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무지개
-이승영 장편소설
----- 차 례 -----
1.불그림자
2.화상의 그루터기
3.늦은 밤의 장소
4.새로운 음모
5.외로운 섬
6.화려한 관계
7.비오는 날, Q와의 만남
8.푸른 사자
9.영원한 꿈 하야리
10.먼 별
1.불그림자
"지금부터 디자이너 윤희 씨가 선 보이는
스테이지 쓰리, 비로드와 실크를 소재로 한
드레스 스무 점을 선보이겠습니다."
스피커가 울리고 불빛이 꺼지자 웅성거리던
목소리들이 가라앉았다. 폴모리 악단의 '우먼
인 러브'가 흘러나오고, 객석으로 뻗은 T자형
무대에 조명이 떨어지자 몸의 곡선을 살린
실크드레스의 여인이 손끝에 흑장미 한
송이를 들고 걸어나온다.
장내는 박수소리로 꽉 메워졌다. 그 소리가
호텔의 복도까지 흘러나왔다. 준은 호텔
로비에서 쇼 룸 쪽으로 마악 발길을 돌리는
중이었다. 어깨에 걸린 카메라를 움켜쥔 그는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를 쓸어올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늦은 것 같군. 그는 눈을
찡그리면 쇼룸의 출입구로 다가섰다.
"몇 번 스테이지야?"
그가 문 옆에 서 있는 두 청년에게 거칠게
물었다.
"쓰립니다."
"됐어!"
그때서야 준은 안심하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듯한
체구였다. 깊고 서늘한 눈매와 콧날로 이어진
입술 선이 다부지면서도 야성적이다. 그가
필요한 것은 톱 모델 유라가 나오는 네 번째
스테이지의 앞 대목이었다. 준은 둘러멘
카메라 가방에서 망원렌즈를 꺼내 끼고
플래시 불빛을 확인했다.
"그치 어디 있지?"
준이 캡을 쓴 사내에게 물었다.
가 꺼줄려나 보다.
사내가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이게? 누굴 약올리는 거야? 누구라니."
"아아, 울 형님 말요?"
"뭐하고 있어."
"미국서 온 양배추 같은 녀석하고 같이
있죠. 무대 앞쪽입니다."
"뭐? 양배추?"
"폼 한번 잡아보겠다는 그런 놈이 하나
나타났다구요."
사내가 빈정대며 말했다. 하긴 요즘은
패션가가 춘추 전국 시대니까 한몫
잡아보겠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설치는
판이다.
준은 내심 혀를 차며 쇼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익자 무대 옆자리에 앉은
얼굴들이 드러난다. 이번 쇼를 주최하는
'사넬 라인'의 표 사장, 디자이너 윤희, 그
옆에 표 사장의 조카이자 붉은 잠바로 통하는
표 전무, 또 그 옆에 양배추 헤어스타일을 한
낯모를 녀석.
국내 굴지의 패션회사 샤넬 라인은 표
사장이 경영권을 쥐고 있지만 운영은 사실상
그의 조카 붉은 잠바의 손에서 요리되고
있었다.
모델업계의 대부. 그게 패션가에서 통하는
그의 별칭이었다. 그는 늘 선글라스에 붉은
잠바를 즐겨 입었다.
"레드 팍스! 정말 소문대로 불여우 같은
모델들이군요."
양배추가 붉은 잠바의 귀에 속삭였다.
"모두 우리 샤넬 라인의 모델군단들이죠.
사람들은 불여우떼들이라고 합니다만……
다음 스테이지를 기대하십시요. 여우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붉은 잠바가 그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잠시 무대가 암전된 사이에
스피커에서 표범의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드럼과 타악기가 섞인 록 뮤직이
소나기처럼 울리면서 조명 불빛이 섬광을
번쩍거린다.
무대에는 표범 가죽 코트를 걸친 검은
선글라스의 여자가 뛰어나왔다. 준은
뷰파인더에 잡힌 모델의 동작을 겨냥하면서
계속 셔터를 눌렀다. T자 무대 끝에 선
여인은 코트의 단추를 풀어헤쳤다.
속옷은 검은 발레복이었다. 몸매의 곡선이
동작에 따라 도발적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는 손간 준은 깜짝
놀라 카메라를 내려뜨렸다. 네 번째
스테이지의 일번 타자는 유라가 아니었다.
준은 화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는 이내
객석에서 빠져나와 무대 뒤쪽으로 올라갔다.
준비실 문은 열려 있었고, 순서를 기다리는
미녀들이 요란한 옷들을 입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유라, 유라는 어디 있지?"
"분장실에요."
한 모델이 그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유라가 지금 뿔다귀 났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준이 분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화장 도구와 액세서리 박스가
번잡하게 쌓여 있는 구석에 한 여자가 거울을
향해 등을 돌린 채 턱을 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유라."
여자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깨끗이 물렸죠, 뭐."
그녀는 겨우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깨
위의 모피 외투가 그녀의 거친 숨결에 따라
파르르 오르내렸다.
"이유가 뭐야?"
"내가 알 게 뭐야,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연출자가 갑자기 종미를 내보내잖아!
내 참 기가 막혀."
"벌써 각본이 짜여져 있었군."
준은 담배를 뽑아 불을 붙이고, 유라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손에서
담배를 낚아채고 뻑뻑 빨았다.
거울 속에 되비치는 유라의 옆얼굴은
열꽃이 피어, 건드리면 진액이 묻어 나올 것
같았다. 은회색 눈화장이 불빛을 받아
반지리거렸고, 틀어 올린 머릿발 아래로 흰
목덜미의 선이 모피 속에 가려 있었다.
"좋아, 내가 표 사장에게 직접 항의하겠어,
이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종미년을 내 대역으로 키우려는 게
분명해. 고 기집애가 요즘 와서 기세가
등등해졌다구."
"붉은 잠바, 그녀석의 장난이군."
그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천장에
눈을 주었다.
"난 말야, 이대로 밀릴 순 없어, 종미 같은
애송이한테 스테이지를 뺏기고 돌아설 내가
아니야!"
유라는 거칠게 몸을 일으켜 분장실을
잽싸게 빠져나갔다.
"유라, 유라!"
그는 유라를 뒤쫓지 않고 천천히 발을 옮겨
무대 옆으로 걸어갔다. 무대는 마지막 여우의
쇼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쇼가 끝난 무대는 불빛이 대낮 같다.
법석대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진 쇼장은
잔치가 끝난 집처럼 썰렁했다.
"굿 쇼."
양배추 머리 자니 홍이 붉은 잠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싸늘하게 손을 잡고
흔들었다.
표 사장은 디자이너 윤희와 한쪽 구석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은 붉은 잠바 곁으로 다가섰다.
"이봐, 표 전무 어떻게 된 거야."
준의 말에 붉은 잠바는 준의 기세를
진정시키듯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유라는 나와의 약속을 어겼어. 이번
조치는 가벼운 경고에 불과해."
"약속?"
"마지막 리허설에 빠졌어. 쇼장에도 늦게
나타났구. 게다가 자니 홍이라는 그 친구를
대동하구 아주 거드름을 피우면서 왔지."
"자니 홍? 그녀석은 뭐야?"
"아까 옆에 앉았던 미국서 온 떨거지말야.
뉴욕 패션가에서 돈푼이나 만졌는지
국내시장을 넘보고 있는 녀석이야."
"그래?"
"자네 나한테 지금 시비를 걸 처지가 못돼.
자니 그녀석이 유라에게 손을 뻗치고 있어.
물론 내 예감이긴 하지만 유라 단속이나 잘
하시지."
"충고하는 건가?"
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별말씀을……. 하지만 톱이란 항상 신인의
도전을 받게 마련 아닌가?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잖아. 내 눈에 거슬리면 순서는
언제나 뒤바뀌지. 그건 비단 유라뿐만
아니야."
"좋아, 이번 일은 충고로 받아들이지.
하지만 오늘 이후에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
있지 않겠네."
"협박인가?"
"거래야."
"좋아, 기억해 두지."
붉은 잠바는 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는다. 그의 웃음 속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준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준은 곧이어 무대 뒤로 올라갔고, 붉은
잠바가 쇼 룸의 입구를 나서려는 찰나였다.
출입구의 검은 커튼 뒤에 유라가 서
있었다. 붉은 잠바는 발을 세웠다.
"거기 가 있겠어요."
유라의 말에 붉은 잠바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휙 돌아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자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안 돼."
그는 유라에게 딱 한 마디를 내던지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표 사장과 붉은 잠바와 일단의 모델들이
차를 부릉거리며 금성 호텔을 떠난 후,
유라는 뒤미처 호텔의 로비에서 나섰다.
그녀가 바바리코트의 깃을 올리고 호텔
정문에 서 있을 때 푸른색 볼보 승용차 한
대가 유라의 앞에 미끄러지듯 섰다.
차의 앞도어가 철컥 열렸고, 운전석에 앉은
자니 홍이 손끝을 위로 까닥이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주위를
되돌아보다가 이내 볼보의 앞좌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가 막 출발했을 때 호텔
늦은 다음이었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일까.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창은 우윳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준은 아파트 3층 계단 옆에서 두 다리를
종이처럼 접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기다린
지 벌써 시간 반이 흘렀다.
준은 발치 앞에 놓인 소줏병을 들어올혔다.
목이 화끈거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
치솟아올랐다. 자니?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
같은 양배추가 유라 앞에 나타난 것일까.
자넨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걸 처지가 못돼.
녀석이 유라에게 손을 뻗치고 있어. 단속이나
하게…….
준은 붉은 잠바가 한 말을 머리에
떠올렸고, 녀석의 볼보를 타고 떠난 유라에
대한 미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우윳빛 창은
어느새 소름 같은 빗방울이 맺혀 있다가 제
무게에 실려 벌레처럼 흘러내린다.
비가 오고 있구나.
그가 병에 남은 마지막 소주 한 모금을
털어넣었을 때 차 소리가 났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리창에 커다란 불그림자 무늬를
그렸다가 꺼졌다.
엔진 소리가 들들들들 회전음을 내며 계속
들렸다. 유라가 왔을까? 그녀가 어떤 녀석의
차를 타고 왔는지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한참 후에야 승용차의 문 닫히는 둔탁한
음향이 들렸고, 차가 떠난 후에야 여자의
구둣발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다.
준은 무릎을 감싸안은 채 계단 아래로 눈을
주었다. 벽 모서리를 타고 유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라의 얼굴은 감홍색이었다.
취했다는 것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유라는 준을 보자 멈칫했다.
"존, 거기서 뭘 하구 있어?"
유라는 그를 존이라고 부른다.
"………."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열쇠가 없어서라곤 못하겠지. 그
쇠꼬챙인가 뭔가로 문따는 솜씨 좀
보여주겠어?"
유라의 음성은 혀끝에 휘말린 채 심한
빈정거림이 배어 있었다. 유라의 몸에서는 술
냄새와 진한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이윽고 준은 유라의 핸드백을 낚아채고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들은 쏟아지듯 아파트의 어둠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불을 켰을 때 둘은 거실의
바닥에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많이 마셨군."
"위스키 한잔이었어."
유라는 되는 대로 옷을 벗어던지고 슈미즈
차림으로 침실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운다. 분홍빛 탈지면을 손가락 끝에
말아쥐고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마스카라를
뽑아내다가 문설주에 서 있는 준을 거울
속으로 바라본다.
"왜 그렇게 서 있지?"
"유라, 널 보면 한심해."
"정이 뚝뚝 떨어지진 않구?"
"나 때문에 그치를 끌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하는군."
그의 말에 유라는 손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날 아직도 그런 여자로 보는 거야?"
유라는 화가 나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
위에 틀어올린 수건을 잡아챈다. 그녀의 긴
머리가 어깨 위로 출렁 흘러내렸다. 유라는
두 손으로 눈자위를 문지르면서 그의 청바지
앞부분이 천막처럼 부풀어오른 모습을 거울
속에서 훔쳐본다.
"유라, 넌 그따위 식으로 나가면 종미한테
계속 밀려날 거야."
"어떤 식인데?"
그녀가 갑자기 몸을 되돌리며 눈빛을
곤두세웠다.
"리허설에 늦게 나타나구, 자닌가 뭔가
하는 놈팽이와 싸돌아다니구……."
"그게 이유란 말이지?"
"네 탓이 커."
"모르는 소리 말어, 존. 그건 표의 변명에
불과한 거구, 근본적인 속셈은 표가 날……
골치아픈 얘기야, 그만둬."
"그치의 속셈이 뭐지? 말해 봐."
준의 어조는 훨씬 강해졌다.
"날, 밀어내고 싶은 거야."
"빌어먹을, 어물거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넌 아직 샤넬 라인의 톱모델이구 붉은 잠바는
널 필요로 하고 있어."
"지금은 그래. 하지만 차츰 상황이
바뀌겠지. 난 그날이 저절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구."
유라는 더이상 대꾸가 없었다.
준은 유라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의 손끝은 뺨에서 목덜미로 흘러
슈미즈의 어깨 끈을 잡아내렸다.
유라는 이미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자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땅콩처럼 돋아오른 유두의
검포도색 부위를 손 안에 가볍게 말아쥔다.
"존, 나말야. 너무 지쳐서 두 알만 먹고
잤으면 하는데…… 어때, 지금 나 필요해?"
유라는 장작처럼 완강한 그의 팔목을 겨우
떼어내면서 눈을 찡그렸다.
그는 늘 필요할 때 끝내 갖고마는
성미였으므로 거절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유라는 곧 경대 서랍을 열고 작은 병에서
알약 두 개를 손바닥 위에 꺼내 그것을
혀바닥으로 찍어 삼켰다.
"엊그제였는데……."
그녀는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불을 끄자 붉은 조명등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유라는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길게 누워버린다.
준은 방의 맨유리창에 닿는 빗줄기들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낀 창에 자신의 모습이
얼룩처럼 서 있고 그 뒤로 먼 아파트
불빛들이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이상하다.
그녀가 원하지 않을 때일수록 더욱더 무섭게
웅숭거리는 이유가 뭘까. 더구나 이렇게
비오는 밤에는 어디로든 깊게 스며들고 싶다.
외로움 때문일까?
준은 다시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붉은 조명등 불빛만 마시며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식물, 꽃도 피우지 못한
채 포자를 바람에 날리고 있는 양치식물처럼
보였다.
"준, 맘대루 해. 난 끝나는 대로 잠 속으로
직진할 거야."
유라는 잠자는 것밖에는 모든 게 귀찮다는
말투였다.
간간이 유라의 큰 숨소리가 한 옥타브씩
가라앉고 있다. 긴 머리발은 수초처럼
베갯머리에 흐트러져 있고, 두 손은 젖무덤
위에 얹혀 있었다.
아랫배가 숨결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두 다리는 내팽개친 것처럼 제멋대로다. 준은
손끝으로 지퍼의 고리를 잡아내렸다. 짧고
강하게 베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다. 아주
천천히 자신의 몸에 감싸인 각질을 벗겨낸
다음 얼핏 거울 속에 되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본다. 순간 그는 자기를 거울 속에서
훔쳐보고 있는 또하나의 타인을 깨닫는다.
군살 한줌 없는 단단한 근육과 큰 어깨의
근골과 탄력 좋은 허리, 그리고 그 아래 숲을
헤치고 솟은 완강한 노여움이 치를 떨고
있었다.
넌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야. 왜 유라를 볼
때마다, 그 깊은 곳에서는 샘물이 끊임없이
괴고 혼탁해져서, 쉴새없이 뻗쳐오르는
것일까. 외로움 때문일까? 그녀를 보면 왜
외로워지는가. 그리고 외로움은 왜 욕망으로
끝없이 뒤바뀌는가.
"준, 잠들기 전에 할말이 있어, 오늘 만난
자니 홍이라는 재미교폰가 뭔가 하는
그치말야……."
유라가 몸을 뒤척이며 준을 바라보다가
멈칫 눈을 크게 뜬다. 그녀는 문득 준의 것이
피노키오의 코처럼 유난히 커보인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녀석의 얘긴 지금 꺼내지 마."
준이 침대로 다가섰다.
"그자에 관해서 뭘 좀 알어?"
유라의 음성이 갑자기 곤두섰다.
"나보담, 유라가 더 잘 알 텐데……?"
패션'이라는 패션회사를 차리고 대대적으로
한번 해보겠다는 거밖에는."
"그래서?"
"그러니까, 앞으로 자길 도와달라는 거야,
그리구 말야…… 날 아주 귀빈으로
모시겠대."
"그래? 그래서 귀빈이 되어 보고 싶어?"
유라는 자기의 허벅지에 단단한 열기가
와닿는 것을 느낀다. 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피로 때문일까?
다른 때 같았으면 이미 그것은 손 안의
미꾸라지였을 것이다. 그의 몸을 거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자니 홍, 그녀석 때문일까? 그의 볼보 차가
아파트 광장에 멈추었을 때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자기의 허벅지로 가져갔다.
그의 융기가 손등에 감촉되었다. 엉큼한 녀석
같으니라구.
"……돈두 꽤 많은가 봐."
그러자 갑자기 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
녀석의 얘기가 나오자 준은 자기의 단단한
뿌리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무참하게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밤은 틀렸군."
준은 그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잘됐어. 준, 죽었구나 싶었는데 다행이지
뭐야."
유라는 잠들고, 그는 갑자기 벼랑에서
떨어진 기분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자니 홍의 얘기가 나오자 그렇게 갑자기
죽어버리다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는
바지를 끌어올리면서 거울 속에서 비맞은
참새처럼 오그라붙은 볼품없는 남근을
유라는 깊은 잠 속으로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준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어둠, 빗소리, 창유리에 그려진 빗방울
속의 불그림자, 욕망 찌꺼기가 타다 말고
꺼진 납덩리처럼 무거워진 몸, 준은 소파에
몸을 던지고 담배를 꺼냈다. 또다시 그놈의
외로움이 스멀스멀 소름처럼 돋아 오른다.
그래, 우리는 너무 깊숙히 서울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되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서울에서 떠나지 못하고
점차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자정이 지난 빗속의 서울은 가위잠에 눌려
있다. 비오는 밤의 침묵이 그를 더욱 외롭게
세."
내세워 유라의 콧대를 꺾으려 하고 있고,
자니 홍은 유라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샤넬
라인에서 빼내려는 음모가 시작된 것이다.
국내의 패션 산업을 독점하고 있는 샤넬
라인을 부수지 않고는 '자니 패션'이 설
자리가 없었다.
자니 그녀석이 샤넬 라인의 노른자인
유라를 탐내고 있는 속셈은 너무나 뻔하다.
준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곧 불을 켜고 노트에 볼펜을 그어대기
시작했다.
유라에게.
내일은 온종일 암실 작업이 있다. 끝나는
대로 전화하겠어. 그리고 유라, 미리 경고해
두지만, 자니 그녀석을 만나지 마. 물론
전화도 받지 말고, 만일 오늘 이후에 내 눈에
걸리는 날, 녀석이 내 손에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넌 알지. 어느 녀석이든 너한테 손을
대는 놈은 그냥 두지 않는다. 그건 모두 네
탓이라는 걸 명심하고 자중해 주길 바래. 준.
준은 편지 쪽지를 유라의 거울 위에
붙여놓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광장의 주차장에는 승용차들이
비맞은 말들처럼 줄지어 있다.
자! 오늘은 어느 말을 고른다? 그는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은색 피아트를 하나
골라잡았다.
"비오는 날에는 바로 저놈이야. 타이어의
탄력도 좋구 호흡도 거세구."
준은 주머니에서 구부러진 철사줄을 꺼내어
차의 열쇠구멍에 밀어넣었다. 몇 차례
손동작과 함께 도어의 걸림쇠는 쉽게
올라간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예의 그
철사로 시동을 걸고 아파트에서 빠져나왔다.
시속 120마일, 30분의 주행. 은색 피아트가
빗길을 달려 반디벌레처럼 날아간 곳은
시내의 번화가 골목 입구였다. 그는 곧
차에서 내렸다.
"네 주인이 내일이면 널 찾아올 거다."
그는 마치 말의 잔등을 두드리듯 손으로
차체를 톡톡 쳐주었다.
골목을 몇 구비 돌면 '하야리식품'이라는
간판이 걸린 5층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
지하실 층계로 준은 내려섰다.
지하실 철문을 통과, 흐린 내등이 켜진
복도를 걸어서 어둠의 끝에 도착한 준은 역시
아까처럼 잠긴 문을 철사줄로 풀고 안으로
들어섰다.
'열려라 참깨'하면 바위문이 열리던
알리바바의 도둑처럼 그는 열쇠구멍에
철사줄을 밀어넣고 움직이면 어떤 자물쇠든
열리고 만다. 마치 그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아직까지 그는 유라를 빼놓고는 자기가 쉽게
열 수 없는 자물쇠를 만난 적이 없었다.
습한 냉기가 감도는 다섯 평짜리 공간에는
캐비닛, 침대와 도안용 책상이 있고 벽에는
책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방에는 빨랫감들이 널브러져 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들이 토막난 분필처럼
수북하다. 거기가 그가 사는 방이다. 그는
때때로 자기가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살고 있는 꼬락서니도 그렇고, 또 자기 같은
사람이란 정말 서울에서는 바퀴처럼 귀찮게
서식하는 벌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은 자동 셔터가 달린 니콘 카메라를
꺼내들고 망원렌즈를 끼었다.
그는 수입포로 렌즈를 정성스럽게 닦다가
카메라를 벽으로 들어올렸다. 유라의 흑백
누드사진이 뷰파인더에 들어왔다. 그가
유라의 사진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사진
속의 유라는 방금 샤워를 끝내고 나온
직후여서 젖은 머리가 가닥을 이루고 있었고,
맨살 위에 물기가 선명하게 반질거린다.
잘룩한 허리로는 도저히 지니기 어려운
멋진 젖가슴을 유라는 두손으로 받쳐들고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섯 통의 필름을 허비한 끝에 겨우 얻은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유라는 자기 체중이
2킬로나 늘었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그대신
젖살이 올라 가슴이 암팡져 보인다고 말했다.
"가슴은 이대로 두고 허리만 마르게 할 수
그가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 유라는 바로
사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어로빅, 수영, 사우나, 안마…… 그녀는
몸매 가꾸는 일에 억척스럽게 돈과 시간을
투자했고, 이제 그녀의 몸매는 어느 부분을
내놓아도 멋진 상품이었다.
샴푸, 안약, 립스틱, 사이다, 소세지, 껌,
아이스바, 치약, 브래저…… 어느 회사든
그녀의 머릿결과 눈과 입술과 몸매를 원하고
탐을 냈다.
유라의 몸은 어느 구석이나 돈과 직결되어
있었다.
"허리 굵어지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 줄
알어?"
"운동 부족이지."
"훌라후프는 자꾸 흘러내리고 곧 싫증이
난다구. 여름에 체력이 떨어졌다고 사흘을
거른 건 내게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어?"
그때 유라는 카메라를 빼앗아 소파 위에
내던지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유라는 방금 욕탕에서 나온 사람처럼 땀을
흘리며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천성이야,
그는 카메라를 눈에서 떼어냈다.
통통통…….
누가 문을 두드린다. 준은 눈을 번쩍 떴다.
커튼 사이로 햇살 한줄기가 그의 눈살을
비집고 들어온다.
"나형이요?"
준의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서울 천지에
나형밖에 없다. 문이 열리자 키가 작고
통통한 사내가 들어선다. 그는 위층 상가의
하야리식품점 주인이지만 고향에 살았을 때는
뒷집 형님이자 학교 선배였다.
"지금이 몇 신데 여직 자고 있어. 이
바퀴벌레야."
준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어제 너의 어머님한테서 전화가 두 번이나
왔다."
"뭐라시던가요?"
"빤하지 뭐, 시골에 집을 지어놨으니 서울
생활 빨리 집어치우고 내려오라는 거지."
준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머님 연세가 금년에 몇이시더라? 예순
아홉?"
"아마……."
준은 잠시 어머니의 나이를 헤아려보다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버린다.
"고향으로 갈 거냐?"
나형의 말에 준은 고개를 더 크게
끄덕인다. 도대체 고향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서울 생활에 반질반질 기름이 밴
녀석이 고향의 흙더미 속으로 돌아가 단
며칠을 견디겠느냐, 어림 반푼도 없는 말은
아예 하지 말라는 비웃음이 나형의 표정 속에
배어 있었다.
"금례는 어떡하구?"
"같이 가야죠."
준의 목소리는 낮게 흘러나왔다. 그는
속마음이나 진실을 말할 때 목청을 한껏
낮추는 버릇이 있었다.
"꿈깨."
"꿈이라니요?"
"금례가 네 말을 들으면 기절하겠지? 그래
금례가 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간다던?"
"우린 약속했어요."
"약속이란 희망사항일 뿐이지 지금의 그
여자는 금례가 아니고 유라야. 유라는 지금
국내에서도 제일가는 톱 모델이구."
"그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넌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늦었어. 넌
결국 유라를 포기하거나 고향을 포기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 거다."
준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난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아요. 형, 난 꼭 금례와 고향으로
돌아갈 겁니다."
준의 목소리는 더 낮게 떨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해봐. 하지만 네가 바라는 것과 금례가
바라는 게 다를 때는 헤어져야 해. 사람이란
서로 바라는 것이 다를 때 헤어지게 되는
거야."
"우린 서로 고향에 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둘다 똑같이. 단지 그 시기가 언제냐가
문제죠."
"그게 언제일 것 같아?"
"곧 올 거예요, 형."
준은 유라의 전성시대가 지나고 인기가
퇴조되어 은퇴할 그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세계의 별들은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연습실은 비어 있었다. 유라는 발레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선다. 평균대를 잡고 여러
차례 몸을 풀고 두 발을 뒤꿈치로 모아
일직선으로 벌리고 섰다. 그녀는
제1포지션에서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다.
넌 부모를 잘 만났더라면 지금쯤 프리마
발레리나였을 거야.
'백조의 호수'의 오데프 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 넌 공주였을
거야. 발레의 기본동작을 가르치는 강사들이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유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발레에 관한 한 모델 중에서 유라와
견줄 상대는 없다. 다행히 모델의 발레는
발레리나의 발레 수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라는 제1포지션에서 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를 직각으로 벌리면서 똑바고 펴는
아라베스크에서 애티튜드 자세로 몸을
변형시켜 갔다.
온몸에 땀이 꽉 찬다.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오종미가 들어섰다.
종미는 잠시 동안 서서 유라의 동작을
지켜본다. 그녀는 유라와 키나 몸무게,
몸매가 거의 유사했으므로 차이점을 쉽게
구별할 수 없었다. 유라보다 세 살이 어리고
여우군단에서는 B급으로 분류된다.
아직 경력이 짧다는 점과 얼굴이 좀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 유라와 다르다. 유라가
불이라면 종미는 물의 이미지인 쪽이었다.
유라는 종미를 거울 속에서 보면서 동작을
계속 멈추지 않는다.
지난번 네 번째 스테이지에서 후배에게
밀려난 울분이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었지만
겉으로 내색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
때문에 태연해야 한다.
"어서 와, 종미."
유라는 동작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종미가
슈트 차림으로 유라에게 다가온다.
"촬영이 있었어, 오전에. 시계
선전이었어."
종미는 자기가 광고 모델로 등장한 것이
못내 신기하다는 말투였다. 유라는 그녀의
말이 자랑으로 들렸다.
종미는 탈의실에 가서 발레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유라는 더이상 연습을
계속하질 않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오니까 안하는 거예요?"
"아냐, 땀을 너무 흘렸어."
"그럼, 샤워하지 그래요."
"알아서 할께."
저 애송이가 속으로 앙큼떠는 걸 보라구,
아주 자기에게 관심이 많고 아껴주고 있다는
것을 말로만 한몫 하고 있군. 유라는 종미의
마음을 현미경으로 보듯 환히 꿰둠고 있었다.
종미는 지금 유라를 가장 큰 선망의
표적으로 놓고 있고, 유라의 방석에 몹시
앉아보고 싶어서 안달이다. 그것을 유라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언니, 자니 패션에 대해서 잘 알지?"
종미가 유라를 넌지시 바라본다.
"잘 모르겠어, 새로 생긴 모델회사 아냐?"
"그 양배추 머리를 한, 느글느글하게 생긴
그치가 사장이라면서요?"
종미의 메스껍다는 듯한 제스처는 유라를
겨냥하고 한 말이었다.
"언니 그날 기분나빴지?"
종미가 동작을 멈추고 유라 쪽으로 몸을
돌린다.
"뭘 말야."
"금성 호텔 쇼에서 말야. 포 스테이지는
언니 꺼였잖아."
유라는 알면서도 짐짓 놀라며 종미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해오는 대담성에
감탄했다.
"기분이야 나빴지만, 까짓걸 갖구 길게
새길 내가 아니야. 너도 잘 알겠지,
우리들이야 걔들 밥이라는 거. 그 덕에 너도
"실은 언니, 난 맘이 안 좋았어. 언니 자릴
내가 차지하는 거 좀 찜찜했었다구,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난 괜찮으니까 맘에 두지 마."
"너두 언젠가는 나처럼 그런 꼴을 당하게
될 거다."
"알구 있어."
갑자기 종미의 유순해진 말에 유라는
동료의식을 느낀다. 사실 종미는 모델
군단에서 두드러진 재목이었다. 젊은
라이벌로는 종미가 가장 무서운 적수였다.
"난 또 무슨 헛소문이 났나 해서 바짝
얼었었어요."
"찔리는 구석이 있구나?"
"아녜요."
유라는 종미의 입을 통해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붉은 잠바가 갑자기 종미를
내세우고 있는 이유의 배경에는 자기를
견제하기 위해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붉은
잠바는 어쩌면 종미를 이미 손아귀에 넣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여자 문제가 깨끗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유라가 아는 붉은
잠바는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종미에게 섣불리 붉은 잠바의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종미로부터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우회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미, 잘 알겠지만 여자의 몸에는 남자의
지문들이 짙게 묻어 있어."
"그인 날 너무 밝혀서 탈이에요."
"즐거운 비명이야?"
"아아뇨? 그인 내 몸 외의 나에 관한 다른
것은 일체 관심도 두지 않아요. 그것도
사랑일까요?"
"성욕은 사랑과 달라."
유라는 문득 그런 말을 해놓고 그게 어떻게
다른 것인지 잠깐 생각이 떠올랐으나
샤워물이 갑자기 뜨거워져서 몸을 비껴섰다.
종미의 손에는 비누가 들려 있었다.
"너 우리집에 놀러 오겠니?"
그녀의 말에 종미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유라가 자기집에 종미를 초청하겠다는 말은
각별한 호의의 표시였다.
현재의 유라처럼 톱 모델이 되는 게 소원인
종미에게는 유라가 사는 모습을을 구석구석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었다.
종미의 손이 자신의 예민한 부위에 닿았을
때 일으킨 전기는 유라에게 묘한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예민한 것은 종미의 손인지 아니면 자신의
몸인지 짐작은 쉽게 가지 않았다. 아마
피부가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유두가 서고 몸이 단단해지고
얼굴이 후욱 달아오르는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종미의 손끝이 허리의 비눗물을
씻어내자 유라는 기대 있던 두 손을 벽에서
떼어내며 돌아섰다.
표가 거느리고 있는 50명의 여우군단은
매해마다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모델
지망생들 중에서 엄격히 선택된
미인들이었고, 모두가 그의 눈이 가려낸
여우들이었다.
50명의 여자를 한손에 거느리고 있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금기사항은 스캔들이나
소문을 일으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
모든 모델은 붉은 잠바로 통한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힘은 막강했다.
사장실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표 사장의
앞에 붉은 잠바가 긴장된 표정으로 얘기를
꺼냈다. 그는 큰 해골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머리를 자주 쓸어올렸다.
"자니 패션의 전용빌딩 내부공사가 거의
끝나고 있습니다. 쇼 룸을 겸한 소극장과
수영장이 있고 대규모 스튜디오도 차렸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녀석이 영화에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영화?"
표 사장은 붉은 잠바의 말을 듣고 있다가
영화라는 대목에서 말을 끊었다.
"모델 중에서 연기력이 좋은 애들을
스타가 되면 상품가치는 더 크지요.
프리미엄이 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속으로 묶여 있는 동안에는 모든 수입이
자니에게 돌아가죠. 녀석은 이미 영화를
착수했고, 모델과 배우를 함께 모집하고
있죠. 또 국내의 의상업계를 손아귀에
넣는다는 것이 그 녀석의 목표입니다. 바로
우리의 대리점이 있는 곳에만 점포 설치를
끝냈습니다. 우리의 시장을 빼앗겠다는
뜻입니다."
붉은 잠바는 표정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표 사장의 얼굴은 노여움이 역력했다. 그는
화가 날 때마다 말을 더듬는 게 특색이었다.
"녀……녀석을 얕잡아……보……고 너무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니, 그녀석은 생긴 건 양배추 같지만
머리가 굉장히 빠른 놈이라구요. 게다가 놈은
미국식 경영 전략을 가지고 우리에게
도전하는 겁니다. 이대로 두면 길게 잡아 2,
3년 동안에 우리의 마지노선이 붕괴될
겁니다."
"방…… 방법이 있나?"
표 사장은 대머리를 쓸어넘기며 약간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지난번처럼 화려한 쇼나 보여주면서 샤넬
라인이 최고라고 선전하는 건 구식입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녀석은 저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전
녀석에게 질 수가 없습니다. 제게 계획이
따로 있습니다."
"전 운영은 하지만 돈줄은 삼촌이 쥐고
있지 않습니까. 녀석을 공략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자금, 자금이라…… 지금처럼 자금 사정이
어려운 때에."
"이대로 두면 우린 밟힙니다."
표는 벌떡 일어나서 주먹으로 자기의
손뼉을 치며 서성거렸다.
"삼촌! 도대체 그 하야리 땅은 뭣 땜에
그렇게 움켜쥐고 계십니까. 그걸 이용하면
되잖아요?"
"하야리 땅을?"
"은행에 집어넣구 대출을 받든가 아니면
처분하든가……."
"음."
표 사장은 조카의 말에 눈을 껌뻑이며 등을
하야리의 땅이 아른거렸다. 그 땅은 그가
노후의 귀향을 위해 비장해 둔 꿈이나 다를
바 없는 땅이었다.
"그 문제라면 준과 상의해 봐야겠다."
그 말에 붉은 잠바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삼촌은 왜 그런 문제에 준을
끌어들이죠?"
그는 삼촌의 말이 몹시 못마땅했다.
"우린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구 준과
약속했었다. 섣불리 결정했다가 난 돌아갈
곳도 잃게 돼."
"알겠습니다. 결정은 삼촌이 하십시오. 그
문제에 준을 끌어들이면 전 빠지겠습니다.
게다가 준에게 그런 말을 하시면 자니란
녀석에게 정보가 샙니다."
"정보가 새다니?"
있기 때문입니다."
"뭐? 뭐라구?"
표 사장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두고
보십시오."
"그…… 그건 안 되지. 내가 준을
만나보겠다."
"아직은 안 됩니다."
"으음……."
표 사장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붉은 잠바는 여전히 서성거렸다. 이제 샤넬
라인의 톱 모델은 종미로 바꾸어야 한다.
유라를 믿고 있으면 발등에 도끼를 찍는 일이
된다는 것을 붉은 잠바는 잘 알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표 사장은 아직도 준과 유라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붉은 잠바의 단호한 어조에 표 사장은 다시
눈을 감았다. 샤넬 라인의 운영책임을 맡고
있는 조카의 작전에 자기의 고집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좀더 생각해 보기루 하자."
표 사장은 결국 조카에게 모든 대권을 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표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 회전의자에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겼다.
종미를 톱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모험이었다. 아직도 유라의 인기와 입김은
막강하고, 자니측에서 유라를 탐내고 있을 때
그가 유라의 비위를 건드린 것은 섣부른
실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라는 언젠가는 샤넬 라인을 버릴
그는 자기 예감을 믿기로 했다.
전화벨이 울리자. 표는 곧 수화기를
들었다. 유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직은
유라가 자기의 손아귀에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좋아…… 만나지."
표가 짧게 말을 끊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벽시계를 훔쳐보았다.
거기서 유라를 만난 지가 두 달이나
되었을까? 그간 표는 여러 차례 유라를
원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해 왔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번에는 그녀가 아쉬운 입장이 된
셈이었다.
이제 유라와의 만남이 더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인지 곧 판결이
유라가 자존심을 굽혀가며 전화를 건 것은
그녀도 어떤 결론을 원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두 시간 후에 만날 유라와의 광경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손으로 자기 뿌리를 몇 번
문질러 건재를 확인했다.
'오늘은 널 녹초로 만들 테다…….'
빨간색 무스탕 한 대가 경인가도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
차는 마치 작은 무당벌레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번이 유라와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널 오늘 녹초로
만들어주겠다. 그래서 잃어버린 내 자존심을
돌려받겠다.
그는 액셀의 페달을 더 힘차게 밟았다.
산을 끼고 돌자 숲속에 숨은 산장이 모습을
빨간 무스탕이 주차장에 들어서자 보이가
쫓아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너무 오랜만에
오십니다. 오시면 203호실로 안내하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보이가 앞서면서 그에게
주절거렸다.
그가 등뒤로 문의 걸림쇠를 누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유라는 보이지 않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표는 침대 위에 되는 대로 흐트러져 있는
유라의 속옷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구겨져 있으면서도 묘하게 여자의 살갗처럼
보였다.
표는 붉은 잠바를 벗어 걸다가 문득 멈추고
욕탕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
헤집는 소리로 보아 유라는 지금 욕탕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표는 잠바를 벗은
벗어내렸다.
그의 욕망이 분노처럼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걸음을 옮겨 욕실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욕실은 짙은 안개 속이었고, 거울
위의 전구가 수증기 속에 몽롱하게 떠
있었다. 시야는 몹시 흐렸다. 욕조 안에서
철썩이던 물소리가 잠시 잠잠해졌다. 머리에
비닐 커버를 터번처럼 쓴 유라는 맥주의
거품처럼 부풀어오른 욕조의 비누더미 속에서
목을 내놓고 있었다.
그녀는 욕탕문이 열리면서 물개처럼 뛰어든
표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놀라서 잠시 멍청해
있다가 이내 침착해졌다.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
유라의 말이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욕심이 나면 항상 성급해져서
그것은 정열적이라기보다는 무모하고
즉물적인 습성이다.
표가 얼마나 빨리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는지, 유라는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놀라서 두 다리를 오그려붙였다.
"자아, 우리 두 마리가 이렇게 마주
앉았으니까 솔직하게 털어놀 수 있겠지."
표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수면 위의
비누거품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욕탕
안에서 사내와 함께 있기를 준을 빼고는
처음이었다. 준과는 그럴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런 일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하지
않은 사태가 돌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싫었다.
"제가 먼저 나가 있겠어요."
족쇄처럼 팔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주저앉았고, 그의 두 팔과 다리가
문어발처럼 허리를 휘감았다.
역시 많이 놀아본 솜씨를 발휘하는군.
침대보다는 여기가 색다르다는 건가? 그의
숨소리가 점차 거세게 귓속으로
밀려들었지만, 그와 맞닿은 살갗은 점차
각질로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사내는 모든 게 독선적이야. 여자란
그저 먹어치우면 그만이라는 육질의 식욕만
갖고 있을 뿐이야. 이 사내에게는 그윽한
눈빛도 없고, 달콤한 대화도 없고,
움직임조차도 준과는 비교가 안 돼.
자기가 끌려들 만한 이유는 한 가지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에게는 샤넬
라인이 있을 뿐이다. 그의 손에는 거지를
그게 아니라면 많은 여자들이 그 앞에서
굽실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표를 처음
만났을 때 유라는 이 사내를 녹여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남은 계약 기간까지
줏가를 떨어뜨리지 애고 인기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표의 손이 지금 자신의 가슴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잇는 것처럼, 유라는 아직도 그의
손아귀에 매어 있었다. 그의 손은 마치
기물이 닿는 느낌처럼 딱딱했다. 그녀의 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지? 유라."
표의 가슴이 등뼈에 붙어 있고 팔목이
그녀의 턱뼈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난 아직도 샤넬 라인의 톱이에요."
그녀는 목소리에 위엄을 잃지 않았다.
표의 말에는 빈정거림이 배어 있었다.
유라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녀석은 지금 손 안에
든 호두를 맘대로 굴리며 잔뜩 자기 도취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쪽에서 반발할수록
콧대가 세어질 것이다.
온몸에 비누가 잔뜩 묻어서 살갗은 잠시도
머무르지 애고 서로 미끌리기만 했다. 표는
유라를 마치 첼로를 놓듯 앞에 안고 두
손으로 열심히 키를 켰지만 유라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여자의 살이란 얼마나
예민한가. 싫은 사내의 혀는 아무리 섬세해도
플라스틱 주걱 같다. 하지만 준은 그렇지
않았다.
준이 깊고 강하다면 표는 짧고 섬세하다.
남자들이란 밖으로 드러나는 성격과
성격이 강한 만큼 남과 잘 타협하거나
상대방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만큼 자기에게
몰두하지만, 표는 겉멋이 잔뜩 들어서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고 침대에서도 상대의
반응을 너무 느끼기 때문에 몰두하지 못한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소나기처럼 내리자
표의 몸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그의 살갗은
검고 어두웠다. 전보다 아랫배의 겹살이 몇
층이나 두터워졌고, 허리에도 군살이 몇
겹이나 더 붙었다는 것은 육안으로 알 수
있었다. 아랫배와 허리에 살이 오르면 담요를
두른 것만큼이나 감각이 둔해져서 힘이 두
배나 들면서 묘미는 두 배나 떨어진다.
뻗쳐오른 그의 무기가 헛끝발이라는 것을
유라는 알고 있었다. 언제나 유라가 산의
중턱쯤 오를 때쯤이면 그는 저 혼자 이미
그러나 준은 지금까지도 한번도 자기를
버려두고 혼자 간 적이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수컷이라는 점에서 표는
준의 상대가 안 되었다. 적어도 표적이
유라인 한에서는 말이다.
채 준비도 안 됐는데 그의 살이 성급하게
찔러왔다. 그의 두 팔은 평행봉을 하듯
욕조의 양쪽을 붙들고 그녀에게 금세 쏟아질
듯한 자세였다. 표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럴 때 남자의 눈빛은 모두 외로워
보인다.
유라는 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발성을 듣고 있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그의 머리를 적시고 등뼈로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의 흔들리는
젖살의 율동을 바라보며, 이따금씩
눈을 감았다.
준과 오랫동안 살을 맞대고 살다가 처음
붉은 잠바의 유혹에 응한 것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표가 자신의 출세를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게 되었다.
표의 뼈는 이번에도 유라가 산의 중턱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때 저 혼자 산꼭대기를
넘어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가 아까부터
자니에게 맘먹었던 욕심은 속절없는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다.
"딴 여자와도 늘 이렇게 성급해요?"
"아니야. 유라, 너만 그래."
"나한테만 그런다니요?"
"넌 딴 여자들과 달리 흡인력이 너무 쎄,
지나칠 만큼."
"참을 수 없게 만들거든, 네가 조금만
움직여도 말야. 난 다른 여자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구. 넌 좀 묘하게
생겨먹었어."
표가 욕조 밖으로 걸터앉으면서 어깨를
내려뜨렸다. 물기에 젖은 그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그에게서 엿보이던 음침한 위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역시 붉은 잠바에
선글라스를 끼고 무스탕에 앉아야 겨우
체면이 서는 외모였다. 표는 패배감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표가 서둘러 욕실에서 나간
후에야 유라는 수증기에 가려 있는 거울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도려냈다.
누런 불빛 속에 되비친 자기 얼굴이
퇴폐적으로 보였다. 널 죽이고 싶다. 표와의
정사 후에는 자기의 살갗도 싫어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준,
약속하겠어, 다시는……. 그때마다 유라는
마음속으로 준에게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자꾸
그 약속을 허물어뜨렸다. 내 핏속의 바람기
탓일까? 남자를 좀처럼 못 참게 만드는
뜨거운 피를 가진 그런 여자.
유라는 브이자로 목이 패여 레이스가 달린
하얀 티셔츠의 팔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허리 밴드가 긴 분홍색 스커트를
입었다.
검은 머릿발이 어깨 밑에서 출렁거렸고,
황금색 팔찌가 오른팔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표가 와이셔츠의 윗단추를 풀어헤친 채
유리잔에 버번을 채웠다.
"한잔 하겠어?"
유라가 잔을 받아들고 입맛을 다셨다.
"대강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오해는
말아줬으면 해."
표가 담배를 손끝으로 들어올렸다.
"절 계속 물먹이시겠어요?"
"위스키를 줬잖아."
"이것도 일종의 물이에요."
"겉돌지 말고 본론을 말해."
"좋아요, 샤넬 라인의 톱은 저예요?
종미예요?"
표는 의외로 의표를 찌르는 유라의 말에
가슴이 찔끔했다. 유라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톱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럼 누가 하죠?"
"자기 자신이지."
생각을 했다. 위기의 순간을 재치로 벗어난
셈이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게도 생각이 있어요."
"그럼 내가 묻지, 유라는 샤넬 라인의 톱을
계속 원하나?"
"프로덕션은 샤넬 라인만 있는 게
아니에요. 난 계약이 끝나가고 있구요."
"그래서 줏가를 올리겠다는 건가?"
"내 줏가를 떨어뜨리고 있는 게 누구죠?"
"좋은 대로 해, 유라. 난 말리지는 않는다.
샤넬 라인에는 모델이 50명이나 있어."
"하지만 유라는 단 하나예요."
붉은 잠바는 화가 나는 듯 버번을 한꺼번에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이봐, 그동안 유라를 대스타로 키운 건
나였어. 시골서 갓 올라와서 촌티가 더덕더덕
나였다구. 그런데 지금 와서는 그렇게 콧대를
높이구……."
"그렇게 날 키워서 톡톡히 재미를 본
사람은 누구죠? 나두 샤넬 라인에 할 만큼은
다했어요. 진을 다 빼먹고 껍질은 누가
버리려 하고 있죠? 키워 준 공치사는 더이상
하지 마세요."
유라 역시 화가 나서 잔에 남은 위스키를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그들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표는 아까부터 유라에게 받은 자존심의
상처를 계속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붉은 잠바를 입고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코에 걸었다. 눈빛을 감추면 자존심도
보호받는 모양이었다.
"좋아, 유라에게 기회를 더 주지. 그대신
그가 구두를 신었다.
"내 차로 가지 않겠어?"
"아뇨."
"그럼 먼저 가겠어."
붉은 잠바가 방에서 나간 후, 유라는
창가로 다가섰다. 바다가 노을에 붉게 타고
있었다. 문득 외로움이 소름처럼 돋았다.
그녀는 준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해질 무렵 어둠이 대지에 덮여오는 바로 그
순간이 되면 유라는 언제나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특히 혼자 있을 때 노을을 보고 있으면,
그리고 도시의 빌딩이 노을에 잠겨 검은
그림자를 내릴 때는 머리 속에 슬픈 필름 한
토막이 펼쳐지곤 했다.
아! 내가 노을을 잊고 있었구나. 참
되살아났다. 그녀는 하야리의 산기슭에서
해질 무렵이면 평야 저쪽으로 함몰되는
커다란 해를 바라보았고, 그 해가 빠진 후
붉은 노을이 점차 잿빛으로 변하면서 어두운
안개에 휩싸이는 광경을 매일 바라보았다.
노을은 그녀의 고향이었고, 고향은 그녀의
과거였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연필자국이 안 나도록 박박 지우고 싶은
과거가 고향에 서려 있고 지금도 그 고향은
노을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렸으면 싶었다. 고향, 하야리를 잊을
수 있는 방법은 그 길 밖에 없었다. 해가
져야 꽹과리 소리와 금적 소리가 멎고,
어머니의 춤은 끝났다. 황해도 영산에서 딸
하나 품에 안고 하야리로 흘러들어온 세습무
김소범 여인의 대를 이어 그 딸 김소례가
금례를 하야리에서 낳아 키웠다.
"어쩌면 넌 니 어미를 빼다 박았지?"
금례의 미모는 소문난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무당이 되는 건
싫었다. 금례는 어려서부터 춤판만 벌어지면
울고 달아났기 대문에 대를 이으려는
김소례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금례가 누구의 딸인지 소문은 나지 않았다.
출처를 물으면 소례 여사는 서울에서 만난 옛
애인과의 사랑의 열매라고 웃어넘겼다.
그녀가 하야리의 뒷산에서 석양을 보고
있을 때면 언제나 준이 올라오곤 했다. 그때
그녀는 준을 오빠라고 불렀다. 준은
하야리에서 대나무집 도련님으로 통했다. 천
평이 넘는 대나무숲이 준의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나절을 가야 준이네 땅이 끝날 만큼 그의
집은 땅부자였다.
준의 아버지는 대개의 그런 집이 그렇듯
한량이었고 준이 열 살 때 어머니가 죽자
새로 맞이한 계모는 집안의 모든 대권을
한손에 휘어잡았다. 다행히 새어머니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인지 준을 친아들처럼
길렀지만 준은 새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금례는 그런 집안의 준을 처음에는
적개심을 가지고 대했지만 준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준이 서울에서 전문대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금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골처녀로 하야리에 남아 있었다. 세습무의
외동딸이 악속받은 장래란 굿판의 대를 잇는
기회만 찾고 있었고, 그 소망은 준이
이루어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준은 하야리의 대나무숲을
너무 좋아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야 할
사건이 터질 때까지는 평온했었다.
어느날 하야리 마을에 큰 불길이 치솟았다.
천 평이나 되는 대나무숲이 불길에 휩싸인
것이다. 초저녁부터 불이 붙은 대숲은 온밤을
대낮처럼 밝히며 타올랐고, 그 다음날 아침
해가 뜰 때야 마지막 재를 날렸다. 마을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불길을 바라보며
날밤을 세웠다가 그 다음날 검은 잿더미로
변한 폐허의 땅을 지켜보았다.
준과 그의 어머니는 그날밤 집을 비웠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준의 아버지는 불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음날 늦게 집으로
언저리에서 맴돌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여길 떠나 준, 고향은 이럴 때 떠나는
거야."
금례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례에게 애초에 약속한 대로 서울로
가기로 맘을 굳혔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대나무숲을 잃은
슬픔보다 크지 않았다.
사락사락 끊임없이 스치는 대나무숲의
물결치는 소리와 금빛 햇살이 숲속으로
비껴드는 아침과 저녁을 그는 얼마나
사랑했는가.
누가 그 거대한 황금의 머릿자락을
태워버렸는가.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준이 알고 싶은 것은 그 아름다운 숲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그렇게 무참하게 사라질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뿐이었다.
대나무숲이 없는 집은 이미 고향이
아니었다.재난은 그에게 서울로 등을
떠밀었고, 금례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준은 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금례와 함께
하야리를 떠나고 말았다. 준은 하야리를 떠난
후 금례와 함께 서울로 스며들어와 살면서
하야리의 대나무숲이 그의 살 속에서 굳어진
날개와 멈춘 강물로 침묵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오랜 후에 금례로부터 고백을 들었을
때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불을 지른 건 나였어."
그는 깊은 침묵뿐이었다. 그런 다음 준은
금례에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널
용서하겠다. 넌 지금 내게 있어서는 하야리의
죽순이야. 나는 네 살과 뼈와 영혼을
내것처럼 매만지며 키울거야. 다 자란
다음에는 하야리로 이식하겠어. 네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나와 하야리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야. 그
불타버린 대나무숲 텃밭으로.
"약속하겠어, 준."
"어떻게 약속하지?"
"목숨을 걸고……."
"좋아, 그말을 믿겠다. 그럼 넌 서울에서
뭘 하고 싶지?"
"욕심껏 살겠어."
"좋아, 내가 네 욕심이 되어 주지. 다만 그
욕심의 끝이 준이며 하야리라는 거을
잊지마."
"잊지 않겠어."
것을 믿었다.
2.화상의 그루터기
준의 팔이 어둠 속에서 높이 치켜지는가
싶더니 잽싸게 유라의 뺨 위에 빨간 손자국을
남겼다.
유라는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카핏 위에 쓰러졌다.
"억울해?"
준이 잇새에 억눌린 소리로 물었다.
"……."
"억울하다고 대답해 봐!"
준은 낮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억울해.
이건 정말 억울해, 왜 때리는 거야.
야만이야. 유라가 바락바락 소리쳐 대들기를
준은 바랐다.
그러나 유라는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앉았다.
"…… 지쳐가고 있어. 난 확실히
지쳤다구."
준의 입에서 담뱃불 빛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는 늘 감정을 안으로 다스리는 데 익숙한
편이었다. 그것은 노력이라기보다는
천성이었다.
그런데 요즘들어 그 천성조차도 균형을
잃을 때가 있다. 물론 그후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지금도 그랬다. 내가
유라에게 손을 대다니…….
"내가 오늘 왜 화를 냈다고 생각해?"
유라의 얼굴은 아파트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온 불빛을 받아 창백했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네 몸에서 풍긴 비누냄새 때문이었어."
유라의 하루 스케줄을 자로 잰 듯 머리 속에
완벽하게 알고 있는 그는 가끔씩 그녀가
종적없이 사라지면 거의 미칠 듯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낮도 아닌 밤에……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더구나 자기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도 없는 일을.
그의 상상과 예감은 늘 가슴을 포장처럼
찢었다. 오늘밤도 준은 유라를 아파트
거실에서 초저녁부터 기다렸고, 유라는
11시가 넘어서야 몸에서 은은한 고급비누의
향내를 풍기며 들어왔다. 그의 콧날은 유라의
몸 어느 구석에 밴 비누냄새조차 맡을 수
있을 만큼 예민했다.
다 집어치우고 싶다, 모두 다. 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10년이야. 넌 지금 이만큼 이루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 또 나도 그렇구.
그렇지만 우리 둘이 지금 가진 게 뭔지
생각해 봐."
준의 목소리는 점차 피아노의 낮은 키처럼
굵고 둔하게 변해갔다.
"부정의 흔적을 닦아낸 비누냄새만이 너와
나 사이에 떠돌고 있을 뿐이야."
그순간 유라가 날쌘 암쾡이처럼 준의 무릎
위로 뛰어 올라왔다.
"준,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유라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준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난 지금도 약속을 잊지 않았어. 꼭 그
약속을 지키겠어. 하야리로 돌아가서 다시
대숲을 일구고 그리구…… 준 다시 말하지만
유라는 준이 곧 자기를 밀쳐내기라도 할 듯
안타깝게 준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유라의
뺨에 얼룩진 눈물이 그의 뺨에 겹쳐갔다.
하지만…… 준은 생각했다. 네가 그 몸에서
찬란한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해.
깊은 잠은 유라에게 산뜻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간밤에는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단지 깊은 졸음이
눈두덩이에 무겁게 매달려 왔었고, 아침에
깨었을 때는 침대였다.
준은 거실의 소파에서 담요를 둘러쓰고
누워 있었다. 간밤에는 그렇게 잠들었다.
화장기를 말끔히 지우고, 긴 머리를 푸른
스카프로 질끈 동여맨 유라는 다갈색 홈웨어
식탁 위에는 토스트 네 쪽, 우유 한 컵과
커피 두 잔, 그리고 파인애플 두 쪽이 놓여
있었다.
체중에 신경이 곤두선 유라는 요즘 우유나
아이스크림, 초콜릿을 기피하고 있었다. 준은
식욕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는 유라에 대해
안쓰러운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미모는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가꾸지
않으면 잡초같이 되어요."
유라는 자기의 미모가 결코 선천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분명 축복받은 일이지만
동시에 저주받은 일이기도 했다. 여자는 자기
미모의 덫에 걸려 평생 그 노예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에서 비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유라의 속눈썹 위에서 무지개처럼
"난 유라가 볼품없이 뚱뚱해져두 좋다구,
그 아프단 소리만 없으면 말야."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션쇼를 위한
연습이 있는 날이나, CF촬영으로 온종일
시달리고 돌아오면 유라는 늘 끙끙 앓았다.
특히 유라의 단골병세는 허리와 어깨근육통과
편두통이었다. 그럴 때 유라는 늘 전화로
준을 불렀다.
"나, 지금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아. 어깨와
팔다리가 말을 안 듣구."
그때마다 준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왔다.
그녀는 몸이 나을 때까지 준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지난 가을에 안약광고 찍고 나서 아팠던
생각나지?"
준의 말에 유라는 파인애플을 입에 가득
"참, 지독한 촬영이었어."
강렬하게 퍼붓는 조명등 앞에서 눈을
깜박거리면 안 되는 촬영이었다. 나중에는
안질에 걸린 사람처럼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덕분에 볼이 씰룩거리는
안면근육통을 후유증으로 얻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리는지 알 수가 없어."
그의 말에 유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바로 그 말이
유라에게는 침같이 찔리는 말이었다. 그는 늘
자기에게 떠남을 획책하는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그녀의 야심은 불타올랐다. 내겐
아직 젊음과 미모가 있고, 앞으로의 무대는
더욱 넓고 크다. 그에게 딴 생각을 할 구실을
줘서는 안 된다.
유라가 대뜸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갈까?"
준은 늘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디로 가지?"
"한 사흘 푹 쉴 수 있는 곳으로 말야."
유라의 눈빛이 반짝거리면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준은 망원경을 들어올려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침햇살이 광장 위를 강렬한
서치라이트처럼 내려비쳤다.
그의 망원경 렌즈 초첨 속에는 광장의
주차장이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일요일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늦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유라, 흰쥐를 골라잡았어."
있는 하얀색 승용차에 렌즈의 초점거리를
맞추면서 말했다.
"기왕이면 고양이를 고르지, 준."
"고양이는 빠른 대신 한눈을 팔아서 안
돼."
"암튼 난 나갈 준비가 됐으니까."
유라는 청바지에 스포티한 청색 반코트를
입고 서 있었다.
"먼저 나가서 길 건너 가게 옆 코너에서
기다려."
"오케이, 실수없이 잘해."
유라가 아파트에서 나간 후 그는 5분
간격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밝았다.
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잠바에 손을 넣은 채
어슬렁어슬렁 흰쥐 옆으로 다가섰다.
준은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그의 시야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을 뿐 주위는 인적이
없었다. 그는 흰 쥐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차의 앞도어에 등을 기댔다.
그가 골라잡은 차는 '심카'라는 영문표기가
붙은 프랑스제 소형차였다. 선뜻 자신이 안
섰다. 고급 외제 차일수록 도어 키의 회로가
복잡하고 단단해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심카'는 처음이었다. 열릴까? 그는 재빨리
잠바주머니에서 한 꾸러미나 되는 열쇠뭉치를
꺼냈다. 그는 다시 주위를 돌아본 뒤
쪼그리고 앉아서 몇 개의 기초열쇠를
도어키에 찔러넣어 보았다. 대강의 회로가
손끝에 감지되었다.
그는 곧 날카로운 강철줄을 꺼내
기초열쇠를 깎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지막 마디의 걸림쇠가 닿는 부분을 다듬어
금속의 마찰음이 났다.
"휴우- ."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심카, 너도
이제는 내 밥이다. 이젠 어느 차라도 자신이
있었다. 여지껏 그의 손끝에서 풀리지 않은
차는 없었다.
그는 작년에 죽은 백씨 노인에게 감사했다.
백씨는 나형이 사는 하야리 식품점 옆의
철물점 주인이었다. 80평생을 열쇠만
매만지고 산 열쇠전문가였다.
준은 시간만 나면 백씨를 틈틈히 찾아가
열쇠 기술을 노인에게 배웠다. 5년에 걸친
수업끝에 그는 노인으로부터 열쇠 기술을
거의 전수받다시피했다. 백씨가 죽자,
철물점은 문을 닫았지만 백씨의 기술은 그의
손에 싱싱하게 살아남았다. 준이 차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불과 5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핸들을 거머쥔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스물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깨끗하고 앳된
얼굴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바짝
긴장했다.
여자는 체크무늬 스커트에 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단발의 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고, 가슴에 서너 권의 책을 한 팔로
감싸안고 있었다. 그녀는 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갑자기 당황한 듯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저 여자가…… 혹시.'
여자가 차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빌어먹을. 골치 아프게 됐군.
준은 엔진 키에 열쇠를 꽂은 채 손을
멈추고 있었다. 여지껏 이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순간 여자는 멈칫하던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준과의 시선을 피했고, 이내 몸을
되돌려 다시 아파트 현관으로 되돌아갔다.
아닌가? 괜히 도둑이 제발 저렸군. 콧김을
푹 내쉬었다.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것은 도둑이
제발 저린 탓만은 아니었다. 여자와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뇌리 속에는 학처럼
깨끗하고 맑은 여자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었다.
이제는 더이상 머무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차 주인이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준은 엔진을 걸고 후진기어를 넣었다.
백미러를 살피고 액셀을 밟으려는 순간, 그의
눈에는 아파트 현관 유리문 뒤에 실루엣처럼
숨어 있는 아까의 그 여자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벽 쪽으로 반쯤 몸을 감추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깐 숨이
멎었다. 이상하다. 저 여자는 왜 저기 그렇게
숨어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것일까. 역시 이
차의 임자? 아마 십중팔구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갔다.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말라. 퍼뜩 그런
말이 생각났다. 도둑은 현장에서 들키면
폭력을 쓴다. 그를 잡을 힘이 없으면 도망갈
길을 터주어라. 여자는 아마 자기 차가
도난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두려워서
빌어먹을, 오늘은 운수가 사납군. 아무튼
지금은 지체할수록 위험 부담이 커진다. 어서
가자, 흰쥐야. 그는 잽싸게 도로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심카는 곧 큰길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빠져나왔다. 코너에 대기하고 있던
유라가 다람쥐처럼 빠른 동작으로 옆자리에
올라탔다.
"잘했어! 존, 얼마나 맘이 졸였는지 몰라."
유라가 대견하다는 듯 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 웬 차가 이렇게 호화판이람."
유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차 안을
휘둘러보았다. 회색 모피 시트, 카스테레오와
카폰이 갖추어져 있었고, 뒤차창 쪽으로 대형
스피커 장치, 목각 인형 두 개. 뒷시트에는
사강의 '길모퉁이의 카페' 원서와 프랑스
그녀는 차 안에서 풍기는 감칠맛나는
향수가 니나리쿨초아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차창 앞에는 여자용 선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존, 이 차 임자는 프랑스 여잔가 봐."
준은 유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카의 주인은 아까 본 그
단발머리의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이 심카와 아무 관련도 없어. 그녀는
아마 어떤 이유 때문에 유리문 뒤에 서
있었을 거야.
이 차는 유라의 말대로 한국에 사는 어느
프랑스 여자의 자가용일지도 모르지.
프랑소와즈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 여자.
미스 프랑소와즈,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유라가 카스테레오의 버튼을 누르자 미셀
뽈나레프의 샹송이 흘러나왔다.
"존, 정말 멋져. 어떻게 운좋게도 이런
차가 걸렸을까. 우린 지금 빠리에서 벗어나서
리용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어.
당신은 장 폴 벨몬드구, 난 가만 있자, 난
그래 맞았어. 난 까뜨리느 드뇌브야. 우린
'빠리 엑소더스'란 새 영화를 찍으러 로케
현장으로 가는 거라구."
유라는 차창 앞에 놓여 있던 선글라스를
눈에 걸면서 참새처럼 말했다.
준은 이따금씩 엉뚱한 상상 속에 빠지는
유라의 허풍을 재미있게 듣곤 했다. 그녀의
감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그런
공상이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을 때는 자기
느낌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장 폴 벨몬드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 별루야, 고등학교 땐 알랑 드롱을
좋아했는데 차츰 나이가 드니까 험프리
보가트가 좋아지더군. 카사블랑카라는
영화에서 그 남자 너무 멋있었어. 그런
남자가 내 옆에 있었으면 꼭 껴안아 줬을
거야."
"남자 앞에서 그런 말하면 안 돼, 유라."
"왜? 질투하는 거야, 존?"
준은 유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선글라스
아래, 유라의 암적색 루즈 빛깔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차창에 바람 밀리는 소리가 낮게
흐르는 샹송과 섞여 귓속으로 젖어들었다.
무심코 한 유라의 말 속에서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경계심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큰 포플러들이 늘어선 전방도로의 시야가
화면처럼 다가왔다.
서로의 솔직한 감정을 사랑해야지. 그러나
준은 자기가 만든 분위기 속에 쉽게
빠져버리는 유라의 짧은 감성을 잘
이해하면서도 용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정열을 가진 여자는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남자 문제에서 유라는
특히 그랬다. 준은 그런 생각을 지우려는 듯
액셀을 힘껏 밟았다.
"배우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유라가 선글라스를 벗겨내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훨씬 가라앉았다.
"나, 영화에 출연해 볼까?"
준이 유라를 흘끔 바라보았다.
"영화?"
준은 순간적으로 자니 홍을 머리에
떠올렸다. 자니 패션이 영화회사를
설립했다는 것은 다 아는 소문이었다. 준은
유라의 말에 계속 침묵을 지켰다. 유라는
준의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은 섣불리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유라는 속으로 후회했다.
둘 사이의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슨
말이 터지면 그들은 상충되는 견해 때문에
감정이 엇갈리고 그때마다 심리적인 억압감에
빠져 입을 다물곤 했다. 갑자기 삐익삐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유라는 깜짝 놀라
카폰을 바라보았다.
"쥬뎀므."
준은 단 한마디를 던지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와! 호호호……."
유라의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터져나왔다.
자기의 예감이 너무나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유라는 감탄하고 있었다.
"프랑스 여자가 방금 무슨 말을 했어?"
"좋게 말할 때 차를 얌전히 돌려달라는
말이야."
"그런데 그 대답이 쥬뎀므?"
"아무려면 어때. 불어면 됐지. 쥬뎀므란 잘
알았다. 오바, 그런 뜻이야."
"피!"
유라가 피식 웃었다. 수화기의 신호가
떨어졌는데 왜 상대방은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카폰은 심카의
임자가 불렀음에 틀림없었다.
벗어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상수리나무가 꽉
들어찬 샛길 옆으로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곧이어 외딴 집의 낡은 기와지붕이 펼쳐진
대나무숲이 그림 같았다. 흰쥐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건강해 뵈는 노파가 다가왔다.
"아유, 어서 오시우."
노파가 그들을 알아보고 반색을 했다. 작년
가을에 며칠 동안 묵었던 길손을 노파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준은 사랑채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렴요. 비워놓구 사는데……"
준이 하필이면 날 이곳으로 끌고왔을까?
대나무라는 큰 화상(火傷)의 그루터기를 과거
속에 구겨넣고 살고 있는 자기에게 고향
하야리를 연상시키는 이 집으로 끌고와서 뭘
마른 댓잎들이 바람에 밀려 쏴락쏴락
서걱거리는 소리가 그녀를 자꾸 우울 속으로
밀어넣었다. 유라는 자신이 그 소리들에 쫓겨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라는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듯 지갑의
지퍼를 열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성냥을 긋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끝으로 타내려 오는
불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는 깊은 어둠 속이었다. 그녀는
대나무숲 울타리 곁으로 다가가 성냥을
그었다. 마른 싸리울타리에 불을 붙이자
불길은 석유불에 당긴 것처럼 솟구쳤다.
갑자기 밝아진 주위, 경쾌한 타음을
터뜨리는 불꽃,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헤집으며 그녀는 집을 향해
집 뒤채로 뛰어든 그녀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수면제 두 알을 입속으로 삼키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녀가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마을은 높은 연기와 침묵 속에 휩싸여
있었다.
유라는 생각을 지유려는 듯 차창을 향해
담배연기를 훅 불었다.
잊어야지. 잊지 못하면 미칠 수밖에.
그러나 대숲 속에서 하야리의 기억을 어떻게
지운단 말인가.
준이 날 또다시 이런 곳으로 끌고온 것은
내게 심리적 고문을 주기 위한 방법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모처럼의 여행을 이런 시골
구석에 처박아버릴 이유가 어디 있을까.
"영화 따윈 꿈도 꾸지 말어."
준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꿈이었어."
"지금도 넌 스타야."
"그렇지만 배우는 아니잖아."
"넌 남이 주는 떡이 쓴지 단지도 모르고
덥석덥석 받아먹는 게 탈이야. 어떤 녀석인
줄 모르지만 널 영화에 출연시키겠다는 게
미끼라는 걸 알아야 해. 도대체 그녀석이
누구지?"
준은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누군 줄 다 알면서 묻긴……."
"자니 홍, 그치말야……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너한테 이미 경고했어. 그녀석을 다시
만날 때 어떻게 된다는 거 기억하고 있겠지."
유라는 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한 말은 사실이었다. 만일 내가 딴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말하거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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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을 보듯 환했다.
도대체 준이라는 남자는 내게 있어서
무엇인가. 불그림자처럼 내 등뒤에 서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을 들고 있다. 내가
이 남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에 진 빚
때문일까.
그가 내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날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야리라는
과거를 고수하려는 헛된 그의 고집 때문일까.
그녀의 머리는 수세미처럼 엉겨왔다. 그
결론은 자기 힘으로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준, 화내지 말어. 난 지금 코너에 몰려
있어. 표가 종미를 내세워 날 치고 있다구.
여기서 같이 맞싸워 이기느냐, 아니면
뛰쳐나가 더 큰 고지를 점령하느냐 선택해야
노시 **파의
종손이었지만, 그분은 너무 연로하시고
유라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그래서 자니 홍을 택하겠다는 거야?"
"붉은 잠바가 날 포기한 것은
기정사실이야. 그럼 내가 설 무대는 어디지?"
"표, 그녀석은 널 시험하고 있는 거야,
네가 빠져나갈까 두려워서 연막을 치고 있는
거야. 넌 샤넬 라인에서 계속 버텨야 해.
그리고 그 다음은 ……."
"그 다음은?"
"때가 되면 넌 은퇴해야 하구. 그 다음에
네 무대는 하야리야."
준은 여전히 자기와의 약속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영화를 해보고 싶어."
"영화를 해도 자니 쪽은 안 돼."
"왜 자니에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거기서 컸어. 그런 네가 무슨 이유로든 자니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면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지. 게다가 난 자니 그 녀석을 위해 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그리고 또 한가지,
녀석은 너에게 지나치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점이야."
어느덧 싱싱하던 햇살이 짙은 구름 속으로
가렸다. 차창 앞을 가린 댓잎 사이로 어둡고
음울한 대나무 숲속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가진 여행이야, 앞으로의 일을
가지고 다투지 않기로 해."
준이 마음을 바꾼 듯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서로의 맘을
상하게 하고 우리들의 여행을 망쳐서는 안
갑자기 어둡게 그늘졌던 그들의 마음은
둘의 똑같은 생각 때문에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준, 그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나를 보면 얼굴색이 달라지는 사람, 그런데
나는 성급하고 냉정한 교만과 욕심 때문에
그를 순간적으로 미워하고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나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는데 난
그것이 너무 많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난 나쁜 여자야. 그러나 준은 날
떠나지 못해. 우리들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대도 실망처럼 큰
것이지.
"존, 난 당신밖에 없어."
그녀는 자기 어깨 위에 온 준의 손을
잡았다. 준의 손마디가 유라의 길고 흰 손을
그의 손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시트를 뒤로 밀었다. 그는 그녀의
스웨터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젖살은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때가 언제였지?"
준이 유라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때라니?"
"맨 먼저 내가 만진 날."
"내가 고3때 가을이었으니까……."
그해 가을도 대나무숲 깊은 곳이었다.
유라는 그때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있었다.
유라가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고 그가 유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유라의 스웨터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딱딱한 각질의 브래저가 손끝에 닿았다. 그
다음 껍질을 밀어올리자 스폰지보다 더
감추어져 있었다. 날카롭게 발기된 끝이 손에
잡혔다.
그때는 유라가 아니고 금례였다. 금례는 큰
숨을 몰아쉬면서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아파, 그녀가 맨 먼저
한 말이었다. 지금 그녀는 아프단 말을 거의
않는다. 유라는 눈을 감고 입술을 벌리면서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준의 손이 닿으면 고압의 전류가 온몸에
타오른다. 어디 그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있는가. 준은 자기 몸의 성감대를 모조리
발견해 내고 확인시켜 준 단 하나의 남자.
자기를 암사슴으로 길러낸 첫남자였다. 그해
가을, 대숲에서 그의 손이 침범해 들어온
이후 오늘까지 준은 유라 이외의 여자는
몰랐다. 준은 자기에게 줄기차게 불을 붙여온
"준, 남자들은 왜 그렇게 만지고
싶어하지?"
유라는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준의 손을
누르며 말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여자들은 결국
어머니의 연장이야. 우리가 아기였을 때 엄마
젖을 먹고 매만지며 자랐지. 하지만 좀더
자라서는 그 잠재 욕구가 차단당했어. 난
남자의 접촉 욕구를 모성 회귀 본능으로 봐.
젖을 빨고 만지고 자기가 나온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회귀 본능은 일종의
애욕이야. 어떤 남자든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모성애를 느끼지."
"당신을 안고 있을 때 가끔씩 난 아기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
그는 어느새 그녀의 스웨터를 밀어올렸다.
"준, 그만해. 참을 수 없어."
그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녀의
스웨터를 밀어내렸다. 그녀의 눈은 안개처럼
젖어 있었고, 뺨은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준은 주위를 보았다.
"지금은 참기로 하지, 긴 밤을 위해."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 둘은 원할 때 절대로 참지 않았다.
"준, 날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대숲으로 들어가면서 유라가 물었다.
