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전쟁-상권
이영민
차례
1. 정당한 타협과 적당한 타협 7
2. 모래시계 세대의 저항 35
3. 서로 다른 젊은 층 59
4.상식이 통하는 세상 89
5.정치 공작 107
6.역사가 만든 순예보 139
7.재야출신의 고전 183
8.여소 야대 223
9.참담한 패배 255
1 정당한 타협과 적당한 타협
동녘 빛을 기다리는 하얀 달빛이 어스름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한강 고수부지.
그 위를 가르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슬을 듬뿍 머금은 새벽
공기를 마시며 마치 발을 맞추듯 나란히 달리고 있다.
두 그림자는 무엇인가 중얼거리다가 멈추어 서고 그러다가는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더니 강가에 릴대를 드리우고 있는 나이가 지긋한 태공의 옆에 멈추어
섰다.
"안녕하세요? 많이 잡으셨어요?"
"어서 오게. 신통치가 않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혼자가 아니구만."
"예, 친구와 함께 나왔습니다. 정균아! 인사드려라."
조정균이 눌러 쓴 모자를 벗어 들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이상한 듯
이소운을 바라보고 나즉하게 물었다.
"어떻게 아는 분이니?"
"얘기가 길다. 그냥 아침운동 나왔다가 알게 된 분이라고만 하자."
노인이 이소운에게 말했다.
"이군. 준비는 잘 되시나?"
"나름대로 착실히 하고 있습니다만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재산이라고는 몸뚱이 하나하고 배짱 밖에 없는 지라...”
"그러지 말고 나하고 낚시나 다니자구. 그 더러운 판에 왜 끼어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언젠가도 말했지만 이군같은 사람은 정치판에 어울리지 않아.
하기 좋은 말로 정치인의 자질이 어떻고 덕목이 어떻고들 떠드는데, 죄다
쓸데없는 소리야. 내가 아는 대로 라면 정치인이 될려면 철저하게 속물이
되어야하고 이중삼중성을 갖추어야 하네. 얼굴이 보통으로 두꺼워서도
안되고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놓을 줄 알아야 된다이말이야. 누군가 정치인을
빗대서 야누스라고 했지. 알고있나? 자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으라구.”
"아저씨도 참... 이제는 도와주시기로 했지 않습니까?"
"술김에 내뱉은 말을 믿으려는 겐가? 이 사람아! 그 놈의 정치하겠다고
나댓다가 마누라 죽이고 자식 새끼 병신 만든 나보고 뭘 도와달라는
게야? 내가 자네를 돕는 것은 정치를 못 하게 하는 것 뿐이야.”
"이미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니 어떻하겠습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불을
지필 수 밖에 없질 않습니까? 어제 저녁에 아드님을 만났습니다. 아드님
말씀이 아저씨만 승낙하시면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 제발 좀
도와주시오.”
"내가 이곳엘 자주 오는 이유가 뭔지 아나? 자네를 보기 위해서야.
마치 젊었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거든. 하늘이 벌겋게 달아 오를 쯤이면
자네가 나타나고 자네가 나타나면 낚시대도 입질을 시작하거든. 참 묘한 일이야
마치 물고기들이 자네가 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단 말이야. 자네를 알기
전에는 한강물고기는 나하고만 대하하는 줄 알았는데,자네하고도 대화를
하는 것 같다구.”
노인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이 낚시대에 매달아 놓은 방울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대가 휘는 걸 보니 꽤나 큰 놈이 걸린 듯 했다. 노인의 조심스런
손놀림을 보면서 뜰채를 집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자는 족히 넘는
잉어가 푸드덕거리며 물 위를 차고 올랐다가는 다시 자맥질을 했다. 소운은
물가로 당겨진 잉어를 뜰채로 담아 올려 노인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낚시
바늘을 빼가면서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놈아! 오늘은 물 속이 어떻느냐? 좀 맑아졌느냐? 오냐, 하루가
같겠느냐 이틀이 다르겠느냐. 그저 세월이 약이겠거니 하고 기다리마.
잘가거라.”
그러더니 노인은 잡았던 잉어를 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정균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이구 맙소사. 그 아까운 걸...”
소운이 웃으며 말했다.
"놓치신게 아니라 놓아 주신 거란다."
"뭐야?"
정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결론을 내리셔야죠."
소운이 다시 채근하기 시작했다.
"이군, 자네가 이 더러운 한강물에서 수영을 하던 때가 있었다고 했지?
예전에는 그랬지. 흐르는 물에 머리를 박고 배가 터져라 들이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을 만큼 깨끗했던 때도 있었지. 그러던 것이 언젠가 부터
서서히 탁해지더니 물고기도 살 수 없이 더러워졌고 새까맣게 죽어버렸지.
최근에 와서 혈색이 돌아오는 걸 보고 다행이다 싶었더니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한계야,한계... 이 물을 바가지로 떠먹을 수 있기까지는
십 년이 걸릴지 이 십 년이 걸릴지 아니면 영원히 불가능할지 알 수 없는
일이네. 바닥이 원체 썩었어야지.어쩌면 자네 생전에는 물이 깨끗해질지도
모르지.”
정균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소운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 보는 정균의 모습을
곁눈으로 바라보면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조금만 참으라는 신호였다.
"아저씨 돌아가시기 전에 깨끗해질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인가? 자네 혼자서 말인가? 무슨 재주로 할텐가
? 그동안 자네같은 젊은이들이 수 십 년동안 수도 없이 나섰지만 결국은
더러운 물에 섞여 흰 놈인지 검은 놈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나? 내가 다
늙어서 천당가겠다고 예배당을 찾았지만 나라 잘되고 정치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매일 빠트리지 않네. 쯧쯧쯧... 신도 못 하는 일을... 혁명을 한다 해도
어렵네. 이 나라의 정치판은 한강물보다 더 썩었어.”
"그래도 한강을 떠났던 물고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깨끗해졌다는 거지요. 노력하고 저항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패배주의에 빠져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는 것은 도리도 상식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뛰어 들었구요.”
"나도 처음에는 자네와 같은 생각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렸고 많은
사람들이 깨끗하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정치에 입문하지.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아. 그놈의 판에 들어가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부류가
되어 버리거든. 더러운 물이야 탈이나도 토사나 하면 그만이지만 오염된
정치판은 사람의 정신까지 파괴하니 문제야. 자네다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더러운 강물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야.
내가 걱정하는 것은 주사나 한 대 맞고 나을 수 있는 토사가 아니라
자네의 건강한 정신이유린당할 수 있다는 점일세.”
"저는 제 소신을 지킬 자신이 있습니다. 부정과 불의에 단호히 맞설 수
있는 자신도 있구요.”
"자네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 자네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그 판은 뭇 세파와는 달라. 적당한 타협이라는 것은 일종의
미덕쯤으로 받아들이는 곳이야. 다시 말하자면 부러져 일회용이 되기보다는
갈라지고 휘외질지라도 오래도록 존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자네라고 해서
스스로 부러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 아닌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소신이
중요한게 아니지 않ㅇ느가 말이야?”
"합리적이고 정당한 타협이라면 굳이 나쁘게만 볼 수는 없지요."
"내 말은 정당한 타협이 아니라 적당한 타협을 말하는 것이야. 까짓거
타협이 소신이고 살아 남는 것만이 유일한 소신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근본적으로 사자는 사자여야 하고 호랑이는 호랑이어야 하는데, 어떤 몹쓸
인간들이 이것들을 섞어 가지고 '라이거'를 만들고는 성공적인 접합이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 그렇게 어거지로 만들어진 '라이거'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불쌍하게도 얼마 살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만들어 지지도 않았지.
그러나 우리 정치판에는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여전히 '라이거'가 만들어
지고 있단 말이야. 그러고는 자기들 끼리 박수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이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비난하고 한숨짓고 외면하고 방관하고 그리고는
또 찍어서는 또 다시 몹쓸 '라이거'를 만드는데 앞세우고... 더 한심한 것은
그 꼴이 보기 싫어서 고쳐 보겠다고 뛰어든 사람들도 한 통속이 되어
'라이거'를 만드는 거수기로 둔갑하고 있다는 현실이지.
자네라고 별거겠나? 도와 달라구? 그래, 도와주지. 하지만 자네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될걸세. 후회가 들거든 한
번으로 끝내게. 자네는 밖에서도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네.나는 자네가 지금이라도 민초 속에서 명예를 찾기 바란다네. 내 말뜻
알아 듣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이소운은 노인과 인사를 나누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던
조정균이 물었다.
"뭐하는 분이야?"
"당신 말씀을 그대로 옮기자면 세상을 낚으려다가 실패하고 고기 낚고
사신다는 분이다.”
"어떻게 알게 됐어?"
"밤낚시를 즐기시는데, 이틀에 한 번 꼴은 나오신다. 아침운동을 하다가
우연히 잡은 고기를 놓아주는 것을 보았어. 대단히 큰 놈이었거든. 처음엔
나도 너처럼 놀랐다. 이상한 노인도 다있다 싶어서 잠시 지켜 보고 있는데,
또 한 마리가 잡혔어. 처음 것 보다는 작았지만 다시 놓아 주더라구.
그래서 다가가 여쭤 보았지.
'아저씨, 사우러 초파일도 아닌데 방생하시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잡은 놈을
왜 아깝게 도로 놓아 주십니까?’했더니 태연하게 대답하시기를 '물어볼
것이 있어서 잡았고 대답을 들었으니 놓아 주어야지.’이러는 거야.”
"신선은 산에서 사는 거 아니냐? 강가에서 웬 신선 흉내를 낸다니?"
"사연이 많은 분이란다."
"사연이 많으면 한강의 신선되냐? 잘하면 나도 되겠네?"
"우라질 놈, 네 놈 사연이 사연이냐? 잡연이지? 신선 모독하지 말고 네
놈 속이나 신선하게 만들어라.”
"미안하다. 그나 저나 뭐하시던 분이냐?"
"젊었을 때 장치판에 뛰어 들었다가 실패하신 분이야. 국회의원 선거에만
세차례나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단다. 그러는 동안에 물려받은 가산은 죄다
탕진해 버렸고 부인은 홧병으로 돌아 가셨단다. 두 아들을 두었는 데, 큰
아들은 선거를 돕다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고 작은 아들은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뛰어 다니다가 전과자가 되었단다. 그런데 그 작은 아들이
박재영이라고 나하고는 가까운 친구라구. 참 묘한 인연도 다 있구나 싶더라.
재영이가 형과 함께 조그마한 글방을 운영하면서 지역에서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 지역에서는 꽤나 알려진 인물이지. 그 친구한테 선거를 도와
달라고 했더니 아버지의 승낙이 없이는 절대로 안된다는거야.”
"아까 도와 달라고 부탁한 그거였구나?"
"맞아.그런데 이 양반이 정치다 선거다 하면 워낙 한이 많은 분이라 결사
반대거든. 오늘이 몇 번짼가 모르겠다. 겨우 승낙을 받아낸거지.”
"너같은 녀석이 어디가 좋아서 손을 들었을까? 알 수가 없네."
"내 특기중에 하나가 물고 늘어지는 것 아니냐?내 이빨에 걸려서 안넘어
가는 사람봤니? 꼭 선거뿐만 아니고 그동안 같이 밤을 새워 낚시도
해가면서 인간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어. 그분 말로는 유일한 대화상대가
낚시에 걸리는 물고기였는데, 내가 나타나 대화 상대가 하나 늘었다고
하시더구나. 말년을 참 외롭게 사시는 분이야. 매우 박식한 분인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두 사람이 시장 모퉁이를 돌아 좁은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귀퉁이가 찢겨진
베니어판에 해장국이라는 글씨가 비뚤비뚤 그리듯이 쓰여있고 그 옆으로
뚜껑이 열린 커다란 솥이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며 연탄화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뻑뻑한 출입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이소운을 향해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반갑게 악수를 교환하고 둥그런 철제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아주머니, 여기 두 그릇이요."
"어서오셔. 준비는 잘 되시남?"
"예,덕분에 잘 되고 있습니다."
"그려, 옛날 것들은 죄다 물러가고 이제 젊은 양반들이 좀 혀야 혀."
조정균이 말했다.
"자주 오는 모양이지?"
"아침운동이 끝나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여기서 아침을 대신한다.
좋지않니?”
"아직도 이런 데가 있네. 되게 오랜 만에 이런 곳에 와본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찾아 다녀라. 옛날 생각해서라도..."
뒷편에서 이소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황빛 제복에 뿌연 먼지를 쓴
한무리의 남자들이었다.
"이선생님요,막걸리 한잔 하실랍니까?"
"아이구,아닙니다. 이제 작업이 끝나셨나 보군요?"
다른 한 남자가 벌건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선거에 나오실라믄 술이라도 한잔 사는거이 도리 아니여? 안그러요
선상님?안살라믄 내잔이라도 한잔 받아야 헐 것이고...”
대답도 듣기 전에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막걸리를 가득 채운 술잔에
시커먼 손가락을 담구고 소운에게 들고 와서는 강권을 한다.
"요렇게 누추헌디서 자주 본께 좋습니다만 고놈에 표땜시 그라는 건
아닌가 모르겄소. 쇼허시는 것은 아니겄지요? 아니라믄 말입니다이, 이 바닥
인생사는 사람 술 한잔 받으시고 내도 한잔 따라 주실라요?”
동료들의 만류하는 목소리가 고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소운은 난처했지만
거절했다 가는 일이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그러시지요. 대신에 양이 많으니 반씩 나누어 마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이쪽 잔에다 따라 드릴 테니...”
다행히 소운의 요청은 흔쾌히 받아 들여졌다.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하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주위에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지고 주인
아주머니의 농담이 흥을 돋구었다.
"저 양반이 샌님인줄 알았더니 술도 마실 줄 아네, 그려? 호호호..."
한바탕 웃음소리가 멈추는 순간 한쪽 귀퉁이에서 시샘이라도 하듯 독설이
던져졌다.
"잡 것들, 지랄하고 자빠졌네.당선돼 봐라, 이런 곳에 코빼기도
안보일테니... 다 똑같은 것들이라구.”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정균이 투정을 부렸다.
"소운아, 나가자. 더 이상 못 앉아 있겠다."
누가 들을 새라 소운이 나즉히 가로 막았다.
"왜 이러니? 식사는 어떻게 하구? 마음 편하게 앉아 있어. 우리도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하고 이런 모습으로 살았어. 새삼스럽게 왜 이러니?”
"하지만..."
"듣기 싫어. 식사 온다.빨리 먹고 나가자."
먹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놓고 해장국 집을 나와 소운의 사무실로 향했다.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난 소운과 정균을 김지은이 의아스럽게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두 분 어떻게 된 거예요?"
"지은씨가 여기 웬일이십니까?"
정균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내가 얘기 안했니?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겠다고 애걸복걸해서 마지못해
채용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도와 달라고 매달린 사람이 누군데..."
"누가 먼저면 어때요? 어차피 두 사람은 전생부터 함께 돕고 사는 걸로
조물주가 정해준 사이잖아? 설마 하니 국수도 없이 살림 차린건 아니겠지?”
"미친 놈, 따라들어오기나 해."
소운이 자신의 방으로 정균을 인도했다. 위원장실이라고 씌여진 팻말이 제법
그럴 듯했다. 몇 명의 선거사무원들이 컴퓨터 앞에서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말이 위원장실이지 작업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좁지 않니?"
"이것도 감사한 심정이다. 전세방 빼가지고는 겨우 이 정도 사무실 밖에
얻을 수가 없더라.”
"숙식은 어떻게 하려고 방을 빼?"
"아예 여기서 먹고 자고 한다. 선거 끝날때까지는 어쩔수 없지. 거기 앉아
라.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자.”
정균이 소운을 측은한 듯이 바라 보았다. 두 사람은 엄밀히 말해서
적이었다. 소운은 야당의 공천을 받았지만 정균은 여당의 공천을 받았다.
애당초 소운에게도 여당의 입당 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입당조건도 좋았다. 선거사무실은 물론 선거자금의
일체를 당에서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무일푼이니 소운에게는 다시없는
호조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객기를 부린다는 주위의 비판아닌 비판의
소리를 감수하면서 야당의 길을 그것도 승상이 투명하지도 않는 소수 야당을
선택했다. 정균은 그러한 소운의 선택에 아쉬움과 우려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여당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군사정권의 비민주적인
통치행위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고 방조해온 인물들이 적지않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자신을 좌경,용공 심지어는 빨갱이로 몰아 세워 영어의
몸을 만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과 한솥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다. 용서와 화해라는 말을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역사적 진실을
덮어 버리자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다. 적과의 동침을 스스럼없이 선택한
최고 권력자의 행위가 용감하고위대한 결단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소운은 권력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닌 바에야 용감하지도 위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개혁이라는 말도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아직도 소운의 주변에는 소외되고
버림받아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민초들이 너무나 많다. 방아간에서
요란스럽게 만들어진 개혁이라는 덩치 큰 떡이 민초들에게는 고물도
나누어 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개혁을 바라보는 민초들의 가슴에는 한낱
허상에 불과한 지도 모를 일이다. 그 허상을 쫓아 안위를 따라가느니
기왕의 허상이라면 민초와 함께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고 생각했다. 비록
처절한 고통이 따를 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 서리라 마음먹었다.
정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렵다."
"어렵다는 건 나도 알아. 내가 선택한 것이니 후회는 안한다."
"네 자신뿐만이 아니야. 너희 당은 교섭단체도 힘들어. 그 후엔 어떻게
할거니?”
"나보고 주저 앉으라는 말이냐?"
소운이 냅다 고함을 쳐댔다. 지은이 잔뜩 놀란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예요? 왜들 그래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별일 아니니까 나가 계세요."
"싫어요. 내가 들으면 안될 말이라면 몰라도 여기 같이 있을래요."
"소운아, 괜찮겠니?"
"형한테 물을 것도 없어요. 제가 그냥 있겠다구요."
지은이 단호하게 주저 앉았다. 소운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정균은 말을
계속했다.
"화낼 일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했을 뿐이야. 너도 언젠가 말했지? 너의
선택이 무리수 임에는 틀림없다고...”
"한마디로 요점이 뭐냐?"
"내 말은 후일을 대비하자는 거야. 이번에는 적당히 해둬."
"그러니까 어차피 질게 뻔한데 바둥거리지 말아라 이거니?"
"그렇게 비비 틀지 마. 네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뭔지는 나도 알아. 그걸
터뜨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그걸로 인해 이의원이 타격을 입으면
어부지리는 다른 후보가 차지할 뿐이지 네 자신을 위한 승부수가 되지
못한다구. 또 이의원 개인이 다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윗선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게 문제야. 다른 것은 다 좋다. 그 자료만은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거야.”
"내가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배신과 변절에 대한 응징이
필요했어. 그래야만 이의원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인사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될테니까.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게 협박만을 일삼고 있다.
네가 나를 찾아온 것도 일종의 협박이야. 한가지만 말하지. 이의원이 출마를
포기한다면 나도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 또 내 자신도 이번 선거를
포기하겠다.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
"그건 말도 안돼. 3선의원이 더구나 선거를 코 앞에 두고 느닷없이
도중하차라니...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니?”
"그렇다면 조건없이 항복하라는 거냐? 네 녀석이 나를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해? 될 성 싶은 소리냐구?”
"아까도 얘기했잖니? 후일을 생각하자고... 만일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너희 당은 깨진다. 잘된다면 우리 당과 통합이겠지? 길이 뻔해. 그
때를 대비해서도 경거망동은 삼가해 달라는 거야. 옛날 내가 구속되었을 때
기억나니? 반성문만 쓰면 집행유예 정도로 석방될 수 있다는 회유에도
기어이 거절했었어. 그 때 네가 뭐라고 했느냐면 '감옥에 앉아서 무슨 민주화
운동을 하느냐? 밖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피를 흘리는 동안 너는 국가의 보호
속에서 편안하게 지내겠다는 거냐? 반성문 쓰고 나와라. 나와서 또 싸우면
그만 아니냐? 감옥에서 남겠다는 것은 현실도피다.’이런 말을 했다. 사실
쫓겨 다니고 피해 다니는 것이 지겹도록 피곤했다. 솔직히 쉬고 싶었어. 결국
반성문을 쓰지 않았고 감옥에서 2년을 썩었다. 지금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소운아, 이번 일도 이와 비슷한거야. 네가 우리 당을 싫어하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야. 네 뜻이 어떤지도 알아. 하지만 한 번 진다고 영원히 지는 것은
아니지 않니? 함께 남자는 거야.그래서 좀더 근원적으로 모순에 대항하자는
말이야. 그때는 내가 적극적으로 네 편이 되어줄게.”
"미안하다. 나는 네 편이 되어줄 수 없다. 그만 일어 나라."
"소운아!"
"글세 소용없어."
"소운아 임마!"
"그만 꺼지라니까?"
소운이 핏발선 눈으로 정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정균이 고개를 떨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운듯 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힘없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 밨으면 한다."
"문닫앗!!"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쩔 줄을 모르고 눈치만 살피고 있던 지은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요?"
"..."
"형..."
"괜찮아"
지은이 눈물을 흘리며 소운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이러다가 큰 일나는 건 아니겠죠? 걱정되서 죽겠어요."
"걱정할 것 없어. 아무 일 없을거야.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겪지 않았니?
누가 보면 어쩔려구 이러니?”
소운이 지은을 살며시 안아 품에서 떼어내고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어설픈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은아,동찬이 호출 좀 해줄래?"
"정기자님은 왜요? 자료 때문에요?"
"그래, 아무래도 동찬이하고 상의를 해봐야겠어. 미리 보호막도 깔아
놓을 겸...”
"나도 함께 만나도 되죠?"
"그래, 너도 어차피 만일을 대비해야 하니까..."
오후 회의를 마치고 10분만 잠을 청한다는 것이 30분을 웃돌고 있었다.
지은이 아차 싶었다. 10분 후에 깨워 달라고 했는데 깜박 했던 것이다.
하루종일 불안감에 휩싸여 생각이 복잡했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터였다. 지은이 화들짝 놀라서 위원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형, 일어나요. 미안해, 30분이나 지났어.”
"아이쿠, 늦겠다. 이 녀석이 그리치니 천문대같은 놈이라 1분만 지나도
난리를 치는데... 서두르자.”
지은이를 태운 소운의 승용차가 강북 강변로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양평에 있는 정동찬기자의 본가를 향해서 서울을 빠져 나가려는 것이었다.
소운의 자동차가 막 워커힐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형, 천천히 가요. 사고나겠어."
"그러게 제 시간에 깨웠으면 좋잖아."
"걱정거리를 안주면 되잖아. 세상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사는 사람이니... 좀
편하게 살 수 없어요?”
"생긴대로 사는 거지 별 수 있니?"
"형 멋대로 사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피곤하잖아? 이건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으니... 시한폭탄을 끼고 사는 게 낫지.”
"걱정마라. 네가 끼고 살지 않아도 여자는 많으니까."
"웃기지마, 나니까 형 옆에 있는 거지 어떤 골빈 여자가 형 좋다고 옆에
있어줘? 어림없는 소리지. 복받은 줄 알아요.”
순간, 소운이 백밀러와 룸밀러를 바쁘게 번갈아 보며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지은아, 너 콤팩트있지?"
"왜 그래요?"
"거울을 꺼내서 뒤를 따라오는 검은 색 승용차를 살펴 봐. 뒤돌아 보지
말구."
지은이 두려운 얼굴로 콤팩트에 달려있는 거울을 꺼내 문제의 승용차를
비추어 보았다.
"저 차가 어때서요?"
"아무래도 미행 당하고 있는 것 같아. 한남동 부근부터 계속 접근해
따라오고 있거든. 확인을 해봐야겠어. 잘 살펴봐.”
소운이 속도를 늦추었다가 빨리 했다가를 반복해 보았다. 그리고 차선을
이쪽 저쪽으로 옮겨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뒷 차 역시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미행 당하고 있었다.
"형,어떻해요? 무슨 일 당하는 건 아니겠지?"
지은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되겠다. 교문리 쪽으로 빠져야겠어. 신호를 이용하면 떼어낼 수
있을거야. 밸트를 꽉 매라.”
소운이 악세레터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곡예를 하듯 간선로를 빠져 나가
시내로 들어갔다. 여전히 문제의 승용차는 소운의 뒤를 밟고 있었다. 퇴근 길
차량이 얽혀 있어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보아하니 기사를 포함해
네 명이 건장한 청년들이 타고 있었다. 미행이 탄로난 것을 알아 차린 듯
했다. 소운은 천천히 인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 갈
심산이었다.
마침 주변의 사이길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시간도 없는데, 별 것들이 다
속을 썩기는 구나.’하고 속말을 하면서 쏜살같이 골목길로 차를 몰았다.
여전히 문제의 검은 승용차가 뒤를 쫓고 있었다. 이쪽 저쪽 골목을 돌다
대로로 빠져 나와 차를 워커힐 방향으로 되몰았다.
"형, 어쩔려구 그래요? 정기자님은 포기할거예요?"
"아무 소리말고 등받이에 꾁 붙어있어."
소운은 비상등을 깜박이며 중앙선을 넘었다. 그리고는 앞 차의 경적소리를
무시한 채 사정없이 차를 몰았다. 아직 해가 남아 있는 터라 위험은 덜했다.
순간 적색 신호등이 켜지고 좌측 도로에서 몇 대의 차량이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속력을 이기지 못한 소운의 승용차가 찢어질듯한 브레이크음을 내며
좌측으로 미끌어져 멈추었다. 그리고는 놀라 멈추어선 차량 사이로 잽싸게
빠져 나가 좌측 도로로 진입하더니 그대로 내닫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소운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끝났다. 이제 안 따라온다. 아니 못따라 오는거지?"
지은이 막 울음보를 터뜨릴듯한 표정을 지으며 창백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정말 끝난거야? 꼭 죽는 줄만 알았어."
"지금 빠져나온 길이 원래부터 지나야할 지름길이었어. 그나 저나 큰
낭패인걸,시간내에 도착하기는 틀려 먹었으니...”
"기왕 늦은 거 여유있게 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해. 우리가 도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그자들한테 왜 쫓아 오느냐고 따질 수 없잖아? 그렇다고 양평까지 미행
당해서 동찬이 만나는 것을 보여줄 수 없고. 동찬이를 보면 자료의 정보원이
누구라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텐데 그러면 동찬이까지 다치게 된다구.”
"하긴... 하지만 자료를 공개하면 언젠가는 알게 되지 않을까?"
"공개된 후에는 문제가 없어. 협박은 불필요해 지고 불가능해지니까. 최소한
신상에 대한 위험은 없어지게 되는 거야.”
어둑해진 산기슭의 작은 도로를 얼마쯤 올라가 차를 세웠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고 있었다. 저쪽 위에서 누군가 불을 비추고 소리쳤다.
"형이요?"
"그래, 늦어서 미안하다."
"빌어먹을 왜 이제 나타나는 거야? 코리안타임 확인하는거야? 얼라,
빈대까지 붙이고 왔네.”
"하필이면 빈대가 뭐예요? 매미 정도면 몰라도..."
"야박하게 오는 손님을 내칠 수는 없지만 빈 방은 없수다. 잠자리는
알아서 해결하슈.”
"헛간이나 마굿간도 없나요?"
"여기는 베들레헴이 아니올시다. 소운이형만 좋다면 요앞에 러브호텔이라도
잡아 드리리다.”
"거 괜찮은 생각이다. 오랜만에 회포도 풀겸..."
"닥치지 못해요? 남자들이란 그저..."
옷깃을 여밀 정도로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랜턴 불빛의 안내를 받으며
싸릿문을 들어섰다. 전형적인 시골 농가의 모습이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소운이 물었다.
"어머님은 어디 가셨니?"
"서울 누이 집에 계세요. 둘째 애를 낳았거든. 허리는 구부정한 분이 일복도
복이라고 허구헌 날 자식들 뒤치닥거리나 하고 사신다니까?”
"정기자님, 뭐 먹을 것 좀 없어요?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더니 배가 몹시
고픈데...”
"말도 마세요. 십 년 아니 이십 년은 감수했을 거예요."
지은이 신이 나서 오던 길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설명하는 동안
정기자는 차와 먹을 거리를 준비했다.
"우선 녹차로 몸부터 녹이고 라면이나 끓여 먹읍시다. 어차피 얘기가
끝나는 대로 서울로 가야하니까 식사는 내려가서 하기로 하고...”
"나는 여기서 묵을 줄 알았는데..."
"재미있는 취재거리가 생겼어요. 자세한건 서울가면서 말씀드릴께요. 그건
그렇고 큰일날뻔 했네.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인걸.”
"그러게 말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형 혼자서 벅차면 한사람 더 붙여 볼까? 박성수의원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야.”
"혼자서도 충분해. 헌데, 저쪽에선 정균이까지 동원했어. 안달이 난
모양이야.”
"그래요? 정균이 형은 뭐래요?"
"뭐라겠니? 포기하라는 거지."
"미친, 그 형 왜 그렇게 변해 버렸어?"
"정균이 나무래서 뭐 하겠니? 그 녀석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게다. 그건
그렇고 시기를 앞당길 필요가 있겠어. 선거공고일까지는 너무 시간이 많아.
내가 견디기가 벅차다구. 보통 집요하게 달라 붙어야지.”
"그건 곤란해요. 아직 증언을 녹취하지 못했어. 이 친구가 겁이 너무 많아서
쉽게 말을 듣지않아. 오히려 없었던 걸로 하면 안되겠느냐고 하소연을
한다니까? 그렇다고 자료만 공개했다가는 조작이라고 역공당할 수 있어요.
이미 원본은 파기했을테니까”
지은이 나섰다.
"제가 나서 볼까요? 저하고는 안면이 있는 사이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소용없어요. 보통 나약한 친구가 아니더라구. 신문사의 명예를 걸고 신분을
보장하겠대도 벌벌 떨고만 있어요. 얼마나 지독한지 몸수색까지 한다니까?”
"몸수색이라니?그건 왜?"
"왜는 왜겠수? 혹시 녹음기를 감추고 있지는 않나해서지?"
"그럴 정도니?"
"일단 좀 더 설득해 보고 안되면 김부장을 동원하는 수밖에..."
"김부장도 내용을 알고 있니?"
"아직은 몰라요. 하지만 정 안되면 털어 놓고 도움을 청해야지 별 수
있겠어요? 대가 강한 분이니까 충분히 협조할거야.”
"그리고 당분간은 전화통화는 삼가하자. 혹시 도청 당할 수도 있으니까.
팩시밀리로 연락하자.”
"제기랄, 무슨 탐정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야, 한밤중에
촌구석까지 내려 와서는 이런 궁상을 떨어야 하니...”
"그만 내려가자,"
"물 끓는데 라면은 먹고 가야지."
"그냥 두고 내려가서 비싼 밥 먹자."
"비싼 밥 좋아하시네. 끽해야 된장찌게겠지. 지은씨, 안그래요?"
"그것이 정답이네요."
2. 모래시계 세대의 저항
벽시계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간이침대를 펼치고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또 협력전화인가?
약은 녀석들이 공중전화를 이용하는지라 발신자를 추적할 수도 없었다. 밖에
있던 동지들증 막내둥이가 전화를 받는 듯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다며
세명 씩 번갈아 당직을 서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의 전환가 보다.
"누님이세요?... 주무시는 것 같은데요? ... 예,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딸칵, 수화기를 놓는 소리를 듣고는 '바꿔 달랠걸' 하고 후회했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택기를 태워 보냈다.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밖에 있는 아이들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아니 회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들의 속마음은 어떨까? 온갖 상념이 잠을 쫓고 있었다.
쿵쾅거리듯 들려오는 초침소리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백 하나,
백 둘,... 천, 천 하나,...
새벽 다섯시, 습관처럼 되어버린 기상시간이다.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약수터로 가는 날이다. 스치로폴 위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는 동지들이 깰새라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왔다. 절대로 혼자 외출을 삼가해 달라는 사무국장의 말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곤히 자고있는 동지들을 일부러 깨워 동행을 요구하기가
미안했다. 약수터에 올라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동안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었다. 눈인사, 수인사를 주고 받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중년의 남자가 소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쁘시지요? 이선생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싸움을
시작했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같은 얘기를 합니다.”
알듯한 얼굴이었지만 쉽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람 못알아보는 것도
일종의 병이 아닌지 몰라’하고 속엣말을 하면서 소운이 대꾸를 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렵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는 것이 저의 장기거든요.”
소운이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6.27지방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습니다. 원체 더러운 꼴을
당하고 보니 정치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사라지더군요. 못나가게 말리는
마누라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큰소리친 탓도 있구요. 하지만 관심까지
버린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분이 있으면 주변에서 도와주고 싶어요. 며칠전에
이선생 사무실을 찾아 갔더니 손님들이 많더군요. 기웃거리다가 그냥 나오고
말았습니다만...”
"그러셨군요. 제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관심이라기보다 이선생과는 인연이 있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공직에 있을 때, 이선생과 한 차례 다툰 적이 있습니다. 철거민 문제로
말입니다.”
그제서야 소운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러고보니 선거홍보물을 통해서도
접한 바가 있었다. 사진과 실물과는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큰 실례를 했습니다. 제가 워낙 둔해서..."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당시에는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원칙을
강조하다보니 다소 언짢은 행동을 했습니다만 이선생이 대단히 합리적인
분이라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협조를 해주셨기에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요. 주민들도
대단히 고마운 분이라고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백수가 됐지요. 우스개소리로 백 가지 기술을 가진 사람이 백수라고
합디다만 저는 한가지 기술도 가진게 없어요. 말이 좋아 명예퇴직이지 쫓겨
나다시피 30년 공직을 떠나고 나니 막막하더군요. 오십 중반에 실업자가
되고 보니 나를 내쫓은 자들이 미워지고 오기가 나더라구요. 그래서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지요. 그동안의 행정시험을 살려서 지역사회를 위해 일조해
보자는 소신도 있었구요.”
"근소한 차이였죠?"
"표차가 무슨 소용입니까? 결과가 중요하지요."
"정당공천을 받았으면 쉬웠을텐데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제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정당도
없고 여당 야당할 것 없이 서로들 잘났다고 싸움질이지만 도토리 키재기
아닙니까? 또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나름대로는 지역기반도 있고
해서 무소속도 괜찮겠다 싶었지요,”
"더러운 꼴을 당하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 입니까?"
"말도 마세요. 공직비리를 저질러서 옷을 벗었다느니, 마누라가 첩이라니,
수십 억을 부정축재했다느니, 별의 별소리를 다들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정직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식구들한테 제일 미안하더라구요.
