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전쟁 -하권
이영민
차례
`하권`
10. 새로운 선택 7
11. 열린 땅 37
12. 내각제와 이원 집정부제 63
13.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105
14. 한으로 얼룩진 세상 125
15. 흔들리는 이상 157
16. 미래가 선택한 사람 193
17. 전쟁은 끝나고 237
10 새로운 선택
하얀 구름덩이가 가녀린 바람을 타고 엉킬 듯 풀리고 뭉칠 듯 떨어지며
용이 되었다 가는 토끼가 되고 새가 되는가 싶으면 꽃이 되기도 하며 기기
묘묘한 현상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고요히 적막 속을 흐르고 있다. 구름 끝
저쪽에서는 여명의 빛자락이 수줍은 소녀의 발그란 볼 색처럼 분홍 빛 고
운 빛으로 조금씩 조심 조심 물들이며 다가오고 있다.
그 여리던 빛자락이 이내 붉은 빛으로 변하여 하얀 구름덩이를 소리 없이
삼키더니 활활 타 오르는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동녘 하늘 위로 둥그렇게
솟아올랐다.
붉은 빛을 머금고 발 아래 깔려 있는 구름은 부드러운 솜사탕도 같고
푹신한 카펫 같기도 해서 뚝 떼어 내 한 입 베어 물고 싶고 훌쩍 뛰어
내려 포근하게 뒹굴고 싶은 충동 마저 일으킨다. 한 뼘이나 될까 두
발자욱이나 될까 싶은 곳에 간신히 구름을 뚫고 고개를 내민 봉우리들이
한창 단장 중인 초록색 자태를 살짜기 보여주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의 조화가 환상처럼 벌어지고 여기 저기서 탄성과 갈채가
터져 나오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그 정상에서 맞는 아침은 실로
감격적이었다. 소운은'한국인의 기상 이 곳에서 발원하다.'라고 쓰여진
비석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며 숨죽여 일출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왕신께 빌었다. 새로운 출발을 다지기 위해 이 곳 지리산을 찾았으니
부디 영산의 정기를 온 몸 가득히 불어 넣어 달라고 ...
서울을 떠난 지 3일째 였다. 모든 잡념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맑고
신선한 마음으로 다가올 내일에 대처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은이의
간절한 동행 요구를 차갑게 거절하고 홀연히 지리산을 찾은 것이다. 마치
극기훈련을 하듯 고독한 종주 동반을 통해 소운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을 채웠고 조금 전 일출을 지켜보며 각오를 다졌다. 이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험한 세파와 자랑스러운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소운은 서둘러 배낭을 챙겼다. 지금부터 잰 걸음으로 하산하면 오늘
중으로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칠선계곡을 타고 내려와 남원으로
달렸다. 고속터미널에 도착해 공중전화를 찾았다.
"성현이니? 마침 자리에 있었구나. 지금 올라간다."
"거기가 어디신데요?"
"남원이다."
"동찬이 형이 몇 번이나 전화했었어요."
"그래? 혹시 또 전화 오면 시간 맞춰서 사무실로 오라고해."
전화를 끊고 신문을 사들었다. 그리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운은 신문을 집어들고 습관처럼 정치 면을 펼쳤다. 선거가 끝난지 한
달이 지나고 제15대 국회의 개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선거후유증이 정치권을 혼미 속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TK를
중심으로한 무소속의 움직임이 활발해 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동우회 형식의 독자적인 교섭단체를 추진 중이라고 했다. 숫자상으로나
성향의 동질성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무소속의
움직임은 여당과 J당이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는 영입작업이 먹혀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3당 체제의 정국운영도 사실상 불가능해
진다.
선거가 끝난 며칠 후 소운은 김동수의원을 만났었다. 이때 5-6공으로
부터 검은 돈을 수수한 일곱 명의 인사들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했었다.
관련자중 이의원을 포함해 4명이 여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김의원은
시간을 달라며 양해를 청했다. 안정의석이 시급한 상황이니 단 한명이라도
아까운게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즉시 처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안정의석이 쉬운게 아니였다. 무소속을
영입하고 M당을 흡수하면 간단하다던 큰 소리가 무색 해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대구출신 대학 후배가 소운을 찾아왔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고향
선배를 모시게 됐다며 인사차 들렸다고 했다. 그는 무소속의 입장을
이렇게 대변했다.
"무소속이 어데 평범한 무소속잉교? 한이 억수로 많다 아입니까. 디립다
욕묵고 쪼끼난 사람들이라꼬요. 즈그들이 싫다고 차뿌다 아입니까?
그카더이 아쉬버가 다시 온나 카능기 말이 되능교? 다시 오라칸다고
가능기 병신인기라요. TK는요 진즉부터 빠이빠이라요. J당으로가능기
우떻것노 싶어도 잘몬하모 거 가도 들러링기라. 거도 누구 혼자 다해
묵을라 안캅디까? 차라리 똘똘 뭉쳐가 교섭단체 만들고 지 목소리 내능기
백번 낫다꼬요. 영감이 뭐라카능가 아능교? 권략무상이라 그캅디다. 쪼매
참고 때를 기다렸다가 권토중래하겠다 그기라요. 이기 무서븐 거
아입니까?"
무소속이 개인적인 반여감정을 가지고 있고 지역적인 반YS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영입의 손길을 거부할
수밖에...김의원은 겨우 한 두명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요지부동이라 했다. 자칫하다가는 여소 야대의 구도로 15대
국회를 개원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일한 기대는 M당에 있었다. 하지만 흡수 통합이냐 당대당 통합이냐를
두고 팽팽한 줄다리기만 계속되고 있었다. 대의 명분보다는 소위 밥그릇과
어줍잖은 자존심이 논점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M당의 일부에서는 제1
야당인 K당과 재결합을 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교섭단체도 안되는
소수지만 사수하자는 의견도 심심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구태적 소모전, 소운은 그게 싫었고 그것이 지리산을 찾게끔 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소운은 신문을 접고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 주어질 역할, 소운이
지리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김의원이 전화를 통해 넌즈시 던져준 바
있었던 모종의 역할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소운은 잠을 청했다. 어두운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졸음이 쏟아졌다. 무리한 산행이었나 보다.
구례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천완봉에 올라 남원으로 내려 오기까지 이틀 밤
낮을 야행까지 해가며 종주를 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만무 였다.
"손님, 다 왔습니다. 어서 내리세요."
소운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버스에서 막 내리려는데 누군가 배낭을
뺏어 들었다. 동찬이었다.
"아니, 사무실에서 기다리지 뭐하러 여기까지 나왔냐?"
"급히 만날 사람이 있어요. 빨리 갑시다."
"만날 사람이라니?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누굴 만난다는 거야?"
"차림새고 뭐고 상관없어. 가보면 알아요."
"나참,..."
소운은 영문을 모른채 동찬의 뒤를 쫓았다.
"여기서 기다려요. 차 빼올께."
잠시 후 동찬의 차가 주차장 출구로 빠져 나왔다. 트렁크를 열고 배낭을
실은 뒤 차에 올라 탔다.
"만날사람이 누구야?"
"김동수 의원."
"뭐야?네가 그 분을 어떻게 알아?"
"내가 모르는 정치인이 어디 있어? 내가 무슨 동네 신문사 기잔 줄
알아? 형이 김의원 한테 내 이야기를 했다면서? 비자금 건 때문에..."
"그래. 그런데."
"김의원이 나를 보자고 하더라구 그래서 아침에 만났는데, 중요한 제안을
하더란 말이야."
"제안을? 그게 뭔데?"
"그건 김의원 한테 직접 들어 보고. 내가 형하고 상의해서 결정하겠다고
했더니 연락되는 대로 바로 보자고 합디다. 언제 올라오나 궁금해서
사무실에 전화를 했더니 성현이가 받더라구. 그래 김의원한테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어떠냐구 물었지. '오케이'하시더라구 먼저 한국호텔에서
만났었지? 거기로 가는 길이야."
"야, 이 꼴을 하고 호텔을 간단 말이야?"
"특이하고 좋은데, 뭘 그래. 한가지 재미있는게, 김의원이 SG를 소상히
알아."
"김의원이 SG를? 아니, 그 양반이 어떻게 우리를 알아?"
"글쎄,그걸 얘기 안해요. 기분이 상당히 안좋아. 형 몰래 뒷조사를 했다는
얘기거든."
"설마, 그럴리야 있을라구. 그럴 분도 아니구."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를 아느냐구요? SG는 우리 밖에는 아무도
모르잖아? 김의원을 아는 사람은 형밖에 없고 형이 얘기 했을리가 없으니
분명 뒷조사밖에 더 있어?"
"믿기지가 않아. 감희 나한테... 차 돌려라."
"왜?"
"만나지 않겠어."
"왜 이래, 형 답지 않게... 약속은 약속이잖아? 불쾌한 건 만나서 따지면
되지 안만날건 뭐있어? 수련을 덜 쌓고 오셨구만?"
소운은 아차 싶었다. 좁은 소견을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다.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어. 꼭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흥분했어."
"형, 느낌인데 말이야. 김의원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실이다. 내가 어려울 때 많은 힘이 되어 주신 분이니까."
"대 선배님이 되시더구만? 그 분도 형을 상당히 아끼는 것 같아?"
"그것도 사실이다. 선배니까 후배를 아끼는 건 당연하지."
"내가 보기엔 그 정도가 아니야. 무슨 까닭이 있어. 맞지?"
"나중에 얘기해 줄께."
동찬의 승용차가 호텔 정문에 멈추어 섰다. 차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로비로 들어서 곧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몇 층으로 모실까요?"
"4층."
'지난 번에도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와 동찬이 411호 객실을 두드렸다.
"형, 지난 번에도 이 방에서 만났지?"
"그런 것 같아."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의원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 소운이, 정기자 어서들 오시오. 자, 앉읍시다."
"안녕하십니까? 자주 뵙게 되는 군요. 그런데 복장이 이래서...."
"복장이 어때서 그러나? 산에서 내려 온 사람이 당연하지. 어서 이리와
앉게나."
테이블 위에 양주 한 병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내 오늘은 한 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소운이 자네 술 실력은
여전 하겠지?"
"먼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오자 마자 왜그래? 천천히 하자구."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래? 뭔가?"
"SG연구회 말입니다."
"아하,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지? 우선 한 잔 씩들 받으라구. 이 방이
내가 자주 쓰는 방이야. 왜 이 방을 좋아하느냐면 우선 4층에 있어서 좋아.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은 4층을 꺼려하거든? 그러니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편해. 또 하나는 4층 담당이 내 조카야. 그러니 낯설지도 않고
불편한게 있으면 금방 해결이 되서 좋지."
"의원님, 제 질문에는 아직..."
"알았어 이 사람아. 얘기를 하려는 중이야. 선거전에 만날 때 내가
자네보고 혼자 오라고 했을 꺼야. 내가 이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중요한 몇 사람뿐이야. 비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지.
조금있다가 내 조카녀석을 소개시켜 줌세. 그날 자네는 셋이서 왔어.
그리고 갈 때에는 한사람은 자네 차를 가지고 갔고 자네와 다른 한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을 빠져 나갔지. 내 말이 맞나?"
"예."
"나는 아무나 이 방에 초대를 안하네. 자네와 정기자는 그런 점에서
특별한 손님이지. 내 조카는 자네가 혼자 올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가 그랬거든. '젊은 사람 한 분이 오실테니 안내를 해라'
그렇게 말이야. 그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겁이 난 게지. 제 딴에는
나를 돕는다고 사람을 시켜서 자네 뒤를 쫓았던 모양이야. 뭐하는
사람들은가 싶었던 거지. 어떤 방법으로 조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성원들의 명단과 몇 가지 연구자료까지 알아 냈더군. 그렇게 해서 알게
된걸세.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자네가 혼자 오기로한 약속을 안지킨 것도
잘못이고 내 조카가 과민하게 군 것도 잘못이지."
"개인의 능력으로는 우리를 조사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조카녀석이 보안사 수사관 출신이야. 총기 사고로 강제 예편됐지. 아마
그 덕을 봤을 걸세.조카녀석을 부를테니까 직접 물어보게."
김의원이 인터폰을 눌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모임의 목적이 뭔가? 그것까지는 못알아냈더라구.하하하... 하여튼
면면이 대단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런지 연구내용도 훌륭하더구만."
노크 소리와 함께 검은 정장차림의 건장한 남자가 들어왔다.
"인사드려라. 이쪽은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님이고, 이분은 XX신문사
기자시다. 우리 후배는 안면이 있지?"
"김진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후배님이 네가 한 짓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 하신다. 사과드려라."
"본의 아니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숙부님 생각만 하다가 그만 큰 결례를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중한 사과엗 소운은 여전히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제가 보안사..."
김의원이 조카의 말을 막았다.
"그건 말씀드렸다."
"그렇습니까? 옛날 동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적인
이해관계라 했고 또 개인적으로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의 도움이었기
때문에 비밀은 철저히 보장될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숙부님을 믿으신다면 백프로 믿으셔도 됩니다."
소운이 과거에 기관원에 끌려가 무자비한 취조를 당하고 풀려 나기전
수사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협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려라. 주둥이를 잘못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줄 알아'하고는 '뭘조사 받았지?' 하며 묻는다.그러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자유로워 졌다.
"우리 회원들 중 기억나는 이름있어요?"
"이미 머리 속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좋아요. 믿어 보지요."
김의원이 조카를 내보내고 소운을 바라보았다.
"자네 수사관들의 심리까지 읽어내는 구만. 대단하이."
"이게 다 그 처절한 경험 덕분이죠. 갈비가 부러지고 이빨이 부러지도록
두들겨 패고는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으면 인심쓰듯이 풀어주면서 이렇게
물어 봅니다. '누가 그랬어?', '어디서 맞았어?' 모른다고 하면 '그래. 영원히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하고 이죽거립니다. 의원님은 그런 꼴을 안당해
보셨으니 이해가 안가시겠죠. 저 친구 대답하는 폼이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느 것 같군요. 아니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든가요."
"내가 아는 만큼은 알고 있을 걸세 자 우선 이 잔부터 비우지."
채워진 잔을 비우고 잠시 잡담이 오고갔다. 마침 동찬이 결혼을 몇 일
앞두고 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동찬에게 화제가 쏠렸다. 늦깍이 신랑
신부를 축하하는 덕담이 이어지더니 이내 소운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SG회원중 유일한 노총각으로 남기 때문이었다. 성현이가 있긴 했지만
김의원은 아직 SG에 새식구가 생겼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 어떻할거야? 아예 혼자 살기로 작정했나?"
"때가 되면 해야죠."
"상대는 있기나 하나? 내가 중매라도 서 볼까?"
동찬이 가로막았다.
"큰일 날 소립니다. 죽고 못사는 아가씨가 있어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래요? 아, 이사람아. 그럼 얼른 해치워. 그러다가 자네 환갑 잔치가 돌
잔치가 되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소운은 결혼 얘기만 나오면 골치가 지끈거렸다. 빈털털이가 다름없는
경제적 현실도 문제였지만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 나갈 자신도 없었다.
오직 한길 만을 고집스럽게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할 그로서는
가정이라는 틀이 적지않은 부담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지은이에게는 항상
미안하고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이었지만 선뜻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가 두려운 것이다. 지은도 소운의 그런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소운은 화제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싫었다.
"의원님, 시간도 늦었고 하니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꽁무니를 빼겠다 이말 이지? 좋아. 그정도로 했으면 생각이 있겠지.
하여간 서둘러 이 사람아. 내가 부조는 톡톡히 하지."
"새겨 두겠습니다."
동찬이 자세를 고쳐잡고 말했다.
"이제 본론을 시작하시죠."
"그럽시다. 단도직입 적으로 말하자면 소운이 자네들의 도움을 받고
싶어. 전에 자네가 해야 할 역할이 있을거라고 한 말 기억하나? 오늘 그
얘기를 하자는 걸세. 자네와 SG연구회가 나서 줘야겠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 누구를 또는 어느 집단을 돕는 게 아니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뭔가를 도모해 보자는 것이야. 이건 내 개인적인 제안이지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는 일이야. 여단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제안하는거란 말일세. 만약 내가 속해 있는
당이나 고위층과 연관된 일이라면 궂이 자네들을 찾을 필요가 없어.
사조직으로 운영되는 기구가하나 둘이 아니지 않은가."
"일단 구체적인 내용부터 알아야겠군요."
"말하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년 대선 이후면 3김 시대는 자연스럽게
막을 내리게 되네. 지금 3김 시대 청산을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짓이고대선까지는 어쩔 수 없이 현상대로 갈 수밖에 없어. 그 후에 대안이
뚜렸하지가 않아. 자네들이 인물을 찾아주게."
"저희들이 무슨 능력으로..."
"충분해. 자네들이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 구성원들의 개인적 능력도 탁월하고. 자네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겠지만 나는 조카의 행위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SG를
알게 되었으니까. 물론 행위는 잘못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봐서 고맙다는
걸세. 어쨋건 자네들이라면 자격도 능력도 충분하다고 믿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제도나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또 검증이나 실험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워낙 카멜레온 같은 판이
아닙니까? 수십년을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도 못하는 일이라구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정황을 가상해서 각각의 경우에 합당한 인물이
누가 있겠는지를 찾아 보자는 거야. 현행 대로 대통령제에서는 누가 좋고
내각제한에서는 누가 적당하고 이워 집정부제가 되었을 경우에는
누구누구가 적임이냐를 연구해 보자는 걸세. 여든 야든 또는 제도권이든
제도권 밖이든 대상을 구분할 필요는 없네."
"2천년대를 대비하자는 말씀이군요."
"꼭 그것만은 아니야. 가능하다면 내년의 주자도 점찍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겠지. 야당에는 주자가 눈에 보이지만 여당에는 아직 부각된
인사가 없어. 물 밑에서야 신경전이 대단하지. 신경전이 표면화되면
통치권에 누수현상이 두드러지게 되네. 이건 개혁 정책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거야. 그러니 교통정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이걸 여당을 위한 일이라고 보지말고 개혁세력에 대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한가지 분명히 할 것은 대권은 한사람의 김씨로서
끝나야 한다는게 내 개인적인 소신이야."
"그렇더라도 여당의 주자를 점찍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가능성에 대한 예상도는 그려볼 수 있겠지요."
"그것 만이라도 좋아. 하여튼 자네들이 중점은 둬야 할 부분은 대선
이후의 정국을 누가 어떤 세력으로 주도하느냐 하는것이야. 내년에 대선이
끝나면 여당이고 야당이고 모두 헤쳐모여가 불가피 하네. 군웅 할거
시대가 된다는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며칠간 말미를 주십시오. 동지들하고 충분한 토의가 있어야
하고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당연하지. 부탁하겠네. 나는 사심이 없는 사람이야. 그저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을 뿐이야.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네만 내가 대권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오해 할 수도 있을
걸세. 나는 그렇게 그릇이 크지가 못해. 국회의원밖에 될 수 없는
그릇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큰 그릇을 찾고 싶은 거고 그것이
국가를 위한 최대의 봉사라고 생각했네."
김의원의 진지한 신상발언이 끝나자 동찬이 물었다.
"의원님 외에 이 계획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어요. 정기자가 알다시피 내가 고위층과 가까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결코 맹종하는 충복은 못돼. 나는 내 소신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지 계보나 고위층의 지시에 의해서 분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이번 일도 내 소신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때문에
하는 일이예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소운이 후배가 잘 알거요. 믿고 일을
할만한 사람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이야기가 대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갔다. 회원들과 합의가 되는 대로
세부적인 계획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술을 빈 잔에 채웠다.
잔을 비운 김의원이 소운에게 물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네. 아까는 농담처럼 물어 봤는데, 연구회를 만든
목적이 뭔가? 상당히 배타적인 모임이더구만."
"명칭이 갖는 의미는 아시지요?"
"그래, 그건 알지."
"그와 관련된 목적이라고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차후에 함께 일을 하게
되면 그때 자세히 말씀드리죠. 뭐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남들이 알게 하는
것보다는 모르게 하는 것이 일하기에 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빗장을
치다보니 비밀스럽게 보일 뿐이죠."
김의원은 더 이상 알려고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동찬이 김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왕에 만남 김에 간간히 제기되고 있는 내각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 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저도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건 하지 맙시다. 내가 술이 취하면 말을 막 해 버리거든?"
"내각제에 관한 의원님의 견해가 궁금한데요?"
"그건 쉽네. 한마디로 논할 가치도 없어요. 왜냐,... 잠깐만, 지금 취재하는
거요? 취재하는 거라면 조심해야지."
"그냥 의견을 듣고 싶에서 그럽니다."
"그럼, 편하게 말을 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사견이요. 왜 논할 가치가
없느냐 말이지..."
김의원의 말이 계속이어졌다.
'SG연구회'. 선거가 끝난 직 후 소운이 사용하던 선거 사무실 입구에는
새로운 이름의 가난이 나 붙었다. 어엿하게 사무실이 마련되었으니 멋진
간판도 제작했다. 모래시계를 심벌마크로 하여 특별히 도안한 서체로
거금을 투자해 스테인레스 간판을 만든 것이다. 사무실 공간이 제법
여유있던 터라 절 반을 막아 한 쪽은 SG연구소겸 소운의 숙소로 사용하고
다른 한 쪽은 이상호가 사용토록 했다. 상호는 이곳에 외국 출판물을
번역하는 작은 출판사를 차렸고 지은과 성현이 번역 실무를 맡아 상호를
돕고 있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 김지은입니다."
"나야, 미혜. 지금 바쁘니?"
"아니? 왜?"
"요 앞의 카페에 와 있어. 잠깐 나와 줄래?"
"왔으면 들어오지 거긴 뭐하러 가있어?"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무 소리 말고 잠깐 나와."
"알았어. 금방 나갈게."
지은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서랍에 집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현씨, 잠깐 나갔다 올께요."
"오래 걸려요? 인쇄소에 들어가야 하는데..."
"멀리 안가요. 금방 올께요."
지은이 가방을 열어 지감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가 길 건너 2층 카페로 들어갔다. 카운터 아가씨가 반색을 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요즘은 통 안오시네요?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좀 바빴거든요."
저쪽 구석에서 미혜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별 일이다. 무슨 얘긴데, 밖에 까지 나오래니? 찻 값만 아깝게..."
"내가 살게."
"네 돈은 돈이 아니니? 그래, 무슨 얘긴데?"
"우선 마실 거부터 주문하자. 우리 오래간만에 맥주 한 잔 할까?"
"얘가 초저녁부터...결혼 날짜가 다가오니 싱숭생숭 하는 모양이구나?"
"그래, 가슴이 콩당콩당 뛰고 그렇다 왜? 그러지 말고 딱 한병만 마시자,
응?"
"알았어. 근데, 금방 들어가야 해. 성현씨도 외출해야 하거든"
둘은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미혜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지은이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니?"
"속상해 죽겠어."
"뭐때문에 그래?"
맥주가 오자 미혜는 잔을 가득 채워 한 모금을 넘기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숙이란 여자 알지?"
"그래, 지금 순천에 산다며?"
"몸이 좀 안좋은가봐. 결혼식때 꼭 오기로 했는데, 어제 갑자기
못오겠다고 영숙씨 어머니 한테서 전화가 왔데."
"영숙씨가 아파서?"
"응."
"못오면 그만이지 왜 네가 속이 상해."
"그게 아니야. 동찬씨가 걱정이 태산이더라구. 뭐라는 줄 아니? 여행갔다
오는 길에 순천엘 들렸다 오자는 거야."
"인사차 들리자는 거겠지. 그럴만한 사이인거 모르니?"
"그냥 그 정도라면 좋겠어. 하지만 한숨을 푹 푹 쉬며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꼴을 보니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아프다니까 딱해
죽겠나봐. 동찬씨는 아니라고 하지만 영숙씨를 사랑하는 감정이 깊은게
틀림없어. 생각해봐라. 내일 모레면 결혼할 남자가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니?"
"설마...동찬씨 입장에서 보면 딱하지 왜 안딱하겠니. 지금까지 잘 이해
해놓고 새삼스럽게 왜 그러니?"
"이해해야지, 믿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동찬씨가 야속해지는 거 있지.
하긴 영숙씨도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나 잘해."
미혜가 남은 술잔을 모두 비우고 지은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지은아. 너 우리 여행 갈 때 같이 갈래? 소운이형하고 말이야."
미쳤어. 남의 신혼여행에 왜 우리가 따라가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그러면 어때? 서귀포에서 목장을 하는 소운이 형 친구가 있다면서?
거기서 지내면 되잖아?"
"지금 비행기표도 못 구해. 그리고 너희들 숙소 예약한 건 어떻하구?"
"비행기표는 내가 구할 수 있어. 꼭 같은 비행기를 탈 필요는 없잖아?
숙소예약이야 취소하면 그만이구."
"글세,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소운이 형이 들어 주기나 한데? 어림없는
소리야."
"네가 설득하면 되잖아?"
"바늘도 안들어갈 소리야. 그만해 듣기 싫어."
미혜가 매달리듯 사정을 했다.
"사실은 순천가는 게 나혼자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떻게 영숙씨를 보니?"
"왜 너 혼자야? 동찬씨가 있잖아?"
"내 생각에는 영숙씨가 우리 결혼소식을 듣고 상심이 크지 않나 싶거든.
그런데 보란 듯이 거길 어떻게 가느냐구."
"그럼 동찬씨한테 가지 말자고 하면 돼잖아."
"그랬다가 동찬씨 마음 아파하는 꼴은 어떻게 보구?"
"참 너두 한심한 애다. 하여튼 나는 못 따라가니까 알아서해."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미혜가 지은의 팔을
매달리듯 붙잡았다.
"지은아. 한번만 봐주라, 응? 대신에 너 신혼여행 갈 때는 내가 따라가
줄게."
"기가 막혀...야, 철딱서니 없는 계집애야. 신혼여행이 무슨 이웃 집
마실가는 건줄 아니?"
"지은아 같이 가자."
지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위기나 넘길
생각으로 미혜를 달랬다.
"알았어. 형한테 얘기나 해볼게. 하지만 어림도 없을 거다."
"야호, 고맙다 고마워."
미혜가 마치 허락이나 받은 냥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카운터에서 지은을 찾았다.
"지은씨, 사무실에서 전화왔어요."
"고마워요. 지금 간다고 해주실래요? 미혜야. 그만 일어나자."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마자
바쁘게 빠져 나가며 말했다.
"여자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탈이야. 형 오셨어요. 들어가보세요."
미혜가 정색을 했다.
"잘됐다, 얘 내친 김에 지금 얘기해 볼래?"
지은이 미혜의 머리를 쿡 쥐어 박았다. 그리고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언제 오셨어요?"
"응 . 조금 전에... 누구 만나러 갔었다면서?"
"미혜하고 얘기 좀 하느라구요."
"미혜도 왔니? 그럼 같이 들어오지 뭐해?"
잠시후 미혜가 들어왔다.
"안녕하셨어요?"
"살림 준비는 안하고 한가하게 싸 다녀도 되니?"
"준비할 게 뭐 있어야지요."
미혜가 지은을 향해 자꾸만 눈치를 줬다.
"왜들 그래?"
"아무 것도 아니야. 형, 차 한 잔 하실래요?"
지은이 핑계꺼리를 만들어 연구실을 나왔다. 미혜가 쫓아나오면서
핀잔을 주었다.
"뭘 망설여? 쇠뿔도 단김에 빼랬잖아?"
"너 땜에 정말 못살겠어. 알았어. 밖에서 전화나 받고 있어."
지은이 미혜의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차를 들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지은이 머뭇거리고 서 있자 소운이 뭔가 메모를 하다 말고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니? 너희들 오늘 이상하다? 이리 와서 앉아. 너희들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작당은 무슨... 형 화 내지마? 사실은..."
미혜가 연구실 문에 붙어 살며시 엿듣고 있었다.
"미혜야! 너 이리 들어와!"
소운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자 기겁을 한 미혜가 '네'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소운의 눈치를 살피면서
다가섰다.
"너 정신이 있는 애냐? 어떻게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어? 마음이 넓고
비단같은 아인줄 알았더니 아주 형편없그나."
소운이 마구 야단을 치자 미혜의 눈에서 닭 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지은이 휴지를 집어 주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지은이도
덩달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콰 하하하..."
소운이 배꼽은 잡고 웃어대자 울고 있던 미혜와 지은이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운을 바라보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난
소운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이 바보들아. 그런다고 그렇게 울어대니?"
지은이 뾰루퉁해 가지고 말했다.
"그렇게 무섭게 야단을 치는데, 울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어요?"
"내가 언제 너희들한테 화낸 적 있었니? 눈물닦고 거기 앉아."
미혜와 지은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의자에 걸터 앉았다.
"미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내가 동찬이하고 상의를 해보도록
하마. 이제 됐지?"
미혜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지은이 깔깔거리면 달려가 소운을 꼭
껴안고 말했다.
"형 고마워요."
"어허, 얘가 왜 이래. 어서 떨어지지 못해?"
소운이 낯을 붉히며 지은을 떼어 내었다. 미혜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 안볼테니 계속해."
그렇게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다. 그러고 있노라니 상호가 땀을
뻘뻘흘리며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남은 힘들에 죽겠는데..."
"아, 선배님 어서 들어오세요. 웬 땀을 그렇게 흘립니까?"
"말도마. 어떤 출판사에서 중국소설책을 오십 권을 싸주더라구. 그걸
들고 지하철역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어깨죽지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아."
"그걸 번역해 달래요?"
"다는 아니고 그 중에서 내용이 괜찮은 걸로 대 여섯가지만 추려 달라는
거야."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있어요?"
"찾아봐야지. 욕심껏 가져오지는 했는데, 이번 달 내로 할 수 있을지
몰라. 이거, 배부른 소리 같지만 일거리가 많아도 걱정이니 원..."
"제가 마땅한 사람을 물색해 볼께요. 그리고 내일 저녁에 회의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거니까 시간을 비워두세요."
11 열린 땅
성진이 미동도하지 않은채 컴퓨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화면을 넘기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입에 물린 담배가
필터까지 타 들어가도 모르고 있었다.
"앗, 뜨거!"
성진이 떨어진 꽁초를 주워 꽁초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에 비벼댔다.
그리고는 또 다시 담배를 꺼네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디로 부턴가 정보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누가 전화 좀 받아 줄래요?"
벨소리가 계속 들렸다.
"전화 좀 받아달라니까?"
벨소리는 여전했다.
"옘병할, 누가 전화 좀..."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로 사라졌어?'
성진이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월간 XX사 김성진 기잡니다."
"야,임마! 빨리 안받고 뭐해?"
"아, 동찬이구나. 너야말로 빨리 안오고 뭐하냐?"
"못가. 이따가 하숙집으로 와."
"왜?"
"바뻐."
"함도 안들어 간다면서 뭐가 바빠 임마!"
"미혜 쫓아 다니느라고 정신없이 바빠. 뭐가 그리 살게 많은지 몰라."
"혼자다니라고 해. 벌써부터 잡혀가지고 어떻게 할려구 그러냐?"
"너나 잘해. 하여튼 바쁘니까 하숙집으로 오라구."
"자료는 빠짐없이 됐겠지?"
"그럴거다. 부족한 게 있으면 나중에 참한 친구를 소개해 줄테니까
협조를 받아. 그만 끊자. 무지하게 바쁘다."
동찬이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육실한 놈. 저러다가 치마폭에 갇히고 말지. 그나저나 어떤 놈이 자료를
몽땅 빼가 버려 가지고 이 고생을 하나 모르겠네.'
성진이 이제 볼만큼 보았다는 듯이 컴퓨터를 꺼버렸다. 펜을 꺼네
무엇인가 열심히 기록을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안돼. 기준치가 전혀 안나온다구. 에이 모르겠다.'
성진이 자리에서 부지런히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둘러멨다. 그러다가
멈칫거렸다. 여전히 사무실에는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죄다 어디로 사라진거야? 이 일을 어쩐다? 옘병할, 내가
세퍼트냐? 될 대로 되라지.'
그러고는 사무실을 빠져 나가려다가 메모판에 하얀 쪽지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갈비집에서 회식 중이니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것-편집국장-'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엇에 집중해 있을 때 건드리면 심하게 짜증을
내는 성격 때문에 컴퓨터에 몰두해 있던 성진에게 아무도 말을 못 붙이고
회식을 위해 모두 자리를 비워버린 것이다.
'잘먹고 잘 살아라. 나는 간다.'
성진은 텅 빈 사무실을 그대로 둔채 밖을 나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려 택시를 잡아 탔다. 아무래도 중고차라도 구입해야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는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빠져나와 연대 앞을 지나고
모래내 시장 앞에 멈추었다. 성진은 택시에서 내려 시장 입구에 있는 국밥
집으로 들어갔다. 성진의 하숙집에서 눈치밥을 얻어먹느니 먹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순대를 사들었다. 그리고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실례합니다."
성진이 대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아이구, 오랜만에 오셨구랴. 그런데 정기자가 아직 안왔다우?"
"약속을 했으니 곧 오겠죠. 방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되다마다요. 어여 들어 가시구랴."
성진이 동찬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이 온통 책으로 덮혀 있었다.
원래가 독서광인데다가 요즘 들어 부쩍 공부하는 습성이 늘었다던 동찬의
말이 생각났다. 이것 저것 책더미를 뒤적이고 있는데 동찬이 들어왔다.
"일찍 왔니? 미안하다. 먼 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한 줄 알면 됐어. 자료나 빨리 내놔."
"임마, 숨 좀 돌리자. 식사는?"
"시장 앞에서 먹고 들어 왔다."
"그래? 다행이구나. 나도 밖에서 먹고 왔는데."
"썩을 놈, 마르고 달토록 보고 살텐데 뭐가 못미더워서 붙어 지내냐?"
"왜, 질투나냐? 장가 한번 더 갈래?"
"시끄러 임마. 얼른 자료 안내놓고 뭐해?"
"알았어. 우라지게 성화내. 자, 이게 전부다. 꼭 자료가 있어야 쓸 수
있냐? 대략 어림잡으면 되지 뭘 그렇게 꼼꼼이 할려고 그래?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어림잡아도 근사치는 되야 할 것 아니냐? 콩나물을 팔아도 근사치를
알고파는 거야."
성진이 자료를 펴들고 펜을 꺼네 죽죽 줄을 긋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나거는 몇 겹으로 접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좀 여유있게 잡을 걸 잘못했어."
"그러게 내가 뭐라고 하던? 욕심부리지 말라고 했잖아?"