"유라가 서울 생활을 끝낼 때까지."
"그때가 언제라고 생각해, 준."
"유라의 욕심에 진이 빠졌을 때겠지.
하지만 그 세계란 욕심만으로 버틸 수 없게
될 때가 있어."
"그때 유리는 결혼하는 거야?"
돼. 우린 하야리로 돌아가 함께 살 거니까."
"그건 나도 원해. 하지만 당신이 나를
얼마나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자기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말투로군."
"조금은 나를 알 수가 있어. 당신의 눈으로
보면 난 한낱 요녀에 불과해. 내 속성은
바뀌지 않았어. 그런 나를 곁에서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상히 여길 때가 많아. 도대체 당신이
서울에서 살면서 거두고 있는 것은 뭐지? 내
사진이나 찍고 나를 보살피면서 끊임없이
속을 썩이고 살기엔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들어?"
준은 유라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금례'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아무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죽어가고 있어.
이 시대에서 내 재능이나 야망은 속절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대숲이 타버리고,
아버지가 죽고 유라를 따라 서울로 온 후, 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대신 얻은 것이
있었지. 그건 금례, 너야. 넌 나를 불로
가졌어. 네 손으로 태워서 나를 획득한 거야.
네가 나에게 준 충격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어.
이제 아버지의 땅이었던 대숲터 밭은 내 것이
되었고, 넌 나와 함께 새로운 대숲을 갖게 될
거야. 서울은 네가 하야리로 돌아가서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단련시켜 주겠지.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은 마음뿐이야.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만이 소중해. 종이쪽지에
두 사람의 이름을 남기고, 얼굴이 닮은
아이를 남긴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사람이 없어. 어머니는 날 좋아하지만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는 남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유산
문제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지. 난 과거는
잊고,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 대신 현실에
충실해. 네 머리는 검고 눈빛은 빛나며
입술은 뜨거워. 난 그것들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네 곁에 있어. 이것은 심장의
고동소리만큼이나 확실한 행복이야."
그녀는 대나무 한 그루를 한쪽 팔에 끼고
기댄 채 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
그래, 그건 나도 모르는 말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서울에서 함께 숨쉬고 그리고
그 후에는 하야리로 돌아가는 것,
그뿐이었다.
어두워지기도 했다.
하늘을 덮은 댓잎들이 바람에 휩쓸리며
쏴아쏴아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밖은
어둡고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둘은 곧 대숲에서 벗어났다.
사랑채의 웃목에는 사과상자와 짐짝들이
다락처럼 쌓여 있을 뿐, 방은 작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격자무늬의 유리창이 한쪽 벽에 나 있고 그
다음 방문은 덧문이었다. 노파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온돌방은 따뜻하게 뎁혀 있었다.
아릿목에는 금침으로 수놓은 낡은 원앙이불이
한 채 깔려 있었다.
작년에 덮었던 이불이 벽장에서 고스란히
끌려 내려왔다. 노파가 시집올 때 해와서
한번도 덮지 않았다는 이불이다. 색은
밖은 어둠 속에서 추출추출 비가 내렸다.
이따금씩 바람에 휩쓸린 빗발이 덧문의
창호지를 후둑후둑 때리고 지나갔다.
30촉짜리 전등이 천장에서 필라멘트까지
환히 보이면서 멀건 불빛을 흩뿌렸다.
그는 잠들지 않았다. 그의 팔 안에서 살아
있는 여인의 고른 숨소리를 자신의 것처럼
듣고 있었다. 빗소리는 흡사 작은 악기들이
모여서 제각기 다른 소리로 합주하는 관현악
같았다. 그는 그녀의 머릿발에서 나는 짙은
살냄새를 맡으면서 유라의 굽은 등뼈마디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그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희미한 불빛을
속눈썹 사이로 바라보았다. 전등불은 마지
못해 불을 켜고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씩 악몽에서 헤어나듯 소스라치게 몸을
떨다가 손을 더듬어 그를 확인하고 다시
안심하듯 숙연해지곤 했다.
"존, 난 잠들 수 없어. 잠깐 잠들면 무서운
가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곤 해. 수면제 두
알만 먹으면 푹 잘 텐데…… 이거 봐,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잖아. 난 이런 헛간 같은
골방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침대가
아니면 한숨도 못 잔단 말야. 내일은 제발
여기서 떠나. 침대가 있는 따뜻한 방이거나
아니면 집으로 데려가 주든지."
한참동안 불평을 털어놓던 유라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는 겨우겨우 새우잠이
들었는지 쌔근거렸다.
준은 가만히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쪼그려 앉았다.
담배연기처럼 폐부 깊숙히 스며드는 외로움을
참아냈다.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방에
살을 맞대고 있어도 시간은 각자 따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유라는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의 떠남을
획책했고, 그리고 하야리를 떠나 서울이라는
유랑의 도시고 흘러 들어왔다. 그녀에게는
정착이란 것을 기질적으로 회피하려는 성향을
자신도 모르게 키워온 것이다.
그녀가 결혼과 아기를 원하지 않은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유라가 처음 실수로 준의
아기를 가졌을 때 그녀는 아이와 자기가 함께
불행해지리라는 이유에서 소파수술을 했고,
준과 하야리를 떠나기 위해 대숲을 태워버린
것만큼이나 큰 결단이었다.
난 세상을 살얼음 밟듯 살고 싶지 않아.
도대체 이 세상에서 아껴야 할 게 뭐지? 준은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자기 심정을 곧잘 드러내곤 했다.
그래, 내일은 여길 떠나자. 준은 이불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갇힌 새의 불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새벽녘에 준이 설핏 잠에서 깨었을 때
유라는 그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온돌의
열기는 이불 위로 훈훈하게 올라왔지만 방
안의 공기는 한기가 감돌았다. 방문은 아직
어둠에 배어 있었다.
심카는 실종된 지 꼭 스물 네 시간이 지난
기어들었다.
아파트의 현관문에서 5미터쯤 떨어진
주차장의 흰색 라인 속으로 톱니바퀴처럼
끼어들어간 흰쥐 심카는 드디어 발을 접어
엔진을 껐다.
준은 자신의 기초열쇠로 깎은 엔진 키를
뽑고 앞도어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심카, 수고했다. 네 주인이 널 반겨줄
거다."
그가 도어를 닫고, 차체를 손으로 톡톡
치고 되돌아섰을 때, 준은 차의 도어에 몸을
기댄 채 멈칫하고 섰다. 갑자기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그는
현관문을 마악 밀고나오던 바로 그 여자,
체크무늬 스커트의 단발머리 여자와
마주쳤다.
권 끼고 부지런히 나오다 준을 보자 기겁을
하듯 발을 멈추었다. 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심카 옆에
멍청이 서 있었다.
이윽고 여자는 천천히 발을 떼면서 심카
앞으로 다가오다가 그대로 지나쳐 걸었다.
준은 이윽고 서둘러 여자의 뒤를 바짝 따라
걸었다.
아파트 밖으로 향하던 여자가 다시 발을
멈춰 섰다. 준이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 같았다.
준은 여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여자는
태연하게 서 있었다. 얼굴빛이 하얗고,
눈빛이 검고 몸이 가는, 좀 독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준은 여자 옆에 다가가 주머니에 심카의
한참동안 키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가 여자의 손에 키를
떨어뜨렸다.
"쥬뎀므."
준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눈을 더 크게 떴다.
준은 이내 되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저……저 잠깐."
여자가 그를 불렀다.
준이 발을 멈추고다시 여자를
되돌아보았다.
여자가 그를 향해 열쇠를 들어올렸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쓰셔도 돼요."
여자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이젠 됐소. 다시는 안 탈 거요. 난 한 번
탄 말은 두 번 타지 않거든요."
준은 남의 차를 탄 주제에 주인 앞에서 무척
거만스럽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도둑치고 너무 뻔뻔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한 번 탄 말을 두 번 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같은 차를 훔쳐 탄 적은 없었다.
더구나 차주에게 들킨 적도 없었다.
"절 좀 태워주시겠어요?"
여자가 심카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잠시 여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준은 여자를 한참동안 올려다보았다.
"도서관에 가는 길이거든요? 길도 잘
모르고 해서 차를 두고 다니곤 했는데 마침
오늘은…… 그러니까 절 태워주시면 모든 걸
용서하겠어요."
흔들어 보였다.
단발머리의 여인이 곧 차에 오르자 준은
여인으로부터 진짜 키를 받아 엔진을 걸었다.
"어느 쪽으로 가시는 거죠?"
"저어…… 프랑스 문화원 아시죠?"
준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곧 기어를 넣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 여자와의 만남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 여자와는 바로 차를
훔칠때 처음 만나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친숙하게 지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여자의 혀에 심하게
휘말린 어색한 발음을 빼고는. 운전석 옆에
앉은 여자의 옆얼굴은 앞모습보다 훨씬
윤곽이 뚜렷하고 이지적이었다.
"제가 주인이란 걸 어떻게 아셨지요?"
"그냥 눈치로 때려잡았죠. 차도둑이란 원래
"차…… 도둑이신가요?"
여자의 말은 프랑스식 발음에 실린 채였다.
"난 차를 훔치지 않습니다. 단지 빌려 탈
뿐입니다. 이번에도 댁의 차를 빌린
겁니다만. 그렇다고 도둑의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죠."
"좋아요. 암튼, 전 그런 거 따지지는
않아요. 어차피 이 차도 제 차는
아니니까요."
"그럼……?"
"제 아버지의 차예요. 하지만 먼저는 이
세상의 차예요."
"이 세상의 차?"
"누구든 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든."
준은 여자의 몇 마디 말 속에 세상을
사실 여자가 차도둑을 그렇게 대해 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요."
"아…… 아니에요. 위로해 드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건 진심이에요."
여자는 손가락으로 콧날을 문지르며 그
말이 사실임을 강조했다.
"차도둑을 엄호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나오십시오.
도망이나 가게. 댁은 내가 차를 뺄 때도
현관으로 몸을 숨기고 피했습니다. 내가
마음놓고 훔치도록 방관한 겁니다. 그걸
잘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비겁한
겁니다."
"아…… 아니에요. 전…… 정말 그때
차라리 그 자리에 없었으면 싶었습니다."
두려워서였나요? 말하자면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말라, 그 때문이셨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전 잘
모르겠어요. 전 그냥 그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왜 그래야 되는 건지 그게 문젭니다.
차도둑의 입장에서 대단히 주제넘은
질문입니다만 꼭 알고 싶습니다."
준의 다그침에 여자는 금방 눈물이 떨어질
듯 울상이 되었다.
"그건…… 그건……."
"대답이 궁할 때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쥬뎀므."
준은 씨익 웃었다.
여자는 처음의 앳된 첫인상과는 달리
완숙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점차 다가오는
준은 심카를 될수록 천천히 안전하게
몰면서 옆에 탄 미지의 여인이 주는 깨끗하고
안락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여자가 한 말들은 조금도 위안적이거나
빈정거림이라곤 없었다. 단지 여자가
자기에게 필요이상의 강렬한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불문학을 공부하시나요?"
"아뇨."
여자는 그 말에 놀라듯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반문 같았다.
"이 차가 댁의 차라면 프랑스와 깊은
관련이 많아서죠. 프랑스 차에 프랑스 책에
샹송에다가 또 향수냄새도 그렇구요. 카폰이
울렸을 때 제가 쥬뎀므라고 대답한 것은 그
때문이었죠."
치아가 고르고 단정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전 불문학 전공은 아니구요.
소설책을 빌려다 읽어요. 사실 저는 국민학교
때부터 프랑스에 가서 살았어요. 귀국한 지가
두 주일? 서울은 아직 길도 몰라요. 그래서
이 차도 그냥 두고 다닐 때가 많아요."
준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는
그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뭔가 정신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준은 그때서야 여자가 이곳
생활에 아직 적응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에서는 니스의 예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죠. 상업 사진이에요. 참,
인사드리겠어요. 제 이름은 조미양이에요.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조앙이라고 불러요."
냄새가 풍기는 한국 여자를 바라보았다. 갈색
스웨터와 단발머리와 미클리 선글라스의
단순한 외모가 크게 돋보였다.
제기랄, 왜 전공이 하필이면 사진이지?
게다가 이름은 조앙, 아직도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난 준이라고 합니다. 무례하게 차도둑이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제
이름은 곧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준, 준, 기억하기 좋은 이름인데요?"
조앙은 장난스럽게 준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이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자 그녀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친밀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사진을 찍는 동업자라는 것이 동질감을 준
때문일까?
차에게 내렸다. 조앙이 준을 바라보았다.
훌쩍한 키에 마른 체구, 다북한 머리와
선글라스 속에 드러난 고독한 눈빛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더 준수한 인상을 주었다.
차도둑으로 몰아치기에는 아까운 사내였다.
점잖은 말씨와 마디를 끊는 듯 강렬한 행동,
예민한 센스가 조앙의 마음을 끌었다.
"절 여기 버리고 가실 작정이세요?"
여자가 준에게 물었다. 준은 망설였다.
기사노릇을 더 해달라는 건가? 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하지 말자.
"혹시 경찰에 신고하시려면 일루 하십쇼."
그는 대답대신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준으로부터 명함을 받아 쥔 조앙은 눈빛을
반짝거렸다. 거기에는 준의 이름과 함께
스튜디오 007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제가 근무하는 사진관입니다. 전
증명사진이나 기념사진을 찍는
사진기사입니다. 특히 출장은 환영입니다.
필요하실 때 불러주십시오. 마드모아젤."
조앙은 손에 명함을 쥔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사내의 모습이
익살스러워 보였다. 열쇠 전문가가 차도둑,
게다가 사진관 기사라. 차도둑이 주인을
만나고도 달아나지 않고 뻔뻔스럽게 여유있게
명함까지 내밀면서 장사까지 하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태워다 줘서 고마웠어요."
이윽고 조앙이 말했다. 프랑스식 발음에
실린 목소리였다.
"고마운 건 바로 접니다. 그럼……."
준은 곧 되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심카를
임자에게 들킨 것은 실책이었다. 다행히 맘씨
좋은 여자를 만나서 이 정도지, 잘못
걸렸으면 지금쯤 그는 유치장의 철책을
붙들고 있기에 알맞을 것이다.
역시 낮도둑은 위험해.
그가 나인 그릴에 도착하자 표 사장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 사장은 아버지와
가장 절친한 고향친구고 어려서부터
친가족처럼 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들 두
부잣집 외아들은 죽이 맞아서 돈을 물쓰듯
하면서 한량노릇을 해왔었다. 그러나 표
사장은 다행히 사업 쪽으로 눈을 돌려
하야리의 땅을 팔지 않고 지킬 수 있었지만
준의 아버지는 땅을 반이나 탕진해 버렸다.
"여보게, 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었네."
"샤넬 라인 관계입니까?"
"그 관계라면 표 전무와 상의하시죠."
"그녀석과 마찰이 생겼네. 자네도 잘
알겠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독점해 왔던
패션산업에 많은 경쟁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네. 우리도 이젠 구식경영으로 맞설
수는 없게 되었지. 문제는 자금인데. 이젠 내
도장 하나면 하야리의 내 땅이 모조리
은행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
"하야리 땅을요?"
준은 놀라서 표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마지막 목줄이 걸린 땅이지."
"하지만 그건 사장님이 늘 말씀하시던
노후를 위한……."
"그래서 나도 무척 고심했었지. 그 땅은
금맥이 발견되고 관광지 개발의 전망이
좋아서 은행들이 군침을 흘리는 땅이지.
"샤넬 라인에 10억을 투자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잖은가."
"확장 부분은 구체적으로 뭐죠?"
"낸들 아나, 조카녀석이 플랜을 짜고
있는데 돈이 그만큼 필요한 모양이야.
투자하면 몇 년 안에 그 돈은 빼낼 자신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도장을 찍으셨습니까?"
"거의 끝낸 상태지. 마지막 도장 하나만
남았어."
"절 부른 이유는 뭐죠?"
"은행에서 우리 땅 옆에 있는 자네 땅까지
원하고 있네. 5억은 더 보더군. 어때? 이번
기회에 합작해 보지 않겠나?"
표 사장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맡기려고 하다니. 더구나 나까지 끌어들여서.
준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그 일이라면 전 어렵습니다."
준의 말은 단호했다. 망하고 싶으면 혼자
망하지 왜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지? 더구나
여우 같은 붉은 잠바의 손에는 10억이 아니라
100억을 쥐어줘도 녀석의 머리 가지고 사업은
어림도 없었다. 그것은 녀석에게 모래를
쥐어주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잘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패션산업이
모델들이나 끌어모아 선전하던 시대는
지났다. 붉은 잠바, 네놈이 삼촌을 어떻게
녹여놨는지 모르지만 경쟁업체와 돈으로
맞서려는 방식 자체가 얼마나 단순한
착상인가.
사진작가입니다. 그리고 하야리 땅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가령 그럴 수
있더라도 그건 안 됩니다. 전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겁니다."
"나도 자네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변함없네. 하지만 사업만 일으켜 놓으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닌가."
"사업은 누가 일으키죠?"
"현금이 일으키지."
"그 돈은 누가 쓰죠?"
"조카의 계획이네."
"자중하십시오."
"무슨 말인가?"
"조카를 너무 믿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이 마당에 그럼 누굴 믿겠나."
"솔직한 충고입니다. 표 전무 머리로는
계획이 따르면 안 됩니다."
"허어…… 맞는 말이긴 하네. 하지만
사업에서 지나치게 주판알을 퉁기면
소심해져서 못 써. 배짱으로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지."
"그건 옛날 방식이라구요. 배짱은 지금에
와서는 솜뭉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은
원칙과 계산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더구나
상대는 뉴욕 7번가에서 '자니' 라벨이 붙은
프로급입니다. 연매출액만도 3백만 달러,
녀석은 자로 잰 듯 패션회사를 경영하면서
본국을 공략하고 있죠. 녀석이 밀라노의
오뜨꾸띄르에 진출한 것은 오래 전입니다."
"바로 그 점이네. 표 전무가 우리 샤넬
라인이 뉴욕 7번가에 쇼룸과 스토어를
개설해야 한다는 것이네."
디자이너 윤희는 국내에서는 일급이지만 뉴욕
시장에서는 크리에이터를 얻고 있지 못하고
있구요. 자니 홍조차도 그 곳에서는
B급입니다."
"골치 아프군."
"지금 없는 돈을 끌어들여 뉴욕 진출은
무립니다. 우선은 국내 시장을 튼튼히 다진
다음 해외시장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계획을 세우십시오."
"표 전무는 자니 패션이 가진 것, 또
가지려는 것과 모두 맞서야 한다는 거네."
"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
돌 같은 녀석, 그래서 10억을 풀어 뉴욕에
쇼룸을 내고 영화사도 설립하고 건물도 다시
짓겠다는 건가? 바보 같은 조카 때문에
거지될 사람 또 하나 있겠군. 자니 패션을
자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똑똑한
발상이었다.
"결국 자넨 투자를 않겠다는 건가?"
"난 하야리를 돈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표 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이미 목줄이 잡혀서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네."
표 사장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끝난 일을 저와 상의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지만 마지막 도장이 남아
있으니까 최후로 말씀드리죠. 하야리 땅을
지키십시오. 패션은 망해도 하야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업가의 말이 아니네. 자네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그리고 또
사실인가?"
표 사장은 드디어 유라의 문제를 안건으로
내놓았다.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표 전무의
장난에 유라가 계속 놀아날 수는 없죠."
"그게 무슨 말인가?"
"모델끼리의 신경전과 라이벌 의식은
굉장합니다. 사장님도 그 점은 아시겠지요?"
"그건 그렇겠지."
"나라고 유라를 묶어둘 수만은 없습니다."
"그럴 테지. 어려운 문제가 많겠지만
유라만은 자네가 노력해 주게. 우린
하야리라는 고향으로 묶인 친구들이 아닌가."
"고향도 실망하면 떠나는 거죠."
"암튼 잘 해주게."
"그만 가보겠습니다."
표 사장은 잠시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듯했다.
준은 다시 돌아서서 표 사장에게 말했다.
"하야리를 버리면 끝장입니다."
준의 말에 표 사장은 다시 눈을 감았다.
대강 짐작으로 표 사장의 하야리 땅은 붉은
잠바의 손에 거의 넘어간 듯했다.
불여우 같은 녀석이 조카라는 것을 미끼로
삼촌의 돈을 공략한 것이다. 그것도 뉴욕
시장 개척이란 미명하에. 그 일은 겉으로
보면 샤넬 라인의 사업 확장이지만
내용으로는 붉은 잠바의 손바닥 안에 들어간
금고나 다름없었다.
준은 이미 붉은 잠바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가 하는 일들이 눈에 너무 빤히
보여서 탈이었다. 준이 나인 그릴에서 나왔을
빛살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의 발신음만 귓속에서 계속될 뿐
응답이 없었다. 그의 예감에 잡히는 곳은
없었다. 촬영 스케줄도 없고, 연습 계획도
없었다.
준은 곧 자신의 지하실방으로 들어와
밤늦도록 암실작업을 계속했다. 그가 찍은
필름들은 모두 유라의 광고용 컬러
사진들이었다.
작업을 대강 끝내고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유라의 아파트에 전화를 했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사진을 골라야 하는데
정말 미치게 구는군. 준은 헤어디자인
살롱으로 전화를 했다. 디자인실의 미스 장의
"언니는요 낮에 들렀다가 곧장 가셨는데요.
2층에서 보니까 어떤 남자 두 분이 유라
언니를 굉장히 큰 외제 차에 태우고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요."
준은 곧 유라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까
미용실의 미스 장이 한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유라의 아파트로 돌아와 유라의 전속
헤어디자이너 미스 장에게 다시 전화를 했을
때, 미스 장은 아까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유라가 머리를 손질하고 되돌아 갔을 때
미스 장은 유라의 뒷머리 모습을 보기 위해
2층에서 유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목에서 웬 사내들이 언니 앞을 막고, 무슨
말을 하더니 언니가 꽤 망설이는 것 같더라.
예정에 없던 뜻밖의 일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유라 언니가 퍽 당황해 했으며
내키지 않는 동행을 허락하는 것 같더라는
얘기였다.
두 사내와 외제차라. 선뜻 물망에 떠오르는
대상은 없었다. 미스 장의 말은 외제차
같았다는 뜻이지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주위에서 외제차를 가진 사람은 꽤
많았다. 붉은 잠바도 자니 홍도 모두
외제차였다.
단지 확증이 가는 것은 그들이 미용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보아
유라의 행적을 아주 잘 아는 자들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유라가 그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따라갔는지 확실하지 않은
3.늦은 밤의 장소
미제 폰티액은 서울 시내를 벗어나자 속도
계기가 150을 넘기 시작했다.
산뜻한 정장을 차려입은 운전기사의 나이는
마흔도 중반을 넘어선 것 같았다.
흰 모피 시트로 감싸인 뒷자석은 넓고
깊었고, 진동이 전연 없는 데다가 자체에서
나는 엔진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차
안에는 작은 간이 스텐드바가 있었고 카폰도
설치되어 있었다. 스테레오에서는 쇼팽의
피아노곡이 낮게 흘렀다.
옆자리의 사내가 '화이트 호스'병을
복스에서 꺼내들고 유라를 바라보았다.
유라는 사내를 향해 씽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가다듬은 콧수염과 구렛나룻이 돋보였다.
눈동자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어깨가 크고
체구가 자기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유라가 미용실에서 나오자 이 미국인이
운전기사와 함께 그녀의 앞에 다가왔을 때
유라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났었다. '자니
홍을 아시죠. 저희는 그분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운전기사가 말하자 미국인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뜻밖이라서 유라는
잠시 멈칫거렸으나 언젠가는 그를 만나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폰티액에 주저없이 올라탔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신가요?"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운전기사는 단지 그 말만 했을 뿐이었다.
유라가 운전기사를 향해 말했다.
"저는 할리웃에서 온 스티브입니다."
미국인이 그녀를 향해 정확한 한국말을
했다. 유라는 순간 깜짝 놀랐다. 미국인이
한국말을 전연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어마! 실례했어요. 저는 한국말을
모르시는 줄 알고 그만……."
"괜찮습니다."
미국인의 말투는 완연히 한국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발음과 억양이어서 만일 눈을
감고 들으면 누구도 그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스티브는 자기의
한국이름이 갑돌이라고 했다. 자니 홍이
붙여준 한국 이름이며 자기는 자니 홍과
동업자라고 말했다.
스티브는 위스키를 작은 유리잔에 따라
스티브와 함께 눈짓으로 축배를 하고, 입술
끝에 잔을 가져갔다. 감미롭고 강력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화이트 호스는 혀를 휘감으며 자극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세요."
유라는 그의 푸른 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특기죠.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씁니다."
"어머!"
유라는 스티브를 감격어린 눈으로
올려보았다. 콧수염 때문인지 위스키 탓인지
그가 미국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와 많이 닮은
것처럼 보였다.
"디자이너신가요? 자니 홍처럼……."
"오! 노…… 난 패션모델 출신이지만
신인이지만 작년에 만든 '뉴욕 카우보이'란
영화는 골든 글로브상 후보작 직전까지
올랐었죠. 아시는지 모르지만 데이비드 린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조연출을 했었죠."
"어마?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만든 바로
그 데이비드 린?"
"아시는군요."
유라는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열이 가득
오르기 시작했다. 유라는 갑자기 유명한
영화배우가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져서 자기는
지금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영화 촬영을
가기 위해 헐리우드의 비버리힐즈로 가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스티브 씨, 미처 못 알아봐서 미안해요.
절 데리러 이렇게 손수 오시다니."
"아닙니다. 전 유라 씨를 모실 수 있는 게
들었죠. 물론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는
사진보다 훨씬 아름답군요. 전 아까 처음보는
순간, 한국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스티브는 고개를 뒤로 빼면서 유라의
얼굴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았다. 유라는 마치
스티브에게 카메라 테스트라도 받는 기분이
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역시 제가 보기에는 유라 씨에게 여러
개의 각도가 있군요. 앵글이 중요하죠. 물론
화장도 필요하지만 유라 씨의 강점을 여러
앵글에서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티브는 전문가답게 그녀에게 자기의
관점을 말했다.
"제 사진들을 보셨나요?"
"봤죠. 그런데 그 사진들은 누가 찍었는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준의 사진
실력으로는 내 진면목을 백프로 살려내지
못했을지도 몰라. 역시 골든 글로브상
후보작까지 오른 영화를 만든 스티브의
눈에는 중의 사진이 헛점투성이로 보이겠지.
스티브는 지금 나를 보고 얼마나 감탄하고
있는가. 사진이 실물보다 못하다는 것은 내
얼굴이 카메라를 안 받는 게 아니라 준의
카메라 기술이 그만큼 미흡하다는 뜻이야.
역시 준은 국제적으로 보면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한 거야.
유라는 점차 스티브에 빠져들면서 자기가
가진 것들이 그의 눈에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이 보일 것인가 하는 열등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니 홍이 손대려고 하는 영화를 위해
미국에서 초대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한국에 오신 건……."
"아! 그건 말이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요. 이번 영화에는 제가 감독 겸
주역을 맡게 됩니다. 반은 뉴욕에서 반은
서울에서 로케가 이루어지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유라 씨를 성급히 만난 것은 제
상대역을 하게 될 한국 여배우의 캐스팅
때문이었습니다."
"어머! 그런 건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지
준비도 없는데……."
"그게 좋습니다. 난 유라 씨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저와 한번 좋은 영화를 만들어
"저…… 제가…… 그럼 스티브 씨와……."
유라는 숨이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니 홍으로부터 영화출연 제의를
받긴 했지만 선뜻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니 홍의 영화제작 계획이 이
정도까지 진척되어 있었다는 것도 놀라왔지만
그것도 스티브 같은 미국 감독을 초청할
정도로 규모가 큰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자니 홍, 녀석은 정말 생각보다 알찬 데가
있어. 자니 홍은 영화 제작을 위해 스티브를
은밀히 침투시켜 나를 전격적으로 만나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 실권을 쥐고 있는 바로 이
스티브가 날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감독의 눈에 들지 않으면 자니 홍이
모른다.
"정말이에요, 스티브 씨?"
유라의 손은 떨려서 밑바닥에 남은
위스키가 출렁거렸다.
"자니의 눈은 역시 정확했습니다. 그가
내게 유라 씨를 추천한 이유를 알겠소.
연기력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유라 씨의
분위기와 인상은 내가 머리 속에서 상상하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오."
"어마!"
유라는 속으로 떨리면서도 정신은 바짝
차렸다. 스티브가 속셈을 밝힌 이상 자신은
지나치게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시간은 많고 여유가 있다. 무조건 오케이는
자신의 주가를 포기하는 행위다. 한 발짝
물러서자. 유라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침을
"하지만 전 영화는 경험이 없어서…… 다시
한번 고려해 보세요. 스티브 씨. 좀더
찾아보면 저보다 나은 여배우를 찾을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자 스티브의 눈빛은 더욱 빛났다.
차는 어느 틈에 도로에서 벗어나 낮은
야산을 끼고 달렸고, 잠시 후에는 숲처럼
하늘을 덮어버린 가로수를 지나 낮은 둔덕의
작은 벽돌담 앞에 멎었다.
스티브와 유라는 차에서 내렸다. 자니 홍의
별장인가? 눈앞에는 멀리까지 골프장처럼 잘
닦아놓은 들판이 있고, 군데군데 섬처럼
펼쳐진 숲들의 경치가 그림처럼 전개되고
있었다.
석양녘 햇살은 저물고, 노을 속에 잿빛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나란히 맞대고 벽돌집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까지 안내하던 운전기사가 말없이
돌아서서 차 쪽으로 되돌아갔다. 잠시 후
엔진소리가 멀어졌다. 거실은 따뜻했다.
고풍의 큰 비로드 소파가 창 쪽으로 길게
놓여 있었다.
"여긴 어디죠? 스티브 씨."
유라가 흡사 진공판에 들어선 것처럼 깔린
거실 안에 서서 스티브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맘을 편하게 갖고 푹
쉬셨으면 합니다. 물론 제집은 아니지만
영화작업을 위해 당분간 제가 숙소로 정한
곳입니다. 어디 맘에 드십니까?"
"너무 좋은 곳이에요. 한데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제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집관리를
혼자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요?"
"불편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게 아니라…… 그럼 자니 홍을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오늘은 아닙니다만…… 가끔 제가
연락하면 오긴 하죠. 제가 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워낙 바쁘기도 하지만
영화 일에는 눈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영화는 철저하게 제 작품이니까요. 물론
프로덕션과 연출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제
말뜻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네, 대강은 알겠어요."
유라는 소파에 앉으면서 스티브가 이미
자기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차 속에서부터 여러 각도로
잠재력 및 적성과 특성을 면밀히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아. 엄청난 제작비가
드는 한 영화의 주연배우를 첫인상만 가지고
쉽게 결정해 버릴 이유가 없지. 더구나
미국놈들은 무슨 일이나 시작하기 전에
치밀하게 계산을 할 거란 말야. 양놈들은
무슨 일이든 적당히 얼렁뚱땅하고 넘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지.
자니 홍을 여기서 만나지 않은 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런데 자니 홍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면 내가 이 숲속의
외딴집까지 왔어야 할 이유가 뭔가?
아까 서울서 자기를 폰티액에 태울 때
운전기사는 분명히 자니 홍의 심부름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여긴 자니
스티브와 유라, 즉 남자와 여자 단둘이 있을
뿐이었다.
"자아! 유라 씨, 잠시 이곳 숙소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해드리죠. 저기 보이는
도어가 욕실과 화장실, 저기보이는 곳이
침실, 또 저기가 주방, 주방에는 냉장고가
있고 웬만한 식품과 음료는 모두 둔비되어
있죠. 저쪽 방은 편집실로 쓰고 있는데
거기엔 소형 스크린과 영사기 기재가 있죠.
원하시는 시간에 제가 만든 필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스티브는 소파 위에 기대서서 손가락으로
각 방을 가리키며 대강의 집구조를 소개했다.
이건 어쩌자는 것일까. 창 밖에는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고 아까 차 속에서 마신
한잔의 화이트 호스는 그녀를 콧날까지
이 집에서 며칠쯤 묵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스티브 씨, 어두워지는데 전 언제 가죠?"
유라는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네? 어딜 가신다구요."
스티브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니? 놀라긴, 이건 거꾸로 된
게 아니야? 유라는 자기가 지어야 할 표정을
스티브가 대신 짓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럼 제가 여기……."
"며칠은 이 집에서 푹 묵으셔야죠. 유라
씨. 우리가 나누어야 할 얘기는 며칠
가지고도 모자랄 정도로 많죠. 우린 지금부터
세밀한 부분의 콘티를 짤 때까지 충분한
얘기와 얘기를 거듭해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자야 한단 말인가요?"
주시면……."
유라는 잠시 생각했다. 스티브는 이미
자기의 출연 제의를 유라가 승락한 것으로
보고 영화에 관한 진지한 얘기를 이곳에서
같이 묵으면서 진행시키자는 의도였다.
스티브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당연한
제의를 자기는 스스로 어떤 오해나 그래서는
안 되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미국인이고, 더구나 영화감독으로서의
가장 자유분방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
영화에 관한 무서운 열정과 집념을 보이는
사내겠지.
그런데 자신은 지금, 한 집안에 남자와
여자 단둘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영화얘기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는
것이다.
열성조차 엉큼한 계략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미국놈들은 우리들처럼
남녀관계를 위험시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당연시하는 것인지도 몰라.
유라는 여러 가지 생각에 몰두하다가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를 지치고
옹졸하게 하는가를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런 편견은 지워야 해. 우리는
지금 영화에 관한 얘기라면 밤은 새워서
얘기해도 모자랄 만큼 열중해야 한다.
"아니에요. 스티브 씨 불편한 것은 없어요.
단지 난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어리둥절할
뿐인걸요."
"그건 미리 계획되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두 지금 제가 만들 영화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거든요."
"맞습니다. 무조건 빠져야 합니다."
유라는 빠지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초여름의 어둠이 창 밖에서 커튼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 스티브는 옷을 갈아입고
유라가 앉은 소파로 다가 왔다.
허름한 청바지에 푸른빛이 감도는 와이셔츠
하나를 걸친 차림이었다. 소매는 걷어붙이고
셔츠의 단추는 세 개나 풀려 고릴라 같은
가슴의 털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노랑내가 훅 끼쳤다.
유라는 팔짱을 낀 채 어둠으로 착색되는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실내등에
드러난 사내의 가슴털을 계속 바라보기가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들고 온 위스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유라의 몸이 닿을 정도로 바싹 다가
"어두워지고 불빛이 켜지자 유라 씨의
얼굴이 굉장히 달라지는군요."
스티브의 굵은 저음이 그녀의 귓가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어떻게 달라졌나요?"
"그건 내 머리 속이 영상이기 때문에 말로
설명은 안 되지만 한 마디로 슬프도록
에로틱하다고 할까?"
그의 손이 유라의 뒤로 가로질러 어깨를
잡았다. 어깨 위에 펴진 큰 손이 마치
흡착판처럼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았다.
오늘 처음 만난 미국 영화배우의 팔 안에
갇혀 있게 된 뜻밖의 사태에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결코 거절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다.
스티브와 금발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속에
깊이 박힌 푸른색 눈 속으로 유라는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스티브의 구렛나룻이 그녀의 콧날 위로
가볍게 다가왔다. 그의 털은 의외고
부드러웠다. 그의 입술이 유라의 입술가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러브리 러브리……."
그는 이내 그녀의 등에서 팔을 떼고 위스키
잔을 들어올리면 입을 열었다.
"영화는 말이죠, 미국에서 온 디자이너와
한국의 한 여인과 뜨거운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미국인 디자이너는 한국의 어느
바닷가로 휴양을 나갔다가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죠."
"그래서요?"
"그들의 풋사랑은 단 며칠 사이에 끝나고
그 미국인 디자이너는 한국을 떠나게 된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물론 그런
통속이 어울리겠죠."
"아닙니다. 그 미국인 디자이너는 그
여인을 미국으로 초청했고 그 여인은
뉴욕에서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유명한 모델이 되죠. 신데렐라의
탄생입니다."
"어마! 비극이 아니군요."
"영화의 후반부는 뮤지컬이 될 겁니다."
"제목은 뭐죠?"
"자니의 서울."
"그럼 그건 자니 홍이 자신의 얘기를
상징적으로 그리게 될 영화가 되겠군요."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접니다. 그리고 그 한국 여인은 바로
유라 씨 당신이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는 사랑하나요?"
"영화에서처럼?"
스티브가 말을 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티브 씨, 난 카메라 앞에는 서
봤지만 대사를 가지고 연기를 해보지는
않았어요. 가령 의상을 입고 표정을
짓는다거나 하는 것들을 빼놓고는……."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유라 씨의
지금 표정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면 아주 좋은
연기가 될 겁니다."
유라는 자기의 지금 표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스티브의 엄청나게
큰 허벅다리와 그 사이가 크게 솟구쳐
결국 새침데기처럼 움츠러든다거나
거절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까지 끌고와서는
괜한 객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스티브는 지금도 계속 자기의 연기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고, 어쩌면 그보다는
자신의 미모와 몸매에 홀딱 빠져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스티브 씨, 당신이 만든 필름을
보여주었으면 해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유라를
다시 쳐다보았다.
"시간은 충분해요. 그건 어느 때라도 볼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유라 씨, 잠깐 눕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디서요?"
스티브가 소파를 가르켰다.
멈칫거렸지만 그의 태도로 보아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유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그의
숨소리는 금세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전 말예요……."
유라는 지금 자신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구체적으로는 한마디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 돼요'라든가 아니면 '이러심 안
되는데, 어떻게 오늘 만난 초면에 자꾸 이럴
수가 있겠어요.'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게
아니야. 그와 비슷한 말들을 당연히 해야
한다.
제기랄 다 쓸데없는 수식어야. 저 좋으면
그만이지. 이 고릴라 같은 가슴의 털을 가진
금발의 미국 숫말이 힝힝거리며 다가오는데
당하는 수밖에 없어. 그게 가장 안전한
길이야. 저 뜨겁게 바뀐 푸른 눈을 도저히
막아낼 재간이 없어, 준.
준, 정말 미안해.
유라는 그의 무게에 밀려 큰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녀의 스웨터가 머리로 추켜지면서
연한 실오라기 하나가 그녀의 머리핀에
걸렸다. 유라의 얼굴이 자신의 스웨터 속에
있을 때 갑자기 불빛이 환히 켜졌고 어디선가
타르르르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마!"
유라의 탄성이 스웨터 안에서 들렸다.
스티브는 유라의 머리핀에 걸린 스웨터의
실오라기를 뽑아주고 그녀의 머리에서
스웨터를 뽑아올렸다.
유라는 죄의식이 깃든 탐욕스러운 젖가슴이
"스티브 씨, 이건 도대체 뭐죠?"
유라는 유리창 커튼 옆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빛과 무비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놀라지 마시오 유라 씨, 난 지금 자동
무비 카메라를 작동시켰소. 그래서 우리들의
동작은 필름에 찍히고 있어요. 이건 테스트
필름이니까 현상해서 우리 둘만 스크린으로
보도록 하겠소."
"하지만 이렇게 밝은 데서……."
"카메라는 10분만 돌아갑니다. 자아……."
그러나 밝은 불빛이었지만 유라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요술에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게 될 두 사람의 정사
신을 카메라로 테스트해 보겠다는 거겠지.
우선 저 필름의 관객은 우리 둘뿐이니까
치밀한 구석이 있군. 역시 미국놈들이란
계산이 빨라.
유라는 카메라를 의식하자 스티브에게
자신의 연기력을 최대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린 지금 영영 헤어지느냐 다시 만나느냐
결정해야 할 마지막 날 밤에 와 있는 신이요.
유라. 자, 지금부터 말은 안하고 몸짓과
표정으로만 헤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을 연출해야 하는 거요."
스티브는 무섭게 밀어닥치는 욕정을
제지하듯 옷들을 수세미처럼 뭉쳐놓았다.
소파 위의 불빛 아래서 그녀의 몸매는 마치
요염한 암사슴 같았다.
그녀는 억센 고릴라처럼 거칠게 돋아난
앞가슴의 탄탄한 피부를 올려보았다. 유라는
있었다. 자기 몸 위로 성큼거리며 올라오고
있는 스티브의 몸체와 남근에 깔리면 숨도
쉬지 못하고 질식하리라는 느낌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두려움으로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늦은 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다루세요."
그녀는 입술이 그의 가슴에 짓눌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젖가슴은
바위에 눌려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서치라이트 불빛은 꺼지고
카메라는 저절로 작동을 멈추었다. 유라는 그
순간 심한 아쉬움을 느꼈다.
연기조차 맘껏 펼치지 못한 채 카메라
작동이 어느새 끝나 버린 것이다.
"이젠 됐어요, 스티브 씨."
"카메라는 끝났지만 우리는 이제부터요."
그는 유라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그의
체구에 비하면 체중은 가벼운 편이지만
유라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 거구와는
처음이었다. 그의 몸은 운동으로 단련되어
근육이 단단한 대신 군살은 없었고 그의
돌기는 가슴 밑의 첨단부까지 큼직하게
몰려와서 응결된 것 같았다.
스티브의 등은 활처럼 굽은 채 소파의
등받이에서 떨어져 있었다.
유라는 하복부는 수영복 자국이 하얗게
드러났고, 울창한 덤불이 살갗을 유난히
돋보이게 했다.
죄스러운 듯 움츠렸던 유방은 이제 땀에
젖은 채 완강히 서 있었다. 두 다리는
종이처럼 흰 허리를 휘감고 있었고, 발목에는
어둠이 들어찬 창유리가 있었다. 밤이었다.
약간의 아픔과 외로움과 허망감이 그녀의
발치 끝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살갗이 굉장한 반응을 보일
것 같았지만 잠시 후에 기대가 깨지고
말았다.
아까 카메라가 작동하고 서치라이트가 비칠
때, 그는 마치 발정난 숫말처럼 무서운
기세로 말발굽소리를 내며 뛰어들었고,
숨소리는 턱까지 높았었다.
유라는 자신의 검게 그을린 욕정을
스티브의 화염에 의해 말끔히 태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나 끝내는 실망이었다.
스티브는 자기를 끈질기게 추적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갑자기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랑 없는 욕정이란 깨끗이 연소되는
너무 많이 경험했다. 붉은 잠바와는 늘
그랬다.
준, 내게는 당신밖에 없어. 난 그걸
성으로도 잘 깨닫고 있으면서도 남자의
유혹에 번번히 넘어가면서 준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가 젖은 무우처럼 빠져나간 후에야
유라는 외로움이 더 크게 솟구쳤다. 하지만
참자. 난 이제 영화배우로 국제무대에 서게
될 거야. 머지 않아 미국의 영화신문에는
한국에서 찾은 스타, 혜성처럼 헐리우드에
떠오르다라는 기사가 실리게 될 거야. 내
흑발과 몸매가 새로운 동양의 섹스 심벌로
미국 영화계를 흔들 것이다. 난 자신이 있어.
스티브가 길을 터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몸을 움츠린 채 잠깐 잠이 들었다.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라는 몸을
일으켰다. 벽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무대
위로 나서려는 피에로 같아 보였다. 헐렁한
스티브의 잠옷을 걸친 자기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스티브는 거실의 소파에서 영화대본을 읽고
있다가 유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굿 모닝."
"굿 모닝이에요."
유라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자아! 유라 씨 식탁에 가셔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시겠습니까?"
"오케이."
유라는 피로가 말끔히 씻긴 탓인지 기분이
상쾌했다. 여전히 딴 세상에 온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초원지대로 시집온 새색시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스티브와
여기서 살아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빵과
잼과 복숭아주스로 아침을 때우자 스티브는
유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집 뒤편에는
마굿간이 있었고, 거기에는 키가 크고 미끈한
밤색 말 두 필이 있었다.
"말을 타실까요?"
스티브가 말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마! 전 한번두 말을 타본 적이 없는
걸요?"
"괜찮습니다. 경마를 하자는 게 아니라
저쪽 능선까지 산책을 할 거니까요."
"떨어지면 어떡하죠?"
유라의 말에 스티브는 씽긋 웃어보였다.
그럴 염려는 말라는 투였다. 그의 웃음이
스티브는 말을 끌어냈고 곧 유라의 손을
부추겨 말 위에 태운 다음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탔다.
"영국산 더러브렛종이죠. 유라 씨가 탄
말이 요 녀석의 애인 나타샤구요. 요놈은
아랍종으로 알라라고 부릅니다."
"날 떨어뜨리지 않을까요."
유라는 말이 움직일 때마다 안장을
움켜주었다. 하체가 계속 움찔움찔했다.
검은 갈기가 잘 빗질되어 앞다리의 어깨
끝까지 늘어져 있고 상박의 근육질이
억세보였다.
"온순하니까 걱정 마십시오. 귓부리가
앞으로 향해 있어서 사람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요녀석들은 서로 굉장히 사랑하고
있죠."
"지금은 발정기가 지나서 조용하지만
여름에는 일주일 내내 하루 두번씩……
알라의 나타샤에 대한 사랑은 너무
극진했죠."
"그것을 말의 사랑이라고 하나요."
"사람도 결국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요?"
"사랑하면 늘 붙어지내고 싶어하니까."
스티브는 유라를 향해 윙크를 보냈다.
"자, 옆구리를 이렇게 가볍게 치면
출발입니다. 고삐를 단단히 잡으시고……."
나타샤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유라의 곁으로 나란히 말을
몰았다.
잔디는 대부분 죽어서 지푸라기처럼 풀풀
날렸다. 햇살이 밝고 바람결이 상쾌했다.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스티브는
어제보다 과묵해진 것 같았다. 가끔씩 그는
눈을 치켜뜨고 유라를 돌아보았다.
"모델 경력은 몇 년이죠?"
"10년쯤 됐을 거예요."
"발레를 해보셨습니까?"
"본격적으로 안했지만 기본 스텝은……."
"그밖에 수영, 스케이팅, 볼링과 스키,
각종 춤과 댄스, 특히 탱고를 잘 추시면
좋구요. 술 마시는 법과 담배나 마리화나
따위…… 남자와 키스하는 방법이나 요령……
특히 베드신은 아주 중요하죠. 최소한 서른
여섯 가지 체위…… 참 실례지만 애인이
있으신가요?"
유라는 스티브의 말을 들으며 점차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배우가 되려면 별
"애인은 왜요?"
"참고삼아 알고 싶은데요."
"있어요."
"좋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이나 성관계를
갖습니까?"
"어머 그런 것도 묻나요?"
"왜요.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아보십니까?"
"처음이에요."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안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면 유라 씨의 성감도 측정이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을 추가해야 하느냐
삭제해야 하느냐 결정해야 할 경우가 있죠.
제가 어젯밤 유라 씨와 성을 나눈 것은
호감이나 욕망 이전에 호흡을 함께 나누는
과정의 하나였습니다. 한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적어도 그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서
결코 여배우를 잘 알고 이해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이성의 경우는 살을 맞대
보지 않고 상대방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죠."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엇이
예술이고 일이며 윤리인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스티브 씨, 난 그런 생각을 안해봤거든요.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생각은……."
"그럼 어젯밤은 굉장히 놀랐겠군요."
"놀랐지만 빨리 적응했죠."
"한국에서는 그게 용납이 안 되는
일이라는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관습이 그런 거니까요."
"전 스티브 씨와 자니의 서울에 출연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스티브 씨가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난
아무런 연기의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좋은 옷이나 입고 걷거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 일 외에는 자신이 없어요.
승마도 못하고 배드신도 자신 없구요."
"배우는 만들어지는 겁니다. 훌륭한 연출자
밑에서 무서운 하드트레이닝을 거쳐서 연기를
체득하게 되죠. 한편의 좋은 영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스탱들이 얼마나 힘든 애로와
갈등을 겪는지 아무도 모르죠."
유라는 입을 꽉 다물었다. 도시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스티브의 말을
들으면 자기의 헐리우드 진출이라는 꿈이
얼마나 안니한 상상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어제 찍은 필름을 보게 될
겁니다."
씨 난 모든 걸 포기하겠어'. 유라는 그 말이
입에서 곧 튀어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날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짙어질 때
유라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스티브는
어두워질 때까지 침실에서 잠을 잤다.
밖에서 차소리가 났고, 현관에서 벨을
울리면서 운전기사가 들어왔다.
"스티브 씨는 어디 계십니까?"
운전기사의 말이 떨어지자, 스티브는
침실에서 외출복 차림으로 나왔다.
"유라 씨 갑시다."
스티브가 현관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유라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데려다 드리는 곳입니다."
운전기사가 지난번처럼 을씨년스러운
그들은 폰티액 뒷좌석에 올라탔고, 차는 곧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유라 씨, 저한테 시간을 많이 뺏겼죠?"
스티브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절 위해서였는데요, 뭘."
"하지만 미리 예정되었던 스케줄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두 즐거웠어요. 많은 걸 배우고
느꼈어요."
"프로덕션과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잡히면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참 혹시 집
전화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유라는 곧 메모지에 아파트 전화번호를
써주었다.
"자니 홍이 제게 연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은 제 집도 알고 있구요."
그때 카폰이 울렸고, 스티브는 곧 수화기를
들었다.
"오케이, 아이 윌 비 데어 순. 나싱
퍼티큘라 시 유."
스티브가 전화를 끊었다.
자니 홍과의 통화가 아닌 것 같았다.
"스티브 씨는 얼마 동안이나 여기 계실
건가요?"
유라가 물었다.
"한 일주일쯤 있다가 미국으로 가게
되구요. 거기서 한 달쯤 준비기간이 걸릴
겁니다. 그 다음은 스탱들과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될 겁니다."
"오늘밤 우리들의 시사회는 어떻게 되죠?"
"아, 그건 필름현상이 아직 안 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필름은 제가 잘
보기로 하죠. 괜찮습니까?"
"할 수 없죠. 하지만 그 필름이 다른 데서
공개되면 정말 안 돼요, 스티브 씨."
"하하하…… 걱정이 되시나 보군요. 그건
저두 마찬가지죠, 유라 씨. 걱정 마십시오."
스티브는 목소리를 낮추어 유라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폰티액은 이윽고 유라의
아파트 입구에 섰다.
"자, 유라 씨. 또 뵙기로 하죠."
유라가 차에서 내리자 스티브는 그녀에게
봉함이 된 흰봉투 하나를 유라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따가 집에 가서 보십시오."
폰티액의 뒷문이 닫히고 차가 스르르
미끄러졌을 때 유라는 무심코 차의 넘버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외 898X. 유라는
들어올린 유라는 집에 가서 봉투를 뜯어볼
만큼 여유가 없었다.
혹시 수표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봉투를 정작 뜯었을 때는 타이프로 찍은 편지
한 장이었다. 유라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유라 씨에게.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테스트에서
실격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기획한 `자니의
서울'이라는 영화의 히로인이 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유라는 그 편지를 가로등 불빛 아래서
읽었다.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아니 스티브, 이럴 수가.
유라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자니 홍, 넌
내게 이유도 없이 침을 뱉은 거야. 미국
떨거지를 시켜서 하룻밤을 농락하고 길바닥에
유라는 자신이 휴지처럼 구겨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왜 낯모르는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
따져볼 생각도 없이 무조건 그들을
따라나섰을까.
자니 홍, 네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런 식의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면
영화 출연을 거절했을 것이다.
유라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자신이 어젯밤 당한 황당한 긴장과 함께
피로가 한번에 몰려왔다. 유라는 잠시 아파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자니 홍이란 녀석을
만나서 당장 어떻게 해야 할 텐데…….
그때 아파트 문이 소리없이 열리면서 준이
나타났다. 거실의 불빛을 등뒤로 받고 선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준……."
설움이 치솟았다. 그녀는 그대로 준의 품안에
쓰러졌다. 유라는 마치 짚단처럼 쓰러졌고
준은 놀라서 엉겹결에 유라를 겨우 부추겼다.
준이 유라를 침대 위에 눕혔을 때 그녀의
이마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이 날
때마다 늘 오는 증세였다. 팔다리가 쑤시고,
입 안이 부어오른 것이다.
그는 곧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화장대
서랍에 넣어 둔 조제약 봉지를 꺼냈다. 한 달
전에 지어놓았다가 먹다 남은 약이 남아
있었다. 유라는 그 증세가 올 때마다 준이
알고 있는 단골 약국에서 약을 짓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 집 약은 유라에게 직효였다.
유라의 신음소리는 높아지고 있었다. 열이
나면 유라는 손이나 발, 혹은 이마가
쇳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처엄 무거워지고 그
때문인지 묘한 환각 작용이 나타나 자신의
몸이 허공에 둥둥 뜨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우선 약을 먹도록 해, 유라."
준은 유라의 목을 부추겨 일으켜, 약
봉지를 입속에 털어넣고 따뜻한 물을 입에
댔다.
약을 먹고 난 다음 유라는 몸을 돌리고
새근거릴 뿐 거의 잠에 취해 있었다. 준은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유라는 베란다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는 시간이었다. 자니 홍의 푸른색
볼보승용차가 아파트 광장을 들어서고
있었다. 유라는 곧 아파트의 층계로
내려섰다.
자니 홍이 유라가 나오는 모습을 보자
아무런 내색도 않고 볼보 옆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체크무늬 베스트와
똑같은 셔츠를 입고, 검은 머플러를 목에
두른 유라의 모습은 검은 블루진 바지 뒤에
금색 벨트 때문인지 10대처럼 보였다.
그는 잠깐 사이에 포착된 유라의 이미지를
머리 속으로 수정했다.
유라의 모드는 지금 스코트랜드풍의
강렬하고 스포티한 멋을 주지만 저런
고전적인 매력에 현대미를 주기 위해서는
머리를 더 짧게 하고 소매를 걷어서 팔목을
드러내야 한다.
유라가 옆자리에 앉자 자니 홍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옷, 누구 꺼죠?"
"유라 씨의 헤어디자인은?"
"왜요?"
"좋습니다. 여긴 쇼 룸이 아니니까. 자,
유라 씨를 어디루 모셔야지? 귀한 손님인데
막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물론 서울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요."
"부담 갖지 마세요.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인면 어디나 좋아요."
"그럼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유라는 자니 홍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양배추머리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은
말라 보였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볼보 차는
강변으로 내달렸다. 하이눈 호텔 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변도로는 불꽃의 행렬이었다.
강은 어둠 속에 갇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제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셨으면
합니다."
자니 홍은 스카치를 입에 대며 말했다. 그
말은 옷을 바꾸어 입으라는 의미 이상의
뜻이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자니
홍은 스티브에 관한 얘기나 영화 얘기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내내 뉴욕 패션가의 상황에 관한
자기의 관점을 몇 가지 늘어 놓았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자기 자랑이었다.
유라는 적어도 자니 홍의 입에서
'스티브로부터 얘기는 들었습니다' 정도는
예의상 먼저 꺼낼 줄로 알았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 얘기는 자기에게 먼저 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니 홍은 그
얘기는 전혀 내비치지도 않았다.
자니 홍이 그 얘기를 먼저 꺼내는 게
쑥스러워서 덮어두고 있거나, 아니면
스티브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기에게 먼저 꺼내야 할 말은 응당
스티브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기를 저두 바래요."
유라는 잔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아니? 유라 씨 그럼 지금 하신 말 사실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자니 홍이 유라의 말을 정식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고려해 보겠어요."
유라는 여유를 두었다. 확정적인 발언은
상대방을 안심시킬 우려가 있었다. 그가
안심해 버리면 상담은 끝날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그럼 상담으로 들어갑시다."
유라의 말에 자니 홍은 눈을 크게 떴다.
"난 유라 씨의 도움이 물론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우린 유라 씨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조건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유라
씨가 자니 패션으로 오시는 전제 조건을 먼저
말씀하십시오."
"조건이야 물론 필요하겠죠. 절 원하시는
쪽이 어떤 의자를 준비해 놓았는지 알아야
제가 앉을 것인지 아닌지 생각할 게
아니겠어요?"
"좋습니다. 우선 전속금은 지금의 세 배로
하고, 모든 수익에 대한 삼십 프로의 권리를
인정하겠습니다. 연내에 뉴욕과 파리의
패션가 진출을 보장하고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여깁니다. 하이눈 호텔에서의 자니
홍 귀국 패션쇼. 그게 끝나면 전에도
서울이라는 영화 스크린에 데뷔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유라 씨, 이만하면 앉을 만한
의자가 아닙니까?"
유라는 영화 얘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자니 홍의 말에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다른
조건들이란 최대의 배려였다. 전속금이나
수익금도 일류이며 뉴욕, 파리 진출 보장도
패션모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자니 홍은 자기가 스티브로부터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자니 홍이
내건 조건들에 대해 투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유라는 영화에 대한 욕심이
끔틀거렸다. 유라는 자니 홍으로부터 다짐을
받아두고 싶었다. 지금 자니 홍은 유라의
그의 한국 패션가 진출은 다른 곳에 비해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기존 시장과 세력들의
완강한 거부 반응과 경계가 심했다.
그 때문에 자니 홍은 먼저 물량공세를
펴면서 이미지를 심어놓는 작전이 필요했다.
국내 최대의 라이벌 샤넬 라인의 톱 모델
유라의 전격 확보는 자니패션의 위력을 크게
보여주는 동시에 샤넬 라인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는 폭탄이 되는 셈이었다.
그의 유라에 대한 투자는 다른 데 쓰는
돈보다 몇 갑절이나 효과적이었다.
"스크린 데뷔?"
유라는 자니 홍을 향해 혼잣말처럼
입밖으로 중얼거렸다.
"유라 씨, 바로 그겁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라 씨는 제가 야심적으로
여주인공과 이미지가 너무 맞아떨어집니다.
유라 씨는 제니퍼 빌즈라는 배우를 아십니까?
유라 씨는 바로 그 배우계열의 독특한
개성미를 영화에서 보여줄 겁니다. 주인공은
서울의 패션모델이 세계적인 신데렐라가 되는
얘기죠."
자니 홍은 열을 내며 영화 얘기를 꺼냈다.
스티브 일은 까맣게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좋아요, 그 영화제작은 누가 하죠?"
"접니다. 자니 프로덕션."
"감독은 스티브?"
유라는 자니 홍의 말 뒤에 스티브라는 말을
넌지시 띄워보냈다.
"스티브?"
자니 홍은 유라를 바라보았다.
젊은 감독 말입니까?"
"맞아요."
자니 홍은 스티브의 얘기를 계속 모른
체하는 것인지 덮어두려는 심산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명감독을 초빙하는 것도 좋긴
하겠죠. 하지만 스티브 같은 비싼 감독이
아니어도 좋은 연출자는 많죠."
"감독을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왜요. 유라 씨가 스티브를 감독으로 선뜻
내세웠기 때문에 전 놀랐습니다."
"놀라시다니요."
"유라 씨의 영화에 대한 안목이랄까……."
"혹시 그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런 분을
감독으로 염두에 두신 건 아니에요?"
"아아뇨…… 이건 아직 기획 단계의
아닙니다."
"그럼 감독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절
주연배우로 프로포즈하신 건 어떻게 되죠?"
"그건 말입니다. 프로듀서의 권한입니다.
난 영화제목과 사람과 돈을 지정합니다. 유라
씨,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제게 숨기시는 게 있나요?"
유라는 자니 홍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스티브라는 인물의 윤곽과 위치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음을 알았다.
"숨기다니요. 유라 씨야말로 뭔가 제게
의심을 잔뜩 품고 계신 것 같은데 알고 싶은
것은 물으십시오. 지극히 은밀한 사업상의
얘기를 빼고는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니 홍의 눈은 흐려 있었다.
"지금 제게 주신 조건은 모두
주역을 맡는다는 것이 첫째예요."
유라의 말에 자니 홍의 안색은 금세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그건 제가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수락하신 건가요?"
"당연하죠."
자니 홍이 손을 내밀었다.
유라는 그의 손을 잡았다가 이내 놓았다.
"좋아요."
"그런데 자니, 영화는 스티브에게 맡기실
건가요?"
유라의 말에 자니 홍은 의아스러운 듯 눈을
크게 떴다.
"유라 씨는 스티브 감독이 무척 마음에
드시는 모양인데요? 아까부터 스티브를 자꾸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자니의
서울이란 영화의 아이디어는 헐리우드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고 있는 제 동생 로버트
홍의 제안 입니다. 난 그 영화를 제 동생에게
맡길 겁니다."
"아니? 그럼 스티브는 ……."
"유라 씨가 추천하시는 스티브도 물론
좋겠죠. 하지만 나는 내 영화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스티브와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던가요?"
유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티브요? 그건 유라 씨가 꺼낸
말이잖습니까? 전 스티브란 이름의 감독은
이름은 알고 있지만 만난 일이 없죠."
"그래요?"
홍이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혹시 스티브는 한국말을 잘하지 않는가요?
자니 씨의 옛 친구였다거나……."
"한국말을 잘 하다니요. 난 미국에도 그런
친구는 없어요. 유라 씨가 뭘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맞아요. 잘못 알고 있었어요."
유라는 스티브라는 미국 녀석이 정체불명의
사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자니
홍의 말이 사실인 이상 스티브란 가공의
인물은 무서운 존재로 머리 속에 자리잡혀
왔다.
순간 속았구나, 망했구나 하는 느낌들이
자신을 마구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래 맞다.
내가 너무 영화에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스티브가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내게로
와서 그렇게 어설픈 카메라 테스트를 할 리가
없었어. 그가 그렇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것도 이상한 점이구.
아, 무슨 꾐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이건
백프로 함정에 고스란히 걸려든 셈이었다.
자니 홍이 모르는 스티브란 과연 누구인가.
한국말을 자동인형처럼 잘하는 스티브, 그는
자니 홍만이 알고 있는 자니의 서울이라는
영화의 스토리까지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니 홍은 지금 스티브를 잘 알지도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니 홍을 계속 의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스티브에 관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에게 엉뚱한 말을 듣는 것일까.
늦은 밤의 장소에 관한 얘기를 섣불리
꺼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스카치와 샴페인이 뒤섞여 유라는 취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이번 제 귀국전의 제목은 자니 홍의 봄
콜렉션입니다. 대담한 누드룩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자니 홍은 자신의 계획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계획들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지금 뉴욕과 달라요. 특히
패션산업이란 미개지의 산업이구요. 물론
차츰 달라져가고 있긴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죠. 때문에
모델들은 옷걸이 취급을 받고 있구요."
많은 사람들의 잠재적 욕구는 굉장히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이거다라는 게
없어요. 바로 그 점입니다. 난 우리의
패션산업은 굉장한 잠재개발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낙관자시군요."
"대체로 그렇습니다."
"자 시간이 꽤 늦었는데요."
유라가 팔목을 들어올렸다.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방 하나를
잡아드리죠. 시간도 늦었는데 주무시고
가셔도 됩니다."
자니 홍은 유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혹하시는 건가요?"
"제 유혹은 끝이 없을 겁니다."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거예요."
후에 하기로 하고, 유라 씨 콜렉션 준비를
위해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긴 시간을
제게 내셔야 합니다. 유라 씨를 위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스케치는 수원 쪽의 조용한 별장에서
하시겠습니까?"
유라는 자니 홍의 기색을 살폈다.
"수원 쪽 별장이라뇨?"
"혹시 그런 별장쯤 갖지 않았나 해서 묻는
말이에요."
"그쯤은 어디든 마련할 수 있죠. 여기
하이눈 호텔이 좋다면 큰 방 하나를 구해도
되구요."
"하지만 나타샤라는 암갈색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거예요."
"조금."
"몰랐군요. 암튼 전 유라 씨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암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단지
앞으로 우리 자니 패션의 마스코트가 된다는
것 밖에는."
"절 그처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난
생각하시는 만큼 멋진 여자는 못 되니까요."
"여자는 만들어진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그럼 앞으로 알게 될 겁니다.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혼자라면……."
"좋습니다. 방을 잡아드리고 전
가겠습니다."
준은 암실의 불을 켰다.
드러내고 있었다.
상반신을 벗고 치마만 입은 유라가
쪼그리고 앉아 클라리넷을 불고 있는
모습이었다.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고, 들어올린 두 팔이 앞가슴을 가린 채
어깨와 가냘픈 선을 강하게 살린 사진이었다.
스무 통의 필름을 허비해서 겨우 한 장
건져낸 이 사진은 비엔나 국제 사진 살롱전에
출품할 작품이었다.
물 속에 명암을 드러낸 사진을 보자 준의
눈빛은 기쁨으로 번뜩였다. 찍을 때부터 가장
맘에 들 것이라는 예감이 적중된 순간이었다.
그는 곧 손으로 인화지를 흔들었다. 사진
작가만이 느끼는 순간의 희열이 온 몸에
짜릿하게 솟구쳤다.
그는 턱을 괸 채 물 속의 유라를 뚫어지게
유라는 물 속의 요정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날 이후 유라로부터는 전화 한통 없었다.
그 역시 유라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자니 홍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것을 종미의
입을 통해서 확인했고, 그 말이 틀림
없으리라고 믿고 있는 상태에서 유라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더욱 매만지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유라가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난 더 이상 할말이 없어. 준, 변명을
할수록 나 자신은 비참해지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날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겠지.
허지만 내게는 당신밖에 없다니까. 만일만일
날 버리면 난 지금부터 말할 수 없이 비참해
준은 유라가 자신의 죄책가뮤 때문에
전화를 못하고 그렇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전화가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준, 내 말을 들어봐. 오해하지 마. 나 아무
일도 없었어…….
웬만하면 유라는 그렇게 나왔으리라.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가 미리 경고한 바로
자니 홍 그녀석을 만나고 왔기 때문에 섣불리
자기에게 전화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이젠 정말 참을 수 없다.
내가 너에게 다시 전화를 한다거나 찾는
일은 없겠다. 그리고 네가 나를 찾아와 모든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도 그건
유라, 넌 이미 나와 마지막 순간에 서
있는지도 몰라.
준은 머리를 싸안고 눈을 감았다. 그때
암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화다. 전화 받아라."
나형의 목소리였다.
준은 암실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유란가요?"
준이 나형의 얼굴을 살폈다.
"아냐? 누군지 모르는 목소리던데?"
준은 유라가 아니라는 나형의 말에 금세
실망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마음속으로는 유라를 멀리할수록
한편으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다. 두 마음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오래 갈지 알 수가
없었다.
준은 식품점으로 뛰어 올라갔다.
"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조 미양이에요."
감이 먼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차소리가
심한 걸로 보아 길거리의 어느 공중전화
같았다.
"실례지만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요?"
준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설마 조앙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샤넬라인의 모델 중의
누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저…… 저……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절 보시면 아실지
모르지만……."
"글쎄요. 누구라는 걸 말씀하셔야지요."
" 절 얼마 전에 프랑스 문화관에 태워다
그때서야 준은 이 여자가 조앙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준은 의외의 전화에
반가움이 앞섰다.
"쥬뎀므 말입니까?"
"쥬뎀므, 맞아요."
여자는 그때서야 상대방에게 자기를
확인시켰다는 안도감이 드는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헌데 차도둑한테 무슨 볼일이 있죠?"
"사진 찍을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어요.
출장 나오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요. 밥벌인데요. 언제 어딥니까?"
준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프랑스 문화관이에요."
3분이 어느새 지났는지 수화기 안에서 뚜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큰소리로 외치자 전화가 끊겼다. 준은
전화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벨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조앙의 말대로라면 어처구니
없는 주문이었다. 아무리 출사환영이라고
했지만 전화를 걸면서 지금 프랑스
문화관으로 오라니, 누굴 스냅 사진사로 아는
모양이지?
그러나 한편 조앙이라는 순진한 그 여자는
거기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된통 걸렸군.
하지만 우리는 전화로 쥬뎀므라고 서로
말했지. 쥬뎀므로 통하는 사이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그래, 조앙을 만나자. 집에 앉아서 오지도
않는 유라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전화를 하고
보자.
조앙을 만나고 있는 동안 유라를 잠깐 잊을
수 있을지도 몰라.
준은 카메라 하나를 어깨에 걸고 집에서
나섰다. 프랑스 문화관은 택시로 15분
거리였다. 택시는 낯익은 심카의 뒤에
멈추었다.
준은 심카의 운전석으로 다가서면서 약간
놀랐다. 차창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지난번의 조앙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펑크 스일의 머리에 미클 선글라스를 쓰고
자색 스웨터를 걸친 여인이 껌을 씹으면서
준이 다가서자 손가락으로 자기 옆좌석을
가리키면서 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혹시 딴
여자인가 싶어 차를 확인했지만 분명히
심카였다. 준은 여자가 시키는 대로 운전석
"놀라셨죠?"
조앙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준은 그녀의 진한 화장 속에서 지난번에
만났던 청초하고 단아했던 조앙의 구석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림없었다.
"전 안 나오시나 하구 다시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오시겠지 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마침 제가 시간이
비어 있어서 이렇게 나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어머! 그래요? 전 아무 때나 전화를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그럴께요."
"헌데 무슨 사진을 찍으시려구요?
"웬일이시죠?
"제 모습을 여러 각도로 찍어 주세요. 물론
포토레이트죠. 그래서 액세서리와 소도구 좀
동원했는데요. 제 모습은 제가 알아서
여러가지로 바꿔보겠어요."
"그래서 이런 차림을 하셨군요."
"좀 야해 보이나요?"
"지난번보다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진은
왜 찍으시나요?"
"스케치가 필요해요. 전 사진보다는 그림이
원래 전공인데요. 목탄화는 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려요. 저 이외에는 누구도 그려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 사진이 많이
필요해요."
"그림을 그린 다음에는……."
"그림과 사진을 혼합시켜요. 그림을 그린
일종의 일러스트죠. 물론 주문 제작인데요.
프랑스에는 그런 종류의 광고가 많아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앙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사진과 그림을 혼합시키는 고도의 테크닉과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광고 포스터 작가.
조앙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에 저 같은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두 되겠습니까?"
준은 자신없다는 투로 말했다.
"맡겨보구 싶어요. 게다가 전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두 없어요.
어차피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니까요."
"암튼 해보겠습니다만 사진사 사진은 역시
못 쓰겠더라고 원망은 말아 주십시오."
"물론이죠."
평크머리 스타일을 하고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심카는 호텔 하이눈의 입구를 향해 느린
속도로 기어 올라갔다.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이 호텔은 탁 트인
한강을 전경으로 각종 최고급 휴양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준은 사진을 서둘러 찍고, 마지막 필름을
감았다.
"준 선배님 수고하셨어요. 이젠 됐어요,
가죠."
조앙은 만족한 듯 웃으며 정원을 벗어났다.
주차장의 심카 옆에 왔을 때 조앙은 차의
도어를 열고 입을 열었다.
"운전해 주시겠어요?"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조앙을 바라보면서
짧은 하루지만 조앙과 아주 오랫동안 만났던
사이처럼 친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제 스튜디오는 여깁니다."
준은 빌딩의 지하실 입구를 가리켰다.
준이 카메라 가방을 챙겨들었다.
"스튜디오 구경을 해도 될까요?"
준은 잠시 망설였다. 조앙이 스튜디오
구경을 하겠다고 나설 줄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 제의를 거절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지하실의 그 음습한
암실이 스튜디오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뿐이고, 또 자신이 거기서 바퀴벌레처럼 살고
있는 모습이 탄로가 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늦었는데 괜찮을까요?"
조앙이 서둘러 내릴 채비를 했다. 늦었는데
괜찮겠느냐는 너무 온건한 거절의 방법이
조앙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르시죠,
그 정도의 완곡한 말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준은 무슨 일이든 마음에 없이 몸을 사리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조앙을 뒤에 세우고
지하실로 내려섰다.
"놀라지는 마십쇼."
그의 말에 조앙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준은 조앙을 데리고 곧장
암실의 문을 열었다. 암실의 작업 공간에는
작은 의자와 탁자가 두 개 있고, 커피포트와
찻잔이 준비되어 있다.
붉은 조명등이 켜지자 암실은 흡사 동굴
속처럼 음험해 보였다. 유수대의
프로마이클로르액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조앙은 확대 현상지를 보며 놀라는
눈치였다. 암실의 차광 설비와 작업대의
시설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이런 3평짜리
암실을 가지고 있는 사진작가로서 부러움의
표시였다.
이윽고 준은 형광등을 켰다. 조앙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이 사진들은?"
조앙은 유라의 각종 흑백 사진들을 하나씩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너무 멋진 사진들이에요. 놀랬어요."
조앙은 팔짱을 끼고 벽에 붙어 서서 준이
미완성으로 방치해 놓은 사진들을 점검하듯
감상했다.
"이 여자 누구예요?"
"모델이죠."
"굉장히 미인인데 실제두 그런가요?"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패션 쪽인가요?"
"시 에프도 하구, 앞으론 영화도 할
겁니다."
준은 유라가 바라는 것을 스스로 허락한
것처럼 조앙에게 말했다.
"좋을 거예요. 사진을 찍어선지 저 여자의
얼굴선에 강한 에로틱이 돋보이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서 혼자 사시나요?"
준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앙의 모든
질문은 부정이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조앙은
자기 질문에 계속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는
드러난 고독한 웃음 속에 잠깐 빠졌다.
알면 알수록 의문 부호가 점차 커지는
이상한 남자였다. 준은 조앙의 눈길 속에서
새어나오는 강한 호기심의 시선이 마치 긴
촉수처럼 자신의 눈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이 남자에 대해서 더 이상의 호기심을
보이지 말자. 그럴수록 남자는 자기를
방어하고 싶어할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이만 가겠어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앙이 차에 오르자
준이 다가왔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할말이에요. 제게
처음 하신 말씀, 지금도 기억하고 계세요?"