마누라, 자식,며느리들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나서서 해명하고 다니느라
진땀을 흘렸으니까요. 다른 후보들 중에는 저와 각별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동창관계로 자주 어울렸던 사람도 있고 몇십 년 지기지우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험한 꼴을 당한 겁니다. 지나간 일이니까 가볍게 얘기하지만
선거가 끝나고는 집안이 통곡바다였습니다. 떨어진게 분해서가 아니라
저질스러운 매도가 분했던 겁니다. 제가 정말로 식구들한테 몹쓸 짓을
한거지요. 지금에 와서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탓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동네사람들의 오해도 풀렸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모든게 제가 부덕한 탓이지요."
"괜찮으시다면 저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젊고 패기있는
젊은이들은 많은데, 세상 경험이 풍부하신 어른들이 안계셔서 고민하던
차였습니다만...”
"왜 하필이면 이곳을 선택했습니까? 어느 모로 보나 상대가 만만치 않은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승산을 따지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알고 있습니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선택한 것입니다.도와 주시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저도 소일거리가 필요하니까요."
"고맙습니다. 큰 힘을 얻었습니다."
소운은 뜻밖의 인연을 감사했다. 실로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약수터를 내려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장골목 해장국집을
찾았다. 소운은 김광수씨와 오전 중에 다시 만나 구체적인 대화를 갖기로
약속하고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소운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조정균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들었다.
"야 임마, 어디갔다 오는거야? 사람을 새벽내내 강가에 세워놓고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나타나느냐구? 이래도 되는 거냐?”
소운이 아차 싶었다. 오늘 새벽에 고수부지에서 정균을 다시보자고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 놈이 얼마나 잘나고 대단한 놈인지 모르지만 친구를 이렇게 업신여겨도
되느냐구?”
정균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소운은 예기치 않았던 실수에 몸둘 바를 몰랐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 워낙 머리가 복잡하다보니
깜박했다. 정말로 의도적인게 아니었어.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거 보았니?
용서해라.”
소운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정균은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면서 쏘아 붙였다.
"나도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놈이야. 다 네 놈 걱정 때문에 이러고 다니는
거라구.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네 놈 하고 싶은 대로 해. 뒷 일에 대해서는
나도 모른다. 분명히 말하지만 네 놈은 크게 다치고 말거다. 내 말 명심
해둬.”
그래, 오히려 잘됐는지 모른다. 결론없는 대화로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모양은 안좋지만 잘된 일이었다. 소운이 이원장실로 들어가
운동복을 갈아 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셩현이 서류를
들고 들어와 인사를 했다.
"이건 오늘 일정표구요, 이건 조금전에 'SC'에서 보내온 팩스예요. 그리고
김지은씨는 하루 쉬겠답니다. 몸살이 난 모양이예요.”
"고마워, 수고했어."
'몸살이라구? 그럴 만도 하지' 소운은 빽빽하게 짜여진 일정표를 훑어 본
후 팩스를 집어 들었다.
수신 : 이소운, 발신 : 'SG' , 제목 : 긴급 간담회, 일시 : 03201900 ,
장소 : J - 1... 그리고 하얀 팩스용지 아랫 부분에 '필히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는 추신이 굵은 서체로 찍혀 있었다.
'종로1가면 최주원이 사무실? 최주원이라... 이 친구 공천에서 탈락한 후 전혀
연락이 없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무슨 긴급 간담회람? 동찬이도 오겠군.
가만? 20일이면 오늘이잖아?’소운은 일정표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다행히
오늘 저녁 7시경에는 일정이 비어 있었다.
오늘은 소운의 수행을 성현이 도왔다. 운전도 성현이 맡았다. 성현이는 한
푼이라도 경비를 절약해야 한다며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할 만큼
열성이었다. 종일 소운을 쫓아다니느라 피곤했던지 길게 하품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형, 아니 이원장님. 종교를 하나 갖는 게 어때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뭐
많잖아?”
"종교를 선거에 이용하고 싶지는 않다."
"한 표가 아쉬운 판국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실제로 득표가 많은 도움이
된다구요. 집사람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말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장로를 뽑읍시다' ,'집사를 뽑읍시다' 하고 설교를 한답니다. 이게 무시
못하는 거라니까요? 정치하는 사람치고 종교없는 사람있습디까? 심지어는
이런 경우도 있다구요. 마누라는 개신교에 나가고 남편은 천주교에 나가고
부모는 부처님을 믿는 답니다. 아예 전 가족이 종교 관련표 사냥에
나선다니까요? 그러니 차제에 눈 딱 감고 아무데나 찾아 가자구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쓸데없는 소리라니요? 저는 심각하게 말씀드리는 거라구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다보면, '종교가 뭐냐' , '고향이 어디냐' , '어디 이씨냐'하고 물어
옵니다. 이럴 때면 전화받는 아이들이 보통 난감해 하는게 아닙니다. 종교가
있나, 전라도인지 충청도인지 고향이 뚜렷하기를 하나, 전주 이씨니 경주
이씨니 하는 유명한 족보를 가지고 있길 하나, 뭐하나 딱 부러지는 연고가
없으니 하는 말이라구요. 연고 가지고 할 수 있는 홍보방법이 막연해요.
연고주의를 타파한다고 떠들지만 현실적으로 민도가 안따르는데, 어떻게
가능합니까? 솔직히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습니까? 그러니 이 참에
하나 잡읍시다.”
"글세, 싫어. 그건 위선이야. 있는 그대로 알리면 돼.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사실만을 진실되게 알리면 되는 거야. 종교단체 대표를 뽑는 것도
아니고, 향우회 회장을 뽑는 것도 아니고, 종친회 회장을 뽑는 것도 아니야.
국민의 대표를 뽑는거야. 남이 도둑질한다고 너 나할 것 없이 도둑질에
나선다면 세상 꼴이 뭐가 되겠니? 똑같으면 비교가 되지 않아. 서로 달라야
쉽게 비교가 되지.”
"위원장님의 고귀한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 표가 아쉬우니..."
"듣기 싫어. 입 다물고 운전이나 똑바로 해. 지금도 신호위반 했잖아?"
"미안해요."
잠시후 소운의 차가 최주원의 사무실 앞에 멈추어 섰다.
"차 가지고 가거라. 아무래도 한 잔해야 할 것 같으니..."
성현이 차창을 내리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 나라도 교회에 나가야겠수. 아니, 교회는 마누라가 나가니까 나는 절을
찾아 가야겠네.”
"예끼, 이놈아."
성현이 손을 흔들며 저만치 멀어져갔다.
25평 남짓한 적벽돌 단독 기와집, 최주원은 이 집을 전세내어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 주원은 스스로를 부르조아 자식이라고 했다. 부르조아답게
그는 졸업과 동시에 거액을 들여 이곳에 사무길을 차렸고 어두웠던 시절
우리의 소중한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소운이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소운이 형, 어서오세요."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그런데 동찬이가 안보이는구나?"
"곧 도착할 겁니다."
'SG'는 모래시계(샌드 그라스)이 영문 이니셜이다.
2년 전, 세칭 모래시계 세대로 불리우는 젊은이들이 연구회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단순한 친목이 목적이었지만 언젠가 부터 주로 정치 또는
사회현상에 관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기획사를
하는 주원이, 신문기자인 동찬이, 시사잡지사 기자인 성진이, 증권회사
정보기획실에 근무하는 홍균이, 노조활동을 하는 진호, 목회할동을 하는
희영이 그리고 유일한 여성멤버로서 김지은이 처럼 르포작가로 활동 중인
미혜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소운은 이들의 대부격으로 고문을 맡고
있고 주원이 회장을 맡았다. 이들은 대학 또는 도시 빈민운동계의 선후배
관계로 모두가 이소운의 영향을 받았다.
"동찬이가 오면 시작하도록 하고 각각의 근황이나 나눕시다."
회장인 주원이의 제안이었다. 홍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운이 형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보아하니 오늘 모인 목적도
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
미혜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선거준비도 궁금하구요."
소운이 주원이를 의식한 듯 머뭇거리며 말했다.
"주원이한테는 좀 미안하다. 니 혼자만 나가게 되서..."
"형이 미안할게 뭐 있어요?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미련은 없어요. 아직
나이도 있고... 차라리 2천년도에 보란 듯이 도전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모래시계 열풍이 분다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구나. 좀더 공부해서 다음에는 우리 모두가
도전에 나서보자.”
"형은 잘 되갑니까?"
"조건이나 환경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모이는 거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다른 얘기도 있어. 아참, 빅뉴스가 있는 데, 형한테는
안됐지만 우리 동지들중 혼자 사는 친구들이 합치기로 했데요.”
"무슨 소리냐? 설마 동찬이와 미혜가 한 방을 쓴다는 말은 아니겠지?"
"바로 그겁니다. 가을에 합치기로 했답니다."
"그러면 동찬이 녀석이 엄청나게 손해 볼텐데? 그녀석, 젊은 애들 잔뜩
놔두고 하필이면 미혜냐? 나이 서른에 애나 제대로 낳겠냐? 여러모로
손핼텐데...”
미혜가 화가 난 표정으로 대들었다.
"형, 남의 말하지 말아요. 지은이는 뭐 영계인줄 아세요? 훗날 무슨 소리를
들을려고 저러실까?”
"어이쿠, 미안하다. 자칫 하다가는 뒷통수 맞겠다."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동찬이가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소운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형, 됐어요. 녹음테이프 여기 있어요. 기가 막힌 내용이 들어 있다구요.
형도 깜짝 놀랄 겁니다.”
소운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어렵다더니 어떻게 했니?"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들어 갑시다."
소운은 윗저고리 깊숙이 테이프를 쑤셔 넣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임마, 오자마자 수선을 떨고..."
홍균이 동찬이를 핀잔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들렸다가 오느라고 그랬다.
저녁은 먹었냐? 짜장면이나 시키지. 고량주도 몇 병 시키고...”
"너스레는 여전하구나."
잠시 잡담이 오고 가는 동안 식사를 주문한 후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갑작스럽게 모여 주십사 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소운이 형 선거문제도
상의하고 이와 관련해서 홍균이와 성진이가 입수한 몇 가지 정보를 검토해
보자는 이유에서 입니다. 소운이 형을 돕는 문제는 형이 오시기 전에
우리끼리 상의를 했습니다. 동찬이하고 홍균이를 빼고는 비교적 활동이
쟈유로니까 선거기간동안 형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로 했습니다. 정보에 관한
설명은 성진이가 하겠습니다.”
성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누런 봉투를 집어들고 유인물을 꺼네 좌중에
돌렸다. 표지에는 흐릿한 글씨로 '1단계 정계 재편계획(안)'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리고 하단에는 유인물의 작성처로 보이는 단체의 명이 적혀
있었다. 성진이 설명하지 않아도 'xx 위원회' 는 여당의 사조직중의 하나로
지목되는 단체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성진이 회의를 이어 나갔다.
"이 자료의 내용으로 보아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작성된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의 지시를 받아 만든
것인지는 아니면 독자적 판단에 의해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당이 다양한 방식으로 총선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계획서는 15대 국회의 과반수 의석확보 전략중의 일한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특정 야당 후보들의 당락 가능성을 예측해 놓은 것이
주목됩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 야당의 고위인사들을 별도로
표기하고 당낙의 결과에 따라 여당의 이해득실이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당과 특정야당이 통합할 경우를 가정하고 누구를 협상 창구로
삼아야 유리할 것인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운은 기가 막혔다.
"이 자료의 신뢰성은 어느 정도인가?"
소운이 물었다.
"반반입니다. 사실이라면 특종감이지만 마타도어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저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마타도어라면 누가 이익을 보겠나?"
"당연히 국민의회나 자민련이겠지요."
"그렇겠지. 이건, 사실이라 해도 공개해서는 안되겠다. 우리 당만 엄청난
피해를 당하겠어. 성진이 생각은 어떠냐?”
"사실 그 부분 때문에 홍균이 하고 성의를 해보았습니다. 증권가에도 이
계획서와 유사한 소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홍균이 말했다.
"구체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구전으로 몇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커지면 골치아프겠지만 현재로서는 잠재된 상태라고
봐야죠.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성진이 계속했다.
"제가 의심이 가는 부분은 3번째 장이예요. 야당의 세사람 지도자가
있어요. 당선 가능선 난에다 K고문과 K대표는 세모로 표시했고 J대표는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어요. 그런데 K고문의 세모표 옆에는 빨간 색으로
가위표를 해놓았고 K대표는 역시 빨간 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거든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통합 협상에 유리한 쪽이 누군지 표기한 게 아닐까?"
주원이의 의견이었다. 미혜도 의견을 건넸다.
"단순하게 그런 의도만은 아닌 것 같아. 혹시..."
하고 말을 멈추자 주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라니? 계속해 봐."
"옛날에 야당끼리 후보를 조정하는 사례가 있었어요. 예를 들자면
여당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 야당끼리 상호 유력한 후보가 있는
지역에는 의도적으로 약한 후보를 내세우는 거예요.
경쟁 관계지만 간접적으로 같은 야당의 후보를 지원하는 방법이지. 그렇게
해서라도 여당이 당선되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어요.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이 이런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잖아요.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러니까 가위표는 떨어 뜨리는 것이고 동그라미는
당선시키는 것이지. 측면 공작을 통해서 유리한 협상대상을 선택하자는
속셈이 아닌지...너무 비약한 건가?”
"아니야. 가능성이 있어. 사실 통합만 된다면 여당으로서는 호남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가 될테니까.”
동찬이 미혜의 주장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주문했던 중국음식이 배달된 것이다. 투덜거리며 그릇을
꺼내는 걸 보니 아마도 한참동안 문을 두드렸던 모양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모두들 회의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술잔을 모두 비웠다. 그러고도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꺤 것은 소운이였다.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이대로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구나. 이렇게 하자.
성진이하고 홍균이는 좀더 정보를 수집해 보고 동찬이는 xx위원회 관계자를
만나서 대화를 가져봐.아직 사실이 확인된 것이 아니니까 모두들
입조심하고. 그리고 이 문건은 모두 회수해서 성진이가 보관해라. 자칫
실수해서 흘릴 수도 있으니까...”
"형은 한 부 가지고 계세요. 어차피 형도 관련된 문제니까 한 번 더 검토
해보는 게 좋을 겁니다. 형한테는 가위표를 해놓았던데?”
소운은 씁쓰레한 표정으로 문건을 받아 넣고는 자리에서 알어났다. 주원이
같이 일어나며 물었다.
"왜 일어나세요?"
"얘기는 그만 끝내고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 오늘은 동찬이가
산다는구나."
"형, 누구한테 덤테기를 씌워? 내가 언제 산댔어?"
"미혜하고 한방 쓰기로 한 기념으로 사라는 거야, 이놈아. 내숭 떨고 있더니
나보다 먼저 가겠다고? 이놈이 아주 흉악한 놈이라니까?”
"할 말 없네. 좋수, 갑시다."
주원이 가로막았다.
"나갈거 뭐 있어요? 여기서 합시다. 주방시설 다있겠다, 여기서 지지고
볶으면 되잖아? 미혜뒀다 뭐에 써먹어? 이럴 때 부려먹지.”
"그래도 괜찮겠니? 사무실이 지저분해 질텐데."
"걱정말아요. 내일부터 휴업이니까. 아까 얘기했잖아요. 형 사무실로
출근하기로 했다고.”
"고맙기는 하다마는 너무 무리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동찬이하고 나가서 먹거리를 사오마.”
소운은 동찬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자료공개 시점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선거공고일과 그 전날중에 선택하기로 하고 보도자료는 지은이가 작성하기로
했다. 정보를 제공한 당사자는 자료를 공개하기 전에 가까운 친척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출국한다고 했다. 이제 후속 대책이 문제였다.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발뺌을 하겠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나오겠지. 소운은
내심 고발 당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선거가 끝난 이후에도 반복해서 이들의 부도덕성을 공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료공개의 시점을 선거에 맞춘 것도 반복효과를 노린
계산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물고 늘어지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긁어 부스럼을 자처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솔직하게 시인해
버리고 관행이었다고 얼버무리면 유권자들은 어떻게 펴가할 것인가? 20억
+a설에 대한 논쟁이 재연된다면 효과는 증폭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쨋든
크건 작건 소기의 성과는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으며 다시 한 번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을 다졌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고 잔칙 시작되었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희영이를 향해 주원이가 소리쳤다.
"목사님, 입 좀 여쇼. 오늘따라 왜 이래?"
희영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십자가라도 부서졌냐?"
"글쎄, 그게 말야..."
"원, 답답한 친구 다 보겠네. 무슨 일 있어?"
"사실은 말이야. 교회선교단을 이끌고 중국을 들어 가기로 되어 있어."
"가면 되지, 그게 어쨌다는거야?"
"2년 예정으로 가는데, 출발이 모레야. 소운이 형한테도 미안하고
여러분한테도 미안하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공적인 일정이니 연기할 수도 없고...”
소운이 희영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녀석, 소심하긴, 목사가 목회 활동만 열심히면 됐지 다른데 신경쓸거 뭐
있니? 잘 다녀와라. 몸 조심하고... 그러고 보니 이 자리가 희영이 송별회가
되겠구나. 자, 한잔 하자.”
잔을 비운 주원이 미안하다며 희영이를 얼싸 안았다. 몇 순배가 돌았을까?
좌중에 취기가 역력했다. 비교적 술이 약한 편에 속하는 주원이 벌개진
얼굴에 노기를 띄우고는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형,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 내가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얻어 터지고
감방을 욌다 갔다하다보니 동기들 보다 졸업이 6년이나 늦었다구. 학번으로는
형보다 훨씬 선배일걸? 5.18때도 6월 항쟁때도 나는 메가폰 들고 깃발 들고
최일선을 뛰어 다녔어. 내가 그 고생을 하고 민주화운동한다고 쫓아 다녔지만
한 번도 민주투사라고 자처한 적 없고 내색 한 번 해본 적도 없어. 가끔
TV뉴스에 정치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동기들의 모습을 볼리치면 부럽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한다구. '쟤들은 저렇게 컸는데, 나는 이게 뭐냐'하는
자괴감에 빠질때도 있어. 내가 걔네들보다 부족한 게 뭐요? 머리가 부족해
아니면 경력이 부족해? 줄없고 뺵없는 거? 이건 공평한게 아니야. 이 나라
민주화는 죄다 저희들이 했다는거야. 저희들 덕분에 민주화가 되었다는거지.
그러니 자기들만 정의로운 사람들이고 자기들만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거야. 패거리 정치 안한다더니 자기들이 패거리를 만들더라구. 그리고는 누구
누구라인이다, 나눠먹기다, 내 자리다, 네 자리다, 내가 먼저다, 네가 먼저다,
내가 보스다, 네가 대장이다, 똑같이 흉내 내더란 말이야. 일류대학
출신에다, 판검사, 변호사, 교수만이 유무능의 기준이 되고 자기들이 모르는
사람은 모두가 적이 되어 버리더라구. 한마디로 자가당착이고 이율배반이다
이거야.”
동찬이 주원을 가로막았다.
"야, 그만해라. 지금 그런 얘기해서 뭐하니?"
"시끄러 임마. 형, 내 말이 틀렸어요? 공천을 못받은게 서운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아니, 솔직히 서운해. 하지만...”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도 이따금 때와 장소를 잘못 정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기대에 못미치는 게 사실이야. 후회도 많이 한다. 네 말대로
2천년을 준비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엎지른
물이니 주워 담지는 못해도 최소한 책임은 져야겠다는 마음으로 현실에
뛰어들고 있다. '내 탓이오' 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남의
탓으로 돌리는 현실이다. 누군가 이런 농담을 하더구나. 사람들이 정치를
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의 언행에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거야. 이런 역설적인 농담이 회자되는 것이 지금의
정치현실이다. 신구세대를 막론하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똑같은 사람들이
아닌지 의심이 갈 때도 많다. 상식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지 않았니? 그러니
평가할 기준도 없고 잣대도 마련할 수 없는 거지. 네가 부족한 것은 나도
역시 부족하다. 우리가 모여서 공부하는 것도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아니겠니? 참고 식혀라. 언젠가는 좋은 분위기에서 훌륭하게 데뷰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주어 질게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해 졌네. 노래나 한 곡 부릅시다."
동찬이 분위기를 잡았다. 돌아가며 한가락씩 뽑아 댔다. 주원이의 기분도
희영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웃고 까불고 그렇게 8명의 SG일행은 아침을
맞았다. 모처럼만의 흥겨운 어울림이었다.
3. 서로 다른 젊은 층
소운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지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눴길래 이제 오는 거예요? 혼자 다니지 않기로
했잖아? 아휴, 술냄새 좀 봐.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정신이 나갔어 정말.”
"그렇게 됐다. 몸살이라더니 좀 어떠니?"
"걱정을 하긴 했어요? 전화 한 통도 없었으면서... 오전 스케줄은 어떻게 할
거예요?”
"성현이보고 비워 두라고 했어. 좀 쉬어야겠다. 차나 한잔 다오. 그리고 나
지금부터 자리에 없는거다.”
"알았어요."
소운은 간이침대를 펼치고 길게 누워 눈을 감았다.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누가 찾아온 모양인데,
들어 가겠다니 안된다느니 하고 실갱이를 벌이고 있었다. 소운이 침대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별 일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들어와봐."
성현이 지은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웬 건달같은 녀석들이 찾아 와서는 위원장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거예요.
질이 안좋은 녀석들 같아서 쫓아내고 있어요.”
"들여보내."
지은이 정색을 하고 말렸다.
"안돼요, 형. 어떤 사람들인지도 모르고 아무나 남날 수 없잖아? 7-8명이
더 되는 것 같아.”
"괜찮아, 대표만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얼핏 보아도 '주먹' 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장한 체구의 청년 두 명이
이소운 앞에 섰다.
"용건이 뭡니까?"
"선거를 돕고 싶습니다."
"돕겠다구요? 어떻게 말입니까?"
"쓸만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못해도 몇십 명은 동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조건이 있겠지만 어떤 조건도 들어줄 수 없어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곳으로 가보시오.”
"..."
"볼 일이 끝났으면 나가 주시오."
한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거참, 세게 나오시네."
소운이 책상 위의 물컵을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었다. 순간 도지기로 된
물컵이 '퍽' 하고 박살이 났다.
"어디를 근거지로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찾아올걸 그랬어. 한때는 나도 조직생활을 한 적이 있소.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어. 우리 아이들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 그만 나가주셨으면
좋겠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젊은이들은 넙죽이 인사를 하고는 부랴부랴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함께 지켜보고 있던 지은이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니? 이거나 치워라."
"어떻게 된 거예요? 대단하네. 다시 봐야겠는 걸?"
"까불기는? 빨리 치워 임마. 애들한테는 아무 소리 말아라. 어디 연락온데
없었니?”
"중요한 전화는 없었어요."
소운이 세면을 끝내고 들어오자 이상호 사무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무장이 회계장부를 펼쳐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위원장, 실탄이 바닥났어."
"전혀 없습니까?"
"그래. 벌써 며칠됐어. 여기 저기서 변통을 해봤지만 내 능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야."
"선배님도 참,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랬어요?"
"당에다 몇 차례나 지원요청을 해 봤는데, 감감해. 이거 당초의 약속하고
빗나가는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꾸려 봐야죠."
"위원장 주머니 사정이야 잘 알지만 식구들이 눈치채면 기 죽는다. 빨리
손을 썼으면 좋겠어. 이것 좀 봐, 지은이가 통장을 내놓았는데, 받아도
되는건지... 위원장한테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아는게 좋겠어.”
"빌어먹을... 꼴이 말이 아니구만. 나는 모르는 걸로 하고 돌려주세요. 쓸
돈이 아니예요.”
소운은 사무장을 내보내고 천장을 향해 한숨을 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주제에 무슨 선거를 하겠다고. 고소하다, 고소해. 확신도 없는 게임에 뛰어든
놈을 누가 뭘 믿고 도와주겠니?’한참을 자책하고 있던 소운이 수첩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바늘구멍이라도 찾아 볼 심산이었다.
여유가 있을 법한 몇 사람을 종이에 옮겨 적고 차례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의치가 않았다. '남들은 번듯한 친척들도 많더구만 그런 팔자도 못타고
나왔구나.’하는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또 다시 수첩을 뒤적거렸다.몇 번을
반복헀지만 마땅한 대상이 없었다. '이를 어쩌나'하고 있노라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쇼? 출근이 늦었습니다."
주원이었다. 커다란 종이봉투를 거꾸로 하더니 책상 위에 빵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는 한 개를 집어들고 비닐을 벗겨 소운에게 건넸다.
"먹어야 힘을 내지. 근데, 뭐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얼굴이 말이 아니네.
밤새 술 떄문에 그런가?”
"걱정이 한 두가지겠냐? 공천 못받은 게 큰 다행ㅇ니 줄 알아라. 내가
이렇게 골치아픈 짓을 왜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형답지 않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거나 받아요."
"이게 뭐냐?"
"내가 쓸려고 준비했던 겁니다. 이게 소용없게 됐으니 형이나 쓰세요.
부담가질 필요없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만 갚으면 돼. 이자도 필요없고.”
소운은 주원이 내미는 작은 봉투를 자신도 모르게 넙죽 받아 들었다.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야,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웃기지마 형, 지금이 처음인줄 알아? 노점상 대책위를 만든다고 뺏어가고,
철거민촌 들어간다고 집어가고, 야학 만든다고 강탈 해간게 한 두번인줄
아느냐구? 이번에는 내 발로 가져 온거니까 좀 다르지.”
"할 말 없다. 어쨋든 고맙다. 부르조아가 좋긴 좋은가보다."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텐데?"
"당에서 보조를 받으면 충분하다."
"얼마나 해줄라구? 선별지원을 할게 뻔한데, 여기야 대상에 끼겠어요? 이것
저것 따져서 특정 지역에다 집중투자를 할거라구. 시늉이야 내겠지만
말이야... 하여튼 꾸려 나가다가 부족하면 얘기해요. 형 주제로는 어려울거고
천상 하늘같은 후배가 방법을 찾아 봐야지.”
소운은 사무장을 불러 봉투를 건네 주고는 주원이를 소개했다. 그러는 사이
약수터에서 만난 김광수씨가 몇 사람의 주민을 데리고 들어 왔다. 바로 전날
수석부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자리도 마련해 주었었다. 주민들과 인사를 소운이
주원이와 김부위원장을 대동하고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오늘따라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놓고 다녀야 한다.’던 박재영의 아버님
말씀이 생각날 만큼 힘겨운 순회의 연속이었다. 재야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유에서인지 보혁에 대한 질문이 사상시비와 함께 지겹게 쏟아졌다. 마치
이소운을 의한 간담회가 아니라 그를 흠집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자리인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박재영이 마련한 글방가족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계획된 간담회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동안 지역주민을
접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 검토하고 정책과 공약을 개발하는
작업이다.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온 소운은 쉴 틈도 없이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성현이 그동안 정리해 둔 각종 서류뭉치를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일일
여론동향 보고서, 간담회 결과 보고서, 면담결과 보고서, 일일 보고서
전화면담 기록부, 방문자면담 기록부, 동별, 성별, 연령별 지지성향 보고서,
등등... 그리고 각종의 보고서 마다에는 최종의 분석의 결과를 소상하게
정리한 데이터가 한 장씩 덧붙여 있었다. 성현이 분석한 결과를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나름대로 문제점과 대안을 제법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소운은 책상서랍을 열고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만의 기록을
비밀스럽게 적어 나갔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주전자
주둥이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벌컥벌컥 갈증을 채웠다. 그래도 시원치가
않다. 시간이 다가 올수록 긴장과 초조함이 더 해갔다. 자금력, 조직력,
경험... 젊고 참신한다는 것외에는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어느 것 하나 나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기성정당들은 지방색에 따라 적지 않은 고정표를 갖고
있었지만 소운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동층 유권자에 승부를
걸어야하는 입장이었다.
'부동층은 대부분 개혁성향을 갖는다.'는 주장을 소운은 신뢰하지 않았다.
비록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는 있으나 보수성과 개혁성을
동시에 수용하는 다양한 정치성향의 집단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젊은 층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라'는 당의 지침에도 불구하고 소운은 이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기성세대에 비해 개혁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불신과 무관심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계층이다. 더구나 투표행위에 있어서 이들 젊은 층의 기권율이 가장 높다는
것도 기대치를 밑 돌게하는 요인이었다.
얼마 전 'SG 연구회' 가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초반의 젊은 층을 대상으로
정치성향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조사결과에 의하면 신세대로 불리우는
20대 연령층에서 정치적 무관심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예 정치에
대해 흥미를 갖지 않고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정치의식 수준도 예상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모래시계
세대로 불리우는 30대와 40대 초반에서는 정치적 관심도가 대단히 높은 만큼
정치불신도 만만치가 않았다. 어찌보면 개혁성향의 유일한 부동층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와 30대 이후의 젊은 층에 지지정당이 없다는 부동층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한 무리의 젊은 층이 아니라
정치적 상식과 의식면에서 엄청난 세대차를 갖고 있는 두 그룹의 이질
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소운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소운이 가장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전체 유권자이
3분지 2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한 그릇에 융화시켜 내 편으로
견인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이소운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80년대 정치사회적 격동기를 온 몸으로 체험했던 모래시계 세대.
이들이 오늘날 민주화의 주역이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소운이 동질감을 갖고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계층이
이들인지 모른다.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렬한 세대, 정치사회적
비판의식이 어느 계층보다 강한 세대, 그래서 모든 정파들이 모래시계 세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혁이 이번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시계 세대만을 놓고 본다면 역시 소운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공감하는
이들마저도 개혁의 방향성에 있어서는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소운을 정신적으로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소운은 박재영이 지역내 시민운동 단체들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 마련한
마지막 간담회를 생각했다. 참석자중 한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한 후...
"먼저 위원장님이 용기에 찬사를 드립니다. 박재영동지를 통해 위원장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상당히 존경할 만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위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원장님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이 아니라
개혁에 대한 확신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문민정부 이후 현 정권은 나름대로
개혁의 조치를 취했고 미흡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도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정부 여당내 개혁세력들이 이런 주장들을 합니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개혁이 추진되지 못하는 이유는 수구세력들의 강한 저항
때문이다. 개혁을 희망하는 모든 세력들이 통치권자에게 힘을 모아주면
개혁은 좀더 순조로워 질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행적과 현재의 상황에 근거해서
정부여당의 개혁은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야합을 지적하기도 하고, 과거
비민주적 독재세력 가시 말해서 과거청산의 대상과 한 방을 쓰고 있다는
것을 비난하면서 그것 때문에 개혁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혁을 하느냐 안하느냐 또는 개혁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시비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자격만을 시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의견이 나왔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수구세력이 개혁에 방해가 되는 요소라면 이를
제거하는 것이 개혁 이전의 단계라고 봅니다. 모든 개혁세력이 결집하면
수구세력의 저항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현정부가 존재할 수
있는 근간이 반개혁세력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수구세력은 과거 비민주적 독재정권에 참여하고 협력했던 세력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들의 협조로 현 정권이 탄생했고 현재도 그들과 강한 연대와
협력관계에 있지 않습니까? 과거청산이 개혁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청산의 대상과 여전히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모순인
것입니다. 수구와 손을 잡고 있으면서 그들 때문에 개혁이 마음대로
안된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국민화합이니 정치사회적 안정이니 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친일 매국노를 친정체제에 끌어 들였던 이승만 정권의 행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의 비극은 과거청산의 실패로 부터
기인합니다. 개혁세력의 결집이 먼저가 아니라 개혁세력이 함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과감한 환부
도려내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개혁의지보다는 정권의 안위를 느끼게 합니다. 예를 들자면,'정치인은
유권자의 판단에 의해 거취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수구로 지목되는
인사들을 대거 총선에 투입시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이 나왔다.
"정치권에 실질적인 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좀 심한 말로 하자면
여 야 할 것 없이 정치권 전체 아니 모든 정치인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각 정당들이 개혁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논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밥그릇 싸움입니다.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자는 목적 뿐입니다.
한마디로 권력싸움에 개혁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구세력은 여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권에도 있어요. '과거를 반성하고 개혁에 동참할 의사만
있다면 과거를 불문하고 함께 하겠다.’며 구시대 인물들을 혈안이 되어
영입했지 않습니까?
수구는 과거의 행적만을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고까지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정치행태나 사고가 시대적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반역적 수구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여론조사를 보면 가장
우선적으로 개혁해야할 대상을 정치권이라고 국민들은 서슴없이 지적하고
있습니다.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관련해서는 개혁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물며
이들에게 개혁을 기대하겠습니까? 따라서 정치세력을 선도할 수 있는 세력,
기성정치권에 물들지 않고 이들을 견줄 수 있는 양심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참석자는 '재야 시민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사들이
제도권으로 흡수되면서 시민운동을 약화시켰다’며 소운을 간접으로
비판하기도 했다.그동안 개혁시대를 주도 해왔던 시민단체의 압력행사가
무디어 졌으며 이러한 현상은 개혁의 보이지 않는 손실이라고 주장했다.
소운은 간담회를 정리하는 인사말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간담회 서두에 저는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개혁을 위해서는 이 한몸
밀알이 되어 썩을 수도 있고 촛불이 되어 불태울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선택한 길이 개혁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방법중의 하나는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방법은 달리하지만 개혁을 바라는
마음은 여러분이나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도와주십사하는 부탁을 드려야할 입장입니다. 심정을 같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여러가지 방법중에 제가
선택한 방법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전혀 성과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번 선거의 결과에 따라서 실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회를 여러분이 만들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소운은 참석자들에게 도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그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운은 간담회 결과에 대해 불만스러웠다.
소운은 승리를 기원한다며 희영이가 건네준 작은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금빛 선명한 십자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창가로 다가 갔다. 창문을 활짝
열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느님, 진정으로 당신이 존재한다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이 나약한 젊은이에게 힘을 주십시오.’
보일 듯 말 듯 몇 개의 별들이 힘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것들도 기운이 다 빠져버린 모양이구나. 옛날에는 그렇게도
반짝거리더니... 얘들아, 우리 기운내자꾸나.’
소운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창문을 닫았다.
한국호텔. 소운이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411호실로 들어섰다.
"어서오시게. 많이 수척해졌구만."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래, 할 만한가?"
"의원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의원보다는 선배라고 부르게. 오늘은 선배대접을 좀 받고 싶거든."
"..."
"이 사람아,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와서 앉아."
소운이 굳은 표정으로 쇼파에 다가가 앉았다.
"바쁘실텐데, 용건부터 말씀하시지요."
