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들의 나라(상)
원제:역사에 없는 나라
이상우
작가소개
1.의문의 여인
2.사라진 사모님들
3.오후의 정사
4.백산공사
5.두터운 비밀의 커튼
6.호반의 공포
7.또 하나의 반정부 단체
8.짙어지는 안개
9.연기처럼 사라지다
10.민독추의 최후통첩
11.첫 번째 희생자
12.공포의 시간
13.수치의 시간
14.첫 대면
15.한 가닥 단서
{{}}1.의문의 여인
후덥지근한 여름이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땡볕도
기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들한 바람이 불 것이라고 추병태 경감은
생각했다.
더위가 가기 전에 꼭 며칠동안 휴가를 다녀오리라고 해마다 생각해왔으나
언제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년에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외면하고 고향을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러나 좀체 손을
뺄 수 없고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더 버티다가는 남들이 다 지나간
바캉스의 그림자나 밟게 될 것 같아 무작정 서울을 떠난 것이다.
경북 월성군 별다리 마을. 이 곳을 추병태는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추병태가 태어난 곳은 여기가 아니고 평북 정주였다. 시인
김소월의 고향으로 유명한 정주는 추병태가 11세때 아버지에게 손목이
잡혀 피난길을 떠난 이후 한번도 가볼 수가 없었다.
11세 때부터 외가 고장인 경북의 이 별다리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랄 때인 40여 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마을 앞 별다리라는 조그만 나무다리도 없어지고 그 밑에 있던
물레방앗간도 없어졌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만들어준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던 미나리강도
없어지고 팽이를 돌리던 동네마당도 없어졌다.
추병태가 살던 초가집도 헐어내고 슬레트 2층집이 들어섰다.
동네아이들과 함께 병정놀이를 하며 드나들던 우거진 대숲도 이젠 흔적만
남아있었다.
별다리 마을이 옛 모습을 모두 잃어버린 건 온천이 발견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레저개발 붐이 불었기 때문이다.
아무 쓸모 없던 땅이 백 배, 2백배로 값이 오르고 밭떼기는 모두 여관과
유흥시설로 변했다.
인구도 갑자기 13배로 불어나 이곳 토박이들은 어디에 섞였는지 찾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 돌장승은 아직 그대로 서 있고 거기서
바라보던 앞산의 기괴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앞산은 아침, 한낮, 저녁, 달밤 등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이 변했었다.
앞산의 주봉인 별산봉은 아침에는 쪽지은 여자의 머리처럼 보이다 한낮이
되면 그림자의 장난으로 곰 엉덩이처럼 보였다. 저녁때는 뿔난 도깨비처럼
보이고 달밤에는 사모 쓴 신랑처럼 보였다.
동네 노인들은 옛날 옛적 이곳에 한 식구처럼 어울려 살던 신랑각시와
도깨비, 곰 등이 인간에게 쫓겨나 저 별산봉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를 회상하며 가는 여름을 혼자 아쉬워하리라고 생각한 추병태는
너무나 변한 모습에 실망했다.
새로 지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추병태경감은 몇 년만에 잡은 여름휴가가 이렇게 비맞은 휴지처럼
구겨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비가 온다고 여관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추병태경감은 우산하나를 여관집에서 빌려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릴 때 엄격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늘 혼자 올라가 울던
동산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너무나 변했다. 그때의 나지막하던 동산은 간 곳이 없고
어마어마한 시설이 가득한 유기장으로 변해있었다.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놀이용 유.에프.오, 간이 떨어지게 하는
하늘열차, 쇠로 만든 회전목마, 요술궁전 따위가 펼쳐져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데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빗소리만이 우렁찬 박수 소리를 내듯 쏟아지는 유기장을 추병태경감은
천천히 혼자 걸었다.
한참 걷던 그는 이상한 장면과 부딪쳤다.
모든 놀이시설이 정지한 채 비를 맞고 있는데 오직 한가지 둥그런 회전
그네만이 혼자 비를 맞으며 돌고 있었다. 관리인이 스위치를 끄지 않고
돌아갔기 때문에 혼자 돌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회전 그네는 물레방아처럼 생겼는데 수평으로 되어있지 않고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원형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한꺼번에 20명은 탈 수 있게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 큰
회전그네가 삐걱거리는 금속성을 내면서 빗속에 혼자 돌고 있는 모습은
어쩐지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유기장에 설치된 수많은 놀이기구들은 모두 꼼짝 않고 쏟아지는 빗속에
괴물처럼 서있었으나 오직 회전그네만이 돌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추병태경감은 혼자 돌고 있는 회전 그네 가까이로 가보았다. 아무래도
관리인이 동력스위치를 끄는 것을 잊어버리고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회전 그네의 높이는 7층 빌딩 높이쯤 되는 것같았다. 수십 개의 그네가
계속해서 삐걱거리는 금속성을 냈다. 그네 하나 하나가 추병태경감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사라지고는 했다. 그 처량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모두 비어있는 그네 속에 한 곳에만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추병태경감은 그네 앞으로 더 다가가 그 이상한 그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그네가 돌아서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저건...
추병태 경감은 분명히 그 그네에 사람 같은 형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네가 다시 눈앞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네가 다가오자
이번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젊은 여자였다.
분홍빛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 여인은 비에 젖어 머리가 목덜미까지
늘어진 채 피부에 붙어있었다.
이봐요! 여보세요!
추병태 경감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 대꾸도 않고 그네에
실린 채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그렇구나!
추병태 경감은 오랜 직업에서 온 직관으로 그 여자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빈 그네를 혼자 타다가 죽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추병태 경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네를 멈추게 하는 동력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놀이장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건물로 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뛰어서 관리실 건물로 들어갔다. 웬일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추병태 경감이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가 다시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늙은이 한사람이 자고 있었다.
술냄새가 확 풍겼다. 탁자 앞에는 화투 한모가 흩어져 있고 소주병이
뒹굴었다.
밤새 고스톱이나 치다가 모두 돌아가고 혼자 술에 떨어져 자고 있는
노인이 이곳 관리인 인것 같았다.
이봐요. 일어나요. 정신 좀 차려요.
추병태 경감이 어깨를 흔들자 노인이 부시시 일어났다.
뉘시요?
그는 느릿느릿한 말로 되물었다.
저기 저것 봐요. 저 회전 그네를 좀 멈추게 해요.
그가 창 밖을 가리켰다.
어어? 저게 웬 일이야? 어떤 녀석이 스위치를 넣었어?
노인은 보기 보다 훨씬 재빨리 비옷을 걸치더니 회전 그네 쪽으로 뛰어
갔다. 뛰는 걸음도 노인답지 않게 재빨랐다.
추병태씨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네는 이미 멈추어져 있었다.
이것 봐요.
추병태 경감은 그네에 실려 밤새도록 오르내리던 여자의 모습을 가리켰다.
아이구! 이게 무슨 변이야. 죽었잖아.
노인은 여자의 모습을 보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얗게 핏기 없는 얼굴에 꼭 다문 입과 비에 젖어 더욱 까맣게 보이는
흩어진 머리카락이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인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얼른 보아도 예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아이구 이일을 어떡하우? 난 이제 망했다 망했어. 뒈질려면 제
집구석에서 뒈질 일이지 하필 여기 와서...... 아이구 이젠 난 망했다
망했어.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그네를 붙들고 중얼거렸다.
영감님 전화가 어디 있지요?
저 사무실에.....
그는 방금 나온 건물을 가리켰다. 추병태씨는 현지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관리실로 들어갔다. 모처럼 별러서 온 휴가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시체를 만나게 되었는데, 난 휴가 왔으니 모르겠다하고 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 관할 지역은 아니지만 그는 하는 수 없이 수사관 추경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현지 경찰서의 초동 수사반이 도착한 것은 그날 정오께였다.
추경감은 월성 경찰서 수사팀에게 변사체만 인계하고 손을 뗄 수도
있었으나 그의 직업의식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문제의 유원지는 경북 월성, 경주 일대에 불어닥친 개발붐을 타고 이룩된
레저시설의 일부였다. 갑자기 땅값이 수백 배로 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이변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유원지가 노는 날인데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북적대던 인적이 뚝 끊어졌었다.
죽은 여인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별다리 마을에 사는 주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20여킬로 떨어진 연하라는 곳에 사는 여자였다. 연하는
장미사라는 한적한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로 아직 레저바람이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인 그 여인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여자였다.
조은하, 나이 38세, 독신.
초동수사를 맡았던 월성경찰서의 하경감이 그 여자의 신원을 알려주었다.
하경감은 인천에서 추병태경감과 함께 근무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자네가 변사체의 첫 발견자이기 때문에 진술을 좀 해주어야겠어.
추경감은 속으로 역시 휴가는 망쳤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추경감은 그 여자, 즉 조은하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적 욕구가
발동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조은하의 사인은 교살이었다. 그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여름용 스카프로
목이 졸려 숨졌으며 그 스카프는 그대로 그녀의 목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다른데서 살해되고 그 빈 그네로 옮겨진 뒤 밤새도록 그네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사망시간은 전날 밤 10시에서 12시 사이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피살된 조은하는 나이가 30대 후반임에도 얼른 보기에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곱고 상당히 미인 축에 드는
여자였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이유 외에도 추경감은 그 살인 사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미인이 기괴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이
어쩐지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추경감은 닷새
남은 휴가를 하경감과 함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임 있는 수사관이 아닌, 국외자의 입장에서 수사에 훈수를 둔다는 것은
참으로 해볼만한 일이라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조은하는 원래 이곳이 고향은 아니었다. 서울서 태어나고 학교도 다녔는데
10여년 전 이 곳 교사로 왔다가 전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남아있었다.
조은하가 처음 연하에 올 때만 해도 이곳은 무의촌으로 오지에 속했다.
국민학교 교사도 의무적으로 배치했을 뿐아니라 오더라도 1,2년을 못
견디고 그만두거나 다른 도시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조은하는 오히려 이곳에 남겠다고 해서 그냥 있었다.
깔끔한 미모에 혼자 산골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많았다.
처음에는 처녀로 알려졌다가 나중에는 이혼한 여자라고 했고, 또 남편이
서울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이러한 추측은 모두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본인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조은하는 늘 조용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자신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 하지 않았다. 서울이 고향이고 교육대학을 나온 뒤 벽지를 지원해서
일찍 이곳에 배치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연하국민학교는 학생이 10학급도 채 안되고 선생님도 여덟명 뿐이었다.
그중 다섯 명은 남자선생님이고, 세명의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조은하 외의
두사람은 나이가 정년에 가까웠다.
연하 일대에서는 예절바르고 예쁜 여선생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몇 사람의
이러저러한 남자들이 접근했으나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처녀인지 이혼녀인지 모른다고?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거야.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면서?
추경감이 그녀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하경감에게 물었다.
글쎄. 그것도 좀 아리송하단 말야. 몇 년 전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
서울서 데리고 왔다더군. 동네 사람이나 학교 동료 교사들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잘 몰라. 어떤 사람은 고아원에서 데리고 왔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서울에 두고 온 자기 아들을 뒤늦게 데려왔다고도 하고......
아이로 봐서는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겠군.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건 이튿날도 비는 억수로 쏟아졌다.
경찰서 창밖은 대낮인데도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어두웠다. 장대비가
햇빛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추경감은 불이 좀체 켜지지 않는 지포라이터를 계속 철컥거렸다. 그는
불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켜지지 않는 지포를 척컥거리면서 즐기는 것
같았다.
미혼모라는 설도 있고 말이야......하여튼 묘한 여자야. 좋게 말해서
신비에 쌓인 여자라고 할까......어쨌던 서울에 조회를 해놓았으니까
자세한 회신이 올거야.
추경감은 남은 휴가를 이용해 그 여자에 관한 것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번 사건에 대해 좀 알아볼 테니......
아냐. 자네는 모처럼 휴가온 것이니까 조용히 남은 날을 즐기게. 이건
우리 사건이야.
하경감이 진심으로 말렸다.
아냐. 난 이런 일을 보면 잠이 오지 않아. 내 취미라고나 할까? 내가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녀도 그냥 놔두게, 관할지역 아니라고 쫓아내지 말란
말일세.
하경감은 웃으면서 추경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더 말리지 않았다.
좋도록 하게.
하경감의 허락을 얻어낸 추병태경감은 경주시내에 조그만 여관방 하나를
얻어놓고 조은하에 대한 개인 수사를 시작했다.
추경감은 우선 조은하가 살해된 시간으로 추정되는 8월3일 일요일 저녁
10시께 유원지 부근의 목격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문을 열고 있던
부근의 구명가게와 식당 등을 다니며 탐문 수사를 해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해가 지자 유기장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데이트 나온
남녀만 드문드문 그곳을 다나들었다는 것만 알 정도였다.
그는 다시 조은하가 다니던 연하국민학교로 가보았다.
경찰에서 오셨다구요? 어제 그저께도 오셔서 물을만한 것을 다 묻고
갔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교장은 귀찮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대했다.
미안합니다.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추경감은 고개를 몇 번이나 숙여 절을 한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긴 금연구역입니다.
미안합니다.
추경감은 다시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담배를 얼른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뭐가 또 부족합니까?
교장은 공손한 추경감의 태도 때문인지 의자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조은하 선생이 8월 3일날 학교에 나왔었습니까?
교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추경감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요즘은 방학이라서 선생님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아, 예, 그렇군요.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추경감은 바보처럼 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조은하 선생은 독신었습니까? 말하자면 이혼녀인지, 서울에 남자가......
이것 보시요!
추경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돌아가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조선생님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모범적이고 단정한 선생님이었단 말입니다. 남자가 어쩌구 하는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교장이 눈을 부라리며 흥분해서 떠들었다. 추경감은 교장의 그런 태도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교장 고문식>
책상 위에 놓인 명패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추경감은 괴상한 이름도 다
있다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남편이 서울에 있었는지 하는 뜻입니다.
조선생은 독신이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어요. 경찰서에서는 형사마다 그걸
캐러 다니나요?
미... 미안합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나는 남선생은...
여보슈. 당신 이상한 사람 아니오? 당신 진짜 형사요? 잡지사서 이상한
스캔들 캐러 다니는 사람 아니요?
교장이 더욱 화를 내는 바람에 추경감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지요. 실례했습니다.
조은하 선생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요.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죄도 있다는 걸 아십시오.
고문직 교장은 추경감의 뒤통수에 대고 퍼부었다. 추경감은 고문직 교장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친한 남자
선생님이 있었냐는 질문에는 더욱 화를 내지 않았던가.
추경감은 교장실을 나오다가 복도끝에 있는 교무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가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지만 교무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추경감은 안에 들어가
한바퀴 돌아보았다. 책상 여덟 개가 놓여있었다. 교장선생님까지 여덟
명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책상이 하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교사 아닌 서무직원이 한 명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 책상이 조은하씨 자리인지 알 수가 없어 두어 바퀴 책상 앞을
맴돌았다. 추경감은 한참만에 책상 위에 놓인 교무일지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책상마다 있었다. 추경감은 조은하라고 쓰인 교무일지가 놓인
책상을 찾아냈다. 다른 책상보다 깔끔하게 책상 위가 정리되어 있었다.
쌓여있는 여나무 권되는 책을 넘겨보았다.
국민학교 5학년 교과서들이었는데 그 속에는 한참 인기가 있는 여류시인의
수필집도 끼어 있었다. 그 외에도 정형외과에 관한 학위논문집 한 권이
있었다. 추경감이 책장을 넘겨보았다. 조은하 누나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책을 쓴 사람은 조준철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조준철이라는
정형외과 의사가 학위논문으로 쓴 책을 누나인 조은하 선생에게 준
것이다.
강남대학교 부속병원 정형외과.
추경감은 책 뒤에 있는 조준철의 신원을 메모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책상을 함부로 뒤지는 거요?
그때 등뒤에서 굵직한 허스키 보이스가 들렸다.
추경감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키가 큰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나 말투는 꼭 남자 같았다. 얼굴 생김도 옷차림이나 파마
머리만 빼면 남자로 생각될 정도였다.
이거 미안합니다. 경찰인데......
추경감이 겸연쩍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경찰이면 남의 사물을 함부로 뒤져도 되는 거요?
추경감은 난감한 기분으로 핀잔을 받으며 책상 위의 책을 제자리에
정리했다. 정형외과 학위 논문집을 제일 위에 얹다가 문득 책표지에
휘갈겨 쓴 숫자를 발견했다.
02-999-4884
추경감은 그것이 서울지역의 전화번호란 것을 금방 알고 머리에
새겨두었다.
미안합니다. 이 학교 선생님 되십니까? 저는 서울 시경의 추병태라고
합니다.
추경감이 허스키여인에게 꾸벅 절을 했다.
저는 이 학교 서무를 보고 있는 추선자입니다.
그러십니까? 이거 추씨를 만나서 반갑군요. 어디 추씹니까?
추경감은 정말 반가워서 함박 웃음을 담았다.
추씨야 함흥 추씨 단일본 아닙니까? 항렬이 병잡니까?
여인은 무뚝뚝하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할머니뻘이군요. 볼일 다 봤으면 가십시오. 조선생 범인은
잡았나요?
아직......평소의 조은하선생에 대한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협조해주시겠습니까?
그 여자는 같은 추씨라는 것을 알자 조금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교장 고문직의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긴장한
얼굴이 됐다.
교장은 조은하 선생을 혼자 좋아하고 다녔지요. 어울리지 않게 그 나이에
짝사랑이라니......쯧쯧쯧.
예?
추경감은 뜻밖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진 않았을 거요. 조은하 선생은 교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2.사라진 사모님들
국무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서해안의 세 번째 매립공사 문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경제부처 장관끼리도 의견차이를 보인 탓인지 토론은 격했다. 총리는 잠시
회의진행을 포기한 듯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때였다. 총리 비서실장 김영기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총리가 있는
사회자석으로 허리를 굽힌 채 급히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몹시 빨라서
마치 뛰는 듯이 보였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표정은 굳어있었다.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있는 총리의 뒤로 간 그는 총리의 뒤로 총리의
어깨 위에 얼굴을 대고 귓속말을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내밀었다.
각하! 큰일났습니다.
정부 내에서는 본래 대통령 외에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영기 실장만은 총리를 각하라고 불렀다. 총리는 그 호칭을 별로
좋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뭐야?
김실장이 큰일이라고 해도 총리의 반응은 느릿했다. 얼굴에 뛴 바보스럽게
보이는 웃음을 지우지도 않은채였다. 그러나 김실장이 내민 쪽지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이게 정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토론 중이던 국무위원들이 언쟁을 중지할
정도였다.
일국의 국무총리가 저렇게 경망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는 장관도 있었다.
이거 어디서 온 정보야?
그의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차차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저한테 직접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뭐야? 어느 녀석이 장난친 것 아니야?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총리의 얼굴은 흥분에서 분노로 차차 변했다.
각하, 지금은 국무회의가 진행중입니다.
김실장이 민망했던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흐흠!
총리는 평정을 찾으려 헛기침을 했으나 그의 흥분, 분노, 불안으로 범벅된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오늘 국무회의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긴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내용은 나중에 다시 여러 장관들께 보고하겠습니다.
총리는 일어서서 급히 그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뒤따라 간 김영기 실장을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왔어? 그놈이 전화한게 언제냔 말야?
아직 5분도 안 되었습니다.
누구누구가 알고 있지?
각하와 저밖에...
그럼 당분간 보안을 지켜. 그래, 다시 한번 자세히 얘기해봐!
총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각하를 바꿔달라는 전화가 걸려와서 제가 받았거든요. 그래서 각하는 지
금 회의중이라 안 되니까 저한테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더니 자기는 <민주독립정부수립추진위원회> 간사라고 밝혔습니다.
민주독립? 그런 단체가 있나?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더니 현정부는 총사퇴해야 된다고 불쑥......
현정부?
구체적으로 말해. 대통령 각하를 비롯한 모든 국무위원이 사임하고,
자기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토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납치된 차는 어디 있다는 거야?
그 얘기는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총리각하 사모님 이하 22명의 국무위원
사모님들을 잘 모시고 있다고만 했습니다.
이거 큰일났군!
총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큰일났다는 소리만 되풀이했다.
그야말로 기상 천외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국무총리 부인 이하
각부장관 부인 22명이 대한적십자사 봉사계획의 일환으로 전방에 있는
국군 부대에 김치를 담궈주러갈 계획이었다. 버스 한 대에 타고 가던
이들이 버스채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다.
혹시 어떤 놈이 장난치는 것 아닐까?
실내를 왔다갔다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총리가 불쑥 김실장에게 한
말이었다.
진상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무장관과 내각정보국장을 빨리 좀 불러. 나는 청와대에 갔다 올
테니까.
총리가 결심한 듯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면서 말했다.
청와대에는 진상을 알아본 뒤에 보고를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각하말씀대로 어느 싱거운 놈이 장난을 치는 지도 모르니까요.
총리는 그 말을 듣고 주춤했다. 그는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탄식처럼 내뱉었다.
네가 총리 해먹어라.!
죄송합니다.
김실장이 총리 앞에 달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빨리 내무장관과 내각정보국장이나 부르라니까.
예.
김영기 실장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총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쥐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다시 일어서서 담배를 피워 물고 방안을 걸어다니며
불안을 떨치려고 애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 내각정보국장이 달려왔다.
그래, 어떻게 된 거요?
총리는 국장을 보자마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했다.
김실장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아직 아무 것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각정보국장은 정말 자기가 일을 저지른 듯한 미안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각정보국장 정일만. 육군 중장 출신인 그는 키가 작고 체격이 날렵해
보였다.
매서운 눈매와 한일자로 꾹 다문 입이 내각국장 정일만의 인상을 날카롭게
보이게 했다. 그가 대통령 측근 중의 측근이며, 현정부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각정보국은 정부의 중요 정보기관 중의 핵심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정보기관이라기 보다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의 중심기관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국장은 형식상 차관 급에 불과했다.
곧이어 내무장관이 들어왔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내무부에는 무슨 보고가 있었습니까?
총리는 내무장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지금 확인중입니다만....
내무장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야당 정치인 출신인 그는 큰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마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는 평을 듣는 내무장관 정채명. 훤칠하게 큰 키에 깡마른 체격이
얼핏보기에는 신경질적으로 생겼으나 지나치게 침착하고 말이 적어
내각에서도 신중파 취급을 받았다.
정장관, 이 일은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보안을 지켜야 합니다.
총리가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정장관님 전 니다. 치안본부장인데 어떻게 할까요?
김실장이 들어서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 내가 받지요.
정채명 장관은 총리에게 목례를 하고는 비서실로 나갔다.
한 20여 분 동안 치안본부장과 전화를 하고 들어온 내무장관이 총리에게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정일만 정보국장은 알아낸 상황을
그대로 보고했다.
두 사람의 보고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총리 사모님을 단장으로 하는 일선장병 일손 돕기 봉사단 은 아침 10시께
장충동에서 출발했다. 적십자사에서 마련한 대형 버스에 장관부인이
대부분인 봉사단은 모두22명이었다. 그 중에는 김교중 내무장관의 부인,
팽인식 공군장관의 부인도 물론 끼어있었다.
장관부인외에 적십자사 사무국 요원 두 명과 육군본부 안내장교 세 명이
있었으나, 이들은 에스코트를 하는 다른 차에 타고 있었다.
대형 버스에는 운전사까지 합치면 스물세 명이 타고 있었던 셈이다. 버스
앞에는 선도하는 육군소속 지프차가 있었으며, 뒤에는 적십자사 소속
승용차와 경찰 경호차 한 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일행은 모두 자동차
4대에 삼십 명 정도 되었다.
차가 장충동을 출발하자 버스 안은 활기가 넘쳤다.
총리 사모님인 문숙 여사가 마이크를 잡고, 오늘 봉사단에 참가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인사말이 끝나자 김교중 육군장관의 부인인
조민숙 여사가 마이크를 잡고 스스로 사회자가 되었다. 원래 수다스럽기로
이름난 그녀는 어느 모임에 가든 앞에 나서서 마이크를 잡는 일을
좋아했다. 우스개 소리나 음담패설도 잘했고 노래도 잘 불렀다. 노래
부르고 노는데는 그녀를 따를 여자가 드물었다.
조민숙 여사의 사회도 시들해지고, 웃고 즐기는데도 모두 지칠
무렵이었다. 버스는 의정부를 거쳐 포천가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앞서 가던 지프가 멈추었다. 덩달아 버스와 뒤쫓던 승요차 두 대도 정차를
했다.
지프에서 안내하던 장교가 차에서 내려섰다.
차량 행렬을 막는 사람들은 군복 차림의 한 사람과 그의 지휘를 받는
사복차림의 남자 여남은 명이었다.
군복을 입고 기관단총을 메고 있는 남자는 아무런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았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는 6 25때 보던 유격대원 비슷했다.
당신들은 누구야?
지프에서 내려선 장교가 기관단총을 멘 청년을 보고 물었다.
우리는 민주독립회 회원이요. 차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내리라고
하시오.
청년이 말하는 동안 십여 명의 청년들은 일행의 차를 둘러싸다시피 했다.
지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왜 이러는 거야?
위기를 느낀 장교가 차고 있던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권총은
실탄이 들어있지 않았다.
쓸데없는 장난은 그만둬!
기관단총을 멘 청년이 주의를 주었다.
너희들 지금 제정신 있는 놈들이냐? 여기 모시고 가는 분들이 뉘신
줄이나 아느냐? 총리각하와 장관님들의 사모님이란 말이야!
장교가 큰소리로 타일렀다.
너희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목적이 뭐야?
적십자사 사무차장 고형섭이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사모님들을 모시고 갈테니 양보해주시오.
군복 청년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이것들 강도 아냐?
고형섭이 군복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이거 놓지 못해?
군복 청년은 고함소리와 동시에 고형섭의 머리를 기관단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윽!
고형섭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자식이!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장교가 군복 청년에게 덤벼들었다.
탕!
군복 청년의 부하인 듯한 사람이 권총을 발사했다. 하늘을 향해 공포를
쏘았다. 그러나 장교는 멈추지 않고 군복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드르륵!
그때 군복 청년의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버스 안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여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장교는 그 자리에 쓰러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승용차의 경호원들은
벌써 길가에 내려선 채 청년들의 포로가 된 듯 꼼짝 못하고 있었다.
당신들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아시오.
군복 청년이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된 경호경찰 두 명을 보고 말했다.
경호경찰들은 아무말도 못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빨리 가자!
군복 청년이 말하자 부하들은 지프차와 버스, 승용차에 몇 사람씩 재빨리
올라탔다. 고형섭 차장과 군복 청년은 지프에 타고, 장교의 시체는
승용차에 실었다. 경호원 두 사람은 버스에 태웠다.
그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해본 듯 일사불란하고 재빠르게 행동을 취했다.
자동차 행렬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포천쪽으로 사라졌다.
그 시간에 다른 차들도 그 길로는 다니지 않았단 말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총리가 신경질적으로 질문했다.
물론 그 국도는 자동차 왕래가 빈번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도로의
양쪽에 그들 일행이 배치되어 자동차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어?
채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간 수행원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어?
아직....... 다만 버스운전사만 거기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
갔기 때문에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각정보국의 정일만 국장이 설명했다.
버스 운전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총리가 정국장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의 신병은 육군본부에 있습니다. 원래 육본소속 버스였으니까요.
내무장관 정채명이 대답했다.
그러면 운전사가 군인이었단 말인 가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육본에서 계약제로 쓰는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그래, 납치된 버스는 어느 방향으로 갔다고 하던가요?
의정부 동북방, 즉 포천가는 국도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일대에 비상령을 내리고 빨리 버스를 수배하도록 하시오.
총리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정보국장이 아주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망설이는 정보국장의 얼굴이
대하자 총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뭐요?
그렇게 되면 이 일이 세상에 노출됩니다. 노출되면 납치범들이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정일만국장이 제법 강한 어투로 말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나한테 문자쓰는 거요?
총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납치범들이 궁지에 몰리면 이판사판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정일만 국장이 굽히지 않고 말했다.
정국장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일은 절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당신들은 쉬쉬하고만 있을 작정이오?
총리가 다시 신경질을 부렸지만 그도 정채명 장관이나 정일만 국장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대통령 각하께 보도를 드리고 올 테니 그 동안 빨리
국무회의를 소집하도록...
총리가 도어 쪽으로 걸어가며 누구에게도 아닌 명령을 내렸다.
국무회의 안건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김영기 실장이 뒤따라가며 물었다.
적당히 핑계를 대.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해서 내가 급히
들어간다고 미리 알려.
수행비서가 재빨리 뛰어나오고 다른 비서들은 자동차를 부르느라
전화기다이얼을 급히 돌렸다.
국무회의는 조금 전에 열리던 경제문제에 관한 회의의 연속이라고 알리는
게 좋겠군요. 기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시지요.
정일만 국장이 김실장을 보고 명령하듯 말했다.
육군장관에게 정국장이 좀 연락하시지요. 나는 곧장 치안본부로 가서
함구령도 내리고 상황을 좀더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정채명 장관은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고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오후 4시경 갑자기 국무회의가
열렸다.
내무, 국방 등 몇몇 장관만이 내용을 알고 있어서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다른 장관들은 약간씩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국무총리가 조금은 괴팍스러워 엉뚱한 일을 곧잘 저지르기는 하지만,
하루에 두 번씩이나 국무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장관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내각은 임명된지 2년이 넘었을 뿐아니라, 총리를 비롯한 많은 각료가
정치성이 강해 일치된 단결력을 보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국회에서도 답변이 서로 맞지 않아 곤욕을 치르는 일이 빈번했을 뿐아니라
난제를 다른 부처로 떠넘기는 것이 예사였다. 의원들 앞에서 서로 싸우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강해지자 은근히 반발하는 발언도 여기
저기서 나왔다.
강압도 못 이겨 침묵을 지키던 언론들도 교묘하게 비판의 발톱을 가끔
보이기 시작했고, 재야나 캠퍼스에 반정부 무드가 익어가면서부터 내각의
불협화음은 노골화되어갔다.
일부 장관들은 지금의 정권이 대오각성을 하든지 아니면 퇴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총리를 기다리고 있는 장관들의 표정은 모두 각각이었다. 저 사람들이
자기 마누라가 악당들에 의해 어딘 가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들을 짓게 될까?
조금 있다 총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내각정보국장
정일만이 따라 들어섰다.
내각정보국장이 이 나라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든 각료가
다알고 있었지만, 국무회의에까지 참석한 일은 없기 때문에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몇몇 각료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정일만은 구석의 보조좌석에 가서 얌전히 앉았다.
여러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총리는 심각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어느 정도 침착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일은 절대보안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여러분 사모님의 생명에 관계된 일인만큼......
갑자기 장내가 경악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
뭐야!
제각기 비명소리를 냈다. 총리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 백합회 회원들이 오늘 오전 전원 납치되었습니다.
네?
일제히 비명이 터져나왔다. 백합회란 전 국무위원 부인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년에 몇 번씩 모여 사회봉사활동을 하는데 그 명칭을
오래 전부터 백합회라고 불러왔었다.
자, 조용히 하시고 지금부터...
총리는 술렁이는 실내를 향해 큰소리로 말한 뒤 정일만 국장을 손짓으로
불렀다.
정국장이 총리가 앉아있는 의장석 옆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비상상황에 대한 내용을 정일만 내각정보국장이
설명하겠습니다.
총리가 정국장에게 눈짓을 했다.
총리각하를 비롯한 장관님 여러분께 공안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정일만 국장이 고개를 숙여 절을 하자 실내는 조용해졌다. 팽팽한 긴장
속에 모두가 정일만 국장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방금 총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방 봉사길에 나섰던 국무위원 사모님
22명이 정체불명의 무장단체에 의해 11시 02분께 의정부 동북방 7킬로
지점 국도에서 피랍 되었습니다.
정일만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여 사죄의 표시를 했다.
국무위원들은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앞에 놓인 컵의 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장관도 있었다.
아시다시피 백합회 회원은 모두 스물세 분입니다만, 원자력부 장관님은
사모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모두 스물두 분이었습니다.
몇 사람이 원자력부 장관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일행을 납치한 단체는 자칭 <민주독립임시정부수립 추진위원회>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단체입니다. 아직 그들과 접촉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총리실로
한 번 전화가 왔을 뿐, 요구조건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피랍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일만 국장이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십여 분에 걸친 정국장의 설명이 끝나자 장내는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럼 정보국에서는 무슨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까?
공보부 장관이 질문을 했다.
우선 전정보요원을 동원해서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보부에서도 협력해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사람들의 생명이 촌각에 달렸는데 신문, 방송 틀어막는 일이나
하고 있단 말이야? 빨리 구출할 방법을 세워요.
다혈질인 팽인식 공군장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임시정부를 세우겠다고?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그런 미친 꿈을 꾼단
말인가? 지금이 2차대전 전인줄 아나봐.
육군장관 김교중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놈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는 미국제였습니다. 우리 군부의 어느 구석과
밀통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무장관이 보충설명을 했다.
뭐야? 군부가 어떻게 했다는 거요? 증거 있어요?
김교중이 내무장관 정채명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자, 조용히 합시다!
총리가 의사봉을 땅땅 두드리며 어지러워진 장내를 정리하려 애를 썼다.
지금부터 백합회 피랍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겠습니다. 대통령께서도
몹시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총리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말을 계속했다.
회의장안의 국무위원들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총리는 목소리를 높여 악을 쓰듯 말했다.
첫째, 이 사건은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이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깁니다. 곳곳에
잠복하고 있는 반정부 단체들이 소요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둘째,
납치해간 단체와 접촉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정장관의 견해를
말씀해보시지요.
총리가 정채명 내무장관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피랍 후 딱 한 번 전화가 있었는데....
정장관은 실내를 한번 돌아보더니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말을
멈칫거렸다. 다음 말이 일으킬 파장을 생각하는 듯 했다.
뭐야? 빨리 말하시오!
장관들이 다그쳤다.
내각 총사퇴를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정장관이 결심한 듯 단호한 투로 말했다.
뭐라구?
여기 저기서 다시 탄성이 터졌다.
미친놈들 아냐?
그래서 제 생각은 우선 다음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말도 안 돼!
팽인식 공군장관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요? 그럼 공군에서 나서서 정찰이라도 해서
찾아내시오!
정채명 장관도 흥분해서 함께 고함을 질렀다.
하라면 못할 것 같아! 새끼들 어느 골짜기에 가서 숨어도 다 찾아낼 수
있단 말이야.
공군장관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여편네가 잡혀가니까 모두 돌았군, 돌았어
육군장관 김교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편네가 영영 안 돌아오면 좋아할 놈들도 꽤 있을걸.
평소 입이 걸기로 유명한 무임소 장관이 맞장구를 치며 씩 웃었다.
{{}}3.오후의 정사
별다리 리조트센터의 일요일 오후는 붐볐다. 곧 비가 쏟아질듯이 찌푸린
하늘도 즐거운 바캉스 족들에게는 아랑곳없었다.
북적거리는 유기장 뒤의 산기슭에 있는 조그만 장급 여관의 지하다방에
조은하가 들어섰다.
어둠에 눈을 익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은 조명이 그녀의 화사한 모습을
비추었다. 1백 68센티의 훤칠한 키에 긴 목이 그녀를 항상 군중들
틈에서도 눈에 띄게 했다.
그녀는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 벌써 두잔째 커피를 시켜놓고 있는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재떨이에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가 초조하게 오랫동안
앉아 조은하를 기다렸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주었다.
