탁상용 알람 시계와 쓰다 만 일기장과 선글라스와 카
메라와 로션과 그리고 담배 몇 갑. 사람이 살면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기껏해야 여행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게 마련이라는 것을 어디론가 떠날 때마다 늘 깨닫게 된다. 생각만큼 그렇
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한데도 우리는 마음의  집에 무얼 그토록 많이 들
여놓고 살아가는 것일까. 때로 창고가 필요해서 마당을 없애기도 하지 않는가. 가방을  꾸려 
놓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이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잇는 사람이 지사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뼈아픈 외로움이  시시각각으로 나를 차갑게 에워싸
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른 다섯 살의 이 사내는 마침내 울고 싶어졌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눈물마저 없다면 어떻게 이 황량한 세상을 적시고 살아
간단 말인가. 외로움 우주의 한 공간에서 그렇게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멀리서 깜박깜박 신
호를 보내 왔다. 허나 그것이 몇억  년 전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빛인가를 알  수 없어 나는 
응답 신호를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화  벨 소리였다. 그 소리는 약 일 분간이나  길게 
울리다가 자동으로 끊어져 버렸다. 그런 다음 몇 분 후 신호음이 다시 울려 왔다. 아, 몇 분 
거리에서 보내 오는 신호군, 이라고 입엣말로 중얼거리며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수
연이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새벽 5시. 날로 밝아 올  시각이었다. 웬일이냐고 묻자 그녀
가 불안스럽게 떠는 소리로 더듬거렸다.  "혹시 울고 있었어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다.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었
어." 잠이 덜 깬 소리로 그녀가 되물어 왔다. 다만 어떤 미지의 한 존재라고만  느껴지는 익
숙한 중성의 목소리로. 어느덧 그 소리는 퍽이나 귀에 익어 있었다. "새벽에  가방을 챙기고 
있었단 말이죠. 파리로 출발한다는 날은 내일일 텐데요." 내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왠지 요령껏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지상에 아는 이가 없으니 서둘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잠결인데도 이 눈치 빠
른 존재는 내 속내를 훤히 짚어 내고 있었다. 그녀는 우선 아까 했던 질문부터 차근차근 되
풀이했다. "글세, 아무튼 울고 있었나요?"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지 꼭 대답을 들어야겠
다는 투였다. 하지만 스물네 살의  여자한테 서른 다섯 살의 남자가  새벽에 울고 있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남아 있다면 그것도 가끔 해볼 만한  일이겠지." 에둘러서 되
받고 나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꿈을 꿨어요. 얼굴은 잘  모르겠는데 한 
남자가 지붕 꼭대기에서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꿈 말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잠이 깼죠."     "..." 
  "아 참, 그리고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어요." 이 말은  그녀가 부러 지어낸 
것일 터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내가 우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연한 생각
에 나는 농조로 은근히 얼버무렸다. "<베를린 천사의 시>란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한데 어떻게 그이가 새벽에 울고 있다는 걸 알았지?" "관심이요." 관심, 이라고 그녀는 냉큼 
되받았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마음 말예요. 그걸 갖고 있으면 상대가 무얼 하고 있는지 어
떤 상태에 있는지 알게 돼요. 진정한 관심이란 마녀의 유리구슬 같은 거예요. 물론 너무  가
까이 있거나 너무 멀리 있으면 보이지 않게 되죠." 그녀는 계속해서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까도 한 얘기지만 내일 떠나면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늘 안녕 하고 누
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사라반드도 황금 마스크도 말예요."
  나는 그녀와 가까운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에선 보이지 않는
다고 그녀가 조금 전에 말했었다. "황금 마스크, 가방 하나에 모든 게 다 들어간다고 생각하
지 말아요. 가방을 챙겨 쑥 빠져나가면 흔적이 남지 않을 것 같지만 그건 절대 그렇지가 않
아요. 아무리 외로운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흔자라고 자만하지 말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존
재들이 자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당신은 또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
고 있잖아요. 그게 누구라는 걸 모르고 있다고 해서 그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지금
부터라도 그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 주세요." 내가 누군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그
렇다면 그 사람은 내가 전에 이미 만났던 사람인가 아니면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람인가. "그
건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
는 사실에요." 
  그녀는 내게 아직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언젠
가 그대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당신은 혼자 살 사람이 못 된다고.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살 사람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그러나 간곡히 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제 신촌의 오래된 정거장에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녀는 내가 집으로 돌아가 혼자 
외로워하리라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관심.  그렇구나. 그녀에게서 이따금씩 받
았던 놀라운 투시 능력은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다만 무의식을 
감지해 내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믿고 있던 그것이 사실은 타자에 대한 순정한 태도와 관심
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이제 지붕 꼭대기에서 내려와 잠들  수 있겠냐고 그녀가 소곤거렸
다. "미리 가방을 쌌다 해도 단 하루를 더 살기 위해서 당신은 다시 가방을 풀어야 할 거예
요."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세수도  하고 면도도 하고 속옷도  갈아입어야 하는 것이다. 또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좀더  자둬야겠다고 말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뭔가 할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그쯤에서 말을  줄이는 게 나도 좋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어디로 떠날 것인지를 얘기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수연
을 생각하며 나는 턱수염이 근사한 브람스를 틀어 놓고 날이 밝아 올때까지 비를 바라보며 
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토록  타인과 동떨어진 존재라고 믿어 왔던  내가 사실은 어떤 
이의 마음 속에 어렴풋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날 아침 나는 방송국 스태프
들과 김포공항 국제선 2청사에서 만나 파리행 12시 비행기를  올라탔다. 많은 질문과 또 눈
에 보이지 않는 대답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남겨 둔 채.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을 지
나 파리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내내 에드빈 피셔가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전곡을 들으며 눈
을 감고 있었다. 때때로 기내식이 배달돼 눈을 뜨게 되면 포도주만 마시고 또 잠도 아닌 꿈
도 아닌 아련한 상태에 나는 깊이 빠져 있었다.  
  언젠가 나는 누구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나는 하늘에 떠 있을 때 가장 마음이 고요해. 지
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추락한다 해도 불구로 살아날 가망성 없이 깨끗하게 산화할 수 
있어서 난 비행기가 좋아. 그래서 한번 기름을 넣으면 백년동안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는 비
행기는 없나 뭐 그런 생각을 이따금씩 하게 되지. 우주선을 타라고?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밤하늘을 떠돌아다니고 싶군.  그러다 일생이 끝나는 순간
에 방출돼 무중력의 우주 속에 영원히 놓여나고 싶어. 거긴  늘 푸르고 적막해서 사람들 싸
우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잖아. 파리에 도착해서 일행이 간 곳은 몽마르트르 부근에 있는 
중급호텔이었다. 석회암으로 지은 오래된 건물들이 칙칙하게  밀집해 있는 그곳에 들자마자 
곧 저녁이 되었고 시차 적응을 위해 자정까지 버티다 자라는 연출자의 말이 있었지만 벌써 
몇몇은 저녁을 먹자마자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촬영 장소는 몽마르트르,  볼로슈 숲, 에펠 
탑, 미라보 다리, 베르사유 궁전 순이었다. 보름  일정으로 왔지만 실제 촬영 기간은 십  일, 
거기서 서울 파리 간 왕복 시간을 제하고 나면 이삼 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물론 그 기
간에 파리에 주재하는 PD특파원과 뉴스 특파원들과의 의례적인 술자리 계획이 있었으나 어
쨌든 하루 이틀은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이었다. 시차 적응을  핑계로 술을 마시려는 
몇몇 일행을 따라 나는 밖으로 나갔다. 음습한 거리엔 몸을  파는 여자들이 가끔 손짓을 하
고 있었고 골목 어귀마다 문을 연 허름한 카페들이 보였다.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니 두터운 
구름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 첫날이 내게는 무거운 피로와 우울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조연출자
와 그가 끌고 나온 이십대의 코디네이터와 다른  한 명의 동료 연기자와 함께 몰려간 곳은 
남녀가 벗고 나와 춤을 추고 또 섹스까지 하는 술집이었다.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
나 싶어 나는 맥주만 벌컥벌컥 마시다 먼저 일어나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나는 자정께 
피렌체로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는가. 아니면 외출 중인가.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파
리에 와 있다고 알리려는 게  아니라 그저 통화를 했으면 싶었던  것이다. 피렌체는 여기서 
먼 곳이었다. 여행철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미리 항공사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쉽게 다
녀올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파리에 와서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도 의심스러웠다. 그녀도 그걸 원할 리 없을 텐데 말이다. 그녀와 통화가 된 것은 촬
영 팀이 몽마르트르에서 볼로뉴 숲  근처로 장비를 옮겨 간 날이었다.  파리에서 사 일째가 
되던 날이기도 했다.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촬영 일정에 제대로 전화를 걸 시간조
차 없었던 것이다. 스태프들도 촬영이 끝나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방으로 서둘러 올라
가 잠을 자두기에 급급했다. 숨기려 했지만 그녀는 내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걸 이내 알아
차렸다. 당황했을 텐데 그녀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소리로 또 말끔한 태도로 그간의 내 소식
을 물어 왔다. 그렇게밖에는 물을 수 없었을테고 나 또한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할 수밖에 없
었다. 늘 그랬듯이 또박또박 음절이 분명한  말투였다. 어쩔 수 없이 남이라는 경계를  두고 
전해져 오는 소리이기도 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더듬더듬  준비되지 않았던 말을 늘어놓았
다. "궁금해서 전화해 봤다. 피렌체로 옮겨 간 것도 얼마 전에야 알았군." "잘살아요." "어쩐
지 쉽게 연락이 되지 않더군." "이해할수 있는 일이에요. 남이 된 지 오래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엔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럼 견고해진 것인가. 안부를 묻지 
않아도 되는가. 아니, 물어서는 안 되는 관계인가. 전생의 아내. 서글픈 이름이었다. 한참 입
을 봉화고 있자 그녀가 남이라는 의미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그것은 내 침묵에 대한 설
명이기도 했다. "전화를 건 게 아주 잘못됐다는 건 아녜요. 하지만 그것이 예의나 도리에 어
긋나는 일은 아닌지 좀더 생각해 봐야 했어요." "..." "연락을  하지 않은 게 더 좋았을지 몰
라요." 전생의 기억이 있는 사람끼리는 생면부지인 사람보다 더 낯설게  되는 법인가. "아직
도 그걸 모르고 있었다면 당신은 여전히 사람살이의 비정함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하긴 늘 
문밖에서 서성대는 사람이니 안의 사정을 알 리 없겠죠." 문밖에서 서성대는 사람.  결혼 생
활 중에도 들은 적이 있는 소리였다. 할말을 잃고 있다가  나는 철하가 10월에 결혼할 거라
는 소식을 그녀에게 전했다. "이미 들었어요. 들었지만 그 역시 당신과 나눌  얘기는 아니라
고 생각해요. 당신이 비록 그 사람과 친구라고 하더라도 말예요." 그런가, 무슨 생각을 했음
인지 그녀가 앞질러 이런 말을 했다. "행여 여기 오실 생각 하지 말아요.
  혼자 사는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지 말란  얘기예요. 또 반드시 혼자도 아니구요."  누군가 
사람이 생긴 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삼 년 동안 외국에 있었는데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부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도 없겠지.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 말을 들으니 마음 한편으로 안심
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에 대한 마음의 짐을 다시 한번 벗어 버리기 위해 확인 
전화를 걸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러한 자문에는 쉽게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내 끊어지리라 생각했던 전화는 십 분쯤 더 계속됐다. "오서 좋은 사람 만나 잘살고 있다는 
소식 듣게 해줘요. 그것이 저에 대한  당신의 남은 도리이자 예의일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당신한테 조금의 부담도 가지고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런가. "참고로  말하면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긴 하지만 가까운 사람에 대한 관심도 소중함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앞으론 부디 
그런 마음을 가져 보세요. 다시 잘못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이 말은  이혼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가 내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때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이제와서  나는 
그렇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이미 포기하고 있었을 터이었다. 한데 내가  정
말 가까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자문하고 있는 사이 그
녀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관심 있어 하지 않았어요. 늘 자신만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했
죠. 그래서 또 늘 자신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그렇군." 나는 한숨 섞인 소리
로 대꾸였다.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뜸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을 
잘 챙기는 사람도 아니었구요." "..." "지금도 여전히 그런지요." "..." "이직도 하나인  하나보
다 둘인 하나를 못 견뎌 하는 사람인가요? 또 누구와 함께 있으면 혼자가 아닌 척을 하느라
고 끙끙거리나요?" "이제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자기를 발견해 봐요. 겉으로만 친절한 것은 
동시에 상대에 대한 접근을 불허한다는 표시라는 걸 알아야 해요. 그나마 시간이 흘러서 이
런 말도 해주는 거예요." 이혼한 지 삼 년이 지난  다음에 그것도 각자 타국에서 이뤄진 최
초의 통화에서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거기엔 결혼 생활  중에도 하지 않았던 말이 많
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타자가 되어 내게 진심인지 진실인지 모를 말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타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빗나
갔건 어느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길들을 가고 있었으므로 그때는 더 이상 상대를 아프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많은 날들 침침한 거실 소파에 마주앉아 숱한 얘기들을 
나눴지만 은빈이 지금처럼 명료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
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턱대고 전화를 한  것이 잘못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다만 안부가 묻고 싶었다고 해도  결국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일
이 된 것 같았다. 나는 파리에서의 일정을 대충 얘기해  주고는 열흘 후에는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딱히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쯤은 얘기해 두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서였다. "늘 건강하길 바라고 이왕 하는 일이니 그림을 통해 자기 빛을 보았으면 해." "그런 
광복절 축사 같은 소리는 자신에게나 하세요. 이만 끊어요." 다음날 새벽부터 촬영이 있었지
만 나는 밖으로 나갔다. 볼로뉴 숲 앞에서 택시를 타고 에펠 탑  근처에 내려 나는 센 강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밤인데도  강가는 여행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어디를 가나 
번요한 불빛에 허전함을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에펠 탑의 중앙 전광판에  'J-882'라는 글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서기 2000년이 882일 남았다는 뜻이란 얘기였다. 그때면  나도 마흔 가까이 되어 인
생의 후반을 생각할 때였다. 그러한데 나는 지금 이국의  도시 한구석을 속절없이 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낯선 사거리의 야외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새삼스럽게 지나온 내 
인생을 반추해 보고 있었다. 스무 살까지는 모든 게  의외여서 어리둥절한 시기였고 서른까
지는 세상이라는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시기였고 그 이후의 삶은 살아온 듯했다. 광복이라고 
은빈이 말했지만 이제는 자신에게서 빛을 찾지 못하면 줄곧 폐쇄된 석탄광처럼 살아갈 수밖
에 없는 시점에 이르러 있었다. 카페 안에서는 이브 시몽의  노래가 끝나고 마침 쳇 베이커
의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실연의 고배를 마신 뒤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며 노래를 불렀
던 쳇 베이커. 하지만 그는 쉰 살을 갓 넘기고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투신 자살했다. 남
들은 그걸 신화 같은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 시대에는 남의 고통이 신화가 
되는가. 일찌감치 문을 닫는 카페를 나와 나는 택시 승강장을 찾으려고 걸어왔던 길을 더듬
어 내려갔다. 거리엔 그새 한 점  두 점 불빛이 꺼져 가고 있었고  여행객들도 다들 숙소로 
돌아갔는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서른 다섯 살의 어느 밤에 이국의 한 횡단
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십자가에 걸려 있는 웬 시커먼 물체가 
침침한 눈에 비쳐 들었다. 그것은 에펠  탑 중앙 전광판 아래 벌거벗은 채  매달려 있는 한 
사내의 형상이었다. 잘못 보았는가 싶었지만 역시 웬 사내가 철탑에  두 손이 묶인 채로 대
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나서 나는 옆에  서 있던 두어 사람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그런 
다음 나는 넋이 나간 채 에펠탑이 있는 방향으로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무래도 
눈에 익은 사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한데 갑자기 거리의 차들과 집들과 문을 닫고 있
는 상점들이 눈에서 하나 둘씩 하얗게 지워지면서 어느덧 나는 황량한 벌판을 걸어가고 있
었다. 먼데서 폭풍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 오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312m의 철탑과 거
기 한가운데 매달려 신음하고 있는 사내뿐이었다. 어디선가 책을  태우고 있는 듯한 냄새를 
줄창 맡으며 나는 바벨 탑인지 에펠탑인지를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만 옮겨 놓고 있었다. 무
언가 잘못됐다 싶었지만 이미 출구가 없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달만 하나 둥그랗게 떠 있는 하늘을 퀭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내리덮은 
대지에 서 있는 철탑. 하지만 그놈의  탑은 아무리 걸어도 좀처럼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탑 
중앙에 묶여 있는 사내의 신음만 귀에 점점 커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한 찰나 사내의 목
소리가 불현 듯 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곧 탑이 무너져 내리고 밤의 대지도 사라지리라." 그게 누구를 향해 외치는 소리인지 모
른 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껏 귀를 곧추세웠다. 겨드랑이에서 진득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일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때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막막한 도시의 어둠뿐이었다. 
"그대는 이제 사람의 마을로 돌아가야 할 때." 온몸이 싸늘히 굳어 버린 채 나는 떨리는 소
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몰라."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의 가장 가까운  저쪽." 
가장 가까운 저쪽이 어디인가. "그대가 어제 버리고 떠나온 곳." 나는 탑에  걸려 있는 달을 
중심 삼아 먼지에 발을 푹푹 빠뜨리며 백야의 벌판을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어제 떠나왔던 
곳을 찾아서. 단 하나의 낯익은 자를 만나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에펠 탑 아래에 
와 있었다. 탑 주변에는 배낭  여행을 온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점상들도 다 철수해서  사위는 포로 수용소를 연상케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소리 없이 끼여 앉아 고개를 뒤로 꺾고 에펠 탑 중앙을 올려다보았
다. 그러나 전광판 밑에 매달려 신음하고 있던 사내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
다. 누구였을까. 내게 그렇게 소리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사내. 아직도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 나를 부르고 있던 사내.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를 돌아오는 동안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기 시작했다. 눈알이 점
점 침침해지며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다 아까 마신 맥주 몇 
병이 토할 듯이 곳을 괴롭히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신음하는 나를  백미러로 훔쳐 보던 
파란 눈의 운전사가 병원 뭐 어쩌구 하는 소리를 했으나 나는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어대고 
있었다. 방에 들자마자 나는 앓기 시작했다. 룸메이트인 동료는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고 흔들어 깨울만한 의식도 내겐 남아  있지 않았다. 옷을 입은 채
로 침대로 엎어져 식도가 타내려가는 아픔을 느끼면서 나는 심하게 앓고 있었다. 시간이 갈
수록 차디찬 공간의 공포가 나를  짓눌러댔다. 손을 뻗어도 도무지 걸리는  것이 없어 나는 
허우적거리며 머리맡의 껄끄런 벽만 더듬어대고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그녀가  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온 것일까. 그녀는 왜 그토록 침울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
던 것일까. 간절히 전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내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
고 새벽이 올 때 스윽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떤 기미나 흔적도 남겨 놓지 않은 채. 그것
은 은빈이었다.
  새벽에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대는 바람에 나는 눈을  떴다. <파리의 우울>이란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고 있는 동료 연기자였다. 여기가 어디냐고 나는 그에게 가까스로 물었다.  그는 
뜨악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한  사이에 나는 내가 파리 
한 모퉁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이제 촬영장으로 나가야죠. 그런데 왜 이렇게 
추운 거죠?" "많이 아픈 모양이로군요. 밤새 어디  갔었어요?" 나는 침대 바닥을 짚고 비틀
비틀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그대로 누워 있으라고 그가 달래듯 말했다. "방금  밑에 내려
갔다 왔는데 오늘 촬영 취소래요. 비가 오고 있어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도로  눈을 감
았다. 어디선가 퀴퀴한 석회암 냄새가 틈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비를 맞고 석회처럼 굳어 
보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지난밤에 일어났던 일을 찬찬히 더듬고 있었다. 그러
한 사이 며칠 전 신촌에서  헤어진 나수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서울을 떠났을 
터이었다. 그대는 이 빗속에 어디로 홀로  짐을 지고 떠난 것일까. 언제까지 그렇게  외롭게 
세상을 떠돌며 살 것인지. 그래, 그대와 나의 호적부는 어느 나라 어느 허름한 목조  창고에 
보관돼 있는 것일까. 룸메이트가 지어 온 약을 먹고 오후가  되니 어지간히 몸이 똑바로 서
졌다. 스태프는 일층 촬영 팀이 모여 있는 큰 방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고 몇몇은 시내로 외
출을 한 상태였다. 칠 년 전에 헤어진 음악가를 찾아 파리에 온 한 유부녀의 이야기를 찍고 
있는 <파리의 우울>팀은 연출자를 포함해 오히려 비가 온 것이 잘됐다는 분위기였다. 조금
의 여유도 없이 며칠 밤낮을 정신없이 돌아쳤던 것이다. 하루 쉬고 있는 동안 나는 문득 생
각이 나서 파리에 유학을 와 있다는 나수연의 오빠, 그러니까 나승지라는 사람의 이름을 수
첩에서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조그맣게 들리는 웬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리고 그는 집에 없었다. 이름을 남기라고 그녀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가 나를 알 리  있을
까 싶었지만 나는 하루 이틀 사이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나수연의 친구라고 알
쏭달쏭한 메모를 남겼다. 친구, 라고 그녀가 받아 적으며 꼭 다시 전화를 달라고 왠지  애조
가 깃들인 음성으로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우유를  한잔 마시고 종일 침대에 누워 
남은 촬영분의 대본을 뒤적이고 있었다. 옛 연인을  찾아 파리에 온 유부녀 K는 모레쯤 에
펠 탑 앞에서 피아니스트인 P를 만나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한 호텔에서 정사를 벌이기로 
돼 있었다. 그런 다음 P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 파리의 집으로 돌아간다. K가 떠나던  날 그
는 공항으로 배웅을 나오려 하지만  K는 거절한다. 그리고 그녀는  서울로 돌아와 그 동안 
잘살고 있던 남편에게 이혼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남편에게.  텔레비전 
드라마의 구조는 언제나 중복되게 마련이고 이제 그것에 식상한 시청자들에게 양념을  치듯 
몽마르트르니 에펠 탑이니 하는 식으로 공간과 배경을 바꿔 줘야  한다. 그 알량한 주제 의
식을 조금만 내세우면 곧바로 시청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잘나가는  PD라도 함부로 
대본을 수정할 순 없다. 중, 고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 드라마  제
작의 철척처럼 돼 있다. 그런 것이다.  나승지를 만난 것은 에펠 탑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촬영 팀이 옮겨 가기 전날 밤이었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의 이름을 몇 번 우물거리며 
나는 생제르맹 데 프레에 있는 <프로코프>란 카페에서 그와 대면했다.
  <프로코프>는 나수연이 파리에 왔을 때  흑인 여가수의 노래를 들었다는 바로  그곳이었
다. 거리 이름을 찾느라 두리번 거리다 나는 십여 분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시간
이어서 카페 안은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 휘황한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 그가 뒤에서 다가와 등을 툭 쳤다. 돌아보지 않고도 나는 그가 나승지라는 걸 직
감적으로 깨달았다. 망설이듯 힘없이 툭 쳐오는 손의 느낌에서 나는 그가 매우 예민한 사람
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165cm쯤  되는 작은 키에 두툼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내가 어쩐지 화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키라고 느꼈던 건 나
수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터였다. 확실히 여동생보다 작은 키에 볼
품없이 마른 몸매였다. 그런데다 어깨가  안쪽으로 굽어 있어 언젠가  나수연이 얘기했듯이 
영락없는 거북이 꼴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스물일곱 살
의 나이에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잡혀 있었다. "며칠 전에 동생한테 전화 받았습니다." 그녀
가 일부러 파리까지 전화를 걸어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수연은 내가 제 오빠를 찾으리란 
걸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파리에 가면 한번 만나 보라고  연락처를 적어 주긴 했지만 꼭이 
그런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수연의 생각대로 내가 그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특별한 볼일이 있을 리 없었다.  한데 왜 내가 저 사람을 만나게 됐지? 
라는 다소 이율 배반적인 생각을 하면 나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밖에 나와 있
으면 늘 주위가 공허하죠." 그러나 파리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그는 덧붙였
다. 소심하든 예민하든 어딘가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친
구였다. "알다시피 이 카페는 유서가 깊은 곳이죠. 볼테르, 루소, 말라르메 같은 문인들이 자
주 들렀고 프랑스 혁명 때는 투사들이 운집했던 곳이기도  하죠. 나폴레옹도 한때 드나들었
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으로 깊게 패어 들어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수연처럼 사람을 꿰
뚫어 보는 섬뜩한 투시가 느껴졌다. 섬세하지만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도 
바로 그 눈빛 때문이었다. 우선 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분위기였다. "뜻을 잘 이해해 주셨
으면 합니다만, 나수연과 저는 약간은  특별한 사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재빨리 
되받았다. "압니다." 나수연이 어떻게 설명해 놨는지 모르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의 설명은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남 선배가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도와 주라고 하더
군요.
  아,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편의상 선배라고 부르겠습니다." 나수연은 파리로  가는 나를 
보고 또 무슨 꿍꿍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저녁 대신 맥주를 조금씩 마셨고 나는 
생선 요리에 포도주를 한자 마셨다. "도와 주겠다고 했습니까?" "물론 도와 드립니다." 나는 
차츰 신경의 거스러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제 3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
고 있는 망명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뚝 말이 끊어져 그와 나는 한 오 분이나 술만 이따금
씩 들이켜고 있었다. 볼수록 기이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존재  방
식의 시스템이 완비된 유형이었다. 그런데다 고장날 확률이  거의 0점대라고 생각되는 그런 
유형. "남 선배께서 파리에 오게 되면 꼭 만날 사람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가 딴 데로 
눈을 돌리며 쩍 마른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군가. 파리에 그럴 만한 사람이 내겐  없
다. "파리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 수수께끼 같은 말에서 놓여 나기 위해 나는 단도직입
적으로 되물었다. "그게 누구라고 하던가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면  그 사
람이<프로코프>안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거리엔 이미 어둠이 겹겹이 내려와 있
었다. 한데 그때의 신기한 경험... 중절모자를 쓴  초로의 신사가 검은 개를 끌고 카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년 전 나수연이 여기 와 앉아 있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
기도 했다. "끝끝내 모른다면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그런 사람이 존재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이마를 흘끗  쳐다보며 나수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들 남매는 무언가 긴밀히 통하는 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수연이 어디에 
있는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서울에는 물론 없습니다." "..."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연락
을 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제야 나는 주변에 심상찮을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다. 
나는 방금 검은 개를 끌고 초로의 신사가 지나간 거리를 내다보며 중심을 되찾기 위해 호흡
을 가다듬었다. 나승지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 어느덧 중심이 흐트러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파리에 오면 만날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며 한편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색종이 같은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또 나수연. 그녀는 이미 서울에  없다
고 했다. 그렇다면 짐작대로 내가 파리로 출발한 직후에 그녀도 서울을 떠났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승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그녀는 지금 제 오빠
를 통해 내게 암호를 보내 오고  있었다. 나는 소란스런 카페 안의 풍경과  창 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실루엣들을 정찰견처럼 뚫어지게 살피다 오감을 한데 모으려 잠시 눈을 감고 있었
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파수가 작동할 거였다. 그가 맥주잔을 들고 비스듬히 내게로 몸을 구
부리며 속삭여 왔다. "어렸을 때 저는 인생의 어떤 풍경을 늘 꿈꾸곤  했습니다." 인생의 어
떤 풍경. 나는 주술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귀를 곤두세우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우선 약 
이십 평쯤의 원룸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라색의 커튼. 아침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투명한 보라로 변하는 농담으로 염색된 커튼입니다. 저는 그걸 엉겅퀴 보라라고 합니다." 말
하자면 울트라 마린 블루가 있고 인디언 레드가 있고 그  비슷한 식으로 그래, 엉겅퀴 보라
가 있다고 하자. "또 코발트 블루의 스탠드가 있어야 합니다. 불을 켜면 방안을 금세 해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빛의 스탠드. 또 마키아벨리의  책과 니체가 영감을 받았다는 바
그너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아 재떨이, 켈빈 클라인 향수, 루이 14세풍의 소파와  식탁, 
로댕의 얼굴을 조각한 모뉴먼트, 마크 레빈슨과 럭서와 마란트로 믹싱한 오디오  세트..." 그
는 또 이사도라 던컨의 맨발 사진과 벨기에제  화병과 혹시 살의 충동이 생길 때 필요할지 
모르므로 체코제 육연발 권총 등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그가 이렇
듯 줄줄이 늘어놓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안경알  속에서 그의 눈이 기형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사시처럼 느껴지는 눈빛.
  "나이가 들면서 저는 그런 것들을 까맣게 잊어 갔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만 정말 감쪽같이 잊어 갔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감쪽같이 잊고 있
었던 겁니다. 그러다 한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파리에 온 지  사 개월쯤 지나서 저는 우연히 
벼룩시장이란 델 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다 낡아빠진 루이 14세 때의  소파 하나를 발견했
죠." "..."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어려서 원하던 제  인생의 풍경이 되살아난 건 아니었습니
다. 하지만 저는 그 소파가 무척이나 갖고 싶어서 다음날  벼룩시장엘 가서 기어코 들고 왔
죠. 한데 그때부터 뭔가 자꾸 허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겨우 인생에서 필요한 단 하나
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틈만 나면  벼룩시장엘가서 이것저것을 들고 오
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뻔질나게 백화점이나 면세점에도 들락거렸죠." 그렇다면 체코제 육연
발 권총도 구한 것일까.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얼마간 복잡한  경로를 통해 결국 손에 
넣었죠." 그렇군. "어느날 아침 저는 엉겅퀴 보라의 빛에 휩싸여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커피를 끊여 놓고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데 문득 유년에 꿈꿔 왔던 풍경 속에  제가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완벽하게 재현된  꿈속에 말입니다." "..." "그때의 제  느낌이 
어땠을까요? 모르시겠죠. 갑자기 나란 존재가 바스러지기 쉬운 껍데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장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책상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권총이 생각난 것도 그때였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가 칙,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묻고 있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맥주 한잔을 더 주문했다. 나는 대꾸를 못한 채 입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해가 
될 듯도 했지만 그걸 조리있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꽉찬 부재. 말하자면  그런 거였습니
다. 탄창이 비어 있는 권총말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전까지 저는 단 한번도  타인을 
염두에 두고 산 적이 없었습니다. 그게 여자든 뭐든 말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
고 산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아버지를 닮아 온갖 소품들에만  늘 관심이 집중돼 있었던 겁
니다. 네, 그야말로 소품 말입니다.
  대리석도 그림도 마키아벨리도 바그너도 한갓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모두가 부재의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존재하려면 
거기에 나를 제외한 타인이 하나 더 존재해야 한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겠지. 
"파리로 올 때 저는 소위 야망이란 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학도 그래서  선택한 겁니다. 
이제야 그게 무서운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저는 감히 사람 위에 군림
해서 사람이란 것들을 지배하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것들이라고? 그의 표정에
서 훅 하고 냉기가 끼쳐 왔다. "저는 사람 모두를 불신하고 마음속으로 증오를 키우며 살아
왔던 겁니다. 성장 과정에서 타인이란 존재는 저에게 늘 적에 해당됐으니까요." 사람이 적인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전공 과목을 버렸습니다. 그걸 공부해야 할 사람
은 어려서부터 각별한 애정을 받고 큰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타인에
게도 인내심을 갖고 충분히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위에서 내려
다보지 않는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온통 야바위꾼들이거나 고작해야 루이 14세풍의 의자에 삐딱하게 앉
아 거드름을 피워 보려는 작자들이 대부분이지. "작년 겨울에  저는 소르본 대학 근처에 있
는 중국 식당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고 저도 사
정이 마찬가지여서 어찌어찌 합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저는 제가 지
금까지 남 선배에게 했던 똑같은 얘기를 듣게 됩니다." 엊그제 내 전화를 받았던 조그만 목
소리의 여자. 그녀일 것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불문학을 하고 싶었고 장미가 핀  예쁜 베
란다와 줄리에트 크레코와 에스프레소 커피와 에이스 크래커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
느 날 그녀도 그런 차가운 공간에 내팽개쳐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그녀의 말
에 따르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종이 인형 같은 존재 말입니다." 종이 인형. "하지만 그 여자
는 저와 달리 자기 인생에서  줄곧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사람은 이미 죽었거나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란 강박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
답니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사람을 만났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누구
에게나 있을 수 있는 얘기를 그는 교묘하게 엮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다. "근데 
이상한 일이죠. 알고 보니 그녀와 저는 초등학교 동기 동창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입학해 역
시 같은 해에 졸업을 한 겁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 왔고 말입니다." 우연치고는 참으
로 놀라운 우연이었다. 말에서 깨어난 그는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천천히 뜯어 보았다.  그
때 나는 누군가를 찾는 표정으로 어두운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내가 파리에 와서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그녀는 사이 그
는 계산을 끝내고 출입문 옆에 서 있었다. 그만 가려는가. 그의 뒤를 따라나서며 나는  가슴 
한쪽이 하얗게 비어 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광장 모퉁이에서  나는 그에게 조금만 더 시
간을 내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안경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그가 그럼 
한잔 더 할까요,라며 택시를 손짓해 잡았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소르본 대학 근처에  있
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작년 겨울 그가 지금의 여자를 만난 장소였다. 또 주은래가 파리  유
학 당시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고 그가 덧붙여 말해 주었다. 건성으로 그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줄곧 미지의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리 요리를 앞에 놓고 고량주잔을 주고받
으며 나는 나승지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다고 그랬습니까?" 그새 불쾌한 얼굴이 되어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가 그가 식탁에  젓
가락을 내려놓았다. <프로코프>에서는 가까이 느껴졌는데 갑자기 몇  걸음이나 쑥 뒤로 물
러나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생경한 거리감에 흔들리며 나는 고량주  냄새에 취해 쿡쿡 
기침을 해댔다. 주방에서 흘러 나오는 광둥어를 들으며 나는 사이사이 취해 갔고 살갗이 슬
슬 벗겨져 내리는 외로움에 간헐적으로 진저리를 쳐대고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이 떠올랐다
면 만날 방법도 이미 알게 된 겁니다."
  사뭇 퉁명스런 어조로 그가 바둑돌 놓는 식의 말을 건네  왔다. 거기엔 어떤 구체적인 의
미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게 누군지 생각난 겁니까?" 고개를 내두르며 나는 벽에 붙어 있
는 중국 여인들의 그림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마리의 물고기가 수면에 튀어 
오르듯 이마에 떠오르는 한 여자의 모습.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내려 앉는 가운데 나는 서
울의 어느 여름날 저녁 택시 승강장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나수연의 얼굴을 뚜렷이 목
도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 찾아갔던 날이었다. 그리고 야릇한 흥분에  떨
며 입맞춤을 하던 바로 그 순간. 그렇다면 내가 파리에  와서 만나야 할 사람이 나수연이었
단 뜻인가. 나는 눈을 들어 열심히 접시를 뒤적거리고  있는 나승지의 뒤통수를 이물수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량주를 따라 마시고 젓가락을 접시로 가져가는 동작을 느릿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전령과 마주앉아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오늘은 파
발이거나 전령인지도 몰라." 그가 불쑥 반말로 대꾸해 왔어. 그 독백조의 태연한  대답에 나
는 신경이 다시 얇게얇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내가  만나길 원하면 방법이 있다는  거죠." 
"그거야 그렇지." 이윽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그가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분명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도 바뀌어서는 안 될 선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남 
선배한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말에  그는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선택. 그렇다면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나수연말고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
니다. 아마 둘일 거라고 수연이가 말했습니다. 물론 단수인 경우가 예외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남선배한테 달린 문제란 뜻입니다." 둘. 뿌옇게 머릿속이 흐려지
며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국 여인들이 그림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그새 신경이 닳을 
대로 닳아 있었던 것이다. 고량주병이 비길 기다려 나는  돌아가고 싶다고 그에게 더듬거리
며 말했다. 그러죠, 라고 선선히  되받으며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자정이 넘어 있었다. 대학 건물을 비스듬히 타고 돌아 큰길까지  나오 택시를 잡아 주며 그
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녁 내내 전령 행세를 했
지만 저는 오늘 수연이의 오빠 자격으로 남 선배를 만난  겁니다. 그게 무엇이든 저는 그애
가 원하는 대로 해줍니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죠. 아니,  그때는 거꾸로 그애가 저한테 그렇
게 했죠. 사실 저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정박아였습니다. 그애의 놀
라운 보살핌 덕분에 이나마 온전한 사람이 된 겁니다. 밤마다  내 방에 들어와 함께 자주며 
더듬더듬 말을 가르쳐 주고 코를  빠트리고 울면 밤새 저를 달래  주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밖에서만 살았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강남에 오십 평짜리 웨딩숍을 비밀의 화원처럼 차려
놓고 좀처럼 거기서 나오질 않았습니다. 네, 어머니에게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  남매
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안 장치가 돼 있는 성북동의 이층짜리 큰 집에는 늘 우리 둘
뿐이었죠. 그래요,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도대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었던 겁니다. 아시
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세상이란 것은 불특정  다수인 복수에 대한 단수로 살아 내야  하는 
거라고 죽 생각해 왔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파리에 와
서야 겨우 깨달은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수연이와 저는 단순한 혈연 관계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고백하자
면 쌍둥이와 같은 존재란 그런 말입니다." 그쯤에서는  나도 말귀를 알아듣고 있었다. 그래, 
그 누구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게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나수연을 선택하는 경우
에도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감당키 힘든 온갖  상념들에 사로잡힌 채 나는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출발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는 거북처럼 등을 구부린 채 어둠 속으
로 비틀비틀 사라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욕조에 누워 나는 생각했다. 나수연을 처음 만
나던 날로부터 파리에 와 있는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그동안 그녀와 나는 꽃
박람회에 갔었고 <오래된 정거장>에 함께 앉아 있었고 편의점 앞 파라솔 밑에도 앉아 있었
고 또 이 주일 간은 저녁마다 내 집에 함께 있었고 그리고 강화도와 석모도에 다녀왔고  그 
날 밤 산타 루치아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기껏해야 사개월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 동안 많은 추억들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 사이에 서로 감춰 둔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한데 이 영리하고 민감한 존재는 낯을 감추고 늘 뒷전으로 물러나 고양이처럼 조용히 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불분명한 감정이 가져올 상처라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내 상태라는 것 때문에  말이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파리 근방에 와 있는 성싶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만날 수 있다고 그
녀는 오늘 제 오빠를 통해 암호를 전해 온 것이었다. 내가 온전히 선택할 수 있겠끔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질과 빛깔이 어떤 것이든 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을. 그래, 사랑하지. 그대야말로 어여쁜 사람이지. 정박아인 오빠를 사랑해 본 여자이므로 상
처받은 사람들의 마음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뿐이 아니고 
이를테면 귓속말과 눈동자와 뒷모습과 또한 육체를 포함한 그야말로 그녀 생의 전부며 일체
였던가. 그러나 그녀를 두고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바는 없었다. 그녀는 펫 숍 보이스의 
<Go West>나 마이클 잭슨의 <Will You Be There>나 그룹 아하의 <The on Me>를 함께 
들을 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노래들을 듣고 있다면 이따금씩  벅찬 환희와 갈채 
사이에서 와락 슬픔이 복받치곤 하는데 그때 눈을 마주치기에  좋은 사람. 그러나 조명탑의 
불이 꺼지고 꽃다발이 흩어진 공연장을 나와서 그대와 나는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풀고 헤
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누울 때 다른 한 사람의 모습이 천장에 
선명히 떠올랐다. 예기치 않게도 그것은 은빈의 얼굴이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침대에 가만
가만 일어나 앉았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지금껏 누가 둥지를  틀고 있는지 모른 채 살아왔
다는 증거처럼 생각됐다. 공소 시효가 지난 증거. 나승지가 선택이라고 말한 것은 과연 나수
빈과 은빈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나수연은 내가  파리에 와서 피렌체와 통화하리
란 사실을 어찌 알고 있었을까.
  은빈에 관한 얘기는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 한두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새벽 4시에 나는 나승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엇보다 나수연이 염려스러웠다.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 그 신속함이 왠지 거북스러웠지만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전화를 
걸어 놓고 데면하게 있자 그가 손가락으로 탁탁 송수화기를  두드렸다. "연락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재워 놓고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이런 식의 말투는 그다지 탐탁스럽
지가 않다. "수연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  는 겁니다." "모릅니다." 
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왜요. 알고 있을 텐데요." "수연이는 그렇게 어리석은 수룰 쓰
는 애가 아닙니다. 또 남 선배처럼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 작자
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연락이 올 겁니다. 그때는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역시 남 선배가 충동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그건 누가 
판단하는 겁니까?" "수연이의 이름으로 제가  판단합니다. 그렇게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니 
좀더 시간을 갖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파리에  와 있는 겁니까?" 
"그 애만이 자신의 거처를 알고 있습니다. 다른 누가 알고  있다면 정작 남 선배일 텐데 그
렇다면 제게 묻지 말아야겠죠."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나승지가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나는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수연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내신 겁니까?" "수연이가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방금 전에야 알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알아낸  셈입니다." 아침이 
올 때까지 나는 에펠 탑이 내다보이는 라운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생각을 잊고 생각을 
얻고자. 마음을 잊고 마음을 얻고자. 그러다 햇살이 밝아 와 건물의 외등이 꺼질 때쯤  조연
출을 맡고 있는 스태프가 내게로 다가와 촬영 준비를 서두르라고 했다. 나는 어찔한 머리를 
휘두르며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코디네이터에게 본장을 받았다.  그런 다음 일행은 미라
보 다리에서 두어 시간 남짓 촬영을 하고 베르사유로 옮겨 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잊었던 
생각과 잃었던 마음은 좀처럼 되찾아지지 않았다. 촬영은 내일이면 모두 끝나게 돼  있었다. 
그리고 삼 일 후 일행은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탈 예정이었다. 서울에서의 촬영이 하루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때는 내가  출연하지 않으므로 달갑게 여기진 않더라도  연출자에게 
얘기해 파리에 더 남아 있을 수도 있을 터이었다. 그렇다면  나수연이 있는 곳을 알아내 찾
아가거나 피렌체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나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걸까. 양쪽을  다 
버리고 훌쩍 서울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거기엔 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선 주미의 어머니와 연락해야 할 테고 어쩌면 주미까지 만나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수연은 왜 하필이면 내가 파리에 와 있는 시점을 택해 그같이 어려운 선택을 주문하고 
있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피하면 안 된다고 그녀는 내게 은밀하고도 간곡하게 전해 오고 있
었다.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일행은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방송국 관계자들
과 개선문이 보이는 샹젤리제 거리의 한 야외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다. 착잡한 마음으로 그
들 사이에 끼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줄곧 피렌체에 있는 은빈과 또 어디  있는지 
모를 나수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담에야 나는 비로소  나수연이 내게 주문하고 있
는 선택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이렇듯 방침한 채 돌아가면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서 다시 
허우적거리게 되리라는 것, 어쩌면 그 속에 빠져 영영 밖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  그래
서 일찌감치 뒤만 캄캄하게 돌아보며 사는 삶이 되리라는 것을 나수연은 내게 알려 주고 있
었던 것이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인생에는 분명 선택의  순간이 도래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어쩌면 산다는 일 자체가 매순간 선택의 연속이고 그것도 공교롭게 양자택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나수연은 은빈의  근처에 와서 내게 물어 오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서거나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와 있다는 것에  나도 동감한다. 그것도 상대적인 선
택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에게 물어서 얻어내야 할 그런 선택이다. 연출자에게 귀띔을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 일어나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래 파리 시내를 내다보고 있
다가 피렌체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저녁 9시였고 유리창에 가는 빗방울이 소름처럼 묻어 
나고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창으로 정령처럼 스며들어 오고  있는 외등 불빛에 의지해 그
녀와 얘기를 나눴다. 다시 전화를 건 사실에 그녀는 당황하고 있었다. 거북스런 침묵이 파리
와 피렌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이어 놓고 있었다. "엊그제만  해도 다시 연락할 생각은 아
니었어." "그런데요?" "연락하게 됐지." "저 지금 술 마시고 있으니까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
요." 그녀는 술을 마시며 이미배를 듣고 있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워 무섭게 피곤한 상태라
며 그녀는 긴장을 되찾기 위해 폭풍우 속의 비행기라도 타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 앉아 보들레르의 시를 일고 싶다고도 했다. 얼마간 취해 있는 상태였다. 취해 있었지만 
나와 얘기하고 있다는 의식은 살아 있었다. "자신에게 완전히 지칠 때까지는 누구도 사랑하
지 못할 사람. 그러나 그건 예술가들이나 하는 사랑이에요. 자기를 옳게 완성하고 나서 하는 
사랑 말예요."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인가. "가슴에 신이 들어  있는 사람들." "..."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흉내를 내며 살고 있어요. 알다시피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녜요. 진짜  불행
을 선택받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거란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요. 기껏해야 텔레비전 수준이에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나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피렌체
에 들렀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어째서요?"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그러고 싶어."
  그러자 그녀가 돌연 된 소리로 밀고 들어왔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전에
도 얘기했지만 이제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하세요.  그렇게 암거래하는 식으로 뒤에
서 얘기하지 말아요. 할말이 있으면 늘 정면에서 하고 그 다음 이 쪽이 무슨말을 하든 온전
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으란 말예요. 알았어요?" "어제부터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내가 
나에게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당신은 막상 두 사람이로군요."  "시간과 거리에 떨어져 있
으니 지금은 이렇게밖에 말할수 없어.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조금은 다
르다는 거야. 상대가 받아들여 줘야 일치가 된단 말이지."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녀가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을 내게  전달해 왔다. 왜냐고 나는 되물었
다. "그 동안 저 많이 변했어요. 그러니 저도 이제는 두 사람인 셈이고 그렇게  되면 넷이서 
회담을 하는 꼴이 될 거예요. 그런 자리 사양하고 싶어요. 굳이 하고 싶다면 당신 둘이서 하
세요." "..." "잘 못 알아듣겠으면 범례를 들죠.  우선 남자 얘기 어때요?"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외롭다는 게 뭔지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게 때로는 수치가 되고 치욕이 되고 
또한 악덕이 된다는 걸 말예요."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때로 외로움에 쓰러진다는 얘
기는 들었다. 그래, 그렇지, 그러하겠지.  "때로라구요? 그렇다면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거예
요. 당신은 먹지도 않을 음식을 하루 종일  주방에 서서 만들어 본 적 있어요. 다음날  모두 
쓰레기통에 갖다 버릴 음식을 말예요.  그리고 또 몇 시간이고 비  내리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울어 본 적 있어요? 집안의 모든 문을 닫고 일 주일식 혹은 이 주일씩 침대에 누워 있
어 본 적이 있어요? 또 애처럼 키우던 고양이를 욕종 처박아 죽여 본 적이 있어요? 멀쩡한 
포도주병을 몇 병이나 따서 싱크대에 피처럼 쏟아 부은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이제 아름다
운 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진심으로 절망해 본 적이 있는가 말예요." 다시금 기나긴 침묵
이 찾아왔다. 컵 속에 내려앉고 있는 사이다처럼 아득한 소음만 수화기 속에서 지루하게 계
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감히 제게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을 정신이 남아 있나요?" "우
선 넷이서라도 얘기하지. 여섯이 되고 여덟이 되면 더욱 힘들테니까 말이야." "각자 낯 모르
는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하는 게 한결 나아요. 여기  동양 여자 좋아하는 이탈리아 남자들 
많아요. 한국 남자들보다 훨씬  예의바르고 섬세한 사람들 말예요."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국적이 다르고 피부가 다르고 말이 다르면 서로 남녀간의  단순한 감정만 남는다. 심플해진
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서로에게 냉정하다는 뜻도 된다. 또 그렇게 되는 경우 이방인의  몫
은 더욱 쓰라리다. 그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도 그러겠다면 그런 거지만 그것이  말
하는 사람의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국에서 용병을 도입하는 일과는 엄연히 차원이 다른 일이다. 물론 알아서 할 일이다. 나
는 진심을 가지고 되풀이했다. "둘이 만나서 얘기해." "만나도 전처럼 괴로울 거예요." "가까
운 타인처럼 모습만 보고 돌아올 생각이야.  서로 그런 사이는 되지." 허나 그녀는  내 말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로 잘  돌아가라고 하면서 열흘 전 통화했을  때 했던 말처럼 
앞으로 잘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남은 도리임을 거듭 강조했
다. 또한 자신은 결코 서울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어둠 
속에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가랑비는  오래된 흑백 영화에서 
보듯 반 어둠의 창에 쉼 없이 비껴 내리고 있었다. 아프지도 외롭지도 그렇다고 쓸쓸하지도 
않은 웬일인지 무감한 시간들이 눈앞으로 무연히 흘러갔다. 그러나 거대한 모래무덤이 무너
져 내리듯 나는 스르르 스르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사이사이 욱죄 드는 가운데 나는 히뜩, 죽음이란 걸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죽음. 
체코제 육연발 권총. 삭발을 하고  캘빈 클라인 향수를 온몸에 뿌리고  거울 앞에 앉아 빵! 
머리에 탄환을 박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다. 거울 앞에 쓰러지는 순간 내 생의 마지막 눈빛을 바라보고 싶었다.
  빵..빵..빵! 따르릉..따르릉..따르릉! 전화 벨  소리에 나는 언뜻 정신이  돌아왔다. 자정이었
다. 누가 이시각에 전화를 걸어 온 것일까. 느낌이 생각을 질러갔던 것일까. 아무 근거도 없
이 나는 그게 나수연일 거라는 예감에 화닥 사로잡혀 있었다. 언제나 이런 위험스런 미혹의 
시간에 그녀는 용케도 나를 찾아오곤 했었다. 비에 젓은 흑백  사진 엽서 같은 거리의 풍경
을 내다본 다음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걸어 온 것은 
나승지였다. 어떻게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을 알아냈을까. 아니지, 며칠  전 그와의 통화에서 
일행이 여기에 와 묵을 거라고 내가 말했었지. "파리, 1997년 8월의 비 내리는 밤이군요. 정
세를 염탐코자 디이얼을 돌렸습니다." 대꾸할 사이도 없이 그가 덧붙였다.  "자정을 기해 당
신은 생의 반환점을 도는 선택을 했겠죠.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 말
에서 나는 나수연에게서 메시지가 당도했다는 소리를 훔쳐 듣고  있었다. 얼마쯤 사이를 뒀
다가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몇 시간 전에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과 긴  통화를 했습
니다. 결과적으로 거절된 선택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는 않습니다. 파리에 와서  그런 
사람을 발견해 낸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수연이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그녀와 내가 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앞으로 위대한 우정을 원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위대한 우정, 이
가고 그가 전보 내용을 수신하는 우체국 안내원처럼 되받아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상황 종
료, 송신 끝입니다" "물론 뜻을 알고 있습니다." "나 형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공항에서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주셨군요." "예의라는 것에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또한 자격을 문제삼지 않는다면 제가 한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요,라
고 나는 신선히 대꾸했다. "그건 거절된 선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대개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서툰 법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제 막 상황
이 발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제넘은 소리라는 건 압니다." "나 형 역시  예의에 너무 신
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한마디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이제는 수
연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이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수연을 염려하
고 있을 터이었다. "저 역시 염려가 돼서 그러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 선배가 알아맞혀 보
시죠. 물론 제가 알려 드린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시르미오네." 생각하자마자 내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이탈리아의 가르다호수에 있는 작은 마을.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가 그곳에 가 있으
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지난 7월 산타루치아 모텔에 머물던 밤에 
그녀에게 그곳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그녀는 종이학처럼 앉아  밤새 내 꿈을 
엿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죠?" 그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시르미오네의 한 호텔에 머물며 내게 전문을 보내 오고 있었어 것이다. 피렌체와 시르
미오네. 참으로 묘한 일이다. 뜻은 다르더라도  내 연인 둘이 지금 모두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승지에게 그녀가 내게 전해 온 메시지가 없었는가고 물었다. 언뜻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선택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더군요. 결과적으로 그것이 거절된 선택이 됐다고 하더라고 말입니다. 
뜻은 남 선배께서 알고 계시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은 수연이가 도와  줬기 때문에 가
능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녀를 사랑보다 더한 우정으로 기억하게 될겁니다. 지금까지 하
고는 뭔가 다른 더 큰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저  역시." 그러고 
나서 잠시 전화선이 불통된 것처럼 응응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잡음에 섞인 그의 목소
리가 띄엄띄엄 흘러 나왔다. "만나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군요. 제가  호텔로 갈까요?" "지금 
말입니까?" "물론, 지금." 어둠 속의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나는 호텔 지하 바에서 기
다리고 있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어둠 속에 앉아 혼자  빵! 빵! 소리를 
내고 있느니 그게 오히려 나을 듯싶었다.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는 지하 일층에 있는 스탠드바로 내려갔다.샹젤리제에 있던 스태프 일행이 거나하게 취해 
왁자지껄 로비로 들어서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뚜
벅뚜벅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바의 문을  열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등을 
돌린 채 스탠드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그 사람을 오감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나를 찾아온 사람이란 걸 이내 알 수 있었다.
  문간에 서서 안을 두리번거리는 동작, 이윽고 내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의 반향, 그 보폭과 키의 무게 중심, 등으로 밀려오고  있는 공기의 냄새와 결, 말하자면 그 
사람의 얇은 허울이 몇 걸음 먼저  내게 당도하고 있었다. 나승지가 아니었다. 아주  낯익은 
사람 그것도 여자였다. 또한 마음 한켠에 사무쳐 있던 그 무엇을 뜻하는 여자. 이윽고  그녀
가 내옆에 잠자리처럼 와 앉았다. 하지만  나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서 아주 먼데서 온  바람의 냄새가 묻어났다. 시르미오네. 