"이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되는 게 없다니까? 회의할 때는 간단할 것
같더라구. 그래서 짫게 잡았지."
"뭐 어떻냐? 여유있게 하면 되지. 다음 달까지 일단계만 끝나면 되잖아.
그러니까 어림잡아도 된다는 거야. 어차피 서너번은 걸러야 할 판인데..."
그래도 성진은 걱정이 안풀리는 모양이었다. 비닐봉투를 찢어내고는 그
속에서 순대를 한 웅큼 꺼내 입 안으로 집어 넣었다. 동찬이 웬거냐며
같이 거들었다. 성진이 볼록해진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무소속 사람들 만나봤니? 교섭단체가 가능하겠어?"
"이제 서명작업이 시작되었으니까 지켜 봐야지. 일부에서는
신당얘기까지 거론되었던 모양이야. 자금추적이 두려워 없었던 얘기가
되어 버렸데."
"참여가 확실한 인사는 몇 명이나 되냐?"
"옥중 당선된 J의원을 필두로해서 TK는 거의 참여 할 것 같고 기타해서
열 댓명은 돼. 몇 사람이 여당하고 J당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지만 잔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있어."
"그렇게 되면 교섭단체는 무난하겠네?"
"그렇다고 봐야지. 어느 정도 방해는 받고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들이야."
"J당이 이대가 컸을 텐데, 완전히 닭 쫓았잖아?"
"닭을 쫓았는지 개가 됐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서가 거의 일치하니까
심정적인 연대는 이루어 질거다. 어찌 보면 동병상련이기도 하지."
"차라리 J당으로 가면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지 않을까?"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어. 예를 들자면 여권이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거든. 아무리 계파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엄연히 두 파로 가라져 있어. 그런데 양쪽 모두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어. 하나는 대권 도전의사가 확실한 의견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쪽 모두가 세대교체를 주장한다는 것이지. 차이라면 한쪽은
개혁지향 적이고 다른 한쪽은 보수쪽에 가깝다는 거야.
무소속 전부가 TK는 아니지만 동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냥
표현하기 편하게 무소속은 TK라는 등식으로 얘기해 보자. TK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과 같이 보수적이면서 세대교체론을 주장하는쪽이 J당보다는
훨씬 매력있어 보이지 않겠니? 더구나 옛 동지들이 대부분이고. 과거의
영화를 복원하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다면 더욱 그렇지."
"하지만 내각제라는 변수가 있잖아? 내각제가 된다면 내분 가능성은
사라지잖아? 어떻게 남 잘못되기만을 기다리냐? 그건 말도 안돼. 그리고
내각제 한에서 무소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러니 진로를 확실하게
정해 놓아야한다구. 물론 내각제로 개헌이 된다면 어차피 총선을 다시
치뤄야 하니까 그 전까지만 진로를 정하면 되겠지."
"내각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그거야 모르지."
"김동수의원이 말하기를 대선전에 내각제가 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더라."
"손가락에 장을 지지는 일이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구.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쫓아가서 발가락까지 지져 버리겠다. 생물같은
정치판의 흐름을 어떻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냐? 내 조만간 내각제
가능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테니 그때 생각하자."
두 사람은 길게 천장을 보고 누워 얘기를 계속했다.
"M당 분위기는 어떤 지 아니?"
"그건 소운이 형한테 물어봐라."
"형은 완전히 뒷 전에 있던 걸?"
"그래도 L최고위원하고는 자주 통화를 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모르지는
않을거다."
"얘기하기 싫으면 관둬라. 뭐, 줄다리기는 하고 있지만 별 수 있겠어?
명분만 챙겨주면 곧 합쳐 지겠지."
"잘 알면서 뭐하러 물어보냐? 별 희안한 놈 다 보겠네."
"근데 말이야..."
동찬이 벌떡 일어났다.
"야 임마, 집에 안가냐? 마누라 안볼거야? 잠좀 자자."
성진이 시계를 보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벌써 이렇게 됐네. 잘자라. 갈게"
성진이 까치걸음으로 대문을 나갔다. 동찬은 팔베게를 하고 누워 낮에
소운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감정표현을 자제해라. 영숙이도 불쌍하지만
미혜도 불쌍하다. 네 놈은 더더욱 불쌍하다. 미혜가 순천에 가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니 다음에 너 혼자 조용히 다녀 와라. 꼭 가야겠으면
나도 같이가자. 어떻 할래?' 그러자 동찬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거 좋은
생각이네. 형도 같이 갑시다. 지은이데리고 가면 되겠네.' 라고 말했었다.
결국 신혼여행을 함께 가는 걸로 이상한 결론이 나버렸다. 덕분에
비행기표를 구하느라 온 종일 씨름을 해야만 했다.
미처 미혜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이 바보스러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 길에 들리겠다고 이미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았으니 안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소운이 형이 같이 가주면 나와 미혜는 물론
영숙이도 부담이 적으리라 생각했다. 영숙이도 형을 보면 무척 반가워 할
것이다. 또한 이 차제에 소운이 형이 설득을 하면 서울로 옮기는 것을
동의할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동찬이 자리를 펴고 잠자리에 들려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각났던 것이다.
'최수정 기자를 성진이에게 소개를 해준다구? 성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설마 나한테 하던 짓이야 안하겠지.'
동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안돼, 그렇게는 안돼지. 빌어먹을 자료 때문에...'
동찬은 성진이 부탁한 자료를 최기자한테서 구했다. 사용목적을 묻자
습관처럼 곧이 곧대로 말해 버렸다.
"이 많은 사람들 기록이 뭐 때문에 필요하데요?"
"나도 몰라."
"모르면 나도 못주겠어."
"꼭 알아야겠어?"
"정선배, 수정이라는 계집애가 궁금한 건 못참는 성미라는 거 몰라서
그래요?"
"사금 채취하려고..."
"사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옥석을
가리겠다는 말이지? 그래서 뭘 어떻게하려구?"
"더 이상은 말 못해."
"알았어요. 그럼 잘가."
"그러지 말고 그거 내놔."
"그럼 말을 하시라구."
"골라서 쓸만한데다 팔려고 그런다."
"똑바로 얘기 못해? 내 입이 무거운거 알잖아."
"입이 두개나 되는데, 어떤 입이 무겁다는 거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한번 걷어 채였다.
"징그러위 정말,...자료가 필요하면 똑바로 얘기해요."
"우리 모임에서 사람을 찾고 있어. 월간 XX사 김성진 기자가 담당인데
나머지는 그 친구한테 물어봐. 필요하다면 소개시켜 줄테니까. 됐냐?"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그런데 무슨 모임이예요?"
"그것도 대답해야 돼?"
"걱정마, 그건 대답 안해도 자료는 줄게."
"그럼 말 안해. 사적인 비밀이니까."
"비밀 좋아하시네. 누구라구요? 김성진이라고 했던가? 적어 나야겠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정선배보다는 솔직하게 말해 주겠지."
"바늘을 여러 개 준비해야 할거야.좀처럼 안들어가는 친구거든"
"바늘이 안들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방법을 아는 여자는
아마 나 밖에 없을거야."
"허튼 짓 할 생각 하지마. 유부남이니까."
"그거 잘됐네. 정선배보다는 경험이 많을 거 아냐?"
그렇게 해서 자료를 얻어왔다. 그러니 두 사람이 만나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동찬은 '설마' 소리를 되뇌이면서 다시 자리에 누었다.
그리고는 '에라 될대로 되라' 하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SG연구회가 김동수의원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 연구소는
연일 회원들의 발길로 분주했다. 김의원은 세부계획을 소운에게 일임했고
그 계획에 따라 이미 작업이 차근 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동찬과 성진
그리고 홍균이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소운과 상호 그리고 주원과 진호가
분석을 하면 지은과 미혜 그리고 성현이 정리와 기록을 맡아서 했다.
토론을 겸한 회의 시간도 자연히 늘어났다. 각자가 직업을 갖고 있는 터라
주로 오후 늦은 시간이 분주했다.
욕심많은 일벌레들도 오늘부터 열흘 동안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정보자료의 수집은 계속해야만 했지만 여유있는 나날임에는
틀림없었다. 모두가 동찬과 미혜 덕분이었다.
"이게 이래뵈도 제주도 토종 돼지다. 자네가 온다길래 특별히 잡아
온거야. 장작불에 구우면 아주 고기가 연하고 맛이 부드러워."
두동강을 낸 드럼통 속에서 장작불이 벌겋게 피어오르고 그 위에 목없는
돼지가 두꺼운 껍질이 벗겨진 채, 통째로 두꺼운 쇠창살에 끼어
지지직거리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커다란 양푼에는 상추와 깻잎
그리고 고추마늘 등 야채들이 수북이 올려져 있고 그 옆으로 됫 병짜리
소주가 버티고 서있다.
서귀포에서 짚차를 타고 한적한 촌락으로 10여분 쯤 들어왔다. 비스듬한
언덕받이에 인조 통나무로 울타리가 둘러쳐진 아담한 농장에 도착하였다.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제멋대로 생긴 나무판자에 '열린 땅'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문패처럼 붙어있는 입구를 이방인 처럼 드러서 조금전
이곳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선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소운 일행과
농장주인 윤현진 내외가 초록빛 풀밭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기고 있다.
"자네가 내려 온다기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밤잠을 못잘 정도였다.
자네한테는 괜찮지만 신혼부부가 포근하게 지낼만한 잠자리는 못될 것
같아 미안하구만. 통나무집이 이색적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해.
정성껏 치장을 했으니 성의 만이라도 알아주시면 고맙겠고."
듣고 있던 동찬이 몸 둘바를 몰라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오히려 폐를 끼치게 되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잊지못할 추억이
되겠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소운이 나섰다.
"그래, 너무 신경을 썼구나. 꼭 낙원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곳인줄 알았으면 진작에 찾아올걸 그랬다. 한 칠 팔 년만에 만나는 구나.
정말 오래간 만에 만났어. 전혀 변한게 없어. 건강한 모습이 너무
보기좋다. 제수씨는 더욱 예뻐졌고..."
"전에는 제가 밉게 보였던 모양이죠?"
"그때도 예뻣지만 지금은 더욱 예쁘다는 말입니다."
"하하하..."
"호호호..."
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서 반짝거리고
이름모를 밤벌레의 울음소리가 끊일 듯 이어지며 잔잔하게 맴돌고 있다.
달빛 그늘아래 펼쳐지고 있는 초원의 밤풍경은 그야말로 평화였다.
소운의 친구가 이처럼 평화스러운 곳을 찾아 이 곳으로 날아온 것이 꼭
8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윤현진은 학창시절 내내 부친이 친여
극우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심하게 배척 당했다. 부친
뿐만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까지 그의 조부님은
조선인 소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였고 조선땅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강점 당하던 전후 시기부터 그의 증조부님은 일본군의
통역장교로 활약했었다. 친일과 친독재로 이어지는 뿌리의 전력이 더욱
윤현진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사실 뿌리의 과거나 현제는 현진의 사고와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 역시 많은 청년학도들 처럼 유신은 죄악이고 독재는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자유가 좋고 평등이 좋고 민주주의가 좋았다. 그리고
그 뜻을 펼쳐보기 위해 펜을 갈기고 악을 쓰고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프락치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의 눈초리에 밀려 한낮 허수아비의
떨림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부모와의 갈등과 동료들과의
거리감이 점점 깊어만 가던 어느 날 그는 조용히 캠퍼스를 떠났다.
소운이 현진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후로 한참의 세월이 흐른 지난
8년 전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나름대로의 이상을 꿈꾸며 그렇게 지냈노라고 했다. 강원도
산자락에 묻혀 탄광노조를 도우며 지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소운을 찾아왔다. 그간의 행적을 소상히 털어 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어. 나좀 도와줄 수 없겠나?"
그때도 개혁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니, 오늘날 만큼이나 너나 할 것 없이
개혁을 부르짖었다. 세상이 변했고 국민들의 생각이 바뀌었으니
지금이야말로 개혁의 적기이고 반드시 할 수 있다는 흥분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때도 세대교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정권교체의 실패가 단일화를 거부한 양김씨의 책임이므로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를 반성하고 양김씨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였다. 그 속에서 개혁과 혁신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현진은 그렇게 생겨난 혁신정당의 명찰을 달고 제13대 총선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소운은 반대했다. 현진이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국민의식의
성숙을 소운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양김씨의 분열과 함께 양분되어
버린 범야권의 재집결만이 군정종신을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결집은 커녕 오히려 사분오열이 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혁신으로 포장된 이면에는 사사로운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운의 도움을 거절당한 현진은 계획대로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국민의식은 현진을 절망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온갖 정성으로
권리를 챙겨주었던 탄광촌의 의식마저도 현진을 거부했다. 현진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 다시
소운을 찾았다. 학창시절의 고통과 그것을 도망치듯이 피해 산골에 묻혀
지내왔던 과정을 고백처럼 눈물로 쏟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며 나약한 모습으로 다시금 잠적해 버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소운은 '이제야 겨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는
현진의 엽서를 받아 보았다. 그를 평화롭게 만든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소운이, 자네도 골치 아프게 살지말고 여기서 나랑 함께 지내지.
자연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지 몰라. 욕심이 없으니 근심도 걱정도 있을
턱이 없어. 있다면 '감귤나무에 벌레가 앉으면 어떻하나, 어미 돼지가
순산해야 할텐데, 조랑말이 뜯어먹을 풀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하는 거야."
"고맙지만 할 일이 끝나면 오도록 하지. 나는 자네처럼 마음이
순수하지가 못해서 욕심도 싑게 포기 못해."
현진 아내각두워진 고기를 상추에 싸가지고 연신 소운에게 권하고
있었다. 잔뜩 배가 불렀지만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따뜻함이 물씬 배어
있었다.
"이 선생님, 결혼하셨다는 말씀은 못들은 것 같은데, 옆에 있는 분하고는
어떤 사이세요? 아까부터 여쭤보고 싶었지만 결례가 될 것 같아서
참았거든요. 보면 볼스록 다정해 보여요."
소운이 수줍어하는 지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쑥스럽게 대답했다.
"글쎄요. 어떤 사이라고 해야할지..."
동찬이 거들었다.
"바로 옆에 두고서도 보고 싶어하는 사이랍니다."
지은이 동찬을 향해 눈을 가볍게 흘겼다.
"어쩐지 신혼부부보다 다정해 보이더라구요."
"아니, 저희들보다요? 이거 안되겠네. 미혜야, 좀 더 바짝 붙어 앉아야
겠다."
"호호호... 가까이만 앉는다고 해서 다정해 보이는 건 아니예요. 이선생님
쪽은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거든요.
마치 어린아이들의 눈빛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같아요. 참, 부럽네요."
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몰라서 그런데, 소운이 이 친구가 워낙 따뜻한 친구야. 참
해맑은 친구라구. 내가 이 친구한테 반한 게 뭔지 알아? 이 친구의
거짓없이 맑은 눈빛이었어. 남자인 내가 반하는데 여자들이야 오죽할까."
동찬이 끼어 들었다.
"제가 처음 형을 만났을 때는 말이지요. 독하고 냉정한 눈빛에 기가
질릴 정도였어요. 근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부드럽게 느껴지더라구요.
분워기에 따라 변신이 자유자재예요."
소운이 겸연쩍게 말했다.
"왜들, 꼭대기에 올리나. 어디다가 떨어 뜨릴려구."
미혜도 한 몫을 했다.
"누가 형을 떨어뜨려요? 나오라구 해요. 내가 혼내 줄게."
끊이지 않는 웃음 속의 대화가 계속됐다. 온갖 시름을 자연속에 묻어
버린 채 소운일행은 깊어 가는 밤을 한껏 즐겼다.
시샘하듯 울어재끼던 조랑말의 콧소리도 사라졌다. 밤벌레의 울음소리는
어느샌가 풀잎 속으로 사라졌다. 타오르던 장작불도 쌓여진 회색먼지
속으로 숨어 들었다. 검게 그을린 고기덩이의 잔해가 굵은 쇠꼬챙이에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별님이 볼새라 달님이 볼새라 커다란
대소쿠리에 감추어 쑤셔 넣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엉덩이에 붙어 있는
티끌을 털어 내며 만찬을 정리했다.
모두를 집안으로 들여 보내고 소운과 현진이 엉성하게 꿰어맞춘
나무의자에 걸터 앉았다.
"아직도 너희 부부를 인정 안하시니?"
"..."
"아이를 가져보면 낫지 않겠어?"
"내가 창씨를 하면 모룰까 2세는 두고싶지 않다. 내가 부끄러운 조상을
둔 죄로 당해야했던 그 고통을 어떻게 물려 주겠니?"
"지나친 자격지심이야."
"아버님이 뭐라시는 줄 아니? 대가 끊기는 한이 있어도 무지랭이 피가
섞인 손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야. 벌써 1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어. 민족을 팔아먹은 집안에 증손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고
족보까지 불태워 버린 나다. 무지랭이 만도 못한 집안에 대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소운은 아직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현진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악귀처럼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다. 괜한 소리를 했구나."
"상관없어. 그래도 이 땅을 내놓으란 말씀을 안하시는 게 용해. 이따금
어머님이 전화를 주시는 것 외에는 왕래는 커녕 인사도 못하고 살고
있는데..."
"그게 아버님이 자네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야. 화해하고 이해시켜
드려. 그래야만 과거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
"집사람도 그런 말을 자주 하지.하지만..."
현진은 말을 잊지 못했다. 소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어두운 하늘만을 바라보다 현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피곤할 텐데 그만 쉬자. 가능한 오래동안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짜여진 일정인데 그럴 수 있나? 가이드까지 책임질 수 있지?"
"물론이지. 만사 제껴 놓았으니 안심해라. 내일 관광길을 생각해서
적당히 즐기고 쉬어라."
현진이 의미있는 죠크를 던지자 소운이 현진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뜨겁게 포옹을 나눈 뒤 집안으로 들어갔다.
소운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다 지은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은이 속이 훤히 비치는 연분홍 빛 가운을 걸치고 빙긋이 소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 어때요?"
"보기는 좋다만은 신혼여행은 우리가 온게 아니야."
"무슨 상관이야? 너무 너무 잘해 놓은 거 있죠. 이런 곳은 처음이예요.
저기 보세요. 벽난로도 있죠? 화사한 욕실도 있죠? 창문 좀 내다 보세요.
마치 시골집 다락방에서 내다보는 느낌이예요. 아주 이국적이라구요. 무슨
재벌집 별장같다니까요? 나두 이런 곳에서 살고싶어."
"기분 그만 내고 어서."
지은이 뿋루퉁해 가지고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무드없게 그러지 말아요. 아참, 내가 봐둔게 있어."
지은이 사뿐한 걸음으로 벽 쪽을 향해 가더니 벽에 붙은 작은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짠... 보세요. 포도주예요. 글라스도 두 개가 준비되어 있고."
소운은 현진의 세심한 배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집 주인들이 보통 멋쟁이가 아니예요."
지은이 콧노래를 부르며 포도주와 잔을 들고 원턱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천정 위에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있는 형광등을 꺼버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사과 모양의 양초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작은
손으로 병 뚜껑을 뽑아 잔을 채웠다.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죄악이라구요. 자, 사랑하는 왕자님. 신데렐라의
건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지은이 흠뿍 행복에 젖은 듯 했다. 소운은 오랜 만에 즐거워하는 지은의
모습을 보았다. 천진한 아이의 재롱을 보듯이 지은이 하는 양을 빠져 들
듯 바라 보았다. '쨍그랑'하고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지은아."
"쉿! 아무 소리 말아요. 이대로, 잠시만 형의 눈만 주세요."
지은의 초롱한 눈망울이 소운의 맑은 눈으로 파고 들었다. 무엇인가를
열신히 기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서히 한
덩어리가 되어 뜨겁게 가슴을 맞댔다. 지은이 속삭이듯 말했다.
"형, 사랑해."
"얼만큼?"
"형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가 지은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아니?"
"그럼, 말이라구. 하지만 내가 더 사랑한다구."
소운은 지은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지은의 거친 숨소리가 소운의
귓전을 때렸다.
다음날 아침,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밖에는 이슬
머금은 초록 풀잎이 태양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그 위를 늘씬한
조랑말들이 힘차게 뛰어 놀고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소운과 지은을
바라보며 현진이 짖궂은 농담을 던졌다.
"두사람 다 꺼칠하구만. 신혼부부야 그렇다치고 자네는 밤새 무슨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 관광길을 대비해서 무리하지 말라고 충고
했을텐데?"
지은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소운이 어설픈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자네가 연출한 분위기에 너무 심취했던 모양이야."
동찬이 놀려댔다.
"형도 그럴 때가 있수? 우릴 따라 나설 때부터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구.
핑계 김에 속 보인거지."
지은이 동찬의 어깨를 쥐어 박으며 눈을 흘겼다.
"왜 그래? 내가 너무 솔직해 버렸나? 지은이도 화색을 보니 그동안 쌓인
회포를 원없이 풀어 버린 것 같은데?"
"시끄럽다. 그만해라. 어서 밥이나 먹자."
계속되는 놀림에 당황한 소운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지은을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위기를 모면하려고 애를 썼다.
12 내각제와 이원 집정부제
SG연구소에 가벼운 실갱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진이 최기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깐깐하게 나오는 성진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의외의 상황에 조바심이 난 최기자가 찰거머리처럼 성진에게
매달렸다. 최기자는 한번 물고 늘어지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었던 자신의
기록을 여기서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각오였다.
"김기자님, 제가 술 한잔 사드릴까요?"
"싫습니다."
"그럼 한잔 사주시겠어요?"
"그것도 싫습니다."
최기자는 '뭐 이 따위가 다있어?'하고 한숨을 쉬었다. 삼일 저녁을
쫒아다니며 구슬르기도 하고 애걸도 해보았다. 심지어 자료를 돌려 달라고
협박도 해보았다. 심지어 자료를 돌려 달라고 협박도 해보았다.
막무가내였다. 여자답지 않은 복장 때문에 기분이 언짢은가 싶어서 오늘은
말끔히 단장을 하고 나섰다. 수년 동안을 입지 않았던 치마까지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있는 자신이 화가 나도록 미웠다. 바늘을 여러 개 준비해야
한다던 동찬의 말을 우습게 알았던 게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끈질기기로는 둘째 가라 서러운
사람이거든요? 포기를 모르고 사는 여자라구요."
"훌륭한 생활 태도로군요."
"비꼬시는 거예요?"
"천만에요. 진심으로 칭찬하는 겁니다."
"근데 왜 비꼬는 것처럼 들리죠?"
"정서문제죠. 마음이 고운 사람은 남의 성의를 곡해하지 않거든요?"
'인제 아주 가지고 놀 생각이로군'
최기자는 은근히 약이 올랐다. 하짐나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교환하는 거죠. 꽤
슬만하거든요?"
"거래같은 건 안합니다."
"거래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맛있는 음식을 바꿔 먹자는 거예요."
"나는 입 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 남의 음식에는 관심이 없어요."
"틀림없이 입 맛에 맞으실 거예요. 한번 들어 보실 래요?"
"..."
"내각제를 분석한 자료가 있어요. 어때요?"
성진은 내심으로 깜짝 놀랬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돈 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치미를 뗐다.
"그게 어디서 나온 자룝니까?"
"흥미가 있는 지부터 말해 보세요."
"말하기 싫으면 그만 두세요. 별로 관심없으니까."
최기자가 안달이 났다.
"정말 이러실꺼예요? 좋아요. 얘기할께요. 내각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여권에서 나온 거예요. 이젠 어때요?"
성진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최기자, 아니 호칭이 불편하니까 이제부터는 수정씨라고 부를께요.
괜찮죠?"
"편하실대로... 그럼 저도 성진씨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그럽시다. 한가지 조언을 해 드리지. 두 사람이 고무줄을 당기고 있다가
한쪽이 놓아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수정씨는 당길 줄 만 알았지 놀
줄은 모르는 것같아. 고무줄을 놔 버리면 잡은 쪽만 아프고 아프면 비명을
지르든 화가 나서 달려들든 반응이 있게 마련이예요. 내가 당겼던
고무줄을 놓아 버리니까 답답한 수정씨가 자진해서 털어 놓잖아요?"
"내가 지금 성진씨한테 당하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는 더 당할 겁니다. 어쨋든 좋아요. 그래 어떤 내용이죠?"
"얘기할 기분이 아니예요. 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럼 이만 끝냈시다. 시간만 낭비할 뿐이니까."
최기자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금 고무줄 놓은신 건가요?"
"아까 놓고난 뒤로는 잡지도 않았어요. 한번 잡아 볼까요?"
최기자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좋아요. 제가 먼저 잡죠. 내각제에 대한 각당의 이해득실이 나열되어
있어요."
"그 정도면 구미가 당기는군요."
"입맛에맞을 것 같은 모양이죠? 하지만 참고는 할 수 있지만 공개할 수
없는 자료예요.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니까요. 공개되면 누구의 짓읹2ㅣ
바로 드러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게 다예요."
"그럼 최기자한테는 쓸모가 없는 자료겠군요?"
"쓸모없는 건 아니예요. 정보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앞으로 취재
활동에 상당한 도움이 될거구요."
"우리 쪽도 마찬가지예요. 밖으로 새 나가면 안될만한 사정이 있어요.
그래서 못 밝히는 거라구요."
"참고만 할께요. SG가 어떤 사람들의 모임이고 뭐하는 모임인지, 어떤
이유에서 사람을 찾고 어떤 기준으로 몇 명이나 골라서 어디에 쓸 것인지,
여기까지만 알면되요.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소운씨, 정선배 그리고
성진씨가 회원으로 있고 이소운씨가 우두머리로 있는 것밖에 몰라요. 또
사람을 찾는 것이 회원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띠고
있다는 심증에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성진씨가 죽어도 얘기해 줄 수
없다면 정선배를 괴롭히는 수 밖에 없죠."
"항복하는 겁니까?"
"천만에요. 고무줄을 놀려고 하는 중이예요. 전략을 바꿔서 좀 약한
장수부터 공략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죠. 내가 너무 서둘렀어요."
"고무줄 놨어요?"
"아파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래요?"
"살살 당겼다가 놓으면 느낌이 적다구요. 아직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네 맘대로 해라'하고는 쏘아붙였다.
"그만둬요! 차라리 바위 돌을 붙들고 얘길하지..."
"아이구 아파라."
성진이 손을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최기자가 생기 오른
표정으로 달려 들 듯이 말했다.
"충격 받았어요? 얘기해 줄래요?"
성진이 정색을 하면서 대꾸했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면
얘기하리다."
"지킬께요. 정섬배한테 불어보면 알겠지만 이래뵈도 신의는 반드시
지키는 여자라구요."
"그 정도로는 약한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잠깐만요, 볼 일 좀 보고 올께요."
최기자가 밖으로 나간 사이에 성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순천이었다.
"여보세요? 혹시 정동찬이라고 있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나다.
성진이. 최수정기자 믿을만 하니? ... 그래 임마 잠시 밖에 나갔다. ... 맨
입이 아니야. 정보 바꿔 먹기다. 꽤 관찮은 내용이야. 어차피 서로가
비밀스러운 정보니까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되겠는 지 현한테 물어 봐라.
...알아서 하라구? 그래, 잘 지내다 와라."
성진이 전화를 끊자 마자 최기자가 들어 왔다.
"시작하실래요?"
"잠깐만요. 가방 좀 열어보시겠어요?"
"가방은 왜요?"
"녹음기 같은 건 없겠죠?"
"정말 지겨운 분이네. 아주 몸수색 까지 하세요."
최기자가 가망을 열고 나더니 두 팔을 벌렸다. '설마'했던 최기자의
생각이 빗나가고 성진이 가방을 뒤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기자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었다. 괜한 장난이었지만 최기자는 포기한 듯 당연스럽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적당히 하세요. 응큼떨지 말고... 아예 벗어 버릴까보다."
수색이 끝나자 성진이 중얼거렸다.
"탄력이 대단하네."
"뭐예요?"
"아닙니다. 혼잣 말이예요. 이해하세요. 워낙 험한 세상이라..."
"얘기가 길어요? 얼마나 걸리겠어요?"
"적당히 하면 금방 끝나고 자세히 하면 길고 그렇죠. 원하는 대로
해드릴께요."
"며칠이 걸리는 한이 있어도 당연히 자세하게 들어야죠."
"내가 그렇게는 못해요. 나도 바쁜 사람이라 시간을 자주낼 수도 없고
연구소도 회의가 잦아서 아무 때나 사용할 수도 없어요. 동찬이를
비롯해서 몇 사람이 휴가중이라 오늘까지는 한가하지만..."
"그럼 오늘 끝내면 되겠네요."
"밤을 세워야할지도 모르는데요?"
"저는 상관없어요. 성진씨만 괜찮다면..."
"좋아요. 일단 나가서 요기나 좀 하면서 얘기합시다. 잠깐만 기다려요
집에 전화 좀 하구요."
최기자가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제가 해드릴께요. 전화번호 대세요."
"집사람한테 걸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해드린다니까요?"
"미쳤어요? 뭐라고 할 건데요?"
"빨리 전화번호나 대요. 싫어요? 가만있자. 성진씨 집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최기자가 수첩을 꺼내더니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성진이 어이가
없었는지 빤히 지켜 보고만 있었다.
"여보세요? 김성진 기자님 댁인가요? 사모님이시군요... 저는 XX신문사
최수정 기자라고 하는데요. 김기자님하고 취재 때문에 밤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 획인하시려면 저희 신문사로 전화해보세요. 혹시 오해하실까봐
제가 직접 전화드리는 거예요.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 김기자님이요? 지금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계시거든요.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 미리 연락 드리는 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최기자가 수화기를 내려 놓고는 눈이 둥그래져서 쳐다보는 성진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최기자는 이제서야 입을 열기로한 성진이 미웠다.
그래서 '한번 당해 봐라'하는 생각으로 성진의 집에 전하를 한 것이다.
아무리 일때문이라지만 어느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남편을 곱게
보겠는가 싶었다.
"됐죠? 외박 허락까지 받았잖아요. 이래야 의심이 덜한다구요."
성진을 최기자의 당돌한 행동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두사람은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편한 곳으로 가자는 최기자의 제안에
따라 편의점에 들러 빵과 음료수 그리고 몇 병의 맥주를 사들고 작은
호텔을 찾아 들어갔다.
호테 객실로 들어서쇼파에 몸을 던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가져온 먹거리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주섬거렸다.그러다가 최기자가
자신의 가방에서 두툼란 봉투를 꺼네 성진에게 건냈다.
"아까 말한 자료예요. 마지막 카드로 사용하려고 미리 준비해왔죠. 읽어
보세요. 그동안 나는 샤워나 해야겠어요."
"나도 씻어야하니까 샤워하고 같이 시작합시다."
"같이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노느니 읽어 보라는 거예요."
"하긴 그렇군."
"볼펜 있어요?"
"아니 샤워하면서 볼펜을 사용합니까?"
"잔소리 말고 볼펜 어디 있어요?"
"볼펜은 없고 저고리 안주머니에 만년필은 있어요."
"가방에는 없어요?"
"컴퓨터밖에 없어요. 왜 그래요?"
최기자가 성진의 가방을 열고 코드를 빼들었다. 그리고 성진의
저고리에서 만년필을 빼냈다. 그것들을 먹거리를 담아 왔던 비닐봉지에
집에 넣고는 욕실로 향했다. 성진이 희한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뭐하려는 겁니까?"
"성진씨가 사무실에서 내 가방을 뒤지고 몸수색을 한 것과 같은
의미에요. 메모할 생각말고 머리 속에만 집어 넣으라는 거예요."
성진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자료를 펼쳐들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막 욕실로 들어가려는 최기자를 불러 세웠다.
"이거 어느 쪽에서 나온 겁니까?"
"아까 말했잖아요? 여권에서 나왔다고..."
"내 말을 그게 아니고 청와대냐, 여당이냐, 아니면 어떤 단체냐, 하는
거예요."
"거기까지 알아서 뭐해요?"
"성향이 필요하니까요."
"여당이예요. 보수파 쪽이요. 더 이상은 안돼요. 이제 됐어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최기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있다가 성진이 욕실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만 더 물어볼테니 대답할 수 있어요?"
최기자가 귀찮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잘 안들려요. 샤워나 끝내고 얘기하면 안돼요?"
"시간을 절약하려고 그래요. 안들리면 문열고 들어요."
"그러지 말고 아예 들어와서 물어보지 그래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고... 표지는 어디갔어요? 학실한 자료라는
근거가 없잖아요."
"일부러 떼어내고 가져온 거예요. 지금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뭐예요? 세상을 속고만 살았어요? 남자가 쪼잔하게 시리..."
"옜날에, 그러니까 6.25동란을 전후해서 여간첩들이 굉장히 많았데요. 이
여간첩들이 미모를 이용해 가지고 스파이 활동을 적절하게 했다구요. 그
당시에 야경꾼들이 뭐라고 하면서 다녔는지 알아요? '여자조심', '빨갱이
조심' 그러고 다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는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구요. 특히 수정씨같은 미인은 더욱 조심해야 하구요."
"말 같지도 않은 얘기지만 듣기 나쁘지는 안네요."
잠시 후 최기자가 옷가지를 손에 들고 하얀 타올을 몸에 두른채 촉촉한
모습으로 욕실을 빠져 나왔다. 성진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뭘 봐요? 여자 몸 처음 보세요? 읽어 보니 어때요?"
"..."
성진이 대꾸는 하지 않고 계속 최기자만 아래 위로 훑어 보고 있었다.
"읽어 보니까 어떠냐니까요?"
최기자가 언성을 높히자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못 읽어봤어요."
"아니, 그 동안 뭐하ㅣ고 있었어요?"
"수정씨하고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아이구 두야. 알았어요. 들어가 씻기나 하세요. 아, 그만 쳐다봐요!"
성진이 엉거주춤 옷을 벗어 재끼고는 팬티 만을 달랑 걸친채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더니 성진이 갑자기 욕실문을 열고 물어 흠뻑젖은
알몸을 드러낸채 소리쳤다.
"이봐요, 수정씨. 내 코드하고 만년필이 왜 물 속에 빠져있어?"
"어머 어떻하면 좋아요?"
성진이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최기자는 잠깐이지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성진의 알몸을 기억하고 숨은 삼켜버렸다. 동찬의
그것하고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단하네'하고 중얼거리며 젖은 몸을
닫아냈다.
최기자가 맥주 몇 잔을 비우고 있는 사이에 성진이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뭘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 봐요? 거기 그냥 서있을 거예요?"