"쥬뎀므?"
준이 맞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맞았어요. 그게 무슨 말씀인 줄 아시고
하셨겠죠?"
"물론이죠. 잘 알겠다 오바, 그 말이지요."
조앙이 씽긋 웃으며 액셀을 밟았다.
4.새로운 음모
어스름이 깔릴 무렵. 유라는 아파트 도어에
키를 꽂으며 문득 자신이 이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에 쫓겨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준과 함께 귀가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화를 하곤 했다.
서로가 늘 함께 곁에 있다는 편안함이
외로움을 떠올릴 여유를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늘 같은 날, 유라는 어둠이 찬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준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존, 나말야 자니프로덕션과 계약을
했어. 일주일 후부터 계약이 발효되는 거야.
수없이 짜여 있다. 물론 알뜰하게 써먹고
본전 빼자는 얘기지만 나한테는 큰 돈과
명예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이야.
그리고 존, 난 이젠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거야.
유라는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스티브 사건을 머리에
떠올렸다. 묘한 사건이었다. 자니 홍은
스티브라는 녀석의 이름조차 몰랐다. 어찌된
일인가.
도대체 스티브란 녀석의 정체는 무엇인가.
유라의 머리로는 도통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일로 준과의 사이는 이렇게 멀어졌고,
자기는 죄책감에 전화조차 못하고 준은 이번
일로 자기를 용서하지 않을 작정인 것
하지만 좀더 기다리기로 하자.
준은 내가 자니 홍과의 계약문제를
스스로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결국 지금 하야리로 돌아가기로 맘을 먹지
않는다면 일은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당당히 자니 홍 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이것은 절호의 기회다.
준도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준도 용서해 주겠지. 자니 홍은
생각보다 시원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처음에 염려한 추근거림도 없었다. 유라는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오랜만에 전축의
다이얼을 돌렸다. 피아노 곡의 음률이 마치
깨끗한 물방울을 퉁기듯 귓속으로 청량하게
뛰어들어왔다. 정말 이렇게 한가하게 숨을
집에 혼자 있어 본 지가 꽤 오래되었던 것
같았다. 자니 홍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호텔에서 말끔히 풀어버린 피로가 몸을
가볍게 했다.
유라는 담배를 피워물다가 문득 전화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 같으면 링이 울리고도 남았을
시간이었고, 기다리기 전에 준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준은 채 반 시간도 못 되어
아파트로 들어서곤 했다.
유라는 전화기를 발가보다가 갑자기 눈이
화끈거렸다. 준은 지금 그 지하실방에
웅크리고 있을까. 그 순간 아파트 도어에서
벨 소리가 났다.
누굴가 이 시간에. 그러면서도 유라는
유라는 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맘이 돌아서서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준은 자기처럼 절대로 쉽게
넘어가고 빨리 변하고 결정을 바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점에서는 나도
그래, 하지만 나는 그 점에서는 준의
발뒤꿈치도 미치지 못하지.
그럼 이 시간에 누구일까.
자니 홍은 아닐 테고.
유라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거실로
가로질러 아파트의 볼록렌즈에 눈을 댔다.
아니? 쟤가 웬일로.
유라의 눈앞에는 종미가 있었다.
"누구세요?"
유라는 일부러 크게 물었다.
"언니? 나예요, 종미."
"종미, 웬일이야, 이 시간에 우리 집엘 다
오구."
"계셨군요. 놀러오라고 할 때는 언제구
이렇게 세워놓구 돌려보낼 참이우?"
"너무 뜻밖이어서 그래, 들어와."
종미는 남색 스웨터에 A라인 스커트와 벨트
차림을 했고, 스웨터 색깔에 맞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요 여우가 날 찾아온 이유가 뭘까. 요즘
소식에 의하면 샤넬 라인의 오종미는 콧대가
드세어져서 얼마나 설치는지 다른 친구들이
눈꼴이 시어서 못 봐주겠다고 하던데.
활약도 대단해서 TV와 신문 잡지에 종미의
얼굴은 부지런히 나왔다.
"일 갔다 오는 거니?"
유라는 종미를 늘 태연하게 대했다.
혓바닥에 조금씩 흘렸다.
"언닌, 요즘 어때, 자니 쪽으로 정말 옮길
셈야?"
종미는 서슴없이 궁금한 것을 직선적으로
물었다.
"그래야 되겠지."
유라는 그 일을 종미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 난 언니가 그 쪽으로 가는
거 솔직이 싫거든?"
"그건 왜지?"
"몰라서 물어요? 우린 좋든 싫든 지금까지
한솥밥을 먹었잖아. 솔직이 언니가 없으면
내가 일이 많아지기야 하겠지, 대우도 더
받구 말야. 하지만 난 언니가 없으면 목표가
없어져서 이젠 인기가 떨어지고 쫓겨날
되고 싶은 목표라도 있고 의지라도 되지만
알다시피 난 반짝 하다가 사라지게 될 꺼야.
난 그걸 잘 알고 있다구요."
"그건 종미의 입장이지 내 입장은
아니잖아?"
"쇼 룸에서나 잠깐 만나는 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럼 종미가 나한테 원하는 건 뭐지?"
"선배로서의 순수한 우정이에요."
"야! 종미가 그런 말을 다 할 줄 알구……
하긴 이젠 떨어지게 되니까 우정이 생길지두
몰라."
"무슨 말이에요?"
"우린 라이벌 의식이 높아서 친해질 수
없었는데, 이젠 이해관계 없이 친할 수 있을
거라구."
서면 서로 피곤해지겠죠."
"앞으로 서로 잘 해보자구."
"헌데 언니, 나 부탁이 있어요."
종미의 표정은 정색이 되어 있었다.
"말해 봐."
유라는 불빛을 빨아들인 종미의 요염한
입술을 바라 보았다.
"이건 어려운 부탁인지 모르지만 난 사진이
필요하거든요?"
종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유라는 얼핏 종미의 의중을 짚어내지
못했다.
"무슨 사진?"
"난 언니처럼 전속 사진작가가 없잖우."
"그래서?"
"선생님은 언니 사진밖에는 안 찍구요."
부탁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보라구."
"선생님에게 내 사진 좀 찍어줄 수 없을까
하구 말예요."
"글쎄, 그건 내게 부탁할 일이 아니잖아."
"언니가 선생님께 말 좀 해줄 수
있잖아요?"
"그래, 말은 해보겠어. 허지만 그이는
고집이 워낙 세서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어.
난 원래 그분께 내 사진 외에는 찍지 말라고
고집하진 않았어."
"그랬어요?"
"내 사진만 찍는 건 전혀 그분의 뜻이지 내
뜻은 아니었어."
그 말에 종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은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쪽으로?"
"……."
종미의 말에 유라는 잠시 말이 없다.
그점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준은 자니 홍을
첫대면부터 싫어했고 지금도 준은 자신의
거취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입장이 아닌가.
"그건 아직 모르겠어."
"선생님이 언니와 함께 자니 쪽으로 자리를
옮기구 계속 일을 하신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선생님이 내 사진을 맡아줬으면
해서 말예요. 나도 물론 개인적으로
부탁하겠지만 그전에 언니에게 사전에 허락을
받아놓구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알겠다, 네 뜻, 난 꽁생원이 아니야.
그분이 널 찍겠다면 난 말리지는 않어."
"고마워요, 언니."
허락을 받아놓구 내게 양해를 구하는 것
같구나."
"아니에요. 어니,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이런 부탁을 하겠어요?"
유라는 종미로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으나
곧 자신이 너무 예민한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건 그렇구, 넌 강 투수와 잘
지내니?"
종미는 화제를 바꾸자 어색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내고 유라의 얼굴을 되돌아
보았다.
"소식 몰라요?"
종미의 말에 유라는 귀가 번쩍했다.
"소식이라니? 무슨 일 있었어?"
"자난번에 주간지 사건 후로 우리들 사이는
"무슨 기사가 났는데……?"
"내가 활동이 많아지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니까 기자들이 우리 둘을 뒤쫓기
시작했죠. 강 일한 투수 인기모델 오 종미와
뜨거운 사이, 이런 기사가 계속 나가면서
우리들은 도마 위의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피곤해지기 시작했구나."
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강 투수가 시합 때 컨디션이 나빠서 잘못
던지잖아? 그러면 그게 모두 내 탓으로
돌아오구 말예요. 기가 막혀."
"그래서?"
"나도 바빠지긴 했지만 요즘은 서로 잘 안
만나요."
"언닌 몰라서 그래. 얼마나 날파리처럼
쫓아다니는 줄 알어? 심지어는 밤길에서 손
한 번 잡고 가도 뒤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다음날 주간지에 사진이 대문짝하게 나가면서
'두 사람의 데이트 현장 잠입 성공' 우리들이
만나는 게 무슨 큰 잘못이나 저지르고 있는
줄로 아나 봐. 그런 기사가 나간 다음
경기장에서 그이가 공을 잘못 던지면
관중석에서 별 야유가 다 들어온다구요. 야!
강 투수 너 어젯밤 힘 너무 뺐구나! 이건
도대체 살맛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우린 당분간 안 만나기로 했지. 합의
이별이야, 잠시 동안. 그랬더니 주간지에서
우리 둘이 드디어 헤어졌다고 잔뜩
떠들어놨어요."
"그렇게 되니까 우리는 저절로
끝나더라구요. 몸이 떠나니까 마음도 떠나고,
마음이 떠나니까 몸두 식구……."
"그게 얼마나 됐지?"
"두 달."
"강 투수와 안 만난 지 두 달이 됐다구?"
"그래요. 이제 우린 끝난 것 같아요.
그렇다구 큰 미련은 없지만 허전한 것은
사실이죠. 그 대신 내가 바빠졌기 때문에
공백은 메워졌지만……."
유라는 종미의 말을 들으면서 준을
생각했다.
몸이 떠나니 맘도 떠나더라는 종미의 말이
자기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손꼽아보니 준과 몸을 섞은 지가 한 달이
넘은 것 같았다.
종미의 눈빛은 부러움에 차 있었다.
"뭐가 말야?"
"자니 쪽으로 옮기면서 수입도 더 크게
보장받구. 영화계로 진출하게 된다면서요?"
그 말에 유라는 깜짝 놀랐다. 이쪽에서만
오고간 말인 줄 알았는데 저쪽에서도 소문이
난 일이었다.
"아니? 종미, 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소문난 건 아니고, 저만 알고 있어요.
자니 프로덕션 영화기획에서 일번타자로
언니를 탐낸 것은 그 영화가 패션 디자이너와
모델이 나오는 한·미 합작 영화기
때문이구요, 언니를 가장 적격자로 찍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종미는 꽤 자세한 내막까지 알고 있었다.
"너 그 말 어디서 들었니?"
자니 홍에게 들은 말을 옮겼겠죠."
"하지만 그 사람들 말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가 아닐 텐데."
"전 잘 모르지만 아마 붉은잠바도 영화
쪽에 손을 대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자니 홍이 영화 손댄다니까 괜히
초조해져, 벌써 영화 감독도 한 사람
들여앉혔대죠."
"붉은잠바가?"
"글쎄 모두들 영화를 만들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패션은 뒷전이구 원……."
종미의 볼은 위스키 탓인지 감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 홀짝거린 위스키가 몇
잔째인지 몰랐다.
달아오르는 쪽인데 지금은 두 잔을 비우고도
머리 속은 백 볼트짜리 전구처럼 밝았다.
같은 업종에서 서로의 관심사를 얘기하는
동안 여자끼리 똑같이 느끼는 공감대가 무척
많았다.
더구나 유라는 종미의 입을 통해서 자기도
몰랐던 새로운 소식을 퍽 많이 엿들을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배가 출출한데 언니 나랑 나가지
않을래요?"
"어딜 가려구."
"뚜뚜클럽에 가서 디스코에 곁들여 간단한
요기라두 하게요."
"이렇게 늦었는데? 좋아, 가지."
유라는 종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뚜뚜클럽은 자정이 자나자 사람들이 많이
중앙무대의 조명불빛을 제외하고는 둘레둘레
테이블들이 새집처럼 어둠 속에 박혀 있었다.
유라는 동료 모델들과 어울려 가끔씩
이곳에 들러 디스코를 추곤 했었다. 디스코로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가벼워지고 피로가
풀리는 효과가 있다.
테이블을 안내하는 보이가 종미와 안면이
깊은지 쪼르르 달려나와 그들을 조용히
테이블로 안내했다.
맥주 두 잔으로 입가심을 하면서 유라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안개처럼 내린 무대의 천장은 별빛
조명불이 깜박거리고 음악은 검은 성처의
블루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은 남녀가
실루엣처럼 흐느적 거렸다. 종미는 초조한 듯
곧이어 블루스가 끝나고 갑자기 폭음 같은
음악과 함께 불빛이 번쩍였다. 아이린카라의
플래시댄스가 흘러나왔다. 종미가 유라에게
눈짓을 하고 무대로 뛰쳐나갔다. 유라와
종미는 마주 서서 몸을 흔들어댔다. 옆
사람들이 그들의 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음악이 네 곡이나 바뀌어도 그들은 잠시
쉬지도 않았다.
유라의 등줄기에서는 땀방울이 흘렀다.
온몸이 땀과 열기로 뜨거워졌다.
흔들어라 흔들어라. 기진할 때까지. 유라와
종미는 서로 누가 오래 버티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디스코곡이 끝나고 불이 꺼지자 블루스가
나왔을 때였다. 유라가 동작을 멈추고
가로막아 서면서 재빨리 유라의 손과 허리를
휘어잡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라는
잠시 멈칫하다가 아내 사내의 스텝에
리드당했다.
노린내가 훅 끼쳐왔고, 유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는 웬 낯모르는
서양녀석이었다. 그냥 뿌리치고 되돌아설까
했으나 음악과 스텝이 그녀를 포기시키지
않았다. 녀석의 춤솜씨는 프로급이었다. 그는
마치 유라를 은쟁반 위의 구슬처럼 가볍게
굴리며 무대를 휘어잡았다. 유라는 지금까지
자기를 이렇게 잘 유도하는 남자와 춘 적이
없었다. 녀석의 목덜미에서는 향수냄새가
은은히 풍겼고 휘감은 팔은 완강한 등나무
같았다.
그녀의 아랫배와 옆구리에 수시로 밀착되어
유라가 녀석의 어깨너머로 건너편을
바라보았을 때 종미 역시 웬 서양녀석의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아마 테이블에서 무대를 구경하고 있던
미국녀석들이 블루스가 나오자 자기들을
점찍고 있다가 뛰어든 것이라고 유라는
생각했다.
유라는 스텝에 끌리다가 무심코 종미를
끼고 도는 서양녀석을 바라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멈추었다.
종미의 머리 밑에 코를 대고 있는 사내는
스티브였다.
아? 스티브, 저 녀석이.
유라는 스티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대는 어두웠지만 조명불빛에 드러난
스티브의 콧수염과 표정은 유라의 눈에
그 순간 스티브와 종미는 유라 옆으로 바싹
다가왔고, 바로 그때 종미는 유라의
파트너였던 남자와 재빨리 한 쌍이 되어
스텝을 밟았다.
그와 함께 스티브가 유라의 허리를 재빨리
안아 돌아섰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나 챈징
파트너였다.
순간, 유라는 어쩔 줄 몰라 두 스텝쯤,
스티브의 리드에 응하다가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거의 흐느적거리던 스티브가 유라의
얼굴을 확인하듯 바짝 가까이 댔다가 움찔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스티브는 유라를 그때서야 알아보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스티브?"
"유라?"
스티브 역시 유라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놀랐다는 제스처였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모른 체하자. 유라는
얼핏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스티브 씨 이런 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반가워요."
유라가 테이블 쪽을 가리키며 가서
앉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반갑습니다, 유라 씨."
그때서야 스티브는 숨을 돌리며 유라와
함께 무대에서 벗어나 테이블에 앉았다.
"우연히 오신 건가요?"
유라가 물었다.
그 말에 스티브는 약간 당황한 눈치를
보이더니
"아 네 그렇습니다."
하고 마지못해 그 말을 수긍했다.
유라는 우선 스티브를 안심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탄로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자리를 피할 것이다.
"스티브, 난 아직 자니 홍을 만나지
못했어요. 테스트에서 낙방한 후로는 실망이
컸습니다."
그 말에 스티브는 즉각 안심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랬습니까?"
"테스트에서 떨어진 후 무슨 낯으로 자니
홍을 만나겠어요."
그러나 스티브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미를 잘 아세요. 스티브?"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럼 두 분은 무조건 우리들의 파트너가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두 분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파트너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유라 씨인 줄은 몰랐습니다."
스티븐는 손수건을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요녀석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녀석을 붙잡아 두지
않으면 파멸이야.
자, 어떻게 한다? 누구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인가. 이 녀석이 달아나기 전에 발목을
비끌어맬 방법이 없을까.
유라의 가슴은 두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해주세요."
음악이 끝났을 때, 유라는 스티브에게
재빨리 말했다.
스티브는 다가오는 종미를 바라보면서
유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종미와 같이
무대에서 내려온 서양친구는 체격이 좋았으나
못생긴 얼굴이었다. 한국말은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지도 못했다.
"언니, 요 양키녀석들 춤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날 팽이처럼 돌리잖아?"
종미는 갑자기 뛰어든 양코배기 파트너들의
기습 덕분에 멋진 춤을 춘 것이 몹시
기분좋은 모양이었다.
"땡큐, 땡큐."
종미가 양쪽으로 손을 흔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스티브가 종미를 향해 말했다. 아마
스티브는 유라의 부탁을 듣고 아예 한국말을
모르는 행세를 할 셈인것 같았다.
"언니 내가 원더풀이래, 요 녀석들 참
귀엽게 생겼지?"
"글쎄?"
"유, 지 아이?"
종미가 옆의 서양인에게 물었다.
"노노……."
그가 고개를 흔들면서 무슨 말인지 길게
읊어댔다.
"군인이 아니고 장사꾼이라나 봐."
종미가 대강 알아듣고 짐작으로 말했지만
유라는 미국인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자기 이름은 제임즈고 앞에 있는 친구는
콜리라고 사업차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쿨리라고 말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미를 향해 권했다. 종미는 사양도 없이
재빨리 스티브를 따라 무대로 나섰다. 유라는
스티브가 내빼지 않나해서 몸을 일으켰다가
스티브와 종미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이내
자리에 앉았다.
제임즈라는 친구는 맥주를 홀짝였다.
"헤이 미스터 제임즈, 넌 숙소가 어디니?
전화번호 같은 거 있어?"
유라가 제임즈에게 물었다.
"홧? 렛 미 노우."
제임즈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호텔 네임 오아 폰 넘버 프리스."
그때서야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노우, 하이눈 호텔, 나인 오 쓰리."
하이눈 호텔 903호실이 자기 숙소라는
말이었다.
"쿨리, 투?"
유라는 쿨리라 불린 스티브의 숙소도
물었다.
"나인 일레븐."
제임즈는 스티브의 방 번호도 시원하게
일러주었다. 스티브란 녀석이 하이눈 호텔에
묵고 있는 줄을 몰랐구나. 하이눈 호텔에
묵고 있었으면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여기서 만나다니.
아무 곳도 모르는 순진한 제임즈의 입을
통해서 유라는 스티브의 숙소를 알게 된
행운을 잡았다. 이젠 녀석의 거처를 알았으니
시간은 벌어둔 셈이었다. 음악이 끝났을 때
종미는 혼자 되돌아왔다.
"아니? 네 파트너는 안 와?"
유라가 묻자, 종미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순간 유라는 스티브 녀석이 내뺐다는 것을
알았다.
"나두,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야겠군."
유라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왔다. 찬바람이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듯 밀어닥쳤다. 택시 정류장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얼핏 길을 건너 뛰는 스티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녀석을 붙들기에는 너무 늦었다.
스티브를 태운 택시가 쏜살같이 어둠을 뚫고
사라졌다.
유라가 다시 홀로 되돌아왔을 때는
제임즈라는 녀석도 사라지고 없었다.
"종미, 요녀석들 어딜 갔지?"
유라가 묻자 종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웃기는 녀석들이야."
유라는 잠시 동안 자리에 앉아서 종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종미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두 미국놈이
우연히 파트너가 되고 싶어서 접근한 것으로
아는 것일까.
갑자기 종미가 그들의 정체를 숨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언니, 내 옆에 앉아있던 제임즈란 녀석 참
순진해, 나보구 오늘밤 자기 숙소로 가서
한잔 하겠느냐고 하길래, 미친놈 노 탱큐라고
했더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리더군."
"너 그 애들 정말 모르니?"
유라는 종미의 말이 사실인가 의심이
들었다. 자기가 나갔다 온 사이에 제임즈도
스티브도 빼돌린 것이 혹시 종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그 양아치들을 내가 어떻게 알아 언니,
춤판에 뛰어든 녀석들 아냐? 혹시 언니가 그
쿨린가 콧수염난 양키랑 아는 사이 아냐?
마주치더니 굉장히 놀라던 걸. 둘이 서로
말야"
종미는 유라의 표정에서 무슨 꼬투리라도
찾아낼 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별 의심을 다하는구나. 괜한
녀석들이 나타나서 오늘밤 우리들을
깽판놓구…… 그 따위 녀석들 얘기
그만두자."
유라가 종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종미는 유라의 술잔을 받아 쭉 들이켜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종미는 눈빛이 고양이처럼 반짝거렸다.
유라는 자기를 탐색하는 종미의 눈초리를
유난히 따갑게 느끼며, 그러나 종미에게
헛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녀석들이 누구지? 난 웬 미국놈들인가
하구 너무 놀라서……."
그때서야 종미의 눈빛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종미는 반짝 세웠던 긴장을 스스로
누그러뜨리는 눈치였다.
"언니가 몰라서 다행이야. 무서운
놈들이지, 난 녀석들의 정체를 알고 있어.
이건 극비지만 하두 엄청난 일이라서
언니에게 말해주는 거야."
종미는 말소리를 낮게 죽였다.
"언니가 안 걸려서 다행이야. 샤넬라인의
그 콧수염 녀석의 꾐에 빠져서 당했다구."
종미의 말에 유라는 귀가 번쩍 띄었다.
가슴이 깊게 찔리는 듯했다.
"당하다니?"
"글쎄, 그 녀석이 카메라 테스트를
한답시고 그 애들을 데려다가 포르노 필름을
찍어서 비디오 카세트를 만든 거예요."
유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순간 머리 속에서
그날 밤 수원의 별장 소파에서 조명불빛을
받으며 스티브와 일을 벌이던 생각이 마치
필름처럼 재생되었다.
따르르르…… 무비카메라 작동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음모에 단단히
빠져들었구나.
애자와 미희는 둘다 자니 패션 쪽으로
유독 애자와 미희와 자기가 그렇게 유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붉은잠바의 스카웃 방해 공작의 흉계에
말려든 것이라는 자명한 판단이 섰다.
"그래서?"
"애자와 미희는 아마 자니 패션 쪽을
포기했을 거예요."
"붉은 잠바의 짓이었단 말이지?"
"그럼 누구겠어요. 난 언니두 말려들었는지
몹시 궁금했어요."
유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까 그 제임즈란 녀석이 미국 포르노
영화 전문배우인데 애자와 미희는
상대역이었다는 걸 애자를 통해서 들었어요.
그리고 쿨리라는 본명을 가진 스티브 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미국 건너가 살다가
나온 놈인데요. 거죽만 미국놈이지 속은
한국놈이에요. 둘다 붉은잠바의
졸개들이구요."
유라는 종미의 말에 입이 딱딱 벌어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스티브 녀석에게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
속은 것이 분했고, 발등에 불은 이미 떨어진
셈이었다.
"종미, 너는 표 전무의 편인데 왜 내게
그런 극비 사항을 말해 주고 있지?"
"언니는 깜깜 소식이군요. 붉은잠바,
그치가 얼마나 교활하고 잔혹한지 몰라서
그래요. 언니가 없으니까 그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날 밀어주고 있지만 난 당분간 언니의
대타에 불과해요. 벌써 붉은잠바는 프랑스
금발이고 한 년은 은발이에요. 둘다 인형같이
예쁘죠. 난 곧 밀려날 거구요."
드디어 붉은잠바는 이미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자니 패션으로 가려는 모델들의 발을 묶고
자기 쪽 모델들을 크게 보강하고
있는중이었다.
"게다가 붉은잠바는 그 동안 날 계속
원했어요. 난 거절했구요. 난 출세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석 말을 안 들을 거니까요. 난
출세를 위해서 그런 타협은 못해요. 강
투수와 헤어진 후 많은 것들을 생각했어요."
유라는 종미의 그런 분별력에 대해 새삼
부러움이 솟았다.
유라는 그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스티브를 만났다가 놓치고, 종미로부터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붉은잠바, 네놈이 날 올가미를 씌워놓고,
이제는 네 손가락 끝에서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를 만들 셈이구나. 넌 자니 패션을
그만두라. 만일 내 말을 안 들으면 필름을
공개하겠다. 넌 망신을 당하고 매장된다.
생각할수록 그날밤 수원별장은 악몽의
밤이었다.
"종미, 그녀석들은 널 알고 있었겠구나."
"아마 스티브는 날 알 거예요."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마워."
"언니두 조심하세요."
유라는 종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가봐야겠어."
"태워다 드릴께요."
종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얽혀들었다. 마치
자동인형처럼 종미의 차에 올라앉아 기댄
다음 혼을 뺀 사람처럼 눈을 감고 꼼짝도
안했다. 혼자 힘으로는 감당해 내지 못할
만큼 완전히 결박당한 거야.
혼자 약은 체하면서 제 꾀에 빠져 스스로
망친 꼴이 되어버렸어. 욕심이란 부리는 만큼
손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법은 없어.
붉은잠바의 자니 홍에 대한 와해공작의
제1호는 스티브 작전이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차가 아파트에 도착해서야 유라는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런 귀뜸해 준 건 언니에 대한 작은 애정
때문이었구요, 충고일 수도 있어요. 우린
서로 도와야 할 때가 올 거예요."
종미가 남긴 말이다.
"조심해 가."
유라는 종미의 차 미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둠 속에 버려진 외로움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자니
홍과의 좋은 예약으로 순조롭게 스타덤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붉은잠바에게
발목이 잡혀 모든 일이 비누거품이 된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표적은 붉은잠바였다.
그가 쥔 열쇠를 회수하는 길밖에 없다.
협상이 불가능하면 힘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유라는 어둠이 깃든 아파트의 어린이
놀이터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약간의 취기도 씻어내고 그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했다. 그녀는 그네
시작했다. 잠시 유라는 흔들리는 율감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하게 스치면서 차 한 대가 아파트
광장의 가로등 불빛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유라는 곧 그 차가 지난번 준이 훔쳤던
심카라는 것을 알았다.
심카의 도어가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남자였다.
가로등 불빛의 가시거리에 휙 모습을 드러낸
남자.
아니? 준!
유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키가 크고 마르고 긴머리를 손으로 젖히며
걸어나오는 사내는 분명 준이었다. 순간
유라는 숨을 멈추고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들어섰다. 준이 나한테 전화를 하는구나.
전화벨은 계속 신호만 가고 있겠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집으로 뛰어들어가 전화를
받고 싶었다. 전화를 받는 것이 서로의
자존심을 죽이며 다시 만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그러나 준은 신호만 울리는 소리에 곧
실망하고 말겠지. 지금 놀이터의 어둠에서
벗어나 걸어가다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오는
준과 우연히 마주치게 할까? 오늘밤 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준은 전화가 안 되면
그냥 되돌아갈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깊이
잠들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아파트로 직접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준은 전화가 안 되면 그냥
되돌아갈 것이다. 유라는 준에 대한 갈망이
준의 목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지금 그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이나
다름없어서 잘못 건드리면 폭발할 것이다.
유라는 그네에서 내렸다. 그때 준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왔다. 그는 다시 심카의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다. 그는 한 번 훔쳐 탄 차는 두 번
다시 타지 않는 성격이었고,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가 심카를 훔쳐 타고 어딜 다녀왔다면
차를 되돌려주러 왔을 텐데 차에 다시 오른
것이 이상했다. 내가 전화를 안 받자 저 차를
타고 다시 가려는 것인가. 유라는 어둠
속에서 될수록 그의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차들 곁에 붙어서 심카 쪽으로 다가갔다.
준은 차 속에서 카폰을 들고 귀에 대고
그렇지. 카폰이 있는데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던 것은 내 전화가 혹시 고장이 나서
벨소리만 들리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나
아닐까.
자! 이제 준에게 가자.
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먼저 꺼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선 그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붙들어야 한다. 유라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실내복 차림의 가운을
걸친 채 걸어나왔다. 유라는 잠시 멈칫 몸을
숨겼다.
그 여인은 곧장 심카 쪽으로 다가왔다.
"지금 오시는 길이에요?"
여자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조앙, 카폰이 고장이군요, 공중전화를
?
그 화창한 하늘 저 멀리 현해탄 바다 쪽에서
준이 차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앙이
다가오자 준은 차에서 내렸다. 준의 손에는
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렇게 늦을 줄 알았으면 내일 주셔두 될
텐데……."
"약속을 지키느라고 서둘렀습니다."
준이 건네주는 봉투를 조앙이 받아들었다.
유라는 그들로부터 십여미터 떨어진 승용차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준을
만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저 여자와는
카폰으로 불러낼 만한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에 이 아파트
광장에서 자기가 아닌 딴 여자와 만나고
있다니. 유라는 가슴 속에서 질투심이
지글지글 끓어 올랐다. 지금까지 여자 문제에
그만큼 준은 자기한테만 모든 신경을
주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위급한 상황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는 지금 준마저 딴 여자와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준, 이건 내게 너무했어.
준, 정말 내게 그럴 수가 있어?
유라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윽고 준과 조앙은 아파트 현관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저번에 찍은 사진은 모두 나왔어요?"
조앙이 물었다.
"그럼요. 봉투에 든 건, 앵글이 다른
것들만 골랐습니다."
"너무 수고하셨어요. 어때요 잘 나왔어요?"
"보시고 나서 욕이나 하지 마십시오."
가셔서 커피 한잔 드시고 가시겠어요."
"제가요?"
"어때서요? 집엔 아무도 없는걸요."
"다음으로 미루겠어요."
조앙은 아쉬운 듯 준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전화드리겠어요."
준이 손을 흔들며 되돌아섰다.
"참 선배님 제 차 타구 가세요."
조앙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까두 빌려탔는데 그럴 수가
있나요? 제 걱정은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준이 되돌아서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선배님이라? 호칭이 이상하군. 유라는 준이
혹시 발길을 돌리지 않나 기다렸지만 준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조앙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저 여자가
주인은 프랑스 여자일 텐데.
분명히 준은 쥬뎀므라고 말하면서 심카의
주인이 프랑스 여자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래 어디 사는
여자인지 알아나 두자. 유라는 곧장 조앙의
뒤를 쫓아 현관으로 들어섰다.
조앙이 탄 승강기는 7층에서 불빛이
멈추었다. 유라는 부리나케 다시 현관 밖으로
뛰어나와 7층을 올려다보았다.
7층의 승강기 왼쪽집 창에 불이 켜졌다.
아파트 나동 7층, 승강기의 왼쪽 집, 심카의
주인인 젊은 여자. 준을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여자.
커피 한 잔 드시고 가겠어요.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건 노골적인 유혹이군. 이 늦은밤에 젊은
준이 그 유혹에 안 넘어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좋죠. 혼자 계신다는데, 왜 커피를
사양하겠습니까 하고 여자를 따라나섰다면 그
꼴을 보구 어데게 참을 것인가. 준, 당신은
정말 믿을 수 있는 남자야. 여자한테는 늘
그렇게 쑥맥이 되어야 해. 그건 정말 잘한
일이야. 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날 안 보구
그양 되돌아가다니 그건 너무했어. 변했어도
보통 변한 게 아니야. 그렇게 끔찍히도 날
밝히던 사내가 저렇게 냉연히 돌아설 수가
있을까. 뜨거울 때는 화롯불 같더니 한번
차가워지자 얼음장이 되어버렸군.
하긴 내가 너무 속을 썩였어. 내 탓이 더
큰 거야. 유라는 아까 준이 사라진 골목을
한참 뛰어가다가 가러등이 없는 어두운
골목길로 덤벙 빠져들자 갑자기 무서운
그래, 준을 못 본 걸로 하자. 도대체 지금
준을 붙든다치자, 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준, 난 붉은잠바가 쳐놓은
스티브라는 거미줄에 걸렸어. 날 어떻게
해줘.
아니, 그런 말을 준에게 할 수가 없지.
준이 만일 내가 스티브 사건에 빠졌다는 걸을
알면 그건 끝장이나 다름없다. 준은 자니
홍과 계약이 끝났다는 말을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라. 난 이대로 버티는 수밖에
없어. 나중에 준이 그것을 수긍하고 날
만나러 올 때까지 난 절대로 먼저 준에게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면 안 된다.
준이 날 찾아온다는 것은 내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니까. 문제는 붉은잠바의
손에 있는 필름을 어떻게 되찾아내느냐에
머리 속에 빤히 계산하고 있었다.
필름을 협박용으로 쥔 그녀석이 틀림없이
날 만나자고 청할 것이다.
유라 날 좀 만나줘야겠어. 그러면 난
그녀석을 만나야 한다. 그 다음 녀석과의
협상은 굉장히 불리하지만 어쩔 수 없다.
좋아. 붉은잠바를 만나자. 유라는 갖가지
묘안을 짜내면서 층계로 오르면서 2층
계단구석에서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던 준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나를 아주 단념해 버렸는지
몰라.
아파트까지 왔다가 나를 만나지도 않고
전화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냉연히 등을 돌린
사람. 이제 준은 남이나 다름없구나. 유라는
2층에 올라서서 창 밖으로 광장을
혹시 준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눈여겨
살폈지만 준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은등 불빛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준은
골목의 어둠에서 벗어났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의 가게 옆에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쩔렁거리는 동전을
손바닥에 펴고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았다. 십
원짜리 동전 세 개가 있었다.
유라에게 전화 해봐. 유라는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을 거야. 준 지금 어디야? 지금 올
수 있어?
유라는 구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것이다.
동전 두 개가 몸살이 난 것처럼 준에게
전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참아야 해. 넌 마냥 그런 식으로
거야. 마음속에서 거세게 반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더욱 유라에
대한 그리움을 솟구치게 했다.
준은 콘크리트 전신주를 주먹으로 치면서
얼마간을 서 있다가 안 되겠다는 듯 공중전화
박스로 들아가 동전 두 개를 밀어넣었다.
신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레바를
내렸으나 전화기는 동전을 삼켜버린 채
반응이 없었다. 고장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전화기가 결정을 내려주는군. 동전 한닢이
손바닥에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핑계삼아, 잘 됐군.
집으로 돌아와 도어를 열고 들어서자 편지
봉투 하나가 발에 걸렸다. 준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 주소도 없었다. 봉투를 뜨고
내용물을 꺼낸 준은 그 안에 든 사진을 보고
소파 위에 나체로 얽혀 있는 남녀의
흑백사진이었다.
사진은 사진작가가 '자아 찍습니다. 여길
보세요. 하나, 둘, 셋'하고 셔터를 누른
것처럼 두 사람이 행위도중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너무나
선명했다.
아니? 유라가.
준은 뜻밖의 사진이 눈앞에 나타나자
처음에는 사진을 의심했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웬 미국인이었고
여자는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유라였다.
그는 의심이 분노와 치욕으로 뒤바뀌어 갔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사건이란 말인가.
유라에 대한 미움을 앙금처럼 가라앉히고
있는 때에 치욕적인 사진은 준의 눈에 불을
있는 사진을 불결한 이물질이라도 닿은
것처럼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는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면서
침대로 다가가 봉투 속의 편지를 꺼냈다.
볼펜으로 휘갈겨 쓴 필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이 사진은 필름 중에서 한 장을 복사한
것이다. 잘 봐둬라. 이것이 우리 모델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는 유라의 모습이다.
유라를 은퇴시키지 않으면 필름을
공개하겠다.'
편지 끝에는 발신인이 없었다. 준은 편지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구겼다. 그는 침대에 몸을
눕히고 갖가지 생각을 굴렸다.
그의 머리 속은 예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없다. 그렇다면 표 전무 그녀석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준은 침대에서
몸을 재빨리 일으켰다. 유라가 기어코 녀석의
덫에 걸렸구나. 하지만 그게 덫이라 해도
사진 속의 유라는 용서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닌가. 아무튼 이 문제는 그냥 둘 수가
없다. 준은 밖으로 나왔다.
시계는 밤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있는 차 한대가 눈에 들어와 그는 곧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쇠꼬챙이를 꺼내 차의 도어에 밀어넣었다.
흔하게 굴러다니는 국산중고차였으므로
도어는 쉽게 열렸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시동을 걸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유라의 아파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토끼처럼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유라의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지금까지 의심하고 경계했던 유라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사진이
처음이었다.
유라, 넌 나를 철저하게 속이고 기만했어.
말로는 절대 아니라고 하면서 나에 대한
순결만은 지켜왔노라고 말할 때마다 그걸
믿으려고 난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
하지만 이젠 드디어 그 꼬리를 감출 수
없겠구나.
그것도 치욕스럽게 남이 보낸 그런 사진을
통해서 그런 걸 알게 되다니. 너 같은 불결한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견디고 있는 나라는
남자란 얼마나 값어치 없고 불쌍한 존재인가.
넌 내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여자야.
사랑하지 않아. 난 오늘밤 널 그냥 둘 수가
없어.
제발 아파트에 네가 없기를 바래. 왜냐
하면 난 너를 보면 어떻게 할 지 모르니까.
만일 만일 네가 아파트에 있다면…….
차는 어느새 아파트 광장에 도착했다.
유라는 거실의 불을 끈 채 소파에 앉아서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다.
문득 광장으로부터 차 한대가 쏜살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라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차를 주시했다. 차 안에서 준이 날쌔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준이야, 준이 오고 있어.
유라는 수은등 불빛 속에 드러난 준을
순간적인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옷을 벗어던졌다.
그렇게 겉옷을 벗은 시간은 정확히
30초였다. 패션쇼 무대에서 한 바퀴 돌고
나오면 다음에 입고 나설 옷을 번개처럼
갈아입어야 한다. 얼마나 빠른 동작으로 옷을
벗어던지고 다른 옷을 얼마나 빨리 입느냐에
따라 쇼무대의 진행은 결정된다.
빨리 벗고 빨리 입고 그 다음 다른 동료
모델이 무대를 한바퀴 돌아 올 때쯤 다시
무대로 등장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벗고
입는 시간이 채 30초의 여유도 없다.
유라는 옷을 벗은 다음, 그 다음은 다시
입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유라는 몸을 눕힌 다음 허리 아래 걸린 한
장의 손수건보다 가벼운 것을 말아내려
떨어뜨렸다.
그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침대 위의
스위치를 밀어올려 붉은 조명등을 밝혔다.
불빛 속에서 그녀의 온몸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담요 속으로 몸을 밀어놓고 엎드린
채 한쪽 발로 담요를 걷어 차고 다리를
드러냈다. 현관에서 열쇠 비트는 소리가
났다. 준이 쇠꼬챙이로 문을 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준은 퍽
조심스럽게 될수록 소음이 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가 거실로 걸어오는
발짝 소리가 들렸다. 침실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방에 들어선 그는 문가에 한참 서
있는 듯 동작이 정지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지금 침대 위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흐트러진 머리다발, 드러난 어깨와 흰 팔과
담요 밖으로 뻗친 다리, 한참 후 그의 지퍼
내리는 소리가 찍하고 짧게 들렸다. 그는
몹시 서두르는 것 같았다. 유라는 일부러
숨을 쌔근거리며 깊이 잠든 시늉을 했다.
허물을 모두 벗어버린 그가 침대 옆으로
바짝 다가오는 인기척을 그녀는 들을 수
있었다.
준, 당신은 오늘밤 너무 믿음직스러워.
심카의 여자가 유혹을 해도 물리치고 내
곁으로 온 정직한 수말. 난 지금 무서운
욕망을 참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어서 날
건드리기만 해.
유라는 베개 속에서 큰 숨을 몰아쉬고
준의 손끝에서는 찌릿찌릿한 전류가
흘러나왔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었다. 유라의
몸 속에 있던 푸석푸석한 마른 풀들이 불에
당겨졌다.
"……준."
유라는 낮은 소리를 내며 잠결인 듯 뒤채는
시늉을 했다.
준은 날쌔게 유라를 덮쳐눌렸다. 유라의
엎드린 등 위로 무거운 바위 하나가
얹혀졌다. 준의 갈퀴 같은 큰손이 젖가슴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아……준!"
유라는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그때 준의 등나무 같은 완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클레인처럼 들어올렸다. 그 순간
민첩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방은 이제 물샐
틈도 없이 꽉 차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물은 순식간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준은
얼마나 큰 한이 맺혀 있었는지 기세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점점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준은 유라의 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손 하나 대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굴곡과 경사가 오르막으로 교묘하게 난
길과 은밀한 숲과 평야와 샘의 위치를 잘
알고, 거기에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았다.
어디에 먹이가 있고 어디는 그냥 지나쳐야
하는지. 어디를 지날 때 바람 소리가 들리고
휘파람 소리가 나는지. 또 어느때 소나기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지. 거친 곳과 부드러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가
쉬거나 머무를 때도 별은 빛났고, 그가 달릴
때는 너무나 많은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서
그녀는 밤하늘의 메아리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리고 높이 오른 다음 내리막길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미끄러져 고삐를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는 그의 등에 깊은 손톱 인장을
남겼다. 준의 등은 상처자국투성이었다. 그
다음 그녀는 실신하는 게 순서였다.
그때쯤이면 준 역시 몽롱한 안개의 보료 위에
몸을 던져 순식간에 깊은 잠의 바닥에
닿았다가 솟구쳐 올라와 소스라치게 눈을
뜬다.
준은 몸을 일으켜 침대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끈적거리는 땀이 근육에 말라붙어
옷을 벗으면 수컷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배가 고파서 정신없이 먹을 때는 나도 한낱
허기진 짐승이라는 것을 의식하지만 나체가
되면 수컷이라는 성별 의식이 유난히
느껴진다.
준은 성큼성큼 방에서 걸어나가 욕실로
들어섰고, 욕실의 벽면 거울에 드러난 자신의
나신을 한참 동안 바라본 후 욕조물 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말끔히 씻긴 욕심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물 속에 누운 준은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행위에 대해서 곰곰 생각했다. 그 끔찍한
사진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단숨에 달려와서
유라에게 어떻게 했는가. 유라를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미움이나 분노가 밀려나가 침대
측은하게 여겨졌고, 그리고 다른 한편 그동안
억눌렸던 욕정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와 함께 아까의 그 분노의 불길이 그대로
욕망의 불길로 변해 버렸다.
이건 어찌된 셈인가. 나는 유라를 그냥
둬서는 안 된다. 그냥 두다니.
내가 유라를 그냥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준은 자기 자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유라의 그 미끄럽고 따뜻하고 좁은
곳에 들어가고 싶다. 내가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은 외로움이나 슬픔을 잘
어루만져 준다. 나는 유라에게 그 방을 다른
사람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주인은 존이야, 당신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이 순결로 도배하겠어.
없어.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함부로 내주고
있었다니…… 절대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주인인 내가 그렇게 말했고 스스로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내 손이
죄를 짓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유라는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은 유라에게 내 약점을
보여주고 말았어. 오늘밤 일은 유라에게
명분을 주는 일이 되어버렸어. 남자는 가끔씩
그놈의 욕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지.
빌어먹을 놈의…… 성이란 남자에게 가끔씩
노예근성을 준단 말야.
유라는 이제 내가 자기를 모두 용서한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존, 자니 홍이 당신에게 일을 맡기고
싶대.'
준은 욕조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라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아파트를 빠져나가야
한다. 유라에게 그 사진에 관한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사진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유라에게 큰 당혹을 주고 나는 그
사건을 풀어야 하기 때문에 유라를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준은 벽거울 면에 나타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준,
넌 정말 멋진 체격을 가졌다. 삼각형의
어깨와 가슴의 질기고 탄력있는 근육, 좁은
허리와 큰 기둥 뼈대를 이룬 다리. 그 가운데
뭐든지 잠깐만 닿아도 성능 좋은 스프링처럼
예민하게 거총자세를 취하는 탄력있는 그놈을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외롭게 보이기도
했다.
준은 욕탕에서 나와 유라의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흐트러진 침대 위에 엎드린 붉은 살갗
하나, 그것이 그의 눈에 비친 모습이었다.
그녀의 등은 조명불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고 검은 머리는 흐트러져 등 위를 어지럽혀
놓았다. 유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주섬주섬 옷들을 걸쳐입고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대로 여기서 빠져나가자.
그렇게 하지 않고 유라가 잠에서 깨어난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아까 아파트로 들어닥쳤을 때 유라가
깨어 있었다면 이 주먹은 이미 유라의
면상으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만큼 자신의 가슴도 크게 멍이 들었으리라.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한번 더 멀리 등을
돌리고 물러서는 게 순서였겠지.
그런데 다행히 유라는 잠들어 있었고,
분노의 주먹에서 터지지 않고 그 아래에서
터졌다.
얼마나 서로를 위해서 다행한 일인가. 자,
유라. 깊이 잠을 자둬. 우리들의 결론은 좀더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어. 넌 지금 큰 모함에
빠져 있어. 만일 사진이 공개되면 유라, 넌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결국은 그 세계에서
사라져야 한다.
준은 침실에서 나왔다. 난 오늘밤, 네
꿈속에 다녀간 거로 해두자. 준은 아파트에서
빠져나와 조앙의 아파트로 발길을 돌렸다.
5.외로운 섬
샤넬라인은 건물부터 그 면모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유행과 소비의 도시 뒷골목 한복판에
번쩍거리는 유리벽 빌딩이 있고 1층 매장은
조명에 따라 분위기가 변하는 쇼윈도우
시설을 하고 있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여신들 같은 마네킹들이
감고 있는 옷들은 그것이 옷이 아니라
한가닥의 섬세한 살갗이나 세포처럼 보였다.
표 사장은 드디어 조카의 뜻대로 하야리의
땅을 팔아 수십 억을 쏟아넣었다. 돈을 바른
건물은 주위의 어느 건물보다 유행옷을 입은
것처럼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세를
확장시키고 경쟁업체로 등장한 자니패션의
숨통을 누른다는 것이 붉은잠바의
전략이었다.
이미 자니패션의 화려한 입성을 과시하게
될 자니 귀국전은 차질이 생겨 자꾸 지연되고
있었다. 자니패션에 나설 모델들이 대량으로
출연의사를 철회했고 수많은 절차와 진행마다
방해를 받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붉은잠바의 손에서 요리되고
있다는 것을 준은 잘 알고 있었다. 유라가
샤넬과 발을 끊은 후에는 샤넬과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준도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되었지만, 그것은 유라가 자니 쪽을 고집한
이유였다.
준은 잠바를 벗고 밤색셔츠 차림으로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샤넬라인의 새 건물로
들어섰다.
수시로 접수되고 있는 모델 지망생들의
유리문에 들어서자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1층 안내실에서 인터폰으로 확인해 보니,
붉은잠바는 부재중이었다. 준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 표는 아마
있었더라도 없다고 하라고 일렀을 게 뻔했다.
늙은 표사장은 만나보나 마나였다.
그는 이제 조카에게 돈도 마음도 몸도 모두
뺏긴 명목상의 인물에 불과했다. 그 땅을
넘기자 그는 조카의 식은밥처럼 되고 말았다.
돈이 군림하는 세계에서 제 손에 쥔 것이
없으면 끝장이라는 것을 표 사장은 나중에야
터득하고 한탄했다. 그를 만나서 하소연을
들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표 전무가 없단 말이지? 몇 층이지?"
전부터 준을 잘 알고 있는 안내원이
"지금 방에는 안 계시구요. 5층 연습실
옆의 커피숍에 계십니다."
그가 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준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였다. 준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승강기 앞은 여자들로 붐볐기
때문이었다. 준은 5층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준이 복도를 걸어나왔을 대 연습실에서는
모델들이 발레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커피숍은 작은 간이휴게실이나 다름
없었다. 모델들이 연습 도중 사이다나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었다. 준이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서양사람이 나왔다.
준은 그를 보자마자 그가 바로 유라의
알아챘다.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저 콧수염을 기른 서양녀석이 포르노필름의
남주인공이라면 저 녀석이 지금 붉은잠바를
만나고 나오는 것은 말하지 않고도 모든
음모를 꾸민 한통속이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준은 재빨리 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단은 붉은잠바를 피해야 한다. 스티브의
뒤를 이어 붉은잠바가 걸어나왔다.
"결정은 그렇게 된 걸로 알겠습니다."
준은 서양녀석의 입에서 나온 유창한
한국말을 듣고 놀랐다. 겉으로 듣기엔
한국사람과 거의 다름없는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고 있었다.
붉은잠바가 복도에서 서양녀석과 헤어졌을
때, 준은 연습실에서 나와 서양녀석의 뒤를
주차장에 들어섰고, 준이 심카에 올라탔을 때
서양녀석은 폰티액의 핸들을 꺾고 있었다.
준의 심카는 마치 폰티액의 뒤에
연결장치를 한 것처럼 거의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가끔씩 폰티액 속의 콧수염은
백미러를 흘끔거릴 뿐 뒤차에는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지만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산한 외곽으로 차가 빠질 때 폰티액은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심카는 소형차였으므로 폰티액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거의 몇 번을 준은
시야에서 폰티액을 놓쳤다가 다시 잡고
놓쳤다가 다시 잡곤 했다. 거리의 신호등
대기가 그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윽고
폰티액은 뜻밖에도 호텔 하이눈으로
들어섰다.
유라, 조앙이 애용하는 단골 호텔이 되었는지
퍽 이상하게 여겼다. 호텔 하이눈은 일류이긴
하지만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빼고는 다른 호텔들의 시설과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단지 실내수영장 시설이 빼어나다는 것을
빼면 한적하다는 잇점밖에 없었다. 녀석의
폰티액은 주차장 끝에 가 섰다. 준은 맞은편
주차장에 심카를 세웠다. 서양녀석의 풍채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면 로버트
레드포드에 속하는 미남이었다. 녀석은
차에서 꺼낸 007가방을 들고 호텔의 현관을
향해 걸었다.
저 녀석의 정체를 밝히면 붉은잠바의
속셈은 드러날 수밖에 없고, 저 녀석은 모든
음모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준은
유라와 녀석이 벌거벗은 사진을 내게 보낸
녀석은 붉은잠바였고, 그것은 유라의
자니패션 진출을 막으면서 유라와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흉계라는
것을 준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붉은잠바의 보복적인 음모에 유라가
휘말려든 것은 큰 실책이었다. 첫문제는
미남이자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미국
포르노배우의 방 홋수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유라는 곧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 하이눈을
향해 달려갔다. 디스코테크에서 스티브와
제임즈를 우연히 만났고, 두 녀석이
달아났지만 제임즈를 통해 스티브의 숙소를
알아낸 것도 큰 수확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티브를 구워삶아서
만일 녀석이 돈을 요구하면, 돈으로, 몸을
요구하면 몸으로 때워서라도 필름을 빼내지
않는 한 적어도 미래의 유라는 없는 것이다.
호텔에 도착한 유라는 즉각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티브의 방을 향했다. 적막이 감돌고
있는 호텔 복도의 양탄자를 한참 걸어서
유라는 방의 홋수를 확인하고 나서 자신이 백
속에 든 재크나이프와 병 속의 알약을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은
약간 떨렸다. 유라는 안에서 밖을 살필지도
모르는 녀석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렌즈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후즈 데어?"
안에서 밖을 묻는 소리였다.
"미스 오, 오 종미예오."
유라는 얼핏 오 종미라면 스티브가
팔았다. 그때서야 쇠풀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유라는 문이 열리자 몸을 비집고
들어서면서 문을 밀어젖혔다. 경계가 잔뜩
서린 상대방을 반 강제적으로 밀고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 안은 커튼이 내려진 채 캄캄한
어둠이었다. 대낮인데도 방 안은
한밤중이었다. 문이 쿵하고 닫히면서 문
안쪽으로 밀려 있던 남자가 유라를 등에서
덥석 껴안았다. 유라의 몸에 휘감겨온 남자의
팔은 맨살이었고 등뒤에 바위처럼 엉겨붙은
몸은 이제 막 갓구워낸 감자처럼
따끈따끈했다.
"어멋!"
유라가 놀라서 목을 돌렸을 때 유라의 몸은
남자의 두 팔이 유라를 들어올린 것이었다.
유라는 곧 침대 위로 던져졌고 알몸의 사내가
덮쳐왔다. 스티브는 여지껏 자고 있다가
자기의 방문을 받은 것이라고 유라는
생각했다.
"스티브 좀 비키세요. 손님 대접이 겨우
이거예요?"
그 말에 사내는 유라의 가슴을 헤집다가
잠시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아임 낫 스티브. 후 아 유?"
유라는 역시 깜짝 놀라면서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켜지자 사내는 몸을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사내는 뜻밖에 스티브가
아니라 디스코테크에서 스티브와 같이 왔던
제임즈였다. 그가 스티브의 방 홋수를 자기방
홋수로 일러주었던 것 같았다.
유라가 침대에서 벗어나려 하자 제임즈는
유라를 두 팔로 제지시켰다.
"캄 온 미스 오. 아이 러브 유."
제임즈는 자신을 미스 오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애욕의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제임즈의 눈에 유라가
누구고 오 종미가 누구이건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제임즈는 지금 디스코테크에서
만나서 자기 숙소를 일러준 여자를 미스 오로
알고 있고, 그 미스 오가 자기를 지금 호텔로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해명할 도리가
없었다.
"헬로, 미스 제임즈, 좀 진정해, 진정하구.
테키리지 테키리지 제임즈."
죽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여자에게 너무 성급히
자기 욕심만 내세우고 있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었다. 유라는 흰 시트를 잡아 빼어
제임즈에게 던졌다. 제임즈는 시트로 치마를
만들어 대강 가리고 앉았다.
"미스 오, 아임 쏘리."
제임즈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다.
"미친 녀석, 아무리 미스 오가 좋기로서니
들어서자마자 그럴 수가 있어? 남자들이란
그저 쯧쯧……."
제임즈는 유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깨를 들썩였다.
"핫 유 토킹……."
유라는 제임즈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스티브의 친구라는 것밖에는.
사기꾼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제임즈, 스티브 룸은 어디지?"
그 말에 제임즈는 무슨 뜻인지 알고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스티브의 방은
위층인 것 같았다. 순간 유라는 제임즈도 한
패거리이기 때문에 혹시 스티브의 일에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제임즈, 넌 뭘하는 녀석이니?"
그 말에 제임즈가 또 어깨를 들썩였다.
"홧 아 유?"
유라가 영어로 물었다.
"오! 카메라맨."
제임즈는 한 팔을 들어올리며 드르르르
하는 소리를 촬영기사라는 소리를 냈다.
유라의 눈빛은 빛났다. 어쩌면 제임즈가
찍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녀석을 먼저 잘 구슬러 보자.
"제임즈, 필름 좀 볼 수 있어? 내
필름말야. 렛 미 시 마이 필름."
그러자 제임즈는 그때서야 두 손가락을
허공으로 올려치며 이제야 네가 날 찾아온
뜻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제스처에 유라는 자기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필름 보여주겠지?"
"오케이, 아이 해브 유어 필름."
제임즈는 곧 호텔의 옷장문을 드르륵 밀어
붙였다.
옷장 안에는 큰 가방 몇 개와 소형
영사기가 보였다. 유라의 눈은 더욱 커졌다.
제임즈는 여러 개의 필름 가운데 하나를 집어
벽면으로 향해 돌려놓았다.
"미스 오, 유아 넘버원."
제임즈는 유라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앗다. 유라는
제임즈가 영사기를 조작하고 있는 동안 침대
밑에 나동그라진 백을 집어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오렌지주스와 맥주가
있었다. 유라는 주스 깡통을 꺼냈다.
"뭘 마시겠어?"
제임즈가 이쪽을 잎바라보며 마실 것을
준비하는 유라에게 `위스키 프리즈'하고
외쳤다. 유라는 탁자 위에 반쯤 남은
위스키를 유리잔에 부은 후 핸드백 속에서
재빨리 꺼낸 수면제 세 알을 컵 속에
밀어넣었다. 유라는 주스를 유리잔에 따른 후
두개의 잔을 들고 침대쪽으로 다가왔다.
제임즈가 위스키잔을 받았다.
"오케이 제임즈."
유라가 유리잔을 내밀자 제임즈가 마주치고
한 모금 마셨다. 유라가 스위치를 내리자
영사기에서 강한 불빛이 맞은 편의 흰 벽에
직사각형의 스크린을 만들었다.
유라는 순간 자신의 모습이 스크린에
어떻게 나타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지켜보았다. 수원의 어딘가에 있던 조용한
집의 거실 소파에서 그때 스티브가 다가와
뜨거운 입김에 퍼부으며 시작된 그 일이
필름에 수록되어 있다니, 필름의 첫장면은
어디서 시작될 것인가.
유라가 숨을 멈추고 있을 때 몇 개의
편집이 안된 숫자들이 찍혀나온 화면은
엉뚱하게도 짙은 숲속의 잔디가 나왔다. 그
입으로 쏟아넣은 다음 유라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팔로 허리를 감싸안았다.
유라는 제임즈의 포옹을 허용하기로 했다.
필름을 보여주는 호의를 베풀어 준 제임즈가
어쩌면 자기를 진흙구덩이에서 건져주는
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은 한 여인이 말을 타고 가는 뒷모습이
잠깐 나왔고, 그 말은 자신이 수원에서 탔던
영국산 더러브렛종 바로 그 말이었다. 유라는
그 당시 말을 탔을 때조차도 카메라가 돌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면 속의 여인은
자기의 뒷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스크린은 계속 되었다. 여인은 이윽고
말에서 내렸고 카메라가 여인의 얼굴을
클로즈업시켰다.
유라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화면 속의 여인은 뜻밖에도 오 종미였다.
아니? 종미가, 종미 너도 당했었구나. 유라는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종미는 수풀 속에
들어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종미가 옷을 벗는 장면을 갖가지 앵글로
속도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가슴을 드러낸 종미가 웃음을 띠고 있을 때
승마복을 입은 웬 낯모를 한 남자가 채찍을
든 채 종미의 곁으로 다가섰다.
유라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제임즈의
손이 유라의 가슴으로 깊게 기어들어왔다.
제임즈가 유라의 허리를 휘감았을 때, 유라는
스위치를 올렸다.
"제임즈, 저건 내가 아니야."
그때서야 제임즈는 화면과 유라를 번갈아
"유라 낫 미스 오."
그는 이름을 혼동했음이 분명했다.
제임즈는 몸을 일으켰다가 그 순간 두 눈을
찡그렸다.
"오 스립피."
방 안의 불빛으로 희미해진 스크린 속의
종미는 남자의 말 채찍에 맞고 있었다.
남자가 종미를 정말 때리는 것 같았고 종미는
아픔으로 신음하는 표정이었다.
변칙성애의 한 장면이 유라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유라는 벽에 연결된 영사기의
코드를 잡아 뺐다.
"저건 미스 오구 난 유라라구."
제임즈는 유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계속 눈을 껌벅거리기 시작했다. 제임즈의
눈에는 잠의 돌풍이 기습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이었다.
이윽고 몇 분을 견디던 그는 슬금슬금
침대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유라는 옷장 속의 가방을 꺼내 필름들을
살폈다.
제임즈가 방금 돌린 필름의 빈그릇에는
영어로 오 종미라고 새겨져 있었다. 필름은
꼭 열 개였다. 거기엔 지난번 종미의 입에서
나왔던 샤넬라인의 후배 모델 미희, 지애
외에도 다섯 명의 이름이 더 있었다.
그러나 유라는 없었다.
유라는 영사기의 릴에 감긴 필름을 손으로
되돌려 감고 그 필름들을 가방에 넣은 다음
제임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자기 필름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우선은 다른 사람들의
엘리베이터를 내려 1층에서 보이를 불러 방
하나를 빌렸다.
3층 끝방에 들어간 유라는 가방을 벽장
안으로 밀어넣었다.
침대 위에 몸을 눕힌 유라는 아까
스크린으로 본 종미의 모습을 떠올렸다.
종미, 그 기집애가 자존심은 있어서 말은
못 꺼내고 속으로 꽤 안절 부절 못했군.
디스코장에서 나에게 넌지시 건넨 말은 뭔가
떠보고 싶은 수작이었지. 그래, 붉은잠바는
국내의 톱모델들은 그런 식으로 굴비처럼
필름으로 엮어놓고 혼자 구워먹겠다는 거군.
누구든 자니 쪽으로 넘보면 재미없다는
거겠지. 그 때문에 자니 홍의 스카웃 작전은
완전히 참패였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걸어
모델들이 군침을 삼켜도 꼼짝할 수가 없는
그런데 내 필름은 어디 있는 것일까.
제임즈가 내 필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스티브의 수중에 있음이 틀림없었다.
유라는 수화기를 들어 911호 스티브 방의
연결을 부탁했다.
링이 계속 울렸다. 스티브의 방에서 링이
울리고 있는 바로 그때 스티브는 호텔의
자기방 도어문 밖에서 전화벨소리를 들었다.
스티브는 재빨리 열쇠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링은 더이상 울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방에 들어서자 수화기를 잠시
바라보았다.
누굴까?
그는 수화기를 들려다 말고 넥타이를
풀었다. 되는 대로 벗어던진 스티브는
작업복에 흰 셔츠를 걸치고 수영복을 넣은
복도에서 모습을 감추자 계단 쪽으로 몸을
숨기고 있던 준의 모습이 나타났다. 준은
재빨리 방금 스티브가 나간 911호 도어로
다가서서 주머니에서 철사줄을 꺼내
열쇠구멍에 밀어넣고 신중하게 작동을
시작했다.
도어문은 그의 손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쉽게 열렸다.
준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민첩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의 머리 속은 마치 도어 자물쇠의
회로를 움직이듯 예민해졌다.
먼저 옷장을 밀어붙였다. 꼬냑 술병이 두
개, 작은 백에는 헌옷들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살폈다. 순간
준의 눈은 섬광처럼 빛났다. 침대 밑 벽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검은 가방 하나.
풀었다.
가방 속에는 작을 릴에 감긴 필름 두 개가
보였고 그 옆쪽으로 검은 보자기가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보자기를
걷어냈다. 순간 그는 숨을 죽였다.
가죽 속에 피스톨의 손잡이 뭉치가
싸늘하게 꽂혀 있었다. 그는 권총을 꺼내려다
말고 보자기로 덮어내렸다. 준의 입에는
미소가 넘쳐 흘렀다.
그가 가방을 여유있게 닫고 옆구리에 낀
다음 등을 돌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온몸에 땀이 쭉
돋았다. 숨죽이는 긴장속에서 울린 금속성
울림에 번개처럼 열을 충전시킨 때문이었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준은 괜한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스티브?"
준은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화기를 타고 울린 음성은 뜻밖에도
유라였다.
이건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내가 유라의
전화 목소리를 모른다면 모르지만, 얼마나
귀에 익은 유라의 전화 목소리인가.
준은 순간 자신의 계산이 엄청나게
빗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유라와
비슷한 여자의 목소리가 이 세상에 없으란
법은 없다.
"스티브요."
준은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지어냈다.
"어마! 스티브, 오셨군요. 저예요.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겠어요?"
스티브라는 녀석이 한국말을 뺨치게 잘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글쎄요,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준은 아까의 목소리 톤을 유지했다.
"절 보시면 알 거예요."
유라의 목소리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준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이름을 대십시오."
준은 스티브와 유라가 서로의 목소리로
누군지 알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스티브, 절 보면 아실 거예요. 제가 지금
곧 그 방으로 가겠어요."
준은 유라가 이름을 대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고…… 그럼 날 보려면 풀장으로 오시오.
난 지금 수영을 하러 나가려던 참이었소.
풀장에서 날 찾으시오."
준은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더이상
스티브의 행세를 하면서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전화가 길어지면 곤란해진다.
유라는 호텔의 어딘가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준은 곧 교환을 불러서 방금 온 전화가
어디서 걸려왔느냐고 물었다.
"301호실인데요."
교환양이 친절히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유라는 방을 빌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우선은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는 호텔의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가 노획한
가방을 심카의 트렁크에 밀어넣었다.
준은 가방 속의 필름들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그 필름이 스티브의 방 안에
깊숙히 보관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유라의
필름이라는 확신이 섰다.
유라는 곧 수영장으로 내려오리라. 풀장에
가서 유라를 만나야 할 것인가? 그러나
필름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라를
만나는 게 이른 느낌이 들었다. 준은
입구에서 잠시 머무적거리다가 이내 풀장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유라가 전화를
끊자마자 내려왔다면 지금쯤 풀장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풀자의 탈의실 안에서 얼굴을 내밀고 풀장을
살폈다.
순간 준은 뜻밖에도 물속에서 막 몸을
건져내고 있는 서양녀석을 발견했다.
스티브는 물에서 나오자 두 손으로 머리의
물을 쓸어내면서 풀장 밖의 벤치에 앉았다.
아니 저녀석이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 되면 조금 후에 나타날 유라가 진짜
스티브와 맞닥뜨릴 것이 아닌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묘하게 얽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유라가 지금 왜 자기
이름도 떳떳이 밝히지 못한 채 스티브를
만나려고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리고 유라는
왜 301호실에 방을 빌렸을까.
모든 점이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준은 여전히 그들에게 자기 모습을
노출시켜선 안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풀장 출입구에 수영복을 입은
준은 라커룸 유리문을 통해서 유라의
행동을 눈여겨 살피고 있었다.
유라는 검은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머리에 검은 수영 캡을 쓰고, 풀장 가까이
다가와서 잠시 동안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스티브를 찾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 벤치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입구
쪽에 나타난 검은 물개처럼 날씬한 여인에
시선을 주고 있던 스티브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유라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이내 몸을 움츠렸다.
준은 스티브가 유라를 발견하고 놀라서
얼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티브는 곧이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유라 쪽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점검하고 난 후, 스티브가 보이지 않자
풀장의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오른쪽 스탠드에 있던 스티브가
슬그머니 물속으로 빠지더니 깊은 잠수를
시작했고, 유라가 코너를 돌 무렵, 스티브는
재빨리 물 속에서 빠져나와 준이 있는
라커룸으로 뛰어올라왔다.
수영장에서 스티브와 유라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스티브가 유라를 피해 달아나는 것으로
보아 대강의 형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유라는 스티브를 만나야 할 일이
절실하고 스티브는 유라를 피하고 있다.
스티브는 지금 유라를 수영장에서 우연히
보고 놀라서 달아났고, 유라는 전화에서
약속한 대로 스티브를 만나러 온 것이다.
잠깐 생각을 또 굴렸다.
난 유라를 돕기 위해 여길 왔고, 유라는
지금 자기가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여기서 스티브를 만나려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튼 유라의 방에 가서 유라가
돌아오길띵 기다리자. 유라의 모든 얘기를
터놓고 자초지종을 들으면 더 좋은 대책이
나올 것이다.
준은 곧 3층으로 올라가 유라의 방 앞에
섰다.
301호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준은 굵은 철사를 꺼내 열쇠구멍을
밀어넣고 손가락 끝에 감지되는 회로를
통과시켰다. 방문은 쉽게 열렸다. 그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으로 들어섰다.
단정하게 물려 있고, 베개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커튼도 풀리지 않았고, 탁자
위의 물컵 두 개가 흰 거즈로 감싸인 채
뒤집혀 있었다. 방을 쓴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옷장 안을
드르륵 밀어젖혔다.
순간 준의 눈에는 아까 스티브의 방에서
가지고 나왔던 똑같은 007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준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는 수십 개의 릴에 감긴 필름이 있었다.
이건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왜 유라가 투숙한 방에 필름가방이 있는
것일까? 이 필름들은 무엇인가? 왜 유라는
스티브를 만나려 하고 있고, 스티브란 놈은
준은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좋다. 일단
이 필름들은 내가 몽땅 압수하겠다. 내용을
보면 모든 의문은 풀릴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유라를 안 만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준은 캐비닛으로부터 가방을 꺼내 손에
들고 재빨리 301호실에서 나왔다. 이제는
가방들을 모조히 노획했으니 호텔 하이눈을
빠져나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준이 심카의
시동을 걸고 있을 때 풀장 안에서 스티브를
찾지 못한 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스티브 요녀석, 수영장에서 만나자고
해놓고 다리야 나 살려라 도망쳤음에
틀림없었다. 순진하게도 놈의 말을 믿고
풀장으로 나온 자신의 어리석음이 미웠다.
부탁했다. 뜻밖에 신호가 철컥 하고
떨어졌다.
"헬로우."
스티브의 목소리였다. 요녀석 능청스럽게
전화는 받는군, 아까의 목소리보다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변해 있었다.
"여보세요. 아직 계시군요."
유라는 짐짓 태연하게 되물었다.
"누구신가요?"
"여긴 풀장인데요. 아직 안 내려오셨어요?"
유라는 울화를 안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부드러운 말씨로 다시 말했다.
"풀장?"
"좀전에 전화했던 사람이에요."
"조금 전?"
"풀장에서 만나자고 하셨잖아요."
911호실인데 혹시 전화 잘못하신 거
아닙니까?"
스티브의 의아스러운 목소리가 되왔다.
"911호 맞아요? 스티브 씨 아니세요."
"맞습니다. 그럼 댁은 누구죠?"
요녀석이 또 딴청을 부리는군. 할 수 없이
전화끊고 올라가야겠어. 유라라고 말하면
요녀석은 지난번 디스코장에서처럼 줄행랑을
놓을 거구. 전화목소리로 날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이젠 무조건 맞닥뜨리는
길밖에 없어.
유라는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그녀는 재빨리 수영복을 벗어던지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수영장에서 나와 승강기를
집어탔다. 스티브 녀석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져 얼떨떨해 있는 틈에 방으로
스티브의 방 앞에 와서 자신의 백 속에 든
칼과 유리병을 확인했다.
제임즈녀석이 깊이 잠든 틈에 스티브를
만나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필름을 손에
넣어야 한다. 유라는 도어 핸들을 밀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유라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빠뜨리고 있던 스티브는 문을 걸고 들어오는
유라를 보자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이게 누구요?"
스티브는 몸을 일으켰다.
"저예요, 설마 절 모르시겠다고 하시지는
않겠죠?"
"반갑습니다, 유라 씨."
유라는 방 안을 휙 돌아보고 나서 스티브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앉았다. 그는 반소매 티셔츠에 헐렁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전화 목소리로 절 아셨습니까?"
유라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몰랐죠. 알았다면……."
"아셨다면 달아나셨겠네요."
"무슨 말씀을……."
"수영장으로 곧장 내려오셨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수영장……."
스티브는 입속으로 중얼거릴 뿐 말의
마디를 분명히 자르지 못했다. 유라가
수영장에서 빠져나오는 자기를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유라 씨,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티브 씨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기나
하세요?"
유라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직히 속삭였다.
스티브는 유라의 태도에 다소 안심한 듯
탁자 위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날 디스코장에서 갑자기 스티브 씨를
만났을 때 저는 얼마나 놀랐다구요. 보고싶은
마음이 그렇게 강해서 제 앞에 나타나셨나
보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스티브 씨는 곧
사라지셨어요. 그때의 제 실망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스티브는 눈만 껌벅거리며 말이 없었다.
이런 말들이 스티브에게 어떤 식으로 통할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은 가장
부드러운 방법을 택하기로 맘을 먹었다.
모델생활을 해왔지만 여지껏 세상을 모르고
살아왔어요. 겉으로는 이렇게 변했지만 제
고향은 먼 시골, 하야리. 마음은 지금도
순박한 시골처녀와 다름이 없어요.
샤넬라인의 표 사장님이 지금까지 절 모델로
키워주셨어요. 그 은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분은 아버님 같은 분이고 표
전무는 오빠 같은 분이에요. 하지만 표
전무는 구박이 심했어요. 하기 싫은 일도
강요로 많이 했구요. 때로는 혹독하게
다루기도 했어요. 하지만 모든 걸 고마움으로
알고 참았지요. 스티브 씨."
유라는 약간 글썽이는 눈으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에는 진실한 호소와
연민이 강하게 스며 있었다.
"그랬겠지요."
"스티브 씨, 어데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 그날 밤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시골의 그
별장의 밤과, 초원과 승마와 스티브 씨가
제게 베풀어주신 따뜻한 배려와 그 모든
말씀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제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어요.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스티브 씨."
유라는 마치 무대에서 대사를 외우듯
스티브에게 좀더 톤을 올렸다.
"스티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난 스티브의 필름
테스트에서 실격당했다고 해서 다시 한 번
고려해 달라고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배우란
운이 닿으면 할 수 있는 것이구요. 또 언젠가
제게도 기회가 올지도 모르죠. 난 지금의 이
생활로도 족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도 좋아요. 사람끼리 진실을 나누고
싶었어요. 거짓이나 타산과 이용가치로
상대방을 만나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정으로요. 전 어려서부터 외롭게 자라서 정이
그리운 사람이에요."
