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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무엇을 어떻게 쓸까

by Casey,Riley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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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서사문 쓰기1 - 살아있는 말은 어디서 오는가 

    일하는 삶에서 글감을 얻고 
  글쓰기는 무엇을 쓰나 하는 문제와 어떻게 쓰나 하는 문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또 글에 
담긴 글쓴이의 생활 태도며 생각의 문제와 표현의 문제로 나눌 수도 있다.
다음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팝콘'이란 제목으로 쓴 글의 전문이다. 이 글에서 글쓰기의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팝콘 
  강석 
  1학년 겨울방학 때의 이야기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학동안에
고생을 해 
보겠다고 집을 나선 나는 이미 정해 놓은 목적지인 부산을 향해 부산행 기차를
탔다. 
도착해 보니 해가 질 때쯤이다. 전에 한 번 친구들과 와본 적이 있었던 나는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남포동으로 갔다. 한 달 동안 지낼 데를 찾던 중 '아르바이트생 구함'
이란 쪽지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사람이 꽤 많이 오가는 길목의 분식점이었다.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음식을 나르고 배달하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배달한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다는 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점심때가 되면
잊지 않고 
오는 아주 예쁜 누나가 눈에 띄었다.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고 비비화를 신고
있는 
모습은 귀여울 정도였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연필 스케치의 단발머리에 눈이
아주 큰 
소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누나가 올 때면 시킨 음식을
가져다 
주고 먹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다는
건 때론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때는 그 누나가 오면 물 주전자를
엎지르기도 
하고 걸리지도 않던 탁자에 걸린다던가 하는 하지 않던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그 며칠 
후에 주방에 있는 아줌마로부터 그 누나가 멀지 않은 곳에서 팝콘을 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그쪽으로 가는 배달은 대부분 내가 갔고, 가끔 부산에 있는
친구가 오면 
함께 팝콘을 사 먹기도 했다. 그 누나는 대학생인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돈 벌면 부자가 되겠다고 하더군. 밤늦게
자고 
아침이라 하기엔 늦고 점심때라 하기엔 이른 때에 일어나면 하루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더니, 어느덧 한 달이 되어 이젠 친근해진 부산생활을 청산해야 한
아쉬움이 되었다. 
분식점 문을 나선 후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지하 상가를 거닐고 태종대에
가서 앞 
바다를 바라다보니 나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이 씻겨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기 전에 누나에게 갔다. 여전히 빨간 파카를 입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그만 
두었냐고 하면서 볼 수 없겠다고 하더군. 나는 선물이라며 작은 인형과 책 한
권을 주었다. 
누나는 줄 게 없다면서 대신 팝콘을 정성스럽게 두 봉지 싸 주었다. 누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향한 기차를 탔다. 이것이 나의 첫 객지 생활
이야기이다. 
가끔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소녀를 보면 그때 그 거리에서 팝콘을 팔던
예쁜 누나를 
생각하게 한다. 
  '영등포상고 2학년 8반 학급문집 '타오르는 영산강'에서'

  이글은 아마도 누구나 재미있게 읽게 되리라 생각한다. 방안에 앉아 허황한
공상을 한 이야기가 아니고, 어른들이 흔히 쓰는 어떤 생각이나 주장을 흉내낸
것도 아니다.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자기 말로 하나의 이야기처럼 적었으니
재미있게 읽히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한 편의 소설이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을 이어 놓았다. 그래서 마치 옛날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글이 그 정도로 읽히는 까닭이 이런 문장의
특이함에 있다고 본다. 
  한 편의 소설이 될 수도 있었겠다고 말한 것은 소설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고,
좀더 재밌게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지 못한 까닭은 글을 쓰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간 때문이다. 그것은 단락이 거의 없는 것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단락이 없이 이야기를 끌어갔다는 것은 어떤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이 그려
보여주지 않고 설명만 해버렸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좋은 체험이라면
몇가지 이야기의 장면을 나누어서 그 장면들을 좀 자세히 그려 보이면 얼마나
좋겠나. 장면과 장면을 차례로 이어 놓으면 꽉 짜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소설이란 별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 씌어진다. 도 굳이 소설을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겪은 일을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 되게 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얼거리를 잡아서 몇 가지 장면을 자세하게 그려
보이면 저절로 이 글은 앞에서 써 놓은 것보다 더 길어질 것이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마도 처음 쓴 분량의 배는 되겠지. 그렇게 써야 이 글에서
나타내고 싶었던 글쓴이의 느낌이나 생각이 제대로 나타나리라 본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떻게 쓰나 하는 표현의 문제였다. 다음은 이 글이
무엇을 썼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겠다. 사실은 어떤 글을 두고 논평할 때는
문장표현보다 그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먼저 따지고
평가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글에서는 표현 문제가 우선 더 드러나 보이기에
먼저 말했던 것이다. 
  이 글을 쓴 학생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학 동안에 고생을 해
보겠다고  혼자 부산에 가서 한 달 동안 분식점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했다. 참
좋은 생활태도다. 방학동안에 산에 올라간다든지, 바닷가에 가서 지낸다든지,
무전여행이란 것을 한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온갖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인데 이 학생은 아주 별나게, 고생을 해 보겠다고 큰 도시에 가서 노동생활을
한 것이다. 노동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에 나오는  낭만 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정말  고생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한데, 그러면서 그  고생 을
해 보겠다고 나서서 또 실제로 그런 생활을 아주 잘 견디어 내었다. 견디어 낸
정도가 아니라  음식을 나르고 배달하는 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배달한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다는게 즐거웠다 고 할 정도로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보람있게 여기고 기뻐했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다운 건강한 태도다. 요즘같이
입신출세를 위한 점수따기 공부에 모두가 빠져서 세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생각도 감정도 병들고 행동은 더구나 잘못되어 있기가 예사인 청소년 가운데
이런 학생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학생은 이런 삶의 태도를 어디서 배웠을까? 부모님이 부산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고 했지만 아마도 부모님한테서 평소에 이런 삶을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면 이 학생의 심성이 참 착해 보인다. 마음이 착하지
않고는 이렇게 살 수 없고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이런 착한 심성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기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생의 부모님은 일하기를 즐기면서
살아가시는 분들이라 여겨진다. 
  글은 이렇게 해서 써야 살아 있는 글이 된다. 보고 듣고 일한 것, 실제로
몸으로 겪은 삶 속에서 나와야 생명이 있는 글이 된다. 방안에 않아서 책만 보고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살아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학생이고 소설가고 시인이고
다 그렇다. 소설가는 방안에서 글만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소설가들이 쓴
작품은 재미있게 읽히는 문학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우리 나라의 문학작품들은 말장난으로 타락했다. 나는 우리
문학이란 것이 우리말을 병들게 하는 가장 큰 근원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글쓰기로 책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파는 어른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린이와 학생들만은 삶을 정직하게 쓰면서 스스로 삶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씌어진다. 그러니까 글쓰기에서는 어떤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어떤 생각을 배워서 쓰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  팝콘 을 쓴 학생도 책 속에 빠져
있었다면 이런 글은 못 썼을 것이다. 모든 창조의 근원은 삶이요 현실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한 달 동안 분식점에서 일을 했는데,
그렇게 일한 것이 제대로 안 나타나 있다. 분식점이라도 여러 가지 음식이 있다.
어떤 음식을 나르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처음 그런 곳에서 일을 했다면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 실패했던 일, 힘들었던 일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
이야기는 아주 없다. 
  물론 이 이야기는 팝콘을 파는 그 누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분식점에서 힘들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밝은 면만을 썼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모처럼
고생을 하러 갔는데, 그렇게 고생을 한 이야기는 안 쓰고 텔레비젼에라도 나올
것 같은 즐거운 이야기만 썼다면 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의 재미가
깊은 감동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글이란
무엇이든지 보기 좋은 것, 듣기 좋은 것을 써야 버젓한 글이 된다고 알고 있다면
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팝콘 을 쓴 학생이 또 한편의 글 - 분식점에서 일한 이야기를 쓰게
되기를 바란다. 음식을 나르면서 보람을 느끼고 즐거워했던 이야기 뿐 아니라
고달팠던 일들, 속상했던 일들, 힘들었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쓴다면
아마도  팝콘 보다 더 훌룡한 글이 될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다시 문장표현으로 돌아가, 좀더 뚜렷하게 몇 가지를 들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앞에서  자기가 겪었던 일을 자기 말로 썼다고 했는데, 보기를 들면  나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돈 벌면 부자가 되겠다고 하더군   나를
보더니 그만 두었냐고 하면서 볼 수 없겠다고 하더군  이렇게 글월의 끝을 
하더군 으로 맺어 실제로 말을 하는 것같이 쓴 것을 들 수 있다. 
  또  밤늦게 자고 아침이라 하기엔 늦고 점심때라 하기엔 이른 때에 일어나면
하루가 알게 모르게 지나가더니, 어느덧 한 달이 되어...  라고 쓴 대문이나 
분식점 문을 나선 후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지하상가를 거닐고 태종대에 가서
앞 바다를 바라다보니 나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이 씻겨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고 쓴 대문들은 많은 사연이 들어 있는 말을 아주 요령있게 줄여서 쓰거나 자기
감정을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좀더 글을 다듬어야 할 대문도 여럿 보인다. 두세 군데 지적해 보겠다.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아주 어수선한 말이 되었다. 더구나  이때부터의 부산생활의 라 하여 
의 가 잇달아 나오는 것은 우리말 법에도 없는 이상한 말이라 하겠다. 이 구절은
 이때부터 부산의 객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쓰든지, 아니면  이때부터
객지인 부산생활이 시작되었다 고 쓰면 될 것이다.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다는 건 때론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자기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한 말이 되었다고 본다.  때론..될
수도 있었다 고 했으니, 그렇다면 그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어도
때론 즐거운 일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쁜 소녀의
먹는 모습 은  예쁜 소녀가 먹는 모습 이라고 써야 우리말 법에 맞다. 또 
있는다는 건 도 잘못된 말이다. 그래서 이 대문을 글쓴이가 잘 다듬어서 썼다면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예쁜 소녀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에게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었다. 
  -부산을 향해 부산행 차를 탔다. 
  이 말은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탔다. 고 쓰는 것이 좋겠다. 어른이고 아이고 
향한다 를 많이 쓰는데, 될 수 있는대로 안 쓰는 것이 좋다. 마지막에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향한 기차를 탔다. 도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고 쓰면
된다.  학교를 향해 갔다. 고 하는 것도  학교로 갔다 고 하면 그만이고 더
깨끗한 우리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
  -가끔 빨간 파카에 청바지를 입은 소녀를 보면...생각하게 한다.
  이 글에서  생각하게 한다 는  생각하게 된다 고 써야 말이 제대로 될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부터

  우리가 쓰는 글에서 가장 많은 글이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찌 되었다는 이야기를 쓰는  서사문 이다. 소설도 서사문이다. 어린이고
어른이고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일기도 거의 모두 서사문이다. 기행문도
서사문이라 할 수 있고, 감상문도 서사문이 그 안에 들어 있기가 예사다.
수필이나 조사 보고문에서도 서사문이 끼어드는 수가 많다. 이 서사문은, 그 글
안에서 동물이나 식물이 임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사람이
임자가 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야기를 쓴 글은  나 
곧 자기가 무엇을 한 이야기를 쓰는 글과, 자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쓰는 글,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경우, 초등 학생이라면 제 동생의 이야기를 많이
쓰겠지만, 중고등학생이라면 부모님 이야기나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흔히 쓰게
된다. 여기서 부모님 이야기를 쓰는 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부모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지 한 차례는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사람이기에 자기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가족의 역사를 적은
일이다. 가족의 역사를 찾는 일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고, 자기를 올바르게
지키고 키워갈 수 있다. 
  셋째,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살아오신 이야기를 쓰게 되면 저절로 깨끗한
우리말로 쓰게 된다. 적어도 다른 글보다는 덜 오염된 글을 쓰게 된다. 그
까닭은, 책에 씌어 있는 글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지식이나 교훈은 귀로
들었던 말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상을 몸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때문이다. 
  앞에서 부모님 이야기를  나  가 아닌  남 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것은  나 
와  나 아닌 사람  을 구별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사실 어머니 아버지는 
남 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라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쓸 때는, 자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함께
살아온 동안의 일들은 바로 겪었던 일이기에 잘 생각해 내기만 하면 쓸 수
있지만,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나 나서도 너무 어려서 기억할 수 없었던
때의 일은 부모님이나 그 밖의 가족들한테 들어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듣고 또, 더러 필요할 때는 조사도 해서 쓰게 되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이 예사다. 
  어느 정도로 길게 쓰나 하는 것도 미리 작정해서 얼거리를 잘 잡아야 한다.
2백자 원고지로 백 장 쓸 수도 있고, 열 장이나 스무 장쯤 쓸 수도 있다. 길이에
따라 쓸 내용도 정한다. 물론 문체도  합니다 로 할지  한다 로 할지 미리
작정해 두어야 되겠지.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만든 문집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오신 길을 저마다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 씌어 있는 말도 눈여겨보기 바란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이연자 
  1931년 6월 14일 새벽, 사람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사이에 평일도의 풀 냄새
나는 골짜기에서 우리 어머니는 태어나셨다. 
  차근차근 나이를 먹어서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학교는커녕 밥 한 끼도 제대로 배불리 먹어 볼 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남의 아이를 봐 주면서 자랐다. 해가
동산에서 뜨기도 전에 일어나 험한 삼으로 나무를 하러 가곤 하셨다. 촌구석에서
이렇게 저렇게 사시다가 어느 아주머니의 소개를 받고 18살 한찬 꽃다운 나이에
월송리라는 아주 큰 동네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몇 년이
흘러서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만 남으셨다. 맨 처음 시집 왔을 때는
시아버지께 사랑을 받았으나 이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남의 마을 산까지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와서 아침밥을 지으셨다. 또 집안 일을 조금 하다가
점심이 되면 산을 향해 달렸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다가 다쳐서
멍들기도 했지만 꾹 참고 살아오셨다. 
  23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우리 큰언니를 낳으셨다. 힘들게 낳은 아이가
딸이었기 때문에 월송리에서 무섭다고 소문난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께 밥 한
깨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계속 일만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우리 둘째 언니가 태어났다.
이제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누이한테까지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았다. 그후 우리 어머니는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딸만 낳는다고 허구헌날 아이를 등에 업도 일을 하게 했다. 그루 몇
년이 흐르고 또 흘러 어머니는 아이를 또 낳으셨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난리인가? 또 딸이었다. 시어머니와 아버지는 쓸모 없는 딸만 낳는다고 하시면서
재혼까지 하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날마다 눈물과 괴로움 속에서 사셨다.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젠 동네 사람들조차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고개를 못들고
다니셨다. 날마다 마음만 아플 뿐이었다. 
  몇 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또 아이를 낳으셨다. 듬직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잔치를 벌일 만큼 기분이 좋으셨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보고 몇 달 더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이제 안심이 되었다. 아들을 낳으셨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춤을 추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다니셨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께 고생했다고 등도 두드려 주고 하면서 잘 대해
주었다. 
  몇 년이 흘러 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풍이 많이
걸려서 고생을 하셨다. 몇 년이 흘러 아이를 또 낳으셨다. 또 아들인 줄
알았는데 쓸모 없는 딸이었다.
  나이를 많이 먹도록 아이를 낳으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탕약을 사서 어머니를 보해 주셨다. 그 탕약을 먹고 나서 몸이 점점
좋아지셨다. 
  세월이 흘렀다. 막내딸이 5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신장을 앓으셨다. 몸이
부었다. 그래서 가난한 살림에도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돈도 없었고 또 수술을 한다 해도 어머니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그냥 약만 먹고 몸 부은 것만 빼고
집에 돌아오셨다. 
  1년이 흘러 막내딸이 6학년이 되었다. 갑자기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힘이 더 빠지셨다.
  막내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또 병이 악화되어서 병원에
가셨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오면 또 악화되고 그랬다. 
  막내딸이 바로 나, 이연자다. 딸들은 막내만 빼고 다 시집을 갔다. 어머니는
더 많이 늙으셨지만 즐겁게 살고 계신다.
   금일 중학교 3학년 5반 졸업문집  보리처럼 꿋꿋하게 에서 

  참으로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오신 어머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 나라
어머니들은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어쩌다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어머니들이 이 어머니처럼 험악한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낳았다고 해서 시부모나 남편한테 학대를 받는 것은 사람의
권리를 짓밟히는 일이지만, 지난날에는 이런 인권유린을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은 옛날의 왕조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얼마전까지도 있었다. 다음은 1985년 4월 경북 울진군 온정국민하교 3학년
김은정이란 어린이가  아기 라는 제목으로 쓴 시다. 

  아기가 남자가 아니라고 집안 식구들은
  매일 욕을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수건을 들고 
  우는 모습을 본다.
   어머니, 왜 우세요? 
  하고 물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할머니께서는 아기 얼굴마저도
  돌아보시지 않는다.
  여자 놓든 남자 놓든 
  엄마 마음대로 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지,
  설움만 받고 크는 아기.
  어째서라도 나는
  아기를 키우고 말겠다.

  나는 지금까지, 초등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쓴
시에도 이만한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시인이라는 어른들이 쓴 요즘의 시에서도
이만큼 감동을 받은 시를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민하교 3학년 아이가 과연
이렇게 썼을까, 하고 놀라고 의심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른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 마음이 병들고 재능이 시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착한
마음과 올바른 생각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가끔 이런 훌룡한 시를 쓰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온갖 험한 고난의 길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기르는 아이한테서는 이런 감동이
넘치는 시가 나오게 되어 있다고 본다. 
  아무튼 딸아이를 천대하는 이 어리석고 야만스런 풍습이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그 뿌리가 뽑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이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그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옛날에 견주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것을 우리 스스로 바로잡지 않고 민주 사회를 세울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제 글에 나타난 말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아주 깨끗한 말로 썼다. 이중과거형  었었다 가 한 군데도 없고,
일본말법이 없고, 어려운 중국글자말도 안 썼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게 되니까 말도 저절로 쉬운 우리말이 된 것이다. 더구나
가난해서 학교에도 못 가고 남의 집에서 아이를 봐 주면서 밥 한끼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자라난 어머니가, 시집을 가서는 또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적는데 어찌 우리말이 안되겠는가. 
  우선 제목부터  어머니의 살아오신 길 이라 하지 않고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이라 한 것이 잘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은 초등 학생들이 쓴 글에도  나의 어머니 란 말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말을 쓴 것이 반갑다. 우리말로 쓴 글에 우리말이 나왔다고 칭찬을
해야 하는 것이 기가 막힌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쓰기 사정이다. 
  - 또 몇 년이 흘렀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때에 다라서 이렇게 글월을 짧게 쓴 것도 읽기가 좋다. 긴 사연을 줄여서
쓰자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도 좀더 깨끗한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을 살려서 쓰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생활 이란 말도 때에 따라서 쓸
수도 있지만  살아간다 고 해도 될 자리에  생활한다 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래서 생활을 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이 대문에 나온  생활을 하면서 는  살아가면서 라고 쓰는 것이 좋다.
  -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이것은 그대로 두어도 되겠지. 만약에 고친다면  지옥 같은 시집살이를 했다
고 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1년 이란 말인데, 10년, 20년, 100년 할 때는  년 이라야 되겠지만
1년 2년은  한 해   두 해 가 낫겠다.
  이것은  한 해가 지나 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몇 년 도 마찬가지다.

  - 몇 년이 흘러
  - 또 몇 년이 흘렀다.
  이 글에는 이렇게  몇 년 이 많이 나온다. 모두  몇 해가 지나  라든지  몇
해가 흘렀다 고 쓰면 좋겠다. 
  - 산을 향해 달렸다.
  이것은  산으로 올라갔다  고 쓰는 것이 낫다. 흔히  학교로 갔다  든지 
집으로 갔다 고 쓸 말을  학교로 향해 갔다   집으로 향해 갔다 고 쓰는데, 좋지
못한 글버릇이다.  학교로 향했다 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 그후 
  이것도   그 뒤  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다.
  - 더욱더 실망과 좌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부분이 좀 마음에 안든다.  좌절 속으로 빠져 와 같은  유식한  말을 쓰지
말고, 정말 어머니가 들려줄 것 같은 말로 쓰는 것이 좋겠다. 
  - 병이 악화되어서 
  - 또 악화되고
  이렇게 나오는 이  악화 란 말도 따지고 보면 글에서나 쓰던 유식한 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말에서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이
나빠져서   또 병이 나빠지고  이렇게 말하니 글도 말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
또 우리말에는  저친다 는 말이 있고  도진다 는 말도 있다.  병이 더쳐서   또
더쳐서  라든가  병이 도져서   도 도져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우리말을
살려서 쓰는 일이 아주 급하고 중요하다. 

