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원 아이들
이영섭
1. 잃어버린 아침
이상하게도 머리만 떨어져 깊은 수령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온 몸의 모든
세포들이 심하게 팽창되어 곧 터져 버릴 듯하고, 마치 수술대에서 막 깨어 났을
때와도 같이 세상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목구멍에서는 썩은 술냄세와 나무 껍질 속
냄새가 밀려 올라와 수령을 더욱 깊이 파헤쳐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감은 눈꺼풀로 문득 환환 빛이 느껴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어젯밤 아니, 오늘 아침에
비틀거리며 들어선 방 안 공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갑자기 울컥 구역질이 났다. 이걸
여자들이 남자 냄새라고 하나 보다. 밖에선 가끔 어색한 웃음 소리와 둔탁하게 테니스
치는 소리가 엇갈리어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야지...
얼굴이 끈적걸렸다. 의식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를 깨웠지만, 일어나고 싶은
욕망도 의무감도 의지감도 의지도 없었다. 세상이 조용했다. 갑자기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불안을 넘어선 조바심으로 나를 일으켜
앉혔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이층 침대 사다리를 붙잡고 발을 내리려
했을 때, 아찔 어지러워서 하마터면 방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남쪽 윙(Wing:방사형 아파트의 각 방향) 끝까지 달려가 정수기에 목을 들이밀고
정신없이 벌컥벌컥 물을 넘겼다. 그리고 수도꼭지에 매달려 깊은 숨을 몰아 쉬면서
다음 동작을 생각했다. 이 시간에는 화장실에 화장지도 남아 있지 않을 거고, 점심
배식시간은 지난 지 오랠 테니 태화반점에 가서 자장면 곱빼기 나 먹을 생각을 했다.
어지럽게 널린 만화책 틈새에서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신지 않았을 법한 양말을 짝에
관계없이 골라 내어 적당히 꿰어 신었다. 홀에 설치된 전화기에서 주인 없는 방을
향해 벨이 저 혼자서 열심히 울고 있는 소리를 뒤로 한 채, 기숙사 유리문을
밀어젖혔다.
어느새 버드나무에 저토록 하염없는 연두가 물들었을까? 어느새 저토록 활짝 핀
개나리 꽃잎들이 노랗게 가지러지며 봄을 겨워하고 있었을까? 대학에 입학하며 처음
만남 나의 서울은 지금껏 몇 번이나 봄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축제의
한가운데서 과연 몇 번이나 춤을 출 수 있었는지.
식당 입구에 몇몇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학생회에서 부족한 도서관 자리
배정을 공고한 모양이었다.
과학원의 공간은 너무 좁다. 1971년에 세워진 이 과학원은, 설립 초기에 스탠포드
대학의 터번 교수가 한국 경제의 성장 속도에 따른 제반여건을 몇십 년 내다보고 장기
계획을 세워 설계했다는데, 실은 그 스스로도 몇 년 전에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는 그
발전 상황에 놀랐다는 말이 있다. 터번의 예측에는 엄청난 오차가 있었다. 그 동안
우리의 경제는 급속히 팽창했고 이에 따라 많은 인적 자원이 요구되어 과학원생의
수도 그에 따라 매년 늘어온 것이다. 따라서 과학원의 공간은 이미 팽창의 극에 달한
이용자들로 인해 비좁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의
자리도 턱없이 무자라 자리 다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다. 학생회에서는 도서관
자리가 부족하여 발생할 수 있는 학생들 간의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석사
1년차를 상대로 해마다 봄이면 도서관 자리를 추첨으로 배정, 공고하였다.
도서관은 본관 건물 4, 5층에 있는데 4층은 올라가야 할 계단 수도 적거니와 서가가
있어서 이용하기가 수월할뿐더러 복사실이 서가 안에 있는, 도서관의 노른자위였다.
하지만 5층은 가건물로 지어졌기 때문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단점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가건물, 즉 콘센트 건물을 깡통 건물이라 불렀다. 그런데 나는
불행하게도 깡통 건물에 배정이 되었다.
하필이면 깡통 건물이라니. 한참을 휴게실 소파에 앉아 떨더름한 기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데 박경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얌마, 니 자리 어디냐?"
"야, 말도 마라. 깡통 건물이더라. 넌?"
"이거 무 이러냐. 과학원이라고 왔더니 기숙사에서 공부하게 됐다. 난 두명이
배정된 자리더라."
"나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구나. 30 퍼센트의 확률이 내겐 안 떨어졌으니까. 너는
좋겠다. 네 시간표 챙기고 다른 사람 시간표까지 챙길 수 있어서."
"낯에는 시간표 따져서 서로 피해 앉으면 된다지만 밤에는 별수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기숙사에 로라가서 하기로 했다."
"야 임마, 너 배짱 있잖아. 몰아내."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맘 편하게 기숙사에서 조용히 하지. 근데 너 수업에 왜
안들어 왔냐?"
"어제 술 엄청 먹고 사경을 헤맸다. 또 리포트 나왔냐?"
"왜 아냐? 오늘 시작한 책 오늘 다 끝내고 ALDEP,CORIRAP,CRAFT(공간을
효율적이고도 최대의 능률을 올릴 수 있도록 배치하는 데 따른 컴퓨터 프로그램들)다
돌려 오랜다."
"언제까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대학에서 다 배운 거라고는 하지만 다른 숙제도 많고,
수업 시간마다 윤전기로 신문 찍어내듯 척축 나오는 페이퍼(Paper:논문)도 모두
읽어야 하는데다 리포트까지 나왔으니, 이거 또 컴퓨터 앞에서 날밤 새우게 생겼다.
갑자기 희종형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교수님들이 내주는 숙제 다하고 수업하는 것 제대로 다 따라하다간 한
학기도 못 마치고 청량리나 용인으로 수용될 거다.'
졸업한 선배들이 지어 준 휴게실 안은 여전히 바둑과 장기를 두는 사람들과 도서관
배정에 따른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박경태는 도서관 자리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느 틈에 과 사람들과 어울려 호탕하게 웃어가며 내기 장기를
두기 시작했고, 나는 인수봉을 바라보았다.
나는 과학원에서 바라다보이는 풍경 중 이 자리에서 보이는 인수봉을 제일로
삼았고, 또한 소중하게 여겼다. 이곳에서 인수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울컥하고 푸른 슬품이 밀려 왔다. 이러한 느낌은, 언젠가 설악산에서 마주친 선녀못에
드리운 산그림자와, 그 바닥 모르게 깊고 그즈넉한 짙푸름에서 오는 마력이, 마치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죽음이 빛깔처럼 느껴졌을 때와 같았다.
죽음의 빛깔.
그때는 그 선녀못에 뛰어들고 싶은 욕망이 왜 그리도 강했던지.
인수봉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빠지다가 이내 어젯밤 일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
서영이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영이는 어제 이별을 선언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유가 우스웠다. 내가 너무 완벽주의자라니 너무도 우습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녀에 대한 나의 모든 행위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틀로
이루어졌다. 만남에 앞서 늘 치밀한 계획과 시뮬레이션(Simulation:현실 세계를
수리적 모델화하기 힘들 경우 실제 그대로의 상황을 설정하여 실험하는 방법)이
이루어졌고, 만남에 임했을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고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바심이 설령 마음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기에, 그려는 그 동안 묘한 피곤함을 느끼면서
만나고 만나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소한 문제로 헤어져 버린다면, 그 긴
세월을 두고 The은 나의 정성은 무엇으로 보상받는단 말인가? 내가 그녀를 그토록
그리워하며 보낸 숱한 나날과, 간절했던 기도와, 때로는 내 마음 속의 금기마저 깨야
했던 시간을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떠벌리지만,
그렇게 하여 남는 것이 공허와 허망감뿐이라면, 아낌없이 줄 수 있을까?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쪼아내어 되씹는 고통과 배신감 그리고 쓸쓸한 절망일 뿐. 그밖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보상 본능과 수여 본능이 어우러져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머리가 어지러웠다. 멀리
보이는 인수봉이 마치 그녀의 흰 이마와도 같아 보였다.
그래.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이 얼마나 있었어? 늘 우린 서로를 재기 바빴고, 서로 확인하려고만
했을 뿐 마음의 벽을ㄹ 헐어 버리지는 못했어. 더욱이나 저절로 벙글어 터지며
피어나는 젊음의 환희 같은 것을 누려 본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그
기쁨만을 느끼려 하지는 않았어. 나는 시지푸스 신화에서처럼 늘 새로운 보따리를
싸들고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그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웃어
버리기까지 했었지.
그녀는 늘 모든 일에 자신 있어 했다. 간혹 나는 그저 그녀 생활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느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먼저
이별을 선언했고 가끔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화해의 신호를 보내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기력하게 그녀에게 달려 가곤 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를 가까이 한다는
일이 두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그녀도 내게서 떠나 버릴 것이라는 불안이
늘 나를 괴롭혔다. 그녀가 떠나 버린 뒤에 나한테 닥쳐 올 그리움의 그림자. 그것을
상상하는 일은 무섭다 못해 몸서리 처질 정도였다. 그래서 가끔씩 폭탄처럼 내뱉는
그녀의 이별 선언은 나를 그만큼 황폐하게 만든 게 사실이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아무리 나를 합리화하고 그녀의 단점을 들추어 내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나를 학대하게 되고, 또 그녀의 얼굴이 또록또록
생각나서 더 보고 싶어질 따름이었다. 사실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니 그것보다는 사랑의 근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그리고 이렇게 많은 여자들 중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 하나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뱃심 좋게 그 어려운 사랑에 대한
본질까지를 개념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에 대한 실체를 내가
잘 알고 있는지 자문하여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제대로 정리해 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때마다 나는
게으름을 피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이 솟아오르면 단지 막연히, 아니
어떤 때는 미치도록 보고 싶은 감정 하나만을 그 이유로 삼아 버리고는, 그녀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달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조용히 참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요즘 들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미래가 잉태하고 있을 불확실성이 문득문득 느껴져서 머리 속에 성냥개비로 탑을 쌓아
두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영에 대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총체적인 불안정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5층 휴게실은 음악 서클 '석향'에서 틀어 놓은 음악의
볼륨이 자꾸 올라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소란스러워졌다. 휴게실은 석사
1년차들의 휴식 공간이다. 더러는 2년차나 박사과정 형들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들에겐 랩(LABORATORY의 약어:실험실)이라는 감옥(?)이 따로 있어서, 이곳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오는 곳이라기 보다는 분을 삭이는 곳이었다. 과학원에서 살다 보면 머리
식힐 일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넘는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졌을 때, 교수와의
싸움에서 졋을 때, 세미나에서 깨졌을 때 등등. 패배는 많고 분노는 작아야만 했다.
과학원에서는 누구나 랩에 들어가야 한다. 과의 특성에 따라서는 입학과 동시에
랩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1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과 더불어 결정되는 예가
많았다. 랩이 결정되지 않은 석사 1년차들은 한 학기 동안 자기가 원하는 실험실에
들어 가기 위해 열심히 도서관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도서관 5층
휴게실은 석사 1년차들의 휴식처였던 것이다.
과학원의 편의 시설은 5층 휴게실말고도 몇 개가 더 있다. 과학원생 중 몇 안되는 ,
아침에 부지런한 사람이 이용하는 세 코트짜리 테니스 장이 있는데, 아침이면 국가
대표 선수였다는 아주 당당하게 생긴 여자 코치가 얼마간의 코치료를 받고 원생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친다. 이 여자 코치는 항상 햇볕에 그을린 탓인지 조금만 어두워도 안
보일 정도였다. 나도 입학 초기에 강습을 받을까 했지만, 희종형이 웃으며 아침밥
먹는 사람수를 세어 보고 난 뒤 결정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실제로 과학원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은 전체 인원 수의 10퍼센트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개중에 밤새워 술 마신
뒤 가까스로 아침을 먹는 사람들을 뺀다면 상당히 재미 있는 수치가 나올 수도
있음직했다.
체육 시설로는 테니스 코트말고 탁구장이 있다. 그곳은 휴식 공간의 부족을 인식한
역대 학생회가 어렵게 마련한 것이다. 이 탁구장은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2호관
옥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기숙사 건물 중의 하나인 혜정사 지하에 있다. 그 혜정사가
지하에는 운동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낡고 구식이어서 흡사 일제 시대 지하
고문기구들을 보는 것 같았지만 있다는 기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탁구장도 민첩한
행동 없이는 치고 있는 사람이 미안함을 느낄 때까지 벽에 공을 튀기며 묵묵히
기다려야 했고, 일부 광적인 야행성 원생들의 오밤중 탁구 체조는 혜정사 관리
아저씨의 수면을 직접적으로 방해했다.
각 기숙사 꼭대기에는 쿠션 좋은 소파와 TV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원생들의
주식이 되다시피한 라면을 끓이는 방이 있다. 그런데 기숙사가 비좁아서 이 옥상에도
방을 하나 마련하여 원래는 다리미질하는 방이었다-3명의 원생이 기숙하고 있었다. 이
원생들은 좁은 공간과 추첨이라는 제도의 희생양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밤마다
들리는 TV소리와, 라면 끓여 먹으며 서로 이야기 하는 소리, 때로는 밤늦도록 TV뒤에
설치되어 있는 탁구대를 이용하며 지르는 괴성 때문에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해
만부득이 도서관을 잠자리로 이용해야 했다. 불행 주 다행이라면 이러한 악조건의
잠자리 훈련으로, 논문이 시작되는 날부터는 미리 갈고 닦은 실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의자 침대-밤샘하다 지치면 실험실의 의자를 붙여 놓고 잔다-생활을 훌륭히
해 나간다는 선배들의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나중 일이고, 우리는 이 악명
높은 옥상의 방에 배정되지 않은 걸 감사가게 생각했다.
물론 방을 배정받는 절차는 공평하기 때문에 다른 소리는 없었다. 기숙사 방을
배정받을 때는 우선 신학기 초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최대한 세 명까지 조를 짜서
서류를 제출한다. 물론 한 명만으로도 신청은 가능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
순서이다. 기숙사 관리실에 가면 함 속에 노란 봉투가 들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꺼내어 보면 거기에 호수가 기재되어 있어 1년 동안의 주거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만약 조를 짜서 제출한 경우, 심지를 잘못 뽑은 자는 1년간 방에 관한 한 모든 일에서
발언권은 제로에 가까웠다.
과학원생치고 야행성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원측에서는 원생들의 야행성 생활 방식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식당에 저녁 9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는 야식 판매장을 오래 전부터 마련해 놓고 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식당과 여타 원내 생활에 관련된 일을 담당한다는 학생회
생활간사가 이 야식 코너를 소개하면서, 라면 하나에 계란을 하나 '톡'풀어서 250원
한다는 말에 모두 웃은 기억이 있다. 이 야식 코너의 메뉴는 간단하다 못해 소박함의
그치였다. 메뉴로는 생달걀 하나를 툭 풀어주는 라면과 정확하게 말한다면 오직
시금치, 단무지만을 넣은 김밥이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과학원에는 매점이 두개 있다. 하나는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 30분까지 운영하는
식당 옆의 매점인데, 여기에는 일반 생필품에서 문구류, 스넥류뿐만 아니라
속옷까지도 준비되어 있다. 또 하나는 혜정사 1층에서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운영하는 매점인데 음료, 스넥류,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제일 잘 팔리는 라면이
준비되어 있다. 이 라면의 막대한 수요로 인해서 학생회에서는 시식회를 통하여 그
품목을 선정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이것들이 편으 시설의 전부였다. 이렇듯 이천여 명에 가까운 원생들의 공간은 어찌
말하면 연구를 위한 최소 단우의 공간만을 부여받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풀어가야만 했다.
"이윤재, 니 밥 묵읏나?"
"아니, 뭐 나왔디?"
"오늘 특식 아이가, 목요일이라."
동하는 휴게실을 빙 둘러보며 생각은 딴 곳에 두고 물었다. 그래 오늘은 3번째
목요일인 특식날이다.
원생들의 식사에 대한 불만은 꽤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년 내내 집단 배식을
받다 보니 질리기도 했을 거고, 일종의 과학원생이라는 특권의식이 작용헀음직도
했지만 문제는 식비였다. 과학원 식비는 경제 기획원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매년 식사
단가는 동결되었다. 그리고 식당이 독립 채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 식비에서 식당
종사자들의 이넌비가 나가는데 그 인건비는 매년 상승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식사
단가가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
나는 경태를 잡아 끌고 식당으로 갔다. 배식줄은 1호관 3층까지 불어나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며 1층까지 왔을 때 게시판의 체육 대회 예선 결과를 살펴봤다. 나는
원래 운동 신경이 무뎌서 운동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요즘 들어 선배들 몇몇이 우리
과에 체육 특기자가 들어 왔다며 체육 대회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체육
특기자는 다름 아닌, 바로 박경태였다. 과연 우리과는 1차 예선을 모두 통과했고, 2차
예선까지 통과한 종목도 있었다. 식당 입구의 상자 위에 놓인 냅킨과 정기적으로
나오는 불교 서클지인[바라밀다]를 집어들었다. 식사 메뉴는 불고기 였다. 식당
아저씨, 아줌마들이 일렬로 서서 국그릇에 쪘는지 삶았는지 모를 고기를 한 그릇 가득
떠 주었고, 식판에 야채와 몇몇의 부식을 올려 주었다.
처음에 입학해서는, 식당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고 이상해서 식사를 못하고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때가 있었다. 이건 도무지 식당이 아니고 행위 예술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대부분 집에서 입는 허드레 옷처럼 구겨지고 늘어지고
칙칙한 빛깔이었고, 거의가 슬리퍼 차림이었으며, 눈동자에는 삶에 대한 집착이라기
보다는 좌절에 가까운 광기가 어려 있었다. 더러는 아무런 목표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의 눈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풋풋하고 생생한 젊음을 나타내는
기색은 식당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태가 불고기를 한 입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야, 너 요즘 왜 그러냐? 4년 내내 수업 한 번 빠진 적이 없는 놈이 수업도 안
들어오고. 오늘 술 한 잔 할래?"
"글쎄다. 나도 왜 그러는재 모르겠어. 일종의 정복감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야
세상을 알 것도 같기 때문인지..."
"짜식. 세상 다 산 놈 같다. 그러지 말고 오늘 밤에 도서관으로 한 열두 시쯤 와라.
숙제 좀 하고 같이 나가자. 그리고 축구 준준결승인데 너도 응원 좀 나와라. 어제
농구 할 때도 선수만 나왔더라. 바쁘지 않은 사람 어디 있냐? 모두들 바쁘고, 그래.
뛰는 놈은 뭐 놀러 과학원 왔냐?"
아직도 꺼슬꺼술한 속인지라 고기가 들어갈 리도 없고 밥 맛도 없어서 먹는 등 마는
둥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나는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너무도
개인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해 학생회에서 친절하게도, 제시판을 피해 식당 앞
유리창에 붙여 놓은 대진표를 확인했다.
체육 대회라고 해서 대학 때처럼 휴강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게임은 거의 오후
4시 이후에 있었다. 따라서 과 대표 선수들은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게임에
뛰려면 수업을 빠져야 하는데, 한 시간만 빠진다 해도 근 일주일은 고생해야 하고
또한 수업 도중에 밖으로 나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가 않았다. 수업에 들어오는 인원이
많아야 20여 명인데 만약 자기가 가고 싶은 랩의 교수님 수업 시간일 경우는 더더욱
빠지기가 곤란했다. 대학에서야 수강 인원도 많고 해서 안 들어가도 그만이고, 출석
점검만 끝나면 뒷문으로 살짝 빠져 나간들 아무런 죄의식도 없겠지만, 이 경우는 벌써
학업과 랩 선태기라는 두가지의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체육 대회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는데, 단체에 대한 소속 의식이 강한 사람들애겐 큰 고민거리였다.
그런 판국에 선배들이 이번 체육 대회에 부쩍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유는 우리
과가 인원수는 적은 데도 불구하고 예선을 모두 통과한데다가 , 5년째 우승의 위업을
자랑하고 있는 전산과의 전력에 차질이 생겨, 우승 후보의 강력한 다크호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감한 전산과도 매일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느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부터 석사1년차가 모여서 마라톤 연습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무엇이든 자기 싫어하는 과학원생들의 끈질긴 고집과 집념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전산과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체육 대회를 준비하는
학생회에서 원생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체육 대회 당일날의 학과 인원수 대비
참석자의 비율을 웨이팅 팩터(Weighting Factor:가중치)로 하여 각 점수에 곱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이팅 팩터는 재적 인원수가 가장 적은 과의 참석률이 높을수록 가장
높았고, 재적 인원수가 가장 많은 과의 참석률이 저조했을 때 가장 낮도록 책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산과의 인원수는 전자과나 기계과에 버금갈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갓 들어온 1년차들의 단합과 관심을 유도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기실 마라톤에
배정된 점수가 가장 컸던 탓이다.
경태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모처럼 도서관에 들어갔다. 벌써 도서관안은 이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잘됐다 싶기도 해서 짐들을 챙겨 5층 깡통 건물에 올라갔는데, 내
자리에는 아직도 옛 주인의 물건들로 그득했다. 별수 없이 메모를 남겼다.
'내일 12시까지 비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레 퀴즈가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진짜 모레 퀴즈(간단한 시험)가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러 때 경태밖에
더 있냐 싶어 경태 자리에 갔더니, 그 녀석 책상 위에는 그이 명물인 벗어 놓은
양말짝은 보이지 않고 보기에도 남사스러운 여자 물건들로만 가득했다.
'어쩐지 그렇게 뻔뻔스러운 놈이 일 대 일로 싸워서 질 리가 없는데, 기숙사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이유가 있었구나. 짜식, 여자에겐 약해 빠져가지고.'
휴게실에 올라가자 경태는 열심히 장기 훈수를 하고 있다가 내가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나며 철우한테 소리쳤다.
"야, 가자! 조철우, 너 오늘 나한테 졌잖아. 술 사야지."
혀 끝에 장난기를 듬뿍 묻혀 가지고 말없이 착하기 만한 철우를 몰아 세웠다.
"좋다. 가자! 오늘 재수 드럽게 없네."
철우는 여전히 하얀 얼굴로 웃으며 장기알을 추스려 담았다. 나에게 있어 이들은,
촌닭으로 서울에 처음 올라와 대학 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지내 왔기 때문에, 언제나 형제처럼 위했고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박경태는 항상 활달하고 장난기가 많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남다른 리더십을 천성적으로 타고났음인지 단체에 대한 개념이 강했으며,
좀 지나칠 때에는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주의나 폐쇄주의가 단체를 일정 기간 동안 뭉치게
하는 데는 최고의 무기인지, 경태가 주도하는 단체는 늘 강한 결집력을 발휘했다.
대학 때도 과대표를 하면서 유난을 떨었다. 학내외 집회뿐만 아니라, 각 대학(특히
여자 대학)축제 때는 그 대학을 과원들이 누비고 다녔다. 따라서 다른 과
사람들로부터 확고한 신념 없이 대중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고
했는데, 실제로 경태는, 시대에 대한 부조리를 알기는 했어도 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만한 사고의 틀을 준비하고 있지는 못했다. 다만 후배들에게 논리성과 정확한
분석력을 기룰 수 있도록 학회 단위 조직들을 잘 정비하고 운용했었다.
철우는 늘 말없이 지내기를 좋아했고 실력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극단적인
현실주의자였다. 이는 젊음이라는 과실을 맛 보기 전인 우리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태도였지만, 그의 신체적인 장애가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약간 절었으나 목발을 사용할 만큼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는 대학 졸업할 떄 개근상 제도가 있었다면 정근상 정도는 무난히 탈
사람이었는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싫어해서 과 단합 대회나 엠티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경태와 나는 이러한 철우의 생활 방식과 사고를 고쳐 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그 예로 철우를 모든 모임에 끌고 다녔고, 그의 신체적 장애를 아주
드러내 놓고 이야기했다. 그 때마다 철우는 우리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신뢰하였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 생각대로 접근했고 철우는 철우대로
그의 성격을 고집한 것이다. 경태와 내가 철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 4학년 때였다. 그리도 학교 수업을 빠지지 않던 녀석이 웬일로 수업엘
들어오지 않았다. 경태와 나는 쾌재를 부르며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속의 철우는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전화를 건 상대가 나라는 알고는 애써 밝은 체를 하며 말했다.
"오늘 형 결혼식이야."
"근데 넌 왜 집에 있..."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아 오르는 것을 참았다. 그렇다! 그를 가지 못하게 막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그가 스스로 그 곳에 가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내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쓸쓸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는
고독을 인내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 날 이후 그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나는 무척 우울했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아픔을 절대화시킨다. 인간이 사회화 과정 속에서 겪는 아픔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일 수바까에 없고, 친구란 그저 그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정도 아닌가. 인간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유형의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성품의 결과치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고 그 이전의 삶에는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다만 성공한 사람의 과거만이
아름다울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콤플렉스는 그 대소와 강약을
막론하고 당사자에겐 절대적인 아픔이고, 그 아픔을 상대적으로 타인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과학원 학사부 잔디밭은 항상 깨끗한 얼굴이다. 이 좋은 바람과 이 좋은 하늘의
별들과 동무하며 환한 등불만큼이나 말끔한 얼굴을 하고, 밤이면 이처럼 외롭게
펼쳐져 있다. 우리는 잔디밭의 괴괴하리만틈 고요한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계단을 따라서 과학원을 빠져나와, 경희대 입구 언저리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를 향해
의견의 조정이나 협의 없이 굴러갔다.
제기동 고래 대학교에서 종암동 쪽으로 한발짝 떼다가 홍릉을 향해서 들어오면 국방
과학 연구소와 과학원 연구부(구KIST), 산림청 정문이 나온다. 그 정문을 지나 산업
연구원의 연못을 우측으로 바라보며 산림청 담장을 따라 올라오다 보면 높은
언덕받이에 보일 듯 말듯한 건물이 보인다. 그 곳이 바로 과학원이다. 이 길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늘 한적하고, 길 양편으로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울창한
숲이 있다. 이러한 한적한 길은 거의 경희대 입구까지 이어진다.
원생들이 가는 술집은 대부분 경희대 입구 언저리에 있다. 이상하게 지리적으로
뚜렷한 구분도 없고 특별한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학원생이 가는 술집과
경희대생들이 가는 술집이 자연스레 구분 지워져 있었다. 입학해서 이러한 이유를
풀기 위한 여러 차례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외상 가능과 불가능의 차이였다. 기실
나는 입학해서 지금까지 과학원 앞 술집에 들어가 술값 걱정을 해 본 일이 없다.
처음으로 술집에 들어선 날 한 번의 등록으로 얼굴이 술값을 대신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 술집 주인들의 기억력이다. 한 번 들르기만 하면 얼굴뿐만이 아니라 학과와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과별로 학년차별로 잘 정리된 외상
장부는 흡사 출석부와도 같았다. 이러한 술집의 숫자는 실히 10여 개는 되고 음식점도
두엇, 부담없이 갈 수 있는 할머니 집이란 가게도 하나 있었다.
실내 포장마차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과학원 앞 술집은 오후 5시경에 문을
열지만, 실질적인 영업은 과학원생들이 출출해지는 밤 11시나 돼야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5시에서 길면 7,8시까지도 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일찍 나온 셈이다.
소주 한 병에 이 집의 명물인 오징어 물회와 병어회를 시키고 나자 철우가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윤재야, 너 요즘 왜 그러냐?"
"글세 특별한 이유는 없어."
"얌마. 거짓말하지 마. 서영이하고 뭐가 또 잘 안되는 거 아냐?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임마. 너는 너무 생각이앞서. 남자는 행동이 중요한 거야. 너같이 고지식 한 놈은
연애하기 힘들어."
경태가 술을 한 잔 쭉 들이키며 꼬집어 내었다.
"솔직히 경태 네 말이 맞다. 어저께 헤어졌다."
"헤어져? 헤어지면 물 하나, 이 사람아. 내일이면 또 만날 거잖아. 아이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볓 번째 헤어지는 거냐?"
"아냐. 이번엔 좀 심각해."
"네가 심각하지 않은 적 있었냐? 여자도 동물이아. 여자에 대한 애정 표현이
소설에나 나오듯 그렇게 정중한 거만으로 되는 줄 아냐? 여자들에겐 직접적이고
강렬한 표현이 더 중요한 거야. 임마! 딴소리말고 일요일 같은 때 야외에 나가서
적당히 분위기 잡고 키스해 주면 되는 거야. 육체적 접촉은 정신적 사랑이
도화선이다! 캬아 좋다. 내말 알겠냐?"
"아냐, 나도 정신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없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걔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이거거든. 너도 알겠지만 네 말대로 할 나이는 이미 지났어.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나이잖아."
"너 성여이 좋아하지? 그러면 된 거 아냐. 지금부터는 서영이가 널 좋아하게 하는
일만 남았잖아. 그렇다면 지금은 너의 강한 표현만 중요할 뿐이지 마음 속에 가춰 둔
하나하나의 조건까지 끌어 내서 조각조각 맞춰 봐야 되냐? 그리고 서영이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미쳤다고 지금까지 만나고 있냐?"
답답하다는 듯이 쏘아대는 경태를 보고 있던 철우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경태의
얼굴을 위아래로 가볍게 쓸어 문지르며 물었다.
"그렇게 잘 아는 너는 왜 아직 여자가 없냐?"
"짜샤, 나는 너 하나면 충분해 임마."
경태가 철우의 살찐 가슴을 움켜 쥐며 웃었다. 어느새 장난으로 들어선 그들을 보며
무언가 부정을 해야만 될 것 같은데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슬며시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날 뿐이었다. 술잔이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잊기 위해서, 그 동안
철우와 경태는 어느새 화제를 도려 제조 공학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기 시작했다. 둘은
학문에 관한 토론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원수같이 싸웠다. 드디어 둘은 종착역인 인신
공격의 단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사실 철우는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자하가에
가까운 체념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 난 무식해서 거기까지밖에 모른다."
"누가 너보고 무식하다고 했냐? 네 개념은 너무 협소하다 이거야."
"야, 너흐들 그만 싸우고 나가자! '이프'에 가서 한잔 하자. 요즘 이프 아가씨가
바뀌었다고 하던데 꽤 이쁘다더라."
"이미 소문났어. 담배까지 피우고 무슨과 박사 과정 형이랑 사귄다고 하던데? 야,
박경태 너는 마냥 우기는 경향이 있어. 그래 난 독선적이다. 그리고..."
사실 과학원생들이 가는 술집. 즉 카페는 퇴폐적인 곳이 아니고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학문적인 대화, 기타 등등의 대화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아가씨가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가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들은 술을 날라다 주고 음악을 틀어 주는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이 울그락붉그락해진 철우를 달래어 이프로 자리를 옯겼다. 우리는 어느
술집에 가든 양주나 와인 이외에는 맥주 3병을 시켰다. 과학원 아파에서 술을 마실
때는 안주를 시키지 않아서 좋았고, 기본으로 언제든 채워지는 팝콘이나 땅콩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가씨 음악 좀 틀어 주세요. 나나무스크리 걸로요."
"야! 청숭 좀 그만 떨어라. 너 파르덴네르무안지 용서하세욘지 뭔지 들을려고 여자
만나냐? 저건 대학 때부터 여자하고 안 돼면 저거 듣느라고 정신이 없어."
"다아 제 멋에 산 더라. 놔 두라. 윤재야. 너 저 노래하고 무슨 사연있냐?"
"왜 한번 이야기했잖아. 그 머리 긴 여 애가 헤어지면서 들려 준 노래 아니겠냐."
"놀고 있네. 그거 언제 쩍 얘기냐. 선사 시대 이전 아니냐?"
"그래도 그땐 참 순수했었지. 헤어지자는 말을 그대로 믿었고,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단지 그 여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었지. 뭐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시간도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한번 문제가 발생하니까 수습할 도리가 없더라고.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거 아닌데
그때는 어찌나 심각했던지..."
차츰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늦어지고 간간이 말을 끊던 경태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술 좌석이 하나 둘 늘어 가고 조그만 카페 안은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로 가득찼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 담배 연기 속으로 묻혀 들어가 뭔지
모를 아늑함을 창출해 내었다. 그 가운데 항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철우만
나의 말을 기다리며 잔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는 철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흔히 침묵이 몱 오는,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긴장감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지나간 날들을 하나 둘 떠울리며 뿌듯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철우와 조오레 나가 배짱 좋게 돈 없이 술을 마시다가
공대생에게는 생명 같은 전자 계산기를 전당포에 잡혔던 일, 몇 번 해보지도 못한
미팅 중에서그와 파트너를 슬쩍 바꾸었던 일, 시험 공부 다 끝냈다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시험 시간에 늦어 D학점이라는 수모를 겪던일, 바쁘기만 하던 방학 생활
중에 시간을 쪼개어 캠핑을 갔을 때 재래식 화장실에 가기가 걱정스럽다며 소식을
하던 결벽주의적 웃음, 학회 일로 한참 정신없는데 불쑥 찾아와 나더러 변했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기억들이, 마치 내일이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추억으로
슬라이드 넘어가듯 떠올랐다.
"청우야! 요즘 들어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이다. 자, 마시자!"
"그럼 요즌 기분 나빴던 일들을 이야기해 봐. 그 요인이 있을 거 아냐."
"으음 그렇지. 첫째는 흐트러진 내 생활과 삶의 자세, 나의 위치, 둘째는 진정한
인간의 행복, 셋째는 삶의 이유, 넷째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식 등등이지 뭐."
"그래 난 복잡해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는 방황은 짧을수록
좋다는 거야. 삶을 성실히 살아가겠다는 다짐 이외에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있다고 치더라도 대답 없는 질문은 피하는 게 좋은 거 아냐?"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못한 걸 어떡하냐? 잠자리에 누울라치면 이러한 무수한
생각이 잠을 못 이루게 해. 내 삶을 성실히 살아왔다고 자부를 했는데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내가 누린 게 과연 무엇일까? 과연 이 세상이 규정하고 있는 관습과
규칙에 따라 사는 삶만을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규범 속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쁘기만 한가? 나의 환경이 극도로 열악했다면 나 역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업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 세상에는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평등이란 후회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라 생각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으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그래 흔히 용기가 없기 떄문이라고 이야기들 하지. 그러나 그러한 요기 역시
일정 환경하의 조건에 지나지 않아. 성직자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자신으 환경을
거부할 수 있어? 누가 함부로 자기의 가족과 친지를 덤덤히 바라볼 수 있냐고?
우정이다 효도다 보은이다 등등의 미명 아래 많은 구속이 현실에서 우리를 옭아매고
있잖아."
나는 서영의 이야기를 피하기 위해서보다는 요즘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한 뭔지 모를
두려움을 말하다가, 너무 흥분한 나를 발견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른 술 한잔을
들이켰다.
철우는 빙그레 웃더니 술잔을 기울여 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순박한 눈빛을 내
눈에 가득히 부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시원하냐? 네 병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다. 그래 다 잊고 술이나 한잔 하자."
갑자기 억울했다.
'짜식 기껏 이야기했더니 해탈한 승려마냥 웃기나 하고, 괜히 쓸데없이
나불거렸잖아.'
"술은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해. 단지 잠시 잊게 할 뿐이고, 술이 깬 후 다시
돌아와 버린 나 자신을 바라보면 처절해질 뿐이야. 그렇다고 시간이 해결해 주지도
않아. 시간은 오직 운명이나 신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할 뿐이지."
나는 점점 취해 가고 있었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어지러웠다. 그리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더니 결국 엉켜 버리고 말았다.
서영의 하얀 손가락이 떠올랐다. 말을 할 때면 버릇처럼 허공을 휘저어 대는 그녀의
손가락은 나를 구석으로 몰아대기 일쑤였다. 그녀는 내말에 복종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권능으로 나를 잡아 휘두르며, 나에게는 오로지
복종만을 원했다. '사랑한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나는 그녀 앞에 서면 아무 것도 생가이 나지 않느다.
나는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진다. 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실패는 무엇일까?
나의 과거에는 실패란 없었다. 나의 능력과 성실한 자세로 모든 시험에 화려하게
합격해 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의 실패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허물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라면 나는 과연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인가?
내 청춘의 하루가 또 이렇게 가는구나.
2.작은 기쁨
기숙사 스피커에서 부저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천둥 치는 것 같은 육성이 울려
퍼지는 바람에 깜짝 잠에서 꺠어났다.
뚜우, 뚜우, 뚜우,
"원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금일 오전 8시 30분부터 한국 과학 기술원 제14회 체육
대회가 서부 운동장에서 열립니다. 원생 여러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학생회에서 원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금번 체육 대회는..."
기숙사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한 높여 놓고 학
과학원에 기숙사는 총 6개 동이 있다. 그 중 3개 동은 본관에서 잘 닦아 놓은
시멘트길을 따라 산봉우리 쪽으로 3분 정도 거리에 있는데 서울 시내 웬생회 간부가
떠들어 대더니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부저 소리가 온 기숙사를 흔들었다. 그렇게도
기다려지던 부저 소리가 이렇게까지 악랄한 용도로 사용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만한
곳에서도 보이는 '파정사', '혜정사', '소정사'가 있다. 이 이름들은 학생회에서
공모하여 붙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 뜻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소정사, 파정사는
1년마다 석사 1년차와 2년차가 번갈아가며 사용했고 혜정사는 반을 갈라 박사 과정과
여학생들이 사용했다.
기숙사의 방 번호는 소정사의 경우 각 윙을 동, 서, 남으로 칭하여 동35하면 소정사
동쪽윙 3층 5호실을 의미했다. 파정사의 경우는 N,E,W로 나뉘었다.
기숙사의 전체 모양은 방사형이다. 즉 세 방향으로 길쭉이 윙이 있고, 각 윙마다
양쪽으로 4개씩의
방이 있다. 방문에는 기숙자들의 사진과 학과 및 이름이 붙어 있다. 또한 윙 끝에는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못 미처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왼쪽에는 샤워실이 있다. 그리고
각 층의 샤워실에는 각 1대씩의 탈수기가 있다. 그리고 각 층의 서쪽 샤워실에 가면
벽면에 정수기 꼭지가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
원래는 방 하나에 2명이 쓰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기숙사의 부족으로 3명씩
사용하는데도 많았다. 그런 방에는 술 많이 마신 날에는 걸쭉한 구토물로도 인공
폭포를 마들 수 있는 2층 침대가 들어 있다. 그러나 3명씩 끼여 살아도 자리가
모자라서, 기숙사 혜택은 과학원을 중심으로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들부터 우선권이
주어졌다. 덕분에 탈락자는 천상 집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다. 그러나 과학원
생활이라는 게 출퇴근으로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잠자는 시간도
모자라는데, 오며 가며 길바닥에 뿌릴 시간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애꿋은 친구방으로 가서 침대 메트리스를 빌려 가지고 방
바닥에서 자곤 했지만, 더러는 과학원 근처에 방을 잡았다.
기숙사 방 안에는 책상 3개와 장롱이 하나, 그리고 캐비닛이 하나씩 구비되어 있고
바닥엔 장판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침대 메트리스였다. 침대 메트리스가 어찌나
낡았는지 가운데 부분에 선배들의 등떼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고, 해결책으로 모포를 말아서 가운데
부분을 평평하게 메우고 자는 것이 관례였다.
이 세 기숙사 중앙의 홀에는 세 대의 전화기가 푹신한 소파 앞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그 중 두 대는 송신용이고 한 대는 수신용이다. 시내 전화의 경우는 그냥 걸 수
있지만, 시외 전화는 교환을 통해 신청해야 했고 그 요금은 월말 학자금에서
감해졌다. 전화를 거는 건 그렇다치고 정작은 전화를 받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각
방에 부저를 설치하고 관리아저씨가 해당 방에 부저로 신호를 보내는데, 기숙자들
이름의 가나다순에 따라 한번 울리면 가장 빠른 사람, 3번 울리면 가능 늦은 사람임을
의미했다. 이 전화 부저 시스템은 모든 기숙사에게 공히 적용되었는데, 모두들
잠시라도 한가한 때는 이 부저 소리를 서로 눈치 못 채게 기다리는게 속사정이었다.
그러다가 제 신호가 울리면 당당하게 웃으며 뛰어나가 푹신한 소파에 앚아 일생에
가장 점잫은 목소리로 응답하는 것이다.
나머지 3개 동은 본관에서 언덕을 넘어 '농촌 경제 연구소'쪽으로 난 후문에
위치하고 있는데, 모두 박사 과정 형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을 유정사 A,B,C동으로
불렀다. 유정사는 아파트이기 때문에 포커 치는 장소로는 제일로 삼았다. 원래는
유정사 뒤에 있는 연구소 직원 아파트를 과학원 교수 아파트로 사용하였다지만,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과학원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하락하여 현재는 타연구소
사람들이 쓰고 있다. 또 전에는 이 곳을 석사 과정들도 사용했었다는데, 여름에
더위를 못 참아 번들거리는 선천적 가죽옷을 자랑하는 바람에 아파트 주민들이 자녀
교육상 안 좋다고 하여, 점잖은 박사 과정 형들에게만 입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때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부저 소리였건만, 지금은 악마의 울음
소리처럼 박바악 울어 대는 가운데 나는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더듬어 기시거리를
최대한 좁혔다.
'으이그! 7시 30분! 이 꼭두새벽에...'
사실 어제 과원들이 모두 모여 체육대회 입장식 리허설을 마치고 나서 오늘 7시
50분에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합의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야한다는 일관된 의견에
따라 선진국형으로 조정된 약속 시간이었다. 왜이리 늦잠의 명수들이 됐는지. 하기야
나도 입학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아침 6시에는 반드시 일어나는 남다른 성실성이
있었건만, 입학한 지 한 달 남짓 한데 벌써 기숙사에서 뛰면 3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강의실을 아침 9시가 되어도 도착할 수 없는 느림보가 되어 버렸다.
철우와 경태가 부스스 일어나며 애써 하회탈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는 몽유병
환자들마냥 자의지 없이 걸어다니는 또다른 환자들 틈에 끼여 세수를 하고,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아침을 먹어 보냐는 식으로 식당으로 달려 갔다.
아침식사의 식단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밤새 술 마신 원생들을 위한 배려인지 해장국
중심의 한식이도 다른 하나는 빵 중심의 양식이라까 뭐 그런 종류다. 그런데 대부분의
원생들은 빵을 선호했기 때문에 8시부터 시작하는 배식 시간에서 적어도 30분 뒤까지
식당에 도착하지 못하면 빵을 구경할 행운은 무척 적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난
원생들의 자랑과 확인은 아침 식사가 무엇이었느냐로 결정되었는데, 오늘은 우리도
빵을 먹을 수 있었다.
과원들과 식당 입구에 모여 입장식 준비물을 확인하고 다람쥐길로 향했다. 이
다람쥐길은 과학원 학사부와 연구부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통로로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가 약간 거북한 정도의 폭이지만, 전부가 숲으로 덮여 있는 덕에 참으로
아름답고 운치 있는 오솔길이었다. 이 길의 양편에는 사람이 다가가면 앞길을
자동으로 비춰 주고 다 지나가면 소등되는 무릎 높이의 가로등이 2미터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입학하고 나서 처음 이 길을 발견한 뒤로는 마음이 스산하거나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가끔 찾아 오곤 하는 길이다. 물론 생활이 바빠지면서
다람쥐길의 존재를 잊고 사는 때가 더 많았다.
다람쥐길 중간에는 야간 통행자를 파악하는 초소가 하나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언덕을 타고 내려오면 80년도에 통합되기 전의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 소위
키스트(KIST)라 불리던 한국 과학 기술원 연구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통합 후
학사부의 공간이 부족해서 재료 공학과가 들어간 건물이 시야를 가린다.
한국 과학 기술원(KAIST)은 80년도 5공화국이 임의로 접을 붙인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와 한국 과학원(KAIS)의 합성어다. 이렇게 카이스트로 통합한 후
키스트를 연구부라 불렀으며, 위치상 서쪽에 있으므로 원생들은 편의상 서부라고
불렀고, 과학원은 학사부로 동부라고 불렀다.
그 모퉁이를 약간 돌아서면 직사각형의 큰 연못과 넓은 잔디바타이 나타나고 본관
건물이 튼튼한 모습으로 버텨 서 있다. 이 본관 건물은 행정동으로 원장실을 비롯한
각 행정 전담 부서들이 있고 일층에는 KIST 건립에 도움이 되었다는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존슨 강당이 있다. 연못을 지나 행정동과 실험실이 가득찬 건물 사이로 죽
타고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을 법한 곳에 운동장이 있는데, 말이 운동장이지 국민학교
운동장보다 작은 규모였다. 그래서 한때는 체육 대회를 과학원 앞 홍릉 국민학교나
경희대 운동장을 빌려서 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숲으로가득 둘러싸인
이곳은-소규모 인원이, 그것도 참석률이 매우 저조한 실정까지 감안한다면-체육대회를
하기에는 훌륭한 장소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들은 박사 과정 선배들이 특별히 이번 체육 대회를 위해 만들어 준 플래카드를
양지 쪽에 터를 잡아 보란 듯이 꽃았다. 그리고 준비해 간 한복을 선두에 입장할 한
쌍에게 입히기 시작했는데, 입는 순서와 방법에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우리과 홍일점인 승아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였다.
과학원의 여학생 수는 매우 적다. 전체 인원의 5퍼센트도 채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시설이 부족한 편이어서 기숙사와 식권이 제공되지 않는 산학과 연보들과 더불어
불이익을 당하고 사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자면 건물마다 여자 화장실은
매우 드물었고 그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은 기숙사를 제외하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우리과는 행복하게도 여학생이 한 명 있다. 오늘은 그녀가 그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체육 대회 입장식에 한 명의 남학생과 짝을 이뤄 한복까지 차려 입고 입장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들이 한복을 다 입혀 놓고 둘의 결혼을 축하한다며 입방아를 찧어대기
시작하자, 승아는 운동화를 신은 발로 우리들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다녔다.
과대표인 상징은 인원수를 파악하고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수마에 빠진 동료들을
깨우느라 본부석에 설치된 임시 전화로 뛰어다녔다. 웨이팅팩터에 들어가는 인원수는
입장식에 참석한 숫자이므로 입장식 전의 인원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과대표 선거할 때 일이 떠올랐다. 과대표를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물론 없었고, 추천받은 사람들마저 모두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우리 과 대표는 사다리 게임을 통해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 그만
그가 재수없게 덜컥 당선되었을 때, 웃음 띤 얼굴 뒤에 감추지 못하던 '망했다!'는
표정이 생각났다.
"상진다, 일을 분담시켜서 해. 혼자 어떻게 다 하냐? 내가 뭐 할 일 없을까?"
내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안쓰러워서 한마디를 했다. 상진은 늘 다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않겠다며 일이란 일은 혼자 다 뒤집어쓰고 하는 성격이었다.
"어 그래?야, 잘 됐다. 윤재, 너 11시쯤에 식당에 주문해 놓은 음료수 좀 가져다
줄래? 식원 20장 주면 될 거야. 자, 여기 있다."
"응 걱정은 이불 속에 묻어 둬라. 알아서 대령할 테니까."
과학원에서 식권은 유가증권, 곧 현금이었다. 정부에서 식비를 일부 보조해 주고
있어서 일정액을 내고 매달 바탕이 노란색인 회수권 모양의 조중식용 60장과 석식용
흰색 식권 30장을 살 수 있었다. 물론 일정액은 학자금에서 자동 공제되었다. 식권의
종류가 두 가지인 이유는 저녁 식사의 단가를 높게 책정했기 때문인데 석식용 식권은
후생관에서관리하는 매점에서 현금과 똑같이 사요할 수 있었다. 단, 거스름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 보조비의 명목이 식사에 한하기 때문에 현금으로는
비불할 수 없다는 원측의 해명이었다.
300여 명이 참석한 체육 대회는 9시나 되어서야 시작했다. 과학원 체육대회라고
해서 기대가 대단했는데, 사실 꼭 국민학교 운동회 같았다. 물론 준비할 시간도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모아 입장하는 전체적인 모습이 그렇게 순진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소품이 침대 시트였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우리과는 한복을 입고 입장했고, 어떤 과는 아프리카 추장으로, 어떤과는 그 짧은
시간을 통해 화약총으로 상대 과를 저격하는 장면까지 연출했다. 우리과, 아니 과학원
전체 과의 표적이 된 5연패의 위용을 자랑하는 전산과의 입장식은 많은 원생들의
짓궃은 야유에도 불구하고 화려 찬란한 황제의 행진을 연출하면서 스스로들
즐거워했다.
원생들은 모두 전산과의 5년간의 우승에 편치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전산과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선수폭이 두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과같이 전산과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과는 게임이 중복되면 선수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일단 중복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계속되는 경기 일정으로 인해 체력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마치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있는 것 없는 것 죄다 다 내놔야 하는 팔자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심 전산과의 체육대회에 대한 집념과 결속력을 인정해
주었고 그러한 노력과 정성에 비추어 연속 우승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입장식 준비만 하더라고 과원 전체가 일일이 소품을 준비한 데다가 과원 모두가
행렬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부러움을 한껏 받았다. 그러나 입장식 점수는,
주최측의 농간이라는 전산과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번 체육 대회에서
전산과의 연속우승을 막아 줄 다크호스로 인정되었음인지 우리과가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다
나는 원래 운동 신경이 둔하여 체육 대회에서 일조할 만한 것은 오직 줄다리기밖에
없다. 그런즉, 잘해야 응원 부대나 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다행히도 이번처럼
잔심부름이라도 있을라치면 괸해 바쁜 척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입장식이
끝나고 시합이 시작되자 항상 말없이 지내는 지방 대학교 출신의 준석형과 다람쥐길을
타고 동부로 넘어갔다.
"형,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니, 그냥 재미가 없어."
"왜요,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형은 의지의 한국인 이잖아요.
군대까지 갔다 와서 그 공부를 다하고."
"글쎄다, 모르겠어. 내가 여기에 왜 와 있는 건지."
"우리 과가 순수 과학도, 그렇다고 첨단 유행학과도 아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긴 저도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산업 공학과라는 게 어떻게 보면 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순전히 모른 것뿐이고, 눈으로 직접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성취욕이 반감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외부적인 상황이
결정해 주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입학 시험 같은 거 말예요. 입학 시험에
합격하면 자신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잖아요. 그리고 학교 시험도
똑같이 성취욕이나 자기 실력의 정도를 시험할 수 있고요. 그리고 학교 시험도 똑같이
성취욕이나 자기 실력의 정도를 시험할 수 있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외부적인
마디들이 사람을 허탈하게 만들데요. 무력감이랄까 아무튼 조금 쉬고 싶어요. 내가 왜
조금의 여유도 없이 이러한 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있으며, 그 결과로 얻은 내
만족감은 다른 이들 웃음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고 말이에요."
내가 얘기를 하는 동안 준석형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수긍이 간다는 건지
관심이 없다는 건지 아무런 반응 없이 듣고 있는 형의 태도로 인해 갑자기 내가 너무
건방진 얘기를 했나 싶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만큼 그의 침묵은 의미를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오르다가 준석형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깊게 들이마셨다. 그의 시선은 울창한 숲 사이로 교묘하게 드러난, 뿌연 모자를 쓴
서울의 창공을 향하고 있었다.
"너느 아마 모를 거다. 지방대생에겐 학업은 곧 생존이야."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다시 다람쥐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4월의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언덕이 가끔씩 얼굴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울고 이따금 까치 소리가 방정맞게 들렸다. 나는 원래 까치를 좋아했다. 어렸을 적
아침에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말을 들어서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등 언저리를 타고 내리는 윤기 있는 까치를 언뜻이라도 볼라치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희종형은 까치를 무척 싫어했다. 어느 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까치 이야기가
나왔는데 희종형은 흥분을 하며, "ㅁ까치라면 쥐약을 놓아서라도 죄 잡고 싶다."고
수리치는 것이었다.
희종형은 우리들의 놀란 표정 때문인 조금은 겸연쩍은 듯 애써 표정을 풀면서
우리들의 반발에 해명했다. 자신도 동물을 끔찍이나 좋아하지만 까치만큼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이유는, "까치가 아침 잠을 깨우는 짐승."이라는 것이다.
형이 처음 입학했을 때 소정사 베란다에 나가 보니 나뭇가지마다 까치 집이
보이는데, 마치 천국에 온 기분이 들더란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원생활에
쫓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잦은 밤샘으로 피곤에 지쳐 새벽녘에야 막 한숨 붙이려고
하면 이 놈의 까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 주의에서 장시간 아침 체조를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번번히 날이면 날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엔 인내심이고 뭐고 모조리 일시에 무너지고, 오직 문명의 이기인 쥐약이
생각나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남의 일같지 않아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또 한 사람 까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과수원을 하는 외숙이다. 우리 외숙네
과수원의 까치들도 사과즙 좀 마시려다가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는 인간의
변모를 경험했다는데, 아무튼 환경이 관습을 만들어 간다는 나의 신념을 굳어지게
만드는 사건들이었다.
나는 한동안 까치 생각을 하느라 옆에 있는 준석형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마냥
걸어갔다. 꼭 무슨 산짐승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혜정사 앞에 도착해서야 준석형을
바라보았다.
"형, 기운 좀 내요. 어떤 철학자가 고양이의 세계와 개미핥기의 세계는 다르다고
했다는데, 내가 형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거짓일 거야. 다만 나는 형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형은 무엇을 위해서건간에 극복이라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니까."
"너, 옛날 노비분서 알지? 그건 분명 꼬리표였어,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또 다른 꼬리표가 있어. 종이라는 꼬리표 대신 소외라는
꼬리표 말이야."
나는 순간 뜨끔했다. 그래, 그이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들은 소수이고 모든
것을 개척하는 자세로 살아야 했고 간단한 숙제마저도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했다.
같은 대학 출신 동료가 많은 사람들은 늘 모여서 같이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따로따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이 살고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꼬리표를 붙이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형의 팔을 잡았다.
기숙사에서 학사부 본관까지는 600여 미터 남짓한 거리인데 양 길가에 버드나무가
서 있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다들 겉으로는 한가해 보이지만
움직임 하나하나마다 조급함이 흩날렸다.
식당이 있는 본관 건물은 1호관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이를 시작으로
9호관까지는 미로 같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번 잘못 들어가면 한참 동안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끔 안전 관리실의 감시망을 뚫고 들어온 잡상인들이
길을 잃어버려 잡히는 수도 있었다.
식당에는 늦게 일어난-그 천둥소리 같은 부저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원생들이
아침을 때우기 위해 테이블 앞에 앚아 소가 되새김질하듯 매점에서 산 빵 조각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준석형과 내가 음료수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우리과원들은 흥분에 들떠 얼굴들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모두들 그 좋은 머리로 우리가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은 대략
75펴센트 정도가 되지만, 문제는 줄다리기에 있으므로 적어도 줄다리기에서 4위
이상은 해야 한다며 과원들을 독려했다. 따라서 과원들을 더 모이게 하여 다른 경기의
주전 선수들을 보호하고 피로도를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승을
조속히 결정짓기 위해서 모든 과원이 마라톤에 참석하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작전이었다.
과원들은 상진의 강한 어조에 모두들 우승이라도 한 양, 아니 전산과의 연승을
중단시키기라도 한 양 기뻐했고 인원 모집 특공대가 뿔뿔이 동부로 떠났다.
과연 점심 때가 되자 석사 2년차와 박사 과정 형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폭
증원된 우리과의 사기는 높아만 갔고 전산과의 대표는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자기과의
초조함을 뿌리고 다녔다. 우리는 즐겁게 옹기종기 모여 식당에 1인당 저녁 식권
3장씩을 주고 주문한 점심 식사를 시작하였다. 더구나 식사 중간 중간에 박사
과정들의 연이은 애프터 제의로 모두들 들떴다.
식사 후에는 드디어 나도 일조할 수 있는 줄다리가 있었다. 인간의 힘이란 무한한
것이어서 우리 과는 별 어려움 없이 준결승까지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전산과 역시
대단한 집념과 인적 자원의 풍요 속에서 결국 우리 고와 결승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이 결정적인 찬스에, 불행히도 우리 과는 배구 경기 결승과 중복되는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과원들은 연속된 줄다리기로 지쳐 있었고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배구 경기는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의 선수만을 배정하고 줄다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줄다리기로 아예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짓고 난 후 배구 경기장으로 가서 열렬한
응원전을 펴기로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줄다리기 경기가 의외로 길어진 것이다. 줄다리기는 3전 2선승제로 1분동안 일정
거리까지 상대팀을 끌어오지 못하면 무효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규칙이다. 그런데
전산과와 우리과는 상대가 상대인만큼 두팀 다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두 번의 무효
끝에 1승 2패로 우리 과의 패배가 결정되고 말았다.
마지막 승부가 전산과임이 발표되자, 우리 과와 전산과 사람들은 서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가진 자들만의 여유있는 멋진 모습이었다. 역시 인적 자원의 우세란 중요한
문제였다. 줄다리기에서 패배한 우리는 배구장으로 달려갔다. 낙승이 기대되었던
배구마저 의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의 열띤 응원과 다른
과원들의 근심스러운 동조 응원에도 불구하고 화공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갑자기 몰아닥친 패배로 우리 과원들은 앞으로 남은 축구, 농구결승전 그리고
마라톤 경기에 대한 작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지만, 매게임마다 선수들의 피로도를
최소화시킬 묘책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 낸 최상의 방안은 게임간의 휴깃
시간을 최대한 벌도록 하고 구기 종목 선수로 지목되어 있는 사람은 되도록 마라톤
출전을 피하도록 했다. 대신 나머지 모든 과원들은 능력별로 등급을 매겨서 1등급에
속하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완주하고 이하의 등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각 등급에 맞추어 페이스를 조절하여 한 사람으 낙오자도 없이 완주하자는 것이었다.
상진은 다시 점수 계산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산을 마친 그는 또다시 강한
어조로우승은 확신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전산과의 점수를 계산해 본 결과 그들의
탁구, 농구, 배구 점수가 저조하기 때문에 웨이팅 팩터를 감안한다면 그간의 우리과
점수가 높았고 우리과는 남은 축구, 농구, 테니스 결승이 있는 반면 전산과는 남은
경기라고는 마라톤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속행된 농구 경기에서 토목과는 거의 악착스러울 정도로 경기를 진행하는
바람에 다른 과의 빗발치는 야유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산업 공학과를
밀어주자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토목과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지만
우리 팀의 조직력과 주원형의 골밑장악력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농구장의 크기가 규격 코트의 반쪽 정도밖에 되지 않아, 외곽이 한치의 여유도 없이
바로 시멘트벽이라, 우리 팀은 승리와 2명의 부상자를 교환해야만 했다. 나머지
테니스 경기는 교수님의 열전에 힘입어 준우승을 따내면서 우리는 더더욱 종합 우승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마라톤 경기는 축구를 제외한 모든 경기가 끝난 후 치러졌다. 마라톤 코스는 서부
운동장을 출발해서 서부 후문을 빠져 나온 뒤, 석관동을 지나 외대, 경희대를 거쳐
동부, 서부 정문을 통과하여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었다. 총 길이로야
비교적 짧은 거리였지만, 건강 관리에 극히 소홀한 우리로서는 매우 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출발은 3시 반경에 이루어졌다. 나는 최하위 등급에 들어가 뒤쪽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건강 관리라고는 특별히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서부 후문으로 나가는
플라타너스 숲길에 이르자 벌써부터 왼쪽 배를 꼬옥꼬옥 찌르는 듯한 아픔과 장딴지가
당겨 오는 아픔 때문에 앞길이 험난하게 보였다. 후문을 빠져 나왔을 때는 같은
등급에 속한 사람들마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뛰어가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질러 나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곁눈질해 가며 외로움을 느꼈다.
누구나 이렇게 마라톤을 하듯 자신으 길을 하염없이 그리고 성실히 달려 가야만
한다. 이 길에는 자신과 유혹만이 존재한다. 그 유혹은 무한한 자기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사회으 통상적인 규범의 틀을 깨고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고 이를
관철시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 용기를 뒷받침할 만한 진리의 발견 또는 자아의
객관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사회의
규범에 묶여 있다. 이 사회의 규범이란 도덕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또는 '너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다소
강압적인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의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이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지도 모른다.
나는 과학자다 되어야 한다. 이 길이 정해진 나의 길이건 아니건 간에 적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러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길을 달리고
나서 결승점이라는 허구에 도달했을 때. 지나온 날들에 과정이라는 관을 씌워 스스로
만족이나 후회를 새기게 될 것이다.
외대 앞에 도달했다. 여학생들이 건네 주는 물수건과 물컵을 받아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몸은 이미 한껏 굳어 있었고 앞뒤로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속력을 붙여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한 명씩 질러가며 교통 통제가 반쯤
풀린 길을 잡다한 생각을 떨어버리며 전력을 다해 뛰었다. 휘경동 신호등을 지나
경희대 쪽으로 꺽어 돌았을 때는 이미 교통 통제도 풀린 거나 다름없어서 아예 인도로
뛰기 시작했다. 경희대 입구에서 실내 포장마차를 지날 때쯤 내 앞에 길을 비키지
않고 선 그림자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나는 문득 그 그림자가 친근하게 느껴짐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가슴에 징소리가
울려 퍼지듯 숨을 쉬지도 못한 만큼의 아픔에 가까운 진동을 느꼈다.
갈색 바탕의 체크무의 티셔츠에 청치마를 입은 성여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와 나의 눈길은 일직선으로 맞닿았다. 짤막한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릴 듯 아주 긴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옆을 말없이 스쳐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도 모를 만큼 분노가 차올랐고 그 분노는 나의 다리를 축으로 내달렸다. 나는
그녀의 저러한 수법에 너무도 자주 빠져들었었다. 이번엔 그 수법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돌아가 환한 웃음으로 그녀를 반기며 깊게 안아
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구에는 등수를 체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진행원들은 마지막 남은 길에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서부 운동자에 다시 돌아와 골인을 했을 때 나는
등수는 부끄럽게도 점수가 매겨지는 선인 2백등을 간단히 넘겼다.
마라톤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우리과 살람들은 점수 계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산 속에 누워 서영을 생각했다. 내가 그냥 뛰어온 후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혹시 지금도 그 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그 길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것도 화가 잔뜩 나서, 아마 다시는 나를 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갑자기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생각되었다. 왜 그냥 뛰어나와 버렸지? 그 흔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두 팔 가득 안아 주지는 못하더라고, 애써 애정의 폭발을
억제하면서 부드러운 눈길을 가득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난 그녀와 인연이
없는 거야. 선천적으로 그녀와 나느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 잊자,
잊어버리자. 그녀 없이도 잘 살아왔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얼마나 편했던가.
나의 상상력은 또한 얼마나 풍성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다가 마음
속으로만 타인을 사랑하는 기쁨은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다가 마음 속으로만
타인을 사랑하는 기쁨은 또 얼마나 컸던가. 만약 서영과 나의 관계가 사랑으로 묶여
있었더라면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은 들지 않을 거야. 아픈 기억보다는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을 거야. 아니, 아름다운 기억이 아주 적더라도 그것이 더욱 소중해서 늘 다름
일들을 지우고도 남을 거야.
과 사람들은 벌써 우승이라도 한 양 오리가 꽥꽥거리듯 싸돌아다니며 떠들어댔다.
점수를 재계산해 본 결과 체육 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양으로 남겨 둔 축구에서
우승만 한다면 종합 우승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산과도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운동장에 산 그림자가 질 무렵쯤 해서 체육 대회의 마지막 경기인 축구 결승이
시작되었다. 우리 과와 겨루는 팀은 재료과였는데, 이 팀은 매년 축구만은 강하다는
역사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재료, 핵 그리고 화학 공학과 건물은 서부에 있기
때문에 연습할 기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매주 한 번씩 운동장에 모여 축구
경기를 통해 친선 도모와 체력단련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시피 했다.
축구 경기가 막상 시작되니 운동장 주위는 이 경기의 승부에 관심이 쏠린 탓인지
모든 과가 질서 정연하게 앉아서 응원을 했다. 대부분 우리 과의 승리를 빌고 있는
듯했지만, 재료과로서는 자기과의 축구에 대한 자좀심이 걸린 문제라 그 사기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무엇이든 지는 것이라면 거의 공포에 가까운 알레르기를
보이는 과학원생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심한 몸싸움이나
반칙 행위가 보일라치면 전산과를 제외한 모든 과로부터 야유를 받아야 했다. 경기의
상황이야 어찌 됐든 우리 과는 경태의 공수를 겸비한 재치 있는 플레이와
골결정력으로 축구에서 우승을 따냈다.
과원들은 이제 우리도 체육 대회에서 우승이라는 걸 해보게 됐다며 신명이 나
있는데, 본부석에 갔던 상진이가 난데없는 비보를 들고 왔다. 종합 점수를 확인해 본
결 과 전산과가 종합 우승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점수를 잘못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회에서 결정해 놓은 참석
인원수의 정의에 대해 상진이가 착각하고 있어서, 입장인원수가 아닌 오전까지의 참석
인원수로 계산하였던 것이다. 과원들은 모두 체육 대회 운영 방식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못내 아위워했지만, 우리 과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음인지 사뭇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폐회식이 끝난 후 학생회에서 제공한 술과 안주, 거기가 참석해 주신 교수님들이
전해 준 격려금까지 들고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과원들은 경희대 입구
복래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모두 기숙사를 향해 올라갔다.
4월이 되면 기숙사엔 온수가 중단되었는데 체육 대회 같은 특별한 날이 되면 한
이틀 정도 아침 저녁으로 두어 시간씩 따뜻한 물이 나왔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학생회의 공고에 의해 많은 학생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기숙사에 들어간
시간에는 이미 각 윙 끝에서 들려오는 샤워 소리와 속옷 바람으로 뛰어 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온통 소란스러웠다.
별로 한 운동도 없는데 전신이 노곤했다. 거의 모든 게임을 뛴 경태는 녹초가 되어
방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야, 윤재야. 우리 한숨 자고 내려가자. 아이고, 젠장. 우승할 수 있었는데 이게
뭐냐? 야, 절우야! 서방님 다리 좀 주물러라."
"야, 나도 말이 아니다. 너도 양심 좀 있어 봐라. 이런 날 여편네는 얼마나
힘들겠냐?"
"야, 빨리 씨고 얼른 나가 보자. 사람들도 기다릴 거고 이렇게 누워 있다간 잠들어
버릴지도 몰라."
경태는 몸집이 풍성한 철우를 마누라로 정했고 철우도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또 한바탕 몸 싸움을 벌일 것 같은 두 장난꾸러기 녀석들의 말싸움을 가로막으며
하나씩 일으켜 세웠다. 우리 윙의 샤워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위 아래층으로 뛰어
다니다가 겨우 1층에서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다. 경태와 내가 샤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 철우는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누워 있었다.
"야, 임마! 빨리 샤워하고 와. 지금 물이 차가워지려고 하더라."
"난 조금 있다가 할래."
"에이, 지저분한 새끼. 빨리 하고 와, 임마!"
경태와 내가 빈정거리며 다그치는데도 불구하고 철우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휘저어 가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접대 샤워할 때 보니까 팬티 입고 하더라. 혹시 저거 그거 없는 거
아니냐?"
경태가 내게 살짝 다가와 이렇게 말하고는 눈짓을 보냄과 동시에 우리는 철우의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우리들의 갑작스러운 돌격은 일단 그의 의지를 쉽게 정복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무언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철우의 반격 아니, 앙탈은 예상 외로 거칠었다.
철ㅇ는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어 헤드폰을 제거하더니 출렁거리는 비곗덩이를 애써
경직시켜 가며 반격을 시도했다. 결국 순발려과 재치로 가득찬 경태와 힘에 관한 한은
인정받고 있는 나로 인해 철우의 아랫도리는 우리들 손아귀에 쉽게 놓여졌다. 사태가
이쯤 되자 철우의 반항은 격심해졌다.
"너희들 정말 이럴래! 너희들 죽인다! 으윽."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앙탈하는 철우를 보며 우리는 깔깔대다가 장난을 그만 두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동안 철우는 씩씩대며 침대에 않아 버얼건 얼굴을 하고 우리를
노려 보다가 따라 나왔다.
이러한 자그마한 장난도 우리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고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친근한 재미거리였다.
복래관에는 어느새 과원의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야행성 동물들이 돼 나서
그런지 체육 대회를 마치고 났는 데도 피곤한 모습은커녕 생생하고 반짝이는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삼겹살이 구워지는 상에 둘러앉아 한잔씩 들고 있다가 우리들이 들어서자 일제히
우리를 바라보며-사실은 경태를 쳐다보고들 있었지만-드디어 사회 볼 사람이
입장했다며 박수를 보냈다.
"나도 좀 먹고 합시다. 내 2전공은 체육이지 사회가 아니냐."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태가 털썩 앉으며 고기를 한 점 입
속에 집어 넣자 박사 4년차 고참인 재성이 형이 술을 한 잔 권하며 말했다.
"내가 시스템 개조해 줄게. 걱정하지 말고 놀아 봐."
재성이 형의 재담 덕분에 경태는 그대로 일어나 사회를 보기 시작했고 철우와 나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비록 우승은 못 했지만 이번 체육 대회는 우리 산업 공학과 역사상 한번도
이룩하지 못했던 준우승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 동안 역대 체육 대회에서 느꼈던
소수 민족의 울분을 깨뜨린, 모든 과원이하나가 되어 이룩한 쾌거입니다. 이번 체육
대회를 통해 저는 우리 산업 공학과의 무한한 가능성을 되새기게 되었고 과학원생의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배로서 다시 한 번 여러분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어떠한 계기가 마련되면 우리는
모두가 힘을 합하여 그것이 고난이면 극복하고 즐거움이면 함께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그러한 과학원생이 되자는 것입니다. 자, 산업공학과의 발전을 위해, 건배!"
우리가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는 동안 의식과 절차를 싫어하면서도 스스로들 꼭
챙기는 순서로 참석자 중에서 가장 선배인 재성형의 격려의 말을 듣고 건배를 했다.
재성형의 말로 의식을 끝내고 하나씩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동과 긴장
뒤에 오는 나른함과 달뜬 기분으로 인해 사람들은 가벼운 농담에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거워앴다. 간간이 곱사추미나 창 등 개개인의 비장의 무기를 연출하는 사람이 있어
시간은 더 즐거워졌다.
몇 차를 거듭한 술자리를 끝내고 경태와 철우, 그리고 재주꾼인 석현, 늘 웃음이
가득한 얼굴인 한표와 같이 기타를 메고 파정사 옥상으로 올라 갔다. 옥상 아래로
서울 시내가 다 보이고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하늘의 별들마냥 무수한 전등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석현의 기타 소리에 맞춰 추억의 물감이 배어 나오는 노래를 하늘로 하늘로
올려 보냈다.
3.야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수업 시간마다 나오는 읽을 거리와 숙제 더미 속에서 매일 같이 허덕였다. 대학
때는 한 학기에 7과목 듣는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한 과목 듣기도
벅찼다. 한 번에 3시간 이상씩 진행되는 수업이야 그렇다치지만 수업 시간마다 논문이
배포되어지고, 숙제가 나오고, 다음 시간에는 퀴즈를 보겠다는 형벌(?)을 계속
가했다. 더구나 벌써 4월 중순이 다 됐으니 중간고사 떄까지 텀페이퍼(일정 주제를
잡아서 학기 중에 1번 또는 2번 써 내는 간단한 논문)를 써내야 할 텐데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그런데더 교수님은 요즘 학생들이 공부를 통 안한다며 석사 1년차들에게 한
학기에 5과목을 강제로 이수케 했으니, 이것은 곧 지옥이었다.
그래서 가끔 머리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밤을
새워야, 아니 잠을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선배들의
충고도 위로도 아닌 멸시였다.
"그건 아무 것도 아니냐. 뭐 대단한 거라고 밤을 새우며 공부는 저 혼자 다하는
티를 내냐? 지금부터 관심있는 분야를 찾아가야지. 그래야 2년차에 올라와서 좋은
논문 쓸 거 아냐."
하루는 계속된 밤샘 때문에 지친 몸을 풀기위해, 토요일 하루를 늘씬 잘 셈으로
기숙사에 올라가고 있는데, 상진이가 1호관과 2호관을 잇는 통로에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나를 불렀다.
"윤재야! 윤재야! 너 오늘 시간 있냐? 시간 있으면 지금 식당 입구로 와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나 지금 바로 내려갈께."
나는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왠지 다급한 목소리로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식당
쪽 계단으로 뛰는 상진의 모습을 보고 식당으로 되돌아 갔다.
"윤재야! 너 오늘 시간 있지?"
"글쎄. 좀 자려고 올라가는 중인데, 계획은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지."
"잘됐다. 오늘 너 미팅 좀 해라."
"대타가 아니고 방금 건수 올린 거야."
"아무튼 좋다. 모처럼 좀 쉬려 했는데 술이나 마셔야겠다. 근데 어디애들이냐?
"ㅅ여대 경영학과 애들인데 내가 퀄리티(Quality:품질)는 보장할게. 그리고 3시에
약속이니까 2시에 출발하면 될 거야. 그럼 2시에 여기서 보자."
"야. 지금 12시 10분인데 2시까지 어떻게 기다리냐?"
"너 리포트 다했어? 리포트나 빨랑 써, 응?"
막상 대답은 했지만 마음이 껄끌러웠다. 서영의 문제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 괜히 죄를 짓는 것만 같았고, 다른 여자를
만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속으로 괜히 승낙했다 싶기도 했지만,
그냥 바람이나 쐬러 간다는 기분으로 가기로 했다.
상진은 나더러 리포트나 쓰라고 했지만, 서영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해서
울적해진 마음이 내 발길을 5층 휴게실로 옮기게 했다. 체육대회 이후로 너무도 바삐
돌아간 시계바늘이 오늘 이 시간에 멈춰서서 초침을 까딱거리며 뭔가 잊었노라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휴게실도 한가했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인수봉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4월 중순의 햇살이 인수봉 이마를 반짝이게 하여 실눈을 뜨지
않고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기를 한번 올라가 봐야 할 텐데.' 요즈음은 오늘같이
한가한 시간을 너무 비생산적인데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림을 그려야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참 좋아했다. 가끔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상장에 기쁨을 표했지만, 내가 점점 그림에 빠져드는 것
같아 보이자 암암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림 도구를 사야 한다고 말할라치면
그 용도를 하나 하나 물어보고는, 내가 청구한 비용을 깎아 버리곤 했다. 나중엔 내가
그림 그리고 않아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괜히 불러서 다른 일을 시키곤 했다. 나는 이
암묵적인 압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약주를 한잔 들고 와서는 나에게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들에게 물으면
흔히 대답하는 대통령이나 정치가나 장군 같은 현실적인 꿈에 대해서는 생가해 본
적도 없었고, 그러한 꿈을 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가끔 이야기하는 진실된 사람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나의 꿈은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가겠다는 소신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나에게 무엇이 되겠느냐는 질문은 때가 되면 학교에서 조사하는 희망 사항하고는 전혀
다른 생소한 물음이었다. 말하자면 어느 날 문득 손이 왜 움직이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저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가겠다는 소신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되어 살아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하루 아침에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인가? 그 당시
아니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권력과 재력을 배격하고 대쪽깥이 살아가는 분 중의
하나고, 어릴 적부터 욕망은 죄를 낳는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해 온 터인데
느닷없이 이러한 질문은 그저 혼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에게 조금은 도전적이었던 나는 아버지에게 사람답게
살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아버지는 더이상 아무 말 없이 그저 한숨을 길게 쉬다가 만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사람은 꿈이라는 욕망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똰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꿈을 정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꿈을 쉽사리 정할 수가 없었다.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파악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 허황한 목표를 정하여 달려 간다면, 그것은 필시 헛된
욕망일 뿐이고, 그로 인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지 못하고 새로운 자리로의
욕망만을 또다시 갖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그때 그때
살아가며 나의 능력이라는 돌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 후에 결정하기로 미루어 놓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지금까지 그 꿈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 능력과 가능성을
찾기 위한 생활보다는 내 생의 자리 하나하나마다 다음 자리만을 생각하며 시간이란
무늬를 수놓아 왔다. 먼 미래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생가하면서 현재의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투자할 줄 모른 것이다.
꿈을 설정하고 그 꿈을 향해 소리치며 자기 투쟁을 하지 않았다. 이젠 꿈을 정해야
한다. 바로 내일이라는 꿈 외에 먼 훗날의 내 초상화를 그려 놓아야 한다.
청색 물감에 하얀색을 많이 넣으면 저 하늘색이 나왔다. 저 하늘색은 나를 늘
눈물나게 하였다. 그리고 항상 어디론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하여 날 역마살
끼게 만든 것도 바로 저 하늘색이었다. 휴게실안은 '주다스 프리스'의 <Before the
dawn>이 몇 번을 반복해서 흐르고 간혹 들리는 바둑알 소리가 먼지처럼 떠다녔다.
나는 연한 하늘과 인수봉의 희디흰 이마에 시선을 둔 채 시간을 넘나들며
괴로워했다. 조용히 가슴 속에 흐르는 눈물 한방울 한방울을 타고 서영의 얼굴이 흘러
내렸다.