유라의 그 말에 스티브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 여자가 지금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은 진실한 정을
자기에게 갈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으로 말한다면 자기처럼 욕구가 큰
사람이 있을까. 스티브는 유라의 말을
들으면서 눈시울이 따뜻해졌다.
한 여자가 자기에게 따뜻한 정을 호소해
오고 있다. 누구나 진실에는 약해지는
법이지만 적어도 스티브에게 유라의 그런
접근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연민을 주고
있었다.
"유라 씨, 난 유라 씨가 날 잊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나쁜 놈으로
기억하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소. 유라 씨가
날 찾는 이유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사실 난 나쁜 놈이요."
"전 스티브 씨를 잘 몰라요. 서로 어떤
연유에서 만났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죠. 단지
전 스티브 씨를 만나고 싶었구요. 모든
욕심을 떠나서 한 여자로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까……
죄송해요. 스티브, 난 지금까지 그래본 적이
없었어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유라는 감탄에 빠져 황홀한
눈빛으로 변해 있는 스티브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유라의 눈길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유라의
"유라! 난 미처 깨닫지 못했어."
스티브의 팔이 유라의 어깨를 죄어왔다.
유라는 맞물리는 톱니처럼 스티브의 가슴으로
몸을 빠뜨렸다.
"스티브?"
유라는 스티브를 올려보았다.
스티브의 콧수염이 천천히 하강했고 입술
언저리에 따가운 감촉을 자극했다.
"스티브, 난 이 파란 눈에 깊은 외로움이
샘처럼 괴어 있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냈어요.
날 폰티액에 태우던 바로 그 순간의 눈길에서
말예요."
"내가 외로운 남자인 줄 어떻게 알았소?"
"눈 속에 그렇게 써 있는 걸요."
"굉장히 예민하군요. 난 사실 외롭게
자라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죠."
스티브는 유라를 완강하게 껴안고 그녀의
입술을 열심히 탐닉하고 차츰 귓덜미와
목으로 목말랐던 사람이 물줄기를 찾듯
더듬어 내려갔다.
유라는 스티브에게 몸을 맡겨버렸다.
"유라, 난 정말 몰랐소. 여자의 눈을
바라보는 내 감정이 말라버렸던 거요."
그는 유라의 가슴을 파헤치며 말했다.
"스티브, 우리 좀더 얘기를 하기루 해요.
우리들의 시간은 앞으로 많아요."
유라는 스티브의 팔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습니다. 우선 우리는 건배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다시 만난 재회를 축하해야
하지 않겠소?"
스티브가 소파에서 일어나 벽장 쪽으로
몇 알을 손바닥에 움켜쥐었다.
만일 기회가 있다면 스티브의 술에 그걸
타야 했다. 녀석이 잠든 틈을 이용해서 방을
수색해야 한다.
"술은 제가 따르겠어요."
유라는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컵에 싸인
종이를 벗겨내면서 말했다.
이윽고 스티브는 벽장문을 드르륵
밀어젖혔고, 그 순간 갑자기 정지된 사진처럼
몸이 굳어졌다. 꼬냑병 두 개가 보였고, 벽장
바로 옆의 침대 옆자리에 놓아 두었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꼬냑병을 꺼내고 빈
벽장 안을 훔쳐보고 재빨리 허리를 낮추어
침대 밑을 살폈다. 분명히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하나의 침대 밑을
기웃거렸고 이제는 호텔방의 커튼 뒤며
침대의 시트를 발칵 뒤집었다.
"무슨 일에요, 스티브?"
유라는 열린 벽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스티브의 헌옷 꾸러미가 담긴 작은 백
외에는 술병 두 개가 소지품의 전부였다.
유라의 눈빛은 실망이 가득 찼다.
"가만 있자. 이건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스티브의 얼굴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뭐, 뭐 말인가요?"
유라의 말에 스티브는 대꾸도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이봐요. 내가 없는 동안 911호실 청소를
했소?"
스티브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아니라구요?"
"그럼 이 전화를 …… 그냥 두시오."
스티브는 전화를 하려다 말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유라 씨 급한 일로 잠시 아래층에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스티브는 그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문을
밀치고 나갔다.
유라는 스티브가 지금 아래층의 제임즈
방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만일 스티브가 지금 제임즈를 만났다면,
혹시 그 녀석이 깨어난다면 자기 방의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스티브와 함께 자기를
잡으러 올라올지도 모른다.
스티브가 당황하는 것은 자기 방에
무엇인가 없어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라는 지금 스티브의 방에 아무것도 없고,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임즈가
깨어나 이 방으로 뛰쳐올라올까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
유라는 곧 백을 옆구리에 끼고 스티브의
방을 나와 버렸다.
스티브의 방에서 다람쥐처럼 빠져나온
유라는 3층의 자기 방으로 잽싸게
되돌아왔다.
후유!
유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스티브와 제임즈, 두 사내를 사이에 두고
겪은 곡예 같은 드라마가 조금 전, 자기가
당한 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쯤 스티브는 제임즈의 방을 찾아가
그를 깨웠을 것이고, 잠에서 깬 제임즈는
가방과 함께 없어진 그 여자에 관한 설명을
유라다. 유라를 잡아라.
스티브는 혹시 자기 방에서 없어진 것조차
나에게 뒤집어씌울지도 모른다. 암튼,
스티브를 찾아가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한 것은 분했지만 하마터면 녀석들에게
뒷덜미를 잡힐 뻔한 순간을 넘긴 것은
다행이었다. 이제 이 방에서 있다가
어두워지면 나가야 한다.
유라는 침대 위에 몸을 눕히고 있다가 팔을
뻗어 옆의 옷장문을 열었다. 순간 유라는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켰다. 옷장 속에 의당
있어야 할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유라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히 제임즈의 방에서 훔쳐가지고 나와서
바로 거기에 둔 007가방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위에 몸을 눕혔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훔친 가방을 도난당했다고 떠벌일 수도
없었다. 잠가놓은 방에 들어와서 가방을
가져간 사람이 누군가였다. 그러나 그
문제만큼은 혐의가 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잃어버린 가방도 종미와 미희,
애자의 필름들이고 정작 자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그것들은 스티브나 붉은잠바와
협상용으로나 혹은 증거자료로 필요한
것들이며 어쩌면 동료 모델들이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제임즈의 방에서 가방을 갖고
돌아가게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젠 스티브에게 어떻게 접근하지?
접근은커녕 이젠 꼼짝없이 그들을 피해야만
될 입장이 되고 말았다. 녀석들이 비밀의
한가닥을 손에 움켜쥔 여자를 그냥 둘 리가
없을 것이다. 유라는 이미 스티브와 제임즈가
호텔문을 지키고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다.그들은 민첩하게 현관으로 내려와
통로를 차단했을지도 모른다.
유라는 그때 준을 생각했다. 준은 지금도
그 여자의 아파트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어젯밤 꿈속에서처럼 나를 흐트러놓고 그
여자의 집에 가서 잠을 잔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튼 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도리밖에
없어.
준은 스티브의 방에서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릴에 감긴 두 개의 필름통 옆에
간직된 권총을 꺼낸 준은 방아쇠가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제 콜트리벌버 더블액션, 45구경 6연발로
새것이었다.
그는 연뿌리 모양의 탄창을 회전시켰다.
탄알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처음
만져보는 진짜 권총이었다. 준은 은빛 총신과
가늠쇠를 매만지고 팔을 들어올렸다.
가늠쇠의 조준권 안에 들어온 목표물은
우연히도 벽에 걸린 유라의 사진이었다. 그는
유라의 코를 겨냥하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요녀석 스티브란 놈은 이 권총을 어데게
숨겨가지고 들어왔을까.
준은 권총을 가죽밴드 속에 넣고 침대 밑에
깊이 감추었다. 이제는 유라의 방과 스티브의
방에서 가져온 두 개의 가방 속에 있는
필름을 인화기에 옮겨 확대해 보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암실로 들어갔다. 필름의
앞토막을 대여섯 장 잘라내어 불빛에
비추어본 다음 인화지를 꺼냈다. 그는
기다리는 동안 내내 마음이 들떠 있었다.
오늘 호텔 하이눈에서의 스파이 작전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
더구나 거기서 유라와 통화를 하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고 유라의 방에서 가방을
노획한 것도 큰 수입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만일 인화지에 나타나는 그림들이 어떤
것인지 밝혀지면 사건의 내막은 쉽게
이윽고 물 속에서 사진의 모습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오종미, 애자, 미희와
그밖에 다섯 명의 샤넬라인 모델들이 미국
녀석과 알몸으로 얽혀 있는 놀라운 장면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준은 두 팔로 몸을 기댄 채 쓴웃음을
지었다. 스티브의 방에서 가져온 필름은
도색필름들이 아니었다.
유라와 찍은 사진은 협박용으로 카메라로
한두 장 찍었는지도 모르지. 스티브란 녀석을
만나서 확인하는 도리밖에 없겠군. 유라는
그것을 알고 있을까?
쿵쿵쿵쿵…….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준은 암실에서 나왔다.
"전화왔다. 전화받아라."
올라갔다.
전화속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유라였다.
"나야 준, 어젯밤에는 왜 날 두고 그냥
빠져나갔어?"
준은 유라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지금 유라의 말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마치
그전에 서로가 좋은 감정이었을 때 나누던
사랑스러운 어감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준의 마음이었다.
준은 유라의 그런 말을 좋게 응대해 줄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준은 말이 없었다.
"준, 왜 말이 없어. 아무튼 날 좀 데리러
와주었으면 해서…… 여긴 하이눈 호텔인데
긴한 말이 있어."
"알겠어. 곧 나가지, 로비에서 기다려."
어렵지만 301호실로 와줘, 기다리고 있겠어."
"알겠어. 그리로 가지."
준은 전화를 끊었다.
유라가 자존심을 꺾고 전화로 오라고 한
것은 꽤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준은 알아차렸다.
"유라가 일루 전화를 다하고…… 웬일이지?
뭔가 좀 풀렸니?"
나형이 준의 어깨를 쳤다.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표 사장은 하야리 땅을 몽땅 팔아버린
걸 보니, 이젠 아예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나 보지?"
"나름대로 궁리야 있겠지만, 두고보세요.
조카녀석이 돈 다 말아먹고 오리발 내밀
거 나중에 가슴치고 후회할 날이 있을 거요."
준의 말에 나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속판은 모르지만 출세한
사람들이니까 머리잘쓰겠지. 너도 한통속이
아니야?"
"아뇨, 거긴 이제 발 끊었어요. 유라두요.
문제는 유라예요."
"유라두 표 사장과 발 끊었니?"
"그런 셈인데 뒤끝이 나빠요."
"그 조카녀석이 깽판 놓는구나."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나와요."
"다 때려치우고 하야리로 들어가래두."
"유라가 말을 안 듣고 있어요."
"너 혼자는 안 되니?"
"좀 더 유라를 두고 볼 작정이에요."
"그애는 텄다니까 그러는구나. 유라가 글쎄
너와 그 시골구석으로 들어갈 애냐? 그건 네
맘뿐이지, 현실을 똑똑히 보라구 쯧쯧……."
준은 또 피식 웃었다.
나형의 말은 언제나 맞다. 유라와 하야리로
돌아가 대숲을 이루고 살겠다는 것은 이미
꿈일 뿐,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이미 유라는 자니 홍으로 기울어졌고
붉은잠바의 보복에 휘말려 그 사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유라는 하이눈 호텔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지 않은가.
준은 지하실로 내려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심카에 올라타고 하이눈
호텔로 향했다. 그의 심정은 착잡해져 갔다.
호텔 하이눈에 도착한 준은 유라가 있는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준."
유라가 도어의 입구에 서서 준을 맞았다.
준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서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준은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면서 앞에
앉은 유라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은 왜 내가 잠든 사이에
빠져나갔었어?"
유라는 약간의 어리광섞인 목소리를
지어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유라를
바라보자 준은 갑자기 유라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내막은 잘 모르지만 무엇인가 혼자
결정하고 판단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뛰쳐나온 거야."
준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 어젯밤 너무 좋았어요. 와줘서
고마웠구. 눈을 떠보니 준이 없어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몰라. 난 지금 굉장히 어려운
입장에 빠져 있어. 물론 내가 저질러논
일이니까 후회는 안해. 혼자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자세한 얘기는 않겠어. 힘이
되어주지 못할 테니까. 난 준이 날 용서할
때까지 기다리겠어. 단지 오늘은 준이 날
집까지 데려다 줬으면 해서 전화를 한 거야."
"내가 꼭 필요한 건가?"
준은 유라에게 되물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이 도와주는 일인가?"
"지금은 그래."
준은 턱을 괴고 가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유라는 지금 이 마당에서도 자기에게 말을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다가 자멸할 때 끝내겠다는 얘기
같았다.
"날 집까지만 데려다주면 돼, 준."
"알겠어."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이 층계를 걸어내려올 때 유라는 그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호텔의 로비를 가로질러
출입문에 나서자 어둠은 깊었다. 호텔 정원과
주차장의 수은등 불빛은 밤안개에 싸여
몽롱한 빛을 뿌리고 서 있었다.
준은 말없이 걸었고, 유라는 준의 곁에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따라왔다.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준은 심카 옆으로 다가섰고,
騁怒?"
불쾌해졌지만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저쪽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숨차게 뛰어오고 있었다.
"유라-."
스티브가 유라를 부르며 다가서고 있었다.
"준 날 집까지 데려다주는 거예요."
유라는 준에게 낮은 말로 말했다. 유라의
그 말은 준에게 경호의 채찍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렸다.
준의 앞에서 내달려온 스티브는 준의
존재를 무시하고 유라의 두 팔을 잡았다.
"유라 날 잠깐 봐야겠어."
스티브가 유라를 잡아끌었다. 준의 눈길에
노여움이 와락 밀어닥쳤다.
"헬로우, 그 여자의 팔을 놓게, 친구."
준이 스티브에게 강렬한 어조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야."
스티브의 말투 역시 강경했다.
그 사이에 유라는 스티브의 팔목에서
빠져나와 둘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유라는 스티브가 준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안심했다.
"유라! 차 속으로 들어가 있어."
준이 유라에게 말하자, 유라는 재빨리
심카의 도어를 열고 들어갔다.
"네놈이었구나."
스티브가 준의 멱살을 잡는 순간 준의 팔이
스티브의 팔을 가격했다.
"왓……."
스티브가 제 팔을 거두면서 죽는 시늉을
했다.
멱살을 쉽게 잡으려 드나."
준은 스티브의 허리를 밀며 녀석을 어둠
속으로 유도했다. 스티브는 밀려가는
척했지만 실은 준을 좀더 어둠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심카로부터
오십여 미터쯤 그늘이 잠긴 숲속으로 옮긴
그들은 비로소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스티브의 공수도 보통 솜씨가 이니었다.
가격거리가 되자 녀석의 발이 이마를 향해
직각으로 날아왔다.
준은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왼발을 높이
뻗쳐 올렸다.
스티브는 준의 두 번째 이음동작의 시간차
공격을 대비할 만큼 빠르지 못했고 기교도
없었다. 턱하고 준의 발이 그의 옆턱을 쳤고
그 반동에 밀린 스티브가 힘을 가누지 못한
준은 날랜 표범처럼 스티브의 몸 위로
올라타고 팔다리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준의
목누르기가 시작되었다.
숨이 컥컥 막혀서 좀처럼 참을 수 없는
고문과 다름없었다.
"억- 억 ."
스티브가 죽는 시늉을 했다. 준은
스티브의 목을 터주었다.
"이봐, 네놈이 찍어서 보낸 사진은 받았다.
그 필름은 어디 두었지?"
준은 스티브로부터 유라의 필름 소재를
이번 기회에 알아내려고 했다.
"무슨 필름 말요?"
숨통이 트인 스티브가 숨을 몰아쉬면서
경우 말을 이었다.
"네놈과 유라가 벗고 찍은 사진 말야. 빨리
없는 사람야."
"그…… 그건 내게 없어."
"그럼 어디 있어!"
"표…… 표 전무……."
"더러운 자식, 그따위 짓이나 하면서
거머리처럼 붙어 사는 네놈을 상대할 수가
없어. 나흘 후 6시까지 그 필름을 찾아서
하이눈 호텔 프런트에 맡겨둬라.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준의 목소리는 준엄했다. 준이 스티브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스티브는 몸을 일으켜 세운
채 잠시 동안 숨을 가누었다.
"스티브, 다시 말하지만 나흘 후 저녁
6시까지 호텔 프론트에 필름을 갖다 놓지
않으면 네 목숨은 나도 보장하지 못한다는 걸
준은 담배를 뽑아물었다.
"담배 한 대 주겠소?"
스티브가 옷을 털면서 일어섰다. 준은
담배를 내밀었다.
"댁은 누구요?"
스티브는 어둠 속에서 식별되지 않은 준의
검은 형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극동무도관 강 사범이다."
준은 자신의 신분을 사범으로 밝혔다.
스티브가 서투른 공수로 덤비다가 큰코를
다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위력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한데 형씨는 유라 씨와는 어떤 사이요."
스티브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유라는 내 동생이야. 스티브, 난 네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오늘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 말을 잘
기억해 둬. 그날 6시까지야. 내 말을 안 듣고
내뺄 생각은 마라. 넌 이미 내 포위망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 극동무도관 유단자들이
오백 명이고 그들이 널 거미줄처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아니?"
스티브는 그 말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놀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강 사범, 그 필름은 지금 내 손에
없단 말요. 표 전무가……."
스티브는 겁먹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스티브, 넌 그녀석과
한통속이잖아. 녀석의 졸개구 말야. 네놈이
유라를 어떻게……."
움켜쥐었다.
"그…… 그건 표 전무의 지시였소. 난 그날
유라와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요."
"그 얘긴 집어쳐! 스티브. 너 혼자 필름을
찾아내서 빼내지 못하면 붉은잠바에게
전해라. 박살나기 전에 그런 장난을 그만
두라구 말야. 어서 가봐."
준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서 있는
스티브를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걸어나왔다.
유라가 자기를 호텔로 부른 이유는 스티브
같은 녀석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준은 알았다. 심카의 운전석에 앉은
준의 심기는 몹시 우울했다. 혼자의 힘으로
녀석들이 옭아맨 동앗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유라의 모습이 가련해 보였다.
마.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면 끝까지 혼자
해보구. 할 수 없다 싶으면 내게 다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든지."
준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옆자리의
등받이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유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지만 이런 일을 어떻게 준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도움을 청하기에는 준의
노여움이 너무 두려웠다.
"스티브란 녀석은 누구지?"
준의 질문이 날카롭게 날아왔다. 유라는
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분노가
무서운 기운으로 싸여 있었다. 만일 섣불리
뇌관을 건들면 금방 폭발할 다이너마이트
같았다.
스티브는 어둠 속에서 준의 발에 차여
흙탕물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잘 됐지, 스티브. 넌 그렇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유라는 혼자 머리 속에 상상의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저 한국말 잘하는 양키는 누구야!"
준의 목소리는 당신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몰라, 날 짖궂게 쫓아다니는 녀석이야."
"언제부터……."
"꽤 오래됐어. 내 팬이래."
준은 유라의 말에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유라는
스티브의 정체를 끝까지 감출 속셈인 것
같았다.
"팬이라구 쫓아다니는 놈팽이들 많아서
좋겠군."
않도록 조심해서 말했다.
"인기가 오르면 할 수 없잖아? 그게 다
유명세로 지불하는 거지. 저런 찰거머리 같은
팬은 많을수록 손해야. 돈 달라고 손을
벌리지 않는 대신 시간 좀 잘라고 떼를
쓰거든? 하지만 나야 시간이 돈이니까 돈
달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저런 녀석은 맛을
보여줘야지. 내 돈이랑 시간이 굳는 거니까.
어때 준, 그녀석을 적당히 주물러 줬어?"
"주물렀더니 의외로 물렁뼈였어."
"양코배기지만 국산 조립품이야. 별 떨거지
같은 날것들이 어떻게 꼬여드는지 저런
녀석들만 없어도……."
준은 시동을 걸었다.
스티브를 성가신 열성팬으로 돌려대는
유라의 순발력 있는 거짓말을 더 추궁해 봐야
제 입으로 사정을 털어놓지 않는 한 준은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왜냐
하면 유라의 속성을 준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버틸 만큼 유라는 버틸 것이 뻔했다.
"오랜만에 이 차를 다시 타보는군요."
유라는 문득 생각난 듯 약간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래."
준이 액셀을 밟았다.
"웬일이지 준? 이 차 아주 산 거야?"
"사긴 뭘 사. 빌린 거지."
"준도 많이 변했군. 한번 빌린 차는 다시
빌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또 빌린 걸
보니. 이 차가 그중 좋았던 모양이지."
유라는 어느새 준이 쏜 화살을 피한 다음
준을 향해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준은
더이상 얘기할 처지가 못 되었다. 말을
꺼낼수록 유라는 자기 문제는 덮어두고 그
문제를 마음껏 부풀리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카폰으로부터 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준이 변속기어를 넣고 수화기를 잡으려는
순간 유라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유라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댔다.
유라는 잠시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갑자기 쥬뎀므라고 톡 쏘듯 앙칼진 소리로
말하고 카폰을 끊었다. 준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라, 인사치고 너무 부드럽잖아."
준이 고개를 잠시 돌려 유라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질투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하지
마. 이건 질투가 아니라 분노야."
조앙의 무슨 말을 듣고 그렇게 화를 냈는지
준은 궁금했다.
"무슨 말을 했는데 화가 났지?"
준의 음성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혹시 전화받으시나 해서 다이얼을
돌려봤어요. 지금은 어디쯤 오시는지요.
커피물이 끓고 있어요, 오버? 그녀의
말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알았다 오버를 대신
해줬어. 쥬뎀므가 알았다, 오버라는
뜻이니까. 준."
유라의 말투는 질투와 빈정거림으로 꽉
차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유라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유라가
질투를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질투라는 앙심을 품기 시작하면
그것은 오뉴월의 서리 같고 저승같이
온갖 인용구절들이 준의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유라의 그런 감정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준은 알고 있었다.
유라의 지금 감정이란 질투가 아니라
욕심이라고 단정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유라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단지
기호에 맞는 가구처럼 곁에 놓아두고 싶은
거지. 쓰거나 아끼지도 않으면서 남은 주지
않고 그저 자기 곁에서 가구처럼 가만히 있어
줬으면 하는 거야. 서랍속의 팬티스타킹을
넣어두었다가 꺼내는 정도의 필요에 해당하는
남자. 그러나 누가 그걸 가져가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러느냐고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큰소리친다.
있는 남자들을 필요한 부분만 고라서 쓰면서
그 남자들이 늘 자기 곁의 가구처럼 가만히
있어 주기를 원하는 거야. 하지만 남자들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그런 너를 깨닫게
되고, 그때는 남자들이 널 캐비닛처럼 여기게
돼. 유라에게 그런 말을 해도 그녀의 귀에는
먹혀들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은 설명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체험으로 깨달아야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준, 나 말야, 준이 이런 차를 타고
다니면서 다른 여자한테서 카폰으로 커피가
끓고 있으니 어서 오라는 따위의 전화나 받는
거 싫어. 이건 준답지 않은 행동이야.
비굴하지도 않어?"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 개의 입을 가지고 열 마디를 골라서 쓸
세상살이에 미숙하기 때문에 내가 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언제 깨닫지?
심카는 어느덧 아파트에 도착했다. 준은
시동을 끄고 라이트를 내렸다.
"톱 모델 유라는 요즘 어떻게 지내지?"
준은 등받이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잘 돼 가구 있어. 일주일 후에는 유니온
호텔에서 자니의 서울 오프닝쇼가 있구요, 그
다음에는 영화계획에 들어가게 되죠. 톱 모델
유라는 영화배우로 변신하게 될 거예요."
유라는 가로등 불빛 한가닥이 가로질러온
준의 콧날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가 생소한
남자처럼 느껴졌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
유라는 두 손으로 머릿발을 들어올리고 난
도와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난
지금 붉은잠바가 쏘는 화살을 피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그건 나뿐이 아니야. 오늘
스티브를 해치운 것처럼 준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준, 저어……."
유라는 그 말이 목에서 입술까지
새어나왔다가 꿀꺽꿀꺽 삼켰다.
"터놓고 말해 보라구,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 뭔지 말야?"
준은 유라의 말을 다그쳤다.
"붉은잠바 그녀석이 날 계속 못 살게 굴어,
날 함정에 끌어넣구, 모략도 하고 협박도
하고 있어."
"구체적으로 말해 봐, 유라."
준은 낮게 말했다.
모델들이 못 나가게 될지도 몰라."
"그건 왜지?"
"그건 붉은잠바가 그만큼 패션계에 입김이
세기 때문이야."
"자니 홍은 쑥인가?"
"당분간은 밀릴 거야."
"유라가 자니의 쇼에 못 나가게 되기를
바라는 점에서는 나와 붉은잠바의 뜻이
같다는 걸 알 테지. 다시 말하지만, 유라.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자니 홍과는 손을 떼.
그대신 샤넬에서 얼마간의 활동은 내가
보장하겠어. 당분간 유라의 시대가 계속될
때까지. 하지만 그 세계의 세대교체는 아주
빠르니까 그런 다음 우리는 하야리로
돌아가는 거야."
"돌아간 다음은?"
결혼을 하고 최고로 멋진 집을 짓도, 대숲을
다시 이루고……."
"그 다음은?"
"난 거대한 농장을 만들겠어. 농장의
이름은 '유라농원'이라고 짓고 싶어. 내겐
그만한 땅과 돈이 있어. 내가 전에 유라에게
말했었지. 난 자이언트라는 영화 속의 록
허드슨처럼 농장주가 되고 유라는 리즈
테일러처럼 농장주의 아내가 되는 거야. 우린
하야리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잔디융단으로
깔고 아라비아 말 두 필을 사게 될 거야."
"그 시골구석에다?"
유라가 준의 말을 불쑥 끊었다.
"내가 하야리로 되돌아가는 날, 하야리는
내 왕국이 될 거야. 난 내 미래의 왕국에
유라를 왕비로 맞겠어. 그게 내 꿈이지. 모든
기다리고 있는 거야."
"준, 하지만 거긴 시골 하야리, 흙과 산과
논밭밖에는 없어.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무식해, 거긴 자이언트에 나오는 그런 멋진
대지가 아니야. 그리고 난 거기서는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뽐낼 수가 없어. 난
많은 사람들이 날 지켜보면서 부러워하고
갈채를 보내고 내 연기력으로 은막을
휘어잡아 보겠어. 내 야망과 꿈과 젊음과
미모를 하야리의 대숲 속에 묻어버리기에는
아는 아직…… 준, 난 서울에서 살아야 해,
아무리 땅이 넓다 해도 난 농장주의 아내가
되기엔 너무 일러. 도대체 준, 왜 날 자꾸
하야리로 끌고가려고 하지? 난 아직도 내
능력을 실험해 보지도 않았다고, 하야리는
나이가 들어서 은퇴할 때 할수없이 귀향하는
나를 나쁘다고 하지? 준, 준이 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사랑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자기가원하는 대로
소유하고 구속하는 것은 아니야. 그건
욕심이지 사랑이 아니야 준, 날 허영에 들뜬
그런 여자로 보지 말어, 준은 늘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순진한 어린아이로
바라보거나 못된 사춘기의 말괄량이 소녀로
바라보거나 음탕한 피를 가진 거리의 여자로
바라보고 있어. 날 언제 한번이나 진정한
애정으로 대한 적이 있어 준? 늘 의심하고,
질투하고, 경멸하고, 미워하면서 그게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갖는 감정이라고 미친년
궁둥이 둘러대듯 둘러대곤 했어. 난 이제
하야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준으로부터
붙들지 마, 우린 완전히 갈라서야 해. 서로의
꿈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빌어먹을, 우린
같은 게 하나도 없어. 난 불같고 준은
얼음같고 이건 도무지 하나도 돼먹지 않았어.
혼자 고향으로 가서 록 허드슨이 되든
농장주가 되든 거지발싸개가 되든 맘대루
하라구. 그리고 제발 날 끌어들이지 마. 난
준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여자니까.
남자들도 수두룩하고 맘만 먹으면
억만장자와도 당장 결혼할 수가 있어. 가,
빨리 카폰으로 그 여자를 불러서 커피물이 다
끓었느냐고 물어보구 지금 곧 올라갈 테니
기다리라구 전활 걸어, 전활 거란 말야
전활……."
유라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생각하는 대로 마구 쏘아대더니 끝내 눈물을
나게 닫고, 또각또각 혼자 걸어갔다.
준은 등받이에 기댄 채 유라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래 유라, 네 말이 모두 맞을지도 모른다.
난 너에 대해 너무 허황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도 몰라. 마치 네가 서울에서 갖는
꿈이 허황하다고 믿듯이 내가 하야리에서
갖고 싶은 꿈도 역시 나의 허영심의 거품에
불과할지도 몰라.
하지만 너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나의
하야리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것만은
확실해.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준은 차 안에서 등받이를
내리고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몸과 마음이
한치도 까딱하기 싫도록 나른해져 버렸다.
유라는 독종이야, 오뉴월의 살모사처럼
손톱만큼도 양보할 줄 모르는 지독한
계집애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말을
들어준 적이 없었지.
아! 저런 독종을 내가 왜 포기하지 못하고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까. 난 왜 저렇게
팔자가 드센 여자의 치마꼬리를 놓지 못하고
저 여자의 운명 속에 자꾸 빠지고 있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다 팽개쳐 버리고 서울을
떠나버리면 될 텐데. 왜 이런 냉대를
받으면서 비굴하게 움츠리고 있는 것일까.
준은 거친 숨을 한참 동안 몰아쉬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준이 밤공기 속에
가슴의 열기를 모두 뿜어내고 진정되었을 때
그는 전화벨소리를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
벨소리가 뚝 멈춘 후에야 차에서 빠져나왔다.
스티브 그녀석이 만일 사흘 후에 필름을
돌려주지 않을 때는 표를 찾아가야 한다.
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정했다.
결국 나는 유라를 지켜야 해, 그 이유는
나는 나의 하야리로 유라 없이 되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라가 없는 하야리는 상상만해도 무의미한
미래나 다름없었다. 유라가 태운 내 과거의
대숲과 그리고 거기서 죽은 아버지는 기어코
나와 유라의 뜨거운 사랑으로 복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라는 내 과거를 그 거대한 불길로 태워서
나를 소유했고, 그 사랑은 나를 얼마나
감동시켰는가. 나는 미래의 대숲을 위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다시 굳혔다.
만일, 만일 유라가 나의 인내와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야리를 거부할 때 나는
하야리의 대숲을 송두리째 포기할 것이며,
그것은 내 미래의 포기를 뜻하므로 유라는
아버지와 나의 미래와 대숲을 파멸시킨
단죄를 내 손으로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 마땅하다라고 준은 주먹을 쥐었다.
그 때문에도 나는 유라를 곤경에 빠지게
해서는 안 돼. 준은 아파트 광장의 가로등
불빛에 나타난 자신의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자신의
그림자는 마치 커다란 곰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걷는 꼴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단지를 빠져나오는 입구를 막 지나칠 때
발견했다. 여자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묻은
채 긴머리가 산발되어 있었다. 유라였다.
준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준은 유라의
어깨를 일으켰다.
유라의 눈은 부어 있었고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준은 유라의 어깨를 일으켜 세웠다. 유라의
뺨에는 눈물자국이 불빛에 비쳐 얼룩져
있었다. 그들은 아파트 도어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6.화려한 관계
실내에 불이 꺼지자 T자형 무대 위에 조명
불빛이 떨어지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숨을
삼키듯 조용해졌다.
입체음향 시스템을 설치한 천장의
대형스피커로부터 강렬한 록 사운드가
울리면서 잠시 후 조명 속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디자이너 자니 홍의 귀국기념과 자니패션
창립기념으로 갖는 패션쇼의 퍼스트
스테이지가 시작되어 톱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자니 홍의 여름컬렉션이 대거 선보이는
이번 쇼는 뉴욕 젊은이들 사이에 불고 있는
펑크 록으로 영 앤드 섹시를 강조하는 대담한
있었다.
짧게 산발한 머리, 노 슬리브에
정삼각형으로 크게 처리한 네크라인, 허리
위로 올라온 상의, 히프에 걸린 짧고 흰
스커트가 비키니 차림처럼 조명 불빛에
눈부셨다.
허리와 배꼽 부분을 벨트처럼 드러낸
여인이 빼르솔제 흰 선글라스를 끼고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그녀의 어깨와 히프는 음악에 맞추어
절제된 굴곡을 그리고 있었다. 짙은 화장과
머리스타일 때문에 사람들은 저 여자가
누군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으나 불빛이 점차
바뀌면서 톱모델이 유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패션쇼는 국내 패션계에 새로운 파워로
날리고 있다는 유명도 때문에 TV에서 전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펑크스타일의 옷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그 옷의 육감적인 애교를 기막히게
살려내는 모델의 동작이 주는 신선하고
에로틱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음악은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가
교차되었고, 유라는 마치 어두운 숲속에서
나타난 요염한 요정처럼 흰 샌들을 한 발짝씩
옮겼다.
준의 자동셔터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 내렸다.
유라가 무대를 한바퀴 돌아 스테이지에서
동작을 멈추고 마지막 미소를 거두자
장내에서는 소나기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무대 앞에 앉아 있는 자니 홍의 입가에는
유라가 무대 뒤로 나왔을 때 쇼 연출을
맡은 미국인 막스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유 아 원더풀."
그가 유라의 등을 두드렸다.
유라는 그에게 윙크를 보내고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유라는 첫스테이지에서 단 한번만
선보이기로 했기 때문에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로비에는 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라는 곧바로 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잘했어, 유라."
준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연습을 많이 못했어 떨렸어."
유라는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의식하며 준을 따라 호텔 문을 나섰다.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랐다.
"하이눈 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샤넬라인
쇼는 완전 참패야. 첫판에 깨졌으니
붉은잠바의 행패가 더 심해지겠군."
유라는 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디너파티는 몇 시지?"
준은 유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7시."
유라는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었다.
붉은잠바의 방해작전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라가 자니패션의 창립쇼 첫스테이지에
서기로 한 것은 준의 지원 때문이었다.
준은 유라에게 출연을 허락했고 그 후에
발생하는 붉은잠바의 보복은 준의 엄호와
경호하에 책임을 맡기기로 했으나 마음에는
어두운 그늘이 지워지지 않았다.
유라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내가 맡는다고 했잖아. 오늘밤
디너파티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세명의
내 친구가 유라의 비밀경호로 잠복할 거야.
혹시 무슨 낌새가 보이면 지체없이 내게
신호를 보내라구."
"그리고 그 다음은?"
유라는 사진 문제가 내심 걱정이 되어 짐짓
준에게 말했다.
"다른 문제도 내게 맡겨."
"준은 마치 모든 걸 다 아는 듯 말하는군."
"너에 관한한 알 만한 정보는 다 쥐고
있어. 걱정 말라구."
"행여 그랬으면 좋으련만……."
유라는 준의 속셈이 무엇인지, 도대체
하지만 미리 겁내거나 걱정하지는 말자.
우선은 당면한 일이나 하나씩 해결하도록
하자.
유라는 얽힌 실처럼 복잡해지는 상념들을
머리 속에서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호텔 가까이 위치한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내려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디너파티 시간까지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면 연회장 뒷문으로 들어가
자니 홍과 몇몇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고
대강 10여분쯤 지나면 화장실 가는 척하고
뒷문으로 빠져나오라고. 차를 대기시켜
놓겠어."
붉은잠바가 혹시 부하녀석들을 거기다
풀어놓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겠어. 난 얼굴만 내밀고 나와서
곧장 집으로 가서 쉬어야겠어."
"별일이야 없겠지만, 난 뒷문 입구에서
기다리겠어. 자니 홍 패거리들에게 내가거기
나타난 것을 보이기 싫으니까."
"알겠어."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의 긴 목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고
희다고 준은 생각했다. 유라의 목에는
가느다란 금목걸이가 반짝거렸고, 흰 셔츠 깃
잎바로 아래 두개나 풀린 단추 사이로
앞가슴의 살결이 매혹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유라의 날렵한 턱과 붉은 입술은 언제
치켜뜨는 눈빛에는 분위기에 따라 우수가
깃들기도 한다. 그녀의 자신감과 자존심의
대부분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더 억세어지고
있다는 것을 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나와 다시 호텔로
향했다. 자니 홍이 베푸는 칵테일파티에는
국내외의 패션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직물회사 사장들과 하이패션 디자이너들,
모델들을 위시해서 영화계와 연예계의
유명인사들은 물론 정계와 재계의 실력자들도
모두 참석했다. 그러나 유독 표 사장과
붉은잠바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파티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파티장
입구에는 샤넬라인 표 사장의 이름으로 보낸
화분은 크게 눈에 띄었다.
넓은 홀 안에는 사람들이 꽉 찼고 모두들
나누고 있었다.
자니 홍은 뉴욕 7번가에서 온 몇몇 미국인
디자이너와 어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홀의
뒷문에서 유라가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예상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유라가 들어오는
것을 본 몇몇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고, 홀 안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유라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카메라맨들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유라에게 길을
터주었다.
유라는 순간 당혹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유라 특유의 제스처와 연기력을
발위, 자니 홍 쪽으로 걸어갔다. 유라의
등장으로 홀안은 갑자기 활기를 띠며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커지기 시작했다.
자니 홍이 유라를 맞으며 옆에 있던 미국
디자이너들에게 유라를 소개시켰다. 그들은
모두 원더풀 원더풀을 연발하여 유라와
악수를 나누고 그녀를 껴안기도 했다. 유라의
숏커트머리와 반짝이는 이어링, 아름다운
몸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화려하게
돋보였다.
신문사와 화보잡지 기자들이 다가와
산발적인 질문공세를 폈다.
"왜 자니패션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무슨 영화에 데뷔하시게 됩니까?"
"결혼 계획은?"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지자 유라는 시종
웃기만 하고 대답은 회피했다.
유라의 주위로 몰려든 사람 중 두 사내가
유라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경계를
그들은 준의 친구들이었다.
유라는 자니 홍이 소개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귓속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유라는 계속 빠져나갈 틈을 노렸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유라의 곁에 한 남자가 바싹 다가섰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중년남자는 푸른색 싱글에
넥타이를 매었고, 향수냄새를 풍겼다.
"준의 친굽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저쪽으로 가실까요?"
남자는 웃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유라는 그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홀의 한쪽으로
따라갔다. 유라는 그를 준이 보낸 친구로
"홀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 남자가 가리킨 쪽은 정문이였다. 가만
있자. 준과의 약속은 뒷문이었는데 어찌 된
셈인가. 유라는 잠깐 망설였으나 계획이
변경된 것으로 생각하고 사내가 안내하는
대로 홀의 정문입구로 향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온 두 사내가 유라의 뒤를
따라 붙었다. 준의 두 친구는 유라가 웬
남자의 말을 듣고 사람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뒤를 쫓기로 한 것이다.
유라는 앞의 안내자와 뒤따라오는 두
사람을 포함한 세 사람이 바로 준이 말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선 유라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뒷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유라는 차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 뒤를
사내가 문 앞에서 몇 사람과 뒤엉켜 시비가
붙고 있었다. 웬 방해자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어서 타십시오."
아까의 그 남자가 정중하게 말했다.
"준, 준은 어디 있죠?"
유라가 뒷좌석에 몸을 밀어넣으면서 그
남자를 향해 물었다.
"유라 씨를 모시라고만 했습니다."
차의 뒷도어가 쾅하고 닫히면서 차가
재빨리 출발했다.
유라는 호텔의 입구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필시 준의 친구들이 드디어 상대를 만나
한바탕 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했다.
유라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운전기사는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핸들을
잡은 자동로보트 같았다. 문득 유라의 눈은
차창 앞쪽의 백미러에 머물렀다. 운전기사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유라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그 사람이다. 스티브에게 수원으로 유혹하던
당시 폰티액을 운전하던 바로 그 사람.
그렇다면 이 운전사는 스티브와 관련이
있고, 결국은 붉은잠바 그녀석이 보낸 차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그때 운전석 옆자리에 놓인
카폰의 신호음이 들렸다. 기사가 수화기를
들었다.
"잘 모시고 갑니다."
운전기사가 그 말을 한 뒤 수화기를 유라
쪽으로 건넸다. 유라는 놀라서 엉겁결에
"유라, 오랜만이군."
카폰으로부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표의 목소리는 늘 기름기가 넘쳐 흐르는 것
같았다.
"뭐예요, 날 이런 식으로 또 속여서 어디루
모신다는 거예요."
유라는 노한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
"유라가 와본 곳이니까 두려워할 것
없다구. 화내지 말어."
붉은잠바의 말끝에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날 계속 이런 식으로 대할 거예요?"
유라의 언성이 한 옥타브쯤 올라갔다.
"왜 그래, 강제가 아니야. 날 만나야 할
일이 있을 텐데 딴전 피우지 말라구."
투였다.
"내가 표 전무를 만나야 할 일이 뭐죠?"
유라는 표가 드디어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면서 딴전을 피웠다.
"암튼 만나서 얘기하기루 해, 전화
끊겠어."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좋아, 어차피 널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스티브라는 함정을 파서
일방적으로 빠뜨려놓은 표와 담판을 지어야
하고 만일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유라는 차창 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표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 것인지 곰곰
따져보았다. 표는 아마 자기가 갖고 있는
사진을 미끼로 제임즈가 도난당한 필름까지
필름가방은 지금 내 수중에도 없지 않은가.
표를 만나면 그 의문도 풀리게 될지 모른다.
유라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차는
어느새 수원 근처의 숲속별장에 닿았다.
유라는 차에서 내려 운전기사의 안내를 받아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현관 앞에 섰다.
운전기사는 현관 문을 열어주고는 곧
되돌아갔다.
악몽의 현장에 다시 오다니. 하지만 범을
잡으려면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늘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진 문제를 해결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유라가 거실로 들어섰다. 예의 그 큰
비로드 소파에 붉은잠바가 앉아 있었다. 그는
티셔츠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유라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라는
이상하게 들떠서 마치 언제 앞발을 세우고
뛰어들지 모르는 표범 앞으로 다가서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느라고 수고했어, 유라, 거기 앉지."
표는 담배 한 대를 새로 물며 의외로
조용하게 말했다.
단둘이 있을 때 유라는 늘 표의 자존심을
건드려 왔고, 그 역시 유라의 그런
가학적이고 도전적인 악취미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것은 마치 투우사가 붉은 망토를
내보이며 소의 노여움을 돋우는 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라의 말이나 태도에 성이 나서 옷을
벗고 달려들어 힘으로 맞서려 했지만
영리하고 능숙한 투우사인 유라는 늘 그의
남성을 여지없이 좌절시켜 왔었다. 넌
나에게는 언제나 보잘것 없는 수컷에 지나지
않아. 유라는 늘 그런 자세를 보였다.
바로 그점 때문에 붉은잠바의 자기에 대한
끈질긴 도전이 계속된다는 것을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한번쯤 모른 체하고 져 줄 수도
있지만 표에게 절대로 일시적이나마 정복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유라는 표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표의 눈길이 점차 도전적인 빛깔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아, 말씀해 보시죠."
유라는 표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상했다. 표를 보면 늘 피해의식을 느끼고
묘한 반발심이 스프링처럼 튀어오른다. 그가
늘 자기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기 때문일까.
지금도 그랬다. 표의 눈빛은 유라의 가슴에
"표 전무님, 도대체 무슨 악감정이 남아서
날 못살게 굴죠?"
"난 국내의 패션계를 지금까지는 내 손으로
주물러 왔어. 아무도 날 넘보려는 작자가
없었지. 그런데 양배추 같은 녀석이 내게
도전장을 내밀었어. 그 녀석은 제일 먼저
유라, 널 빼가는 것이 목표였어. 그리구 넌
우리를 배신하고 녀석의 계획에 가담한 거야.
난 너로 인해서 가장 큰 패배감을 오늘 맛본
거야. 게다가 자니란 녀석은 널 필두로 우리
여우군단들을 줄줄이 빼갈 계획이었다구.
가만히 있으면 우린 완전히 붕괴될 처지였어.
넌 내 입장에서 그 문제를 생각해 봤나?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은 바로 그거였어. 우리
여우들을 그녀석에게 뺏기지 않는 일 말야."
"그래서 나를 위시해서 애들을 꼬셔서
방법을 썼단 말이죠."
"나한테는 우선 그런 방법밖에 없었지.
사업을 하자면 그것도 작전이야."
"그 작전이 성공했나요?"
"거의 성공적인 찰나에 수포로 돌아갔어.
잘 알고 있겠지."
"뭘 말예요."
"제임즈가 유라에게 필름을 모조리 뺏긴 거
말야."
표는 목소리를 한층 누그러뜨렸다.
유라는 어느덧 얘기가 본론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졸렬한 작전이었어요. 표 전무답지
않은……."
"그래, 어떻게 해야 내가 비열하지 않지?
유라, 너와 애자, 미희, 종미에게조차 무릎을
애걸해야 떳떳한 방법인가?"
표는 애써 자신을 억제하는 것 같았다.
"왜 모두들 표 전무 곁을 떠나려고 하는지
생각해 봤어요?"
"생각해 봤지만, 이유는 딱 한 가지야.
자니 쪽의 대우가 좋고 장래성이 있어
보이거든."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유라, 널 위시해서 모든 여우들이
은공도 모르고 날 배반하는 건 그냥 둘 수
없어."
"바로 그점이에요. 네가 누구 덕에 지금
행세하느냐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거예요."
"배척은 너희들이 한 거야. 난 너한테도
해줄 만큼 해주고 결국은 배반당했어. 그걸
알았어?"
표의 노여움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 유라는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득이나 이해가 안 통할수록 포기하지
말고 머리를 써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표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가.
유라는 머리를 빨리 회전시켰다.
"지금 나한테 원하는 것은 뭐죠?"
유라는 표가 자기를 이곳으로 납치해 온
이유를 알고 싶었다.
표는 몇 번이나 언성도 높이고 표정도
험악해졌지만 예상 외로 자신을 잘 억제하는
것 같았다.
평소의 표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며
"유라에게 지금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유라는 표의 뜻밖의 말에 속으로 놀랐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단검을 던지듯 상대방에게 독단적이고
직선적으로 요구 했었다. 그가 몸을 원할
대는 늘 어던 구실이든 붙여 오게 하거나
강압적이었다. 이어서 오늘밤 표가 자니의
디너파티에서 교묘한 수법으로 자기를 빼낸
것도 어떤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날 일루 데려온 이유는 뭐죠?"
"내 뜻을 밝히려는 거야. 내 말을 잘 들어.
우리는 굉장한 사업계획을 짜놓았어. 자니 쪽
플랜보다 더 크면 컸지 작는 지 않아. 그리구
유라를 위시한 다른 애들의 대우도 대폭
주선하고 톱을 지키도록 내가 보장하겠어.
이건 강요나 협박이 아니야. 권유라고 해야
할까? 선택은 유라의 뜻에 달린거야. 난 단지
예스냐 노냐, 그 답변만 들으면 돼."
"내가 만일 노한다면?"
"그건 유라 맘이야. 유라의 자유니까."
"노하면 사진을 공개하고 날 패션계에서
매장시키겠다는 얘기가요?"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달라졌어. 난 본래는 나쁜놈이 아니야. 난
사업가의 입장에서 유라에게 조건을
제시했고, 유라가 원하지 않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구."
이런 능구렁이 같은 녀석, 나쁜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서 나와는 정면
충돌을 피하려는 거야.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엇다.
"당연히 그래요. 그따위 사진 공개가
무서워서 예스 할 내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표 전무, 내가 모델의 세계에서 밀려날 것
같죠? 그건 어림도 없어요. 모든 일이 표
전무의 머리 속에서 구상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만일 이후에 나에 대한
보복이나 방해가 계속된다면 나도 가만 있지
애겠어요.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대는 거예요,
나중에 후회할 일을 자청하지 마세요. 만일
샤넬라인을 폭력조직배들의 소굴로 만들지
않고 패션산업을 계속 지키겠다면 말예요."
유라는 사실상 표의 사진공개 협박이
두려우면서도 그 두려움을 지금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나쁜 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에게
약점을 보이면 그것은 비굴밖에 남는 게
없었다.
유라의 강경 발언은 즉시 효과가 있었다.
표의 표정은 수없이 무너져 있었다.
"유라, 난 오늘 유라에게 간청하고 있는
거야. 유라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뭘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야."
"신뢰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해요."
유라는 목소리의 톤을 낮추었다.
"이봐, 유라. 난 앞으로 영화에 손을 댈
계획이야. 그건 오랜 꿈이 있어. 이미
할리우드에서 연출과 기술진들이 일부 와
있다구. 멋진 영화계획이 잇어. 감독두
유라를 보고 단번에 오케이를 했어. 만일
물색할 도리밖에 없어."
"영화는 단 한 편만 찍을 건가요?"
"앞으로 계속 만들 계획이지. 샤넬
프로덕션,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흥행물들의
기획이 짜여 있다구."
"앞으로 찍을 다른 영화에서 날 필요로
한다면 고려해 보겠어오. 그렇지만 이번에는
오케이를 할 수 없어요. 난 영화 때문에
자존심까지 버리진 않겠어요."
"굉장히 여유가 있어졌군, 유라."
"여유보다 자신감이에요."
"좋아. 반드시 이번 영화가 아니래두 난
유라에게 계속 기회를 주겠어."
"하지만 지난번 스티브가 카메라 테스트를
한다고 몰래 찍은 그따위 필름이라면 제게
출연제의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표가 자기에게 그런 아량과 여유를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표가 자기 앞에서 고집을 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호의적이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아까 TV에서 중계를 봤지. 유라가
등장하는 장면 말야. 나는 큰 충격을 받았어.
유라가 그렇게 멋진 모델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어. 처음에는 유라인 줄
몰랐을 정도야.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밖으로 나가 멀리서 보니까 그 가치가
보였어. 내가 유라를 놓친 것은 실수였고,
자니 그녀석에게는 큰 행운이었지……. 유라,
그녀석이 만드는 영화에 출연할 셈인가?"
"지금 계획으로는 그래요."
작품에는 출연할 셈인가?"
"생각해 보겠어요. 첫번 작품이 실패할지도
모르잖아요."
"실패하두 좋아, 우리가 다시 유라를
출연시켜 성공하면 되니까. 난 자니 그치와
영화로 대결하게 되지. 유라가 영화에 출연을
거절하면 우린 종미를 쓰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영화계에 설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저도 돕겠어요. 표 전무가 절
이용하고 방해하고 모함하려 들지 않는다면
말예요."
"유라, 필름 사건은 잊어버려. 약속하지만
난 이제 유라를 귀찮게 굴지 않게 될 거야."
유라는 표의 태도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생각한 때문일까? 내 가치가 크기 때문에
비굴해졌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잘 알겠어요. 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앞으로는 좋은 얼굴로 대하기로
해요."
표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길에는 욕심의 불길이 아까부터
타오르고 있었다.
"유라, 갈 건가?"
표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 오늘밤 제가 여기 온 것은
강제였어요. 난 파티 중에 곧장 이곳으로
유괴되어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난 지금 내
발로 여길 나가고 싶어요."
유라가 소파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여긴 별장이구 아주 조용하지, 밤도
깊었구. 난 양처럼 순해졌구. 어때 유라,
여기서 자고 가지 않겠어?"
표가 유라의 등뒤로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그냥 가겠어요."
유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젠 유라와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
텐데…… 어쩌면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고……."
표의 손이 유라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무척 감상적이신데요?"
"난 유라를 좋아했어."
"그런데 불행하게도 절 좋아하는 점이 제
맘에 안 들었어요. 여자들은 남자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파악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그럼 유라는 내가 왜 유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가치도 없어요."
유라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표가
유라를 와락 껴안았다. 그의 팽창한 살갗
하나가 완강하게 밀착해 왔다.
"놓아주세요. 날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마세요."
유라는 뒤에서 붙들린 채 숨찬 소리로 겨우
말했다.
"난 지금까지 한번두 유라를 이겨보지
못했어."
표의 손이 앞가슴을 더듬었다.
유라는 그의 몸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유라가
이내 힘을 빼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표가 갑자기 동여맨 두 팔을 풀었다.
"강제로 그렇게 하면 결국에 여자는 좋아
"지금까지 어느 여자든 다 그랬지."
"왜 표 전무는 여자에게 정복감을 느끼고
싶어하죠?"
"그건 남자의 본을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구."
"본능에 무척 충실하군요. 마치
동물처럼……."
"그게 내 수준인지도 몰라. 자아 강요하지
않겠어, 유라. 유라가 나한테 산장으로
와달라고 애걸한 적도 많았지. 그때마다 난
갔었구. 결국은 패배감에 사로잡혔지. 유라는
날 섹스로 교묘하게 이용해 왔어. 내
패배감을 자기 자신의 우월감으로 자위하면서
내게는 늘 도전하도록 유도했었지. 유라, 넌
굉장한 색마야. 널 당해낼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아. 내가 잘 알지. 내가 준, 그녀석을
때문이야."
"사람의 관계를 그쪽으로만 파악하시려
드는군요."
"그게 실제적이지, 그점에 있어서는 유라도
예외가 아니야. 돈, 명성, 섹스, 너도
남자들의 그런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잖아? 널 만족시켜 줄 만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잘 아시는군요. 내 욕심을 모두 만족시켜
줄 남자를 난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유라는 소파의 등받이 뒤로 허리를 기대고
있었다.
표는 되돌아서서 위스키 두 잔을 들고
왔다.
"자아, 목이나 축이고 가."
유라는 표가 내미는 유리잔을 받아들고 한
"준, 그녀석 참…… 유라, 그녀석에게는
만족하나?"
표는 벽에 기댄 채였다.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자니 홍은 유라의 명성을 보장해 줄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난 패션모델이구 영화계 진출을 꿈꾸고
있어요. 그가 날 필요로 하는 것은 내
연기예요."
"준이 유라에게 원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사랑? 좋은 말이지, 사랑을 못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좋은지 알 수가 없지.
빌어먹을, 사랑 한번 못해 본 주제에 할 말이
뭐가 있겠어."
"이젠 그만 가겠어요."
"좋아, 유라. 잘 가. 하지만 아까 우리들이
한 약속은 잊지 마."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죠?"
"난 앞으로 유라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구,
유라 역시 내가 하는 일에 선의로 협력해
달라는 거 말야."
"그 말은 잊고 싶지 않은 말이군요."
표는 탁자 위의 버저를 누르고 운전기사를
불렀다.
유라가 현관으로 나갔을 때 등뒤에서
'앞으로 잘 부탁해'라는 표의 말을 들었다.
밤공기는 서늘했다. 유라는 아까의
운전기사가 훨씬 친절해진 것을 느꼈다.
주인의 지시에 충실한 로보트나 다름없었다.
마음이 날아가는 것처럼 가벼웠다.
필름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이었다. 그가 달라진 이유가 유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였다.
유라는 아파트에 돌아온 뒤에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눕혔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눈에 무거운
것이 매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누워서 10년쯤 자다가 깼으면
싶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래 살다 보니
표가 고개를 숙이는 꼴도 보는군. 하지만
뒤에 무슨 흑심이 없고서야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변할 수는 없을 거야.
더구나 자니와 영화로 대결하겠다면서 내
말을 순순히 승복하고 필름문제는 더이상
납득이 안 갈 만큼 저자세였다.
일단은 잘 됐어. 오늘밤부터는 두 다리를
쭈욱 뻗고 자게 됐으니 이젠 정말 잠다운
잠을 자도록 하자.
유라가 눈을 감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준일까?
유라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귀에 낯선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라 씨 댁입니까?"
목소리가 굵고 강직했으며 귀 속으로
들어오는 음의 파장이 크고 부드러웠다.
"맞습니다. 누구신지요?"
유라는 그 목소리 때문에 거부반응 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이름을 말씀드려도 절 모르실 겁니다.
드리는 게 도리겠지요. 저는 큰산입니다."
"큰산? 그러니까 높은 산이라는 뜻인가요?
산이 크다는……."
"해석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들려오는 말투는 계속 겸손했다. 그녀는
괴이하다 싶으면서 장난기같은 묘한 호기심에
귀를 곤두세웠다.
"큰산 이라면 어느 산인지, 말하자면
히말라야인지 록키산이나 알프스산도 있구요.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인지 아니면 가까운
남산……."
"그냥 큰산 정도로 알아주십시오."
"좋아요. 큰산이신데 절 찾으신 이유는
뭔가요?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그동안 광고나 잡지에서는 잠깐씩
뵈었지만 움직이는 유라씨를 본 것은 오늘
"아! 그랬었군요. 헌데…… 전화하신
것은……."
"오늘 제가 TV로 보고 오랫동안 찾아헤매던
바로 그 여자가 유라 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절 찾았다구요?"
"유라 씨 같은 분이 바로 제가 원하고
갈망하던 여인상이었다는 뜻입니다."
"아아! 네에…… 그래서 전화를 하셨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곧 유라 씨가 누구며
어디 살고 있고 형편이 어떻고 그리고 앞으로
뭘 원하는지 모든 것들을 알았습니다."
"알다뇨. 저에 관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아실 수 있죠?"
"큰산이기 때문에 다 보이고 다 들을 수
유라는 이 전화야말로 약간 비정상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익명의 미친 전화라는
판단이 섰다.
인간이라면 유명세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소모성 전화였다. 그런
열광적인 남자팬들의 전화는 가끔씩 받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놈팽이는
팬이라고 하면서 대뜸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는 전화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화는 그중 가장 점잖고
교양있는 팬인 것 같았다.
"아무튼 호의적으로 봐주셔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팬으로 남아주세요.
열심히 하겠어요. 그럼 이만 전화를
끊겠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유라씨는 앞으로 최고의 인기와 명예와
부를 누릴 것입니다."
유라는 듣는 말이라도 반가웠다. 최고의
인기와 명예와 돈, 그것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 사내는 마치 예언가처럼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관상을 보시는 분인가요? 후훗……."
유라는 계속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유라 씨는 이제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제부터 바로 이 시간
이후부터는 큰산이 유라 씨의 뒤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라 씨는 큰산이
유라 씨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끼는지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 크고 부드러워서 그 울림은 마치 동굴
속에서 들리는 반향음 같았다. 유라는 이
남자 미쳐도 아주 곱게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말씀이라두 고마워요. 그러면
이만 실례하겠어요."
유라는 전화를 끊었다. 세상이
허무맹랑해서 이제는 팬들도 사진이나 보고
속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면 얘기를
나누고 만나고 싶다고 하소연을 한다.
특히 남자팬들은 거리에서 사인을 받고
좋아하는 여자아이들과 달리 자기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도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그중에도 애송이들은 말 한마디에
나가떨어지지만 오늘 전화 같은 중년남자
한번 시간을 내달라, 만나달라고 한다.
대체로 만나달라는 남자들의 경우는 자기가
만날 만한 가치나 자신이 있기 때문이고 그
자신이란 한 마디로 돈도 있고 미남이고,
아니면 어떤 부분에서 힘을 가졌다고 믿는
쪽이었다.
그래, 혹시 호감이 가서 만났다고 치자. 그
나이의 그 사내와 커피숍이나 카페에
마주앉아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꽃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그런 일들은 10대에 이미 모두 겪었고
그리고 각자가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동안
지치고 귀찮아져서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얘기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잡담인가?
그 사내들도 그런 얘기들이 싫고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어쩔 수 없는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유라가 만나고 시간을 내야 할
남자들은 실제적인 기능이나 효과를 갖는
것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시간은 내가 하는 일에 집중시키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도 산더미처럼 밀려 있고,
잠잘 시간도 모자란데 소득도 없는 커피
한잔이나 술 한잔 따위 속셈이 뻔한
중년놈팽이 팬들과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돈도 많고, 시간도 철철 남아돌고, 잘 먹고
놀아서 정력이 뻗쳐 있는 중년사내들이
노리개 대상으로 찾는 것이 바로
인기연예인들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내가
미인이고 섹시하기 때문인가? 만나는
남자들이면 모두가 눈을 위 아래로 쓸며
자기들끼리 말한다.
내 재능이나 연기력을 미모보다 더 쳐주려고
하지 않는다.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아서 행세를
한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여기고 싶은
것이다. 무조건 안아보고 싶어 안달이고, 안
되면 입으로 욕설이나 퍼붓는 사내들. 유라가
혼자의 상상으로 우울해졌을 때 전화벨이
또다시 세차게 울렸다. 유라는 수화기를 번쩍
들었다.
"이봐요. 왜 자꾸 귀찮게 하시죠? 점잖으신
분 같은데 이쪽에서 전화를 끊으면
알아들으셔야지 거친 말 나와야 하겠어요?"
유라의 노기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저어……."
상대방는 주눅이 들었음인지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셨드래두요. 서로 좋은 말이 오갈 때 서로
좋게 통화를 끝내야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시면서 필요 이상 길게 말씀하시면
저두 참기가 어려워요. 저두 패션모델이기
이전에 사람이에요. 알겠어요? 선생님.
그러니 저를 아끼는 팬이시라면 또 훗날 만날
기회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서로 감정
상하지 않도록 하구요. 이 전화는
끊어주시도록 하세요."
유라는 점차 목소리를 낮추며 상대방을
달래는 어투로 변했다.
"유라, 나야 나……."
그때서야 준의 목소리가 유라의 귀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마! 준, 준이었어?"
유라는 자신의 성급한 태도에 놀란
"무슨 나쁜 전화를 받았었나?"
"그래요. 방금 웬 팬이라는 놈팽이 하나가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
갖구 귀신씨나락 까는 소릴 하잖아요."
"그래, 그건 그렇구.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유라."
"어떻게 되긴요. 호텔로 날 모시러 온
녀석에게 납치되었었지."
"누구야 그 친구는……?"
"몰라서 물어? 준……."
"난 순진하게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녀석들에게 고스란히 당했군."
"준의 친구들 믿고 뭘 하겠어. 날 앞문으로
버젓이 빼내가는데도 두 손 놓고 있을 정도면
말 다한 거지. 암튼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안심해."
"의외로 환대받았어. 앞으로 잘 해보자는
거야. 이젠 날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도
하더군."
"그 작자의 말을 믿나?"
"안 믿으면 어떻게 하겠어? 무슨 꿍꿍이
속인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날 귀찮게
안하리라는 예감은 들어."
"그래, 두고 보기로 하지."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지, 준?"
유라는 졸린 듯한 목소리로 애교섞인
말미를 지어냈다. 잠이 무더기로 쏟아져오는
중이었다.
"집 근처의 공중전화야. 친구들과 함께
있어."
"혹시 심카의 그 여자 아파트에서 전화하는
건 아니겠지? 준."
더구나 아주 느긋한 여유를 보이면서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유라의 말씨가 준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겼다.
"여긴 공중전화야, 유라."
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고 신호음은 곧 끊겼다.
준의 말이 전화 도중 끊어졌으므로 유라는
준의 전화를 다시 기다렸다.
아까부터 잠이 쏟아져 와서 이제 준과의
통화가 끝나면 전화코드를 뽑아버리고 잠에
빠질 작정이었다.
전화벨이 또다시 세차게 울렸다. 유라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준이 아니었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요?"
"일방적으로 통화를 길게 하시는 것도
예의가 아닌 줄로 아는데요."
유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유라 씨는 제
호의가 별로 탐탁치 않은가 보군요."
"그건 그래요. 또 전화하신 건 항의하기
위해선가요?"
"항의는 아닙니다. 난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오. 아까의 얘기를 잠깐만 더 계속하고
전화를 끊겠소."
사내의 음성은 침착했다.
"말씀하세요. 큰산이 어쨌다구요?"
"나중에 알고 보면 실례를 했다고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난 여자에게 직접 내
손으로 전화하기가 무척 힘든 사람이오."
"그건 왜죠? 나이가 많으셔서 손이 떨리기
유라는 남자의 말을 힘껏 비틀었다.
목소리로 봐서 30대는 훨씬 넘어보였다. 대강
느낌으로는 40대 후반이 아니면 50대의
초반일지도 몰랐다.
"허허…… 아직 손이 떨릴 만큼 늙지는
않았소. 난 기왕 어려운 전화를 한 김에 유라
씨를 도와줄 일이 없나 묻고 싶었소. 혹시
살면서 불편한 일이 있소?"
유라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안됐지만 불편한 점은 없어요. 더구나
댁이 날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구요. 가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부탁할
맘이 없습니다."
"허허, 그건 왜죠? 이 큰산의 힘을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은데 그럼 내 힘을 한번
유라는 이 미친 사람이 제정신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점차 울화통이 치밀었다.
만일 전화를 끊으면 또다시 벨이 울릴
것이다.
"시험 말인가요. 무슨 힘이 있다는 거죠,
도대체?"
"뭐든지 원하는 바를 말해 봐요."
"돈으로는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돈을 주겠소."
"하지만 조건이 붙는 돈은 10원 한장도
받지 않겠어요. 난 돈이 아쉬운 여자가
아니니까."
"조건을 붙이지는 않겠소. 큰산은 돈으로
유라 씨를 흥정할 사람이 아니오."
"어떻게 주시겠어요. 난 시간이 없는
사람이니까 돈을 받으러 나갈 수는 없어요."
한 장을 우송하겠소. 원하는 금액을 쓰도록
하시오."
"어머! 그러다가 제가 댁을 부도라도 내게
한다면 어떡하죠?"
"큰산은 부도 걱정을 안합니다."
"고마워요. 보내주세요. 어느 이름 모를
팬으로부터의 성금이라고 생각하고 알맞는
금액을 찾아 쓰겠어요."
유라가 자니 홍의 첫 패션쇼에 출연한 이후
유라의 집으로 날아온 팬레터는 수백 통에
이르렀다.
전화통 역시 불이 날 정도였다. 각
영화사에서 출연교섭이 왔고, 큰기업에서는
광고모델 주문이 쇄도했다.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도 많았다.
공간에서 극소수의 부유층을 상대로 한
하이패션을 주로 했고, 신문이나 잡지광고에
고정된 사진만 게재되었던 유라는 TV의
생방송 중계가 유라의 미모를 대중에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도화선은 폭발적이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유라라는 여자의 미모에
사람들은 아니 저 여자는 누군데 저렇게
이쁘지 하고 눈을 휘둥그래 뜨고 다시 볼
정도였다.
TV에 나오는 여자들의 매일 그 얼굴이 그
얼굴에 식상해 있던 사람들은 새롭게
매력적인 스타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국측으로부터 출연제의도
왔다. '한밤의 데이트'라는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유라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만일 한 시간짜리 대형프로에 나가서 이말
저말 다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다하게 되면 더
이상 뭘 드러낸단 말인가.
"준, TV에 출연을 해야 하나?"
유라는 준의 의견을 물었다.
"유라가 앞으로 인기관리를 해야 해.
지난번 TV중계로 많은 사란들로부터 놀라움을
주었지. 도대체 저 패션모델이 누구지? 그런
호기심과 의문을 잔뜩 주었어. 그런데 이번
TV에 나가서 나란 바로 이런 사람이요 하고
다 드러내 버리면 인기가 더 오를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폭락할 위험 부담도 있어.
유라는 지난번 패션모델로서 무대의 연기를
보여줬으니까, 앞으로도 화면에는 연기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는 일 이외에는 매스컴
출연을 삼가는 게 좋을 거야. 특히 영화계
얼굴만 팔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늘어놓고,
자기 분야도 아닌 오락프로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삼가해."
준의 말에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은 사람들에게 연기 한번 보여주지
못했는데 매스컴에 끌려다니며 얼굴만
내밀다보면 사람들은 곧 식상할 것이며
앞으로 배우로서 마이너스가 되리라는 것은
당연했다.
유라는 준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TV의 '한밤의 데이트'는 출연거부했다.
"내일 아침 10시까지 방송국 스튜디오로
나오시오."
조연출은 상대방 일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사정이 있어서 안 되겠는데요."
"뭐요? 우린 콘티까지 다 짜놨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콘티라니요. 지난번 전화하셨을 때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지 출연하겠다고 약속을 한
건 아닌데요?"
"뭐라구? 이건 도리어…… 허참 기가
막혀서. 암튼 만나서 얘기합시다."
유라는 거기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유라는 머리를 묶고 간편한 옷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집에 있으면 전화가 그칠
사이 없이 왔고, 그 전화의 대부분은 각종
잡지에서 만나달라, 시간을 내라,
찾아가겠다는 전화였다.
신문의 영화기사에는 자니패션이 이번에
기획하는 대작영화의 주연에는 모델 유라가
TV중계로 유라가 유명해지자 그 인기의
상승무드를 타기 위해 자니 쪽 영화 홍보팀이
앞질러 터뜨린 기사였다. 제작비 4억을
투자하는 한미합작 영화인데다가 한 한국의
시골 여자가 모델과 발레리너로 브로드웨이의
신데렐라가 되는 과정을 담는 대형 영화에
패션모델인 유라가 히로인으로 캐스팅 된
것은 영화계에서 빅뉴스였다.
자니 홍과 사전에 영화에 관한 얘기는
있었지만 일이 그렇게 급진전 되리라고는
유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니 홍은 유라에게 전화로 신문발표를
했다는 얘기를 통보하고 구체적인 준비는
이쪽에서 알아서 진전시키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나 해 두라고 했다. 때문에 유라는
사실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할 처지가 아니었다.
유라가 마악 층계로 올라 섰을 때, 집배원
한 사람이 내려서다가 그녀와 마주쳤다. 그는
얇은 봉투 하나를 유라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는 등기속달이었다. 내게 등기속달을
보낸 사람은 누굴까. 봉투를 뒤집어보자
발신인도 없었다. 집배원은 유라에게 봉투를
건네주고는 사라졌다.
유라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흰 종이로 겹쳐 싼 안을 펼치자 당좌수표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유라는 깜짝 놀랐다. 바로 며칠 전에
전화를 했던 목청 좋은 미친 남자가 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수표는 금액난이 비어
있었다.
유라는 곧 봉투 속을 뒤집어보았지만 수표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유라는
소파 위에 앉아 수표를 들여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남자 계속 장난을 해보자는
심사군.
수표가 가짜일지도 모르고, 부도난
수표일지도 모르지. 날 놀라게 하려고 보낸
종이쪽지에 불과할 거야. 이걸 진짜로 알고
금액을 써넣고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간다면
얼마나 순진한 사람인가. 그건 미친 녀석의
머리 속에서 나온 장난에 휘말리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유라는 수표를 반으로 접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런 녀석의 장난이라면 종이비행기로 접어
정말일까, 가짜일까 하고 맘을 쓸 필요가
없었다.
유라는 종이비행기를 들고 베란다로
나왔다. 저만치 꼬마 두어 명이 놀고 있었다.
그녀의 종이비행기를 공중 높이 던져올렸다.
종이비행기는 성능이 좋지 않아서 금세
아래층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졌다. 유라는
안에 거실로 되돌아와 소파에 몸을 눕혔다.
당좌수표에는 금액난만 비어 있을 뿐 여느
수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큰산은 곧
유라 씨에게 백지수표 한 장을 우송하겠소.
원하는 금액을 쓰도록 하시오.
유라는 큰산의 낭랑하고 자신에 찬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어쩌면 그녀석의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
당당하게 보내겠다는 수표가 분명히 내 손에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 수표비행기는 가짜와
장난이라는 판정을 받고 아파트에서
이륙했으나 기상불순으로 아래층 잔디밭으로
불시착하고 말았다.
넌 왜 수표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가짜라고
경솔하게 판단을 내렸지?
그건 진짜인지도 몰라. 넌 괜히 전화한
남자를 미친 녀석으로 몰아 붙이고, 수표가
오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든 거야.
네가 몇푼이라도 금액을 써서 은행통장에
넣었다고 해서 널 보는 사람은 없어. 속았다
치고 시험해 보라구.
유라는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을 벌떡
일으키고 베란다로 다시 나갔다.
아래층의 잔디밭은 눈에 환히 들어왔다.
그런데 조금 전에 던졌던 종이비행기는
뿐이었다.
유라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유라는
잔디밭을 샅샅이 살폈지만 수표비행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히 아까 2층에서 던질 때
잔디밭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했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유라는 그
백지수표가 거액의 현금이나 되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라가 발길을 되돌리는데 서너 살 짜리 한
꼬마 아이가 한 손에 든 종이비행기를 위로
날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유라의
눈은 금세 환해졌다. 사내아이는 다른 아이를
향해 종이비행기를 던졌고, 그것은 잘 날지도
않고 다른 아이 발치에 떨어졌다.
그 아이는 종이비행기를 손끝으로 모아
쥐고 날아가는 시늉을 해보면서 윙윙윙
"얘……."
유라는 뛰는 아이 뒤를 숨차게 쫓아갔다.
아이는 멈춰서서 유라를 바라보았다.
"얘, 그 종이비행기를 이리 줘."
유라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싫어, 이건 내 비행기야."
"아냐, 아줌마 꺼야. 아까 아줌마가
비행기를 만들어서 던진 거야."
"아줌마가 버렸잖아요?"
"사실은 버린 게 아니구 날린 거야."
"내가 주웠단 말야. 내 비행기야."
심술이 많아 보이는 아이는 종이비행기를
움켜쥐고 뛰기 시작했다.
"엄마!"
아이는 저쪽에서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여인 쪽으로 뛰며 자기 어머니에게 구원을
유라는 아이를 따라 뒤쫓았다.
"무슨 일이세요?"