사나이는 흔한 여름용 흰 점퍼에 푸른색 캐주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준수하고 근엄하게 생긴 용모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맑은
피부라든가 적당히 살이 찐 체격이며 지적인 얼굴이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은하......
그는 다가선 조은하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미소를 띄우기는 했으나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감격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은하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의 시선은
사나이에게서 단 1초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이 보였다.
은하!
마주앉은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며 사나이는 다시 감탄스럽게 불렀다.
도저히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었어. 하루종일 은하의 얼굴로 머리가 꽉
차있었거든.
사나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고백같은 것을 했다. 아무리 낮추어
보아도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이었다. 여자를 앞에 놓고 유치하고
달콤한 말장난이나 할 나이는 아니었다.
이 세상을 다 주어도 은하와는 바꿀 수 없지.
아이 선생님도......근데 왜 그때는 그랬어요?
조은하도 그의 달콤한 속삭임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얼굴에 미소를
담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했다.
그때야 은하가 도망간 것이지. 나는 은하에게 버림받고 죽어버릴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몰라. 하기야 별볼일 없는 신랑감이었으니까......
사나이의 이야기에 조은하는 아이스 커피 잔에서 스트로우를 뽑아들고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장난을 하면서 옛날 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어른들의 잘못이었지요. 요즘
같은 세상만 되어도 그렇게 어른들의 비뚤어진 인생관에 우리가
희생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은하부모의 입장에선 그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찌들어지게 가난한 목수의 아들한테 딸을 선뜻 주고 싶은
아버지가 있겠어? 별을 두개나 붙인 장군집안에서 말이야.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별단 사람들의 만능시대였잖아?
사나이도 당시 회상에 젖어 있다가 대답했다.
다 옛날일 이예요. 그러나 선생님이 오늘처럼 이 나라의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란 걸 몰랐으니까 우리아버지도 훌륭한 안목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게 되었나? 하기야 목수의 아들이 이름을 날린 것은 역사에도 있어.
누군 데요?
조은하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크고 맑은 눈동자가 귀엽게 보였다.
예수그리스도......
호호호. 정말 그렇네요.
하지만 20년 전에는 야간 대학에 다니는 가난한 고학생에 불과했지.
어지러운 세상에서 전혀 짚고 일어설 것이 없는 별볼일 없는 녀석이었지.
그런데 감히 장군집 외동딸을 훔치겠다고 했으니......
선생님을 놓쳤기 때문에 저는 시골에 묻혀 청춘을 보내게 되었는지
몰라요.
이제부터라도 우리 새로 시작할 수 없을까요?
정말 선생님이 저를 찾아왔을 때는 너무 놀랐어요. 저를 어떻게
찾아냈어요.?
내 지위를 조금 이용했을 뿐이지. 정부도 그 정도의 직권 남용은 용서할
거요. 자. 배고플텐데 어디 나가서 맛있는 것 먹기로 하지.
사나이가 일어서서 먼저 나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듯
나란히 걷지 않았다.
조은하가 앞에 서고 사나이가 서너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그들은 허름한 돼지 갈비 집에 들어가 싸구려 백반을 먹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유원지의 북적거리던 인파가 거의 사라지고 어둠이 조용히 사방에
내려앉고 있을 때 그들은 장급 여관의 2층방에 있었다.
은하......
사나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조은하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마며 볼에
키스를 퍼부었다.
아이......
뜻밖에 기습을 당한 조은하는 조그만 두손으로 사나이의 가슴을
밀어냈으나 힘을 주지는 않았다.
옛날 생각나?
사나이는 한 손으로 조은하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안고 남은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나쁜 사람!
조은하는 흥분해서 호흡이 고르지 못한 상태에서 말을 했기 때문에 발음이
분명하지 못했다.
공사장 2층에서 은하와 사랑을 나누다 경비원에게 들켜 망신당한 것
생각나?
아이 창피해. 당신은 악동이야.
조은하의 상대방 호칭이 선생님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
그럼 어떻게 해. 사랑은 해야겠고 여관비는 없고...... 그때 은하는
치마도 걸치지 못하고 공사장 경비장으로 끌려갔었지. 하하하......
아이 그만 둬요. 제발......
사나이가 은하의 입을 자기 입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더 말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불.......
사나이의 억센 양팔 속에 갇힌 은하가 천장의 형광등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사나이가 벽스위치를 더듬어 끄고는 은하를 침대위로 밀고가 넘어뜨렸다.
밖에서는 비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은하의 얇은 블라우스를 능숙한 솜씨로 벗겨냈다. 스커트도 금방
벗겨지고 브레지어와 팬티바람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밖의 건물 불빛이 창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조은하는 시트로 몸을 감쌌다. 사나이는 그때서야 천천히 웃옷을 벗었다.
샤워부터 할까?
이 여관방에는 개인 샤워실이 없는 것 같아요.
조은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서울의 호텔과는 물론 다른 곳이었다.
사나이는 내의를 아무 곳에나 팽개친 뒤 시트를 걷고 조은하를 껴안았다.
우리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조은하는 거부하지도 환영하지도 않는 엉거주춤한 태도로 말했다.
우리는 20년 묵은 연인들이야. 누가 말린단 말이야!
사나이는 이제 거친 손길로 조은하로 부터 장애물은 모두 제거했다. 그는
천천히 조은하를 현악기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난 학교 선생님이에요. 품행 단정한 선생님. 그리고 당신은 이 나라의
중요......
사나이가 다시 조은하의 입을 자기 입술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중심부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난 몰라. 이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직도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의 의미 없는 말소리는 차츰 사라졌다. 밖에는 쏟아지던 빗줄기가
이제 소나기로 변해 줄기차게 퍼부었다. 사나이의 뜨거운 몸부림을
식히려는 듯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두어 시간 뒤 사나이는 유원지 입구에서 혼자 택시를 타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허탈한 모습이 된 조은하는 혼자 떠나는 택시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허망한 기분으로 돌아서서 걸어오는 조은하
앞에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구세요?
놀란 조은하가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그림자를 미처 쳐다보기도 전에
그는 조은하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녀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추경감이 이틀동안 추적해서 알아낸 내용이 이상과 같았다.
여기서 몇 가지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조은하가 만난 사람이 20여년전의
연인이라는 것과 그 사나이가 지금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고학하면서 상류집안의 딸인 조은하와 연애를 하게
되고 집안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연 당한다는 흔해빠진 멜로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그 문제의 사나이와 밀회를 하고 난 뒤 미행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조은하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간 것까지는 목격자가 있어서 알 수 있었으나
그 그림자가 과연 조은하를 살해한 범인이냐 하는 것은 단정할 수 없었다.
추경감은 우선 조은하가 만나 흰 점퍼의 옛날 애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방 종업원이나 여관집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들은 그들의 대화는 그
사나이가 정부의 고급 관리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을 사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장군의 딸은 마침내
집을 뛰쳐나와 시골에 은거하며 국민학교 선생님으로 일생을 마칠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출세한 옛 애인이 나타나
원한에 맺힌 사랑을 나눈 뒤 질투의 그림자에 피살되었다는 줄거리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조은하의 아들이라는 국민학교 학생은 누구의 아들인가?
교장 고문직의 아들인가? 옛 애인의 아들인가? 아니면 다른 제 3의 인물이
남편으로 있었는가?
추경감은 조은하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동네 제일 안쪽에 방 두칸짜리 기와집이 조은하가 살던 집이었다. 연하
국민학교에서 2,30분은 충분히 걸어서 가야 하는 물안실 마을이 그녀가
살던 동네였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조은하 선생님 댁이지요?
추경감이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섬돌에 앉아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할머니와 멍하니 앞산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어디서 본듯한
석고상의 이미지를 풍겼다. 추경감은 그 소년이 바로 조은하의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멍청하게 추경감을 쳐다 볼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왔습니다. 여기가 조선생님댁 맞지요?
그제야 할머니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아이가 조은하 선생 아드님인가요?
이번에는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도 아무 표정이 없었다.
너 이름이 뭐니?
추경감이 할머니와 소년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조민주.
소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이 조씨라면 어머니와 같지 않은가?
추경감은 이 소년이 조은하를 미혼모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할머니는 조선생님의 친척 되십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눈만 멀뚱멀뚱하던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난 옆집 사는 사람인기라. 얘가 불쌍해서 와 있는 기라.
네, 그렇군요. 민주네 할머니 댁에는 연락을 했나요?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권하면서 말했다. 할머니는 담배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댁이 어딘지 알면 선상님이 연락 좀 하소.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조선생님이 쓰시던 방에 좀 올라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추경감이 일어서서 마루로 올라가려고 했다.
죽은 사람 원수는 안갚아주고 오는 순사마다 남의 집 방만 뒤지고 가노?
그 방에 살인범 있는 기요?
할머니의 목청이 높아졌다.
뒤지든 말든 맘대로 하소. 하지만 우리 조선상님 같이 깨끗하게 산 사람
방에는 아무것도 나올게 없을 것인께.
추경감은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은하의 방에 들어서 있었다.
천장이 낮고 조그만 방에는 여름인데도 싸늘하게 냉기가 돌았다. 주인을
잃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박한 시골방 그대로였다. 반닫이 옷장 위에 여름 이불이 가지런하게
업혀 있었다. 옆에는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있었다. 추경감은 책상 위에
앉아 꽂혀있는 책들을 살폈다. 국민학교 각 학년 교과서와 교과용
참고서가 대부분이었다. 참고서 옆에 시집 몇 권과 수필집 등 잡다한 책이
백여권 채곡채곡 쌓여있었다.
추경감이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서랍이 둘뿐인 책상에는 화장품류,
각종 영수증 등이 나왔다. 잡동사니뿐이었다.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방위 쪽에 횃줄이 쳐져있고 거기는 일상복과
빨래를 한 듯한 여자의 팬티, 브레지어 등이 몇 개 걸려있었다. 여자의
내의를 방안에서 말리는 조심스러움이 엿보였다.
추경감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을 살펴보았다. 책더미 속에서
앨범을 발견하고는 펼쳐 보았다.
운동회 때의 스케치 사진과 아들 조민주와 함께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사진첩을 유심히 살피던 추경감은 한 남자와 단둘이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사진이 붙어있는 페이지는 다른 사진이 없었다. 말하자면
소중하게 취급했다는 인상을 풍겼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체격이 건장하게 보이는 남자는 20대 후반이나
30대초반쯤으로 보였다.
연하의 애인일까?
추경감은 빙긋 웃었다. 어쩐지 눈썹이 송충이처럼 시커먼 그 사나이에게
신경이 쏠렸다.
추경감은 그 사진을 뜯어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감추었다.
죽은 사람 원수를 갚으려는데 이 정도 무례는 조은하 선생도 용서할
거야.
추경감은 이렇게 위로하며 책들도 뽑아 넘겨보았다.
한참 책을 뒤지다가 드디어 의도한 것을 발견했다. 일기장이었다.
추경감은 그것을 들고 나와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했다.
원수를 갚는다면 선상님도 용서할끼구마.
뜻밖에 할머니 대답은 쉬웠다.
할머니, 민주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추경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아이구 불쌍한 것.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이 되었구나!
할머니는 갑자기 생각난 듯 소년의 어깨를 쓸어안으며 한탄을 했다.
아버지에게 보내면 안될까요?
추경감이 할머니의 대답을 들을 셈으로 계속 질문을 했다.
애비를 찾으면야 오죽 좋겠어요? 에그 불쌍한 것.
아버지가 어디 계신데요?
추경감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최근에 조선생님 찾아온 사람 누구
없었나요?
할머니는 추경감을 멀건히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만 가로 저었다.
조은하씨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 있을 텐데...... 서울에 있는 높은
분이라든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 선상님이 왜 이 산골에 처박혀 혼자
살았겠습니꺼? 괜히 이상한 소문 맨들지 마소. 우리 선상님은 깨끗한
사람이라예. 교장 선상님도 늘 칭찬했다 아입니꺼.
교장 선생님이 자주 이 집에 들렸었나요?
작년엔가 한번 이 동네에 왔다갔지요.
조선생이 돌아가시던 날 누가 찾아오거나 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잘 모르지만 그 날은 일요일인데 별다리 다녀온다고 나가는 것을
동구밖 장승 앞에서 보는데...
혼자였나요?
네? 자꾸 이상한 걸 물으면 대답 모하겠심더.
할머니는 입을 다물었고 추경감은 그냥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추경감은 별다리 유원지 다방과 여관 등을 다니며 그가 가지고 온 사나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날 밤 문제의 남자가 이 사람인가를 확인했다.
그러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추경감은 별 소득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관에는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감님이시죠?
키크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남자. 눈썹이 송충이 기어가듯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나이.
바로 추경감이 앨범에서 뜯어온 그 사나이였다. 추경감이 하루종일
소득없이 헤매며 찾아다닌 그 사나이였다. 그 사나이가 나타난 것이다.
사나이는 몹시 침울한 얼굴이었다.
아니, 당신이......
추경감의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다.
예? 저를 아시나요?
이번에는 사나이가 당황했다.
조은하씨 때문에 왔지요?
추경감이 사나이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 과연 듣던 대로 날카로운 분이 시군요. 인상과는 전혀 달라요.
사나이도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내 인상이 어떻습니까?
날카로운 수사관이라기 보다는 마음씨 좋은 복덕방 아저씨 같은데요.
이거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사나이는 불쑥 뱉은 말을 후회하는 듯 다시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 바로 맞추셨소. 모두 그렇게 이야기해요. 난 추병태라고 합니다.
서울시경에 있습니다.
추경감은 이 사나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더할 나위 없이 궁금했지만 겉으론
크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네, 그렇군요. 저는 조준철이라고 합니다...... 제가 누군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죽은 조은하의 친동생입니다. 한성대학 의대
레지던트입니다.
아, 정형외과 선생님이시군요.
예? 그것까지 알고계십니까?
좌우간 반갑습니다. 저녁식사 전이면 같이 나가실까요. 저 건너에 춘천
막국수 잘하는 집이 있어요.
저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나를 죽인 범인에 대한 이야기를.....
우선 나갑시다. 저녁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지요.
추경감은 조준철과 함께 석양이 비껴든 유원지를 등지고 걸어나갔다.
{{}}4.백산공사
조은하의 직접 사인은 목이 졸린 질식사였다. 어깨 가슴 등 몇 군데에
울혈 현상이 있었으나 그것은 반항할 때 생긴 흔적 같았다. 다른 곳에서
살해되어 회전그네로 옮겨졌는지, 회전그네에 앉혀놓고 살해를 했는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으나 피부의 상태로 보아 다른 곳에서 살해되어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다. 여자의 몸속에서는 B형의
정액이 발견되었으며 성교를 맺은 것은 24시간 이내라는 검시결과가
나왔다.
우발적인 강간살해로 보기에는 납득 안가는 점이 많거든.
하경감은 이렇게 말했다. 추경감이 수사한 내용을 알려주고 그날 밤 함께
여관에 들어갔던 서울 사나이를 추적해보라고 권유했다.
아니, 자네가 그것까지 알아냈단 말인가?
하경감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추경감에게 수사의 진전 상황을
숨기려고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경찰서에서 아는 일이면 나도 알 수 있다네.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 형사대를 보내 그 사람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다네. 그런데 그 40대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경감이 이번에는 도움을 청했다.
글쎄. 지금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고급 공무원이거나, 아니면
정치인일지도 몰라.
그게 수사의 애로란 말야. 높은 사람의 뒤를 함부로 캘 수도 없고......
서울 친정집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는 수밖에 없는데......
시집도 안간 여자가 무슨 친정집인가? 하여튼 출세한 목수의 아들을
찾아라, 이건가?
하하하. 뚱딴지 같이 목수의 아들은 무엇인가 제가 무슨 예수라고?
추경감은 하경감이 아직 그 정도까지 깊이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추경감은 경찰서를 나오며 머리를 정리해 보았다.
조은하의 20년 전 애인. 목수의 아들.
지금은 정부의 중요 인물.
추경감은 더욱 호기심이 솟았다. 무엇인가를 캐고 말겠다는 욕망이
가슴속에서 피리소리를 들은 코브라처럼 고개를 자꾸 들었다.
그러나 휴가 날짜를 다 써버린 추경감은 조준철과 함께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조준철은 부검이 끝나 검찰로부터 해방된 누나 조은하의 시신을 화장한 뒤
그가 손수 운전해 온 소나타에 추경감을 태우고 귀경길에 올랐다.
울적하게 보이기도 하고 분노에 차 보이기도 한 그의 일자로 다문 입에서
추경감은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형!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
조준철은 묵묵히 앞을 보고 운전만 했다.
저어......
말해보십시요.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이웃집 할머니에게 맡기고 온 조카 말입니다. 조민주......
걔 아버지가 누구냐 이거죠?
그래요.
그건 나도 몰라요. 걔에 대해서 물으면 누나는 입을 다물어버렸으니까요.
누나는 시집간 일이 없으니까 합법적으로 낳은 아이는 아닐 겁니다.
어떻게 보면 누님과 전혀 닮지도 않았어요. 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우는
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친구의 아이를 맡아 기르는지도 모르겠고...
조형은 별다리에 자주 내려갔었나요?
웬걸요. 이번이 꼭 두번째군요. 십여년 전 한번 와 본일이 있어요.
이번에는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왔습니다.
신문에 조은하씨 사건이 났었나요?
그럼요. 엽기적 어쩌구 하면서 남의 비참한 죽음을 상품으로 포장해서
냈더군요.
추경감은 조준철이 날카로운 표현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안계신가요?
우리는 3남매였지요. 어머니, 아버지는 비참하게 돌아가셨고 큰 누님은
밥술이나 먹고삽니다. 내 학비랑 뒷바라지도 큰 누님이 했으니까요.
하기야 그 집 강아지 쉰밥 얻어먹는 대우밖에 못 받았지만...... 그래도
남매는 남매니까......
사이가 안좋았나요?
조준철이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추경감은 목청을 낮추었다.
혹시 알지도 모르지. 우리 아버지 사건......
조준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 사건?
추경감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휴게소에서 뭣 좀 먹고 가시지 않겠어요?
조준철은 차를 중부휴게소로 몰고 들어갔다. 휴게소에 두번이나 들렀지만
또 쉬고 싶었다.
두 사람은 종이컵 커피를 들고 차 앞에 비스듬히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부모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추경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었나요?
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경감님은 혹시 조덕 장군 반정부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조준철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유명한 조덕 장군이......
추경감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했다.
그래요. 조덕 장군이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추경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알고 있다.
20여 년 전의 사건이었다.
육군 소장이던 조덕 장군이 정부를 맹렬히 규탄하는 반정부발언을 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된 일이 있었다.
당시 전국 곳곳에는 민주정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반정권 조직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은 매일 반공법 위반 등으로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가끔 소규모 시위도 일어났지만 무참한 진압으로 피만 흘렀다.
강력한 중앙 정부의 서슬 시퍼런 통치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공포의
구름을 전국에 드리운 때였다.
현역 육군 소장이며 중요한 직책에 있던 조덕 장군이 돌연 반체제 단체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의 대통령과 집권당을 맹렬히 비난하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용기 있는 참다운 군인이라고 했으나 일부에서는
미친자라고 비난을 했다.
어쨌든 그런 행동을 한 군인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곧 체포되었다.
군인이 정치에 관여했을 뿐아니라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고 군 기강을
흩트렸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졸병으로 강등 당하고 군에서 쫓겨났다. 이 유명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상황은 아직도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일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했지요. 마음의 상처도 상처지만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으니까요.
고문을 당했나요?
경감님도 고문하신 일없나요?
갑자기 조준철의 눈이 반짝였다. 분노를 쏟아내는 것 같았다.
난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래서 그 뒤 아버님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사건 이후 술에 묻혀 세상을 잊으려고 몸부림치던 아버님은
심장마비로 1년만에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죠.
그랬군요.
추경감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 재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빼앗다 시피 다 없어지고 우리 남매는
시집간 큰누나가 돌봐 주어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조은하씨는 왜 시골에 은둔하다시피......
집안이 그 모양이 된 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랬을 겁니다. 난 누나의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싫어서 연락을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담배 있어요?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주었다. 그는 방금 담배 한대를 다 피웠는데 또
불붙여 입에 물었다.
자, 이제 슬슬 갑시다.
그가 운전대에 앉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조은하씨의 아들 조민주는 누굽니까?
차가 중부 고속도로의 종점 가까이에 이르자 추경감이 다시 물었다.
나도 몰라요. 정말 모릅니다.
조은하씨가 죽기 전날 밤, 아니 바로 그날 밤 만난 남자에 대해서도 정말
짐작가는 것이 없읍니까?
추경감이 다시 담배를 권하며 물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차가 천호동 네거리에 닿았을 때였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우리 집은 둔촌동 아파트니까 벌써 지나쳤어요. 시내까지 가시면 시경
근방에서 내리면 되겠는데...
난 남대문까지 가니까 잘 되었군요.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면 내가
잡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잘못되어가서야 되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잘못된 세상 때문에 희생된 사람입니다. 그땐 내 나이 어려서
뭐가 뭔지 몰랐지만...... 누님의 일만은 꼭 밝혀놓고 말 겁니다. 경감님
듣기 거북하실지 모르지만 난 누구도 이젠 믿지 않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추경감이 내릴만한 남대문 근처에 차를 세웠다.
혹시 명함이 있으시면......참 고마웠습니다.
한성대학교 정형외과 레지던트 조준철. 명함은 없습니다. 다음에
연락하기로 해요, 우리.
조준철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휭하니 차를 몰고 가버렸다.
추경감은 아직도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걸어서 시경까지 갔다.
야, 반장님. 바캉스 재미가 어땠습니까?
추경감을 제일 반기는 사람은 역서 강형사였다.
마른 체구에 행동이 재빨라 경솔하다고 핀잔을 받는 고참 형사였다.
그래. 이제 강형사 차례야.
추경감이 찬바람이 나오는 천정밑에 서서 땀을 말리며 웃었다.
저야 뭐. 여우같은 여편네가 있습니까, 토끼 같은 딸이 있습니까?
이 사람 보게. 그럼 우리 마누라가 여우고 우리 딸 나미가 토끼란
말인가? 예끼.
하하하 그렇게 되었나요? 반장님, 이거 미안합니다. 결코 반장님 가정이
동물원이라는 뜻은 아니구요. 하하하
강형사의 익살은 결코 밉지가 않았다.
추경감은 바캉스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들려주고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의문의 사나이 신원부터 밝혀야겠군요. 좋은 아인가 뭔가......
조은하.
예. 그 조은하의 친정집 주변부터 알아보는게 좋겠습니다. 학교
동창이라든지 친척이라든지....... 가만있자. 제가 현지 경찰서에
연락해서 조은하 주민등록번호부터......
여기 있어.
추경감이 조은하에 대한 메모장을 던져주었다.
이 전화번호는 뭡니까? 02에 999,4884......
메모장을 찬찬히 넘겨보던 강형사가 불쑥 물었다.
글쎄, 조은하의 책상 위에 있던 책에 적혀있던 번호야. 02는 서울 지역
번호일 테니까 999에 4884번을 걸어봐.
강형사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통화중이더니 마침내 녹음된
전화국의 안내말이 나왔다.
이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번호입니다.
반장님 혹시 잘못 적은 것 아닙니까?
강형사가 수화기를 든 채 추경감을 쳐다보았다.
추경감이 수화기를 빼앗아들고 들어보았다.
......이 번호는......
강형사 한국통신공사에 아는 사람 없나?
한국통신공사요?
전기통신공사 말이야. 전화국......
네, 동창들이 수두룩하지요. 거기가 요즘은 제일 좋은 직장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대학을 나올 때는 그렇지도 않았거든요.
거기 가서 이 번호에 대한 히스토리를 좀 알아오게.
네, 히스토리라구요? 하하하 반장님도 영어 쓰십니까?
추경감이 눈을 흘겨보자 강형사는 목을 움츠려 보이고는 그냥 나갔다.
몇 시간 뒤 돌아온 강형사는 약간 흥분된 얼굴로 보고했다.
이거 대단히 이상합니다. 두달 쯤 쓰다가 반납된 번호인데, 정부기관
번호인 것 같습니다.
정부기관?
추경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서도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데 정부기관에서 설치했다가 반납한
것이라고만 했어요.
설치 장소는?
성북구 길음동 1239번지의 125 백산공사라고 되어있습니다.
우선 거기로 가보자.
추경감이 벌떡 일어서서 나갈 준비를 했다.
지금 퇴근시간도 넘었어요. 내일 가시죠.
강형사가 머뭇거렸다.
자네 볼일 없으면 가보게. 나 혼자 갈 테니까...
아니 반장님......
혼자 휭하니 시경을 나서는 추경감 뒤로 강형사가 달려왔다.
그들은 여름철의 긴 해가 넘어가고 거의 어둠이 깃들 무렵에야
백산공사라는 곳을 찾았다.
삼양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8층짜리 빌딩의 3층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조그만 문 위에 조그맣게 가로로 쓰여진 플라스틱 간판이 있었다.
추경감이 노크를 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실례합니다. 어흠!
강형사가 크게 헛기침을 하자 옆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왔다.
흰 반소배 점퍼차림에 안경을 쓴 젊은 남자였다.
누구시죠? 어떻게 왔죠?
청년은 날카로운 경계의 눈빛을 늦추지 않고 말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어 다부지게 보였다. 짧게 깍은 머리와 굵은
팔뚝으로 보아 운동선수 같다는 인상을 풍겼다. 아니면 군인이 민간복장을
한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여기가 백산공사인가요?
추경감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년은 추경감과 강형사의 아래위를
천천히 흩어보았다.
무엇 문에 백산공사를 찾나요? 이사가고 없는데요.
그럼 청년은 백산공사 직원이 아닌 가요?
강형사가 묻자 그는 피식 웃었다.
직원?
백산공사가 도대체 뭐하는 회사인가요?
백산이 뭐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오셨어요? 도대체 당신들은 소속이
어디요?
청년은 더욱 경계 태세를 굳히며 말했다.
우리는 시경에 있는 경찰관들입니다. 이분은 강력계의 추경감님이구요.
나는 강형사입니다.
강형사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형사님들이군요. 근데 백산엔 왜 오셨습니까?
청년은 형사라는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댁은 뉘신 가요?
강형사가 화를 참으며 다시 물었다.
난 박이라고 하죠. 박중위.
청년은 전혀 태도가 바뀌지 않은 채 딱딱하게 말했다. 중위가 군인의
계급인지 이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백산공사가 뭐하는 회사입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다시 물어보겠는데 정말 여기가 뭐하는 곳인 줄 모르고 왔단 말입니까?
하긴 백산은 다 이사가고 나만 남아서 잔무정리를 하고 있지만......
청년이 바닥에 뒹굴로 있는 신문부스러기를 발로 톡톡 차면서 말했다.
거만하고 자신에 찬 행동이었다.
999에 4884가 여기 전화번호입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청년은 이맛살을 몹시 찌푸려 보이면서 말했다.
그건 왜 묻습니까?
수사상 필요해서 그럽니다. 도대체 백산공사가 뭐하는 곳인지
밝히십시오. 우린 경찰이라니까요!
강형사가 마침내 분통을 터트렸다.
이 양반들 이거 큰일 날 사람들이네. 형사면 형사지 왜 그렇게
딱딱거려요.
박이라는 청년이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면선 추경감과 강형사를
노려보았다. 여차하면 한바탕 붙을 태세였다.
이봐요, 젊은이. 우리는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는데 죽은 사람이 여기
전화번호를 남겼단 말입니다. 그럴 리야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이
회사에 있는 직원과 피살된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요. 수사에 협조해 주시구려.
추경감이 박의 마음을 누구러뜨릴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회사라구요? 여기가 회사라구요? 흐흐흐. 그래, 죽긴 누가 죽었단
말입니까?
청년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였다.
월성군에서 국민학교 여선생님이 피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999에 48884라는 전화번호를 남겼거든요.
여긴 그런 여자하고 관계없는 곳입니다. 딴데 가서 알아보시오
아니 정말 이 사람이...
청년이 단호하게 말을 끊자 강형사가 덤빌 듯이 화를 냈다.
강형사 그러지마. 박선생, 선생 말고 이곳에 딴 사람은 없습니까? 가령
사장님이라든가......
추경감이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사장님이라구요? 이 양반들 이거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군. 당신들 정말
형사님들이오?
박이 얼굴을 몹시 찌푸려 보이며 말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선생들 말대로 여기 사장님은 지금 퇴근하고 없으니 다음날 다시
와서 알아보시오. 그리고 백산공사가 무슨 회산지 당신들 상관에게
물어보고 다니슈. 자, 이제 나가주실까요?
청년이 손바닥으로 추경감과 강형사의 가슴을 밀었다.
어어......
아니......
두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 청년의 손바닥에 밀려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
작은 문이 꽝소리를 내며 닫히자 추경감이 강형사의 소매를 끌면서 계단을
내려섰다.
그들은 미아리 삼거리 근처 돼지 갈빗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갔다. 백산공사와 그 이상한 박중위라는 청년에 관해서는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이튿날 추경감은 정보과 간부들에게 백산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거 정보국 분국 아닌가?
육군부 비밀첩보대 아냐?
폭력배들의 위장 사무실인지 몰라.
전에는 무슨 공사라는 정보기관이 더러 있었는데......
모두 이런식으로 한마디씩 했다.
추경감은 혼자서 다시 길음동의 그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괴상한 그
청년의 윗사람 되는 사람을 만나 자세한 내용을 물을 참이었다. 청년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아 이 백산공사라는 회사에는 뭔가 비밀이 숨어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나 추경감이 그 사무실에 갔을 때는 문이 잠겨 있고 어제 보았던
백산공사라는 조그만 플라스틱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은 문을 몇 번 흔들고 두드려보다가 돌아섰다. 우선 현관에 있는
빌딩 사무실로 찾아가 물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시경에 있는 추라는 형사입니다. 그런데 3층에 있는 백산공사라는
회사에 대해 좀 알고 싶어 왔는데요.
추경감은 빌딩의 경비원인 듯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백산공사요? 그 회사 아침에 모두 이사갔는데요. 급한 일이 생겼는지
보증금 반환도 필요 없다면서...
아뿔싸......
추경감은 백산공사가 서둘러 사라진 것이 어제 자기가 다녀간 일과 관계가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그 회사가 무슨 사기라도 치고 도망간 건가요?
추경감이 낭패해하자 경비원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저기, 그 회사 보증금은 얼마였나요?
추경감이 경비원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아시는데...... 월세가 많기 때문에 보증금은
얼마 안될 거예요.
경비원은 추경감의 아래위를 흘끔흘끔 보면서 말했다.
그 사무실이 이곳에 문을 연것은 언제인가요?
글쎄요, 전 온지가 얼마 안돼서......저 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백산공사가 뭐하는 회산지는 아십니까?
글쎄요. 무슨 무역회사라고도 하고 외국회사 출장소라고도 하고.......
저도 자세히 모르겠어요.
사무실을 좀 볼 수 없을까요?
아무도 없는데 봐서 무얼 하시렵니까?
경비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좀 보고 싶은데요.
경비원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열쇠꾸러미를 챙겨들고 계단을 올라섰다.
사무실은 경비원 말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벽에는 무엇인가를 여기 저기
붙였다 뜯어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추경감은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휴지더미 사이에서 조그만 수첩 같은 것을
발견했다. 빨간 표지로 된 수첩에는 표지에 [복무규정]이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속 알맹이는 다 뜯어내고 없었다.
추경감은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 보셨습니까? 요즘 사무실이 모자라니까 여기도 금방 세가 나갈
겁니다.
그렇겠군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추경감은 의문만 잔뜩 안고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추경감님!
그가 막 빌딩을 나가자 누군가가 불렀다. 추경감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거 조준철씨 아니오?
뜻밖에 거기에는 하늘색 셔츠를 입은 조준철이 서 있었다.
경감님도 허탕치셨군요.
그럼 당신도 백산공사에?
조준철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1 한강교의 자동차 행렬도 뜸해지고 중지도의 불빛이 한결 선명하게
보였다.
{{}}5.두터운 비밀의 커튼
조준철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30분이었다. 그는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으나 다시 소주잔을 기울였다.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 앞 조그만 구멍가게 앞의 간이 의자에 앉아
소주를 먹기 시작한 것이 벌써 2시간 가까이 되었다. 그는 한강 인도교와
아파트 11동의 불켜진 현관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11동의 7층에는 아직도 창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현관입구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손님, 밤이 깊었는데 이제 일어나시지요. 가게문을 닫아야겠는데......
몇 번이나 하품을 하면서 조준철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중늙은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닫으세요. 계산은 해드렸지 않습니까? 난 여기 좀더 앉았다가 가겠어요.
나한테 신경 쓰지 마시고......
조준철은 중늙은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11동 현관에
못 박혀 있었다. 누군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눈이었다.
11동 7층은 전용면적 40평이 훨씬 넘는 아파트 두채를 터서 만든
요정이었다. 그 집이 요정이란 것이 아직 들통나지 않아 이웃 사람들이
조용히 있는, 말하자면 비밀요정이었다.
비교적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 위에 시버스 리갈이 세 병째 올라왔다.
모두가 술기운이 약간씩 올라 있었다.
육군장관 김교중, 공군장관 팽인식, 내무차관 서종서, 그리고
내각정보국의 정일만 국장, 이렇게 네명과 눈이 게슴츠레해진 네명의
아가씨들이 사이사이 끼어 앉아 있었다.
이마가 좁고 코가 뭉툭해서 원숭이 같은 인상을 주는 육군장관 김교중이
가장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목이 길고 비교적 말수가 적은 팽인식
공군장관은 술이 취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미남으로 생긴 서종서도 그렇게 떠드는 편은 아니었다. 눈이
반짝이고 머리가 반백이 된 내각정보국장 정일만이 혼자 계속 떠들고
있었다. 주로 화제는 음담패설이었다.
정일만은 음담패설로부터 별별 이야기를 다 쏟아냈다.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두 시간 전 술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희한한 음담패설로 아가씨
배꼽을 잡게 한 것도 정일만이었다. 그러나 차츰 화제가 시국쪽으로
흐르자 정일만은 울컥 화가 치미는 듯 했다.
문제는 신문쟁이 놈들이야. 이놈들은 지어미가 뭣을 처먹고 만든
종자들인지 상대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돈을 입에 처넣어도 안되고,
세계일주를 시켜줘도 안되고, 데려다가 발바닥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도
안되고... 하여튼 그런 맹랑한 종자는 처음 본다니까.
그는 계속 자작 스트레이트 잔을 입에 털어 넣으면서 떠들었다.
방법이 없다니까. 문을 닫게 해야 돼. 그까짓 신문사 한 두개 없어지면
어때, 끄윽.
김교중 장관이 맞장구를 쳤다.
그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선 신문을 폐간시킬만한 명분이 있어야
되고....또 닫았다고 칩시다. 미국이다 영국이다 하는 내정 간섭 잘 하는
나라들이 가만있습니까? 언론탄압이다, 독재다, 하고 떠들어댈
테니까......
서종서 차관이 입을 열었다.
하긴 우리가 보신탕 먹는다고 데모하는 녀석들이 런던에 있는
얼간이들이니까...
팽인식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경제개발인지 쇠발인지 하는 것은 신문쟁이들이 입다물게
해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발표하기 전에 그것부터 조치를 하라고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정일만이 갑자기 딱딱하게 말했다. 모두들 잠시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분위기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무거워졌다.