그래, 파리에서도 제법 먼 곳이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라노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인 베로나를 거쳐가야 하는 곳이지. "어제 저녁 9시에 파리에 왔어요" 그 시각에 나는 피렌
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제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저절로 알아지더군요. 그런데  불쑥 예정에도 없던 파리로 오게  됐어요." 
"..." "울고 있었어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별 이유도 없이  그냥 울고 싶었고 마침 눈물이 
쏟아져 주었어요. 네, 하늘에서 혼자 울고 있었어요." 시르미오네에서 밀라노를 거쳐 파리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하늘에서. "그리고 왜 울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건 마치 열 살
이 되고 스무 살이 될 때처럼 돌아갈 수 없는 시간대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아픈 느낌 때문이었을 거예요. 무슨 뜻인지 당신은 잘 알 거예요. 당신도  어
제오늘 반환점을 돌면서 느꼈던 감정이 있었을 테니 말예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
의 음성에서는 감정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이 삭막한 냉기.  그 
냉기로 인하여 나는 여태도 옆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혼령으로 나를 찾아왔
다는 느낌이 든 것도 그때였다. "그래요, 절대로 옆을 돌아보지 말아요. 당신과 눈을 마주보
는 순간 저는 푹 잿더미로 내려앉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때서야 그녀에게서 고통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눈보라의  밤에, 들판에, 홀로 벌거벗고 
서 있는 자가 받고 있을 법한 지독한 고통이었다. 눈사람  하나가 하얀 자전거를 타고 지평
선을 따라 삐뚤삐뚤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요, 하얀  자전거. 시르미오네의 한 호텔에서 저
는 잃어버렸던 하얀 자전거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냈어요." 마침내 알아냈군.  그녀가 턱을 
덜덜 떨면서 주문이라도 외듯 이런  말을 중얼중얼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 마음의 
깊푸른 골짜기, 아직 청년인 그대의 기나긴 한숨, 지금도 빗속에 첩첩이 내려앉고 있는 밤의 
꽃송이들, 어두운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대의 아련한 옆모습-그런 것들 속에-또 그대가 어지
럽힌 기쁜 탁자 위에, 자고 일어난 구겨진 침대 위에,  과일을 먹다 남긴 예쁜 접시에, 가슴
에서 늘 울고 있는 숲속에, 바람에, 그 사이에서 틈틈이 빛나고 있는 햇살에... 이 모든 것을 
다 합하여 당신의 그 황금빛 마스크 안에." "..." "그래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그 황금빛 마
스크 안으로 하얀 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거예요."  나를 처음 본 순간이라고 그
녀는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이 괴로운 기쁨. 사랑하는 남자에게 처녀를 주고 나서 모든 여
자들이 느꼈을 이 아픈 상실의 기쁨." "..." "그렇게 오늘 저는 하얀 자전거와 이별했어요. 제 
처녀와 순결의 상징인 하얀 자전거를 영원히 잃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래서. 당신이 원하
기만 한다면 저의 처녀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온 거예요.  제 처녀의 주인은 어쨌든 당신이
니까요." 나는 미라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눈보라의  밤에, 벌판에. "원하지 않
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당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도와 주세요."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하얀 자전거를 이국의 어둑한  창고에 
갖다 버릴 수가 없었다. 또 미련이라고 그녀가 말했지만 그러고  나면 나 역시 스스로를 감
당하기 힘들 것만 같았다. 도대체 그 동안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파리의 한 모퉁이에
서 나는 이런 고백을 듣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날이 밝아 오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
을 그대. "당신 앞에서 울고 싶었는데  어느새 눈물이 다 말라 버렸어요. 앞으로  저는 울지 
못하는 여자가 될 거예요. 첫사랑이란  과연 이런 것이로군요." 첫사랑.  그 말에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가 스탠드 밑으로 내 손을 잡아 왔다. 잠자코 있다가 나
는 천천히 손가락을 벌려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다. 차츰차츰 정녕이 식어 가고 있는 그녀의 
차디찬 손,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잡아 보지 못할 손. 무턱대고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발자
국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탠드 위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 밤 당신과 인연
을 맺고 나면 필연적으로 내세에서 다시 만나게  될거야. 두렵지 않아?" "그게 당신은 두려
운가요?" "그런 말이 아니야. 인연을 맺는 대신 이승에선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사
실이 두렵지 않냐고 묻고 있는 거야.
  이렇게 가엽게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 지상에서의 시간이 말이야."  나는 내세라는 것이 
어쩐지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됐고 지금이 그 내세여서 그녀의 혼령과 만나고 있는 듯한 착
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차생에서  그녀를 보지 못하더라도 이 지상에  살아 있는 동안엔 
아주 가끔씩이라도 서로를 엿보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라고 해도 그
건 어쩔 수 없는 진심이었다. 만약 오늘 밤 인연을 맺게 되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터이
었다.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저를 사랑하고  있군요." 물론이었다. 그
녀의 손에 번개가 치듯 완강한 힘이 몰려왔다 금세 사라졌다.  불현 듯 서늘한 느낌이 정수
리로 몰려와 옆을 돌아보려 하자 그녀가 재빨리 외쳤다. "돌아보지 말아요!" 그런 다음 그녀
의 손에 예의 아픈 힘이 주기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옆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녀에게서 전달돼 오고 있는 전율을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할복이라도  하듯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는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있다는 느낌
이 몰려온 것은 내 손목의 힘이 다 빠져 나갔을 때였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한순간 나
는 약속을 저버리고 비스듬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아!하고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깊숙이 떨군 채 그녀는 다른 한 손을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집어 넣고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안 돼! 라고 외치며 나는 그녀의 축축한 어깨를 싸안았다. 하지
만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절정에 올라 막 음읍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복부
에 칼이 박힌 듯 그녀는 자맥질을 해대고 있었다. "안아 줘요!" 입술을 깨물고서  그녀가 그
렇게 외쳤다. 나는 그녀의 등을 뒤에서 가슴으로 덮쳐 안으로 손가락을 그녀의 입으로 가져 
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내 손가락을 이빨로 깨묾과 동시에 허리가 앞으로 푹 꺾였다. 
그녀는 오 분 십 분의 죽은 듯이 스탠드 아래로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
내 그녀의 손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 냈다. 그녀는 탈진한 상태로 미동도 못한 채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내 손을 잡고 있는 동안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
의 처녀를 거세해 버렸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완강하게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
다. 얼마 후 그녀가 고통에서 막 깨어난 소리로 타인으로서  최초의 인사말을 내게 건네 왔
다. "사랑해요." 이 진부한 단어 속에는 실로  얼마나 숱한 아픔이 도사리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제 감정에 져서 상대에게 이런 말을 무심코 내뱉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차가운 시간이 찾아오면 함부로 그 말을 입밖에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타인으로 돌아선 다
음 전해 온 최초의 그 말에서 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이 진실일 때
는 영원히 현재형으로 쓰인다는 사실도 그때 깨닫고 있었다. 긴  숨을 거듭 몰아 쉬고 나서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영원한 현재가 두려워 저를 거세해 버렸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지상에서 남아 있는  동안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비록 
추억 속에서라고 하더라도 말예요." 추억.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저는 지금 제가 기뻐요. 
저는 당신을 사모하던 여자였고 당신을 통해 오늘 비로소 여자가 됐어요. 이 순간만큼은 우
리 둘이 하나였던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고 말하기에 여전히 감당키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요. 저는 당
신의 신부잖아요. 오늘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주세요." 대답대신 나는 그녀의  어깨를 깊게 
싸안으며 아주 조금 눈물을 흘렸다. 그녀와 나는 매미  껍질처럼 앉아 스탠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그녀의 몸은 빠르게 식어 갔다.  "피가 다 말라가요." 그녀 몸 속의 더운 
피가 다 말라 가고 있었다.  "손수건을 빨아다 주세요" 나는  몸을 가누고 의자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오 분을 잠자코 서 있다가 이윽고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로 나왔다. 주
머니 속에 빨리 않은 손수건을 그대로 넣고서. 그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그녀가 보이지 않았
다.

    13. 하늘에서 울다  
  아침에 눈을 떴지만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넋이  빠져 있었다. 스태프들은 벌
써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모닝 콜이라 생각하고  받아 든 전화에다 대고 한 
촬영기사가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로비로  내려오라고 
했다. 왜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은 것일까. 아니, 깨웠겠지. 하지만 그 동안 나는 까맣게  죽
어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세수도 못한 채 나는 짐을 꾸려 허둥지둥 로비로 내려갔다.  무얼 
빠트렸는지 돌아볼 새도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프린트 앞에 놓인  소파에 스태프들이 
모여 앉아 언짢은 얼굴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공항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이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룸메이트였던 동료까지 부
러 그러는지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고 줄곧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붙잡고 왜냐고 물어보고
자 해도 좀처럼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망한 가운데 보딩 시간이 다가와 나는 일행 뒤
에 붙어 출국 심사대를 통과했고 그 순간에야 나수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
는 거지? 왜 나승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조차도  물어 볼 생각을 못했던 거지? 라는 때늦은 
생각을 하며 나는 허겁지겁 여권을 뒷주머니에 꽂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트랩에 오르면서도 
또 피렌체 있는 은빈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거운 말만 남겨  놓고 이대로 돌아가도 과연 되
는 건가? 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길게길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둘러봐도  
내가 보이지 않았다. 혼겁한 얼굴에  좌석벨트를 매고 앉아 있는 내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도대체 들지 않았다.
  뒤통수에 풀썩 총을 맞고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꼴이었다. 옆에 앉았던 촬영기사가 말
을 걸어 온 것은 비행기가 드골 공항을 이륙하고 나서 스튜어디스가 음료수를 건네 줄 때였
다. 윈도 시트에 앉아 있는 내게 잔을 대신 받아 건네 주며 그가 나를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밤새 어딜 갔다 왔어요?" 밤새 어딜 갔다  왔냐니. "프런트에 물으니 아침 7시에 들어왔다
고 하던데요. 그 통에 호텔이 발칵 뒤집혔잖아요. 출발 당일에 사람이 하나 없어졌으니 말예
요." 나는 외출했다 들어온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그러긴 그런 
모양이었다. "며칠 전에도 무단으로 외출했다가 새벽에 들어왔잖아요. 고의가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 눈밖에 날 필요는 없잖아요. 뭘 묻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걱정이 돼서요." 거기
까지 말하고 그는 잠을 자두려는지 눈을 감아 버렸다. 나 역시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
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나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었다. 메뚜기  떼처
럼 까맣게 모래가 날려 가고 있는 벌판에. 지평선 끝에서 몇 점 불빛이 명멸하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누군가 멀리서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
었고 또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모래 폭풍 속을 지나가고  있는 게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바흐를 듣고 싶어, 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머나먼 불빛에 눈을 던져 둔 채. 이렇게 자꾸  가다 보면 어디<바그다드 카페>라도 나타나
겠지. 그 영화를 수리남의 외진 사막에서 촬영했다고 그랬던가? 그렇다면 바흐를 치는 흑인 
소년이 있고 마술을 하는 뚱뚱한 독일 여인이 있고 오로라를  그리는 키 큰 화가가 있겠지. 
타임머신에서 내린 듯 나는 문짝이 삐걱거리는 사막 한가운데의  카페에 다다라 있었다. 모
래에 묻혀 있는 드럼통, 바퀴가 두 개나 내려앉은 자동차, 누가 던져 놨는지 모르지만  하늘
에서 쉑,쉑,쉑,쉑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부메랑, 그 사이에 솟아 있는 부서진  풍
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들의 낮은 웃음 소리. 떨리는 가슴을 안고 문을 들어서려는  순
간 머리 위에서 밤의 신호인 듯 붉은 외등에 탁하고 빛이 들어왔다.
  그대가 왔군, 하고 누군가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멈칫거리며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래, 검은 소년이 붉은 천 아래앉아 음악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평균율>을 피아
노로 연주하고 있었다. 벽에는 바흐의  사진이 붙어 있고 카페 한구석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껑충한 키의 화가가 하나.  그러나 사방을 둘러봐도 뚱뚱한 독일  여인과 커피를 끊여 
주는 인상 좋은 사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 나를 향해 속삭이는 소리가 
귓전에서 들려 왔다. "피아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
무도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일까. 어디선가 조용히  나를 눈여겨보고 있는 그대. 이
토록 먼 사막에서 나를 기다려 온 그대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 나는 비니 나무의자에 뒤꿈
치를 들고 다가가 앉았다. "잘 오셨어요. 뜨거운  커피를 갖다 드리지요." 귀에 익은 소린데 
마치 변조된 음성처럼 웅웅거려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바흐를 들으며 
기다려 보지. 공기 속에서 맡아지는 저 오묘한 소리의 질서. 그녀가 내 앞으로 기척을  죽이
고 다가왔다. 코 끝에 스미는 커피의 향기로, 살 냄새로 나는 그녀가 지척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어 탁자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단정한 소리의 울림. 손을 뻗으면 이
내 감겨 올 수 있는 거리에 그녀는 서 있었다. 그 때도 바흐는 쉼 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나는 천천이 팔을 내밀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몸짓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손 끝에 걸리지 
않았다. 모래에 물이 스미듯 그녀가 소리없이 웃었다. 아주 가까이에 와 있는데 왜 닿지  않
는 걸까. "오늘 밤엔 볼  수만 있을 뿐예요." 여전히 이중으로  울리는 목소리. 그제야 나는 
눈을 뜬고 눈앞에 하얗게 벌거벗고 서 있는 나수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은 붉은 
비단 천에서 반사돼 나온 빛에 아름답게 감싸여 있었다.
  긴 머리칼을 뒤로 늘어뜨리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밤새 궁금했어. 그런데 내가 여길 찾
아 온 것인지 그대가 나를 불러서  온 것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제  부름을 받고 온 거예
요." 언뜻 전신이 무감하게 굳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슬쩍 궁둥이를 움직여 보았
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둘지 말아요." "..." "거기 당신을 
묶어 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에요. 그러니 풀려 나는 방법도 자세히 알아내야 해요." 그
렇군. 끈 없이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나는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조명이 스미고 있는  붉은 
비단 천. 그 위에 떠다니고 있는  구약 성서의 음표들. 춥지도 덥지도 축축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습자지 빛의 실내. "여기가  어디지?" "당신의 무덤이에요. 서른 다섯  살의 당신 무덤 
말예요. 아침이 올 때까지 스스로 풀려 나지 않으면 의자에 묶인 채로 영원히 미라가 될 거
예요." 그래, 무덤이로군. 한데 공기는  켜켜이 부드럽고 그리운 그대까지 와  있군.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곧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런 다음엔 온통 주위가  춥고 어둡게 변할 
거예요." 영원히, 라고 두런거리며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턱이 굳어가며 입술이 말라붙
고 있다는 몹쓸 느낌이 한 꺼풀씩 얼굴에 씌워지고 있었다. "그대가 내 무덤으로 나를 부른 
이유를 말해 줘." "우선 마스크를 저에게 주세요. 제 하얀 자전거를 가진  대신 황금빛 마스
크를 벗어서 제게 주는 거예요."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가져  가, 라고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홱 살 껍질을 벗기는 아픔이 찰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입술에서 피가 몇 방울 
투둑 흘러내렸다. 마스크를 들고  그녀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말을 잃었어요. 지금부터는 
침묵 속에서, 침묵의 끝에서만 말을 하게 될  거예요. 그 동안 당신은 너무 많은 말을  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줬어요. 기억해요?"  그대에게도 말인가. "물론이에
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있었을 뿐예요." 용서. 가장 잔인한  사랑의 복구. "아
뇨, 용서는 위대한 감정이에요. 당신은 그 말의 뜻을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실내의 
불빛이 점차 어두워지며 바흐도 귀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도 차츰 어두운 공기와 뒤섞이고 있었다. 그새 내게서 사라지려
는가. 절박한 심정이 되어 나는 그녀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지 그래. 
할 얘기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건 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오직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야만 해요. 저는 아주 잠깐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문지기에게 몸을 
허락하고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어디로 말인가/" "사람들
에게 묻고 대답할 수 있는 장소. 당신도 무사히 그곳으로 오길 원해요. 당신의 용서가  필요
하고 또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그런 곳으로 말예요." 그게 어딘가. "당신이 버리고 온 세상, 
그리운 열대." 그러한 사이에 마침내 실내의  불빛이 모두 사라졌다. 보이는 건  삐걱거리는 
문밖에서 희미하게 스며들어오고 있는 붉은 외등 빛뿐이었다. 그녀가 안에 있는지조차 확인
할 수 없었다. 더듬더듬 소리를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도 귀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러한 잠시  실내에는 물이 차오르듯 차가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나는 의자에 묶여 있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마구 용을 써대고 있
었다. "안녕, 내 사랑. 그리운 열대에서 다시 만나요." 그녀의  음성이 이렇게 문틈에서 들려 
오는가 싶었는데 순간 쾅!하고 문이  안으로 닫혀 버렸다. 꿈이었던가. 아니면  꿈과 현실의 
경계였던가. 어젯밤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를 헤매다 아침에야 돌아온 것일까.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은 파리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나수연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었다. 그것도 
지금으로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밤이었다. 축축이 젖어 있는 
몸. 비행 항로를 알려 주고 있는 스크린을 멍하니 마주보며  나는 이마와 목덜미의 진한 땀
을 닦아 냈다. 비행기는 모스크바 상공을 지나 페테르스부르크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
었다. 몸살이 시작되려는지 뒤통수에 후끈한 열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화장실에 다녀와 나는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해 아스피린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눈을  감았
다. 눈을 감자, 누군가 거대한 청동 거울을  들고 내 옆에 다가와 있는 듯한 희번한  느낌이 
몰려왔다. 아니, 내가 그 거울 속에 거미처럼 들어가 앉아 있는 듯한 기묘한 상태가  찾아와 
있었다. 그 어떤 지침인 듯. 나는 실눈 뜨고  가만가만 기내를 두리번거렸다. 승객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고 스크린에서는 프랑스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창이었다. 그렇다, 창밖에 거
대한 청동 거울 하나가 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블라인드를 거두고 밤하늘로 눈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말
간 하늘 한가운데 신화처럼 떠 있는 달을. 또한 달  안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조그맣게 달려
가고 있는 하얀 자전거를. 나수연의 벌거벗은 몸을. 그 주위에 모여 서 있는 낯익은  사람들
의 얼굴을. 그리운 열대. 그들은 비행기 안의 나를  아주 심각한 얼굴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사무치게 간직하고 있던 이들의  모습이
었다. 그리고 나는 울고 있었다. 무수히 떠 있는 별무리 속을 헤집고 다가온 달은  비행기를 
집어 삼킬 듯이 부풀며 커지더니  마침내 광활한 밤의 대기 속으로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나만이 그때 우주의 장관을 보고 있었을까. 그 순간 세상  모든 이들은 잠들어 있었던 것일
까. 무서운 황홀에 몸을 떨며 나는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몰래 닦아 냈다. 그러고 나자 파리
에서 비행기에 오를 때 내게서 몽땅 빠져 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다시 몸 안에  들
어와 있음이 느껴졌다. 웬일인지 몸과 마음의 무게중심이 시계추처럼  허리 끝에 똑바로 들
어와 있었다.

    14. 실천에서
  나는 베란다 창을 통해 여름 스키장을 내다보고 있다. 빈 리프트들이 굵은 전동선에 매달
려 까닥까닥 흔들리고 있다. 8월의 마지막 토요일. 주말을 보내러 온 사람들이 호텔  앞에서 
띄엄띄엄 서성이는 게 보인다. 무주에 있는 설천이다. 이곳 리조트로 내려온 지 그새 일주일
쯤 되었나 보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슬그머니 혼자 짐을 꾸려 내려왔다. 아침마다 나
는 슈퍼마켓에 다녀와 쌀을 안치고 콩나물국과 된장찌개를 끊여 놓고 9시쯤에 식사를 한다. 
그러고 나서 오전에 산에 다녀와  차를 마시고 저녁때까지 책을 읽거나  묵은 일기를 쓴다. 
글쎄, 일기라기보다는 지금껏 살아온 생의 기억들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나가고 있다.  이틀
에 한 번꼴로 만년필 튜브에 잉크를 갈아넣으며. 저녁이 되면  리프트 승강장 옆에 있는 티
롤 호텔 바에 가서 맥주를 마신다. 티롤, 알프스의 한 지류에 속해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이라는 얘기를 바텐더한테서 들었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내에선 은은한 원목 
냄새가난다.
  오스트리아에서 공수해 온 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거기서 맥주를 마시다  11시쯤에 내가 
묵고 있는 백합동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 잠이 든다. 얼마 
전부터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편도나무에게 
말했노라. '그대여 나에게 신의 얘기를 들려 다요.' 그러자 편도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백
합동에는 토요일인데도 사람이 들지 않는다. 이 콘도에는 나혼자만이 묵고 있는 성싶다.  밤
새도록 아무 기척도 들려 오지 않는다. 여름의 검은 산자락. 때로 비에 젖고 있는  주차장의 
자동차들. 비어있는 상점. 일식 집에서  권태로운 얼굴로 화투를 치고  있는 사람들. 내려온 
날부터 새벽마다 이런 꿈을 꾼다. 잠옷을 입은 아홉 살쯤 된 소년 하나가 문밖에 와서 눈을 
비비고 서 있다. 아니, 그는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일어나 갸웃이 문을  열어보면 
그애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야 알게 
되었다. 아홉 살. 그렇다면 그때부터 줄곧 나는 잠옷을 입고 새벽마다 어느 집 문밖에 서 있
던 소년이었을까. 아마 그런지도 모르지. 아홉 살의 어느 날 밤에 나는 아버지에 의해  문밖
으로 쫓겨난 적이 있었다. 무얼 잘못했겠지. 한겨울 밤이었는데 몹시도 춥고 무서웠었다. 아
침이 될 때까지 그러나 아버지는 방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이십여 년이나 잊고 있던 기억
이 왜 무주에 내려와서 떠오른 것일까. 하긴 누구에게나 그런 비슷한 경험들이 있게 마련이
다. 아무튼 내일 새벽에도 그애는 잠옷 바람으로 내 방문 앞에 서서 울고 있을 것이다. 저녁
마다 티롤 호텔 스탠드바에서 마주치는 부인이 하나 있다. 네 번 혹은 다섯 번쯤 모습이 마
주쳤을 것이다. 사정이야 알 일 없지만 그녀도 일행 없이 이곳에 내려와 묵고 있는 성 싶다. 
오늘 밤에도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다. 그녀는 늘 연둣빛 투
피스 차림으로 티롤 호텔 2층 스탠드바에 나타난다. 하루 이틀은 잘 몰랐는데 정확히 밤9시
에 목조 계단을 따박따박 올라와 매일 같은 자리에 검은  핸드백을 올려 놓고 앉는다. 나이
는 서른여덟이나 아홉. 더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암만해도 그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다.  물결
치듯 목덜미까지 잘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칼, 고르게 박힌 흰 이빨, 담배를 쥐고 있는  희고 
길쭉한 손가락, 보라색의 매니큐어,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세하게 떠는 듯이 보
이는 긴 속눈썹 밑의 검은 눈, 시간에 마디를 내듯이 이따금씩 몰아 쉬는 공허한 한숨. 그러
다 정확히 11시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챙겨 들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목조 계단을 느릿느릿 밟아 내려간다. 그러면 나도 술값을 지불하고 호텔에서 십 분쯤 걸리
는 백합동으로 걸어서 돌아온다. 그녀는 왜 여름 스키장에 내려와 있는 걸까. 설천엔 그렇게 
새벽마다 잠옷을 입고 찾아와 방문 앞에서 우는 아이가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쩐지  낯
익은 부인이 있고 열흘 전 파리에서 돌아온  서먹한 내가 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술을 
마시다 나는 이런 꿈에 사로잡히곤 한다. 가슴에 베개를 껴안은 아이가 연둣빛 투피스의 부
인이 묵고 있는 호텔 방 앞에서 밤새 서성이고 있는 그런 꿈을. 저녁 8시 50분에 나는 티롤 
호텔 스텐드바에 가서 먼저 앉는다. 그녀가 매일 앉던 바로 그 자리에. 오늘은 그녀에게  말
을 걸어 보리라. 토요일이지만 홀에는 두세 팀의 사람들만이  앉아 키득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의 검은 등이 유리창을 통해 스며  들어온 달빛에 이물스럽게 반사되고 
있다. 오 분 전. 나는 전동선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빈  의자들을 내다보고 있다. 
눈이 없는 설천의 밤. 따바따박.
  발자국이 목조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나는 고개를 외틀고 사십오도 
각도로 계단 쪽을 바라본다. 이어 쥐색 모자의 끝이 보이고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습관대
로 마지막 계단을 올라와서 그녀는 잠시 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내 눈과 마주친다. 순간 
흠칫하고 희미한 놀림의 그림자가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다. 외출했다 돌아온  집에 태연히 
앉아 있는 손님을 발견했을 때처럼. 돌아 내려가려다. 그녀는 내처 타원형의 스탠드로  다가
온다. 시선은 그랜드 피아노 쪽에 두고 있다. 흔들림 없는 걸음새로 그녀는 내가 앉던  자리
에 가 앉는다. 일직선의 맞은편 자리다. 그녀와 나는 자리바꿈을 통해 이제 피할 수 없는 줄
다리기를 시작하게 됐다. 그녀와 말이 통한 건 밤 10시쯤이다.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 나가
고 나서 홀 안에 바텐더와 여급만 남게 되었을 때 그녀가 바텐더를 통해 내게 위스키  한잔
을 보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그날
도 11시까지 바에서 시간을 보낼 양이었고 맞은편에 버티고 앉아 있는 내가 자꾸 신경이 쓰
인 나머지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이란 그런 식으로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나
는 오 분쯤 후에 위스키 잔을  들고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잔을  보내 오긴 했지만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옆에 앉기가 무섭게 그녀는 담배에 칙, 성냥불을 그어 붙이고 태연
한 모습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눈에 걸려 들었다.  그
녀에게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숲에  들어가면 맡게 되는 상긋한 냄새가  났다. 그건 화장품 
따위가 아니라 말하자면 분위기의 냄새다. "오늘은 제가 필시 부인께 말을 걸겠지,  라고 아
침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담배가  물린 손가락으로 위스키 잔을  그러쥔 채 별 
반응이 없었다. 내가 어떤 경우의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내 주신 위스키를 
다 마실 때까지 옆에 앉아  있겠습니다." 속눈썹 밑에 유난히 깊게  박혀 있는 검은 눈으로 
그녀가 나를 돌아보더니 꺼끌한 소리로 되받았다. "저를 유혹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건  부인이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거꾸로 
제가 물어보죠. 제가 지금 부인을  유혹하고 있는 겁니까?" 깊은 눈빛으로  그녀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빈틈없이 꽉 짜인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은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만들
어 가는 것이다. "손이 좋군요. 자주 그렇게 손가락의  힘을 완전히 빼고 있어 봐요. 여자들
은 남자들의 그런 손에 마음이 끌리거든요. 낮엔 억세다가도 밤이 되면 한없이 약해지는 남
자의 여린 손 말예요." 아무것도 거머쥘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되도록 손에 힘을 풀고 산
다. "아까부터 남창우 씨가 말을 걸어 올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죠. 지루하게 더듬거리고 있
어 제가 먼저 술잔을 보낸 거죠."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텔레비전이라는 
흉물덕분이다. 이렇게 되면 실로 여러 가지가  복잡해진다. 우선 음성 다중 방송을 해야  한
다. 그녀가 내 쪽으로 의자를 빙 돌렸다. "아까의  질문에 이제 답하죠. 당신은 일주일 전부
터 저를 유혹하고 있었어요. 첫날 여기서 마주쳤을 때부터 말이죠." "그랬군요." "묘한  기미
가 느껴지는 유혹이어서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죠. 저  사람이 왜 나를 유혹하고 있는 
걸까 하고 말예요. 제가 잘못 넘겨짚고 있는 건가요?" 그런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
제가 아니다. 그녀는 요령껏 자기 방어에 열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유혹이란  걸 받
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섹스에 관한 유혹이죠. 남창우 씨도 단순히 그런 건가요? 저는 그게 
궁금했습니다. 아니라면 각자 물위에 떠 있는 널빤지를 딛고  서서 밤새 오락가락하는 담화 
데이트를 원하시는 건가요."
  나는 그녀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일단 완충 지대에  돌을 갖다 놓았다. "널빤지 없이 
그냥 맨발로 물위에 서서 나누는  담화는 어떻습니까. 발이 빠지게 되면  물론 빠지는 겁니
다." 흔들리리라 생각했던 그녀는 별 흐트러짐이 없었다. 담배 끝에 말려 있는  재를 재떨이
로 가져 가 가볍게 떨어뜨리며 그녀는 쿡, 하고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좋아요, 받아들이기
로 하죠. 하지만 물위에 서서 얼마나 버티겠어요. 저야 연습이 잘돼 있어서 그런대로 견디는 
편이지만요." 말솜씨가 여간이 아니었다. "먼저 제가 한 수 알려 드리죠. 물위에 서 있기 위
해서는 손가락 뿐만 아니라 온몸의 힘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빼고 있어야 합니다. 자
칫 눈알에 힘만 줘도 바로 풍덩이란 말씀이에요. 그럴 수 있겠어요?" 어쨌든 해보는 데까지
는 해보는 . "재밌는 게임이 될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할까요? 자,  호루라기부터 불죠." "흥, 
남창우 씬 이미 실패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상대에게 이미 빈틈을 
보여 줬으니까요. 언제나 그렇게 아무곳에나 자신을 내보이고  다니나요? 말하자면 늘 잠옷 
바람에 베개를 가슴에 껴안고 다니나요? 그러므로 남창우 씨는 공이 울리자마자 일 라운드
를 뺏긴 셈입니다." 뭐라고? 그건 어찌 알았는가. 당황하여 나는 섣불리  자세를 흐트러뜨렸
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핸드백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스탠드 위에 펴놓았다. 바에서 쓰
는 메모지였다. 신기하게도 거기엔 잠옷 바람에 베개를 껴안은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
다. "그렇게 놀랄 것도 없잖아요? 엊그제 남창우 씨가 바로  여기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낙서
한 그림이니까요." 그렇구나. 그녀는 무엇에 쓰려는지 메모지를 접어 도로 핸드백에 집어 놓
고는 위스키 잔을 입술로 가져 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는 눈을 돌려 산자락의 리프트를 내다보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뒤
늦게 여름 휴가를 온 셈인데 하필 피서지에서 남창우 씨를 만났군요.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파리에서 돌아온 걸로 아는데요." 그녀는 지난 주 
토요일 밤에 티롤 호텔의 한 객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나 또한 그날 
수색의 집에서 냉장고의 남은 맥주를 꺼내 마시며 내가 주연한 <파리의 우울>을 보고 있었
다. 그때 나는 얼마 동안이라도 서울을 떠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무장
소 무공간의 결락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제 생각이 맞다면 남창우 씨는 어느 날 갑
자기 난쟁이 아이로 변한 거예요. 이제 서른 다섯 살이라고 그랬나요?" 어쩐지 나는 그리웠
던 미지의 사람과 만나고 있는 성싶었다. 작위없이 이렇듯 이내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기란 매우 드문 일이다. 비록 상대가  나를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녀의  이름부터 
물었다. "그걸 알아 뭐하게요. 어차피 설천을  떠나면 그걸로 게임 오버일텐데요." 그러하겠
지. 하지만 기억 한쪽에 이름 정도 남겨 놓은들 무슨 일이야 생기겠는가. 바텐더가 부주의하
게 툭치는 바람에 주화의 실내등이 이마 위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
자가 주황으로 내 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를 몇 번 되풀이하다 멎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위
스키 잔을 그대로 두고 나는 바텐더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물끄러미 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냄새를 감추고 후후  웃었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한  가지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었다. 추억은 그 순간 몽롱하게 뒤에서 내 등을 껴안고 있다가 히히거리며 계단 
아래로 급히 사라졌다. 그녀는 서른여덟의 혼자인 여자였다. 젊어서는 피아노를 했고 몇  년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도대체 별 생각없이  스물아홉 살에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주부로 살았는데 몇 년 전에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때 친정  아버지가 전립선염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미국에 가 
있었다. 그녀는 그 사고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타국에서 뒤늦게 소식을 접해 
그런 모양이라며 일순 한숨을 내쉬었다. "장례가 끝난 뒤  돌아와서 보니 지금까지의 제 인
생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더군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말끔히 말예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
르지만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기나긴 꿈을 꾸다 적요로운 초저녁에 침대에 일어나 
앉은 정도의 기분이었죠. 나중에 생각하니  그때껏 인생이란 것이 저한테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거예요." 물건이라고?
  "어쨌든 그후로 저는 조금씩 인생이 물렁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맵고 짜기도 하
다는 걸 알게 됐죠. 물론  대가가 지나치게 컸지만 그때부터는 하늘에서  툭 떨어진 식으로 
두 번째 삶을 살기 시작한 거예요. 이해하시겠어요? 잠옷 바람의 난쟁이 아저씨." 쉽게 이해
한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어떤 계기를 통해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하고 싶
었다. "세계는 모두가 각기 다른 거울이라고  합니다. 직선이거나 단순 곡선이 아니고  사방 
연속 무늬로 이뤄져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 또한  입체적인 물건이겠죠." "그
런데 그게 자의적으로는 넘나들 수 없다는 데 인간 조건의  비극이 있는 거겠죠. 삶은 절대
로 마음먹은 대로 바꾸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때로 그 앞에 앉아 있는 무력한 자신을 볼 때
는 정말이지 극심한 절망을 느낍니다." 그녀는 평창동에서 의상실을 하고 있었다. 전공은 아
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잃고 나서  언니가 물려준 것을 받았다고  했다. "이곳이 설천이란 
말을 얼마 전에야 들었어요. 우리말로 하면 눈내가 되나요?" 그렇겠지. 여기서 그닥 멀지 않
은 곳에 또 반딧불내라는 곳이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가 반짝하고 눈을 빛내며 
내게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엷은 아르마니 향수 냄새가 몰려왔다.  "한자론 
그럼 형천인가요?" 그렇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찾아가 보면  거기 아직 반딧불들이 
온통 환한 시내를 이루고 있겠다.
  "아름다워요." 눈앞에 보듯 그녀가 떨리는 소리로  우물거리며 스탠드 바닥을 손가락으로 
타다타다 하고 가로로 몇 번 두드렸다. 무슨 음악일까. 그녀가 후후 웃으며 손가락을 안으로 
접어 들였다. "기껏해야 쇼팽의<야상곡>입니다.  아무튼 겨울엔 설천이고 여름엔  형천이라 
이 말씀이죠. 우리 이따 그리로 가볼까요?" 나는 대꾸 없이 맥주병을 집어들고 다시금 습자
지 같은 창을 통해 본 리프트들을 내다보았다. 쇠의자마다 달빛이 곱게곱게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음의 시간이 일  분쯤 지나갔다. 그러다가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피아노로 <월광>을 쳐주시면 형천으로 모시고 가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말예요?" "여기서 전주를 거쳐 변산으로 가다 보면 어느 길가에 <월광>이란 야식집
이 있습니다. 작년엔가 전주에 들렀다 내소사 채석강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그 야식집 간판
을 보고 펄쩍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펄쩍? 하고 그녀가  내 말을 흉내내며 반딧불처럼 웃
었다. "엉뚱한 데가 있군요.  하지만 남의 영업집에서  피아노를 쳐대면 누가  좋아한대요?" 
"그거야 부탁을 해놓고 볼 일입니다." "농담이 아니군요." "물론입니다." 꼭이 술기운 때문이
랄 수도 없었는데 어쨌든 얘기는 여기까지  와있었다. 말하자면 설천, 형천, 월광의  차례로. 
아까부터 이쪽이 하는 얘기를 훔쳐 듣고  있었던지 바텐더가 방긋이 웃으며 손바닥  하나를 
벌려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리켰다.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던 그녀가 옷깃을 여
미며 자리에 일어나 그럼 한 마디만요, 하더니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달빛이 그녀의  연둣
빛 몸뚱어리를 일순간에 환하게 싸안아  버렸다. 그녀의 구부린 등 너머로  보이는 밤의 빈 
리프트들. 연주가 시작되자 홀 안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배 안을 연상케 했다. 나는 천천히 
달빛에 쓸리며 짙푸른 밤하늘로 둥둥 떠가기 시작했다. 숨죽일 듯한 공기의 밀도 속에서 그
리고 나는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밤의  푸른 대기 속에 떠 있던 
달의 환영을 보고 있었다. 그러하고 문득 공기의 울림이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찰나,  잠옷을 
입고 가슴에 베개를 껴안고 있는 아이 하나가 리프트를 타고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게 보
였다. 나는 매를 맞은 사람처럼 화닥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려는 몸짓을 했다. 그때 
피아노 앞에 몰려 있던 반딧불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부스스 일어났다. 그녀가 스탠드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넋이 빠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아마도 나는 생으로 꿈
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멀뚱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녀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옆에 앉
게 했다. "왜요, 연주가 마음에 안 들어요?"  나는 도리질을 하며 의식을 가다듬었다. "아무
래도 야식집 간판만큼은 못한 모양이네요." "아닙니다. 밤하늘에 둥둥 떠다니다 방금 지상으
로 내려온 터라 여태 어떨떨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얼버무리며 나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
의 땀을 닦아 냈다. 그제야 그녀는 꾸물꾸물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가만 살폈다.
  "헛것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로군요." 그녀의 눈 속에서 반딧불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당처럼 귀신을 쫓아드리고 싶군요. 저도 까맣게 자주 지쳐 본 경험이 있
어서 하는 소리예요. 그땐 아닌게아니라 요란한 색깔의 옷을 입고 털부채와 방울을 들고 펄
쩍펄쩍 춤이라도 추고 싶죠." 나는 형천 가까이 설천에서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면
부지였던 한 여인과 이런 식으로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마음의 지친 때를 틈
타 잠깐 어디서 왔다가는 도로 슬며시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바에서 일어선 것은 얼추 자
정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나는 약간 술기운이 올라 있었고  그녀도 걸음새의 탄력이 빠
져나가 있었다. 1층 로비까지 내려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꾸물거리고 있자 그녀
가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는 앞가슴에 팔짱을 낀채 나를  돌아보았다. 빰이 발그레하게 상
기돼 있었다. 마주서서 보니 키가 작은 여자였다. 이마에 머리칼 몇 올이 풀려 내려와  밤의 
우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약속대로 반딧불내로 저를 데려가야 하겠죠?" 그거야 기꺼이 그러겠지만 그녀는 음주 상
태였다. 그녀의 눈이 숲속에 숨어 있는 작은 밤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만만하게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입가에 잘못  칠한 루주 같은 
웃음을 머금고 그녀는 왠지 장난스럽기까지 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
겠습니까? 라고 물으려다 나는 앞서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오 분 후에 따라 나
왔다. 그 동안 안에서 무얼하고 있었던 걸까. "그새 자정이로군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녀가 들으라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자정이에요." 뒷전 밤의 공기 속에서 그녀의 발자
국 소리가 다가왔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쳐 차가 있는 곳으로 앞서 걸었다. 나는 느릿한 걸
음으로 뒤에서 그녀를 따라갔다. 호텔 지붕에 걸려 있던 달이 어느새 거칠봉 쪽으로 기어올
라가 있었다. 그녀의 소나타 승용차에 올라타며 내가 운전을  하랴고 물었지만 그녀는 핸드
백을 뒷좌석에 집어 던지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가 거부할  거예요." 알썽달쏭한 말이었
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삼 년쯤 됐나요? 그 동안 이 사내와 무척 친해졌어요. 육감이 통
할 정도로 말이죠." 이 사내. 하긴 그렇게도 생각할수 있지. "음주 운전도 꽤  한 편이죠. 근
데 신기하게도 사고는 한 번도 나지 않더군요." 위험천만한 얘기다.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서로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거예요. 어느 때 부턴가 모종의 일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사람이든 차든  길들
이기 나름인 거예요. 차를 운전하고 있으면 가끔 제 몸으로  전달돼 오는 일종의 정욕을 느
낄 때가 있어요. 제법 완강한 힘을 가진 정욕말이죠. 어때여, 알겠어요?" 나는 알 것 같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비슷한 경우지만 나 역시 내가 입고  있는 양복에서 사물이나 바라보
고 있는 풍경에서 종종 성욕을 자극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
의 것이죠. 차가 엔진 소리를 내며 능동적으로 제게 접근해 온단 그런 얘기예요. 그 힘에 자
신을 일치시키고 저항을 멈추고 있으면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는 그런 말씀." "아
이 언더스탠드." 그녀는 느리게 차를 몰아  구천동 쪽으로 내려갔다. 차가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이 여겨지는 매우 부드러운 운전이었다. 그 느낌은  마디 없이 완망하게 이어지
고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사이사이 옆을 돌아보며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운전 
솜씨가 뷰티플하군요."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수경대를 앞두고 오른편 구
천동 쪽으로 길을 틀며 그녀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구월담 쪽으로 직진해 내려가야 반딧불
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둠 
저 앞에서 무언가 그녀와 내가 타고 있는 차를 잡아 끌고 있다는 느낌에 압도돼 있었기  때
문이었다. "저기 왼쪽에 솟아 있는 산 이름이 뭐죠?" 힘을  풀고 앉아 있던 그녀가 낮게 속
삭여 왔다. "적상산이라고 들었습니다." "적상이라뇨?" "붉은 치마 말입니다. 바위며 돌이 온
통 붉은색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여 놓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또 일이 분 
숨을 죽이고 차만 몰았다. 그러더니 문득. "오늘은  붉은 치마를 입고 나올걸 그랬나 봐요." 
"..." "저기 치맛자락이 달을 품고 있네요."
  은은했던 소리가 금세 복숭앗빛으로 변해 있었다. 검푸른 숲에  실크 커튼처럼 내려와 있
는 달빛이 이쪽을 내려다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가 바깥으로 쑥쑥 빨려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유혹이 될지도 모를 말을  그
녀에게 던졌다. "당신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누군지  말입니다." 그녀가 이의로 곧장 되받
았다. "그새 안팎이 다 궁금하다 그 말씀이죠. 하지만 아직 일러요. 승부처에 다다르려면 좀
더 전희 진행이 필요한 법이에요. 남창우  씨나 저나 전희에 더 몰두하는 스타일이죠.  항상 
끝을 남겨 두고 천천히 그리고 생생하게 전과정을 탐닉하는  스타일 말예요. 그것이 불행한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그걸 고집하는 거예요." 차는  구불구불 깊은골 쪽으로 빨려 들
어가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존재에게 전체를 집어 던지기 위해 늘 끝을 틀켜쥐고 있
는 거겠죠. 그런데 이쯤의 나이가 되면 서서히 불안한 생각이들죠. 과연 그 어떤 존재가  세
상에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단 말이죠. 맞나요?" "하나를  주고 나면 다른 
하나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건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성질이 다른 거예요. 
아시잖아요 왜." "그렇다면 아직도  그걸 품고 계시단  말씀인가요?" 후후 웃으면서 그녀가 
재빨리 한 손을 뒤로 돌려 내 등을 쳤다. "어디 찾아보세요." 바람 한 점  없이 천지가 고요
하고 적막한 밤이었다. 반딧불은 보이지 않았다. 깊은골을 지나 수심대에서 둥그렇게 꺾어져 
파회를 지나 추월담까지 올라갔는데도 반딧불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 몇 마리쯤
이 시냇가에 숨어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와 내가 구경하고 싶었던 것은 바디가 무리 지어 있
는 말 그대로 형천이었던 것이다. 거게 십 년 전에  왔다가 구월담 근처에서 반딧불 무더기
를 본 후론 더 이상 구천동 자락에 와본 일이 없는 터였다. 내가 옆자리에서 초조하게 부스
럭거리고 있자 그녀가 눈치를 챘는지 함벽소에서 차를 세우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렇게 
초조해할 건 없어요. 그 대신 잠깐  시내에 내려갔다 오도록 하죠." 그녀와 나는  차를 세워 
둔 채 밤의 연인처럼 팔소매를 잡고 시내로 내려갔다.
  티, 티, 하고 그제야 반디 몇 마리가 머리 위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수풀에 또 몇 마디가 
머리 위에서 날아가고 있었다. 수풀에 또 몇 마리가 앉아 있는 게 보이기도 했다. 걸음을 멈
추고 그녀가 피우다 만 담배를 시내에 집어 던졌다. 담뱃불은  포물선 하나가 방금 물 속으
로 사라져 간 것이다. "반딧불은 거의  사라졌어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보호  구역에 가면 
가끔 장관을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어요." 그녀는 처음부터 이 지역
에 반딧불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나는 여
선생님을 따라 나온 소년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모든 불빛들이 한 점씩 
한 점씩 우리들 인생에서 사라져 가고 있어요. 아마 당신 나이쯤이었을 거예요. 제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 게 말예요. 그땐 사방이 탄광처럼 캄캄했죠. 그나마 이렇게 몇 점 불빛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아주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녀가 내뱉는 깊은 한숨 소리가 귓전에 덮
여 왔다. "남창우 씨가 지금 인생의 막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첫날 봤을 때부
터 눈치채고 있었죠. 저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그러니 낯선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 말해 봐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왜 갑자기 난쟁이 아이로 줄어
들었는지 말예요. 듣고 싶어서 그래요." 밤의  고요를 헤집고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귀에 
차갑게 흘러들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반딧불을 찾으려 눈알을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게 궁금합니까?" "솔직히 말하면 섹스보다도 궁금해요.  황홀한 섹스라는 건 이미 자나갔어
요. 아직 그걸 잊을 나이는 아니지만 그 앞에 다다르면  옷깃을 여미고 단추가 잘 채워졌나 
오히려 몸을 도사리게 됩니다. 이제 저는 사람에게서 질감이란 걸 느끼고 싶어요.  옷감처럼 
저마다 느낌이 다르잖아요. 오늘 남창우 씨와 저는 어느덧 남자 여자라는 경계를 지나 담담
하게 존재로 만날 정도의 나이가 된 거예요." "..."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덧붙였다. "오늘밤에  남창우 씨와 함께 있고 싶습니
다. 그러나 그게 정욕 때문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느낌이 통하는 사람이니 이런  말씀도 
드리는 거예요.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면 흔적은 남지 않겠죠. 그러나 질감에 따라서는 지워
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죠. 그게 왠지 두려워요. 그래서 차마 여쭙지를 못하고 
초조하게 애를 태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름만큼은  알아야 서로 평등하게 만나는 
게 아닌가. 어떤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름이 중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저는 여자잖아요. 그
만큼은 남자가 봐줘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다 저는 이미 많은 것을  그쪽에 대고 얘기했어
요." "..." "세계는 서로 다른 거울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남창우 씨가 왜 제 거울에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서 무얼  보셨는지요. 그렇다고 거울 삯을  내라는 건 아닙니다." 
밤 공기가 물 소리에 밀려  구천동 골짜기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건너편 수풀 속에서 
반디 몇 마리가 깜빡깜빡 열심히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내친김에 새치골 지나 윗중리까지 
가볼까요? 더럭 무리 진 반딧불에 미련이 남는데요." 그녀가 밤의 물푸레나무 밑에 서서 무
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세 뼘쯤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였다.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얼굴엔 뜻을 알 수 없는 야릇한 우수가 배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기
웃기웃 올라갔다.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달빛을 받아 형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시동을 걸기 전에 그녀가 내게 짧게 키스를 해왔다.  반디의 무리를 찾아 그녀와 나는 
내처 적상산 계곡으로 차를 몰아 들어갔다. 붉은 치맛자락 안으로. 어찌나 사방이  적막한지 
행여 천리 밖에도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긍휼한 밤 풍경에 사로잡혀 나는 기어이 헛
소리를 뇌까리고 있었다. "여러 곳을 다녀 봤지만 무주의  밤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때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듯이."  치마령을 넘어가며 
그녀가 나직한 소리로 되받았다. 다시금 누군가 보내 온 전령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
다. 왜 그럴까. "반디는 하늘을  덮고 있어 눈에 보이지  않나 봐요." 그런가. "봐요, 하늘이 
오농 형광빛이에요." 밖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내다보니 하늘은  과연 형광빛에 은은히 감싸
여 있었다. "곧 월식이 있을 거예요 추석 때쯤이가는 얘길 들었어요. 그때  여기도 캄캄해서 
반디만 몇 마리 깜빡거리겠죠." 월식. 무심코 그녀가 내뱉은 말에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몸
이 굳어졌다. 겨드랑이에 확 식은땀이 배어 나오며 목울대로 뻐근한 통증이 몰려들었다.  월
실이라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렇든 저렇든 나는 퀭한 눈으
로 적상의 안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추석  때라면 앞으로 보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쯤 나는 주미의 어머니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때가 하필 월식이라니. 금세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챈 그녀가 아랫새재쯤에서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이어 차를 아예 세워  버렸
다. 웬일인가 싶어 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 이상 가면 안 되겠어
요. 차가 말을 안 듣고 있어요. 이쯤에서 속히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자동차 따위가 왜 말
을 안 듣는단 말인가. "묻지 말아요." 문득 냉정하게 변한 말투였다. 그녀는 차가 돌려 올라
온 길을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급작스런 일이어서 더 이상 물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설천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운전석에 깊숙이 몸을 사리고 앉아 입을 닫고 있었다.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백합동에 와서야 그녀는 쩍마른 소리를 내뱉었다. "짐작했던 것보다 상태
가 안 좋군요.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요."그녀가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 이상 옷감의  질감 따
위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갑게 앉아 있다가 나는  차에서 내리며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이제는 아이 언더스탠드, 라고 말할 기회가 영영 없어진  건가요?" 그녀는 운
전대를 잡고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가다듬으며 밖에 서 있는 나를 내다보았다. " 필요하다면 하루쯤 더 머물겠
지만 아시다시피 그건 남창우 씨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사람은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그네일수록 그것은  더욱 신경 쓰이는 일이죠. 그러기  위해서 
하루는 더 필요합니다." "어떻게 필요한데요?" "피아노를 한 번 더 쳐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
겠죠." "리바이벌이나 리메이크는 싫습니다."  "이번엔 고난도입니다. 바흐의  <평균율>입니
다. 물론 첫마디면 족합니다." 그녀는 되묻고 있었다. "그건 또 뭔데요? 그것도 어디 야식집
이나 구둣가게 이름인가요?" "거기엔 오늘 미처 찾아내지 못한 반딧불내도 속해 있습니다." 
"그러고 또?" 내 말이 진작부터 마뜨갆았거나 아니면  기분이 단단히 상해 있는 듯했다. 하
는 수 없이 나는 주섬주섬 집어삼키고 있었다. "영원과 정화, 그리고 순정." 그리고요? 하고 
그녀가 자동 응답기처럼 되풀이했다. "그리고 오늘 만난 반딧불내 당신." "그렇군요, 남창우 
씨가 지금껏 부려먹은 것들이 죄 그 안에 들어 있군요.  아마 그중에는 지나간 여자들도 서
넛 끼여 있겠죠. 영원, 정화, 순정 적어도  이렇게 세 명 정도는 말이죠." "..." "남창우  씨는 
빈틈을 자주 보이는 스타일예요. 그러니 이번 라운드도 싱겁게 끝나 버린 셈이에요.  그런데 
글러브를 끼고 더 이상 버틸 수 있겠어요? 이쪽에서 초조하게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남창우 
씨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죠?  어쩌면 그게 여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또 저와 
비슷한 여자.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불쑥제 거울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 여자를  만나려
고 말이죠. 교탁에서 있으면 책상 아래로 만화책을 훔쳐보는  학생쯤은 금방 발견하게 됩니
다. 솔직한 사람이라면 교탁 앞으로 나와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손을 들고 서 계시기 바랍
니다." 내가 뜨악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
래도 바흐에 관한 수식이 거의 만점에 가까워서 봐주기를  하겠습니다. 설천에서 하루만 더 
묵기로 하죠. 내일 저녁 9시에 스탠드바에서 만나요." 무슨 말을 하는지  따라잡기조차 힘들
었다. 손을 들어 보이고 내가 돌아서려고 할 때 그녀가 언뜻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이 묵
고 있는 객실 번호를 알려 주었다. "새벽을 기해 임시 개방하겠습니다. 만약에  오신다면 어
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방으로 들어와 베란다 아래로 내다보니 이미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호텔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거실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일기장과 커피잔과 뚜
껑이 열린 채 굴러 있는  몽블랑 만년필을 실감이 나지 않는  기분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어딘가에서 고요히 타오르고 있을 반딧불내로 달이 숨어 버린 새벽이었다. 나는 잠옷 바
람에 헐렁한 윗도리만 걸친 채 티롤 호텔 앞까지 와  있었다. 더군다나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었는가. 허나 아니었다. 한여름 밤의 차갑고 습한 공기, 검은  단청빛으
로 아득히 열려 있는 하늘.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프런트에서  졸고 있는 직원이 눈에 들어
왔다.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부지불식간에 잠에서 깨어나 밖을 살피러 나왔다
가 슬금슬금 이쪽으로 와버렸을 게다. 반쯤은 무의식인 상태에서 또 반쯤은 잠결을 빌미 삼
아. 오늘은 일요일 새벽이고 어젯밤 투숙객이 다 빠져 나가 호텔은 텅 비어 있었다.  엘리베
이터 앞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갔다가 나는 띵똥! 소리에 프런트의  직원이 튀어나올까 싶어 
계단을 통해 3층 객실로 올라갔다. 그녀가  투숙해 있는 객실 문 앞까지  와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방금 지나온 회랑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복도는 은행  금고처럼 무거운 공기로 빈
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라고 마음을 추스르며 나는 초인종을  길게 
한 번 눌렀다. 삼십 초쯤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잠들어 있는 것일까. 글
쎄. 초조한 상태로 잠시 기다렸다가 나는 다시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안에서 자물
쇠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갸웃이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문은  열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만  밖으로 조용히 새나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실내의 불이 꺼져 버렸다.
