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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광수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Casey,Riley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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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광수




    제1장 신화가 살아 있는 나라
    1. 지천에 소가 널렸어도 배고픈 나라?
  1986년 인도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인도 동부에 큰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죽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때 중앙지  제1면에 
"우리의 어머니 암소를 살립시다!  우리 모두 1,000루삐씩 기부하여 우리의 
어머니 암소를 살립시다!"라는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를 보고 나는  수업 중에 선생님께 따지듯이 물었다. "사람이  다 죽어
가는 판국에 사람을  살리자는 말은 없고 소를  살리자는 말만하니 이해할 
수가 없다." 인도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소에 대한 이런  관념을 이해
하기가 힘들다. 오히려  "인도인들은 소 때문에 가난해!"라든가 "소만 잡아
먹어도 굶어 죽는 거지는 없을  텐데!"라는 말을 쉽게 하게 된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한 외국 촌놈의 말을 묵묵히 들으시더니 몇 마디 풀어 놓
으셨다. 종교적 이유나 관념 체계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 인도는 우
리 모두 알다시피 매우 가난한 나라이다.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몰렸다고 치자.  이때 소를 하나 둘 다 잡아먹어  버리면 장차 
무엇으로 농사짓고 무엇으로 먹고 살겠는가? 또 소들을 잡아먹는다고 근본
적인 문제가 해결되는가? 소라도 잘  먹여야 우유라도 얻어 몇 사람이라도 
더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소마저 죽으면 또 그것을 먹고 연
명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별문제 없을 게고." 사실 이런 생각은  그 선생
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이국 땅에서  온 
나로서는 생각을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선뜻 납득이  안 
가고 납득이 갈  듯하면서도 이해가 안 가고...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
한 일일지도 모른다.

    소는 어머니이다
  인도에는 1982년 통계에 의하면 1억 9,000마리의 소가 있다. 인도는 세계 
소 인구(아니 우국?)의  6분의 1에 달하는 소를 가지고  있는, 세계 제일의 
소 보유국이다. 물론 인도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더욱이 소를 어머
니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며 숭배하고 있다.
  인도인들이 소를  숭배하게 된 것은  베다(Veda) 시대의  유목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유목민들에게 소는  매우 중요한 식량원으로서 부의  상징이었
다. 특히 소는  고기에서부터 똥, 오줌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것
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무한한 사랑과 희생처럼 비쳐져 소는 사
랑과 희생의  화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 시대 최고의 신인  인드라
(Indra)의 임무는 소를  많이 빼앗아 오는 일이었고 제사장의  주된 임무는 
소를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었다.
  소 보호 : 추운 겨울에 소를 따뜻하게 해 주고 있다. 소가 건강해야 농사
도 잘 짓고 풍요를 바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소는 자연스럽게 제사의  재물로 쓰이게 되었다.  제물로는 
소 외에도 여럿 있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소였다. 소를  많이 잡게 해 달
라고, 또 그렇게 잘  빌어 달라고 제사장에게 가장 소중한 소를  바쳤던 것
이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제사를 갈수록  더 복잡하게 형식화시켜 성대하게 치
렀다. 많은 소를  확보하는 것은 곧 그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한다는  것이었
고 동시에 권력의  장악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제사장 자리를  독점하고 
있던 브라만(Brahman)들은 제사를 성대하게 치름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내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대규모로 치러지는 제사는 곧 소의 손실을 의미
한다. 당시의 인도는  이미 농경이 정착되었던 때라 생산을 위해서는  소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도 전통은 계속 구태의연하게 그 자리를  맴돌고 있어
서 제사장들에 의한 대규모의 소 도살은 농업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등장한  종교가 불교(Buddhism)와  자이나교
(Jainism)이다. 힌두교(Hinduism)의 전통을 거부하고  나선 이들은 그 당시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한 왕과 상인,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경제 구조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잡아 갔다.
  부처는 소를 보호하도록 하였고 특히 암소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불교의 
불살생이라는 교리는 만방에  전파되었지만 사실은 소의 불살생이었다.  부
처는 불살생을 가르침으로써  소를 사회적으로 축적할 수  있도록 했고 더 
나아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제사장 중심인 힌두교의  심장
에 비수를 꽂는, 실로 엄청난 충격파였다.
  힌두교의 카스트(caste)  사회 질서가 이렇게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자 
브라만 제사장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불살생을 하나의 실천 계율로 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힌두 경전에  암소는 성스러운 신들이 살고  있는 영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똥에는 여신  락슈미(Lakshmi)가 살고 있고  가슴에는 스깐다
(Skanda) 신이, 이마에는  쉬바(Shiva) 신이, 혀에는 사라스와띠(Sarasvati) 
신이, 그의 '음메' 소리에는  베다의 네 여신들이, 그의 등에는 야마(Yama) 
신이, 그리고 우유 속에는 여신 강가(Ganga)가 살고 있다.
  끄리슈나 : 소를  보호하는 목자 끄리슈나가 소떼를 물가로 인도하고  있
다.
  힌두교의 제사장들이 소 보호를  채택하면서 소는 급격히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소 보호는 힌두교의 최고 세 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Vishnu)와 관
련되면서 발전해 갔다.  소 보호는 비슈누의 화신  끄리슈나(Krishna)의 몫
이다. 신화 속의  끄리슈나는 태어난 후 부모에게 버림받아 목자들에  의해 
거두어진다. 그들의 보호로 훌륭하게 성장한 끄리슈나는 힌두  최고의 신이 
되었고 소를 보호하는  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힌두교는 이렇게 소  숭배
의 정당성을 확보해 갔다.
  끄리슈나의 소 보호 신화는 제사의 신 인드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
화 속에서 인드라는 세상의 모든 소를 제물로 쓰기  위해 노획한다. 그런데 
그보다 한 수 위인  끄리슈나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버린다.  이에 크게 
노한 인드라가 세상에 홍수를 내려 모두 멸망시키려 했으나 끄리슈나는 산
을 쌓고 소들을 그 위로  대피시켜서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안전하게 보호
했다. 우리는  이 신화에서 구세주의  역할이 인드라에서 끄리슈나로  옮겨 
갔고 구원의  양식이 제사에서 보호, 즉  사랑과 헌신으로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끄리슈나가 인드라로부터 소를 보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힌두 
최대의 축제가 디왈리(Divali)이다. 이날이 되면  사람들은 끄리슈나의 탄생
지인 브린다완에 있는  고와르다나(Govardhana) 산을 숭배하는 의례를  치
른다. 원래 '고와르다나'라는  어휘는 '소(go)'를 '증가시키다(vardhana)'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이것이  변하여 '부(dhana)'를 증가시키기 위해 
'소똥(govar)'에 의례를 지낸다는 뜻이 되었다.

    암소가 생산하는 다섯 가지 성물
  암소가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받으면서  그가 배출하는 것들 또한 성스러
운 경지에 오르게  된다. 소를 성스럽게 여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배출물까
지 성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러나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러한 성물의 경지에 오른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우유, 우유를 발효
시켜 만든 고체 요구르트, 요구르트에서 추출해 만든  버터, 소똥, 소오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인도의 전통적인 힌두교-카스트 사회에서  무엇보다
도 중요한 정화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인도인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농촌이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집 담벼락에 소
똥을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이나  마당을 소똥으로 덧칠하는 것은 바로 부
정 막음이자  액막이의 하나이다. 또  엄격한 브라만들은 성스러운  경전이 
있는 서재를 소오줌으로  정화시키곤 한다.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  시체가 
빠졌다거나하여 물이 오염되었을 때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고 우물물을 다
섯 번 퍼낸 다음 그 안에 소오줌을 넣는데 소오줌이 정화력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벽에 바른 소똥 :  소똥도 말릴 겸 집안의 오염도 정화할 겸해서  담벼락
에 소똥을 붙여 말린다.
  다히(dahi)라는 고체 요구르트는  생유를 가열해 살균한 후  유산균을 넣
어 발효시킨 것인데, 하룻밤 정도 방치해 두면 우유가  신맛을 띠는 반고체 
상태로 된다. 이것은 밥과 함께 먹기도 하고 조미료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히를 뒤섞으면서 다시 가열하면 우수한 질의 버터 오일이 생기는데 이것
이 기(ghi)라고 하는 버터이다.  버터는 상온에서 고체 상태이기 때문에 장
기간 보존이 가능하고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여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요
리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다. 버터는 또한 약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목축
민들의 물물교환에서 중요한 물건으로 인정받기도 하는 등 이용 범위가 매
우 넓은데 인도 유제품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독실한 힌두들이 오염된 몸을 정화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 중에는 암소가 
생산하는 다섯 가지  정물-똥, 오줌, 우유, 요구르트,  버터-을 섞어 마시는 
것도 있다. 이  다섯 가지의 혼합 쥬스(?)는 부정을  몰아내는 데 오랫동안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 왔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찜찜했는지 내
용물이 약간 바뀌었다. 다섯 가지 가운데 소똥과 소오줌  대신 꿀과 설탕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갖는 의례적인 권위는 변함이 없다.

    착취하기 위해 숭배하는 소?
  암소가 생산하는 다섯 가지 성물  가운데 으뜸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우
유이다. 우유는 제사를 비롯해서 여러 의례 때 바치는  가장 깨끗한 음식이
다. 제사 불을 피울 때는  으레 우유를 정화시켜 만든 버터를 뿌린다. 소똥 
타는 연기와 불꽃에 쏟아 붓는 버터 타는 냄새가 섞여 하늘로 올라가면 신
들을 기분 좋게 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유는 우리 나라나 중국 사람들  체질에는 그리 잘 맞는 음식이 아니어
서 예로부터 우리의  식생활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인도 
사람들에겐 우유가 체질적으로 잘  맞는 데다 더운 환경에서는 요구르트와 
버터 같은 유제품이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우유는 그들 식생활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인도 농촌 사람들에게 우유 짜기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한 방울
의 우유라도 더 짜내기 위해  암소 주인은 박제된 가짜 송아지까지 대동할 
정도이다. 이것도 효력이  없을 경우에는 앞뒤로 구멍이 뚫린 파이프를  암
소의 음문에 쑤셔  넣고 바람을 훅 불거나 암소의  꼬리를 제 음문에 집어 
넣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소 젖의 주인은  송아지가 아니고 사람이 된다. 
또 황소는 얼마나  착취당하는가! 인도의 황소만큼 무거운 짐을 지는  경우
가 또 있을까? 또 소가 무거운 짐에 힘이 부쳐 걸음을 잘못 옮기기라도 할
라치면 여지없이 긴 막대기로 소불알을 힘껏 때린다. 그러면  소는 펄쩍 뛰
다시피하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황소가 논밭에서 일 잘 하는  거야 새삼 언
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암소가 우유를 주고 황소를 낳아  주니 이처럼 고마운 존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종자 자체가 가뭄과 더위를 잘 견디는 흑소이다 보니 인
도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 
특히 암소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라만의 권위, 소의 신성
  역사적으로 암소가 보호의 대상이  되면서 카스트 제도와 연결되다 보니 
자연히 카스트 체계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만과 관련되
었다. 브라만은 의례를  집전하는 자로서 제사에서 주로 암소의 다섯  가지 
생산물을 다루었다.  반면에 가장 낮은  위치의 불가촉민은 성스러운  소의 
부정, 즉 소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었다. 인도에서 최하위의 부가촉민
인 짜마르(Chamar)는  소가죽으로 신발 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인도 
남부의 빠라이야르(Paraiyar)는 소가죽으로 만든  북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 
예인이다. 이발사나 세탁부  같은 계급들도 매우 낮은 계급에 속하지만  짜
마르나 빠라이야르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다. 그들은 소의  부정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암소의 신성성은 카스트 사회에서  사제인 브라만이 스스로를 정의 존재
로 승격시켜  최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촉민을 
부정의 존재로  만들어 사회적 불구로 남게  했다. 한 사회 내에서  일정한 
집단이 부정한 직업을 갖는 것은  다른 집단이 정한 직업을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불가촉민의 부정 개념은 브라만의 정  개
념에서 따로 떼어 내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힌두 카스트 구조에서 양극단인 브라만과 불가촉민, 이  두 개의 집
단은 소의 신성성으로 인해 실존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 복합체의 신성 이미지를 먼저 해체하지  않은 채 불가촉
민성의 사회적 철폐를 시도한다거나, 브라만의 독점적 지위의  해체를 주장
하는 것은 실효성의 측면에서 볼 때 지극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2. 깔리! 악마를 죽이는 우리 엄마
  중국 신화를 보면 인간의 기원은 여와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다. 여와는 천지가 처음 열리자,  흙을 파고 그것을 물로 반죽해 사람 모양
을 만들었다. 아주 바쁘게 일하며 잠시도 쉬지 않았으나 이내 힘이 부쳤다. 
그래서 새끼줄을 그 반죽 속에  담갔다가 땅에 내려 놓으니 그것들이 살아 
움직여 사람들이 되었다.
  이러한 중국판 창조 신화에서 여와라는 여인은 전형적인  어머니 신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 창조 신화의 한켠에도 어머니 신의 흔적이 보인
다. 웅녀가 바로 우리의 어머니 신이다. 오랜 동굴 생활 끝에 사람이 된 웅
녀는 단군을 낳는다. 이때 동굴은 바로 웅녀의 자궁을 상징한다.
  어머니 신은 창조니 신화니 하는 거창한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 살고 있는 집의 허름한 처마 밑에도 우리의 어머니  신은 있다. 바로 삼
신할매이다. 할매가 웬  어머니 신이냐고 되묻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천만
의 말씀이다. 우리  전통에서는 자식에 관한 모든 권리를 어미의  시부모가 
갖고 있기 때문에 출산과 관련된 주요 권리 또한 할매에게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할매는 결국 시어미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보호하는 어머니 신
  세상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어머니 신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여자들에
게 아기를 점지해 주고, 아기를 어머니의 자궁에서 안전하게  빼내 주는 역
할을 주로 한다. 힌두교에서는  락샤시 자라(Rakshasi Jara)가 이러한 어머
니 신의 전형이다. 힌두  신화를 보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두  왕비 이야기
가 나온다. 그들은 서로 왕의 아기를 잉태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써 보지
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아이를 갖고자 하는 것이 사랑 때문
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임을 락샤시 자라 신이 꿰뚫어보고 아기
를 점지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각각 반쪽의 아기
를 낳게 되지만, 이내 그  반쪽 아기들을 밖으로 내동댕이친다. 이때 그 반
쪽 아기들을 하나로 합쳐서 완전한 아기로 탄생시키는 일을 락샤시 자라가 
한다. 고귀한 생명 보호의 정신이다.
  어머니 신 샤슈티(Shashthi)  역시 같은 일을 한다.  태초에 어떤 왕비가 
12년 동안의 임신 끝에 아기를 낳았는데 죽은 아기였다.  그러자 샤슈티 신
이 나타나 그 아기를 다시 소생시켰다고 한다.
  이 샤슈티 신을 벵갈 지방의 여인네들은 굳게 믿고  따른다. 여인들은 해
산 후 엿새째가 되면  항상 이 샤슈티에게 정성껏 의례를 바친다.  이때 어
린아이들은 조개를 목에  달고 다니는데 이 조개가 바로 여신  샤슈티이다. 
조개를 달고 다니는 것은  샤슈티가 아이들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어서이다. 그들에게 샤슈티는 항상 어린아이들을 보호해 주는  신이기 때
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나 세계 각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조개 목걸이, 조개 팔찌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린 
부적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님으로써 특히 여자나 아이들 심지어 가축
들까지도 액운이나 질병, 불임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종교적 상징 분석의  대가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그의 저
서 [이미지와 상징](Images et Symboles)에서 조개가 악령이나  주술을 막
는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여성 생식기의  외음부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듯 아기를 수호하고 나아가 액막이의 역할을 해 주는 어머니 신에서 
우리는 자애롭고 친근한  엄마의 모습을 본다. 자애로운 어머니 신을  이야
기하니, 불교 설화에 나오는 하리띠(Hariti)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하
리띠는 원래 아기들을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그런데 이 못된 하리띠가  부
처님의 말씀에 교화되어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지난 세월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아기를  수호하는 여신이 되었고 
수많은 아기들을 액과 질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고 한다.

    질병을 가져다 주는 어머니 신
  이 세상에 자식을 낳고 잘 키우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도처에서 자
식이 병들고 죽고 하는데,  그런 일을 겪는 어미의 심정은 어떨까?  그것을 
신의 저주요 천벌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상심을 바탕으로, 이성으
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을  가져다 주
고, 자식을 보호해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신이 그 혹독한 저주  또한 내린
다고 생각했다. 옛날  인도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회였다. 낳으면 죽고 또 
낳으면 죽고 하는 그 무서운 일은 바로 이 신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
다.
  풍요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곧 황폐함을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요,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의 자애로움은 동시에 파괴를  가져다 주는 잔인
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힌두교 특유의  논리에서 나온 것
이다. 그들은 세상을 결국 하나로 보았으니 생산은 곧  파괴요 죽음은 창조
와 일치한다. 힌두교 최고의 신 쉬바가 피를 부르는  징벌의 신이고 질병을 
주관하는 신이면서 동시에 우주적 생산을 주재하는 신인 것도 이런 논리에
서 나온 것이다.
  아기를 보호하는 어머니 신 역시 예외가 아니니, 어머니  신인 동시에 악
령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힌두교에서는 병을 주재하는  역할도 어머니 신이 된다. 가장 널리  숭배
되는 질병의 신은 천연두의 신  쉬딸라(Shitala)이다. 쉬딸라는 힌두뿐만 아
니라 이슬람 교도들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대중적이다. 그녀는 
미개한 부족민들부터 교육받은 인텔리층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그녀는 특히 약사들의 숭배의 대상이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쉬딸라에게 매달린다. 일단 그녀의  저주를 받으면 몰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쉬딸라는 눈이 셋이고 몸은 하얗다. 한 손엔 빗자루를 들
고 또 다른 손엔 물이 가득 찬 항아리를 들고  있다. 나귀에 올라타 있는데 
발가벗은 몸을 금과  진주로 장식하고 있다. 나체?  물론이다. 아기 수호든 
질병이든 기본적으로 모두 생산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생산은 발가벗음
에서 나온다. 벗지 않고  생산할 수 있겠는가? 쉬딸라의 그 괴상한  모습은 
인도 약국의 처방전에 항상 그려져 있다. 일종의 부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쉬딸라의 우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들은  매끈한 돌에 못 같은 것으
로 자국을 파고 그걸  쉬딸라로 삼는다. 이는 결국 매끈한 여자의  몸에 남
자의 날카로운 물건으로  자국을 만든 것이다. 쉬딸라의 사당은 마을  바깥
에 있는데  주로 큰 나무 밑이나  숲 속에 있다. 마하라슈뜨라  지역에서는 
님(nim)이라는 잎을 띄운 물로  이 우상을 목욕시키고 그 잎을 환자들에게 
뿌리는 세례 의식을 한다. 이는 의학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질
병이-특히 인도에서는  천연두가-민중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를 퇴치하는 것이 민중들의 가장 우선적인 바람이었음을 의미한다.
  쉬딸라는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른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깡까르 마
따, 풀마따, 마리 암마,  시딸람마, 강감마 등과 같이 대부분 엄마를 뜻하는 
마따(mata)나 암마(amma)와 관련되어  있다. '엄마'보다 더 포근하고  동시
에 무서운 존재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피에 목마른 여신
  또 다른 어머니 신의 모습을 살펴 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어머니'의 모
습을 찾아보자. 바로 '피에 목마른' 어머니 신들이다. 깔리(Kali)! 깔리는 악
마를 죽이는 신이다. 깔리는 잘라 낸 악마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 있다. 또 
다른 손으로는 잘린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다.  그것도 두 개골
로 만든 그릇으로 말이다. 목에는 해골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고 허리에
는 잘려진 손으로 만든  치마를 두르고 있다. 그의 얼굴은 항상  피를 갈구
하는 검붉은 혀로 상징된다. 정말 잔인한 모습이다.
  어떤 성화를  보면 깔리는 쉬바를 발로  짓누르고 서 있다. 그  주위에는 
까마귀들이 온갖  시체들을 뜯어 먹고 있다.  그 상황에서 깔리는 발  밑에 
짓눌려 있는 쉬바와  성교를 한다. 쉬바의 성기  역시 흥분된 상태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함인가? 이것은 깔리가 피를 부르면서 파괴하지만 그것은 결
국 생산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깔리는 쉬바의 아내이다. 그런데 그 아내가 
바깥 주인을 깔아 뭉개고 있다. 대단한 상황 역전이다.
  여신 깔리의  얼굴 : 낼름거리는 혀를  통해 피에 목마른 여신의  모습을 
본다.
  깔리처럼 '피에 목마른'  여신의 모습은 원시 시대에  성행했던, 산사람이
나 짐승을 제사의  공물로 바치던 희생제의 유산이다. 힌두 신화에서는  살
아 있는 사람이나 짐승을 제사의 공물로 바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라자스탄  지방의 전설에는  메와르 지방의 랑가  왕이 여신  짠디까
(Chandika)의 진노를 피하고자 아홉 왕자들을 산 채로 바치는 제사를 지냈
으나, 신의 목마름을 다 채우지 못해 왕 자신까지도  제물로 바쳐졌다는 이
야기가 나온다.
  이런 모습은 다른 종교에서는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오로지 힌두교
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이다. 왜 유독  힌두교에서만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깔리의  잔인성의 기원을 고대 사회의 불평
등 구조 속에서 찾는다. 깔리야말로 카스트와 사회, 경제의 착취 구조 속에
서 억압받던 민중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 주었을 
것이다.
  인간은 보통 자신의 힘으로 헤쳐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절대
자를 찾는다. 그것은  절대자가 자신의 기도 속에서나마 그의 손을  붙잡고 
하늘 나라 저편으로 인도해 주거나, 괴롭히는 악의 존재를  응징해 주기 때
문이다. 깔리는 후자의  역할을 해 왔다. 그것은  그들이 어렵고 두려울 때 
어머니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슈드라(Shudra), 불가촉민, 여성, 소작
인과 같이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자들은 지고의 어머니 신 깔리의 품안에
서 보호받고자 하며, 또한 그가 자신들을 괴롭히는 모든  문명과 문화를 처
절하게 응징해 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깔리는 못살고  핍박받고 착취당하면
서 사는 무지렁이들의 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잔인한 '어머니'의 모
습에서 전혀 잔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악마를  죽이는 그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여신 두르가 : 호랑이를 타고 악마를 무찌르는 여성 전사  두르가의 용맹
성이 보인다.
  깔리와는 또 다른 성격의 여신 두르가(Durga)도 있다. 여신 두르가는  깔
리와 마찬가지로 생산의 원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악을 응징하는 여신으로서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이다.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두르가는 백전  불패의 
전사이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창을,  또 다른 손에는 채찍을..., 그
녀는 수도 없이 많은 손으로 여러 가지 무기를 들고 악마를 물리친다.
  무지렁이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곧 이상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으로나 정신적으로, 물질과  경험의 세계에서 벗어나 초월의 세계로 갈  만
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  즉 생산이
었고, 생산은 탈물질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세계에 
집착함으로써 얻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산과 치병의 신으로  믿는 신들에게서 재앙을 받고 그러면서도 
그 신에 대한 숭배를 통해 복과 재물을 구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정신적 
근본이 물질 세계의  변화무쌍한 리듬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원리를 
'어머니'에서 찾는다. '어머니'는 초월의 세계로 나아가지  않고 경험의 세계
에 함께 있는, 그러면서 끝까지 물질을 가져다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래서 그들이나 우리나 어려울 때는 항상 어머니를 찾게 되는 것이다.

    3. 동서남북에 숨겨진 우주의 비밀을 찾아라
  천마총에 가 보았는가? 고대 신라인들의 우주가 숨겨져  있는 곳. 무덤의 
주인은 동쪽에 머리를 둔 채 서쪽을 향해 발을 뻗고  누워 있고, 그가 들어 
있는 관은  북쪽을 향하게 된다. 그가  누운 목곽의 서쪽에는 금으로  만든 
큰 귀고리, 유리로 만든 작은 곡옥, 여러 가지  토기들이 놓여 있고, 목곽의 
남쪽에는 제물이 놓여  있다. 동서남북마다 제 역할이 철저히 나뉘어  있는 
셈이다.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이렇게 방향을 정한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왕이 
들어가신 영원한 세계, 그  안에 우주를 축소하여 바쳤다. 중국의 진시황릉
에도, 불교에서  세운 탑들에도,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에도 우주의 원리가 
담겨 있다. 단지 문화의 특성에  따라 상징의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추구하
고자 하는 궁극적 의미는 다르지 않다. 그 우주의  비밀은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동서남북의 세계 안에서  얽히고설켜서 
살고 있다.

    동, 제사의 방향
  인도 사람들이 사는 집은 항상 동향이다.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짓
는 제단도 항상 동쪽을  향하고 있다. 그 안에 모셔진 불도  동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은 제사의  신이자 불의 신인 아그니(Agni)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신들이 사는  곳이요 영원한 천국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동쪽은 제사의 방향이며 브라만의 방향이다. 종교적으로  가장 성스
럽게 숭앙하는 방향이 바로 이 동쪽이다. 고대의 제사  가운데에는 소를 풀
어 주고 그가 가는  방향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이 있었다. 이때 풀어  준 소
가 동쪽을 향해 가는 것은, 제주가 가까운 시일에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
고, 궁극적으로는 극락 세계로 갈 것으로 풀이된다.
  스와스띠까(Svastika) : 축제 전야에 바닥에 그리는 상서로운 문양들로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동쪽과 관련된 징조들은  모두 길조이다. 그래서 결혼, 임신, 입문  등 길
조를 기대하는 양의 의식을 행할  때 땅바닥에 그리는 상서로운 무늬는 서
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긋는다. 이때  땅에 뿌리는 다르바(darba) 풀잎도 그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이파리들이 모두 동쪽을 향해 놓여  있다. 이 의식
에 참여한 사람들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며, 제사에 바쳐진  소의 머리 역
시 동쪽을 향한다.

    남, 염라대왕이 사는 곳
  동이 신이 다스리는 천상의 세계라면 남은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죽음 즉 
조상의 세계이다.  그곳은 지옥의 방향이고 그곳에는  죽음과 폭력이 있다. 
그래서 끄샤뜨리야(Kshatriya)의  방향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조상은 
복을 가져다 주고  후손들을 보호해 주는 존재이지만, 인도 사람들에게  조
상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들이 조상을 섬기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
이라기보다는 그 혼령이 자신들에게 화를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전통과 비교해 보면 원혼을 달래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소 점에서 
소가 남쪽으로 가는 패가  나오면, 그 제주는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지옥으로 불려가는  것
으로 풀이된다.
  남쪽과 관련된 징조들은  불길하거나 음의 의미를 갖는 것이 많다.  그래
서 아침 저녁으로  모시는 조상 제사나 아이가 태어나  세 살이 되는 해에 
행하는 체발식과 같이 음의 의미가 강한 경우가 남쪽과  관련되어 있다. 조
상 제사  때 바치는 제물은 항상  제사식장에 봉헌된 불의 남쪽에  놓이고, 
이때 뿌려진 다르바 풀잎 하나하나도 모두 남쪽을 향한다.  체발식 때도 가
위나 칼, 뜨거운 물을  담은 놋쇠 그릇 등 머리카락을 자르는  도구들은 모
두 제사 불을 기준으로 남쪽에 놓여야 한다. 같은  제물이더라도 조상의 혼
령을 달래기 위한 제사에 바치는 소의 머리는 남쪽을 향하게 된다.

    서, 동물의 세계
  서는 동물의  세계이다. 동물의 세계는 언제나  풍요롭다. 비록 어리석은 
인간들에 의해  자연계가 많이 훼손되어  멸종되어 가는 동물들도  많지만, 
그들의 세계는  원래 풍요 그 자체였다.  인도 사람들은 그 세계가  서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는 부와 생명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바
이샤(Vaisha)의 세계가  된다. 누구든 자손을  많이 두고  싶거나 가축들이 
새끼를 많이 낳게 하고 싶으면, 제단의 불을 서쪽으로  향하게 놓고 거기에 
공물을 바쳐야  한다. 그들은 부부 관계를  할 때 남자의 정자가  동쪽에서 
자궁으로 들어가고, 반면에 그  태는 서쪽에서 자라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
서 특별히 서는 처의 세계요 자손들의 세계이다. 소  점에서 소가 서쪽으로 
가면, 그 제주는 조만간에 자식이나 하인을 많이 두거나  추수 때에 풍작을 
맞게 된다.  보름달이 뜰 때 행하는,  풍요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의식 때 
키, 바구니, 절구, 절구공이 등을 서쪽에 향해 놓는  것 또한 서쪽이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는 그냥 서 자체이기 이전에, 동의 반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서는 신과  양과 정의 세계를 등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섣불리 
서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들이 집을 지을  때 서향으로 하지 않는  이유도 
많은 재물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의 세계를 등지고 싶지 않기 때문
이다. 재물이나 자손을  많이 갖고 싶으면 집을  남향으로 한다. 서는 동에 
대립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을 남이 대신 맡는 것으로 해석
하면 되겠다. 어차피 남은 서와 한 계열이니까, 초록이 청색과 동색이듯 말
이다.

    북, 사람들의 세계
  북은 사람들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사람들의 세계가  아니고 
신의 세계를  향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죽음의 세계를 향하지 않은  사람 
즉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세계이다. 그래서 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매우 낮고 속되고 오염된  그러나 활기차게 움직이는 살아  있는 
세상이다. 북은 병이 창궐하고 썩어 문드러지고 죄악이  판치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사람  사는 재미가 있기에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
다. 그래서 슈드라의 방향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방향이다.
  결혼이나 입문 의식 때 긋는 상서로운 문양은 서에서 동으로 세 줄을 그
은 후에 남에서 북을  향해 한 줄을 그어 마무리한다. 이때  바치는 음식들
은 모두 북쪽을 향해 놓는다. 의식을 행하는 중간  중간에 일어나는 동작들
은 모두 남에서 북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아이의 탄생  의례 때 산모가 아
이를 그 아비에게  넘길 때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결혼식에
서 하객들이 예물을 바칠 ㄸ 신랑은 신부의 남쪽에 서서 신부의 손을 잡고 
북쪽을 바라보며 의례를  행해야 한다. 남과 서가  동색의 관계일 때, 북은 
동과 동색의 관계를 유지한다. 전자가 음이고 후자가 양이다.

    완전한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
  우리 민족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왔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남쪽이야말로  이상의 방향이자  희망의 방향이었다.  그곳에서 
농업을 일으키고 그것을 발판으로 사회를 이루고 나아가  국가를 세웠으니, 
관념과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항상 남이 앞의 방향이요 양의 방향이요 정의 
방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향  집은 삼 대가 덕을 쌓아야 얻을 수 있다."
고 할 정도로  남이라는 방향을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다.  풍수적으
로도 앞쪽 즉 남쪽으로 강이 흐르고, 등 뒤인 북쪽으로  산이 둘러 있는 터
를 가장 좋은 명당으로 치고 있다.
  반면에 인도 사람들의 주류는  기원전 1500년경에 알프스 부근 어딘가에
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 땅에 들어왔다. 그들은 인도  아대륙 
북서쪽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지만, 원래 유목민인지라 이내  발걸음을 옮
겨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였다. 동쪽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그들은 농경
을 익혔고 그곳에서 점차 가족과 사회를 이루면서 정착  생활을 하였다. 동
쪽, 그곳에서  그들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셈이다. 네 가지  [베다](Veda), 
신에 대한 제사, 우주관,  사회 계급, 국가, 구원관 모두가 동쪽에서 이루어
졌다. 그래서 그들은 동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산다.
  얀뜨라(yantra) : 밀교에서 수행할 때 사용하는  신비한 도형. 동서남북과 
중앙이 균형을 이루어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동쪽에서 문명을 이룬 그들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가 자신들의 문명을 전
파하였다. 그래서 남은  정벌의 대상이자 교화의 대상이었다. 산스크리트어
(Sanskrit;범어)로 남쪽을 '닥쉰(dakshin)'이라 하는데, 이것이 영어화되면서 
'데칸(Deccan)'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닥쉰'에 바로 '오른쪽'이라
는 뜻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리아인(Aryan;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쓰고 기원전 1500년경  중앙 아시아로부터 인도나 이란으로 이주한 
고대 민족)들이 애초에 서에서 동으로 향할 때 남쪽은 그 방향에서 오른쪽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였기 때문
에 서가 오른쪽이고  동이 왼쪽이었다, 그래서 고구려 사신총 벽화에는  우
백호가 서쪽에 있고 좌청룡이 동쪽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오른쪽은 정의 방향이자 정상 방향이고, 왼쪽은  부정의 방향이
자 비정상  방향이다. 오른쪽은 성이고 왼쪽은  속이다. 그래서 입문식이나 
결혼식과 같이 정의  행위를 할 때는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도 오른쪽을 
자유롭게 하여 성사(sacred  thread;명주실로 된 끈으로 힌두교인들 가운데 
위의 세 계급만이 착용할 수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한  번 태어난 이후 종
교 의례를 통해  다시 한 번 태어났다는 표시이다)를  걸치고, 반대로 장례
나 조상 제사와 같은 부정의 행위를  할 때는 반대 방향 즉 오른쪽을 부자
연스럽게 하여 성사를  걸친다. 그러한 행위의 본질이 부정한 것이므로  성
사 걸이 또한 그에 걸맞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손바닥 장식 : 결혼식날 신부는  온갖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미는데, 상서
로운 무늬를 그리는 손바닥 장식도 빼놓을 수 없다.
  혼례식장 한가운데 불이 놓여 있다. 그리고 예식은 이  불을 중심으로 이
루어진다. 예식에서 신랑과 신부 그리고 사제와 하객들이 그  불을 도는 순
서가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잘 보면 모두 일정한 방향으로 돈다. 바로 오
른쪽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도구와 시설들은  철저히 오른쪽으로만 
놓여 있다. 신랑과 신부가 앉아 있는 방향 또한 오른쪽이다. 신랑도 그렇지
만 신부는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장신구로 치장한다.  그것도 화려한 것들
로 골라서 눈, 코, 귀,  이마, 목, 손가락, 발가락 등은 물론이고 손바닥에까
지 화려하고 상서로운 무늬를 그린다. 이것은 인도인들이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정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반면에 장례를 보면, 상주가 시신에 불을 붙인 후  타오르는 불을 중심으
로 왼쪽 방향으로 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돈다. 조
상에게 바치는 제물도 남쪽을 향해 놓고,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머리가 남
쪽을 향하도록 눕힌다.
  동서남북과 좌우가 만들어 내는 세계, 그것은 분명 좀더  나은 세계와 삶
에 대한 추구이자  완전한 세계에 대한 갈망이다. 이것을 힌두교의  세계관
에서 보면 신의 세계에 대한 귀소 행위이고, 우리의  풍수사상에서 보면 인
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신의 관계이다. 이 모두가 다 이상  사회의 실현
을 바라는 인간들의 소박한 꿈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그들만의 우주의 비
밀이 깃들여 있다.