그러니까....
정일만이 다시 말을 꺼내려다 다시 생각을 바꾼 듯 입을 다물었다.
좌중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 재미없어. 우리 달걀 돌리기 해용. 김군아, 여기 접시하고 달걀.
서종서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못참겠다는듯이 나섰다. 네 아가씨 중에
가장 고참인 듯했다.
야, 달걀 돌려가며 옷벗을거 뭐있냐? 시간도 다 되어가고 하니까 빨리
끝내자. 너희들 그러고 보니까 신고식도 안 했잖아? 너 일어나.
김교중이 좌중의 아가씨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듯 둘러보더니 서종서
옆에 앉은 아가씨를 가리켰다.
둘러앉은 네명의 사나이는 다시 술판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야, 이년아. 너부터 시작해. 신고식 말이야. 화끈하게.
왜 저부터 해요, 장관님. 사모님부터 시키세요.
서종서 아가씨도 만만치 않았다.
저년 보게. 이년아 네 서방은 차관이고 우리 사모님은 장관 여편네야. 자
한잔하고 시작해.
김교중이 술잔을 서종서 아가씨 가슴에 집어던졌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세사나이는 김교중과 서종서 아가씨의 입씨름을 낄낄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서방 잘못 만나 괄세 되게 받네. 하지만 우리 서방이 여기서 제일
미남이란 걸 알아두세요.
아가씨는 술을 자작으로 한잔 따러 스트레이트로 마신 뒤 벌떡 일어섰다.
똑바로 서지 못하고 약간 비틀거렸다.
자, 그러면 나부터 신고식 하겠습니다. 술판 파장에 신고식 하기는
물장사 8년에 처음이다. 자, 모두 주목. 장영자 신고합니다.
아가씨는 치마를 훌렁 까 내렸다. 노팬티인 아랫도리가 금방 드러났다.
아가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치마를 다시 추켜올렸다.
야야, 난 보지도 못했어. 다시!
정일만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기 때문에 굳어졌던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오버액션이 심했다.
재상영은 없습니다. 우리 집은 개봉관이니까요.
저년 보게. 너 다시 못하겠니?
정일만은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두 장을 흔들었다.
야, 다시 해봐. 이 종이 쪽지로 네 그 곳 가릴거야.
어머, 정말 우리 국장님 멋쟁이.
장영자라는 아가씨는 금방 치마를 벗을 태세를 했다.
이제 재 상영관으로 신장개업 합니다.
장여자라는 아가씨는 금새 치마를 훌렁 내리고는 적나라한 모습을
정일만의 코밑에 들이밀었다.
정일만은 수표를 그녀의 아랫배에 붙여주었다.
다음!
김교중이 옆에 있는 인식 장관의 아가씨를 가리켰다. 그녀는 술이
약한지 처음부터 얼굴이 홍당무가 되가지고 술잔을 냉수 컵에 붓기
바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서서 천천히 치마를 벗어 내렸다.
아니, 쟤는 팬티잖아. 너 예절도 모르냐?
육군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분홍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이제 신고할거예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팬티를 끄집어내리며 말했다.
정인숙 신고합니다.
야, 근사하다.
정일만이 손을 대려고 했다.
이거 왜이래. 촉수엄금!
팽장관이 정일만의 손을 잡았다.
다음!
김교중이 재촉했다.
야, 술맛 나는데. 눈 안주가 좋아서 그런가.
정일만이 계속 떠들었다.
그들은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11동 현관 앞이
부산해졌다. 비서들이 급히 달려나오고 운전사들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가게문도 닫아버린 길가에서 소주잔을 움켜쥐고 있던 조준철이 11동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비서들의 부축을 받으며 네사람이 나왔다. 제일먼저 팽인식 공군장관이
차를 타고 떠났다.
다음은 정일만, 서종서가 갔고 김교중이 맨 나중에 차에 오르려고 했다.
그가 오늘의 호스트인 모양이었다.
김장군님!
그가 차에 막 오르는 순간에 조준철이 뛰어나가며 불렀다.
비서가 재빨리 조준철을 가로막았다.
누구야?
차에 타려던 김교중이 다시 내리며 말했다.
장군님, 접니다. 조준철입니다.
조준철?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조준철을 바라보았다.
예. 조덕장군의......
응? 조장군의 아들 아니냐? 네가 웬일이냐?
김교중이 술이 확 깨는 모양이었다.
장군님 좀 뵈올려고......
그래? 여기 타라.
조준철이 차에 올라탔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
세시간쯤 기다렸습니다.
그래 무슨일이냐?
장관실로 연락해도 만날 수가 없고 여기 모임이 있으시다기에.......
그래, 무슨 일인데? 세 시간씩 나를 기다린걸 보면 보통일은 아닌 것
같은데......
조준철은 김교중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아버지 조덕 장군이 2등병으로
강등 당해 군에서 쫓겨난 뒤에도 충성을 바치던 의리 있는 장군이
김교중이라고 조준철은 늘 생각했다.
누님이 죽었어요. 억울하게 말입니다.
김교중은 조준철의 누나를 좋아해서 특별히 관심을 보였었다. 아버지 조덕
장군의 부하이기도 하지만 누나 조은하 문에 이들 남매와 인연을
계속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신문에서 보았다. 안됐다.
그는 그의 감정을 간단하게 표현했다.
범인은 잡았니?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아뇨. 그래서 한가지 여쭤볼려고 그럽니다.
차가 한강을 뒤로하고 용산 육군 타운으로 들어섰다.
무엇이냐?
백산공사가 무슨 단쳅니까? 어디 소속인지요?
조준철이 김교중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백산공사?
김교중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백산공사가 누님의 죽음과 관계가 있냐?
그가 신중하게 되물었다.
아니 꼭 그렇다기보다는......누나가 그곳 사람과 연락이 오간 흔적이
있거든요.
그래?
김교중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알았을 거다. 조은하씨가 백산과 연결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을
더이상 캐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교중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백산공사를 장군님은 아세요?
조준철이 확인하려는 투로 물었다.
백산공사는 비밀정보기관이다. 소속은 알 것 없고...... 그곳과
조은하씨는 절대 관계가 없다. 너는 그 일을 더이상 캐지 말아라. 살인범
수사는 경찰에 맡겨두어야 한다.
조준철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 여기서 내릴래요.
용산 육군장관 관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가 섰다.
안녕히 계십시오.
조준철이 내리면서 얼굴도 마주보지 않고 말했다.
내 말 명심해라.
조준철은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다. 그는 다음날 시경에 전화를 걸어
추경감과 만났다.
그래 백산공사에 대해 뭣 좀 알아낸 게 있어요?
추경감이 조준철을 피자 집으로 끌고 들어가 앉으며 말했다.
여기 중짜 한개.
추경감이 주문을 했다.
아니, 제가 피자 좋아하는 것을 경감님이 아셨어요?
요즘 젊은이 치고 피자 싫어하는 사람 있나?
하지만 경감님 세대라면 이런 것보다는 빈대떡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조준철이 웃었다.
하긴 그랬었지. 헌데 우리 집에 나미라는 고명딸 하나가 있는데, 얘가
눈만 뜨면 피자 피자 하는 바람에...... 허허허, 딸이 내 입맛을
고쳐놓았다구나 할까? 그건 그렇고, 백산공사에 대해 알아낸게 있나?
추경감은 스무살이나 아래인 조준철에게 말을 놓을 수도 없고 꼬박 꼬박
존댓말을 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걸 자꾸 캐면 안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아니, 조준철씨도?
추경감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누가 그런 경고를 했나?
누가 공식적으로 저한테 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정부에서 일하는 높은
분한테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누나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쓸데없는
짓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조준철은 대답하지 않고 피자만 어적어적 씹었다.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만만치 않은 정보기구 중의 하나라고만
하더군요.
글쎄, 그 말을 해준 사람은 누구냔 말이야.
추경감이 다시 캐물었으나 그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실은 말이야, 나도 경고를 받았다네.
추경감이 쓴 표정으로 말했다.
네? 경감님도요? 누가 경고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국장님에게 불려갔었지.
쓸데없는 것 캐지 말라고 했겠군요.
조준철이 힘없이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지. 자네는 왜 쓸데없이 남의 지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쫓아다니느냐고 야단을 치시더군.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하셨나요?
우리 시경 관할 구역은 아니지만 내가 시체의 발견자니까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요?
조준철이 추경감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의 송충이 같은 진한 눈썹이
호기심으로 꿈틀거렸다.
좌우간 백산공사니 뭐니 하는 곳을 쓸데없이 드나들지 말라는 거야.
그리고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는 거야. 뭣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손을 떼기로 했나요?
공식적으로......
추경감님도 별 수 없군요.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조준철은 몹시 실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추경감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추경감의 그 결심은 큰 화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파트단지 입구로 들어서자
청년 두사람이 다가왔다. 뒤에는 검은 색 프린스 승용차가 서 있었다.
시경의 추병태 경감이시죠?
그런데요. 누구시죠?
추경감은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두 청년은 날쌔게 추경감의 양팔을 낚아채고는 자동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거 왜 이래요. 난 경찰관이란 말이요. 경관을 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이건 가장 나쁜...
시끄러워, 이 늙은이야!
청년 한 사람이 추경감의 뺨을 비틀었다. 추경감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자동차는 추경감의 비명을 뒤로 남긴 채 어두워지는 서울 시내 쪽으로
달렸다.
{{}}6.호반의 공포
국무회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리멸렬한 상태로 변해갔다. 자신들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분위기는 공통적이었다. 공군장관의 말대로 라면 한
주먹도 안되는 불량배들한테 아킬레스건을 잡힌 셈이 된 것이다.
총리니 장관이니 국장이니 하는 권력의 상징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일 수
있을까? 백 만을 호칭하는 막강한 육해공군도 손을 쓸 수 없고, 수십만
명의 폭력 데모대를 막아내던 경찰력조차 힘을 쓸 수 없다니.
이 나라의 반체제, 반정부 등의 세력을 숨도 못 쉬게 만들고, 그들의
안방생활까지 바꾸어놓던 내각정보국을 비롯한 각종 공작, 정보,
수사기관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한탄을 넘어서 불평을 터트리는 장관까지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국무위원석은 가관이었다. 총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있는 앞에 웃옷을 벗어 던진 장관이 있는가 하면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뒤로 벌렁 자빠진 자세로 있는 장관도 있었다.
대낮에 부녀자들이 떼로 끌려가도 아무도 막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야!
더구나 그 도로는 군사 전용도로다시피 한 곳인데, 군부대들은 무엇을
했단 말이구?
좌우간 모두들 얼이 빠졌어. 정보기관들은 뭘했어. 여기가 레바논이야
남미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장관님들도 있을 걸. 마누라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고 하잖아. 납치된 버스가 아주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장관님들도 있을 걸, 허허허....
의무장관이 농담반 진담반의 허튼 소리를 했다.
영부인 같은 미인을 모시고 사는 배장관도 그런 고약한 생각을 하시오?
김교중 육군장관이 배소성 외무장관을 향해 정색을 하며 한 말이었다.
흐흐흐....
팽인식 공군장관이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흥분해서 떠들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자, 여러분!
갑자기 총리가 의사봉을 땅땅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던 장관들이 느릿한 동작으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지금부터 정부 내에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합니다. 방금 각하께서
결정을 리셨습니다. 비상대책위원회에는 다음 호명하는 분이
참가하겠습니다.
정채명 내무장관, 김교중 국방부장관, 고일수 법무부장관, 박인덕
공보장관, 서종서 내무부차관, 정일만 내각정보국장, 조민석
육군참모차장, 성유 육군정보국장 등으로 비상대책위를 구성합니다.
비상대책회의는 이 순간부터 종합청사내 내각회의실에 설치합니다.
국무위원 여러분은 각자 편리한 곳에 돌아가 계시되 언제나 비상대책위
사무실과 연결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만 해산합니다.
총리가 다시 의사봉을 땅땅 두드렸다.
잠깐만...
정일만 국장이 일어서는 국무위원들을 향해 말했다.
사모님들의 신원에 대한 정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장관님들께 개별적으로 저희 요원이 방문하겠습니다.
뭘 조사하는 거요?
팽인식 공군장관이 불쾌한 듯 소리쳤다.
사진이라든지, 옷차림, 외모 같은 것 등입니다. 협조해주십시오.
정일만이 고개를 숙여 절하며 말했다. 막강한 그의 힘에 비해 겸손한
태도를 그는 늘 잊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운 인물이란 평을 듣고 있었다.
내각과 모든 정보, 보안 기구가 발칵 뒤집혔으나 밖은 조용했다. 아직
아무 언론기관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비상대책위가 설치된 후 첫날밤을 맞게 되었다. 몇 시간을 우두커니
비상대책위 사무실에 앉아있던 장관들은 거의 돌아갔다.
오후 내내 내가 여기 붙어있으니까 기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단 말야.
롯데 호텔 사우나에 가서 좀 쉬고 올테니 급한 일 있으면 연락 좀 줘요.
박인덕 공보부장관이 제일 먼저 빠져나갔다.
뒤이어 고일수 법무, 김교중 육군장관도 적당한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다들 빠져나가고 장관중에는 정채명 내무장관이
자정이 넘도록 남아있다 피곤에 지친 듯 옆방의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붙였다.
사무실에는 정일만 국장과 성유 육군정보국장, 서종서 내무차관만이 남아
여기 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지시를 내렸다.
전화의 대부분이 함구령을 내리는 협박조의 말들이었다.
반정부, 용공성 지하단체의 리스트 업을 끝냈는데, 민주독립
임정추위같은 것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단체는 없습니다. 50년대의 각종 단체에는 독립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갔으나 벌써 그런 명칭이 사라진 것은 20년도 넘거든요.
정일만 국장이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노출되지 않은 집단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에는
평양에서 내려왔거나 평양의 지령을 받는 단체가 아닐까 하는데...
성유 육군정보국장이 의견을 제시했다. 날카로운 콧날과 늘 일자로 꾹 다
물고 있는 입이 그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단신으로
북한지역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했다는 소문을 지니고 있었다. 육군
내에서도 그의 정체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전에 대통령과 같은
사단에서 근무했으며 정일만 정보국장과 함께 2대 정보기관의 책임자라는
것만 알려진 상태였다.
평양에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조민석 육군차장이 눈을 번쩍 떴다.
그때였다. 밖에 있던 직원이 뛰다시피 회의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국장님, 왔습니다!
뭐야? 오긴 뭐가 왔단 말야?
정일만이 나무라는 것으로 보아 내각정보국 직원인 모양이었다.
민주독립임시정부라고 합니다.
어디 있어?
저기...
직원은 책상 위에서 빨간 불이 반짝이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전화가 왔단 말야? 녹음준비 되었지? 어디서 거는지 빨리 캐치해봐.
정일만이 재빠르고 능숙하게 지시한 뒤 전화기 앞으로 갔다. 그 전화는
총리 비서실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일만이 호흡을 가다듬은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수화기를 든 정일만을 쳐다보았다.
정일만은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전화의 목소리를 특수 스피커를 통해
실내에 들리게 했다.
총리 좀 바꾸시오.
스피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는 지금 주무십니다. 제가 비서실장인데 말씀하시면 분명히
전달하겠습니다. 누구시라고 할까요?
비서실장으로 위장한 정일만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나는 민주독립정부수립 추진위원회 최고위원 중의 한 사람이오. 오늘
낮에 총리에게 전달한 요구사항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전화 속의 목소리는 톤이 약간 높아있었다.
아, 예.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될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일 때문에
오늘종일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여보시오!
상대방이 정국장의 말을 자르며 도중에 튀어나왔다.
어물쩡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큰일날 것이요. 총리에게 똑똑히 전하시오.
이 나라는 지금 전 국토 전 국민이 독재자의 바위에 깔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고. 사람의 목숨이 오뉴월의 개만도 못하오. 무슨
정보기관이 그렇게 많은지 매일 수십 명의 양심적인 국민들이 끌려가 고통
당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고 있소. 이 악마의 집권은 하루 빨리
종식되어야 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스물두 명의
장관들이 홀아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지금 사모님들은 잘 계십니까?
정일만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아직은....... 그러나 언제까지 보장할 수는 없소. 우리 위원회에는 성미
급한 사람도 많고 인정 많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우리
동지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국민들의 질식할 듯한 공포를 씻어줘야
합니다.
이 어마어마하고 성스러운 민주투쟁의 제단에 스물두 명의 희생이
바쳐져서 나라가 바로 선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사모님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요?
겁은 조금 나겠지만, 그거야 지금까지 휘두른 권력의 남용이나
호의호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백합회 회장이신 문숙 여사께서도
남편인 총리의 빠른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참고하십시오.
환자는 없는지요? 지금 감금되어있는 위치를 말씀하실 수는 없겠지요.
감금이라는 표현은 쓰지 마시오. 당신들의 그 귀신같은 대민 사찰망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중대한 국사를 이런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만나서
타결점을 찾도록 합시다.
정부가 우리를 인정치 않는데 어떻게 협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실체를 인정토록 노력하겠습니다. 우선 예비접촉 같은 것을 안전한
곳에서 갖는 것이 어떻습니까?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실내의 일행은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우리 위원회에서 좀 상의해 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락한다면 장소와
거기에 나올 사람을 준비하시오.
좋습니다.
정일만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대답했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를 걸겠소
아니, 여보세요!
정일만이 다급하게 불렀으나 그는 사정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모두의 얼굴에 아쉬움이 나타났다.
녹음은 되어있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위치는 서울 시내입니다.
장충동쪽에 있는 공중전화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곳에 수사요원이
갔습니다만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밖에 있던 요원 한 사람이 들어와 서종서 내무차관에게 보고했다.
빨리 총리에게 알리고 협상 대표를 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성유 육군정보국장이 정일만 국장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지금 비상대책위를 소집하도록 연락하지요.
정일만 국장은 비상대책위 소집을 지시하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육군정보대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나요?
조민석 참모차장이 성유 부장을 보고 물었다.
의정부에서 신철원 등 전방에 이르는 모든 길을 수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성유 부장이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입가에 신경질이 있는지 그는
거북한 일이 생기면 얼굴을 실룩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들이 거의 모였다.
고일수 법무장관은 어떻게 되었소?
총리가 장내를 돌아보다가 정일만 국장에게 물었다.
연락이 안 됩니다. 댁에도 안 계시고......,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회의를 시작합시다. 정일만 국장이 지금까지의 상황보고를
하시오. 지금이 몇 신가?
총리는 맞은편 벽에 있는 시계를 보기 위해 안경을 꺼내 썼다.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일만 국장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한 뒤 자기 의견을 덧붙였다.
따라서 납치된 백합회원들은 서울 시내에 들어와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어요. 민주독립임시정추위의 지도부만 서울에
있고 납치를 한 행동대원은 지방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유 육군정보부장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꼭 그 의견을 내세워야 할
계제도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했다.
어쨌든 놈들이 간단한 것 같지는 않소. 그러면 그들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들을 말해보시오.
제 생각에는...
김교중 국방장관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장소에 우리 대표가 가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한 장소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가느냐 하는 것만
정 하면 됩니다.
정부에서는 각료급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그들이 요구하지 않을까요?
박인덕 공보부장관이 발언했다.
제가 대표로 가겠습니다.
김교중 장관이 나섰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성유 부장이 얼굴을 더욱 실룩이며 말했다.
그때였다. 밖에 있던 김영기 비서실장이 급히 들어와 총리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은밀히 말했다. 총리의 표정이 갑자기 흥분한 상태로 변했다.
조민석 차장, 빨리 나가 보시요. 급한 전화가 와있답니다.
총리가 조참모총장을 보고 말했다. 조민석 차장은 벌떡 일어나 뛰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위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조금 후
조차장이 벌겋게 흥분된 얼굴로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소?
총리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예, 방금 의정부 북방을 수색하던 부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납치된
사람중 한 사람이 탈출해서 나왔답니다.
어느 장관 부인이오?
정채명 내무장관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모두가 긴장한 채 조민석 참모총장의 입만 쳐다보았다.
부인이 아닙니다. 수행했던 고형섭 적십자사 사무차장이었습니다.
일행은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서 탈출했답니까?
지금 어디에 있어요?
다른 사람은 무사하답니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질문했다.
산정호수 남쪽 12킬로 지점에 있는 헌병초소로 달려왔답니다. 일행은
산정호수에 있는 호반이라는 민간인 호텔에 있답니다.
뭐야!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빨리 구출해야 돼.
박인덕 공보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채명 내무장관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섣불리 구출한다고 들어갔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들이 인질의
생명을 앞세우고 저항할 것이 뻔합니다. 신중히 구출작전을 세워야
합니다. 산정호수 일대는 우리 군부대가 완전포위를 시작했으니 딴 곳으로
도망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민석 육군참모차장이 말했다.
신중하고 완벽한 구출작전을 세우겠습니다. 제가 곧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성유 정보부장이 총리에게 허락을 요청했다.
김교중 장관과 성부장은 현장으로 급히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고형섭씬지 뭔지 탈출해온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총리가 조민석 차장을 보고 물었다.
지금 서울로 오고 있습니다. 두 시간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현장부대에서 상황설명을 마쳤답니다.
조차장이 대답했다.
서울에 온 뒤에는 신병을 저희 정보국에서 인수하겠습니다.
정일만 국장이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치안본부에서 인수해야 합니다.
정채명 내무가 말했다.
천만에요. 우리 군부에서 보호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구출작전도
육군에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유 육군정보부장이 항변하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고형섭 차장은 일단 내각정보국에서 조사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김장관과 성부장은 빨리 떠나시오.
총리가 결론을 내렸다.
두 시간이면 온다던 탈출자 고형섭은 세 시간도 훨씬 넘은 아침 6시반쯤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비상대책회의의 결정에 따라 신병이 내각정보국으로 인계되고 당분간
비밀 보호조치를 받게 되었다.
고형섭 차장이 밝힌 피랍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의정부 북방에서 피랍된 일행은 유유히 신철원쪽으로 가는 국도를 달려
포천 검문소를 통과했다.
맨 앞에 국방부 소속 지프차가 서고 뒤에 버스가 따랐기 때문에
검문소에서도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고형섭차장의 신분증을 보이자 쉽게
통과되었다. 지프차 앞에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청년이 운전석 옆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고형섭차장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포천 외곽을 통과한 차량은 곧장 신 철원으로 향하는 국도를 거침없이
달렸다.
이들은 성차에 이르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자동차를 산정호수쪽으로
몰았다.
끌려가는 동안 버스 안의 사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몰랐다. 아마도
긴장과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프차에 타고 있던 고형섭은 계속 그들과 말을 나누어 보았으나 간단한
대답만 할뿐 단서가 될만한 말은 남기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요?
고형섭이 군복 청년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산정호수까지.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거기 가서 우리를 어떻게 할 작정이요?
먹이고, 재우고 . 잘 모실 테니 걱정 마시오.
이게 얼마나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을 아시오?
고형섭은 기가 막혀 말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오.
청년은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왜 우리를 이렇게 하는 거요?
상부의 명령이오.
상부가 어디요?
밝힐 수 없소.
혹시 평양은 아니오?
아니오.
그는 신경질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요?
고형섭은 다시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 단체의 정체에 대해 무언가
단서를 얻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어떤 단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요.
청년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신념에 가득찬 단호한
태도는 여전했다.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 좋은 세상이란 말이오?
닥치지 못해요?
그는 돌아보며 더 못참겠다는듯 고함을 질렀다.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산정호수 유원지 경내에 들어섰다. 휴일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꽤 많았으나 그들 차량을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다.
일행은 호수를 왼쪽에 끼고 상류쪽으로 한참 올라갔다. 산기슭에 외따로
선 민간인 호텔 마당에 차가 머물렀다. 호텔 호반 이라는 큼직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자 다왔으니 내리시오.
군복 청년이 먼저 내리면서 말했다. 고형섭이 차에서 내리자 버스에서도
여자들이 겁에 질린 채 내려서고 있었다.
호텔은 이미 이들의 손에 접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종업원이나 손님인
듯한 사람은 하나도 뵈지 않았다.
호텔 입구에는 사복 청년 서너 명만 서성이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다 내렸습니까? 모두 호텔 안으로 들어가시오.
군복 청년이 명령했다.
여자들 중에는 고형섭의 얼굴을 보자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죽은 장교의 시체는 청년 서너 명이 들고 호텔 뒤쪽으로 사라졌다.
공포에 질린 일행은 청년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들은 이쪽으로 와!
그들은 경호원 두 사람과 고형섭을 따로 데리고 갔다. 고형섭은 그때야
운전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들은 모두 식당 안으로 몰아넣고, 남자는 식당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 같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문 앞에 보초를 세운 뒤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 호텔 종업원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고형섭이 경호원들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모두 다 죽였을 거요.
경호원은 창 너머 푸른 호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고형섭은 창쪽으로 가 보았다. 바로 앞이 호수였다. 창문을 열고 나갈
수는 있으나 호수 수면까지는 20미터도 넘는 절벽이었다. 뛰어내리면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두어 시간 지난 뒤 고형섭이 불려나갔다. 로비에 있는 티 테이블을 모아
사무실 모양을 만들어놓았다. 의자에 앉은 나이가 좀 든 사람이 여자들을
하나씩 불러내 무엇인가 물으며 적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찰관들이
피의자를 불러 조사를 받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고형섭이 나갔을 때는 미인으로 이름난 배소성 외무장관의 부인이
불려나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름이 뭐요?
배소성.
그건 당신 주인 이름 아니오. 당신 이름이 뭐냔 말이오.
김순줍니다. 천구백사십팔년생.
김순주 여사는 묻지도 않은 것까지 대답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여기서 도망을 가?
그때, 복도 옆에서 청년 하나가 여자 한 사람의 팔을 비틀어 쥐고
들어오며 말했다.
백장군님! 글쎄 이 여자가 화장실 간다기에 데리고 갔더니 도망을 치려고
하지 않습니까?
청년은 팔을 비틀어 쥔 여자를 밀치면서 탁자에 앉아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짧게 깎은 머리가 반백인 사람이 백장군인
모양이었다. 고형섭은 그를 잘 기억해두었다. 그가 이곳의 지휘자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가 중요한 지시를
하는 것 같았다.
도망을 쳐?
백장군은 겁에 질려 서있는 여자의 아래위를 천천히 훑어보며 물었다.
체신장관 부인이랍니다.
팔을 여전히 비틀어 쥐고 있는 청년이 말했다.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것들 신사적, 아니 숙녀적으로 대접해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데리고 들어가서 모조리 발가벗겨 앉혀 놔! 여기가
어딘데 도망을 쳐!
일행을 납치해온 군복 청년이 큰소리로 말했다.
다 벗겨요?
청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팬티까지 모조리 벗겨.
군복 청년은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히히히, 구경거리 생겼네. 좀 늙기 들은 했지만 여자는 여자니까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청년들도 히죽히죽 웃었다.
체신장관 부인을 붙들고 있던 청년은 백장군이라는 늙은이를 잠시
쳐다보았다. 군복 청년의 명령을 확인하려는 태도였다.
그건 너무합니다. 야만인의 짓입니다. 이분들은 이 나라 국무위원들의
사모님이란 걸 잊지 마시오.
고형섭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백장군을 보고 항변했다.
대접을 받으려면 점잖게 굴어야지. 도망을 쳐?
군복 청년이 내뱉었다.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런 더러운 짓을 하면 절대로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고형섭이 다시 소리쳤다.
야! 뭐해? 빨리 데리고 들어가서 모조리 벗겨. 독재자들 여편네
사타구니는 어떻게 생겼는지 잘 봐.
군복 청년이 화가 난 모양인지 마구 퍼부었다.
그러나 백장군은 청년을 향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청년은 금세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체신장관 부인을 앞세워 식당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이리 좀 와!
군복 청년은 고형섭을 불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호텔
사무실이었다. 책상 두개가 놓여있고 전화기가 있었다. 옆으로 보이는
창문으로는 호수가 눈 아래서 출렁이고 있었다.
전화를 좀 거시오.
조금 전과는 달리 군복 청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책상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전화요? 어디에 겁니까?
적십자사에 걸어 사무총장 좀 바꿔주시오.
군복 청년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고형섭이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뚜뚜
소리만 나고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화 다이얼을 돌리던 고형섭은 순간
탈출해야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화기 옆에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전기 다리미가 얹혀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군복은 담배를 피우며 멍청히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형섭은 재빨리 다리미를 집어들고 군복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군복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고형섭은 재빨리 창문을 열고 20여 미터 아래의 호수로 뛰어내렸다.
그는 원래 수상구조원이었다. 10여 년 전 뚝섬 유원지에서 적십자사
봉사원으로 수상구조원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날 적십자사 간부가 된
것이었다. 고교시절 전국대회에는 한 번도 나가지 못했지만 수영선수였다.
호수로 뛰어내린 고형섭은 사력을 다해 호수를 건넜다. 호수 건너편은
바로 국도였다. 그는 국도로 올라서자마자 숨이 넘어갈 정도로 뛰었다.
그가 헌병초소에 닿았을 때는 기진맥진해있어 쓰러질 지경이었다.
{{}}7.또 하나의 반정부 단체
안경 씌워!
추경감을 납치해서 태운 검은 색 프린스가 남대문 앞에 이르자 왼쪽에 탄
사나이가 말했다. 추경감을 가운데 놓고 양쪽에 두사람이 앉은 모습은
수사기관에서 중요인물을 연행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왼쪽에 탄
구레나룻이 거무스름한 사나이가 높은 놈인 것 같았다.
오른쪽 사나이가 호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내주었다. 그 사나이는 체구가
작고 피부가 고와 여자처럼 보였다.
이걸 쓰라는 겁니까?
추경감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도 용의자들을 많이 연행해보았지만,
당해보니 역시 불쾌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빨리 써!
오른쪽 여자 같은 사나이가 쉰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말했다.
추경감이 선글라스를 쓰자 세상이 캄캄해졌다. 선글라스가 아니라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안경이었다. 추병태 경감은 그들이 왜 이것을 쓰라고
했는가를 비로소 알았다. 지금부터 자동차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추경감이 불안을 떨쳐낼 양으로 말을 걸었다.
뭐가 말이오?
왼쪽 사나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를 풀어놓을 때까지 말입니다.
누가 풀어준대?
사나이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그럼 재판도 없이 종신형을 사는 겁니까?
종신형이 될지 사형이 될지 모르는 일이지.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동빙고동도 아니고, 남산도 아니고
추경감은 이름난 수사기관의 분실이 있는 동네를 대었다.
우린 그런 곳과는 관계없어요.
그렇다면 이들은 국가기관의 일부인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아도 소용없겠지만, 그럼 당신들은 어느 기관 소속이오?
추경감이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돌아보긴 했지만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기관소속이 아니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편이오.
그런 사설단체에서 대한민국의 경찰관을 납치해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오?
그러나 추경감의 공갈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흐흐흐 . 대한민국이 당신들 것인 줄 아시오? 썩은 독재자들의
하수인이 가지고 노는 게 대한민국인줄 아시오? 흐흐흐
왼쪽의 사나이는 큰소리로 한참동안 웃었다. 추경감은 그런 류의 인간을
요즘 들어 많이 보았다. 헛바람이 들어 자기들만이 정의의 투사요,
민주주의 수호신인 것처럼 설치는 철없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칠순이 넘은
노인들로부터 젊은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런 류의 인간들이 너무 많아져
세상이 시끄러워져가고 있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당신들도 민주투사요?
추경감이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들 투사들은 혁명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면서요? 부모도
없고, 스승도 없고, 법도 없고 . 더구나 정조도 없어 투사끼리는
구별하지 않고 아무 여자나, 아무 남자나 같이 자준다면서요? 섹스도
혁명의 무기라고 하던가
닥쳐!
왼쪽의 사나이가 팔꿈치로 추경감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윽!
추경감은 눈에 불이 번쩍 나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금방 죽는 것 같았다. 보통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자동차는 여러 차례 신호에 걸려 섰다가 달리곤 했다. 어디쯤
왔는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멎었다.
빨리 내려! 허튼짓 하면 옆구리에 바람구멍이 난다!
왼쪽 녀석이 추경감의 뺨에 차가운 물건을 대었다. 서늘한 금속성 감촉이
날이선 칼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추경감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엘리베이터에 들어섰다.
벗어도 돼!
추경감의 선글라스를 벗겨내며 녀석이 말했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가리키는 불이 켜졌다 지워졌다 하고 있었다. 모두
21층까지 있는 건물이란 것을 눈여겨 보아두었다. 17층에 이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내려!
추경감은 그들에게 끌려 내려졌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복도였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앞을 보니
금속촉감이 나는 재료로 방의 호수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1708호란 방으로 추경감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호텔이었다. 널찍한 룸에 한켠으로 침대가 놓여있고 4인용 소파와
경대, 옷장 등이 있었다. 커튼이며 벽지, 카펫 등이 굉장히 고급
호텔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어느 호텔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추경감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슬그머니 제쳐보려고 했다.
거긴 안 돼! 소파에 앉아요.
그를 데리고 온 여자 같은 사나이가 추경감을 잡아당겼다. 그는 날이선
단도로 자기 턱을 슬슬 긁고 있었다.
추경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여기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만약 극렬 좌경단체라면 정말 추경감 하나쯤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조그만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청바지 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그녀는 첫눈에 어디서 본듯하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 곁에 있는 경대에 앉더니 가방 속에서 전동타자기를 꺼냈다.
그녀는 코드를 찾아 꽂은 뒤 종이를 끼우고 타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윤기가 나는 검은머리에 날카로운 콧날이 인상적이었다. 약간
앞으로 내민 듯한 이마가 지성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알맞은 키에 다리가 긴 20대 여인
추경감은 어디서 그녀를 보았던가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최근에 어디서 본 아가씨였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모시고 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여자 같은 사나이가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자기보다 상위직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군인처럼 짧은
머리에 어깨가 약간 굽어보이기는 했으나 운동선수처럼 보였다. 나이는
추경감을 납치해온 녀석들보다는 훨씬 많은 사십대 후반쯤으로
생각되었다.
어서 오시오, 추경감! 무례하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담배 태우시지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담뱃갑을 추경감 앞에 내밀었다.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들고 지포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철거덕 철거덕
몇 번 불을 켜려고 했으나 고물 라이터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라이터 불 안 켜진다는 것은 다 압니다. 경감님이 생각에 잠길 때는
그 고물 지포를 철걱덕거린다죠?
사나이가 빙그레 웃었다. 추경감은 이 녀석들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난 강이라고 합니다. 보통 강속구라고 하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야구를 조금 했는데, 그때 투수였던 내 공이 꽤 빨랐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가 성질이 좀 급해서 그렇게 통하죠.
쓸데없이 주먹이 빨리 나가기도 하고, 권총 방아쇠를 빨리 당기기도 해서
일을 망치고는 후회하지요. 아마 강속구치고는 오발탄 강속구일 것입니다.
추경감은 그의 말이 저윽이 불쾌하게 들렸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강속구 잘 때리는 4번 타자는 아닙니다. 그냥 열심히 정직하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는 대한민국의 가난한 공무원일 뿐입니다.
잘 알고 있소. 잠실에 있는 25평짜리 국민주택형 아파트의 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지요. 성실하고 희생적인 아내와 귀여운 나미는 그래도 무능한
아버지에게 불만이 없지 않습니까?
추경감은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수모감을 느꼈다.
도대체 그런 것까지 캐내서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당신들의 목적이
무엇이오?