  돌연한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 나는 한동안 숨을 죽이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며 거실의 희미한 풍경이 동공에 비쳐 들었다. 나는 구두
를 벗고 게걸음으로 소파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또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잠옷 바람의  아저씨."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은  침실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다 말고 벌떡 일어나  침실이 아닌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누 거품을 잔뜩 
풀어 약 오 분 동안이나 손을 닦았다. 물기를 수건에 닦으며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나를 한
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토록 낯선 모습의 나를. 큰 트럭을 타고 아주 추운 곳으로  떠
났으면 좋겠는 새벽이었다. 몸과 마음이  천천히 얼어붙어 이윽고 내가 얼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노르드곶에 가면 이런 허황된  꿈이라도 이룰수 있는 것인가. 그녀는  나이트웨어를 
입고 화장대 앞에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술을 약간 벌린 
채. 퀭한 눈으로 미동 없이. 스탠드 등이 공기를  엷은 푸른빛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저기 
놓여 있는 의자가 당신의 자리예요." 나는 고개를 비틀어  창가에 놓여 있는 의자를 바라보
았다. "거기 가서 앉으세요. 오늘 밤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는 혼이 빠져 나간 사람처럼 
창가로 느릿느릿 다가가 웃옷을 벗어 창틀에 걸치고 잠옷  차림으로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됐어요. 그럼 지금부터 몸에 있는 힘을 천천히 빼내는 거예요. 피를 빼내고 살을 벗고 뼈를 
하나씩 들어내서 바닥에 내려놓는 거예요. 그런 다음 응시를 통해 서로 교감을 시작하는 거
예요." 그녀는 침대로 올라가 가로로 길게  드러누웠다. 한 손은 머리에 괴고 다른  한 손은 
가슴과 복수 사이에 내려놓았다. 양쪽 무릎은 붙여 이십 도 가량 앞으로 끌어당긴 자세였다.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지만 잘  균형을 이룬 몸의  윤곽이 요염하게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몸의 힘을 빼라고 했죠." 나는 손가락부터 몸의 힘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
는 반쯤 눈을 내리감고 입술을 약간 벌려 잠이 쏟아지는 표정을 지었다.
  무릎 안쪽으로 잠깐 핏줄이 곤두서 나는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한데, 그녀가 제 가
슴을 손으로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튀는 소리를 들으며 묵
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 힘을 밖으로 내보내란 말이야, 어서. 이윽고 그녀의  손이 
허벅지 가운데로 옮겨 가면서 왼쪽 다리가 슬그머니 들춰졌다.  그러고 나더니 그녀의 몸이 
춤을 추듯 부드럽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눈을 흡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괴롭고 아픈 얼굴이었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숨이  찬 나머지 머리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성욕과의 부대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기묘
한 상황의 낯섦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갔고 눈동자의 초점이 완
전히 풀어지면서 고통스런 신음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내가 부릅뜬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
자 마침내 그녀가 끙 하고  몸을 뒤채더니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무엇이 잘못됐나 싶어 
나는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몸짓을 했다. 그때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대로 있어요!" "..." "오늘 당신과 관계를 갖게 되면 저는 마귀처럼 당신에게 집착
하게 될 거예요.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되면 당신은 나의 노예가 될 테고 이제 어디로도  갈 수가 없게 돼요." 여름 스키
장. 형천. 설천. 적상. 빈 리프트. 잠옷을 입은 아이. 나는 의자에 앉아 몸을 풀어놓은  채 그
녀의 박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몇 해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생
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동안 받았던 고통  때문에 그녀는 꼭 그만큼이 남의 고통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타인(남자)
과의 관계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몸부림침을 치며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등을 보인 채로 
그녀가 말했다. "나를 원해서 온 게 아니었군요." 그것은 나도 명료하게 알 수가 없었다. 경
우에 따라서는 아마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또 그게 아닌 것도 있었을 것이다.  커튼
이 젖혀 있는 방으로 밤 불빛 물결이 기웃기웃 타넘어 오고 있었다. "밤의 어머니가 필요했
나요." 밤의 어머니. 그런지도 모르지. 나이트웨어를 입고 깊이 잠들어 있는 젊은 날의 어머
니가 그리워 몰래 침입해 들어왔는지도 모르지. 무릎 안쪽과  겨드랑이에 흘렀던 땀이 식어 
가고 있었다. 나는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금 거울을 들여다보니  내얼
굴이 염소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데 아까와는 달리 거울  속의 내가 오히려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고 비누를  묻혀 천천히 몸을 닦아 냈
다. 그런 다음 얼굴에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고 그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의자를 
침대 모서리에 갖다 놓고 앉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누워 있었다. "비록 섹스를 하지 않았다
고 하더라도 당신은 오늘 일을 가지고 누군가를 속이게 되겠죠. 아까 알았습니다. 당신이 끝
내 제게로 오지 않았을 때 당신 마음속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말예요. 그러니 이제 어쩝
니까." "속이겠지요. 묻는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거짓이 생겼군요." "때로 거짓도 필요
합니다. 당신한테 타인의 고통이 필요하듯이 저에겐 누군가를 속이고 나서 괴로워할 거짓이 
필요합니다. 방금 욕실에서 거울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게 아직 고통이 필요하다는  걸 
말입니다." "..." "사람 또한 서로 거울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
은 거짓과 고통을 암암리에 주고받으며 숨차게 살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중
요한 것은 거기에도 순정과 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주 못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무덤을 파는일만은 삼가야겠죠. 그렇게 되면 문득  세상의 거울 하나가 사라
져 버리는 것과 같을 테니까요. 요컨대 고통스런 삶에선 거짓도 때로는 남을 위해 필요하다
는 겁니다. 그게 궁극적으로 옳은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아
온 건 사실입니다." "..."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려면 우선 마음의 청소부터 해야 합니다.  그
러기 위해서 때로 고통이란 청소부가 있어야 합니다."
  "무얼 그렇게 괴로워 하나요." "남에게 함부로 베푼 상처. 그가  받은 상처만큼 저에겐 저
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꼭 그래야만 되는 건가요?" "밤마다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삐걱
거리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저를 봅니다. 곧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다리. 그러니 한
시 바삐 건너가야 하겠죠. 그런 다음 혹시 다리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 모를 사람과 만나
고 싶습니다." "거기 누가 기다리고 있죠?" "그건  건너고 난 다음에 알게 됩니다." "아무도 
없다면요?" "그래도 건너가야죠." 그녀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
다보고 있었다. 적상산은 보이지 않았고  여름 스키장이 잃어버린 도시  아틀란티스처럼 밤 
그늘에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깜박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
는가 싶었는데 귓전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만 일어나  거울에서 걸어 나와야
죠." 코 끝에 치약 냄새와 샴푸 냄새가 스미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에게 그 동안 어
디에 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반딧불내에 갔었잖아요." 그녀가  되살아난 사루비아처럼 웃었
다. 그때 나는 사방에서 티티거리며 날고 있는 반디의 환영을 목도하고 있었다. 긴 꿈을  꾸
고 깨어난 기분으로.
  나는 그녀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아침이 오기 전에  나는 이곳을 떠나 
백합동으로 돌아가야만 할 터이었다. "이제 말해  봐요. 새벽에 왜 몽유병 환자처럼  깨어나 
여기로 왔는지. 그러니까 당신을 이렇게 난쟁이로  만들어 놓은 게 무엇인지 말예요."  나는 
왜 내가 티롤 호텔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아니 왜 무주에 내려와 있는가를. 그
리고 나는 그 답을 결국  알아냈다.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요, 시작해요."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려면 조금 서둘러야 할지도 몰랐다. "어떤 부인이 처녀로서 저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부인이 처녀 적에 좋아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
구하고 당신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있었다는 말이로군요." "최근에야 그렇다는 걸 알았습
니다. 그 동안 그 부인은 딸을 통해 제게 감정을 투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감정이죠. 이
를테면 사랑인가요?" 그건 섣불리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미와의 일만을 돌이켜
보면 군데군데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딸을 시켜 당신을 사랑했다 이 말이죠."  "..." 
"무서운 일이로군요." "그건 사실도 모른  채 저는 그녀의 딸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가까
이." "더할 수 없이."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가  못내 두려웠다. "계속해요." "나중에 
딸은 알게 됩니다. 자신이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저럼." "그 남자는  얼마 전에 자살을 했습니
다." 그녀가 스탠드에 놓여 있던 담배를 가져 와 성냥불을 켰다. 성냥 불 속의  그녀 얼굴이 
오래 전처럼 낯익어 보였다. "그녀는 지금 깊은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곧 그 부인을 만나야만 하는데요." 대답이 이내 돌
아오지 않아 알루미늄 꼭지를 따는 내가 불현 듯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 표정을 살피
며 큼큼, 기침을 했다. "어쩌다 그런 사랑을 했나요.  어째서 사랑이 부리고 있는 종의 얼굴
을 몰라 봤나요." 사랑이 부리고 있는 종. 담배가 연기가 청회색으로 내 눈앞을 지나  창 밖
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삼각형의 추상화  속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 모서리가  흔들리는 
추상. 그리고 구토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멀미 중세. 나는 맥주로 구토증을 가까스로  내
리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지금 나이트웨어를 입고 앉아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 "남
창우 씨는 기만을 당한 셈이지만 결국 용서해야만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아까 말한 그 
다리를 건너갈 수 없을 테니까요.  남창우 씨는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받기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용서가 가능할 거예요." 이 여자도 용서를 말하고 있었다. "그  일에 드는 시
간도 만만치 않은 법예요. 그것 또한 궁전을  짓는 일만큼이나 대역사라는 말이죠." 그런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가 굳은 얼굴로 나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제가 남창우 씨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죠?" 금세 못 알아듣고 나는 우멍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표정을 감췄으나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전해져 오는 차디찬 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
는 의자에서 일어나 카디건을 걸치고 돌아왔는데 그때부터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역력했
다. "남창우 씨와 제가 언제 이렇게 가깝게 된 거죠?"  꿈에서 깨어난 쉰 소리로 그녀가 물
어 왔다. 말귀를 알아듣고 나는 가만가만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제게서 줄곧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요?" "..."  "제가 남창우 씨를 쉽게 허락했던 까닭을 이제 
알겠어요. 말하자면 저도 모르게 말려든 거예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솔직히 대답해 줄  수 
없나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야 나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득히 먼데
서 새벽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적상산 자락
으로부터 청회색으로 밝아오는 빛을 혼몽한 상태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는 소리와 여름날의 새벽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손
가락만한 화병에 단 한 송이 꽂혀 있는 장미.
  그때 석류빛 얼굴의 한 여자가 창가에 서 있는 잠옷 바람의 사내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었다. 이 무슨 늦여름 아침이 꿈인가. "한 시간 안에 남창우 씨는 이곳을  빠져 나가
야만 해요. 그 전에 더 물을 게  있으면 어서 말하도록 해요." "그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몸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이트웨어 자락 
속으로 맨발을 감췄다. "나이가 든다 해도 여자들은 늘 누군가에게 몰두하고 싶어해요. 이를
테면 딸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투사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게 그런 종류의 단순한 감정
이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감정. "거기에 혹시 교활한 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알게 되더라도 침착하게 하나하나 풀어 가야 할 거예요." 교활한 마음. "만나서 들으면 알게 
되겠지만 남창우 씨에게 빈 곳이 있어서 다 그런 일도 생긴 걸  거예요." 그랬겠지. "그러니 
흉한 모습으로 돌아서면 안 됩니다. 그 부인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 주고 가능하다면 마음의 
문도 닫아 주고 난 다음에 자신의 모습을 챙겨 돌아오면  좋겠죠. 사람에겐 그런 광경이 필
요한거예요." 나는 묵묵히 있다가 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떠날 겁니까?" "그래야겠
죠. 유원지에 오래 머물다 보면 문득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여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지친 얼굴로 내가 보는 앞에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이불을 끌어올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침대  옆으로 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그녀
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예 세상을 잊은 고요한 얼굴로 꿈속
을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나는 나수연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그
녀의 잠든 모습을 어둠 속에 앉아  내려다 본 적이 있었다. 안에서 흘러  나온 홀연한 빛에 
싸여 손을 갖다 대면 곧 타버릴 듯이. "저를 보며 또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군요." 그녀가 반
수면의 잠꼬대로 웅얼거렸다. "나와 닮은 처녀. 내가  서른여덟 살 된 그 여자로군요." 새벽 
5시였다. "요 며칠 동안 당신은 나를 통해 그 여자를 만나고 있었죠." 묻는  것인지 다만 잠
꼬대인지 모를 말투였다. 그래, 이 여자를 처음 만난 순간 나는 파리의 어두운 골목  어귀에
서 헤어진 나수연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서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곧 
그런 일을 해내야 할 사람이니까요. 막연하긴  했지만 어째 처음부터 느낌이 그랬죠."  나는 
감람빛으로 트여 오고 있는 하늘을 내다보며 그녀가 완전히 잠들 때를 기다려 문을 열고 밖
으로 빠져 나왔다.
  깨어나니 오후 5시가 돼 있었다. 무려 열두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는 얘기였다. 황망한  기
분에 무엇부터 해야할지를 몰라 허둥거리고 있다가 나는 냉장고를 뒤져 빵과 우유로 허기를 
때운 다음 커피를 끓여 놓고 책상에 앉아 나수연에게 편지를  썼다. 물론 부치자고 쓰는 편
지는 아니었다. 오늘에야 나는 그대와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리운 사람. 반딧불내 근처
에 와서 다시 그대를 만나다니. 영속과 영원. 그것을 믿게 되면 삶도 하나의 종교가 되겠지. 
그대는 어느 날에 어여쁜 모습 나부끼며 다시 내 앞에 나타날는지. 그때는 사랑이 아니어도 
좋겠지. 그대는 내가 이 지상에서 만난 가장 순결한 존재. 저기 여름 스키장에 그대의 흰 자
전거들이 매달려 있군. 언젠가 저 자전거를 타고 그대는 햇빛 눈부신 길모퉁이를 돌아 홀연
히 나타나겠지.
  밤 9시에 나는 정장을 하고 티롤 호텔 스탠드바에 가서 그녀와 만났다. 그녀는 먼저 와서 
블루 스카이라는 칵테일을 앞에 두고 있었다. 칵테일 잔 안을 흘끗 들여다보니 푸른 하늘에 
흰구름 한 점이 솜털처럼 가볍게 풀어져 있었다. 잘 잤느냐고 속삭이자 그녀가 가만히 웃어 
보였다. 월요일 밤. 홀 안에 있는 손님은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그러고자 했던 건 아니었으
나 나는 나수연에게 쓴 편지를 그녀에게 대신 건네 주었다. 딱히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와의 만남에 단순하고 깨끗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묵묵히 
편지를 읽은 다음 핸드백에서 잠옷 바람의 아이가 그려진  메모지를 꺼내 내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오늘 밤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했다. "비 내리는 날에  쇼윈도 안에 앉아 손을 
멈추고 가끔 남은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있어요. 그 안개 같은 것, 그  수수깨끼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죠. 안 그래도 세상은 온통 은유로 가득  차서 늘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하
잖아요.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그게 변함없이 인생이라는 걸 저는 알게 됐어요.  수수께끼가 
있는 한 인생은 계속될 것이고 또 가끔은 여기서처럼 근사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걸테죠. 
그렇다면 한꺼번에 인생이 던지고 있는 수수께끼를 다 풀어 내려고 하면 안 되겠죠. 세련된 
사람이라면 이쪽에서도 수수께끼를 던져 인생과  겨룰 줄 알아야 할  거예요." 그게 그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피아노  앞에 가 앉아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그녀가 이미 
계단을 내려간 뒤였다. 스탠드 위에는 무슨 징표라도 되는 양  그녀가 시켜 놓은 블루 스카
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니 생각지도 못했던 엽서가 와 있었다. 이런이런. 그것은 나수연이 부쳐  온 
것이었다. 남아 있는 짐을 챙기러 다시 시르미오네로 왔어요. 이 엽서를 받을 때 저는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가 있을 거예요. 아마도 느르드곶이 될 것 같아요. 아주 추워져서 그예 마
음까지 얼어 버리면 좋으련만. 당신은 언젠가 제게 열대에 대해 말씀하셨죠. 야자수와 큰 꽃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들과 아침이면 양동이를 들고 나무의 시든 꽃을 다는 소녀와 힌두교
에 대해서 말예요. 거기 힌두 사원에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했나요?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요. 어차피 우리 사는 세상이  사람의 열대인 걸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노르드곶에 
가서도 제 마음이 다 없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이  갔던 열대에 들러 꽃과 물과 쌀로 세례를 
받을 거예요. 그럼 우린 멀리서 하나의 종교에 입문한  교도가 되겠죠. 그리워요. 하지만 파
리에서 나눴던 한때의 그 사랑은 이제 현세에서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사랑이에요. 이곳 
시르미오네는 변함없이 올리브 나무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수와 오래된 성과  밤늦게까지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파는 카페들의 마을이에요. 알고  계시겠지만 내세에는 여기서 당신의 
신부가 돼서 만날 거예요. 꽃과 물과 쌀의 마음으로 썼어요.  그럼 이만 총총. 9월로 접어드
는 시르미오네에서 나수연 드림. 


    15. 월식
  그로부터 며칠 후에 나는 양재역 근처에 있는 한  칵테일바에서 주미의 어머니와 만났다. 
추석 무렵 월식이 있던 날이었다. 흰색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그간에 퍽이나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 언젠가처럼 그녀와 나는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눴다. 눈을 마주보
고 있으면 오히려 말이 막히고 거짓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주로 스탠드바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 표정과 말로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의 미세한 것들이 사이사이 전달
돼 오곤 한다. 그리하여 진실은 오히려 말과 표정에 있지 않다. 그녀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무주 생각이 나서 블루 스카이를 먼저 한잔 마셨다. 옆에서 물끄러미 칵테일 잔을 내려다보
고 있던 그녀가 첫마디를 이렇게 내뱉었다. "흐리군요." 아닌게아니라 흰구름이 제멋대로 풀
어져 그레이 스카이로 변해있었다. 여의치 않아 또 연락이  늦어졌다고 나는 어젯밤 전화에
다 한 말을 되풀이했다. 그랬을 것이라고 그녀는 무감하고 느린 어조로 되받았다. 데킬라 선
세트를 주문하며 나는 주미의 소식을 물었다. 암만해도 대꾸가  없어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늦게 묻고 있다는 건 저도 압니다."  "사람이란 항상 늦는 법입니
다.
  그러니 남창우 씨도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월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사이사이 통유리창 밖의 하늘을 훔쳐보고 있었다. 밖엔 말간  어둠이 켜켜이 내려앉고 있었
다. 그러나 어디에 떠 있는지 달은 보이지 않았다. 사각으로 기울어 있는 빌딩 숲의  공제선
만 청와빛 어둠에 흔들리며 타고 있었다. 지붕 위에 비행접시가  와서 멈춰 있는 그런 기분
이 드는 저녁이었다. 나는 달의 우물을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갈치가 인연이 되어  만난 
두 남녀에 대해서. 무엇이 불안스러운지  그녀는 아까부터 몸을 부스럭거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칵테일 잔에 눈을 박고  그녀의 말이 건너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칵테일 잔에 
눈을 박고 그녀의 말이 건너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들은 대로라면 주미는 지금 우도
에 내려가 있는 중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목덜미에 가려움이 스멀스멀 핥고 지나갔다. "남창
우 씨는 오늘 긴 얘기를 들어야 할겁니다. 어쩌면 한  여자의 일생에 관한 얘기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올해 쉰 살이었다. 일생을 얘기한다 해도 부족한 나이라고 할  수는 없었
다. "그러나 모두 다 하지는 마십시오. 그중에는 제가 들어서는 안될 말이  있는지도 모릅니
다. 다만 주미에 관한 얘기라면 뭐든지  듣겠습니다. 그런 다음, 비록 늦긴  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염두엔  두겠지만 그렇게 안 될지도 모릅니
다. 주미에 대해 얘기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제 얘기도 해야 될 테니까요." "..."
  "지난 일이지만 주미가 남창우 씨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밤을 기억합니다. 아니, 새벽이었
죠." 일 년 육 개월 전이다.  그녀와 헤어진 것도 그새 육  개월이 됐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세월은 이와 같이 흘러가는 법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 옛일 또한 시간에 묻히고 밖으
로 뾰족이 나와 있는 부분도 조금씩 풍화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때의 일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되풀이되고 있다니. "그 만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이제 와
서 고백합니다."그녀는 지난 봄에 만났을 때처럼 맥주를 한  병 비우고 나더니 양주를 주문
해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정에 술집에서  나
와 그녀와 나는 편의점까지 걸어가 커피를 마시며 달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한 절름발이 
노인이 처마 밑을 지나 어딘가로 가고 있었지. 그래, 그랬었지. 돌이켜보면 그땐 나는 쉰 살
의 부인이 아니라 그녀의 처녀와  만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달의 우물에 관해 
물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닥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군요." "주미와 헤어진 
뒤에 알게 됐습니다." 거푸 두 잔을 마시고 난 뒤에  그녀는 차츰 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
다. 나는 그녀가 근래 술에 기대고 산다는 것을 눈치챘다. 알코올 습관은 의외로 쉽게  사람
을 나쁘게 바꿔 놓는다. 중독 말이다. "그렇다면 낚시꾼에  관한 얘기도 들었겠습니다." "네, 
우도의 전설을 들었죠."
  "전설. 그렇군요, 이제는 전설이군요." 마른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오래된 기
억이란 결국 전설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엉뚱하게 타인을 통해 되풀이되는 경우가 있
다. 유전을 통해서 회한을 통해서. 그러니 우리는 어쩔수  없이 옛사람의 후예인 것이다. 그
녀는 고즈넉이 달의 우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네, 우도는 갈치잡이로  이름난 섬입니
다. 철이 되면 낚시꾼들이 아직도 많이  모여들죠. 백야. 맑은 밤이면 갈치가  널려 있는 집 
마당이 온통 은빛으로 변합니다. 그 사람과 저는 그 마당 안에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주미
의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때 마당 위에 똑바로 보름달이 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이 들어와 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누워 있는 형국이었죠.  훗날 거기에 우물이 생길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 "그 사람이 우도에  머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눈을  피해 매일 밤 
달이 뜨는 시각에 산호 모래밭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달이  질때쯤이면 헤어져 집으로 돌
아오곤 했습니다. 언약도 했습니다. 저는  또 그 언약을 믿었지요."  밖엔 아직 달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분필 가루 같은 어둠만 파랗게 하늘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어딘가에 
이미 달이 떠 있음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우물을 판 건  제 아버지가 거기다 저를 묻어 버
리려고 그랬던 겁니다. 이미 배가 불러  와 문밖 출입을 못할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날의 
일을 들어 죄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간 낚시꾼이 언약대로 저를  데리러 오면 함께 
따라가게 할 작정이었으나 산달이 다 되도록  그 사람한테서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밤마다 삽을 들고 나가 마당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 "당신 손
으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으니 제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지게 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
래도 혹시 혹시 하며 저는 나날이 그 사람을 기다렸지요.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뻔히 알면
서도 말입니다.
  죽음은 오히려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왠지 없었지 않을 것 같은 원망과 회한이 두려
웠습니다." "..." "아무튼 저는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나간 채 산호  모래밭을 
헤매다 아버지에게 끌려 와 매를  맞고 잠든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다 일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방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대낮인데 날이 컴컴해지기 시작했지요. 하늘을 보고 
나서 일식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죽음이 닥쳐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해가  완
전히 가려질 즈음 저는 신발만 벗어 놓고 우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집을 비
운 참이었지요." 죽음이란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해와 달이 눈에서 캄캄히 사라지는 방식으
로. "그날 밤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고통스런 조산이었습니다. 주미말입니다." "..."  "제가 하
는 말을 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전설 같습니다." "어차피 전생의  일입니다." 긴 한숨을 내쉬
며 그녀가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렇군요." 어제가  곧 죽음인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누
구나 죽음에 붙들려 살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산 죽음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은 단지 전생에서 끝나지 않고 현생으로 이어집니다.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이라
고 그녀는 말했다. "남창우 씨  말대로 모든 얘기를 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요, 중요한 
것은 남창우 씨와 제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됐는가 하는 걸 테니까요."  "..." "언젠가 저는 
우연히 남창우 씨가 출연한 텔레비전 토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코크쇼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때 화면으로  흘러 나오고 있던 어떤 마
취적인 분위기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화면의  안과 밖이 뒤바뀐 듯한, 좀더 정확한  말하면 
제가 큰 화면 속에 앉아 남창우 씨가 나오는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
다. 그건 아마 이런 걸 겁니다. 각자  다른 장소에 있지만 실은 하나의 공간에 속해  있다는 
느낌 말이지요." 나는 그녀가 말한 바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고 있었다. 큰 화면 속에 들어 
있는 작은 화면. 그리고 그녀와 나. "저는 왜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남창우 씨가 우도에 왔던 낚시꾼과 모습이 닮았던 것은 아니었습
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익숙한 냄새며 손을 뻗으면  곧 만져질 듯한 촉감 따위 
들이 남창우 씨를 통한 저한테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화면 속에 얼른 무엇이 나
타났다 사라졌다는 느낌이 든 것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건 일종의 그림자 같은 것이었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어느덧 그녀와 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
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왜 그런 경험을 하게 됐는지 정확히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뜬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현상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잠깐 화면에 나타났던 겁니다. 
그러고는 남창우 씨 뒤로 숨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남창우  씨는 마술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웬일인지 낚시꾼을  흉내내고 있는 듯이 보였던  겁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화면 안쪽에 배치돼 있는  몇 가지 소도구들, 엇갈리는 시선, 
헛기침 소리, 조명에 반사된 색감... 이런 것들이 묘하게 하나로 어우러져 그런 분위기를  만
들어 내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남창우 씨가 전에  출연했던 드라마의 몇몇 
장면들이 편집이 돼 나왔는데 거기서 저는  또다시 그 수수께끼의 그림자를 목격하게  됩니
다. 남창우 씨와 겹쳐 있는 그림자를 말입니다. 저는 우물 속의 오랜 잠에서 천천히  깨어나
기 시작했습니다." 으스스한 말이다. "그것은 과거라는  상자 안이었습니다. 저는 뚜껑을 열
고 밖으로 나왔죠. 그리고 남창우 씨가 앉아 있는 작은  텔레비전 박스 안으로 걸어 들어갔
죠. 그 해묵은 시간의 상자 속으로  말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잊고 있던 그 
사람이 거기 태연히 앉아 있었으니까요. 아니라고 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는 나비를 보신  적이 있겠죠." 본 적이 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지금은 내가 그렇다. 그녀는 고개를 틀어 총회색으로 불안스럽게 떠 있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러나 달은 창의 사각 안에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밖이 푸른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걸로 봐서 월식이  시작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 쉬며 데킬라 
선세트 다음에 주문한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켰다. 취하면 안 돼, 라고 나는 아까부터  의식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화면  뒤에서 어
른거리던 그 빛의 그림자가 돌연 남창우 씨와 몸을 끼워 맞추면서 하나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남창우 씨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고통스런 표정을 감추고 있
는 게 역력했습니다.
  삽시간에 사람이 바뀌게 된 거죠." 그런데 어째서 내겐 그런 기억이 없을까.  하기야 그건 
텔레비전 밖의 누군가에게서 일방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나는 맥주병을 스탠드에 탁 
내려놓으며 등짝을 꿈지럭거려 보았다. 한여름에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있는 것처럼 둔중한 
느낌이 내 등을 껴안고 있었다. 그 느낌은 곧 무감각한 상태로 의식을 바꿔 놓고 있었다. 그
러한 때에 옆에서 이런 소리가 귓전에 흘러 들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요. 당신은 이미 몸
이 바뀌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틀어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내 눈을 태연히 
마주보며 잔에 남아 있던 술을 입술로 가져 가 빨  듯이 비워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당신
과 나는 우도에서 헤어지고 나서 무려 이 십육년 만에 해후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틀림없
이 낚시꾼에게 하듯 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어 나는 이봐요, 하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흐트러져 있던 눈의 초점을 
동공 한가운데로 모았다. 그와 함께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표정이 서서히 되살아
났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주미를 시켜 저를  유혹했단 말입니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깐만요,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십 분 후
에 그녀가 돌아왔는데 그 동안 나는 줄곧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재고 있었다. 바깥 
공기를 끌고 들어온 그녀가 옆자리에 가만히 와  앉으며 밤의 소리로 내 귀에 대고 속삭였
다. "월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 마침내 시작되고 있는 모양이군.  누가 내 등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이군. "그럼 아까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복수를 하
려고 했던 겁니다."
  복수? 놀란 마음으로 나는 그녀의 차디찬  얼굴을 노려보았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당
신에게 말입니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아 거푸 되물었다. "저한테 말입니까?" 그녀의 눈 밑
에 작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었다. "남창우 씨를 통해 그 사람에게  말이죠." 유혹이 아니
라 복수. 그리고 상대는 엉뚱하게도 아무 상관도 없는 남창우,  곧 나다. 그게 하필 왜 나여
야 한단 말인가. 복부가 터질 듯한 요의를 간신히 추스르며 나는 기우뚱하니 일어나 절룩절
룩 밖으로 나갔다. 바야흐로 하늘에서 월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웬 나쁜 피를 가진 짐승이 
사과를 베어먹듯'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 동안 
누군가 나를 저렇듯 뒷전에 숨어 갉아먹고 있었다는 얘기다. 나는 달이 지워지고 있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창을 통하여 스탠드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담배를 피우다 만 동작으로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어째서 그 
같은 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더란 말인가. 복수. 그렇다면 그녀는 주미가 나
를 배신할 거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딸을 조
종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한순간 진저리를 치고 나서 나는  거리에 나와 하늘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그녀는 스탠드에 팔꿈치
를 괸 채 얼굴을 싸쥐고 있었다. 경련이  이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로부터  십 
분 정도를 나는 속절없이 그녀의 등만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한 
병을 더 비우고 잠꼬대처럼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루이 암스트롱의 고즈넉한 목소리를 들
으며 나는 작년 2월 주미를 만났던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
고 있었다. 과연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옆에는 지난 일들의 증거가 고
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것은  그 일이 아직 종료하고 완료된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했다. 나는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깨울 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두 시간만 참으면 됩니다. 월식이 끝나면 고통도 사라질겁니다." 그녀는 옴짝도 않은  채 고
개를 스탠드에 처박고 있었다. 취했나 싶었지만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월식이 끝나기 
전에 얘기를 마쳐야만 합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녀가 고통스러울 거라는 깨달음이 언뜻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때문이었다. 
그러니 외로운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타일러야 하는 법인가.  자중하라, 
자중하라고. 나는 무너져 가고 있는 그녀를 일깨워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고분고분 내 말에 
따랐다. 술도 술이려니와 고통에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때마침 지나던 택시에 올라타며  나
는 여의도로 가자고 택시 운전사에게 재촉했다. 달은 이제  삼분의 일쯤이 검게 먹혀들어가 
있었다. "세상이 곧 어둠에 휩싸일 겁니다." 뜻 없이 내뱉은 말에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며 
내던지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여의도엔 왜 가냐는 물음도 없이 그녀는 파리한 입술을 앙
다물고 간헐적으로 진저리만 치고 있었다. 나는 3월에 주미와 헤어지던 날 선글라스를 끼고
밖에 나가 목격한 일식 현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휘황하던  대낮에 갑자기 내 일생에 몰
려들던 칙칙한 어둠. 그날 나는 어쩌면 한번 더 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실로  숱한 
죽음이 있고 한 사람의 일생을 따져 볼 때도 죽음은 늘 되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서 다시 어렵사리 태어나곤 하는 것이다. 택시가 여의도로 들어서자 나는 주미와 만났던 식
당 앞에 차를 세우게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 둔 채 그녀에게 말했
다. "작년 2월에 주미를 만난 곳입니다. 확인해 두시기 바랍니다."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가 가리킨 곳을 내다보았다. 하얗게  죽어 있는 그녀의 게슴츠레
한 눈으로 내가 가리킨 곳을 내다보았다. 하얗게 죽어 있는  그녀의 얼굴에 밤 그림자가 얼
룩지고 있었다. 나는 내처 운전사에게 말해 마포대교 쪽으로 내달렸다. 그런 다음 다리가 시
작되는 지점에서 다시 차를 멈추게 하고 한강 선착장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식당에서 나와 
주미를 데리고 저곳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엔 마포대교를 함께 뒤뚱거리며 건너갔습니다. 지
난 여름 부인과 함께 오기도 했었죠. 기억납니까?"  퀭한 눈으로 선착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 그녀가 맥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됐습니다. 이제 다리를 건너가 주십시오." 택시는 금세 마포대교를 건너  가든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여기까지는 부인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 그럼 택시에서 내려 계속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홍대 앞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녀는 내 표정을스윽 살피고
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달은 이제 검은 접시 위에 세 토막으로  잘라 놓은 사과 한 쪽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육교를 건너 용강동 쪽으로 접어들었다. 홍대 앞에 도착할 즈음이
면 월식이 끝날 터이었다. 어둠침침한 길을 지나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
만 해도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던 그녀는 이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담배를 피워 물고는 
휴우 숨을 고쳐 쉬었다. "주미를 시켜 내게 어떻게 한  거죠?" 얼른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
녀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 얼굴 어딘가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 순가에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옆인 듯  뒤인 듯 나를 따라오는 모습이  주미를 많이 닮아 
있었다. 돌아보지 않은 채 나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뒤에서 발걸음이 멎고 담뱃불이 땅
에 떨어지더니 주황 불꽃이 바람에 쓸려 내 발목께로  날아왔다. "남창우 씨를 유인해 우물
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밤에 달입니다." 그 동안 나는 한 여인에게 이리저리 끌려 우
물로 가고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그렇게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지체 없이 나는 되
물었다. "주미에게 남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까?" 그녀가 파르르 떠는 소리로 간신
히 대꾸해 왔다.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얼마간 말을 잃고 나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겉으
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저는 한편으로 주미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역시 그 사람의 피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로구나. "주미에게 당신을 꼬드기도록 매일매일 부추기고 암시를 주었습니다. 저는 주미
가 결국 전에 만나던 남자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돌아가게 할 
생각이었죠.
  당신을 죽인 다음에 말입니다." 나를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숨을 멈추
고 가만히 서 있다가 내처 앞으로 걸어갔다. 한 박자 느린 동작으로 그녀는 나를 따라서 움
직이고 있었다. 도시가 검은 이불보에 덮여 가고 있었다. "주미는 한순간도 저를  사랑한 적
이 없었군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남창우 씨한테  정을 
느꼈던 건 사실입니다. 어쨌든 깊이 만나왔으니 말예요. 하지만 주미가 사랑했던 건 그 사람
뿐이었습니다." 갖가지 혼란스러운 생각에  휩싸여 나는 말을  잃고 홍익대학교 방향이라고 
잠작되는 곳으로 휘적휘적 발걸음만 옮겨 놓고 있었다. 그녀는  힘에 부치는 걸음걸이로 나
를 따라오고 있었다. "남창우 씨 말이 맞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누구나  한눈을 팔
게 되는 순간이 있은 법입니다. 오히려 안심이 돼서 옆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곤 
합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때는 그래서 한눈을 판 다음인 경우가  허다하죠. 
그래서 저는 사이사이 주미를 눈여겨보며 그때마다 그애를  교사했던 겁니다." 냉혹한 말이
었다. "남창우 씨와의 관계가 깊어진 다음에 주미는 그 남자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
만 때가 늦어 있었죠. 저는  주미의 혼란을 이용해 남창우 씨가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게 
하면서 고통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된 셈이었다. "주미도 
알고 있었나요? 자신이 기껏해야  사랑이 부리고 있는 종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종이라
뇨? 하고 그녀가 옆으로 바투 다가오며 반문했다.  "자신이 그 어미의 꼭두각시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녀는 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
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말을 되씹으며 서강대학교 앞을 막  지나 극동방송국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달은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스듬히 때를 맞춰 나는 그녀
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복수가 이뤄진 겁니까?" 그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피카소 거리를 왼편에 두고 홍대 앞을 지나 주미와 새벽에 앉아 있던 야식집을 찾아 청기와 
주유소 사거리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와 처음 만난 지 일 년 육  개월 만에 나는 그녀의 어
머니와 함께 현장 검증이라도 하듯 같은 코스의 길을 가고 있었다. 다시는 이 길을 오지 않
기 위해. 다시는 이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시 바삐 부인의 복수에서  놓여 나
고 싶습니다." 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서며 나는 그녀가 제대로 나를 따라
오는지를 살필 겸 뒤를 돌아보며 무심코 그런 말을 던졌으나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복수가  이뤄졌냐고 아까 제게 물으셨죠. 그렇습니다.  그게 
다시 한번 제게 가해지는 고통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수가 이뤄진 것이겠죠." "용서할 
수는 없었던가요?" "그런 일은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거꾸로 용서받을 
짓을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도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 "아시다시피 예기치 못
했던 사람의 죽음이 그걸 증명해 준 셈입니다." <와사등>이라는 야식집을 찾아내 들어가려
는데 마침내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져 하늘에서 사라져 있었다. 달은 녹슨 동전
처럼 희미한 테두리만 남긴 채  희미하게 전봇대 위에 걸려 있었다.  지하로 통하여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그녀의 얼굴에 왠지 모를 두려움의 그림자가 살얼음처럼 뒤덮여 있었다. "납
골당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납골당. 그래, 그런지도 모르지. "이따가 밖으로 나
오면 하늘에 달이 보일까요?" 쩍 갈라진  소리로 그녀가 탁자 맞은편에 앉으며  궁시렁거렸
다. 굳이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으므로 나는 입을 다물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미와  마
주앉아 있던 바로 이 자리. 음습하고 퀴퀴한 냄새, 천장 구석구석에 갇혀 있는 날카로운  어
둠. 그리고 나는 그때 그 지점으로 돌아와 앞으로 계속될  삶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
어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잘못된 복수의 울타리에서 그만  놓여 나고 싶다고 
다시금 간곡히 말했다.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주미와 저  사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까?" 그녀는 심문을 받는  죄수처럼 파리한 얼굴로 맥주잔만 붙들고  앉아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남창우 씨의 틈을 봤던  겁니다. 비록 텔레비전을 통해 느낀 사실
이긴 하지만 남창우 씨에겐 큰 구멍이 나 있습니다. 그걸 알게 되니 방법이 간단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마음이 뚫려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미를 의심하는 딸은 없으니까 주미에게 제  마음을 감추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
다. 저는 남창우 씨를 만날 때마다 주미가 자신이 여자임을 느끼도록 했을 따름입니다. 여자
란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온전히 여자라고 느낄 때 쉽게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부인이 저
지르고 있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나요?"  "차츰 두려움을 느끼지 시작했습니다. 깊은 
늪에 빠져 들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서둘러  빠져 나왔어야죠." "변명이 되겠
지만 때가 늦어 있었습니다. 이쪽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쪽에서 이미 알고 있었습
니다. 죽은 그 남자 말이요. 주미도 그때는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 "그 사람이 
자살한 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생각하고 일을  저
질렀던 건 아닙니다. 이것만큼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주미는 그 사람한테  돌아갔
습니다. 그게 제 생각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주미를 
설득했습니다. 모두가 불행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남자 쪽에서 서둘러 결
혼 날짜를 잡고 식까지 올렸지만 두 사람 모두 다가올  앞날이 두려웠을 겁니다. 주미로 인
해 신혼 여행이 취소되고 나서야 그 남자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 동
안은 승부에 집착해 있느라고 다른 생각은  못하고 있었겠죠." 승부라니. "왜요. 남자들한테
는 다 그런 게 있지 않나요? 일단 이기고 보자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 말입니다. 그러고 나
서는 뒤를 돌아보며 안색을 바꾸지요." 그런가. "그 사람은 저 혼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
을 겁니다. 성정이 여린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게 자살로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이지  몰랐습
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을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주미가 방송국  일을 그만두고 여행
을 떠난 뒤 저는 생각다  못해 남창우 씨를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미를 구하고 
싶었던 겁니다. 여의도로 찾아갔을 때는 더욱  절박한 상황이었죠." 삶이란 과연 낯  모르는 
사람의 서툰 생각으로 이렇듯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그녀는 죽은 남자와 내게 그
리고 주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며 급기야 고개를 떨구고 울먹이기 시작
했다. 그녀는 나와 주미와 죽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
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어떤 일이든 다 할 수는 없는 듯 법인 것이다. 용서라는 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가 없다. 
솥뚜껑에 짓눌린 듯한 답답한 마음으로 나는 잔을 집어 들며 맥빠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이 침침한 지하  납골당에서 빠져 나가야만 할 터이었다.  허나 용서라는 것이 
말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이상 쉽게 무슨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주
미가 내게 느끼고 있는 죄책감만이라도 덜어 주길 바란다고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애
가 저에게 품고 있는 원망은 제가 감수해야겠지만 남창우 씨가 아니더라도 주미는 또 죽은 
남자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게 될 겁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가 행할 수 있는 몫을 맡아 달라는 얘기였다. 이제 와서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이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리고 또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이 그 동안에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복
수란 자신에게 들이미는 칼일지도 모른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아무 저녁이든 홀
로 앉아 가만히 생각해 보라. 머리에 등불을  얹고 그 등불이 꺼지기 전에. 누가 내게  칼을 
들고 찾아오는 모습을. 그 사람의 붉은 눈동자를. 검은 발자국을... 그러면 생각의 끝을 이르
러 결국 알게 된다. 그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과거에 있어서도 그게 역시 나였
다는 것을. 생각에서 깨어나 어슴푸레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였다. 앞에  앉
아 있는 부인의 얼굴이 밤새 까맣게  타 있었다. 탁자에 술을 남겨 놓은  채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의자에 풀어져 있는 그녀를 일깨워 밖으로 나왔다. 컴컴한 계단 한중간에서 그
녀가 내 팔소매를 붙들어 뭐라 말하려는 순간 그만 툭 손이 미끄러져 내렸다. "일단 밖으로 
나가죠." 밖으로 나오자 백야처럼 밤이 밝아져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꺾고 하늘을 올려다보
며 낮게 외쳤다. "월식이 끝났군요!" 검푸른 하늘 아래를 그녀와 나는 조금 더 걸어갔다. 그
녀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다. 동교동  로터리를 앞에 두고 우체국 옆  기찻길을 건너며 나는 
무심코 이제 타인이라면,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옆에 따라 걷고 있던 그녀가 뭐라구요?
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타인이라면 용서를 해야겠죠. 그게 더 이상 나 자신이거나  나의 일
부가 아닌 이상엔 더더욱 말입니다."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타인이기 
때문에 용서를 하겠다는 말인가요?"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타인이란 동시
에 전혀 새로운 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나, 라고 되받으며 그녀는  그 말
을 곰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앞으로도 길게 생을 거듭할 타인에게 함부로 복수를 염두에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게 곧 복수가 된다는 사
실을 오늘 밤 부인을 통해  깨달은 겁니다." "제가 많이 잘못했습니다."  "동시에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일이 어쩌면 자신이 원하기도 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걸 겁니다.  비
록 늦긴 했지만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그래요." "죽은 사람에 대
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하더라
도 거기엔 분명 산 자들의 몫이 있었으니까요." "..." 신촌까지 내려올  동안 그녀는 말이 없
었다. 아니, 다시금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울어본 자는 안다.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돌아갈 데가 없다는 것을. "감정을 거두십시오. 내일도 또 모레도 인생은 계속될 텐
데 그렇게 지루하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현대 백화점이 건너다 보이는 
신촌 로터리 건널목에서 택시를 잡아 그녀를 태워 보내려고 하는 참에 그녀가 문을 닫으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서너 걸음쪽 비켜서 있던 내게로 다가왔다. "이제 만날 일이 없
겠죠?" 나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며 아마 그렇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다. 일껏 우물에서 
기어 나왔는데 다시 만난들 무엇하랴. 봄날의 일식도 가을날의 월식도 이제는 모두 끝난 것
이다. 역시 그렇겠죠? 하며 헬쑥한 표정으로 그녀는 횡단보도 건너편 유흥업소가 빽빽히 들
어서 있는 백화점 옆 골목길을 아슴히 건너다보았다. "뭔가 할말이 남아 있는  듯해요. 억지
로 부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무표정하게 바
라보고 있자 그녀의 눈빛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었다. 더웠던  한낮인데 월식이 끝나고 나
서부터 사방에 숭숭 구멍이라도 뚫린 듯 차디찬 바람이  가슴으로 스미고 있었다. 무르춤하
게 서 있다가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는 걸 보고 앞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그녀도 보도 
블록에서 내려서 내 뒤를 비틀비틀 따라왔다.
  현대 백화점 앞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그 시각엔 적당히  갈 
데조차 없었다. 신촌 기차역 앞의 <오래된 정거장>이  떠올랐으나 거기까지 걸어가려면 족
히 또 이십 분은 걸릴 터이었다. 막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그녀가 백화점 주차
장 옆에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를 손으로 가리켰다. "잠깐이면  될 텐데 저기면 또 어떻습니
까." 길모퉁이의 포장마차에 들어가 아무렇게나 고등어 구이를  시켜놓고 그녀와 나는 더듬
더듬 소주를 마셨다. 포장마차에서 나올 때  소주는 반 병쯤이 남아 있었다.  그래, 소주 반 
병, 그리고 긴 나무 의자의  중간에 흘러내리듯 앉아 있는 그녀의  굽은 허리, 가쁜 숨소리, 
발이 아픈지 신발 밖으로 내놓은  뒤꿈치 두 개, 팔소매에 묻은  술 얼룩, 헝클어진 머리칼, 
왼쪽 손목의 은장 카리타스 시계,  비누 거품을 묻혀도 좀처럼 빠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가운뎃손가락의 사파이어 반지,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빨간 매니큐어, 간헐적으로  엄습하는 
허리춤의 찬바람... 나는 쓸데없이 그런 것들을 기억에 담아  두고 있었다 어쩌면 생은 매순
간의 그런 자잘한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뒤를 돌아보면 과거란 한갓 
흐린 날의 유리창인 듯 풍경을 담아 내지 못하고 다만 바람에 떨고 있을 뿐이다. 떨고 있는 
사이 그리고 생의 집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오늘 나는 당신과 헤어지겠어요." 나는 화닥 
명치 끝으로 중심을 끌어 모았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게 관연 내 인생이었던가요?" 그
녀는 유령처럼 계속 웅얼거렸다. "저는 이십칠 년 동안 흐린 거울만 들여다보고 살았습니다. 
혹시 당신이 찾아왔을 때 내가 거기 없으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그 거울마저 잃어버
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이제는 다 좋다고  쳐요. 하지만 난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죠? 난 이제 쉰 살의 늙은 여자입니다. 대답해요, 그것만큼은 당신이 얘기해 줘야  하잖아
요." "..." "그렇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내 그림자를 붙잡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마
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나는 이렇게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누구나 제 그
림자에 홀려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내 존재라는 것도  다 나라는 그림자에 불과할는지 모
릅니다. 그러니 거울이 없어졌다 해도 나라는 존재는 남게 되겠지요. 이를테면 거울이  생기
고 나서 미혹이 생긴 걸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해묵은 그림자에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
다." "그런가요?" 그녀는 잠시 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는  낚시꾼에게 말하고 있었
던 것이다. "눈꺼풀에 비치는 것이 진짜 자기  모습일 겁니다." "눈꺼풀에 보이나요?" "눈을 
감으면 보이질 않습니까. 오늘 밤하늘에서 벌어진 일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게 
제 몸의 그림자 안에 있는 겁니다." "제 몸의 그림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며 포장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다면 남창우 씨란 엉뚱한 그림자
가 지나가고 나서 저의 밤이 겨우 밝아진 셈이군요." "부인이 선택하신 일입니다." "이제 와
서 하는 말이지만 주미를 통해 남창우 씨에게 과거의 제못다 했던 감정을 이루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주미와 결혼을 시켜서라도 옆에 두고 보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걸 그랬습니다. 말이란 때로 밤의 창문 밑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의 그림
자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무섭지요." "사람들은 이제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갓 말 때문에  얼마나 숱한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지금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게 진실이라면 말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저절로 알려 줄 겁니다." 전생의 우물에서 막  빠져 나오 이 가엾은 늙은 여
자는 이제 혼자 밤길을 더듬어 가야만 할 것이었다. 그 길은 아무도  알 수 없고 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자신도 지금은  그 길을 모르고 있겠지만 저만의  고요한 침묵에 오래 
잠겨 있다 보면 아마 찾아지기도 할것이었다. 밤의 포장마차. 펄럭이는 주황의 지붕과 9월의 
새벽. 언뜻언뜻 마음에 와 부딪곤 하는 낙엽  지는 거리의 풍경. 한번 더 뜨겁게 죽어  술병 
옆에서 차디차게 식어 버린 저 먼 바다의 고등어. 혼자서 끓고 있는 양은솔. 빈 술병들이 남
김없이 꽂혀 있는 빨간 플라스틱 박스. 나는 오래 전  은빈과 피카소 거리의 포장마차에 앉
아 그녀의 고백에 귀기울이고 있던 밤을 아득히 떠올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는 
이름도 모르는 부인과 그 부근을 지나왔었다. 인생은 단 하나의 긴긴 외길일 터인데 언젠가 
지나왔던 길을 옆으로 다시 구경하며 지나치게 되는 것인가. 그때마다 우린 흐린 창을 통해 
침침한 눈으로 밖을 기웃거리게 되지. 그리고  보게 된다. 그때 하필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인생이란 아마도 그토록 희미한  창틀 너머로 어둡게 지나
가고 있는, 나를 닮은 어떤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찢어진 우산이거
나 다 닳아 버린 신발을 신고  단 하나의 외로운 사랑을 찾아 가고  있는... 한데 그 사랑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소식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에서 나오기 직전 
나는 주미의 상태를 물었다. 10월  철하와 송해란의 결혼식에 가게 되면  그때 우도에 있는 
주미에게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아까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볼 건가요?" 꺼끌한 
소리로 그녀가 되받았다. "한 번쯤 만나 보는 게 좋겠죠." 포장마차 밖으로 가을이라고 느껴
지는 밤바람 소리가 길게 휘몰아쳐 가고 있었다. "저 바람에 거리의 나무들이 춥게 옷을 벗
겠군요." 그녀도 바람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가을이 왔나 봅니다.  긴긴 여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가을엔 어떤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해도 부디 평안하시기 바
랍니다." "편지를 쓰듯이 얘기하는군요." "안 그래도 올 가을엔 몇  군데 편지를 쓸 데가 있
습니다. 생각이 나면 부인께도 한 장  부쳐 올리지요. 무릇 만물이 하나라는데 어쩌면  옆에 
앉아 계신 분이 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별해도 
결국은 단 하나의 외로운 존재들인지도 모르잖습니까." "힘들게 해서 많이 죄송합니다." "그
렇다면 모두가 힘들었던 거겠죠."
  그녀와 나는 새벽 어둠 속으로 걸어 나왔다. 신촌 로터리로 나와 택시를 잡느라 허둥거리
고 있는 그녀의 굽은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왠지 그러고 싶군요." 그녀가 바람 속에 서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택시가 
와서 뒷좌석 왼쪽엔 먼저 내가 타고 오른쪽에 그녀가 앉았다. 불광등에 갔다가 수색까지 가
려면 새벽 3시는 될 터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날의 삶이 매일 자정을 기해 문을 닫고  다
음날 아침 7시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택시  안에서 그녀는 주미의 상태에 대해서 
내게 말해 주었다. "신혼 여행을 취소하고 제주도에 가  있는 동안 주미는 어찌어찌해서 그 
사람이 자살한 소식을 듣게 된 모양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수, 나로도, 속초, 밀양, 거제도까
지 혼자 떠돌아다니다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모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로 주미는  제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열쇠를 따고 들어가 보면 벌거  벗은 채로 책상 
밑에 들어가 떨고 앉아 있었습니다. 먹는 대로 토하고 잠을 자지도 않는지 밤새 중얼중얼하
는데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선풍기나 전화기나 거울을  붙잡고 앉아 
넋이 나간 소리를 내뱉곤 했습니다. 상태는  점점 악화됐죠. 옷장을 열어 놓고 가위로  옷을 
조각조각 찢어 놓고 심지어는 자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
이었죠."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번은 부엌칼을 들고 저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생각
다 못해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도 어미로서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이틀 만에  도로 
집으로 데리고 왔죠. 의사의 말로는 심한 우울증에다 정신분열  증세가 겹쳤다는데 너무 늦
게 왔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늦게라뇨. 아무튼 그때  참 많이 절망했습니다." "..." "이따금
씩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미는  우도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습니
다.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그곳에 아직 주미의 외할버지가 계시거든요. 그래요, 남창우 씨가 파리에 가 있는 동안 그
러저러한 일들이 숨막히게 이어졌습니다. 파리에 가 있는 동안 그러저러한 일들이 숨막히게 
이어졌습니다. 파리에 가기전에 주미를 만났다고  해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염두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긴 이런 말을 아무렇지
도 않게 늘어놓고 있는 제가 아직도 교활하게 느껴지는군요." "아직도 거기에우물이 남아있
습니까? 갈치가 널려 있던 마당에 말입니다." 히뜩 나를 돌아보고 나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일  겁니다. 주미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다행히 나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습니다. 아직 전화를 제대로  걸거
나 받지는 못하지만 사람은 알아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요즘은  종일 산호 모래밭에 나가 
있다 저녁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언젠가 나도 그곳을 걸었던 기억이난다. 하지만 그게 언제
이고 누구와 함께였던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학생 때였거나 아니라면 방송 촬영 일로 다
녀왔겠지. 택시에서 내리며 그녀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서먹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녀
의 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손을 잡는 순간에, 나는 그녀가 이십육 년 전에 헤어진  사내의 
손을 쥐고 잇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비로소 그 사내와 헤어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잘까요, 라고 그녀가 깊게 가라앉은  소리고 뇌까렸다. 속에 울음이  매달려 있는 소리였다. 