"그러는 수정씨은 왜 그러고 있어요?"
"거추장스러워서요. 안입던 치마도 불편하고 이대로가 좋지않아요?"
"뭐 싫지는 않지만 신경쓰여서 제대로 일이나 볼지 모르겠네. 나도 그냥
이러고 있지 뭐. 참, 탐스럽다. 은근히 욕심이 생기는 걸?"
"그래요? 얼마나 솔직하게 털어놓는 지 결과부터 확인하고 성진씨의
욕심도 검토해 보도록 하죠."
둘은 그렇게 중요한 곳만 가린 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성진이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내각제가 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시작된 자료는 내각제와 과련해 각
당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그 실현가능성을 분석하고 있었다. 내각제의
논의가 국가가 처해 있는 환경적 조건이나 국민의사에 따른 통치구조
변경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의 이동과 관련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권력을 지향하는 특정 개인이나
정치집단이 현행의 제도보다 좀 더 용이한 방법으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내각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정당이 갖는 정치적 입지와 현상적인 정치구도가 내각제의 실현 가능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내각제 옹호론자들은 '대부분의 선진각국이 내각제를 선호하고 있으므로
세계적인 추세에 발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각제가 책임정치를
그현하는 제도인 만큼 집권당의 적득적이 정책수행을 유도할 수 있으므로
국가발전에 보다 기여할 수 있는 제도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대통령중심제나 내각제나 다수 당ㄷ이 국가경영과 정국을
주도하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내각제만이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절대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두 제도 모두가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불가능해 진다. 대통령중심제는 권력의 독점이라는
측면에서 정부와 여당이 하나인 듯 하지만 국가경영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상 이원화된 협력관계에 있다. 따라서 여당이 불완전해도 정부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대통령이 행사하므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가경영은 여전히 가능해 극도의 국가적 불안을 일정 부분
차단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가적 권한이 정당에 일원화 되는 내각제
하에서는 집권당의 불안은 곧 국가적 불안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는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국가안보에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료에는 이와같은 찬반의 주장을 전제로 보완책이 제시되어 있었다.
다름아님 프랑스 형태의 '이원 집정부제'이다. 국민이 직접선거로 뽑는
대통령에게 외교 안보와 국방을 관리하도록 하고 다수 당이 그와의 내각을
책임지는 형태를 말한다. 이 경우 권력의 독점을 방지함은 물론 내각이
불안해도 외교와 안보에 관한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로 이런한 이원 집정부제 형태의 내각제를 논제의 중심선상에 올려 놓고
있었다.
먼저 여당이 갖고 있는 내각제와의 역학관계가 나열되고 있었다.
정부 여단은 원칙적으로 내각제를 반대한다. 논의 자체가 불필요 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임기전 개헌이 된다고 해도 그 실시 시기는 임기가
끝나는 98년 이후에나 가능하다. 인위적이긴 하지만 안정의석만 무난히
확보 된다면 정국 불안의 요소도 사라진다. 권력구조의 변경을 필요로
할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설사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고 97년 대선
이전까지만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면 그만이다.
또한 개헌 논의는 진행되고 있는 개혁정책의 적득적이고 일관된 수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변경된 제도가 권력의 연속성을 보장하지
않는한 정권교체 이후의 안전보장에 대한 핵심권력층의 불안과 동요가
일어날 수 있으며, 보혁복합이라는 여당의 이질적구성이 내포하고 있는
잠재된 갈등이 한 순간에 표출될 가능성도 있다. 즉, 제도변화와 느슨한
개혁정책 게다가 집권 말기적 상황이 보수세력에 안도감을 심어줄 수
있어서 이들의 감정적인 반발에 의한 이탈을 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만큼 개헌논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논의를 수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집권후반기
후계자 선정문제와 관련해 권력누수 현상이 심각해지고 상황의 정도에
따라 내부 분열 다시 말해서 당내 보수파의 이탈이라는 극한의 상태가
빚어진다면 안정적인 집권마무리가 어려워진다. 또한 권력의 연장선상
으로의 승계가 불가능할 경우 퇴임후 안전이 어렵게 되고, 따라서
여당뿐만 아니라 어느 당이 되었건 향후 절대의석 확보하는 것은 희박한
상황이니 만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정파와의 연대가 불가피해
진다. 현행 제도 아래서의 정파 연대는 통합이 되어야 힘을 발휘할
수있지만 현존하는 두 야당중 어느 당도 통합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연합 정부의 형태가 가능한 내각제가 필요해진다.
연정을 통해 절대 과반수가 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우회적이긴 하지만
안전보장도 가능해진다. 결국 권력의 수평적 이동으로 인해 빚어질
현권력층의 안전성 확보문제가 개헌논의의 수용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내각제를 수용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도
이원 집정부제가 전제가 된다. 왜냐하면 순수 내각제인 경우에는 연정으로
안전의석은 확보 되겠지만 다수당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다수당이 되리라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원 집정부제인 경우에는
대통령과 내각의 수반인 수상 중 어느 한 쪽이 되었건 부분적이나마
권력연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료에 의하면 정치색이 비교적 유사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한 팀을
이룬 적이 있는 K당을 유일한 연정 파트너로 선정하고 있다. 이 때 권력의
분배는 대권욕이 강한 K당이 대통령을 그리고 여당이 수상을 맡도록한다.
성진이 자료에 심취해 있는 동안 최기자가 연신 하품을 해 대며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성진씨."
"..."
"이봐요, 성진씨."
"..."
답답한 최기자가 성진의 어깨를 건드리며 께속 불렀다. 그러자 성진이
손을 들어 최기자의 팔을 밀쳐 내고는 여전히 자료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최기자가 이번에는 성진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큰 소리로 불렀다.
"성진씨!"
성진이 화를 벌컥 내며 최기자를 쏘아 봤다.
"귀찮게끔 왜 이래! 썅 일하는 거 안보여?"
최기자가 어이가 없었는 지 입을 딱 벌리더니 강하게 반발했다.
"썅이라니. 어따 대고 썅말이야? 당신 말다했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거리고 있는 최기자를 본 성진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기가 막혀 죽겠네."
최기자가 분이 안풀리는지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성진을 노려보더니
침대 위로 올라가 벌렁 누워 버렸다.
"정말 미안해요."
성진이 최기자에게로 다가가 어께를 토닥거렸다.
"어딜 만져요? 이 손 못치워요?"
"미안하다잖아요. 내가 원래 무엇에 열중하고 있을 때 방해받는 걸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그냥 습관적으로 나온 행동이예요. 절대 본의가
아니라구요. 그러니 그만 화 풀어요."
"..."
"됐어요?"
"보기 싫으니까 저리가요."
성진이 껌벅이는 눈으로 최기자의 몸을 구석구석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최기자의 엉덩이를 탁 치고는 침대커버를 끌어올려 최기자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부드러운 시선을 최기자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
"왜 불렀어요?"
"몰라요."
"이제 화 풀어요. 잘못했다잖아요. 말해요. 왜 불렀어요?"
최기자가 성진을 흘겨보며 대답했다.
"깜짝 놀랬다구요. 무슨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래요?"
"나도 몰라요. 태생이겠지 뭐."
"빨리 좀 끝내요. 따분해 죽겠다구요. 그걸 몽땅 외워 버릴 거예요?
이러다간 밤을 꼬박 세워도 안 끝나겠어."
"알았어요. 빨리 끝낼께요."
성진이 다시 쇼파로 내려와 앉아 나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다음은
K당 차례였다.
K당의 경우 겉으로는 내각제를 포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필요성은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유는 자력으로 대권고지에 도달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운이 적지 않다. 더구나 다가오는 대선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강박감과 초조감이 팽배해 있다.
K당이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각제의 형태는 당연히 이원
집정부제이다. 그리고 내각보다는 대통령에 더 많은 관심을 갖지고 있다.
내각제를 선택할 가능성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의 여부, 둘째는 정계복귀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강하게 어필되고 있는 세대교체론을 여하히 극복하느냐의
여부이다.
현실적으로 대선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여러 차례
경험에서도 나타났듯이 지역에 편중된 지지기반의 한계성은 가장 큰
취약점이 되고 있다. 산술적으로 호남의 인구가 영남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고 설사 TK를 제외한다고 해도 3분지 2의 수준에 불과하다.
수도권에 의지한다는 것도 과거의 전례로 보아 확신이 부족하다. 천
만명이나 되는 유권자중 30퍼센트가 지지세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시
지역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그나마 젊은 층의 관심도 과거와 같지 못하다.
TK와 충청권이 여권으로 부터 이탈되었다고 하지만 애당초 K당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니었다. 이탈도 부분적일 뿐이고 더구나 충청권의
이탈은 K당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다.
이와같은 계산으로 볼 때 3파전을 가정한다면 9백만표를 상회해야
당선권이다. 지지기반을 몽땅 합해도 당선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기대를
걸만한 정치적인 상황 변화도 조짐을 찾기 힘들다. 정부 여당의 실정을
공격하는 것도 여권의 실지 회복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그다지
여의치가 못하다. 이렇듯 숫적 열세를 만회할 만한 방법이 현제로서는
전무하고 앞으로도 가능성은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정계복귀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무척 따가운데다
당연한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다. 세대 교체론자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은
총선때 보다 훨씬 강도높게 다가올 것이 뻔하다. 결국 언행 번복에 대한
도덕성 시비와 개혁층으로부터의 퇴진압력이 보수와 개혁층 유권자에게
많든 적든 흔들림을 유발시킬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한 만큼 확신없는 모험보다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이원 집정부제 형태의
내각제이다. 정치연합으로 K당이 대권을 쥐고 협력당에 내각을 맡기는
것이다. 정파연합은 지역성 탈피를 수반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대권은
보다 쉽게 획득할 수 있다. 내각제로 통치구조가 바뀌면 세대
교체론자들의 목소리도 희석시킬 수 있고 득표력의 제고를 기할 수 있다.
그러면 K당의 파트너는 누가 될것인가. 대상은 다양하다. 수치만을
욕심낸다면 J당이건 TK세력이건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결정적인
협조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감안한다면 양김의
연합보다는 TK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TK는 반정부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여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여당과의
연대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는 여당이 분열된다는 가정에서만 가능하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J당은 순수 내각제만 선호한다. 하지만 수적 열세로 인해 다른 당의
노선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J당의 경우 내각제는 보다 절실하다. 당세로
보나 지지기반으로 보나 대권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따라서 권력에대한 최소한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내각제밖에 없다.
어쩌면 J도 이원 집정부제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겉으로 나타나는 순수
내각제의 주장은 권력욕을 숨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지도 모를 일이다.
J당은 스스로 파트너를 정하기 보다는 선택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성진은 자료의 내용을 머리 속에 요약하며 나머지 부분을 훑어
내려갔다. 성사여부가 남아있었다.
내각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시점은 96년 정기국회 후반이 될
것이다. 여당의 대권 후보 경쟁이 시작 되기 전에 정치공세를 가함으로서
여권내부의 혼란을 유도하려는 의도와 대선의 기선을 장악하려는 수단의
일환이다. 시기적으로도 내각제 논의가 종결되려면 최소한 대선일정
이전이어야한다. 절차상 대통령의 제안과 국회의 의결 그리고 국민투표로
이어지는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만 해도 2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따라서
정치권의 논의는 79년 정기국회 초반에 완결짓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기를 놓치면 향후 몇 년 동안은 내각제 논의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쨋든 내각제의 성사여부에 대한 칼자루는 분명히 여당이 쥐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한 여당이 내각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원칙적으로 개헌의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었다. 설사
여권이 분열되어 또 다시 여소야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하더라도 여당의
의석이 개헌 저지선 이하로 떨어질 공산이 적기 때문이다. 통치권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한 내각제는 논의로 끝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진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버린 최기자를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손이 가다가 멈추고 말았다. 하도 곤하게 자는 지라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최기자의 얼굴 만을 쳐다보던 성진이
슬그머니 침대속으로 파고 들었다. 최기자의 따뜻하고 보드러운 살결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런 날도둑 같으니라구. 어딜 달라 붙어요?"
최기자가 발딱 일어나며 성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딴 맘먹고 이러는 거 아니예요. 깨우기가 미안해서 나도 눈이나
붙이자고 누운 거라구. 오해하지 말아요."
"누우면 그냥 눕지, 왜 남의 몸에 살을 대느냐구요?"
"침대도 하나고 덮을 것도 하나 뿐인데 어떻합니까? 더구나 숙박비는
내가 냈는데 , 왜 수정씨만 독차지해야 되요? 나는 내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이라구요."
"다 보기는 했어요?"
"다 끝났으니 이렇게 누워있는 거 아닙니까?"
"끝나다니요? 이제 얘기를 해줘야죠. 빨리 일어나요."
"조금만 쉬었다가 합시다."
최기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누워 버렸다.
"한가지만 더 물어볼테니까 아는 데 까지만, 아니 말할 수 있는데 까지만
말해 쥐요. 그 사람들이 이런 자료를 만든 이유가 뭐랍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총선 이후 보수파가 극도의 약세로 입지가 바뀌어져
버렸어요. 자파에서 차기 대권을 노려보고 싶은데, 당내 후보경선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 버렸죠. 게다가 집권 후반에 들어 개혁정책이 강화되다
보니 잠시 잠잠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구요. 그래서 노느니
염불한다고 딴 생각을 해 본 모양이예요. TK와 손잡고 신당을 만들면
어떻겠나 한거죠. 그렇다고 대권 경쟁에 뛰어 들기는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만약 내각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검토를 해봤겠죠.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극비리에 이탈 가능한 대상자를 조사해 봤더니
소수에 불과하더래요. 게다가 내각제가 될 가능성도 생각보다는 적고..."
"혹시 K의원이 주도한 거 아닙니까? 대권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
대표적인 보수파 리더잖아요."
"누가 주도했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이런 자료까지 만들
정도였다면 초기에는 대단한 각오로 시작했겠죠. 하지만 주저 앉기로
했대요. 내가 봐도 승산이 없는 게임이니까."
"아직 모르죠. 후계자 싸움이 본격화되면 상황이 또 달라질지도..."
"성진씨는 내각제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어떨지...문제는 국민들이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제와 비교 할 수
있는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데다 관심도 없어요. 국민여론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괜히 정치권만 떠들고 있다구요."
"안될 걸로 보는 군요."
"그렇다기 보다도 국민 일반의 분위기가 아니올시다에요. 통치권자의
의중을 읽어낼 수도 없고... 누가 그럽디다. '통치권자가 다른 김씨와
통치력을 비교받기를 바라겠느냐? 현행 대로라면 3김씨중 자신만이 유일한
대권경험을 갖게 될 걸로 믿고 있을텐데, 굳이 개헌은 안 할 것이다. 굳이
내각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해도 두 김씨가 일선에서 물러 난다면
내각제를 하겠다고 조건을 붙일 것이다.' 이 말도 일리가 있잖아요?"
"하긴 그렇네요. 하짐나 후보자간의 역량에 차이가 있다면 다른
김씨라고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그나저나 여권후보는 누가 될 것
같아요?"
"그걸 알면 이 짓 안해요. 미아리에다 거적이라도 하나 깔고 있지. 요즘
점쟁이들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알아요? 더구나 정치인들을 상대로 하면
한 건에 수백이 왔다 갔다 한다구요."
"정치인을 상대로 할려면 미아리보다 여의도가 낫죠."
"그게 좋겠네."
잡담을 주고 받다가 최기자가 다시 일어났다.
"이제 그만 쉬고 시작합시다."
"뭘 시작해요. 몸에 손도 못대게 하면서..."
"징그러운 소리 하지말고 어서 얘기 꺼내요."
성진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개를 등에 받치고 기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 부터 할까요?"
"우선 SG연구회가 뭐하는 단체인지 부터요."
"미리 얘기하지만 자세히는 안돼요. 그러니 추가 질문은 거절하겠어요.
알았죠?"
"얼마나 성의를 보이느냐가 문제예요. 거기에 따라서 추가질문도
필요하면 할 거구요. 성진씨도 알았죠?"
"그리고 분면히 기억해야 할 게 있어요."
"뭐를요?"
"내 욕심을 고려해 보겠다는 말..."
"젯밥 생각 말고 염불부터 하세요."
성진이 한바탕 웃고 나서는 본론을 꺼냈다.
"창립은 1992년 5월 17일, 회원은 1명의 옵서버를 포함해서 총10명,
구성원의 직업별 분포는 기자 2명, 르포작가 2명 증권 전문가 1명,
노동운동 전문가 1명, 정치인 1명, 정보기획 전문가 1명, 출판전문가 2명
공히 재야 운동권 출신이며 정치지향적인 인물, 연령 분포는 30대가 8명
40대가 2명. 이상 질문있어요?"
"추가 질문 안받겠다면서요."
"질문이 있을 것 같아서 선수치는 거예요."
"이름은 차차 알게 될테니 세사람만으로 됐고, 옵서버는 뭐에요?"
"그걸 물어볼줄 알았다구요. 옵서버가 뭐냐면 끼어 주기는 그렇고
버리자니 아깝고 하는 여자분 이예요. 농담이구요, 우리 모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죠. 르포작가인데 자료 분석에는 일인자거든요.
특별한 사유로 인해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어요."
"특별한 사유가 뭔데요?"
"더 이상 질문 안 받겠어요. 다음 궁금한게 뭡니까?"
"좋아요. 다음은 모여서 주로 무슨 작당을 하는지 말해 줘요."
"작당이라니."
"그럼 어떤 수작을 꾸미는 지로 바꿀께요."
"이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알았어요. 하는 일이 뭐냐, 정치와 관련된
각종 정보 자료들을 수집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이 주된 일이고
가끔이긴하지만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는 제반 사안들을 연구해요.
이를테면, 사회문제나 경제, 문화 등 다양해요. 그동안의 연구실적으로는
디스켓으로 약 백여장이 보관되어 있어요. 연구 목적은 우리의 슬로건으로
대신하자면 '아름다운 사회 더불어사는 세상 만들기'이구요. 앞에서
말했지만 정치지망생들이 스스로 그릇만들기를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요. 이상. 다음으로 궁금한거는요?"
"추가 질문있어요. 백여장 중에 대표적인 연구 제목 몇 개만..."
"다음 궁금한게 뭐냐고 물었잖아요?"
"되게 까탈스럽네. 사람을 찾는 이유요."
성진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조금만 쉽시다."
"또요? 자주 쉬면 상한다구요. 그냥 계속해요."
"어허, 이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부분이라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요.
그러니 머리 정리 좀 하고 시작하자구요."
"좋아요."
두 사람은 다시 휴식에 들어갔다. 성진은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할 지
난감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더구나 최기자가 건내준 내각제에
대한 자료는 성진의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당초
바꿔먹자고 한 대로 자신이 얻어먹은 만큼 나누어 주는 것이
도리였다.성진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최기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손을 머리맡에 깔고 말똥 말똥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대 커버가
허리춤 까지 내려와 아담한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앏은 가리개
속으로 거뭇한 몽우리가 답답하게 솟아 올라 있다. 성진의 시선을
의식했는 지 머리맡에 있던 두 손을 옮겨 가지런히 가슴 위로 얹었다.
성진은 손길의 충동을 억제하며 입을 열었다.
"수정씨."
"네?"
여전히 눈망울을 천정에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농담 한마디만 할께요."
"농담이라니요?"
시선은 변함없었다.
"그거 임자 있어요?"
'그거라니요?"
"두손으로 감싸고 있는 거요."
그러자 최기자가 상체를 일으키고는 성진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임자가 없으면 가지기라도 할거예요? 지금 가지고 있는 거나 관리
잘하세요. 다 쉬었으면 어서 시작해요."
성진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어떤 놈이 될지 참 좋겠다. 저렇게 예쁘고 탐스럽게 생긴걸 얻을 수
있는 녀석은 행운아일거야."
"뭐라고 궁시렁거려요? 빨리 얘기 시작해요."
"알았어요. 뭐라고 했더라? 아참, 사람을 찾는 이유를 물었지? 21세기를
준비하자는 겁니다. SG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모래시계 세대를 의미하는
겁니다. 2천년대의 주역이죠.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주역으로서의
가치를 함양하는 과정이예요."
성진이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최기자도 자세를 고쳐잡고 귀를
곤두세웠다.
"6.3세대와 4.19세대의 변절을 뼈져리게 체험했습니다.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지는 것이죠.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작업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상상할 수 없는 각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이상을 쫓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다소
허황되 보일지 모르지만 이상이라는 것처럼 때묻지 않은 게 없어요.
우리는 몸으로 행동하고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면서 그 때묻지 않은
이상을 찾고 있어요. 수정씨가 궁금해하는 사람찾는 작업도 우리가 찾고
갈망하는 이상을 함께 찾아 나설 사람들이예요."
"상당히 추상적이군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가 찾아온 이상들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인간세계에서 반드시 가능한 일들을 형상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아름다운 사회가 뭐겠어요? 그것이 추상입니까? 그게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차피 완전한 세상은 없어요. 지구산의 인구중 10퍼센트가 장애를
갖고 있다는 통계가 있어요. 4천만이 넘는 인구중에 4백만이
장애인이라구요. 그 사람들이 어떨게 살고 있는 지 아세요? 그리고
지구상의 인간의 절반이 의식주를 걱정하면서 살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어떤지 아세요? 30퍼센트에 가까운 국민이 소외계층이라구요."
"조물주는 인간 자체를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어요. 그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에 의해 똑같이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 지배를 받고 있구요.
완벽한 것ㄹ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예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근접시킬 수
있다면 뼈를 깍는 고통이 있다고 해도 해내야죠. 그걸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작지만 우리만이라도 나서 보자구 뭉친
겁니다. 부족하고 완전하지 못한 인간일 망정 고치고 다듬고 부족한 것을
채워서 스스로가 우선 완벽에 가까워진 후에 다른 것들을 완벽으로 견인해
내자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완벽해 지지 않으면 결코 다른 것들에 대해
당당해질수 없기 때문이죠."
"좋아요. 그렇다면 이소운씨가 현실에 참여한 것은 스스로 완벽해
졌다고 생각한 건가요?"
"말했잖아요. 몸으로 행동한다구요. 일종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체험을 통해 현실을 깨우치자는 거지요. 우리 팀중에 유일한 현실
참여자예요. 그 분의 체험이 우리 모두의 간접경험이 되니까요. 그 분은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예요. 자기 희생을 통해 회원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럴 듯 하네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자신의 실패경험을
동료들에게 전달해서 간접경험을 쌓게한다.' 그런 고매한 뜻이 있었다는
말이네요. 지난 선거에서 재야 출신 신진들이 몰살 당하다시피 했어요.
그들과 별로 다를게 없잖아요. 결과만 보면 이소운씨도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입증된 게 아닌가요?"
"한 통속으로 보는 건 옳지 않아요. 소운이 형은 명예욕이나
보상심리와는 거리가 멀어요. 수저도 없이 밥상에 앉아 배부르기는
바라지는 않는다구요. 애당초 승리를 바라지도 않았어요. 다만 승리 외적인
다른 기대감이 있었던 거지요."
"좋아요. 꼬투리 잡자는 건 아니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죠. 다시 사람
찾는 일로 돌아가자구요. 그럼 사람을 찾는 것은 SG의 식구를 늘리자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왜 회원 학보와는 별개라고 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아니예요? 그럼 정선배가 그랬나? 어쨋든 회원을 늘리려는 건가요?"
"그거와는 상관없어요."
"그거 보세요. 상관없다고 하시잖아요. 그럼 모순이네. 2천년대를
준비하기 위한 사람들, 이상을 찾기위해 필요하다면서 회원과는 별개라니
이해가 안가요."
"우리는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 관리자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네요? 그게 누구예요?"
성진은 아차 싶었다.
"그건 말 못해요. 다만 우리가 일하는 과정에서 필요로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하죠. 그렇다면 사람찾는 일이 스스로의 판단에서라기 보다는
숨어있는 사람의 의뢰를 받았거나 공모를 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맞아요?"
"의식과 사고를 함께 하는 사람이예요. 양쪽이 동시에 필요로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최기자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더 물어도 그 이상의 대답은 못들을 것 같으니 이정도로 하죠. 그러면
몇 명이나 찾고 있어요?"
"숫자는 상관없어요. 엑기스만 뽑다보면 하나가 될지, 열이 될지, 백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일단 잡아야 된다고 생각되는 대상은 모두
선택할 생각입니다."
"기준이 뭐예요?"
"알면 도와주겠어요?"
"모르죠. 추천할 만할 사람이 있다면 소개할 수도 있구요."
"첫째는 정치 지향적이어야하고, 둘째는 제도권 경험이 없어야 하고,
셋째는 개혁성향이 강해야 하고, 넷째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고,
다섯째는 기초적인 전문성이 있어야하고, 여섯째는 남녀를 불문하되
SG세대라야 합니다."
"더럽게 까다롭네. 어디 기억이나 하겠어요?"
"머리가 나쁜 사람도 사양하구요."
"걱정말아요. 끼워 달라고 안할테니까. 관리방법은요?"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예요."
"나참,...솔직히 말해봐요. 이상찾기 말고 뭐가 또 있죠?"
"그건 말 못해요. 결정적인 비밀이니까."
최기자가 성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성진의 표정을
세세히 관찰하며 말했다.
"혼저 상상해 볼께요. 누군가 다른 관련자가 있다고 했죠? 그 사람이
향후 정국 구도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기자가 잠시 말을 끊고는 몸을 일으켜 성진의 하복부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렇다면 대권 구도와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대선 이후의
정치구도에도 고나여할 수 있다. 그런 실체의 경험을 일련의 과정으로
밟으면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질적 양적으로 키워 나간다. 그렇게
2천년대로 연결시킨다. 시기적으로 보아 급박한 상황이라 모래시계가
멈추기전에 사람찾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SG와 그들이 찾는 사람은
일선에 배치될 사람이고 숨어있는 사람은 일선보다는 높은 곳에 있을
사람이다. 대구너 구도를 ㅁ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숨어있는 사람도
그보다 높은 곳에 있을 사람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을 수 있다. SG가
내각제를 연구하는 것을 보아 대권구도에 관심이 있고 그 관심은 숨어있는
사람의 관심과 일치한다. 어때요? 내 추측이 그럴 듯 해요?"
"..."
"대답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지 아세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한 긍정을 의미한다구요. 이 말도 맞죠?"
"..."
"흠, 대단한 사람들이군. 아주 흥미로운 사람들이야. 정선배가 이런
사람들과 한패 거리라니... 충분히 그럴 만한 양반이지."
성진이 속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당신이란 여자, 도대체 어떤 여자야?"
최기자가 여전히 성진의 하복부에 눌러 앉은 채 말을 받았다.
"왜요? 정선배가 얘기 안하던가요?"
"전혀... 동료를 소개시켜 준다기에 남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왠
머슴같은 여자가 나타나더라구."
"호호호... 첫 인상이 머슴같았어요? 지금도 머슴같아요?"
"지금이야 여우같아 보이지. 꼬리가 아흔아홉개쯤 달린 백여우."
"한번 홀려 볼까나 어쩔까나..."
최기자가 엉덩이를 살짝 흔들어댔다.
"왜, 긴장되요? 정선배가 내 얘기를 안했으니 다행이지?"
"무슨 뜻이야?'
"정선배 결혼하는지, 전혀 몰랐댔어요. 결혼식 전날에야 알았다구요. 지난
선거때 기획물을 준비하느라고 이틀밤을 함께 지냈거든요. 첫 날은
정선배가 내 욕심을 거절했고 둘째 날은 내가 거절했지만 정선배도
적극적이진 않았어요. 왜 그러나 싶었더니 결혼을 앞두고 있었더란
말이예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를 즐기는 타입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어요?"
"그런 말 나올 줄 알았어요. 불편해서 못 앉아 있겠네. 그만 긴장을 풀어
줄께요."
최기자가 성진의 몸에서 떨어져 쇼파로 내려와 앉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때로는 남자기 그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막상 상황에
처하고 보니 왠지 모르게 생각이 달라지더라구요. 예스냐 노냐 마음이
교차하는 거죠. 그런데 정선배하고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아무 것도
아까울게 없다는 생각이었죠. 정선배를 짝사랑 했었거든요. 결혼한다니까
얼마나 분하고 서러운지... 좀 일찍 말해 줄 일이지... 하긴 슬픔같은 것에
워낙 익숙해 지다보니 이젠 감각도 무뎌졌지만..."
성진이 '날샜구나' 싶었다. 최기자가 다시 침대로 올라와 다소곳이
자리에 누웠다.
"아까 제가 뭐랬죠? 얘기가 얼마나 솔직한지를 보고 성진씨 욕심을
고려해 보겠다고 그랬죠?
"그래서 솔직했어요?
"대체로 그랬어요. 아니, 많이 솔직했어요. 약속대로 할께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되요."
"괜찮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안그래도 된다잖아요."
성진이 괜스레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약속 지키겠다는데, 뭐가 기분 나빠요?"
"멍석을 깔았잖아요?"
"제가 언제요?"
"동찬이 얘기는 왜 해요? 그 얘기 듣고 어떻게 내 욕심만 채우냐구요?"
"별 일이야. 정선배하고 성진씨 욕심 채우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친구간의 의리때문이예요?"
"수정씨가 남자라면 하겠어요? 보세요! 날샜다구요."
성진이 팬티를 훌렁 벗어 내렸다. 최기자가 성진의 아랫도리를
쳐다보고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역시 내가 사람볼 줄은 안다니까? 성진씨가 내 몸을 탐했다면 그 길로
사타구니가 절단났을 고예요. 그걸 노린 거죠. 내가 그런 헤푼 여자는
아니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다른 직업을 택했죠."
그러더니 창 밖을 보았다.
"어머, 정말 날 샜네?"
창 밖이 발강오고 있었다. 정말로 날이 새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의 바라보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성진씨, 정선배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마세요. 나혼자말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어요. 알았죠?"
두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면을 마쳤다. 그리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면서 최기자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물어 볼께요."
"뭐가 또 남았어요?"
"나도 SG에 참여 할 수 있어요? 찾는 대상으로서가 아니고 정식
회원으로 말이예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예요. 회원중 단 한사람만 반대해도 안되도록
되어 있어요. 사람이 많으면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연구활동이
어렵거든요."
"안되면 할 수 없구요. 정치부 기자이긴 하지만 사실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구린내가 나서 싫어요."
"우리한테서도 구린내가 나요?'
"아니요? 거울처럼 투명하고 맑아 보여요. 언제까지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응지는 모르지만, 아니 그러기를 바래요. 색깔 얘기가 나오니까
재미있는 말이 생각나네요. 한번 들어 볼래요?"
"나가면서 해요."
객실을 빠져나오면서 최기자가 개구쟁이처럼 까불며 말을 이었다.
"어느 야당의 B의원하고 C의뤈하고 색깔 논쟁이 벌어졌어요. B의원이
C의원보고 '색깔 좀 분명히해라. 줏대없이 이리갔다 저리 갔다 하지말고'
그러니까 C의원이 '그래 나는 회색분자라 아무데나 잘 어울려서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간다. 그러는 너는 무슨 색이냐?' 하니까 B의원이 뭐란 줄
아세요? '나는 똥색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모두
피해다니지.'라고 했데요. 사실 빨강이 어디 있고 파랑이 어디 있어요?
모두가 불분명한 회색분자들 뿐이라구요. 그렇지 않으면 냄새나는
똥색이고. 안그래요?"
두 사람은 호텔문을 나서 대로 변에 멈추어 섰다.
"수정씨 어디로 갈거예요?"
"신문사로 들어가야죠. 성진씨는요?"
"집에 들렸다가 옷 좀 갈아입고 나와야겠어요. 어때요, 우리 집에서 아침
들지 않을래요? 집사람 음식 솜씨가 제법이거든요."
"왜요, 혼자 들어가기가 겁나세요? 그렇다고 한 이불 속에서 한 밤을
지낸 외간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까지 데려가요? 참 뻔뻔스러워...
혼자 가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겠죠. 안녕히 가세요.
유익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13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뜨거운 태양 빛이 온 대지 위에 작열하고 있었다.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가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정치권을 더욱 후끈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여당은 TK지역에서 옥중 당선된 J씨의 실형 확정선고로 인해
치루어진 보권선거에서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한
기쁨이 채 가시지도 전에 몇 명의 소속의원들이 개인비리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희비가 교차하고 있는 여당과 마찬가지로 야당 역시
비리혐의을 받고 있는 의원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새벽 6시. SG연구소에김동수의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몇 명의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운이었다.
"감사할 것 없네. 당연히 처리해야 할 문제니까. 본인들이 자진해서
의원직을 사퇴하도록 유도를 하고 있지만 완강히 버티고 있네. 자네가
양은 차지 않겠지만 가능하면 사법처리는 안할 생각이네. 하지만 끝까지
버틴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지."
"그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삼지는 않으신 것 같더군요."
"두 사람은 먼지가 적어. 털만큼 털어 봤지만 아주 극미한 정도라 선뜻
처리하기가 쉽지 않아. 그렇다고 비자금 수수내역을 밝힐 수 는 없지
않나? 받은돈도 다른사람에 비한다면 몇 푼 되지도 않고하니 이 사람들은
덮어 주자구. 대신에 구두로 정신차리도록 단단히 꾸짖어 놓았네. 이제 그
문제에 관해서는 잊어 버리자구."
"알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소운이 김의원을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성진이
디스켓을 컴퓨터 본체에 끼워 넣고 키보드를 눌렀다.
"몇 명이나 되는가?"
성진이 대답했다.
"생각보다는 우리 입맛에 맞는 인물이 적습니다. 우선 화면부터
보십시오. 신상명세서까지 자세히 조사해 놓았습니다."
김의원이 화면을 유심히 관찰하고 나서 말했다.
"30명이라... 소운이 어때? 이 정도로 되겠나?"
"더 필요하시다면 계속 찾아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질적으로
정예화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보안상 문제도 염두해 두어야
하구요. 입이 많으면 그만큼 새어나갈 소지도 많아 지니까요."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이 정도로 하세. 추가로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지. 그리고 자네가 직접 이 사람들을 만나보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개별 접촉을 끝냈습니다. 조직화 시키는 작업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역시 자네답구만. 그래, 얼마나 필요한가?'
"자금 말씀입니까? 필요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비로 참여하도록
확약을 받았습니다. 시작부터 도움을 받으면 자신에 대한 의지력이 약해
집니다. 꼭 필요할 때는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의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모니터를 차례로 살펴
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부탁하네."