    서사문 쓰기 2 - 가치 있는 글은 어디서 오는가 

    먹는 이야기를 쓴 글

  다음은 여중 3학년 학생이 쓴 밤을 먹은 이야기다. 여러분을 무엇을 먹은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는지, 이런 글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밤
  어제 엄마께서 경동시장에 가셔서 밤을 사 오셨다. 갈색의 윤기가 나는
알밤이었다. 
  동생들은 밤을 사 왔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그 밤이 싫었다. 옛날에는 밤을
무척 좋아했지만 작년부터 밤을 싫어한다. 이유인즉, 작년에 할머니께서
주셨다며 엄마께서 밤을 한 봉지 가져 오셨다. 우린 그 밤을 난로 위에 얹어놓고
밤이 익기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밤 껍질이 갈라지면서 하얀 색의
밤살이 드러났다. 
  우린 서로 먹겠다며 서투른 솜씨로 밤을 까고 조그마한 밤알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껍질도 다 까지 않고 그냥 입을 통과,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입속에서 쫀든쪽든한 것이 톡 터지면서 단물이 흘렀다. 나는 그냥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씹어대며 입속으로 밤을 연신 집어넣었다. 근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뱉어보니 까만색의 밤벌레가 몸이   어진 채로 내 입속에서
나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생들은 신이 나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웃으시며 물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때 물을 무척이나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종일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후로 밤을 싫어한다.
  그리고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밤을 먹고 있을 때는 무지무지 먹고 싶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

  밤을 맛있게 먹다가 벌레를 씹고 놀란 이야기다.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느낌을 가질 것이다. 
  1) 벌레를 씹어 먹었다니 얼마나 놀랐겠나. 끔찍한 일이다.
  2) 나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 이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3)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쓰겠다. 나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사람에 딸 온갖 의견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체로 이 세 가지 느낌이 가장
많으리라 생각한다. 
  밤을 먹다가 잘못하여 그만 밤 속에 들어 있던 벌레까지 먹게 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밤을
먹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평범한 일이다. 말하자면 이 글을 누구에게나
있는 일, 보통으로 겪는 일을 쓴 것이다. 이렇게 일상으로 겪는 일을 일상으로
하는 말로 쓴 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가? 우선 앞에서 든
것처럼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곧 자기표현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을 가지게 한다.
또한, 쓴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 자기의 삶을 바로 보게 하고, 삶 속에서
자기를 바로 세워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게도 한다. 참된 글쓰기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이런 글을 누구보다도 중고등학생들에게 읽히고 싶다.
중고등학생이 되면 대체로 자기가 나날이 겪는 일, 느낀 일을 솔직하게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근사해 보이는 것, 문인들이 쓴 글에서 흔히 나오는 것, 무슨 
척하는 것을 쓰고 싶어한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 학생 때부터
자기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는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중고등학생이 되면
더욱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이 자기가 겪은 조그만 일을
자기말로 쓰는 글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리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이
자리에서 좀더 많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루도 빠짐없이 무엇을 먹는다. 그렇게 먹어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먹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고 누구나 나날이 그것으로
살고 있는데, 어째서 먹는 이야기를 쓴 글이 드문가? 더구나 학생들의 글에서
그렇다. 먹는 것은 천하고 동물들이나 즐기는 것이고, 그래서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덮어두어야 할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먹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목숨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어떻게
천하고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는가?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 먹는 것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는 일들을 걱정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그것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이 하는 정치고 경제고 역사고 학문이고 종교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문화인 것이다.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예술이고 문학이고 철학이고
종교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는  먹는 것 을 대수롭잖게
여긴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밖에 안될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쓰는 글도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한다. 앞에서 든 글은
밤을 먹다가 생긴 일을 썼다. 밤이나 감같은 과일은 누구나 가끔 먹는다. 그런데
밥은 누구든지 날마다 먹는다. 밥을 먹는 이야기는 더 많이 글로 씌어져야 한다.
어떤 밥을 먹는가, 어떤 반찬을 먹는가. 어디서 누구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먹었는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먹었는가. 요즘은 온갖 오염식품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런 오염식품을 먹은 이야기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아무튼
중고등학생의 글은 시인이나 수필가나 소설가들이 쓰는 문학작품의 흉내를
글감과 제목에서부터 내려고 하다보니 솔직한 자기 이야기, 평범한 삶의
이야기가 잘 안 나온다. 그래서 대체로 뿌리가 없이 공중에 뜬 종이꽃처럼 되어
있기 예사다. 앞에서 보인 밤 이란 글은 이런 점에서 모두가 한번 읽어 볼 만한
글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겪은 일상의 일들을 자기가 하는 말로 정직하게 쓰는 것이 모든
글쓰기에서 가장 귀한 바탕이 되고 알맹이가 되는 것임은 초등 학생이나
중고등학생이나 육칠십 나이가 된 늙은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뭔가 근사한 것,
보기 좋은 것을 찾고 말재주를 부리려고 하는 태도로 쓰게 되면 어른이고 아이고
아주 병든 글만 낳게 되어, 글을 쓰는 자신은 물론이고 그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보기글  밤 이 읽는 이들에게 줄 좋은 면만을 말했다. 이제부터는
좀 문제가 되는 점, 좀더 잘 썼으면 하는 면에서 말해 보겠다.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삶을 가구는 참된 공부가 되고
모든 글쓰기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겪은 것을 솔직하게
쓰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체험을 쓴다는 것과 정직하게 쓴다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무엇이 더 있어야 하나? 
   밤 이란 글을 다시 살펴보자. 이 글을 요약하면, 밤을 구워서 서로 많이
먹으려고 하다가 그만 밤벌레가 입안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씹어 먹었다.
나중에야 벌레를 씹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물을 자꾸 마시고 화장실에 가고
했다. 그 뒤로는 밤이 싫어졌다.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은 안 먹겠다. - 이렇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심정과 기분을 그대로 쏟아놓기만 했다. 이렇게, 이런
정도로 써서는 국민하교 3,4학년이 쓴 글과 다를 것이 없다. 제 동생, 동생의
동생이 쓴 글 정도밖에 될 것이 없고, 동생의 동생쯤 되는 나이가 갖는 생활과
생각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야 하나? 어떤 생각이, 어떤 삶의 몸가짐이 더 있어야
하나? 
  앞의 글을 또다시 살펴보면, 밤은 먹기 싫다, 죽을 때까지 나는 밤을 안
먹겠다고 했는데, 그런 얕은 기분방출만 했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반성이나
자기가 가지게 된 그런 심정에 대한 검토는 조금도 없다. 그래서 이 글이
국민하교 중간학년 아이가 쓴 글 정도밖에 안 되고 만 것이다. 
  이 학생이 벌레를 씹어먹게 된 것은 동생들하고 서로 다투어 많이 먹으려고
보늬도 잘 까지 않고 먹어서 그렇다. 보늬를 잘 벗기지 않으면 벌레가 먹은 밤도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그렇게 된다. 벌레를 씹어 먹었다고 놀라고, 다시는
밤을 안 먹겠다고 했다면 마땅히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할 것인데,
동생과 서로 다투어 많이 먹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 
  또 한 가지, 밤벌레를 한 번 씹었다고 해서 앞으로 평생 밤은 안 먹겠다고 한
태도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의 나이만큼 그 마음이 자라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면 밤알 속에 들어가 밤만 먹는 벌레란 얼마나 깨끗한 것인가?
사람은 온갖 짐승과 별의별 벌레를 다 잡아먹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람의
몸을 차츰 병들어 죽게 하는 갖가지 무서운 독이 든 약들을 빵과 과자와
음료수들에 넣어 고운 색깔을 만들고 향기를 풍기게 하고 달콤한 맛을 들여서
먹게 하고 있는데, 이 글을 쓴 학생도 그런 가공 식품은 즐겨 사 먹을 것이다.
그런데 밤벌레 한 번 씹었다고 다시는 밤을 안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물론 나는  밤 이란 글을 쓴 학생이나 이 학생과 별로 다름없는 태도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달콤한 가공식품을 사 먹는 것보다 차라리 벌레 먹은
밤을 벌레가 들어 있는 그대로 먹는 것이 천 배 만 배 건강에 좋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한다고 벌레 먹은 밤을 그대로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또 밤만 먹으면 됐지 벌레까지 먹을 것은 없다고 본다. 다만 벌레 먹은 밤을
그대로 먹었다고 해서 죽을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는 그런 어리석고 좁은
마음의 울 안에서 마땅히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다시 되새겨 말하면, 글은 자기가 겪은 일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또 남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가치가 있는 글을 쓰려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가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제 이 글에서 말을 어떻게 썼는가, 표현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보기로 하자. 
  - 옛날에는 밤을 무척 좋아했지만 작년부터 밤을 싫어한다. 이유인즉, 작년에
할머니께서 주셨다면 엄마께서 밤 한 봉지를 가져 오셨다. 
   옛날에는  했는데,  작년 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옛날이란 말은 맞지 않다. 
지지난해까지는  하든지  재작년까지는  이라고 써야 옳다. 
   이유인즉 이란 말은  이유 도  까닭 이란 우리말이 좋고,  -인즉 도 글말이니
입으로 하는 말  -는 이란 토를 쓰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까닭은 이 된다. 
  그런데 이 글월에서  까닭은..  해 놓고 그 까닭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러니까 
까닭은 이렇다. 고 해서 한 글월을 따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할머니께서 주셨다면 어머니..  이렇게  께서 가 거듭 나오는 것이 문제다. 
-께서 를 다 없애고  할머니가 주셨다며 어머니가.. 해도 되고  할머니께서 만 
-께서 를 붙여도 된다. 초등 학생들이 글을 쓸 때  엄마께서   아빠께서  이렇게
자꾸  께서 를 붙이는데, 실제 말에서는 안 쓰는  께서 를 자꾸 붙이는 것은
교과서의 글과 시험 문제가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엄마가 오셨다. 고 하면
다 되는 것이지  엄마께서 오셨다. 고 할 필요가 없고, 그런 말을 없는 것이다. 
-께서 가 자꾸 들어가면 글이 어설퍼지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30분 정도 있으니까 밤 껍질이 갈라지면서 하얀 색의 밤살이 드러났다.
  난로 위에 얹어 놓은 밤이 익는데 30분이나 걸리는가? 그리고 밤살이 하얀
색인가? 이런 것을 자세하게 쓰지 않더라도 틀리게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 조금이라도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껍질도 다 까지 않고 그냥 입을 통과,
뱃속으로 들어 갔다. 
   더 먹겠다는 경쟁 속에서 는  더 먹겠다고 서로 다투어 라고 쓰는 것이 더
알맞은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껍질도 다 까지 않고  했는데 이  껍질 은 두꺼운 겉껍질이 아니고
속껍질이니  보늬 라고 해야 한다. 
   그냥 입을 통과...  이렇게 쓴 것은, 밤을 씹지도 않고 그냥 꿀떡 넘긴 것
같다. 글은 천천히 알맞은 말을 골라서 공을 들여서 써야지 거칠게 아무렇게나
마구 써서는 안된다.
  - 까만 색의 밤벌레가...
  밤벌레가 까맣던가? 밤 알맹이와 비슷한 색이라고 나는 알고 있는데..
  - 화장실에서 종일 살다시피 했다. 
  어느정도 사실인지 의심스럽다. 사실이면 사실같이 써야지.
  - 그리고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밤을 먹고 있을
때에는 무지무지 먹고 싶다.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치는데, 한편 또 그것을 무지무지 먹고 싶다니, 어찌된
것인가? 소름이 끼친다는 감정과 무지무지 먹고 싶다는 욕구는 한꺼번에 일어날
수 없다. 아마도 먹고 싶다고 한 말이 진정일 듯 싶은데, 그렇다면 소름이
끼친다는 말은 부풀린 말이거나, 그 앞까지 써온 말을 되풀이해서 강조하다 보니
거짓이 된 말인지 모르겠다. 
  -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 밤을 먹지 않겠다. 
  무지무지 먹고 싶다고 해 놓고는 이렇게 마지막을 맺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말도 밤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는 말을 살리기 위해서 쓴 것같이 느껴진다.
무지무지 먹고 싶은 걸 뭐 때문에 죽을 때까지 먹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하는가?
그래야만 밤벌레를 먹고 혼이 났다고 써 놓은 글이 살아나는가?
  글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속여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절대로 글이 살아날 수
없다. 정직하게 쓴 글이라고 했는데, 자세하게 살피니 이런 문제가 또 드러난다.

  글쓰기에서는 일부러 거짓을 쓰려고 할 때만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글의
어떤 모양을 내어 보이려고 한다던가, 자기가 한 말을 자꾸 강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말이 부풀어져서 정확하지 않은 말이 되기도 한다. 그런 것이 거짓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물을 정확하게 그려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더구나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빈틈없이 성실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고,
정직하게 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높은 가치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친구 이야기를 쓴 글

  다음은 취업을 앞둔 여고 졸업반 학생이 먼저 일자리를 잡아 나간 친구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쓴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다음 네 가지 물음에 대답할 준비를
해 보자.
  첫째, 일고 난 느낌이 어떤가?
  둘째, 표현이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대문이 있으면 말해 보자.
  셋째, 이 글에서 흔히 우리가 쓰는 글과 다른 점이 있다고 보는가? 있다면
어떤 점인가?
  넷째, 이 글에서 다듬어야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라.

    친구를 찾아서 
  홍성실 
  친구가 취업을 나갔다. 안성주유소 판매직으로, 갈 때는 물론 기대감으로 잔뜩
들뜬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지금, 자주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하곤 한다. 힘들다는 거다. 사람들도 보고 싶고,
  사실 이런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겁이 난다. 난 과연 적응할 수
있을는지, 그리고 적응하는 데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자신이 없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보다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까지 있었는데.
  오늘은 얼굴이라고 한번보고 오려고 찾아갔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더
반가운 거라 하기에 연락하지 않고. 일요일이라서 휴게소 안은 몹시 붐볐다.
국수나 커피를 사가지고 가다가 부딪혀 다 쏟게 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나도
그 사람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 국수 판매하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글세, 너무 바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땀까지 흘려가며 국수에 국물을 부어주고 있었다. 부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길게 늘어선 줄 뒤로 가서 섰다. 한 사람, 두 사람 줄더니
이제는 내 차례다. 친구는 받은 돈을 정리하느라 머리를 숙인 채  무얼 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능청스레  여기 국수 맛있어요? 라고 되묻고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목소리를 알아듣고 쳐다볼까 봐서.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를 듣더니  성실아  하고 부르는 거다. 옆모습이라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내 얼굴엔 도장이 찍혀 있단다. 주근깨 말이다. 역시 펄쩍펄쩍 뛰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자꾸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몇 마디밖에 나눌
수가 없었다. 더 기다려도 시간이 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간다고 말하고는
뒤돌아서는데,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데,
괜스레 마음만 흩트려 놓은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그러나 이젠 믿기로 했다.
잘 이겨 나갈 거라고.
  (안성여고 생활글쓰기 반  우리끼리 얘긴데요  제3집 93.12)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물음에 대답해 본다.
  첫째, 이 글에는 친구를 생각하는 글쓴이의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다. 졸업도
하기 전에 일자리를 구해 나간 친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걸어오는 전화를 자주
받고(첫째 문단), 자기가 가야 할 일자리 걱정도 하면서(둘째 문단),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어느 날 그 친구를 찾아가 만나고 온 일(셋째 문단)을 썼는데, 그렇게
만나러 가서 본 친구의 모습과 행동, 그리고 자기가 한 일들이며 생각을 쓴
말들에 정이 넘쳐 있는 좋은 글이다. 남들은 어떤 느낌이 드는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 느낌은 그렇다. 

  두 번째 물음인 표현이 잘 된 대문은 본 것과 한 것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쓴
대문과 생각을 잘 잡아서 쓴 대문, 그리고 어떤 형편을 요령있게 잘 말해 놓은
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문단에서는 친구의 형편을 아주 짧은 글로 요령있게 썼다. 띄어 쓴 자리를
넣어서 모두 55자밖에 안 되는 이 문단에 글월이 6개나 들어 있으니, 평균해서
한 글월의 길이가 9자밖에 안되는 셈이다. 글이 얼마나 간결하게 씌어져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읽기 좋은 글이 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다음 문단에서는 친구의 소식을 듣고 곧 닥쳐올 자기의 앞날을 걱정하여
불안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을 짧은 말로 잘 적어 놓았다. 
  셋째 문단이 이 글의 중심인데, 여기서는 휴게소가 붐비는 모양을  국수나
커피를 사 가지고 가다가.. 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이렇게 설명하는 말로
쓰지 말고 바로 어떤 일을 본 그대로 잡아서 가령  한 아주머니는 국수를 사
들고 가다가 옆 사람에 부딪혀 국수물을 쏟았다  이렇게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다음에 친구를 본 것을  그런데 글세, 너무 바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땀까지 흘려가며 국수에 국물을 부어주고 있었다  고 썼다. 친구가
땀을 흘리면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을 잘 잡아서 썼다. 
  이렇게 해서 친구를 보고는 글쓴이가 어떻게 했고,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나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는가 하는 것이 이 글의 중심이자 막바지로 그 다음에 잘
씌어 있다. 좀 길지만 다시 들어보자.

   ...부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길게 늘어선 줄 뒤로 가서 섰다. 한 사람,
두 사람 줄더니 이제는 내 차례다. 친구는 받은 돈을 정리하느라 머리를 숙인 채
 무얼 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능청스레  여기 국수 맛있어요? 라고
되묻고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목소리를 알아듣고 쳐다볼까봐서.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를 듣더니  성실아  하고 부르는 거다. 옆모습이라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내 얼굴엔 도장이 찍혀 있단다. 주근깨 말이다. 역시
펄쩍펄쩍 뛰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자꾸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몇
마디밖에 나눌 수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의 한 판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꾸며낸 연극이 아니고 삶의
한 순간이다. 몸으로 겪은 것을 그대로 잘 생각해 내어서 쓰면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을 준다.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저마다 가지각색으로 다른 연극을 연출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귀한
연출을 하면서도 그것이 귀한 것인 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가 보고 듣고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것을 자세하게
붙잡아 차근차근 쓸 줄 아는 사람만이 슬기로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쓴말을 보자. 

   그래서 간다고 말하고는 뒤돌아서는데,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데, 괜스레 마음만 흩트려 놓은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그러나 이젠 믿기로 했다. 잘 이겨 나갈 거라고. 

  얼마나 알뜰한 자기 살핌인가? 따스한 친구 생각인가? 이 대문에서도 한
글월의 평균 길이가 열 자밖에 안 되도록 간결하게 썼다. 

  세 번째 물음은, 이 글이 우리가 흔히 읽는 글에 견주어 다른 점이다. 글월이
짧다는 것도 특색이지만 그보다도 더 남다른 것은 글월의 맺음말씨끝(어미)이 
-다  로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은 글월이 모두 32개인데, 그중 20개는  -다 로 끝맺어 놓았고, 나머지
12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 있다. 
  * -로(으로)    2개 
  * -겠지        1개
  * -고          4개 
  * -는데        2개 
  * 때문에       1개 
  * 봐서(-아서)  2개
  이와같이  -다  말고 여섯 가지 씨끝(어미)을 맺는꼴로 쓰고 있다. 누구나 잘
아다시피 소설이든지 수필이든지 평론이든지 생활글이든지 우리가 쓰고 읽고
하는 글은 한 글월의 마지막에 나오는 풀이씨(용언)가 거의 모두  -다  한
가지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만 글이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어쩌다가 달리
씌어졌다고 해도 기껏해야 한두 가지로 다른 꼴이 나타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2백자 원고지 4장 반쯤 되는 길이에  -다 가 아닌 말끝이 여섯
가지나 나와 있으니 놀랍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글월이 끝맺는 결과로 이 글을 읽어보면 아주 독특한 맛이 난다. 그 맛이란
무엇인가? 글이 살아 있다는 느낌, 글이 글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말로
씌어졌다는 느낌이다. 
  살아 있는 말은 방안에 앉아서 생각만 해서는 나올 수 없고, 책을 읽어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만 읽고 몸으로 겪은 일이 없으면 도리어 죽은 말(책으로 읽힌 글말)만
늘어놓게 된다. 살아 있는 말은 다만 현실 속에서 나날이 살아가는 삶속에서만
나올 수 있다. 이 글도 절실한 삶을 본 대로 들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한 대로
행한 대로 자세하게 붙잡아 썼기에 자기 자신의 말이 되어 이런 글로 나타난
것이다. 무슨 문장 이론 공부를 해서 그 이론에 맞게 써서 이런 글이 된 것도
아니다. 요즘 글쓰기 공부의 귀한 방법처럼 모두가 여기고 있는 그 논리 공부를
해서 논리에 맞게 쓰려고 했다면 이런 살아 있는 글은 결코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여러 가지 씨끝(어미)에 나타나는 글월의 성격을 좀 알아
보기로 하자.
   안성휴게소 판매직으로.  
  이 글월은 마지막에  나갔다 란 풀이말을 줄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풀이말을 줄인 까닭은, 바로 앞에  나갔다 로 끝난 글월의 맺음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두 글월로 나누지 않고 보통은 한 글월로 해서 
친구가 안성 휴게소 판매직으로 취업을 나갔다.  이렇게 쓴다. 한 글월로 써도
이 경우에 긴 글이 아니다. 그러나 짧은 글도 이 학생은 이렇게 두 글월로
나누어서 앞에 쓴 글월은  -다 로 맺고, 뒤에 쓴 글월은 여러 가지 형태의
풀이씨나 토로 맺어서 글이 더 싱싱한 느낌이 나도록 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슨 이론을 배워서 이렇게 쓴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로 입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어 있어서 입말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초등 학교 1,2학년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면 때로 아주 살아 있는 입말을 쓰는데, 이것은 어른들이
쓰는 글말을 흉내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에는 이 밖에도 한 글월로 쓸 것을 이렇게 두 글월로 나누어 쓴 대문이
많다. 
   힘들다는 거다. 사람들도 보고 싶고.  이것은  사람들도 보고 싶고, 힘들다는
것이다 로 쓰지 않고 앞쪽의 반을 떼어서 따로 한 글월을 만들어 뒤에다 쓴
것이다.
   난 과연 적응할 수 있을는지..  이렇게 시작되는 글월도, 아주 길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오는 글월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 그 안에 들어가 두 글월이 한
글월로 될 수도 있는 형태인데, 이렇게 나누어 놓았다. 
   오늘은 얼굴이라고 한번 보고 오려고 찾아갔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더
반가운 거라 하기에 연락하지 않고.  이것도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더 반가운
거라 하기에, 오늘은 얼굴이라고 한번 보고 오려고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갔다 
고 쓸 수 있다. 
   일요일이라 휴게소 안은 몹시도 붐볐다. 국수나 커피를 사 가지고... 벌어질
정도로  이것은  일요일이라 휴게소 안은, 국수나 커피를 사 가지고 가다가
부딪혀 다 쏟게 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붐볐다 고 쓸 수도 있는 것을 두
글월로 나누어 썼다. 
   나도 그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국수 판매하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앞에 그 보기가 있듯이, 뒤에 따로 떼어 놓은
글월을 앞의 글월 앞쪽에 갖다 놓고 그대로 이어서 한 글월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능청스레  여기 국수 맛있어요?  라고 되묻고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목소리를 알아듣고 쳐다볼까봐서.  이것은 뒤의 글월을, 앞의 글월에
있는  되묻고는 과  얼굴을  사이에 끼워 넣으면 된다. 
   그러나 이제는 믿기로 했다. 잘 이겨 나갈 거라고  이것도  그러나 이제는 잘
이겨 나갈 거라고 믿기로 했다 고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글월을 둘로 나누어서 앞의 글월은  -다 로 맺고, 뒤의
글월은 다른 여러 가지 형태로 맺어서 말을 살려 놓은 것이다. 
   갈 때는 물론 기대감으로 잔뜩 들뜬 마음이었겠지. 하지만..  이것은 
..마음이었겠지만..  이렇게 해서 이어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끊어서 딴 글월을
만들었다. 
   그동안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데 괜스레 마음만 흩트려 놓은 것 같아서. 
이 글월 끝에는  그렇다 는 말을 줄였다고도 볼 수 있다. 
   걱정도 되고  다섯자로 된 이 짧은 글월은  걱정도 되지만  하고 그 다음
글월에 이어질 수도 있는 말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글월을 짧게 끊어 써서 싱싱한 말이 되게 한 것이 이 글의
특색이요 좋은 점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다듬어야 할 말인데, 이렇게 살아 있는 입말로 쓴 글이 되어
있어서 글에서마나 쓰는 잘못된 말은 없다. 이 정도로 깨끗한 우리말로 쓴 글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글이 말까지 병들게 해서
입에서 나오는 말도 잘못된 것이 많아 이 글에서도 한 두가지가 보인다. 
  - 국수 판매하는 곳을 찾았다. 
  이렇게 나오는  판매하는 은 마땅히  파는 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쉬는 곳 에  휴게소 란 이름이 붙고,  파는 이 가  판매직 이 되어 버린
자리에서  국수 판매하는 곳 이란 말도 저절로 나올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래도 다듬어야 할 말이라고 본다. 
  - 무얼 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  여기 국수 맛있어요?  라고 되묻고는..
  이렇게 두 군데나 나오는  라고 는  하고 로 써야 본디 쓰던 우리말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이 글은 감상문인가 서사문(이야기 글)인가 하는
문제다. 이야기가 있는 감상문 같기도 하지만, 감상이 적힌 이야기글이라 하는
것이 더 알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글이든 감상문인지 서사문인지 어중간하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따라서 글을 쓸 때는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느낌이나
생각을 쓰는 데에 더 무게를 두어서 감상문으로 하든지, 느낌이나 생각이 얼마쯤
들어가더라도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서사문으로 쓰든지 해서, 처음부터
어떤 형태의 글을 쓴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감상문 쓰기  -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웃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다음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이번에는 낱말이나 말법도 보아야
하겠지만 글의 내용을 더 많이 생각해 보자.
 