"한시 바삐 상심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비트적거리는 걸음으로 대문 앞까지 걸어가
더니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전생을 돌아보고 있었을 것이
다. 그러한데, 그녀가 돌아보고 있는 전생의 퐁경이란 골목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는 택시 한 
대와 그 안에 앉아 있는 웬 낯선 사내 하나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제 그 풍경을 떠나 아침
이면 문 앞에 닥쳐와 있을 가을과 함께 남은 인생의  풍경과 마주해야만 할 터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희끄무레한 모습이 백미러에 도께비처럼 나타났다가는 금세 사라졌
다. 그리고 그것이 여름의 끝이었다. 

    16. 그대 밝은 고요
  집으로 돌아와 자동 응답기에 녹음된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찰나에 전화 벨이 울리며 풀려 
나가던 테이프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새벽 3시의 전화. 나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보세요?" 한데 담배가 반이 타들어갈 동안 상대는 말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
으려다 나는 언뜻 수상쩍은 느낌이 들어 마른 소리로 저쪽을  다시 불러 보았다. 그러나 담
배를 재떨이에 눌러 끌 때까지도 상대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베란
다 창틀로 빠르고 지나가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웬 도둑고양이란 말인가. 하긴하긴. 간간
이 손가락 끝에 물이 묻듯 들려 오는 미세한 숨소리. 상대도 송수화기를 귀와 입에 대고 있
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숨소리만 가지고는 그게 누구란 걸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안  그래도 
가끔 그런 전화가 걸려 오는  터라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걷잡을 
수 없는 피로 속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비몽사몽 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려는데 
그리고 거실의 전화 벨이 다시 울렸다. 이 신새벽 저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더듬거리며 찾
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먼 곳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같았다. 혹은 먼 곳에서 방금  돌아온 
자가 걸어 온 전화라는 느낌이 온몸으로 감지됐다. 이번에도 상대는 제 목소리를 감추고 오
랫동안 이쪽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 미묘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해묵었던 마음
이 몸 밖으로 스르르 놓여 나고 있는 환한 공허감이  찾아왔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
이었다. 견고한 어둠을 뚫고 내 몸에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들어와 가만가만 묵은 마음을 
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허전한 감미로움.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나는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희한한 밝음을 목도하고 있었다.
  누구일까. 침묵으로 내 마음을 열고 있는  자. 그 침묵의 미묘한 밝음.  그 밝음이 가져다 
주고 있는 이토록 오련한 고요. 나는 내가 아는 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하나씩 떠올려 보았
다. 그리고 일 분이 지나고 이 분이 지난 다음에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깨달아 
갔다. 몰래 기침을 하고 나서 나는 이윽고 낮은 소리로 저쪽에 첫마디를 전해 넣었다. "돌아
온 모양이군," 그러자 비를 맞고 있는 밤의 장미인 듯 저쪽이 잠깐  흔들렸다.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군. 그래, 그대는 어디를 돌아  왔는가." 장미의 흔들림은 가까워졌다 멀어졌
다를 안타깝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긴 여름을 보내고 돌아오지 조간 신문처럼 문턱에 가을
이 떨어져 있더군. 알고 보니 그대가 돌아온다는 징조였나 봐." 희미한 웃음기가  멎고 어쩐
지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한숨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서  말을 해봐. 듣고 싶군. 언제나 화
환 같은 목소리." "..." "그리운 교도. 우리 영혼엔 늘 쌀과 물과 세 가지 색깔의 꽃이 필요하
지. 아무리 추운 곳에 갔었더라도 마음만은 다 버릴 수  없었을 거야. 그래, 지금 그대는 그
때 우리 함께 머물던 그리운 열대로 돌아온 모양이야. 그렇지?" 잠시 후 그녀가  열대, 라고 
반벙어리 소리로 아니,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쌀...꽃...물?" 
"그래." "그래?" "암, 그렇고말고." 그녀는 간신히 내 말을 되받아 흉내내고 있었다. 나는 천
천히 그리고 더욱 또박또박 그녀에게 다음 말을 전했다. "그대는 늘 어여쁜 바람의 여인. 이
젠 그대가 내게 말씀을 전할 차례야." 그녀가 잃어버렸던 말을 찾아 혀를 굴려 내게 응답해 
오기까지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 시간은 의외로 오래 걸렸다. 나는 송수
화기를 스피커 옆에 갖다 대고 그녀와 전에 함께 들었던 마리안 앤더슨의 노래를 틀어 놓았
다. 노래가 흘러 나오는 동안  나는 그녀와 헤어졌던 파리의 낯선  골목을 또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호텔 지하에 있는 바에서  내게 처녀를 주었던 그 삭막하고 쓸쓸했던  밤을. 
피 묻은 손수건을 쥐고 화장실에서 나오니 그녀는 사라져 있었고 나는 밖으로 그녀를 찾아 
나갔었다. 그녀는 어두운 파리의 뒷골목에 상처입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새 나를 잊은 얼굴이 되어. 총을 맞고 쫓기는 짐승의 눈초리로.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소리로 내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그곳에 버려 둔  채 
골목을 돌아 나왔다. 다음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주에 다녀온 뒤 그녀가 시르미
오네에서 부쳐 온 엽서를 받았었다. 그녀는 거기다 노르드곶으로 갈 거란 말을 했었다. 하지
만 그녀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 올 것인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어디에 가든 부디 
마음만은 잃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 그러면 그야말로 눈사람
이 되고 말 사람이었다. 턴테이블이 멈추고 나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
다. 그와 동시에 예의 중성의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 나왔다. 그 목소리는 여로에 지쳐  허
스키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박에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월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그 
언젠가 세계꽃박람회 소식을 듣고 동남아의 축이란 섬에서 돌아왔듯이요." 월식. 그래, 그랬
었군. "때맞춰 가을이라구요. 네. 그새 모든 세상이 가을이로군요."  허스키한 가을의 소리로 
그녀가 방금 대문을 들어선 손님인 양 말했다. "하지만 월식은 보지 못했어요.  방금 배낭을 
메고 집으로 돌아왔으니까요. 네. 신발도 이제 겨우 벗어  신장에 올려 놓았어요. 언젠가 다
시 그 속에 거미가 하얗게 줄을 치겠어요." "줄을 치겠지. 그럼 그대는 그 옆에 놓인 신발을 
신고 또 긴 여행을 떠나겠지." 그제야 그녀가 후후, 하고 머리칼이 두 올쯤 얼굴로  풀려 내
려온 투로 웃었다. "그런데 말예요. 오늘 월식이 있었으니 당신한테도 무슨  일이 생겼겠죠? 
그럴 때마다 당신한테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곤 하잖아요. 가령 봄에 일식이 있었던 날
이 그랬던 것처럼 말예요." 그녀는 그 먼데서도 여전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리고 그때를 맞춰 돌아온 것이다. 나는 차근차근 그 동안  무주에 갔던 일과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일어났던 일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동양란처럼 앉아 내 얘기를 듣
고 있었다. "과연 월식이었군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새로 나겠군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겠죠."  그래, 하고 나는 순순히 대꾸했다. 언제나 
외롭고 적막한 순간에 그대는 불현 듯 내게 찾아와 말씀을  들려주곤 했다. 가끔 그대 생각
을 하면 나는 몹시도 서글프고 행복한 마음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당신의 
연인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 마음의 여인과 얘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늘 당신 마음속에 갖고 있던 여인. 당신이 저를 만나기전부터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던 원초적인 여인 말예요." 그와 함께 나는 반딧불내에서 만났던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누구였던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 마음에 존재하고  있던 
여인이었지? 
  "그 여자는 저와 닮은 존재. 조금은 가까운 존재. 당신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  여자와 만
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 그 여자는 당신 마음속의 여인은 아닌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 그 여자는 당신 마음속의 여인은 아닌 거예요. 내 그림자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렇
다면 앞으로 나수연은 정작 만날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린  그때 파리에서 단 한 번의 영원
한 만남을 이뤘어요. 나머지는 처음부터 줄곧 당신 마음속의 여인을 보며 저를 만나고 있었
던 거예요. 그건 당신도 이제 알아야 해요. 그러니 이제는 저의 그림자를 밟기 위해  아무하
고나 인연을 가져서는 안 될 거예요. 아시겠죠?"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나는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사람은  저마다 남성 속의 여성 혹은  여성 속의 남성을 갖고 
있잖아요. 아니, 포함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겠네요.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겉모습과 달
리 남자 여자로 분리된 게 아니라 복합 단수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저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자이고 당신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인 마음을 갖고 있어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존재. 
다시 말하면 애증의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을 뜻하는 거죠.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
과 닮은 여자들과 만나 왔어요. 단 한 번도 타인으로서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죠. 이
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요." 타인으로서의 여자. "당신은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
이 있나요? 솔직히 대답해 봐요. 그 여인들이 바로 자기 자신의 칙칙한 환영은 아니었는지." 
"..." "하지만 늦지 않았어요. 영영 그걸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세상엔 많으니까요. 지
금부터라도 진정한 타인을 발견하도록 애써봐요. 아까 당신이 타인이란 동시에 전혀 새로운 
나라고 하셨죠. 당신은 이미 깨닫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그렇게 전혀 새로운 나를 만나 관
계를 맺어 보도록 하세요. 사랑은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녀는 또  이런 말
도 했다. "또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미워했는데 사실은 그들에게 그만큼 의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밖이 이미 희부윰하게 밝아 와 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 그토록 많은 세월이 왜 필요했었는지를 이제부터라도 곰곰이 생각해 봐요. 그 답이 알아
지면 당신은 그때부터 근사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그녀가 지금 어느 지점에서 
내게 이런 말들을 전해  오는지 갑자기 궁금해져  거기가 어디냐고 가만히  속삭여 물었다. 
"집이에요."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니지. 생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 있냐는 거지." 한참  궁리
한 끝에 그녀가 나선형의 계단 끝, 이라고 내게 전해 왔다. 나선형의 계단 끝이 어딘가.
  "넓은 사막 한가운데 다 무너져 가는 탑이 있어요.  꼭대기까지 나사 모양의 계단이 이어
져 있죠. 오랜 시간이 걸려 저는 그 어둡고 가파른 계단의 꼭대기에 도달했어요. 그 끝에 이
르러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볼 수가 있죠." "거기서 그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
양이로군." "사막 어딘가에서 모래를 털고 커다란 짐승  하나가 일어나 저벅저벅 내게로 걸
어올 때까지 네,기다리고 있는 중이죠." "커다란 짐승" 그녀는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온몸이 
모래투성이인 킹콩 한 마리가 사막에서부터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그대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나를 사랑하는 커다란 자, 라고  그녀가 꿈결처럼 말했다. 그녀는 사
막 한가운데 있는 탑 위에 올라앉아 자신을 데려갈 아주 큰 사랑 하나를 밤낮없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비로소 저라는 존재를 본 듯도 해요. 이제 소
리 소문 없이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고 싶어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싶지는 않
아요. 한시 바삐 돌아가 벗어 놓았던  껍질을 찾아 쓰고 다분다분 제 나이를  살고 싶어요." 
그녀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그땐 아마  저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라요."  안타까운 얘기였
다. 가을에 그녀는 호주의 사막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지점에서 긴긴 여행을  끝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게 당신과의 마지막 통화가 될 거예요. 앞으로 당신은 모든  것을 스스
로에게 묻고 그때마다 용기 있는 대답을  구해야 할 거예요." "..."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누군가 곧 먼데서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당신은 또 오
랜 세월 방황하게 될 거예요. 아무 소식 없이 슬쩍 왔다가 당신이 찾지 못하면 다시 둘아갈 
그런 사람이에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나는 모래투성이의  커다란 짐승 말인가? 라고 그녀
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고 있군요."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해본 
소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이제 커튼을  치고 잠을 
자둬야겠어요." 그녀가 수화기를 막 내려놓으려고 하는 참에 나는 재빨리 외쳤다. "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
녀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7시부터 8시까지  대문 밖에서 누가 
오지나 않나 하고 기다리는 그런 여자. 전에 어떤 남자가 제게 지나가는 말로 다음 주 수요
일 7시에서 8시 사이에 너의 집 앞에서 가다릴게, 하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여고 때의 일이
죠. 그 약속을 아직까지 믿고 있는 그런 여자요." "그리고  또?" "이십대 중반인데도 영화관
에 앉아 있다 총소리가 나면 놀라서 소란을 피우는 여자.  그래서 아무도 저하고 극장에 함
께 가려고 하지 않아요. 창피하다고 말예요." 그녀는 또 무엇이든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것을 
보면 시운을 쓰지 못한다고 했다. 깨진 유리, 바늘, 삼각자, 압정...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 
당장 둥그렇게 갈아 놓는다고 했다. 또 짐승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피를 보게 되면 그녀
는 간질병 환자처럼 온몸이 뒤틀린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 "당신처럼 울트라 마
린 블루, 한겨울 저녁에 처마 끝에서 사라지는 보라색의 짧은 햇빛,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2악장의 마디마디와 그 음표 사이의  아름다운 침묵, 브람스, 귀가 빨간  청거
북, 십 년째 늘 일 분이 늦고 있는 에스프리 손목시계(그래서 제 인생은 영원한 일 분 전의 
상태에서 힘차게 뛰어가고 있어요. 일 분후를 향해서 말예요), 삼분의 일쯤  타고 있는 담배
에서 피어 오르고 있는 회색 연기, 저쪽  가을 담장 안에서 들려 오는 동자승들의 웃음,  소
리, 반쯤 파란 낙엽, 4월의 배꽃과 6월의 밀밭과 9월의 검은 담장에서 시들어 가는 장미, 잘 
닦아 놓은 빨간 자동차..."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그런 것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며 
그녀는 살아가고 있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피곤해하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그쯤에
서 작별의 인사를 전했다.
  "그래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늘 기대하며 살게  될 거야." "잊지 않는다면 늘 옆에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비록 아침이더라도 깊은 잠과 함께했으면 해." "내일이나 모레 아
침쯤 일어날 거예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항상 그랬어요." "모쪼록 그러길 바래." "오늘은  제 
꿈에 나타나지 말아요. 아주 조용히 저만 껴안고 자고 싶어요."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내
가 안녕, 이라고 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월식이 끝난 그날 아침에 나는 나수연과  그렇
게 헤어졌다. 그녀 말대로라면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볼 수가 없을 터이었다. 갑자기 알고  있
던 모든 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에 몸을 떨며 나도 커튼을 두텁게 치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17. 어둠의 속삭임
  가끔 열대에 관한 꿈을 꾸곤 한다. 나는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곱 시간 동안 하늘을 
날아 자카르타를 거쳐 현지 시각으로 밤9시에 발리의 우랄라이 공항에 내린다. 언제나 그러
하듯 금세 온몸으로 달려드는 사방의 후끈한 열기. 우기의 밤이다. 나는 여행 가방을 택시에 
싣고 야자수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열대우림의 비좁은 도로를  달려간다. 창으로 튀어 들
어오고 있는 빗방울과 뭘 설명하기 힘든 열대의 냄새. 역시 꽃이 썩고 있는 그런 냄새다. 10
시 나는 우붓이라는 마을의 첸다나 코티지에 짐을 부린다. 밤이 늦었지만 코티지엔 불이 환
하다. 정원 한가운데엔 풀장이 있고 객실이 마흔 개인 3층으로 된 붉은 벽돌집. 디딤돌을 밟
고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나는 대나무로 지은 방으로 들어간다. 스물두어살 먹은 상냥한 처
녀가 탁자에 맥주병을 갖다 놓으며 생글생글 웃는다. "또 오셨군요." 하지만 그뿐이다. 그녀
는 빈 쟁반을 들고 작은 뒷문을 지나 정원으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짐을 풀고 비가 내리고 
있는 풀장에서 한시간 사라져 버린다.  나는 짐을 풀고 비가 내리고  있는 풀장에서 한시간 
동안 수영을 한다. 종려나무에 둘러싸여 있는 타원형의 풀장. 밤이 깊어 나는 발코니의 대나
무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한다. 혹은 엽서를 쓰기도 한다.  이곳
에서는 사람도 하루 사이에 풍경에 속해 버린다.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여행객들의 웃음 소
리, 낮은 발자국 소리, 영어 혹은 일본어 혹은 말레이시아나 태국어 들이 뒤섞여 간간이  들
려 온다.
  자정이 지나면 온갖 소리는 잠들고 그러면 나도 방으로 들어가 길게 눕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대나무로 지어진 벽에서 푸르스름한 햇살이 침대에 무수한  빛의 그물을 드리운다. 나
는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몸을 뒤채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힘들여 문을 열려고 하지만 
좀처럼 그래지지가 않는다. 밖은 부신 햇살의 천국일 텐데. 논바닥의 오리 떼와 다시 사방의 
종려나무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열대의 햇빛과 꽃무늬 치마를 입은 처녀들.  머리
에 이고 가는 꽃과 과일. 타냐 롯에 간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석양이 아름답다는 곳. 단애
로 이루어진 절벽 끝에 서서 나는  썰물 때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눈앞의 섬을 바라본다. 
섬 안에 절이 있다. 300년 전인가,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 그곳에 절을 짓고 일생 도를  구했
다고 한다. 타냐 롯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숭이 사원에 들러 한 처녀와 만난다. 키가 작은 샤
롱의 여자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박쥐가  사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문득 가슴을  드러내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현혹됐지만 나는 그냥 돌아섰다. 나무들 사이에서 수많은 박쥐가  눈을 
뜨고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그녀와 살을 섞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밤에도  비
슷한 꿈을 꾸었다. 아, 식은땀으로 뒤덮인 온몸의 열기.  원숭이 숲으로 박쥐나무 숲으로 가
야 할까 보다. 태아처럼 구부려 발바닥을 검사해 본다. 한데 어느 날의 꿈엔가는 푸른  종려
나무 숲에 누워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옷을 벗고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올라왔다. 열대의 그 
여자는 아니었다. 단발의 마른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환각제를  먹
인 다음 섹스를 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숲을 빠져나가. 아니, 종려나무가 보이는 호텔이었다. 
얼굴 없는 마른 여자가 그때 내 몸에 나타났다 사라져 갔던 것이다. 새벽에 깨어나면 그 여
자를 생각한다. 가끔. 왜 그 여자를  생각하면 은빈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지  알 수 없다. 
그래, 봄에 만났던 여자다. 제주도에 내려가기 전에 그 여자들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찬바람이 부는 화요일 오후에 나는 연락도 하지 않고 강남에 있는 강 선생의 사무실로 찾아
갔다. 돌아보니 거의 육 개월 만에 그를 만나러 가는 셈이었다. 봄에 헤어지고 나서 그 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나와 강 선생은 늘 그런 식으로 만나 왔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만
나 또 기약 없이 헤어지곤 하는 것이다. 양재 전철역에서  내려 포이초등학교 앞에 있는 강 
선생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는 오후 5시가 돼  있었다. <빠삐 커뮤니케이션>이란 간판이 붙
어 있는 사무실 안은 인형들이 앉아 있는 것처럼 메마른  냄새를 풍겼다. 강 선생은 이번에
도 외출 중인 상태였다. 나는 한  여직원에게 안내되어 강 선생의 방으로 갔다.  이구아나를 
키우고 있는 커다란 유리관과 벽면에 붙어 있는 바다 물고기  도감. 그전과 달라진 것은 없
었으나 나는 그 방에서 일종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주인이 긴 여행을 
떠나 있을 때 맡아지는 묵은 공기의 냄새가 방안을 구석구석  채우고 있었다. 밖에 있는 여
직원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던지 잠시  후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승용차  안인 듯 수신 
상태는 매우 불량했다. 웬일로 연락도 없이 찾아왔느냐고 그가  다소 무뚝뚝한 말투로 내게 
물어 왔다. "근처에 왔다가 생각이 나서 둘러 보았습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다니. 누가 말
인가?" 평소에 그의 말투가 날카롭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나는 칼 끝에 닿은 생선처럼 신
경이 곤두섰다. 그걸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이번에는 그가 가라앉힌 소리로  저녁에 선약이 
있다고 했다.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괜찮다면 합석하겠나? 그저 술이나 마시자고 만든 
자리니까." 아니라고, 하며 나는 뒤로 물러났다.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
던 것이다. "그러지 말고 저녁 8시에 김혜정 씨하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김혜정. 그때
서야 나는 내가 강 선생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혜정이란 이름
에 발목이 걸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리관 속의 이구아나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게. 장소는 김혜정 씨한테 알려 놓겠네. 오랜만에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또 언제 
만날지 모르지 않나. 마침 자네한테 할  얘기가 있네." 께름칙한 상태에서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김혜정이란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우명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커
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내 맞은편에 가 앉았다. 노크를 하고  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몰랐
는데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전과 달리 머리가 어깨 너머로 길어 있었고 얼굴에
도 어느 정도 빛이 되살아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탄력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여자에게서 한번  빠져 나간 빛은 좀처럼 
되찾아지지 않는다. 색깔이 변해 갈 뿐이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도사리고 있는 
동안 나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강 선생과 약속한 8시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
었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아는체를 했다. "봄에 만났으니  오랜만이죠? 잘 지내셨는지요."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본 다음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네, 그럼요." "빠삐라는 개가 보
이지 않는군요." "한 달 전 쯤 주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말  발음이 확실히 전보다 또박하게 
변해 있었다.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
녀가 스커트 밖으로 드러난 다리를 안쪽으로 오므렸다. 짧은 치마가 익숙하지 않은 듯 아까
부터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감색 투피스가  모습과 잘 어울려 보입니다."  이따위 말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이 나이까지  스커트를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몸을 바꿔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 전부터 입고  다니죠." 몸을 
바꾼다. 그래,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지. 자신에게 사소한  변화를 줌으로 해서 의외로 기분
과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남들 눈에는 별스럽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보
면 자신에게 일종의 입체감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요컨대 감정이 자유로워지고 표정
이 풍부해진다는 뜻이다. 가령 우산만  해도 과감히 단색의 분홍이나  하늘색이나 주황이나 
흰색으로 바꿔 써보라. 당장 비오는 날의 느낌이 달라진다. 또 햇빛이 좋은 날에는 꽃다발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 보라. 내 기분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거리의 풍경이 변한다. 이런 식으로 
가끔 남들 눈에 띄어도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누가 시비를 거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
가 될 리도 없다. "주인에게 돌아갔다면  치료가 잘된 모양입니다."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학대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려보낸 거예요. 그 집 주인이  장기 해외 근무를 
나갔거든요. 그래서 부인한테 돌아간 거예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로군요." "그렇긴 하지만 개가 주인을 그리워해서 더 이상 데리
고 있을 수도 없었죠" 그렇군요. 하며  나는 더듬더듬 찻잔을 집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초조해하고 있는 걸까. 그녀보다 오히려 내가 더 산만해져 있지 않은가. 나는 지난 봄에  강 
선생과 호텔에 들었던 새벽, 내 방에 들어왔던 여자를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느낌이 차츰 분명해
졌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그녀는 어째 나갈 생각을 않고 소파에 다소곳이 버티고 앉
아 있었다. "여름에 밖에 나갔다 오셨다죠?" "저 말입니까" "강 선생님한테서 언뜻 들었습니
다." 내가 파리에 다녀온 얘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 동안 연락한 바가 없었지만  강 선생
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방송국 일 때문에 파리에 보름쯤 가 있었고 또 이런 저런 
사소한 일들이 겹쳤었노라고 의례적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다분다분 고개를 주억거
리더니. "열대에 다녀왔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건 또 언제였죠?" 왜 느닷없이  이 여자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걸까.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는 되는 대로 얼버무렸다. "벌
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삼  연도 더 된 일이군요." "강  선생님이 가끔 그 말을 하길래요." 
그런 얘길 왜 하필 이 여자에게 하는가. "저도 언젠가 종려나무 숲을 본 것  같습니다. 물론 
열대에 가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서였는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좀처럼 떠
오르질 않습니다. 그래서 열대란 말을 들으면  남창우 씨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종려나무 
숲을 보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어디서  그걸 보았던 것일까. 얼마 후에 그녀가  퇴근 
시간이라고 말하며 저녁을 먹으로 나가자고 했다. "식사 후에  강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모
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럼 시간이 엇비슷하게 맞을 겁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사무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스치듯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떠가는 종려나무 숲의 환영을 목도하고 있었
다. 그런 풍경이었다. 그날 나는 환각에 빠져 들면서 왕가위 감독의<아비정전>을 보고 있었
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왔던  여자는 틀림없이 김혜정이란 얘기였다.  한데 그녀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어복쟁반이라는 
평양식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들어와 보니 그 매운 허기와 현기증에 시달리던 봄날 아침
에 강 선생과 셋이 와서 밥을 먹었던 곳이었다. 결혼을  앞둔 여자처럼 뒤를 말끔히 정리한 
얼굴로 앉아 그녀는 얌전하게 입에  밥을 떠넣고 있었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녀에게 기어이 결혼  운운하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자 그녀가 수저질을 멈추고 빤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웃어  버리고 그녀는 고개를 도로  밥상에 떨어뜨렸다. "혹시 
기차역의 코인로커에 여행 가방을 넣어 두고 와서  지금 잠깐 저와 만나고 있는 건 아닙니
까?" 그녀가 수저를 뒤로 옮겨 잡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이따가 식당 문을 열고 나
가면 밖에 꽃가마가 와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여라도  밤에 비가 내리면 어쩌
지? 시집은 여기서 하도 먼데 비바람에 남포등 꺼지면." 농담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래,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농담쯤은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녀는 멋쩍은 듯 입을 닫고 밖을 기웃
거리는 척을 했다. 소녀 때는 어여뻤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밖에  사람이 지나
가는 것을 보면 어두운 극장에 앉아 마구 햇빛에 긁힌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
다." 그녀는 격리감에 대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심한 경우에 그녀는 그 창  밖의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피를 가진 존재로  생각될 때가 있다고 했다. 때로  그들의 눈초리가 자신을 
향할 때 두려움 섞인 공포를 느낀다고도 했다. 이미 여러  번 타인에 의해 꺾여진 사람에게
서 흔히 보이는 덧없음과 막막한 표정으로 그녀는 따르륵! 수저를 밥상에 내려놓았다. 어둠
이 내린 창밖에 혹시라도 꽃가마가 와 있지 않나 싶어 내다 보는 척을 동안에 나는  그녀와 
한 줄기 마음이 통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미로서 다가오는 것이기도 했다. 옛적 낯선 사람과 함께 밤길을 걸은 적
이 있는데 뒷날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느끼게 되는 친근감 따위. 실례지만, 하고 나는 그녀
의 나이를 더듬어 물었다. 실은 그녀의 학번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용케 알아들었는지 그녀
가 85학번이라고 대꾸했다. 나보다는 몇  해 아래였지만 내 군복무 기간을  따져 보니 한두 
해는 나와 같은 시기에 대학에 다녔을 것이었다. 그런 저런  얘기를 하니 자신은 86년에 제
적당해 졸업을 하지 못했으며 훗날 복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그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랬었군. 그녀는 올해로 서른 두 살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서른 
두 살의 모습은 찾아지지 않았다.  언뜻 보면 이십대 후반의 앳된  표정인데 가까이서 보면 
제 나이에서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는 거친 모습이었다.  봄에 만났을 때와 달리 화장기가 
있었지만 속병을 오래 앓고 난 흔적이 얼굴에 역력히 배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뭐 광
휘라는 게 있다고 했나? 그것이 사라지면 아무리 타고난 미인이더라도 아름다움이란 게 느
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요컨대 그녀의 얼굴에서는 안타깝게도 그것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런 모습으로 꽃가마를  타면 차가운 혼령의 모습일  텐데. "밖에 비가 내립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사선으로 툭툭툭 
듣고 있었다. 고적한 밤이었다. 그녀와 함께 저 빗속을 걸어 오늘 밤 나는 과연 누구를 만나
러 가는 것인가. 각자 신발을 꿰신고  밖으로 나오며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역시 엉뚱한 말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김혜정 씨와  저는 비가 내리고 있는 밤길을 함
께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오래 전의 일이겠죠."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녀가 캄캄하게 기침을 해댔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한평의 어두운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따박따박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처음 만났
을 때도 그랬는데 얘기를 나눌수록 점점 익숙한 느낌이 드는군요. 김혜정 씨와 저는 어쩌면 
한 기억의 울타리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넘겨짚지  마세요." 그녀가 
옆으로 떨어져 걸으며 나를 밀어냈다.
  "한번 더 넘겨짚자면 김혜정 씨한테서 아프게 느껴져 오는 바가 있는데 그게 제게도 그닥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얘기할까요?" "그 따위로 취조하듯이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
가 문득 격양돼 있었다. "그러다 유치하게 한때는 우리 동지였지, 라고 말한다는  거 다압니
다. 하지만 남창우 씨하고 저 그런 사이  아니에요. 또 혹시 그랬다고 해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때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절대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들이라는 걸 남창우 씨는 모르고 있나요?  사람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도 다들  편견만 
있지 이해라는 건 눈곱만치도 없잖아요 이해가 될 리 없겠지요." 고통. 불쑥 튀어나온 그 말
에 입이 막혀 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외피가 두터운 사람이었다. 고통으로 인해 껍질이 
두꺼워지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고통이 나와도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선
연해졌다. 그래서 나는 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녜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되새기고 싶
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도 그것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쯤 말씀드리면  아시겠죠. 
그러니 이제 다른 얘기해요." 내가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던가. 나는  머릿속을 헤적거리다가 
그 쯤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꽃가마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한참을 궁리하는 척하
다 그녀가 번안조로 응대해 왔다. "바위 고개 언덕을 홀로 넘고 있겠죠. 가마꾼도 없이 신부
도 없이 말이에요." 가마꾼 없이  어떻게 고개를 넘어가겠나. "우쭐거리며  앞서가는 남포동 
따라갑니다." 제법이었다. "비바람이 심한데 아직 등은 꺼지지  않았군요." "글쎄, 꺼지지 말
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마저 꺼져 버리면 밤길을  어찌 더듬어 가겠습니까." "그렇군요, 아침
이면 여지없이 생이 또 거듭될 텐데." "거듭됩니까, 풍전등화인데도 말입니까?" "..." "생이란 
말을 들으니 참으로 새삼스럽군요. 그렇습니다, 생이란 먼데서 우쭐거리며 가는 남포동을 따
라가고 있는 빈 꽃가마입니다." "그  안에 누군가 어여삐 단장을  하고 앉아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게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녀는 맥풀린 소리로 웃으며  남창우 씨
도 참, 하며 혀를 찼다. "네?" "아직도 그 나이에 낭만의 소년이 느껴지니 부럽습니다." 그럴 
리 없겠으나 그 말이 나는 싫지는 않았다. 스물이 넘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소
년, 그래 내가 옛적 소년이로군. "남자와 오랜만에 걸어 봅니다. 비바람이 부는 밤길에 말입
니다." 남자. 그래, 그녀는 오래간만에 남자와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어
색하지 않으니 참 우습군요." 차분히 목안에 젖어 드는 소리였다. 나는 옆을 따라 걷고 있는 
그녀의 무릎을 훔쳐보고 있었다. 걸음새가 어딘가  모르게 기우뚱기우뚱하는데 거기에서 묘
한 박자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사람의 걸음새였다. 그것은 또한 많이 헛디뎌 본 사람
의 발걸음, 해서 언제나 위태롭지. 그래, 날마다 춤추고 사는 사람들은 모르지, 그 박자 사이
에 캄캄히 처박혀 있는 위태로운 그림자를. "혹자는 세상일이 늘 반복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고 합니다. 그렇다면 김혜정 씨와  이렇게 걷고 있는 것도 하나의  우연한 반복일지 모릅니
다." 왜 또 이러세요, 하며 그녀는 한 발자국 옆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어제의 
일이 앞으로 계속 반복된다는 그런 말입니까?" "경험이 반복된다 해도  그때마다 의미는 조
금씩 달라지겠죠." "그렇든 저렇든 새로운 생의 경험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로군요." 그
녀는 새로운 생의 경험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완곡하게 바꿔 설명했다. "아니, 새로
운 일들이 찾아오게 마련인데 왜냐하면 과거에 우리가 그 일을 미처 경험하지 못하고 지나
쳐 온 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 친절도 하십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나를 
돌아보는 듯하다가 얼른 고개를 바로잡았다. "얼추 왔습니다 그리고 강 선생님을 만나기 전
에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가을 가랑비 속에서 나는 유흥업소가 들어서 있
는 골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 같은 네온상의  빛들이 사각으로 뒤엉켜 
거리를 번요하게 난도질하고 있었다 어느덧 김혜정과 나는 강남의 뒷골목으로 들어와  있었
다. "오늘 강 선생님의 낯선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묻어 
두세요.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묘하게 날이  겹치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사람에겐 이면이란 게 있잖습니까,  오늘 하필 강 선생님의 이면을 보게 
되는 날이 될는지도 모르겠단 뜻입니다."  그런가. 일년에 서너 번쯤 강 선생은 환각 증세에 
빠지던 김혜정은 덧붙였다. "환각이라뇨?" 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다 
왔다고 하면서 <거문고>라는 이름의 지하 술집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전에 다녀 봐서 
알지만 옆에 여자가 끼어 앉곤 하는 술집이란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자 두엇이 탁자에 앉아 카드를 돌리고 있다가 남녀가 함께 들어서자 뚱한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김혜정에게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카운터인지  프런트
에서 강 선생이 들어 있는 호실을 물어 내게 알려 주고 나서 그녀는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
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던 터였으므로 나는 잠시 당황한 채로 서있다. 그새 9시가 가까
워져 있었다. 그거야 별 상관이 없겠지만 나는 이대로 그녀와 헤어지는 게 섭섭하고 아쉬웠
다. 그렇다고 합석을 하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만날 수  없겠느
냐고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은 김혜정 씨를 만나려고 온 겁
니다." 왜요? 라며 그녀가 눈을 반짝 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
만 왜 그런 경우도 있잖습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떨떨한  표정을 짓고 서서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힘에 겨운 표정이기도 했다.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 보세요." 이 말을 던지고 그녀는 밖으로 돌아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입구에서 그녀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려 세웠다. "혹시 봄날의 제 
실수를 빌미 삼아 이러고 있는 겁니까? 그래요, 그때 제가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
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고 나서 많이 안심했습니다 의외로 좋은 사람 같아
서 말이죠. 그런데 그 생각이 지금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방에 몰래 들어와 내 몸을 훔친 것은 솔직히  그때부터 이해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렇다
면 이쯤에서 금나 풀어 줘도 되지 않겠어요?" 나는 술집 앞에서 그녀와 이런 식의 말씨름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꼭 만나야만  한다면 한 번쯤 만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약속 따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쪽한테도 떳떳치 못한 
일입니다." 나는 비가 내리고 있는  지상과 지하의 경계에 흔들리며  서서 그녀가 쏟아내고 
있는 말을 들으며 아까 걸어왔던 길을 흘겨보고 있었다. 가을의 어수선한 밤비가 거리를 삭
막한 추상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나는 예민해진 그녀를 붙잡고 더  이상 약속을 원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반쯤 젖어 있는 축축한 계단  앞에서 그녀와 나는 어색하게 헤어
졌다. 그녀는 우산도 없이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거리로  몸을 움츠린 채 발걸음을 내
딛었다. "택시 타고 가요. 감기 들면 기침하잖아요."  그 말에 그녀가 언뜻 돌아서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점자책을 읽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일 초, 이 초, 삼 초가 춥게 
지나갔다. 그녀는 웬일인지 턱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함부로  하지 마
세요." 멀리서 또 나를 가만히 밀어내는 말투였다. "그게 여자한테 하는 소리라면 더더욱 그
러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아직 그런 말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를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말이 왜 순간 나를 아프게 했는지  모른다. "빗속을 동행해 
온 친구로서 하는 말입니다." "친구요?"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히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그 말은 그래도 듣기에 편하고 좋군요." "김혜정 씨는 어쩌면 과거
에 제 옆사람의 옆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관계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제  옆사람
이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김혜정 씨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밤길을 동행해  온 친구에게 말입니까?"  "저녁에 꽃가마를 놓친 친구에
게." 그녀는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인해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잃
어버렸던 그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내 앞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멈칫멈칫 내 
앞으로 다가와 멈추더니 숨어 하듯 내 귀에다 대고 물었다. "누군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
나요?" "네, 아주 먼데서 외롭게 혼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늘  옆에서." "또한?" "그
렇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가까이라뇨? 하며 그녀가 손수건으로 터져 나
오는 기침을 막았다. 그새 감기가 들어 가는 모양이었다. "늘 마음에 있으니 더 이상 어떻게 
가깝겠습니까." 그녀의 얼굴에서 비에 젖은 네온사인 빛이 어룽어룽 얼룩지고  있었다. 모처
럼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의 모습이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잠깐 동안 돌연 필름이 뚝 
끊긴 듯한 공백의 순간이 찾아왔는데 그 사이에 그녀는 내게 가봐야겠다는 뜻을 눈으로 전
해 왔다. 그리하여 그녀와 나는 빗속에서  다시 한번 작별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녀는  굳이 
전철을 타고 가겠다고 하며 비에 젖은 거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질 즈음에 그녀가 이쪽을 아득히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밤의 풍경 밖으로 점점이 사라졌다. 언젠가 그녀를 만날 날이 오겠지. 
혹은 그게 가까운 날이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만나는 
일에 대해서 오늘 그녀가 동의했다고 생각한다.
  강 선생과의 약속은 그새 한 시간 반이 늦어져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옷에 묻은 비
를 털어 낸 다음 미니스커트의 안내를 받아 어둠침침한 회랑을 따라갔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넓은 공간에 여기저기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이윽고  ㄷ자로 구부러진 모퉁이를 꺾
어 들자 '밤이슬'이라고 적혀 있는 방문이 나타났다. 미니스커트가 노크를 한다음 안으로 들
어서자 서너 명의 사내들이 옆에  다른 스커트들을 앉혀 놓고 카드를  돌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빈 술병들이 보였고 그새 얼마쯤 취해 있는 기색들이었다.  강 선생은 내가 서 있는 
대각선 끝의 테이블 모서리에 앉아  있다가 충혈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눈빛에서 내가 왜 섬뜩한 느낌을 받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미처 상대를 알아보기 전에 
습관적으로 무심코 던지곤 하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전과 달리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풀려 
있는 모습이었다. 짐작했던 대로 그다지  합석하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으나  나는 테이블과 
미니스커트의 무릎 사이를 지나 그의 옆에 가 앉았다. 늦게 왔군, 하며 그가 손을 내미는 바
람에 얼결에 마주잡고 말았지만 그때 전해져 오는 느낌도 어째 께름칙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거기서 나는 강익수라는 인물과 다시 만나고 있었다. 그는  합석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
다. 술과 담배 연기에 찌든 피로한 얼굴로 그들은 내  손을 건성으로 잡았다가 놓고는 이내 
카드로 눈을 돌렸다. 거기엔 공교롭게도 내가 전속으로 있는 방송국주간도 끼여 있었다.  평
소엔 얼굴을 대할 기회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상대도 나를 껄끄럽게 여기는 눈치임이 분명했
다. 또 무슨 국가 기관원에  근무하는 사람과 모 건설업체 이사로  있다는 오십대의 남자가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 선생이 자신의 고객들
이라고 설명했지만 오가는 말투를 보면 꼭이 그런 것만도 아닌 분위기였다. 오랜 친분이 느
껴지는 말들이 무심코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카드 놀이는 지루하게 계속됐다. 옆에 붙어 앉아 있는  미니스커트들이 끼여들 여지도 없
어 그들이 하는 일이란 얌전히 입을 닥치고  있다가 가끔 잔이 비면 술을 따르거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담당 미니스커트가 따라 
주는 대로 가끔 술만 입에 털어  놓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자리에 왜  그가 나를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내 가보겠다고 일어설 계제도 아니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
서 그가 카드에 눈을  박은 채 내가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기껏해야 이런  말을 내뱉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지?" 몰라서 묻는가 싶기도 했지만 나는 기억에  있는 대로 고
분고분 대꾸했다. "그렇지, 내가 여의도에서 회를 뜨고 있을 때였지. 그때 자네는 이미 한물
간 탤런트에다 아내한테 버림까지 받은 한심한 영혼이었지." "..."  "올 봄에도 또 그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서 나를 찾아왔었지.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강남까지 부러 왕림하셨나." 담당 
미니스커트가 긴가민가하는 기색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
본 듯 어머, 하고 궁둥이를 피했다가  도로 바로잡았다. "왜 말이 없나?" 대꾸를  하고 말고 
할 건덕지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 식으로 그는 오 분이나 십 분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귀에 
꽂히는 말을 던져 왔다. "아까는 왜 늦은 거지. 김혜정이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은  거야? 옛 
생각들이 나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라도 부르다 왔나?" 다른 세 명의 사내와 미니스커트들
이 담배 연기 속에서 도깨비처럼 내가 앉아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 나는 김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비에 무너지고 있는 어둑한 산자락을 넘어가는 빈 꽃가마에 타고 있을 
터이었다. 부디 길을 잃지 말고 무사히 집 앞까지 당도하면 좋을 텐데. 거기 신랑은  없어도 
하루치의 안식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래, 같은 수박들이었으니까 그걸 확인한 다
음엔 모종의 유대감을 느꼈겠지." 수박이라니. "겉은 퍼렇고 속은 빨간  채소인지 과일 말이
야." 수박든 과일이다.
  "그리고 또 시내 운운하며 이러쿵저러쿵 후일담을 나눴겠지. 그럼  여기 앉아 있는 이 작
자들은 바야흐로 그 시대의 내 동업자들인 셈이로군. 수박을 창고로 나르는 일들을 맡아 했
었지." 그때 건설업체 이사가 그만 하게,라며 된 소리를 냈고 정부 기관원도  카드를 테이블
에 내려놓으며 불쾌한 기색으로 일어나 방  모서리에 벽장문처럼 붙어 있는 화장실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송국 주간은 집요하게 카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켜켜이 욱죄 드는  갑갑
증을 참지 못해 나는 언제 자리가 파할지를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금  더 기다리게." 그
러나 그 조금이라고 한 시간은 또 길고 지루하게 계속했다.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사내가 
밴드라고 하는 음향 기기를 밀고 들어오고 나서 뒤늦게  술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포로처럼 
앉아 있던 미니스커트들이 비죽비죽 일어나 새로 술과 과일 접시를 가져오고 나서 육십 연
대풍에서 구십 연대풍에 이르는 노래들이 줄창 귀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이 따로 없었다. 또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큼큼하고  텁텁하고 야릇한 냄새가 공기 중
에 퍼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마리화나를 돌려 피우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구토가 일
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데까지 와서 낯도 모르는 자들이 미니스커트를 끼고 떠들어대고 있
는 꼴을 관람하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강  선생은 마리화나에 취한 눈을 희번덕
이며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배싯걸고 있었다. 옆에 있던 미니스커트
가 뜬금 없이 내게, 오늘 밤 그냥 갈거예요? 라고 속삭이는 소리도 그는 다 듣고 있었다. 마
침내 견디지를 못하고 나는 그 북새통 속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담당 미니스커트
가 곧장 따라 나오며 갈 거예요? 하면서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저 실은 남창우 씨 팬이에요." 프라이팬이지 볼펜인지 그  말이 그때 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먼저 가겠다고 강 선생님한테 전해 주십시오."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방 잡
아 놨는데요, 하고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했다. "강  사장님이 그리로 모시래요. 십 분 후에 
오시겠다구요." 그리라니. "이리로 오세요." 망설이다가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분홍신'이라
는 무슨 구둣가게 이름을 흉내낸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녀가, 요금은  받
지 않겠으니 오늘 밤 같이 있었으면 한다고 소곤거렸다. 주차장에  온 것도 아닌데 웬 유무
료 타령인가. 게다가 나는 차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목하 생리 중이라고(남자도 한 달에 한 
번쯤은 피를 흘린단 말이다)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며 나는 그녀를 '밤이슬'로 돌려보냈다. 
그가 온 것은 그로부터 약 삼십 분 후였다. 그때는 밤 11시였고 나는 멍청하게 '분홍신'안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나른함에 빠진  얼굴로 그는 흘러내리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쪽을 자극하는 말투는 여전히 뽀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안
내해 왔던 미니스커트를 불러 술을 가져 오게 하고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언젠가 내
게 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다시 꺼냈다.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의 만남엔 실로 여러 가지의 
방식이 있네. 또한 성격이라는 것도 있지. 가령 자네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만났다고 생각
하나?" 스쳐 지나가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대개는 다 그런 것이다. "좋아, 그런 식으로 만나 
왔지. 그런데 만남에는 일종의 단계라는 것이 있네.
  말하자면 어떤 국면이 존재한다 이 말일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동의한다고 나는 무뚝
뚝하게 대꾸했다. "자네와 나 사이엔 그런 단계와 국면이라는 게 없었지." 생각해 보니 그랬
던 것 같다. "거기엔 이유가 있네.  자네와 나는 애초부터 터놓고 만날 관계가  아니었던 거
야.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고 자네를  여기로 불렀네. 한가지 미리 얘기하자면 나는  자네가 
대학생일 때부터 알고 있었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길래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동일 인물이었지.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하지만 자네가  <학>에 나타
나지만 않았더라도 오늘 같은 자리는 없었을 거야.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걸세." 동
일 인물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근래 자네가 나를 찾아올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네. 그게  하필 오늘이 되고 말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오늘은 자네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걸세. 자네 말대로 비껴 
만난 사람은 언젠가 비껴 헤어지는 거야. 게다가 더 이상 정체를 숨기고 만날 수도 없는 일
이지." 물론 나는 강 선생을 만나지 않고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굳이 관계의 끝을 면전에서 통고할  필요
야 없지 않은가. "언젠가 나에 대해 털어놓을 기회를 갖고 싶었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자네
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었네." "충고라면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하고 
그가 가물가물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술병은 비워지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정물처
럼 놓여 있었다. 그것은 서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벌써 짐작했겠지만  자네가 
학생이었을 때 나는 국가 공무원이었네. 정확히 말하면 시국  관련 사범들을 잡아들여 문초
하는 정보과 형사였지." 내심 놀라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태연한 모습을 보
이려 했다. 때로는 십 년을 만나 온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살아오
면서 몇 번인가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순간마다 몹시 불길한 느낌을 받
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가까운 사람들의 이면은 보지 않고 살았으면 싶다.  혹
은 그가 나를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연애에 있어서도 그것은 다른  모습은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개의 관계라는 것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시작해 어느  쪽이든 또 일방적으로 끝
나게 마련인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타인이란 늘 관계라고 이름지어진 틀 속에서 만난 
그림자들이었을 뿐이다. "옆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그때의 내  동료들이었네. 그
래, 자네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하고 감옥으로 들여다보냈지." "문촙니까, 고문입니까?" 나는 
대항하듯 나직이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나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눈을 딴 데로 
돌렸다. "그때는 그게 내 일이었고 또 선택의 여지도 없었네. 공교롭게도 시국이 혼란스러울 
때 나는 공무원 신분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지금 쌍방이 피해자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
니까?" 거기서 말이 뚝 끊어져 껄끄러운 침묵이 테이블 위에 괴괴하게 감돌았다. 나는 철하
와 은빈과 또 그 당시에 만났던 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논쟁은 피하고 싶네. 오늘은 내 얘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자리가 끝났으면  하네. 어차피 
잠시 후면 자네와 나의 인연은 다하네. 궁금한 게 있으면  나중에 김혜정 씨한테 듣도록 하
게. 자네가 곧 그 사람과 만나리라는 걸 알고  있네." 김혜정. "그 사람도 나와 왜곡된 인연
을 맺었던 사람일세." "왜곡된 인연이라구요?  더 이상 정치 외교적  발언은 삼가시고 육하 
원칙에 따라 명료하게 말씀하십시오." "조용히  듣게." 나는 뿌옇게 피가 머리로  몰려 가는 
현기증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소파를 지그시 눌렀다. "김혜정은 `85년 민정
당 중앙정치연수원 기습 점거 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오다 `86년에 건대 사태  때 현장에서 
연행됐네. 전학련의 간부를 맡고 있었는데 수배 중에는 위장  취업자로 노동 현장에 침투해 
활동한 경력도 있지." "..." "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칠 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됐네." "당신 손에 의해서 말입니까?" 그는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 손에 의해서지." 김혜정은 `91년 이 년의 감형을 받고 출소했다. 시기는 다르지만 철하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녀는 그후 몇 년을 정신병원과 요양원에서 보낸 뒤 민추협 
산하에 있는 단체에서 일하다 연초에 강익수를 만나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얘
기들이 나로서는 명료하게 기승전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김혜정이 강익수와 일을 
하게 되었다는 대목에 와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강익수는 김혜정이 출소하기 바
로 전인 `90년에 정보와 형사직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지도 몰라도 
그후 이 년여를 낚시를 하느라 바다에서만 보냈고 훗날 일식 집에서 일하게 된것도 그게 빌
미가 된 일이라고 했다. 일식집말고도 그는 한양대학교 앞에서 당구장과 생맥주집을 경영한 
일이 있었고 얼마간의 공백이 있는 다음 <빠삐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덧붙였
다. 김혜정을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김혜정과 다시 만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 강익스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정보과  형사직을 그만두게 된 동기에 대
해서 몇 가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당시에 나는 많은 고문을 자행했네. 좋아, 이제는  내 입으로 자행이라고 말하겠네.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식견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상이니 하는  따위도 잘 모르네. 체육대학
을 나와서 별다른 직업을 찾지 못해 어쩌다  공무원이 됐고 그것이 생업이다 보니 피할 수 
없는 일도 하게 됐네. 그렇다고 이제 아서 면죄부를 받겠다는 뜻은 아닐세. 하지만 이것만큼
은 얘기하고 싶네.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폭력에 대한 속성 말일세. 그것이 사람마다 갖
고 있는 원초적인 공포에 대한 반사적인 힘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권력을 위한 도구
나 수단으로 쓰이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네. 어쨌든 당시에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온갖 폭력을 행사한 사람일세. 그것은 어쩌면 사람만이 갖고 있는 폭력에 대한 유희적
인 속성일 거야." "..." "어느 날 나는 시국 사범으로  붙잡혀 온 한 학생을 고문하다가 거울
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네. 가해를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을 말일세. 그때서야 나
는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의 잔인함을 보았네. 더불어 내가 거기에 중독돼 있다
는 사살을 깨달았네." 그러한 일 인 권력 체제의 시대를 우리는 얼마나 길고 고단하게 살아
왔던가. 그런데도 우리처럼 어제를 잘 잊고 또한 그때의 자신들도 한시 바삐 잊어버리고 한
때는 지기였던 사람들까지 함부로 걷어차며 각자 질주해 가는  사회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오랜 질곡의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자신에 대한 공포를 느꼈
네. 그것은 윤리적인 감정에서 오는 자책감하고는 다른 것이었네. 그보다 더 엄밀하게  말하
면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네. 그걸 하필 나 자신에게서 보아 버렸던  걸세." 그는 
인간의 본능 속에 내재해 있는 폭력과 그것에 대한 자기 공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더욱 
절망스러운 건 폭력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일세. 그 앞에 꿇어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 말일세. 
이것은 내 경험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나는 폭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
은 보지 못했네.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사실일세. 예외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그 앞에선 더 이상 신념을 두둔하지 않았다는 걸세. 가학자와 피가학자의 관계로 단둘이 있
게 될 때 거기엔 사상이란 게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걸세. 단지 폭력에  대한 유희와 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할 뿐이네. 사람이란 의외로 쉽게 익명으로  변하는 존재고 거기에 자네들
이 말하는 거대한 사랑은 없네." "사랑이라구요?" "자네들이 왜 늘 입버릇처럼 얘기하지 않
았던가. 그래서 나도 배운 말일세." 그때 사랑의 모습이 사라졌다, 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가
만히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정념과 열망과 어쩌면 순수한  정욕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사랑이 부재한다면 역시 삶이란 것도 부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차가운 밀실에 반
납하고 나온 사람들은 자괴감(그보다 더한 수치심과 굴욕감) 때문에 긴 세월이 지나도 타자
를 거부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해졌으므로.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고통과 맞서는 하나의 복수일세."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뜻을 되물었다. "고통
이 두 개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아닐텐데 사람들은 쉽게 익명의 단수
임을 택한다 그 말일세." 그는 내게  배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따져 물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만 알려 주고 있는 것일세."  "무얼 말입니까?" "자네들이 말하는  그 사랑에 대해서." 
고통에 맞서는 하나의 복수만이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다. 또한 그것만이 저 불온한 힘의 집
행자들이 두려워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사랑
을 잃은 자들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삶을 빼앗겨  불행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기나긴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두 개로 나누어진  고통이 하나로 다시 
합쳐지면 불행이 반으로 줄어드냐는 것이다. "역시 하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거기엔 사
랑의 위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나, 적어도 그 가능성이 말일세." 사랑의 위력. "나도 이제 와
서 깨달았네. 그것의 위력으로 사람들마다 고단하고 누추한 삶을  꾸려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일세. 이것도 김혜정과 함께 지내면서 배운 걸세." 그렇게까지 말했지만 나는 그와 화해하
는 마음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눈길을 피한 채 강익수와  나는 
어색하게 몸을 비틀고 앉아 잠자코 술만 마셨다. 그와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에게
도 어떤 식으로든 기회라는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좀처럼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져 그가  피로한 모습으로 '밤이슬'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와 고통과 절망과 회한이 들끊고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자정
을 기해 헤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서 말입니다." 자정까지는 약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철조말에 긁힌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어 볼  게 있습니
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저 옆 방의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겁니까?"