가만, 가만
강속구는 그의 설명과는 달리 꽤 침착했다.
지금 경감님이 이 강속구를 취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우리가
당신을 심문하려는 겁니다.
불법 폭력단체가 경찰관을 심문하다니
추경감이 빈정대듯 웃었다.
자, 봉주씨. 준비됐지요?
강속구가 전동타자 아가씨를 보고 말한 뒤 추경감에게 질문했다.
서울시경 강력계소속 추병태 경감! 백산공사를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강속구가 질문하자 봉주라는 아가씨가 타자를 했다. 심문한 내용을
기록으로 작성할 모양이었다.
난 그런 것 모릅니다.
그래요? 그럼 999국에 4884라는 전화번호는 어떻게 입수했나요?
그런 전화번호 기억나지 않는데요.
추경감은 시치미를 뗐다.
좋습니다. 그럼 길음동에는 무엇 하러 갔습니까?
길음동이라구요? 나는 수사를 하는 경찰관입니다. 이런 저런 전화도 걸
수 있고, 여기 저기 어디든 다닐 수 있는 겁니다.
그렇구 말구요. 그렇게 다닌 곳중 백산공사가 기억 안 난다니 말이
됩니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999국에 4884라는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나요?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보겠습니다. 조은하 피살사건은 당신의
관할구역도 아닌데, 왜 계속해서 캐러 다니는 겁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인가요?
강속구는 껌을 꺼내서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그의 못생긴 얼굴이 약간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경찰관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데 관할이 무슨 문제입니까? 더구나 그것은
내가 현장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캐묻고 난리를 피우는 거요?
추경감이 탁자 위에 놓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라이터
대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추경감!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 앞에 불려왔다가
털어놓지 않고 온전히 나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오. 봉주씨, 이건
기록하지마!
그는 타자 아가씨를 보고 주의를 시킨 뒤 말을 이었다.
당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이런 곤경에 처할 리
있겠어?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걸.
그는 껌을 딱딱 소리나게 서너 번 씹은 뒤 다시 시작했다.
길음동에서 만난 녀석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요?
모릅니다.
조준철이는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그 사람은 상관없어요.
추경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신이 얘기하지 않으면 조준철이 불도록 할 수도 있어. 그리고 정
고집을 부리면 잠실에 가서 나미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너희 아버지 요즘
뭐하고 다니는지 아느냐고
뭐야?
추경감이 벌떡 일어섰다.
이 비겁하고 나쁜 놈들 어린아이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들다니. 천벌을
받는다. 천벌. 만약 우리 나미에게 손만 까닥했다간 봐. 내 일생 동안
너희 놈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야.
추경감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흥분하지 말아요. 다만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지, 꼭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자, 다시 묻겠는데 999국-4884번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강속구는 추경감이 펄펄뛰었으나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전과 똑같은
태도로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추경감은 조금 전과는 달리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잘 생각해보시오.
강속구는 갑자기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곧이어 추경감을 데리고 왔던 여자같이 생긴 청년이 다시 들어왔다.
왜 우리 강속구를 화나게 만들었소?
청년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강속구가 앉았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계속해서 심문을 할 모양이었다. 이들이 추경감을 취조하는 모습은
전통적인 수사기관의 수법과 비슷해서 이들이 정부의 어느 수사 파트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주기도 했으나,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비겁한 수작으로 보면 테러집단 같기도 했다.
화장실에 좀 갔다와서 합시다.
시달리던 추경감이 제의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안의 욕실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욕실에 들어선 추경감은 이곳 저곳을 살폈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흔히 있는 타월이나 1회용 세면도구 등을 찾았으나 말끔히 치워져있었다.
추경감은 그런 것에서 호텔의 이름이나 마크, 전화번호 등을 찾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추경감의 이런 행동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추경감은 며칠 동안 감금돼 잠도 자지 못하며 심문을 당했다. 결국은
사실대로 다 말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끌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선글라스를 쓴 채 자동차에 실려 나와 시경 앞에서 방면되었다.
캄캄한 밤중의 일이었다.
시경과 집에서는 그 동안 법석이 났었으나 추경감은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관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다는 것도 창피한 노릇이지만 그것이 상부에
보고되면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그는 몇 가지 소득을 가지고 풀려났다.
우선 봉주인가 뭔가 하는 그 전동타자기 아가씨를 어디서 본 듯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준철과 함께 다방에 앉아있던 아가씨였다.
조준철과는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조준철이 그
아가씨에게 이용당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소득은 그 호텔이 산곡관광이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었다.
호텔의 룸에는 그 호텔 이름을 알아낼 만한 모든 자료는 다 없어졌었다.
흔히 있는 호텔 안내 책자라든지 편지지, 편지봉투 등 모든 것이 철저하게
감추어졌었다. 그런데 강속구가 신고 다니는 실내화에 산곡관광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을 눈 여겨 보아두었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호텔의 이름을 다 추적해보았으나 산곡관광호텔 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추경감은 다시 관광여행사 리스트를 구해보았으나 산곡관광이라는
여행사도 없었다.
추경감이 며칠 동안 산곡 에 매달려 있었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조준철이 찾아왔다.
그 동안 연락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조준철은 얼굴이 햇볕에 타서 윤기가 났다.
어디 다녀왔나?
추경감이 자기 행적을 감추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아뇨. 많이 탔죠? 미행을 좀 하고 다녔더니
두 사람은 레지가 불친절하게 집어던지듯 가져다놓고 가는 커피를 마시며
마주보고 싱긋 웃었다.
누나를 살해한 그 문제의 사나이가 정부의 고위관리가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가졌습니다. 누나는 분명 정부의 무슨 비밀을 알아냈거나, 그와
비슷한 무슨 음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준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누나가 살인범을 만나는 동안 정보기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그 고관을 감시하고
있었는지 누나를 감시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추경감도 처음부터 추리하고 있던 부분 중의 하나였다.
혹시 산곡관광이라고 모르나?
추경감이 불쑥 물었다.
예? 산곡관광요? 모르겠는데요.
조준철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전번에 말이야. 조선호텔 커피숍에 내가 찾아갔을 때 같이 앉아있었던
예쁜 아가씨 있지. 머리는 짧게 깎고 콧날이 날씬한
추경감은 납치되었을 때 본 봉주라는 여자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음....
조준철은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봉주 말이군요.
그래, 그 아가씨, 참 인상적이던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걔는 내 걸프랜드예요. 예과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났는데 . 지금은
사설 경제연구소에 취직해서 다니고 있어요. 애가 아주 착실하고
쓸만해요.
경제연구소?
추경감의 귀에는 그 말만이 들렸다.
예. 소규모라서 월급도 보잘것없대요. 어때요? 경감님이라면 며느리 삼을
만 하던가요?
조준철이 나봉주에게 단단히 빠져있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차차 그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생각이었다.
조준철과 헤어진 추경감이 시경으로 돌아오자 강형사가 달려왔다.
반장님, 알아냈습니다.
강형사가 수첩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알아내? 무엇을?
그 산곡인가 귀신곡인가 하는 회사 말입니다.
그래?
산곡관광은 관광회사가 아니고 관광호텔, 도자기 굽는 요(窯) 등을
가지고 있는 회사 이름입니다.
하지만 산곡관광호텔이란 없는데
산곡이란 호텔을 가지고 있는 법인 이름이고, 호텔 이름은 다르죠.
그래, 무슨 호텔이야.
뉴페닌슐라호텔
뭐야?
추경감은 눈을 번쩍 떴다. 뉴페닌슐라는 강남에 새로 생긴 중급 규모의
호텔이었다.
{{}}8.짙어지는 안개
추경감과 강형사는 강남에 있는 뉴페닌 슐라 호텔로 단숨에 달려갔다.
겉보기에는 중세 유럽의 고성 같은 인상을 풍기는 호텔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전혀 다르게 극히 심플하고 실용적으로 설계된 호텔이었다.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 즉 표리부동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군요"
강형사가 로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들이 으리으리한 로비에서
두리번거리자 벨 보이가 다가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벨 보이는 미국식 질문을 했다. 추경감은 그 말이 비위에 거슬렸으나
아무말도하지 않았다.
"높은 분들을 위해 방 몇 개를 예약하려고 합니다. 우선 방 좀 보여
줄래요"
강형사가 거짓말을 했다. 내부 구경을 하면서 이곳이 맞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였다.
"객실도 여러 종류라..."
벨 보이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두사람의 아래위를 계속 훑어보면서
말했다.
"몇 군데만 보여 주시지요."
"스위트나 브이아이피를 원하십니까?"
"그것부터 봅시다."
추경감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벨 보이는 어딘 가로 가더니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든 사람을 데리고 왔다.
"저는 이 호텔 부지배인 김총연입니다."
추경감에게는 그 말이 김청년처럼 들렸다.
"예. 저희는 일본과 거래를 하는 컴퓨터 회사 직원들입니다. 내주에
일본서 많은 직원들이 오기 때문에 방을 좀 예약할까 하고..."
강형사가 거짓말을 잘 했다. 추경감은 못마땅했으나 벌레를 씹은 기분으로
그냥 참았다.
"예 그럼 우선 사무실로 갈까요?'
"아닙니다. 방부터 몇 개 보았으면..."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객실로 안내되었다. 추경감은 한눈에 이 호텔이 그때
끌려갔던 곳임을 확인했다.
방의 구조는 물론이고 벽지며 욕실에 붙은 특이한 무늬의 타일 모두
그때의 악몽을 일깨워 주었다.
"맞습니까?"
강형 사가 추경 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틀림없어. 방은 더 볼 것도 없어. 사람들만 찾아내면 돼."
두사람은 호텔의 로비에 가서 마주 앉았다.
"여기 로비에만 죽치고 앉아 있으면 그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강형사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는 단 말인가?"
강형사가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이 호텔의 고객 명단을 훑어보면 어떨까요?"
"그것도 소용없을 거야. 그놈들이 누군지 이름을 알아야 말이지..."
"그래도 뭔가 단서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 호텔 지배인이 일본 고객을 상대하는 컴퓨터 회사 직원에게 고객
명단을 보여 줄 것 같아?"
"그. 그렇네요."
강형사가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자네는 이만 퇴근하라고. 나는 여기서 얼쩡거리며
오늘 저녁과 내일 일요일 종일 살펴 볼 테니까."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불이 켜지지 않는 고물 지포 라이터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저도 함께 있겠습니다. 만약 그놈들이 나타나면 혼자서 어쩌겠단
말씀입니까?"
강형사는 꼼짝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듯 두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꽉
잡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그놈들이 나타나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아 놓은 뒤 연락
할 테니 그런 염려는 마라."
"헤헤. 제 하숙집은 달동네가 되어서 전화 없다는 것 아시면서..."
"그럼 삐삐로 연락하지."
"어쨌든 저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강형사를 겨우 설득시켜 돌려보낸 추경감은 로비에만
어물정거리고 있을 수 없어 호텔 밖으로 나가 거닐면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러나 저녁 무렵이 되었지만 그날 추경감을 납치해간 사람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이 시장끼를 느끼고 곁에 있는 설렁탕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을 때 였다.
"반장님 같이 가시죠."
어느새 왔는지 강형사가 다시 나타났다.
"이런 이런 !"
추경감은 뜻밖의 일을 당할 때 자주 하던 감탄사를 연발했다. 놀랍고
반갑단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두사람은 간단히 설렁탕 한 그릇씩을 해 치운 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강속구라는 자가 있던 곳이 1708호라 고 하셨죠? 거길 곧바로 쳐들어가
보는 것이 어떨까요?"
강형사가 다시 제안했다.
"그 곳을 아직 가보지 않은 것 같은가?"
"그럼 벌써?
"그 호실에는 이미 아무 흔적도 남아있는 게 없었어. "
그럼 혹시 다른 호텔...
"무슨 소리야 틀림없어."
"그럼 마냥 이렇게 하리꼬미(잠복의 일본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무렵 이
호텔에 들어 있던 사람들의 명단을 봅시다."
성질 급한 강형사가 앞장서서 호텔 사무실로 들어갈 태세 였다.
"낮에 우리는 컴퓨터 회사 직원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투숙객 명단을
내놓을 것 같아?"
그 말에 강형사는 주춤하고 섰다.
"할 수 없지요. 신분을 밝히고 알아 봐야지요. 가시죠."
추경감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강형사를 따라 갔다. 사무실에 들어섰으나
다행스럽게도 낮에 그들을 안내했던 부지배인은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뒤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했다.
호텔 책임자는 두어 군데 전화를 해 보더니 순순히 투숙객 명단을 내
놓았다.
추경감이 납치되어 왔던 날짜의 투숙객을 다 보았으나 수상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1708호실 투숙객을 찾아보았다. 부산에 사는 젊은 부부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손님들 혹시 기억 납니까?"
추경감은 부산 주소로된 20대 부부의 투숙객을 가리켰다.
"글쎄요. 그 날 담당자한테 알아보죠."
책임자는 잠시 나갔다 돌아왔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군요."
추경감은 그 투숙객의 주민등록 번호와 주소를 적었다.
"이날 수사기관 같은 곳 사람들이 이 호텔 방을 빌린 일 없읍니까?'
강형사가 물었다.
"수사 기관요?"
책임자는 놀란 듯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녀가 섞인 단체가 투숙 한 것은 기억하십니까? 이 날 말입니다."
추경감이 투숙객 장부에 적힌 날짜를 가리키며 물었다.
"글세요. 하도 단체도 많고 해서... 우리 호텔의 객실은 3백개도
넘습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더 이상 알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호텔을 나왔다.
그들은 로비에 앉아 12시가 넘도록 드나드는 사람을 살폈다. 그러나
강속구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은 그날 자기를 취조하던 1708호실에 있었다고 기록된 부산의 젊은
부부를 추적 해보았다.
컴퓨터의 신원 조회에서는 부산시 동래구에 주소를 둔 구청 직원으로
신원이 나와있었다. 여자는 무직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김순택. 28세. 장인숙 24세."
추경감은 일단 두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김순택과 장인숙은 신혼 부부였다. 그리고 그 기간에 서울에 온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리 캐물어 보아도 강속구 같은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강속구 일당이 그 부부 이름을 도용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들 부부 이름을 가져다 대었을 가요?"
강형사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추경감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더 이상 무엇을 캐 낼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뉴페닌슐라 호텔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아무것도 밝혀 낸
것은 없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정부의 정보 기관 같기도
한데 하는 짓은 범죄 단체들이 하는 수법과 같단 말야."
추경감은 강형사를 보고 몇 번이나 이렇게 되뇌었다.
추경감은 도리없이 정공법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봉주라는 아가씨를 찾아야 해. 조준철군에게 다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
추경감은 그들이 잘 가던 조선호텔 커피숍으로 조준철을 불러냈다.
오랜만에 본 조준철은 얼굴이 핼쓱해져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 동안 별일 없었나?"
추경감이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
"별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만 이야기 할 일이 못됩니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끔씩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쫓기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한 모습이기도 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으나 겁이 나서 그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쐬주나 한잔할까?"
추경감이 분위기를 바꿀 속셈으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저...저는..."
조준철이 약간 주저했으나 추경감이 단호하게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바람에 그는 엉거주춤 따라 나섰다.
그들은 창경원 뒷골목에 있는 포장마차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일러서
그런지 포장마차는 딱 그 집 한집만 전을 벌여 놓았다.
소주가 몇 잔 오가자 조준철의 표정은 누그러졌다.
"그래 무슨 일이야? 봉주 아가씨하고 싸우기라도 했나요?"
추경감이 벼르던 말을 꺼냈다.
"봉주가 사라졌어요."
조준철은 완전히 풀이 죽어있었다.
"뭐야? 사라져?"
추경감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집에서도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몰라요. 일주일째 연락이 끊겼어요."
추경감은 강속구와 그 일행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신분이 탄로 나게 된
것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추경감은 진작 봉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봉주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추경감이 조준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프리랜서였어요. 이곳 저곳 번역거리 같은 것도 맡아서 해주고... 타자나
컴퓨터, 워드 프로세스 같은 것을 잘 다루고, 영어 불어도 잘 했거든요."
"그래 조준철씨는 요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말해 봐요.
추경감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나직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벌써
술기운이 목을 차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준철도 얼굴에 약간의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만있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다고 했어요."
"음... 그래 그게 누구야?"
추경감은 틀림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조준철은 안주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슬쩍 보았다.
나이는 들어 마흔에 가까운 것 같았으나 얼굴은 제법 곱상하게 생겼다.
그녀는 일에 바빠 두 손님의 이야기는 전혀 귀에 담지 않는 것 같았다.
"전혀 누군지 모르겠어요. 병원에서 나오는데 완력 좋은 사나이들이
무조건 차에 태우고 전혀 앞이 안 보이는 선글라스를 씌우더군요.
"그랬어?"
추경감은 그들이 강속구 일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 호텔로 데리고 갔지?"
추경감이 자신 만만하게 말했다.
"아뇨."
"아니야?"
"에. 차에 태우고 서울시내를 계속 돌아다니다가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병원 앞에 내려놓더군요. 앞이 캄캄한 선글라스를 썼기 때문에 어디로
돌아 다녔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어요."
조준철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래 드라이브만 하다가 내렸어? 여자도 있었어? 후후후..."
추경감은 전혀 우습지도 않은 대목에서 혼자 웃었다.
"그렇게 낭만적이 못 되었습니다. 경감님."
조준철도 추경감의 느닷없는 웃음소리를 듣자 말에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끔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쓸데없이 탐정 흉내를
내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 인줄 아느냐? 그런 일은 경찰에
맡기고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 오늘밤 이후에도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하고 다니면 네가 인턴으로 있는 병원의 네 환자들이 이유없이
연속으로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너도 사고로 병신이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아이 끔찍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알고 있었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그들이 누구를 죽인 것은
분명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나 한테 그런 협박을 하겠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소주잔만 계속 입에 털어 넣었다.
"그 괴전화 02, 999, 4882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한참만에 조준철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말야..."
추경감은 잠시 말을 끊고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슬쩍 보았다. 부지런히
칼질을 하는 아줌마의 볼륨 있는 유방이 육감적으로 출렁거렸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조은하씨 피살 사건의 배후에는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정치적 배경을 가진 여러 갈래의 조직이 개입된 것 같아."
"여러 갈래의 조직이라구요?"
조준철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다른 입장을 가진 조직이 개입된 것 같아.
조은하씨가 평소 정치적인 세력과 접촉을 하고 있지는 않았나?"
추경감이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멈추고 조준철을 바라보았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누나는 세상이 싫어 숨어 살다시피 한 분입니다.
시골에 묻혀 국민학교 학생과 더불어 세월을 묻고 있었습니다. 그런
누님이 무슨 야망이 있다고 정치세력과 접촉을 한단 말입니까?"
조준철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가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데..."
추경감은 아주머니가 구워 내 놓은 가짜조기를 열심히 뜯어먹었다.
"어쨌든 우리를 협박한 녀석들이 정부 정보 조직인지 사조직인지 그것부터
알아 내야해. 조준철씨는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요."
추경감이 정색을 하고 조준철에게 술잔을 건너 주었다.
"나봉주 말이야."
봉주요? 봉주 소식을 알고 계세요?
조준철은 추경감이 진지한 투로 나봉주의 이야기를 꺼내자 깜짝 몰라며
물었다.
아니,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잘 들어. 나봉주는...
조준철은 긴장된 눈빛으로 추경감을 바라보았다.
"나봉주가 강속구와 한패거리야."
"예?"
조준철이 너무 놀라 술잔을 떨어뜨릴뻔 했다.
"정말이야 내가 납치되어 갔던 뉴페닌슐라호텔에 그 여자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맙소사!'
조준철은 입을 딱벌리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겁니까?'
조준철이 따지듯이 말했으나 추경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날밤 그들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뒤 헤어졌다.
그 다음날 추경감에게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국장실에 불려간 추경감은 놀라운 지시를 받게되었다.
"추병태 경감! 이건 극비 차출이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고... 해외
출장으로 처리 할 테니 곧장 치안본부 제4부장에게로 가 보시오."
뜻밖의 명을 받은 추경감은 어안이 벙벙했다. 상부에서 극비속에 수사를
해야될 일이 있는데 그 요원으로 추경감을 차출하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가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건 나도 전혀 모르오. 아마 합동 수사 본부 같은 것을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일은 이 방을 나선 뒤에는 입밖에 내면 안 됩니다."
국장은 몇 번이나 함구령을 내렸다. 추경감은 30여년 경찰관 생활을
했지만 이런 일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추병태 경감은 국무위원 부인들 피납 사건의 수사 요원으로 극비리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처음에는 본인도 국장도 알지 못했다.
용공단체나 반체제 조직을 검거하기 위한 특수대에, 드물게 정보요원 아닌
수사요원이 동원된 정도로 생각했었다.
{{}}9.연기처럼 사라지다
포천 부근에 주둔하는 공수특전단의 여단 규모 병력이 황급히 산정호수
일대에 투입되었다. 그 외각에는 다시 신 철원에 있는 부대 중에서 2개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봉쇄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움직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육군부 장관으로부터 육군 참모 총장에게로 거기서 다시 군과 군단을 거쳐
사단으로, 혹은 독립 부대로 작전 명령이 떨어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야만했다.
김교중 육군장관은 산정 호수 입구에 있는 관광 호텔을 임시 지휘 본부로
삼았다.
"절대로 여기서 작전하는 것이 외부로 노출되어서는 안돼!"
뒤늦게 달려온 조민석 육참차장과 성유 육군 정보부장, 그리고 그곳을
맡은 사단장 및 특전 여단장과 지휘부 회의를 끝낸 김교중 장관이 한번 더
당부를 했다.
육군 참모총장은 미국에서 열리는 연례 국방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
중이었다.
호반 호텔로 직접 투입되는 공수 특전여단 중의 1개 소대 병력은 변일근
여단장이 직접 맡기로 했다. 변일근 준장은 월남전에서 무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적의 후방 침투, 폭력진압등 특수 부대의 작전에 능통한 젊은
장군이었다. 그는 애국심이 누구보다 강하고 충직하기로 이름난
장군이기도 했다.
"호텔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대대장이 변장군에게 은밀하게 보고했다. 호텔의 양쪽은 숲으로 쌓여 있고
뒷면은 호수와 닿아있었다. 그러니까 남쪽은 호수이고 동서쪽은 소나무가
우거진 산기슭이고, 북쪽은 정문으로 되어 있어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변장군의 작전은 양쪽 산기슭을 이용한 특전대의 기습과 호수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호수로 공격한다는 것은 물밑으로 들어가서 접근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변장군은 물위에 떠있는 두 척의 유람선을 무장선으로
바꾸었다. 유람선은 두 시간마다 호수를 한바퀴씩 돌았다.
"유람선 한 척은 동쪽에서 접근하고 다른 한 척은 서쪽에서 접근한다. 두
배가 동시에 호텔에 닿으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3분의 간격을 두고
접근한다. 먼저 도착하는 유람선은 갑판과 객석에 서 노래자랑을
위장한다. 큰 소리로 노래와 반주를 내 보내 놈들이 전혀 의심하지 못하게
한다. 배가 호텔에 접근하면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변장군은 유람선을 맡은 두 소령에게 자세한 명령을 하달하면서
마지막으로 작전 시간을 일러주었다.
"17시 30분 정각!"
변장군의 주공격진은 동쪽 능선을 타고 소나무 숲으로 접근하는 일이었다.
16명의 방탄 조끼를 입은 특전대원이 등산객으로 위장하고 소나무 숲에서
나타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여자 대원도 두명이나 끼어있었다. 그들은
배낭으로 위장한 기관단총과 권총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주 공격진을 돕는 것은 서쪽 소나무 숲의 1개 소대병력의 화력이다.
이들은 노출되지 않게 접근하여 호텔의 곳곳을 겨냥하고 유사시를
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주공격진 및 엄호 병력이 작전을 개시하기 직전 북쪽 정문에 먼저 위장
병력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었다.
다섯 명이 낚시꾼으로 위장하여 호텔정문으로 들어서는 일이었다. 이들이
가장 위험한 일을 먼저 시작한다. 그들이 호텔을 지키는 무장 세력과 제일
먼저 접촉하게되고 뒤따라 동쪽의 등산객 부대가 들이 닥쳐 호텔을
장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7시 30분 정각! 위에는 무장한 헬기 두 대가
동시에 나타나 호텔 옥상으로 접근하도록 했다.
이렇게 육지와 호수, 하늘 등 삼면의 육해공 입체 작전이 완벽하게
계획되었다. 설사 이들이 살아 남아 호텔을 탈출해 도망간다손 치더라도
외각을 둘러싼 보병의 포위망을 뚫을 수는 없게 되어있었다.
17시 30분!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북쪽 호텔 정문에 낚시꾼 다섯 명이 나타났다.
낚시백을 둘러 메기도하고 손에 들기도 했다. 낚시조끼 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방탄 조끼였다. 낚싯대를 접어 넣은 것같은 길쭉한 물건은 여러 가지
총기 종류였다.
"아무도 없나봐."
조심스럽게 호텔 정문을 들어선 낚시꾼 부대 책임자가 중얼거렸다.
호텔 정문에는 예상했던 보초가 없었다. 호텔마당은 너무나 조용했다.
왼쪽에 커다란 버스와 승용차 대여섯 대가 서있었다. 군용 지프차도 한대
버려지듯 비뚤하게 서있었다.
그러나 호텔 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했다.
"이놈들이 지금 내숭을 떠는 거야."
리더가 조용히 말했다.
"어딘가에 있는 총구멍에서 우리의 심장을 겨누고 있을 거야."
그들이 호텔 현관문에 도착했으나 그때까지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계십니까?"
앞서 가던 리더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 순간
다섯 명은 총구를 앞으로 향한 채 번개처럼 현관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워키토키에 대고 리더는 숨가쁜 신호를 보냈다.
"현관으로 들어간다. 공격 개시!"
그와 동시에 동쪽에 있던 등산부대가 호텔 담을 넘어 뛰어 들었다.
하늘에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했다. 호텔 뒤의 호수 위에는
구성진 노래가락과 반주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아무도 없잖아!"
먼저 들어간 낚시부대가 허탈한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30여명의 무장특공대가 들이닥쳐 이곳 저곳의 문을 열어 제쳤다.
그러나 호텔은 이사간 집처럼 텅비어 있었다. 여기 저기 의자가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식당에는 먹고 남은 음식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있고 가스
레인지 위에는 물이 아직 끓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곳에도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모두 도망가고 없잖아!"
특공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허탈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는 작은 비둘기. 둥지에 왔지만 병아리는 없다."
등산 대원을 지휘하던 장교가 작전 본부에 보고했다.
"알았다. M장치가 있을지 모르니 즉각 철수하라. 모두 빨리 집밖으로
나가라!"
작전 지휘부에서 긴급한 명령을 내렸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폭발물 장치가 있을지 모르니 모두 밖으로 나가라!
모든 물건은 그대로 두어라. 절대 손대지 말라. 즉시 밖으로 나가라!"
지휘자가 큰소리로 여러 차례 고함을 질렀다.
호텔안에 들어섰던 30~40명의 대원들이 들어올 때처럼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 있던 납치범들은 백합 회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폭발물 처리반이 도착했다.
그들이 호텔을 샅샅이 탐색하는데도 서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무런
폭발물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들의 전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묶여있는
사람 10여명을 데리고 나왔다. 손발이 묶인 채 입에 재갈을 물고 있는
사람들은 이 호텔의 종업원들이었다. 남자가 네 명 여자가 아홉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등산복, 낚시꾼
차림의 무장 게릴라 같은 특공대원들을 보자 그들의 공포는 극도에
달했다.
살...려...주...세...요...
대원들이 그들 중에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을 변일근 장군 앞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 준장이요. 이제 안심 하시오. 당신들은 누구요?"
변준장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워낙 엄한
표정만으로 살아온 군인이라 표정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예! 저는 이 호텔 사장입니다."
나이 좀 들어 보이는 깡마른 남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제 처남이고 전 이 호텔 지배인입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은 아직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공포의 냄새가 그냥 남아
있었다.
"자! 담배 한대 피우시오."
변장군이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권했다.
담배를 받아 입에 무는 사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름이 무엇이오?"
"박 필성 입니다. 처남은 하무조라고 합니다."
그들은 담배를 한 모금 마시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 어떻게 된 겁니까? 처음부터 이야기해 보십시오. 박대위 필기
준비해!"
변장군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며칠 전부터 호반 호텔에는 백장군이라는, 나이 쉰은 넘었을 법한 풍채
좋은 한 남자와 건장한 젊은이 두 사람이 투숙하고 있었다. 백장군이라는
사람은 별로 말이 없고 점잖아 박필성 사장이나 하무조 지배인은 그를
예비역 장군쯤으로 생각했다.
"용무가 무엇이었나요?"
듣고 있던 변장군이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휴양을 왔다고 만 말했는데 별로 눈여겨보지는
않았어요. 같이 온 젊은이는 여러 군데에 전화를 거는 것이 일 이였어요."
그들은 호텔 방에 있는 공중전화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들이 온지 사흘째 되던 날 마침내 일이 일어났다.
군복차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 도한 사람들이 십여 명 밀어 닥쳤다.
"여기 사장 좀 나오라고 해!"
그들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이 곳 저곳을 뒤지며 거칠게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하무조 지배인이 무례한 무리 앞에 나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 종업원이 모두 몇 명이오? 당신이 사장이요?"
기관단총을 멘 군복차림의 청년이 지배인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당신들 도대체 뭐요?"
하지배인이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
"조용히들 해요!"
그때 백장군이라는 사람이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백장군을 보자 모두
부동자세로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지배인 이 사람들 식당으로 좀 안내하시오. 난 사장님을 좀 만나고 올
테니..."
어찌 보면 탈영병 같기도 하고 게릴라대원 같기도한 이들은 하무조
지배인을 따라 모두 식당으로 들어갔다.
백장군은 같이 묵고있던 두 청년과 함께 호텔 사무실로 들어가 사장 앞에
앉았다.
"박사장 지금부터 내말을 잘 들으시오."
백장군이 엄숙한 표정으로 사장을 보고 말했다. 사장이 고개를 들어
백장군과 두 청년을 바라보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백장군 뒤에 서있던 두 청년이 어느새 손에 권총을 꺼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요구가 있습니까?"
박필성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오. 나라와 겨레를 위해 중대한 일을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백장군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이 호텔에 들어 있는 사람은 모두 몇 명입니까?"
"단체 손님이 있었는데 오늘 모두 떠나고 젊은 부부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여기서 내보내십시오."
"예? 뭐라고 얘기해서 내보냅니까?"
"호텔 내부 배관에 이상이 생겨 가스가 누출되는 것 같아 위험하니 딴
호텔로 옮기라고 하십시오. 지금 당장 갔다 오시지요."
백장군이 턱으로 지시하자 권총을 든 젊은이 한사람이 박사장을 데리고
나갔다.
이렇게 헤서 젊은 부부가 호텔을 떠나자 종업원 열 두명과 낯선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모든 종업원은 지하실로 모아두게."
백장군이 군복 청년을 보고 지시했다.
종업원 열 두명은 모두 겁에 질린 채 지하실로 끌려갔다.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손발도 묶였다.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호텔은 완전히 백장군과 그의 부하들 손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지하실에 갇힌 뒤에 무슨 소리 같은걸 못 들었나요?"
변장군이 사장을 보고 물었다. 박사장은 잠시 생각을 더듬는 듯 했다.
"가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 소리는
우리를 더욱더 공포에 떨게 했죠. 도대체 그 불한당 놈들은 누굽니까? "
"그 외에 다른 이상한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까?"
"아이구 말도 마시오. 우리는 그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배인이 엄살을 떨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은 당분간 우리 요원들에게 협조해야겠습니다. 우선
그들의 인상착의에 대해 모두 자세히 말씀하셔야겠고, 그리고 당분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겠습니다."
변준장의 말이 떨어지자 두 젊은 여자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짧은치마가
말려 올라가 핑크빛 팬티와 허연 허벅지가 다 드러난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감금되었던 종업원들은 다시 연금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범인들이 연기처럼 사라진 호텔에 모인 작전 지휘부는 허탈에 빠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김교중 육군장관이 굉장히 화를 냈다.
"그래,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야! 그놈들이 홍길동이라도 된단 말이야?
빨리 흔적이라도 찾아 내봐! 개벼룩 같은 놈들! 퉤! 퉤!"
그는 화가 나면 아무 곳에나 침을 마구 뱉는 버릇이 있었다.
호텔 안을 샅샅이 조사했으나 뚜렷한 유류품이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폭발물 장치 같은 것도 없었다.
"어디 어디에 전화를 걸었는지 그것도 조사해 봐."
수색 보고를 받은 성유 정보부장이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육군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치안본부 수사팀이 도착했다.
이곳 저곳에서 지문을 뜨고 쓰레기통이나 의자밑 등에서 버린 종이 쪽지를
수집했다.
치안본부에서 급조한 수사팀에는 물론 추병태 경감도 들어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 겁니까?"
살인사건 현장과는 너무나 다른 곳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던 추경감이
동료인 서경감을 보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납치범들이 여기 있었다고 조금 전에 들었어요. 무장
납치범들인 모양인데 아마 정부 요인을 납치해 간 것 아닐까요?"
추경감은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수사를 하라고 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단 말인가?
몇 시간동안 여기 저기를 헤매던 추경감은 여자 옷가지 몇 개가 책상 위에
모아져 있는 것을 보았다.
추경감은 그것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투피스중 윗도리 하나와 쇼울, 스카프 두개, 허리띠 한 개였다.
추경감이 그것을 하나 하나 세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스카프는 최고급품이었다. 추경감 같은 가난뱅이 월급쟁이 아내는 꿈도
꾸지 못할 그런 물건이었다. 상당한 위치에 있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물건이란 것을 금방 알았다. 허리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자의 투피스 윗도리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
제일의 패션 디자이너인 A라인에서 만든 옷으로 M.S.Cho라는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다. 추경감은 그것을 꼼꼼하게 수첩에 적은 뒤 수사 팀장인
수사본부 제4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부장님 우리가 지금 무엇을 쫓고 있는 것입니까?"
추경감이 몇 번이나 벼르던 말을 했다.
"나도 잘 몰라. 정부의 일을 하던 중요한 여자 스물 두 명이 무장 괴한
단체에 붙들려 갔는데 그들이 여기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
괴한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과, 외부 어디와 연결이 있었나를 찾아내는
거라네."
4부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추경감은 육군 장관이라든지 특전대, 치안본부팀등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어있는 것은 보통 중대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반국가적 사건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가졌다.
추경감과 달리 전화를 추적하던 팀은 그들이 공중전화만 사용했기 때문에
어디에 전화를 했는지 거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호텔의 교환을 이용한 시외 전화가 3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추적해 보았다. 그 중 2건은 신혼여행온 젊은 팀이 자기 집에 건
것이었다. 그러나 한 건은 백장군이라는 사람이 있던 방에서 건 것으로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았다. 상대방은 은하수 재벌그룹 기획실장이었다.
은하수 재벌이 이 엄청난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더 밝혀야 할 과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단서를 얻은 셈이다.
산정호수 현지에서 범인과 인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비대위 사무실은 허탈과 분노로 가득 찼다.
"도대체 막강한 군대, 철통같은 경찰력은 다 어디 가고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이야?"
성질 급한 장관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10.민독추의 최후통첩
"이 지경이 되었으면 그냥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을 공표하고 북부
지역이라도 부분 계엄령을 선포해야 합니다."