연구소를 나온 김의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건물 뒷켠 골목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검은 색 승용차에 올라타고 골목을 빠르게 벗어났다.
김의원의 배웅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온 소운이 성진을 불렀다.
"아무래도 네가 맡아 줘야겠다. 그 쪽 회원으로 참여해서 방향도
잡아주고 다리 역할도 해야겠어."
"적극적으로 관리를 하려면 형이 직접 나서는 게 좋지 않아요?"
"우리 모임이 관여하는 것으로 비춰지면 곤란해. 우리는 싱크탱크
역할만 하는 거야. 그렇게 해도 전면적인 관리는 가능하니까."
"알았어요."
"그리고 창립준비를 빨리 끝내라. 벌써부터 대권레이스가 시작된
분위기야. 줄달기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다음달 중으로 출범시키도록 하죠."
"그렇게 해봐. 그런데 성현이가 요즘 풀이 몹시 죽어 있는데, 왜 그런지
알고 있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여자 때문인 것 같아요."
"여자라니?"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모양새가 우습게 되어 버렸어요. 서로 환경이
맞지 않아서 좋아만 하고 지냈는데, 여자가 결혼 상대를 다른 남자로 정해
버렸어요. 둘다 끔찍히 좋아했던 모양이야. 얼마 전에 성현이도 잘 아는 그
여자의 친구 결호뇨식장엘 갔더니 결혼할 사이라면서 왠 남자를
소개하더라는 거야. 성현이 딴에는 오래간 만에 만나서 연극이나 볼려고
티켓을 준비해 잔뜩 들뜬 기분으로 갔다가 어이없는 꼴을 당한 거지.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식장을 빠져 나와 생각하니
자기 꼴이 말이 아니더라는 거야.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그동안 온갖
정성으로 사랑을 보냈던 나날을 생각하니 너무나 분하고 원통하더래요.
지금 증오심이 가득해 가지고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지 어디
두고보자'하면서 지내고 있어."
"그 녀석 참."
"남자 녀석도 형편없어 보아더래. 데려와도 쓸만한 놈이나 데려올
일이지. 그럼 억울하기나 덜 할거 아니야?"
"내 사람이겠거니 했다가 하루 아침에 다른 당으로 가버리니까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거나 똑 같구나. 그렇다고 기가 죽어 있으면 어떻해? 한
솥밥 먹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가도 훌쩍 떠나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둘이 지내온 얘기를 들어보니 쉽게 잊을 정도는 아니더라구.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잖우? 그러다가 말겠지."
소운은 서울지역에 유일한 무소속이었던 H의원이 친정이나
마찬가지였던 K당행을 거부하고 M당과 함께 여당에 합류한 예를
떠올렸다. 소신보다는 정치적 이해를 쫓아 변신을 거듭하는 사례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당사자들은 변신의 결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 지거나 대중적 관심도에서 밀려나게 되는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B의원이었다. 그는 총선당시 중책을 맡아
지역구 후보들의 당선을 지워했으나 여당의 저조한 득표율로 인해 15대
등원 마저도 실패했다. 때문에 당내 입지도 상대적으로 약해져 대권에
대한 희망도 포기해야하는 지경에 놓여 버렸다.
어쨋든 과반수 안정의석 확보에 성공한 여당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성대한 통합 전당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당헌의 변경을 포함해
새로운 지도체제를 구성하고 집권종반기의 안정적인 마무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당 대표는 유임, 선거총책을 맡았다가 전국구로 등워한 L의원은
고문으로, M당의 공동 대표였던 K의원은 수석 최고 의원으로, 역시
공동대표였던 J의원과 등원에 실패한 B씨는 최고으원으로 위촉이 각각
내정되었다. 그러나 외형상 화려한 진용을 갖추고 막 출범을 기다리고
있는 당지도부에 이상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수면하에 있던 대권갈등이
노출된 것이다.
"다녀 왔니?"
소운이 막 출근한 지은을 불러 앉혔다.
"예, 여기 있어요."
지은이 A4용지 만한 유인물을 소운에게 건냈다.
"전체 대의운들에게 모두 뿌려진 것 같아요."
대권후보의 조기 가시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유인물이었다. 지은이 말을
계속이었다.
"보수파의 짓이라는 게 일만적인 시각이예요. 당 대표측을 지목하는
사람도 적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가한 거구만."
"김의원님은 뭐래요?"
"아무 말도... 물어 보지 않았다. 우리가 알아서 판단해야지."
"그런데 측근들이 의외로 반응을 안보여요. 동찬씨 말로는 측근들이
마타도어 작전을 편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마타도어?"
"대표가 한 짓으로 우장해서 청와대의 노여움을 유도하자는 거죠.
그렇게 되면 대권에 대한 의사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될거고, 그렇게
시간을 벌어서 확실하게 세를 다져놓자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보수파의 견제책일
가능성이 높아. 이런 식으로 운을 떼어서 청와대의 의중을 떠보는 거지.
후계자 문제에 관한한 철저히 함구로 일관하고 있으니까 답답하기도
할거고. 또 조기가시화라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야. 야당은
벌써부터 지지기반 확산을 위해 강연회니 세미나니 하는 핑계로 대학은
물론이고, 여성단체, 노동단체, 농어민단체, 노인, 장애인 할 것 없이 각계
요로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거든. 사실상 득표 활동에 돌입해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야. 반면에 여당은 아직 후보자를 논의 조차 안하고
있으니, 이런 상황을 문제 삼는다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라구.
유인물에서도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잖아?"
"우리는 언제 쯤 움직일 거예요?"
"우선 조직부터 해놓고 내년 초쯤에 표면화 시킬 계획이다."
"시간이 될까? 전국 조직망을 갖출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텐데..."
"좀 빠듯하긴 하지만 어렵지는 안을 거야."
"규모는 요?"
"일차 목표는 오천명 정도고 후보가 결정되는 시점을 전후로 해서 십
만까지 확대할 생각이다."
"그만한 자원이 되겠어요?"
"안될 것도 없어."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하는 말이지."
"물론 기존의 정치권이 꾸려 왔던 사조직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특성으로 꾸민다. 두고봐라. 틀림없이 깜짝 놀랄 집단이 될거야. 너 나를
못 맏니? 한다면 하는 사람이잖아?"
"못믿는 게 아니고 그저 걱정이 되서 하는 소리지."
"염려 안해도 된다. 복안이 준비 되어 있으니까."
"유신세대도 끌어 들일 거예요?"
"유신세대는 나하고 상호 선배면 족하다. 유신 초기 세대는 이미
제도권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어. 벌써부터 일부는 변절되기도
하고 기회주의적인 행각을 벌이는 자도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게 되먹지
않은 정치질서에 동화되어 버린 때문이야. 자신의 입신 만을 생각하고
현실안주을 위해 무사안일을 선택한거지."
"선배님이야 모르지만 형은 꼭 유신세대로만 볼 수 없지. 양 쪽에서
모두 험한 꼴을 겪었잖아요. 경험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모래시계 세대에
훨씬 더 어울린다구."
"하여튼 유신은 신제품이 아니야. 이미 중고가 되어 버렸어."
"그러면 선택의 폭이 더욱 줄어드는데?"
"잊어버렸니? '어려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건 바로 네가
한 말이야."
"기억력 하나는 알아 준다니까?"
소운은 지은의 콧등을 가볍게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은이 밖으로
나가 손걸레를 들고 들어 왔다. 소운의 책상을 정성스럽게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거예요?"
"..."
"미혜가 부러워요."
"..."
"내 말 듣고 있어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 것도 준비된 게 없잖니?"
"고대광실을 준비해요? 아니면 금광이라도 캐기를 기다려요?"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놈의 일... 누가 일을 못하게 한 대요? 가정을 꾸미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구요. 어떻게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도 못 만들면서 큰일만
고집부려요? 작은 것을 잘해야 큰 일도 잘된다구요."
"기왕에 기다리던 길이잖아?"
"그럼 얘기를 해보세요. 일 년을 기다릴까요, 십 년을 기다릴까요?
아님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기다릴까요? 무한정으로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어야 희망을 갖고 기다리지..."
"잘 참아 오구선 오늘따라 왜 그러니?"
"이대로 파파 할머니가 되어 버릴까봐 겁이 나서 그래요. 엄마 아빠
등살에도 못견디겠고 더 이상 불효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구요."
"알았다. 궁리를 해보자."
"궁리하겠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골백번도 더
들었다구요. 아무래도 내가 부담스러운가봐."
소운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정말..."
"진짜 화낼 사람이 누군데... 알았어요. 그만 둘 께요."
지은이 횡하고 나가려는데, 소운이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그렇게 언짢아서 나가면 어떻하니?"
소운이 되돌아선 지은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고 말했다.
"미안하다. 나도 하루 빨리 함께 하고 싶어. 하지만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 이해 못하겠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구. 마음이 여유롭지가
않아. 그러니 조금만 참아다오. 부탁이다."
지은이 아무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잠시 소운의 품에 안겨 있다가
떨어지며 밝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미안해요. 조심할게. 미혜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까 질투가 나서
그랬어."
"욧즘 미혜 얼굴보기가 어렵더구나? 아예 우리일은 팽개친다던?"
"그게 아니고 집보러 다니느라 바뻐요."
"집이라니?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사를 한데?"
"이사는 무슨... 영숙씨가 서울로 이사를 오는 모양이예요."
"그러니? 잘 됐구나. 요즘은 오해를 안하는 모양이지?"
"언니 동생하면서 얼마나 잘 지낸다구. 형이 설득한게 주요했어."
"상당한 발전이구나. 그럼 소일거리라도 마련해 줘야겠는 걸?"
"조그맣게 분식점을 차리겠데요. 그래서 점포가 딸린 집을 찾고 있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운가봐."
"이 근처에서 한 번 알아보지. 신축 건물들이 꽤 많으니까 어쩌면
마땅한게 있을 지도 몰라."
"참, 그래야겠네. 우리도 자주 이용하구."
지은이 수화기를 들고 미혜를 찾았다. 대화를 들어보니 미혜도
반가워하는 모양이었다. 지은이 통화가 끝나자 소운이 말했다.
"내일 출장계획이 있다."
"갑자기 왠 출장이예요?"
"전국을 한 바퀴 돌아 봐야겠어. 여론이 어떤지 알아봐야 하니까."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잖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 또 내가 제일 자유롭기도 하고."
"얼마나 걸려요?'
"한 열흘 정도."
"그렇게 오래? 전당대회는 어떻하구요."
"관중석에 앉아서 박수치는 역할밖에 더 있니?"
"나도 따라가면 안돼요?'
"번역 일은 어떻하고? 일도 일이지만 남의 눈총도 생각해야지."
"언제 남의 눈치보고 살았나? 요즘엔 일거리도 없어서 따분하던
참이라구요."
"글세 안돼."
"이 삼일만 따라 다녀도 안돼?"
"안된다니까?"
"치사하게..."
소운이 뾰루퉁해진 지은을 바라버다 못 이기는 척 말했다.
"기회 봐서 강원도 쯤에서 연락할게."
지은이 이내 화색이 돌아가지고 소운의 목에 매달렸다.
"누가 볼라."
아닌게 아니라 상호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어이쿠. 이거 실례했구만."
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손님이 오셨어. 최스정 기자라고 하는데? 어제도 그냥 갔어. 시간
약속을 하고 오랬더니 오늘도 그냥왔구만."
"최스정 기자라... 잘 모르겠는 걸? 무슨 일로 왔데요?"
"직접 얘기하겠아면서 말을 안해."
"그래요? 들여 보내세요."
잠시 후 최기자가 예의 거친 복장을 하고 소운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명함을 건내 주면서 인사를 하고는 소운이 권하는 의자에 걸터 앉았다.
"저 기억 안나세요?'
"만난 적이 있습니까?'
"지난 선거때 한번 뵈었는데..."
"그랬던가요?"
"정동찬 기자하고 같은 부서에 있어요. 김성진 기자도 잘 알구요."
"그렇습니까? 그래 찾아온 용건이 뭡니까?'
"전에도 그러시더니 오늘도 역시 급하시군요. 차 한 잔 주시면 안되요?'
"아참, 미안합니다. 손님 접대가 서투른 편이거든요."
소운이 지은을 불러 차를 부탁했다. 그리고 재차 용건을 물었다.
"SG연구회가 저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
"신세라니요?'
"사람찾는 일을 도와드렸어요. 제가 명단을 제공했거든요."
"아, 그 분이었그만. 인사가 늦었지만 정말 고마웠습니다."
"별 말씀을 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신세를 져야겠어요."
"빚을 갚아달라는 말씀인가요? 제가 알기로느 거래가 있었던 걸로
보고를 받았는데요?'
"거래가 아니고 음식을 바꿔 먹은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손해를
본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미 지난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시다면
그 손실 부분을 이선생밈께서 보충을 해주셨으면 해서요."
"손실 보충이라... 바라시는 게 뭔지 말씀해 보세요."
"보충해 주시겠어요?'
"일단 용건부터 말씀하세요."
그때 지은이 차를 가지고 들어 왔다.
"고마워요. 아기씨도 회원이세요? 여자 분이 두 분이라고 들었는데...
성진씨 말로는 그 중에 한 분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면서요?"
지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의 행동 수칙 중에 '낯선 사람과 불 필요한 대화를 피하라'는
조항이있어요. 차 드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머, 냉정도 해라. 여기만 오면 왜 그렇게 주눅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대화를 나눠 보면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
"주눅 든 사람같이 안보이는데요? 어서 용건을 시작합시다."
소운의 재촉을 받은 최기자가 입으로 가져 가려던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차마실 시간도 허락하지 못할 만큼 바쁘신 모양 이군요. 빨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몇 명이나 찾으셨어요?"
"그 다음에 물어볼 말은 뭡니까?"
"제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분면 어떤 특정인의 전위대로 활용한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요. 그 다음에 묻고 싶은 것이 뭐냐고
하실거죠? 그것만 알면 되요."
"둘 중에 한가지 만 말하죠. 서른 명을 찾았어요. 다른 한가지는
감각적으로 추측하세요."
"그 많은 사람중에서 겨우 서른명이예요? 생각했던 것 보다 엄청 적은
숫자네요. 나머지는 비밀이라는 말씀이구요. 경험으로 봐서 더 이상
물어봐야 시간만 낭미겠고..."
"판단이 빨라서 좋군요."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알고 보니 이선생님 경력이 굉장하시더군요?
그런데 왜 혼자 사세요?"
"사생활까지 조사하는 걸 보니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군요."
"불쾌하세요? SG연구회에 관심을 갖다보니까 자연히 이선생님이 궁금해
지더군요. 죄송해요."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소운이 언짢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운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남에게 조사를 당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진
찍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수난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최기자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 나쁜 뜻이 아니었는데..."
"그만 일어나시죠."
"잠깐만요. 개안적인 질문 하나만 더 드릴께요. 자주 찾아뵈도
괜찮을까요? 그냥 인생 상담이나 하는 정도로..."
"미안합니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소운이 간단히 거절해 버리자 최기자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단지 지난번에 성진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회원으로 끼워주지 않겠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어요. 헌데 쉽지가
않겠더라구요. 그래서 몇번 만나다 보면 점수를 얻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서 말씀드린 거예요. 제 나름대로는 수완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거든요."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고맙지만 회원을 충원할 계획이 없어요."
"이러면 어떨까요? 옵서버를 하나 더 두는 셈치면..."
"미안해요."
"절대로 안되나요?"
"미안합니다."
"하는 수 없죠. 내일 다시와서 졸라 봐야겠군요."
"내일도 별 수 없어요. 또 내일부터 당분간은 자리에 없을 겁니다."
"어디 가시나요?"
"지방 순회계획이 있어요."
"그러시군요. 여러 가지로 저는 운이 없네요."
최기자가 자리를 뜨려다 말고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되둘아섰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여줍고 갈께요. 이선생님 일정관리는 어느
분이 하세요? 스스로 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성있게 움직일려면 따로 관리자가 필요해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연구실을 빠져 나가는 최기자의 뒷모습을
지은이 나즉하게 중얼거렸다.
"예의도 모르나봐. 여자가 복장이 저게 뭐람?"
14 한으로 얼룩진 인심
'전당대회 대성황'
소운이 아침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지방을 돌아다닌지 벌써 열흘째를
맞는다. 예상보다 순회일정이 장기화되고 있는 것이다. 남아있는 충북과
강원도를 포함하면 예정보다 이 삼일은 더 걸릴 것이다.
그동안 뚜렷한 소득도 없이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를 들렸다가 어젯밤
늦게 이곳 선산군에 도착했다. 대구 경북은 항상 관심을 끌게 하는
지역인지라 무엇인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식사하이소."
"아이구, 번번히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어데예, 안 잊고 찾아 주시는 것만도 고맙다 아입니꺼. 촌이라 찬이
마땅치가 안네예. 많이 드이소."
"박형은 어디 갔습니까?"
"논에 물꼴 트러 나갔십니더. 비가 억수로 오네예. 새벽부터 쏟아지기
시작하더이만 지금은 장대 비라예."
박점동. 소작쟁이 노릇이 징그럽다고 온 가족을 데리고 냄비랑 수저랑
이불보따리 하나 올가 매고 서울을 찾았다. 대대로 농사 일만 해온 탓에
마땅한 기술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막노동 판을 전전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참에 재개발로 어렵게 마련한 전세집이 헐리게 되었다.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동네사람들과 철거민 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임대 아파트 딱지 한 장을 움켜 쥐었지만 당장 월세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었다.
마침 정부가 수도권의 인구를 분산시킨다며 농어촌 지역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세대에 일정액의 이주 정착비를 지원한다고 했다. 각박한
서울생활에 지친 박씨는 임대아파트 딱지를 처분하고 정부정책을 쫓아
다시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삼천 평 규모의 논밭을 빌려 논농사와
비닐하우스를 치며 다시 농군의 생활로 돌아왔다. 비록 적지 않은
빛더미에 골머리를 썩고 있지만 그래도 따뜻한 고향 땅이 서울 생활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 내며 박씨가 방문을 열었다.
"편히 쉬었나? 모기가 많체?"
"어서 들어오세요. 아침 일찍부터 애쓰십니다."
"농사꾼이 다 그렁기지 뭐. 야야, 밥 가온나."
박씨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예, 곧 갑니더."
잠시후 박씨 부인이 밥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물이 많이 찼던교?"
"논에는 별기 아인데 하우스에 물이 들어가뿟드라. 그거로 막다보이
이래 안 늦었나. 자네 밥은 와 안가오노?'
"지는 따로 묵을 끼구마는요."
"그럴 필요 뭐있노? 이선생 보고 수줍어 그카나? 개안타. 함께 묵고
차뿔고로 퍼뜩 가온나."
"그러시지요."
박씨 부인이 극구 사양하고 방을 나갔다.
"예편네가 이선생만 보면 저라네. 그놈의 철거반인가 깡패 새끼들인가
때무로 젖탱이 뵈준게 그리 챙피한 모양인기라."
"박형도 참..."
식사가 끝나자 과일과 음료수가 놓여졌다.
"이선생이 우리집에 오는 걸 우째 알았는가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데."
최기자였다. 성현이 소운의 일정표를 아무 생각없이 최기자에게 건네 준
것이다. 일정표에는 만일을 대비해서 묵을 곳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가는 곳마다 전화를 하고 았었다. 일정관리를 누가 하느냐고 물었을 때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여기 워치를 묻데? 아침에 이리로 온다카더마는..."
"여기를 찾아오겠다구요?"
"와, 뭐하는 여자고?"
"신문사 기잡니다."
무슨 이유로 여기를 오겠다는 것인지 소운은 난처했다. 아무래도
마주치기 전에 장소를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비가 퍼붓듯이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니 쉽게 나갈 수도 없었다. 박씨까지 비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소매를 잡고 말렸다. 하는 수 없이 방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냥 내려온 기는 아닐끼고 특별히 볼일이 있었든 갑제?"
"전국 일주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역마살이 있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여론 수집하러 다니는 기구마?"
"눈치는 여전하시네요."
"그기 다 누구한테 배운긴데. K대표가 애 묵었던 모양이더마는..."
"누가 그러던가요."
"대표가 안될뻔 했다카데? 총선 참패로 TK역할론이 끝났다는 기지. 팽
달할기라고 소문이 무성했는기라. 소문은 소문으로 끝났지만도..."
"그게 어디 쉽습니까? 이 지역을 아예 포기해 버리면 모를까 대안이
뚜렷하지 못하니 별 수 없죠."
"L고문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카더이만..."
"아무리 대중적인 인기가 높고 정부 고워직에 있었다고 해도 질서가
있는 법이거든요. 정치경헙도 없는 초선의원을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겁니다.
모르죠. 정치 흐름에 쉽게 적응을 할 테니까 익숙해지고 나면..."
"신당얘기 들었나?"
"듣긴 들었지만 지나간 얘기 아닙니까?"
"그기 아이다. 다시 얘기가 나온다 그말이라."
"다시요?"
소운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때 밖에 누군가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계십니까?"
최기자였다.
"누굴 찾아오셨능교?"
"여기가 박점동씨 댁이 맞나요?"
"제 남편인데예."
"바로 찾았군요. 혹시 서울서 오신 이소운씨라고 계신가요?"
"쪼매만 기다리시소."
소운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이렇게 궂은 날 길을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소운이 방문을 열고 최기자를 맞이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왔어요?'
"간신히 맞췄네요. 일정표가 잘못된 거예요? 아니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거예요? 원래 날짜대로 지나시질 않더라구요."
"어디서부터 추적했어요?'
"여수에서 부터요. 그동언 길바닥에 뿌린 돈만해도 수억이예요. 아휴,
다리야. 그런데 항상 이런식으로 다니세요?"
"이런 식이라니요?"
"계속 민박을 하셨잖아요. 아시는 분이 전국에 깔려 있는 모양이죠?"
사실 소운은 지방 어느 곳을 찾아가도 숙식 걱정을 안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설사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일부러라도
민박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접
확인하고 배우고 느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고 특히 정치에 관심을
집중시킨 이후부터는 좀더 가까이서 여론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 내 뒤를 쫒아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첫째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구요. 둘째는 취재를 위해예요. 이선생님이
전국을 돌아다니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궁금하거든요?"
소운은 최기자의 당돌한에 저윽이 당황하면서도 태연스럽게
외면하려했다.
"아침식사나 했어요?"
"못했어요. 또 놓침녀 어쩌나 싶어서 부랴부랴 달려 오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박씨가 부인을 불러 밥상을 차려 오도록 하고는 자리를 비켜주려고
일어났다.
"그냉 앉아 계세요. 그리고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보세요. 그 얘기가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습니까?"
"내가 눈치 없이 앉아 있는 기나 아인지 모르겠구마는..."
"상관없어요. 말씀이나 계속하세요."
"그라지 뭐. 근자에 부쩍 야그가 나온기라.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사형언도로 확실시되고 안있나? 정치적으로 선거가
있을 끼라고 기대했든 긴대 날새 뿐기라. 그라이까네 한번 해보자 이래
나오는 기지. 법은 법이고 국민들의 심판은 따로 받겠다 그기지."
"군사반란이나 내란수괴는 형량이 사형밖에 없어요. 대법원 판결이야
당연한 것이고 정치적 선처는 그후에 이루어지는 거지요. 몇자례의 감형이
이루어질게 뻔하잖아요. 사법부의 판단과 정치적 배려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형이 떨어진 다음이 문젠기라. 수순을 밟아가 나라 밖으로 쪼까낼라
한다는 기라. 그기는 못참는 다는 기지. 그라이까네 뭉쳐가 누가 깨지든
싸워 보자는 생각인기라."
최기자가 끼어 들었다.
"신당얘기예요?"
"최기자는 가만 있어요."
"아니예요. 저도 대구에 들렸다가 얼핏 들은 게 있어서 그래요. 모
의원의 사무장을 하는 선배가 있거든요."
"턱도 없는 소리를..."
"그래만 볼기 아이다. 니죽고 내죽자 카모 몬할 것도 없제. 이 사람들은
철저히 정치보복을 당하는 거로 생각하고 있다꼬. 전직대통령들이 와
구속됐는 지 아나? 제작년 말쯤부터 신당을 만들라 그카다 괘씸죄에
걸려뿐 기라."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문민정부가 개헌을 한다카는데, 자기들과 가까븐 사람들만 집중적으로
철퇴를 맞는 기라. 그거로 방어한다고 신당을 준비했제. 그기 정보가 새
나가가 자금추적을 받았는데, 거서부터 억수로 많은 비자금이 들통 난기지.
내친김에 쳐뿐기라. 집권초기에 뭐라카더노? 역사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더노 말이야. 그래놓고 느낫없이 비자금을 때리뿌고
역사를 바로잡는 다꼬 12.12 5.18로 족쇄를 채워뿐 기라. 이쪽에서는
말이지. 4천억 설이 우연이 아니라 칸다고. 계획된 나리오였다는 기지.
그냥 쳐뿌마 정치 보복으로 오해를 받을수 있으니까네 도덕적으로 깔아
뭉게뿐 다음에 결정타를 먹여뿐기라. 가만 놔뒀다가는 수구세력들이
뭉쳐가 개혁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나설기 뻔한데, 우째 보고만 있겠노?"
"어쩻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최기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어차피 드러날 것은 죄다 드러났고 더 이상 뺏길
것도 없는 판인데, 겁날게 뭐 있어요? 게다가 아직 숨기고 있는 카드도
있다는게 정설로 되어 있는 판이고 그게 사실이라면 그걸 무기로 삼을 수
도 있는 거죠."
"무기가 있어도 일회용이예요. 겨우 하나 남아 있는 건데 함부로
사용했다가 나중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하려구."
"지금이 최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아까 박형이 말씀하신대로 망명 길까지는 막아 보자는 생각이 있다면
꼭 쥐고 있어야지.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거기에 쫓아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나 같으면 신당을 만들 시기가 지금이 아니라 권력 이동이 끝난
후를 선택하겠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견제가 덜 할테니까."
"그런데 움직임이 상당히 구체화되고 있다는 말들을 하거든요?"
"일부러 흘릴 수도 있지. 여론을 떠볼 필요도 있고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시키려는 의도도 있을 수 있고."
"상당히 비관적이군요."
"현실적으로 쓸데없는 몸부림에 불과해요."
"그래 보나? 우쨋거나 말이 많은기 좋을 건 없제."
"정부 여당에 대한 여론은 여전하죠?"
"하모. 당분간 만회 하기는 틀렸다고 봐야 할기라. 대선때 가도
마찬가지고. 여당에서는 누가 될거 같노?"
"아직 이릅니다."
"뭐가 아직 일러요? 이선생님 심중에는 결정되어 있잖아요? 뭘 그렇게
쉬쉬 하세요?"
"최기자는 사람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으니 좋겠어요."
박씨가 두사람의 관계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두 분은 적군인교, 아군인교? 말이 오가는 폼을 봐서는 도저히 분간이
안서네."
그러자 최기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적를 아군으로 받아 달라고 졸라 대고 있는 데, 좀처럼 인정을
안하시려고 해요."
"여수부터 찾아 다닌 걸 보마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구마는..."
"모통 사이는 아니구요. 아주 특별한 사이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예요.
일방적이긴 하지만..."
소운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좀처럼 날이 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종일 온다 캤는데 우짜지?"
"그냥 출발해야 겠어요."
"하루 더 묵고 내일 가모 안돼나? 오랜만에 왔는데 술도 한 잔하고..."
"그러고는 싶지만 벌써 정해진 일정을 넘겨 버렸어요. 오늘은 그만
일어나고 다음에는 여유있게 올께요."
"할수 없지. 쪼매만 기다리그라."
박씨가 밖으로 나갔다가 두 손에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한참 만에
돌아왔다.
"워낙이 깡촌이라 줄거라고는 이것밖에 없네. 이것 저것 내 농사 진기다.
별거는 아니지만도 내 성의니까 네 아무 소리말고 받아 가그레이. 차 문
열어라 내 실어 주꼬마."
박씨 부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 보다가 부엌으로 내달았다.
"이선생요. 이것도 가져 가이소. 참기름이라예."
"아닙니다. 혼자사는 사람이 뭐 이런 게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두고
드십시오."
"아이다. 우리 집사람이 생각 잘했네. 옛날생각 안나나? 서울서 천막
생활할때 찬밥에다 고추장넣고 참기름 몇 방울 떨궈가 푹푹 비비노마 김치
없어도 맛이 꿀 맛이었는 기라."
"그랬었죠.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정만큼은 최고 였어요. 아주머니 고맙게
먹을께요."
"고맙기는 예. 날도 궂은데, 조심해 가이소. 하루만 더 계셨으면 좋겠구만
서운하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안녕히계세요. 기회봐서 또 들릴께요."
잠시 후 시골 길을 빠져 나와 읍내로 들어선 소운은 차를 멈추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기자를 바라 보았다.
"어디로 갈 겁니까?"
"이선생님은요?"
"충북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저도 그 쪽으로 갈께요."
"같이 다닐 수 없어요."
"그럼 저보고 여기서 내리라는 거예요?"
"버스터니널까지 태워다 드릴테니 거기서 부터는 알아서 하세요."
"이렇게 쏟아지는 빗 속에다 게다가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곳에
연약한 여자를 혼자 버려두고 가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참, 잔인하네요."
"누가 여기를 오라고 했어요? 찾아 왔으니 가는 길도 알 것 아닙니까?'
"..."
소운은 말없이 눈만 껌뻑이고 있는 최기자가 딱해 보였던지 다른 제안을
했다.
"그럼 김천까지만 태워다 드릴께요. 됐죠?"
"충북 어디로 가실 건데요?"
"그건 왜요?"
"글세 어디로 가실거냐구요?"
"청주에 들렸다가 제천으로 넘어갈 겁니다."
"그럼 제천까지만 태워다 주세요."
"거기까지는 안되요."
"제천이 제 고향이예요. 기왕에 가시는 길이니까 태워다 주세요."
"좋이요. 틀림없이 거기까지 만이야. 딴 소리 하면 안돼요?"
"빨리 가기나 하세요."
와이퍼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힘겹게 밀쳐내고 있었다. 소운의 승용차는
그렇게 빗 길 국도를 어렵게 벗어나 김천을 거쳐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차가 북쪽을 향할수록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주에 도착할 즈음엔 또 다시 굵은 빗 방울이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청주에서의 볼 일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우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많이 쏟아진 담?"
최기자가 짜증스럽게 투덜 거렸다. 소운이 말을 걸었다.
"이제 말문이 트였어요?"
선산을 출발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입을 꼭 다문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입 열고 왔나요?"
"아하, 그렇게 됐구만. 최기자는 비를 싫어해요?"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많이 오는 건 무섭다구요. 보세요. 이젠 천둥
번개까지 쳐 대잖아요.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이예요."
"죄를 많이 짓고 살아온 모양이군."
"뭐예요?"
"아니올시다. 혼잣 말을 한거예요."
"이놈의 비가 언제 그칠려고 이러나 모르게네."
"남자들한테 한 맺힌거 있어요?"
"무슨 말씀이예요."
"여자들이 시장엘 가서 물건을 살 때 보면 '이놈은 얼마요, 저놈은
얼마요' 그러잖아요. 최기자도 마찬가지네. 왜 멀쩡한 비보고 놈자를
붙여요? 년이라고 하면 기분 좋겠어요?"
"별걸 다 시비야. 언제 출발 하실 거예요?"
"빨리 가고싶으면 지금 출발합시다."
소운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유소를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주에 도착하자 가까운 식품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들고 계속 차를
몰았다. 비는 여전했다. 거의 제천에 도착할 즈음 최기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저보고 비를 싫어하느냐고 물으셨죠? 이선생님은 어때요? 비를
좋아하세요?"
"눈보다는 좋아합니다."
"왜요?"
"눈은 허위와 가식의 상징이예요. 세상을 덮고 있을 때는 순백 색으로
고결한 척 자랑하지만 녹은 다음에는 전혀 아니예요. 세상을 얼마나 추한
꼴로 드러내는 지 모른다구요. 그렇지 않아도 지저분한 것 투성인데,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거든요. 하지만 비는 그렇지 않아요. 싹 씻어가거든요.
오늘처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더더욱 시원스럽게 씻어가 버린다구요.
비가 개인 후에 하늘은 보세요. 얼마나 푸르른가. 비가 그치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맑고 신선해 보이는지 몰라요."
최기자가 중얼거렸다.
"낭만적인 구석이 없지는 않네."
"그렇게 중얼거리지 말고 큰 소리로 말해 버릇해요. 윗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예요."
"내가 최기자를 무시했어요?"
"아니면 뭐예요? 선산에서 박씨 아저씨가 싸준 보따리만큼도 안
여기잖아요. 큰 욕심도 아니고 팀에 끼워달라는 것 뿐인데 마치 거머리나
붙어다니는 것처럼 외면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낼 궁리만 하시잖아요."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입장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끼리의 액속이 있어요. 또 들어온다고 해도 십 년, 이십 년을
인연으로 모인 사람들하고 같을 수가 없다구요."
"하루면 백년의 인연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건 이유가 되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마음들이 닫혀 있는 것 같아요. 너무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게 느껴져요. 몇 차례 연구소를 찾아 갔는데, 갈 때마다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걸 느꼈다구요."
"내가 최기자를 경계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런 느낌이 안들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 하는 지 아세요?
대화를 통해 솔직해 졌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구요. 충분히 어울릴 수
있다는 증거 이기도 하구요."
"왜 우리 팀에 관심이 많아요? 굳이 들어오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김성진씨가 이상을 찾는 모임이라고 했어요. 허황된 이상이 아니하
눈에 보이는 이상을 찾아 다닌다구요.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사이에 차는 제천을 접어들고 있었다. 소운이 말없이 차를
멈추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히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예요. 지금 하는 일도 힘든 일이고
잎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최기자가 정색을 하고 애원 하듯이 말했다.
"알고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 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중도에서 포기할 사람이 없어요."
"저도 포기하지 않을께요. 끝까지 갈께요."
소운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늘게 약해져 버린 빗줄기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자주 연구소에 들려요. 그러면서 기회를 봅시다."
최기자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좋아했다.
"좋아하기는 일러요. 아직 승낙한건 아니니까. 나 혼자만의 의사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전체적인 합의가 있어야 가능해요. 그러니까 분위기에
적응하는 연습부터 하면서 가능성과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봐요."
최기자의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 들었다. 여수에서부터 줄곧 소운의 뒤를
쫓아 다닌 보람이 있었다.
"집이 어디예요?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집앞까지 바래다 줄께요."
최기자가 방향을 잡아 주면서 말했다.