  "그런데라니?" "과정이야 어떻든 이제 와서 면죄와 사랑을 운운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그
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미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알다시피 나는 많은 청춘들을 감옥
으로 보낸 사람이었네. 비록 원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쁜 피를 가진 사람이 됐지. 그
걸 씻어 내기 위해 나 역시 긴 세월 삶을 잃고 살아왔다는 걸 부끄럽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
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받아 가며 숨어 살다시피  했네. 그래, 내게는 
거꾸로 세상이 감옥이다 보니 더 이상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네.  또 이 나이가 되면 새
로운 인연은 그리 쉽게 맺어지는 법이 아닐세. 좋은  인연이란 어쩌면 청춘시절에만 찾아오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어쨌든 나는 저들마저 외면하고 나면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지. 
저들도 실은 자네들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일세. 물론 
개중에는 남의 힘을 빌려 제 것으로 행사하며 살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지." 자리에서 일어
나기 전 그는 형사로 있을 때 정보과 리스트에 내 사진과 이름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기억
을 못하는 일이지만 내가 자취방에서 검거될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쓰디쓴 마음으로 인연의 굴레라는 말을 되씹고 있었다. 나는 그가 김혜정을 만
난 경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물어 보았다. 강익수는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끝내 말하길 꺼
려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찾아와 해후하게 되었다고 우회적인 설명만으로  그쳤다. "직접 
찾아왔다구요?" 그에 대한 답도 그는  피했다. "김혜정 씨는 곧 사무실을  그만둘 예정이네. 
늦긴 했지만 그 사람도 인생이란 걸 새로 시작해야만 하겠지. 인생이란 누구한테나 짧은 것
이고 매순간이 단 한 번뿐인데도 현재의 긴 시간을 다음  생을 위해 투자한 사람이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인데 말이야.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무너지지 않지. 훌륭한 처녀야." 누구
든 생의 짧음과 덧없음과 또한  순간의 일과성에 대해 모르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멈칫거리기만 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왜냐
하면 거기엔 생의 거대한 불안과 맞설 수 있는  고독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무실
을 그만둔 다음에는요?" "그건 그 사람만이 알고 있겠지."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핏기마저 가신 
수척한 얼굴에 손마저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의 사랑을 무참히 짓밟았던 자의 손을 엉겁결
에 마주잡고 있는 순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갖가지  상념과 회한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신
과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또 무슨 인연으로 만나 이렇듯 음습한 지하 술집에서 헤어지고 있
는 것인가.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당신이 하필 내게 사랑의 위력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스듬히 다퉈 문을 밀고 나가면서 나는 아까 그가 해주겠다던 충고에 
대해 물었다. "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듣고 가겠습니다." 밖으로 통하는 계단 앞에 와
서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젠 자네도 그만 밖으로 나오게." "..." "인과,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일세. 말하자면 고통이라는 것에 의식적으로 오래 또 너무 깊이 잠겨 있지는 말게. 때로는 
가볍게 거기서 튀어나와 감연히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때로 그들 편에서 삶이라는 걸 
해석해 보게. 자신에게만 집착해 있으면 결국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법일세.  이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니 굳이  충고랄 것도 없겠지." 밖으로 나오니  다음날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방금 전인 어제 강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밤이슬'로 들어가던 그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리며 앞으로 다시는 내가 찾지 않기 바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나로
부터, 김혜정으로부터, 그때 나와 청춘을 함께 했던 사람들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는 밤길을 걸어 강남에서부터 한남대교까지 비를 맞고 갔다. 무슨 특별한 생
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한시 바삐  나라는 인과의 우물에서 기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붙잡혀 있었을 따름이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 나는 묵은 사진첩
을 들춰보다 날이 밝아오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먼 곳이다. 

    18. 코스모스 광시곡
  김혜정을 만난 것은 제주도로 내려가기 하루 전이었다. 어려운 만남이었다. 10월의 첫  번
째 금요일이었으므로 날짜로 치면  3일이었고 그 다음날은 철하와  송해란의 결혼식이었다. 
서둘러 그녀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제주도에 다녀온 뒤에는 왠지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
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강 선생과 헤어진 며칠 후 전화를 걸어 보
니 그녀는 9월 말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어디, 해외냐고 
묻자 그녀는 아직도 외무부에서 여권을 발급받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
도 웬만큼 변했건만 아직까지도 서류 통제를 받고 있다고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덧붙
였다. 그녀는 나에 대해 아직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에  아직 익숙지 않은 상태였다. 얼마쯤  망설이고 
피하다가 그녀는 그럼 꼭 한 번만 만나겠어요,  하며 가까스로 응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누군들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함부로 떠들고 싶겠어요. 듣기 싫으시겠지만 지난 봄의 제 실수
를 만회하는 기분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렇긴 해도 남창우 씨가  무슨 이유로 저를 만나자고 
하는지는 따로 설명해 주셔야만 합니다." 나는 옆 사람의  거울로 나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
고 싶다고 그녀에게 완곡하게 말했다.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더 이상의 
말은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게 되면 나는  그 이유를 다시 분명하게 설명해야  할 터이었다. 불쑥 
생각이 나서 나는 전에 어디선가 읽은 글을 띄엄띄엄 송화기에다 전해 넣었다. 그녀는 도사
린 채 듣고 있다가 가만히 전화를 끊었다. 삶은 아픔이고 늙음이다. 오, 놀라워라. 거기 아픔
과 늙음사이로 때로 뜨거운 구원의 빛이 찾아든다. 기나긴 세월의 강이다. 묵은 시간의 환영
인 듯 길가에 떼지어 피어 있는 코스모스. 그 아슴한 길 한가운데로 사랑이 끝난 뒤처럼 서
글피 맑은 햇살이 빈 수레처럼 흔들리며 가고 있다. 단 하루, 단 한번의 시간을 내준 그녀와 
함께 나는 양수리에 와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줄기  강물이 하나로 넓게 겹쳐 흐르
는 곳에. 이곳에 오면 늘 가슴팍에  차오르는 흥분과 감격을 느끼곤 한다. 청량리에서  만나 
좌석버스를 타고 그녀와 나는 정오에 이곳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휘황한 
햇살에 방향 감각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홍천을 거쳐 설악으로 가는 코스모
스 길이 가뭇없이 이어져 있었다. 찻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자  그녀는 고즈넉한 소리로 아니
에요,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콘크리트 건물 안에 앉아 있고 싶진 않습니
다." 이렇게 좋은 날에. 뜻밖의 말이어서 나는 마음을  풀고 그녀의 옆을 따라 걸었다. 강물
은 빙판처럼 번쩍이며 변함없이 깊게 남하하고 있었다. 어색함을  잊고 한참을 말없이 걸어
가고 있을 때 그녀가 돌부리를 툭툭 차며 이런 말을  내뱉었다. "삶은 아픔이고 뭐 또 늙음
이라고 그랬나요?" 그녀는 전바의 코스모스 길에 아련한 얼굴을 던져 놓고 있었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음이 나는 반가웠다. 나는 문어체로 뒤를 이어 받았다. "오, 놀라워라. 거기 아픔
과 늙음 사이로 때로 뜨거운 구원이 빛이 찾아든다." 구원, 이라고 읊조리고 나서 그녀는 허
수아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가을 볕이 눈썹을 하얗고 따갑고 물로늘어지고 있었다. "그
게 누가 한 말이죠?" "김현 선생입니다. 양평 묘비에 씌어 있는  말이죠." 마른풀 냄새가 그
녀를 감싸 안고 남은 힘으로 내게로 사뿐사뿐 몰려오고 있었다. "이런 밝은 날을 보는 것도 
아마 한참 전이죠?" 묻는 투였으나 그것은 독백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는 응답하지 않고 그
녀 쪽으로 귀를 활짝 열어 놓았다. "이것도 만약에 구원인가요?"
  이번에도 어법에 맞는 말이 아니거니와 뜻도 뚜렷하지 않았다. "가령 그것은 이토록 눈부
신 코스모스 길 한가운데로 찾아오는건지요. 뜨거운 흰빛으로 말이죠." 서글프고  간절한 소
리였다. "구원 말예요, 남창우 씨"  그녀는 내게 답을 원하고 있었다.  허나 나는 이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창우 씨도 구원의 경험이 없는 건가요?" 나는 구원의 경험! 하며  툭툭 
돌부리 두어 개를 걷어차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홍천 길로 무연히 걸어갔다. "만
약에 말이죠. 그것이 이런 광경으로 와주는 거라면 때맞춰  산화해도 아무 상관이 없겠습니
다 이렇게 아픈 황홀로 찾아온다면 말입니다." 미루나무가 일제히 서쪽으로 쏠리고 있는 강
가에 그녀는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그녀의 손수건에는 봄의 민들레가 수놓여 있었다.  풀밭
에는 철 늦은 토끼풀들이 드문드문 물방울처럼 떠 있었다. 나는 거기서 구원의 경험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말하고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주 조금 눈물이 났다. "네, 그것
은 때로 눈물겨운 황홀로 찾아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과는  썩이나 다른 모습으로 여기  앉아 있겠죠. 아니, 
여기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남창우 씨는 선택된 사람이군요. 자기를 구원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말예요." 그래,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어제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돌
이켜보니 그이는 분명 내게 구원이었다. "김혜정 씨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아니라면 
조금 늦고 있는 거겠죠." 그녀는 풀밭 의에 떠 있는 물방울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또 구
원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풍경으로부터 전해져 올 수도 있는 거겠죠." "전해져 와요?" "풍경 
밖에서, 비의의 옷을  입고, 풍경의 담을  가뿐히 타넘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그런 말을 다 배웠어요?" 혐의가  느껴진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아픔과 늙음 사이로 말입니까?" "그 사이로 와서 여기 두 갈
래의 강물처럼 중간에서 크게  합쳐지겠죠? 그리고 또 먼데로  깊푸르게 흘러가는 겁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꼭 나쁜  것은 아니군요. 진심에서 하는 소리니  행여 신경 쓰지 마시구
요." 그녀가 내게 담배를 하나 청했다. 불을 붙여 주자 그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이내 밭은기
침을 해댔다. 가까이서 보는 강물은 담배연기 속에서도 우리  청춘의 봄날처럼 푸르고 푸르
렀다. 그녀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들고 찾아온 구원에 대해 내게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런 
사람은 흔히 이쪽을 몰래 구원해 놓고 곧 사라져 갑니다.
  알고 보면 모든 구원의 모습이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날에 꼭 대문 사이
로 슬쩍 옷자락을 흘리고 지나가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하느님,  남창우 씨의 하
느님은 누구였어요?" "..." "하느님이 많았나요?" 무엇이 되게 궁금한 초등학교 1학년생의 말
간 얼굴로 그녀가 대답을 재촉했다. 하느님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때 나는 나수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천에서 만났던 미망인. 나수연은 분명 울울한 혼란의 시기에 슬그머니  찾
아와 내게 구원의 빛을 던져 준 존재였다. 나는 김혜정에게  그녀에 대해 시간을 갖고 차근
차근 들려주었다. 꽃나무처럼 조용히 숨결을 부풀리며 듣고 있다가  그녀는 시린 눈으로 하
늘을 올려보았다. "부럽군요. 남창우 씨의 하느님은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으
니 말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또 그런 셈이었다. 잠시 햇빛에 취해 있는  듯하다가 그녀가 
이런 말을 수줍게 던져 왔다. "여고 때 즐겨 읽던 시인데 한번 들어 볼래요? 이하석 시인의 
<분홍강>인데 그땐 이런 청승마저 잘 어울릴 나이였죠."  나는 달뜬 기분으로 그녀의 여고 
때 목소리에 귀를 던져 두고 있었다. 내 쓸쓸한 날 분홍 강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
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가에 고기 떼들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 분홍 강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 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
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
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분홍강>.
  언젠가 나도 읽은 적이 있는  시였다. 청승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여쁜  자기 사랑의 여린 
증거였다. 우리는 모두 여린 사랑을 잃지 않는 존재들이었으면 좋겠다.  "저도,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피를 닦는다고 하는 강은교의 <풀잎>이나, '콜라를 마시는 해변의 김혜정이 하나'
라는 구절이 나오는 오탁번의 <단조>같은 시들을 학교 때 많이 읽었습니다." "뭐요, 김혜정
요?" "맞습니다. 거기다 왜 김혜정이란  사람 이름을 썼는지 저도  모르겠지만 아마 시인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교적 많이  쓰는 이름이니까 코카콜라처럼 보통명사화
시켜 썼을지도 모르구요. 기억나는 대로 한번 읽어 볼까요?" 진눈깨비가 내릴 만도 하이 실
내에는 오일 스토브와 보리차가 끓어오르는 흰 주전자 빈 의자가 몇 개 밖엔 희고 작은  짐
승들이 짖을 만도 하이 철 지난 언덕을 올라가는 그대 해협을 통과하는 겨울 화물선에 우스
꽝스런 깃발이 하나 골목에서 용변 중인 개가 하나 콜라를 마시는 해변의 김혜정이 하나 카
렌다에서 지난해가 무심결에 펄럭일 만도 하이 그대와 그대의 옆 사람이 아직 알에서 깨어
나기 전 이 언덕에는 세속의 바람이 안  불고 모여라 하는 바람소리 바람소리를 잊으면 안 
되이 언덕의 정세는 날로 긴장되어 팽팽히 잡아당길 만도 하이 실내에는 지난 일들이 대로
하여 끓어오르고 밖엔 태연하게 눈이 내릴 만도 하이 그대 나이는 꼭 스무 살 그대와  그대
의 옆 사람을 만나면 여러 가지 실감날 만도 하이 그런 시가 있었군요, 하며 김혜정은 언뜻 
상기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나는 구원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시의 
마음으로 있을 때 그 행간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6월의 장미꽃을 들
고, 젖은 구두를 벗어 들고, 흰 무명 핸드백을 들고, 팔랑개비를 들고 말입니다." 
  "네,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사람이 아직 아름다운 존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그
때 불쑥 반발하는 힘이 옆에서 뿌옇게 전해져 왔다. 웬일인가  싶어 나는 그녀를 얼른 돌아
보았다. 돌연 억세진 얼굴로 그녀가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왜. "사람이 아름다운 존잽
니까?" "...무섭고 추한 존재지요. 그래도 그런 믿음을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
추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 추함 옆에 미자가 함께 붙어 있지 않으면 더군다나 사람의 추함이
란 얼마나 더 끔찍하겠습니까?" 참는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깨진 콜라병
처럼 자신이 겪은 사람의 추함과 무서움에 대해 쏟아 놓기 시작했다. 햇살은 그새 기웃기웃 
꺾여 뒷전의 코스모스 길에 톱날 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86년 10년 
경찰서로 연행되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털어놓았다. 언뜻 당황했지만  나는 잠자코 듣고 있
었다. 그녀는 밤 9시쯤 형사들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돼 공안실로 끌려가 새벽 3시까지 일차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상황실장이라는 완장을  찬 형사에 
의해 수사과로 다시 끌려가 수배자에  대한 심문 조사를 받았다. 협조를  안 하고 새벽까지 
버티자 급기야 고문이 시작되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워 놓고 브
래지어를 위로 들어올린 다음 지퍼를 내리더니 서슴없이 아래로  손을 집어 넣더군요.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말귀를 알아듣고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감
았다. 그녀의 진술은 계속됐다. "급기야는 팬티가지 벗겨 내리고 가슴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국부를 마지면서 몸을 비벼대더군요. 그래도  시원찮았던지 나를 일으켜 세운  다음 바지를 
완전히 벗겨 내리고 뒷수갑 채운 채 책상에 강제로 엎드리게 한 후 뒤쪽에 붙어 서서  성기
를 떼었다 붙였다 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때 제가 느꼈던 경악과  공포와 절망과 굴욕을 
말예요. 의자 밑에 저를 난폭하게 끌어내려 무릎을 꿇게 하고 자신의 성기를 보도록 하면서 
조사를 거듭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내 얼굴을 잡아당겨 자신의 성기를 내 입에 집어 넣으
려고 했습니다. 아시겠어요? 미친 듯이 반항하자 억지로  유두를 빨면서 죽이겠다고 위협했
습니다. 그런 일이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매일 반복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느라고 저
는 잠을 못 이뤘습니다.
  자살의 충동도 정말 지겹도록  숱하게 느꼈습니다." 그만 하라고  나는 말했다. "아뇨,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문이란 절대적으로 불균형한  관계에서 이뤄지는데 상대는 아
시다시피 익명입니다. 그걸 견디지 못하고 동료를 고발하게되면 자신과 자신의 주체성을 배
반한 것이 되고 나아가 자신에게 존재의 의미를 주었던 집단의 결속과 유대를 배신한 것으
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간접적으로 고문 피해자를 고문  가해자와 한통속으로 만들어 버
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함정과 이중의 구속으로부터 도대체 무슨 수로 벗어나겠습니
까. 자신의 가치와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절대로 거기서 얻은 고통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공 조명으로 빨갛게 흐려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예측 불가능한  공포의 끝없는 
순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세요. 거기서 모든 과거는 하나씩 파괴됩니다.  그러
고는 마침내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저말고도 우리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
나 많았습니까. 아직도 회복을 못하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줄잡아 60
여 개국이나 되는 정치적 저개발 국가에서 지금 이 순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사
형수들과 함께 목욕을 시키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민변을  포함한 몇몇 인권 단체에
서 꾸준히 애들을 쓰고  있지만 나라가 바뀌지 않는  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 
"크로자핀이라는 정신 치료제가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저는 그 약을 매일 복용했습니
다." 그녀의 진술은 한동안 더 계속됐고 나는 그 모든 말들을 캄캄히 엿듣고 있었다. 눈앞에
서 그 많은 코스모스들이 차례로 쓰러져 가고 있었다. "단지 성고문에 대해서만 얘기했지만 
그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습니다. 사지가 묶인 채로  그릇을 핥아 밥을 먹고 구둣발로 
유방이나 배를 짓밟히는 초벌적인  고문만 당해도 사람은  이미 짐승수준으로 전락합니다." 
"..." "출소하고 난 뒤에 저는 제가 사람이란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급기야 정신 발작을 일으켜 용인정신병원과 인천기독병원에  입원을 되풀이했죠. 특수 치
료를 열세 번이나 받고 그것도 안 돼  목을 매고 또 면도날로 동맥을 끊으려고까지 했습니
다. 퇴원하고 나서도 후유증으로 한글조차 잊어버리고  한때는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기간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저는  절대로 현실의 사람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이 년을 요양원과 기도원에서 보냈습
니다. 말이 요양원이지 그건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이었죠." 감정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그녀
는 줄곧 몸을 떨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그 모든 일들이 실감이 나지 않아 막상 울음조차 나
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손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강원도로 가는 길을 붉
은 눈으로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왔던 길을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땅거미가 지고 있는 포장도로만 직선으로  내려다보며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코스모스들이 닿아 줄기가 마구 겹쳐 흔들거리고 있었다. 철길을 옆에 두고 그녀와 나는 양
수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삐뚤게 나있는 길로 들어섰다. 강에 저녁 무렵의 빛이 쏟아지며 엷
은 핏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차들이  앞뒤에서 오고 갈 때마다 그녀와  나는 옆으로 비켜서 
강물을 곁눈질로 훔쳐보고 있었다.  "세상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제가 
겪은 사람이란 존재는 절대로 아름다운 짐승이 아닙니다. 더불어 사람살이도  말예요." 목이 
콱 잠겨 있는 소리였다. "그러니 여고 때처럼 여리고  청승맞은 사랑의 힘을 믿으라고 해도 
이제 와서 그게 되겠습니까. 거리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곧 절대적인 유리감
에 시달리곤 합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인지요. 아직도 그런 유리감과 우울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마음을 마구 헤쳐 놓습니다. 저  자신이 생각해도 슬프기 짝
이 없는 일입니다." "..."
  "요양원 생활을 끝내고 민추협 산하에 들어가 있었지만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서
야 저는 알았죠. 이미 모두가 타자이므로, 우리 모두가 남김없이 사랑을 잃었으므로  관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어라 강변하고 싶었으나 그런 말이 쉽게 머리에 
떠오를 리 없었다. "아직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성이 몰수된 시대에서는 여전히 이
념이 유효하다고 말이죠. 사상과 철학을 통제하는 사회는 역시 영원한 제3세계일 수밖에 없
다고 말이죠. 생각해 봐요,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 말들과 생각들이 통제되고 또한  그게 
범죄로 조작됐는지 말이죠. 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온 거예요. 남창우 씨도  기억하시겠
죠?"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는  단 한 번도 전향을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전향. 
거기엔 결코 그 시절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완강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도 때로 간교함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이성이나 이념을 앞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죠. 우리를 괴롭힌 것은 권력자들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까지 포함돼 있
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향을 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론 이념을 고수하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그때 순정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다들 몸과 마음들이 가난합니다.  오히려 장애인 취급을 받
고 있죠. 그런데도 감히 그들에게 보험을 들어 놓고 사는 세상이에요. 이 사실만은 잊지  말
아야 합니다. 그래도 그때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던 이들의 몫으로 세상이 이쯤 돌아가고 있
다는 사실 말이에요." "글쎄요, 어떻게든 삶이라는 걸  되찾아야 할 텐데요. 그런데다 저 같
은 사람에게도 과연 삶이 가능할는지요. 서른에는 분명 입술이 예쁜 아이 둘을 갖고 싶었건
만 벌써 그 나이도 지났어요. 남창우 씨는 그래도 제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
으시겠죠. 그걸 믿어 보라고  말예요. 하긴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서먹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뜻인지 그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은 그녀가 
구원을 원하고 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식민지  시대를 겪고 동란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몽땅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거칠기가 짝이 없고 동방예의
지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죠. 모두가 따로따로고 타인에게 한치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
니 나쁜 것만 자꾸 늘어나죠. 기껏해야 남의 밥솥에나 눈독을 들이고 말이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이러다 모두 큰일이 날 텐데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벌써 그런 날이 저기
서 화적 떼처럼 쳐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며 코스모스에 먼지를 
뒤집어씌웠다. 그새 불을 밝히기 시작한 카페촌이 눈앞에 군용야전 막사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는 건 어쩌면 강익수 씨  때문일지도 모
릅니다. 들으면 아시겠지만 그런 사실이 얼마나 역설적인지요." 나는 강익수의  이름이 튀어
나와 대뜸 긴장하고 있었다. 대번에 불길한 느낌이 머리 끝으로 쭈뻣쭈뻣 몰려들었다. "남창
우 씨 짐작대롭니다.
  비록 성고문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교대로 들락거리며 나를  취조한 담당 형사였습니다." 
역시 그랬었구나. "그때의 강익수 씨를 저는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도 온갖 고문을 받았으니까요. 그래요,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용인하거나 
묵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인가고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인천기독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 사람이 저를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와서 소위 용서라는 걸 구하더군요.  말하
자면 악의 혼령이 저를 찾아왔던 겁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알턱이 있었
겠습니까? 오히려 병이 재발돼 치료만 길어졌습니다. 그 후 민추협  사무실에 있을 때 다시 
저를 찾아왔더군요. 끔찍해서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만나기는 했지만 옛날 일이  되
살아나 고통스럽고 무서웠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치료가 어지간히 된 상태여서 비교적 꿋꿋
한 자세로 그 사람과 마주앉아 있었지요. 그 사람은 다시  제게 용서받을 기회를 달락 했습
니다. 하지만 뭐 어떤 식으로  제가 기회를 줍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요." "그게 무슨 
뜻의 용서였을까요." "사람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좀처럼 그
런 마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
다. 솔직히 거짓말이라도 꾸며대서 빨리 돌려보내고 싶었죠.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
각이 갑자기 마음에 치미더군요.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얘기했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거
듭거듭 단호하게 말이죠." "..." "돌아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물론 단단히 같
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런데 그 사람을  보내고 나서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무엇보다도 먼저  저에 대한 연민이었겠지요. 혹여라도 제가  그 
사람한테 연민을 느꼈을 리는 없었을 겁니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날 하루 종일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  "다음날에야 저는 제가 울었던 까닭
이 저는 물론 그 사람을 포함한 사람 전체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로 
사람이란 짐승에 대한 순수한 연민 말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네, 조금은." "오래 그 
일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제게 구하고 있는 용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말입니다. 
또한 그건 생각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러하겠지. "어느  날 저는 
자청해서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얼마나  망설이다 갔을지는 남창우 씨도  짐작하겠지요." 
그래, 그렇지. 그러했겠지. "가서 말했죠.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말이죠. 그건 우선 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않고는 삶을 계속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게 상대를 위한 일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
었습니다." 그녀는 강익수의 말대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은 피어나는 법인가.  그녀는 새벽의 연꽃처럼 순결한 여자였다.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아까 강둑에서  내게 말했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사랑과  그것의 
위력을 믿고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의 일 년을 그 사람과 함께 보냈습니
다. 그렇다고 그쪽에 뭘 요구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나날이 사는 모습만을 지켜봤죠. 그
가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어떻게 사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말이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
게 저도 잃었던 과거와 존재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겁니다." 사람, 이라고 나는  속으로 되뇌
어 보았다. 그러자 이상한 더움이 목울대로 차올랐다. 김혜정과 나 그리고 모든 이들을 포함
하는 말인 바로 사람. 그녀와 나는 마을로 들어서 <사파리>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저녁  참
이어서 배가 고팠던 것이다. 유리창 밖으로 어둠에 저문  북한강이 불빛에 묻혀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리를 골라 앉아 그녀와 나는 맥주를 시켜 놓고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고 있는 동
안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밥 먹는 일에만 몰두해 있
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녀가 속으로 울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8시가 되어 스피
커와 마이크가 설치된 간이 무대로 칠판십 연대에 활동했던  가수 송창식이 나타났다. 헐렁
한 개량 한복 차림에 기타만 하나  들고 나타난 그는 <상아의 노래를> 시작으로  손님들이 
신청한 <토함산>과 <사랑이야>와 <비와 나>와<애인>을 차례로 불렀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양수리와 가까운 광주 퇴촌에 살면서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이 카페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평일이었으므로  손님은 별반 없었지만 분위기
가 금세 십 년 전쯤으로 되돌려져 숱한 기억들을 반추게 했다. 어쨌든, 김혜정과 나도  송창
식이 활동하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 이었다. 골똘히 무대에 시선을  던져 둔 채 그녀는 가끔 
맥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나는 밤의 강물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건너편  마을의 
불빛들이 강물을 황금 반죽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두 갈래의 물이  겹쳐진 다는 뜻으로 
전에는 두무골이라 불렀다는 마을이었다."알고서 왔어요?" 언뜻 정신이 돌아와 나는 김혜정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몇 모금 술에  그녀의 눈 밑이 벌써 달아올라 있었다.  "송창식 씨가 
나오는 덴 줄 알고 부러 왔어요?" "전에 촬영 때문에 근처에 왔다가  우연히 들렀는데 그때 
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하지만 오늘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왜요, 산만한가
요?" "아뇨,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그냥 물어 본 것입니다." 그녀는 어여뻐야 했을 그 시절
의 캄캄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래는 <철 지난 바닷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
쯤에서 나는 오늘 그녀를 만나고자  한 이유를 얘기했다. "오랫동안  저는 타인에겐 무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이 저 때문에 받고 있는 고통조차 외면한  채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지
냈던 겁니다." 듣고 있다가 그녀가 그래서요? 라고 되물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너
무 먼데까지 와버렸습니다. 근래들어 자주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무얼 착각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옛사람들에  대한 쓸데없는 동정이
나 부채 의식 따윈 갖지 않아도 좋아요. 그게 자칫 상대에 대한  모멸이나 기만이 될 수 있
다는 거 모르세요?" "압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들이, 아니 단 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 사람이 이제 와서 제게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염치가 없다 해도 이렇게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군요. 사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누군가와 화해라는 것도 시도해 보고 싶습
니다. 돌아보면 그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흠집과 상처를 내며  살았습니다."  "그
래서요?" 여전히 뾰족한 말투로 그녀가 말끝을  물고늘어졌다. "한때는 제가 고통을 받았다
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 반대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또 어
째서죠?" "상대는 그때 진심으로 저를 사랑했는데 저는 그걸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실패했습니다.
  또한 그후의 모든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게는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부재했기 때문
에 누군가를 사랑할 줄을 몰랐던 겁니다. 저를 옆에서 구원한 사람이 깨우쳐  준 일입니다." 
"뜻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야." 표정을 슬쩍 바꾸며  그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김혜정 씨를 만나 오히려 고통으로 인해  사람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김혜정 씨는 견고한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 아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은 아닐지 몰라도 그건 사실입니다.  아마 전에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 식으
로 자꾸 사람을 몰아붙이지 마세요."  "제 옆 사람도 아직  사랑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의 가까운 사람인데 지금은 먼 곳에 혼자 떨어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받고 
있는 고통을 김혜정 씨를 만나 깨우치고 싶었습니다. 내용은  달라도 김혜정 씨와 여러모로 
사정이 닮아 있는 사람입니다. 나이와  학번도 같고 또 지금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
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송창식은<그대 있음에>를 
끝으로 무대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창을 통해 강물을 내다보고 있었다. 9시가 가까
웠으므로 그녀와 나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는데 그녀가 스쳐가는 말투
로 이런 말을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분도 아직 사랑을 잃지 않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
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가 남창우 씨를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 부분이 생겼듯이 말이죠." 나는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 그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
끼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주고 있는  그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차가 와서 그녀와 나는 좌석버스에 함께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차가 출발했고 버스가 
강물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동안 내내 울적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어느 땐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런 말을 건네 왔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남창우 씨 마음에 
사랑이 부재하단 얘긴 틀린 것 같습니다. 조금 서툴렀겠죠. 그땐 모두가 사랑에  서툴렀잖아
요. 하지만 오늘 남창우 씨는 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별로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
스런 일이었다. "제게 구원의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신 것처럼  남창우 씨도 부디 그러길 바
랍니다. 된다면 저도 그래 보도록 해야겠죠.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면서 그런 거  느꼈습니
다. 맞아요, 그쪽은 틀림없이 구원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내 손등에 제 손
바닥을 얹어 왔다. 어떤 거북함도 주저함도 없는 깨끗한 동작이었다. 이런 사람이 학교 선생
님이 되면 아이들이 얼마나 깨끗하게 클까, 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버스는 구리시를 
지나 망우리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망우리 고개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그 시각에도 만
원인 삶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옆에서 문득 전해져 오고 있는 초조함의 징후
를 몸으로 선연히 감지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을로 들어서자 그녀는 다시금 불안에 빠져 들
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안타깝게  생각됐다. 많은 경우 상대에게 되레 상처를  주곤 
하는 연민의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며 손까지 잡고 왔건만 그녀는 깊은 수렁에 빠져 
들듯 몸을 떨고 있었다.
  청량리 종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으나  그녀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  보이지가 않았다. 
영락없이 잠시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 도로 감방으로 돌아온  죄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
의 팔목을 거머쥐고 한시 바삐  그 북새통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탔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이는 계단  끝 
모서리에 앉았다. 여름에 나수연과 함께 앉아 있던 곳이었다. 계단에 놓여 있는 화분의 코스
모스들이 밤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녀가 겨우 마음을 수습한 듯 
코스모스예요, 하며 떠는 소리를 냈다. "어쩌면 여기까지 뒤따라왔네요. 가엾기도 해라, 여리
고 여린 것들." 나는 그녀의 서글픈 목청을 들으며 밤의 코스모스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제
가 오늘 누구한테 속임을 당했거나 나쁜 꼬임에 넘어갔던 건 아니겠죠?" 아니라는 뜻의  말
을 나는 차분히 그녀에게 진심을 가지고 들려주었다. 가엾은 사람. 그녀는 뒤늦게 구원의 가
능성을 믿게 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이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그것
을 기다린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또 그녀에게는 또 다른  형벌의 시작인 것처럼 보였다. "정
말이지 한없이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편지를 읽는 투로 그녀는 말했다. 대꾸하는 나도 기이
하게 같은투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녹슨 청동문이 열릴 때 들리는 소리인 것입니다."  "..." 
"닫혔던 마음이 열릴 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밖을  향한 두려움 말입니다." "밖을 향한 두
려움." "그러나 문이 열리고 나면 곧  어떤 이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찾아옵니다. 얼굴 
좋은 사람이 말입니다." "얼굴 좋은 사람이." 코스모스처럼 모가지를 한껏 틀고 그녀가 확인
하려는 듯 내 얼굴을 살폈다. "믿어 보는 겁니다. 저 또한 비슷한 처지여서 이렇듯 단호하고 
절박하게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고 싶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같은 처지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김혜정 씨가 방금 우리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상대는 늘 나와 처지가 같은 법인 모양입니다." 그녀를  진정시키고 싶어 나는 어쨌든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녀를 욕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코 없었으므로 좀 억지스럽다 해도 왠
지 그렇게 말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정이 됐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조용하게 광화문 세종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의 
찬바람이 슬슬 무릎을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코스모스 가 눈앞에서 그 여리고 여린 대궁을 
가누지 못해 모로 쓰러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그녀가 옷자락을 털고 일어났다."가을이  다 
갈 때까지 이순신 장군이 지켜 주겠죠?" 네? 라고 반문하며 나는 앉은 채로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맥주 한잔 더 할 시간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도 궁둥이를 털
고 계단에서 일어났다. "코스모스들 말입니다. 양수리에  피어 있는 것까지 전부 다  장군이 
지켜 주겠죠? 저 큰 칼을 차고 말입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럴 거
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이 가을 한반도 전역에 핀 코스모스는 그가 호령하며 전부 
지켜 줄 터이었다. 그녀가 대학 때 가끔 들렀다는  세종문화회관 옆 골목의 <세우>라는 조
그만 카페로 가서 그녀와 나는 맥주를 세 병 마셨다. 마음의 떨림이 유독 심했던  날이었다.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이었다. 맥주를 마시며 그녀는  내일이나 모레쯤 한 달에 
걸쳐 한반도 남한을 일주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하
며 내가 다녀 본 아름다운 곳들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그녀는 여행을 다닌 경험이 거의 
없었다. 나는 해남과 강진과 경주와 지리산과 강릉 속초와  충남북의 여러 고장과 마지막으
로 서울에 대해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서울요? 하더니 눈을 흡떴다.  "떠나 있으
면 광화문 네거리와 대학로와 인사동과 신촌 같은 데가  이상하게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건 
서울이 우리한테 실제적인 장소이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적이라뇨?" "현재 우리가  고단한 
꿈을 꾸며 살고 있는 장소 말입니다." 그녀는 생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육십 년
대에 이미 누가 그런 말을 했죠. 서울은 삶의 백화점이 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구십 년대 말
이고 어느덧 세기말입니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더욱 다난하겠습니까. 하지만 떠나  있으면 
머지않아 돌아오고 싶어집니다. 그건 서울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있거나 정확히 말하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요컨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서울이
라는 곳에 삶이라는 걸 송두리째 빼앗기고 살기 때문에 곧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
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내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있
었다. 하지만 한편 수긍이 간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행을 계획한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자기가 있던 곳을 떠나 반대
편에서 삶을 해석해 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모쪼록 아름다운 풍경  많이 관람하시고 부디 
힘을 얻어 돌아왔다면 좋겠습니다. 여러 곳을 다녀 봤지만  특히나 봄과 가을엔 한반도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토해 내는  땅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필 상처도 많은  모양이죠." 
"상처요?" "풍경이 있으면 상처도 있습니다." "남창우 씨가 생각하기엔 그게  아름다운 겁니
까? 풍경만 있고 상처가  없으면 그렇지가 않은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 저는 
상처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익숙하고 정들게 느껴집니다. 맑은 건  좋지만 너무 맑은 
건 어째 거짓말 같아 보입니다. 밑동을 잘랐는데 거기 나이테가 안 보이면 느낌이 어떻겠어
요. 무늬 혹은 결이라는 게 없질 않습니까. 그러니 상처가 다 나쁘다고만 생각할 것도  아닙
니다. 우리도 이제 결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게 자칫 옹이나  흉터로 
남지 않게 마음을 잘 보살피면서 말이죠." 고통이 컸던 사람에게는 자칫 욕됨이 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어쨌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얘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여 준다면 저  역시 고맙습니다. 고작해
야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일뿐인데요." "아니에요,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의 말이란 걸 알겠어
요. 나머진 스스로들 알아서  해야겠죠." 그럴 것이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힘만으로는 
화해나 사랑이 불가능한 거처럼 거기엔  또 각자의 몫이란 게 남아  있을 것이었다. 자정이 
되어 그녀와 나는 술집에서 나와 광화문 거리를 조금 더 걸었다. 구동아일보 사옥이 건너다 
보이는 파출소 앞 정류장까지 와서 그녀와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방배동
에 살고 있었다. 몇 잔 술에  취했는지 파리한 얼굴에 그녀는 다리까지 휘청거렸다.  감옥에 
있는 동안 얻은 속병 때문에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다고 그녀는 힘든 표정으로 내게 말했
다. "남창우 씨는 앞으로 뭘 할 거죠? 계속 텔레비전 생활을 할 건가요?" 텔레비전 생활. 처
음 들어 보는 표현이었다. 뜻을 알았으므로 나는 요즘의 내 생각을 그녀에게 솔직히 털어놓
았다. "딱히 뭘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텔레비전 밖으로 나와야
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 오래 타자의 껍질을  빌려 쓰고 그곳에 갇혀 살았
습니다. 저로서는 그게 곧 감옥이었던 셈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은 옵니다." "특히나 
상업 방송은 모의와 조작투성이입니다. 시뮬레이션이란 말을 들어 보셨겠지요. 가상의  공간
에 가상의 존재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상의  존재한테도 어느 날 삶이라
는 게 발생하기 시작해 관계를 요구받고 또 요구하기도 하는  일이 생깁니다. 나인 남이 나
를 대신하고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쯤이면 내  몸에서 빠져 나간 나를 무기
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밤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저는 많
은 것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매번 항구에서 멈칫거리기만 하다가  배를 놓치고 그만 여기
까지 와버린 겁니다. 그런데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으니 참 딱한 일이지요." 그
녀가 내 정면으로 성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남
창우 씨가 제게 그렇게 열심히 해준 말들도 덩달아 허사가 되는 셈입니다." 아무 말도 못하
고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늦지 않은 겁니다. 그렇죠?" 그녀가 타고 갈  버스가 먼저 왔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잡고 흔들더니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얼른 자리에 
앉아 차창에다 입을 대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그렇죠? 하고  또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
인 다음 막 출발하는 버스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19. 섬 그리고 섬
  이토록 사무친 가을의 한가운데서 당신의 평안을 묻소. 서울에  이제 노란 은행잎의 계절
이오. 기나긴 코스모스 길에서 돌아와 나는 쓰고 있소. 먼길을 돌아 나는 여기까지 왔소. 늘 
새롭게 다시 가야만 하는 생의 원점으로 말이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그땐 미처 
무슨 뜻이었는지를 몰랐는데 이제야 나는  당신이 내게 사랑이었다는 걸  알았소.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너무 오래 망각의 저편에서  살아온 것이오. 그래서, 그것이 또 무모한  일이고 
다시 실패할지 모르는 일이라 해도 우리 삶이 함께 계속돼야  한다는 걸 알았소. 10월이 가
기 전에 피렌체로 가리다. 여름에 비켜 돌아온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도 모르오. 왜냐
하면 나는 더 많은 사람 사이의 진실과 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오. 오늘 나는 철
하의 결혼식을 보러 제주도에 가오. 당신이 옆에 있음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더운 눈으로 지
켜보겠소. 어수선한 세상에 우리 일도 해를 넘기지 않고 무슨 매듭을 보았으면 하오. 고작해
야 나는 당신한테는 미혹이고 스스로에겐 여태 우매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소. 이 편지가 
하필 당신을 노하게 하지 않기를 부디 바라며. 먼덴데 마음 자주 살펴 부디 모습 잃지 않길 
바라겠소. 그럼 속히 부치고 내내 기다리리다.
  혹은 아픈 말이 되더라도 꼭이 답신 바라며. 새벽에 은빈에게  쓴 편지를 아침 일찍 우체
국에 가서 부치고 나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5월에  다녀왔으므로 오 개월 만에 다시 
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실로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무려 십 년을 등에  붙어 
있던 정든 그림자 하나가 오늘 제짝을 찾아 나와 결별을 하려는 참이었고 또 그러므로 해서 
지난 세월의 질곡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은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그러저러한 이유가 생겼기 때문일  터이었다. 그러나 제주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마음 한쪽이 우울하고 허전했다. 안  될 일을 가지고 억지라도 부리듯  만나 왔던 주미와의 
일들이 이마에 떠올랐던 것이다. 또한  나는 그녀와 다시 잘 헤어지기  위해 섬에서 섬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공항에 내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모슬포 읍내에 있는 식장에 도착하니 
결혼식이 막 시작되고 있는 참이었다. 지난 여름 파리에  가기 전의 통화에서 결혼식만큼은 
서울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도 철하는 끝내 제주도 그것도 모슬포를 고집했다.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신랑 신부에겐 이곳이 서로를  만나 삶을 되찾은 곳이므
로 서울과는 또 다른 감회가 서린 곳이라는 거였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어서 더 이상의 말
은 하지 않았으나 자칫 궁색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어 내심 염려스러웠다. 예상했던 대로 
식장엔 하객이 많지 않았다. 청첩을 했을 리도 없으려니와 용케  양가 부모를 모셔 온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학 시절에 자주 어울렸던 몇몇 면면들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신
부 쪽만 서울에서 친구들이 예닐곱 명 내려와 축가를 준비하고 부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
었다. 나머지는 신랑 신부가 제주도에 내려와 얼굴을 익힌 먼 이웃들이 고작이었다.  송해란
과 단란주점에서 함께 일하던 여자 서넛과 또 모양새가 어떤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단골 고객 두엇까지 어설픈 콤비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자리에 끼여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면 철하의 직장 동료 대여섯이 나머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불협화음처럼 느껴지
던 분위기는 예식이 시작되자 사뭇 기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어느 예식장을 가도 어수선하
게 마련인데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차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이제 막 부부가 
되려는 한 쌍의 남녀를 진지한 얼굴들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부가 입장하고 나서 철하가 근
무하는 여행사 지점장의 주례로 성혼 선언과 함께 시작된 이날의 결혼식은 한 시간이나 사
뭇 엄숙하게 진행됐다. 중간에 신부의 친구들이 기타를 치며 축가를 대신하여 불러 준  <사
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가 크잖은 식장에  올려 퍼질 때는 몇몇  이들이 몰래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는 모습까지 보였다. 나 또한 그때는 가슴이 시큰해져 있었다. 언뜻 보니  신
랑 신부도 감정을 참고 있음이 역력했다.
  갈색 양복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하늘색 넥타이를 맨 철하의 모습도 그날따라 더욱 듬직
하고 근사해 보였다. 급기야 면사포를  쓴 신부가 참지를 못하고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이자 하객들이 박수를 보내 그녀의 덧없던 슬픔을 지워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식이 끝나
고 부케를 받는 그녀의 친구도 덩달아 어여삐 보였다. 하객들이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몰려 
나가고 폐백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식장에  우두커니 앉아 얼마간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식당으로 가 요즘은 어디서 하지도 않는 잔치국수를 먹으며 그들의 행복한 미래를 마음속으
로 빌었다. 유리문 밖으로 보니 하늘도 드높이 푸르러 햇빛이 사방으로 투명하게 쏟아져 내
리고 있었다. 누군가 툭하고 등을  두드린 건 국수 그릇을 물리고  삶은 돼지고기에 소주를 
두어 잔 걸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앉은 자리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부
신 날이로군, 축하해." 그새 양장으로 갈아입은 송해란과 철하가 청량한 냄새를 풍기며 자리
에 와 앉았다. 신부가 얌전한 모습으로  먼데서 부러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하고  말했으나 
철하는 대뜸 섭섭하단 말부터 했다. "하루 전엔 진작 내려와 주변을 살펴  줘야지, 그러잖아
도 쑥스런 늦장가의 전야에 그렇듯 두꺼운 외로움을 입히다니." 말솜씨는  여전했다. 얼굴을 
붉히며 송해란이 얼른 그의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말이 쑥 들어갔지만 안 그랬으면 필시 
걸쭉한 말이 몇 마디 더 튀어나왔을 터이었다. 물론 탓하고자 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랬어
야 했지. 그런데 마침 오늘 아침까지 되게 바빴어. 늦장가라곤 하지만 새삼 나보단 앞서가는 
셈이니 그저 시샘에 울화에 여기저기 나도 물꼬를 터보려고  삽을 들고 설치느라고." 픽 하
고 웃으며 그는 소주잔을 들어 나더러 넘치게 따르라고 했다.  내 잔은 송해란이 먼저 다소
곳하게 채워 놓고 있었다. "그럼 물꼬는 트고  내려왔니?" 단숨에 소주잔을 비우고 빈 잔을 
내게로 돌려주며 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물꼬만 트면 무얼 해. 물이  흘러 들어와
야지." "쯧쯧, 아직 멀었군, 멀었어"
  못 들은 척하며 나는 잔을 비워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물은 마음이 있으나 양동이가 
찾아와 주질 않네. 하는 말도 몰라? 앉아 기다리면 저절로 물이 들어와? 넘치게 길어 와 물
꼬에 부어야 큰 물이 따라 들어오는 법이야." 다소곳이  있던 송해란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
다. "두 분 지금 다투고 계신 거예요? 아니면 무슨 선문답들을 나누고 있는 건가요." 그러자 
신랑이 신부에게로 눈을 부라리며 핀잔을 줬다. "사내들이 시방 환담 중인데 어딜 아녀자가 
함부로 끼여드는가." 전 같았으면 바락 하고 금세 대들었을 송해란이 그날만큼은 눈만 슬쩍 
흘기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때의 빚을 신부는 두고두고 신랑에게 갚으며 살 것이었다. 그
것도 내 눈엔 다 좋아 보였다.  내가 넘긴 잔을 반쯤 비우고 나서  신부는 그녀의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갔다. 그 자리에서 철하와 나는 소주 한 병을 마저 다 비웠다. 취할 만큼 
마시면 안 될 듯해 그만 하자고 하자 그럼 그래야지, 하며  그는 벌써 목이 취한 소리를 내
며 고개를 건성으로 주억거렸다. "그 대신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지내는 거야, 알았지?" "첫
날밤에 왜 내가 옆에 있어. 까닭 없이 신부한테 원한  살 일 있어?" "어제부터 사람을 기다
리게 해놓고 당일 식이 시작되고 나서야 코빼기를  내밀고 나더니 뭐 그럼 또 금세 서울로 
줄행랑을 놓을 작정이야?" 그건 아니라고 해도 어찌 첫날밤을 신랑 신부 틈에 끼여 있을 수 
있겠는가. 당치도 않은 말이어서 나는 말을  돌려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고  물었다. 
"첫날밤은 이미 수차례 치렀으니 되도 않는 소리고 신혼 여행이야 어디 딴 데로 갈 필요 있
어? 여기가 어딘 줄 몰라서 그런 얘길하고 있는 거야?" 물론 여기는 제주도였지만 식을  치
른 곳이 곧 신혼 여행지가 된다는 것이 신부 쪽에서 보면 섭섭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 또
한 염려가 됐다. "부부 합의 사항이니 그것까지 자네가 신경  쓸 필요 없고 지난 봄에 마침 
봐둔 곳이 있으니 그리로 갈 작정이야." 그곳이 어딘지를 나는 또 물었다.  "왜 사람이 그렇
게 무뎌졌어. 봄에 내려왔을 때 셋이 함께 갔던 덴데  그새 잊었어?" 그렇다면 서귀포에 있
는 파라다이스 호텔을 말하는 것이었다. "신혼 여행이고  뭐고 제주도에서 그냥 보내자니까 
그렇다면 파라다이스까지는 보내 달라고 하더라. 여자들이란 뭐 어쩔  수 없이 모두 사치를 
원하는 모양이야." 그것까지 사치라면 더 이상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식이 끝
나고 나면 택시를 타고 남산을 한바퀴 돈 다음 새로 도배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혼  여
행의 전부였다고 하지만 그때는 모두가 그랬던 것이고 이제는 남들 하는 것 비슷하게는 해
야 매사가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이었다. 모름지기 대사란 남들 비슷하게 치러내는 것이 가
장 좋을 터이다.
  그 정도면 신부도 양보할 만큼은 한  것이었다. "아무튼 오늘 밤은 나와  있어 줘야겠어." 
아무래도 그냥 그러는 것 같지만은 않아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신부와의 합
의 사항이면 재고해 보지." "물론." 그렇다면 이참에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그러마고 동의를 했다. "그  대신 자정까지는 신혼방으로 들어가. 혹시  알
아? 나도 우렁각시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될지." 그쯤에선 그도 고집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
다. 하객들이 돌아갈 때까지는 아직도 치러 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나
는 신랑 신부의 부모들과 그날로 서울로 올라가는 손님들을 봉고차에 태워 공항으로 데려다 
주어야만 했다. 신부의 친구 두엇은  눈치를 보니 내려온 길에 하루  이틀 관광이라도 하고 
가려는 듯 일어날 기미가 없어 봉고차 하나면 족했다.  오후 5시쯤 공항에서 돌아오니 이미 
식당 손님들도 뿔뿔이 돌아간 다음이었다. 사람이 없어 뒤에 남았던 신부의 친구 둘이 봉고
차에 색실을 두르고 식당과의 일도 끝낸 모양이었다. 앉아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나는 또 
신랑 신부를 싣고 서귀포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기 전 신부의  친구 중 하나가 철하에게 다
가와 하는 소리를 듣고 신부는 거기서 또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 "많이많이 행복하게 해주
세요. 투사 출신답게 언제나 자랑스럽고 열렬하게 말예요." 누군가 싶어 돌아보니 손에 부케
를 들고 있는 여자였다. 그 장면은 그날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거기 남아 있던 모두
에게 기억될 것 같았다. 철하도 거기서는 말문을 잃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뒤에서 손을 흔드는 신부의 친구들을 놔두고 나는 신랑 신부를 태
우고 이윽고 서귀포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 셋이서 말이 없는 가운데 나는 오른쪽에 펼쳐져 있는 짙푸른 바다를 이따금
씩 곁눈질로 살피며 거기 쏟아져 내리는 꽃잎 같은 햇살을  눈자위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나
는 뒷좌석에서 신부가 신랑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모른 척 귀담아듣고 있었다. "고마
워요." "무슨 그런 성급한 소릴. 사방 첩첩 고생길이  훤한데." "이제는 둘이잖아요. 둘이 하
는 고생엔 아마 기특한 뜻이 담겨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철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
다. 그러다가. "그렇다면 우선 애부터 만들지. 애가  있어야지 이거 원 벌써부터 늙은이처럼 
뒤가 허전해. 방금 전에 식을 마친  주제에 내가 너무 주책인가." 내 눈치를  보는지 신부의 
말소리는 운전석까지 들려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신부는 신랑의 말에 어떤 응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그새 7시가 다 돼 있었다. 앞쪽으로 내다보이는 바다에  청
회색 그늘이 덮이며 호텔 내부에도 때맞춰 불이 켜지고 있었다. 색실을 두른 봉고차가 나타
나자 로비에 서 있던 사람들과 다른 신랑 신부들이 기웃기웃 몰려나와 무슨 구경이라도 난 
듯 배싯거리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약해 둔 호텔 방에 들어  신부가 화장을 지우고 
짐을 푸는 동안 철하와 나는 허니문 하우스에 앉아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차를 
마셨다. 그때 철하가 송해란에게 청혼을 하던 장면이 떠올라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도 내가 웃는 뜻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일이 과연 잘된 것인지는 모
르지만 반은 자네가 만들어 놓은  일이야. 그러니 앞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반은 자네 책임인 셈이지." 그것도 도대체 말이라고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럼  애를 둘 낳게 
되면 그것도 하나는 내 책임이니까 떠맡기겠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왜 아니겠어." 말을 해
봐야 늘 당하는 것은 내쪽이었다. "그래서 하는 소린데 자네도 이쯤에서 날개를  접어. 이제 
와서 알았지만 혼자 산다는 거 의외로 나쁜 짓 같아.
  스스로한테도 나쁠뿐더러 세상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  같단 말이지. 그건 아무에게
도 봉사나 헌신을 하지 않고 살겠다는 뜻 아니겠어. 그게 마누라가 됐든 뭐가 됐든 옆에 누
굴 두고 함께 비비면서 살아야  옳은 일 같아." 고작해야 서른  중반에 그것도 방금 혼례를 
마친 터에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너스레를 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말이 틀리다
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가 은빈의 얘기를 꺼낸 것은 신부가 저녁 식사를 하러 허니문 하
우스에 나타났을 때였다. 그래서 그 말은 시작과 함께 뚝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은빈의  이
름을 듣고 내 머릿속은 다시 실탈처럼 엉키고 있었다. 오늘  그가 극구 나를 서귀포에 잡아 
둔 것도 은빈의 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 그렬려고 해도 표정이 자꾸 뻣뻣해졌
다. "왜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요?" 조심스럽게  양쪽을 돌아보며 신부가 선 채로 머뭇거
리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얼른 그 마을 되받으며 신부를 의자에 앉게 했다. "그럴  리가 있
나요. 주책없이 신혼 부부 틈에 끼여 앉아 있으려니 자꾸 면구스러워져서 그렇죠." "창우 씨
도 참, 이제 우린 남이 아니잖아요." 남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철하도 거기다 대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 이젠 남이 아니지. 그러니 당신 앞으로  저 저를 도련님이라고 불러." 
신부가 어이없는 얼굴로 내 눈치부터 살폈다. "왜 싫어? 방금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누군데." 
듣고 있기가 거북해 하는 수 없이 내가 되받았다. "그만그만, 안 그래도 오늘부턴 해란 씨를 
형수님이라고 부를 작정이었으니까."