"급하기는... 담배 한 대 태우겠나?"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이 별로..."
"허허, 지나치게 경계하는구만. 편하게 얘기하자구."
"태평하시군요. 저는 선배님만큼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없기는 나도 마참가지야. 선거를 네 번씩이나 치뤄봤지만 이번처럼
힘든건 처음일세.”
김동수의원, 4선의 여당 중진의원으로 소운의 대학교 대선배이다. 두 사람은
한 때 각별한 사이였지만 3당 합당후 정치적 견해차로 소원해 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자네를 아끼고 있어.
지난 번 재야 인사를 영입한다고 하길래 내가 자네를 추천했어.”
"정균이한테 듣고 알았습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자네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불쑥 내 멋대로 해서
마음 상하지는 않았나 걱정했지. 하지만 항상 자네를 아끼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게.”
'이 분이 웬 안하던 아첨이람?'하고 생각했다.
"부담없이 얘기하세. 자네를 설득하자고 부른게 아니야. 설득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지만... 선배로서 자네에게 조언을 하고 싶을 뿐일세.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
"내일 아침 9시에 제 사무실에서 합니다."
"구체적인 증거가 뭔가?"
"경리장부 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금이 제공된 날짜와 금액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보자의 증언도 녹음되어 있구요.”
"그것이 진본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결제권자의 사인이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감정을 의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을 만 하겠구만. 몇 명이나 관련되어 있나?"
"현직에 있는 인사만 해도 7명입니다. 그중 야당이 1명이고 나머지는
여당인사입니다. 여당인사 중에는 구야인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괜찮다면, 내게 자료를 보여줄 수 있겠나?"
"안 될것도 없지요."
소운은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사이에 끼워둔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김의원에게 건넸다.
"사본을 복사한 것이라 좀 흐립니다."
"자료를 유심히 훑어보던 김의원은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가던 김의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 자들이야 같은 패거리니까 그렇다치고 이 사람들은
뭐야? 이게 다 얼마야? 이런 더러운 놈 같으니라구.”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래도 제가 잘못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독재가 어떻고
민주화가 어떻고 떠들던 이자들이 뒷 구녁에서는 더러운 돈을 수 억씩 받아
먹었다구요.”
얼굴이 벌개진 김의원은 소운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연신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라이터에 불을 지폈다.떨리는 손 때문에
불꽃이 크게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담배연기를 한숨과 함께 길게 내뿜으며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이런 짓을..."
"선배님, 이제 저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김의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연신
담배를 빨아대며 방안을 오락가락하던 김의원이 조금 진정이 된 듯 자리로
돌아와 풀썩 주저 앉았다.
"이봐, 소운이. 할 말이 없네. 솔직히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증언대로라면 5,6공으로 부터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사람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여야가 따로 없어요. 주로 88년과 92년에 총선자금으로 받았고
두차례나 받은 사람도 있어요. 대표적인게 이의원이라구요. 이 자는 3억씩이나
챙겨 먹었어요.”
"13대 총선때 나한테도 5공 사람이 찾아와서는 봉투를 건네준 적이 있지.
나를 뭘로 보고하는 수작이냐고 호통을 쳐서 돌려 보낸 적이 있어. 내가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네의 주장이 충분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 물론
위에서는 펄쩍 뛰었지만 말이야... 하마터면 나도 걸려 들 뻔하지 않았나. 이
자들이 보험을 다양하게 들어 놨구만.”
"장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도 도의적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의 방법에는 찬성하지 않네. 이것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익과도 무관하지 않아. 자칫하면
정쟁에 휘말릴 수도 있고 통치력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라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구. 자네나 나나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질 않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그 정보를 어디서 누구한테 얻었나?"
"누구이건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건 엄청난 정보야. 이건 여권의 주요 인물이라도 감히 접근조차 불가능한
정보라구. 내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왜 하필이면 지금처럼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이런 정보가 나올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야.자네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사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해도
내용의 진실 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은 겁니다.”
"혹시 이런 의도가 깔려 있다면 어떻게 하겠나? 예를 들자면 5,6공 세력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거래를 시작한 것이라면... 만약에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건 상당한 압력이 될 수도 있어. 자네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일부에 지나지 않아. 이왕에 줄거면 통채로 내놓지 무엇 때문에 일부만
내놓았을까? 5,6공 자금의 정치적 유입설이 끊임없이 제가되고 있지만 아직
물증이 드러난 적은 없었어. 5,6공 당사자들도 이미 관련자료를 페기했다고
주장하고 있거든. 그런데 당사자들도 페기했다고 주장하는 자료중의 일부를
자네가 가지고 있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 이 말이야.”
"저는 애당초 폐기했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어딘가에는 반드시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담보로 보험을 든 사람이
증서를 간단히 불싸 지를 바보가 어디있습니까?”
"그렇지? 자네더 그렇게 생각하지?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아닌가? 그것을 쉽게 없애버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수 없는
일이지.”
"..."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면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인물이 측근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을 것이고... 헌데, 수사과정에서나 재판과정에서도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자료를 외부에 누출시켰다는 말이거든? 이 점이
의심스럽다구.”
"..."
"이봐, 소운이. 이건 공적 냄새가 짙어. 한마디로 정치협상을 끌어 내려는
압력의 수단이라고 여겨지지 않나? 통치권은 물론 정치권 전체에 압력을
행사해서 위기를 털출해 보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는거야. 계획적으로
일부를 흘려소 '까불지 마라. 내가 입열면 너희들은 모두 죽는다. 그러니 더
이상 건드리지 마라’이러는거야. 또 이런 효과도 계산되었겠지. 예컨데,
국민들로 부터 파렴치범으로 몰려있는 상황에서 '봐라, 우리나 쟤네들이나
더럽기는 마찬가지다.’는 식으로 여론을 양비론으로 몰고가 집중적인 여론의
화살을 피해보자는 거지. 20억 +a 설이후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대단히 격앙되고 있고 이 부분에 관한 한 국민여론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그러니 압력용으로나 여론 희석용으로는 금상첨화지.”
"..."
"지금 세간에는 비자금을 특정인만 받았겠느냐, 그것만 받았겠느냐, 대선
때만 받았겠느냐, 이런 말들이 공공연하지 않나? 관행이었다고들 하니까 그
관행이 특정인에게만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지. 자네가 자료를
공개하면 '사실이었구나' 하고 땅을 칠거야. 심지어 국민들은 이런 의심도
하고 있어. 81년도에 야당이 창당할 때 5공이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야. 당시의 선례를 근거로 야당이 정당의 운영자금까지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의심을 한다구.”
"요는 뭡니까? 제가 저들의 의도에 말려 들고 있다거 보십니까?"
"말려 들기 보다는 자네가 충심만을 생각해서 계획대로 기자회견을 하고
만인에게 '이 놈들이 이런 놈들이요'하고 공개를 한다면 손뼉을 치는 쪽이
따로 있다는 거지. 자칫하면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에 불을 지르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일세. 그렇지 않겠나?”
"선배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덮어 둘 성질의 사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선배님의 예측이 실제와 다를 수도 있구요.”
"물론 덮어 두어서는 안되지. 덮어 두는 것은 나도 용납할 수 없어. 어떤
형태로든 단죄는 해야지. 또,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순수한 차원에서 한 일 일
수도 있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득을 보는 쪽은 마찬가지야. 정치권이 각성하는
것이 중요해. 그러나 국가적 이익을 고려한다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네. 과거청산이라든가 역사 바로잡기라든가 하는 일련의 개혁작업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일세.”
"선배님은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이럼녀 어떻겠나? 이 사람들을 지금 상황에서 처리할 수는 없네. 우리 당과
관련된 사람들은 선거가 끝나는 대로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서 출당 조치나
제명 처리를 하지. 그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어. 누구든 털면 먼지가 나게 되어 있어. 더구나 이미 더러운 먼지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어렵지는 않을 걸세.”
"기자회견을 중지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자네의 심정이야 십분 이해하네. 충정어린 마음도 존경하고. 내가
자네한테 하고 싶은 말은 보다 큰 이익을 생각하자는 거야.
"하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또 저 혼자서 하는 일도 아니라서
무어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있었나? 몰랐구만. 뭐, 이 자리에서 가타부타하자는
것은 아니야. 내일 아침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차근차근 신중을 기해 보라는
거지. 자네가 강행을 한다 해도 내가 탓할 일은 아니지만 가급적 내 조언을
받아주게. 내가 정치에 뛰어든 후로 다른 것은 몰라도 한 번도 헛 눈을 팔지는
않았어. 그건 자네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도덕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백퍼센트는 안될지 모르지만 그에 가깝게 살려고 노력해 왔어. 그래서
자신있게 자네를 만나 보겠다고 자청을 했고 또 이런 부탁을 하는 걸세.”
"선배님이야 정직하기로 소문난 분이신데요. 어쨋든 충고는 고맙게 받아
들이겠습니다.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고맙네. 열심히 하게. 욕심같아서는 이의원을 꺽어줬으면 좋으련만...
못된..."
소운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의원도 따라서 일어났다.
"분 초가 아까울 판국인데, 시간을 너무 빼었구만."
"천만에요. 시간을 뺏기기는 선배님도 마찬가지지요."
소운은 김의원으로부터 자료사본을 넘겨 받았다. 언뜻 'xx위원회'의
비밀문건이 생각이 났다.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얼마든지..."
"혹시 이번 선거에 어떤 공작이 있는 건 아닙니까?"
"공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아닙니다. 노파심에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러시면, 'xx위원회'를 아시죠?
그 곳에서는 어떤 일들을 합니까?”
"당의 정책을 보좌하는 학술단체라고나 할까? 중요한 정책에 관해서 자문을
구하고 의뢰도 하고 그러지. 뭐 여러 조직중에 하나인 셈이야.”
"그렇군요. 식구들이 많나요?"
학자들 몇 명에 젊은 친구들이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러나?”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 보았습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보게."
"그냥 궁금한 것 뿐이라니까요. 그만 됐습니다."
김의원은 싱겁다는 듯이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언제 연락주겠나?"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가부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다가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서...”
"알겠네.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라겠네."
소운이 객실을 빠져나와 커피숍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성현과 주원이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소운을 맞았다. 주원이 퉁명스럽게 쏘아 부쳤다.
"도대체 누구하고 무슨 얘기를 나누었길래 이제사 옵니까?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는 줄 아세요? 한가한 양반같으니라구.”
"미안하다. 성현이는 사무실로 들어가라. 그리고 주원아, 동찬이를 수배해서
네 사무실로 당장 오라고 해라.”
"사무실로 안가요? 준비할 게 많은데..."
성현이 걱정스럽게 말헀다. 주원이 이상한 눈으로 소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심각한 일이야?"
"이따가 설명해 줄게. 휴대폰 좀 다오."
소운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지은을 찾았다. 그리고는 즉시 주원의
사무실로 오도록 지시를 했다. 소운과 주원은 택시를 잡아타고 종로로
내달았다. 동찬이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 무슨 일이예요? 급한 일이 생겼다니? 설마 단골 호떡집에 불난 것은
아닐테고...”
"김동수의원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지은이가 오면 같이 얘기하자."
동찬은 짐작이 가는 듯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주원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대낮에 호텔방에서 여당의 거물과 비밀스럽게 만났다는 말이지? 이거 나만
모르는 비밀이 있는 모양인데, 영 소외된 느낌이네.”
"담배 좀 다오."
"형, 담배 끊었잖아? 이거 모를 일이네. 왜들 이래, 정말..."
소운은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고 폐 속 깊숙히 들이마셨다. 현기증이 났다.
그래도 연신 담배를 빨아댔다. 잠시 후 지은이 바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은이 역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은은 소운이 누구를 만나고 있었는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원이는 그동안 몰랐던 얘기지만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보태는게 좋을 것
같아서 함께 하자고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라. 그리고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라.”
소운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나갔다. 그리고 김의원을
만나 주고 받은 대화내용을 빠짐없이 전했다. 소운의 말이 끝나자 지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도자료를 다 만들어 놨는데..."
주원이 말했다.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보태는 게 중요하다면 우리끼리 이럴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모두 부릅시다.”
동찬이 주원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소운은 'SG 연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일려면 저녁나절이나 되어야 했다. 희영이는
며칠 전에 중국으로 떠나 버렸고 홍균이는 퇴근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호와
성진이 그리고 미혜는 소운의 지역구에서 현장을 순회하고 있었다.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지은이 소운의 귀에 입을 바짝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소근거리지 말고 크게 얘기하슈. 뭔 비밀이 또 있나보지?"
주원이 심술궂게 참견을 했다.
"아니예요. 잠깐 나갔다 와도 되죠? 잠깐 데이트 좀 하고 올께요."
"좋을대로 하슈. 매일 붙어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데이트람?"
두 사람은 주원의 사무실을 나와 인근 카페로 들어섰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지은이 나즉하게 입을 열었다.
"형, 괜찮아? 많이 힘들어 보여요."
"솔직히 좀 힘들다."
"어떻게 할 생각이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무엇이 최선인지도 모르겠고 최선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도 들어.”
"차라리 몰랐던 일로 덮어 버리면 어떨까?"
"그건 안돼. 무책임한 짓이야. 친구들하고 좀 더 논의를 해보자."
"뾰족한 수가 나오겠어? 시간이 없잖아. 당장 내일이라구."
"방법이 있겠지."
테이블 위에 검붉은 커피가 수증기를 하늘하늘 날리며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은이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는 소운을 바라보았다.
가엾은 사람, 바보같은 사람, 세상에 널려 있는 문제거리를 온통 자기 혼자
짊어지고 살아 가려는지...
4. 상식이 통하는 세상
지은에게는 소운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주도하고 그러다가 수배되어
도피처를 찾아 이 곳 저 곳을 전전했다. 끈질긴 기관의 추적을 피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지리산이었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처분했지만 푼 돈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약간의 식량을 준비하고 배낭을
챙겨 입산을 결심한 것이다.
열흘이나 지났을까, 아끼고 아꼈던 그나마의 식량도 바닥이 났다. 책에서나
읽었던 그 옛날 빨치산의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등산객들
틈새에 끼어 먹거리를 해결하기를 며칠, 삶이 싫어졌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산을 내려가서 내 발로 감옥행을 선택할까도 싶었다.
죽어도 그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감옥으로 간다면 몰라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음침한 조사실에 들어가 취조를 당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선배들의 경험담이 그녀를 몸서리치게 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등산객이 절반쯤 남기고 간 소주병을 들고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숨도 안쉬고 들이킨 후 침낭 속에 몸을 묻었다. 눈을 감았다.
평화로웠다. 눈을 떠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소운이였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못된 계집애야, 죽는 줄 알았다."
소운은 으스러지게 지은을 껴안았다.
지은이 행방불명이 되자 소운은 그녀를 찾아 헤맸다. 찾다 찾다 생각난 것이
지리산이었다. 지은이 틈만 나면 찾아 다녔던 지리산이었다. 평소에도 '나는
지리산에서 살고 싶어’라는 말을 자주 꺼내곤 했었다. 혹시나 하고 지리산
자락을 뒤지고 다니다가 낯익은 텐트를 발견했다. 단숨에 달려 텐트 속에
머리를 디밀었다.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가을의
중턱이라지만 산 속은 이미 겨울이었다. 지치고 기진해 식어가는 지은의
몸뚱이를 자신의 몸으로 혼신을 다해 녹였다. 기가 막힌 사연 때문에 주변의
도움을 요청할 입장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밤을 세웠고 중천의 해를
맞았다.
소운이 지은을 처음 만난 것은 학교 근처 야학에서 였다.지은이는 그곳에서
노동의 현실을 배웠고 실천하는 용기를 배웠다. 그렇게 일 년 남짓 함께
하다가 돌연 휴학계를 내고 위장취업에 나섰다. 소운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지은의 아픔에 커다란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많은
동지들이 영어의 몸이 되거나 쫓겨 다니는 불행을 겪고 있었고 지은이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소운은 지은의 행방을 찾아 헤맸고 다행히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가 있었다. 처절한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눈이
붓도록 통곡을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되었다.
지은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소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소운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후 살포시 몸을 기대었다. 눈에 고인 이슬을
감추기 위해서 였다.
"형, 힘내요. 항상 힘들었잖아? 이번에도 잘 견딜 수 있을거야."
소운이 알았으니 안심하라는 듯 지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SG연구회'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운과 지은이 자리에 없는 동안 동찬이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던
모양이다. 반복할 것 없이 곧바로 토론에 들어갔다. 소운이 회의의 서두를
열었다.
"그동안 나와 동찬이 그리고 지은이 이렇게 세 사람이 이 문제로 많은
토의를 했었다. 사전에 여러분께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혹시 뒤따를지도 모르는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생각에서 였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동거동락하자고 해놓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쨋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 뭐요. 지금 그걸 따져 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
갑시다.”
진호의 말이었다. 소운이 계속했다.
"김동수의원의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찬동할 수 있는 주장도 아니고...”
"치긴 쳐야 할 것 같은데..."
"당연하지. 박수치는 자가 누구고 피해보는 자가 누구냐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국민 전체가 이미 농락을 당했고 피해자가
되어 있는 판인데...”
"김의원 말은 방법상의 문제를달리해 달라는게 아닐까요?"
"방법은 무슨 얼어 죽을 방법. 자기들이 당장 몰매를 맞게 생겼으니 빠져
나가 볼 심산으로 그러는게지.”
"그렇지 않아. 내가 겪어본 바로는 김의원 그 양반, 상당히 곧은 분이다.
냉철한 분이야. 이런 문제를 가지고 누구의 편을 든다든가 하는 그럴 인물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해했을 거라고 본다. 동찬이는
어떠니?”
"김의원 말대로 우리가 연희동 측에 이용 당하고 있다면 정보를 준 사람이
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이 쇼라면 몰라도.”
"어떻게 알게된 사람이냐? 나도 지금껏 이름 석자도 모르고 있잖니?"
"성이든 이름이든 절대로 밝히지 않기로 약속을 했거든. 사실 우리 집안과
가까운 사람이야. 집안 행사 때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어. 그 때 비자금
얘기를 하다가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욕한다'면서 자금 수수설을
말하더라구. 그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농담이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게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양반이 측근에
붙어서 심부름을 했던 사람이거든. 그래 혹시나 해서 만나자고 했고 아는게
있으면 얘기해 달라고 간청을 했지. 쉽게 얘기를 하더라구. 누구 누구가
얼마를 받았는데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거야. 그래 직업이 직업인지라 대뜸
수첩을 꺼내 받아 적었지.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제발 못들은 걸로 해다라고
통사정을 하더라구. 그게 어디 쉬운가? 내가 오히려 진실을 밝혀 달라고
생떼를 썼지. 몇 날 며칠을 찐득이처럼 붙어다니며 설득을 했더니 결국은
불더라구. 일이 그렇게 된거야. 그러니까 내가 의심하는 것은 김의원 말대로
저쪽의 계획된 유출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거지.”
"그런데 그 사본은 어떻게 가지고 있었데?"
"그게 집안 망신이라니까? 이 사람이 손버릇이 안 좋아요. 횡령 비슷하게
하다가 6공 초기에 짤렸데. 그냥 나오기가 서운했던지 나중에 등이나
쳐먹자는 심산으로 몰래 복사를 했던 모양이야. 본인 입으로 그러더라구.”
"그 사람이 너를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은 없니?"
"인척이기는 하지만 가깝게 지낸 적은 없어요. 그저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 그 사람도 마찬가지일거야. 얘기 중에 내가 기자인지
몰랐었다고 하도군. 뭐 사전에 내 신분을 알고는 모르는 척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아.”
"흠, 그래? 이거 감이 영 안 잡히네.'
성진이 제안을 했다.
"그러면 두가지를 가정해 놓고 얘기를 해보자구. 계획된 공작일 경우와
우연한 경우로 말이야. 첫 번째의 경우라면 김의원의 주장이 맞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예정대로 작업을 진행 시키는거야.
계획적이라면 당연히 원본을 가지고 정치협상을 시도할 것이고 우연이라면
그럴 수가 없지. 그자들 말대로 원본을 파기했을 수도 있으니까. 원본이
공개된다면 단순히 정치권을 유입된 자금만이 문제가 되겠어? 나머지 자금이
정당하게 쓰여졌을 리가 만무하잖아? 결국 원본이 공개되어서 자신들한테
득보다 실이 된다면 발견되기 전에 없애 버릴 수도 있는거지.”
"그런데 두 가지의 가정 중에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무슨 재주로 알아
내느냐는 말이야. 정보를 준 사람이 백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구치소를 찾아가서 본인을 만나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러다가는 밤을 세워도 끝이 없겠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취소하자.
대신에 동찬이가 기사를 쓰는 거야.”
"기사를 쓴다면 결국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농간에 말려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기사를 쓰되 의도를
차단하는 거야. 예를 들자면 이니셜을 사용해서 '누구 누구가 이렇고 저렇다는
설이 있더라’하고 쓰는 거야. 딱 잘라서 언급하지않고 미적지근하게 김만
뿜어 놓으면 어느 쪽이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 아니냐? 일단 설로 끝내
놓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자구.”
"기사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을까?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근거도
없이 설 만으로 기사를 쓴다고 시비를 걸텐데... 데스크에서 다루어 줄지도
모를 일이고. 이미 기사 송고도 마감된지 오래여서 지면도 확보할 수
없다구요.”
"시비정도야 감수를 해야지. 데스크는 김부장을 설득하면 되잖아? 이
정도면 특종감 아니니? 바지가랭이라도 붙들고 매달려. 찐득이 근성이 네가
자랑하는 장기 아니냐?”
"관련자들은 어떻게 하구, 그냥 내버려 두고?"
"그건 김의원한테 우리 측 의견을 전달하고 처리를 확약 받을게. 이 정도로
양보한다면 그쪽에서 크게 손해 볼 것도 없잖니?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그땐 자료를 공개하는 수밖에...”
"김의원을 어떻게 믿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양반 정도를 알고 신의도 있는 분이야. 내가 믿는
사람을 너희들은 못 믿겠다는거냐? 그 부분은 나한테 맡기고 결론을 내리자.
모두들 내 제안이 어떠냐?”
"모두가 동의했다. 소운은 즉시 수화기를 들어 김의원을 찾았다.
"의원님, 저 이소운입니다."
김의원이 정색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소운은 정리된 내용을 설명하고
김의원의 의견을 믈었다.
"절충을 하자는 얘기구만. 알았네. 30분 후에 연락을 함세."
"아닙니다. 제가 전화를 걸겠습니다. 지금 외부에 있거든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수화기를 내려 놓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예정된 30분이 흘렀다. 소운은 다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좋네, 자네 제인대로 하지."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만약에 약속을 지켜 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저도 책임질 수 없
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게. 자네는 아니라도 내가 용납을 못해. 알겠나?"
"감사합니다."
소운과 그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운은 지은에게 각 언론사로
기자회견이 취소되었음을 통보하도록 지시했다.
"취소 사유를 뭐라고 하죠?"
동찬이 나섰다.
"그냥 회견 목적이 소멸되었다고만 하세요. 좀 귀찮을 걸?"
"에이, 참. 보도자료는 죄다 소각해야겠네? 마땅한 곳도 없는데."
"내일 새벽에 고수부지 나갈 때 들고 나가서 내가 태울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하, 그러면 되겠구나. 나랑 같이 가서 태우면 되겠네."
"무슨 소리야? 그 새벽에 사무실에 나오겠다는 거야? 무슨 재주로 일어
날래? 잠이나 적어야지...”
"걱정을 마세요. 사실은 오늘부터 선거가 끝날 때까지 사무장님 집에서
지내기로 했거든? 미혜도 함께 있기로 했다구요. 사무장님 사모님이 특별히
방 한칸을 비워 주셨거든요.”
"참, 지극한 정성이다. 저러고도 떨어지면 어쩌나..."
"미혜가 핀잔을 주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격려는 못해 줄 망정 재수없이..."
"아차, 실수 실수...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니까?"
한바탕 웃음이 자지러졌다. 소운은 이렇게라도 웃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XX신문.
'비자금 받은 정치인 다수' 라는 제목이 사회면 톱을 장식하고 있었다.
'말썽많은 비자금의 정치권 유입설이 사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번 총선에 출마한 L모씨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데, L씨는
이미 관련자료를 확보하고 자료를 검토했으나 정국의 안정과 원활한 총선
분위기를 위해 당분간 공개를 유보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6공으로
부터 비자금을 수수한 정치인은 여당의 L의원, K의원, C의원, B의원, H의원
등이며 이들 중에는 구야권 인사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야당의 K의원과 또 다른 K의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비자금의 수수는
주로 선거를 앞두고 이루어졌으며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의
정치자금이 건네졌다고 한다. 한편 L씨의 측근들은 자료의 공개가 가져올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이를 극구 만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운이 아침운동을 마치고 돌아오자 사무장이 다가왔다.
"조금 전에 이의원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뭐라고 하던가요?"
"전화를 부탁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쪽에서 걸라고 하고선 끊어 버렸지.
꽤 기분이 안 좋은 투던데?”
"잘하셨어요. 그런데 폐를 너무 많이 끼치는 것 아닙니까? 형수님한테
고맙다고 좀 전해 주세요. 남편 뺏아가고 객식구까지 떠맡긴다고
나무라시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자기가 자원해서 그렇게 된거야. 부담가질 필요없어.
신문 봤나? 정기자가 특종 잡았더군.”
"그래요?"
소운은 시치미를 뚝 떼고 사무장이 집어주는 신문을 받아들고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녀석, 그럴 듯하게 갈겼구만'하고 책상에 앉으려니까 사무장이 문을 빼꼼히
열고 말했다.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나봐. 자네가 왔는지 어떻게 알고... 이의원이야. 1번
받아 봐.”
'제길 ,아침부터 재수는 글렀군' 소운이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소운입니다."
"나요. 이의원이요. 당신 참 대단해. 당신이 얼마나 고고한 사람인지 지켜
보겠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시작에 불과하다구요."
"그래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건가?"
"당신이 매장되는 걸 지켜 봐야죠."
"나를 이길 것 같소?"
"선거에는 질지 몰라도 인생은 지지 않아요. 당신보다 훨씬 집념이 강한
인간이거든요. 내 말을 새겨 들으세요.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스스로 떠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지요.”
"협박하는 건가?"
"천먼에요. 협박같은 건 당신들이나 즐기는 것이지 나는 그런거 좋아하지
않아요. 충고라고 생각하세요.”
"젊은 녀석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나도 충고하나 할까? 그렇게 날뛰다가
제명에 못죽어.”
"충고 고맙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소운은 수화기를 부숴져라 내려 놓았다.
"개같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협박은 뭐고 충고는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한테 볼 일 있으세요?"
"아, 식사 안할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알았어요. 곧 나갈께요. 먼저들 들라고 하세요."
"금방 나와. 찌개 다 식기 전에..."
사무장이 나가자 소운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저는 이소운이라고 하는데요, 김의원님 계십니까?"
"안녕하세요? 지금 회의 중이시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누굴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잠시 후 김의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날세. 수고했네.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더구만."
"취재기자가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동찬이라고 의원님도
잘아시죠?"
"정기자? 알다 마다. 그 사람이었구만. 필이 곧기로 유명한 친구로 소문이
났지. 언제 같이 만나서 식사나 함께 하세.”
"선거나 끝나고 봐야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러지. 선전을 비네."
"감사합니다.선배님도 선전하십시오."
소운이 김의원에게 동찬을 소개한 것은 약속을 지켜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김의원도 소운의 의도를 짐작할 것이다.
이로서 일단락을 마무리했다.
오후 내내 언론사와 기자들로 부터 기자회견이 취소된 사유와 준비했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소운은 일체를 거부하고 면담을
중단한 채 최종적인 선거에 몰두했다. 각종 선거홍보물이 속속 도착하고
사무실 분위기는 점차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모든 점검이 마무리되고
저녁시간이 되었다. 소운은 사무실 가족들을 모아 조촐한 다과회를 마련했다.
책상마다 깔아놓은 종이컵에 음료수를 가득 채우고 건배를 했다. 그리고
소운이 조용히 그러나 힘있는 어조로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이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해 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깨끗한 정치, 올바른 정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이번 선거에 나섰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도와주시는 것은 저의 뜻에 동의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합심해 주기를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선거를 임하는 우리의 최대목표는 당선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기대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운동선수가 마지막 기력이 남아 있다면 좀 더 나은
기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후회를
남긴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하기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후회없는 승부를 위해
모두가 노력합시다. 인력과 자금력은 남들보다 형편없이 뒤지지만 젊은
패기와 정열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장점을 최대의 무기로 삼아 승리의 깃발을 꽂아 봅시다.”
요란한 함성과 박수소리가 끝나자 이상호 사무장이 김광수
수석부의원장에게 다시 한 번 건배 제의를 요청했다. 소운은 다과회를 간략히
마무리하고 운동원들을 서둘러 귀가시켰다.본 게임을 대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늘밤 당직은 사무장과 주원이 그리고 지은과
미혜가 맡기고 했다. 그리고 동찬이 취재가 끝나는 대로 합류하기로 했다.
소운도 오늘만큼은 일찍 수면을 취하기로 잠자리를 준비했다.실로 모처럼
만의 여유있는 휴식이었다.
5. 정치 공작
땀에 흠뻑 젖은 정동찬이 다방문을 들어 섰다. 빈자리를 찾다보니
동료기자가 보였다. 옆자리를 차고 앉아 가방에서 휴대용 PC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취재 수첩을 펼치면서 혀를 내둘렀다.
"야, 이건 선거가 아니라 전쟁이다, 전쟁."
"선거가 다 그렇지 뭘 그래?"
"그게 아니야. 이건 너무들 한다구. 한마디로 아사리판이야. 이런 선거 두
번만 치렀다가는 나라 꼴이 개판이 되겠어.”
동찬이 컴퓨터 자판을 부리나케 두들겼다.
"김기자, 몇 분 남았어?"
"뭐가?"
"마감시간 말이야."
"10분."
"이런 제기랄, 또 한방 먹게 생겼네."
"그러게 적당히 하고 다니라니까?"
"빌어먹을... 취재수첩 하나 가지고는 부족할 정도라구."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휴대폰을 요란하게 울렸다.
"바빠 죽겠는데, 어떤 새끼야?"
"야, 정기자. 너 지금 어디있냐? 매일 이렇게 애먹일래?"
"아이구 미안합니다. 지금 보내고 있습니다."
"보내고 있는데 여기는 왜 안들어와? 빨리 서둘러. 벌써 몇분을 넘겼는지
알기나 아냐?”
"아, 전화를 끊어야 서두를 것 아닙니까?"
빽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김부장님?"
"아니면 누구겠어? 누가 놀고 다니나, 원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오늘 내용은 뭐야?"
"말 시키지 마, 헷갈려."
"나한테 신경질 낼 필요 없잖아."
"시끄러 이 인간아!"
동찬이 고함을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둥그런 눈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사람 처음봤나' 하면서 아랑곳 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서둘러 송고를
마치고 한시름 놓았다는 듯, 김기자에게 담배를 청했다.
"사서 피워."
"씨팔, 성질머리하고는 고새 삐졌어? 이봐 아가씨, 여기 담배 좀 갖다
줄래요? 88라이트로...”
종업원이 담배를 들고 와서 차 준비를 했다.
"차는 뭘로 드릴까요?"
"아까 마셨잖아?"
"그건 아까가 아니고 아침에 드신 거예요."
"하루에 한 잔이면 됐지 올 때마다 차를 마셔야 되우?"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세요? 자리에 앉으시면 엽차만 대 여섯
잔을 마시면서 최소한 자리 값은 하셔야죠.”
동찬이 멀뚱거리며 종업원을 쳐다 보다가 하는 수 없이 차를 주문했다,
"오늘 일진이 더럽구만..."
김기자가 고소하다는 듯이 쏘아 붙였다.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지."
"성질 돋굴거야? 그래, 오늘은 뭘 잡았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정기자부터 얘기해."
"내 참 더러워서. 좋다, 좋아. 내가 먼저 하지. XX선거구에서 후보자끼리
난투극이 벌어졌어. 합동유세 중에 서로 심하게 까더라구. 결국은 터지고
말더라니까? 먼저 연단을 올라간 후보가 상대 후보를 디립다 쪼아 대니까
당했던 후보가 자기 차례가 되서는 행여나 질세라 무자비하게 까대더라구.
경고를 두 차례나 받았는데도 안아무인이야. 결국은 먼저했던 후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연단을 뛰어 올라가 멱살잡이를 하더라구.
그러니까 밑에서는 운동권들이 난리가 났어. 패싸움 일보 직전에 경비 경찰이
진압봉을 들고 간신히 뜯어 말렸지. 선관위가 둘다 고발을 했는데 결과가
기대된다니까? 이게 무슨 짓들인지... 김기자는?”
"예라, 찻 값이나 내고 나와."
김기자가 다짜고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왜 김기자 찻 값을 내나? 얘기 안하고 갈거야?"
"이하 동문이네. 한 지붕에 안 사는게 큰 다행이다."
그러더니 휭하고 나가 버렸다. 동찬은 찻값만 덤탱이를 쓰고 말았다.
'씨팔, 다시는 내가 먼저 말하나 봐라.'
동찬이 씨근씨근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겼다.
다방을 나와 다음 취재장소를 생각했다.
'그래 소운이 형한테로 가자'
소운의 선거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소재를 파악한 후 부랴부랴 차를
몰았다. 소운의 개인유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청중이 꽤 많아 보였다.
연설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니 원고가 필요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동찬은 유권자들의 심중이
궁금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귀를 귀울이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저 사람 어떻게 샐각하세요?"
"..."
"할아버지, 이소운 후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구요?"
대꾸가 없었다. 옆에 있던 같은 또래의 노인이 쿡쿡거리며 말했다.
"그 영감탱이 귀가 어두운디?"
"내가 오늘 왜 이러는 지 모르겠네. 듣지도 못하시면서 뭘 저렇게
열심이시죠?"
"입하에 모양새를 읽어 부려. 저래뵈도 재주는 있는 영감이랑께?"
"기가 막혀서... 그럼 할아버지께 여쭤 볼께요. 저 사람 어때요?"
"똑똑하구만. 낯부닥도 잘 생겨 부렀고. 젊응께 좋구만."
"그럼, 저 사람을 지지하시겠네요?"
"아니여. 나는 벌써 딴 놈으로 정해 부렀어."
"누군데요?"
"아, 김선생 아그들 찍어 부러야재."
'오늘은 정말 안된다, 안돼'
동찬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다른 사람을 찾았다.