비상대책회의가 이틀이 채 못 가 위원들 중에는 짜증을 내는 사람도
나왔다.
특히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심했다.
"더 이상 기자들을 따돌릴 수 없어요. 유.피.아이 기자는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아요. 나와의 단독 회견을 요구하고 있어요. 무엇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국무회의가 자주 열리느냐, 뭔가 비상사태가 있는 것 아니냐
하고..."
박인덕은 그 비대한 체구와는 달리 무슨 일이든지 지그시 참고 넘기지
못했다.
"계엄령이란 말도 안됩니다. 더구나 이 사실을 공표 했다가는 전국이
불안의 소용돌이 에 빠져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 날 것입니다."
내무장관 정채명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는 사건이 생겼을 때부터 가장
무게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비상각의를 리드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관록 있는 정치인 출신인 그는 다른 장관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한때는 극렬한 야당 투사로 반체제 인사들의 단식 투쟁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따르던 야당 대통령 후보가 참패하고 당이 깨지자
한때 정계를 은퇴했었다. 몇 년동안 지방에 파묻혀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뒤 거뜬히 당선되자 이번에는 자기가 늘
공격하던 여당에 입당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장관이었다.
그는 작년 개각 때 파벌 지역 안배와는 관계없이 입각, 내무장관의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의 능수 능란한 변신이 그렇게 눈에 거슬리게 보이지는
않았다.
각료 중에 가장 노장급인 그는 항상 신중한 행보를 취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나, 체재유지를 맡은 젊은이들에게는
항상 경계인물 취급을 받았다. 각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총리보다
한살이나 위인 예순 여섯의 나이에 때로는 그의 점잖은 처신이 무서운
투사처럼 변모해 보일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계에나 각료 중에 그의 계파는 거의 없으며 차관인 서종서가 그와
가깝다는 설도 있고 그 반대라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직무상으로나 인간관계로나 서차관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훤출한
키에 성성한 백발이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채명의 침착한 태도가 박인덕의 화를 더욱 돋군 듯 했다.
박인덕은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왔다갔다했다.
"그럼, 위수령 같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마누라쟁이가 이틀씩이나
강도들한테 잡혀가 있는데 겨우 한다는 짓이..."
박인덕장관이 분을 참지못하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 것 봐요. 강도들하고 협상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놈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돈일 것입니다. 제놈들이 마치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있지만..."
박인덕이 계속 떠들어댔으나 모두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소위 민주독립정부추진위, 즉 약칭으로 '민독추'에서는 협상에 응해
왔었다.
일차로 신라호텔 주차장의 미니버스 안에서 대표끼리 만나자는 제의가
왔다.
즉각 정일만 내각정보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네 명의 협상 대표가 그곳으로
갔다. 물론 극비 속에 원거리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지정한 신라 호텔 주차장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뒤 민독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일만 국장 좀 바꿔 주시오. 다른 장관은 필요 없어요. 당신들
비상대책윈가 뭔가 만든 것 다 알고 있어요."
전화의 목소리는 화가 나있었다.
"내가 정일만이요. 왜 나오지 않았소?"
정국장이 전화를 받는 동안 비서실장이 수화기의 스위치를 눌러 마이크로
연결시켰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를 그렇게 우습게 보지 마시오. 무력을 동원해서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전화 목소리는 무쇠처럼 카랑카랑했다.
"절대로 무력을 동원한 일이 없소. 뭔가 오해를..."
정일만 국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의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우리를 허수아비로 보지 마시오. 장충동 공원에서부터 신라호텔 뒷담에
이르기까지 사복 특전단 2개대대가 배치된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었소.
주차장에도 경찰 특수 진압대가 숨어 있었던 것을 다 압니다. 다음에 또
그런 서툰 짓을 하면 사모님 중에 몇 명을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야만스런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를 구하겠다면서 그런 부도덕한 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냉혈 동물이라는 정일만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저지른 범죄, 반인륜적, 반민족적 만행에 비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오. 당신들이 인권을 지키겠다는 선량한 국민들을 얼마나 잔혹한
고문으로 죽이고 병신으로 만들었어요."
"말이 지나쳐요."
정일만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듣고 있는 비대위 멤버들은 모두가
공포에 질려 얼굴에 핏기를 잃었다. 정채명 장관만이 표정의 변화 없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쓸데없는 논쟁할 시간이 없어요. 만나보지 못하게될 사모님이 누군지는
우리도 모르오. 아마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할지 모르오. 어쨌든 다시 한번
대통령 각하께 전하시오. 대통령 이하 전 내각이 즉각 사퇴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홀애비들만 모인 국무회의라는 희대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자,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여보시오!"
그러나 전화는 딸깍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여섯 시간이 지나도록
민독추의 연락은 끊겼다.
매스컴들은 저마다 무엇인가가 있다는 냄새를 맡았는지 집요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캐내지는 못했다고 정국장이 보고했다.
"도대체 육군 정보 부대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의정부 동북방이라면
그건 육군의 앞마당 아니오. 그런데 무장 호위를 받으며 수십 명이 타고
가는 버스를 이리 저리 끌고 다녀도 그 흔적을 찾지 못한단 말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소리를 질렀다. 비대위 사무실은 엄숙한 회의장의
분위기는 벌써부터 없었다. 여기 저기 소파 위에 담요가 널려 있는가
하면, 각종 음료수병들이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다.
비교적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일수 법무가 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시간문젭니다.
성유 육군 정보부장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얼룩무늬 특전단
전투복에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누구 겁주는 거야? 여기가 어딘데 권총을 차고 다녀!
박인덕장관이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성유 부장에게
삿대질을 하며 분통을 엉뚱한데 터뜨리고 있었다.
박장관! 말이 지나치지 않아요? 성유 부장은 현역입니다. 군인이 군복
입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보고있던 김교중 육군장관이 거들었다.
군복? 현역? 그래 현역 군인들이 군복입고 국무회의 책상에 나타나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었소?
그 말에는 뼈가 있는데!
김교중 장관이 정색을 하고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실내에 긴장이
팽팽해졌다. 조민석 육군 참모 차장과 성유 부장도 긴장한 얼굴로
일어섰다.
내가 뭐 말 잘못했나?
박인덕 장관은 갑자기 달라진 실내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말꼬리를 흐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 해 보시오! 군복이 이 나라를 망쳐 놓았다는 뜻입니까? 박인덕
장관!
김교중 장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였다.
자. 그런 논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닙니다. 우리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모입시다. 아이구 벌써 시계가 10시나 되었구먼.
정채명 내무 장관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애를 썼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잠깐 쉬시고 내일 아침에 조찬을 같이
들도록 합시다. 장소는 삼청동 그린에 준비하겠습니다. 여섯시까지
모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이 정채명의 장관의 말을 맞받았다.
삼청동 그린이라는 곳은 정보요원이나 각료들이 쓰는 비밀숙소 중의
하나였다. <안가>라고 하는 종류도 이 중의 하나였다.
분위기는 다시 바뀌고 장관들이 슬금슬금 일어서서 깜깜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갔다.
정채명 내무장관이 탄 그랜저는 한강을 건너 개포동 아파트로 들어섰다.
해방이후 40여년동안 그 많은 격동기를 헤엄치듯 잘 견뎌온 그는 이제
나이 70을 바라보면서 뒤늦게 입각하여 내무장관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감투에 눈이 어두워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정치에 대한 철학과 국가관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황해도 재령의 부농집안 태생으로 일정시대 동경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인테리청년이었다. 해방이후에는 학교 선생님 등을 지내면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6.25 이후 야당에 투신하고 맹활약을 했다.
이승만 정권을 공격하다가 용공분자로 몰려 세차래 투옥까지 당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는 관록을 세웠다. 여러 공화국을
거치는 동안 반독재투쟁의 맹렬 투사로 이름을 굳혔다.
그는 야당의 부총재까지 이르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 갑자기
정계 은퇴 성명을 내고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정권이 바뀐 몇년뒤였다.
정채명은 여당의 중견간부로 등장했다.
그의 화려한 야당 경력이나 반정권투쟁의 반생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임소 장관을 거쳐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불같은 야당시대의 성격은 간데 없고 온화하고 신중한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에 있는 젊은 장관이나 정보책임자들에게는 항상
의구의 눈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채명장관은 집이 있는 개포동 아파트 13동 앞에 도착하자 운전사와
수행비서를 아파트 입구에서 돌려보냈다.
그가 집안에 비서나 기사를 데리고 들어간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그는 13동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다. 그의 아파트는 3층이었다, 그러나
그는 3층에 내리지 않고 한 층위인 5층에 내렸다. 이 아파트는 4층이 없기
때문에 3층 바로 위가 5층이었다.
정채명은 아래층의 자기 집과 같은 위치에 있는 506호의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30대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살폈다. 시간이
밤 11시가 넘었기 때문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재빨리 정채명의 팔을 나꿔채 안으로 잡아 당긴 후 문을 닫았다.
정채명이 현관에 들어서자 여자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정채명을 끌어안고
얼굴을 가슴에 대고 문질렀다.
됐어. 됐어!
정채명은 여자의 등을 가만히 두드리면서 여자를 가슴에 안은 채 거실로
올라섰다.
어떻게 된거예요? 연락도 없이......
여자는 거실에 올라서자 정신이 든 듯 정채명의 웃옷을 받아들며 말했다.
미안해 수진이......
정채명은 수진의 등을 밀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수진이 정채명의 옷을 받아 걸고 가운을 내주었다.
나 샤워 좀 할 테니까 술 좀 꺼내 놔요.
정채명은 침실에 달린 욕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수진은 부엌에서 손박만한 판에 로얄 살루트 병과 마른안주 몇 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침대 곁에 있는 푹신한 두 개의 소파 가운데 있는 작은 탁자에 술상을
얹었다.
아네모네 그림 같은 분위기가 방안에 가득 찼다. 침대 덮개의 초록과
남빛이 어울린 무늬며 장식대 위의 자기들이 특히 그랬다.
아이 시원해.
정채명은 금방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아랫도리만 가린채 나왔다. 나이를
착각 할 정도로 건장하고 탄력 있는 피부가 불빛에 윤기가 났다. 가슴에
무성하게 난 검은 털은 배꼽으로 타고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그러나
희끗한 색깔이 섞여 거기서는 그의 나이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재빨리 수진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어 보았다.
아야야.....
수진이 엄살을 떨었다. 그녀는 어느새 베이지 색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얼굴은 살짝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밝아 보이는 눈동자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엷은 입술이
그녀를 지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썩 미인은 아니었으나 보면 볼수록
정감이 도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세상에 이름이 좀 알려진 여류화가 방수진이었다.
자, 한잔하지 수진이도.
정채명은 스트레이트로 두잔을 마신 뒤 방수진에게 잔을 권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방수진이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정부일이라는 게 늘 그 모양이지 뭐.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고...
수진은 정채명의 대답에서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무슨 일 정말 없어요?
방수진이 정채명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기다란 목이 에로틱하게
보였다.
우리말이야.
정채명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방수진을 안고 침대 위에 넘어졌다. 그의
숨결이 약간 거칠어졌다.
아이 잠깐만......
수진은 거부하지는 않으면서 말을 그렇게 했다. 정채명의 하체를 가렸던
타월은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의 뜨거운 심벌이 수진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수진의 가운을 벗겨 침대 밑으로 집어던졌다.
서른여덟살.
완숙하게 무르익은 그녀의 육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아기를 낳아보지
않은 옅은 핑크빛 유두가 희디흰 그녀의 유방을 더욱 순결하게 보이게
했다. 기다란 목과 작고 가련해 보이는 그녀의 가슴도 잘 어울렸다. 흰
피부와 너무나 대조적인 그녀의 긴 생머리는 더욱 섹시하게 보였다.
목덜미와 가슴에 살짝 얹힌 몇 가락 머리칼의 검정색깔과 그녀의 중심부에
무성하게 난 비너스의 상징인 검정색이 앙상블을 잘 이루었다.
잘록한 허리께서 부터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그녀의 히프와 천천히 그
볼륨을 유지하면서 뻗은 허벅지가 정채명의 억센 하복부에 깔려 비명을
지를 듯 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한 달이나 당신을 기다렸어요. 요즘 통 안아 주지
않았잖아요.
그녀는 정채명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백미터 육상선수처럼 뛰기 시작했다.
정채명의 한쪽 손이 그녀의 가슴에서 배로 내려갔다. 그는 팽팽한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손은 약손이다. 내 손은....
그는 어릴 때 할머니에게서 듣던 말의 흉내를 내었다.
후후후...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방수진이 장난스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덧 그녀의 손도 정채명의
아랫도리에 가서 남자의 비소를 유린하고 있었다.
정채명의 손은 방수진의 배를 쓰다듬은 뒤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손은
촉촉한 장미송이에 닿았다.
아니 언제 이렇게 이슬이 내렸나?
그가 다시 짓궂은 농을 걸며 그녀의 비밀한 장미송이를 조심스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여보...
방수진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갑자기 두 팔로 정채명을 힘껏
끌어안으며 몸부림을 쳤다.
정채명은 더 주저하지 않고 최후의 공격태세로 자세를 바꾸었다.
정채명이 그의 뜨거운 심벌로 그녀의 중심부를 공격했다.
흑!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한 순간을 맞았다.
두 사람은 이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격렬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파도는 방안의 모든 색깔을 흔들며 방안을 풍선처럼 긴장되게 만들었다.
비명같기도 하고 신음같기도 한 고통의 숨결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풍선은 터졌다. 거센 파도는 방파제를 무너뜨리고 온통 거센
물결을 쏟아 부었다.
두사람은 한참동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영화의 스톱모션과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수진이 정채명의 털 무성한 가슴을 슬며시 밀었다.
조여사 요즘 안보이던데 어디 갔어요? 조민숙 여사 말입니다.
방수진이 입을 열었다. 조민숙이란 바로 밑에 층에 사는 정채명의
아내였다.
음, 어디 좀... 거 자꾸 3층 기웃거리지 말아요. 혹시 눈치라도 채면...
정채명이 수진에게서 떨어져 누우면서 말했다.
왜요? 당신의 반은 내꺼란 말이에요. 나도 권리가 있단 말이에요.
방수진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수진이 너 미쳤어?
정채명이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도 언제 까지나 이런 아슬아슬한 생활 싫단 말이에요. 그늘에 숨어서
당신이 조여사와 함께 버젓이 외출하는 모습이나 보며 숨을 죽여야 하는
이런 생활이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아요?
방수진도 함께 일어나 앉으면서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채명은 방수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러나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만난 거요. 우리 운명에
순종합시다.
정채명이 수진의 어깨를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 흙, 흙...
갑자기 수진이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래, 알아요 알아...
정채명은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정채명의 가슴을
적셨다. 정채명은 안다는 말을 되풀이했으나 무엇을 안다는 건지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다.
미안해요.
벌거벗은 채 정채명의 가슴에 안겨 한참 울고 난 수진은 그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은 눈으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정채명의 욕정을 자극했다.
정채명은 안고 있던 방수진을 갑자기 침대 위에 눕히며 그녀의 가슴 위에
자기의 체중을 실었다.
아니...
정채명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히려 방수진이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다.
정채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수진을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정채명은 조금전 보다 더 적극적이고 정열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당신 정말 대단해요. 당신 나이가 올해 몇인데....
수진은 더욱 요염한 몸짓으로 정채명의 공격을 받아드리며 감탄했다.
나이와 섹스는 반비례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런 일 처음이잖아요?
그런가? 우리가 서로 몸을 섞은 게 몇 년이나 되었지?
정채명은 공격을 늦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수진은 두 팔을 뻗어 정채명의
목을 껴안고 상체가 거의 매달리다 싶어하고 있었다. 점점 숨이 가빠져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수진은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무엇이든 힘껏
물어뜯고 몸부림을 쳐야만 견딜 것 같았다. 온 몸의 신경줄이 다 챙 챙
감겨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다리가 허공에서 몸부림을 쳤다.
몇 년이나....으, 음!
정채명도 더 참지 못하고 짐승같은 신음을 토하며 최후의 공세를
퍼부었다.
그들이 이렇게 만난 것은 따지고 보면 십여 년이 넘었다. 젊을 때부터
여색을 밝히던 정채명을 거쳐 간 여자들은 많다. 그러나 한 여자와 십여년
동안 잠자리를 같이 해오기는 아내 말고는 방 수진이 처음이었다.
방 수진은 자기가 그늘에 숨어서 살기는 이제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본심은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우리 화단에서 이름깨나 있는 수진은 생활이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가정을 이루어 한 남자의 아내로서 평범한 일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여자였다.
말하자면 그녀는 결혼 생활이나 가정보다는 하고 싶은 예술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다른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정채명과 오랫동안
이런 비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두사람 나름대로 이기적인 계산이
있어서였다.
우선 정채명의 입장으로는 경제적이나 정신적으로 전혀 부담감을 주지
않는 방수진이 좋았다. 거기다가 그녀의 잠자리 솜씨나 여자로서의 몸매는
정채명을 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수많은 여체를 경험한 그는 방수진 만한
여자를 처음 만났던 것이다.
방수진 또한 자기의 남자에 대한 지적 허영심을 채워 주는데는 정채명
만한 남자가 드물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나이를 잊은 그의 정력은 그를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정채명이 야당 투사로 한참 이름을 날릴 때였다.
권위주의 정권을 규탄하는 목청이 전국 곳곳에서 팽배하던 때였다.
정채명은 정권 타도를 위한 집회를 앞두고 그 준비에 한창이던 때였다.
밤늦게 홍제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보는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따라 시내 어느 일류 호텔로 갔다. 당시 정권을 유지하던
기관의 고위 간부가 나와 있었다. 정채명은 여러 번 보아서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목이 통통한 40대의 남자였다. 청년들은
그를 지배인이라고 불렀다.
야 정의장 오랜만이요. 밤늦게 이렇게 모시고 와서 죄송합니다.
그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채명은 화가 났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채명을 의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속해있는 당의
중앙위 의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지만 반정권 투위의 공동의장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횡설수설하던 그는 결국 그들이 목적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젠 국가적 정력을 소모하는 그런 일에는 손을 빼시지요. 그리고
사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는 미리 만들어진 성명서를 내 놓았다. 독재정권 타도 국민대회
공동대표직을 사퇴하라는 것이었다.
허허허... 당신들 참 희한한 생각을 했군요. 이것보다는 당신들의
독재자가 왕으로 취임하는 공작을 하는 것이 빠르지 않을 까요?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칠텐데요.
정채명은 이렇게 화두를 꺼낸 뒤 곧 노기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위 어린애 같은 짓 그만 하고 당신 상전한테 국민의 마음을 잘
읽으라고 해!
정채명이 성명서라는 것을 박박 찢어버리고 일어섰다.
정채명씨! 좀 앉으실까?
그때 갑자기 목짧은 사나이의 말투가 달라졌다.
뭐야?
기왕 오셨으니 비디오나 한편 보고 가시지요.
사나이가 이렇게 말하며 옆방에 있는 청년을 불렀다.
그거 돌려봐.
사나이가 명령하자 그가 비디오 테이프를 틀었다. 텔레비전의 흑백 화면이
켜졌다.
앉아서 보시죠.
사나이가 정채명을 보고 비웃듯이 말했다. 정채명이 텔레비전 화면을 얼핏
보았다. 자기 얼굴이 나온 것 같았다. 정채명은 얼마가지 않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나쁜 놈들!
정채명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좀더 보시십시요. 재미있는 장면이 있을 것입니다.
목짧은 사나이가 계속 빈정대듯이 말했다.
화면에는 정채명이 지방에 있는 어느 호텔에 혼자 들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얼마 안가 장면이 바뀌고 객실 안에서 한 여자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이 나왔다.
저 여류 기억 나시지요?
사나이가 물었다.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채명은 떨리던 손으로 입을 가리었다. 마주 앉은 여인은 얼굴이나
이름을 대면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여류 변호사였다.
어떤 놈이 저런걸 몰래 찍었어? 이런 나쁜 짓을 하고도 너희 놈들이
무사할 줄 알아?
정채명이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이건 우리가 찍은 것이 아닙니다. 여변호사의 별거중인 남편이 찍은
겁니다. 그 사람이 이 증거물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요.
사나이의 말이 끝나자 화면에는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나왔다.
정채명과 여류 변호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리얼하게 비치고 있었다.
정채명은 앞이 캄캄해졌다. 이것은 일주일 전 그가 지방에 강연 갔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그 지방 출신인 여류 변호사는 정채명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자유분방한 그녀는 자기 말대로 정조의 자유 를 마음껏
누리는 여자였다. 그런 여류와 천하의 한량 정채명이 만났으니 밤이 그냥
지나갈 이가 없었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또 부담없이 헤어지는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미행을 당해 부도덕하고 추악한 모습을
들키고 말았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살찐 중년 여자와 황혼 길에 접어든 남자와의 정사 장면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더구나 여자가 리드하다 싶이 하는 모습은 추악한
본능의 격투장 같은 아름답지 못한 장면이었다.
침대 위의 정사 장면이 영화처럼 그렇게 볼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 그것도 나이 들어 비곗살이 오르고 아랫배가 처진 남녀가
침대 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여러 사람에게 보여 준다면
대개가 저렇게 추악하게 보일 것이라고 정채명은 생각했다.
여변호사의 신음이 절정에 올라가자 정채명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제발 그만 둬! 제발!
그러나 목 짧은 사나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의 격투는 좀체 끝나지 않았다. 경기의 주도권을 쥔 여류가 계속해서
정채명을 위에서 공격했다.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과 모음이 정확하지
않은 말들이 두 사람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방어 자세로 몸부림치던
정채명은 여류의 두 유방을 움켜쥐고 신음을 토했다.
그만 두지 못해!
정채명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 것은 고함이라기 보다 울음에
가까웠다.
목 짧은 사나이가 스위치를 껐다.
도대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정채명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이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찍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비겁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채명은 그들이 이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 하는 짓은
그 것을 찍은 것 보다 더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우리는 의장님이 국민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정계를 떠나는 모습을
막기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채명의 목소리가 더 누그러졌다.
목짧은 사나이가 정채명에게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이 여류 변호사의 남편이 정의장님을 간통죄로 고발하게 되면 법정에 이
증거물이 제출되겠지요. 물론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이 증거가 매스컴에 공개되겠지요. 꺼리가
없어 헤매던 기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꺼리입니까? 그 뒷일이야 상상할
것도 없지요. 정의장님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모든 공직에서 자태를
감추어야 하겠지요. 아니 형무소에서 회한의 나날을 보내야 하겠지요.
정채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담배만 빨고 있었다.
그래, 당신들의 요구가 무엇이요? 내일 모래 있을 반정권 집회를
중지하라는 거요?
목 짧은 사나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뭐요?
정의장님이 은퇴하는 겁니다.
사나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음....
정채명은 신음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조금전 침대 위에서 여류와 정사를
벌이며 토하던 신음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갑자기 정계를 떠난다고 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소?
민주인사 탄압이라고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겠지요. 학생, 종교계,
언론계.... 그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민주주의 신봉 국가, 그리고
국제 단체들의 분노... 그 것을 어떻게 감당할 작정이요.
정의장이야 말로 참으로 애국자십니다. 그런 걱정까지 다 하시다니... 뭐
그렇게 세상이 시끄럽지는 않겠지만 골빈 사람들이 조금은 이야기 꺼리로
삼겠지요. 그러나 그 조그만 시비꺼리도 없애버릴려면 역시 정의장이
협조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나이는 자기의 임무가 거의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란 말이요?
정채명은 차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집회가 열리기 전에 병원에 입원을 하는 것입니다.
입원?
정채명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정의장님을 마루타 취급을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입원을 하면서도 그
일을 마치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합니다.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사나이는 일어서서 좁은 실내를 한바퀴 돈뒤 정채명 앞에 앉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인 것 처럼해야 기자 놈들이 더 쫓아다니니까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합니까?
정의장님은 몸이 좀 좋지 않은 걸로 합니다. 어디까지나 중병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강조하면 청개구리 매스컴은 그 반대로 마구 써 댈
테니까요.
그래서?
정의장의 건강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처럼 해 놓은 뒤 사람을 시켜
성명서를 냅니다.
성명서?
그렇습니다. 아까 찢으셨지만....
내용이 뭐요?
건강상의 이유지요. 요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분간 정계를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같은데 요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공장 아이들이 불편 없이 해드릴 것입니다. 거기서
정의장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취미 생활이나 즐기시는 겁니다.
그가 취미 생활이라고 한 것은 정채명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빗대서 한 말이었다.
정채명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거기서 두 시간만에 나왔다.
나쁜 놈들 너희들 각본대로 해주겠다. 그러나 두고 보자!
정의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 뒤 그는 그들이 짜주는 각본대로 행동했다.
물론 매스컴은 속아주었다. 그러나 속으면서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채명은 일주일 뒤에 비엔나로 떠났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방수진이였다.
{{}}11.첫 번째 희생자
민독추의 연락이 끊어진 뒤 긴장상태에 있던 비대위에서 갑자기 회의를
소집했다. 정채명 장관만 연락이 끊겨 참석하지 않았고 다른 위원들은
30분 이내에 다 모였다.
여러분을 갑자기 오시라고 한 것은 민독추로 부터 이상한 제의가 왔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각하와 상의해서 처리 할 수도 있으나 여러분의
의견을 ...
총리께서 의견이 그러하시면 각하와 상의해서 처리하시지 번거롭게
비대위까지 소집을 하십니까?
육군장관 김교중이 불만을 토로했다.
국가의 중대사에 번거롭다는 것이 무슨 말이요?
박인덕 공보부장관이 한마디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두 사람의 언쟁은
유명했다.
그러면 비대위의 요구를 공개하겠소.
총리가 의사봉을 두어 번 친 뒤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 1시 15분에 자칭 민독추 부위원장이라는 자가 총리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왔소. 10분 뒤에 나와 통화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내가 10분쯤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자가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통화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곧 이어 스피커에서 녹음된 통화 내용이 흘러 나왔다.
...총리를 바꾸시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렸다.
...나는 민주독립 정부 추진 위원회 부위원장이요. 총리께서 직접 전화를
받아주어서 고맙습니다...
곧이어 총리의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국무위원 사모님들은 모두 안전합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까지는 ...
...어디에 계신 지요?...
...서울 시내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정부에만 안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 시내에 인질이 있다는 바람에 모두가 경악했다. 계속해서 대화
내용이 흘러 나왔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귀하들이 나라를 위한 충성으로 이런 일
하고 있다는 것 압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두시오. 우리는 아마추어 운동권하고는
다릅니다. 오늘은 좀 쉬운 요구를 하겠소. 우리들이 일을 추진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사람이 한사람 있습니다. 이 사람을 좀 제거해 주시요. 우리들의
일이 원만히 결말에 도달하고 희생자를 한사람도 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
일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요?...
...내각 정보국장 정일만이란 자요. 그 사람을 현직에서
해임시키시오....
비대위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정일만 국장을 아무도 쳐다보지 못했다.
...그건 무엇 때문이요?....
....이유는 우리보다 총리께서 더 잘 아실지 모르겠군요. 그 사람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잇점을 이용해 국무위원들을 우습게 보는 자요.
그리고 쓸데없는 꾀를 내어 국가의 진로를 방해하는 자요. 이 자가 있는
한 우리의 협상은 이루어 질 수 없소...
...그런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요 그런데..
...그건 그쪽 사정이요. 만약 이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요. 시한은 오늘밤까지입니다. 자 그럼 또
연락하지요....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미친놈들...
김교중 장관이 책상을 치면서 말했다.
그 뒤 다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민독추 집행부의 백장군이라고만 밝힌
자가 협박을 해 왔습니다.
총리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또 무슨 요굽니까?
그때 언제 들어 왔는지 늦게 온 정채명 내무장관이 물었다.
자기들 요구가 오늘 중에 관철되지 않으면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
모두가 침통한 얼굴이 되었다.
민독추라는 단체의 조직 중에 노출 된 것은 지휘부와 행동대였다.
지휘부에서는 주로 부위원장이라는 자가 연락을 해 왔으며 행동대의
책임자는 스스로 밝힌 백장군이라는 사람 같았다. 사모님들의 납치를 직접
지휘하고 산정호수 호텔에서 모습을 보인 그는 예비역 장성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했다.
합동 수사본부에서 그의 몽타주를 놓고 누구인가를 추적하고 있었으나
좀체 알 수가 없었다.
비대위 멤버들은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총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두
번째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한참동안 아무 말 않고 있던 총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오늘 중에 내각 정보 국장을 해임하지 않으면 인질 중에 한
사람이 희생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야?
으, 음...
모두가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총리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고일수 법무 장관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할 생각입니다.
총리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견을 모아서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총리께서는 아무 대책도
의견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김교중 육군장관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
기습을 당한 총리가 우물우물하자 김교중 장관이 다시 거품을 물고
떠들었다.
이거 뭔가 불투명 한 것이 있어요. 우리한테 공개 안되는 정보가 있는 것
같아요. 비상 대책위도 모르는 일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김교중이 책상을 치면서 떠들자 모두가 불안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육군 장관은 그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총리가 다시 분위기를 평상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오해가 아니오. 그럼 내 몇 가지만 물어 봅시다. 오늘 오후 2시 극비리에
미국 대사가 대통령을 만난 것은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미국 대사관의
정보 책임자가 오늘 새벽 총리 공관을 찾아온 것은 무슨 일이며, 이어서
그 자가 두번이나 정일만 국장과 극비리에 만난 것은 무슨 일입니까?
도대체 미국 아이들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김교중 장관의 말에 모두가 놀라는 것 같았다.
정일만 국장은 해명하시오!
팽인식 공군 장관이 소리쳤다. 그는 어느새 여기에 들어와 있었다.
김교중 장관 그게 모두 사실입니까?
잠자코 있던 배소성 외무 장관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비대위
멤버가 아니었으나 들어와 있었다.
우리 육군에도 날고기는 정보조직이 있습니다.
김교중 장관의 말이 떨어지자 배소성 외무가 벌떡 일어섰다.
이 나라 외무 장관인 나도 모르게 외국의 대사가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외국 요원들이 우리 국장 나부랭이나 만나고 다닌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말 이 나라에 정부가 있는 것입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배소성 외무가 대단히 흥분한 것 같았다.
정일만 국장은 빨리 해명해요!
팽 공군장관이 다시 흥분해서 떠들었다. 원래의 의제는 간데 없고 엉뚱한
사안을 가지고 열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좋아요. 모두 나를 죽일 놈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다 얘기하지요.
정일만 국장이 총리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허락을 해 달라고 하는
표정이라기 보다는 어절 수 없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총리는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겠으니 네 말은 네가
책임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말씀 드리지요. 시간이 없어 비대위에 보고하지 못한 것을 용서
하십시오. 사실은 이 일을 미국 정부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누가 고자질했어?
흥분 잘하는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소리쳤다.
누가 고자질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정보 기관이 알아 낸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정부에게 정보를 주면서 대책을 물어 왔습니다.
그래 우리 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박상천 해군 장관이 물었다. 원래 비대위 멤버는 내무, 법무, 공보,
육군등 몇몇 장관만 참석하게 되어 있었으나 회의가 열리는 동안 옆방에
있던 장관들이 거의 합석을 해버려 국무회의 모양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인질들을 서울 시내에 데리고 와 있답니다.
뭐야?
모두가 다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 어디 있다는 장소도 알고 있었나요?
정채명 장관이 물었다.
그건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만...
도대체 철통같은 경비망을 쳤다는 산정 호수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단
말이야? 정말 그놈들이 날고기는 놈들인지 우리 방위망이 개판인지 알
수가 없군..
입 험하기로 유명한 박인덕 공보가 투덜거렸다.
자 여러분 그럼 내각정보국장 진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총리가 국무위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무회의의 격식 같은 것은 벌써
없어졌다.
제가 신상 발언을 좀 하겠습니다.
그때 정일만 국장이 일어섰다. 총리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제가 대통령 각하에게 사의를 표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국무위원
여러분이 다른 의견을 가졌더라도 저는 물러나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의견 없어!
누군가가 야유를 했다.
그러나 정일만의 사의 표명은 대통령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것은
민독추에게 끌려 다니는 시초가 되기 때문에 들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저런 친구를 붙들고 있단 말이야. 각하도 참 딱하셔.
정일만 국장에게 피해를 입은 장관들이 결과를 듣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결정이 얼마나 잘못 되었나하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자정을 막 넘기자 민독추의 백장군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대위 즉
총리 집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민주 독립 정부 추진위의 백장군이요. 중요한 통고 사항이 있으니
총리를 바꾸시오.
전화는 즉각 총리 공관으로 연결되었다.
당신들은 우리의 경고를 무시했소. 지금 시각은 24시 06분.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의 사임 인사는 없었소. 인정합니까?
그게 아니고... 백장군. 우리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국가의 일이라는
것이 ...
쓸데없는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일, 국가의 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국가의 일이란 말입니까? 지금 총리나 대통령이라는 자
들이 하는 짓은 국가의 일이 아니오. 당신들 독재, 비민주 집단의
횡포이지 어째 국가의 일이요? 아무리 좋게 말해도 독재 정권의
망동이지요.
그거야 견해가...어쨌던 우리 협상으로 일을 풀어 나갑시다.
당신들 독재 집단과는 협상으로 될 일이 없어요. 어쨌듣 우리의 경고를
무시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요.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으니 곧
알게 될 것이요?
뭐라구요?
총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희생자는 우리가 경고 한대로 제비뽑기로 정한 것이요.
아니... 여보시오!
총리의 목소리가 분노와 당황으로 비명처럼 변했다.
다시 경고하겠는데. 내일 중에 정보국장을 해임하지 않으면 또 희생자가
나게 될 것이요. 아니 그러지 말고 빨리 우리의 최초 요구인 내각 총사퇴
결의를 하고 물러 나시오.
여보시오..
그럼 또 연락 드리리다.
여, 여보시오...
그러나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그와 동시에 밖에 있던 김영기
비서실장과 서종서 내무 차관이 놀란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비대위 수사본부에서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 일을 하고 있던 추병태 경감은
지친 얼굴로 간이 침대에 잠깐 누워 있었다. 그는 아무 성과 없는 수사를
하면서 이틀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띠리리리...
전화 벨이 울렸다. 추경감은 눈을 부비며 겨우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경감님 전화 바꾸겠습니다.
전화의 목소리는 수사팀에 파견되어 있는 내각정보국의 젊은 요원이었다.
나 수사3부의 신대령입니다. 빨리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좀 와
주시겠습니까? 올 때 캐비넷 속의 2번 파일을 좀 가지고 오십시오.
전화는 일방적이었다. 추경감은 그가 시키는 대로 2번 파일을 가방에
넣어서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언제 나왔는지 수사팀 공용 캐피탈이 나와
있었다.
그가 적십자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그 곳 사람들이 옆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추경감님 오셨군요.
신대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운데는 흰 시트에 덮인 이동식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인 듯한 사람이 서
있었다. 병상 위의 흰 시트 밑에는 시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박사님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아까 제가 당부하신 말 잊으시면 큰일
납니다. 꼭 보안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신대령이 당부를 하자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실내에는 병상 침대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신대령은 아무 말도 않고 시트를 걷었다.
아니...
거기에는 잠든 듯한 모습으로 40대 여자가 누워 있었다. 추경감은 오랜
직업적 직관으로 그것이 시체라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일이 터진 것 같아.
어떻게 죽었습니까?