    4.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는 나라
  인도에는 사람의 수만큼 많은 신이  있다고들 한다. 소, 말, 독수리, 코끼
리, 원숭이 등 모두가 신이다. 심지어는 쥐도 신이고  뱀도 신이다. 살아 있
는 모든 것들이 다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디 이뿐이랴? 
돌도 신이요 나무도 신이요 물도 신이요 불도 신이다.  강도 신이요 하늘도 
신이요 바람도 땅도 공기도 별도 모두 신이다.
  이 세상의 종교치고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종교가 어디 있을까마는 인도
의 힌두교만큼 실생활 모든 구석구석이  다 신의 세계와 깊이 관련된 나라
가 또 있을까? 인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신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자식의 이름
도 신의 이름을 따서  짓고 명절의 유래도 신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전체가 
하나로 뭉뚱그려진 것이 힌두교의 세계요 신의 천국이다.

    명멸하는 신들의 세계
  힌두교는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 모태가 되었다. 그들은  돌
을 숭배하였으니 그  영원함과 무거움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  인
더스(Indus)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들이 더해졌다. 그들은 땅
을 숭배하였으니 끊임없이  곡식을 생산해 내는 그 땅을 어머니로  여겼다. 
여기에 새로  들어온 아리아인의 신들이  또 추가되었다. 그들은  서쪽에서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며  긴 유목 생활을 하던 족속들이었다. 그래서  그
들은 폭풍우가 가장  두려웠고 소와 말을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로  여겼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여러 계통의  신들은 상황이 바뀌면 서로 싸우고 죽이
고 사랑하고 합치고 하면서 명멸해 갔다.
  어떤 신은 처음에는 지존의 위치에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으나 후
대에는 다른 신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신의 시중을 드는 일개 부하 신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경주 석굴암에는 부처를 지키는 금강신이라는  장수가 있
는데 그가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신이다. 금강신은  기원전 1500년경 인도 
땅에 들어온 아리아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던 폭풍우의 신 인드라이
다. 그는 적을 무찌르고 소를 빼앗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최고의 신이
었으나 후에 불교에  흡수되어 부처를 지키는 일개 장수로 전락한  것이다. 
또 어떤 신들은  초기에는 아예 이름도 없었다가  문화와 시대가 변하면서 
나중에 지존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인도 최고의 신 쉬바는 아리아인들이 모시던 신의 족보에 이름 한 자 올
리지 못했던 변변치  못한 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의 제왕이요  파괴
자이다. 또 어떤 신은 처음에는 혼자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 저것 흡
수한 결과 지금은 엄청난 군단을 장악하고 있기도 하다.  쉬바와 함께 힌두 
최고의 신으로 쌍벽을 이루는 비슈누가 바로 그런 신이다.  그는 아홉 명이
나 되는 화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에는 부처도  있다. 실제 역사상의 
인간 석가모니가  가상의 신 비슈누의 화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어떤 
신은 할 일을 다  해 이젠 더 이상 숭배 대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창조
주 브라흐마(Brahma)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창조는  이미 끝났고 우리는 
지금 보존과 파괴의 윤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힌두 신화의 
생명력에 대해  수꾸마리 바따짜르지(Sukumari Bhattacharji)는 그의  역저 
[인도 신통기](The Indian Theogony)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의 변화는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전은 삶이  시
작된 이래로 수많은 종족, 씨족, 가족들 간에 발생한 계속되는 갈등과 충돌 
속에서 만들어져 왔다. ...신들이 명멸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고가 유입되
고 그것이 기존의 사고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쉬바 : 춤추는 제왕인 쉬바의 우주  춤. 우주의 징벌이 그의 춤에서 비롯
된다.

    원숭이 신, 코끼리 신 그리고 뱀 신
  각각의 신들은 그를 따라 다니는 졸개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 역시 모
두 사람들의  추앙을 받기에 충분한 신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이다.
  하누만 : 라마를 충성스럽게 모시는 원숭이 신
  하누만은 신 라마(Rama)를  태우고 라마의 부인 시따(Sita)를 구하러 악
마의 소굴로 쳐들어간다.  대장 하누만을 좇아 졸개 원숭이들이 모두  모인
다. 대장은 하늘을 날아서 히말라야로 가 돌을 나르고  졸개들은 그 돌들을 
모아 다리를 놓는다. 그러고 나면 라마가 바다를 건너  악마를 무찌르러 간
다.
  인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이다. 우리로  치자
면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는 장면이다. 바다를 
건넌 후 라마는 악마를 물리치고 금의환향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현명한 왕
이 되었다.
  라마를 도운 원숭이 하누만은 어린 시절 태양빛에서 영양을 섭취해 성장
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람처럼 날아다닌다. 마치 손오공을 연상시킨다.  손
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구하듯 하누만은 라마를 도와 악마를 물리
친다. 하누만은 그  공으로 사람들로부터 영웅이라는 칭호를, 라마로부터는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도와 악마를  물리
치고 젊음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되었다. 인도 사람들이 원숭이를  정의의 
사도쯤으로 여기거나 자손을 점지해  주는 삼신할매쯤으로 여기는 것은 모
두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돈 없고 배경 없는  보통 사람일수록 매일매일의 
삶이 고달프다.  고단한 삶일수록 어려움은 더  많은데 어느 한 곳  의지할 
곳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인도의 보통 사람들은 원숭이  신 하누만에게 자
주 의지하곤 한다.
  인도 사람들이 하누만과 함께 가장 많이 모시는 신으로 배불뚝이 코끼리 
신 가네샤(Ganesha)가 있다. 가네샤는 부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꿈에 본 
바로 그 흰  코끼리이다. 부처는 새상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이
다. 그는  세상을 포기함과 동시에 세상을  정복했다. 세상을 포기함으로써 
우주의 진리를 다스리는 제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꿈 속에
서 거대하고 힘이 넘치는 코끼리로, 그것도 자연의 색이요 무욕의 색인 흰
색의 코끼리로 나타난 것이다.
  이 코끼리가 힌두교에서는 쉬바의 아들 가네샤로 나타난다.  가네샤는 긴 
코를 가진 코끼리의  얼굴과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얼굴에는 하나의 
이빨이 몸에는 네 개의 손이 있다. 그는 항상 쥐를  타고 다니거나 많은 쥐
떼를 거느리고 다닌다. 그의 상징인 긴 코와 머리는  지혜와 현명함을 뜻하
고 그가 타고 다니는 쥐는 끈기를 상징한다.
  가네샤 : 배불뚝이 코끼리 신 가네샤의 춤추는 모습
  인도에서 코끼리는 사람들의  일 가운데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인도인
들에게 코끼리는 전쟁터의 탱크요  짐을 나르는 트럭이요 공사장의 포크레
인이요 사람을 실어다  주는 자가용이다. 코끼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
으면 누구든 "허, 그 참 영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네샤는 배불뚝이이다. 영락없이  만고에 편안한 부자 나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가네샤는 어려움을 헤치고  풍요, 번영, 행운 그리고 평안을 가져다 
주는 신의 상징이다.  그런 연유로 외국인들의 눈에는 다소 괴상망측해  보
일지도 모르지만 가정의 부와 특히 사업의 번창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에게
서 복과 행운을 구한다.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이 집과  가게의 대문에 그를 
그린 성화를 걸어 놓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새  집으로 이사했을 때나 새
로이 사업을 시작할 때 은행에 새 구좌를 열었을 때,  혹은 멀리 출장을 갈 
때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는 사원에 처음 들어갈 때도 보통 그에게 헌화함
으로써 행운을 빈다. 책을 쓰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에게  먼저 축복과 행운
을 빈다. 그래서 많은 책의 첫머리에 '가네샤에게  경배를'이라는 문구가 적
혀 있다. 또 학생들의 노트 표지에도 흔히 등장하는데, 학생들은 시험을 앞
두고 그에게 과자를 바치며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
  인도 사람들이  널리 숭배하는 동물 신으로는  뱀을 뺄 수가 없다.  뱀은 
태초의 창조 과정에서  위대한 보조 역할을 수행하였다. 창조 작업은  비슈
누로부터 시작되었다. 비슈누는 영원한 명상에 들어가고 이어  그의 배꼽에
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오른다. 그 연꽃 속에서  브라흐마가 탄생하고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업을 완수한다. 이 위대한 창조가  바로 뱀의 품안에
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뱀은 곧 창조를 수호하는 신인 것이다.
  이 신화의 모티브가 우리의 [심청전] 안으로 들어 왔다.  효심 깊은 심청
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연꽃을 타고 나타나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였다. 
어둠에 빛을 주니 이  일이 바로 창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빛의 창조를 
수행한 심청의 수호신이 용왕이고, 그 용왕은 다름 아닌  힌두 창조 신화의 
뱀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뱀이 우리 사회 문화 속에서  용으로 탈바꿈한 것
인데, 우리가 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용왕이 비를 몰고  다니듯 이 뱀은 비를 몰고 다니는  신이다. 그래
서 인도 사람들,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은 뱀을 매우 상서롭게 여긴다. 그들
은 뱀이 곧 생산과 창조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뱀은 여전히 무
서운 존재이다. 그에게  물리면 모두 죽는다. 그  뱀을 쉬바가 정복했고 또 
부처가 정복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쉬바 신은 뱀을 목에 걸고 다니고, 인
도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진리의 법을 지키는 왕이 바로 뱀이다.  이러한 
연유로 용이 뱀의 역할을 대신하는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의 명랑법사는 서
해의 용왕에게 불법을  구했고, 문무왕은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자 한 것이다.
  인도의 관광지에 가면 땅꾼들이 코브라를 바구니에 넣고 피리를 불어 그
가 고개를 쳐들고 혀를 낼름거리며 춤을 추게 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이들이 뱀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면을 
인도 풍물의 전부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들을  위한 
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구나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고 전문적인 땅꾼 카스트들만이 하는 것이다.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
  힌두교에서는 실제 역사에서 활약한  영웅들이 신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마치 중국 사람들이 [삼국지]의 관운장을 집안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고대  인도의 역사를 보면  어디까지가 
신들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인간들의 실제 역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것은 인도 사람들이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점이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실제 역사 속의 인물인 최영 장군
이 신으로 섬겨진다고는 하지만 일부에서일 뿐이다. 신화에  나오는 단군이
나 박혁거세조차도 신으로서 합당한 섬김을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우리 민족의 평등 정신의 발로이다. 시쳇말로 풀어 보면, 네가 잘나
면 얼마나 잘났고  내가 못나면 얼마나 못났느냐 정도로  할 수 있지 않을
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금  왕족도 없고 천민도 없는 것일 게다.  우리에
게는 거대  신화도 없고 서사시도 없다.  우리 신화 속의 영웅들  이야기는 
탁월한 삶이나 비범한 성취의 이야기가 아닌 자연과 인간의 고난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성취해 온 것도 불타는  교육열
과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도 모두 이 평등 정신의  소산일 수 있다. 하지
만 졸부들의  부끄러운 모습, 분에  넘치는 과소비 그리고 '어글리  코리안' 
같은 평도 어쩌면 이 때문일 수 있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를 지
탱해 주는 '어른'이 없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 있는  마하뜨마 간디(Mahatma Gandhi)의 묘(엄밀하
게 말하자면 추념비이다)에 가 보면 인도인들의 사람 섬기는 모습을 잘 이
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여 주는 모습은 죽은 간디에 대한  추념의 차원을 
넘어 숭배의 수준이다.  간디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미 신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몇백 년  뒤에 간디가 라마나 끄리슈나와  같은 
또 하나의 신으로  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예는  마하라슈뜨라 
지역의 불가촉민들이 숭배하는  암베드까르(Ambedkar) 박사의 경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불가촉민의 해방자로서  그들의 추앙
을 한껏 받았다. 그가  죽은 후 많은 사람들이 집에다 그의  위패를 모시고 
그를 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그는 이미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힌두교의 
많은 종파들에서 이런 모습은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라즈니쉬(Rajneesh)나 사이 바바(Sai Baba)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이 된 사람 : 히말라야 산록의  어느 수도원에 있는 신상. 그 주인공은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신으로 숭배되는 것도 인도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도의 진짜 요가 수행자들을 보기 위해 히말라야  쪽으로 가 보았
을 때의  일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사'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많은  '도사'들이 수도하고 있는 것
은 사실이지만. 이런저런  요가 도량을 순례하다 한 군데에서 재미있는  장
면을 목격하였다.  요가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 요가를 가르치는  선생이자 
이 센터의 설립자인 사람의 영정을 모셔 놓고 그 위에 꽃다발을 걸고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는 등 숭배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 보통 옷차림으
로 나타난 그 선생에게 그들은  신으로서의 예우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
았다. 선생이 앉은 자리  앞에 모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박고서 선생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들을  외고... 영락없이 살아 있는 
신이었다. 그러던 그가 우리 일행과 같이 사진을 찍고  센터를 구경시켜 주
고는 기부금을 달라고 하였다. 역시 돈 이야기였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
이고 하는 짓도 보통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이미 신의 지위에 도달한 것이
다. 내가 통찰력이  떨어져 그를 못 알아본  것일까? 정녕 그는 살아  있는 
신일까?
  그래서 힌두교에는  신이 '갠지스(Ganges) 강의  모래알' 만큼이나 많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억의 인구가 만들어 낸  신들이 오죽 많겠는가? 
영겁의 세월 속에 부처가 있으면 그  전생의 부처가 있을 것이고 또 그 전
생의 부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인도 사람들의 인생 각 단계는 모두 신과 연계되어  있다. 태어났을 때부
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통과 의례에 각각의 신들이 연관되어 있다.  또 봄
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 가을, 겨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시 풍속에 신들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지겨운 겨울을 보내고 봄도  지나면 여름을 반기
는 축제를 끄리슈나 신이 여자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놀이에 빗대어 벌인
다. 더운 여름에 고생하며 지은 곡식을 수확한 다음에는  그에 감사하는 축
제를 라마 신이  금의환향하는 모습에 빗대어 벌인다. 농촌에서의 하루  일
과는 소에게 먹이를 주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소를 어머니로 숭배하는 행위
이다. 사람이 죽어  화장하면 강물에 뿌리는 것이 보통인데 어머니인  갠지
스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양이 된다. 이렇듯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
에 들  때까지 하루 24시간의 모든  생활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단계 하나하나가 신들의 뜻에 따라 그 의미가 새겨지는 것이다.
  이렇듯 힌두 신  모두는 그들을 믿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공존한다.  그
래서 하찮은 것이 없고 모두가 존중받을 만한 생명체이다.  나 또한 전생에 
저런 미물이었고 너  또한 그랬으리라. 누군들 다음 세상에서 저렇게  태어
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 속에서 산다.  그러니 다른 종교처럼 
성스러운 세계와 속된  세계가 따로 구별되지 않는다.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 힌두 인간의 세상이요 힌두 신들의 세계이다.  그 속에서 신도 
인간처럼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태어나고 죽고 또 윤회의 수레바퀴 속
에서 허덕이기도 하고... 이것이 힌두 신의 세계이자 인간의 세상인 것이다.
  여기에는 힌두 특유의  일원론적 우주관이 있다. 우주는 창조-보존-파괴
의 끝없는 순환 속에 있으며  파괴가 보존이고 보존이 창조이며 창조가 곧 
파괴라고 한다. 사람은 이 순환 가운데 나타나는 일개  유한한 존재일 뿐이
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분노, 자비와  공포는 
끊임없는 우주의 전개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 궁극적으로는 모
두 하나이다. 이 유일의  절대 진리가 세상 만물에 숨쉬고 있기  때문에 만
물은 결국 동일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도 그렇고 신들도  그렇고 
모든 존재는 이 거대한 우주의 진리 속에서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힌두 신의 세계는 무한하고  더불어 힌두 인간의 세계 또한 무한하
다.

    제2장 오염을 삶의 경계로 삼아
    1. 카스트란 무엇인가?
  어떤 외국인이 지금 당신에게 "What are you?"라고 물어 온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중고등학교 때 배운 영어를 되살려 "I'm a student."라고 
대답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좀더 근본적인  'what'에 대한 
물음, 즉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결혼하지 않은 남자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
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대답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386세대
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전라도  사람입니다."라는 대답도 
있을 수 있고,  "경주 이씨 성암공파입니다."라는 대답도 나올  수 있다. 그
러나 아마도 "회사원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삶이 직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어떨까? 그들도 우리처럼 다양한 대답
을 할 것이다. 물론 우리처럼 "회사원입니다."라는 대답이 많기는 하겠지만 
우리처럼 압도적  다수는 아닐 게다.  "벵갈 사람입니다."라는 대답도 있을 
것이다 "힌두입니다(힌두교도라는 뜻)."라는 대답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 "꿈하르(Kumhar)입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카스트를 대답하는 것일 게다.
  이는 인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카스트라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카스트를 알려 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대답이  되는 
셈이다.

    카스트의 신화
  '카스트(caste)'라는 말은 인도 고유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16세기경 포
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인도 땅에  들어와 인도 사람들이 끼리끼리 사는 모
양새를 보고 자기 나라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인도 사람들이 끼리끼
리 모여 사는 모습을 보고 그 집단들이 각각 이질적이지 않고 단일한 것이
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신라 시대의 진골, 성골 
하는 식의 집단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나라 말의 '단일 혈
통의'라는 뜻을 가진  카스타(casta)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 카스타
가 영어화되면서 카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인도인들의 그 '끼리끼리' 집단은 '카스타'가 뜻하는 그런 단일 혈
통의 집단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 집단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여 카스타라는 어휘를  썼고 그래서 지금도 '카스트'의 이해와 적
용에 오해와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브라만의 복장  : 시대와 지역에 따라  브라만의 의상은 많은 변천을  해 
왔지만, 그들의 문화 독점욕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끄샤뜨리야의 복장 : 끄샤뜨리야의 입는 옷은 훨씬 더 다양한데, 이들 대
부분이 다양한 외래인이나 토착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디 인도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끼리끼리' 집단
을 어떻게  불렀을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불렀는데, 하나는  바르나
(Varna)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띠(Jati)라는 것이다. 자띠란 '같은 뿌리에
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뜻으로 바르나 안에서 다시 여럿으로 세분화된  집
단이다. 우리가 흔히 "인도에는  네 개의 카스트가 있다."고 할 때의 그 카
스트는 '바르나'이다. 브라만, 끄샤뜨리야, 바이샤 그리고  슈드라가 네 가지 
바르나이다.카스트 체계를 '사성제도'라고 할 때 그  성이란 바로 '바르나'이
다.
  바르나는 색(color)이라는  말이다. 원래의 뜻이  그렇다 보니, 카스트(즉 
바르나)가 인종 구분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하얀 피부
의 아리아인들이 인도 땅에 들어와 까만 피부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피부색
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여 바르나라고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
다. 그렇지만  이는 고대 인도의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데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식민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날조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견
해로 그  '끼리끼리' 집단이 하는 일(즉  직업)을 종교 의식에서 색이  가진 
상징성에 맞추어 정했다는 것도 있다. 브라만은 하얀색, 끄샤뜨리야는 빨간
색, 바이샤는 노란색, 슈드라는 검은색이라는 것이다.
  한편 신화를 통해  고유의 바르나를 부여받지 못한  불가촉민은 그 집합 
자체가 바르나와 같은 사회적 기능을 한다. 그들은 자띠의  성격을 갖는 마
하르(Mahar), 짜마르 등의 소집단들로 나뉜다.
  인도 사람들은  네 바르나가 태초의  인간에서 나왔다는 신호를  믿는다. 
그 신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태초에 마하  뿌루샤(Maha Purusha)라는 인간이 있었는데  그는 스스로 
태어나 존재하는 자였다. 그는 깊은 명상 뒤에 인간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를 제사지냈다. 그래서 그의  머리를 제사지내 브라만을, 팔을 제사지내 끄
샤뜨리야를, 배를 제사지내 바이샤를 그리고 발을 제사지내  슈드라를 지어 
냈다.
  교육을 시키는 브라만 : 베다와 경전들을 교육하는  일이야말로 브라만의 
최고 권리이자 의무이다.
  사람들은 신화를 믿는다. 그래서 태백산 웅녀의 끈질김으로  태어난 우리
이기에 은근과 끈기가  바로 우리의 기질이라고 믿는다. 이렇듯 인도  사람
들도 자신들의 신화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만이 태초 인간의  머리
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일과 교육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끄샤뜨
리야는 팔에서 나왔기 때문에 힘을 다해 싸우고 지켜야  하며, 바이샤는 배
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지런히 먹여 살려야 하고, 슈드라는 발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의  셋을 충실히 받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기가 막힌  상징이다. 원래 신화라는 것이  상징의 세계인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이야기야말로 사람들의  뇌리에 쏙쏙 들어갈 만큼 기상천외하
다.
  깔리 :  남편 쉬바를 깔고 서  있는 모습에서 강인하고 섬뜩한  여신상을 
보여 주는 한편,  쉬바와의 성교를 통해 생산자의  모습도 보여 준다. 악을 
징벌하는 여신인 깔리는 잔혹한 모습으로 나타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만, 
민중들을 보호하는 모성 또한 보여 준다.
  쉬바 : 파괴와 재건의  신인 쉬바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황소 위에서  춤
을 추고 있다. 그의 춤사위에서 파괴와 징벌을, 그의 남근에서 생산과 풍요
를 읽을 수 있다.
  빠르와띠 :  산신인 히말라야의 딸이자 쉬바의  부인. 현모양처의 상징이
다.
  짜끄라 : 진리와 법,  그리고 그것이 만방에 널리 퍼지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윤회의 수레바퀴이기도 하다.
  링가 안의 쉬바  : 링가는 쉬바의 남근을 상징한다.  생산을 주재하는 신 
쉬바가 자신의 링가 안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인도인들의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난디 : 쉬바 신의 충직한 자가용  황소. 쉬바 신을 모시는 사원 입구에는 
항상 난디 상이 있는데, 쉬바를 모시고 와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면사자상 : 아쇼까 왕이 명을 내려 사르나트에 세운 돌기둥  머리에 조
각되어 있는 사자상. 동서남북의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여 있다. 현재 인도의 국가 문장이다.
  쉬바와 갠지스 강 : 천상에서 쏟아져 내리는 장대한 물줄기를  쉬바가 머
리로 받아 땅으로 안착시키는 모습. 이렇게 해서 생겨난  강이 바로 갠지스
이며, 이로써 오랜  가뭄이 끝나고 풍요의 시절이 도래하게 되었다고  전해
진다.
  신성한 암소 : 인도인들은 암소의 몸 안에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신들
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비슈누와 뱀 :  비슈누는 브라흐마가 창조한 우주를 지키고 유지하는  신
이다. 뱀의 보호 속에서 태초의 명상 휴식에 잠겨 있는 비슈누의 모습
  락슈미 : 미와 행운의 여신. 풍요의 상징인 우유 바다로부터 솟아난 락슈
미는 비슈누의 아내로서 인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시는 신들 가운데 하
나이다.
  이렇게 태어난 네  계급 가운데 브라만, 끄샤뜨리야, 바이샤, 이  셋을 드
위자(dvija)라 불렀다. 드위자란 두  번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 번은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종교 의식을 통해 태어나기 때문에 
두 번 태어난  자인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를  주로 영접한 자는 거듭남을 
얻는다.'는 논리와 동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떤 사람이
든지 믿음을 통해 중생을 얻는  반면 힌두교에서는 세 계급의 혈통에서 태
어난 사람들만이 의식을  통해 중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을  치
를 자격이 없는 슈드라는 한 번밖에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
은 종교, 사회적으로 무자격자이다.  슈드라는 베다도 볼 수 없고 브라만들
로부터 의례 집전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는  고대 법전의 조항들은 
모두 여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마누법전]과 [문명 충돌론]
  고대 힌두 법전인 [마누법전]을  보면 슈드라를 짓누르고 억압하는 카스
트 사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마누법전] 제8장의 슈드라에  대한 경고 
사항을 보자.
  드위자의 이름과 태생을 무례하게 부르면 그 입에 손가락 길이 열 배 되
는 쇠못을 쳐야 한다.
  브라만에게 그 도리를  거만하게 가르치려 드는 자에게는  왕이 그 입과 
귀에 뜨거운 기름을 붓게 해야 한다.
  처참한 모습이다. 아무리  고대 사회라지만 정말로 이렇게 살았을까?  이
를 두고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대부분의 초창기  서양의 인도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들어 브라만들의 잔인한 착취와 슈드라의 철저한 예속 그리고 
그로 이한 인도 사회의 고착성을 강조했다. 법전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이
다. 반면에 서양이지만 인도 문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객관적이고 과학적
인 해석을 하였던 A.  L. 바샴(A. L. Basham)같은 이는 이와 반대의  해석
을 하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이야말로 브라만 중심의  구조에 대한 슈드라의 
반발과 갈등이 상당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실제로  쇠못
을 치거나 기름을 붓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제재 조치
가 법전에 나타난다는 것은 역으로  그만큼 그들의 반발로 인한 사회적 갈
등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법전이라는  것은 어디
까지나 당위성의 표현이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
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다른 데로  눈을 돌려, 미국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  충돌론](The Clash of Civilizaion)에 
담긴 논리를 생각해  보자. 미국 정부는 수년간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면
서 헌팅턴에게 옛 소련 붕괴 이후 재편되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연구
를 청탁하였다. 그들의 의도는 어떻게 하면 세계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안
정적으로 확립할까 하는 것이고, 이와 더불어 그 기도에  어떤 요소들이 걸
림들로 작용할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팅턴은 결론적으로, 
세계의 많은 지역-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옛 소련, 남아시아, 중동-에서 
법과 질서가 사라지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볼 때 많은 영역에서  문명이 
야만주의에 의해 밀려나고 있어 급기야는 세계의 암흑 시대라고 하는 전대 
미문의 현상이 인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문명'에 바탕
을 둔 미국과 유럽이  협력해야 '야만주의'가 일으키는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헌팅턴의 공격적  탐욕의 정신이며 동시에 [마누법전]을 지
탱하고 있는  정신이다. [문명 충돌론]의  미국 정부나 [마누법전]  당시의 
인도 정부나 똑같이 안정된 국제 또는 국내 질서의  확립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헌팅턴과 [마누법전]의 편찬자가 발견한, 사회를 전복할  만한 가장 
심각한 위험  요소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반발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였
다. 그래서 [문명 충돌론]은 '야만주의'를, [마누법전]은  '슈드라에 의한 윤
리 교육'을 기존의  사회 질서를 전복시킬 만한 적으로 규정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물리적 제재를 아끼지  않겠다고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탈식민, 탈근대주의가  야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이 가히 기존의 질서를 바꿀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마찬
가지로 [마누법전] 당시 사회의 슈드라들의 움직임도 야만적이지 않을뿐더
러 그 세력이  짓밟는다고 뿌리까지 으깨질 정도로  약한 것이 아니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야만주의'와 '슈드라주의'의  합리성과 정당성이 심하
게 왜곡되어 있고, 파상적으로 일어나는 그들의 저항이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에 대해 인도사의  태두인 R. S. 샤르마
(R. S. Sharma)는 그의 저서 [인도  고대사](Ancient India)에서 이렇게 말
하였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노예를 비롯한 생산자 계급들에  대한 억압
이 채찍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인도에서는 브라만적 세뇌 교육을 통해  형
성된 이데올로기로 바이샤와 슈드라에 대한 억압이 행해졌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구미 중심의 정복과 파괴의 문명 이데올로
기에 대항하여 탈식민주의와 탈근대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듯이, 인도 
고대 사회에서도 슈드라 계급은  브라만 중심의 카스트 이데올로기에 마냥 
굴종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밟힐수록 꿈틀거렸고 소리 높여 항거했으며, 
편협한 브라만들을 심하게  꾸짖기도 했다. 그것이 고대 인도 사회에서  변
화의 밑거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인도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 중심 역
할을 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인도 사회에서는 슈드라만도 못한 사람들도 있다. 아예  바르나에 속하지
도 못한 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가촉민이  바로 그들이다. 힌두 전통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사람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도 슈
드라는 그 탄생이 신하에 의거해  있는 반면 불가촉민들은 신화에서 그 존
재 근거조차 찾을 수 없으니 종교, 사회적으로 개 돼지와  다를 바 없는 존
재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는 불가촉민을 죽이는 것을 남의  집 
짐승을 죽여 손해를  입히는 것과 똑같이 취급하기도 했다. 창조  신하라는 
것은 곧 사람을 만든 이야기인데  거기에 나와 있지 않으니 그들은 사람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끼리끼리' 집단에  해당하는 이름도 붙여 주지  않은 
것이다. 보통 불가촉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편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카스트, 억압과 착취의 도구
  바르나는 역사적으로는 농경이 발달하고 생산이 풍부해지면서 발생한 계
급이 그 기원이다. 당시  사회가 제사를 통한 경제 행위 중심이다  보니 브
라만이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종교적으로 제사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잡일을 맡은 자들이  가장 낮은 슈드라로 자리잡은 것이다. 결국  바르나는 
사회적으로 계급과 동일한 역할을 해왔다. 브라만과 끄샤뜨리야는  지배 계
급의 역할을 해 왔고  바이샤 이하는 피지배 계급이 된 셈이다.  다시 말하
면 바르나는 사회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일 뿐이지 실생활 하나하나를 구분
하는 기준은 아니다.
  이러한 바르나에 비해 실생활  하나하나를 세세히 규제하는 단위는 자띠
이다. 우리가 흔히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같은  사람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
다."고 말할 때의 그 '카스트'가 곧 자띠이다. 사람들은 이 자띠를 기준으로 
직업을 규정하고 대대로 세습되며 서로서로 순위를 짓고 그 안에서 결혼과 
식생활 등을 규제한다. 인도 사회는 여러 카스트(자띠)들이 분업 관계를 유
지하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목수의 카스트로 태어난 자는 죽을  때
까지 목수이어야 하고, 토기공 부모를 둔 자는 자신도  토기공이 되어야 하
며, 세탁부의 아들은 세탁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세습성은 카스트 정신의 
중요한 원리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요즘은  두말
할 것도  없고 고대나 중세에도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예는  허다하다. 
가까운 예로, 고대와  중세의 수많은 왕조 가운데 끄샤뜨리야 카스트에  속
한 사람들이 세운 왕조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왕은 다 끄샤뜨리야가 된다. 
이는 끄샤뜨리야가 아닌 사람일지라도 칼만  잘 쓰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  왕은 곧바로 브라만에게 압력을 행사해 자신의  족보를 
끄샤뜨리야로 각색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또 가난한 브라만이  부유한 
슈드라에게 고용되어  집안 제사를 지내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브라만 
출신 창녀도 있고 슈드라 출신 학자도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의 서열
도 반드시 카스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돈과  힘이라는 새로운 물
질적 척도에 의해 사회적 순위가 결정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브라만 출
신 소작농이 슈드라 출신 지주 앞에  서면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됨은 두
말하면 잔소리이다.
  이렇듯 직업에 대한 규정과 세습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순위는 원칙
적으로는 매우 강력하게  규정되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융통성이  많았다. 
이에 비해  음식과 결혼에 대한 규제는  상당히 까다롭게 지켜져 왔다.  그 
가운데서도 음식, 음식  중에서도(음식에는 크게 물, 식사,  담배 세 가지가 
있다)물에 대한 규제가 가장 엄격하다. 그것은  공동체 사회 전체의 명의로 
된 불문율에 의해서이다. 이를 어기면 카스트 체계 밖으로  일시적 혹은 영
구적으로 추방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마을 안을 끌고  다니며 욕을 보이는 
것, 혹은 벌금을 물리는 것,  목욕을 포함한 정화 의례를 부과하는 것 등이 
있다.
  그렇지만 식사에 관한 여러  규제는 근대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점
점 완화되고 있다.  하지만 불가촉민과의 식사에는 아직도 큰 장벽이  버티
고 있다. 근래에 들어 정부와 여러 민간 단체들이  불가촉민과 같이 식사를 
하는 집회를 많이 열곤 했는데 그다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카스트가 가진 자들의  억압과 착취의 도구로 이용되어  온 것에 대해선 
부인할 수 없지만 이 제도 또한 역사의 발전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이다. 어
느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해 온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제도 속에서 민중들은 때때로 카스트의 단결을 통해  정치, 경제적 이득
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신분의 변동을 이루기도 했다.  그물망처럼 형성된 관
계들이 사회, 경제적 분업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어 그  안에서 고유의 직
업에 종사하는 한 최저의 생활은 보장된다. 이와 같이  카스트 제도는 나름
대로의 합리성을  가진 법이요, 효율성을  가진 체계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2.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고 소똥으로 밥짓고
  내가 가르치는  대학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갓 마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도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중에 "인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랬더니 '갠지스 강'이라
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간혹 갠지스 강을 세계  4대 문명의 발
상지인 인더스 강과 혼동하는 학생들이 있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만큼 갠지스 강의 정경은  인도의 대표적인 이미지의 하나로 우리에게
도 낯설지 않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죽어서는 자신의 몸을  태운 재가 그 강에 뿌려지기를 소원한다. 
이방인들의 눈엔 그저 평범할 뿐인, 아니 오히려 그  더러움이 심각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자아내기만 하는 그 강에 무슨 의
미가 담겨 있는 걸까?