모판을 깔아놓고 야채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많이 파셨어요?"
"저놈의 유센가 뭔가 때문에 장사를 못허겄어요. 여기가 명당자리나 되는
게비여. 오늘만 세 번 재구먼?”
"들어 보시니까 어떠세요?"
"저 양반 운동원이유?"
"아닙니다. 기잡니다."
"그려요? 그래도 젊은 양반이 제일 낫구먼요. 나이 먹은 것들은 그만허고
젊은 양반들이 좀 혀야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허다마다요. 딸하나 있으면 사위 삼았으면 좋겄네. 호호호..."
자리를 옮겨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곁으로 다가 갔다.
"안녕하세요? XX신문사 기잡니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있습니까?
이 지역에서는 다섯 명의 후보자가 나섰는데 비교를 해보셨는지요?”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만 후보마다 공약이 비슷비슷해서..."
"이 후보의 경우도 그렇습니까?"
"좀 다르기는 하네요. 그 중 나은 것도 같고..."
동찬이 이런 식으로 몇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고마해라, 시끄러버서 몬살겠다. 간다이 하모 어데덧나나? 개핵은 무신
개핵이고? 조용히 사는기 개핵인기라.”
그러자 듣고 있던 한 청중이 중얼거렸다.
"또 지랄이다, 또. 저게 큰 병이라니까?"
동찬이 물었다.
"뭐하는 사람입니까?"
"말도 마쇼. 환자요, 환자. 제 맘에 안드는 사람이면 무조건 저
지랄이라구요. 아까도 한방 얻어 터졌는데, 영 정신을 못차리네.”
유세가 끝나고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동찬은 소운에게 인사를 하고
주원에게 다가 갔다.
"고생이 많다. 자주 찾아온다는 게 여의치가 않구나."
"공인이 그렇지 뭐."
"잘 되가니?"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아. 이제 시작이니까 좀 더 피치를 올려야지."
"내가 몇 사람을 만나봤는데, 반응은 괜찮은 것 같다. 헌데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지역성향이 너무나 강하다. 그걸 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겠어. 각 정당이 선거전을 아예 지역 대결구도로 몰고 가고 있어. 대리전
양상이 되니까 더욱 노골적이야. 선거후유증이 엄청날 것이라는 게
현장기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정말 큰 일이다.”
"우리도 걱정하고 있어."
"형은 좀 어떠니? 건강은 괜찮을 것 같니?"
"워낙 강골 아니냐? 옛날 생각해 봐라. 단식 투쟁하면서도 일주일을 돌
던지던 사람아니냐? 아마 한 달도 버틸거다.”
"허긴 괜한 걱정이다. 인원은 충분하니?"
"처음보다 몇 사람 더 늘었어. 자원봉사를 자청한 사람들이야."
"고나운 일이구나. 자금은?"
"내가 여기 저기서 변통을 하고 있어. 어렵긴 해도 버틸 수 있을거야."
"여러모로 고생이 많구나. 당에서는 지원이 없다니?"
"몇 푼 내려 왔는데 코끼리 비스켓이지. 이곳은 포기한 모양이더라.
정당연설회 때나 몇 푼 들고 올 모양이더라. 생색이나 내자는터좌 거겠지.”
"그거 한 번 알아봐야 겠구나."
"알아볼 거 뭐있니? 뻔한 통수 아니냐? 몇몇이 집중적으로 끌어쓰고
있겠지. 그러고도 당선만 안되봐라. 내 이것들을 가만두지 않을테니.”
동찬은 소운 일행을 빠져 나와 선거사무실로 향했다. 취재장소를 옮기기
전에 음료수라도 사다주기 위해서 였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전화홍보팀을
독려하고 있던 성진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게 누구야? 얼굴 잊어 버리겠다."
"미안하다. 자주 못와서 ... 고생이 많지?"
"격려하러 왔냐, 미혜보러 왔냐?"
정신없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던 미혜와 지은이 뾰루루 달려와 생글거렸다.
지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자님이 어인 일이셔? 우리 취재하려구? 예쁘게 봐줘."
"유권자들이 너희들 목소리 들으면 웬 할머니들인가 하겠다."
"웃기지마. 이래뵈도 데이트 신청하는 유권자도 있다구. 미혜는 세 건이나
약속을 했는걸?”
"아이구, 잘됐네. 잘하면 혹 하나 떼겠구나."
미혜가 화가 나서 달려 들었다.
"내가 혹이었단 말이지?"
하면서 동찬의 가슴팍을 마구 두들겼다.
"농담입니다 농담..."
"야, 눈꼴 사납다. 그만들 해라."
성진이 동찬이의 팔을 잡아끌고 소운의 방으로 들어 갔다. 미혜와 지은이
따라 들어오자,
"야,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전화기나 가지고 놀아. 우리 둘이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치사한 남정네 들이구만..."
두 여자가 뾰루퉁해서 밖으로 나갔다.
"동찬아, 내일 부산에 내려 간다. 오는 길에 전주에도 들려 볼 생각이다.
같이 가지 않을래?”
"지난 번 XX위원회 문건 때문에? 하긴 나도 내려가 볼 생각이다. 그 뒤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잖아?”
"그래. 홍균이가 좀 깊숙히 파본 모양인데, 아무 것도 나온게 없었어.
움직인다면 지금쯤이 아닐까 싶거든?”
"여긴 어떻하구?"
"지은이가 야물게 잘하고 있어. 안심해도 될거야.형한테 양해도 구해
놓았고."
"언제 출발할래?"
"전주까지 들려야 하니까 가급적 아침 일찍이 출발하자."
"알았어. 그럼, 첫 비행기로 내려가자. 내가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을게."
"지금까지 분위기는 어떤 것 같니?"
"여당이 조금 밀리는 듯 하지만 백중지세로 봐야겠지."
"과반수가 가능하겠어?"
"아직은... 판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어. 그나 저나 네 일은 안해도
되니?"
"월급쟁이가 일을 안하면 어떻게? 어차피 선거 얘기 밖에 더 있겠니? 다음
호에는 선거판의 주변 이야기를 엮어볼 생각이야. 그러니까 선거도 돕고
얘기거리도 찾고 일석이조지.”
동찬은 소운의 사무실을 나와 현장 취재계획을 취소하고 신문사로 차를
몰았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김부장이 정색을 하고 동찬을 향해 말했다.
"야, 정기자. 선거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말랬잖아?"
"지금부터 내일 모레까지 서울특별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할
작정입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야?"
"출장을 보내 주십시오."
"뭐야? 지금 제 정신이야? 사람이 부족해서 난린데 어딜 보내달라구?
안돼!"
김부장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지만, 출장가겠습니다."
"이 친구가 왜 이래 정말!"
동찬이 갑자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꼭 가야할 일이 생겼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소용없어.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아!"
"부장님, 제가 허튼 짓 하는거 봤습니까? 중요한 일이라니까요?"
이제 김부장이 사정을 했다.
"글세, 찐득이 후배님. 제발 나 좀 살려줘. 지금도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땜질하기도 급급해. 자네까지 떠나면 댐이 무너진다구.”
그러자 동찬이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했다.
"안돼요! 꼭 가야 합니다."
"이 웬수같은 인간아. 그래, 무슨 일인지 얘기나 들어 보자."
"그럼 보내 주시겠습니까?"
"여의주를 건진다는 내용이면 보내주지."
동찬이 김부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산 쪽에 이상징후가 보인다구요."
"확실해?"
"확실치는 않지만 그걸 확인해 보려구요."
"확실치 않으면 안돼. 주재기자한테 맡기고 그냥 자네 지역이나 지켜."
"사모님께 전화할까요?"
"우리 집사람은 왜?"
"지난 번 강릉가실 때 동행했다는 미스 조 얘기 좀 전해 드리려구요."
"정기자, 너 정말 이러기냐?"
"기왕이면 모스크바 갔을 때 호텔에서 있었던 일도 설명해 드릴까요?"
"우라질...알았다, 알았어. 대신에 큰 거 하나 잡아와. 빈 손으로 왔다가는
그 방정맞은 혓바닥에 가시나 돋혀 버리라고 빌거다.”
"진작에 그러실 것이지, 사람을 치사하게 만듭니까?"
"출장허가는 못받아. 출장비도 없고. 위에서 모르게 알아서 갔다 와."
동찬은 신이 났다. 책상서랍에서 새 취재수첩을 꺼네 가방에 쑤셔 놓고는
김부장을 향해 속삭였다.
"사모님께 잘해 드리세요. 참 좋으신 분이세요. 강릉 일이고 모스크바 일이고
이미 알고 계시더라구요.”
"뭐야?"
동찬이 큰 소리로 웃으며 쏜살같이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여행사에 들러
비행기표를 예매한 뒤 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항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가까운 포장마차로 몸을 들이 밀었다.
다음 날 아침, 동찬이 게슴츠레한 얼굴로 공항로비에 들어서 티켓을
교환하고는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게이트 앞을 서성이는 성진이 보였다.
"일찍 나왔니?"
"아니, 조금 전에...근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술독에 술이 얼마나 들어가나 실험해 봤거든."
"냄새가 아직도 난다. 그렇게 퍼대고도 속이 멀쩡하니?"
"그렇지 않아도 난리다. 화장실을 얼마나 드나 들었던지 뒤가 따가울
정도다. 보고선지 뭔지 그 문건은 가져왔니?”
"그래, 비행기 안에서 줄게. 시간됐다. 나가자,"
"잠시 후 비행기가 땅에서 하늘로 날아 올랐다. 성진이 문건을 꺼내
동찬에게 건네 주었다. 유심히 훑어 보고 있는 동찬을 향해 성진이 말을
걸었다.
"지난 번에 XX위원회 관계자를 만났다며?"
"수석연구원이라는 사람을 만났었지."
"아무 것도 안나오던?"
"응. 까놓고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선거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어?"
"여야대소야 짤라 말하더라구."
"그래서 이런 걸 만들었나?"
"여소야대가 되면 여당이 어떻게 할 것 같으냐고 했더니 '다수 의석을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간단히 말해 버리더라니까. 전혀 개의치 않다는
태도였어. 그래서 방법이 있느냐고 했지.”
"그랬더니..."
"알면서 뭘 묻느냐는 식이야."
동찬이 갑자기 고통스럽게 배를 움켜 잡았다.
"야, 휴지, 휴지..."
"화장실에 있겠지. 그러게 적당히 마실 것이지..."
동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기적 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성진이 터져 나올
듯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싸 감았다.
비행기가 김해공항 활주로를 미끄러져 멈추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어데 가실랍니꺼?"
"해운대로 갑시다."
"놀러 가능교?"
"팔자 좋은 소리하시네.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기 아이고, 어저끄 밤에 안 있습니꺼, 거서 안좋은 일이 있어가 검무이
심한 기라요.””
"안좋은 일이라니요?"
"언 놈들이 선거사무실에 기어들어가 운동권을 쥐패뿔고
강도짓을 했다 아입니꺼? 털기는 얼맹가는 몰라도 엄씬 챙깃을 끼라. 금마들
쥑인다카이.”
"선거 사무실이라 사람이 꽤 많았을 텐데요?"
"어데예, 네 명이 자고 있었다 캅니더. 선거 돈이 노름 돈인기라.
그카니까 얼매나 뺏긴는 지도 말도 몬하고... 컴퓨터까지 몽땅 실어가뿌따
아입니꺼?”
"컴퓨터까지요? 그렇다면 선거자료까지 몽땅 사라졌을 텐데..."
"그래 난리 아잉교? 마 우얄끼요, 막말로 선거 조기뿐기지."
"혹시 누가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닐까요?"
"안 그케도 그립디다. 돈 가지고 물건 가간기는 좋은데, 와 사무실을
뿌사뿐는지 모른다카데요. 컴퓨터 디스켓까지 모조리 작살이 냈능기라.
그카니 언놈이 의심을 안하겠능교? 경찰이 신고를 받자마자 그물을
쳤다카는데 땅 속으로 꺼져 뿐는지 하늘로 솟아 뿐는지 흔적도 없는
기라요. 누가 해꼬지를 했다케도 근거가 있어야 할낀데 먼지캥이도
없는기라. 팔 뿌라치고 머리 터지고 이빨 뿌라지고 쥐 터진 얼라들만
불쌍체.”
"기사 아저씨, 경찰서로 갑시다."
"경찰서는 와 예?"
"알아 볼게 있어서요."
"손님들도 경찰인교?"
"아닙니다. 기자예요."
"그라입시더."
"그런데 아저씨, 여기 선거 분위기가 어때요?"
"여는 완전히 YS판이지 뭐. 아무리 변했다케도 지역싸움을 하모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거 아입니꺼? 손님들도 대개 그캅니더. 다 왔십니더.”
"수고하셨습니다."
동찬과 성진은 신분증을 보이고 담당경찰로 부터 간밤의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경찰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답답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럴 만도 했다. 7-8명으로 추정되는 범인들이 얼굴에 복면을
해서 의상과 체격 외에는 인상착의를 알 수가 없고 범행에 사용한 승용차가
12인승이고 어두운 색이었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색상이나 차종을 알 수가
없었다. 한가지 기대를 거는 것은 양자 간의 격투 과정에서 범인들 중
하나가 얼굴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국과 병원 등에
이미 협조요청을 내놓은 상태였다. 그 외에는 검문검색과 탐문수사에
의존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장기수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동찬과 성진은 단순한 강도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어 저질러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누구의
소행일까? 어떤 목적으로 저질렀을까? 정당과 관련이 없는 피해자, 왜
하필이면 이쪽을 선택했을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두사람은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식히기 위해 바닷가로 나갔다.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타고 밀려 오던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 위로
밀려왔다. 성진이 동찬을 힐끗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야, 가방 한 개씩 꿰차고 처량 맞게 앉아 있는 폼이 꼭 집 나온 애들
같다. 옛날 생각난다.”
"옛날 생각이라니?"
"내가 중학교 2학년 여름에 부엌에 있던 어머니 지갑을 통채로 들고
부산으로 도망왔던 적이 있어. 방학을 앞두고 성적표가 나왔는데, 형편없이
떨어 졌더라구. 호되게 야단맞을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갈데가 있나. 하루 저녁은
여인숙엘 들어가 잤는데 주인이 자꾸 이상하게 보는거야. 집이 어디냐, 여긴
왜 왔냐, 뭐하는 아이냐, 하면서 꼬치 꼬치 캐묻더리구. 그 다음부터는
여인숙도 가기가 싫어졌어. 그래서 이 바닷가를 돌며 나무 밑에서도 자고
바위 밑에서도 자고 그렇게 지냈다. 한 열흘쯤 지나니까 돈이 떨어졌어.
큰일 났지 뭐냐. 배는 고프고 돈은 없고... 그 때도 지금처럼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옆에는 비닐가방 하나 달랑 놔두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거든. 마침
순찰을 돌던 경찰관이 오더니 이것 저것 묻더라구.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집으로 연락을 했고 아버님이 내려 오셔서 서울로 올라갔지. 얼마나
맞았는지 종아리가 터져 가지고 며칠을 걷지도 못했다.”
"맞아도 싸다."
그러면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 왔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동찬과 성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 보다가 박장대소를 했다.
경찰이 신분을 확인하고 자리를 뜨자 두사람은 모래바닥을 뒹굴며 다시
한 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동찬이 먼저 말을 꺼넸다.
"어떻게 생각하니?"
"뭘?"
"이번 사건 말이야. 혹시 작업이 들어간 건 아닐까?"
"글세 방법이 좀 거칠잖아."
"과거에는 백주 대낮에 흉기를 든 깡패를 동원해서 창당을 방해했던 일도
있었어.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사건을
비일비재하다구. 지금이라고 그런 방법이 동원되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
"피해자와 다른 후보들과 어떤 이해관계가 성립되는지, 그것부터 비교해
보자구. 일단 다른 후보들 사무실부터 찾아가 보자.”
"그래, 그게 좋겠다. 우선 요기부터 하자. 속이 쓰려 죽겠다."
두 사람은 모래를 털어내고 가방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근처 식당을
들어가 아침을 해결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1여 3야 그리고 한 사람의 무소속, 다섯명의 후보가 나섰지만 사실상
2파전이나 다름 없었다. 먼저 야권 후보를 찾아 가기로 했다. 한
야당후보의 선거사무실로 들어갔다. 선거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초라한 분위기였다.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기자라고 하니 정색을 하며 자리를
권했다. 음료수를 내가 놓고는 수선을 핏기 시작했다. 공약이 어떻고
정치현실이 어떻고 어느 후보는 어떻고 등등... 동찬이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장황한 설명을 제지하고 간 밤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물어보았다.
"딱하게 됐죠. 그러게 뭐하러 사무실에다 돈을 둡니까? 내가 보기에는
내부적 소행으로 잘 아는 자의 소행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감쪽같이 해먹을 수가 있겠어요?”
"공작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요?"
"공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무집기를 부쉈다고 공작이랍니까? 생각해
보세요. 도둑놈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려는데, 집주인이 대든다고
합시다. 당연히 자기방어를 하게 되고 치고 받고 싸우다 보면 물건도
부숴지는 거지요. 공작이라면 정치테러를 당했다는 말인데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합니까? 괜한 비약이라구요. 범인들도 다쳤다고 하더군요. 동료가
다치니까 집기를 부수는 등 더욱 퐁가하게 군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야당후보 측을 찾아 갔다. 이쪽에서도 앞서와 마찬가지의 견해를
보였다. 단순강도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마지막 야당후보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왕이면 후보를 만났으면 하고 미리 연락을 취했다.
가급적 그렇게 하겠노라는 대답을 듣고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나
후보는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동찬이와 안면이 있는 후보의 측근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고 있노라고 했다. 두 사람은
곧 밀실로 안내되었다.
"잘되십니까?"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좋은 편입니다. 여론조사 결과도 좋구요.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여론이란게 곧 표로 직결되는게 아니다 보니 전적으로 믿을
것은 못되죠. 그런데 먼 것까지 웬일이십니까?”
"서울에만 있으니 갑갑해서요. 지방의 선거공기는 어떤지도 궁금하고...
그런데 간밤에 안좋은 일이 생겼더군요?”
"아하, 그것 때문에 오셨군요?"
"아닙니다. 공항에서 오는 길에 택시기사한테 듣고 알았습니다. 사건사고야
제 분야하고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우리도 자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공작이니 뭐니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뭐 짚이는 게 있습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없어요. 공작이 되었건 단순범죄가 되었건 우리한테는
간접적인 피해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이쪽이 피해를 입습니까?"
"알아보니까 그 사람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더라구요. 선거자료가 모조리
없어진데다 운동권들이 겁이 나는지 하나 하나 떠나 버린답니다. 하다 못해
전화번호까지 사라져서 전화홍보도 못하는 실정이래요. 그 사람이 여권표를
좀 먹어 주길 바랬는데... 이제 선거운동을 제대로 못하게 생겼으니 다
틀렸지요.”
"오히려 동정표가 몰리지 않을까요?"
"돈 때문에 틀렸어요. 얼마를 잃어 버렸는지 경찰에 밝히지를 못하는 걸
보면 절대로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최소한 선거비용 상한액과 관련된
액수가 분명해요. 아주 악재가 되고 있어요. 벌써부터 돈선거를 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후보를 사퇴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적이기는 하지만 소신은 있는 사람이예요.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구요. 아마 혼자서라도 끝까지 갈 겁니다.”
"공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영감님하고 그런 얘기를 나누어 보기는 했지만... 글쎄요. 뭐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냥 진상조차나 해보자는 입장이예요.”
'간접 피해라...'
동찬은 속엣 말을 중얼거리는 성진을 쳐다보았다. 성진이 역시 동찬이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선전을 당부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한군데가 남았다. 동찬이 피해자의 사무실부터 들리자는 했으나
성진이 경찰에서 들은 얘기 외에 더 나올 것이 있겠느냐며 반대했다.
성진이 동찬의 뒤를 따라 선거사무실을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어, 박선배. 여기 웬 일 입니까?"
"성진이 아이가? 니 여기 웬 일이고? 취재 나왔나?"
"예, 어떻게 이런데서 만나게 되네?"
"좀 도와 줄라꼬 와있다. 고향 선배아이가. 선거라 카능기 억수로 힘드네.
이래 힘들모 서울에 있었을 끼라.”
박선배라는 사람이 성진과 동찬을 회의실로 인도했다.
"어수선하제. 쪼매만 기다리그래이."
그리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야야, 뭐하노? 빨리 차가 온나! 근데 이 분은 누고?"
"아참, 소개가 늦었네. XX신문사 정동찬 기자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슴더. 반갑네요. 성진이는 대학 후뱁니더. 억수로
가깝지예. 마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기라요. 성진아. 안 그렇나?”
"맞습니다."
박선배의 호들갑에 비해 성진은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표정이
밝지 못했던 것이다. 한동안 선거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성진이 박선배에게
물었다.
"어제 사건은 뭡니까?"
"어제? 아, 강도 사건말이가? 그 양반 재수되게 없데. '우째 이런 일이'라
카더니 바로 그 양반을 두고 한 말인기라.”
"피해자 쪽에서 의혹을 제기한다고 하던데요?"
"공작이라카는거?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기 우째
가능하겠노? 그래 해본 소리일기다.”
"어떤 야당후보 측에서는 진상조사를 나섰다고 하더군요."
"한가한 갑네. 경찰이 할 일을 와 즈그들이 하노? 관심없다. 마, 그 얘기는
때리 치자고마. 언제 갈끼고? 오늘 저녁에 한잔하자. 부산에 와서 회도 못
묵고 가모 되겠나? 내 한턱 쓸꼬마.”
성진이 동찬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일어나노?"
"바쁘실텐니 그만 일어날께요. 다른 약속도 있고..."
"그래? 하모 볼 일보고 전화하그라. 알았제? 그냥 가모 혼난데이."
"시간나는 대로 전화할께요."
성진이 동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잰걸음으로 빠져나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얼핏 레스토랑이 보였다. 성진이 다짜고짜 동찬을 끌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왜 그래?"
"저 사람 XX위원회 연구원이야. 저 사람으로부터 문건을 입수했다고."
"뭐야? 그럼 이게 어떻게 된거야?"
동찬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여기에 와 있는거지?"
"선배라잖아?"
"너, 설마..."
"알아. 내 머리도 지금 복잡해. 진정부터 하자."
동찬이 조바심이 났다.
"안 되겠어. 소운이 형한테 연락해야지."
"연락해서 뭘 어쩌려구?"
"김동수의원이 있잖아? 김의원한테 알아보라고 해야지."
"가만 있어봐. 우연일 수도 있다구. 또, 알아 봐서 뭘해?"
"우연치고는 상황이 너무 리얼하지 않니? 분명히 뭐가 있어."
"글세, 서두르지 말라니까. 저 사람 나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잖아?
캥긴다는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구. 배짱이 아무리 두둑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는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상하다는 거지. 설사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어. 시간 끌며 하는 일이 아니잖아? 한마디로 단 칼에
끝낸 거라구. 최소한 이 곳에서 만큼은 미래형이나 진행형이 아니라 이미
과거형이 되어 버렸어.”
"그럼 어떻하자구?"
"어떻하긴 우선 정리도 할겸 부산 분위기나 알아보고 다니자. 그리고 오늘
밤에 전주로 가는 거야. 그쪽 상황이나 살펴 보고나서 생각하자.”
"..."
"동찬아, 그렇게 하자니까?"
동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리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아예
순리를 좋아하지 않는 집단이다.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관련된 문제라고 해도 아니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다고 해도 순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 뿐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온겆 술책과
계략이 사악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다. 오직 승자가 되기 위해서, 오직
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사악함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악의
근원이 아니던가. 동찬은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주체할 수 없었다.
시내로 들어왔다. 하얀 종이에 어느 후보의 연설회를 알리는 공고가
너덜거리며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마침 시간이 맞았다. 장소도 마음에
들었다.
용두산 공원, 동찬은 유세에는 아랑곳 없이 탑 위에 올랐다. 둥근 조망대에
기대어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옛날 국민학교 담임선생님 말씀이 생각났다.
남자는 모름지기 바다처럼 넓은 가슴을 가져야한다고 배웠다. 아량, 도량,
이해심, 여유, 이런 것들이 풍부해야 큰 그릇이 된다고 배웠다. 그게 바다와
같은 마음이라고... 그러나 바다가 화가 나면 천지를 삼킨다는 사실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 바다가 되자. 여유롭게 품다가 단번에 삼켜 버리자.'
동찬은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확성기를 타고 들려오는 낯설은 선량의
호소가 한낱 시끄러운 굉음으로만 들렸다. 동찬은 바다를 향해 '야.
이놈들아' 하고 목아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기분이 좀 풀렸니?"
"가자, 전주로..."
"아니? 그럴 필요 없겠어. 그냥 서울로 올라가자. 우리가 진실을 확인한다고
해도 아무 곳도 할 수 없어.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 그저 객석의 구경꾼일
뿐이야.”
"그럴 걸 뭐하러 내려 오자고 했냐?"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야. 애당초 이 문건을 가지고 친그들에게 회의를
요청한 것은 소운이형 때문이었어. 사실 여부나 의도에 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구. 여권의 움직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어야 후에 대책을 세을거
아니냐? 단순히 형을 돕기 위한 생각 뿐이었다구. 이번에 온 것도 내가, 아니
우리가 본 것을 그대로 소운이형한테 전해주고 향후에 적절히 대처할 것을
조언하기 위한 것이었고 애당초 이길 가능성이 없는 게임을 시작했고 형도
그것을 알고 있어. 우리도 과반수 불가, 교섭단체 불가라는 결론에 동의를
했었잖아? 통합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쨋든 소운이형이 정치를 계속
하려면 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지난 번에 비자금
문제를 공개하지 않은 것도 형 입장에서는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과반수가 안될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예상일 뿐이야. 된다면 어떻게
할래?”
"14대 총선때 여당은 여권이 똘똘 뭉치고서도 149석으로 과반수를 못
넘겼어. 비록 한 석이 부족했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었다구. 무소속을
영입해서 겨우 과반석 의석을 확보했지. 지금 상황이 그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 완전히 전열이 흐트러져 있다구. 게다가 보스세력들의 저항이
대단하잖니?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도 무시 못하고. 뿐만 아니야. 그전
같으면 제 1당이 절반에 가까운 전국구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득표율에 의해
나눈단 말이야. 과반수 분위기가 아니라구.”
"교섭 단체는?"
"지금 선거 분위기를 몰라서 묻냐? 지역대결에다 3김구도로 흘러가잖니?
게다가 인기도 급전 직하해 버렸어. 타당에 비해 지지기반도 취약하니
득표력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증론이라구. 득표율이 최하위로 딸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잖아?”
"총선 후에 소운이형의 입지가 확실히 보장된다는 근거는 없잖아? 세력
싸움에서 밀릴 것이 뻔한데...”
"눈 앞의 상황을 볼때는 그래.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는 또 한 번 변한다.
권력누수를 방지하기 위한 조정이 반드시 있다구. 당연히 기존 권력층을
강화시킬 것이고 이때는 소운이형 쪽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인물로 꼽힌다.
나는 애당초 영입을 시도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본다.”
"차라리 그때 가버렸으면 이런 속은 안썩었을 것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내부조정을 기대하기 어려웠어. 그래서 나도 극구
반대했었다구. 지금은 힘들지만 전화위복이 될거다. 비자금 건만으로도
상당한 평가를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더구나 김의원의 장담대로라면
이의원이야 당선이 되도 정치적으로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아냐?”
"생각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는데, 하루가 어떻게 변할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어. 한 치앞도
모르는 게 정치판인데 어떻게 예측 뿐인 훗날을 믿을 수가 있느냐구?”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사람들이 오늘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막연할 지라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나 희망이라는게 있기 때문이라구.
'안개 속에 서면 우리 모두 혼자이어라' 하는 헤르만 헷세의 싯귀가 생각이
난다. 우리는 지금 안개 속에 살고 있어. 외로울 수 밖에 없지.”
"제법이구나. 문학도 출신답다. 그래. 성루로 가자. 소운이 형한테 가자.
가서 외로워도 함께 외롭고 힘들어도 함께 힘들자. 대신에 어디 좀 들렸다
가자.”
"어딜 들려?"
"내일까지 출장 허가를 받았거든. 지금 올라가면 김부장이 가만 두겠어?
전쟁터로 바로 보낼거다. 이놈의 선거판 쫓아 다니는 거 지긋지긋하다. 단
하루라도 추한 꼴 좀 덜 봤으면 좋겠다.”
"형을 조금이라도 도와야지."
"제기랄, 노비문서라도 썼냐? 약이 떨어졌으면 충전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새롭게 시작하잔 말이야.”
"알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는 올라가는 거다?"
"그래 임마."
두 사람은 열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아무 소리말고 따라오라는 동찬의
말에 성진이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따라 나섰다.
6.역사가 만든 순애보
열차 안이 온통 선거얘기로 가득했다. 영호남을 잇는 열차여서 그런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전혀 어색함이 없이 어우러져 들려왔다.
이렇게 다정하게 사는 이웃들을 무엇이 경계와 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이 어깨걸고 두레를 했다는 화개장터, 대대의 조상
때부터 함께 어우러져 발가벗고 물장구를 쳤다는 섬진강, 그 화개나루가
있는 하동강 위를 열차는 반가운 기적을 울리며 힘차게 달리고 있다.
순천역에서 동찬과 성진을 실은 택시는 구시가지를 지나 변두리 끝
국도변에 멈추어 섰다. 도로를 몇십 미터나 벗어나 조그만 가게가 보였다.
출입문 위에는 하얀 백열등이 노란 달빛을 받으며 매달려 있었다. 동찬이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르키고 있었다.
"저 집 막걸리가 기가 막히다."
"술집이냐?"
"술도 팔지만 구멍가게 같은 곳이야."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어?"
"역마살 때문에..."
동찬이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머니 저 왔습니다. 동찬이가 왔다구요."
성진이 깜짝 놀랬다.
'얼라? 어머니라니? 동찬이 어머니는 양평에 계시잖아? 그런데 언제
순천으로 오셨지?”
"동찬이라니? 아이고 이놈아, 어서 오너라. 영숙아, 서울 오빠 왔다. 아,
뭐해? 이 년아. 오빠 왔다니까?”
"내버려 두세요. 제가 건너가 보죠 뭐."
"저 년만 보면 복장이 무너져서... 그래, 이 밤중에 웬일이냐?"
"일 때문에 내려 왔다가 마침 시간이 나서 들렸어요. 죄송합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썩을 놈, 전화라도 좀 자주하지 그랬냐? 아침에 까치가 울더니 이렇게
네 놈 얼굴을 보는구나. 고맙다, 고마워.”
성진이 영문을 몰라 멍 하니 쳐다 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어떤 관계람?'
동찬이 그제야 성진을 소개했다. 성진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동찬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벽을 보니 나무액자에 빛 바랜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젊은 남녀를 가운데 두고 훤칠하게 생긴 중년 남자와 아주머니가 양쪽에
행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마도 가족사진인 모양이다. 동찬이 가방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아주머니께 절을 올렸다.
"저녁 먹어야지? 잠시만 기다려라."
"괜찮아요. 오는 길에 요기를 했어요.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요."
"그럴래? 그럼, 그러자꾸나. 안주거리가 뭐가 있나 모르겠다. 옳지, 닭이나
잡자.”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있는거나 주세요. 김치면 되요."
"아니다, 이놈아. 닭이 아니라 돼지라도 있으면 잡아야지 무슨 소리냐?
밤새워 얘기 나눌려면 김치 가지고야 되겠냐?”
아주머니는 방을 나가면서 소리쳤다.
"영숙아, 아 영숙아! 너 이년 당장 못올래? 오빠 안 볼껴?"
"그냥 두세요. 제가 건너가 데려 올께요. 성진아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건너올게.”
동찬이 방을 나가고 성진이 우두커니 방을 지켰다. 부엌에서는 아주머니의
신바람 나는 노랫가락이 흘러 나왔다.
'꼭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네 저 화상이 저렇게 엉뚱하다니까?'
성진은 더해 가는 궁금증에 짜증이 날 판이었다. 멀리서 동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숙아, 오빠야. 들어가도 되니?"
"..."
"오빠 들어간다?"
동찬이 문을 열자 영숙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오랜 만이다. 잘 지냈니?"
영숙이 이불 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얼굴 좀 보자. 우리 영숙이가 얼마나 예뻐졌나. 어서..."
여전히 흐느낄 뿐이었다. 동찬이 살며시 이불을 들추고 영숙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동찬의 눈에도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오빠!"
영숙이 동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더윽 서럽게 울었다. 부엌 쪽에서
고함이 들려 왔다.
"아, 이년아. 울긴 왜 울어? 반가운 사람이 왔으면 웃어야지."
동찬이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영숙을 달랬다.
"그만해라. 다른 손님도 왔어. 오빠 친구야. 눈물 닦고 건너가자."
영숙이 동찬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왔잖아?"
영숙이 좀처럼 동찬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6년의 세월을 울고도 남아있는 눈물이 있더냐? 그래. 까짓거 울어라.
그리고 손 모아 바라건데 제발 이제는 잊어라.’
생각해 보면 참, 기구한 사연이었다. 동성에다 이름이 끝자만 틀린다고
형제처럼 지냈던 정동훈.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영숙의 가슴 속 깊이 애타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녀석, 동찬은 그의 맑디 맑았던 옛모습을 생각했다.
이들은 같은 민요 동아리 회원으로 만났다. 동훈과 영숙은 동찬을 친형,
친동생처럼 따랐다. 누가 봐도 이들은 영락없는 형제고 남매였다. 85년
여름, 동찬은 동아리 회원들을 이끌고 청평 어느 계곡으로 하계 수련회를
떠났다. 사물을 신명나게 두들기며 하루를 보냈다. 느즉한 저녁무렵,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저만치서 낯익은 남녀의 노래소리가
흐르는 물소리에 섞여 흘러 내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발을 빼고 노래소리를
따라 갔다. 동훈과 영숙이 다정한 모습으로 기대 앉아 있었다. 동찬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의 틈새에 끼어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끼어
들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동찬은 영숙에게 연민의 정을 품었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어머니를 빼고는 그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여인인지도
몰랐다. 사랑한다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기를 몇차례였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동찬의 심장은 멈춰 버릴 듯이 쿵쾅거렸다. 혼자서 그렇게 마음 조리다가
영숙이 동훈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허전했다. 쓸쓸하고 외로웠다. 깊이 패인 마음의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 동안을 고통과 씨름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해진다면 나에게도
행복이다.’그렇게 아픈 마음을 달래며 여느 때와 같이 많은 시간들을 이들과
함께 보냈다.