  철하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신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예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분위기가 바라 잡힌 듯하여 곧바로  식사를 주문하고 밥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몇 병  시켜 잔을 채웠다. "모쪼록 어여쁜  생을 누리시고 부디 남의 
눈에 밟히지 않게 오래오래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까닥 숙여 답례를 하며 신부가 
농조로 되받았다. "무슨 주례사  같네요. 알았으면 미리 부탁드릴  걸 그랬어요." 하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뜻이  전해졌으니 됐지 싶었다. "아무튼  거듭 감사드려요. 애 백일 
때 돌 때도 내려와 주실 거죠?" "그래야죠." 그때 철하가 신부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눈
치를 채고 얼른 입을 닫았다. 쓸데없는 배려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마음이 조금 
갑갑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식장에서 있었던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천천히 식사를 끝내자 9시가 됐고 맥주 두어 잔에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 신부는  아
닌게아니라 사전에 신랑과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던 듯 자리를 비우고  일어났다. 아니 왜? 
하고 내가 잡자 철하가 내 입을 막았다. "그래,  속히 들어가 이불 깔고 기다려." 그녀는 그
럼 천천히들 말씀 나누세요, 하고 제법 남의 아내가 된 티를  내며 치마 끝을 살짝 치켜 들
고 밖으로 총총 사라졌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마실까?" 그렇
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이쯤에서 자리를 옮겨  보는 것은 좋을 듯하여 나는 그를 따라 
일어섰다. 호텔 본관 지하에 있는 스텐드바로 옮겨 철하와 나는 맥주를 몇 병 더 마셨다. 거
기서 그는 은빈의 얘기를 꺼냈다. "고맙게도 며칠 전 축전을 부쳐 왔더라."  그 정도 가늠은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젯밤 통화도 했어." 넥타이를 한 손으로 느슨하게 풀며 그가 맥주잔을 돌려 잡
았다.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몇 쌍의 신혼 부부들이 몰려들어 왔다 빠져 나간 스
무 평 남짓한 술집 안은 금세 적막하고 고적하게 변해  버렸다. 유니폼 차림의 여급 하나만
이 스탠드 안에 앉아 그런 듯 아닌 듯 이쪽에 귀를 던져 두고 있었다. "여전히 힘들게 사는 
모양이더라."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슬쩍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도로 맥주 잔으로 눈을 돌
렸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왜 알 수 있는 거잖아." 자존심  때문에라도 누구한테 직접
적으로 그런 말을 할 여자는 아니었다. "여름에 자네가 다녀가고부턴 더 그런가 봐." 다녀간 
게 아니라 파리에서 전화 통화를 했을 뿐이었다.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들어.  섭섭한 얘기
가 될는지 모르지만 은빈이하고 나는 또 자네하고 달리 통하는 데가 있어. 왜 그런 거 있잖
아. 좀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말이야." 섭섭할  리도 없고 
또 거리가 가져다 주는 담백함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관계에
서 느껴져 오는 이쪽의 묘한 소외감은 어쩔 수 없었다. 자격지심 때문일까. 자리가 껄끄러워
지는 듯해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녀가고 나서 더욱  힘들단 얘긴 대체 무슨 
뜻인가." "아마도 혼란을 뜻하는 거겠지." 혼란이라니. "말 그대로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거
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자네도 알겠지만 혼자 오래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두터운 자기 보호막을 만들게 되지. 그걸 원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그래야만 살아 낼수 
있으니까 객지에 있는 여자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겠지. 그런데 거기다 대고 다른 사람도 아
닌 바로 자네가 느닷없이 돌맹이를 던졌다고 쳐봐." 내가 돌맹이를 던졌다.
  "사람이란 겉이 단단해 보일수록 왜 그만큼  속은 물러하잖아." "그것은 자네가 은빈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얘기겠지." "그렇게 말하면 뭐 그런 거겠지." 그의 말대로 
나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해. 굳이 우
회하지 않아도 잘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지하 술집에까지 들려 올 리 없건만, 그때  내 귀
에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깊게 쳐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황막한 밤이었다. "우선 자네가 
은빈이에게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냥 어설프게 어
떤 마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마음인지를 초등학생에게 하듯이 쉽고  뚜렷하고 
친절하게 말이야." "그럼 되는가? 왜 그런 마음인지를  뚜렷뚜렷 밝히고 나면 집 공사가 되
는가." "아니, 그러고 나선 기다려야지."  기다려야 한다. "이봐 은빈인  현재 매사가 두려운 
상태야. 또 사랑하는 일에 있어선 항상 저쪽이 먼저인 거잖아." "그걸 자네도  알고 있단 말
인가." "어쩌다 보니 내가 주제넘은 소리까지 하고 말았지만 안타까워서  그래.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속이 깊게 닫혀 있더라. 그게 모두 자네 탓이라는 얘긴 아니지만 나도 마음이 답
답해서 그래." 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동안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무슨 
뜻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가 감옥에 가기 전의 일이지만."  그렇다면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어느 날 은빈이가 나를 찾아와 고백하더군, 자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고 말이야.
  그때 나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지."  그게 정확히 언제의 일인가.  "`87년의 자넨 은빈의 
화실에서 지낸 적이 있어. 6,29선언이 있던  해였으니 나와 함께 총학에서 일하다  여기저기 
쫓겨 다닐 때였지.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감옥으로 가기 얼마 저의 일이야. 화실에서 함께  지
낼 때 은빈이가 자네한테 정을 느꼈던가 봐. 내게 그러더군. 자넨 순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이고 또 그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은빈이가 자네를 배신한 
셈이 되겠군." "아니, 솔직히 그렇게는 생각한 적이 없어. 나중에야  알았지. 은빈이가 왜 자
네를 선택했는지 말이야." "..." "나는 동지로서 그녀에게 많은  걸 요구하고 은빈이는 그 모
든 걸 내게 주었지. 그래 나는, 사랑에 대해서 그녀만큼 순정하지 못했어. 다만 필요한 거라
고 생각했지. 난 그 시절의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지만 내  어리석은 자만과 영웅심만큼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싶어."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전향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사랑에 관한 한은. 왜냐하면 그것만큼은 어떤 시대에도 어떤 경우에도 순정하게 지
켜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건 어떤  이념보다도 그 자체로 높고 깊고 갸륵한  거야. 
그것이 없는 한은 사람 사이에 이룩되는 일이 없지. 순정한 세상 순정한  사람살이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며 그도 한숨을 몰아 쉬었다. "은빈인 사람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나한테 찾
아와 고백한 사실도 절대로 자네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지."  "..." "한 가지만 더 얘기하
면 은빈이가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왔던 건 순전히 도리 때문이었던  거야. 아무튼 자네는 
처음부터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거야. 나도 은빈이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은빈이도 
더 이상 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는데 자네는 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어리석은 사
람." 어리석은 사람, 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내가 감옥으로 찾아
갔을 때 자넨 왜 은빈이에 대한 감정과 미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했지? 은빈이와 나의 관
계를 알고 있었으면 말이야. 그것도 은빈이가 부탁한 사항인가?"
  "...솔직히 외롭고 힘들어서 문득문득 미련이라는 게 생기더군.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았지
만 그래서 자네를 통해 혹시나 하고 은빈이의 마음을 확인해  봤던 거야. 이 일에 대해서는 
기회가 오면 자네와 은빈이한테 사과하려고 했어.  진심이니까 받아 줘." "갈수록 가관이군. 
그러나 사과는 받아들이기로 하지. 하지만 그 대목이 은빈이와 나의 관계에 훗날 어떤 영향
을 미쳤는지 아는지 모르겠군. 더군다나 나는 그제나 이제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 
"내가 자네 탓을 하고 있군, 미안하이." "나도 그렇게 됐네." "그건 그렇고 왜 이제  와서 그
때 은빈이의 부탁을 내게 누설하고 있는  거지?" "더 이상 우리가 어리석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야. 결과적으로 자네와 나는 모두 사랑에 무지한 사내들이었고  한 여자만 그 사이
에서 다치고 쫓겨난 셈이지." 진실은 왜  항상 뒤늦게 찾아오곤 하는 걸까. 모든  것을 잃고 
난뒤에. 다시 시작하기에는 온 마음과 온몸이 지쳐 있을 때.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어쨌는
지 그가 옆에서 쿡쿡 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러나 그마저 없다면 우린 어떻게 되겠나. 
진실 말이야. 다만 처벌만 기다리며 앉아 있어야겠지. 그러니 자네도 이제는 일어나  움직여 
가게. 어쩌면 은빈이는 생의 처벌을 대신  받고 있는 중인지도 몰라.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가지고 말이야." 생의 처벌. 듣기조차 두려운 말이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신부가 생각
나 나는 그에게 그만 들어가 보라고 했다. 오늘은 어쨌든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한 날이고 그
것은 두고두고 거룩한 일이 될 터이어서 시작부터 티를  남겨서는 아니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내돌렸다. 11시. 이미 밤 깊은 시각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해
란이도 알고 있어." 덧없던 고통에서 빠져 나와 새로 생이 시작된 날이지. "아니, 오늘은 여
럿이 함께 다시 시작하는 날이야. 해란이와 나 그리고 자네 그리고 또 멀리 있는 우리 옛사
랑." "우리 옛사랑. 그 말은 그래도 듣기에 비교적 괜찮군." "먼데 있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
이 멀리 있는 건 아니잖아. 자네는 언젠가 내게 매듭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어. 봄에 내려
왔을 땔거야.
  한번 끊어졌다 다시 이어 놓으면  추하다고 그랬던가? 하지만 그  말은 틀렸어. 그렇다면 
오늘 식을 올린 나도 지금  방에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신부도  모두 추하다는 걸 거야." 
매듭. 그래,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아무렇게나 묶어 놓으면 그렇기도  하겠지.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이제 자네도 제법  잘 이어 묶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거야." 그 말은 더 
이상 어리석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철하와  나는 방금 사막에서 돌아
온 사람들처럼 맥주만 꾸역꾸역 비워댔다. 그러는 사이에 금세 자정이 됐고 이제는 그가 방
으로 돌아갈 시각이었다. 웬일로 그는 순순히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 뜬금 없이 옆에 있는 
단란주점인지 노래방으로 한사코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내가 결혼이란 걸 했는데 그래 축가 
하나 안 불러 주고 입을 닦겠단 말이지. 더도 말고 두 곡만 불러." 되레 내가 초조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노래방으로 성큼성큼 앞장서 들어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노래를 고
를 사이도 없이 그가 김민기의 <친구>를  눌러 버렸고 반주가 나오자 비틀비틀 일어나  내 
어깨를 팔을 두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노래는 누가 부르
는 거랄 수도 없이 뒤범벅이 돼<북한강에서>, <아침 이슬>, <잊지 않으리>, <사랑의 기쁨
>, <님과 함께>로 마구 왔다갔다하다  새벽 1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예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니 호출을 받은 소방수처럼 다급히 방으로 뛰어올라 갔다. 
나는 로비 밖으로 나와 상념에 잠긴 채 호텔 정원을  거닐었다. 달빛이 맑은 밤이었고 하늘
엔 별들도 오랜만에 총총했다. 허니문 하우스 쪽으로 나가 보니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
었다. 그만 생각을 그치려 했으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갖은 상념에 휩싸여  호텔 정원을 네 
바퀴 돌고 나서 철하와 송해란이 잠들어  있을 방을 괜히 두리번거리는 척하며 새벽  3시에 
내 방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급기야 내가 아주 어리석은 사
람이었다는 깨달음이 목울대로 아프게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전화  벨 소리를 듣고 잠에
서 깨어나니 그새 커튼 밖이 훤히 밝아 있었다. 십 리 안까지 들여다보일 듯한 바다가 절벽
에서 포말을 토해 내며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철하였다. 10시.
  "웬 늦잠이야. 누가 신랑인지 모르겠구만  이거, 옆에 아직 우렁각시가 누워  있는 모양이
지?" 밤새 안녕했던 듯 첫마디부터가 아연한 농담이었다. "천천히 씻고 내려와, 로비 커피숍
에서 기다릴 테니까." 나는 서둘러 욕실에 들어가 면도를 한 다음 옷을 입고 커피숍으로 내
려갔다. 무얼 하려는지 모르지만 오후까지는 시간을 내달라는 철하의 부탁이었다.  아무려나 
커피숍으로 내려가니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첫날밤을 보낸 송해란과 철하가 신혼  부부 
특유의 어릿한 비린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어젯밤엔 늦게  올려 보내서 원망 많이 하셨
죠?" 신부에게 물으니 제법 수줍어하는 얼굴로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다. "날이 밝아야 돌아
올 줄 알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두 분 사이의 우정을 의심할 만큼 빨리 돌아와 실은  당황했
어요." 그쯤이면 괜찮았다는 말이었다. 철하는 옆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기특한 듯 신부를 바
라보고 있었다. 어찌됐든 허니문 하우스로 옮겨 된장찌개로 아침을  떼우고 나니 정오가 됐
고 신랑 신부와 나는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봉고창에 올라탔다.  왜 하루쯤 더 머물지 그러
냐고 하자 그가 퉁박스럽게 받아넘겼다. "1박 2일이면 신혼  여행은 충분하고 저녁 참엔 급
히 돌아가 어서 살림을 시작해야지."
  해안도로를 일주하는 것으로 신혼 여행을  끝내겠다는 말이었다. 신부도 서운한  빛 없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맞아요.  이런 데 오래있으면 왠지  불안해요. 어젯밤에도 집이 
막 도망가는 꿈을 꿨어요." "집이 도망가요?" "우리  살림할 집 말예요." 당분간은 모슬포에 
있는 철하의 셋집에서 살림을 차릴 거라고 신부는 말했다. 하지만 임시로 관리를 해주고 있
는 남의 가건물에서 살림을 한다는 게 어째 불안스럽게  들렸다.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 어쩌면 곧 자네가  사는 마을로 이사할지도 모르겠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동안 많이 생각했는데 이제 나도 결혼을 했으니 그만 유배를 철하고 서울로 돌아가야겠
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운전대를 바로잡으며 뒤에 탄 승객이 잘 있나를 확인하
려는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변화가 느껴져. 또다시 선거철이고 정치의 계절이잖아. 
뭐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서울로 돌아가면 뭔가 내 할 일쯤 없겠어?" 결연한 말투에 이내 대
꾸를 못하고 나는 앞에서 달려오는 가을 제주의 해안도로만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름다운 길이었다. 하지만 철하의 말대로 언제나 아름다운 길만 달리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눈을 부릅뜨면 어떻게 먹고 살 방도는 생기겠지. 어쨌든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것에는 
둘 다 동의했어. 그 때문에 신혼 여행도 제주도에서 보내기로 한 거야." 그는 서울로 돌아와 
무얼 하겠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않았다. 나또한 굳이  묻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가 있겠지. 이제 그들은 순정한 사랑을 시작했느데 무엇이 두려워 계속 뒤에 남아 있겠
는가. 돌아보면 오랜 유배의 시간이었다. 사람이 한번 무너졌다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토록 기나긴 법인 것이다. 잠깐 사이 나는 김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란 늘 정면으
로 살아가기 힘든 일인데 철하와  그녀는 어쨌거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정면이란 
인생에 자기를 전적으로 던질 줄 아는  자에게만 보이는 것이라. "우리 모두에게 `90년대는 
불길한 시대 같아. 초입부터 정신없이 폭죽만 터뜨리고 있는데 사실은 바닥이 새고 있는 유
람선을 타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위험천만할뿐더러 이렇게  질주해 가다간 급기야 암초에 
부딪히고 말지. 왜들 그렇게 야단법석인지 몰라. 자넨 어떻게 생각해?" "아비 없는 사람들처
럼 살고 있지. 위아래의 연속성이 없는 삶말이야. 못난 아비라도 그 아비한테서 내가 비롯됐
다는 것을 잊고들 사는 것 같아. 이제는 저마다 전후 사방을 밝히고 살 때라고 생각해." "전
후 사방. 그래, 우린 사이키 조명이 번쩍거리는 도가니  안에서 살고 있지. 차라리 캄캄하면 
자기라도 들여다보려고 할 텐데 사방이 너무 요란스러워." "..." "그건 그렇고 자넨 이제부터 
어떡할 셈인가?" 하루 사이에 또 듣는 질문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답할 때가 온 것도 같았
다. "우선 버려 둔 땅으로 돌아가야겠지. 풀이 무성하겠지만 들춰보면 아직 이삭이  남아 있
을 테고 어떤 것들은 웃자리 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어쨌든 사람이란 여러 
곳에 동시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말하자면  태초에 자기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대
지가 있었더란 말이지." "구약성서로군." "내게는 신약이지." 해안도로를 돌아 모슬포에 도착
하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돼 있었다. 그것으로 1박 2일에 걸친 결혼식과 신혼여행이 모두 끝
난 셈이었다. 그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신접살림을 하게 될 막사식 별장에서 나는 송해
란이 끓여 내온 커피를 마시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서울로  가려고?" 서운한 얼
굴로 신랑 신부가 하루쯤 묵었다 갔으면 한다고 내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이란 걸 알았으
나 나는 그러마고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또 갈 데가 있는 것이다. 속내를 모른 채 철하는 슬
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를 따라나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송해란에게 악수를 청하며 나는 
부러 가벼운 말을 건넸다. 그녀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내 손을 마주  쥐었다. "생
각해 보니 해란 씨의 노래를 여태 못 들어 봤습니다." "어제 뒤풀이  자리에서 했는걸요. 창
우 씨 공항에 손님 데려다 주시러 갔을 때요." "아무튼  저는 못 들었으니 다음 번엔 꼭 듣
게 해주십시오. 철하가 연예인과 결혼하게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철하가 옆에서 끼여들었
다. "말 고를 필요 없어. 듣기 쉽게 딴따라라고 해.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그
렇게 송해란과 작별하고 철하와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갔다. 오월에 보았던 흰 소
가 오솔길에 나와 있다가 풀밭으로 슬금슬금 길을 비켰다. "단란주점 일은 계속 시킬거야?" 
"이거 왜 이래. 정말 누굴 딴따라로 아나. 내가 아무리 연예인을 여편네로  맞았기로서니 어
젯밤 아이를 잉태한 산모를 접대부로 내보내겠어?" "그렇지? 그러면 안 되겠지?" 당연 그렇
게 믿고는 있었지만 삶을 대하는 그의 전투성이 가끔 걸렸던 터여서 한번 확인해 본 것뿐이
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이야?"
  마침내 눈치를 채고 그가 물어 왔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에둘러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섬에서 섬으로 가고 있구만." "그런 길도 있나?" 석연찮은 표정으로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살다 보니 그런 길도 있구만. 하지만 가야만 하는 곳이라면 가야 하겠지. 이미 
늦었어. 더 이상 묻지는 말게." 정류장에서 한 십 분을 말없이 서 있다가 나는  버스에 올라
탔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는 내게 부디 길을 잃지 말고 서울까지 무사히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성산 부두에서 막배를 타고 우도로 들어가는 길에 바람이 심했다. 이물에 서서 뒤로 
밀려나는 성산포를 바라보며 나는 숱한  추회에 잠겨 있었다. 내 주위엔  왜 이다지 유배에 
처한 이들이 많은가 하고. 생각할 것도 없이 철하와 은빈과 김혜정이 그렇고 의미가 다를지
는 몰라도 나수연과 서주미도 따지고 보면 그런 상태에 있었다. 배에서 내려 밀항이라도 하
듯 섬 주위를 두리번거린 다음 나는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일전에 주미의 어
머니를 만났을 때 대충의 위치를 전해 들은 터인데다 지나던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그녀의 
외가는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어둠이 깔리는가 싶더니 이내 땅바닥에 내 그림자가 뚜렷하
게 드러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에 그새 달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내 그림자를 밟으며 
그녀가 묵고 있는 집으로 곧장 질러갔다. 나는 이십여 년  전 우도에 왔던 낚시꾼이 그러했
듯 뒤꿈치를 들고 돌담 안으로 들여다보았다. 방문에 불빛이 보였으나 집 안은 적막하고 고
요했다. 섬돌에 신발 두 켤레가 놓여 있는 게 눈에 먼저 들어왔고 정갈하게 빗질이 돼 있는 
마당 한가운데 허리 높이로 담을 쌓은 우물이 보였다. 그러나  갈치가 널려 있는 것은 보이
지 않았다. 막상 마당으로 들어서질 못하고 나는 담 밖에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그녀의 모
습이 나타난 건 뒤편 구릉에서였다. 멀리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져 돌아보니 완만한 능선을 
타고 한 여자가 마을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긴  했으나 먼발치였으므로 그게 
누구라는 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익숙한 걸음새, 몸의 흔들림을 보고 나는 그게  주미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짐승처럼 마을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나는 몸을 비켜 담 모퉁이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대문으로 들어서
고 있을 때 나는 담 모퉁이에 기대 기침소리를 냈다.
  그녀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어둑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
지 못한 채 마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오 분쯤 후였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또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
었을 것이다. 그녀는 키가 더 작아져 있었고 밤바람 때문인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담 모퉁이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
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나서 그녀는 도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십 분이  지
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발길을 돌려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그
녀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거기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혹은  오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것
으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미 어머니와 내 생각이 어떻든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쪽에선 상대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도  때로는 그게 아닌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다. 나는 하염없이 모래밭을 밤 거미처럼 왔다갔다했다. 달은 점점 높
아져 이윽고 백야나 다름없이 밤바다를 밝혀 놓고 있었다.  파도는 검은 남빛으로 부서지며 
성산포로 밀려갔다 우도로 밀려왔다를 쉼 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가 모래밭 끝에 나
타난 것은 9시가 다 돼서였다. 나를 만나기 위해 그녀는 두  시간 동안이나 마음을 다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그녀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거리를 좁혀 걸어
갔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 그러나  한때는 서로 하나라고 믿었던 존재. 
그러한 사람과 나는 썰물이 빠져 나간 틈을 타 마지막으로 모습을 확인하려는 참이었다. 나
와 얼굴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약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그렇게 서로 얼굴을 뚜렷이 확인할 수 없는 거리에 서 있을 때 그녀와 함
께 했던 날들이 천천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거미  걸음으로 그녀가 서 있는 곳으
로 다가갔다.
  무르춤하게 있다 내가 모래 위에  앉자 그녀도 사이를 두고 따라  앉았다. 그녀의 고르지 
못한 숨결이 귓전에 들려 오고 있었다.  말문이 트일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렇듯  더없이 
가까웠던 사람과 타인으로 만날 때 당신은 무얼 느끼는가. 어떻게 헤어져야 남은 슬픔 없이 
머리를 들고 각자 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하늘의 구름이 급기야 눈에서 흐려지고 
있음을 볼 때 정녕 나는 누구이고 또한 그대는 누구인가.  지나간 정념이란 그렇듯 파란 눈
물 속으로 잠깐 사이 떠가는 흰구름 같은 것이리라. 그녀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깜빡 잊
고 있는 터에 축축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울어야 할 것이라면 울어야만  할 터이었다. 그녀는 삼십 분을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그렇듯 하염없이 울고 있을  것이었다. 
삶이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가끔 통곡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때 
옆에는 옛추억이 넋을 잃고 앉아 있다. "한번은 이런 순간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
녀는 떨고 있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왜 내려왔나요. 저를 또 다그치러  왔나요?" 내가 다
그칠까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아직도 회복이 안 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뭘 다그칠게 있단 말인가. 그것은 서로  온전히 마주보고 있을 때나 하는 
일이다. 바람이 꺼끔해지면서 파도 소리도 주춤해 있었다. 산호 모래밭 위에는 두 개의 커다
란 그림자만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물 속에 있다  달밤에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인어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인어들도 사랑을 할까. 
아마도 하겠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을." 그저 뜻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두려워하지 
마. 그럼 이쪽도 두려워지게 마련이지." 이  역시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은  아닌 듯했
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사랑을 되풀이하게 마련인데 그때마다 그게  모두 첫사랑이라지. 
그런데 그게 첫사랑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것은 항상 지나간  사랑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냐
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다시 사랑을 해야 할 텐데 그게 또 첫사랑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전령 삼아 내가 왔다는 거지.
  지나간 날의 한편 그림자가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떨군 채 묵묵히 듣고 있
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과거와 잠깐 만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 그 사람과 마음을 풀
어놓고 못다 했던 얘기를 나누는 거야. 그리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야. 날이 밝는 대로 전령
은 돌아가야 해." "전할 말이 뭔데요?" 겨우 입을 열어 그녀가  물어 왔다. "서로를 다시 아
프게 속이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모두가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 "그걸 
알려 주려고 비행기를 타고 왔나요?" "비행기와 버스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지." "..." "아
까도 말했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나 역시 매순간이 그런 거야." "창
우 씨도 그 동안 그랬나요?" "그래, 그랬지." "..." "모든 사랑이 선택의  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 그걸 바랄 수도 없는 일이지. 그래서 때로 전령이 필요하고 혹은 자신이 그런  사람
이 돼보기도 하는 거야. 사랑이란 더 이상 추상명사가 아니라  사람이 갖고 있는 온갖 감정
을 합한 단수의 보통명사라고 생각해. 그래서 거기엔 그야말로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사랑
의 방식의 존재하지. 가령 당신이 나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를 돌이켜봐. 이를테면 그런 경
우도 포함돼 있다는 말이지." "그건 무서운  얘기해요." 깊게 잠긴 소리로 그녀가 되받았다. 
그녀와 나의 만남엔 타인의 감정이  개입돼 있었다. 그녀도 이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가 창우 씨를 진심으로 좋아한 때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 말
을 하고 있는 게 아니지. 당신과  나 사이에 가면으로 쓰고 숨어 있던  사람들 얘기를 하는 
것이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거기에  당신 잘못은 없다고 생각해." "제  잘못도 있잖아
요." "알고서야 제 인생을 앞에 두고 그런  일을 벌이겠나. 이제 와선 꼭 누구라고도  할 수 
없겠지. 다만 사람의 마음을 줄곧 엄습하는 배신과 복수의 감정이 문제겠지. 사람에겐 또 오
해하는 것과 어리석음이라는 것도 있어. 돌아보면 나 또한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왔어. 그 빚
을 갚으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이 걸릴지도 몰라. 알고 보니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랑
들을 해왔던 거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말이야." "모두가요?" "그렇게 말해도 틀리지 않겠지. 
그야말로 전체 다가 말이야." "전체. 그런 건 저 몰라요." "그 속엔 당신과 나의 경우도 포함
돼 있는 거야."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나서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서로 뜨겁게 용서하고 어서 다음 사랑들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남은 사랑이 지나가기 전에."
  "그렇다고 기억들이 사라지나요? 마음엔 아직 저지른  일들이 남아 있는데요." 그녀는 죽
은 남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쉽게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
을 아프게 용서할 줄 알아야 더불어 타인도 뜨겁게 용서할 수 있는게 아닐까. 이봐, 그런데, 
그게, 첫사랑 말이야." 감정을 참고 있음이 역력하더니 그녀는 다시금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
했다. 그녀가 울고 있는 동안 달은  성산포 쪽으로 비스듬히 옮겨가 있었다. 뒤편  우도에서 
보면 거대한 왕관처럼 보인다는 제주 동쪽 끝 성산포. 나는 지난  5월에 와 있던 성산 호텔
이 보일까 싶어 눈을 돌려 보았으나 검은 왕관에 가려 찾을 수가 없었다. 객실이 서른 개뿐
인 조그만 3층짜리 호텔인 것이다. 거기서 혼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는 그녀가 이곳 우도
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길로 불과 이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이 가까운 
섬에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 앉아 그때 내가 머물던  곳을 아득히 더듬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래밭에서 일어나 악어바위가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산호 모래밭이 
있는 작은 섬에서의 이별. 그리고 날이 밝으면 나는 속히 돌아가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마
지막 인사의 말을 건네고자 앞서 걷고 있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달이 내 옆을 비추며 떠
오고 있었다. "일식이 있던 날 당신은 태어났지. 캄캄하게  해가 죽고 밤이 되자 달이 떴지. 
당신은 달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스물일곱  살의 성숙한 여자가 됐어.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 보름 주기로 달 모양이 변하듯 참으로 많은 일들이 말이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전혀 변하지 않은 자신을 또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달이 매일매일 모양을 바꾸지만 실
은 늘 둥그런 하나의 별이듯이 말이야. 그러니 자신이 아직도 하나의 온전한 존재라고 믿어 
봐." "..." "하루가 무섭게 모두들 변해 가고 있어. 그래서 변하지 않는 온전한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대개 잊고들 살지." "그게 뭔데요?" "사람의 힘으로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진실. 사
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전까지는 완전한 존재라고 하더군. 달처럼 순결한 존재.  그러니
까 아기 말이야.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라는거야. 그런데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서 갑자기 불완전한 존재로 변한다는 거지. 그때부터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세계에 속하기 위해 그야말로 긴긴 시간을 공포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야해. 그건 어른
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
려 하고 급기야 싸움을 일으켜 서로 죽이기도 하지. 불안하기 때문에 말이야. 단 하나, 사랑
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지.  그것조차 종종 칼부림이 되고 속임
수가 되곤 한단 말이야." "그래서요?" 그녀가 옆으로 다가와 내게로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저마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순결한 존재를 다시 발견해내야만  해. 하나인 전체 속에서 말
이야. 그것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어. 우리들이 나눴던 사랑처럼 세계도 이
제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고통의 끝에 와 있는 것 같아." "고통."
  "그런데 또 놀랍게도 사람이란 고통을 통해 순결해지는  유일한 존재야. 그래서 필요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해. 때로 손을 뻗어 타인에게 휴식을 청하기도 하면서 말이야. 
사람이란 어쨌든 포도 넝쿨처럼 어우러져 살아야 해." "..."  "당신도 이제는 돌아올 때가 됐
어. 유배를 갔던 많은 이들이 지금 다들 돌아오고 있는 중이야. 내 주위의 얘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단 말이야. 돌아와서 이제는 저마다 하얀 자전거를 타고 저 영원하고 순결한 달
의 지평선을 한바퀴씩 빙 돌아보는 거야. 그러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두고 아하, 그게 
그런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야." "하얀 자전거요?" "가장 순결한 존재가 타고 다니는 
자가용. 번호판은 물론 0번이지." "0번" "완전하고 무한한 숫자. 절대 끝나지 않는 영원히 맞
물려 있는 선. 저 모든 둥근 것들. 달과 해 그리고 하늘의 숱한 별들. 또한 순결을 회복했을 
찰나의 너와 나의 모습." "언제 그런 생각들을 했나요?" "혼자서는 못하지. 구원이 찾아와서 
알려 주고 갔지. 그래, 세상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몰라도 결코 변할 수 없는 커다
란 진실이 있어. 우리가 서로 구원하고  구원받는 존재들이라는 거야." 그제야 그녀는  나를 
만난 두려움을 잊은 듯했다. 그래,  더 이상 두려워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저한테도 구원이 
오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그것이 내게도  구원이 되지." 그녀와 나는 발길을  돌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도 달은 길을 밝히며 그녀와 나의 뒤를 좇고 있었다. 낮은 구릉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발걸음을 멈췄다.  왜? 하는 얼굴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엔 실고추빛으로 핏발이 도져 있었다. "지난  일들이 과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나요?" 나는 그녀가  던진 물음표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무효가  되지는 않지." "그렇다면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었군요." 
울먹이는 소리였다. 나는 자신에게 하듯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거야. 어쩐지 그 일이 내게 하필 필요했던 일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걸  받아들여야
만 더디더라도 새로 나겠지. 
  부디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그러도록 할게요." "그래." "이제 창우 씨와 저는 못 
보게 되는 건가요?" 그 질문은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가끔 
생각이 날 테지. 그때마다 그게 서로 만나는 거겠지." "그런  건가요?" "한번 만났던 사람은 
사실 완전히 헤어져지지 않는 거야.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지. 그럴 때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내게도 한순간 회한은 일었
다. 그러나 어느 한쪽은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이리라. 걸음을 서둘러 집 가까이로  왔을 
때 그녀가 민박집을 하나 잡아 뒀다며 손가락으로 슬레이트  지붕 하나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손을 잡으면  그 온기 때문에 며칠 또  괴로울 거예요. 그냥 가세요." 
거기서는 그녀가 옳은 듯했다. 나는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  놓으며 잘 가라고 눈으로 말했
다. 그녀는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마침내 발길을 돌려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
다. 썰물에 떠내려가는 한 점 섬처럼. 우도에서의 밤잠은  괴로운 것이었다. 끝간데 없는 어
둠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는 사나운 꿈에 시달리다 깨어나면 먼데서 파도 소리만 무섭게 쳐
들어오고 무섭게 쳐들어오고 막상 가늠할 수 없는 지척에 눈빛이 파란 짐승들이 잔뜩 몰려
와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용서하라, 용서하라고 수없이 되뇌고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새벽 몇 시인가도 모르고 나는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
갔다. 일찌감치 선착장으로 나가 첫 배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어제는 맑았던 밤인데 밖에 안
개가 몰려와 있었다. 얼마나 지독한 안개인지 이슬비가 듣듯 온몸이 금세 젖어 버리며 쿡쿡 
기침이 나왔다. 길을 더듬더듬 짚어 내려가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녀가 잠들어 있
는 집은 눈에 잡혀 들지 않았다. 하늘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
고 뿌연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무작정 파도 소리를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모래
밭에 앉아 얼마를 떨었던가.
  아마 나는 뜬눈으로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긴 시간을 그곳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추위  속에서 다만 사람이 그립다, 라는 느낌만  집요하게 
가슴을 잡아 뜯고 있었다. 배가 온 것은 날이 밝고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을 때였다. 어떻
게든 오늘 이 섬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다 나는 뛰듯이 뱃전에 올라탔다. 
또다시 나는 섬에서 섬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중에는 반드시 뭍으로 돌아가 그리운 
사람을 하나 만났으면 한다는 간절한 생각이 몰려왔다. 한데 그리운 이 내 누구? 버스에 터
덜터덜 실려 제주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였다. 서울로 가는 탑승권을 받아 쥐고 스
낵코너에서 커피와 토스트에 대충 아침을 때우고 화장실까지 다녀왔는데도 보딩 시간이  이
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공중 전화 부스로 가서 철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장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은 것은 송해란이었다. "그인 아침 일찍 출근했는데
요." 그녀는 불안한 음성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 왔다. 제주 공항이라고  알려 줬으
나 그녀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구요, 왜 있잖아요,  어디냐구요." "..." "죄
송해요, 워낙 말솜씨가 서툴러서요. 근데 무슨  뜻인진 아시죠? 도련님." 그녀가 도련님이라
고 한 건 무언가 급해서 엉겁결에 튀어나온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정신이 돌
아왔다. "그래요, 이제야 여기가  어딘지 알겠습니다. 제주공항이군요."  "...그렇죠? 거기 맞
죠?" 송해란과 나는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까지 통화했다. 나는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손에 
쥐고 있는 송수화기를 이물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창우 씨, 하고 수화기  속에서 
나를 불렀다. "괜찮은 거죠?" 그렇다고  나는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녀는 한숨을  몰아 쉬고 
나더니 제 목소리를 되찾고 재차 물어 왔다.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남이 아니라고 한 말 기
억나세요?" "기억납니다. 엊그제 파라다이스 호텔 허니문  하우스에서 해란 씨가 저한테 한 
말이죠. 그때가 아마 오후 7시쯤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후후,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건 없구요. 아무튼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이제 저한테도 말해  줄 수 있는거 아녜요?  말씀해 보세요." "형수님께 말입니까?" 
"그렇게 불러도 좋구요. 필요하면 그이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그런 말까지야 있겠습니까? 
다만 섬을 탈출하다 보면 혹 육지로 돌아가지 못할까 초조해질  때가 있는 거겠죠. 아마 그
런 증상일 겁니다." 무얼 짐작하고 있는지 그녀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을 탑승권
을 들고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해요. 게다가 안개도 이미 걷혔는데요." 철하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그녀는 뭔가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창우  씨 
보내고 나서 그이 참 많이 걱정했어요. 그인 창우 씨를 사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뜬금
없이 사랑은 무슨 사랑. "끝까지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래요. 창우 씨는 바로 그런 사람이잖
아요. 그게 단 한 사람뿐이더라도 세상에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한
테는 또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손님들이 불현 듯 찾아오기도 하잖아요." 손님. "저녁에 그
이 들어오면 뭐라고 전해요?" "공항까지는 길을 잃고 무사히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알 겁니다."   "그럴게요. 그리고 서울까지 부디 무사히 돌아가길 빌어요. 저희도 곧 
뒤따라 올라갈게요."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그녀가 아침,  하며 한마디를 보탰다. "창우 씨한
테도 곧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그때 우리 넷이 모여서 함께 영화 구경도 가고 삼겹살
에 소주도 먹고 또 노래도 불러요."  "노래?" "그래요, 전직 가수들은  아는 이들 앞에서 절
대 노래 같은 거 안 하지만 창우 씨 한테는 기꺼이 불러 드릴게요.
  원하신다면 평생 말예요." "평생?" "그래요, 우리 손잡고 예쁘게 오래오래 살아요." 손잡고 
예쁘게 오래오래. 이래서 세상엔 신부 같은 여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 마음을  순식간에 
부드럽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녀에게 인사말을  했다. "부탁
이 하나 있는데 오늘 저와 통화한 사실을 부군께 비밀로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주춤, 하더
니 그녀가 왜요? 미심쩍은 소리를 냈다. "해란 씨하고 저  사이에 비밀이 하나쯤 있어도 된
다는 생각이 방금 막 들었습니다." 웃고 나서 그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그이한테 
잘 도착했다고 꼭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는  아침에 우도에서 배를 탈때처럼 서둘러 
검색대를 통과해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자 날이 완전히 맑아
져 있었다. 비행기에 앉아 10월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몇  번이고 안도의 긴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이로써 나는 섬에서  섬으로 왔다갔다하는 이틀 사이의 긴  여행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집에 도착해 나는 목욕탕에 다녀와 저녁때까지 긴긴 잠을 잤다. 그리고 오후  7시
에 일어나 방송국 지인들과 간단한 통화를 저녁을 먹고 비디오테이프로 영화 <순수의 시대
>를 봤다. 그러고 나니 자정이었다. 망설이다가 나는  자정이 지난 시각에 주미의 어머니에
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우도에  다녀왔다고 말하고 주미를 만난 일이  나로서도 좋은 일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
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울로 돌아오리라는  말도 전해 주었다. 아마도 곧 돌아올  것이었
다. 그녀가 내 소식을 묻길래 나는 그저 심상한 대답으로 대신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음악
을 듣고 영화도 보고 또 전화까지 드렸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하루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인생을 사시라고 그녀는 내게 간곡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싶다고 하며 나는 전화를 끊고 
캔맥주를 세 개 비우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들자마자  어쩐 일인지 또 잠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20. 가까운 곳
  10월이 다 가는데도 은빈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를 못하고 10월
의 마지막 날에 피렌체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자동 응답기가 받았다. 이탈리아 말과 한국
어로 녹음된 메시지에다 그녀는 여행 중이라고만 짧게 알려 놓고 있었다. 어디로 여행을 갔
는지 또 언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여행. 미심쩍은 말이었다. 그녀
는 유독 움직이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 즈음 방송국에서  기획사를 통해 주말 연속극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으나 나는 발작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렇다, 틀림없이 발작적이었다. 
전화를 걸어 온 담당 매니저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고 사이를 두었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나에 대한 매니저로 일을 포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둔 일이었고 저쪽에서도 채산성이 없는 일을 계속할 수는 없을 터
이었다. 나는 남은 배당금과 관련된  서류처리를 그에게 부탁했고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꾸해 왔다. 재고해 보란 등의 아무런 여지도 없었다. 그것은 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
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하릴없이  신촌의 <오래된 정거장>과 세종문화회
관과 일산 호수공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장미원의 꽃들과 호수의 연꽃들은 이미 끝이  다 타버려 다음해를 준비하느라 제  속으로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철하와 송해란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누군가
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는데도 철하에게서는 웬일인지 연락이 오지 않았
다. 자리가 잡히면 소식이 오려니하고 나 또한 별다른 연락은 하지 않았다. 달력을 보니  그
새 11월 중순이었다. 철하의 상경 소식을 들은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담당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세무 관련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충무로에 나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는데 
때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하철 입구에서 파란 비닐 우산을 사서 쓰고 기획사
가 있는 동국대학교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애완견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는 거리는 
보도 블록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질척거리고 있었고 흙탕물이 튀어 바지가  더러워졌
다. 어쨌든 육 년이나 해온 텔레비전 일을 그만두는 날이었으므로 기분은 더없이 묘하고 착
잡했다. 미련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앞이 막막한 때문이었다. 그때 뒷전에서 빵빵!하고 승
용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와 멈춰섰다. 돌아보니 작동 중인 윈도 브러시 안에 웬 여자가 하
나 앉아있었다. 처음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암만해도 아니겠지 싶어  나는 
몸을 돌려 우산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뜯겨 나간 보도 블록을 피해 걷고 있는
데 차가 따라오더니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아, 반딧불.  지난 여름 무주 리조트에서 만났
던 여자였다.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치게 되다니. 서울 바닥이 의외로 좁다고는 하지만 참
으로 뜻밖이었다. 그녀는 몸을 숙이고 차창 밖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망가진 보도 블록 사이로 걸어가는 헐렁한 비닐 우산의 남자. 한눈에 딱 알아봤습니다." 나
는 반가운 낯으로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비오는 날의  선글라스는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싱글거리며 벌컥 차 문을  열고 나더러 타라고 했다. "이런  날이 더 눈부신 사람도 
있는 거예요." 약속이 있다는 말을 못하고 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안
에서 나를 살피며 이랬다. "타지 않으면 앞으론 기회가 없을 텐데요. 언제 또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겠어요. 안 그래요?" 나는 우산을 접고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녀는  내 바짓가
랑이에 튄 흙탕물을 잠깐 흘겨보았다. "그런 후줄근한 모습으로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이죠?"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는 동국대 앞에서 차를 유턴하더니 매일 경제신문사거리를  빠르게 
지나 평화방송 쪽으로 우회전해 중앙극장 옆의 주차장에다 차를  집어 넣었다. 예정된 코스
를 밟아 가듯 막힘이 없었다. 아연한 심정으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도  사실은 약속
이 있어 가던 길이었어요. 남창우 씨처럼 별로 달갑잖은 약속이죠.
  아무 연락 없이 하루나 이틀쯤  늦어져도 상관없는 약속 말예요.  그쪽은 어때요?" "글쎄
요." "이런 날에 하필이면 건조하고 지루한 얘기를 나누러 가고 싶진 않았는데 마침 잘됐군
요. 그렇다고 상대한테 손해나 피해를 끼칠일도 물론 아니구요." 그렇다면 나도 그런 것이었
다. 내일이나 모레쯤 가도 상관없을 뿐더러 상대에게 손해가 되는 일도 아니었다. 나는 그녀
의 핸드폰을 빌려 기획사의 매니저와 간단하게  통화를 하고 그녀에게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물었다. "그건 저도 무르겠는데요. 일단 우산을 쓰고 명동 거리를 걷다보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르지 않을까요?"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학생 때나 하는 일이지만 미리 정해 놓지 말
고 어떤 일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 쓰며 그녀가 말
했다. "어쩐지 유쾌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원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와 함께 명동성당 쪽으
로 올라갔다. 그녀는 검은 반코트에 청바지와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무주에서보았을 때와는 
달리 몇 살이나 젊어 보였다. 나이가 몇이라고 했더라? 언덕바지에  있는 사진관 옆을 지나
며 그녀가 내 우산을 툭건드렸다. "성당에 들어갔다 갈까요?" 성당.  "왜요? 저는 지나는 길
에 가끔 들르곤 하는데요." 카톨릭 신자냐고 묻자 그녀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
지만 그런 곳에 들어가 서성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깨끗한 마당을 가진 큰 집들 말
예요." 그렇지. 어디든 신이  주재하고 있는 곳에 가면  한결같이 마당들이 깨끗하지. "그런 
마당에 들어가 있으면 금방 마음이  정갈해져요. 남창우 씨는 그런  경험 없어요?" "여기가 
그런 데 아닙니까."
  성모 마리아상 앞에 놓인 꽃다발들이  비를 맞고 있었다. 거기서 그녀와  나는 각자 파란 
우산과 흰 우산을 받쳐들고 서 있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죄 얘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한 줄로  줄여 답했다. "지난달부터 손님을 기다
리고 있는데 웬일인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우산을 뒤로 조금 비껴 들고 내 얼굴을 
살폈다. "그럼 이쪽에서 가면 되잖아요." "어디에 있는지 오고 있는 중이겠죠." 이쪽으로  오
고 있다? "글쎄, 그런 생각은 미처 못해 봤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다니요. 아까는 분
명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더니 얼굴을 감추고  그녀는 의미심장하
게 웃었다. 수녀 둘이 그녀와 훔쳐보며 기도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요즘도  옷을 만드
시나요?" "옷이요? 네, 그럼요." 그녀는 한 달에 열 벌쯤 옷을 만들고 있었다. 직원 둘이 더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를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옷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느질 솜씨만큼은 한국 사람이 최고 수준이라는  것말고는 옷에 관해서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쨌든 남들이 입을 옷을 만드는 직업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
을 해야 할 것인가를 나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3시예요. 괜찮다면 어디 가서 점심 할까요? 
저 아직 식사 전이거든요." 나도 점심을 거른 참이어서  나는 그녀와 명동성당을 빠져 나왔
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명동 거리는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어  마치 우산 쇼를 보러 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산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군. 중앙우체국 뒷골목
에 있는 <명동칼국수>집에서 그녀와 나는 별말도 없이  칼국수를 먹었다. 젓가락을 내려놓
고 나서 그녀는 희뿌연 유리창 밖을 기웃거리며  어디 또 갈 데 없을까요? 하는 말을  던져 
왔다. 글쎄, 갑자기 갈 데가 어디 있겠는가.
  전에는 명동에 나오면 <필하모닉>이라는 음악 감상실을 자주 다녔지만 지금은 아마 없어
졌을 것이다. 나는  <명동칼국수>집에서 가까운 <부루의  뜨락>이라는 음반집을 오랜만에 
찾았다. 한때는 고전음악을 듣는다고 자주 들르던 집이었다. 그곳에 들른 것은 여름에  무주
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내게 들려준 베토벤과 바흐가  생각나서였다. 에드빈 피셔가 연주한 
바흐의 명반을 구한 곳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비좁은 계단을 통해 LP만 모아 놓은 3층으로 
올라가서 나는 그녀에게 리히터가 키릴 콘드라신과 함께 1968년에 모스크바 스테이트  심포
니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1번>을 사주었다. 학교  때 피아노를 한 사람이
라니 어지간한 레이블은 다 갖고 있을 터였다.  물론 리히터도 있을 터이었다. "아녜요, CD
밖엔 없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여기 와서 이런 명반을 구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헤르치의 연주보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듣는 편
이군요." "차이코프스키 피협 1번은 리히터와 아르페르치밖에 모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
면 운이 좋은 편이군요. 알짜만 골라서 들은  셈이니까요. 거짓말이라는 건 알지만요." 푸르
트벵글러의 대형 사진이 붙어 있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와 그녀와 나는 우산을 비껴 쓰고 광
교 쪽으로 내려갔다. "음악이든 뭐든 다  한때인 모양입니다. 무엇에 집착해서 한번  커다란 
정념의 덩어리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빈 곳이 좀처럼  다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건 사람
에 관한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이해의  폭은 늘어나도 정념은 온전히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글쎄요, 거기서부터 인생이 다시 보이는 거긴 하겠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비에  젖은 제 
운동화만 내려다보면 걷기만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찌감치  거리의 네온사인 켜지기 시작하
고 먼데서 일긋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꿈처럼  어른거렸다. "거리가 비에 부서져 
도시라솔파미레도로 내려앉고 있군요. 그런데 저런 풍경이 어째 지금은 착색 판화처럼 예뻐 
보이는군요. 옆에 누가 있기 때문일까요?" 대답이 없자  그녀가 제풀에 희미한 소리로 웃었
다. "차가운 맥주가 먹고 싶군요. 어디 그럴 만한 델 알고  있나요?" 리히터와 차이코프스키
와 맥주. 그리고 뒤에서 느닷없이 경보음을 울리며 찾아온 여름날의 손님. 그러나 광교에 아
는 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맥주 맛이야 병에 들어 있으니 어디나 다 같을 테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데라면 좋을 터
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중앙극장 옆에 주차해 놓은 차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튼 술 얘기
가 나왔으므로 그녀와 나는 신호등을 건너 종로서적 뒤에  있는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
에로>라는 2층 카페로 올라갔다. 비에 젖은 목조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갈 때 그녀가 내 손을 슬쩍 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그녀의 
얼굴이 무주에서 만났을 때처럼 마흔 가까운 여자로 변해 있었다. 화장으로 감춘 눈가의 주
름살과 담배로 약해진 잇몸과 윤기를 잃은 머리칼과 탄력 없는 피부가 한눈에 빨려 들어왔
다. 맥주컵을 잡은 손에도 엷은 주름살이 드러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그처럼 방심하
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빛이 빠져 나간 모습으로  맥주만 홀짝거리고 있다가 무주에서의 
일을 들춰냈다. "그때 일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럼 남창우 씨와 상관없이 제가 조금 힘
들어지곤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음인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카페엔 사람이 북적거렸고 
공기도 후텁했고 맥주 맛도 미지근했다. "가끔 남창우 씨를  만나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
니다. 위안을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창우 씨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동질감이란 게 느껴
집니다." "..." "어때요, 저와 생각이 비슷하다면 비나 눈이 내리는 날 차를 타고 함께 여행을 
떠나면요? 그래서 바닷가나 산사 아래서 하루치의 인생을 나누는 일 말예요. 부끄러운 얘기
지만 저에겐 그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남자에게 안도감을 줄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고 있다는 말이죠.
  눈치챘겠지만 유혹하고 있는 거예요." 유혹. 기다리는 손님이 없으면 받아들이고  싶은 유
혹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곧 안도감이  사라진다 해도 받아들이고 싶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몸은 늙고 마음만 남게 마련이다. 나눠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안도감이란 것도 거기서 비롯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성냥불을 담배에 붙이
고는 양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엷은  긴장의 빛이 감돌고 있었
다. 어쩐지 스스로 괴롭고 아픈 모습이었다.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그녀는 재떨이에  꼭꼭 
눌러 껐다. "저는 손님이 될 수 없는 사람인가 보군요." "반가운 손님입니다." 그런가요? 하
고 그녀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매달고는 다시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갑갑한 마음
이 되어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유리창으로 눈을  돌렸다.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
요. 서로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회의 순간인지도 모르잖아요." 스피커에서는 피터 폴 앤 메리
의 <500마일>이란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여름 무주와 늦가을 비가 내리는 서울
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밤길을 따라 나는 여름 무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그곳은 실감이 나지  않는 거리로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티롤  호텔. 
반딧불. 적상산. 그러나 서울이라는 곳은 휴양지처럼 언제나 지우고 떠날 수 있는  임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이다.  사소하게 주고받는 모든 말과  행위가 서로에게 
덫이 되고 그물이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지금 내게 하고 있는 말은 일종의 법을 요
구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마음에도 법이 있고 감옥이 있다. 그녀는 담배 연기  속에
서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을 것
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순 그녀의 속눈썹이 하프  소리처럼 
떨리더니 얼굴로 잔잔히 피가 몰려 올라왔다.
  그러더니 왜요?라고 눈으로 물어 왔다. "제게는 곧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의 빚
이 큰 사람이어서 어디에 가 있어도 아마 생각이 날 겁니다. 당신과 둘이 채송화가 피어 있
는 돌담 옆에 서서 비가 내리고 있는 먼 바다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생각날 
사람입니다." 그녀는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이마의 머리칼을 길게 쓸어 올렸다. "그
렇군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언뜻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삼 분 정도가 지나자 아까 
충무로에서 만났을 때의 탄력을 회복했다.  역시 감정의 군더더기가 없고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었다. 사람에겐 저마다 스타일이 있게 마련인데 어느 때나 그걸 잃지 않는다는 건 생
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밖은 어둠이 내려 비도 먹물빛으로 변해 있었다. 검은  비가 
내리는 늦가을 밤. 창문 옆에 놓인 보라색 양란이 혼자 외롭게 밤을 지키고 있었다. "어딘가 
커다란 응덩이가 있는데 거기 악어 한 마리가 살아요. 눈만  내놓고 수면에 가만히 떠 있어
요. 악어는 무얼 보고 있을까요?" 느닷없이 웬 악어인가. "라코스떼. 남창우 씨 가슴에 박혀 
있는 게 악어 맞죠?" 내가 입고 있는  남방 셔츠의 브랜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나  원참. 
어쨌든 대답을 해야겠기에 나는 커다란 웅덩이부터 떠올렸다. "풀잎 사이에 숨어 있는 황소
개구리와 가마우지. 그리고 가마우지의 옆구리에 물고기 두 마리가 떠 있군요. 하지만  다들 
몸을 사리고 잠들어 있으니 악어도 가만히 있어야겠죠." 그녀는 후후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
다. 어깨에서 머리칼이 아름답게 따라 흔들렸다. 8시였다. 그녀와  나는 마시다 만 맥주잔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까지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갈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군요." 종
로에서 명동 중앙극장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언제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온 것인가. "악어가 
거기까지 바래다 줘도 괜찮겠는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한결 든든할  거예요." 그녀가 우산
을 고쳐 잡으며 내 팔꿈치를 괜히 툭  건드려 왔다. 오늘 두 번째였다. "제 유혹을  견뎌 낸 
남자는 남창우 씨가 처음인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죠." 농
담조로 하는 말이었다. "어려운 시험을 견뎌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저를 시
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나는 악어의 소리를 흉내내 그렇게 말했다. "그 문어체의 화법도 
자꾸 들으니 딱딱하지만은 않군요." 을지로 지하도를 건너 명동 길로 접어들었다. 말없이 우
산 속을 걷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녀가 몇 년 전에 남편과 아이 둘을 한꺼번에 잃은 여자라
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자 혼자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한번 인생을 치러 본 사람
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겠지.