    왜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할까?
  태초에 갠지스 강은 천상에서 흐르던 강이었다. 그 강은  비슈누 신의 발
가락에서 흘러나와 천상의  극락 세계 곳곳을 적셔 주는 풍요의  강이었다. 
그러던 중 지상에 큰 가뭄이 들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인 한 분이 갠
지스 강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를 소원하며 고행에 고행을 거듭한 결과 드
디어 갠지스 강을 지상으로 끌어내려도 좋다는 허락을 신들에게서 얻어 냈
다. 그런데 아뿔싸! 문제가 하나 생겼으니 그 장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땅
으로 곧바로 떨어진다면  이 땅의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버릴 것이 아닌
가. 이 사태를  염려한 쉬바 신이 결국  그의 머리로 강 물줄기를 받아  그 
물줄기들을 조각내어 땅에 안착시켰다. 그래서 갠지스 강은  쉬바의 머리칼
이요 쉬바가 목욕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 쉬바가  요가하는 자요 명상하는 
자이니 갠지스 강 또한 요가하는 곳이요 명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갠지스 강은 성소 중의 성소요 깨끗함 가운데 깨끗함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라나시(Varanasi)의  갠지스 
강에 가 보면 그  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럽다. 강  위쪽에는 화장터
가 있어 시신을  태우고 그 재를 강물에 뿌리는데  그 행렬이 끊이질 않는
다. 모르긴 해도 인도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유골이라는 것이 생각
보단 단단해서, 살은 금방 타  없어져 버리지만 뼈는 쉽게 타지 않는다. 우
리 나라의 화장터에  분쇄기가 설치되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갠지스 강에서 행하는 화장은 오직 나무 땔감으로만 하는 자연식이라 유골
이 그렇게 잘게 바스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갠지스 강에  뿌려진 유골 중에
는 완전히  바스러지지 않은 뼛조각 같은  게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연전의 상업영화 [쇼킹 아시아]에 나오는 장면처럼 해골이 둥둥 떠다닐 정
도는 아니다. 그런  경우가 있다 해도 아주  특별한 예외의 경우일 것이다. 
갠지스 강에 십수 번  가 봤지만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인도를 야만스
럽게 격하시키려는 서양인들의 '노력'이 구석구석에 배 있음을 알 수 있다.
  갠지스 강에서 빨래하는 여인 : 우리가 빨래 방망이로 두드려  빠는 것과
는 달리, 인도에서는 빨랫감을 잡고 바닥에 때려서 빤다.
  갠지스 강의 화장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목욕을 한다. 게다가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더 아래로 가면  빨래터도 있으니 그 물로  빨래를 
하고 그 아래로  가면 또 다른 화장터가  나오고 또 목욕을 하고...  이러니 
그 물이 더럽기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갠지스 강에
서 목욕을 하고자 그곳을 찾는 인파가 끊이질 않는다.  그 사람들의 눈에는 
강물이 더러워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단연코  그렇다. 지금은 델리  대학교 
교수인 나의 대학원 친구  말라이의 말을 빌리면 "그 강물은 화학적으로는 
더러울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깨끗하다."
  인도인들에게는 갠지스 강은 깨끗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염을 정화시
키는 힘도 가지고 있다.  갠지스 강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여러 정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정화 능력을 가진  강이 갠지스 강만은 
아니다. 인더스 강도 그렇고 야무나 강도 그렇다. 그리고 다른 많은 강들이 
그렇다. 하지만 갠지스  강이 성스러움이 가장 널리 인정되는 대표적인  강
이다. 갠지스 강 내에서도 강이 발원한 곳은 더욱더 성스럽게 여겨진다. 그
래서 전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여사를 화장한 유골은 갠지
스 강의 발원지에 뿌려졌다. 강과 강이 만나는 곳도  발원지와 더불어 성스
럽게 여겨지는 지역이다. 그래서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이  만나는 곳은 힌
두교의 대표적 성지이다. 그곳에는  특별한 날 예컨대 춘분이나 추분, 동지
나 하지, 보름날이나 그믐날,  일식이나 월식날 등에 많은 순례자들이 모인
다. 모두 죄를 씻고자 하는 마음으로 온 사람들인데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
를 이룬다. 이들은 사제가 일정한 신호를 보내면 모두  한꺼번에 강물에 뛰
어든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뛰어들다 보니 죽거나  다치
는 사고도 비일비재하다.
  강물의 정화 능력은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물
을 떠 와 장소를 옮겨 사용해도 된다.  또 보통의 물이라도 갠지스 강(혹은 
다른 성스러운 강)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면서 사용하면 갠지스 강물과 같
은 정화 능력을 갖게  된다고 믿는다. 물론 갠지스 강 그  자체보다는 성스
러운 힘이  부족하겠지만. 그래서 힌두교의  모든 사원에는 물탱크가  있고 
이곳에서는 여러 다양한 의례와 함께 정화 의례가 행해진다.

    소똥 말리기
  갠지스 강과 함께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정물로는  소똥이 있다. 엄밀
하게 말하자면, 소똥이라기보다는  소똥을 포함하여 암소가 생산하는  다섯 
가지의 성물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우유,  버터, 고체 요구르트, 소똥, 
소오줌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
은 뭐니뭐니 해도 소똥이다.
  인도의 농촌에서는 장마철이 지나고  건기가 오면 동네 아낙네들이 본격
적으로 몰두하는 일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소똥 말리기이다. 아낙네들은 
소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시피 하면서 소가 싼 똥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은 
소똥들을 잘 섞고  비벼서 작은 쟁반만한 덩어리를 만드는데, 물론  손으로 
비벼서 만든다. 그리고 그  소똥을 볕이 잘 드는 담벼락 같은  곳에 더덕더
덕 붙여 놓고 말린다. 담장에 붙어 있는 소똥은 연료로 쓰기 위한 것이다.
  인도같이 더운 나라에서는 소똥을 모아 말려서 취사용 땔감으로 쓰는 것
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소똥을 모으고 그것을  반죽
하고 말려서 저장하는 것이 아낙네들의  하루 일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이다. 농촌에서는 말린  소똥 덩어리를 도시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소똥 덩어리  만들기 : 연료로 쓰기  위해 소똥 반죽을 쟁반만한  크기의 
덩어리로 만든다.
  1996년 소똥 이용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인도 북부의 한 마을에서 몇 주 
동안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본 소똥의  양이 아마 평생 볼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아침에 눈떠 저녁에  눈감을 때까지 오로지 '소
똥, 소똥, 소똥... '  하루 종일 소똥만 보고 소똥 타령만 했었다.  그래도 지
겹지 않았던 것은  그 가운데 좋은 연구거리가 있었기 ㄸ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소똥 가스 시설이었다. 언뜻 보면 우리네 변소에  설치해 놓은 정화조
같이 생긴  저장 탱크에 소똥을 가득  채워 놓으면, 밑바닥에 깔린  소똥이 
발효하면서 가스를 배출한다. 이 천연 가스를 호스로  가스렌지에 연결시켜 
연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신하고 효율적인 것 같았던 이  아이디
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시설이 개인이 설치하기에는  비용
도 많이 들고, 필요한  만큼의 똥을 모으려면 소도 많이 있어야  하기 때문
이었다. 돈 있는  사람들에겐 유용하겠지만 돈 없는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그 정도를 운영할 만큼의  돈이 있는 사람들은 
엘피 가스를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그런 시설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소똥에서 나온 가스로  음식을 해 먹으면서 매우 흐뭇해 했
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정결하고 복된' 소똥에서 나온  가스로 요리
했으니 오죽하겠는가.
  '똥박사'로 널리 알려진 인류학자 전경수 교수가 1983년에 조사한 북제주
군 구좌읍  송당리에서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제주의 시설이나  인도의 
시설이나 원리면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똥에 대한 
인식의 현격한 차이였다.
  인도와는 달리 제주에서는 똥과 밥의 연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
다. 여기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상님
께 드리는 제삿밥만큼은 "똥불 태워 지을 수 없다."라는 논리였다. 결국 우
리처럼 똥과 밥의 연결에 대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문화 속세서는 이런 
시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도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이 활용하
는 것은 단순한 똥이 아니라 성스러운 어머니로 추앙받는  소의 똥이다. 그
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니 우리보다  훨씬 더 똥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
지만 소똥은 예외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돈이  없다. 그래서 '똥'과 
'밥'에 관한 문제에서, 우리에게는 사고방식이  걸림돌이 되지만 그들에게는 
돈이 걸림돌이 된 셈이다.

    소똥의 여러 가지 기능
  소똥은 신성하게 여겨지다 보니  땔감으로 쓰이기 전부터 이미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동네  아낙네들은 소똥을 모아 손으로 애써 덩어리를  만
들고 그것을  담벼락에 붙여 말린다. 이때  벽에 붙은 소똥 덩어리는  이미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집 바깥에서 들어올지 모르는  부정을 막는 것이
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부적으로 액막이를 하는 셈이라고나 할까?
  이 외에도 소똥을 물에 개서 집안 구석구석에 바르기도  한다. 특히 신성
한 곳에  발라 그곳이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한다. 아이의 출산시에  탯줄을 
끊어 주러 불가촉민이 왔다 가면 산모의 집안 여인들은 소똥 갠 것을 토방
에 바름으로써 그  불가촉민으로 인한 오염을 제거한다. 연중 계속되는  축
제와 의례 때가 되면 며칠 전부터 소똥을 개서 토방과 앞마당에 바르는 것
도 바로 집안 정화의 의미에서이다. 이런 목적이 아니더라도  일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소똥 갠  것으로 토방과 안뜰을 발라 준다. 인도식  장판 깔기인 
셈이다. 이는  물론 부정을 막자는 뜻이겠지만  실생활에 유용하기도 하다. 
묽게 개서 바른 소똥이 마르고  나면 똥 냄새도 없어지고 먼지를 쓸어내는 
비질을 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여러 모로 산뜻하고 상쾌해진다.
  중요한 종교 의례나 통과 의례  때에도 소똥은 자주 등장하여 정화와 부
정막이의 기능을 해 준다.  쉬바 신을 믿는 사람들은 성화 의례  때 고행자
들을 화장한 재를  몸에 칠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대신 소똥을 태운 재를 
몸에 바르는  경우도 있다. 모든 의례  때 사용하는 신성한 장소를  소똥을 
발라 정화시키며 그때 놓이는 성스러운  불을 붙이는 불씨도 소똥 말린 것
을 사용한다. 인도의  설날인 홀리(Holi) 때는 첫 짜빠띠(chapati)를 만들어 
먹는데 그것은 반드시 새로운 소똥 불꽃에 굽는다.
  인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갠지스 강에서 화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갠지스 강 화장터라는 것은 한정될 수밖에 없는 데다 땔감 등 화장
에 필요한 비용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돈까지 얹어 주면서 
미리 예약을 한다. 그러다 보니 제사장의 기세가 사뭇 당당하다. 그 양반에
게 밉보이면 대충  태우고 타다 만 것을 그냥  물에 뿌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것이 돈 문제로 귀결된다. 갠지스 강이 가
지고 있다는 그 정화의 힘 역시 돈으로 사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 돈 없
는 사람들은 죽어서  갠지스 강에 뿌려지는 게 어쩌면  사는 것보다 더 큰 
소망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똥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얼마든
지 구할 수 있고 그 위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모두에게 평
등하다. 그래서 소가 한없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3. 아침마다 만나는 황금의 요정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를 돌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도시의 하
수도 시설이다. 도시에 있는 집들 대부분이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고 또 많
은 집들이 저마다 목욕 시설을 갖추고 있는 데다 이들이 다시 변소와 연결
되어 있어  참 놀랍다. 변소에서 일을  보고 물로 뒤처리를 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광경을 보노라면 마치 내가 불과 몇 년  전에 폐허가 된 유적지
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곤 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기원전 2000년 이전의 일인데.
  그들이 내놓은 배설물은 하수도를 타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분뇨 
처리장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배설물은 각 가정에서  나
오는 오물들과 섞이게  된다. 그래서 배설물과 오물에서 나오는 심한  악취
를 막기 위해  하수관을 땅 밑에 묻고  그 위에 덮개까지 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 골목에는(시내 한복판이었는
데도) 덮개가 없는 하수구 뿐이었다. 이렇게  비교를 해 보니 인더스인들의 
청결 의식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럽에서도  이렇게 발달한 하수
도망은 기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하니 자그마치 2,000년 정도나  더 빠
른 셈이다. 
  모헨조다로의 거대한 목욕탕 : 5,000년 전 인더스 강가 언덕 위에서 펼쳐
졌을 정화 의례의 장관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들이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거대  도시인  모헨조다로
(Mohenjo-daro)에 큰 목욕탕이 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목욕탕은 인더스 문명 전역에 세워진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고, 
또 도시 중심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지배층들의 성채 한가운데 세
워져 있다. 목욕탕과 하수도를 가장 뛰어난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문명! 
그 주인공들은  왜 그렇게까지 청결에 집착했을까?  그들의 깨끗함에 대한 
의식이 이미 청결과 위생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정과 성의 관념에 도달
해 있지 않았을까? 그들의 후손들이  갠지스 강에서 그토록 정성스럽게 목
욕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똥을 제대로 누어야 브라만이다
  고대 힌두교도들은  똥을 오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똥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똥은 불결의 원천이고  우리 몸을 오염시킬 뿐만 이니라 결
국에는 영혼까지 오염시킨다고  믿었다. 그래서 똥을 누고 난 다음에는  반
드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했다. 부엌에 들어가야 하거나  종교적 의례를 앞
두고 있는 경우에는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나마 정화  의례를 행하기도 했
다.
  힌두교도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분인 브라만들의 똥누는 모습을 한번 살
펴보자. 우선 그는 부유하다. 그래서  집 안에 변소를 갖출 수 있는 여력은 
충분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집 안에 변소를 만들지 않거나, 있다고 해
도 이용하기를  꺼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똥을  누는 일이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해가  뜨기 전에 1리터 정도의 놋쇠 단지에 물을 담아  가
지고 집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밭으로 간다.
  그곳에 도착한  브라만은 옷을 벗기 전에  우선 신고 있던 신을  벗는다. 
다음으로 그는 목에 어슷하게 걸쳐 있는 성사를 귀에  걸친다. 그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이 땅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땅은 이제 곧  똥으로 오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는 허리띠로  자신의 눈을 가린다. 불결한 
아니 종교적으로 오염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혹여 성스러운 해나 신전 
혹은 다른 브라만들을  봄으로써 그들을 오염시킬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이
다. 물론 똥을 보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똥을 다 누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는 주위에서 흙을 한줌 집
어들어 우선 항문부터  닦는다. 그런 다음 손을  닦고 물로 헹군다. 손으로 
닦을 때는 반드시  왼손만 사용한다. 왼쪽은 부정한 쪽이고 오염된  쪽이기 
때문이다. 물로 헹굴 때는  오른손으로 물을 부어 손을 닦는다. 여기까지가 
끝나고 나면 남은 물로  입을 헹군다. 이것은 그가 오염을 만드는  죄를 저
질렀기 때문에  영혼을 정화시키는 차원에서  하는 의례 행위의  일종이다. 
입에 든 물을 뱉을 때도 물론 왼쪽으로 뱉는다.
  이렇듯 거의 종교 의례라 할 수 있을 만큼 까다로운 똥누기를 모든 사람
들이 다 따르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러한 까다로운 절차는 종교 전통에 가장  충실해
야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
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회적 차별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그걸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아주 무식하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더 원칙적으로  잘 따르느냐가 그 
사람과 그 집안의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
겠지만 이 네 가지만큼은 행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밭에서 똥누기가 즐겁다
  인도 사람들의  여행 보따리는 참 크다.  물론 나라가 크다 보니  이불도 
가져가고 솥도 가져가고 옷가지도 가져가느라 그런 것임은 어렵지 않게 이
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짐 가운데 꼭 빠지지 않는 게 하나  있는데 로따
(lota)라고 불리는, 놋쇠로  만든 물그릇이다. 이 필수품은 이동식 변기라고
나 할까? 이것만 있으면 어디에서든지 거기에 물을 채워 인적이 드문 곳으
로 가서  거림낌없이 똥을 눌 수  있다. 반면에 이것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똥을 누고 난 다음  뒤처리 방법이 난감해진다. 물론 로따 대신  빈 병이나 
깡통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화장지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똥을 닦고 그 휴지를 주위에 버리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대단한 실례 혹
은 그 이상을 저지르는  짓이다. 이는 화장지를 사용하는 것이 제  몸을 더
럽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불결한' 휴지를 남의  눈에 띄게 함으로써 다
른 사람들을 매우 불쾌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차같이 변소가  있고 그 안에 수도 시설과 조그마한 
바가지가 준비되어 있는  편리한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태반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에게 여행 필수품 제1호는 단연코  로따이다. 버스 여행
을 하다가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어떡할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곳이 
어디든지 그 사람이 누구든지  차를 세운다.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그래서 인적이 좀 뜸한 마을 어귀의 밭을 지날 때면 항상 앞일을 생각해서 
차를 세우고 남녀노소, 브라만, 불가촉민 너나 할 것  없이 볼일을 본다. 일
단 마을에 들어가면 용무를  보는 게 그리 편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
에 떡 본 김에 제사지내고 활 쏜 김에 코 푼다고 인도 사람들은 똥오줌 싸
는 김에 바람도 쐬고 이야기도 나눈다. 참으로 아기자기한 풍경이다.
  인도 사람들이 똥오줌을 밭에 가서 누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똥을 거름
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똥은 비록 유용하지만 더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과일밭에는 누지 않는다. 과일은 신에게 바
치는 제수용품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도 사람들이 변소로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밭에서는 그 '불결한' 행
동을 쉽게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똥을 눌 때 엉덩
이를 사람이 지나가는 쪽으로 두고 얼굴은 벽이나 숲  쪽을 향한다. 남자들
이 앉아서 오줌을 누는  것 역시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전
통 복장 자체가  서서 지퍼를 내리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양식 바지를 입은 사람도 앉아서 오줌을 누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불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여행과 똥이 얽혀 있는 곳이 있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바로 그곳이
다. 힌두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성지,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변은 온통 똥
으로 뒤범벅이다. 똥지뢰가 깔려  있는 셈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
은 이 모습에서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성지란  원래 사람들이 바글
바글 끓는 곳이다. 그것은 세속에서 더러워진 몸을 깨끗한  성지에 와서 씻
고자 하는 마음에서 너나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변소가 
없다. 인위적  공간을 전통적으로 싫어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인도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말은 그들의  정부가 청결한 
공중 변소를 꾸준히  유지할 만큼의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다. 도시에만 설치하고 유지한다 해도 그 넓은 땅덩어리에  얼마나 많은 돈
이 들겠는가.  외국 관광객들이 서울 시내에서  겪는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이 제대로 된 공중 변소가 없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많
이 모이는 곳에 있는  우리 변소의 상태는 끔찍할 지경이다. 우리가  이 지
경인데 하물며 인도의 경제력으로 오죽하겠는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화장지가 귀하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뉴델리의 고급 호텔에  가면 거리낌없이 화장지를 훔쳤다. 그 화장지는  겨
우 우리의 갱지  수준이었지만 아내의 화장을 비롯하여  살림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요즘은 인도의 화장지  질이 정말 몰라보게 좋아졌다. 이는 인도
의 전통적인 배변 방식이 적어도 도시에서는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이
다.
  인도의 똥누기 절차가 까다롭고  불결하다 하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이 있다.
  1996년 겨울, 연구와 인도 북부의  한 농촌에 답사 갔을 때였다. 우리 일
행은 마땅한 숙소가 없어 어떤  사람의 농장에서 원두막 역할을 하는 별채
를 사용했다. 물론 변소는 없었다. 그 주인은 인도에서 가장 큰 인구 1억의 
주정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현역  주의회 의원이었다. 그는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우리가 자고 있는 숙소 근처의 밭으로 와서 똥을 누고 크게 소리 
한 번 지르고 돌아가곤 했다.  물론 그의 집엔 수세식 변소가 있다. 그런데
도 그는 거기에서 일을  보지 않고 매일 밭으로 나왔다. 물 한 통  옆에 차
고 말이다. 그는 아침마다 밭에  있는 상큼한 요정을 만나고 간 것일 게다. 
그 요정은 아침마다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지금도 그때의 그 상큼한  기분
이 느껴지곤 한다.

    4. 죽기살기로 목욕하는 사람들
  인도 사람들은  매일 목욕을 한다.  그들이 목욕하는 모습은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그들은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다
른 사람들의 눈에 띌  것 같은 곳이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물론 여자들
은 다소 장소를 가리지만.
  그들이 목욕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목욕의 의미와 관련된 재미있
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아침에  목욕을 한다. 아침에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침에는  반드시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목
욕을 거르는 경우는 없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목욕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목욕을 하지  않은 채 하루 일을 시작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러고 보면 그들에게 목욕이란 단순히 건강을  위한 위생과 관
련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목욕'이라는 것은 무엇일
까? 그 내력과 의미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옷을 입고 하는 목욕
  그들은 절대로 알몸으로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식사하는  사
람이 알몸으로 식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마누법전]에서 가르치
고 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지금까지 목욕은 하되 옷을 입고 한다. 옷
을 입는다고는 하나 다  입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경우  웃옷은 벗고 
팬티를 입고 하거나 치마  같은 것을 두른 채로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사
리(sari) 같은 것을 입고 목욕을 한다. 옷을 벗지  않으니 남자가 여자들 앞
에서 목욕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여자도 남자들 앞에서 목욕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의 세수 정도로 여긴다고나  할까? 그래서 목욕
하는 걸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다. 옷 속으로  닦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
라면 그들의 목욕 실력은 감탄스러울 만큼 절묘하기까지 하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여인들 : 인도인들에게 목욕은  성스러운 강에서 
오염을 씻어 낸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강 중에서도 으뜸은  갠지스 
강이며, 대개 여자들이 목욕하는 곳은 따로 떨어져 있다.
  그걸 모르고 목욕을 한 적이  있었다. 옷을 훌렁 다 벗고 말이다. 1997년 
겨울, 인도 북부 우따르  쁘라데쉬 주의 한 마을에서 현지 조사를  할 때의 
일이다. 마을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  마을들 가운데쯤에 위
치한 도로변의  한 과수원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그날도 지프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니 온몸이 모래투성이가 되어 귓속
까지 모래가 찬 것  같았다. 날은 저물고 주위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
도 없고 해서 그냥  옷을 다 벗고 목욕을 했다. 그러고 나서 기분  좋게 새 
팬티를 입으려는데 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현지 조사를  도
와 주던 조수의 일갈이었다. "옷을 벗지 말고 목욕하세요!" 순간 나는 얼굴
이 달아올랐고(조수에게 당하는  꾸중이라니, 대단한 봉변이다) 본능적으로 
대꾸했다. "옷을 입고 하는 목욕이 어찌 옷을  벗고 하는 목욕을 나무랄 수 
있소?" 그랬더니 갈수록 가관이다.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라야지요, 다 
알 만한 분이... 에이, 나  원."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현
지 조사가로서는 빵점이었던 셈이다.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껍질을 입고 목욕하라.
  그 후론 [마누법전]에 나오는 이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적어도 
인도에 가서는 말이다.
  [마누법전]은 목욕하는 법에 관한 책인가 싶을 정도로 목욕에 관한 원칙
과 금기 사항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법규 가
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이 목욕한 웅덩이에서는 목욕하지 말고  항상 강, 물
웅덩이, 호수, 연못, 폭포 아래  같은 곳에서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 
시설을 갖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흐르는 냇가나 강에 가서 
목욕을 하거나 길가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바가지로 퍼서 끼얹으면서 목
욕을 한다. 물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집 주변 호수나 연못  같은 데서라
도 목욕을 하긴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니 인도 사람들에
게 우리의 대중탕 이야기를 해 주면 이맛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대중탕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 그리고 목욕에 그토록 악착같이(?) 
집착하는 이유는 힌두 고유의 '오염'에 대한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들은 사
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생산되거나 분비되는  것을 가장 불결하게  여긴다. 
그 불결은  단순한 더러움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된다고  믿는다. 
그로 인해 계급이  구분되고 사회 활동이 제약당한다. 그래서 오염에서  멀
리 떨어져 있는 것이 가장  가치있고 점잖은 생활이고 이러한 생활을 하는 
자는 자연히 높은 브라만들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낮은 불가촉민이나 
슈드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무엇이
든지 생명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인 셈이
다. 그래서 시체,  피, 가죽, 똥, 오줌, 침,  정액, 땀, 머리카락, 손발톱 등이 
사회적 삶 속으로  난입한 상태를 오염이라고 말한다. 생명이 죽음  가까이
에 있어서는 안 되고 마찬가지로  죽음이 생명 가까이에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탄생시킨 산모가  죽음을 태우는 장례에  참여해도 
안 되고 죽음을 맞이한 과부가 생명을  갓 본 산모에게 가 보아도 안 되는 
것이다.


    오염과 터부의 원천
  오염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시체이다. 시체를 터부시
하지 않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마는 시체가  지닌 오염의 위력이 인도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둔  순간부터 그의 가족과 집안 혹은 
마을 전체는  극도의 오염에 전염된다. 주검이  집안에 놓여 있을 땐  누구도 그 
집 안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떠한 정화  행위도 그 오
염의 위력은 약화시킬 수 없으며  사제가 와서 장례를 치르고 밖으로 내가는 것
만이 오염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동안 그 집에서는  물론이고 마을에
까지 모든 정결한 의례 행위가 중지된다. 심지어  사원에서 행사를 하고 있던 도
중이라도 옆집에서 초상이 나면 바로 중지된다.
  육식을 하지 않는 것도 이 시체의 오염과  관련이 있다. 육식이란 결국 시체를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식도  정결과 오염을 기준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소
고기를 먹는 자가 가장 많이 오염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
기, 생선,  달걀 순으로 오염의 지위가  결정된다. 카스트 서열상  중간에 위치한 
카스트들은 육식을 할 경우  주로 닭고기와 양고기를 먹고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먹지 않는다. 음식을  통해 자기의 정결성을 과시하여 남과 차별을  두려는 것이 
그들의 속내이다. 인도에서는  항상 채식주의가 정통으로 인정받고  육식을 하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브라만들은  채식주의자이고 불가촉민
들은 육식을 한다. 한편  채식에도 등급이 있으니, 최고의 정결을 유지하려는 자
는 마늘이나  파 같은 것은 먹지  않는다. 마늘이나 파는 뿌리  식물이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생명을 죽여 없애는 육식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원에서 신발이나 벨트를  착용하고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원래 신발이나 벨트는-지금은 합성제품이 많이  나와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가죽으로 만들고, 가죽은 동물 시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오염과 직업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카스트의 높고 낮음이 결정된
다. 그래서 소를 비롯한 짐승의 시체를 처리하는 자가 카스트상 가장 낮다. 여기
에는 단순한 시체  청소부도 있지만 제사때 쓸 소를  잡는 자도 있고 잡은 소를 
먹어 치우는 자들도 있다. 물론 돼지나 닭을  키우고 그것들을 잡아 시장에 내다 
파는 자들도 이에  속한다. 우리의 백정이 여기 카스트 체계에서도  똑같이 가장 
낮은 신분인  셈이다. 이들은 모두 불가촉민이다.  오죽 사람으로 치지 않았으면 
그들을 가리키는 고유의 이름도 없어서 그냥 영어로 'untouchables'라고 부를까? 
그들에게는 그만큼 오염과 가까이 있는 직업이  무서운 것이다. 소가죽으로 신발
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소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 역시 모
든 계급 중에서 최하층에 속한다. 이발사나 세탁부와  같은 계급도 매우 낮은 계
급이기는 하지만 이들보다는 더 높은 것도 그들이 성스러운 소의 오염과는 상관
이 없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상위 카스트 가운데서도 오염과의 긴밀도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 자기 직업
이 오염과 거리가 멀수록 지위가 높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반대로 낮아진다. 그
래서 같은  브라만이라도 사제보다는 학자가  더 높다. 사제는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항상 오염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제 가운데서도 
장례 의식을 담당하는 브라만이 가장 낮다. 항상  시체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
이다. 반면에 학자는  항상 베다 경전이나 그외 다른 성스러운  경전들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더 높은 것이다.
  오염과 관련된 사람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과부이
다. 과부란 남편이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그래서 과부는 항상 오염을 방출해 내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과부가 집안
의 어느 누구보다도 무조건 그리고 절대적으로 정결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부는 어떠한 상서로운 행사에도 나갈  수 없고 어떠한 축복된 자
리에도 참석할 수 없다. 항상 단순하고 깨끗한  옷만 입어야 하며 심한 경우에는 
고개를 들고 다녀서도  안 된다. 게다가 과부는 어차피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에 
집 안의 오염된 일들을 도맡아 해야 한다. 물론  그 오염된 일을 하고 나서 해야 
하는 정화 의례의 수준도 더 엄격하다.

    오염을 내뿜는 것들을 멀리 하라
  시체 다음으로 오염되었다고  여기는 것으로 피가 있다. 월경 중인  여자가 제
사나 의례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나 신성한 일을 앞둔 경우 그들을 터부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출산시 탯줄을 자르는  사람은 피가 깨끗이 닦이기 전
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아기를 분만한  산모를 극도로 오염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도 피  때문이다. 아기의 아비는  목욕재계를 하면 즉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복귀가 인정되지만 산모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산모는 세 이레에  걸친 격리 
생활을 해야 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물로  정화욕을 치러야 사회에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다. 물론 그 기간 중에 산모를 접촉해서는 안 되지만, 산모 역시 집 
안의 아무것도  만져서는 안 된다. 산모가  복귀한 다음 그녀가 입고  있던 것은 
모두 세탁부에세 보내 정화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산모의 오염은 일시적인 것이
라 과부처럼 영구적인 오염에 놓인 사람과는 그  처지가 다르다. 이 모두가 생명
을 중시하는 힌두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격리라는 것도  어찌 보면 산모를 푹 쉬
게 해 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피 다음으로 오염을 많이 방사하는  것은 동물의(물론 인간을 포함한)분비물이
다. 똥, 오줌, 침, 머리카락, 손발톱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발사나 청소부가 전통
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하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신성한 의례를 앞두고 있
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배변을 끝내고 와야  한다. 혹시라도 도중에 일을 보
게 되면 그 의례는  심히 부정을 타게 된다. 그래서 독실한  브라만들은 배변 후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세탁부는 남의 오염된  옷을 빨아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탁부가  없는 마을
은 없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세탁부에게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곡식이나 
돈을 주거나 혹은 다른 일, 예컨대 이발사는  이발을 목수는 목수 일을 대장장이
는 대장장이가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해 준다. 그런데  세탁부라고 모든 빨래를 
다 군소리 없이 빨아  주는 것은 아니다. 세탁물에 피가 묻은  것은 물론이고 어
떤 경우 똥이  묻어 있으면 빨래를 거절하거나 웃돈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세탁
은 주로 강가에서 하지만 물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웅덩이 같은 곳에
서 빨래를 하는 경우도 자주 본다. 그 물은  썩을 대로 썩어 빨래가 더 더러워지
면 더러워졌지 도저히  깨끗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거기에서  열심히 빨
래를 하곤 한다.
  땀을 흘린 상태로는 특별히 정결을 요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종교 의례뿐
만 아니라 밥짓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독실한 사람들은 요리 전에 옷
을 갈아입기도 한다. 그것은 그 옷이 땀으로-보이든 보이지  않든-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갈아입을 옷이 없어  못 갈아입
는다. 없는  것도 서러운데 '오염된' 옷으로  일하고 밥짓고 밥먹고  잠자고 하니 
'지체 높은' 사람들에게서 '무식한 상것' 취급을 당한다.
  정액 또한 오염원의  목록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
에서 큰일을 앞두고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은 대단히 부정한 일로  여겨 왔다. 인
도에서도 식구 중에 누가 해산을  앞두고 있으면 모든 구성원은 부부 관계를 터
부시한다. 해산뿐 아니라 성인식, 장례 등 집안의 대소사가 목전에 있을 때 부부 
관계는 철저히 금지된다. 그것은  오염의 위력 때문이다. 그 오염은 사정에서 발
생한 것이다.  사정한 남자는 일시적이나마  오염되고 그 오염은  목욕으로 다시 
정결하게 된다. 그래서 신혼부부는 아침에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물가에 가서 
뒷물을 해야 한다. 뒷물을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었다면 대단히 큰 
죄를 범한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오염원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 그  자체가 아니고 
오염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슈드라와 불가촉민
들이다. 브라만들이 혹은  브라만이 아니라할지라도 그들보다는 높은  사람이 특
별히 정결해야 하는 날에  길거리에서 가죽일을 하는 불가촉민을 보았다면 그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 고대의  [마누법전]에는 불가촉민
이 브라만의 그림자만 밟았더라도 그 브라만은  목욕재계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불가촉민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에 든 막대기로 소리를 내 신호를 보내면서 걸어야 했다. "나 오염된 놈 지
나가니 보지도 말고  재수 없다고 하지도 말라."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세탁부가 
빨아서 가져온 옷을  다시 헹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세탁부가  빨았다고 해서 
오염이 제거되었다고 여기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세탁부가 옷을 가져올  때 그
의 손으로 들고  왔으니 그 옷은 그의 손에  의해 다시 오염되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직조공이 새  옷을 가져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물로 행구기도 한다. 
단순한 헹굼이 아니라 물로 정화 의례를 치르는 것이다.

    예의와 도덕, 진흙밭에서 피어나는 연꽃
  오염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논
에서 모내기를 할 때는 불가촉민과 같이 일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동네에서 
열리는 연극을 구경할  때 불가촉민과 브라만이 같이 앉는 것도  괜찮다.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때나 시장에서 부딪치는 경우 등은 모두 
괜찮다. 같은 불가촉민이라도 집에 그냥 놀러 오는  경우 즉 사적인 관계로 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직업인으로 오는 경우에는 오염이  방사된다. 또 
한집에서 같이 사는 하인은 주인집 자녀를 포함해서 어떤 사람들과 접촉해도 문
제되지 않는다. 같은 구성원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떠한 경우라도 
그들이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이렇게 많고도 많은 오염을 씻어 내기 위해  목욕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
리는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위대한  '물'의 힘을 본다. 그 물의 힘에 
대해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물에 의한 재계나  정화의 목적은 창조가 '비롯된 때', 즉  태초의 시간을 순간
적으로 현실화하는 데 있다. 그러한 의식은  세계나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상징
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연꽃과 창조 : 우주녀(cosmic woman)의 안에 힌두 삼 신이 있으니, 자궁에 브
라흐마가, 가슴에 비슈누가, 머리에는 쉬바가 있다.  그리고 이 힌두 사상의 태가 
연꽃이다.
  목욕을 함으로써 그들은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도 신의 원초적 
모습과 가장 가까운  형태로.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목욕을 빠
뜨리는 법이 없으며, 남들이 오염시킨 '탕'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이나 탕 속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 새로운 인간으로의 탄생을 포기
하고 타락한 인간으로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사회의 실제 상황을 보면 낮은 계급들은 오염 속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
다. 그렇지만  슈드라나 불가촉민조차도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체 높은' 브라만 
못지않게 오염원을 멀리 두고  살고 싶어한다. 그들도 무시당하지 않고, '고상한' 
인간답게 '자비로운' 신같이 살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의 직업 자체가 '오
염'되어 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 모든 일 하나하나를 정화 의례로 정결케 하자
니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자
사자 목욕을 하는 것뿐이다. 물이야 얼마든지 있고, 그 물을 끼얹기만 하면 오염
은 제거되고 그럼으로써 최소한의 인간 대접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살려는 발버둥이며 몸부림이다. 그  위에서 '지체 높은' 브라만 나리
들의 예의와 도덕이 꽃핀다. '나의 고상함'을 꽃피우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남의 
비속함'을 조장한다. 참으로 남 위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인간 군상의 비
열한 모습이다. 이것을 나는 진흙밭에서 피어나는 연꽃이라 부른다. 진흙밭은 불
쌍한 민중들이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종교요, 연꽃은 잘나디잘난  브라만들의 고
상한 철학이다.