수련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들은 학생부부가 되었고, 이듬해 동훈이
학사모를 쓰자 마자 영숙의 아버님이 경영하던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87년
초,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영숙의 아버님이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자 회사의
경영권이 동훈에게 넘어왔다. 당시만 해도 백 여명의 종업원을 두고 수출용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유망한 중소기업 중의 하나였다. 경험이 절대 부족한
젊은 동훈은 도저히 자신이 서질 않았다. 밤을 세워가며 공부를 했지만
부족함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동훈이 겨우 눈을 뜨게
될 무렵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다.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나고 사회전반에 민주화 열풍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가장 활발한 변화가 일어난 곳은 노동계였다. 변화라기 보다는 극심한
혼돈 속에 빠져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지만 치열한 권리다툼이 전쟁처럼 벌어졌다. 노조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수많은 사업장이 쟁의에 휘말렸다. 동훈의 사업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운동을 경험한 동훈이지만 바뀌어진 자신의 입장을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쟁의가 계속되고 막대한 생산 차질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바이어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거래선이 하나 하나 끊겨 갔다. 극도의 자금난으로 회사가
어려워질 즈음 가까스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회사는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었으나 출고량은 급속히 줄어 들었다. 게다가 한 번 꼬여 버린 자금난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고 봄이 되었다.
노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 아니다 다를까 '춘투'가 시작되었다. 이미
악화되어 버린 회사 재정을 노조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다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직장폐쇄와 점거농성이라는 첨예한 대립을
지켜보며 동훈은 한숨지었다. 동훈이 몇 사람의 노조간부를 설득해 집으로
초대했다. '회사는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 는 통념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자신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다. 단칸 전세방을 소개한 다음날 노조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대폭으로
양보했다. 그리고 또 협상이 타결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곪아
쌓여있던 자금난이 부도라는 극한 상태로 터져 버린 것이다. 동훈이 회사에
들어온 지 2년, 경영권을 넘겨받은 지 불과10개월 만의 일이었다.
동훈은 자책감에 사로 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인이 평생동안 피 땀
흘려 일구어 놓은 전재산을 모조리 날려 버리고 빚더미로 몰아 넣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삶을 포기할까 하는 유혹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동안을
폐인처럼 지내던 동훈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반드시 다시
일으키고 말겠다’는 쪽지 한 장을 영숙에게 남겨둔 채,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꼭 이맘때 쯤이었다.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영숙에게 벼락같은 쪽지가 날아 들었다. 부산에
있는 모 원양회사 직원이 들고 온 사망통지서였다. 어업중 불의의 사고로
순직했다는 것이었다.
영숙이 동훈의 유품을 싸 들고 이곳 순천으로 내려온 것은 6년전의
일이다. 얼마 안되는 보상금을 움켜 쥐고 혼자 계신 어머니와 동훈의
고향땅을 찾았다. 꿈에도 못잊을 사랑하는 이가 태어난 곳에 뼈를 묻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죽을 때까지 죄의식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가엾은 님과
혼이라도 함께 있기를 갈망하면서...
동찬은 부산 앞바다를 노려 보면서 왈칵 동훈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전주
길을 포기하자 마침 잘됐다 싶어서 이 곳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영숙아, 건너가자. 어머니 또 역정 내시겠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들고 영숙이 방을 나왔다. 영숙의 어머님이 부엌에서
내다 보시며 말했다.
"옳지. 그래야지. 그래야 오래비 마음도 편하지. 어여 들어 가거라. 내 금방
상들고 따라가마.”
동찬이 영숙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서자 성진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다. 기만히 보니 영숙으 물론 동찬이 녀석 눈까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란 말인가?'
잠시후 영숙의 어머님이 술상을 들고 들어 왔다.
"자, 우리 동찬이는 괜찮지만 손님 입맛에 맞을 지 모르겠구만."
"아이구, 별 말씀을... 이렇게 밤늦게 폐를 끼쳐서 오히려 죄송합니다. 제가
낄 자리가 아닌데 눈치없이 따라 온 것 같군요.”
성진이 동찬을 향해 의미있는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막걸리를 몇 주전자나
동내고 있었다. 파장이 다 될무렵, 동찬이 자세를 고쳐 잡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서울로 가십시다. 제가 가까이서 모실께요."
"저 년이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간단 말이냐?"
"언제까지 이러고 사실라구요? 이제는 잊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글쎄, 내가 못 잊는게 아니라... 허긴, 내 죄도 크지."
영숙어머니는 벽애 걸린 사진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불쌍한 사람, 그렇게 착하디 착한 사람이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그 여린 가슴에 박힌 못도 못 빼고 망망대해에서 고기밥이 되었으니...
애당초 고집부리지 말고 내 집에서 살았으면 그런 꼴은 안 당했을텐데...”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영숙아, 서울로 가자. 오빠가 곁에 있어
줄게. 어머님이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니? 이제 훌훌 털고 새 출발하자.
동훈이도 네가 이렇게 사는걸 절대로 바라진 않을거야.”
영숙이 그저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성진이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바람을 쏘이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냥 여기서 살께요."
"글쎄, 저것이 저렇다니까? 나도 굳이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처음에는
이방인처럼 대하던 동네 사람들도 지금은 아주 가까운 이웃이 되었고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다. 영숙이가 가겠다면 모르지만 여기서 사는 것도 괜찮으니
크게 염려하지 말아라.”
"과거 속에만 묻혀 사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여기에 계속 머무는 한은
헤어날 수 없다구요. 영숙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여기를 떠야 해요.”
"그렇긴 허다만. 저것이 말을 들어야지."
"영숙아, 이것 만이 능사가 아니야. 아예 잊어 버리라는게 아니고 과거와
미래를 같이 생각해. 동훈이가 차지하고있는 공간을 너를 위해 조금만 비워
두라는 거야. 그게 현명한 거라구.”
"오빠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
동찬은 답답해 오는 가슴을 쓸러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가끔 나들이도 하고 그래. 서울 친구들도 좀 만나고...
바깥 바람도 쏘이다 보면 기분도 나아질 거야.”
"노력해 볼께요."
다음날 아침, 동찬과 성진은 영숙 모녀와 헤어져 서울로 향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서 아쉬운 듯 떨어질 줄 모르던 동찬과 영숙 모녀의 이별을
지켜보며 성진은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영화다, 이건 영화야'하고
중얼거렸다. 성진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우울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동찬의 옆구리를 툭치며 말했다.
"야, 동찬아. 말 좀 해라. 그렇게 아쉬우면 다시 돌아갈까?"
"..."
"임마, 말 좀 해라. 벌써 두 시간을 벙어리로 가고 있어. 도대체 누구냐?
혹시 과거의 여인 같은 거 아니냐?”
동찬이 여전히 시선을 차창 밖으로 둔채 힘없이 말했다.
"그런게 아니야."
"그럼 뭐야? 내가 알면 안되는 일이냐?"
그제서야 동찬이 자세를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옛날에..."
동찬이 사연을 털어 놓았다. 성진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일이 있었구나’했다.
"동훈이도 영숙이 모녀도 혼란한 한 시대의 희생양이야. 오랜 어둠의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이었어. 영숙이 모녀는 아직도 그 비극을 안고 산다.
깊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나는 선속에도 악이 있다는 것을 이들로
부터 배웠다. 지금도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자신들로 부터 뿌려진 악에 대해서는 결코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기 위해 빚어진 악은 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국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느 집단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고라구. 순리를 거부하기는 똑같은 자들이란 말이야. 나는
이들을 미워한다.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투사라는 이름으로 악을 정당화
하려는 자들을 미워한다.”
"진정한 투사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자랑하지도 않고... 소운이 형이
말했지? 자기는 투사가 아니라 4천만 중에 하나였다고 말이야. 형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주변 사람들에게 살신성인으로 산화해 버린 영령들을
욕되게 하는 짓이라고 노발대발 했었어. 나는 소운이 형같은 사람도
많다고 믿는다.”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지금 우리들 주변에는 소영웅주의를
자랑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 국민을 팔아먹기는 기성인들이나
마찬가지라구. 그들도 이 시대의 청산 대상이야.”
"네가 분노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다. 그런데 한가지만 물어보자. 너
지금도 영숙씨 사랑하니?”
"..."
"그렇구나. 사랑하는구나. 영숙씨도 네 감정을 아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영숙이도 나도... 그냥 가까이서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고 싶은 심정 뿐이야.”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곁에 두고 있다보면 어떻게 발전할지 모른다구.
미혜가 알면 어떻하려고 그런 생각을 하니?”
"미혜도 알고 있어. 결혼 약속을 하기 전에 모두 털어놨어. 마음의 일부가
영숙이에게 가 있다는 것도 말했고.”
"그런데도 선뜻 결혼하겠대?"
"과거없는 남자 어디 있냐고 하면서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는게
부럽다고 하더라.”
"걱정된다. .... 영숙씨 대단한 미인이던데? 마음 정리되면 쓸만한 남자
골라서 중매 한 번 서봐야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진심이냐? 아무래도 네 녀석이 안 보내줄 것 같은데?"
"미친 놈..."
성진은 동훈이라는 후배를 생각했다. 어떤 인물이었기에 영숙 모녀와 동찬의
가슴 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으로 남아 있을까? 빌고 떠도는 혼백일 망정
외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훈이라는 후배 말이야. 어떤 친구였어?"
"별 걸 다묻네?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려구?"
"샘이 나서 그런다. 도대체 얼마나 잘난 녀석이길래 열녀가 나고 너같은
놈이 못잊어 하는지 샘이 난다구.”
"그냥 착하고 순수했었어. 명랑하고 쾌활해서 친구들도 많았고. 학교 다닐
때는 우리 민요패에서 꽹과리를 다뤘는데, 솜씨가 일품이었다구. 1학년 때부터
상쇠를 도맡아 했어. 아버지가 옛날에 사당패에 있었대. 그 아버지한테
배웠다나?”
"평범하게 살아온 친구는 아니겠구만?"
"그래.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 떠돌다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 순천에
정착했대. 어머니는 생활고 때문에 가출해서 소식이 끊겨 버렸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머리가 워낙 좋은 녀석이라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와서 줄곳 장학금으로 대학을 다녔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아버지께 부쳐 드릴만큼 건실한 효자이기도 했고. 참 열심히 산
녀석이야. 운동을 하면서도 장학금 놓칠새라 착실히 수업듣고 아버님 용돈해
드린다고 틈틈히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럼 영숙씨 모녀가 사는 동네에 그 친그 아버님도 함께 사시겠구나."
"동훈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실성을 하셨어. 매일을 아들 기다린다며
길가에 나가 지나는 버스마다 붙잡고 '동훈아. 동훈아' 하시다가 그만 교통
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지. 영숙이가 내려간지 얼마 안돼서의 일이야.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동훈이 아버님이 사시던 집이란다. 영숙이가 쓰는 방이
동훈이가 사용하던 방이고.”
"세상에..."
성진은 동찬의 눈이 붉어 지는 것을 보았다. 손수건을 꺼내 동찬의 손에
쥐어 주면서 성진이 말했다.
"동찬아 그만 하자. 괜한 걸 물어본 것 같다."
"괜찮아. 하던 얘긴데 뭘... 그렇게 착한 녀석이 자존심은 강해 가지고
처가집과 합치는 걸 싫어했어. 그 애들이 결혼할 때 주위에서 '동훈이 땡
잡았다.’고 했지. 처가집 덕 본다는 소리가 싫어서 사장 노릇할 때도
단칸방에서 살았어. 사주겠다는 자가용도 마다하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인천까지 출퇴근했어. 장인이 월급봉투에 얼마를 더 얹어주면 다른 사원들과
형평이 맞지 않는다고 돌려 주곤 했어. 그런 녀석을 두고 못된 놈들이 여자
잘 만나 횡째했다며 수군거렸다구.”
"대단한 친구였구나."
"대단하다 마다. 비록 동생이었지만 난 그 아이를 존경한다. 내가 그 아이를
존경하는데 영숙이는 오죽하겠니?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아도 한이 남을
거다.”
성진이 '휴-'하고 한 숨을 쉬었다.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한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성진의 목이 탔다. '이놈의 차는 싀지도 않나?' 하는데
때마침 고속버스가 휴게소로 진입하고 있었다. 동찬과 성진은 음료수를 입에
털어 넣고 공중전화를 찾았다.
"여보세요? 아, 지은이구나. 나야, 성진이. 지금 올라가는 중이야."
"벌써? 지금 어딘데?"
"휴게소야.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야.별 일 없지?"
"응, 아무 일 없어. 간 일은 잘 됐어?"
"올라가서 얘기할게. 미혜 좀 바꿔줄래?"
성진이 동찬에게 수화기를 넘겨 주었다.
"네가 받아라."
"놔 둬, 금방 올라갈 건데..."
"받아 임마!"
성진은 동찬이 전화를 받는 사이 신문을 여러 장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신문마다 선거 관련기사로 가득 덮혀 있었다. 얼핏 보니 '위험 수위를 넘고
있는 인신 공격’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단골메뉴 중에 하난데 뭐'
하고 지면을 넘기려다가 다시 고쳐들었다. '인신공격 중에는 사실도...' 하고는
그 옆에 'L후보 여성 편력 드러나 망신' 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XXX선거구에 출마한 L 후보가 여성 편력이 심했던 것으로 드러나 커다란
망신과 함께 선거에 심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역 의원
출신인 L후보가 XX당 후보로 출마한 C후보 측이 여성문제로 인신 공격을
가한다며 C후보와 선거 종사자들이 무더기로 검찰에 고발하자 C후보측은
이에 무고혐의로 맞고소를 했고, 결국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C후보의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난 것. 결국 L 후보는 무고혐의로 계속 조사를 받는
한편...’
성진은 혀를 찼다. 동찬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뭘 가지고 그러냐?"
"한 번 읽어봐라. 옛날 싸구려 주간지를 읽는 것 같다."
동찬은 성진으로부터 신문을 넘겨 받아 훑어 보고는 낄낄거렸다.
"자승자박이구만. 이 사람 그걸로 유명하지."
"여자 문제로?"
"그래. 웃지 못할 얘기 하나 해줄까? 국회 퇴근시간이 지나서 C일보 모
정치부기자가 L의원의 회관 사무실을 지나다가 사무실에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는거야. 의원회관 사무실은 카드키를 사용하는데 문이 잠겨져 있지
않으면 카드키를 꽂는 곳에 파랗게 불이 들어와 있고 잠겨 있으면 빨간 불이
들어와 있거든. 그 불빛을 보고 사람이 있다고 안거지. 그래 얼굴이나 보고
갈려고 문울 열었더니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지.
여비서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어이가 없더래. 문을 닫고
나오다가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문을 열고는 '문단속이나 잘하고 하지
그랬습니까’하고는 사무실을 나왔대. L의원이 난리가 난거지. 혹시 기사를
쓰면 어쩌나 하고...”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그냥 덮어 버리고 말았지"
"형편없는 자구만?"
"들키면 스캔들이고 안들키면 로맨스가 되는거야."
"그거 말되네."
"남녀관계라는 게 지위 고하나 나이 장소를 불문한다구.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하면 그만이지만 기분좋은 얘기는 아니지.”
"스캔들이 되었건 로맨스가 되었건 참 스릴있는 게임일거야."
"왜 너도 그 방면에 관심있냐?"
"그런 재주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여간 세상은 유행가 말대로 요지경이다, 요지경이야."
두 사람은 번갈아 신문을 뒤적거렸다. 어떤 신문에는 일부 선거구에 대해
벌써부터 우세니 경합이니 열세니 하고 각 후보들의 당낙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었다.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니 무리한 분석도 아니었다. 소운의
지역을 보니 이의원과 다른 야당후보 간의 경합으로 소운은 열세로 표기되어
있었다. 만약 이의원의 비자금 수수사실이 폭로되었다면 상황은 달라 졌을
터였다. 어쨋든 애당초 소운의 입장에서는 당선자와의 표차를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이었으니 열세로 분석되었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동찬과 성진은 소운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라면파티가 한창이었다.
성진이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젓가락부터 들고 대들었다.
"아이구, 배고파."
"굶고 다녔어? 몇 개 더 끓여야 겠네."
동찬이 딱하는 듯이 말했다.
"남들은 고기를 먹어도 힘들어 하는 판에 라면이 뭐냐,라면이?"
미혜가 되받았다.
"밖에서 뛰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게 뭐가 있어?
하루 한끼 쯤은 분식을 해야 건강에도 좋다구. 잔소리 말고 동찬씨도 우선
있는 것부터 들어. 뜨거운 물이 있으니까 금방 더 끓일거야.”
"건강 좋아하시네. 라면만 보면 넌더리가 난단 말이야. 옛날에 한 반년
가량은 삼세끼 라면으로 때웠더니 입에서 군냄새가 나더라. 정말 지겹게
먹었었다. 지금은 라면 먹는 사람을 보면 사람 같이도 안보인다구.”
성진이 입안에 라면을 가득히 넣고는 우물거렸다.
"사람같이 안보이면 우리가 뭘로 보이냐? 개나 돼지처럼 보이냐? 먹투정
부리지 말고 먹기 싫으면 짜장면 이라도 시켜라.”
"그게 그거지. 야, 미혜야. 한 단계만 높혀서 된장찌게나 하나 시켜줄래?
장래 서방님의 소원이다.”
"소원씩이나? 까짓거 불쌍한 중생 구제하는 셈 치지."
식사를 다 마친 지은이 동찬에게 다가와 신문을 내밀었다.
"이거봐, 이따위 분석기사를 실어 가지고 운동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어. 왜들 그래? 자기들이야 흥미가 있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큰 피해가
될 수 있다구. 기자들도 좀 신중해 줬으면 좋겠어.”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니? 꼭 따지는 것 같잖아."
"동찬씨도 조심하라는 거야. 자기 웃자고 남 골탕먹이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형수님!"
동찬이 장남스럽게 지은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식사가 끝나고 동찬,
성진, 지은, 미혜는 차를 앞에 놓고 한 자리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주제는 역시 선거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은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어절려고들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나중 일은 안중도 없고 그저
눈 앞에 있는 이익 만이 전부야.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국민을 담보로
위험한 게임을 즐기고 있다구. 과열이니 혼탁이니 하는 소리가 이제는 한낮
개짖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야. 그야말로 극치를 달리고 있어.
여기 저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까지 빈번한 실정이니... 아마 우리나라
선거사상 최악일거야.”
"예상했던 일이잖아?" 하면서 성진이 한숨을 쉬었다.
"설마 이렇게 까지야... 지방은 좀 어때?"
"수도권에 비하면 적막강산이지. TK쪽이야 서울과 마찬가지일거구. 특별히
한 두군데 빼고는 거의 일방적인 게임으로 흐르고 있어.”
"아예 정당에 지역을 쪼개줘 버리지. 괜히 중앙에 와서 나라 전체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자기 지역에서만 정치하라고... 걸핏하면 국민정당은
얼어죽을... 아예 당면 도 바꿔 버리는 거야. 호남당, 영남당, 충청당 이렇게
그러면 구별하기도 편하잖아? 지역주의니 패권주의니 하는 거 하지 말자고,
아니 하지 않겠다고 떠드는 자들이 선거때만 되면 도로아미타불이라구. 되려
지역패권주의를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듯이 부추기고 있으니 원... 국민들도
보통 어리석은게 아니야. 누구를 위한 주권 행사인지도 몰라.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을 못한다고. 그저 내 고향사람이 최고야. 그렇게 당하고도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어떤 기업가가 정치를 4류라고 했지만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은
5류쯤 될거야. 아직도 60년대 수준이라구.”
언제 들어왔는지, 진호가 잔뜩 화가 나서 마구 투덜거렸다. 동찬이 차를
권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있어?"
"한바탕 하고 오는 길이다."
"한바탕이라니? 싸웠단 말이야?"
"어떤 우라질 놈들이 유세장에 와서는 우리 애들한테 시비를 걸더라구.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렇다고 싸우면 어떻게 해?"
"내가 싸운게 아니고 애들하고 그 놈들하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뜯어
말리느라고 진이 다 빠졌다. 봐라, 이 목을...”
그러고 보니 목 근처가 빨갛게 긁혀 있었다.
"우리 애들도 거칠기로는 한가닥하는 애들이 아니냐? 자칫하다가는 쟤들이
다치겠더라구. 그래 겁이 나서 뜯어 말렸지. 유세장이 엉망진창이 되버렸어.
지난번 합동유세 때도 봐라. 괜히 시비를 걸지 않테? 그때도 간신히 충돌을
면했는데...”
"도대체 뭐라고 시비를 걸어?"
"지난 번과 같아. '야권표를 갈라 먹을려고 나왔느냐' 되지도 않을 걸
뭐하러 나왔느냐’'여당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등 그따위 허무맹랑한
소리들이지. 언쟁도 필요없이 우리 애들이 들고 패버리더라. 상식이 없는
자들 하고 싸워봐야 똑같은 꼴이 되니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야.
소운이 형이 유세를 포기하고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겨우 상황이 끝나기는
했는데...”
진호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계속했다.
"진단서를 끊어서 형사처벌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거야. 자식들이
제법 다쳤거든. 공선협에서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했으니까
자잘못이 가려지곘지만 골치깨나 아프겠어.”
"윗 것들이 그러니까 아랫 것들까지 형편없이 굴지. 이거 재발 가능성이
많을텐데 걱정이구나.”
"그게 문제라구. 이 놈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아? 아무래도
후보자끼리 신사협정이라도 맺어놔야 안심이 되지, 원...”
"그거 참, 남의 일만이 아니구나."
"도대체 뭐하자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정말 열불이 난다구."
"그동안 여러 가지로 위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잘 견뎌왔는데..."
"아이구, 나도 모르겠다. 좀 쉬어야겠다."
진호가 소운의 간이침대를 펼치더니 훌쩍 누워버렸다. 성질이 워낙 급하고
사나워서 별명이 멧돼지라는 진로였다. 성진이 진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화가 났다하면 물 불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 못된 성질을 죽이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을 할까? 이것도 사람되어가는 과정이겠거니 하고 참아라.”
듣고 있던 친구들이 쿡쿡거렸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SG연구회 회원들이
노래방엘 간 적이 있다. 그때 노래를 제일 잘 한다는 진호가 '부산 갈매기'
'비내리는 호남선' '대전 부르스' 를 연달아 불러 제꼈다. 부산 갈매기보다
점수다 높으면 우리가 이긴다며 '은하철도 999'를 신명나게 불러댔다.
팡파레가 울려 퍼지자 일행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었다. 그때가 생각이 나는지
침대에 누워있던 진호가 예의 그 '은하철도 999'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질세라 손뼉을 맞춰 큰소리로 따라 불렀다.
"기치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지나면..."
노래가 끝나자 약속이나 한 듯 '빰바라 밤 빠바밤 빰빠라밤...'을 힘차게 합창
하더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배꼽을 잡고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끝나고 동찬이 미혜를 향해 눈짓을 보내고 밖으로 나갔다.
동찬의 뒤를 따라온 미혜가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
"그래. 우리 옥상으로 올라 갈까?"
동찬이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서며 두 팔을 길게 벌리고 심호흡을 했다.
"역시 서울 공기는 탁하다."
"부산이야 뭐 별 다를려구?"
동찬이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없이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 얘기가 뭐야?"
"나, 순천에 다녀왔어."
순간 미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을
가장해 말했다.
"그래? 영숙씨는 잘있어?"
"계획했던 게 아니야. 일정이 변경되어 시간이 남았어. 그래서 내려간 김에
들려 본거야.”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
"너한테는 조금이라도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야."
"어쩔땐 동찬씨가 참 미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얘기를 들으면
내 기분은 어떨거라는 것쯤 짐작할 수 있잖아? 솔직한 건 좋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잖아?”
동찬이 미혜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많이 언짢구나. 미안하다."
미혜가 동찬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동찬씨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동찬씨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좀더 시가이 흐르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부이길
기대하지도 않아.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것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구. 내가 마치 동찬씨의 대리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어. 그러면서도 동찬씨의 일부로
나마 곁에 있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동찬씨를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찬씨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구. 나도 여느 여자들처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특별한 여자가 아니라구.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면
너무 힘들어.”
"내 마음은 그게 아니고..."
미혜가 동찬의 말을 가로 막았다.
"됐어, 그만해. 길게 얘기해 봐야 도움이 되지 않아."
동찬은 미혜를 힘주어 끌어 안았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부터 주의할게."
얼마 동안을 말없이 동찬의 품에 안겨있던 미혜가 나즉히 물었다.
"우리 결혼한다고 얘기했어?"
돌연한 질문에 동찬이 움찔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동찬은 영숙에게
결혼얘길 하려고 했다. 영숙에 대한 애틋한 가멍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말을 못했다. 영숙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동찬은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심하게 질책했다. 동찬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응."
"뭐래?"
"그냥, 축하한대?"
"겨우 그것 뿐이야?"
'이것도 선의의 거짓말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혜의 표정으로
보아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동찬이 미혜의 손을 꼭 붙들고 사무실로 내려왔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들고는 인사를 교환한 뒤 신문사로 향했다.
동찬을 태운 택시가 차량 숲에 파묻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 짓도 이젠 못해 먹겠어. 옘병 할, 하루 종일 이 모양이니..."
기사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돌아가도 괜찮으니 편하신 길로 가세요."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예요. 교대시간은 다 되가는데, 아직 사납금도 못
채웠으니...”
기사의 짜증을 외면하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선가 선거
로고송이 요란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지붕 위에 대형 스피커를 부착한
버스가 보였다. 아마도 정당 연설회를 지원하는 차량인가 보다.
'공해다, 공해야'
동찬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인물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선거는 아니다. 정당의 정책을 보고 선택하는 선거도 못되었다.
이미 선거 초반부터 지역 대결, 3김 대리전의 양상으로 선거 구도가 짜여져
버렸다. 일부에서는 정당 대결구도라고 주장하지만 그 말이 그 말이다.
대선자금 공개논쟁, 정계복귀와 20억 +A설, 수구의 원조, 제 2중대,
사상시비, 세대 교체론 등등... 물고 물리는 흠ㅈ비내기가 전국의 선거현장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다. 정책이나 공약은 저만치 뒷전이다.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는 철저하게 인물을 보고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던 어느 유권자가 '고향에 갔더니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다며 천상 팔 굽는
쪽을 선택해야겠다’더라고 기사가 귀뜸을 해주었다.지역에 따라 똘똘
뭉치기가 절대 주주인 3김씨와 이들을 등에 업은 후보자들의 부추김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재현되고 있다. 거의 환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유권자들의
부분집합이 미세한 공집합 속으로 낯설고 외로운 오지의 나락으로 깊숙히
밀어 넣고 있다.
언론마다 사상 유래없는 과열 혼탁선거를 비난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정치권의 자제를 호소해도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각 신문마다 선거관련 사건 사고로 사회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문제도 내 탓이 없다. 모두가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과열도 혼탁도 충돌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고발과 맞고소가 이어지고
경찰서 마다에는 선거 사범으로 가득 찼다. 전잰이었다. 반도의 남녘이
선거전쟁으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혼돈으로 몰고 간단
말인가? 동찬은 답답하기만 했다.
누군가 선거구도를 3김 시대의 복원을 재차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며 이렇게
비판했다.
'한 김씨는 개혁을 위해서는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안되고 여기에는
인적 청산까지도 포함한다고 강조하더니 이제는 그 청산 대상을 유권자의
몫으로 떠 넘기고 이율 배반적인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또 한 김씨는 은퇴를
번복한 것이 아니라 계획을 수정한 것 뿐이라며 보수인지 개혁인지 모를
애매한 정치색을 보수를 품에 껴안고 개혁을 얘기하는 모순을 이해해 주기를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김씨는 한 때 개혁이 필연적인 시대의 요구라며
쌍수로 협력하더니 어느 날부터 느닷없이 정통 보수를 자처하고 보수
결집을 요구하고 다닌다. 그 주변에서 3김 청산이 세대교체라며 진정한
개혁의 유일한 주체라고 검증도 없는 자기 주장으로 3김의 틈새를 비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국의 유권자는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어리둥절
하거나 아예 알 필요도 없다는 듯이 노래하라면 노래하고 춤 추라면 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 버렸다. 주권을 행사하려는지 종권을 행사하려는지 표의
가치 상념을 상실하고 그저 내 편 네 편을 가르느데 앞장서고 있으니,
나라의 주인이 이래서야 어찌 마당쇠가 안방을 넘보지 않겠는가?’
동찬은 보수가 되었건 제발 제대로만 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어느 사회건 보혁은 공존한다. 보수가 있으니 개혁이 있는 것이고 개혁은
다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보수가 되고 그렇게 보혁의 역사는 반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잘못된 것만 있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것이고 옳은 것만 있으면 어떤 것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순리를 좋아하는 동찬은 공존의 법칙을 떠 올렸다.
그러나 공존이 법칙을 수용할 그릇이 없었다. 근본적으로 행위에서 부터
상식에 벗어 난지라 어떤 훌륭한 법칙과 어떤 합리적인 규칙도 통하지가
않았다. 모두가 욕심때문이라고 했다. 개인의 욕심, 집단의 욕심 그것이
반도의 남쪽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다고 믿었다. 지역을 갈라놓고 마음을
갈라 놓았으며 그 멈추지 않는 갈라짐은 국민통합이 가능성을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진호의 넋두리에 덧붙여서 아예 전라도를
경상도로 전라도를 경상도로 개명해 버리고 충청도 역시 다른 지역과
지명을 바꿔 버리던지, 아니면 아예 자기 고향에서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법률을 만들면 이따위 갈라먹기 정치는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빠져있는 동안 택시는 힘겨운 행진을 마치고 신문사에
멈추어 섰다.
'내일 올 걸 그랬나? 아니야.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했지.'
동찬은 김부장의 호통을 걱정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 볼 일이 없어 빨리 왔어요."
"무슨 소리야? 빈 손으로 왔단 말인가?"
"빈 손으로 온 건 아니죠. 갖고 갔던 가방은 그대로 들고 왔으니까요."
김부장이 정기자의 귀를 비틀어 쥐었다.
"이 넉살아. 뭐라구? 가방이 어째? 야, 이 바쁜 시국에 이틀이나 허송을
하고는 뭐가 어째?”
"아야, 아야, 아파요. 대신 저녁 살께요."
"저녁 같은 소리하고 있네. 솔직히 말해. 어디서 뭐하고 왔냐?"
"귀부터 놓으세요. 사실대로 말할테니"
김부장이 마지 못해 손을 놓았다.
"그래, 이실직고 해봐. 대신에 수작 부렸다가는 너 죽고 나 사는거야.
알았어?”
동찬이 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한 가지 약속할게 있어요."
"약속이라니? 자네가 지금 나하고 거래한 입장인 줄 알아?"
"비밀을 지키겠다고 하시지 않으면 때려 죽여도 얘기 못합니다.
장난이 아니예요. 정말이라니까요? 부장님 말씀대로 제가 아무리 천둥
벌거숭이라고 해도 거짓말은 안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좋아, 약속하지."
동찬은 김부장을 복도로 데리고 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김부장에게 건네 주고 자신도 한 잔 뽑아 들었다.
"약속하셨습니다."
"알았다니까?"
김부장의 퉁명스런 다짐을 받고 나서 동찬은 모든 것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김부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동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이야?"
"의심이 나면 이 친구한테 확인해 보십시오. 지금 선배 선거를 돕고
있어서 통화가 쉽진 않을겁니다.”
동찬은 성진의 연락처를 호출번호와 함께 적어 주었다. 그제서야
김부장이 믿는다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털어놓고 갔으면 서로 편하잖아?"
"허락을 해주실지도 의문이고 냄새만 가지고 '이겁니다' 라고 할 수도
없었다구요.”
"고생을 하기는 했구나. 들어 가자. 숙제가 있어."
동찬은 김부장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숙제라니요? 또 누구를 죽일려고 그러십니까?"
동찬이 걱정스럽게 숙제를 기다렸다.
"재야출신 후보들의 득표활동 상황을 알아봐. 대상은 정치 초년생들이고
시간은 모레 마감시간까지. 우리만 사용할게 아니야. 주간지 특집으로도
나갈거니까 알아서 하라구. 할말있어?”
"나 혼자요?"
"최기자 붙여 줄게."
동찬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그 친구하고는 죽어도 싫어요. 다른 사람으로 주세요."
"안돼. 사람없어."
"부장님, 누구 말려 죽일 생각입니까?"
"그래, 복수할려고 그런다. 농담이고 실제로 사람이 없어."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마음 편하게 팔자려니 해."
"그 불여우를 어떻게 다루라는 말씀이세요?"
"술 한잔 먹이면 나긋 나긋해져. 아무리 거칠어도 여자는 여자아냐?"
"최기자 발에 안걷어 차인 기자가 없을 정도라구요. 그 망아지가 하필이면
내가...”
"잘 구슬러서 러브호텔이라도 한 번 가봐. 그럼 좀 나을거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부장님 혹시..."
"야, 너 정말 그럴래?"
"김부장이 소리를 지르자 여기 저기서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상상할게 따로 있지..."
"그런데 어떻게 아시냐구요. 누가 잠자리 정보라도 주던가요?"
"말이 그렇다는거야. 쉿..."
김부장이 갑자기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최기자가 들어온 것이다.
헐렁한 바지에 투박한 등산화를 신고 어깨에는 봇짐같은 가방을 둘러맨
폼이 영락없이 건달이었다.
"정선배, 오랫 만이유. 얼굴 잊어 버리겠어?"
동찬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책상으로 향했다. 최기자가
소매를 잡아 끌더니 톡 쏘며 말했다.
"인사하자마자 일어서는 사람이 어디 있어? 숙녀 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예의범절을 다시 배워야겠네.”
'숙녀 좋아하네.'
"앉아요. 근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내가 오니까 입을 닫아?"
"러브호텔 얘기"
"거기 취재할 거야?"
"그게 아니고 혹시 같이 갈 사람이 없나 하고 부장님 한테 상의를
드렸지. 최기자는 생각없지?”
순간 최기자의 발이 동찬의 아랫배를 걷어 차고 있었다.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 하는 동찬을 바라보며 김부장이 고소하다는 듯이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잘한다. 한 대 더 갈겨줘."
"부장님도 똑같아요."
"이거 왜 그래? 나는 카운셀러 역할 밖에 안했다구?"
최기자가 동찬의 어깨 저고리를 잡아 당기며 말했다.