    라면 한 그릇의 사색
  정해진 밤 자습을 마치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집에 와서 혼자 라면을
끓여서 마시다시피 먹고 있는데, 창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내다보니 술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는 알 수 없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동네 사람들도 몇 끼어든 것 같다. 나로서는 감히 해볼
엄두도 안 나는 욕이 동네를 울리고 있다. 그런 속에서 스프를 두 개 넣어
걸쭉한 라면과 걸쭉한 그 소란을 음미하여 본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가? 아닐 게다. 그런 보통 사람일 게다. 파라리
넥타이 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나 생명에는 관심도 없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나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가? 신사답지 못하게 욕을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 사람들이 부시 대통령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
국민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군인이었던 정치인도 더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래도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여러 사람이 듣도록 함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우리들은 어떤가? 눈도 깜짝 않고 남의 마음을
도려낼 만한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 있다. 그것도 더 배운 놈일수록 남 공격하는
게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얼굴 빛은 물론 맥박이나 혈압의 변화도 없다.
그나마 저들은 흥분해 있고 이성이 잠시 비켜난 상태 아닌가? 그럼 저들이
우리보다 착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 같을 게다. 
  그럼 왜 저들은 나쁘게 보이고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왜 대통령이 전쟁
터뜨리면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가? 돈 많고 많이 배운 놈일수록 포장을 잘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저들은 못 배우고 돈 없다는 이유로 자기의 나쁜 점을 그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불이익이 아니고 정당한 거다. 나쁜 것 나쁘게 평가받지 않는
게 부당한 거다. 그럼 나나 더 배운 놈이나 돈 많은 놈이 부당한 것이네?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당해질 수 있지? 모르겠다. 어쨌건 플러스 마이너스로 볼
때 우리는 마이너스고 저들은 제로에 가까우니 저들에게 항상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성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진 놈 배운 놈은 마이너스 벗어나기만 해도
대단한 인물이 된다. 그만큼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울수록 더러워지기 쉽고
깨끗해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글은 꽤 주의해서 읽어야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게 될 것 같다. 그만큼
남다른 생각이 나타나 있고, 글월마다 뜻이 차 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는데, 밖에서 고함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아저씨의 아주머니가   지거리를
하면서 싸우고 있고, 마을 사람도 몇이 끼어들어 있다. 여기서 글쓴이는 그 이상
자세히 그 싸움의 속사정과 모습을 살피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겠지만,
흔히 일어나는 이웃 사람들의 싸움이라 도 그런 것이겠지 하고 그 이상 관심을
안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흔히 일어나는 사람들의 싸움에 대해서 오늘은 뭔가 생각을 좀 정리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가 먹는 라면과 함께 곰곰이 되씹어 보자고
해서 생각을 적은 것이 이런 감상문이 되었다. 
  이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 보나. 저 듣기 거북한 욕지거리,
교양이 없고 무식한 사람들이 토해내는 고함소리, 누구나 저 사람들을 욕할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나쁘기로 말하면 저들을
욕하는 점잖은 사람들, 신사 숙년들, 무엇을 배웠다는 이들이 훨씬 나쁘다.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할뿐이지만, 교양을 갖추고 배웠다는 사람들은 점잖게
논리를 세워서 상대편을 아주 크게 해치는 말을 한다. 그뿐 아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은 사람의 목숨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전쟁까지 일으켜 사람을
무더기로 죽인다. 그런데 어째서 골목에서 욕설을 하면서 싸우는 저들을 나쁘게
보이고, 돈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나쁘지 않게 보이는가?
그것은  포장을 잘 하기 때문  이다. 곧 속임수를 쓰기 때문이다. 골목에서
싸우면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이 잘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그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면, 돈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한 사람들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 대강 이런 생각이다.
  이 글을 쓴 학생은 자기도  배운 놈  편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보다 착한가?  하고 스스로 묻는 말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고
했고,  다 같을 게다 는 대답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 라고 한 말에는 돈
많이 가진 사람이나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까지 들어가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튼 배우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언제나 땀흘려 일하면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식하고 거칠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플러스 마이너스로 볼 때  플러스도 아니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 에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저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반성하면서 살아야 한다. 가진 놈, 배운 놈은
마이너스 벗어나기만 해도 대단한 놈이 된다 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서 조리있게 쓴 글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일과 삶을
보는 관점이 뚜렷하고, 그래서 아주 확신을 가지고 쓴 글이다. 글쓴이의 이런
주관과 신념은 어떤 책에 씌어 있는 이론을 읽어서 머리 속에 넣어 놓은 것으로
풀어 낸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몸으로 느끼고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만큼 자기 것으로 된 말로, 확신에 찬 말로 썼다. 
  이 글에서 무엇보다도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글쓴이의 깊은 이해와 따스한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이 이런 생각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고등학생으로서
이만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느낌과 생각을 쓴 것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그래서 그것이
결코 어떤 감정에 치우치거나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매우 온당하게 나타나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 또한 글쓴이가 가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심정에서 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쯤 하고, 낱말과 문장에 대해서 말해 본다.
  - 라면 한 그릇의 사색
  좀 멋을 부린 제목이다. 이런 멋이란 알고 보면 흉내다.  차 한잔의 사상 
꼴로 쓴 것이다. 이렇게 쓰더라도 늘 입에서 나오는 낱말을 쓰면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사색 을  생각 으로 바꾸어 보라. 흉내가 아니고 제법 제 생각같이
느껴질 것이다. 
  - 내다보니 술에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는 알 수 없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여기서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에 핏대 세우는 싸움이다 고 하는 말이
괴상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말법이 아니다. 우리말법일 수 없는 것은, 이런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곧 깨달을 수 있다. 하도
외국글 따라 외국말법을 그대로 옮겨 써놓은 글을 많이 읽게 되니 자기가 쓰는
글도 그만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써야 하나? 말하는 대로 쓰면 된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운다 고 말이다. 
  - 그런 속에서 스프를 두 개 넣어 걸쭉한 라면과, 걸쭉한 그 소란을 음미하여
본다.
  글재주를 잘 부려 놓은 대문이다.  ..라면을 먹으면서 시끄러운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고 할 것을 이렇게 멋을 부려 썼는데, 그다지 억지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말재주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차를 마실 경우에야 이야기를
하면서 마실 수도 있고 무엇을 골똘히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배가 고파 라면을 
마시다시피  마구 먹으면서 무슨 바깥의 사람 소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재치는 크게 허물하지 않겠다.
다만 이 이상의 말재주를 부릴 생각은 말아야 하고, 말재주를 즐기는 버릇을
조심해야 하고, 이런 말재주보다 차라리 소박하게, 보통 우리가 누구나 입으로
하는 말로 쓰는 것이 더 좋은 글이라는 것만은 알아 두어야 한다. 또 위의
글대로 쓴다고 하더라도  음미하여 본다 만은  맛보기로 한다 고 쓰는 것이
좋겠다. 
  - 신사답지 못하게 욕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신사 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일본 사람들이 쓰던 말로  상류 사회의
남자 란 뜻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쓸 말은 아니다.  점잖지
못하게...  이렇게 쓰면 우리말이 되는 것이다.
  - 국민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여기에 쓴  거리끼지 않는 은 좀 맞지 않은 말이다.  서슴지 않는 이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 그래도 저들은 상스러운 욕을 여러 사람이 듣도록 함으로써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있지 않은가?
  이 글월에 나오는  함으로써  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이것은 글에서만
나오는 말이니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여 나  해서 로 쓰면 될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을 써야 글이 살아난다. 
  -그것도 배운 놈일수록 남 공격하는 게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논리적, 합리적, 비교적.. 이렇게 무슨  -적 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이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쓰는 꼴이니 안 쓰는 것이 좋다. 도대체  논리적 이란 무슨
말인가? 논리가 잘 서 있다는 말인가? 잘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인가? 겨우
조금만 서 있다는 것인가? 논리가 잘 서 있다는 말이라면  논리가 서 있고  하면
될 것이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또 그렇게 써야 할 것이다. 무슨  -적 이란
말은 말뜻을 흐리게 하는 좋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 그럼 저들은 못 배우고 돈 없다는 이유로 자기의 나쁜 점을 그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불이익을 짊어지고 있나?
  여기 나오는  이유 란 말은  까닭 이란 말로 바꿔서 쓰는 것이 좋다.  돈
없다는 이유로 를  돈이 없기 때문에 라고 써도 되겠지. 그리고  평가받아야 를 
값매겨져야 로 쓸 수는 없는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불이익 도  손해 라 하는
것이 좋다. 
  중국글자말 앞에  불 자를 써서 본디 말에 반대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많고,
이런 말이 편리하다고 해서 자꾸 쓰지만, 우리말을 죽이는 결과가 되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말고 우리말을 살려 쓰는 것이 옳다.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할
 불- 자 붙은 말을 다음에 들어본다. 
  불가하다 - 옳지 못하다  
  불가분의 - 뗄 수 없는 
  불가사의하다 - 이상야릇하다
  불가해하다 - 알 수 없다
  불경기 - 세월없다
  불계승 - 안 세고 이김 
  불과하다 - 지나지 않다 
  불가능하다 - 할 수 없다
  불가불 - 마땅히 
  불가피하다 - 피할 수 없다
  불결하다 - 깨끗하지 못하다
  불경제하다 - 헤프다 
  불공평하다 - 고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런데도
  불굴의 - 굽힐 줄 모르는 
  불귀객 - 못 돌아올 사람 
  불균일한 - 고르지 않은 
  불균형 - 고르지 못함
  불량 - 나쁨 
  불로소득 - 힘 안 들인 벌이
  불리하다 - 이롭지 못하다
  불만족하다 - 만족스럽지 않다
  불매운동 - 안사기 운동
  불면증 - 잠 안 오는 병
  불멸 - 안 없어짐 
  불명예 - 명예롭지 못함
  불모지 - 풀 안 나는 땅. 메마른 땅
  불무하다 - 없지 않다
  불문 - 묻지 않음
  불문가지 - 물을 것 없음. 뻔함
  불미스러운 - 좋지 않은
  불변하다 - 변함없다
  불복 - 복종 않음
  불비 - 못 갖춤
  불비점 - 못 갖춘 점. 덜된 점
  불사약 - 안 죽는 약 
  불사조 - 안 죽는 새
  불사한다 - 사양 않는다
  불손하다 - 버릇없다
  불순물 - 잡것 
  불식 - 씻음
  불시에 - 갑자기 
  불안감 - 불안한 느낌 
  불야성 - 등불천지
  불요불급하다 - 급하지 않다
  불요하다 - 쓸데없다
  불우 이웃 - 가엾은 이웃
  불응한다 - 따르지 않는다
  불원간 - 머지않아
  불의 - 뜻밖
  불충분하다 - 넉넉지 않다
  불충실하다 - 충실하지 않다
  불취학 - 학교 들지 못함
  불치병 - 못 고칠 병
  불침번 - 안 자는 당번
  불쾌감 - 언짢은 느낌
  불통 - 막힘 
  불퇴진의 - 안 물러설. 끄덕없는
  불투명색 - 흐릿한 빛
  불투명하다 - 흐릿하다
  불편부당 - 공평함. 치우치지 않음
  불평분자 - 불평꾼
  불필요 - 필요없음
  불허 - 허락않음. 허가않음
  불황 - 세월없음
  불후 - 안 썩음
  불후의 - 안 썩는. 길이 생생한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중국글자의 해독을 입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중국글자말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우리말을 살릴 수 없다.
  끝으로, 이 글은 마지막에 라면을 다 먹은 이야기를 한마디 덧붙였더라면
자연스런 형식을 더 낫게 갖추었을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친구의 죽음을 생각하며 
  다음은 지금부터 꼭 40년전에 쓴 글이다. 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슬픈 마음을 적어 놓은 이 글은 지금 읽어도 가슴에 와 닿는다.
무엇을 쓰든지 진정으로 쓴 글은 이와같이 오래오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머리로 재주로 쓴 글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없지만,  참말 로
쓴 글의 목숨은 이래서  영원하다 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 
  군복중학교 3학년 김종만
  어느 날 초등학교 학생으로부터 오늘 진현이 초상친다는 말을 무심 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진현이가 죽었구나! 그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말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으나 이처럼 갑자기 그의 앞에 애통한 죽음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진현이는 아직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는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고생과
설움 속에 자라났건만 꽃다운 이 소년기도 넘기지 못하고 이처럼 갑자기 영원히
오지 못할 황천의 길을 가고 만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슬프다. 나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허무한 운명임을 다시금 생각한다.
  과거 그와 한 학교에서 뛰놀고 학교에 오고 가던 그때가 어제 같건만,
이렇게도 애통한 죽음이 그의 일생을 끝마치게 한 것은 참으로 꿈 같은 일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할아버지 한 분을 부모와 같이 여기고 삼촌 밑에서 한때는
남다른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꾸준히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지난번 졸업식을
앞두고 교내에서 동무들끼리 추억장을 주고 받을 때, 나는 그가 써 달라는
추억장에 이렇게 써 주었다.  삼년 동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공부 충실히
하였으며 예수 진심으로 믿었느냐? 부디 진실히 믿어 천당에 갈 때는 너 혼자
가지 말고 나도 좀 다리고 가 달라.  이렇게 장난삼아 써 준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도 내가 쓴 말대로 진현이는
천당으로 가 버렸다. 내가 쓴 그 추억장은 내 기억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연 천당에 가서 내가 써준 추억장을 들여다보고 있을까?
  아아 진현이! 이제는 너를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이 다만 안타까운
마음만 품을 뿐이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너와 더불어 한 교실에서
뛰놀던 여러 친구들도 너의 죽음을 서러워하고 다시는 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영원한 인생의 이별로서 슬퍼할 것이다.
  죽음1 인간이란 것이 한 번 나서 한 번 죽기는 공통된 운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란 말 한 마디가 왜 이렇게도 섭섭한지. 더구나 꽃다운 소년기도
넘기지 못한 애석한 젊은 죽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오지 못할
황천 길에서 세상 모르고 잠든 것을 생각하니 그저 기가 막힐뿐,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군북중학교 학생문집 (1955,10)

  이 글은 참 깨끗한 말로 썼다. 어디 한 군데도 써서는 안되는 어려운 말이나
일본말투가 안 나온다. 그래서 요즘 학생들이 쓴 글에 견주어 볼 때, 역시
그때는 자연이 그다지 오염되지 않았던 것과 같이 말도 오염이 덜 되어 있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런데 꼭 한가지 잘못된 말이 있다.  -었었다 라는 이중과거형을 쓴 것이다.
  - 그는 오늘날가지 할아버지 한 분을 부모와 같이 여기고 삼촌 밑에서 한때는
남다른 설움과 고통을 받으며 꾸준히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이 글월은  그는 오늘날까지...왔었다. 로 되어 있는데,  왔다 고 하면 될
것을  왔엇다  란 괴상한 말을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대관절 어째서 이런 말이
마치 갑자기 달라진 (돌연변이) 현상처럼 나타났는가? 이 글이 실려 있는 
학생문집 을 죄다 훑어 봐도 다른 글에서는 이  었었다 (았었다)가 어디에도 안
나온다. 물론 이 말이 함안 군북지방의 사투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함안뿐
아니라 경남 어디에서도, 경북이고 전라도고, 우리 나라 어디서고 이런 사투리는
없다. 
  이 학생이  었었다 를 쓰게 된 것은 말로 쓴 것이 아니라 글에서 이 말을
배워서 글로 쓴 것이다. 그럼 어떤 글에서 이 말을 배웠을까?
  두 가지 글에서 이 글말을 배웠다고 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소설이나 동화나
수필, 그 밖에 문필가들이 써 놓은 온갖 글에서 이  -었었다 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책을 읽는 학생들이 이런 잘못된 글말을 저도 모르게 배워서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었었다 는 이광수의 소설에서부터 나온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이 말을 안 쓰는 작가가 더러 있었고, 한 잡지에서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렸다면 그 가운데서 세편은 이  -었었다 란 말이 아주 안 나올
정도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이 말이 안 나오는 작품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어느 글에서고 아무런 까닭도 원칙도 없이 제멋대로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오는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말이 아니니까 무슨 원칙이 있을 수도 없다.

  다음 또 하나는 어이없게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 교과서로 이 괴상한
말법을 배운 것이다. 그때 나는 이 학생이 다니던 학교에서 철없게도 최현배
선생의  우리 말본 을 신이 나서 가르쳤는데, 바로 그 책에 이  었었다 가
나온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한글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우리말과 글의
체계를 세우는 일에도 큰 업적을 남긴 분이지만, 우리말 움직씨(동사)의
때매김(시제)을 영문법의 틀에다가 억지로 맞추어 놓은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었었다   -었었었다  따위를
쓰도록 한 것이다. 해방 후 온 나라의 학교에서 문법 교과서로 가장 많이 쓴
것이  우리 말본 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배우고 가르친 사람들이 글을 쓸 때면 
문법에 맞는  글, 유식해 보이는 글이 되게 하려고  -었었다 를 자랑삼아 쓰고,
심지어 말을 할 때도 가끔 지껄여 보고 싶어하는 풍조가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군북중학교는 우리나라에서 표준말을 쓴다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상도 시골의 학교이기에 많은 학생들의 글을 모아 놓은 문집에도 이렇게 겨우
한 학생이, 그것도 단 한 번  -었었다 를 썼을 만큼 아니, 그보다 차라리 우연히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알맞을 정도로 글말의 공해를 적게 입은 것이다.
  이  -었었다 는 최현배 선생보다 앞서서 우리 글을 연구한 주시경 선생의
문법책에서부터 나온다. 일제시대 문인들의 작품에 이  -었었다 가 나온 것도
우리 한글학자들의 잘못된 문법책에서 영향을 받아 그 모양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한글학자들의 잘못은  말 을 떠난  글 의 질서에 매달리고, 그 질서 속에
빠져버린 데 있엇다. 말을 떠난 글의 질서는 남의 것이다. 중국 것이고, 일본
것이고, 미국 것이고 서양 것이다. 
  이 밖에 바로 영어 공부를 하고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이 말을 쓰게
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근본을 다지면  -었었다
란 말을 지어낸 한글학자들의 잘못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앞에서, 이 글  친구의 죽음 이 입말로 쓴 것이 아니라 글말로 썼다고 했는데,
그것을 좀 설명해야 되겠다. 이 글이 들어 있는  학생 문집 은 모두 123쪽으로
되어 있고, 이 책에 실려 있는 학생들의 글은 모두 입말로 씌어 있다. 이 
친구의 죽음  바로 앞과 뒤에 있는 글들만 보더라도 
   아침을 일찍 먹고 지게를 걸머지고 나무를 하러 간다. 
   하루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어쩐지 눈물이 흐르고... 
   오늘부터 기다리던 하복을 입게 되었다. 
  이런 말들로 시작되어 있고, 어느 글이고 다 이와같이 보통 우리가 하는 말로
씌어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죽음 만은 좀 다르다. 
  - 어느 날 초등 학교 학생으로부터 오늘 진현이 초상친다는 말을 무심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처음 시작한 글월도 말을 하는 것처럼 쓴 것 같지만, 말과 다른데가
있다.  학생으로부터  이것은 입으로 하지 않는 말이고 글에서만 쓰는 말이다.
입으로 하는 말대로 쓴다면 마땅히  학생한테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그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말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으나 이처럼 갑자기
그의 앞에 애통한 죽음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여기 나오는 대이름씨(대명사)  그 도 실제 입말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말이다.  신음하고 도 입으로는  앓고 라고 말하고,  듣고 있었으나 도 입으로
말할 때는  듣고 있었지만 이라 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알았으랴! 도 
알았겠는가! 라고 해야 살아 있는 말이 된다. 
  이 밖에도 입말로는 쓰지 않는 말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자라났건만 - 자라나지만
  황천의 길 - 저승길
  과거 - 지난날 (과거는 입말로 어쩌다가 쓰인다)
  어제 같건만 - 어제 같은데
  학원의 길을 밟아 왔었다 - 학교를 다녔다
  하였으며 - 하였고, 했고
  과연 - 정말
  너와 더불어 - 너와 함께, 너와 같이 
  애석한 - 아까운 
  황천 길 - 저승길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 인생이 허무한 것을 절실히 느낀다
  이와같이 보통 우리가 입으로는 하지 않는 말들이 때로는 이름씨(명사)로,
때로는 움직씨(동사)의 씨끝(어미)으로, 때로는 어찌시(부사)나 토씨(조사)로
여기 저기 섞여 있어서 글 전체의 분위기라 할까, 질서 같은 것이 입으로 하는
말과는 조금 다르게 되어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글의 내용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사람의 죽음을 얘기하는 자리가 되자니까 여느 때는 농담을 하면서
지내던 친구였는데도 저절로 마음이 굳어지고 엄숙한 심정이 되어 이런 글말투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었었다 란 잘못된 말도 이런 글말의 분위기가 되다보니
갑자기 한 개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고 보면 글말에도 쓸 수 있는 것이 있고, 써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글로 쓸 수 있는 말은 다시 또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중국글자말(한자말)이다. 앞에서 들어 놓은
글에 나오는  황천   과거   과연   애석 같은 말이 여기에 든다. 이런 말들은
입으로 더러 쓰게도 되었지만 어디까지만 글에서 생겨난 말이다. 다음은 옛말이
되어버려서 우리가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글로서는 그대로 쓰고 있는 말이
있다. 앞에서 들어 놓은 말에서  -건만   -으며   -으랴  따위로 된
움직씨(동사)의 씨끝(어미)들과,  -로부터 라는 토가 이런 말이다. 
  세번째는, 역시 옛말이지만 한문을 새겨 읽을 때 나오는 말을 그대로 글에서
쓰고 있는 말인데, 앞에서 든 글에서는  더불어 와  바 가 있었다. 이 밖에도
한문새김말은  하여금   이른바   -으로써  따위로 많이 있다. 
  이 세 가지 글말들은 오랫동안 우리가 읽어온 글 속에서 글말로 이어져 왔기에
우리 것으로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우리 것이 아니라든지 벌써 죽어버린 말이라 하여 아주 물리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살아 있는 입말로
쓰지 않거나 쓰지 않아도 될 말이니 글을 쓰는 경우에도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말을 안 쓰거나 쓰더라도 적게 쓰는 것이 좋겠다. 입으로 하는 깨끗한 우리말을
써야 글도 살아나는 것이다. 
  다음에, 써서 안되는 글말은 앞에서 말해 놓은  -었었다 란 말 밖에도 아주
많은데, 대강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아주 어려운 중국글자말이다. 조우, 해후, 호우, 하자(흠), 방불, 서식,
종용, 독백, 포효, 미지수.. 얼마든지 있다. 
  둘째, 말하기도 힘들고 알아듣기도 어려운 중국글자말이다. 오자, 오수, 오지,
수수, 유가, 주가, 고자, 기로, 끽연, 만끽, 가시화, 의의, 의외, 화훼, 회화,
박차, 미소, 미아, 유아, 발발.. 신문이나 잡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런
말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에 싹 쓸어 내버려야 할 말들이다. 
  셋째, 우리말이 있는데 공연히 쓰는 말이다. 돌연, 돌입, 붕괴, 비래, 작물,
제초, 상호, 조기, 기호, 관건, 주방, 석권, 계곡, 도서(섬), 냉수, 여명, 초원,
수면, 휴식을 취한다.. 깨끗한 우리말을   아내고 안방에 들어와 앉아 주인
노릇을 하는 이런 엉뚱한 한자말이 얼마나 많은가! 
  넷째, 우리말의 얼개를 아주 망가뜨려 놓는 말이다. 구조를 파괴하는 말이라고
하면 더 잘 알아 들을지 모르겠다. 나의 집, 나의 어머니, 우리의 갈 길..
이렇게  의 를 아무데나 쓰는 경우라든가, -에 있어서, -에 있어서의, -에의,
-에로(의), -로의, -으로부터의... 이런 따위로 쓰는 말인데, 거의 모두
괴상하게 되어 있는 토로서, 일본말을 따라 쓴다고 이 꼴이 되었다. 
  다섯째, 아주 일본글을 그대로 쓰는 말이다. 입장, 입구, 역할, 수순, 수속,
취급, 수취인, 인상, 인하, 매입, 매도, 민초, 승부사, 보다(어찌씨 = 부사로
쓰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이런 말들 가운데는 벌써 입말로 널리
쓰고 있는 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널리 쓰고 있더라도 이런 말은 일본의
글말이니 언젠가는 꼭 없애야 한다. 
  여섯째, 서양말이다. 가이드, 오픈, 이미지, 쇼핑, 조깅, 레크리에이션,
캘린더, 조크, 스케줄, 해프닝.. 이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우리말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말들이다. 
  일곱째, 지식인들이 제멋대로 만들어서 퍼뜨리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보기를 들면  먹을거리 란 우리말을 안 쓰고 공연히  먹거리 란 말을 써서
우리말을 어지럽게 하는 따위다. 책을  읽거리 라 하고 옷을  입거리 라 하니 참
어이가 없다. 이것이 다 책에 갇히고 글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하는 꼴이다. 
  말은 우리 것이다. 그런데 글은 중국에서 오고 일본에서 오고 서양에서 왔다는
것을 꿈에도 잊어서는 안된다. 