한번도 명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 이해하기 어려운 웃음만을 준 여자,
언제나 칼날 같은 손가락만 기억되는 여자, 사실 이 여자와의 만남은 숙명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그때 나는 학생 운동으 순수성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의 방향성과 노선 싸움이 운동의 주도권싸움으로 와전되어 버린
운동권을 떠나기 위해 그간의 일들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운동권을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성화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나의 미래가 불안했다. 그래서
도피의 심정으로 강원도 일대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할 일을 생각해 보기로 한
시점이었다.
첫날은 도시가 온통 검은색으로 파묻힌 태백에서 하루를 지새우면서 앞으로 이처럼
어두운 곳도 감상력이 아닌 나 자신의 일부여야 한다는 생가을 했다. 다음날은 도계를
거쳐 상정까지 국도를 따라 걸었다. 밤이 쉽게 찾아오는 산 속의 마을이라 다리가
끊어질 듯한 아픔 속에서도 밤의 포근한 품속으로 쉽게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학대하고 싶었다. 어둑한 산그늘 속에서 저녁을 먹고 기차를 타고
강릉에 가서 낙산으로 가려 했는데, 강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낙산행 버스가 끊긴
뒤였다.
한번 정한 여로라 바꾸기는 뭐해서 터미널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묘안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밖에 보이는 용달이나 승합차 중에 낙산에 갈 차가 있으리란 판단에서였다.
나는 서슴없이 밖으로 나가 차마다 물어보고 다녔다. 다행히도 승합차를 한 대
구하기는 했는데, 내가 줄 수 있는 돈은 운전기사가 요구하는 돈에 턱없이 모자랐다.
운전기사가 먼저 터미널 안을 뒤져 동행자를 태우고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은근히 귀찮아 졌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낙산으로 갈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동행자를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낙산행 매표소 앞에서 우왕좌왕 왔다갔다
하는 네 명의 아가씨를 찾아냈다. 그들은 서클에서 엠티 답사를 위해 왔다가 시간이
늦어져 버스를 놓쳤는데 이렇게 차편을 구하게 됐다며 기뻐했다.
차에 오른 나는 그 중에 한 학생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캐주얼 복장에
앙증맞은 빨간색 배낭을 막 내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순정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주인공과도 같이 맑고 투명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도도한 빛마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내 눈길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떨리고 어색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자기들끼리 오늘의
사건들을 일기라도 쓰듯이 시시콜콜 재잘대었다.
"보라고. 걔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도 이렇게 번듯하게 답사를 올 수 있잖니. 남자
애들은 뭐든지 자기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큰일이라니까. 이번에 우리가 답사를
완벽하게 해가는 거야. 그러면 걔들도 우리가 무서운 줄을 알 거 아니겠니? 왜 영국이
형은 생긴 것 같지 않게 소심한지 모르겠어. 우리가 어린애들이나 되는 양 벌벌 떨지
않든. 아무튼 우리들끼리 뭉쳐 있으니까 여러 모로 편하기도 하고 괜찮다, 얘."
참으로 아늑한 밤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느끼는 밤은 야합이요, 도피의
세계로 보였지만 동해안의 밤은 안락이자 꿈이었다. 무수히 많은 별들, 어두운 밤길,
헤드라이트에 몸을 던져 오는 이름 없는 벌레들...
나는 이러한 안락감에 도취되어 있다가 어렴풋이 길 옆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음을
알았다.
"야! 바다다!"
나도 모르게 나직이 소리를 냈다가 옆에 타인이 있음을 깨닫고 순간 움찔했다.
"얘들아! 바다다!"
"야호! 바다다!"
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나는 다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말을 붙일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한 학년은 위인 듯싶어서
용기를 내었다.
"목적지가 낙산이세요?"
"예, 참 어디까지 가세요? 아저씨 덕분에 저희들이 편하게 가게 됐는데 인사도 못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ㅈ대 1학년들이에요. 아니 이제 2학년이죠."
"저는 ㄱ대 3학년 이윤재라고 합니다. 여행차 강원도 일대를 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중에 리더로 보이는 학생의 말에 나도 서울서 왔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제쳐두고 다시 그들만의 이야기로 빠져들어갔다.
나는 순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마음에 드는 저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놓치지
않을까 하고 고심했다. 하지만 기회란 의외로 쉽게 오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나에게 말을 붙인 학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낙산에 있는 민박촌 아세요? 저희들은 이곳이 처음이라 지리가 어두워서요."
"아 알지요. 아주 많이 있기는 한데 제철이 아니라 문을 열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나는 낙산이라는 땅을 밟아 본 일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관광지에 민박촌이
없다면 말이 될 리가 없다.
"얘들아, 정말 문이 닫았으면 어떡하지? 큰일인데."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문을 닫았으면 가서 여세요. 힘이 모자라면 제가
미력하나마 도와드리죠."
그들은 황당한 나의 제안에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과 한
팀이 되어 간간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들의 이름도 소개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할 만큼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강서영'이라는 이름만
가슴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천덕꾸러기들을 떨쳐내고
그녀와 단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였지만 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가끔 웅덩이를 그냥 지나치는지 덜컹거렸다.
거뭇거뭇한 어둠을 털어내며 낙산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낙산은 예상했듯이 사람이 거의 없었고 횟집 몇 군데와 포장마차 두어 곳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차에서 뛰어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내 옆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출발하는 차의 매연을 피하듯 횟집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백마를 탄 기사나 된 것처럼 다 떨어진 배낭을 한 손에 들고 주저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주머니,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기 민박 문 연 데 있습니까?"
"조 옆으로 돌아가 보세요."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형색을 살피며 돈은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는지 턱으로
길모통이 쪽을 가르켰다. 나는 그들을 기다리게 하고 혼자 걸어 갔다. 다행히 민박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계획에 없던 민박을 그들 옆방에 잡은 건 당연했다.
내가 짐을 풀고 있는 동안 그들 방에서는 깔깔대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 잠시
후 리더 겨이던 수진이란 학생이 문을 두드렸다.
"시간 있으시면 이 방으로 오시지요. 여기까지 온 게 모두 선배님 덕분인데 잠깐
놀다 가세요."
"그럴 게 아니라 우리 포장마차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죠?"
수진은 다시 돌아가 숙의를 하더니 곧 내 방으로 와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밤
공기가 싸늘한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여행의 자유 때문인지 장난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영은 맨 뒤에 따라오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맨 먼저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포장마차 안에는 신혼부부인 듯한
한쌍이 안주만 듬뿍시켜 놓고 있고 그외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늘 여자 후배들에게
그랬듯이 꼼장어를 안주로 시켰다.
오늘밤에 무언가 서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내야겠다는 오기 비슷한 호기심을
눅이느라 건배도 하는 둥 마는 둥, 먼저 소주를 한 잔 조심히 마셨다. 그리고 간간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서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댁은 어디예요?"
"평창동이에요."
"아버님은 뭐 하세요."
"음, 그냥 장사 해요."
"무슨 장사요?"
"대기업 회장님이에요. 껌도 팔고, 과자도 팔고, 야채도 팔고 해서 계열사가 10개쯤
되는 구멍가게죠."
그녀의 농담으로 인해 단도직입적으로 나가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포장마차 안은 웃음으로 가득찼다. 나는 그녀가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의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정공법을 쓰기로 했다.
"사실 미팅 나온 것도 아니고 하니 호구 조사나 얼굴 셈은 빼고,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삶의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인만큼 이렇게 우연히 만난 길손들끼리 자신의
고민이나 방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보죠. 제가 먼저 이야기할게요."
서두를 꺼낸 나는 술잔을 벌컥 비우며 말을 이었다.
"저는 사실 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벽증에
가까우리만치의 주관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 나는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죠. 대학에 처음 들어와 햇병아리였던 재작년 사월, 캠퍼스 안은 온통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했었죠. 가마나히 그 무리들을 바라보고 있느라면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봄에 겨워서 말이죠. 오후 강의가 없어서 꽃 그늘에 앉아, 이리저리
지나가는 사람들 하며 그들이 지날 때마다 한겹씩 묻어 오는 봄의 내음을 맡으며
행복감에 충족돼 있었죠.
그런데 학생회관 쪽에서 웅성웅성하더니 갑작스레 사오십여 명의 학우들이 스크럼을
짜고 몰려나와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어요. 삽시간에 광장 주변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죠. 그 학우들은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이 그리고 인원의
불어남도 없이 광장 한가운데로 나오며 단호한 어조의 한 학우의 외침을 따라
사바아에 차가운 비수를 날리듯 왜쳐 대기 시작했어요. 나는 저것이 바로 데모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연신 하시던 말이 떠올랐어요.
'가거든, 데모 같은 건 하지도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아암.' 그리고 TV에서
자주 나오던 북괴의 불순분자가 혹책하여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있고 이에 일부
대학생들이 연류되어 있다는 말도 퍼뜩 떠올랐어요. 두려움은 호기심을 유발하죠.
저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 보고 싶었어요. 과연 무슨 말을 하길래...
그러나 저는 결국 못 듣고 말았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경들이 로마 병정들같이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오와 열을 빈틈 없이 유지한 채 군화 소리로 온 캠퍼스를
짓누르며 학생회관 앞 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장갑과 잠바 차림의 사람들이 주변 학우들에게 으름장을 놓아가며 멀리 몰아내기
시작했죠. 그들 중엔 각목을 든 사람들도 있었고 손에 쇠뭉치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들은 마치 그 상황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순식간에 그리고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극히 사무적으로 출현했어요.
저는 그자들이 형사라고 직감했을 뿐 펄펄 난다는 무술 경관이란 사실도, 손에 든게
사과탄이라고 불리는 최루탄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드넓은 공장 안에는 그 사오십 명
남짓한 학우들만 동그랗게 모여 있는 꼴이 됐는데 그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어요.또, 두려움을 떨치지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어요. 단지 소름 돋도록
힘이 나게 하는 엄숙하고도 단호한 하나의 목소리만 들렸어요. 허나 그 순간은 무척
짧았어요.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함성이 터지는 것을 신호로 사냥감을 눈 앞에
둔 치타들처럼 사복 경관들이 뛰기 시작했죠. 한 학우에 서너 명씩의 포획자가 사냥
부위를 나워가지기나 하려는 듯 비틀고 꺽고 휘어잡아 갔어요.
잠시 후 굥양관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욕설이 튀어 나오며 돌멩이가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신호로 사복 경관들의 보호 아래 사진사가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고, 로마 병정들은 공격할 성이 생겼음을 기뻐하기라도 하듯
건물 안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며 몰려들어 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 상황을 아무
미동도 없이 심장이 멈춰 버린 사람처럼 지켜 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어요. 여러분들은 학원 자율화
세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홍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나는
그 길로 교문을 빠져 나와 학교 앞 소주집에서 깡소주를 들이마셨어요. 그 동안
거짓에 싸여 살아온 나의 삶과, 그렇게 살아오게 한 그 모든 것들이 증오스러웠어요.
저는 거기서 결론을 내렸어요. 적어도 떳떳한 자라면, 적어도 합리적인 정통성을 가진
자라면, 그리고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자라면 무력은 사용치 않을 거라고, 그리고
반드시 학원은 지켜져야 한다고.
그런데 정부 권력은 야비한 폭력을 휘들러 사고와 발표와 양심의 자유와 국가
최고의 보루인 학원을 무자비하게 능욕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언가 정당성을
내세우지 못하는 명백한 부도덕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이제 저는 당신의 아들의 아니고 당신을 낳아 준 그리고 나를 낳아
준, 그리고 내 아들이 살아갈 이 땅! 바로 이 산하의 아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그리하여 이 땅의 진실되지 못한 썩어 문드러진 살을 깨끗이 도려 내리라고. 적어도
후세는 아니 나의 후배들에겐 이러한 학원을 물려주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때만
해도 저는 많은 부분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였죠. 왜냐하면 나는 20여 년 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히 그 원인을 규명하고 분석할 능력을 말살당했기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고 허둥대는 꼴이었죠."
나는 연신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학 1학년 봄의 그 원통하고 분한 기억이 되살아나
가끔 이를 악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복받쳐 올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괜히 나의 강한 어조로 어색해진 포장마차의
얼음같이 굳어버린 공기를 휘저어 버리기라도 하듯 그들에게 소리쳤다.
"야. 술들 좀 먹어라! 어차피 너희들은 내 후배고 나보다 늦게 죽을 확률이
많으므로 내가 반말을 한들 아무런 법적인 제약이 없겠지? 물론 이제껏 법대로 되는
세상은 보질 못했다만 요 안에서만이라도 하자. 어때?"
갑작스런 나의 변신에 그들은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나는 끝까지
꼼장어를 먹지 못하는 서영에게 말도 안 되는 꼼장어의 영양학과 고급스러움을
줄기차게 설명했지만, 예견했던 대로 그녀는 한 토막도 손대지 못했다.
"강서영! 너 이거 못 먹으면 시집 못 간다."
"왜요? 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요."
"응, 당연하지. 나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런 말해 본 적이 없거든."
"뭐라고요?"
우리들은 간간이 바람이 기웃거리는 포장마차 안에서 믿음이랄까. 정이랄까 하는
인간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주춧돌을 자연스럽게 쌓아 갈 수 있었다. 우리들은
여행이라는 달뜬 기분으로 앞세워 밤바다를 바라보며 걷기도 했다. 바다는 참으로
많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우리들의 가슴 속까지 파도를 밀어 올려
보내곤 어색하게 떨어져서 걷는 우리들의 마음을 그 파도로 죄 다시 쓸어가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도 따스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들은 민박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에 빠져 들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젯밤의
술자리로 인해 부쩍 가까워진 그들과 식사를 같이하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선뜻 떠나기에는 미련이 남았다. 서영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한다? 다시 한 번 정공법을 쓰기로 했다. 우선 짐을 꾸려 가지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방을 향해 소리쳤다.
"강서영씨, 2월 22일 오후 2시에 종로2가 종로서적에서 만납시다. 안나오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기다릴 겁니다. 말하자면 프로포즈죠."
"야! 너 오늘 미팅 나간다며? 서영이가 불쌍하지!"
경태가 느물거리며 다가왔다.
"너도 나가냐?"
"야, 내가 안 나가면 또 누가 나가냐? 오늘은 기분도 그런데 술 먹는 길로 꼬셔야
될 텐데 잘 될지 모르겠다. 야, 우리 작전 좀 짜자. 우선 말야, 그 파트너 정하는 건
생략하고 적당히 농담 따먹기 하다가 어린이 대공원 같은 데 가서 기분 전환하고 그
길로 이태원에 가는 거야. 넌 가만히 있어. 내가 바람 잡을 테니까."
"갑자기 나 안 가고 싶다."
"이 새끼! 깔깔깔."
미팅을 나가는 사람 가운데는 여자 친구를사귀어 보려는 의욕이 강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한 환상에서 일찍이 깨어나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물론 나이도 나이고 해서 여자를 사귀기 위한 만남은
주로 소개에 의한 경우가 많기는 했다. 왜냐하면 과학원생들은 여자 문제에 관한 한은
거의가 쑥맥이어서 대량의 모집단에서 하나의 샘플을 설정하고 이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잘 알고들 있었다.
대다수 원생들은 주로 자기 자신의 삶의 동반자로서의 여인을 원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의 과정을 잘 이해해 줄 수 있고 살아가는데 큰 무리없이
다소곳한 여자를 원하는 순정파에 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생들의 학업에
대한 열의는 매우 정열적이었고, 마음의 한구석에 여자가 들어서면 그 일부가 전부가
되어 벌릴 만큼 정열적 기질을 전이시키는 습성을 거의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의미 없는 만남 자체를 거부했고 애초부터 의미 없어 보이면 그
시간만큼은 서로 부담없이 유쾌하게 소비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경태는 여자 문제만큼은 철저했다. 대학 4년 동안 여자가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는데 꼬박꼬박 중요한 시점에서는 여자 냄새를 풍겼다. 비근한
예로 과학원 시험 보기 전 날 밤늦게 도서관에 찾아온 의문의 여자를 목격하였는데도
지금껏 한번도 그 여자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었고 미팅을 나갈 땐 으레 녀석의
농간에 의해 이태원에 가서야 종을 쳤다.
"근데 너 돈은 있냐?"
"없어, 딱 커피 두잔 살돈 있다. 얌마, 여자들은 비상금이라는 게 있나부더라."
"경태야! 너 언제 크냐?"
38번 버스를 타고 태능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따가워진 햇살 속으로 많은 남녀들이
줄지어 그들만의 언어로 재잘거리며 그들만의 아는 거리를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문득 소외감을 느꼈다. 다들 말을 잃고 저마다의 생각을 주워 담으며 약속된
카페로 향했다. 마치 화려한 풍경화 속에 어울리지 않게 튀어 묻은 물감처럼...
역시 경태의 추진력은 탁월했다. 뭔가 석연찮은 기색을 하면서도 이 무심한
아가씨들은 푸른 동산 입구에서 발을 서로 맞추며 상의하다가 우리들이 표까지 끊어
주었다. 다섯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남자들이 따로 따로 재잘대며 간혹 웃음말을
서로 던지고 받으며 일정한 평균 거리를 두고 크레이 사격장을 향해 올라갔다. 이건
누가 보다 미팅이었다. 그런데 미팅에서도 간혹 참한 아가씨가 끼여 있듯이 한눈에 저
사람이다 싶은 김아리라는 아가씨에게 철우는 벌써 침을 발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발랄해 보이는 아가씨인 채나경에게는 경태가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경태는 어느새
채나경과 장난을 쳐자며 다른 사람들의 어색함을 풀어 주었고, 우리 모두는 튀긴
물감에서 분위기라는 붓으로 덧칠하는 풍경 속에 서서히 잠겨 들었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 속에 우리를 내몰아치던 원 내의 으슥한 바람을 풍덩 빠뜨려
버리고, 오늘이 있으므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아갔다. 계획했던 대로
경태의 제안이 시작되었다.
"배도 고픈데 어디가서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합시다. 어때요?"
순간 병아리 같은 대학 3년생들은 바짝 긴장하는 것 같더니 다섯이 빙 둘러 뭔가를
의논했다. 예상대로 한두 명이 빼고 있고 채나경이 연신 다그치고 있었다.
"얘들아? 오빠가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경태는 열심히 속닥거리고 있는 병아리들에게 다가가 채나경과 김아리를 잡아
끌었다. 그들은 마지못한 듯 있다가 대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가 이태원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플로워에는 아무도
없었고 첫 손님을 맞는 웨이터들의 목소리만 울렸다. 춤인지 체조인지 몸부림인지
모를 몸짓을 하면서도 모두들 즐거워했다. 나는 원래가 춤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생리적으로도 거부감을 일으켜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니 책을
한 자 더 보는 편을 즐겼다. 이러한 행위를 아예 퇴폐적 유희로 규정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들의 율동을 바라보며 역시 젊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거지, 즐길 줄 알며 열심히 살아갈 줄 알며, 아니야, 이건
즐기는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는 뭐지? 그건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야. 그 정서를 우리는 상실한
거야. 어렸을 적 할아버지들께서 여러 어른들을 불러모아 시조 가락을 주고받던
정서를 우린 잃어버린 거야. 공연이 아닌 어울림이라는 유희를 잃어버린 거야. 그러한
정서를 잃어 버리게 한 제국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즐겁다며 후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지금 병들어 가고 있는지도 몰라. 우리네 정서를 상실한
경망이라는 병을 말이야.
그래서 이 사회는 이토록 혼탁해지고 있는 거야.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권력의
안위화 영구화를 위해 제국주의에 몸을 판 정치인들 대신 온 국민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 폭력은 부조리가 낳은 사생아야. 이것은 문화적 폭력이야. 이 사회는
부조리야. 진리 속에서 자유를 얻으려는 지식인은 없고 야합과 비굴만이 구석구석을
병들게 하고 있는 거야. 나? 나도 마찬가지야. 문제 제기만 했을 뿐 해결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비겁자야. 그렇게도 죽어가고 끌려 갔는데 난 그 아무 데도
서 있지 못하고 웅크린 어깨를 한번도 펴보려 하지 않았어. 그래, 무언가 나는 잘못
하고 있다.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해.'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났고, 우리 팀들은 어느새 땀방울이 빛나기 시작했다.
"녀석아, 너 김아리 맘에 들지? 이렇게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자.
어때? 그래야 다음에 또 만날 기회도 잡을 거 아니냐?"
나는 철우를 설득했다. 철우는 바로 그거다 싶었는지 경태와 상진 등에게 귀옛말로
무어라 전했다. 잠시 후 무드 있는 재즈 음악이 나오자 누구는 집에 간다며 가고,
누구는 바래다 준다며 가고 해서 경태, 철우, 나, 그리고 김아리, 채나경, 거기에
평범하게 생긴 숙영이라는 여자만이 남았다. 우리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철우는 김아리에게 정신을 빼았긴 터라 선불을 요구하는 웨이터에게 주저없이
돈을 빼어 주고는 씩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짜식 도움이 필요하다, 이거지. 몸
받쳐 충성하마!' 우리 셋은 눈길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산업 공학은 뭐 하는 거예요?"
채나경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우리들도 잘 몰라요. 정말 알고 싶어요?"
"좀 생소하잖아요."
난처한 질문에 슬쩍 말을 돌리려는 철우에게 숙영이가 앞길을 막았다.
"산업 공학이라는 현상들을 정식화하고 이를 통해 최적해를 구하는 학문이에요,
여기서 현상이라는 것은 회사일 수도 있고, 정부일 수도 있고 가정일 수도 있고,
우리가 접하는 모든 부분들일 수 있어요.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하면 정형화할
것이며 또한 최적해를 구해 낼 것인지를 위해 통계학, OR, 조직론, 컴퓨터
시뮬레이션, 생산관리, 작업관리, 경제성 공학, 인간공학 등등을 배우죠.
산업 공학은 이렇게 광범위한 부분에 적용할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지금 우리가
않아 있는 의자의 안락도를 높이는 설계에서부터 이 카페에 몇 명의 종업원이 가장
적정하고, 몇 개의 테이블을 얼마의 사이즈로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문제들도 설명할 수가 있어요."
경태의 설명에 이해가 가는지 어떤지 좌우간 그들은 고개를 끄덕겨렸다. 경태가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우리 이런 것도 대학에서 했었어요. 여자 속옷은 어떤 사이즈가 가장 편한가?"
우리 모두는 소리없이 웃었다.
"과학원이 뭐 하는 데예요?"
다소곳이 않아 있던 아리가 모처럼 한 마디 묻자 철우가 몸을 파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공부하는 곳이죠. 대학 마치고 석사, 박사 과정을 이수하는 곳인데요. 좀 힘이
들죠."
"군대는 안 가나요?"
"예, 대신 3년간 국내에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군대보다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긴 지옥이에요."
"아니, 왜요?"
"음. 대학생이니까 알겠지만 중간고사 때 벼락치기 공부하죠? 우린 그 벼락치기
공부를 매일 날밤을 새워 가며 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거기 졸업하면 뭐 해요?"
아리의 연이은 질문에 우린 순간 당황했다. 지금까지의 질문은 미팅을 나가서나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항상 듣는 질문이라서 어느 정도 모범 답안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리의 마지막 질문은 솔직히 말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철우와 내가
주춤거리자 경태가 말을 받았다.
"옛날 선배들은 석사를 마치고 교수로 갔습니다. 요즘엔 석사 마치면 대개 일반
기업이나 연구소 등에 가서 연구를 하죠. 물론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의 능력은 이미 소문이 나 있죠. 요즘은 박사 과정 중에 있는 형들이 교수로
가요. 그런데 이젠 교수 자리가 거의 없어요. 그러나 교수건 연구소건 그건 어떤
직업을 갖느냐일 뿐이고요. 일단 좋은 논문을 써야 하겠죠. 내 분야에선 세계
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하는 거죠. 국민의 세금으로 편하게
공부하고 있으니 그만한 책임감이 따르는 거죠. 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상 자신의
자리매김을 해야 되는데, 그것은 이 조국가 민족을 위해 나 스스로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럴라면 세계 제일의 자리에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졸업을
하고 나서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꼭 이루어야 할 꾸미요 우리의 야망입니다."
4. 그대도 여기 있다면
원에서는 교수님들을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성 다음에 박사님을 붙였는데,
교육 기관이라기 보다는 연구 기관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과에는 8개의
연구실이 있다. 다시 말하면 여덟 분의 박사님이 계신 것이다. 다른 과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교수님들은 학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연구
경력도그렇거니와 연구 실적은 대부분 세계적 수준이었다. 그래서 원생들은 교수님을
상당히 경외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수, 아니 박사님의 말씀은 곧 법칙에
가까우리만치의 권능(?)을 가지고 있어서 학생들은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인간 공학을 강의하시는 변 박사님이 수업을 하다 말고 혼자말처럼
물으셨다.
"중간고사 언제 보지? 4월 28일 저녁 7시 어때?"
우리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범위는 없고, 물론 오픈 북(Open Book)이고, 시간 제약 역시
없고, 참 텀페이퍼 내여지?" 하며 우리들을 쑥 쳐다보셨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텀페이서는 언제까지 내야 합니까?"
"물론 그날 저녁까지 내는 걸로 하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워드프로세서 치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도록 하세요."
변 박사님의 뜻을 설명하지면 이렇다. 중간고사는 4월 28일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끝나는 시간은 답안을 다 쓸 때까지이고, 시험 범위는 그간 배운 것고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이며, 시험 시간에 어떤 자료든 가져와서 봐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텀페이퍼는 착실히 써서 시험 보는 날까지 제출하되 컴퓨터에 입력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으므로 그 시간에 연구를 더하고 손으로 갈겨 써도 다 읽겠다는 말이다.
수업이 끝난 후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말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인간 공학과 관련하여 수업 시간에 나온
매터리얼(Meterial:강의나 세미나 시간에 나누어 주는 학문적 지식이 요약된 자료)과
도서관 논문 서기를 뒤져 찾아 놓은 논문을 꺼내 보았다. 화일 박스 하나는 족히 넘는
양이었다. 그리고 책이 두 권이었다. 책은 둘째 치고라도 논문 한 편 읽으려면 두서너
시간은 걸리는데, 암담하기만 했다.
과학원에는 석사 경고 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경고 정도가 아니고 퇴원도
가능한 무서운 형벌이었다. 한 과목이라도 C가 나오면 석사 경고가 되고 이것이 두
학기 연속이면 퇴원이다. 그러나 퇴원만으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퇴원과 동시에
군대에 가야 하고 그간의 경비 일체를 반납해야 했다. 그렇다고 교수님들이 학점에
대해 관대하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학점은 극도로 짰다. 올 A는 고사하고,
C만은 족어도 받지 않아야 했다.
나는 일단 인간랩(인간공학 연구실을 이렇게 불렀다)에 갔다. 혹시나 선배들에게
좋은 정보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마침 박사 과정 2년차의 경석형이 있었다.
"형, 우리 중간고사 본다는데 자료 좀 없어?"
"자료? 너 수업 안 들어 갔었냐?"
"그러지 말고 좀 주세요."
"옛날 시험 문제는 있다만 같은 문제는 고사하고 비슷한 것돠 다시 나온 적이 없어.
매시험 떄마다 문제가 확 변한다니까. 여기서 자료를 구하느니 도서관에 빨리
올라가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이지."
"그럼 어떡하죠? 그러지 말고 정말 좋은 길 없어요?"
"모여서 공부해. 그게 사는 길이야."
나는 하는 수 없이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떄마침 철우가 올라왔다. 우리는 암담한
마음으로 도서관 휴게실에 올라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야, 우리 가타이 모여서 하자. 대학 때 스터디 그룹 할 떄처럼 모다 다 읽고, 그
중 한 부분씩 발표를 해 보고 예상 문제를 도출해 내는 거야."
"그래! 그게 옵티말(Optimal:최적)인 것 같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윤재는
역시 천재야."
"뭐얼?"
당초 인간공학에 관심이 없어서 강의를 신청하지 않았던 경태는 우리더러 고생 좀
하라며 약 올리듯 어꺠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때 우리는 스터디 그룹을 조직했다. 대개 그 시점에서 3가지
부류로 나누어지기 마련인 졸업생들의 진로에 따라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늘 붙어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중 하나는 일찍이 취직을 하기 위해 나름대로
영어다 뭐다 해서 같이 몰려다녔고, 또 하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원 시험
위주로 공부하는 그룹이 있었다. 마지막 하나로 과학원을 위한 그룹이 형성되었는데
그 때 우리멤버는 모두 열셋이었다.
우리 열세 명은 3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지금까지 강한 연대 의식과 남다른 우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침 8시부터 밤 12시가 되도록 늘 같이 지내고 일 주일에 두 번씩의
세미나를 개최하여 각 과목의 주요 문제들을 해결하여 갔다. 일요일, 휴일, 방학 등등
배낭을 메게 하는 날들도 우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오로지 도서관 자리에서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사실 입학 시험에 낙방한 태성과 건호을 빼고는 그대로
과학원에 입학해서 그 때와 거의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과학원 입학 시험은 다른 대학의 대학원 입학 시험보다 먼저 치러져서 만약 떨어진
사람은 다른 대학원에 가도 무방했지만 우리 대학의 대학원만은 그러질 못했다. 우리
대학 교수들은 일단 과학원 시험에 응시한 학생에 대해서는 당신의 자식으로 생각지
않으려 했다. 그도 당연할 것이 열심히 키운 자식이 다른 집 양자로 가는 거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학원 시험에 떨어지면 군 문제가 해결되었을 경우에는
대부분 재수를 했다. 태성은 다행히 다른 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군대를 연기한 뒤
재수하고 있고 건호는 결국 통계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철우와 나는 도서관을 빙 돌아 우리 대학 출신 중 인간공학을 신청한 스터디 그룹
멤버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각자 발표해야 할 내용을 나누고 201 강의실에서 내일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험은 일 주일밖에 남지 않았고, 다른 과목 시험도
줄줄이 발표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여유를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논문에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쉬운 것과 중간것, 어려운
것으로 분류하고 쉬운 것부터 잡아 읽기 시작했다. 대학 때 배웠던 작업자의 작업
곤란성 지수에 따른 작업자의 반응 시간을 정리한 피츠의 법칙(Fitt's Law)을 이용한
작업 공간에 관한 연구들, 그리고 매직(Magic)7에 관련된 논문들이었다.
매직 7은 채널 캐퍼시티(Channel Capacity)를 말하는데,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의 정보량은 7+-2 bit라는 것이다. 여기서 bit는 실현가능성이 같은 두 개의 대안
속에서 하나가 명시되어 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을 의미한다. 대학에서는
슬쩍슬쩍 단편적인 원리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심도 있게 읽으며 새로운 학문의
가치를 헤쳐가는 논리의 흐름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러나 문제는 폴트 트리 애널리시스(Fault Tree Analysis)였다. 이것은 시스템
에러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다른 것인데, 어찌나 어려운지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벌써 새벽 3시 반이나 됐는데 중간도 다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담배를 챙겨
들고 휴게실로 나갔다. 휴게실에는 낮에 보다 사람이 더 많았고 아니나 다르까 철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야, 무 해. 임마, 지금 논문 쓰냐?"
"아니야, 하도 기가 막혀서 나왔다. 윤재, 너 많이 했냐?"
"응, 한 번 다 끝냈지. 뭐 쉽더라."
"놀고 있네, 잘났다."
"이거 좀 심각하다야. 오늘까지 다 못 하겠는데."
"야. 술이나 한잔 하자. 배도 고프고 잠도 슬슬 오고."
"너 웬일이냐? 네가 다 술을 먹자고 하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일구먼."
"야. 작년 이맘 때, 그 순진하던 병호형이 과학원 들어가서 변한 거 너 못 봤냐? 나
그 심정 이해 간다."
"음, 너 졸업할 수 있겠다. 그 정도면..."
"쓸데없는 소리말고 가자!"
사실 남아 있는 문제들이 많아서 주저스러웠지만 의외인 철우의 행동 때문에 할머니
집으로 갔다.
할머니 집은 상점이다. 그것도 조그마한 구멍가게인데 의자를 갖추어 놓고 라면과
달걀을 삶아서 팔고 있었다. 원래는 할머니가 장사를 했는데 요즘은 마흔 가까이 된
며느리가 가게를 꾸려 가로 있었다. 그 며느리는 남편을 사고로 일찍 잃은 탓인지 늘
우울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라면말고는 맥주나 양주를 먹을 수 있었는데, 항상
얼음이 준비되어 있어 기숙사에서 마시고 싶을 때는 이 얼음을 소중히 싸들고
기숙사까지 뛰어갔다.
우리는 라면과 맥주를 시켜 놓고 멍한 머리로 인해 아무 말 없이 않아 있었다.
아줌마는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하고는 기계적으로 라면을 끓이고 술을 날라왔다.
"아주머니, 이렇게 외상 많이 해도 장사돼요?"
"그러믄요. 첫째, 월말이면 안 가져오는 학생이 없잖아요. 그리고 떼일 염려는
더더욱 없고. 옛날에 우리가 외상 장부를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오는
학생마다 외상 먹었던 것 생각해서 마음대로 적으라고 했죠. 얼마나 지나서 그 장부를
농 밑에서 찾았거든. 그런데 원래 장부의 외상값보다 학생들이 적은 금액이 더
많더라니까요."
아주머니는 원래 말이 없는 분인데, 꽤 무료하고 졸리웠던지 말에 꼬리를 이어
갔다.
"시험이 다가오니까 내려오는 사람이 없어서 오늘은 일찍 닫을까 했더니 윤재씨가
왔구만요. 시험 안 봐요?"
계속 대답을 했다간 길어질 거 같고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니어서 대충 대답하며
술잔을 비웠다.
처음 보는 시험! 이거 정말 잘 봐야 하느데.
"철우야! 너 인간 공학 랩 가고 싶다고 했지?"
"응, 그런데 이거 잘 될지 모르겠다."
"난 결론 내렸다. 대학 때도 느낀 거지만 이건 노동력 착취를 위한 학문이라고."
"뭐라고? 인간의 작업 조건을 개선하고 좀더 인간 중심의 기계를 설계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작업장에 기계를 도입하고 그 위험도와 안전도를
설계하는 학문인데 노동력 착취는 아니지. 오히려 노동환경 개선 아니냐?"
"아니지, 작업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노동 강도를 높이기 위한 거야. 물론 네 말도
맞긴 맞다만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돈이 중심이야. 아무리 좋은 이론과
솔루션(Solution:해답 또는 최적의 방법)이라 하라지라도 사용자가 쓰는 각도에서는
얼마든지 착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너 사회주의자냐? 왜 그렇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냐? 미래의 세계는 과학
기술 사회를 넘어선 정보화 사회야. 정보화 사회란 인간의 노동력 중심이 아닌 정보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를 말하는 거지. 즉, 과학 기술 사회의 완성으로
노동의 의미가 바뀌게 된다 이거야. 많은 직업들을 기계가 대신 할 거고 인간은
명령만 내리는 사회로 간다 이거지. 인간 공학은 과학 기술
사회에서는 작업 개선을, 정보 사회에서는 인간의 신뢰도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야. 이것이 첨단이며 인간중심의 학문이 아니고 뭐겠냐?"
"인간의 사회는 결코 비물질적인 요소만으로 정의할 수는 없어. 네 말대로 정보화
사회가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정보라는 비물질의 소유자는 누구일까? 곧
자본가야.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의 주체 역시 자본가이고 이들은 계속해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해 낼 거야. 고용의 기회는 적어지고 자본은 점점 더 소수의 사람에게
독점되어지는 건 아닐까?"
"아니야! 결코 아니야! 인간의 관심사는 평등이나 자유라고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행복이라고 말들 하는 삶의 질이야. 네 말대로 그러한 자본의 독점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 사회는 삶의 질이 공동으로 상승될 것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돼.
우리 나라만 해도 지금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70년대와 비교해 봤을 때
삶의 질이 얼마나 향상되었냐! 그렇기 떄문에 진보된 사회에서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진보된 사회 형태에서 발생한 노동 혁명을 너 봤어?"
우리의 그칠 줄 모르는 논쟁은 계속되어 갔다. 자신과 결부된 것에는 결코 지지
않으려는 철우의 끈질김과 논리를 번복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는 내 자존심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 맞붙은 것이다. 끝내 철우는 나의 말문을 닫아 버릴 비장의 무기를
들어 나를 후려쳤다.
"야, 그러는 너는 왜 산업 공학을 공부하냐. 또 인간 공학은 왜 해?"
도서관 창문으로 은근한 아침 빛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안 것은 별로 마시지도 않은
술이 입 속에서 새끼를 치는지 입 안 가득히 뭔가 들어 있는 듯해서 칫솔을 들고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나는 도서관 문을 밀고 나가 산뜻한 아침의 손길이 뻗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지나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북적거릴 서울시의 등때기를 바라보며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의미를 헤아려 보았다. 언젠간 나도 저기 사람 사는 마을로 돌아가 저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겠지? 지금껏 학교와 집 외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떤
건물 속을 매일 아침 드나들겠지? 그리고 무엇인가를 하겠지? 단지 생활이라는 명찰만
붙이고 다니겠지...
세면대에 머리를 쳐박고 씻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의 누군가 씻어 내라고 했다. 다
쓸어 내고 희망만 남기라고 하였다. 나는 일찌감치 갈아 놓은 수건에 아직도 묻어
있을 법한 아줌마의 고마움을 얼굴로 감쌌다.
오늘도 시험이 발표되고 내 머리 속은 한계를 느낄 만치의 자료들로 가득차서
조금만 움직이면 하나둘 톡톡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모두들 우왕좌왕 하며 기존의 시험
문제를 서로 복사하고 숙제 냈던 것도 복사를 맡겼다.
과학원에서는 복사에 관한 한 그 양에 거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일단 실험실에만
들어가면 복사 전표에 기록한 후 제출만 하면 복사실에서 착실히도 잘 챙겨서 복사해
주었다. 다만 제본 값은 별도로 부담해야 했으나 책을 전체 복사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복사물을 많이 봐야 하는 관계로 복사 질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썼다. 잘못된 복사물은 시력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회에서 복사질을
늘 점검하고 사용하는 복사 용지도 수시로 검토하는 덕분에 복사 상태는 좋았다.
하지만 복사비가 무료인 것은 랩이 결정된 다음이기 때문에, 아직 랩이 배정되지 않은
우리들은 복사를 하려면 돈을 내야 했다. 그래서 편법으로 선배들에게 찾아가 살며시
부탁해서 복사 전표를 얻어 오는 방법을 썼지만, 그 일도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다.
주는 선배는 선배대로 랩 계정을 깎아 먹는 일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도 많은 양이 아니면 되도록 우리 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방향을 택했다.
7시에 201강의실에는 자료들과 밤샘으로 구겨진 듯한 다서 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하나씩 강단에 나가 문제를 설명하고 각각의 이론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핸드아웃(Handout:논문이나 책을 읽고 축약하여 정리한 노트)을 배포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설명이 나오면 즉시에 반론이 제기됐고 깨끗한 결말이 날 때까지 논쟁은
계속되었다. 우리의 토론은 무려 6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끝날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문제점과 간결한 솔루션을 들고 모두 기숙사로 향했을 때는 새벽 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기숙사에선 경태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철우와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들어가 옷을 벗어 침대 위에 적당히 걸어 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 갔다.
"얌마? 니들 죄 졌냐? 야, 형님 배고프다. 가서 라면 좀 끓여 와라!"
갑자기 경태가 홱 돌아서며 우리를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보니 우리 역시
배가 출출했다.
"그래, 철우야! 라면이나 먹고 자자."
"잘 생각했다. 네가 끓여 와라."
철우가 침대에 걸터 않으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라면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는 사람 방방이 돌아다니며 라면 다섯 개를 주워 담아
와서 옥상으로 올라가 라면을 끓였다.
라면 끓이는 방 창문으로 미아리의 불빛들이 아름답게 비쳐 왔다. 그 작은 불빛들은
한데 뭉쳐 큰 불덩어리가 되었다.
조그마한 코펠에 다서 개나 라면을 끓여 들고 7층에서 3층 우리방까지 내려오니
경태와 철우는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야! 장난 그만 하고, 신문지 깔고, 세팅해!"
세팅이라는 것은 우리 방에 그릇이 없엇 라면 봉지를 둥글게 말아서 공기처럼
만들어 그 위에 라면을 놓고 먹기 위함이었다. 라면을 끓인 나는 당연히 코펠 뚜겅을
차지했고 철우와 경태는 내가 잘 챙겨 들고 온 빈 봉지를 정성스레 접어서 하나씩
들고 앉았다.
"윤재 너 끓이면서 다 먹은 거 아냐? 아이고, 그리고 이게 뭐냐. 띵띵 불었다."
"야, 말 많이 하면 많이 못 먹는다."
우린 재잘거리며 정신 없이 먹어치웠다. 가끔씩 찬밥과 김치가 없음을
아쉬워하며..."
라면을 다 먹고 나서는 홀에 있는 보리차를 떠다가 목을 휑궜다. 경태는 다시
책상에 붙어 않았고 우린 잠을 청했다. 하지만 경태의 글씨 쓰는 소리와 시계 바늘
소리가 내 온 신경을 다 찌르고 다니는 듯해서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아이고, 철우
녀석 코 골기 전에 자야 될 텐데. 하지만 나는 철우의 코 고는 소리가 날 때까지,
잠드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경태가 의자에서 일어나 철우를 발로 찼다.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약효는 길지
못했다. 드르렁드르렁 하다가는 숨이 딸깍 멎었다. 나는 순간 저 녀석 저 대목에서
죽는 거 아냐? 하고 숨을 죽이고 몰아 내쉬기를 기다렸다. 불안했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퓨 하며 내쉬었다. 나는 발딱 일어나 앉았다.
"경태야! 저거 어떻게 안 될까?"
"시험 때라 약처방을 써서 고생시킬 수는 없고... 어떡하지?"
"약처방?"
"응, 치약 처방 말이다. 숨을 들이마실 때 치약을 쭉 짜주면 콧구멍으로 쑥
들어가지. 너 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 가서 그런 짓 안 해 봤냐?" 그리고 치약을
거기에다 바르면 띵띵 부어 오른다. 그러니 코 속에 들어가면 어떻겠냐? 야, 우리
코하고 거기에다 다 발라 줄까?"
"그건 너무 심하니까 코에다만 넣자. 근데, 그거 임상 실험은 된 거냐? 확실하게
다음부터는 안 골뿐더러 후유증은 없는?"
"그으럼."
"야, 그럼 우리 한 번 해 보자."
"그래, 나도 이제 자야겠으니 불을 끄고 양쪽 콧구멍에다가 잽싸게 쏘아 주고 우린
잠에 빠지는 거야."
경태는 스탠드 불을 끄고 치약을 더듬더듬 찾더니 철우에게 다가가 한번 건드려
보고 계속 코를 골자, 순식간에 일을 끝냈는지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 일순간 코 고는
소리가 멎더니 벌떡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핑 하며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뭐야? 아이고."
우리가 웃음 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이 철우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 방은 샤워실
옆이라 철우가 열심히 코 속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과정을 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웃음을 참아가며 슬며시 일어나 서로 눈짓을 보내고는 다시
누웠다. 잠시 후 들어온 철우는 씩씩거렸지만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나의 신경세포를
건드리지 않아서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철우는 책상에 휴지를 수북히 쌓아 놓고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어젯밤 일들이 생각나 웃으려다 말고 태연히 물었다.
"언제 일어났냐? 밤 샜냐?"
"너희들 두고 보자, 응."
"야, 무슨 일인데 그러냐? 감기 걸렸냐?"
"그럼 경태 이 새끼 짓이구나."
내가 시치미를 뚝 떼자 드디어 전모를 알았다는 듯이 일어나더니 대뜸 성냥을 찾아
들고 불침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경태의 목에 침을 살짝 바르더니 그 위에 성냥개비
숯을 붙이고 종이를 말아 그 주위를 감싸서 열을 차단한 뒤 불을 붙였다.
아치미에 깨우는 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던 경태는 불침 단 한 방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사태를 누치 채고는 베개를 들어 철우에게 던졌다.
이 때부터 아웅다웅 서로 말싸움이 시작됐다. 지금도 코 안이 화하고 후끈거린다며
소리를 지르고, 코 고는 죄인이 잠을 먼저 자긴 왜 먼저 자느냐며 서로 낄낄거렸다.
인간의 힘은 무한하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철우는 우리를 따라 나섰다. 경태와
나는 서로 까치집 머리를 하고 나섰고 철우는 코를 연신 후비며 유정사를 지나
후문으로 나왔다. 영양 보신을 해야겠기에 우리는 점심으로 고기나 먹을까 해서였다.
우리의 고행의 길은 끝이 없었다. 연이은 밤샘과 시험이 번갈아 가며 괴롭혔고
텀페이퍼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몰아 대었다. 시험 시간은 무제한이었지만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교수님이 학문의 길은 끝이 없다는 말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시간은 그야말로 무제한이었다. 자정쯤 되어서는 좀 쉬고 하라며 음료수를
뽑아 주고 가는 교수님도 있었다. 뒤돌아가는 교수님의 어깨를 보며 나는 분명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은 참으로 편한 것이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중간고사가 끝났다.
우리의 자존심과 학문에의 열의를 무참히 박살내어 버리고 중간고사라는 폭풍이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중간고사라는 부담만 끝났을 뿐, 수업의 로드(Load:부담)는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퀴즈 보고 리포트가 나오고 논문이 읽을거리고 제공되었다.
우리는 중간고사가 끝났다는 기쁨으로 영화 보러 다니고 미팅 건수 만들던 대학
시절은 어쩌면 허영이요 사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중간고사가 끝나자
제일로 하고 싶은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실컷 잠이나 자고 싶었으니까.
토요일 오후가 됐다. 오월의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서울이 집인 사람들은 모두
옷가지를 한보따리씩 싸들고 집으로 갔고 고향이 먼 나는 기숙사로 향했다. 토요일의
기숙사는 사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야식 코너나 야간 매점이 문을 열지 않아서가
아니고, 텅 빈, 남모르는 집에 들어서는 것 같은 거리낌이 기숙사 전체를 감돌았다.
나는 만화책을 뒤적이다가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가는 도심 속에 언뜻 서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열심히
그녀를 부르며 쫓아 뛰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더욱 힘을 내어 뛰었다. 나의 발은 무언가에 계속 걸려
걸을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부저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계속 잠에 들어가 그 꿈을 이어가고
싶었다. 또 부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기 위해 되도록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며 부저 소리를 세웠다.
한 번, 두 번! 아니, 내 전화다.
나는 맨발로 뛰어 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이윤재씨, 전화 받으세요."
"예, 고맙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 나야."
"서영아!..."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가슴이 뛰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간의 그리움이 일순간에 폭발해 버리는 듯했다. 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무슨 말을 할까?
"형! 잘 지냈어?"
"으응..."
또 한번의 침묵이 흘렀다.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왜 전화했어?"
"그냥."
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깊은 숨을 몰아 쉬기 위해 수화기를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았다. 밤이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가로등 밑에서 버드나무가 빗줄기에
겨워 흔들거렸다.
"그럼 됐어. 잘 지내세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몸이 붕하고 뜨는
듯했다. 잠시 후 딸깍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내 심장을 가로질렀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눈을 감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도 생각이 나던 사람인데, 나는 이렇게 몇 마디 해보지도
못하고 빈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그냥 나왔다.
굵은 빗줄기가 선뜻선뜻 목을 때렸다. 나는 이내 흠뻑 젖었다. 그래 씻어가 버려라!
바보 같은 이 나약함을 쓸어가 버려라!
"아니 원인이세요. 이 비를 다 맞고. 윤재씨,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색도 안
좋아요."
카페 캔(CAN)의 젊은 여주인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들고 와 앉으며 근심스레 물었다.
"술 좀 주세요. 독한 걸로요."
"담근 술 있는데 드릴까요?"
"예, 많이 주세요."
그녀는 매실주와 과일을 깍아들고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카페 구석자리에
쟁반을 내려놓고 치마를 접으며 앉았다.
"무슨 걱정 있어요? 꼭 실연당한 사람 같아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물을 들이키고 그 컵에 매실주를 가득 담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이문세 거 있죠? B면 좀 틀어 주세요."
나는 노래를 가슴에 담으로 술잔을 비워 갔다.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한 병을 다 비우고 유령처럼 일어나 우산을 주는 그녀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며 밖으로 나왔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 탔다. 서영의 집 부근에 내려 무작정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한참을
망설이며 시계를 바라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그녀가 받았다.
"서영아! 서영아! 나다, 보고싶다. 지금 집 앞이야. 나와라, 보고 싶다. 기다릴게."
그녀의 집 대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자 그녀가 대문 앞에 서서 우산을 두
손으로 잡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내게서 두어 발짝 떨어져 섰다.
나는 성큼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나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품은 참으로 따스했다. 그녀는 한손으로 나의 어깨를
가볍게 올려 놓았다. 나의 몸이 순간 출렁이는 것 같았다. 그녀도 떨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뜻 모를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상큼한 여자의 냄새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냄새가 나를
휘감아 버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그녀의 온 몸은
비둘기가 뛰어오르듯 일렁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왠지 어색해서 기리를 두고 걸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레떼라는 곳에 들어갔다. 우린 처음으로 옆에 앉았다. 그건 내가
의식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티셔츠 위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동안은 앞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가슴의
곡선을 느낄 수가 없었는데, 오늘 보는 부드러운 선은 처음으로 여성임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나에게 몸을 의지한
그녀는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얹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너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너는 나의 일부처럼 늘 나를 따라
다녔어. 그렇지만 남들처럼 그렇게 쉬운 사랑은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한 만남은
왠지 두려웠어. 항상 헤어짐을 연슴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너와의 헤어짐이란
너무도 두려웠어. 쉽게 뜨거워진 쇠는 쉽게 식는다고 하잖아. 그렇게 쉽게 식어
버리고 싶진 안았어. 그런데 이번 기회에 난 소중한 걸 깨달았어. 너는 나의 전부라는
것을.... 이런 곳에서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랑해!"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고백하며 우습게도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동해안의
우연한 만남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서영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말을 하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러한 서영의 당당함과 자신감을 볼 때마다
어두운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감추려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늘 내가 먼저 이야기
꺼내면 그녀의 어렵고 힘든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를 대할 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그녀에게서 절망을 보아 왔다.
"서영아, 난 오늘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너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단지
이야기할 기회도, 필요성도 못 느꼈던 내 어린 시절에 관한 얘기를 말이야. 나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어. 야산이 있는 농촌이었는데 한 십리쯤 걸어 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지. 내 위로 형님 한 분과 아래로 여동생도 하나 있지. 몰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빠도 있었어. 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셨어.
우리 집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소작은 아니었지. 아버지는
일찍 장가를 든 덕분으로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할 떄 내가 벌써 두 살이었어.
집안 살림을 모두 엄마가 맡아서 하셨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농사를 남자 한
명 없이 어떻게 해냈을까 몰라.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에 논두렁을 보러 간다고 나가신 엄마는 그 날 밤 할머니의 통곡과 동네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에 싸여 영영 일어날 수 없는 몸으로 돌아왔어.
난 그 때 죽음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면서도 남들이 우니까
나도 울었을 뿐 왜 울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기억이 나. 갑작스레 상처를 한 우리
아버지는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대학도 그만둔 채 전주에 자리를 자리를 잡았어. 우리
아버지는 전주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어. 그때 지금의 어머니를 만나
새살림을 시작했지, 나는 그 때까지도 나의 친엄마의 부재에 대한 불편함이나 그리움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지.
하지만 새어미니를 맞았을 때는 어디론지 달아나고 싶었어. 작은 공간에 최소한의
부분만 내놓은 채 숨어 있고 싶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빠른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결단을 현명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새 어머니도 자신의 욕심을 전혀 챙기지
않는 참 좋은 분이야. 그래서 나는 이복 동생도 없어. 아무튼 그 때부터 나는
할머니의 품 안에서 자랐지. 그리고 차츰 잊혀져 가는 엄마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말을 없애고 친구를 없애고...
넌 그리움의 본질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은, 적어도 혈육의 그리움은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과 그림움의 대상과의 닮은꼴을 찾는 작업이야. 어쩌면 나는 엄마의 죽음
뒤로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 앞에 존재하느 것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비겁하고 당돌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게 했는지도
몰라. 난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 그건 그립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그 그리움은
자꾸 커서 두려움이 되었지. 너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두려움 말이야."
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녀가 울고 있느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소 감추며 살 부분이 있다. 적어도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간직해야 할 전설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의 전설을 주워
담을 차롄데 서영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와 월요일에 제출할 리포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11시가 돼도 철우와
경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 9시경이면 모두 집에서 돌아오던 녀석들이 늦으니
걱정이 되었다.
멀리서 퉁탕거리는 소리와 함ㅁ꼐 경태와 철우가 서로 뭔가 잘잘못을 가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짝이 부서져라 철우가 방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야!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캬! 오늘 멋진 데이트를 할 수 있었는데. 아이고,
저 인간."
앞뒤 없이 퍼부어 대는 경태의 말에 철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윤재야! 저 인간 참 못됐다. 내가 아리를 찍었으면 밀어줄 것이지 나를 완전히
물먹이더라니까."
"무슨 얘기들이냐? 아리기는 뭐가 아려?"
"야, 접때 미팅했던 애들 있잖아? 오늘 철우가 집으로 전화를 했더라고, 김아리하고
채나경이를 만나기로 했으니까 나오라고. 그래서 나갔지."
"야 , 근데 나와서 깽판을 쳐! 대낮부터 술 마시자고 하면 어떤 여자가 마시냐?
내가 그랬잖아. 영화 보러 가자고. 그런데도 이 인간이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결국
커피 한 잔만 하고 들어가 버렸잖아."
철우와 경태는 어디서들 마셨는지 거나하게 취해서 서로 잘났다고 싸웠다. 그 때
슬며시 방문 밑 틈으로 전단 한 장이 들어 왔다. 나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갑자기 숨막히게 하는 종이 색깔과 그 위에 찍혀 있는 느낌표로 얼른 눈이 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낚아챈 후 방문을 살며시 열어 복도를 내다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경태와 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과학원에서 이러한 전단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과학원은 원래 국가 가급 비밀 기관에 속하기 때문에 경비가 철저했다. 특히나
입출입 통제가 엄격해서 가슴에 학생증을 매달고 다니지 않으면 여러 모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원칙상 연구 내용이나 연구 중간 단계의 메모조차도 분쇄해야
한다.
안전 관리실은 초소가 여러 군데다. 거기서 입출입을 통제하기도 하고 밤이면 학생
게시판에 공고된 내용을 모조리 적어 매일 아침 원장에게 보고 했다. 그리고 공고를
붙이기 위해서는 학생회의 검인이 붙은 공식 용지 외에는 모두 철거가 되었다. 따라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대자보가 나붙은 예는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소리내어 그 전단을 읽었다.
-오월을 맞이하며-
과학원생 여러분!
과학원 생활이란 끊임없는 긴장감의 연속과 자기 투쟁의 정점을 걸어가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혜택에 힘입어 과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강한 자긍심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생활 구조가 우리 자신을 즉물적이로 말초적인 인간으로
몰아대고 편협화된 개인주의를 창출해 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얼마되지 않은 여유 시간의 거의 전부를 잠과 술과 퇴폐적 놀이 문화에 소진해 버리고
있습니다.
물론 생활의 긴장감으로 인해 어느 부분까지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합리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오월을 맞이하여 우리들을 체제 내적 객체로 놓고 객관적인
점검을 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7년 전 5월, 광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라는 꽃을 위해 산화되어 갔습니다.
단지 정통성이 없는 독재 정권의 유지를 위한 무력에 의해 그들은 민주를 외치며
처첨히 죽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과학도로서의 시각으로 광주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연구하는 -즉 우리의 생산물인 -과학이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복지를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폭탄은 인류의 대체 에너지를 위해 개발된 핵을
대량 살상용 무기로 전용해 버린 아주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현재 제국 열강은
군비를 계속적으로 증강하고 있고, 인류의 전체적인 평화와 복지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할 과학 기술은 그들의 힘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집적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러한 군사적 과학 기술의 발달이 전체 산업 기술을 발전 시킨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실상 군사 과학 기술과 산업 기술과의 차이는 10년 이상의 차이가
있을 뿐더러 극히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산업 기술로의 이행은 부적절하다는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전세계적 군사비의 단 1퍼센트만 투자해도 제 3세계 국가들간의 농업 기술을
앞당김으로써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을 구하고도 남습니다.
현재의 군사비의 단 몇 퍼센트만 투자하더라도 세계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많은
질병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기술의 본질은 단순히 과학
기술이라는 비물질적인 요소가 바로 과학 기술자의 생산물이란 사실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 과학 기술자들은 중세의 예술인들처럼 독재 권력과 힘의 논리를 지탱하는
제국주의의 시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우리는 과학 기술자로서의 아집과
개인주의로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가공할 무기들을 생산하는 데 과학적 호기심과
흥미만으로도 연구할 수 있는 불행한 가치관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다시 돌아온 5월을 바라보며 참된 과학인으로 세계 인류를 위한 진정한
과학 발전을 위해 자신의 시각을 객관화하고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은 진정한
과학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1987. 5. 과학 기술 연구회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 가는 동안 철우와 경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다 읽고 난 나도 책상 위에 던지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과학원 내의 학생 활동 단체 수는 매우 적었다. 우선 학생 자치 단체로서 학생총회,
간사회의, 대의원회, 석림 편집 위원회가 있었다. 학생총회는 학생회장, 부회장,
간사회의 총무, 대의원 의장, 석림 편집 위원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생회장이 구성하는 간사회의가 학생회 운영을 거의 다 맡아 하는 실정이었다.
이 간사 회의에는 총무, 학술 간사가 있고재정 담당 재무 간사, 원내 서점인 방한
서적과 도서관으로 담당하는 사업 간사, 체육 대회를 주관하는 체육 간사, 여학생
권익을 옹호하는 여학생 간사, 기타 원내 문화 창달과 서클 관련 업무를 하는 교양
간사가 있었다.
또 특이할 만한 것으로는 산학 간사와 연보 간사가 있었는데 산학이라함은 학비를
국가에서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기업에서 조달하며 매달 일정액의 장학금을 주어 졸업
후 해당 기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연보는 연구원보를 약칭한 것인데
연구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산학제 학생과 동일했다. 각과 대표로
구성된 대의원회는 예결산을 심의하고 제반 원내 활동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리고
석림 편집 위원회는 [석림]이라는 과학 관련 정기 간행물을 제작하는 조직이었다.
원내의 문화 형성을 이끌어 가는 서클로는 열 개 정도가 있는데, 체육 서클인
'테니스회'및 심신 수련을 위한 '정각도회'가 있으며 학술 서클은 한국 과학 기술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향토'와 올바른 고대사 연구를 위한 '아리'가 있다. 또한 취미
서클로 올바른 유아 교육을 위한 '유아 교육 연구회'와 음악을 통한 친목 모임인
'석향'이 있어, 봄.가을 정기 공연(외부 초청 공연)과 휴게실의 음악을 제공하였고
나머지는 종교 서클들이다. 그러나 서클들의 원생 참여도가 불균형하기 때문에 제대로
운영되기가 힘들었고 기타 미술, 사진, 등산 등 취미 서클이 있다 없다 했다.
그런데 '과학 기술 연구회'라는 이름은 참으로 생소했고, 그들의 이러한 전단은
우리를 일상 생활에서 꺠어나게 하는 작은 힘을 제공해 주었다.
방 안은 담배 연기로 가득찼고 우리는 우리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태야! 어? 너희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하게 하고 있냐? 자, 맥주나 좀 들고
하지."
권도현이가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오며 무거운 방안 공기를 깨고 캔 맥주를
방바닥에 쏟아 부었다.
"야, 웬일이냐? 집에 가서 엄마한테 춥고 배고프다고 울어댄 거 아냐?" 경태는
푸짐하게 쌓인 술과 안주를 한 팔에 안을 듯이 받아서 바닥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오냐, 나라에 돈이 떨어져서 식당이고 뭐고 다 문 닫았다고 했다, 왜? 농담이고,
사실은 너희들에게 할 얘기 있어서 그래."
"뭔데? 그럼 이거 쥐약 아니냐?"
"아냐! 그냥 우선 상의 좀 하려고. 사실은 이번 학생회장에 출마하려고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우리는 맥주를 한모금 마시다 말고 도현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학 때 그가 한 행적들로 보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과학원에 들어와서는 거의
도서관에 살다시피 했고 별로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없기에 우리는 나름대로 그가
이젠 공부에 전념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리들의 태도에 해명이라도 하듯 도현은 부드러운어조로 말을 이었다.
"과학원에 와서는 공부나 열심히 하려 했는데 그간 학생회 활동을 보니 문제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원생들을 주도하는 입장이 아니고 그 귀를 따라 다니며 불만
해소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어. 사실 과학원은 한국 과학의 산실이고
이나라 과학의 중추임이 분명한데 그들에게 진정한 과학자로서의 자질이랄까 하는
객관적 인식의 자를 제공하고 이끄렁 가야 할 강력한 학생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희들이 알듯이 나는 보수주의자 아니냐.
그래서 나는 그러한 학생회의 일차적 토대를 만들고 싶어. 첫째로 철저한
개인주의를 인정하되 충분한 의견 수렴과 의식 고양을 할 수 있도록 대중적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의 일차적인 기능은 커뮤니게이션이라고 보거든. 그래서
원내의 모든 채널을 이용한 의사 전달과 수집이 우선 과제인 것 같고, 둘째는
과학원의 문화 변혁을 들 수 있는데 지금 원생들은 여유 시간을 그저 낭비하고 있어.
이러한 시간을 모아 정서 함양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새로운 서클과 기존 서클의
강력한 지원이 따라야 할 것 같아,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복지 문제인데..."
"응, 알겠다. 너라면 이미 세부 계획은 다 세웠을 거고 나는 찬성이야. 너희들도
찬성이지? 그런데 기존 조직들은 만나 봤냐?"
"응, 서클 장들이나 대의원들 그리고 현재 학생회 임원, 석림까지 모두 만나서 내
뜻을 전했는데 다 크게 공감하는 것 같았어. 그 중 일부는 적극적인 지지를 하기로
약속했고."
"그래, 그럼 다 된 거 아냐. 일단은 우리가 해야 할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운동원은
구성 했고? 소요 자금도?"
"아니, 그것이 문제긴 한데 잘될 것 같아, 운동원은 각 과에서 1명씩을 조달받기로
약속이 돼 있어."
"좋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은 충분히 도울 테니 열심히 해봐! 그리고 넌
분명히 해낼 거라고 믿어."
"고맙다."
도현과 경태는 서로 머리를 움켜 잡았다. 철우는 일단 이 일에 발을 깊이 들여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고 물론 나도 그랬다. 우리는 간간이 술을 홀짝거려 가며 과학원의
현안 무제를 이야기했다. 마치 도현이 모두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대중의 의사가 없어 보이는 과학원생들이지만 공동 생활로 인해 학문적인 것과
극히 개인적인 일 이회에는 모두 서로 알고 있었다. 대덕이전에 따른 문제점, 과학원
위상의 문제점, 정부의 과학 정책, 현 시국의 문제에서부터 기숙사, 식당, 도서관
등등의 문제까지 불평을 양념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도현의 학생회장 출마로 인해 우리 과원들은 다시 한 번 들뜨게 되었다. 사실
중간고사가 끝나갈 무렵 학생회장 선거에 관한 벽보가 커다랗게 나붙었지만, 대개는
열심히 읽기는 하되 식사 끝난 후의 소화 운동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았었다. 물론 나
역시 대충 읽어 보고 난 뒤 '아! 여기도 이런 게 있구나'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원생들은 자신의 학문 이외의 존재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취미 활동 즉 운동이랄지 그림이랄지 음악처럼 자신의 여가 활용
시간에 관한 것에는 또 열심이었지만, 대중 앞에 선다거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자신과 직접 관련돼 있지 않은 곳에 투자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지 요 몇 년 동안은 계속 단독 출마로인해 찬반 투표만 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경영 과학과에서만 몇 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또 한 번
원내가 수근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경태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와서 거금 1만 원씩을 공출(?)해 갔고, 급기야는 사역까지 시켰다.
저녁 먹고 도서관에 들어 앉아 페이퍼를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목덜미를
잡더니 그냥 쭉 끌어올렸다.
"야! 따라와! 이번엔 머리 쓰는 일이니 안심해라!"
"어딜? 지금도 머리는 빽빽해."
"잔소리 말고 따라와! 지금 구호 만드는 중인데 생각 안 나면 옆에서 매직으로
쓰기라도 하라고."
경태가 오뉴월에 개 모가지 끌듯 데려간 곳은 선거 운동 본부로 정했다는 학생회실
바로 옆 석림실이었다. 석림실에 들어서는 순간 과학원이 사회의 섬이라면 이곳은
과학원에서의 섬으로 느껴졌다. 책장에 빽빽히 꽃힌 책들의 제목부터 대학가 서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었고, 벽에 붙여 놓은 포스터나 구호도 과학원 내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채소밭에 낫자루처럼 서 있었다.
"어? 윤재 왔구나! 이거 미안한데 인사들 좀 해. 우리 관데, 대학 친구야."
"생물 공학과 성현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경영 과학과 김민언, 장성철 그리고 기계 공학과 박병진,
핵공학과 한형원, 물리학과 진태석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곧바로 도현은 원래의
주제로 돌리는 듯했다.
"어때요? 그 동안 과학원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정적이지 않았습니까? 또한 너무
개인주의적인 사고와 편협한 전문 지식에 매달린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니 일단
'석림이여! 꺠어나자!'라는 정도의 슬로건이면 무난할 듯한데요."
도현은 여러 개의 대안들 중에서 하나를 치며 들며 물었다. 다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슬로건은 이렇게 정하고, 나머지 호소력 있는 문구들은 과학원 곳곳에
붙여서 그 의미를 전달토록 합시다."
우리는 색색의 종이에 구호를 적어 나갔다. 도현이는, 유세가 시작되는 목요일부터
날짜별로 구호를 붙일 곳과 정확한 매수를 정하여 투표일 하루 전까지 과학원 전체를
선거 구호로 도배한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선거 구호는 다양했다.
'압제의 사슬을 풀고'
'새벽이 오고 있다!'
'과학 기술자여! 단결하라!'
'바람! 바람! 바람!'
'폭풍 전야', '민주=선거=참여' 등등 많은 구호들이 형형색색의 종이들에 적혀 각종
계단 크기에 맞게, 또는 나무에 붙일 수 있게끔 준비되어 갔다. 우리는 각자 분담된
양을 열심히 메워 갔다. 간간이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아까 인사한 성현이라는 사람이
러닝메이트로 부회장에 출마했다는 사실과, 박충열이라는 사람이 석림 편집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향토 서클과 기타 서클, 각 과에서 한명씩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성현은 입심도 좋고 친화력도 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우리가 구호를 쓰는 사이, 성현은 노트에 적힌 선거 일정을 하나씩 점검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아 갔다. 그리고 한편으로 유세문과 기타 연설문을 작성하며
충렬과 민언이라는 사람에게 검토를 부탁하였다. 민언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고, 특히 과학원이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문구를 수정 보완하여 갔다. 또한
도현은 열심히 안팎으로 드나들면서 먹을 것과 새로운 인원을 조달했고 경태는 자금과
선거 운동원을 확보하는 듯했다.
1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일을 대충 마칠 수가 있었다. 도현과 성현의 타이트한 일정
관리로 우리는 원래 양보다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성현은 애프터를
제안하며 마지막으로 유세문을 검토하자고 했다. 우리는 모두 석림으로 갔다. 석림은
야식으로 수제비를 파는 맥주집인데 말수 많은 뚱뚱한 아줌마가, 주눅 든 것처럼
잔기침을 자주 하는 아가씨를 데리고(?) 장사를 하는 집이었다. 우리는 서로 처음
만났지만 과학원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동질감이 어느 정도 개개인에게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를 접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언제든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오늘 수고들 하셨습니다. 자, 마십시다. 여러분들이 있는 한은 아무것도 두렵지
안네예."
성현은 맥주잔을 높게 치켜 들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긴급 동의가 있는데, 우리 한두 번 만날 게 아니고 늘 얼굴 볼사인데 말
놓고 지냅시다."
"좋제!"
머리를 맞대고 둘러않은 우리 술자리는, 도현이가 선거일정을 체크하고 끝으로
유세문을 낭독하고 나자 쉽게 취해 갔다.
나는 원래 고등 학교 시절부터 생물이니 화학이니 하는 등등의 과학이라고 불리던
학문에는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또한 진저리가 났었다. 암기할 사항은
많고 예외도 많아서 어쩐지 만만하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현에게 생물학이
뭐냐고 물었다.
"생물요? 그걸 다 말할 수는 없고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것만 말한다면 저는
패트(Fat:지방)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사실 패트의 종류는 다양해요. 그 중에서
저는 먹을 수 있는 패트, 그것도 식품으로 쉽게 가공할 수 있는 패트, 또 동양적
지방에 관심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서양식 지방만을 접하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렇지요, 대부분 식품공학이 서양에서 연구되었기 때문에 모두 서양 지방에 관한
연구뿐이죠. 그러나 동양지방은 가공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더러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연구하자면 꽤 오랜 기간이 걸리리라고들 예상하고 있어요. 근데 제
얘기보다는 저기 석정이가 연구하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 야! 석정아, 얘기 좀 해
봐라!"
"음, 저는 미생물학을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생물의 행동 양식에 관심이
있어요. 미생물이 섹스를 할까요."
"글쎄요, 그 조그만 게 그런 기능이 있을지 의문인데요."
"이건 좀 밝히기 이르지만, 미생물을 고배율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비디오를 찍어
보면 참 재미있는 게 많아요. 세포 가운데서 움직이는데 이것들이 섹스를 해요.
그리고 독특한 분비물을 배출하죠. 그리고 움직임도 다양하고, 빙빙 한 방향으로만
도는 놈이 있는가 하면 랜덤(Random: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놈도 있죠. 그러나 그
현미경 속으로 들여다보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자세히 보면 무언가는 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점들이 있어요. 미지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이죠."
"야! 너희들 계속 요요 할래. 말 놓자니까."
도현은 가만 듣고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도현의 말에
깜짝 놀라 턱을 치켜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새로운 영역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지. 현미경으로 그놈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놈들 꼬리를 홱 집어 들어
가지고 손가락으로 튕겨 주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귀엽다니까."
"우린 생물 교육을 잘못 받은 것 같아."
"뭐 대부분의 과학 교육이 다 그렇지. 너무 인위적인 암기에만 의존하는데다 설명도
천편일률로 진부하고,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와 흥미를 일꺠워 줄 만한 내용이
전혀 없잖아."
현의 혼잣말 같은 문제점 지적에 도현이 끼여 들며 한 마디를 붙였다.
"생물학에 대해 내가 너무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과학이란 학문은 출발 전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닐까? 문명 초기에 과학자는 지배계급의 서기 정도에 불과했고,
가진 자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불 수 있지, 이들은 과학이
실질적이고도 경제적인 목적에 부합될 때 비로소 유효 적절하게 발전한다는 사실을
배제한 채, 과학을 오로지 사회와는 완전히 분리된 순수 지식으로 추구했던 것이지.
하지만 식물 세계를 정복한 것은 예로 들자면, 구체적으로 수많은 정원사와
식물수집가 없이는 한 학자의 학설이 유지 발전되기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우리
나라 과학 교육은 바로 그러한 사회와 고리를 이루는 대신 유리된 개념으로 떼어내서
과학을 일종의 낯설고 환상적인 차원의 학문인양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연신 다리를 흔들면서 벌컥벌컥 마셔 대던 민언이가 도현의 심각한 어조에 불쑥
빈잔을 내밀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그렇게 교육을 받았는데, 사실 오늘날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은 차츰 그 빛을
잃어가는 것 같지? 우리 과(경영)도 돈이 되지 않는 분야는 도태되거든."
학생회장 출마 마감 기한인 5월 4일까지도 도현이외의 출마자는 없었다. 또 단독
출마가 된 것이다. 도현은 단독 출마에 대해 심히 부담을 느꼈다. 왜냐하면 경선이
되어야 유권자, 즉 원생들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 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의
정통성에서도 깊은 신뢰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각 기숙사
방을 순회하면서 그의 공약을 설명하고 여론 수렴을 해 갔을 뿐더러, 투표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선거 홍보에 들어갔다. 구호뿐만 아니라 투표일을
디데이(D-day)로 정하고 매일 차감해 가는 카운트다운판을 큼직하게 만들어 식당 앞에
붙여 놓고 그 날짜를 꼬박꼬박 지우며 X표로 세어 갔다.
예상대로 유세장에는 40여명의 원생들만 참석했지만, 그는 유연한 제스처와 강한
어조로 연설하였다. 투표 당일 날은 투표율을 한 점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식당 앞에
설치된 투표소 앞에 운동원을 정장 차람으로 세워 투표를 호소하는 불법(?)까지
서슴지 않아다.
개표 결과는 놀라웠다. 과학원 역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로 그이 당선이
확정되었고, 그 날로 과학원 전역에 나부꼈던 구호들과 유세문이 깔끔히 치워졌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라게 한 사람은 바로 경태였다. 경태는 도현의 출마 이후,
체육 대회 때만큼이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도현의 논리와 성실성을 설명하면서
실질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더니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도서관에 파묻혔다. 그
누구보다도 무섭게 공부에 전념했던 것이다.
27년 만에 서머타임제가 실시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 데도 우리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았다. 사실 시간대에 관한 한 바깥 세상의 규정은 우리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편한 때 일어나 편한 시간까지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연일
날아오는 최루탄 냄새는 우리를 짜증나게 했다. 단지 동쪽 경희대와 외대, 서쪽으로
고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최루탄 냄새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하나는 짜증, 다른 하나는 이해였다. 여하튼 수업 시간에 날아드는 최루탄 냄새는
우리의 수업을 거의 완전히 박살내었다. 박살내는 빈도수가 누적되어 가면 갈수록
짜증을 내는 사람들의 수는 비례하여 증가하였다.
신민당을 탈당한 의원드리 만든 통일민주당 이야기나, 4.13 호헌 주치를 분쇄하기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은 날마다 상황을 새롭게 전개시켜 나가는
것 같은데, 거기에 우리드르이 몫은 없는 듯 했다. 군대 갔던 친구들이 휴가 나와서
왠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옛일을 다시 해 보고파 하는 마음을 이해하라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명동 성당에 나가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청량리로 나가 지하철을 갈아타고 명도까지 가는 데도 상당히 매웠다.
하지만 나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은 곧 남의 일인것만 같았고, 나는 나의
갈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길이 다른 내가 내 갈 길을 가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그곳은 또 예전같이 내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명동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까맣게 잊어야만 했다. 그곳에는
이미 오랫동안 잊어 왔던 푸른 제복의 전경들이 요소요소를 통제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마치 내가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지는 군중이 막 시위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나는 이곳에 이방인으로, 그저 참관인으로 서 있었다. 낯익은 구호와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와 동시에 그보다 더 낯익은 최루탄 발사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보도블록 조각이 양편에서 날아 다니고, 화염병이 움찔할 만큼의 두려움을 실어
터지고, 무전기를 든 사복 경찰들이 익숙하고도 일상적인 임무를 수행하듯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전경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군중들은 찢어진 종이 조각처럼 흩날렸다.
그리고는 무참히 잡혀 그것보다도 더 혹독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단지 최루탄 때문만이 아닌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곳에 서서 울었다. 나는
어느 곳에 서야 하는가? 오직 부여된 과업만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밤새 목놓아 울어도
시원치 않을 조국의 오늘을 맨몸으로 뚫고 나가려는 동아리들 사이, 그 어떤 곳에
서야 하는가?
5. 파도에 마음을 묻고
과학원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논문만큼이나 중요한 필수 과목이 있다. 이것을 바로
교양 과목이라고 하는데, 거의 격주로 목요일마다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초빙하여
특강을 듣는 것이다. 소홀하기 쉬운 교양을 쌓으라는 특별한 배려였다. 그런데 이 한
학기용 강좌에 다섯 번 이상을 들어가지 않으면 다음 학기에 재수강을 해야 하고,
2년이 지나도록 이수하지 못하면 절대로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무과
직원들이 강당 입구에 사천왕같이 지켜 서서 출석표를 나누어 주고 강좌를 들은 후
반드시 소감을 써 내도록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초빙되어 오는 인사들도 좋고 해서 어찌 이 강좌를 빠지리 하며
열심히 들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세 번밖에 듣질 못했다. 무슨 조화인지 목요일이면
꼭 일이 생기고 보강 수업을 하고 어찌어찌 하다 보면 결국 못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 과는 다행인 편이었다. 실험이 많은 과는 실험이 언제 끝날 줄 모르기
때문에, 교양 강좌에 참석한다는 사실 자체를 얼마든지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실험의 중간 과정을 체크하기 위해 스톱위치를 목에 매달고
다니며 오로지 실험실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이 문제의 교양 과목을
재수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과 게시판에는 항상 만인이 다 볼 수 있도록 출석
횟수가 붙어 있었다. 스스로들 알아서 재수강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배려였다.
제조공학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데 누군가 오늘 넷째 주 목요일이므로 교양 강좌가
있다고 두런거렸다. 이 때 상진이 다가와서, 오늘 날씨도 좋고 하니 대리 출석시키고
경희대 캠퍼스 구경가자는 거였다. 아카시아꽃이 그럴 듯하게 피어서 재미있을
거라고...