여인이 유라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이 아이가 가진 종이비행기가……."
유라는 숨이 차서 말을 맺지 못했다.
"이 아줌마가 내가 주운 종이비행기를
뺏으러 했어."
하면서 종이비행기를 유라 쪽으로
내던졌다. 아이는 종이비행기의 임자가
유라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와 따지고
들면 자기가 엄마한테 혼이 날 줄 알고
종이비행기를 미리 포기한 것이었다.
유라는 종이비행기를 집어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인이 유라에게 재차 물었다.
던졌거든요. 그런데 이 애가 이걸 주웠어요.
전 다시 내려와서 이걸 찾으려고 했구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난 또……."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섰다.
유라는 접힌 종이비행기를 풀고 접힌
부분을 두 손바닥으로 눌러 폈다. 좋아, 속은
셈치고 은행에 가서 몇 푼 적어보자. 가짜면
그만이고 진짜라면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옷이나 한 벌 해입으면 그만이지.
혹시 나중에라도 전화가 오면 팬이 보낸
성금으로 블라우스 한 벌 해 입었다고
말해주면 그 남자는 얼마나 흐뭇해 할까.
지난번 자니 홍의 여름컬렉션 중에서 맘에
드는 블라우스 한 벌이 있었지.
그게 얼마 짜리였든가?
한성은행 창구는 한산한 편이었다.
유라가 수표를 잘 편 다음 볼펜을 들고
마악 삼십 오만 원을 쓰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만일
현금을 찾을 수 있다면 보낸 사람이 나중에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 배짱이 벼룩의 간보다 못하더군.
기껏 맘대로 쓰랬더니 컬러 TV 한 대
값이었어.
날 우습게 봤어.
유라는 속으로 큰산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자기를 비웃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금액이면 차라리 수표를 보관하는 게
낫지. 괜히 남한테 신세졌다는 부담만 들었지
별 소득도 없어. 까짓것 옷이야 입어도 그만
볼펜을 내려놓고 수표를 손에 말아 쥔 채
은행을 나와버렸다. 은행 앞에서 길을 건널
때 흰색 승용차 한 대가 유라의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승용차는 햇살에 광채가
번쩍거렸고 운전석에는 선글라스를 낀 여인이
핸들을 쥐고 껌을 씹고 있었다.
차 한대는 살 만한 배짱이 있어야지. 대략
천만 원 정도면 저런 승용차 한 대 살 텐데.
빌어먹을 기왕 내친 김에 공 일곱 개를 그려
넣을까? 그 미친 녀석도 선심을 쓴다면 차
한대 정도쯤 돼야 어깨를 펼 수 있겠지. 물론
그것도 돈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제 입으로
큰산, 큰산 하면서 단돈 천만 원의 잔고도
없으면서 그런 수표보냈다면 미친놈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약소하게 각오하지 않았을까?
유라는 삼십 오만 원짜리 블라우스에서
1천만 원짜리 승용차로 엄청나게 뛰어오른
자신의 욕망 지수를 생각하고 입이 벌어졌다.
1천만 원 받아 승용차를 구입하고 나서
혹시 큰산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주신
돈으로 승용차를 샀다고 전하고, 고마운
뜻으로 모시러 가겠다고 말하면 그는 흐뭇해
할 것이다.
괜히 혼자 좋아하지 말고 쓸데없는 공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상상으로는 안
되는 게 없으니까.
유라는 아파트로 들어서다가 문득 맞은편
아파트의 유리창에 비껴든 햇살 하나가
눈으로 비껴드는 것을 피했다.
그래, 승용차가 문제가 아니야. 공 하나만
더 붙이면 지금 햇살을 되쏘고 있는 저 넓은
거긴 방이 네 개나 되고 거실이 넓어서
궁전처럼 꾸미고 살 수가 있어.
돈이 있으면 지금같이 좁은 아파트에서
옹색하게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국내에서
둘째라면 서운해 할 톱 모델이
소형아파트에서 차 한 대 없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그녀의 눈에는 궁전같이 꾸민 마흔 평
아파트가 어른거렸다. 지금이라도 맘만
먹으면 이 수표가 그걸 간단히 충족시켜 줄
것이다.
장 욱이라는 사람은 누굴까.
과연 1억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겠는가.
큰산이라고 큰소리 떵떵치고, 자기 능력을
시험해 보겠느냐고 하던 작자가 통장에 1억도
없으면서 백지수표를 보낼 리는 없다는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유라는 아파트로 들어와서 자신의 거실을
휘익 둘러보았다.
아늑하게 꾸민 실내장식이 갑자기 초라한
느낌으로 눈에 들어왔다. 이만큼 사는 데도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는가. 은행융자금은
아직도 다 갚지 못했고, 통장에는 생활비가
백 오십 이만 원이 있을 뿐이다. 유라는
수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몸을
눕혔다.
이제 곧 전속금을 받고, 영화출연료도
받으면 현금으로 큰 돈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준에게 고향으로
가겠다고 하면 자신은 농장 여주인으로
행세를 하며 살 수가 있게 된다. 그까짓 1억
마련할 수 있는 돈이야. 우습게 보지 말라구,
큰산.
유라는 눈을 감았다. 서울 근교의 대지
천평쯤 되는 우거진 숲속의 집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10억이 대순가? 벽은 흰색으로
칠하고 이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풀이 있으며
언제라도 수영복을 입고 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빌어먹을, 괜히 미친 녀석의 장난에 별
오만가지 상상이 찬란한 무지개 빛깔을
그리며 머리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군. 이제
그만 꿈을 꾸기로 하자.
욕망은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지더니 포화
상태까지 왔다.
삼십 오만 원짜리 블라우스에서 시작해서
교외의 별장 같은 저택까지 커진 헛된 꿈에서
신경이 예민해졌어.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큰산일까. 전화벨이 울리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유라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유라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나야."
휴우- 유라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큰산이
아닌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어디야, 준?"
"집이야. 왜 목소리가 그렇게 떨리지? 무슨
일이 있었나?"
"일이 있어."
유라는 탁자 위의 수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큰일은 아니구, 삼십 오만 원짜리
블라우스를 사고 싶은 일이야."
옷사겠다고 말하고 샀었나?"
"사줄 수 있겠느냐구."
"그야 사야 할 일이라면 사줘야지."
유라는 준의 말을 들으면서 손으로 수표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준, 또 있어. 차 필요한데 한 천만
원쯤 되는 승용차를 사야겠는데 그 돈 어떻게
안 될까?"
"승용차라구? 왜 갑자기 차 얘기를 꺼내는
거지?"
"난 지금까지 차 없이 살았어. 차가
필요하다구. 사줄 수 있겠어?"
"어렵지만 할 수는 있어. 한데 그런 얘기는
만나서 해야지, 왜 갑자기……."
"만나서 얘기하면 다 되나? 또 있어."
유라는 수화기를 바꾸어 들었다.
아담한 집을 짓고 살고 싶어. 그 집은 내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대로 아주 멋진
설계를 하게 될 거야. 돈에 구애를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야. 돈이 억수로
들어가도 원이 없는 그런 집."
유라는 수표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건 서울에서는 안 돼, 유라. 하야리에는
그런 땅이 있고, 우린 고향에 돌아가면
대나무 숲을 일구고 거기엔 유라가 원하는
그런 집을 짓게 될 거야. 지금이라도 유라가
나와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면 가능한
일이야."
준의 목청은 점점 높아졌다.
"준, 지금 날 설득하려 들지 마. 난 내
꿈과 목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난 이제
영화출연을 눈앞에 두고 있어. 모든 계획은
"그래, 잘 됐어. 원하는 대로 되고
있으니까 열심히 해야지.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승용차라든가 저택 같은 공상에
들떠 있으면 안 돼. 그건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야."
"그래 준, 맞았어. 그건 내 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돈만 있다면 준에게 해달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지금은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하라구. 괜한
욕심에 들뜨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어."
"고마워 준, 그 말 새겨듣겠어."
유라는 전화를 끊고 나자 탁자 위의 수표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수표를 종이비행기로 날려보내는 건데
이제는 정말 미친 녀석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아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혹시 큰산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 큰돈을
써넣었다고 해도 액수가 크면 지불한도도 안
되고 또 된다 치더라도 미친 녀석이 지급을
중지시킬 수도 있다. 유라는 수표를 들어
찢어버릴까 하다 기왕 녀석이 장난 삼아 해본
수작이니까 녀석을 곯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널 시험해 보겠다. 넌 나한테 잘못
걸린 거야. 빌어먹을 미친 녀석의 장난에는
미친 짓으로 응수해 줘야지 녀석도 깨달을
것이다.
유라는 볼펜을 가져와 수표의 금액난 왼쪽
끝에 1자를 쓴 다음 0자를 써넣었다.
10,100,1000……공을 네 개, 다섯 개, 여섯
계속 써나갔다.
금액난에는 0자가 꽉 찼다. 유라는
헤아려보지도 않고 빽빽이 0자를 쓴 다음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은행의
마감시간은 남아 있었다.
유라는 휘파람을 불면서 은행을 향해
걸었다. 장난도 이런 장난은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었다. 하긴 이런 수표를
받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젠 실현되지
않는 꿈이라 해도 가슴은 약간 긴장이
되었다. 정말 미친 녀석이 아니라면 녀석은
액수에 놀라서 기절 초풍을 할 것이다.
시험을 해봐도 유분수지, 그렇게 많은
돈을…… 하지만 일은 네가 먼저 자초한
거니까 한방 맞아도 싼 일이야.
유라는 은행 창구 여직원에게 수표를
새침하게 생긴 여행원이 무심코 수표를
바라보다가 놀라서 유라를 바라보았다.
유라는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은행통장을
꺼냈다.
"그거 여기 넣어주세요."
유라는 통장을 건넸다. 여행원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수표를 다시 보고 숫자를
헤아리다가 말고 유라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얼마예요?"
여행원의 손끝이 떨렸다.
"잘 보세요, 얼만지."
유라는 자기가 써넣은 금액을 알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행원이 수표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은행 대리인 듯싶은 중년 남자가 여행원이
안경너머로 보냈다.
그 역시 수표를 들고 금고가 있는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라는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가빠오는
호흡을 참느라고 고개를 돌려 심호흡을 했다.
되돌아와 앉아 있는 여행원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괜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수표가
부도가 났건, 지불정지가 됐건 몇 사람의
손을 떨게 만든 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은행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유라는 태연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자기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앞에
앉아 있는 여행원과 그 뒤의 남자직원이 기가
질렸다는 식으로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유라는 소파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불과 5분의 시간이 경과했는데 몇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은행원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보긴 뭘 봐, 그 정도 돈거래하는 사람
처음인가? 내 모습이 온통 돈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하지만 말야. 기왕 보는 김에 잘
봐두라구. 이래봬두 난 그 정도의 돈은
떡주무르듯 하는 사람이니까.
유라는 놀라운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보라는 듯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손님, 저쪽 문으로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이윽고 여행원이 일어나서 유라에게
은행사무실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가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이미 많은
은행원들이 이미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는지
안으로 들어서는 유라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왜들 저렇게들 놀랄까? 은행지점의
잔고가 거덜이 날 만큼 큰 액수는 아닌데.
유라 역시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며
은행원이 안내하는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점장이 그녀를
정중하게 맞았다. 유라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가라앉히며 소파에 앉았다.
"저어…… 손님."
지점장의 떨리는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저어…… 지급은 떨어졌는데요. 손님,
혹시 전액을 빼가시는 건 아니실 테죠."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유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그건 아닙니다."
유라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행지점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라가 은행 밖으로 나왔을 때는 햇살이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빛났다.
큰산은 정말 미쳤구나.
그 엄청난 금액을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재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왔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지급하라고 지시한 배짱이
더 무서웠다.
자존심도 보통이 아니군.
것처럼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세상이 갑자기
진공관 속에 들어온 것처럼 조용해지고 온
몸의 뼈마디가 녹아버린 듯 힘이 빠졌다.
맥박조차 뛰는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엄두가 안 났다.
정신차려라. 넌 지금 그게 모두 네 돈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한두 푼이라고 해도
모르지만 그 액수를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어떻게 하겠다고 나서서는 절대 안 돼.
유라는 속으로 자신에게 타일렀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은 차려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돈 더미에 빠졌을 때는 더 큰일이지. 그래,
그 돈은 한 푼도 내 돈이 아니다. 그 사람은
일을 저질러 놓고 가슴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용기를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해두기로 하자.
큰산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돈은 고스란히
돌려드릴 테니 다시는 그런 장난은 서로가
하지 말자고 말하기로 하자.
장욱이란 과연 어떤 인물인가?
도대체 얼마나 재산이 많으면 그 엄청난
돈을 은행에 두고 있을까.
그것도 부동산이나 증권도 아니고 현찰을
말이다. 세상에는 별 부자도 많지만 전화 한
통화로 선뜻 그런 돈을 남의 수중에 넘겨줄
만한 부자도 그리 흔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유라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그 돈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을 때 전화가
"접니다. 큰산."
유라는 그 맑고 낭랑한 음성에 귀가 번쩍
뛰었다. 그러나 놀라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화 기다렸어요. 정말 큰산이란 것을
인정해 드리겠어요. 하지만 전 놀라지
않아요. 우린 이제 서로를 시험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돈은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유라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큰산의
웃음소리가 잠깐 들렸다.
유라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자코 있었다.
"유라 씨, 난 남자요. 한번 맘먹고 드린
돈을 되받을 만큼 비굴한 사람이 아니오.
백지수표를 보낸 건 그만한 재력도 있고
말했듯이 그 돈에는 조건이 붙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쓰시오."
유라는 그 말을 들으면서 기가 차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미치지 않고서야 그 많은 돈을 아무
조건도 없이 선뜻 내준다는 말이 이치에 닿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장 선생님, 아무리
돈이 남아돈다고 해도 제가 받을 수는
없어요. 난 사실 돈을 벌기 위해서 모델을
하고,영화에 나서려는 것은 아니에요. 돈이
목표였다면 왜 그런 일을 하겠어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면 그보다는 훨씬 편하고
많이 벌 수 있는 능력도 있어요. 전 돈이
중요하고 편리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돈에
제 인생을 걸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저한테
돌려드릴 테니 받으시구요.언제 시간 나시면
커피 한 잔 들면서 이런 얘기하면 재미있을
거예요. 서로 놀란 일 말예요. 어때요. 제
의견?"
"돈 얘기는 이제 그만 하기로 합시다. 유라
씨, 좀더 좋은 얘기를 하도록 하죠. 전 유라
씨와 한번 만나서 커피를 나누고 싶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수표와는
상관없는 일로 해주시면 어떤지요. 물론
싫으시다면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그게
조건은 아니니까요."
큰산은 여전히 예의를 지키면서도 유라를
만나고 싶어하는 의사를 비쳤다. 유라는
도대체 이 엉뚱한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귀에 척척 감기는 이 돈 많은
더 컸다.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돈을
돌려드린 후가 아니면 어렵겠어요. 이건 제
조건이에요."
"하하하…… 좋습니다. 돌려주시는 건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
우선 만나서 돈을 돌려주시는 방법을
의논해도 되겠지요. 제 의견이 어떻습니까?"
상대방이 그렇게 나오는데 이쪽에서
쓸데없는 결벽증을 보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장소와
시간은 제가 정할까요. 아니면
그쪽에서……."
"장소는 유라 씨가 정하시면 시간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하이눈 호텔 커피숍, 코스모스 호텔
라운지?
아니야, 그렇게 번쩍거리고 혼잡한 곳을
잡을 필요는 없어.
"저어…… 문화회관 앞길 아시죠. 수은등이
있는 길 말예요. 회관 정문에서 위쪽으로 세
번째 가로등 밑으로 정하겠어요."
"좋습니다. 기억해 두죠. 시간은 밤
9시경으로 정하겠습니다."
"언제요?"
"비오는 날 9시경입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밤 9시에 비가 내려야 됩니다."
"좋아요. 전 비를 맞고 있겠어요. 우산을
받쳐주세요."
"비오는 날 밤을 기다리겠소."
준은 침대의 시트 밑에서 권총을 꺼냈다.
반질반질한 윤기가 도는 손잡이를 매만지고
자물쇠가 잠긴 방아쇠를 당겨보기도 했다.
그는 다섯 개의 탄알을 빼보기도 하고
탄알들을 다시 장전시키기도 했다. 스티브란
녀석은 이 총을 어디서 구했을까. 그리고
도대체 이 총은 어디에 쓰려고 갖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 붉은잠바가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넬라인이 요즘 확장되고 있는 사업을
보면 표 사장의 하야리땅 판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만큼 기세가 커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권총을 침대 밑에 깊숙히 넣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표를 만나보면 대강은 눈치를 잡을 수가
문제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준은 카메라를 걸치고 서둘러 집에서
나섰다. 몇몇 잡지에서 청탁된 사진들을
기고해야 할 일들이 밀려 있었다.
샤넬라인의 건물에 도착한 준은 곧바로
승강기를 이용해서 표의 방앞까지 왔다. 준은
표의 방 입구에서 스티브를 만났다. 스티브는
준이 누군지 알아 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날밤 하이눈 호텔에서 간단한 싸움을 했을
때는 어두웠고, 그가 준의 얼굴을 식별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준이 들어서자 붉은 잠바가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곧이어 스티브가 방으로
들어섰다.
준과 스티브가 표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다.
표의 말이 떨어지자 스티브가 일어나
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은 스티브의 손을
잡았다.
"핫하- 두 사람이 구면인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표의 웃음소리가 게걸스럽게 계속되고
있었다.
"구면이라구요? 난 첨 뵈는데요."
스티브가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었다.
준은 표가 그날밤 하이눈 호텔에서의
닭싸움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좋아, 스티브. 초면이면 초면인 거구.
이분은 내가 얘기하던 사진 작가 준이요.
모델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작가지.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그런데 준,
유라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나간
표의 표정이 달라지면서 진지한 자세로
나왔다.
"하지만 표 전무가 내게 그런 협박편지를
보낸 건 실수였어. 유라를 놓고 날
흥정했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처사요."
준의 강경한 어조에 표가 약간 수그러드는
낌새를 보였다. 그러자 스티브는 유라라는
말이 나오자 준을 다시 바라보며 멈칫 놀라는
시늉을 했다.
"준, 그래서 내가 사과하는 뜻으로
만나자는 게 아닌가."
표의 얼굴은 준의 태도 때문에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표 전무에게 묻겠어. 유라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뭔가?"
준의 질문은 칼날처럼 되돌아왔다.
붉은잠바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봐 준, 난 유라 때문에 자니새끼한테
계속 궁지에 몰려서 질식할 상태까지 갔었어.
유라뿐만 아니야, 내가 그처럼 자랑하던
여우군단이 유라로 인해서 완전히 붕괴된
상태라구. 이판사판이다 싶었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그쯤은 내가
너끈히 하고도 남을 일이라고. 유라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난 유라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 왜냐 하면 난 유라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자네라면 경우가
다르겠지. 공정한 입장에서 판단해 주게.
내가 나빴는가, 유라가 나빴는가, 자네도 그
당시는 유라편이 아니었잖은가. 하지만 난
참았다구. 결국 내가 참았다기보다는 참을
것이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뭔가?"
"그건 밝힐 수 없네. 암튼 유라는 운 좋게
내 울타리에서 빠져나갔고 내 사업은 쑥밭이
되었지. 자니녀석의 개관 쇼가 있던 날
우리가 얼마나 유라에게 당했다는 것은
자네가 알 거야. 난 그 날을 결코 잊지
않겠네. 하지만 난 재기하기로 이를
악물었지. 성공하면 그것은 유라 때문일
것이네. 그러나 만일 내가 이대로 쓰러지면
그것도 유라 때문이야. 유라가 책임을 져야
하네. 내게 있어서 유라는 자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요녀야. 난 요녀한테 질 수가 없어.
그건 애 명예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야. 만일
내가 요녀한테 져서 내 사업이 쓰러지게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네.
그 한 가지가 뭔지 아는가?"
표가 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게 협박하는 건가?"
준은 표의 눈빛과 팽팽하게 맞섰다. 둘은
좀처럼 눈싸움을 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스티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의 팽팽하게 긴장된 신경전을 곁에서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티브, 잠깐 나가 있게."
붉은잠바의 말에 스티브는 기다렸다는 듯
방에서 나갔다.
"준, 유라를 사랑하나? 그건 자네의 큰
착각이야. 솔직히 말하지. 유라는 자네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가 아니야.
그앤 아주 저속하고 악랄하고 무서운 여자네.
자네가 유라를 사랑하는 것은 증오심
때문인지도 몰라. 가학자적 심리가 애정으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준은 표가 남의 관계에 대해서 아주 건방진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준, 그건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거야.
자넨 그걸 아직 몰라."
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표의 말이
점차 자신을 과격한 감정으로 터뜨리고
있었다.
"이봐 준, 유라가 언젠가 내게 말하더군.
이건 정말 듣기 힘든 말이지만 자넬 위해서
해야겠어. 자넨 고향집과 대나무숲을
불태우고 아버지조차 잃었어. 자네가 가장
사랑하는 대나무숲과 아버지를 금례라는
여자에게 뺏겼어. 그대신 자네가 가진 건
유라야. 가장 가증스러운 여자를 사랑하는
가학적인 심정으로 바꾸어 놓은 거야."
표의 음성은 좀더 냉연해지기 시작했다.
"자네가 유라를 사랑하는 것은 대부분
증오에서 바뀐 것들이야. 사랑이 끝나면 그
증오가 무섭게 폭발하게 되지. 유라가 자네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죄책감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네. 하지만
과거는 자꾸 잊혀져 가고 있고, 유라는
과거의 자네의 족쇄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어.
그걸 자네는 막을 수 없지."
"잘 아는군…… 그런 말하려고 날 불렀나?"
"내 말이 전혀 억지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나?"
"내게서 왜 그걸 인정받고 싶어하지?"
"충고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변했군, 그런 충고도 다 할 줄 알구."
"내 말을 믿게 될 때가 올 거네."
"유라가 자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또하나 있긴 있지."
"뭔가?"
"자넨 유라의 몸을 당해내거든…… 안
그런가?"
"뭐라구?"
준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건너뛰어 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주둥아리를 찢어놓겠다. 말을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입이 있는 것은 아니야."
"내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부정하는 건가?"
그 순간 준의 주먹이 표의 턱을 향해
거세게 날아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표는 소파 위로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날 부른 건 그따위 개짖는 소리를 하고
표는 쓰러진 채 손으로 턱을 움켜쥐었다.
굉장히 아픈지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준, 유라가 두려워하고 있는 건 나보다
너라는 걸 알라구. 넌 유라에게 있어서는
거머리 같은 존재야. 그걸 알고 있나?"
준은 더이상 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지금 골이 날대로 나서
화풀이를 할 대상을 찾지 못한 것이다. 준은
표의 방에서 벗어나 아래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표의 말에 반발을 보인 것은 그의 말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유라에 대한 무서운 증오를 사랑으로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아버지와 대숲을 태워버린 그
사랑이 끝나면 그 다음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무서운 미움의 불길이 유라에게 폭풍처럼
몰려갈 것이다.
그건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유라가 내게서 성을 탐닉하는 것은 죄의식을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준이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을 때 어느새
그의 앞에는 표가 나타났다. 표는 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준은 다시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준은 표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얻어맞으면서 커피숍까지 비굴하게 따라붙는
이유를 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이상 유라의 얘기는 입에 올리지
않겠네. 난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준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더이상
화를 내면 표의 기세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주먹싸움에서는 몸놀림이나 주먹 힘이 더
좋아야 하지만 말싸움에서는 먼저 화를 내면
지는 것이 이치였다.
"영화를 하나 기획하고 있네. 각본은
제임즈란 미국놈이 썼는데 뛰어난 녀석이지.
스티브와는 할리웃에서 한 솥밥을 먹은
친구야. 스티브는 미국의 일류감독 밑에서
일을 해서 기대할 만한 녀석이구 말야."
"그따위 포르노나 찍는 녀석을 높이 쳐주고
있군."
"그건 아냐, 자네가 보면 알 거네. 나도
사람을 보는 눈은 있어. 내가 부탁하는 것은
카메라야. 그쪽을 자네가 맡아주겠나?"
표의 제의는 뜻밖이었다.
속으로는 활화산처럼 끓고 있는데 표는
태연히 자기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마치
아까 맞은 것은 싹 잊은 듯 천연덕스러운
태도였다.
"이봐 표,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난
사진작가지 영화의 카메라맨은 아니야.
게다가 네가 만드는 영화에 왜 내가
끼어들어."
"아직도 맘을 가라앉히지 못했군. 이건
비지니스야. 난 뭐니 뭐니해도 자네의
사진만큼은 높이 치고 있어. 난 자네의
영상감각을 사겠다는 거야."
"별로 내키지 않아. 물론 난 영화에 욕심은
있지만 원한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주워먹지는
않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표."
"알지…… 난 이 영화에 유라의 출연을
거절했어."
"당연하지. 자넨 유라가 샤넬라인을
떠났다고 하지만 유라를 자니쪽으로 보낸
것은 바로 자네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표."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라는 힘 있는 쪽을
선택하는 여자라는 사실이야. 그건 내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 어쩔 텐가 준, 자네가
원하는 개런티를 주겠네."
"유라가 아니면 누가 출연하는가?"
"아직은 미정이지만 대치해야 한다면
종미밖에는 없어."
"종미?"
준은 의아한 듯 목청을 높였다. 종미를
출연시키려고 하는 영화에 자기를
카메라맨으로 쓰려고 한 표의 발상이
없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물론 자네는 유라의 사진만을 찍어 왔어.
그게 사진작가로서의 고집일 수도 있고
유라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것은 영화인데다가 준, 너무 자기 고집만
갖지 말고 편견을 버리게. 자네의 카메라
앞에서 명연기자들이 나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난 이번 영화에 자네가 꼭 도와주면
싶네."
표는 곧이어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준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표의 이름과 도장만 찍힌
백지수표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번 부탁은 나와의 개인
감정이나 유라의 문제와는 별도라고 생각해
주게. 기다리겠네."
준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표는 벌떡
준은 탁자 위의 백지수표를 바라보면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아주 실용적인 녀석이야. 사람을 매수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군.
개인 감정이나 유라문제를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한 부분은 돈으로 사겠다는 뜻이고, 네
값은 네가 정하라는 식의 배짱과 여유를
백지수표 한장으로 보여주고 있는 붉은잠바의
전략은 사줄 만했다.
좋아, 붉은잠바의 전략은 사줄 만하다.
준은 수표를 손으로 들어 여러 갈래로 찢은
다음 재떨이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은 곧 카운터의 전화를 빌었다.
"쥬뎀므."
준이 조앙을 부르는 암호를 썼다.
"저예요. 어디 계시죠? 지금 신호대기
"그럼 조앙 일루 좀 와주겠어,
샤넬라인……."
"아! 그래요? 전 지금 아주 가까이 있어요.
입구로 지금 나오세요."
전화를 끝내고 준은 서둘러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준이 정문에서 잠시 서 있을 때 심카가
그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준은 재빨리 도어를 열고 조앙의 옆자리에
탔다.
"어디로 모시죠?"
"원하시는 대로……."
"아니? 손님이 행선지를 대야지, 이건
어떻게 거꾸로 되었죠?"
"세상이 지금 거꾸로 돌아가고 있어. 조앙,
방금 난 영화의 촬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어마, 정말 멋지군요. 이건 보통일이
아닌데 한잔 사야 되는 거 아녜요?"
"이쪽에서 영화 촬영 파트를 맡겨달라고
졸라야 할 텐데 백지수표를 줘가면서
맡아달라고 하니 세상이 거꾸로 된 셈 아냐?"
"정말 그렇군요.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정상이 아닐까요?"
조앙은 핸들을 시외로 빠져나가는 쪽으로
꺾고 있었다. 그대로라면 인천고속도로
쪽이었다. 준은 잠자코 모른 체했다.
"하지만 백지수표는 너무했어."
"그만큼 선배님의 카메라 재능을 사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얼마를 써넣으실
거예요?"
"그건 비밀이지."
"제게만 살짝 알려주세요."
더 구체적으로 재미있게 해야 한다면
조앙보다는 유라가 옆에 있어야 했다. 지금
준은 유라와 해야 할 얘기들을 사정을 잘
모르는 조앙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유라는 그만큼 멀어졌고 조앙은 아직 자기의
생활권 속에서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생소한 불편한 상대였다.
"무슨 영화예요? 제목은 뭐구요? 정말
축하해요.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카메라에서
영사기로 옮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죠. 저 역시 영화는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정지된 사진만 찍다가
피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모습을 담고 싶다는
충동은 사진작가면 누구나 갖게 되죠. 영화
찍게 되시면 준형의 영상감각은 십분 발휘될
거예요. 프랑스에서는 사진작가들이
촬영과 연출을 겸하는데요, 기량만 발휘되면
그처럼 적격은 없죠. 일정이 잡히면 저두
로케현장에 따라가고 싶어요. 전 영화촬영과
아트디자인과 의상과 분장 쪽까지 손댈 수
있어요. 절 촬영 조수로 써주세요. 선배님
일이라면 노 개런티로 일 하겠어요. 그냥
따라다니게만 해줘도 좋구요. 어때요, 녜?
오케죠?"
조앙은 신이 나서 혼잣말처럼 계속하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준을 바라보았다.
"하게 되면 조앙의 말을 들어주지. 하지만
결정된 것은 아니니까 바람은 빼두라구."
"와아! 정말 기뻐요. 꼭 맡게 되기를
바래요."
심카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조앙의 운전솜씨는 난폭하고 열정적이었다.
준의 말소리는 엔진소리에 묻힌 채
희미하게 들렸다.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 거예요. 책임져야
할 가족 없죠?"
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앙은 앞을 바라본 채 곁눈질로 준의
대답을 받았다.
"그럼 기다리는 애인은 있어요?"
그 말에 준은 피식 웃었다.
"웃으시는 거 보니 걸리시는 모양이군요.
그 애인 장래를 책임져야 하나요?"
"책임져야 한다면……?"
"그럼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죠.
누구한테 원망 듣게요?"
조앙은 이차선으로 옮기면서 속력을
떨어뜨리고 느린 대형화물트럭의 뒤를 천천히
아까부터 조앙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푸른색 볼보승용차가 심카의 속력을 맞추어
따라오지 않고 조앙의 백미러에서 사라졌다.
조앙은 백미러를 계속 훔쳐보며 아까의 그
볼보승용차가 뒤따라오는지 살폈다. 핸들을
잡은 남자 옆에 선글라스를 낀 미모의 여자가
자꾸 조앙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유라라는 분 말예요. 선배님을 아주
사랑하시는 것 같더군요."
조앙의 말에 준은 귀가 번쩍 띄었다.
"유라를 만났군."
"슈퍼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어요. 잠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준 선배님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하더군요. 그런
말은 제게 경계심을 갖고 한 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여자의 입장에서 질투가
남자를 깊이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여자는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조앙은 백미러를 다시 살폈다.
조앙이 바라보는 백미러 안에는 아까의
푸른색 볼보승용차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볼보 역시 속력을 줄이고 이차선으로
들어서서 심카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조앙은 볼보차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핸들을 쥐고 있는 배추형의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의 옆에 마치 여왕처럼 앉아 있는
여인은 눈을 씻고 보아도 유라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유라의
얘기가 한창 오가는 동안에 거울 속에 비친
유라의 모습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앞을 바라보고 있던 유라가 심카를
조앙은 유라가 자기들을 드디어 알아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라에게
당당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유라는 지금 어느 남자의
차에 타고 있고 준은 자기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내가 마치 화약고라도
되는 느낌이 드는군. 유라가 조앙에게 무슨
말을 하든 자유인 것처럼 조앙도 유라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 자유야."
준은 조앙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뒤따라오던 볼보차는 차선을
바꾸어 심카를 추월했다.
볼보차가 심카의 옆으로 추월하는 그때
준은 무심히 볼보를 바라보았고 문득 차창
속의 유라와 눈이 마주쳤다.
유라는 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교차되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준과 유라가 서로를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가 지금 선배님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유라 씨가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조앙의 말에 준은 혹시 조앙이 유라가 방금
자기 곁을 비껴갔다는 것을 알고 묻는 말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앙이 방금 말한 대로 접근 금지의
경고를 어겼다고 생각하겠지."
준은 자니 홍의 볼보 승용차가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는 햇살 속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고를 어긴 벌칙은 뭐죠?"
조앙의 짖궂은 질문은 계속되었다.
"대답이 어렵군."
터뜨리면 준을 건너보았다.
"유라 씨가 어느 남자한테도 안 넘어간다는
자신이 있으세요?"
조앙의 그 질문은 명백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은 상대방이 나한테 얼마나
사랑의 신뢰를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단언할 일은
아니지."
"단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군요."
"골키퍼가 있다고 공이 안 들어가나?"
준의 말에 조앙은 쿡하고 웃었다.
볼보 승용차는 심카를 따돌리고 인천
시내로 진입한 후 곧장 월미도로 향했다.
자니 홍은 바닷가의 제방 쪽으로 차를 세워
놓고서야 숨을 내리쉬었다. 그는 운전하는
음악만 들으며 앉아 있었다.
바다는 마치 셀룰로이드를 펼치고 채광을
하듯 햇살이 눈부셨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바로 차창 앞까지
회색의 가슴을 드러내며 하강했다.
"오, 시걸이군, 아주 암팡져 보이는데?
……여잔가 봐."
자니 홍이 담배를 입에 걸면서 말했다.
"암놈이라구 말하세요. 갈매기보구 여자가
뭐예요?"
"오 마이 미스테이크, 동물이니까
암놈이라고 해야지…… 아냐 노우, 놈은
남자한테 쓰는 말이니까 암년이라고 안하나
유라 씨?"
"맘대로 하세요."
유라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그녀는 지금 심리가 좋지 않아서 자니 홍의
말이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심카가 앞에 보일 게 뭐야. 조앙이라는 그
기집애가 준을…….
유라는 혼자 울화를 삭이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둘이 심카를 타고 잘 놀아나는군. 준 역시
볼보를 보았다면 자니 홍과 잘 놀아난다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이번에는 서로 들켰기 때문에
피장파장이지만 조앙이라는 애 나중에 만나면
따끔하게 손을 봐주든지 해야지. 지난번
슈퍼에서 만났을 때 점잖게 대해 줬더니
뜨거운 줄 모르고……. 그래 넌 이제 나한테
곤죽이야. 하긴 준이 문제지. 누굴 탓하겠어.
여자가 아무리 꼬리를 쳐도 준이 의젓하면
늑대들이라더니…….
유라는 속에서 열이 확확 끓어올랐다. 그
때문에 자니 홍과의 오랜만의 드라이브를
모두 잡친 기분이었다.
"유라 씨, 노 굿 컨디션?"
자니 홍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니에요. 좀 피곤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카 에어컨 때문에 상쾌해요."
"나가서 바람 쏘이겠습니까?"
"아니에요. 차 안에 그냥 있고 싶어요.
바다를 바라보면서 얘기 좀 하죠."
자니 홍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햇살에 닿아
번쩍거렸다. 백금 반지에 박힌 다이어에서
반사된 날카로운 빛살이었다. 그의 손가락
등에 검은털 대여섯 개가 눈에 거슬리게 솟아
있었다.
윗단추가 세 개나 풀린 앙상한 가슴팍 위로
성긴 가슴털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보였다.
그의 아랫배는 군살이 없이 편편했다. 큰
다리에 비해 허벅지 살은 약해 보였다. 핸들
밑의 그의 융기는 땅땅하게 퉁겨져 있었다.
유라는 선글라스 너머 자니 홍의 체격을
순간적으로 살펴보면서 처음 만나던 날
아파트에 바래다주면서 손을 잡던 때를
떠올렸다.
자니 홍은 유라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얼굴에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유라는 자니 홍에게 일부러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의 수줍음을 덜어주고
싶어서였다.
"유라 씨……."
자니 홍은 유라를 불러놓고 그 다음 말을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유라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켰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윽고 유라가 입을 열었다.
자니 홍의 눈빛은 뜨거웠고, 이마에는
핏줄이 크게 돋아났다.
뒤로 쓸어넘긴 머리카락, 하얀 이마와 깊은
속눈썹 속에 잠긴 음험한 눈. 석고로 빚어
놓은 듯한 코며 붉은 입술과 대조적인 흰
뺨과 긴 목덜미를 사내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빛 반소매 블라우스 위로 솟은
유라의 가슴을 바라보면서 자니 홍은 침을
삼켰다.
"난 지금 스타와 함께 있군요."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별 말씀을 다 하세요. 난 아직 스타
"내 옆에 있으면 스타의 옆자리에 있는
거요. 유라 씨, 이젠 우리가 이렇게 바닷가로
드라이브 와서 뷰티풀 시절을 볼 시간은 없을
거요. 유라 씨는 시나리오 리딩에 들어갈
거구. 난 며칠 후 뉴욕으로 떠나야 됩니다."
"그렇군요."
"우린 아주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있는 거요, 유라 씨."
자니 홍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니?"
"킬링 타임이오."
"이렇게 갈매기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말예요?"
"유라 씨는 나와 갈매기를 보고 있는 것이
즐거운가요?"
바라보면서 감상에 빠질 그런 나이는
지났어요. 한때는 바닷가에서 그저 파도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던 적이 있었지만,
아마 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굉장히 조숙했었군. 내가 일곱 살 때는
파도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하긴 파도를 볼
수 있는 눈이란 꽤 늦게 뜨이는 법이지. 그럼
유리가 지금 시간을 이렇게 쓰지 말고 좀더
실제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요."
유라는 자니 홍의 실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승낙했다.
"유라 씨는 실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오케이를 했죠?"
자니 홍은 여전히 침착하고 세밀했다.
빌어먹을, 좁쌀 영감처럼 캐묻고 있군.
"열 마리의 새보다 손 안에 든 한 마리의
새가 더 낫다는 말 아세요?"
"그건 더 어려운 말인데요, 유라 씨. 그건
왜죠?"
"만질 수 있으니까요."
유라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새를?"
자니 홍의 눈빛은 밝아졌다.
"어느 새를 택하시겠어요? 갈매기와 유라."
유라는 자신이 입에서 왜 그런 유혹적인
언사가 튀어나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기를 원하는 남자의 눈빛을 볼 때마다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준, 당신은 오늘
조앙을 갖겠지. 난 지금 그 생각을 하면 피가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어. 아까
고속도로에서 심카를 본 것은 결정적인
갈매기와 바다를 보고난 후 자니 홍과 사업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회를 먹고 되돌아갔을
거야.
하지만 난 지금은 준의 결백을 믿을 수가
없어. 도대체 준은 조앙을 데리고 어디로
숨어버렸지?
그래, 그렇게 하라구. 그대신 난 오늘 자니
홍을 갖겠어. 그는 내게 처음 만난 날부터
굉장히 자극을 준 묘한 남자였어. 앞으로
그의 신세를 져야 할 거구. 또 그가 날
원하고 있고, 우린 앞으로는 서로의 일에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을 거구. 어쩌면
자니는 날 당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이건
그에게 호의를 베푼다기보다는 내 호기심이
더 큰 때문이야.
자니 홍의 푸른 볼보는 해변으로 난 길로
굴곡이 심한 도로에서 바다 쪽으로 핸들을
꺾자 작은 호텔이 나타났다. 바닷가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건물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햇살을 등지고
호텔로 들어섰다.
후끈거리던 바깥 공기와는 달리 내실은
냉기가 돌 만큼 에어컨이 잘 되어 있었다.
보이가 안내해 준 방에 들어선 유라는 자니
홍의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을 눈치챘다.
테라스가 있는 2층 거실은 냉방 장치 때문에
유리문이 닫혀 있었고 유리문을 통해서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유라는 창에 기댄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뜨거운 태양의 광채 속에
눈부셨다. 자니 홍이 유라의 곁으로 다가와
한 손을 유라의 어깨에 얹었다. 그는
"유라 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난 너무 솔직해서 늘 손해를 보면서
살아요."
"무슨 뜻이오, 유라 씨?"
"전 갖고 싶은 것들을 참지 못하고 늘 그걸
탐해 왔어요. 그리고 내 탐욕을 방해하는
것들을 냉혹하게 버렸어요."
유라는 창밖을 바라본 채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소. 한쪽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쪽을 얻을 수 없는거요."
유라는 자니 홍의 말에 되돌아섰다.
"자니, 나한테서 원하는 것이 뭐죠? 내게서
정말 필요한 것은 뭔가 말해 봐요. 난 진실을
알고 싶어요."
자니 홍은 입가에 뜻모를 웃음을 흘리며
실내에서 더욱 근엄해 보였다.
"첫째 난 유라 씨를 모델로서 손꼽고 있고,
다음에는 배우로서 유라 씨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거요. 난 유라 씨가 연기자로서
성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건 내
사업적인 욕심이오. 알겠소? 난 유라 씨에게
그것 외에는 욕심이 없어요. 물론 나는 독신
남자로서 유라 씨에게 연민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건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소."
유라는 자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니, 자니는 디자이너로 명예를
얻었고, 사업가로 그만큼 성공했는데 왜 여태
결혼을 안하셨나요? 전 그게 퍽 궁금했어요."
"그건…… 난 말요. 그만둡시다. 아까 말한
"애인도 없으신가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으니까 나를
사랑하는 여자도 없소."
"어머! 그럼 자니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있겠지요?"
"내 명성과 돈을 좋아하는 여자들은 많지만
진심으로 나를 아껴주는 여자는 없소."
"그럼 자니, 자니에게 접근해 오는
여자들은 자니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 지
구별이 되던가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자니 홍은 아까의 불타는 듯한 눈빛이
사라지고 평소의 잔잔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유라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이 묘한 사내의
진심에 대한 의구심을 더 캐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라의 질문은 언제나 정곡을 찌르며
들어왔다.
"유라 씨는 내게서 필요한 것만 가지면
됩니다. 다행히도 유라 씨가 필요한 것이
내게도 필요해서 잘 맞아떨어진 것이
아닙니까? 우린 서로 원하는 것을 주는
공생의 관계죠."
자니 홍의 대답은 의외로 정직했다. 그는
겉으로 보기보다는 훨씬 침착하고 진지했고
참을성이 많은 일면이 엿보였다. 적어도
붉은잠바 보다는 모든 점이 우세해 보였다.
"자니, 내가 중요했나요?"
"아주 중요했습니다. 적어도 샤넬라인이
독점하고 있는 국내에 첫발판을 내딛게 해준
것은 유라 씨였습니다. 나는 이번 귀국
패션쇼는 유라 씨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죠."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유라는 자니가 자신의 속사정에 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일이 잘 되기만
기다렸습니다. 유라 씨를 위시해서 붉은 여우
군단의 핵심들이 제 쇼에 참가하기 직전까지
표 전무의 방해와 압력을 어떻게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죠?"
유라는 자니 홍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다.
"저한테는 모든 정보가 들어옵니다. 저한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유라 씨는 잘 견디어
내더군요. 그 점에 대해서 유라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유라는 자니 홍의 뚝심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동안 자기가 받은 고통을 잘
있었던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뉴욕의 7번가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견디어 내는
스테미너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유라는 좀더 침착하게 여유를 보이고 있는
자니 홍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호텔의
유리창을 통해서 반사되는 햇살은 너무
투명하고 깨끗했다. 밖은 30도가 넘을 펄펄
끓는 대낮인데 방은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했다.
"수영하러 나가지 않으시겠어요?"
유라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창밖으로 먼 모랫벌이 보였고,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난 스위밍을 싫어하는데…… 그럼 이렇게
수영을 하고 오겠소?"
유라는 자니 홍의 미국식 발상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해변에 같이 와서도 각자
원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좋아요. 30분 정도만 바닷물 속에 있다가
오겠어요. 그동안 낮잠을 주무세요."
"오케이."
자니 홍은 몸을 일으켜 유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라는 찬 냉기에 소름이 돋아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유라의 아랫배에 자신의 몸을 바짝
붙이면서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그녀는 그가 밀어붙이는 스텝에 따라
조금씩 뒤로 밀려나면서 그의 어깨 쪽으로
자니 홍의 스텝은 블루스였고, 유라는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잡았다. 그는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휘익 휘익……."
자니 홍의 휘파람 소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감미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의 유연한 몸의
율동에 따라 스텝을 밟고 있는 유라는 점차
호흡이 한 단계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 바닷가에 나가 수영을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유라의 말은 이미 바다에 나갈 맘이 거의
없어졌다는 듯 의욕을 잃고 있었다.
그의 휘파람이 낮고 부드러운 허밍으로
바뀌었다. 스텝은 아주 짧고 느렸지만 그의
입김은 귓바퀴를 얼얼하게 했고, 밀착된 그의
살이 아랫배와 엉치 둘레를 골고루 들쑤셔
"난 침대에서 낮잠을 자겠소."
그의 말에 유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의
스텝은 침대 옆에서 멈추었고 유라가 고개를
숙이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손이
유라의 블라우스 단추 몇 개를 열어놓았다.
그녀의 검붉은 유두는 맹렬하게 곤두서
있었다. 자니 홍의 묘한 접근과 유혹에
휘말려 유라의 살갗은 크게 부풀어 오르고
넘쳐 흘렀다.
참 이상하군. 별 관심도 보이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태도를 취하면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차츰 온 몸을 얽매어 버리는
수법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었다.
그녀의 옷들이 바닥에 모두 흘러내리고
등을 눕혔을 때도 그는 좀처럼 야수로 변하지
않았다. 유라가 기다리면서 몸을 굴려
동안 서 있었다. 자니 홍의 손은 자신의
혁대에 가 있었다. 유라는 그가 침묵과
절제를 호흡처럼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람을 끊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가죽혁대가
유라의 흰 등을 향해 예리하게 날아들었다.
"아앗!"
유라의 입에서는 순간적으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무 갑자기 당한 기습이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자니 홍의
눈빛은 무서운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유라는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두 팔로 가슴을
안은 채 자니 홍을 올려다보았다.
입이 떨려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순간
자니 홍의 오른편에 높이 치켜든 가죽혁대가
쉬익 하고 바람을 가르며 유라의 옆구리를
유라는 옆으로 몸을 쓰러뜨리며 베개를
껴안고 일어섰다.
"자니 홍, 이럴 수가!"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자니 홍을 향해
큰소리를 질렀다.
그순간 자니 홍은 세 번째 치켜든 자신의
팔을 올려다보며 불현듯 놀란 표정을 짓고는
들어올렸던 혁대를 허공에 휘익 던져버렸다.
그때서야 유라는 재빨리 침대 밑으로
뛰어내리고 옷을 주워입었다. 대강 옷을
추스려 입은 그녀는 방문으로 뛰어나갈
듯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쪼그려앉은 자니
홍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미친 녀석. 사람은 겪어봐야지 안다더니
자니 홍의 그런 행동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유라는 지난번 제임즈의 방에서 보았던
필름에서 종미는 방금 자니 홍과 같은
남자에게 말채찍으로 맞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붉은잠바와 스티브 녀석이 종미에게 그런
장면을 연출시킨 것은 어쩌면 자니 홍을
의식하고 만든 필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유라 씨 미안하오. 내가 참았어야 하는
건데, 결국 내 치부를 드러내고 말았소."
유라는 자니 홍이 지금 무엇을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자신이 혁대로 친
사실이 잘못이란 말인가, 아니면 자신의 그런
속성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방구석에 구부러져 있는 자니 홍의
가느다란 여름용 가죽혁대가 마치 살모사처럼
금세 독니를 빼물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원해서 내 옷을 벗겼고, 난 너라는 남자의
묘한 성충동에 호기심을 발휘했을 뿐이야.
난 널 그렇게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준과의 약속을 어기기만 했지. 난 날 원하는
사내의 눈초리만 보면 이상하게 참을 수 없이
무너지는 약점이 있고, 그 사내를 눈감고
지나가기가 그렇게 어려워. 난 내가
음탕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걸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자니, 네가 나의 기대를 완전히 깨고 그런
추태를 보여준 건 너무했어.
유라는 분노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유라 씨, 이게 내 실제의 모습이오.
사디스트란 말이오. 난 조금전 유라 씨가 내
혁대에 맞고 아픈 표정을 짓는 그순간 아!
자니 홍의 눈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자니 홍, 왜 내게 미리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이런 자리까지 만들어 버렸죠? 이런
꼴을 보게 된 것은 서로를 위해 불행한 일이
아니에요?"
유라는 이제야 겨우 말이 제대로 나왔다.
"유라 씨, 난 어렸을 때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소. 어머니는 아주 미인이셨소.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고
말았소. 처음엔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그후부터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커가서
나중에는 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 내리쳐야
직성이 풀리는 가학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던
거요. 그래야만 욕구가 생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유라 씨, 난 사디스트가 되고 만
거요."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유라는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몸을
되돌렸다.
자니 홍의 태도로 보아 다시는 아까처럼
기운이 등등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릎꿇고 고개를 숙인 채 주눅이 들어
있는 그의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조차 했다.
남자가 여자 앞에서 수컷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었을 때처럼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 점에서는 붉은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처음에는 늘 당당한 기세로 나오다가
유라를 당해내지 못한 다음에는 볼품없이
기세가 꺾여서 물러나곤 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래도 나았다. 자니
홍의 경우는 그보다 몇 배나 보기에 딱했다.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풀이 죽어 있었다.
정말 사디스트란 말로만 들었고, 사브리느란
영화에서 카트린 드뇌브가 나무에 매달려
매맞는 영화 장면을 보고도 현실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 현장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라 씨, 날 용서할 수 있겠소?"
자니 홍은 자신이 죄인이나 된 것처럼
유라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니, 이건 제가 용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 같아요. 난 지금 정신이 없어서
도무지 머리가 잘 돌지 않고 있어요. 이건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일이니까 서로
덮어두기로 하죠. 그나마 잘 참아 주셔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겠어요. 제
잘못도 큰 것 같구요."
씨에게 자신있게 대들지 못한 것은 그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소. 난 앞으로 유라
씨에게 더 좋은 우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 밑바닥을 보여준 사람은 유라
씨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앉으며 손마디를 꺾었다. 따악따악 하는
소리가 손마디에서 몇 번 들렸다.
유라는 자니 홍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안았다.
그에게 모성애가 필요하다는 것을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가 되어 있었다.
"자니 걱정 말아요, 자아."
자니 홍은 유라의 가슴에 안긴 채 마치
커다란 아이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배추형의 곱슬머리카락은 감촉이 이상했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머릿발을 끌어내렸다.
유라는 놀라서 뒤로 물러앉았다.
자니 홍의 배추형 머리는 가발이었다.
짧게 깎은 밤송이 머리카락이 모자의
테처럼 둘러 있었고 이마와 머리의 상반부는
반질거리는 대머리였다.
자니 홍이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자니, 가발이었군요. 하지만 왜 배추형의
머리를 하셨죠? 지금이 훨씬 미남인데요.
그리고 만일 헤어스타일을 하시려면 다른
모습으로 바꿔보세요."
유라는 속으로 놀랐으나 그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유라 씨, 오늘은 제가 유라 씨에게 실체를
자니 홍은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자기자신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싫어지죠. 그래서 남에게는 드러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늘 만나는 사람에게 그걸
감추기 위해서 해야 하는 노력이나 신경은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죠.
하지만 그걸 포기했을 때는 아주 자유스럽고
편해집니다. 그건 제 경험이에요."
자니 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유라 씨에게 숨길 것이 없어졌소.
유라 씨, 스위밍하러 갔다 오시겠소?"
"아뇨, 밖을 보니 더워서 나갈 맘이
없어졌어요. 해변이나 한바퀴 돌다가
오겠어요. 한 시간 후에 차에서 만나요,
자니."
"그럽시다."
오후임에도 해는 무서운 열기를 지상에
퍼붓고 있었다.
유라는 호텔 가게에서 챙이 큰 밀짚모자를
사서 머리 위에 푹 눌러쓰고 모랫벌을 향해
걸었다.
선글라스 속의 세상은 푸른 빛으로 변했고,
맞닿은 수평선은 반사된 빛으로 광활한
경계를 또렷이 드러냈다.
샌들 안으로 모래들이 기어들어 발바닥의
감촉을 자극했다.
참, 사람이란 모를 일이야.
디자이너 자니 홍, 그만한 명성과 돈을
모아쥐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이 부러워
할 그런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찰거머리처럼 그를 감싸고 있지 않은가.
그는 여자의 따뜻한 애정에 고갈되어 있는
무서운 고독을 가시처럼 혼자 키워온
독종이야. 그가 지금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애인도 없는 이유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니 홍이라는 사람을 파악하는 열쇠는
바로 그거 하나면 된다. 그가 누구라는 것은
그 비밀의 열쇠를 아는 사람이면 해독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라는 모래 위에 꽂아놓은
비치 파라솔의 돗자리에 앉아서 수영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만큼 몇몇 사람들의 틈에 끼어 수영복을
입고 걸어오고 있는 체격이 좋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준이었다.
준의 옆에는 조앙이 없었다.
유라는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딱 벌어진 체격과 끈질긴 섬유질처럼
꼬인 근육, 긴머리 속의 고독한 얼굴 표정.
탐스럽게 꿈틀거렸다.
준은 물에서 나와 유라가 있는 비치 파라솔
가까이 오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아마 조앙을 찾고 있거나, 쉴 수 있는 그늘을
찾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유라가 잽싸게 휘파람을 쉬익 불었다.
그러자 준은 유라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아직 누군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유라는 밀짚모자를 벗으며 흔들었다.
그때서야 준은 훔칠 놀라더니 몇 걸음을
성큼성큼 걸어 다가왔다.
"조앙?"
준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비치 파라솔
그늘로 들어섰고 그때서야 자기 말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세상이 좁다는 걸 알아야 해, 준."
陋痼?
"아니? 유라, 어떻게 여길……."
준은 놀라면서도 반가운 듯이 유라의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준, 날 조앙이라고 부른 김에 조앙처럼
지금부터 대해 봐."
유라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준의
어깨와 가슴을 바라보았다.
"자니, 그녀석과는 일 때문에 여기까지
어울려 왔다고 내게 말하고 싶은가?"
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조앙과는 애정 때문에 여기 온 거라로
말하고 싶어? 준."
"그 여자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너의 자유야. 하지만 분명한 점은 네가 날
오해하고 있는 것보다는 난 떳떳하다는
점이야. 조앙과 나는 단순한 친구 관계야."
내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 빨리 가봐 준, 내
성미 잘 알지? 어떻게 하리라는 것 말야."
"빌어먹을 그 성깔 또 나오는군. 그 미국
양아치 같은 놈은 지금 어디 있지?"
준의 말에 유라는 입을 다물었다.
안 만났어야 하는 건데 피곤하게 됐군.
준은 갑자기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유라는 손으로 준의 가슴과 어깨를
매만졌다.
"준, 이런 얘기 서로 안하기로 해. 난 아무
일 없었어. 자니 홍이 미국 가기 전에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드라이브 나온 거야. 곧
여기서 떠날 거야. 이따가 밤에 아파트로
오겠어?"
유라는 갑자기 부드러운 말씨로 변했다.
준은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땅에 대고
유라는 준의 가슴과 허리에 흐르는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주면서 점차 그녀의 손은
준의 성난 듯 부푼 부분을 도닥거려 주었다.
"10시까지 아파트로 들어가겠어. 준, 서로
화난 건 그때 풀기로 해. 어서 조앙에게
가봐."
"그럼 10시에 보도록 하지."
준이 몸을 일으켜 되돌아섰을 때 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 잊지 마. 오늘밤이야."
준은 유라를 뒤로 하고 심카 쪽으로
걸어가면서 유라의 말대로 세상이 참 좁다고
생각했다.
넓은 천지에 갈 곳도 많은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수욕장에서 두 커플이
약속이나 한 듯 이쪽으로 드라이브를 온 것은
그것은 마치 유라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는
이렇게 각기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늘에 세워둔 차 속에서 조앙은 등받이를
낮춘 채 누워 있었다.
준은 곧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심카의 운전석에 앉은 그는 몸을 눕혔다.
카스테레오 흠악은 여전히 샹송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풀어보려고 물 속에
들어갔다가 유라를 만나서 더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도 이젠 유라에 관해서 퍽 관대해졌군.
자니 홍과 단둘이 온 유라를 만나고도 지나쳐
올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난 나답지 않은
일인가.
커졌는지, 포기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유라와의 사랑은 자신의 운명속에 본드처럼
붙어서 굳어버렸고 이제는 그것을 떼어내려면
뼈도 함께 부서지리라는 점이었다.
밤 10시에 아파트에서 만나자는 유라의
말은 다분히 조앙을 의식한 포승줄이었다.
준은 유라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바로 유라의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조앙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늘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준은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낮추고 눈을 감았다. 차 안의 쿨링 상태가
쾌적했고, 해가 큰 구름 속으로 들어간
후에는 바다로부터의 채광 반사도가
떨어졌으므로 차 안은 훨씬 아늑해진
준은 눈을 감았다.
조앙의 숨결소리가 음악과 함께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얼마나 잤는지. 문득 눈을 떠보니 바다는
어두웠다.
옆자리의 조앙은 보이지 않았다.
물결소리가 높았고 저쪽 모래벌에서
모닥불을 피운 젊은이들 몇 명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둠은 마치 검은 보자기를 해변에
씌워버린 것처럼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준은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조앙을 찾았다.
그는 모닥불 쪽으로 발을 옮기다가 문득
모래 위에 혼자 바다를 바라보며 웅크리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조앙이었다.
조앙은 준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왜 날 깨우지
않았지?"
"너무 곤히 잠드셔서 그대로 두었어요."
준은 오른팔을 벌려 조앙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조앙은 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기어
들어왔다. 조앙의 몸은 따뜻했다. 그녀의
머릿결에서 진한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본
조앙의 살냄새였다. 해변의 저쪽,
모닥불로부터 기타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들렸다.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아
옛나알을 말하리라 기쁜 우리 젊은 날-
불어와 준의 머리카락을 날렸고, 노래 소리는
파도 소리에 잠깐씩 빠져 끊어질 듯
계속되었다.
준이 손목 안에 잡힌 조앙의 팔은
보기보다는 훨씬 단단했다. 손끝에 밀리지
않은 피부였다.
잠시 후 조앙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준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잘 식별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깊고 잠잠했다. 준은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습도는
높았다.
준의 손은 이미 조앙의 가슴 속으로
더듬이처럼 파고들었다. 생소하고 낯선
살이었다. 살갗은 미끄럽고 단단했다.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기타 반주와 함께 그 노래는 계속
반복되었다. 준은 조앙의 가슴 속에서 손을
빼냈다.
"첨이에요."
그녀가 준에게 입을 떼며 나직히 말했다.
"뭘 말하는 거지?"
준은 얼핏 조앙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제 가슴을 만지신 거 말예요. 지금까지
아무도 제 가슴에 손을 넣어 본 남자는
없었어요."
"그랬었군."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앙은 프랑스에 애인을 두고 오지 않았나
보군."
제 탓이 크겠죠."
"그 탓이 뭔지 알고 싶군."
"프로포즈는 많이 받았지만 프랑스
남자들은 싫었어요."
"그건 왜지? 프랑스 남자들은 매력이 있을
텐데. 한국 남자들에 비해 훨씬 정감적이고
부드럽고……."
"그건 제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남자에
대한 기호가 퍽 까다롭고 힘든 것이 탓이죠.
쉽게 빠져들 만한 남자는 못 만났어요."
준은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처음 남자의 손을 허락한 일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그 나이에 어떻게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라는 이미 열 아홉 살부터 자기의
말고 여자의 가슴은 처음이었다.
"……전, 아빠 탓도 컸어요. 저의
남자관계에는 너무 엄격하셨어요. 아빠는
프랑스에서 사시지만 철저한 한국 남자예요."
"따님을 프랑스 남자한테 시집보내기가
싫으셨군."
"철저했어요. 이번에 제 한국 여행을
허락하시면서 농담삼아 말씀하셨어요. 남편감
하나 사냥해 오라구요."
"사냥해야 한다면 생포해야겠지."
"그저 아빠의 바람이지만 제 소망이기두
해요. 좋은 사람 만나기를 오래 기다렸어요.
그리고 만났어요. 지금."
어둠 속에서도 조앙의 눈빛은 또렷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만났어요. 지금…….'
갑자기 자신이 걸어온 과거와 유라와 같이
해온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정결하지 못한
흙탕물 속을 걸어온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난 조앙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놈이오."
준의 우울한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렸다가 사라졌다.
모닥불 주위로 너울거리는 젊은이들의
그림자가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한무더기의
불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싫어요. 자격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조앙은 세상을 너무 단순하고 깨끗하게만
보려고 해. 물론 그런 자세는 좋은 일이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만……."
준은 말끝을 흐렸다.
내 식으로 사람을 볼 줄 알아요."
조앙은 무릎걸음으로 준의 곁으로 다가와
준의 손을 잡아 투박하고 거친 그의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조앙의 입술
감촉은 젤리처럼 여리고 말랑말랑했다.
"저랑 같이 프랑스로 가요. 준, 거기 가면
아빠가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아마 아빠도 틀림없이 준을 좋아할 거예오.
틀림 없어요. 프랑스에 가서 저와 영화
공부를 해요, 네?"
조앙의 간청을 뿌리치듯 준은 모래밭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서너걸음 성큼성큼 바다
쪽을 향해 걸었다.
모든 걸 알아서 해준다? 참 좋은 말이지.
문득 준은 조앙이 더없이 행복한 여자라는
알아서 해주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감을 주는가.
"조앙, 내게 연연할 필요는 없소. 조앙은
나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들을 잘 갖춘 여자요."
준의 말에 조앙은 볼 부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는요? 누구는 꼭 준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시려는 건가요?"
준은 조앙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바닷바람에 휩쓸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맞다, 조앙. 너의 말대로 유라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의지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 유라에게는 나밖에 없어. 유라가
누가 있는가.
"이제 그런 말은 그만두고 돌아갈까?"
준이 달래듯 조앙의 팔을 잡자, 조앙이
애원하는 눈길로 준을 바라보았다.
"저…… 전, 오늘밤 돌아가지 않았으면
해요. 이 좋은 파도와 어둠과 준을 두고 또
어디로 가야죠? 다시 아파트의 콘크리트
속으루요? 정말이에요. 같이 있어 주세요."
조앙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났다.
"제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계시잖아요."
조앙은 차를 몰아 모랫벌을 빠져나왔다.
해변 호텔 앞에 차를 세운 조앙은 준을
바라보았다.
자니 홍의 볼보는 보이지 않았다.
"내리시겠어요?"
나왔다.
호텔 앞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준은 조앙이 설마 자기를 끌고 호텔로
가겠다는 것이 아닌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늘밤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은
해변의 차 속에서 얘기를 나누고 잠도 자고
가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이 차에서 내렸다.
조앙은 준의 곁에 바짝 붙으며 준의 팔을
끼었다.
"방 하나를 빌리겠어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우리 둘만의 방."
조앙이 부끄러운 듯 속삭였다.
"그럴 필요 없어. 조앙, 방을 빌리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해. 오늘은 저쪽
수풀에 가서 밤공기를 마시다가 가는 게
조앙이 발길을 멈추고 잠시동안 준의
기색을 살폈다. 서로의 의사가 엇갈리는
순간, 조앙이 재빨리 판단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자아- 조앙, 내 말을 들어. 수풀 속에
누워 별을 세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들의
별도 정하고……."
"좋아요. 오늘은 제가 양보하겠어요."
준은 조앙의 팔을 끌고 호텔 옆에 가꾸어
놓은 잔디를 통해 떡갈나무 가지가 우거진
둔덕에 도착했다.
그들은 잔디에 앉았고, 준은 조앙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자아 어느 별을 정할까, 조앙의 운명의
별은 어디 떴지?"
"여기예요."
콧날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난 그럼 지상에 뜬 별인가?"
"아주 큰별이죠. 내 옆에서 날 비추는
별이에요. 내 마음속으로 그 빛살들이 깊숙이
박혀서 정신을 못 차리게 흔들어 놓은 별."
"조앙은 너무 남자에게 자기 맘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흠이야.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정열적인 것인지……."
"둘다예요."
"서구적인 태도야, 그건. 한국여인은
속마음을 은근히 감추고 여자들은 좀더
콧대를 높이면서 남자의 접근을 유도해야
하는 건데."
"전 그런 거 싫어요. 위선적이에요."
조앙의 손이 준의 가슴 속으로 기어 들어와
그의 편편하고 질긴 근육을 손바닥으로
"유라 씨는 너무 미인이에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제가
상대가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 전 미리
물러나겠어요. 그건 여자의 외모가 기준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죠. 하지만 그게 기준이
안 된다면 전 자신이 있어요. 이상하게
그동안 만나면서 많은 부분이 저와 일치하는
것을 느꼈어요. 그건 두 사람을 헤어지지
못하게 하는 큰 조건이 된다고 생각해요.
서로 많은 뜻과 느낌이 같다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울로 돌아올 때는 준이 핸들을 잡았다.
강렬한 두 개의 헤드라이트 불빛은 마치 어둠
속을 더듬는 반디 같았다.
"조앙, 난 조앙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착각이란 말인가요?"
"아니야, 착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왜냐 하면 조앙은 그 나이에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으니까.
난 서른의 중반을 넘었고 이 나이에 세상을
다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흐름이
잡혀버렸다는 뜻이야. 심로라고 할까 마음의
길이 결정났어. 내 과거는 꼼짝할 수 없이 내
운명의 발목을 잡아맺고 그게 내 미래를
좌우할 거야.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 내 말."
"전 잘 모르겠어요."
"몰라도 그냥 그렇게 알아줬으면 해. 난
과거에 너무나 큰 짐 하나를 지고 있어서 그
짐을 계속 지고 가든지 아니면 없애야 해."
"그 짐이 뭔데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거야, 그건."
"운명론자란 따로 없어. 운명이나 과거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그 거미줄에
점점 빠져들거든."
조앙은 짧은 한숨을 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뭔지 모르지만 참 어렵게 사시는 것
같아요. 저는 어려서 아직 세상을 잘
모르지만 아주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야."
준은 조앙의 말에 갑자기 자신이 심각한
연극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난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살펴보자.
유라 때문은 아니었다.
유라는 제 인생을 원하는 대로 스스로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여자의 인생에
편승하고 있으면서 그 여자를 고향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고 있다.
내가 등에 지고 있는 짐이란 과거인가,
유라인가. 왜 과거를 짐으로 갖고 있는
것일까. 유라는 정말 내 등의 짐인가.
준의 머리 속은 실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조앙의 말이 맞다.
단순하게 살자. 난 그저 유라가 하야리로
되돌아가자고 할 때까지는 그녀의 곁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복잡한 문제는 하나도
없다.
심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준은 차를 하야리 식품점 앞에서 멈추었다.
"자아! 조앙, 핸들을 잡겠어?"
그는 조앙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커피 한잔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좋아, 아까 같은 떼를 쓰지 않는다면 커피
조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준은 조앙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서면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유라를
생각했다. 아니면 지금쯤 유라는 아파트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준은 암실의
불을 켜고 조앙과 함께 소파에서 늦은 밤의
커피를 나누었다.
"저랑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시는 거 대답을
기다리겠어요."
조앙이 일어나면서 다시 꺼낸 말이었다.
준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조앙이 돌아간 후 준은 침대에 몸을 눕히고
한참동안 멍청하게 누워 있었다. 조앙을 따라
프랑스로 잠적해 버릴까.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서울을 떠나 물 설고 낯선
외국땅에서 새롭게 살 수도 있었다.
먹는다면 이렇게 유라 옆에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괴롭고 외로운 나날을 허송하고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유라는 자니라는
녀석의 거미줄 같은 생활권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자신의 미래를 걷게 되리라.
생각해 보면 자신은 이제 유라를 위해 해야
할 역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준은
침대 밑에 손을 밀어넣어 권총을 꺼냈다.
이건 보자기에 싸서 한강물 속에 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권총을 들어 천장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이상하게도 권총을 손아귀에
넣으니 살의가 되살아났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붉은잠바, 자니 홍,
스티브,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유라와의 관련 때문에
아니다, 그들이 표적이 될 수가 없지.
나는 유라에 대한 미움을 그들 때문에
반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서울을
떠날 때는 내 발목을 붙들고 있는 과거를
말끔히 청산하고 난 후가 아니면 안 된다.
과거란 바로 유라였다. 유라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지 않는 한 나는 참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내가 유라를 떠나야 할 그때가
반드시 오리라.
그것은 준이 가진 확실한 예감이었다. 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준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는
자정을 지나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누굴까,
이 시간에 날 찾아온 사람이. 혹시 위층
식품점의 나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11시 이후 시간에는 내려오지
준은 권총을 든 채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요."
"저예요. 유라."
준은 유라의 음성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유라가 자기 집을 찾아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고 의외의 일이었다.
준은 아까 해수욕장에서 오늘밤 10시에
아파트로 오라고 했던 유라의 말을 떠올렸다.
준이 유라의 말을 무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라는 늘 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 사항을 말했고, 그녀의 말을 준은
자신과의 약속처럼 지켜왔었다.
준은 재빨리 방으로 되돌아가 급히 침대의
시트 밑으로 권총을 밀어 넣은 다음 현관으로
되돌아왔다.
문이 열리자 유라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
머리도 뒤로 묶은 채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들어와, 유라."
그의 말에도 유라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준이 유라에게 다가가 허리를 잡아끌자
그녀는 마지 못해 발을 움직였다.
술냄새가 확 끼쳤고, 다리는 많이 풀려
있었다. 유라는 거의 준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매를 말아올린 와이셔츠의
앞섶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았다.
"왜 그래, 유라."
준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라의
눈물은 늘 그가 유라에게 구축해 놓은 벽을
완벽하게 허물곤 했다.
그녀가 눈물을 보일 때는 그 눈물 속에
그녀의 가장 가난한 진실이 보엮고, 그녀의
슬픔은 언제나 하야리에서 버림받은 외로운
여자 금례로 되돌려 놓았다.
우린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하야리에서 서울로 피신해 온 의지할 데 없는
두 사람이야. 그런 말을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끌어당겼다.
그 이후 점차 유라가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유라는 강해져 갔고, 그만큼 유라는
준의 존재를 갈망하지 않아도 되었다.
"준, 이제 와서 날 버리겠다는 거야?"
유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버리다니, 유라. 내가 왜?"
"그렇잖음, 왜 밤 10시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날 그렇게 푸대접하는 거야."
기분이 아니었어."
"언제는 날 기분이 나서 만났어? 정작 내가
외로워서 필요할 때는 오지도 않고…… 좋아,
조앙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 만나더니 이젠
맘이 변했다 그거야? 아까 바다에서 만났을
때도 여간 속이 상하지 않았는데 내가 열
번을 참으면서 준을 그 여자한테 돌려보낸
거였어. 그런데 나와는 약속도 안 지키고
눈빠지게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랑곳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와서 잠이 와? 준, 말
좀 해 보라구. 난 자니 홍과 사업상 거기 간
거지만 준은 조앙하구 데이트하러 간 거
아니야? 내가 거기서 준의 체면봐서
보내줬으면 곧장 되돌아와야지. 그동안 밤이
늦도록 그년하구 뭘 하구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거야. 날 이렇게 가슴에 멍들게
좀. 왜 그렇게 말이 없어. 나한테 죄진 것
없으면 말해 보란 말야, 어서."
유라의 목청은 점차 높아져 갔고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흐느낌이 변해서 뇌성벽력의
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용히 말해, 유라. 여긴 아파트가
아니야."
"내가 성질 죽이구 사니까 속도 없는 줄
알아! 내가 누가 무서워서 목소리를 죽여.
내가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 준은 항상
불만인데, 내가 그 작자들 좋고 사랑해서
쫓아다닌다면 난 할말이 없어. 모델 생활이란
남자들을 늘 상대해야 하는 거구, 그런
친구들을 늘 상대해야 하는 거구, 그런
친구들 안 만나고 그럼 여자들만 골라서
만나란 말야! 비지니스로 이 남자 저 남자
쫓아다니는 찰거머리 같은 치들도 있는 거구.
내가 여자니까 유혹도 받는 거 감수해야지.
맨날 남자들한테 몸 사리고 피하고 상대
안하고, 그래서 끝내는 고립당하고
따돌림당해야 된단 말야?"
유라의 뺨에 흐른 눈물자국은 거의
말라버렸고, 눈화장에서 흘러내린 얼룩이
눈자위를 멍이 든 것처럼 얼룩져 보이게
했다.
준은 침대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알겠어. 이젠 준의 맘을 거울 보듯 빤히
들여다보고 속셈을 알았으니까 더이상 말하지
않겠어. 조앙인가 하는 그 멋진 여자와
결혼해서 하야리로 돌아가라구. 가서 준이
원하는 대로 큰 농장을 만들어 그년을 내
난 그따위 이젠 부럽지도 않아. 그애는
나처럼 준의 속을 썩이지도 않을 거구. 아주
잘됐어. 나두 이젠 준의 눈치보면서 사는 데
신물이 났어. 우린 여기서 헤어지는 거야. 난
다시는 준을 찾지도 않을 거니까, 날 찾지도
마. 전화도 하지 말구. 잘살아."
유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자신의 사진 패널을 들어올려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곧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고 문짝이
떨어지듯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준은 팔짱를 끼고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폭풍우를 견디고 난
다음 그 뒤에 남은 가벼운 바람에 휘휘거리는
나뭇잎처럼 갑자기 세상이 가라앉아 버린
느낌이 들었다.