"남자가 왜 이렇게 약해 빠졌어? 그런 힘으로 러브호텔을 가도 바지도
못 내리겠다. 평생 책임질 자신이 있다면 러브호텔이 아니라 요 옆에
여관이라도 따라 가지, 어때요?”
"사양할게. 아무래도 다른 여잘 찾아 봐야겠어."
최기자가 동찬의 사타구니를 툭 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런 빌어먹을... 가지고 놀아라.'
김부장이 우스워 죽겠다고 난리였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저 말괄량이한테 숙제나 설명해줘요."
"숙제라니?"
"부장님한테 물어봐."
김부장이 설명이 끝나자 최기자가 동찬을 야릇한 눈으로 흘겼다.
"정선배하고 파트너가 된다는 말이죠? 그것도 이틀씩이나?"
동찬이 죽상을 하고 자기 책상으로 가 앉았다. 최기자가 쫓아 오더니 동찬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때고 속삭였다.
"기회가 두 번이네? 어디 누가 센가 힘겨루기 한 번 해볼까? 장가를
못간거지 안간건지 확인도 해볼겸... 어때요? 정선배 오늘밤 당장 시도해
볼까? 벌써 기분이 이상해 지는 걸?”
동찬이 어이가 없어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왜 이래? 이래뵈도 벗겨 놓으면 볼 만하다구. 보고 싶지 않아?"
"누가 듣겠다. 입다물고 저리 가라. 제발 어이구 누가 저 화상을 여자로
만들었는지...”
"용기없는 남자보다 백 번 낫지. 준대도 싫단 남자는 처음 봤네."
동찬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봐, 누가 듣는다니까?"
"들으면 대수야? 오늘 밤이 어떠냐니까?"
"진담이야?"
그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농담이다. 농담도 못하냐? 남자들만 농단하란 법있냐?"
동찬이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쪽에서 누가 일어나 말했다.
"어이, 거기 무슨 일 있어? 왜 이리 시끄러워?"
최기자가 또 다시 소리나는 쪽ㅇ르 향해 고함을 쳤다.
"하던 일이나 해. 남 집안 일에 신경쓰지 말고."
그리고는 자기 자리에 앉아 뭐가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를 한참
끄적거리더니 동찬을 바라 보았다.
"정선배, 언제부터 시작할거예요.?"
"30분 후에..."
"그렇게 빨리요?"
하면서 또 다시 동찬의 곁으로 다가 왔다.
'이게 왜 또 가까니 와? 시한폭탄이 다가오는 것 같네.'
최기자가 또 다시 동찬의 귀에 입을 갖다 대더니,
"이건, 진담인데, 오늘 밤에 어때? 몇 안되는 선택된 남자라구. 화장실
갖다올 동안 결정해. 준비가 필요하니까.”
하고는 휭하니 가버렸다. 동찬은 최기자가 사라진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가 없네. 요물이야, 요물.'
잠시후 최기자가 돌아왔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동찬이 취재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시작하게."
책상으로 뛰어가 가방을 둘로메고는 쫓아 나오며 채근했다.
"대답부터 해야지."
동찬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최기자를 노려보았다.
"선배로서 말하는데, 아무 소리말고 따라와."
동찬이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다가가 멈췄다. 최기자가 또 말을 걸었다.
"정선배, 그러니까..."
"시끄러."
"정선배."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올라 탔다. 최기자가 동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돌리지 않았다.
"뭘 봐?"
"멍충이."
최기자가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오자 동찬이
최기자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여기부터 가봐."
"나 혼자?"
"한 두사람이 아니야. 이틀 동안 다 찾아 다니려면 시간이 빠듯해.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날테니까.
"끝나면?”
"휴대폰으로 연락해. 적당한데서 도킹하자구. 지금 다섯 시니까 열 시까지
끝내.”
"알았어요. 그럼 먼저 갈게."
최기자가 손을 흔들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동찬은 부산엘 가면서 차를
하숙집에다 세워 놓고 나왔다. 천상 택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택시를
기다리다 생각을 바꿨다. 택시로는 정해진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마침
가는 곳이 전철과 연결된 곳이었다. 동찬은 지하도로 뛰어 내려갔다.
동찬은 매표서 앞에 멈추어 명단을 꺼넸다.기왕이면 같은 방향을 묶기로
했다. 빨간 볼펜으로 세 군데를 체크했다. 표를 구입해 개찰구를 빠져
나갔다. '지금 인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동찬이 전철로 빨려 들어
갔다. 머리 속으로 순서를 정했다. '끝에서 부터 훑어오자.' 여당의 K후보,
야당의 K후보와 L후보 순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7. 재야 출신의 고전
동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동찬입니다."
"정선배, 저예요."
"끝났어? 지금 어디야?"
"봉천동"
"봉천동? 거긴 뭐하러 갔냐? 취재지역하고는 전혀 엉뚱한 곳이잖아?"
"차가 고장나서 버스를 탔는데, 깜빡 졸았나 봐."
"차는 어떻하구?"
"견인차를 불러 가지고 서비스 센터에다 끌어다 놨지."
"알았어. 지금 가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근처에 뭐가 있나 봐."
"서울대 입구 지하철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께요."
"30분도 더 걸릴거다. 지루하니까 어디 들어가 있어"
"자상도 하셔라. 그럼, 지하철역 구내에서 나와 가지고 서울대 쪽으로 제일
가까운 카페에서 기다릴게.”
'자상한 것 좋아하시네. 대중 앞에서 너같은 여자하고 어떻게 함께 있냐?
망신스럽게...’
동찬은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거 참 의외로 고전이네'
취재결과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생각보다 선거가 어렵네요.' 라고 말하던
K후보, '막판 뒤집기만 잘하면 승상이 있어요' 라고 하던 또 다른 K후보,
'괜한 짓을 했나봐. 최선은 다하고 있지만...' 하고 말끝을 흐리던 L후보,
모두가 겉으로는 태연한 듯 했지만 모두가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여
야가 따로 없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때가 아니었다. 5일간의 잔여 기간이
있는데다가 막판 외부지원이 히든 카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도 히든
카드를 승부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전은 분명히
고전이었다. 동찬은 그 원인을 찾아야 했다.
'아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이거 큰일이네.'
동찬은 고민거리가 생겼다. 취재 내용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그런데 마땅한 장소가 없는 것이다. 최기자가 여자가 아니라면 근처
아무 여관이라도 들어갈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하숙집으로 데려갈 수도 없고 친구하고 자취를 한다는 최기자 집으로 갈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쩐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를 넘고 있었다. 서울대 입구역을 알리는 차내 방송이
들리고 이내 열차가 멈추어 섰다.
'빌어먹을 김부장'
동찬은 김부장을 원망했다. 지하도를 빠져나와 카페를 찾았다.
"정선배"
"어, 왜 여기 서있어?"
"여기가 제일 가까운 카펜데 문 닫을 시간이라고 들어오지 말래."
그러고 보니 그럴만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미안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이라도 들어가 있지. 알아서 찾아 갈건데. 막힌 구석이 있긴
있구나."
"그럴 줄 몰라거사 아니라 내가 정선배의 머리를 멋 믿어서 그랬어."
"내가 졌다."
동찬이 자리를 뜰 생각을 않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갈거야? 정선배 하숙집으로 가자."
"안돼. 너무 늦었어."
'늦어서가 아니고 너를 데리고 갔다가는 난리난다.'
"그럼 어떻게? 할 수 없지 뭐. 근처 여관이라도 가야지. 보니까 여관
투성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싫어"
동찬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라 모르겠다. 방법이 있어야지.'
"할 수 없지. 적당한데를 찾아 보자."
"적당하나 마나 아무데나 들어가. 여관이 다 그렇지, 시장 바닥에서 옷
고르듯 골라 잡을거야?”
"사람들 눈에 안띄는 곳으로 가잔 말이야."
"창피하단 말이지? 그럼 골라 잡지 뭐"
두 사람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중 한적하다 싶은 곳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좁다란 쪽창으로 중년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빈 방있어요?"
"어서 오세요. 온돌로 드릴까요, 침대로 드릴까요?"
"저는 온돌로 주세요. 최기자는?"
"두 개 할려고?"
"당연하지."
"하나만 해요. 침대방 하나만 주세요"
"아니요? 온돌방하고 두 개 주세요."
최기자가 동찬을 잡아 끌더니 나즉하게 말했다.
"왜 아래? 정말 낯선 여관에서 여자 혼자 자란 말이야?"
"나란히 얻으면 되잖아?"
"온돌방하고 침대방하고 나란히 있는지 위 아래층에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냥 갈래요? 무서워서 혼자는 못잔다구요.”
"하지만..."
"내일은 어떻할 거야? 수십 명분을 정리할려면 내일은 밤을 세워도
모자란다구. 정선배 무슨 결벽증있어?”
언쟁을 벌이고 있는데,
"가실 거예요? 주무실 거예요?"
그러자 최기자가 다가 가서는
"잘 거예요. 침대방으로 하나 주세요."
"나는 침대서 못자."
"바닥에서 자면 되잖아."
그리고는 열쇠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동찬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숙박계를 기록하고는 뒤를 따랐다. 방안으로 들어간 동찬이 가방을
내려 놓으며 어색ㅎ나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료 꺼네. 빨리 끝내고 쉬자."
"뭐가 그리 급해요? 샤워부터 하고."
"뭐를 해?"
"샤워! 서울이 먼지 구덩이라구. 하루 종일 뒤집어 쓴 먼지는 닦아내야 할
것 아니야? 위생관념도 없나봐.”
'위생 좋아하네. 복장이나 단정히 하고 다닐 것이지...'
"맘대로 해라."
동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기자가 속옷 만을 남기고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최기자는 치약을 짜 입에 문채 타올을 목에 두르고 욕실로 들어
갔다. 동찬이 깜짝 놀랐다. 욕실 벽이 투명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부가 훤히
비치는 것이다. 최기자의 벌거벗은 몸뚱이로 하얀 물줄기가 세차게
뿌려지고 있었다. 얼핏보니 안 쪽에 커튼이 보였다.
"최기자, 커틈 좀 치고 해라."
아무 대꾸가 없었다.
"커튼 좀 치라니까?"
소용없었다. 동찬이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다시 말했다.
"커튼 좀 치라니까?"
"싫어. 안보면 되잖아?"
'얘가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네 맘대로 해라.'
동찬이 포기하고 침대에 벌렁 드러 누웠다.
"내 몸매 어때요? 이 정도면 쓸만하지?"
동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생각보다 몸매가 대단했다. 순간, 미혜와
영숙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갔다.
'이게 무슨 짓이람?'
고개가 자꾸 욕실 쪽으로 향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저렇게
곱고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천박하게 차리고 다니는
걸까. 동찬은 최기자의 전혀 다른 면을 지켜 보고는 아예 고개를 욕실
쪽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미혜와 영숙의 모습을 떠 올렸다.
그리고는 최기자의 벌거벗은 몸매와 번갈아 교차시켰다.
최기자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동찬은 얼른 눈을 돌렸다.
"감상이 어때요?"
"뭐가?"
"시치미는... 지켜 본 소감이 어떠냐구?"
"예쁘다. 정말이야. 솔직히 예뻐."
"탐나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옷이나 입어."
"정선배도 씻어."
"난 괜찮아."
"씻어."
"괜찮다니까?"
"더럽게... 씻어!"
"알았다. 알았어."
동찬이 마지 못해 욕실로 들어갔다.
"옷 입고 할거야? 안에는 갈데도 없다구."
동찬이 욕실 안에서 옷을 벗어 방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주르륵 커텐을
쳤다. 그러자 최기자가 따졌다.
"이건 공평치가 않아. 커텐 걷어."
"싫어."
"걷으라니까? 공평한게 아니라구. 안그러면 소리친다?"
"야, 이 계집애야!"
"어쭈, 이제 욕까지 하네. 누가 이기나 해봐?"
"알았어, 못된 계집애 같으니라구."
"또 욕이야!"
"취소다, 취소."
동찬은 할 수 없이 커텐을 절반 쯤 걷었다.
"다 걷어. 덜 공평해."
"최기자. 제발 봐주라."
"좋아. 그 정도로 하지 뭐. 근데 사실은 남자 몸매는 처음 본 거야. 느낌이
괜찮은데?”
"몇 안되는 남자 중에 하나라며?"
"그거야 불을 껐으니까 못봤지.이렇게 자세히 본건 처음이라구."
최기자가 유리벽에 가까이 다가와서는 신기한 듯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동찬은 겸연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리 안갈래? 커텐 쳐버린다."
"웃기지마. 내 고집을 누가 꺽어."
동찬이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최기자를 바라보았다.
"옷입어. 흉하다."
"보여줄 것 다 보여줬는데 새삼스럽게 감출게 뭐람?"
"그래, 그래. 그나마 팬티라도 입었으니 다행이다."
"정선배도 괜찮은데?"
"빨리 일이나 끝내자. 자료 가져와."
두 사람은 취재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취재 내용이 비슷했다.
취재느낌도 유사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을까? 선거
경험 때문일까? 아니야. 실무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현장 지휘를 하고
있으니까. 그럼 전랼상의 문제일까? 그것도 아니야. 중앙당의 지침에 따라
전략적인 방향 설정은 충분히 마련되었겠지 .그럼 뭐가 문제일까? 두 사람은
진지하게 원인을 따져 보았다. 그러다가 동찬이 수첩을 덮었다.
"내일 나머지를 돌아 보면 가닥이 잡히겠지. 오늘은 그만 쉬자."
"그래요. 나도 피고하던 참이야."
"잘 자."
동찬이 최기자의 볼록하게 솟아있는 가슴을 힐끗 쳐다보고는 침대 위에서
베개를 내려와 바바닥에 던져 놓고 누웠다. 그리고 사파리를 들어 배를
덮었다.
"올라와서 자."
"미쳤니? 여기서 잘거야."
"올라와서 자라니까?"
"싫다구."
"무슨 짓을 하자는게 아니야. 올라와서 자."
"싫어."
"야, 정선배! 세상 모든 여자가 포기할 인간아!"
최기자가 화를 벌컥내며 침대 속으로 몸을 묻어버렸다. 동찬은 야릇한
유혹을 떨쳐 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척였다. 눈을 감고 열심히 별을
세어 보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정선배, 일어나요. 늦었어."
동찬이 눈을 떠보니 벌써 나갈 채비를 갖춘 최기자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
"몇 시야?"
"9시"
"뭐야? 이거 큰일났네. 일찍 일어났으면 바로 깨우지."
"안 깨운지 알아요? 마치 송정처럼 자고 있더라구."
동찬은 서둘렀다. 취재시간이 30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아침식사는 같이 못하겠어. 각자 알아서 해결하자구."
최기자가 손을 내밀었다.
"밥 값도 안가지고 다녀?"
"어쩜, 누굴 거지로 아나봐?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딘지 가르쳐 줘야 할 것
아냐?”
"아차, 그렇지."
동찬이 메모지를 건네주자 최기자가 낚아채 듯 받아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묘하게도 최기자의 거친 모습이 그다지 미워보이지 않았다. 동찬이 여관을
빠져 나와 보니 막 골목을 벗어나고 있는 최기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늘밤
일이 걱정이었다. 지난 밤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또 목석이 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동찬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정선배. 나예요. 오늘은 정선배가 연락해."
"그럴 필요 뭐 있어? 어제와 같은 방법으로 연락해."
"골평하게 살자구요. 호출해요."
최기자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여느 때 같으면 욕이 먼저 튀어
나왔을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동찬은 사라져 버린 목소리에 덤덤할 뿐이었다.
동찬은 메모지를 꺼내 어제처럼 취재순서를 체크하고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보자들의 홍보 명함이 길바닥에 어지럽게 굴러 다니고
있었다. 발 밑에 깔리는 몇 장의 명함을 비틀 듯 밟아 버렸다. 스스로가
지지리도 가난한 후보라고 자랑아닌 자랑을 늘어놓는 후보를 찾아갔다. 전날
시간 약속을 해 놓았지만 20분이 초과되고 있었다. 동찬이 실수로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이거 미안합니다. 바쁘실텐데 본의 아니게..."
"천만에요. 일정이야 조금씩 늦추면 되는 것이죠."
"잘 되십니까?"
과거에더 한차례 선거 경험이 있다는 C후보는 여당의 공천을 받았다.
빈털털이라는 개인의 재력이 의심이 갈만큼 비교적 재정적인 여유는 있는 듯
싶었다. 아마도 중앙의 지원이 충분한 모양이다. 상황실 벽에 걸린 도표를
바라보았다. 굳이 선거 초기에 작성된 도표라고 강조하며 얼굴을 붉히는
양을 보니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관리한 것같다. 하지만 도표의 좌측
상단에 어제 날짜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약간의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종합 평가란에는 졍합이란 빨간 글씨가
또렸했다.
"전에는 이곳이 아니었지요?"
"예. 서울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서울을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낯선 곳을 개척하려다 보니 무리가 좀 따릅니다.”
"이곳 정서는 어떻습니까? 비교적 보수층이 두터운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신도시 치고는 젊은 층이 많으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죠."
"젊은 층을 주요 공략 대상으로 삼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개혁을 주요 쟁점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입니까? 갈라먹기가 되겠군요. 보스세력에
어부지리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보수층에 대한 설득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안정을 기조로 한 개혁방향을
제시해서 개혁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는데 즈력하고 있습니다.”
동찬은 벽에 걸린 도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50대 이상에서 지지율이 낮군요. 보수층에 대한 접근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후보님의 강한 재야 이미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느지요.”
"제게는 풍기는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괜한 사상시비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특정후보가 선거 분위기를 보혁구도로 몰아 가려고 하는 것이
원인이 되고 있구요. 하지만 선거가 막판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점차 바뀌고
있습니다. 장년층 유권자들이 지역주의에 흔들리고 있거든요. 그렇게만 쪼개
진다면 불리한 것만은 아니지요.”
"지역주의에 흔들리는 건 젊은 층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장년층에 비하면 그다지 심하지가 않습니다.젊은 층은
장년층에 비해 정치의식 수준이 높은 반면에 지역 연고에 대한 관심은 낮은
편이거든요.”
"지역구도가 이롭게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군요?"
"바람직한건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를 이길려면 적절히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흐름에 대해 함구하고 있을 뿐이지요.”
선거참모들이 바쁜 유세일정을 내세워 C후보를 채근했다. C후보와 함께
선거사무실을 나오면서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지역주의를 싫어하지만
적절히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에 현실이 이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덧붙이기를 '두 김씨가 여전히 특정지역의 맹주로서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3김 청산을 선거이슈로 삼았다가는
해당지역 출신 유권자들을 자극시킬 뿐이어서 당의 선거지침에도 불구하고
아예 3김 청산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검은 돈의
수수등 도덕성에 관한 대한 공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동찬은 다음 장소를 향해 바쁘개 걸음을 옮겼다. 이상과 현실, 동찬은
스스로도 이상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편이 세상살기가 훨씬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랑새를 쫓고 무지개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잡을 수 있는 현실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었다. 풍요의 만족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바보같은 짓인가. 마음을 채우는 것도 물질을 채우는
것도 현실에서 구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명예, 권력, 부...
동찬은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요,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라고
언젠가 희영이가 일러준 성경의 구절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찬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지. 땅 속에 들어 간들수의 한 벌에 한 평
흙 속이고 그나마 재가 된다면 먼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말
육신인데... 후회만 남지 않는다면 별난 인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거야’
동찬은 SG연구회를 떠올렸다. 이상을 쫓고 있는 자들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혼신으로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었던 민주화의 이상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상을 설정하고
찾아 나섰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가 그것이다. 정치건,
사회건, 경제건, 문화건 간에 모든 행위와 현상은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을
위해 행해지고 비추어져야 한다. 그래소 이들은 변화와 개혁을 필요
충분조건으로 삼았다. 아직은 이상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것을 믿었다. 그 이상을 잡고 나면 또 다른 이상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동찬은 한껏 즐거웠다.
'그래. 이상을 쫓고 사는거야. 꿈을 먹고 사는거지. 언제까지나 그렇게
파랑새를 쫓고 무지개를 찾으며 사는거야. 조나단의 갈매기처럼...’
동찬은 가벼운 발걸음은 어느 새 다음 장소로 다달아 있었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S후보,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이 여느 재야출신의 후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여유롭다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부드럽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지역구도에 맥이 빠진
모양이다. 유세 현장에서 만난 S후보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현실의
벽을 하소연을 하듯 털어 놓았다.
"백번을 정책과 인물이 중요하다고 해도 설득력이 없어요. "
"그래도 다른 후보들에 비해 지명도가 높질 않습니까? 당초 그 점이 유력한
무기가 아니었던가요?”
"그렇긴 하지. 그 지면도라는 것이 생각보다 못하더라구요. 기층 서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경력가지고는 안통해. 하긴 먹거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시민운동이 뭔지 관심이나 있었을까만은...”
자신을 몰라주는 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서민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일수록 연고주의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만 이곳은 어떻습니까?”
"옳은 분석이예요. 피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하고
상대적 박탈감이랄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또 개인적으로는 정서가 참
순수하다고 느끼는데 그 순수한 정서만큼이나 흔들림이 크다구. 그걸
후보자는 물론 정치지도급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악용하고 다니거든. 각
정당에서 지원나온 사람들이 한결 같아요.”
초반에는 분의기가 괜찮았으나 몇몇 인사들이 휩쓸고 간 뒤에는 신통치가
않다고 했다. 다행이 여성들의 관심이 다소 높라지고 있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성들의 지지에 대해 '순수한 시민운동에 댛나 관심이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높은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나름대로의 분석도 내
놓았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었다. 순수 시민운동이 국민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실생활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여성들의
관심도가 남성에 비해 높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쨋든 S후보의 엄살에도 불구하고 선전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동찬이
S후보를 찾아 가는 길에 확인해본 지역주민들의 여론으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동찬은 재야 출신 후보들을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운동권 출신의 재야 인사와 순수 시민 운동단체
출신의 재야 인사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유권자들에게 비추어지는
강온의 두가지 이미지를 근거로 한 것이다. 개혁 성향은 두드러 지지만
차갑고 강한 이미지가 운동권 출신에게 있다면 순수 시민운동가 출신에게는
개혁 성향을 가지면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내세울 수도
있었다. 따라서 운동권 출신이 어렵게 느껴고 있는 보수층으로의 접근이
순수 시민운동가 출신이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동찬은 소운이 보스층의 냉정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생각했다. 소운 역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지은에게 '소운이 형을 사랑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지은은 '도전적인
삶을 강인하게 살아가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내면의 정이 따뜻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뭇 사람들로부터 차갑고 냉정한 인물로서만 각인되어 있을뿐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상상하기조차 꺼리는 듯 했다. 소운 스스로도
가장 넘기 어려운 핸디캡이 자신의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15만의
유권자를 일일이 접촉하지 않는한 단숨에 아니 불과 10여일의 일정으로는
자신의 이미지를 불식시킨다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많은 세월을 투자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동찬은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답사형식으로 취재를
끝내기로 했다. 시간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배 속에서 괴이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도록 점심은 커녕 아침도 먹지 못했다. 주의를 둘러보니 설렁탕 집이 눈에
들어왔다. 동찬은 허기진 배를 달래며 안으로 들어섰다. 몇 잔의 물로
요란떠는 뱃속을 진정시키는 사이 음식이 놓여 졌다. 허겁지겁 몇 수저를
뜨고 있노라니 한 무리의 남녀들이 왁자지껄 식당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어깨에는 띠를 두르고 몇 명은 구호가 요란하게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이 인사를 꾸벅하고는 동찬에게 명함을 건네주며 지지를
부탁했다. 이곳 주민이 아니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고 거절하자 상관없다며
식탁에 놓아두고는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더럽게 시끄럽네'
동찬은 음식을 비우고 이쑤시개를 집어 들었다. 한쪽의 빈 테이블에서
세 여자와 한 남자간에 가벼운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계산 해줘요."
"글쎄 내일 받아 가시라니까요?"
"내일 부터는 나오기가 힘들다구요."
"끝날 때까지 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밀린 빨래니 뭐니 집안 일도 수도 없이 밀렸어요. 돈도 돈이지만
집안 일까지 엉망이라고 남편이 얼마나 닥달인지 모른다구요.”
"어쨋든 지금은 드릴 수가 없어요."
"왜 이래요? 몇 푼이나 된다구... 아까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주던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예요?”
"장소가 틀리잖아요. 진작에 말을 하던가."
여자들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장소는 얼어죽을 장소예요? 빨리 주세요. 말을 안하니까..."
"말을 안하다니요?"
"이것 보세요. 반 나절 한사람이나 온종일 쌔빠지게 고생한 사람이나
똑같이 주면서 누구는 먼저 주고 누구는 나중에 주고 그래요? 누구는 이 짓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세요?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나선
것이지... 할데가 뭐 여기뿐인 줄 아세요? 다른 곳에서도 오라고
난리라구요.”
"아주머니 글세..."
"글쎄고 서당세고 큰 소리 나기 전에 빨리 주기나 하세요."
남자가 안되겠는지 여자를 데리고 화장실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두툼한 봉투를 꺼네 얼마씩인가를 여자들 손에 쥐어
주었다. 그제서야 여자는 조용히 식당을 빠져 나갔다. 동찬은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여자들의 뒤를 바싹 따라 붙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저 사람들이 알면 기분 나쁠텐데..."
"자기들이 더주면 되잖아? 그 여편네가 진작 귀띔을 해줬으면 처음부터
이쪽에서 하는 건데 그랬어.”
"그러게 말이유."
"그 여편네는 두 군데를 뛴데. 재주도 좋아."
"두 군데나? 어떻게?"
"여기서 명함을 잔뜩 받아 들고 나와서는 대충 돌리고 집에 들렀다가 다른
명함을 가지고 저쪽 동네로 넘어 간다는 거야. 저쪽에서는 집이 멀다는
핑계를 대고는 저녁때 한무데기 받아가지고 집에다가 갔다 놓는다나
어쩐데나.”
"그러다가 들키면 어쩌려구?"
"들키면 대순가? 즈이들이 죽일거야, 살릴거야? 또 극회의원을 여기서도
한 사람 뽑고 저기서도 한사람 뽑는다니까 들킬 이유도 없고. 메뚜기도
한철이라는데 이럴 때 반찬 값이라도 챙겨야지.”
뒤따르며 엿듣고 있던 동찬이 말을 걸었다.
"선거 운동하세요?"
"그런데, 누구세요?"
"예, 저도 선거운동 좀 해보려구요. 백수건달이거든요. 노느니 염불한다고
담배값이나 벌어 볼까 하는데 소개 좀 시켜주실래요?”
한 여자가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대꾸했다.
"그럴 사람같지는 않은데... 우리도 몰라요. 아무데나 찾아가 보세요."
"얼마나 줍니까? 아주머니들은 얼마씩 받습니까? 아까 식당에서 보니까
제법 많은 돈을 받던데요? 반찬값뿐만이 아니라 근사한 옷 한 벌도
사겠던데요? 지금이 큰 대목이죠? 해마다 선거가 있으니 아주머니들은 참
좋으시겠어요. 아주머니 같은 분들이 많나보죠?”
동찬이 여자들을 따라가며 계속 대답없는 질문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여자들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찬은 재니있다는 듯이 장난섞은 질문을
퍼부었다.
"당원은 아니죠? 자원봉사도 돈을 주죠? 선거사무원으로 등록은 됐나요?"
여자들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동찬은 골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도가 백날 좋아야 의식이 따라주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찬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다른 장소로 이동을 서둘렀다. 가봐야 뻔한 일이었지만 끝내기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소운이 형한테나 가볼까? 아니야. 재수없게 최기자나 만났다가는
골치아프지. 내가 맡ㅇ르 걸 괜히 그 친구를 보냈어. 가보나 마나겠지만...’
아직 경기도 지역에 머물고 있는 동찬은 소운의 선거사무실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두어 군데를 지나치듯 서울로 들어왔다. 이제 최기자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전에 준비할 것이 있었다. 자료를 정리할 장소를 정하는 일이었다.
어제처럼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신문사로 들어가자니 마땅히
회의를 할 만한 자리가 없고 역시 집으로 가서는 안되겠고, 그때 주원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주원의 대답은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이미 후배들이
세미나를 준비한다며 며칠째 사용하는 중이라고 했다. 내일 오전에
정리할까도 싶었지만 그렇다고 막판 국면으로 접어든 선거상황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찬은 난감했다.
'모르겠다. 일단 어디있나 불러나 보자'
동찬은 휴대폰을 꺼네 최기자의 호출번호를 눌렀다. 잠시후 최기자가
연결됐다.
"어디 있어요?"
"영등포. 최기자는 어디야?"
"사당 전철역 근처예요. 여기 포장마차가 끝내 주는데?"
"술 마시고 있어?"
"술은 무슨 술이야? 배가 하도 고파서 우동이나 한그릇 먹으러 왔지. 술도
한 잔할까 생각 중이긴 해.”
"이봐 안 끝났어. 행여 술맛리 생각 하지마. 어디서 만날까?"
"정선배가 이리로 오슈. 이 시간에는 아마 택시가 빠를거야."
"알았어. 지하도에 만남의 장소라는 곳이 있어. 거기서 기다려."
동찬은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은 불과 20분도 되지 않아서
였다. 의자에 앉아 발장난을 놀고 있는 최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모습에
쓸쓸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동찬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어, 정선배. 빨리 왔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어제의 차가웠던 동찬의 모습이 아니다. 거칠고 쌀쌀맞던 최기자의 본래의
모습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함께 목욕을 하면 친숙해 진다고 한다. 단순히
육신만을 벌거벗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훌훌 벗어버리고 아무런
가식이나 포장이 없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높은 신뢰감을 갖게
된다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신뢰만큼 종요한 것이 또
있겠는가.
동찬과 최기자의 변화된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 갈거예요?"
"글세... 친구 사무실을 빌려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
"..."
"어떻게 할까? 천상 여관방으로 갈 수 밖에 없겠어."
"좋을대로 해요."
최기자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니까 아무데로나 가자구요."
두 사람은 서로 토라진 연인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하도를 벗어 났다.
그리고는 화려한 네온 간판이 제법 그럴싸하게 반짝이고 있는 모텔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마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며 3층 구석방을 안내했다.
'러브호텔은 주야없이 붐빈다더니만 여관을 차즌 사람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구만.’
동찬은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종업원이 나가자 최기자는 침대 위로 몸을
날리고는 길게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피곤해?"
"응..."
"많이?"
"응,..."
어젯밤에는 순서가 이게 아니었다. 동찬은 내심 최기자의 거침없는 행동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순서라면 굳이 유혹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기대가 벗어나고 있었다. 동찬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최기자가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빨리 일부터 꿑냅시다."
"샤워 안해?"
"조금 있다가 하지 뭐."
동찬은 알 수 없다는 듯이 취재수첩을 펼쳤다.
"좋아. 느낌이 어땠어?"
"대부분이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점수를 후하게 줘도
경합 이상은 안될 정도야.”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원인이 어디 있을까?"
"글세... 내 생각에는 재야에 대한 인식이 그전 같지가 않아요. 예를 들자면
재야에 대한 필요성이 예전같지 절실하지 않다보니 전력에 대한 평가도
상대적으로 낮고 관심도도 그다지 높지가 않아 보였어. 비교적 안정된
질서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재야라는 특수성이 갖는 강열한 이미지에 오히려
반감을 느끼는 것도 같고... 한가지 특이한 것은 재야라고 다같은 재야가
아니라는 거예요. 시민단체 출신들은 비교적 선전하고 있거든.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미지의 차이라는 거예요. 이미지상의 강온의 차이가
악전고투와 선저의 차이를 보이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개혁을 주장해도
강경한 입장보다는 부드러운 개혁을 국민들이 선호하고 있는거죠. 투사적
기질보다는 전문적인 지식이 시대적 요구에 맞지 않겠어요? 어찌보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민들은 현실적인 욕구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봐야겠죠. 투쟁이니 인권이니 하는 부분은 잊혀진지
오래잖아요? 물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갈등이 여기저기 있지만 다중의
공감보다는 지엽적인 문제로 치주되는 것이 고작이고...
또 한가지는 운동권 출신을 지지하는 층은 젊은 층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것은 같은 기대응 지낸 동질감이나 게혁에 댛나 강한 욕구가 일치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보수 기성세대와는 여전히 적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결국 한정된 지지층이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있고 그나마
같은 성향의 경쟁 후보가 있는 경우에는 치열한 권리싸움을 벌여야하니
더욱 어렵죠. 이소운 후보가 정선배와 가까운 사이라면서요? 이후보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아?”
"내 생각과 차이가 없군. 예상보다 정리가 쉽겠는데? 그럼 원인을 요약하고
그리고 나서 살을 붙이지.”
"그전에, 정선배는 재야출신들의 제도권 진입이 얼마나 성공하리라고
생각해요?”
"산가에 뛰어든 이상 이미 제도권에 발을 디딘 것이나 마찬가지야.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가 문제지.”
"까다롭기는... 그게 그거 아니야?"
"제도권이 정치권이고 정치권을 대표하는게 정당이고 정당의 당원이면
제도권의 일원이지 꼭 뺏지를 달아야 제도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구.
또 정치하겠다고 나선 것은 현 제도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이미 제도권 인사가 된거지.”
"알았어요. 그렇다치고 뺏지를 몇 명이나 달 수 있겠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회의적이야. 굳이 성과를 예상하라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 관두자.”
"유리한 이미지, 이미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싶은 거지? 이소운 후보는 어때?”
"관두자구."
"어렵다고 생각하죠?"
동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정리해 볼게. 고전하는 첫째 원인은 강한 이미지가 시대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지지층이 젊은 층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나마 같은
개혁성이 필요한 후보들과의 경쟁으로 표의 분산이 필연적이다. 셋째, 재야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대단히 약해졌다. 넷째, 투사보다는 전문적인
지식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그리고 언급하지 않는 것 중에 개혁의
성징성 만을 중시하고 지역기반이나 정서와 관계없이 무리하게 내몰린
경우도 있다. 대충 이런 정도면 되지 않겠어?”
"하나만 더 추가하면 어때요? 지역 연고가 분명한 정당의 후보들은
지역주의라는 프리미엄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다구.”
"그렇지."
두 사람은 분석결과에 대해 하나 하나 살을 붙여 나갔다. 그렇게 작업이
끝나자 분의기는 다시 어색해 졌다. 동찬이 TV스위치를 켜보았다.지지직하는
잡음소리만 요란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몇 시간은 흘러야 했다. 최기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동찬이 양말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구. 피곤하다. 세구나 하고 자야겠다. 최기자는 안씻어?"