사실 서머타임제가 실시되어 그렇지 않아도 낮이 길어졌는데 아직 창창한 4시 밖에
안 되어서 귀가 솔깃했다. 옆에 있던 상진, 동하, 그리고 산학으로 같이 들어온
규영이가 이에 동조를 했다.
"난 세 번밖에 들어가질 못했어."
"야, 니는 무슨 걱정이고? 내는 한 번 들어갔다. 물론 대출은 했지만서도."
동하가 내 어깨를 잡아끌며 얼렀다.
"좋은 플랜 있으면 컨틴젠트 디시전(Contingent Decision:전 단계의 가부에 따라
후속 단계의 가부가 결정이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엮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꽃구경은 할 수 있잖아아."
늘 느물느물 하면서도 순박한 규영이가 거들었다.
"철우야! 너도 같이 가자!"
"난 리스크 라이커(Risk Liker:투자에 있어 위험이 클수록 이익이 높다. 이러한
높은 위험을 불사하는 투자가)가 아니야. 이 몸은 그냥 강좌에 들어갈래."
모두들 잘됐다는 듯이 철우에게 달려들어 각자 학번과 이름을 휙휙 갈겨 쓴
연습장을 북 찢어 맡겼다.
"그라믄 니가 대출 좀 해라."
"내가 어떻게 네 명 걸 다하냐? 나는 정리도 잘 못하잖아."
살짝 발을 뒤로 뺴는 철우를 우리는 우우 하니 에워싸고 살갑게 몸을 털우주며
야단을 떨었다. "니 아니믄 우리는 우예 사노?" 그리고 밤에 라면을 끓여 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했다. 아무튼 철우는 조심스럽게 종이들을 접어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들 넷은 교수님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슬리퍼 차림으로 경희대 캠퍼스를
향하여 진군했다. 캠퍼스의 화사함에 찬탄하면서 일변 샤넬라인 위로 올라간 여자들의
스커트 밑으로 날씬하게 뻗어내린 다리를 곁눈질하노라고 마음이 난만하였다.
"느그들 오늘 미팅 안 할래?"
"동하야! 너 능력 좋잖아 한 번 해봐?"
"능력은 무슨 능력? 그러지 말고 우리 동전 두 개 던지자."
우리는 의사결정을 할 때 곧잘 동전을 던졌다.
나는 앞앞을, 규영은 할아버지와 10, 동하는 탑과 100, 상진은 뒤뒤를 선택했다.
동하는 백원짜리 동전과 10원짜리 동전을 두 손아귀에 넣고 짤랑짤랑 마술사처럼
흔들어대더니, 더운 바람이 슬쩍 묻어나고 있는 하늘에 높이 던졌다.
나는 순간 난감했다.
'장난으로 그냥 해 본 건데 하필이면 나라니!'
우리는 경희대 캠퍼스를 돌며 열심히 4명의 여자를 찾았다. 아카시아 꽃잎이
우리들의 앳된 젊음을 비늘로 떨어 놓은 것처럼 발 밑에서 하얗게 웃었고, 간간이
불어오는 하늘의 더운 입김에 겨운 듯 나뭇가지 위에서돠 하르르 뛰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여자들을 이 원수 같은(?) 놈들에게 끌어다 바칠까?'
'어떻게 하면 촌스러운 이 몰골로 여자들에게 다가가 품위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정신이 없는데 동하가 내옆구리를 꾹 찔렀다. 과연 네명의 학생이 책과
노트를 가슴에 감싸 안고 걸어 오고 있었다.
'숫자는 맞는다만.' 나는 성큼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쭈뻣대다가 뒤에서 미는 힘에
별수 없이 다가갔다.
"저어, 실례합니다."
나는 애써 정중히 이야기를 했는데도, 이 학생들은 마치 나를 자장면 배달부 보듯
쳐다보더니, 저희들끼리 서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아이고!
아니구나.'싶었다. 그래도 의젓하게 목소리를 눌렀다.
"저, 연못으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다시 한 번 예의를 갖춘 나의 정중한 물음에도, 이 학생들은 말 한마디 없이,
개중에 가장 당돌하게 생긴 학생 하나가 턱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시늉을 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 내려가 버렸다.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나의 원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내 머리를 쥐어 박으며 갖은 구박을 다 퍼붓고 온갖 욕을 다했다.
"야. 도저히 못 하겠다. 내가 대학생도 아니고, 이 늙은 나이에 이거 하리?"
"그래서 정말 못 하겠다는 얘기냐?"
"아, 아니. 할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하지만 나는 역시 해 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내가 살 테니
술로 대신 때우자."고 간절히 애원한 끝에 우리는 모두 캔으로 옮기기로 했다. 경희대
교문을 빠져 나오는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름으로 커다랗게 써붙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다는 성명서였다. 나는 그것을
곁눈으로 힐끔보며 지나갔고, 나머지는 아예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캔의 여주인 문희씨는 우리를 밝게 맞아 주었다. "아아, 일단 라면을 끓여
주십시오." 우리는 오랫마나에 김치를 놓고 포식을 하고 기분이라며 진을 한 병
시켰다. 이때 한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왔다.
"짜식들, 너희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줄 알았냐? 독 아나에 든 쥐지. 너희들 못
꼬셨지? 니들 주제에 무슨 헌팅이냐?"
"이 화상아, 앉아라, 않아."
상진은 느물거리는 한표를 잡아 앉혔다. 한표는 술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즐거워했다.
술이 몇 순배를 돌았고 화제가 끊기는 바람에 잠시 조용해졌을 때였다.
"야 너희들 랩은 결저했냐?"
갑작스런 상진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랩 선정은 누구에게나
고민 거리였다. 어떤 랩을 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인생에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설령 이미 정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산학이고 해서 일단 선형통계랩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일단 졸업한 뒤
박사과정에 남기는 힘들 것 같고 연구소로 갈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공정 설계 또는
제품 설계를 위해서 실험 계획을 공부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규영이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동하가 물에 젖어 축 처진 막을 걷어 버리듯 말했다.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고, 언젠가 공식화해서 이야기해야겠지.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시제이."
"그래, 야, 사실은 내가 어제 몰래바이트 한 돈을 받았거든. 2차는 내가 좋은 데
가서 낼게."
한표가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으며 좌중을 놀라게 했다. 물론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의 전략을 드러내기 않고 싶은 마음들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에서 접어 버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길이었는지도 몰랐다.
과외는 불버이고 과학원에서도 일찍이 원장 명의로 과외를 하는 자는 엄단하겠다는
내용의 회람을 돌린 적이 있었지만, 간혹 과외를 하는 원생들이 있었다. 대부분
친척들을 통해서 꽤 많은 보수를 받고 몰래하는 아르바이트였던 것이다.
우리는 한표의 솔직함과 그의 제안을 높이 평가하며 흥건히 취한 상태에서 캔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상진은 할 일이 있다며 슬쩍 내뺐다. 우리는 결국 다시 네
사람이 되어다. 한표는 자기만 따라오라며 택시를 잡아 우리를 밀어넣었다.
한표가 우리를 데길고 간 곳은 작은 술집이었는데, 맥주 양주라고 쓰여진 간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저런 간판이 붙은, 저런 작은 술집에서는 과연 어떤 것을
파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는 취기를 핑계 삼아
겁없이 밀고 들어갔다. 한표는 여러번 와 봤다는 증거라도 제시하듯 마담 아줌마와
손을 잡고, 좋은 아가씨들 대라며 능청을 부렸다. 나는 난생 처음 들어간 곳이라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되도록이면 촌티가 나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숙사보다 숨이 더 막히는 어둑하고 습한 장 내에 다닥다닥 좁은 방, 아니 커튼을 친
구석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여지없이 넘어지듯 커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아가씨 넷이, 미스 장이에요, 서예요, 리예요,
김이에요, 하며 들어와 감기듯이 착착 한 사람씩 옆에 붙어 앉았다. 한표는 연신
호탕하게 웃어 가며 미스 장과 농담을 나워 가며 손놀림을 빨리 했다. 나는 이렇게
사나부다, 이렇게들 살아가나 부다, 하며 애써 압리화를 시키고 맥주 컵을 계속
돌렸다. 화장 냄샐까, 여자의 살내음이 뭉클 끼쳐 왔지만 왠지 그런 것이 쓸쓸하게
느껴져 슬픈 감정이 일었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왜 이렇게 타락하였나? 아니다. 이것은 순리이다.
내 나이 이제 스물 넷이다. 나는 성인이고 이런 곳에 안 어울리는 건 아니다. 아니
이것은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두 가지
세포밖에 없다. 쾌락과 학문, 이 두가지 세포만 서로 화합하며 무성히 자라고 있을
뿐이다.'
내 옆에 앉은 미스 김은 안주를 집어 주며 손가락으로 입술은 건드려 교묘하게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화장품이 뒤섞인 냄새와 간드러진 살집이 자꾸 밀착되어 왔다.
나는 서영을 생각했다.
'이것은 서영에 대한 죄악이다. 그리고 난 서영에게 주지 않은 그 어떤 것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녀의 하얀 손이 떠올랐다. 나는 연거푸 목젖에 맥주를 부어 대다가 김에게 따라
주었다. 내 잔을 받아 쥔 미스 김은 깔깔거리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이 아저씨, 처음인가 봐. 아주 쑥맥 아냐?"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하고 있네. 잘 좀 모셔!"
한표는 약간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갑자기 김이 나를 감싸안았다. 나는
모지락스럽게 몸을 빼냈다. 그러자 김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한표가
이와 동시에 뛰어나갔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한표를 불렀다.
"한표야! 한표야! 미안해. 내가 처음이라 그래. 미안하다."
잠시 후 한표와 김이 들어왔다. 김의 눈에는 눈물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김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 다 같은 사람이야. 하지만 네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내겐 소중한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난 이런 상황이 생리적으로 싫어. 미안해.'
한표와 동하의 재담으로 분위기는 다시 돌아서는 듯했지만 사실 젖은 행주처럼 처진
마음은 억지로 꾸미는 헛웃음만 토하게 했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과학원 후문에서 경비아저씨에게 학생증을 흔들어 보이고 택시를 파정사 앞까지
몰았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파정사 입구 테니스 코트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때 갑자기 동하가 파정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용팔이 빼고 다 나와!"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 용팔이 빼고 다 나와 봐라."
이 때 어디쯤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용팔인데, 조용히 좀 합시다."
선뜻 반팔 셔츠 속으로 5월의 밤공기가 스며 들었다. 항상 잠자리에 들려면 누군가
꼭 한 사람씩 소리를 지르며 올라와 수면을 방해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 잠자리가
편칠 못했는데,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방해자가 되었다는 죄스러움으로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파정사 문을 밀치면서 우리는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기숙사가 없는 규영은 나와
함께 자기로 했다. 방에 들어 갔을 때는 경태와 철우가 책상에 붙어 앉아 연구에
열중이었다.
"야! 라면 끓여 와! 지금까지 기다리느라 배 고파 죽을 뻔했다."
"지독한 놈. 형님이 이렇게 취했는데 어떻게 끓이냐. 니가 좀 해라."
"약속은 약속이다. 지킬 건 지켜야지. 저 떨거지는 또 뭐냐?"
"나다, 왜? 집 없는 천사다. 오늘 이 방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려고."
"그래, 어서 와라. 윤재, 너! 신발 좀 벗고. 철우야, 너 빨리 라면 끓여 와."
"왜, 내가 라면을 끓이냐? 너희들 이거 안 보여?"
철우가 손가락으로 방 안의 빨래를 가르켰다.
"짜식, 한 번 한 걸 가지고 뭘 그래, 임마."
"어, 한 번? 너희들 같이 살면서 언제 빨래해 봤어?" 아닌게 아니라 침대 얼턱이며,
사다리, 라지에이터, 창틀, 그리고 대충 삐져나온 부분을 이용해 걸쳐놓은 줄 위에
빨래가 즐비했고, 철우는 자랑스럽게 바지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철우 저
자신도 제대로 깔끔한 편은 못 되는데 나와 겨태한테 질려서 가끔 일찍 기숙사에
올라와 빨래를 죄 몰아다가 했고, 우리는 악랄하게 그것을 정기화하여 그의 고유
업무로 만들고자 여간 노력한 게 아니었다.
빨래라는 게 자동세탁기에 가져다가 중성 세제를 듬뿍 넣고 스위치만 넣으면
그만이지만, 각 층에 24개의 방 사람들이 고작 1대의 세탁기를 같이 쓰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많이 발생했다. 어떤 때는 그냥 빨래 바구니만 줄을 서서 기다렸고,
빨래를 다 했다 해도 꺼내 가는 걸 잊어 버리는 사람이 많아서 비닐 봉지며 창틀에 다
된 빨래가 항상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귀찮아 되도록이면 빨래를 하지 않고
사는 예가 많았다.
빨래는 철우가 가끔 한다지만 방 청소만은 누구의 일도 아니었다. 어떤 때는 철우의
오바이트 자국이 한 달을 넘어갈 때도 있었다. 가끔 부모님들이 온다는 소식이 오면
그 날은 모두 일찍 들어와, 앞으로 언제 다시 틈을 낼 수 있을지 모르는 방 청소
날짜를 위해 말끔히 치워 놓고, 어떤 때는 가구의 위치까지 재정리하여, 그 후로는
되도록이면 최선을 다 하여 어지르지 않고 살아 가려고 노력했다.
"아이고, 철우 없이는 못 살지. 철우야앙. 근데 내가 몹시 배가 고프거든.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고 마음 속 깊이깊이 꼭 간직하고 살아갈게. 잊을 만하면 또 해 주면
되잫아. 빨리 갔다 와라."
나는 콧소리까지 내어가며 철우에게 다가가 푸욱 쓸어 안았다.
"아이고, 이 원수, 저리 치워! 막거리 마셨냐? 술 냄새가 왜 이리 지저분해."
"아니당. 여자 껴안고 마셨당."
"뭐? 잘 논다. 너 많이 변했다. 벗는 영화조차도 안 보던 녀석이 이제 제가 나서서
벗겨?"
"벗기는 거 너 어떻게 알았어? 너도 갔다 왔지? 요런 음험한 노옴."
"가긴 , 어딜 가? 나도 그런 건 안다."
"벗기기는 뭘 벗겨? 쓸데없는 공상말고 라면이나 끓여 와라, 응?"
철우는 나의 능청에 체념하고는 코펠과 라면을 챙겨 들고 나서다가 처억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위 아래로 훑어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규영이가 그러는 철우 어깨를 쳤다.
"철우야! N45에 가스 버너 있더라. 그거 좀 빌려 와. 그리고 하나 사라, 사!"
"규영이 너는 그걸 어떻게 아냐? 우리도 모르는데."
"기본 아니냐, 기본. 다른 사람들 방에 가서도 놀고들 그래라. 너희들끼리만 사냐?"
가스 버너는 기숙사에서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7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불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슬쩍 구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게을러서 그것
하나도 사다 놓지 못했었다. 우리 넷은 라면을 무려 열세 개나 끓여 해치웠다. 우리는
포만감에 휩싸여 한참을 헐떡거리며 규영이가 들려 주는, 세 명이서 열일곱 개를 끓여
먹었다는 모 과의 기록에 다시 한번 놀랬다.
규영이게게는 방바닥에 침대 매트리스를 깔아 주고 이불 한 장씩을 걷어 주었다.
규영이는 두말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자리에 들었고 경태는 계속해야 된다며
책상에 다시 붙어 앉았다.
나는 2층 침대에 누워 가까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를 않았다. 서영의 얼굴이 마음 속 깊은 곳 물빛으로 번져왔다.
'내일은 서영을 만나러 가야겠다. 남산에라도 올라가 꽃길을 걸으며 오래오래
이야기 해야겠다. 그 동안의 일들을, 그리고 나의 마음의 파편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끼워 고스란히 그녀에게 주어야겠다. 지금 전화나 해 볼까, 아니야, 너무 늦었어.
그리고 분명 전화통에 매달려 죽치고 있는 놈이 있을 거야.'
일상 생활의 단조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늘 쫓기는 시간 때문에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각 홀에 송신용 전화기근 두 대밖에 안 되는 시간대에 관계없이 전화통을
붙잡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끝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갑자기
바삐 전화 걸 일이라도 생기면 위아래 층으로 뛰어다미녀 빈 전화통을 찾아야 했다.
철우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다가 펜을 집어 던지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스탠드를 끄더니 부스럭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경태의 불만스러움이 내
귓가로 그대로 전해 왔다. 잠시 후 경태가 라디오를 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서서히
서영을 가슴에 얹은 채 잠에 빠져들어갔다.
도서관에 앉아 제조공학 퀴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도현이 불쑥 찾아와 나를
학생회실로 끌고 갔다. 학생회실은 3평 남짓한 방이었는데 각 간사들의 사물함과
소파, 사환 학생의 책상, 그리고 체육 대회용 플래카드 등으로 꽉 차 보였다. 나는
어색한 기분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한마디를 뱉었다.
"인수인계도 아직 안 끝났을 텐데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냐?"
"뭐 인수인계라고 할 것도 없고 전대 임원들은 벌써 짐을 다 싸 갔기 때문에
괜찮아. 커피 한 잔 할래?"
"좋지. 그런데 왜 그런 심각한 얼굴로 바쁘신 분께서 나를 다 찾으셨어?"
도현은 나의 물음에 씩 웃으며 담배만 피우고 있다가 사환이 내려놓은 커피잔을
들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 뉴스는 듣고 사냐?"
"아니, 저혀. 신문 본 지도 꽤 오래 됐어."
"그럼, 요즘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구나. 천주교 사제단에서 2월에 죽은
박종철 있지, '탁'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박군 치사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성명서를 냈어."
"응, 그건 어저께 경희대에 갔을 때 슬쩍 보기는 했어."
"다행이구나.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핵심에 속하는 건 아니야. 문제의 핵심은
4.13호헌 조치로 지금의 정부가 군부 독재 권력을 영원한 집권 연장선에 놓으려는
음모야. 그래서 이번 5.18 주간을 치러 오면서 많은 국민들에게 민주화 공감대를
형성시켰고, 이를 토대로 재야 및 야권에서 모종의 대반격을 시도할 모양이야. 박군
사건도 이의 한 기폭제로 대국민에 대한 5공 정권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이에 대한
응징의 소리를 표출토록 하는 중요한 마디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바는 과학원에서 이러한 총체적인 전 국민의 관심사이자 역사의 한 길목을
어떻게 홍보해 나가야 되고 대표 기구인 학생회는 또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과학원생들의 특성상, 그리고 그 의식의 성숙면도 면에서 잘 못
터뜨렸다가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아도
모인다는 개념도 없고 정치적 관심사에 대해서도 불감증을 보이는 집단 아니냐.
그런데 학생회의 방향성에 문제 제기를 받는다면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 과학원측도 이러한 부분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거든. 그러나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그리고 역사의 한 획이 될지도 모를
이번 흐름 속에서 우리가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여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한 이 땅의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뿐더러 앞으로의 과학자 위상에도 막대한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렇다면 당위성에 의해서만 쫓겨 조급하게 행동을 했을 때 이 가냘픈 뿌리마저
송두리째 뽑힐지도 모른다고, 무엇보다 먼저 과학원의 조직을 단단하게 엮어 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일단 명확한 자기 색깔을 지니고 있는 서클을 중심으로 토의를 하고 있지만
의견이 분분해. 그리고 일단 우리들은가진 자이기 떄문에 사소한 일에도 두려움이
많아. 고양이 목에 방월달기 식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우선 나의 입장을 호가고히
정리하는 일이 제일 급한 것 같아. 그래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거야."
"내가 뭐 입장이 있나. 요즈음은 나도 여러 모로 고민이 많다."
"그래, 그건 이해가 간다. 너나 나나 학회 생활을 해 본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동지르이 피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들만 동지들을 버리고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그러나 그것도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내야 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해."
"하바리화시키자고? 또 한 번 합리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내 생을 굴절시켜 보자고?
우린 상황 논리를 벗어 나야 해. 좋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돼.
그러나 네가 진정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여기에서 획득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참된 용기가 있어야 해. 너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자신이 없어. 이제
위선적인 사람으로 살긴 싫어. 나는 이렇게 나를 정의하고 싶어. 나는 과학원에 있다.
그리고 나는 과학원에서 얻은 소중한 것들에 매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이 땅의 왜곡되고 굴절된 현실을
바로잡고는 싶다. 그래서 나는 행동 없는 지식인이요, 감상주의적 양식인임을
자인하면서도 기득권을 뽐내는 가치없는 인간이라고."
"윤재야! 진정해. 나도 너의 심정에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 최소한의 것들은 해
나가야지 않겠냐. 경직된 사고는 인간을 자유스럽지 못하게해. 너무 섣불리 규정하지
마. 만약 네 말대로라면 너 또한 4.19 세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강력한
표현이야. 그래 우리는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어하지. 그러나 그 범주 안에서만이라도
동시대인으로서의 역사 의식과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
"아무튼 솔직히 지금 나의 심정으로서는 너한테 해 줄 말이 없어. 미안하다.
다가오는 하루, 하루, 그리고 그 매순가마다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너무 많아.
그렇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질문에 전혀 대답을 못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지금껏
무엇을 쌓아 왔을까 싶으리만큼 무견해의 연속이야. 정말로 지금은 힘들어.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몰입하고 싶어."
"알겠다. 네 마음 알 것 같아. 좀더 시간을 가진 뒤 얘기를 해 보자. 그러나 확실히
해 둘 것은, 우리는 대학 시절 서로 고생하고 살았던 것만은 꼭 기억하자. 그 압제와
탄압 속에서도 눈물겹게 이토록 살아 왔던, 그렇기에 이토록 미안함이 많은 그 시절을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의 고민도 우리의 좌절도 우리의 기쁨도 결코 잊지는
말아라."
"그래. 그 땐 적어도 마음은 하나였지. 나의 마음도 하나였고..."
나는 도현의 담배 뿜는 소리를 뒤로 하고 축 쳐져서 학생회실을 빠져 나왔다. 4층
계단을 내려와 1호관과 연결되는 통로에서 과학원의 잔디밭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한적한 대낮의 과학원 잔디밭은 방학중인 고등학교의 텅 빈 운동장 같아 보였다. 내
마음도 비어 그 곳에 같이하고 있었다. 누구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말기를
바라면서...
도현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던 소리가 계속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책을
덮고 자잘한 글씨로 곱게 쓰여진 서영의 수업 시간표를 펼쳐 보았다. 마지막 수업이
5시에 끝난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두 시간이면 여기서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짐을 내팽개치기라도 하듯이 과학원 문을 빠져 나와 부랴부랴 흑석동에
도착했을 때는 4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 코를 아리게 하는 최루탄 가스의 뒷냄새를
숨을 몰아 참아가며 나는 경영대학 건물로 향했다. 캠퍼스 안은 봄빛 화사한 꽃무리와
색채의 물결로 가득했다. 내가 예정된 강의실에 도착하여 조심스럽게 귀를 문에 댄
채로 강의실 안을 살피고 있을 때는 반팔 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참아가며 강의실 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섬뜩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앞문을 바라보았는데 열린 문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르까, 수업이 끝났는지
어쨌는지 칠판에 어지러운 흰 백묵 글씨만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할 뿐 강의실은
덩그라미 비어 있었다.
그래도 뛰어나와 도서관, 휴게실, 동산, 그리고 학교 앞 갈 만한 카페며 다방까지도
모조리 뒤져 보았지만,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친근한 목소리의 일하는 아줌마는 서영이가 아침에
학교간 후 아직까지 안 왔다고만 했다. 낭패였다. '어젯밤 전화라도 해서 암시를 해
두는 건데'하는 후회가 밀려 올라왔다.
버스 정류장을 한참을 서성거리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가장 만날
확률이 높을 듯싶었다. 다시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다 되었다. 그너라
그녀는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길목을 계속
주시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수상쩍게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어떤
여자는 내 앞까지 조심스럽게 또각거리며 걸어 오다가 내 앞을 지나자마자 뛰어갔고,
어떤 아저씨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나느 그들에게 범죄형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다가 포기하고 그냥
담벼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않아 담배를 피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큰 길을 돌아 무거운 책가방을 맨 채 걸어오는 그녀의 눈에 익은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나는 얼른 일어나 옷을 재빨리 고쳐 입고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가, 아무래도 놀랄까 봐 좀더 밝은 곳으로 옮겼다.
서영은 그녀만의 속도로 걸어 오다가 문득 앞을 쳐다보더니 나를 발견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달려왔다.
"형?"
"그래, 나야.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휴강이어서 미애랑 경숙이랑 종로에 나가서 놀다 왔어. 왜? 미팅이라도
했을까 봐?"
"아니, 재미있었어?"
"응, 이러지 말고 요 앞에 가서 커피 마시자."
서영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여기서 언제부터 서성거렸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나의 팔을 끌었다. 나는 순간 여기가 그녀의 집 앞인것을 생각해 내고는
슬그머니 반 발짝 정도 떨어졌다.
우리는 서영이 집 근처에서 만날 때면 늘 가는 '자그만한 공간'이라는 카페에
들어가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에 먼지처럼 앉았다.
"난 아이스크림, 형은?"
"나는 레몬차."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도착했어. 학교에 있다가 괜히 오고 싶어서."
"전화라도 하지. 하도 궁금해서 전화했었는데 아무도 안 받더라고."
"조금 바빴어."
나는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마음속으로 기어 들어서, 찻잔을
들고 노오란 차 빛깔을 ㅂ마라보다가, 기억을 마셔 없애기라도 하듯 한 모금 홀짝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일 주일 새에 얼굴이 많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쉬어요."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도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을 큰 행복으로 알았다. 왼쪽 눈 오른쪽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바라보곤
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아들고 성냥을 툭 켜 붙이고 성냥개비를 흔들어 불을
껐다.
"참, 성냥 좀 줘 봐. 내가 오늘 이런 거 배웠다. 미애가 그러는데 이 성냥으로 점을
칠 수가 있대."
그녀는 성냥 한 개비를 뽑아 불을 켜더니 불이 붙은 성냥골에 다른 하나의 성냥골을
두 성냥개비가 일직선이 되도록 하여 붙였다. 피지직 하는 소리와 하얀 연기가 작은
폭발을 일으키자 얼른 후 하고 불어서 불을 껐다. 이미 두 성냥개비는 하나가 되어
붙었다. 그리고는 이 성냥개비를 수평으로 놓고 맨나무만 있는 한 쪽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렇게 해 가지고, 불이 꺼지지 않고 그래도 넘어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여자애들은 쓸데 없는 데다 의미 부여하길 즐겨 하나 몰라."
"여자애들이 그러는 게 아니라 인간이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런 일을
속으로 무척 좋아한다고. 안 그래?"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불꽃이 타들어 가는 것을 숨을 멈추며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제발 떨어지지 말기를 바라면서, 탁자에 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고 불꽃이
생명이라도 된 것처럼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거멓게 탄 두 개의
성냥골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부분에서 불꽃이 가물거리더니, 그 검은 색깔 속으로
잦아들어 숨어 버림과 동시에 하얀 연기만을 허무하게 남겼다.
"어머!"
나도 참았던 숨을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용히 길게 내쉬었다.
"야! 그거 넘어가기 어렵겠다. 어떻게 이미 타버린 부분을 불꽃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 그리고 성냥개비에는 초 성분이 들어 있는데 그게 많이 묻어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리고 나무의 성질에 따라 다르고, 변수가 너무 많은데.
어떤 성냥갑의 것을 잘되고 어떤 것은 잘 안 된다면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래서 그냥 심심풀이로 해 보는 거야. 신경쓰지 마."
하지만 우리들은 이내 어색해져 갔다. 나는 성냥을 들어 다시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실패였다. 나는 또 해보았다. 서너 번을 반복했을 때야 불꽃은 간신히 다른
성냥개비로 넘어갔다. 서영은 재떨이에 수북히 쌓인 성냥개비를 정리하며 나에게 말을
던졌다.
"옛날에 알럭산더가 어느 나라를 정복하러 갔을 때, 그 나라의 경계선에 도착했는데
거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났대. 그 노인은 알렉산더한테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주면서 그것을 풀면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하더래. 알렉산더가 어떻게 했을까?
이 정복자는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더니 칼을 뽑아 들어 싹뚞 실타래를 잘라 버렸대.
운명이란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거죠."
나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조바심이
났다.
"11시가 넘었다. 너무 늦었는데. 혼나지 않겠어?"
"얼른 들어가야지. 내일 할 일 있어요?"
"아니, 내일 우리 야외로 나가 볼까? 색깔이 너무 좋은 날들이어서 그냥 보내기에는
아까울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이런 푸르름을 평생에 육십 번 정도밖에는 볼 수
없잖아."
"좋아요. 어디로 가죠?"
"광릉이 좋다던데, 어때?"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자, 서영이는 살짝 웃으며 입술의 움직임으로 잘가라는
인사를 소리없이 남기고, 철컥 열리는 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큰 길에 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대학 시절에는 좌석 버스조차 타는 걸 꺼려 했고
또 탈 돈도 없었지만, 과학원에 와서 시간의 짧음을 느끼기 시작한 뒤부터는 어느
곳을 가든 되도록이면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것이 편했다. 사실 과학원 안에
며칠이고 묻혀 있다가는 택시를 타고 근처에만 다녀와도 몸이 무겁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생활의 단조로운 리듬이 주는 파격에 대한 불쾌감.
나는 곧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담배 냄새가 익어 도서관 안이 공부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는 꿈틀거림도 없이 스탠드 불빛 속에 고개를
묻고 정신없이 연구를 하고 있었다. 내일 놀기위해 나는 오늘 밤을 새워야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적어 두었던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해결된 것은 빨간색
연필로 줄을 그어 갔다. 어느새 두껍게 정리된 화일을 덮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휴게실로 나갔다. 휴게실 소파에는 한 사람씩 커피잔을 들고 멍청히 않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두서넛은 소파에 길게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뽑아들고 옥상으로 나왔다. 서울 시내는 은하수 물결을 울듯 불빛이 아른거렸다.
불빛을 적시는 푸른 공기에 상큼한 새벽 냄새가 배어 났다. 저기에 1천만 명이 있다.
여기에는 나 혼자 있다. 저들은 대부분이 자고 있을 게다.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저어기 산 밑에는 서영이도 잠들어 있을 게다. 아름다운 두 손을 모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잠들어 있을 게다. 편지를 쓰기로 했다.
늘 그리운 서영에게
5월입니다. 나의 이 무거운 짐 때문에 점점 퇴색해 가는 의식이 죄스러운
5월입니다. 나는 이 5월 앞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언제고
나에게 있어 어려운 당신을, 언제고 다짐받고 싶은 당신을, 언제고 은빛 아는 당신의
웃음을.
그 동안 나에겐 진실이 없었습니다. 당신한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항시 목이 메어
오는 간절함을 한 번도 펴 보이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을 질책하였습니다.
늘 당신을 갈증나게 하면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절망감에 휩싸이도록 만들어 가기만
했습니다.
5월입니다. 이젠 죽도록 사랑하는 당신을 정직하게 마음껏 안아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을 짓이기어 즙처럼 묻어나게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푸른 마음의
칼이 나의 이 옹이 박힌 폐부를 하나둘 도려 내어 주었으면 합니다.
5월입니다. 나를 하나둘 정리해 가야만 하겠습니다. 진실만을 남기고 모두 버려야
하겠습니다. 또 다른 5월 앞에 서서 슬퍼하지 않도록, 저 하늘과도 같이 틔어 아무
장애 없이 사물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나의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 어떤 강요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만을 남기고 마음을 쓸어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나의
전부이므로...
이윤재
나는 생각나는 대로 쓴 편지를 봉해서 책상 서랍 속에 넣었다. 서랍 안에는
이것말고도 몇 통의 편지가 그렇게 쌓여 있었다.
토요일 오전이어서인지 광릉 수목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간혹 보이는 연인들이
다정히 손을 잡고 흔들거나 서로 꼬옥 붙어 어깨를 껴안고 거니는데, 그 곁으로
바람이 가끔씩 곁눈질 하는지 웃음소리가 튀어 올랐다.
그 날 마 이후 나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애정을 참기 어려워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 마음을 들키는 것도, 쉽게 가까원지는 것도 두려워서 어색해 보일
만치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어깨가 맞닿은 것마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도 나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별로 없는 숲속에 둘만이 걷고 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두려운 것일까,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나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어렸을 적에 꽃을 좋아해서 데이지며 미모사며 백일홍
꽃씨들을 사다가 묘판을 만들어 기르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목련꽃을
좋아하노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목련꽃이 싫어했다. 단아하고 청초하기는 하되
떨어진 꽃잎이 거무스름하게 말라가는 모양은 동정을 구걸하는 비겁함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목련꽃을 싫어한다고 대 놓고 말하기가 난처해서 내가 좋아하는 꽃을
이야기했다. 나는 정신을 온통 흔들어 버리는 능소화의 퇴폐적이기까지 한 유혹의
입술을 좋아했고, 들녘이나 신기슭에 분홍 꽃잎 진갈색 무늬로 정교하게 피어 태어난
곳을 떠나면 쉬 말라 버리고 마는 패랭이 꽃의 알려지지 않은 지조를 좋아했고,
아무도 보아 주지 않고 이제는 볼 만한 사람조차도 없을 것 같은 탱자나무 가시
사이로 할머니 속적삼 자락처럼 아무렇게나 핀 듯한 탱자꽃을 좋아했다.
참으로 오랫만의 숲이다. 밀밀하고 짙은 나무 등치 수목들의 숲이 왜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프게 느껴질까. 이상하지. 절망감까지도 저며든다. 수많은 세월을 아무
말 없이 그 곳에 서 있었을 또 하나의 절망이 우뚝우뚝 서서 하늘에 연두색 눈물을
적셔 놓고 있었다. 바람마저도 그들이 자욱한 한숨으로 토하는 은장도 잎사귀 절망이
두려워서인지 그들의 윗머리만 슬쩍 건드리며 비껴갔다. 날카롭게 돋아난 잎사귀
끝들이 바람에 뒤집히며 햇빛을 바다 칼날처럼 빛났다.
나뭇잎들이 나부끼며 가슴을 자잘하게 베어 낸다. 쓰라리다. 칼레 베인 손가락을
감싸듯이 나는 서영의 손을 꼬옥 잡았다. 쓰라림이 서로에게 삼투되어 슬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하얀 손만 그리워지던 기억 대신 이제는 이 위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걸었다. 오도가도 못하게 발을 묶어 두던
나의 절망을 잘라 버리는 쓰라닌 따쓰함을 전해 받으며, 그녀의 손가락 마디 마디를
하나씩 만져 보았다. 머나먼 강물을 거나가는 징검다리처럼.
월요일이면 일요일 밤에 돌아온 친구들의 깨끗해진 옷가지들을 볼 수 있어서인지,
마무리는 잘 못하면서 시작은 늘 부산을 떠는 습성 때문인지, 요일이며 날짜를 제대로
알고 살지 못하면서도 월요일만은 잘 기억이 났다. 하기야 석사 2년차만 되면 달력을
읽을 줄도 모르게 된다고들 했다. 특히 달력의 빨강과 검정을 구분해서 살면
졸업하기가 힘들다나.
점심을 먹고 새로운 기분으로 과원들고 몰려서 과사무실에 올라갔다. 먼저 과사무실
앞에 있는 편지함을 기웃거려 봤지만,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철우와 경태의 편지함을 차례로 뒤져가고 있는데, 뒤에서 게시판을 보고 있던
한표가 소리를 질렀다.
"오메! 큰일났네! 얘들아! 이거 봐라. 이게 원 날벼락이냐?"
삽시간에 편지함 앞에 붙어 있던 애들이 게시판에 몰려들었다. 학생과에서 붙인
공문이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아래 적인 명단은 교양 강좌의 부정 대리출석자이므로 6월 13일까지 학생과에
들러서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며, 재적발될 경우 재수강 처리를 할 것이니 차후 재발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숙의를 했지만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찌됐든 일단 학생과로 모두 가 보기로 했다. 우리는 서부로 가는 셔틀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부와 서부의 거리는 꽤 멀었기 때문에 시간당 두 번 꼴로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많은 학생들의 소감을 다 읽어보고 족집게같이 대출자 것을 찾아
냈느지 의아해하며, 철우의 무능함을 성토해 가며, 육중한 서부 본관 건물 3층에 있는
학생과로 갔다.
학생과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사유서 양식을 떼어 주며 쓰라고 하고는
관료적인 어조로 나무랐다. 우리들은 앞을 다투어 구구절절 지어낸 사유서를 써
내고는, 학생과를 다람쥐 꼬리 감추듯 빠져 나오며 앞으로 빠질 수 있는 날짜를 세어
봤지만, 그 누구도 자신있게 일수를 채웠다고 할 수 없어, 서로 잊지 말고 교양 강좌
시간을 알려 주기로 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쯤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코가 매웠고 여기저기서 재채기 소리가 나면서 코
푸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또 데모를 하는 모양이구나!'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고대 캠퍼스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흰 최루탄 가스를
바라보았다.
'최루탄 가스로 덮인 저 안에는 어떤 목소리가 있고, 또 저 최루탄은 어떤 논리로
그들을 휘감고 있을까?'
문득 도현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우린 저 속에서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며 뛰어 다녔지. 최루탄의 매움보다는
흩어져 가는 친우를 향하여 갈기갈기 찢어지던 우리의 분노와 나약한 의지가 우리를
더 노여워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터져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지. 몰려오는
전경들의 검은 모습을 보고, 두려워 말고 침착하자며, 서로 숨을 곳을 알려 주고,
끝난 뒤에 만날 장소를 서로를 향해 외치던 절실함. 어금니 물고 숨을 곳을 찾아
뛰어갔지.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흘러내리는 막걸리를 닦아내며 서로 주먹을 불끈
쥐었지. 그 참담함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임을 확인하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지.
그 때는 이미 분노보다는, 암울한 현실보다는, 따뜻한 우정을 생각했었지. 그 우정은
순간이었던가?'
나는 학생회실로 도현을 찾아갔다. 사환은 퇴근을 했는지 도현만이 창가에 서서
깊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서 와라. 조금 맵다."
"응, 고대에서 하나 봐. 뿌옇더라."
"그래? 앉아라. 어떻게 왔어?"
"걸어왔지."
"짜식, 커피할래? 아, 참. 우리 유자차 있다. 한 잔 먹어 봐."
그가 유자차를 타는 동안 소파에 기대어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배가 좀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짜식,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윤재야, 그러고 보니 우리 이렇게 둘이 오붓하게 있어 본 지도 오래 된 것 같아.
한 3년 됐나?"
"그 정도 된 것 같은데. 술 마신 지도 오래 됐고."
"그래, 맞다. 우리 술 한 잔 하러 갈래? 기분도 그런데."
"난 지금 바쁘다. 주말에 열심히 놀았거든. 할 일이 태산 같아."
"여유 있어 보이는데? 한 잔 하러 가지. 해지는 거리를 바라보며 지나간 일들이나
안주 삼아 이야기 해 보자."
"마안합니다, 됐습니다아."
"거 안 넘어가네. 너 많이 어른 됐다. 이제 그 감상주의 팔아먹었냐?"
"인간은 끊임없는 번뇌로 가득찬 동물이니라. 감상이 곧 번뇌 아니겠냐."
"절로 들어가지?"
"야, 거 스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새벽 4시에는 일어나야 되고, 평상시엔 어디
누워 보지도 못하고, 먹는 거라고는 고작 풀뿐이고..."
"농담 그만하고, 너 나 좀 도와 주라."
"뭘?"
"학생회 아니면 서클도 좋으니 한 번 해 보는 게 어때?"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일어서서 집기들을 하나둘 건성으로 만져가며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휘이 둘러보았다.
"도현아! 나 공부할래. 한번 미치도록 해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두가지를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미안하다."
"아냐, 너한테 부담 지우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그래 공부해라. 그것도 아주
열심히."
도현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고는 내게로 다가와, 시선을 창 밖의 잔디 위에
멀리 꽃고 서 있는 내 어깨를 꼬옥 잡았다.
"윤재야, 나도 내실을 기하기로 했다. 서클을 중심으로 진정한 과학자상을 다지는
데 전력하기로 했어. 일단은 정치적인 모든 것에 초연해서 우리의 먼 미래를 위해
나가기로 했다. 무엇이든, 남을 억압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 전력
매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니까, 우리 모두 열심히 해보자."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우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6. 선택
세면대에 물을 가득히 채웠다. 구명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지 쫄쫄쫄 물 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물 속에 밀어 넣었다. 차가운 느낌이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세면대 바닥에 두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굵은 아미노산 덩어리는 신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깨를 앞으로 조였다. 러닝셔츠가 등 전체에 찰싹 달라붙어었다.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팔뚝의 땀구멍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땀방울에 눈이
부셨다.
이 손가락은 뇌의 지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까?
이 손가락 내외부에도 무수한 '생명'이 있다. 나를 이루고 있느나무수한 생명들,
그들은 나의 지령 없이도 살아가고 있다. 또 그것들이 모여 또 하나의 '생명체'가
되고 그것이 또 모여 '기관'이 되고 그것이 또 모여 '나'가 된다. '나'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여 '사회'가 된다. 사회가 모이고, 각자의 생명의 집합이 이
'지구'를 이루고, 여러 개의 별들이 모여 이 '우주'를 이루고 이 우주가 모여...
생명의 시작, 이것은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자기 중심적 사고로 개념화된다.
이 손가락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없다면 인간이라는 논리적 객체는
무의미해진다. 이 손가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생명체들도 사고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의지는
곧 사고력이 아닌가.
인간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있다. 사람의 극히 미세한 세포들이 하나씩 떨어져 움직인다. 그리하여
인간은 없어진다. 인간은 공간에 허무로 서 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공간적 의미의
인간은 없어지고 만다. 다시 그 세포들이 모인다. 하나의 인간이 다시 된다. 세면대에
올라 붙어 있을 어떤 보이지 않은 생명체와 나는 동일하다. 그러나 나는 서서
사고한다. 붙어 있는 그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수하다고 믿는 마음은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아닌, 그리고 나도 아닌, 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너보다 더 우수해야 한다. 심한 열등 의식이다. 그 열등 의식은 사람을
투쟁하게 만든다. 동질의 열등의식을 갖는 사람끼리 집단을 형성한다. 우선 열등한 그
집단들은 무기의 강약에 의해 순서를 정한다. 그리고 그 무기에 열등에서 발생한 모든
분노를 실어 투쟁한다. 투쟁이 끝나면 전리품을 더 많이 갖기 위해-물론 그것도 덜
열등해지기 위한 투쟁이다-집단내부의 투쟁이 발생한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열등한
집단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그래서 이 조그마한 생물이기를 거부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열등함을 감추기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죽은 물체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생명체는 또 다시 자연에 뿌려져 결국 열등한 인간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손가락에 붙어 있던 마지막 기포가 부유하다가 터졌다. 그 터짐의 소리는 나에게는
굉음이었다. 두 손을 서로 비벼 나를 이루고 있던 생명체의 일부와 나에게 붙어 있던
생명체며 무기질을 떨어 버렸다. 깨끗함.
6월의 햇살이 창틀에 고개를 괴고 나를 엿보고 있었다. 대충 옷을 거쳐 입었다.
어느새 기람 ㄹ고사를 보는 시점까지 달려와 버렸다. 시간은 늘 아쉽고 한스럽다.
시간쌓기 작업이란 얼마나 어렵고도 쉬운 일인가. 나는 언젠가는 내게 힘을 줄 만한,
가치 있는 시간의 퇴적층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간단한 바람에도 흩날려
버리는 모래를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심을 끝낸 원생들이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곧 기말 고사 기간이므로 아마도 여유
있는 박사과정 형들이 칠 거라고 생각하고, 테니스장 옆을 끼고 대충 놓여진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윤재야! 이제 일어났냐?"
테니스 코트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았더니 언제 일어나서 밥먹고
테니스까지 치는지 경태가 뛰어왔다.
"내 메모 봤냐?"
"아니? 그냥 나왔는데. 그리고 그 쓰레기 더미에서 눈에 띄는 게 뭐 있냐?"
"침대 위에 올려 놓았었는데... 아무튼, 너 '경제성 공학 특수논제' 다 정리했다며?
그거 좀 카피 해야겠으니까 4시까지 갈게. 준비 좀 해 놔라."
"다 하기는? 아직 멀었다. 우선 정리된 것까지만 보라. 세월 좋다. 누구는 테니스
치는데 누구는 도서관에 매달려 있어야 아니. 참, 그 메모 내용이란 게 그거냐?"
"고럼, 귀족 아니겠냐. 준비 좀 해 줘."
새벽까지 준비해 둔 노트 안에서. 아주 지엽적이고 깊은 내용을 가진 부분은
제외시키고 주제별로 정리된 것을 강의 순서대로 다시 정리해서 복사실에 맡겼다.
이단 두 부를 신청했는데 아무래도 규영이가 찾을 것 같아서였다. 왜냐하면 기말
고사가 다가오면서 각자 어느 정도 랩을 결정하고 있는지라 해당 랩의 교수가
강의하는 과목을 집중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랩의 교수가
강의하는 과목을 정리한 노트는 누가 보다도 훌륭할 수밖에 업고, 더구나 규영이는
쉽게 공부하려는 친구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경태는 OR랩을 생각하고 있었다. 경태는 대학 때부터 OR에 미쳐 있었다. OR은
오퍼레이션 리서치(Operation Research)의 약자로, 사회현상이나 생산 현장을
체계화하여 최적화시키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OR이 주는 명쾌함이
왠지 싫었다. 그래서 나는 경제성 공학에 관심이 많았다. 경제성 공학은 작게는
설비의 투자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기업의 투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의 타당성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생산 체계 수업에 들어갔다. 훤칠한 키에 학자로서는 너무나 매력적인 용모를 갖춘
진도영 박사가 시험일자를 발표하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사람처럼.
"여러분, 열심히 하세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번 학점을 짤 겁니다. 아무쪼록
열심히들 해서 석사 경고 받는 일 없도록 하세요. 허허허."
"교수님, 종강은 언제 합니까?"
"시험 보는 날까지 수업은 계속할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템퍼이터 내야 끝나는 거
아니에요? 자, 수업 시작합시다."
수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
발표에다가 어김없이 숙제까지 내주고 가셨으니어디 이게 인간으로서 감내해 낼 수
있는 형벌일까?
나는 일단 도서관으로 갔다. 시험 일정을 죽 살펴보고 템퍼이퍼 일정도 보았다. 한
20일 정도 남은 기간 내에 시험 5과목 텀페이퍼 5편을 써야 한다니? 그렇다고 숙제다
퀴즈다 해서 텀페이퍼 준비는 전무라 할 정도인데 뒤로 넘어질 지경이었다. 사실상
텀페이퍼 한 편만 쓴다 하더라도 꼬박 일 주일은 밤을 새워야 될 판인데 시험에다가,
으 생각하기도 지겨웠다. 나는 철우를 찾아갔다. 철우는 나와 휴게실에 올라가 커피를
뽑아 들었다.
"아이고, 이제 나 죽었다!"
"나는? 배 째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거 난리다. 난리."
철우는 듬직한 배를 드밀며 소파에 길게 누웠다. 참으로 난리였다. 이건 기계도
아니고, 날마다 밤 새워도 아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안 할수는 더욱 없을 거고.
'최선을 다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대책없이 앞만 보고 뛰어가는 것도 분수가 있지.
뭐 묘안이 없을까? 나는 골똘하게 담배만 깊이 들이마셨다. 이때 정일수가 구부정한
어깨를 하며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 때 성적도 무척 좋았고 상당히 샤프한
면이 많은 반면, 그만큼 이기적인 부분도 많았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냐? 시험 공부 다 했어?"
"다가 뭐냐. 시작도 못 했다."
"얘들이 그러던데 너 공업 경제는 다 정리했다며?"
"잘못된 소문은 빠르기도 하지..."
"그러지 말고 카피 좀 해 주라."
"너는 그 과목 안 듣잖아?"
"그래도 정리해 두면 또 아냐? 내년에 쓸 수 있을지."
"야, 너 OR하고 생산 체계 정리한 거나 내 놔."
"언제 그걸 다 하냐? 아직 시작도 못 했어. 다 하면 줄게."
그는 슬금슬금 가버렸다.
'짜식! 다 정리하고 놔 둔 거 봤는데. 간둬라, 간둬! 내가 한다.' 갑자기 속이 비비
꼬였다.
"윤재야, 일수, 쟤 왜 저렇게 혼자 노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자기가 정리한 거 쉽게 줄 수 있겠냐? 그나마 일수
노트는 화려하잖아. 자기도 아깝겠지. 뭔가 반대 급부에 있어야 교환이 가능한 사회
아니냐?"
"너 언제부터 공자 됐냐? 지금 개인 플레이해서 좋을 일이 뭐 있냐?"
"그러는 너는, 인간 공한 정리한 거 왜 오픈 안 시키냐?"
"내가 뭘? 보여 달래면 왜 안 보여 주겠냐? 그리고 아직 다 안 됐어."
"쓸데없는 소리 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이기적이 되는 게 사람이야."
중구형이 우리가 떠드는 사이에 언제 들어왔는지 커피를 뽑아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왜 이렇게들 퍼져 있냐?"
"아니, 형은 웬일이에요? 학생들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으실 텐데."
우리는 서로 자세를 고쳐 바로 않으며 인사를 했다.
"응, 박사님하고 프로젝트에 대해 상의하러 왔다. 재미는 어떠냐?"
"아이고 죽겠어요. 이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다들 그렇게들 살았어. 세상에 너희들처럼 편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
공짜로 다 해 주잖아. 그런데 이제 겨우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호들갑을
떠냐! 지금부터라도 밤 새우면 되잖아.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형, 그래도 다섯 과목을 어떻게 20일 안에 끝내요?"
"그러게 평소에 좀 해 두지."
"시간이 있었나요."
"시간이 없어? 너희들 술 마시는 시간, 이태원 간 시간, 이렇게 커피 마시는 시간
다 합해 봐."
"그런 건 휴식이지요."
"젊은 사람들한테 휴식이 어디 있냐? 특히나 공부한다는 애들이, 술마실 시간 따로,
커피 마시는 시간 따로, 다 따로 두면 언제 공부하냐?"
"그래도 우린 인간이고 스트레스도 풀어 줘야 되고요."
"잔소리말고 공부나 해. 다 끝나면 내가 진짜 술 한 잔 시지. 그리고 쉬운 것부터
잡아 나가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거야. 또 24시간 곱하기 20해보라, 시간 많다."
"형도 교수 다 됐구먼!"
"야, 우리도 다 그렇게 했어, 너희들 논문 쓰기 시작하면 정말 자살할 생각하기
바쁘겠구나. 지금은 연습에 지나지 않아. 그래도 과학원 생활에서 이 때가 제일
편하고 좋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우리는 종구형의 말에 황당해서 웃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 다들 들어가서 공부 해."
"에, 알았어요."
우리는 떠밀리다시피 해서 각자 도서관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노프에 과목을
중심으로 해야 할 일들을 나열애 보았다. 그리고 비교적 쉬운 일과 중요한 일을
뽑아서 우선 순위를 매겼다. 먼저 리포트를 쓰기로 했다. 좀 비중이 떨어지는 것은
뒤로 미뤄 뒀다가 다른 애들이 해놓은 것을 참조해서 써 보기로 하고 말이다. 그러나
한 문제를 푸는 데 2시간씩 꼬박 걸려서 가까스로 해결하고 나자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도무지 밥 먹으로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계속 앉아서 한 과목 리포트를
끝냈을 때는 이미 밤 11시였다. 밤이 좀 늦기는 했지만 서영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휴게실로 나가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뚜, 뚜, 뚜.
"여보세요."
서영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혀 응대를 했다.
"여보세요, 나야."
"응, 형! 목소리가 왜 그래?"
"아냐, 괜찮은데. 너 잘 지내냐? 지금 뭐 해?"
"전화 받고 있잖아. 호호. 이제 책 읽다가 피곤해서 자려고 누워 있는 중이었어."
"시절 좋다. 이 오빠는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데 천국에서 수면을 취하신다고."
"아니, 왜 거기가 지옥이야?"
"지옥이 아니고 뭐겠냐? 합법적으로 잠 안 재우는 지옥."
"아, 기말 고사 보는 모양이지."
"응, 그런데 보고 싶다. 내가 그리갈까?"
"너무 늦었잖아."
"너는 안 보고 싶은 모양이지?"
"아니 보고 싶어. 근데 내가 나갈 수가 없잖아."
"알았어. 네가 전화 받아라."
"무슨 소리야? 형?"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한 권 꺼내들고
계단을 뛰어내렸다. '보고 싶을 때는 봐야지!'하는 일념뿐이었다. 그녀의 집 부근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다.
"형, 왔어?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바쁘고 힘들 텐데 왜 왔어. 조금만 기다려 내가
내려갈게."
"아니야, 그냥 창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어 봐. 멀리서라도 보기만 하면 되니까. 너
나오면 나 가버린다. 다 너를 위해서야. 엄마한테 들키면 혼쭐나잖아. 기억 안 나?"
"알았어."
그녀의 집 담벼락 아래로 갔을 때 서영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손을 잠시 흔들어 보이고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넌 항상 그렇게 멀리서
나를 손짓 하고, 난 너를 잡으려 하고 아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시원한 바람이 골목을 휘 돌아와 나를 발견하고는 움찔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가는
달빛이 그녀의 어깨선을 더욱 곱게 비추어 주었다. 어둑한 방을 등지고선 그녀는,
창가에 뿔리를 내린 나무처럼 곧고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창틀에 팔으라 고이고
미동도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참 멀리 있는 공간이었지만, 마치 내 얼굴 바로 앞에 있는 듯 선명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몰고서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담뱃불로
허공에 글씨를 썼다.
"서영야! 널 사랑해."
그녀도 알았다는 듯 허공에 그 흰 손가락으로 수를 놓았다.
"영원히."
나는 한없이 거기 그렇게 서 있고 싶었다. 아래층의 불이 꺼졌다. 아마 서영의
부모님도 주무시려나 보다. 불이 꺼지자 마치 이 세상엔 우리 둘만이 남아있는
듯했다. 내 눈에는 눈물이 묻어났다. 날아갈 수만 있다면 살며시 날아서 그녀를 꼬옥
안아보고 싶었다.
과학원에 돌아오자 깊은 밤 2시가 다 되었다. 책상 위에는 철우의 메모가 남아
있었다. 자기 자리로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철우의 자리로 찾아가자 녀석은 내
팔을 잡더니 휴게실로 끌고 갔다.
"너, 어디를 가서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냐? 너 또 자깐 잠깐 사라지는 병
도졌냐? 경태가 왔다 갔다. 들어올 때 복사한 거 가지고 오라 더라."
나는 복사실로 달려가 낮에 맡겨 놓은 복사물을 찾았다. 복사실 안은 튜너 냄새로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안에서는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묵묵히
복사기를 돌리고 있었다. 중끼적으로 새어 나오는 복사기 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고, 단지 노동의 그늘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나의 복사물을
익숙한 솜씨로 복사물 더미 속에서 찾아내어 건네 주었다. 나도 익숙한 솜씨로 양쪽
주머니를 뒤져 출처도 모를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고 거스름돈을 받아 되는 대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는 다시 복사기를 돌렸다. 결국 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였다. 복사기는 한 구석이 번쩍번쩍 점멸하는 신호등같이 보였고, 어둠
속에 그 빛을 만드는 사람과 기계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담배에 절은 목이 가래를 끓게하고 호흡이 가끔 끊어질 듯해서. 아침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팔을 위로 쭉 뻗쳐 올린 채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맛있는 잠을 떨어낸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다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무런
건물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이 빽빽한 것처럼 생각됐다. 아무런 건물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 빽빽한 것처럼 생각됐다. 온 몸이 상쾌했다. 저기 저 사람들보다 나는 어제
하루 정도는 더 만하이 살았다. 그것이 열매를 맺었든 맺지 않았든. 멀리서 태양이
솟아오르려나 보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려나 보다. 사실은 밤이나 낮이나 늘
그 자리에 떠 있는 태양인데 하루에 어느 정도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일 항상 보아야 한다면, 아마도 이 사회의 제도나 규범이 지금처럼
형성되기가 어려울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제도나 규범은 규칙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오후가 되자 메케한 최루탄 냄새가 도서관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너나없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팽 패앵 코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연히
휴게실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어떤 이들은 옥상으로 나가 멀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즈음엔 경희대의 시위를 막기 위해 과학원 입구며 담벼락에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과학원 사람들은 거의 말이 없었지만 모두 불만에 가득 차 보였다. 그러나 강한
표시는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한가지의 학문뿌니다.
다른 생각이 배어 들어갈 틈도 정신적 여유도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학문)를 저해하는 요소가 등장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퇴치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장애물 중 가장 관대하게 대하는 것은 바로 이 최루탄이었다. 무슨 이슈로
시위가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들은
거기에 동참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정도였고, 거기에 비판을 가하는 것을
마치 십자가에 돌을 던지는 거와 같이 생각했다.
나는 멍하니 인수봉을 바라보았다. 휴게실 안은 재채기와 코푸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소란을 흐느끼듯 쓰다듬으며 이광조의 <나드리>라는 노래가 실내에
흘렀다. 동하와 규영이가 휴지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하고 마 이기 뭐꼬. 또 무신 데모가. 그만 좀 하제. 허구헌 날 데모하고 이게 무슨
짓이고."
그는 코를 연신 풀어대며 짜증을 내었다. 규영은 나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한
소리를 조심스럽게 붙였다.
"좀, 너무 심하지 않니? 요즘은 연일 데몬 거 같아. 윤재야, 요즘은 무슨
일이래냐?"
"내가 아냐? 너는 매일 신문 보잖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 하는 놈이 그걸
모르면 누가 아냐?"
"나도 요즘 기숙사나 도서관에서 그냥 잔다. 신문 본 지도 오래 됐잖니."
"무슨 일은 무신 일, 또 군부 독재 타도것제."
동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고슴도치
머리카락 끄트머리마다 물이 묻어 송곳이 하나씩 뻗어 있는 듯했다.
"윤재야, 어찌 좋은 방법 없겠니? 여기서는 공부를 못 하겠고, 그렇다고 여기를
떠날 수도 없고."
"떠난데도 마찬가질 끼구마. 어디 요즘 데모 안 하는 데 있드나."
"글쎻, 큰일이긴 큰일이네."
우리는 대책없이 열심히 코를 풀면서 앉아 있었다. 최루탄을 쏘아도 너무 쏘는 것
같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의 대부분을 괴롭히는 데 돈을 쓰는 정부도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성싶었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 그래서 국민의 지지 기반이 취약한 정권, 그래서 항상 뒤가
켕기고 약한 정부. 언제쯤이나 국민이 신뢰하고 희망을 거는 정권이 탄생할 것인지
의문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잘못없이 모두 하던 일손을 놓고
있다. 이 또한 얼마만한 손실이냐. 우리가 힘을 모다 덤벼도 아쉬운 판에 손을 놓고
쉬게 만드는 정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데모를 하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어떤 형상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 피곤한 일어어서인지, 누구나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만 즉물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또 우리는 너무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다. 허나,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논리적으로
타당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대안 또는 대책이 없으면, 그것은 단지 넋두리에 불과한
불평 불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한 형태의 원인은 부조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들이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한 퍼스널리티의 유형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헤미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필리스틴(Philistine)의 속성을
간직하면서 말이다. 어느 한쪽 편에 선다는 게 사실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중용, 그것은 진실로 성인이나 하는 거룩한 소리고, 우리 같은 범인은 절대로 중용을
실행하지 못한다. 단지 어정쩡한 회색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풍향이 달라졌는지 일대 소동이 끝났는지 최루가스 냄새가 잠잠해졌다. 우리는
뿔뿔이 다시 도서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태한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유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어젯밤 찾아놓은 복사물을 넘겨 주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찡긋해 보이더니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어젯밤 정리해 둔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바쁜 마음에 영어로 정리해
두었더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중간고사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반복되는 실수였다. 의미가 자체 문장에 의해 전달되지 않는 부분은 우리말로
다시 적어 넣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로 미루어 두었던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논문들을 차분히 정리해 나가기로 했다. 어떤 선배들은 하루에도 논문을 몇 편씩 소설
읽듯이 한다는데 이거 원 워낙이 압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들이 많았다.
'이것들을 다 읽고 이해한 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간단한 논문 하나를 써야만
기말 텀페이퍼가 나올 수 있는데...'
그냥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계획된 대로 진행시켜 보기로 했다. 전날 밤에 한 시간
정도는 자두는 건데. 피곤이 몰려왔다. 논문의 업스트랙트(Abstract:논문 앞에 논문
내용을 요약해 두는 글)를 읽어 보고 순서를 정해놓고는 철우를 찾아갔다. 같이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철우는 오늘 밤도 새워야 될 것 같다며 체력 보충을
하자고 제안했다. 엄밀히 말한다면 영양 보충이지만.
우리는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라면을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는 경태를 끌어내어
'대우 로스'집으로 갔다. 이 집은 삼겹살을 싸게 아주 많이 주는 집이었다. 우리는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정이 되어 가자 피곤이 와르르 몰려왔다. 나는 커피라도 마실 겸 휴게실로
나갔다. 휴개실에는 소파에 몸을 구겨 놓고 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소파에 몸을 잔뜩 움추린 채 끼여
앉았다. 종이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다리를 두 손으로 깍지를 끼여 가슴에다
잔뜩 끌어들였다. 포근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문득 차가운 기운에 깨어난 것은 이미 새벽 4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아휴! 많이도 잤군!'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노출됐던 피부가 끈적거린다.
그리고 머리가 무겁고 아팠다. 띵한 머리를 깨느라 고개를 흔들다가 명훈이 형
이야기가 떠올랐다.
명훈형은 석사 2년차인데, 대학 때부터 공부 잘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한
공부 벌레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맹렬히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석사 2년차 때부터는
거의 랩에서 의자를 붙이고 자는 데 익숙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집에 가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잠부터 자는게 상례였다. 명훈형
어머니가 지난 겨울, 아들이 집으로 오면 늘 그랬듯이 따뜻한 아랫목에 포근한 요를
깔아서 잠자리를 해주시더란다. 그런데 막상 그 이불 속에 들어가니 너무 포근한 것이
어색해서 잠이 영 오질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 하느 수 없이 습관처럼 맨 바닥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고 있었는데,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바라보고 계시더란 얘기였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의자 침대에 익숙해져 있었다.
세수를 대강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속이 쓰렸다. 다시 나가서 찬물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인간 공학을 정리하려다 보니 일단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걸 보고 방향을
잡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철우를 찾아갔지만 그의 빈 의자만 하품하고
있었다. 인간 공학을 가르치는 변승석 박사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였고
학문적으로 학생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었지만, 학점이 무척 짰다. 어느
해인가는 거의 반 이상을 F학점으로 좌악 깔아버린 이로 있다고 했다. 절대평가를
준하는데 여기서 '절대'의 의미는 변 박사의 '만족도'혔다. 그는 그냥 커피를
마시다가도 뛰어난 논문을 하나씩 쓰는 신화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는데, 그분의
만족도의 수준은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지 않은가?
나는 학기 초에 인간 공학 랩에 관심이 있어서 수강 신청을 하고 있었는데, 수강
신청자가 너무 적어서 정보를 교환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영악한 자들이 자신의 노력물을 적들에게 넘겨 주는 행위를 할 리는 만무했으니, 나는
뒤로 정보를 빼내기가 바빴다. 그래도 철우는 나에게 조금은 공개할 수 있는 놈이란
생각이 들어서 안심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철우를 찾아서 휴게실, 인간 공학 연구실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 데도 보이지를 않았다. 아침이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어차피
할 일,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 볼 양으로 강의록을 뒤지고 있는데 철우가 불쑥
나타났다.
"권도현이가 좀 도와 달래서 갔다 왔다. 너는 휴게실에서 세월 좋게 자고 있더라."
"응, 좀 잤지. 커피나 한 잔 마시자."
휴게실에는 공동 묘지 같던 조금 전의 상황하고는 완전히 달라져서 즐비하게 누워
있던 시체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푸석한 얼굴로 종이컵 하나씩을 신주처럼 받쳐들고
앉아 생각에 잠겼는지 잠이 덜 깬 건지 몽롱한 유령들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창
밖으로는 안개가 자욱이 끼여 마치 지옥에 있는 침묵의 방 정도에 끌려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도현이는 뭐 하대?"
"열심히 공부하지. 학생회장이라고 뭐 하나 눈감아 주느 거 있든? 지가 자청한
고생인데 별수 있어? 인간 공학 때문에 이것저것 같이 좀 하고 왔지."
"나한테도 이것저것 좀 알려 줄래?"
"너는 시간도 많고 해 놓은 것도 많을 거 아냐. 나보다 많이 한 놈이 뭘 물어보냐?"
"자 지금 절박한 상황이다. 한 세트 카피 좀 해 주라."
"별 거 없어. 너도 정리하면 금방 하잖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짜식! 꼼꼼한 노트 들키지 않으려고 야단을 떠는구나. 됐다,
됐어. 혼자하고 말지.
오늘은 수업마저 두 과목이나 들어 있다. 나는 속으로 쫑알거리다가 일어나서 내
자리로 돌아왔다. 기말 고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신경이 곤두섰고, 자신이
습득한 지식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서, 서로 피하는 형국이 되므로
자연히 혼자서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좀 빠른 애들은 선배들에게 전년도 시험 문제나 요즘 랩에서 연구하고 있는
최신 정보를 입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시험 보는 날에 제출해야 되는 템페이퍼는
이틀에서 일 주일씩 날짜가 늦추어졌다. 그 결과로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만큼 고된 시간이 연장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연일
최루탄 냄새가 사정없이 날아 들어와 드디어는 원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재채기를 못이겨 수업이 중단되고 사태가 왕왕 발생했다.
이 무렵 과학원 내에는 이상한 언어 표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장의 끝에 '군'또는 '는'을 붙여서 경제적으로 말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좋군."
"굉장히 뛰어나군."
"밥 먹으로 가는(밥 먹으로 가자)."
"어젯밤 새웠는(어젯밤 새웠다)."
"그거 하면 좋겠는(그거하면 좋겠다)." 등으로 의문문, 감타눔, 의뢰 서술 등에
관계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극히 상황의 긴장과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사람들은 점점 정신 이상자처럼 되어 아주 사소한 아무 일에나 끼득끼득
웃고 장난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아마도 그것은 분열 증세이리라. 머리 속 어딘가를 그 무엇에 의해 빼앗긴 것이
분명했다. 우리에게 남은 건 단지 말초 신경과 연구를 위한 몇 조각의
뇌세포뿐이었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밤에 치렀고 오픈북에다가 시간은
무제한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시험 감독도 없는 거나 진배없었다. 하지만 총 네다섯
문제를 모두 풀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오픈북'이라고는 하지만 말이
그렇지 책을 본다고 해서 풀어질 성격의 문제도 아니고, 또 책을 보는 사람은 아마도
F학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픈북의 의미는 단지 책 뒤에 나오는 확률 수치
등의 값을 구해 놓은 테이블 정도를 보라는 이야기에 불과하고, 사실 본문 내용은
머리 속에 모두 들어 있어야만이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픈북은
학생들이 약 올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가끔 교수님이 목이나 축이라며 음료수를
뽑아다 주거나 커피를 뽑아다 주었다. 그것은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표시로
보였다.
시험은 모두 끝났다. 텀페이퍼도 여러 날의 낮과 밤의 시간을 꿀꺽 삼켜서 배가
볼록 튀어 나온 상태로 제출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시간을 타고 떠나갔고,
남은 것은 두꺼운 노트뿐이었다.
도서관에 앉아 한 과목씩 내가 습득한 지식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강의
순서대로, 그 학문에는 어떤 흐름의 어떤 주류가 있으며, 그 주류에서 어떤 이론들이
생성 발전되어 새로운 체계를 형성시켜 가는지, 또 현재의 수준은 어떠하고 앞으로의
전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주요 흐름조차도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항시 그렇듯 단편적인 지식들이 낱낱으로 존재할 뿐 유기적 형태로 통합된
모양을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각 이론들을 체득하기 위해
밤을ㄹ 새우며 그토록 방대한 자료를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야, 다른 친구들은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어. 내 머리 속의 지식들이 산등성이에 조각 조각 붙어
있는 천수답이라면, 적어도 그들은 잘 정리된 평야지였어. 그래, 난 머리가 좋지
않은가 봐. 난 학문을 할 놈이 못돼. 막고 품는 방식으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적어도 진정한 학문을 하려면 관심과 흥미만으로는 안 돼. 그것과 더불어 반드시
재능이 있어야 해. 학문도 예술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걸 난 몰랐어. 공부는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 난 그 재능이 없어.'
나는 엉망이 된 책상 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과학원을 도망 나와 버린 것이다.
'어디로 갈까? 도봉산? 아냐, 그건 너무 멀고 힘들 거야. 남산에나 갈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택시를 잡아타고 남산에 가자고 했더니 기사가 국립극장에서 내려줄테니 걸어서
올라가 보라는 것이었다. 국립극장도 처음이었다. 묵직한 건물이 극장이라는 이름만
붙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법원 건물 정도는 돼 보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었을 텐데
자가용 없이 오려면 찾아오기 힘들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진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금으로 공평한 분배를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에서의 세금의 윤리라고
본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혜택을 받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꼭대기를 힐끗 바라본 후 차도를 따라 남산을 올랐다. 날씨가 무척 더웠다.
차도에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아스팔트 위로 더운 기운이 벌떡 일어나
덤벼들었다. 작년 6월 하반기에는 이렇게까지 덥지는 않았던 듯한데 올해는 굉장히
덥게 느껴졌다. 어느새 겨드랑이는 흥건해진 땀이 움직일 때마다 윤활유 작용을 하여
미끈거렸다. 발걸음을 멈추고 모든 동작을 작게 만들어서 체력 소모를 막아 보려
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금호동의 산동네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멀리 잠실에
체육관이 보였다. 내년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열심히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올림픽은 내년 언제쯤 하나?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를 위한 축제는 아닌 듯하니까.
한강도 보였다. 한강은 흐르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기다랗게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몇천 년을 흘러서 수로도 조금은 변했을 것이고 깊이도 변했을 거고 수질도
변했을 텐데, 소란스럽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고 흐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러워 보였다. 나는 짧은 삶의 길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부산을 떨며 온갖
가식과 들뜸과 거짓으로 스스로를 찬란하게 만들려 하고, 무언가 쟁취를 해서 정상에
등극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저 강은 조용히 미소를 짓는 듯 모든 것을 웃어
넘기며 살아간다. 흐르는 강물은 어제와 같은 강물은 아니라고 하지만, 강은 바라보는
그대로 변하지 않는 강이다. 나도 늘 그대로이면서 진중하고, 건강하게 변해 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발 밑을 보니 남산의 숨통을 꾹 찍어 누르고 있는 외인 아파트가 질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산의 손발을 조이듯 건물들이 스물스물 남산의 머리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조금씩 올라가면서 남산 안에서만 사유하기로 했다. 그것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남산은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이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지. 지금은 저기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유형 무형의 선들이 봉수대를 대신하여 통신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봉수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변방의 위급을 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선조 때에는 그 경로가 5로나 되었다 하는데, 그리고 직봉이 무려 120개나
됐다는데, 지금은 5개 경봉수 모두 다 사려져 버렸다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몇백 년을 흘러 완성된 우리 것을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없애 버리다니.
선조들의 유적은 효용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가? 과학은 필요에 의해 발전하며 불필요한 것을 파괴해 간다.
그리고 거듭 발전해 간다. 과학은 충분한 논리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파괴를
정당화시키며 기존의 존재물을 위협한다. 허나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는 그 위협이
무엇이고, 또 무엇을 지켜야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되도록이면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펼쳐 보려고 노력했다. 남산
꼭대기에는 국민학교 때 책받침에 그럴 듯하게 박혀 있던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었다.
'서울'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남산 타워의 모습은 초라하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 오후,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위용의 건물을, 청년이 되어 다시
찾아가 보았을 때, 문득 의아할 정도로 조그맣고 힘없던 건물 모습과도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꿈이나 이상의 현실적 출현에 대한 실망인지도 몰랐다. 타워에 올라가
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깨지 않기 위해 그냥 그 언저리를 돌아보기로 했는데,
모 신문사에서 묻어 놓은 타임캡슐이 눈에 띄었다. 우리의 먼 후대에게 전하는
우리들의 메시지!
나는 내 후대에게 무엇을 남겨 놓고 떠날까? 무얼해서 살아가지? 지금까지는 한
번의 실패도 없이 꾸준히 걸어왔다. 그리고 나는 늘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학문은 나의 길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적어도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싶은데, 학문에
대한 능력은 없다. 결단코 확실히 말 할 수 있다. 나는 학문을 할 재능이 없는 자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서 업적을 남겨야 하나, 아니 그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한 부분이 되어 그냥 묻혀 사는 건 솔직히 의미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 4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공부를 했으면 얼마나 했고, 그 단기간 내에 드러난 나를 과연 얼마나 확실히
평가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단지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 의미를 상실한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총 17년에 가까운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만의 성을 쌓아
두고, 실체를 본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모든 것들에 벌써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자의식의 부족, 내가 미치도록 매달릴 그 무엇은 없을까? 그래,
취미 생활을 시작해 보자. 그림을 그려 보자고.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다 잊어버렸다가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남산을 뛰듯이 내려왔다. 식물원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그늘마다 장사꾼들이
좌판을 벌려 놓고 막걸리며 안주 나부랑이를 팔고 있었다.
홍대 입구에 가서 수채화 물감이랑 붓 그리고 그 앞의 상점에서 양초를 하나 샀다.
물감을 한 번 칠하고 주요한 부분에 양초를 입힌 후 덧칠을 해 볼까 해서였다. 물건을
모두 산 후 서영을 만날까도 싶었지만, 이런 기분으로 만나기는 싫어서 과학원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어 철우는 뒹굴거리며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어디를 갔다 이제 오냐? 사람들이 너 많이 찾았다. 오늘 저녁에 모두 모여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그래, 거 좋은 생각이군. 좋는! 좋는!"
"너도 병들었군."
"그래 나도 병들었는데, 근데 그건 무슨 만화냐?"
"야, 이거 정말 재미있다. 구영탄이 동전 가지고 장난하는 건데... 어? 너, 그레
뭐냐? 으히히, 내 선물이군."
"선물 좋아하네. 이거 형님 취미 생활할 거리다. 왜."
"뭔데, 한 번 보자. 이거 뭐냐? 등화관제 훈련 한다냐? 양초를 다 사오고. 야! 이건
또 뭐냐? 너 전공 바꿨냐? 아니면 직업 좀 바꿔 보려고? 생기지 않게 물감은?"
"이리와! 너 한 번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이리 와."
나는 음료수를 팩을 휴지통에서 꺼내어 물통을 만든 다음 찰랑찰랑 물을 채워 놓고
법석을 떨었다. 철우는 열심히 비아냥거리더니 어느새 만화책에 빠져들어 가끔
낄낄대며 웃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얼 그릴까 하고 고심을 했다.
그래, 정물부터 그리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띄는 휴지통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널려진
양말과 라면 봉투, 그리고 휴지 조각들을 요모조모 살피며 구도를 잡았다. 나는 하얀
도하지 위에 연필로 쓱쓱 그려 나갔다. 그 검은 선들은 나를 어디론가 탈출시켜 주는
통로 같았다. 희미하게나마 대강의 윤곽을 잡았는데 경태가 불쑥 뛰어들어 와 철우
위로 덮쳤다. 순간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곧이어 경태는 내 뒤통수를 때리며
도화지를 낚아 들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음, 대단한데, 쨔샤! 이렇게 있지 말고 시험도 끝났는데 한 잔 하려 가자. 이거
뭐냐? 응."
경태는 웃음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도화지를
책상위로 던져 버렸다.
"형님 취미 생활 좀 하자 응?"
"잔소리 말고 나가자. 어? 이거, 구영탄 아냐? 이거 보고 나가자."
나는 웃으며 철우한테로 걸어가 그 옆에 앉았다.
"너, 또 당했냐?"
"당할 뻔했다. 아이고, 저 웬수."
전화부저 소리가 울렸다. 경태는 우당탕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잠시 후 그는
문을 꽝하고 닫으며 다시 돌아왔다.
"백성만이다. 오늘은 기숙사에서 마시잔다. 술하고 안주하고 사가지고 방으로 올라
오래."
경태는 곧잘 선배들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선배가 멀리서 걸어가면 '누구야'하고
이름을 부르고는 반대쪽으로 도망 가곤 했다. 성만형은 재수를 해서 들어왔는데
심성이 착하고 선해서 잘만 어르면 뭐든지 다 해주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선배가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는 후배들이기에 우린 어둑해진 길을 두말 없이 걸어
내려가 '할머니 집'에서 양주와 얼음 그리고 마른 안주 거리를 사 가지고 올라왔다.
E52에는 성만형의 룸메이트인 충이형과 재성형만이 그룹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성만형은 우리가 들어서자 물건값이 얼마인지 확인하더니 돈을 꺼내어 주며 물었다.