  세상을 살아가려면 사람은 항상 안과 밖의 경계를 잘 조절해야 한다. 남자인 경우도 그게 
안 되는 때가 종종 있다. 사람은 누구나 반이어서 나머지 반을 찾게 마련이다. 그걸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남자와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다. 아무튼 혼자 살려면 남자와 여자라는 일인이
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된다고 해서 문을 닫아 걸면 모양새도 안 좋을뿐더러 
되레 그게 또 약점이 된다. 명동성당 앞을 지나며 그녀는 발을 멈추고 십자가를 올려다보았
다. 저 어둠 속에서 아직도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비 내리는  밤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주차장까지 와서 그녀는 내게 더 내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선선히 그러겠다고 
했다. 운전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픽 웃으며  우산을 접어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
에 올라탔다. "여름에 무주에서도 그렇게 물었죠."  그랬던가. 옆자리에 올라타 안전 벨트를 
어깨에 두르며 나는 그녀와 걸어 내려온 명동 길을 내다보았다. 돌이킬 수도 다시 돌아갈수
도 없는 저 아득한 밤비의 거리를. 그녀는 고요히 앉아 카스테레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이제 저는 곧 마흔이 되겠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겠죠. 요즘 들어 죽
음이란 걸 생각해 봐요. 그건 곧 삶을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
은 제가 죽어도 얼마간 더 세상에 남겠죠. 저는 저의 부재보다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아파
요."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과 아이의 부재 뒤에 얼마간 더  이 세
상에 남겨져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그게 곧 자신의 얘기인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부재 뒤에 남겨진 존재들인 것이다. "남창우 씨는 여름에 만났을 때보다 뭔가 좀 선
명해진 거 같아요. 그땐 꼭  고아원에서 쫓겨난 아이 같았는데 이제는  학교 운동장을 비로 
쓸어 놓고 입학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막 부임한 선생님의 모습이에요." 누굴 기다리
고 있으면 사람이 선명해 보이는가.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운동장의 주인이겠죠. 손님 
말예요." 대놓고 묻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그게 누군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대꾸를 
않고 그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왜 그렇게 공허하게 보이나요?  마당을 다 쓸어 놓고 나
서도 말예요." "..." "남창우 씨는 모습이 어두워요. 운동장이 어두컴컴하니까 손님이 안 들어
오고 있는 거예요. 상상해봐요. 비가 내리고 있는 밤의 운동장을 말예요." 그런가. 언젠가 나
수연과 함께 나는 비 내리는 운동장의 스탠드에 앉아 파리솔을 쓰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
지. 한데 그게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차는 평창동 쪽으로  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물바
다로 변해 있었다. 한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며 그녀가 메마른 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어
쩌면 가까운 곳에 와 있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저 우멍하니 앉아 있었다.  혼자말이려니 하
고 흘려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 손님이란 사람 말예요." 그제야 나는  어둑한 옆을 돌아보
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조등에 드러난 빗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
까?" "남창우 씨도 실은 알고 있어요. 다만 아무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거
예요.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면서 분명히 그렇게 느꼈어요. 물론 제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남창우 씨 자신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무의식 속에서 아련히  감
지되는 게 없는지 한번 생각해 봐요. 좀더 주위를 환하게 밝혀 놓고 말예요. 손님은  그렇게 
맞아야 하는 거예요." "..." "귀한 분인가 봐요. 
  다른 사람은 발도 들여놓을 수가 없으니 말예요. 하긴 인생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쯤 있어
야겠죠." 차가 평창동에 있는 그녀의 의상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나는 언젠가 나수연
이 내게 했던 말을 번쩍 기억해 냈다. 누군가 곧 먼데서 당신을 찾아올 거예요. 그때 그 사
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당신은 또  오랜 세월 방화하게 될 거예요. 아무  소식 없이 슬쩍 
왔다가 당신이 찾지 못하면 다시 돌아갈 그런 사람이에요. 그녀가 안전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넋을 잃고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그런 모습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있었다. 밖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그녀는  석연찮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시겠어요?"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맥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녀가 네?하고 되물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묻는 말로 대답했다. "커피 한 잔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더니 괜찮
겠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불이 꺼져 있는 의상실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
이명숙 옷가게>. 지중해풍의 하얀 건물에 안이 삼십  평쯤 돼보이는 작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이명숙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오 일을 여기서 하루 종일 일한다고 했다. 집
은 차로 십여분 거리에 따로  있었다. 그녀는 통유리창에 면한 응접실의  불을 켜고 수건을 
가져 와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 낸 다음 커피를 두 잔  가지고 소파에 와 앉았다. 앞에
서 비에 젖은 여자의 냄새가 났다. "그냥 여길 한번 함께 오고 싶었어요." 길을 가다 무심코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의상시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방송국의 소품실이나 분장실과
는 달리 여기엔 묘한 질서와 생동감이 있었다. 마치 왕족의  무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네킹들이 순장을 당해 서서  죽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베르사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불쑥 연락을 드릴까도 생각해 봤어요. 만약에 그랬다면 뭔가 
지금보다 훨씬 복잡해졌겠죠?"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힘든 길을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는 커피잔을 
들고 유리창에 홀뿌리고 있는 밤비를 마네킹 사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네킹과 밤비.  그리
고 방금 시내에서 비를 맞고 돌아온 여름 무주의 나그네들. 그런 밤이었다. "그게 누군지 물
어 봐도 되겠어요?" 그녀는 기어코  손님의 이름을 묻고 있었다. 나는  사이를 두고 천천히 
커피를 마신 다음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그게 누구인가를  말해 주었다. 이혼한 아내라
는 말에 그녀는 문득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망인의  얼굴로 다시금 부재 뒤에 남겨
진 자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가끔  아무나 붙잡고, 저 어떻게 하죠?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아마 실제로 그러기도 했을 거예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글쎄, 어떻게 
하지? 라고 반문하죠. 아무도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기껏해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경솔하게 굴다가는 자칫 엉뚱한 꼴을 보게 될 테니까, 
이러죠.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몇 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갔
어요. 그렇다면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걸까요?" "..."
  "이런 밤에 여기 앉아 있으면 바다에 떠 있는 여객선이  생각나요. 또 거기 타고 있는 사
람들의 모습들이 보여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혹은 졸고 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말예요. 아마도 그게 사는 걸거예요. 인생에는 파트너가  필
요한 법이고 제게도 사실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 "그게 꼭 남자라는 얘기는 아녜요. 하
지만 그게 마네킹이거나 벽에 걸려 있는 옷이라고 생각해 봐요.  공허하지 않아요? 낮에 충
무로에 남창우 씨의 뒷모습을 봤을 때 화닥 반가웠던 것도  다 그래서였을 거예요. 이젠 이
해하시겠죠?" "그래요." 그녀는 빈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얘기를 계속했다.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저는 또 뭔가를 기다리며 살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그 기다림 안에도 움직임이 있
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사람들의 말은 옳지 않았어요. 그 말이  무관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무관심. 그랬을 것이다. 사람이란 의외로 타인
에게 아주 무관심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파트너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계시
겠지만 사람은 뜻밖에도 약한 짐승이고  그래서 건빵한 조각에 한 순간  옷을 벗기도 하죠.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그걸 내미는 손 때문에 말예요. 주제넘은 소리지만 그분을 다시 만나
게 되면 그런 것도 다 이해하고  받아 주시길 바라요. 다른 뜻은 없고  그저 같은 여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도 진심을 예시했다.
  "여기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 유심히 보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렇게 되면 오히려 사람들이 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테니까요. 이건 제 경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가만가만 웃고 나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우연
이라도 해도 사람의 만남엔 확실히  설명하기 힘든 비의가 숨어 있는가  봐요. 오늘 남창우 
씨를 만나서 저를 한번 더 깨닫게 됐어요." 나도 오늘 그녀를 만나 비의의 전언을 수신했다. 
사람은 이렇듯 암암리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말에
도 한껏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그다지 나쁜 것만도 아닐 테
죠.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깨우치게 되잖아요. 아주 미세한 결로  이루어진 
인생의 사소한 것들 말예요. 이를테면 옷감 속에 감춰진 엷은  무늬나 잠시 한눈을 팔다 다
시 시작된 바느질 자국 따위,  그걸 육체는 시간을 통해 기억하고  또 스스로에게 남기잖아
요."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얼굴엔 생을 여러 번 숙고해서 받아들인 수조함이  배어 있
었다. 삶이란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통해 길들여 가는 것이리라. "자기 나이를 가장 좋은 나
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제대로  사는 방법이겠죠." 나는 흐려진  눈으로 마네킹과 옷들과 
유리창의 빗물과 앞에 앉아있는 그녀를 차례로 눈여겨보며 맥주를 마시다 자정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상실을 나오기 전 나는 그녀와 이런 말잇기식의 대화를 나눴다.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지금이 바로 생의 한순간인 것을 어제는 몰랐습니다." "닥쳐올  날엔 또 무슨 쓸쓸한 
황홀." "그럼 빛이 그리웠던 나그네가 밤길을 더듬어 오겠지요."  "숱한 새벽과 여명의 하늘 
끝에 걸린 어린 날의 꿈들을 그가 가져  왔으면 좋겠습니다."
  "새벽 창밖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으면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
다." 비는 서서히 그쳐 가고 있었다. 옷가게를 나와 거리로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그리고 
불이 꺼져 있었다. 은빈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갔다.  그녀는 
이혼을 하고 나서 나와 살았던 아파트를 나와도 안면이 있는 그녀의 친구에겐 전세로 맡기
고 이탈리아로 떠났었다. 나는 수렁거리는  마음으로 성산동에 있는 아파트로  전화를 넣어 
보았다. 11월 19일 수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국이 어수선한 때였다. 
전화는 자동 응답기가 받았다. 세입자는 인사동에 있는  <덕원화랑>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
는 중이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화랑으로 연락을 해달라고 하며 그녀는 전화 번호를 알려 
놓고 있었다. 나는 인사동에 있는 화랑들이 매주 수요일에  전시회가 시작된다는 걸 기억해 
냈다.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할까 생각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인사동으로 나갔다. 오
후 7시면 화랑이 문을 닫을 시각이고 그렇게 되면 은빈의 친구도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
덕원화랑>이 있는 인사동 사거리에 도착한 것은 저녁 6시 30분이었다. 가로수가 색종이처럼 
낙엽을 날리고 있는 바람 찬 거리에서  나는 쟈코메티의 조각처럼 잠시 앙상하게  흔들리며 
서 있다가 화랑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회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혼잡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왔지만 더불어 네 명이 모여서 하는 그룹전이었다. 4층  전시실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사람
들이 그 좁은 전시장 안에  북적거리고 있었다. 일일이 그들의 낯을  살피며 돌아다닐 수도 
없어 쭈뼛거리고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도로 내려와 복도에 있는 공중 전화
에서 김성아라는 화가를 찾았다. 화랑으로 들어올 때 포스터를  보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온갖 소음이 들려 나오는 가운데 한참 만에 그녀가 전화를 바꿔 들었다.  그녀
는 어쩐 일이세요? 하고 대뜸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만났으면 한다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하고 반문했다. 나는 또박또박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데요?하며 반감이 느껴지는 소리를 냈다. "바쁘신  건 알지만 은빈이에 관한 일이
니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며 공격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
데 왜 저를 찾는 건데요? 은빈이에 관한 일은 그쪽에서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나는 간
곡하게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빈이와 가까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탁합니다. 
두 분은 오래 전부터 절친한  사이가 아닙니까." 피할 수 없었던지  그녀는 저녁 약속이 돼 
있으니 9시쯤에나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9시라고  해도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
었다.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화랑을 나와 나는 골동품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과 다기점과 헌책방과 액세서리 점을 기웃
거리다 국밥을 사먹고 9시 10분 전에 그녀와  약속한 <볼가>라는 찻집 겸 술집에 먼저  가 
있었다. 눈이라도 내릴 듯 하늘에 검은 구름이 낮게 몰려와  있었고 바람은 점점 세찬 기세
로 불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난 것은 9시 30분이었다. 전시회 오픈 기념으로 받은 꽃다
발을 두어 개 가슴에 껴안고 문을 들어선 그녀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날엔 으레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추렴을 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꼭이 그래서 그런 
것만도 아닌 얼굴이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그녀에게 의자를 내 주었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용건만 말씀하세요." 그녀는 비우고 온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꽃다발까지 챙겨 들고 온  걸로 봐서 그건 아니지 싶었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빈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초조한 마음에  나는 곧장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걸 왜 저한테 묻죠?" 그런가? "모르고 
있단 말인가요?"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는 꽃다발을 옆자리에 내려놓더니 물컵을  집어 들었
다. 이런 식으로는 도대체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을 듯했다. 나는 도박이라도 하는  심정으
로 다시 이런 말을 던졌다. "은빈이가 서울에 와 있는 걸로  압니다." "뭐라구요? 도대체 누
가 그런 소릴 해요." 그녀는 꼿꼿하게 도사리고 앉아 완강하게 내 말을 부인했다. 이미 시작
된 도박이었으므로 뒤로 물러설 계제도 아니었다. 이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
니 말이 이리저리로 뛰고 있었다. "알고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꼭 만나야 합니다. 은빈이
에겐 아직도 누구보다 제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그녀는 언저
리만 맴돌고 있었다. "모르고 있는 겁니까?" 어수선한  모습으로 그녀는 내 눈길을 피한 채 
무릎 위에 놓인 가방 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은빈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용접
해 놓은 철대문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이사이 이쪽 눈치를 살피며 어쩌다 입을 열  듯 하다가도 또 눈길을 딴 데로 돌리면서 
딴청을 부렸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내가 은빈이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
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그녀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은빈이와 저에
게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제야 그녀는 쏘듯이  툭 내뱉었
다. "그렇다면 은빈이가 어디 있는지쯤은 항상 알고 있어야죠." 나는  지난달에 피렌체로 가
려고 편지를 썼던 사실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과정의  일들을 얘기했다. 그녀는 요령부득인 
얼굴로 이마에 진땀까지 흘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자물통도 이런 자물통이 없었다. 하지
만 경우와 때를 보고 열 때는 또 열어야만 할 게 아닌가. 그녀가 불안한 동작으로 꽃다발을 
손에 쥐어 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둘 다 힘든 사람들예요. 누군들 조개 껍데기처럼 양쪽
이 딱 맞아서 살겠어요.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꼭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예요. 
제가 뭐 하고 싶지도 않은 말이지만 하루하루 비비면서 닳아지고 그래서 나중에 비슷해지는 
게 부부란 거 아녜요? 왜들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그런 욕심은  혼자 있을 때나 부리고 사
는거예요.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두 사람  그러다가 잘못된 거 아녜요?" 그랬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저 지금 남창우 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
게까지 말하니 저도 무릅쓰고 얘기하겠어요. 그전에 한 가지 약속하세요. 저도 나중에  은빈
이에게 할말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약속하겠다고 나는 말했다. "은빈이를 만나는 일이 오히
려 나쁜 일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그애는 다시 못 일어나요. 무슨 뜻인
지 아시죠?" 그녀는 확인하려는 듯 내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도 꼭 만나겠
다는 뜻인가요?" "서울에 있습니까?" "서울에 있습니까?" "지금은 아니예요." 서울에 있다가 
그녀는 이틀 전 양평에 있는 친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한갓진 곳에서 쉬고 싶
어했노라고 그녀는 전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보름 전에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무슨 일
로 서울에 오게 됐는가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마침 
늦게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 겸사겸사 들어온 셈이죠."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물론 외조모 상을  다하리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나를 겨냥한 말이라는 건 그때는 알고 있던 터였다. 친구의  결
혼식은 지난 주였고 신랑 신부는 지금 신혼여행 중이었다. 그럼 은빈인 언제 피렌체로 돌아
가는가. "그런 말은 아직 못 들었어요. 하지만 제게 입막음을 부탁하더군요." 입막음. 아까<
덕원화랑>에서 나와 통화하고 나서 그녀는 곧바로 은빈이에게 내가 찾아온 사실을 알린 모
양이었다. "그건 서울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부탁받은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혹시라
도 남창우 씨가 찾게 되면 대답을 피하란 얘기 말예요." "..."  곤란한 일이라는 건 알았으나 
나는 은빈이가 가 있는 곳이 양평 어디인지를 그녀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며칠 있다 서울
로 올 거예요. 제 생각으론 그때 만나는 게 좋을  듯해요. 아까 무척 당황하고 있었어요. 그
런데 또 불쑥 양평까지 찾아가면 어떻겠어요. 얼마간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
아요. 누구라도 쫓기는 느낌을 받고 있으면 더 세세 달아나는 법이 잖아요. 또 그렇게  쫓아
가서 잡은 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당분간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건 제가 부탁하는 거예요." 
"..." "내용은 모르지만 은빈인  몹시 불안한 상태예요. 바깥  생활도 이젠 힘든 모양이구요. 
이혼하고 나서 서로 만난 적 있나요?" "여름에 파리에 갔다가 통화만 했을 뿐입니다." "그게 
처음였던가요?" "그렇군요." "남창우 씨도 알고 보면 참 매정한 사람이에요. 저야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안타까운 건 사실이에요. 이제  와서 찾아 다니는 
남창우 씨 모습도 그렇고 그때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이 전세금 빼가지고 밖으로  나가더니 
봐요. 몸만 상해가지고 돌아오잖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파먹고 살아갈 마음이라고 벌어 놨어
야죠. 작업은 웬만큼 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다 사람 꼴이 된 다음의 일 아녜요?" 피곤한 얼
굴로 그녀는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수습하고 일어났다.
  나는 그녀를 따라 찻집을 나왔다. 쌀쌀한 밤이었다. 양평엔 지금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터
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인사동 기로 나와 그녀에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그녀는 오두마
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수첩 한 장을 찢어  은빈이 가 있는 양평 전화 번호를 내게  적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것도 나중에 가서  다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으니까 말예요." 나는 그녀가 적어 준 전화 번호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그녀를 바
라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게 있는데요, 은빈이가 서울에 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
죠?" "모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김성아 씨를 만나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녀는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무튼 되게 놀라더군요. 은빈이 말예
요."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다가 그녀가 발길을 돌려 내게로 왔다. "만나 보세요. 저도 웬
지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럴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살던 집을 빌려 쓰고 있다 보니까 
마음이 약해져 결국 만만한 꼴이 되고 말았군요. 저도 꽤나 냉정한 사람인데요.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만만하게 보았던 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란 세상
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녀가 돌아서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밤늦게 버스를 타
고 집으로 돌아왔다. 양평. 차를 빌려 가면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잇는 거리다. 하지만 김
성아의 말대로 거기까지 찾아가는 일은 더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은빈이 서울에 와 있다
는 사실이 나로서도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이튿날 나는 철하와 통화했다. 번호를 
알아내 내가 건 전화였다. 그는 마포 공덕동 로터리 부근에  전셋집을 구해 서울 살림을 시
작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있을 때와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소리로  그는 몇 년 만에 돌아
온 서울 생활이 힘에 부친다고 했다. 무얼 하느냐고 묻자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야당의 선
거 캠프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 말이야?" "그거말고  당장에 무슨 선거가 있
어?" "거기서 뭘 하는데." "뭘  하겠어. 고작해야 정당원 행세로  전단이나 박는 뒤치다꺼릴 
일이지."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
다가 그가 자조 섞인 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새 정권이 탄생할 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하
려고 했던 것은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아. 나는 불온한 권력에 항거하고 싶었던 거지 권력을 
만들어 내는 데 이바지하려고 뛰어 다니는 건 아니었거든. 여든 야든 말이야." "그렇다면 다
른 일도 생각해 보. 자네 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아무리 그럴듯한 정권이  들어서도 
거리의 맨홀 뚜껑처럼 모든 구멍을 다 막을 수는 없어.  가령 이런 것도 생각해 봐. 장애인, 
아동, 청소년, 노인, 환경 문제 따위 말이야. 그런 일도 매우 중요하고 물론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야." "그런 말을 듣고 있으니까 내가 노인네가 된 것  같군." 선거 캠프에서 무
얼 겪고 느꼈는지 그는 확실히 맥이 풀려 있었다.  "그제나 이제나 나는 외곽에 주둔하면서 
불온한 힘에 대항하고 싶어." "자네는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가?" "그게 자네가 
갖고 있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부분이야. 권력이 생기면 거기 붙지 못해 대개들  안달이잖아. 
또 눈이 밝아져 사방을 꿰뚫어  보는 데는 얼마간의 물리적인 시간은  필요한 거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맥이 빠져 있어." 그쯤에서 말을 돌리고 싶어 나는 송해란의 소식
을 물었다. "뭐 사설 학원에 나가 애들 모아 놓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치고 그러
는 모양이더라. 웬 여자가 남자보다 더 바빠. 학원에서 돌아와서도 하루 종일 시장이다 어디
다 왔다갔다하느라고 도대체 코빼기 보기가  힘들어. 나 그 여자 그렇게  살림 좋아하는 거 
정말 몰랐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래도 삶에대한 애정이 깃들여 있었다. 여유를 되
찾고 나서 이번에는 그가 은빈의 소식을 물어 왔다. 그녀가 서울에 와 있다는 말에 그는 깜
짝 놀라고 있었다. "그래 만났어?" "나도 어제 알았어.
  지금은 양평에 있는 친구 집에 가 있는 모양이야. 서울로 나오면 만나야 되겠지." "어떻게 
왔대?" "글쎄, 외조모 상을 당해 들어온 모양인데 자세한 건 만나  봐야 알겠지." 그는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이런 소리를 전해  왔다. "느낌이 심상찮은데. 자네한테는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라. 내 말 알아듣겠어?" 알아들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돌
아왔다니 기쁘군. 그래, 이제 속속들이 다 돌아오는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조만간
에 만나 소주라도 한잔하자고 하면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바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는 배
를 타고 강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는 듯한 초조한 느낌이 사위에  두텁게 몰려와 있었다. 
시국도 그렇고 철하 부부의 살림살이도 그렇고 은빈의 일이 또한 그러했다. 

    21. 먼 곳
  양평으로 찾아가지 못한 채 나는 김성아의 그룹전이 끝나는 그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인
사동으로 나갔다. 그날은 11월 25일이었고 전날 밤 나는 김성아와 전화로 짧은 얘기를 주고
받은 터였다. 은빈은 아직도 양평에 있는 친구의 화실에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아직 은빈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자 그녀는 내일쯤엔  아마 화랑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어요. 피할 생각이라면 부러 들를 리 있겠어요."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엔 그녀도 은빈과 통화를 하거나 만날 일이 없었다 "둘 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으니 그게 무
슨 꼴들이에요." 숨바꼭질이라니. "남창우 씨도 자기  뒤에 숨어 있잖아요." 내일 화랑에 들
르겠다고 하자 그녀는 마음대로 하세요, 라며 마뜩찮은 소리를  하고는 딸깍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도 화랑엔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고 한쪽에서는 그새 그
림을 내리느라고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리고  은빈은 그곳에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숨어 
던지고 있는 곁눈질을 받아 내며 김성아를 찾았으나 그녀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나는 <관훈미술관>골목에 있는  <산타페>라는 곳으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친구인 화가 부부 그리고  사십대의 화가와 함께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김성아와 건너편 탁자에 마주앉아 몇 분 간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전시회가 끝난 뒤의 허전함과 피로가 드리워져 있는 침침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한 발 늦
었어요. 낮에 들렀다 갔어요." 전시장에 나타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또 어디로 간 것일까. 
"점심 먹고 일산에 있는 친구 화실로 간다고 떠났어요."
  일산이라도 가야면 가야 할 터이었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도 모레도 역시 못 만날 거라
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하고 시들한 소리를  하더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석하고 
있던 부부가 화가와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들도 얼마 전에 시카고에서 귀국
한 사람들로 일산에 있는 화가와는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김상아는 내게 전
화 번호와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밀어 놓으며  술에 취해 있는 혼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앞으론 이런 거 물어 보며 다니지 마세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요. 좀더 은밀하고 
확실한 방법을 찾아보세요. 둘만이 알고 있는 방법 말예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낮에  은
빈이가 왔을 때 물었더니 남창우 씨 만나고 싶지 않은 눈치였어요. 내일 아파트로 돌아와요. 
곧 피렌체로 떠날 예정인가 봐요." 투명한 여울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환영을 목도하여 
나는 몸을 털고 일어났다. "가도 얘기할  분위기가 아닐 텐데요." 그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산타페>를 나와 일산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화실은 일산  신도시 북쪽 끝에 있는 대화 
전철역 부근에 있었다. 바람은 찬데 밤하늘엔 별들이 다퉈 돋아 나고 있었다. 8시 30분에 전
철역 부근에 내려 나는 화실로 전화를 걸었다. 주인인 듯한 여자에게 은빈이를 만나러 왔다
고 하자 그녀는 이쪽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댔다. 수화기 속에서는 술
병이 부딪히는 소리와 음악 소리와 네다섯 명쯤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섞
여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얼마후 그녀의 목소리가 밤의 기별처럼 들려 왔다. 실감이 나지  않
았지만 틀림없는 은빈의 목소리였다. "용케도 찾아왔네요. 방금 성아한테 연락받았어요." 그
녀의 어투엔 묘한 비아냥거림이 배어 있었다. 그렇든 저렇든  나는 밖에서 만났으면 한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전 여기 있어요. 그게 누구든 불려 나가고 싶지 않아요." "만났으면 
해." 돌연 술기운이 걷힌 소리로  그녀가 칼칼하게 되받았다. "지금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예요. 도대체 당신 정신이 있는 사람이에요?"  부옇게 밤하늘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공중 전화 부스안에서 내다보며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안 된다고 했죠, 알겠어요? 그래도 만나겠다면 여기  지하 벙커로 총을 들고 내려오든지
요. 술 취한 군인 양반같으니라구." 술 취한 군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두운 주택가 골목
을 서성이다가 나는 약도를 보고 용도가 분명치 않은 삼층집 지하로 내려갔다. 아직 공사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페인트 냄새가 지워지지 않은  걸로봐서 신축한 건물인 듯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나와의 대면을 과연 이런 식으로 하려 들 터이었다. 그러니 그게 
지하 벙커라 하더라도 속히 만나 보는 편이 낫겠지. 이를  테면 그녀는 벙커 앞에 철조망을 
쳐놓고 그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음이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삼십대 
중반의 화실 주인으로 이마가 유독 튀어나와 다소 기형적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육십 평쯤 
돼보이는 커다란 콘크리트 지하의 화실엔 미국에서 배워 온 초현실주의풍의 그림들이  여기
저기 걸려 있었고 유리 온상처럼 만들어진 한구석엔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주방 옆에 
직사각형의 긴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두 사람의 사내와 화실 주인과 은빈이 앉아 술
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포도주병과  양주병 들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침실  안에 
있는 오디오 세트에서 흘러 나오는 비발디의 <화성에의 영감>을 들으며 나는 그들  사이에 
서먹하게 끼여 앉았다. 두 명의 남자는 눈치로 보아 화실  주인과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
인 듯했다. 한 사람은 모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미술 잡지의  기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대학
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강사였다. 그들이 내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고 나는 은빈의 건
너편에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 삼 년여 만의 해후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
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나를  흘끗 바라보고는 옆에 앉아 있는  대학 강사와 중세의 
종교미술에 대한 담론을 계속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하고  있던 얘기였는지 화실 여주
인은 또 영어 억양이 채 가시지 않은 어둔한 발음으로 기자를 붙잡고 한국 화단에 대한  불
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 화단은 실험적인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든가 
학맥이나 지연을 문제 삼는 고질적인 풍토  때문에 새로운 화풍의 제시는 물론이고  도대체 
그림을 할만한 분위기가 되지 않는다는 따위의 진부한 얘기였다.  대학 강사와 은빈의 화제
는 또 이탈리아의 건축 양식에서 파리의 <소나무>라는 아틀리에로 옮겨 가 있었고 나는 복
제한 토르스인양 뜬눈으로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미술잡지 기자가 
내게 술잔을 내밀며 이런 말을 던져 왔다. "박은빈 씨의 전직 남편이시라구요." 대꾸를 못하
고 나는 슬쩍 은빈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대학 강사와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
떤 국내 화가에 대한 얘기에  붙들려 있었다. "남녀가 만났다 헤어질  수도 있는 건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일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합니다. 이혼들을 하고 나면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저쪽 사람들은 안 그러잖아요. 찾아가서 생일 파티도 해주고 또 상대방이 재혼을 하게 되면 
식장까지 찾아가서 축하해 주잖아요. 저도 그게 사리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리에 맞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할 얘기가 아니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 나는 
대학 강사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은빈을 황망한 눈으
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강사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려  앉았다. 
구 분짜리 <화성에의 영감>은 계속 오토리버스되면서 육십 평 콘크리트 지하의 공기를  어
지럽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나는 간간이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가 나를 바라볼 때까지 묵묵
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졌는데도 좀처럼 자리는 파하지 않았다. 기름물감 냄새에 
취해 머릿속이 차츰 탁해지고 이따금씩 받어먹은 술잔에 눈과 관자놀이로 딱딱한 피로가 몰
려들었다. 각자 화장실에 두어 번 들락거리는 통에 자리가 바뀌어  피할 수 없이 은빈이 내 
옆자리에와 앉게 된 것은 화실 여주인이 존 슈만의 <비밀의 도시>란 재즈곡으로  CD를 갈
아 끼웠을 때였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더니  거푸 두 잔의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나머지 사람들이 이쪽이  분위기가 석연찮다는 것을 눈치챈 
것도 그때쯤이었다. 은빈이에게 은근히 수작을  부리던 대학 강사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기색이 역력했고  결국 1시가 되어 슬그머니  화실을 빠져나가. 그리고 
십여 분 후에 잡지 기사도  가야겠다며 양복 윗도리를 집어들고 일어났다.  남은 것은 탁자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술병과 안주  접시와 <비밀의 도시>와 주방을 치우며 이쪽  동정을 
살피고 있는 화실 주인뿐이었다.
  그만 나가는 게 좋겠다고 나는 은빈에게 말했다. 더 이상  머무는 것이 화실 주인에게 부
담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엉거주춤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섰
다. 어수선하게 화실 주인에게 인사를 남기고 나는 은빈을 데리고 간신히 지하 벙커를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사방이 안개였다. 한강이 가까운데다 호수공원까지 있어 일산에 안개
가 많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지난 5개월의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지독한 안개였다. 기침
을 하며 나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비축할 양으로 팔을 잡았다.  그녀는 팔을 잡아 빼며 고개
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을 앞서 걸어 나갔다. 도로엔 이따금씩  전조동을 켠 차들이 안개 속
을 달려가고 있었고 날은 차가웠다. 그녀는 도로를 무단 횡단해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기다
리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찾지 못한  채 나도 기습적으로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술이 깨고 있는지 그녀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안개 속에 주유소와 편의점
의 네온사인이 보였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자고 했을 것이다. 
그녀는 턱을 떨면서 얼굴을 감춘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디 갈데가 없는 밤이었다.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러고나면 아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멀리 옮겨서 얘기할까. 강원도나 전라도도 괜찮단 말이지. 말하자면  당신이 안심
할 수 있는 장소 말이야." 듣고 있더니 그녀가 귀에 와 박히는 말을 던져 왔다. "왜요, 그렇
게 먼데까지 나를 납치해서 또 어떻게 하려구요." 납치라니.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낯선 곳으로 사람을 데려가 몰래 떨어뜨려 놓고는 혼자  사라지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
지만 반박할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택시는 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안개 속으로 승용차 한 대가 빨간 유령처럼 지나가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종이 커피를 앞에 놓고 편의점 앞의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 나는 외
조모의 부음을 늦게서야 접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하고 그녀는  안
으로 잠겨 들어간 소리로 대꾸했다.
  "당신과 내가 왜 이런 곳에 앉아 있는 거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엄격히 말해 
그녀는 서울에 집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이탈리아에도 집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쪽은  남
에게 빌려 주고 있는 상태고 한쪽은 거꾸로 빌려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피곤하면 오늘
은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안개가 파라솔 위에 가랑비처럼 듣고 있었다. 안개도  소리를 내
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일쯤 다시 차분하게 만나고 싶어." 
"제게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요. 그런 사이가 아닐뿐더러 오래  전부터 제 주머니는 비어 있
으니까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자꾸 억지를 부린다면 그건 엄연한 불법이예요." 그녀가 언제 
이탈리아로 돌아갈 예정인지 몰라 나는 갑갑하게 사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칫 범법이  될지도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돌아가지 말고 여기 있어.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야." 그녀는 짧
게짧게 담배를 다 피우고 나더니  다시 또 손가락을 떨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은 
삶이 곧 사람의 감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에요. 또 불행하게도 삶은 아직까지 당신의 얼
굴을 몰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과 옛날 감옥의 얘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아요.  누
군가를 사랑해서 그 사람을 감옥으로 삼는 이들은 당신처럼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상대방
이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제풀에 지쳐 바닥에 
드러눕죠. 하지만 삶이란 역시 그런 게 아녜요. 없는 듯 늘 함께 있는 거고 상대가 자기보다 
조금 일찍 감옥에서 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당신은 모르겠죠. 부부의  도
리란 특별히 잘해 줄 리 없어도 상대보다 조금 더 오래 세상에 남아 있어 주는 거라는 사실
을 말예요. 당신은 당신의 여자가 언제나 위대하고 자극적인걸 원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에
요.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건 애정 결핍에 시달리는 남자들이나 하는 생각이에요. 그건 동시
에 상대에게 늘 그만큼의 자극적이며 전적인 애정을 원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그런
가. 그리고 또 뭐가 있는가. "상대가 단순하고 조용하게 나이를 먹어 가도록 하는 사소한 배
려 하나면 되는데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자신과  상대한테 요구하며 사는 사람이에요." 그
런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고는 있나요? 잘 모르겠죠. 당신은 상대에  대한 
염려 대신 그 잘난 연민과 의심으로 한 여자와 살아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또 자신에 대한 
동정과 연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구요." 그녀의 어깨  위에 안개의 입자가 하얗게 맺히고 
있었다. 지쳐 있는 얼굴이었다. 이제 서른두 살인 그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의 나이를 
먹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좀처럼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계속 얘
기하고 있었다. "당신은 또 늘 생의 주변에서 서성거리기만 하는 사람이죠. 생이라는  건 틀
림없이 삶의 중심에서 이뤄지는 일인데 당신은 왜 그런지  언저리만 배회하고 있죠. 그러고
는 안팎을 기웃거리며 신음하며 비틀거리죠. 그렇지만 당신만 아프게 사는 게 아녜요.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심상한 모습들을 하고 살아가요.  그중엔 자기 
고통 때문에 남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걸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것이 또 남
의 고통을 더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당신은 결과적으로 게으른 인생을 산 사람이 됐
어요. 자기한테만 한눈을 파느라고 도대체 아무도  거두지 못했어요. 알기나 해요? 사는  게 
결국은 다른 이를 거두는 일이라는 걸요."  "..." "곧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그러나 
당신을 이것은 알아야 해요. 결국 또 당신이란 사람이 나를 그곳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말예
요. 삼 년 전에 제가 이탈리아로 떠났던 상황을 아직도 되풀이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녀
는 서울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삶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혼자 사는 삶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커피향처럼 목에 잠기는 하오의 적막,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 원할 경우에만 사람
을 만날 수 있는 배타적인 자유와 편안함, 가까운 사람에게  불의의 상처를 받을 염려를 하
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따위에 대해서. 하지만 그 말은 내게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나머
지 인생이 더 이상 불연속적이거나  불확정적이길 바라지 않아요.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대로가 당신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예요. 어느  쪽이든 비례로 따지자면 결국 
51:49일테죠. 혼자든 둘이든 말예요. 그러나 그 실제의 차이는 아주 큰 거예요. 당신은 혼자
일 때도 둘일 때도 늘 49인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51이 되지 못하는 49. 그게 바로 나였다. 
"되풀이하지만 누구나 51이 되고자 애쓰며 살아요. 이건 진실에 관한 문제예요. 저  역시 당
신과 함께 살때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그러고 있어요. 그런 거예요. 어떻게든 49를 51로  만
들어 보려는 태도나 모습이 삶에  있어선 필요 충분 조건이란 거예요.  당신처럼 생에 잘못 
끌려 온 사람처럼 늘 인상을 쓰고 사는 남자는 필연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도 불행하게 만들
어요. 어떤 사람이 자신에 관해서 전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도 도대체 고마워하거나 감사해
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 여자를 거두고 또 다른 이를 거두겠어요." 휴우. "지난 
여름부터 당신은 제게 다시 고통을 주기 시작했어요.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이 돼서 그런 건
지 이제 대답해 봐요."
  나는 파라솔에 듣는 안개 소리에 망연히 귀를 팔고 있었다. 할말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것은 뭔가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무슨 도움이라도 청하
는 심정으로 편의점의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여점원을 바라보았다. 그러한데 어디
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엔 환청이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안개의 켜를 
뚫고 웬 노랫소리가 파라솔 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홀연한 기분에 사로잡혀 하얀 프
라스틱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은 아까 편의점으로 올 때 보았던 
주유소 뒤 편에 있는 건물이었다. 기타를 든 카우보이 형상의 노란 네온사인이 건물 외벽에
서 명멸하고 있는 게 희미하게 눈에 빨려 들어왔다. 은빈이도  그때는 그 소리를 들은 모양
이었다. 나는 움츠리고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개도 피할 겸  저리로 자리
를 옮기면 어떨까. 이제부터는 내 말도 들어야 할 테니 말이야." 그녀는 파리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더니 몸을 일으켜 내 뒤를 기웃기웃 따라왔다. 아니, 나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안개와 추위를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유소 옆길을 지나 그녀와 나는 카페의 흰 나무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이층의 목조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는 마당엔 그새 코스모스가 지
고 있었고 차를 마실 수 있게끔 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입구 옆에는 낡은 프라이드 자
동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문  옆에 달려 있는 스피커에서는 그때 닐  다이아몬드의 <Be>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영화 <갈매기의 꿈>의 배경 음악으로 나왔던 노래였다. 도시의 한복판
에 이런 전원식의 카페가다 있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그다드 카페>. 출입문 위에 붙어 있는 간판에 씌어 있는 글씨였
다. 그랬다, 안개 속을 헤매다 찾아온 곳이 우연찮게도 <바그다드 카페>라는 이름의 술집이
었다. 기묘한 기분에 빠져 나는 슬그머니 발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 여종업원에게 물으니 새
벽 2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얘기였다.  손님이라곤 정체를 알수 없는  중년의 남녀와 이십대 
중반의 남녀 한쌍이 전부였다. 은빈과 나는 나무 계단을 통해 불규칙한 발소리를 내며 이층
으로 올라갔다. 카페는 수리남의 사막에  있던 영화 세트를 밤새 잠깐  이곳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그렇지. 물탱크 뒤편 저녁 하늘로 부메랑이 날아가고 가로로 길게 이어져 있는 아스
팔트엔 긴 연통을 단 트럭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다 지친 여행객들이 기름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바흐를 들으며 밤참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이층엔 아무도 없었다. 은빈과 나는 자줏
빛 국화가 놓여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확인해 두려는 표정으로 흐린 창
을 통해 편의점 쪽을 내다보았다. 길을 잃은 건 아니 모양이야, 라고 나는 입엣말로  중얼거
렸다. 종업원이 발소리를 죽이며 올라와 뜨거운 커피 두 잔을 가만가만 내려놓고 아래로 내
려갔다.
  노래는 칼리 사이먼의 <You're So Vain>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어쩐지 이루  말할 수 없
는 적막감이 느껴졌다. 언뜻 졸다 깨어나면 노래만 남고 카페는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분
위기. "오래간만에 이곳에 와보는군." 그녀는 멀뚱한 눈으로 나를 눈여겨보며 커피잔을 입으
로 가져갔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떠 있을 때야.  꿈을 꾸었다, 나는 바그다드 카페에 앉
아 있었지. 그때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것도 그럼 꿈이었나? 나는  의자에 묶여 있었고 고통
받고 있었지. 파리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였어." 듣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잠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무도 아니었지. 그저 차양에 고여 있
는 한줌 저녁 햇살 정도였어. 나는 내일의 무덤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하늘에 떠 있는 무덤. 
그래, 나는 죽어 있었지. 몇 시간 후면 땅으로 내려가야 할 텐데 더 이상 몸에서  피가 돌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살려 달라고  외쳤
어.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말이야." 그녀가 눈꺼풀을 열고 이윽고 초점을 맞춰  나를 바라보
았다. "어떻게 깨어났는지 몰라. 깨어나 하늘을 보니 달이 떠 있더군. 그야말로 쟁반같이 커
다란 달. 그때 나는 약속했지. 그 하나의 완전에 대고, 생을 거듭하겠다고 말이야." "무슨 말
을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요." 잠이 쏟아지는 얼굴로 그녀가  희미하게 읊조렸다. "우
리가 다시 만나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자칫하면 그게 남은 생의 허리를 도로 꺾어 놓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런데요." "당신은 나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 그게 대부분은 맞겠
지만 어떤 것은 틀리기도 해. 전에도 서로에 관해 다 알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내게도 
51에 해당하는 진실이 있었다는 거야. 결과적으로 그게 49가  됐으니 할말이 없어졌지만 그
래도 진실은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해. 어리석음만 아니었다면  모든 게 순수하게 지속됐겠
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혼자 힘으로는 안 되는 일들도  있어."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밖엔 여태도 안개가 다퉈 어른거리고 있었다. "늦었어요. 다시 시작하기
에는 그 동안 서로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어.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험의 끝에서 함께 시작했던 거야. 오히려  그것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나는 당신이 그 동안 경험한 것들을 동시에 
원하고 있는 거야. 나도 지난 삼 년 간 당신한테  고백하지 못할 일들을 겪었는데 돌이켜보
면 그런 과정이 필요했던 것도 같아. 그래, 나는 항상 더디게 깨닫는 사람이야. 일일이 겪거
나 누가 보여 주지 않으면 모르지.
  하지만 알고 나서 되풀이하거나 번복하지는 않아." 어쩌면 그녀에게 내가 또 잘못을 저지
르고 있는 것은 아니까 싶어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 옆
에서 나를 흔들리지 않게 잡아 줬으면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엔 아직도 슬픔과 낙담과 
일말의 의혹이 깃들여 있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 쉬었다.  "당신에게 고
통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다시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양평이든 어디든 찾아가 만났으면  했다. 
어쩌자고 나는 늘 막차를 타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식으로 살아온 걸까. 그러므로 어
떤 경우엔 미리 질러가 길을 쓸어 놓고 상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힘겨운 표정
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여종업원이 계단을 올라와 빈 잔에 커피를 채워 넣었다.  나
는 시계를 내려다보며 아래층에 손님이 남아 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젠 다 가셨습니
다." "혹시 문밖에 누가 와 있지 않나요?" 이 말은 아마도 다급한 마음에 쫓겨 얼결에 내뱉
은 소리였을 것이다. 그녀가 네? 하고 내게로 허리를 구부렸다. "기다리는  손님이 있으신가
요?" 은빈은 국화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밖을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쟁반을 
세워 들고 계단 옆에 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수상쩍은 얼굴은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는데요."  아무도 없군. 나는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며 다시 주의 깊게 내다봐 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누군가 문밖에 와 있다는 느낌이 
집요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창가에 서서 다시 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제야 나는 그게 바로 나  자신의 그림자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녀에게  바흐가 
있으면 들려 달라고 말했다. 종업원이 내려가고  나서 나는 은빈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주유소 물탱크 위로 부메랑이 웽웽  날아가고 있군." 영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때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스피커에서  바흐가 곧바로 흘러 나왔
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에 나오는 <평균율>이 아니라 글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
주곡>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부메랑
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상을 마친 다음 저것은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우리는 각자 
먼데서 돌아와 지금 사막의 한가운데에 만나고 있는데 아침이 되면 이 카페는 아마 훌쩍 사
라져 버릴 거야.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여기에 앉아 있거나 다시 올 수 없어. 또다시 무거운 
가방을 끌고 배고픈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는 모래 위를 걸어가야 해." 그녀는 죽은 듯 말이 
없었다. "새벽 2시군." 그녀는 핏기 서린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더니  이윽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야겠어요. 아무래도 잠을 좀 자둬야겠어요. 아까부터  술 취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당신도 그만 쉬어야겠구요." 아니게 아니라 발목에  추가 달려 깊은 나락으로 한없
이 추락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화분에 있는 국화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고는 비틀비
틀 계단을 내려갔다. 일층으로 내려가니  그녀는 김성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파트로 
갈 테니 문을 열어 달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남기고  있었다. <바그다드 카페>를 나와 바
래다 주겠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축축한  안개가 사위에서 쳐들어오고 있었
다. 지하철역 근처로 나왔는데도 지나가는 택시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유
령선처럼 택시가 나타난 것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났을  때였다. 성산동으로 가는 택시 안
에서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는 날짜를 물었다. "사흘 후요. 아니,  이제 이틀 후군요." 그녀는 
좌석 뒤에다 목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일 쯤 찾아가리다." "그러세요." 뜻밖의  선
선한 대답이었다. "집에 있겠지." "그럴게요." 허나 그것은  맨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 잠이들어 가면서 잠꼬대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갖은 상념에 빠져 
나는 밖으로 흘러가는 캄캄한 안개만 망연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오 년을 함께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새벽이었으므로 일산에
서부터 십오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
러보았다. "성산동이야." 그 말을 듣고도 그녀는 얼마를  더 택시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쓸고 가는 이방의 차가운 외로움을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엔 현재 
자신이 서울에도 없고 피렌체에도 없는 사람이라는 무국적자로서의 비애가 서려 있었다. 나
는 운전사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고 택시에서 내려 그녀와 아파트 현관까지 걸어갔다. "이럴 
것까지는 없어요. 됐으니까 돌아가세요." "..."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부탁이요." 
그녀는 지친 걸음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현관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나는 그녀의 뒷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텅 빈 엘리베이터가 내려와 그녀를 집어삼킬 때까지 그 자
리에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두 통의 전화 메모가 돼 있었다. 모두 철하가 남긴 것이었
다. "돌아오면 전화 부탁하이... 자정이야.  늦더라도 상관없으니 꼭 연락 주게."  이미 3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아침에 연락을 하리라 생각하고 나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잠
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발작적으로 일어나  알몸인 채로 거실로 나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깨어 있었다. 다가온 선거 때문에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캠프에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한다면 그
래야겠지. 한 나라의 수반을 뽑는 일은 더없이 중대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은 초등학교 반
장 선거하고는 물론 다르단 말이지." 무슨 낌새를 차렸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그가 
입을 열었다. "예민해져 있군. 그렇다면 아침에  전화해도 될걸 그랬어." "늦더라도 연락 달
라고 자네가 그랬지. 그렇다면 비록  새벽 3시라도 전화를 안  할 수가 없게 된단  말이지." 
"이봐, 조금 침착해질 수 없어?" 그는 내가  방금 은빈이를 만나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내게  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그래, 만났지.  하지만 당장은 
도대체 자네와 묻고 대답할 말이 없단 말이야. 자네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번 은빈이 
일이 내게는 대통령 선거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거야." 그가  마른 숨을 내쉬며 알고 있
다고 얘기했다. "아냐, 자넨 아직 모르고 있어. 자넨  여전히 대통령 선거가 더 중차대한 일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물론 더 중요하지. 하지만 선거권이 없는 사람한테는 역시  선거
권이 우선하는 법이야. 무슨 뜻이냐면  도대체 사회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또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개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를 생각해 
봐. 그러고 나서 무슨 고유한 의미의 선거권이 존재하고  민주주의 방식의 투표가 가능하냔 
말이다. 분단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그것도 부족해서 또 동서로 갈려 싸우고 있잖아. 도대
체 언제부터 계속된 일이고  또 언제까지 그럴  작정들인지 자네가 한번  대신 대답해 봐." 
"자네 지금 과민해져 있어." "물론이지.  왜냐하면 자넨 지금 은빈이와 나와의  일을 캐묻고 
또 어줍잖게 판관이 되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내가 한번 만나  볼까? 하는 식의 얘기를 하
려고 솔직히 나한테 전화한 게 아니냔 말이야." "그럼 그게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려고 내게 
전화를 한 거로군." "물론이지. 그게 얼마나 잘못됐냐면 자칫하면 묵은 필름을 다시 꺼내 돌
리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어쩌면 은빈이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나 사실을 자네와 나는 간과하고 있어. 물론  은빈이에게 내 진심을 전하고 
그런 태도를 마지막까지 보여 줘야만  하겠지. 하지만 그 다음 일은  역시 그녀에게 맡기는 
것이 옳은 거야. 대의나 상식만이 진실에 가까운 게 결코 아니야. 우리는 전혀 짐작할  수도 
없는 전혀 엉뚱한 일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거나  다치고 있어." "그야 그렇
지." "그중엔 우리가 덮어씌운 고통으로 인해 현재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단 말이
야. 그렇다면 그런 사람한테도 뭔가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지." "그게 하필 나
이거나 은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 그제야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송수화
기를 내려놓고 나는 물을 한 컵 마신 다음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우리와 뜻이 다르
다고 해서 누군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아니야. 만약에 넓고 훌륭한 세계가 존재한다면 
결국 거기서 다들 만나게 돼 있다는 것이 지금의 내 굳은 생각이야. 이 생각을 말해 주려고 
나는 잠을 못 자고 이 신새벽에 자네를 호출한  거야." "나는 가까운 사람의 안부가 궁금했
던 걸세. 그게 잘못됐다는건가?" "가까운 사람인가, 아니면 또 그놈의 동지인가?"  "...동지보
다 가까운 사람일세. 그러니 그렇게 몰아붙이진 말게."  "물론이지." "..." "속히 담화가 가한 
자가 아니라면 내가 왜 일껏 전화를 했겠나. 그래, 자네는 근무 외 시간에도 가방을 메고 다
니는 우체부 같은 사람이야. 오늘밤에는 안개가 많이 꼈던데 힘들지 않았나?" 그는 대답 없
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봐,  지금 은빈이와 나에 관한 일엔 그 어떤  누구도 
개입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야.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진작에 긴
급 구조 신호를 보냈을 거야. 나도 방금 그런 일을 저지르고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왜 제 생
각에 맞게 상대를 설득하려고만 들지?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생각의 어떤엔 
역시 저쪽이 이쪽과 같아야 한다는 이기와 독단이 깔려 있어.  내 생각엔 사람은 서로 위아
래에 있지 않아.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가 누추하다고 해서 밑으로 내려다보거나 하는 짓
은 하지 말아야 해. 거꾸로 누가 높은 데 앉아 있다고 해서 무작정 올려다볼 필요도 없겠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냐면 밑에 있던 사람들이 위로 자리바꿈을 하고 
나면 거기 요란스럽게 장식한 의자에 똑같이 버티고 앉아 전에 그들이 만들어 놓았던 옷을 
걸쳐 입고 또 감히 사람을 내려다보려 한다는 거야.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역사 발
전의 과정이라는 거고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역으로 동원되고 또  다쳤는지를 
한번 상기해 봐. 다시 소급해서 말하지.
  은빈이와 내 일에 관한 문제는 서로의 고유한 코드로 해결할 일이야. 왜냐하면 아직도 은
빈이와 나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녀를 붙잡기보다는 지금부터라도 
우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별로 없어. 그녀가 이탈리아로 돌
아가기 전에 이쪽에서 적어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얼마쯤이라
도 마음이 편해지고 자유로워질 거야." "...만약에 은빈이가 서울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땐 어
떡할 텐가?" "그 얘긴 이미 제주도에서 끝냈지.  은빈이를 만나서도 그런 뜻을 전하고 방금 
돌아온 참이야." "그럼 됐어.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자네 생각이 옳은 거야." "개인의 일도 대
사에 속한다는 걸 이해하는 데서 대의가 시작돼야 해. 그  다음엔 서로 평등하게 조금씩 희
생하고 양보하면 되는 거야. 내가 남보다 많은 걸 가졌을 때 그것은 이미 온전한 내 것만이 
아닌 거야. 남이 가져야 할 것까지 넘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가령 우리가 경제 개발 원
칙이 죽 그래 왔다는 거야. 저마다 상대가 가진 것을 빼앗는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온통 투
전판에다 싸움판이 돼버린 거지." "은빈이가 자네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군." "새벽
의 빨간 가방을 맨 우체부도 늘 나의 선생이지. 우체부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작
업인데 아무도 그걸 모르지." 그제야 그가 웃으면서 내 말을 되받았다. "아무리 심각해도 자
네는 농담을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 늘 자신을 몰아붙이면서도 아마  그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겠지. 그래, 이런 때일수록 여유를 가져 봐." "동감이야." "그런 소식 기다리겠네.  그
리고 이번 투표에 빠지지 말고." 전화를 끊고 나자  아파트 문구멍으로 조간 신문이 배달되
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은빈이 이탈리아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나는 성산동으로 그녀를 찾아
갔다. 전날 새벽 철하와 통화하고 나서 온갖 생각에 시달렸으나 그녀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
각엔 변함이 없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다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처럼 놀이터
의 벤치에 앉아 한 시간을 꾸물거렸다. 회양목 울타리에 둘러  싸인 놀이터의 뿌연 먼지 속
에서 아이들은 미끄럼틀을 타거나 시소를 타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 날의 한때가 있게 마련인데 어느 날 불쑥 어른이 된 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
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깊은 회한이 몰려왔다. 저들도 언젠가는  커서 우연히 놀이터를 지나
가다 자신들의 뿌연 옛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반드시 나이를 먹어야만 
알게 되는 세상의 진실을 조금은  뒤늦게 깨달았다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어둠 
속을 불안스레 서성이며 수없이 많은 문들을 힘겹게 밀고나가 봐도 생은 좀처럼 빛을 허락
하지 않는다.