사진 패녈을 바닥에서 주워올렸다. 긴
머릿발을 휘날리며 웃고 있는 유라의 얼굴이
그를 쓸쓸하게 했다.
준은 담배를 찾았으나 빈갑이었다.
재떨이에 피우다 남은 꽁초 하나를 헤집어
불을 붙였다.
우린 아마 헤어질 때는 이렇게 서로
종이처럼 구겨진 채 끝날 것이다. 준은 그런
예감이 들었었고, 지금처럼 이런 상태에서
서로가 찾지 않으면 그대로 끝나리라는
생각도 했다.
준은 몇 모금의 담배를 들이마시고 방문을
열었다. 현관문은 열린 채였다.
이 늦은 밤시간에 혼자 뛰쳐나간 유라가
걱정이 되었다. 택시는 잡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이런 시간에 여자 혼자는 위험한
준은 현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순간
준은 바로 담벼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유라를 발견했다. 그는 놀라면서도 한편
안심이 되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겠어, 유라."
그가 유라 앞에 서서 말했다.
그러자 유라는 몸을 일으켰고 갑자기
자신의 몸을 준에게 던졌다.
"준-."
그녀는 준의 가슴에 매달려 계속 흐느꼈다.
준은 잠자코 서 있었다.
"준, 나 여기서 자구 가겠어."
유라의 말소리가 흐느낌과 함께 낮게
스며나왔다.
준은 유라를 붙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침대로 부축했을 때 유라는 준을 향해
준은 유라를 안은 채 침대 위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날 날, 꼬옥 안아줘 준, 어서."
준이 유라를 두 팔로 안았을 때, 유라는
청색 스커트의 자크를 스스로 걷어내렸다.
유라가 그렇게 먼저 서두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몹시 갈증에 허덕였는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몇 점의 옷들을
내던졌고, 미처 보조를 맞추지 못한 준을
서둘러 밀어내린 다음, 준이 손 쓸 사이도
없이 스스로 손을 끌어넣었다.
그다음 유라는 눈을 감고 조용히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준의 열기는 너무 억세어져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눅이 들린 것처럼 움츠려 있던 기세가 몇
단계를 뛰어넘자 탄력을 더해갔다. 준이
두 손으로 준의 턱을 감싸쥐었다.
"준, 천천히 오래……."
준의 입은 굳게 다문 채였다.
유라의 눈자위에 진 얼룩은 뺨과 콧날조차
시커멓게 흐려놓았고,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조금 전에 광채가 빛나던
그녀의 눈은 안온하게 변했고, 독처럼
뿜어내던 입김은 따뜻한 온기로
부드러워졌다.
흩어졌던 세포들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고, 섬세하게 칼날을 세웠던 신경들이
풀어져서 제 줄기를 찾았다.
"난 당신을 의심했었어."
유라는 눈을 감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준은 유라의 눈썹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더듬어보고,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바라본
다음 몸을 눕혔다.
준은 아까 유라가 내던져버린 사진 패널이
창가에 비뚤어진 채 세워져 있는 것을
바라보았고,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눈속으로 파고드는 빛을 바라보았다.
불빛은 곧 그녀의 흐트러진 머릿다발에
가려서 그늘을 드리웠다.
침대의 스프링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속에서 자꾸 으스러졌다. 유라의 두 무릎은
옆구리의 뼈에 닿아 있었다. 형광등의 불빛이
유라의 머리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가려지곤 했다.
……오오늘도 걷는다아 마아는……
걷는다아마는…… 걷는다아…….
창 밖에서 어느 술주정꾼이 혀꼬부라진
아슴히 들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제풀에
겨워 넘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유라는 잠시동안 숨을 멈추더니
옆으로 쏟아지듯 엎드렸다.
그녀의 숨소리는 거의 끊어질 듯하다가
멈추었다. 준은 다시 몸을 뒤틀었다. 책상
위의 시계가 삐익거리는 금속성 음향을 세 번
울렸다.
유라는 고갤 옆으로 돌린 채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의 귀에는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뼈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유라의 크게
벌린 입 속에 웅크리고 있는 혀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힘이 집중된 상태에서 준의 어깨는
손톱으로 패였고, 그 다음은 눈도 보이지
한줄기의 소금기를 맛보았다.
7.비오는 날, Q와의 만남
9시가 5분 전을 가리고 있는 그 시간에
유라는 문화회관 앞 층계에서 있었다. 안개가
잔뜩 서린 수은등의 몽롱한 불빛을 바라보는
유라의 눈빛은 우울해 보였다. 아직 우산을
받아야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미리 앞질러 확대했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
속에는 이미 비가 내려서 촉촉히 젖어
있었다. 괜히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우산을
든 행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유라는 멋적은 생각이 들어 팔에 우산을
걸고 팔짱을 낀 채 돌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갔다. 발걸음이 너무 느렸으므로 다른
사람이 보면 할 일이 없어서 흐느적거리며
유라는 비도 오지 않는데 지레 자신이
초조해서 여기까지 나온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행동이 미운데다가 이런 데서
어슬렁거리면서 사내들의 흘끔거리는 시선과,
엉뚱한 사내와의 시비가 울화를 발화점까지
끌어올렸다.
어디서 분한 마음을 풀 것인가. 유라는
아까의 사내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유라는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준의
집으로 향했다. 울화를 식혀 줄 사람은
준밖에 없었다. 어떤 화풀이도 준은
받아주었고, 준은 그런 유라에게 더 큰
기쁨을 느끼곤 했었다.
준은 암실에 있었기 때문에 유라가 누른
벨소리를 처음에는 들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 문짝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자 유라의 성난 얼굴이 거의 폭발
직전에까지 올라가 있었다.
"아니? 유라?"
준은 기쁨과 함께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유라가 집에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니? 내가 온다고 했는데 문을 걸어
잠그고 그렇게 벨을 울려도 뭘하고 있었어,
도대체."
유라의 목소리는 지극히 억제된 상태였다.
손만 대면 천둥이 칠 듯 했다.
"암실에 있어서 듣지 못했어, 유라."
유라는 되는 대로 문 안으로 들어서서 준의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갔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준은 유라의 서슬에 잠시 주눅이 들었으나
"어휴, 냄새야! 시트는 언제 빨았는데
이렇게 고약하지? 방은 꼭 돼지우리같이
지저분하구."
유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코를
싸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홀아비 냄새지. 세탁을 안해서 그런 게
아니야."
준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돈은 시골에다 꼬불쳐두고 어디
쓰려구 이렇게 궁상을 떨어, 준. 도무지 이런
데서 이렇게 살면서 날 오라는 건 날
무시하는 거 아냐? 하야리 부자면 내가
한번을 와도 기분좋게 다녀갈 정도는 해놔야
하지 않겠어? 도무지 하나도 맘에 드는 게
없다구."
"왜 그래, 유라. 밖에서 또 무슨 일 있었나
"무슨 일? 무슨 일이라니, 내가 뭐 준에게
화풀이 하러 온 줄 알어? 나 솔직히 말해서
이런 구질구질한 데 오구 싶지 않어, 준이
돈이 없어서 이렇게 산다면 이해는 하겠어.
하지만 도대체 날 어떻게 보구…… 나
예민해서 구질구질한 꼴 못 보는 줄 알면서
이게 뭐야, 준. 참는데도 분수가 있지. 날
하야리로 데리고 가겠다는 사람이 그
조앙인가 심칸가 하는 년과 해수욕장이나
어울려 다니고, 그년 차를 빌려 타고
다니면서 쥬뎀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그래 나한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와?
보자보자 하니까 놀아나는 게 아주 가관이야.
이중 인격자 흉을 봤더니 바로 그런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내가
가만히 듣고 보니까 날 만만하게 보는
그년한테 쫓아가 유리창 다 부숴놓을 수
있어. 내 성질 잘 알지, 준. 끝까지 피 보는
거, 그걸 잘 알면서도 나한테 그러는 건 끝장
보겠다는 거 아냐?"
준은 유라의 기세가 점차 오릿募?
것을 알았다. 화가 극도에 다다르면 유라는
뭐든지 때려부숴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게 옆에 있으면 말의 파편을 우박처럼
맞고 있어야 했고, 나중에는 뭐가 날아올지도
몰랐다.
준은 그대로 되돌아서 암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유라는 화풀이가 상승세를 탈 무렵 준이
앞에서 사라지자 화가 한 단계를 뛰어올라
침대의 시트를 쭈욱 손으로 잡아빼서 방으로
내던졌고, 그 바람에 비뚤어진 매트리스를 두
그와 동시에 준이 침대의 베갯머리 매트
위에 찔러넣은 권총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라는 방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보자
쥐라도 본 듯 동작을 일시에 정지시키고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이윽고 유라는 조심스럽게 한발짝씩 권총을
향해 다가섰다. 그녀는 권총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게 무슨 권총인가? 준이 권총을 숨겨두고
있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유라는
준의 큰 비밀 하나를 엿본 것 같은 두려움에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준이 금방이라도 이
권총을 자기에게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권총을 보자, 자기를 향해 겨누고 있는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준이 권총을 은밀히 마련했다면,
그것은 무서운 증오심 때문이고, 그 표적이
바로 자기라는 확신이 갔다. 넌 언젠가 내
손으로 죽을지도 몰라. 왜냐 하면 난 널 죽일
수 있을 만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아, 준의
권총은 언젠가는 나를 하야리로 끌고가는 데
쓰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끝내 내가 버틸
때는 끝내…… 아아…… 하고 유라는
몸서리를 쳤다.
유라는 권총을 재빨리 자신의 핸드백 속에
넣고 자크를 채웠다.
유라는 곧 매트를 바로잡고 시트를 아까의
모습대로 매만졌다. 그녀는 준의 방을 다시
한번 휘익 돌아보았다. 눈초리는 밤쾡이처럼
책상 서랍을 열었다. 혹시 서랍에서 준이
숨기고 있는 또다른 비밀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유라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영사기 필름에서
확대 인화한 종미의 나체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유라가 제임즈의 방에서 보았던
종미의 필름이었다.
거기에는 샤넬 라인의 불여우들 사진들도
복사되어 있었다. 유라는 눈앞이 캄캄했다.
스티브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준이 이
사진들을 입수했을까?
무서운 음모가 준에게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준이 이 사진들을 은밀히 손에
넣었거나…….
원위치에 놓고 서랍을 닫았다. 이 모든
것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우연히 준에게로 온
것이 큰 수확을 준 셈이었다. 준이 자신의
신상에 관한 모든 것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체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라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체했던 준이 새삼스럽게
두려워졌다. 유라는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침대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얼굴에는 슬픔을
띠고 가장 외로운 자세로 그림자처럼 꼼짝도
안했다. 이윽고 저쪽에서 암실문이 열렸고,
준의 발짝 소리가 조용해진 방을 향해
다가왔다.
준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유라의 귓속으로
조용히 기어 들어왔다. 준의 비밀을 알고난
직후인 때문인지 준이 전혀 딴 남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준에 대해서는 모르는 구석이
없으리만큼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자신이 어리석고 단순했다는 것을 유라는
깨달았다.
그래,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열
길의 물 속보다 더 모르는 일이야. 준의
침대시트 밑에 권총이 숨겨져 있었고, 자신의
감쪽 같은 비밀로 알고 있던 필름 사건들을
준은 얼마나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준, 역시 당신은 무서운 사내야. 내가
당신으로부터 열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은 한 치 가까이
하면서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한 여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윽고 유라는 핸드백을 살며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혹시 준이 핸드백을
들어준다거나 드는 일을 미리 막기 위한
속셈이었으나, 유라는 준에게 마치 몸을
요구하는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듯 준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그런 동작을 취했다.
예상대로 준은 유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준은 유라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졌다.
그순간 유라는 침대에 앉은 채 준을 팔로
감싸안았다. 준은 선 채로 유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아귀에 한 움큼 들어왔다. 유라의
이빨이 준의 자크를 물고 천천히 밀어내리는
동안 그는 큰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그녀의 코와 뺨과 목덜미에 골고루
가볍게 닿은 후 입술의 촉감을 즐겼다.
"누구 거지, 존?"
유라의 눈길이 위로 올라왔다.
"가장 원하는 여자에게 소유권을 주겠어."
준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갑자기 유라가 몸을 일으키며 똑바로 섰다.
"그게 누구라고 생각해, 존."
"자신에게 물어봐, 유라."
준은 눈을 다시 뜨고 유라의 허리에 맺힌
매듭을 풀었다. 허리가 풀리고 몇 개의
단추가 열리자 유라의 검은 비옷 속은 싱싱한
살갗이 한장의 포장지에도 싸이지 않은 채
드러났다.
"아니? 무슨 일이지, 유라?"
준이 놀라서 물었다.
지키고 있어. 늘 이렇게 말야. 이 세상에서
나만큼 당신을 원하는 여자는 암두 없어.
그런 여자가 나 이외에 나타난다면 그게
누구든 내 손 안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
존."
유라의 입술은 꽃뱀의 혀 같았다.
"그래, 유라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유라
거야. 하지만 유라가 원하지 않아서 녹슬도록
버려두면서 자신의 것이라고 내세우지는
말아.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유라."
그녀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산낙지처럼 꿈틀대며 준의 위에
있었다.
단지 준이 유라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사랑이란 이렇게 무섭게 매달려 긴 흐느낌
쓸쓸하게 했다.
그녀는 그에게 산낙지처럼 오랜 시간
이상을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잠 속으로
직진해서 몇 시간을 자고 난 후에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여자고 돌변해 버리곤 했다.
도대체 유라의 극심한 변덕은 준을 늘
불안하고 지치게 만든다. 이제는 그런 것들이
생리처럼 관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유라는 잠의 늪속에 빠지지
않았다. 전보다 훨씬 단축된 시간이었고,
유라의 몸은 금세 식어서 청동구리 같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웬일이지? 유라."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존, 몸무게가 는
것도 아닌데 몸이 무거워졌어."
유라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왜
알았다. 처음에는 잊고 있었으나 행위 도중
문득 준의 권총과 자신의 스티브와의 사진이
머리에 떠오르자 갑자기 몸이 굳어져 버렸다.
준은 직감적으로 유라의 몸에 긴장이 온
것을 눈치챘다.
유라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준은
여전했다. 유라는 스스로의 변명과 위로를
준에게 지금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존, 난 언제나 당신 거야. 그것은 불을
보듯 확실한 사실이야. 난 언젠가는 하야리로
되돌아갈 거구. 존의 곁에 있게 될 거야.
하지만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어떤 일이
내 신상에 있어도 그 약속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존은 알고 있어야 해. 어떤
오해도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존, 존, 내
말이 들려? 내가 어떻게 살든 그건 존과
알겠어, 존?"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순간마저 그녀의 말을 부인할 만큼 그는
냉정하지 못했다.
"약속했어. 존, 내가 어떻게 살든 난 존과
늘 이렇게 만날 거구. 존은 날 오해하고
버려서는 절대 안 돼. 왜냐 하면 존, 우리가
서로의 것을 이렇게 굳게 지키고 있는 한
우리는 어떻게 살든 걱정없는 거야."
원하는 것을 서로 채우고 난 후 유라는
레인코트를 주워입고 바닥에 둔 핸드백을
들었다.
"나 집으로 가서 자야겠어, 존. 여기선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까."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가보았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고, 하늘은 음침하고 낮게 내려앉았다.
유라는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가슴이
불어오는 바람에 계속 설렁대며 뛰기
시작했다. 비야 제발 오지 말아 줘. 난 널
기다리지 않어. 내가 기다린 건 비가
아니라…….
유라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른 다음, 거실로
되돌아와 바닥에 누워 있는 저금통장을 발로
걷어찼다.
통장은 유라의 발등에 걸려 주방 쪽으로
날아가 식탁 밑에 떨어졌다.
그런 큰 액수를 발길로 차본 것도
처음이었다.
벗어내렸다.
벽에 붙은 대형거울 속에 자신의 벗은
전신이 불꽃처럼 서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떠받들어 보기도
하고 허리를 굽혀 보고 몸을 비틀어 보면서
갖가지 포즈를 통해서 보여지는 몸의
균형미를 거울 속으로 판단해 보았다.
영화대본 속에서도 모델인 여자주인공이
화려한 옷들 앞에서 나체로 서서 옷을 고르기
전에 자신의 몸매를 나르시스적 도취에 빠져
감상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유라는 그때
취할 연기를 미리 실연해 보았다.
그런 연기라면 어떤 포즈나 표정도 자신이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밤
9시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만나야 할 것인가. 그 사내는 화려한
왕줄나비 같은 차림을 좋아할 것인지 아니면
비에 어울리는 단순하고 외로운 차림을
좋아할 것인지.
유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여러 차례
궁리끝에 벨트가 있는 여름용 검은
레인코트를 집어올렸다. 그녀는 내복이라고는
한 장도 걸치지 않는 맨살에 레인코트를 입고
벨트로 허리를 죄었다. 하복부와 히프의
굴곡이 살갗에 밀착된 다음 레인코트는 무릎
아래에 머물렀고 윗부분은 단추를 세우고
코트의 깃을 목 위로 세웠다. 풀러내린
머리는 핀을 이용해서 몇 가닥 죄고 검은
레인모를 썼다.
됐어. 이만하면 빗속의 여인으로는
그만이야.
받쳐주었고 검은 옷 위로 몸매의 굴곡이 잘
드러나 보였다. 목덜미와 얼굴빛은 검은 빛깔
때문에 더욱 희고 매끄러운 발광체같이
돋보였다.
유라는 자신의 옷매무시를 잘 추스리면서
거실로 나왔다.
평소에 브래저는 거의 안해서 이제는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웠지만 허리 밑은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밤인데 뭐, 누가 보는 것도 아니구. 이런
날에는 습한 바람에 살갗을 불러놓아도
좋겠지.
그녀는 식탁 밑으로 허리를 굽혀
저금통장을 집어들고 코트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이젠 비만 내리면 되었다.
새어나왔다. 유라는 창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등으로 빗물 한방울이 스쳐왔다.
빗물의 감촉은 신선하고 차가웠다. 이제
오늘이 바로 약속한 그날이 되어버렸군. 뜻
모를 설레임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유라는 검은 박쥐 우산을 들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9시까지는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유라가 마악 아파트에서
나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누굴까?
유라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유라."
준의 음성이었다.
"어디야, 준."
"집에서 전화하는 거야. 비가 올 것
같아서……."
"비 말예요?"
유라는 딴청을 피웠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어. 아직 많이
내리지는 않지만 말야."
"오랜만에 비가 올 모양이네."
유라는 준이 왜 전화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준은 늘 자기와
만났었다. 단지 비가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둘이는 만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라도 준을 전화로 불러냈었다. 비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좋았다.
비는 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점액질이
생수처럼 만들어져 거센 욕구를 충동질했고,
충만한 감성을 부서뜨리지 않으면 참을 수
유라는 잠시 망설였다.
"별일 없으면 지금 갈게, 유라."
준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야, 준. 나 지금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는 참이었거든? 밖에 나가서 일이 빨리
끝나면 내가 전화를 하겠어. 하지만 전화가
없으면 일이 길어지는 줄 알라구."
전화기 앞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준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준은 지금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그다음 해야
할 말을 잊고 있으리라.
아마 그는 지금쯤 머리 속에서 자신에 대한
온갖 나쁜 상상을 피워 올리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밤에는 늦게 되나?"
준의 침울한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안 오면 일이 취소될 거니까 준한테 가겠어."
"왜 비가 문제가 되지?"
"영화 때문이야. 촬영팀이 헌팅을 하는데
내가 조인했으면 해서 말야."
유라는 준을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래야만 준이 납득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난 집에 있을
테니까 늦더라도 오라구. 문은 열어놓겠어."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볼께."
유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준을 그렇게
따돌릴 때마다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준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 사내 큐는 어떻게 나타날까.
벤츠를 타고 나타날까, 리무진을 타고
유라의 머리 속은 스크린처럼 그 남자에 대한
온갖 상상력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의 집은 구름 속의 궁전같이
어마어마하고 별장이 세계의 각처에 있고
혹시 개인용 호화여객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라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우산 속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어머!"
유라가 엉겁결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유라 씨죠?"
키가 크고 담갈색 싱글에 넥타이를 맨
사내가 엷은 색안경을 끼고 서 있었다.
"저어…… 큐 씨, 큐 씬가요?"
"큐라니요?"
"저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사내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고, 록
허드슨과에 속하는 미남이었다.
"유라 씨, 큐란 무슨 말입니까?"
그의 음성은 전화기에서 울려나오던 바로
그 소리였다. 팽팽하고 낭랑하고 힘이 넘치고
부드럽고 에로틱한 바로 그 목소리였다.
유라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를 처음
만난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전부터 오랫동안
만나온 듯했다.
"큐란 퀘션마크라는 뜻의 첫자예요. 그냥
제가 붙여본 이름이죠. 헌데 장욱 씨는
수표에 써 있는 이름이 본명이신가요? 물론
큰산이란 별칭이겠지만요."
"장욱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큐라고
불러주십시오."
"큐가 좋습니다. 비오는 날의 큐."
그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재미있는 분이군요."
사내는 우산 속에서 유라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안으며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때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길가에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다. 큐가
뒷도어를 열었다.
"타십시오, 유라 씨."
사내 말에 유라는 엉겁결에 올라탔다.
뒤이어 사내가 오르자 벤츠는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큐는 별로 말이 없었고 안경을 벗지 않아서
눈빛을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우산을 받을 정도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저는 꽤 망설였어요."
"그랬겠군요. 하지만 안개비도 비가
아닙니까? 맞으면 젖으니까요. 전 유라 씨가
오늘 나오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큐의 목소리는 전화기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의 말소리는 귓속에 척척
감겼다.
이런 미남에 젊고 건강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 것이다. 얼마나
좋은 복을 타고났으면 이렇게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조건들을 가질 수 있을까. 우선
첫인상은 그랬다.
벤츠가 한강다리를 건너서 아파트 지역을
지나더니 어느 한적한 공터에서 멈추었다.
"유라 씨, 잠시 내려서 차를 바꿔
타셔야겠습니다."
유라는 큐의 말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나리오대로 몸을 맡겨야 한다. 언제,
어디로,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질문이 길어질 것이다.
큐란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난 것부터
그것은 의문의 시작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저쪽 공터에 불빛이 켜진 채
프로펠러가 돌고 있는 헬리콥터가 보였다.
"이쪽입니다."
유라는 큐가 이끄는 대로 헬리콥터로
향했다. 역시 자가용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면 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안 되었다.
유라는 큐를 따라 헬리콥터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색 헬기는 그들이 타자 곧
어두운 하늘로 떠올랐다.
"정말 놀랐어요."
유라는 옆자리의 큐에게 말했다.
"미리 말씀을 안 드려서 죄송합니다. 유라
씨, 우리는 지금 해외로 향해 밤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해외라니요?"
"바다 밖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관계가 없습니다만 너무 어리둥절해서
현실감이 없어요."
유라는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불의 구슬들을 뿌려놓은 듯 질펀하게 퍼져
있는 서울의 야경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안개에서 벗어나자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안개의 구름층이 서울에만 얕게 몰려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음은 솜처럼 가볍게
날았다. 유라는 레인코트 속에 손을 넣어
딱딱한 통장을 손끝으로 잠시 만지작거렸다.
괜히 통장 속의 그 거액이 한낱 용돈에
오늘 돈을 돌려주기로 했기 때문에 얘기는
꺼내야 했다.
"저 말예요. 액수가 너무 많아서 놀라셨을
거예요."
유라는 큐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 비행기는 30분 후면
남해에 도착합니다. 작은 섬이죠. 섬이름을
큐라고 합시다. 큐 섬에 도착하신 다음에
되돌아가시는 시간은 유라 씨의 자유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유라 씨의
자유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만은 제게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지 혹시
짐작하시고 계십니까?"
"아뇨? 전혀……."
씨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해주시는
겁니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
약속이라면 얼마든지 지킬 수가 있다. 이런
밤의 어둠을 뚫고 솔개처럼 하늘로 멀리 날아
큐 섬의 둥지를 찾아가는 밀월여행을 둘만이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쪽은 유라였다.
유라는 날갯소리를 들으며 너무 황홀한
나머지 큐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큐가 아까
우산 속에서처럼 어깨를 감아주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과묵한 사내였다. 흰색
자가용 헬기는 마치 어둠 속을 나는
갈매기처럼 바다를 가로질러 아주 작은 섬에
도착했다.
섬은 육지로부터 멀지 않은 해안선
근처였다. 어둠 때문에 지형과 위치가
섬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헬기는 바다 아래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향해 마치 새가 먹이를 쪼아 먹기 위해
내려앉는 것처럼 하강을 시작했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완전히 멎은 다음에는 유라는
큐의 뒤를 따라내렸다. 조종간을 잡은
조종사에게 큐는 한 손을 들어보였다.
100여 미터 전방쯤 숲에 가린 집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유라 씨, 이제 다 왔습니다."
큐가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큐섬이오."
"제가 큐라고 말했다고 해서 모든 걸
큐라고 정해 버리는 건가요?"
유라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리고 여유있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다부진 콧날과 깊고 조용한 눈매며 큰
어깨가 유라의 눈에는 신뢰감과 함께
의지하고 싶은 힘을 느끼게 했다. 30대
중반쯤 되는 이 젊은 재벌은 누구일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는 남자를 만난 것은 행운인지도 몰랐다.
젊고 건강하고 미남에다가 돈의 위력이
가미된 그의 풍모는 남자의 매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숲이 가린 길목에
벤치가 있었다. 아마 정원으로 가꾸어 놓은
곳인 듯 했다.
"잠시 앉으실까요?"
그가 권하는 벤치에 유라는 앉았다.
"하늘을 날아서 이런 곳까지 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어요. 마치 꿈속을 날아온
유라의 말소리가 바닷바람에 휘휘 날렸다.
"너무 일방적으로 멀리 모셔서 죄송합니다.
거리는 멀지만 그대신 시간적으로는 퍽
단축이 되었지요."
그의 목소리는 들을수록 귀에 잘 감겨왔다.
남자의 음성이 에로틱하게 들린 것은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암튼 누군지는 모르지만 절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오히려 실례를 한 게 아닌가
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제가 전화로 돈 얘기를 꺼낸 것은 딴 뜻이
없었어요. 그저 치기에 불과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이 되자 전 당황했던
거예요.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제 뜻을
전하겠어요. 전 이런 돈을 요구해서 가질
유라는 코트에서 도장과 함께 든 통장을
꺼내 큐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큐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통장을
받아 다시 유라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렇게 되면 우린 전화로 장난을 한 게
됩니다. 유라 씨, 난 장난삼아 그래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유라 씨도 비오는 날의 약속을 지키신
게 아닙니까?"
"그래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전
놀란 거예요."
유라는 통장을 손에 쥔 채 떨었다.
큐가 유라의 어깨를 다시 감싸쥐었다.
"유라 씨 통장은 어서 넣으십시오. 우리들
얘기가 서로의 진실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돈을 되돌려주고 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지만 이게 진실이라면 이 액수는 너무
엄청나게 많아요. 전 말 한마디로 이런 돈을
고스란히 제 수중에 넣을 수는 도저히
없어요."
"액수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 돈은 유라 씨가 앞으로 대스타로서 발판을
굳히는 데 품위를 지키는 기금으로 한 사람의
팬이 기증한 것으로 아시면 됩니다. 돈으로
재능을 살 수는 없지만 돈은 재능을 키울 수
있죠. 큐는 그럴 만한 재력을 가졌습니다."
유라는 큐의 말을 꿈결처럼 듣고 있었다.
큐가 유라의 손에 든 통장을 큰 손으로
감싸쥐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유라의 목소리는 떨렸다.
"자아 그럼, 유라 씨. 큐의 집으로
드리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유라
씨와 큐와의 만남은 아름다운 비밀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유라 씨는
언제든지 원하시는 시간에 집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단지 꼭 지켜주실 일은 집안에
들어가셔서 절대로 놀라시지 말 것이며, 또
말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시오.
절대로 놀라지 말고 말을 하지 말 것, 이것만
지켜주십시오."
유라는 큐의 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놀라지 말고,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왜냐 하면 큐는 처음부터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며 그대신 그 이유에
대해 묻거나 주석을 붙이는 일을 싫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큐, 그렇게 암시적인 드릴과 재미를
들어가서 안 놀랄 것이며 절대로 말을
안하겠어.
무슨 수수께끼가 큐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인지 유라의 호기심은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유라는 큐가 안내한 대로 현관
앞으로 다가섰고 그가 문을 열기 전에 유라의
손을 잡았다.
"유라 씨?"
유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라 씨, 집에 들어가시면 큐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겠습니까?"
큐는 자기 자신을 마치 남처럼
객관화시키는 말투를 계속 쓰고 있었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말하는 뜻을 유라는 밤의 쾌락이라고
그가 유라의 승낙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라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유라 씨는 이제 진짜 큐를 만나게 될
겁니다."
유라는 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짜 큐가 자기가 아니라는 뜻이
사내의 눈빛 속에 써 있었다.
그가 유라의 등을 다독거렸다. 그리고 이내
현관문을 열었다.
유라의 등뒤로 현관문이 닫겼다. 갑자기
빗소리와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그녀의
귀에서 끊어졌다. 유라는 순간 젊은 큐가 그
모든 격정의 소리들을 모조리 끌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았구나.
심부름꾼에 불과한 존재였다.
거실은 어두웠으나 그녀가 들어서자
무대처럼 불빛이 차츰 밝아졌다.
건너편 소파에 웬 남자가 깊이 파묻혀
있었다. 그는 무대에 드러난 주인공처럼
보였다.
유라는 거실에 올라선 채 석고처럼
어리둥절한 자세로 서 있기만 했다.
불빛이 환해지자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남자가 이마에서 손을 떼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머!"
유라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벌렸다.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흰머리가 약간씩 희끗거리는 그는 유라가
누구인가는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아까 젊은 큐가 놀라지 말라고 당부한 뜻을
유라는 잘 알았다. 이 정도로 놀랄 일이라면
젊은 큐가 당부할 만한 일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을까. 이분이 바로
큐였다니. 사진만으로만 보아 왔던 그 사람의
실체가 눈앞에서 현실감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유라는 그가 손짓하는 대로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섰다.
"오느라고 수고했어, 유라."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끓는 가래 속에서
둔탁하게 흘러나왔다. 거의 들리지 않는 톤의
굵은 음성이었다. 유라는 그의 앞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보는 분에 대한
예의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밀었다.
유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유라의 손을 잡은 채 소파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라는 그의 압력에 밀려 소파
옆으로 끌려가 옆에 바짝 앉았다. 그의 힘은
마치 로보트의 팔처럼 거세게 느껴졌다.
그녀를 잡아당기는 그의 눈빛은 금세
불빛이 일어날 듯 강렬해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는 한 팔로 유라의 어깨를 감싼 채
뜨거운 눈빛으로 유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한 뼘 앞에 그의 콧날이 서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잔주름이 있었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턱이 위엄을 더해 주었다.
"놀랐소?"
그가 입을 움직였다.
유라는 그의 눈빛에 빨려들 것 같아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말했다.
"술 들겠소?"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때서야
몸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술을
가지러 간 동안 유라는 창가로 다가가 짙은
어둠 속에 잠긴 바다를 바라보았다.
빗소리와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집안이 완벽한 방음장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유라는 그때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비오는 날의 9시에 큐라는 함정에 빠져
밤하늘을 날아 섬까지 온 경로는 마치
착각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유라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판별이 안 되는 상태에 있었다. 이제
원하는 하룻밤을 위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었다.
이 함정은 이미 큐의 전화를 받은 그때부터
빠져들기 시작했던 일이었다. 유라는
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방이 이렇게 큰산인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생각할수록 부담스럽고 어려워져서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이 쓰였다. 큐가
아까의 그 젊은 녀석이었더라면 얼마나 멋진
밤을 기분좋게 지낼 수 있었을까. 이젠 저
남자를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일은 엄두조차 낼 수가 없는 생각이었다.
미리 알았던 일이라면 절대로 오지
않았으련만.
"자아-."
유라는 깜짝 놀라, 되돌아서서 그가 내미는
유리잔을 받았다.
"어려워 마라, 난 오늘밤 평범한 남자에
불과하니까."
그가 술잔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그래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될까요? 말하자면
격의없는 친구 사이처럼."
"좋아."
유라의 말에 그는 유라의 어깨를 툭치며
웃었다.
"큐라도 불러도 될까요?"
유라는 호칭을 통해서 상대방을 좀더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붙여드리는 오늘밤의 이름입니다."
"좋아, 좋아."
그는 또 한번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시종 유라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싹 붙이고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안은 채 위스키를
다 마실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이윽고
유라의 글라스에 위스키가 바닥이 나자 그는
유라에게서 떨어졌다.
맑은 불빛이 나직하게 줄어들었고 벽가에
놓여 있던 전축 턴테이블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블루스곡이었다.
음악이 실내에 가득히 차올랐다.
"자아-."
그가 유라에게 다가왔다. 유라의 코와 그의
코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유라는
맨발이었으므로 키가 거의 같았다. 그의 키가
큰편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스텝을 밟았다. 한 곡조의
블루스가 끝나자 그는 유라를 껴안은 채
그녀의 머릿다발에서 스며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짙고 강렬한 살냄새가 후각을
파고들었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유라의
옷단추를 풀었다. 검은 비옷 속에 들어앉아
있던 흰속살이 드러나자 그는 소중한
도자기라도 쓰다듬는 듯 가볍게 매만졌다.
그는 조금씩 서둘러 그녀의 허리띠를
풀어제쳤고 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속에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는 것을 보자 흠짓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복숭아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내듯
아주 조심스럽고 미세한 손놀림으로 유라를
모조리 벗겨내고 속살에 머금고 있는
그러나 그는 역시 프로급이어서 좀처럼
들뜨지 않고 침작했다.
그는 몇 겹의 자기 옷을 모조리
걷어내렸다.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서 그의
근육은 젊은 남자에게서 보이는 팽창력은
없었지만 나이치고는 단단한 살갗에 속했다.
그의 배는 편편했고, 어깨도 컸지만 그는
곤두서지 않았고 별로 우람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것은 참새처럼 날개를 오그려
붙어 있다가 서서히 융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들어가고 있는 풍선처럼
순식간에 부풀어올라서 그의 몸체에서 돌출한
어느 부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팽창되었다가 정지되었다.
"자아-."
그는 이번에도 자아…… 하는 식으로
그가 가리킨 곳은 거실의 왼쪽 구석에 있는
욕실문이었다.
욕실의 문을 열자 몽롱한 불빛 속에 낮은
안개층이 깔려 있었다. 10여 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실내의 바닥은 값비싼 흰색
타일이 깔려 있고 큰 목조 침대와 대형
거울과 각종 운동 기구들이 있었다.
욕조는 반질거리는 대리석 타원형으로 작은
수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는
서슴없이 욕조로 뛰어들어 몸을 담고
유라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는 목욕실의 화려한 실내장식과 크기에
놀라 잠시 입이 벌어졌다. 이렇게 좋은
욕탕은 처음이었다.
유라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알맞게 더운 물이 살갗을 부드럽게
유라를 바라보았다. 유라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리에 그를 만나 보게 된
것조차 황송한 일이었으나 옷을 벗고 걸친
것이 없어지자 마음의 부담은 없어졌다.
모든 사람이 경애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도
옷을 벗자, 다른 남자와 다를 것이 없는 한낱
수컷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의 눈길 속에 타오르고 있는
욕망의 시선 역시 다른 남자의 눈에서 흔히
보이는 탐욕의 눈길에 불과했다.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리자 긴장으로 단단해
있던 그에 대한 외경심도 차츰 녹았다. 잠시
후 그가 물소리를 찰랑대며 유라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물 속에서 손을 뻗어 유라의 온몸을
조심스럽게 매만졌고, 이윽고 욕탕에서
コ?의아해하는 문제를
풀어주고 싶어서 그래."
비누거품으로 그녀의 온몸을 덮었다.
그가 그녀의 발끝부터 마사지를 시작했다.
유라는 사양했지만 그가 원했다. 그의 큰
손은 비눗기를 밀리며 다리로부터 점차 위로
거슬러 올라왔고 비탈과 골짜기와 평야와
둔덕을 차례로 휩쓸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손으로 유라의 온몸을 청결하게 닦아내겠다는
집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이렇게 손으로 온몸을
매만진 적은 없었다. 그것은 여간 정성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늘 남들의 시중만 받았던 그가 오늘밤에는
한 여자의 때밀이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유라의 몸을 문질렀고
비눗기를 닦아낸 다음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누군가 미리 꾸며준 무대 장치처럼 치밀한
순서에 의해서 짜여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고, 유라 역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와 나눌 말이 도대체 머리 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침대 위에 동그랗게 내려비치던 흐린
미등이 유라의 눈속에 들어왔다. 약간의
외로움이 잠깐 동안 그녀의 가슴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준, 난 지금 생각지도 않은 깊은 함정에
빠져들었어.
물론 내 탓이긴 하지만, 지금 굉장히
부담스러워. 지금은 우선 당해놓고 보자는
심정뿐이야. 미안해. 유라는 딴 남자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준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5초 정도는 들곤 했다.
원하는 여자를 골라 갖은 수단으로
끌어다놓고 쾌락에 빠지는 것이 습관이겠지.
하지만 이분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남자를 하룻밤
차지한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있을까말까한
일이 아닌가.
그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고 그의
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아보고
싶어하는가.
그는 침대로 올라왔다.
그의 긴 머리칼은 흐트러져 이마를 가렸고
눈빛은 흐려 있었다.
"절 어떻게 아셨어요?"
유라는 손으로 그의 턱을 쓸면서 그윽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패션쇼를 보다가 유라를 발견했어."
그는 유라의 가슴을 손아귀로 가볍게
말아쥐면서 예의 그 둔탁한 목소리를
지어냈다.
"절 좋아하시나요?"
"그래서 만나게 된 게 아닌가. 첫눈에 날
사로잡았다구."
"영광입니다."
그는 이미 고개를 숙이고 마치 모유에
굶주린 아기처럼 유두를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모든 남자들은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났고, 여자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는
사실을 유라는 그때마다 머리에 떠올리곤
했다.
물론 남자와 살을 맞댈 때마다 감격의
차이는 있었지만 남자들이 자신에게 무섭게
되돌아가서 어머니의 살에 대한 그리움의
갈증을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단 한 방울의 젖도 나오지 않고 마개처럼
닫힌 유두를 그처럼 열심히 흡입하는
남자들의 심사가 어디에 있을까.
유아기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의 젖에 대한
욕구불만이 어른이 되면서 성적 욕망으로
변하는 것인가.
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반응이 예민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처음에는
신포도를 먹으면 몸서리가 쳐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오다가 온몸이 저리도록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으로 변한다.
그의 입은 흡착판처럼 떨어질 줄을 모르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는 닫힌 먼
아래서부터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유라가 그의 머리채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어머니가 없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뜨거운 눈빛과 콧날과 벌려진
입술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이분은 그 나이에도 아직 여자 앞에서는
아이가 되고 싶은가 보다. 그의 눈빛은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본 채 세운 뼈를 밀고 들어왔다. 유라는
그의 허리를 팔로 감고 뒷머리를 쓸었다.
"아직도 아기 같아요. 귀여운 아기."
그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더 깊이 들어올수록 그녀의 흡인력이 더
커졌다.
그가 보통남자들과 다른 힘을 가졌다는
아직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가 30대인지
40대인지 아니면 현재 나이 그대로인지는
아직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밀고
당기는 동안 유라는 이 막강한 남자에게
패배감을 주고 싶은 욕심이 솟았다.
그 많은 돈을 휴지처럼 던지는 이 남자의
오만과 자신을 이런 곳에 꼼짝없이 빠져들게
한 심리적 보복심이 군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이윽고
비등점에 이르렀는지 그녀를 무섭게
움켜쥐면서 몇 번을 부들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의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겨우
자신을 일으킨 다음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나이에 비해서는 굉장한 숫기를
가졌어. 결국 당해내지는 못했지만 말야.
공상에 시달리다 겨우 눈을 붙였다.
역시 준을 당해낼 남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이분이 젊었을 때는 굉장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다.
파도소리에 유라는 눈을 떴다.
그녀는 쟁반같이 크고 푸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창가에는 등을 보인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라는 깜짝 놀라서 흰
시트를 잡아올려 자신의 몸을 가렸다. 등을
돌리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잘 주무셨습니까, 유라 씨."
젊은 큐가 유라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어머!"
간밤의 그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젊은
큐가 앉아 있자, 마치 그가 어젯밤 자기와
동침했던 남자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된 셈예요?"
유라가 젊은 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뭘 말입니까?"
"그분은 어디 가셨나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 그분은 너무
바쁘셔서 여기 오래 계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유라는 언성을 높였다.
"난 보시다시피 큐입니다."
"그분의 비서인가요?"
"그분과 나와의 관계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유라 씨는 그분이 누군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는 유라에게 조금이라도 빈정댄다거나
경멸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언제나 깎듯이
예의를 지켰다.
"주무시는 동안 들어와서 죄송합니다만 곧
나가겠습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서 도어 쪽으로
다가섰다.
"잠깐…… 절 보셨나요?"
유라가 그를 세우고 물었다.
"뭘 말입니까?"
"아까 제가 잠든 모습 말예요."
유라는 시트로 몸을 가리면서 물었다. 아까
눈을 뜨기 전까지 자기의 알몸이 거의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어야만 아는 일이 아니라면 묻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유라도 따라 웃었다.
"앞으로 절 어떻게 하실 거죠?"
"지금부터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라
씨, 이곳에서 며칠 쉬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흘 이상은 안 됩니다. 이 섬에서 나가시고
싶으시면 언제라도 현관에 있는 벨을
누르시면 모터보트가 유라 씨를 육지로
모십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에는 운전기사에게 모든 걸
맡기시면 됩니다."
"맡기다니요?"
"유라 씨는 앞으로 제 말씀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뭘 말인가요? 저의 뭘 맡으신 거죠."
"모든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내 운명도 맡으시나요?"
유라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이 섬에서 나가고 싶어요."
유라는 침대 앞에 서 있는 젊은 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흰 와이셔츠에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수염을 깎은 구렛나룻의 면도자국이 다부져
보였다. 별로 표정이 없고, 싸늘하게
느껴지는 대신 완강해 보이는 외모와
부드러운 가슴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손을 뻗어 유라의 턱을 매만지며
유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보았다. 유라는
그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 자아, 난 바빠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구요.
떠나기 전에 다짐해 둘 말은, 이 사실을
다른 지시가 없는 한 남자관계를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라 씨가 앞으로
꼭 지켜야 할 철칙입니다."
젊은 큐는 그 부분에 관해서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명령이시군요."
유라는 속으로 반발감이 올라왔다.
"이건 명령입니다."
"만일 그 명령을 안 따른다면 어떤 벌칙이
있나요?"
"엄청난 대가가 따릅니다."
"위협하시는 건가요?"
"난 위협은 안합니다. 그건 충고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내 충고는 경고와 다를
바가 없죠. 유라 씨는 현명하기 때문에 제
말뜻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그대신 충고를 잘 따르면 제게 어떤
대가가 오죠?"
"유라 씨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돈, 명예, 인기……."
유라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젊은 큐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지금이라도 그런 것들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너무 늦었습니다. 유라 씨, 유라 씨는
이제 어제의 유라 씨가 아닙니다. 이제 유라
씨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졌습니다."
유라는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는 목덜미로부터 부드럽고
완만한 선으로 뻗어나갔고, 살결은 희고
뻗쳐나온 검은 갈기를 바라보았다. 유라는
갑자기 자신이 섬에 유폐되어 버린 것과
동시에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니고 끝이
났다는 허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난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유라는 마음속의 느낌에 반발이라도 하듯
이 젊은 큐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유라 씨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유라 씨의 경쟁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윙크를 보내고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방에서 나갔다.
유라는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저만큼 벽거울 속에 쪼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오만하고 요염한 자신의 몸매를
오후에는 서울로 가리라 생각했다.
유라의 전화는 며칠째 캄캄했다.
아마 촬영이 시작되어 어딘가 로케의
현장으로 떠났겠거니 하고 준은 자기에게
소식도 없이 떠난 유라만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얼마 전 유라가 다녀간 후부터 침대
밑에 감추어두었던 권총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준은 그것이 유라와 연관지어졌다.
준은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잡지의 일들이
밀리면서 바빠졌고 몇 가지 큰 일을 마치고
나자 시간의 틈이 났다.
준은 자니 패션 쪽으로 연락을 해 본 결과
촬영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로케는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영화팀들도 유라가
수 없다고 불평이 다락 같았다.
준은 암실작업을 대강 마무리지어 놓고
해질 무렵이 되어 유라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아파트의 주차장에는 눈에 익은 심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조앙은 프랑스에서
도급 맡은 일을 위해서 당분간 아파트에서
두문불출하게 됐다고 말했기 때문에 지금쯤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리라.
준은 아파트 문이 굳게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안으로부터는 감감소식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지 문을 따고 들어가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주머니에서 철사 꼬챙이를 꺼내들고
열쇠구멍에 맞추어 넣었다.
오랜만이었지만 유라의 도어 자물쇠는
훤하게 알았다.
문을 열었을 때 준의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집은 텅비어 있었다.
준은 신발을 벗지 않고 거실로 뛰어들어
갔으나 가구는 한조각도 남지 않고 비어
있었다. 준은 방문을 모조리 열어 보고
화장실 문을 밀쳐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산사태처럼 와르르와르르 무너져 메어지는
것을 느꼈다. 준의 가슴은 이윽고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유라의 목욕탕에 걸린 벽거울 속에 서
있는 남자를 가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빠뜨린 채 문틀에 기대고 서서
자신의 흘러내린 머릿다발을 갈퀴처럼
밀어올리고 서 있었다.
아름다운 인어처럼 욕탕속에서 뛰쳐 나오던
욕탕은 메말라서 퀴퀴한 냄새만 새어나왔다.
집의 어느 구석이고 유라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유라가 신던 헌 슬리퍼 한
켤레가 베란다에 한짝씩 뒤집혀서 던져져
있을 뿐이었다.
기어코 떠났군.
그날 밤 늦게 집을 찾아와서 몸을 나눈
것이 이별의 예식이었던 것이라고 준은
생각을 굴렸다. 그는 흡사 고독한 밤의
늑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아파트
안을 서성댔다. 그는 이윽고 베란다로 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유라가 신던 슬리퍼를
나란히 맞추어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도 모르게 감쪽같이
집을 옮겨야 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전화로 뭘 사고 싶다고
분명한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준은 어둠
속에서 한참동안 석고처럼 앉아 있었다.
준은 유라와 만난 마지막 밤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다.
날짜는 벌써 열흘 전으로 거슬러 내려갔다.
언젠가 유라가 자기 곁을 떠날 때는 이렇게
말없이, 그리고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리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둘 사이는 너무 강력한 접착제가
붙어 있어서 서로를 떼어 놓으면 서로가
상처를 내고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것은
서로가 가장 아픈 일이었고,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유라, 나는 언젠가는 널 이렇게 흔적없이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 네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이렇게 소식없이 훌쩍 떠나버린
너에게 나는 지금 이상하게도 연민대신
분노가 들끓어 오르는 것은 뭐지?
이젠 넌 나와의 관계를 이렇게
청산하겠다고 눈으로 보여주었고, 앞으로도
날 찾지 말라는 것을 행동으로 말해 준 거야.
앞으로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되든 너와 나는
과거의 한 남자와 한 여자였을 뿐, 지금은
아주 다른 타인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자.
그래, 유라.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해
보겠어. 하지만 만일 그것이 내 노력이나
눈물로도 안 될 때는 나는 그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건 모르는 일이야. 왜냐 하면 난
너를 제외시킨 내 미래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가지와 줄기를
잘라낸다고 해서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고 할
수가 없어. 너 역시 어떻게 살든 준이라는
남자의 그림자를 악몽처럼 거느리게 되겠지.
빌어먹을. 준은 불쑥 몸을 일으키고 유라의
아파트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서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때 그의
뒤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멈추었고,
빠앙하는 귀에 익은 클랙션 소리가 났다.
준이 몸을 돌리자 불빛이 꺼졌다.
심카였다.
조앙이 유리를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저예요."
조앙은 외로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준은 조앙이 밀어주는 차의 도어를 열고
"이상한 예감이에요. 전 지금 전화를
하다가 안 돼서, 댁으로 가려고 차를
끌고나온 길이에요. 여기 오신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했군요."
조앙은 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웬일로 날 찾아가지?"
준의 음성은 우울했다.
"일 끝냈거든요. 며칠째 꼬박 마무리
작업을 하고 붓을 놓고 나니까 너무 허탈하고
반가워서 술 한잔 사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일을 기어코 끝냈군. 난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암튼 수고 많았어,
조앙."
"고마워요."
조앙은 준의 우울한 분위기가 자신에게까지
심카는 서울의 불빛을 빠져나와 포플러가
우거진 교외를 반딧불처럼 날아갔다.
카스테레오에서 우울한 샹송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준의 샹송의 음률이 마치 자신의 심정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심카는 도로를 벗어나 어느 낮은 산의
풀숲 속으로 몸체를 밀어넣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꺼지고 내등도 꺼지자 조앙은 카세트
버튼도 꺼버렸다. 완벽한 어둠과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차창을
통해서 어슴프레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조앙이 준을 향해 입을 열엇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그런 것 같았어요. 유라 씨 만나시고
조앙의 목소리는 경색된 어조 때문인지
약간 떨렸다.
"찾아갔더니 이사를 가고 없더군."
"네? 이사를요?"
조앙은 준의 말이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데 이사를
가는 데도 알리지 않고 찾아가서야
이사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일까.
조앙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이 텅 비어 있으니까 이사를 간
거겠지."
"연락도 없었나요?"
"그동안 서로 바빴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말이 끊겼다.
"준, 유라 씨와는 왜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두 분이 오래 전부터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조앙은 오래전부터 준에게 묻고 싶은 말을
드디어 꺼냈다.
"서로의 일이 있었으니까. 알다시피
모델이란 결혼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운
직업이니까, 나 역시 사진 찍는 일에 바빠
있었구."
"이해할 수 없어요. 결혼생활이라는 게 뭐
따로 있나요? 둘이 한 공간을 쓴다는 거 외에
또 뭐가 있죠?"
"조앙은 프랑스식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있지만 한국식으로
결혼생활이란 뭔가 대단히 부담스럽고
복잡하게 생각되거든…… 게다가 인기
직업이란 결혼을 하면 주가가 떨어지구……."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둘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면서 함께 살지 않고 있다는
친구관계도 아니면서 말예요. 더구나 이사
가는 것도 알리지 않는다면 그건 친구보다 더
나을 게 없잖겠어요?"
"……."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 유라 씨를 길에서 만났을 때 내가
형을 만나는 걸 잔뜩 경계하는 말투를
늘어놓았어요. 마치 소꼽장난하는
기집애들처럼 말예요."
"조앙의 눈으로 보면 우린 좀 이상한
관계지."
"이상해도 보통은 아니에요. 전 두 사람의
내막은 모르지만 사람이란 재산처럼 소유한는
것은 아니에요. 두 분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서로를 독점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애정의 열정은 두
앙상한 줄기로만 서로 얽혀 있는 ……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준은 조앙의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라와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석이
조앙의 눈을 통해서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서로 과거와 현재로만 관습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관계는 참 많아요. 한국에
오니까 그런 남녀관계와 부부들이 참
많았어요.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구요.
때문에 열정도 없었어요. 마지못하고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난 유라 씨가 준형을 갖고
싶지 않지만 남주기는 싫은 그런 상태라는
것을 눈치로 깨달았어요. 형은 유라 같지는
않았어요."
"유라라는 여자의 요기에 매달려 있는
남자예요. 과거는 잘 모르지만 준형은 만일
유라 씨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아주 피곤한
사랑일 거예요. 그런 사랑은 피로해서 자신이
지쳐서 까무라칠 때까지 아마 깨닫지 못할
거예요. 왜냐 하면 환상이란 사라지기
전까지는 현실처럼 보이니까요."
"그럼 유라는 나의 환상이란 말인가?"
"어떤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여자가
그래요. 그건 그 남자로서는 아주 잘못
걸려든 거예요."
준은 조앙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을까?"
"지금은 모르시겠지만 유라에게서 빠져나온
다음에는 깨닫게 될 거예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그 여자에게 감금되어 있었는가를
"방법이 있을까?"
"저예요. 제게 몰두하세요. 저하고
프랑스로 가는 거예요."
조앙의 손이 준의 팔을 붙들었다.
"단지 유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원하신다면 그게 탈출로예요. 하지만 전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준은 눈을 감았다.
조앙과 프랑스로 간다면 유라와는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져야 하고 고향 하야리의
귀향도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유라를 중심으로 설계했던 미래는 완전히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
이미 유라는 은밀히 집을 옮겨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준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에 제가 한 말의 확답을 제게 오늘
주세요. 전 이곳 일을 끝냈구요. 곧 프랑스로
되돌아가야 해요. 만일 프랑스로 가기
싫으시다면 전 갔다가 돌아올 거예요. 파리냐
서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절 받아주느냐 안
받아주느냐 그게 문제예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준은 조앙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작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조앙을 기쁘게 해줄 수가 없어. 난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리라는 것을 잘
알아. 난 누구하고나 무슨 일이건 쉽게
타협하지 못해. 모든 일이 완벽하게
해결되기까지는."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조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 남자는
것일까.
"아직도 유라 씨를 사랑하시는군요."
조앙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 내가 유라를 사랑하고
있는지 증오하고 있는지. 하지만 어느 것이든
둘 중에 하나일 거야, 아마."
"유라 씨를 찾으실 건가요?"
조앙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찾으신 다음에는요?"
"난 유라를 그냥둘 수가 없어."
준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그냥둘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유라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대로 그렇게
살도록 그냥둘 수가 없어."
"그럼 강제로 같이 살겠다는 건가요?"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유라에게 그럴 권리가
있나요?"
"없어."
"없으면서……."
"단지 내 증오심이 유라를 그냥 두지 못할
거야, 아마. 왜냐 하면 그 여자는 내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만 둬, 날
노여움으로 떨게 하지 마, 유라. 널 그대로
둔 건 사랑이라는……."
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면서
언성을 한껏 높였다가 갑자기 자신의 분노에
놀랐는지 목소리를 죽였다. 조앙은 준의 언성
속에서 튀어나온 몇 개의 단어로 준과 유라와
얽힌 과거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문득
조앙은 입을 다문 채 잠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준의 심사가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의 화약고에 불을 당겨서는 안 돼.
지금 준은 유라라는 여자의 행방불명에
신경이 곤두선 고양이의 귀처럼 예민해져
있는 거야.
그의 귀에는 지금 자기의 말이 한마디도
먹혀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집에 가셔서 조용히 쉬셔야겠어요. 제가
괜히 이런 곳에 와서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나 봐요."
조앙이 시동을 걸었다.
"조앙, 일 끝난 거 축하해. 며칠 후엔 내
마음도 가라앉게 될 거야. 그때 좋은
마음으로 한잔 하기로 하지."
조앙이 차가 다시 오던 길을 되잡아
달렸다.
교외 지역에서 점차 서울로 진입할수록
불빛들이 많아졌고 차량의 소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준은 이렇게 우글거리는
풍뎅이들처럼 기어다니는 차량이며 밤의
불빛들이 번쩍거리는 혼탁한 서울에서
하루바삐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유라의 행방을 찾는
일이고, 유라를 만나면 이제는 그 만남이
어쩌면 두 사람의 마지막 상면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준, 제 아파트에 가서 위스키 한잔 드시고
가시겠어요?"
조앙이 차의 핸들을 아파트 쪽으로 꺾으며
말했다.
"심각해지셨어요?"
조앙이 준을 향해 큰소리를 내질렀다.
"조금."
"심각해 하지 마세요. 인생은 세라비예요."
조앙이 카세트를 켰다.
기타로 편곡한 재즈음악이었다.
빌어먹을, 잠깐씩 유라를 생각하면 세상은
갑자기 심각해지고 마음은 미모사의
이파리처럼 여리게 움직였다. 인생은 아주
간단한 1차 방정식의 공식 같은 거야.
유라와의 문제를 그런 공식 속에 넣으면
얼마나 편리한 해답이 나오는지 모른다.
지금, 조앙의 마음처럼 단순해질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간단 명료해질까.
심카가 아파트에서 도착하자 준은 갑자기
이 아파트가 이사 간 후 다시 와본
한번도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유라가 없는 이 아파트는 이제 남의
아파트였다. 아직은 조앙이 살고 있는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트가 갑자기
그렇게 낯선 아파트로 보일 수가 없었다.
조앙이 차에서 내리자 준도 밖으로 나왔다.
"조앙, 난 이대로 집으로 가야겠어.
술마시면 세상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 안
되겠어."
준이 조앙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앙은 준의 손을 잡고 악수를 끝냈다.
"예까지 와서 맘이 달라지셨어요? 난 괜히
기대가 컸잖아요?"
"나중에 한잔 하는 게 좋겠어."
"그럼 택시로 가시겠어요?"
"그러지."
억제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내일이나 모레라두
변덕이 생기면 훌쩍 비행기를 탈 거예요.
소식 없으면 파리에 있는 줄로 알고 계세요."
조앙은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면서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래선 안 되지. 떠날 때는 작별의
예식쯤은 가져야지 않겠어?"
준은 수은등 불빛에 비친 조앙의 얼굴이
오늘따라 퍽 처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작별의 예식은 보봐르에게나 필요한
거예요. 난 보봐르를 좋아하지만 신봉하지는
않아요."
"정말, 전화 한통 없이 떠나진 않겠지?"
준은 엉거주춤 서서 심각하게 물었다.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으니까 지금 확답은
일은 아니잖아요. 인연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아무리 떼어놓아도 둘이 죽자고 만나니까.
혹시 우리 둘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을 줄
알아요?"
"좋아, 그런 기대는 미래에 걸지."
"정말이에요. 그럼 나 들어가겠어요."
준은 조앙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앙은 몸을 되돌려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아파트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준은
왼쪽 코너를 돌아 아파트 관리사무실을
찾아갔다. 유라가 언제쯤 이사를 갔는지 알고
싶었다.
"…… 아! 네에, 한 일주일쯤 됐을 겁니다.
저한테는 단독 주택을 사서 가시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평창동 어디라든가? 암튼 아파트가
팔려서 내일은 새 주인이 이사올 겁니다."
준은 사무실에서 되돌아 나왔다. 갑자기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유라가 눈을 떴을 때는 벽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햇살의
미립자들이 강렬하게 침투되고 있었다.
절간처럼 조용한 방에 감도는 침묵에 유라는
낯선 도시에 온 이방인 같은 착각에 빠졌다.
잠시 후 새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실크 잠옷을 걷어올리고 쟁반같이
넓고 둥근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탁 트인 전경 아래로 도시의 집들이 낮은
지붕을 잇대며 수그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산의 중턱 숲에 세워진 이 집은
마치 높은 망루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남해의 섬에서 서울로 오자 곧 입주하게 된
집이었다. 모든 일은 어른의 지시를 받은
비오는 날의 큐가 빈틈없이 처리해 주었다.
혹시 어른이 지시가 없었더라도 큐에게는
그런 재량권쯤은 있어 보였다. 평창동 숲속의
저택으로 둥지를 옮긴 후 유라는 그동안 빈
집의 가구들을 두 주일에 걸쳐 완벽하게
들여놓았다.
큐는 이따금씩 전화만 했을 뿐 얼굴도
디밀지 않았고, 어른은 얼굴 한번 비치지
않았다. 유라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숲속의 저택에는 중년이 지난 아주머니 한
사람이 집안 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유라는
벽에 설치된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노크소리가 났고 깔끔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
사람이 냅킨을 덮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에는 계란 후라이, 빵과 치즈와 커피가
"목욕물은 준비가 되었는데요, 아씨."
유라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손거울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강릉댁이 아씨라고
하는 말이 약간 귀에 거슬렸으나 아가씨라고
불러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헌데 우유는 욕탕에 반쯤만
채우지 그랬어요."
"반만 채웠어요."
"그럼 됐어요."
강릉댁이 방에서 나가자 유라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다가 문득 준의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은 준에게 전화라도 해야 할까? 하지만
준을 만나서 무슨 변명을 궁색하게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아파트를 말없이 비우고
은밀히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것은 어떤
이유로도 준이 용납치 않으리라는 것을
준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하긴 이번
일은 상의할 성질이 아니었다. 이건 준에게
작별의 선포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준을 잊지 못하면서도, 준이라는 이름 속에
얽힌 자신의 비참한 과거와 죄의 얼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끈질긴 탈출 욕구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미래는
하야리라는 죄악의 땅이 형벌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준은 자기를 그 땅으로 끌고갈
호송인이었다. 유라, 잘한 거야. 이런 기회에
넌 준에게서 벗어나야 해. 유라는 혼잣말처럼
자신에게 타일렀다.
유라가 목욕을 마치고 응접실로 나왔을 때
싱글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타임지를
읽고 있었다. 그의 면도날에 밀린 구렛나룻과
턱이 푸르게 돋보였다.
"오랜만이오, 유라 씨."
그가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유라는 웃음을 띤 채 큐의 맞은편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어른께서는 지금 방콕에 계십니다. 회의가
끝나시면 모레쯤 귀국하게 됩니다."
유라는 큐로부터 어른의 행방을 처음
보고받았다. 어른의 스케줄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캄캄한 것이 당연했고,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왜 안 따라가셨나요?"
큐의 눈빛은 늘 잘 닦은 검은돌처럼
반질거렸다. 그의 눈빛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있다.
그는 어른의 거대한 조직을 컴퓨터처럼 한
손에 조작할 수 있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었다. 어른의 결단과 선택은 늘 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에서 조직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딴 수재에다가 유도가 8단이며 수영선수라는
것을 유라는 운전기사로부터 들었다.
그의 어른이 총애하는 3명의 참모비서
가운데 하나였으나 최근에는 수석비서로
뛰어올라 어른의 측근에서 대부분의 문제를
한손에 처리하는 파워맨으로 부상했다.
그 이유는 큐가 가장 야심과 배짱이 크다는
것이 어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바빠서 유라 씨를 찾아뵙지
지금부터 3시간을 할애할 수가 있습니다."
큐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3시간? 난 그런 데이트에는 응하지
못하겠는데요. 나한테는 24시간을 다
주겠다는 남자들이 줄을 서고 있거든요."
유라는 느긋한 웃음을 흘리며 큐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런가요? 그럼 이 몸은 그만 물러가야
되겠군요. 유라 씨의 앞으로의 계획은 스스로
상상과 착각을 자유롭게 하시도록
해두겠습니다."
"제 계획 말인가요?"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이 3시간이라도 아쉬운
대로 허락해야겠군요."
"그럼 나가실까요?"
시간을 굉장히 아끼는 사람 같았다. 눈빛은
초침처럼 움직였다. 유라는 큐를 따라 벤츠에
올라타면서 오늘 그가 가져온 블랙박스 속에
자신의 미래가 얼마나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릴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이 어른의 지시인지 아니면 큐의
계획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든 미래는 마치
큐가 잡은 핸들처럼 그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능숙하게 차를 몰고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큐가 모는 벤츠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70층 건물의 지하창고 속으로
큰 바퀴벌레처럼 기어들어갔다. 유라는 큐를
따라 빌딩의 승강기를 잡아탔고, 승강기는
70층까지 삽시간에 치솟아 올랐다.
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손잡이 안에
"바로 여기요, 유라 씨."
그가 방문을 열었다.
그의 방은 거실과 침실이 따로 있는 아늑한
밀실이었다. 거실에는 큰 책상이 있었고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윈도우 브라인드를
젖히자 시내 전경이 발치 아래로 드러났고
거리의 차들은 흡사 미니 카처럼 움직였다.
"구름 위에 뜬 집 같군요."
유라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감탄했다.
"여기가 내 집이오. 유라 씨, 세상이 내 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소?"
큐는 웃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넥타이를 반쯤
풀었다. 하얀 와이셔츠 겉으로 완강한 어깨와
가슴의 근육이 돋보였다.
"호텔이긴 하지만 홀아비 냄새를 감출 수
없군요."
해보였지만, 사실은 은은한 향수냄새
때문이었다.
"내 집에는 유라 씨가 처음이오."
"어머 정말이에요? 영광이군요."
"그만큼 유라 씨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도 되는 거요."
그의 말에 유라는 고개를 돌려 큐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온도가 높았다.
"중요하다는 뜻은……."
유라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눈빛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이윽고 시선을 바꾸며
큰 의자 두 개를 창 쪽으로 옮겨놓았다. 둘은
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전 말예요. 잘 아시겠지만 갑자기
변해 버린 제 생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가 정말 나인가 의심이 들구요."
유라는 큐 앞에서의 모든 점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분간일 거요. 유라 씨는 곧 적응하게 될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유라 씨의 머리와
재능과 미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과분한 말씀이에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난 절대로 봉을 잡았다는 생각은 않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매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이에요. 너무 솔직히
말씀드린 건가요?"
유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큐 역시 놀라지 않았다.
"그럼 유라 씨가 어른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뭐죠?"
큐의 질문은 면도날 같았다.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스크린 스타, 그게 내
꿈이에요. 내가 모델이 된 것은 배우로서의
야심을 키우기 위한 발판이었어요. 하지만
내게 그 기회가 오지 않았어요. 나는
스크린에 데뷔하기도 전에 내 주위의 많은
남자들을 당해 내야 하는 곤혹을 무섭게
치러왔어요. 그 이유는 남자들이 내 연기를
원하기 전에 내 몸을 먼저 원했구요. 날
이용만 하려 했어요. 내 말뜻을
알아듣겠어요?"
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내 야심에 불을 당겨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푼돈이나 만지면서 영화
기획한답시고 날 자기들이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는 밥으로 여기고 콧대 세우는
신출나기들 앞에서 내 자존심 구겨가며
한심했구요. 이젠 그들에게 지쳤어요. 그건
제가 힘이 없기 때문에 휘둘려온 거예요. 난
연기에 정말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모두들 날 이용하기 위해 미끼만
던졌을 뿐 내 욕심을 채워줄 만한 임자를 못
만났던 거예요. 제가 어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제 희망일 뿐이지 강제사항은
아니죠. 난 정말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여건과 기회를 못 만나서
재능을 썩이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 팀을
만들어 영화 한 편에 손을 대고 싶어요. 혹시
어른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유라는 큐 앞에서 두 주먹을 쥐어보이며
열변을 토했다. 자기 자신의 맺힌 한을
"……만일 어른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소, 유라 씨."
그는 담배를 꺼내 유라에게 권하고 불을
당겼다.
"용납이라니요. 난 희망 사항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결국 그분은 나를 원했고, 난 내
기분에 빠져서 백지 수표 함정에 말려들지
않았어요? 비오는 날의 큐, 그건 바로 당신의
머리 속에 쓴 시나리오가 아니었나요? 난
내가 스스로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아요. 그게 나쁜
일이었다면 그 사람 탓이 아니라 내 탓이기
때문이에요. 그대신 난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어른의 집에서 떠날 수가 있어요. 난 숲속의
그 저택에는 미련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가 있다구요."
유라 씨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라 씨는 어른을 모시고 있는
한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할 수가 없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도 안 됩니다. 그밖에 모든
것들은 모두 허용됩니다만 그것도 어른이
용납하시는 한도 내에서입니다."
큐는 허공에 담배연기를 뿜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큐의 말은 낮고 부드러웠지만
한랭전선을 표시하는 저기압처럼 차고
단단하게 유라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제게 지금 경고하시는 건가요?"
유라는 큐의 말을 칼끝처럼 느끼며,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일종의 경고긴 하지만 난 유라 씨에게
어른이 원하시는 바를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난 그분을 보좌하고 있을 뿐,
"그럼 얘기는 끝났군요. 난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훌륭한 분으로서 존경했습니다.
지금도 내 만은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어른이 제 자유를 규제해야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유라는 좀더 튀어나오려는 울화를 억제하며
말했다.
"어른은 유라 씨가 숲속의 저택에서 조용히
취미생활을 즐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큐는 이번에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마치
허공에 대고 독백하듯 말했다.
"절 이 공중누각으로 데려온 것은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요?"
유라는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화 내지 말고 앉으십시오. 내가 유라 씨를
"그게 어쨌다는 거죠?"
"유라 씨는 앞으로 어른의 말씀을
거역하시면 안 됩니다."
"안 된다니요, 내가 어른의 부인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내가 어른의 뜻에 따라야 할
이유가 뭐죠? 내가 무슨 죄라도 졌다는
말인가요?"
"흥분하지 말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바로
그 점입니다. 유라 씨가 어른의 부인이라면
그분의 뜻을 따르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내가 어른의 부인이라면
그분의 말은 하늘같이 들리겠죠. 아마 당연히
그래야 할 거구요. 하지만 난 그분을 한번
잠자리에 모셨을 뿐이에요. 어른이 원하지
않거나 내가 싫으면 그건 쉽게 끝나는
거예요. 난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나, 내가
못해요. 그건 내 본능이에요. 알겠어요? 난
오늘 당장 그 집에서 떠나겠어요. 어른께서
무슨 명목으로 내 자유를 묶어두시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들으니 내 꼴이
정말 우스워지는군요. 설마 그 집에 살게
해준 대가라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유라는 자신이 지금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럴 때일수록 큐처럼
냉정해져야 한다고 맘 먹었다.
"물론 어른은 아무 대가 없이 유라 씨에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리시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유라 씨, 다음에 어른을 만나면 유라
씨의 뜻을 분명히 어른께 전하셔야 합니다."
"제가요? 내 입으로요?"
"왜, 안 됩니까?"
"보세요. 날 놀리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 책임은 지금도 모면할 수 없어요.
채홍사답게 어른에게 직접 전해 주세요. 내가
존경하고 있는 어른을 잠시나마 가까이
모셨던 것은 영광이었구요, 그것은 비밀로
오래 간직하겠다구요."
"유라 씨."
큐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유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촉광이 더
높았다.
"만일 어른께서 유라 씨를 부인으로
맞겠다면 유라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큐의 말에 유라는 문득 거닐던 발길을 딱
멈추고 큐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시동안 숨이 정지되는 것 같았다.
"나를 아내로? …… 어른이 그런 말씀을
비치시던가요?"
"왜 그러십니까 유라 씨, 놀랬습니까?"
큐의 눈빛은 유라의 표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큐의 말이 그녀의 정곡을 찔렀으나 유라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유라는 큐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그런 말을 낚싯밥처럼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머리가
컴퓨터처럼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머리속에 들어앉아서, 멋대로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중이라고 유라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큐, 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래요. 난 돈에
흥미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돈은 사람에게 행복의 조건은
되지만 돈 자체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욕심도 많고 꿈도 크기 때문에 나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보면 잘못도
저지르고 나쁜 사람도 될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어요.
제가 결혼을 안한 것도 한 남자에게
매어버리기 싫은 이유도 컸구요. 아직은
자유스럽게 살아야 할 터전이 내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날 시험해
보려고 하지 마세요. 시험은
백지수표만으로도 족해요."
유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너무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했으므로 큐는 갑자기 유라가
다른 여자처럼 느껴졌다.
"유라 씨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어른은
나이가 많고 건강도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이제 그분은 점차 일에서 벗어나 안정과
노후를 보살펴 줄 따뜻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제가 그 역할에 적합한 여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죠?"
"어른의 가족관계는 복잡합니다. 또 재산에
얽힌 아들간의 압력도 큰 편이죠. 사업
쪽으로는 어른은 노익장으로서의 파워를 더욱
과시해야 할 입장입니다. 젊고 아름다운 새
신부는 그룹의 힘을 확신시켜주는 심리적인
효과를 주게 되겠지요. 유라 씨는 여러 명의
물망에 오른 후보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제가
유라 씨에게 특별히 배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어른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그렇습니다."
유라는 큐의 말에 잠시 말이 없었다. 이
문제를 여기서 쉽게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어른이 그 나이에 젊은 아내를 필요로
하는지 전 이해할 수 없군요."
"어른의 뜻은 나도 잘은 모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은 그분의 입장에서 살펴본
이유에 불과하지만 그분의 깊은 뜻을 저 역시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오늘날의 이
위치를 가진것은 운도 좋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오묘한
이치와 결단과 추진력입니다. 어른은 아마
자기만이 헤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어떤 이유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유를 헤아리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유라의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큐도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단지 유라는 어른이 결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되는 일이었다.
유라는 세상이 갑자기 분홍빛으로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큐는 그동안 자기를 숲속의
저택 속에 감금시킨 저의가 그 때문이었다면
그를 나무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황금빛 미래를 감추어 둔 채 침묵을
지킨 그에게 감사의 말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만일, 만일 큐의 말대로 내가 어른의
마지막 부인이 될 강력한 후보자 중의
하나라면 나는 지금 큐에게 잘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라는 그에게
아첨을 떨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른은 이미 나를 만났고, 그분의 의중은
백에 팔십은 나를 간택하리라고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큐는 이미
어른의 결정을 알고 있으면서 나한테는
그것을 숨기며 내 의중을 간파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
"저도 그 후보 중의 하나에 올랐다면
기대를 가져야 되겠군요."
유라는 들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며
일부러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유라 씨는 그게 별로 달갑지가 않다는
투로 말씀하시는군요."
큐는 유라의 표정을 좀더 진지하게 살폈다.