    일기글 쓰기 - 일기글 어떻게 쓸까 

    책으로만 익힌 말을 쓰지 말고 
  다음은 여중 3학년 학생이 쓴 어느 날의 일기다. 이 글 가운데 잘못 쓴 낱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진성여중 3학년 김하연
  모의 고사 시험 보는 날이다. 난 어제 아파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성적이
떨어질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왔다. 나는 어제 큰 일을 치른 사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맥이 없었다. 
  시험 보기 3분전, 나는 필통 속에 있는 컴퓨터용 연필을 깎으려고 꺼냈다.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나는 가슴이 어
두근거렸다. 시험 볼 시간은 2분도 채 안 남았는데. 앞에 있는 선아에게 연필을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내가
선아에게  계속 깎아봐, 선아야!  하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선아는 미안하다는
듯이 연필을 보여주었다. 연필은 몽당연필이 되었고,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종이 울렸다. 나는 컴퓨터용 연필이 없어 울똥말똥한 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려 했다.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하연아, 너가 내 연필 써. 나는 샤프연필로도 쓸 수 있으니까.  선아의 말이다.
아까 선아가 연필을 몽당연필로 만들어서 죄책감에 빌려주는 것보다 친구의
우정으로 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선아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는데, 그리고 샤프연필로 잘못하면 틀린
채점이 나오는데, 나에게 연필을 주고 자기는 샤프연필로 쓰다니! 고민이 많고
혼자라고 생각하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느꼈다.  내 주위에도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가 있구나! 
  (학급문집 <추억을 되새길 땐 이 책장을 넘기셔요>에서)

  앞에서  잘못 쓴 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 고 했지만, 이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 글에 나오는 선아란 학생의 고운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시험점수를 서로 많이 따려고 하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는 학생사회에서 이렇게 따스한
정을 나누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가? 정말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켜고 둘레를 밝혀주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면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불빛이 있음을 알려준 이 학생도 참 좋은 글을 썼다고 칭찬하고
싶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글에 적힌 말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글은 어느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도 적었다. 어른들이 흔히
글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이나 일본말법이 한 군데도 없고, 보통 입으로 하는
자기의 말을 그대로 썼다. 글을 쓰는 태도가 아주 제대로 되어 있는 학생의
글이라 하겠다. 더러, 좀더 정확한 말을 썼으면 싶은 데가 몇 군데 있지만 그런
것이야 대수롭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단 한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 한 말인데, 세 군데 나온다. 
  -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 
  이 학생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만 썼는데, 이렇게 써도 괜찮은가? 맞는
말일까?
  만약 국어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말에다가
맞는 말이라고 표를 해야 할까?
  
  연필을 깎는데 심이 / 꺾어졌다.(  )
                     / 끊어졌다.(  )
                     / 부러졌다.(  ) 
                     / 떨어졌다.(  )

  연필심은  끊어졌다 고 하지 않는다.  꺾어졌다 고도 하지 않고  떨어졌다
고도 말하지 않는다. 연필심은  부러졌다 고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말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러졌다 고 해야 하는 까닭을 여기서
이치로 따져서 다른 세 가지 말이 주는 느낌과 말뜻의 다름과 함께 한참 설명말
수도 있지만, 원체 이런 말에 대한 느낌이나 말뜻의 자세한 차이를 생활 속에서
제대로 느껴서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이런 느낌과 이치를
설명하는 짓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역시 생활이다. 어떤 말이든지 생활 속에서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기로 든 글을 쓴 학생이  연필심이 부러진다 고 하는 아주 쉽고
평범한 우리말, 국민하교 1학년이면 저절로 다 익히게 되어야 할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쓴 까닭은 결국 어려서부터 연필을 칼로 깎는 생활이
없었고, 그래서 생활에서 쓰게 되는 살아 있는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학생뿐 아니라 이 학생과 같이 공부하는 오늘날 우리나라
학생의 문제다.
   부러진다 는 말을 모르는 학생이 어째서  끊어진다 한 말은 썼는가? 
끊어진다 는 말을 쓰게 된 까닭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잇는 것은, 교과서나 그밖에
학생들이 보는 책에서  부러진다 는 좀처럼 나오지 않지만  끊어진다 는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책으로만 익히는 말의 허방 - 함정이 여기에 있다. 
  바로 며칠 전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연필심이 끊어진다 는 글을
읽어주고, 학생들이 어째서 이런 말을 쓸까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듣고 있던 한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요즘 학생들이  끊는다 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학원을
다니다가 그만두면 끊는다고 해요.  너, 요새 주산학원 끊었니?   난 피아노
끊었어  이렇게 말하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끊는다는 말을 자주 써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한갖 유행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삶을 잃은
학생들의 입에서 유행하는 말은 결국 책과 방송에서 얻은 것밖에 될 수 없다. 
  이  끊는다 는 말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얼마 전 동시를 쓰는 어느
학교 선생님이 시를 쓴 것을 보여 주었는데, 그 시에  고사리 끊으러 간다 는
말이 있기에 
   고사리는 꺾는다고 해야지, 왜 이렇게 썼어요?  했더니, 
    저도 고사리는 꺾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6학년 음악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로 나와 있어요  했다.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고 나와 있다니 세상에 무슨 그런 교과서가 있나
싶었지만, 교과서고 사전이고 잘못된 것이 많다고 알고 있기에 이렇게 또 말해
주었다.
    아무리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작품, 더구나 시를 쓰는
사람은 살아 있는 우리말을 써야지요. 교과서고 사전이고 그밖에 어떤 책보다도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백성들이 쓰는 살아 있는 말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 시인은 시원스럽게 따라주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음악 교과서에 나오 가사가 민요 교재로 되어 있어요.  했다.
  그 뒤 6학년 음악책을 구해서 보았더니 정말  끊자 로 나와 있었다. 
  다음은 22쪽에 나와 있는 교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사리 끊자@]
  전래동요 (한만영 채보)
  고사리 대사리 끊자 나무 대사리 끊자
  유자 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장장 벌이어
  끊자 끊자 고사리 대사리 끊자
  앞동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아빠 반찬하세.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끊자 가 될 리 없다. 사투리도 이럴
수는 없다. 채보- 악보를 만든 사람이 어디서 잘못 들었거나,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 적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래도 모른다 싶어 1931년에 나온 [조선 구전 민요집](김소운
편저)을 찾아 보았다. 이 책에는 고사리를 꺾는 민요가 네 편 나와 있다. 짧으니
다 적어 보자.

  고사리 꺾자 
  동내 울산을 넘어가자
  (66쪽. 이것은 충남 공주 사람이 적은 것인데, 제목은  동래 울산 이라고
되어있다)

  고사리 대사리 꺾세
  좃침 댓침 꺾세
  (74쪽. 충남 부여 사람이 적었는데, 제목에는 잡이라 되어 있다. 

  [@고사리 대사리 꺾자@]
  거춘 대춘 꺾자
  광주 무등산에 가서
  고사리 대사리 꺾자
  제주 한라산에 가서
  고사리 대사리 꺾자
  (123쪽.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람이 적었다. 제목이  고살 이고, 끝에 
처녀들이 명절 때 모여 놀며 라고 써 놓았다.)

  고사리 캐로 간다고 
  핑계핑게 하드니
  총각낭군 무덤에 
  삼우제 지내러 간다네
  (328쪽. 경남 진해 사람이 적었는데, 제목이  속요 잡 이라 되어 있다)

  이렇게 4편 중에 3편이  꺾자 로 적혀 있다. ( 캔다 는 말이 한 군데
나오는데, 이 말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역시 고사리를
끊는다는 말은 충청도고 경상도고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또 찾아 보았다. 이번에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바로 초등 학교
6학년 음악책에 나온 민요의 원형임에 틀림없는 노래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뜻밖에도  껑자 로 되어 있다. 제목만은  고사리 꺾자 로 썼다. 노래
앞에 이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면서 노는가를 설명해 놓았는데,
다음에 옮겨 놓은 노래말은 첫머리 것으로 이것은 전체의 4분의 1밖에 안 되지만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란 말은 끝까지 되풀이되어 있다. 

   설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받는 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설소리  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
  수양산 대사리 껑거다가 
  우리 아배 반찬하세
   받는 소리  고사리 대사리 껑자
  만부 대사리 껑자 
  유자꽁꽁 재미나 놀자
  아장장장 벌이어
  껑자 껑자 고사리 대사리 껑자

  여기서 의문이 다 풀렸다. 전북 고창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사리를  껑는다
(이것은  꺾는다 고 써도 같은 소리가 된다)  껑자 라고 말하고 노래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교과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껑자 가  끊자 로 되어
버렸다.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일부러 고친 것이 분명하다.  껑자 란
표준말이 없으니  껑자 에 가까운  끊자 로 하자고. 내가 보기로는 악보를 만든
사람이 이렇게 고치지는 않았을 것 같고, 교과서를 만드는 실무자들이 이렇게 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것은 국정 교과서가 우리말을 일부러 틀리게 고쳐 적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하는 하나의 보기가 된다.
  최근 전남 고흥군에 있는 한 선생님 얘기를 들으니 호남지방에서는 어디를
가도  고사리 껑자 라고 말한다 했다. 그래 이 문제는 다시 더 알아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또 시험문제를 하나 내어 보기로 하자. 다음 네가지 말
가운데서 어느 것이 바른 우리말인가 표를하라.

  고사리를 1) 껑는다. 껑자. (  )
  2) 끊는다. 끊자. (  )
  3) 꺾는다. 꺾자. (  ) 
  4) 캔다. 캐자. (  )

  어느것이 표준말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바른 우리말이냐고 물었으니 3)과
함께 1)에도 표를 해야 맞다. 사투리도 틀리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끊는다 는 아주 틀린 말이다.  캔다 도 더러 쓰기는 하지만 맞지 않는 말이다.
고사리는 꺾지, 캐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시험문제가 나왔다고 할 때 3)과 1) 두 군데 다 표를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3)에만 표를 하는 사람도 이 문제에서 맞는 점수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로 되어 있으니 교과서대로 채점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길은 우선 두 가지다. 점수를 따기 위해서 사실이고 진실이고는 다 덮어두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외운 대로 2)에 표를 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그따위 점수 같은 것에 붙잡혀 있지 말고) 당당하게 3)과 1)에다 표를
하든지다. 나로서는 뒤의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길이 있다. 자기가 믿는 것은 마음속에서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점수를 따기 위해, 이것이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2)에다가 표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이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싶은데, 나로서는 찬성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틀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모조리 말릴 생각은 없다. 마음속에 지닌 그
믿음을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말과 진리를 책으로 글로서만 배우고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누구든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고 사실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유식한 말을 쓰지 말고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있을 신현복 군은 어릴 때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해서
국민학생 때 쓴 것을 일기문집으로 한 권(현복이의 일기), 중학생 때 쓴 것을 두
권(자물쇠여 안녕, 슬픔에서 축복으로) 낸바 있다. 여기 들어 보이는 것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 쓴 글인데,  슬픔에서 축복으로 라는 책 맨 끝장에서 좀
짧은 글들을 고른 것이다.
    이사
  5월 13일 (토) 비오다 맑음
  난 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 방, 내 책상이었다.
  그렇다. 우린 이미 이삿짐을 옮겼다. 장차 먼 곳으로 이사해야만 할 거사는
장초의 예상과는 반대로 우린 한 동네에서 짐을 옮긴 것이다.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이삿짐을 옮겨 놓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 놓지도 정리 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 방은 다르다.  책상 이 오기가 바쁘게 난
정리하기에 바빴다. 그 넓기만 하던 내 방이 책 무더기로 갑자기  책천지 가
되었다.
  두 시간이 훨씬 넘었다. 내 옷은 먼지 자국에 심히 더렵혀져 있고, 다리는
다리대로 아파왔다. 무거운 이삿짐을 들고, 메고, 2,3층 사이를 돌았기
때문이다.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기분만은 정말이지 상쾌했다. 난 내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내 책상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즐거움과 온갖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싶어하던 내 방이었다.
  늦은 밤, 무슨 일로 내 옛집에 찾아 갔을 때, 그것들은 이미 검은 아가리를
내놓고 나를 맞았다. 세 식구와 그 살림살이와 책들을 쑤셔 박기엔 너무나
비좁았던 우리 방도 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피어 오르는 옛 향수까지
억누르지는 못했다. 
  언젠가, 이 옛집은 곧 세워질 새 집을 위하여 허물어지리라. 그럼 난 슬퍼해야
하리라. 엉엉 울어야 하리라. 그러나 난 옛집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돌아서야만 했다.
 
  이사를 한 날에 쓴 일기다. 중학생이 되어도 3학년에 올라간 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제 방을 갖게 된 기쁨이 나타나 있다. 밤늦게 옛집에 찾아갔을 때 느낀
것도 잘 잡았다.
  - 언젠가 이 옛집은 곧 세워질 새 집을 위하여 허물어지리라. 그럼 난
슬퍼해야 하리라. 엉엉 울어야 하리라...
  이렇게 글월의 끝을  -다 로만 쓰지않고  -리라 를 자연스럽게 섞어 써서
싱싱한 문장이 되게 한 것도 능숙한 글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대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이삿짐을 옮겨 놓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놓지도 정리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첫머리부터 읽어 가다가 이 대문에 와서 누구든지 좀 어리둥절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삿짐 옮긴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의미
니  뜻 이니 하는 말이 나와서 아무래도 좀 부자연스럽고, 말을 꾸며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이런 정도의 글이야
손끝에서 저절로 나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책과 글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이런 글이 아무래도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글을 이와 같이 엉뚱하다고
느끼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이 갖는 글에 대한 느낌이야말로 (결코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깨끗하고 건강한 느낌인 것이다.
   이 짐을 옮겼다는 의미는.. 뜻이다  이 글월을 나 같으면 다음과 같이
쓰겠다. 
   이삿짐을 옮기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풀어놓지도 정리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고쳐 쓴 것과 본디 써 놓았던 글을 견주어 보기 바란다. 그러면  의미
니 뜻 이니 하는 말이 괜히 들어가 있고, 말을 머리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고 한 말도 내가 쓴다면  그래서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든지,  온 몸이 지쳐 맥이 빠졌다 고 쓰겠는데, 이런 말까지 잘못
썼다고 나무라지는 않겠다. 아무튼  유식한 말 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말에서만은  유식 한 것이 사실은 무식한 것이다. 
  이 밖에 낱말 두세가지, 말해 둘 것이 있다.
  - 내 옷은 먼지 자국에 심히 더럽혀져 있었고
  여기 나오는  심히 는  많이   아주   크게   몹시  이런 입말 가운데 어느
것이나 알맞은 말을 골라 썼으면 좋겠다.
  - 그러나 기분만은 정말이지 상쾌했다. 
  여기 쓰인  상쾌했다 는  시원했다 고 쓰는 것이 더 낫겠다. 
  - ... 피어오르는 옛 향수까지...
  이 대문에서  향수 란 말을 썼는데,  그리움  이라 해도 될 것이다. 다음은 
이사 에 이어서 오는 글이다.

    급변하는 시대
  5월 26일 (금) 맑았다
  20세기 초 이후 시대는 급변했습니다. 이 시대는 그 사회 구성원을 볼 때도
70-80대(세)는 공맹교육을 받고, 50-60대는 일제 식민교육을, 30-40대는 미국식
교육을, 그 아래 세대는 시대 모순을 비판하는 세력으로 자라나 오늘날 이
민족의 가치관은 크게 혼동을 빚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급변하는 과도기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물질문명의
과도기란 것은 우리 피부로 절실히 느끼는 문제입니다. 우리 공업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입시 준비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컴퓨터를
배우라고. 급변하는 이 시대에 컴퓨터가 보편적으로 보급된 10년,20년을
내다보고 꼭 컴퓨터 이론이라도 배워라. 그러나 난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세상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급류를 타고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급류를 타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시대가 서글펐다.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시대가 서글프게만 느껴져 무한정으로 눈물을 쏟고 싶어한단 말이다.
  이 글에서 공업 선생님이 컴퓨터를 배우라고 하신 말씀을 고마워하면서도 
그러나 난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세상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급류를 타고 흘러가는 듯해서였다. 급류를 타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시대가 서글펐다 고 한 것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
말이 되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로 오랫동안 자기를 가꾸어 왔기에 이만큼 주체를
세울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쓴 말은 왜
이런가?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이건 영 모양을 구겨 버렸다. 자리를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 라고
했으니 너무나 유치한 말이다. 자기를 이런 이상한 말로 분칠해서 어떤 어른들
모양을 내어 보이려고 한 것을 보면, 앞에서 해 놓은 말조차 책에서 읽은 남의
말을 흉내낸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우수에 잠기길 좋아하는 감상자의 눈에는, 그의 가슴에는 
  이 구절을 모두 싹 없애고  나는  이라고만 써서 읽어 보라. 비로소 글이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끝에 가서  무한정으로 눈물을 쏟고 싶어한단 말이다 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 대문은 장난하는 기분으로 쓴 것 같다. 
  또 하나, 이 글은 앞쪽의 반쯤은  합니다  체로 썼고, 뒷쪽 반은  한다 체로
썼다. 글에 따라서는 이렇게  합니다 와  한다 가 뒤섞여도 자연스럽게 읽히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글에는 두 가지 글체로 써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왜 이렇게 썼을까? 처음부터  한다 로 써야 옳았을 것이다.
  이밖에 낱말 몇 가지를 들어 본다. 
   혼동 이란 말을 쓰더라도  뒤섞음 이나  섞갈림 이라고 써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혼란 이란 말을 쓸 것을 잘못 썼다. 
   특히나 는  더구나 하면 아주 고운 우리말이 된다. 
   물질문명의 과도기  이것은 무슨 말인가?
   보편적으로  이것은  두루 하면 된다.
   급류  이것은  급한 물살  이나  급한 흐름 이다.
   표류하는 은  떠내려가는 하면 된다.
   우수  이것은  근심 이다.  근심 이라고 쓰면 좋은 글이 안 되고,  우수 라고
써야 그럴듯한 글이 되고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감상자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한 편을 더 들어 본다.

    침묵
  6월 18일 (주일)
  차라리 침묵을 지키리라. 주님이 정죄하신 입술로 무엇을 말하랴. 무엇으로
민주를 외치랴. 무엇으로 나를 내세우랴. 참말로 이 입술이 죄다. 신현복의 모슨
것을 사랑할 수 있어도 이 입술만은 나를 몸서리치게 한다. 간디의 말씀을
곱씹기 시작했다. 
   소란을 소란으로 막으랴. 침묵으로 막으리라. 
   비폭력은 침묵에서 시작. 
   침묵의 유익함은 체험을 통해서만 안다. 
  간디는 비폭력 정신을 소중히 여겼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침묵을 사랑했다.
위대한 성인이 그 침묵을 사랑하듯 나도 이 침묵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 침묵의 아름다움을 인식시켜 나갔다. 
  실제로 침묵은 아름다웠다. 악을 용납하는 침묵으로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곧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침묵은 비굴이 아니라 무던히 참아내는 인내였다. 침묵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었다. 침묵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나에게 이 침묵은 너무나 절절히 요구된다.
  이 죄인은 이제 그만 교만과 미움을 버려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 죄인에겐 홀로 생각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침묵은 비폭력보다 앞서 요구되는 과제가 되었다. 

  이 글은 첫머리에 시작한 짧은 글월들의 맺음을  -리라   랴 고 해 놓은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뛴다. 
  그리고, 무슨 말을 잘못한 듯 입술이 죄라면서 간디의 말을 들어서 침묵을
사랑한다고 했고, 그래서 침묵을 찬양하고 있는 말들이 매우 그럴듯하게 읽힌다.