"물론 라면도 사왔겠지?"
"아뇨? 지금 9시 안 됐잖아요. 그래서 매점 문은 안 열었을 거고..."
"그럼, 너희들은 수고했으니까 일수 네가 이따가 라면 좀 사 와라. 여기 식권
있다."
"형은 라면은 평소에 사다 놓지. 그냥 이거 먹고 말죠?"
"이 새끼, 또 잔머리 굴리기는. 사오라면 사와!"
"헤헤, 형 그래요, 이따가 봐서 사요죠, 윤재야, 이따 갔다 와라 응?"
"그래, 있다가 보자. 알았어, 임마."
나는, 우긴다고 그가 사올 인간도 아니고 먹다 보면 분명 또 밖으로 나갈 텐데 뭐.
하는 생각으로 받아 넘겼다.
"그래, 너희들 랩은 어떻게 할래. 이제 랩 결정하자고 할 텐데."
충이형이 잔을 돌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 형. 머리 아프게 그런 얘기 그만하고 산업 시찰 가서 놀 계획이 나 짜죠."
일수가 한 모금 꼴깍 마시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야, 너는 건배도 안 하고 너 먼저 마시냐! 그리고 선배가 이야기 하면 좀 들어라.
사실 랩에 대해서 의견 조정을 좀 해야 되지 않겠냐?"
충이형은 일수를 나무라며 신중하게 화제를 안정시켰다.
"일수 네가 잘못했다. 맞아요, 좀 있으면 공식적으로 랩을 결정하게 될 거고
우리끼리라도 어느 정도 의견조정을 해 보야 될 것 같아요. 사실 지금까지 누구
하나라도 어느 랩을 가겠다고 공식화해서 말한 사람도 없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서로의 의견을 좀 들어보죠."
경태는 일수의 행동에 대해 형들에게 미안한 듯 점잖게 말을 이어 갔다.
"저는 OR랩을 가려고 해요. 그리고 박사 과정에 안 올라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고요."
"그래, 지금 박사 과정에 안 올라가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거다. 나는
선통 랩에 가려고 한다."
"이 형님은 인간 랩에 갈 거다. 역시 사람은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또 인간
유충이가 인간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게 멋있지 않냐?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씩 마를
건짜 건배하자. 얼음도 녹기 시작하느데, 자, 건배!"
"건배!"
우리는 관례대로 술을 단숨에 털어 넣은 후, 무리 위로 잔을 거꾸로 퍼어서 다
마셨음을 확인시키고, 잔을 돌려 술을 채웠다.
"충이형, 저도 인간 랩에 가려고 하는데요."
철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충이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사실은 나도 OR랩이야. 어떠냐? 서로 도우면서 열심히 하면 되지."
일수는 철우를 툭 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태였다. 적어도 경태의 눈에는 더더욱이 중대한 문제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랩에 두 명씩 갈 경우 박사 과정에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은 매년 각 랩당
1명에 불과한데, 우리 학교 출신끼리 싸워서 한 명이 탈락할 경우 효율 면에서 극히
저조해질 것은 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미루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서로의 의견이 밝혀지자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고, 무언가 얘기를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표정이었다. 일수가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모두들 그 판으로 넘어가는 듯은 했지만 개운한 얼굴들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결국 우리는 10시쯤 되어 밖으로 나와 고대 앞 제기 시장통에 가서 소주 한 잔을 더
하기로 하고 닭갈비 집에 도착했으나, 거리에는 최루탄 냄새가 자욱하게 고여 있었고
술집들은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괴괴했다.
사실이지 과학원 밖은 긴장감이 감도는 나날들이라고 했다. 도현의 말에 의하면 5공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며칠 전에는 연세대 이한열
군이 교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져 있으며, 차기 대권 주자가
체육관에서 태어났고, 구민들 모두는 호헌 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우리들은 이러한 거대한 흐름 속에서 뚝 떨어진 섬에 외따로 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과학원 내에도 많은 '리플랫'이 뿌려졌고, 연일 날아오는 최루탄 냄새로 특별한
기운은 느꼈지만, 그러한 느낌을 확인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아니, 시간적
여유보다는 우리의 의식의 방향이 달라져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즉물적이고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인간이 도어 갔다.
우리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다시 과학원 앞의
'러브뱅크'에 와서 적당히 마시다가 들어와 버렸다.
기숙사 문을 밀치자 헉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더운 바람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아직 여름의 초입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이렇게 더우니
올해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싶었다.
강의실 안에는 웅성거리는 과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과대표 상진이가
앞을 나가 서서 구승이와 농담을 나누며 사람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 씩 웃더리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유재 왔으니 다 온 것 같습니다. 시작합시다."
"그래, 시작합시다."
"더러운 놈, 철우 어디 있어? 깨우지도 않고 저만 쏙 나가?"
나는 변명이라도 하듯 철우에게 달려가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자, 그 동안 여러 번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기를 바랐고, 어떤 사람은 미리 침도
발라 놨던 랩 선정에 관해서, 오늘 일단락을 지을까 하고 이렇게 모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랩에 모두 다 갔으면 좋겠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한 교수님
밑에 맥시멈(Maximum:최대) 5명밖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양보하고 잘 조정해서
이로 인하여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학과장님과 상의를 해
봤는데 1지망부터 5지망까지를 나눠드린 용지에 써 내시면, 교수님들께서 1지망을
우선하여 뽑되 이번 학기말 고사를 반영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안이
있다거나 이의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없으면 이 용지를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있게 웃으며 컴퓨터로 찍어낸 양식을 흔들어 보였다. 이 때
구승이가 일어서더니 고개를 숙인 채 말했습니다.
"사실 랩 선정은 과학원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니만큼 며칠간의 유예
기간을 두어 과원들이 서로 조정할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나같이 공부 못 하는 사람은 까딱 잘못하면 5지망에서나 걸릴 텐데, 그러면 너무
기분 나쁘잖아요."
구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들 동의한다고 소리를 쳤다.
"좋습니다.그러면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모이기로 하되, 내일은 반드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강의실을 빠져 나오는데 경태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야, 6시 30분에 캔에서 보자. 우리끼리라도 조정해야지."
"알았어. 다 올 수 있대?"
"응, 모두 모이기로 했다."
나는 도서관으로 들어가 그 동안 차일피일 미루어 두었던 자료들을 과목별로
정리했다. 과목별로 코드를 매기고, 각 과목별 과제와 핸드아웃을 묶어 관련 자료들을
보충하였다. 정리를 하다 보니 파일이 모자라 매점에 가서 흰 식권을 내고 여러 개를
구입하여, 이번에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걸린 것처럼, 그리고 마치
어디론지 떠나면서 매듭을 지을 요량인 것처럼 정리를 모두 끝냈다. 정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 되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캔으로
갔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물컵 표면에 생긴 물기를 쓸어내리며
기다렸다. 잠시 후, 철우와 경태가 들어왔고 드 뒤로 재성형과 성만형이 들어오자
캔은 떠들썩해졌다. 다음 주에 갈 산업 시찰 이야기며 이후로 실시되는 특례 보충역
훈련에 대해서 아는 것은 모두 털어 놓고들 귀가 무거울 정도였다. 모두들 오늘
모이게 된 주요 문제를 직접적으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피하는 입장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더더욱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로 과장된 웃음을 범벅칠하며 다른
이야기가 끼여들 틈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잠수 후 복학생 중에서 들어온
재주꾼 종화형, 뺀질한 일수를 선두로 하여 규영, 충이형이 들어오자 성만형이 맥주
한 박스를 시켰다.
"야, 오늘 마시고 죽자! 아가씨, 맥주 좀 많이 갖다가 냉장고에 미리 넣어 두세요."
술잔을 돌리고 건배를 한 후 경태가 과감하게 말 문을 열었다.
"권도현이만 못 오고 다 온 것 같으니까 이야기 좀 하죠. 지금부터 솔직히 자기가
가고 싶은 랩을 이야기해 봅시다. 고도리 순서로 나부터 시작할까? 자, 나는 OR랩을
가려고 합니다. 자, 다음."
도현이를 제외한 10명이 모두 자기가 원하는 랩을 부르고 나자 좌중은 말이 없이
조용했다. 실내의 음악소리만 더욱 크게 들리고 다들 나름대로의 계산에 바빴다. 총
8개의 랩 중에서 2명 이상이 가는 랩이 다섯 개나 됐고 한 명도 가지 않겠다는 랩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태는 열심히 받아 적은 종이를 죽 훑어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굳은 것 같은데 이걸 생각해야 한다고. 나중에 박사 과정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은 랩당 한 명이야. 그러니까 우리끼리라도 쫑나서 서로 싸우면
곤란하지. ㄴ대 애들보라고. 작년에도 걔들은 랩당 정확히 1명씩 갔어. 그래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지 않고 박사 과정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우리들끼리 같은
랩에 두 명씩 가버리면 결국 우리끼리 싸워야 한다고."
경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박사 과정에 올라갈 것을 생각해서 자기가 관심 없는 학문을 선택할 수는
없잖아. 어차피 경쟁 사회인데 박사 과정에 올라가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하면 될 거
아냐?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자기가 원하는 랩에 가게 놔 둬."
일수의 찬물을 끼얹는 발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경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해서 일수가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대학 때부터 같이 공부를 해 왔어. 그것도 항상 붙어 다니면서 공동 운명체란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위하여 서로의 장래를 북돋우며 살아왔어. 대학 때를 잠깐만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들을 우리는 다른 대학에 빠져 나가지
않도록 번호까지 부여해 가면서 보안을 유지했었잖아. 그러한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들을 보호하기 우함이었지. 어떻게 보면 그것은 집단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었어. 그러나 그 당시 우리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우리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았었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상당한 인간적 유대감을 유지했었고 키워 왔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목적도 내용도 다 그러한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랩에 가야 해.
그러나 그 전에 대원칙이 있어. 우리가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이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까리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각자가 모두 랩을 정했다고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람. 랩을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던가를... 어떤 사람은 교수를 보고, 어떤
사람은 학문을 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보았을 거고 또 어떤 사람은 쉽게
졸업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자, 일수가 말한 대로 각자가 원하는 랩을 가야
돼, 경태의 말대로 우리끼리 싸우지 않도록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가면서 랩을
조정해보자.
나는 그 동안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물론 나는 내 이야기로
인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간혹 잊고 지냈던
부분들에 대해 꼬집어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카페 안은 우리들만이 못을 박은 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고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술잔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자, 그럼 두 명씩 가겠다는 랩에서 한 명씩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군대도
갔다 왔고, 나이도 많고, 박사과정 올라간다고 해서 20대 박사는 텄고 하니, 내가
통계 랩으로 갈게. 어떠냐?"
군대를 갔다 온 종화형의 목소리가 침묵 위에 말뚝같이 내리박혔다. 그러나 침묵은
원래가 무거운 것 아닌가. 그래서 여러 사람이 거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손을 쓰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자,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장을 내야
하잖아. 동전을 던지든지 사다리를 타든지 해서 결정을 해버리자."
재성형이 한 소리를 보탰지만 역시 침묵은 겨울 밤 시냇물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당연했다. 모두들 자기가 가고자 하는 랩을 결정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해
왔었고, 마음 먹은 랩을 가기 위해 그 동안 들인 공도 대단했다. 다른 과목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리포트 한 페이지, 텀페이퍼 한 페이지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자기가 원하는 랩의 석 박사 과정 형들과 친분도 다져 놓고
있었고 은근슬쩍 벌써부터 논문 테마까지 집적거려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은 각 랩 간에 성격이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다른 랩을 간다는 것도 위험 천만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은 단지 현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데 있다. 또한 자신의 장기 계획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맞아 떨어지는 조건을
갖춘 학문이어야 하며, 랩의 환경, 즉 교수님의 성향이 충죽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랩을 선정하는 데 있어 동전을 던지거나 사다리를 타고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이러한 논의는 너무 시기가 늦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단지
우리는 지금 대학 때부터 형성된 집단주의를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그리고 이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균열되고
있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지금까지 지켜오던 관계에 대한 결벽증으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을 내세우며, 그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지나지 않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자리.
"우리가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제
와서 랩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그 이유는 각자가 모두 알
거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랩을 조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컨스트레인트(제약조건)가 박사 과정 올라가는 데 쫑나지 말자 이거 아냐. 그렇다면
박사 과정에 올라갈지의 여부를 각자 들어 보자. 그래서 한 랩에 두 명의 박사 과정
지원자가 있다면 그건 서로 조정할 일이고, 너무 문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항상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문제를 풀어가는 규영이가 입을 뗐다. 그는 가끔
극단적인 발언으로 오해를 사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각이 장기적으로는 옳은
것들이었다.
"그래, 규영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모두 한 번 이야기들 해 보지."
하지만 철우와 재성, 종화형 외에는 유동적이었다.
"대안이 없네. 일단 술을 마시고 오늘 갈 데까지 가자. 자, 잔들 들어! 마시고
죽자!"
종화형이 깔깔대며 건배를 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도 우리는 결로능 얻지 못했다.
결국 모든 일은 각자 자신들에게 맡기고, 내일 과 회의에서 자기가 희망하는 랩으로
가되, 만일 바꾸고 싶으면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술이나 진탕 마시기로 했다. 술이
어느 정도 오르자 성급히 받아 마시던 철우가 소리쳤다.
"형들, 오늘 이태원 가죠."
"우와, 철우 많이 변했네. 네가 이태원을 다 가자고 하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놀랐다. 결국 철우의 제안대로 시원한 바람 부는 거리로
나와 이태원 소방서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택시 잡기에 바빴다.
경태와 철우, 그리고 규영은 나오 함께 택시를 탔다.
"에이, 씨팔! 우리 익 하나 조정 못 하냐. 결국 이렇게 되면 박사 과정 올라갈 때
ㄴ대 얘들한테 깨지게 되어 있다고. 나도 모르겠다."
경태가 체념하듯 내뱉었다.
"야, 이젠 힘들다. 이건 개인에 관한 문제라고. 공동체로 확대시켜서 풀어갈 문제가
아니라니깐. 뭐 우리가 공산주의냐? 획일적으로 해 나가게."
규영이가 경태의 머리통을 쓸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아쉽다. 4학년 여름 방학 때 스터디 그룹하면서 과도관(과학도서관)
복도에서 빈 우유팩 가지고 우리들끼리 편 나누어 축구를 하곤 했었잖아. 250원짜리
음료수 내기."
내가 규영의 말을 잡으며 이야기를 꺼내자 철우가 낄낄대며 웃더니 말을 받았다.
"그래, 그래. 그 때 윤재, 너 바지 찢어진 적 있었지. 다행히 매점에 옷핀이 있어서
그걸로 적당히 막아 놓고 있다가 라면 집 아줌마가 꿰매주고. 하하하."
"뭐 윤재가 문제냐. 충이형이 넘어져 가지고 진짜 코가 깨졌잖아. 하하하."
"하하하."
경태의 말에 우리 모두 충이형이 한참 동안이나 코에 밴드를 붙이고 다니던 얼굴을
생각해 내고는 정신없이 웃었다. 경태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얼른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혹시 담배 피워도 되느냐고. 운전사는 떠들어 대는 우리들에게 신경질이
났던지 아니면 4명이 타서 합승을 못하게 되어 심술이 났던지 퉁명스럽게,
"마음대로 하세요."
내뱉고는 창문을 세차게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는 여름이다.'고 외치 듯 밀려
들어왔다. 이태원에는 오밤중 1시경이 됐는데도 사람들로 붐벼 거리가 꽉 차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허리로 웃어 댔고, 빤질거리는 무스를 잔뜩 바른
머리를 하고 검정으로 몸매를 쫘악 다듬은 젊은 남자들은 손으로 웃음을 받아 넘겼다.
한 결음을 뗄 때마다 파리 떼처럼 호객꾼들이 몰려들어 위협 반 회유 반으로 자기네
술집을 소개했다.
화려한 조명, 그리고 너무도 멋진 율동들을 창출하며 춤을 추는 플로어의 많은
사람들... 국민학교 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온 친구가,
문화적 충격과 이질감에서 오는 사회적 부적응은 매우 컸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4차선밖에 안 되는 전주 팔달로의 횡단 보도를 건너는 데도 많은 시가나이 걸렸고, 또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녀야 하고,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는 어린 학생들의 삶의 질
자체가 자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회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춤을 추지 못한다.
그리고 잘생기지도 말쑥하게 차려 입지도 못했다. 이태원의 문화적 충격은 어쩌면
그의 것과는 다른 류일지라도, 그것이 적어도 피해 의식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하지만 나는 가진 것이 있다. 나는 성공할 수 있고, 그들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자격도 있다. 나는 여러 번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모든 스트레스를 모래같이 불빛같이 분노같이 마구 토하고 뿌리듯 플로워 위에서
나는 광란을 하였다.
모두 날아가 버려라!
랩을 결정하는 날엔 모두들 자기가 원하는 랩을 써 냈다. 우리끼리 전혀 조정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써 낸 것이다. 경태의 입버릇이 되어 버린 염려대로 ㄴ대
애들은 모든 랩에 한 명씩 신청함으로써 또 다시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려 놓았다.
경태는 기숙사에 돌아오 집기들을 내동댕이치며 분통을 터트리더니, 이내 가방을 챙겨
들고는 집으로 가 버렸다. 말없이 튀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오로지 그의 것일
수밖에 없는 선택의 불안이 고독하게 어려 있었다.
7. 마지막 여유 시간
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우리 과는 석사 1년차 27명 모두는 관광
버스에 올라탔다. 드디어 산업 시찰을 가는 것이다. 인솔 교수는 정기철 박사가
맡았다. 이 분은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새벽 1시 이전에는 절대로 퇴근을 하지 않고,
연구실에 꼭 박혀 있는 캐드/캠(CAD/CAM)랩의 교수님이다. 학문적 스트레스를 무척
많이 주는 분이었지만, 학생들에 대한 관심도 많고 개인적으로 만나면 매우
다정다감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분이었다.
그러나 원리 원칙에 엄격하다 보니 이번 산업 시찰이 그야말로 현장 학습에만
몰두할 것으로 생각되어 적지 않은 걱정을 하게 되었다. 우리 과코스는 대덕에
생긴다는 과학원 이전 부지와 과학 기술대를 방문하고, 창원의 ㄷ자동차 부품 회사와
부산의 철강 제조업체를 둘러보는 순서였다. 총 일정은 2박 3일. 1박은 마산에서,
나머지 1박은 부산에서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날 밤 아니 오늘 아침까지 밤을 세운 덕분으로 차에 올라 타자마자 푹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상진이의 고함소리가 아니었다면 늘씬 잘 수도 있었을 텐데,
벌써 빨간 벽돌로 지어진 연립 주택 같은 건물 앞에서 차가 멎어 있었고, 우리는
겨울잠을 자고 막 기어 나오는 뱀들처럼 꾸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과학기술 대학 앞이었다. 도서관이며 수영장이며 기숙사 등등을 둘러 보고 식당에서
식사를 한 연후에, 허허벌판에 파헤쳐진 땅덩어리 위에서 현장 사무소장에게 앞으로
들어설 과학원의 모습을 설명받았다. 우리들은 속으로 꺼림칙해 있었다. 과학원의
대덕 이전이 기정 사실화되는 듯도 싶었고, 어떻게든 과기대와 연결 지으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몹시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결정 나 있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 봐야 아무 소용 없고, 결집력이 전무한 과학원생들 마음은 이미
딴 곳에 있어, 그러한 사실을 단지 잠시 잠깐 딴전 피우기 위한 소재로 이용하기에
바빴다.
과학원을 대덕으로 옮긴다는 것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대덕 부지가 잡혀 있었고, 이전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원생들이나 교수들은 이에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지방으로 내려갈 경우 아무래도 좋은 학생들을 유인할 만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학원의 위상 자체와 정부의 지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산업과 학문의 협동 고리가 끊어진다는 점이었다. 과학의 최우선
과제는 그 결과물의 실현에 있다. 즉 이 결과물이 산업체에 직접 접목, 활용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산업체는 서울.경기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고
대덕 주변에는 그러한 산업체가 거의 없는데, 그 연결을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특히나 우리 나라 과학의 가장 취약한 점이 바로 '산학
협동'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점이었다.
세 번째로는 학문에 대한 정보와 기자재의 부족 및 편중 현상이었다. 사실
과학원에는 절대적인 면에서 부족하기는 하지만 최신 학문을 수행하기 위한 자료가
많이 비치되어 있어서, 각 대학 교수나 연구진들이 자료를 찾기 위해 자주 방문을
하고 있었다. 이 자료들을 대덕에 비치할 경우, 나라 전체적인 관심에서 그 비싼
저널들고 서적에 대한 중복 투자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과학원생들의 큰 특징이 과학
기자재를 외국으로부터 사들이지 않고 청계천에서 부품을 구입하여 자체 제작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 먼 거리를 부품을 사기 위해 오가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건 실로 큰
손실이었다.
네 번째로는 교수 자녀들의 교육과 주거 문제였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긴 했지만 이기주의적 발상으로 치부되어 표명화되지는 못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원칙이나 정부의 의견은 구구하게 많았지만 실제로
공개된 것은 없었고, 가장 큰 이유로 겨우 공간상의 부족을 내세우는 데 그치고
말았다. 현재의 홍릉에서는 더 이상의 부지를 확보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덕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줄여서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과학 기술 인력 부족으로 인해 더 많은 석.박사를 배출해야 하고,
2001년까지는 몇 명 수준까지 되어야 하며, 선진국과 같이 국미 몇 명당 몇 명의
박사가 있어야 한다는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논리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골조 공사가 끝난 기숙사며 도서관 건물 자리 그리고 아파트 공사장 같은
부지를 돌아보고는 미련없이 아니 그 기억을 떨어 내버리기라도 하듯이 차에 올랐다.
모두들 어느 정도는, 이 곳에 오기 전에 졸업 할 것이라는 이기심밖에는 없는 듯했다.
차에 올라타자 다시 잠이 나를 불렀다. 마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뒷자락을 서둘러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미리 예약된 여관에 들어가 짐을 풀고 마산 출신인 진엽형의
말에 따라 '홍콩빠'라는 델 갔다. 정 박사는 마산 지역의 교수로 있는 제자들이
초대하여 어디론지 갔기 때문에 한층 자유스러웠다. 마산이 처음인 대부분의 우리들은
'빠'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이상한 곳을 연상했는데, 그게 횟집이 즐비한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란 걸 알고는, 은밀한 기대감을 쑥스러워하고 너털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통통하게 생긴 아줌마 집에 들어가 생선회를 시켰다. 이 집은 마산 앞바다가
발 밑에 있는 집이었는데, 물이 워낙 쌔까맣게 보였을 뿐더러 시궁 냄새까지 났다.
조국 근대화에 멍들어 버린 이 산하의 현재 모습이었다. 아줌마는 입심 좋게 떠들어
대며 회와 술을 올려 놓고는, 밤이라며 총각들은 먹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조그마한
접시에 고기 내장을 몇 점 올려 내놓았다.
"여기 총각밖에 없는데 누가 먹어요? 이게 뭐예요?"
"그게, 밤이라카네. 말하자믄 숭어 그건기라."
"그거가 뭔데요?"
"잠 한 숨도 몬잔데이."
우리는 까르르 웃어댔다. 오는 길에 잠을 충분히 잔 덕분으로 우리는 밤 늦게까지
피곤을 모르고 놀 수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 나와 담배를 사며 동전을 많이
바꿨다.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0시에 전화를 한다고 당부해 두었는데, 10시
5분이나 되었다.
"여보세요, 저 서영이 선배 이윤재라고 하는데요. 밤 늦게 죄송합니다만..."
나는 전화를 받는 분이 서영의 어머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예를 갖추었다.
"나야, 도착했어?"
"응, 도착해서 저녁 먹고 전화하는 거야. 떨어져 있는 건 항시 마찬가지인데, 직접
달려갈 수 없는 공간적 제약이 강화되니까, 참 멀게 느껴지고 더 보고 싶어지는데."
"나도 그래. 내일 시험 끝나면 나도 방학이다. 집에서 좀 쉬다가 취직 공부
해야지."
"취직 공부? 넌 그냥 취직되는 거 아냐?"
"뭐? 취직이 그리 쉬운 줄 알아? 이 사회가 여성한테 얼마나 부당하게 대하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단니깐. 속 편한 소리 그만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일찍 들어와 있어라, 전화할게. 그리고 취직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는데, 그건 내 월급을 나눠 쓰는 취직을 말하는 거야."
"뭐? 아무튼 친구들이랑 영화보러 가기로 했는데. 형도 없고, 있다해도 항상
바쁘다고 같이도 못 있잖아."
"알았어, 잘 있어."
"화 났어?"
"아냐, 동전이 다 떨어졌어."
"알았어요. 잘자,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알았어."
나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짜식은 항상 저 혼자 논단 말이야.' 나는 은연중에
화가 나 있었고 또한 조바심이 났다. 4학년에다가 시험도 끝났겠다, 디스코장 같은 데
가서 열심히 놀거나 저의 과 남학생들이랑 술 마시러 쏘다니지는 않을까? 맘이 놓이지
않는다. 얼굴도 괜찮고 분위기도 있고 하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지. 그 잘 쫓아다니는
녀석은 이제 괜찮은지. 술좌석에 돌아왔을 때는 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호색가인
세열형은 좋은 데 있으니 갈 사람 있으면 붙으라며 은근히 재성형을 꼬드기고 있었다.
세열형은 돈을 열심히 모아 이름 난 사창가를 여향하러 다닐 정도였고, 음식도
주의해서 먹고 술도 많이 마시지를 않았다. 그것은 정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세열형과 재성형은 미리 빠져 나갔다. 이에 질세라 한표는
상진이랑 기훈에게 나이트가서 여자나 꼬시자고 허풍을 떨었다.
술판은 파하고 다들 자기의 목적지를 향해 떠난 뒤 노름할 사람만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스톱과 포커판이 벌어진 방을 피해 조용한 방으로 가 대충 씻고는
잠을 청했다. 깔깔 대는 소리가 웅성거리는 소리로, 결국은 먼 벽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방마다 말이 아니엇다. 술병은 술에 취해 잠든 사람들과 아주
잘 어울리게 널브러져 있고, 아직도 포커판이 계속되고 있는 방도 있고, 준석형과
한표는 무언지 술을 마셔 대며 신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7시
10분이었다. 아이고, 이 중생들!
나는 샤워를 하고 마산 수출 자유 지역 공단이 바라다보이는 개천 언덕에 올라갔다.
공단 안은 희미한 연기에 싸여 있었다. 개도국으로서 고속성장을 위해 매판 자본을
끌어들이고 노동 집약적인 임가공 산업으로 가득 채워진 저기 저 현장. 많은 사람들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근대화의 목소리에 눌려 지내 온 저 세월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우리 나라 산업의 기저를 탄탄히 해주지 못한 예상된 허망함. 지금도 저
안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오늘 하루를 매고 있을 것이다. 태양이 훌쩍 떠올라 얼굴이
따가웠다.
흐느적거리는 유령들이 버스에 다 올라타자, ㄷ자동차 부품 회사까지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회의실에서 이 회사 사장의 브리핑을 받았다.
자동차의 트랜스미션, 액슬 등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설계를 직접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실질적인 생산 현장의 소개와 문제점을 설명하는 순간, 뒤에서 '욱'하는
소리가 나더니 사장의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한표가 어젯밤 먹은
음식물을 붉은색 카펫 위에도 벌여 놓고 폭로해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당황해
하고 있는데 사장만이 계속 껄껄 웃고 있었다. 이 분은 과학원에서 교수 생활을
하셨던 경력이 있어서인지 모든 뒷이야기를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한표를 씻어 주고 차에 올려 놓고는 생산 현장을 직접 둘러보았다. 기계의
배치 관계, 작업상의 무부가치적인 요소, 설비 자체의 자동화 정도 등 나름대로 관심
있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생산 관리 부장과 몇몇 직원에게 하였다.
"작업자에게 불쾌한 언행을 삼가해 달라."는 사장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작업대에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증오에 가까운 빛이 서려
있었다. 사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내려 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는 사회를 미리 단정짓는 버릇을 버려야겠다는 편의주의에 빠져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스에 돌아오자 정 박사는 우리들에게 술을 자제해 줄 것을 주의시킨 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어디서 챙겼는지 두툼한 서류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도착해서
열처리를 주로 하는 제조업체에를 방문했다. 원래 부산 지방도 임가공 위주의 취약한
산업 기반이었기 때문에 색다른 업체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대우를 해 주었다. 우리는 구석구석 둘러보고 제조공학에서 배운 간단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산은 승아의 본가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젯밤에도 여기서 자고 오늘 아침에
합류했었다. 승아는 어젯밤 편히 잤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서비스 한다며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 우리는 자갈치 시장의 요모조모를 훑어 볼 겨를도 없이 혀변가의 한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모두 모인 셈이었다. 정 박사는 또
제자들과 만나러 갔고 밤이 되면 또록또록해지는 야행성인 우리 모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죽 둘러앉을 수 있었다. 이제 어는 정도 랩도 결정되었고, 시험도 끝나고,
다들 서로 친숙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두 즐거운 마음만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자, 우리 노래나 한 곡씩 부릅시다. 멀리 부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푹
놀고 갑시다."
상진은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하면서 제일 음치로 소문난 규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난 노래 못 하는 거 알잖아. 누구 죽일래? 나 노래 부르면 너희들 모두 잘 거
아냐."
"고마워, 우리들 좀 푹 쉬게 해 다오. 돈 안 받고 노래 하라는데 무슨 말이 많아."
규영은 한참을 빼다가 별수 없다는 듯이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고 순서는 자동으로
고스톱 방향으로 넘어갔다. 전날 그렇게들 술을 퍼 마시고 놀고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다들 성성해져서 젓가락을 두드리고,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부산의 밤도 깊어만
갔다. 다들 선배들이 과학원 생활, 아니 이젠 인생에서 마지막 여유 있는 시간이라며
충분히 놀고 오라고 당부한 말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모두 마음을 풀어 놓고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 <마지막 여유 시간>이라고 하자. 그 여유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황급히 지나 버린 시간을 다시 추스려 보야야 할까? 아니지, 산다는 것은 어차피
의미가 없는 것인지 몰라. 무의미한 것이기에 어떻게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온갖
거짓과 위장을 일삼으며 발악에 가까운 정열을 태워 버리는지도... 그래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술잔은 거듭 돌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슬며시 빠져 나와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기회를 여려 번 노렸지만, 그녀가 집에 있을 시간대와 다른 사람들
누에 띄지 않을 틈을 재다가 늦어진 것이다. 예상외로 서영은 집에 없었고 연락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올라가고 싶었다.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들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다시
술좌석에 돌아와 더욱더 많은 양의 술을 입 안에 털어넣고 자청해서 일어나 노래도
불렀다. 그러다가는 이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빠져 나와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받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시간이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 초조했다. 바다
바람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허공을 맨 주먹으로 날려 보았다. 하지만 바다
바람은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나를 건드렸다. 열심히 주먹을 휘둘렀다. 이길 수가
없는 게임.
나는 다시 술판으로 돌아왔다. 파장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일단 술에 취한 한표는
잠이 들어 버렸다. 군대를 다녀온 형들만 정신을 차리고 뒷 수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하니 밖으로 몰려 나왔다. 2차 가자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결국 암묵적인 계획대로 나이트 클럽으로 향했다. 예쁜 아가씨들이 날렵한 몸매와
둥실한 엉덩이가 플로어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원을 만들어 플로어를 빙빙 돌기도
하고 신발을 모두 벗어 던지고 맨발로 춤을 추기도 했다. 물론 웨이터가 가끔 와서
우리를 제지했지만, 다수의 횡포가 아닌 다수의 몰염치로 우리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것도 술이라는 힘을 빌려서 말이다. '자, 모두 나오 보라고 그래.
없지? 우린 잘났단 말이야. 부러울 게 없어. 우리들 세상이야.' 우리는 술을
부어댔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점점 조명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다시 낙 전화를 걸었다. 서영이 받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영은
나인 줄 아는 듯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끊었다.
그래, 왔으면 됐어. 마치 나는 외박을 하고 온 아내를 용서하기라도 하듯 마음 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그리고 만약 통화를 하다가 부모님께 들키면 그 동안 내가 전화를
걸어 놓고 그냥 끊어 버린 걸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 아니가.
나는 사람들이 가득 찬 플로어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미친듯이 몸을 흔들어
댔다. 사람은 자신의 성을 하나둘 허물어가며 산다고 생각했다. 그 성은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든지 아니면 대학, 고교 때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간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회의 규범
이상의 자기 자신의 규범이라고 믿었다. 가치관이라고 흔히들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렇게 애매모호하면서 순간적으로 결정된 자기 방어적 논리력을 바탕으로 한 아주
허물어지기 쉬운 토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더 완고하게
그것을 지키려 든다. 사고의 경직성은 사람을 메마르게 한다.
나는 온 몸이 땀 투성이가 되었다. 우리 테이블에 도현이가 앉아서 담배를 물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쑥스러웠다.
나는 그에게로 갔다. 나는 왠지 뒤틀리는 심정으로 그에게 도전적으로 외쳤다.
"도현아, 이리와라. 학생회장이면 다냐? 빨리 와."
"됐어, 이리 와. 더운 것 같은데 목이나 좀 축여라."
"고맙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시오?"
"응, 그냥 앉아서 보는 거지 뭐. 젊음이란 아름다운 거야. 무슨 짓을 해도 추잡해
보이지 않고 왜소해 보이지 않으니..."
"기가 막히군. 그래, 넌 젊은 놈 아니냐?"
"나? 나는 겉늙었지. 그래서 나는 가장 불행한 젊은이인지도 몰라. 나는 끝내
젊음이라는 아름다운 과실을 따 먹지 못하고, 결국은 아쉬워 하겠지."
"사람이란 때가 있는데, 그 때에 맞추어 어울리게 살아가야 행복한 거 같더라. 너,
그 '때'놓치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라."
"짜식, 후회는 벌써 다 했다. 때도 다 놓쳤고."
"너, 이제 겨우 스물 넷이야. 어리디 어린 게 무슨 때 운운하고 있어. 빨랑 따라
나와."
"야, 난 춤을 못 추잖아. 꾸어다 논 보릿자루 만들지 말고 어서 너나 나가라."
나는 도현의 팔을 잡아 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황소 같은 고집을 부리며
혼자 잘 놀아 보라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는 이내 그를 단념했다. 그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 할 사람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책임감으로 여기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플로어로 올라갔다. 경태가
플로어 위를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반은 미쳐 있었다. 일단 우리들의 생활
중심지를 이탈하였고, 또 우리의 머리 속에 어떤 사슬, 어떤 끈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 플로어에는 이제 곧 우리를 다시 내몰아 댈 가까운 미래만이
숨어 있을 뿐이었다.
여관에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휴가(?)를 이렇게 마무리 하는 건
아쉬웠지만, 나는 아무렇게나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돌아오는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장마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부산에서, 남을 사람은 남고, 고향에 갈 사람은 헤어지고, 그곳에서 서울로 돌아갈
사람들만 태워 보냈다. 나는 종화형과 성효랑 전주행 버스표를 끊었다. 성효는 전주에
살았고 종화형은 정읍에 살고 있었다. 성효는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름대로 수줍음이 많기는 해도 아는 사람에겐 재치 있는 말로 곧잘 즐겁게 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 훌훌 털어 버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참으로 오랫만에 가는
고향길이었다. 길이며 건물들이 모두 새로워 보였고, 또한 실제로 변한 것도 많았다.
단 6개월 만에 많은 것이 변할 수 있음을 알았다. 차도 제법 많아진 듯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진보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생소하다거나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건
아니었다.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모든 것이 친근하고 그러한 변화가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함석 대문을 미치고 들어갔다. 어머니는 없고, 할머니가 반기셨다. 할머니께 큰절을
올린 뒤 차도가 있으신지를 여쭸다. 할머니는 당뇨로 수년간을 고생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반가워하셨고 힘든 몸을 추수리며 밥을 차려 주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만류하고 그 옆에 나란히 함께 누웠다. 그리고 할머니 코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옛날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나를
귀여워하셨고, 나도 할머니께는 끔찍하리만치 잘 해드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할머니의 젖을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듯하다. 대학 때부터 서울에 올라가서 공부하는 바람에 가끔
고향에 오면, 할머니 방에서 지내곤 했는데 할머니가 연로함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항상 불경만 외우실 뿐 큰방에서 오셔서 자손들이 노는 것을 보시는
일이 드물었다. 항상 할머니를 큰방으로 오시라고 하지만 어느샌가 슬그머니 당신
방으로 가시곤 했는데, 나는 꼭 할머니 방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적적함을 달래
드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할머니의 그러한 행동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지 못했다.
오랫마네 뵈는 할머니 모습에, 울컥 가슴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먼 엤날 잃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고 몸부림 치던 그 슬픔이
아닐까 했다.
"야야, 너 왔으니 발톱 좀 깎어야 쓰것다. 이 놈의 것이 자꾸 파고드는디, 어떤
놈이 깍어 주지도 않고, 가끔 내가 답답해서 깔작대다가 덧나기만 허고 말여."
"그래요? 에이, 할머니는. 어머니도 깎어 주시고 형도 깎어 주잖아요. 들으면 서운
허것네. 어디 한 번 봐요."
할머니의 발톱은 드세고 거칠었을 뿐더러 운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조금만 길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 발톱은 마치 할머니의 운명과 같다고
생각했다. 일찍 할아버지를 보내시고 외아들 하나 기르면서 처음 얻은 며느리마저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뒤, 할머니는 가사 일고 논농사를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 손주들을 길러 내야만 했던 것이다. 적어도 새어머니가 들어 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내가 적신 물수건으로 발톱을 불린 후 깎아 드리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방학 때 내려간다는 소식만 들으시면 시간에 맞추어 발톱을
불리고 있다가 도착하여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발톱을 내미셨다. 할머니의 발을
차가웠다. 원래가 손발이 따뜻한 분인데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것에 노라, 왜 이리
차갑냐고 여쭈었다.
"죽을라고 그러지. 이제 살만큼 살었으니 피도 차가워지고 맥박도 힘이 없어서, 그
끝까지 갈 리가 없지."
"할머니도 참.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물수건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와 할머니 두 발에 둘러놓고 손톱부터
깎아드렸다. 오른손을 다 깍자, 손을 오므려 머리카락에 몇 번 문질러 보더니
웃으셨다.
"역시, 우리 윤재구나. 니 형이 깎으면 꼭 손톱이 머리 끄댕이를 잡아 뜯어."
"줄로 잘 갈아야 하는데 안 갈아서 그렇죠. 형이 좀 덤벙대잖아요. 그래도 할머니가
발톱 깎아 달라고 하시면 아무 소리 않고 잘 하잖아요."
"그래도 난 니가 깎어 주는 게 제일 시원허다잉. 인제 이것도 몇 번 안돼서 난 죽을
거다. 이번에는 며칠이나 있다가 갈래?"
"한 삼 이밖에 안 돼요."
"너는 왜 그렇게 바쁘냐? 꼭 일 년에 한두 번 오면서 그것도 쬐금 있다가 훌쩍 가
버리니. 원 서운해서..."
"할머니, 미안해요."
"니가 저번에 사다 준 담배는 다 피웠다. 은하수로 바꿔 필라다가 그냥 피웠지. 내
새끼가 사다 준 거라 바꾸기가 뭐 혀서."
"이번에도 바꿔 피우지는 마세요. 참, 가방 속에 있는데 이따가 꺼내드릴게요."
"안 피워야 허는디. 안 피우면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여."
"줄이세요. 그리고 운동을 꼭 하시고요. 요즘도 아침에 산책 하시죠?"
"응, 5시 반쯤 되면 나가서 한 바퀴 삥 돌면 6시 반쯤 되야. 그리고 들어와서
독경하다가 밥 먹지."
나는 할머니의 손톱을 다 깎아 드리고, 발톱이 불 때까지 기다리며 할머니 모습을
하나씩 뜯어 보았다. 기력이 많이 쇠하신 모습이었다.
"할머니, 죽는다는 얘기 그만 하시고 자손들이 번창하는 걸 끝까지 지켜 봐야겠다
하고 생각하셔야 해요."
"이제 살만큼 다 살었다. 늙어서 오래 살면 못 볼 꼴만 많이 보게 되지 좋은 것이
무에 있것냐. 다들 잘 되라고 기도 허니께 다들 잘 될 거다. 니 엄마도 고생 많이
헌다. 나 땜시, 이이고."
"윤재야, 이 방에서 냄새 난다는디 오래 있어도 갠찮냐?"
"냄새는 무슨 냄새요? 할머니는 별 걱정을 다 하네."
"그런디 요것들은 냄새가 난다고들 난리여."
"누가요?"
"누군 누구..."
할머니와 누워서 빗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마당을 바라보며 어렸을 적 이야기며 지금
생활하는 얘기며 서영이 얘기를 해드렸다. 할머니는 서영이를 꼭 복 싶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들어오시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다가 나를 보고는 뛰어들어 오셨다.
"아이고, 윤재 왔구나. 전화라도 허고 오지. 비는 안 맞았냐?"
"예, 우산 하나 사 가지고 왔어요. 부산에 산업 시찰 갔다가 잠깐 들러 봤어요."
"아이고, 살 빠진 것 좀 봐.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옷이 그게 뭐냐? 당장 옷 사러
가자."
"저 지금 배 고파요. 밥이나 먹고 가죠."
"그려 그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왔으면 아버지도 일찍 오시라고 하고 네 형이랑
동생도 일찍 오라고 하는 건데... 조금만 기다려잉, 금방 밥 주께."
어머니는 항상 나를 대할 때는 직위적인 냄새를 풍겼다. 늘 과장된 행동과 따뜻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어머니에게는 항상 깍듯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나는 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왠지 거리감도 좁힐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게 남아 있는 친엄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결벽증적인 그리움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사제밥-군대 은어라고는 하지만
우리들도 그렇게 불렀다-을 먹고 할머니 방에 드러누었다. 잠에 혼곤히 빠져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와 할머니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어머님, 저 왔어요. 술 한 잔 했습니다."
"오냐, 왔냐. 윤재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뛰어 나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가 절을 올렸다.
"아버지, 잘 계셨어요? 할머니께 먼저 절 올렸어요. 아버지가 안 계셔서."
"음, 잘 지냈냐? 술이나 한 잔하자. 어이, 여봐! 술 좀 가져와."
"술은 무슨 술이에요. 많이 취하셨구만."
어머니가 어버지의 옷을 받으며 한 소리를 하는 동안, 뒷문으로 형고 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아마도 그들이 들어 왔을 때, 할머니가 나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 분명했다. 형은 군대 갔다 와서 복학을 하고 있는 상태였고
동생도 대학 2학년이었다. 우리는 술상 주의에 빙 둘러 앉아 술잔을 돌렸다.
"서울은 어떠냐? 시끄럽지?"
"그런가 봐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바깥 생활은 전혀 모르고 지냈어요."
"그래, 좋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기까지도 꽤 시끄럽다. 광주 사태가 일어났던
해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나서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이 정권이 힘들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들 생각하는가 봐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저는 연구하기에도 바빠요."
"그래야지. 이 와중에도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중에 안정을 찾기가
쉬어지지."
"오빠! 살 빠졌네? 이 시대를 고민하는 일보다 연구라는 것이 더 힘든 모양이지."
"그래, 좀 변했지?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탔냐? 뽀얗던 얼굴이 쇠뚜껑 같다야."
나의 물음에 윤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지금 같은 위기 의식을 느껴 보기는 첨이다. 사람이
나서야 될 때와 주중해야 될 때가 있는데 적어도 지금은 모두들 나서야 할 시점인 것
같고, 또한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듯하다. 원래 상처가 덧나면 곪기 마련이고
곪으면 썩게 되지. 썩은 것은 도려 내야 돼. 군부 독재를 타도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영도자를 뽑아서 그에게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가야 할 때야.
물론 추후에 대권 싸움이 시작될 때는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지. 현재로서는
다음에 누가 정권을 잡느냐도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지금 김대중 씨가 사면 복권이
되지 않은 상태이긴 하다만 그가 다시 나올 것은 뻔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김영삼
씨와의 위상 문제와 대권에 대한 이견이 없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난 이 시대를
이끌어 줄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너희들에게 참으로 많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치
상식이 통하는 시대가 열려야 하겠지만, 정치라는 게 원래가 초봄에 녹는 고무 얼음
같아서 예측 불가능이라, 뭐라고 말하기에는 힘든 상태임이 분명하다. 그래 너를 보니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역력하구나. 난 네가 그렇게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보이긴 하다만, 아무튼 잘된 일이다. 언제 올라갈 생각이냐?"
아버지는 술을 마실수록 의식이 또렷해지는 특이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너무 빨리 취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는 합리적이면서 자신의 원리 원칙을 분명히 지켜 나가는 사람이었고
자식들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만을 원했지만, 사실 그는 매우 권위주의적이었다.
"내일 모레쯤 올라갈 생각이에요. 우선 랩이 결정될 것 같으니까 지도 교수님과
상의도 해야 되고, 또 7월 초에 훈련 받으러 가야 되니까 이런 저런 준비도 좀
해야죠.'
"전공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공업경제 랩을 가기로 했는데요. 지금 연구 방향은 벤처 캐피를(Venture
Capital:모험 기업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나 인력 계획(Man-power Planning:각종
전문 인력 수급 계획에 관한 학문)쪽인데 그 이상의 많은 연구 테마가 있어요."
나는 아버지의 질문에 다소 당신과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는 항의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미리 연구 내용까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문과 출신이라 잘은 모르겠다만, 아무튼 논문쓰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그 분야에서는 최고가 돼야지. 박사 과정은 올라갈 거냐?"
"모르겠어요. 지금 심정으로는 학문을 할 재능이 없어 보여요. 일단 석사 논문 써
보고 결정하려고요."
"무슨 소리냐? 올라 가야지. 우리 집안에 아니 우리 새끼들 중에서 박사는 꼭
나와야 내 속이 편허것는디."
"쓸데없는 소리! 자네는 가서 그냥 자."
옆에서 안주를 이모저모 만지작거리며 모양을 내느라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시자 아버지는 바로 말을 막아 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잘라 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지키려는 최소한의 예의인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도 어머니는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그런 상황만 되면 이내 어색해져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변이 좋아서인지, 남모르는 슬픔을 혼자 잘 삭이는 능력이
있어서인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도 이왕 시작한 거 한 번에 박사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 나도 생각이 있고 확정적인 건 아니니까, 다음에 또 얘기 하죠."
"그건 그렇다치고, 입대하는 건 얼마나 걸리냐?"
아버지는 화제를 바꾸며 담배를 찾아들었다.
"3주 교육인데요. 아침에 가서 저녁에 나오는데 다들 과학원 생활 중에서 가장
편하다고 해요. 훈련이 쉬워서가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저녁 시간은 놀 수가
있대나 봐요."
"그러면 군대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거냐?"
"에, 그리고 졸업 후 3년간은 국내에 있어야죠."
나는 이제야 이런 문제를 물어보시는 아버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회 제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특히나 당신의 이익에 관련된
부분은 더욱 정도가 심했다. 새벽이 다 되도록 현시국 문제며 형제들의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깨어 일어나신 어머니는 그만 자라는 말을 하품과 함께 토해 내시고는 다시
잠에 빠졌고, 할머니 방에서는 낮은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가족 모임에서
항상 말이 없는 윤지는 어느새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갔고, 과일주 병에는 자신의
향기를 토해 낸 매실이 통통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자리를 정리하며 형과 나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자, 얘들아, 오늘은 이 방에서 같이 자자."
"아이고 싫어요. 좀 편하게 잘래요."
"임마! 같이 자자."
형과 나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도망치려 했지만, 완력이 좋은 아버지에게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의 품은 언제고 차가운
바람소리가 나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겨드랑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자기 일쑤였다.
갑자기 몸이 굴려졌다. 또 아버지의 장난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취침
시간에 관계없이 아침 6시 이전에는 어김없이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했다. 부지런한
것까지는 참 좋은데, 자식들의 늦잠을 용서하지 않고 각 방을 돌며 깨우는데 그
방법이 사뭇 요란했다. 온 방을 헤집고 뒹굴거리거나 여름의 경우에는 물을 뿌리거나
알밤을 먹이고 해서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했다.
이에익숙해진 나는 얼른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는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할머니
방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벽을 보며 경을 외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인자하게
웃으면서 아랫목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나는 눈인사와 함께 그 곳에 가서 누웠다.
적어도 이 방에서는 하루 종일을 자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어머니의 점심
먹으라는 소리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출근하고 시국 때문에 조기 방학을 한 윤지와
형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윤지야, 점심 먹고 너희 학교에 가자."
"왜? 여기 와서도 공부 하시게?"
"아니, 경철이하고 태식이가 복학했을 텐데, 아마 걔들 학교에 있을 것 같단 말야."
"맞아, 도서관에서 산다고 그러더라. 저번에 우연히 캠퍼스에서 봤는데 인제
늙었더라. 하지만 요즘은 하도 시끄러워서 학교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또
그 오빠들이 학교에 나왔을지도 모르겠네. 전화 번호 몰라?"
"잃어버린 지 오래다."
학교 안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가운데 어제 내린 비에도 불구하고 최루탄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윤지는 학회실을 간다며 헤어졌고 나는 도서관을 찾아 올라갔다.
땀이 뒤범벅이 되었다. 도서관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서관 내부에
다닥다닥 붙은 붉은 글씨의 구호들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도서관 한 방씩을 돌다가
결국 경철이를 찾아냈다. 경철은 나를 보자 깜짝 놀라며 팔을 붙들고 복도로 나왔다.
"웬일이냐? 이 새끼, 소식도 없이 살더니 간첩질하다 왔냐? 자, 잠깐만 기다려라
애들 데리고 올게."
경철은 뛰어 가더니 가방을 싸 들고 광렬과 용길을 데리고 나왔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그들의 하숙집으로 갔다. 이들은 고등학교 친구들로 군대 가기
전까지, 아니 내가 과학원을 준비한답시고 친구들과 연락을 하지 않던 작년부터
연락이 끊어졌었다. 그들은 지금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한지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경철과 용길은 집이 시골이어서 하숙을 하고 있지만, 광렬이는
공부한답시고 버스로 30분이면 가는 집에서 빠져 나와 이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광렬이는 자기 집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공부를
내세웠음에 틀립없었다. 그의 부모님은 매우 극성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술병이 가득한 방 안에 들어가니 이불을 개고 치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광렬은
빗자루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윤재야, 너 왜 소식 한 자 없이 사냐? 우리는 죽은 줄 알았다, 임마."
"경황이 없었어. 죽어 지내고 있는데 무슨 연락이냐."
"애들은 만나봤냐? 서울에 있는 애들 말이야. 아! 참, 종대도 과학원에 들어
갔다며?"
"응, 종대하고는 몇 번 마주쳤는데 서로 바쁘니까 조용히 앉아서 얘기 한 번 제대로
못 해봤어. 그리고 작년에는 일년 내내 도서관에 쳐박혀 있어서 애들하고는 소식이
끊어져 버렸지."
용길이가 음료수를 따라주며 빙그레 웃었다.
"자, 마셔라. 그래도 반갑다야, 여기까지 찾아오고, 생활은 어쩌?"
"그저 그렇지 뭐."
"그래도 니가 고등학교 때도 착실하더니 결국 해냈다잉. 군대 문제는 해결됐음게
인제 펄펄 날것다."
"왜?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 군대 갔으면 편했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들
지내냐? 요즘은 취직도 잘 안 된다는데."
나는 지방대의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먼저 말해 버리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복학생들이기 때문에 취직에 신경이 곤두서 있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떻게 되겠지. 근디 요즘은 시국이 시끄러워서 도서관에 앉아 있어도 공부가 안
되야. 육장(항상) 최루탄 냄새에다 확성기 소린디 뭐."
"용길이 넌 참가 안 하냐?"
"어디? 참석하고 있지. 분위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이번엔 꼭 참석해야 헐 것
같여."
좁은 방에 4명이 모여 있어서인지 무척 더웠다. 광렬이는 어디선가 선풍기를
구해다가 텅 하고 내려놓고는 틀었다. 용길은 그러한 광렬의 정강이릉 툭 치며
말했다.
"천천히 좀 해라. 이 새끼 손에는 남아 나는 게 없어. 유재야, 너 애들 좀 보고
가야지? 연락 돌릴 테니까 여기 있다가 같이 나가서 얼굴들이나 보자. 그리고 대추도
왔는갑더라."
대추는 다름 아닌 강대주를 말함이었다. 서울에 같이 올라와 한 3학년까지는 자주
만나던 친구였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감감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었고 의협심이
강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꼭 찾아 다니며 만나보곤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대추 걔 바쁠 텐데. 요즘 시국이 이런데 여기까지 내려올 새가 없을 텐데."
"아녀, 그 새끼 요즘 가끔 나타나, 수배 중이라서 서울에는 못 있는 갑더라."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대주가 학생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수배 중이라는 사실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용길의 말은 대주가
우리들 만남의 범주에서 멀어진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미 우리와는 같이 있을 수 없는 좀더 높은 고지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무슨 일로 수배 중이냐? 걔가 공식적인 짱(학생 운동 단체장)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데? 요즘 수배받는 놈들이 한 둘이냐. 웬만하면 다 수배여."
광렬은 뒤로 벌렁 누우며 담배 연기에 말을 묻혀 냈다. 우리들은 고교시절에 같이
다니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비교적 나는 조용한 편이어서 그들과 항시 붙어다니지는
않았지만 교분은 두터웠다. 그들은 말썽을 많이 피웠다. 학교 주변 과수원에 서리하러
가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큰 주전자로 두 개씩의 복숭아를
선사하는가 하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복도에서 말타기를 하며 소란을 피웠다.
또 밤이 이슥해지면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옥녀못이라는 개울가의 샘이
있었는데, 그 곳에 가서 동네 처녀들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 보기도 했다. 그리고
포르노 잡지를 구해다가 돌려 읽기도 했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밖으로 나가
실내 야구장이나 오락실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오기도 했지만, 성적은 다들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묵인하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를 정도로 관대했다.
"용길아, 니 말대로 오늘 얼굴들 좀 보자. 그런데 시내가 온통 난리라던데 밖에서
볼 수 있을까? 어때? 오랫만에 광렬이 어머님께 인사도 드릴 겸 너희 집에서 모이는
게."
"좋지,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이번 주에 오랬으니까 전화하고 가자."
나는 광렬의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복숭아와 돼지 고기 두 근을 사 들고 우리집
찾아가듯이 들어갔다. 광렬의 어머니는 반가워하시며 절 받기를 극구 거부하였다.
언제나 친자식처럼 대해 주시는 그분은 광렬이가 군대간 사이 추석 때 한 번 인사드린
후로는 3년 만에 뵙는데도, 늘 보는 사람처럼 격의 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광렬의
유일한 여동생인 연욱이 뛰어나오며 반갑에 인사를 했다.
"야! 연욱이 니가 이렇게 컸냐? 국민학생 코 흘리개가 벌써 대학생이라니 세울이
놀랍구나. 아이고, 어머님 죄송합니다..."
"괜찮다. 접때 왔을 때 야가 고등학생이었지?"
"그러믄요. 이제 다 커서, 어디서 만나면 인사도 함부로 못 하겠는데요."
어머니가 저녁 상을 치우고 푸짐한 술상을 들여 오셨다.
"너는 좋겠다. 좋은데 들어가서 군대도 안 간다며? 근디 우리 광렬이는 인제사
대학생인디 언제 졸업헐랑가 모르것다. 긍게 고등학교 3학년때 너만치만 공부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디. 재수하라고 헐때 재수라도 혀서 서울로 대학을 갔어야
혔어. 아이고, 오랫만에 만났을텐디 어서들 놀아라잉. 윤재야, 너 술 어떤 거 갖다
주까? 양주 있는디 그거 마셔 볼래?"
광렬의 어머니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가더니 양주를 한 병 들여 놓고는 꼭
자고 가라며 나가셨다. 연락을 받는 황찬일고 주성권이 도착했다. 찬일은 치대에
다니고 있는데,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조용한 친구였고 성원이는 의대에 다니고
있는데 재치 있는 말솜씨로 우리들을 곧잘 즐겁게 해 주는 친구였다. 그는
들어서자마다 곧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야 된다며 호들갑을 떨더니 먹어 대기
시작했다.
"윤재야, 니가 없는 동안 우리끼리 모임을 지속해 왔다. 모임 명칭도 '토방'에서
'깃발'로 바꾸고 정관도 만들어서 좀더 짜임새 있게 꾸며 나가고 있어."
"미안하다. 내가 연락을 하고 지냈어야 하는데 군대 갔다 온 네가 이렇게 힘을 쓰게
됐으니, 정말이지 미안하다."
"잔소리말고 이번 여름에는 같이 지리산이나 갔다 오자."
"다다음 주부터 훈련에 들어 가. 7월 말쯤 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야..."
"그래, 그건 그 때쯤으로 하고, 지금 대주가 도망 다니고 있는디, 우리가 돈을
모아서 매달 전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전에 잠깐 만나 봉게 일가 친척한테도
가보지 못하고 허는 것이 무척 쪼달리는 모양여. 그래서 생각한 것인디, 우리가
조금씩 모아서 온라인으로 송금해 주면 걔 형편이 조금은 필 것도 같은디, 어쩌것냐?"
용길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며 맞장구 쳤고 금액도 정해서 매달 용길의 통장으로
송금하기로 했다.
"야, 너는 좋것다잉? 군대도 안 가고, 나는 언제 군대 갔다가 레지 밟고 의사
된다냐. 어떻게 빠지는 방법 없나? 군대 갔다 와서 전문의 따면 서른다섯 살이랑게.
언제 돈 벌어? 의사는 참 어려운 직입여."
성원은 언제 배를 채웠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닦아 내고는 담배를 방바닥에 대고
톡톡치며 말했다.
"쉰소리 마. 난 하사까지 달고 나왔는데 누가 취직이나 시켜줄지 모르겠다. 넌
그래도 의사 자격증만 따면 어느 정도 끝나잖아. 우리들은 그저 지금부터 열심히
영어다 시사다 해서 해 보지만 희망이 없다. 희망이."
경철은 한숨을 쉬듯 내뱉었다. 나는 나대로 그 간의 나의 힘들었던 생활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것은 배부른 자의 푸념으로밖에 생각해 주지않을 분위기여서
그만두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이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는 거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 갓 입학하여 지방에 있는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막연한
감정과는 달리, 모든 것들이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면서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희들 봉진이 알지. 봉진이네 돈 많이 벌었다고 하더라. 효자동에서 미나리깡 안
했었냐. 그게 엄창나게 올랐디야. 그래서 걔네 아버지는 미나리깡 그만 두고 땅
팔아서 개고기나 사 먹고 커피숍에 가서 하루 종일 죽친단다. 옛날에 그 새끼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다녔는디 생활이 확 펴버렸는 갑더라. 아이고 우리 촌구석은 언제
땅값이 팍 뛰어버린다냐."
성원이 우연히 만난 봉길이 얘길 꺼내며 부러운 듯이 장호아하게 들어 놓는
이야기에 광렬이가 맞장구를 쳤다.
"어디 봉진이뿐이냐? 요즘 난리들이더라. 작년에 땅값이 많이 올랐는가벼. 그래서
전주도 졸부들이 많아져서 근교에 음식점들이 즐비하다니까."
"땅값이 오른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필연적인
결과야. 그런데 땅값 상승으로 인해서 부를 챙기는 투기꾼들의 농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하고 조장하는 정부에 큰 잘못이 있지 않겠냐? 우리 나라 경제가 사실상
급격하게 팽창했거든. 정부의 누가림용 자료가 아니라 외부에서 평가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라가 근래 들어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루어 낸 건 사실이라고. 그런데
경제의 발전 속도에 비추어 국민들을 위한 복지나 삶의 질 자체를 높이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미약할 뿐더러, 사실상 의도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정도거든.
그러면서도 개발이다 뭐다 해서 그 계획을 미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챙기거나 유포시켜서 해당 지역의 지가를 높여 놓은 거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왜곡된 서비스업을 팽창시키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부를 재배분 받지 못한 대다수의 집단이 이에 편승해서 건강한 경제
발전을 저해시키게 된다고, 첫째로 노동 윤리가 없어져서 산업의 근간인 제조업의
위축이 오겠지. 둘째로 경제 발전에서 서비스업의 발전에 의한 기여도가 높아짐으로써
실질적인 건강한 경제 발전의 척도가 무너지지..."
나는 사실 땅값 상승이나 주가 상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나라 경제의
좌표가 의심스러웠다. 한탕주의에 해당하는 투기라는 불건전한 경제 행위는
근본적으로 근로 의식을 더럽히고, 나아가서 국가 산업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제조없의 몰락을 예고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용길은 나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이어받았다.
"일본에는 억대 거지가 있다고 하더라. 도시 근처의 야산을 가지고 있지만 팔리지
않는다는 거지.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로 땅값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분명히 환금성의
문제가 발생할 거야. 지금은 땅을 서로 교환하거나 명의 이전의 과정을 이용해서 땅을
불리고 있지만, 지가가 상승하고 적어도 개발이 요원한 땅들은 내놓아도 팔리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우리 나라도 억대 거지가 탄생하는 거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땅이
있지만, 전혀 팔리지 않으면 굶는 수밖에 더 있냐?"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 기업들도 문제야. 기술력은 없고 단지 싼 가격으로
밀어붙이고 있는데, 그게 거의 다가 재벌 기업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다 보니 수출
장멱에 걸려서 넘어지게 되는 거지. 대만은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라거든. 그러니까
수출 장멱에 걸리기가 어렵다는 거야. 숟가락 하나 가지고 어떻게 따지겠냐? 우리
나라는 재벌 기업들이 거의 모든 제품을 생산해 내고 있어서 기업 하나만 잡고
늘어지면 되거든.
또 중요한 원자재는 모두 수입하지. 중요 부품도 수입하지, 뭐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게 없어. 엔고가 일본 경제를 흔들리게 할 거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흔들리고
있잖아. 왜냐하면 중요 부품을 사다가 써야 하는데, 그것이 일본에서만 생산되고
있으니 당연히 원가가 상승하게 되지. 우리도 빨리 기업 형태를 중소 기업 체제로
전환하고 이들 기업간에 주식의 소유를 공동화해서, 외국 기업에 대응하는 카르텔이
자연스럽게 형성 될 수 있도록 재편해야 될 거야."
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찬일이가 물었다.
"우리 나라 경제가 상승하고 있기는 있는 거야? 언론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뭐
변한 게 있어야지."
"하지만 성장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고,
실제로 데이터상으로는 놀랄 만한 성장을 하고 있어. GDP에서 재투자 비율이
30퍼센트가 넘게 차지하고 있어서 미국의 두 배에 해당하지. 그러나 그런 수치보다는
건강한 경제냐가 문제겠지.
건강한 경제로 발전을 하려면, 경제 행위는 160여 개국이 서로 우위를 다투는 거나
다름이 없잖아. 말하자면 누가 더 힘이 세냐 이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은
산업 현장과 학문 사이의 갭이 너무 커. 다른 나라를 예로 삼지 않더라도 우선 학문적
결과물이 산업에 잘 적용이 될 수 있도록 산학 협동이 제도적으로 안착이 되어야
하겠지. 앞으로의 경제 발전의 틀은 지금까지의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고
'기술'이라는 무기가 될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국가에서 기술 예측을 통해서, 미래를 위해 장기적으로 개발해야 할
기술적 과제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선정해서 과감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국가 차원에서 본다면 중복 투자도 많고 장기 계획도 없어 보이니 문제지.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현 시국 문제로 화제가 넘어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의 중산, 6.10 대회의 장엄함, 나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여러 가지 화제가
쏟아져 나왔다. 가두 시위에서 경찰을 무장 해제시키고 다음 날부터는 장비가
경찰이나 시만이나 같아진 얘기하며, 6.29선언을 쟁취하기까지의 진행 과정과 군부의
쿠데타 설까지 화제는 풍부했다.
그리고 군부 정권을 끝장내야 하겠다는, 재야 세력의 움직임과 YS와 DJ의 향후
방향에 대한 논란과, YS가 대통령과 협상 중 DJ의 사면 복권을 제지했다는 풍문인지
정설인지 모를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리고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의 의해 차기
야권 대통령 후부에 대한 얘기로 옮아갔다. 오늘 모인 이 방안의 사람들은 YS나 DJ중
단일 후보가 나오기를 원했을 뿐 DJ를 추종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YS와
DJ의 시대에 직접 선이 연결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단지 두 사람의
정치 행보에 대한 신뢰감이 있었고, DJ의 경우 신화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실제 권력과의 연계성을 지으려 하지는 않았다.
"얘들아, 그만들 하고 지내 온 이야기나 하자. 해결도 안 될 일을 뭐라고 하냐? 자,
윤재부터 얘기해 봐라. 우리 오랫만에 만났으니까, 그간의 갭을 도려 내야지. 총각 뗀
얘기부터 해봐, 임마."
성원의 말에 찜찜하게 앉아 있다가, 그가 재차 재촉하는 바람에 하나씩 지나간
일들을 펴 놓았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하고 싶던 얘기들도 했다. 간간이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 아니냐는 놀림에도 불구하고 연욱이가 연신 날라온 안주들이 쌓이고
밤이 이슥히 깊어 왔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의 여울을 다 넘어가고 싶어했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며 성원이가 일어나자 찬일이도 일어섰다. 나도 가 봐야겠다며
일어섰는데, 애들은 막무가내로 함께 자자며 말렸다.
"하도 오랫만에 왔으니 집에서 자야지. 어머님! 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루로 걸어나오며 안방에 대고 인사를 했는데, 광렬의 어머니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자고 가지 왜 일어난디야, 니 자식 내 자식이 어디 있다냐? 나도 엄만게 자고
가거라. 너 가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디. 내가 니 어머니한테 전화해 줄팅게 오늘은
여기서 자자잉. 그리고 아버지도 출장가셔서 안계시니까 니들 맘대로 놀아도 되고,
어서 들어가자 응."
어머니는 나를 잡아 놔 주질 않았고, 성원과 찬일은 나더러 그렇게 하라며 떠밀고는
도망치듯 가 버렸다.
"아이고, 별수 없네요. 어머님 대신 내일 아침에 찌개 맛있게 끓여 주세요."
"오빠! 내가 모닝 커피도 대접할게요. 숙녀의 커피 맛 좀 보시라."
"참, 연욱이 너 지금 라면 좀 끓여 주라."
"라면? 건강에도 좋지 않은 걸 왜 먹어. 그리지 말고 안주 좀 더 줄까요?"
"아니야, 난 이제 밤에 라면 안 먹으면 잠이 안 온다."
"윤재야, 라면 많이 먹지 말어. 그거 방부제가 많이 들어 있디야. 그리고 튀기는
기름이 산성이래야. 아무튼 별로 안 좋다니까 먹지 말어."
"어머님도 참, 오늘 하루만 딱 한 그릇 먹을게요."
"그려, 그려."
연욱이 끓여 온 라면을 먹고 나서는 광렬의 좁은 방에 넛에 누웠다. 누워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잠에 빠져 들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냐?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인제 내가 너 보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것다."
할머니는 눈가에 물기를 비치며 내 얼굴을 이모조모 뜯어 보며 손목을 놓을 줄
몰랐다. 지나간 80년의 세월이 주름살에서 스며 나오듯 했다. 그 주름살의 30퍼센트는
적어도 나에 대한 부분도 섞여 있을 게다. 나는 방문을 나서며 아직도 애자에 묶여 먼
옛날을 잡아매고 있는 전깃줄이 얽혀 있는 처마 한귀퉁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솟는 눈물을 지워 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갈 때처럼 동네 끝 채전 밭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사랑은 기다림인가?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인가? 그는 나에게도
사랑을 느끼는가? 자신의 친혈육도 아니데, 저리도 포근하고 헌신적으로 할 수
있을까? 나는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걸어갔다. 나는 나를 위해 키워 내고
나를 감싸 주었던 고향을 뒤로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과학원은 다시금 사람들로 소리없이 붐볐다. 랩도 결정이 되었다. 모두 다 원하는
랩에 들어가게 됐다. 우리 랩은 모두 다섯 명으로 도현과 군대를 갔다 와서 사회
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임재원 그리고 세열, 성효였다. 우리들은 먼저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지도 교수 장경오 박사의 방은 책으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책상
위에도 자료와 책이 컴퓨터 높이를 넘어서 있어,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이 책더미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장 박사는 우리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위의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의자를 갖다가 앉으라고 했다.
"자, 일단 악수부터 합시다. 반갑습니다... 방이 지저분해서 미안합니다. 우리 랩에
들어오신 걸 환영하고, 또 나는 좋은 학생들 받아서 기쁩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우리 랩은 프로젝트를 많이 하는데 내가 한국에 온 지도 사실은 얼마 되지 않아서
랩의 구성이 아직 다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와서 고생을 좀 해줘야
되겠고, 또 해본 선배들도 많으니까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는
교육기관이므로 베이직컬리(Basically)좋은 페이퍼 써야 합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가 많다면 많은데, 서서히 세미나 해 가면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분야를
셀렉션(Sellection)하고 그걸로 테마를 잡아서 페이퍼 쓰기 바랍니다.
단 내가 반드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중에 닥터코스에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이 우리 랩의 관심 분야뿐만이 아니라, 관련 분야까지도 충실히 다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랩도 발전하고 저도 논문 지도하기가 재미있을 겁니다. 세미나
일정은 남선이에게 일임을 했으니까 계획을 세워서 발표를 할 거고... 여러분들
왔으니까 우리 회식 한번 합시다. 반갑습니다. 기타 물어볼 것 있어요? 없으면 그렇게
하고 나가 보세요."
장 박사 방에서 나오자, 남선형은 오늘 저녁에 랩 회식이 있으니 그 자리에서
세미나 내용과 일정을 얘기하겠다고 했다. 우리 랩 최고참인 박사 3년차 현지섭 형과
박사 2년사인 유남선, 박사 1년차 이정식 형이 있고, 석사 2년차에는 김인학, 박정규,
김상호, 박형덕으로 4명이었다.
우리 랩은 공간이 좁아서 교수 방 옆에 붙은 방에 지섭, 남선 그리고 승규형이
있었고 7호관에 방 3개를 내어 캐드/캠 랩, 공업통계 랩 그리고 우리 랩이 있는데,
여기에 나머지 4명이 있었다. 학교 선배인 형덕형이야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선배들은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다만 학기 초, 신입생 환영회 때 한 번
얼굴을 슬쩍 지나친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논문이라는 고된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남의 눈에 뛴다는 건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되고, 또
그러는 것을 그들 자신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가끔 석사 2년차들과 복도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논문 잘 돼 가요?"
"논문 다 썻다면서요?"
이런 인사를 들은 선배들은 거의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연일 올빼미
생활을 했고, 어쩌다가 우리들과 술좌석에 어울렸다치면 그 소문은 과학원에 쫙 퍼져
버렸다. 논문을 포기했다는 둥, 약간의 바아냥거림 조로 논문을 이미 다 썼다는 둥
하고 말이다.
저녁 회식 때는 상견례의 자리여서 랩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
박사는, 생각 같아서는 석사 1년차들도 바로 랩에 자리를 마련해서 같이 연구해
나가고 싶지만, 현재는 공간이 부족하므로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고, 세미나에
불참하는 일 없이 착실히 따라오기를 당부하였다.
랩이 결정이 되면 그 연구실에 들어가서 바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데, 과학원
공간이 부족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따라서 천상 석사 2년차들이 졸업하고 나가야
자리가 생기는데, 대부분 논문 심사가 끝나고 난후인 1월경에야 실험실에
들어갈까말까 했다.
왜냐하면 논문 심사 뒤에도 교수들은 자신의 학생들을 그냥 놔두질 않기 때문이다.
졸업한 후인 2월 말까지는 연구를 계속시키는데, 그것은 제도적인 이유보다는
교수들의 자존심이라 해야 옳았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들이 사회에 나가 자신의
이름을 쓸 것이므로 절대로 실력이 모자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녁 회식은 석사 2년차들의 논문 내용을 화제로 하여 계속되다가, 석사 2년차와 장
박사는 연구실로 올라가고 실질적인 랩의 대장인 남선, 정식형이 우리를 카페 '러브
뱅크'로 데리고 갔다.
선배들 중 지섭형은 부산에 있는 대학교의 교수로 나가 있고, 남선 형도 자리를
잡아야 했다. 박사 3년차가 되면 어느 정도 잡(Job)을 잡아서 나가야 졸업 후가
안전했는데, 점점 교수 자리가 없어져서 박사 과정 형들은 그냥 랩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도 지섭형은 자리가 일찍 결정되어서 다른 선배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남선형은 170센티미터 정도의 키에 홀쪽한 편으로 말수가 많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랩을 운영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권위 의식도 많이
엿보였다. 반면 정식형은 날카로운 눈빛을 소유하고 있는 이지적인 인물로 보였다.
그는 남선형과 다소 알력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7호관을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아차피 우리도 2-3명은 7호관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정식형의 휘하에 있어야 하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남선형은 이번 여름 방학 동안의 세미나는 우선 석사 2년차의 논문 중심으로 하고,
다음 학기부터 본격적인 세마나에 들어가지고 했다. 우리들은 아직 랩의 연구 과제에
대해서 잘 모를고 있었다. 석사 2년차들의 논문이 바쁘기 때문이었다. 세미나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11시였는데 우리들 보충역 훈련 기간에는, 수요일에는 저녁 7시,
토요일 5시에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리 랩의 필독서를 몇 권 추천해 주면서, 미리
복사실에 맡겨 놨으니 이삼 일 뒤에 랩에 와서 찾아 가라고 했다.
"정식형, 우리 다음 주부터 훈련 들어가는데 힘 안들어요?"
성효는 가끔 웃기나 할 뿐 아무 말이 없는 정식형에게 물었다.
"힘들지. 유격 훈련도 하고, 각개 훈련도 하고, 잘못 하면 뺑뺑이 돌리고..."
"물어 볼 사람한테 물어 봐야지. 쟤는 방위 출신이야.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다른
사람들 삼 년 할 걸 니들은 3주 만에 해야 되니까, 얼마나 힘들겠냐. 우리 때는
훈련받다가 총알에 맞아서 한 명 죽었어."
"남선형은, 거짓말 좀 그만 하쇼. 애들 주눅들게..."
"임재원 씨는 3주 동안 뭐 하실래요? 시간도 많은데 랩에 오셔서 복사라도 좀
하시죠."
"죄송합니다. 집에 좀 가기로 했는데 갔다가 일찍 와서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해 본 소리니까 집에서 푹 쉬고 오십쇼. 교수님도 바쁘시고 하니
찾지 않으실 겁니다. 참 세미나는 참석해야죠."
"아, 그러네요. 그럼 남아 있겠습니다."
남선형은 선심 쓰는 척하더니 세미나로 발목을 죄었다. 재원형은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훈련을 들어갈 필요가 없었고, 옵션도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식당과 강당은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학생회에서 훈련복 일체를 업체에
의뢰, 싼값으로 일괄 구매하여 원생들에게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군복, 군화,
혁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고무줄까지도 비닐 봉지에 한 세트씩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강당에는 재봉틀을 준비해 온 업자가 즉석에서 수선을 해 주었다. 도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생활 간사에게 무어라 얘기를 하더니 계단으로 뛰어올라 사려져 버렸다.
아마도 학생회실로 올라가는 듯했다. 나는 따라가 요즘 근황이나 물어보려고 했지만
바쁠 것 같아서 포기하고, 판매원에게 사이즈를 말하여 한 벌을 받아다가 강당에 가서
입어 보았다. 제복이 주는 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왔는지 경태도 한 벌을
챙겨 입고는 모자를 뒤로 꺾어 쓰고 나타나 권총을 뽑아 쏘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대충 챙겨 가지고 기숙사로 올라왔다.
철우는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서방님 오셨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이 년이 뭐하고 있는 거야."
경태는 들어서자마자, 철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형님이 독서 중이니까 정숙 좀 해줄래?"
철우는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점잖은 목소리를 빼내었다.
"잔소릴말고 일어나서 음료수 좀 뽑아 와라. 더워 죽겠다."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너만 덥냐? 나도 더워서 뿅 가겠다."
"넌, 서방님이 이런 더운 날씨에군에 들어가시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불쌍하나 거 좋아하네. 형님 인생 포기한 거 보면 모르냐. 불쌍한 건 나다! 나!"
"네가 뭐가 불쌍해, 임마."
"우리 랩은 당장 실험실로 들어오래잖냐. 다음 주부터 나가서 잔심부름 해야 돼.
그리고 교수님이 웬만해야지. 어저께 회식 때 교수님만 말씀하시고 학생들은 일인극
구경했다고. 그리고 우리 석사 1년차들은 안중에도 없으신가 봐. 하기야 선배들
이름도 왔다 갔다 하신대더라."
나는 둘이 말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음료수를 뽑아 가시고 와서 하나씩 안겨 주고는
책상에 앉았다. 한 번 그어 보기만한 도화지 위에 선을 추가 시키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양말이며 쓰레기통은 큰 틀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때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웃옷을 벗어서 의자 위에 결쳐 놓고는 둘의
모양새를 쳐다보았다.