"먼저 씻고 나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눈을 꼭 감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동찬이 세면을
하고 나오자 최기자가 벌떡 일어났다.
"샤워좀 할게"
그러더니 어제와는 달리 옷을 입은 채로 욕실로 들어갔다.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렸지만 유리벽이 아니라서 볼 수 없었다. 동찬은 최기자의 나신을
떠올리며 욕실 쪽으로 궁금한 시선을 보냈다. 그때였다. 최기자가 욕실 문을
열고 말했다.
"정선배 내 가방 안에 보면 포장된 물건이 있을거야. 그것 좀 꺼내봐."
"뭔데?"
"꺼내기나 해요."
동찬은 믈건을 꺼내 들었다.
"뜯어서 한 장만 줘."
포장지를 뜯어보니 두 장의 앙증맞은 팬티가 들어 있었다.
"어떤 걸로 줄까?"
"꼭,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그러는 것 같네. 아무거나 줘."
동찬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먼저 집히는데도 한 장을 들고
욕실문으로 다가 갔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팬티를 건네 주었다.
"어쭈, 오늘은 궁금한 모양이지? 자진해서 눈요기를 하고..."
동찬은 겸연쩍은 미소를 흘렸다. 잠시 후 샤워를 끝낸 최기자가 욕실을
나오며 말했다.
"정선배는 내가 추한 여자로 보이겠지? 추한 여자도 자존심은 있어.
정선배는 어젯밤 내 자존심을 보기좋게 짓밟았어.”
"내가 언제?"
"나를 거부했잖아."
"거부한게 아니야. 존중한 거지."
동찬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부도 존중도 아니었다. 다만 겁이 났을
뿐이었다. 오늘은 겁을 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상황은 기회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거짓말하지마. 좀 더 솔직해져. 그런 점에서는 내가 정선배보다 위라구.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자신있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거 아냐?”
"그렇다고 아무 남자한테 몸을 맡기는건 좀 심하지 않아?"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아무 남자는 아니야. 내 나름대로는 기준이 있다구.
뭔지 알아?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어야 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깨끗하거든. 이런 사람들은 남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아. 그러니
하룻밤의 일이 비밀스럽게 간직될 수 있고. 또 정신이 건강한 사람치고
육체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구.”
"내가 그런 기준에 맞는다고 생각했어?"
"지나치게 건강한 사람을 선택했지. 아님 결벽증 환자를 선택했거나... 덕분에
내 자존심만 상해 버렸구.”
"그게 자존심과 무슨 상관이야?"
"여자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알아요? 상당한
각오와 기대를 가졌었다구. 그런데 소 닭보듯 하고선...”
"..."
"어떤 분이 '톡 까놓고 나는 이만큼 받았다. 내가 밝혔으니 당신도 밝혀라'
하는데 '나는 못 까발리겠다. 정 알고 싶으면 요만큼만...' 하니까 혼자만 망신
당하잖아. 내가 그 꼴이라니까? 정선배도 그랬잖아. 나는 숨김없이 다
보여줬는데 절반은 가렸잖아? 물론 보기는 다 봤지만... 세상은 공평치가
않아. 남자들은 원하는 대로 다하고 여자들은 그래서는 안되고 ...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나는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웃기지마. 표현만 안하는 내숭일 뿐이지. 분명히 어젯밤 일을 후회하고
있을걸? 아니예요?”
동찬은 할 말이 없었다. 가렵지도 않은 뒷 머리로 자꾸만 손이 갔다.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캥기는 모양이지? 그럽시다."
최기자가 겉 옷을 벗어 옷장 속에 집어 넣고는 침대속으로 몸을 집어
넣고는 잘 자라는 한마디를 던진 채 눈을 감아버렸다.
'매정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동찬이 잠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리자 최기자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
"침대에서 자요."
동찬은 그제서야 복장을 정돈하고 최기자의 옆에 누웠다.
"서툰 짓 할 생각은 말아요. 오늘은 위험해. "
동찬은 둥그런 눈을 천정에 고정시켰다.
'빌어먹을...'
잠이 안오기는 어젯밤과 마찬가지였다. 최기자의 향긋한 살냄새 그리고
따뜻한 촉감이 동찬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동찬은 주책스럽게 솟아 나는
본능을 억누르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최기자 자니?"
"아니요?"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를..."
"왜 헐 값의 나이가 되도록 시집을 안가는 거지?"
"매이는 게 싫어.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결혼은 해도 후회고 안해도 후회라잖아? 기왕이면..."
"후회하라고 하는 것이 뭘 기준으로 하겠어요? 자연의 법칙 만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도 포함된다구. 자연의 법칙은 내가 아니라도 따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상관없고 본능적인 욕구는 혼자 사는게 유리해. ”
"그게 전부야?"
"아니요? 또 이유가 있다면 엄마 때문이야. 찌들대로 찌든 가난, 혹독한
시집살이, 4남매 뒷치닥 거리, 남편의 끝도 없는 외도... 환갑의 나이에 칠십
노파가 되버렸어. 몸도 마음도 온통 생채기 투성이로 살면서 한 번도 싫다
좋다 내색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구. 속 모르는 남들은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이라고 칭찬 비슷하게 추켜 세우지만 역으로 말해서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깡그리 포기해 버린 그야말로 무책임한 삶이었다구.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그건 말이지."
"천만에,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멀었어. 여자는 애나 보고 살림이나
하는 것이 여전히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어. 물론 여성들 스스로가 그러한
사회의 인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겠지. 벽을 넘는 고행보다
벽에 기대는 편안함이 좋은거야.”
최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찬을 향해 돌아누웠다.
"기왕에 나온 얘기니까 정치 얘기 좀 해볼까? 선거 때만 되면 각 정당들이
앞을 다투어 여성들의 등용을 떠들고 있어요. 한 두자리의 당직을 할애하고
전국구후보에 몇 명을 배정하고 지역구에 몇 명의 후보를 내고 그런다구.
엄청난 배려임을 누누히 강조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한마디로 쇼를
하는 거지. 위대한 남성들의 선처로 마련된 그 쇼의 무대에 서는 여자들이
얼마나 커다란 영광이겠어? 한마디로 해프닝이야. 인구의 절반은 여자고
국가사회가 보장하는 모든 권리의 절반도 여성의 몫이라구. 그런데
자기들끼리 독식을 해놓고는 거지 동냥을 주듯이 한 두 개만이라도 고맙게
받아 먹으라고 던져줘? 낯짝 두껍게도 그게 여권신장을 위한 최대의
배려라는 거야.
뭐, 여자들이 문제가 없느냐면 그렇지는 않지. 전에 지역구에서 총선에
출마한 적이 있는 여자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 유권자의 절반이 여자니까
산술적으로 봐서 열심히만 한다면 당연히 당선되어야 하는데, 남자들 네명에
여자가 단 한사람 뿐인데도 맥 못추고 떨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야.
설사 남성 후보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된다고 해도 좀처럼
표를 던지지 않더라는 것이지. 정치를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여자들이 힘센 남자들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사실 힘 센 남자는
남편 하나면 되잖아?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태도의
표본이지. 안 그래요?”
"최기자. 정치 한 번 해볼래? 여성들의 든든한 빽이 될 소지가 보이는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싫어. 마치 동양 얻어먹는 느낌이
들게 뻔하거든. 최소한 정선배같은 사람들이 정치판의 절반, 아니 삼분의
일이라도 차지하고 있다면 그때는 고려해보지.”
"하이구, 고마우셔라.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최기자가 몸을 돌려 곧게 돌려 누우며 말했다.
"뭐든지... 까짓거 기왕 발가벗은 김에 몽땅 벗어버리지."
"나 말고 최기자한테 선택된 남자가 몇이나 되니?"
"한 두명도 되고 수십명도 되고 때로는 수백명도 돼. 어쩔 때는 따로따로
어쩔 때는 한꺼번에 선택하는 수도 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상상 속의 선택이지. 형상으로는 정선배가 두 번째야."
동찬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기자는 동찬의 심증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한때 죽고 못산다는 남자가 있었어요. 어느날 갑자기 나보다 좋은 여자가
생겼다며 훌쩍 떠나 버렸지만... 사랑은 주는 것으로만 알던 때라 아낌없이
바쳤어.”
"그런데 왜 떠났어?"
"공부를 더 하겠다고 유학을 떠나더니 현지 교포와 눈이 맞아 주저 앉아
버렸거든. 얼마 전에 뉴스를 탈만큼 대단한 석학이 되서 귀국했더라구.”
"그랬었구나. 근데, 수 십, 수 백명은 무슨 뚱단지야?”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분통이 터지는 거야. 배심감,
증오심, 분노 이런 감정들이 보통 괴롭혔지. 오기가 나니까 '세상 남자들이
너 하나뿐이더냐.’하는 생각이 들더니 모든 남자들을 나 혼자 독차지
하겠다는 욕심까지 들더라구. 참 이상한 계집애지. 남들은 그렇게 되면
남자라고는 꼴도 보기 싫어진다는데 나는 정반대 였거든? 내가 생각해도
별종이야. 연예인, 운동선수 심지어는 정치인 등 떠오르는 모든 남자에게
내 몸을 던져 버리는 거야. 물론 상상이지. 어쩔 때는 떼거지로 상상해 놓고
옷을 벗어 젖히고는 그 속으로 뛰어드느 경우도 있고. 다 지나간 옛날
얘기지만...”
"참 내가 생각해도 별종은 별종이다. 근데 왜 나를 선택했어?"
"우연이야. 추억 속의 남자가 되어 잊혀진 줄 알았던 사람이 TV뉴스에
얼굴을 내밀었어. 그걸 본 순간 왈칵 서러운 생각이 들더라구.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정선배를 보는 순간 옛 생각에 빠져 버린거야. 정신건강을
빼고는 생김새나 행동이 어쪄면 그렇게 똑같은 지 몰라. 첫사랑은 잊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봐.”
"최기자가 그런 순정파였는지 전혀 몰랐네. 천상 여자는 여자다."
"언제는 남자였고? 이래뵈도 내면은 부드러운 여자라구요."
"한 번 만나보지 그래?"
"만난거나 다름없어요. 정선배가 있으니까."
"꿩대신 닭이란 말이지?"
"농담이야. 선택된 이유를 알고 나니까 기분 나빠요?"
"나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아."
동찬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전자를 집어들어 컵을 채웠다. 가득한 냉수를
이내 입 속으로 털어 넣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었다. 부드러운 살갗의
마찰이 동찬의 온몸을 전율시켰다. 최기자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다음에 기회가 있을거야. 하지만 내가 먼저 원하는 것은
기대하지마. 다음에는 정선배 차례라구. 위험하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줄 수
있어. 그렇다고 감정이 개입된 것으로 오해는 하지마. 나는 단지 정선배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고맙고 그래서
존중하는 마음으로 계속 대화 상대가 되어주기 바랄 뿐이야. 어떤 형태의
대화가 되었건... 오늘은 안돼.”
최기자가 동찬의 손을 살며시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욕망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하얀 밤을 새워 맞았다.
8.여소야대
이소운의 선거사무실. 소운의 참모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막판 상황점검에
들어갔다. 이제 투표일을 제외하고는 3일 밖에 남지 않았다.
"사무장님을 어디 가셨지?"
소운이 물었다.
"참고인 조사가 있다고 해서 검찰청에 갔어요. 올때가 됐는데..."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성현이 답했다. 소운과 관련된 고소 고발 건수만
해도 십 여건이 넘는 모양이다. 주로 흑색선전과 인신 공격등 허위 사실
유포와 선거 운동 방해가 주종을 이르고 있었다. 결혼한 적도 없는 사람을
이혼남이라고 매도하고 운동권 경력을 빨갛게 색칠해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비난하는가 하면, 여권인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좌우익을 섭렵한 믿지 못할
개혁론자라고 공격했다. 선거 운동원을 협박하는가 하면 홍보용 명함을
탈취해 가기도 했다. 유세장에 계란과 각목을 던지고 달아나는 일도 있었고
괜한 시비로 싸움을 걸어오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대항하다 보니
자연 고소 고발이 잦아질 수 밖에 없었다.
소운은 계속 상황을 확인했다.
"전화홍보 쪽은 어때?"
지은이 대답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통화자의 대부분이 주부들이니까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상당히 호의적이예요. 초반에 인지도가 30퍼센트도 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통화자가 확실히 인지하고 있어서 홍보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득표력이 똑같이 높아진 것은 아니야. 어떤
성향의 인지도냐가 중요한 거지.”
"우리 표라고 확신되는 수치는 높아요. 투표행위로 연결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주부들이 독자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다른 가족들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까 선뢰성 면에서는 다소 낮다고 봐야죠.
남자통화자의 경우는 보다 뚜렷한 편이예요. 젊은 층은 절반 가량이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있어요.”
"부동표 비율은 어느 정도지?"
"전화상으로는 20퍼센트 정도가 아직 후보자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어요.
성진씨가 여론조사를 했으니까 잘 알겠네.”
성진이 말을 받았다.
"약간 웃돌기는 하지만 비슷합니다. 남아있는 부동표를 흡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층의 기권을 막는 것도 중요합니다. 부동층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반드시 투표를 하겠다는 유권자가 60퍼센트 밖에 되지
않아요. 투표율이 낮아질 가능성도 크다는 것입니다. 기권방지를 위해
시민단체의 협조를 부탁하기는 했습니다만 전례로 봐서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그때 사무장이 헐레벌떡 회의에 참여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형식치고는 꽤나 까다롭더라구..."
"수고하셨어요. 중앙당의 분위기는 어때요? 무슨 얘기 없던가요?"
"어제 상황실하고 통화를 했는데 신통치가 않은 모양이야."
"더 이상 지원은 없겠군요."
"끝났다고 봐야지. 몇 군데로 집중시킬 모양이야. 기대하지 맙시다."
소운은 혹시나 하고 던진 질문이 역시나 하고 돌아왔다. 분위기는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것이 참모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제 분위기를 투표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성현아 뭐 준비한 것 있으면 말해봐."
"지금까지는 일자 형태로 유세 일정을 짜왔는데 이제는 지그제그로 투망을
쳐야겠어요. 반복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용차량을 최대한
동원해서 쉴새없이 돌아다녀야 겠구요. 모든 것을 동시다발적으로 실시해야
겠어요.”
"전화홍보 방법도 단순히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시행할
거예요. 이미 그렇게 시작했어요.”
"좋아, 그런 식으로 일정을 짜도록 하고... 그동안 열심히들 도와줘서 상황도
빨리 좋아졌어요.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봅시다.”
소운이 회의가 끝나자 지은이를 따로 불렀다.
"동찬이 아직 연결이 안됐니?"
"예."
"사무장하고 주원이 성진이 좀 불러줄래? 동찬이는 계속 수배하고."
"알았어요."
잠시 후 주원과 성진이 들어왔다.
"선배님 그리고 너희들 솔직히 말해라. 어떻게 생각하니?"
주원이 말했다.
"결과를 예측하란 말입니까?"
"그래. 내 생각에는 뒤집기는 불가능해."
"미리 속단할거 뭐있수?"
성진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속단해서 좋을 건 없어. 내 말이 어렵다는 내 말에 너희도 공감한다면
더 이상 출혈은 필요없어. 선배님 생각은 어때요?”
"글세,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는 계속하는 것이..."
"주원이도 마찬가지냐?"
"내가 이런 말하면 전주가 발뺌을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도 형과
같아. 차라리 뒷처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야. 여론은 이미
이의원으로 기울어졌다고 봐야 한다구.”
지은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동찬씨 곧 이리로 오겠데요."
"그래, 알았어. 지은이도 거기 앉아. 일단 동찬이가 오면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보고 결정하자.”
흐르는 침묵을 깨고 진호가 들어왔다.
"형, 언제쯤 나갈겁니까?"
"한 시간쯤 있을거야. 왜 그러니?"
"애들 데리고 몇바퀴 돌다 올께요. 차량 있는대로 끌고 갑니다."
"그래. 수고해라."
진호가 나간지 30분이 지나서 동찬이 도착했다. 소운은 동찬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답변을 기다렸다.
"소운이형 의견을 따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장을 돌면서 객관적으로
느낀바를 말씀드리자면 한마디로 중과부적입니다.”
결국 소운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유급운동원과 투개표 참관인을 포함해
향우 지출되는 비용이 일체 동결되었다. 단, 사무비와 자원봉사자들의 식비 및
교통비 등 실비의 지출은 현행대로 유지시키기로 했다. 소운은 성진에게
선거가 끝난 이후의 행동지침도 마련토록 하였다. 결연히 마음을 정리한
소운은 동찬을 향해 물었다.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말입니까?"
"각당의 움직임과 현재의 상황이나 선거결과 예측같은 거 말이야."
"가자들끼리 주고 받는 정도 밖에 없어요."
"그거라도 좋다. 어디 들어보자."
"좋게 말하면 지역안배고 나쁘게 말하면 나눠먹기가 될거라고 봐. 지난 번
주원이 사무실에서 있었던 회의때도 얘기헀잖아요? 지금 상태로 보면
우리가 예측한 그대로야. 며칠 남기는 했지만 대략적인 윤곽은 드러났다고
봐야지.”
"투표율은 어떨까? 득표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텐데..."
"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요. 선거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하도 시끄러우니까 외면해 버리는 거지. 우리끼리 예상으로는
70퍼센트를 겨우 넘길 것 같아요.”
"실제로 그 정도가 된다면 표차는 좁히기 어려워지는데... 이 곳만이라도
투표율을 높일 수 있도록 강구해 보자.”
동찬이 선거 주변얘기를 계속 늘어 놓았다.
"각 정당들이 애당초 허황된 포부를 갖고 시작했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잖아? 언젠가 각 정당이 목표로 하는 의석수를 모두 합하니까
450석이나 되더래. 정원은 299석인데 말이야. 공상인지 망상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꿈이 컸어. 하지만 개 꿈이 될거라는게 모든 취재기자들의
주장이라구. 우리가 각 정당별로 상황을 분석해 본 적이 있어. 그걸 설명해
볼게. 여당부터 시작하지. 과반수를 확보하려면 지역구의 절반과 40퍼센트의
득표율을 얻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풀어 나가자구. 다른 정당과 비교해
어떤 장점이 있을까? 장점은 첫째 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무게있는
간판스타들이 많다는 점. 둘째 잘하든 못하든 개혁의 주체라는 점. 셋째
집권야당으로서 정책공약에 대한 신뢰성이 타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등이야. 단점은 첫째 수구세력의 저항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는 점. 둘째
TK의 이탈, 셋째 보수세력의 분산등이 있어. 장점과 단점중에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느냐는 것이 쉽게 저울질하기가 어려운게 사실이야. 대체로
단점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보는데, 이러한 경우 과반수는 힘들게
된다구.
예를 들어 부산과 경남북, 그리고 수도권을 제외한 경기도와 강원도를
싹쓸이하고 수도권에서 과반수를 얻어도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채우기가
쉽지 않아. 4당 대결에다 무소속까지 득세를 하고 있으니 득표율도 낮아질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전국구 의석도 만족스럽게 차지할 수 없게 되지. 결국
수도권에 승부를 거는 수 밖에 없어.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이 쉽지 않아.
여당의 간판 스타들이 젊은 개혁성향의 표를 흡수하는데 성공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하지만 인기가 곧 표라는 등식은 선거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판스타 중에 한 사람인 B씨를 통해 두차례나 입증되었다구. 그러니
백퍼센트 믿을 수도 없잖아?
야당을 볼까? K당이 제 1야당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다만 몇석을 차지할 것이냐가 관심이지. 장점이라면 지지세력의 단결이
막강하다는 것과 수도권에 상당한 지지세력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고,
단점이라면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스타가 없다는 점이지. 지금 돌아가는
상황만 봐도 단 한사람의 영향력에 의존하는 경햫이 짙지. 또 하나의 단점은
좋아하는 층과 싫어하는 층이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야. 때문에
내 것은 관리하기 용이하지만 남의 것은 뺏어오기는 어렵지. 그리고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재료가 많아.
우리는 K당이 과연 독자적인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어.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광주와 전남북 그리고 서울을 완전히
장악하고 득표율이 30퍼센트를 넘긴다면 전국구를 포함해 백석이 가능할 수
있지. 하지만 욕심에 불과해.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경기지역을 생각하는데
공단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도시 지역이라 주민들의 성향이 정확히
들어나지 않고 있어. 대체로 보수 성향이 강하지 않겠느냐고 보는데 예상이
맞다면 기대에 미치기는 어렵다구. 득표력 면에서도 우려할 만해. 인구
분포상의 열세에다가 야권이 분열된 상태이니 당연히 득표력이 떨어질 수
밖에... 충청권에 대한 기대도 전만 못할거야.
보수원조라고 자청하는 J당은 수도권보다는 TK지역에 대한 기대를
모으겠지. 지역기반을 석권해도 다른 지역에 대한 성과가 없으면 그저
캐스팅보트나 노리는 정도의 세력이 되겠지. 보수층이 어떻게 작용할 지가
변수겠지만 지나치게 우익으로 나가고 있어. 중도세력이 보구층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만 쉽게 J당으로 다가서지는 않아. 지역 스타는 있어도 전국
스타는 없다는 핸디캡이고. 다행히 이완된 보수세력을 흡수한다면 당락에
관계없이 비교적 높을 거야. 아마 욕심의 절반에다 다 다를까 몰라.
M당은 대중스타는 많은데 힘이 분산되어 있어. 결집력이랄까 응집력이랄까
그게 약해. 뚜렷한 지지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깔도 여당과 구분이 되지
않아서 독립된 이미지가 없어. J당을 따라잡기도 힘들거라는 게 중론이라구.
최대의 관건은 아무래도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냐의 여부야. 현재의
상태로는 지역구도 만만치가 않고 득표력도 기대할 만 못해. 개혁 성향의
젊은 층을 얘기하지만 담을 그릇이 없어. 하긴 수치로 본다면 2-30대와 40대
초반의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상황이니까 기대를
걸어 봄직도 하지. 하지만 배는 있는데 뛰어난 사공이 없고 그나마 노를
저을 만한 사람을은 자기 발등을 관리하기에도 벅차거든. 소운이형이
듣기에는 민망하겠지만 최악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지도 몰라.
14대 총선때 각당의 득표력을 보니까 여당이 40퍼센트를 넘지 못했고
30퍼센트를 넘긴 야당도 없더라구. 어쨋든 선거가 끝나면 인위적인 정계
재편은 불가피할 거야. 복잡한 일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거든. 과반수 안정의석
후계자문제, 집권 후반기 권력누수 현상, 5-6공 처리문제, 개혁의 연속성
유지, 내각제 개헌론 등등... 모두가 한결같은 난제들 뿐이잖아? 게다가 북쪽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고.”
동찬의 오랜 정황 설명이 끝났다. 소운은 동찬이 얘기를 계속하는 사이
진호가 돌아오자 즉시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동찬의 얘기를 듣고 주원과 성진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미혜와 지은이,
사무장의 근심어린 표정을 애써 무시하고 대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돌려
버렸다. 지은이 사무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무장님, 한가지 궁금한게 있어요. 소운이 형과 어떤 선후배 사이예요?
우리가 소운이 형과 함께 지낸게 길게 15년이 넘고 짧다해도 10년이거든요.
저희들보다 오래되셨나요?”
"그냥 사회에서 만난 사이야. 후배님들 보다는 훨씬 오래전의 일이야. 한
이십년은 족히 됐을걸세.”
이십 년이라는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랬다.
"그렇게 오래 되셨어요? 어떻게 알게 되셨는데요?"
"할 만한 얘기가 아니야."
"비밀이라도 있나요?"
"비밀은 무슨... 지은씨나 미혜씨 앞에서는 불편한 얘기야."
"여자와 관계있는 모양이죠?생긴 것만 그렇지, 우리가 어디 여잔가요? 전혀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내가 거북하다구."
지은이 자꾸 채근했다.
"아이, 사무장님 궁금해 죽겠어요."
미혜도 거들었다. 주원이와 동찬이도 끼어 들었다.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이 소원하지 않습니까?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이거 참..."
이상호 사무장이 난처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계속되는 채근에 별
수 없었던지 자세를 고쳐잡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얘기를 하긴 하겠는데 듣고나서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보기 없어."
"점점 궁금해지네. 절대로 그러지 않을 테니 염려일랑 단단히 붙들어
매세요. 우리가 누군데요.”
"알았어."
사무장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내가 사창가를 무대로 건달생활을 했다면 믿겠나?"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도 그럴것이 겉으로 풍겨나는 인상이
법없이도 살 만큼 착하고 순하게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소 사람을
대하는 예의범절이나 두루두루 지식이 해박한 것이 선비같았다. 실제로
미혜가 선비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었다.
"왜, 놀란 모양이지? 이미 오랜 옛날 일이지만 사실이야. 그것도 아주 못되
먹은 건달이었지. 내가 대학 2학년때 유신을 맞았는데 그때 유신 반대운동을
하다가 데모주동 혐의로 감옥엘 갔고 학교는 재적을 당했지.”
사무장은 자신의 과거를 속죄 하려는 듯이 잔잔하게 털어놓았다.
사연인즉 이랬다.
1972년 유신을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을 들끓던 그때 이상호 사무장은 세칭
일류대학의 경제학도로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정의감과 리더쉽이 강했던
이상호가 시위에 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료들을
독려하며 시위를 계속하던 어느날 광화문까지 진출해 연좌 농성을 벌이는
시위대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탄과 가스가 살포되었다. 시위 현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많은 시위 인파는 골목으로 지하도로
넘어지고 밟히면서 몸을 피했다.
질서를 외치며 시위대의 대피를 돕던 이상호는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부상자를 발견했다. 하얀 최루탄 분말이 흐르는 피에 섞여
얼굴을 덮고 있는 지라 호흡까지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이상호는 부상자의
팔을 끌어 골목으로 인도한 후 런닝셔츠를 찢어 응급조치를 취했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후송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위대를 향해 진출해
오고 있는 경찰의 벽을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쓰레기통 옆에 있는 부러진
연탄집게를 주워 찢어진 런닝셔츠를 매달아 백기를 만들고 등어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상자를 들쳐없고 경찰이 깔려있는 대로로 향해 뛰었다.
"부상이 심합니다.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이상호는 지휘관인 듯한 경찰을 향해 소리쳤다. 부상자가 경찰차량에
태워지는 것을 확인한 상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시위대를 향해
줄달음을 치려는 순간이었다.
"저 새끼 잡아!"
동시에 경찰의 곤봉세례가 이상호를 향해 가해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이상호가 전신에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
유치장이었다.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만기 출소를 했다. 갈 곳이 없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왔던 상호는 전과자가 되어 버린 모습으로 도저히 가족
앞에 나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출소하던 날 상호는 마중나온 형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집을 찾겠다.'는 말을 전하고 형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미 학생의 신분도 아니었기에 학교를 찾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경찰의 눈이 상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을 찾아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혹시나 엉뚱한 피해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톨이가 되어버린 상호는 남산, 장충단공원,
효창공원, 사직공원 등을 전전하며 며칠간을 노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상호는 공사판을 찾아갔다. 일이 끝나면 건축자재 더미
사이에서 새우잠을 잤다. 얼마간의 돈이 모이자 밤이슬 만이라도 피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어슥한 초저녁, 후암동 골목을 따라 남산길을
오르려다 보니 좌측으로 마치 성냥갑으 다닥다닥 붙여 놓은 듯한 후즐근한
건물들이 보였다. 상호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을 만한 방을 구할수 있으리라
싶었다.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 여인숙 간판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두리번 거리며 골목을 막 들어서려는데, 웬 중년여자가 팔을
잡아 끌었다.
"아가씨 찾수? 이라와요. 끝내주는 애들이 많다구."
"아닙니다. 잠자리를 찾고 있어요."
"긴 밤하려구? 싸게 해줄테니 따라와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살 방을 구한단 말입니다."
"진즉 그렇게 말할 것이제. 어디 아는데 있수?"
"아니요.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상호는 여자의 뒤를 따라 좁다란 골목을 꺽어 들었다. 여자는 'XX여인숙'
이라고 팻말이 붙은 집으로 상호를 안내했다.
"언니가 웬 일이야. 손님을 다 모셔오구?"
"야, 계집을 찾아 온 사람이 아니여. 방을 구한디야."
"그래요? 얼마나 계실건데요?"
"모릅니다. 한 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여주인이 상호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방을 안내했다.
"이 방이 좀 조용할거예요. 하지만 동네인지라 밤에는 좀 시끄러울 거예요.
바로 옆방에도 장기 투숙 손님이 계시니까 말동무하시면 되겠네. 방세는
한 달치씩 선불로 주셔야 하구요, 혹시 외박을 하시면 제가 방을 좀
사용할께요. 토요일은 워낙 바쁘거든요. 괜찮죠? 그런데, 이렇게 잘생긴 젊은
총각이 왜 이런곳에다 방을 얻을까?”
여주인의 수다스런 입놀림이 계속되는 동안 상호는 방세를 지불하고 봇짐을
방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수돗가로 나가 세수를 한 후 벗어놓은
남방셔츠로 얼굴을 닦아 내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하얗게 솟아 오르고
군데군데 별빛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에 야한 복장을 한
젊은 여성들이 들락거렸다. 상호는 자신의 처지가 사뭇 한심스러웠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지난 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여인숙에 고용되어 몸을 파는 아가씨들도 상호의 친구가 될만큼 여인숙
생활이 익숙해 졌다. 상호의 훤칠한 외모에 반한 아가씨들이 육탄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그 해 겨울. 외로웠던 몇 개월의 시간들이 잊혀질 무렵의
어느날 밤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르는 비명소리가 찢어질 듯 들려왔다.
우당탕 소리를 심상치 않게 느낀 상호가 방을 뛰쳐 나갔다. 세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또 한 젊은 청년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었다. 제지하는 상호를 향해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이들의 공격을 되받아 쳤다. 상호의 날렵한 몸놀림은 이내 세 명의 청년들이
제압해 버렸다. 실로 일순간의 상황이었다. 유도와 태권도로 몸이 달련된
상호는 시위 현장에서 대 여섯명의 진압경찰과 일대 격투를 벌이고도
멀쩡하게 나타나기가 일쑤일 만큼 대단한 실력가였다.
청년들이 사라지자 상호는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청년을 일우켜 세웠다.
주먹패들 간에 세력싸움을 벌이다가 싸움에 밀려 도망오다 보니 상호가
묵고 있는 여인숙이었다. 보복이 두렵다며 보호를 요청했고 상호는 하룻밤을
승낙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폭력세계의 실체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상호는 그날 밤 괴청년들의 보복 습격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상호는 그
습격에서 온전할 수 있었다. 상호를 감시하고 다니던 경찰이 사태에 개입했던
것이다.상호는 '경찰의 감시가 득이 될 때도 있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쩃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 저녁, 공사판에서 돌아와 보니 일단의 무리들이 상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 밤에 함께 있었던 젊은 청년도 끼어 있었다. 그중 한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무슨 소립니까?"
상호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상호에게
여주인이 다가와 내실로 이끌었다. 내실에는 여주인이 마련한 술상이 차려
있었다. 한 사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는 이곳이 자신들만의
영역이었는데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한 조직이 관할권이 존중되어 왔던
오랜 관통을 깨고 이곳을 장악하기 위해 압력을 가한다. 조직의 열세로
저항에 한계가 있어서 새로운 실력자의 도움이 필료하다. 당신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우리들의 보스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도와달라’
한마디로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젠 폭력배까지 되라구? 하긴 이미 전과자가 되버렸으니 못할 것도 없지.
뚜렷한 계획도 없으니...’상호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여급들이 내실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조직원 15명, 그 중 쓸만한 싸움꾼은 7-8명에 불과했다. 상대는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상호는 힘보다는 대화로
문제를 풀기로 했다. 조직원을 보내 대화를 요청했다. 대화에 응하겠다는
전갈을 받고 단신으로 호랑이 굴을 찾아갔다. 조직원들의 만류가 대단했지만
상호는 달리 믿는 구석이 있었다. 24시간 자신을 따라 다니는 감시의 끈이
있는 한 신변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신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스로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한 경찰에
끌려 다닐 이유도 없었다.
호랑이굴에서의 담판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사사로운 것에 욕심을 내서야
어찌 대인이 되겠는가 우리는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니 관례대로 지역의
관할권을 침해하지 말라. 질서와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공멸한다.’고
설득했다. 용기가 가상했던지 상호의 요구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두 지역은
형제의 의를 맺고 일체의 간섭과 압력으로 부터 벗어났다. 뿐만 아니라
남대문시장파 속에서도 무시못할 존재로 부각되었다. 이렇게 보스자리를
튼튼하게 굳혔다.
상호일당이 하는 일은 뻔했다. 여급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화대의 일부를
상납받고 업소의 주인들로 부터도 보호비를 챙겼다. 사창가를 대상으로 하는
어떠한 장사도 이들의 허락과 사례비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역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들을 사창가로 유인하는 일도 이들의
몫이었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켜 주는 일도 이들이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거액의 사례금이 뒤따랐다. 일당들은 쓸만한 아가씨가 있으면 먼저 상호한테
바쳤다. 원하기만 하면 술과 여자는 천지에 널려 있었다. 상호의 정서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을 감시해 오던 경찰의 시선도
느슨해 졌다. 기껏해야 소재파악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예 상호 자신이
'나 여기있으니 안심하시오' 하고 돌아다녔다. 해가 바뀌고 봄인가 싶게
초여름을 맞았다. 토요일 오후 휴가와 외박을 나온 장병들이 사창가로 몰려
들었다. 상호일당도 바빠졌다. 으레히 행패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행패를
부리다가 상호일당에게 발각되는 경우엔 여지없이 곤죽이 되어 끌려 나가야
했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지자 골목길이 고요를 되찾았다. 아직도 각
업소마다는 긴 밤을 신청한 남자들이 여급을 끼고 힘자랑을 하고 있을 것
이다. 불이 하나 하나 꺼지고 김밥 장수의 처량맞은 목소리만니 어두운
골목길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상호가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김밥이 있습니다. 삶은 계란이 있습니다."
몇군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급들의 흥정소리가 들렸다.
"처음보는 총각이네. 계란 두 개하고 김밥 세줄만 줘요."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뭐야? 처음보는 놈이야? 어디..."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어, 이것봐라. 야 임마.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겁대가리 없이 누구
허락받고 이 구역에서 장사를 해?”
"김밥장수도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어, 이 자식이 말대꾸도 할 줄 아네? 죽을려구 환장했나."
그러더니 우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얘가 큰일 날려구. 오빠. 좀 나와보세요."