   주님이 정죄하신 입술   이 죄인은   이 죄인에게  따위 말들이 나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겠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무슨 말을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싶은데, 그렇다면 그런일의
경과를 먼저 적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기서 우러난 생각을 남들이 참
그렇겠구나 하고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말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구나, 말을 안 하는 것이 이롭고 말이 없는 상태가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고
진심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일기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 또 가령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고 자기만 보고
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마음의 움직임만을 적기보다는 사실과
체험을 적어 두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고 뒷날에 참고도 된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 삶의 체험을 기록해 놓지 않고는 느낌과 생각이 살아날
수 없다. 또 삶의 체험을 적어 놓으면 느낌과 생각이 저절로 그 속에 나타나게도
되는 것이다. 
  이래서 이  침묵 이라는 글은 그만 책에서 읽은 간디의 말을 예찬하는 글처럼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침묵은 유익하다, 침묵은 아름답다는 말들은 아주
그럴듯하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런 말들이 현실을 떠나 생각만으로
펼쳐지는 말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침묵은 아름다웠다. 악을 용납하는 침묵으로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악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땅히 그 악을 바로
잡으려고 해야 할 것이고 악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행동은
빛나고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그 악이 더럽다고 피하는 침묵이 아름답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악을 피해 침묵하는 것은 제 몸만 사리는 이기심에서 나온
몸가짐이요, 비겁한 것이다. 둘레의 형편에 따라서는 침묵을 반드시
비겁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부끄럽고 괴로워해야 할
일이 되었으면 되었지 아름다운 행위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행동이 없고, 있어도 보잘 것이 없는 정도로
되어 있고 다만 책만 읽고 글만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으로 읽은 지식과
관념을 제것처럼 여겨서, 보잘 것 없는 제것과 마구 뒤섞어 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글만 쓰는 문학인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말재주의 결과라고 할 것인데,
슬기로운 소년 현복이도 벌써 이런 길을 접어든 것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낱말 두어 가지를 지적한다. 
   의미하기도  이 말은  뜻하기도 라 쓰는 것이 좋겠다. 
   절절히  이 말은  간절히 나  절실히 로 써야 한다. 같은 한자말이면, 널리
써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이 밖에 간디의 말을 따와서  침묵의 유익함은 체험을 통해서만 안다 고 한
것은, 어느 책에 나온 것이겠지만  침묵이 유익함은 체험으로만 안다 고 하든지,
 말없음이 이롭다는 것은 몸소 겪어야만 안다 고 써야 할 말이다.

    설명문 쓰기 -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까

    싱싱한 입말로 쓰고

  우리가 글을 읽다 보면 그 글에 씌어 있는 낱말이나 말법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이야기 내용에 아주 압도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 글은 성공한
글이고, 좋은 글 또는 훌룡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낱말이나
말법에 잘못이 한 군데도 없이 깨끗하게 씌어진 글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시시하거나 옳지 못한 생각 또는 행동을 적어 놓았다면 그 글은 읽을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말은 논리로 따져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글의 내용이
절실한 이야기로 꽉 차 있으면 허튼 말이 없고 겉치레 글 꾸이기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쓰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남의 것
흉내나 내고 말재주를 부리게 되고, 이래서 깨끗한 우리말 대신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유식하게 보이는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을 쓰는 것이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고등학생이 쓴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자신이 이 학생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해 보자. 나는 이런 학생과는 사저잉
다르니 골치 아픈 것 가지고 생각하기 싫다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내가 만약 대학의 입시문제를 내는 일을 맡았다면
수험생들에게 이 글을 읽게 해서  자신이 이 글을 쓴 학생이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써 보시오  라는 문제를 낼 것이다. 
  ( 이 편지글은  십대들의 쪽지 라는, 달마다 거저 나눠주는 작은 책을 펴내는
분에게 보내는 글이고, 바로 그 책에 실렸던 것이다.)

  너무 답답해서 또 펜을 듭니다. 
  오늘 학교에서 오는 길에 편지를 부쳤었는데 그리고 쪽지 상담실에 전화도
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다시 또 써야만 마음이 가라앉는다면 전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아이겠죠?
  요즘 들어서 하루라도 안 운 날이 없어요. 특히 어제 오늘은 하도 펑펑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 있구요. 정말 모든 게 제겐 너무 견디기가 힘듭니다. 
  전에 편지 보셨다면 제가 왜 이러는지 대충 이해는 하시겠죠? 
  오늘은 학교 갔다가 집에 와서 책상을 보니 책상이 아주 깨끗해요. 책이니
공책이니 그 많은 시험지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죠. 
  전 누구 짓인지 다 알았죠. 아빠였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할 사람이라고는 아빠뿐이니깐요. 
  아빠가 저에게 대응하시는 말이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 거라  그거였죠. 그래서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는 거였어요. 
  전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이번 성적이 나쁘게 나오고 또 전에 제가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는 것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지난 얘기고 물론
지금은 안 그러죠. 
  시험 끝난 후로 제 능력에 많은 실망과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딛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아빠까지...정말 너무 힘드네요.
  아저씨, 이런 말 어떨지 모르지만 너무 암담해서 죽고 싶어요. 
  오늘 전화쪽지를 들고 보니깐 남의 말에 실망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더라구요. 옳은 얘기지만 그 남의 말이 너무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때,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의욕을 잃었을 때 전 어떡해야 하는 걸까요.
아빠의 말은 100% 틀렸어요. 전 할 수 있고, 이렇게 힘들 때에 특히 부모님이 좀
도와주시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전 모든 희망을 잃었는 걸요.
모든 힘을 잃었죠. 제 능력을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이젠 그렇게 내가
노력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 정말 살고 싶지 않아요.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얼마쯤 이야기를 했는데 곧 8시가 되어 결론을 못
내렸죠. 사실 지금 제겐 전화통화도 금지된 상태예요.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저며 오네요. 이젠 학교에서 억지로 명랑한 척할 힘도
없어요. 제 처지를 생각하면 마구 울음이 나와서 학교에서도 거의 울상으로
지내다시피하죠. 
  절 이해해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물론 제게 큰 힘이 되지만 이런 얘기까지
털어놓진 못하고 있어요.  으악  소리라도 막 지르고 싶어요. 
  아저씨, 전 아빠 때문에 소심하게 자라난 듯 싶어요. 아빠는 성격이 좀
괴팍하거든요. 말을 아주 함부로 하죠.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마구 해요. 욕을
하는건 아니지만 속을 밟아놓는 말들을 마구 해요. 아빠 때문에 제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지도 모르죠. 전 아빠 말에 대꾸도 못하고 있으니깐요.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눈물이나 뚝뚝 흘리며
땅바닥을 쳐다보는 일밖에 할 수가 없는 걸요. 이런 제 자신이 또 더욱 미워지고
싫어지네요. 
  엄마 아빠가 제 성적을 보고 실망하셨다는 건 알지만, 그건 그들이 절 성적
때문만으로 키워 왔기 때문일 거예요. 여태까지 성적이 꽤 좋았거든요. 아빠
엄마는 제가 성적 좋은 거 하나 빼면 사랑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나 봐요. 
  성적이 떨어지니깐 여지없이 시달림을 받고 있어요. 하긴 전 부지런한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고, 그나마 성적이 좀 좋았다는 거 그거
빼면 정말 사랑해 줄 가치가 없는 애인지도 모르죠. 
  머리가 아프네요. 울었더니 눈도 아프고,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예요. 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거든요. 제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
  내일 아침에 또 눈이 부어 학교 갈 생각을 하니 끔찍해요.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 걸까요?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분의 존재까지 부정하게 돼요.
아저씨의 답장만을 기다릴께요.

  이 편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첫째,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아저씨(십대들의 쪽지 발행인)하고 어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았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학생이 아저씨의 회답을
고맙게 여기기는 했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바로 또 이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학교에 갔다 왔더니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이고 공책이고 시험지들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넌 보아하니
대학 갈 필요도 없고 공부해 봤자 그쪽으로는 성공도 못할거라. 고등학교는
다니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니 멋대로 해보라 고 하는 아버지의 짓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서 버림받은 이 학생은 구원을 청한 것이다.
  셋째, 아버지가 이러는 까닭은 성적 때문이다. 이 학생은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까지 성적 보고 저를 키워 왔다고 생각한다. 성적말고는 저를 사랑해 줄
가치가 없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본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성적이 나빠지니까 
고등학교도 다니든지 말든지...  하고 자기를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넷째, 아버지의 말은 100% 틀렸다. 자기는 그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도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저러니 어찌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니 무슨 희망이 있는가? 죽고 싶다. - 이것이 이 학생의 마음이다.

  다섯째, 이 학생은 전에는 성적이 괜찮았는데 요즘 와서 좀 나빠진 것 같다.
그 까닭은 쓰지 않았다. 이 학생은 지금 집에서 바깥과 전화통화조차 금지당한
상태로 감금당하다시피 되어 있는 듯하다. 
  여섯째, 이 학생의 성격은 본래 아주 밝았던 것 같다. 한때 농구선수를 좀
쫓아다녔다고 했는데, 농구선수로 경기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러
다녔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괴로워도 학교에서는 명랑한 척 했는데,
이제는 그럴 힘도 없어졌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도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속은 막 터져버리고 싶은데
그렇단다. 그래서 소심하게 되고 열등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래도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은데...  했다.  하긴 전 부지런한 것도 아니고 착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고 못하고  했지만 이런 말에서 도리어 착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성품이
엿보인다.
  일곱째, 이 학생은 어머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가정에서
발언권이 없거나 아버지 주장을 따르기만 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성격이
괴팍해서 말을 함부로 한다고 했고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해서 아들-딸일까?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을 울려 놓는다고 했다. 전화를 못하게 하고 책을 없애
버린 것이 모두 아버지가 한 것이다. 
  지금가지 글의 내용을 정리해서 일곱가지로 나누어 적어 보였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몇 가지 판단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이 학생이 아버지가 한
말이나 행동을 바로 그대로 적어 놓지는 않고 설명하듯이 써 놓았지만, 이
학생이, 아버지 이야기를 서 놓은 것이 사실이라고 믿어 진다. 그리고 이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날마다 끊임없이 꾸지람을 하고 잔소리를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학생이 요즘에 와서 공부 성적이 떨어진 까닭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이렇게 아이를 괴롭히고 속을 밟아 놓는 말을 마구 하는데
어떻게 공부를 제대로 하겠는가? 이런 아버지 밑에서는 어떤 아이도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학생이 지금까지 이 정도라도 견디어 왓다는
것이 내가 보기로는 참 놀랍다. 정말 장하고 훌룡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아버지는 인권을 짓밟는 말과 행동을 자식 앞에서 태연하게 한다. 그래서
이 학생이 아버지를 비판한 말은 모두 정확하다.  아빠의 말은 100% 틀렸어요 란
말이 조금도 기분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생각으로는 해결하는 길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다. 
  이 학생의 성적이 나빠진 까닭, 지금은 학교에 가는 것조차 끔찍하게 되고,
살아갈 의욕을 잃어 버리고 아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잇는 것이 모두 아버지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아버지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고등학생쯤 되면
이제는 아주 어린 아이와는 다르니까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제 생각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 말씀은 무엇이든지 덮어놓고 따르니까 이렇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은 이 학생 혼자서는 어려운 것이다.
누가, 어느 어른이 도와주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학교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 밖에 친척 어른이나 이웃 어른, 아니면 이 편지로 도움을 요청받은 
쪽지 의 아저씨가 학생편이 되어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이렇게 힘들 때 부모님이 좀 도와주시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텐데... 하고 제 능력을 믿고 있는 이런 훌룡한 학생을 도와주지 못하고
기를 죽이고 열등감만 갖게 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가, 그것을
충고해서 깨닫게 하는 일은 둘레에 있는 어른들이 할 일이다. 
  다른 도 한가지 길은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이다. 이 학생의 고민과 절망,
잘못된 아버지의 행동, 이 모든 문제는 대학 진학만이 오직 한 가지 살아가는
길이라고 복 있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이다. 과연 대학 진학만이 학생들의 갈
길인가? 대학 진학이 그런 끔찍한 비극을 겪고 목숨가지도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인가/ 인생의 황금기에 온갖 잡동사니를 암기하는 일로 시달리고, 벗들은
죄다 적으로 만들고, 그래도 안되어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런 살벌한
경쟁에 이기고 살아 남아도 대개는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 있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여전히 대학이요 대학만이 사람이 가야 할 단 하나 최상의
길인가/
  나는 그렇게 안 본다. 그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뒤집혀진 관점이다.
대관절 대학을 나와서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취직을 못 해서, 대학원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고, 외국에 가서 또 무슨 학위를 따 와도 놀고 있기가
예사다. 내가 갈이고 이런 실업자들을 가장 많이 구제해 주는 곳이 온갖
과외공부를 시키는 학원이다. 이래서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책읽기
공부로 영어 공부로 시달리는 판이 되었다. 어느 초등 학교 1학년 아이는 과외를
열 다섯 군데나 다닌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와같이 잘못된 교육의 결과는
다시 또 더 잘못된 교육의 씨를 뿌리고, 이래서 우리 아이들의 불행은 끝없이
되풀이되고ㅡ 역사의 비극은 끊어질 줄 모른다. 
    그런 말은 꿈 같은 이상론이다. 그래도 대학을 가야 사람 노릇을 한다. 
  그래도 또 이런 말을 한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되면 어떤
종교집단에서 보여주는 광신자들의 행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른들이야
그와 같은 무더기 미친 증세에 빠지든지 말든지 젊은이들만은 제 정신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고등학생들은 부디 자기 목숨 자기가 지켜서
아끼고 살아가라고 부탁하고 싶다. 사람의 목숨이란 얼마나 귀한가! 이 목숨을
오늘날에는 선생님도 부모조차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학은 고사하고 초등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훌룡한 일을 한 보기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나는
대학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할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오늘날 우리 나라의 학생들이 죽자 사자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거의 모두 취직 수단을 얻기 위해서다. 그 취직이란 것을
보장받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이 학생에게 더 자세한 말을 해줄 자리가 없기에 이만 쓰고, 부디 좀
자유스럽게, 자기 목숨과 삶을 귀하게 가꾸면서 살아가라고만 말하고 싶다. 
  끝으로 문장과 낱말에 대해 잠깐 적어 둔다. 
  이 글은 참으로 싱싱한 입말로 썼다. 하고 싶은 절실한 말을 그대로 쏟아
놓았기에 이런 좋은 글이 되었다. 그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쓴 글이 아니기에 유식해 보이는 말이나 말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학생이, 성적이 떨어졌다고 부모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다만 두가지 잘못 쓴 말이 있다. 첫머리에  부쳤었는데   했었는데  라고 해서
과거형을 겹으로 쓴 것과, 좀 뒤쪽에 가서  땅바닥 쳐다보는  이라고 쓴 것이다.
발 밑에 있는 땅은 내려다보는 것이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이토록 싱싱한 말로 쓴 글에도 틀린 말이 나오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이 벌써 입말까지도 잘못된 글의 영향을 받아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기 쉬운 우리말로 다듬고
  다음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훌룡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내가 믿고 있는 어느
고등학교의 학생이 쓴 글이다. 학생들이 하고 있는 여러가지 회의를 소개하고
있는 이 글에서,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울러 다듬어야 할 말의 문제도 살펴보기로 하자. 
    회의 시간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 말은 옳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입시 위주의 교육속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는 학생들에게 주인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학교는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고 참여하는 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은 그 해결 방법도 잘 모르고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수가
많다. 
  우리 학교의 여러 가지 회의는 그런 뜻에서 의미가 있다.  학우회 는 재학중인
전교생을 회원으로 하는 학생자치기구이다. 매달 둘째주 목요일에 열리면 한 달
동안 학생과 각 부서 및 동아리의 활동 사항과 결과를 보고하고 다음달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한달 중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토론한다. 여러 가지 건의
사항이 나오지만 최대한 학생들 안에서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또  간담회 라는 모임이 있다. 한 학기 중 학년별로 두 번씩 열린다. 학생들과
선생님 모두가 둘러앉아 학급회의 때 부족한 이야기라든지 선생님과 함께
해결해야 될 문제들에 대해 토의한다. 학생들은 최소한 한 번씩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게 된다. 진지하고 진실된 얘기가 많이 나와 2-3시간 계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특이한 것은  연석회 가 있다. 3월에 연석회원 전체가 일년 동안의 활동
계획을 세운다. 매월 둘째주 월요일에 모여 계획했던 것을 반성하고 다짐한다.
학우회의 예산안도 연석회의에서 보고되고 통과된다. 현재는 전교생 75명중
21명이 연석회 임원이다.
  그리고  전교 회의 가 학기말 마지막 학우회 시간에 열린다. 한가지 주제 또는
한 학기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교사와 전교생이 모여 자유스럽게
이야기한다. 친구 또는 선생님께 좋지 않았던 일이 있었던 경우 이 회의에서
사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처음에는 발표자가 별로 없어 지루하게 생각하지만
한 가지 토의 내용이 결정되면 열띤 토의에 들어간다. 
  이것으로 간단히 소개를 마친다. 이외의 것은 물론이고,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학생이라면 이와
같은 여러 회의와 학생 활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해야겠다. 
  아무튼 학교의 주인인 우리가 학교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더욱
함께 참여하는 회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3학년 오대혁)

  이 글은 여섯 문단으로 나누어서 썼다. 첫째단에서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
되자면 학생 스스로 여러 가지 활동에 참가해야 하지만 우리 나라 학교에서는
입학시험 공부만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니 학생이 주인으로 될 수 없다고 했다.
둘째단에서는 자기 학교에서 하고 있는 여러 가지 회의 활동 가운데서  학우회
의 성격과 구성, 하고 있는 일을 소개했고, 셋째단에서는  간담회 의 구성과
회의하는 때와 내용을 말하고, 넷째단에서는  연석회 를, 다섯째단에서는 
전교회의 를 이렇게 소개한 다음 마지막 여섯째단에서 보충하는 말과 의견을
적었다. 이 학생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 회의 토론 활동을 요령있게 잘 소개했다고 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다른 학교의 학생들, 그러니까 시험공부에 시달리는 우리
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읽으면 이런 학교가 우리 나라에 있는가 싶어 신기하게
여길 터이고, 그래서 학생들이 채워주기 위해서는 이 학생이 쓴 글과는 좀 다른
형식으로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곧 설명문보다는 기록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그 여러 가지 회의나 토론 활동 가운데서 어느 한 가지를 정해서, 실제로
어느 날 어디서 몇 사람이 모여 무슨 말을 한 것을 말한 그대로 기록해서 읽도록
한다면 읽는 사람이 그 현장을 생생하게 눈앞에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아무리 서투른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설명문대로 쓸 자리가 많겠지만, 비록 아무리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명으로 그친다면 결국은 지식을 개념으로
머리에 넣어주는 것밖에 안된다. 그런데 기록문이나 서사문은 어떤 현실을
간접으로 체험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공부를 해야 하는 글은
역시 눈으로 보고 듣고 몸으로 겪은 것을 그대로 정확하게 적어 보이는
글-서사문, 사생문, 기록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글에 씌어 있는 말을 좀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에 적힌
말들은 어른들의 글말을 따라 써서 아주 별나게 오염이 된 말들은 아니다.
그러나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을 썼다고는 볼 수 없다. 그 까닭은 이 글의
성격이나 형식에서 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사문이나 기록문이나 사생문으로
쓰지 않고 설명문으로 썼기 때문에 삶의 말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설명하는 글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개성ㅇ 있는 자기 말고,
우리말을 살려서 쓸 수 있다. 
  이 글에 나오는 말들을 다듬어 쓰는 일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싶다.
첫째는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이고, 둘째는 될 수 있는 대로 고쳐 쓰는 것이 좋은
말이고, 셋째는 다른 말로도 쓸 수 있는 말이다. 
  첫째,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은 다음과 같다. 
  -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수가 많다.
   -으로서의 는 우리말법이 아니다.  포기 란 말은 많이 쓰지만 쉬운 우리말이
있으니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 대문은  주인으로서 가진 권리를 내버리는
수가 많다 고 하면 된다.
  - 그런 뜻에서 의미가 크다.
   의미 가  뜻 이니까 같은 말이 되풀이 되었다.  의미 는 어떤 경우에서도
모두  뜻 이라고 하면 말하기도 좋고 듣기도 좋다. 그러니 위의 대문은  그런
점에서 뜻이 크다 고 쓰든지,  그래서 뜻이 크다 나  그래서 큰 뜻을 가졌다 고
쓰면 될 것이다.
  - 매달
  이것은  달마다 라고 써야 한다.
  - 각 부서 및 동아리의 활동사항과 결과를 보고하고
  이 대문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은  및 이란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실제로
입으로 말하지 않으니 마땅히  와 라는 토를 써야 한다. 그 다음에 곧 또  과 가
와서 읽기가 안 됐으면 이  과 를 다른 이음토로 바꾸면 된다. 그래서 이 대문은
 각 부서와 동아리의 활동상황이며 결과를 보고하고  이렇게 쓰면 좋겠다.
  - 문제등에 대해
  이  등 이 일본글에서 왔다.  문제들에 대해 하면 그만이다.
  - 진실된
  많이 쓰고 있는데, 잘못 쓰는 말이다.  진실하다 란 말은 이어도  진실되다 란
말은 없다. 그러니  진실한 이 아니면  참된 이라고 써야 옳다. 
  - 이 외의 것
   이 외 가 좋지 않다.  이 밖 이나  그 밖 이라고 하면 된다.
  -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학생이라면
  여기 또  -으로서의 가 나왔다. 이것은 일본말법이니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참된 이나  바른 이라고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위의 대문은  참된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진 학생이라면  이렇게
써야 바른 우리말이 된다. 

  다음은 될 수 있는대로 고쳐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말을 들어 본다. 
  - 부족한 이야기라든지
  여기서  부족한 이라고 썼는데,  부족했던 이라고 쓸 말을 잘못 쓴 것 같다.
그런데 이  부족 이란 말도 모자란다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모자랐던 이야기라든지 가 아니면  다 못했던 이야기라든지  하고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매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달마다 라고 쓰도록 권하고 싶다.
  -보고되고 통과된다. 
  이것은  보고하고 통과시킨다 고 하는 것이 좋겠다. 
  -발표자가
  이 말은  발표하는 사람이 나  말하는 사람이 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 더욱 함께 참여하는
  마지막에 나온 말인데,  함께 보다는  많이 나  열심히 가 더 알맞은 말일 것
같다.  참여 한다면 벌써  함께 하는 것이니까.