"이제 말씀 낮추세요. 팀에 들어가며 제일 막내가 될텐데..."
"아참, 나이가 얼마나 됐어요? 여자 나이는 물어 보지 않는 거라고
하던데..."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불편하다구요. 스물 여덟이예요."
"생각보다 많네. 한가지 주의할 게 있어. 연구소에 오더라도 당분간은
우리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그리고 회의 시간에는 참여
할 수 없어. 이해하겠지?"
"좀 서운하긴 하지만 하는 수 없죠. 그렇게 할께요."
제천 시내로 들어와 몇 블록을 지나니 아담한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소운의 차가 그 앞에 멈추어 섰다.
"제천에서 주무시기로 되어 있죠?"
"그래."
"언제 출발하실 거예요?"
"아침 일찍."
"강원도에는 숙박 표시가 안되어있던데요?"
"거기서는 민박을 안할테니까. 아직 숙소도 정하지 못했어."
"아침에 저랑 같이 가면 안되나요?"
"안돼. 중요한 약속이 되어있거든. 서울로 바로 올라가. 나를 만났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마. 점수 받는데 지장이 클테니까."
"알겠습니다."
최기자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아파트 앞에서 손을
흔들고 서있는 최기자를 뒤로 하고 소운은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아직은 회색 빛이 서려있는 구름 사이로 가느다란
햇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운은 서둘러 민박짐을 나섰다. 가는 곳 마다 한
웅큼씩 들려주는 보따리가 자동차 뒷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운이 공중전화를 찾아 지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출금 안했구나. 다행이다. 지금 강릉으로 가는 길이야."
"일정이 너무 지연되지 않았어요?'
"성현이 보고 서울 일정을 조적하라고 지시해 놓았어. 중요한 건
순연시키고 그렇지 않은 건 취소하도록 했으니까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어디로 가면 되요?"
"속초로 와라. 전에 묵었던 집 알지? 거기 가서 기다리고 있어. 강릉에
왔다가 삼척까지 들리려면 좀 늦을 꺼야."
"알았어요."
소운은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영동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일정을 마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 행선지를 향하면서 소운은 생각했다. 무엇이 지역을 가르고
무엇이 사람들을 이간 시켰을까? 호남의 정서가 영남의 정서와 상반되고
영남의 정서는 또 다시 양분되어 극도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거기에
충청권은 이에 질세라 독자적인 정서를 착실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강원도는 또 어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거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는 비관적인 얘기 뿐이었다. 남북으로 허리가
잘리운 것도 원통한 일이건만 그나마 남녘 땅 곳곳이 갈갈이 찢겨진 채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만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인물이 좋아서가 아니다. 정책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왔으니
손좀 흔들어 주시오'하면, 때려 죽일 놈, 되 먹지 않은 놈, 미운 놈이라고
손가락 질을 해댔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오냐, 너 왔구나.
그래라. 또 한번 뭉쳐보자'고 쌍수 들어 환영한다. '거지같은 놈이나 빌어
먹을 자식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던 제천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오ㅅㅂ
보 백 보 보고 도토리 키 재긴데, 어느 누가 우리네 생각해서 태평선대
만들거라고 정의 찾고 인물 찾겠는가?'라고 되묻던 아낙네의 푸념소리도
떠올랐다.
호남은 한은 뭐고 TK의 한은 뭔지. 온통 한 맺힌 백성들만 사는 줄
알지만 그래도 몇 사람의 한 때문에 우리까지 멍에를 지고 산다며 또 다른
한을 토로하는 백성들도 적지 않다. 누가 만든 한이고 누가 먼저 한을
심어 주었는지 따져보는 것도 이제는 신물이 나도록 역겨워 졌다며 검게
주름진 얼굴을 찡그리던 농군의 한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속을 드나들며
'원 한번 풀어 봅시다. 한 한번 풀어 봅시다.'하고 잊혀질만 하면
나타나서는 한을 부추기는 사람들은 누군지. '그래서는 안된다. 이래서도
안된다.'하다 가도 '저쪽에서 그러니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며 또 다시
들처내고 갈라놓고 그러기를 수 십년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것도 지쳤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지내온 것도 오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을 폈다가는 이내
오무려 버리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하면서 외면해 버린 것도 오래다.
누가 무엇으로 어떨게 바로 잡아야 할지 도무지 묘안을 찾을 길이 없다.
소운은 답답한 마음에서 차창을 내렸다. 세차게 들어오는 산 바람을
맞으니 조금은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았다. 대관령 고개를 치달아 오르며
저쪽 태백준령 너머에는 어떤 모습들이 있을까 생각했다. 깊고 푸른
바다를 끼고 있으니 마음도 동해 바다 만큼이나 깊고 푸르렀으면 하는
믿지 못할 기대감만 생겨났다.
그렇게 강릉엘 들러 심척 길을 내달아 어둑한 저녁을 맞았다. 그리고는
갔던 길을 되 밟아 속초로 향했다. 밀려오는 심신의 피로를 바닷 바람에
맡기면서속초에 도착하니 한 밤중이 다 되었다.
"아주머니 오랜만입니다."
개 짖는 소리에 방 문을 열어 보던 주인 아주머니가 맨 발로 뛰어
나오며 소운을 반겼다.
"아이구, 어서 오시구려. 많이 늦었수. 색시는 진작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화났겠수. 전화라도 할 일이지."
"시간에 쫓기다 보니 그럴만한 경황이 없었어요."
뒷 채로 돌아간 소운이 정자같이 단초롬하게 지어놓은 별채 앞에 멈추어
섰다.
"지은아."
그리고 바운을 열어 보니 지은이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다. 소운이 가볍게 지은의 어깨를 흔들자
깜짝 놀래 눈을 떴다.
"오래 기다렸니?"
"깜박 잠들어 버렸네. 언제 왔어요?"
"지금 막 도착했어. 너무 늦었지?"
지은이 소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더니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피곤해 보인다. 빨리 씻고 쉬어요. 아참, 식사는?"
"삼척에서 먹고 왔어. 너는?"
"아줌마가 회덮밥을 맛있게 해 주셨어요."
그때 주인댁이 커다란 쟁반에 생선회를 잔뜩 올려 들고 왔다.
"괜히 미리 준비해 놨어. 이렇게 늦게 올 줄 어디 알았어야지. 싱싱한
맛은 덜할 거유."
"고맙습니다. 잘 먹을께요."
주인댁이 물러가자 소운이 지친 몸을 방바닥에 길게 내 던졌다.
"그냥 누워 버리면 어떻해요?"
"잠시만,... 너무 힘들다."
지은이 소운에게 다가가 팔과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소득은 있었어요?"
"고생한 만큼은 안돼. 서울엔 별 일 없지?"
"응, 근데 성진씨 때문에 우스워 죽겠어."
"왜?"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커다랗게 안대를 하고 다니거든?"
"또 맞았데?"
"요번엔 맞은 게 아니고 피하다가 제 풀에 다친거래요."
"이번엔 뭘 잘못했다니?"
"마누라 생일을 깜박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술이 떡이 되가지고 새벽에
들어갔데요. 마누라가 베개를 던지니까 그걸 피하려다가 침대 모서리에
받쳐 버린거지. 말도 못해요. 아예 한 쪽 눈이 감길 정도로 부었더라구."
"그 녀석 참, 허구헌 날 터지고 사니? 매맞는 남편 말만들었지 성진이
같은 녀석도 없을꺼야."
"누가 아니래요? 하여튼 며칠동안 연구소가 웃음바다야."
"그만 주물러라. 팔 아프겠다."
"괜찮아요. 또 한가지 뉴스가 있어요. 형 지방 내려가기 전 날 아침에
여기자가 왔었지? 최 누구라고 하던가? 동찬씨하고 같은 신문사에
있다던..."
"그런데?"
"성진씨가 그 여자랑 외박을 했데요. 여자가 얼마나 당돌한지 자기가
직접 성진씨 집에 전화를 해 가지고 일 때문에 함께 밤을 지낼테니 양해
해 달라고 했데요. 그리구선 아침에 집엘 들어 갔다나 봐. 그때도 몇일
동안 귀 밑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었잖아요? 그때도 마누라한테 얻어
맞았던거야."
둘이 배꼽이 빠지라고 웃어 댔다.
"참, 대단한 여자야. 안 그래요?"
"솔직해서 좋구나. 그 때 우리가 순천에 있을 때 아니었니?"
"맞아요. 무슨 자료 때문에 순천으로 전화를 했었지. 아마?"
"별 일이야 있었을라구..."
"별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어디서 지냈는지 모르지만
팔팔한 남녀가 한 밤을 같이 지냈으면 마누라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의심 보다는 기분 나쁘잖아? 성진씨 부인이 어디
보통내기예요?"
소운이 최기자를 생각하고는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릴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좋지 않게 찍혀 있으니 만회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소운이
계속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지은을 만류하고 몸을 일으켰다.
"됐다. 그만해라. 씻고 올테니 회나 먹고 있어."
"내가 등밀어 줄게."
"괜찮아. 피곤할 텐데 그냥 앉아 있어."
"싫어요. 같이 들어갈래."
지은의 고집을 못이기는 척 받아 들이고 욕실로 들어 갔다. 머리
끝으로부터 찬기운이 온 몸으로 퍼졌다. 지은의 부드러운 손길이 하얀
비누 거품을 일으키며 소운의 전신을 탐험이나 하는 듯이 조심스럽게 오고
갔아. 쌓였던 피로가 일 순간에 사라지고 뜨거운 욕정이 핏줄을
곤두세웠다. 이내 벌거벗은 두 개의 몸둥이가 하나가 되었다.
"들어가도 되우?"
"아주머니 잠깐 만요."
욕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턱이 없는 주인댁이 눈치 없이
방문을 열었다. 기겁을 한 소운이 지은에게서 몸을 떼고는 서둘러 물기를
닦고 허탈한 표정으로 주저 앉아 있는 지은을 남겨둔 채 욕실을 빠져
나왔다.
"아이쿠!"
주인댁이 소운을 보더니 깜짝 놀라 얼굴을 휙하니 돌렸다. 소운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주인댁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속옷을
챙겨 입고는 겸연쩍게 말했다.
"뭐, 처음보는 물건도 아닌데요. 됐어요. 이제 눈 뜨세요."
"미안허우. 이러게 눈치가 없어 가지고... 그러게 늙으면 갈 데가 딱 한
군데 뿐이라니까."
"무슨 일이세요?"
"바깥 양반이 좀 보잡디다."
"약주 하시려구요? 이거 오늘은 곤란한데... 술이 한 잔이라도 들어가도
쓰러질 것 같거든요? 보통 피곤한게 아니예요. 내일 하시면 어떠신지 여쭤
보시겠어요?"
"그러게 안된다고 했건만 욱박 지르는 바람에... 그렇게 전하리다. 재차
미안허우. 색시는 어디 갔수?"
"예? 아예... 요 앞에 잠깐 나간 모양입니다.."
욕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지은을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회는 손도 안댔네?"
주인댁이 방 안을 휭하니 둘러 보았다. 소운이 욕실 문 앞을 힐끗
보더니 지은이 벗어놓은 속옷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주인댁이 돌아가자
소운이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은을 껴안고 욕실을 나왔다.
"여휴, 지겨워. 저 아줌마 상습적으로그러는 거 아냐? 지난 번에도
그랬잖아. 그때는 아저씨랑 같이 와서 우리 둘다 알몸을 보여 줬잖아.
못살어 정말. 다시는 이집에 안올래."
지은이 투덜거렸다.
"일부러야 그러시겠니? 타이밍이 묘하게 떨어지는 거지."
"무슨 타이미이 올 때 마다 맞아 떨어져요?"
"그만해라. 들리겠다. 옷입고 바닷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
소운은 지은을 달래서 바닷가로 데려갔다. 바람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데
파도는 어둠을 타고 세차게 갯바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바위를 때리며
부서지는 물보라가 해안 초소에서 비취지는 서치라이트의 불 빛을 받아
유난히 하얀 빛을 더했다.
"참 좋다. 그죠?"
"그래."
"저렇게 부서지는 파도는 얼마나 아플까."
"왜 얻어 맞는 바위는 걱정 안해주니?"
"내 딴에는 시를 읽는 기분으로 감상하고 있는데, 그렇게 재를 뿌려야
겠어요?"
"생각을 해봐라. 저기 바닥에 깔린 모래가 바위 가루라구. 저렇게 가루가
되도록 얻어 맞았으니 얼마나 불쌍하니?"
"그럼 때리는 파도는 안 아프단 말이예요?"
"모래보다는 낫지. 파도가 부서지는 것 같지만 부서지자 마자 하나가
되어 버린다구. 그리구선 또 뭉쳐진 덩어리로 바위를 향해 돌진하잖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서져도 결국 하나가 되어 버리잖아? 반면에 바위는
죽도록 얻어 맞고 모래가 되어 흩어져 가지고는 파도에 쓸려가기도 하고
바람에 날려 가기도 하니 얼마나 불쌍해?"
"하긴 그렇네."
"우리는 파도가 되어야해. 절대로 저 따위 무력한 바위가 되어서도
안되고 모래는 더더욱 되어서는 안된다."
"형은 어떻게 모든 사물을 우리와 비교해서 생각해요? 정서가 풍부한
사람 같다가도 마지마게 가서는 메마른 사람처럼 느껴진다구요."
"정서면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어이구, 자화자찬까지?"
소운이 무슨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심각한 모습으로 지은을 바라
보았다.
"지은아, 우리 대선이 끝난 후에 함께 하자."
지은이 깜짝 놀래 휘 둥그런 눈으로 소운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이예요?"
"그래, 그렇게 하자."
"믿기지가 않네. 갑자기 생각한 거예요?"
"아니? 여기로 오면서부터 줄곳 나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서 결정한거야."
지은이 소운의 품에 살포시 안기며 말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데..."
"그랬지?"
"그러믄요. 형 너무너무 사람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그만 들어가자."
두 사람은 어깨를 감싸안고 어둠 속의 파도를 등졌다. 지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실, 눈이 빠지게 기다린 건 아닌데... 형 오기전에 잠들어
버렸잖아요?"
"기다리다 지쳐서 잠든 게 아니었니? 내가 착각을 했구나. 그럼 대선
후에 약속도 취소해 버릴까?"
지은이 소운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달려 들었다.
"그건 안돼! 절대로 안된다구!"
"쉿! 잠들 깨실라."
주인댁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문 단속 잘하고 자슈."
지은이 주인댁 방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팔 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지은의 풋풋한 호흡을 느끼며
소운이 나즉이 속삭였다.
"예쁜 꿈 꿔라."
"그냥 잘 거예요"
"그냥 자지 않으면 춤이라도 추고 잘까?"
지은이 소운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소운과 지은은 충혈된 눈을 비비며 바닷가로 나갔다.
수평선 저 너머로 붉은 기운이 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삽 시간에
바다를 벌겋게 물들이는가 싶더니 둥근 불덩이가 수평선 위로 휘영청 솟아
올랐다.
"혛, 뭘 기원했어요?'
"미련한 바위보다는 파도가 되게 해 달라고. 너는?"
"나는 형하고 반대야. 미천한 모래고 자갈이지만 그것들을 한 데 모아
시멘트를 섞어서 거대하고 단단한 빌딩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
"그럼 나보다 한 수 위가 되는 거니?"
"모르겠어. 머리좋은 형이 판단해봐."
15 흔들리는 이상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뮈하자는 짓거리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서임기내 내각제는 안한다고 못을 박았는데, 왜 책임있는 당내 인사가
내각제 얘기를 흘리고 다니느냐 말이야? 통치권에 도전하겠다는 거야
뭐야? 임기가 얼마 안남았다고 벌써부터 치받겠다는 거지? 좋다. 이거야.
한번 해 보자구."
김동수 의원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가지고 전화통을 패대기 쳤다.
"이것들이 안하무인 식으로 나오는구만. 이봐, 김기자. 진행 속도를
가속화 시켜야 겠어."
성진이 대답했다.
"이제 기자가 아닙니다. 그냥 김군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사표를 낸다더니 정말로 낸건가?"
"예, 어제부로 수리가 끝났습니다."
"그래?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구만."
"보고서 여기 있습니다."
보고서의 겉표지에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의 모임'이라는 글귀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미래청이라... 아무리 봐도 이름 부터가 근사하단 말이야. 어디 좀 보세.
창립대회가 5월 중순이면 아무래도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와
엇비슷해질 것 같은데..."
"그런데 당겨져야 하겠어. 내각제 논의도 잠 재워야 하고 가급적 후보가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을 늘려 줄 필요가 있고."
"그럼 4월 말경으로 당겨 보도록 하죠."
"괜찮겠나?"
"좀 무리가 있기는 합니다만 어렵지는 안흥ㄹ 겁니다."
"기왕에 앞 당길려면 최대한으로 당겨보지."
"알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계획에 관해 어디 설명이나 들어볼까?"
"골격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게."
"우선 미래포럼 상황부터 말씀드리죠. 7개 반으로나누어서 이번 주 안에
현장으로 파견합니다. 1반은 서울, 인천, 경기지역을 묶어서 SG가 특별
관리를 합니다. 제2반은 대전과 충청남북도, 제3반은 광주와 전라남북도,
제4반은 부산과 경남, 제5반은 대구와 경북, 제6반은 강원지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는 반외 지역으로 분리시켜습니다. 제1반과
제주지역을 제외하고 각반에 30명의 미래포럼 회원들을 연고에 맞춰
적절히 배정을 했습니다."
"제1반이 제일 믿음직스럽구만. 그럼 제주는 어떻게 할 건가?"
"소운이 형 친구분을 활용 할 생각입니다. 대단히 유능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소운이 형이 지금 제주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구만."
"이미 각 지역마다 SG가 비밀리에 접촉해온 인재들아 깔려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주요 포스트로 해서 작업을 진행 할 겁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대로 당에서 준비하는 것과는 별도로 저희들 나름대로 지역을 돌면서
필요한 공약들을 수집할 겁니다. 한 달 동안 작업이 진행되니까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한 달 동안 오천명을 만들 수 있을까?"
"저희들이 이미 접촉해온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오천
명은 쉽습니다. 그 다음이 어렵겠죠. 십만 청녕들이란게 간단하 숫자는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는?"
"말씀하신대로 창립 시기를 당겨서 늦어도 4월 하순 경에는 미래 포럼을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의 모임'으로 개칭해서 창립을 선언할 겁니다.
창립대회와는 별도로 각 시도별로 지부 결성대회를 갖고 이삼일후에
서울로 집결해서 중앙 창립대회를 갖도록 합니다. 그 자리에 L고문을 초빙
강사로 모실 계획입니다."
"오천 명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의 함성이라.... 보기는 좋겠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을텐데..."
"그건 걱정하시기 않아도 됩니다. 일부만 지원해 주십시오. 행사를
이벤트로 하면 각 기업체들로부터 협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L고문을 아예 창립총회 때 고문으로 추대하면 어떨까?"
"그건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미래청의 행동에 제약이 초래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찌감치 특정 정치인의 사조직으로 비취지면 여기
저기서 눈총을 받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추가 회원 확보에도 상당한
지장을 받습니다. 그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십만 회원이
안되더라도 확보된 회원을 한 자리에 모아 8월 경에 대규모 하계 수련회를
갖습니다. 이 자리에서 고문으로 추대하고 깁의원님은 명예회장으로 추대
할 생각입니다. 이때부터는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 있습니다."
"그게 좋겠군. 이회장은 언제 올라 오나?"
"아직 회장이 아닙니다. 소운이 형이 특히 당부하는 말입니다. 출범도
하기전에 회장으로 불리우면 주위에서 안좋은 평판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4월 창립 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될 때까지는 이소운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기를 원할 겁니다."
"이거 단단히 교육을 받는구만."
"더 이상 궁금하신게 있습니까?"
"됐네. 보고서만 봐도 되겠어. 지출 계획서는 어떻게 준비할 건가?"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소운이 형과 직접 상의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요번 주 내로 출발한다고 했지?"
"예."
"그럼 소운이 성울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라고 전하게. 아, 그리고
한가지만 물어보세. 지금 자네들 회원이 몇 명이나 되나?"
"모르셨던가요?"
"알고는 있네만 혹시 변화가 있나 싶어서."
"저희들끼리는 수도권을 맡는다는 게 불안하신 모양이군요?"
"예끼, 이사람아. 그런게 아니야. 내가 한 사람을 추천해도 되겠는지를
상의하려는 것이야."
"몇 명으로 알고 계십니까?"
"여덟명이 아니었던가?"
"열한명으로 늘었급니다. 더 이상 충원 계획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그중에 한 명은 벌써 육개월 째 테스트 중이구요."
"테스트도 하나?"
"그러믄요. 우리는 단순한 회원이 아니라 형제 자매나 한가지거든요.
그런데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미안 하이. 못 들은 걸로 하게."
성진이 김의원이 아지트로 사용하는 호텔을 나와 연구소로 발 걸음을
옯겼다.
연구소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주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독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무슨일 있었냐? 왜들 이래?"
지은이 먼저 운을 뗐다.
"주원씨 사무실이 박살 났데."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박살이 나?"
성진이 주원을 붙잡고 다그쳤다.
"간밤에 손님이 다녀간 모양이야. 아예 쑥밭을 만들어 놓았다. 며칠 전에
어떤 놈이 전화로 협박을 했었다. 미래포럼을 폐쇄하지 않으면 좋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며칠만에 그렇게 됐다."
그전에 SG가 그랬던 것 처럼 미래포럼 사무실을 주원의 사무실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이거 신고도 못하겠고 참 더러워서..."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해?'
"야 임마, 어떤 놈이겠냐? 아무래도 서른명 중에 한놈이 배신을 한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왜 협박을 당하고 쑥밭이 되냐? 그건 그렇고
미래포럼이 SG에대해서 알고 있냐?"
"전혀 입도 벙긋 안했다."
"소운이 형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야. 회장으로 선출 될 때 까지는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하도 엉망으로 만들어 놔서 뭐가 없어졌는 지 알수가 있어야지."
"자료같은 것도 그 쪽 사무실에는 한가지도 없어. 몽땅 여기서
관리한다구. 없어진 게 있다면 서른명에 대한 명단 뿐일 거야. 그것도 네
사무실에는 이름만 있을 뿐이야."
"회원들이 알고 있을 게 뭐가 있을까?'
"L고문하고 김의원이 관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향후 일정이나
계획 같은건 그때 그때 얘기를 주었으니까 모를테고..."
"야, 너무했다. 그러면서도 모이라면 모이든?"
"사정상 어쩔 수 없다고 당분간만 이해 하도록 묵계가 되어 있었지.
비밀 유지가 필요 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근데, 나는 회원에 가입도 안했는데 왜 나한테
협박을 하냐? 이해가 안가잖아?"
"공간을 제공한데다가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고 있는 나하고의 친분
관계도 있고 하니까 깊숙히 관련된 것으로 보았겠지."
"그럼 소운이 형은 왜 몰라? 소운이 형이 그 시람들을 설득하고 모은
장봉인이잖아?"
"그 이후에 한번도 얼굴을 내놓지 않았어. 내가 회원들이 궁금해 하길래
아예 뒷전으로 빠져 버렸다고 말해준 적도 있고. 아마 김의원하고 가까운
관계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잠시 도와주고 만 것 으로 알거야."
"그나 저나 배신자가 있는 건 확실 한데, 이놈을 어떻게 색출해 낸다?
지역으로 내려가기 전에 잡아내야 하는데 말이야."
주원이 걱정을 안해도 성진이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관리가 너무
소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은이 나섰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배신자가 있다면 보스파와 관계된 인물일 것
아니야? 그러니까 보수파와 연고가 있는 곳은 파견을 일단 지연시키고 그
외의 지역만 우선 시작하자구."
"그것 만으로 불안래. 다른 지역일 수도 있어."
성진이 반대했다.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작업을 중단시킬 수는 없잖아?"
지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정이를 이용하지."
"수정이를? 어떻게?"
"우선 배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지역부터 순서를 정해. 제일 타켓이
제5반이지? 여섯 명 모두에게 특정 정보를 주는 거야. 그리고 나서
최수정이라는 여기자가 찾아 갈지도 모르니까 혹시 만나더라도 절대로
얘기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거야. 수정이를 보수파의 끄나풀로 위장시키는
거지."
"배신자가 있다면 털어놓을 거란 말이지? 좋아. 당장 시작하자.
수정이부터 수배해라."
지은이 최기자의 호출번호를 급하게 눌렀다. 바로 전화가 왔다.
"수정이니? 지굼 어디있어?"
"연구소로 가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빨리 와. 중요한 일이 생겼어."
"알았어. 언니. 후딱 달려 갈게."
최기자가 헐레 벌떡 연구소로 달려 들어왔다.
"그렇게 뛰어 다니지 않아도 돼는데..."
"내가 할 일이 생겼어? 별일이야."
지은이 자초지종을 설병하자 최기자가 신명이 나서 여섯명의 명단을
챙겨 들었다.
"어떤 자식인지 걸리기만 해봐라. 요절을 내 줄테니."
성진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아주 물을 만났구만."
"그러믄요? 이게 얼마만에 주어진 일거린데..."
"이 친구들 만날 때는 옛날처럼 하고 나가."
"성진씨는 내가 예쁘게 하고 다니는게 기분 나빠요? 언젠가 처럼
머슴같이 하고 다녀요?"
최기자는 SG에 출입하면서부터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여성스럽게
바뀌어져 있었따. 어쩌다 치마를 입거나 얼굴 화장을 하고 나타나면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언제 시작하죠?"
"내일 당장. 상황이 급해."
"예,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범인을 잡아도 사타구니는 걷어 차지마. 왜 꼭 걷어차도 그것만 노려서
차는지 모르겠어."
"개인적인 취미예요. 간섭하지 말라구요. 그래도 부러질 정도는 아닌데..."
"손으로 건드리는 것도 하지마."
"아하, 그건 끊었어요. 우리 식구들 외에는 손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손을 사용하는 애정 표현이고든요?"
주원이 응큼스럽게 나섰다.
"그 애정 표현 나한테도 해 보면 안될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기자가 발길질을 해 버렸다. 그러자 주원이
아랫 도리를 붙잡고 바닥에 엎어져 죽는다고 나뒹굴었다. 지켜보던 지은이
냉소를 보냈다.
"고소하다. 얘, 수정아 한방 더 갈겨버려."
"언니도 참, 그랬다가 사모님께 무슨 원망을 들으라구."
"한참 만에 몸을 추스리고 난 주원이 최기자를 슬금슬금 피해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옘병할... 성하게 붙어있나 모르겠네. 야, 성진아. 나 화장실 좀
갔다오마."
얼마나 웃어 댔는지 모두들의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그런고
있는데 홍균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나도 같이 웃자."
"이 시간에 왠 일이냐?"
"성진이 너는 사표 냈다면서?"
"그래. 일 끝나면 다시 찾아가도 된다. 휴직을 하라는 걸 미안해서
안되겠더라구. 동료들 보기에도 미안하고. 그런데 회사는 어떻하고 나왔니?
지금 한창 바쁠 시간일 텐데..."
"이 쪽 지점에 볼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렸어. 잘되고
있냐?"
"아직은 소소한 것 말고는 어려울 게 없다."
"증권가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여당의원들 몇 명이 탈당한다는
거야. 이름까지 거면되고 제법 구체적이야."
"몇명이나?"
"서너 명 된다나봐."
"신경 쓸 거 없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주사위는 던져졌어."
"대표를 경질한다는 말은 뭐냐?"
"얘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후보 경선을 두고 모양새도 안좋고
시기상도 맞지 않아서 흐지부지 되 버렸어."
언제 들어왔는 지 주원이 끼어들었다.
"요즘은 증권가 소문도 빠르지가 못한 것 같더라."
최기자가 주원을 흘끗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벼 말했다.
"멀쩡하죠? 대체로 그 정도 충격밖에는 없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홍균이 너는 알 것 없다. 내 증권이나 팔아다오."
"그걸 갑자기 왜 팔려고?"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하려고 그런다."
"지금이 어때서 그래? 그 정도 시설이면 최고급이라던데..."
성진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홍균이 크게 걱정을 하고 나섰다.
"야, 하필이면 이럴 때 사고가 생기냐?"
"왜 그래? 임마. 짜식이 사고가 나길 기다렸던 것 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게 아니고 신문도 안보냐? 증궈주가 폭락 장세라구. 돈의 죄다
빠져나가고 있으니 당연하지. 어차피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거면 아예
문을 닫아 놓으면 안되겠니?"
"선거가 끝나야 회복 될 게 아냐? 그때까지 기다리라구? 그동안 나는
뭘로 먹고 사냐?"
"아버님 신세 좀 져라."
"웃기는 소리도 하지 마라. 지금까지 갖다 쓴게 어딘데. 벼룩도 낯짝이
있지."
"그렇다고 헐값에 처분할거야?"
"알았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잘 생각했다. 도대체 대통령 선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 가길래
주식 값이 영향을 받을 정도야?"
"전직 대통령이란 사람이 그러지 않더냐? 천 몇 백 억인가를
지원했다고. 어디 그 뿐이겠냐? 몇 개의 사조직까지 관리하려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날 거다. 근본적으로 선거 풍토가 잘못 되어있어. 대규모
군중을 모으는 선거유세를 하다보니 돈이 더 들수밖에 없지. 만 명이
모이면 절반은 동원되는 사람들이야. 동원하면 맨입으로 하니? 최소한
차비와 밥값은 주고 동원한다구. 그런 식으로 선거기간 내내 사람을
동원한다면 그 비용 만도 수백억이 후딱 날아간다구. 지난 번 대선 때
후보들이 이백 억을 썼네 삼백 억을 썼네 하고 신고를 했다고 하더라만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욕할 소리야."
"남들 욕할 것이 뭐있냐? 당장 우리도 한 몫을 하고 있는 판인데..."
"경우가 다르지."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경우는 무슨 얼어죽을 경우야. 조금 덜했으면
덜했지 별 차이는 없어. 백원을 훔치나 백만원을 훔치나 훔치기는 다
똑같아. 어쨋든지 건전하게만 하자구. 건전하다는 표현도 우습기는 마찬
가지 지만..."
서로들 할 말을 잊어버렸다. 주원의 말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은 날 오후였다. 주례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차에 최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성진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떻게 됐어?"
"멋지게 잡아냈어요."
"역시 보수파 지역이었구나. 어떤 놈이야?"
"들어가서 말씀드릴께요."
"지금 바로 들어올수 있니?"
"그러께요. 한 3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오케이. 수고했어."
쉽게 잡아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일정에 큰 차질을 빚을 뻔
했던 것이다.
"수정이가 한 건 올렸구나. 그렇게 심사숙고 해서 골라냈는데, 어떻게
그런 친구가 끼어들게 되었는지..."
소운이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수정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겠어. 그 동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서도 한차례 불만도 표시하지 않고 잘 버텨주었다. 이쯤에서
결론을 내리자. 선배님 생각은 어때요?"
성호가 대답했다.
"나는 별로 이의가 없어. 좀 거친게 흠이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건실하고 착해. 솔직하게 자기 소신을 피력할 줄도 알고."
"다른 사람들은 어때?"
주원이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발길질만 안하면 좋겠는데 언제 또 당할지 알수 있어야지."
"무슨 소리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은이 터져 나올 듯한 웃음을 억지로 참아 내며 말했다.
"지금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할 때고 미혜 공백도 메꿔야 하니까 받아
들였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너무 열심히 해 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별 다른 의견이 없으면 모두 눈을 감아. 감았으면
반대하는 사람만 손들어."
아무도 없었다. 새 식구가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됐어 눈떠. 지금부터 우리 식구가 되었어. 그동안 우리가 지내온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 주고 만에 하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 하지 말고 붙잡도록 해. 그게 혈육보다 강한 우리들의 재산이니까."
모두가 박수를 치고 최기자를 기다렸다. 얼마 후 예외 없이 숨이 턱에
찬 최기자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소운이 낮은 목소리로 성진을 향해
속삭였다.
"성진이가 나가서 보고 받아라."
"왜요? 그냥 들어오라고 하면 되지."
"시키는 대로 해. 지은이 나가서 양초를 사와. 샴페인 한 병도 사오고.
수정이 모르게 해라."
"알았어요."
성진과 지은이 연구실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리고 모두가 촛불을
하나씩 켜들고 실내등을 껐다.
"수정이 밖에서 뭐하니?"
소운이 큰소리로 최기자를 불렀다.
"차 준비하고 있어요."
"그냥 거기 놔 두고 들어와라."
최기자가 문을 열고는 어리둥절하게 서있었다. 소운이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오늘부터 회의에 참석해도 좋다. 축하한다."
"이선생님..."
"그래, 오늘부터 정식으로 우리 식구가 되었다."
우레 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들으며 수정이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소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감격스럽게 울어댔다. 반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온 보람이었다.
"그만해라. 회의를 시작해야지. 자 여기 초를 들고 불을 붙여라. 그리고
너의 각오를 말하는 거야."
수정이 복받치는 울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각오를 말했다.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는 짓은 안할께요. 그리고 열심히 할께요."
샴페인이 터지고 다시 한번 축하의 박수가 사무실을 떠나갈 듯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자리를 정돈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자, 오늘 회의는 신고식겸 수정이부터 시작하자. 회의는 항상 자유 토론
형태로 이루어 지니까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오늘 일에 대해서
들어보자."
수정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SG회원으로서의 첫
발언을 낭낭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예상대로 제5반 신 모씨예요. 이 사람은 보수파 대부와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동창이고 같은 고향 사람이기도 해요. 미래포럼에 참여한
이후에 보수파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망설였데요.
그러다가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게 생활고 때문이었어요. 결국 돈에 팔려간
꼴이 되어 버리 거죠. 그동안 정보를 빼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성공을 못 했다고 하도군요. 회원을 빼내라는
지시도 받았대요. 하지만 아무에게나 함부로 접근 할 수가 없으니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어요.이것도 저것도 안되니까 주원씨에 대해서
조사를 부탁하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느낀 대로 미래포럼을 후원하고 있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를 했다는 거예요. 성진씨와
주원씨가 실권자인 것처럼 보고를 한 모양이예요."
"그런데 왜 주원이 한테만 해꼬지를 했대?"
"성진씨는 기자라는 신분 때문에 피해를 면한 거죠."
"일을 저지는 놈이 어떤 놈이래?"
"서울 출신 S의원이요. 이 사람이 수구에 가까운 보수파 거든요?
TK라인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구요."