상호가 여급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어 나갔다. 방문 앞에 너부러져
있는 녀석을 보니 제비라고 부르는 상호의 부하였다. 몸이 날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조직원 중에서도 제법 주먹깨나 쓴다는 녀석이었는데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가쁜 호흡을 답답해 하며 길게 누워있었다. 그
엎어진 나무통 옆으로 김밥과 계란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쟤가 그랬어요. 턱을 발로 채인 것같아요."
여급이 김밥장수를 가르켰다. 얼핏보니 스물도 안되 보이는 어린애였다.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네가 그랬어?"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김밥장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너 이바닥이 처음이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정당방위를 했을 뿐입니다."
당돌했다. 뭐 이런 녀석이 있나 싶었다.
"어린 녀석이 배짱 한 번 두둑하구나. 너 몇 살이냐?"
"열 아홉입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했지?"
"삼일쨉니다."
"누구 소개를 받았어?"
"소개라니요?"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구만. 이름이 뭐냐?"
"소운이라고 합니다. 이소운이요."
사무장은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렇게 소운을 처음 만났어. 어렸지만 땅땅한 체구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평범한 녀석으로 볼 수 없었어. 어둠 속에서도 소운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인다는 느낌을 받았지.”
지은이 긴장된 표정으로 사무장의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사무장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어쩌랴 싶었다. 상호는 여전히 끙끙거리며 쓰러져 있는
제비를 발로 툭툭 찼다.
"정신차려 임마. 그러게 매사에 조심하라고 했잖아. 이게 무슨 꼴이냐.
어린애한테...”
여급이 제비를 부축해 일으켜 방 안으로 데려 갔다.
"너 말이야. 모르고 한 일인 것 같으니까 그냥 보내주마.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빨리 사라져.”
"그렇게는 못합니다. 음식값을 변상 받기 전엔 못 갑니다."
"철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꺼져. 멀쩡해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인줄 알아.”
"돈을 받으면 가겠습니다."
소운이 버텼다. 그러자 상호의 부먹이 소운의 복부로 날아왔다. 급습을 받은
소운은 배를 움켜쥐고 몇 걸음 뒤로 물러 났다가 상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운의 공격을 간신히 피한 상호가 소운의 턱을 향해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소운이 몸을 숙여 피하고는 오른 발을 높이들어 자세가 흐트러진 상호의
어깨죽지를 내리찍었다. 상호가 두 무릎을 꿇고 주저 앉나 싶더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소운의 발목을 잡아 내 돌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두
팔로 목을 감아 눌렀다.
"끝났어. 버둥거려 봐야 못빠져 나가."
상호가 팔을 풀고 일어나 손을 털며 말했다.
"대단한 녀석이구나. 좋다. 계산은 내일하도록 하고 오늘은 그만 가거라.
내가 계산해 주마. 이 집에서 기거하니까 아무 때나 와도 좋다.”
소운이 흩어진 김밥과 계란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무통을 챙겨 어깨에
들춰멨다.
"감사합니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소운이 꾸벅 인사를 하고 여인숙을 빠져 나갔다.
"김밥이 왔습니다. 삶은 계란이 왔습니다. 김밥이오..."
소운은 장사를 계속했다. 소운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상호는 제비를 힐끗
쳐다보며 핀단을 주었다.
"야. 쟤 하는거 봤어? 자만 떨다가 큰 코 다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임마
턱 뼈나 온전한지 모르겠다. 저 녀석 건들이지마 . 내가 챙길테니까.
알았어?”
다음날 밤, 낯익은 김밥장수 목소리가 들렸다. 소운이었다. 상호는 배짱좋은
소운이 썩 마음에 들었다. 소운은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사창가를 돌며 김밥과
계란을 판 돈으로 학비를 벌어 쓰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사창가를 상대로
이런 장사를 하냐고 물었더니 밤 시간을 이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후 소운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상호의 관할구역에서 김밥
장사를 계속했다. 상호와 소운의 사이에는 어느덧 두터운 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소운이 대학생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상호의 모교에 사회과학도가 되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가 되어버린 두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게 된다.
운동권에 가입해 쫓겨 다니고 구속과 제적이라는 운명을 공유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운은 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복학이 되었다가 다시
재적되었고 몇 년후 재차 복학이 되어 간신히 학사모를 썼다. 상호는 세
차례의 폭력 전과를 포함해 사성장군이 되어 대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다가 서슬 퍼런 5공 정권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그 후로 폭력세계와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한 속에서도 두 사람은 틈틈히 우정을 나눴고 그 우정 속에서 상호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계기가 주어졌다. 상호는 자신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소운의 덕분이라고 했다. 소운의 흐트러지지 않은
건실한 생활태도가 자신을 자극 시켰다고 말했다. 지금의 부인도 소운의
중매로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소운의 일이라면 내외가 발을 벗고 앞장
선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사무장의 얘기가 끝났다.
지은이 얼마전에 사무실을 찾아온 청년들 앞에서 물컵을 손아귀에 쥐고
박살을 내던 소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과거가 있었으니...'
그러면서 사무장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지은씨. 이거 왜 이래? 그러게 얘기 안한다고 했잖아.”
"믿기지가 않아요. 사무장님이 그런 과거를 갖고 있다는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구요. 너희들은 믿어지니?”
"믿지마. '저 사람이 소설을 썼겠거니' 하고 흘려버리라구. 이제 잡담들
그만하고 나가 봐. 한 표라도 보태야지.”
"알겠습니다. 대장님.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주원이 사무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전화홍보에 열중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합류한 지은을 남겨두고 모두 사무실을 나갔다. 각기의
손에는 명함이 한웅큼씩 쥐어져 있었다. 동찬돠 미혜는 버스정류장으로
나머지는 지하철역으로 흩어졌다.
동찬과 미혜는 기호와 이름을 목청껏 외치며 명함을 돌렸다. 가져온 명함이
동이 나자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어서 와유? 힘들지유? 열성으로 허시니께 꼭 되실거유."
"벌써 단골잡아 놓았니?"
"그럼 내가 누군데... 아줌마가 소운이형 열성 팬이거든. 저기 봐."
미혜가 가르키는 손가락을 따라 가보니 수십 장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진짜 자원봉사자라구. 손님들 붙잡고 소운이형 선전을 얼마나 해주시는지
몰라. 어쩔때는 다른 후보 지지자들과 싸우기도 하신데.”
"그러시면 장사에 지장이 많으실텐데..."
"안되면 말지유. 다 나 좋아서 허는 짓이구먼유. 맨날 자시든거 드릴까유?
신랑되실 양반인 모냥이니께 오늘은 제가 한턱 쓰것두먼유.”
동찬이 정색을 했다.
"아이구. 아닙니다. 아주머니. 얼마나 남는다고..."
"돈이야 있다 가두 없구, 없다 가두 있는 거라잖유? 아무리 그 정도두
못허겄슈? 사실은 오늘 기분이 흠씬 좋은 날이구먼유.”
미혜가 반갑게 물었다.
"어머나. 그러세요? 무슨 날인데요?"
아주머니가 싱글벙글 거리며 안주를 내밀었다.
"식기 전에 어여 드서유. 미안허지만 술은 그 밑에 있구먼유."
동찬이 리어카 밑에서 소주를 꺼네 냉큼 뚜껑을 비틀어 잔을 채워 들고는
물었다.
"신나는 일이 있으신 모양이죠?"
"신나다 마다유. 즈히 애들 아빠가 차를 샀슈. 봉고 트럭인디 거기다 야채랑
과일이랑 실어다가 팔러 다닐거구먼유. 남의 집에서 심부름을 허다가 5년
만에 사장님이 되었으니께 얼매나 좋겄슈?”
"아유, 잘됐네요. 정말 잘됐어요. 축하해요."
"아주머니 아무래도 건배 한 번 해야겠는걸요?"
동찬이 아주머니에게 잔을 권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잔을 들어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다’를 크게 외치고 잔을 비웠다. 동찬은 '사람사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수천 억을 가지고 어떤 놈들이 나누어
쳐먹었는 지는 몰라도 서민들의 작은 기쁨에 비하면 독을 먹은 돼지나
다름이 없는 자들 일 것이다. 모처럼의 즐거운 술자리에서 값진 술을 얻어
마신 동찬과 미혜는 아주머니의 해말간 미소를 배웅삼아 포장마차를 나왔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찬이 미혜와 헤어지는 것이 퍽이나 아쉬운 모양이었다. 동찬은 소운의
사무실 앞에 세워둔 승용차에 기대어 목을 뱅뱅 돌리며 미혜를 힐끗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술을 괜히 마셨나?"
"왜, 올라와? 차 놔두고 택시 타고가."
"내일 아침엔 어떻하구. 차 가지러 올려면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요즘 얼마나 피곤한지 아니? 말도 못한다.”
"그럼 어떻해? 사무실에서 좀 쉬어가던지."
'눈치없는 계집애'
동찬은 계속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서성거렸다.
"어떻할거야?"
"걱정말고 올라가. 조금 있으면 정신이 맑아질거야."
"동찬씨 지금 어지러운거야?"
"약간... 괜찮다니까? 어서 올라가."
"안되겠어. 어디 좀 앉아."
"그냥 요 근처 어디서 쉬고 아침에 갈까?"
"근처에 쉴 데가 어디있어? 가만! 동찬씨 지금 나한테 수 쓰는거지."
"얘가 왜이래? 무슨 수를 쓴다구..."
"아무래도 이상한 걸... 아무튼 운전할 생각하지마."
"아이구, 모르겠다. 슬슬 몰고 가보지 뭐."
동찬이 키를 꺼내 차 문을 열었다. 막 시동을 걸려는데, 미혜가 동찬의 팔을
잡아 당겼다.
"안돼, 사고나 나면 어쩔려구. 빨리 내려."
동찬이 못이기는 척 차에서 내렸다.
"그럼 어떻하란 말이야?"
"불안해서 안되겠어. 근처에서 자고 아침에 가."
"그럴까? 같이 가자."
"같이 가긴 어딜 같이가?"
"이곳 지리를 잘 모르니까 같이 찾아 보자구."
"찾아보고 말것도 없어. 저기 간판 안보여? 저기서 자. 아침 일찍 깨우러
갈게."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여관 간판이 보란 듯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동찬은
아무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여우야, 나 간다. 집에 도착해서 전화할게."
미혜는 동찬이 뾰루퉁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림없다는 듯이
혀를 쏙 내밀었다.
9.참담한 패배
4월 10일 밤 12시.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모두 끝났다. 이제 유권자의 마지막 심판 만이 남았다.
소운의 사무실에는 그동안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책상마다에는 각종 음료와 술 그리고 가벼운 안주거리가 수북이
놓여 있었다. 소운은 선거일이 공고되기 전날 운동원을 모아 놓고 '후회를
남기지 말자’고 했던 자신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 이순간 만큼은 결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야말로 후회없는 한판이었음을 자신했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일순간 소운을 극도의 피로 속으로 몰아
넣었다. 온몸의 기가 모두 빠져 나간 듯하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실컷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숱한 고비를 참아 넘기고 16일 간의 길고 긴 여정을
헌신적으로 함께 해준 운동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려야 한다. 보은은 못할
망정 함께 대화하고 웃어 주는 예의를 지켜야 했다. 지치기는 자신
만이겠는가? 찌든 피로에도 불구하고 유종의 미를 남기기 위해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겠지. 소운은 기력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은아. 차가운 냉수 좀 갖다주겠니?"
"형, 혈색이 안좋아. 괜찮아요? 힘들면 안에 가서 쉬지. 여기는 우리한테
맡기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말고 냉수나 갖다줘."
지은이 가져온 냉수를 단숨이 들이키고 심호흡을 했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사무장이 일어나 소운에게 다가왔다.
"위원장, 수고 많았어. 자, 한 잔 하자구. 피곤할땐 소주가 최고야. 한 잔하고
나면 괜찮아질거야.”
소운은 사무장이 권하는 대로 소주를 넙죽 받아넘겼다. 그리고는
사무장에게 잔을 넘겨 술을 따랐다.
"고마워요. 선배님. 다시는 이런 짓에 끼어들지 마세요."
"무슨 소리... 위원장 덕분에 좋은 경험했어. 다음에도 나한테 이런 기회를
주면 지금보다 완벽하게 해낼게. 그래 주겠지?”
"선배님도 참..."
소운의 원기가 회복된 모양이었다. 술기운인지 창백했던 얼굴 색도 화사하게
돌아왔다. 소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을 챙겨 들었다. 좌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술잔을 채워주고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소운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남아있는 동지들을 언제까지나
잊지않고 기억했다가 기필코 우뚝 솟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사람씩 자리를 떴다. 이제 남은 사람은 김광수 수석
부위원장과 이상호 사무장 그리고 홍보실장 성현이와 SG회원들이었다.
뒤늦게 동찬이도 합류했다. 김광수 수석 부위원장이 말을 꺼넸다.
"큰 도움이 못되서 밍나하게 생각합니다."
"천만에요. 얼마나 귀중한 원군이었다구요. 절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서운합니다.”
"그렇게 여겨 주시니 고맙습니다. 선거를 치뤄보니 어떠세요?"
"이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전쟁을 치른 기분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다음 번에는 잘 적응하세요. 그동안 옆에서 보니까
안타까운 정도로 분위기에 신경쓰시더군요. 거슬리는 것은 안보고 안들으면
그만이에요. 더러운 것은 피해 버리면 그만이구요.”
"마음 속으로는 그러리라 했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감정을 숨기기가
힘들더군요. 아직 수행이 모자란 탓이겠지요. 노력하겠습니다.”
진호가 나섰다.
"형, 밤새울거유?"
"왜?"
"밤을 세우려면 술이 모자라잖아. 까짓거 좀 더 합시다."
주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럽시다. 아침 일찍 투표하면 끝이잖아? 그리고 쉬면 되지."
다들 박수로 동의를 표시했다. 지은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안주가 마땅치 않은데..."
"안주는 무슨, 옛날에는 새우깡 한봉지로 소주 다섯병을 마셨어. 그때를
생각하면 안주타령 안나올거야.”
"그거야 우리끼리일 때 얘기지. 부위원장님이나 사무장님도 계신데..."
" 우리 때문이라면 걱정말아요. 아참, 뒷골목에 가면 구멍가게가 있을거야.
할머니가 잠이 없으셔서 늦게 까지 문을 열어 놓는데. 거기가서 두부나 몽땅
사오지. 기왕이면 김치도 좀 얻어오고.”
사무장이 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쇤네 후딱 다녀옵지요."
"술은 내가 사올게."
성현과 진호가 밖으로 뛰어 나갔다. 김 부위원장이 담배를 꺼내 물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정치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저 어깨너머로 보거나 여기
저기서 주워 들은게 고작이지요. 내 짧은 소견으로는 선거 이후에 상당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위원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적인 식견이 짧기로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만은 부위원장님의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겁니다.”
주원이 나섰다.
"어제 오늘 사이에 주가가 많이 떨어졌어요. 투표를 앞두고 주식 값이
떨어진다는 건 어떤 이상 조짐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선거결과와 관련이
있다는 소리도 있고. 홍균아, 무슨 소문없냐?”
"정부 여당의 안정의석을 의심하는 분위기로 봐야지. 다시 말해
정국불안이나 정책변화에 대한 경계심리같은게 작용하고 있어. 현장 사정에
정통한 기자님이 더 잘아시겠지.”
동찬이 말을 받았다.
"내가 뭘... 뚜껑을 열기 전엔 몰라."
"얘기 왜이리 소심해 졌지? 그런 말은 누가 못하냐?”
"아직은 크고 작은 변수가 있고 언제 무슨 일이 돌출될지 모른다구. 조금
전에만 해도 돈봉투를 돌리다 발각된 사건이 있었어. 그것도 두 건씩이나.
마감 뉴스에 살짝 비쳤지만 내일 아침이면 크게 보도될거야. 이런 경우
소속 덩에 상당한 영향이 있을거야. 투표가 마감될 때까지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어.”
"어느 당이냐? 누구야?"
술과 안주를 사러 나갔던 성현과 진호가 차례로 들어 왔다. 지은과 미혜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책상을 정리하고 새롭개 술자리를 마련했다. 지은이
두부를 잘게 썰다가 팩시밀리를 바라 보았다. 하얀 종이가 싹뚝 잘려 바구니
속으로 들어갔다. 지은이 손을 놓고 다가가 용지를 집어 들었다.
"소운이 형. 희영씨가 메시지를 보내 왔어요."
중국에 있는 희영이 격려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존경하는 소운이형!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저도 열심히 기도했지만 가까이
있는 친구들의 고생만큼이나 되겠습니까? 앞으로도 돌팔이 젊은 목사
희영이는 형을 위한 기도를 아끼지 않을 겁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친구들도 건강하시길...’
희영의 메시지의 하단에는 십자가와 함께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쓰여
있었다.
"녀석 고맙구나."
"참 지극한 정성이다. 형은 복도 많아."
주원의 말이었다. 김 부위원장도 소운의 인덕이 몹시 부럽다고 했다. 새롭게
술자리가 마련되고 잔이 오갔다. 그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주고 받으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지금 이시간에도 적대감정으로 가득한 의심과 불신의
갈등이 곳 곳에서 감시어린 시선으로 표출되고 있을 터였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법과 부정의 현장을 잡기위해 또는 예방하기 위해 깊은 어둠
속에서도 부릅뜬 눈을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만하는
선거질서, 이따위 그릇된 선거문화를 누가 만들었던가. 자초한 인과응보의
늪에서 불안한 밤을 보내는 후보들과는 달리 소운과 그의 동지들은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투표일을 맞고 있었다.
투표시간이 가까워 졌다.
소운은 세면장으로 갔다. 옷을 훌훌 벗어 벽애 걸고 샤워기의 손잡이를
힘주어 돌렸다.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비누거품이 온 몸을 감쌌다가 물줄기를 따라 사라졌다. 소운은
가슴 속에 남겨 두었던 더러운 기억들까지 모조리 씻겨가기를 바랬다.
양치질을 하고 수염을 깍고 머리를 손질했다. 깨끗한 마음으로 그리고
정결한 자세로 투표에 임하리라 생각했다.
세면장을 나와 말끔한 옷으로 단장했다. 소운은 김부위원장과 사무장을
그리고 성현을 대동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투표장으로 향하는 소운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소운을 격려하는 유권자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투표장에 도착했다. 선관위 관계자와 악수를 나누고 투표인 명부를
확인한 후 용지를 건네받았다. 기표소에 들러 자신의 기호 밑에 힘주어
붓뚜껑을 누르고 용지를 곱게 접어 나왔다. 투표함에 용지를 찔러 넣고
투표소를 빠져나왔다.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투표를 마쳤다. 선관위
관계자가 소운에게 다가왔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한시름 놓았습니다만 좀 더 고생하셔야 겠습니다."
"참관인을 한 명도 안두셨더군요."
"우리가 아니라도 지켜보는 눈이 많을 테니까요. 괜히 번잡하기만 할
뿐이죠."
"그래도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개의치 않겠습니다. 그럼..."
소운은 가볍게 인사를 교환하게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두들 여기 저기 흩어져 골아 떨어져 있었다. 지은이
차를 들고 위원장실로 들어왔다.
"차 드시고 눈 좀 붙이세요."
"너도 쉬어야지."
"정신이 점점 맑아지는 걸?"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푹 쉬고 느즈막히 나와."
"그냥 형하고 같이 있을께요. 쉬고 싶으면 알아서 쉴테니 제 걱정은
마세요. 투표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반장 선거하는 기분이더라. 왜 있잖아. 자기가 자기 이름 쓰는 거."
"정말 그렇겠네. 왜, 다른 사람 찍지 그랬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지? 그자 저나 나는 누구를 찍는다지?”
"아참, 그러지 말고 빨리가서 투표하고 와라."
"하긴 해야겠는데 누가 누군지 알아야지."
"집에 가면 홍보물이 있을 것 아니야. 그걸로 라도 비교를 해봐."
"온통 과대포장을 했을텐데 어떻게 믿어요? 주인 집에 물어봐야겠군."
"객관적인 분들이라면 도움을 청해봐.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갔다와."
"왜 자꾸 쫓아 버릴려고만 해요?"
"그게 아니고..."
"알았어요. 지금 다녀올께요. 대신 딴 생각말고 눈 좀 붙여야돼?"
"그럴게."
"아니야. 아예 잠자리를 바주고 갈게. 자는 걸 보고 갈거야."
"극성이다. 미혜도 투표하러 오라고 해."
"벌써 갔어요. 형 투표하러 나가고 바로 동찬씨랑 같이 갔어. 동찬씨는
취재 때문에 못올거래요. 내일 저녁때 쯤 연락하겠데.”
"밖에 누가 온거 아니니?"
지은이 문을 빼꼼이 열어 보았다.
"어머, 일찍들 왔네. 투표들 했어? 선견지명이 있어서 도와 달라고 했지.
이제 마음놓고 다녀와도 되겠네. 푹자요. 알았죠?”
지은이 소운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소운은
쏟아지는 잠을 여유있게 받아 들였다.
소운은 눈을 떠보니 어느새 다녀 왔는지, 지은이 소운의 간이침대에 두
팔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 나와
지은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운이 사무실에 나와 보비 아가씨들 뿐이었다.
"일어나셨어요? 뭐 좀 드셔야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우리만 쉬어서..."
"저희들은 괜찮아요. 매일 쉬었잖아요."
"다들 어디 갔어요?"
"투표하고 오신다고 나가셨어요. 끝나는 대로 바로 들어오시겠데요.
사무장님은 선관위에 계시구요. 사무장님 댁에서 미혜언니가 전화하셨어요.
사모님이 저녁준비 해놓으신데요.”
"형수님도 참,... 미안하지만 사발면 남은거 있어요?"
"라면 드시게요? 그러시지말고 밥 시켜 드릴께요."
"됐어요. 라면이 좋아요."
소운이 TV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시간대별 투표 현황이 소개되고
있었다. 예년의 같은 시간대에 비해 투표율이 저조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투표 참가를 권유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때 맞춰 사무실
창문을 통해 투표를 독려하는 방송차량이 요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소운은
다시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투표율이 낮아질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투표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소운의 득표율도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권표가 젊은 층에서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운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TV를 지켜보며 가볍게 요기를 마쳤다. 잠시 후
사무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어요?"
"아니야. 서류 좀 확인하려고 갔다 왔어. 서류가 한 두가지라야지.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어. 서류만 복잡하게 많다고 해서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가
되나? 그런다고 훌륭한 인물이 뽑히냐는 말이야. 백날 제도를 뜯어 고치고
규정을 새롭게 만들어봐야 소용없어. 온통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놈들이
태반이라구.”
"좀 쉬셔야할 텐데..."
"걱정마. 그렇지 않아도 사우나탕에 가서 두어 시간잤더니 아주 개운해.
위원장도 사우나나 갔다오지 그래.”
"저는 됐어요. 근데, 형수님이 무슨 저녁시사를 준비하신데요? 선배님이
시키신거 아닙니까?”
"시키기는... 다 알아서 하는 사람아닌가?"
"성현이한테는 싸오라고 해야겠어요. 동지들하고 같이 먹어야지 나 혼자만
배부를 수 있습니까?”
"원, 사람도... 매일도 아니고 처음있는 일인데 뭘 그래?"
"그래도 싫습니다. 형수님께는 죄송하지만 여기서 나누어 먹을께요."
"알았네. 이 사람아. 그 황소고집을 누가 말려? 전화해 놓을게. 오늘 밤은
어떻할거야.”
"새벽 두세 시 쯤이면 결론이 나올겁니다. 그때까지 지켜보죠."
소운은 계속해서 투개표 실황방송을 지켜 보았다. 각당의 표정이 차례로
비춰지고 있었다. 다시 투표현황이 나열되었다가 투표를 독려하는 진행자의
호소가 반복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건 이기주의다. 시대가 만든 이기주의고 문화가 만든 이기주의다.'
소운은 답답했다. 현실의 두터운 벽을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리와
의무는 공유하고 있으나 행위의 몫은 나누어져 있었다. 무당의 굿을
신명나게 구경하다가 판이 끝나면 잔치에 끼어 들어 아귀처럼 자기몫을
챙기는 그러한 이기주의다. 죽일 놈 나쁜 놈 떠들다가 채찍을 쥐어주면 대번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버린다.
소운은 반세기를 맞는 우리나라 정치사가 4류 밖에 되지않는 후진성에
허덕이고 있는데는 정치를 대하는 국민들의 태도도 적지않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3불3무' 가 그것이다. 불신,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정치권에 대한
감정도 노력보다는 무관심, 무판단, 무행위로 외면돠 방조와 방임을
거듭했다. 이제 국민들은 앞으로 불어 닥칠 정치권의 혼돈을 바라보며 또
다시 '3불3무'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자연히 나아질 것이라는 소극적인 기대가
수십 년 계속되었다. 조상님의 제삿상에 케잌과 피자가 올려지는 세태가
되어버린 오늘날, 정치는 신세대의 관심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미
그들의 사고와 정서의 영역권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났을지도 모른다.
주인된 의무와 권리보다는 배낭을 먼저 찾는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것인가. 케잌과 피자가 아니라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오는 캡슐 한
알이 조상님께 바쳐지는 세태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는 결코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은 커녕 바로 잡을 수도 없다. 국민들의 힘, 그
강력하고 소중한 힘을 소운은 간절히 소망했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감촉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구나."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요?"
"이것 저것..."
"마감시간이 거의 다된 것 같은데..."
지은이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투표상황은 어때요?"
"가벼운 마찰이 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야."
"그거 말구. 투표율이 얼마나 되느냐구요."
"기대치보다는 못할 것 같다."
"그럼, 걱정이네. 많이 낮아요?"
"예년의 선거와 시간대 별로 비교하자면 몇 포인트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어.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이대로
굳어진다고 봐야지.”
하나 둘 동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금방 사이에 사무실이 북적거렸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향후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투표 종결을
알리는 뉴스앵커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사무장과 미혜 그리고 성현이
커다란 들통과 겹겹이 쌓아올린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개표방송을 지켜보는 소운의 사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서서히 한 두 곳씩 당락의 윤곽이 드러자고 있었다. 소운은 이미 낙선이
확인되었다. 개표 시작부터 줄곳 3위를 달렸다. 득표율마저 예상을 밑돌았다.
소운에 대한 관심은 이미 멀어졌고 함께 TV를 지켜보던 동지들의 숫자도
현저히 줄어 들었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고 울분섞인 욕설을
퍼붓는 이도 있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쓰린 속을 달래는 이도 있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술잔을 기울이는 이도 있다. 한숨 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다가는 자리르 박차고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소운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은이 그 뒤를 따랐다.
"상심하지 마세요."
"표차가 너무 많이 나버렸어. 이렇게 까지..."
"투표율이 낮은 때문이예요. 겨우 70퍼센트를 넘겼으니..."
"꼭 그것 뿐만이 아니야. 어쨋든 참패다. 그냥 패한게 아니라 참패를
당한거라구.”
주원, 성진, 홍균, 진호 그리고 미혜 등 SG회원들이 차례로 소운의 방으로
들어왔다. 성진이 소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형, 사무장님이 많이 취하셨어요. 어떻할까요?"
"실수하실 분은 아니니까 모른척 해. 성현이 좀 블러줘."
잠시 후 성현이 들어왔다.
"벽보 줌비해라. 그리고 아침 일찍 시장부터 인사를 다닐테니까 일정을
잡아 놓고. 가급적이면 내일 하루로 끝낼 수 있게 준비해.”
"알겠습니다. 플랜카드는 어떻게 할까요?"
"사무실에만 하나 걸도록 하자."
성현이 소운의 지시를 받고 나가자 홍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선전하신 겁니다. 우울해 하실 필요 없어요.”
"위로 안해도 된다. 다 끝낸 일이야."
주원이 나섰다.
"마무리나 잘 합시다. 시작도 좋지만 마지막 정리도 중요하니까."
"옳은 말이다."
지은과 미혜가 옆에서 훌쩍거리자 진호가 꾸짓듯이 달랬다.
"뭐하는 짓들이야? 어디 초상났어? 그만들 해."
"그렇게 서 있지들 말고 앉아라. 서운하겠지만 내 능력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걸 어떻하겠니. 좀 더 다듬고 충전해서 다시 시작해보자. 너희들
알지? 나는 한 번 졌지 절대로 두 번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거.”
"그래요. 심기일전 합시다."
가라앉은 분의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술에 취한
사무장의 노래소리가 들렸다. '일송정 푸른 솔은...' 2절 3절까지 두 번 세
번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들려
왔다. 동찬이었다.
"형 접니다. 기분이 어때요? 괜찮죠?"
"그래, 괜찮다. 바쁠텐데 웬 일이냐?"
"제가 뭐랬어요? 판이 다시 짜여 진다니까요? 이대로 간다면 우리 예상이
적중하는 거라구요. 아직 단정할 시간은 아니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윤곽으로는 거의 예측대로예요.”
동찬의 말을 들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가 넘었다.
"TV 보고 있어요?"
"아니다."
"각 당이 보통 어수선한게 아니야.”
소운은 수화기를 내려 놓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계재편을
떠올렸다. 정계재편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과연 목적의 순수성은 담보할 수 있는가? 소운의 소속당은 어찌될
것이고 자신은 또 어찌될 것인가? 자신은 과연 소신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울려 설 자리가 없다면 또 다시 홀로 서야겠지. 정치판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정글 숲과 같다던 김동수의원의
말이 생각났다. 그 험한 정치집단의 이기주의가 자신의 자리를 흔쾌히
보장해줄리도 만무했다. 줄을 찾지 않고 빽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재편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살아 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차라리 이대로가 좋을 수도 있다. 주변에 연여할 필요없이 홀로서기와
자력갱생이 가능한 지금의 상태가 소운의 성격에 어울리는 지도 모른다.
입바른 소리에 눈총을 받아야 하고 굽히지 않는 소신에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당당한 목소리와 곧은 행동이 자유스러운 그런
분위기가 소운은 좋았다.
'현실 속에 이상이 있다'는 말이 소운을 현실 정치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어쩌면 명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밖에서 기를 쓰고 밀어도 넘어
지지않는 담장을 안으로 넘어 들어가 그 속에서 밀어보면 쓰러뜨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추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온갖
악취를 풍기고 있는 담장 속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청소하고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높디 높은 담장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온 몸으로 사력을 다해
두드리고 밀기를 얼마였던가. 미동도 하지 않은채 버티고 있는 담장에 부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가 보니 악취의 원흉들이 겹겹이 버팀목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운은 내가 안에서 밀테니 당신들은 밖에서 잡아
당기라며 소리쳤다.
소운은 마음을 다졌다. 그래, 이제 시작한 것이다. 설사 밖에서 잡아당길
사람들이 구경꾼이 되고 소풍을 간다 해도 밀 수 있는 힘이 있을 때까지는
밀어보자. 그러다 힘이 부쳐 악취에 폐가 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는 말자. 언제나 처럼 그렇게 부딪혀서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소운은 종이를 들고 펼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뒷 벽에 압핀을
꽂아 붙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모조지에 소운의 그림자가
새겨졌다.
"백지에서 다시 시작한다. 저 벽에 붙여진 하얀 종이에 차근 차근 그림을
채워갈거다. 보란 듯이 멋진 작품을 만들거야. 꾸밈없이 아름답고 맑고
청초한 그림을 반드시 완성시키겠어. 절대로 더러운 이물질이 섞인 물감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연의 색만 선택할거야.”
갑작스런 소운의 언행에 모두가 얼이 빠져버린 듯 했다. 소운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 모두, 나를 믿지?"
"..."
"지금까지 처럼 앞으로도 도와줘야 돼. 그럴 수 있지?"
"..."
"난 실패하지 않았어. 나는 지금 단지 과정을 밟고 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작은 실수를 범한 것 뿐이야. 이젠 실수같은건 없다.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나면 목표는 반드시 손에 잡힌다.”
"형..."
주원이 소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절대로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도와줄 수 있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의 제의로 모두의 손이 소운의 책상 위에
포개졌다. 그리고 힘찬 구호가 실내를 흔들었다.
"화이팅!"
사무장이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뭐하는 거냐? 나도 같이 끼면 안돼냐?"
"술 좀 깨셨어요?"
"취한 줄 알았냐? 그냥 취한 척 한 것뿐이야."
소운이 성현을 불러 들이고 모두에게 말했다.
"내가 한가지 제안을 할게. 선배님이나 성현이나 대단히 순수하고 유능한
사람들이야. 그동안 겪어봐서 잘들 알겠지만... 나하고는 각별한 사이이기도
하고. 두 분만 괜찮다면 지금부터 우리 SG회원으로 위촉하고 싶어. 여러분들
생각은 어때?”
모두들 대환영이라며 박수를 쳤다. 이상호 사무장과 성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SG모임이 부럽다는 말을 종종 해왔던 터였다.
"그리고 이 사무실을 SG사무실로 사용하자. 그동안 주원이 신세만 져서
늘 미안했는데, 이 기회에 독립하자구.”
주원이 물었다.
"지구당은 어떻하구요?"
"신경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간판을 내려야 할거야."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나가서 개표상황이나 마저 지켜보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소운의 뒤를 따랐다.
막판 개표가 한창이었다. 판도는 이미 드러났다. TV화면에는 각 정당의
피곤한 모습과 환호하는 당선자의 모습이 번갈아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거결과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동찬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형, 동찬입니다. 끝났어요. 오늘 밤에 좀 봅시다."
"피곤할텐데 괜찮겠니?"
"견딜만 해요."
"무리하지 마라. 나도 날이 밝는대로 인사를 다녀야 하고 그게 언제쯤
끝날지 장담할 수 없거든.”
"어쨋든 갈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끊습니다."
동찬이 전화를 끊고 얼마 후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지은이 수화기를
건네 주며 속삭였다.
"김의원이야."
"예. 이소운입니다."
"날세."
"축하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거, 축하받자고 전화한 것 같구만. 고생했네. 설마 자네답지 않게
상심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덤덤하게 앉아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다른게 아니고 결과를 봐서 알겠지만..."
소운이 말을 가로막았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향후 상황에 대해서는 지금 얘기할 계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근자에 연락드리고 찾아뵈면 안되겠습니까?”
"그래, 경황이 없겠지. 내가 너무 서둘렀구만. 가급적이면 빨리 봤으면
좋겠네. 지난 번 대책도 논의를 해야겠고 하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어디 조용한데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시게."
김의원과 통화를 끝낸 소운은 성현을 불러 일정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동지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
사무실을 걸어 잠근 후 떼거지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하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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