  셋째로, 달리 쓸 수도 있는 말을 들어 본다. 왜 잘못 쓴 말도 아닌데 또 달리
쓸 수 있는 말을 드는가 하면, 무슨 글을 쓰더라도 말을 자유롭게 쓰고, 개성이
있는 자기 말로 써야 그 글이 더욱 잘 살아 나기에, 늘 자기가 쓰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을 들어 놓으면 더러 자기 말 버릇을 고치거나 말을 자유롭게 찾아 쓰는
데 참고가 될까 싶어서다.
  이 글을 읽으면 너무 틀에 박힌 말이 많이 나온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학생들도 저절로 쓰게 되는 말, 그런 말을 아주 쓰지 말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말만 쓸 때 결국 어른들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그런 틀에 박힌 말을 보기로 들면, 앞에 나온 바로잡아야 할 말들
아니고도  입시위주   주인   참여   활동사항   건의사항   활동계획   최대한 
 토론   토의   적극   노력   학년별 ... 이럼 말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실제로 학교에서 많이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소개하는 글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기도 하다고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이
정말 학교의 임자가 되어 그 생활을 스스로 창조하면서 살아간다면, 입으로 하는
말까지 좀더 학생답게(어른들이 쓰는 판에 박힌 말에서 벗어나) 싱싱한 말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정도까지 가야 학생들이 진짜 학교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 난 다음에도 정말 이
나라의 주인이 될 것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쓰던 말을 모조리 다 물리치라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우선 몇 가지 말이라도 달리 써 보려고 하는
노력만은 있어야 되겠다. 
  -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럴 때 나오는  ...라는 이 문제다. 언제부턴가 글이고 말이 모두 이렇게
되어간다.  ...는 이나  ...하는 이 본래부터 많이 쓰던 우리말이다. 
  - 입시위주의 교육 속에서
  이것은  입학시험을 목표로 하는 교육에서 로 쓸 수 잇다.
  - 학생들 스스로 움직이고 참여하는 활동이 
  여기 나오는  참여 란 말은 참 많이 쓰고, 이 글에서도 여러 번 나온다. 많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다 보면 안 써야 할 자리에도 쓰게 된다. 여기서는 
참여하는 을  함께 하는 이라고 써도 될 것이다.
  -학생자치기구이다.
  여기 나온  기구 란 말을 우리말로 쓸 수 없을까?  얼거리 라고 할 수는
없겠나 싶다. 
  - 그 한달 중
  이  중 이란 말을 가끔은  가운데 라고도 쓰면 좋겠다. 그래서  가운데 란
우리말을 살렸으면 한다. 
  - 건의사항
  이것은  올리는 의견   해달라는 의견   바라는 것  이렇게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 최대한 학생들 안에서 
  이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학생들끼리 라고 써도 좋을 것이다.
  -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
   풀려고 애쓰고 있다 고 쓰면 어떨까.
  - 한 학기 중 학년별로
  이것은  한 학기 동안 학년마다 따로 라고 써도 될 것이다.
  - 토의한다.
  이 말은  따지고 의논한다 고 쓸 수도 있다. 
  - 최소한
  이 말은  적어도  하는 것이 더 낫겠다.
  - 주제
   으뜸제목   중심제목 이라 할 수도 있다. 더러는  문제 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경우도 있다.
  - 물론이고
   말할 것 없고  해도 될 말이다.
  - 말한 바와 같이
   바 란 말은 글에서만 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말했듯이 나  말한대로 라고
쓰는 것이 낫겠다.
  - 적극 참여해야겠다.
   열심히 참석해야겠다 든지  부지런히 함께 해야겠다 고 써도 될 것이다. 
적극적으로 를 쓰지 않은 것은 잘 되었다.
  - 활동사항과 결과를 보고하고
  이것은 앞에서도 나왔는데, 활동한 것과 결과를 알리고  이렇게 써도 될
것이다. 
   창조 란 말을 사전에서는  처음 만들어냄 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삶을 창조한다 고 하면  새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간다 는 말이 된다. 그런데 
말을 창조하면서 쓴다 고 하면, 신기한 말로 머리로 궁리해서 만들어 낸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말,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우리말을 살려서
써야 말을 창조하는 것이 된다. 말을 창조하는 마음가짐으로 써야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다. 
  

    논설문 쓰기 - 생각과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이제부터 글을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해 보자. 무엇을 어떻게 쓰나
하는 여러 가지 글쓰기의 문제를 실제 작품을 보아 가면서 풀기로 하겠는데,
내가 가장 힘들여 말하려는 것은 깨끗하고 바른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그
까닭은, 지금 우리말과 글이 남의 나라 말을 따라 함부로 써서 아주 엉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초등 학생 때부터 잘못 배우기 시작하여 중고등학생이
되면 어른들과 거의 다름없는 정도로 오염된 말을 쓴다. 그런 상태가 학생들이
쓴 글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중고등학생 때 우리말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아주 평생을 괴상한 병신 같은 말로 살아가게 되고, 이래서 우리말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말이 죽으면 우리 겨레도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중고등학생들의 청순한 마음을 믿는다. 이제부터 우리가 기어코
살려야 할 우리들의 목숨인 겨레말과, 어떻게 해서라도 물리치고 뿌리 뽑아야 할
불순한 남의 말을 구별해서, 말할 때나 글을 쓸 때 티없이 깨끗한 겨레의 양심을
살려주기 바란다. 여러분이 우리말을 살리지 않으면 누가 살리겠는가?
  먼저, 글 한 편을 들어 보기로 한다. 다음 글은 고등하교 1학년인 두 학생의
이름으로 어느 학급문집에 발표된 글이다. 제목 앞에  주장글 이라 적혀 있다.
논설문이라 하지 않고  주장글 이라 한 것이 잘 되었고, 지도한 선생님의
믿음직한 태도까지 나타난 듯하다. 두 학생이 의논해서 썼겠는데, 주장하는 글을
이렇게 몇 사람이 토론하고 의논해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보충수업 이대로 좋은가?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면 광주의 많은 고등학교들이 보충,자율학습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와 농촌간의 보충수업이 주는 의미는 다를지라도 우리
학교 보충수업의 실태를 보면, 선생님들의 열의에 비하여 수강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다. 처음 출발이 타의가 아닌 자의(?)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학습태도가 나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이(미경,정숙)함께 생각해 보면 첫째, 농촌의 특수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에 들어 가면 들에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집안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어떤 남학생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농약을 하고
온다고 들었다.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 피로가 겹친다. 
  이에 가중하여 보충수업 한 시간씩을 받으려는 정말 잠이 올 수밖에..
  의욕상실증 환자 같다.
  둘째로는, 능력별 보충수업이 아니라서 정숙이는 잘 따라가지만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만약에 2학기에 보충수업을 한다고 하면 자신의
능력에 맞춰 반을 편성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원인을 접어두고 보충수업 자체를 놓고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하는 수업만 가지고도 대학을 들어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수업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보충수업까지 괴롭히니 보충수업이
아니라, 이중 짐 지우기 수업이다. 
  그래도 우리는 밤 10시까지 하는 살인적인 심야학습이 없으니 참 좋다. 하기야
농촌에서는 할 수도 없지만, 보충수업을 현행대로 하면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하루 빨리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농촌학교에서 하고 있는 보충수업이 농촌의 현시로가, 학생들의 능력
차이를 생각하지 않은 반 편성 때문에 그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런 보충수업은 없애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한 글이다. 주장을 하는
글은 이와같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기의 의견을
차근차근 조리있게 써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은 생각을 알기 쉬운 말, 바른 말로, 어른들이 흔히 쓰는 글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말로 써야 한다는 점에 다듬어야 할 데가 많다. 다음에
다듬어야 할 곳을 차례로 들어 보겠다. 
  -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면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신문을 보면  하면 된다.  신문 에다가  지상 을
붙일 필요가 없고,  통해서 도 안 쓰는 것이 훨씬 읽기 좋고 깨끗한 말이 된다. 
  이  -을 통해서 란 말은 많이 쓰는데, 이렇게 아주 없애 버리든지, 다른 더
알맞은 말로 바꾸든지, 토  으로 를 쓰면 된다. 보기를 들면  이 길을 통해서
학교로 간다 는   이 길을 지나서 학교로 간다 고 써야 되고,  친구를 통해서
알았지요 라면  친구가 소개해서 알았지요 로 쓰는 것이 좋고,  노동을 통해
삶을 배우고 는  노동으로(일을 해서) 삶을 배우고  하면 되는 것이다. 
  - 도시와 농촌간의 보충수업이 주는 의미는 다를지라도
  이 대문은 말이 좀 이상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말을 볼 때 
도시 학교의 보충수업 실태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만약 말이 좀 잘못되었더라도 이 대문을 그대로 둔다면 우선  의미는 다를지라도
만은  뜻은 다르겠지만 으로 고쳐야 하겠다.
  - 열의에 비하여 
  이 말은  열의에 견주어 라고 쓰는 것이 좋다.  -에 비하여 는 일본글따라서
쓰는 꼴이니 어떤 경우에도 우리말  -에 견주어 라고 써야 한다. 
  - 매우 소극적이다.
  적극적, 소극적, 주관적, 객관적, 사회적, 역사적.. 이렇게 어떤 중국글자말
다음에  -적 을 붙여 쓰기를 잘 하는데, 이것은 일본사람들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는 것이고, 또 말뜻을 흐리게 하는 좋지 못한 말이니 안 쓰는 것이 좋다.
버릇이 되어 자꾸 나온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쓰도록 애써야 한다. 
적극적으로 는  적극으로 하면 되고,  소극적으로 는  소극으로  하면 그만이다.
 주관적으로 와  객관적으로 도  주관으로   객관으로  하면 된다.  주관적인
생각 이라면  주관인 생각 이나  주관으로 된 생각  하면 더 분명한 말이 된다. 
사회적 명성이 는  사회에 이름이 라고 하면 되고,  역사적인 일을 은  역사에
남은 일을  하면 시원스런 우리말이 된다. 
  여기 나오는 말  매우 소극적이다 는  매우 소극이다 고 써도 되고,  소극
이란 말도 쓰지 말고 아주 다른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겨우 따라 가는 상태다 
이렇게 말이다. 
  이  -적 이란 말을 자꾸 쓰다 보니 아무데나 마구  -적 을 붙여서 우리말이
아주 어설프고 어지럽게 되어가고 있다.  대체로 하면 될 것을  대체적으로 라고
말하고,  상식으로  할 것을  상식적으로 하고 하고,  시간이 바빠서  할 것을 
시간적으로 바빠서  하는 것과 같다. 또  늘   언제나  하는 우리말을 안 쓰고 
일상  이란 말을 쓰다가 여기에다  -적 을 또 붙여  일상적으로  한다든지, 
크게  하면 될 것을  대체적으로  한다든지,  몸이 고달파서  할 것을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하는 것이 다 그렇고,  마음  이란 말을 써도 될 자리에 
정신 을 쓰고, 다시 여기에도  -적 을 붙여  정신적 으로 하는 것도 그렇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배운 쉬운 우리말을 안 쓰고 책에 나오는 글말(곧 그
대부분이 남의 나라에서 온말)을 쓰는 것은 남들에게 유식함을 자랑해 보이려는
아주 얄팍하고 천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하도 이  -적 을
많이 쓰다 보니 그만 이 말이 굳어져서 어떤 경우에는 대신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 수도 있다.  민주적 질서와 독재적 질서  이럼 말은  민주의
질서와 독재의 질서  하든지,  민주 질서와 독재 질서 하면 되겠지만  민주적
목소리를 죽이지 말고  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이것도  민주의 목소리를.. 하면
되지만 처음 쓰는 말이라 좀 낯설게 느껴질 때는  민주적 목소리 가 어떤
목소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민주적 목소리가 국민 전체의
목소리라면  민주적 을 쓰지 말고  국민의 목소리를 죽이지 말고  하면 되는
것이고, 이렇게 쓰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말이 되는 것이다. 
  - 타의가 아닌 자의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타의   자의   -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말이 다 문제가 된다. 
타의 는  남의 뜻 이나  남의 생각 이라 해야 되고,  자의 는  제 뜻 이나  제
생각  이라고 하면 된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는  했는데도  라고 써야 한다. 
  이  -도 불구하고  란 말이 아주 좋지 않은 글말이다. 입으로 하지 않는
괴상한 말을 유식하게 보인다고 글에다가 자꾸 써서 퍼뜨리는 것은 우리말을
죽이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는 짓이다.  그런데도 하면 될 것을 외국글에 병든
학자나 문인들을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쓰는 병신 노릇을 우리
학생들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 
  - 이유
  이 말은  까닭 이라고 써야 한다. 중국글자말 가운데도 홀소리를 셋이나
잇따라 내어야 하는 이런 괴상한 말을 우리말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소리내기가
힘들고 알아듣기가 거북한 중국글자말은 이 밖에도  의의 (뜻),  의외 (뜻밖), 
의아스럽다 (이상스럽다) 따위 아주 많다. 
  - 농약을 하고 
  이것은  농약을 치고 나 농약을 뿌리고  라야 옳다. 
  -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
   육체에는 보다  몸은  하든지  사람의 몸뚱이는 이라고 쓰면 더 좋다. 
  - 가중하여 
  이것은  더하여 이다. 
  - 자신의 능력에 맞춰
  이 글에서는  자신의 가 아니고  학생들의  라고 써야 된다. 
  - 하는 바램이다. 
  이것은  하고 바란다  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 아니면  좋겠다 고 쓰든지.
  - 이런 원인을 접어 두고 
  여기서는  원인을  보아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알맞은 말이 된다. 
  - 살인적인 심야학습이
  이것은  사람잡은 한밤중 공부가 라고 쓰면 된다. 여기도  -적 이 나왔다. 
  - 현행대로 하면 
  이것은  지금대로 하면 이라 쓰는 것이 좋다. 
  - 정상화되었으면 
  이 말의 짜임을 보면  정상   화   되었으면 이란 세 가지 말이 하나로 되어
있다.  정상 은  자로 란 말이다.  화 는  된다 는 듯을 지닌 중국 글자말인데,
그 다음에 또  되었으면 이란 말이 붙어 있으니 겹말이 되 셈이다. 그러니  화 
와  되었으면  이 두 가지 말에서 한 가지만 써야 한다. 만약  화 를 쓴다면 
-화하였으면 이라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글자말을 쓸 필요가
없으니  화 는 마땅히 없애야 한다. 그래서 이  정상화되었으면 은  바로
되었으면 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어른들이 잘못 쓰고 있는 요란한 중국글자말 문체로 된 글에는 무슨  -적 
하는 말과, 무슨  -화된다 는 말이 아주 많은데, 중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어설픈
글말은 아주 사람의 몸을 망치는 병균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여 딱 잘라 거절해서
안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화된다 의 보기를 더 들면  교육이 민주화되기를 
 자유화되는 교복의 문제   기독교가 토착화되기 위하여 .. 이렇게 수없이 쓰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우  교육이 민주로 되기를   자유로 되는 교복의 문제 
(또는  자유로와지는 교복의 문제 )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위하여  이렇게 써야
할 말들이다. 
  지금까지 다듬어 놓은 말을 대강 그대로 해서, 앞에서 든 글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본디 쓴 글과 견주어 보기 바란다. 
 
  신문을 보면 광주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보충, 자율학습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학교의 보충수업 실태는 잘 모르지만, 우리학교 보충수업의 실태를 보면,
선생님들의 열성에 견주어 수강하는 학생들의 태도는 겨우 따라가는 형편이다. 
  처음 출발이 남의 생각이 아니고 제 생각으로 했는데도 점점 학습 태도가
나빠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들(미경,정숙)이 함께 생각해 보면 첫째, 농촌의 특수성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에 가면 들에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어떤 남학생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농약을 치고 온다고 들었다. 사람의
몸뚱이는 한계가 있는 법, 피로가 겹친다. 
  이에 더하여 보충수업 한시간씩을 받으려니 정말 잠이 올 수밖에.. 의욕
상실증 환자 같다. 
  둘째로는, 능력별 보충수업이 아니라서 정숙이는 잘 따라가지만 나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만약에 2학기에 보충수업을 한다고 하면 학생들의
능력에 맞춰 반을 편성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접어두고 보충수업 자체를 놓고 생각하면, 학교에서 하는
수업만 가지고도 대학을 들어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업 중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보충수업까지 괴롭히니 보충수업이 아니라  이중
짐지우기 수업  이다. 
  그래도 우리는 밤 10시까지 하는, 사람잡은 한 밤중 공부가 없으니 참 좋다.
하기야 농촌에서는 할 수도 없지만.
  보충수업은 지금대로 하면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하루빨리 바로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아마도  어이구, 이렇게 쉽게 쓰는 게 더 어렵겠는데  할
것 같다.
그렇다.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쉽고, 쉽게 쓰기가 도리어 어렵다. 이것이
거꾸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삶에서
배워야 하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에게,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말이 말로 되어야 글도 되는 것이니까. 

  우리말 공부를 할 때는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잘못 쓰는 자기의
말버릇
가운데서 한두 가지 말부터 먼저 고쳐 나가도록 하면 된다. 그 한두 가지를 바로
잡아
놓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이 생겨서 더 많은 말들을 더 쉽게 고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여남은 가지 말을 지적했지만, 그 가운데서  -을 통해서   비하여   -도
불구하고   -화된다 
 -적  이렇게 다섯가지 말이 가장 널리 잘못 쓰는 말이고, 이런 말부터
고쳐나가야 된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글을 머리로 만들지 말고 
  글은 몸으로 부딪힌 일을 쓰고 가슴에 울려온 느낌과 생각을 쓰는 것이지,
머리로 써서는
안된다. 머리로 글을 만드니까 말을 부질없이 꾸미게 되고 사실과는 다른 것을
쓰고 유식한
말을 흉내낸다. 알맹이는 없이 말만 요란한 글, 남을 속이는 거짓스런 글은
이렇게 해서
씌어진다. 거짓글까지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을 논리로 써서는 안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논리로 쓰는
것이 머리로
쓰는 것이다. 다음은 고등하교 1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이 글이 몸으로 부딪힌
일을 쓴
글인지, 머리로 쓴 글인지 살펴보자. 
    어머니
  우리는 흔히 어머니를  위대하다  라고 일컫는다.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빨래 청소는 물론, 모든 것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를 위해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꼭 의무적으로
일을
하신다. 이럴 땐 나의 마음은 흐뭇할까? 아니다. 돕고 싶을 뿐이다.
솔선수범해서 도와야 할
우리는 일이 많다고 해서 피해 버린다. 이 일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나는 방이 더럽다고 야단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에게 틈이 언제 있냐고
하신다. 이건 나의
일시적인 말에 불과하다. 어머니의 거룩한 상. 이건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이것을 이룰지....
  그러나 나도 하염없이 노력을 하련다. 쓴내나는 생활을 이겨내는 어머니, 왜
어머니의
입에서  목구멍에서 쓴내난다 라는 말이 자꾸 나왔어야 할까. 
  어제의 일이다. 
  새벽부터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엄마는 오늘 답배 모종을 해야 하니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귀가 따가울 정도다. 좁을 얻어야만
우리가 편할
텐데.. 하고 우선 편함을 앞세운다. 점심 전에 아버지께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니, 이건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그런 말하면 못쓴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나는 이유를 단다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시는 분을 잊기 쉽다.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그러나 엄마, 먼 미래를 기다려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열심히 도울께요. 
  효도도 잘 할 거예요. 

  이 글은 다 읽고 나서도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다. 가슴에 울려오는 것이
없다. 맛이
없는 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는 글이 된 것은 머리로 썼기 때문이다. 
  글 가운데 실제로 겪은 사실을 쓰려고 한 대문이 있기는 있다. 담배 모종을 한
것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대문이 그렇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쓰다가
그만두고 곧
머리로 말을 만드는 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를 위해 늘 일만 하면서 고생하는 어머니는 훌룡하시다. 나는 어머니께
효도를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쓰려고 했다면 무엇보다도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하시는
모습을(언제 어디서 보았다든지, 함께 일하면서 깨달았다든지 하는 사실을)
뚜렷하게 그려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정직한 이야기는 없이 그저 머리로 생각한 말만
늘어놓았으니 그런
말이 군소리가 되고 빈 말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머리로 글을 쓰면 유식한 글말을 흉내내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이
글에는
공연히 쓴 글말, 유식한 한자말에다가 아주 허황한 말까지 나온다. 
  이렇게 잘못 쓴 말, 제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 말을 차례로 보아 나가자. 
  - 우리는 흔히 어머니는  위대하다 라고 일컫는다. 
  여기  일컫는다 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쓰지 않는다.
벌써 죽어버린
말이라도 그것을 대신해서 쓸 말이 없다면 살려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린애들의
입에서도 쉽게 나오는  말한다 를 쓰지 않고  일컫는다 를 써야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글을
전문으로 쓰는 문인이든지 학생이든지  일컫는다 란 말을 쓰는 까닭은, 뭔가
유식한 글을 써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실제로 말을 할
때도    우리
어머니는 훌룡하시다 고 하지   우리 어머니는 위대하시다 고 말하지 않으니까. 
  - 새벽부터 일어나 꼭 의무적으로 일을 하신다.
  여기 나오는  의무적으로 란 말은 어떤 말일까?  어쩔 수 없이 란 뜻일까?
앞뒤의 글을
보아서 그런 뜻은 아닌 것 같다.  반드시 란 뜻으로 썼는가? 그러나 바로 앞에 
꼭 이란 말이
있다. 결국 이 말은 아무 쓸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
말이 좀 덜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해야지.
  - 솔선수범해서 도와야 할 우리는 일이 많다고 해서 피해 버린다. 
  이 글월에 나오는  솔선수범 은 학교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학생들 앞에서
선생님들이
무슨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쓰는 이 말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런 글에서
쓸 것이 아니다.  먼저 본을 보여 하면 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했는데, 
나는 이라고 할
것을 잘못 썼다. 
  - 이전 나의 일시적인 말에 불과하다. 
  이 글월은 다음과 같이 써야 한다.  이건 내가 한 번 해본 말일 뿐이다. 
  - 어머니의 거룩한 상.
  갑자기 나오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선  상 이란 말부터 무슨 말인가?
모습이란
말이라면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 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머니의 거룩한
모습 이 나오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이  어머니의 거룩한 상 이 나온 다음에는  이건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과연
내가 이것을
이룰지.. 라고 써 놓았는데, 이 말들이 서로 어떤 듯으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다. 
  - 나도 하염없이 노력을 하련다. 
  이  하염없이 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 것 같다. 
  - 왜 어머니의 입에서  목구멍에서 쓴내난다  라는 말이 자꾸 나왔어야 할까. 
  이 글에 나오는  나왔어야 는  나와야 로 써야 우리말이 된다. 이것은
이중과거형은 아니고
그냥 과거형이다. 우리말 움직씨(동사)에는 이중 과거형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형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두어 가지 보기를 들어 본다. 
   복잡한 도로, 기사설명 혼란 알기 쉽게 약도 게재했어야 
  이것은 어느 신문에 난 독자의 글제목이다. 내용을 읽어 보니 신문에서, 서울
동남부
지역의 간선도로망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공사를 하는 형편을 보도한 모양인데,
그것을
글로만 설명해 놓아서 알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를 곁들어 
눈으로 보아서 잘
알 수 있게  설명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제목도  약도
게재했어야 로 쓰지
말고  약도 게재했더라면 으로 써야 우리말 답게 된다. 물론  게재 란 말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약도 실었더라면 이나  약도 그려 보였더라면  이라고 쓰는 것이 더
좋다. 또 이
말은  약도 게재해야 -> 약도 실어야  이렇게 써도 된다. 
  한 가지 더 들어 본다. 
   의문 있어도 확인까지 기다렸어야 
  이것은 동아국제마라톤에서 코스 길이가 문제가 됐을 때, 바로 한국최고기록을
세운
김완기 선수가 한 말을 동아일보에서 기사로 실으면서 낸 제목이다. 이것도 
기다렸어야 가
아니고  기다렸더라면 이라 하든지, 아니면  기다려야 했다 고 허야 우리말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는, 기사를 읽어 보니 바로 김선수가 그렇게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코스 길이에 의혹이 있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그치고 최종확인을
기다렸어야
하는데 일부 언론에서... 
  신문기사란, 남이 말한 것조차 흔히 기자의 글 버릇대로 고쳐서 나오는 글이
되어 있어서
김 선수가 이런 말투로 애기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실제로 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도 잘못된 말법으로 쓴 글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글만 읽어 왔으니 입으로 하는 말까지 오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갔어야   했어야 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갔더라면   했더라면 
하든지  가야
했다   해야 되었다 고 써야 우리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일이다. 
  - 그래도 나는 이유를 단다. 
  이런 말도 순조롭게 이해되지 않는다. 무슨  이유 를 달았다는 것일까? 그
앞에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했다고 했으니, 일을 그만 두고 무슨
핑계를 대서
어디로 빠져 나가려고 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 말은  그래도 나는 핑계를 대고
어디로 놀러
가려고 했다 고 써야 할 것이다.  이유 란 말은  까닭 이나  핑계 로 쓰는 것이
좋다. 
  -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분을 잊기 쉽다.
  여기  봉사 란 말이 나오는데, 왜 이런 말을 썼을까? 봉사란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두고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봉사한다고
할 수 없다.
이 글에서  봉사하시는 이란 말 대신에  애쓰시는 이란 쉬운 말을 쓰면 아주
알맞고
자연스럽게 읽힐 것이다. 무엇이든지 잘 써 보려고, 유식한 글을 써 보려고 하면
이런 탈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서 와서 잘 알고 있는 말을 쓰면 틀림이 없고 좋은 글이
되는데, 그런
쉬운 말 쉬운 글은 안 쓰고 어려운 말과 글을 쓰려고 하니 잘못된다. 머리로
글을 만들면
저절로 이런 꼴이 되고 만다. 
  -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이 글월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말이 있다.  항쟁하듯 이란 말인데, 정말
어머니가
일하시는 것을  항쟁하듯  한다고 보았을까? 이런 경우에도 보통 우리라 말하는
쉬운 말로
썼으면 좋겠다.  항쟁하듯 노력을 하신다 고 쓰지 말고  땀 흘려 일하신다 든지,
뭐 이렇게
말이다. 
  - 그러나 엄마, 미래를 기다려요.
  여기 나온  미래 란 말, 참 딱한 말이다. 왜 입으로 하는 우리말을 쓸 줄
모르고 유식병에
걸린 어른들의 글말을 따라 쓸까? 이럴 때 실제로 어머니 앞에서 말을 한다고 해
보라.
어떤 말이 나오겠는가? 아마 틀림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 먼 훗날을
기다려요. 
  그리고  미래 란 말은  앞날 이라고 해도 된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미래
라는 말은
거의 모두  앞날 이란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어느 신문, 어느
잡비에서도
 앞날 이란 우리말을 쓴 글을 보지 못했다. 모조리  미래 라고 쓴다. 이래서
우리 어른들은
모두 한자말에 중독이 되고,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는 무더기
정신병(집단정신병)에 결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니 한문글자를 써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한문글자와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외국숭배사상이다. 제것을 멸시하고 남의 것만 쳐다보는 이 더러운 마음가짐은,
일제시대에는 왜놈들한테 붙고 그 뒤로는 미국에 매달리고 서양만 쳐다보면서
서양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들어 모시는 판이 된 것이다. 
  말 하나 바로잡는 것이 단지 말버릇 하나 고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우리
겨레의 마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어머니 란 글은 어느 학급문집에 실려 있는 글인데, 글 끝에는  놉 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다. 
  - 식사를 제공하고 날삯으로 일을 시키는 품꾼.
   식사를 제공하고  이게 안 된다.  밥을 먹이고 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쓴 학생이 일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 학생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 이 지긋지긋한 담배,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니..
  이런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방이 더러우면(농사짓는 집에서 방이 좀 어질러져
있는 것을
 더럽다 고 하는 것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다.) 스스로 깨끗하게 정소할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한테 야단치다니 참 어이가 없다. 또 담배 모종을 하면서 그 일을
지긋지긋하게
여긴다.
  다음, 어머니가 일하시는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빨래 청소는 물론, 모든 것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다. 
  - 엄마는 고달픔을 참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쟁하듯 노력하신다.