주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신사 녀석이 그런 것까지 얘기를 하더란 말이지?"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아하, 이 자가 배신자로구나'하고 생각하니 한방
갈겨 주고 싶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나쁜 사람같은 느낌이 아니었어요.
말투나 행동하는 것이 점잖고 순해 보이더라구요. 그래소 까놓고 얘기를
해버렸어요. 제가 원래 거짓말 같은 것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사실만 얘기해라. 앞으로 없었던 일로 하겠다.'하고
설득을 했죠."
"그랬더니 불어?"
"처음에는 자꾸 자리를 피하려고만 하더라구요. 그래서 협박을 좀 했죠.
신분증을 들이밀고는 '기사 거리가 없어 고민하던 참인데, 잘됐다. 이건
심각한 테러행위다. 당신 이름이 거론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더니
조금있다가 술술 털어 놓더군요. 보세요. 녹음까지 해왔죠."
"녹음도 했어? 그거 잘됐다. 이 새끼들 한번 당해봐라."
주원이 흥분해 가지고 녹음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소운이 말렸다.
"뭘 어떻게 하려구?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잠자코 있어. 그리고
수정이가 일을 아주 꼼꼼히 처리했구나. 첫 사업치고 아주 훌륭해. 박수
한번 더 쳐줘야겠다."
수정이 박수 소리를 들으며 수줍은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가려고 했다.
"어디가니?"
"더 이상 보고할게 없어요. 아까 준비하던 차나 마저 끓여 오려구요."
회의는 계속됐다.
"조금전에 말한 대로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만
접어두고 다음 얘기로 들어가자. 우리가 상시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여섯명 뿐이야. 여섯명으로는 우리가 맡은 지역을 커버하기가 벅차지
않을까?"
성진이 대답했다.
"홍균이만 빼고는 다들 시간을 할애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한달
간만 집중하면 되니까 개인적인 생활에 다소 무리가 있어도 참아야죠.
동찬이하고 수정이 그리고 저하고 서울지역을 맡고, 진호랑 성현이가
인천하고 부근 공단지역을 맡고, 상호 선배님하고 지은이가 서울 근교를
맡고, 형하고 주원이가 경기도 외곽을 맡으면 될 것 같아요. 기존에 박아
놓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협조를 받으면 벅찰 것도 없어요."
"그러지 말고 서울을 한꺼번에 덤비자. 동찬이는 진호쪽에 붙고
성진이는 상호선배를 도와라. 그리고 지은이하고 수정이는 서로 상의해서
둘 중에 한사람이 사무실을 지키도록해."
동찬이 나섰다.
"사무실은 미혜보고 지키라면 되요."
"배가 남산만 해가지고 어떻게 사무실을 지키냐?"
"산달이 아직 한달 반이나 남았어요. 움직여야 건강에도 좋다구요."
주원이 참견하고 나섰다.
"2세 만드는 게 뭐가 그리 급해서 서둘렀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속도위반한 것 같다구."
"야 임마, 지극히 정상적으로 생겨 난 거야. 네 말대로 속도위반을
했다고 치자. 솔직히 우리 중에서 속도위반은 안한 사람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안 그래요, 형?"
"왜 나를 쳐다봐?"
"형이라고 별다르겠어?"
"이놈들이..."
지은이 화살을 피하려는 듯이 말을 막고 제안을 했다.
"그러면 나랑 수정이하고는 그때 그때 필요한 지역에 지원을 나가는
걸로 하죠. 그러면서 틈틈이 여성동지를 규합하는 작업도 병행하면서..."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러면 20일 동안 작업을 끝내고 나머지 열흘 동안
서울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성진아 디데이를 언제 잡았니?"
"이번 주 목요일이요. 바로 내일 모레예요. 내일 저녁 7시에 모두
모이도록 조치했어요. 제5반은 회의가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할께요."
"장소는 어디로 정했어?"
"주원이 사무실 그대로요. 일부러라도 회원들 한테 부서진 현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은 것 같아서요."
"잘했다. 그리고 성현이는 지금부터 지출계획서를 작성해봐."
"벌써 해놨습니다. 어제 제주에서 전화 주셨을 때 바로 준비했어요."
"빨라서 좋구나. 그럼 내일 저녁 때 사무실로 자금을 보내도록 하마.
김의원 조카 편에 보내지게 될거다."
회의가 끝나고 성진이 제5반 소속 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성진으로부터 보고서와 관련된 브리핑을 받고 난 소운은 SG일행을 연구소
옆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영숙의 가게로 보내고 김의원을 만나기 위해
호텔로 향했다.
김의원과 소운이 마주 앉았다.
"연일 수고가 많네."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현재까지는 6대 4정도로 앞서고 있어. 차차기를 내다보는
중진급인사들이 속속 지지를 선언하고 있어서 점점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네.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야."
"저 쪽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갖은 수작을 다 동원하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있겠나? 내각제를
흘리기도 하고 공정한 경선이 아니라구 탈당 위협을 가하지도 했지만
어림없는 짓들이지."
"미래포럼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야? 그게 어떤 놈들이야?"
"S의원의 짓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저
알고만 계십시오."
"어떻게 하려고?"
"꼼짝 못하게 발을 묶어 버릴 생각입니다."
"어련하겠네만 무리하지 말게. 괜히 일이 커졌다가는..."
"제 스타일 아시잖습니까? 조용히 봉해버릴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지출계획서를 가져왔습니다. 숙박비와 교통편은 현지에서 조달이
되니까 비용이 상당히 절감될 겁니다."
"그러지 말고 여유있게 사용하게. 지나치게 빡빡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에 회의가 있습니다. 시간에 맞추서 보내
주십시오."
"누구를 보낸다? 성진군이 다녀가면 안되겠나?"
"그 친구 돈이라면 근처도 안가려는 친굽니다. 조카분을 보내십시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보안에도 적격일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군. 알았네. 그런데 고문님은 언제 만나겠나? 자꾸 보고싶어
하시는 데."
"창립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얘기야 늘상 하고는 있지만 미리 상견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야."
"사람이 중요한게 아니고 일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지금 만나봐야
열심히 하라는 말과 그렇게 하겠다는 말 밖에는 나눌 얘기거리도
없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고문님을 존경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원님도
아시다시피 특정개인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자네 뜻이야 왜 보르겠나만 그 양반이..."
"제 말씀 그대로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 향후 일정과 관련해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지난 번에 자네가 쓴 칼럼을
읽어 보았네. 은연중에 고문님까지 끼워 넣은 것 같더구만."
"솔직한 심정을 글로 옮긴 겁니다. 지금 여야 할 것 없이 온통 지역색을
부추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당 지도부가 점점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국가 최고 통치권자를 뽑는 과정이 아니라 동네 아이들
땅따먹기 만도 못한 짓입니다. 네 땅 내 땅 갈라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건
저나 우리식구들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예요. 만에 하나 고문님이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발을 뺄겁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쓴 글을 일종의 경고로 받아 드리 셔도 무방합니다."
"갑자기 무서워 지는 걸?"
"의원님이 흉허물없는 선배님이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건방졌다면 양해 하십시오."
소운이 시계를 들여다 보더니 급히 일어났다.
"가려나?"
"예, 약속이 있어서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호텔을 나온 소운이 횡단보도의 신호를 보고 바쁘세 걸음을 옮겼다.
호텔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S의원의 지구당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지구당에 들어서자 여사무원이 쪽지를 건내주었다. 목욕이나 함께 하자며
사우나탕에서 기다리겠다는 쪽지였다.
'정신 나갔군. 무슨 용건인지도 모르고...'
카운터에서 S의원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곧 바로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손님, 옷을 갈아입고 들어 가셔야지 그냥 가시면 어떻해요?"
"사우나를 하러 온게 아니예요."
"그래도 안되요. 그 복장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구요."
종업원의 만류에도 아랑곳 없이 그가 들어 있다는 작은 독방으로
들어갔다. 음침하게 생긴 사우나실에 뽀얀 수증기가 가득 차있고 방 한
가운데데 놓여진 침대위에는 한 남자가 엉덩이에 타올 한 장만을 걸친채,
역시 타올로 주요 부분만 가리고 있는 여자의 손에 몸뚱이를 맡기고 누워
있었다.
"어서 오시오. 그런데 옷이 그게 뭐요?"
그대로 누워 고개만을 돌리고는 소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무표정하게 남자의 몸뚱이를 고깃덩어리처럼 주무르기만 했다. 남자가
몸을 돌리자 엉덩이에 걸쳤던 하얀 수건이 침대 밑으로 미끄러졌다.
가려졌던 부분이 흉하게 드러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여자의
두 송이 그 주위를 음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사우나를 하면 밤잠이 잘 오거든... 그래, 나를 보자는 용건이
뭐요?"
소운은 여자의 음탕한 손놀림을 외면 하며 입을 열었다.
"여자를 내보내십시오."
"괜찮소. 신경쓰지 말고 할 얘기 있으면 하시오."
"내 보내십시오."
"어허, 왜 이래? 순진하게시리..."
소운이 목청을 높였다.
"내 보내라니까!"
"이 사람이 어디다 대고 버르장머리 없이 눈을 부릅떠?"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침대체서 몸을 일으켰다. 소운이 멀거니 바라보고
서 있던 여자를 잡아 채듯 바깥으로 밀어 냈다. 몸에 감았던 타올이
소운의 손에 걸려 바닥에 떨어지자 실오라기 하나 없는 여체가 드러났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 타올을 집어 들고 몸을 감싸더니 쏜살같이 나가
버렸다.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 지 모르지만 감히 겁도 없이 내 앞에서
행패를 부려?"
소운이 대꾸도 없이 안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스위치를 눌렀다.
녹음기를 타고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잿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소운이 녹음기를 끄고 말했다.
"당신이 나를 기억한다면, 내가 어떤 인간이라는 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면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거요."
두 사람은 과거 어두운 시절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좋지않은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무실을 뭔싱복구 해주시오. 그리고 언행을 조심하시오.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쯤은 이 순간에서 확인 했을 것이요."
"시키는 대로 하리다. 부탁이니 여기서 끝냅시다. 무슨일이 있어도 죽은
사람 처럼 지낼테니..."
소운이 녹음기를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소운은 남자의 턱을 문지르며 증오의 미소를 흘렸다.
"여자는 다시 집어 넣어 줄테니 계속 즐기시지."
남자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소운은 흐물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무틱한 남자의 물건에 침을 뱉어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들 처럼 비열하고 더러운 인간들에게는 반드시 우리같은 사람이
필요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소운은 사우나실을 나와 송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분을 삭히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주원아. 나다."
"형, 지금 어디계세요? 아직 영숙씨 가게에 모여있는데..."
"지금이 볓 신데 아직 게기에 있어? 빨리 집에들 가라. 그리고 네
사무실 피해 내력을 상세하게 정리해서 S의원에게 갖다 주도록 해라."
"뭐라구요? 그자가 변상한데요? 아니, 어떻게 했길래요?"
"그건 알 필요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해."
"잠깐만요. 지은이 바꿔달래요."
지은이 한동안 말이 없어서 전화가 끊긴 줄 알았다. 잠시 후 지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이 좋긴 좋네. 형, 나 오늘 형하고 있어야 겠어."
"왜?"
"이따가 얘기해 줄께요. 지금 바로 올거죠?"
"알았다. 그럼 가게로 가마."
소운이 영숙의 분식점에 도착해 보니 영숙의 어머니가 술이 잔뜩 취해
있었다. 일행들이 집엘 가지 못하는 이유가 뻔했다. 영숙의 어머니가 가지
못하게 성화를 한 것이었다. 소운이 들어서자 혀가 꼬부라진 영숙이
어머님이 소운을 보자 술기운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이런, 어쩌나. 이선생 올 줄은 몰랐네. 내가 너무 많이 취했나봐.
이해하지?"
"그러믄요. 이제 그만 들어 가서 쉬세요."
무안해서 어쩔줄을 몰라하던 영숙이 어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토닥거리는 말이 오고가더니 영숙이 방을 나오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게 말려도 안되더니 오빠가 한마디 하시니까 금방
착해져 버리네요."
"뭐 어떠니? 다 우리들이 좋으셔서 그런 걸."
"형, 그자한테 어떻게 한거예요?"
주원이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걸 알아서 뭐할래? 수정이 한테나 고맙다고 해라. 수정이가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으면 어림없는 일이니까."
"그건 그렇지. 어떻게 고맙다고 해야하나? 애정 표현을 할 수도 없고.
나는 수정이 보다 애정표현 방법이 진하거든?"
그러자성진이 또 끼어 들었다.
"너 또 나뒹굴고 싶냐? 그런 얘기 하려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
"아차,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네."
좌중이 웃음 바다가 되었다. 주원이 소운에게 술잔을 권하면 말했다.
"형, 오늘밤도 함께 지냅시다. 대사를 앞두고 단합대회도 할 겸. 어때요?"
"괜찮지. 하지만 밤을 세우는 건 안된다."
수정이 궁급해서 물었다.
"단합대회를 어떻게 하는 건데요?"
지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동양화 공부하는 거란다. 고스톱말이야."
"애게... 난 또 뭐라고. 우리도 끼워 주는 거야?"
성진이 정색을 하고 나섰다.
"여자들이 어딜 끼냐? 너희들은 여기서 잠이나 자. 아니면 여자들끼리
하던가."
"그런 법이 어디있어? 남녀평등을 앞장서서 외치는 남자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나도 할거야."
수정이 대들자 주원이 성진을 거들었다.
"아무리 평등도 좋지만 어떻게 여자하고 노름을 하냐?"
"노름을 하는게 아니잖아? 더구나 단합대회를 한다면서 자기들끼리 만
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이제는 지은이 수정을 두둔하고 나섰다.
"우리 수정이 잘한다."
"이상한 남자들이야. 고스톱을 치는데 왜 남자 여자 편을 갈라?
고스톱에서는 학력도 철폐 되었다구요. 국민학교 나온 사람들이나 박사나
고스톱판에서는 잘치는 사람이 최고잖아? 하물며 남녀을 차별하다니..."
"알았다. 알았어. 같이 가자."
동찬이 졌다는 듯 수정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소운이 말했다.
"동네의 이목도 있고 하니까 너희들은 여기있어."
"이선생님의 지역이라 그거죠? 좀 치사하지만 하는 수 없지. 알았어요.
따라가지 않을 테니 실컷 단합대회 하세요."
수정이 뾰루퉁해 가지고 포기하고 말았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 소운이
지은을 불렀다.
"아까는 무슨 말이니?"
"응. 오늘 집안 행사가 있었어요. 일가 친척들이 잔뜩 몰려 왔을꺼야.
틀림없이 내 문제로 옥신각신 할게 뻔하거든. 도마위에 올려놓고 얼마나
난도질을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구. 그래서 아침에 나올 때 아예
외박하겠다고 말했거든. 잘 됐어요. 모처럼 영숙씨하고 얘기도 나눌겸
여기서 잘께요."
"그랬구나. 괜히 걱정을 했잖아?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
"잠깐만요."
"왜 그래?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잠깐이면 되요."
"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요? 걱정 거리 있어요?"
"걱정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그런데, 요즘 게속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지내고 있잖아요? 얘기해요. 뭣
때문에 그러는지."
"..."
"형! 내 맘이 편치가 않다구."
사실 소운은 그가 벌이고 있는 일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 지, 그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는데 도운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엇엔가 옳지 않은 것에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구태가 접목되는 것 같기도 하고 상식 보다는 술수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현실의 강한 벽에 부딪치면
과거처럼 이겨내기 보다는 타협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유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두려운 생각이 들고 밤 잠을 설치는 사례가 늘어갔다.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 일기장을 들춰보고 과거를 되 돌아
보거나 한갓진 곳을 찾아 머리를 식혀 보기도 했지만 그다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어떨 때는 모든 것을 아우들에게 물려주고 아니 떠넘기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이나 다니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했다. 옛날에도
그런적이 있었다. 결국 현실 도피라는 자타의 비난을 받은 후에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일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신을 오염시키지 않을 자신감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운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지은을 향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많은 데 믿음을 줄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
나를 좀 도와 주겠니?'
지은이 소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럴 줄 알았어. 형은 지금 여유가 없어진거야. 쫓겨다닌다고 생각하지
마. 형이 스스로 가는 길이니까 자랑스럽게 생각해. 왜 그런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학대하려 해요? 그러다가 언젠가처럼 사라져
버릴려구? 그러지마. 십년 전하구는 다르다구. 그때는 형이 혼자 였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형의 곁에 있어. 나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형을 지켜줄게. 형, 이러게 하자 형은 한 이틀 늦게 출발해. 지금은 바람이
너무 불어서 형의 마음을 춥게 하고 있어. 이 상태로는 내가 안심이
않된다구. 나하고 마음을 녹이고 출발해요."
"바람이 분다고? 마음이 춥다고? ... 이렇게 흔들려 보기는 처음이다.
아무래도 안정을 찾아야 겠지."
소운은 지은의 어깨를 토닥이고 밖에있는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16 미래가 선택한 사람
1997년 4월 19일 오후 2시. 종합무역 전시장 3층 대서양관에 수 천의
젊은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의 모임 창립대회'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오색의 조명을
받으며 당당하게 걸려있고 대회장 주변에는 각종의 구호가 적힌 만장들이
곳곳에서 나부끼고 있다. 연단에서는 사물놀이패의 축하공연이 대회장의
열기를 한껏 고조 시키고 있었다.
전국의 긱 시도에서 지부 결성대회를 마치고 하루 ㄹ앞당겨 강경한 수
천의 회원들은 정해진 숙소에서 밤을 보낸 뒤 오전 일찍 수유리 4.19
국립묘역을 참배했다. 그곳에서 민주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2천년대의 대망을 준비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했고 그 다짐을 이곳
대회장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하고자 하는 것이다.
드디어 대회를 알리는 팡파레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회기가 입장하고
긴딘힌 의례절파가 끝났다. 순서에 의해 정관과 강령이 통과되고 이어서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소운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함께
선출된 중앙 집행부와 각 지부의 대표들이 연단앞에 나란히 서서 팔을
높이 치켜 들어오천 회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었다. 연단 아래서는
SG회원들이 담담한 표정으로 소운의 늠름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대회를 마치고 집행부와 각 지역 대표들과의 간단한 다과회를 마친
소운이 연구소로 돌아왔다.
"형, 잘했어."
"축하해요."
소운은 동료들의 인사에 미소로 응답하며 연구실로 들어섰다.
"취임 인사가 멋지던데요?"
주원이 칭찬의 말을 건냈다. 소운은 자신의 취임 인사를 떠올렸다.
'구태의 질서를 바로 잡는 데 젊은 청년들이 앞장서야 한다. 국가 사회를
좀 먹는 그 어떠한 병폐도 과감히 쓸어내는 것도 청년들의 몫이다.
그래야만 2천년대의 새로운 시대를 부끄럽지 않게 맞이 할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의 모임의 희망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저항에 부딪치고 있었다.
"김의원 연락 없었니?"
"없었어요. K고문을 초청하지 그랬어요? 김의원이 좀 언짢아 하는
모양이던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야당이 색안경을 쓰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떻게 여당에서 까지 견제를 할 수 있어? 그 상황에서 초청을 강행
했다가는 어떤 소리가 나올 지 모른다. 당내 견제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이유가 뭔지 부터 알아야 겠어."
"김의원 생각은 어차피 부딪칠 일이라면 피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김의원도 지금 곤경에 빠져 있어. 고위층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거대한
조직을 만든 이유가 뭐냐는 거야. 김의원이 사적인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김의원이 오해부터 풀어놓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부딪쳐서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어."
"김의원님 사정이 그렇다면 사무실 운영비를 마련하는 게 쉽지는
않겠군요?"
"지부회장들하고 집행부에서 내놓은 것 만으로도 앞으로 삼개월은
버틴다. 그때까지도 해결이 안되면 다시 주원이 사무실로 들어가야지. 이건
농담이고... 성진이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연구소에 나오지 마라.
사무총장이면 회장보다 중요한 직책이야. 이제 SG는 분리 시키자구. 단,
씽크탱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SG는 상호 선배한테 맡기도록
하겠다. 이의 없지?"
"이거 꼭 집 떠나는 가장을 보내는 기분이네."
"또 있어. 지금 언론에서도 정치권 못지 않게 시선이 곱지 않아.
그러니까 동찬이 하고 수정이는 이것을 중화시켜줘. 한쪽에서 치면
부드러운 기사로 분위기를 조절해 달라는 거야. 자꾸 구설수에 휩싸이다
보면 위축되기 마련이니까. 알았지?"
"데스크를 구워 삶아야 하는데, 어떻게..."
소운이 수정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찬이는 힘들겠지만 수정이는 가능하겠지. 그렇지?"
'믿어줘서 고마워요. 까짓거 미인계라도 써 보지 뭐."
동찬이 갖잖다는 투로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게다가 소문은 좋아야지. 온통 깡패 아니면 망나니로
통하는 데..."
"그런 소리 하지마. 꾸미면 나도 괜찮다구. 성진씨는 잘 알거야."
성진이 당황스럽게 말했다.
"왜 나를 끌어 들이니? 내가 알기는 뭘 안다구..."
소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명심해야 할게 또 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 해도 SG에 조그만
손상이라도 있으면 안돼. 말이고 행동이고 철저하게 조심하라구. 다들
알았지?"
한참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에 김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접니다. 소운입니다."
"이 회장,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초청을 못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상황이 그런걸 어떻하나? 뉴스를 보니 대단하더구만 아주 보기
좋았어. 지금 바쁘지 않나?"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닐세. 오늘은 내가 연구소로 감세. 이제 여기 저기 눈치볼 것도 없을
것 같으니."
"그러시겠습니까? 잘 됐군요. 모차람 저희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얼굴이나 한 번 보시죠."
통화를 끝내고 한 시간쯤 후에 김의원이 나타났다.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았어. 아주 성공작이었다구. 시샘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호기심과 관심이 많다는 증거고 또한 성공을 반증하는 거지."
"다 의원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소운은 김의원을 의자로 안내한 후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한 친구는 지금 산후 조리중이고 또 한 친구는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지금 쟁의 중이라 못 왔습니다."
소운의 소개가 끝나자 김의원이 반갑게 말했다.
"귀한 분들을 만나게 되서 영광입니다.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지만
이회장이 하도 아끼는 바람에 이제사 기회가 되었군요.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도움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의원의 밀이 끝나자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떨지 모르지만 정치하시는 분들은 인사하는
방식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연설하는 듯 하시던데, 의원님도
그러시네요."
그러자 지은이 수정의 옆구리를 찔렀다.
"얘, 수정아..."
"그렇잖아? 그러니까 진실해 보이지가 않고 상투적으로 보인다구.'
"얘가 정말..."
"아닙니다. 다 맞는 말이예요. 하지만 여러분들 한테 상투적으로 인사를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죄송해요.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그러믄요. 오히려 좋은 지적을 받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최기자가
마음에 쏙 드는 걸요?"
김의원이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수정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 앞으로 최기자 말을 명심했다가 조심하도록 할께요."
"감사합니다. 첫 느낌과는 달리 저도 김의원님이 마음에 쏙드는 걸요?
사실 처음에는 무서웠거든요."
수정이 애교스럽게 김의원의 손을 잡았다. 수정의 태도를 지켜보던
식구들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회장하고 얘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단 둘이서 말입니까?"
"자네가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네."
"그럼 다같이 듣도록 하지요."
"그러세. 하긴 이번 일의 주역들이니 다들 알고 있는 얘기들이겠구만."
김의원이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시작했다.
"당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심상치가 않다니요?"
"각각이 따로 움긱이겠다는 태도야. L고문이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독자세력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하는 군요?"
"그렇지 우리 쪽이야 당초부터 누가 있었나? 지금도 M당에서 온
사람들이 적극 뒷 받침을 하고 있고 소장파들이 합류하는 정도가 아닌가?
거기에 중진 실세들이 보수차를 견제 하자는 심리가 작용해서 협조를 해
온거지. 그런데 미래청이 창립하면서 쏟아지는 구설이 대부분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식이거든. 그렇게 거대 조직을 필요로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누구냐, 바로 L고문이다, 이렇게 공식을 만들고
있다구. 그러니 기존의 세력들이 불안을 느끼는 거야."
"김의원님과 관련 해서는 뭐라고들 합니까?"
"내가 욕심이 있다고들 하지. 뒷 일을 떠맡는 대가로 권력의 핵심을
노리고 있다고도 하고. 나한테야 나한테야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윗
분한테 해면하면 그 뿐이지."
"그체적인 움직임이 있던가요?"
"조금 전에 들은 얘기네만, 중진 실세들이 독자 계보를 만들려는
모양이야.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거래를 요구해
올 거란 말일세."
"협력의 대가로 후일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겠죠."
"그렇지. 거절하면 발을 빼겠다고 나올 것이고."
"대체 몇 그룹이나 됩니까?"
"서너 개 되지. 그 중에는 차차기를 노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니 이
일을 어떻하면 좋겠나? 솔직히 '너희들 끼리 잘 해봐라'하고 나오면 난감해
지거든? 우리 쪽이 가지고 있는 당내 조직으로는 대의원을 확보하기가
쉬운일이 아니야. 뛰어 줄 사람은 물론이고 동원 인력도 부족하다구."
"위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옛날같으면 모르지만 지금은 야단을 친다고 해도 먹혀들지도 않겠지만
설사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도 행동으로는 시늉 만 낼게 뻔하지. 윗 분이야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밑에 사람들은 이 판에서 계속 남아서 자기 밥그릇을
지켜야 하는데, 쉽게 말을 듣겠나? 그게 권력 누수가 아닌가? 과거에는
권력의 우산 밑에서온갖 향유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때가
언제였냐는 태도야. 한마디로 찢어진 우산이 되어 버렸어."
소운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보수파의 공격에다 개혁파의 분열이라는
이중의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죽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대의원들을 각개 격파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글세 그게 어렵다구. 우리쪽 의원들을 죄다 모아 봐야 서른 명도
안된다구. 그렇다고 기간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의원 숫자가 좀
많나? 그러니... 국민 여론을 이요하는 방법을 찾아모고 있는데, 여의치가
않아. 사실 여론 조사를 해 보면 단연 1위를 달리고 있거든. 그걸
대의원들이 쉽게 외면하지는 않을게 아닌가?"
"대의원을 누가 뽑습니까? 지구당 의원장들이예요. 지역에서 행세깨나
할려면 위원장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위원장의 영향을 받지 여론에는 관심이 없어요. 의원님 지역을 예로 들어
보자구요. 의원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만. 그러니 어떻하나? 거래를 할 수도 없도고..."
"정말 더러운 권력욕이군요."
"차차기를 노리는 쪽은 더해. 권력의 핵심에 남아 있어야 그만큼 유리해
지니까."
"만약에 카드가 바뀌게 된다면 집니다. 그 사람들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야. 카드가 바뀐다고 해도 승산이 있다고 보는 거지. 3김
청산하고 세대교체론이 먹혀들고 지역주의만 조성되면 누가 나가도 이길
수 있다고 보고 있어."
"웃기는 군요. K당이 노리는 게 뭔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지요.
당내에서만 무대 안론이 아니라 국민적 여론으로도 무대 안론이
나타나기를 바란다구요. 아무리 지역성향으로 흐른다고 해도 되지도 않는
인물을 선택하겠습까? 국민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사실말이지
K당후보야 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중에 인물이 아닙니까?"
"가만,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식사나 하면서 계속하세. 내가 한턱 쓰지."
"그게 좋겠군요. 그러시면 요 건너 편에 저희들이 자주 이용하는
분식집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간단히 약주오 하실 수 있구요. 음식솜씨도
그만입니다."
수정이 말리고 나섰다.
"어떻게 의원님을 거기로 모시고 가요? 장소도 비좁은데..."
김의원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내가 원래 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예요. 그리로 갑시다."
"저는 비싼 것을 얻어먹고 싶은데..."
"그래요? 뭐 먹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요. 뭐든지 사줄테니..."
그러자 지은이 농담처럼 핀잔을 주었다.
"수정이가 오늘 너무 까부는 것 같구나."
"어머, 그랬어? 지금부터 조심할게."
소운이 수정의 등을 다독거리며 밀했다.
"괜찮다. 내가 의원님의 성향을 알기 때문에 권해 드린거야. 지은아.
영숙이한테 전화해서 어머니 좀 바꿔줘."
잠시후 소운이 지은이로부터 수화기를 건내 받았다.
"어머니. 소운입니다."
"아이구, 회장님이 왠일이신가? 아주 큰 감투를 썻더구만. 뉴스를
몇번이나 봤어. 축하하네 이사람아."
"고맙습니다. 지금 방을 좀 써도 되겠습니까? 귀하신 손님이
오셨거든요?"
"되다 마다. 어느 어른의 분부시라구."
"어머님도 참. 지금 곧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정리한 후 곧바로 영숙의 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김의원을 알아본 영숙의 어머님이 몸 둘바를 몰라하며 일행을 방으로
안내하고 주문을 신청했다.
"식사를 뭘로 준비할까?'
"의원님, 이 집 칼국수 맛이 일품입니다. 그걸로 하시죠."
"칼국수 좋지. 기왕이면 소주도 한 잔 하세."
"어머님 들으셨죠?"
"그래, 허지만 안주가 변변한게 없어서..."
"우리가 매일벅은 걸로 그냥 주세요."
"제육볶음?"
"예, 그거면 최고 아닙니까?"
영숙이 어머니가 문을 닫고 나가자 어머니라고 부르는 내력을
궁금해하는 김의원에게 소운이 간단한 설명을 하고 연구소에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소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독자 세력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설득을 해봐야죠."
"글세... 그걸 곧이 곧대로 믿어 주겠나?"
"사실을 말하는데도 못 믿는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하겠습니까?"
동찬이 끼어 들었다.
"제가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얘기하고 싶은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세요. 모두 참고를 할테니."
"감사합니다. 언론을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컨대 권력욕에 의한
내분이라면 그걸 지상을 통해 사실대로 비판을 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도덕적인 문제가 부각되니까 행동이 자유롭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소운이 반론을 제기했다.
"그렇더라도 드러나지 않는 제동을 건다면 막을 방법이 없지. 이렇다
저렇다 표현도 하지 않고 뒷짐만 짓고 있게 된다면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할
수 있겠니?"
"드러내 놓고 제동을 걸든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든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잖아요?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 나몰라라 하는 건 곧 해당
행위나 마찬가지고 그게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오는 무언의 항의라고
지적하면 그만이지."
김의원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대의원을 확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실효를 거둘 수가 없어요."
"언론에 적전 분열 현상이 자주 보도 되면 본 경기에 가서도 손실이
생긴다. 우리는 지금 내부의 적과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
김의원이 답답한지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후보 경선까지는 겨우
한달밖에 여유가 남지 않았다. 경선만 승리하면 그 후에는 물이 흐르듯
순탄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걸림돌을 예상했더라면 진작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통치세력에 의존해온
것이 후회로 남을 뿐이었다.
식사가 도착하고 몇 잔의 술이 오갔다. 끊이지 않는 대화였지만 여전히
미궁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깊은 밤으로
빠져들었다. 설득과 타협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결론만을
내린채 뿔뿔이 흩어졌다.
또 다시 홀로 남은 밤. 소운은 근심이 가득한 김의원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오랜 정치역정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지켜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권력의
핵에서 자신의 영달을 꾀할 수 있음에도 혼자이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다. 양지에만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김의원은 그늘에 고독하게 서있는 꽃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향기를 품고 있는 분명 한송이의 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몇
명만 더 있어도 한결 보기좋은 정치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몇안되는 힘이라도 당당하게 굽히지 말자. 굽은 것보다는 작고
좁아도 곧은 것이 훨씬 쓸모가 있지 않은가. 정해진 일에 열중하자. 될대로
되라는 식 보다는 되게 끔 하면서 그렇게 도전하자. 정의로운 것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번에도 입증시켜 보자.'
소운은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책상서랍을 뒤져 '미래청'의 사업
계획서를 들춰 보았다. 8원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는 대규모 하기수련회가
잡혀있다. 미래청의 거대함을 만방에 알리는 최고의 행사가 되어야 했다.
그서을 대비해 전국을 돌며 세미나를 개최하고 지역 회원들을 독려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몇 배의 규모로 양심적인 청년 세력을 확대 시켜야
한다. 소운은 벅찬 가슴으로 계획서를 읽어 내려갔다.
초록이 짙어가는 5월 어느 날이었다. 미래청 회장실에 동찬과 수정이
작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형, 축하해요."
"왜 내가 축하를 받아야 하니? 승자는 따로 있는데..."
"저도 축하해요. 모처럼 밝은 표정을 보니까 너무너무 기분 좋은 것
있죠. 항상 이렇게 밝았으면 좋겠어요."
"고맙구나. 수정이가 오늘은 아주 곱게 단장을 했구나.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
"그러믄요? 오늘은 회장님하고 데이트를 할 거니까요."
"나하고? 나하고 수정이하고 데이트를 한단 말이지?"
"대신 지은이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야 되요. 질투하면 곤란하잖아요?"
동찬이 수정을 꾸짗었다.
"얘가 왜이러는 지 모르겠어. 아주 큰일을 저지를 얘라니까?"
"왜 그래? 정선배는 내가 하는 일 마다 왜 그렇게 못마땅해요?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꾸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회장님하고 데이트 좀 하겠다는 데, 그게 뭐가 이상해?"
"너 진심으로 그러는 거니? 정신이 있어?"
"웃겨 정말... 그래, 농담 좀 했다 왜?"
수정이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소운이 나서서 달랬다.
"왜들 이래? 축하 해주러 온 사람들이 싸움질 하는 건 뭐니? 그만들
둬라."
동찬이 수정을 힐난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운을
바라보고 말했다.
"지방에서 지켜봤다면서요?"
"그래, 세미나를 취소할 수가 없었어. 그렇지 않아도 김의원님 한테 실컷
야단 맞았다. 야단도 아주 기분 좋게 치더구나."
"예상 밖의 대승이라는 평이야. 그동안 지긋 지긋 했던 주변 얘기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구."
"정선배가 왜 지긋 지긋해? 회장님이 그랬겠지."
"너 정말 까불래?"
"왜, 한방 맞고 싶어? 오랜만에 발길질 한번 해볼까?"
동찬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뒷 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것 봐. 겁을 내면서 왜 자꾸 건드려요?"
"어허, 그만들 하라니까."
수정이 찔금 하더니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냥, 축하만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할 말이 있는 거니?"