"선배들이, 가자마자 우리들은 죽었다고 하더라. 졸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누가 그 랩 가랬냐? 네가 가 놓고 무슨 잔소리야. 오히려 잘 됐지. 야,
윤재야! 너도 랩에 못 들어가지?"
"아니, 들어갈 수 있지. 겨울에."
"좋는. 야, 우리 열심히 놀자. 저 새끼 랩에 들어가면 옴짝달싹도 못 할 테니까.
우리끼리 축제란 축제는 죄다 찾아 다니며 노는 거야."
"잘들 놀아라. 난 스쿠터 사기로 했다. 스쿠터 타고 안암 극장에나 다니면서 명화
감상이나 해야겠다."
"스쿠터? 스쿠터가 뭐냐?"
"무식한 놈. 왜 자장면 배달 다니는 오토바이보다 작은 거 있잖아. 왜 배 아프냐?"
"배 아프기는? 참으로 좋은 시식인. 근데 너 돈은 있는?"
"집에 가서 짜웅하고 왔지. 30만 원은 집에서 대주고 나머지는 학자금 받아서
불입하기로 했다.
철우는 점점 걸어다니는 걸 힘들어 해왔다. 과학원은 죄다 언덕이고 한번 나가려면
먼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철우로서는 힘이 부칠 수밖에 없었다. 철우가 스쿠터를
산다는 말에 경태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고양이처럼 튀어올라 철우에게 다가갔다.
"우와, 그거 생각할수록 잘됐는데. 언제 살 거냐?"
"네가 좋아할 거 뭐 있냐?"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내 것 아니냐. 언제 살 거야?"
"훈련 끝나기도 전에 번쩍번쩍한 스쿠터가 형님 주차장에 턱 서 있을 테니깐."
"철우, 너 면허증 있냐? 오토바이도 면허증 있어야 하나 보던데."
"윤재 너는 왜 또 그렇게 무식이 통통 튀냐. 스쿠터는 면허증이 없어도 되쇼묭."
"야, 그거 잘됐다. 축하한다."
나는 그에게 추가흘 해주고는 다시 책상에 올라 앉아 연필을 들었다. 적어도 훈련이
끝날 때까지는 한 점을 완성하고 싶었다.
'윤재야! 철우야! 우리 오랫만에 함께 모였는데 참신하게 놀아보자. 윤재 너
우리한테 서영이 안 보여 줄래. 정식으로 오늘 인사도 하고, 곧 있으면 군대도 가는데
이별의 노래도 불러야 할 거 아니냐.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다. 역시 경태는 머리가 좋아."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나도 못본 지 오래 됐다. 그리고 진짜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 들으면 우리 죽이려 들거다. 뭐가 그리 대단해서 군대, 군대하냐?"
"야! 숨겨 놓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서영씨와 저녁을 함께 먹는 거야."
"얘들이 지금 정신이 없네. 쓸데없는 소리말고 어서 잠이나 자라. 오수가 얼마나
건강에 좋은 줄 아냐. 보약이야, 임마. 그 동안 힘들 많이 쓰셨을 테니까 어서들
주무시옵소서."
"그러지 말고 한 번 보자. 소원이다, 소원."
경태는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포기할 놈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한번
시도하면 끝장을 보는 성미였고, 기분 나쁠 정도로 집요했다. 그의 애걸 뒤에는
무서운 공격이 있었으므로 내가 먼저 반격을 했다.
"좋다. 그러면 서영이만 나오랄 게 아니라 너희들 그 참신한 생선들 얼굴도 좀
보자. 그래야 짝도 맞고 서영이는 자연스럽게 나올 거 아냐."
경태와 철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경태가 입을 떼었다.
"철우야, 불러내!"
철우는 속으로는 좋으면서 입을 삐죽이며 도로 누워 버렸다. 사실 철우는 아리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입만 떼면 아리 얘기였고 틈만 나면 아리를 위한 선물을
준히했지만 한번도 직접 전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핸디캡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경태는 아리와 철우를 맺어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었는데, 요즘에는 한계를 느꼈음인지 통 같이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태와 철우는 누가 전화를 하냐는 것으로 서로 싸우다가 결국 경태가 나갔다.
"철우야, 너도 한번 멋지게 돌진해 봐라. 청춘의 그림 속에 사랑의 열병이 들어
있지 않으면 노년의 세월에 후회라는 병을 앓게 될 거야."
"나한테는 그림의 떡이지. 그냥 좋아해 보는 거야..."
철우는 씁쓸하게 웃고는 만화책을 책상 위로 집어 던지더니 음악을 틀었다. 철우는
조용한 흘러간 팝송을 좋아했는데, 언젠가 집에 가서 잔뜩 녹음을 해다가는 음악을
즐겨 들었다. 나는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끔 경태의 웃음
소리가 열린 방문으로 파고 들어 와서 감정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잘되는
모양이었다.
"철우야, 너는 너의 병을 스스로 고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거야. 너만큼 머리가 좋은 놈도 드문데, 너는 항상 스스로를 못났다고 생각하지.
이젠 네 사랑을 네 손으로 거머쥐어라. 대학때 네가 밤새 정리한 리포트를 우리과
모든 사람들이 베끼기에 바빴던 것처럼, 너의 사랑의 방법도 우리가 베낄 수 있도록."
철우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노래 장단에 맞추어 흔들어 대던 발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매미 소리가 방향을 몰라 헤매이는 담배 연기 사이로 들어와 폭발하고
있었다. 언젠가 모르게 창턱에 올려져 있던 일회용 컵이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안정
상태를 찾아서 계속 움직이고 있던 농짝의 어느 틈새가 다시 맞추어지는지 틱 하고
소리를 냈다.
경태는 예상 외로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그는 전화번호를 적었던
종이를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홱 던져 놓고는 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야, 나가서 우리 어린이 대공원이나 갔다 오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경태의 말에 철우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아리가 안 나온대?"
"아니, 아리는 없고 나경이만 있는데, 특강 들으러 가신단다."
우리들은 드림랜드로 갔다. 놀이기구들을 타다가 그것도 지쳐서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간은 있는데 할 일이 없다는 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우리들은
술 마시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를 자유스럽게 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앉아 있던 도서관의 의자를 제외하고는.
8.어떤 죽음
서영은 단단히 화가 나 있음이 분명했다. 서울에 올라와 잠깐 얼굴을 본 후
로는 전화도
제대
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전화를 거르면 다음은 왠지 미안해서 안하게
되고, 다음은
쑥스
럽고, 다음은 두렵고 하는 순서로 감정이 변하여 전화하기가 힘들어졌다. 아무
튼 그녀를
만나기
에 앞서 좋은 명분을 만들지 못하면 혼쭐이 날 판이므로, 내 생활을 죽 둘러
보았다. 랩이
결정이
되었고, 아직도 학문이라는 실체는 잡히지 않고, 또 훈련도 준비해야 되고...
나는 속으로
되뇌이
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부산에서 그리도 보고 싶던 서영을 서울
에 올라와서
는 왜
그렇게 만나기를 미뤄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 그리움이 증폭되나?
서영은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따졌다.
"그럴 수 있어? 전화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손가락이 다 아팠어? 나는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아?"
"아냐, 그건 경황이 없었고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 보지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럼, 난 같이 고민하면 안 돼요? 난 그냥 부르기만 하면 나와서 재미 있게
지내 주다가
들어
가면 돼? 아무튼 됐어. 나는 이런 자리도 싫고 형도 연락하지 마."
"왜 그래,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그런 말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에요. 이젠 됐어요. 저 들어갈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화가 날 대로
나 있었고,
그 뿌
리도 어제 오늘에 키운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집 앞에까지 간신히 따라가
구슬려 보기
위해
커피 한잔 하자고 제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강하게 나오니까, 왠지 내가 죽어야 할 것만 같았을 뿐이다. 그녀는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부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6시다
! 나는 경
태에게
뛰어 내려가 그를 깨웠다. 경태는 누운 채로 눈을 번쩍 뜨고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벌떡
일어났
다. 나는 뛰쳐 나가 세수를 하고 옷을 되는 대로 꿰어 입었다. 그리고 어젯밤
챙겨 둔 군복
나부
랑이가 들어 있는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그런데도 경태는 침대에 걸터앉아 가
만히 나 하는
행동
만 보고 있었다.
"경태야 ! 정신차려 ! 가야지 ! 6시 30분까진데 아침은 먹고 가야 할거 아냐?"
그제서야 경태는 세수도 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기숙사
에서 원생들
이 뛰
어나갔다. 식당도 아수라장이었다. 평소 때 같으면 커피잔이 몇 개 있고, 간혹
한 사람 정도
가 그
잔 중 하나의 주인이 되어 생각에 잠겨 있을 식당인데, 벌써 줄을 서서 배식
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빵을 타서 그 속에 내용물을 대충 우겨 넣어 가지고 본관 앞에 대기하
고 있는 3호
차에
올라탔다. 전에는, '저 차는 무슨 차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지나갔던
내용년수가
지난 듯
한 예비군 수송 차량이었다. 인원 점검이 끝나자 이내 차는 출발을 했고, 차 안
에서 빵을 대
충 먹
어 치워 버렸을 때는 거의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도 혼곤히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연병장
한가
운데에 우리 차들이 서 있었다. 정면엔 높은 단상이 있는데, 연병장 뒤편으로
간이 막사들
이 서
있었다. 그리고 주위는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들은 내려서 기계처럼 그 막사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막사
안은 3면에
선반이
설치되어 있어서 사제 옷을 집어 넣은 가방을 그 위에 얹었다. 시멘트로 된 바
닥에는 사우
나탕에
있을 법한 나무 판자로 깐 깔대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어
깨우며 옷을
갈아입
고는 연병장에 모였다. 부슬비가 약간 내렸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장시간을 기
다려야 하는
지 몰
랐다.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
한 시간이 넘게 지난 후에 다시 일어나 오와 열을 맞추고 서서 기다렸다. 잠
시 후 연대장
이 와
서 우리들은 입소식을 했다. 입소식이 끝나자 각 소대별로 책임을 맡은 중위들
이 와서 인사
를 했
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주간을 같이 보내
게 될 중위
오기
반입니다. 훈련기간 중에는 민간인의 신분이 아니고 훈련병이므로 우리들 규칙
에 잘 따
라주기
바라며,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훈련을 마치기를 부탁합니다. 그럼 좀 쉬
고 식사를
한 다
음, 정신교육부터 실시할 계획입니다. 이상."
그 옆에는 '조교'라는 흰 글씨가 붙은 철모를 쓴 방위들이 한 소대에 한 명
씩 따라 붙었
다. 우
리들은 조교의 구령에 맞춰 막사로 돌아왔다. 원생들은 대부분 잠에서 덜 깼는
지 모두 멍한
상태
였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소대장 상진이가 오늘의 식사 당번을 정해 주었다. 잠
시 후 그들
은 배
식을 받아왔다. 식사의 질은 특식 날보다 훨씬 나았다. 훈련하느라 고생한다며
식사 단가를
높게
책정했기 때문이었다. 조그만 닭 한 마리와 과일등 풍성한 점심. 선배들이 점심
시간이 가장
즐거
울 거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도 과학원에서 일부러 보리차를 끓여 식
힌 후 얼음을
동동
띄어서 시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식사 후 부슬비가 그치자 연병장의 모래들
은 햇빛을 받
아 이
마를 빛내고 있었다.
두 시간 가량의 정신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어찌나 허리가 아픈지 일어날
수가 없을 지
경이었
다. 그리고 교육 내용도 고등 학교 때나 대학 때 배운 거와 큰 차이가 없어서
우리의 의식
을 집
중시킬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첫날이라고 일찍 귀가를 시켜 주는
지라 쾌재를
부르
며 울타리를 빠져 나왔다. 버스를 타고 앉아 밖으로 나오며 민가를 본 순간은,
1주일 간의
병영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대학 1학년 때의 기분과 똑같았다. 초록색만 보다가 원
색들을 보는
느낌
은 마치 흑백 TV만 보다가 컬러 TV를 보는 기분이었다. 획일화의 가장 큰 단
점은 상상력
의 억
압이다. 지나가는 아가씨의 허리 곡선이 한아름 눈에 들어왔다. 거리에는 호박
모양의 수박
을 즐
비하게 쌓아 놓고 아주 멀리 간 아들이나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서 있는 상인
들을 주마간
산으로
보면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과학원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낮에는 그
렇게 잠이
쏟아져
도 밤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하게 떠지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 중심을 잃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다시 찾으려고 하면 노력이
갑절도 더 든
다. 탁
하기는 쉽다, 하지만 다시 찾으려고 하면 노력이 갑절로 더 든다. 이것이 몇 개
원 안 되는
과학원
생활에서 얻은 지혜라면 지혜였다.
저녁을 먹고 놀러가자는 사람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빠져 나와 서영
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무작정 서서 기다렸다. 허
리도 아프고
다리
가 후들거려서 그냥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너무 늦어지니까 슬며시 걱정
이 되기 시
작했고,
나중에는 부아가 끓어 올랐다.
'아니, 밤늦게 어딜 쏘다니고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고 있는데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더
니 잠깐 멈추었다가 그냥 지나치려 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리
고 어느덧 화
가 난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영아, 미안하다. 휴가 받아 나온 오빠를 이렇게 대접할래?"
"진짜 군대 간 사람들이 웃어요."
"서영아, 이러지 말고 축하주 한 잔 사주라. 고집 좀 부리지 마."
"고집? 내가 지금 고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늦었어요. 들어가야
돼요."
"고집이 아니면 응석이야?"
나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말에 가시를 달아 얘기를 했다. 서영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들어가
버렸다.
'그래 들어가라 ,들어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나도 휭하니 과학원으로 돌아와 버렸다.
기숙사에는 사람 냄새가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증발해버린 듯했
다.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가 스케치를 끝냈다. 그림
이 잘 그려진
듯해
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 그림이나 그리면서 해탈해야지. 색칠을 해볼까, 이대로
우선 둘까,
고민
을 하다가 책꽂이에 꽂힌 푸시킨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끼는 시집 가
운데 하나였
다. 나
는 설렁설렁 넘기다가 문득 한 페이지에 시선이 닿았다.
나는 신이 당신으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을 받게 만든 바 그대로
진심으로, 부드럽게
당신을 사랑했소
방문이 확 밀어젖혀지며 경태가 고꾸라지듯 들어왔다. 어디서 마셨는지 술
이 머리 꼭대
기까지
차올라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씩 웃었다. 마치 고
양이가 벌벌
떨고
있는 쥐에게 다가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웃음일 것처럼 생각되었다.
"야아..윤재야 뭐하냐, 어엉? 그림 잘 그렸네."
그는 내 그림을 들고 바라보는가 싶더니 순간 하늘에 붕 띄우고는 오버 헤드
킥을 차고 나
서 뒤
둥그러져 버렸다. 그 바람에 도화지의 한 가운데 신발자국으로 움푹 패어 버렸
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왠지 다행스러운 일처럼 생각되기까지 했다.
"야이 새끼야 ! 고맙다. 색칠하기 전에 없애 줘서."
내가 그새 잠들어 버린 경태를 침대로 옮기고 있는데 철우가 들어왔다.
"어? 이게 뭐야? 신발바닥 잘 그려 놓았네에."
"그래. 그것도 경태의 신발을 모델로 해서 움직이는 동작을 사실에 가깝게 그
렸지."
"안됐다. 이 떨거지 언제 들어왔냐?"
"이제 방금 들어 오셔서 조렇게 퍼 자고 있다. 넌 랩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
다고 그렇게
열심
이냐?"
"말도 마라. 나도 너희들처럼 훈련받는 신세였으면 좋겠다. 세미나를 하는데,
혁찬형 알
지? 박
사 과정 4년차. 그 형이 발표를 하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시더니 핸
드아웃을 던
지시면
서 '너, 대학교 나왔냐? 이건 대학 졸업하는 애들 논문감도 안 돼.' 하고는 나가
시더라고. 헌
데 더
날 죽이는 것은, 선배들이 휴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선방했다는 거야. 다른 때 같
으면 재떨이
가 날
아가고 난리가 났던 모양이더라고. 내가 지옥에 갔다, 지옥!"
"그러니까 사람들이 변 박사님을 존경하는 거 아니냐. 실력 있겠다. 좋은 논
문을 화장실
에서도
한 편씩 쓰시는 분인데, 너희들이 못 따라가니까 그렇지, 헛소리말고 열심히
해라. 젊어서
고생
사서도 한다더라."
"그럼 내 거 사가라."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철우의 심기를 긁었더니 툭 쏘아 대고는 책상에
붙어 앉았다.
그리
고는 무언가 정리를 하다가, 아침에 나갈 때 깨워 달라고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태풍 '셀마'가 지나간 지가 일 주일이나 지났는데 장
마가 끝나지
않았는
지, 비가 기분 나쁘게 내렸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비가 오면 좋아했다. 비가 오
는 날은 정신
교육
을 받으니까 말이다. 아니, 사실 뙤약볕이 아닌 실내에서 교육을 받으므로 졸 수
있다는 큰
장점
이 있어서이다.
우리들은 하루 종일 교육장에 앉아 이론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우
리들은
적당히 밀려오는 식곤증과 교관의 단조로운 자장가로 인해 잠에 빠져들 수 있었
다. 앞을 보
고 있
는 척을 하며 졸고 있는데 난데 없이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번쩍 떴을
때는, 교관
이 우리
옆 소대인 화학과 한 학생을 군화발로 다시 한번 차고 있을 때였다. 피가 거꾸
로 치솟음을
느꼈
다. 저 군화발, 저 군화발이 우리들의 피를 얼마나 흘리게 했던가.
1945년 8월 14일 청진과 나남으로 상륙한 소련군의 군화발과, 그 해 9월 8일
인천으로 완
전 무
장과 점령자로서의 포고 제 1, 2호를 날리며 온 미군의 군화발에 50년대를 짓
밟혀야 했고,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너온 공수 특전단과 해병대의 군화발에 의해 60년대
와 70년대를
살아야
했다. 또한, 솟아 오르는 민중의 힘을 다시 짓이겨 버린 80년 광주의 그 군화
발들. 모두가
내 가
슴에는 뜨거운 피를 끓게 하였다.
나보다 먼저 누군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만 둬! 치우지 못해?"
교육장은 일순간 정지를 했고, 그 짤막한 침묵 끝에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
했다. 교관은
사태
의 심각성을 알아 차렸는지, 간부 원생들을 불러 갔다. 한참 만에야 돌아온 그는
우리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 사건의 발단은 한 원생이 총을 깔고 앉아서 잠을 잤기 때문이었는
데, 그 원생
이 밤
샘 실험을 한 끝에 쏟아지는 졸음이라 이해는 가지만, 총을 깔고 앉았다는 건
아무래도 심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군내의 민주화를 외치며 구타를 없애고 있는 마당에,
장교가 비인
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 또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간단히 지나가 버렸다. 그것은 자신 이외에는 관심을 갖
지 않는 과학
원생의
개인주의에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나는 심한 허탈감에 빠져 버
렸다. 왜냐하
면 나
는 그 사건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밝힌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솟구치는
피의 역류에
도 불
구하고, 나는 그저 나의 기득권의 포기나 박탈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의 앞에
서 나를 숙여
버렸던
것이다.
기숙사에 올라와 7호관에 들러서, 들고 온 책을 읽을 요량으로 목차를 훑어
보았다. 비가
그쳐
서인지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에 버려진 도화지가 방 한가운데 몇
개의 발자국
이 더
찍힌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도화지를 집어 올려 화장지로 대강 발자국을
털어 낸 후,
책꽂
이 위에 놓았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재미가
없을 때에
는 노
트에 정리를 해 가면서, 그리고 증명을 해 가면서 읽는 것이 나의 버릇이었다.
나는 파일
노트를
펴고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책에 빠져 들기 시작했고 어느덧 재미가 붙어 가속
도가 생겼다.
일단
흥미있는 부분을 다 정리하고 나자 새벽 3시가 되었다.
그 때까지도 경태와 철우는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알람시계를 6시에 맞
추고 침대에
누웠
다. 한편으로는 잠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철우가 들어왔다. 나는 계속
잠에 들기위
해 자
는 척하고 있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 침대로 들어가더니 코를 골기 시작
했다. 얼마나
됐을
까. 경태가 술에 취해 문짝을 부술 듯이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연병장은 따가운 햇살로 자신의 수분을 열심히 하늘로 퍼 올리고 있었다. 숲
에서는 매미
울음
소리가 진동을 했다. 며칠간의 비 뒤에 오는 쾌청함으로 마음마저 오랜만에 가
벼워졌다.
우리들은 산중턱에 올라가서 각개 훈련을 받았다. 철조망을 기어서 통과하고
포복을 하고
수류
탄을 투척하는 등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였다. 입안에 겔 상태의 타액이 고여
아무리 뱉어
내어도
끈적끈적거려서 구역질까지 나게 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
처럼 움직이
는 훈
련을 받았더니 녹초가 되었다.
우리들은 방위병들과 교관들의 전송을 받으며 또 다시 버스를 타고 훈련장을
빠져 나왔
다. 그
리고는 바퀴가 구르기 무섭게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해
야 하는지를
알려
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단지 수면을 보충해서 저
녁에 랩으로
가든
술을 마시러 가든 모두 자신들의 스케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하여 노력할 뿐이었
다.
나는 저녁을 먹고 랩에 들러 남선형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 랩의
연구 방향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고 자료를 주며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또 자료를 한 보따리 싸
들고 기숙사
로 돌
아왔다. 경태는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너 시절 좋구나. 연일 술에다 만화책에다, 천국에 오셨네."
"지금 놀지 않으면 언제 노냐? 내 인생의 황금긴데.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
라, 난 열심
히 놀
테니까. 참, 스케치한 거 미안하다. 내가 취하면 그런 줄 알면서 왜 말리지 않았
냐?"
"아니다, 됐다. 너 같은 짐승 말리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냐?"
"야, 라면이나 먹자. 끓여 온나"
라면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라면 다섯 개를 품은 코펠은 견디기가 힘
든지 몸을 뒤
틀었다.
창문 너머로 미아리 산동네의 가로등이 엉켜 붙어 있었다.
우리들은 그걸 다 먹고는 숨쉬기도 곤란해서 침대에 널브러졌다.
"경태야, 철우 요즘 아리 만나냐?"
"그 새끼, 김아린지 또아린지한테 빠지긴 빠진 모양이더라. 나는 맨날 실험실
에 처박혀 있
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밤에 아리네 집에 가는 모양이야."
"밤에 뭐하러 아리네 집엘 가?"
"그냥 서서보고 온대. 창문에 불이 들어온 걸보고 서 있으면, 똑같이 있는
기분이란다.
로미오
났다, 이도령 났어."
"그냥 서서 보고 온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직접 만나는 경우는 없대?"
"글세,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남자 친구가 있다나 봐. 내가,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 어
가냐고
해 주기는 했지만, 낙심이 큰 모양이더라. 짝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더라."
"전화 한 번 해 봐라. 철우하고 술이나 한 잔 하게."
"조오치!"
경태는 읽고 있던 만화책을 집어던지고는 철우를 불러내었다.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다. 한 한기 동안
살다 보니
얼굴
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모르면서도 모두 아는 사람
들이, 그것도
동질성
이 있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 일인
가. 그
래서인지 카페 안은 생기가 넘쳐흐르는 듯했다. 경태와 나는 철우의 고백을 듣
고자 암묵적
인 의
도가 있었으므로 양주를 시켰다.
"철우 요즘 랩에서 고생하는데 술 한 잔 우리가 살게. 힘들지?"
"요것들이 약 먹었나? 너희들 마시고 또 토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얘는 속고만 살아왔나. 마셔, 이건 윤재가 사는 술이다. 그래 랩 생활은 재미
있냐?"
"재미는? 죽지못해 살고 있는 거지."
"엄살 부리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너 논문 다 쓰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걸 어떻게 알았어? 논문 다 썼지. 그래서 조기 박사 올라가려고."
"야, 조기 박사는 논문 안 써 임마. 알고 좀 거짓말 해라."
조기 박사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석사 논문을 면제해 주어, 석사 1년차만
마치고 바로
박사
과정에 편입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1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20대 박
사의 가능성
이 높
아진다. 우리 과의 경우는 조기 박사가 드물었다. 조기 박사는 학과마다 선호
도가 달랐기
때문이
었다. 모 과의 조기 박사들은 이상하게도 도중에 미쳐 버리거나 자퇴하는 경우
가 많아서 거
의 폐
지된 경우도 있었다.
경태와 나는 철우에게 많은 술을 권했다. 철우는 우리들의 의도를 아는지 모
르는지 잘도
받아
마셨다. 결국 그는 술에 추해서 웃음이 많아졌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철우야, 너 아리는 만나고 있냐?"
"아리? 아니. 내 주제에 무슨 사랑이냐. 공부나 해야지."
"사랑? 너 그러니까 아리를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지?"
"아니? 내가 무슨 사랑을 해."
"솔직히 말해. 사랑하는 건 사실이잖아. 그리고 이 형님들이 잘 코치 해 줄
테니까 말해
봐."
철우는 비실비실 웃던 표정도 잃어버린 채 고개를 내리깔고 갑자기 조용해
졌다. 철우의
옆에
앉아 있는 경태는 나를 바라보고 찡긋 웃더니 철우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얌마, 서방님 놔두고 바람을 피워. 이래도 되는 거야, 응?"
"아야야, 이거 못 놔. 바람은 무슨 바람. 난 서방님 너밖에 없다."
"그러믄 또아리는 뭐야. 솔직히 말해 봐."
"놔 봐 이야기할게. 휴, 진짜 아프다. 아무래도 남자 친구가 있는 것 같더라.
전화해도 잘
안 받
고, 우연히 마주친 걸 가장해도 반가워하지도 않아. 그래서 포기하기로 했지."
"그런데 임마 밤마다 사라져서 그녀의 창가에 가 세레나델르 부르고 있어?
으으으, 미치
지."
"내가 뭘?"
"됐다. 아무튼 아리가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직접 확인해 봐야
될 일이고,
중요
한 것은 네 마음인데... 아무래도 넌 아리를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도
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네가 조금만 솔직하게 군다면 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법도 한데."
철우는 나의 말에 시선을 사방에다 뿌리며 술잔을 비웠다.
"도움은 무슨 도움... ."
하지만 그는 분명 우리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심정이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철우가 첫사랑을 시도 중인데 우리가 무엇인들 못 도와주겠냐. 이야기를 해
봐."
"이 서방님이 용서해 줄 테니까 어서 불어."
"나도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이번에야말로 나 혼자 겪어야 할 고통인 것 같
다. 너희들의
도움
이 절실하게 그리운 건 사실이지만 나한테는 소중한 시간이므로, 이건 나 혼자
처리해야지
하는
생각이야."
아침부터 허둥대며 훌련장에 갔는데, 햇빛이 폭포처럼 내리쏟아졌다. 빳빳한
군복 위로 땀
이 배
어 오르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유난히 많이 심어진 포
플러나무 꼭
대기조
차 미동을 하지 않았다. 개미 한 마리가 땅바닥을 힘들여 기어갔다. 어디를 다쳤
는지 아니면
더위
를 타는지 모래 한 알을 넘어가는데도 몹시 힘들어 했다. 머리 한복판이 이글
이글 불덩이
화로가
되었다. 귀가 멍했다.
화생방 교육을 하는 교관은 조교에게 방독면 쓰는 시범을 보인 후 우리들에
게 분대별로
실습을
해보라고 지시했다. 우리들은 날씨도 덥고 해서 대충 앉은 채 겨우 하는 시늉
만을 했다.
교관도
지쳤는지 자리에 혼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훈련 날짜가 지날수록 훈련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소
대별로 차등
은 있
었지만, 우리들에게 무리한 훈련을 시킬 생각은 아닌 듯했다. 때로 어떤 교관
들은 열심히
굴렸는
데, 특히 전체가 모이는 자리에서는 앞뒤로 맹렬하게 뛰어다니며 지휘를 했다.
간혹 교관이
나 조
교와 원생간에 갈등이 빚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이는 특히 실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의 원
생들이
심했는데, 그들이 밤새워 실험을 진행하고 훈련에 임하기 때문에 졸음을 뿌리치
지 못해서였
다. 그
중에서도 조교와는 그 갈등의 정도가 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원생들은 그들
의 행동을 무
시하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마치 교관보다도 더 우리들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서영에게 전화를 했다.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
면 관계 개선
이 힘
들어 보였다. 우선 내가 그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리움이 옅
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조급한 행동은 자제되었다. 나는 그것이 생
활의 방치에
서 오
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사실 생활에 대한 긴장감이 거의 없어져 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 쉬거나 놀고 있을 때 책을 읽지 않고 있는 불안감이 어느 정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서영아! 네 의도를 잘 알았으니까, 한 시간 뒤에 집 앞 그 카페에서 보자. 끊
는다."
나는 강한 어조로 얘기를 한 후 뚝 끊어 버렸다. 아마 놀랐을 것이다. 나는 콧
노래를 부르
며 화
원에 가서 빨간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나는 주인에게 눈
인사를 하고
는 창
가에 가서 앉았다. 서영이 들어서자, 나는 장미 다발을 테이블 밑에 숨겼다. 그
녀는 무표정
한 얼
굴로 앞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어?"
"응."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너도 대학 4학년이니까 나만 믿고 있을 수도 없는 노
릇 아니냐?
이제
깨끗이 정리하고 서로의 갈길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에게 충분한
사람이 되도
록 노
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아무튼 그 동안의 모든 일에 감사한다."
나는 비장하게 얘기를 한 후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체념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거였어요? 알았어요."
그녀는 무너지듯이 그 한 마디를 떨군 후 일어섰다. 나는 표정을 바꾸어 얼
른 일어서는
그녀의
팔을 나꾸어 잡고는 장미꽃을 쥐어 주었다.
"요 꼬맹아! 앉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그녀는 얼떨떨한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장난이 심했나 보구나. 그간 저의 잘못을 용서 바라오며 선처를 부탁
하나이다, 마
마."
그녀는 어이없이 웃더니 장미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시선
을 창밖으로
돌리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난 진짠 줄 알았잖아... 내가 너무 심했나 봐, 미안해. 그런데 입장을 바꿔놓
고 생각을
해 봐.
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먼 도시에서 전화 한 뒤로 한 번도 연락이 없
이 지내면 내
가 걱
정을 안 해? 나 저녁도 안 먹었어. 그 벌러 저녁이나 사 줘."
"그러믄요. 뭐 드시겠습니까?"
"종로에 나가서 국수 사 주세요."
종로의 밤거리는 쾌적했다. 가끔 부딪치는 서영의 어깨의 감촉은 가슴까지 파
고들었다. 나
는 살
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 와 나의 심장 소
리가 온 세상
을 깜
짝 놀라게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
모차르트 교
향곡 25
번'을 사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판을 가슴에 꼬옥
껴안고 걸었
다. 그
러고 보니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한 것이 없었다. 흔히들 건네주는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
릿조차
도 주어 본 적이 없었다. 수줍음이 많았고 웬지 감추어 두고픈 마음이 강했던
것은 아닐까?
남들
이 기뻐하는 날에는 우리도 기뻐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우리
는 그녀의 집
앞까
지 왔다. 그녀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집 주변의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그래, 참 공기가 좋구나. 그냥 이대로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지?"
"예, 우리도 언제 헤어짐 없이 늘 같이 지낼 수 있을까요... ."
이틀째 내린 집중 호우로 중부 지방에 이재민이 4만 명이나 발생했다. 태풍 '
셀마'가 남부
지방
을 강타하더니 올 여름은 한반도가 비에 떠내려 갈 모양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강당에 모여
정신
교육을 위주로 훈련 기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배낭을 맨 선남선녀들의 행렬도
보이지 않았
다. 그
래서 비는 원생들을 기쁘게 했다.
말이 방학이지 대부분의 원생들에게는 학기 중보다 더 힘든 게 방학 기간이
었다. 대부분
세미
나가 진행되었고, 세마나에서 교수나 선배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감내해 내야
하고, 또 돌
아오는
세미나에서 무언가 새로운 모습으로 문제없이 발표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하느라고 골
이 빠
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일부분을 깎아내야만 하는 과정. 우리들도 예
외는 아니었
다. 다
행히 랩 세미나가 없는 경우는 놀 수 있지만, 그나마 랩 선배들의 닦달에도
버틸 수 있는
뻔뻔함
이 필요했다.
훈련 두 번째 주에는 사격 훈련이 있었다. 사격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교육을
받아야 했다.
비에
젖은 땅바닥에서 기어가며 조준 연습과 영점사격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격장
에서의 규율
은 매
우 엄했다. 그리고 교관이나 조교들도 겁을 많이 주었다. 저번 기수들 중에 한
명은 오발
사고를
즉사를 했다는 등, 불발탄이 있을 때는 엎드린 채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교관에게 달려와 총구를 들이대며 원인을 묻는 사람이 있다는 둥 하며 속이 빤
한 겁을 주었
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적인 발언이 아니라도 우리는 떨고 있었다. M1소총의 사
격 소리가 원
체 크
기도 했지만, 만약이라는 가정 사항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격은 무사히 끝났으나 그 뒤가 더 문제였다. 표적이 3발 이하로 들어간 훈
련생들은 따
로 모
아 진흙탕에 포복을 시켰다. 불행하게도 나 역시 진흙탕에서 기어야 하는 사
격 실력을 갖
추었다.
일단 진흙탕에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시원했다. 휴식 시간에 모두 세면대로 달
려가 씻은 후
옷을
빨아 입었다. 예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오줌을 누는 획일화의 악습
이라니.
충청 지방에 이어 수도권까지 집중 호우가 내려 6백 명 가까이 사망하였다.
공장들이 물
에 빠
져 버렸고 재산 피해도 엄청났다.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수해 지역으로 급파되
어 복구 작업
을 벌
였다. 우리들은 연일 강당에서 정신 교육을 받았다. 결국 토요일 날 귀가하기
전에 훈련소
에서는
나머지 일 주일의 훈련을 8월 중순이나 하순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모두들
돌아가 수해
복구
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교육이
연기될 경
우, 미
리 잡혀 있던 일정이 수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과학원으로 돌아와 TV 앞에 몰려들었다. 난리 그 자체였다. 전국이
모두 물에
뒤덮여
있었다. 원생들은 각자 고향으로 전화를 하고 물이 빠지지 않아 돌아갈 수 없
는 사람들은
안절부
절 했다. 다행히도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귀향길에 올랐다.
도현은 식당 앞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수재 의연금을 걷는다는 대자보를 붙였
다. 비는 6월
의 모
진 민주화를 위한 싸움의 앙금을 벗겨 내버리기라도 할 듯이 계속 내렸다. 충
청 지방은 한
번 더
집중 호우를 맞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어느 정도 복구가 되는 가운데 날벼락을
맞은 것이
다. 하
느님은 공평한가?
철우의 스쿠터가 도착했다. 철우는 기숙사 앞에 나가 조그만 스쿠터를 번쩍번
쩍 빛나도록
광택
을 내고 덮개를 씌우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스쿠터를 타고는 과학원 안팎을 휘
젓고 다녔다.
그러
는 철우를 경태가 그대로 놔 줄 리가 없었다. 그는 키를 빼앗아 가지고 철우를
뒤에 태우고
안암
동이며 때로는 태릉까지 갔다 왔다. 철우는 호들갑을 떨며 경태는 미친 놈이라
고 외쳐 댔다.
도무
지 무서운 줄을 모르고 도로 전체를 종횡무진 한다는 거였다. 아무튼 그들은
틈만 나면 안
암동에
생긴 소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왔다. 어쩌다가 무술 영화라도 보고 오는 날에
는 기숙사에
들어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경태가 나와 철우를 이용하여 영화를 다시 찍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이다.
나의 책상 위에 올려진 물감에도 먼지가 수북이 올라앉았다. 비도 멎었고
다시 무더운
날씨가
계속 되었다. 기숙사에 들어와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서영인가 하여 잽싸게
뛰어 나갔짐
나 뜻
밖에도 도현이었다. 저녁에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캔 맥주를 사들고
왔다. 경태와
철우는
안암동 소극장에 갔음이 분명했다.
"학생회 일은 잘 되냐?"
"바쁘다. 요즘은 축제 준비하고 있어."
"벌써? 축제는 9월에 하잖아?"
"미리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야 멋진 축제가 되지 않겠냐. 중요한 건
축제가 아니
고, 사
실은 오늘 아침에 사람이 죽었어."
"누가?"
"물리학과 석사 2년찬데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고."
"자살?"
"그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원래 과에서도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은 사람
이었다나 봐.
오늘
새벽에 집에 들어와서 타자 치는 소리가 나더라지. 부모님들은 으레 있는 일
이어서 그냥
주무셨
다더구만. 그러다가 새벽 5시경에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서 가 보니, 그 양반
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더래. 말하자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 거지.
그래도 숨은
붙어
있어서 병원으로 옮기던 중 사망했대."
"참 모질게도 목숨을 버렸구나. 부모님께 그 무슨 불효냐. 뭐 유서 같은 건 없
었고?"
"유서랄 것도 없고 단지 타자로, 어디에 있는 책은 도서관에 반납하고, 통
장과 도장은
어디에
있는데 찾아서 외상이 어디어디 있으니 갚고, 하는 등등 극히 사무적인 내용 이
외에는 일체
없었
다는 거야. 이론물리 전공인데 과에서는 학문적 벽에 부딪쳤거나 철학적 배경
에 의해 그랬
을 거
라고 그러더라."
"장례는 어떻게 하기로 했대?"
"장례랄 것 뭐 있냐? 성혼도 안 했고 악상인데다가 자살이니, 원에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잖
아."
"거 참 안됐다."
"오히려 잘됐는지도 모르지,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 아니냐?"
"비약하지 말아라, 응?"
우리들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캔 맥주를 조심스레 마셨다. 충격이 컸다. 과학
원에서는 일
년에
한 명씩은 사고든 자살이든 해서 죽어 갔다.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전
해 내려져 왔
다.
소정사 6층에서 약품을 마시고 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피를 토하며 1층까지
내려와 자살
을 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졸업을 앞둔 박사 과
정 학생이
실험을
하다가 정전이 되었다. 그러면서 용기 안에 있던 용액이 밖으로 흘러내렸다. 당
연히 그 학생
은 용
액을 밟고 서 있게 되었는데, 그 때 전기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 실험기기에
는 고전압이
흐르
게 되어 있었고 그 원생은 그만 감전사했던 것이다. 그것도 논문이 이미 외국
저널에 실려
서 졸
업을 몇 달 남기지 않은 상태였다.
또 어느 때였던가, 학생회 부회장이 겨울에 술을 마시고 기숙사로 올라오다
가 기숙사 바
로 못
미처에 있는 산림청으로 통하는 언덕 위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지나
가는 원생들
이 본
것을 끝으로 실종이 되었다. 그 언덕의 높이는 아마 50미터는 될 것이다. 그는
그리로 굴러
떨어
져 동사를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웃지 못할 사건을 만들어 냈다. 첫째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현재
는 그
언덕의 중간에 철책이 드리워졌다. 둘째로는 그 다음 기수가 졸업 앨범을 만드
는데 맨 뒤에
학생
회 임원 사진으로 소개하면서 발생했다. 그 사망 사고를 모르고 있던 앨범 편
집 위원들이
전 대
의 앨범을 가만히 살펴보니 부학생회장 사진은 실려 있지 않아, 그게 관례인가
싶어서 멀쩡
히 살
아 있는 부학생회장 사진을 뺀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박사과정 형이 지도교수의 오열 속에서 간경화로 죽은 일
도 있었다.
"그 이야기만 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아냐. 소문 낼 일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는 하고 싶었어."
"근데 생각보다 더 침울해 뵈는데?"
"죽는다는 것도 그렇고, 내 임기 중에 이런 불상사까지 났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6...10
투쟁부터 시작해서 이한열 추모제까지 나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도 없
었고,
비는 줄기차게 와서 다 떠내려가고, 이제 사람까지 죽고... ."
"그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거냐? 너 요즘 왜 이렇게 나약해 뵈냐?
꼭 사춘기
소년처
럼. 그러다가 너도 자살하는 거 아니냐? 정신 차려!"
"나도 잘 모르겠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서 그런지, 실제로 일을 해 보니까
제약 조건들
이 너
무 많아. 그렇다고 그러한 제약 조건들을 때려 부술 수도 없고... ."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 뭐가 제약 조건이라는 거냐?"
"... ."
"너 스스로 기득권에 심취해 있는 거 아니야?"
"사실 그래. 이 과학원을 포기할 수 없나 봐. 이미 난 여기에 들어와있고, 이
체제를 부정
도 파
괴도 하지 못하면서 단지 고민만 할 뿐이지."
"너 가만 보니까, 아직도 논리를 세우지 못한 것 같구나. 상황 파악이 끝났으
면 네가 나가
야 할
길을 확고히 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한 거 아냐? 그리고 6월의 일련의 싸움
에 대해, 너
는 과
학의 중립성을 부르짖으며 일단 기반만을 조성해 나가겠다고 했잖아? 그랬으면
됐지, 지나
간 일
을 가지고 그렇게 후회하고 불안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 내가 보기엔 넌
지금 무언가
실질적
인 고민에 빠져 있어. 돌리지 말고 이야기 해 봐. 속 시원히... ."
"없어. 하지만 너한테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 축제를 준비하면서 보니까 기
존의 프로그
램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만 치중이 되어 있어. 대폭적인 수정을 가해야겠더라고. 그런
데 그것이 문
제야.
축제 기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촌극 경연 대회'하고 '석림제'야. 촌극 대
회야 각 과에
서 하니
까 별문제고, 석림제는 말하자면 카니발이거든. 연예인 불러서 쌍쌍이 노는
거야. 그런데
석림제
를 어떠한 형식으로 바꾸어 보냐는 거지."
"학생회 간부들 생각은 어떤데?"
"여러 가지 의견이 있어. 기존의 형식을 고수하자는 의견과, 외부 공연단체
를 블러다가
의식을
깨우치는 밤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와 있지. 예를 들자면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의 약
어)'나 노동극을 공연하자는 거지."
"내 생각은, 대학원에서의 축제는 학문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말하자면
학회에서 여
는 세
미나 형식처럼 모든 과의 학문적 성숙도와 미래지향적 학문의 전개 등을 서로
교환하는 자
리여야
한단 말이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행사는 불가능할 거야. 그래서 우리들
은 학부가
없다는
핑계를 삼아 놀아 보자는 거 아냐? 좀더 미화하자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자는 거지.
따라서
석림제를 개혁하는 일은 많은 원생들의 이탈을 유발할 거야. 네 의도를 정 반영
하고 싶다면
축제
중간중간에 그런 프로그램을 배치해서 무리없이 여러 사람의 호응을 받는 것이
어떨까?"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긴 하다만, 석림 축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전체
흐름
상 주제가 명확하지 못해. 축제 기간을 통일감있는 일련의 흐름으로 꾸몄으면
하거든."
"과도기적 학생회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니냐?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
려하지 않고
논리
성이나 명목을 앞세우다 보면 오히려 실패하지 않을까?"
"그래, 일단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학생회 간사들에게 공연 단체들이
나 각 대학의
축제
중 좋은 포맷을 찾아오라고 부탁을 했으니, 다음 중네 무언가 나오겠지."
"도현아! 너 좀 쉬어야겠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 봐라.
사람
이 여유가 없으면 사유도 없어지지."
우리들은 화제를 바꾸어 집안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들
을 나누는데
경태와
철우가 퉁탕거리며 들어왔다.
"어? 회장님 오셨습니까. 이런 누추한 곳을 다 찾아 주시니 영광이로소이다."
경태가 능청을 떨었다. 이에 질세라 철우도 술에 약간 간 혀로 도현에게 인사
를 했다.
"야, 야, 도현아! 부탁 하나 하자. 에스컬레이터 좀 설치해라. 힘들어서 못 다
니겠다."
"응, 설치하지. 오늘 새벽에 나랑 같이 나가자. 백화점에 가서 좋은 걸로 하나
씩 뜯어 오
지 뭐,
하하하."
철우와 경태는 방바닥에 뒹굴고 있는 캔 맥주를 하나씩 들며 오늘 본 영화
줄거리를 사
실보다
더 장황하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서로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에
가면 서로 엎
치락거
렸다. 결국 그들의 그러한 장난은, 철우의 웃옷 단추가 모두 풀어지거나 흰 엉덩
이가 다 드
러나서
항복을 선언하고야 끝나지만, 의견의 조정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만들 하고 우리 시간도 좀 있고 하니 내일은 학교에나 갔다 오자. 지금 도
서관에서 시
험 공
부들 열심히 하고 있을 텐데, 가서 격려 좀 해 줘야지."
도현은 경태와 철우를 제지시키며 제안했다.
작년 이맘 때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들 캠핑 간다고 난리들인데 우리
들은 무거은
가방을
메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꼬박 도서관에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
은 다 뭐하냐
고 야
속해 하기도 했었다.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고 머리가 어지
러워서 많이
마시지
는 못했지만, 선배들이 찾아와서 한 마디씩 해주면 왠지 안심이 되고 더욱 열
심히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시험에 붙으면 꼭 후배들에게 열심히 찾아 다니겠노라 마음 먹
었는데, 그때
가 언
제였나 식으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경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거 좋은 생각이다. 대신 각자 랩에 해당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시험 문제를
출제해 가자.
걔들
테스트도 해 보고, 사실 좋은 정보도 될 것 같으니까. 우리 중간...기말 고사
본 문제들을
중심으
로 해서 내보자. 어때?"
우리는 만장 일치로 합의를 하고 경태는 각 방을 찾아다니며 이 사실을 알렸
다. 그런 다
음 우
리들은 책상 머리에 앉아 시험 문제를 내고 해답을 만들었다.
과학원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 4학년 후배는 총 8명이었다. 이들을 이
끌어 나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 동기이며 작년에 물을 먹고 재수하고 있는 태성이었다.
과학 도서고나 5층에는 우리가 작년 한 해 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해 왔던 자
리에, 후배들
이 감
자 줄기에 감자 붙어 있듯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휴게실에 모여 음료수
한 잔 씩을
마셨
다. 늘 선배들로부터 귀염을 받아온 형근이가 길쭉한 키로 가운데 서서 우리들
을 공격했다.
"형들, 너무한 거 아니우. 들어가면 다야! 작년에는 붙으면 꼭 자주 찾아오겠
다더니 정작
들어
가고 나니까 코빼기도 보이지를 않아? 너무한다! 너무해!"
경태는 웃으면서 몸을 날려 형근이 뒤통수를 한 대 치고는 응수했다.
"어따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이렇게 왔으면 됐지 뭐가 불만이야? 자, 그만
들 쉬고 빈
강의실
로 올라가서 시험이나 보자. 오늘 아침 60점 밑에 맞는 놈들은 죽는 줄 알아!"
후배들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세마나를 해가며 자체 시험을 치지만 아무
래도 미심쩍
고 불
안하기 때문에 선배들이 물고 온 시험 문제는 단비일 수밖에 없었다.
2시간 동안 시험을 치르고 나서 각자 자기가 낸 문제를 나가 풀어 주고, 나머
지는 앉아서
채점
했다. 예상했던 대로 재수를 하고 있는 태성이가 단연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
고 형근이와
원철
이는 위험한 수준이었다. 풀어가는 과정이 모두 논리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풀이 죽어 있었다. 여름 방학이 중간이므로 세미나가 반절은 다
끝났을 거고
대부분
두 번째 하는 과목일 것이므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
다. 우 르은
짜기
나 한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 이맘 때 선배들이 와서 시험보고 나서
지었던 표정
을 생
각해 가면서.
"니들 이렇게 공부하면 되냐? 과학원 시험이 무슨 장난인 줄 아냐? 너희들은
소스(source
: 시
험에 도움이 되는 자료)도 많잖아? 시간 얼마 안남았다.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열심히들 해.
괜히
겉멋 들어가지고 공부 한다고 가방 덜렁덜렁 메고 다니지 말고. 일단 나가서 저
녁들이나 먹
고 하
자."
우리들은 후배드을 이끌고 고기집으로 갔다. 그들의 식사 상태는 보지 않아
도 뻔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서 도시락으로 점심과 저녁을 먹고,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
학교
밖 식당으로 나와 오징어 볶음이나 제육볶음을 시켜 놓고 도시락을 까 먹고 있
음이 분명했
다. 작
년의 경험에 의하면 식욕도 대단하지를 못했다. 도서관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점심
식사
후 체력 유지를 위해 농구장에 가서 한 시간정도 뛰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
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으레 술을 마시며 난리를 피웠을 후배들은
맥주나 한
잔씩
따라 건성으로 건배를 하고는,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이것 저것 물어 보
느라 정신이
없었
다. 어떤놈은 노트까지 꺼내어 하나씩 물어 보기도 했다.
우리들은 작년에 정리한 노트를 시험 발표가 끝난 후 다시 수거해서 편집하여
우리 학번
노트
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전해주었다. 물론 그 전에 내려온 선배들의 유명한 노
트도 그대로
전해주
었고, 나머지는 우리의 노트에 포함시켜 놨었다. 하지만 우리들도 그랬듯이 선
배들이 직접
설명해
주는 편이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후배들은 요즘 과학원 교수들의 동정과 랩의
변화까지도
물어
보았다.
웅성대며 이야기를 나누기 한 시간 남짓 했을 때, 형근이가 벌떡 일어나 말했
다.
"형님들! 형들! 다름이 아니라 저희들 고생하는데 언제 과학원에 초대해서
스트레스 한
번 풀어
주세요. 우리들도 미리 익혀 놔야 편할 거 아니우."
그래, 그래, 걱정마라. 너희들 전 과목 세미나 끝나고 과학원에 와서 특식도
먹고 마음 탁
놓고
술이나 한 잔씩 하자."
경태는 후배들에게 선뜻 약조를 했고, 후배들은 신바람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훈련을 다시 한다는 소식은 없고 수해 복구가 한창이라는 말만 들렸다. 우
리 랩의 석사
1년차
들은 7호관 랩으로 불려갔다. 세미나에 참석하라는 교수님의 지시 때문이었다.
7호관 랩으로 가자면 곰팡이 냄새가 나는 여러 개의 생물공학과 실험실을
지나고 마지
막으로
화학과 실험실을 지나 좌회전하면 된다. 생물공학과 실험실 복도를 지나는데,
흰 실험용
가운을
입은 사람이 복도에 있는 냉장고 속에서 비닐로 싼 물건을 펴더니, 검은빛이
도는 빨간 고
깃덩이
를 꺼내어 끌을 대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매우 둔탁했고 마스크를 쓴
그 흰색의
원생은
묵묵히 그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마치 사형 집행자나 되어 보였다. 어둑한
조명과 눅눅
한 곰
팡이 냄새, 가운을 입은 사람, 둔탁한 망치질 소리,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황급
히 복
도를 돌아 우리 랩에 들어섰다.
우리 랩은 칸막이로 막힌 캠랩과 선형통계랩 사이에 있어서 말을 약간만 크
게 해도 양
랩에서
다 들렸다. 석사 2년차 형들은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형욱형은
컴퓨터에 앉
아 '디
거(DIGGER)'를 하고 있었다.
과학원에 컴퓨터 게임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게임이 '디거'와 '테
트리스'였다.
디거는
땅을 파는 두더지가 체리를 따 먹도록 하는 게임이었고, 테트리스는 다각형들
을 짜맞추는
게임이
었는데, 소련에서 서방국 프로그래머들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설과 어린
이 교
육용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정식형이 대뜸 물었다.
"화학과에서 무슨 냄새 안 나든?"
"아뇨, 곰팡이 냄새만 나던데요."
"또 터졌나? 아무튼 조심해라. 어제 결국 브롬이 터졌는데, 우리는 그 냄새를
맡으며 하루
종일
이 방에 있었다. 브롬을 마시면 여자들은 괜찮은데 남자들은 고자가 된대. 화학
과 걔네들도
너무
하지. 터졌으면 비상 사이렌을 울려야지 저희들만 도망을 가?"
"형들 나한테 잘 보여야겠네요. 내가 한 마디 하면 장가 못갈 거 아니에요>"
"농담 마라. 우리들 어제 그 소리 듣고 모두 나가서 술 마셨다.."
형욱형은 오락을 하면서 나를 나무랐다. 상모형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
다.
"우리 룸 메이트인 생물공학과 사람 말이, 서부 생물 공학 센터에는 생명에
치명적인 미
생물도
있다는데요.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동부에도 위험이 많이 도사리고 있을 텐데.
우리 실험
실에됴
이상한 냄새가 가끔 들어오잖아요."
"권도현이 어디 갔냐? 걔는 알고 있기나 한 거야?"
정식형은 푸념하듯이 말했다. 나는 화학과나 생물공학과 실험실을 피해 계
단을 따라 1
층으로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식형으로부터 세미나 일정과 읽을거리를 받아들고
학생회실로
가보았
다. 학생회실에는 도현과 부회장인 성현, 그리고 총무 간사 일수가 앉아 있었
다. 사환이
커피를
내왔다.
"도현아! 브롬 터졌다면서?"
"그래서 오전에 원장님을 뵙고 왔다. 그런데 현재로선 대책이 없는 모양이야.
일단 유사한
상황
이 발생했을 경우 안전 관리실을 중심으로 신속히 대피하고 사후 처리를 할
수 있도록만
해두고
왔다."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참, 성현씨. 냉장고에서 꺼내서 끌로 깨내는 고깃덩
이가 뭐예요?
생물공
학과 복도에서 그러던데."
"왜 갑자기 존대야? 말 놓기로 해놓고. 그거 쥐 간이야. 실혐용으로 쥐에서 간
을 제거하여
급속
냉동한 거지. 그래도 그건 다행이지. 왜냐하면 우리과에서 쓰는 대부분의 미생물
들은 수입을
하거
든. 미생물도 순종이 있어서. 그런데 수입하는 과정에서 죽어보리면 수입 기간이
길기 때문
에 졸
업 못 하는 거지. 다시 발주해서 들어도는 데는 한 1년은 걸릴걸."
"야, 그거 골 때리군. 그래서 생물공학과는 랩에 일찍 들어가는."
일수는 과학원의 유행 문장을 대뜸 쓰며 낄낄거렸다. 그들은 축제 준비를
하고 있는 모
양이었
다. 나는 도현이가 도움을 청할까 봐 서둘러 일어났다. 괜히 잡히는 날이면 시간
을 다 까먹
고 말
테니까.
나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어가 정식형이 준 페이퍼를 꼼꼼히 읽었다. 투자
가 예상되는
프로젝
트의 비용을 예측(Cash Flow Forecasting)하는 논문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입구에 사람들이 게시판을 보
며 죽 둘러서
있었
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니어서 나도 게시판을 향했다.
'오늘 오후 2시경 서부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던 핵공학과 * * * 가 급
거하였습니
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로 쓰여진 사망 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며칠 전 찾아
왔던 권도현
의 얼
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잡히지않던 실체가 벽면에 걸려 있음을 알았
다. 나는 학
생회실
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숙사에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이없도록 흔한
일이고, 가
까이에
서 발생한다는 걸 알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지 않도라도 죽을 수 있는 것이
고, 아무 때나
예감
없이 찾아오는 허망함이 주변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영을 찾아 그녀의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입구에 학생증을 맡
기고는 구석
구석을
뒤졌다. 그녀는 한구석에 처박혀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 영어 공부를 하
고 있었다. 나
는 그
녀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볼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
으며 눈짓을
하고는
먼저 빠져 나왔다. 잠시 뒤 그녀는 가방을 싸들고 나타났다. 마치 구세주라도 온
양 기뻐하
는 폼
이 공부가 하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넜다. 물이 많이 불어서 곧 넘칠 것 처럼
출렁거렸다.
열어
둔 창문으로 가끔 먼지가 날아 들어와 얼굴이 따가웠다. 아스팔트의 정염이 불
타올라 이글
거리는
기운이 도시를 덮을 듯 했다. 우리는 종로 한구석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
숍 안은 약간
한기
가 들 정도로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 있었다. 서영은 달뜬 마음으로 재잘거리다
가 생각난 듯
말했
다.
"어제 어떤 사람이 쫓아왔어."
"너 데모 했냐? 사람이 쫓아 다니게."
"농담이 아니고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던 사람이야. 어제 집에 가는데 따라와
서는 시간이
있냐
면서 얘기 좀 하재."
나는, 처음 말을 꺼낼 때부터 떨리던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누군데?"
"신방과 복학생이래. 나를 학교에서 자주 봤다나? 남자 친구가 없는 것 같아
서 친구하고
싶대.
오늘도 도서관 내 앞 자리에 앉길래 위층으로 자리를 옮겼어."
"얘기 안 했어? 남자 친구 있다고. 그리고 무슨 그런 사람하고 얘기를 해? 무
시해. 무시하
는 것
보다 좋은 처방을 없어. 그리고 집에도 일찍 들어가고. 아무튼 축하한다. 따라
다니는 남자
도 있
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얘기를 했지만 걱정스러웠다. 우리도 작년에 공
부하면서, 늘
도서
관에서 보는 여학생을 흠모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장난 이
상인 것을 알
고 있
었다. 나는 서영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대놓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참았
다. 대
신 그녀의 장래 직업에 대해 화제를 돌렸다.
권도현이 초초한 모습으로 우리 방으로 찾아온 건 핵공학과생이 죽은지 사
흘이 지난 뒤
였다.
그는 약간의 취기가 있었다. 그는 그냥 자기 방으로 가다가 들렀는지 내가 있
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얼싸안으며 말했다.
"윤재야! 네가 있었구나. 오늘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자, 일단 나가자."
"어디로? 지금 1시야. 이 밤에 어딜 가려고."
"아무데나."
나는 그가 어떠한 생각에 빠져 있을 거란 짐작이 있어서 그를 따라 나섰다.
그는 취기를
과장
하여 나에게 몸을 기대듯 어깨동무를 한 채 정문을 나섰다. 그는 정문 수위에
게 인사하는
걸 잊
지 않았고, 수위도 거수경례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 타고는 운
전사에게 애
걸하듯
이 말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신사동까지 가고 싶은데요. 남산 길로 가서 남산에 올라
갔다가 가
면 안
될까요?"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밤이 늦어서 안 되겠고요, 남산 순환도러를 한
바퀴 돌아
서 가
죠?"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드라이브를 했다. 밤 공기는 시원했다. 가슴까지 뻥 뚫리
게 할 정도
로 상
쾌했다. 밤은 어둠으로 서울을 덮어 감싸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만 빛나도록
해 주었다.
그래도
가장 무수히 빛나는 것은 빨간 십자가였다. 강변을 따라 가로등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의
식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도 조용히 빛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그 불빛들. 우리
는 남산의 숲
사이
를 천천히 달리며 통과했다. 마치 마디마디를 통과하듯 쉿 소리를 내며 가로수
들이 넘어지
는 소
리를 내었다. 밤은 아름답다. 나만의 것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신사동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커피를 파는 집을 찾기 위해 거닐다가 잠원동 쪽
에 커피숍이
란 간
판을 발견하고는 그 곳에 들어섰다. 주인에 대한 고마움이 따뜻하게 일었다. 즐
비하게 숲을
이룬
건 모두 술집뿐인데, 이렇게 조그만 커피숍을 차려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
다니, 어찌 아
니 고
맙겠는가?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창가로 가 자리를 잠았다.
우리 자리
의 대
각선 쪽에 부부사이는 아닌 듯해 보이는 중년 남녀 두 쌍이 앉아 양주를 마시며
몸을 서로
부딪
치지 못해 일부러 지어낸 웃음을 쏟으며 서로에게로 기울였다. 우리는 그들이
양주를 마시
는 모
습을 보고 문득 잘못 들어 왔나 싶었지만, 메뉴 안에 커피가 들어 있어서 주문
했더니, 점원
이 메
뉴판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접어갔다.
"핵공학과 사람은 어떻게 된 거냐?"
나는 먼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물었다.
"사람 죽는 거 참 쉽더라. 학생회실에서 너 나간 뒤에 축제 준비를 하고 있
는데 전화가
왔어.
사람이 죽었다고. 핵공학과 사람들이 원래 축구를 자주하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날 얼굴
도 창
백하고 해서 골키퍼를 보게 했대. 한참 경기를 하고 있는데 힘없이 쓰러져서 경
희대 응급실
로 옮
기는데, 가는 도중에 운명했다고 하더라. 사인은 심장마비래. 나는 그때 전화
를 받고 바로
경희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지. 참 원통한 것이,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보험
을 하셔서 먹
고 살
아왔나 봐. 모두 육 형젠데 막내래. 형들은 막내를 위해 희생하고 이 분만 대학
을 나왔더라.
어머
님이 보험을 하시니 어디 연락이 잘됐겠어? 겨우겨우 어떻게 연락은 됐는데.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병원으로 오시는 길에 열심히 기도하셨대. 제발 무사하라고. 영안실에
들어서시더니
그만
혼절을 하시더라. 오죽 하셨겠어. 아닌 밤에 날벼락이지. 병도 아니고 누구한
테 맞은 것도
아니고
축구하다가 쓰러져서 죽다니... ."
"장례는 어떻게 했냐?"
"원장님하고 의논을 드렸더니 내 의견을 따르겠다고 하시더라. 그래 이리저
리 알아봐서
장례금
을 좀 만들고, 유족들의 의견에 따라 핵공학과장으로 하기로 했지. 발인하는 날
에 대학 때부
터 단
짝이고 과학원에서도 룸 메이트인 고인의 친구가 통곡을 하는 바람에 눈물
바다가 됐어.
유족들
이 원생들에게 피해가 된다며 아침 7시에 치러서 너희들은 못 봤을 거다."
이번의 두 죽음은 나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와 무관한 죽음, 그러나
우리를 포함
한 죽
음인 것이다.
9. 또 하나의 시작
폭우로 인해 전국적인 피해를 입어, 이의 복구를 위하여 중단됐던 훈련이 다
음 주인 8월
17일
에 재개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일정이 확실하게 발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
은 랩에 가
보거나
박사 과정 형들을 만나는 일로 하루하루를 채워 갔다. 따라서 집에 다녀오는 사
람들이 많아
신문
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신문에는 자동차 회사 전국 사업장에 쟁의가 발생한
소식이며, 전
주·광
주 시내버스 전면 파업 소식 등 노사 분규에 관한 기사로 가득했다.
날씨도 덥고 나가기도 귀찮아서 점심도 거른 채 기숙사에서 자화상을 그려보기
도 하고, 내
얼굴
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내 얼굴과 마주했다. 아무리 들여다보
아도 잘생겼
다거나
개성이 있다거나 분위기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짜증을 내는 듯한
인상이었다.
이마는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은 어중간한 폭이어서 바보스럽게 보이기까지도
했고, 그 위
로 흩
뿌려진 머리카락은 이발소에 들어서기가 미안할 정도로 반곱슬에다가 굵으면서
올들이 제각
기 다
른 방향을 하고 있었다. 눈은 작았고 옆으로 찢어져서 제법 날카로운 빛을 발했
지만 흰자위
는 이
미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코는 다행이도 낮지는 않았으나 특징을 나타
낼 만한 어느
부분도
없었다. 입술은 까맣게 타서 환자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귀에서 턱까지 이어진
선은, 이제
성숙된
턱뼈가 각을 이루고 있었다. 수염은 안 깍은 지가 일 주일은 되어 보였는데, 숱
이 적어 전
체적인
윤곽만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었다. 수염을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깍지 않고
그리는
편이 낳을 듯싶었다. 수염을, 손가락으로 가려운 곳을 긁듯 부벼 보았다. 그것
들은 싸라락
싸라락
소리를 내며 누웠다가 다시 꼿꼿하게 일어섰다.
전화 부저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윤재씨 좀 부탁합니다."
"전데요? 누구세요?"
"야, 이놈아! 나다! 형님이다!"
"어? 누, 누구세요?"
"대주야, 임마."
나는 옷을 걸쳐 입고 동숭동으로 달려갔다. 약속한 카페에는 대주가 안경을
쓰고 앉아
있다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일어났다. 우리는 얼싸안고 반가워했
다. 카페 안
의 데
이트 족들은 이 요란한 상봉에 힐끗 우리들을 쳐다보았으나, 곧 다시 그들만
의 이야기를
나누기
에 바빴다.
"살아 있었구나! 저번에 전주에 가서 소식 들었다. 그래 이렇게 사람 많은
데 돌아다녀
도 되
냐?"
"조심하기 조심해야지. 특히 요즘 노동 투쟁이 격화되면서 검문 검색이 더 살
벌해졌어."
"그럼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자."
"아니야, 괜찮아. 여기서 얘기 좀 하다가 뒷골목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뭐. 바쁘지
않냐?
몸은 좋아진 것 같다야."
"좋아지기는? 그 동안 정신 없이 바빴는데 요즘은 훈련 받는다고 조금 한가해.
너는 밥은
제대
로 먹고 다니냐? 잠은 제대로 자고?"
"엉,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 너도 알 듯이 여기저기서 끼여 자고, 돈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거지 뭐. 사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제 본 것 같다. 다행히 전주에 네 소
식 들어서 그
렇지,
만약 안 그랬으면 언제 만났을지 모르겠다잉?"
"미안하게 됐다. 여러 모로 친구들한테 죄를 짓고 사는데, 지나간 건 지나
간거고, 너는
뭐하고
지내냐?"
"이번 유월 투쟁 기간에는 남들처럼 나가서 싸우지는 못했지. 어떤 선배네
집에서 숨어
있다가
한열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눈물이 나오더라. 후배여서가 아니라 '내가 과연
용기있는 자
인가?'
반문하여 보았고, 창살에 갇혀 몸부림치며 철책 안에서 으르렁거리며 맴도는 상
처투성이 맹
수 같
은 고통, 참다운 세상이지를 못하는 이 놈의 땅덩어리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었
어.
지금은 좀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달 중순 그러니까 다음주가
되겠구나, 그
때 전
구 규모의 대학생 연합체가 결성될 거야. 이제 직선제라는 열매보다도 더 중요
한, 군부 독재
를 말
살시키는 일에 전념하여, 내 자식이 떳떳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땅을 만들어
가야겠지. 시
골가면
봄에 쟁기질 하잖냐? 우직하고 성실한 소와 삶의 원초적 노동력을 소비가 아니
라 소진하며
살아
가는 농부가, 지난해의 땀과 한숨과 원통함과 간혹의 즐거움을 곱게 갈아 엎어
버리는 것.
난 이
한반도를 그렇듯 곱게 갈아 엎어 버리고 싶다."
나는 그이 비장한 표정과 목덜미에 돋아오른 핏줄을 보며, 이 나라는 혁명이
허락될 만한
자리
가 이미 다 차버려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려다가 꾹 참고 말았다.
그는 참으로
의협
심이 강하고 강인했으며 용맹했다. 고등학교 때 불량 서클에 가입된 애들을 패
고도 끄덕없
이 다
니던 놈이었다. 대학에 와서도 가끔 가투(가두 투쟁의 준말, 도심지에서 하는
시위)에 나갔
을 때
나 학내에서 연합 집회가 있었을 때, 서로 만나는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최전선에 서
서 적
이 아니 적들과 용맹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혁명은 이루어질 거야! 적들은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어. 6월 투쟁을
통해서 나는
민주의
힘과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강한 확신과 신념을 얻을 수 있었어. 우리의 목
적은 더 이상
미제
를 등에 업고 부패한 이 땅의 권력과 그 시녀들을 처단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
을 순 없지.
기본적
으로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 확대 재생산된 자본과 그 자본을 토대로
해서 배태된
자본가
계급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의 목적은 바로 그 자본주의라는 틀, 다
시 말해서 이
체제
를 말살시키고 민중이 염원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야! 전국 방방곡곡에 꿈틀
대는 염원이
있다.
곧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해."
왠지 모르게 등골에서 땀이 솟았다. 그리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히틀러가 민중은 단순하고 무지하고 기억
력이 나쁘다
고 했
다지. 네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어는 정도 그 말을 믿어.
물론 방향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말야.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말하자면 공동의
목표가 형
성되기
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지. 그 현상은 시장 경제에서 가끔 발생하는 카르텔의 장
기적 이윤을
극대
화하는 쪽의 유혹을 버리기는 불가능한 일이거든.
또 하나는 규모의 문제인데, 우리 나라도 이제 그 뿌리가 어떻든 간에 규모가
비대해졌고
사회
의 형태가 유기적이고 치밀하게 채워져 있어. 따라서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할
수 있을 만
큼 똑
같은 이념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 적정 인원의 확보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봐."
그는 나의 반론에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설득을 당했
다거나 논리
가 서
지 않는다거나 한 건 결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는 그의 동지적 대
상에서 제외
시켰을
뿐이다. 나의 느낌이 그러했다. 물론 그렇다고 친구라는 관계마저 단절한다는
의미는 아니
다. 그
는 천성적으로 많은 애정을 지니고 있는 놈이므로.
"그래, 시끄러운 얘기 그만 하고 우리들 살아온 이야기나 해 보자. 우리가 대
학교 3학년
때 만
나고 그 뒤로 못 봤지?"
"아니야, 2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왜 신촌 자장면 집에서 본 후로는 처음이잖
아. 그렇지?
마치
어제 만나는 기분인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고교 시절에는 같은 서클의 멤버인데다 졸업 후에도
수시로 찾
아가서
만날 정도로 친했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상당량이었을 뿐더러 못 만나는 동
안에도 친구
들에게
서로의 소식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봐도 그 동안의 공백이 못 느껴
졌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는 서로를 무조건 이해하려는 자세가 항상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만
남에서
어떤 말이라도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지리산 가기로 했다. 언제냐면, 이 달 21, 22, 23일인데 금, 토, 일요일이야. 어
때?"
"전주 갔을 때 그 얘기 들었다. 그러마고는 했는데, 그 때 내가 훈련에 들
어가거든. 그
다음주
는 안 될까?"
"그 때는 애들 개학이잖아."
"개학은 9월 아니냐?"
"세상 시끄럽다고 조기 방학 했었잖아. 그래서 일찍 개학 하나부더라."
"참, 너 학교는 어떻게 됐냐?"
"곧 제적되겠지. 졸업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옆길로 새지 말고, 그러면 네가
갈 수 있는
날짜
는 언제냐?"
"그러고 보니 이번 주밖에는 없구나. 그리고 이번 주에 간다 해도 일요일날
서둘러 와야
월요
일날 훈련받지."
"그럼 안 되겠네? 어떡한다?"
"별수 없지. 일단 너희들끼리 갔다 와. 갔다 와서 서울에서 모두 얼굴 한 번
보자."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과학원 근처로 갈까? 우리 둘이 같이 자본 지도 오래 됐는데 오늘은 같
이 자자. 여
관 같
은 데는 임검도 있고 하니까, 오히려 과학원 기숙사가 안전할 거야. 오늘 술도
좀 마시고
오랜만
에 밤새워 이야기나 나누자."
"그려, 사실 오늘 밤 11시에 모임이 있는데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전
화를 걸어서
양해
를 구하고 그러도록 하자."
그는 전화를 걸러 슬쩍 좌우를 둘러본 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공중전
화 부스 앞으
로 걸
어갔다. 그의 어깨는 당당하게 보였다. 몸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 있었다.
나는 괜히 눈
시울이
뜨거워 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많은 아픔을 가져야만 하는 이 시대가 서러웠다.
우리는 과학원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캔에 가서 맥주 잔을 기울였다. 그
는 자신에 찬
어조
로 나지막이 이 정권은 무너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설령 무너지지 않더라도 군
부 독재는 더
이상
연장되지 않을 거라고.
카페 안은 석사 1년차들로 반을 차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상
진과 기훈이
가 들
어오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만약 대주가 없었더라면 오늘 그
들과 술을 많
이 마
셨을 많이 마셨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일찌감치 기숙사로 올라왔다. 과학원 출입은 엄격했다. 안전 관리실
아저씨들이
일일이
신원을 확인했고, 원내에서는 밤을 새울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나자 경비원들은 원생들의 얼굴을 대충 알아보았다. 따라
서 동행자에
대해
서는 술이 취했다거나 고성 방가를 하는 등의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심하게
단속하지 않
았다.
우리는 무사히 정문을 통과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안전 관리실 아저씨들
이 도현과 같
이 다
녔을 때 기억을 해 둔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경태와 철우는 방에 없었다. 나는 방을 대강 치웠다. 대주는 워낙
깔끔한 녀석
이어서
더러운 곳이 있으면 먼저 치워 버리는 습성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수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방을 치우는 것을 막무가내로 거들며 깨끗이 좀 살라
고 나무랐다.
그는
나의 책상 위의 도화지를 보고,
"제도도 하냐?"
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책꽂이에 올려둔 물감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
며 빙그레 웃
었다.
우리는 방 가운데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그 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서로 물었
다. 방, 아니
벽이
란 이토록 묻어 두었던 정을 끄집어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버님, 어머님은 어떠시냐? 못 뵌 지도 오래 됐는데... ."
"그냥 그러시지 뭐. 워낙 연로하셔서 농사는 못 지으시고 그 동안 진 빚을 갚
느라 어머니
가 소
일을 하시는데 탐탁지 않아."
"형은?"
"미안하지, 뭐."
대주보다 한 살 더 위인 형은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주의 시위
관련 문제로
고미
끝에 군에 입대했었다.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아무튼 지금은 복학해서 고시 공부하고 있어.
워낙에 머리
가 좋
으니까 실력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 ."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시선을 담배 재떨이로 쓰이는 사탕 깡통안에 박
은 채 담배
를 깊
이 피워 마셨다.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축축한 날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그는 두리
번거리
며, 룸 메이트들은 오늘 안 들어오냐고 생각난 듯 물었다.
"들어오기는 할 텐데 방이 많이 비어 있으니까 거기들 가서 자라고 하면 돼.
걱정 마, 대
학 동
기동창들이야."
"어떻게 그러냐? 우리가 나가서 자든지 같이 자든지 해야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러라잉?"
기숙사에서 바깥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어두면 여자 친구와 같이 있으니 '접
근 금지'라는
의미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성만형 친구가 다른
과에 있는데
그 살
람 룸 메이트가 여자를 데리고 와서, 그 날 밤 밖에 나가서 잤다는 이야기는 들
었다. 하지만
대주
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인만큼 자는 데 있어서는 별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었다.
스쿠터가 언덕배기에서 힘쓰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안 되어서 경태와 철우가
함께 들어
왔다.
"어?"
"인사들 해라. 내 친구 강대주라고, 너희들 알지?"
"아이고,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박경태입니다."
"전 조철웁니다. 잘 부탁합니다."
"반갑습니다. 강대줍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경태는 책상에 가서 앉는 철우에게 눈치를 하더니 데
리고 나가려
하며
말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어? 아니에요. 저 때문에 나가십니까?"
"아니에요. 저희들은 또 스케줄이 있어서 나가 봐야 돼요. 그럼 편히 쉬세요."
그는 철우의 어깨를 감싸안아 끌 듯이 나갔다. 나는 그들을 뒤따라 나가 미
안해 했더니,
경태는
웃으며,
"걱정말고 잘 재워라."
하고는 철우에게 군밤을 한 대 먹였다. 대주와 나는 침대에 누워 고등 학교
시절이며 지
금 친
구 사는 형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
어난 대주는
가봐
야 할 곳이 있다며 내가 찔러주는 차비도 뿌리친 채 떠나갔다.
그가 타고 떠나는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서서 바라보며, '내가 너를 다시 만
날 수 있을
까?' 하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빠져 있던 몹쓸 생각에 깜짝 놀라 털어
내어 버리듯
고개를
흔들고는 철우의 랩으로 갔다. 혹시나 그가 랩에 있지나 않을까 했는데, 실험실
에는 아무도
없었
다.
마음이 울적해져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철우의 스쿠터가 기숙사 앞에
세워져 있는
게 아
닌가. 이 자들이 들어왔다는 징표였다. 그들은 잠에 쿨쿨 빠져 있었다. 어디가
서 밤을 새우
고 왔
음이 분명했다.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어제 대주가 지은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올라 곰팡이
가 슬었을 옷
가지들
을 주섬주섬 라면 박스에 담아 가지고 나가 세탁기에 털어 넣었다. 저녁 때 같
으면 줄을 서
서 기
다려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서 바로 넣을 수가 있었다.
나는 코 고는 소리를 참으며, 책상 앞에 앉아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
는데, 거울에 낀 먼지와 듬성듬성 찍혀 있는 손자국이 지저분하게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거울, 필통, 자들을 들고 나가 물에 씻어 내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방을
보니
다 치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까 봐 멍하니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경태
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참 재미있었다. 열다섯
권짜리를 모
두 읽
고 나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어젯밤을 새운 것 샅아 깨울 수도
없고, 또 고마
운 마
음에 점심이라도 사야 될 것 같아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갑자기 괘종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기 전에 맞추어 놓은 모양인데 아무
도 일어나는
놈이
없었다. 점심 배식도 끝난 시간이어서 나는 그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어제 나가는 길로 포르노 테이프를 빌려다가 랩에서 보려고 하는데 선
배들이 있어
서 그
들이 기숙사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기다리며 공부를 하다가, 새벽 3시에야 비디
오를 시작해
서 6시
쯤 휴게실로 올라가 눈을 붙이고 기숙사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점심을 산다고 하니까 그들은 신이 나서 따라 나섰다. 태양을 머리에
인 듯이 머리
꼭대
기가 뜨거웠고, 아스팔트 위로 내던져졌다가 튀어오르는 열기가 콜타르같이
다리에 엉겨
붙었다.