"달갑지가 않다니요. 난 이런 식으로는
이건 매음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박사님은 악덕 포주가 되는 셈이구요. 그리고
어른은 천하의 한량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만일 제가 어른의 부인이 된다면 난 왕비가
되고 큐는 어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준
전령자가 되구요. 또 어른은 저를
선택함으로써 무서운 사람으로 그 위세를
내외에 떨치게 되는 거예요. 물론 저는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큐에게
웃어보였다.
"정말 원하신다면 난 유라 씨에게 표를
던지겠습니다. 그 대신 그 대가로 제게 무얼
주시겠습니까?"
유라는 문득 바로 그 말을 꺼내기 위해서
"대가? ……물론 있죠. 예부터 중매가
잘되면 쌀이 세 가마지만 잘못되면 뺨이 세
대라고 했죠. 이건 다른 사람의 중매가
아니라 박사님의 중매니까 그 대가는 꽤
크리라고 보는데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겠어요? 물론 제가 치를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시겠죠?"
"유라 씨는 제가 무슨 대가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지수표?"
그 말에 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유라 씨는 내게 백지수표 한
장을 건네주시면 됩니다."
유라는 그의 농담 속에 진담이 섞여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감지했다. 컴퓨터 같은 큐의
머리는 이미 어른의 유산 액수를 계산에
牙羚珦뼉層?몰랐다.
"좋아요. 우리의 협상은 끝났어요. 일이
잘되기를 바라겠어요."
유라가 일어서서 큐에게 악수를 청했다.
"농담이지만 수표에는 뭘 요구하실
건가요?"
"유라 씨."
큐의 미소는 싸늘했다.
8.푸른 사자
유라는 마당의 마른 잔디 위로 비껴든
석양의 햇살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백여
평이 넘는 정원의 담쟁이덩굴이 뻗어 올라간
울타리 아래 코스모스와 사르비아가 한데
어울려 화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의 베란다 창가의 등나무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큐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은 후부터 자신이
탄 운명의 배는 도저히 그 행방을 가늠할 수
없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런 뜻밖의
행운이 자기 운명 속에 매복되어 있었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젊은 나이에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일약 황후처럼
행세하고 사는 것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일이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한낱 여배우에서 모나코
왕비가 되어 평생을 그림같이 살지 않았는가.
유라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손을 흔들며 우아하게 웃던
그레이스의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어느덧 자신이 바로 그 모습으로 바뀌는
상상을 했다.
어른의 나이는 여든 살, 남은 여생을 그와
함께 소일하며 꿈처럼 살다가, 그가 죽은
후에는 막대한 유산을 손아귀에 거머쥔다.
그후에 나는 그 재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 아아-
유라는 황홀한 상태에서 잠시 감았던 눈을
사흘 동안의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갔기
때문에 집은 비어 있었다. 유라는 담배를
뽑아 입에 물고 연기 한 모금을 뿜어내며
길고 큰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찌뿌둥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맞은편 구석에 놓인 대형
텔레비전에 비디오 코드를 꽂아 화면을
작동시킨 다음 등의자로 되돌아와 다시 몸을
묻었다. 엠마뉴엘 부인의 역을 맡은 실비아
크리스텔이 챙이 넓은 멋진 모자를 쓰고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간다.
카메라가 그녀의 푸른 눈과 입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잡아간다. 그녀가 어느 집
소파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프란시스 레이 음악의 강렬하면서도
우수적인 배경 음악이 화면의 영상을 더욱
드러나고, 카메라의 렌즈가 그녀의 유두를
클로즈업시켰고, 여인의 혀가 그 부분을
감아쥔다.
유라 씨는 지금 그 후보에 올라 있으니
어느 남자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큐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유라는 몸을 일으키고
화면을 응시했다.
심한 갈망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지진처럼 반응이 왔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니 준과의 그날
밤 이후 스무 날이 더 지났다.
준이 그리웠다. 그 순간 유라는 준이 왜
자기에게 그토록 필요한 남자였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준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그동안 준을 떠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 욕망은 살갗의 전신을 실핏줄로 뜨겁게
데우며 머리를 혼란시켰다.
그것은 비어 있는 위가 입에서 갈증과 저작
욕구를 발동시키듯, 자궁을 수축시키며
무섭게 흡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본능은 품위와는 별개였다. 배고프면 침이
흐르는 것처럼 성 역시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사람도 다른 동물처럼 식욕과 성욕과,
그리고 깊은 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유라는 리모트로 화면을 끄고 가슴에 손을
넣은 채 손아귀 안에 들어온 한 웅큼의
살갗을 비틀었다.
외로움이나 괴로움은 혼자 억제하며 참아낼
수 있지만 성은 혼자 힘으로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준과의 규칙적인 성생활이 그동안 자신에게
남자들에게도 여유를 보일 수 있을 만큼
넉넉했는지를 유라는 비로소 깨달았다.
만일 사람이 배가 고프면 더러운 빵조차
아쉬운 법이지만, 집에 빵을 둔 사람은
절대로 남의 빵에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과
이치가 같았다.
그렇다고 그녀는 누구에게나 손을 벌릴
만큼 자존심이 녹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배가
당장 고프다는 이유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같은 남자들을 손쉽게 다룰 수는 없었다.
준을 빼놓고는 지금까지 어느 남자와도
만족을 얻지 못했다.
붉은잠바, 스티브, 자니 홍 그리고
어른조차도 준을 능가할 수만은 없었다.
어른은 섬세하고 능란했지만 쇠진해 있어서
그와의 생활 가운데 성은 가장 큰 불만이
있었다.
지금까지 거칠고 야생적인 힘으로 자기를
다스려 온 남자, 준. 그가 만일 자기 곁에
얌전한 독일산 포인터처럼 지켜만 준다면
유라는 준에게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 과거의 모든 죄악을
거머쥐고 있는 처형의 땅, 하야리로 나를
회귀시키려는 무서운 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과거를 벗어나자면 하야리에서
멀어져야 하고, 하야리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는 준에게서 떠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준을 잊기 위해서는 준과 그동안 강하게
단련된 성을 잊어야 한다. 만일 그 남자를
잊지 못해 다시 되돌아간다면 자신은 젊고
하야리 땅에 묻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유라는 진저리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준을 잊기 위해서라도 한 남자가
필요해. 그 남자는 바로 어른이 될 수도
있지만, 이 폭발적인 정열을 불태우기에는
어른은 너무 약해. 그것이 과연 돈과 명예로
대신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정말
모르겠어. 유라는 깊은 고통 속에
사로잡혔다.
지금 당장 준이 거친 혀와 거센 손아귀와
뱀처럼 감아줄 굵은 팔이며 깊은 계곡이
밑바닥까지 내리는 뿌리가 절실하게
그리웠다.
명분이 중요한가, 현실이 중요한가. 아니면
아니다, 아니다.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유라는 전화의 다이얼을 또박또박 돌린
다음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댔다.
신호음이 몇 차례 귓바퀴를 타고 울렸고
유라의 가슴은 그에 따라 파르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야리 식품점의 나형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바꿔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이 들렸고, 잠시 후 숨이 찬
듯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단숨에
달려온 것 같았다.
"나요, 준이요."
유라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면서 감정이 끓어 올랐다. 목이 꽉
메어와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자기
스스로도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준이라구요."
잠시 후 그가 전화기에서 떨어지면서 나형,
유라 전화가 맞아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준의 들뜬 음성, 불안한 어투가 고스란히
유라의 귀에 들려왔다. 괜한 짓을 했구나
전화를 안했어야 하는 건데, 그의 외로운
늑대같이 황량해진 표정이 무서운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유라의 가슴에 불씨를
당겼다.
"유라야? 전화 안 끊었으면 대답해. 어서
어서 빨리……."
준의 음성은 광야에서 고독하게 짖는
늑대의 울음처럼 처량하게 들렸다. 유라는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말은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야. 어서."
유라는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통해 준에게 울음소리를
계속 들려줄 수는 없었다.
나같이 드세고 눈물도 감정도 없는
모래처럼 부서진 여자가 준의 과거를
망쳐놓고 그의 아버지와 대나무를 몽땅
불살라 버리고 끝내는 그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지금 와서 그에게 무슨 낯을 들 수 있을
것인가.
유라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다가 지쳐 고개를 들었다. 울음은 얼마간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지만 울음이 끝난
다음에 온 적막과 외로움을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유라는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어머! 언니 웬일이야. 소식이 끊겨서 몹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유?"
종미의 놀라움은 예상보다 컸다.
"잘 있어. 헌데 종미, 나 좀 만날 수
있겠어?"
"그럼 언니가 만나자는데 왜 안 나가겠어.
다른 약속 다 취소하고 갈 테니까 어디서
만날까? 언니가 정해."
"이태원 뮤즈 지하실에서 1시간 후에."
"어머! 언니, 거긴 좀 야한 데 아냐."
"오늘밤에는 좀 야해지고 싶어."
"좋아요. 나도 언니 덕분에 오랜만에
야해볼까. 그럼 이따가 봐요."
전화를 끊고 나니 지금까지 울적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유라는 옷방으로 들어가
남성복 스타일의 셔츠와 바지를 입고 주홍색
체크무늬 대형 자켓을 걸쳤다. 유라는
신고 대문을 나섰다. 언덕길을 내려서자
택시가 다가왔다.
"이태원이요."
유라는 택시의 뒷시트에 몸을 웅크렸다.
뮤즈 살롱 지하실에 도착한 유라는 옷깃을
세우고 모자를 눌러 쓴 채 구석 테이블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꽤 멀리 떨어진 무대에서는 강렬한 조명
불빛과 함께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이
울려나왔고,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춤판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제 머잖아는 이런 곳에
와서 디스코를 출 기회도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자유는 한톨의 씨앗만큼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어른의 부인이 되려면 사려가 깊고,
지성적이며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웃을 때도
디스코 홀 출입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조차도 자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큐가 안다면 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어른의 부인으로 후보에 오른 여인이
양코들과 흑인들이 태반인 디스코 홀에 섞여
있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 봐도 좀수를 줄
수가 없는 행위였다. 잠시 후 프러밍고
모자와 바지와 레인코트 스타일의 검은
망토를 걸친 종미가 유라 곁으로 다가왔다.
둘은 패션모델답게 독특한 차림과
액세서리를 했음인지 주위의 여자들이 눈여겨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종미는 유라의 뒤로 와서 꼬옥 껴안고
그녀의 모자를 벗기며 뺨에 키스를 했다.
"애정의 표시가 멋지구나."
느낀다.
"우린 애인 사이였잖우?"
종미가 모자를 벗고 코트를 벗어서 의자
위에 걸쳤다.
"10분만 조인할까?"
"그래, 긴장이나 풀고……."
유라는 쟈켓을 벗고 종미를 따라 휘황한
무대 위로 올라섰다. 음악은 모두가 빌보드
차트의 베스트 텐이었다.
유라의 앞에서 키가 장대 같은 흑인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며 춤에 열광했다. 거의
벗다시피한 쇼 걸 몇몇이 스탠드 위에서
조명들을 받으며 윤기나는 몸매를 과시하고
있었다. 유라와 종미는 세 곡을 계속해서
추고 난 후 테이블로 돌아와 백주 한 병씩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풀렸다. 집 구석에서 여왕처럼 차리고 앉아
음악을 듣고 있을 때는 자신의 생각에 깊이
빠져 사소한 문제들이 굉장히 큰 고민처럼
머리를 죄어 왔으나, 종미와 편한 마음으로
길거리의 부랑자처럼 걷자 세상이 좀더
커보였다.
그들은 거리에서 코인으로 커피를 빼들고
종이컵을 든 채 가로등 밑을 걸었다.
싸아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냉기로
감싸주었다.
"언니가 날 만나자고 하다니 너무
뜻밖이었어요.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었어.
어떻게 된 거요, 도대체?"
종미가 플라타너스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어떻게 되긴."
"실종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으니
"실종?"
유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떠도는 유령
같은 소문의 정체를 종미로부터 듣고 싶었다.
"언니가 소문없이 사라졌다는 루머가 쫙
퍼졌어. 그게 사실이었잖아. 아파트를
소리없이 옮기고 전화두 두절됐지. 게다가 준
선배도 나한테 언니 소식을 물어볼 정도가
됐으니…… 더구나 악성 루머가 돌아서
언니가 지금은 미국에 가 있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 소식을 몰랐으니까."
"미국에 왜 갔다는 거지?"
"돈 많은 재미교포 2세가 언닐 물어갔대나?
그게 사실이우?"
종미는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웃었다.
"그럴 듯하군. 그밖에는?"
"배가 불러서 꼼짝 못하게 됐다는 거야.
"얼씨구."
"헌데 자니 쪽 영화 일은 지금까지 추진이
안 되었나 보죠."
"대본까지 나왔는데 계속 질척거려. 역시
영화는 영화판에서 놀던 사람들이
만들어야지, 패션회사 친구들한테
맡겨놓으니까 치수만 재느라고 볼일 다
보더라구.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제격이지……."
"맞아요, 언니. 표 전무도 자니패션이 언니
내세워서 영화한다니까 한참 들떠서 날
내세우겠다고 야단이더니 영화제작법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자라목처럼 그 말이 쑥
들어갔다. 헌데 언니는 그동안 어디 있었수?
내게도 그건 비밀이우? 하긴 준 선배한테도
안 알렸으니 나한테야……."
보였다. 종미로서는 그 문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은 아직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집 한
채를 숲속에 마련하고 은거해 버렸어. 계획한
일도 잘 안 되고 내 개인문제도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 숨어버린 거야. 오늘은
너무 답답해서 너와 얘기라도 나눌까 해서
이렇게 나왔지. 세상 소식도 궁금하구
해서……."
"그러니까 바람쐬러 나온 거군. 날
불러줘서 고마워요 언니, 나두 패션세계에서
밉네 곱네 해두 말 터놓고 지내는 건
언니밖에 없었어. 지난번 스티브 녀석의
포르노 필름 문제 언니가 해결해 줘서 우리들
몇몇이 살아난 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때 우리가 매장되었더라면 우린 벌써
살아남아서 근근히 밥이라도 먹고 독립해서
사는 거 여간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지난 일이야. 과거 얘기는 꺼내지두
말자구. 그래, 샤넬라인은 잘되구 있어?"
"지방 매장도 거의 팔고 서울만 겨우
유지할 정도로 다 망했지 뭐. 워낙
패션회사들이 무섭게 난립하면서 자금 공세로
나오니까 조직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돈 가진
사람들이 판을 휩쓰는 세상이라구.
붉은잠바는 아직도 기가 살아서 큰소리
치지만 옛날에 비하면 사람 많이 변했어."
"너한테는?"
"우린 전속에서 모두 빠져서 이젠 프로로
뛰고 있어. 언니, 샤넬라인 옷 입어본 지도
오래 됐다구."
유라는 종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단했다. 돈이 세력이지만 그 위에 머리가
군림하지 않으면 돈은 바닥이 나기
마련이었다.
유라는 종미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언니, 마징거 알아?"
종미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더니 뒷면에 전화번호를 써주었다.
"이건 뭐지?"
"마징거 제트의 전화번호야. 마사지맨이지.
짧은 밤은 10만 원이구 긴 밤은 20이야.
서비스가 기막히고 비밀이 보장될 거야. 우리
같은 독신녀에게 가끔씩 필요한 존재야.
요긴할 때 이용해요. 언니."
가을은 저혼자 깊어갔고, 바람결은 점차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2층의 유리창을
시들어버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라는 체크무늬 통바지에
허술한 스웨터를 걸치고 머리를 뒤로 묶은 채
대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백화점에 들렀다가 저녁을
사먹고 되돌아올 작정이었다. 강릉댁이 왜
그렇게 아낙네 차림으로 운전기사도 부르지
않고 외출하느냐고 물었지만, 유라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유라는 거리를 걷다가 쇼윈도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시골에서 갓 올라와
어리둥절해 하는 처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길도
주지 않는 평범한 차림이 훨씬 자유롭다는
것을 느꼈다.
뭇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남자들의
음험한 눈초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유라는 백화점의 여성의류 매장 앞을
거닐었다. 늦가을과 겨울을 위한 갖가지
화려한 옷들이 최신 유행의 패션바람을 타고
쏟아져나와 있었다. 목이 없는 검은 마네킹이
걸친 흰가죽 반코트가 눈에 선뜻 잡혔다.
유라가 앞으로 다가가서 코트를
만지작거리다가 가격표를 들추어 보았다.
자니 패션에서 나온 겨울 콜렉션이었다.
유라가 멈칫 놀라 고개를 들어 매장 안을
바라보았을 때, 여러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유라를 향하고 있었다.
"유라 씨."
안에서 낯익은 음성 하나가 황급하게
터져나왔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재빨리
홍이었다.
자니 홍은 푸른색 와이셔츠에 다갈색
싱글을 입고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유라의
팔을 잡았아. 유라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으나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유라 씨. 미국에
가셨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는데 언제
오셨지요? 그렇게 소식을 끊고 연락조차 제게
안하시다니, 너무 하셨습니다."
그의 눈자위는 가벼운 경련이 일고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배추형이엇다.
"암튼 커피숍으로 잠깐 가실까요?"
자니 홍이 그녀의 손목을 으스러지게 잡고
행여 놓치기라도 할 듯 우격다짐으로
잡아끌었다.
유라는 꼼짝없이 붙들렸다는 체념이
백화점 코너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마침 매장의 현장 디스플레이를 보러
나왔던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뜻밖입니다."
자니 홍의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여전하시군요. 사업은 잘 돼가나요?"
"이봐요, 유라 씨. 유라 씨가 내게 끼친
로스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사업은
지금부터 로킹을 시작했습니다. 난
말요……."
자니 홍의 눈빛에는 점차 증오가 안개처럼
덮여오고 있었다
"유라 씨, 난 유라 씨와 조용히, 그리고
길게 얘기를 해야겠소. 여긴 백화점이고
사람들의 눈이 많아요. 날 따라오십시오."
자니 홍의 말에 유라는 죄인처럼
많았다. 그는 유라를 데리고 백화점 옆에
있는 호텔 라운지로 갔다. 서산에 어린 해가
큰원을 그리며 새털구름을 주홍빛으로 물들여
놓은 채 산허리 밑으로 스물스물 가라앉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니 홍의 푸른색 와이셔츠에 햇살
한가락이 한가롭게 되비치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재빨리 손끝에 걸었다.
유라가 그의 머리가 가발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 배추머리가 그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밖으로 위장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여져서 연민의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는 침대에서 여자에게 혁대를 휘둘러야
하는 슬픈 짐승이라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 대한 혐오감보다는
동정심이 앞섰다.
경련이 일고 있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요, 유라 씨."
그가 약간 빈정대고 있다는 것을 유라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척 어려운 걸음이었어요."
유라는 쌀쌀한 어조로 맞장구쳤다.
"아- 이제 다시 말하지만 유라 씨가 제게
끼친 로스는 너무나 막대합니다. 순조로웠던
국내 진출이 유라 씨로 인해서 엄청나게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자니 홍은 손도 떨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느낌대로라면 그의 손은 벌써 뺨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자니 홍의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은
내 책임이지만 그럴 만한 쇼크를 준 것은
자니 홍에게도 있잖아요? 영화는 대본이 나온
잃고 주저앉고 만 거예요. 내가 자니 홍에게
전속을 옮긴 것은 영화배우로서의 야심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허리가 잘린 마당에
내가 무슨 신명이 나서 쇼무대에 나서죠.
영화는 날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나요?"
유라는 될수록 말소리를 억제하며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이봐요 유라 씨, 난 영화 계획을 계속
추진했었소."
"그런데요?"
"유라 씨,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빅
브러더를 아십니까?"
"빅 브러더? 그가 누구죠?"
"잘 아실 텐데요. 그가 유라 씨의 영화
출연을 스톱시킨 거요."
"장 이사 말이오, 태백그룹의……."
순간 유라는 큐를 머리에 떠올렸다. 자니
홍은 지금 큐를 빅 브러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라는 어른이 그저 정계와
재계의 거목이라고 알고 있었지, 큐와 어른이
태백그룹까지 소유하고 있는 줄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분이 뭐라고 했어요?"
유라는 큐의 파워가 새삼 굉장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우리의 영화 자니의 서울을 망쳐놓은
거요. 이런 말은 다시 하고 싶지도 않았소."
자니 홍의 얼굴은 충혈되어 있었다.
유라는 솟아오르던 기세를 갑자기 꺾고
한숨을 포옥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없다고 통고하면 자니 홍은 꼼짝 못하고 그의
말대로 따르는 것인가. 큐란 누구이며, 그가
무슨 힘을 갖고 있기 대문에 자니 홍이
두려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라 씨, 이건 우리끼리 하는 얘깁니다만
난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유라 씨가
출연하지 않으면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애초부터 그 영화는 유라 씨를 보는
순간 발상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오. 유라
씨가 어떤 사정에 의해서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난 우리의 계획을 취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죠. 반드시 빅 브러더의 지시
때문만은 아니란 말요."
자니 홍의 음성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빅 브러더의 힘이 거기까지 미치나요?"
모든 분야에 키펀치를 쥐고 있죠. 그분
한마디면 난 서울의 자니패션을 뉴욕으로
철수시켜야 합니다."
"그럼 샤넬라인도 그렇습니까?"
"샤넬라인의 표 전무가 기세가 꺾이는 것은
빅 브러더의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요.
유라 씨, 결코 우리가 경쟁업체로 등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라는 자니 홍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사태의 윤곽이 서서히 잡혀왔다. 그렇다.
큐의 입김은 안 미치는 곳이 없이 골고루
뻗쳐 왔다. 그는 실핏줄을 관장하고 있는
동맥의 위치만큼 강한 인물로 군림하고
있었다.
유라는 그때서야 그의 자장권 밖에서는
조무래기들처럼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는
권력과 재력의 구조는 누군가 파워를 쥔
자의 호흡과 리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유라는 그때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난 큐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유로웠던 대신 조무래기들의 손때에서
놀아었던 마네킹 같은 여자였구나. 이제 나는
큐의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갔고, 그 속에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조종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넌 어른의 눈에 들어서 머지않아 그분의
큰몫을 갖게 되는 패를 쥐고 있는 거야.
과도기인지 모르지만 큐조차 널 두려워 할
만큼 그 속으로 끼어든 거야. 넌 지금 머리를
써야 해. 넌 지금 장기판의 졸이 아니라구.
유라는 스스로를 높이 끌어올린 때문인지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나로서는 참기 어려운 치욕적인 장면을
보였소. 난 그후 유라 씨를 내 생애를 걸고
사랑하리라 작정 했었오. 그런데 내 계획은
영화 계획처럼 파장이 났소. 앞으로 유라
씨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기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만 거요."
자니 홍의 눈빛 속에서 8월의 독기어린
살모사의 눈같은 살기가 무섭게 치솟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유라에게
소리질렀다.
"퍽 유, 갓뎀!"
자니 홍의 주먹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유라는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지금
그와 맞서 화를 돋우게 하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앉아요. 자니, 그건 우리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나 역시 자니 홍이 영화 계획을
포기한 이유를 오해했던 거구요. 우린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좋은 감정으로
시작했어요. 그게 우리 뜻과는 달리 빗나간
거예요. 우리 둘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자니?"
자니 홍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리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참아내느라고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그는 의자에 앉으며 유라의 팔목
하나를 손아귀에 단단히 쥐면서 유라의
얼굴에 바짝 대고 떨듯 말했다.
"유라! 난 지금 널 죽이고 싶어. 난 무척
참고 있는 거야. 내 수치심과 증오심은
극도에 달하고 있어. 내 독기를 풀어주려고
생각한다면 날 따라와. 끌려가면서 다른
이렇게 잡힌 채 조용히 따라오란 말야,
어서."
자니 홍의 눈빛은 지난번 해변의 호텔에서
혁대로 내리치던 바로 그때의 모습이었다.
"아아…… 손목 비틀지 마세요.
따라가겠어요. 손을 놓아요."
유라는 무서움에 떨며 그를 달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순간 그가 유라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유라는 퉁기듯 의자에서 벗어나와 그가
이끄는 대로 승강기 입구까지 왔다.
그는 구내전화로 방 번호를 요구하는 것
같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5층에서
내리자, 보이가 방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유라는 이 손 좀 놓으세요, 하고 말했으나
보이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돌아섰다.
방문이 닫히자 자니 홍은 표범처럼
달려들어 유라의 옷을 찢어버릴듯
움켜쥐엇다.
"자니, 제발 이러지 말아요."
유라는 애걸하듯 빌었으나 자니 홍은
유라의 뺨을 찰싹 갈겼다. 유라는 거의동시에
주먹에 턱을 맞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니 홍은 미친 듯이 자기의 허리에서
가죽혁대를 빼들더니 유라의 등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스웨터 위로 그의 혁대가
바람소리를 쉬익쉬익 내며 수없이
날아들었다.
"자니! 그만두지 못해!"
유라는 겨우 몸을 일으켜 그의 혁대를
자신의 팔로 감아쥐었다.
희열에 찬 표정이 유라의 눈앞에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자니 홍은 갑자기 정신이
드는지 기세를 떨어뜨리고 지난번 해변
호텔에서처럼 몸을 웅크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니 홍, 난 옛날의 유라가 아니야. 넌
오늘 나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어. 빅
브러더가 오늘 네가 나한테 가한 치욕을
갚아주게 될 거야."
유라는 자니 혼을 향해 혁대를 내던졌다.
"유라, 빨리 내 앞에서 꺼져! 빨리 꺼지지
않으면……."
유라는 호텔 방문을 밀치고 나왔다.
유라는 자니 홍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죽지 않으려면 다시는 내 눈앞에는 얼씬도
자니 홍의 울부짖은 고함소리가
엘리베이터까지 들렸다.
승강기 안에 붙은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턱은
부어오르고, 머리카락은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자신의 분노에 일그러진 모습은 마치
탈바가지를 쓴 모습처럼 흉측스러웠다.
유라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호텔에서
빠져나와 택시 정류장에 대기하고 있는
콜택시에 몸을 부렸다.
차에 타고 오면서 유라는 곰곰 생각했다.
겉으로는 상냥하고 선량해 보이는 자니 홍의
내면에는 무서운 성질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니 홍이 자기에게 폭행을 가했던 것은
수치스러운 열등감이 성 욕구에 불을
당기면서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왔던
것이라고 유라는 결론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유라는 소파에 얼굴을 묻고
한참동안 흐느껴 울었다. 울다 지치면
쉬었다가 다시 울고, 울음이 멈추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생각해 내고 또 울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처럼 불행한 여인이
없다는 것이 서러움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누구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는 외로움은 더욱
컸다.
만일 준이 있었더라면 그는 이렇게 외로운
자기를 깊이 껴안아 주면서 괴로움을 희열로
바꾸어 주었을 것이며, 내일쯤은 자니 홍의
뼈가 성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둠이
이불자락처럼 몇 겹으로 덮인 집안은 자신의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유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준 대신, 큐가 복수를 맡아주어야 한다. 빅
브러더로 통하는 큐가 자니 홍의 사업을
불도저로 말끔히 밀어내고, 자니 홍은 겨우
목숨을 건져 미국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이 미국 거지발싸개 같은 민대가리, 이
사디스트야, 이제 너는 한국에서 다 살았어!"
유라는 눈물을 닦고 전화기를 붙들었다.
"웬일이오, 유라 씨."
큐의 축축하게 젖은 음성이 유라의
귓속으로 강한 풀벌레 소리처럼 밀려
들어왔다.
"빅 브러더 나예요. 유라. 제가 어떤
놈팽이한테 훅을 맞고 까무러쳤다가 도망쳐
유라의 말에 큐는 잠잠했다.
"그대로 두시겠어요?"
유라가 다시 다그쳤다.
"그가 누굽니까?"
"미국 떨거지, 배추머리 자니 홍이에요."
그는 또 말이 없었다.
"내가 그와 영화 계약을 했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알겠소. 그 일은 내게 맡겨두시오. 하지만
앞으로 유라 씨는 남자들을 만나면 안
됩니다. 유라 씨는 어제의 유라 씨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준은 조앙의 전화를 받았다. 공항에서
짐꾸러미 수속을 마치고 출발 1시간 전에 건
마지막 전화였다.
조앙."
준은 전화기에 대고 고함소리를 질러댔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왔다가 하야리
식품점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나형, 왜건 좀 빌려야겠어."
준은 벽에 걸린 열쇠를 잡아채다시피
꺼내들고 나형이 미처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쏜살같이 차 쪽으로 뛰었다. 왜건이란
식료품 배달용 승용차였고, 라면박스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쌓여 있었다.
"야, 임마. 짐도 안 풀었다구."
준은 나형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시동을
걸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운전석 천장 위까지 쌓아올린 라면상자가
속도에 실려 흔들리자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미꾸라지처럼 추월하고 빠지면서
속도를 점차 올렸고, 왜건이 김포가도를
120으로 질주할 때는 라면상자는 반 이상이나
사라진 후였다.
다른 차들이 준의 차에 밀려나면서 놀라
브레이크를 삐익삐익 걸고 섰으며, 행인들도
눈을 휘둥그래 뜨고 라면상자를 떨어뜨리며
달리는 차를 구경했다.
그의 강속구 같은 스피드 때문에 큰 위험이
따르는 몇 번의 위기를 넘겼지만 그가 공항에
도착하는 데는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조앙은 그녀 특유의 우아한 블라우스에
카키색 모자와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대합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준이 나타나자 조앙은 그의 팔을 끼고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준은 작업복 바지에
티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린 채였다. 머리는
수북하게 길었고, 구렛나룻과 턱수염이
거칠게 자라서 그는 마치 사이키딜릭 5인조
그룹의 전자오르가니스트 같았다.
조앙의 하얀 얼굴이 모자의 차양에 가린
불빛 그늘 밑으로 쓸쓸하게 나타났다.
"조앙, 이건 너무했군……. 하긴 한 시간
전이라도 전화해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난
이렇게 빨리 떠날 줄 몰랐어."
준은 벽에 기댄 채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앙은 준의 몸에 바짝 기댄 채 그의
구렛나룻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그렇게 빨리 달려올 줄 정말 몰랐어요. 난
5분 전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어요."
조앙의 눈빛은 젖어 있었다.
"왜건에 실었던 라면상자가 반이나
없어졌소, 엔진에서 불이 날 뻔했다구."
"암튼 보구 떠나게 돼서 기뻐요. 사실은 더
맘이 아프지만, 그래도 우리는
잠시동안이나마 좋은 친구였어요."
준이 손을 내밀자 조앙은 그의 손을 감싸며
입으로 가져갔다. 준은 조앙을 와락
끌어안았다. 바로 그때 카메라의 플래시가
번쩍 하고 터졌다. 준과 조앙은 플래시
불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준, 지금이라도 날 붙들어 주지 않겠어요?
준이 나보구 가지 말라고 하면 비행기 티켓을
당장 찢겠어요."
조앙은 팔로 준의 허리를 돌려 안으며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공항대합실에 있는 많은 환송객들이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조앙, 난 아직 서울에서 할 일이 남아
있어. 내 일이 잘 정리되면 프랑스로 가게
될지도 몰라. 내가 니스에 있는 영화학교에
입학하고 조앙과 같이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
순간, 조앙의 눈빛은 금싸라기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준, 정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
"왜 미래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고
계시죠?"
"확신하기엔 내 현실이 너무 불투명하기
때문이야."
"허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난 니스로
조앙을 만나러 갈 거야. 꼭 그렇게 하겠다구
그렇게 말해 주세요."
"조앙, 그 문제는 편지로 다시 쓰겠어.
내가 가면 거처할 곳을 알아 봐 줘. 될수록
조앙의 집 가까운 곳에 말야."
태어나서 들은 말 중에 가장 기쁜 말이에요.
이 기쁨을 어떻게 하죠?"
조앙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다가 준의
허리를 무섭게 끌어안았다.
"……도착하면 편지 주겠지?"
"그럼요. 도착하는 대로 전화하겠어요.
그리고 준, 메모를 남겨두긴 했지만 아파트에
심카를 두고 왔어요. 그건 준형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심카를 타세요. 절
생각하시면서……."
"차도둑에게 결국 차를 주는군."
"욕심을 내셨잖아요."
"고마워, 잘 쓰겠어."
"다시는 남의 차를 타시면 안 돼요."
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희망을 갖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게
아무도 모르지만, 마음 변하지 말고 제
곁으로 꼭 오시기를 바라겠어요. 그럼 모든
것은 편지로 전하기로 하고 이제
들어갈래요."
조앙은 백에서 비행기 티켓을 꺼내 두 손을
찢는 시늉을 하다가 손아귀로 감아쥐면서
흔들어 보였다.
조앙은 뒤돌아서면서 손을 마구 흔들었고,
준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 말예요. 준…… 좋은 소식
기다리겠어요."
조앙은 몇 번이나 아쉬운 듯 손을 흔들다가
승객들에 밀려 안으로 사라졌다.
유라는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대강
마치고 두 손으로 긴 머릿다발을
영국 패션잡지에 난 다이아나 헤어스타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헤어 디자이너 미스 장에게 전화로 시간
약속을 해놓고 머리손질이 끝나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면
새로 들어온 비디오테이프 몇 개 사들고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집에서 마악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걸 사람은 큐밖에 없었다. 큐 이외에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유라예요."
그녀는 수화기를 들자 대뜸 말했다.
"접니다, 큐. 오늘 저녁식사는 나하고
약속해야 합니다. 7시에 내 방으로
오십시오."
감전현상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난 아무 남자와 쉽게 만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난 아무 남자가 아니라 큐요."
"어른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만나서는 안
된다고 말씀내리신 분이 누구죠?"
"유라 씨, 지금 농담하실 시간이 아닙니다.
중요한 일이오. 7시에 내 방으로 오십시오.
문은 열어두겠소."
큐가 말을 끝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가 오라면 땅끝까지도 구름
위까지도 가야 한다. 그의 말은 곧 어른의
말이나 다름없다고 어른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굴욕이라도
참아야 한다.
유라는 그 길로 미용실로 향했다.
알았어요. 그동안 머리는 누구에게 맡겼죠?"
미스 장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는 갑자기
유라의 귀에 대고 나직히 말했다.
"소문에는 패션계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셨다던데…… 어떻게 되셨어요?"
유라는 바로 그 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지금도 끈질기게 나돈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몸이 아파서 은거했더니 그런
터무니 없는 소문이 나도는군요. 미스 장,
미안하지만 아무에게도 제가 여기 다녀갔다는
말을 하지 말아 주세요, 녜?"
"저야 말 옮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제
미용실이 워낙 유명 인기스타들이 많이
드나드니까 신문기자들이 수시로 밀어닥쳐서
주간세계 기자 한 분이 오고 계시네."
그말이 끝나자마자 유라의 얼굴 위로
플래시 하나가 번쩍 터졌다.
유라가 옆을 바라보자 웬 남자가 수첩을
들고 서 있었다.
"전 주간세계 정 기자입니다. 유라 씨,
언제 귀국하셨습니까?"
유라는 기자에게 어처구니 없이 걸려들고
말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경우 말대답을
하다 보면 가볍게 잡힌 꼬투리 하나가 열
배로 과장되어 기사화되고 그런 다음에는
꼼짝없이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정 기자님, 머리손질이 끝나면 독점
인터뷰를 해드리겠어요. 혹시 다른 기자들이
눈치 채기 전에 멀리 떨어져 주세요. 그렇게
유라는 머리손질이 끝나자 거울 속에
나타난 우아한 자신의 머리결을 돌아보면서
이런 머리라면 다이아나비나 그레이스 켈리
같은 왕녀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미모라고 생각했다.
"다이아니가 보면 질투하겠어요, 유라 씨."
헤어디자이너들의 침바른 찬사가 조금도
과찬이 아니라고 유라는 믿었다.
"자아, 수고하셨어요."
유라는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네주었고, 미스 장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
기뻐했다.
그때 미용실로 전화가 왔다. 머리 손질이
끝난 것을 기막히게 알고 있는 주간세계
기자의 전화였다.
"유라 씨, 기사는 거의 다 썼습니다만
찍으시면 되겠습니다만, 절
만나주시겠습니까?"
유라는 정 기자의 당돌한 전화에 기가
막혔다.
"기사를 다 썼다니요. 인터뷰도 하지 않고
기사를 쓸 수가 있습니까?"
"대강의 플로트가 짜여졌다는 얘깁니다.
주변 취재와 추측만으로도 4페이지는
충분합니다. 게다가 난 유라 씨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소문없이 잠적했던 인기
패션모델 유라, 다이아나 헤어스타일로
서울에 나타나다. 그동안 떠돌던 소문의
진상은 이렇다, 그 다음 번 기사는 유라 씨가
오셔서 직접 읽으시고 확인하신 다음
정정하거나 고치고 또는 맘에 안 드시는
표현은 지적하실 수 있습니다."
비위를 몹시 건드렸지만 그녀는 꾹 참아냈다.
만일 거세게 나간다면 다음날 자신에 관한
기사가 어떻게 나가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연예란 기사에서 터지는
인기인들의 사생활에 관한 부분은 보호받을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기자들을 구슬리고
달래는 게 고작이었다.
"좋아요. 정 기자님 곧 뵙도록 하겠어요.
지금 어디 계시죠?"
유라는 정 기자를 만나 자신의 기사를 쓰지
말도록 단단히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어떤 기사든 주간세계에 이름 석 자가
오르면 그것은 어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셈이 된다. 큐가 자기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강조한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하이눈 호텔 805호실로 와주십시요."
"아니? 호텔은 왜죠?"
"저는 지금 특집반의 일원으로 호텔방 두
개를 임시로 빌려서 스튜디오와 편집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면 스튜디오
사진을 멋있게 찍을 수가 있습니다.
805호실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유라는 전화를 끊고 잠시 망설였다. 호텔로
가고 싶은 생각은 전연 없었지만 기자
제멋대로 쓴 추측기사를 그대로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유라는 큐에게 전화를 했지만 신호만 갈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유라는 벤츠를 타고 하이눈 호텔로 향했다.
그놈의 하이눈 호텔에는 마가 끼었는지 무슨
일이건 하이눈 호텔이 안 끼어들 때가
유라는 승강기를 타고 805호실 앞에 섰다.
방문이 열리자 유라는 무심코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재빨리 문이 닫혔고,
유라의 등 뒤에서 문을 막아서는 사내가
있었다.
"으하하하……."
유라는 뒤를 바라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붉은잠바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유라, 정말 오랜만이군."
유라는 그 순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미스 장의 헤어 살롱이 언제나
함정의 입구였다.
그전에도 거기서 머리를 매만지고 나오다가
길에서 스티브에게 수원으로 납치당했던
사실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오늘 역시 정
미용실에서 잠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군, 그 미스 장이 샤넬라인의 모델들
미용전문을 맡고 있기 때문에 붉은잠바와
깊이 내통을 하고 있었고, 오늘 그곳에
자신이 나타나리라는 사전 정보를 그애가
알려주었음에 틀림없었다.
"표 전무가 주간세계의 편집기자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군."
유라가 표를 향해 싸늘한 표정을 던졌다.
"유라는 여전히 나한테 쌀쌀맞게 구는군,
그 성깔이 언제 좀 달라지지?"
표는 불쾌감을 표시하며 유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유라는 비겁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여유를 되찾아 소파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래서 함정을 여기저기 파놓았는데 오늘
기어코 거기서 걸려든 거야."
"날 만나야 할 급한 이유가 뭐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테지. 난 너 같은
여자를 계속 찾았지만 아직도 만나지
못했어."
"날 포기한 줄 알았는데 끈질기군, 표
전무, 그렇게 여자만 밝히니까 샤넬라인의
기둥이 뽑힌 거 아녜요?"
"닥쳐!"
표는 특유의 검은테 안경을 벗고
붉은잠바의 쟈크를 밀어내렸다.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포기를
못하죠, 표 전무? 종미처럼 져주면 날 귀찮게
굴지 않겠어요?"
이글거렸고, 그는 유라의 거센 반발과
빈정거림에서 묘한 도전 의식과 쾌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유라는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거센 반발을 유도하고 성에서
패배하면 할수록 그 여자를 다시 찾는 묘한
습벽을 가지고 있었다.
"표 전무, 날 지금 어떻게 해보겠다는
수작은 말아요. 잠시 후면 내 보디가드들이
이 방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난 표 전무의
함정에 걸릴 때마다 당하던 옛날의 유라가
아니에요. 거짓말인가 아닌가는 지금 증명해
보이겠어요."
유라는 핸드백에서 워키토키를 꺼내
안테나를 뽑고 버튼을 눌렀다.
"김 기사, 대기하고 있어요?"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올라갈까요?"
흘러나왔다.
"아녜요, 연락이 있을 때까지 워키토키를
켜두고 얘기를 들으세요."
"알겠습니다."
"……."
붉은잠바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때요. 표 전무님, 사장님은 잘
계시나요? 사업이 잘 안 된다는 얘기는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지방 매장은 거의
철수하고 서울 매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구요.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은
하이패션업계가 불황을 만나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탓도 있지만 경쟁업체인
자니패션의 조직과 자금에 밀린 탓으로 보고
싶은 것이 표 전무의 입장이겠지요. 하지만
가는 사람의 성격과 인품에 그 회사의 흥망이
달린 거라고 봐요. 표 전무는 이미 자니
홍과의 머리싸움에서 패했어요. 집념도 없고,
작전도 없고, 돈도 모자라죠. 표 전무의 머리
속에는 여자로만 꽉 차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정복되지 않는 여자를 정복할 것인가,
그 욕구에 지치고 시달려서 나중에는 거지로
깡통을 찰 거구요. 결국은 아편중독자처럼 될
거예요. 내가 자니패션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믿는 것은 큰
잘못이구요. 표 전무가 날 이기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지 현실은 아니에요. 나한테
성적으로 입은 열등의식을 회사와 연관시켜
미움으로 키운 건 표 전무 자신입니다. 왜
나한테 복수심을 키우며, 날 이기지 못해
끝없이 괴롭히고 있죠? 뇌병원에 한번
심리적인 편집광에 사로잡혀 있어요.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난 이제 표 전무와 무관한
여자예요. 제발 내 곁에서 함정을 파고 덫을
놓지 마세요. 신문기자를 사칭해서 날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고작 그따위 성
불만인가요? 표 전무가 계속 그렇게 처신하면
신문에 이런 사실들을 낱낱이 폭로하겠어요.
우리 붉은 여우군단 애들을 모조리 농락하고,
사업도 망해서 표 사장의 하야리 고향땅까지
다 말아먹고, 지금도 정신 못 차리고 얼이
빠져 있군요. 표 전무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
붉은잠바와 검은 안경을 패션계에서는 여자
사냥꾼과 천하의 난봉꾼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말은 표 전무의 사생활이니까
할 필요는 없지만 만일 이후에라도 날 계속
귀찮게 굴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겠어요.
수작을 하면 망신을 당할 거예요."
유라가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 표는 침대
위에서 유라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병아리를 채려는 매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유라의 워키토키에서는 호텔 바깥의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바람소리와 남자의
기침소리와 차량들의 경적소리.
유라는 호텔 방문의 열쇠고리를 따고,
워키토키를 껐다.
유라가 복도를 걸어나올 때 표가 그녀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유라, 넌 언젠가는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넌 나를 송두리째 망친 요녀야."
유라는 표의 말을 들은 채 승강기에
올라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속에 갇혀 굶주린 늑대들처럼 눈에 뵈는 게
없다니까.
모두가 날 죽이겠다고 벼르는군, 표도 자니
홍도. 하지만 유라는 네놈들의 노리개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말겠어.
붉은잠바, 넌 언젠가 거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지가 되고 말 것이라는 내 예감이
들어맞을 것이다.
유라가 하이눈 호텔 뒷산에 조경된 숲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워키토키를 준비했고,
바깥에 보디가드들이 곧 들어오게 된다는
말로 붉은잠바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부터 진한
외로움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라는 백양나무 숲속에서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았다. 며칠 사이에 숨돌릴 사이도
수가 없었다. 난 자니 홍과 붉은잠바가 말한
대로 정말 요녀일까. 나를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가 나를 원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파괴되고 불행에 빠져왔다.
생각해 보니 자기를 만나 행복해진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 남자들은 자기를 보면
풍선처럼 만져서 터뜨리고 싶어할까. 그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불행해지는 거야.
유라는 낙엽들을 차며 고목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훌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운명은 이미 흐름의 끝에 왔어, 큐의
말대로 그들은 모두 과거의 남자들인 동시에
과거의 망령들이기도 하지.
앞으로는 절대로 그들을 만나서는 안 되고,
서울을 떠나야 한다.
하야리를 떠날 때 고향의 대숲을 모두 훨훨
태우고 서울로 왔듯이 이제는 욕망의
대숲처럼 칙칙하게 들어선 서울의 남자들을
모두 버리고 서울을 떠나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밤 큐로부터 중요한 말이 떨어질 것은
분명했다. 유라는 천천히 몸을 떼고 숲에서
빠져나왔다. 유라는 벤츠 안에서 붉은잠바의
붉은색 무스탕이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큐와 약속한 7시가 되었다.
"유니온 호텔로 가주세요."
유라는 차가 출발하자 손거울을 꺼내고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유라는 열린 호텔 방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 또하나의
실루엣처럼 보였다.
"문을 닫고 들어오십시오, 유라 씨."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좀더 투명하게
확대되어 들렸다.
유라는 그의 의자 뒤쪽으로 다가섰다. 큐의
어깨가 두 손 앞에 펼쳐져 있었다. 큐의
어깨뼈는 생각보다 크고 단단해 보였다.
날개가 큰 남자군, 이런 어깨라면 생각보다
꽤 높이 멀리 비상할 수가 있겠군. 그가 70층
꼭대기를 개인 사무실로 빌려 쓰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세상을 자기 발 밑에서
다스리겠다는 심리적인 동기가 더 큰 것이다.
"무슨 근심이 있어요? 박사님."
유라는 지금까지 그에게 쓴 어감 중에서
"난 근심이 없는 사람이오. 단지 묵상할
따름이지."
"그럼 어려운 묵상중이신가요?"
"아니오, 아주 가벼운 일거리 하나를
구상하고 있었소."
"저와 관련된 것인가요?"
"그렇소."
"자니 홍을 혼내줄 계획은 없으신가요?"
"자니도 문제지만 오늘 표가 유라 씨에게
한 행위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군요."
"보고 받았습이다. 하지만 오늘 일은 유라
씨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라 씨를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
문제는 더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합시다."
유라는 내심 놀라면서 빈 의자를 끌어당겨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라 씨를
어른에게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조건은 아주
좋아요. 유라 씨는 젊고, 미인이고, 세상에
알려진 스타이며, 다른 여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지적인 체취가 돋보이는 반면에 강한
에로스를 발산하고 있고, 또 드러난 스캔들이
없었으며 야심이 있다는 점이 어른과의
결합에서 어른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도 그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는 말인가요?"
유라는 갑자기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의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소."
유라는 그순간 눈을 감았다. 눈 속에서는
세상이 분홍빛으로 변했다.
큐가 손을 내밀었다. 유라는 그의 손을
잡았다.
"유라 씨, 내게 약속한 백지수표는 언제
주시겠습니까?"
"언제 받기를 원하시나요."
"어른의 호적에 유라 씨가 입적되는 즉시
받고 싶습니다."
"꿈만 같군요."
"잘 들어 두십시오. 유라 씨. 어른은 지금
서독에 있는 제 친구의 내과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새벽 제 친구가 은밀히
전화를 했습니다. 어른은 간암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유라는 입이 굳어진 채 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유라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어른은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만 곧 알려야
하겠지요. 허지만 유라 씨가 입적이 될
때까지는 보류하겠습니다. 하이델베르그의
의사인 내 친구는 내가 지시하는 시간까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유라의 맥박은 더 크게 뛰기 시작해서
호흡장애가 오는 듯 답답해졌다.
"수속은 언제 되나요?"
"지금 곧 어른의 호적부에 유라 씨의 이름
석자를 쓰는 시간은 단 몇분이면 끝납니다."
"어른이 허락했습니까?"
"어른은 결정을 끝냈고 모든 일은 내가
실행합니다. 어른은 귀국한 다음 유라 씨와의
결혼을 전격적으로 발표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서류상으로 혼인신고를 은밀히 해놓고
의도 때문입니다."
"혼란이란 무슨 뜻이죠?"
"어른의 집안에는 배 다른 세 아들이
있습니다. 서류정리도 없는 결혼 발표는
집안의 큰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큐의 음색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냉랭하게 흘러나왔다.
"어른이 서울을 떠나기 전에 건강에 대한
의심은 없었나요?"
"최근 건강이 나빠진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서독에서의 차관 문제로 어른이
직접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차관
문제는 제가 모두 해결하고 왔기 때문에
어른은 예우상 그곳 사람들을 방문한
것입니다. 병원의 친구를 소개한 것은 나지만
서독에 가신 김에 진찰을 하시도록 권유했던
친구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의
계획과 예정은 그대로 진행시킬 것입니다."
"박사님, 난 지금 무서워요."
"유라 씨는 조금도 동요하지 마십시오.
어른이 작고한 후에도 태백그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번영을 계속할 것입니다. 유라
씨 뒤에 제가 있는 한……."
"어른이 자신의 병명을 알고 난 후에는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녜?"
"명심하시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모든 일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을 취소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혹시 이혼 수속을 강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라 씨는 버텨내야 합니다. 그것은
어른의 수치가 되기 때문에 명예를 위해서도
그건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정신적인
것입니다. 모든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유라
씨는 절 믿으시고 모든 문제를 저와 상의하면
됩니다. 마음을 강하게 잡으십시오. 유라
씨는 꼭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리라고
믿습니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큐의 손을
무섭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유라는 큐의 큰 손을 어루만졌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어깨와 팔 언저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무서운 음모가 서슴없이
발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공상적이고 한낱 꾸며낸 가설에 불과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유라의 머리 속에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충실한 사냥개
같기도 했고, 어른을 상대로 무서운 게임을
벌이는 도박꾼 같기도 했다. 큐의 손은
유라의 어깨와 등을 가볍게 어루만지다가
이내 떨어져나갔다. 이 남자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나를 객관자의
입장에서 대하고 있다. 그의 눈에는 자기가
원하는 한 가닥의 욕심도 내비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면서도 괘씸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보스에 대한 예우 때문일까? 순간 유라는
남자로서의 큐에 대한 반발감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남자들 가운데 이처럼
거리를 두고 대해 준 남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큐, 방이 퍽 어둡군요."
말했다.
"불을 켤까요, 유라 씨?"
그의 음성은 불을 켤 의사가 전연 없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아니에요. 때로는 이렇게 어두운 게
좋아요. 어둠 속에서는 눈빛을 감출 수가
있거든요. 상대방에게 보이기 쑥스러운
눈빛을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혹시, 유라 씨가 지금 그런 입장에
있는가요?"
"그럴 수도 있어요. 지금은 밤이고, 이런
시간에 젊은 남녀가 단둘이 방 안에 앉아
있을 때, 대부분의 남자들은 눈빛이
달라졌어요. 난, 나를 원하는 남자들의
눈빛을 보면 가끔씩 견디기 힘들 때가
"유라 씨가 내 눈빛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이군요."
"다행이에요. 하지만 나는 박사님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퍽 공식에 충실한 감정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제 앞에서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니까요. 혹시 실례되는 말씀인지
모르지만 서울에 애인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미국에 있으신가요?"
"피츠버그에서는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서로
자유로운 관계입니다."
"오랫동안 못 만나셨겠군요."
"전화로만 가끔씩 안부를 주고받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다.
절 당분간은 감시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자유롭게 행동할 시간도 유예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오늘밤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국제호텔에서 자겠어요.
프런트에 제 이름으로 숙박계를 쓰겠어요.
편의상 제 소재지를 밝혀두는 거예요."
"유혹하시는 겁니까, 유라 씨?"
"지금부터 1시간까지만이에요. 그 후엔
방문을 잠그겠어요."
유라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밖으로
나왔다.
9.영원한 꿈 하야리
유라는 국제호텔 프론트에서 숙박계를 쓴
후 열쇠를 가지고 5층으로 올라갔다.
호텔방에 들어온 유라는 핸드백에서 빗을
꺼내다가 문득 명함 한 장을 손에 잡았다.
지난번 종미가 연필로 적어준 전화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명함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전화기 옆에 놓고 몸에서
옷들을 말끔히 벗어낸 다음 조명등 불빛 속에
붉게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나신을
거울속으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금욕으로 단단해진 살갗이 성난
비늘처럼 거칠게 돋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비오는 날의 큐에게 유혹의 오랏줄을 던져준
것은 그의 극기를 시험하기 위한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공식이 어느 쪽인지는 큐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되겠지만 만일 1시간
안으로 그가 방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유라는
자신이 크게 상처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오히려 그를 마음놓고
미워할 수가 있고, 지신의 방종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준이라는
야생마 같은 들개의 거친 손으로 길들여진
유라에게는 그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이
성이었다.
그 부분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눈도 귀도
예민하게 열리고, 살갗의 모든 세포들이
한꺼번에 들끓기 시작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안정이라든가 정서란 끝장이 나고
만다.
사람을 끝없이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랑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라는 베드의 흰 시트를 걷어올리고 몸을
밀어넣은 다음 전등갓을 밝히고 있는 조명
등불을 껐다.
만일, 만일 큐가 지금까지의 그답게 1시간
후에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는 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고 유라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유라는 성이라는 게
얼마나 자존심을 치사스럽게 구겨버리고 마는
것인가를 깨달았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준을 지금 이순간
끌어들이는 것은 경솔한 짓이야. 그는 나를
보자마자 숨통을 눌러버릴지도 몰라. 그는
지금 얼마나 살모사처럼 질투와 배반에 독이
올라 있겠는가.
부르는 게 백번 낫지. 난 지금 피어오른 불만
꺼버리면 되는 거야. 그들은 돈만 받고나면
감쪽같이 뒤끝도 깨끗하다. 그래, 그래야
되는 거야.
유라는 어둠 속에 누운 채 토끼처럼 귀를
열어놓고 귀를 기울였다.
그때 호텔의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인기척과 함께 바람처럼 스며드는
발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이 찰칵 잠기는
소리와 함께 열쇠 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유라는 온몸이 굳어졌다.
드디어 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시 눈을 익히는
듯 싶더니 잠시 후에 유라의 침대 앞에 섰다.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손을 더듬어 유라를
"저예요, 유라. 제대로 찾아오신 거예요."
유라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부웅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잘 식별되지는 않았지만 사내는 침대
옆에서 서둘러 옷을 벗고 있었다. 그가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금의 이 어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서로가
낯선 타인으로 몸을 내맡기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어른의 여자를 손대는
죄책감에 부담을 느끼고, 이 어둠 속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은밀히 한 여자를 훔치고
난 후,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은지도 모른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말을 나누는
절차란 사실상 이 시간에는 필요가 없다. 이
순간 살갗에 부딪쳐오는 물체는 윤리가
그만이다.
그는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육질로 변해서
그녀가 한 꺼풀 덮고 있는 시트 속으로
짐승처럼 돌진해 들어왔고 그녀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섭게 비집고 들어오는 완강한
각목을 받아들였다.
유라는 그 순간 세상이 까마득해지면서
지금까지 자기 몸에 한번도 남자를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새롭고 신선한 충격
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오랜 금욕이 가져다주었던 갈망이 살갗의
세포마다 엄청난 열량으로 끓어올라서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그의 어깨와 팔다리는
바위처럼 단단했고, 활력은 날쌘 독수리처럼
거칠고 능숙했다.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유라는 숨돌릴 여유가 없었지만 자기 몸을
수말은 준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잠시 고삐를 완만하게 늦추고
그녀의 어깨를 팔 안에 단단히 옭아맨 다음
귓가에 뺨을 밀착시켰다. 순간 유라는 깜짝
놀랐다.
사내의 구렛나룻이 뺨에 거치른 촉감으로
다가왔다. 큐는 수염이 없는 깨끗한
얼굴이었다는 생각이 번쩍 스쳤다.
"누구얏!"
유라의 신음소리는 금세 놀란 목청으로
바뀌었다.
"내가 누군지 지금도 모르겠어?"
사내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바퀴에 부서져
왔다.
"준?"
"겨우 임자를 알아보는군."
똑바로 감아쥐었다. 그리고 준은 팔을 들어
조명등을 켰다.
그녀는 순간 눈을 감았다. 타오르던 불길이
잠시 정지된 상태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소. 사고력은
정지된 상태였다.
"자! 유라,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라구,
예전에 나에게 보냈던 그 표정대로 나를 보란
말야. 난 지금 네 살 속에 있어. 우리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야."
준은 유라의 입술에 뺨을 갖다 댔다.
그녀는 입을 완강하게 닫고 있었다. 다시
거센 구름이 몰고온 폭우가 번개를
동반하면서 우뢰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버드나뭇잎들의 갈기를
휘날렸고, 젖은 나무줄기들이 비에 적신 채
우뢰소리가 구름을 따라 이동하듯 차츰차츰
멀어져 갔고, 한참동안의 정적이 감돈 다음
햇살이 조용히 그리고 엄숙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긴 흐느낌과 한숨소리가
넉넉하게 가라앉은 다음, 그들은 늪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늘어져 있었다.
"날 어떻게 찾았어, 준?"
그녀는 담요자락을 끌어당기며 힘없이
물었다.
"내 더듬이는 고성능 레이다야. 유라쯤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는 손끝에 담배를 감아쥐고 짧게 빨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꽤 오래 걸렸잖아요."
"유라가 내 주파수를 알고 사이클을 잠시
바꿨기 때문이야."
울렸다. 유라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아, 유라. 만일 놈팽이라면
오라고 해도 좋아, 목뼈를 부러뜨리고
싶다면……."
전화벨이 계속 울리자 유라는 수화기를
들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유라 씨?"
큐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잠깐 잠들었어요."
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단히 말했다.
"어려우시리라 믿습니다만 어른을
생각하셔서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재를 밝혀주셨기 때문에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 아무 이상이 없이 잘
주시기 바랍니다. 긴급한 연락사항이 있을지
모르니 가능하면 외출을 삼가시고 댁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큐의 말이 끝나자 유라는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빌어먹을…… 못오면 말 일이지
전화는 무슨.
유라는 속으로 큐가 오지 않은 것이 천만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큐가 왔다면 그는 오늘밤 침실까지
미행해 온 준과 마주쳤을 것이고, 준이 아까
말한 대로 목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녀석인지 오늘 운수가 좋았군. 이럴
때는 전화소리가 크게 들려서 유라가 나한테
녀석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 주지 않아도
잘 들었어. 난 네가 사는 집도 알았고, 네가
여기 오기 전에 들렀던 유니온 빌딩의 70층
사무실 방도 알고 있고, 그 다음 호텔
프론트에서 네가 이 방에 들어온 것도
확인했어. 문이 잠겼더라고 난 여길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유라는 잘 알겠지. 난 못
여는 문이 없으니까 말야. 하지만 난 이 방에
들어올 때 열쇠를 딸 필요도 없었어, 문이
잠기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넌 옷을 벗고
알몸으로 어둠 속에 누워 있었던 거야. 아까
전화한 녀석을 살 속까지 편하게 들어올 수
있게 하려는 심사였겠지. 넌 골키퍼를 없애고
들어오는 볼을 다 받아들이겠다 이거지? 그런
게임은 이 세상에는 없어."
유라는 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고 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준에게 진 과거의 빚을
사랑으로 갚겠다고 마음속을 그렇게 깊게
다짐했었지만 사랑이란 죄의 몫을 보상하는
데 적절한 도구가 되지 못했다.
준이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은 준의 과거에
대한 빚을 보상해야 하는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아무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그는 지금 자신의 손목을
완강히 잡고 있는 것이다.
"자아, 유라,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어.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겠어.
지금 이 길로 나를 따라 하야리로 간다면
그동안 유라가 내게 준 모든 고통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하겠어. 하지만
유라가 끝내 우리들이 약속한 귀향을
거절하고 또다른 변명이나 이유를 들어 날
설득하려 든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끝장나는
거야."
준은 침대 위에서 누에처럼 몸을 웅크린 채
"난, 준과의 약속은 잊지 않고 있어.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난 준을 사랑하고
있어. 준은 내가 사랑한 첫남자이자 마지막
남자가 될 거야. 이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준도 나를 잘 알고 있지만 난 이렇게
살면서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사람은
준밖에 없어.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모두 날 이용하려 들기만
했어. 준, 내가 결국은 준과 함께 하야리로
가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지금 내가 벌여놓은
일들은 준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한 게
아니야. 내 말을 들어봐 준, 곧 그때가 올
거야. 내가 서울에서 이루고 싶었던 일들이
곧 눈앞에 닥쳤고, 그 일이 이루어지면
준에게 얘기를 해줄 거야. 준, 괴롭지만 날
유라는 몸을 일으켜세우고 손바닥으로 준의
어깨와 팔과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말했다.
그녀는 마치 화가 난 동생을 달래듯 준의
단단한 살갗을 매만졌다.
준은 유라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다가
몸을 똑바로 눕히고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긴 머리채가 어깨를 덮고 가슴까지 치닫고
있는 격랑에 비하면 너무나 가라앉아 있는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은 준의 질긴 가슴을 쓸면서
편편한 배와 허리 밑으로 마치 그의 뜨거운
불길을 끄려는 듯 흘러내렸다.
"준, 내 말 이해해 주겠어? 난 지금 굉장히
큰일을 벌여놓았고, 이제 곧 그 일이 끝나면
돼, 물론 어렵겠지만 기다려 줘, 준. 난 그
일 때문에 준을 잠시 떠나려고 한 것이지
준이 싫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 못 만난
그동안 내가 괴로웠던 것을 생각하면 그건
정말 눈물나는 일이었어. 내가 얼마나 준을
원했는지 알고 있어?"
유라는 웅크린 준의 것을 움켜쥐었고
그것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곤두섰을 때,
또다시 모든 말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더이상 살지 않을 사람처럼
유라에게 사로잡혀 격렬한 동작에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은 이제 한이 없을 만큼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불빛 속에 들러난 침대 위는 흐트러지고
구겨진 채, 담요를 제멋대로 둘러덮은 두
방 안의 모든 침묵을 한 치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새벽 3시.
눈을 뜬 것은 준이 먼저였다. 그는 침대의
흰 시트 위에 흐트러진 유라의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주면서 잠든 유라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증오와 애틋한 연민의 감정이
한동안 소용돌이쳤다. 그는 유라의 엎드린 채
드러난 동그란 어깨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치열한 질투가 가시바늘처럼
자신의 온몸에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유라의 이 몸에 다른 사내녀석이 손을 대고
있는 상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피가 솟구쳤다.
난 절대 그걸 인정하지 못하겠어.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네가 은밀히 딴 남자를
욕심을 인정해 주기 위해 공식적으로 널 어떤
녀석에게 허용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난 지금부터 널 죽이든지 아니면 나와
하야리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는 찾아야 한다는
집념에만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서
살을 맞대자 그는 자신의 생각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준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옷을 주워입고 불을 켰다. 형광등
불빛이 대낮처럼 방 안을 밝히자 그의 머리
속은 더욱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유라를 흔들어 깨웠다.
잠 속에서 겨우 눈을 뜬 그녀는 처음에는
여기가 어딘가 하고 의아해 하듯 주위를
돌아보았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준을 보자
"준, 가려구?"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리며 앉았다.
"가야지, 여기서 살 수는 없지 않아?"
유라는 준의 말이 꽤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그의 결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수십 메가톤의 핵폭발을 저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어쩔 셈이야? 준."
유라는 몸을 웅크렸다.
"유라, 어서 일어나 옷을 입어. 우린 날이
밝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왜, 뭐가 그리 급하지?"
"넌, 아주 느긋하고 여유있게 살고
있었지만 난 그렇지 못했어. 난 서울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지. 지금까지는
유라, 너를 위해서 나를 참고 기다리며 그
널 찾은 지금, 내 마음은 굉장히 초조하고
조급해졌어. 난 널 위해 단 1시간도 기다리지
않겠어, 절대로. 네 말은 지금까지 나를
마약처럼 혼수상태로 만들고, 날 깊게 잠들게
했고, 난 네 말대로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살아왔었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내게는
기다림은 없어. 난 행동만 남아 있을 뿐이야.
어서 일어나 옷을 입고 여길 떠나."
준의 말이 독을 바른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귀에 꽂혀왔으므로 유라는 더이상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임을 직감했다.
유라는 옷을 주워입었다.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다. 가슴 속에 작은
분노의 미립자들이 엉켜서 점차 혹처럼
단단해지고 있었다.
사랑? 좋아하는군, 난 너를 증오해 왔어.
너무나 엄청난 대나무 숲속에 둘러싸여서
내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널 거기서 끌어내려고 했지.
대나무를 태웠고, 네 아버지를 죽였고, 결국
넌 내 곁으로 돌아왔어. 나는 하야리를
떠나는 데 성공했지만 그대신 나는 과거의
망령 하나를 서울로 끌고온 거야. 난 너에게
벗어나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과거의 조악이
거머리처럼 내 곁에 붙어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해. 유라는 자기 앞에 흡사 포수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준에 대한 적개심이 무섭게
치솟아올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유라는 옷을 입고 방 가운데 섰다.
"자, 이젠 방에서 나가는 거야."
유라가 앞서 걸었고 준이 그녀의 뒤를 따라
"준, 그 기집애 차를 나보고 또 타라는
거야?"
유라는 조앙의 프랑스 차 앞에 서서 준을
노려보았다. 준은 차 도어를 열었다.
"타!"
그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난 이 차는 타지 않겠어. 그 기집애 차를
타고 내 앞에 나타나다니, 이건 날 모독하는
거야."
그러자 곧 준이 성큼성큼 다가와 유라의
앞에 바짝 섰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유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작은 숨을
몰아내쉬며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심카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딜 가는 거예요."
"날 납치하는 건가요?"
"네 자유대로 생각해. 네가 지금 나에게
납치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넌 납치당하는
거고, 나와 함께 하야리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넌 아름다운 귀향이 되는 거야."
유라는 끓어오르는 울화가 발화점에
이르렀으나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자제를 했다. 화는 화로 맞서지 말라.
이길 승산을 애초부터 없다. 이 남자는
별수없는 망령의 하나다. 그의 사전에는
둘이라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뒤가 꼭
막혔고 머리 구조가 단세포 동물이다.
"하지만 준, 여기서 직접 하야리로 가서는
안 돼, 난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싶어,
이런 화려한 옷을 입고 귀향하고 싶지는
않아."
준의 눈빛은 유라의 진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제발 그 집은 잊어버려!"
준의 간곡한 말에 유라는 고개를 꺾었다.
"유라, 그건 네 집이 아니야. 그건 네가
살아서는 안 될 집이라구. 넌 그 영감님의
눈에 들어서 글 집의 전속 매음부로 타락해
버린 거야. 넌 지금 얼마나 네가 더럽고
추악하게 변했는지조차 모를 만큼 마비되어
있어. 돈이 얼마난 무섭게 사람의 눈을
가려버리고 양심을 마비시킨다는 것을 넌
모르고 있어. 넌 지금 내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겠지. 마치 내 말이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의 말처럼 생소하게
들릴 거야. 하지만 생각해 봐. 넌 모델의
경력을 쌓고 그다음은 연기자로 진출하려던
있어? 5만 원을 받으면 창녀구, 집 한채를
받으면 귀빈이라는 착각은 하지 마. 넌 열은
모르고 하나만 아는 까막눈이야. 내가 널
지금 하야리로 끌고가는 것은 내 욕심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넌 지금
서울에서 떠나지 않으면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비참해지고 말아. 그건 그런 세계에서
그렇게 빠진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비극이야. 부모들은 아이들이 나쁜 길로
들어설 때 가차없이 매를 들고 못하게 하지.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 그게 왜 나쁜지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야. 난 지금은 널 사랑하지
않아. 예전처럼 널 사랑할 만큼 정열이 남아
있지도 않고 이젠 지쳐서 오히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야. 네가 옛날의 유라가 아니듯
나 역시 옛날의 준이 아니야. 서울에 살면서
귀향의 약속은 아직 살아 있어. 그게 어쩌면
의무와 책임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에
널 악의 소굴 같은 서울에 남겨두고 돌아가지
못했던 거야. 유라, 먼지가 잔뜩 끼어서 내
말이 귀신의 씨나락같이 들리고 있는 유라,
난 널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하야리로
끌고가는 것이 아니야. 네가 불쌍해서,
자기자신이 어떤 길로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고 있는 네가 너무 안 되어서 널
데리고 가는 거야. 이렇게 강제로라도 널
그곳에서 건져내지 않으면 넌 끝내는
후회하게 되고 어쩌면 후회해 보지도 못하고
막다른 길목에 부딪치게 된다구. 아직도 내
말이 우습게 들리거든 눈을 감고 한숨 잔
다음, 다시 눈을 뜨고 저 밤하늘의 별들을
다시 보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만한 가치가 없는 땅이야……."
준은 자신도 모르게 얘기를 길게
늘어놓다가 문득 유라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로가 그녀를 잠 속으로 깊게 빠뜨린 것
같았다.
심카는 어둠 속에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던지며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빛들이 불구슬처럼 흩어져
있었고, 대지는 깊은 어둠에 잠긴 채
찬바람이 차창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준은 종미의 입을 통해서 유라의 소재지를
파악한 다음, 여러 날의 미행과 추적을
통해서 유라가 지금 어느 우산 속에 들어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준은 지금 유라를
강제로라도 하야리로 잠적시켜야 한다고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는 2차선 국도의
포장길을 달리고 있었다. 속도는 훨씬
줄어들었고, 엔진소리는 꿈결처럼 유라의
귓속에 들어왔다.
유라는 잠깐 몸을 뒤척인 다음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을 꺼냈다.
"충고는 고마워 준, 모두가 날 위해서 그런
말을 해줬다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견해 차이야. 세상을 모두 그런
식으로 본다면 아무도 정당하게 사는 사람은
없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은
자기 책임이고 그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야.
네가 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선택한 길이 나쁘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독선이라고 생각해. 누구나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려고 하다 보면 무리가 따르고
그런 점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는 남이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봐. 난 지금 준의
일방적인 판단에 강요되고 있는 거야. 난
어린애가 아니고, 준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바보가 아니야. 난 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내
인생을 포기히기는 싫어. 지금 준이 내게
하고 있는 행동은 폭력이야. 자기 빚을 갚지
않는다고 날 우격다짐으로 괴롭히고 있는
폭도나 다름없어. 지금 이 행동이 정말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질 말아줘. 난 준의 그런
얄팍한 애정에 희생되고 싶지 않아. 날 진정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차를 돌려서 날 서울로
되돌려 줘. 사랑이란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어. 날 이렇게
강제로 하야리로 끌고가서 도대체 어떻게
준은 갑자기 속도를 줄였고, 차를 도로
옆에 바짝 붙여서 세웠다.
준은 핸들을 잡은 채 몸을 유라 쪽으로
돌렸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유라, 어느 쪽이 유라를 위한 것인지는
지금 결론이 나지 않아. 내 말이든 유라의
말이든 어느 쪽이 옳은가는 미래가 결정해 줄
거야. 지금은 아무도 몰라. 하지만 난
유라보다 더 많이 살았고, 세상을 더 알고
있어. 내가 지금 유라에게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은 내 판단이 더 정확하다는 확신
때문이야. 제발 내 결정을 따라줘. 나중에
후회할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야."
준의 음성은 훨씬 부드러워졌고 유라에게
하소연하는 간절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하고 싶고, 나도 그대로 하도록 두고 싶어도
이미 때는 늦었어. 준은 지금의 내 형편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네 형편이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지? 뭘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야, 응?"
"지금은 말할 수가 없어.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준은 날 하야리로 데리고 갈 수갈
없고, 설사 날 데려갔다고 해도 그건
잠깐동안일 뿐이야."
"좋아, 어떤 꿍꿍잇속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 계획은 변경시킬 수가 없어."
준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먼 들판의
지평선 어디쯤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별빛들이 바래서 빛을 잃었고, 먼 산의
굴곡들이 시야에 나타났다.
심카는 어둠이 걷힌 도로에서 벗어나
벼랑 위에서 멈추었다.
어둠의 휘장은 완연히 걷혔다. 새벽바람이
차창에 부딪는 소리가 요란했다.
벼랑 앞에는 낮은 산야와 논밭이 전개되고
그 밑으로는 계곡을 끼고 내려보이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라는 그 강을 잘 알고 있었다.
준은 하야리로 건너가는 강의 긴 다리에서
훨씬 벗어나 지름길을 택했다. 여기서
하야리로 들어가자면 나룻배를 이용해야
한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낮은 산 하나만
넘으면 샛길이 나타난다.
"자아, 우리는 이제 여기서부터 걸어서
가야 해, 뒤 트렁크에 우리들이 하야리를
떠날 때 입었던 헌옷들이 있어, 난 그때
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통바지였어. 우리는 그 옷으로 갈아 입고
여기서 내려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하야리로 들어가는 거야."
준이 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 미쳤어? 옷을 갈아입다니 그게 무슨
짓이지?"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이건 우리가
하야리를 떠날 때의 옛모습 그대로 하나도
변하지 않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해."
"하지만 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서로가 이제는 서울사람으로 변했고, 지금은
미움과 반목으로 이 자리에 있으면서
가식적으로 옷만 갈아입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런 애들 장난 같은 짓을 하자는
거야."