    5. 음식남녀, 그 안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우리가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
고 돌아다닌 한  여자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 여배우 출신의  저명인사 브리지트 
바르도이다. 그녀는 개고기를  먹는 야만스런 민족에게 세계인의  대축제를 맡길 
수 없다고 만방에 떠들고 다녔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개라는 것이 참  그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것이 워낙 사람과  가까이 지
내다 보니 둘 사이에 생겨난 정이 남다르게  유별나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개
를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여기고 산다. 깨끗한 욕조에서 개 피부에  잘 맞는 비
누와 샴푸로 목욕도 시키고 또  개 전용 미용실에 가서 퍼머도 해 주고 꼬리 손
질도 시켜 주곤 한다.  우유도 먹이고 고기도 먹이고... 개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진 음식도 한둘이 아니다.
  핵가족 시대에 이르러서는 개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대체하고 있
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심한 배신감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그 대신 '충직한' 
개를 사랑하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라는 것이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람을 앞서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개한테서  사람의 혼을 느끼고 사람의 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의 개고기 섭취  문화를 야만스럽다고 하는 것을 이해 못 하
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개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을 먹는 것
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건 그들 중심의 문화에서  바라본 독단
이자 편견이다. 개는 어디까지나 가축일 뿐이고  가축이 인간의 식용으로 사육되
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게다가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음식 문화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자생성이  있는 법이다. 한쪽에서 터부시하는  음식이라도 다
른 곳에서는 별미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저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오랫동안 먹어 온 사람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도리
어 이상한 사람이다.

    왜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인도를 공부하다 보니 인도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는다. 여러 가지 질문 가운
데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단연코  "왜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
가?"일 것이다. 같은 질문을 하도 여러  번 받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아주 간단하
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왜 우리는 상추쌈을 손으로 먹지요?"라고  되
받아침으로써 말이다.  질문한 사람은 나의 반문에  보통은 약간 당황한다. 그때 
나는 몇 마디를 보충하면서 본격적인 이해  구하기를 시도한다. "음식을 왜 손으
로 먹느냐고 묻기 전에, 왜 그 나라에선  손으로 먹는 음식이 발달했을까를 묻는 
게 더 좋은 질문일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상추나 김으로 밥을 싸 손으
로 집어 먹는 것이  전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젓가락으로 멸치를  집어 먹는 것
이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듯, 인도 사람들이  음식을 손으로 먹는 일이 더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인다. 또 인도 초대 수상인 J.  네루(J.  Nehru)
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네루가 전 서독 수상 브란트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브란트가 예의 똑같은 질
문을 했더란다. 그랬더니 네루가 "당신은 마누라랑 밤에  잘 때 그냥 하는 게 좋
습니까, 아니면 그거(?)  끼고 하는 게 좋습디까?"라고  했단다. 재치도 재치이지
만 음식과 섹스의 공통점을 파악한 게 기가 막히다.  두 행위 모두 그 생명이 맛
에 있지 않은가. 네루의 말은 정말 그 맛을 제대로 살려 주는 살아 있는 답이다.
  인도 사람들이 음식을 손으로 먹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들의 음식 문
화가 매우 높은 청결성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손으
로 먹겠는가? 그들도 문화인이자 나름대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 문화가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인도 같은 나라가 또 어디 있
을까 싶다.
  인도의 음식 문화를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한바탕 음식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다. 우선 인도  음식 문화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보다 '어떤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가?'가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요리하면 맛
있게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 높지만 어떻게 요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
한 관심이 훨씬 더 높다.
  짜빠띠 굽는  모습 : 물과 밀가루만으로  만든 반죽을 구워 카레에  찍어 먹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으로, 서로 다른 카스트끼리는 나눠 먹기를 꺼린다.
  인도의 음식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물을 사용해
서 만드느냐 아니면 우유를 사용해서 만드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에는 밥이
나 짜빠띠가 속한다(짜빠띠란  밀가루에 물을 적당히 넣어  반죽한 다음, 기름을 
치지 않고 화덕 위에서 구운  것이다. 생긴 것이 꼭 우리의 호떡 비슷하니,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호떡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후자에는 우유로 만든 기
름인 기(ghi)를 사용하여 튀긴 음식과 우유로 만든 과자 같은 것들이 있다.
  양자 가운데 그들은  물로 만든 음식이 쉽게 오염된다고 본다.  물이 우유보다 
오염되기 쉽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로 음식을 만들 경우에는  음식이 오
염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한다. 우선 목욕을 하거나  손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
아입은 후 부엌으로  들어간다. 일단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 도중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중에서도 오염과 직결된다고 생각되는 일, 즉 변소에 가는 일 
같은 것은 금기 중의 금기이다. 이 외에도  문을 열어 준다거나 잔화를 받는다거
나 가게에 갈 일이 있다거나  하면 반드시 손을 씻고 해야 하고 돌아와 다시 음
식을 만들 때도 또다시  손을 씻어야 한다.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 자기보다 카
스트가 낮은 사람이 부엌에 들어와서도 안 될뿐더러 자기가 요리하는 것을 보이
는 것도  좋지 않다. 자기보다 낮은  카스트는 그만큼 더 오염된  자이기 때문에 
높은 카스트의 음식에 손을 대면 오염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층  카스트와 상층 카스트 이웃끼리는  음식을 주고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다만 우유나 우유 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물로 만든 음
식의 경우에 한해서  특별히 꺼린다는 것이다. 우유나 우유 기름을  사용하면 우
유가 오염을 막아  주지만, 물은 쉽게 오염된다는 것이 그들의  신앙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인도 사람들이  손님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할 때 우유나  우유 기름
을 사용하여 만든 음식을 주로 내놓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은 우유를 넣어  끓인 인도 특유의 홍차인 짜이나  우유로 만든 과자 같은 것을 
손님들에게 주로 내놓는다.  그들 문화에서 다과 대접에 비해 식사  대접은 상대
적으로 드문 편이다.
  그래서 카스트가 서로 다른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그리 자주 있는 일
이 아니다. 카스트가 달라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없다면 결혼  피로연과 같은 공
공 장소에서는 어떻게 할까?  이런 경우에는 카스트가 다른 사람들과는 한두 자
리쯤 떨어져 거리를 두고 같은 카스트끼리 줄을  지어 앉아서 먹는다. 물론 연회 
같은 자리에 나오는 음식은 주로  우유와 우유 기름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 대부
분이다. 밥이 나오더라도 우유 기름으로 볶은  밥이거나 요구르트에 적셔 나오는 
것이 많다. 우유에는 정화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음식 예법이 까다로운 뜻
  인도 음식 문화의 까다로움은 그들의 식사 예법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인
도에서는 왼손은 오염된 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식사할 때는 반드시 오른손만 
사용한다. 왼손은 대변을 보고  뒷물을 하는 손이 아니던가. 레스토랑에 가면 핑
거 보울(finger bowl)이라는  손 씻는 그릇이 나오는데, 괜찮은 레스토랑일  경우
에는 은으로 만든 그릇에  레몬도 한 조각 곁들여 나온다. 핑거  보울은 처음 보
는 사람에게는 식사  전에 마시는 레몬차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사실은 
식사 전에 오른손을  닦으라는 간이 세숫대야 같은 것이다. 핑거  보울을 사용하
든 사용하지 않든 손을 씻지  않고 식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이다.
  식사할 때 대화를  하지 않는 것도 예법에서 중요한 원칙이다.  대화는 식사를 
끝내고 손과 입을 씻고 난 뒤에만 허용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난 후 반드시 손과  입을 닦는다. 식사 중에 말을 하지 말라는 것  또한 오염 때
문이다. 말을 하다 보면 침이 튀게 마련이고  침은 음식을 오염시키는 것이기 때
문에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넓게 보면  청결성을 유지하고픈 집념의 소산이
다.
  인도 요리에 쓰이는 여러  가지 양념들 : 더운 나라이다 보니  요리할 때 양념
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로 인해 빛깔은 원색적으로 되고 맛도 강해진다.
  또 음식을 먹을 때는 개인 그릇을 사용한다.  큰 접시에 담겨진 음식에는 공동 
스푼이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그릇에 덜어  먹어야 한다. 침을 음식을 오
염시키는 주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유학할 때의 일인데  이런 문화에 
익숙지 않다 보니  내가 겪은 해프닝도 꽤 많았다. 한번은  드위베디라는 선생님
께서 우리 가족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가기 전에 아내에게  이런저런 지켜야 
할 예의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내게서 일어났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후식으로 과자가 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과자를 이것저것 
만지다 그 중  몇 개를 골라 접시에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과자는 몽땅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으로 음식을 먹었으니 내 손에는 침이  묻어 있
을 테고(설사 깨끗이 닦았다 하더라도),  그 침 묻은 손으로 과자를 집었다 놓았
다 했으니 그 과자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다른 과자도 모두 오염되었다는 것이
다. 물론  이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선생님이 워낙  독실한 브라만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땐 정말 낯뜨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인도 사람들이 우리의 음식 문화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사람들
은 물을 마셔도 자기 잔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남의 잔으로는 절대 마시지 않
는다. 대부분은 물로 일단 손을  씻고 그 손을 잔삼아 물을 마신다. 이럴진대 우
리는 여러 사람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가운데  찌개 하나 터억 놓고 "자, 먹자!" 
하고는 각자 자기 숟가락을 입과 냄비에 번갈아  가면서 푹푹 찔러 대고, 그것도 
쪽쪽 빨아서 게걸스럽게  먹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인도 친구들은  설사 고
기가 들어 있지 않은 찌개라  할지라도 전혀 먹지 못할뿐더러 그 희한한 풍경에 
난처해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여우 집에 식사 초대 받아  간 두루미 꼴이리
라.
  인도에서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
다. 물론 흘려서도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접시가 닳을 정도
로 싹싹 문질러 대며 다 먹는다. 음식을 먹고  난 뒤의 접시 상태는 마치 핥아먹
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카레를 밥에다 흥건히  부어서 이렇게 
깨끗이 처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짜빠띠를  카레에 찍어 먹는 경우 또
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경우라도  음식을 남기는 경우는 없다. 심한 경우에는 손
에서 팔로 흐르는 카레 국물까지 혀로 다  핥아먹는다. 남부 음식은 대개가 물기
가 많아 혀로 오른팔  안쪽을 핥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
면, 식사를 마친 후 그릇에 물을 부어 밥알  하나까지도 남김 없이 다 먹는 스님
들 생각이 난다.  아마도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인도적 음식관의  일부가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서로 다른 카스트가  먹은 음식은 오염이 된다고 하지만 예외도  있다. 세속을 
떠나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먹을 경우는 다르다. 사두(sadhu)라고 부르는 고행자
는 출가하기  전의 신분이 불가촉민이든 슈드라이든  상관없이 아무 우물에서나 
물을 떠먹을 수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사두의 오염은 매우 성스러
운 것으로 존중되기도 하는데  그가 발을 씻은 물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그 물을  마시기도 한다. 그가 먹다 남긴 음식  또한 같은 이치
로 전혀 오염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성스러운 것으로 존중된다.  부모와 남편
이 먹다 남긴 음식 역시 마찬가지이고 제사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자기 
아닌 남이 손을 댔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음식과 관련해서  음식을 담는 그릇에도  엄격한 원칙이 있다.  그릇 중에서도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매우 쉽게  오염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질그릇은 
자기보다 낮은 카스트가 만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가정부라 할지라도 질그릇은 
만져서는 안 되고 오로지  그 집의 안주인만 만질 수 있다.  토기장이가 새 질그
릇을 가지고 오면 반드시 물로 정화시킨 후  사용한다. 인도 사람들이 외부 사람
들에게 물이나 차를 줄 경우  질그릇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엔 반드시 새 질그릇
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외부 사람이 사용한 그릇은 반드시 
깨뜨려 버린다. 그릇을 한 번  쓰고 깨뜨려 버린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 
질그릇은 무늬도 없고  특별한 모양도 없이 초벌구이만 한 것이기  때문에, 품도 
거의 들지  않고 농촌에서 흙만 있으면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걸 깨 버리면 그  흙으로 다시 그릇을 만들어 쓰면 된다.  적어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회용 컵보다는  훨씬 위생적이고 경제적이며 환경  친화적이다. 질그
릇이 이렇게 쉽게 오염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에 놋쇠 그릇은 그와는 반대이
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놋쇠 그릇이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
  음식 문화가 이처럼 까다롭다  보니 전통적으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은 브라
만이다. 브라만 계급은  고귀한 신분이어서 다른 카스트들에 비해 오염이  덜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가정부라 할지라도 요리를  맡은 가정부는 브라만 출신
의 '뼈대'  있는 집안의 규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인도의  문화를 모르는 
일부 한국 사람들은 인도인 가정부에게 부엌일 외에 다른 일도 하라고 종용하곤 
한다. 가정부가 거절하면 돈을 더 줄테니 변소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라고 요구
한다. 우리네처럼 가정부 한 사람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집안일이 좀더 원
활하게 이루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요구가 합리적이고 당연
한 것일 테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요청을 받은 인도인 가정부는 모
욕감을 느끼고, 심한 경우에는 일을 그만두기도 한다. 그럴 경우 주인은 그 가정
부 등 뒤에 대고 "그러니 이  나라가 요모양 요꼴로 가난하지."라며 비난하기 일
쑤이다. 
  더불어 사는  세계가 아름답다.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해 주는  가운데 인류의 
문화는 공존공영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와 다름'을 열린 마음으
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편견 없
이 맞이하는 연습부터 해  보자.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를 자꾸 되뇌면
서.

    제3장 그래도 카스트는 살아 있다
    1. 태어남, 삶의 그 원초적 질곡
  신화 라마야나(Ramayana)에는 라마의 동생 락슈만이 라마의 부인이자 자신의 
형수인 시따를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해  돌아온 후, 형수로부터  예쁜 명주실로 
된 끈팔찌를 채워  받는 장면이 나온다. 시동생과 형수 사이가  믿음으로 엮이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이야기에서 연유되어,  매년 힌두 음력으로 칠팔월 보름달이 뜬  날이면 누
이들은 예쁘고 밝은  색의 명주실을 여러 겹으로 매듭지어 끈팔찌를  만든다. 그
리고 그 끈팔찌를 오라비나 남동생  혹은 시동생이나 시숙 등 가족의 남자 형제
들에게 채워 준다. 앞으로 일년 동안 자신을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런 청을 결코 거절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매우 영
광스럽게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가족  내에서 남
자라는 존재는 항상 여자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라버니여 보호해 주소서
  인도의 끈팔찌는 서로의 관계를  묶는다는 점에서는 중세 유럽 남자들이 자기 
아내에게 채워 준 귀고리와 의미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근본적 의미는 판이
하게 다르다. 인도의 끈팔찌가 남매간의 우애를 다진다는, 화합과 유대의 의미가 
강한 반면, 유럽의  귀고리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소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복
과 우열의 의미가 강하다.
  우리 나라에도 이 끈팔찌를 차고 다니는 여성들이  요즘 꽤 보인다. 그만큼 인
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도 되겠고 인도의 문물이 이젠 우리에게 그
리 낯설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도 되겠다. 끈팔찌의 뜻을  알든 모르든 유
럽식 귀고리나  팔찌로 대표되는 여자들의 액세서리에  인도의 끈팔찌가 한몫을 
차지하는 것을 보니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가 인도  전공자라서가 아니라 
획일화된 문화는 그 생명력을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끈
팔찌의 의미까지 알아 주었으면 금상첨화이겠다.
  화려해지고 패션화된  끈팔찌 : 인도  여인들이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아 오라버니의  손목에 채워 주었던 끈팔찌. 지금은 화려한  외형 속에 
그것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사라져 가고 있다.
  끈은 본래 무언가를  잇거나 묶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그와 연
관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끈은 반지나 목걸이로 쓰이기도 한다. 또 실로 만들
어진 것도 있고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풀을 엮어  만든 것도 있다. 
흰색도 있고 붉은색도  있고 형형색색으로 된 것도  있고 검푸른색으로 된 것도 
있다. 모두 다  저마다의 특정한 쓰임새가 있지만 대개는 어떤  것을 보호하거나 
두 개의 사물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흰색 끈은 탄생식이나 입문식 등  통과 의례 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
는 마음에서 차고,  밝은 색 끈은 축제나 명절 때  찬다. 반면에 짙고 어두운 색 
끈은 악령 같은 것으로부터 주술적으로 보호받고자 할 때 찬다.

    거듭난 사람만이 차는 끈
  한편 어떤 것을 잇는 상징으로  인도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성사라는 것이다. 성사는 사람을  성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역
할을 한다. 이 끈을 차고 있으면 성의 세계에 속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엔 감히 접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나 다 찰 수  있는 것이 아
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차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1995년부터 계속 이어진 인도 북부 농촌 현지  조사 때의 일이다. 우리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박사 학위를 가진 대학  강사를 보조 연구원으로 채용했고 조사 
지역도 그분의 고향 마을로 정했다. 2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조사를 효과적
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우리는 오랜 동안 그가 끄샤뜨리야 계급에 속하는  줄 알았다. 물론 그가 어떤 
카스트에 속하든지 우리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호기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고향 마을에 갔을 때 우리는  그가 매우 낮은 
신분임을 알게 되었고 그가 차고 다니던 성사 또한 '불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
다. 그 후  꽤 오랜 동안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배울 만큼 다 배운  사람이..." 하는 쪽으로 항상 결론이 나
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성사는 약 1미터  남짓한 무명으로 된 끈이다. 옷 속에  차고 다니는 겉으로는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엉덩이  쪽으로 걸쳐 
몸의 오른쪽에 줄이 늘어지도록 하고 다니지만,  장례처럼 극히 오염된 자리에서
는 그 반대 방향으로-성사가 주검이 놓인 들것에 닿아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
해-찬다. 바로 이 끈이  수천 년 동안 인도에서 사람 차별의 주범 역할을  해 오
고 있다. 이로 인해 숱한 눈물과 회한의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노라
고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니고데모라는  이가 사람에게 거듭나라니 그 무슨 
말인지, 대체  늙은 사람이 어미 뱃속으로  어떻게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건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어미의 배에서  태어난 것은 첫 번째 탄생이
고 진짜는 믿음으로 인한 두 번째 탄생이라고 했다.
  이와 유사한  개념이 힌두교에도 있고  그것의 증표가 바로  성사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믿음을 통해  두 번째 탄생이 이루어진다면, 힌두교는 의례를  통해 두 
번째 탄생이 가능해진다. 기독교는 겉으로 거듭남을  표시하지 않는 반면에 힌두
교도들은 성사로 그것을 표시한다. 또 하나의 차이는, 기독교에서는 거듭나지 않
은 자라도 일상 생활에서는 전혀 지장을 받지  않지만, 힌두교 사회에서는 두 번 
탄생을 하지 않은 자는 모든 생활에서 지대한 애로를 겪는다는 것이다.
  성사 : 상위 카스트들만 찰 수 있는 끈으로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되 밑으
로 늘어진다.
  그래서 이 두  번째의 탄생은 힌두교에서 대단한 특권이다. 그  특권은 오로지 
브라만, 끄샤뜨리야, 바이샤의 세 상층 카스트들에게만  있다. 그 외의 다른 계급 
즉 슈드라와  불가촉민들은 절대로 두 번  탄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성스러운' 
종교에 의해 그들은  오염된 이단자 정도로 취급된다. 그래도 슈드라는  그 신분
의 기원이 힌두교 창조  신화에 기록되어 있어 '슈드라'라는 이름으로라도 그 존
재를 인정받고 있지만 불가촉민은 신화 어디를 뒤져 봐도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다.
  결국 브라만, 끄샤뜨리야, 바이샤는 생물학적  인간이자 종교 사회적 인간이고, 
슈드라는 단순히 생물학적으로만 인간이며,  불가촉민에 속하는 수많은 인간들은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이 아닌 셈이니 종교, 사회적으로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
가. 마하뜨마 간디는 이  불가촉민들을 하리잔(Harijan), 즉 '신의 사람'이라고 높
이 칭했으나  많은 당사자들이 그러한  동정주의에 크게 반발했고,  다른 계급들 
역시 반발하여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그들은 스스로를 '핍
박받는 자'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화적 기득권에 
대해 처절하게 항거하고 있다.  
  상층 세  신분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입문식을 거친다. 물론 그  특권은 남자 
아이들에게만 주어진다. 그 입문식 또한 행할 수  있는 나이가 신분에 따라 달리 
정해져 있다. 브라만이 가장 어렸을 적에,  끄샤뜨리야가 그 다음, 그리고 바이샤
는 그 다음 나이에  한다. 그 식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성사를 몸에  걸칠 수 있
다. 그리고 입문식을  했으니 스승을 찾아가서 학습을 받고 지혜를  구하고 진리
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정작 학습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이 의무 과
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만 의식에서  바라나시나 카쉬미르 같은 고
대의 유명한 학교로  길을 떠나는 행동을 그냥 상징적으로 흉내낼  뿐이다. 그리
고 의식이 끝나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대해진 자신의 권리 찾기에 여념
이 없다. 의무는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이제 입문식을 마치고 성사를  차니 두 번 탄생한 사람 즉,  드위자가 되고 동
시에 어른이 되면서 또 사회인이 된다. 한  번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으니 그
냥 사람이라는 생물체에  불과하다. 이는 어린애가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회적으
로는 정상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반드시 의례에 의해 다시  한 번 
태어나야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슈
드라는 제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
급받는다. 어린애들이 베다 학습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성스러운 우주의 지혜를 
터득할 수도 없으며, 사원에서 열리는 여러 가지  종교 의례에도 참여할 수 없듯
이, 슈드라 또한 그런 일에서는 철저히 배척당하고 있다.

    인간 차별의 그 질곡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니. 
봉건 시대에는 그럴 수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런 표식이 남아 있고 여전
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니...
  성사는 인간 차별의 질곡 그 자체이다. 이  줄을 차고 있어야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인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성사를 가장 성그럽고 존귀한, 가장 가치 있는 것
으로 취급한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성사를 차고 있지 
않으면(물론 그 성사가 옷  밖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가 죽고  고개가 떨
구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서는 낮은  신분이더라도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
은 자기 신분을 드러내는 이름-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성-을 살짝 바꾸거나 감추
어 버리고 성사를 차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시골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내지만 
도시에 나오면 큰맘 먹고 차고 다니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용감한 사람인가 아니면 불쌍한 사람인가? 그들은 카스트를 속이
는 것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결국 같은 의미인데도 불구하
고 성사를 몰래 차고 다니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약간의 두려움까
지 느낀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처음엔 상당히 실망하곤 했었다. 속으로 그들을 
비겁한 자라고 비웃기도 하고 안팎이 다른  사람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토록 오랫동안  그들을 짓눌러 온 멸시의  질곡을 벗어던진다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하는 연민 또한 들곤 한다.
  성사, 삶의 그 원초적 질곡... 우리 사회엔들 없었겠는가?

    2. 불가촉민이여 우리들의 친구여
  암베드까르 박사를 아는가? 불가촉민 출신이면서 근대 인도가 낳은 최고의 석
학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현재 인도공화국의 헌법을 기초한 사람...
  암베드까르는 인도 남부 마하라슈뜨라 주에 있는 최대의 불가촉민인 마하르로 
1891년에 태어났다. 주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마하르들은 전통적으
로 죽은 가죽을 치우는 일을  주로 하면서 다른 마을로 심부름을 가거나 마을의 
파수꾼 일을 했다. 그리고 더럽고 불결한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도맡았다. 이러
한 세습 노동의 대가로 마을  한구석에서나마 살 수 있었으며 생존에 필요한 최
소한의 곡물을 얻었다. 그들의 촌락 내에서의 생활은  이런 천한 일을 한다는 전
제하에서만 보장되었는데, 항상 강제와 차별이 따랐다.
  그들은 카스트 힌두들이 다니는  사원에도 출입할 수 없었으므로 어떤 점에서
는 힌두교도라 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들은  개나 돼지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으니 [마누법전]엔 그들 불가촉민에 대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옷을  입고... 재산은 개와 당나귀이며... 깨진 식기만을 사
용하며... 개, 돼지, 닭과 마찬가지로 브라만이 식사하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되며... 
마을 밖에서만 살고... 낮에 돌아다니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지 않도록 표
지를 달고 다녀야 하며, 밤에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불가촉민 여자와 하룻밤 통정을  하거나 음식을 받아 먹은 경우에는 3년간 탁
발을 하여 음식을 먹고 성구를 읊어야 속죄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근대에 들어서도 별로  향상되지 못했다. 많이 나아졌다
고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사회에 끼지  못하는 '오염된' 존재이다. 
그들은 꽃이나 금은으로  몸을 장식하고 다녀서도 안 되고, 남자는  코트나 셔츠
를 입어서도 안 되며, 집에서 쓰는 그릇은 반드시 흙으로 만든 것이라야만 하고, 
여자는 화장품을 남자는  우산이나 샌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방에 따
라 다르지만 많은 곳에서 이와  유사한 규율이 부과되었고 이를 지키지 않을 때
는 심한 폭력이 가해졌다.
  우리의 백정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비단 옷을 사입을 수는 있
어도 그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철이 덜 든 한 처녀가 비단 옷
을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문 밖으로 나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들켜서 결국 
두들겨 맞아 죽는 장면이 정동주의 소설 [백정]  어딘가에 나온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실제로 일어나곤 했던 우리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암베드까르의 처절한 투쟁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은 데칸  지방을 식민지화였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마하르들은 촌락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전
통 직업을 버리고 철도  건설 노동자, 공장 노동자, 도시 노동자, 영국군의 용병, 
영국인 가정의 하인  등으로 자리를 잡았다. 암베드까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는 용병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준위에까지 올랐다. 
불가촉민 출신으로는 그래도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암베드까르는 고등학교를 졸
업한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자기보다 일곱 살 아래인 마하르 출신 처녀와 결혼하
였다.
  암베드까르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불가촉민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전례가  없던 쾌거였다. 그는 봄
베이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고 그곳에서 카스트 차별이 
없는 생활을 체험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무더운 여름에 
교실에 있는 물주전자에서 직접 물을 먹을 수 없었던 굴욕적인 추억을 되새기곤 
했다.
  귀국 후인 1920년경부터 그는 사회 개혁 운동에  몸을 던졌다. 우선 그는 마하
르의 대표자 집회를 열어 전체 마하르를 결집하였고 나아가 불가촉민 전체를 위
한 투쟁을 벌였다.  전인도의 불가촉민을 대표하는 지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활
동 기반은 항상  자신이 속한 마하르였다. 암베드까르는  마하르들에게 무엇보다
도 소고기를 먹지 말 것을  호소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도 사원에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  힌두들의 멸시를 
받지 않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문을  발행하고 대학을 
세우고 결사체를 만들면서 갈수록 공고한 단결을  꾀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고대 
인도의 끄샤뜨리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카스트들의 멸시와 냉대는 
변함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주위의 압력은 거세졌다.
  이에 암베드까르는 좀더 적극적인 투쟁의 길을 택하였다. 1927년, 그는 불가촉
민의 이용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던 식수 수원지까지 1만 명의 행진을 지휘하여 
그곳의 물을 퍼서  마시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불가촉민이 손과  입을 대고 
그 물을 먹는다면 다른 카스트 힌두들에겐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될 터였다. 그 
물은 모두  오염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양 세력의  충돌 직전에 
암베드까르는 비폭력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고 실제로 물을 퍼마시는 실력 행사
는 벌이지 않았다.
  반면 카스트 힌두들은 그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 소똥, 소오줌, 우유 등을 수원
지에 넣고 정화  의례를 하는 한편 불가촉민들에게  무차별 보복과 테러를 가했
다. 무엇보다도 처절한 경제 보복이 이루어졌다. 마하르들은 일거리가 끊겼고 물
건을 살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박해는 이들의단결을 더욱  강화시켰고 한
층 더 큰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그는  1935년에 불가촉민을 향해서 차별의  근원인 힌두교를 버리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그  상징으로 불가촉민 차별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마누법전]
을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카스트 힌두들 앞에서 성전을  불사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지만 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의연
하게 살육의 보복을 감내하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굴하지 않고 나아
갔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56년 10월, 그는  마하르 대중들을 이끌고 불교로 집
단 개종하였다.  그것은 카스트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부처님의  나라에서 살아 
보고자 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두달 후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보
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불가촉민제 철폐 운동은 암베드까르와 같은 불가촉민 당사자에 의해 진행되기
도 했지만, 람  모한 로이(Ram Mohan Roy)나 풀레(Phule) 그리고  마하뜨마 간
디 같은 불가촉민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크게 고무되기도 했다.  간디는 불가촉
민제를 인도  사회의 암적 존재로  보았으며, 민족 운동을  이끌면서 불가촉민제 
철폐를 중요한 강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디는 암베드까르와는  달리 불가촉민
의 해방은 힌두교와  카스트 체계의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
서 그는 불가촉민 해방 운동에 정상적인 카스트 힌두가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간디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으며 불
가촉민 출신의 양녀를 두었고 가장 부정시하는 변소 청소를 솔선해서 하기도 했
다.
  이러한 간디의 운동을 암베드까르는  동정주의라고 심하게 공격했다. 암베드까
르의 입장은 카스트 힌두의 동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불가촉민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불가촉민제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불가촉민 해방이라는 동일한 목표  속에서 서로 다른 노선을 
견질함으로써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 양대 흐름은 인도가  독립하면서 국민회의 
정부하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간디의 노선은 민족  정당을 표방하는 집권당 국민
회의 강령 속에서  살아 숨쉬었고, 암베드까르는 초대 수상 네루  정부의 내각에 
법무상으로 입각함으로써 그 정신을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호를 위한 차별?
  암베드까르는 헌법 기초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독립 인도공화국의 헌법 제정
에 힘을 다했다. 그에 의해 제정된 인도공화국 헌법의 제17조를 보자.
  불가촉민제는 폐지하고  어떤 식으로든  그 관행을 금지시킨다.  불가촉민이라 
하여 그들에게서 어떤 자격을  박탈시키려는 것은 법률에 따라 처벌되는 범죄에 
해당된다.
  이어 정부는 불가촉민 차별에 대한 처벌을  구체적으로 정한 '불가촉민제 범죄
법'을 제정하고 그들의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학
교에서는 교육  장려금이나 급식비, 교재  등을 지급하고 입학  시험에서는 특별 
대우를 해 주었다.  관계에서는 그들 출신들을 위해 일정 비율로  자리를 할당했
다. 그리고 선거에서도 의석의  일정 비율을 그들에게 할당했다. 이제 그들은 일
정한 비율의 범위 내에서 교육의  기회를 갖거나 공공 부문의 직업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다.  이른바  '보호를  위한 차별
(protective discrimination)'  정책이었으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이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s)'였다.
  그러나 지정 의석 정책은 모든 불가촉민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지는 못하였다. 
세상이 으레 그렇듯이 혜택은 그들 중에서도  일부 부유층에게만 돌아가고, 대부
분의 '우리들의  친구'는 여전히 철저하게 소외당하였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정부의 혜택으로  새로 '엘리트'가 된  자들이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전체 동료들의  처절한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더  심하게 견
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대다수의 불가촉민들은 좀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회 변혁 투쟁을 전
개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들에게 삶은 그 자체가 투쟁이요  쟁취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른바 '달리뜨(Dalit) 운동'이다.  달리뜨! '부수어지고 찢기고 으깨진 자, 
핍박받는 자', 사회 혁명가 풀레가 지은 그 이름에서 그들의 슬프고 뼈아픈 역사
를 읽는다.
  바로 깨지고 부서지고 으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쉬지 않고 오늘도 사회 
변혁을 위해 싸우고  있다. 체제 전복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지만  그들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보호를 위한 차별 정책'에  대한 비불가촉민들의 분노가 가장 어
려운 상대이다. 1990년 여름,  델리 대학교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 분신이라
는 극단적인 항거가 그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준다. 그들 또한 가난하
고 소외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친구이다. 불가촉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혜택
을 못 받는  비불가촉민들의 철저한 외침 또한 외면하기 어렵다.  이 역설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불가촉민,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기성 정치 집단에게  철저히 이용 당하고 뿔뿔
이 흩어져 있다.  사회적으로는 그들 내부에 상층 카스트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심한 차별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서로의 배타성으로 인해 하나의  단합된 조직
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물리적 충돌이  자주 일어난
다. 아! 갈 길은 먼데 해는 자꾸 떨어지고 있다.
  전체 인구의 15퍼센트,  1억이나 되는 우리들의 친구, 그  이름 불가촉민. 그들
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날은  언제나 오려나. 아니,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하려
는지 자꾸 암울한 느낌이 든다.

    3. 뿌리 깊은 나무, 카스트
  카스트 체계는 그것이 생긴 이래로 2,000여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거센 반발
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 체계 전체가 흔들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처럼  웬만한 바람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부처도  결국 카스트 
체계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유토피아를 사회밖에 건설해 보고자 했던 것
이다. 만민형제와 사회동포를 부르짖는  기독교들이나 이슬람 교도들의 공동체에
도 카스트는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종교도 인도에서 카스트를 
뿌리뽑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카스트 체계의 유연성 때문이다. 강한 쇠가 부러진다고 했던가. 카스트
는 결코 강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버드나무가 큰  바람을 품은 채 제자리에서 흔
들리듯 카스트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를  얼마든지 다 수용해 왔다. 슈
드라도 브라만이  될 수 있었고  브라만이 불가촉민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모든 
변화는 인정하되 다만 그 틀 안에서만 용납하였다.
  인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카스트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카스트를 부인하고  사회 밖으로 떠난 사람들도  결국에는 '세상을 버린 자'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카스트를 이루어 결국 카스트 체계 안에  편입되었다. 카스트
로부터 추방당한 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추방자'로서 또 다른 카스트를 이루어 
새로이 편입되었다. 그래서 인도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인도에 있는  모든 것은 카스트 안에  있고, 카스트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빠져 나가려야 빠져 나갈 수 없고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도 없다. 그야말로 인
도라는 곳에서 카스트는 운명 그 자체인 것이다.