우리들은 냉면 한 그릇씩 먹고 경희대 입구의 커피숍으로 들어가 더위를 식혔
다. 이번 여름
은 비
도 많이 오고 태양열도 많이 오는 날씨인가 보다.
토요일이 되자, 남은 일 주일의 훈련은 수해 복구에 전념하라는 의미에서
면제되었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그 놈의 비 때문이었다. 무수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토요일의 세미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진해되었다. 석사 2년차들은
발표하는데
온 열
정을 쏟았다. 한 번의 코멘트가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수 있고, 그것이 곧
논문을 쓰는
과정
에서 부딪치는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석사 1년차들
은 가끔 질문
을 던
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듣는 데 전력했다. 교수는 때를 가리지 않고 허약한 고
리를 끄집어
내었다.
그 때마다 발표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기 일쑤였다. 아마도 밤을
새우면서 하
다 보
지 정신이 없었나 보다.
나는 세미나를 지켜보며 재종형이 알려 준, 조금은 살벌한 유희를 떠올렸다.
내가 어렸을 적에 방학 때가 되면 시골에 있는 고모댁에 놀러를 갔다. 한번
은 방학이 아
닌 초
봄에 갔었는데, 재종형은 나를 데리고 논 사이로 흐르는 개울가로 갔다. 그는
말뚝을 하나
뽑아
들더니 개구리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였다. 그것도 하나요, 둘이요 하는 수까
지 세면서 말
이다.
그러다가 그는 한 마리의 개구리를 생포한 후 뒷다리에 실을 묶고는 개울 위에
던졌다. 개
구리는
자유의 몸이라 생각됐는지 개울을 헤엄쳐 가장자리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반대쪽에서
물뱀
한 마리가 개구리를 향해서 스르르 헤엄쳐 왔다. 그 때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
다. 뱀을 본
개구리
가 재빨리 도망칠 줄 알았는데, 치던 헤엄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
짝을 못 하고
정지
해 있었다. 뱀도 서두르는 빛이 전혀 없이 보다 여유있게 슬슬 다가가서는 개
구리의 몸을
감았다.
그리고는 뱀이 힘을 주자 개구리는 한 일자로 쭉 뻗었다. 뺌이 개구리의 머리부
터 삼키려고
하는
찰나, 재종형의 몸둥이가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그 때 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로는 동물은 절대적인 위
험에 직면하
면 생
존을 위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만큼 공포에 휩싸인다는 점, 둘째로는 진정한
힘을 가진 자
는 여
유롭다는 것이었다. 나는 세미나를 하면서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황
을 처음으로
느꼈
다.
세미나가 끝나자, 교수는 석사 1년차들에게 곧 수강 신청이 있을 것이므로
반드시 4과목
이상
신청하도록 명령을 하고는, 다음 주는 일본 출장이라고 공고한 후 나가 버렸다.
우리들이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자, 정식형이 웃으며 말했다.
"수업 4과목 듣는 것이 부담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제까지는 너희들에게 주어
지는 공부였
고 이
제부터는 너희들이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될 거야. 너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스스
로 찾
아서 하는 공부이므로 지금과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게다."
나는 서들러서 약속 장소인 종로로 달려갔다. 서영은 금방 도착했는지 손수건
으로 얼굴을
찍어
대고 있었다. 서영은 내가 앉자마자 본론을 애기했다.
"집에서 선 보래."
"선?"
"여기저기서 선이 들어오나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서영의 부모님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아무
리 띄엄띄엄
만나기
는 했어도 근 3년간을 만나오고 있는데, 나를 싹 무시하고 선을 보라는 이유가
있을 법했다.
하기
야 서영은 대학 4학년이니까 선이 들어올 나이이기도 했다.
"집에서 나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지?"
"알긴 아는데... 우린 아직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넌 뭐하고 그랬어?"
"무슨 선이냐고 팔짝 뛰었죠. 나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
냐고요."
"그랬더니?"
"엄마는 깜짝 놀라시면서 혼기를 놓치면 좋은 사람 다 놓친다고, 빨리 서둘러
서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래요."
"그래서?"
"그래서, 생각해 보자고 했어요."
"워?"
나는 가만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서영에게 무엇이었던가?'
사랑한다고 살근거리는 말을 자주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결혼을 전제로
둔 여러 가지
미래
에 대한 설계도 하지 않았었다. 서영도 답답했을 것이다. 남들은 선본다고 이리
저리 다니고,
그녀
의 친구들도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은 결혼을 서두른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
만, 난 무심
히 넘
겼었다.
현실적으로도 나는 결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도 않았고 준비할 수 도 없
었다. 석사나
마치
고 자리를 잡아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만약 박사 과정에 올라갈 경우 보조
금 11만 원
가지고
가정을 유지할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결혼을 하려면 집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돈
은커녕
먹고살기도 바쁜 실정 이다. 사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
었다. 더구나
결혼은
구속이라는 생각이 강했고, 내가 뭔가 이루고 난 뒤에야 생각해 볼 문제라고 덮
어두고 있었
다. 또
'나에게 있어 서영은 무엇이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애인?'
'아니면 소설에나 나오는 끝없는 갈망의 대상?'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 사랑에 대한 미래를 설계하지 못한 것
이 큰 오류였
던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아니야, 나가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급히 갈 데가 있어."
아무튼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내가 정식으로 프로포즈하
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를 데리고 서울을 벗어나 교외의 '백마'로 갔다. 예상외로 자연 경
관은 별로 볼
것이
없고, 분위기 있어 보이는 술집들만 논 한가운데에 우뚝우뚝 서 있었다. 이 곳에
서 제일 처
음 생
겼다는 집에 들어가 포도주를 주문했다. 술집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색깔의 촛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을 은은히 받는 실내 장식이 돌담 형식이어서 운치가 있었다. 나는 술
을 두 잔에
조금씩
따라 한 잔을 건네주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중요한 시점에 해야 할 말을 미리 연습하자 않는 버릇이 있었다. 카라
얀도 리허설
없이
바로 연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할 말을 미리 생각을 함으로
써, 말의 진실
과 생
명력을 너무나 진부하게 때묻혀 버리고, 작위적인 치장으로 허구만을 건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차를 타고 오며 도중에 해야 할 말
을 떠올리지
않으
려고 노력하였다.
"서영아! 너는 나한테 사랑의 참의미를 깨닫게 해 준 유일한 사람이야. 난 네
가 내 생활
속에
있음으로 해서 살아가며 너로 인하여 내 존재의 의미가 확실해지곤 한다. 난
너를 사랑해.
영원의
함께 하고 싶어."
서영은 나의 말을 알아듣겠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지만, 나는 내가 한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
을 알고 창피하였다.
나는 기술사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혼? 결혼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거에는 종족 번식의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래서 여성은
가정
에 가두어져 있었고, 또한 외부의 세계와도 단절이 되었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
대의 여성은
남성
과 동등하게 대접 받고 있고, 그 대접을 받을 만한 모든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
않은가? 그
렇다면
현대에 있어 가족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적어도 후세를 위한 기본 단위
조직은 아니
다.
현대에 있어서는 내 대에서 종족이 문을 닫는다고 하여 천지 개벽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
고, 집
안 어른들이 모여 죽일 놈 살릴 놈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옛날 노비들은 결혼
하기 어려웠
다. 그
래서 남자 종들은 어사령을 부르며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던가. 사람 대접은
커녕 마소나
전답만
도 못한 처지의 그들이 신세 한탄을 할만큼 결혼이 절박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
까.
그렇다면 아무 것도 바랄 것 없고 천덕꾸러기로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
들이었지만,
그래
도 사내여서 본능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성적 욕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현
대에는 결혼
을 하
지 않고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 않은가? 관습에 의해서 나이가 차면 혼인을
하고 또 자식
을 낳
아 기르는 것만이 결혼의 의미는 아닐 것이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속시원한 대
답이 안 나온
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하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늘 바
라보며 살고
싶다.
하지만 나의 주변에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사랑 없이 결
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한 4학년 때, 하숙집에서 종화형과 같이 방을 썼었다. 그는 잠을 자다가 내
게 와서 나를
꼬옥
껴안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잠결에도 그의 다리가 척하고 내 허리께에 올라
오면 모질게
밀어붙
여 버렸다. 그 얘기를 아침에 일어나서 하면 종화형은, "나이가 들면 베갯잇이
쓸쓸해 보인
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의 말이 진실
이라면 결혼
은 외
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 아닌가?
원생들은 대부분 일찍 결혼을 하였다. 전문 뚜쟁이들이 엮어 주는 경우도
많았고, 연애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늘
잔웃음을 지
어 보
일 뿐이었다. '왜 사냐건 그냥 웃지요'였다. 그리고 굳이 입을 여는 사람은, "결
혼을 하고 나
면 마
음이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너무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결혼을 하는지
그런 질문은
좀 미
뤄두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서영이가 선을 보는 것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반대를 했다. 솔
직히 기분이
나빴다.
나는 그녀가 미팅을 하는 것도, 친구들과 나이트에 가는 것도 반대를 해왔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밀리는 버스에 타기라도 하면 가까이 붙어 있는 남자들의 행동에 늘 마음이
꺼림칙해서
기분이
좋지를 않았다. 결혼은 일단 뒤로 미룬다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이러한 나의
태도를 보여
주기도
싫었고 마음을 말해 주기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나에게만 묶어 두고 싶
을 뿐이었다.
일요일은 비가 억수로 내렸다. 우리는 우산을 들고 걸어다니다가 계획대로 극
장으로 들어
가 영
화를 보았다. 가벼운 미국 영화의 전형적인 오락물이었다. 볼 때는 즐거웠지만
나와서는 한
장면
도 생각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와서 서영은 열심히 재잘거렸다. 서영이 말이
많아진 것
같았
다. 좀더 어려진 것도 같고 아무튼 귀여운 모습으로 변화고 있었다. 그녀는 들어
온 선에 대
해 즐
거운 듯 내뱉었다. 어떤 남자는 집안이 좋은데다 잘살고, 또 어떤 이의 아버지
는 무엇을
지냈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쏟아냈다.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
어넘기고 있
었지만,
그 건수 하나 하나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서영의 집
안의 대해 자
세히는
모르는 있었다. 출가한 언니가 한 명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있으며, 생활 형편
이 먹고 남
아도는
정도라는 것밖에. 내가 서영에게 그의 집안에 대해 묻자,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해."
하더니 그 빗속에 흠뻑 젖으며 홍대까지 걸어갔다.
그녀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자꾸 다른 얘기를 하며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녀의 핸드백
끈은
손톱의 학대에 못 이겨 이미 구겨져 있었다.
"웃긴다.,형. 우리가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만나 오는
동안 서로에
대해
너무도 많은 걸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에요. 형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겠지만,
우리집은 아
주 강
력한 모권사회예요. 엄마가 골동품상을 하셔서 우리들을 먹여 살리죠. 아빠는
직업을 여럿
전전하
셨지만 지금은 집에 계셔요. 아빠는 책을 참 좋아해요. 솔직히 말한다면 책이 인
생의 전부라
고 해
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 아빠의 모든 생활은 오로지 학구적이에요. 무슨 사고나
사건에 대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요.
대통령 직선제만 해도 그래요. 아빠는 관련 서적을 몽땅 사다 쌓아 놓고는
마구 읽고 나
서 우
리들한테 술을 친구 삼아 체계적이고도 골똘하게 빈틈없이 설명해 주시죠. 아
빠의 유일한
즐거움,
아니 즐거움을 넘어선 철학, 혹은 인생을 사는 평생 자세예요, 일관된.
그러니 어디 다른 데 관심이 있으시겠어요. 하길래 직장에 오래 계시질 못하
세요. 책에서
세운
아빠의 원리 원칙을 그대로 지키며 살기가 어려운 것이 이 사회요, 세상이니까
요. 엄마는 이
런 아
빠를 보며 우리들에게 곧잘 푸념처럼 말씀하시죠. 여자 복은 남편 밥 먹는 게
제일이라고요.
그래
서 먹물 많이 묻은 걸 싫어하세요. 일단은 생활 능력에 의심이 간다나요."
* * *
원래대로 한다면 우리는 미금의 연병장에서 구르고 있을 터인데, 기숙사 침
대 위에서 집
에 다
녀온 철우가 들고 온 한 뭉치의 신문을 읽었다. 울산의 자동차 회사 노조원
들이 본사에
올라와
농성 중이라는 등의 노동운동 기사가 모든 신문에 걸쳐 다루어져 있고, 미 국
내선 DC9 항
공기가
디트로이트 메트로폴리탄 공항에서 고가도로를 들이받아 백 명 이상이 사망한
희한한 사건
등이
실려있었다. 또 '동백아가씨', '고래사냥'등 의 노래들이 해금되었고 종합주가 지
수가 500선
을 처음
으로 돌파했다고 난리들이었다. 그리고 대주 말대로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대
학생 대표자
협의회
(전대협)'가 결성되었다는 기사와 이의 의의 등을 해설한 글이 크게 나 있었
다. 우리들은
끼득끼
득 웃어가며 기사를 읽기도 하고 경탄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다가 신문을 방바닥
에 내동댕이
쳐 버
렸다.
경태는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튀어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우리 여행 가자! 말하자면 캠핑이라는 것 말이다!"
"미쳤군, 미쳤어. 지금이 여행갈 때냐? 실험실에서 잘리게 생겼는데 놀러가
면 나는 쫓겨
난다,
쫓겨나."
"철우야! 넌 그 생각이 잘못된 거야. 여행을 가서 싹 털어내 버리고 더욱 열심
히 하는 거
야. 항
상 미적미적하니까 더 그런 소리를 듣는 거지. 개길 때는 왕창 개기는 거야.
윤재야! 너는
어떠
냐?"
"좋는-,놀러가는-."
"하하하 저 새끼 철우 빼고 우리끼리 가자."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달라지는데, 근데 언제 갈 거야? 아니야, 안돼. 그렇
잖아도 선배
들한테
눈에 나고 있는데 여행간다면... ."
"넌 언제 한번 맘 편하게 캠핑 가 본 적 있어? 우린 사회에서 사육되고 있
었어. 얌마,
우리도
이 젊음을 향유할 권리가 있단 말이야. 젊음이란 어느 곳에서도 보상받을 수
는 없단 말이
지."
"그래, 가자. 가"
철우도 발딱 일어나며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싶은 눈치였다. 우리방에서 세
미나를 하고
있는
랩은 우리 랩뿐이었다. 철우는 랩에 나가 실제 실험 장비를 운용하는 방법과 랩
에서 연구해
놓은
기존의 데이터 베이스를 활용하여 기초적인 연구를 하고 있고, 경태는 선배들과
일 대 일로
매칭
이 되어 박사 과정 형의 지시에 따라 연구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정을 세움에 있어 가장 큰 제약 조건은 수요일과 토요일에 계획되어
있는 우리
랩의
세미나였다. 토요일의 세미나만 없다면 전주 친구들과 지리산에라도 가고 싶었
던 것이 조금
전까
지의 마음이었는데, 경태의 제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토요일은 교수가 일본 출장 중이어서 아무래도 빠지기는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놀러
간다고
빠질 수도 없고, 또 다른 이유를 대고 빠졌다가 비밀이 없는 과학원 내에서 그
보안사항이
하루
이상을 가기 힘든 건 뻔한 일 아닌가?
묘안을 짜내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를 모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첫째로
방학이 없는
과학원
에서 교수의 휴가에 맞추어 쉬는데, 이번 일본 출장이 휴가를 겸한 것이므로
남선형을 꼬
드겨서
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적당한 집안 사정을 이유로 빠
져 나가 경태
의 집
으로 도망을 가서 그 곳에서 모든 준비를 해 가지고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끼
리만 비밀을
지킨다
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대안이었다. 그리고 출발은 20일 목요일에 해서 일요일
에 돌아오자
는 거
였다.
나는 남선형은 왠지 껄끄러워서 먼저 정식형을 찾아갔다. 우선 말을 이리저
리 돌리며 이
야기를
붙이고는 본론으로 들어가 애걸조로 정식형을 설득했다.
"형! 우리 석사 1년차들은 과학원 생활도 처음이고 한 학기 동안 고생도 많
이 했잖아요,
물론
형들도 다 거친 과정이지만. 그리고 우리들은 뙤약볕에서 훈련도 받았는데, 공식
적으로 며칠
쉬면
서 생각할 여유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들도 곧 있으면 새 학기에 들어가고
그러면 또
삥삥
돌아야 될 거 아닙... . "
"말 돌리지 말고, 지금 한바탕 놀아 보자는 얘기 아냐? 너희들이 뭐했다고 그
래? 다 겪는
과정
이야. 석사 2년차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
"정식형 ! 우리같이 고생하기 전에 한 번 휴가가죠."
형덕형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거들었다. 정식형은 이내 구겼던 얼굴을 펴고는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래서 저번 주 세미나 끝나고 남선형에게 이야기했더
니 완강하게
반대
를 하더구먼. 그러니 별수 있냐? 중간 중간에 시간을 잘 빼서 놀 수 없겠니?"
"혀어엉, 한 번만 더 얘기 해 주세요. 일생 일대의 형한테 하는 처음 부탁이
잖아요. 죽을
때까
지 잊지 않을게요."
"잊지 않는다고 하는 놈 중에 기억하는 놈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까 잊을 만할 때 또 해주면 되잖아요."
"너 같은 놈 잊지 않게 해주려면 하루에도 수십 번 해야 되게? 아무튼 알았다,
알았어."
"형만 믿어요 고맙습니다., 정식 형님."
대신 정식형은 랩 운영비로 걷어 둔 흰 식권을 주며 먹을 것을 사오라는 심
부름을 시켰
다.
결국 정식형의 도움으로 석사 1년차에 한해서 토요일 세미나는 들어오지 않
아도 된다는
발표를
남선형이 직접했다. 하지만 남선형은,
"기어코 놀러 다니는 시간으로 쓰지 말고 2학기 준비를 위해 쓰라." 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남선형이 교수로 가는 학교 학생들은 꽤나 힘든 대학 생활이 될 거라 생
각했다.
우리들의 여행 코스는 목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소금강 자락에서 잠을 자고,
소금강을 경
유해서
경포대 그리고 내설악을 돌아보기로 했다. 이 코스는 철우를 위해 높이 올라
가는 일을 피
할 수
있도록 짜여졌다. 그리고 규영을 합류시키기로 했다.
철우나 나는 소금강이라는 목적지로 인해 사뭇 즐거웠다. 강길을 따라 노래
를 부르며 또
는 나
룻배라도 타 볼 수 있는 기쁨,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그래
서 철우는
샌들도
준비를 해 가지고 갔다.
휴가철이 끝나고 수해가 많아서인지 여행을 가는 사람은 우리들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소금강
에 도착하자 밤이 깊었는데도 아직도 철 늦은 관광객을 위한 시설과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우리
는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서 규영의 부끄러운 웃음 뒤에 섞인 탐욕을 뿌리치지 못
한 화투판을
벌였
다. 나는 조금 치다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누웠다.
서영은 내가 놀러 간다고 하자, "갔다 와."라고는 했지만 고개를 숙이며 툴툴
대었다. 미안
한 생
각이 들었다. 방학 때라고 어디 한 번 제대로 같이 놀러가지도 못했고 자주
만나 주지도
못했었
다. 문득 같이 왔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밤을
나 혼자만
즐기는
것이 더욱 미안했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 건가?
그 날 밤 우리가 자는 동안에 들려온 물소리도 우리를 강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하게 만
들었지
만, 아침에 주위를 바라본 순간 그 물소리는 우리들의 놀라는 소리에 목을 움츠
려야 했다.
그 물
소리는 전날 비가 와서 물이 불어 계곡에서 나는 소리였고, 우리 시야를 떡하
고 막아선 건
분명
산이었으니까.
지난 밤 내가자고 있는 동안, 결국 이 녀석들은 술을 마시고 디스코장을 갔다
온 모양이었
다. 철
우는 소금강이 산임을 알고 퍽이나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그를 이끌고
계곡을 따라
오르
기 시작했다. 간간이 젊은이들이 쌍을 이루어 우리를 질러갔다. 나는 다시금 서
영과 같이 오
지 못
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젊은 쌍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
떻게 같이 올
수 있
었을까 하고 의아했다 나는 계속 서영과 동행을 꿈꾸었다.
아름다운 소금강을 떠나 경포대에 오면서도 나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
보며 서영을
생각하
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으레 있는 말다툼과 가끔의 의견 차에 의한 감정 싸움이
있어서, 결
국 소
주병을 들고 경포대의 밤물결이 밀려와 있는 백사장으로 나갔다. 우리들은 장
난을 치다가
모두
물에 빠지고 말았다. 바닷말은 차가웠다. 가끔 해파리가 다리를 쏘아 친구들은
물 속에 뭐가
있다
며 호들갑을 떨었다.
한밤에 옷을 입고 물 속에 빠져, 끊임없이 육지를 갈망하는 파도의 안타까움
과 그리움과
사랑
을 배우며 떠다니는 기쁨은 그저 황홀하였다.
최초의 용액 형태를 취하고 있던 원시 단백질의 분자가 서로 묘여 분자군을
만들고, 마침
내 물
속을 헤엄치기는 하지만 생명체라고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생명의 기원으로 보이
는 액적, 즉
코아
세르베이트를 출현시켰던 바다. 우리가 바라볼 수 없는 곳이 더 많은 바다. 그래
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바다.
우리들은 그 속에 들어가 먼 옛날의 선조들처럼 뛰어 다니고 있었다. 우리들
은 해변에 나
와 소
주를 마셨다. 덜덜 떨릴 만큼 추웠지만 소주가 들어가니 조금 나았다. 우리들
은 모래밭에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또 서 있기도 하며 노래를 불렀다. 고교 때, 가곡을 배운다는
사실이 고마
웠다.
수강 신청을 했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4과목을 신청했다. 강의 시간표가 무
거워 보였다.
일단
세미나는 중단되고 석사 1년차는 10월부터 세미나를 진행하기로 했다.
서영은 한 과목만 수강신청을 했다며 약을 바짝 올리더니 꼭 만나자고 했다.
나는 모처럼
술렁
거리며 사람으로 가득찬 식당을 지나 과학원을 빠져 나와 종로로 갔다. 종료
서적 앞에서,
고개를
서로 빼내어 어미새가 가져다 주는 먹이를 서로 먹기 위해 재잘대는 새끼들마
냥 서 있는
사람들
속에, 나도 끼었다.
한참을 움직일 수도 없을 만치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양산을 받쳐 든
서영을 발
견하고
는 사람들을 비집고 나갔다. 서영은 손에 쇼핑백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끌면
서 같이 갈 데가 있다며 바삐 걸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명통 쪽으로 따라
갔다. 그녀가
데리고
간 곳은 명동의 한 스카이라운지였다. 그곳에서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예약석으
로 갔다. 나
는 얼
떨떨한 기분으로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이윤재 씨, 축하해요."
"뭘?"
"어? 내가 잘못 알았나? 오늘이 형 생일이잖요?"
"오늘이 며칠인데? 가만, 어? 맞네."
"깜짝 놀랐잖아요. 생일 축하해요."
"그래 고맙다. 이렇게 귀빠진 날 기억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이거 선물이에요. 이대 앞에서 티셔츠 하나 샀어요. 남자들한테는 뭘 선물하
는지 알 수가
있어
야죠. 한 번 보실래요?"
"이거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냐? 이거 알록달록한 게 여자 거 같다야."
"아니에요. 남자들도 많이 입는다 말이에요, 싫어요?"
"아니, 아니야. 고마워."
나는 원래 튀는 옷을 입지를 않았다. 왠지 쑥스럽고 꼭 사람들이 나만 쳐다
보는 것 같아
서였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촌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미안했다. 나를
위해 준비
한 선
물울 기쁘게 받아야하는 건데 심드렁했으니 그럴밖에. 나는 부러 얼굴을 환화
게 하고는 이
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오늘 한 달 용돈을 다 쓰겠다며 음식을 주문하고 포도주도 한
병 시켰다.
생일은 참 우스운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의미 있는 날도 아니다. 탄생이 필연
이라면 그
이전의
인연도 소중하고 그 이전의 인연도 소중하다. 단지 이 세상의 빛을 처음 보게
되었다는 의
미 외
에는 없다. 태어나기 이전에도 나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
들의 생일은
모든
사람이 축복을 하고 기뻐한다. 거리거리에 상징물을 매달기도 한다. 그사람이
뛰어난 인물
이었으
므로 축복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와는 무관한 탄생도 많다. 난 내 생일이
라고 서영의
축복만
을 받았다. 왠지 쓸쓸한 건 사실이다. 괜히 고향의 가족들에게 서운했다. 전
화라도 한 통
해주면
될 터인데 외 잊어 버렸을까?
그녀는 얘기를 하다가 불쑥 졸업여행을 곧 가게 될 거라고 말했다.
"졸업여행? 그거 안 가면 안 되겠냐?"
"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졸업 여행을
가면
남학생들과 같이 갈 텐데 무슨 일이 있을지 못미더웠다. 더구나 따라다닌다는
남자도 있고,
졸업
여행이라는 들뜬 기분과 그 곳의 정취에 마음이 불타올라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만 같았다.
하지
만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속이 좁아 보일 것이고, 또 나는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서영
이만 못 가게 한다면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왜 안
되느냐고 거
듭 물
었다.
"말도 안 돼. 졸업 여행은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고요. 그리고 형은...
."
서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머리 속에 생각이 부풀어오르도록
가득 차기만
할 뿐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생일에 벌어진 일이어서 인지 얼굴을
밝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였지만, 기분이 나쁜 건 확실했다.
기숙사에 돌아오니 경태와 철우가 책상에 붙어 있었다. 나는 슬며시 쇼핑
백을 장롱에
깊숙이
넣었다. 옆구리 찔러 절받기가 싫어서였다. 오랜만에 기숙사에 모두 붙어서 연
구하였다. 나
는 정
식형이 준책을 읽었다. 12시가 넘어서 상진이가 들어왔다.
"우와! 학구열 죽이네! 박경태! 이야기 좀 하자. 이거 원 무서워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
야지."
"뭐꼬?"
"대의회를 했는데 축제 준비 좀 같이 하자고."
"무슨 축제 준비?"
경태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과학원 축제의 꽃! 촌극 대회가 있잖아. 빨리 대본도 쓰고 캐스팅해서 연습
해야지. 그거
상금
이 많아."
"그래? 축제 일정 잡혔대?"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한단다. 시간이 없어. 한 20일밖에 안 남았잖아."
"근데 학생회 애들은 이제 난리야?"
"이건 학생회 소관이야. 빨리 대본 써서 검열도 받아야 되고, 할 일이 많아.
이리 다들
내려와
서 이야기 좀 하자."
"검열?"
우리는 방 가운데로 모이며 누구랄 것도 없이 상진에게 물었다.
"대본 써 가지고 학생회에 제출하면 거기서 문제 있는 대목은 삭제를 하도록
되어 있나
본데,
학생회장인 이번에는 어떤 부분도 삭제나 수정이 없을 거고 단지 사본 1부만
받아서 참고
하겠다
고 하더라."
"별걸 다 가지고 넘어지네."
"야, 말도 마라, 저번 달에 반핵 포스터를 학생회에서 붙이도록 허가해서 도
현이가 꽤나
원측하
고 싸웠나 보던데."
경태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상진이가 설명을 했다. 상진은 우선 대본을 쓸
사람이 필요
하다며
나를 지목하였다. 하지만 난 연극 대본을 써 본 일도 없고 괜히 손댔다가 시
간만 쫓길 것
같아서
극구 반대했다. 그러자경태는 구승이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상진은 그렇지
않아도 구
승에게
먼저 부탁을 하고 오는 길인데,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았으니 다시 말해 보겠다
고 했다. 대신
촌극
총괄은 경태가 맡고 나는 소품을 준비하기로 했다.
결국 대본은 구승으로 낙착되어 '긴게 좋더라'란 제목으로 5년 단임 대통령
제를 제안하
는 실력
자의 본 마음을 요즘 유행하는 코미디 프로인 '회장님 우리 회장님'의 형식을
빌려 꼬집
어 내는
것이었다. 경태는 촌극 대회에 우리 과 석사 1년차 전원을 출연시킨다는 원칙
아래 배역을
늘여
놓았다.
우리들은 학기가 시작되어 바쁜 데도 연습을 충실히 했다. 진엽형은 고향 후
배에게 시켜
촌극
포스터를 그리게 했고, 도현도 연습하는 강의실에 가끔 들러 보고 갔으며 어
쩌다가 캔 맥
주 한
박스씩을 주고 가기도 했다. 경태는 학생회실로 찾아가 전년도의 자료들을 구
해다가 분장,
소품
등의 아이디어를 얻어냈다. 우리들은 축제 일 주일 전을 기점으로 총연습에 들
어가기로 하
고, 그
동안 대본 수정과 기타 준비물에 대한 점검에 최선을 다 하기로 하였다. 몇 번
의 연습이 어
느 정
도 자신감을 주었을 뿐더러 연습에만 계속 매달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축제와 연이
어지는 추석
연휴로
연구 태도가 나빠질 것을 우려한 교수들이 우리들을 더욱 닦달하고 있을 것을
제외하고는.
1학기 성적표는 학생이나 집으로 우송되지 않았다. 우리들도 자신의 학점을
알아보기 위
해서는
학적과에 가서 열람을 해봐야 했다. 단, 석사 경고자는 노란 봉투가 편지함으로
배달된다는
데 우
리 과도 몇 명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친구들은 1학기에 비해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랩이 결정되어 시어머니가 많
아졌기 때문
에 그
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자가 자신을 위한 자기 자신의 공부를 해야 하기 때
문이었다. 말
하자면
자신의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는 학교 생활이 된 것이다. 이것이 과학원에 와
서 겪는 가장
큰 변
화였지만, 그렇다고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원생들이 자주적
생활 양식에
익숙
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랩에 들렀다. 정식형은 "찾아도 없던 녀석이 제 발로 걸어 왔
구나." 하며
반가워
했다. 이유인 즉은 곧 오픈랩(OPEN LAB.)이 있는데, 그 준비를 하자는 거였
다. 오픈랩은
학생회
에서 주관하는데, 과학원을 지망하는 학생이든 아니든 과학원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학
원의 각종 정보와 실험 기구 등을 공개하여, 학문적 목적에 맞는다면 이용하라
는 취지에서
과학
원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랩 같은 경우는 실험이 없으므로 보여 줄 것이 없었다. 정식형
은 그 동안
랩에서
축적해 둔 데이터 베이스(DATA BASE)를 보여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DB
는 선배들인
연구
하면서 정리한 관련 논문들이 실린 잡지, 연도, 볼륨(VOLUME) 번호, 저자 및
내용이 수
록되어
있었다. 내용은 논문 앞에 나와 있는 요약문(ABTRACT)을 입력시켜 놓은 것이
었다. 정식형
은 나
보고 그 날 안내를 맡고 DB정리시 문제가 발생하면 수정하라고 했다.
기숙사에 돌아와 경태에게 오픈랩을 한다고 했더니, 그는 벌써 후배들과 저
녁 약속까지
해두었
다고 했다. 참 기민하고 오지랖이 넓은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픈랩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
러 오는 사람이었다. 작년에 우리 스터디 그룹도 여기 참가했었다. 따라서 그들
은 대개 시험
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내할 거리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
다가 나왔다.
투어가
모두 끝나자, 우리들은 대학 후배들과 잔디밭에 앉았다. 도현이까지 행사를 위
해 입었던
양복을
그대로 걸치고 참석했다. 후배들은 초조한 눈빛을 감추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
댔다. 우리들
은 후
배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는 돌려 보냈다. 후배들은 잔뜩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오늘 몰려온
엄청
난 인파가 모두 경쟁자임을 알아서인지 풀이 죽어서들 돌아갔다.
서영은 새 학기에 한 과목만 듣는다는 가벼움 때문인지 밤마다 기숙사로
전화를 했다.
난 그
전화를 받기 위해 밤마다 기숙사로 올라가야 했다. 그녀는 전화를 길게 하기 위
한 의도로밖
에 없
는 뉴스거리를 하나씩 가지고 재잘거렸다. 8월 말에 민속 공예업체인 오대양 대
표 박순자씨
와 신
도들이 용인 공장 식당 천장에서 집단 자살을 해서 연일 그 이야기뿐이라는 둥,
YS와 DJ가
모두
대권에 도전하는 사태가 발생할 거라는 둥, 울산에서 노조가 대규모 시위를
하여 큰일이
라는둥,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누가 예쁘다는 둥 하며 시
간을 끌었다.
덕분에
나는 전화를 끊고 일어날 때, 뒷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들지 않아야
했다.
어느날은 서영이가 대뜸 9월 23일에 졸업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결정
적인 이유가
생긴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다름 아니라, 그가 졸업 여행을 가게 되면 나는 축제 파
트너가 없으
니 어
떻게 하느냐고 다그쳤던 것이다. 그녀는 난감한 듯 말했다.
"내년 축제 때는 꼭 파트너해 줄 테니까 졸업여행은 보내 주라, 응? 혀엉."
"안 돼! 그러면 나도 다른 파트너 구해서 쌍쌍파티 갈 거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알았어.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나도 싹 잊고 갔
다 올 거예
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설마 그녀가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갈 사람
은 아니라고
생각했
다. 좀 미안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여헹을 보내는 것은 못미더웠다. 나는 도서
관으로 올라
가 오
늘 나온 숙제를 했다. 희뿌연 안개가 자욱이 끼는 아침이 올 때까지 앉아 있다
가 늘어지게
하품
을 하고는 아침을 먹었다. 더위가 꺾였는지 아침엔 싸늘했다.
오후에 편지함을 열어보니 소포가 와 있었다. 들자마자 출렁하는 소리가 들렸
다.
'무슨 약인가?' 하고 겉봉을 살펴보았다. 윤지가 보낸 거였다. 그리고 소포
밑에는 편지
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편지는 놀랍게도 연욱이가 보낸 거였다. 난 두 개를 들고 어느
쪽을 먼저
펴 볼
까 하다가 기숙사로 올라갔다. 밤을 새웠기 때문에 피곤해서 푹 자고 새벽에
내려올 작정
이었다.
소포 안에는 양주 한 병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이 동봉되어 있었는
데. '오빠 생
일 축
하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술 한 병 샀으니 마시고 취해서 노여움을 잊으시기 바
랍니다. 동생
윤지
가.'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왠지 코 끝이 시큰해졌다. 광렬의 동생 연욱의 편지
는 의외였다.
의례
적인 인사와 근황을 묻는 내용 끝에 9월 말쯤 올라갈 테니 서울 구경 좀 시켜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픽 웃으며 많이 컸구나 생각하고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10.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어느 날 과학원 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니 정면에 보이는 2호관 건물의 유리창이 없는
벽면을 두 개의 큰 플래카드가 덮고 있었다.
'축 제14회 석림 축전'
'깨어나라! 석림이여!'
그리고 게시판도 축제 홍보물로 그득했다. 전야제인 23일 밤의 석향음악제를 시작으로 영
화 상영, 개막식, 마당극, 바둑대회, 씨름 대회, 촌극 경연 대회, 과학원 대덕 이전 문제를 다
룰 간담회, 학생처장의 중국 슬라이드 쇼, 석림제, 기숙사 층별 모임, 각종 서클에서 준비한
단막극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플래카드가 걸리고 축제 일정에 대한 홍보물이 붙고 팜플렛이 나오자, 축제에 대한 기대
감도 생기고 왠지 9월은 기쁠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지만, 수업에 들어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숙제도 숙제려니와 퀴즈도 많아서 아무래도 축제를 잘 보내기 위해서는 여러날의
밤샘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회에서는 원생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매일 색다른 홍보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
다. 하루는 잔디밭 앞에 널찍한 낙서판이 등장하였다. 며칠 뒤 그 낙서판은 수학 공식과 각
과의 전문 이론을 이용한 조크로 채워졌고 정치적 낙서도 간혹 눈에 띄었다.
우리 과는 촌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체육대회 때의 울분을 삭이기 위해 총력전
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체육 대회 우승보다는 현실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2학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원생들은 시간에 쪼들린 탓에 체육 대회 때처럼 연습을 하는 과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태는 정보 수집에 열중했다.
왜냐하면 촌극 경연 대회의 심사는 석사 1년차 과대표들의 여자 친구가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원 내부 생활에 초점을 맞추거나 현 사회상을 잘 반영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
상이었다. 그러니 소재를 뭘로 택하느냐는 그 만큼 중요했다. 나는 경태가 지시하는 대로 소
품을 일일이 챙겼다. 분장은 아무래도 승아가 맡는게 좋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승
아도 배역이 있었는데 그 역을 맡았다간 시집 가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며 분장 담당이
백 번 났다고 쾌히 승낙했다.
승아가 맡은 역은 최 회장의 부인 역으로 맨 마지막 장면에서 최 회장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5년 단임이라고 보고(?)를 하면 '나는 긴 게 좋더라'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대사야 짧
지
만 여러 가지 뉘앙스가 풍긴다며 꺼려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 과 촌극의 제목은 '긴 게
좋
더라'러 결정되었다.
토요일이고 해서 졸업 여행을 고집하는 서영은 조금 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형, 그 옷 왜 안 입었어?"
"축제 때 입으려고."
내 말을 안 듣고 그렇게 여행을 꼭 가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공격에, 서영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서영은 굳었던 얼굴을 풀고는 부드럽게 애교까지 섞어 가며 졸랐다.
"형, 나 졸업 여행가고 싶어요. 애들이랑 마지막 여행이잖아요. 대학 4년 동안을 같이 다
닌 애들인데 나만 빠지면 돼요?"
"애들이라니?"
"그래, 갔다가 와라. 하지만 축제 기간에 혼자 있어야 할 이 이윤재의 외로움도 알아줬으
면 좋겠고, 그 보상으로 이 다음부터 너에 관한 의사 결정권의 일부는 전적으로 나한테 있
을 것!"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전적으로 따를게요."
하지만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친구가 더 중요한가? 내가 더 종요하지 않은가?
나 홀로 축제를 보내라고 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몇 개의
제약 조건을 더 붙였다. 말하자면 여행 가서 매일 나에게 편지를 부칠 것, 사진은 한 장도
숨기지 말고 내게 보여 줄 것, 앞으로는 화내지 말 것 등등. 하지만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모든 저건을 반발없이 받아들였다.
정말로 큰일이었다. 촌극은 혼자 본다치더라도 마지막 날의 석림 축전은 홀자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 여자나 잡아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서관에 묻혀 지낸다는 것은
너무도 궁상맞고 초라하지 않은가. 나는 기숙사로 돌아오면서도 축제를 어떻게 보내나 하는
걱정으로 서영의 여행에 대한 걱정은 할 수조차 없었다.
기숙사에는 경태와 구승이가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고, 철우는 옆에 붙어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경태는 소품 내역이 약간 바뀌었다며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건
성으로 받아서 책상 위에 던져 놓고는 철우의 침대 위에 벌령 누웠다. 얼마 있다가 구승은
가고 우리들 끼리만 남았다. 경태는 얘기한 것을 정리하고는 내게 말을 던 다.
"너는 좋겠다. 축제 파트너 있어서."
"너도 좋겠다. 건너짚기 잘해서."
나는 누운 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반문했다.
"아이고, 저 새끼 뺑끼칠 (페이트칠;속임수)은 알아줘야 해. 허기야 또 싸우신 모양이지?
서영이는 대단해. 어떻게 저런 새끼 비위를 다 맞추고 살까?"
"그래, 축제 때 보면 될 거 아니냐. 홀아비 한 마리가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꼴을."
"경태야, 너는 참으로 위대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미처 못 했지?"
경태는 능철떠는 철우를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아무튼 나는 여자라면 싫다. 그러니까 빼주라."
"윤재 저 새끼, 내 저럴 줄 알았어. 철우가 할 거지? 지금 전화하러 간다. 윤재, 너 정말
생각없어?"
경태는 수첩을 찾아들고 나가며 대답도 듣기 전에 나가 버렸다. 나는 철우의 풍만한 가슴
을 만지며 말했다.
"사랑의 길은 멀고도 험한겨."
그는 징그럽다는 듯이 내 손을 뿌리치며 씩 웃었다. 잠시 후 경태는 흡족하게 웃으며 돌
아와 내일 2시에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다섯 명이라 사람을 더 구하러 간다고 나가 버렸다.
나는 일어나서 대충 씻고는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밤을 꼬박 새워 숙제를 하고, 우리 랩에서
하고 잇는 연구 주제들을 간단히 읽어가며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찾아갔다.
미팅이 있던 일요일. 나는 혼자서 육계장으로 점심을 때우고 기숙사로 돌아와 잠에 빠져
들었다. 두런거리는 소리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일어나 보니 경태와 철우는 술을 마
셨는지 얼굴이 벌개 있었다.경태가 입고 있는 옷이 좀 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느꼈다.
"윤재야! 일어났냐? 오늘 죽이더라. 정말 이쁜 애들만 나왔더라고. 역시 홍걸이는 알아줘
야 해. 후배 중에 그런 놈이 있다는 건 자앙이라니까. 그리고 이 옷이 나를 오늘 또 죽이지
않았겠냐. 미안하다.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장롱을 뒤지다 보니 이게 있더라. 나한테 잘 어울
리는 것 같지 않냐?"
나는 어안이벙벙했다. 그는 그 알록달록한 티셔츠의 단추를 풀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 잠
이 확 깨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아, 서영아. 아끼고 아끼던 건데 첫 개시를 저 놈이 하
다니. 나는 마치 내 여자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내가 입어 보았다 할지하도 빌려 주고 싶지
않은 물걸인데... 하물며.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경태는 침대에 누우며
나의 심장을 긁는 소리를 또 했다.
"그리고 접때, 내 침대 메트리스 밑에 양주가 한 병 있던데 애들하고 같이 나눠 마셨다.
봤는데 안 마실 수가 있어야지... ."
나는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내 생일을 구실로 받은 모든 선물이 경태의 것이 되어 버
리다니.
"잘했다, 잘했어."
"그거 웬 술이냐? 꽁생원처럼 숨기기는."
"그래, 미안하다. 조금 있으면 네 생일 아니냐. 그때 내가 사 줄게.
아무트 잘 먹었다. 끄윽, 오늘 기분 땡이다. 환타스틱(Fantastic)!"
작년에 공부하면서 서로의 생일을 챙겨 준 일이 있었다. 고맙게도 경태는 그것을 기억하
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잠이 들자, 서영이 준 옷을 가져다가 손으로 빨았다. 마치
몹쓸 것이 묻어 있기라도 하듯 대 여섯 번쯤 비누칠을 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합리화시켜
보려고 이러저러한 생각을 해 보았지만 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으이그, 저 놈이 이런 면만
없다면 사람 같을 건데... .
도서관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다람쥐길을 걷고 싶어 기숙사 뒤쪽으로 발을 돌렸
다. 택시 한 대가 질주해 오더니 소정사 앞에다 술에 취한 원생들을 내려놓고 오던 길을 다
시 질주해 갔다. 술을 많이 마시는 날이면 경희대 입구에서 기숙사까지 기본요금보다 조금
더 나오는 거리이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택시를 잡아타고 올라온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
고 소정사로 들어갔다.
공기는 어느덧 서늘해져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다람쥐길 초입에 들어서자 가로등이 딸깍 소리와 함께 빛을 발하며 오랜만의 의무를 수행
하는 기쁨을 표했다. 나는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비록 생물은 아니지만 고맙기는 마찬가지
였다. 길은 사람 세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폭에 한 명이면 넉넉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도블록이 깔려 있었다. 한 발자국씩 찍어내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너무 빠르면 너
무 쉽게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게 사는 것 아닌가. 조금 더 들어가자 나는 완전히 섬을 이루
었다. 주위는 나무들로 그득해서 칠흑같은 어둠이 었고 같혹 나뭇잎이 바스락거릴 뿐 주변
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다음 차례의 가로등만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두려움이 일었다. 우
주의 공간에 나만 부유하고 있는 느낌.
누구도 우리를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도,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미래를 핑계삼
아 앞지르기를 습관화한다.
내가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시골에는 깨나 콩을 타작하는 도리깨도 있었고, 인력으로 물
을 퍼올리는 물자새라는 수차도 있었다. 가뭄이 계속 되는 여름날에는 동기간의 우의나 그
동안 다져왔던 이웃간의 정리도 다 여지없이 버리고 논에 댈 물싸움을 하였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씻은 듯이 화해를 하였다. 추수 때가 되면 다시 낫을 들고 품앗이를 하러 서로의 의
논으로 가 나락을 베기도 하고 홀태로 나락을 훑기도 하였다. 이웃마을 고모제에 놀러가면
그 마을 어른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뉘집 자식이냐?"
하고 물으실 때 할머니가 늘 가르쳐 주신 대로,
"학동 후살리 둘짼디요."
하였다. 그러면 그 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살떡은 자식 복은 있었던 갑여."
하며 가던 길을 가곤 했다. 어느 날은 덕석말이를 당했다는 아재의 문을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른들은 늘 비밀이 많았다. 그리고 애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것도 많았다.
그 후 나는 도회지로 이사를 와서도 골목대장을 하며, 집 앞에 있던 파밭에 파꽃이 탐스
럽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꽃으로 창이나 화살같이 서로 던지며 전쟁놀이를 할 요량으
로 그 꽃을 따다가 파밭을 모두 짓뭉개 버렸는데, 그 파밭 주인인 똥 푸는 절름발이 할아버
지는 어머닐 찾아와 허리를 굽신거리며 그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파값을
변상하고 나에게 아무런 꾸지람을 하시지 않았다. 큰 난리도 나지 않았고 동네가 시끄럽지
도 않았다. 그 때도 누가 뉘집 자식인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식'으로 어른들
이
평가되었다.
도시락 반찬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김치반찬은 냄새가 나서 싫어했다. 학용품은 더
많이 변했다. 잡기장이 노트로 변했다. 또 사는 동네도 많이 달라졌다. 급기야는 살인 사건
도 났다.
서울에 와서는 누구집 자식인지 밝힐 이유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고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되고, 길을 가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었다. 이게 20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의 변화였다.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감정이 상하는 놈은
굳이 볼 필요가 없다. 안 보면 그만이니까. 뉘집 자식인지 밝힐 필요도 없다. 그런 것까지
기억해 줄 만한 한량이 없으니까. 그러나 편해졌다기보다는 외로워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
다.
사랑은 외로움을 퍼내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사랑은 더 외로움을 찍어낼 뿐이다. 서영을
사랑하면 할수록 허전함과 더불어 잡히지 않을 그 무언가를 쫓아가는 듯한 풍족한 절망 끝
에 외로워짐을 느낀다. 언제 어느 때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외로움으로 변색되어 버린다.
그리움을 핑계로 서영을 만난 후에는 웬지 만나지 않았다면 더 아름다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사랑이란 그 대상의 실체가 아니라 그 대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허상인지도 모른
다. 그 허상에 대해 그리워하고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존재는
인식의 기초라고 하는 말에는 어느정도 공감을 하지만 왠지 사물과 인식은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다람쥐 길 중간에 있는 터널을 지났다. 발자국 소리가 연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내게만
들려와 가슴 한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여 불이 켜진 초소 앞에 놓여 있는 출
입자 명단에 학과, 학번, 이름을 기계적으로 써 넣고는 서부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참 좋은
잔디다. 나는 한 발자국에 두 번 힘을 주었다. 한 번은 잔디의 감촉을, 한 번은 땅의 기운을
느끼도록. 나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잔디밭 끝에 다다르자 숨이 차 올랐다. 그 곳
에 드러누웠다. 별이 많이 보였다. 가을이 가까워 온 모양이다.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등 밑
으로 습기가 차오름을 느낀다. 그 습기는 나를 물 속 깊이 가라앉힐 것만 같았다.
서영의 얼굴이 하늘에 가득찼다. 나는 눈을 감았다.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만한 사람도 많고 그 이상인 사람도 많다. 그런데
왜
난 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는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너라는 사
람이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또 다른 존재도 마찬가지로 사랑할 수 있
지 않을까? 내 사랑의 대상이 유일한 너인지를 확인하고 싶다. 그래 잠시 시간을 두어 보자.
사고를 너에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두어 보자. 그러면 유일성은 입
증될 것이므로.'
편지함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얼른 꺼내 보았다. 편지 봉투가 파스텔로 채색이 되어
있었다. 연욱이 서울에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자기네 학교가 다음 주부터 축제인데, 마땅히
놀거리도 없고 해서 화구나 사려고 온다는데 체류 기간을 일 주일이나 잡고 있었다. 우리
축제가 들어 있는 기간이었다. 나는 기숙사로 올라가며 수위실에 있는 전화 메모지를 보았
다. 기숙사 수위들은 외출 중인 원생들을 위해 전화의 메모가 있을 경우 그 노트에 죽 적어
놓아 두었다. 나는 혹시나 서영이가 전화를 햇나 싶어 뒤적인 거였는데 엉뚱하게도 고광열
의 전화가 메모되어 있었다. 나는 모임을 서울에서 하려나 보다 싶어 교환에게 시외 전화를
신청했다.
"어? 윤재아! 왜 이렇게 늦냐? 많이 기다렸다. 야! 다름이 아니고 고연욱이가 서울을 간대
요. 잠은 이모네서 자는데, 걔가 서울 지리를 잘 모르니까 시간 있으면 동생 좀 데리고 귀경
좀 시켜 주라. 다 큰 녀석이 외지에 간다니까 걱정이 돼서인지 엄마가 전화를 했더라고. 20
일 날 간다는데 네 전화번호 가르쳐 줬거든. 너도 적어 봐. 이모네집 전화 번호 가르쳐 줄
테니까. 일요일쯤 해 봐라. 준비 됐냐?"
광열은 제 할말만 다 하고는 전화세 많이 나온다며 끊어 버렸다. 나는 조금 난감했다. 공
부해야 할 것도 많고 축제 준비도 해야 되고, 일요일에는 서영이도 만나야겠는데 일이 중복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전화 번호를 주머니에 북 찔러 넣었다.
촌극 경연 대회가 가까워오자 각 과의 촌극에 대한 홍보물이 과학원을 가득 채웠다. 대의
원회에서 촌극 포스터까지 점수를 매기기로 하면서 그 열기가 더했다. 기계 공학과에서는 1
호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빨랫줄을 치고 거금을 투자해서 러닝셔츠 5장을 깃발처럼 매달아
수학기호를 이용해서 홍보하였다.
전기전자과는 포스터를 가장 많이 붙인 과였다. 삼국지의 인물을 컬러로 그려 넣어서 홍
보를 했는데 '아래 명단에 있는 분은 관람불가이니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해놓고 히틀러부
터 AIDS 감염자까지를 나열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재미없으면 아예 만들지를 않는다!'
라는 만용까지 부렸으며, 맨 끝에는 신문에서 큰 활자를 일일이 오려 붙여 가지고 '선착
순
입장객 100명에게 로열 승용차 1대씩 무료 증정'이라고 해 놓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로 '안 함'이라고도 분명히 적어 놓았다.
또 항공공학과는 잡지에서 여자 속옷을 선전하는 사진을 오려다가 떠억 붙여 놓고는 화끈
한 촌극을 보여 주겠다며 별렀다. 생물공학과는 과학원 대덕 이전을 빗대어 '지옥 이전'이란
제목의 촌극을 홍보했는데 '먼저 청와대를 대덕으로! '라는 카피를 성공시켰다. 우리 과는
진엽형의 도움으로 미모의 아가씨를 두 명이나 등장시킨 포스터를 준비했는데 '대풍 회장
선거 공약 : 전 룸살롱의 식권화! '라는 표어를 크게 부각시켰다.
날이 갈수록 촌극 연습은 진지하게 이루어졌다. 소품은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종이로 만
든 TV수강기, 풍선과 폭죽이었다. 조명은 리허설할 때 외부에서 들어오는 조명팀과 맞추면
되었다. 연습을 하면서도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종화형의 재치가 날이 갈수록 빛났다. 한
참 연습을 하고 나서는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종화형이
"민주당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서 앞으로 대통령 선거에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됐
다." 며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약간의 입씨름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YS편과 DJ편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서로 얼굴이 붉어질 만큼 격양이 되자 경태가 손을 흔들어 중지시켰다.
김대중 씨가 복권이 되고, 선거가 가까워오면서 과학원에도 두 김씨에 대한 출마 여부가
자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튼 양 김씨가 싸우고 있는 동안 민정당의 신임 총재는 미
국으로 날아가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면 김일성을 서
울에 초청하고 TV연설도 제의할 용의가 있다고 벌써부터 공약을 하고 다녔다. 그것도 미국
에서.
촌극 연습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실제 무대에 올라가면 떨릴 소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소
주를 먹이는 작전까지 세웠다. 연습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음료수를 사들고 랩으로 찾아갔다. 석사 2년차들은 밤을 새워 가며 논문을 쓸 것이
기 때문이다. 7호관 랩에는 형덕형과 정식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음료수도 남고 해서
옆 방의 선형통계 랩에 들렀더니 예상대로 희종형이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앉
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잘 왔다는 듯이 반갑게 맞았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우리가 기계냐? 조금 전에 들어갔다."
"잘 돼요?"
"어, 다 썼어."
희종형은 끼득끼득 웃었다.
"진도가 안 나간다. 죽겠다, 죽겠어."
"형은 다 해 놓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놀리지 마라. 저 창문에 커튼 보이지? 아무 하는 일 없이 담배만 두갑 정도 피우며 우두
커니 밤을 새우다가 저 커튼 자락을 보면, 아예 저기에 목을 매고 싶어져. 그러면, 편할 거
란 생각이 들지. 아마 어느 날인가 나 혼자 있게 된다면 진짜 맬 수도 있을 거야."
"아무려면,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으허,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현실보다 끔찍한 건 없을 거다."
몇 해 전에 모 과의 학생이 일 주일을 꼬박 새우고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희종형이 지나
친 밤샘으로 자신의 기력을 너무 많이 써버리지 않았나 싶었다.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공부 벌레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고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중의 하나
였다. 그는 그 고집을 자신의 학문 연구에 소진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억척
스럽게 공부를 했는데 꼬박 한 달을 연구실에서만 보낸 적도 있는, 한 마디로 독종이었다.
나는 오늘 밤에는 무언가 나올 것 같다며 연구실에 붙어 있겠다는 희종형을 말리지 못하고
기숙사로 올라왔다. 뭔가 금세 될 것 같은 그 놈의 예감이란... .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었다. 일요일 아침이다. 서영에게 전화를 안 한지가 꽤 오래 된 듯싶
었다. 어제도 기숙사 메모 노트를 열심히 뒤져 보았지만 연욱에게서 온 것밖에는 없었다. 나
는 그의 이모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연욱이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통화하기 어렵네요. 오빠 바쁜가 봐요?"
"바쁘기는 바쁘지. 하지만 네 녀석을 위한 시간은 따로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말해 봐."
"오늘 2시쯤 만날까요? 내가 아는 데라고는 고속터미널하고 남산밖에 없는데... ."
"그럼 남산 꼭대기로 와."
"뭐요? 오빠는 지금도 농담 잘 하는구나?"
"거기가 반포라고 그랬지? 그러면 거기서... 아니다! 내가 그 근처로 가서 전화하지.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너희 엄마가 물어내라고 할 거 아니냐."
"괜찮아. 나도 찾아갈 수 있다고.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앤가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면 이런 걱정 안 하지. 내가 갈게."
나는 굳이 찾아 오겠다는 연욱을 만류하여 내가 가기로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서영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만일 서영이가 만
나자고 하면 어떻게 얘기해야 할 것인지도 난감했고, 연욱을 만나러 간다고 말하기에는 왠
지 거북스러웠다. 다음 주면 여행을 떠나는데 자기를 만나지 않고, 그것도 관계와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나는 전화기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전화 벨 소리가 홀에서 들리고 우리
방의 부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놀랐다. 경태가 일어나 내
전화라고 일러 준 후 다시 누웠다.
누굴까? 분명히 서영일 것 같은데, 얘기를 해야 하나? 나는 전화기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
다.
"형, 저예요."
"어, 서영이구나."
"왜 통 연락이 없어요? 바쁜 거예요, 아니면 삐친 거예요?"
"삐치긴 누가 삐쳐? 그냥 바빠서 그랬지."
"오늘도 시간 없겠네?"
"으... 응."
"보고 싶지 않아요? 나 오늘 나가서 쇼핑도 하고 파마도 할 건데 파마하기 전에 잠깐이라
도 봐요."
"파마는 왜 해? 생머리가 좋은데."
"얼마나 귀찮은 줄 아세요? 여행 가서 매일 드라이로 펼 수도 없고. 애들이 오늘 하면 여
행 갈 때쯤 해서 예쁠 거래요."
"미워질 예상은 안 하나 보지? 그래 파마하고 집에 가서 쉬어. 나는 푸들 키울 생각은 없
는 사람이니까."
"화 많이 났구나."
"아냐... ."
나는 시큰둥해진 서영을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쿨쿨 자고 있는 한 마리의 돼지와 깡마른 여우 한 마리를 놔두고 식당으로 갔다. 식
당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번 주에는 집에 간 사람이 적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
밖에 나가려는 차림이었다. 평소에 보던 색깔이 아니라 좀 깨끗해진 옷들을 입고 있었기 때
문이다. 아마도 축제를 위해 여자 친구를 만나거나, 미팅을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절
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축제 때 뭐하고 지내나도 싶고, 경태가 마련한 미팅이라도 나갈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욱은 체크 무늬 티셔츠에 뽀빠이 바지를 차려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나왔다.
연한 화장을 해서인지 숙녀티가 나긴 했다. 나는 어쩐지 어색해서 그가 내 앞에 서기도 전
에 옆으로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옆에 따라오며 열심히 재잘거렸다. 어머니가 서울
가는 걸 말려서 혼났다는 얘기를 택시 안까지 달고 들어와 떠들어 댔다.
홍대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응', '아니'하는 간단한 대답 이
외
에는 다른 할 말이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도 가벼워졌고 과학원의 일들도 모
두 잊을 수 있었다.
연욱은 화방을 여럿 돌며 이것 저것 값을 물어보고는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며 물건을 샀
다. 나는 연욱의 세심함에 놀랐다. 집안이 부유해서 모자라는 것 없이 살아온 녀석인데 여간
꼼꼼하고 규모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적어 온 리스트 중에서 파스텔을 사주었다. 그
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녀의 쇼핑이 길어져 저녁 식사시간
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서영과 가끔 가는 종로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종로와 명동
거리를 거닐까 해서였다.
"네가 복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내가 며칠 전에 학자금을 탔거든. 그래서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데 나타나서 나도 행복하고."
"내가 시골에서 한양까지 왔는데 땅이라도 팔아서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우?"
"팔 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자, 뭐 먹을래?"
"우와, 비싸다. 뭐가 이렇게 비싸요? 학교 앞은 싼데. 난 이거 먹을래요. 오무라이스. 한국
사람은 밥 먹어야지."
"왜? 먹고 싶은 거 먹지?"
"된장지개도 팔아요?"
"됐다, 됐어. 나도 같은 걸로 먹지 뭐."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시면서부터는 연욱은 말수가 적어졌다. 아무래도 피곤할 거란 생
각이 들었다. 안색도 조금 어두워지는 것 같았고 손놀림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오빠! 애인 있어?"
"왜?"
"아니, 그냥."
"넌 있냐? 요즘 애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해어진다며?"
"오빠는 요즘 애들 아냐? 오빠하고 나하고 겨우 세 살밖에 차이가 안나요. 요즘엔 애들
이 없다니깐."
"그래서? 맞먹겠다는 얘기냐? 너 조명발 받으니까 이상해지는 거 아니냐? 하하하."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레스토랑을 나와 명동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쇼윈도우를 열
심히 바라보며 걷다가도, 수레에 벌려 놓고 파는 액세서리 상인들을 만나면 쏜살같이 뛰어
가 이것저것 만져 보고 귀에다 대보고 하다가는 도로 놓고 옆 수레로 옮겨갔다. 연욱은, 이
것은 어떠냐 저것은 어떠냐 귀에 걸어 보이며 연신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여자들만 북적대
는 그 주위에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창피해서 건성으로 "좋다!"만 연발했다.
그리고 가방을 파는 수레에 가서도 이리저리 걸어보고 들어보면서 어떠냐고 물어 댔다.
그녀는 그 중의 하나를 몹시 갖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얼마 전에 옷을 한 벌 샀는데, 저걸 매면 어울릴 것 같아요. 저 정도의 가방은 하나쯤 있
어야겠는데."
수레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도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나는 가방 파는 데로 가
값을 물어 지불하고는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굉장히 즐거워하며 내 옆에 달싹 붙었다.
"연욱아! 이제 밤도 늦었고 들어가자. 참, 어디 가서 전주 어머님께 전화 한 통 해드리자.
걱정하실 텐데."
"걱정은?"
"야, 고양이한테 생선 맡겨 놓은 꼴인데 걱정이 안 되시겠냐? 따라 와."
"맡긴 게 누군데... ."
연욱의 어머니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늦었으니 빨리 들어가라며 전화세 오른다고 어서
끊으라고 재촉했다. 나는 추석에 가서 뵙겠노라고 말씀드리고는 연욱에게 송수화기를 바꿔
줬다. 연욱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 사이에 끊어 버렸다고 투덜댔다. 반포에 도착하자 11시가
훨씬 넘었다. 밤 공기가 시원하고 좋았다.
"연욱이 땜에 오늘은 즐거웠네. 그럼 들어가서 쉬고, 잘 놀다가 내려가라."
"또 안 만나 줄 거예요?"
"나도 바빠. 축제 때 촌극 연습하는 거 도와줘야 되고 공부도 해야 되고."
"축제? 언젠데요? 야, 가 보고 싶다. 과학원도 축제 해요? 대학교처럼? 언젠데요?"
"으응, 이번 주 수요일부터 대학교 축제하고 비슷해."
"야, 재미있겠다. 나 거기 가면 안 돼요? 안 떠들고 조용히 있을게요. 이번 주에 ㅊ니구들
만나는 것 빼고는 할 일이 없단 말이에요."
"그럼 집에 일찍 내려가면 될 거 아냐? 아니다. 그래, 그러면 축제 때 와라. 촌극 경연 대
회가 제일 재미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보고, 원한다면 마지막 석림제도 같이 가자."
"우와! 신난다! 오빠, 고마워요. 그러면 수요일부터는 집에 붙어 있을게요."
"그럴 필요 없어. 축제는 밤에만 하니까."
"오빠, 오늘 너무너무 즐겁고 고마웠어요. 오빠도 그랬죠?"
"그래, 즐겁고 고맙고. 들어가서 푹 쉬어라."
연욱은 신이 나서 내 손에서 쇼핑 백을 받아들고 머리카락을 팔랑거리며 뛰어들어갔다.
나는 택시를 잡아 타고 과학원으로 돌아왔다. 약간 피곤해서 택시 안에서 깜박 잠이 들었
나 보다. 기숙사에 올라 가려다 도서관으로 갔다. 오늘 일을 생각해 보니 꼭 귀신에 홀린 듯
했다.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던 연욱이가 숙녀가 되어 나타나서 내 정신을 못차리게 해 놓고
는, 그녀가 얻을 것을 모두 얻어간 듯했다. 나는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책을 폈다. 하지만
도무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마음만 뒤숭숭해져서 읽어지지가 않았
다. 서영에 대한 걱정도 되었다. 나는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휴게실로 나갔다. 한표와 동하
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재, 니 어디갔다 왔노? 오늘 연습 때 왜 안 왔어?"
"아참! 그랬지. 뭔가 허전하더라니. 그래 잘 했어?"
"네가 없어도 된다는 걸 알았지."
한표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신 대답을 했다. 연습장에 내가 안 나타나자 승아가 훌륭하게
해냈다고 했다.
"다들 어디 갔어?"
"끝나고 경태가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해서 나갔다가 러브뱅크에서 한잔 했제.
그리고 이태원에 가려다가, 어떤 회사원이 거기서 AIDS 걸렸다며? 그래서 줄행랑 놓고 뿔
뿔이 흩어져서 우리는 도서관으로 왔지."
"윤재, 니 숙제한 것 좀 도고?"
"나도 지금 막 하려는 중인데."
"그라지 말고 좀 주라. 힘들어서 못하겠다."
"내일 아침에 줄게."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심호흡을 하고는 공부를 시작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
를 뽑아 들고 식당 앞 잔디밭으로 걸어나갔다. 촌극 경연 대회와 축제 홍보물들이 사방에서
조용히 나부끼고 있었다. 문득 학생회실을 올려다보지 불이 켜져 있었다. 아마도 축제 준비
를 위해 밤을 새웠나 보다. 사실 축제가 다가오면서부터 도현은 학생회실에 붙어 살았다. 도
서관에 있던 책들도 아예 그리고 옮겼고 그 곳에서 자고 먹고 했다. 학생회장이라고 봐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수업을 받는 데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숙제를 하면 도현에
게는 오픈을 했다.그러면 그는 그것을 이용해 좀 색다른 각도로 문제를 문제를 해결하여 제
출하면 되었지만, 퀴즈나 시험 준비는 스스로 해야만 했다. 우리들은 그의 건강을 걱정했다.
담배는 말도 못하게 늘어 있었다.
나는 학생회실로 올라갔다. 문을 사라마ㅕ시 열고 안을 살펴봤다. 권도현과 몇몇 간사들
이 소파와 의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담배 냄새가 역겹게 밀려 왔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와
깡통에는 담배 꽁초가 넘쳐 흘렀고, 도현의 손에는 담배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나는 문을
조용히 닫고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석향 음악제'를 보기 위해 쌍쌍이 강당 입구에 줄을 지어 서 있고 식
당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축제 기간에는 매일 저녁 특식이 나왔다. 그리고 학생회 주관하
게 식당 앞에 잔디밭 사이에는 '석촌'이라는 간이 주점이 세워져 술과 안주를 팔았다. 여기
저기 홍보물이 나부끼고 외부 사람들이 모여 들자 축제 분위기는 떠있었지만, 대부분 상대
적으로 시간이 있는 박사 과정이나 석사 1년차들만이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연욱을 불러서 보여 줄까 했지만, 오늘 저녁에 기숙사 층별 모임도 있고 내일 낮에는 촌극
연습도 있어서 시간이 모자랄까 봐 관두기로 했다.
식사를 후다닥 끝내고 도서관으로 올라와 숙제를 했다. 숙제는 매우 중요하다. 학점을 위
해서가 아니라 숙제를 하지 않으면 그 과목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체득될 수가 없기 때문이
다. 11시가 다 되어 기숙사로 올라갔다. 각 층에는 맥주와 안주가 오밀조밀 준비되어 있고
'모이라'는 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는 노트와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놓은 뒤 미리 와
있던 철우와 같이 홀로 나갔다. 홀에는 20-30명이 모였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들이므로
인사는 편하게 이루어졌다. 학생회에서는 각 층에 한 명씩 대표를 지정해서 진행하도록 배
려했는데, 우리 층은 당연히 경태였다.
경태는 유연한 화술로 우리 층 사람들의 분위기를 유도하였다. 우리 아래 방에 사는 사람
들은 우리더러,
"밤에 제발 쿵쾅거리지 말라."
고해서 우리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은,
"세탁기에서 세탁물 좀 빨리빨리 내가라."
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실 옆 방에 사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화장실 정확히 찾아주기."
를 바랐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로 오인하여 자기들 방을 열자마자 오줌울 누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때는 가서 못싸게 할 수도 없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어서, 치우는데 고생이 많다."
고 말해 우리들은 배꼽이 빠질 듯 웃었다. 그 방 사람들은 그것은 또 약과라며,
"어떤 사람들은 방문을 열자마자 오바이트를 해대고는 거기 쓰러져 그대로 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사람들을 방지하기 위해 문을 잠가 놓고 자는 경우 한밤중에 꽝꽝 문을
두드리면서 누가 화장실 문을 잠갔냐고 난리를 피우는 사람도 있다."
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화를 쓰는 문제도 말이 많았다.
"전화기 세 대가 있다고, 한 사람이 한 시간 이상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를
지성인답게 자제할 것."
을 부탁했다.
공동 생활을 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얘기들이 얼추 끝나자 경태는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하더니, 어깨동무를 유도하고 선창을 했다. 술을 한 사람당 한 캔씩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두 캔씩이 돌아갔는데 금세 동이 났다.
이때 도현이가 학생회 간부들과 순회를 하다가 우리 층에 들렀다. 모두와 악수를 나눈 뒤
이 프로그램의 취지에 대해 설명을 했다. 과학원생들의 가장 취읔한 고리인 유대 관계를 돈
독히 하는데 그 첫 번째 목적이 있었다고 말하자, 모두 박수를 치며 격려해 주었다. 이때 한
사람이 일어나
"술을 더 달라."
고 말하자, 학생회실 전화가 지금 술을 더 달라는 전화로 불이 난다며,
"이 자리는 술을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 보다 진지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이니 부디 축제
에 계속적인 관심을 가져 달라."
고 부탁하고는 사라졌다.
어느 층에선가 '아침이슬'을 불렀다. 우리 층도 따라부르기로 했다. 우리가 그 노래를 따
라
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층에서 같이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그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마치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아침에 도서관에 들러 숙제를 마무리하고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갔는데 사람들이
즐비했다. 오후 1시부터 '기적(Miracle)'이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기 위함인
것 같았다. 영화 상영은 도현의 공약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모두들 그것을 실행할지에 대해
서는 의문이었는데, 그 약속은 어김없이 지켜져서 매달 한 번씩 일금 1천 원에 거의 최신
영화를 강당의 대형 스크린에 비추어, 영화관과 전혀 차이 없이 우리들에게 선사해 왔다.
나는 점심을 대충 먹고 도서관에 박혀 있다가 촌극 최종 리허설을 위해 강당으로 내려갔
다. 우리는 순서에 따라 조명과 음향의 보조를 맞추어 연슴을 마쳤다. 다른 과 사람들은 우
리 연슴을 보고 칭찬이 자자했지만 사실 우리는 중요한 장면과 도구들은 보안을 위해 감추
어 두고 생략한 상태였다. 하지만 조명 팀에게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경태는 다른과 수
준을 본다고 그 곳에 남았고, 우리는 쌍쌍이 앉아 식사를 하는 이색 풍경 속에서 식사를 마
치고 잔디밭으로 나갔다.
개막제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모인 사람이 너무 적었다. 학새오히 간사들이 모여 숙의를
하더니 20명이 모인 잔디밭에서 사람 수에 상관없이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며, 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과학의 산실에서 돼지 머리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실
은 우리들만큼이나 비과학적인 요소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드물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달 초순에 과학원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과학원 자리가 6 . 25 때 격전지여서
많은 전사자들의 원혼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학하기 전에 만난 여자 친
구
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럴 듯한 상황과 맞
아 떨어져야 속도가 빠른 법이 아닌가. 따라서 그러한 실질적인 예가 수도 없이 나왔다. 사
실은 나도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었다.
개막제가 끝나고 바로 마당극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예정 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
었다. 학생회에서는,
"마당극을 한다고 공고했지만 사정상 변경이 돼서 남사당패의 공연이 있을 예정인데, 교
통이 막혀서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사과를 했다. 결국 8시가 되어서야 남사당패가 도착하고 서둘러 공연이 시작되자 많
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개막제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남사 패는 정규 공연을 마
치고 뒤풀이를 했다. 관람하고 있던 거의 모든 원생들은 한데 어울려 빙빙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잔디밭 위인데도 하도 많은 사람들이 갖은 춤을 추어 대서 뽀얀 먼지가 일었다.
나는 1층 접견실로 가 연욱에게 전화를 했다. 조금 전의 남사당패의 공연에 이은 뒤풀이
상황이 날 어느 정도 흥분시킨 것이 사실이었다. 연욱은 왜 이제 전화를 했냐며 투정으 ㄹ
부렸다.
"내일 5시 30분까지 과학원으로 올 수 있냐?"
거두절미 그렇게 물었더니.
"벌써 가는 길을 다 알아 두었어. 걱정 마."
하고 호기를 부렸다. 원래 과학원 출입은 어려웠지만, 축제 기간에는 초청장이 있으면 도
는 원생과 동행일 경우는 자유스러웠다. 단 건물 안으로는 여전히 들어갈 수 없었고, 안전
관리실 요원들이 곳곳에 모두 투입되어 보이지 않게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다.
내일 오전 오후 모두 수업이 들어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 올라가 수업을 준비했다. 서영은
오늘 출발했울 것이다. 일요일 이후로 한 번도 그녀와 통화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하지 않
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보지 시간대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서영은
나에게 여러번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았으리라. 과학원의 어느 곳이든
전화가 24시간 다 되지만 오직 한 곳, 기숙사만은 자정부터 아침 8시카지는 전화가 되지 않
는 섬이었다. 나는 서영에게 아침에는 전화를 하지 말도록 당부를 해두었었다. 그것은 과학
원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 메모 노트를 봤다. 어제 날짜로 서영은 두 번이나 나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 한
마디 전해 주지 못하고 떠나 보낸 것이 가슴이 아팠다.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울했
다. 그리고 걱정도 되었다. 그냥 가버렸으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날엔
꼭 가서 반겨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는 서영이가 선물로 준 옷을 입었다. 왠지 그래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아서였다.
연욱은 정문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건물을 설명해 주며 다니
다가 식당 앞에서 경태와 마주쳤다. 경태는 연욱을 보자 나의 어깨를 툭 치며 '결국 모셔
왔
구나, 녀석'하는 눈치였다. 나는 순간 '아니야, 임마'하는 눈치를 얼른 보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 박경태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경태가 무슨 말을 떠벌릴지 몰라 먼저 설명을 했다.
"친구 동생이야."
"짜식, 또 거짓말하고 있네. 알았으니깐, 나 지금 파트너 데리러 간다. 소품은 점검해 봤는
데 그거면 되겠더라. 마음 놓고 놀아라."
"야! 야! 경태야!"
경태는 손을 흔들며 눈을 찡긋하고 뛰어갔다. 나는 속으로 연욱을 서영으로 착각하고 있
는 경태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의 인사로 약간 위
축이 된 듯 토끼 눈을 하고 서성거리는 연욱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줄을 섰다.
가끔 마주치는 과원들이 눈인사를 하며 '너도 애인 있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는
나서서 일일이 '얘는 아니다, 내 친구 동생이야.' 하는 설명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연욱에
게
과학원의 제도나 원생들의 습성들을 설명해 주며 더 이상의 마주침을 피해 보려고 했다. 그
것은 내가 연욱을 만나고 있어서가 아니라 서영에 대한 나의 결백이 입증되기를 바라기 때
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긴 꼬리가 줄어 어느덧 우리도 배식을 받아 한참 만에야 빈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어렵게 강당의 한 자리에 연욱을 앉힐 수 있었다. 시작하려면 아직도
40여 분이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벌써 다 차버린 것이다. 자리를 구한 것은 여간 다행스
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맨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는 어제 모든 소품을 배역들에게 배
포하였기 때문에 쪼그리고라도 앉아서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다. 잠시 후 승아가 등
을 치더니 봉투를 건네주고 갔다. 그 봉투에는 폭죽이 들어 있었다. 우리 과 모든 사람들은
강당에 고루 퍼져서 촌극이 끝남과 동시에 일제히 폭죽을 터뜨리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분위기 작전이었다.
드디어 경영과학과의 촌극부터 시작되었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무대에 희미한 조명만이
비치고 있었다. 한 사람이 공포에 휩싸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먼저 나온 사람을 뒤쫓았
다. 슬로 모션이었다. 두 사람은 무대를 가로질러 갔다. 조명이 꺼지고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어둠은 계속되었다. 갑자기 영화관에서 익히 듣던 음악
이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아리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한다면 지금 준비하십시오. 피임약 xxx'
객석에서 숨죽인 웃음이 번져 나왔다. 영악하게도 영화관의 피임약 선전을 녹음해 온 것
이다. 그리고 무대 한 면이 다시 밝아 왔다. 화려한 황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조금 전 보다 더 흉악하게 생긴 사람이 그 뒤를 쫓았다.
경영과학과는 이런 식의 실험적인 촌극을 꾸몄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뒤쫓아 다니는
절대 공포였다. 그리하여 과학원생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기 위한 시도인 듯했다.
다음은 전기전자과의 차례였는데, 이들은 행복의 함수를 돈과 술과 섹스로 표현하였다. 그
리고 행복을 최대화(Maximize)하기 위해서 이들 변수를 어떤 조건에 두어야 하는지를 밝히
고 있었다. 특히 술을 대변하는 선비 복장을 한 배우는 연기력이 대단했다. 그는 막걸리 병
을 들고 나타나 술의 역사부터 따져 나갔다. 술이란 선사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조개무덤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술을 한 잔 마시고 꼬막을 까서 입에 떨어넣고 뚝뚝
던진 것이 한 군데에 모여 조개무덤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술이 약간 취한 목소리로 연기
를 해 나갔는데, 우리는 그가 분명히 술을 마시고 출연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전기전자
과의 연기가 끝나자 박수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다시 인사를 나온 그는 말짱
했다.