  오래 묵은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둘레는 커질지
언정 끝내 제 껍질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때  가서 전체적인 모양새가 어떤가 하는 
것만이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문을 열어 준 것은 김성아였다. 내가 올 
줄 모르고 있었던지 그녀는 어수선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일껏 찾아온 사람에게 돌아가
란 말을 못하고 그녀는 안으로 나를 들였다. 나는 거실  소파로 안내되어 그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보험 회사 직원처럼 서먹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한 동안에  나는 차츰 오래 비워 두
었던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것은 다만 장소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삼년여 전 내가 집을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공간의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
면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오디오 세트, 냉장고, 텔레비전, 심지어는 첼로를 켜고 있는 
카잘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과 <천국보다  낯선>의 영화 포스터까지 그 자리엔  빈틈없이 
고정돼 있었다. "전세금을 내주긴 했지만 삼 년 동안 작업실로만 빌려 썼어요." 김성아의 집
은 연희동에 따로 있었고  물론 결혼을 해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딸까지  두고 있었다. 
"은빈이가 부탁해서가 아니라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돌아올 거니까 관리해 준
다는 생각으로 썼던 거예요. 작업 때문에 안방만 조금 바꿨지 나머진 그대로일 거예요. 작은 
방의 서제도 마찬가지구요." 은빈은 점심을 먹고 나서 교보문고에 간다고 집을 비운 상태였
다. 광화문 교보. 하지만 세 시간째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찾아올 거란 사실을 
알고 부러 피한 것일까, 안보이는  사이에 김성아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나타났다. "이왕 
오셨으니 기다려 보세요. 저는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가 봐야 해요. 아무 말도 없이  나갔는데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땐 어쩔 작정이에요?" 그 말은 이쪽에서도 적당히 눈치를 봐
서 돌아가란 얘기였다. 물론 그래야만 할 터이었다. "내일 출국 예정이 맞나요? 은빈이 말입
니다." 신발을 신다 말고 김성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전에 짐을 꾸리는 
걸 봤으니 아마 그러지 않겠어요?" "..." "저도 그애의 속내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작정 잡
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잖아요. 남창우 씨 마음이 정 그렇다면  여유를 갖고 다시 기회를 만
들어 보든지요. 하지만 이번엔 왠지 힘들 것 같아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태에서 뭔가 결
정한다는 게 그렇잖아요. 더군다나 그쪽에서 곧 전시회를 여는 모양인데 그것도 은빈이에겐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남창우 씨도  잘 아시죠? 그중에는 
여건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돈이나 기회가 없어 주저앉는  사람들도 많아요. 지금 들어온다 
해도 은빈이한테도 당장 뾰족한 수가 없어요. 그런 것도 생각해 주셔야 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내게 열쇠를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오 분쯤 더 소파에서 뭉그적거리다 
나는 서재로 쓰던 작은 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 방도 내가 집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게 그대로였다. 손을 대지 않아 먼지가 하
얗게 쌓여 있는 것말고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해묵은 달력까지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내가 쓰던 의자에 앉아 낡은 잡지와 이미 바늘이 멎어 있는 탁상시계와 대학 때 읽던  책들
과 서랍 속의 편지와 사진 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일찌감치 사라졌을 
거라고 믿고 있던 터였다.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
는 의자에 눈을 감고 앉아 은빈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와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을 텐데 5시가  되고 6시가 돼도 돌아오기는커녕 전화조차  없었다. 도로 거실로 
나가 장식장 옆에 놓여 있는 여행 가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나는 주인 없는 집에서 다시 
커피 한잔을 끓여 마셨다. 그때부터 줄곧 주인이 부재 중인 집에서. 베란다 창에 어둠이  깃
들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6시 30분에 착잡한 심정으로 아파트를 나왔다. 

    22. 달에 앉아 이야기하다.
  경비실에 열쇠를 맡기고 나는 홍대 전철역까지 걸어서 갔다.  어둠이 내린 거리엔 변함없
이 네온사인이 명멸하고 있었고 진눈깨비라도 내리려는지 도회의 공제선에 하늘이 회색으로 
기울게 걸려 있었다. 청기와주유소 사거리에서 나는 십 년 전 은빈과 포장마차에서 나와 추
위에 떨며 여관을 찾아 헤매던 길을 잠시 건너다보고  있었다. 일군의 대학생들이 플래카드
를 들고 꾸역꾸역 밀려 내려오며  뭐라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확성기를  단 선거 홍보 
차량이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것을 눈여겨보며 나는 전철역으로 통하는 지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런 다음 편도 승차권을 사서 시청으로 가는 전동차에 훌쩍 올라탔다.  전동차는 
약 삼 분 간격으로 정차하면서 신촌, 이대, 아현, 충정로  역을 거쳐 십오 분쯤 후에 시청역
에 도착했다. 나는 시청 방향으로 나와 프레스 센터를 지나 구동아일보사까지 와서 지하 계
단을 통해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거리엔 은행잎들이 바람에 마구 쓸려 가고 있었다.  아직도 
은빈이 교보문고에 있으리란 기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서점
에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경제, 사회, 음악, 인문학, 여행, 문학 코너를 한
바퀴 돌다가 바로 엊그제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장 필립 투생의 "텔레비전"이란 소설책을 산 
다음 스낵바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읽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매장이 문을 닫는 시각까지 어쨌든 여기 앉아 있을 거란 말이다. 나는 두 시간 
후면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수험생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책  읽기에 몰두해 있었다. 
마침내 볼펜을 꺼내 들고 이렇게 군데군데 밑줄까지 쳐가며.  육체적 사랑이라는 것은 접영
으로 400미터를 나아갈 때의 혼란스럽고 남성적인 에너지보다는 평영에서 팔을 내저을 때의 
관능적 평온상태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특히 육체적인 사랑은  내게 커다란 내적 안정을 
준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_- p.20
흠, 그렇군. 그로부터 196쪽까지 읽을 동안 나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모터
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후 핸들을 누르고 손잡이를 푼후 좌석 밑에 있는 핸들로 보정기를 조
정했다. 다음에, 그녀의 가슴을 둘러싼 보호복에  달린 네 개의 가족 벨트를 단단하게  죄어 
고정시킨 후, 갑자기 자기 뒤에 누가 있는지를 보려는 듯 뒤를 홱 돌아보았고(그래 그래, 난 
언제나 여기 있어). 곧 이어 이륙 허가 신호를  맏고는 재빠르게 존에게 돌려 준비가 다 되
었으니 이제 곧 이륙한다고 말했다. -p.196  
  여기까지 읽었을 때 배가 고팠으므로  나는 김밥을 사다 놓고 마저  읽기 시작했다. 몰론 
그때까지 누군가 내게 다가와 피아노 건반처럼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거나 알은체를 하는 일
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매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버티고 앉아 있겠단 말이
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더  말하지 않겠다. 묘사하는 즐거움 보다
는 행위의 은총을 특별 대우할 줄 아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들롱은 내 곁에 벗은 채 누웠
고, 그녀의 배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나는 그녀 배꼽  주변의 매끄럽고 팽팽한 
피부를 만져 보았다.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숙인 채 믿을수 없을  만큼 당당하고 자신에 
찬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p.234
  텔레비전에 전원을 넣자 그것은 우주의 최초의 몇  초이거나 최후의 몇 초일 것 같은 흰 
화면을 내보이며 칙칙거리기 시작했고, 다양한 채널 중에서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채널을 
맞추려고 화면에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p.240 
  다시 여기까지 읽고 났을 때(김밥은 다 먹어 치운 상태였다.) 갑자기 거인이 하품을 하는 
것처럼 매장 안이 기묘한 기운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폐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나는 얼른 마지막 페이지를 훔쳐보았고 그것은 246쪽이었으니까 남은 것은 고
작해야 여섯 쪽에 불과했다. 다 읽을 수 있을까. 시계를  보니 폐점 십오 분 전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눈알을 굴리며 급기야는 엉덩이를 반쯤 들고 서서 한 권의 책을 마지막 줄까지 숨
차게 읽어 버렸다. 나는 침대에 바로 누웠고, 그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꼼짝 않고서 이 영원
의 한 순간을 음미했다. 가까스로 되찾은 침묵과 어둠을 - p. 246  
  오 분 전 9시였다. 나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표지를 새  책처럼 꾹꾹 눌러서 책상 끝
에다 슬쩍 밀어 놓고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으므로 실수로 흘리고 간 것처럼) 뻐근한 다리
를 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외서 코너를 비스듬이  돌아 나머지 오분 동안 음
반점을 기웃거린 다음 정확히 9시 정각에  광화문 지하철 방향으로 빠져 나가기 위해  마침 
풀어져 있던 신발끈을 바로 맸다. 그 순간 웬 황금빛의  눈부신 덩어리가 눈에 튀어 들어왔
다. 나는 넋이 빠진 상태에서 그쪽으로 멈칫거리며 끌려갔다. 그것은 밤의 아스팔트 위에 잘
못 떨어져 내린 작은 달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은 달이 아니고 차라리 그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고 있는 실은 문구 코너  한쪽 선반에 놓여 있는 지구의였다.  또 그것은 구경 270mm, 
축적=1:47,250,000 크기의 지구 모형으로 형광빛 아래서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황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황금의 지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보았다. 
손가락에 새겨진 손금 사이로 지구의 매끄러운 표면이 그야말로 감탄스럽게 와닿았다. 나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놀려 위도와 경도 사이를  더듬으며 그 둥근 물체를 조금씩  회전시켜 
보았다. 마침내 지구의는 자전을 하며 순간순간 이쪽에다 빛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내  맥박
은 시시각각으로 거칠게 변해 급기야는 숨이 멎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문구점 담당의 여
직원이 등 뒤로 다가와 폐점 시간임을 상기시켰고 나는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람을 대하
듯 짐짓 외롭고 고독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달에 올라와 처음 
만난 사람을 바라보듯이 한편 반갑고 다정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여지없이 당황한 표정
을 지으며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고 나는 지구의를 들고 그녀를 성큼성큼 따라갔다. 나는 그
녀에게 삼만 팔천 원을 지불하며 또 틀림없이 기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손님이 다 빠져 나간 매장에서 재수 없게 치한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거의 울상을 짓고  있
었다. 거스름돈을 내게 건네 주고 포장지를 꺼내는 그녀의 손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떨리
고 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나는 채 포장이 되지 않은 그 황금빛 지구의를 덥석 집어
들고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아닌게아니라 내가  지구가 아닌 다른 혹성
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삽시간에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를 벗어나 무중력의 공간에 수직으로 가만히 떠 있는 느낌
이었다. 주위엔 광막한 어둠이 내려 있었고 갑충처럼 납작하게  등을 구부린 차들이 소리없
이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황량한 곳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나는 지구의 육분의 일 
중력을 의식하고 도둑 걸음으로 사람이  모여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손에는 
물론 황금빛 지구의를 들고. 시청역으로 돌아와 나는 전동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거기
라면 나처럼 집을 나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터이었다.  전동차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
이 기묘한 혹은 감탄스러운 혹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지구의를 들고 서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원 참, 왜, 이것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서울역 광장으로  나와 생
경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광장엔 바람이 찬데도 저마다  가방과 보따리를 든 사람
들이 기차를 타고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로 가려고 북적거리고 있는  참이었다. 주변엔 
기계우동과 술과 안주를 파는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신문 가판대와 서부역으로  넘어
가는 통로의 코인로커 아래 쓰러져 있는 거지와 구두닦이와 홍익매점 같은 것들이 눈에 띄
었다. 오랫동안 기차를 탄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으로만 보였다. 
  여기라면 그래.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겠군. 나는 일제 시대 때 지은 서울역 청사
로 의젓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장항선과 경부선을 타려고  플라스틱 의자와 찻집과 패
스트푸드점과 스낵바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잡지 신문을 보거나 혹은 졸고 있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구내를 한바퀴 천천히 돌았다. 구세군 자선냄비를 들고 그
러하듯이. 그러고나서 분수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통해 9시에 시작했을  뉴스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는 스물네 개의 파란 플라스틱 의자중의 하
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오십 전후로 보였으나 유난히 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었
기 때문에 내 눈에 금방 들어왔는지  모른다. 가죽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책을 읽고 
있다가 그는 MBC 9시 뉴스 화면으로 눈을 가져 갔다. 그 순간 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던가. 
하지만 확실하게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책에서  텔레비전으로 눈을 옮겨 가는 
사이에 내가 그의 눈에 슬쩍  걸려든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뉴스가  끝날 때까지 화면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분수대 난간 바닥에  앉아 있는 이십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네 명의 여자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여행 차림의 그들은 한  여자가 하는 얘기를 나머지 세 
명의 여자가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네들은 백양사로 늦은  단풍 구경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보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유세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임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문민 정부의 대통령이 벌써 권좌에서 물러나 
있는 듯한 정치 상황 속에서 헌정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부르짖는 야당과 어떻게든 기득
권을 놓지 않으려는 야당의 공방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었다.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려 온 것
은 정규 뉴스가 끝나고 CF가 나가고 스포츠 뉴스가 막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잡음
까지 섞여 있는 희미한 소리여서 어디서 들려 오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치 두 
개의 방송 음파가 겹칠 때 뒷전에서 끓고 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수신용 안테나를 조절하
듯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고 눈까지 내리감았다.
  그것은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었고  호른으로 시작된 서두부가 현악기와  겹치면서 
차츰 장엄한 물결을 일으켜 가고 있었다. 알다시피 탄호이저는 성과 속, 영혼과 육체의 투쟁
을 다른 오페라로 속세에 물든 로마 교회에 대항해 과감하게 자기 사상을 관철시켜 마침내 
영혼의 승리로 이끈다는 장중한 가극이었다. 1962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자발리슈가 연주
한 곡을 나도 학교 때 자주 듣곤 했었다. 약 십칠 분의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그 잡음 
뒷전의 소리에 이끌려 완전히 주위를 잊고 있었다. <탄호이저 서곡>이 끝나고 사이가 있은 
다음 이번에는 또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이 흘러 나왔다. 타악기와 현악기가 동시에 힘
을 합해 거대한 추인 양을 내리치는 반복이 시작되고 있을 때 나는 그 소리가 희미하긴  하
지만 아주 가까운 데서 들려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지구의 무
게를 새삼스럽게 감지했고 그러자 내가 정말이지 비행접시를 타고 먼 행성 사이를 소리없이 
날아 방금 달에 사뿐히 내린 듯한 기분에  빠져 버렸다. 두려워 말고 이제 눈을 떠봐,  라고 
스스로를 부추기면서 사위를 분간하고자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눈을 뜨자 어둡
지도 밝지도 않은 끝간데 없이 황량한 정거장의 물 마른 분수대 난간에 내가 태연히 걸터앉
아 있었다. 보이는 건 정거장 곳곳에 희디흰 얼굴들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아까 
백양사로 단풍 구경을 간다던 네 명의 여자는 이미 기차를  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텔
레비전에서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방송 연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한데, 문득  잊고 
있던 <코리올란 서곡>의 끝마디가 다시금  귓전에 와닿아 나는 홀린  듯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흰 머리의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아까는 정면으로 
텔레비전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 언제 분수대로 자리를  옮겨 온 것일까. 
그의 무릎에는 예의 가죽 가방과 그 위에  겹쳐 놓은 책이 보였고 시선은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나는 그가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음악을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심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하자 그가 그녀를 돌렸다. "여긴 금연일세."  아, 금연이
로군. 구내 곳곳에 <금연>이란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실을 깜빡 잊고 있
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흰머리의 그 사내와 말문이 트였다. 내가 도로 담뱃갑을 호주머니
에 집어 넣는 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그는 필시내 무릎에놓여 있는 지구의도 보았을 것
이다. 그게 뭔가? 하고 그가 믿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질문을 내게 던져 왔다. 나는  짐짓 
조롱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황금으로 만든  지구올시다." 자신감에 
찬 내 대꾸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 반응없이 지구의만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까 내가 교보문고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동작으로 조심조심 손을 뻗어 지구 표면을 더듬
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루하게 더듬다가 또  슬슬 자전을 시켜 보기도 했다. 그닥  달갑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아름답구만."  아름다울 뿐만 아
니라 그가 듣고 있던 바그너나  베토벤과도 잘 어울리는 형상이었다.  "하늘에 앉아 아침이 
밝아 오고 있는 장엄한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으이." 하늘이라니. 당신과  나는 지
금 달에 앉아 있단 말이야. 달의 정거장에 앉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밤 기차를 막막하게 기
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나칠 정도로 오래 지구의를  만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영락없이 
대신 그걸 들고 앉아 있는 꼴이었다. 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러자 그가 수직 상승하는  지구의의 움직임을 따라  일어나며 나를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어디로 갈 셈인가?" 나는 이 피에로  같은 사내를 물끄러미 마주보며 우선은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는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이라고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그
러고 나서 영화 <카사블랑카>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험프리 보가트처럼 우아하게 뒷모습
을 보이고 돌아서 (영화에서처럼 모자를 쓰고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잠시 주춤한 다
음, 마치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로 다가가듯이 구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내 
뒷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의를 들고  어둠에 싸여 있는 광장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 내 뒷모습에. 나는 순교를 앞둔 신부라도 된 성싶었고 그리하여 광장으로 
나가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결국 참지를 못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흰머리
의 피에로가 분수대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는 나를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나
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런데 제기랄! 그는 바로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경이 파랗
게 곤두선 나는 급히 계단을 내려가 문을 밀고 나가 검정과 노랑으로 번갈아 둘러 칠한  둥
근 가드레일(혹은 바리케이드)위에 걸터앉아 거친 동작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균형 
잡힌 걸음걸이로 내게 일직선으로 다가와 옆에 궁둥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담배를 끌 때
까지 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명동으로 빠지는 고가도로인지 남대문로인지 아니면  대우빌
딩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나서  과연 이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얀 머리의  사내가 자꾸 신경에 거슬려 
그럴듯한 생각은 이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나와 있으니 자네 말마따나  황량한 달의 표면에 앉아  있는듯하이. 사방에 불빛이 
보이고 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지만  여지없이 황량하게 보여. 아까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는 잘 빨아 놓은 잠옷을 입고 춤이라도 추고 싶더구만." 잠옷을 입고 춤을 춰? 역시 
피에로다운 말이로군. 나는 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고 지구의를 돌려 어둠 속에서 간신히 한
국의 서울을 찾아냈다. 거기 역전 가드레일 위에 흰머리의 사내와 내가 허리를 구부린채 앉
아 있었다. "모든 별들이 아직 태고의 신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지구만이 쓰레기로 가득 차 
있어. 문명과 사상의 쓰레기로 말이야. 사람이란 원래 이렇게 번쩍번쩍하는 부자가 아니었던 
것이야. 그저 나무와 물과 짐승이 갖는 것만큼만 가져야 했던 거야. 그 나머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듯이 대부분이 쓰레기인 셈이지." 나는 아닌게 아니라  쓰레기 더미에 앉아 있는 기
분이 들어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야말로  도처가 쓰레기인 것이다. "생각해 보게, 
나무나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매순간 쓰레기를 게워내며 살고 있네. 빈집에 혼자 있어도 하
루가 지나면 여기저기 치워야 할 것들이 생긴단 말일세. 그런데 그걸 그냥 내버려두면 필연
코 다른 사람이 치워야만 하지. 어쩌다 사는 일이 쉼 없이 빗자루질만 하는 일이 돼버렸어." 
"..." "전에는 안 그랬지. 하지만 요즘 세상은 분명히 그래. 제것만 치우는 데도 상당한 노력
과 시간이 필요한데 어떤 사람들은  남이 쓸어 놓은 길로 그냥  마구잡이로 지나가지. 그럼 
뒤에 남은 사람은 또 밤낮없이 쓰레기만 치우고 살아야  한다는 데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
다. "적어도 왕이 생기기 전에 안 그랬지. 그런데 도처에서 왕들이 발흥하고  그래서 금은동
이 필요하고 철이 무기로 둔갑하면서 지구가 온통 감옥과  살육장으로 변한 게야." 나는 착
잡한 마음으로 지구의만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견뎌 
왔는지 자네 아나? 혹시 마키아벨리나 칸트나 마르크스보다도 피타고라스나 레오나르도다빈
치나 도스토예프스키나 베토벤으로 견뎠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바그너는 반유태주의자였으
니까 여기선 제외하도록 하지." 그런 대답이라면 나도 얼마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
습니다. 3B가 있는데 베토벤도 그 중의 하나죠. 빅 쓰리 말입니다." 나는  그의 연설에 가까
운 질문에 이렇게 첫 번째의 답을 했다. 하지만 답해  놓고 나니 어딘가 모르게 방정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3B?" 그가 의아스런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바흐, 베토벤, 비틀스 말입니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물론 비틀스도  좋지, 하고 또 허허 
웃었다. 그런데 왜 웃는단 말이가. 내가 뭐 잘못 말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럼 이 땅엔 누
가 없을까? 뭐 조선 때도 좋고 고구려나 신라 때도  상관없으니 말이야." 나는 진지하게 생
각하는 척하다가 별수 없이 또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희는 어때
요? 저는 그 사람이 진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멋진  그림을 그린 사람은 지구상
에 흔치 않아요. 뭐 고흐나 렘브란트만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럴듯하군. 그럼 석굴
암을 만든 김대성도 거기다 집어 넣으면 되겠군.  그리고 또 없을까?"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돈오견성한 이래 숱한 중생에게 빛을 던진 원효도  있잖습니까. 제비집 형국의 여수 
돌산 향일암도 그가 지나가도 세웠답니다. 향일이라 했으니 일출이  아름다운 곳을 그냥 지
나지 못했겠지요." "그래, 거기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지. 또 그 아래 <처갓
집 식당>의 갓김치와 동동주도 일품이지." 이럴 때 웬 술타령이란 말인가. "또 순교한 김대
건도 있고 뭐 세종대왕은 어떻습니까?" "세종대왕? 그래, 어쩔 수 없이 왕이 필요한 시대가 
마침내 인류사에 도래했지. 그중에는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이도 있었지. 하지만 역시 그  신
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백성에게 끼친 고통과 누를 생각해야만 할 거야. 역사는 어쩌면 인
간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이거나 덫인지도 몰라. 그건 이제  운명처럼 인간에게 가차없이 적
용돼 도대체 빠져 나갈 방법이 없지. 아무튼 지구상에서 인간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진 것만
큼은 부인할 수 없어. 급기야는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고 있단 말일세. 금세기에  텔레비전이 
출현하고부터는 인간의 모든 신성은 완전히 파괴됐어. 이러단 분명 신이  노하고야말지." 흰
머리의 사내는 경부선에 속해 있는 어느 지방 대학의  교수였다. 학교에서는 수학을 가르치
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주 제 거처럼 지구의를  좌우로 멋대로 회전시키면서 중얼거렸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있단 말이지? 눈에 안 보이는 아주 작은 점으로 말이야. 
  우주에는 1천억 개 정도의 은하가 있고 행성의 수로 따지면 10의 22제곱, 즉 1백억의 1조 
배쯤 되는 숫자야. 지구는 물론 그중 하나의 별에 불과하지. 그걸 생각하면 인간 존재는  좀
더 겸허해져야 해." 그는 오른손 검지로 한국을 더듬었다. 서울은 그의 손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북태평양을 가로질러 캐나다의 토론토로 손가락을 가져 갔다. "나는 여기서 오
래 살았네. 서른에 한국을 떠나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돌아왔지. 거의 십오 년은  귀에
서 눈물이 날 만큼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네." 귀에서 눈물이 난다고? 그렇단  말이지. "망명 
중인 추운 북아메리카 땅에서 병으로 아내를 잃고 껍질만 돌아왔네." 망명. 그러나  나는 굳
이 사연을 묻지는 않았다. 귀에서 눈물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어느 것도 감히 물을 엄두
가 나지 않았다. 나는 빙글 지구의를 회전시켜 북반구 유럽의 이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것은 지중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와 있었고 피렌체는 아쉽게도 표기가  안 돼 있었다. 
나는 또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보았던 중국과 인도네시아와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와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 같은 데를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짚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
는 왜 이걸 들고 지금 서울역 대합실에 앉아 있었던 건가?"  그래. 내가 왜 이걸 들고 지금 
서울역 광장에 앉아 있는 것일까. 무르춤하게 뒤를 돌아보며 나는 오늘 하루의 일을 되돌아
보았다. 오후에 나는 성산동에 갔었고 홍대 앞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교보문고에 갔었
고 스낵바에 앉아 한 권의  책을 읽었고 우연찮게 지구의를 발견하고  이곳가지 오게 됐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됐다는 거다. 내가  타고 온 비행접시는 광장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차역에 오면  어쨌든 사람들이 있고 또 어
디로든 갈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는 흰 머리칼  아래로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찬찬히 살
펴보았다. "아니, 목적지가 뚜렷한 사람들이 역으로 오지. 그러니까 자네는 아직 갈 데를 정
하지 못했던 말이지?"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이번에는 공항이 떠올랐고 내가 왠지 그리로 가
야 할 것을 기차역으로 잘못 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너무 오래 여기
서 지체하고 있던 셈이었다. "공항엔 불이 꺼져 있지. 이런 시각에 비행기는  이륙하지 않는
단 말일세." 그런가? 말을 피하고  있었지만 어느덧 그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내일 공항을 
통해 떠나기로 돼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내게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곧 열차를 타야 하네. 자네의 얘기를 
들을 시간이 없다 그 말일세. 그래서  느낌만 갖고 하는 말이니 실수가 되더라도  이해하게. 
왜 굳이 무슨 말을 하냐고? 그건 오늘 자네가 내게 뜻박의  장면의 보여 줬기 때문일세. 언
제 다시 그런 기막힌 장면을 보게 되겠나. 황금빛 지구의를  들고 서울역 광장에 앉아 있는 
사내. 그 덕분에 나도 밤하늘에 앉아 아침녘의 고요하고 장여한  지구를 내려다 볼 수 있었
지." 그닥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나는 얼이 빠진 노인네처럼 잠자코 있었다. 때로는 얼
마쯤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참고 있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나도 이제 그만큼은 나이를 먹었
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게 됐다.  "잘 들게. 자네의 모습은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일세. 
그것은 자네가 아니지만 역시 자네이기도 하지.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넨 누군가? 반대로  현
재 자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그 사람을 우선  떠올려 보게. 그게 바로 자네
의 모습이니 말일세." 무슨 뜻인지를 몰랐으므로 나는 멍청하니 그대로  있었다. "슬픔에 빠
진 아이처럼 골똘히 생각해 보게. 자네가 아니고 다른 어떤  이가 지금 지구의를 들고 여기 
앉아 있네. 자네는 멀리서 그 사람을 보고 있지. 짐작컨대 그이는 자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야." 그 말 뒤에 이상하게도 고통이 찾아와 나는 앉은 자세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이 
순간부터는 모습을 잃지 않도록 애쓰게. 혼자 있어 안 보일 때도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되네. 
그게 바로 상대의 모습이 된다 이말일세. 더불어 자신을 그렇게 쫓지 말게. 그럼 그  사람도 
스스로를 쫓게 되지. 자네는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엄격함  때문에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네." 그제야 나는 어렴풋이 그가 하고 있는 말을 알 듯했다.
  "우린 저마다 둘인 하나고 동시에 하나인 둘일세. 그런  식으로 세계는 자전과 공전이 동
시에 이뤄지고 있다 그 말일세. 이제 알겠나?" 나는 무턱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자기 모습을 생각하며 움직이게. 누누이 말하지만 그게 곧 그 사람의 모습이 되
므로 아주 조심조심해서 말일세. 또 만약에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게. 그 역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일세." 그가 
가방을 챙겨 들고 가드레일에서 일어났다. "자네는 방금 어떤 지나가던 자의 말을 엿들었네. 
하지만 그 말이 도움이 됐으면 싶네." 어떤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그 말을 듣자 나는 어쩌
면 그가 이순간 다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를 내 생의 어느 날 밤에 만난 최초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황량한 도시의 광장에서 뜻밖의 사도를 만나 묵시의 전언
을 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내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그는 옷자락을 추스르고 돌아
서더니 갈기 같은 흰머리를 날리며 서울역 청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둑한 광장을 가로
질러 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자동 카메라처럼 좇고 있다가 나는 지구의를 들고 벌떡 가드
레일에서 일어났다. 서울역이 그때는 내게 분명 생의 한  정거장이었는데 그가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면 어디로 가게 될지 끝내 알 수 없을 터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한편 절멸을 뜻하기도 하는 이 말을 되뇌이며  나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
갔다. 나는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와 몇 마디의 말을 더 주고받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대합
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막 올라가고 있는 그의 뒷자락을  손으로 잡아끌었다. 그는 아무렇지
도 않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고 이어 손목시계의 바늘부터  확인했다. 그러고는 계단을 마
저 올라가 나를 향해 의연하게  돌아섰다. "무얼 잊었는가?" 나는  필시 무언가를 잊어버린 
심정으로 속히 그걸 기억해 내려고 허둥거리는 몸짓을 했다. 이윽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은 고작 이러했다. "어딜 그리 서둘러 가고 있는 겁니까?" 그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더니 대
뜸 이런 화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는 오히려 등불이 가물거리는 곳
에 있다." 잠시 후  알게 되지만 그것은 유가  사상을 주체로 한 중국의  전통 미학을 다룬 
"화하미학"이란 책에 나오는 말이었다. "거기  등불이 가물거리는 곳으로 나는  가고 있네." 
그러나 나는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린 아득히 마주보고 있네." 내가 고
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는 개찰구를 빠져 나가는  행렬의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암표상처럼 그에게 바투 붙어 어기적거리며 개찰구까지 따라갔다. 그는  나를 외면한 채 내 
손에 들려 있는 지구의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그 따위  헷갈리는 말을 또 늘어놓았다. "천지
는 크게 아름다우나 말하지 않는다." "뭐라구요?"  답답한 마음에 나는 귀가 먹은 노인네인 
양 소리를 질러댔다. 개찰구를 막 통과하려는 참에 그가 옆으로 빠져 나오더니 이마에 내려
온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내 안에서는 지금 세상이 거듭나고 있네. 얼어붙었던  강물이 풀
려 흐르고 온 숲이 깨어나 인광의 비늘을 후득이며 떨고 있네. 또한 저기 먼 바다로부터 웬 
거인이 뗏목을 타고 뉘엿뉘엿 강물을 거슬러 오고 있음을  보고 있네." 거인이 뗏목을 타고 
강물을 거슬러 온다. "그리하여 내 가슴에선  일전의 폭퐁우가 다시 몰아치고 있네.  잠들어 
있던 세계가 슬슬 깨어나고 있단 말일세. 광장에 앉아 웬  사내가 들고 있는 지구의를 목격
한 순간부터."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이런 말을 주절주절 내뱉으며  그는 마지막 승객으로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고귀한 꿈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
아차렸다. 나는 그의 꿈이 오늘 밤만이라도 깨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돌아서 가고 있는 
그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그는  내 단말마의 외침을 듣고 반사적으로  돌아섰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지구의를 그를 향해  내밀었다. 그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기우뚱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그걸 내게 주겠단 말인가?"
  나는 그가 믿을 수 있게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갓 태어난 아기를 받아 들 듯 조심스럽게  지구의를 내게서 건네 받았다. 나는 
속삭이듯 그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한마디 한마디씩 되풀이했다. "천지는 크게 아름다우나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가 방긋이 웃으며 되받았다. "머뭇거리지 말고 문득 네 마음을 내
어라. '금강경'의 말씀." 나도 머리에 남아 있는  말이 하나 있길래 냉큼 맞장구를 쳤다. "자
성은 단박에 닦는 것이니 세우면 점차가 있으므로 세우지 않는다. '육조단경'의 말씀." "이로
써 오늘 두 사람이 깨달음의 대개와 통했다." 개찰구를  사이에 두고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그와 나는 도적들처럼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고 나자 이번에는 내가 오히려 서두는 마음이 
되어 그에게 발차 시각이 가까워졌음을  상기시켰다. "어서 내려가십시오. 늦겠습니다." "그
래, 이제야말로 급히 가야 하네. 그럼 지금부터 자네와 나는 각자 헤어져 제집 처마 아래 등
불이 가물거리는 곳에 서있기로 한걸세." "이쪽과 저쪽에서 마주보며."  그는 혼몽한 얼굴로 
지구의를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윽고 경부선 
열차가 서울역 구내를 빠져 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나서야 돌연 사무친 혼자가 되어 남아 
있는 어둠을 향해 돌아섰다. 

    23. 지평선 너머
  광장 곳곳엔 아직도 갈 데 없는 부랑자나 거지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배회하고 있었으
며 때마침 역으로 들어온 기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지친 몸을 끌고 출구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몰아쳐  가고 있는 광장 한가운데 서서  나는 그들의 모습을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가 지하도를  통해 서울역 반대편으로 나와 무심결에  시청역 
방향으로 내려갔다. 정신이 돌아온 것은 중앙일보사 앞을 지나 순화동을 빠져 나온 다음 프
라자 호텔이 마주보이는 건널목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왼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세종로와 
시청을 눈여겨보다 나는 덕수궁 담길을 따라 경향신문사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깊고 깊은 
어둠의 끝을 향해. 그리고 삼성병원을 보고 길을 건너 고가도로  밑을 지나 또 한참을 넋을 
잃고 걷다가 마침내 나는 밤의 수렁에 빠져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잃었다는 자각과 
함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보이는 건 문을 닫은 상점들과 거리에 세
워져 있는 차들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어쩌다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낯 모를 행인뿐이
었다.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그머니 부상하는 일말의 두려움을 쓸어 안으며 나는 검은  아가리
를 벌리고 있는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얼마를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한 잠시 안개가 
걷히듯 차츰 눈에 익은 건물과 거리와 공중  전화 부스와 이런 것들이 주위에 몰려와 있었
다.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나는  홍익대 근처 정확히 말하면 극동방송을  끼고 있는 주택가 
골목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 지레 당황한 마음에 얼른 시계를 
보니 얼추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더욱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곳이 은빈이 학교에 다닐 때 
세들어 살던 집 골목이었던 때문이었다. 어느 새 나는 그 집앞에까지 와 있었다. 야경꾼처럼 
골목에서 얼마를 서성거리다 나는 가물가물 빛이 보이는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자
정. 나는 길가에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서 있는 공중  전화 부스로 들어가 성산동으로 전
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어째 또 김성아였다. 여느 날 같았으면 작업을 마치고  연희
동으로 갔을 텐데 내일 출국하는  은빈이를 위해 함께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은빈은 잠이 
들어 있었다. "깨울까요?" 무덤덤한 소리로 나는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으나 나는 멀뚱하게 송수화기를 든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었더라도 아마 나는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내일 오후 2시 비행기예요.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다고 나는  메마른 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항에 나가 보도록 하세요. 그게 좋지 않겠어요?" 나가 봐야 하리라.  그러나 과연 그래야
만 하는지는 뚜렷이 알 수 없었다. 떠나는 마당에 또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내가 고집스럽게 송수화기를 붙들고 있자 그녀가 기웃기웃 주위를 두리번거리
는 눈치더니 은빈이에게 전해 줄 말은 없나요? 하고 물어 왔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김성아를 통해 전할 말은 아니었다.  내눈에는 
그때 밤의 빈 주차장, 새벽의 사막, 깊고 마른 우물,  두터운 검은 커튼, 날짜가 지난 신문...
이런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가  보도록 하세요." 그
녀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할말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싶어 내가 전화를 끊으려
고 하자 그녀가 아니, 잠깐만요!하더니 송수화기를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
고 나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뒤따르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이 묻어 있는 
은빈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여보세요." 이렇게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통화 상대가 나라
는 사실을 안 듯했다. 그와 동시에 멈칫 하고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말을 잃고 공중 전화 부스를 통해 어둠에 뒤덮인  거리만 멀뚱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거기 
어디예요." 종일 흐렸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풀풀 흩날리기 시작했다. "막 진눈깨비가 내리
기 시작한 오래 전의 거리." "왜 그런 곳에 있는 건데요." 택시  한 대가 위험천만하게도 급
히 우회전을 하며 피카소 거리로 질주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만 집에 들어가요." "당신도 알고 있어.  여기가 어딘지. 말하자면 일전의 그곳인데 마
침 바람까지 불어가고 있군." "그런말은 풍향계나 붙잡고 하세요." 풍향계. "어떤 경로를  통
해서인지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와 있어. 맨 처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에 말이지. 낙타나 
노새처럼 밤새 걸었어. 그래,  이제 차고에 들어가 편지를  벗고 그만 쉬어야겠어." "차고라
뇨." "마구간 말이야." 그녀는 한동안 무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당신은 여태 그 텔레
비전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군요. 게다가 지금은 냉장고 박스나  사과 궤짝처럼 거리에 버려
져 있구요." 아. 그렇군. 텔레비전이로군. "그래, 나는 어쩌면 당신과 최초의 몇 초이거나 최
후의 몇 초일 것 같은 순간을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숨을 죽이고 이쪽의 동정
을 엿보고 있었다. "화면 조정 시간이 끝나고 텔레비전에서 마침내 흐릿한 영상을 내보내고 
있군. 첫 번째 장면은 아까도 말했듯이 차고 안이야. 거기 한쌍의 남녀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에 냄비를 올려 놓고 물을 끓이고 있군." 내 말에  그녀는 은근히 겁을 집어먹은 듯했고 목
구멍이 떠는 소리로 재촉하듯 물어  왔다. "당신 어디에 가  있는 거예요?" "텔레비전 박스 
안이거나 공중 전화 부스거나 그렇지." "엉터리 그림 그리지 말고 독도법으로 얘기해요." 독
도법. 지도를 보고 얘기하란 말이지. "그때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태백에서 돌아온 바로  그 
지점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나도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군. 아까는 달에 
올라가 앉아 있었는데 정거장을 나와 밤새 걷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여기더군. 그렇
다면 무사 귀환한 셈이겠지." 그쯤에서 그녀는 대충의 정황을 눈치챈 듯했다. 목을 가다듬고 
나서 그녀가 물어 왔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예요." "어디로 가든 그게 텔레비전 박스 안이
라면 사실 움직일 필요가 없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이제  누가 그만 전원 코드를 빼줬으면 
싶어. 당장 나는 미치도록 자고 싶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텔레비
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싶어." 그녀는 다시금 접속 불량으로 칙칙거리기 시작하는 화
면에다 대고 더듬더듬 말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그 말은 정확히 수신되지 않았다.
  "이제...그만...집...당신...그때...밖에...있는...이잖..." "뭐라고?"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
는 들려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잡음이 사라지고 나서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니 전화
가 끊겨 있었다. 일부러 끊은 것도 아닌 듯한데 아무튼 불시에 먹통이 돼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집어 넣으려고 하다가 나는 그만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스 안에 무릎을 꺾고 
웅크려 앉았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하루살이 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진눈깨비를 바라보
고 있었다. 누군가 밤사이에 슬그머니 대다 버린 마네킹같은 모습으로. 그래, 어쨌거나 이제
는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거야. 나수연이 생각난 것은  새벽 1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가을
이 되면 호주에 있는 사막에  가 있겠다고 했는데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성북동 집에서 쿨쿨 자고  있겠지. 망설임 끝에 나는 그녀
의 집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심야 통신을 시도했다. 굳게 닫혀 있으리라 믿었던 문이 의외로 
쉽게 열리듯 그녀, 나수연의, 네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밤이 아니고 맑은 아
침에 전화를 받는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현실감을 읽고 약 오  초간이나 길게 허둥거렸고 
그 이유는 그녀의 목소리가 예의 멍멍한  중성에서 탄력있는 이십대 중반의 여자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갓 결혼이라도 한 신부처럼 느낌이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그녀
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나는 서먹한 기분에 사로잡혀 과연 이쪽이 누구라
는 걸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이쪽의 화답을 기다리
고 있었다. 나는 먼저 기침 소리부터 내고 저음의 목청으로 입을 열었다. "근래 화장을 시작
한 모양이로군. 그래,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됐지."
  그녀는 내가 누구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수줍은 웃음을 웃으며 반가운 대꾸의 말을 
던져 왔다. "아, 그이로군요." 그이? "그 사람, 그쪽, 아무튼  당신 말예요." 늘 그래 왔든 순
식간에 사람을 낭만에 젖게 하는 여자였다. 나는 몸을 고쳐 앉으며 그녀와의 화답을 시작했
다. "난 그대가 엊그제 결혼한 줄로만 알았어. 밤의 그쪽에서 신부들이 즐겨 쓰는 화장품 냄
새가 나더란 말씀야. 그래, 신랑은 아직 귀가치 않으셨나 보지?"  "후후, 여전하시네요. 그런
데 맞아요, 저 얼마 전부터 화장 시작했어요." "그럼  미상불 혼례를 올렸단 말인가?" "학생 
신분이어서 아직 못했지만 신부가  될 준비는 하고 있어야죠.  후후." "그렇군. 그런데 왠지 
그 말을 들으니까 서운한데."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이긴 했지만 그건 얼마쯤 진심이기도 했
다. 내가 알고 있던 나수연이 불쑥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거의 삼 년 만에 저
는 제가 떠났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먼데 하얀 자전거의 환영을 보고 무작정 길을 떠났던 
늦가을의 교문 앞으로 말예요. 돌아보니 글쎄  저는 그 동안 지구를 한바퀴 다  돌았더군요. 
그래요, 언젠가 한 통의 전화쯤은  받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 데 제  느낌이 그대로 맞았어
요." 나는 그녀가 하고있는 말을  귀담아들으며 여태도 야릇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나 역시 그와 비슷한 고백을 했다. "나도 방금  먼데서 돌아왔지. 그러니까 말이야, 하얀 자
전거를 타고 달의 지평선을 돌아왔지. 늦가을의 교문 앞은 아니지만 나도 그와 같은 장소로 
말이야. 이런 기막힌 일이 있나. 자칫하면  서로 어디에 있는지 몰라 영영 목소리조차  듣지 
못할 뻔했잖아. 근사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녀는 며칠 전에야 호주의 사막에서 돌아왔
노라고 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학교  교문 앞으로 캥거루처럼 뛰어갔었노라고 
덧붙였다. 지금은 생의 리듬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며 다음 학기에 복할 거라는 말도  했다. 
"암, 모쪼록 그래야지?"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내 말을  받았다. "그쪽도 빙글빙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생각했어요.  우연히 저와 때가 겹쳐  정말이지 반가워요, 황금  마스
크." 황금 마스크.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였다. "그래,  빼빼로 공주, 사라반드." "하얀 자전거
와 황금 마스크의 추억이었어요." 이 말 끝에 그녀는 넌지시 이쪽의 소식을  물어왔다. 그건 
은빈의 얘기를 물어 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저 날이 밝으면 공항에 나가 봐야 할 것 같다고만  에둘러서 말했다.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는 음, 음, 또 무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애써 생각할 것 없어.  이제 그 신통
력도 빠져 나간 것 같으니 말이야. 그건 중성의 상태에서만 작동되는 거잖아." 그런가요? 하
고 그녀는 다시금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희미한 소리였다. 나는 생각이 나서 파리에서 만났
던 그녀의 오빠 나승지의 소식을 물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무정부주의자고 그래서 이방인
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사람이에요. 
  세계라는 암초에 부딪혀 북극해 같은 곳에 침몰해 있는  존재예요. 그러니 죽지도 썩지도 
않고 항상 그대로 얼음 인형으로 살아갈 사람 말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불행하다거
나 잘못됐다거나 하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예요. 세상의  어
느 한 사람한테는 영원한 존재인 사람말예요." 그녀는 아직도  마음 깊이 그를 사랑하고 있
었다. "저는 그 사람의 어머니예요. 그러니 어떻게 사랑을  그치고 그만 둘 수 있겠어요.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있는데 얼음 인형이 지난달에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 
그거야말로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로군." "그렇죠? 그런데  더 호들갑스럽게 말하고 싶은 것
은 그애가 글쎄 저를 닮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를 닮았다는 얘기로군." 방심을 하
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옛날처럼 하하거리고 남자처럼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 복원된 추억의 한순간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가 외롭게  중성으로 떨고 있던 순간들이 
몹시도 그립고 아쉬웠다. 내가 은근히  그런 말을 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물론 필요하다면 지금도 가끔은 작동 시킬 수  있노라고 짐짓 능청을 떨었다. "예를 
들어 그쪽 베란다의 화분들이 벌써부터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겠어요. 정신이 없더
라도 들여다보고 물 좀 주도록 하세요." 나는 오늘  밤 당장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베란다의 
화분들을 내다보았다. "거기 화분에 꽃이 피어 있을 때는  마치 정갈한 일본식 정원 같았어
요. 밤에 불을 켜놓으면 말예요. 하지만 그 집도 곧 없어지겠죠?" 없어지다니. "곧 없어져요. 
거긴 그쪽한테는 임시로 머물던 공간이었어요. 처음부터 저는  알고 있었어요." "길모퉁이에 
버려져 있는 텔레비전 박스 같은 데 말인가?" "네?"  "요컨대 공중 전화 부스 말이야." "네, 
이를 테면 그런 데죠. 하지만 거기 머무는 동안엔 화분에 물주는 거 절대로 잊지 말아요. 빼
빼로 공주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래,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생의 임시 공간에서였다. 그
리고 이제는 각자 자기라는 존재의 둘레를  한바퀴씩 힘겹게 돌아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녀와 나의 관계를 두고  달과 지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늘 세상  어딘가에서 
마주보고 있지만 결코 가까워질수 없는 그러나 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로 남
는... 그러한 잠시의 생각 끝에 나는 그녀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음을 깨달았고 마침내 작
별의 말을 심야 통신을 통해  전송했다. "안녕, 사라반드. 여름의 파리."  그러자 저쪽에서도 
이내 응대가 왔다. "안녕, 황금 마스크. 시르미오네." 그러고 나자  곧 영원히 시작되는 순간
처럼 주위가 온통 적막감에 휩싸이더니 문득 텔레비전이 꺼지듯 나수연이란 존재가 저쪽 어
딘가에서 팍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베란다의 불을 켜고 물뿌리개를 가져 와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약 오 분간  우두커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다가 집안의 불을 하나씩 차례로 끈 다음 이윽고 영원의 품에 안기는 
심정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가 있는 방을 들어갔다. 눈을 뜨니 아침 7였다. 눈을 뜨는 최
초의 순간에 느닷없이 몸을 싸안았던 생경한 느낌은 이사하는 날의 아침과도 같다는 것이었
다. 나는 가만히 눈을 뜬 채 누워 집 안에 있는 물건들-책상, 옷장, 오디오 세트, 물컵, 아프
리카 인형, 빨간 스탠드, 전화기, 탁상시계, 책, 거울, 카메라, 액자, 텔레비전-을 하나씩 생각
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어졌을 때 쓰레기와 먼지, 하고 8시 정각에 침대에
서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길게 샤워부터 했다. 그런  다음 바게트와 우유로 
아침을 먹고 대청소를 했다. 그날 9시 정각부터 정오까지. 정오가 되어 나는 옷장에서  짙은 
흰 줄무늬가 있는 감색 양복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꼼꼼히 접어 맨 다음 양
말을 신고 닦아 놓은 구두를 꺼내 신고 문을 나섰다. 날은 흐려 있었다. 잿빛 구름이 남쪽으
로부터 이동해 오고 있었다. 오후엔 비가 올지 모르겠어서 나는 우산을 챙겨 들고 아파트를 
나와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평일이었으므로 차는 금세 자유로로 들어서 행주대교
를 건너 오후 1시쯤에 국제선 2청사 앞에 멈춰 섰다. 2시 비행기라면 은빈이도 지금쯤엔 공
항에 도착해 있을 터이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 주차장에 
빽빽히 서 있는 승용차들과 입국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버스나 택시를 타고자 가방을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빈을 출국장에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알이탈리아 항공임을 알리는 전광판의 AZ 14:00라는 글자를 보며 나는 그녀가 이미 
탑승 수속을 마치고 어디 커피숍에라도 앉아 있지 않나 싶어 스낵코너와 흡연실과 구내 매
점을 기웃거렸고 대기석에 앉아 텔레비전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고  다녔
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나는 성산동으로 전화를 
넣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나는 보딩 시간이 되어 슬금슬금 출국 심사대가 있는 곳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흘끗거리며 발권 데스크로  다가가 출국자 명단을 확인해  보았다. 한데 
거기에도 은빈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예약자 명단에 기재돼있었으나 아직까지 탑승 수속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 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을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공항으로 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나는 다시  출국
자 게이트로 가서 심사대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그녀가 나타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끝내 오지 않았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편을 이용한다 하더라
도 국제선 2청사를 통해 나가게 돼 있으므로 여기로 오지 않았다면 어디 다른 곳에 가 있다
는 얘기였다. 불안스런 마음으로 출국 전광판을 쳐다보며 나는  급기야 보딩 시간이 마감되
고 오후 2시가 되어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출국자를 돌아 나왔다. 그리고 
활주로가 보이는 출국장 끝 계단 난간에서 서서 알이탈리아 항공기가 활주로로 슬슬 미끄러
져 이윽고 하늘로 치솟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는 대각선으로 얼마간 
치솟다가 서서히 수평을 유지한 다음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늘에도 땅에도 없다,  라
는 부재와 공허감에 나는 어쩐지 이국의 낯선 공항에 혼자 버려진 심정이었다.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도로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 대기석에 앉아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여행객들
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이럴땐 일단 숨을 멈추고 가만히 있어  보
는 거야. 오후 2시 30분이 되어 나는 아뜩한  현기증을 끌어안고 의자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출국장을 벗어 나왔다. 천천히 걸어,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야, 라
고 중얼거리며.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그 언젠가 축에서 도착한 나수연과 함께 버스를 타기 
위해 서 있던 1층 정류장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급기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항  주변은 
금세 뿌연 비안개에 가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때서야 나는 대합실 의
자에 우산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고 어쨌든 비를 맞고 돌아갈 수는 없었으므로 출
국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렇게 하루에 네 번씩이나. 내가 앉았던 자리에  우산
은 얌전히 45도 각도를 유지한 채 세워져 있었다. 나는 우산을 집어들고 1층 입국장으로 통
하는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래, 확실히 내가 무얼 잊고 있었단 말이다. 그녀는 입국자 대
기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책을 읽고 있었다.  핸드백에 단출한 바바리 코트 차림이
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옆 의자에  지팡이처럼 우산을 세워 잡고 앉았다. 그녀가  책을 
마저 읽을 때까지 기다릴 양으로(그녀는 물론 내가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그
머니 곁눈길로 보니 그녀는 230쪽을 읽고 있는 중이었고 그것은 언제나 나도 읽은 적이  있
는 책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다음 책장을 넘겼을 때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가 나타났고 
나는 그 첫 줄을 재빠르게 읽어냈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더 말하
지 않겠다. 묘사하는 즐거움보다는 행위의 은총을 특별 대우 할 줄 아는...) 운운.
  그것은 어제 내가 교보문고에서 읽고 스낵바에 놓고 온 책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각에 그
녀도 매장 안에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놀라움을 감추고 그녀가  246쪽까지 다 읽을 때까지 
얼음 인형을 흉내내 똑바로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책장을 덮고  핸드백을 열어 책을 
집어넣은 다음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늦었군요. 그 새 3시가 다 됐
어요." "아, 그래, 공항 구경을 하느라고 내가 조금 늦었지. 말하자면  나는 2층에 택시가 나
를 내려놓는 바람에 거기가 1층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거야." "우산 갖고 왔네요. 저는 비가 
올 줄 몰랐어요." 그녀와 나는 입국장을 빠져 나와 우산을 펴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그
리고 광화문으로 나가는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으므로 마치 
장마철에만 운행하는 전세버스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고 우리는 광화문에 나가 우선 늦은 점
심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해물 스파게티와 비오는 날의  노란 우산을 좋아하는 여자
였다. 

    에필로그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서 은빈은 다시 이탈리아로 갔다. 거기에 삼 년여 동안 남아있던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올 1월에 귀국해 모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구해 봄학기
부터 강의를 나갔다. 나는 성산동으로 짐을 꾸려 들어갔고  3월에 연극과 뮤지컬 공연을 기
획하는 단체에 일자리를 구해 출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되는 일
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생각이  나서 강 선생과 통화를 했고(한  번쯤 연락을 할 생각이었
다.) 혹시 알고 있나 싶어 김혜정의 소식을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2월 중순에 결혼을 
했다는 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허나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금은 남편의 직장이 있는 
속초에서 살고 있으니 가끔 통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강선생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왜냐고 묻자 그냥 건강이 좀 문제라며 구체적인 말은 피했다. 그러나 회복하게 
되면 횟집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뜻은 잘 모르겠으나  자신은 바닷물고기와 생래적으로 끊
지 못할 친화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화를 해줘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어려운 시절이 다시 와 있었다.
  6월에 은빈은 이탈리아에서 작업했던 작품들을 가지고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동주>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가 시작되던 날  김철하 송해란 부부가 갤러리로 우리를  찾아왔다. 
나로서도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각자 자리가 잡힐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저
녁에 그들 부부와 우리는 갤러리 근처에 있는 <버섯골>이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왕과 시
>란 카페에서 술을 마셨다. 그들 부부를 정식으로  초대한 것은 은빈이었다. 송해란은 오랜
만에 친언니를 보듯 볼이 달아올라 은빈의 손을 잡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정작 
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송해란이었다 뱃속에 5개월된 아이를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철
하는 선거가 끝난 뒤 두어 달 송해란의 학원 돕다가 얼마 전부터 환경운동연합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의미 있는 일이었고 그와 잘 어울리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 좀 서먹하던  분
위기는 차츰 화기를 찾아갔고 은빈과 송해란이 얘기에 몰두해 있는 동안 철하와 나도 그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아이를 갖게 된 걸 축하해." "고맙군. 자네 말대로 위대한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키우고 싶어. 뭘 해도 좋고 남루해도 좋아. 다만 삶의 의미를 의미있게 살 줄 
아는 인간이면 되는 거야. 사람은 분명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야. 역사에 속해 있는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앞뒤를 살펴 늘 새롭게 세계를 건축할 줄 아는 존재니 말이야." 밤이 늦었지
만 일행은 노래방까지 갔다. 송해란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은빈의 부탁 때문이었다.  거기서 
송해란은 <아침 이슬>을 불렀고 은빈은 이탈리아 말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불렀다. 돌
아온 밤엔 하늘에 사무치게 큰 달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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