  이런 대문에서 읽을 수 있는  희생 이라든가  항쟁하듯  하는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을  희생 이라고 보고, 또
어머니가 쉴새 없이
일하시는 것을  항쟁하듯  하는 것으로 본 것은, 이 학생 스스로 일을 하면서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란 것은 귀찮고 고달프고 지긋지긋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피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잘못된 교육과 사회풍조에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일과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며 태도이지만, 어땠든 잘못된
생각이고
태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그이 어수선하고 말이 제것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올바르게 가꾸어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쓰기 - 소설을 어떻게 쓸까
   
    글재주를 부리지 말고
  고등학생들은 어떤 형태(종류)의 글을 써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국민하교 때의 글쓰기를 그대로 연장, 발전시켜서 글의
갈래를 좀더
자세하게 나누어 서사문, 사생문, 기사문, 감상문, 기행문, 설명문, 광고문,
논설문,
조사보고문, 편지글, 일기글, 시, 극본.. 따위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작품의 갈래를
따라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을 쓰는 것이다. 이 둘 중 어느것이 옳은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는 어떤 글을 쓰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써놓은
학생들의
글 - 어쩌다가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두 번째인 문학작품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이어 온, 어른들 글 흉내내는 중고등학생들의 글쓰기
전통이다. 최근
어느 문화재단에서 청소년 문예작품을 현상으로 공모하면서 작품의 갈래를 시와
소설로
현상해 놓았고, 또 전국규모의 어느 문학단체에서도 청소년을 상대로 시와
소설을
현상모집하는 광고문을 낸 것을 보아도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학생들의
글쓰기 틀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체로 보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교과 공부에서 글쓰기란 것이 가장
천대받는
공부로 되어 있어서 거의 내버려둔 상태라 하겠다. 여기에다가 얼마 전부터는 이

첫머리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첫째 대답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글의 갈래에서
유독
논리만을 강조하는 논설문 쓰기가 점수따기 공부의 수단으로 별난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쓴 글이 학생들이 자기를 표현한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아무튼 학생들이 쓰고 있는 문예작품이란 것이 어떤 글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여고 1학년 학생이 쓴  콩트 인데 어느 학생신문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콩트 는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소설이다. 
  
    그 녀석
  며칠전부터 나를 따라 다니며 지겹게 주위를 빙빙 돌던 그 녀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고 피곤했다. 우리 동네 녀석이 분명한데 날 점찍어 놨는지 자꾸 내
주위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 식구들은 무척이나 더위를 타서 여름만 되면 집안의 모든 문을 열어
놓고
살다시피 한다. 그 바람에 녀석은 열려진 문 틈으로 힐끔힐끔 대문안을
훔쳐보더니만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말이나 욕설을 퍼붓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을 잘 참고
견디어 냈으며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계속 따라 다녔다. 
  그 녀석은 외모가 늘씬했고 눈매는 날카로왔으며 행동도 매우 민첩했다. 길고
쭉 뻗은
다리로 담벼락에 기댈 때에는 그의 매력이 한층 더 살아났다.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 다닐
심산인 듯,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인내심 또한 대단했다. 
  그날도 무척 무더운 하루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문단속을 했다. 너무도 무서운 집념으로 달려드는 녀석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내
방까지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신경쇠약
내지는 과대망상일런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녀석에게 나는 지쳐 있었고, 아니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으니까. 
  꿈나라 열차를 타려고 막 표를 끊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일거라는 짐작과 함께 허겁지겁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불을
켜는 순간, 그 녀석과 창문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 밀폐된 공간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니... 내가 놀라는 바람에 그 녀석은 얼른 저만치 물러나 책상앞에 늘씬한
다리로 걸터앉았다. 나는 그 쭉 뻗은 다리에 조금은 호기심도 생겼지만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함이라도 지르면 녀석이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녀석은 내가 고함을 치지 않는 것에 대해 저으기 안심하는 눈치였다. 난
머리를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이제까지 나를 그토록 따라다녔고 이렇게 내
방까지 들어왔으니 결코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리 저리 궁리를 하는 사이,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등골이 오싹했다. 
  과연 그 녀석은 맛있는 고기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큰일이다. 워낙 민첩한 놈이라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방을 둘러보며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내 방에는 신변을 보호할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놈이 다가옴에 따라 나도 재빨리 일어서서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런데 역시 그 녀석은 상당히 민첩했다.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그 녀석이 휙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가장 두껍고 무거운 국어대사전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사전을 꺼내 그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피가 튀었다. 그 녀석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했다는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통쾌감을 느꼈다. 
  나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지긋지긋한 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나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힘껏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엄마! 나 모기 잡았어!

  이것은 모기 이야기고 모기를 잡은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지막 한 줄
앞까지 읽는 동안에 아무도 이 이야기가 모기에 대해서 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꿈을 꾼 이야기인가?
이제 곧 무슨 말인가 알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읽게 되는데,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말 한 마디에서,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가까이 하려
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서로 맞서 노려본 끝에 그만 죽여 버린 상대가 모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모기 이야기였구나, 하고 그 뜻밖의 결과에 놀라는 다음
순간은 웃음이 나오고 어이가 없다는 느낌도 따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만든 기술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읽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끌어갔고, 그 마지막 판에서 관심을 더욱 모아서는 깜짝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다음에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모기에
시달리는 한 사람의 모습인가? 모기란 곤충의 지독스러움인가? 그 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뜻밖의 일에 머리를 한 대 맞았다는 느낌뿐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 독자 앞에서 글을 쓴 사람은 좋아라 웃는다.
 그것 봐. 내 글재주가 어때? 용용 속았지?  하고.
  과연 이런 것이 소설일까? 그러나 뜻밖의 일에 놀라게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온갖 기술 가운데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소설이 될 수 없다. 이 글은 마지막에 가서 뜻밖의 일에 놀랐다는 것 밖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 글을 끝가지 읽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좀 참고 읽었다. 무슨 말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니 참고 읽을 수 밖에 없다. 학생이 쓴 소설이니까 하고,
읽어 가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좀더 순진한 학생이라면
아마도 이런 글을 끝까지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대체 무엇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글을 무슨 까닭으로 자꾸 읽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모기
이야기란 것이 밝혀지고,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글을 헛 읽었다고 깨달은 것은 
속았구나! 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글쓴이가 읽은 사람 앞에서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잘도 속아 넘어 갔지 하는 웃음이다. 
  본래 소설이란 것이 독자를 감쪽같이 속이는 글쓰기 기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더 할말이 없다. 그러나 소설이 사람을 속이는 글이 되어서 되겠는가? 소설은
어디까지나 참을, 진실을 이야기하는 글이어야 한다.  
  이  그 녀석 이란 글은 모기 이야기를 쓴 것이니까 모기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모기란 말이 없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모기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그녀석 을 아주 사람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좋다. 다만 이럴 때 
그 녀석 을 도무지 모기로는 볼 수 없는 말로 많이 적어 놓았다. 
  그런 대문을 좀 들어보자. 
  - 녀석은 열려진 문 틈으로 힐끔힐끔 대문 안을 훔쳐보더니만..
  - 내가 어떤 말이나 욕설을 퍼붇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은 잘 참고..
  - 그 녀석의 눈매는 날카로왔으며..
  - 길고 쭉 뻗은 다리로 담벼락에 기댈 때는 그의 매력이 한층 살아났다. 
  - 나는 그 쭉 뻗은 다리에 조금은 호기심도 생겼지만...
  - 고함이라도 지르면 녀석이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녀석이 휙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대문들에서 더러 좀 불려서 말했다든지, 또 일부러 모기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익살스런 말로 의인화해서 쓴 것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의 거의 모두가 모기가 하는 짓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만큼, 또는 모기를
보고 자연스럽게 느낀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멋대로 쓴 말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마지막에 가서  나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사전을 꺼내 그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하고 쓴 말을 보면, 모기가 달려들어 혼비백산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모기가 달려 들었는데 대사전을 꺼내 모기를 힘껏 내리쳤다는
말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대관절 왜 이렇게 썼는가? 모기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래서 엉뚱한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그래야 마지막에 가서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왜 놀라게 하려 했나? 그것밖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학생들이 이런 따위로 지어내는 이야기, 창작이라는 글쓰기를
아주 좋지 않게 본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그것은 진실이 되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거짓이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체험을 쓰면
자기표현이 다 되는 것이어서, 이야기를 지어 만들 필요가 없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쓰는 것은 어른들의 글을 흉내내기 때문이고, 그런 흉내내기를
문예지도 선생님들이 글쓰기 지도기술로 알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그 녀석 이란 글만 해도 그렇다. 뭣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가? 이렇게
쓰지 말고, 모기 이야기라면 정말 자기가 어느 여름날 하룻밤을 모기에 시달리고
모기에 물렸던 이야기를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써야 한다. 그렇게
써야 바른 글쓰기 공부가 되고, 그런 글쓰기를 해야 나중에 소설가가 되더라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학생때부터 소설가 흉내를 내어
제멋대로 된 말로 독자들을 웃기고 놀라게만 하려고 아무 책임도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써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첫머리에
말해 놓은 중고등학생들, 또는 청소년들이 써야 할 글의 종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면,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은 두 가지 대답 중
어디까지나 첫째에서 들어 놓은 여러 가지 글의 형태를 고루 쓰는 공부를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다듬어서 써야 할 말이나 잘못된 표현을 들어본다. 
  - 주의 (둘레)
  - 접근하려는 (가까이 하려는)
  - 열려진 문틈으로 (열린 문으로)
  -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이젠 아주)
  - 외모 (겉모습)
  - 민첩했다 (재빨랐다)
  - 심산 (속셈)
  - 포기하지 (버리지)
  - 인내심 (참을성)
  - 무서운 집념으로 달려드는 (끈덕지게 들러붙는)
  - 신경쇠약 내지는 과대망상일런지도 모르지만 (신경쇠약이나
헝풍생각일는지도 모르지만)
  - 불을 켜는 순간, 그 녀석과 창문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불을 켜자,
그 녀석과 창문이 보였다)
  - 밀폐된 공간으로 (꽉 닫힌 방으로)
  - 자기 신변에 (제 몸에)
  - 난 머리를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 혼비백산하여 (혼이 빠지게 놀라, 혼쭐나게 놀라)

  공연히 불려서 말하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표현은 앞에서도 들어 놓았다. 모기
이야기라면 어려운 말이나 멋이 있어 보이는 말재주 같은 것은 도무지 필요가
없겠는데, 이런 글이 된 것은 결국 독자들을 감쪽같이 속여서 놀라게 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무슨 글을 쓰든지 글을 쓸 때는 언제나 그 글이 읽는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글이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쓰는 글은 어른들이 쓰는 글과 같은 수준의 글을 쓰기 위한
연습의 과정으로 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글은 어른들이 흉내내어
쓸 수도 없는, 그 자체로 훌룡한 가치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목숨과 삶이 어른들의 그것과 똑같이 소중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써야 살아 있는 글이 씌어지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쓰고 
  서울에 있는 어느 고등하교 1학년(아마도 남녀공학만인 듯) 학생들이 교실에서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썼다. 제목은  나의 길 이다. 쓰기 전에 담임 선생님이 어떤
말을 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김소월의 시  길 을 읽혔다. 그 시간에 써 낸 글
31편을 모두 읽을 기회가 있었기에 여기 그중에 몇 편을 아무거나 뽑아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무거나 뽑는 까닭은, 다 읽고 난 다음에 어떤 점에서든지
유달리 특색이 있다든지 인상에 깊이 남아 있는 글이 없다고 느꼈지 때문이다. 

  1 
  난 어렸을 때, 길이란 보도블럭, 아스팔트, 시골길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러나 차차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길이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학교라는 울 안에 갇혀
있다가 막상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라 두리번두리번거리다가
나쁜 길로 빠져 사회에 악이 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여검사, 우리 여검사 라고 부르시곤
했다. 그땐 여검사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래, 난 여검사가 되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난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과연
나에게 있어 가장 보람되고 즐겁고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른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과 적성을 살려 그 길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난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아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 나의 선택이 나의 장래를 결정짓는다. 
  난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이 있지만, 그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허황된 꿈만 가득 품은 그런 사람이 되기는 싫다. 
  나의 길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다. 먼 훗날 10년, 20년, 아니
죽는 그 순간까지 지금 나의 길에 대한 선택에 대해 후회 없는 나의 길을
찾아가야겠다. 

  글을 쓸 때 선생님이 어떤 내용을 쓰라고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의 길 이란 제목으로 쓴다면 다음 세 가지 가운데서 한 가지나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모두를 써야 할 것이다. 
  1.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자라난)길.
  2. 지금 걷고 있는 길. (지금 살고 있는 나날)
  3. 앞으로 갈 길.(살아갈 앞날 이야기)
  다시 말하면 자기가 걸어온 길이나 걷고 있는 길이나 가야 할 길을 쓰면 된다.
자기 삶을 쓰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하면서 어렸을 때 이야기를
쓰고, 그 다음에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해서 지금의 심경을 쓰면서  난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이 있지만.. 이라고 하여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대문에서는 자기가 할 말을 썼다. 
  그런데 첫머리 여러 줄 쓴 것은 쓸데 없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먼
훗날...  어쩌고 한 말도 공연히 말을 너절하게 만들어 썼다. 
  -  지금 나의 선택이 나의 장래를 결정 짓는다 
  이런 말은 보통 입으로 하는 말로 쓰는 것이 좋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장래가 결정된다  이렇게 말이다. 
  - 과연 나에게 있어 가장 보람되고 즐겁고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대문에 나오는  나에게 있어 도 일본말법으로 된 글말이다.  있어 는
없애고  나에게 만 써야 우리말이 된다. 
  자기가 겪은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을 쓰는 글은 나날이 지껄이는 쉬운
우리말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엉뚱한 글말이 나오고,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게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
  
  2
  김소월은 시에서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살아가면서 여러 번
열십자 복판에 설 것이다. 특히 우리와 같이 젊은 사람들은... 이 시기에 들어선
길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도 요즈음 그 삶의 가로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내가 가야할 길을 찾고 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나?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지만, 뚜렷이 내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인생의 뚜렷한 길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 모두가 나의 존경의 대상이다. 
  나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막연히 보이는 길로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생각에도 회의가 된다. 과연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이 세상에는 자신을 위해, 자신의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인지, 또 어떤 길로 나아갈지.. 참 무서운
고민이다. 
  
  이 글도 첫머리와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소월의 시
또는  나의 길 이란 말을 해설해 놓은 듯한 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쓴 것도 뚜렷한 말이 되지 못하고 막연한 말만 늘어놓았다. 따라서 맨
끝에  참 무거운 고민이다 고 했지만 그다지 절실한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 사람은 누구나,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살아가면서 여러 번
열십자 복판에 설 것이다. 
  이 글에서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는, 이란 말은 공연히 꾸며놓은
말이다. 지워 없애는 것이 좋겠다. 자기 이야기나 써야 할 글에 쓸데없는 말을
적으려 하니까 이런 말재주를 부리게도 되는 것이다. 
  - 삶의 기로에서 
  이것은  삶의 갈림길에서 나  살아가는 갈림길에서 라고 써야 하겠다. 
  - 그래서 인생의 뚜렷한 길을 가지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 모두가 나의 존경의
대상이다. 
  이런 말은 좀더 정리해서 쉬운 입말로 쓰면 이렇게 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뚜렷한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나는 모두 존경한다. 

  3 
  나의 길, 생각하기도 싫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그저 막막할 뿐이다. 
  한때는 꿈도 많고 희망찬 하루하루를 살아왔지만, 지금은 그저 단 하나의 길을
꼭 가야만 하는 처지다. 대학이란 단 하나의 길을...
  솔직히 내가 가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에 가지 않는다면 가족의 실망과
주위의 시선, 그리고 학벌을 따지는 우리 나라에서는 내가 밟을 수 있는 땅이
없을 것이다. 
  나도 대학에 가 보고는 싶다. TV에서만 보던 대학생활들을 나도 느껴 보고는
싶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엔 대학이라는 길! 그 좁고도 험난한 길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살아왔는지 하는 허무함과 아픔이 나를 한숨짓게
한다. 어릴 때의 꿈과 희망들은 다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내 앞엔
어두운 길 하나가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내가 과연 그 어둡고 험난한 길을 잘 갈
수 있을는지 나 자신도 모르낟. 
  단지 그 길을 가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이 글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야 하는 길, 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길, 험난한
길, 그래서 어둡기만 한 대학으로 가는 길을 앞에 두고 그 막막한 느낌을 썼다.
그래서 첫머리부터  나의 길, 생각하기도 싫다 고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만
쏟아 놓은 솔직한 글이다. 
  이 학생이 가는 길은, 소월이 열십자 한복판에 서서 어느 길도 내가 갈 길은
아니라고 하는 그 길과는 아주 다른 길이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억지로
끌려가는 길인 것이다. 
   시선 이란 말은  눈길 로 쓰는 것이 좋겠다. 
 
  4
  나는 나의 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돈 많이 벌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가끔 TV에서 나오는
어려운 사람들, 몸이 불편한 장애자들의 어려움이 나올 때면, 나는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줄 자신이 없었지만, 그들의 희망과 꿈을 키워주고 싶었다.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사랑으로 그들을 돕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난 그들이 이
세상을 싫어하지 않고 사랑을 배우고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물질적으로나마 돕고
싶다. 그래서 나는 장래 희망이 언제나 불투명하고,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공부를 해 왔다. 그래서 난 자신의 목표가
있어 그것을 성취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난 사실,
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꽉 차 있다. 
  김소월의  길 을 읽고 정말 공감이 갔다.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나는 불투명하고 희미한 나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다.
비록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이 글에 나타난 이 학생의 생각은 앞과 뒤가 좀 달라서 통일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학생은 지금까지 어려운 사람들, 장애자들을 도와주고
싶어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을 도와주는 길은 우선 물질로 도와주는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공부해왔다 고 말한다. 이 얼마나 뚜렷한 삶의 목표인가! 그런데 이렇게 말해
놓고 곧 그 다음에  그래서 난 자신의 목표가 있어 그것을 성취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고 썼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 까닭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
입고 잘 몰기 위해 살아간다. 학생들도 모두 공부하는 목표가 입신출세해서 잘
살기 위해서다. 그 아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불행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면 제 정신을 가지
사람이라고 보지도 않고, 바보 대접을 하는 판이고, 그런 삶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도 없고, 학생들이 글로 써야 하는  나의 길 로 인정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을 솔직하게 썼다가,
그만 다른 일반 학생들의 생각으로 돌아가 자기만이 가졌던 생각을 지워 버리게
된 것이라 본다. 
  더구나  나의 길 이란 글쓰기 시간에도 갈길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 시인의
시를, 본보기가 되는 생각이 담긴 글인 것처럼 선생님도 보여 주신 것 아닌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깨끗한 마음은 이렇게 되어 자꾸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죽어간다. 
  이 글에서 고쳐 써야 할 말을 살펴보자. 
  - 물질적으로 
  이것은  물질로 하면 된다. 
  - 물질적으로나마 
  이것도  물질로나마 로 쓰면 그만이다. 
  - 그것을 성취해 가기 위해 
  이것은  그것을 이뤄가지 위해 라고 쓰는 것이 좋다. 
  - 미래에 대한 
  이것은  앞날에 대한 이라 써야 한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글 네편을 들어 대강 살펴보았는데, 이 네편에서 지적한
중요한 문제점 네가지를 다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하는 글에서 군소리, 일반스런 논리를 늘어 놓았다.