    카스트에 부는 변화의 물결
  그런 카스트에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것은 영국이  도입한 시장 
경제 체계로 인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인도땅에 들어온 영국인 통치자
들은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인도인들을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
의 경제를 도입하였다. 그 자본주의란 바로 직업주의를  근거로 한 화폐 교환 경
제였다. 
  식민지화와 더불어 진행된 근대화에  의해 밀어닥친 화폐 경제의 물결은 농촌
을 도시의 상품 경제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을 사람 중에는  세습 직업을 버
리고 도시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경제  체계가 지
닌 불평등한 교환 체계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늘어났고 결국 그들은 노동의 대
가를 화폐를 기준으로 꼼꼼히 요구하게 되었다.  게다가 근대화의 영향으로 낮은 
카스트 사람들도 토지를  가질 수 있게 되자 이러한 현상은  우후죽순, 파죽지세 
격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 인하여 카스트 체계는 급속히 붕괴되어 갔다. 
  노니야(Noniya)라는 카스트가 있었다.  소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는 불가촉
민이었다. 새로운 경제 체제는  그들에게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질 좋은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다 보니  소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들은 소금 장수 일을 버리고 새로운 일
을 맡았다. 식민 통치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도로 공사나 관개 수로 
공사 또는 벽돌이나  타일 같은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는 뛰어들었다기보다는  밀려났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전통적  카스트 분업 
체계에서 딱히 어느 카스트의  일이라고 정해진 바가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었기
에 그 일을 담당하는데 주위의  반대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인가. 영국 통
치자들이 날이면 날마다 하는 일이 도로를 닦고 철로를 놓는 일이었으니 사업은 
당연히 확장  일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버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였다.
  노니야들은 졸지에 거부가 되었다. 그 영향력은  마을 전체에 급속도로 퍼졌고 
이를 기반으로 그들은  토지를 확보해 나갔다. 그리고 소작인도 많이  두게 되었
다. 동시에 브라만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마을에 사원을 
세워 주거나 마을 제사에 거액을 기부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물론 이를 거부
하는 브라만들도 있었고  반발하는 다른 세력들도 있었지만  돈으로 무마시켰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 카스트가 끄샤뜨리야였음을  천명하였다. 물
론 브라만들의 재가가 뒤따랐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그들은 이제 어엿한 끄
샤뜨리야 카스트에 속하게 된 것이다.
  아히르(Ahir)라는 슈드라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소를 치고 우유를 내다 
팔거나 소가죽을 처리하는 일을 하였다. 그들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왔다. 영국인
들이 들여온 새로운 음식 문화로  인해 우유의 수요가 급속히 늘면서 그들은 큰 
재력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 북부에 흩어져 있던 카스트들과 유사한 직
업의 카스트  세력들을 규합해 전인도 야다와  대연맹이라는 결사체를 조직하였
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육식을 금지하고 매일  정화 의례를 엄격하게 행하는 등 
'브라만처럼' 살기로 결의하였다.  동시에 야다와(Yadava)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
택하여 인구 센서스에 자신들을 끄샤뜨리야로 등록하였다.

    브라만처럼 살아 보리라
  사회의 변화를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브라만처럼'  살아가는 것, 즉 제도 안으
로의 회귀를 통해  이루려는 이 현상은 카스트라는  뿌리 깊은 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는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우리 나라나 일본, 중국, 태국 
그 외의 많은  비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평등  사회의 물결을 타면서 고유의 
사회 체계가 송두리째  변화되었지만 인도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낮
은 계급들은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카스트 밖으로가  아닌 카스트 안으로 잡았
다. 브라만처럼 살기라는 이런  현상을 인도의 대표적 사회학자인 M. N. 스리니
와스(M. N.  Srinivas)는 산스끄리뜨화(Sanskritization)라고  명명했다. 브라만의 
생활 행태와 그 문화의 기반을  산스끄리뜨라 부를 수 있으니 이런 현상을 그렇
게 부르는 것이다. 이 이론에 무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이보
다 더 적합한 용어가 없어서 보통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인도인들의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일본 출신의  세계적 인도학자인 나까무라 
하지메는, 그들이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유한한 조직체 대신  다르마(dharma)라
는 보편법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카스트 체계를 최고의 조직체로 
받들고 있으며 그 보편법이라는 것은 곧 브라만이 만들고 다듬은 것이기 때문에 
브라만의 문화가 만인의  생활 규범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와  철학을 연결
시킨 명쾌한 분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변화가 다  산스끄리뜨화로 규정될 수는  없다. 따즈마할
(Taj Mahal)로 유명한 아그라 주변의 짜마르라는 불가촉민들의 경우를 보자.  그
들은 그곳 전체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수적으로는 일단 큰 세력이었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오염된' 일을  해 왔고 가난에 찌들어 살다 보니 사회에서 
가장 낮은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여느 슈드라나  불가촉민과 마찬가
지였다. 그들에게도 기회는 왔다.  새로 도입된 피혁 산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
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무역에 뛰어들어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도 자신들의 카스트 이름을 바꿔 자따브(Jatab)라는  고상한 끄
샤뜨리야 이름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야다와의 경우와는 달리 끄샤뜨리야로 등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가촉민으로 남았다. 이는  자신들의 경제력의 기반인 가죽  산업을 독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게다가 소가죽이 주는 '오염'이라는  의식이 과거처럼 그렇게 강력
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돈만  쥐고 있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 '좋은' 직업을 버리면서까
지 카스트를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정부
에서 제정한 불가촉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으로 많은 이익을 취할 수도 있
었다. 일석삼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카스트의 색은 없어지고 비중은 떨
어지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는 살아 있다
  앞서의 자따브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 운동에 활
발히 참여해 왔다.  그리하여 독립 이후에는 정당을 창당하는 등  지역에서 막강
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자따브들이 다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그들  대부분은 불가촉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 게 있다면 그들 중  일부가 신장된 경
제력이나 특별 우대 정책을 통해 영항력 있는 존재로 성장하였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전체 자따브의 권익을 위해 선거 때면 큰 활약을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최소 단위의 지방  선거에서부터 수상을 뽑는 총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선거에서 철저한 카스트 몰표를 행사한다.  그들의 보스는 앞에서 진두지휘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주저  없이 표를 던진다. 이념도 모르
고 정강도 정책도  모른다. 오로지 자신들의 카스트를 위해서 표를  던지는 것이
다. 철저한 카스트주의이다. 그래서  그 카스트 몰표를 얻기 위해 모든 정치인들
은 선거 때마다 안달하며 그들에게 매달린다.  심지어 어떤 정당은 불가촉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의 할당량을 최고 70퍼센트까지 약속하는 경우도 생겼을 정
도이다.
  사실 불가촉민의 몰표를 카스트  이기주의로 보지 않고 계급 투쟁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 대부분의 불가촉민들은 피지배  혹은 피착취 계급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그들도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도 계속 이어지고 더 심해지는 카스트 몰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다. 그러다 보니  불가촉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을 철폐하라는  브라만 출신
들의 거센 항거가  빈발하고 있다. 내 모교인 델리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줄지어 일어났다는 보도는 나를 참으로  착잡하게 했다. 이제는 불가촉민
들이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것일까? 아니면 수구 세력들의 마지막 버티기일까?
  이 무서운 카스트  몰표는 마침내 인도의 정권 교체를 가져왔다.  정권이 바뀌
면서 대법원의 독립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현직 수상과 고위관료들이 줄
지어 구속,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 뿌리 깊은 부패 구조가 많이 파헤쳐지
고 있는 것이다.  정경 유착의 문제나 언론 독립의 문제가  불가능하게만 여겨지
지 않는 것은 문맹률 35퍼센트의  사람들이 일구어 낸 선거 혁명이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는 존재하는가?"  인도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자
주 나오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때마다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을 한다. 길게 설명
하자면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한 마디로  그렇다 아니다라고 답하기에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인도의 유력 일간지인 [스테이츠먼]
(Statesman)이 1967년에 쓴 사설 제목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Caste hierarchy declines as  Casteism rises(세습-배타-위계의 카스트 구조는 
쇠퇴하고 있는 반면 카스트 몰표가 횡행하면서 카스트 의식은 오히려 더 강화되
고 있다).

    4. 남자도 아닌 것이 여자도 아닌 것이, 중성 여인들의 슬픈 이야기
  1984년 델리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인 샨띠니께딴이라는  곳에서 말로만 듣던 
그들과 마주쳤다.  남달리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괄괄해서 그들이  바로 히즈라
(hijra)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듣던대로 그들은 여럿이  함께 다녔는데, 
처음 접한 내겐 '몰려다닌다'는 다소 위협적인  느낌이 들었다. 씨익 웃으면서 구
걸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생경해 비위가 심하게 상하고  소름이 끼쳤고, 
또 금방 무슨 행패라도 부릴 것만 같아서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피해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들에 관해 좀더 알게 되자 내가  그들을 크게 곡해했다
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연구는 선뜻 내
키지도 않는 데다 또 그들과 접촉해 볼 용기도 나지 않아 아직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히즈라의 웃음 뒤에 밴 눈물
  히즈라는 여장을 하고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을  일컫는다. 그들 중에는 태어
날 때부터 양성을  모두 가지거나 비정상적인 생식기를 가진 사람도  있지만, 사
실 그런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실제로 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
은 그들이 양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괴이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직후
나 어린 시절에  히즈라들에게 유괴되어 히즈라로 산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
실과 다르다. 그들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런
데 자꾸 여성같이 행동하는 것이  좋고 더 나아가 여자가 되고 싶어 자발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그래서 남근과  고환을 외과적으
로 제거하는 이른바  거세 수술을 한다. 그러고는 사리를 입고  머리카락을 기르
고 화장을 하고 힌두 여인들이 차고 다니는  팔찌, 발찌, 귀고리, 코고리 같은 모
든 종류의 장신구들을 차고 다닌다. 문화적으로는  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이다. 그렇지만 남성  생식기를 제거한 후 여성 생식기를 이식하지는  않으니 일
반적인 성 전환자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결국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셈이
다. 이들을 두고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인 세레나 난다(Serena Nanda)는 하나의 
독립적인 제3의 성이라 하였다.
  거세는 평범한 성불구 남성을  히즈라라는 지위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이다.  수술을 통해서 성불구의 남성은  죽고, 성스러운 힘을 부여받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거세 수술은 히즈라 집단에 
입문하기 위한  한 과정으로 여신의  사원에서 시행된다. 거세  수술은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비밀리에 행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거세가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
다. 거세 수술은 전혀 의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조산원이 맡아 한다. 조산원은 
절단한 후  피가 쏟아져 나와도 지혈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 
피는 남성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모두 흘려 버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출혈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발생한다. 하지만 힌두교 내의 많
은 일들이 그렇듯 이 수술  또한 그들이 모시는 여신의 권능으로 실시한다고 믿
기 때문에 수술 결과를 가지고 조산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수술 후 상처는 
바늘로 꿰매지 않는다. 하지만 병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상처 부위에 뜨
거운 참깨 기름을  반복해서 바르는 등 나름대로의  토속적 치료 방법을 동원한
다.
  히즈라들과 여신 : 히즈라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여신을 둘러싸고 있다. 여신은 
남녀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
  힌두 사회에서 히즈라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하면서 널리 알려진 전통적인 역
할은 아들이 태어난 집에 가서 축하 의례와  공연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청중들
에게 춤과  익살과 노래를 바친다.  이때 외설적인 여자의  몸동작으로 사람들을 
크게 웃긴다. 그런 후  대표 한 사람이 축복을 받을 주인공  아이를 어머니 팔에
서 데려와 자신의  품에 안고 악령이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례와 
축복을 기원하는  의례를 행한다. 그러고  나서 복채와 공연료를  받아서 즐겁게 
돌아간다. 또 그들은 결혼식에서  공연을 하기도 한다. 결혼식을 치른 후 신혼부
부가 신랑집에 머무는 동안 이웃과 친구 및 친척들 앞에서 히즈라는 신혼부부가 
아들을 낳고 금슬  좋게 오래오래 살도록 축원한다. 그리고 복채를  받아 총총히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히즈라들은 자신들이 요구한 만큼의 복채가 나오지 않을 때는 심한 욕설을 퍼
붓고 그래도 안 될  때는 저주를 하기도 한다. 그들이 최고로  악에 받쳤을 때는 
입고 있던 치마를 걷어 올려 자신의 해괴망측한 생식기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
이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보는 사람들에게 성불구의 저주를  내리는 셈
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면 그들의 요구가 아무리  지나치다 해도 두 손을 들고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경찰을 불러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경찰
들도 힌두교 세계 내에서  가족을 구성하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 '믿음'의 영향
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이  뜯어내는 바가지 요금은 엄청
난 액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괴롭혀 치부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주라는 것이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겐 별로 영향력이 없지만 부
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
을 일종의 부의 재분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히즈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과 불임의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곧 그들에게는 가정의 번영과 다산을 가져다 줄 능력이 있다는 논리에서 기원한
다. 언뜻 보면 모순된 논리이지만 이것이 곧 힌두교의 세계이다. 징벌의 신인 쉬
바가 동시에 생산의 신이 되고  자비를 내리는 어머니 신이 질병을 내리는 신이 
되는 경우처럼 힌두 세계에서는 비일비재하다.
  히즈라들은 언제 어디서 아이, 특히 사내아이가  태어났고 또 어디서 결혼식이 
치러질 것인지를 알아 내기 위해  그들의 영역 내에 있는 집들과 산부인과 병원
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가 찾게 되면, 그들만의 표식을 출입구에  해 둔다. 그 
표시는 다른 히즈라에게 그곳은 이미 선택된 장소이기 때문에 의례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 집에 표시를 한 집단은 아이  이름을 짓는 날을 
비롯해서 중요한 의례를  치르는 날이면 잊지 않고 방문한다. 고객이  되고자 하
는 가족이 먼저  히즈라들을 찾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히즈라들이  알아서 나타
난다.

    금욕주의자로서의 자부심
  히즈라는 남성의 성생활을  포기한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금욕주의와 연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대서사시 [라마야나]에서 찾
고 그것을 근거로 금욕주의자로서 당당한 자부심을 가진다.
  라마는 아내 시따를 데려오기 위해  악마 라와나(Ravana)가 있는 랑까(Lanka)
로 가면서 자신을 배웅 나온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남녀 여
러분, 눈물을 닦고 돌아가십시오." 그 후 랑까에서 금의환향한 라마는 명상을 하
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자들
로서 라마가 떠날 때 특별히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
대로 앉아서 그가 돌아올 때까지 명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라마의 큰 
축복을 받았다.
  히즈라들이 세상을 포기한  초세속적 수도자로 자처하면서 성스러운 방랑자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이런 신화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초세속적 수도자
들'은 물질적 소유, 카스트 관계, 가족 중심의 삶, 평범한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
망 등을 다 포기한 존재인 것이다.
  밀교의 교리를 보여 주는  남녀 교합상 : 히즈라들의 세계관과, 이것의 연원이 
되는 밀교의 세계는 음양 합일의 원리에서 동일하다.
  이러한 그들의 삶 또한 힌두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그것은 밀교(Esoteric 
Buddhism)의 음양 일체론과 관련된다. 밀교는 궁극적으로 여성의 에너지를 추구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남성인 쉬바가  여성인 빠르와띠와 하나의 자
웅동체를 이루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밀교에서는 여
성의 궁극적인 에너지가 우주의 근본 에너지이고,  그 여성성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남성이  스스로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히즈라의 
문화가 그 근본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히즈라 문화의 연원은 곧 밀교라
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히즈라는 여장을 하고 여자같이 행동하며  산다. 죄를 저지른 히즈라에
게 내려지는 징계의 하나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불명예스럽
고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히즈라들은 피부를  여자처럼 곱게 관리해야 하는
데 면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얼굴의 수염을  일일이 뽑아야 한다. 그들은 모
든 행동거지를 여자처럼 하므로 여자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걷고, 여자처럼 다소
곳이 앉고 서며, 여자처럼 앉아서 오줌을 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성격은 여자
들같이 온순하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히즈라들은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있으며 매춘으로 생
계를 잇고 있다. 이것이 히즈라들이 보통 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
다. 그리고 매춘이 그들의  주요한 소득원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에 종사하는 자
는 그들의 공동체  내에서 보통 일탈자로 낙인 찍힌다. 인도에서  매춘이 저속하
게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춘은  금욕주의, 탈세속주의, 탁
발승 문화 같은  그들의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
  대부분의 히즈라들은 구걸로  살아가고 있다. 거지도 어엿한  직업인이라는 인
식이 인도에서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도시에서 산다. 델리나  봄베이 그리고 구자라뜨의 아함다바
드 등지에 주로  산다. 도시에서는 구걸을 하기 위해 히즈라들끼리  집단을 이루
고 자신들의 독점적 영역을 설정해 두고 있다.  하지만 구걸 행각은 생각보다 어
려운 일이다. 본래 유순한 그들은 사람들  특히 개구쟁이 소년들이나 불량배들에
게 자주 놀림을  당하거나 봉변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어쨌든  도시에서 구걸은 
분명히 안정적인 수입원인 데다가 그 자체가 탁발승의 이미지와 잘 어울려 상승 
효과를 얻기 때문에 그들은 이 일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제3의 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붙어 있는 존재였는
데, 나중에 둘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연원을 둔 유럽 문화에서는 남과 여
가 분리된  상태에서 서로를 갈망하는-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것만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 이분법에  경도되어 있는 유럽 문화에서는 
제3의 성이라는 것은 도저히  인정되기 어렵다. 그래서 성에 관한 그 숱한 '문제
들'이 일어나지만 논쟁만 있을 뿐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에
서는 그런 류의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 인도 사회에서 히즈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5. 우리 엄마 저 하늘의 별이 되소서
  요즘도 남편과 사별한 아내를 '미망인'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표현 속에는 남
편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회한이 담겨 있다. 우리  선조들은 홀로 된 
여인들이 지조를 지키며 혼자 사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네들을 '열녀'
라 하여 비석도 세워 주고 홍살문도 세워 주면서 자손 만대의 귀감이 되도록 하
였다. 만약  그들 중에 누가 남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더 존경을 받았을까?
  일단 이러한 마음으로 인도의 사띠(sati)  풍습에 대해 이해해 보기로 하자. 사
띠는 남편이 죽으면 그를  따라 같이 죽는 풍습 혹은 그  여인을 가리킨다. 인도
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기  때문에 남편을 따라 죽는다는 것은 곧 스스
로를 화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사띠 즉 '착한 여인'이라고 부른다. 우리 
전통과 마찬가지로 비석도 세워 주고 가문의 최고 자랑거리로 삼는다.

    루쁘 깐와르, 그 영원한 이름
  1987년 9월 4일, 나는 인도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접하게 되었
다. 말로만 듣던 '사띠'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물론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신문을  통해  사건의  생생한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다.  루쁘  깐와르(Roop 
Kanwar)라는 열여덟 살의 여인, 시집 온 지 갓  일곱 달밖에 되지 않은 그 소녀 
같은 여인이 남편을 화장하는 불더미에 자신의 몸을  던져 버렸다. 수백 명의 군
중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라자스탄 주의  수도인 자이뿌르 시에서 자동차로 불
과 두 시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데오랄라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후 이  일은 전국적인 뉴스로 보도되었다. 언론과 여성계에서는  사띠 자체
의 금지뿐만 아니라 사띠 행위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행위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
다고 연일 목청을 높였다. 반면 사띠는  '복음'이 되어 지방의 '유림' 격에 해당하
는 사람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그날 이후 십삼 일째 되는 
날 예정대로 사띠 찬양의 축제가 열리고, 여기에  자그마치 삼십만 명이 넘는 사
람들이 모여 시가  행진을 하면서, 그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탄압하는 '야만적'
이고 '무식한' 소리에 항거하고 '빛나는' 전통을 지키자고 울부짖었다. 이후 이 마
을은 성지로 자리잡았다.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현행법에 의하면  분명히 살인 혹은 살인 방조 행위에  해당함에도 불구
하고 몇몇 잡아들인 사람들조차 정치적 압력에 의해  결국 다 풀어 주었다. 풀려
난 이들이 영웅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 기독교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1817년 한  해 벵갈 지방에서만 자그마치 
칠백팔 명의 여인들이  사띠를 행했다고 한다. 사띠는 1829년 영국  총독 윌리엄 
벤팅크에 의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후 사띠를  행한 횟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독립 후에는 총 40건 정도가 보고되었을 뿐이다.

    등신불은 흠모하고 사띠는 저주하고?
  왜 그들은 사띠을 행할까?  우리네 열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찜찜함은  남는다. 그들
이 사띠를 행하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더듬어 보자.
  힌두 여자는 남편이 죽은  후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나는 과부로 살
아가는 것이요 또  하나는 사띠를 행하는 것이다. 과부라는 뜻의  인도말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은 여자, 동시에  죽음(가장 강력한 오염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여자 즉 재수 없는 여자이다.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는 죄악을 저
지른 여자이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모든 정상적인 종교, 사회적 행위에서 배제
당한다. 그녀는 정죄를 해야 한다. 어떻게 정죄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벗겨 낼 수 있을까?  고행만이 유일한 길이다. 고행에
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같이 40일 간의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고 이슬람 교
도들처럼 일정  기간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체의 식욕, 성욕  등의 욕구를 
죽이는 것도  있다. 그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30년 면벽일 것이고  그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굶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 길은 불교에서  여전히 추앙
받고 있는 등신불이다. 등신불은 스스로를 분신하여  죄를 떨치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띠의 원리이다. 그래서 사띠는 문자 그대로 착한 
여자이다. 착한 여자란 무엇인가?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하는 여자이다. 남편의 죽
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극복하여 오염을 상서로운  것으로 바꾼 존재이다. 과부일 
때는 고행자의 위치에 있지만 사띠를  행하고 나면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
이다.
  사람들이 사띠를 추앙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다. 모두  죄를 씻
고 신을 추앙하자는 논리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사띠는 자발적이다. 우리의 
열녀들이 자발적이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베다 메흐따라는  한 여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아홉 살 때 그이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레 람 하레 람!
  그때 그이의 나이는 열셋이었고
  우리는 모두 독실한 상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나는 라자스탄의 우리 할머니 선조들이 사띠를 기꺼워했고
  그 후 모두 여신이 되어 추앙을 받고 있다고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레 람 하레 람!
  나는 시집을 가자마가 사띠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신이 되어야지라고.
  하레 람 하레 람! 

    남성 중심 사회의 비극
  죽음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하여 그동안 맺었던 모
든 관계가 끊어지고 쌓아 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
들은 사후 세계를 생각했고 그곳에서 그  관계들을 복원하리라 소망한다. 진시황
은 자신의 무덤에 엄청난 토용을 매장해 놓고 사후에도 그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다. 어떤 이는 망자의  무덤에 성경책을 넣어 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돈을 넣
어 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술이나 화투패를  넣어 주기도 한다. 망자가 고양이를 
너무너무 아꼈다면 그들은  살아 있는 고양이를 넣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망자
가 가장 아낀 것은 뭐니뭐니 해도 아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내도 넣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순장이다. 고대 우리 나라에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이
런 생각에서 사띠가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띠가 그렇게까지 널리 퍼진 데에는 또 다른 사회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족 제도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가족을 이루며  산 남자들은 자신이 죽은 다음 자신의 가족
이 다른 남자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만이 영원히 
자기 가족, 자기 핏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혈통도 아들에게 상
속되고 재산도 아들에게 상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죽었는데 여자가 살아 있다면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여자가 죽은 남자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을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문제가 생기면서부터 과
부의 재가가  금지되기 시작한다. 바로 봉건  사회가 시작되는 500년경부터이다. 
이때부터 과부와 가문의 남자들 사이에서 재산 상속에 관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
된다. 결국  봉건 사회의 발달은  과부에게서 일체의 상속권을  박탈하였고 결국 
가문을 위해 순교해 주기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사띠 : 사띠를 거행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찬양하는 인도인들과 걱정으로 침통
해하는 영국인들, 이들은 전통 수호와 미신 타파로 심각하게 맞서게 된다.
  처음에 사띠는 남자의 횡사가 가장  많았던 무사 집단에서 큰 호응을 받기 시
작했다. 그래서 1987년의  그 사띠도 무사 전통이 가장 충일한  지역인 라자스탄
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가 사띠가 가부장제 확립에  큰 역할을 하자 점차 전
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서 사띠는 재산이 많은 지주와 상인  집안에서 독실
하게 지켜지는 것이다. 돈 없는 민중들은 사띠라는  것은 아예 생각할 필요가 없
었다. 결국 사띠는 추잡한 돈 싸움이 종교의 옷을 입은 것이다.
  사띠를 행할지의 결정은 남편이 죽은 직후 바로  해야 한다. 물론 사띠 집전은 
남편 시신을 화장할 때  같이 하는 경우도 있고 한참 뒤에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바위같이 굳은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마음에 징이 박히도록 듣고 
새겨야 한다. 그래도 간혹 불길 속에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강물로 뛰어드는 경
우가 생기곤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래서 사띠를 행하고자 하는 여인은 먼저 여러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말리는 것을 뿌리쳐야 한다. 이때 남겨지는  자식들의 처
지가 무엇보다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다.  심청이가 눈먼 아비를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듯이 이 여인은 어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불더미에 몸을 던지는 것
이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결심이 확고할 경우에는  몸에 불을 
대 보고 참는 정도를 시험하기까지 한다.
  최종 결정이  끝나면 적막이 흐른다.  이때부터 그녀는 이미  사람들에게 신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이상의 눈물은 없다. 이제 주위 사람들은 축복을 고
대하며 이 상서로운 현장으로  몰려든다. 이윽고 때가 되면 장작을 쌓아 올린다. 
그 위에서 죽은  남편이 기다린다. 의례가 시작되고 그녀는 사다리를  타고 장작
더미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남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얹고 좌정한다. 그
녀는 어머니가 되고 남편은 아들이 되는 형상이다.  마침내 자신의 젖을 물려 키
운 자식이 불을 붙인다.
  울 엄마 활활 타올라
  저 하늘의 별이 되소서

    제4장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1. 라마야나 이야기를 보면 인도가 보인다
  어떤 민족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유태인의 
[구약성서]를 꼽는다. 이에 대해  크게 이의를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나는 인도인들의 [라마야나]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태초의 시' 라마야나를 들으며 
  [라마야나]는 고대  인도인들이 남긴 대서사시이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구전
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인도인들
의 생활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라마야나]를  '태초의 시'라고 부른
다. 살아가는 삶의 모든 모양새가 여기에서 생겨났으니 그럴 법한 말이다. 그 안
에는 하루하루 이어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 그들을  올곧게 붙들어 주는 격언이 
있고, 하루하루의 행복 속에서 저절로 흥얼거리는 가락이 있다. 기도문이 여기에
서 나왔고  축제가 여기에서 나왔으며  사랑이 여기에서 나왔다.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여기에서 배우고 선을 지키는 방법을 여기에서  배운다. 총 이만 사천 수
의 아름다운 시로 이루어진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우리는 인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참모습을 본다. 이럴진대, [라마야나] 이야기를 모르고서야 어찌 인도를 이
해할 수 있겠는가!
  옛날 옛적에 천지가 개벽하고,  하늘에서 갠지스 강이 내려와 이 땅을 적셨다. 
세상 한중심에 아요디야라는  나라가 있었고 거기에 착한 왕 부부가  살았다. 왕 
부부는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고  라마라는 옥동자를 낳았다. 그리고  그 동생 
락슈만을 낳고서 그들은  백성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그만 왕
비가 몹쓸 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뒤이어 궁전에 들어  온 계비는 날마
다 두 아들을 못살게 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 어느덧 총기를 잃은 왕은 계비
의 모함에 속아 라마를  멀리 정글로 귀양을 보낸다. 그런 후  계비는 자신이 데
리고 온 아들을 왕위에 앉히지만  그 왕은 언제까지나 라마가 돌아와 선정을 베
풀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라마는 떠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추호의 어김도 없이 아내 시따를 데리고 정
글로 향하고 그 뒤를 동생 락슈만이 충성스러이  따른다. 셋이 정글 속에서 행복
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멀리 남해 섬에 사는 악마가 침입해 아내 시따를 납치해 
가 버린다. 라마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아내를 구하기 위해 나서고  그 뒤를 락
슈만이 여전히 충성스러이 따른다.
  라마와 락슈만이 남해  섬을 정복하고자 가는 길에  산천초목 모든 것 가운데 
돕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원숭이  대왕 하누만은 멀리 히말라야로 하
늘을 가르고 날아가  그곳에서 집채만한 돌들을 옮겨다 다리를 놓아  주었고, 부
하 원숭이들을 대동하여 악마의 성을 함락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라마는 
악마를 정의의 검으로 죽임으로써 시따를 구했다.
  아요디야의 백성들은 악을  물리치고 다시 돌아온 라마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기름 종지에 불을 붙여 온  성을 장식하였고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이복 동생인 
왕은 라마에게 왕좌를 바쳤다. 세상은 다시 선이 앞서고 평화가 퍼졌다.

    권선징악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라마야나] 신하를  통해 인도 사람들은  정의는 항상 승리한다고  믿는다. 그 
정의는 비록 모함을 받지만, 참고 기다리면서 묵묵히 제 길을 간다. 바로 라마가 
간 그 길이다.  그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 길엔 
변명도 없고 해명도 없다.  악은 망하고 선은 승리하는 그 길은  비록 험난한 길
이지만 곧은 길이요  옳은 길이다. 라마의 후예들은 그들의 영웅이  걸어온 진인
사와 대천명의 길에서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본다. 그 길은  비록 지난한 길이
지만 만물의 동참이 있어 결국 승리하는 길이다.  그 가운데 원숭이 대장 하누만
의 도움이 아주  감격적이다. 정의를 따르고 주인을 섬기는 원숭이  대장의 모습
에서 낮은 사람들은  상전에 대한 뜨거운 복종심을, 높은 사람들은  하인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배운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주변의 원숭이들을  보면서 원숭이 
신 하누만을 연상하곤 한다. 원숭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각별한 것도 이와 무
관하지 않을 것이다.
  라와나와 싸우는 라마  : 바닥에 그득한 시체와 머리가 여럿인  악마 라와나의 
모습이 이채롭다.
  [라마야나] 이야기에는  따뜻한 가정도 있다.  비록 계모가 사악한  짓을 하고 
거기에 아버지마저 속수무책으로  속아 넘어가 잘못된 명령을  내리지만, 라마는 
반항하거나 불효를 저지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효
심을 읽을 수  있다. 라마가 맏이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가운데  친동생은 물론이
고 이복 동생까지 그 위엄에 압도되어 그를  존경하고 따른다. 부모와 자식 간의 
충성 관계가 그대로  형과 아우에게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본다. 오늘날  인도 가
정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가족 관계의 전형이다.
  [라마야나]는 아내에 대한 지아비의 의리를 또  하나의 중심축으로 두고 있다. 
그만큼 이 이야기에서 아내 시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지아비에게 충성하는 
아내를 위해 지아비 역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
면서, 우리는 인도 사람들의 조강지처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헌신을 읽을 수 있
다. 모든 것이 가부장의 세계에서 권선징악으로 다시 하나가 된다.
  연꽃 세계 :  끄리슈나와 라다가 양과 음으로 만나  하나를 이룬 세계, 그것이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연꽃 세계이다.
  쉬바-빠르와띠 자웅동체  : 밀교에서 이상적으로  보는 신의 모습으로서  몸의 
오른쪽은 남신  쉬바이고 왼쪽은 여신 빠르와띠이다.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식품, 
심지어는 거느리는 동물들까지 반반씩 나뉘어 있다.
  히즈라들의 신 : 몸 안에 남녀 생식기가  함께 들어 있는 여신으로 히즈라들이 
섬기는 신이다. 위쪽에  보이는 쉬바의 코가 남근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인더스 문명의 인장들 : 그 정확한 용도와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
기에 새겨진 그림들은 당시의 종교 내용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근형 쟁반 : 제사 때 사용하는 청동 쟁반으로 여근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카주라호 사원 벽면의 부조 : 남녀가 몸으로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찾
는 것이고,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까마 수뜨라 세계의  성애 : 까마 수뜨라 세계의 성애는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까마 수뜨라 세계의  춤 : 까마 수뜨라 세계의  춤은 중요한 사랑의 기술이다. 
여인의 춤은 남자를 유혹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꾼달리니의 기의 움직임 : 꾼달리니는 요가 가운데 하나이다. 꾼달리니를 수행
하면 인간의 몸  안에 농축되어 있는 기가 위로  상승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
다. 이것은 몸  안의 기를 축적함으로써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보는  밀교의 세계
와 통하는 점이 있다.

    정치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마야나] 신화의 주제는 라마가 결국 왕좌에  복귀하고, 이후 선정을 베푸니 
끄샤뜨리야에 의한 이상 정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라마는 바로 비슈나가 
정치를 바로잡고 이상  정치를 펴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화신이다. 기독교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인도 사람들은 정치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곧 정치가는  혈통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진다. 인
도공화국의 초대 수상 네루의 뒤를  이어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고 다시 
외손자 라지브 간디(Rajiv  Gandhi)가 집권하는 '네루 왕조'가 성립하게  된 이면
에는 이런 인도인들의  혈통과 뿌리에 대한 믿음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간디가 
소속된 국민회의당 정부가 [라마야나]를 TV용 드라마로 만들어 총선 전에 전국
적으로 방영한 것도 교묘한  선거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여름, [라마
야나]가 방영되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전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을 정
도였다.
  요즘은 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십여  년 전, 처음 태국 관광이 
붐을 일으켰을 때는  우리 관광객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불순한 동기로 태국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에이즈 덕분에(?) 그 수가  많이 줄었다 한다. 그런
데도 태국에 가는 우리  관광객의 수는 여전히 많다. 아마 많은  사람이 곰과 뱀
을 찾아 떠난 보신 관광객일 것이다.
  라마 일가와 하누만  : 라마와 시따 그리고 락슈만은 인도  사람들에게 단란한 
가족의 상징이다. 아래에는 시중을 들고 있는 하누만이 보인다.
  그런데 사실  태국은 섹스나 보신이  전부인 나라는 아니다.  그곳에는 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 중  하나가 방콕에 있는 에메랄드궁 벽
면에 그려져 있는  [라마야나] 이야기이다. 라마가 태어나서  금의환향할 때까지
의 주요 장면이 우리 경복궁 회랑만한 길이에 아름다운 태국식 화법으로 그려져 
있다. 방콕에서 버스를 타고 서너 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폐허 속에서 발굴한 
유적지를 볼 수 있다. 태국 사람들이 가장  자랑하는 아유타야 왕조의 옛 수도의 
모습이다. 아유타야!  그렇다 [라마야나]의 본거지인  아요디야의 태국식 발음이
다.
  태국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왕조의 이름이 바로 [라마야나]의 아요디야에서 
따온 것이라면, 그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인도 신화에서 빌려 왔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아직도 태국  국왕의 별호는 라마 9세인 것이다. 더구나  태국 제일의 정
궁 벽면에 [라마야나]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면, [라마야나]가 태
국 사람들의 생활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
가 없을 것이다.
  [라마야나]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
오는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 부분을 잠시 훑
어보기로 하자.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뒤 장성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총각인
지라 주변에서 빨리  결혼하라고 그 성화가 실로 대단했다. 수로는  권력에 줄을 
대고자 하는 그들의  한결같은 속내를 다 알아차리고선 모든 청을  물리치고, 바
다 건너에서 온 한 외지 출신 처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 처자가 "소첩은 아유
타국 공주올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아유타국이라! 아유타국이라 하면  라마 
신이 이상 정치를 폈던 바로 그곳이다.
  우리로 치자면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아사달과 같은 곳이다. 두계  이병도 선
생의 의견을  좇는다면, 아사달이라는 말은 다름  아닌 조선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역사에서 권력의  가장 원초적인 기원은 바로 아사달에 있는  것이다. 그러
니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그 국호를 조선이라 정한 것은 다른 어떤 의미
보다도 "나는 아사달에서 온 사람이오."라는 것을 천명한 것과 같다.
  수로왕의 부인이 된 그 처자가 아유타국 출신 공주라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치
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진짜로 인도에서 왔는지를 증명해 보기  위해 인도를 
들락거리고, 이런저런 추론을 세워  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화가 가지
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알아야 그 안에서 역사를 추출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라마야나]를 통해 인도 사람들의  '영웅 신화'를 읽을 수 
있다. 1981년, 노벨 문학상 수상과 동시에 우리 사상계에 권력의 속성에 관한 본
격적인 연구의 불을  지펴 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영웅에 대해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영웅이란 가능한한 위험이 가까이 오도록 허용하고 그 문제에 모든 것을 거는 
행동에서 탄생한다. 영웅은 위험성을 최대한 증폭시켜 적을  만들어 낸 후 그 위
험을 극복해 낸다. 영웅은 적을 굴복시키지만 자신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살
아남는다. 그리고 그 승리의 순간은 곧바로 권력의 순간이 되고 더 나아가 '신성 
불가침'이 부여된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인간은 서로 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이나 연민은 큰 의미가 없다.
  라마야말로 전형적인  카네티식의 '영웅'이다. 신성 불가침의  화신이며 동시에 
권력의 화신이다. 그러한 라마를 인도인들이 믿고 숭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웅 
라마의 이야기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인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도인의 내면 세계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2. 아이 낳는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유
  남자가 장가를 가는 것인가, 여자가 시집을  오는 것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고
대에는 남자가 장가를 갔으나 조선  초기 이후부터 차츰 여자가 시집을 오는 것
으로 바뀌었다.
  인도 사회 또한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없진 않겠지만, 철저히  여자가 시집
을 오는 형국이다.  조혼을 한 데다가 대부분 외간 남자들에게는  얼굴을 내비칠 
일이 없을 정도로  집 안에만 묶여 있으니, 연속되는 시집살이는  날이면 날마다 
고추같이, 당초같이 매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첫 탈출구는 아이를 낳는 일이다. 아이를  낳는 것은 그가 비로소 가정
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을 받는 일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승인인 셈이다. 또 아이
를 낳는 것은 집안에 경제적으로 큰 보탬을  주는 일이다. 농촌에서는 사람의 손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경제력인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
기에서 갓  태어난 생명체의 운명은 두  가지로 크게 달라진다. 아들은  장차 이 
집안을 먹여 살릴 사람이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든든한 동아줄이지만, 딸
은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 모아 시집을 보내야 하니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
온 썩은 줄인 셈이다. 그러니 아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딸은 없으면 없을수
록 좋다. 인도 땅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새  생명이 58,000명이나 된다고 하니, 탄
생의 순간 희비의 엇갈림도 58,000번은 되는 셈이다.