"준, 준은 지금 옛날의 준이 아니야,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의 준이 아니라구,
벌써 세월은 10년이 훨씬 넘었구…… 아아
정말이지 제발 이러지 말아."
유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이윽고 유라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왜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외로움과
서러움이 목밑까지 차올라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준은 담배를 피워 물고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유라의 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유라의 눈물 앞에서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무리
유라의 눈물 앞에 기를 꺾어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늘 그의 얼음장같이
단단했던 가슴을 풀리게 만들었고 끝내는
연민에 사로잡혀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곤 했었다.
준은 그녀가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다시 산란해지기 시작했고, 유라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스스로의 죄의식을
일깨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해 버리도록
종용했다.
그는 팔을 뻗어 유라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곧 그녀의 울음은 더욱 커져서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까지 오염되기 시작했다.
준의 눈에서는 금세 말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물은 한 여자의 고통에 대한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유라의 울음은 더욱 더 세차게
폭발해서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왔다.
"아……준, 정말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난 지금 지금……."
유라의 눈은 아이라인의 검은 색깔이
지워져 온통 먹물로 번져 있었다.
"그래, 유라. 내게 말해 봐. 무슨 말이든
다 털어놓으라구, 어서."
준은 낮은 목소리로 울음을 억제하며
되뇌었다.
"날, 날 안아줘. 난 지금 준을 원하고
있어."
준이 재빨리 그녀의 좌석을 눕혀주자,
유라는 몸을 굴려 뒷좌석으로 넘어갔고, 준은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가 뒷도어를 열고
유라는 실성한 사람처럼 준에게
덤벼들었다. 준은 유라를 무섭게 끌어안고
옷을 끌어내렸다.
유라의 체온은 난로처럼 뜨거웠고 그는
전에도 늘 그랬듯이 눈물 끝에 깊게 오는
유라의 드센 욕망을 나사못처럼 깊게
고정시켰다.
유라의 슬픔은 언제나 열화 같은 성으로
끄지 않으면 해결하는 방법이 없었다. 준
역시, 유라의 눈물 뒤에 오는 진한 감정이
습관처럼 자신을 거세게 만드는 데 익숙해
있었다.
유라의 울음소리는 곧 긴 희열로 이어지는
흐느낌으로 변해서 급류를 이루었다. 경사에
세운 차가 2,3미터 뒤로 미끄러져 흙이랑에
덜컹 받혀 멈출 때까지도 그들은 그것을
맞은편의 먼 산기슭에서 구름에 가린
햇살이 강렬한 빛을 서치라이트처럼 하늘에
쏘아올렸다.
강 아래 옅게 깔린 안개들이 구릉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산개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유라는 준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드러난 젖가슴은 숨을 쉴
때마다 높이 오르내렸다.
"준, 날 이대로 죽여줘. 가장 평화롭고
나른해진 이 상태로 죽었으면 해. 아무
욕심도 없고 편안한 지금 준의 손에서 죽는
게 소원이야. 그러면 준은 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고, 난 준에게 진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그건 서로를 위해
할말이 없어. 날 죽여서 저 강물에 던져주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고향 가까이서 죽은
혼이나 달래겠어. 난 하야리에 가는 것보다는
여기서 죽는 게 백번 낫다고 생각해. 당신은
늘 날 죽이고 싶어했잖아. 나…… 지금 괜히
센티해져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니라구. 어서
날……."
준이 유라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는
유라의 말을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유라, 정말 죽고 싶다면 목숨을 내게 맡긴
셈치고, 내말을 들어주면 돼. 날 따라 지금
하야리로 가는 거야. 죽었다는 셈치고 말야."
준은 유라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협곡을 통과해서 강을 끼고
불어오는 바람이 열린 차창을 통해 차갑게
몰아붙였다. 바람소리는 비파소리처럼
휩싸였다. 아무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유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가만히
새어나왔다.
"준, 이미 늦었어."
유라는 흐트어진 옷매무새를 여미고
웅크렸다.
"뭐가 늦었다는 거야. 우리는 모든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지금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그간 서울에서 살았던 과거는
모두 꿈으로 돌리고 저기 눈앞에 멀리 보이는
우리의 고향 하야리로 가면 되는 거야."
준은 두 주먹을 쥐어보이며 말했다.
"준, 나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정계의 실력자이자 태백그룹 회장인
그분의 호적에 올라 있어."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은 금세 멎어버리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유라."
"그분이 날 원했어. 나도 그걸 원했구.
결혼식은 아직 올리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날짜가 잡힐 거야. 어른께서는 며칠 안에
서독에서 귀국할 거구, 돌아오면 우리들의
결혼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어. 결혼발표로
인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미리
서류상으로는 완벽하게 해놓은 거야. 이제 난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거야……."
준은 두 손으로 유라의 두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폭탄
같은 선언이었다.
"안 돼 유라! 그건 안 돼. 지금 유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준, 제발 진정해. 난 거짓말을 안해. 내
성격 잘 알지? 내 형편이 지금 이렇게 되어
있다구."
"아냐, 그건 믿을 수가 없어. 그사람이 그
나이에 유라를 아내로 맞을 이유가 없어
더구나 그렇게 안해도 될 일을 호적에까지
유라를 올려놓다니, 유라는 지금 무엇인지
모르지만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거야."
"준, 그렇지 않아. 그 일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어. 내가 아파트를 떠나서 그
집으로 들어갈 때부터 그렇게 계획된 거야.
난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런 약속이
아니었다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그래, 좋아. 그게 사실이라고 하자.
유라는 정말 그를 사랑하나? 그래서 그 늙은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를 사랑한단 말이지?"
"사랑하지는 않아.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준이야."
준은 유라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유라의 말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똑바로 말해, 유라. 날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늙은 살쾡이의 아내가 되겠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
"사랑과 결혼은 달라, 준. 나는 그분과
결혼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준을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는 없어. 내
말뜻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 준."
유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계속했다.
"난 준을 사랑해.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남자야. 내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승낙했다면 나는 지금 준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어.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아니야.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
없는 경우는 너무 많아. 물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만 그건 아주 이상적으로
맺어지는 케이스구, 많은 경우에는 그렇지
못해. 나 역시 준을 사랑하지만 준은
남편으로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해
왔어. 내가 만일 평범한 아녀자로서 남자의
뜻만 받들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살 수
있다면 두말할 여지가 없지. 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아서
준이 원하는 대로 하야리의 고향에 들어가
타고나지 못했어. 내 운세는 그걸 용납하지
못해. 준도 그걸 인정할 거야. 그런데 준은
한결같이 나를 자기의 운명 속에
구겨넣으려고 획책해 왔어. 난 준이 그동안
서울에서의 나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넌 내
뜻에 동조할 여지가 못되는구나, 그렇게
깨닫고 자기자신의 뜻을 죽이든지 아니면 날
떠나보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리라
생각했고, 그러기를 바래왔어. 하지만 준은
내 과거의 잘못을 담보물로 잡고 날 자기의
노예로 여겼던 거야. 그리고 이제와서는 바로
여기까지 날 강제로 끌고와서 내가 무릎을
꿇고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요구하고 있어.
물론 당신은 날 이 세상의 어느 여자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사랑은 그 여자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야.
살도록 해주고 그리고 끝내는 자유롭게
떠나도록 해주는 것이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봐. 사랑하기 때문에 그
여자의 곁을 눈물로 떠나는 남자의 사랑은
비록 맺어지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크고 넓은
남자의 사랑인지 준도 잘 알겠지. 준은 내가
온갖 허영과 사치와 욕정에 물든 나쁜 여자,
자기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시궁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될 여자, 아직
어리고 덜 되고 맹목적이고 제 분수도 모르고
부나비처럼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여자로만
보아왔기 때문에 날 이렇게 붙들고 있는
거야. 내가 당신에게 승복하고 당신 말을
고분고분 듣고 당신 뜻대로 고향에 따라가야
행복하고 잘되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어.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수는 없잖아. 이 세상에서 무엇이 참되고
진실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당사자지
제삼자는 아니야. 준의 눈에는 내가 벌레처럼
보이겠지만, 그 벌레는 자기나름대로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설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해. 내 말을 인정해 준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준이
판단해. 내 운명이 준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나 역시 준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겠어. 그후에는 폭력밖에
남는 게 없겠지, 준."
준은 팔짱을 낀 채 유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유라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
가운데 그처럼 조리있고 냉정한 적은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라는
이미 남의 아내였다. 세상사람들이 법적으로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도 번복되지
않는 태백그룹의 회장부인인 유라. 그 유라가
사랑이라는 말로써 가장 온당하게 내린
결론이 현재는 거부될 수 없는 힘으로
발휘하고 있었다.
준의 눈자위는 파르르파르르 경련이 일고
있었고, 눈빛은 깊은 슬픔이 먹구름처럼
자욱히 덮이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텁수룩하게 돋아난
구렛나룻을 조용히 쓸고 있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끝났어. 우리 둘은,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난 거야. 유라가 아무리 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해. 그 말은 위로가 될 수는 없어.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유라에게서 느끼는 배반감을
대나무밭을 내 아버지와 함께 태워버리고
나와 함께 서울로 갈 만큼 날 사랑했어. 난
그때 집과 아버지를 잃은 고통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너의 불길에 감동해서 고향을 떠날
수가 있었어. 내가 고향을 떠났던 것은
우리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고,
세월이 지나 상처가 아물면 넌 나와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로 약속했었지. 난 서울에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세월을 지탱하면서 너
하나를 위해서 헌신해 왔어. 사랑했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었지. 우리는 서로가 오다가다
눈이 마주쳐 사랑하게 된 사이가 아니라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바탕으로 키운
사랑이었고, 미래와 운명을 건 사랑이라는
자부심으로 견뎌 왔었어. 그런데 너는
서울생활에 물이 들면서 점차 변하기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고통을 나는 너의 입장에서
이해했지만 그러나 나는 네가 세월이
지나면서 너의 고통이 아물기를 기다렸고,
그때가 되면 너는 다시 내 손을 잡고
하야리로 귀향하리라고 믿어 왔어. 어떤
고통도 우리는 극복하리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에게 귀향을 전할 때마다 넌 서울에서의 네
욕심에 파묻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날
무마시키려고만 했어. 넌 끝없이 날
기다리라고 하면서 시간만 유예시켰고, 그
세월은 어느덧 10년이 흘렀어. 그리고 끝내
나는 네 입에서 때는 이미 늦었고 남의
아내가 되었다는 말을 기어코 듣고 만 거야.
그리고 그 입으로 사랑은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가증스러운 말을 하고 있는
아니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넌 나에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거야. 내 가슴에 못질을
하면서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참아 달라고 말하는
너의 그 흉악한 사랑법에 박수를 칠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네가 우리들의
순수한 고향을 짓밟아서 획득한 고귀한
회장님 부인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겠어. 네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는 거야, 유라."
준의 겉모습은 초연해 보였으나 가슴 속은
이글이글 타고 있다는 것을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그 옛날 하야리의 대숲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처럼 증오가 절정에
달해서 그 불은 유라에게 옮겨붙을
그가 지금 이대로 참아낼 수 있을까?
온몸의 세포가 뒤섞이고 혈관의 피는
솟구치며 맥박은 더 높이 뛰고 있는데.
지금은 절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에게 거슬리는 말을 한 마디라도
한다면 그것은 불길에 땔감을 던지거나
휘발유를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노여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는가. 그의 분노는
대숲과 아버지를 불태운 여자를 사랑할 만큼
무서운 위력을 갖지 않았는가.
유라는 자신의 무릎 위에 내던져진
옷보따리를 바라보았다. 보자기에 싸인 채
풀려나온 옷은 10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입었던 청색 통바지와 검은 스웨터였다. 그
옷은 문득 가난한 시절의 기억을 향수처럼
그때 준은 유라의 손을 잡고 안개를 헤치며
강가로 나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준, 우린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해.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는 떳떳하게 성공해서
당당하게 돌아와야 해. 그녀가 안개의 강을
헤치며 노를 젓는 준에게 한 말이었다. 그때
준은 유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먼
과거의 빛바랜 약속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린 시절의 꿈이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현실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금례? 난 한때 금례였었지, 하지만 유라야.
다시 과거의 금례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죽는
일보다 못해. 그래, 그건 준의 망상 속에
옷을 입을 수가 없어. 내게 이 옷을 입히려는
준의 생각은 얼마나 어린애 같은 수작인가.
유라는 핸드백에 손을 넣어 손에 잡히는
싸늘한 권총의 손잡이를 손 안에 끌어모아
쥐고 검은 스웨터를 가슴에 끌어안고 차에서
내렸다.
준은 저만큼 바람 속에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라를 되돌아보았다.
"옷을 갈아입지 않겠어?"
준은 성난 듯 외쳤다.
"옷 따위가 그렇게 중요해요?"
유라가 반박하듯 고함을 질렀다.
"그건 우리들이 약속한 거야."
"약속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래, 나는 그 약속에 목숨을 걸었어. 넌
난……."
준은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는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차의
뒤쪽을 힘껏 밀어붙였다.
돌 뿌리 하나를 넘긴 앞바퀴가 구르자 차는
준의 힘에 밀려 벼랑 쪽으로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준이 차체에 힘을 가하자 육중한 심카는
그대로 벼랑을 향해 돌진했다. 허공에서
곤두박질을 치던 차는 100여 미터의 강물
아래로 몸체를 떨어뜨리며 꽈당 철벅 하는
굉음소리를 내며 수면에 큰 파문을 그렸다.
안개 속에 잠겨 있던 강물은 순식간에 차
한대를 삼키고 난 후 잠잠해지고 말았다.
준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를
이젠, 모든 게 끝났군. 우린 이제 빈손으로
남았다. 서울에서 묻은 먼지와 오염된
생각들을 차와 함께 모두 강물 속으로
던져버린 거야.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이마
위에 흐트러놓았다. 멀리서 붉은 해가 검은
구름들을 뚫고 치솟고 있었다.
유라는 그의 등뒤에서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유라의 손에 든
권총이 그의 등을 향해 겨냥되고 있었다. 그
권총은 준의 방 침대시트에서 되찾은 미제
콜트리벌버 더블액션 45구경 6연발이었다.
유라는 연뿌리 모양의 탄창을 회전시켰다.
탄알 다섯 발이 고스란히 장전되어 있는 은빛
총구는 준의 어깨뼈 바로 밑을 겨냥하고
있었다.
유라는 두 손을 뻗어 허공에 받쳐든 채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내가 죽든지 당신이 죽든지, 우린 결국
누군가 혼자 살아남아야 될 거야. 지금
이순간 그 선택이 내 손에서 이루어진 거야.
유라는 눈을 감은 채 방아쇠를 당겼다.
방아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에 걸친
쇠붙이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방아쇠의 자물쇠가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순간 유라의 심장은 돌처럼 굳어졌고 숨이
딱 정지되었다. 준이 돌아서서 유라를
바라보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움직이지 마, 준."
유라는 준을 겨냥한 채 짧게 고함을
질렀다. 준은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잠깐 사이에 침착을 되찾는
듯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테지.
잠깐 사이에 모든 일은 해결될 거야. 사랑할
일도 미워해야 할 일도 모두 끝날 거야."
유라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군. 유라,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하지만 넌 절대로 날
쏘지 못해. 왜냐 하면 하느님은 네가 날
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야.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준은 유라를 향해 천천히 발을 떼었다.
"움직이지마, 준."
그녀는 겁먹은 목소리로 외치면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는 몇 발 뒤로
물러서다가 큰 바윗돌에 걸려 곤두박질을
치면서 넘어졌다. 유라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고, 총구는 계속 준을 겨냥하고
그녀는 알지 못했다.
유라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입술 속으로 소금기가
밀려들었다. 권총을 들어올린 두 팔이 천근의
무게가 되었다.
"유라, 어서 쏘라구. 난 할말이 한마디도
없어. 사람의 목숨이란 아무런 결론을 갖는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끝날 수도 있는
거야."
유라는 뒤로 물러서다가 다시 방아쇠를
끌어당겼으나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만일
방아쇠가 풀렸다 해도 자기를 마주 바라보며
다가오는 준의 면전에서 총을 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윽고 준은 권총의 방아쇠가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자물쇠가 풀릴 거야."
준은 이제 두 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서서
유라에게 말했다.
유라는 그가 말한 대로 손가락으로 돌출된
고리를 밀었다. 그러자 찰칵 하는 금속성
음향이 들렸고, 그순간 방아쇠의 유격에
탄력이 붙었다.
준은 선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유라의 긴장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잠긴 방아쇠 때문에 체념되었던 살의가
무섭게 되살아났고, 이상하게도 그순간
세상이 고요한 정적 속에 휩싸이는 느낌이
왔다.
당겨버려, 방아쇠를 당겨버리라구, 넌 벌써
끝냈어야 할 일을 잠시 지체한 거야. 유라,
어서 당겨. 끝내버리라구, 해치우라니까 어서
충동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아-.
유라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팔을
힘껏 들어올리고 방아쇠의 고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타앙---.
총소리는 잘 닦인 놋쇠를 치는 소리처럼
간결하고 시원한 폭음소리를 내며 새벽공기를
흔들었다. 유라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이 나간 듯 총을 내려뜨리고 몽롱해지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햇빛을 등에 받고 있는
준의 큰 그림자는 넘어지지 않고 우람하게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총은 준의 머리 위로 발사되었던 것
같았다. 유라는 그 순간 커다란 안도의 숨을
내리쉬었다.
문득 유라의 의식 속에는 그 총에 맞지
않았다는 느낌, 그 느낌이 마치 자신이
되살아난 듯한 희열로 바뀌어 피가 순식간에
솟구쳐올랐다.
됐어, 난 준을 쏘지 않았어. 하마터면
난…….
유라가 준을 향해 권총을 힘껏 던져올렸다.
준은 자기 앞으로 휙하고 날아오는 권총을
엉겁결에 두 손으로 받았다. 그는 권총을
손아귀에 끌어쥐고 신기한 듯 손으로
쓰다듬었다.
"자아 준, 이번엔 당신 차례야. 난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어. 어차피 그 권총은
내 손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했던 거야."
유라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들었다. 유라의 모습은
들어올렸다. 그의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다.
"넌 날 쏘지 못했어. 그건 내가 잘 알아.
세상은 공평하기 때문이야. 넌 바로 조금
전에 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놓치고 말았어. 이제부터는 내
운명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어. 이제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린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유라, 넌 지금부터 금례가 되는
거야. 어서 대답해 봐."
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유라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할말이 있으면 지금 해."
준의 음성은 준엄했다.
"할말 없어 준, 난 이제 지쳤어. 이대로
죽는 게 편해. 아까 준의 말대로 사람의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어.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아 줘."
준은 총구를 들어올렸다. 그의 눈은 순간
무서운 증오로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타앙- 타앙-.
총소리는 아까처럼 새벽공기를 흔들며
정확히 세 번 울렸고 그 반향음이 멀리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방은
발사되지 않고 찰칵 하는 짧은 금속성의
음향만이 마침표처럼 그들의 귀에 들렸다.
이윽고 준은 권총의 자물쇠를 채우고
그것을 가슴 속에 깊이 넣었다.
"이제 우린 서로를 죽였고, 다시 살린
거야."
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내리막길로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다리는 몹시
곧이어 유라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제는 서로가 탈진한 상태에서 무엇이든
원하고 내세우고 고집을 부릴 힘이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어디든 바람막이가
될 만한 곳에 가서 따뜻한 물 한모금 마시고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유라는
준의 서너발치 뒤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얼마쯤 지나자 안개가 짙은 강이 나타났다.
강의 수면은 호수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아침햇살이 안개 속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수면 위에 빛줄기들을 꽂아놓았다. 준은 강물
가까이 다가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쪽
10여미터 떨어진 나룻터에 작은 나룻배 두
척이 매어 있었고 그 뒤쪽으로 작은 집 한
채가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알고 있었다. 북쪽으로 다리가 놓여지기 전에
하야리 사람들은 강 노인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 강 노인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이른
아침이었고, 안개가 짙어서 강가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준이 손으로 가리키자 유라는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는 곧 익숙한 솜씨로 배를
묶어놓은 밧줄을 풀은 다음 노를 잡았다.
나룻배는 물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유라는
뱃전의 한구석에 누에처럼 몸을 웅크리고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지금의 자기
모습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계속 노젓는 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었다. 강의 수면을 덮고 있는 안개는
아직도 두터운 층을 풀지 않고 있었다.
혼자 흘렀다. 안개는 서서히 풀려가는
중이었다.
"팔뚝만한 잉어들이 낚시에 물리곤 했었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 강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물살도 나룻배도
그리고 안개도……."
그의 목소리가 솜처럼 뭉치는 것 같았다.
노에 휩쓸리는 물소리가 잠결 속에 들렸다.
유라는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무서운
졸음이 오한에도 불구하고 눈두덩에 무겁게
매달려왔다. 강물에 흐르는 배처럼 운명을
맡겨두자. 무슨 일이든 억지로 되는 일은
없지, 마치 물이 낮은 쪽으로 흐르듯. 그가
젓고 있는 방향은 하야리로 가는 길이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준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가 없어. 정말, 고향에는
없단 말야. 고향을 스스로 버린 사람들의
죄책감인가?
혹시 나처럼 고향이 꼴도 보기 싫은
사람들은 없을까? 없을까? 있다면 그런
사람끼리 모여서 고향 욕이나 실컷 했으면
싶구나.
유라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한가한
생각은 지금처럼 심각한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었다.
"난 여름이면 수영으로 강을 건너곤
했었지. 유라가 수영을 배운 건 바로 이
강이었잖아? 그때가 아마 중2때였나?"
노젓는 소리 사이사이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강가로 나온
건, 집이 싫었기 때문이었지, 집에서는 늘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만 들렸거든. 난 그게
정말 싫었어. 난 밤이면 집안으로 숨어들어가
잠을 잤고, 낮에는 대숲으로 강으로 집을
피해 멀리서 방황했었어. 정말 하야리란
지긋지긋한 악몽이 죽순처럼 자라고 있는
곳일 뿐이야.
유라는 잠깐 사이에 소스라치게 눈을 떴다.
준은 노를 놓은 채 멍하게 서서 수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룻배는 스르르 밀려
강기슭에 닿았다. 뱃전이 바닥에 닿았을 때는
몸이 휩쓸렸다. 안개는 거의 걷혔고,
바람결은 꽤 찼다. 준이 노를 놓고
되돌아섰을 때, 유라는 쪼그려 앉은 채 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준은 강가의 마른 갈대와 수초들
사이에 끈끈이 붙은 안개가 걷힌 사이로
발견했다.
유라는 그 그림자들이 누군가를 대뜸
알아차렸다. 그순간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차올랐다.
준은 젓던 노를 손에서 놓고 망연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가죽잠바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서 내린 채였다.
곧이어 쉬익 하는 휘파람소리가 나자 네
사람이 잘 훈련된 것 같은 사냥개들처럼
뱃전을 향해 달려왔다.
"누구야, 너희들은-."
준의 외침소리는 의연했다. 사내들은 배를
에워싼 채 보스인 듯싶은 사내의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준은 저항하지 않았다. 검은 늑대처럼
뛰어들던 가죽잠바의 사내들은 준의 의연한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은 모두 헬멧을 썼기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 중
한사내가 유라의 팔을 붙들어 나룻배 밖으로
부축했다.
"이봐 친구, 내 말을 순순히 듣겠나?"
그 중 보스인 듯싶은 사내가 준을 향해
말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들은 준이 배에서 걸어나오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준이 배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내가 양쪽으로 준의 팔을 잽싸게 끼었다.
"너희들은 웬 녀석들이냐."
준의 낮은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떨렸다. 그
순간 한 사내의 주먹이 준의 배를 향해
속사포처럼 날아갔다.
"으윽-."
준의 신음소리가 유라의 고막을 찔렀다.
유라가 자기를 끌어내린 사내에게
소리질렀다. 그순간 준은 양쪽에서 자신을
비끌어매고 있는 두 사내를 순식간에
엎어치기로 땅에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러자 유라의 곁에 서 있는 사내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내가 준을 향해 달려드었다. 두
사내 역시 준의 번개 같은 발에 면상을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이윽고 땅으로 넘어진 네 사내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준을 에워싸고 덤벼들 태세를
갖추었다. 그순간 유라 곁에 있던 사내가
재빨리 유라의 허리를 감아쥐고 오토바이
위로 들어올리며, 동시에 시동을 걸었다.
"안 돼요, 날 내려줘요."
그때 오토바이는 출발했고, 유라는 넘어질
듯한 순간에 그 남자의 허리를 두 팔로
오토바이는 큰 굉음소리를 터뜨리며
자갈밭을 무섭게 내닫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는 시골의 구불구불한 논밭길을
한참동안 두뚱거리며 달려 큰 길에 이르자
속력을 더 했고, 한참 후에야 강의 북쪽에
걸린 다리 위에서 멈추었다. 다리 위에는
푸른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다. 유라의
차였다.
운전기사 김씨가 재빨리 내리더니 뒷도어를
열었다. 유라는 차에 타지 않고 아까의
오토바이 사내를 향해 돌아섰다.
"내 말을 듣지 않겠어요?"
유라의 음성은 노기가 등등했다.
사내는 헬멧을 들어올린 채 유라의 시선을
피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정말 내 말을 듣지 않겠어요."
유라의 목소리는 다시 한 옥타브 높아졌다.
사내는 어쩔 줄 몰라서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사내가 겨우 말했다.
"지금 강으로 가서 그 사람을 풀어주고 그
네 남자를 데려오도록 하세요."
"그건 안 됩니다."
"김 기사, 장 비서를 불려주세요."
유라의 말이 떨어지자 김 기사는 재빨리 차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유라는 카폰을 들고 침을 꿀꺽 삼켰다.
"유라예요. 난 무사해요. 그분을
풀어주도록 하세요. 어서요."
유라는 숨을 새근거리며 재빨리 말했다.
"유라 씨. 그 일은 그들에게 맡가고 빨리
큐는 여전히 냉랭하고 침착한 어조로
유라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봐요, 날 두번 다시 말하게 하지
말아요. 당신이 보낸 사람을 바꿔줄 테니
빨리 말해요. 만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여기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모든 일을
파장내고 말겠어요."
"좋아요, 유라 씨. 전화를 바꿔주시오."
유라는 큰소리로 가죽잠바의 사내를
불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뛰어서
카폰을 잡았다.
"……네 ……네."
가죽잠바는 카폰에 대고 계속 굽실거렸다.
드디어 그는 카폰을 놓고 유라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제
부하들이 지금쯤은 녀석을 적당히 주물러
그는 오토바이에 설치된 마이크를 잡고
버튼을 눌렀다.
"거미 나와라, 오바."
그러자 곧 응답이 왔다.
"거밉니다."
"녀석을 그대로 두고 곧 철수하라, 오버."
"알겠습니다."
그는 마이크를 잡은 채 유라를 바라보았다.
"지시가 끝났습니다. 어서 차에
오르십시오."
유라는 침통한 심정으로 차에 올랐다. 준이
4명이나 되는 늑대 같은 녀석들에게 얼마나
당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그쯤해서 준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만일 큐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준은 목숨을
큐의 거미줄 같은 정보망과 조직이
치밀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유라는
벤츠의 뒷좌석에 몸을 가로눕히고 눈을
감았지만 몸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얼마 전 강 언덕에서 준과 맞서 총성을
주고 받던 심리적인 충돌들이 가슴에 심한
상처를 주고, 그 장면들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준과의 결별이 더 이상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자위할 수는
있었지만 이런 식의 헤어짐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후유증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꽤 긴 고통으로
이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고 있었다. 어른이 돌아오고, 그는
자기에게 어떤 것을 요구를 할 것인가, 그에
따른 큐는 무슨 음모를 가지고 맞설 것이며
자신은 그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 머리 속은 엉겅퀴처럼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돼. 유라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유라는 눈을 뜨고
창문의 커튼을 통해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침대 맞은편 장식대 위의 야광시계의
시침이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 밖에서
참새 지저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올 뿐
아침은 깊은 정적 속에 빠져 있었다.
유라는 어제의 일들이 간밤의 꿈속의
전혀 없었다.
심카를 타고 하야리로 가는 강의 벼랑에서
준과의 팽팽했던 대결, 다섯 발의 총성과
심카의 추락, 그리고 안개 속의 나룻배와
준의 독백, 검은 헬멧을 쓴 녀석들의
출현이며 준의 위기…….
유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피로는 말끔히
가셨지만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지금쯤 준은
혼자 하야리로 돌아갔을까? 그가 나를
포기하고 하야리로 돌아가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시작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음으로는 준에게 안되었지만 서로가 다른
운명을 합치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휘말린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라는 몇 차례 몸을 뒤척이다가 이불을
어젯밤 욕실에서 그대로 침대로 기어올라와
잠으로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살갗에는 헝겊
한 조각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유라는 침대 위에서 한참동안 미용체조를
계속한 후 몸 전체에서 땀 기운이 돋자 방
안을 천천히 거닐었고, 거울 앞에 앉아서
어깨까지 풍성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묶으며 자신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스스로 보아도 요기로움이 넘치는
몸매였다. 짧은 허리와 굴곡이 좋은 가슴이
자신만만하게 곧두서 있었다.
준, 괴롭지만 참으라구. 난 기어코 해낼
거야. 나보다 못한 애들도 출세해서
번쩍거리고 사는데 그 애들보다 내가 못할 건
없어. 난 미모나 머리나 욕망이나 무엇이로
보든 만만하지 않아. 이제 난, 그 엄청난
회장부인이며 상속녀가 된 거야. 어른은
3개월이면 세상이 끝날 거구. 날 큐를
손아귀에 넣고 어른의 세 아들녀석들을
요리한 다음 그 다음은 큐를 고려해 보겠어.
녀석은 내가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벅찬
상대지만 약점을 잡고 있는 한 힘을 쓰는 데
한계가 있을 거야. 녀석은 날 이용하고
있지만 나 역시 녀석에게 이용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유라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펴보았다. 어른의 호적 이름 바로 옆칸에
김금례라고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큐가 두고 간 서류였다.
유라는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면서 그 서류
한 장이 어떻게 어른의 엄청난 지위와 위치를
실감할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것인지, 그것은 어떻게 느껴지는 것인지
유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속의 요정의 불그림자처럼 비치고 있는
자신의 요염한 자태에 잠시 취해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유라는 수화기를
들었다.
"접니다, 유라 씨. 지금 내 사무실로
오십시오. 오실 때는 벤츠를 이용하지 마시고
택시로 오십시오. 녀석들이 뭔가 눈치를 챈
듯, 낌새가 이상해졌습니다. 유라 씨의 차가
미행당할 염려가 있습니다."
큐가 유라에게 주의를 주었다.
"녀석들이란 누굴 말하는 거죠?"
"어른의 돌대가리들 말입니다. 세 형제가
요즘 계속 회동하고 있습니다."
"어른은 귀국하셨나요?"
계십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만나서 말씀하도록 합시다. 유라 씨, 난
사무실을 옮겼소. 같은 유니온 빌딩이긴
하지만 반대 방향이니까 69층 승강기에서
내려 왼쪽 코너를 도십시오. 도어에 영어로
닥터 장이라는 작은 표시를 보게 될 겁니다.
그 방 앞에 오시면 자동으로 문이 열릴
겁니다."
"비디오 감시 장치라도 되었나요."
"그보다 더 민감한 겁니다."
"좋아요. 30분 내로 가겠어요."
유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초고성능
감응도처럼 두뇌 회전이 빠른 그가 만들어
놓은 회로를 따라가면 자신이 들어가기를
원했던 그 문이 과연 열릴 것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야리로 가는 강기슭에서
자신을 준의 손에서 고스란히 빼낸 큐의
조직와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그날 준과 함께 호텔에서 빠져나간 후
하야리 입구까지 큐로부터 철저히
추적당했지만 자신은 이미 큐의 손바닥 안의
손금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라는 바지와 털스웨터에
쟈켓을 걸치고 털가죽을 심은 평범한 외출복
차림으로 집에서 빠져나왔다. 큰 길에 나선
유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택시를 기다렸다.
인도에 서 있은 지 채 40초도 안 되어 도로의
저쪽 코너로부터 콜택시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유니온 빌딩으로 가주세요."
유라는 뒷좌석에 앉으면서 운전기사에게
바라보았다. 운전기사는 의외로 풍채가 좋은
미남이었다. 그는 엷은 회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운전사 복장도 갖추지 않았고,
콜택시 운전사들의 모자도 쓰지 않았다.
녀석은 껌을 쩍쩍 씹으며 간간히 휘파람을
쉬익쉬익 불었다. 차는 얼마쯤 가다가 좌회전
신호에서 잽싸게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은
유니온 빌딩 쪽이 아니었다.
"보세요, 기사 아저씨, 방향이
틀리는데요?"
유라가 의심이 번쩍 들어서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딜 간다고 하셨지요?"
운전기사가 별관심이 없다는 듯 물었다.
"유니온 빌딩이에요."
"아, 알고 있습니다. 이 길로도 갈 수
운전기사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어느덧 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갈 수 있는 내리막길 골목
입구에서 차를 돌려세웠다.
"손님, 차가 고장인데 잠깐만 손 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운전기사가 밖으로 나가 버닛을 열었다.
급경사에 차를 세웠기 때문에 유라는
뒷좌석에 앉았으나 몸이 앞으로 쏠린 자세로
앞시트를 붙들고 있었다. 차의 버닛에
앞차창은 시야에 가려 있었다.
유라는 몸을 돌려 뒷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도로의 좌우는 석축이 높았고 고갯길의 높은
꼭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바쁜 시간에 고장난 택시 안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콜택시 운전기사의
태도가 몹시 눈에 거슬렸으므로 유라는
그 순간 뒤쪽 높은 언덕으로부터 집채만한
덤프트럭이 괴성을 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멋!"
유라는 순간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그대로
뒷시트에서 몸을 던져 인도로 뛰어들었다.
바로 간발의 시간차로 벽돌색 덤프트럭은
콜택시를 깔아뭉개며 10여 미터 앞까지 밀려
내려갔다.
트럭이 충돌하는 소리와 급브레이크 밀리는
소리가 유라의 귀에서 큰 굉음소리를 냈다.
유라는 숨이 거의 콱 막히고 눈앞이
아찔했다. 선글라스가 박살이 났고 무릎과
허리를 겨우 헤집고 기어가 석축의 돌계단이
있는 후미진 곳으로 몸을 이끌고 간 유라는
종이처럼 구겨진 콜택시를 숨을 죽이며
콜택시 운전기사 녀석이 말짱한 모습으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녀석은 여전히 껌을 씹으며 구겨진 차 안을
살피고 있었다. 유라는 멈춘 심장을 겨우
가누며 계단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운전기사
녀석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들어왔다.
그순간 유라는 언덕 위에서 빨간색 무스탕
한 대가 날쌔게 내려오더니 멈추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빨간 무스탕은 트럭 운전사의 위치에서
그대로 후진으로 언덕으로 되돌아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경꾼들이 거리를 꽉 메웠을 때 유라는
언덕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무릎뼈가 쑤셨고,
허리가 삔 것처럼 통증이 왔다. 보도로
유라는 택시를 잡아타고 유니온 빌딩의
근처에서 내렸고, 빌딩의 뒤쪽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6층까지는 계단을 이용한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유라는 큐의 지시대로 왼쪽 코너를 돌면서
아까의 충돌 사고가 왜 우연이 아니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닥터 장이라는 푯말이 붙은 도어가
열리면서 큐의 굳은 얼굴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군요, 유라 씨."
큐는 유라의 얼굴을 예리하게 살피며 이미
무슨 일이 있었음을 기정 사실로 눈치챈 것
같았다.
"제가 타고 오던 콜택시가 덤프트럭에 받쳐
종잇장처럼 구겨졌어요."
그녀의 말에 큐는 잠시 정색을 했다.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단 몇 초 사이에 내 기지가 날 살렸어요.
내가 뛰어내리자마자 트럭이 덮쳤거든요."
"운전기사는?"
"고장으로 밖으로 나간 뒤였습니다."
큐는 팔짱을 낀 채 창 밖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별안간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이봐, 지미는 지금 어디 있나? 연락이
없었다구? 녀석이 배신했다. 당장 찾아!"
큐는 속사포처럼 말을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그처럼 민첩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유라는
알 수가 없었다.
"트럭사고와 연관된 일인가요?"
유라가 미심쩍은 질문을 던졌다.
"콜택시 운전을 맡은 녀석입니다. 녀석은
오늘 유라 씨를 이곳까지 안전하게
모셔오도록 책임을 맡은 친구였습니다."
"어마…… 그럼……."
"유라 씨는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말고
요근처의 호텔에 묵으셔야 합니다. 이미
누군가 우리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방해를
시작했습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어른은 귀국하셨고 지금은
섬에 계십니다. 어른은 서독에서의 진찰
결과에 대해 내게 일체 입을 다물고 계시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른은 내
친구에게 자신의 진찰 결과를 일체 비밀로
어른은 국제적인 도약에 앞서 국내외에
자신의 건재를 표방해야 할 입장입니다
노익장의 이미지를 과시하는 데 유라 씨는
어른의 심볼로 떠오르는 별이 되는 겁니다.
그 때문에 어른은 이번 크리스마스파티 겸
태백그룹 창립 50주년 기념파티에서 결혼을
공식 선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번
파티에는 국내외의 졍계와 재계의 요인들이
대거 참석하게 됩니다. 이번 결혼 계획은
물론 제가 짠 계획입니다만 어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비밀작전입니다. 이번 작전으로
어른은 지금 가정적으로 재산을 둘러싼 세
아들의 집안싸움에 재동을 걸어 견제시키고
단합시키며 세계적인 플랜트사업계획 발표로
세계은행들의 차관과 투자의욕을
높이고,자신의 노후대책을 결정하는 몇 가지
큰타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은 지금
그 계획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그
계획을 포기한다는 것은 가속도가 붙은 차에
급 브레이크를 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 어른이 갑자기 비관적인 상태가
되어 모든 계획을 완전히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른은 내게 모종의
지시를 내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유라
씨와의 문제를 원상복구로 돌리게 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 결정은
크리스마스이브 전에 선택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의 이번 계획을 아들들이
눈치챘다면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트럭사건은 우연한 사고를
가장한 녀석들의 방해 공작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세한 내막은
것은 사실입니다. 유라 씨는 앞으로 철저하게
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혹시 유라 씨의
주변인물 가운데 유라 씨와 어른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유라 씨를
하야리로 납치해 간 그 친구도 그 사실을
모릅니까?"
큐는 지금 준을 의심하고 한 말이었다.
유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종미와 붉은잠바가 맘에 조금 걸렸다. 그러나
정확하지도 않으면서 지레짐작으로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 분을 하야리로 보내셨나요?"
유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준의 소식도
퍽 궁금한 일 중의 하나였다.
"하야리로? 그건 모릅니다. 제가 유라 씨의
전화를 받고 지시를 내렸을 때는 그 녀석들은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 녀석이 또다시 유라
씨의 앞에 나타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유라는 큐의 말에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강가에서 4명의 사내와 맞선
준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어른은 그날 파티에서 저와의 결혼을
발표하게 되나요?"
"그렇습니다. 어른은 결혼 발표와 함께
유라 씨를 소개하실 것입니다. 유라 씨는
그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단 위에 올라
어른의 소개로 5백여 명의 하객들 앞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때까지 유라 씨는
절대적인 신변의 안전을 필요로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유라는 큐의 말을 들으면서 그 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기 모습을 머리 속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웃음을 띠며 연단에
오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놀랄 것이다. 카메라의 셔터가 수없이 터지고
사람들의 불빛에 드러난 자기의 얼굴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다. 과연 과연…….
과연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을까.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해 줄
만한 어른의 젊은 아내감인가?
유라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해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자신이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이제는 단지 어른의 그런 계획에 자신의
운명이 맞추어졌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유라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트럭 사건이
호텔방에서 누에처럼 갇혀 살았다.
호텔은 유니온 빌딩의 바로 옆 건물이었고,
경호를 책임진 큐가 호텔의 안팎에
사냥개들을 풀어놓았을 터이므로 외출을 하게
되면 어차피 미행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트럭사건 때 콜택시 운전기사가
큐의 경호원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정도로 치밀하다면 큐의
감시망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유라는 아예 호텔 방문을 잠그고 식사조차
룸서비스를 받았다. 큐의 전화는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시간의 확인겸 위로 전화였다.
일곱째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유라는
외출을 결심했다.
너무 오랫동안 방 안에만 갇혀 있었던
탓인지 마음이 자꾸 우울해지고 세상 일이
앞에서 기초화장을 끝낸 다음 눈화장을
대담하게 하고 립스틱으로 입술을 강렬하게
칠했다. 얼굴이 모습이 완연히 바뀌어 아무도
첫눈에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곧 갈색 프레어 스커트와 더블 쟈켓을
걸치고 앞 챙이 긴 모자를 눌러썼다.
그녀는 방에서 나와 승강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을 통해서 지하실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유라가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도열되어 있는 차들 중에서 엄청나게 큰
외제차 한대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녀는
차창 옆으로 다가갔다. 외국인 여자가 핸들을
쥐고 있었다.
"태워주시겠어요?"
유리문이 잠깐 내려지면서 꽤 늙어보이는
은발의 여인이,
하고 유창한 한국말로 대답했다.
"종로."
"오케이, 타십시오."
유라는 재빨리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차창은 어두웠고, 외국인 여자와 호텔로
빠져나가는 것을 감시원의 눈을 피하는 데
적격이었다. 유라는 자켓의 칼라를 귀밑까지
밀어올렸다. 종로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태워줘서 고맙다고 하자, 여인은 웃음을 띠며
참 미인입니다라고 말했다.
화장을 귀신 나오도록 야하게 했는데
미인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렇게 봐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 지금부터 어디를 간다?
거리에 서자 갑자기 발길이 정지되었다.
호텔에서 나가면 가고 싶은 곳이 지천에
앞이 캄캄했다.
거리의 가로등은 휘황하고 상점의
쇼윈도우와 네온사인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지만 머리 속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구석에 혼다 서서 방향을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바퀴벌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라는 마치 외국의 거리에 던져진
여행객처럼 하느작거리며 발을 옮겨놓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 어차피 지금 내가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더라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화장조차 바꾸지
않았는가.
그래, 거기나 가보기로 하자. 유라는 택시
정류장을 찾았다. 유라가 택시에서 내린 곳은
전에 살던 아파트였다. 아파트에서는 창마다
따뜻한 불빛들이 새어나와 광장의 추위를
주차장에는 여전히 차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늘 보이던 심카는 보이지 않았다. 준이 강물
속에 밀어버린 심카, 그 주인, 조앙은 지금도
아파트에 살고 있을까?
유라는 아파트 입구에서 조앙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있을지 몰라. 하지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라면 그 집 방문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유라는 수은등 불빛을 마주보며 광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늦은 귀가시간이면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준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가를 창문의
불빛으로 확인하곤 했었다.
혹시 불빛이 꺼져 있더라도 준은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어깨를 껴안거나
끌어당기곤 했었다.
그 때문에 유라는 늘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술래잡기처럼 가슴이 설레었던 기억이 났다.
그게 불과 몇 달도 채 안 되었던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먼 과거처럼
까마득했다. 기뻤던 일들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외롭고 슬펐던 일은 생소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과의 인연이 없는 곳처럼 무의미한
장소는 없다. 비록 자기가 오래 살던 곳이라
해도 한번 떠난 뒤 그곳을 다시 찾아오면
그처럼 삭막해질 수가 없다. 만나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사람도 한번 정이 떨어지고 나면 다시
만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데 하물며 전에
살던 공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들어섰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상점마다 불빛으로 트리를 만들어 걸었고,
스피커에서는 캐롤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유라는 한참동안 걷다가 다시 거리의
한모퉁이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서울에는 친척 하나 없고, 친구도 없었다.
모델생활을 하면서 사귀었던 친구나 후배들을
하나씩 머리 속에 떠올렸지만 모두가 일과
얽매어 있던 친구들이었고 마음을 나눌 만한
친구는 없었다.
준이 떠난 서울, 그리고 처음부터 내
집이라는 느낌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평창동의 그 집에조차 갈 수 없는 지금, 다시
되돌아갈 곳이란 호텔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의 운명이 발붙일 곳이란 오직
번질거리는 그 자리밖에 없었다.
지금은 스스로 원한다 해도 모델이나
영화배우의 길은 닫혀 버렸고, 하야리로 가는
길도 막혀 버렸으며, 보이는 길이란 큐가
플래시로 가리키는 황금빛 계단 위의 그
아슬아슬한 자리뿐이었다.
그래, 네가 나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그렇게 쓰겠다. 큐, 우리는
동업자야, 아무도 서로의 하수인이 아니야.
난 지금 그 길 밖에는 갈 길이 없어. 난 마치
내가 가장 원했던 곳을 가고 있는 것처럼
스스대며 가야 해. 누구도 운명을 대신해
주지 않아. 유라는 걷다가 스탠드 바라고 써
있는 간판 앞에 섰다.
그녀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홀
안에는 자욱한 담배연기속에 흐린 불빛들이
들어찬 가운데 떠드는 소리들이 와락
벌떼소리처럼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라는 스탠드의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중년쯤되어
보이는 여인이 스탠드 안쪽에 앉아 있다가
유라 쪽으로 다가왔다.
"위스키 스트롱으로 주세요."
유라는 모자를 눌러쓴 채로 팔로 턱을 괴고
앉았다. 옆자리에는 해맑은 동안을 가진
청년이 얼굴에 잔뜩 취기가 오른 채 앉아
있었다.
술집여인이 위스키 한 잔을 유라 앞으로
내밀면서 고개를 숙여 유라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혼자 오셨수, 처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미스터 최, 옆에 예쁜 숙녀 한 분이
오셨는데 이젠 날 자꾸 꼬시지 말고 잘 해봐,
알겠어?"
술집 여인은 허스키 목소리로 옆자리에
사내에게 말을 휘익 던졌다. 유라는 옆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대학생인 듯 얼굴에 '어리고 순진함'이라는
글자를 써붙인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착해
보였다.
"아가씨, 우리집 처음 오신 초면에
실례지만 이 총각은 대학 4학년인데 우리집
단골이에요. 날 보구 애인하나 소개해 달라고
몇 해 전부터 조르는데 아는 처녀가
있어야지. 소개 못해 주면 날 보구
책임지래나? 원. 저래도 자기가
중년마담이 저쪽으로 자리를 뜨자 그
총각은 유라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위스키를 입속으로 아주 조금씩 흘려넣으며
혓바닥을 쏘는 강렬한 미각을 음미했다.
"저어…… 저 마담 얘기, 사실이
아니에요."
청년의 말이 낮게 들려왔다.
유라는 청년에게 고개를 돌려 끄덕여
주었다. 사실이거나 말거나 유라에게는 그런
농담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남자들과
우연한 인연과 기회를 만들기 위해 혼자
위스키 한잔 마시러 바에 들를 만큼 여유있고
한가한 청운시절을 갖지 못했던 미련리 청년
말을 들으면서 다시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유라, 반만 마셔야 해. 이따가 침대에서 곯아
떨어지면 난 외로워지니까.
반잔을 강조했다. 위스키 한 잔이면 황홀하게
가버리는 자기의 주량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준을 돌아보며, 아니? 어제
였는데 오늘도 또 그럴 거야? 준, 노망들었나
봐, 나 같은 할머니는 정말 못당했으니까,
젊은 애 하나 붙여줘야 할까 봐.
유라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청년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청년은 유라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의 앞니는 금박이었다. 유라는 한잔을
후루룩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청년은 정말
말이 없었다. 이젠 취해서 길바닥에 주저앉기
전에 호텔로 되돌아가야 한다. 술이란 즐거울
때 마시면 꿀이지만 괴로울 때 마시면
독이었다.
그녀가 스탠드 바에서 나어가을 때 다리가
오리가 걷는 걸음과 흡사했다.
유라는 찬바람이 목덜미에 와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아주
멀리서 몽롱하게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빌어먹을…… 괜한 객기였어. 시인은 한잔
술에 시 한수가 나온다는데 자신은 한잔 술에
무서운 외로움과 슬픔이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는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 혼자 서 있는 그림자.
어두운 밤바다. 등대도 없고, 삼각파도만
휘몰아치는 무인도가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다.
유라는 자기가 예상했던 대로 발걸음이
제대로 옮겨지지 않자, 공중 전화 박스 앞에
서서 한참동안 유리문을 붙들고 서 있었다.
그때 스탠드 바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도와드릴까요?"
유라는 겨우 얼굴을 들어 그 청년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화를 거실 겁니까?"
"아뇨."
유라는 큐에게 전화를 하려던 생각을
거두었다. 이 청년이면 밤거리의 안내자로서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댁으로 모셔 드릴까요?"
청년의 말에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댁이 어디십니까?"
"집이 없어요. 난, 갈 데가 없는 여자예요.
그만하면 알겠죠? 청년."
그러자 청년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멋진 여인을 어디로 데려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 여자는 정말 갈 곳이 없는
일인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여인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날 어디로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누울 수
있는 곳으로 말예요. 시간이 지나면 깰
거예요."
청년은 곧 유라와 팔과 어깨를 부축하고
걷기 시작했다. 길가에 모텔이라고 쓴 간판이
네온사인 불빛을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유라를 겨우 부축하여 계단으로
올라섰다.
"바로 옆에 방이 있습니다."
보이는 유라가 걷지 못하는 것을 알고 아주
가까운 방으로 안내했다. 유라는 방에
들어섰을 때도 정신은 또렷또렷했으나 방안의
온기가 밀려오자 무겁게 눈이 감겨왔다.
"준, 왜 그대로 서 있어. 얼마나 내가
유라는 모자를 벗어던지며 이불위에
고꾸라졌다. 청년은 벽에 기댄 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사내가
뛰어들었다. 그들은 유라를 한팔씩 잡아
들어올려 부축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신 차리십시오."
두 사내는 유라를 차에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년은 모텔 밖으로 나와서
한참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10.먼별
창가의 후박나무 큰 잎들이 고스란히 말라
떨어져 내리고 가지에는 잎이 몇개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준은
창을 통해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구름들이 더 낮게 내려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눈이라도 금세 내릴 듯했다.
그는 왼쪽 팔에 감긴 붕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의사는 사흘 후면 퇴원해도
좋다고 말했지만 준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날 하야리로 건너가는 강가에서 네
녀석들과의 치열한 격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후 그는 강 노인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되돌아와, 곧 제일병원에 입원했다.
주먹으로만 승부를 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팔 골절에 다리가 찢기고,
얼굴이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상처는 대강 치료되었으나 왼쪽 팔은 아직
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준의 상처는 더 깊은
가슴 속에 있었다.
그날, 고향 하야리 가까이서 유라와 벌였던
일들이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고,
실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늑대 같은 네 녀석에게 겨우 빠져나와
피투성이와 곤죽이 된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하야리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귀향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 좌절되고 말았다.
우선은 서울로 되돌아가야 한다. 몸을
회복시키고 나서 모든 문제를 다시
생각하기로 하자.
알렸고, 계속 나형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종미의 병간호를 맡았다. 나형을 통해서
입원소식을 전해들은 종미가 병원으로
기습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종미는 병원에 오자마자 준의 병실을
특실로 옮겼고 준에게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마치 그런 기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열성을
보였다.
잠시 후 병실문이 열리고 종미가 들어섰다.
그녀는 바지에 털스웨터와 코트를 걸친
평범한 젊은 주부 같은 차림이었다.
"주무시지 않았어요?"
그녀는 수퍼에서 사온 식료품과 음료수를
내려놓으며 준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준은
그녀의 친절을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으므로
나중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벗겨지고 잇는 사과의 속살은 종미의 손목
색깔과 같았다.
"준형이 더 아파서 계속 입원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옆에서 사과나
깎아주게."
준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사흘 후면 퇴원이야."
"의사한테 얘기해서 아예 이달 말까지
연장해야겠어요.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보내고 싶어요. 얼마나 멋져요."
그녀는 사과를 포크에 찍어 준의 손에
들려주었다. 준이 사과를 입에 넣고 있는
동안 종미는 준의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거칠게 자란 곳을 손등으로 계속 매만졌다.
준은 그런 종미의 애무를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이 외로운 남자를 지켜주는
한 남자의 까칠까칠한 턱수염의 촉감을
자신의 손등으로 즐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여자는 행복한가?
준은 종미의 타는 듯한 눈빛을 바라보면서
왜 이자리에 유라 대신 종미가 그렇게 앉아
있어야 하는지 새삼스럽게 비감을 느꼈다.
유라에 비하면 종미는 훨씬 여자답고
섬세했고, 유라보다 자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다
"유라 소식, 못 들었어? 종미."
준은 종미가 알리 없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소식통이란 종미밖에 없어서
물어보았다.
"아뇨, 전혀 없어요."
준은 그날 강가에서 있었던 사건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라는 어디로 납치된
그 때 종미는 준의 손을 움켜잡았다.
종미의 따뜻한 체온이 손 안에 들어왔다.
내가 잡아야 할 손은 이 손이 아니지, 난
아직 여자의 손을 잡아야 할 만큼 궁지에
빠지지 않았어. 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창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후박나무의
마른 잎새들은 뜰에 켜놓은 수은등 불빛을
조명등처럼 받고 있었다.
"준형, 이제 유라 언니 얘기 그만 할 수
없어요. 지금은 제가 형 옆에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나도 형을 좋아했어요. 유라
언니에게 질투가 나서 못 견딜 만큼."
종미는 준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그러나 준의 가슴
속에는 유라에 대한 뜨거운 연민으로 가득 차
것은 낯선 얼굴이었다. 그는 왜 조앙이
자기를 원했고, 또 이처럼 종미가 자기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기가 유라를 그처럼 못잊어 하고 있는
것처럼 불가사의한 의문에 속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어. 그 사람이 좋아질 때는 아무리 그
사실을 거부하고 부인해도 그럴수록 연민을
부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야.
그렇다면 아예 좋아해 버리고 말지, 끝장이
날 때까지.
"종미, 날 잊는게 좋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유라라는 여자에게 파괴된 영혼을 가진
망령의 남자에 불과해. 난 앞으로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못해. 그건 불을 보듯 한해,
종미. 누구든 내 앞에서는 불행하게 된다구.
"난 유라 언니의 옆에서 유라 언니가 가진
인기, 명성, 사랑을 늘 부러워했어요. 그
중에 어느것 하나만 가져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었죠. 난 끊임없이 언니의 것들을
탐내왔어요. 지금두요. 하지만 결국 어느것도
내것은 아니었어요. 난 유라 언니를 미워하지
않아요. 단지 부러워할 뿐이에요. 형도
마찬가지에요. 좋아요. 끝까지 우정을
지키도록 하겠어요."
종미는 담요를 들어올려 준의 몸을
덮어주었다. 밤이 더 깊었다.
유라는 눈을 뜨자 몸을 일으키고 침대 옆의
턴테이블에 부착된 전자시계의 숫자판을
바라보았다. 온종일 누에처럼 침대 위에서
잠을 잔 탓인지 머리 속은 깨끗했으나 허리가
유라는 유리창의 커텐을 걷어냈다.
겨울날의 저녁햇살이 추위에 열기를 잃고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이었다. 새벽 5시가
아니라 석양녘이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호텔방으로 들러도 되겠느냐는 문의
전화였다.
유라는 실크 잠옷을 걸치고, 침대 위를
대강 치운 후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큐는
여전히 말쑥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암갈색 바지에 체크무늬 웃저고리를 입고
유라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드디어 내일입니다. 유라 씨, 오랫동안 잘
견디셨습니다. 어른으로부터 그동안 별다른
언질은 없으셨습니다. 어른은 모든 일을
계획대로 밀고 나가실 것 같습니다."
펼쳐놓았다.
`태백그룹 창사 50주년 기념파티'
때, 12월 23일 유니논 빌딩 70층 라운지.
식순에는 어른의 축사 외에 몇몇 정계와
재계의 거물급 인사의 축사 등 공식적인
순서가 있었다.
"어른의 결혼 발표는 식순에 빠져 있나요?"
유라의 눈길은 팜플렛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식순에 없습니다. 어른의 축사가
끝나고 샴페인을 터뜨리기 직전에 기습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라는 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라 씨는 그때 대기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나오셔서 어른의 곁에
서야 합니다."
큐의 눈길은 유라의 실크 잠옷 앞가슴에 가
정지되어 있었다.
"어른이 그 계획을 그대로 밀고나가는
이유를 아시나요?"
유라의 의심은 계속됐다.
"어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세
아들의 반발은 거품에 불과합니다."
"어른이 서거하신 후에는?"
"법적으로는 유라 씨가 실력자가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제 손에 들어 잇습니다. 지금도 열쇠는 제
손에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세 아들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당분간은 나를 손대지 못합니다."
"나도 박사님을 손대지 못할까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라 씨."
"그 점을 어른이 인정하겠다는 점이 제게는
신임한다 하더라도 세 아들이 있는데 큐가
후계자가 되도록 방치해 두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더구나 자신이 죽은
후의 재산 분배를 내게까지 넘기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 계획은 어른이 암선고를 받기 이전에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변경사항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른의 큰
뜻을 헤아릴 길은 없습니다. 난 단지 지금의
계획을 수정없이 밀고나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유라는 컵에 찬물을 부어 입을 적셨다.
입속이 마르는 것은 긴장한 탓이었다.
"유라 씨, 내일은 우리가 약속한 대로
진행됩니다. 유라 씨가 이제부터 할 일은
지금까지 입었던 옷 중에서 가장 빛나는
날개를 다는 일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회장실
소속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라는 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큐, 난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건 내가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던 일이에요."
유라는 큐의 턱 밑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는 유라의 몸에서 강렬한 살냄새를
맡았다. 자기를 올려다보는 여인의 눈매는
놀랍도록 젖어 있었고, 갸름한 목덜미와
드러난 어깨선과 굴곡이 거의 드러난
가슴이며 허리가 그의 심장을 금방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않은 것처럼 원하지 않았던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큐는 유라를 왜 그처럼 많은 남자들이
원하는가를 이순간처럼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빛과 몸매와 냄새는 남자의
눈과 코와 가슴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했다.
"큐, 하지만 난 그대로 할 거예요. 내가
당신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무대위에 서는 거예요. 연기는 기막히게
하겠어요. 그렇지만 훗날, 내 연기가 끝난
다음에 당신은 누구의 남자가 되는 거죠?"
유라는 큐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대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순간 그녀는
그의 남성이 아랫배를 지그시 밀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이 아닙니다."
그는 손으로 유라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거렸으나 호흡은 몇 옥타브쯤 높아
있었다.
"큐, 언젠가는 반드시 날 원할 거예요."
유라는 밀착된 그의 몸을 좌우로 쓸면서
말했다.
넌 벽돌 같은 가슴과 컴퓨터 같은 머리를
가졌지만 결국은 내 몸에 감전되자 발기하고
말았어. 넌 지금 내 머리 속에 들어앉아서
버튼으로 마징거 제트처럼 로보트 팔을
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네 남성의
실핏줄을 기립시키고 끝내는 내게 그것을
주고 말 거야. 왜냐 하면 나 역시 널
조종하는 굉장히 성능 좋은 리모트 콘트롤을
가지고 있거든.
않죠? 어른이 무서워서?"
그녀의 갑작스런 질문에 큐는 높은 숨을
내리쉬며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대답은 후에 해드리겠습니다. 어느날
밤, 유라 씨는 그 답변을 듣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자아, 행운을 빕니다. 유라 씨."
큐는 유라에게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려보이며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유라 역시
그를 향해 자기 손가락에 입술을 맞추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 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백그룹 창사 50주년 기냠 만찬에는
국내의 1천여 명의 귀빈들이 초청되는 매머드
파티가 될 것이라고 신문들은 떠들어댔다.
왜냐 하면 그날 밤에는 정계와 재계와
이번 태백그룹의 서독 플랜트 사업 진출로
인한 국제적 도약을 계기로 세계의 유수한
은행들이 투자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기업인들의 로비활동이 치열해질 전망이었다.
스무 살에 태백그룹을 창업, 50년 동안
정계와 재계를 군림해 온 어른의 경영 철학과
투지의 생애에 관한 기획기사는 거의 모든
신문들이 다투어 게재했고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서 얼마나 큰 위업을 쌓았는가를
기렸다.
큐의 전략의 하나로 은밀히 추진되어 온
일련의 쇼크작전은 예상 외로 큰 효과를
가져와 많은 경쟁그룹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가 고령이고, 세 아들들의 불화관계와
불황으로 태백그룹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50주년을 계기로 발표된 일련의 사업계획들을
보고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어른의 세 아들이었다. 그들은
기습적으로 발표된 이번 계획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에 있었고, 아버지가 결혼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소문과 정보를 흘려듣고도
유라라는 여자만을 적대시해 왔을 뿐이었다.
큐는 그동안 치밀하게 진행해 온 자신의
전략이 백발백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른 역시 뜻밖의
파문과 효과를 가져온 이번 일련의 발표에
대해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른은 집무실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서독의 병원에서
받은 진단 결과에 대해서는 당분간 입을 다물
아들과 타협한 일을 큐에게 알여야 했다.
그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처럼 맺혀왔던
그 문제가 이제야 풀린 것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어른은 의자 속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접니다."
큐가 어른의 옆까지 바싹 다가와서
잠시동안 서 있었다.
큐는 어른이 지금 어떤 모종의 결단을
내리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에 와
있었다.
한참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어른은 의자를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수고했네, 자네 덕분에 우리 그룹의
맥박이 제대로 뛰기 시작했군. 나는 서독에
가서야 자네가 얼마나 그곳에 기반을 잘
다져놓았는가를 실감했네. 자넨 내 실력을
능가하는 경영의 잠재력을 보여줬어. 그대신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불행을 발견했지만
말야……."
"또 다른 불행이라뇨?"
큐는 어른이 자신의 진찰 결과를
고백하려고 하나 싶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차차 얘기하기로 하지. 우선
태백의 50돌 기념잔치에 나도 자네에게
"무슨 황공한 말씀입니까? 회장님."
큐의 말에 어른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큐를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턱, 훤칠한 키에 비상한
두뇌를 가진 30대 중반의 남자. 어른의 눈빛
그늘 속에서 한 여인의 이미지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잇었다.
"가까이 오게."
어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큐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큐는 자신의 손을 잡는 어른의 연민어린
눈빛을 바라보았다.
"날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부터는
아버지라고 불러라……."
"아니?"
큐는 곧 무릎을 꿇고, 어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른이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큐의 어깨는 가볍게 들먹거리고 있었다.
"세 녀석들과 아침에 겨우 타협을 보았다.
그녀석들이 이제야 널 형제로 인정했어. 넌
이제 떳떳한 내 아들이다."
큐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세 녀석들은 네가 아니면 태백그룹의
장래가 어렵다는 것을 수긍했다. 널 그룹의
후계자로 승복했고, 또 널 형제로 인정하기로
했어. 이제야 나는 지하의 네 어머니,
요시꼬에게 떳떳하게 됐다."
그는 동경 유학 시절의 한 여인에 대한
회상에 잠시 빠져들었다.
"나는 오늘 우리의 50주년 만찬석상에서 널
"고맙습니다, 아버님."
큐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어서 나가 봐라. 그밖에 모든 계획들은
내가 지시한 대로 시행하도록."
"그럼 이만 나가겠습니다."
큐는 어른의 방에서 나오자 잠시 큰 숨을
들이켰다. 얼굴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또렸했으나 눈에서는 총기가 번쩍거렸다.
큐는 재빨리 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이봐, 강실장, 오늘밤 계획을 B로 바꾼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그밖에 다른 일들은
차질이 없도록."
큐는 지시를 내린 다음 서둘러 나갔다.
이젠 끝났구나. 오늘밤 이후부터 내 인생의
황금빛 정오가 시작되는 거야. 나는 돈과
자들에게 앙갚음을 할 것이며, 한처럼
웅크리고 있던 날개를 한껏 펴고, 찬란하고
눈부시게 하늘 위를 날리라. 내 꿈과 욕망의
끝까지…….
유라는 이를 악물었다.
70층 라운지를 꽉 메운 하객들, 여기저기서
잔 부딪는 소리와 실내악 연주, 웃음소리,
어른의 축사와 우레같은 박수소리, 갑자기
어두워진 실내에 한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며 그 불빛 속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채가 그치지 않고 까마귀들의
날개 터는 소리처럼 계속 들렸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고, 열려진 문으로 낯선
사내가 들어섰다.
"급한 일입니다, 나가셔야겠습니다."
한 사내가 정중하게 말했다.
않았는데요."
유라는 의아스럽게 눈을 치켜뜨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옷은 아직 갈아입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라 씨를 급히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유라는 사내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먹이다가 이내 사내를 따라나섰다.
두 사내는 유라를 양쪽에서 호위하듯 바싹
붙어서 승강기 앞까지 안내했다. 승강기는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 문이
열렸다. 고속 승강기는 눈깜짝할 사이에
유라와 두 사내를 지하실 주차장까지
밀어내렸다.
"그분은 어디 계시죠?"
유라가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마치 녹음기에서 나오는 목소리처럼
기계적으로 말했다. 그들은 위의 지시로
움직이는 로보트들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어떤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주차장에서도 두 사내는 유라를 양쪽에서
호위하며 차 앞에 다가서가다. 유라의
벤츠였지만 운전기사는 낯선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유라는 건너편 코너에서 마악
돌아선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준이었다.
유라가 준을 바라본 바로 그때 준은 몸을
날려 달려오는 듯 싶었고 유라는 벤츠의 열린
뒷도어로 고개를 낮추며 몸을 디밀었다.
유라가 엇! 하고 놀라는 사이 유라를 태운
두 사내는 각각 앞자리와 뒷자리에 유라와
닫았다.
유라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되돌리자 준은
벼츠의 차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며 무슨
말인지 큰소리로 외치며 차를 손으로
잡아끄는 시늉을 했다.
벤츠가 가벼운 폭발음을 내며 출발하자
준은 부리나케 옆의 차 도어 쪽으로
옮겨붙었다. 유라는 뒤 창을 통해서 준이
어느 흰색 승용차의 잠긴 도어를 따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준, 내 예감이 맞았군. 당신이 혼자
하야리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난
알았어. 당신은 절대로 혼자 하야리로 갈
리가 없어. 그건 마치 내가 혼자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거야.
유라는 혼잣말처럼 입속으로 중얼거려
혀로 굴려 불러보았지만 그것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환상의 땅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준이 유니온 빌딩에 이 시간에 온 것은
이해가 안되었다. 그는 어른의 옆에 서 있는
자기에게 박수를 쳐주기 위해서 이곳에 올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지하 차고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치고 너무나 묘한 우연이었다.
유라를 태운 차는 복잡한 시내에서 벗어나
성산대교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유라는 눈발이 자욱히 흩날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차가 어디로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머리 속으로 떠올렸지만 연관되는
곳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죠?"
유라는 사내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며
"잘모르겠습니다."
그는 아까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앞자리에 앉은 사내가 상관인 듯 싶었다.
유라는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어디로 가고 있죠?"
유라는 앞에 앉은 사내의 귀에 바짝 대고
부드럽게 물었다.
"박기사,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나?"
그는 운전기사에게 되물었다.
"김포공항입니다."
운전기사가 짧게 말을 삼켰다.
"공항? 공항으로 왜 가죠? 거기에 누가
있죠?"
"우린 잘 모릅니다. 박사님이 그곳으로
급히 모시라는 분부가 내렸습니다."
유라는 겨우 행선지를 알았지만 그 외에는
알고 있었다. 유라는 얼핏 아까 지하
차고에서 본 준의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 보았다.
순간, 유라의 가슴은 크게 뛰기 시작했다.
차의 뒤창 바로 뒤쪽에서 바짝 붙어서
맹렬하게 따라오고 있는 흰색 승용차의
운전석에는 준이 핸들을 쥐고 있었다. 준은
재빠르게도 바로 그 흰색 승용차를 타고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혹시 잘못 보았는지도 몰라.
아까 지하 차고에서 본 남자는 준이 아니었을
거야. 아마 준의 인상과 비슷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뒤에서 흰색 승용차를 타고
쫑아오고 있는 저 남자는 준이 아닐지도
몰라. 난 지금 너무 준에 대한 노이로제에
빠져 전혀 생명부지인 저 흰색 승용차의
남자를 준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유라는 다시 고개를 되돌려 보았다.
흰색 승용차의 핸들을 쥐고 있는 준이 한쪽
손을 흔들면서 자기가 지금 뒤쫑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제스추어를 보내고 있었다.
아아! 준, 제발 돌아가줘. 날 따라오지
말아. 지금은 날 따라올 시간이 아니라구.
어서 되돌아가 줘. 제발.
유라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누군가
우리 차를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살피며 옆자리의
사내에게 말했다.
"그래? 웬 녀석이지."
그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냥 둬, 공항까지 따라오도록
놓아두라구. 혹시 방향이 같은 차일지도
사내는 침착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차가 공항의 국제선 입구에 도착했을 때,
뒤따르던 흰색 승용차 역시 뒤에 와서
멎었다.
그 시간에 유니온 빌딩의 70층
스카이라운지에는 사람들이 법석대고 있었다.
특별히 초청된 실내악단의 연주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모두 손에 술과
음료수들을 들고 서서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작은 연단에 부이 켜졌고 연단
위에 마련된 의자로 태백그룹을 움직이는
핵심 멤버들이 착석을 시작했다. 어른의 세
아들이 자리잡은 바로 옆자리에 큐가
나타나자 세 아들들이 차례로 큐에게 악수를
받았다.
아직 어른은 입장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한 사내가 큐의 옆에 가까이
다가와 귀엣말로 말했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내의 말에 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장님은?"
큐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 엘리베이터로 올라오시는 중입니다."
"상태는 어떤가?"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꼭 참석하시겠다고
우기십니다."
그때 큐가 연단에서 일어서서 앞장서자
핵심 멤버들과 세 아들들이 우르르 따라
일어섰다.
큐를 필두로 사람들이 출입구에 도열햇을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큐의 존재가
밝혀졌으므로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태백그룹의 젊은 후계자 큐의 박력있는
모습을 보려고 아우성이었다.
이윽고 어른이 나타나자 장내에는 우레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어른은 만찬석상의 출입구로 천천히 나타나
제일 먼저 큐의 손을 잡았다.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갈채가 쏟아졌고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들렸다. 바로 그 시간에 유라는 두 사내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대합실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유라는 뒤를 돌아 보았다.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흰색 승용차가
뒤에 와서 멎었을 때까지도 준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유라는 두 눈으로 똑똑히
역시 그는 준이 아니었어. 난 웬 사내를
준으로 착각했음에 틀림없어.
유라의 머리 속에는 온통 준의 생각이
갈피갈피 꽂혀 있었다. 왜 지금 이 시간에
큐와 어른을 만나러 가고 있는 지금, 준의
생각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를 거부할수록 그가 더욱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마음이 약해졌나봐. 도대체 큐와 어른이
공항에서 이 시간에 날 기다리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아마 어른은 오늘 외국에서
급히 귀국했을지도 모르고 큐가 지금 어른을
마중나왔을 것이며 이제 나는 큐와 어른과
함께 만찬회장으로 동행하게 될 거야.
유라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추리했고
자신의 예상이 십중팔구 맞아떨어지리라고
출입문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유라."
유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라, 가면 안 돼."
10여미터 뒤에서 준이 달려오면서 소리쳤을
때, 웬 사내들이 준의 팔과 허리를 붙들며
제지시켰다. 유라는 두 사내와 함께 걷다가
문득 이마 위를 올려보았다. 뉴욕행
탑승객들의 출입구였다.
"아니? 여기는……."
유라가 멈칫거리자 두 사내는 그녀의 팔을
한쪽씩 완강하게 붙들며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보세요. 어딜 가는 거예요?"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오시면 알게
유라는 그들의 팔목에 이끌려 보잉 747의
거대한 기체속으로 흡입되었고, 좌석에 앉을
때까지도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큐나 어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두
사내는 작은 007 가죽가방 하나를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자, 그럼."
그들은 유라에게 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녀는 비행기의 몸체가 허공으로 치솟기
시작했을 때,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유라는 그들이 남겨주고 간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약간의 달러와 흰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유라는 재빨리 봉투를 찢었다.
접힌 타이프 용지에는 큐의 짤막한 메시지가
단 한 줄 타이프 되어 있었다.
없습니다.'
편지는 유라의 손 안에서 구겨졌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시야가 몽롱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아까
준의 마지막 표정이 엄청나게 클로즈업이
되어 떠올랐다. 이어서 큐의 비는 듯한
눈매가 준의 얼굴 위에 오버랩되었다.
하지만 큐, 난 돌아오겠어.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는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넌
반드시……."
유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었다. 차고 싸늘한 냉기가
전해져 왔다. 하늘에는 엄청난 불구슬들이
흐트러져 있고, 달빛 한줄기가 그녀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외로움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픔은
무서운 기세로 그녀의 혈관마다 넘쳐흘렀다.
"준, 난 꼭 돌아오겠어…… 당신
곁으로……."
유라는 창에 이마를 대고 한참동안 어깨를
들먹이다간 긴 흐느낌 끝에 지쳐서 몸을
의자에 가눈 채 잠이 들었다. 잠든 그녀의 뺨
위로 달빛 한가닥이 흘러들어와 잠시
머물렀다. 보잉 747은 큰 날개를 펴고 태평양
상공을 한마리의 새처럼 까마득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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