"수정이 때문에 말 못해요. 혼자 오겠다니까 고집을 부려 가지고..."
수정이 코웃음으로 동찬의 핀자을 받아 넘겼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왜 그렇게 무안을 주니?"
"내가 평소에도 그러나요? 오늘 아침부터 계속 못된짓만 하더니...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 끝까지 따라 오잖아. 아침에
신문사에서 어땠는지 아세요? 하여튼 기가 막히는 애라구. 김부장을 걷어
차버렸다니까? 그것도 맨날 취미로 차는데를 말이야. 좀 듣기 싫은 말을
하긴 했지만 너무했다구."
소운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천호동가서 밤기술 하나만 배워 두면 시집가서 귀여움 받는 다고
했거든."
"뭐야? 그건 정말 맞을 소리를 했구나."
"아무리 그렇다고 내일 모레면 손주 볼 나이인 사람을 걷어차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알았다. 그건 그렇고 할 얘기가 뭐냐?"
"형이 맨날 지방으로만 돌아다니니까 상의할 시간이 있어야지. 영숙이
말이예요. 괜찮은 친구가 있어서 소개를 해 주려고 하는데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아. 교통사고로 상처해서 혼자 사는 친구거든."
"네가 쓸만하다면 믿을 만은 하겠구나. 그런데 왜 싫대?"
"그냥 혼자 살겠대요. 제 엄마나 중매서래."
"그래서 나보고 설득을 해 달라는 거니?"
"예. 다른 사람음 몰라도 형 말은 듣잖아."
"너도 많이 변했구나. 영숙이에 대한 감정은 정리됐니?"
"아직 사람하기는 하지만 사람하니까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거지."
"알았다. 수일 내로 만나보마. 수정이나 찾아와라."
동찬이 막 찾으러 나가는려는데, 수정이가 들어왔다.
"귀신이다. 얘기가 끝난 줄 어떻게 알고 들어오니?"
"신 내렸다. 왜?"
수정이 톡 쏘아 붙이고는 나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동찬이 안가겠다고
버티자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지켜보고 있던 소운이 가까운 공원에
가서 바람이나 쏘이자며 데리고 나갔다.
"겨우 이런데를 데리고 오시네. 실망했어요."
수정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하던가 말던가 동찬이 이곳 저곳을 둘러
보며 딴 소리를 늘어놓았다.
"전쟁을 기념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거야. 전승기념관이나
전쟁박물관은 들어봤어도 전쟁기념관이 뭐냐구. 한국은 온통 전쟁만
즐기는 나라처럼 보이잖아. 도대체 기념할 게 따로 있지, 원... 그렇다고
이긴 전쟁도 아니잖아. 겨우 그것도 외세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휴전을
얻어낸 것 뿐인데, 기념할 게 뭐가 있어. 반세기에 가까운 지금도 전쟁의
비극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저것봐, 저 처참한 장면을... 에이!
국립묘지나 갈 걸 괜히 여길 왔네.
근데 높은 사람들은 걸핏하면 국립묘지를 가던데, 가서 뭐라고 묵념을
하는 거지? 정말로 선열들게 '우리나라 잘되게 해 주십시요.'하고 기도
하나? 기도를 할거면 조용히 갔다 오지 무엇 때문에 광고를 해 가지고
신문 방송 기자들을 무더기로 불러서 함께 다니는지 모르겠어.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높은 사람들이 그런데를 가면 대단한 거고 일반
국민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야."
"정선배, 입도 안 아파? 남자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야, 최기자 전쟁기념관을 국립묘지로 옮기면 어떨까?"
"그만해. 듣기 싫어."
그제서야 동찬이 입을 다물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잔디밭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옆엘 보니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보였다.
"관상용으로 잔디를 키우는 나라도 흔치 않을거야. 풀을 심어 놓은 것이
아니라 금싸라기를 뿌려놓았나봐. 하긴 잔디로 꽃꽂이도 한다니까.
'들어가니 마라, 앉지 마라, 만지지 마라,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하다 못해 소변금지에다 개조심까지 세상이 온통 부정어 투성이야. 그러니
애니 어른이니 정서가 메마를 수밖에..."
"또 시작이다. 정선배, 오늘 음식 잘못 먹은 거 있어요?"
"국회에는 왜 저럼 금지 팻말이 없나 몰라. 잔디밭에 못들어간다는 것
말고, 뇌물먹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패싸움하지 마라, 놀고 먹지 마라,
이런것들을 덕지 덕지 붙여 놓으면 졸을 텐데..."
"야! 정선배!"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그만 하랬잖아!"
"얘까지 뭘 못하게 하네."
"바람을 쏘이러 왔으면 기분 좋게 마랍이나 쏘이고 가면 되지 분위기
잡칠 일있어? 웬 불평불만을 그렇게 쉬지도 않고 늘어 놓느냐구?
미혜언니가 잠자리를 거부했어? 헛눈 팔고 싶은데 뜻대로 안돼?
신문사에서 사표내래? 카드 빚을 못 갚았어? 장이 뒤틀려? 무엇때ㅔ문에
심통이 잔뜩 나가지고 맑은 공기를 오염 시키냐구."
수정이 마구 쏘아붙이자 동찬이 자리를 피해 머렸다.
"형, 음료수 좀 사올께요."
멀어져가는 동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눈을 흘기던 수정이 소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원 확보는 잘 되요? 지금 몇 명이나 확보 했어요?"
"한 이만 명 정도... 이대로 라면 8월 까지는 목표치의 절반까지는 가능할
것 같다."
"회장님에 관해서 취재 좀 하면 안돼요? 미래청을 홍보도 할 겸...
그러면 회원 확보에도 도움이 될게 아니예요?"
"아직은 안돼. 일단 저쪽 분들하고 만나서 협의를 해 봐야지. 취재할만한
시점이다 싶으면 제일 먼저 수정이한테 기회를 줄테니 아무
걱정하지마라."
"정선배가 기분이 안좋을 텐데?"
"같이 하면 되잖니. 혼자하기 벅찰 만큼 한꺼번에 터질꺼야."
"기대가 크네요."
"그건 그렇고 지난 번에 호남지역을 취재했다면서?"
"아참, 사실은 오늘 그 얘기를 해드리고 싶어서 정섬배를 따라 온
거예요. 그 쪽도 일사분란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지난 번에 물갈이를 당한 사람들이 뒷전에서 구경꾼이 되고 있다나
봐요. 필요 없다고 쫓아 냈으니 새 사람들하고 잘해 보라는 식이래요.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어디 잘 되나 보자'하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 쪽도 큰일 이구나."
"회장님도 참, 지금 내 코가 석잔데, 남의 일을 걱정하고 있어요?"
"남의 분란에 박수를 칠 수는 없지 않니? 똘똘 뭉쳐도 어려운 판에
얼마나 걱정들이 많겠어."
"사실 누구 덕에 구나마라도 떵떵 거렸겠어요? 그나마 유능해서 선택된
사람들도 아니고... 배은망덕이라고 비난하는게 무리는 아닐 거예요."
"권력 무상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한 둘 이냐? 그저 마르고
닳도록 해 먹을 욕심으로만 가득한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 있으니까."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난파되겠지."
"바로 그거예요. 그때 가서 두고보자는 거지요."
"이번에도 안될 거라고 보는 모양이지?"
"그런 생각이 없으면 감히 항명이나 하겠어요? 영원히 끝장인데. 핵
분열이 생기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고 믿는 거예요. 아무리 권력이
좋다기로 서니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어요?
'선생님'하고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더니 이제는 '그 양반'에서 '씨'로
바뀌었더라구요. 해도 너무 한다구요."
"사람은 덕으로 다스려야 하는 거야. 용장이고 맹장이고 지장임에는
틀림없지만 덕장이 되는데는 소흘한 모양이지."
음료수를 사러 갔던 동찬이 소운과 수정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고 저쪽
벤치에 앉아 혼자서 음료수를 들이키고 있었다.
"정선배! 거기서 뭐하고 있어요?"
살짝 고개를 돌려 볼 뿐 이쪽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슨 고민이 있나? 굉장히 우울해 보이네. 좀처럼 처럼 모습을
안보이는데..."
"심란할 거다.우리가 저쪽으로 가자."
자리를 일어서며 수정이 물었다.
"심란 하다니요? 무슨 일인데요?"
"그럴 일이 있어. 그냥 모른 척 하고 내버려 둬라."
동찬의 곁으로 다가서자 물끄러미 올려다 보고는 말했다.
"둘이 하도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끼어들 수가 있어야지."
수정이 몸을 숙여 동찬에게 제의 했다.
"정선배, 우리 화해도 할겸 저녁때 술이나 한잔 할까?"
"호주머니가 거덜났다."
"내가 사면 되잖아. 어때요? 회장님."
"그럴까? 그럼 SG식구들도 모두 부르자.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그러면 내가 부담이 크잖아. 식구들은 내일 만나고 오늘은 우리
셋이서만 하자구요."
수정이 자꾸만 졸라댔다. 동찬이도 수정이 요구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소운이 마지못해 시간을 정했다. 그러면서 번역물이 밀려 꼼짝 할
수 없다던 지은을 떠올렸다. 무척 보고 싶었다. 숙소를 옮긴 후로는 매일
한 차례씩 주고받는 전화통화 외에는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지방
나들이가 잦은 것이 더 큰 이유인지도 몰랐다.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어
연구소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엉뚱한 약속을 해버린 것이다.
그날밤, 술에 만취한 동찬이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수정이
까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술집에서는 시간이 다되었으니 나가
달라고 성화였다. 난감한 지경에 빠진 소운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쉴만한 장소로 데려다 주겠노라 했다. 하는 수 없이
손님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한다는 술집 봉고차에 동찬과 수정을 차례로
실었다. 소운일행을 태운 봉고차는 강변을 따라 행주산성 길을 타고
올라갔다. 다시 굽은 길로 내려 서더니 낯선 슬라브집에 멈추어섰다.
기사의 도움을 받아 동찬과 수정을 방으로 옮겨 놓았다.
"여기도 저희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살림집으로 사용하기도 하구요.
음식도 하고 숙박도 하고 그럽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잠깐만요. 방이 이것 밖어 없습니까?"
"있지는 합니다만..."
"그럼 하나 더 주세요."
"그냥 이 옆에 방을 쓰십시오. 방값을 따로 받지 않을테니..."
"고맙습니다."
소운이 자리를 깔고 동찬을 눕힌 후에 수정이를 부축해 옆방으로
옮겼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펴 수정이를 옮겨 눕혔다. 동찬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막 방문을 나서려는데, 수정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윗도리를
방바닥에 벗어 던지고 황급히 화장실로 데려갔다. 한참동안 욕지기를
하고나자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너무 많이 마셨나봐.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동찬이만 그런줄 알았더니 너까지 아예 정신이 나갔었구나. 행주산성
근처에 와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수정이 수도똑지를 돌려 얼굴과 입안을 닦아내고는 배를 쓸어 내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어머, 남자 화장실이잖아? 창피하게..."
"그럼 나보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란 말이니? 어서 들어가 쉬어라."
"어디 갈려구요?"
"옆 방에 동찬이랑 같이 있으니까 푹 쉬고 아침에 보자."
수정이 소운의 팔을 잡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지 말고 밤새 얘기나 해요. 잠도 올 것 같지가 않아요."
"내일 생각을 해야지. 억지로라도 눈 좀 붙여둬. 그렇게 혀까지 풀려
가지고 무슨 얘기를 나누니?"
수정이 애원 하듯이 붙들고 늘어졌다.
갖은 교태로 소운을 붙들어 놓고는 좋아라 생글거렸다.
"계집애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니?"
"정선배 순애보를 들으니까 술이 마구 들어가더라구요. 정선배도
정선배지만 영숙언니도 대단해. 나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못살 것 같아. 저
아직도 혀가 꼬부라졌어요? 보기 흉해요?"
"아까 보다는 나아 졌다."
수정이 자리에 눕자 소운이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왜 자꾸 도망가려고만 해요? 아직 잠이 안들었잖아요?"
"도망가긴 누가..."
하는 수 없이 다시 주저 앉았다.
"지은이 언니 얼만큼 사랑해요?"
"그건 왜?"
"부러워서요."
"부러울 것도 많다. 너도 빠리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나는 그러기 힘들꺼예요. 지금까지 항상 헛물만 켜고 살았거든요. 내
사람이다 싶으면 떠나 버리고, 이 사람이다 싶으면 임자가 있고, 지지리
복도 없는 애라구요."
"상투적인 얘기네요.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란게
뭔지..."
수정이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해 가지고 맥없는 소리를 혼잣말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 같이 넘치는 복을 주체도 못할 정도인데
나는 항상 외로운 들새 신세니... 아무래도 됨박 팔자를 타고 났나봐.
아니면 우리 엄마가 태몽을 잘 못 꾸셨는가. 회장님은 잘 모르실거네요.
제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여지인지..."
"자신을 너무 비하시키지마. 우리 수정이는 열정이 있는 애니까
틀림없이 좋은 일이 닥칠거야. 그리고 굳이 이성이 아니라도 다른쪽의
사랑을생각해봐. 그러면 마음이 여유로워 질거야. 예를 들자면 일에 대한
사랑이나, 사회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거..."
"농사꾼이 땅만 파먹고 살 수 없고 어부가 고기만 바라보고 살 수 없는
거 아니예요? 사람이 살면서 일에만 치여산다면 그건 불행이라구요.
사화나 이웃을 생각하는 것도 결국은 일이잖아요? 일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해요. 하지만 그것이 텅빈 마음의 공간을 채워 주지는 못한
다구요. 정신적으로 안식 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몸도 여유로워 지죠.
어떤 사람은 취미 활동을 얘기 하지만 그것도 정신적 여유가 없으면 모두
귀찮기만 하다구요."
"네 말이 틀리지는 않다만은..."
"위로의 말이라면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네요."
소운은 잠이 솔솔 쏟아지느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수도 없었다.
나오는 하품을 몰래 흘려내며 수정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회장님. 사적인 자리에서는 달리 부르면 안돼나요? 오빠라고 부르면
어때요? 아님 큰오빠라고 하던가? 너무 딱딱해서 싫어요."
"좋을 대로 해라. 내 생각에도 그게 낫겠다. 가족이면 가족답게 호칭을
사용해야지."
"그럼 오빠라고 부를께요. 물론 공석에서는 절대 아니구요. 오빠."
"응?"
"그거봐, 훨씬 부드럽잖아요. 오빠는 헛 눈 팔아 본적 있어요?"
"지금까지는 소신껏 살았다고 자부한다."
"정치적인 것 말고 이성적인 것 말이예요."
"..."
"언젠가 결혼한 선배언니 집에 놀로 갔다가 들은 얘긴데요. 그 언니가
이러더라구요. 가끔은 남편 이외의 남자를 생각 할 때가 있데요. 그냥 마음
적으로만요. 텔레비젼에 비치는 연예인을 보면 '멋있다. 잘났다. 저런
남자와 사귀어 봤으면...' 한데요. 길거리를 가다가도 멋진 남자와 눈길이
마주치거나 지나가는 모습을 봐도 그같은 생각이 날때가 있구요. 이건
어린 여학생들이 가수나 운동선수와 같은 대중 스타를 향해 목이 터져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과는 다르다구요. 이성적인 동경에서 우러나오는 경우죠.
어쩔 때는 남편과 성행를 하면서 머릿 속에는 달느 남자를 그려 본데요.
그러면 오르가즘을 훨씬 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정신적인 간통이고
부정한 생각이겠죠.
여자가 그러는데, 남자들은 오죽 하겠어요? 게다가 남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발산시키는데도 많구요. 남자들이 이런 말을 자주하도군요. '밥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 짜장면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라구요. 한 여자로는
만족 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을 본질적으로 하나라느 것에 만족하지 않는
존재예요. 이 점에 있어서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구요. 다만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와 질서라는
틀 때문에 내면의 욕구를 자제하는 것 뿐이죠. 여자보다는 남자가
자제력이 약하다는 차이점만 뺀다면 동물적 욕구는 똑같아요. 오빠 생각은
어때요?"
"부인하지는 않겠다."
"오빠라고 다르진 않겠죠.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분이라고는
하지만 수정이가 당장 이 자리에서 유혹한다면 어찌될까 몰라...?"
수정이 소운을 힐끗 쳐다보며 표정을 살피고는 당혹해하는 모습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우고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정치인 중에 이런 분이 있어요. 수 십년을 한결가이 한
지도자를 섬겨 왔는데, 모시는 분이 힘들면 자기가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
하면 자기가 더 고통스럽고, 기쁨도 슬픔도 항상 자기가 더 크고 많은
거예요. 간이고 쓸개고 갖다 바친 것은 이미 옛날 이고 더 이상 줄게
없어서 걱정을 할 정도 라구요. '네 목을 내놔라' 그러면 '아이구 여기
있습니다.'라고 바칠 사람이예요. 그런데 그 모시던 대상이 없어지면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어요? 낙이 없겠죠? 전 참 궁금해요. 만약에 죽도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이 나로부터 멀어 진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할까.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갈길을
찾아가게 되더라구요. 모르겠어요. 얼마나 진실된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죽도록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충성을 다한다.'라고 했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변신을 하더라구요. 왜, 그러잖아요? 가족 중에 누가
세상을 하직하면 슬퍼하는 남은 가족들한테 '산 사람은 다 살아가게
되어있다.'라고 위로하잖아요? 그 말이 진리인 것 같기는 한데... 인간의
마음이란게 워낙 변덕이 심해서 세상에서 이 사람이 최고라면 마음을 섞고
몸을 섞으면서도 세월이 지나면 '그게 아니었구나'한다든가 '저 쪽에 있는
떡이 더 커보이네'한다구요. 첫 눈에 반 했다느니 천생연분이니 하는게 일
순간적인 수가 허다 하거든요. 오빠는 끝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있어요? 나는 솔직히 자신 없어요. 하지만 지금 만큼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어요. 상대는 전혀 모르고 있는데, 미련둥이 처럼 저
혼자서만요. 매일을 애태워 바라만 보는 거죠. 이러는 수정이가 불쌍해
보이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 놓으면 되잖아? 뭐
때문에 감추고 있니? 그러면서 외롭다느니, 복이 없다느니, 됨박
팔자라느니 타령만 늘어놓니?"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막강한 임자가 버티고 있는 남자라구요.
전에도 한번 혼자서만 끙끙 앓다가 고백하려는 순간에 날아가 버린적도
있구요. 한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슬퍼했었는데, 또 이 모양이니..."
수정이 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소운은 앉아 있기가 딱했다. 뭐라고
말을 건내지도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 수정의 손에 쥐어주었다. 수정이
훌쩍 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수정이가 참 바보같죠?"
"아니야, 바보 같기는..."
"만약에 지은이 언니 말고 다른 여자가 나같은 경우처럼 오빠를
좋아한다면 오빠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글쎄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사실을 안다면 설득을 시켜야지."
"어떻게요?"
"어떻게냐구? 뭐, 더 좋은 사람을 찾아 보라고 해야지. 그 이상 뭐라고
하겠니?"
수정이의 훌쩍거림이 조금씩 커졌다. 코까지 막히는지 맹맹한 소리로 옆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선배는 완전히 맛이 갔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 데려다 놓았어."
"내일 아침까지 정신을 차릴수 있을까?"
소운은 수정이 동찬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넥타이를 풀어제끼고 답답함을 달랬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수정을 바라보며 무겁게 말했다.
"그건 왜?"
"글쎄요. 정신차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경험으로는 아침에도 어려울거다. 지금 상태로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거야."
그러자 수정이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너 동찬이를 사랑하니? 그래? 그러면 안돼.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사람이야. 미혜가 알면 난리가 난다구."
수정의 울음 소리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소운이 큰일 났다는 듯이
수정을 달랬다.
"뚝! 그만 그쳐. 누가 오겠다. 수정아, 정신 차려.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얼마든지 있어. 하필이면...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만
그치고 나 좀 봐라. 나 좀 보라니까? 수정아..."
수정의 울음이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는지 소우닝 수정을 일으켜 새우고 포근하게 감쌌다. 그렇게라도
진정을 시켜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정은 커녕 울음소리만 더욱
거칠어졌다.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울어라. 까짓꺼 실컷 울어라."
소운이 달래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등만 다독 거렸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수정이 조금 진정을 찾고 있었다. 여전히
수정의 등을 다독거리며 소운이 나즉하게 입을 열었다.
"수정아, 네 아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아. 하지만 동찬이는
안된다. 절대로... 내 말 알겠니?"
"오빠는 괜찮아요? 오빠를 사랑하는 건 괜찮냐구요."
소운이 깜짝 놀랬다.
"얘가 정말..."
"정선배는 아니예요."
"동찬이는 아니야?"
소운이 '휴'하고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정을 가슴에서
밀어내고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물었다.
"그럼 누구야?"
"예."
"그게 누구야?"
수정이 소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얘기할 수 없어요."
"그래? 얘기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수정이 다시 흐느끼고 있었다.
"그만해라. 지금도 눈이 퉁퉁 부었어. 내일 그 얼굴로 출근할래?"
수정이 갑자기 소운을 와락 끌어 안았다.
"오빠... 사랑해요."
소운이 갑자기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이 멍해짐을 느꼈다.
가슴이 마치 방앗간의 발동기처럼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수정의 몸에
얹혀있던 두 손의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기가 막혔다.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물로 범먹이 된 수정이의 볼이 자신의 얼굴을
비벼대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귓전에 대고 쏟아붓는 수정이의
사랑한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눈 앞에 알 수 없는 물체들이 어지럽게
오고 갔다. 그리고 심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눈을 감아 버렸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수정은 소운을 온 몸으로 끌어 안은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꿈이겠거니, 아니 꿈이어야만 한다고 소운은
생각했다. 소운이 맥이 풀린 두 팔을 올려 수정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수정은 잡았던 손에 더욱 힘을
가할 뿐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수정아, 이 바보야. 안돼. 누구 보다도 네가 잘 알잖아."
"..."
수정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소운만을 뜨겁게 끌어 안고 있었다.
"이러면 안돼.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이니? 우리 냉정해 지자."
수정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알아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 사랑하는 걸
어떻해요. 오빠를 너무너무 사랑하는걸..."
"나는 그렇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지은이 뿐이라구. 아니, 나도
너를 사랑해. 하지만 그건 식구로서 사랑하는 것 뿐이야."
"오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렇게 바라지도 않은게요.
지은이 언니도 저는 사랑해요. 결코 언니의 행복을 빼앗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내 마음까지 막는 건 너무 잔인해요. 그냥 이렇게 나 혼자서
오빠를 사랑 할 거예요. 저는 그것 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요."
"그냥 일순간의 감정이었겠니 하고 끝내. 이건 옳은 일이 아니야."
수정이 소운을 감고 있던 팔을 살며시 풀어 내더니 무릎을 꿇고 퉁퉁
부은 눈으로 소운을 애원하듯이 바라 보며 말했다.
"오빠, 내가 잘못했나봐.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나도 이러는
내가 너무 미워요. 하지만 사랑을 포기할 순 없다구요. 내 사람이 되어
달라는게 아니잖아요."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때 수정이 뭔가
결심을 한 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제가 불편하시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예요. SG를 더나겠어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빠를 바라 볼께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렇ㄹ게 오빠만을 사랑하며 지내겠어요."
소운이 벼락같이 화를 냈다.
"수정아! 못된 계집애 같으니라구. 네 맘대로 나가고 들어오고 그래?
네가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거야? 철딱서니가 없어도 분수가 있지.
SG의 귀신이 되었으면 되었지 절대로 못 나가! 알아 듣겠어?"
"하지만..."
수정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운이 다시 야단을 쳐 댔다.
"그치지 못하겠니? 아직도 나올 눈물이 남았어? 울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만 그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심스러운 애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딱하고 측은한 생각에 수정을 끌어 안았다.
"그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지은이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갖고 그런
과정을 겪다 보면 자연히 정리 되겠지. 마음이야 고통스럽겠지만... 제
말로는 변덕스러운게 인간의 마음이라 했으니 달라지겠지. 소운은 그러한
심정으로 수정을 달래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봐라."
"시간을 주세요. 오빠와 나 이렇게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말이예요. 지은의
언니의 십분지 일, 아니 백 분지 일만 주세요. 오빠는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저만 사랑할께요. 오빠, 제발 부탁이예요.
"..."
"젤대 무리하지 않을께요. 오빠와 지은이 언니를 방해하지도 않을께요.
단지, 이따금 제가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오빠를 가까이서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을 때 오빠를 찾을께요. 그때만 제에게 시간을 나눠 주세요."
"식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가 많잖니?"
"그건 둘만의 시간이 아니잖아요. 그것도 안되겠어요?"
"이 바보야..."
"그래요. 바보가 아니라 뭐래도 좋아요. 제발 그렇게만 해 주세요.
안돼요?"
"그런 허망한 사랑이 어디있어? 왜 그런 무모한 사랑을 하려고해? 이건
행복이 아니야. 엄청난 불행이라구. 그걸 모르겠니?"
"저한테의 불행은 오빠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잃게 되어 있잖니?"
"아니요? 제 마음 속에 남아있는 한 잃는 게 아니예요."
"알았다. 그렇게 할게. 하지만 행여나 내 마음이 너에게로 바뀔거라는
기대는 갖지 마라.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이성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지은이 뿐이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어. 내가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이야."
수정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터져 나오는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며
소운을 와락 끌어 안았다. 그리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오빠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러는 수정을 소운은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다. 수정의 감정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수정아. 그렇게 총명하고 의지가 강한 아이가 어쩌다가못된 덫에 걸려
버렸는지 모르겠구나. 수정이의 착하고 고운 마음을 사로잡을 사람이
그렇게도 없단 말이니?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거친척 했지만 따뜻하고 고운 마음씨를 갖고 있고
티 없이 맑고 순한 천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아이였다. 아무 것도 거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솔직함도 있었다. 소운은 괜스러 눈물이 났다.
'불쌍한 아이.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러다가 언젠가는 예쁜
학의 날개를 달고 꿈의 세께로 훨훨 날아가겠지.'
"오빠, 울어요?"
"..."
"미안해요. 제가 너무 괴롭게 했나봐."
소운이 수정의 부은 눈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 마음까지 울고 있다. 너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아이는 없을 거다.
이제 눈좀 붙여라. 얼굴이 말이 아니야. 꼭 물에 불어버린 모습이야.
나한테 예쁘게도 보여야할 것이 아니니?"
"오빠 손이 참 따뜻해요.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거예요. 지금은
저를 위해서 계시는 거예요. 그렇죠? 저 팔베개 좀 해주실래요?"
소운은 수정을 자리에 눕히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워 팔을 뻗었다. 그리고
평화스럽게잠들고 있는 수정을 지켜 보았다.
이른 아침, 소운이 동찬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옮겨 갔다.
"어, 형. 어떻게 된거예요?"
게슴치레한 얼굴을 하고는 동찬이 물었다. 아직도 지독한 술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뭐가 어떻게 되니? 아무 것도 생각 안나지?"
소운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근데 어디 갔다 왔어요?"
"수정이랑 있었어. 지금 씻고 있을거다."
"밤새 수정이랑 있었단 말이예요?"
"임마. 뭘 그런 눈으로 쳐다 봐?"
"수상하잖아? 야, 수정아! 빨리 들어와 봐."
"이 녀석이 근데... 얘기 좀 나눈 것 뿐이야."
"밤새도록 무슨 얘기를 나눠요? 설마 얘기만 나눴을라구."
수정이가 쭈빗거리며 들어왔다.
"쟤가 왜 그래? 너 얼굴이 왜 그래? 왜 그렇게 부었어?"
"누가 술에 약을 탔나봐. 전에는 아무리 술을 해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정선배는 괜찮아요?"
"이거 수상한데? 형, 기자 눈치를 간단하게 보는 건 아니겠지?"
"뭐가 수상해? 입닥치고 빨리 정신부터 차려. 네 녀석 몰골은 괜찮은 줄
아니?"
동찬이 소운의 하얀 와이셔츠 팔부분에 화장품이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소운을 슬쩍 바라보고는 콧 노래를 부르며 모른척 세면장으로
향했다.
17 전쟁은 끝나고
"입당원서는 얼마나 수거됐지?"
"오늘까지 95퍼센트를 웃 돌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만은 채우겠구나."
"당초 계획보다는 숫자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 정도만 해도 성공한 거야. 그동안 방해 공작이 좀 심했니?"
"이따가 회의 때 보고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알겠습니다. 좌석은 몇 개나 추가 할까요?"
"후보하고 김의원, L의원, N실장 이렇게 네 자리만 마련해. 그리고
수행원들은 들여 보내지 마라. 꼴보기 싫으니까."
"그래도 밖에다 세워 둘 수는 없잖습니까?"
"회의가 대외배로 진행되는 것이니까 밖에서 적당히 대기 하라고해.
젯밥에만 관심있는 자들이 많아. 빨리 교체하지 않고 뭐하는지 모르겠어.
그자들 한테 우리 내부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다. 김의원께도 말씀드린
사항이니까 그대로만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운과 성진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자료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여러 대의 고급승용차들이 남영동 미래청 중앙본부의 정문에
차례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성진이 승용차에서 내리는 낯 익은 몇 사람을
영접하고 사무실로 안내 했다. 성진은 소운의 지시대로 따라오는 수행원을
제지했다. 약간의 승강이가 벌어지자 김의원이 수행원들을 물리쳤다.
회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운이 사무실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 해
회의장으로 안내했다.
"곧바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 진행을 맡은 미래청 사무총장
김성진입니다."
성진이 삼십여 명의 참석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회의를
속개했다. 역할에 따라 집행부 및 15개 지부 대표자들의 소개와 경과보고
그리고 회의의 주제와 안건을 설명해 나갔다.
"안건처리를 위해 이소운 회장님께서 회의를 주재하겠습니다."
소운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단상으로 걸어 나갔다.
"아시는 바와 같이 8월 계획이 수련회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로
바뀌었습니다. 대규모 인파를 수용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고 소요경비도
만만치 않아서 당초의 계획을 바꾼 것입니다. 8.15광복절 기념행사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갖습니다. 이날은 미래청의 새로운 출발을 다지는
임시총회도 겸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결정을 해주셔야 할 것은
외부인사에 대한 영입입니다. 이미 각 지부에서는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만 기록 보존을 위해 이 시간의
절차를 밟는 것입니다. 그럼 안건 토의에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L후보를
고문으로 추대할까 합니다. 그리고 김의원을 명예회장으로 L의원과
N실장을 각각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래청의 정신에
합당한 인사를 추가로 자문위원에 위촉한 후에 자문위원단을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말썽의 소지를 없에기 위해 육만 회원
전원에게 입당원서를 제출토록 지시를 했고 오늘 현제 95퍼센트의
입당원서가 도착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안건에 대해 이의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의없습니다."
재청, 삼청이 들어왔다.
"더 이상 이의가 없습니까?"
그때 김의원이 손을 들고 소운을 바라보며 눈짓을 했다.
"죄송하지만 발언권을 드릴 수 없습니다."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알지만 저와 직접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부득이
양해를 구했으면 합니다만..."
소운이 성진을 불렀다. 그리고 뭐라고 귓속말을 주고 받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드릴 수 없습니다."
김의원이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고 말았다.
"이의가 없으면 박수로 통과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행사장에서 전체 회원들의 추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회읭가 끝나고 소운이 네명의 외부 인사를 회장실로 안내했다.
"이회장, 고맙소. 내 미래청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소."
L후보가 인사를 했다.
"별 말씀을요. 후보님과 미래청의 정서가 하나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운이 한쪽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김의원을 바라보고 말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만 의원님 의향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무엇을 맡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L의원님 하고도 상의를
드렸습니다. 지금 차차기소리만 들어도 닭살이 돋습니다.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지금부터 L의원님이 나서게 된다면
앞으로 더욱 심한 견제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김의원님께서
총대를 매셔야 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미래청의 위력이 막강해지자 차차기를 노리는 인사들이 압력을 행사하며
요직 참여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들의 의도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소운이 지목하고 있었던 L의원을 차차기 희망자중 유일하게
참여시킨 것이다. 그러면서 더 이상 현역의원의 참여는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못을 박아 버렸다.
"이미 결정을 내려 버렸으니 하는 수 없지. 이회장 의사를 따르도록
하겠네. 이사람아 몸도 좀 생각을 해야지. 입술이 그게 뭔가. 온통 부르터
가지고. 딱해서 볼수가 없구만."
"염려 마십시오. 이래뵈도 보통 강단이 아닙니다."
"그동안 지방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말을 들었소."
"예. 회원 확보가 만만치 않은데다 초기부터 강력히 밀어 붙이 필요도
있었구요. 독려차 세미나를 전국에 걸쳐 시행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치적 관계를 적절하게 감추어오다 보니 각 지방에 있는
시민단체의 협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세미나만해도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 대부분이거든요. 덕분에 좋은 인재들도 많이 발굴했고 정치적
오해도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는 몇 차례나 가졌소?"
"4월 19일 창립대회 직후부터 시작해서 8월 초까지 서른다섯 차례를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시간을 지방에서 보낼 수 밖에요."
"대단하구만. 자료 준비도 수월치 않을텐데..."
김의원이 나서려고 했다.
"사실은 이회장이 다른..."
소운이 황급히 김의원을 제지했다.
"김의원님이 자료준비를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김의원이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세미나 자료는 모두가 백여건의
연구자료를 가지고 있는 SG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SG의 존재를 끝까지
비밀로 해 달라는 소운의 요구를 김의원이 깜박했던 것이다.
소운은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세미나는 선거가
공고되기 전까지앞으로도 계속 개최하기로 했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의
다양한 봉사활동에 앞장 선다는 것, 회원은 확보 가능한 수까지 늘려
나가는 것, 당적을 확보하고 있는 한 정치 활동에도 적극 개입한다는 것,
각 지역 별로 독자적 정책개발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 등등에서후보자
유세지원 계획에 이르기 까지 세세한 설명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당이나 개인의 사조직으로 인식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그러실 리야 없겠지만 누차 강조드리는 대로 구태의
선거형태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후보님이나 그 외의
여러분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운을 받고 있습니다만 선거라는 특수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소요되는 비용에 불과합니다. 선거가 아니면 조직 관리비는
저희들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김의원이 끼어들었다.
"어허, 이회장..."
"아닙니다. 재차 삼차라도 이 부분만큼은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희들은 말그대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이 추구하는 이상에 절대로 때를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알았소. 명심하지."