    아이를 가질 때부터 낳을 때까지
  갓 시집 온 여자는  낮에는 소같이 일해야 하고, 해가 진  다음에야 겨우 달콤
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비록  녹초가 된 몸이지만 부부의  운우지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여자는 바짝바짝 타는 심정으
로 마을에 있는  사원을 찾는다. 여신 나르바다  마이(Narbada Mai)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빈다.  "신이시여, 우리의 어머니시여, 아이를  갖게 해 주소서,  아들을 
갖게 해 주소서."  여자는 손에다 소똥 반죽을 잔뜩 묻혀  사원 바닥에 손도장을 
찍는다. 한 번  두 번... 손가락이 밑을 행하도록  찍은 손도장 범벅 속에 여자의 
집념이 흥건히 고인다. "아들  하나 터억 낳고, 나도 황금색 카레 반죽으로 버젓
이 손가락을 위로  해서 손도장 범벅시킬 날이  오겠지. 암 오고 말고..."  여자의 
간절한 기원 속에 하루하루가 간다.
  여신상 : 아이 낳는 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집안 대소사가 여신을 숭배하는 일
에서 시작한다. 중심부에 새겨져 있는 여근이 여신의 생산의 역할을 강조한다.
  어머니 신이 감복한 것일까?  아이를 갖게 된 여자는 그때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금기 속으로  빠져 든다. 우선 가능한  한 바깥 출입을 해서는 안  되고 집 
안에서도 조용히 물러나  있어야 한다. 해산할 때도 친정은 물론이고  산파 집에 
가서도 안 된다. 심지어는 친정 어머니에게 알리는 것조차 꺼린다. 모든 것은 시
집에서 시집 여자들이 해야 할 몫이다.
  아홉 달이 지난 어느  날 여자는 산통을 느낀다. 그때 남자는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달려가 아내  곁에서 대기한다. 남자가 여자 곁에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출산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뜻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새로 태어나
는 아이의 시, 일, 월 그리고 별자리를  받기 위한 것이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
지로 해산을 앞두고 준비를 하게 되는데 이때 사람들은 주변이 오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 기간 동안은 집안  청소도 절대 할 수 없으며 외부 
사람들과 접촉해서도 안 된다.
  여자가 해산을 할  때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할머니들이 산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슬하에 자손이 많고 모두가 건강하게 잘 자랐다면, 여기에다 재복 또한 많
은 할머니라면 여기저기서  모셔가기 때문에, 그 할머니가 받은 아이의  수는 백 
명도 더 될 것이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는  마을에서 가장 낮은 카스트의 아낙이 
산파가 된다. 아이를 낳는  일을 크게 오염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탯줄을 자르는 일은 극도로 심각한  오염이기 때문에 산파 외에는 누구도 그 일
을 하지 않는다. 설사 산파가 늦는 한이  있더라도 탯줄을 자르는 일만큼은 아무
도 대신  나서지 않는다. 산파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탯줄을 자른 산파는  아기 엄마가 악령으로부터  보호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태를  산모가 기거하는 방 옆  땅 속에 파묻는다. 산파는  흙으로 만든 
요강을 산모 옆에  두고 그 동안 사용했던 모든 오염된  것들 즉 사리, 깔개, 닦
개, 걸레 등을 수거해 세탁부에게 맡긴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와 산모를 쉬게 
하고 돌아간다. 그런 다음에도 한참  동안 아무도 아이를 볼 수 없다. 아이의 아
버지도 물론이다.

    해산은 곧 오염이다
  여자가 해산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집안 전체를 심하게 오염시키
는 일이다. 애를  낳음으로써 피를 보기 때문이다.  피도 보통 피가 아니고 아홉 
달 동안 자궁 안에서 나오지 못한 채 고여 있던 월경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해산 후 사흘 동안이 가장  심하게 오염된 날이므로 오직 산파
만이 산모를 수발한다. 생명체는 고귀하지만 심한  오염 속에서 태어난다는 생각
은 마치 인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진흙밭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연상시킨다. 그
래서 해산 후 아이의 고모들이  맨 먼저 하는 일이 방과 집안의 곳곳을 물에 반
죽한 소똥으로 정화시키는 일이다. 소똥 반죽을 칠할  때는 땅이나 벽에 마치 무
슨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한다. 지그재그로 그리기도 하고 굵게  가늘게를 반복
하면서 칠하기도 한다. 그 위에 다르바라는 풀을 뿌린다. 소똥 반죽이 마르고 난 
마당과 방은 보기에도 좋고  닿는 촉감도 참 좋다. 또 시원한  느낌도 드니 더욱 
좋다. 냄새가 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소똥이라는 게 다 알다시피 풀찌
꺼기인데 냄새가 나면 얼마나  나겠는가? 소똥 반죽칠은 결국 우리로 치면 장판
을 새로 까는 것과  같다. 우리같이 춥고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사람들은 구들
에 장판이 최고지만 인도처럼 더운 곳에서는 소똥 바닥이 최고이다.
  소똥 바르기  : 소똥 반죽으로 마당을  바르는 것은 우리가 장판을  까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흙으로 갓 빚은 항아리에 붉은 물감이나 소똥 혹은 카레 가루 같은 것으
로 무늬를 그려 넣은  다음, 깨끗한 물을 채워 아이의 아버지가  직접 부엌 아궁
이 위에 올려놓는다. 물이 끓으면 산모에게 붉디붉은 홍차를 준다.
  사흘간의 정화를 끝내고 나면 브라만 사제를  초청해서 의식을 치른다. 아이를 
안은 산모와 아이의  아버지가 나란히 앉는다. 이들이 자리에 앉고  나면 브라만 
사제가 한 손에 성수를 들고 온다. 그는  가져온 성수를 부부에게 조금씩 마시게 
하고 머리에 뿌려 줌으로써 몸의 안과 밖  모두를 정화시킨다. 정화를 마친 브라
만이 사례로 받은 보따리를 들고  총총히 돌아가고 나면 그 집은 다시 정상적인 
생활 공간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여자는 아직  멀었다. 비록 극도의 오염 상태는 끝났다지만  음식을 만
드는 일이나 정과 관련된  집안일은 아직 맡을 수 없다. 앞으로도  일정 기간 동
안 여자는 집안 사람과는  접촉할 수 있지만 외부 사람은 만날  수가 없다. 그리
고 떨어진 곳에서 산파의 뒤를  이어 이발사 아낙의 수발을 받으며 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 한 달 가까이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지내는 것은 세계 공
통의 문화이다. 인도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렇고  히브리 사람
들도 그렇다.  그것이 격리라고 하는 '죄'의  모양새를 뒤집어 쓰고  있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 기간 동안만큼은 여자들이 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도처
럼 남성의 권력이 월등한 곳에서는 그것이 '죄'라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우리 나
라나 다른 곳에서는 달랐다.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일
  해산한 지 일 주일에서 열흘  정도가 지나면 또 하나의 중요한 의식이 기다리
고 있다. 저녁 예닐곱시경,  집안 여자들과 이발사 아낙만이 참여한 가운데 아이 
고모의 주도하에 치러지는  비공개 의식이다. 집 한가운데 있는 큰방  중앙에 상
서로운 무늬를 그려  놓고, 그 위에 나무판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 위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온갖 치장을 한 산모가 아이를  안고 앉는다. 이때 
산모는 흰색 숄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다. 그리고  이발사 아낙이 산모 발등에 카
레 가루 반죽과 붉은색 물감으로 상서로운 무늬를  그린다. 그 무늬에는 여러 가
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우리에게는 불교를 통해  들어온, '만'이라는 글자로 
알려진 무늬이다. 발등에  상서로운 무늬를 그려 주는 이 의식이  끝나야 비로소 
산모는 그 집안의 여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했다고 인정을 받는다.
  아이를 낳은 지 십이 일이  지나면 아버지는 일가 친지를 모시고 아이에게 이
름을 지어  주는 의식을 한다. 브라만  사제가 집전하는 가운데 쌀을  담은 구리 
쟁반이 아버지 앞에  놓인다. 아버지는 오른손 집게 손가락으로 쌀  위에 아이의 
사주와 별자리를  적은 다음 아이에게 주고자  하는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 
브라만 사제가  이를 허락하면 아버지는  그와 친지들에게 능력껏  답례를 한다. 
그러고 나서 모두 돌아가면 마침내 한 생명의  탄생에 대한 초반 의식이 끝난다. 
물론 그 뒤로는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수많은 의식과 절차들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그 주인공이 엄마에게  아이로 바뀌는 것이 다를 뿐, 담겨  있는 의미는 다 
같다. 모든 것이 새 생명의 '안녕'을 위해서이다.
  아이 낳는 절차가 이다지도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은 그들의 생명 중시 사상에
서 온 것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서 그들은  '한 생명체가 이 세상에 무사히 
도착했나이다'라는 감사의 신고식을 신에게 하는  것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보내 
주셨으니 이제 당신께서 보호해 주소서'라고 신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아이 낳는 절차가 엄격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
회'에서 생산력은 매우  중요하다. 아이 낳는 일은  곧 생산력과 직결될 뿐 아니
라, 여자로서는 가족과 공동체의  정식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
요한 의미가 있는데 어찌 하찮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이
런 데서부터 비롯된다.

    3. 결혼, 축제인가 전쟁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이  축제가 아닌 곳이 없다. 결혼이 두  남녀가 만나
는 것일 뿐만 아니라 두 집안이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렇다. 동시에 결혼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고 더 나아가 더불어 사
는 사회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결혼을 마치 전쟁 치르듯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왜 그럴까. 그들에게 결혼
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일까?

    힌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힌두교는 가정 중심의  종교이다. 그래서 가장이 최우선으로 삼는 권리  겸 의
무는 집안의 대소  제사를 치르는 일이다. 물론 가업에 힘쓰면서  가족을 부양하
는 것이 우선일 테지만, 이것 역시 집안  제사의 음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에서 볼 때 제사의  중요성이 더욱 돋보인다.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제사 중에서
도 가장 중요한 것이 조상 제사이다. 조상  제사를 통해 돌아가신 조상들의 영을 
위로한다. 가장은 이 제사를 영원무궁토록 지켜야 하고  그 제사를 잘 지켜줄 자
식을 두어야 한다. 물론  아들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바
로 결혼이다. 
  결혼식 : 가운데 놓인 구리 쟁반에 쌀, 코코넛 등을 담은 후 브라만 사제는 신
혼부부가 자식을 많이 낳고 복 많이 받고 잘 살게 해 달라는 축도를 한다.
  이처럼 힌두교도의 인생에서 결혼은  다른 어떤 사회적 행위보다 중요하기 때
문에 결혼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이 매우  까다롭게 정해져 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까다로왔는지 [마누법전]에서는  여덟 가지 종류로 나누어,  어떤 결혼
은 권장하고 어떤 결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 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결혼의 종류에 따라 이미  자손들에게 덕이 갈지 해가 갈지가 결정된다는 것
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는가. 부모가 신랑 신부감을 골라 결혼을 
시키는 것은 좋고, 본인들이 서로 좋아서 결혼하는 것은 좋지 못하며,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처녀를 납치해서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전통적인 결혼 풍습은 지역마다  서로 달랐다. 지금에 와서는 
그 차이가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지역마다 풍습이 많이 달랐
다. 그러니 인도같이 땅덩이가 넓은 곳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인도의 결혼 문화는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공통적인 것들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카스트 안에서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시  다른 카스트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을 경우 우선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음식 문제이다. 음식의  맛이 맞네 안 
맞네의 문제를 넘어서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가정 제사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또 문제가 생긴다. 물
론 서로 다른  카스트와 결혼한 사람들은 이미  음식이나 제사 문제에는 초연한 
사람들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중요한 장애가 아닐 수 없다.

    결혼에 관한 몇 가지 규칙
  인도 북부에서는 같은 카스트 내에서 결혼을 하되 서로 다른 씨족에서 배우자
를 찾아야 한다. 부계 씨족,  모계 씨족, 친조모계 씨족, 외조모계 씨족 이 네 가
지 씨족을 피하여 자신의 배우자를 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모계 쪽으로는 다
섯 세대를 그리고 부계 쪽으로는  일곱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상이 같지 않은 
사람하고만 결혼할 수 있다. 굳이 우리와  비교해서 설명한다면 이제는 달라졌지
만 동성동본끼리는 결혼을 금한 것과 같다.
  그리고 배우자는 반드시  마을 밖에서 구해야 한다. 또 한  집안에서 배우자를 
동일한 마을에서 취할 수  없다. 우리의 겹사돈 금지와 흡사한 사회적 의미이다. 
이는 결혼을 통해 집안과 집안 간의 관계 더불어 마을과 마을 간의 관계를 더욱
더 확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고자  하는 바
람이 결혼을 통해 제도화된 셈이다.
  북부에서 지켜지는 또  하나의 결혼 규칙이 있다. 신부는 같은  카스트 내에서 
반드시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위치의 가문으로만 시집갈 수 있다(한  카스트가 
하나의 집단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무릇 모든 집단이 다 그렇듯, 하나의 카스
트 내에도 여러 개의 분파가 있다).  특히 브라만 같은 상층 카스트들이 더 까다
롭게 지키는 규칙이다. 따라서 여자들이 결혼할 수  있는 카스트의 범위는 더 줄
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제도화된 결혼 규칙을  통해 최고의 지배 집단은 계속
해서 소수의 집단으로 남아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북부 지방의 가족 관계는  절대적으로 가부장적이다. 가족의 모든 
권위는 남자에게만 계승된다.  재산권 또한 남자들에게만 있으므로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종속된 채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일단 사내아
이라면 나이가 더 많은 여자 어른보다도 집안에서  서열이 더 높다. 이곳에도 우
리네와 똑같은 삼종지도가 있으니  어릴 때는 아버지, 결혼 후에는 남편,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특히 남편에 대한 절대 복종이 강조되고,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요구되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아 선호
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경전에서까지 아들 낳는 법을  일러 주고 
있을까?
  짝수째 되는 날에  결합하면 아들을 얻을 것이고, 홀수째 되는  날에 결합하면 
딸을 얻는다. 그러므로 아들을 원하는 사람은 짝수 날에만 결합하라.
  그렇지만 실제 가정 생활을 보면 안주인의 지위가 완전히 예속적인 것은 아니
다. 보통 자식을 낳고 집안의 곳간  열쇠를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으면 그때부터
는 발언권이 매우 커진다. 여기에다 일부일처제가  원칙이다 보니 안주인의 실세 
위세는 생각보다는 크다.

    사촌혼을 하는 사람들
  가부장적 결혼 문화는  인도의 남부 지방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된다.  같은 카
스트끼리만 결혼을  하고 씨족끼리는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부에 비해 한가지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마을 내에서 배우자를 찾아 결혼한다는  점이다. 마을 내 결혼이라! 본디 마을이
란 같은 일가  피붙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배우자를 선택한다
면 일가 친척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
  남자는 자기 집안의 제일 손위 누이의 딸을  가장 바람직한 상대로 고른다. 그
리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손아래 누이의 딸과는 혼인을 금하고 있다.  손위 누이
의 딸 다음으로 선호하는 대상은 고모의 딸이나  외삼촌의 딸이다. 다시 말해 사
촌혼이 일반적으로 선호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계 사촌혼은 금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혹은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손
을 낳을 염려가 있는 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혈족 결
혼이 해롭다는 생각은  극히 근대에 만들어진 믿음일 뿐이다. 혈족  결혼에 관해
서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프랑스의 제닐 페랑(Genil-Perrin)은 [정신의
학에서의 변질 사상의 기원과 발전의 역사]에서,  혈족 결혼의 해악은 프랑스 혁
명 이후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시민 계급이 구귀족을 공격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귀족은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기
득권을 독점적으로  누리기 위해 혈족 결혼을  해 왔을 뿐, 혈족  결혼과 그들의 
반인류적 역사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시민 계
급은 귀족들이 혈족  결혼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인간 말종들을 낳게 되었다고 
독단적으로 해석하였다. 이  유명한 변질설이 19세기에 새로운  학설로 일반인들
에게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에서는 이종, 고종 할 것 
없이 사촌혼이 널리 성행하였고,  고려 시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실만
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
고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 이후  강력하게 금지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가부장  제도 속에서 
다듬어  놓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일환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두아르트  푹스
(Eduard Fuchs)는  그의 저서  [풍속의 역사](Illustrierte Sittengeschichte  vom 
Mittelalter zur Gegenwar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 도덕의 원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것은 일부 민중에 의해 혹은 보다 많
은 민중에  의해 부도덕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특수한 변화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것은 그 시대  도덕의 법률이나 
불문율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결국은 법률적, 사회적, 철학적 측면에서 승인되
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 시대에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모든 사람들
에 의해서 공개적인 도덕률로 요구되던 것조차도 다음 시대에 들어서면 종종 부
도덕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인도의 상황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인도 남부의 사촌혼 제도는  그들이 엄
연한 역사적  전통의 발전이자 존중받을  만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북부 
사람들로부터 심하게 모욕받고  배척당해왔다. 유사 이래로 계속해서  인도 사회
의 주도권을 잡아 온 인도 북부의 지배층들에게 남부의 사촌혼 문화는 자신들의 
독점적 권력  유지 체계에 큰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인도 사람들이  쓰는 가장 
심한 욕이 "니미 씹할!"이 아니고 "니  누이 씹할(베흔 쪼웃)!"인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인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심코 던지는 
이 '베흔 쪼웃'이라는  욕에는, 사촌혼을 하는 남부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속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결혼 지참금에 담긴 속뜻
  딸을 낳는 것이  죄가 되는 사회, 딸자식을 두는 것이  고통스럽기만한 부모는 
어서 빨리 키워서 시집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노심초사 좋은 데로 시집 가야 
할 텐데 하는 그 마음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같이 쉬운 일인가. 엄격
한 전통 사회에서  혹여 잘못된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안달하면서도 또 그렇다고 
마냥 치마폭에 싸 둘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다가 행여 혼기를 놓치기라
도 하면 어찌할 것인가. 결국 딸자식을 둔  부모가 나서서 기나긴 전쟁을 시작한
다. 그들에게 결혼은 곧 전쟁이다.
  그래서 혼담은 여자쪽에서 시작하는 법. 중매쟁이를  사이에 두고 여자쪽이 혼
인 신청(?)을 하면 중매쟁이는  그 이름을 남자쪽에 보인다. 이름과 집안을 보고 
남자쪽은 일방적으로 조건을 내건다. 이른바 계약의 시작이다. 그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피부가 흴 것. 몸에 털이 적을 것 등이 신랑이 될 당사자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친정  오라비가 많을 것(친정 오라비는  시집 간 여동생에게 
영원히 물질적으로 후원을  해야 한다는 굴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친정집이 
부자일 것 등은 신랑집 가족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부분이다.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다우리(dowry)라고 불리는 결혼 지참금에 대한 
것이다. 다우리는 신부가 신랑에게  바치는 순수한 현금만을 가리킨가. 그 외 혼
수나 예단 같은  것은 물론 다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우리는  철저하게 중매
쟁이가 양쪽 집안 사이에 서서 계약한다. 계약은 결혼 전에 얼마를 내고, 결혼식
장에서 또 얼마를 내고, 결혼 후 언제까지 얼마를 낸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계
약금-중도금-잔금 시스템이다.  이를 두고 여자를  돈으로 판다고  혹평만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문화를 두고, '통과  의례(rites of passage)'라는 용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벨기에의  민속학자 아놀드 반 게네프(Arnold van Gennep)는  신랑이
나 신부가 자기가 속해 있던 원래의 집단(친족, 부족, 연령, 성별 집단)과의 유대
가 매우 강력하여 이 유대를 깨뜨리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바로 결혼 지참금 제
도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숲 속  같은 속에서 의례적인 싸움을  하기도 하고 
신부대나 지참금도 여러 번에 걸쳐 지불되는 것이다.
  이 다우리는 워낙  가부장적인 인도 사회에서, 신부를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고 
나아가 시댁 집안에서  신부와 친정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높여 주는 역할을 해 
주곤 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노예 대금'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다우리가 없어서 시집을  못 가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88년이던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느 무더운 여름 아침이었다. 여
느 때와 다름없이  조간 신문을 펼쳐 들었던  나는 제1면 한가운데 실린 사진에 
질겁을 하고 신문을 덮었다.
  ...네 자매가 살았다. 아버지는 하위공무원.  인도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가정
임에는 분명하지만 네  자매를 시집 보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는 
어렵게 중매쟁이 앞에 끌려가다시피 나갔다. 그리고  거듭해서 똑같은 꼴을 당했
다. 돈은 없는데  상대방은 또 다우리 이야기를 꺼낸다. 결국  또 깨졌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맏이와 부모가 외출한 틈을  타서 동생들이 
선풍기에 목을 매달았다. 우리 셋이 없어져 주면  언니라도 시집갈 수 있을 테니
까... 수도 델리에서 일어난 일로 기억한다.
  인도에서 공부할 때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던  친구 놈도 다우리를 받았다고 
했다. 알 만한 놈이자 배울  만큼 배운 놈인지라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내 욕지
거리를 다 들은  후, 그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결혼은 당사자들끼리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무서운  논리에 빠져 있었다. 갓 대학 교수가  된 그 친
구는 1락(lak) 루삐를 받았다고 했다. 제 친구들은 보통 2락을 받고, 고시에 합격
하면 10락도 받는단다. 1락이면 십만을 가리키는 인도의 숫자 단위이다. 당시 그 
친구의 월급이 5,500루삐였으니 1락이면  교수 월급의 20배이다. 우리 식으로 환
산해 보면 당시 교수  초봉이 약 15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면  3,000만 원쯤 되는 
돈이다. 그러면 고시에 합격한  자는 3억원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기가 막힐 노
릇이다.
  다우리는 부유층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물론 부자들의 경우처럼 탐욕의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
데 다우리는 남부에서는 북부만큼 심하지 않다.  오히려 그쪽에서는 신부대를 받
는 경우도 많다.  또 북부에서도 여자가 경제력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다우리는 
주지 않아도 된다. 결국  다우리는 여자가 사회, 경제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신문에 등장하는  구혼 광고를 보면(인도의 대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는 정기적으로 구혼  광고가 실린다. 마치 요즘 우리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
고 있는 [벼룩시장]  류의 생활정보지의 광고와 비슷하다), "다우리  필요 없음."
이라는 파격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도 하지만,  아직은 다우리가 없어 결혼을 
못 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다. 간혹 다우리에 반발하여  결혼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 맹렬 여성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형들의 결혼
  결혼하는 나이를 보면  인도 사람들의 또 다른 결혼관을 알  수 있다. [마누법
전]에 따르면 '서른  살 남자와 열두 살 소녀',  혹은 '스물네 살 남자와 여덟 살 
소녀'의 조합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남자는 20년 이상의 학습기를 
거쳐야 모름지기 바람직한 군자가 되기  때문에 나이가 스무 살 이상이 되는 것
이고, 여자는  초경 이전에 시집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그처럼 어린 
나이에 가게 되는  것이다. 초경 이전을 적령기로 잡은 이유는  처녀성은 물론이
고 종교적 정성까지고  남편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다. 일단 몸이  피를 머금으면 
여자는 종교적으로 오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비가 딸을 초경 이전에 
결혼시키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극단적인 유아 
결혼의 풍습까지 생긴 것이다.
  유아 결혼 : 결혼  후 따로 살다가 신부가 성숙하면 다시  결혼식을 치르고 같
이 산다.
  1986년 6월 섭씨 40도를 웃도는 어느 날 밤에 성대한 결혼식이 서부 라자스칸 
주의 한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섯 쌍의 소년 소녀가 결혼을 한다. 그 가
운데 가장 어린 짝이 만 11개월 된 강가라는 처녀와 아찰라라는 만 네 살 된 총
각이다. 가장 나이 많은 짝은 신부가 만 아홉 살 된 경우이다. 인도의 유력 시사 
주간지 [인디아 투데이](India Today)는 이를 두고 '인형들의 결혼'이라고 했다.
  '인형'들은 식을 마친  후 이집 저집 인사를 다닌다. 사람들은  덕담을 하고 또 
축복해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사이  곳곳에서 축하연이 벌어지고 오색 물감
과 꽃이 마을 전체를 수놓는다. 이윽고 '인형'들은 첫날밤을 맞는다. 그들은 첫날
밤을 어떻게 보낼까?  아쉽겠지만 그들은 합방을 하지 않는다.  여자 '인형'이 좀
더 자라서 소녀가 될  때까지 그들은 각자 따로 산다. 그러나  그러다가 만에 하
나라도 남자 '인형'이 죽기라도 한다면 여자 '인형'은 평생을 과부로 살아가야 한
다. 물론 요즘은 보기 드문 경우이다.
  지금은 법으로 21세  이하의 남자와 18세 이하의  여자는 결혼이 금지되어 있
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유아 결혼을 시키고  있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들도 이제는 이런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만두려 하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
들끼리 쉬쉬하며 행사를 치른다. 그러고서는 전통을  지킨 뿌듯함에 안도의 한숨
을 내쉰다.
  전통이 법보다 크고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하지만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공허하게 하는 경우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인도 
사람들에게 결혼이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은 그것이 전
쟁처럼 느껴지는 것도 다 이런 모습들 때문일 것이다.

    4. 죽은 사람을 향한 마음, 산 사람을 위한 장례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적막 강산 이 길에도 다시 올 날 있을랑가.
  어허이 어이!
  어이 가리 넘차 너화 너!
  통곡과 한숨, 느닷없는 방문객,  대문간에 내다 놓은 밥, 그 옆의 고무신, 수의
가 바랬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고모... 저녁  내내 마신 술에  화투판은 결국 
싸움판으로 바뀌고...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새는 오늘도  어김없이 재잘거리고, 
눈물 속에 피어나는  꽃, 상여 소리는 멀리멀리  산을 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가야 하는 길. 누구든 덤덤하고 묵묵히  맞아야 하는 길인 줄 모르는 바
는 아니지만 어찌 그리 사연도 많고 회한도 많은지.

    갠지스 강 화장터에서 만난 소녀
  인도 사람들은 장례를 어떻게 치를까  하는 것은 인도에서 공부할 때 내가 항
상 궁금해하던 중요한 관심사였다.  1984년 어느 날, 인도 현대사가 낳은 최고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인디라 간디 수상 피격 사건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나
는 곧장  갠지스 강에 가 보고  싶었다. 세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의 성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상 안에서의 죽음은 세상 밖에서의 죽음과 어떻게 
다를까? 지금 같아선 별 관심을  가질 만한 일도 아닐 테지만 당시엔 어찌 그리 
보고 싶던지.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때문이었겠지만.
  이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던 터였지만, 이리  뚫고 저리 뚫고 해서 우여
곡절 끝에 뉴델리  역에 도착하여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라나시로  가는 도중에 
분노에 찬 폭도들은 열차를 정지시키고 수색했다. 그 와중에 많은 시크(Sikh) 교
도들이 참변을 당했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 도착했다. 곧
장 보고 싶은  걸 찾아보았다. 그런데 없었다.  단 한 가지, 죽음은  슬픈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혹시 무슨  특별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찾아 
나선 내 모습에 스스로 겸연쩍어했다.
  한 가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강  상류쪽에 자리잡은 화장터에 시신 한 
구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오십대쯤 되었을까, 아니면 인도 여인들은 늙어 보
이는 경우가  많으니 사십대나 되었을까?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눈가에 눈물을 
그득 머금은 채 강물을 떠다 그 시신 위에  연신 부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시신
을 감싸고 있던 베가 이내 몸에 착 달라붙었고 젊디젊은 여자의 몸이 그대로 드
러났다. 나는 계속 바라볼 수가 없었고 그러는 나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얼마간
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져 이내 불이 붙었고 곧 한줌 
재가 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소녀는 고요히  강에 뿌려졌지만 그  강은 고요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밑에서 
사람들은 목욕을 하느라고 활기가 넘쳐 흘렀다.  세속에서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더 씻어 내려는 안간힘이었다. 그 중에는 마음의  죄까지 씻어 내려는 것인지 물
을 떠서 마시는  이도 있었다. 그 밑은  온통 빨래터였다. 갠지스 강물로 빨래를 
하면 더 깨끗하게 빨아지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 밑엔 또 화장터가 있
었다. 그러나 갠지스 강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저 흐르고만 있었다.
  소녀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나를 장례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
게 했다.