추경감은 신대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죽은 것이 틀림없다면
사인부터 알아야 이것이 범죄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
2번 파일 가지고 왔어요?
신대령은 추경감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손을 내 밀었다. 추경감은
대단히 불쾌했다. 나이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자기를 하찮은 부하 사병
대하듯이 하는 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신대령의 표정이 워낙
심각하게 굳어져 있기 때문에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추경감이 가지고 온 서류 봉투를 내 밀었다. 열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랐다.
신대령이 봉투를 열었다. 거기에는 16절지 크기 만한 여자들의 얼굴
사진이 20여장 들어 있었다. 얼핏 보아 모두 나이고 40대 이상인 것 같고
혈색이 좋아 보이는 여자들이었다.
신대령이 사진을 한장 한장 바삐 넘겼다.
옆에서 보고있는 추경감은 안면이 있는 얼굴이 많다고 생각하고 저
여자들을 어디서 보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렇구나!
추경감은 그 얼굴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았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높은 사람들의 사모님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냈다.
사진을 한장 한장 넘기던 신대령은 석장의 사진을 골라내었다. 그리고
추경감에게 물었다.
저분이 어느 사진의 주인공 같습니까?
추경감이 석장의 사진과 시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전혀 다른 사람들
같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했다. 여자란 화장했을 때와 안했을 때가 대단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시체의 사진이 누구라는 것은 금방
알아냈다.
이 사진이군요.
추경감이 신대령이 들고 있는 사진 중 한 장을 가리켰다. 얼굴이 갸름하고
하관이 쪽 빠진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귓불까지 빨려 올라가 다른
부위보다 귀는 좀 못생기게 보였다.
틀림없는 것 같죠?
신대령이 추경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경찰에서는 변사자의 신원 확인을 어떻게 합니까?
신대령이 다시 질문을 했다.
보통은 시체에서 발견된 유류품으로 확인하지요. 주민 등록증이나 운전
면허증 같은 것으로 확인합니다.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수첩의 주소나 전화
번호 같은 것을 찾아 연고자에게 연락하지요. 연고자가 있을 경우 불러서
시체를 확인하면 간단히...
아무 단서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되면 좀 복잡하지요. 우선 시체의 성별 나이 등을 추리해 실종
신고자중에 대조를 한다던가, 지문을 채취해서 대조한다던가...
이 시체는 그런 수고는 덜겠구먼...
신대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살 된겁니까? 머리 뒷부분의 상처로 봐서...
추경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함부로 뭐라고 우리가 말해서는 안됩니다.
신대령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진을 건네주었다. 뒤를 넘겨보았다.
차영순.(42) 박상천 해군 장관 부인.
추경감은 짐작했던 일이지만 깜짝 놀랐다. 해군장관 사모님이 심야에
변사체로 병원에 실려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차피 우리가 보고서를 써야 한다면...
이 일은 목숨을 걸고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잠깐만...
그는 옆방으로 갔다. 아마도 시체의 신원을 알아냈다는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들어온 신대령이 입을 열었다.
이 시체는 김포와 강화도간의 국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밤 12시 반경에
발견되었습니다. 교통 사고로 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딴 곳에서
죽여 가지고 그곳에 가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경감님은 이 시체의 발견
경위에 대해 보고서를 만드시고.... 시체는 곧 국립과학 수사 연구소로
옮겨 사인에 관한 조사를 합니다. 그 결과도 추경감이 한꺼번에 보고서에
넣어 주십시오.
추경감은 밤을 새워 시체의 발견 과정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날 밤 12시 30분 경에 강화에서 김포로 들어오던 경찰 순찰차가 길가에
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발견했을 당시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았고 얼른
보기에 과속 뺑소니차의 희생자처럼 보였다.
시체는 신원을 모르는 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지고 합동 수사본부에 의해
즉각 보안 조치가 단행되었다.
추경감은 시체가 발견된 시점이 통행금지 이후이기 때문에 통금 후에 그
곳 국도를 과속으로 달리던 차량에 의해 치어 죽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통행금지 시간 이후에 다니는 차량이라면 경찰차나 군용차등 공적인
임무를 띤 차들일 가는성이 많다. 공적인 임무를 띈 차량이 뺑소니를
했다면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시간에 차영순씨가 그 곳에 무엇 때문에 갔느냐 하는
의문부터 풀어야 할 판이었다.
일국의 장관 부인이 한밤중에 시외의 국도에 혼자 있었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경감은 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상천 해군장관의 가족을 만나려고
했으나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추 경감은 그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었으나 따질 입장은 아니었다.
또한 다른데 에서 살해되어 그곳에 옮겨졌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기 때문에
우선 국립과학 수사 연구소의 부검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국과수 에서 온 의견서를 신대령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사인은 그날 밤 12시전후. 직접 사인은 경골 골절. 어깨 왼쪽 팔과 다리
등에 외상.
그리고 아주 특이한 것은 혈액 속에서 다량의 마취제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차영순 여사는 누군가에 의해 납치되어
마취된 상태에서 국도 변에 버려지고 과속으로 지나가던 차가 치여
죽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가 있었다.
해군 장관의 아내를 납치해서 마취시켜 죽게 하는 음모가 있었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신대령이 말끝마다 보안
보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누군가가 마취시켜 차도에 버림으로서 죽게 만들었다면 자기들 손으로는
직접 죽이지 않았다는 어거지를 쓸려는 것이지...
추경감의 보고서를 다 읽고 난 신대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2.공포의 시간
추경감은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추정한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이튿날
신문에는 엉뚱한 기사가 났다. 조간신문 사회면 밑쪽에 조그만 차영순의
인물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추경감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해군장관 부인 차영순씨 교통 사고로 국도서 사망>
그리고 기사 내용은 박상천 해군 장관의 부인 차영순(43세)씨가 어젯밤
강화 김포 사이 국도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했다. 차영순씨는 강화도
전등사에 불공을 드리고 오다가 뺑소니차에 받쳐 변을 당한 것 같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추경감은 어이가 없었다. 신문에 언제나 진실만 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기사도 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건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야.
추경감은 신대령에게 이런 발표를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 성과도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는 기밀을 지켜야 한다는 상부의 지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기
때문에 함부로 발설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차영순씨 사건은 추경감이 추측한대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민독추가
자기들 말을 들어주지 않은데 대한 첫 번째 보복 조치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교묘한 방법으로 희생자를 낸 것이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매스컴에 털어놓을 수도 있는데 정부가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택해 준 것은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확실했다.
그들이 하는 짓도 떳떳한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납치해 가는 범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용인 받을 수 없는
짓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당분간 이 사건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처음 났을 때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이 한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의 말이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 다시 정부의 비상대책위가 열렸다. 총리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정일만 내각 정보국장의 사의를 대통령 각하께서 받아 들였소
예?
모두가 놀랐다. 정일만이 누구인가? 직급은 정부 조직상 일개 국장에 불과
하지만 그 권력은 총리보다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나라의
모든 일은 정일만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내각 체재를
실지로 유지하고 있는 힘이 그에게서 나온다고 할만큼 그는 막강했다.
내각은 물론이고 정계, 재계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비위를 거슬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장차관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를 무시하고 그의 뜻을 어긴 각료나 정치인들은 하나 하나 제거되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들렸었다. 말을 듣지
않는 정치인이나 각료는 우선 그의 재산형성 과정을 문제로 삼았다.
거기서 먼지 가 나오지 않으면 남녀관계, 가족 친인척까지 엮어 넣는
수법을 썼다. 그래도 먼지 가 없으면 만들어내서 올가미를 씨우고 만다.
그러한 무소불위의 강자를 해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총리의 말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람도 많았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정일만 국장은 12년동안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이 나라를 지탱해온
애국자입니다. 잠시나마 쉬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그가 일어섰다.
총리 각하를 비롯한 국무위원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이 한사람 때문에
많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 각하께는 제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간곡히 말씀 드렸습니다. 각하께서는 잠시 그 자리만 물러
가 있다가 사태가 수습된 뒤 다시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각하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그의 말끝에 모두가 켕기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사태만 끝나면 다시
돌아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임 정보 국장은 누굽니까?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큰 소리로 물었다.
후임에는...
총리가 한참 뜸일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육군 정보부장 성유 소장이 맡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성유부장을 돌아보았다. 정작 본인은 뜻밖이라는 듯이 놀랐다.
벌떡 일어선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날 오후에 내각 정보국장의 경질이 발표되었다. 이유는
정일만 국장의 건강 때문이라는 비공식 발표도 있었다. 내각은 마침내
해군장관 부인 차영순의 무참한 죽음을 보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날 늦게 민독추 집행위의 백장군이라는 자로부터 신임 성유 국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영전을 축하하오. 그런데 내각이 일괄 사퇴를 할 때는 같이 그 자리를
나가야 할 테니까 재임 기간이 한시간이 될지 하루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백장군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사모님들은 지금...
아, 염려 마십시오. 불행하게도 한 분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나머지
스물 한 분은 건강하게 아주 잘 있습니다. 숫자가 더 줄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발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잔인한 짓은 그만 둡시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 것은 전적으로 당신들 하기 나름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친
것을 말하자면 당신들 내각 정보국을 따를 기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불쌍한 해군장관 부인으로 말한다면 당신들 말대로 교통사고 아니오?
말장난 그만 둡시다!
성유 국장이 고함을 꽥질렀다.
허허허... 성질이 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게 신경질을 내서야
일이 풀리겠소?
백장군의 전화 목소리가 더욱 유들유들해졌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 좀 합시다.
성유 국장이 목청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좋소. 오늘 밤 자정에 미국 대사관 앞 정문에서 성유 국장과 단 둘이
만납시다. 만약....
사태가 대단히 숨가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더구나 22 사모님 중 한
사람이 희생된 이후 내각의 분위기는 대단히 달라졌다. 지금 까지 이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장관까지 말이 적어졌고 일부 장관들은
공포 분위기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내각 정보국에서 엄중하게 보도 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이렇다 할 보도가 나오지는 않았다. 서방의 통신중 하나가 정부에 이상
기류가 있다는 정도의 보도를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성유 신임 정보국장이 백장군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무렵 미국
정보책임자가 김교중 육군 장관과 시내 호텔의 은밀한 장소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국 정보 책임자는 인질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김교중
장관도 그의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군의 일부 정보 기관으로부터 대강의
보고를 받아 윤곽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교중 장관은
인질들의 행방에 관한 그 중대한 보고를 비상 대책위나 총리,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정보를 혼자 독점하고 있는 것이
유동적인 지금의 상황에서 처신에 절대로 유리한 점도 있지만 그 보다 그
내용이 자신과도 관계가 있는 군내부가 연관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인질들에 대한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21명의 사모님들은 지금 서울 시내의 은밀한 곳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조그만 봉제 공장 같은 건물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이 산정호수 호텔을 감쪽같이 빠져 나와 거기 까지 온 경로는 참으로
교묘했다. 어느 첩보 영화라도 흉내 내지 못할 방법으로 서울까지
잠입했었다.
산정호수 호텔에서 인질을 감시하고 있던 백장군은 외부로부터 특수 공격
부대가 그 곳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정부 쪽에서 하고
있는 아주 깊숙한 내막까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민독추의 조직원이
비대위나 군 수뇌부에도 있다는 증거가 된다.
백장군은 공격 부대가 출동하기 직전에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갔다.
인질들을 빨리 트럭에 태워라.
백장군이 군복 청년을 보고 명령했다.
트럭에 다 태우기가 어려운데요.
그가 약간 난색을 표했다.
무슨 소리야? 육이오 전쟁때 미군 야전 지프에 열두 명이 타고 후퇴한
기록이 있어. 8톤 트럭에 여자 스물 두명이 못 탄단 말이야?
그, 그렇지만...
여자들이라 아무리 히프가 크다고 하지만 태울 수 있어. 히프가 큰 대신
안 달린 것도 있잖아. 후후후...
그런 긴박한 판국에 백장군은 농담까지 하며 웃었다.
군복청년은 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나가 여자들을 군 트럭에 태웠다.
백장군의 말대로 차곡차곡 짐짝 재다시피 여자들을 태우니까 놀랍게도
스물 두명 모두를 태울 수 있었다. 그 대신 트럭에 탄 인질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포개진 짐짝이 되어 있었다.
여자들이 가지고 있던 핸드백들은 모두 압수되어 내용물에 대한 정밀한
검사를 마친 뒤 그들의 승용차에 실려 있었다.
핸드백을 샅샅이 검사한 백장군의 부하 한사람은 보고서를 백장군에게
주었다. 백장군은 트럭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호텔을 떠나며 보고서를
읽었다.
핸드백의 내용물은 대부분 화장품 류와 현금 등이었다. 어느 사모님은
현금과 수표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어느 사모님은 콘돔을 잔뜩 넣어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가정
주부가 핸드백에 콘돔을 넣어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뻔한
일이었다. 백 장군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어느 장관 부인의
핸드백에서 그런 것이 나왔는가를 잘 보아 두었다.
핸드백 보고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정보로 취급된 것은 사모님들의 전화
번호 수첩이었다. 그 전화 번호들은 남편인 장관들의 사교 범위, 성향까지
짐작하게 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트럭과 승용차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호텔을 유유히 빠져 나온 뒤
가깝게 있는 어느 부대로 들어갔다.
근방 부대의 상급 사령부 소속으로 되어 있는 트럭이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는데 아무 제약도 받지 않았다.
인질이 빽빽하게 탄 트럭 안에는 기관단총을 빼어든 군복 청년이 여자들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트럭은 부대 뒤를 돌아 창고 같은 임시 막사 뒤에 멎었다. 부대 안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모두 조용히 내려요. 말소리를 내면 이 기관총이 입을 막아 줄 겁니다.
인질을 감시하던 청년이 말했다. 인질들은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모두 내렸다.
인질들은 겁에 질려 모두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임시 막사 같은
곳의 문이 열리고 군 앰뷸런스 3대가 나왔다. 환자나 시체를 나르는 차
같았다.
자 일곱 명씩 빨리 타요.
군복 청년 대여섯 명이 어디서 왔는지 나타났다. 그들이 인질들을 일곱
명씩 세대의 앰뷸런스에 태웠다. 한 명이 남는데 그 한 명은 앰뷸런스의
앞좌석에 태웠다. 앞좌석에 탄 사모님은 나이가 가장 많은 정채명 장관의
부인 조여사였다.
앰뷸런스 안에는 기관단총을 든 청년들이 세곳에 다 타고 있었다.
앰뷸런스는 곧 긴급차의 사이렌을 울리면서 부대를 빠져나갔다. 자동차는
산정 호수쪽에서 의정부 쪽으로 오지 않고 그 반대쪽으로 달렸다. 철저한
검문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정부 쪽에서 전방으로 가는 차량이야
그렇게 심하게 검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요?
커튼을 젖히고 손바닥만한 차창으로 밖을 내다본 해군장관의 부인 차영순
여사가 기관총 청년을 보고 물었다.
어딘 어디예요. 서울 가는 거지...
청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그 반대 방향인데요.
차영순의 이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오? 다시는 창밖을 내다보면
안됩니다.
청년이 다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산정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향으로 가기 위해 신 철원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 철원에 이르자 그곳에서 다른 길을 택해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각 검문소에서는 부대 표시가 확실한 앰뷸런스를 까다롭게 검문하지
않았다.
자칭 백장군 일행이 인질들을 싣고 간 앰뷸런스는 인근 의무부대에 있던
것이었다. 이 의무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상급부대의 지휘관 두명이 이
엄청난 일을 도왔던 것이다. 두 사람의 고급 장교중 한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고 한 사람은 김교중 장관이 직접 관할하는 군 수사대에 신병이
억류되어 있기 때문에 김교중 장관은 대강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교가 절대 입을 열지 않기 때문에 배후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김교중은 이 사실을 비대위나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한편 앰뷸런스 세대로 신 철원을 출발한 그들은 유유히 문산을 거쳐
서울의 북부지역에 들어왔다. 상계동의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하자
군복청년들은 인질을 한 사람, 한사람 데리고 내려갔다. 인질이
앰뷸런스에서 내리자 남자 한사람씩이 인질 곁에 붙어 섰다.
제일 먼저 차영순 여사가 차에서 내려서자 나이 서른쯤 되어 보이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곁에 다가섰다.
사모님 여기서부터는 우리 두 사람만이 행동을 합니다.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 가시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젊은이가 나직하게 말하며 차여사에게 슬그머니 팔짱을 끼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여사가 사방을 둘러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청년이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서울이입니다. 상계동.
청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벌써 어둠이 깔려 여기 저기에
전기불빛과 네온사인들이 찬란했다. 많은 인파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차영순은 사람들의 모습만 보아도 살 것 같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차영순이 청년의 귀밑에 입을 대고 나직하게 다시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요.
청년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차영순여사의 팔을 꽉 쥐었다.
청년은 군인이이예요?
그런걸 자꾸 묻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서 사람 살려 하고 소리치면 어떻게 되지요?
차영순이 사방을 돌아보며 물었다. 자기만 이 청년과 팔짱을 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민숙여사나 문숙 총리부인도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차영순은 이들이 여기서부터 남녀 2인조로 행동하며 딴 곳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치면 한 사람이 죽게 됩니다.
청년은 갑자기 차영순의 왼손을 잡아끌고 자기의 바지 호주머니로 가지고
갔다.
여기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차영순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섬뜩하고 날카로운 금속 촉감의 무엇을 느낄
수 있었다. 칼이었다.
차영순은 갑자기 공포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 짓으로
보아 능히 그럴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같이 전철을 탔다. 수많은 남녀노소가 차에 타고 내리지만
아무도 차영순의 입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야속할 뿐이었다.
청년과 나란히 전철 의자에 앉아 안을 둘러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학생
차림의 젊은이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을 이리 저리 넘기며 보았기
때문에 큰 글씨로 된 뉴스는 다 읽을 수 있었으나 자기들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장관 사모님 스물 두명이
납치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옆에는 김순주
여사가 나이 마흔도 넘어 보이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점잖게 앉아 있었다.
얼른 보면 부부처럼 보이기도했다.
그들이 차에 흔들리면서 얼마를 갔을 때였다.
다음은 서울역이 되겠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 방송이 있고 얼마 안되어 차가 멎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탔다. 차내는 다시 정리가 되고 차가
출발했다. 차영순 여사와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여사 앞에 젊은 군인
두사람이 서 있었다. 전방 부대에서 휴가라도 나온 것 같았다.
그때 차영순이 김순주 여사의 얼굴을 흘깃 보았다. 대단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국무위원 사모님 중 가장 미인이고 성격도 활달해 모임이
있을 때는 늘 리드 역할을 해 오던 여자였다. 농담이나 음담패설도 잘
늘어놓아 사람들을 웃기고는 했다.
잔뜩 긴장해있던 김순주 여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 살려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김순주 여사는 벌떡 일어나서 차안의 사람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살려 주세요. 나는 외무장관부인이에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김순주는 함께 옆에 앉아 있는 감시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차영순 여사도 일어나서 소리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른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있다가 김순주 여사가 두 번째 악을 쓸 때야
일어나기 위해 움찔 거렸다.
꼼짝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소리를 지르거나 움직이면 이게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옆에 있는 사나이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의 칼끝이
차영순 여사의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차여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김영순이 소리를 쳤으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호기심 어린 얼굴로 김순주여사와 40대 후반의 감시자를
번갈아 볼뿐이었다.
이봐요. 젊은이 나 좀 살려 주어요.
김순주 여사는 앞에 서 있는 군복의 두청년 팔을 붙잡고 울먹이듯이
말했다.
아주머니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요. 이 사람이....
젊은 군인이 옆의 감시자를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그때였다. 감시자가
느닷없이 철썩 하고 김순주 여사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구먼. 정신 병원에 도로 처넣어야
되겠어.
감시자는 이렇게 말하며 김순주 여사를 우악스럽게 끌어다 자리에
앉히고는 다시 두어 차례 뺨을 때렸다. 금방 김순주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사람 살려! 제발 사람좀 살려 주어요!
얼굴이 피범벅이 된 김순주가 처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차영순은
일어나서 무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옆구리의 칼 때문에 겁에 질려
떨고만 있었다.
젊은이들 신경 쓸것 없어요. 이 사람은 우리 집 사람인데 벌써 근10년째
이러고 산답니다. 조금 나은 줄 알고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 갑자기
이렇게 발작을 하곤 한답니다.
감시자가 차안의 사람들이 들으란 듯이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입니다. 나 좀 살려 주세요. 나는 외무부장관
배소성씨의 처랍니다. 나는 지금 이 사람한테 납치 당했어요.
김순주가 다시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여편네. 이제 외무부 장관이야? 지난달에는 네 서방이 육군
참모총장이라고 떠들더니 이제 외무부 장관으로 승진 한거여?
감시자가 김순주의 양팔을 꼼짝 못하게 쥐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이 불쌍한 것아 정신 좀 차려. 네 남편은 장관도 장군도 아니고 미아리에
있는 설렁탕집 주인이야.
감시자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채 김순주를 붙들고 말했다.
얼굴에 피칠을 하고 눈동자가 이상해진 여자가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내가
장관 부인이라고 떠들어야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김순주의 남편으로 둔갑한 감시자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서
웃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별 미친년 다 보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아주머니 정신 좀 차리세요. 옆에 계신 아저씨가 아주머니의 주인이에요.
팔을 잡혔던 군복 청년이 불쌍하다는 듯이 김순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젊은이 고맙네.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곧 조용해 질걸세.
감시자가 이렇게 말하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김순주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아니에요. 이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요. 나 뿐 아니라 장관들 부인을 모두
납치했어요.
김순주가 다시 일어서며 악을 썼다.
어허... 이거 큰일 났구먼...
감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차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김순주의 말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쯧쯧쯧... 남자란 여편네를 잘 만나야지...
평생 고생이겠구먼...
차안의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차며 미친 여편네를 데리고 사는 남자를
동정했다.
전철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플래트홈에 닿았고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탔다. 내리는 사람들은 미친 여자 한사람 구경했다는 표정으로 혼자
씩 웃었다.
이렇게 해서 김순주 여사의 필사적인 탈출 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전철은
서울역을 지나 밤 11시경 사당 역에 도착했다. 역에 도착한 인질들은 들어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 한사람씩과 짝을 맞추어 사당역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역 앞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 버스에 옮겨진 채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실려갔다. 같이 온 남자들은 모두 없어지고 백장군과 젊은이 몇
사람만 함께 있었다. 그들도 나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수용되었다. 사당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장지역 어디라는 짐작만 할 뿐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학교 교실 같은 곳에 들어 갔을 때 모두 줄을 지어 바닥에 앉게 한
사람은 여자였다.
사모님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여기는 서울 시내입니다. 여러분의
고생은 모두 이 나라 민주화를 앞당기는 거름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잘 풀려서 여러분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중의 한사람이 접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 갈대까지 내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집행위의 여성부장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장난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모든 일에 절대 협력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도록 합니다.
바싹 마른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30대의 여성부장은 이렇게 말하고
나갔다. 헐렁하고 모양 없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여자지만 눈
하나만은 반짝였다.
사모님들은 다른 여자 감시원들이 가져다 준 김밥으로 요기를 한뒤 마루
바닥에 들어 누웠다. 난방이 되지 않아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담요 두장씩만 가져다주고는 그냥 자도록 했다.
모두가 잠이 올 리 없었다. 한참동안 뒤척이고 있던 사모님 중 한 사람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잘 하면 여기서 도망 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였다. 그는 전철
안에서도 탈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고도 또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여기는 여자들만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모두가 네명이야.
무기도 가지지 않은 것 같아.
모두가 나직하게 한마디씩 했다.
내일 아침 아침밥 가져와서 나누어 줄 때 해치우자구.
총리부인 문숙 여사가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이 건물 밖에만 나가면 서울 시내야. 우리가 집단으로 뛰어나가면 성공
할 가능성이 커.
문숙 여사의 이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의 20대 여자가 아침밥을 가지고 들어왔다.
햄버거를 일회용 용기에 담아서 들고 와 나누어주었다. 추운 겨울 아침에
써늘한 햄버거 였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여자가 햄버거를 다 나누어 준 뒤 식수로 쓸 큰 물통을 마주 들고
들어왔다. 그들이 식수통을 막 놓고 일어설 때였다. 문숙 여사가 눈짓을
하자 사모님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달려들어 두 여자를 깔아뭉갰다.
으, 윽...
두 여자는 소리칠 틈도 없었다. 수건으로 입을 막고 여자들의 허리끈으로
손발을 묶었다. 두 여자는 구석에 밀쳐지고 담요로 덮어 씨여 졌다.
성공이다!
모두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 차영순 여사와 팽여사가 좀 나가보고 와요.
문숙 여사가 명령했다. 팽여사란 공보부 장관 부인 팽희자여사를 말했다.
두사람이 비교적 젊고 재빠르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곧 일어나서 감시원들이 드나들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1분이 한 시간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였다. 두 사람이 들어왔다.
{{}}13.수치의 시간
어떻게 되었어요?
문숙여사가 숨 돌릴 틈도 안주고 두사람에게 다잡듯이 물었다.
이 문을 나가면 긴 복도 같은 것이 있고 그 끝에 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있어요. 마당에는 제품 같은 것을 여기 저기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어요.
일단 마당까지 나가면 흩어져서 행동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요.
팽희자 여사가 요령 있게 설명했다. 모두가 긴장해서 얼굴이 굳어진 채
팽여사의 설명에 귀를 귀우렸다. 외무장관 부인 김순주 여사는 너무
긴장해 이를 덜덜 떨고 있었다.
자, 모두 들었지요? 그럼 지금부터 조용히 저 문으로 나가는 겁니다.
마당까지 가서는 각자 알아서 행동합니다. 여기는 공단 지역이니까 밖에는
아마 인가보다 공장이 많을 것입니다. 아무 공장이나 문이 보이면
들어가십시오. 길로 도망치다 잡히는 것보다 훨씬 낳을 테니까요.
문숙 여사의 지시를 들으며 김순주 여사는 하이힐을 벗어 손에 들었다.
모두 운동화 같은 간편한 차림으로 왔으나 김순주 여사만은 한껏 멋을
내려고 그랬는지 야회복 같은 화려한 외출복에 하이힐까지 신고 있었다.
하기는 여기 모인 스물 두명의 사모님 중에는 그녀가 가장 인물이 뛰어
났기 때문에 그것을 과시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행은 발소리를 죽이고 문을 나섰다. 차영순과 팽희자가 앞장서고 그
뒤를 문숙, 조민숙등이 따랐다.
그들은 마당까지 무사히 왔다. 마당을 나선 그들은 하나 둘 흩어져 마당에
쌓아놓은 화물더미 뒤로 사라졌다. 김순주도 조민숙과 함께 방금 나온
건물의 뒤로 돌아갔다. 탈출이 일단은 성공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담이 이렇게 높아?
김순주와 함께 건물 뒤로 돌아온 조민숙은 자기들 키의 두배나 됨직한
공장 벽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들은 담을 따라 나갔다. 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건물과 담 사이의 좁은 마당으로 한참
걸어가자 앞이 막히고 말았다.
나무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더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김순주가 조민숙을 돌아보며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이 것을 넘어가야지.
조민숙이 상자더미 위로 기어오르려고 했다. 네모 반듯한 상자들이 거의
빈틈없이 포개져 있었지만 더러는 손으로 잡거나 발판이 될만한 틈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민숙은 김순주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편이었으나
그녀보다 먼저 상자더미를 오르기 시작했다.
김순주도 들고 있던 하이힐을 집어던지고 상자더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어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기진 맥진해서 주저앉고 말았다.
도저히 안되겠어요. 앞으로 돌아갑시다.
조민숙이 숨을 돌린 뒤 일어서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두사람은 앞쪽
마당으로 나갔다. 목을 빼고 살폈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모두 무사히
도망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발자국을 죽이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조그만 화단이 잘 가꾸어진 마당이 나왔다. 그 끝에 공장의 정문이
보였다. 두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들이 거의 정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요것들이!
벽력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억센 손이 조민숙의 뒷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김순주도 어디서 나왔는지 튀어나온 사나이에게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어마!
두 여자가 까무러칠 듯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뜨거운 맛을 좀 보여 주어야겠어. 여기서 감히 도망을 쳐?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김순주가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빨리 데리고 가! 이제 다 잡은 거야?
나이 조금 들어 보이는 여자가 두 남자를 보고 소리 쳤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본 여자였다. 이곳의 책임자인 것 같았다.
예
두 사나이는 조민숙과 김순주의 팔을 비틀어 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처음 들어 왔을 때 갔던 곳이 아니었다.
조민숙과 김순주는 창고에 들어서자 마자 희한한 풍경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곳에는 사모님들이 모두 붙잡혀 와 있었다. 그러니까 김순주와
조민숙이 스물 한 번째와 스물 두 번째로 붙들려 온 것이었다. 잡혀온
사모님들은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옷을 벗기운채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그 곳은 저번에 수용되었던 창고보다는 덜 추운 것이
다행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브레지어와 팬티만 입은 채 옷을 홀랑 벗기우고 마루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혀 와 있었다.
빨리 벗어!
그들을 데려다 준 남자가 나가자 그 곳을 지키고 있던 여자가 놀란
조민숙과 김순주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
두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었다. 검정색 브레지어와 팬티를 입은
김순주와 흰색 내의의 조민숙은 대조적이었다. 살이 붙어서 굴곡이 잘
보이지 않는 조민숙과 풍만하면서도 굴곡이 선명한 김순주의 몸매는
대조적이었다. 살결도 김순주쪽이 훨씬 윤끼있고 희게 보였다. 늘 처녀
시절에 미스 코리아 예선에 뽑힌 일이 있다고 자랑하던 김순주는 과연
빼어난 몸매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모두 생각했다.
저쪽에 가서 앉아요!
감시하던 여자가 소리쳤다. 조민숙과 김순주는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기다시피 벌거숭이 일행 속으로 들어갔다. 꼭 포로 수용소의 여자
죄수들처럼 보였다.
당신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려고 우리가 애를 썼지만 스스로 자기 인격을
자기들이 버렸어요. 강아지들처럼 몰래 도망을 가다니!
이 곳 책임자인 것 같은 나이든 여자가 일행을 노려보며 떠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 여자를 여성 부장이라고 불렀다.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일이니까 지금부터 당신들이 받는 대접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의 싸늘한 얼굴에서 여자들은 저절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몇 가지 규칙을 일러주겠어요. 잠을 자기 전에는 담요를 몸에
덮으면 안된다. 문이 열려 있더라도 절대로 밖을 내다보면 안된다.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아선 안된다. 만약 이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빤쓰까지 마저 벗겨버릴 것이다.
화장실은 어떻게 합니까?
문숙 여사가 불쑥 질문을 했다. 부장이라는 여자가 옆에 있는 여자
감시원을 쳐다보았다.
줄을 서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옆이거든요.
그녀가 옆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다시 도망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을 남자 부원들이 와서 다루게 될
것이요.
여성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사모님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입술이 파랗게 변한 여자들도 있었다. 옷을
입었을 때의 모습과 벗었을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그래도 장관 사모님의 체면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배어 있는 것 같던 여자들도 모두 하잘것없는 벌거숭이에 불과하게
보였다. 벗은 모습은 가지각색이었다. 몸매를 잘 가꾸어 그래도
여자로서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이 너무 쪘거나 피부가
쭈굴쭈굴한 볼품없는 여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판이었다.
그들은 거의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어야만 했다. 서너 시간 지난 뒤에
여성 부장이 다시 나타났다.
여러분의 바깥양반들이 미련해서 협조를 잘 안하는 것 같아요. 대신
여러분이 고생을 더 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부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두 남자가 책상 두개와 의자를 들고
들어와 앞에 놓았다. 남자들은 벌거숭이 여자들이 무더기로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기가 질린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의 인생상담을 좀 하겠어요.
여성 부장이 책상에 앉으며 심술궂게 말했다.
여성부장의 옆에는 젊은 여자 두명이 필기 준비를 해가지고 앉았다. 여성
부장이 심문하는 내용을 적으려는 태도 같았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좀 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어요. 여기 기초 자료가 있으니까 아예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파일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럼 누구부터 시작할까요? 자기 인생을 고백하고 반성할 지원자는
없나요?
그녀가 벌거숭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저 여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자세히 몰라 모두가 불안한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망자가 얼른 나오지 않는군요. 그럼 내가 지명을 하겠어요.
그녀는 일행을 다시 눈 여겨 둘러보다가 박인덕 공보부 장관의 부인
팽희자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팽희자씨 앞으로 좀 나오실 까요?
지명을 당한 팽희자씨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베이지색 브래지어와
끝에 주름이 잡힌 베이지색 팬티를 입은 그녀는 살이 좀 찌긴 했으나 그
나이치고는 늘씬한 몸매였다. 가느다랗고 하얀 종아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리로 좀 나오실 까요?
여성부장이 자기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팽희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암소 모양 무거운 걸음으로 앞에 나앉았다.
거기 앉아요.
정희자가 여성부장을 향해 앉았다.
나를 보지 말고 저쪽 사모님들을 보고 앉아요.
팽희자가 돌아앉았다. 다른 여자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얼굴로 여러 여자들을 향해 의자에 앉은 팽희자는
자기의 무릎이 벌어져 숙녀답지 않은 앉음새가 되어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피부가 맑고 풍만했다. 그녀의 맑은 피부는 고급스러운 팬티
브래지어와 함께 약간의 품위까지 풍겼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가정
부인답지 않은, 약간의 끼가 흐르는 것도 감출 수가 없었다.
우선 자기 소개부터 해보세요.
여성부장이 팽희자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팽희자는 어떻게 하라는지
몰라 고개를 뒤로 돌려 여성부장을 쳐다보았다.
남편 관등성명도 몰라? 누구 여편넨지 대봐요.
갑자기 여성부장의 말이 거칠어졌다.
예, 예... 저는 박인덕 공보부 장관의 부인 팽희잡니다.
팽희자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하하하... 지가 제보고 부인이라고?
처입니다.
팽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오빠도 장관이란 이야기는 왜 안해요?
여성부장이 다그치듯 말했다.
예. 저희 오빠는 공군장관인 팽인식씨 입니다.
또 다른 오빠는....
예. 둘째 오빠 팽선식씨는 경호실 차장이고.... 동생 팽만식은
세무서장이고...
잘 하는군. 처남 매부간에 장관질 해먹는가 하면 요직이란 요직은 다
차지했군. 이 나라가 너희들 팽가의 나라냐?
여성부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따지면 당신네 집안 식구가 해먹고 있는 것이 어디 그 것 뿐이겠어? 집안
자랑은 그쯤 해두고 이제 본인 이야기 좀 해보시지... 본인 팽희자씨
명의로 된 아파트와 콘도가 몇 채나 되지요?
그때였다.
남의 사생활을 너무 들추지 맙시다. 이러는 당신들의 목적이 도대체
뭐요?
총리 부인 문숙 여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행 중에 나이 가장
많은 그녀는 자기가 나서야 한다고 판단 한 것 같았다.
누가 함부로 떠들라고 했나요? 우리는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물 두명 아내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힘없는 아녀자들을 불법 감금하고 협박이나 하는 일이 잘하는
일인가요? 진정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따위 지각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숙 여사가 지지 않고 막 고함을 질렀다.
누가 지각없는 짓을 얼마나 했는지 조금 참고 기다려 봐요.