다음날 정오, 잠실 주경기장에는 미래청이 주관하는 광복절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국의 모든 언론기관이 이 광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동찬과 수정이 연단 가까운 곳에서 소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한 광경이다. 엄청난 열기야."
"정선배, 회장님 곁으로 좀더 가까이 갑시다."
"너무 가까우면 형이 부담스러워 한다구."
"그래도 가까이서 보고싶어. 얼마나 자랑스러워?"
"알았어. 저기 형이 앉아있는 맨 앞줄에서 세 번째칸까지만 가자."
"오케이."
기념식이 끝나고 임시총회가 속개되었다. 소운이 연단에 올라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기수가 들고온 회기를 굳게 쥐고 힘차게
흔들었다. 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높은 하늘로
울려 퍼졌다.
이어서 간단한 의식이 끝나고 외부인사 영입에 대한 추인이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한나 하나의 순서가 끝날 때 마다 우레 와 같은
박수와 우렁찬 함성이 회장을 떠나갈 듯이 터져나왔다. 회장과 명예회장의
인사말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L고문이 연단에 올라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청년들의 함성에 크게 고무된 듯 가늘게 떠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끝냈다.
본격적인 선거지원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사실상 청년 선거 저위대 출범 식같은 분위기라구? 엄청난 규모의
사조직은 또 뭐야? 베일에 쌓인 관리체계? 이거 별 얘기가 다 나오는 군."
SG연구소에 회원들이 모여 신문을 들춰 보고 있었다.
"이소운 그는 누구인가? 어, 이건 수정이가 쓴거잖아?"
주원이 수정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썼어요. 한번 읽어 보세요. 마음에 쏙들걸? 아니야, 그거
이리줘봐. 지은 언니가 먼저 읽어 봐."
"야, 누구 먼저면 어떠니?"
"그래도..."
수정이 주원에게 신문을 뺏어 지은에게 건넸다. 읽어 내려가던 지은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마음에 들어?"
"그래, 자세히도 썼다.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다 알고..."
"이 정도도 모르고 어떻게 한 식구라고 할 수 있어?"
지은이 수정을 꼭 껴안았다.
"그래, 예쁘다. 우리 수정이..."
성진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야, 이건 좀 심했다. 이거봐. '엄청난 조직관리비 자금출처 의혹'이라니
벌써부터 뒤통수를 치고 나오는 걸?"
"그 정도는 예상을 했어야지.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검은 돈이 유입된
것도 아니고 운영비의 절반 이상은 회비로 운영되니까. 나머지도 찬조를
받은 걸로 하면 그만이지. 전체를 다 합해도 두 차례의 대규모 행사비가
태반이고 그것도 기업체의 협찬을 받았어. 실제 찬조비는 전체비용에
비하면 조금밖에 안돼. 까짓거 공개하라면 공개해도 무방하다구. 오히려
깜짝들 놀랄걸? 다른 당에서 씹기 시작한거야. 앞으로도 계속해서
씹힐텐데 벌써부터 놀라면 어떻하냐?"
동찬의 말이었다.
"너도 취재했잖아? 네가 쓴건 어디있어?"
"4면 하단에 있잖아."
"동기, 목적, 성향, 그런거네?"
"그걸 알려야 씹히는 걸 희석시키지."
오랜만에 나온 미혜가 읽어보고는 말했다.
"꼭 우리 얘기를 쓴 것 같다. 그지..."
"그게 그거지. 뭐, 다른거 있어?"
"그건 그래. 근데, 형은 여기 언제 오는 거야?"
"오늘 올 수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아직 아무 연락이 없어."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형이다."
지은이 수화기를 집으려다 수정이와 머리가 부딪쳤다. 수정이도 반가운
나머지 얼떨결에 수화기로 손이 갔던 것이다.
"아이 아파, 언니가 받아.'
수정이 머리를 문지르며 수화기를 양보했다.
"형이야? 나예요. 지은이... 올 수 있어?... 정말?... 언제쯤 오는데요?...
알았어요.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와.'
지은이 싱글 벙글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오신데요? 언제요?"
수정이 지은이 만큼이나 좋아했다.
"지금 막 후보님 사무실에서 김의원하고 자문위원들을만나고 나오는
길이래. 곧 고착하겠지. 수정아. 거기 봉투좀 집어줘."
"이거 말이야? 이게 뭔데?"
"세미나 자료."
"세미나를 또 가신데? 큰일이다. 그래 가지고 몸이 견디시겠어?"
"글세 말이다. 선거일이 공고될 때까지 계속이란다."
수정이 침울해졌다. 행주산성 이후로 단 한번도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시간은 커녕 어제 행사장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최근들어 소운이 그리워지고 있었는데, 또 다시 지방행이라니 낙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까지 쫓아갔다가는 부담만 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수정은 슬그머니 연구실을
나와 건물 밖 가로수에 몸을 기댔다. 소우닝 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지
때문이었다.
소운의 차가 주차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소운의 모습이
나타났다.
"수정아. 왜 나와 있니?"
"슈퍼에 들렸다 오는 길이예요. 너무 오래간만이네요."
"그렇구나. 그래, 그동안 잘 있었니? 너무 예뻐졌구나."
"예뻐졌어요? 빈말이래도 고맙네요. 근데, 오빠 또 지방가요?"
"그래, 세미나 일정이 끝날려면 아직 멀었어."
계단을 올라가며 소운이 대답했다. 뒤를 따르던 수정이 다시 소운을
불렀다.
"오빠, 저 있잖아요..."
소운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머뭇거리고 서있는 수정을 바라보았다.
"얘기해라."
"저기..."
"어서 얘기해. 시간이 필요하니?"
"..."
"어허, 또 눈물... 그러지 말고 얘기해봐."
"얘기해도 안되잖아요. 또 지방에 가시면 언제..."
"오늘은 안되고 내일 보자. 내가 시간되는 대로 호출을 할게. 그럼 됐지?
자, 어서 눈물닦고 들어가자."
수정이 돌아서 눈물을 훔쳐내고는 소운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다들 오래간 만이구나."
"형, 어서오세요."
모든 식구들이 차례로 소운을 얼싸 안았다. 마치 개선 장군이나 들어온
것 같았다. 상호가 소운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구나."
"그런 셈이죠. 선배님이 많이 도와 주셨어요."
"내가 도와준게 뭐가 있어? 그런 턱없는 공치사는 싫다."
다정한 대화들이 오가는 도안 수정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소운이 그
보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수정이가 막내라고 여전히 차 심부름만 시키는 모양이구나."
"아니예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예요. 또 다들 제가 차를 만들어야 제
맛이 난데요."
"부려 먹으려고 없는 소리를 하는 게지."
동찬이 이죽거리고 나섰다.
"수정이는 신문사 그만두고 찻 집이나 하면 잘하겠다. 차맛도
그만이지만 찻잔을 들면 아주 다소곳해 지거든?"
"그런 말이 어딨냐? 서로가 존중해 줄줄 알아야지."
소운이 가볍게 야단을 쳤다. 상호가 한마디 거들고는 얘기거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어떻게 잘 될 것 같은가?"
"아직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죠. 후보 측에서 다양한
전략을 마련하고 잇으니까 좀더 두고 봐야죠."
"여야간에 이슈가 확연하게 갈라지고 있어. 야당은 정부여당의 실정에
초점을 맞추겠지. 특히 중소기업의 대량 도산을 근거로 경제 정책의
실패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어. 결국 무분별한 개혁정책이 빚은
실정이라고 개혁의 한계를 물고 늘어지겠지. 안정 희구 세력을 겨냥해서
보수경쟁을 벌일거구. 이 정도가 주요 공격 재료가 되겠지만 그 외에 뭐가
있을까? 내 생각에는 별게 없을 것 같은데..."
동찬이 의견을 냈다.
"특정지역을 의식하는 이슈는 있겠죠. 예를 들자면 역사 바로세우기가
정치보복적 측면이 강하다든가, 개혁이 특정지역 길들이기에
사용되었다든가. 지역정서를 유리한 국면으로 자극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TK지역은 여전한가?"
"아직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감형조치를 취한 것이구요. 좀
부드럽게 순화시켜보자는 거죠. 그것도 후보가 건의 하는 형식으로 했어요.
반응이 곧 나오겠죠."
"글세, 그게 얼마나 작용할라구? 워낙 골이 깊어서 말이야. 아예
석방되기 전에는..."
"석방문제도 거론이 되고 있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이 많아요. 벌써
두차례나 감형을 한데다 형기도 일년 반밖에 안지났고, 선전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게 뻔하니 국민여론도 의식해야 한구요. 석방조건을 놓고
협상이 시도되고 있다는 말도 있어요. 노씨는 건강이 안좋은 상태니까
신병치료자 외국으로 나가는 형식으로 처리하고 전씨에게는 형평성을
고려해서 노씨와 함께 석방은 시켜주되 주거는 제한하는 조건으로 낙향을
유도 한다는 겁니다. 선거도 선거지만 통치권자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부담으로 남아 있는 문제니까 어차피 임기내에 설거지를 할 거라면 이쯤에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석방이야 시기가 문제였지 당초부터 정해진 수순이 아닌가? 그 정도야
알만한 사람은 다 알거라구."
"어쨋든 그 카드 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여당쪽 이슈가 야당보다는 무게가 있을 것 같아.
세대교체론이나 3김 시대 청산론이 주를 이루겠지."
" 또 하나가 있어요. 이게 자칫하면 지역을 자극할 소지는 있는데,
중부권 역할론이라는 거지요. 예컨대 영호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휴지기가 필여하다든가, 또 화해를 시킬 수 있는 중개자가
필요하다 든가, 이런 논리를 펴는 겁니다. 사실 너무한 지역에서 권력을
독점하다 모니까 다른 지역이 소외된 부분이 상당하거든요. 경제적 측면은
특히 그렇고 인사 정책에서도 피해를 많이 받아온게 사실아닙니까? 그게
자그만치 35년이라구요.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불공평한 대접을 받아
왔으니 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호남지역만이 피해자는 아니지."
"당연하죠. 정도의 차이가 있는 뿐이라구요. 그러니까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되는 겁니다. 중부권 역할론이 언젠가도 제기된 적이 있었어요.
선거는 아니예지만 아마 지난번 대선전에 여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본선에서는 전혀 언급이 될 수 없었죠."
가만히 듣고 있던 주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대교체론과 중부권 역할론이 조화만 잘 되면 상당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겠는데요?"
"문제는 지역 할거주의가 첨예하게 되살아나면 이것도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사실 지역감정이 일어난다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돼. 특히
야당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해 진다구. 그야말로 나눠먹기 식이 될테니까.
그렇게 되면 숫자 싸움밖에 안되거든.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들이 똑바로만
튕기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지할 수 있을거야. 야당이 그동안 실패한
이유가 그 계산착오였어.지역간의 숫적 차이가 절반도 넘게 나고 있는데,
단순하게 부족분을 수도권에서 메꾸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자가당착적인
계산을 했었다구. 설마하니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지은 않겠지. 하긴 야권
통합이라는 재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 그게 얼마나 허구적인
세력이었는지는 뚜껑을 연 다은에야 알게 되었거든. 당시 지역주의가
첨예한 상황이었는도 지역 맹주가 갖는 위력을 우습게 알았던 거지."
"지난 번에 우리가 분석했을 따도 그부분을 지적했었잖아. 엄청난
인구격차가 승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거라구."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를 가정한 거지. 하여튼 지난번
대선때 처럼 이번에도 그게 절대적인 변수가 될게 틀립없어. 지난
4.11총선을 봐라. 나눠먹기로 끝나고 말았잖아? 지역주의 징후가
농후하다구."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대화, 항상 그렇듯이 이들의 대화는 시공을
초월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세워 자리를 마련해도 대화의 재료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누군가 먼저 중단시키기 전에는...
"너무 늦었어. 그만들하지."
지은이의 제안이었다. 소운을 생각하면 흐르는 시간이 너무나 아깝기만
했다. 결국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모두가 연구실을 빠져나가고 소운과
지은만이 남았다.
"형, 너무 오랸만에 보는 것 같다. 그지."
"정말이야. 너무 바빴다. 보고 싶었니?"
"그걸 말이라구 해요? 형은 안보고 싶었던 모양이네?"
"그런 소리하지만. 그러니 매일 전화했잖니?"
"어떻하지?"
"뭘?"
"어디로 갈꺼냐구요."
"글세, 어디로 갈까? 일단 나가자."
두 사람은 연구실을 나와 소운의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소운은 그전처럼 자유롭지가 못했다. 몇 차례에 걸쳐 매스컴에 오르
내리다 보니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피로를 풀기 위해
한적하게 시간을 갖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곱든 밉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지은을 데리고 갈데가
마땅치 않았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소운이
갑자기 차를 멈추었다.
"잠깐만 기다려. 전화 좀 하고 올게."
바쁘게 전화를 하고 돌아와 차를 오던 길로 돌렸다.
"차를 왜 돌려요? 어디로 갈려구?"
"김의원 아지트 알지? 그 호텔로 간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텐데 괜찮겠어요?"
"거기는 괜찮아. 비상 출입구가 있거든? 김의원 조카보고 나와 있으라고
했어. 그 사람이 안내할거야. 방도 그 사람 이름으로 예약해 놓겠데."
"참 편리하네. 그나저나 휴대폰 하나 장만해요. 불편하잖아? 차도 조금
나은 걸로 바꾸고."
"김의원도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혹시 노랭이
아니냐고 묻더라. 휴대폰은 장만해야겠어. 하지만 차는 이대로 쓸거야.
멀쩡한 걸 왜 바꾸니?"
"한 단계만 높히란 말이야. 이게 뭐야? 아니야 아예 내가 사놓고 말거야.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바꿀 위인이 아니지."
"그럴 필요 없다니까."
"듣기 싫어. 이번에는 내 고집대로 할거야."
소운의 차가 호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니
저쪽에서 김의원의 조카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김의원의 방과 맞은 편에 있는 방이었다.
"김진규씨. 이거 의원님과 마주시는 건 아닙니까?"
"걱정 마십시오. 오늘하고 내일은 안오십니다. 보시면 어떻습니까? 남도
아닌데... 포도주를 갖다 놓았습니다. 남도 아닌데... 포도주를 갖다
놓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서비스하는 겁니다. 앞으로 잘 봐달라구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참, 숙박비도 지불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가실 때 불편할 것 같아서요. 아듬에 기회있응 때 개인적으로
청구를 하겠습니다."
모처럼의 단촐한 시간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쇼파에 앉아 포도주를 따랐다. 상당히 오래된 백포도주였다. 잔을
부딪혀 건배를 나누고 지은이 소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얼굴 구멍나겠다."
"세미나다니면 한참 있어야 보게 될텐데 실컷 봐 둬야지."
"한참이래야 두 달 정도야."
"그것 뿐이 아니잖아. 그리고 나면 선거 일정인데..."
"하긴 그렇구나. 나도 실컷 봐야 겠는걸?"
그렇게 눈을 마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 선거 끝나면 뭐할거예요?"
"당분간 쉬어야지. 여행도 다니고 책고 읽고... 하고 싶은 게 많아."
"후보쪽에서는 무슨 얘기 없었어요?"
"너 뭘 기대하고 있니?"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중책을 맡기겠다고 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양했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
소운이 쇼파에소 일어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실로 향했다.
"우리 합치는 날짜는 생각해 봤어요?"
"아직... 하지만 늦어도 초봄 쯤에 해치우는 게 좋겠어. 뭐하니? 그러고
있을꺼야?"
그러자 지은도 몸에 걸친 껍질을 귀찮다는 듯이 벗어 제꼈다. 그리고
소운이 먼저 들어간 욕실로 몸을 집어 넣었다. 두 사람은 습관철머 서로의
몸뚱이에 비누거품을 일으키며 손장난을 놀았다. 그러다가는 금방 한
덩어리가 되어 거친 호흡을 교환했다. 한동안의 밀회가 끝나고 욕실을
나와 친대에 누웠다. 다시금 온몸으로 나누는 사랑의 속삭임이 계속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나서 땀에 흠뻑 젖어버린 몸뚱이를 애써 떨구고는 다시
어우러져 샤워를 마친다. 언제나와 같이 정해진 식순처럼 그렇게 두사람의
사랑 행각은 끝이 났다.
침대로 돌아와 지은이 소운의 품에 얼굴을 묻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소운은 수정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그 아이를 만나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일상의 대화처럼 항상 그래왔던 행동처럼은 어려울 것 같았다.
수정이의 감정을 알고 있고 그 아이가 어떤 심리적 상태로 자신을 대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소운도 잠이 들어버렸다.
지은이 소운을 흔들어 깨웠다.
"형, 시간이 너무 지났어요. 그만 일어나요."
"상과없어. 오늘 아침에는 중요한 일이 없으니까. 전화기나 밀어줘."
소운이 성진을 찾아 일정을 확인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잤니? 이리와서 앉아봐."
소운이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넸다.
"지난번에 영숙이한테 얘기는 했다만 이 친구를 영숙이와 연결을
시켜줘. 이대로 두면 동찬이도 힘들고 영숙이도 힘들어. 그러니까 우리가
나서서 두 사람 문제를 해결해야 겠어. 대부 노릇 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영숙씨가 만나기는 하겠대요?"
"거절하지는 않았어. 마음 불편하지 않게 적당히 손을 써봐."
"알았어요."
소운이 세면을 하고 나와 옷을 챙겨입고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지은을 바라보고 말했다.
"수정이 잘 보살펴 줘라.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거야."
지은이 쇼파로 내려앉아 눈을 말똥거리며 대꾸를 했다.
"참 이상해."
"뭐가 이상해?"
"수정이가 형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예사롭지가 않다는 생각이 번뜩
든다구요. 형을 나보다 더 걱정 해 주거든?"
"그게 뭐가 이상해?"
"여자한테는 이상한 직감이란게 있어. 형이 수정이를 걱정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난건데... 아니야. 그만두지 뭐."
"우리 사이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니?"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면 어쩔래?"
"그거야 어쩔 수 없은 거지. 그렇다고 형을 빼앗기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야. 괜한 생각하지 말고 잘 보살펴줘."
"좀 침울해 하는 것 같기는 해. 그전 보다 말수도 적어졌고 장난도 잘
안쳐. 그전의 수정이 아니라구. 달라지긴 확실히 달라졌는데..."
"괜히 심문하듯이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마라. 내버려 두면 고쳐지는
병을 앓고 잇으니까."
"형은 알고 있구나? 그렇죠? 얘기해 줄 수 없어요? 그래야 보살피는데
도운이 되지."
"모르는 척 하고 그냥 넘어가라. 네가 안다고 해서 수정이한테 도움이
될 문제가 아니야."
"걱정말아요. 나도 아로 있으니까. 형을 한번 떠본 것 뿐이야."
"알고 있어? 뭐를 아는데?"
"형 때문이잖아? 수정이가 형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구. 어제도 형이
온다니까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 밖에 나가서 형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형이 말을 안해도 잘 해주려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수정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역시 지은이는 천사다."
"보자고 하면 피하지 말고 만나주세요. 그렇다고 진하게 노는 것까지
허락하는 건 아니예요."
소운이 기특하다는 듯이 지은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지은이 소운의
무릎위에 폴짝 뛰어 앉으며 말했다.
"걱정말아요. 그런데 우리 이제 언제나 만나요?"
"그래도 돼요? 하지만 참을께요. 일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이제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지은이도 알고 있으니 수정이 마음을
바로잡기는 휠씬 쉬워진 것이다. 두사람은 예의 비상 출입문을 통해
호텔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소운은 미래청으로 지은은 연구소로 각가
헤어졌다.
사무실에 도착한 소운은 성진을 불러 오후 일정을 조정토록 지시했다.
아무래도 수정이를 만나려면 중요하지 않은 한 두건의 일정을 취소해야만
가능했다.
"어느 걸 빼죠? 다들 그렇고 그렇데..."
"어디 좀 보자. 여기 당관계자들을 빼버리지. 만나봐야 뻔할거야. 자리
얘기나 꺼내겠지."
"의원들 말입니까?"
"그래. 적당히 다음으로 미뤄 놔. 어차피 내일 지방으로 떠나고 나면
거기까지야 안찾아오겠지."
"제가 귀찮아 죽겠어요. 저보고 손을 써달라고 야단이라구요. 한 사람은
뭐라는지 아세요? 회장님께 고급 승용차를 제공하겠대요. 차를 보니까
형편없이 안 어울리더래나?"
"어제 오늘 왠 차 얘기가 계속 나오냐? 그러자 들이 오면 귓 방맹이를
올려 버려. 뒷 일은 내가 책임질테니까."
"어련 하시겠습니까. 그럼 이 세건을 빼버리죠. 시간도 마지막에 나란히
잡혀 있네요."
"잘됐구나. 됐다. 그만 나가봐라. 그리고 1번 전화는 내방으로
고정시켜놔라. 긴히 통화할 데가 있으니까."
소운은 부지런히 수정이를 호출했다. 잠시 후 전화벨이 울렸다.
"오빠, 수정이예요."
"그래, 6시에 보자. 어디서 볼까?"
"글쎄요? 좀 멀리 나가도 되요?"
"너무 멀리는 곤란하지."
"그렇게 먼 곳은 아니예요. 왕복으로 세시간 정돈데..."
"아는데가 있으면 그렇게 하자."
"제가 시간 맞춰서 사무실로 갈께요. 형 차는 놔두고 제 차로 가요."
소운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몸을 깊숙히 집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붙였다. 다행히 오늘은 바깥 약속이 없고 찾아오는 면담객만 만나면
되었다.
시계가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소운은 옷걸이에 걸려있는 상의를 벗어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30미터 쯤 전방에 수정의 빨간 색 승용차가 보였다.
주위를 살피며 다가가 잽싸게 몸을 실었다.
"가자. 이거 스타가 된 기분이다. 행인들 눈치까지 봐야하니 원. 어디로
갈꺼니?"
"장흥으로요. 괜찮죠? 거기 가면 친구 카페가 있어요. 유원지 상류에다
멋진 돌 집을 짓고 아베크족을 기다리고 있어요. 밤이라 경치는 볼 수
없지만 분위기는 그만이예요."
"그러니? 아주 기대가 큰걸?"
"어제는 재미있었어요?"
"뭐가?"
"지은이 언니랑요."
"그래 워낙 오래간만에 만났잖니?"
"언니가 무척 좋았겠어요. 나도 언니 만큼이나 즐거울라나 모르겠다."
수정이 카세트에 테잎을 끼워 넣고 스위치를 돌렸다. 잔잔하게 흐르는
고전음악으 들으며 장흥유원지에 도착했다. 수정이의 손에 이끌려 카페로
들어섰다.
"진희야. 나냐 수정이..."
"어머,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이리와 자리를 마련해 놓았어."
홀을 반바퀴쯤 돌아 칸막이가 따로 준비된 아늑한 별실로 인도 되었다.
벽에는 이름 모를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소담하게 걸려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아요."
"아참, 인사드려. 우리 오빠야. 흔히 말하는 거시기 오빠지."
인사를 나누고 나자 금방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았다.
"영광이예요. 이런 곳에서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만나게 될줄이야. 우리
최수정 기자님 덕분이네요."
"얘, 무슨 인사가 그렇게 길어? 가서 먹을 거나 가져 와. 오빠 김치
볶음밥 어때요?"
"그거 좋지. 이런 곳에서도 그런 걸 파는 구나."
"그러믄요? 없는게 없어요. 그걸로 가져다 드릴께요. 물론 술도
곁들어야죠?"
"아니야. 그냥 음료수나 갖다줘. 운전을 해야 하니까."
"오늘 갈꺼니? 안돼. 오랜간 만에 와 가지고 그냥 가버리면 어떻하니?
방도 깨끗이 치워 놓았는데..."
"잔말말고 밥이나 가져와."
수정은 턱을 고이고는 말없이 소운을 바라모았다. 소운의 불편한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정아 그렇게 쳐다 보고 있으니까 쑥스럽다."
"그렇게 쑥스러워요? 바라보고 있지 않으려면 뭐하러 마주 보고 있어요?
제가 오빠 옆으로 옮길께요."
수정은 소운의 곁에 나란히 않아 소운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였다.
"아이 좋아라. 너무 행복해 지는 것 같아."
소운이 클라스를 들고 목을 축였다. 그저 수정이 하는 냥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음식이 놓여졌다.
"두 사람 너무 보기 좋다. 계집애, 오빠 하지만지. 아깝다."
"너, 끼어들 생각 아예하지마? 나는 일분 일초가 아까운 사람이라구."
"요걸 친구라고... 그러지 말고 식사하는 동안만 끼워 주면 안되겠니?"
"요때 만이야. 식사 끝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식사가 계속되는 동안 두 여자의 수다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수정의
눈길은 소운의 손놀림 그리고 음식을 오물거리는 입모양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얘, 나 좀 처다보고 얘기해라. 정말 너무한다."
"식사 끝났어. 빈 그릇이나 들고 어서 일어나."
수정은 다시 소운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소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소운이 시계를 들여다
보는 것을 느낀 수정이 나즈막히 입을 열었다.
"가야 할 시간이죠?"
처량맞은 목소리가 소운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서운한
표정이었다.
"그렇죠? 가야 하죠?"
"조금 더 있어도 돼. 그렇게 내가 좋으니?"
"아무 말 말아요. 그냥 이대로만 있어요.'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이제 소운이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 가자."
"진짜로 가야 되요?"
"그래. 이제 일어나야 해. 다음에 다시..."
"다음에 언제요? 지방 가시고, 선거 시작되고, 그러면 몇 달이 흘러
버리는데..."
소운이 수정의 등을 토닥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넸다.
"많이 늦어졌어."
"부탁이 있어요. 안 들어주셔도 되는 부탁이예요."
"뭔데?"
"..."
"왜 그렇게 나약해 졌니? 울음 그쳐. 그리고 부탁이 뭔지 말해."
"오늘 븜만 여기 있으면 안되요? 안되겠죠? 그렇죠?"
"수정아... 이러면 여러 사람이 고통스럽게 돼. 착한 수정이가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일어나자."
"키, 여기있어요. 너는 여기서 쉬었다 갈께요."
"이러지마 수정아. 이러는게 무슨 소용이 있어?"
"보내는 연습을 할께요. 헤어지는 연습 말이예요. 서울 가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오빠를 모내는게 싫을거예요."
"수정아..."
소운은 수정을 와락 껴안았다. 뭄을 떨며 흐느끼는 수정을 꼭 끌어안은
소운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상황을 본 친구가 두 사람을
내실로 안내했다.
소운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토록 가엽기만한 수정이를 그냥 두고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과로운들 수정이의 고통마 하겠나
싶었다. 수정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손길이 닿으면 닿는 대로
입술이 다가오면 그러는 대로 수정이 하는 양을 정성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다가 또 다시 기나긴 포옹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흐느끼다 지쳤는지 수정의 떨리던 어깨가 평온해 지고
슬픈 숨소리도 고요해졌다. 소운의 품속에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소운은 수정을 힘주어 꼭 껴안고 나서는 살며시 팔을 풀었다. 그리고 조심
조심 수정을 눕혔다. 헬쓱해진 수정의 얼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다 다뜻한
호흡을 담아 수정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안스러운 감정을
억누른 채 방을 빠져 나왔다.
이슬 가득한 새벽 산 길을 내려오며 수정이 잠들어 있는 카페를 몇
차례나 올려다 보았다. 무거운 발검음이 자꾸만 멈춰지려는 충동을 느꼈다.
또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자 않았다. 울고 있을
수정의 얼굴 만이 눈 앞에 어른거릴 뿐이었다.
선거가 시작되었나 싶더니 어느 새 투표일이 다가왔다. 항상 그렇듯이
산거는 마치 저주받은 악위들의 전쟁터와 같다. 다는 아니지만 난장판이
되고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흔한일이었다. 술수, 음모, 협박, 폭력, 폴로,
흑색선전, 유언비어 등등 건전한 사회에서는 죄악으로 치부되는 온갖
형태의 추한 모습들이 연출된다. 권력을 위한 이전 투구는 결코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거짓과 탐욕을 위한 전쟁이다. 적어도 우리가
겪어온 선거는 모드가 추악한 전쟁이었다.
상처뿐인 영광, 찢겨진 승리를 자랑스럽게 거머쥐고 나면 더럽고
추하기만 했던 그동안의 경쟁은 한낮 무용담이 되어 버린다. 반성이나
각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사과나 단죄를 촉구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모든 것을 시간 속에 묻어 버린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이 열리면 더러운 전쟁은 관례처럼 반복된다.
우려했던 혼탁, 걱정스러웠던 과열 그리고 반도의 남녘을 갈갈이 찢어
놓는 땅 따먹기가 엄청난 후유증을 예고한 채 과정이 끝나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시대의 종말이 될지 이상의 무덤이 될지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결과만을 숨죽여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비행기표 구했니?"
"예, 내일 오후 세시 표예요."
"그럼 아침 일찍 투표를 끝내고 공항에서 만나자. 가능하면 한 사람도
빠지지 마라. 가서 한 열흘 푹 쉬었다가 오자."
"미래청은 어떻하구요?"
"서울시 지부장 한테 모든 것을 위임해 놓았다."
"그런데 결과를 보고 떠나도 될걸 무엇 때문에 미리 떠나요?"
"가봐야 같은 땅덩어리야. 거기서 조용히 TV나 지켜보자구. 여기
있다가는 온갖 등살에 남아나지 못해. 후보쪽하고도 양해가 되었어. 나냐
항상 내 맘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냐? 성진이 어디갔니?"
"저 여기 있어요."
"디스켓은 한 군데로 모았지?"
"예. 쌍그리 정리했어요. 분량이 보통이 아니예요."
"회원 관리 현황만 남겨놓고 모두 소각해 버려라."
"저쪽에 보고는 안합니까?"
"그럴 필요 없어.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고. 이젠 자유다."
"야호!"
"수정이는 뭐가 그렇게 좋으니?"
"오빠가 자유면 나도 자유거든요. 눈치 보실 것 없어요. 지은 언니 잠깐
나갔가든요?"
"나가긴 어딜 나가니? 여기 있다. 더 이상 너 자유스러운거 용납못해.
남의 밥에 재 뿌리는 심보도 용납 못하고."
"언니야..."
"알았어. 그럼 적당히 자유를 즐기는 거야. 약속할 수 있지?"
"고마워. 약속할게. 근데, 그러다가 오빠를 나한테 뺏겨 버리면
어떻하지?"
"자신있으면 뺏어봐."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는거야?"
"정선배는 신경쓸거 없어. 미혜언니 한테나 신경써. 지은 언니, 영숙이
언니도 같이 가자. 나 그 언니 순애보에 반했거든?"
"요 여우야, 그렇지 않아도 준비했어."
"챙길 것 미리 챙겨 놓고 디스켓은 한데 모아서 영숙이 가게에 갖다
놔라. 보니까 작은 금고 까지 들여 놓으셨더구나. 자정이다 다들 나가자."
"오늘 영숙이 어머니 떼 돈 버시겠네."
"동찬씨가 산다면서?"
다음닐 아침, SG일행은 투표를 하기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미리 부재자
투표를 해버린 수정이 소운을 따라 투표장으로 향했다.
"오빠, 기분이 어때요?"
"너하고 있으면 마음이 너누나 평화로워진다."
"그게 아니네요. 투표를 앞둔 기분이 어떠냐구요?"
"이런 헛 짚었구나. 그냥 덤덤하다."
수정이 소운의 허리를 감싸안고 발 장난을 놀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니?'
"그러믄요.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과 생각지도 못했던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새가 된 기분이예요.
날아갈 것 만 같다구요. 언니한테는 비밀이예요? 질투하면 어렵게 얻은
자유를 뺏기거든요."
"요 맹꽁이 같으니라구."
소운이 수정의 머리를 콕 쥐어 박았다.
투표를 마친 소운은 수정을 데리고 곧장 공항으로 달렸다. 시간이
충분했지만 수정이 사랑을 고백했던 행주산성 아래 음식점엘 가보고
싶었다. 어차피 점심도 먹어야 했다.
"수정아, 이 집 생각나니?"
"오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얼마나 애를
태웠느지 아세요? 그날은 내 생애중 가장 극적인 날이었어요."
"극적이긴 나도 마찬가지다. 수정이가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었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아직도 오빠를 사랑하는 수정이가 부담스러워요?"
"지금은 아니다. 항상 우리 수정이를 행복하게 해줄 방법만 생각하고
있다."
"정말이세요? 영원한 행복은 아니겠죠? 그 몫은 내것이 아닐테니까."
"그래. 하지만 순간 순간이라도 행복해 하는 모습만 보고싶어."
"장흥 갔을 때 오빠가 없어진걸 알고는 하루종일 울었다고요. 내가 욕심
부린게 밉고 오빠를 힘들게 한게 미웠어요. 그냥 잠들어 버린건 더욱
미웠구요. 그날은 수정이가 드릴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근데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뜻을 이루고 말거예요. 이건 욕심이
아니라구요. 지은이 언니가 참 고마워요. 너무 많이 의지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언니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털어놓고 말았어요.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더리구요. 제가 오빠를 뺏어 갈꺼라고 했더니
어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네가 오빠를 뺏어 가기 전에 오빠가 먼저
나를 데려간다.'라고 했어요. 언니는 오빠를 너무나 신뢰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졌다는 생각이 퍼뜩들더라구요. 언니의 당당한 자신감 때문에 제가
오빠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거죠. 오빠 사랑해요."
소운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수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소운과 수정은 식사와 함께 막거리 한통을 걸게 들이키고는 공하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더 가족들과 다음 날 세벽, SG일행을 두 대의
짚차에 나누어 타고 한라산 중턱으로 올랐다. 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일출을 기다렸다.
"오빠. 눈을 싫어 한댔죠?"
"싫어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아."
"눈보다 비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특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더욱
좋다구요."
"그게 눈이 싫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쌓인 눈은 말이죠? 감추고 있는게 모두
아름다운 것 뿐이예요. 그러니까 녹아도 지저분한 것도 아니구요. 눈도
눈나름이라구요."
"우리 수정이 말이 맞다. 어니 눈 다운 눈을실컷 밟아 보자."
소운이 어린아이 처럼 눈 밭을 여기 저기 뛰어 다녔다. 그러는 사이
동쪽 하늘 아래 수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SG일행은
두 손모아 무엇인가 열심히 기원하고 있었다.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내자
일행은 손을 탑처럼 포개고 구호를 외치고는 만세를 불렀다.
"이상을 찾아서!! 만세!!"
책,영화,리뷰,
아름다운 전쟁 -하
반응형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