차례차례 진행이 되어 나가다가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었다. 그대 어제 석향 음악제에서
과학원의 역사 이래 처음 실시했다는 가요제에서 우승한 사람이 나와 노래를 했다. 그의 잔
잔한 목소리를 관중을 매료시켰다. 그 노래가 끝나자 다시 촌극이 진행이 되었다. 드디어 우
리 과의 순서도 돌아왔다.
나도 가슴이 떨렸다. 사람들이 잘해 줄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화형은 대단했
다.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이 대사를 꾸며 나갔다. 그리고 그의 대사마다 관객들의 옷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어떻게 보면 우리 과 촌극은 그의 원맨쇼나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촌극
이 끝나자 강당은 폭죽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역시 관중들은 그 마지막의 폭죽을 보고 준비
성에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와아, 와.
촌극이 끝났다. 경태는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과가 우승을 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너
무 늦어 있었다. 벌써 11시였으니까. 택시를 잡는 것도 전쟁이었다. 연욱은 신경쓰지 않고
즐거워했다. 이모네 집 앞에서 연욱에게 잘가라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니까 나를 잡더니
물었다.
"내일은 애인하고 갈 거예요? 아까 보니까 내 애기 많이 했나 보던데."
"아냐, 내일 올래?"
연욱은 심각했던 얼굴을 금세 고치고는 활짝 웃으며 내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그럼요. 제가 한양까지 올라와서 뭐 할 일 있겠습니까? 내이른 일찍 만나서 커피도 좀
사주세요. 그리고 내가 전해드릴 것도 있고요."
"그게 뭔데?"
"나쁜 건 아닐 테니깐 걱정마시고요. 내일은 어디에서 몇 시에 만날까요?"
"그래, 그러면 내일 2시쯤에 우리 택시 탄데 기억하지? 그리 와라. 며칠 동안 연락도 못
했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했는데 그 벌로 커피는 사야 추석에 널르 다시 볼 수 있겠지?"
"좋아요, 그럼 들어가세요. 나 땜에 너무 고생하네, 고마워요. 갈 수 있죠?"
"그럼, 나는 세 살이거든. 그래 잘 자라."
기숙사에 올라가다 보니 전화가 또 왔었다. 서영의 골난 표정이 눈에 선했다. 될 대로 되
라 싶었다. 그리고 일요일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열심히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요일
은 서영이가 돌아오는 날이니 오후 8시부터는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침 나절까지 늘씬 자고 일어났다. 경태와 철우도 자다 일어나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경태야, 축하한다. 너 때문에 우승한 거야."
"잔말말고 너 어제 서영이 데리고 왔던데 어떻게 된 거냐? 예쁘더구면."
"걔 내 친구 동생이야. 서울에 들렀다가 시간이 맞아서 온 거야. 서영이는 ... ."
"놀고 있네. 거짓말 좀 하지 마라. 친구 동생이 학기 도중에 왜 와? 그리고, 할 일 없이
오빠 친구한테 찾아와서 축제 파트너까지 해준단 말이야? 말 같은 말을 해야지."
"걔네 학교도 축제래. 그리고 걔네 오빠하고 나는 친해서 고등 학교때... ."
"자기네 학교 축제 놔두고 다른 데 가서 노는 사람이 어디 있냐? 둘러대지 말고 솔직히
말해. 말한다고 어디가 덧나냐?"
"아이고, 복장 터지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너 촌극에서 배역 맡을 걸 그랬다. 저 능력을 괜히 썩였는데."
"알았다. 씻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이고, 싫다. 우리 라면이나 먹자."
"좋는!"
경태와 철우는 모종의 약속이 있는지, 라면으로 배를 불리고는 스쿠터를 타고 나갔다.
나는 연욱을 데리고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연욱은 흰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잡히
는 느낌이 편지 같지는 않았고 얼른 펴 보기도 뭐해서 그녀에게 뭐냐고 물었다.
"나도 몰라요, 엄마가 주셨어요."
나는 봉해지지 않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어머님도 참... 어떡하지? 아무튼 주시는 거니까 아주 감사하게 받겠다고 말씀드려라. 그
리고 이런 거 주시면 안 찾아뵐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려. 나도 이제 성인이고 돈도 생기는
데... ."
"오빠는 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잘 생각하지."
"장난하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너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본 녀석이라 깜찍하고 귀엽고 뭐 그렇지, 왜? 웬 녀석이 너 밉
다고 그러든?"
연욱은 나의 대답에 한참을 망설였다.
나도 그녀의 의도가 잡힐 듯도 했다.
"사실 서울에 올라오는데 힘이 많이 들었어요. 다 큰 계집애가 타지에 가서 일 주일씩이
나 있다가 오는 걸 엄마가 쾌히 승낙하실 리가 만무하다는 겉 오빠도 잘 알잖아요. 그런데
제가 엄마한테 졸랐어요. 서울에 가서 오빠를 보고 오고 싶다고요. 그랬더니 의외로 엄마는
승낙을 하시고..."
나는 긴장이 됐다.
이 상황을 빨리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 나는 오빠가 좋아요. 사실은 중학교 때부터 오빠를 좋아했어요.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오빠가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됐다며 인사하고 간 후 나는 많이 울었어요. 영원히
못 볼 사람 같았는데 가끔 오시더군요. 대학에 올라와서는 사춘기 때 올 수 있는 그런 감정
이 아닐까 하고,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해봤는데 오히려 그 때마다 오빠는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어요. 지난번에 오빠가 왔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더라고요. 청
춘이라는 환각 속에서 나의 열정을 꿈꾸고 싶었어요. 그리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을요. 그래서 이번 축제 기간을 기회로 잡아 올라온 거예요."
난감했다. '교복 자율화 세대는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심하다. 또한 이것은 연욱
이 나에 대해 오랜 세월을 간직해 온 허상일 뿐이다. 적어도 나의 생각은 그랬다. 그렇다고
연욱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연욱은 나의 말을 기다리듯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조금 급해졌다.
"사실 나도 네가 이렇게 커서 나타나니 놀랍다. 그리고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사랑이란 적어도 당사자들이 함께 공감하고 있어야 어느 한 쪽이
불행해지지 않아. 너도 나를 이해하겠지만 나는 지금 상당히 당황하고 있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때론 시간이라는 공백은 사람들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거든."
나는 담배를 테이블 위에 수직으로 톡톡 쳐서 밀도를 높인 후 피워 물었다. 담배 연기가
조명들이 내리쬐는 사이로 달려들었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연욱을 데리고 서부 잔디밭에서 벌어지는 석림제에 참가했지만, 머리속은 단 한 가지의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에서 멋어날 것인가. '해바라기'의 미니 콘서트가
있
고, 레크레이션을 하고, 조명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지만, 머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앉을
수가 없었다. 단지 과학원 전통이라는, 마지막 날의 석림제에서 발표하는 기숙사이용 우수자
중에 우리 방이 뽑혔다는 것밖에는. 그것도 가장 지저분한 방으로 말이다. 어디선가 경태가
늠름하게 뛰어나가 도현으로부터 부상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다. 석림제가 끝나고 셔틀버스
를 타고 나와, 연욱을 이모네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혼자 보낼까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
었다. 연욱은 내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오빠 우리 언제 다시 만나죠?"
"이번 추석 때 보면 되잖아."
"그렇게 말고요... 편지할게요. 오빠! 고마웠어요. 담배 많이 피우지 말고 밥 잘먹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편지할게요."
"그래, 너도."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걸었다.
나는 여자가 있다고 말해 버릴걸. 아니야, 그 녀석에게 너무 상처가 심할 거야. 다른 사람
도 아니고 광렬이 동생 아닌가. 이렇게 시간을 두고 있다 보면 어느 정도 나에 대한 환상을
버리겠지. 사람의 감정이라 ㄴ얼마나 무모하고, 얼마나 라디칼(Radical)한가.
한참을 걷다가 아차 싶었다. 오늘은 서영이가 오는 날인데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었다. 나는 허겁지겁 과학원으로 돌아와 메모를 보았다. 전화 온 것이 없었다. 나는 불안했
다. 일단 서영의 집으로 가 보았다. 그녀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나야, 잘 갔다 왔어?"
"편지 받았어요?"
"아, 아니?"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나는 분명히 속달로 부쳤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끊어요."
"서영아! 미안해 편지함에 가보지를 못했어."
"알았어요. 아무튼 좀 쉴래요."
편지함에는 속달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두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처음 보낸 편지에는
토요일 9시에 '자그마한 공간'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있었다.
11. 사이코
축제가 끝나자 과학원은 다시 어둠으로 뒤덮인 듯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
람들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 후에 식당 앞에 모여 이야기하
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건물 밖에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과원들과도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만나기가 힘들었다. 가끔 휴게실에서나 볼 수 있었고 밤늦게 야식
코너나 술집에서 스치듯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마치 모두 자신만의 굴을 파고 동면에 들
어간 것 같았다.
벌써 쌀쌀한 기운이 조석으로 날아와 가을을 듬뿍 안겨 주고 있었고, 낮에는 따가운 햇볕
이 내리쬐어 여룸에 수해로 고생한 농촌에는 나락이 잘 여물어 갈 듯했다.
곧 중간고사를 본다는 부담 때문에 하루하루가 무척 힘들게 돌아갔다. 공부라는 것이 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흥미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일일 때는 넘어야 할 장애물로 자신
과의 싸움도 그만큼 치열해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깔깔대었고, 절대
로 다른 일에 시간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었다. 모처험 기숙사에 올라와 모두 같이 있게 되었는데, 돌연히 2층 침대에서
1회용 라이터를 바닥으로 던졌을 때 이것이 깨지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이 붙었다. 철우는
"절대 깨질 리가 없다."고 했고 나는 "반드시 깨질 것." 이라고 단언했으며, 경태는 "내기를
걸어라."고 종용했다.
결국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장판이 깔리지 않은 입구의 바닥에
힘껏 라이터를 던졌다. 순간 팍!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기며 라이터는 박살났다. 그러나 우
리를 감탄하게 한 것은 그 불꽃이었다. 우리는 형광등을 끄고 다시 해보았다. 파랗게 인을
뿜으며 타오르다가 찬란하게 꺼지는 불꽃.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라
이터 한 박스를 사다가 아예 창문을 열고 기숙사 앞의 시멘트 바닥에 던져 보았다. 그리고
는 '까오' 소리를 연발하며 즐거워했다.
기숙사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어느 방에는 TV, 냉장고, 오디오까지도 있었다. 우리 옆
방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들은 광다이오드를 이용해서 해가 뜨면 아람을 울리는 장치며, 원
하는 시간에 가전 제품을 작동하게 하는 장치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한번은 기숙사를 올라오는데 그 방 주인 중의 한 사람이 무선으로 조종되는 자동차를 가
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열심히 구경했다. 재간이 여간 뛰어난 게 아
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우리 과를 선정한 것에 후회를 하고는 픽 웃었다. 아들을 낳으면, 하
나 사서 반드시 내가 가지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 올라가는 계단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커피가 담겨진 종이 컵을 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마치 동상 같았다. 나는 도서관에 올라가 정리를 하다가 노트가
모자라 매점으로 가는데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아까처럼 꼭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그 옆
을 지나가면서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 잔 속에 시선을 묶어두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트를 사가지고 올라오는 데도 마찬가지였다. 못 되어도 30분은 지났을 것 같았다.
"언젠가 그 사람이 계단 한 개 올라가는데 30분 걸리는 걸 봤다. 계단 한 개에다 우주를
건너는 시간을 거는 것 같았어."
철우가 말했다.
"과학원에 도사 만지."
철우와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동하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수척한 얼
굴에 머리는 감지 않아서 떡이 되어 있었다.
"야, 임마! 머리 좀 감아라."
"니는 잘 감나? 난 지금 일 주일째 못 감고 있다. 처음에는 가려운데 그 고비만 넘기면
신경 안 쓰인다. 내가 이번에 내친 김에 신기록 세울끼라. 수학과 선배가 3개월 동안 안 감
아서 머리가 세 갈래가 되었다드 . 그래서 난 한가닥으로 만들끼라. 우습나?"
"아휴, 이 짐승! 저리 가!"
사실 우리는 씻는데 인색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시간대에 맞추어 샤워를 한다는 것은
그 날의 일진이 아주 좋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을 잡았다 하더라도 우선 잠을 자기가
바쁘지, 결코 샤워장으로 달려가게 되지는 않는다. 경태만 봐도 세수 안 하고 나가는 때가
태반이었다. 사실 우리들의 몰골은 게으른 사육사 밑에서 자라는 짐승 같은 꼴이었다. 하지
만 개중에는 더욱 더러운 사람이 있었다.
물론 천성적으로 더러움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이는 시간을 그만큼 벌게 되므로 더
행복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시간에 쫓기다 보면 이빨 닦는 것도 일이어서 세면장에 가기
가 여름에 재래식 화장실에 가는 것 보다 싫었다. 철우도 더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철우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두 개나 됐는데, 하나는 하룻밤 사이에 스물 한 번이나 오바이트한 후
대충 닦아내고는 한 달 동안이나 청소를 하지 않고 지낸 대기록이었다. 하지만 제 몸 하나
는 잘 닦는 편이었다.
추석 이후의 중간고사를 걱정하며 7호관 랩으로 향했다. 1호관 랩은 남선형도 남선형이려
니와 교수님 방이 있기 때문에 발길이 향해지지 않아서 자연히 7호관으로 자주 가게 되었
다. 논문 준비를 하고 있던 형들은 내가 들어서자 잠시 쉬자며 의자를 둥그렇게 만들어 이
야기 꽃을 피웠다.
"윤재 너희 방이 가장 더러운 방으로 뽑혔다며?"
"내가 도현이 찾아가서 따져야겠어요. 우리 방이 그렇게 까지 더럽지는 않은 것 같은데...
."
"그거 매우 공정하게 심사하는 거야. 생활간사가 일일이 기숙사 방을 방문해서 체크하고,
또 청소하는 아줌마들한테 물어봐서 결정하기 때문에 하루 어질렀다고 주는 건 아니라고.
너희방이 더럽다는 걸 과학원에서 모르면 간첩이지. 누가 너희 방 찾아 가디?"
형덕형은 내가 불평을 하자,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듯 심사의 공정성에 대해서 설명
을 했다. 나도 심사 제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도현이가 우리를 편하게 생각
해서 주었다는 심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식형이 자기 방 룸메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말도 마라. 우리 룸베이트는 성질이 이상해서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는 자기 책상에다 일
렬로 정돈해 가며 비벼서 끊다. 결국에 가서는 책상 가득히 담배 꽁초로 덮이게 되는데, 그
사람은 그제서야 싹 쓸어내고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다른 것은 다 놔 두더라도
그 담배 냄새가 얼마나 역겨운데."
"미리 치워 버리면 되잖아요?"
"맞아 죽으려고? 언젠가 한번 치웠는데 노발대발 하더라. 자기 스트레스 푸는 유일한 방
법이라나."
"심하다! 우리 방에 담배 꽁초가 그득한 깡통에서 흘러 나오는 냄새조차도 맡기가 역겨운
데."
"그래도 견디고 안 치우잖아! 그래서 너희 방이 뽑힌 거야, 임마."
나도 정식형으로부터 읽을거리를 받아서 기숙사로 올라왔다. 불이 꺼진 걸 보면 이 녀석
들은 오늘 분명히 밤을 새우고 돌아올 보양이었다. 서영에게 편지를 쓰려다가 펜을 집어던
져 버리고는, 잠이 오면 그대로 잘 요량으로 침대에 누워 논문을 붙들고 읽었다. 그리고 나
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지 덜컹 문이 열리고 소란을 피우는 소리에 문득 깨어났다. 경태와
철우말고도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다름 아닌 병호형이었다. 그들은 술이 극도
로 취해 있었다.
"놔! 놔! 나는 떨어져 죽어야 돼!"
"형! 그만 하세요. 이 창문에는 철망이 있잖아요."
"그래! 맞아. 나가야지, 놔! 놓아!"
"형, 이렇게 죽으면 개 값밖에 안 돼요."
"개 값? 그래, 난 개다. 놓아!"
"자고, 내일 아침에 죽어요. 우웍."
철우는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병호형을 죽지 말라며 잡고 늘어지다가 급기야는 선 채로
그 자리에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태는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누워 자빠졌고 철우는
침대 다리를 잡고 오바이트를 하고, 병호형은 경태의 침대에 나뒹굴어졌다.
나는 다시 누워 잠에 들려고 했지만 머리가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철우가 잠잠해지자 경
태와 병호형은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경태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나
는 일어나서 병원에라도 데려가야되는 것 아닌가 해서 주저주저 하고 있는데 잠시 후 괜찮
아지고는 했다.
부스럭거리며 병호형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쿵쾅거리며 걷더니 장롱 문을 열었
다. 그리고는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쏴!' 하고 오줌을 눠 버렸다. 지금 말
린
다고 해서 그칠리도 만무하고 어떻게 해야되나, 가슴을 조이면서
'장롱 바닥에 둔 것이 무엇이었던가.'
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철제 캐비닛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기 어떤 물건이 있는
지 생각나질 않았다. 오줌은 많기도 해서 한참이나 걸렸다. 다 눈 병호형은 바지 지퍼를 올
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장롱 문을 닫고는 침대로 가서 눕더니 코를 골았다.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할까 고심을 하다가 일단 일어나서 내려가 스탠드를 켜 보았다.
순간 나는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장롱 밖으로 흘러 넘친 오줌 줄기가 경태가 뒤집
어 쓰고 있는 담요로 길을 잡아 이미 거의 다 스며들고 있는 중이엇다. 철우의 오바이트 작
품은 문 앞에 좍 펼쳐져 있었다. 나는 도저히 이 상황에서 견디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판단
하고 일단 기숙사를 나왔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휴게실에 가서 자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리가
멍한 상태여서 공부를 하는 것도 그리 효율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커피를 뽑아들고
앉아서 서영과 연욱을 생각해 보았다. 서영의 졸업여행을 전후로 해서 이상하게 얽혀버린
실타래를 풀어야 하겠는데 정리가 쉽지 않았다. 사실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하
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연욱과의 만남에 대한 죄의식이 작용한 탓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영을 제외한 다른 여자를 그리 오래 만나본 것도 처음이었고,
여자로부터 그런 고백을 받아본 적도 처음이었다. 사실 연욱의 고백 자체보다는 그녀가 한
말이 나를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청춘있었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열정에 빠져보았는가?'
'내가 서영을 사랑한다면 그녀에 대한 열정이 존재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나의 억압된 열정은 참인가?
점심을 먹고 걱정이 되어 기숙사로 올라갔다. 철우와 병호형은 없고 철우의 오바이트 자
리엔 수해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신문지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경태는 오늘 새벽에 덮고
잤던 담요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지린내인 듯도 하고 맥주 썩은 냄새인 듯도
한 역겨운 냄새가 방 안을 온통 흔들어 진동했다.
나는 창문을 열어제치고는 발로 경태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흔들면 흔들수록 그는 담요
를 더 뒤집어쓰며 몸부림 쳤다. 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제서야 그는 투덜대며 일어나더
니 다짜고짜로 "몇 시냐?"고 물었다. 내가 2시라고 대답하자 수업에 늦었다며 법석을 떨었
다. 나는 그를 붙잡아 앉히고는 어젯밤 일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술이 덜 깨서인지 얼굴을 한번 찡그리고는 나가버렸다.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절대로 함구할 것이며, 오늘 저녁 식사 후에 방으로 모이라고 소리를 쳤다. 그것은 소
문이 빠른 과학원 내에서는 이런 비밀은 지켜 줘야 하기 때문이고, 대청소를 할 생각이었다.
나는 장롱 문을 아무 생각 없이 열었다. 지린내가 확 덮쳐 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코를 막
고 서 있다가 그만 아찔해지면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다름 아닌 서영이가
사준 옷이 그 속에 있지 않은가? 흠뻑 젖어 가지고. 나는 망연자실 한참을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수숩해서 이 비운의 옷을 들고 세면장으로 가 대야에 세재를 듬뿍 풀어 담갔다.
저녁 식사 후 들어온 경태와 철우는 담요를 내다버리고 방바닥을 치우고 부산하게 움직였
다. 우리는 이 상태에서 다시는 더 어질지 말기로 하고, 나는 어제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이
야기 해주었다.
"우와! 내가 병호형 오줌을 뒤집어쓰고 잤단 말야? 잠깐 있어라. 샤워 좀 하고 올게."
"지금 물 안 나오니까 이따 밤에 하도록 하고. 병호형이 어제밤 왜 죽으려고 했는지나 물
어보자?"
"왜, 석사2년차 병 있잖아. 고 3병보다 더 무섭대. 논문병이라고나 할까? 병호형은 어저께
술이 좀 취하니까 차도로 막 뛰어들고 기숙사 올라오면서도 창문으로 계속 뛰어들겠다는 거
야. 말리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근데 왜 우리방에 와서 잤냐?"
"소정사까지 바래다 주기도 힘들고 형도 여기서 자겠다고 하잖아. 누가 오줌 싸고 싶어서
온 줄 알았냐?"
경태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철우는 자신에게 화제의 불똥이 튈까 봐서 그런지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경태는 갑자기 깔깔대며 웃더니 신무형 이야기를 꺼냈다.
"윤재야! 요즘 신무형 본 지 오래 됐지? 얼굴이 엉망이 됐대. 병호형한테 들었는데 언젠가
아침이 다 되어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오더래. 술은 잔뜩 취해 가지고 옷으 ㄴ여기저기 찢
어지고 누구하고 싸운 듯이 피를 뚝뚝 흘리며 들어왔더란다. 병호형이 자초지종을 물으니까,
기숙사를 올라오는데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서 싸웠다나. 상대편 인원이 너무 많을 뿐 아니
라 아무리 패도 쓰러지지 않더라는 거지. 알고 보니까 기숙사 올라오는 길에 소나무 밭 있
잖아? 그 속에 들어가서 소나무들하고 밤새워 싸웠다는 거야. 말이 되냐?하하하.
나는 하도 우스워서 찜찜했던 마음이 다 가지는 듯 했다. 석사 2년차들은 논문 심사가 다
가오자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음날 게시판에 학생처장 명의로 공고가 크게 나붙었다. 유정사 위의 타기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가 타인에 의해 심하게 손상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과
학원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현실로 미루어 볼 때, 내부 워생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
으므로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라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는 한두 살 먹은 유치원도 아니고 적어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만 있는데, 함부로 타인의 재산을 손상시키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이것은 원측이 보안상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기 위하여 원생들을 범법자의 개연성을 가
진 집단으로 규정하려는, 원측의 무모하고도 비겁한 음모라고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추석을 이틀 앞두고 전주로 출발했다. 전주에 도착해서 잠에 빠져 들었다. 책은 많이
도 가방에 넣어 왔는데 그 이유를 잊어버리고 계속 자기만 했다.
"야, 이좀아! 건강을 생각해야지. 이렇게 늦게 일어나면 어떡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신선
한 공기도 마시고 운동도 해야지! 난 네 놈 보면, 너 ㄴ아마도 인류 역사적 관점에서 퇴행
하고 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카디안 리듬이라는 게 있거든, 그것은 인류가
생존해 오면서 몇천 년을 두고 알게 보르게 배인 습성이야.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는 잠을
자고,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 일련의 정상적인 리듬 말이야. 원시인들은 너처럼 낮에는 자
고 밤에는 사냥을 나간 것이 분명해."
늦잠을 자고 있는 - 적어도 아버지 기준에는 지금은 6시 반이므로 - 나에게 장난기 있게
깨우시다가 나를 안고는 일장 훈계를 했다.
"아버지, 그거 근거 있는 말씀이세요? 원시인이 왜 밤에 활동을 해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이고 짐승들보다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데. 그럼 조개 무덤도 밤에 만들어졌겠네요?"
"밤에 움직였다면 그런 줄 알아!"
"아버지! 저는 변종일 뿐이에요. 자연도태의 법칙을 보세요. 종들 사이에는 커다란 가변성
이 존재하고, 어떤 특정 종의 개체수는 그 생계 유지 수단 이상으로 증대하는 경향이 있는
데, 그 결과 종들 안에서와 종들사이에 생존을 위하 ㄴ투쟁을 하며, 이 투쟁에서 가장 강한
자와 가장 적합한 자만이 생존하게 되다. 아셨어요? 그래서 저는 가장 강한 좀이 되기위해
조면하는 거라고요."
"드디어 구나, 요놈!"
"아이고! 아야!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
아버지는 군밤을 한 대 주신후 방바닥에 나를 던져 버렸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아버지를 배웅한 다음 방에 퍼져서 잠을 자고 있는데, 윤지
가 와서 전화왔다며 받아보라고 흔들어 깨웠다. 내가 비몽사몽 간에 누구한테서 왔냐고 붇
자, 여자라고 호기심을 발라가며 대답했다. 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혹시 연욱이 아닐
까? 윤지는 아예 전화기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야! 저리가! 어린애가 오라버니 전화를 엿들으려고."
"전화기 참 더럽네! 잘 닦아야지. 신경 쓰지마. 난 전화기나 닦고 있을테니까."
윤지는 싱글거리며 전화기 옆을 떠나지 않고, 화장지로 먼지 하나 없는 전화기며 받침대
를 문질러대고 앉아 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나예요, 연욱이. 내려왔으면 전화를 해야지. 어제 하루 꼬박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
으면 어떡해요?"
"어, 어제 늦게 도착했어... ."
"나올 수 있어요? 오랫만에 고향에 왔으니까 내가 멋진 곳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난 멋진 곳을 찾았는데?"
"어딘데요?"
"여기, 우리집. 원없이 잘 수 있거든."
"그래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까요?"
"얘가? 무슨 소리야? 그래그래, 내가 나갈게."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자, 윤지가 코 앞에 다가와 누구냐고 속삭이듯 물었다. 나느 ㄴ대소
롭지 않은 듯 윤지를 밀치며 대답했다.
"넌 알 거 없어! 아무도 아니야."
"그럼 유령인가 보지? 목소리가 예쁘던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같기도 하고... 혹
시 연욱이 아니야?"
나는 가슴이 철커덕 내려앉을 듯했지만 태연한 척 잡아떼었다.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까 연욱이가 분명해. 어째 오빠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더라니.
"연욱이가 누군데 그래? 나 소개 좀 시켜주라."
"우와! 이 능청! 광렬이 오빠 여동생, 고연욱! 아냐?"
나는 잡아떼는 것을 포기하고 윤지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맞아. 연욱이야. 그런데 넌 어떻게 그걸 알았냐?"
"죄다 털어 놔 봐. 내가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나는 망설이다가 대충 그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윤지는 연욱과 서로 이름 정
도는 나를 통해 알고 있엇는데, 대학에 올라와 잠깐 같은 서클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연욱이가 캠퍼스에서 우연히 만나서는 나에 대해서 묻더란 것이다. 여자 친구는
있느냐, 과거에 여자를 사귄 적이 있느냐는 등등.
"고게 시누이가 될지도 모르는 나를 무시하고 오빠하고만 통화를 하다니. 오빠, 진짜 여자
친구 없어? 하기야 오빠 같은 쑥맥이 여자 친구가 있을 리가 만누하지. 연욱이 걔괜찮아. 집
안도 웬만하고, 생긴것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성격은 뭐 요즘 애들이지. 캠퍼스 안에서 다른
남자랑 걸어다닌 것은 본 일이 없어. 잘 해 봐."
나는 뭔가 더 캐낼 것이 있다는 듯이 빈정거리며 물어대는 윤지를 피해 약속 장소를 나갔
다. 깔끔하고 잘 정돈된 커피숍이었는데, 과연 지방 도시는 소비 중심의 경제 행위가 우선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좁은 도시에 이 정도로 큰 가게가 운영될 수 있다는 자체가
그러한 생각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내가 들어서자, 연욱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 같아서
얼른 자리에 앉았다. 연욱은 연신 웃는 얼굴로 학교 생활과 집안 얘기로 꽃을 피웠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편지도 보내려고 했지만, 그 속에 넣을 예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아직 부치지 못했다며
자신의 애기만을 조잘 거렸다. 나는 그 편이 오히려 편했다. 나에게 관한거야 뻔한 거고 입
을 벌려서 이것저것 늘어 놓을 기분도 아니었다. 연욱은 더욱 생기가 있어졌고 훨씬 발랄해
진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얘기를 했더니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광렬 오빠도 그리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단지 자신이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부탁했다는 사실이 의도적인 것처럼 보
일까 걱정했어요. 그렇다고 오빠가 우리의 관계를 아는 것은 아니에요. 친구 미림이한테도
의논을 했었는데, 아참, 미림이 잘 모르죠? 미림이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에요. 언제 소
개시켜 줄게요. 아무튼 미림이도 오빠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요. 부러운 모양이에요. 그리
고 사실은... 윤지도 만나봤어요. 대학 1학년 때는 윤지랑 같은 서클에서 활동도 했었는데,
나는 바로 나왔죠. 윤지가 그런 얘기 안 해요? 언제 우리 놀러가요. 저는 놀러 가 본적이...
."
그녀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수렁으로 자꾸 빠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이수렁에서
벗어날 방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제 와서 서영을 핑계대어 빠
져 나갈 수도 없고, 밋밋하게 앉아 있다가는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우선 솔직하게 서영의 존재를 알리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꾸 사실을
은폐하고 질질 끌다가는 어떤 낭패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서영과의 관께르 ㄹ이
야기하면 연욱도 현명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욱은 그칠 것 같지 않았던 말을 멈추고는 시계를 보더니,
"좋은 식당이 있어요."
하며 나가자고 했다. 나는 연욱에게
"밥은 늘 먹는 거고. 어디 좋은 술집에나 가자."
고 제안했다.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해야 잘 될 것 같았다. 우리가 들어간 술집은 칸막이가
있고 형식적으로 각 칸마다 차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동동주와 두부김치를 주문했는데 다른 안주가 여럿 더 나왔다.
내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담배를 피워 대며 술잔을 비우자, 연욱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건배를 하자며 술잔을 내밀자 씩 웃
더니 한 모금 마셨다.
"연욱이 술 잘 마시는구나."
"아니에요. 잘은 못마시고 친구들이랑 엠티 같은데 가면 소주 한병정도는 마셔요, 다음 날
몸을 가누지를 못해서 그렇지. 헌데 친구들은 나보고 잘 마신다고 그래요. 걱정 말아요. 어
디사거 함부로 마시지는 않으니까. 오빠는 술 많이 마시죠? 나무 마시지 말아요, 우리 아빠
친구도 술 많이 드셔서 돌아가셨어요. 참 담배도 그만 피우세요. 많이 피우면 얼굴이 까매진
대요."
연신 나오는 말을 막기 위해 잔을 들어 내밀자, 연욱도 잔을 들어 살며시 부딪치고는 다
시 조금 더 마셨다. 나는 연욱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문을 열었
다.
"연욱아! 내가 너한테 할말이 있는데, 오해는 하지 말고 잘 들어라.네가 저번에 와서 이야
기를 할 때, 사실 충격을 받아서 이야기를 못하고 말았어."
연욱은 순간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무슨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사실 난 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어. 난 너를 단지 친구동생으로만 생각해 왔
을 뿐이야. 물론 네가 이렇게 성장을 해서 나타나니까 나도 너를 새롭게 보게 되고, 너의 말
에 고민을 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넌 친구 동생으로 남아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너도 알지만
광렬과 난 절친하 ㄴ친구인데, 만약 너와 일이 어떻게 잘못 된다면 우리들의 우정도 금가지
않겠냐? 너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거야. 너무 급하게 서둘지 말고, 진지하
게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봐.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나 ㄴ너의 사춘기 대 나타난 사람
이기 때문에 그때의 환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음으로써 나타나느 ㄴ현상에 불과한지도 몰
라. 내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는 서영의 얘기를 하려다가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고 말았다. 연욱은 내 얘기가 끝나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술잔으 ㄹ비우더니 자기 손으로 따라 다시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다
시 다르려고 했다. 나는 연욱의 손을 잡고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그리고는 술을 더 시켰다. 새 술이 나오자 한잔을 더 비우더니 말문을 열었다.
"오빠! 오빠는 여자가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저
는 자존심도 없는 줄 아세요? 그리고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난 오빠를 분명히 사랑하고 있
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춘기의 잔상도 아니고 분명하고 또렷한 현재의 상태에요. 나는 분명
히 말하겠어요. 난 오빠를, 이윤재를 사랑해요. 설령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마음은 변하
지 않을 거고, 또 포기하지도 않을 거예요. 나도 달라붙는 타입의 여자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쯤은 알지만, 이것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달라요.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거
란 말이에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 와서 서영의 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욱의 말에 수긍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담배만 피워 대며 자리를 굳게 지키고 앉아 있었다. 연욱은 갑자기 무
너지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취해 있다고 단정했다. 연욱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연욱의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측은한 생각도 들고, 내가 나쁜 놈
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연욱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
다. 연욱은 내게 무너져 왔다. 연욱은 수건을 꺼냈다. 연욱은 눈물을 억제하며 몸을 일으켰
다. 나는 연욱의 얼굴을 피하기라도 하듯 담배를 찾아 물었다. 라이터 불이 어둑한 공간을
반짝 비추다가 이내 꺼졌다. 연욱은 애써 스스로 진정을 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연욱아! 나가서 찬바람 좀 쐬면서 걸을까?"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나가죠."
연욱은 휘청거리며 일어서더니 올바로 걸으려고 하는 노력이 역력한 부자연스러운 걸음으
로 카운터로 갔다. 나는 연욱을 만류했지만, 고집을 부리며 자신이 계산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입구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좀 걸렸다. 여자 화장실이라 따라 들어갈 수도 없고, 혹
시 빈 속에 마신술이라 토하지나 않나 싶었다. 한찬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나타났다. 하지만 걸음은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연욱은 밝은 길과 사람들이 많은 길을 피
해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나의 팔에 두 손을 휘감은 채였다. 나느 ㄴ혹시나 누가 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도시가 워낙 작아서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라,
소문이 날까 봐서였다.
나는 연욱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내게 기대어
걷다가 나를 올려다보는 정도였다. 우린 시내의 한적한 길을 반복해서 다니다가 그녀의 집
앞까지 왔다 .연욱은 내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와락 내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나느 ㄴ엉거
주춤하게 연욱을 안은 꼴이 되었다. 나느 ㄴㄸ어내려느 ㄴ의도를 들키지 않게 몸을 돌려 보
려 했지만, 연욱은 나의 허리를 더욱 감싸 안았다. 내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그리고 한 발짝 뒤로 물
러서며 말했다.
"나도 너 같은 열정을 지녔다면, 사랑의 의미를 알았을 거야... ."
나는 연욱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시내 쪽으로 걸어나왔다. 갑자기 연욱이 아름답게 생각되
었다.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아름다움이었다. 자신있게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아픔이라
는 음험한 실체와 맞서 싸우는 모습, 나에겐 없는 것이었다 .내가 서영을 사랑하는 방식은
늘 그렇게 맥이 빠지고 생각이 앞서는 것이었다.이제야 나는 서영이라는 대상을 젊은 가슴
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스스로 서영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물끄러니 바
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의 대상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서영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서영아! 내일 밤차로 올라갈 거야. 모레 아침에 집 앞 카페앞에서 보자. 보고 싶다. 내
마음이 비어 있는 것 같아."
나는 성묘를 갔다 와서는 바로 역으로 향했다. 집안 식구들은 크게 이상해하지는 않았
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자만, 오늘 올라가야 된다는 강한 의무감마저
생겼기 때문에, 나느 ㄴ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일찍 카페에 도착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추석 다음 날이라 변두리느 ㄴ여업하
는 곳이 드물다는 것을 깜거었던 것이다. 나는 무작정 기다리기로 하고, 어렵게 구한 파란
솔을 풀어 입에 물었다. 일단은 아무런 대책 없이 서영을 만나기로 했다. 지나간 일들에 대
해 말해야 할 것도 같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 보면 또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주변을 어슬렁대었다.서영은 빠글빠글한 파마 머리로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파마를 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성숙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고, 그녀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들은 종로로 나와 종종 가던 집에 들렀다. 평소 때와는 달리 사람이 적어서 비교적
쾌적하고 조용했다.
"미안해요, 화 많이 나셨죠?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닌데,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다
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 동안 내가 화가 나서 연락을 제대로 하지 않은 줄로 생
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화 안났어. 재미있게 놀았으면 했는데 괜찮았어?"
"재미있지도 않았어요. 항상 형 생각만 났어요. 왜 같이 오지 못하는 세상인가 하는 생
각도 했고요.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녀는 나에게 줄 선물을 사왔다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 상자를 풀자 라이터가 나
왔다.
"선물할 때 남자 친구에게만 주는 게 있는데, 넥타이 하고 허리띠는 나에게 묶어 두기
위해서고, 라이터는 활활 타오르듯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뜻이래요. 신발은 안 사주는 거래
요. 신발을 사주면 거꾸로 신고 도망간대요."
나는 라이터를 소중하게 손으로 쥐고는 딸깍 하고 켜보았다. 불꽃은 망처럼 생긱 구멍
속의 필터를 타고 올라온 가스에 일정한 형태로 찍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마치 그대로, 자
신을 결코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남김없이 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어제 손님들이 많이 와서 나보고 시집가라며 중매를 서겠다고 야단들이었어요. 나는
남자가 있다고 선언했죠. 그랬더니 엄마보다 아빠가 더 놀라시더라고요. 엄마는 손님들 앞이
라 그런지 쟤는 괜한 소리를 한다며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오늘 저녁에는 엄
마한테 모두 말씀을 드릴 거예요. 괜찮죠?"
"괜찮고말고. 너도 나이가 찾으니까 내가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지. 더 이상 미적대면
서 시간을 끄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그럼 저도 형 부모님 뵈야겠네요? 이번 겨울방학 때 같이 내려갈까요?"
"그래 그러자. 그 전에 나도 부모님께 말씀드려야지. 그건 그렇고, 우리 놀러가자. 우리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나보자."
"언제요?"
"아무때나."
"공부 안 하고요?"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너 아니냐? 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추석기간 동안 없어졌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로 크게 달라진 모습은 안 보였지만,
항상 매일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짧은 기간이나마 헤어졌다가 만나는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
니었다. 나는 일찍 돌아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과학원 속에서 두려움에 가까운 외로움을 느
끼고 있던 터라, 경태와 철우의 출현이 굉장한 안도감과 기쁨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나는 방도 깨끗이 치워 놓았고 침대들도 잘 정리해 두었다. 책상을 제외하고는
아주 깨끗해졌다. 책상은 본인 아니면 결코 정리되지 않는 난지도보다 더 복잡한, 진품과 쓰
레기더미가 엉켜 있는 곳이 아닌가. 경태와 철우는 집에서 매일 잠만 잤다며 뽀얘진 얼굴로
싱글거렸다. 그들은 내가 일찍 돌아온 이유가 교통 체증 때문인 줄 알고, "아예 더 쉬었다가
내일쯤이나 오지 그랬냐."며 일찍 기숙사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미안해했다.
우리들은 토요일 밤의 재회를 자축하기 위해 오랜만에 동문들끼리 모여 술을 한 잔 하
기로 했다. 경태는 전화를 걸어 본다고 홀로 뛰어갔다.
철우와 나는 옷을 입고 창문을 열어 밖의 공기를 살폈다. 추석보다는 덜 둥그렇지만 그
래도 밝기 면에서는 더 환한 달이 앞 야산 위로 한 뼘이나 떠 있었고, 싸늘한 공기가 방문
으로 밀고 들어왔다. 과학원 생활속에서 이렇듯 신선하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은 이렇게 계절따라 바뀌는 가슴 뭉클한 바람밖에 없을 듯했다. 나는 창가에 서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나 누구 한 사람 올라가 주지 않는 구릉의 꺼먼 윤
곽을 바라보았다. 그 밑으로 테니스장이 빈 머리를 내밀고 내일 낮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테니스장의 기다림을 만족시켜 주지는 않았었지만, 이 기분대로라면 가서 뛰어놀고
싶을 정도였다.
러브뱅크에는 주인만이 독서를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주인에게 추석 인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선배들은 이 자리가 올해 논문 심사 때까지는 마지막 걸린 술좌석이 될 것
같다며, 마음먹고 술을 마실 작정이었다.
우리들은 술을 마시기 위새 마셨다. 잔도 빨리 돌아갔고, 선배들은 논문 쓸 때의 힘든
과정을 우리들에게 얘기하며 '쌓인다',를 연발했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자 유곤형이 고백
할
게 있다며 비밀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어느 날 논문도 안 되고 해서 술을 마시고 과학원을 올라오는데 가로등인지 달빛에 의
해선지 앞길에 죽 반짝거리는 게 있더란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까 자동차 백미러들이 빛에
반사되고 있었는데, 괜히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 죄다 주먹으로 쳐냈다는 거였다. 우리들은
언젠가 나붙었던 공고의 진범이 유곤형이었음을 알고 놀랐지만, 왠지 그의 마투나 행위가
재미있어 한참을 웃었다. 희종형은 우리와 함께 웃다가,
"그래도 남의 물건을 상하게 하는 것은 나쁘다."
며 은근히 유곤형을 나무랐다. 그러자 유곤형이 희종형에게 큰 소리로 따지듯 말했다.
"야, 임마! 너는 술 먹고 정신 읽어서 두 번이나 병원에 갔잖아."
"그래도 난 때려 부수지는 않았다. 그냥 넘어지기만 했지... ."
"기분이 어때요? 나도 오늘 마시고 가봐야겠다."
"한 번 마셔 봐라. 위에 구멍 나면 끝없이 마실 수 있어."
희종형은 경태에게 술잔을 주며 대답했다. 그리고 '원숏'을 외쳤다. 경태는 단숨에 마
시
고는 다시 희종형에게 따라주었지만, 그는 선배로서 명령한다며 다시 한번 원숏을 시켰다.
철우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잔을 거듭 비우자 눈에서 눈물이 나고 코 끝이 찡해지더니
트림이 거침없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바이트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열심히 마셨다. 논문 이야기며 코
스웍 이야기가 난무하는 동안 술이 많이 올라왔다. 경태는 선배들에게 2차를 가자고, 장소를
차례로 물었지만 "외상이 많아서 안 된다."고 다들 고개를 저었다. 외상이 많다고 뭐라고 하
는 사람은 없지만 주인에게 미안하기 때문에 발길이 뜸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고대 앞으로 옮겨서 현금을 이용한 닭발을 안주로 술을 마셨다. 결국 우리들은
많은 술에 찌들어 서로에게 기대어 과학원으로 돌아왔다, 희종형은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
하고 실험실로 향했다.
우리들은 뒤어켜서 기숙사로 올라왔다. 경태는 "라면 좀 끓여라."며 우리들에게 닦달을 했
다. 나는 철우와 함께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는 힘이 들어서 침대에 누웠다. 철우와경태한테
다 끓으면 먹으라고 소리친 후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코펠이 버너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고, 라면을 먹
은 흔적이 없이 경태와 철우가 곯아 떨어져 있는 것이다. 후다닥 내려가 창문을 열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라면은 끓은 상태여서 퉁퉁 불어서 물은 보이지 않았다. 가스는 켜있는 상태
였다. 가슴이 철렁하여 가스통을 빼내어 흔들어 보았다. 다행히 끓는 도중에 가스가 다 떨어
진 모양이었다.
나는 평화롭게 자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고는 홀로 나가 캔 사이다를 뽑았다. 환한 가을
햇살이 테니스 코트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베란다로 나
갔다. 따뜻하고 좋은 햇살이었다. 충만한 하늘의 기운니 나를 감싸고, 간혹 바람이 머리카락
을 건드렸다. 나는 쪼르리고 앉아 햇살을 마시듯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무감! 무상! 행복하다는 게 이런 걸까?
12. 만약 신이 있다면
어떤 대학교에서 대통령 선거 모의 투표한 결과를 게시판에 게재했다고,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관련 학생회 간부들을 수배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과학원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
할 주자들에 대한 시나리오와 당선 가능성을 점치는 화제를 재미있어 했다. 신민주 공화당
을 창당한 JP는 연고지를 중심으로 대규모 군중 집회를 열며 유신의 본당임을 자신하고 나
섰고, 민주당은 YS와 DJ의 결별을 점치는 여론과 더불어 각자의 연고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며, 여권의 총재도 부산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과학원에서도 역시 지역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 갈등이 묘하게 표출되기도 했
다. 그것은 대부분 YS와 DJ 중 누가 대권에 나서야 하는가의 공방전에서 확실하게 부각이
외었으며,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제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연고지 출
신의 정치인을 마음에 두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정치인에 대한 포부와 신념에 대한
믿음보다는 맹목에 가까우리 만치, 특별한 이유를 달지 않은 채 그 이름을 부르는 정도였다.
바깥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만큼, 과학원 안에도 석사 졸업 논문심사 일자가 가까
워옴으로써 부산해졌고 초조한 빛마저 감돌았다. 그것은 논문 심사 당사자들인 석사 2년차
가 전 원생의 2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도움을 주고 있는 박사 과정 형
들까지 합친다면 과학원의 절반이 논문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석사
1년차들은 다시 중간고사 시즌을 맞게 되어 정신이 없었다. 1학기 동안 쌓아온 노하우가 있
음직도 한데 바쁘기는 마찬가지였고,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선배들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또한 대학 후배들도 11월 첫째 일요일에 입학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중간고사
시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들도 그들을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할
지경이었다. 몇몇 원생들은 이미 지쳐서 시험을 포기한 듯이 멍하니 앉아 하룻밤을 그냥 지
내는 사람도 있었고, 술집에 파묻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해서 거의 모두 도서
관이나 실험실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남선형이 석사 1년차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너희들을 오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들 랩이 결정된 지 벌써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도 세미나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교수님께서 다음 주부터 세미나에
들어가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니까 모두, 지금까지 읽어온 페이퍼들 속에서 어느 정도 관심
분야를 찾았을 테니까 다음 주부터는 바로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기 바란다.
알겠지?"
"모르겠는데요?"
성효가 웃으면서 되물었다.
"모르긴 뭘 몰라. 지금까지 랩에 드나들면서 논문들이나 자료들 많이 가져다가 읽었을 것
아냐? 그러면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이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는 부분도 생겼을 거고, 그 중에
서 하나씩 뽑아서 발표하면 될 것 아냐?"
"그게 아니라요, 곧 있으면 중간고사 봐야 되는데 언제 세미나 준비를 해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결정 아닙니까?"
"그런 건 교수님께 직접 말씀드려. 아무튼 다음 주부터 매주 토요일 2시부터는 세미나가
진행될 수 있게 준비를 하도록 해! 교수님도 참석하실 거야. 다섯람이 1시간씩만 발표해도
일찍 끝나기는 힘들어. 나도 장가가야 하니까 준비들 철저히 해서 시간이 지연되지 않도록
들 해."
우리는 주둥이를 한껏 빼고 밖으로 나왔다. 사실 랩장인 남선형은 교수님의 전달자일 뿐
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이유를 대어봤자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용기 있게
대변해 주었더라면, 중간고사 후에 시작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들 풀이 죽어
서, 그리고 어느 정도 화가 나서 도서관으로 올라갔고, 성효와 나는 7혹관으로 가 정식형과
상의해 보기로 했다.
"하라면 해야지. 너희들이 무슨 수로 거역하겠냐. 불평들 그만하고, 그래 페이퍼는 읽어
봤냐?"
"조금은 읽어 봤지만 바로 발표할 수 있을 정도는 못 돼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중간고
사 시작되는데, 따로 또 세미나 준비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예요."
"하이, 그 새끼들, 불평은 아무런 도움이 안돼. 과학원은 상식이 통하지 않은 사회야. 그리
고 지금 이렇게들 징징거리지만 결국은 해야 할 일이고 또 해 낼거잖아. 그런데 무슨 불만
이 그렇게 많아."
"알았어요."
"윤재, 너는 어느 쪽에 관심을 두고 있어?"
"저는 리스키 인베스트먼트(Risky Investment : 미래의 볼확실성하의 투자안)에 대한 캐
쉬 플로(Cash Flow : 현금 흐름)의 에스티메이션(Estimation : 추정)에 관심이 있는데요."
"읽은 건 있어?"
"예, 진 엔 레소(Zinn & Lesso)가 쓴 거하고 벅 앤 힐(Buck & Hill)이 쓴걸 읽었는데요."
"잘했다. 리스키 인베스트먼트(Risky Investment)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초기 논문들이기
때문에 꼭 읽어 봐야 할 것들이지만 그걸로는 발표하기가 약하겠는데. 한번 더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고... 아니다. 오늘 이 논문들을 줄 테니까 읽어 봐. 영(Young)이 쓴 거야 캐시 플
로가 컨티뉴어스(Countiuous : 실숙선상의 모든 점에서 발생하는)한 상황이어서 좀더 현실
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보이거든. 그건 그렇고, 성효는 읽어 본 거 있냐?"
"아니오. 가지고 가서 읽어 봤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요. 개념이 안 잡혀요."
"으이그, 큰일이다, 큰일이야. 주접대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정식형은 성효에게도 논문을 더 주며 방향을 제시해 주고는 등을 떠밀다시피 도서관으로
몰아냈다. 우리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올라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숙제
를 하다가 만 리포트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려고 했다. 무엇부터 손
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정식형이 준 논문을 눈으로 대충 읽어 넘겼다. 상당히
깔끔한 논문이었다. 하지만 논문 속으로 빠져들다가는 한 과목 낙제는 감수해야 할 처지인
지라 숙제에 눈을 돌렸다.
시험을 두 과목이나 치르고, 세미나 준비를 한답시고 머리에 휴식은 손톱만치도 주지 않
은 채 마구 때려넣기만 했다. 머리가 돌 지경이라든가, 혹은 조금만 움직이면 머리 속에 든
것이 날아가 버린다든가 하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 많은 정보들이 헝클어지지 않고 머리
속에 잘 정돈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세미나에 들어갔다. 우리 석사 1년차들이 다 모이고 정
식형과 남선형이 참석을 했다. 교수님이 들어오자 세미나는 바로 진행되었다. 처음 순서는
성효였다. 그는 조금 빠른 어투로 논문을 설명해 나갔다. 교수님은 머리에 손을 얹고는 가만
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한 십분이나 지났을 때쯤 해서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성효야, 왜 익스포넨셜 디스트리뷰션(Exponential Distribution : .지수분포 ; 확률 분포의
하나)을 가정했을까? 그게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되니? 그 페이퍼는 지금 특정한 성격의 프
로젝트를 가정하지 않고 커먼(Common)한 케이스를 이야기하고 있거든. 그런데 좀 이상하
지 않니? 아무리 핸들링(Handling : 다루기)하기 쉽다고 하더라도 리얼 월드(Real World :
현실 세계)에서 발생하지 않는 거라면 사상 누각일 뿐이라고. 안그래?"
성효는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 혹은
상황을 확률적으로 설명할 때 우리는 주로 확률 분포를 많이 쓴다. 곧 확률 분포는 그 현상
을 그대로 표현 또는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교수님은 논문을 쓴 사람이 가정하고
있는 분포 자체를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이것은 건물의 기초 공사 부분을 흔들어 버리는
거와 거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줄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성효가 대답을 명쾌히 하지 못하면 발표 단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
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침묵의 띠를 벗어나 웃음이 나오려는 것
을 참아야만 했다. 성효가 침을 연신 바르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 때문은 아니었다. 나
는 교수님의 말씀에서 영어가 얼마나 들어가나를 세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엊그제
화학과 사람하고 가졌던 우연한 술자리 생각이 떠오른 틋이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과학을 특정 집단의 사치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문 용어를 무수히 만들어 내서 과학자들끼리만 점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
계
면활성제에 대한 무슨 무슨 연구'하면 그럴듯하게 들리겠짐나, 사실 계면활성제라는 것은
다
름 아닌 '비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누에 관한 무슨 무슨 연구하고 말면 될 것을 그
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얘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들도 영어를 많이 쓴다. 그것은 아직도 용어가 한글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었고, 또한 우리들은 대학 때부터 원서만 배워왔기 때문에 영어 용어로 얘기할 때 훨씬 빨
리 개념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님의 다음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정식형이 교수님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
다. 교수님은 계속 진행하도록 했지만 5분도 못 되어서 질문을 퍼부으셨다. 그리고 그 질문
에 성효는 다시 오줌 싸다 뱀이라도 만난 양 겁에 질려 버렸다. 하지만 그는 떠듬거리며 계
속 설명을 해갔다.
나는 교수님의 말씀에서 영어를 찾아 내다가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성효 다음은
내 차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련해 온 핸드아웃을 살짝 들춰가며 예상되는 질문들을 간
추려 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준비했는지 까맣게 잊어버
린 것 같았다. 그리고 발표하려던 줄거리가 서로 엉켜 버렸다. 정식형이 옆구리를 찌르는 바
람에 일어나서 나갔지만,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가조차도 까마득히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땡볕의 신작로 길을 홀로 걷는 기분이었다. 남선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발표를 재
촉했다. 나는 서서히 발표를 해나갔지만, 교수님은 나에게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나는 홀로 그렇게 서 있었다.
"윤재야, 너무 걱정하지 마. 다 그럴 때가 있는 거야. 네가 열심히 한건 내가 알고 있으니
까, 다음에 준비 잘해서 발표하도록 해라."
세마나가 나로 인해 끝나 버리고, 교수님의 법정의 판사처럼 나에게 무엇인가를 언도하고
는 나가 버린 후 정식형이 내게 해 준 말이었다.
나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아니 창피했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
다. 소문도 소문이지만 준비해 간 내용을 발표하지도 못하고 박살이 나버린 것이 허탈했다.
나는 기숙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먼저 이불을 둘러썼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
었다.
사실 노력하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이게 뭔가? 나는 어젯밤에
도 내가 지금 공부에 몰두하여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 내고 있는 것이 뿌듯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사춘기 때부터 육체를 학대하며 초극해 보려 했던 나 자신이 우스워지기도 했다. 목
표를 향한 준비 과정에서 자신과 자연스럽게 화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고는 하
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자기 진화는 극복에 있다고 믿으며 노력했는데. 그런데 속된 말로
개피를 본게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니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리고 이사태를 수습할 방도를 생각해 보
았다. 이대로 당하는 것은 너무도 억울했다. 일단 월요일, 그러니까 내일 교수님께 해명을
해야겠고 지금 빨리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는 판단이 섰
다. 다음 주에 남은 두 과목의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게 마음 먹고 올라간
도서관에 들어가 앉자 다시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연습장에 낙서를 하고 있는데 철우가 나타났다.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
는 안 들어 왔었다. 그는 다짜고짜로 나를 끌고는 옥상으로 나갔다.
"윤재야, 공부하는데 미안하다. 나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
"뭔데? 너 무드 잡는 거 처음 봤다.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인데?"
철우는 무언가 말하기가 곤란한지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의 힘없는 다리가 한층
어 측은하게 보였다.
"여기서는 도저히 말을 못 하겠다. 밖으로 나갈래?"
"너 진짜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냐? 야, 철우야!"
철우는 한쪽 팔로 힘든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
었다. 그는 기숙사 앞의 나무숲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윤재야! 나 어젯밤 내내 아리네 집 앞에 서 있다가 이제사 오는 길이야."
"뭐?"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를 못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아예 다음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아리를 좋아하는 거 말야. 만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어. 이전까지는 이런 감정이 사치일뿐더러
나는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 헌데 이 놈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나를 휘감아
버리더라고. 그래 나도 사랑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어. 누구를 좋아해 보고 또 가족이 아닌
이성에게 사랑을 받아보고 싶었지. 내가 나쁜 놈이냐? 어제는 공부하다가 갑자기 보고 싶더
라. 그래서 아리고 올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렸어. 그리고 만나서는 고백했지. 내가 사랑한
다고 고백할 자신은 없더라. 엄두도 안 나고. 그래서 보고 싶었다고 말했지. 그리고 앞으로
도 보고 싶으면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냥 가버리더라. 그래서... ."
그는 울지는 않았다. 그냥 고개를 속이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났다.
대학 때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처럼.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험이고 세미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와 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렇다고 일요일인데 조용한 술집은 없을
것이다.
우리 둘은 기숙사에 맥주를 사다 놓고 마주 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가
5년 동안에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어른스러운 웃음이었다. 우리는 침묵을 안주 삼아 계
속 마셨다. 우리들은 취했다. 철우는 잠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여서 행복해 보이
기까지 했다.
새로이 시작하는 월요일이었지만, 밤샘 덕분인지 약간의 술 때문인지 몸이 무거웠다. 과
사무실에 들렀다가 편지함에서 연욱이가 보내온 편지를 집어내었다. 봉투는 현란하게 채색
되어 있었고 고연욱이란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편지를 뜯어볼까 하닥 주
머니 속에 구겨 넣고는 도서관으로 올라왔다. 마지막 시험이 내일 있어서 어느 정도 준비를
마무리해야 되기 때문이다. 막상 공부를 하려니까 편지가 궁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편지를 꺼내어 펴 보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하게 박아 쓴 것이 석장이나 되는
장문이었다. 편지지도 겉봉처럼 파스텔로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가느다랗게 향수 냄새가 풍
겨 왔다. 편지의 내용은, 추석 때 있었던 일로 미안하지만 그래도 연락 한 자 없이 일찍 서
울로 올라가 버려서, 야속하고, 자존심이 무척 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부담으 ㄹ
지워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을 이해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으며 조
만간에 서울에 올라오겠다는 것이었다.
다 읽은 편지를 책상 위에 던지고 나서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데, 어느
새 왔는지 경태가 편지를 집어 들고는 나를 툭 치더니 도망 가버렸다. 총알처럼 뒤따라가
겨우 빼앗기는 했지만, 경태는 서영이가 보내온 편지로 단정하고는,
"잘해 봐."
하며 낄낄대면서 내려갔다. 나는 그렇다고 편지 겉봉을 보여 줄 수도 없는 일이라 아무렇게
나 생각하라고 체념을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짖어 버렸다.
시험은 모두 끝나고 텀페이퍼를 쓸 일만 남았다. 나는 도서관 서가로 달려가 관련 논문들
을 죄다(?) 찾아서 복사실에 맡겼다. 일단 논문들을 읽고, 그 중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들을
뽑아 조금 진보된 논문을 써 볼까 해서였다. 결국 어렵게 테마를 찾아서 정리하고 학과 컴
퓨터실에 가서 앉았다. 컴퓨터실에는 나와 같이 텀페이퍼를 쓰기 위해, 거의 모든 동기들이
총출동으로 앉아서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텀페이퍼의 윤곽을 써 놓고
핵심이 되는 문제를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래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상에 에러가 많이 떠서 일이 진전되지가 않았다. 나는 에러를 체크해 내
어 다시 런(Run : 실행)을 시켰는데 금방 진행될 기미가 없었다. 나는 런 상태를 두고 담배
를 피우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과원들이 많이들 나와 있었다. 동하는 나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며 물었다.
"윤재야! 니는 언제 끝날끼고? 내 는 오늘 밤 안으로 안 끝날 것 같은데."
"글세 나는 알고리즘(문제의 해를 구하기 위해 규칙들을 나열하여 푸는 절차)인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일찍 나오기는 틀렸는걸."
"그럼 우리 술이나 한잔 하제이. 한 두세 시간 마시고 오면 되지 않겠나."
우리들은 예닐곱 명이 술집으로 갔다. 술좌석에는 정치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그러자 카
운터 은희씨는,
"오늘 N총재가 이리를 방문했는데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투석을 하는 모습이 TV
에 나왔어요."
하고 무서워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잘 했다."고 소리치기도 하고 "그게 무
슨 짓이냐."고 흥분을 하기도 했다. 대권에 대한 화제는 각자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
므로 의도적으로 깊은 대화는 서로 피했다. 동하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자기 친구 이야기
를 시작했다.
"대통령이야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지만, 일단 사회가 힘들어 하지 않도록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할끼고마. 전기전자과에 있는 내 고등학교 친구가 저번 주에 정신 병원에 들어갔다
카드라. 공부도 잘했던 놈인데 여기 들어와서 미쳐 버린기라. 걔들은 일찍부터 랩이 결정해
서 논문 준비를 우리들 보다 먼저 하고 있었나 본데 의욕이 과하게 앞섰는지 정신이 너무
나 약한긴지 정신 병원에 들어갔다 카대. 물론 그 놈의 자존심 때문인 것을 알지만. 우리,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없나?"
"우리 선배도 한 명 정신 병원에 갔대. 박사 과정 형인데 박사 논문이 잘 안 되었나 봐."
상진이가 동하의 말을 듣고 있다가 사례를 하나 더 들자, 한표가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듯이 목청을 돋우며 다듬더니 얘기를 꺼냈다.
"너희들 그거 모르냐? 과학원 선배 중에 7단계 수석을 한 사람이 있다매. 대학 입학 수석,
졸업 수석, 과학원 입학 수석, 석사 과정 졸업 수석 등등 어떻게 해서 7단계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수석이 일곱 개란다. 그런데 5년 동안 박사 학위 논문을 써 가지고 외국 저널에 보
냈는데, 그 사람보다 한 달 먼저 같은 주제로 연구한 논문이 들어와서 리젝트(Reject : 기
각)되었다며? 그래서 그냥 학위 못 받고 떠났다고 하더라."
나도 들은 바가 있는 얘기였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한표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5년 동안 한 편밖에 못 다냐?"
"그런가 봐. 왜 그 과는 세계 수준에 비해 10년 정도 뒤져 있기 때문에 졸업하기가 힘들
다고 하잖아. 석사 2년차 선배들도 논문 쓰면서 도서관에 매일 찾아가서 자기하고 같은 내
용의 논문이 발표되었는지 어쩐지 확인하잖아. 만약에 같은 논문이 미리 발표되어 버리면
졸업은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
"그러고 보면 과학원 교수님들은 공부 열심히 하는 거야. 언제 그렇게 많은 논문을 읽고
찾아내지?"
"밥만 먹고 연구실에 사시잖아. 하기야 대단한 사람들이지.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1
년 365일을 항상 매일 15시간 이상은 연구실에서 보내는데. 그러면 1년에 몇 시간이냐? 음
4천 시간이 넘네. 왜 사시는지 모르겠어."
상진과 동하가 말을 서로 주고받다가 어느새 화제는 교수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상진은 한표에게 술을 권하고 싱글거리며 말했다.
"니네 교수님은 강의할 때 모습하고는 영 딴판이라며? 힘들겠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마르잖니."
"교수님이 마르시는 게 아니고? 너는 살만 피둥피둥 찌는 것 같다."
"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봐라. 야, 너희들 수업할 때 우리 교수님 얼마나 자상하시고 마
음씨 좋게 생겼냐. 그런데 밑에 있는 학생들은 쥑인다! 쥑여! 예외는 없고 사기도 절대로 못
쳐! 여름 방학 때 하루 학교 안 나왔다고 얼마나 당한 줄 아냐? 그 육중한 몸매에 빗맞아도
한 방 아니냐.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한표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듣고 있던 충이형이 잔을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놓으며 넋두
리를 했다.
"한표야. 너는 행복한 줄 알아라. 우리 교수님은 석사 과정은 사람으로도 안 봐. 내가 인
사하면 자기 랩 학생인지 아닌지도 모르셔. 하기야 박사 과정 형들도 사람으로 안 보는데
뭐. 우리 랩 세미나 한 번 하면 초상집이다. 핸드아웃이 하늘을 핑핑 날아다닌다고. 기화형
은 이번에도 졸업 못 한다고 하더라. 박사 과정 5년차 아니냐. 그런데 아직도 논문을 보내지
도 못했어. 교수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집어 던져 버린다고."
"형도 졸업하기 힘들겠네?"
상진은 약을 올리며 말했다.
"졸업? 졸업하기 힘들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희망은 있어. 우리
랩에서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딴 형이 있거든. 교수님보다 먼저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성
실성과 뛰어난 머리고 좋은 논문을 써 가지고서 지금도 교수님이 유일하게 신임하고 있지."
"근데, 형은 성실하지도 않고 머리도 안 좋잖아. 그래서야 어디 박사 과정에 올라갈 수 있
을지 몰라? 히히히."
상진이가 충이형을 놀려서 우리를 모두 웃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포인트라고! 우리 교수님은 석사 과정은 사람으로 여기질 않는다니까."
"그래서 매년 한 명씩 딜레이당하잖아."
실제로 충이형의 랩은, 석사 과정에서 매년 한 명씩은 2년 만에 졸업을 못 하고 한 학기
를 더 다니면서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 딜레이를 당한 사람이 꼭 있었다. 물론 다른 랩에도
없는 게 아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상진이가 계속 충이형의 약을 올리자, 충이형이 여기에지지 않고 물었다.
"너희 랩 교수님도 만만치 않다더라. 의외로 프로젝트가 많다지. 아마... ."
교수님들은 대부분 산업체나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프로텍트에 대한
수익은 과학원으로 귀속되지만, 학문을 실제적인 산업에 적용함으로써 국가의 전체적인 과
학 기술 발전을 꾀한다는 데 그 참여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밑에서 일하는 학생들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프로젝트를 하면서 논문 테마를 잡아 논문을 쓰게 되
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일이 많아
지고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누가 아니래요. 거기다가 요즘은 책까지 쓰고 계셔서 연습 문제 해답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요. 윤재야, 너희 교수님은 인간성 좋기로 소문이 나서 여러 모로 편하겠다."
"인간성이 좋다고 졸업 쉽게 시켜 주는 줄 아냐? 자고로 가까이 있으면 허물이 많이 보이
는 법이니라. 우리 랩도 죽어 난다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선배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이제야 알 것 같아. 학기 초에는 서로 자기 랩에 오라며 별의별 사탕발림을 다하더니 정작
랩에 가보니까 '아이고, 이 녀석아. 니는 고생 문이 활짝 열렸데이!'밖에 더 외치냐?"
"그러게 말이다. 세상 믿을 놈 하나도 없어. 사탕발림이 제 편하자고 한 거 아니니. 지 할
일, 우리들한테 시키려고 들어오라는 거지."
"그런 말은 좀 심하다냐!"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처지를 한탄했다. 자신의 시간을 온통 과학원 안에 바쳐도 성
과라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 더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상진은 한숨을 후우 깊이 내
뱉더니만 좌중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를 말을 했다.
"우리들 사는 게 심하지 않니? 공부말고는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잖아. 매
일 시간 나면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스탠드바에 가서 노래나 부르고... ."
"다른 일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잖아? 여자 친구 만나는 시간도 없어서 죽겠는데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어? 그리고 난 이제 머리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TV도 코미디 프로밖에
는 볼 게 없어. 뉴스는 그게 그거고, 드라마나 기획물은 머리만 아파 들어오지도 않아. 솔직
히 신문도 해외 토픽 외에는 보고 싶지도 않아. 생산적인 일이란 그저 오줌, 똥밖에 없지,
히히."
"딴소리말고 술이나 마셔라 응? 그리고 다른 거 생각하면 뭐하냐? 지금 당장 올라가서 텀
페이퍼 써야 하고, 또 숙제도 해야 되고, 프로젝트도 해야 되고. 다른 것을 할 만큼 시간 있
는 놈은 행복한 거지. 요새 내가 제일로 하고 싶은 일은 그저 마음 편히 잠이나 자는 거야.
시간 나면 만화책이나 설렁설렁 보다가 그것도 지치면 스르르 잠 자다가 하는 거. 신선이
따로 있냐?"
한표는 실실 웃어가며 상진의 진지한 문제 제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도 한표의 말에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상진의 말은, 나에게는 잔잔한 웅덩이
에 돌을 던지는 효과가 있었다. 우선은 나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태해졌다는 것이다.
그 나태는 권태로움이 아닌 무비판적 환경의 수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생활에 이미 관습화되어 버린 것이다. 그 한 예로 나는 지금도 먼지가 수
북이 쌓여 있을 화구를 거의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또한 그 화구들을 사게 된 이유
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관습화된 나의 생활 이외의 것은 먼지와 같은 존재에 불과해서, 나
는 책상을 열면 바로 보이는 주민등록증조차도 필요할 때 찾으라면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정
도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런 것은 모두 사치에 불과할 뿐이
었다. 그리고 허영이었다.
컴퓨터실 안에는 날이 밝았는 데도 사람이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고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일찍 끝내고 우리들을 약올리듯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빠져 나간
녀석들도 있었지만, 성질을 부려 봐야 나만 손해 아닌가. 아침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도 없었
다. 아니 아침 식사 시간이 된 것을 모른다고 해야 옳으리라. 우리들은 한표가 '밥먹고 합시
다!'를 외쳤을 때에야 겨우 알았으니까.
그나저나 걱정이었다. 세미나 준비를 해야 하는데 템페이퍼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또 당한다면 그 땐 나는 끝장이다.
"이제 막 들어온 석사 1년차가 어떻게 됐든 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
다."는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월요일에 찾아간 교수님은 완강했다.
"내 무슨 이야긴지는 알겠는데, 콘스트레인트(Contraint : 제약 조건)는 너나 다른 사람들
이나 똑같았다고. 너도 인정하지? 그렇다면 나로서는 네가 나태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 그렇
지 않니? 이 상황은 네가 책임을 져야지.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다음 발표
때, 나나 남선이나 정식이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는 일밖에는 없어.
스터디도 어느 정도 운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해. 그렇기 때문에 누가 훌륭한
연구 결과를 내놓느냐로 인간을 메저(Measure:측정)하지는 않아. 단, 연구하는 과정이 진지
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억셉턴스 레벨(Acceptance Level, 합격 수준:원래 품질 관
리 용어로 양품으로 판정하는 기준)을 만족시킨다. 나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얼굴 씻을 시
간도 없었고 체력 좋은 걔들 따라 밤새우다 쓰러져서 시험을 못 치른적도 있어.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모두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남들처럼 편하게 살 생각
이었으면 공부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 아니니.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 있잖니. 너희들의
기본적인 머리는 나도 인정해. 하지만 학문에 있어서 혹독한 자기 연마가 없으면 사치스럽
게 생각하지. 학문이라는 사치품을 끌어안고 사는 거나 다름없어. 내 말 알겠지? 자 그럼 열
심히 하고, 나가 봐."
왜 이렇게 일이 밀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업을 하면 늘 돈에 쪼들리고, 정치를
하면 늘 사람에 쪼들린다는데, 나는 항상 시간에 쪼들린다. 다 내가 멍청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 한다면 오늘까지 텀페이퍼를 마치고, 오늘 밤과 내일 하루를 이
용해서 토요일의 세미나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오늘 끝내기는 어렵게 생겼다. 화려한
텀페이퍼를 써서 교수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맨 밑바닥에
해당하는 기대치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결국 나는 밤이 이슥해져야 대강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치에도 못 미
치는 수준이라고 생각되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책상 위의 책더미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
고 세미나 준비를 위해 정식형이 건네준 논문을 찾아 들었다.
세미나는 큰 무리 없이는 끝났다. 다만 대개의 사람들은 낙오자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짓밟으려고 안달인 사람도 있음을 알았다.
적어도 동기들끼리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특히 남선형은 마치 나의 조그마한
누라도 기어이 밝혀 내려고 안감힘을 쓰며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핸드아
웃에 있는 오자마저 핀셋으로 집어내듯 찾아내어 나를 핀잔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점점 그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정말 주는 거 없이 미운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래서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다.
* * *
기쁜 마음으로 서영과 한 약속을 위해 일요일 아침인데도 일찍 일어나-그래야 9시지만-기
숙사를 내려가다가,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소정사에서 내려오고 있는 주원형을 만났다.
"주원형, 왠일이우? 교회가?"
"일요일에는 교회 가는 날 아니냐?"
"형, 언제부터 신자가 됐어요? 아마도 하나님은 형을 받아 주지 않으실 것 같은데."
"너도 내년 돼 봐라. 만약 신이 있다면 사람을 이 지경에까지 집어 넣지는 않을 거란 생
각 들걸? 몇 주 다니고 나니까 맘은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너도 내년 되기 전에 어서 교
회나 절로 가 봐. 유정사 지하에 가면 두 개 다 있어."
"난 안 믿어요. 세상에 나밖에 믿을 게 또 있어요."
"순수과학을 하는 물리학과나 생물·화학과 사람들이 종교를 더 믿는다. 과학을 깊이 하
다 보면 풀리지 않는 아니, 설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신의 능력으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들
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된다고 하더라. 왜 통계학에서도 온리 가드 노
우스(Only God Knows:신만이 아는 값, 모집단의 특정치는 통계적 근거에 의해 추정되는데
참값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는 뜻)라는 말이 있잖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나 자신
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잘 다녀오세요."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과, 그것을 가진 후에 종교가 발휘하는 능력은 참으로 이상하고 대
단한 것이다. 주원형같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비웃던 사람이, 성경책을 겨드랑
이에 끼고, 옷도 깨끗이 갈아 입고 푹 자고만 싶을 일요일 아침에 교회를 향해 걸어가다니.
대학 때, 친구인 종재도 1학년 때는 그렇게 술도 잘마시고 놀기도 잘하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알코올 성분이 든 건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을뿐더러 담
배까지 끊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영접하라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던가.
나는 종교에 대해서는 냉정했다. 누구나 인간은 자기 생에 있어 주어진 배역이 있다고 믿
었다. 우리는 그 배역을 성실히 잘 수행하면 되는 것이고, 종교란 단지 그 배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과서와 같은 존재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배역을 잘 소화하는데 내 나름대로 합리
적이고 객관적인 준거를 마련하여 거짓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교과서에 나를
맞추어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근형이 '신이 있다면 인간을 이
런
처지에 놓이게 하지는 않을 거다.' 라고 한 말이 머리에 자꾸 맴돌았다.
서영은 나를 데리고 자연농원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벌써
코스모스가 핀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과학원 안에서도 보았는데 그냥 지나쳤다는 것도 깨
달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영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냥 잠에 빠지고 말았다. 서영은 나
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눈 앞에 벌어진 변화에 잠시 어리둥절
했다.
'여기가 자연농원이구나!'
주차장에는 차들이 제법 많이 차 있었다. 가을 하늘은 시렸다. 그 하늘을 깊이 머금어 을
씨년스럽게 느껴지는데, 쌀쌀한 공기가 싸르락 나를 베어냈다. 우리는 놀이기구도 타고 동물
원도 구경을 했지만, 나는 별로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서로 가볍게 기대듯 걷다가 서영에게
물었다.
"서영아, 넌 내가 과학원 때려 치우고 군대 간다면 어떻게 할래?"
"갑자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표정도 별로 좋지를 않고."
"그게 아니고 괜히 그러는 거야. 사는 게 의미가 없어. 야, 내가 시골에 가서 농사 짓는다
해도 너 나한테 시집 올래?"
"그건 한 번 생각해 봐야죠. 내 남편이 농부라고 상상해 본 일은 없어서 친구들한테 설명
할 말도 마땅치 않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요. 백화점도 없고 슈퍼마켓
도 없을 텐데. 결혼은 현실이라고요."
"그래? 그러면 넌 내가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냐?"
"으음, 생각은 안 해 봤지만 적어도 서울에서 살아야 하고 깨끗한 양복을 입고 다녀야 되
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학교 훈장이랄지 연구원이랄지 이런 걸 원한단 말이지?"
"말하자면 그렇죠. 왜요?"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형, 왜 그래요. 사춘기 소녀처럼."
"넌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
서영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나대로 힘들 때 토라지거나 하는 서영이 못마땅해서 가
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서영은 갑자기 길가에 있는 간이 바에 나를 끌어 앉히더니 술과 안주를 시켰다.
"형, 한 잔 따라 줄까?"
"안 돼, 내가 따라 마실 거야. 술은 시집 와서 따르라고. 먼저 받아라. 그런데 넌 이런 데
를 어떻게 알았냐? 너 남자 친구 따로 있는 거 아냐?"
"형은, 참. 사실은 월요일날 소현이 하고 같이 왔었어. 형하고 데이트하기 위해서 현장 답
사를 해 뒀지."
"시간도 맣다. 나한테 반절만 빌려 주라. 나 술 마셔도 괜찮을까? 아무래도 많이 마실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마시지 뭐. 너도 좀 마셔라."
"그래도 조금만 마셔요. 기분은 어때요? 괜찮아졌어요."
"좀 나아진 것 같아. 넌 내가 무슨 고민하는 줄 아냐?"
"형 말을 들어보니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얘기 해도 돼?"
"뭘?"
"솔직히 말해서 순간적으로 오는 정신적 방황 아냐? 내일이 되면 또 열심히 살 거잖아."
"그래, 그렇게 되겠지. 산다는 게 뭔지."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밤의 손길이 대지의 구석구석에 닿아 있었다. 어느 한순
간에 이 손길은 우왁스럽게 온 세상을 움켜 쥐어 버릴 것이다. 나는 홀짝홀짝 소주를 마시
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영은 기분이 좋은지 계속 옆에서 재잘대었다. 나는 그녀가 노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구름이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 모든 것이 아름답다.'