문숙 여사가 만만치 않게 나오자 여성 부장이 오히려 목청을 낮추었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부터 시작된 이 청문회가 끝난 뒤에 과연 여러분이 이 나라를 이끄는
국무위원들의 아내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합시다. 그럼 청문회를 계속
하겠습니다. 팽희자씨. 어디 아파트부터 이야기 해봐요.
팽희자가 더듬거리는 말로 대답했다.
압구정동에 60평짜리 하나 있어요. 장관 관사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집인데 지금은 전세를 놓았어요.
또?
여성부장이 독촉을 했다.
대치동에 마흔 두평짜리 한 채....
또?
이제...
팽희자가 대단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싫다 이거예요? 그렇다면...
여성부장이 두툼한 파일을 넘기기 시작했다.
광주군에 대지 2만평, 경남 사천에 농지 임야 합쳐 8만평, 속초에 30평형
콘도, 해운대에 콘도 2개. 이래도 숨길 거예요? 더 들쳐낼까요?
그녀는 파일을 읽다가 말고 팽희자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건 모두 제 이름이 아니고...
팽희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남편, 친정동생 이름이다 이거지.
전 잘 모, 모르는...
그녀의 입술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돈이 어디서 모두 난 것인지 백분의 일만이라도 대 보시지요.
팽희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말을 못해요? 남편 박인덕 장관이 공무원, 재벌, 관련업체등으로부터
닥치는 대로 뇌물 받아 부동산에 투기해서 번 돈이라고 왜 말 못해요?
그녀는 파일을 다시 들여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당신네 정권이 자랑하는 그 내각정보국에서 보고한 것을 보면 당신
부부와 국민학교 다니는 아들까지 동원된 가족 친지 이름으로 사 둔
부동산이 2백억도 넘는다고 하는군. 전국구 국회의원 처음 했을 때만 해도
집한칸 달랑 있던 사람이 대통령 비서관. 차관, 장관 지내는 6년동안에
월급으로 이렇게 모았단 말인 가요? 어디 해명 좀 해 보시지...
여성 부장의 말에 벌거벗은 사모님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항상 청렴
결백한 장관으로 알려진 박인덕씨 부부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그 것 보다 이 납치 집단들이 내각
정보국의 일급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또 더 충격을 받은 일은 내각 정보국에서 장관들의 재산을
모조리 체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아끼고 아껴서 모은 재산입니다. 친정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도 있고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 아껴서 모은 재산이라구요? 공무원 월급을
아껴서 몇 년 사이에 몇 백억 원씩이나 모았다구? 야, 이 나라 참으로
좋은 나라군요.
여성 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천장을 쳐다보며 한참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장관 사모님! 영등포 어둠침침한 공장 구석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 열 여덟 시간씩 일하는 우리 봉제공 딸들이 발이 부어
걷지 못할 정도로 혹독하게 미싱질을 해서 한 달에 얼마 받는지 알아요?
20만원도 채 안돼요. 그 불쌍한 노동자들이 2백억 원을 모으자면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1만 달, 8백년 이상을 모아야 하는 돈이야. 그런데
당신네들은 팔이 열 개야? 발이 백개야? 사모님 밑구녕은 구멍이 열
개라도 되나? 무슨 수작이야!
여성 부장은 공연히 자기 말에 자기가 흥분해서 욕설을 퍼부으며
떠들어댔다.
팽희자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고도 장관 자리에 버티고 있겠단 말입니까? 내 말이 틀렸어요?
이래서 우리가 나선 것입니다.
그녀는 책상을 치면서 열변을 토했다.
팽희자씨는 들어가고 다음 육군장관 사모님 선영실씨 좀 나오실 까요?
그때 얼굴을 감싸고 의자에 앉아있던 팽희자가 여성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선 들어 가 앉아 있어요. 선영실씨 빨리 나와 이 의자에 앉아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브레지어와 그야 말로 치부만 겨우 가린 작은
팬티를 입은 선영실이 나와 의자에 앉았다.
선영실씨 자기 소개부터 할까요?
여성부장이 다시 파일을 뒤적이며 말했다. 선영실에 관한 파일을 찾은 듯
그것을 한참보고 있다가 비웃음 같은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김교중 육군 장관 부인 선영실 입니다. 나이는 서른 네살. 두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취미는 도예, 학력은 세계대학 최고 경영자 과정
수료입니다.
그녀는 거리낌없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자에 앉은 자세도 다리를
딱 포개어 당돌하게 보였다. 조금 전의 죄인 같은 팽희자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비교적 잘 빠진 몸매에 오기가 철철 넘치는 것 같았다.
김교중 장관이 나이 몇인데 선영실씨는 서른 넷이란 말인 가요? 몇 살
차이에요?
열 네살 차이에요. 왜 그것도 민주화의 장애 요소인가요?
아니?
선영실의 뜻밖의 말에 모두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일격을 당한 여성 부장은
아무 말도 않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실내에 침묵이 흘렀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래 열 네살이나 차이가 난 연유를 좀 설명해
보시지. 학력은 고교 중퇴군...
여성부장이 파일을 한참 들여다 본 뒤에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늦게 만났어요. 그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 만났으니까요.
선영실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어디서 만났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봐요.
벌거숭이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앉아 선영실의 입만 쳐다보았다. 우선
겁에 질려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던 여성부장을 대하는 너무나 당당한
그녀의 태도가 은근히 시원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사생활이 파헤쳐진다는
데 입맛이 끌렸다.
선영실은 국무이원들 모임에서도 가장 젊고 예쁜 축에 들었다. 그리고
말솜씨가 유창하고 세상 물정에 밝아 은근히 그 여자의 과거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였다.
김교중 장관과는 나이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좀 어울리지 않는 사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떻게 한 이불 덮고 사는 사이가 되었는지 얼른 이야기해봐요.
여성부장의 말은 한껏 비꼬는 투였다.
물론 이야기하지요. 우리가 처음 사랑을 느낀 것은...
사랑타령 따위는 집어 치워요.
여성부장이 화를 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예요? 당신이 자꾸 하라고 하니까 하는 얘기
아니에요?
선영실이 마주 화를 내 주었다.
당신들 같은 주제에 무슨 고상한 사랑은 사랑이야? 술집 작부와 주정뱅이
똥별이 만나 개처럼 그 짓이나 한 주제에...
여성부장이 더는 못참겟다는 듯이 야비한 말을 마구 퍼부었다.
그래요. 우리는 룸 살롱에서 만났어요. 서부 이촌동에 있는 비밀
요정이였어요. 나는 그 곳의 호스티스고 그이는 손님이 였어요. 우리는
거기서 만나 사랑을 알기 시작했어요. 그이는 당시 그의 와이프와 마음이
맞지 않아 이혼 수속 중이었어요. 우리의 사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어요. 우리는 마침내 결혼했어요. 그이가 전방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였어요. 이제 속 시원해요?
선영실이 고개를 뒤로 돌려 여성 부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뒤틀린 긴 목이 희고 아름다웠다. 포개고 앉은 두 다리가 탄탄하고
육감적이었다. 배에도 군살이 하나도 없었다.
선영실의 말이 시원 시원하기도 하지만 사생활의 비밀이 낱낱이 공개되는
것이 더 시원하다고 밑에 앉아있는 국무위원 부인들이 생각했다.
흥, 그러면 그렇지. 술집 작부 출신이 어디 감히...
그의 젊음과 빼어난 인물, 그리고 당당한 태도, 달변 등이 시기의 대상이
되어 왔었지만 이제야 선영실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사모님들은 모두
경멸의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정말 국무위원 부인 망신이야. 어떻게 저런 여자가 끼어 가지고...
그녀들은 지금 자기들이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가를 잠시 잊고 선영실에
대한 고소함 같은 것으로 잠깐 만족했다.
그래 그 화냥기 흐르는 엉덩이를 흔들어 40대 유부남을 홀려 이혼 시킨
뒤에 무슨 못된 짓들을 다 했어요? 백분의 일이라도 털어놔 봐요.
여성부장이 다시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온갖 상소리를 다 석어 가며
다그쳤다.
못된 짓 한 일은 기억에 없어요.
선영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안했다구? 그럼 내가 좀 대 볼까? 당신 친정 오빠는 남대문 시장의 백수
건달인데 당신이 김교중 장군 꼬셔낸뒤 갑자기 졸부가 되어 군납업체
사장이 되어 홍콩으로 노름하러 사흘들이 나가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
할껍니까? 그리고 의정부에서 싸구려 식당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던
호스티스 출신 당신 언니와 형부가 갑자기 서울 영동에 10억대가 넘는
땅을 사들여 호화 갈빗집을 차린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지. 그 갈빗집의
절반은 선영실 당신 지분이라고 하던데...그뿐 아니야. 김교중과 선영실
이름으로 되어 있는 헬스클럽 회원권 여섯개, 골프 회원권 3개, 콘도
회원권 네개. 이건 모두 어디서 난 것이지요? 당신들 정권의 정보기관이
보고한 당신들과 친척 명의로 된 재산이 줄잡아 60억이 넘는다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 할거예요?
이 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예요. 시장 경제의 원리를 존중하는 자유의
나라란 말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 능력껏 사는 것 아녜요?
선영실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자유? 자본주의? 시장경제? 정말 웃기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군인들 진급
심사때 마다 돈 보따리 거둬들이고 군수품 입찰 때마다 문 앞에 줄서든
썩은 업자들로부터 짜낸 것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남편이
별하나면 여편네는 별 둘 행세를 한다는 것쯤은 모든 국민들이 다 알아요.
청춘을 나라를 위해 바친 사람들이 군인입니다. 당신네 같은 생각
모자라는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던 국민들이 굶어죽든 알 바 없이 그
알량한 인권이 어쩌구 민주주의가 어쩌구 하면서 헛소리 할 때 그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고뇌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처럼
살만하게 만들고 나라 잘 지켰으면 골프회원권쯤 몇 개 가지는 로열티도
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선영실은 여전히 기가 죽지 않았다.
뭐라구? 로열티라고? 돈 긁어다 받치고 아부한 덕택에 얻은 별자리, 장관
자리니까 로열티 챙기겠다는 뜻이야? 나 참 기가 막혀!
여성부장은 정말 기가 막힌지 물을 한 컵 부어서 꿀꺽 꿀꺽 마셨다.
부관인지 당번병인지 시켜 남편 오입질 하는 것 감시하게 하고 보고
소홀하게 한다고 이 나라 장교를 뺨 때리는 것도 장군 부인의 로열티야?
어머, 어머...
듣고있던 다른 장관 부인들이 더 놀라는 것 같았다. 육군장관 부인이
표독스럽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었으나 그런 정도라는 것은 그들도 잘
모르는 스캔들이었다.
구제 불능! 선영실은 들어가고 다음 상공업장관 부인 황순덕씨!
선영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제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뒤이어 황순덕 여사가 허리를 굽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나이 40대 중반인 그녀는 살이 쪄서 축늘어진 뱃가죽이 접힐
정도였다. 탄력을 잃은 유방도 비겟덩이처럼 무기력하게 보였다. 넓적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심술이 디룩디룩 흘렀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요.
예, 저는 상공업 장관 윤항규씨의 처되는 황순덕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올해 마흔 여섯살이구요 체중은 59킬로...
후후후...
그때 누군지 웃음을 못 참고 웃었다.
조용히 해욧! 그리고...
여성 부장은 웃지도 않고 독촉했다. 황신덕은 덥기는커녕 소름이 돋을
정도로 쌀쌀한 실내인데도 땀을 뻘뻘 흘렸다.
재산 같은 것은 모두 남편이 관리하니까 나는 잘 모르고요..
지금 사는 집이라도 대봐요.
여성부장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녹번동 단독 주택에서 십년째 살고 있습니다. 대지는 55평이고 건평은
40평입니다.
아니...
다른 국무위원 부인들이 못믿겠다는듯이 한마디씩 했다.
설마하니...
조용히 해요.
여성부장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친뒤 말을 이었다.
남편이 무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내인 당신이 칠칠치 못해서 그런 것
인줄 알기나 해요? 그것도 이 나라 노동자들의 집에 비하면 대궐이에요.
윤항규 장관은 그래 좀 깨끗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아내인
황순덕이 얼마나 주책스런 짓을 많이 하는 여자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입으로 이야기 해봐요. 남편이 깨진 곗돈 물어넣다가 직장 쫓겨 날뻔 한
일.. 어디 그 뿐이야? 이혼 당할 번 한일 고백해봐요.
그녀는 다시 그 문제의 파일을 들쳐 보면서 이야기했다.
그런 일은 ...
내 입에서 험한 소리로 말하기 전에 당신 입으로 변명해보아요.
황순덕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편은 모든 점이 다 모범적이고 좋은데 한가지...
빨리 말해요.
한가지 거시기가 시원치 않아 밤일이 제대로 안되어서...
여기 저기서 다시 술렁이며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반대로 저는 그 일을 밥먹는것 보다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좀 주책을
부린 것뿐입니다.
좀 주책? 일 국의 장관 부인이 장관의 운전사와 붙어먹은 일이 좀
주책이요?
실내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어쩐지 얼굴에 화냥기가 흐르더라니까.
저 얼굴을 가지고 세상에...
사모님들은 자기들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고 심판대에 오른 황순덕 여사
흉을 보기에 바빴다. 불법 조직원들에게 볼모로 잡혀와 벌거벗기운 채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서도 같은 처지의 여자들에게 빈축과 비웃음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디룩디룩 하다고 하기에는 무엇 하지만 비계덩이 덩치의 황순덕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빨리 설명을 해 봐요. 나 보다 여기 앉아있는 국무위원 사모님들께서 더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여성 부장이 슬슬 비꼬면서 독촉했다.
박기사와는 딱 네 번밖에...
황순덕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는 표정이었다.
몇 번까지 다 외우고 있군. 그래 그 네번은 왜 하게 되었는지 설명을 좀
해 보시지...
그 녀석은 나쁜 놈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부 엿보아 두었다가
나를 괴롭히고는 했습니다.
황순덕은 오히려 자기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식으로 말했다.
설명을 해봐요.
우리 그이 친구 중에 나를 은근히 좋아하는 임사장이 있었습니다.
임사장은 그이한테 가끔 용돈도 대어주는 처지였습니다. 임사장은...
임사장은 무엇을 하는 사장입니까?
여성부장이 말을 끊고 물었다.
외국에서 뱀, 지렁이등 건강식품을 수입하는 회사 사장이죠.
그러니까 상공 장관인 당신 남편 윤항규씨가 그 뒤를 봐주고 대신
용돈이나 얻어 쓰는 사이란 말이지요?
여성 부장이 빙그레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건 아니에요. 우리 윤장관은 남을 봐 줄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도 아닐
뿐 아니라 뱀 같은 것을 수입하는 것은 보건부에서 하는 일이 돼놔서...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봐요. 솔직하게 .
임사장은 우리 집 식구처럼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황순덕이 처음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른
사모님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의 입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일을 벌이게 된 대목부터 말해봐요.
여성부장은 다른 인질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스캔들
청문회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일년쯤 전이에요. 그이가 장관이 된지 석달쯤 되었나요.
임사장이 우리 집에 와서 셋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지요.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그이는 대통령 각하가 급히 부르셔서 외출해 버리고
우리는 둘이 남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었지요.
분위기 좋았네.
여성부장이 비꼬았다.
음악을 들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그이의 잠자리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우리는 서로 흥분해서 그냥... 나중에 보니까
우리는 침대 위에서... 정말 나도 내 정신이 아닌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
였어요.
그래서?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그녀의 입을 쳐다 보고있었다.
그 뒤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둘만 만나게 되면 뜨거웠지요.
남편은 전혀 눈치를 못 챘다는 겁니까?
여성부장이 여러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을 물어주었다.
예. 남편 대신 박기사가 눈치를 채고는... 처음엔 남편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 돈을 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게 큰돈이 없다는 것을 안 박기사는
대신....
그래서 몸으로 때웠다 이거군요. 또 다른 남자는 없어요?
아니 제가 뭐 창녀예요? 이 남자 저 남자를...
황순덕이 처음으로 화를 냈다. 듣던 사람들은 모두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러분 중에 질문 있으면 해봐요.
여성 부장이 갑자기 인질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임사장하고 박기사 중에 누가 더 좋았어요?
재무장관 부인 이미선이 질문했다.
윤장관 하고 비교하면 어땠어요?
아이, 혼자만 재미봤군요?
남자가 몇이야? 호호호...
여기 저기서 선망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남편 이외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도덕 불감증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조용히들해요. 뭐가 그리 잘한 짓이라고 떠들고 야단이에요!
여성부장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모두 자기들이 지금 어떤 입장에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것 같았다.
일국의 장관 부인들이 이 모양으로 타락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야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남자들처럼 타락한 지도층이
이 나라에 일찍이 있었던가요? 이것은 이 나라 지도층이 타락한 부분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째서 당신들보고 권좌에서
물러가라고 하는지 여러분들이 지금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겁니다.
황순덕씨 이제 내가 창피해서 당신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어요.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분하고 부끄러워 당신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단
말이에요.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요.
실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재무장관 부인 좀 나와요. 남의 섹스 스캔들에 그렇게 흥미가
많던데 당신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김휘수 재무장관 부인 이미선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일어섰다. 그녀의
백랍같이 흰 피부도 얼굴과 함께 붉어졌다. 인물은 그렇게 특출한 편이
아니었으나 각선미가 아주 아름다웠다. 그녀는 조용히 걸어나가 청문회
의자에 앉았다.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선 사모님 관등 성명부터 대시지요. 나이를 잊지 마세요.
여성부장이 조용히 말했다.
김휘수 재무부 장관 부인 이미선 입니다. 1천 9백 4십 8년생이고요.
그러니까 마흔 일곱이지요. 주소는 서울 특별시 압구정동...
번지 보다 평수를 대요.
여성부장이 말을 가로막았다.
예순 두평짜리를 아래위에 트고 삽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124평 짜리 복층 아파트에 산다는 말인
가요?
여성부장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재무부장관 아냐? 온 나라 돈이 모두 모두 자기들 주머니
돈이였을테니까. 그래 다른 재산도 불어 봐요.
이미선은 한참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워낙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압구정 아파트 말고 그 동네에 58평 짜리
두채가 더 있구요, 우리 장관님 명의로 된 땅은 제주도에 15만평, 고성에
2만평, 해운대에 3천평, 강원도 고성에 만 2천평 그리고 남대문 시장에
4층짜리 조그만 상가 빌딩하나... 그리고....
그녀는 생각이 나지 않은 듯 더듬거렸다. 아마도 그 보다 훨씬 많은
부동산이 있는 것 같았다.
부동산 아니라도 생각나는 것 있으면 이야기 해봐요.
여성부장이 독촉을 했다.
우리 장관님 명의로 된 콘도가 3개, 골프 회원권이 네갠가 다섯 갠가...
그리고 내 이름으로된 헬스 회원권 두개, 내 이름으로 산 주식이 약
8억원어치.. 아이구 이럴때 왜 이렇게 생각이 잘 안 나지...
그녀는 정말 생각이 나지 않은 듯 머리를 감쌌다.
그녀가 생각이 안나 이정도 밖에 이야기 않았는데도 많은 사모님들은 혀를
내둘렀다.
김휘수 재무장관이란 사람은 원래가 재무부 관리 출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재산을 많이 끌어 모은 줄은 몰랐네. 세상 사람들이 이미선씨
당신은 5백짜리, 김장관은 2백짜리라고 한다면서.
예?
이미선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놀라 여성부장을 돌아보았다.
왜? 틀렸어요? 인사나 청탁하러 당신들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오백만원
이하 돈을 싸가지고 오면 당신은 만나주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김장관은
2백만원 이상만 싸고 오면 만나 주었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요?
{{}}14.첫 대면
해군 장관 부인 차영순이 강화 국도 상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후
정부측의 비대위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정말로 그들의 말대로 스물
두명의 사모님들이 차례로 희생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장관들도
있었다. 더구나 정일만 정보국장이 그 자리에서 물러 선후 비대위를
이끌고 갈만한 뱃장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제기랄. 정부라는 게 이렇게 무력한 줄 몰랐어. 차라리 국민들에게
알리고 공개 수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라.
함부로 말을 뱉는다고 총리한테 여러 번 핀잔을 들은 공보부장관 박인덕이
불평을 했다.
이 일을 세상에 알려 보세요. 그날로 우리는 모가지가 열 두개라도 못
당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거들었다.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사람 다 죽인 뒤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박상천 해군장관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는 부인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비대위 대기실로 쓰는 효자동 안가에 틀어박혀 있다가 총리실겸 비대위
사무실인 이곳에 나타났다.
정일만 전 국장은 장관들의 이런 불평을 듣는지 안 듣는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국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정보국의
자문역이라는 명목으로 비대위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처럼
사태를 손에 쥐고 능동적으로 일하지는 않았다.
저어...
그때 총리 비서실장인 김영기가 들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총리 각하께서 모두 회의실로 모이시랍니다.
뭐야? 또 탁상공론이야?
박인덕 장관이 불평을 하면서도 제일 먼저 일어섰다. 곧 총리가 들어와
비대위 공식 회의가 열렸다.
방금 민독추 집행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총리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었다. 거의 점퍼
차림이었으나 고일수 법무장관과 김휘수 재무장관 만은 단정하게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들을 민독추 집행위라는 명칭으로 총리께서 호칭 하셨는데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까
정채명 내무장관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아, 인정한다기 보다...
총리가 갑자기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똑똑하고 분명하고 부러지게 하십시오!
박상천 해군장관이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술이 셀뿐 아니라 아무리 마셔도 전혀
표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왕에 현실로 다가온 것을 인정하고 안하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형식론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박인덕 장관이 손을 흔들어가면서 말했다.
총리 주재하의 국무회의가 열리던 과거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불장군들의 모임 같은 회의 분위기였다.
제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소위 민독추 집행위라고 하는 자들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내용은 성유 내각정보국장이 보고하겠습니다.
총리는 국무위원석 뒷좌석에 앉아있는 성유 국장을 돌아보았다. 성국장
옆에는 정일만 전 국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예. 보고들이겠습니다. 지금부터 23분전인 19시 정각에 소위 민독추
집행위의 자칭 백장군이라는 자가 비대위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녹음한
것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성국장이 손짓을 하자 곧 녹음된 전화 대화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민주독립정부 수립 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 백장군 입니다.
내각정보국장을 바꾼대 대해 다시 한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작
그런 우리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무고한 인명의 희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은 사모님들은 안전합니까?
김영기 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
...물론 입니다 숫자는 스물 한 명으로 줄었지만 모두 안전합니다. 그
여자들은 지금 참회의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참회의 의식이라니...또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김영기 실장의 목소리가 흥분되었다.
...우리 여성부장의 인도하에 그녀들과 남편들인 소위 장관님들의 과거
잘못을 낱낱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고문을 하고 있단 말이요?...
...아아, 흥분하지 마십시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들이 그런
비민주적인 일을 할 것 같습니까? 고문 같은 것은 당신들의 무기가
아닙니까? 다만 사모님들은 스스로 옷을 모두 벗고 깨끗한 몸으로 그들의
잘못을 한사람 한사람 고백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맙소사! 옷을 모두 벗겼다고?...
이런 나쁜 놈들!
대화 녹음을 듣고 있던 김교중 육군장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스피커가
일단 멈추었다.
파렴치범들 아니야. 내 마누라 몸에 손만 댔어봐라!
팽인식 장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조용히 합시다. 설마 그런 야만스러운 일이야 일어났겠습니까? 자
다시 시작합시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곧 스피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벗긴 것이 아니고 참회하기 위해 그녀들이 택한 일입니다. 몇
명이 살아서 돌아갈지 모르지만 모두 새 사람이 되어 돌아 갈 것입니다.
...사모님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절대 안전하니까 안심하시구요... 오늘
요구 사항은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까요?...
...내일 아침 한강 유람선 위에서 만납니다. 아침 7시에 여의도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에 우리 대표가 타고 있을 것입니다. 배가
한남대교 근방에 이르면 우리 대표가 얼굴을 보일 것입니다. 당신들
대표는 두 사람만 허용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성유 국장이여야
합니다....
....또 한사람은...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들 대표가 누군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 우리가 성유국장의 얼굴을 아니까 승객 중에
우리가 타고 있다가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들 대표는 두 사람 외에는
안됩니다. 엉뚱한 짓 하면 보복 당합니다. 배가 폭파될 뿐 아니라...
한시간뒤 전화 할 테니 회답 주십시오...
스피커는 거기서 끊어졌다.
자, 여러분 잘 들으셨지요. 다음 전화가 올 시간은 20분 남았습니다.
의견이 있는 분은 말씀하십시오.
총리가 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비대위를 하는 겁니까 국무회의를 하는 것입니까?
김교중 육군 장관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총리가 다시 의석을 돌아보았다.
비대위 멤버가 아닌 국무위원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도가 없어져 회의도 중구난방 일뿐 아니라 참석자도 기준이 없었다.
비대위면 어떻고 국무회의면 어때? 지금 꼭 그걸 따져야겠어? 제,
제기랄...
술취한 해군장관이 떠들었다.
그럼 축소 국무회의라고 해둡시다. 의견이 없으시면 제가 결론을
내겠습니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조용해졌다.
성유 국장을 단장으로 하고 합동 수사본부의 제3부장 신대령을 대표로
지명하겠습니다.
신대령이 누구야? 육군이야 해군이야?
해군 장관 박상천이 또 혀곱은 소리로 떠들었다.
신동훈 육군대령입니다. 합동수사본부 제3부장이고 육군 특무부대에서
차출된 요원입니다.
성유 국장이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면 그렇게 가결 된 것으로 알고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총리가 의사봉을 세번 두드리고 김실장에게 말했다.
빨리 대통령 각하와 통화하게 해주어.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분 뒤 민독추 집행위의 백장군으로부터 총리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국무총리 좀 바꿔 주시오. 나는 백장군입니다.
자칭 백장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내가 총리요. 백장군 어서 말해 보시요. 아니 내가 먼저 묻겠소. 우리
국무위원 부인들은 무사하오?
우리가 잘 모시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총리께서 결단만 잘 내리신다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아내 노릇 어머니 노릇 잘 할겁니다. 그러나
국무위원 여러분이 미련하게 처신한다면...
알겠소. 그래 요구사항은 뭐요?
총리가 백장군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쪽은 성유 국장과 또 한사람을 정했습니까?
그렇소. 성유 국장의 비서나 보좌관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좋아요. 그러면 회담이 성립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시간을 바꿔도 좋습니까?
말해 보시요. 처음엔 아침 7시 첫 출항 배라고 하셨지요?
아침 일곱 시에는 유람선을 타는 손님이 너무 적어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오후 2시로 변경하려고 합니다. 오후 2시 정각에
여의도 선착장을 떠나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총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수정 제의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경고했지만 엉뚱한
일을 하시려고 한다면 큰 낭패를 당할 테니 이 경고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우리 사모님들이나 잘 모셔 주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그럼...
백장군이 전화를 끊었다.
곧 총리실에는 성유 국장과 정채명 내무, 김교중 육군장관, 정일만 전
국장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그자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길밖에 없는 가요?
총리가 정일만 전국장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는 이미 현직을 떠난
사람이지만 그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성 유국장이 대답을 했다.
그들에게 끌려 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김교중 육군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잡혀있는 인질을 다 죽이고도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도 그들을 인질로 잡아야 합니다. 협상을 하자면 틀림없이 그들 중
핵심 인물이 나올 테니까 그자를 잡는다면 그들의 본거지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고....
그건 지극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만일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면 스물 두
부인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정채명 내무장관이 조용한 목소리로 반대 의사를 말했다.
이제 스물 한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명, 열아홉명으로
계속 줄어듭니다.
김교중 장관이 목청을 높였다.
그들이 유람선 위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난 뒤의
일이라고 보아야합니다.
아무 말도 않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정일만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한강 복판에 떠 있는 유람선은 외부에서 함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많이 타고 있어서
어떤 작전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놈들은 참으로 묘한 착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합니다. 그 대신 눈에 뜨이지
않게 강변에서 유람선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조치를 해 두어야
합니다. 유람선 내부에도 물론 감시장치나 비상시의 대비책을 세워 두어야
합니다.
정일만의 말을 들으며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변 양쪽에서 유람선을 계호하는 일은 김육군 장관이 맡으시고...
내무부에서도 협력해 주시죠. 그리고 유람선내의 일은 성유 국장이 알아서
하십시오. 오후 두시까지면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나가서 일들을 하세요.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두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김교중 육군장관은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튿날 오후 2시.
추병태 경감은 시골 중늙은이로 변장을 하고 못생긴 중년 여자 한사람과
부부로 가장하고 유람선에 올랐다.
추경감은 2시 출발하는 배에 중년 여자와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올라탔다.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추경감은 배에 오르면서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손잡고 외출을 해본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낯선 여자와 손을 잡고 생전 처음으로 한강 유람선에 오르다 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못생긴 중년 여자는 과거 정부의 첩보기관에서 일한 여자 같았다. 그러나
일단 시골 중늙은이의 아내 역할을 맡자 진짜처럼 잘 해냈다.
넝감 이쪽이유. 이쪽...
그녀는 어리둥절해 있는 추경감의 손을 이끌고 유람선 아래층 뒷자리로
갔다.
유람선 안은 평소 추경감이 강둑에서 바라보던 것보다는 훨씬 넓고
화려했다.
아니 이곳은 2층이 있잖아? 우리는 어느 층이지?
추경감이 당황해서 말했다.
넝감은 이층이 좋겠수? 이층에 가면 멀미 헐틴디유... 그래도 좋담
이층에 가봐유?
추경감은 이 배를 타기 직전 합동 수사본부 제3부에서 간단한 브리핑을
받고 왔었다. 그의 역할은 끝까지 시골서 온 중늙은이 관광객 부부다.
여하한 경우에도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관찰해 두었다가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유람선을 처음 탔기 때문에 이 배가 2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아래층보다 전망이
좋고 앞에는 반주를 하는 악단도 있었다. 아마 신나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것 같았다.
그들이 2층 의자에 앉아 올라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승선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추경감이 갑자기 여자의 팔을 흔들었다.
추경감은 막 배에 오르는 수사본부의 신동훈 대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디? 원숭이라도 배에 탔시유?
여자는 추경감의 실수를 숨겨주려는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추경감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입을 다물었다. 배에는 빈자리가 별로 없을 만큼
사람이 탔다.
2시 5분. 유람선이 서서히 한강 복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추경감은 아무래도 위층보다는 아래층에 문제의 인물들이 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밑으로 내려왔다.
우리 제일 뒤에 가서 앉아요.
그녀가 추경감 곁에 딱 붙어 서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추경감은 너무
밀착해 온다고 생각하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집에 있는 마누라
얼굴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아래층 제일 끝 좌석에 앉았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 시야에 들어왔다. 추경감은 중간쯤에 앉아있는 신대령을 보았다.
그는 흰색에 검은 칼라가 있는 점퍼 차림이었다. 그의 옆에는 머리를 짧게
깎고 다부져 보이는 4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추경감은 그가 정부측의
고위층 대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안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거의 남녀 짝을 지은
사람들이거나 여자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고
농사를 짓다가 온 듯 얼굴이 볕에 그을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도
데이트를 나온 듯한 젊은 커플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추경감은 테러리스트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명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럴듯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사람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배가 잠수교의 낮은 다리 밑을 빠져나가 한남 대교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신대령 곁에 앉아 있던 40대 신사가 일어서서 좌석 밖으로
나왔다. 그가 성 유 내각 정보 국장이란 것을 그제야 추경감은 알았다.
성 유 국장이 좌석 밖 통로에 나와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선
내의 스피커에서는 서울의 강변 풍경을 설명하는 안내 스피커가 계속 왕왕
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 같았다.
추경감이 선 내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자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일어나서 황급히 통로로 다가갔다.
그녀는 성국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추경감이 잔뜩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유국장을 보고 무어라고 간단히 말을
건넜다. 성국장이 여자를 돌아보며 대꾸를 했다.
여자 테러리스트구나!
추경감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황급히 선실 밖으로 나갔다. 추경감이 나가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곁에 있던 파트너 여자가 그의 허리춤을 잡아끌어
앉혔다.
넝감은 가만 있어유. 내가 좀...
그녀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늙은 여자치고는 행동이 대단히
재빨랐다. 추경감은 다시 숨을 죽이고 성국장 주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그녀가 금시 들어왔다.
아니여유. 그 젊은 여자가 멀미를 해서 뱃전에서 토하고 있어유.
그녀가 웃으며 추경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추경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저기!
그때 그녀가 나직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성유국장 곁에 한 남자가
다가갔다. 신사복 차림의 그 남자는 뒤로 돌아서 있기 때문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신사의 말을
듣고 있는 성유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어 마디 서로 주고받던 두
사람은 나란히 뒤쪽으로 걸어왔다.
이쪽으로 오는데... 늙었어요. 쉰 살은 훨씬 넘었겠는데... 저런
테러리스트도 있나?
추경감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추경감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걸어온 두 사람은 맨 뒤의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추경감은 자기 뒤에 와서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귀를 바싹 곤두세우고 두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노형! 앞에서 두 번째 칸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보이지요?
늙은 테러리스트의 말 같았다.
예. 저기 검은 가방이 놓인 곳 말이지요?
성유 국장의 대답이었다.
그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내 호주머니에 있는 리모콘의
스위치만 눌으면...
아니!
성유 국장이 짤막한 신음 같은 말을 토했다.
추경감은 그것이 성능이 강력한 폭탄일 것이란 것을 금방 알았다. 만약
서툰 일을 하면 그 것을 폭파시켜 여기 탄 사람은 모두 물귀신을
만들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눌러야 할 일은 없을 것이요. 우리는 백장군이 하라는 대로
충실히 하고 있소.
성유 국장이 곧 냉정을 되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저기 한강 양쪽 강변에 특수부대 요원들이 쫙
깔렸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 밑 한강 수중에도 무장
병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안에도 도청장치가
있어 외부에서 유리알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다행이
이 배에는 당신들 부하가 별로 없는 것 같소.
사실과 다릅니다.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을 나는 문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 스위치만 누르면 무고한 유람선 관객 수백 명과 함께 당신네
정부는 수장이 되는 거요.
제발 그런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같이온 보좌관은 어디에 있소?
백장군의 목소리였다. 추경감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앞에서 열 두 번째 줄 흰 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육군 소속입니다.
백장군 일행은..
가운데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이지요? 그 여자가 들고
있는 큼직한 가방도...
제발..
성유 국장이 더 듣기 거북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할 때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들이요. 우리는 언제 죽어도 좋아요. 필요 할 때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소.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리는 추호도 백장군
일행을 해칠 생각은 없소.
나도 이 리모콘 스위치를 누르는 불행이 없기를 바라오. 또 나하고
같이온 동지가 저 가방 속에 든 것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도록 해 주시요
백장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가방 속에 든 것이라뇨?
성 유 국장이 당혹해 했다.
나중에 갈 때 한부 드릴 테니 가져가서 검토해 보시요. 그건 그렇고
우리가 처음에 요구한 일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처음에 요구한 일이라뇨?
이때 추경감이 슬그머니 일어나 배 밖을 구경하는 척 하고 백장군이라는
사람을 흘깃 보았다.
약간 희끗한 짧게 깎은 머리에 하관이 쪽 빠져 날카롭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얼굴 표정을 읽기가 어려운 차가운 사람 같았다.
저기 아파트들이 꼭 벌집 같지유?