    죽음은 영원한 윤회의 한 과정일 뿐
  인도에선 사람이 숨을 거둘 징후를 보이면 맨 먼저 깨끗한 땅바닥 한 곳을 골
라 소똥으로 청소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정결한  베를 깔고 그 위에서 죽을 수 
있도록 한다. 누구든지 땅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지 침대에서 숨을 거두
면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그 침대를  지고 다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래서 "뒈질 때 침대에서  뒈져라!"라는 말은 욕 중에서도 쌍욕이다. 이는 인간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수구지심의 표현이리라.
  장례를 집전하는 사제와  상주는 맨 먼저 쟁반 위에 동전들을  모은다. 동전과 
함께 빤짜가위야(Panchagaviya ;  성스러운 소똥, 소오줌, 우유, 버터, 고체  요구
르트 등을 섞은 것)를  쟁반 위에 놓고 그것을 조금 떼어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 
넣어 준다. 이때  성스러운 물을 입에 부어  주기도 한다. 성스러운 물은 갠지스 
강에서 떠오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까이에 있는 힌두교 
성지에서 길어 온다. 그리고 그에게 주문을 중얼거리게 한다. 빤짜가위야나 성수
는 육신을 정화시키는 의례이고, 주문은 영혼을 정화시키는 의례이다.
  그리고 죽어 가는 이가  기르던 소 한 마리에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을 한다. 
그러고선 소를  데리고 와서 그로 하여금  소의 꼬리를 잡게 한다.  그래야 소가 
그를 좋은 세상으로  인도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를 브라만에게 
선물로 바친다. 이렇게  해야 죽은 자가 염라대왕에게 불려간 후  지옥불의 강을 
건널 때, 그 소가  그를 안전하게 건너게 해 준다고 믿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는 저승 사자를 따라 구천
구곡을 건너는 멀고 먼 여행길을 떠난다고 믿는다.  영영 다시 못볼 별리의 정리
가 담겨 있다. 반면에 인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
로 강을 건넌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사는 거처를 옮기는 이주의 
정리를 담고 있다.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
하러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시작이자 영원한 윤회의 한 과정일 뿐이다. 소를 브라만에게 바치고 난 후, 곡물
의 종자나 설탕, 옷가지로부터 금은 보화나  심지어는 땅까지 브라만들에게 바치
는 의례가 행해지기도 한다.
  장례식 :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자가 장작더미 위에 눕혀진다. 숙연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망자의 몸은 타 없어지고,  사람들은 이제 그가 다른 생
명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믿는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  집안 사람들은 시신을 집의 문지방 위에,  머리를 남쪽으
로 향하게 눕힌다. 그리고 우선 불을 피워 바치고, 밖에서는 일가 친척들이 시신
을 화장터까지 싣고 갈  들것을 만든다. 우리의 관 같은 것이  따로 없고 들것만 
있으면 된다. 시신을 옷을 입힌 채 먼저 한 번 씻기고, 이발사를 불러 온몸의 털
을 깎은 후 다시 깨끗이  씻긴다. 그 다음, 바닥에 깔았던 베를 수의삼아 시신을 
둘둘 감는다. 귀와 코 등의 모든 구멍을  버터와 백단나무 가루를 섞은 반죽으로 
막는다. 그리고 꽃, 향 등이 봉헌되며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손을 먼저 망자의 발
에 댔다가 다시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대는 방법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 동안 이발사는 마을을 돌며 부고를 전한다.  부고를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은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시신을 화장하는데 쓸  나무들을 들고 
망자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부인들은 망자  집안의 여자들을 위로하고 장례일을 
돕기 위해 망자의 집으로 간다.
  시신을 들것에 싣고 화장터로 향하는 행렬의 선두에는 전령 일을 맡은 이발사
가 서는데, 그는  항아리에 소똥을 태워 만든  불씨를 담아 간다. 이때 여자들은 
화장터까지 따라갈 수 없고 집에 남아 망자를  향한 곡을 한다. 시신이 화장터로 
가는 도중에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새알을 봉헌한다. 이는  아직도 시신에 
붙어 있는 혼을  괴롭히는 여러 악귀들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본래의 의
도와는 달리  악귀 대신 시신을 '달래는'  경우가 일어나기도 한다.  모든 의례를 
다 마치고 화장용 장작더미에 올리려는데 시신이 그 밀가루 새알을 먹고 소생하
는 일도 벌어진다고 하니, 결국 이 새알은  혹시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는 시신을 
위해 만든 새참인 셈이다.
  화장터에 도착하면 맨 먼저 땅바닥에 그리 깊지  않은 구멍을 하나 판다. 예의 
정화 의례를 한  후 그곳에 몇푼의 동전을 던진다. 그러고선  화장터를 소똥으로 
정화시킨다. 여느 의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제단에 불을  모시는데 이 경우 이발사
가 가지고  온 소똥 불씨를 여기에  모신다. 이때부터 이 불은  의례를 주관하는 
신이 된다.  상주는 항아리에서 불씨를 꺼내  마른 소똥에 불을 붙인  후 시신의 
배에 올려놓고 불의 의례를 행한다. 상주는 이제  떠나가는 망자의 몸 곳곳에 이
별의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사제는 제단 앞에서  불의 신에게 망자의 영혼을 받
아 하늘로 데리고 가 줄 것을 기원하는 주문을  왼다. 불은 연기를 내고 그 연기
는 하늘에 가 닿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주는 시신의 입에 금동전  한 닢을, 이어 다른 사람들은 물에  불린 곡
식 알갱이를 넣고, 가족들은  앞서 바쳐진 금이나 은 그리고 돈  등을 거둔
다. 이어 불에 잘 타도록 얇게 쪼개진 장작이 시신  위에 놓이고 상주는 세
상에서 가장 서러운 목소리로 곡을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곡을 따라 
한다. 이어 상주는 횃불로 네 귀퉁이에 불을 붙이고  장작더미 왼쪽으로 돈
다. 상주의 뒤를 따라 참여자들이  모두 함께 돈다. 그러고 나서 상주를 제
외한 사람들은 곧장 강으로  가서(주변에 강이 없는 경우에는 마을의 연못
으로 간다)  목욕을 한다. 상주는  시신이 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신이 
반쯤 탔을 즈음에 대나무로 시신의 해골을 깨뜨린다. 이는  해골 속에 갇혀 
있는 혼을 내쫓는 것이다. 이제 혼은 주변을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된다.
  시신이 완전히 타고 나면 상주는  불을 끄고 자신의 몸에 강물을 뿌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뒤를 
돌아보면 망자의 혼이 자신을 따라와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갈 사
람은 갔으니 잊을 건 잊고 이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 후 망자의 집에서는 그간  사용한 모든 항아리를 깨뜨려 없애고 새 
항아리를 준비해 사용하며,  모든 옷과 이불을 세탁하고 집안팎을 새로  칠
하며 바닥은 소똥  반죽으로 정화한다. 그날 저녁에는 망자와 같은  카스트
들이 모여 또 한  차례의 의례를 행한다. 이제 비로소 망자는  조상으로 승
격되고 그 이후에야 망자의 가족들은 그동안 혹독했던 여러 금기에서 해방
된다.
  이제 상주는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서쪽을 향하여 가정과 자손
의 번창을 기원한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브라만을 포함해서 모든  카스트
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이를 끝으로 사회로 완전히 복귀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선택
  요즘 우리의 장례는 숫제 난장판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저녁 내내 술판
에 화투판에 그것도  모자라 싸움판까지 벌이고... 발인때까지 일거수  일투
족을 살펴보면 이건 마치 놀이판 같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경의가 없어서
도 아니요 망자에 대한 슬픔이 없어서도 아니다. 다만  슬픔에 잠긴 유족들
이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 쉬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결국 장
례는 우리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또 다른 생활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
다.
  사람들이 모이고, 그 자리에서 얽히고설킨 그간의 감정들을 푼다. 하지만 
그 동안 망자의 덕으로 인해 참고 눌러 왔던 감정들이 더 악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로써  가족과 그가 속한 공동체는 새롭게 단합하기도  하지
만, 망자  덕에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어  오던 관계가 청산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관계로  멀어지기도 한다. 결국 장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회화 과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극적인 것인 
셈이다.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례를 둘러싼 절차 하나하나가  모두 오염과 
정화 즉 성과  터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가장 
무서운 공동의 적에 대해 산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  의식의 표현이다. 그들
은 죽음을 가장 오염된 것으로  상정해 놓음으로써 공동체가 공생할 수 있
는 여지를 마련한 것이다.  그 오염된 주검을 처리함으로써, 카스트와 카스
트 간에 존재하던  비인간적 관계는 어느덧 화합과 협동의 관계로  변한다. 
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관계임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장례의 부분 부분에 스며 있는 성을 중심으로 한 오염과 터부의 상
징적 표현이 까다로운 공동체일수록  그 내부에는 협동과 갈등이라는 이중
성이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5. 365일 명절의 나라, 홀리에서 디왈리까지
  지금은 많이 사라진 옛모습이 되었지만, 우리에게도 분명  명절을 기다리
던 시절이 있었다. 세뱃돈이 다 떨어질 무렵이면 어느덧  밤이 새도록 쥐불
놀이를 하던 대보름.  밤새도록 까먹은 부럼에 도깨비는 얼씬도 못하는  화
롯가에는 인정이 그 화롯불만큼이나 따스하게 피어오르던 시절이 우리에게
도 있었다.
  아스라히 사라져 버린 잊혀진 우리의 명절을 따뜻한 남쪽 나라 인도에서 
찾아 보자.
  일년 내내 크고  작은 명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 오니 가히 명절의 
나라요, 이 나라만큼 명절이 많은  나라는 세상 아무 데도 없다. 계절이 바
뀌면 계절 신에게  바치는 것이 명절이요, 집안에 옥동자가 태어나면  그의 
만수무강을 신께 기원하는  것도 명절이요, 신이 노는 날을 기념하여  그를 
기리니 그것도 명절이요,  신이 악마를 퇴치한 것을 기리니 그것도  명절이
라. 물 뿌리는 명절, 불  밝히는 명절이 있고 끄리슈나 신에게 바치는 명절
도 있고 라마 신에게 바치는 명절도 있으며, 원숭이에게  바치는 명절이 있
고 뱀에게 바치는 명절도  있다. 또 산에 바치는 명절이 있으면  강에 바치
는 명절도 있고, 달이  찼다 하여 명절을 쇠기도 하고 달이  기울었다 하여 
명절을 쇠기도 하니, 모든  명절이 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방 천
지와 동떨어진 것이 없다. 가히 일년 사시사철, 명절이 우리네 종갓집 제사
만큼이나 많다.
  명절날이 오면  모두가 일손을 놓는다.  집안을 온갖 상서로운  그림으로 
장식하고 꽃잎을 따서 복을 부르는 무늬를 그려 놓는다.  집안 여자들은 온
갖 장신구들로 몸치장을 하느라 바쁘고 남자들은 먹고 즐기고 노느라 바쁘
다. 멀리 갔던 가족과 친척들이 돌아와 마당을 가득  채우고 고향에 돌아온 
친구들의 얼굴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되살아난다.

    한 해의 시작을 홀리의 풍요로움으로
  인도의 한 해는  홀리(Holi) 명절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된다. 홀리는 힌두 
음력으로 팔구나(Phalguna)라고 하는 달에 벌어지는 명절인데 팔구나 달은 
양력으로 치면 2월과 3월에 걸친 달이다. 홀리는 이달  첫보름 사나흘 전부
터 시작하여 보름날 밤에 최고조에 올랐다가 끝을 맺는다.
  우리의 음력은 초승부터 시작하여  그믐까지를 한달로 치지만 힌두 음력
은 보름부터 시작하여 다음 보름까지를  한 달로 치니 홀리는 팔구나 달의 
시작을 기리는 명절이다.  여러 가지로 우리 대보름과 비슷한 세시  명절이
다.
  홀리는 지방에 따라 그 쇠는 방식이나 배경 신화가  다르다. 악마 죽이기
를 상징하는 불놀이가 그 절정을 이루는 곳이 있는가  하면, 끄리슈나 신과 
그의 연인들이 노는 이야기가 각색되어 만들어진 물뿌리기 놀이가 그 중심 
테마가 되는 곳도 있다. 물론 인도답게 그 둘이 교묘하게 섞인 곳도 있다.
  불놀이는 역시 밤이 되면서 그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마른 
소똥 덩어리와 마른  장작들을 가져와 동네 빈터에 쌓는다. 제대로  준비하
는 경우에는 짚을 엮어 집을 만들기도 하는데 우리네  달집과 비슷하다. 그
곳에 불을 붙이면 불은  하늘 끝까지 차 오른다. 불이 타는  동안 사람들은 
그 안에 곡식 알갱이도 던지고 갖가지 채소도 뿌린다.  그것들은 불에게 바
치는 공물인 셈인데 홀리까(Holika)라는 불에 타 죽은 여신을 상징한다.
  홀리까는 악마의 여신이다. 그는 우리의 전설에 나오는  마마대왕같이 마
마(천연두)를 아이들에게 옮겨 하나씩  그 목숨을 앗아 가는 나쁜 일을  하
는 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마마대왕이 남자인 반면에  홀리까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 홀리까가 아이들을  하도 많이 죽이고 돌아다니니  그것을 보다 못한 
쉬바 신이 사람들에게 홀리까를 처치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사
람들은 쉬바 신의  말에 따라 동네 빈터에서 마른  장작을 모아 태우고 그 
주변에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노래하고 춤추게  하고 모두 소리지르고 
북을 두드리면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그 여인을 불렀다. 이어  불더미
에 마른 소똥을 던져 넣고 붉은 물감을 뿌리며 악마를 죽이는 주문을 외었
다. 아이들 목소리에  군침을 삼키며 달려온 홀리까는 그만 악마를  퇴치하
는 주문에 힘을 잃고 불에 빠져 죽었다. 그 후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
고 온 나라에 다시 행복이 찾아왔다.
  흔히 홀리를 물의 축제이자 색의 축제라고 하는 것은 이 명절 놀이가 끄
리슈나 신의 물놀이와 관련되어 있어서이다. 이날은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물을 뿌리고 노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가족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거리낌없이 물
을 뿌린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온갖 물감을 물에  풀어 빨간 물도 만들
어 뿌리고 파란 물도  만들어 뿌리고 노란 물도 만들어 뿌린다.  물은 보통 
고무 풍선에 넣어 던진다. 골목에 숨어서도 던지고 지붕  위에 숨어서도 던
진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아예 물동이째 끼얹어  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이
다. 짓궂은 아이들은 아예  땅을 파고 거기에 물을 부어 흥건히  고이게 한 
다음 진흙탕 반죽을 만들어 그걸 사람들에게 뿌리거나 사람들을 떠메고 와
서 빠뜨리기도 한다.  즐길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곤욕이요  낭
패일 수밖에 없다. 어른이고 아이고 남자고 여자고 높은  카스트고 낮은 카
스트고간에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 이날은 모두가 다  뒤집어 쓰는 날이요 
뿌리는 날이다.
  이렇듯 모두가 뒤집어 씌우고 뒤집어 쓰는 모습은 끄리슈나 신의 신화에
서 비롯되었다. 끄리슈나  신은 힌두 신들 가운데 가장 멋쟁이이고  사랑과 
연애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는 신이다. 어느 신보다  자유분방하고 사람들
과 친한 신이다. 그는 애인이나 친구들과 물 뿌리기  놀이를 즐겼는데 매우 
육감적인 놀이이다. 홀리날 사람들의 물 뿌리기 표적  1호가 젊은 아가씨들
인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물과 색의 축제 홀리 : 끄리슈나와 그의 여자 친구들이  색색의 물감으로 
물총 놀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날은 아예 큰맘 먹고 즐기는 편이 낫다.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래서 아침  일찍 흰옷으로 갈아입고  나선다. 처음에는 쭈삣거리다가도  한 
바가지만 덮어쓰고 나면  제일 용감한 특공대가 되어 모두 악역(?)을  도맡
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라고는 하지만, 남을 괴롭히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
니라  맨정신으로는 잘  하려 들지  않는게  보통이다. 그래서  그들은  방
(Bhang)이라는 술 아닌 술을  마신다. 방은 꼭 우리 막걸리 같이 생겼는데 
발효시킨 것이 아니니  엄밀하게 말하면 술은 아닌 셈이다. 그것은  우유에 
마취 효과가 있는 방이라는 약초를  짓찧어 풀어 넣은 것인데 마시면 술에 
취한 것과 거의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다 보니 이성을 잃는 경우도 많다. 
남의 집을 월담하거나  처녀나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희롱하는 등 지나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점잖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그러다 보니 요즘은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게 되었다.  결국 놀이 명절 
고유의 분위기는 퇴색해 가고 도덕과 의례에 있어서의 형식이 더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변질은  인간 세계에서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문화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J.   호이징하(J. 
Huizinga)는 그의  저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에서  이렇게 말하
였다.
  문화가 점차 복합화되어 가고 다양해지면서 그리고 생산 기술과 사회 생
활 자체가 보다 훌륭하게 조직화되면서 문화적 토양은 점차 놀이와의 모든 
접촉을 상실한 채 세속적인 관념,  사고의 체계, 지식, 교의, 법칙, 규제, 도
덕, 풍습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 문화는 더욱  진지한 것이 되었고 놀이는 
보조적인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정의와 평화를 기원하는 디왈리
  홀리로 막을 올린 인도의 명절은 디왈리(Divali)로  그 막을 내린다. 홀리
는 여름이 시작되는 팔구나 달이  시작할 때 쇠는 반면에 디왈리는 여름이 
끝나는 아슈위나(Ashvina) 달의  끝부터 까르띠까(Karttika) 달의 시작까지 
쇤다. 홀리가  보름날 밤에 쇠는 것인  반면에 디왈리는 그믐날 밤에  쇠는 
것이 무척  대조적이다. 그것은 홀리가  여름을 시작하는 세시  풍속이라면 
디왈리는 여름을 접는 세시 풍속이기 때문이다. 까르띠까는  양력으로 11월
에서 12월 사이에 걸쳐 있는데, 바야흐로 겨울이 시작되는 달이다.
  단아하게 불 밝힌 디쁘 : 불 밝힌 디쁘와 그 위로 펼쳐지는  불꽃 놀이는 
빛의 축제인 디왈리에 빠질수 없는 요소이다.
  디왈리는 빛의  축제이자 소리의 축제이다.  사람들은 디왈리 하루  전날 
밤을 초띠(Choti) 디왈리라고  부르는데 새끼 디왈리라고 보면 그  뜻이 통
할 것 같다. 이날 밤부터  디왈리는 시작된다. 신에게 봉헌하고 난 뒤 사람
들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그리고  집안의 중요한 다섯 곳에  불을 
밝힌다. 이 다섯 곳은  집 입구, 곳간, 우물, 보리수와 같은 큰 나무(우리로 
치면 당산 나무), 부엌이다. 인도 농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들이다.
  락슈미 :  연꽃으로부터 나오는 미와 풍요의  여신 락슈미.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는  가신을 안방, 마루, 부엌,  뒤꼍, 곳간 등에  모셨는데, 두 
나라를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제미있을 것 같다. 우선 부엌과  곳간은 두 
나라에서 공통된 부분이다. 이 두  곳은 그만큼 중요한 곳, 다른 어떠한 것
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우리의 마루는  인도의 집 입구와 
역할이 같고, 추운 우리  나라의 경우 집 안에서 안방이 중심  역할을 하는 
데 반해  더운 인도의 경우에는 우물이  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뒤꼍이나 인도의 보리수나  모두 업 혹은 정령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 억측일까?
  손바닥만한 옹기에 '기'라는 우유 기름을 붓고 그 안에 심지를 놓아 거기
에 불을 붙인다. 그  흙으로 만든 손바닥만한 질그릇을 디쁘(dip)라고 부르
는데 디왈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이 불 밝힌  디쁘야말로 인도를 상
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낙이 다소곳이 절하는 모습이 우리가 손님을 맞는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깨끗하게 단장된 디쁘에 단아하게 붙여진 불의 모습은 인도 사람들이 손님
을 맞는 마음가짐을 잘 나타낸다.
  스와스띠까 : 복을 가져다 주는 상서로운 그림으로  불교에서 쓰는 '불'자
가 바로 이것이다.
  족적 : 미와 풍요의 여신 락슈미의 족적으로 불교로 가면  부처의 족적이 
된다.
  이 디쁘는 흙으로 빚은 것이라  쓰고 나면 언제든지 부담없이 깨서 버릴 
수도 있다. 환경 오염도 없고 또 특별히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라 참 유용
하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이 촛불 혹은 전굿불로 대체되었다.  도시 사람들의 
경우 심하게는 몇 층짜리 집 전체에 전구를 촘촘히 박아 놓는 경우도 허다
하다. 그 자리에는 디왈리는 간데없고 크리스마스 이브만 남아 있다.
  디왈리는 락슈미 신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락슈미는  그들에게 
풍요와 아름다움을 가져다  주는 여신이다. 그는 어둡고 더러운 곳을  싫어
하여 아예 발도 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에겐 지예슈타(Jyeshtha)라는 언
니가 있었다. 더럽고 후미지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지예슈타는 락슈미와
는 반대로 병을 가져다 주고 집안에 흉과 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
들은 락슈미를 맞이하기 위해 온 사방을 쓸고 닦는다.  마당이나 벽에 상서
로운 무늬를 그려 놓고 그것을 꽃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그들이 즐겨 그리
는 무늬 가운데  하나가 불교를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온  '불'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만'이라는 음을 가진  글자가 되어 있지만 원래는 빛나는 태양
을 도식화한 그림이다.
  그러고는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힌다. 지붕에도  놓고 담벼락에도 놓는다. 
락슈미가 멀리서도 잘 보고 들어오시라는 간절한 희구이다.  그것도 부족하
여 밤새도록 폭죽을 쏘아올린다. 모두가 다 재복을 구하고  명리를 얻기 위
해서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의 가장 생생한 철학이자 시가 아니겠는가.
  디왈리 명절은 락슈미  신화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여느 인도  명절
이 다 그렇듯,  여러 가지 신화와 거기에서 기원한 이야기들이  복합적으로 
엮이고 합쳐져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라마야나] 이야기에서  나
온 것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악마를 물리치고 금의환향한 라마를  환
영했던 뜻으로도 디왈리  불을 밝힌다. 14년간의 억울한 유배 생활을  청산
하고 아요디야 궁으로  돌아온 정의의 왕 라마를 모든 백성들이  환영하던, 
그때 그 신화 속으로  돌아가 사람들은 불을 밝힌다. 이 땅에  평화와 정의
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름이라야 제 맛이 나는 세상
  인도인들은 겨우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날은 춥고 몸은 움츠러들고 밀
폐된 집 안에서 제대로 청소도 못하여 병균이 온 사방에 득실거리는 것 같
아 찜찜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을 무렵에 홀리를 맞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물로 씻고, 불로  태우고 하여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여름을 맞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때부터 한  해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홀리를  매
우 귀히 여긴다. 이런  의미는 디왈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동안 여름철 
특히 우기 동안 집안 곳곳에  득실거리던 병균을 말끔히 치워 없애야 하는 
때에 그들은 디왈리를 쇤다. 사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말끔히  단장한 후 불
을 밝혀 풍요의 여신을 맞는다. 추수를 했으니 먹을  것도 풍부하여 사람들 
인심도 넉넉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날만은  부족함이 없으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우리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만물이 
존재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내가 그 안에 사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집안  구석구석, 마을 곳곳에 불을  밝혀 감사의 제를 드린
다. 굳이 비교하자면 홀리는 우리의 단오와 같고 디왈리는 추석과 같다. 단
오가 우리에게서 명절로서의 의미가  퇴색된지 오래라 그 비교가 실감나진 
않지만 말이다.
  인도는 겨울이 매우 짧고 여름이 긴 나라이다. 그렇다  보니 생활의 대부
분이 여름 위주로 되어  있다. 사는 방식도 여름 위주라 우리  같은 온돌도 
없고 두툼한  겨울 옷도 신경 써서  장만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와 비교해 보면  추우 날씨도 아닌데 그들에게는 더없이 춥다.  그래서 
그들은 겨울은 싫고 여름이 좋다. 홀리는 싫은 겨울을  보내고 반가운 여름
을 맞는  명절이고, 디왈리는 좋았던  여름에 대해 감사하면서  아쉬움으로 
보내는 명절이다. 그래서 인도는 여름이라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제5장 성이 씨줄 되고 성이 날줄 되어
    1. 인더스 문명 그 풍요로운 남녀상열지사
  다른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신석기 시대부터 땅을 어머니
로 섬기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사람들이 살고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이었다. 
인더스 문명은 소위  세계 4대 고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서,  기원전 2500년
경부터 1500년경까지 인더스 강 유역과 인도의 서북부 지역에서 크게 발달
한 청동기 문명이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은 영향권이 넓은 데 비해  그 본
질에 대해 알려진 것은 너무 적다.
  인더스 문명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70여년 전의  일이다. 
이집트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은 역사에서 사라지
지 않고 그 다음 문명으로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인더스  문명은 어느 순간 
역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추정하건대 기원전 1500년경의  일일 것
이다.

    인더스 문명의 생산 논리
  지상에서 사라지고 땅 속에 묻힌 채 4,0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21년 
어느 날, 인도가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신음하고 있을 때  마치 그
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인더스 문명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통치자
들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라호르라는 곳과 물탄이라는 곳을 연결하는 
철도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도인 인부들이 공사  책임자에게서 받은 
벽돌 구입비를 빼돌리고 대신  지하 어디에선가 벽돌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인들은  곧바로 모든 공사를 중지시키고  본국으로 전보를 쳤
다. 영국에서 고고학 발굴대가  왔고 그들이 발굴 공사를 시작한 지  약 십
년만에 비로소 이 유적이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인더스 강 유역에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았다. 오
랜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살아오지 않
았던가? 그러다가 그들은 강가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최초의 문명을 꽃피
웠다. 이제 정교한 농기구를 만들고 나날이 농경의 지혜가 쌓여 갔다. 남은 
곡식들을 서로  바꾸어 먹었으며 또  일부는 지도자에게 세금으로  바쳤다. 
지도자는 세금으로 군대와  행정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보호하였다.  곳곳에
서 도시와 국가가  발생하였고 그 안에서 사유 재산이 만발하였다.  모헨조
다로와 하라빠(Harappa)를 비롯한 많은 도시가 발달하였다. 도시들을  중심
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역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와 가난이라는 이
중 구조가 생겼으며 그 골은 더 깊어 갔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못한다던가? 일단 물질의 
풍요를 맛보게 되자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생산에 대한 생각밖에 없
었고 입으로는 연일  생산을 찬양했으며 손발이 다 닳도록 열심히  일했다. 
그래도 욕심이 차지 않자  그들은 생산의 신을 찾았다. 그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들은 무엇을  생산의 신으로 모셨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
다. 종교적 상징은 항상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생산이라는 메
커니즘을 여자에게서 찾았다.  땅에 씨앗을 뿌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결
실을 맺는데 그와  똑같은 원리가 바로 여자의  자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여자를 생산의 터전으로 보았고 
그것이 곧 '땅인 어머니 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종교학에서는 이 '땅인 어머
니 신'을 지모신 혹은 대지모신이라고 부른다.

    땅과 여자, 인더스 문명의 이중주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곳곳에서  테라코타로 만든 수많은 여자 조각물들
이 발굴되었다. 그  대부분이 나체이며 여자의 성적 특징이 지나치게  강조
되어 있다. 그 조각물은 '실제로 저렇게 젖가슴이 큰 여자가 있을까?' '정말 
엉덩이는 나 어렸을 적  우리집 떡판만하구나.' '어른들이 보시면 "고거, 애 
하나는 쑥쑥 잘 낳게 생겼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겠다.' 등의 여러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지모신 : 머리에 쓴 화관의 풍채로 보아 당시 상당한  숭배의 대상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지모신 : 젖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한 전형적인 지모신이다.
  또 몇  개는 특이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우리의 명성황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화관같이  생긴 것을  쓰고 있다.  명성황후 시대보다  적어도 
4,000년 전의 것들이니  저 정도면 근사하고 위엄있는 화관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일종의 여신상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4
대 고대 문명 가운데 인더스  문자만이 유일하게 아직도 해독되지 않고 있
기 때문에 추정 외에는 방도가 없다.
  누구든 이 문자를 해독만 하면 노벨상 하나쯤은 받을수  있을 터이다. 인
류 역사의 풀리지 않던 중요한 매듭 하나를 풀었는데 그 공로가 몇몇 정치 
협상가들의 입담보다 못할까!  우리의 우수한 두뇌들이 인류의  수수께끼에 
도전할 그날을 학수고대해 본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곳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에는 인장이라는 
것이 있다. 이 물건에 대해 마땅히 부를 만한  우리말이 없으니 부끄럽지만 
외국 학자들이 사용한 'seal'이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인장이라 하
자.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쓰는 도장이라는 뜻은 아니다. '뭔가를  찍기 위
한 용도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뭔가가 새겨진 물건' 정도의 뜻이
라고만 이해하면 되겠다. 손바닥만한 크기로 타일같이 직사각형  혹은 정사
각형으로 네모지게 생긴  것이다. 그 안에는 많은 글자들과 그림들이  새겨
져 있는데 글자는 해독이  안 돼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림들은  주로 망측
한 것들인데 뜻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발굴된 한 직사각형의 인장에는 머리를  밑으로 하고 두 다리를 들어 벌
리고 있는  발가벗은 어떤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양다리 사이 깊은 음부에는 어떤 종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떤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그림인가? 그러나 망측
하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생각이고 당시 사람들은 이 모습에서 뭔가 신성한 
기운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곡식을 잘 자라게  해 주는 그런 신성한  기운 
말이다. 전형적인 지모신의 모습이다.  이로부터 몇천 년 뒤인 후대 힌두교
에 등장하는 여신 샤깜바리(Shakambhari)의 원형을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샤깜바리는 '자기 몸에서 식물들을 기르는  여신'으로 힌두교의 전
형적인 지모신이다.
  어찌 생산하는 일이 여자만으로 될 수 있겠는가? 도처에서 애 낳는 여자
를 숭배하였다면 그것은 곧 그만큼 씨 뿌리는 남자를 숭배하였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다음의 사진을 보면  대단한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른바 
토르소, 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 상이다. 그런데  이 남자를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비록 부러져서 원형을 할 순 없지만, 그 
둘레를 통해  짐작해 보건대 성기가  무지막지하게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저렇게 큰 성기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이 
경우도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생식기가 지나치게 강조된 것이다.  이 남자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면,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몸이 원통형으로  되
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변강쇠를 연상시킨다. 참 
육감적이다. 이  토르소도 여신상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가지고 노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들은 이 토르소의 신성한 시운이  풍
요와 번영을 가져다 주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토르소  : 성기가 강조된 남성의 육감적인 모습에서  다산 
숭배를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인장에는 이런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머리 하
나에 얼굴이 셋인, 사람같이  생긴 이가 머리에 왕관 같은 것을  쓰고 가운
데 앉아있는데 그 모습이 실로 범상치 않다. 특히  앉은 모양새가 결가부좌
의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주변의 호랑이,  코끼리, 코뿔
소, 황소 등의 동물로 보아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동물들은 그가 타고 다닌다는  자가용이자 그를 지키는 수호신이니 우리의 
산신령이 데리고 다닌다는 호랑이 같은 것이다.
  쉬바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신 : 결가부좌의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신은 동물의 주이다.  사방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이  보인
다.
  이 신은  남신이가 여신인가? 남신이다.  어떻게 아는가? 가운데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가운데를 똑바로 보라. 눈살을 찌푸려서는 안된다.  한창 발
기되어 곧게  솟아 있는 그 성기에서  음심을 읽어서는 안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들처럼  신성한 기운을 느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바로 성스러움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생산의 신화
  인더스 문명은 어쩌다 멸망하였을까? 아무도 모른다.  세계사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묻혀  버린 예는 별로 없다.  몇몇 학자들에 의해 몇가지  의견이 
개진되었다. 인더스 강의 범람? 글쎄, 범람을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닐텐데, 
새삼스럽게 범람으로 인해 망하기까지야 했을까? 아리아인들의 무력 정복? 
한 문명이 완전히  정복당할 만큼의 충돌이 있었다면, 뭔가 그에  상응하는 
흔적들이 대규모로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뭘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생산 터전의 황폐화! 그거다. 바로 이것이 인더스 문
명을 몰락시킨 것일 게다.
  1984년에 나는 모헨조다로와 하라빠 그리고 그 외의 몇몇 유적지들을 둘
러보았다. 10월 말이니 여름이 지난  때였다. 그곳에 가 보고 맨 먼저 놀란 
것은 주변 환경이었다. 거의  사막에 가까울 정도의 황무지였다. 강물은 다 
말라 바닥이 드러나 있고 기온은 한여름도 아닌데 섭씨  50도 안팎이다. 이
런 곳에서 어떻게 그런 화려한  도시가 발달할 수 있었을까? 그 큰 도시를 
뒷받침할 만큼의 풍부한 농경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들었
다.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당시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다.
  지금 우리는 쓰레기에 치어 죽을 지경이다. 온통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이다. 이러다간 모든 땅이  쓰레기로 뒤덮일 것만 같다. 네팔의 에베레스트 
산 베이스 캠프가 온통 쓰레기와 똥으로 뒤덮여 있다는 소식이 얼마 전 텔
레비젼에 크게 보도되었다. 마음놓고 마실 물도 없다. 63빌딩에서 쏟아붓는 
변기 오수의 양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이 개발에만  미쳐있
다. 개발은 온 지구를 벌집  쑤시듯 들쑤셔 놓았다. 그러다보니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풍토병들이 온 지구를 휩쓸고 다니고 있다.  세계화의 결과로 세
계는 일일 질병권이 되었다. 개발이 거꾸로 우리 지구의  생명줄을 조여 오
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별을  찾아 가야 하는 것
은 아닐까? 그런데 현재로선 우리의 문명을 다른 별에 이식시킬 만한 기술
이 아직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고스란히  앉아
서 죽어야 하는 건가?
  혹시 인더스 문명도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로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사막
의 확장으로 인해  토지는 황폐화되고 강물은 마르고  숲은 사라지고 날은 
더워지고 농사는 더 이상 지을 수 없고... 그들이  가꾸고 꿈꾸던 땅의 풍요
로움이 깨지던 날 그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녀상열지
사'의 문명은 땅 속 깊이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더스 역사는 신화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신화  속에
서 인더스 문명은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2. 세상을 학대하는 사람들
  누구든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이 싫고 사람들이  싫어 다 
등지고 싶을 때 삿갓에 죽장 들고 바람따라 세월따라 부평초같이 떠돌아다
니고 싶다는 생각을.
  부처가 살던 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 
세상을 정복하고자 세상을  버린 것이다. 세상을 떠나 하늘을 이불삼고  땅
을 베개삼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그냥 흘러흘러  떠돌아 다니는 사람
들,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부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요 인생은 그물에 걸려 있다.
  이제 그 그물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가리.
  그리고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리.
  타오르는 연기와 같이
  떠도는 무소처럼 혼자서 가리.