서영은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어깨를 툭 치며 자기를 봐 달라고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서영을 바라보며 찡긋 웃어 보였다. 웬일인지 서영의 얼굴이 알유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들반들하고, 꼭 잡아서 품 속에 넣어 두고 싶은 모습 말이다. 어쩌
면 내 눈이 타오르듯 보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잔에 남은 소주 한 모금을 꼴깍 마시
고는 의젓하게 눈빛을 감추며 서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서영은 가만히 그러는 나를 바라
보며 웃었다.
13. 판도라의 상자
후배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이 과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억지로 여유있
어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경험이라는 학습은 이
해와 포용을 가져다 주는 삶의 시간 독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나도 초조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시험이 한 달 남았을 때는 빨리 보
기
를 고대하기도 했지만, 보름 정도가 남은 이맘때에는 어디가 아프기라도 해서 떨어졌을 때
핑계 거리라도 됐으면, 미안한 얘기지만 전쟁이나 혹은 과학원에 불이라도 나서 시험이 연
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시험
문제를 가르쳐 주지 않나, 내가 본 데서만 시험 문제가 출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쓸
데없는 공상을 하는 때도 많았다. 그러나 자꾸 떨어지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나의 바람에는
아랑곳도 없이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시험보는 날은 하숙집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시험장에 들어갈 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
이
날 정도로 조심했다. 그때는 평소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미신이 줄줄이로 생각났었다.
미역국을 먹지 말라. 계란을 깨뜨리지 말라. 새옷을 입고 시험보러 가지 말라. 아침에
여
자가 길을 막아서면 재수가 없다. 맹인을 보면 갑갑한 일이 생긴다 하는 등등의 말도 안 되
는 미신이 머리를 온통 뒤집고 다녔다.
그래서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고사장에 입실하기 전까지 앞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
고
있었다. 그 날 아침에 몇몇의 선배들도 지금 우리 뒤를 이어 공부하고 있는 이 후배들이 일
찍부터 나와 격려를 해주고, 커피를 끓여 주고 했는데도, 나는 그들을 피해서 고사장으로 바
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점심 시간에는 외출이 허용되어서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따뜻한 물과 커피를 주었었
다. 그 시간에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있어 하는 사람들이 하나
도 없었으니까, 후배들은 우리들의 눈치만 살필 뿐 말 한마디 던져보질 못했다. 그리고 재수
를 한 선배와 우리 동기 한 명이 그 틈을 이용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시험을 포기한
것이다.
시험이 끝난 날 밤, 우리들은 과학원에 있는 선배들과 대학 3학년의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시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후배들은 우리들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래서 모든
시험 문제는 그대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더욱 괴로워졌다. 10대 1이라는 경쟁률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누가 문제를 설명할 때마다 답안을 쓸 때 빠뜨린 부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본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집에 걸어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극도로 체력이 약해 있었고 긴장도 풀린 탓에다가 술을 갑작스레 너무 마셨
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우리들은 운명의 초조한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일 주일 후에 있을 시험 발표까
지
의 기다림은 그야말로 형극이었다. 만약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구나 나는 이미
영장을 피할 수가 없어서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군대를 갔다 와서는 또 무엇을 해
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단 일초도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연일 술로 이어진 나날이었다. 그
기
다림의 시간도 결국은 갔다. 세월은 무심하므로.
1차합격했을때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일단은 일 주일 후에 다시 면접을 보아야 하
고, 거기에서 1차 합격자의 10퍼센트 내지 20퍼센트가 또 떨어진다. 또 무심한 그 세월은 우
리를 괴롭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면접 고사장에 나를 들여보냈다.
고사장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각 방에 교수님이 네 분씩 앉아 있는데, 불공평하게도 우리
는 혼자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두 방을 다 돌아야 했다. 나는 질문을 별로 받지 않았
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가면 10분 이상 소요되어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피를 말렸는데, 나
는 허탈하게도 가정 환경이나 용모에 대한 질문만 주로 받다가, 전공에 대해서 는 한두
차
례로 끝나고 말았다. 선배들은 그러면 붙었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나로서는 가망이 없기 때
문에 내보낸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되도록 이면 면접시험장에서 저지른 실수
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내가 대답을 하며 손을 비빈 것 같은데 자신 없는 모습
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하는 류의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어떻게나 확대가 되어 나를 짓눌
렀는지.
또 일 주일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날도 왔다. 나는 붙었다. 그리고 내
옆
에서 같이 공부하던 녀석들이 떨어졌다. 재수한 선배도 떨어졌다. 합격이란 기쁨 뒤에 숨어
있던, 커다란 불곰 같은 공포가 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실패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나도 언제든 실패의 쓴잔을 마실 수도 있다. 나와 함께 똑같이 애쓰고도 떨어진 저들처
럼.'
하는 생각이 덮쳐 와 괴로웠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시험에 실패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
다.
우리들은 후배들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예상 문제
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그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도 있다는 걸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문제를 깊이 연국하지 않을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책상에 글씨 쓰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들었다.
예비 소집일에는 경태가 학교에까지 따라가서 문제를 설명해 주고 왔다. 경태는 후배들
의
실력을 양에 차지 않아 했다. 그 는 다른 학교의 유력한 합격 예상자에 대한 숫자를 조사해
가지고 와서는, "반타작이나 할 것 같다." 며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그는 시험이 일 주일밖에 남지 않음에 따라 동문회원들에게 회비를 걷고 술 마실 장소를
정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철우와 나는 방 안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누워 있었다.
"윤재야! 너 오늘 왜 이렇게 태평하냐?"
"쉬고 싶어서."
"경태는 참 대단하지. 메모리(컴퓨터의 기억용량:여기서는 두뇌의 기억량을 의미)가 풍성
도하지. 선
후배도 잘 챙기고, 공부도 잘하고."
"걔는 운명인가 봐. 어떤 때는 불쌍하더라. 안 되는 일도 지가 나서서 안달을 하고, 마
음
에 맞는 친구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너 정말 오늘 시간 있냐?"
"왜? 은근한 목소리를 보니, 너 뭔가 할 얘기가 있구나? 혹시내게... ."
"그래, 아리 말이야.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 아리가 정말 나의 진실을 끝까지
외면할까? 아니야, 내가 괜히 아리를 괴롭게 만들 이유가 없지. 그건 이기주의야. 자꾸만 내
가 내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독점욕, 또 그 독점욕을 그럴듯
하게 포장한 위선이요 폭력이지... ."
"글세...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그렇지. 하지만 산다는 데 논리가 우선하는 것은 아니잖
아...
적어도 네가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위선자가 아니란 얘기야. 일단은 내가 해코지 할
녀석도 아니고. 그런데 반대로 아리의 행동을 놓고 보자. 아리는 너의 말을 무시했어.
그렇다고 내가 아리를 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라는 너의 진심을 무참히 깨 버
렸어. 그건 아리가 이기적이라는 얘기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 변화가 두려
워
서, 어쩌면 너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을지도 몰라. 너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하지도 않
고, 좋고 싫고 이전에 말야. 그것도 사실은 인정해 줘야지만.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너를 가
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겠지? 그 방법... 사람의 만남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건, 공동
의 목표가 있는 조직 안에서 아니겠냐? 학교라든가, 서클리라든가, 학원, 그래 학원이야!
접
때 아리가 학원 다닌다고 했잖아? 아침에 영어 회화 학원 다닌다고 했지?"
"어, 학원 다니고 있어."
"그래! 맞아! 너두 그 학원에 등록하는 거야. 어때?"
"학원을 옮기면?"
"옮기면?... 그렇게 쉽게 옮길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잖아."
철우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우며, 경태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
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다고 해서 아리가 나를 이해할까?"
"그것도 차차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거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너의 진솔
한
마음을 전할 것인지. 하지만 처음엔 아무 내색도 않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연을 가장
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고, 단지 전혀 아는 체도 하지 말고 디니는 거야."
"말은 그럴듯 하다만 그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스토리다. 아리의 표정을 보았다면 그런
발
상을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을 텐데... ."
"글쎄...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그렇지. 하지만 산다는 데 논리가 우선하는 것은 아니
잖...
적어도 네가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위선자가 아니란 얘기야. 일단은 네가 해코지 할
녀석도 아니고. 그런데 반대로 아리의 행동을 놓고 보자. 아리는 너의 말을 무시했어.
그렇다고 내가 아리를 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아리는 너의 진심을 무참히 깨 버
렸어. 그건 아리가 이기적이라는 얘기야.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변화가 두려워서, 어쩌
면 너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싶을지도 몰라. 너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좋
고 싫고 이전에 말야. 그것도 사실은 인정해 줘야지 만.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너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겠지? 그 방법... 사람의 만남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건, 공동의 목표
가 있는 조직 안에서 아니겠냐? 학교라든가, 서클이라든가, 학원, 그래 학원이야! 접때 아
리
가 학원 다닌다고 했잖아? 아침에 영어 회화 학원 다닌다고 했지?"
"어, 학원 다니고 있어."
"그래! 맞아! 너두 그 학원에 등록하는 거야. 어때?"
"학원을 옮기려면?"
"옮기면? ... 그렇게 쉽게 옮길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잖아."
철우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경태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
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다고 해서 아리가 나를 이해할까?"
"그것도 차차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거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너의 진솔
한
마음을 전할 것이지. 하지만 처음엔 아무 내색도 않고 있는 것을 좋을 것 같다. 우연을 가장
하는 것은 불가능할 거고, 단지 전혀 아는 체도 하지 말고 다니는 거야."
"말은 그럴듯하다만 그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스토리다. 아리의 표정을 보았다면 그런
발
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을 텐데... . "
철우는 테이프를 뒤적이더니 '블랙사바스'의 '쉬 이스 곤(She is gone)'을 틀어놓고는 따
라
불렀다. 그의 가는 목소리가 더욱 노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철우는 나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바로 옮겼다. 그 증거로 나에게 학원증을 흔들어
보이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된다며 걱정을
앞세웠다.
도서관 4층이 폐쇄되었다. 하지만 4층의 서가와 5층은 여전히 개방되었다. 입학 시험 문제
출제와 인쇄를 위한 공간으로 임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밤낮으로 불이 꺼지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도서관은 혹사당하는 공간이었다. 365일 단 하루도, 그리고 단
한
시간도 휴식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나라의 밝은 장래를 약속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교수님들이 그곳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수업은 계속 되었지만 세미나는 잠시 중단되었
다. 수업 시간에는 교수님의 말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주목을 하며 들었다. 교수님의 말 한
마디의 이면에 이번 과학원 입학시험 문제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경태는 매일 각 수업 시간에 나온 정보를 수집하여 갔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는 없었고, 단
지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단서는 몇 개 모아졌다. 우리는 금요일에, 그간 수집한 정보를 모아
서 찹쌀떡을 수대로 사 가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후배들이 빈 강의실에 모두 모이자, 경태
가 말을 열었다.
"그간 고생들이 많았다. 내일모레만 지나면 다리 뻗고 잘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라. 그
리고 내일은 도서관에 있지 말고 빈 강의실 잡아서 같이 공부하다 일찍들 집에 들어가서 쉬
어. 그럼 지금부터, 시험에 나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대략 출제 방향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밝힐 테니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먼저 전공I에서... ."
"글쎄, 그것도 편하실 대로해야지. 나야 아는 데도 없고."
그러면 오늘 엄마하고 얘기를 한 연후에 전화할게. 대신 내일 저녁에는 기숙사에 붙어 있
어야해!"
"안 되는데. 후배들하고 같이 있어 줘야지. 그러니까, 내일 잠깐이라도 얼굴 좀 보자."
"좋지요."
우리들은 내일 약속을 하고는 연극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여린
그물을 드리우며 두 눈에 가득 실려 들어 왔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복잡한 머리를 걷어
내 주기라도 하듯 햇살의 그물을 흔들어 당기며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청량리 중학교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옹
기종기 모여 버너를 피우고, 잡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북새통을 이루었다. 현재 대학 3학년인
후배들이 인사를 꾸벅하며 오더니 학교 마크와 함께 과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인 플래카드
밑으로 데려갔다. 대여섯 명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커피를 안겨 주었다. 우리들은 어정쩡
하게 서서 시험 볼 후배들을 기다렸다. 시험 볼 사람들은 제각기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고
개를 푹 숙인채 더러는 후배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더러는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일
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황급히 들어갔다.
후배들이 꺼칠한 얼굴로 하나 둘씩 도착했다. 우리들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과호를 외
치고 난 수 들여보냈다. 8시 30분이 되자 교문은 닫히고, 공연이 끝난 뒤의 마당처럼 학교
안에는 황량함이 감돌았다.
우리들은 후배들을 데리고 과학원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였다. 이제 좀 쉬고 점심 시간에
가서 또 봐 줘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시간을 때워야만 했다. 우리들은 후배들과 탁구를 치
며 시간을 보낸 다음 고사장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 되자 아침과는 다르게 교문 앞에는 우리들과 몇몇 팀밖에 없었다. 우리는 운
동장으로 들어가 버너에 불을 켜고 라면을 끓였다. 우리들은 후배들에게 도시락을 싸오도록
했다. 우리도 선배들로부터 작년에 그런 지시를 받았었다. 점심 시간이 1시간 30분이 어서밖
에 나가 사먹을 시간은 충분하지만 마땅히 먹을 곳도 없고, 그 시간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정리를 하라는 배려였다. 후배들은 도시락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냥 망연자실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했다. 영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공I이 너무나 어려웠
다
는 것이었다. 경태는 후배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이따가 풀고, 지금은 어서들 밥먹고 전공II준비해야 할 거 아냐! 먹어야 힘이
나
서 쓰지. 휘발유 없는 자동차 가는 것 봤냐? 어서들 밥이나 먹어. 그리고 원철이는 어디 갔
어?"
대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철이만 안 보였다. 우리들은 작년에 경험한 일이 있어서 미
리 3학년 후배들은 풀어 감시를 하게 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만들어 놓았는데 보이
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얘들이 밥을 먹고 있는 동안 원철이가 나타났다. 그는 울었는지 눈
까풀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경태는 원철이를 데리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후배들은 다시 들어갔다. 그들의 어깨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서영은 같이 놀 자며 앙탈을 부렸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후배들은 얼른 보아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놓일 것 같았다. 경태와 같이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아니 후
배들에 대한 걱정이 켜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음 주 일요일에 ㅍ호텔 커피숍에서
3시에 만나자는 서영의 어머니 전갈을 되뇌며 학교 앞에 있는 막걸리 집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술집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특이나 원철이는 경태의 품안에 엎드려 울
고 있었다. 경태는 "남자새끼가 무슨 짓이냐." 며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지만, 한 손
으
로 그를 꼬옥 안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 엄금엄금 기어 들어갔다. 아
니, 우리가 업어서 학교 근처의 하숙집에 데려다 눕혔다.
철우는 피곤하면서도 밝은 모습으로 도서관에 나타났다. 나는 그의 안정감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이틀이나 아침 일찍 일어나 학원으로 달려갔음이 분명했다.
"아리는 만났냐?"
만난 게 아니고 바라보기만 했지.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좋더라. 그리고 오랜만에 영어 공
부 하니까 재밌던데."
"아침에 일찍 일어난 게 아니고, 잠을 안 잔 거 아니냐?"
"어떻게 알았냐? 대신 새벽에는 교재를 다 외워 버리기로 했다. 프리토킹도 시키거든. 언
젠가는 아리와 작이 되어 이야기하게 되겠지."
"아예 그쪽으로 나가시지. 그래 하루종일 어디 있었냐? 따라갔었나?"
"아니, 네 말대로 무시하고 왔다. 지금까지 랩에 있었어. 기숙사에 올라가서 라면이나
끓
여 먹자."
"라면 있던가?"
"매점에 가서 사 가지고 올라가지. 그리고 야식 코너에서 김치나 담아가자."
라면 4개를 넣어 끓였다. 철우는 라면을 먹으면서 말수가 많아졌다. 그의 마음 속으로 피
어 오르는 기쁨의 정도를 알 수 있었다.
"한 클라스에 열두 명인데 여자가 훨씬 많아. 어제 인사를 하는데 창피해서 죽을 뻔했어.
야, 예쁜 여자들 많더라. 생선은 양키들이야. 말을 천천히 하기는 하지만 워낙 내가 영어
실
력이 없잖냐? 뭔가 물어보기는 물어보는데 알 수... . "
"어, 내 전화네. 잠깐만."
나는 홀로 뛰어나갔다. 서영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수화기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예요. 과학원 앞에 와 있어요."
연욱의 목서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냐?"
"어? 어어, 친구."
"혹시 서영씨 아니냐? 너는 좋겠다.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
"그렇지도 않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친구가 좀 만나자고 해서."
"과학원 친구냐? 이 밤에 약속을 다하고 알았어. 이따 올 때 술이나 사와라. 많이 말고 캔
맥주로 한두 개만."
밖에는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이 어느새 계절을 빗질
하며 낙엽을 재촉하여 스산했다. 연욱은 저만큼에 넓은 가방을 메고 서서 발끝으로 톡톡 길
바닥을 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만이구나. 이 밤에 어인 일이냐?"
"... . "
"가자, 너무 늦었는데 데려다 줄게."
"어디로?"
"이모네."
"나 지금 전주서 오는 길이에요. 그냥 뛰쳐 나오다시피 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집을 나왔다는 얘기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오빠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나는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연욱은 눈을 땅바닥에 둔 채 두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단지 연욱을 빨리 집으로 보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
다. 지금은 11시가 다 되었는데 전주로 가자면 열차밖에는 없다. 하지만 세상이 흉흉해서 밤
차로 다 큰 여지를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전주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이모네
집으로 데리고 가는 수밖에는 없다.
"연욱아, 가서 어머님께 전화해야겠다. 그리고 이모네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만나서 이야
기 하자."
"싫어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 여기서 그냥 갈래요. 그렇게 하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
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이야?"
나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런 대책없이 같이 있자 는 것은 앙탈이 아니고 무엇
인가?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철우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가버리더라.'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연욱의 진실을 나도 인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어디로 갈까?"
"아무데 나요."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내가 생각한 것은 만화가게였다. 심야 만화가게 하면 하룻밤을 재
미있고 편하게 보낼 수 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실제로 동기들이 만화가게에서 방음
새우고 들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연욱은 내 생각을 말하자 피식 웃으며 걷자고 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종로까지 걸어 나갔다. 나는 답답했다. 빨리 과학원으로 돌아가 이 시
간에 잠이나 보충해 두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하지만 연욱은 비장한 모습으로 계속 걸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심야 다방의 간판
이 번쩍거렸다. 나는 연욱을 데리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다소 시끄러웠다. 어린애
들
이 드문드문 앉아 깔깔댔고, 종업원들은 하품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 보였
다. 여자 종업원이 자동인형처럼 일어나 다가오더니 무표정하게 심야 비용을 내라고 말하고
는 주문을 받아갔다. 심야비용? 나는 그 단어를 여러 번 되뇌며 웃었다.
"오빠! 왜 웃어요 ?"
"아내야, 그냥 재미있어서."
"오빠는 내 행동이 어리고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죠? 그렇기도 하겠죠. 나도 스스로 우
스
워질 때가 많으니까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오빠를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보고 싶어지는 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오빠는 태어나서 이런 감정 한 번도
없었어요?"
"감정은 불가산 추상명사 아니냐? 그걸 어떻게 세냐? 그 대상이 이성이든 아니든 그런 감
정을 늘 헤아릴 수 없는 상태로 우리들 마음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것 아냐?"
나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아름다워 보였다. 한 사람을 사랑하
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런데 나는 서영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영도 그러할 것이다. 우
리는 가장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는 원시안을 가지고 태어났나 보다. 서영이 만약 나를 떠
난다면, 그래도 그녀는 나에게 아름다움으로만 비춰질까? 연욱은 종이르 꺼내더니 낙서
를
하지 시작했다. 그러다가는 생각났다는 듯이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었다.
"오빠! 이거 내가 그린 건데요, 실력 없다고 나무라지는 말아요. 생각이 잘 안 나는 부분
은 우리 오빠 앨범을 참조했어요. 창피한데... ."
그 안에는 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기쁜보다는 숨이 턱 막
히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연극의 감정이 입혀진 또 다른 실제의 나를 마주보고 있다는 기묘
한 생각이었다.
아무 말이 없이 의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연욱은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잠바를 벗어서 그녀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그대로 잠에 빠져 들어갔다.
연욱은 어디에 이러한 열정을 숨기고 있었을까?
사랑의 근원은 무엇일까?
나는 이 여자를 거부할 수 없다.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이 여자를 위해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서영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연욱을 보
면서도 객관적인 마음이 되어 여유를 부릴 수 있었고, 나 또한 아름다움은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무엇이든 미리 규칙적으로 정의하고 상투적으로 규정하려는 나의 태도는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연욱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그렇게 진실되게, 간혹은 무로히
만
치 내 사람을 키워 가리라.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고 터지는 생명의 소리를 감추지 않고, 나는 연욱의 잠든
모습을 보며 편지를 썼다.
연욱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는 아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다른 여자를,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고 있다. 너의 순수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
며,
나는 너를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찍 말을 하지 못하고 이제야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어리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너는 나의 고백을 통하여 상심하거나 상처받지는 않을 만큼 강하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너로부터 사랑의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사랑의 참모습도 알았다. 신이 너와 나를 일
찍 맺어 주었다면 나는 행복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만일 지금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너의 참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지.
연욱아! 이제 집에 가거든 방황 오래하지 말고, 서로 다시 만났을 때 웃으면서 만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기 바란다.
나는 쪽지를 그녀의 가방에 살짝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를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그녀
의 맑고 평온한 모습이 내 가슴에 뭉클한 덩어리로 얹혔다.
우리들 주위로 여러 무더기의 젊은이들이 흩어져 자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썰
물이 빠지듯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침이 되었다. 연욱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더니 부
끄러운 듯 살짝 웃어 보이고는 화장실로 갔다.
우리는 하룻밤이라는 아늑한 옷을 걸쳐 입은 연인처럼 다정스레 걸었다. 풍족한 햇살을
받으며, 소란한 아침 도시에서 넓은 평원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연욱을 기차에 태워 내려 보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연욱은
뭔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는 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룻밤을 빼먹어서 정신없는 스케줄을 짜야 할 형편이었다. 도서관 안은 비교적 사람들이
많았다. 2학기가 되면서부터는 랩으로 들어간 사람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자리가 비어 있
었
다. 나는 자리에 차분히 앉아 오늘 수업 받은 과목부터 정리하고 나서는 세미나 준비에 들
어갔다. 하지만 잠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대충 읽을 논문을 몇 편 들고는 기숙사로 올라갔다. 우리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방에 불
을 켜기도 싫었다. 머리가 아픈 건지 잠이 와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집이 그리워졌다. 서울에 올라오고 난 뒤부터는 아예 집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
았다. 그런데 이렇게 나약해지면 어김없이 집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산소에도
가 보고 싶어진다. 머리는 점점 더 아파왔다. 과학원에 들어온 후로 감기나 몸살에 걸려 본
적은 없었다. 그것도 사치에 속하는 일에 불과하다. 정신이 나약해져서 그러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 불을 켜고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논문을 정리하며 읽었다. 아예
깡
그리 번역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강한 강도의 외적 자극은 약한 자극을 지워 버린다.
새벽까지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대충 논문 읽기를 끝내고는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일은 오전 수업이 없으니 잘 수 있을 만큼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리를 죽 펴
보았다., 있는 힘을 다해.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밑으로 내려가 시계를 장롱 속에
처넣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나
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심장이 고동을 쳤다. 숨을 멈춰 보았다. 그렇다고 심장 고동이 멎는
다
면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팝송에 나오는 노래 가사를 생각했다. 그 노래 가사에는
귀신ㅇ르 쫓는 주문이 들어 있었다. 고개를 살며시 빼 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 고개를 내미는 순간 목을 후펴치는 것이 있었다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가위에 눌렸나 보다. 나른 식은땀을 닦아내고 침대 위에 나부라졌다. 땀이 흘렀다. 서영
의
이름이 저절로 불러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과학원을 빠져 나와 약을 샀다. 간단한 몸살 기운이라는 약사의 말이
안도감을 준 것이 사실이다. 힘은 다 빠져 나간 승이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싶었다. 나는 아프면 음식을 더 잘 먹는 좋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서영은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며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나는 황폐해졌다는 생각이 들기
조차 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려 놓았다 그녀
는 두 손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처음으로 누구에게 기대 보았다. 그리고 그 품은 진정
으로 안락했다. 나는 잠이 들었다.
시험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우리의 예상은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1차에서 8명이 붙었
다.
떨어진 녀석들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합격된 녀석들도 미적거리지 않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다시 일 주일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에
소모해야 된다. 누구 하나 어깨를 펴고 기뻐하지 않았다. 쌀쌀한 기운에 에워싸인 이 공간을
비수로 자르듯 잘라 버리고 자신의 작은 몸을 감추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 희망은 신의 의도적인 올가미이다.
나는 옷을 차려 입다가 그제서야 입을 옷이 변변히 없음을 알았다. 공식 석상에 나갈 일
이 없으니 양복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작년 졸업에 사 입은 양복은 작아서 들어가지도
않
았다. 경태나 철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 걸 빌려 입고 나가기도 뭐해서 늘
입던 옷을 꿰어대고는 '빨아두기하도 할걸.' 하는 후회를 했다. 신발도 더러웠다., 세면장
에
가서 물로 대충 닦아내고는 운동화 끈을 다시 맸다. 그것 또한 낭패였다. 안쪽에 있던 부분
은 하얗고 밖은 더러워서 그것들이 꼬이자 얼룩덜룩하게 보였다. 머리는 길어서 끄트머리가
휘말려 올라가, 감았는 데도 부스스했다. 나는 면도기를 가져다가 옆머리에 물 칠을 하고는
반듯하게 잘라냈다. 더 이상하게 보였다. 거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뛰어
나왔다.
호텔 입구에서 나는 약간 주저했다. 처음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호텔하면 왠지 불
결한 관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장소라는 구태의연한 생각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호텔을 들어섰을 때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잘 꾸며진 실내 공간, 수천 수만 개 수정
들이 휘황하게 매달린 샹들리에 눈부신 불빛 기등이며 포근포근 소리도 안 나게 깔린 보랏
빛 양탄 자, 그리고 고급 의자들이 우아한 기풍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도록 그 곳을 미끄
러
져 들어가고 나가는 내국인과 외국인들의 차림새가 나와는 너무 다르게 보였다. 나는 용기
를 내었다. 이런 곳쯤이야 뭐 앞으로 내 집 드나들 듯 할 텐데 처음부터 잘 해야지.
커피솝에 들어서서 나는 점잖을 빼며 죽 둘러보았다. 그러자 웨이터가 와서는 손님을 찾
느냐고 물어보더니, 이름을 대자, 아가씨를 시켜서 딸랑거리는 종이 달린 작은 칠판을 들고
손님들 자리를 돌게 했다. 아는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가 먼저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황급히 담배를 꺼내다가 도로
넣었다.. 갑작스레 어른이 들어오면 결례라도 될까 봐서 였다.
20분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옆자리에서는 선을 보는 것인지 양가 어른인 듯한 분들 옆에
남자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슬로비디오를 틀어놓은 듯이 모든 동작을 우아하게
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 이라는 제도는 얼마나 합
리
적인가. 그야말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극치 아닌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서, 신도
아
닌데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상대방의 상품적 가치를 재어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상품적 가치가 꼭 금전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한 평가 방법은 분명히 상대방의 가치를 축정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리라.
나는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바삐 담배를 꺼내 물고는 거울에 나를 비춰
보았다. 턱 밑에 털 하나가 제대로 깎이지 않아 삐죽 나와 보였다. 나는 무슨 벌레라도 잡은
듯 획 잡아 뽑아 버렸다. 담배 연기는 나의 거친 숨을 타고 허파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옷
을 한번 더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나와 내자리에 가 앉았다.
나의 삶의 주변에서 늘 얼쩡거리는 희망은, 마치 과거와 같아서, 무수한 후회와 더불어 미
래를 점치는 도구이다.
14. 베인 마음
"그러니까 아리가 네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줬단 말이지?"
경태는 철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 일어나며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니까. 아!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녀의 마음을 미소로 보여 주시다니, 이
어찌 감읍하지 않으오리까."
"너,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니냐? 아직 이른 거 아냐? 실제로 만나서 아리가 어떤 방식으
로
나올지 누가 알아? 그리고 내 생각에는 네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 아니고 아리가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리가 선제 공격할 생각인지도 모르고. 내 생각에는, 아리가 좀 보자
고
했을 때, 네가 우선 거부를 했어야 옳았다고 생각되는데."
"윤재 쟤는 가끔 초치는 성미가 있어. 내가 잘되는 게 그렇게 꼽냐?"
"아니야. 단지 철우 네가 잘됐다니까 우선은 기뻐. 철우야, 아무튼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
각해 두었다가 대처할 수 있도록 해라. 그건 그렇고 나도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잘 듣
고 조언 좀 부탁하자. 갑갑해서 그래."
"뭔데?"
경태와 철우는 나에게 눈을 돌리며 동시에 물었다. 그들도 내가 도움을 청하는 것은 처음
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번 주 일요일에 서영의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영은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나타났다. 그들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어머니의 모습이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부인의 맵시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머리 속에 막
연히 자리잡고 있던 중년 부인에 대한 개념은, 단지 허리를 드러내지 않은 치마를 걸치고,
윤기 없는 머리를 적당히 손질하여 펑퍼짐한, 얼굴은 약간의 기미와 나이보다 많은 양의 주
름이 잘 받지 않는 화장기로 덮여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서영의 어머니의 모습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그리고 차림도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감은 흔적은 별로 없었지만, 샤넬라
인에 가까운 치마 길이부터가 충격적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하고, 어른이 먼저 앉기를 기다렸다가 앉았다. 서영은 앉자마자
테이블 밑으로 내 발을 툭 차고는 어머니가 안 보게 웃었다. 나는 당황하여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서영의 어머니가 말문을 먼저 열었다.
"서영이한테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과년한 딸을 두고 있는 부모이기 때
문에 궁금한 것도 많을 수밖에 없고, 또 알고 싶은것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잠깐 만나서 무슨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있
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혹이라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
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윤재군이 우리 딸과 어느 정도로 깊이 사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딸을 시집
보내기 위해 부모로서 의당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도리란, 내 딸이 좀더
좋은 조건에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지요."
서영의 어머니는 잠시 말을 그쳤다. 서영은 얼굴이 발개져서 그녀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순간 무엇이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의 어투에는 부드러
움으로 포장된, 금방 깨어진 유리 조각에서나 볼 수 있는 차가움이 날카롭게 깃들어 있었다.
서영도 매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내가 기가 죽은 건 아니었다. 우습게도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오기가 돋아나고 있었다.
"과학원이라는 데가 뭐하는 곳입니까?"
나는 늘상 듣는 질문을 또 받았지만,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순간 망설였다.
"과학을 공부하는 곳인데요, 71년에 생겼습니다. 그때는 나라도 가난하고 자원도 없고 하
니까 국내 우수 과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 면제 학비 혜택을 주어 과학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기관입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죠."
나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질문은 계속 쏟아졌다.
"졸업을 하면 무엇을 하지요?"
정말 낭패였다. 솔직히 나도 아직 정하지는 못하고 있는 문제였다. 나는 어머니의 질문을
종이에 프린트해서 시험보는 형식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문제가 일단 너무 어려웠
고, 시험 하나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석사를 마치고도 교수로 가는 사례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
래서 졸업 후에 박사 과정에 진학하거나 취직을 하게 되는데 연구소나 생산 현장에 나가도
록 되어 있습니다."
"박사를 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내가 너무 형사처럼 물어서 미안해요. 그냥 알고 싶
어
서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씀하세요."
부담 갖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꼬.
서영의 어머니는 미리 준비된 대본을 읽듯이 짬을 주지 않고 물었다.
"예. 과학원 박사가 되려면 좀 특별한 제도를 거쳐야 합니다. 그것은, 해외 저널에 논문
이
실려야만 졸업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저희과의 경우는 평균 5년이 소요되고 있습
니
다."
"그러면 앞으로 육칠년은 더 있어야 한다는 건데 ... 요즘에는 외국에서 박사를 받고 와
도
교수 자리가 어렵다고 하는 것 같던데요?"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다. 머리가
띵해 왔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불안감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확인한다는 것은, 아무래
도 우울하기까지 하다.
"고향은 ..... "
"전줍니다."
"전라 북도 전주? 아버님은 뭐 하시고? 아버님의 고향도 전준가?"
"예. 그리고 시청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말단이라 뭐 전문이랄게 있겠습니까."
나의 오기는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그리고 나도 상품적
가치가 따져지고 있음을 알았다.
"형제는?"
"위로형이 한 명 있고 아래도 여동생이 있습니다."
"형님은 결혼했어요?"
"엄마! 뭐하시는 거예요?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천천히 물어보세요. 그리고 다른 건
내가 집에 가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얘는? 너는 내가 물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잖니? 그리고 내가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
을 물어 본 것도 아닌데."
"예, 맞습니다."
모녀는 서로 화를 억누르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서영을 힐끗 쏘아보며 말했다.
"안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형이 먼저 장가를 가야 제가 갈 수 있겠죠. 형은 지금 군대 갔
다 와서 복학한 대학생이라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
니어서, 안정된 생활을 하려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겠죠."
서영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순간에, 이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능히 능가할 만한 나의 사랑과 다짐
같은 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서영의 어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윤재군은 우리 서영이를 좋아하는가?"
"예? 예."
"..."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구먼."
서영의 어머니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윤재군이나 우리 서영이는 나이가 아직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같은 나이가 되면
노
파심이 많아져요. 다시 말하면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주저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왜냐
하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짐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랑의 힘으로 버티지 못할 것이 무에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삶이란 그렇
지를 못해요. 나도 어렵게 살아 봤어요. 솔직히 서영이는 기억이 나질 않겠지만 얘가 어렸을
때 우리도 고생 많이 했습니다.
허나 지금은 고생을 하지 않아도 살 만큼 갖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때는 다들
고생을 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버티고 살았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요? 그리고 나중에
딸자식 갖게 되면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솔직한 내 심정을 이야
기할게요. 나는 두 사람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공부 중인, 그리고 앞으로도
학
문을 할 사람에게 내 딸을 맡기고 싶지 않아요. 서영이도 결국은 지겨울 거예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랐으니까요."
"엄마!"
서영이가 말을 끊었지만, 어머니는 한 번 딸을 쳐다보고는 침착하게 말을 계속 이어갔다.
"왜 그런가. 첫째로 서로 환경이 너무 달라요. 환경이 다르면 살아가는데 모가 많이 나와
서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갖지 않을 수가 없어요. 둘째로는 솔직히 나는 내 딸을 윤재군같이
어리고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어요. 셋째는 두 사람 아니, 윤재군은
아직 젊어요.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인생의 반려자를 물색할 시간적인 여유
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러나 미안하지만 우리 딸애는 결혼 적령기예요. 윤재군이 우리 서영
이를 사랑한다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다시 말하면 아니, 똑똑한 사람
이
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거예요."
나는 둔기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무섭게 돋아오르
던 나의 맹독성 오기도 그 순간에 박살이 났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서영아, 가자."
"싫어요, 먼저 가세요."
"빨리 따라나서는 게 일을 더 이상 그르치게 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서영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서영도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였는지 엉겁결에 끌
려
나가며 말했다.
"형! 전화할게."
경태와 철우는 눈이 동그랗게 되어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덤덤했다. 나는 서영과
어머니가 나간 뒤에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마음의 큰 동요는 없었다. 흔히들
이런 일을 겪으면 술을 진탕 마시고 깽판을 부린다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당하고
보
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과학원으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른 대책을 강구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그때의 상황을 잊어버리고나 있지 않은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가끔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영과
만나야 한다는 것일 뿐이었다. 오늘은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면서 그때의 일들도 떠올랐
다. 그러나 아직도 머리는 멍한 상태였다. 마치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윤재야! 내가 정직하게 얘기해도 되지?"
"그래, 말해 봐."
"만나지 말아. 솔직히 그만한 여자 또 없겠냐?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안 하는 게
좋
아. 멀리 갈 것도 없어. 우리 형은 지금도 명절 때 혼자 온다. 물론 네 마음은 몹시 아프
겠
지만, 이럴 때일수록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게 좋아."
"그래, 조금 비굴해지기는 해. 철우 네 생각은 어떠냐?"
"서영이는 만나 봤어? 서영이와 너만 좋다면 그만 아니냐? 나 같으면 못하겠지만 너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구나? 하하하."
서영과의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전화를 바꿔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단념을 하고는, 수업이 있는 내일 학교로 찾아 갈 생각이었다.
아침에 황급히 뒤꽁무니를 빼어 달아나는 철우를 바라보며 잠에서 깼다. 서영을 만나야겠
다는 생각이 나를 일찍 깨운 모양이었다.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 만남을 위해 채워야 할 노
동이었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까 하다가 요즘은 아침을 먹으면 몸이 무겁고 하루가 힘겨
워서 안 먹는편이 나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음료수를 두 팩이나 마셨다. 부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영은 수척해 보였다. 차는 우리를 어둠 속으로 몰아갔다. 내가 그려를 처음 만난 날의
밤처럼, 마치 두 사람의 목적지는 서로 다른 곳에 두고 다만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것뿐이
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적한 곳에 서 있는 레스토랑에 닿았다.
"형! 미안해요... . "
"뭐가?"
"저도 엄마가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예측 가능한 일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밖에는 없어. 그럴 수도있지. 나는 너희 부
모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너희 부모님의 입장이라면 나도 그럴 가능성
이 있지. 단 우리는 우리들만의 생각에 몰두해서 그러한 현실적인 부분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지. 이 산을 넘을 자신이 없으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게 되겠지?
하지만 넘든 넘지 못하든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 그게 바람직할지, 그렇지
않을지. 그러나 너희 부모님은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너나 나는 바람직한 쪽으로 배팅하
고 있을 뿐이야. 안 그래?"
"형! 지금 그런 분석적인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 지금 밖에도 못 나가게 됐단
말이야. 오늘 수업이 있기 때문에 빠져 나온 거라고. 그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래......"
"..."
'뭔 일이 이래?' 이 생각만 났다.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많이 해 봤지만, 그것
은
나의 자아의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이리저리로 갈라져 버릴
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우리 관계에 제삼자들이 나타나 우리를 방해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누가 감히 나에게서 서영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서영을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대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빨리 대안을 내지 않으면 절망이
주어진다. 워 게임(War Game),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내가 싸워야 할 적이 가진 자원을
분석하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자원의 사용을 최적화하는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야 할 때
이다. 상대방은 사회적 명성과 부를 가지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서영을 조정할 수 있는 권
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현재까지의 성실성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과학원생이라는 자격밖에는 아무것
도 없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인텐지블 팩터(Intangible factor : 무형의 요소, 즉 측정하기
어려운 요소)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서영의 미래를 보장할 만한 '가능성'이외의 현재에 확
보
된 '실물'은 아무것도 없다.
"서영아! 너는 나를 믿지?"
"그럼, 누굴 믿어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형! 우리 도망갔다 올까?"
"그건 너무 야비한 방법이다. 정정당당하게 처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고통스럽고 힘
들더라도 우리끼리의 믿음만 확실하면 두려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을 거야. 내가 다시 한번
너희 부모님을 뵈면 안 될까? 아니, 아버님과 남자 대 남자로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
까?"
"형! 솔직히 얘기할게. 아빠는 더 반대가 심하셔. 나는 두 분이 반대할 거라고 예상은 했
었어. 내게 형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당신들의 사위에 대한 조건을 귀가 아프
도록 말씀하셨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 오빠를 기다리는 일이
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그 조건이라는 게 뭔데?"
"좋은 집안과 확실한 학력과 직업."
"좋은 집안이 뭔데?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집안? 그래, 우리집은 권력도 돈도 없는 집
안
이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어. 나는 근원적으로 그 정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내 학력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이제껏 내 학력에 대
해
수치심을 느껴 본 적은 한번도 없었어, 나는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고. 그래, 너희집은 대
단
해?"
"뭐라고? 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아니래?"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었나 봐. 미안해. 그래, 우리 모두 진정하자. 우리 둘이 싸
우
면 안 돼. 미안해."
"..."
"아무튼 내가 아버님을 한 번 뵈어야겠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할게."
"그래요. 하지만 우리 엄마가 반대하는 실제 이유는, 엄마는 아빠한테 질린 부분을 형한테
서도 느낀다는 점이에요. 엄마는 아빠의 지나친 학구적 열정에 의해 당신의 인생이 험했다
고 생각하세요. 현실적으로 아빠는 골샌님에 불과한데, 엄마까지 나서지 않으면 온 식구 큰
일나게 생겨서 온갖 일 다 나서서 손수 해 오신 엄마거든. 그래서 형도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계신 거죠. 이번에도 귀가 아프도록 뭐라시는 줄 알
아?
여자는 남편밥 먹고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우리는 더 먼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애써 히히덕거리며 불안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감
을 벗어버리려 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둥지 없는 발판에서 서로
바람을 가려 주며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가엾고도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우리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도시의 불빛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가슴을 움켜잡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서영은 집앞에 이르자 무너지듯 내게 몸을 떨어뜨리며 흐느꼈다. 나도 모
르게 눈물이 나왔다.
"서영아! 왜 이래.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조금만 참아, 괜찮아."
서영의 어깨는 더욱 출렁거렸다. 서영은 바다이고 나는 바위였던가. 그려는 자신의 끄트머
리인 파도로 내게 달려와서 부서지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으면서도 서서히 나
의 몸을 깎아내고 있지는 않았던가.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안타깝고 조심스럽게 서로를 확
인하며 서서히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우리 서로 꼭
보듬고 섬이 되어 떠나자!
철우는 만취가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왜 이렇게 났을까? 엄마! 으흐.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흑흑흑."
경태는 침통하게 옆에 앉아 철우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짐작하고 내 의
자에 앉아 담배를 찾아 물었다. 경태가 한 대 달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불을 붙여 건넸
다.
철우의 몸은 허물어져 갔다. 이내 그는 잠에 빠져 버렸다.
"아리가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의미없는 짓 하지 말라며, 학원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기
가
그만두겠다고 했대. 그리고 사귀는 남자가 있으니까 더 이상 따라다니지 말라고도 했단다.
그런데 나경이를 통해서 알아본 결과, 아리는 사귀는 남자가 없어. 철우가 거의 매일같이 집
앞에서 기다렸는데 늘 혼자서 집으로 오더래. 다른 남자가 있었으면 철우 성질에 그냥 단념
했을 텐데 ..."
"무슨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지 모르겠다. 나도 오늘 서영이를 만나고 왔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한가 봐. 아니, 다른 남자하고 결혼하래나 보더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들 그래? 짜기라도 했냐? 그래서 서영이를 집에 들여 보냈어?"
"그럼, 어떡해? 묘안이 없을까?"
"나도 모르겠다. 우리방 애들은 한결같이 이 모양이냐. 도현이는 아귀같이 달려드는 뚜쟁
이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고, 한표도 들어오는 규수들 차내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하는 또, 야, 수첩 들고 교문 앞에 서있는 중매 아줌마 때문에 저어쪽부터 고개 돌리고 도
망가기 바쁘다더라. 아무튼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이나 해라. 나 요즘 실험실에 있어. 조용
히
혼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실험실에 메모를 남겨. 알았지? 순진한 녀석들이 꼭 일을 낸다
니까 ..."
"나 오늘 도서관에 있을게. 내일 아침에 기숙사로 들어올 테니까 철우나 잘 봐 주라. 오늘
숙제 나온 거 있지?"
"지금 공부가 되겠냐?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나가지."
"아니야. 할 건 해야지."
"네 책상 위에 갖다 놨다."
막상 도서관에 와서는 서영의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이 맴돌았다. 현재 중요한 것은 숙제
를 하는 일이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고 밤샘에 들어갔다. 공부를 안 하면 불안하
다. 정신 집중이 안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습관화된 탓일까?
서영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긴장을 한 탓인지 말이 얼른 나오지를 않았다.
"저, 안녕하세요. 서영의 친구 이윤재라고 합니다. 전화로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
송합니다."
그쪽에서도 긴장한 눈치였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요?"
그 목소리는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고, 자못 위엄이 섞인 무게를 과시하려는 것 같았
으나 어쩐지 융통성 대신 아집으로 옭은 노랑목이 섞여 있는, 그리 짝 달라붙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목소리가 성격을 반영한다면 그렇게 시원시원한 성격은 못 되어 보였다.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주신다면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얘긴데요?"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식으로 무덤덤하게 말을 했다.
나는,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의 시나리오에는 들어 있지 않은 공격이
었다.
"저어, 따님에 관한 얘긴데요."
"서영이는 곧 결혼할 텐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장난 전화 그만하고 공부나 하세요."
그는 무덤덤하게 질문을 던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망연자실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순간, 상대방의 연륜을 고려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짰
음을 알았다. 패착이었다. 권투처럼 잽을 써서 탐색전을 펼치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싸움
도 아닌데, 경험 없는 선수가 멋부리다가 일격에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기숙사로 올라갔다. 서영이가 전화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태와 철우
는 라면을 먹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경태야, 오후에 내 숙제 좀 내 주라. 네 책상 위에 올려 놓을게."
"오늘도 수업에 안 들어 올라고? 난리구나! 난리야! 왜들 그러냐? 대학 때도 안 그러
던
녀석들이 과학원에 와서들 난리야. 오늘 나갈 거냐?"
"모르겠어. 지금 서영이 아버님께 전화를 하고 왔는데, 곧 시집갈 거니까 단념하라시더
라."
"뭐야? 윤재, 니가 어때서? 간둬라, 간둬. 그러고 보니 나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구먼."
철우는 흥분을 하여 소리치다가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음인지 체념에 가까운 말을 하
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아 봐. 앉아 봐! 얘길 좀 해보자. 철우 너는 아리가 받아주지를 않고, 윤재 너는 서영이
와 이미 사랑을 하는데 부모님이 반대를 하는 상황 아니냐. 철우 너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덤벼야 할 일이고, 윤재 너는 다급하겠구나."
"다급한 건 마찬가지지. 나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장벽이
나를 막아서고 있어. 이걸 부서야 해."
"철우, 너는 왜 이렇게 과격해지냐? 요 놈의 여편네가 요새 겁이 없어졌어. 이리 와 봐
너, 내가 다른 여자 만나면 나 죽일 수도 있겠네? 이리 와, 너도 죽어!"
"이 상황에 장난이냐? 좀 조용히 좀 해라. 나 지금 내 정신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무덤덤
하게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상하다니까."
"내 정신하고 바꾸자. 나도 사랑의 악마에 걸려들고 싶어 죽겠다. 그래, 농담 그만하고
윤
재나 철우 너희들 비상이니까 너희들 숙제는 내가 대신해서 낼게. 숙제 걱정은 말고 열심들
해 봐."
"그래, 윤재야. 나도 있잖아. 노트 정리한 거 다 줄게."
"고맙다, 하지만 철우 너도 힘들 텐데. 그리고 숙제는 내가 해야지."
"아니야, 이젠 마음이 좀 편해졌어. 안 되면 지 죽고 나 죽는 거지 뭐. 이렇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나를 발견한 것으로 충분해. 너희들도 알듯이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지 않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자 경태가 철우의 엉덩이를 때리며 설거지를 하라고 소리를 지르
고,
철우는 경태더러 하라며 엎치락뒤치락거렸다. 철우의 죽는 소리가 나오고 곧이어 항복을 외
치더니 씩닥거리며 코펠을 챙겼다.
그들은 다 나가고 나만 혼자 남았다. 그제서야 슬픔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눈물이 나온 건
아니었다. 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아주 슬픈 노래만을 골라서 틀었다. '페데리코의 탄식
',
'별은 빛나건만...'
나는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작아지고 있었다. 아주 작아져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마음
이
편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편했다. 나는 삶이라는 짐을 벗어 버리고 기어 다니고
있
었다.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자신의 '꿈'이라는 욕망을 부둥켜안고 남에게 ㅃ앗기지 않으
려
고 애벌레들처럼 끝없이 기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제 꿈의 욕심을 더 많이 채우려고 남의
꿈을 빼앗아 자신의 꿈에다가 덧붙였다. 남에게서 빼앗아 꿈이 그의 노적가리를 이루고 있
기도 하였다.
나는 기어 가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삶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
다.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언어'라는 사치품도 없어졌다. 나는 기어 가기만 하면 되었다.
날
씬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살이 찌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기어 갔다. 동굴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기어 들어갔다. 누가 뛰어나와 나를 잡아먹어도 그만이었다. 나는
내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는 운명을 받
아
들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신념이었다. 나는 기어 갔다. 동굴은 끝이 없었다. 나는 그곳에
고치를 만들었다. 더 크기위한 작업은 아니었다. 나를 숨기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것은 단지 운명이었다. 나는 열심히 고치를 감았다. 그 속에 들어갔다. 나는 잠에 들지도
않
았다. 단지 그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악을 쓰듯 노래를 불렀다. 저항은 아니다. 굳이 말한다
면 노래는, 아직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마지막 세포에 대한 체념의 끈이었다.
땀이 고치 안을 채우고 있었다.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나는 그 땀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
을 느끼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땀은 더욱 나서 결국은 고치 안을 가득 채워 버렸다. 공기는
어디로 빠져 나갔을까 하는 걱정을 잠시 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냥 내게 주어진 것이라
인정했다. 나는 물 속에서 숨을 쉬지 않았다. 아니 내 세포들이 대신 숨을 쉬는 것 같았
다.
나는 안락했다. 아니 이 고치를 벗어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살았던 기억
이 날 듯도 했다.
밤이 오고 있었다. 차가워진 바람이 열어 둔 창문으로 한 올씩 에이듯이 파고 들어와서
가슴 한복판을 단숨에 찌르더니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어두워진다기보다 자신의 색채로 변해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땅은 자신
의 색깔을 감추고 있었다. 아니 검은 하늘의 색깔이 젖어 내려와 땅은 온통 그렇게 물들어
버리고 있었다.
"아버님께 전화를 했었어. 너 시집간다고 하시더라. 감사하더라고. 아무것도 없는 내게
이
렇게 빨리 따님을 주시다니 ..."
"형, 나 지금 농담 듣고 싶은 기분 아니야. 형! 정말로 나를 사랑해? 나는 형이 자꾸 남처
럼 느껴져. 왜 이렇게 무덤덤해?"
"무덤덤하기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이러고 있는 거야. 난 너를 사랑해. 너를
놓칠 수는 없어. 방법을 찾아야 하겠는데 마땅히 떠오르지를 않아. 먼저 내 생각을 정리해야
겠어. 어떻게 하면 좋은지 ..."
"형! 나 내일 선보러 나가야 해 ..."
"..."
"사랑해."
그녀의 말은 긴 여운을 남겼다. 나는 일단 과학원을 뛰쳐 나왔다. 과연 내가 부족한 게 무
어란 말인가? 무슨 이유로, 무슨 권리로, 그녀의 부모님은 우리를 떼어 놓으려 하는가? 나는
목적지도 없이 밤길을 걸었다. 머리가 멍했다. 다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직 그녀는 나
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선을 본다고? 그건 안 돼!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만이 그녀를 행복하
게
해 줄 수 있다. 누구도 그녀를 가지거나 나처럼 사랑할 수는 없어. 안 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몰랐다. 단지 포장마차가 주홍 불빛 천막을 눈물같이 물들이며
나한테 손짓하고 있었다.
"손님 그만 마시세요."
주인은 불안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말렸다.
"그냥 주세요. 괜찮아요."
주인은 주저하며 술병을 내밀었다. 술이 취하지는 않았다. 머리가 선명해져 갔다.
서영의 집안에서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학문을 하기 때문이라는 건가? 말도 안 돼. 어떻
게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확장하여 다른 모든 일을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도
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상하게도 기숙사에 누워 있었다. 포장마차의 부신 백열등밖에는 생
각나는 것이 없는데도, 나는 늘 자던 곳에 와 있었다. 경태는 내가 일어나자 라면을 끓였
다.
나는 라면을 앞에 두고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런지 모르게, 나는 라면 인생밖에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윤재야! 너 왜 그래? 너답지 않게 약해지고 있어? 얌마, 여자 때문에 우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야 문제를 해결하지. 빨리 먹어. 먹고 나서 얘기하
자. 빨리!"
"그래, 고맙다."
담배를 깊게 물었다. 경태는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경태는 재촉하지도 않고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
댔다.
"철우는 아직까지 안 들어 왔다. 사실은 그 놈이 더 걱정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숙제는 모두 해 놨어. 빨리들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해. 나 나갈게. 수업에 안
들어 올 거지? 철우한테서 연락 오면 랩으로 전화 좀 해 주라. 내가 가서 데려올 테니까. 그
럼 좀 쉬어라. 그리고 너희들 이 상태로 일 주일만 더 가면 과학원 생활 끝장이라는 것도
명심해라."
그는 짐을 챙겨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나 홀로 남았다. 나는 그대로 누웠다.
정확하게 서영의 부모님의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왜 그분들은 서영과 나의 오랜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사전에 이를 제지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부모님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서영과 나 사이에서 발생한 의사 소통의 문제는 아닐까? 서영은 어쩌면 진정한 이유를 알고
있을 터인데,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나의 뇌세포는 제각기 떨어져 나와 사방을 헤매고 있는데도 세
상은 아무런 변함이 없다. 빈 공간에 떠 있는 자연인 이윤재.
15. 새는 하늘에서 산다
11월도 다가고 있으니 어느 순간에 87년도 횡하니 날아가 버릴 것이다.
시간의 존재는 맨 처음과 끝 마디에만 살아 있는 것인가? 그래서 시작과 끝은 늘 부산하
고 소란스러운가? 하지만 나의 둥지는 고요함을 잃지 않았다. 과학원 안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다들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디론지 실종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피곤해 보였고 체념에 가까운 동작으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석
사 1년차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말고사는 가까워오고, 알게 모르게 논문 쓰는 일이 목전으로
다가옴으로써 미리 겁을 먹고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이제 1개월만 지나면 모두 랩에 처
박
혀야 되고, 그때부터는 논문을 쓰기 위한 세미나가 진행될뿐더러 실질적인 석사 2년차가
되
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배들의 고통스러운 논문 과정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게 되는 시점
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묻혔다. 나의 유일한 도피처인 것처럼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
고 먹고 하였다. 누구와의 대화도 피하고, 나는 기계처럼 강의실과 도서관으로 왔다갔다 하
며 공부 아닌 다른 모든 일에 무심했다. 나는 광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것만이 나의 유
일한 대안이었다. 나는 모두 잊어버리고 싶었다. 나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려서 그것으로 나
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것이 며칠간의 방황의 결론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나는 엄청난
도피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집착을 찾아낸 것이다.
"윤재야, 이야기 좀 하자."
"..."
경태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도서관의 의자에 붙은 듯 그대
로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책장만 넘겼다. 경태는 망설이더니 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
싸잡고 흔들어 댔다.
"서영이가 전화 했었어."
"..."
"야, 따라 나와."
휴게실 한 구석에서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경태를 바라보며, 종이컵을 이리저리 돌렸다.
경태는 그러는 나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서영이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했었어. 오늘 저녁에 다시 하겠다더라. 요즘 왜 그래? 이야
기 좀 해 봐라.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답답해서 그래. 자세히 이야기나 들어보면
속이 좀 편해지겠다. 무슨 일 있었어?"
"..."
"니는 벙어리 됐나?"
갑갑하기는 갑갑한 모양이다. 그는 부모님 고향이 경상도라서, 화가 났을 때나 답답할
때,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는 가끔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아니, 할 이야기가 없다. 미안하다. 철우는 어떻게 됐어?"
"그 새끼? 그 새끼도 나타나지 않고 있어. 랩으로 전화를 했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곧 있으면 기말고산데 어서들 기운차리고 준비해야지. 너희들 심정은 이해가 간다만 그런다
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빨리 얘기해 봐. 답답해 죽겠다."
"나중에 얘길할게."
경태는 포기하고는 일어서서 갔다.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서 인수봉을 바
라보았다. 인수봉은 초라하게 보였다. 장엄하고 우람한 봉우리가 아닌 서울의 한구석에 던져
진 바위덩이에 불과해 보였다. 나는 시야를 좁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기숙사와 야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문득 이름 모를 새가 기숙사 앞 동산 위로 날아올랐다. 까만 그 새의
날개 밑으로 노란색 깃털이 보였다. 새는 가지를 차고 날아 차오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지나간 흔적은 없었다. 내 앞의 풍경은 조금 전과 전혀 다름없이 정지해 있었다.
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어디로 가서 자신의 삶을 풀어갈까?
그가 하늘을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우는 양아치 차림으로 도서관에 나타났다. 경태와 나는 담배만 피워 마셨고 철우는 아
무 말 없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
다. 그 바람은 너무 아린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얘들아, 나가자.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자. 술 마신지도 오래 됐고."
우리는 경태의 제안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따라나섰다. 나도 땅을 밟아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건물 밖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잔디밭은 밤이라는 막을 둘러쓰고 훵한 눈
을 적막하게 뜨고 있었다. 가슴이 메었다.
우리는 러브뱅크로 흘러 들어갔다. 러브뱅크? 그래 사랑도 저장이 된다면, 그냥 두어도 이
자가 붙고, 언제까지고 그렇게 저축해 둘 수만 있다면...
철우는 의연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바다에 갔다 왔어. 내가 조금 큰 것 같지 않냐? 바닷가를 거닐며 생각을 했지. 나는 무엇
을 위해 살아왔는가? 도대체 그 동안 나는 나의 삶을 생각하면서 살아오기나 했는가? 나
는
뒤돌아 모래사장에 찍힌, 전혀 대칭이 이루어지지 않는, 움푹짐푹 서로 다른 형태의 두 줄기
발자국을 바라보며, 남들한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우울한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그
것을 극복하기 위한 성실함, 뭐 그런 거들을 헤아려 보았지.
그리고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을 찾아냈지.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커
다란 짐승이었어. 그 짐승은 나를 삼켜 버리고 있었어. 다름 아닌 포기라는 짐승 말이지.
어
쩔 수 없다는 말처럼 절박한 것은 없다.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니
까.
나는 쉽게 포기하며 살아왔지. 체육 시간에 나가서 축구를 한다는 건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
야. 그리고 내가 노력을 아무리 해도 체육 점수는 양 이상을 받을 수는 없지. 그것만이라면
다행이지. 나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관련있는 것이라면 모두 포기를 해야만
돼.
나는 인간이야. 나도 갖고 싶은 게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아. 그런데 이놈의 세상은 내가
얻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어떻게 해서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포기라는 짐승에게 잡혀 먹힌
거
지. 아리는 내 것이 될 수가 없어. 단지 내 마음 속으로 그녀가 내 것임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지. 이젠 공부나 해야겠다. 다 잊어버리고 공부나 해야겠어. 너희들 조심해라. 난 이제부
터 진짜 공부를 할 테니까. 가장 페어한 경기가 이것말고는 없을 것 같아."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초연해 보였고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경태
는 철우의 어깨를 쓸어안았다.
"서방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람들이 보잖습니까?"
철우의 아양에 경태가 그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윤재야, 너는 나보다 가진 게 많아. 서영이를 놓치지 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놓
치
는 것은 나 같은 병신밖에는 없어. 꼭 서영이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달란 말이야. 그래
야 내가 더욱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철우의 말을 듣고도, 서영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내 사랑의 소
중함이 느껴졌을 뿐. 그러나 그것은 서영이라는 존재하고는 거리가 먼 하나의 관념에 불과
했다.
나의 생활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연일 도서관에서 살았다. 철우나 경태가 가끔 올
라와서 서영의 전화 메모를 주고 갔지만, 나는 무관심히게 힐끗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서영의 전화나 연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를 정도로
냉정해져 갔다. 그리고 다른 생각에 빠지려 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생각이 나지도 않았
다.
나는 그저 수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시험 공부를 하거나, 숙제를 하는 등의 학문에만
열
심히 빠져들었다. 바보가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싶었다.
가끔은 휴게실에 나가 커피를 마셨다. 인수봉을 바라보는 짓은 아예 하지 않았다. 종이컵
의 테두리를 자근자근 씹어대거나 담배를 깊이 들이 마시는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들어오곤 했다. 친구들의 인사에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에도 끼지 않았다.
나
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 보일 뿐이었다.
"백기완 씨가 나온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 누군데?"
"그것도 모르냐? 무식하기는. 민통령 부의장 아니냐. 당대의 웅변가이자 통일 문제 전문
가. 그리고 최종 학력은 국졸."
"그래? 후보들이 많구먼. 그래서 여당이 되게 돼 있어."
나는 내 옆에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소란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 무심
히 서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을 부르는 하늘이 더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울
컥 가슴에 치밀어오르는 무엇 때문에 황급히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경태가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잡아 끌었다. 나는 그의 서슬에 못이겨 다시 휴개실로 들어 갔다.
"음료수 마실래?"
"아니."
"그럼 커피는?"
"아니."
"윤재야! 말 좀 해 봐! 너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된줄 아냐? 벌써 이 주
일
이 다 돼 가. 너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애들이 너 무서워서 말도 붙이기가 어렵
대. 그리고 서영이한테는 전화해 봤어? 연일 서영이가 전화를 했는데, 요즘은 뜸해졌어. 어
제도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가 많이 안 좋더라고. 너답지 않게 이렇게 계속 방치할 거야?
포기한 거냐? 포기했다면 아예 다행이겠는데 너는 아직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아. 어떻게
됐는지 말을 해 봐!"
"할 말 없어, 미안해. 나는 지금 아무 생각도 없어. 그냥 도서관에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야."
"말이 안 통하는구먼. 답답하다, 답답해."
"철우는 어떻게 됐냐?"
"너도 알듯이 체념에는 도가 큰 놈이잖아. 그런데 요즘에도 가끔 과학원을 빠져 나가더라.
며칠 전에 물어봤더니 글세 ... 아리네 집에 계속 가나 보더라. 만나지는 않고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나 보고 오는 거지. 가끔 무서운 놈이란 생각이 들어. 그 집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잠드는 경우도 있나 보더라, 이 추운 날씨에..."
"그 놈한테 그러한 열정이 숨어 있었다는 건 상상이 안 가는구나."
경태는 돌아갔다. 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는,
잠은 기숙사에서 자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죽여 버리겠노라고 벼르고 갔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기숙사의 따뜻한 잠자리가 그리워졌다. 벌써 느슨해지고 있는가?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데 도현이가 나를 붙잡았다.
"윤재야! 얘기 좀 하자. 학생회실로 가지."
나는 생소한 공간에 들어선 듯했다. 학생회실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오랫만의
다른 공간에 서 있음으로 해서 어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의식을 되
돌려놓는 이상한 힘을 발휘했다.
"윤재야!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며? 미리 그렇게 진 빼고 하다가 나중에 지치는 것 아
니냐?"
경태와 철우가 고마웠다. 이 좁은 사회에서 소문은 빠르기도 한데, 도현은 전혀 모르고 있
는 눈치였다.
"지치는 게 뭔데? 그거 먹는 거냐?"
"이 새끼, 주둥이는 여전해 가지고.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애들한테 물어봤더니 도서
관에 처박혀 산다고 하더라. 충격이다. 네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데 큰일났다. 어
떻게 해야 좋을지 ..."
"무슨 일인데? 그거 백두산만 하냐?"
"백두산보다 크다. 이번 선거 어떻게 보고 있냐?"
"무슨 선거? 반장 선거?"
"그래. 대한민국 반장 선거다. 농담 그만하고. 이번 선거가 4파전이 될 것 같다. 백기완 씨
가 출마한대. 물론 그가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하지. 내가 보기에는 여당이 될 것이 분명한
데, 민간 정부 수립이 이리도 길고 험해서야 되겠냐. 이대로 또다시 당한다는 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도도 없어서 불안하기만 하다."
"난 그런 거 모른다. 나는 내 일이 많은 사람이야."
"정말 너 변했구나. 네 생각이 그 정도라면 위험 수준 아니냐? 기본적인 시각 자체마
저
부정하고 너 자신의 생활 속에만 머무를 속셈이야?"
"그렇게 봐도 좋고."
나는 그 다음의 도현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내 삶의 자세를 교정해야겠다는
의도인지 열심히 떠들었다. 나는 그의 이마를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내가 서야 할
자리와 삶의 목표에 대해서...
"도현아! 너는 왜 사냐?"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나는 내가 살고 있음을 느끼기 위해 산다. 왜?"
그는 자신의 장황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내가 딴소리를 하자, 실망에 가까운 눈초리를 잠
시 던지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나는 미안 하기는 했지만 일어나서 학생회실을 빠
져 나왔다. 휴게실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의외로 병호형이 앉아서 나를 보자 손을 흔들었다.
"윤재야!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며?"
"뭘요, 논문은 잘 돼가요?"
"미치겠다. 막판에 오니까 왜 이렇게들 씹어대는지 아주 죽겠다. 하기야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많고."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떡해요. 잘 하겠지요. 교수님은 만족하세요?"
"만족? 만족 안 하시니까 죽겠지. 드래프트(Draft : 논문 초안) 만들어 오라고 하셔서, 그
동안 해온 거 일 주일 동안 밤새워서 갖다 드렸더니, 빨간색으로 도배를 해놓으셨더라."
"세미나 시간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거 아닙니까?"
"그랬지. 그 초안을 만들기 위해서 수십 번이나 바꾸고, 새로 컴퓨터 돌리고, 나리를 쳤지.
그런데 무슨 소용이냐? 교수님 양에 안 차니까 문제지. 교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은 어
렵지. 큰일이야. 논문 심사는 얼마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해서 졸업이나 할 수 있을지 의
문
이다. 이러다가 딜레이당하는 거 아냐?"
"형은 박사 과정 올라가니까 논문 정리할 시간이 좀더 있잖아요."
"교수님들이 그런 생각하시냐? 교수님들은 석사 논문도 웬만하면 퍼블리시(Publish : 해외
학술잡지에 실리는 것)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원하시잖아. 실제로 석사 논문이 실리
는
경우도 많이 있어. 너도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일찍 실릴 수 있을 거야."
"희종형은 어때요?"
"걔라고 별수 이냐? 그렇게 열심히 했어도 아직 드래프트도 안 나왔어. 워낙이 어려운
테
마를 잡아서 고생깨나 하더라. 그 녀석 자세만큼은 알아줘야 하는데 운이 안 따르나 봐. 그
것보다 주원이가 문제다."
"왜요?"
"아, 아니야."
병호형은 말을 잘못 꺼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닫아 버렸다가, 내가 계속 궁금해서
묻자 소문내지 마랄며 말했다.
"드래프트를 갖다 드렸더니 글쎄, 같은 테마로 퍼블리시된 게 있대. 그것도 이번 호 아이
이 트리플(IEEE : 해외 저널의 이름)에. 교수님은 관심있게 저널을 찾아보셨는데, 심사도 얼
마 남지 않은 판에 누가 저널이나 확인하고 앉아 있을 수 있냐? 큰일 났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래요?"
"모르겠다."
참으로 걱정이었다. 그렇다면 주원형은 졸업하기는 틀린 것 아닌가? 병호형은 어깨를
늘
어뜨리고 휴게실을 나갔다. 나는 일순간에 현실로 돌아와 버린 느낌이었다. 시간되면 졸업해
왔던 그간의 학교 생활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갑작스레 피곤이 밀려 왔다.
기숙사는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서 느낄 수
있는 괴괴함이 흘렀다. 코펠에 말라 붙은 라면 국물과 몇 가닥의 면발이 그러한 느낌을 더
해 주었다. 멀리 여행을 다녀와 어리저워진 자신을 추스리듯, 힘 없이 방을 대충 치웠다.
책
상에 앉아 서람도 정리했다. 가운데 서랍에서 과학원 시험볼 때 받은 수험표를 발견했다. 시
험 준비를 위해 고생했던 시간, 그리고 과학원에 들어와서 한 짓거리들이 그 수험표에 다
적혀 있기라도 한 듯, 모든 생각을 일시에 떠올리게 하였다. 나는 수험표를 다시 던져 넣고
서랍을 닫아 버렸다. 나의 꿈이 그곳에 갇히기를 바라면서 ... 책상 위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
다. 휴지에 물을 묻혀서 모두 닦아 내었다. 나의 욕망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듯이. 안 하던
짓을 하고 나서 죽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부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의식 중에 몸을 돌리다가 망설였다. 서영이 전화일 거라는 생
각에서였다. 받아보기로 했다.
"어, 난데. 일찍 들어왔구나. 바로 올라갈게. 철우도 올라간 댔어."
경태는 기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철우는 파리해졌고 수염이 텁수룩이 자라 있었다. 나도 그제서야 긴수염을 생각했다. 교수
님들은 수염이 좀 길었다고 해서 뭐라시진 않으셨다. 그것뿐만 아니라 외모에 관해서는 일
체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언젠가 지도 교수님의 유학 생활 때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들고 우리처럼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경태는 무거워 보이는 비닐 봉지를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우와, 이게 얼마만인겨? 좋는! 좋는!"
우리는 경태의 큰 동작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빙그르르 돌며 철우를 껴안았다.
"마누라, 보고싶었당."
"아이고, 이 화상 언제 죽냐."
"앉아, 앉아. 마 우리 조촐하게 한 잔 하제이. 이 형님께서 할머니 살롱에서 요렇게 푸
짐
한 술상을 봐 왔잖냐!"
경태는 양주와 안주들을 즐비하게 차려놓고 얼음을 담으려고 코펠 뚜껑을 찾았다.
"가만 있어 봐. 선녀가 다녀갔나? 방이 깨끗해졌네? 윤재, 너한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놀랍다. 자, 마시자."
우리는 술잔을 가득 채우고 '위하여'를 외친 다음 입 안에 털어넣었다. 오랫만에 마신
술
이라 그런지 목 속을 타고 내려가 뱃속에까지 닿는 느낌이 뜨거웠다.
"주원형은 큰일났더라. 같은 주제의 논문이 이미 퍼블리시됐대. 재수가 없을라니까 똥 밟
았지. 랩에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겠어. 여인숙 그 자체다. 다들 널브러지고 지저분하
기
이를 데 없지. 우리 랩장도 아무 말 안 하더라. 선배들 논문 쓰는 것 보니까 무섭더구먼. 나
는 제대로 졸업이나 할지 몰라. 윤재, 너는 테마 잡았냐? 도서관에서 금을 캐지는 않았을 거
고, 뭔가 잡았을 것 아닌가배?"
"너는 요즘 학과 수업 안 들어가고 논문 테마 잡고 있냐? 2년차 선배들 때문에 세미나한
지도 오래 됐다."
"어, 요 자식 입이 열렸구나! 철우야, 윤재 얘는 한동안 벙어리 됐었다. 지금은 얼굴이 좀
났다. 오전까지만 해도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더라."
"말을 어떻게 붙이냐?"
"잘."
"윤재, 너는 아직도 그 상태인 모양이구나. 서영이하고 안 만나 봤어?"
"철우 너나 걱정해라."
"내가 어때서? 나야 잘 하고 있지."
"다 알고 있어. 너 왜 밤마다 사라지냐?"
"그냥, 거기 가야 마음이라도 편하기 때문이야."
"나는 도서관에 박혀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던데? 공부도 재미있게 했고, 사람들 얼굴
안
봐서 좋고."
"다 좋은데, 서영이는 만나 봤냐고?"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일단 한군데 몰입하고 싶어서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어. 폭풍전야
일 수도 있고, 이대로 끝나 버릴지도 모르지."
"그 동안 무슨 변화라도 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리고 서영이에게 너무 무책임
한
행동 아니냐? 서영이는 뭔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던데? 전화 목소리가 날이
갈
수록 안 좋아지고 있어. 내가 한번은 찾아 오시라고 말했거든.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모양
이더라. 빨리 대책을 세워야지. 우리 모두 그 집에 달려가서 데모라도 할까? '서영이를 석
방
하라!'하고 말이야."
"무책임? 그래, 무책임하지. 하지만 마음은 안정이 됐어. 그 당시에 내가 어떤 행동을
취
했더라면 극단적인 면모밖에는 없었을 거야.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
"그러면, 지금은 무슨 대안이라도 있냐?"
"아니."
경태는 나의 대답에 한숨을 쉬었다.
철우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라. 아무튼 나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안 하는게 좋다고 생각해.
나중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결혼이란 구조는 안 그래도 복잡한데."
"너는 아직 사랑을 몰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철우가 경태에게 한마디를 했다. 그것은 너무 차가워서 섬뜩하
기까지 했다.
"사랑이란 결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아니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살고 내가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야."
철우는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절실한 눈빛은 나를 몰아대는 압력이었
다. 나는 밀려드는 그 시간을 삼키듯이 술을 한 모금 넘겼다. 달큰한 기분이 들었다. 나른
해
지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근 상태처럼 여겨졌다.
전화 부저가 울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 두울.
철우와 경태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정지 화면처럼 세 사람은 침묵하였다. 이윽
고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윤재씨 좀 부탁합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는 울듯이 외쳐댔다. 그 소리는 아주 먼 과거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시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터지며 나를 휘감아 버렸다.
"여보세요."
"형!"
서영은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흐느낌
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먼 과거에다가 비워 놓고 온 여백을 아득
히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 흘렀을까? 우주 공간 저 멀리로 사라져간 시간들, 그
되부를 수 없는 거리만큼일까?
"서영아! 내가 학교로 갈게."
또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뒷문에 계세요."
"꼭 기다려. 네가 오지 않아도 난 거기에 서 있을 거야."
나는 한참을 베란다에 서서 찬 밤공기를 가슴으로 받았다. 앞동산은 웅크리고 깊이 앉아
밤을 품어 들이고 있었다. 아주 어둡게. 그 밑으로 가로등이 찬연히 빛났다. 그 불빛들은
밤
의 눈물인가. 그 빛은 모두 내 가슴팍으로 박혀 와 점멸하며, 어두워진 나를 기어이 밝혀 내
려고 안감힘을 썼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면도를 했다. 그리고 때낀 손톱이며 발톱도 깎았다. 어제 빨아놓은
옷을 차려입고 맨 먼저 미장원으로 달려갔다. 미장원 아가씨가 깜짝 놀라게 아는 체를 하며,
왜 이렇게 오랫만에 왔냐는 둥 안보인 사이에 수척해졌다는 등 갖은 수다를 떨며 머리에 물
을 뿌렸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어떻게 깎아드릴까요?"
그녀는 가위를 들고 머리 방향을 조정하며 물었다.
"알아서 해주세요."
내 신체의 일부는 아무런 미련 없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머리를 감고 나서 드라이를 하고는 거울을 슬쩍 바라보았다. 잘 깎았나를 검사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어색하지 않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가씨는 다 깎은 머리 위에 쉬이익 스프레
이를 뿌려서 머리 모양을 고정시켰다. 나는 미장원을 나와 한참을 걷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흐트러서 다시 갈퀴질을 했다. 편안함.
오랫만의 거리였다. 거리는 낯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처럼 두근거림이 일었
다. 다른 세계에서 만났던 여자를 만나러 가기 위해 종로 거리를 몇 번이고 배회하다가 배
짱을 앞세워 기다리던 기억과, 어설픈 웃음으로 나타났던 서영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시
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애인처럼 느껴지던 편안함 뒤로, 왠지 모를 불안함이 뾰조록 돋아오
르던 그 순간에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들이 질두를 하고, 내년 올림픽을 선전하는 광고물이 여기저기 흩날리고 사람들이 바
람
소리를 내며 바쁜 걸음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었다. 모두들 저 자신에게 가장 알
맞는 안정 상태를 찾아내고, 유지하기 위해 지금 낯설게 끼어든 불안정을 알게 모르게 제거
해 내고 있을 것이다. 불안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와 질기고 깊게 스며듦으로, 그러다가 끝
내는 그것이 삶 속에 뿌리를 박을 수도 있으므로 그것이 더 자라기 전에 잘라야 한다. 현명
한 지혜로든, 정확한 계산으로든, 아니면 뜨거운 열정으로든 그들의 걸음 속에는 도전이 숨
어 있었다. 나는 나의 안정 상태를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새는 자신의 안정 상태를 찾기 위해 하늘을난다. 언젠가는 땅에 발을 다시 디뎌야 할 운
명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힘과 경험과 본능을 다하여 휙 날아오른다. 새는 땅 위에
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하늘을난다. 그리고 그 에
너
지를 모두 나는데 소진해 버린다. 그는 무모한 감상주의자이다. 왜냐하면 새는 보이지도 않
고 잡하지 않는 목표를 향해 용기있는 날개를 힘껏 펼치기 때문이다. 언제나 불안하고도 새
로운 미지.
나는 그대로 서영을 만나러 갈까 하다가 시간이 남을 것 같아서 도서관으로 돌아와 그 동
안 내가 해온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나의 안정 상태를 찾기 위해 그 동안 이렇
게 많은 자료들과 책 더미 속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끝이 어디이든지 간에, 나는 그
속이 편안하였다. 그것은 결코 옹색한 도피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나의 '자리'였던 것
이
다. 내가 있기 위한 '존재의 초석'이었던 것이다. 견고한 지상. 나는 펼쳐진 책을 짝 소리
가
날 정도로 덮었다.
그리고 나는 서영에게로 한 걸음에 달려가기 위해 도서관을 훌쩍 나섰다. 나의 또다른 희
망과 자유인 하늘을 움켜잡기 위해 나는 날아올랐다.
새는 하늘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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