추경감 옆에 앉아 있던 파트너도 함께 일어서며 한마디했다. 그녀는 또
슬그머니 추경감에게 팔짱을 끼고 겨드랑이로 파고들었다.
어흠, 어흠...
추경감은 몹시 겸연쩍어 계속 잔기침을 하며 그녀의 팔을 떨쳐 내려고
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백장군과 성국장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장군이 요구한 일은 대단히 무리한 일이요. 갑자기 대통령과 내각이 몽땅
사퇴를 해버리면 그 공백 기간은 무정부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혼란이 일어나도 보통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요. 우리가 즉각 임시 과도 정부를 구성해서
질서를 잡을 테니까요.
그렇게 쉽게 될 일이 아니요. 우선 당신들이 정권을 담당한다고 나서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노출되어 국민들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정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민이 따를만한 범국민적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덮어놓고 낯선 사람들이 나와 우리가 이 나라를
맡겠소 하고 나서면 누가 그것을 따를 것입니까? 정권이 창출되자면
모택동의 말처럼 총구가 있던지, 국민의 지지표가 있던지 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는 총구로 정권을 창출하는 일은 인정하지 않소.
하여튼 어느 날 갑자기 내각이 총사퇴를 해버리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요.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을 무질서와 범죄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정부가 없어지면 이 사회는
주먹센 놈이 지배를 하게 될 테니까 약탈, 방화, 강간 ,살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결국은 아무도 통제 할 수 없는 지옥으로 이 나라가 변하고 말
것이요. 그렇게 되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가만있을 것 같소? 결국은
나라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요.
그런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그만두고 나가더라도 곧 모든
국민들이 납득 할만한 능력 있는 지도자가 이 나라를 이끌 것입니다.
백장군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들이 납득 할만한 인물 ? 그게 누굽니까?
성유 국장이 눈이 둥그래졌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것은 당신들이 물러 나보면 알게 될 것이요
추경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저들의 배후에는 지명도가 높은 거물이
있다는 짐작을 했다. 그것도 한 두사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여튼 그런 기발하고 이상한 방법으로는 정권교체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요. 그러니 우리 정부측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겠소.
제안? 좋아요. 이야기 해보시오.
성유 국장이 호주머니에서 메모한 것을 끄집어냈다. 성국장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백장군의 얼굴이 극도로 긴장되는 것을 추경감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기를 꺼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첫째, 민독추측과 정부는 상설 협의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명칭은 국가
개혁 비상회의 같은 것으로 하고 우선 이런 기구를 만들어 정권을
넘기던지 개선하던지 하는 초헌법적인 문제를 협의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구를 국민 앞에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민독추를
세상에 공표하고 그 구성원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도 당신들의
단체를 인정한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당신들의 기구는 그
목적이나 강령을 세상에 알려 국민들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유 국장이 잠시 말을 끊었다.
우리의 목적을 국민들이 안다면 틀림없이 지지를 할 것입니다.
백장군이 자신에 넘친다는 투로 말했다.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민독추의 중요 멤버 중에는 현재 정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건 얘기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성국장이 제안한 초헌법적
협의기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돌아가서 위원회에 보고를 하겠습니다. 내가
이 자리서 어떻게 하겠다는 회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안이
있나요?
있습니다. 지금 인질이 되어 있는 국무위원 부인들을 즉각 무조건
석방하십시오.
그건 안됩니다. 무조건 다 석방 해버리면 당신들이 우리를 상대나
하겠습니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개별적으로 가족과 전화로 안부통화나마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에...
만약에 무엇입니까?
만약에 국무위원 부인중 다시 희생자가 나온다면 정부는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지금 정권 담당자들의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정권이 설사 당신들한테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무고한 해군장관의
부인을 살해한 죄과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유 국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해졌다.
그건 우리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들의 책임이지요.
어쨌던 정부측 제안은 이제 더 없나요?
인질들과 전화 통화가 안된다면 가족들이 한번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가족들 모두가 안된다면 몇 사람이라도 대표가 가서 만나도록
해 주십시오. 장소를 비밀로 한다면 그 일에도 협조하겠습니다.
성국장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건 가서 협의를 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백장군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24시간 여유를 주겠습니다. 24시간 이내에 행동을 취하십시오.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장군은 한참동안 성유국장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24시간 이내에 당신들의 자가 비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말대로
어느 날 느닷없이 정권이 총사퇴를 한다면 국민들이 우선 어리둥절해 할뿐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실정, 독재, 인권유린 등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퇴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실정, 인권유린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런 사레가 별로 없어서 비판 할
것이 없는데요...
성유국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
백장군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가 주위를 의식했는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저기 나하고 같이온 여성동지가 당신들이 비판받을 자료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가지고 가서 이래도 할말이 없는지 반성해 보시요. 24시간
이내에 시작해서 매일 한 두건씩 당신들의 비정(秕政)을 폭로하는 거요.
만약에 24시간 이내에 이일이 시작되지 않으면 국무위원 부인은 스무
명으로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짓밟는 일은 제발 그만 둡시다.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성유국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들 정권 담당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소위 국무위원
부인들도 그들이 스스로 밝힌 자기들의 죄를 보면 백번 죽어도 할말없는
여자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민초들을 우롱하고 양심 파는 일을 예사롭게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백장군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단호하게 들렸다.
그 분들을 심문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빨리 풀어주고 우리 이야기합시다.
그건 글쎄 당신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서로 딴 곳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배는 다시 떠났던 선착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 그럼 자리로 다시 돌아갑시다.
백장군이 일어서서 걸었다.
다음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성유 국장이 물었다.
당신들의 회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내일 아침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겠소.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부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백장군은 그 말을 남기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빨간 모자를 쓴 여인한테서
서류 봉투 같은 것을 받아 성유국장에게 전달했다.
배는 곧 선착장에 닿고 장내 안내 방송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쳤다.
추경감은 배 밖을 내다보았다. 선착장 근방에 허수룩하게 차린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그게 모두 위장한 수사, 경호 요원들 같았다.
추경감이 다시 선내 좌석으로 눈을 돌리자 백장군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은 벌떡 일어서 사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눈에 얼른 띠어야할
빨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어떻게 되었어요? 그자들이 어디로 갔어요?
추경감은 곁에 있는 짝인 여자를 보고 물었다.
저기 계단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그녀가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추경감이 계단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으나 백장군이나 빨간 모자의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빨간 모자가 안 보이는데?
빨간 모자요? 그게 뭐 머리카락처럼 머리에 붙어있나요? 남의 눈을
피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표적이 되는 차림을 그대로 하고 다닐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추경감은 멍청한 자신을 나무랐다.
그들은 가버렸으니 우리도 내려요.
추경감은 하는 수없이 그녀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우리 어려운 커플 해냈으니 차나 한잔해요.
그녀가 추경감의 팔을 끌었다. 추경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따라
여의도의 어느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그녀를 보고 추경감은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까지 같이 있던 늙은 여자는 간데 없고 젊고 발랄한 여자가 미소를
띠며 앉아 있지 않는가?
전 전미숙이라고 해요. 주제넘게 경감님 사모님 노릇을 해서 미안해요.
갸름한 얼굴에 뾰족한 턱이 그녀를 약간 날카롭게 보이게 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미인 축에 드는 여자라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아이 경감님도 뭘 그렇게 들여다보세요?
예? 제, 제가요...
추경감은 당황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변장을 할 수가 있었나요?
아까 화장실에 가서 다 지워 버렸지요.
그녀의 목소리도 완전히 달라졌다. 사투리를 쓰는 중늙은이가 아니라
발랄한 젊은이였다.
우리 보고서는 각각 쓰기로 되어 있지만 오늘 여기서 헤어진 두에도 모른
척 하기는 없기예요?
그녀가 아이스커피 한잔을 단숨에 마신 뒤 한 말이었다.
추경감은 사무실로 돌아와 거기서 관찰한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서로
꾸몄다.
그는 보고서를 쓰다가 문득 승무원복을 입고 다니던 한 여자의 얼굴을 떠
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영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넘어갔던
여자였다.
맞아. 그 여자다!
추경감이 혼자 고함을 질렀다.
그 여자가 왜 거기에 나타났을까?
추경감이 그 여자라고 한 것은 얼마전 그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페닌슐라 호텔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전동타자기를 치던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나봉주. 피살된 조은희의 남동생
조준철의 애인이기도 한 그 정체불명의 여자가 이번에는 유람선의
승무원으로 둔갑하고 나타난 것이다. 추경감은 그 여자가 승무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어느쪽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유람선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추경감의 추리는 맞았다. 유람선 회사에는 그런 승무원이 없었다.
{{}}15.한 가닥 단서
추경감이 한강 유람선 위에서 세 번째 만난 여자, 나봉주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뚝한 콧날과 계란형으로 생긴 갸름한 얼굴이 그녀를 미인으로
보이게 했을 뿐 아니라 날카롭게 보이게도 했다.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긴 하체가 퍽 육감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도대체 몇 살인지 알기
어려운 묘한데 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상당히 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주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추경감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조준철의 애인으로서 였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난 것은 가해자로서 였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조은하의 피살 사건, 추경감의 납치사건,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무위원 부인 납치사건과 모두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되고, 이 세 가지의 사건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의 여인 나봉주는 그때도 조준철과 만나고 있었다.
조준철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병원에서였다. 정형외과에서 레지던트
2연차 일을 보고 있는 그는 가끔 의사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그 날밤도 당번인 그가 외래에서 진찰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밤 열
한시가 훨씬 넘어서였을까?
조선생님 응급 환자인데요.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여자 환자 한 사람을 부축하고 들어왔다. 팔을
다친 듯 손수건으로 싸매고 들어오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조준철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감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낯선 사람 같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빨리 저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이리로 눕혀요.
조준철은 그녀를 진찰대에 눕히고 상처난 팔을 보았다. 왼쪽 팔에 골절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다가 다치셨어요?
그는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일생에 처음 만나는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골목에서 치한한테 당했어요.
그녀가 약간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당해요? 아니 그러면...
조준철은 그렇게 말해 놓고는 엉뚱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곧 얼굴이
붉어졌다.
미, 미안합니다...그런 뜻이 아니고...
조준철이 당황해하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라뇨? 내가 성폭행이라도 당한 것 같아요? 그런 일 당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팔을 부러뜨린 거랍니다.
그녀가 또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조준철은 가슴에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그 날밤 이후 조준철은 나봉주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몸을 섞었다.
근 일년을 사귀면서도 나봉주는 자기의 가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조준철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피상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카프카 같은 어려운 책을 줄줄 외우다시피 좋아한다든지,
살아있는 낙지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먹으면서 즐긴다든지, 섹스를 할
때는 틈틈이 계속 군것질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따위였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조준철에게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추경감이 페닌슐라 호텔에서 그녀를 본뒤 조준철에게 귀띰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일은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그 일은
추경감이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조준철은 생각했다.
추경감이 한강 유람선에서 나봉주 같은 여자를 보았다는 다음날 나봉주와
조준철은 경북 월성군 조은하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있는 별다리 마을에
갔다. 나봉주가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제의를 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준철도 누나가 남겨둔 아들 조민수가 어떻게 지내나 보고싶기도 하던
차라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함께 나섰다.
고문직 교장은 무척 반가워했다. 조민수는 교장이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 날밤 시골 교장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조그만 시골방은 시골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자리에 누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한참뒤 나봉주가 먼저 조준철의
손을 가만히 잡고 나직이 말했다.
그냥 잘 거예요? 우리밖에 나가서 한번...
밖에? 그것 괜찮겠는데...후후후...
조준철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보름달이 가까워서인지 달이
훤하게 마을을 비치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조준철은 봉주의 어깨를 감싸며 나직이 물었다. 초겨울이라도 이상하게
그렇게 춥지가 않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에 가봐요.
봉주의 제의대로 그들은 마을 앞에 있는 학교로 갔다. 문이 열려있어 쉽게
학교 안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텅빈 마당을 달빛이 채우고 있었다. 잎
떨어진 나무와 운동장가의 철봉대만이 기다란 달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았다.
밤공기는 참 맛이 좋은 것 같아요.
봉주가 준철의 겨드랑이를 파고들면서 속삭였다.
공기도 맛이 있나?
그럼요. 이럴 땐 달콤한 맛이라고 해야 옳은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연못 옆의 나무 벤치에 앉았다. 앉자 말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봉주야...
준철은 그녀의 입가에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봉주의 스웨터 속으로 들어가 브레지어를 하지 않은 그녀의 유방을
감싸쥐고 있었다. 따뜻한 촉감이 손바닥을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나봉주가 속삭였다. 그녀의 작은 손도 준철의 가슴팍에 들어와 있었다.
사랑해. 봉주야...
부드럽고 따뜻한 유방에서 전달된 달콤한 촉감은 준철의 심장으로 왔다가
차츰 밑으로 내려갔다. 준철의 숨결이 가빠졌다. 준철의 손도 밑으로
내려가 봉주의 스커트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은 팬티를 헤치고 더 아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이!
그녀가 무례한 침입자를 의식하고 무릎을 오므려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오히려 준철의 허리춤으로 들어와 아래로 공격하고
있었다.
가만...
준철의 손은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헤집고 들어가 마침내 봉주의
비밀스런 삼각지에 도달했다. 까칠한 촉감이 그녀의 무성한 비너스 둔덕의
상태를 잘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준철의 손바닥은 그녀의 비너스 언덕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다녔지만 그녀는 이미 방어를 포기했다. 준철의
손가락은 점 점 대담해져 이번에는 최후의 지점에 이르렀다.
음...
봉주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녀가 더욱 밀착해왔다. 그녀의 손도
가만있지 않았다. 준철을 통째로 포로로 잡은 듯 움켜쥐었다.
준철은 더 참을 수 없는 듯 그녀를 나무 벤치에 눕히고 옷을 마구
벗기려고 들었다.
잠깐...
갑자기 그녀가 바쁘게 놀리는 준철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는 안돼요.
왜? 밖에 나가자고 했잖아?
달님이 보아요. 우리 모습을 보고 얼마나 웃겠어요?
쳇! 난또...
준철은 멈췄던 손을 다시 놀려 봉주의 스커트를 벗겨내려고 애를 썼다.
정말 여기서는 안돼요. 달님뿐 아니라 저기 서있는 나무들도 다
본단말이예요.
나봉주가 무릎을 오므리고 준철의 양쪽 뒤를 잡고 키스를 했다.
뭐야? 나무들이 본다고? 하하하...
정말이에요. 우리가 뭐 포르노 배우예요? 우리 저쪽으로 가요.
나봉주가 벌떡 일어나 준철의 손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준철은 하는 수 없이 그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준철의 손을 잡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교실에는 낮으막하고 예쁜 책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은 교실 안을 다 둘러보았으나 그들이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만한
공간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복도로 나가봐요.
봉주는 다시 준철의 소매를 끌고 복도로 나갔다. 남쪽으로 난 창에서
달빛이 유난히 밝게 비쳐 들어왔다.
여기 앉아요.
그들은 복도에 앉았다. 봉주가 먼저 스웨터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준철이도 옷을 벗어 복도에 깔았다. 그리고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봉주를
안고 그 위에 쓰러졌다. 우악스러울 정도로 황급하게 그녀의 팬티를
벗겨냈다. 보드랍고 탄력 있는 그녀의 피부에서는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달빛을 등에 지고 그녀를 위에서 감쌌다.
봉주야. 우리...
그녀는 숨이 막혀 잠시 말을 끊었다. 달빛이 그의 등과 허리에서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었다. 봉주의 심장 고동도 점점 빨라져 준철의
가슴에서도 느껴졌다. 봉주의 하얀 두다리가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렸다.
우리 결혼 하는 거야...결, 결혼...
준철은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동작은 차차 빨라져 이제 말하는
것도 포기한 것 같았다.
결혼을 하자구요?
그때 갑자기 나봉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준철을 돕던
행동을 딱 멈추었다.
왜 그래?
준철이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수 없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뭐 말이야.
새삼스럽게 왜 결혼 할 생각을 했느냐 말이에요.
그녀는 다리를 오므려 준철을 자기 위에서 밀어내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준철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꼭껴안은 봉주의 가슴을 풀어주지
않았다.
봉주야
조준철은 봉주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봉주의 상체를 더욱 옥죄면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봉주는 준철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한동안 애를
쓰다가 포기한 것 같았다.
준철의 몸부림이 더욱 강렬해지고 뜨거운 숨결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곧이어 두사람은 힘을 합쳐 부푼 풍선을 터뜨리는 일에 힘을 합쳤다.
아, 아...
두사람은 동시에 자음 없는 말을 토하며 풍선을 함께 터뜨렸다. 두사람은
동시에 행동을 그치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준철의 등에는 땀이 송송히 배어 있었다. 준철은 가만히 팔을 뻗어 봉주의
가슴 위에 얹었다. 땀으로 촉촉이 젖은 그녀의 유방을 쥐었다. 유방은
아직도 조금전의 감동을 잊지 않은 듯 따뜻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봉주야..
준철이 나직하게 불렀다.
예?
나봉주도 돌아보지 않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까는 왜 그랬지?
우린 결혼 할 수 없어요.
무슨 소리야?
우린 결혼 같은 것 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결혼이란 말이 나오면서부터 그녀가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고 준철은 생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준철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나한테 숨기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아.
그는 손으로 봉주의 가슴과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준철씨!
그녀가 갑자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봐. 뭐든지...
준철의 손은 그녀의 가슴과 배를 거쳐 그녀의 중심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준철의 손은 금방 격전을 치른 그녀의 중심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준철의 손놀림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무릎이 저절로 열려 준철의 손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녀는 그것도 무의식중에 한 행동 같았다. 그녀는 준철과의 결혼 문제에
무엇인가 심각한 사항이 있어 그것이 그녀의 모든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봐.
준철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다시 봉주를 공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나 준철씨한테 숨긴 게 너무 많아... 난, 난 나쁜 아이야.
그녀는 갑자기 준철의 가슴을 파고들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봉주는 나쁜 여자가 아니야.
준철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그녀는 얼마동안 말은 않고
흐느끼기만 했다. 한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준철씨는 내가 첫 번째 여자야?
너무나 갑작스런 질문에 그는 무어라고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그건....
빨리 대답해 봐요.
아, 아니... 으, 응.
호호호...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요?
울던 봉주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준철은 봉주의 정서상태가 지금
대단히 불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첫 번째 여자이고 형이하학적으로는 단정 할 수
없고...
형이하학적으로 설명해 봐요. 솔직하게.
그녀의 작고 따뜻한 손바닥이 준철의 가슴에 닿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원을 그리듯 쓰다듬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데 따라
준철의 피부에는 신경이 살아나서 그녀의 손을 따라 내려갔다.
의과 대학 본과에 진학 했을 때 친구들과 한잔하러 갔걸랑. 술이 엉망이
돼 가지고 우리는 여자를 사기 위해 헤매 다녔지.
그래서요?
그녀의 손이 이번에는 준철의 중심에 와서 닿았다.
나봉주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조준철의 남성을 가볍게 쥐었다. 준철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신음을 토하며 봉주를 힘껏 껴안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나봉주는 준철의 기분은 모르는 체 샅에서 손을 쑥 뽑아버리고 상체를
발딱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부지런히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준철도 하는 수 없이 함께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서야 날씨가 몹시
춥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 여자한테 동정을 받쳤어요?
그녀가 준철의 손을 잡고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말했다.
어떻게 했는지도 잘 몰라. 여자가 어떻게 독촉을 하던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일은 끝나고 말았어.
호호호... 제대로 찾긴 찾았어요?
봉주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밤공기를타고 복도 끝까지
퍼져나갔다.
찾아? 뭘? 으, 음....
준철은 한참 만에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는 웃음을 삼켰다.
두사람은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으로 나왔다. 스산한 초겨울 바람이
옷깃을 헤집고 지나갔다. 봉주는 왼손을 준철의 바지 호주머니네 넣고
그의 겨드랑을 파고 들어왔다.
봉주씨!
아무말 없이 운동장을 다 걸어 나온 준철은 교문을 나서자 엄숙한
목소리로 봉주를 불렀다,
예.
봉주가 고분고분하고 다소곳한 아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한테 숨기는 게 많다고 했는데... 얘기 할 수 없어?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아.
미안해요. 몇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어요. 나 준철씨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아요. 준철씨가 좋아지는 만큼 나는 괴로워져요.
아니. 그럼 지금까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단 말이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자고 그랬다 이 말이지요?
말하자면...
왜 좋아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좋아한다는 것이 너무나 막연한 말
아녜요? 같이 앉아 차한잔 마셔도 거부감이 없는 정도로 좋아하는 사이,
같이 영화관에서 손잡고 함께 웃으며 영화를 즐길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
잠자리를 함께 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 그리고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만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또 한 시도 보지 않으면 생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좋아하는 사이....
그래 나는 그 많은 등급 중에 어디쯤 속하는 거지?
준철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는 잠자리를 같이해도 후회하지 않을
단계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그럼 우리 결혼 할 수도 있잖아?
이 말을 해놓고 불안한지 준철은 봉주의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준철씨는 내게 첫 번째 남자가 아니래도 나하고 결혼하겠어? 가령
말이야...
봉주는 내가 첫 번째 남자라는 것을 내가 더 잘 알아.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어.
준철이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한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갰다. 그녀가 무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겁난 사람 같았다.
두사람은 한참동안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만에 준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 이야기 말고 나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봐요.
봉주는 한참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혹시 국가 정보기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어요?
정보기관? 내각 정보국이 막강한 곳이란 것은 사람들이 다 알지.
군부에는?
군부에는 육해공군에 각각 정보기관이 있지. 그 중에도 육군 정보부가
가장 광범위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난 우리 아버지한테 가끔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횡포를 들은 일이 있거든.
어떤 횡포예요?
두사람은 고문직 교장의 사택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달은 더욱 마을로
가까이 내려와 동구 고샅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군 정보기관이 군에 관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까지 개입해서
정치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루려고 한 것이라든지...
야당 정치인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든지 하는 일 말이죠?
야당 정치인들 뿐 아니라 여당 정치인들도 입바른 소리를 한다든지 하면
혼내주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혼 내 준대요?
방법도 여러 가지더군. 가장 초보적인 방법이 목표 인물이 경영하는
회사를 못살게 하는 방법이지. 세무사찰을 한다 던지, 은행 돈 줄을
막아버린다든지, 다른 회사에서 거래를 끊도록 한다든지, 때로는 수표를
사 모아 두었다가 일시에 풀어서 부도가 나게 만든다든지 하는 일이지.
그리고?
봉주가 준철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턱과 입술을 뾰족이 내 민 모습이
귀여워 준철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말이야 그래도 굽히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다가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게 되지. 그것도 모자라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일이
있었어. 아버지가 그러는데 말이야 한번은...
조준철이 잠깐 멈칫했다. 그이야기를 해야하는지 어떨지 망설여지는 것
같았다.
한번은?
나봉주가 독촉을 하자 그는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여당 인사 중에 꽤 강직하게 알려진 사람이 있었는데 집권자들이 하는
꼴이 마음에 맞지 않아 해외에 나가서 외국 기자들에게 할 소리를 다
해버렸대. 그랬더니 나으리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 사람을 당장
데려다 혼을 내라고 했다나. 그러나 그 사람은 들어가면 당할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외국에서 빙빙 돌기만 했대. 그랬더니 그 사람의 부인을
데려다가 온갖 고문을 다 했다는 거야.
아이 비겁해. 그래 어떤 고문을 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성 고문 같은 것이지. 발가벗겨 묶어놓고 온갖 수치스런
짓을 다하면서 네년의 영감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 것을 영감이 다시는
못쓰게 만든다느니...
아이! 그만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우울한 시대가 그들의
머리를 무겁게 했다. 한참만에 나봉주가 입을 열었다.
육군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육군정보부 외에도 정보기관이 몇 개 더
있어요. 혹시 거미부대란 이야기 들어보았어요?
거미?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내가 거기 관계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뭐야?
조준철이 깜짝 놀라 돌아섰다.
다른 건 더 묻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이야기 좀 해보아.
조준철이 봉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떻게 해서 거기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아요. 거미부대는
국군 비밀 첩보부대인데 육군장관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장차관도 거기서 감시를 하고 있거든요.
뭐? 장차관도? 모든 장차관을?
요즘 특별히 요주의 인물로 보는 장관들은 팽인식 공군장관, 서종서
내무차관등이예요.
팽장관? 서차관?
조준철은 서차관이라고 하자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죽은 누나
조은하가 여고 다닐 때 서종서라는 대학생 이야기를 가끔 했었다. 아마도
조은하가 그 남학생에게 호기심이 있었거나, 어쩌면 연애라도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의 서종서가 오늘 내무차관이 되어
있는 서종서와 동일인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종서 차관은 왜 감시를 받는 거야?
잘 모르기는 해도 정채명 장관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가 봐요.
다른 생각?
조준철은 나봉주의 손을 잡고 고문직 교장의 사택 대문앞 바위에 앉았다.
서종서 차관과 정채명 장관은 서로 감시하는 사이란 뜻이야?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건 우리가 알 필요도 없는 일이구요.
그런데 봉주가 어떻게 해서 거미부대 일을 하게 된 거야?
나봉주는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냥 앉아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묻지 마세요.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그때였다. 교장 사택의 반쯤 열린 대문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누, 누구요?
조준철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나봉주를 자기의 등뒤로 숨기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나봉주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의 행동은 거의
본능적이었다.
어흠. 나요 나. 고 교장이요. 어흠!
고문직 교장은 그들이 너무 놀라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아, 교장 선생님이시군요. 밤이 깊은데 주무시지는 않고...
조준철이 겸연쩍어 목을 움츠리면서 웃어 보였다.
젊은이들이야말로 먼길을 와서 피곤 할텐데... 그건 그렇고 지금 내가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대문께 누가 있는 것 같아 나와
보았다가 들은 얘긴데...
고문직 교장이 한참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서종서 내무 차관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 가요?
고문직 교장이 참으로 엉뚱한 말을 한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서차관을 아시나요?
나봉주가 말했다.
안다기 보다는 여러 번 그 이름을 들은 일이 있어서...
어떻게 그 이름을 들으셨나요?
이번에는 조준철이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
고문직 교장은 조준철의 맞은편에 있는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꽤 심각해 보였다.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세사람의 뺨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준철과 나봉주는 긴장한 채 교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미 고인이된 조은하 선생이 살아 있을 때였소. 그날은 방학중이라
학교가 텅비어 있었는데...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된지 근 열흘이 지나
학교에 별 일이나 없나하고 들렸지요. 그런데 마침 텅 빈 학교에는 조은하
선생이 혼자 나와 당직을 하고 있더군요. 조선생은 고향이 서울이라고
하면서도 방학 같은 때 한번도 고향에 가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고문직 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비벼 불을 껐다.
조은하 선생은 보기 드물게 화장한 얼굴에 화사한 옷차림을 하고 밝은
표정으로 운동장 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더군요. 조은하 선생
인물이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만한 미인을 아마 이 고을에서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은하에 대한 추억담을 몇 가지
더 늘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로 보아 아마도 그가 조은하를 짝사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서종서씨는...
듣기가 답답했던지 조준철이 입을 열었다.
참, 내가 서종서라는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조은하
선생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웬 신사 한사람이 학교로 왔더군요.
단정한 차림에 예의 바르고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한여름인데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어요. 그리 큰 키도 아니고 잘생긴
인물도 아니었으나...뭐라고 할까 약간은 근엄하고 점잖은 그런
모습이었어요. 나이는 한 마흔 대여섯....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보셨습니까? 그래 그 사람이 바로 서종서라는
사람이었군요.
조준철이 고문직 교장의 말을 더 단축시키기 위해 거들었다.
맞았어요. 그 사람이 바로 서종서라는 사람이었어요. 조선생을
찾아왔어요.
두 사람이 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것 같았나요?
나봉주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았어요. 아마도 학교에서 두사람이 만나기로 한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자기가 서종서라고 하던가요?
조준철이 물었다.
아니죠. 조선생은 그 사람을 나한테 소개하지도 않았어요. 나는 두사람이
만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나와버렸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서종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나봉주가 묻자 그는 아무말도 없이 담배 다시 피워 물고 입을 열었다.
방학중에는 학교 문을 닫아놓기 때문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수위가
적어놓지요. 나는 학교를 나오면서 슬그머니 방문객 명단을 보았지요.
그랬더니 주소가 서울로 된 서진서라는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람이 서 종서 입니까?
이튿날 나는 동네에서 조은하 선생을 만나 말을 걸었지요. 어제 서울서
오신 서진서 선생은 돌아가셨냐고 했더니 아, 서종서씨 말이군요. 라고
하더라니까.
그렇게 되셨군요.
두사람은 고문직 교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조은하 선생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았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이 곳까지 왔다는 것입니까? 이름도 속이면서...
글쎄입니다.
그 뒤도 그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국회에서 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이 있을 때 국무위원석에 그 사람이
앉아있더군요. 확실히 그 사람인지 아닌지는 좀 자신이 없지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내무차관 서종서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밤공기가 찬데 난 먼저 들어가겠어요.
고문직 교장이 일어서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봉주는 어떻게 해서 거미부대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좀 설명할
수 있겠어?
준철이 봉주의 어깨를 껴안고 그녀의 몽실한 젖가슴을 만지면서 물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준철씨 화 안 낸다고 약속 할 수 있어?
나봉주가 준철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물론이야. 약속 할 수 있어.
준철이 봉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방안으로 들어가요. 추워요.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벗고 따뜻한 이불밑에 들어가자 준철이
봉주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봉주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찬 밤공기속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싸늘해진 봉주의 몸이 준철의 애무를
받자 차츰 더워지기 시작했다. 준철의 손은 봉주의 등을 쓰다듬다가 다시
몽클한 가슴으로, 그리고 부드러운 아랫배를 거쳐 샅으로 옮겨갔다.
아이...
봉주가 무릎을 오므렸다. 그러나 상체는 더욱 준철에게 밀착시켰다.
준철이 봉주의 팬티를 벗기려고 했다.
아니, 준철씨...
말과는 달리 봉주는 몸을 뒤척여 준철이 쉽게 옷을 벗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쉽게 다음 동작으로 옮아갔다. 그들의 두 번째
사랑 행위는 밖에서보다 훨씬 격렬하게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봉주야.
땀에 흠뻑 젖은 준철이 한참만에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어둠 속에도
번지르하게 땀에 젖은 그의 긴 허리가 봉주의 눈에 들어왔다.
거미 이야기 다시 해봐!
준철의 목소리는 조금전 정사를 치를 때와는 너무도 다르게 차가웠다.
내가 무슨 이야기해도 이해한다고 말했지요?
봉주는 옷도 입지 않고 누운 채로 꼼짝 않으면서 말했다.
약속했잖아.
준철의 대답은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가 처음 그 부대에 들어 간 것은 공채 모집 광고를 보고서 였어요.
4년전에 신문에 첨단 기업체에서 타자 요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서
그걸 보고 그 곳으로 찾아갔지요.
봉주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시험을 치러 간 곳이 육군 부대였어요. 나는 거기서 쉽게 합격하고 보안
교육을 받은 뒤 배치가 되었지요. 봉급도 대단히 많이 주고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어요.
혜택이라니?
준철이 돌아보며 물었다.
면세 제품을 살 수 있다 던지... 물건을 면세로 사면 엄청나게 싸요.
육군 병원을 거의 무료로 이용 할 수 있다 던지....그런데 처음 배치된
곳에 가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놀라?
예. 내가 늘 다니던 큰 백화점의 꼭대기 층이 글쎄 사무실이지 뭐예요.
물론 군복 같은걸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곳에 육군 정보 부대인
거미 부대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았어요. 그곳에서 나는 주로 기밀
문서를 타자하고 복사하는 일들을 했어요. 나를 도와주는 남자 요원이
한사람 있었는데... 물론 군인 신분 이였지요.
봉주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래서?
준철이 말을 재촉했다. 그는 미아리의 이상한 사무실을 생각했다.
정말 준철씨 화내면 안돼요.
봉주가 준철의 가슴을 가만히 쓸면서 말했다. 그의 털부숭이 가슴은 땀에
젖어 촉촉했다.
응.
준철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우리 두 사람은 가끔 밤늦게 까지 남아 일을 하고는 했는데...
그 남자 이름이 뭐야?
그건 말하지 않을래요. 하여튼 그 남자와 함께 몇 달을 일하는 동안
우리는 퍽 가까워졌어요. 마침내 어느 날 그는 사랑의 고백을 해 왔어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드리고...
그래서 여관방부터 달려갔단 말이지.
갑자기 준철이 화를 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유치하게...
봉주가 벌컥 화를 냈다. 준철의 가슴에 있던 손을 얼른 떼고 돌아앉았다.
.....
한참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봉주씨. 화났어?
준철이 봉주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며 말했다.
이럴 때 질투 내지 않는 남자가 있겠어? 미안해 다시 이야기 해봐.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좋아하게 되었지요.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불장난을 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일이 생겼어요. 어느 날 밤
우리는 야근을 하다가 그만 철없는 장난을 시작했거든요. 사무실 소파
위에서 두 사람이 다 옷을 벗다싶이하고 엉켜 있었는데....
엉켜? 어떻게?
준철의 목소리가 다시 거칠어졌다.
호호호...상상에 맡겨요.
갑자기 봉주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두 사람의 어색한 사이를
금방 바꾸어 놓았다.
재미 좋았겠군. 그래서...
준철의 목소리도 약간 장난기를 띠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우리 부대장이 부관을 데리고 들이닥쳤지 뭡니까.
후후후...꼴 좋았겠는데...
준철이 고소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 남자는 어딘 가로 사라졌어요. 다시는 그 사람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는 거미 부대의 다른 파견대로 옮겨가게 되었어요. 그 곳을
그만두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벌써 4년반이나 지난
일이군요.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해?
준철이 봉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거미 부대는 같은 육군 소속의 정보 부대이면서 다른 부대와는 전혀
교류가 없어요. 마치 정부의 다른 정보기관을 적군인 것처럼 다루어요.
그러니까 오직 장관 한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기관이란 말이군.
추경감은 한강 유람선 회담에 대한 보고서를 낸 뒤에는 곧장 산정호수에서
발견되었던 여자들의 유류품과 남자들의 지문 등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여자들의 옷은 거의가 그곳 종업원들의 옷이었다. 두어 가지만 국무위원
부인들의 것이었다. 범행을 저지른 납치범 일행들의 옷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추경감이 성과 없는 수사를 끝내고 오랜만에 잠실에 있는 25평짜리 초라한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였다.
손님이 와 계신데요.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는 추경감의 아내가
건넌방을 가리켰다.
경감님 접니다.
추경감이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방문이 열리며 사람이 나왔다.
아니 당신은.... 조준철씨 아니요?
예.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두 사람은 좁은 방에 마주 앉았다.
그래 밤중에 여기까지 왔을 때는 보통 일이 아닐 것이고...
조준철은 나봉주에게서 들은 거미부대의 이야기와 고문직 교장에게서 들은
서종서 차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나를 납치해서 페닌슐라 호텔로 데려 갔던 사람들은 육군
정보부대인 거미 부대란 말이군.
추경감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동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찾아갔던 길음동의 그 이상한 사무실도 거미부대와
관계가 있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화 번호를 적어놓은 조은하씨도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닐까?
그때 별다리 학교서 누나 소지품에서 발견된 999국에 4884란 전화 번호
말이죠?
그뿐 아니라 서종서 차관과도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지...거미부대와
내무부와 국민학교 여선생님이라...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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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없는 나라_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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