    이제 그 그물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가리라
  부처에게 이 세상의  질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어려서는  세
상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베다 경전을 배워 익히고,  성장해서는 결혼을 하
고 가정을 이루어 진리와 신과 조상들에게 항상 제사를  지내고, 나이가 들
어서는 지나온 삶을 관조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시 사회가 추
구하는 인생의 이상적 단계였다. 이 진리를 지켜야 이  세상에서 공덕을 쌓
고 그 공덕으로 인해 다음 세상에서 보다 좋은 처지로  환생할 수 있다. 만
약에 누구든 이러한 진리에 대해 불평하거나 나태하면 다음 세상에서 돼지
나 개 혹은 천민으로 태어난다.
  부처는 이러한 세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세상
에서 열심히 공덕을 쌓아 다음  세상에서는 더 좋은 생으로 태어나야 한다
는 윤회의 메커니즘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는 그 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
다. 그에게 있어서 순환은  끝없는 고통일 뿐이었다. 세상은 고통으로 뒤덮
여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없애야 했다. 고상한 말로 하자면 '고-집
-멸-도!' 이것이 윤회로부터의 탈출 즉 해탈이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부처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물
론이고 사랑하는 것조차도  부질없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행위
가 다 부질없다 했다. 그에게는 전쟁과 증오도 의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사랑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회적 행위를 중지하는 것, 그
것만이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이었다.
  사회적 행위를 중지하는 것은 곧 세상을 떠나 혼자  사는 것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항상 혼자 다녔으니 그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녔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
지도 않고 어느 누구와  어떤 인연도 쌓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세상을 떠
났기에 이름을 버렸다. 어떤  카스트 출신인지, 어느 고장에서 온 사람인지 
알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상을 버린 증표로 머리와 수염도 깎았다. 황
톳빛 가사를 두르는 것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였다.
  세상이 싫으니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사람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옷을 입었더라도 10년이고 20년이고 끝까지 그 
옷과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들. 비가  오면 비가 몸을 씻어 줄 것이요, 바람
이 불면 바람이 먼지를 털어 주리라. 머리카락은  새둥지처럼 얽히고설켜서 
지난 세월의 헝클어짐  그대로이리라. 발끝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에는  때가 
겹겹이 들어앉아 가죽이 된 사람들.
  세상이 싫으니 경제 행위를 할  수도 없고 먹고는 살아야겠고 그래서 그
들은 남들에게 적선을  권하는 것이다. 그래도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돕는 
일을 선을 쌓는 일 즉  적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떠난 자'의 걸식 행위
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 기회일 수도 있으리라.  남이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고...
  그러나 세상을 떠남 그 자체는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
다. 그것은 진리를  찾기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제 
조건이 충족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진리를 찾을 것인가?  그 진리는 세상 
밖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좆을 저주하는 사람들
  '떠난 자!' 일반적으로 사두라고 불리는 사람들. 궁극의 진리를 찾아서 세
상을 버리고 떠난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진리를 찾는 것일까?
  사두들은 눈뜨면 걷도 눈이  감기면 잔다. 어느 한 곳에 길게  머무는 것
을 스스로 금하지만 일정 기간이나마  머물고자 할 때는 큰 느티나무나 동
굴 속에 터를 잡는다.  특히 비가 두세 달씩 쏟아지는 우기  때는 어디서고 
머물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 눈에 그들 '성자'들의 모습이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럴라치면 세상 사람들은  그 '성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밥
을 갖다 주고 따뜻한  옷을 갖다 주고 온갖 물질 공세를  퍼붓는다. 이른바 
보시이다. 그러고 나면 '성자'는 그들을 향해 한 마디  던져 놓고 또 홀연히 
떠난다. 싹트고 있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 
살 수가 없다.  또다시 마을로 내려 온다. 다시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간다. 
그는 또 떠난다. 숨바꼭질인가 쫓고 쫓김인가?
  그러다가 그들은 특별한 때가 되면 성지에 모인다. 여러  성지 가운데 쁘
라야그라는 지금의 알라하바드에 있는  갠지스와 야무나 강이 만나는 곳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55년, 전국의 사두들이 110세의 '성자'와 축복을 
함께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다. 그는 30년 동안 나무  꼭대기에서 고행을 했
다. 그가  이제 수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것이다. 정해진 한  순간 바로 그 
'성스러운' 순간을 기리고 그 기운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두들은 물에 들어
가기 위해 뛰어가고 밀고  넘어지고 그 위를 덮치고 또 밀고  덮친다. 그러
다가 수백 명이 깔려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에 그
들은 다시 세상 밖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성스러운 영혼을 찾아서...
  사두들의 성스러운 바가지  : 사두들이 목욕하 때 사용하는 바가지로  목
욕할 때마다 바가지에 대한 정화 의례를 행한다. 단순한  도구의 차원을 넘
어 일종의 숭배물이 되기도 한다.
  사두들은 화장터를 배회하고 다닌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을 즐기는 역설의 문화라고나 할까? 아니면 죽음 앞에서 삶을 찾는 이반의 
문화라고나 할까? 그들은 가끔 해골을 바가지삼아 밥도 빌어 먹고 물도 떠
먹곤 한다. 해골에 담긴 밥을 유난히도 게걸스레 먹는  사두의 모습에서 생
의 붉은 빛을 보았다면 너무 역설적일까?
  그들의 고행은 철저히  육체적 고행이다. 육체는 곧 물질이요 물질을  넘
어서는 것이 곧 정신을 찾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사두들은 극
좌적인 고행을 한다.  우를 세상 안에서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고 
좌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라 할 때, 극좌적인 방법이란  세속적인 삶을 학대
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두는 나무에  매달린 그네 같은 것에  의지하여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서서 보낸다. 경전을 읽고 명상하고, 읽
고 명상하고 이러기를 어언  12년. 머리 위에 뜨거운 화로를 이고  있는 사
두도 있고 몸을 땅바닥에  던져 떼굴떼굴 굴리고 있는 사두도 있다.  또 어
떤 사두는 한쪽 팔을 들고 고행을 한 지가 4년째이다.  손톱이 자라 굽어지
고 휘어진 모습이 그간의 세월을 말해 준다. 그 사두는  앞으로도 8년이 더 
남았으니 그 사이 손톱은 얼마나 더 자랄 것인가.
  그림1. 십 년 넘게 팔을 들고 고행을 하고 있는 사두
  그림2. 모래 속에 머리를 박는 고행을 하는 사두
  그림3. 성욕을 극복하기  위해 남근에 무거운 돌을 다는 고행을  하는 사

  그림4. 머리에 뜨거운 화롯불을 이는 고행을 하고 있는 사두
  육체적 고행은  결국 육체의 저주로  연결된다. 그것은 그들이  부정하는 
물질의 근원을 육체에서  찾기 때문이다. 육체를 저주하는 것은 곧  감각을 
억누르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색즉시공이다. 감각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어
떤 고행을 해야 하는가?
  감각은 물질이고 물질은 곧 생산이다. 생산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연에서의 생산 원리를 음양의  원리에
서 찾았고 그 원리를 인간의 생산 원리에 빗대어  생각하였다. 그래서 땅을 
어머니로 숭배하였고 돌을 아버지의 성기로 숭배하였다. 그래서  풍성한 농
사를 바탕으로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돌을  통해 우주적 남성 
에너지를 바라듯,  생산을 만악의 근원이라  여기고 물질을 고통의  뿌리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극복해야 할 만악 고통의 첫번째 근원으로 자신의 
남근을 꼽았다. 그래서  남근을 저주하고 그것을 초월해야 모든 물질  세계
를 초탈한다고 믿은 것이다.
  남근을 저주하는 사두에게 자신의 성기는 더 이상 생산의 근원이 아닐뿐
더러 고행에  가장 큰 장애인 방해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무거운  것을 
자신의 남근에 달아먀  성기의 감각을 완전히 죽여 발기한다거나 하는  '치
욕적인'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고행을 하는 집단
에 입문하면 맨  먼저 하는 의식이 몽둥이로 남근을  세 번 가격해 그것을 
불구로 만드는 일이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돌을 매단다거나 성기를  막
대기에 감아 잡아끈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한다.
  어떤 사두는 머리만 남겨 두고  자신의 몸을 모래 구덩이에 파묻기도 한
다. 또 어떤 이는 금식을  통해 감각을 죽이고자 한다. 부처가 그랬고 예수 
또한 40일 동안 그랬다.
  '머리는 왜 남겨 두었을까?'  수행자에겐 외람된 언사일지 모르지만 누구
든 그 수행자를 보면  이런 생각에 빠진다. 머리가 있는데 감각이  죽을 수 
있을까? 모래 구덩이에서 나온 다음에도 여전히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금식 고행을 마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감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또다시 먹을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할  텐데. 감각을 완
전히 죽이려면 모든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
려면 머리도 파묻어야  하고 또 금식 고행을 하되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삶 그 자체가 고통이면 죽음이야말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
일한 길이 아닐까? 이런 의문에 빠져 보는 것은 우리같은 무지렁이뿐만 아
니라 수행자 자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금식을 하는 사두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산 채로 
화장시키는 사두도 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 일부에서 행해지는  등신불 수
행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도 당으로 건너가 스스로  등신불
이 되어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부처로 숭앙받고 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의 
극복이 죽음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떠난 자들은 과연 진리를 찾았을까?
  '떠난 자!' 그들을 성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기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 보는 사람
의 몫인 셈이다.
  전체에 비해 그들은  분명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인들의 삶의  방
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사회  속
에 남아 주어진  단계를 거치면서 사는 삶을  이상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한
다. 태어나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입문식을 하고 학습을 한다. 이 기간에는 
스승 밑에 들어가 삶의  진리를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그 학습  단계가 지
나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 그 안에서 자식도 낳고  부모도 공경하고 재
산도 모으며 가장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그리고 말년이  되면 숲으로 들어
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조용한 명상의 단계를 가진다.  이것
이 힌두인들에게 정해진 이상적인 삶의 세 단계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이  세 단계를 거치는 사회적  삶을 포기하고 세상을 
떠나 사는 것 역시  또 다른 삶의 한 단계로 인정해 주고 있다.  비록 극소
수의 사람들이 택한 삶이지만, 어엿한 인생의 네 번째  단계로 자리잡고 있
는 것이다. 우리가 '떠남'을 신비스럽게만 볼 필요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할 필요도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그들만의 독특한 네 단
계의 인생에 대한 관념 때문이다.
  제3의 눈 :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보는 눈으로 쉬바의 미간에 있다. 
그래서 사두들은 이 문양을 이마에 그려 넣기도 한다.
  이 세상을  버리는 자들을 통해 인도  사회가 지닌, 가진 자들의  못가진 
자에 대한 착취를 느낄  수도 있지만, 또 그만큼 물질을 초월한  정신 세계
에 대한 열망이 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는 영의  세계를 찾은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사회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저런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익을 주장하고 심지어는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종파도 있고 그 가운데 이권도 있으니  그들끼리 
패고 죽이고  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한번 떠난 세상을 뒤돌아보지  않고 
세상 바깥  그 깊은 곳으로  영원히 떠난 사람들도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떠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완전한 문화이다."라고 했
고, 또 어떤 사람들은 "떠나는 것으로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며 그 자체
가 위선이다."라고 했다. 그들과  그들의 문화를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떠남'은 카레만큼이나 분명하면서도  묘한 맛을 낸다. 그것이 바로 
인도 문화가 품고 있는 참맛이 아닐까?
  떠난 자들, 그들 모두가 진리를 찾았을까?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버
리고 떠난 그 세상 밖에서 그들은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세상에 파묻힌 사람들
  세상을 버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
들이 택한  유일한 길은 세상 밖에서  고행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의 부처는 수년간의 방황 끝에 마침내  진리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진
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던 당시의 많은 
수도승들에게는 가히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깨달음이었다. 부처 이후  지금
까지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고자  고행의 길을 떠난 사람들은 무수히 많
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의 '무지렁이'들에겐 
그저 '그림의 떡'이다.  그들은 병들어 쓰러져 있는 노부모를 두고  차마 세
상을 등질 수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 하는  자식들을 팽개
치고 진리를  찾아 떠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기적인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아
내와의 꿈 같은 잠자리를 포기하기 역시 어렵다.
  뱀에게 물려 금방 죽을 것만 같은 사람들에겐 세상 밖의 진리보다 그 고
통을 함께하며 병을 낫게 해 준다는 신이 더  소중하다. 그래서 미신이라도 
좋고 어리석음이라도 좋으니 부적도 붙이고 주문도 외서 뱀독을 빨리 제거
하고 싶은 바람뿐이다.
  사람들은 세상 안에 머물면서도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세상 사
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잘 키움으로써 선을 쌓
아 다음 세상에서 더 좋은 태어남을 얻으면 된다고  자위하며 산다. 그래서 
어려서는 진리를 배워 익히고 장성해서는 결혼하여 가정을 지키고 그 안에
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며 인생의 황혼기에는  지나온 인생과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얻은 진리를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진
리라고 믿고 산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믿고 의지하며  신에게 제사를 올리
는 삶 속에서  궁극적 진리를 찾고자 한다. 설사 '깨달은'  사람들이 그들을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욕하더라도 그들로서는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내가 곧 진리요 내 몸이 곧 진리이나니
  그렇다! 진리는 세상  안에도 있다. 그 진리는  바로 내 앞에 있다. 아니 
내가 바로 진리요 내 몸이 곧 진리다라고 소리친다.  그것은 민중들이 살아
나가는 중요한 삶의 방편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찾는 진리는 어
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찾는  것일까? 자, 이번에는 세상  안 
구경을 한번 떠나 보자.
  세상 밖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육신을 저주함으로써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
릴 수 있다. 결국  세상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가정을  지키고 육신
을 숭배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집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든 신과 우주의 진리는  정신이 아닌 육체 안에 존재한다고 믿
는다. 그래서 우주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육체 안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이는 수지침의 원리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손을 육
체라고 생각하고 우리 몸의 모든 신경과 혈도 등을  우주라고 생각해 보자. 
우리 손의 모든 부분이 몸에 직결되듯이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우주와 직
결된다는 것이다.  세상과 진리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곧 진리인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무지개]에 그려진 그 무지개, 진리는 찾
아다닌다고 찾아지는게 아니고  찾아 다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나눈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런 세계
관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계가 대사에게 "대사는  어찌 생긴 것이 돼지 같습
니다그려, 헛헛헛."하자 무학대사가 받기를 "장군께서는 생긴 것이 부처 같
사옵니다그려, 헛헛헛." 했단다. 그러자  이성계가 다시 "대사께서는 어떻게 
제 말을 들으시고도  그런 대답을 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무학대사가 "부
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일 뿐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우리는 보통 이 일화에서 이성계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와 무학대사의 
넓은 도량을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이 일화에는 진리에 관한 두 가지 세계관이 숨겨져  있다. 하나는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면 진리고 아니면 아니라는 입장이다.  무학대사가 돼지같이 
생겼다면 그것은 그냥 돼지같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진리인 것이다. 또 하
나는 진리란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입장이다. 이성계가  잘
생기고 못생기고에 관계없이 대하는  자가 부처이기 ㄸ문에 부처로 보인다
는 것이다.
  세상을 지키고 그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은  무학대사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에겐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것이다. 
그에게 도둑질은 더 이상의  죄가 아니다. 왜? 그는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존재는  동일한 가치를 지닌 진리이다. 그렇다면 깨달음과  못 
깨달음은 무엇이 다른가?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농부가 부처요 부처가 
곧 농부이다. 또 도둑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도둑인 것이다. 나아가 개가 
부처고 부처가 개인 셈이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생활이 곧 
진리이고 세상 속에서 해탈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해탈이 
따로 있고 윤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 본능의 바다에 빠지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보면 결국 어떠한 존재든지 이미 최고의 궁극적 가치
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세상 안의  그 어떤 존재 예
컨대, 사랑, 효,  국가, 물질 등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한 반면에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절도, 강도, 살인, 강간같은  행위조차도 모두 궁
극의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본능과 감정의  극
복을 최고 가치로 치듯 세상 안 사람들은 본능과 감정에 대한 집착을 최고
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성을 가장 중심에 놓는다. 세상 바
깥 사람들이 성을 저주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할 때 그들은 성에 집착함으로
써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독을 치료하기 위해 또 다른 독(=항생제)을 쓰듯,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본능에 빠져야 한다.
  더러운 것을 닦기 위해 더러운 것(=걸레)을 쓰듯,
  현자는 자신을 닦기 위해서는 더러운 짓을 해야 한다.
  그들이 성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이 철저히 일원론적
이기 때문이다. 일원론? 좀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
  만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곧 만물의 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
서 그들은 모든 가치를 만물의 뿌리에 두는 것이다.  그러면 만물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어머니의 자궁이다.  자궁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여기에서 나오지 않은 생명은 없다. 자궁은 더할 나위  없이 성그럽고 여기
에서 나온 모든 존재는  그래서 다 가치있는 것이다. 우주 생산의  신인 쉬
바도 결국 우주의 자궁에서 나왔고 부처 또한 우주의  자궁에서 나왔다. 그
래서 양과 음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바로 하나인  것이다. 서로 다르지 
않은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여자 가랑이 속에서 액즙을 핥는 사람들
  아래의 오른쪽 사진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형상화한  신상이다. 남자의 
모습이 반이고 여자의  모습이 반이다. 젖가슴도 한쪽은 남자의 것이고  다
른 한쪽은 여자의 것이다. 성기도 남자의 것을 반으로 가른 모양이다.
  아래의 왼쪽 사진은 쉬바 신이 타고 다니는 황소 신의 상인데 중앙에 젖
가슴이 달린 남자인지,  남자 성기가 달린 여자인지 모호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모두 음과 양의 합일 속에 세상의 진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쉬바의 황소와  자웅동체 : 상체는  여성으로 하체는 남성으로  이루어진 
자웅동체가 쉬바의 황소 안에 들어 있다.
  자웅동체 : 몸의 오른쪽은 남성이고 왼쪽은 여성이다.
  여근 숭배 : 밀교  수행을 하는 여신의 가랑이 밑으로 들어가 그  액즙을 
핥는 숭배자의 모습
  그래서 그들은 자궁을  숭배한다. 그 숭배 의례가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
도 행해지고 있다. 그 의례에서는 여자의 성기 모양으로  만든 나무나 돌로 
된 조각 혹은 그림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제 여인의 성기 밑에서 
숭배 의례를 행하기도 한다. 여자 성기를 숭배하는 것은  결국 자궁이 가지
고 있는 에센스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에센스는 항상  그렇듯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것이다. 곧 자궁 안의 액즙이 바로  그 에
센스이다. 거대한 여신의  가랑이로 들어가 그 액즙을 핥는 숭배자들의  모
습은 성기에 돌을 매달고 고행하는 사두들의 모습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
다.
  세상에 파묻힌 사람들,  그들 모두는 진리를 찾았을까?  물질 속에서, 죄 
속에서, 본능 속에서, 얽히고설킨  이 세상에서 그들은 과연 자유를 얻었을
까?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찾는 것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인도인
들의 숙제이다.

    섹스 도시락
  몇 년 전 카주라호를 방문했을 때이다.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 기가 막힌 
물건 하나를 샀다. 짜빠띠를 담는 그릇이니 우리말로 도시락을  하나 산 셈
이다. 원통형으로  된 이 도시락은 그  둘레에 눈이 번쩍 뜨이는  그림들이 
조각되어 있다. 웬만큼 낯두꺼운 이도 바로 보기가 민망한  다섯 가지의 성
교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소위 정상 체위가 하나 있고  그 옆에는 남자가 도망가려는 암말을 잡아 
뒤에서 삽입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또 소위 69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녀
의 장면도 있고 그 옆의 것은 엎드려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뒤에서 삽입하
는 그림이다. 마지막 것은  여자 혼자 정면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
는 장면이다. 이런 모습들이 다른 것도 아닌 도시락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섹스 도시락 : 밀교의  근본 원리인 음양 합일의 원리가 밥 먹는  도시락
에까지 새겨져 있다.

    자연의 생산 원리와 인간의 생산 원리
  이야기를 좀 멀리 거슬러 올라가 시작해야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선사 시대 사람들의 세계로 한번 가 보자. 그들은 수렵으로 연명하거
나 기껏해야 초보적인 목축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자 애썼
다. 그렇게 자연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변화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자연이 그들의 주식량인 동식물들의 생활  주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더 나아가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수
렵과 목축을 성공리에 수행하기 위해서는 폭풍우가 없어야 했고 물이 얌전
하게 흘러야 했다. 그리고 항상 불을 가까이에 두어야 했다. 그러나 자기들
의 기대와는 달리 느닷없이 변하는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은 늘 공포와 두
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을  어떤 신의 현
신쯤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외지
에서 온 아리아인들이 수렵과 목축을  하면서 천 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이
동 생활을 했던 인도같은 곳에서는 그 증거들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쉬바 남근석 : 링가로 불리는 남근석은 여근인 요니와 함께  하나를 이룬
다. 뱀이 감겨 있는 모습이 쉬바에서와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도구를 개발하였고 농경을 시작하였다.  농경으
로 인해 비교적 안정적인 식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그 기반 위에서 정착 생
활을 시작했다. 정착은  생활에 많은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니  한번 
맛본 편안함을 놓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넉
넉하고 풍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노동력이 풍부해야 농사를 잘  지
을 수 있다는 이치는 그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자식
이 곧 식량이요 행복이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유복한' 가정이라 함은 
부모 슬하에 자식이 많은 가정을 이르는 말이고,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자
식이 재산'이라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의  역할이 농경 사회에서 크게 부각되었다. 자식은  여
자가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애를 낳고 잘 기르는 일은  곧 식량을 
원할하게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되었다.  따라
서 여자가 애를  낳고 기르는 과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자리잡았다.  결
국 여자의 성기와  젖가슴은 식량 생산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를 강조해서 
만든 물건들로 주술을 벌이곤 했다.
  여성 원리의 부각은  곧 남성 원리의 부각으로 이어졌다. 원시인들이  자
연의 생산 원리를  인간의 생산 원리와 동일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
자와 남자가 성적으로 결합하고 그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뱃속에서 생
산물이 나온다는 원리를 땅과 씨앗이 결합하는 원리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성기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의 성기를 
강조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인 하라빠  문명 이래로 남근
석과 여근석이 상당수 발굴된 것도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소산이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
  [마누법전]에서 고대 인도인들은 여자를  밭이라 하고 남자를 씨라 하였
다. 남성이 씨고 여성이 밭이라는 표현은 남성 중심적인  창조 개념이 발전
된 것이다. 생산 행위에서 여성은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씨가 뿌려
지는 피동적인 밭으로 간주된 것이다. 우리 문화에도 남자는 씨, 여자는 밭
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래서 대리모를 씨받이, 대리부를 씨내리라고  했다. 
남자는 천하대장군이요, 여자는  지하여장군이라 하여 남자를 하늘, 여자를 
땅에 비유했다. 하늘이 비를 내리는 모습이 남자의 모습이요, 그 비를 흡족
히 받아  곡식을 잘 기르는 모습이  여자의 모습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을 높고 절대적인 존재로 보는 유교적 사상도 내포되어 있다.
  여자를 밭이라 여기는  것은 여자와 땅의 생산  메커니즘을 같다고 보는 
것이다. 벵갈 지방 사람들은 여자가 한 달에 한 번  월경을 하는 것처럼 땅
도 월경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월경 중인 여자들을 쉬게 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땅도 이 기간 중에는  쟁기질이나 파종은 물론이고 그 외의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쉬게 하였다.
  어떤 원시 부족들은 추수 의례  때 마을 처녀들이 외간 남자들과 자유롭
게 성관계를 갖도록  허용하거나 권장하고 있다. 마을 처녀들이 그  마을의 
생산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외부의 양기를 받아옴으로써 마을이 
풍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도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왕비를 국모라고 생각해 왔으며 왕실에서 
자식을 많이 생산하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 
하여 왕이 자식을 낳아 줄 후궁을 보는 것을 정당화시키기도 했다.

    음양과 피, 그 영원한 주술의 법칙
  왕비가 국모의 상징이 된 것은 옛날 인도의 베다  시대 때부터였다. 아리
아인들이 인도 땅에 들어와 천 년 가까운 유목 생활을 마치고 처음 정착하
기 시작했을 때 왕은 이제 영토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왕은 대관
식을 치르기  전에 자신의 말 즉  왕마에 군사들을 딸려 사방으로  보낸다. 
왕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요,  왕마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일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무사히 돌아온 왕마를 왕비가 예쁘게 단장하고 궁전에서  기다려 맞이한다. 
왕비와 왕마 둘은  조용한 침실로 들어가 성스러운 성관계를 갖는다.  그러
고 나면 왕마는 희생되어 그 피로 땅을 적신다.
  말 희생제 : 양을  상징하는 왕의 말과 음을 상징하는 왕비가 교접한  후 
말을 희생시켜 그 피를  제단 위에 뿌렸다. 이러한 말 희생제는  베다 시대
에 행해졌다.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경이  그의 저서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주장한, 이른바  유사성의 법칙에 의한 모방 주술이다.  왕비는 
여자로서 땅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국모로서 나라 전체의 음력을 상
징한다. 또 왕마는 그  성기로 인해 씨앗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나라 전
체의 양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둘의 성교는 나라  전체에 풍년을 가져다 
주는 모방 주술 행위가  된다. 여기에 더해 희생제를 치러 그  교접으로 생
성된 '성스러운' 피를 땅에 바쳤으니 어찌 풍년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피, 세계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모방 주술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온 대표
적인 소재이다. 인도의  어떤 부족들은 지금도 파종하기 전에 밭  한가운데 
돌을 세우고 그 돌 위에 붉은색 칠을 하는 주술을  행한다. 붉은색은 곧 피
다. 그것은 곧 월경이다. 월경은 생산할 수 있도록 생산력을 준비하는 작업
이다. 그래서 붉은색을  칠하는 것은 생산력을 땅에 주입시키는 것을  상징
하는 행위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원시인들이 죽은 사람의  몸에 붉은 칠을 
하는 것도 그들이  붉은 색은 피의 색이요 피는  곧 생산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가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의 소생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었다는 이야기이다.
  결혼한 힌두 여인들이 가리마에 붉은색을 칠하는 것도 다 이러한 연유에
서이다. 생산을 하기 위해 피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과부나 처녀
는 가리마에 붉은색을 칠하고 다닐 수 없다.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월경 
중인 여자나 임신한 여자가 몸에 검붉은 칠을 하고 다니는 현상도 이와 같
은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족민들이 밭 한가운데 돌을 세우는 것은 밭으로 상징되는 여성에 돌로 
상징되는 남성을 교접시키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전
형적인 생산  추구의 풍습이다. 남녀  성기를 상징적으로 교접시키는  것은 
곧 남녀가  실제로 하는 성교와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힌두교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종교가 초기에는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도덕적으로 음란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도 다 성교를 생산 추구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녀의 성교는 생산을 가져다 주는 주요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점차 
물질 생산의 근원인 제사와 동일시되었다. 어떤 경전에서는  제사를 여자로 
묘사했는데 그 비유가 실로  절묘하다. 여자의 하복부는 제사의 단이고, 여
자의 음모는 제사에 바쳐진 식물이다. 여자의 피부는 약초  소마를 짜는 제
단 바닥이며, 여자 성기의 두음순은 제화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 비유가 
더 절묘하다. 여자는 제화이고, 여자의 하복부는 제목이며,  여자 성기의 외
음부는 제화의 불꽃이다.  그리고 남자 성기의 삽입은 제화에 연료를  넣는 
행위이고 남녀의 결합이 일으키는 불꽃은 그대로 제사의 불꽃이다.
  앞서의 도시락에 새겨진 낯뜨거운  '섹스 파티'도 결국 민중들의 좀더 잘 
살아 보고자 하는  바람이 담긴 종교적인 형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 
음심을 품거나 음란하다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항상 그렇듯이 민중들은  음란하지 않되 표현이 성적인 것이 많고,  가진 
자들은 음란하되 표현은 성적인 것을 감춘다.

    관념의 산을 넘어 까마 수뜨라의 세계로
  어떤 것이 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잘 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인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힌두 금언 중 하나이다. 무엇이든  할 만한 좋은 
일이라면 머리로만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 그리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인도 사람들의  진리관을 잘 보여 주는 금언이다. 그들은  지식이
라는 것은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고 있다.  인도의 
성자들은 머리의 지혜를  몸의 요가를 통해 완성하고, 사람들은 기적과  마
술을 보면서 머리  속에 존재하던 신의 강림을 맞는다. 의학적으로는  사람 
몸을 직접 해부해 봄으로써 전체를 보고 그리하여 의학 지식이 완성된다고 
믿어 실천하였으며, 예술에 있어서는 조각 하나하나를 망치로  치고 정으로 
쪼고 끌로 다듬어 석굴 사원 전체를 세움으로써 신을 봉헌함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쉼 없고 지침 없는 통합의 과정이요, 관념
의 세계를 실체의 세계로 연결하는 실재적인 과정이다.

    법과 실리와 성애를 추구하는 사회
  모름지기 힌두라 하면 다르마와 아르타와 까마의 세 가지를 추구하면 살
아간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높은 신분의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따라 이 세  가지를 잘 실행하
면 이승에서는 물론이고 저승에서도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고 
믿는다. 훌륭한  자는 이들을 잘 알고  행한 후에는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니 그는  다가오는 다음 세상의 행복을 묵묵히 준비
할 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의  실천은 곧 건전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실제 삶을 뜻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신분의  의무를 잘 지키는 법의 준수, 세상살이에 
필요한 물질을 쫓는 실리의 추구 그리고 이 둘 안에서 육체에 깃들여 있는 
성의 기쁨을 누리는 성애의  추구야먈로 가정을 떠받치는 대들보 아니겠는
가? 그래서 이  셋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셋으로써 하나를 
이룬다. 그 중 하나를 행함으로써 다른 둘에게 피해를  준다면 결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그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법이나 실리뿐만 아니라 성애  또한 힌두들이 애써 행해야 하는 인
생의 당당한 목표의 하나이다. 그래서 힌두들은 성을 알고자 하고, 성을 완
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성은 은밀한 것이 아니어야  하고 
그것을 다루는 것  역시 부끄러운 일이 아니어야  함은 이러한 연유에서이
다.
  밀교 사원 벽면의 부조들 : 카주라호를 비롯한 많은 밀교의  사원에는 까
마 수뜨라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것은 상징의 세계일 뿐, 음란의 표현은 
아니다.
  성은 사람이 사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
치는 [까마 수뜨라](Kama Sutra)는  가정에서 널리 학습되는 것이면서 동
시에 사원에서도 교육되는 것이다. 이는 성과 속이 둘이  아니고 하나인 힌
두 세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성이 종교가 되고 그  종교
는 다시 예술이  된다. 까마 수뜨라의 내용이 사원에 공개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성을 추구하되 제대로 추구하라
  성애가 이러한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성욕은 식욕과 더불어 인간이  생존하
는 데 무시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니  이를 완전히 억누르고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까마 수뜨라]에서는 이것이 
없으면 정신병 같은  해로운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성
욕으로 몸을  망치고 가문을 망친 자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버릴  수도 
없지만 탐닉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애는 바로 다스려져야  하며 
바로 가르쳐져야 하는 것이다.
  인도에서 법전은 인간 생활에서  만인이 공인하는 사항들의 근원이며 으
뜸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이를 배우고 익히면 다른  사람은 그로
부터 그 진리를 배워  행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다 법의  진리를 이해하고 
깨달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경우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경제나 재정의  원리를 깨달아야만 돈을 버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돈을 버는 기술을 어느 누군가로부터 배워 애써 행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은 더불어 배우는 것 : 여자들은 소녀 때부터 다양한  성애의 기예를 
익힌다. 자연 속에서 본능을  만끽하며 노는 것 같이 사랑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성애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인들은 성에 관한  원
리를 깨달을 필요는 없다. 다만 옛 성현이 남겨 준 책으로 그 기술을 알고, 
믿을 만한 자로부터  배워익히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소녀  때부터 
성애에 관한 기예를 익히게  된다. 성애 또한 훈련이 따라야 하니  그 훈련
들이 마침내 사랑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사랑을 소녀에게  가르칠 수 있
는 자로는 유모의  딸로서 결혼한 자, 신뢰할  만한 여자 친구, 이모,  나이 
든 하녀, 지금은 거렁뱅이지만 전에는 한 집안에서 살았던 여자, 믿을 만한 
언니 등이다. 훈련은 혼자 해도 좋지만 여럿이 모여 하는 것 또한 좋다. 사
랑을 배우는 훈련을 기꺼워하는 자라면 거지 아니라 더한 사람이라도 마다
하면 안된다.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놀이가 
다 사랑의 완성을 향한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든지 목표
인 성을 통한  사랑 혹은 사랑 그  자체를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또 
나아가 육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서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의 높은 산에서 해방되고자  하였
고 이를 위해서 꾸준한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힌두의 성 세계이
자 [까마 수뜨라]의 세계이다.
  사랑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 또한 지극히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
는 것이다. [까마  수뜨라]를 편찬한 밧시야야나(Vatayayana)는 궁중의 비
빈처첩과 화류계 여인들이 성에 대한 경험이 매우 풍부한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래서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여염집 
규수들에게는 남편의 바람기를 잠재워 화류계 여인들에게 남편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랑의 기예를 다양하게 익히도록  권유하였다. 밧시야
야나는 그들이 익혀야 할 기예로 예순네 가지를 들고 있다. 노래, 연주, 춤, 
서화, 자수, 놀이 등 여인들의 규방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물론이고 침실을 
꾸미는 방법,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땋는 방법, 손톱을 다듬는  방법, 애인
과 비밀스런 말이나 암호로 교통하는 방법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들 모
두가 완전한 성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은 무엇보다도 여
러 가지 방법들을 통합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며 몸으로 직접 실천하
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의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쁨을 추구하는  방법 
또한 기쁨으로 행해져야  한다. [까마 수뜨라]에서는 그 기쁨이 우리  몸에 
있는 다섯 감각 기관에서  온다고 한다. 귀에서 오고 코에서 오고  눈과 혀
에서 오고  살갗에서도 온다. 이들 모두를  자극하고 온 정신을 쏟았을  때 
느껴지는 기쁨이  바로 성의 기쁨이다. 이  다섯 감각 기관과 정신이  한데 
어우러지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수많은  새로운 조합을 끊임
없이 시도하며 절정을 갈구한다.
  쾌락의 절정을 함께 누림으로써  부부의 운우지정은 더욱 깊어지는데 이
는 기예로까지 승화한  다양한 성행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다양
한 성행위에는  실수도 수치심도 없고  다양한 인위적인 수단도  허용된다. 
이른바 변태니 아니니 따질 여지가 없는 셈이다. 격식에서  나온 사랑은 습
관에 의해 얻어지는  사랑일 뿐, 공허한 것으로  본다. 인간은 본디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갖고 있어서  어디에든지 무엇에든지 적응하며 생존하게 되
어 있다.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잘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그런 것일 뿐 
애써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열정적
이고 누가 얼마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일 뿐 다른 것은 아무 문제도 
관심사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가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 그리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여자는 
기교를 남자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몸이 곧 사원이니 그 안에서 태양이 지고 달이 뜬다
  그러다 보니, [까마 수뜨라]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하다. 어떤 여
인이든 다 똑같이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반면에,  남자는 똑같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사내가 두 여인을 취할  때는 반
드시 동시에 취해야 하고 그 나누어지는 기쁨은 같아야 한다.
  까마 수뜨라의  세계에서 사랑은 공평한 것  : 두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남자는 둘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우주의 원동력은 삼라만상  모두에게 차례차례 그 힘을 나누어 준다.  그 
힘은 셀 수 없이 많은 모양과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를 
기쁨으로 기다리고 그  안에서 무한한 은혜를 느낀다. 이것이 우주의  진리
이다. 사랑이 곧 우주의 중심이라면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래서 [우
빠니샤드](Upanishad)에서 현자는 우주와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엑스터시(ecstasy)가 있는 곳에 창조가 있고
  엑스터시가 없는 곳에 창조가 없나니
  무한함 속에 엑스터시가 있고
  유한함 속에 엑스터시가 없도다
  한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성애가 사랑이라면, 전제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 전제는, 나는 내 
존재의 본질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그  또는 
그녀-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비롯된 사랑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철저한 사랑의  이분법이다. 이에 반해  [까마 수뜨라]의 세계는  철저히 
일원론적이다. 성애는 신이 주신 최고의 은사이며 이를 즐기는  것은 곧 신
을 섬기는 것이다.  몸이 곧 사원이다. 그  안에서 태양이 지고 달이  뜬다. 
그 안에는 돌보아야 할 땅이 있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숲이 있으며 노래하
여야 할 시기가 있다. 그 안에 성스러운 강이 흐른다.
  내 사랑하는 이에게 내 몸을 기꺼이 가원으로 만들어
  기쁨의 제단 위에 이 몸을 바치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면
  내 사랑하는 이가 내 몸을 신성케 하리.
  이것이 힌두의 세계, [까마  수뜨라]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관념의 높은 
산을 넘어 물질의 넓은 땅에 서 있다.
  밀교에서 보는 인간의 몸 : 인간의 몸 안에 모든 우주가 있고  그 중심은 
생식기이다.
  [까마 수뜨라]의 세계가 기본적으로는  지체 높고 유복하고 호사스런 자
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하루  한 끼 먹고 살기
도 어려운 민중들에게 분명 사치스럽고 방탕한 세계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그 그림자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여인들이 남자들의 관심을 끌고 그를 차지하기 위해 벌
이는 처절한 몸부림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여인들의  삶은 그만큼 물
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라 관념의  세계로부터는 차라리 자유롭다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물질과  육체의 세계로 인해 그나마 여성의 지위가  그만큼이
라고 향상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역설일까? 비록 낮에는 남
성의 지배  이데올로기 밑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밤에라도 여성의  지배가 
가능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라는 이야기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남자
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다가
온다. 이것이 바로 이론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실제의 세계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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