  둘째, 자기 이야기를 뚜렷하게 쓰지 않고 막연하게 말해 놓았다. 
  셋째, 자기 생각을 쓰다가도 그만 다른 말을 써서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넷째, 자기가 한 일을 쓰는 글이니까 쉬운 입말이 되어야 할 터인데, 글말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 
  학생들의 글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까닭이 두 가지다. 하나는 선생님이
젬고을 잘못 내어 준 때문이고, 다음 하나는, 쓰기 전에 소월의 시를 보여 준
것이 잘못되었다. 
   나의 길 이라고 하는 말은 없다.  나의 길 이란 말이 어떤 경우에 실제로
쓰이겠는가?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때가 있는가? 없다.  내가 가야 할 길
이라든가  내가 가고 싶은 길  이런 말은 있어도  나의 길 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은 외국말 번역해 놓은 글에서나 나온다.(물론 잘못 번역해서 나온
것이지만) 외국말 잘못 번역한 글말을 글쓰기 제목으로 내어 주었으니, 이런
제목으로 쓴 글에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뚜렷한 자기 이야기는 안 쓰고 막연한 인생의 길이니 뭐니 하는 군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이 때문이고, 글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다음은 소월의 시를 보여준 문제인데, 그 결과로 많은 학생들의 글이 
갈래갈래 갈린 길  그 여러 길이 있어도 내가 갈 길은 없다는 소월 시의
내용같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시를 모범 답안처럼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쓰라고
지시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학생들 가운데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이 훨씬 더 많다고 봐야 한다. 또
가야 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소월과 같이 아주 꽉 막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만약 이 학생들에게  내가 걸어온 길 이라든가  내가 가야 할 길 같은
제목으로 지난날 살아온 이야기나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지금 겪고 있는 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뚜렷하게 쓰게 했더라면, 그리고 쓰기 전에 소월의 시가
아니라 같은 반 어느 학생이 살아온 싱싱한 이야기를 쓴 글을 들여주거나 읽힐
수 있었다면 훨씬 절실하고 가슴에 와 닿는 글들이 씌어져 나왔을 것이라
확신한다.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꾸며 쓰는 버릇 어떻게 고칠까
  이번에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문제를 학생들이 쓴 시를 몇 편 보면서
생각하기로 한다. 다음은 어느 학교 문예반에서 나온 문집 가운데 실려 있는,
여고 1학년생의 시다. 

    @[친구@]
  새벽 별보다 더 청량한 
  너의 눈은 
  시원한 시냇물보다 더 맑은 
  너의 음성은 
  넓은 대지에 떨쳐진 푸른 
  너의 얼굴은 
  어느덧 
  다소곳이 앉아 슬픔을 
  머금고 
  장미빛 붉은 여운만을 남긴 채
  소리없이 자꾸만 자꾸만 멀어진다.
  마지막 남은 한 떨기 작은 
  꽃잎처럼..

  이 시는 친구의 모습을 잔뜩 아름다운 말로 그려 놓았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말로 그려 놓았다  라는 느낌은 가슴에
와닿는 감동이 아니고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구나 하는 느낌이다. 이래서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시가 아니다.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 썼다고 했는데, 우선 이 작품에 나온 한자말이나 잘못
쓴 말부터 살펴보자. 
  - 청량한 
  입으로 소리내었을 때, 울림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무슨 말인가? 귀로 들었을
때 쉽게 알 수 있는 말, 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더구나
이런 내용을 쓴 시라면 글에서만 나오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밝은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셋째줄에  맑은 이 나와 있다. 이 셋째줄의  맑은 은  음성  곧
목소리를 말한 것이니  고운 하면 될 것이다. 
  - 음성
  이 말도  목소리  라 하면 된다. 어린 아이들도 다 알고 쓰는 말이 가장
깨긋한 우리말이고, 시가 될 수 있는 좋은 말이다. 
  - 대지
  이것은  땅 이라 써야 한다. 땅을  대지 라고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어른들(남의 나라 글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글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고, 겉멋 부리고 허세 피우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대지 는 우리말이
아니다. 만약에  땅 이라 쓰면 뭔가 보잘것 없고 빈약해 보이는 말 같고  대지
라 하면 그럴싸해 보이고 시가 될 것 같은 말로 느껴진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잘라 말하고 싶다. 
  넓은 땅에 떨쳐진 푸른 
  너의 얼굴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얼굴이 땅에 떨쳐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떨쳐진  (떨친다)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잘못 쓴 것이다. 
  - 여운 
  이 말은  울림 이라 하면 그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떨기 작은 
  꽃잎처럼..
  이것은 말이 틀렸다.  꽃잎 은  떨기 라 하지 않는다.  한 떨기 라 했다면 
꽃처럼 이라고 써야지. 이렇게 엉뚱한 말을 쓴 것도 말을 말로서만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우선 한 차례 말을 우리 것으로 깨끗이 다듬어 놓고 (말을 잘못
써서 무슨 말을 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어쩔수 없이 그래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그러면 훨씬 쉽게 읽힐 것이다. 
  그런데 낱말만 다듬어 놓았다고 해서 이 시가 썩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낱말과 낱말들이 모여서 이뤄진 문장이 원체 공중에 둥 떠 있는 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쓰는 투의 말로, 개념으로 된 말로 씌어 있는 것이다. 
   새벽 별보다 더 맑은 눈 
   시냇물보다 더 고운 목소리 
  이런 것은 유행하는 노래말이지 시가 될 말은 아니다. 이런 말을 또 괜히
어려운 한자말이나 글말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서 그 바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말의 속임수가 될 뿐이지. 여기에다 틀린 말을 써 놓은 것이며,
이 모든 말의 허방이 뿌리도 향기도 없는 종이꽃을 손으로 만들려고 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한다. 
  친구든지 무엇이든지 대상을 아름답게만 그려야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게만 그리려고 할 때 도리어 그것은 거짓이 되기 예사다. 사실을
정직하게, 또렷하게 잡아 보여야 시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역시 같은 문집에 있는 같은 학년 학생의 작품이다. 

    @[기쁨과 슬픔@]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언제나 창가에 두고 싶어서.
 
  햇살이 비추면
  그 빛에 빛나고 
  달빛이 비치면 
  내 작은 별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내 창가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어둔 그림자만 보일 뿐.

  내겐 기쁨을 
  주었지만
  꽃에겐 
  아픔이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다듬어야 할 한자말이 없다. 쉬운 말로만 쓴 점은 잘 되었다. 그런데
말의 문제는 여전히 있다.
  꽃의 모습이 아름다워
  손에 쥐었다.
  첫머리에 나온 이 말인데, 여기 씌어 있는 낱말들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른 질서를 가진 말고 되어 있다.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할 때  꽃의 모습이.. 라고는 하지 않는다.
   꽃 모습이.. 라고도 안하고  꽃이 아름다워..  하는 것이다. 시가 꼭 입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써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
입으로 하는 말을 떠나면 그것이 거의 모두 일본말법이나 서양말법을 따라가는
글말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서 쓰는 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좋은 시의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줄에 적힌  손에 쥐었다 는 매우 간결하고 요령있는 말 같지만
잘된 말이 아니다. 시는 어떤 모습이든지 행동이든지 될 수 있는 대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로 되어야 하는데, 이 말은 그저 최소한도의 뜻만 전하는 말로 되어
있다. 대체 그 꽃은 어느 꽃밭에서 꺾었다는 것인가? 가계에서 샀다는 것인가?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달라고 해서 얻었다는 것인가? 
   꽃이 아름다워
  한 송이 샀다. 
  가령 이렇게 쓴다고 해서 말이 길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게 무슨
꽃이었는지도 쓸 것이지 왜  꽃 이라고만 했는가?
  시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물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고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는 것이라면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를 추상으로 된 말로만 쓰다니!
이것은 시에서 가장 거리가 먼 글이요, 시가 될 수 없는 글이다. 이래서 둘째
연도 최소한의 뜻만 전하면서 곱게 그려 보이려고 한 말이 되었고, 셋째 연은
쉽게 전달이 안 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 보니까 이 시는 이 학생이 겪은 사실도 없는 일을 말로만 이렇게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물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 와서, 지금까지 대강 설명만 하듯이 한 말들이 조금은
살아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꽃이란 생명을 두고 생각하는 태도가 고등학생이
마땅히 가져야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그 꽃에게 어찌  아픔  정도이겠는가?
바로  죽음 인 것을!
  다시 같은 문집에서 한 편만 더 들어 본다. 이번에는 3학년생의 작품이다. 

    @[아부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밑을 두세 번 걷어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상의 
  검정 장화
  목장갑을 끼고 
  두 바퀴 삐그덕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한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난 친구들과 거리를 나돌다
  누군가를 외면한다.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가지 
  한없이 바라보았다. 
  난 그 누군가의 
시선조차도 외면한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를 외면한다.
  마치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서 있는 아부지를...

  이 시에서도 어려운 낱말은 별로 없지만  상의   시야   시선  같은 말은
잎으로 하는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상의 는  웃옷  이나  저고리 로 쓰면
좋고  시야 는  눈  하면 되고,  시선 은  눈길 이면 된다. 
  이 시는 모두 다섯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연의 마지막마다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말이 되풀이 되어 있다. (다만 끝연에서는  외면한다  다음에 다른
말이 더 붙어 있다.) 1,2연은  도망친다 이고 3,4,5연은  외면한다 이다. 이 
도망친다 와  외면한다 는 비슷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다. 바로 이 시의
주제가 되는 말이겠는데, 그렇다면 지은이는 무엇에서 왜 도망치고 외면하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벌써 제목에서 나타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내 모든 앞날을 결정하는  아부지 로부터 도망하는 것이고, 그  아부지
를 외면하는 것이다. 그 까닭을 이 시에서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목과
2연과 마지막 연에서 적어 놓은 말들로 느껴 알 수 있다. 사투리를 쓰는 무식한 
아부지 가 싫고,  밑을 두세번 걷어 올린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이
싫고,  검정장화 와  목장갑 과  두 바퀴 삐그덕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하게 일만 하는 사람이 싫고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가난한  아부지 가 싫은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 작품을 쓴 사람의 정신 상태가 문제된다. 자리를 낳아준
부모가 싫고 일하는 사람이 싫고, 가난한 사람들이 싫고, 그래서 이 땅과 조국이
싫고 부끄러워 남의 나라만 쳐다보고 서양나라만 부러워하는 이런 정신 상태는
비단 이 작품을 쓴 학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미 이런 정신
상태를 우리 겨레가 가지고 있는 무더기 정신병이라 하여,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말, 일본말, 서양말을 쓰고 싶어하는 고약한 버릇으로 지적한 바가 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부고 높여주는 것인데, 이런 병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난 거리를 헤매다 
  누군가를 보고 도망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첫 연부터 이렇게 낯선 사람을 말하듯  누군가
라 해서 되풀이해 놓은 것도 문제지만, 대관절 고등학생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거리를 헤매는가? 이래서 이 작품은 지은이의 마음가짐뿐 아니라 표현이 또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시 같은 것을 흉내내고, 시인인 척하는 글 버릇 말이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참마음을 쓴 것이 아니라, 전체가 어떤 틀의 시를 흉내내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앞에서 지은이가  아부지 를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까닭이 2연과 5연에 나타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2연도
5연도 제대로 쓴 것이 아니다. 2연에 그려 놓은 사람은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헐렁한 군복 바지에 작업복 웃옷   검정장화 .. 와 같은 말들을 늘어
놓고  구슬땀을 흘리며 분주 하다는 따위 틀에 박힌 말만 적었지, 조금도 그
사람의 뚜렷한 모습이 안 보인다. 5연은 더 엉터리로 되어 있다.  뒤란에
뒷짐지고 홀로 서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   아부지 라 했는데, 이
아부지는 뭘 하는 사람인가? 왜 감나무를 눈물로 쳐다보는가? 잎이 떨어진
감나무처럼  아부지 가 서 있다니 무슨 뜻을 나타내려 했는가? 엉터리요,
흉내요, 무슨  척하는 말일 뿐이다. 
  4연을 보면  외면하고 돌아선 나를   그 누군가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  다가, 그만  그 누군가의   눈길조차도 외면한다 고 했다.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를 바로 보려고 하는 또 하나의 나를 외면했으니,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요, 따라서 도망치고 외면하는 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난스런 말이다. 
  시의 제목  아부지 란 말부터 문제다.  아부지 라고 아직도 말하는 고등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부지만 말을 얼마든지 글로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그것은, 다른 말들은 모두 표준말이고 유식한
말인데, 이런 말을 쓴 사람이 하필 아버지란 말을 안 쓰고  아부지 라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아부지 란 사투리를 쓰는데서 그런 사투리로 살아가는, 일만
하는 아버지, 가난하고 무식하고 그래서 부끄럽기만 한 살붙이의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속셈으로 쓴 것일까? 그래서 실제는  아빠 라고 말하면서
글에서는 일부러  아부지 라 쓴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계산이요 흉내다. 계산과 흉내가 시를 결딴낸다. 거짓되게 한다. 사투리나
써서 무식한 그 아버지가 싫고 부끄럽다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지금까지 시 세편을 들어 말했는데, 오늘날 고등학생들이 쓰는 시의 특징 -
결점을 이 시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생들의 시에 공통되는
결점은 1.삶이 없고,삶을 떠나 있고,2.시인들의 시를 흉내내고, 3.실감이 따르지
않는 허황한 말을 늘어놓은 것, 이 세 가지다. 


    살아있는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란 무엇인가
  시라고 말하는 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일하는 동안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감동)을 싱싱한 우리말로
나타낸 글이다. 
  이렇게 시의 뜻을 밝혀 놓고 볼 때, 시가 되는 조건을 세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살아간다 는 것이고, 둘째는  감동 이고, 셋째는  싱싱한
우리말 이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첫째는 무엇을 썼는가 하는 글감(소재)의
문제가 되고, 둘째는 시의 알맹이가 되고, 셋째는 시의 형식, 또는  시가 담겨
있는 그릇  아니면  시가 입고 있는 옷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둘째에 들어가 있는  감동 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여길 것이다. 시가 감동이 없이 쓰일 수 없고, 감동이 시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첫째(삶)와 셋째(말)를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감동 은  삶 과  말 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저절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제목에서  삶 이란 말을 넣지 않은
까닭은  말 의 문제가 그대로  삶 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에서 삶이 빠지면 
  삶, 곧 살아간다(생활한다)는 것은 넓게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동안에 하는 모든 행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일하거나 길을 걸어가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싸우거나 먹거나 무슨
흉내를 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잠자고 꿈꾸는 것도 삶이고, 방안에 앉아
공상을 하는 것도, 미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 것도 다 삶이다. 이렇게 보면
무엇을 쓰든지 삶 아닌 것이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글에는 삶이 없다 고 할 때 그 삶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삶이 아니고, 적어도 시의 알맹이가 생겨날 만한 삶이다. 병들지 않은
삶이요, 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남을 따라가기만 하는 삶이 아닌 삶,
바람직하고 건강한 삶을 말한다. 
  바윗돌 위에서나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는 씨앗이
싹터날 도리가 없다. 잡초가 나 있더라도 적어도 흙이 있고 햇빛이 죄는
땅이라야 씨앗이 싹틀 수 있으니까.
   그럼 시를 쓰는 사람이 어디 미친 짓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겠는가?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는데, 내가 보기로는 그렇지 않다. 미치거나 잠꼬대를
한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대체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이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볼 수 없다. 시인들이 써 놓은 시를 보면 그렇게 느껴진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겠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은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만, 일을 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된다.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고 다 병든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어느 땅에서고 진리다. 아이들도
일을 하면서 배워야 (일하는 것이 그대로 배움이 되어야) 참 배움이 된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고 쓰고 외우는 공부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만 해야 할 대 사람의 성격은 병들고 비뚤어져 버린다. 일이 없는 공부,
책만 읽는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이 열 배 백 배 낫다.
  사람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글을 쓰는 것도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방안에 혼자 앉아서 생각만 하거나, 글만 쓴다면 그런 삶도 좋지 않다.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게 되면 그 생각이 병든다.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 글만
자꾸 쓴다면 그 글이 제대로 쓰일 수가 없다. 
   그래도 시인과 소설가들은 글만 잘 쓰고 있더라. 
  그렇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글만 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나는 글만
쓰고 있는 이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제시대고
오늘날이고 많은 문인들이 글만 써 왔는데, 그래도 지난날에는 그 폐단이 좀
덜했지만 오늘날에는 글만 쓰고 있는 사람들이 글의 공해, 문학의 공해를 아주
크게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지난날에 폐단이 덜했다는 것은, 일제시대나 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시인들이
글만 쓰기는 했지만 그들이 자라난 과정에서는 삶이 있었고, 대체로 일을 하면서
자라났기에 시가 될 만한 땅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물론 지난날에는
삶이 있었더라도 지금 삶에서 떠나 있으면 제대로 쓰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가 아주 병들 정도로까지는 되지 않을 바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연과 일하는
삶을 떠나서 방안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 자라나 어른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또 방안에 앉아 생각만 하고 시만 쓰고 있으니, 이런 시가 어떤 알맹이를 담고
어떤 말고 되어 있을 것인가는 그것을 바로 읽어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의심할
만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를 검토하기에 앞서 일제시대부터 가장 이름이 나 있는
시인들의 시를 몇 편 들어서 시와 삶의 문제, 시와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 명시를 모아 놓은 책들의 맨 앞머리에는 흔히 새로운
우리 시의 첫 작품이라고 해서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가 실려 있는데,
그 첫 연이 이렇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1908년에 나온  소년  창간호에 실린 이 시를 두고 오늘날까지 우리
문단에서는 새로운 시의 역사를 열어 놓은 시라고 하고, 또 너무 생각을
드려내려고 한 까닭으로 현대시라 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는 달리 본다. 무엇보다도 이 시를 보면 말이 깨끗하다. 살아 있는
우리말로 되어 있다. 오늘날 많이 시인들이 써 놓은 시와 견주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로 쓰여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아주 잘못되었다.  해에게서.. 가 뭔가?  해 란 하늘의
해가 아니고 한문글자인  바다 해 자의  해 다. 그 무렵에는 한문글자를 섞어서
쓸 때라, 요즘 같이 한글만으로 쓰는 시대에 와서는 마땅히  바다에게서.. 로
바꾸어서(번역해서) 써야 하는데, 모든 책에서 이렇게  해에게서.. 라 써
놓았다. 사실은 이렇게 바꿔서 쓰기조차 어럽게 되어 있다. 아직도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들이고  해에게서 꼴로 쓰고 있는 글이 얼마나 많은가! 
  또  바다에게서.. 라고 써 보았자 우리말이 안 된다.  바다에게서 소년에게 란
우리말은 그때고 지금이고 없다.  바다가 소년에게 라 해야 말이 되지.
  시의 제목을 왜 이렇게 붙였는가? 이 시의 제목만이 아니다. 많은 시인들이
시의 제목을 이렇게 우리말일 수 없는 괴상한 말로 붙였다.(물론 소설도
그랬다.) 일본글을 그대로 직역해 놓은 꼴로 쓴 것이다. 이것은 시인들의 삶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글로 공부를 하고,
우리 글로 시를 썼지만 언제나 일본말로 된 책만 읽고 책 속에 파묻혀 살고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지난날의 시인들은 어렸을 때 삶이 있었고, 그
삶 속에서 제대로 우리말을 익혔기에 시를 쓸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었는데, 시의 제목에서는 병든 지식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 주게 되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다듬어 썼다는 정지용 시인의 시 제목은, 한문글자로
쓸 수 없는  바다   별   달   나무  같은 말만 한글로 쓰고, 그밖에 한문글자로
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한문글자로 썼다. 심지어  유리창   기차 까지 한문으로
써 놓았다. 또 우리말로 쓰면 될 것을 일부러 한문으로 써서,  배 멀미 라 할
것을  선취 라 쓰고,  봄눈 이라면 될 것을  춘설 이라 했다. 그리고
보통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한문글자를 시의 제목뿐 아니라 본문에서도
마구잡이로 섰다. 우리말을 그렇게 구슬같이 다듬어 썼다는 시인이 어째서
이토록 우리말일 수 없고 우리 글일 수가 없는 글로 시를 썼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용 시의 이 모순된 비밀은 시인의 삶과 말의 관계를 생각할 때
쉽게 풀어진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삶이 없이 시만 썼던 식민지 시인의
비극이었으니, 어찌 정지용 시인뿐이겠는가. 이들은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제 겨레의 말로 쓸 수밖에 없었고 우리말로 버리지 못하고,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을 쓰지만,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권위 를 아주 팽개쳐 버리지 못하고 그 겉
껍데기나마 꾸며 보이고 싶어서, 다시 말해 우리는 비록 한글로 쓰지만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문글자를
섞어서 썼던 것이다. 
  정지용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 애송되는 시에  향수 란 것이
있다. 물론 이 제목도 한문으로 써 놓은 것인데,  고향 생각 이라면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의 제목처럼 느끼거나 무식한 촌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알고, 
향수 라고 해야 그럴듯한 시의 제목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구나 요즘은
많을 줄 안다. 이렇게 우리말을 죽여 놓고 우리 겨레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해
좋은 책임은 이런 유명시인들이 마땅히 지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향수 란 작품을 보기로 하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일제시대, 그리고 60년대까지 우리 모두의 고향이었던 농촌을 이만큼 아름다운
말로 나타낸 시도 썩 드물 것이다. 여기에는 농사일의 고달픔이라든가, 굶주림에
따르는 정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괴로운 추억이 도리어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되었다.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어 있으니까 괴로운 기억은
묻혀 버렸을 것 같기도 하지만, 시인의 추억과 상상은 그저 아름다운 고향을
그림으로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여기 씌어 있는 말들 가운데는 어떤 정경이나 사실을 재미있고 알맞은 말로
나타내어서 우리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많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다  나간다든가,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운다든가,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라든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이라든가, 이런 말들은 모두 우리 겨레의 삶에서 우러난 말로
느껴진다. 더러 놀랍도록 재주를 부려 놓은 말들조차 자연스럽게 가슴에 와닿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시에 씌어 있는 모든 말이 싱싱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사실은 매김자리토씨(관형격조사)  -의  가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를 이렇게 깨끗한 말로 쓸 수 있었던 것은 이 신인이 고향 생각을 하면서
고향 이야기를 한 때문이다. 고향 이야기를 하자니 고향 말, 곧 우리말로 쓰지
않을 수 없다. 고향의 말은 바로 일하는 삶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고향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릴 때 이야기를 쓰지 않고,
도시에서 시만 쓰면서 살아가는  현재 의 이야기를 써 놓은 시는 거의 모두
앞에서 말한 제목뿐 아니고 본문에서조차 어려운 한문글자를 마구 써서
보통사람은 읽을 수도 없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시가 일하는 사람들의
정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팔자 좋은 사람들의 취미생활에서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 시의 산줄기에서 한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고 모두가 알고 있는
시인의 시가 이 모양이란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이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위에 들어 놓은  향수 만
해도 앞에서 좋은 시라고만 말했지만 사실은 아주 커다란 흠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얼룩배기 황소 라고 한 것인데,  얼룩배기 소 란 우리 소가 아니다.
요즘은 외국 소를 많이 들여와서 얼룩소를 흔히 볼 수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그런 서양의 얼룩소가 짚벼개를 베고 주무시는 아버지며
사철 맨발인 아내가 일하면서 살아가는 고향 마음에서 울고 있다니! 
  이것은 고향 생각을 하고 고향 이야기를 쓰면서 그만 어느덧 고향을 떠나 생각
속에 취하고 말에 취해 재주를 부린 것이다. 이 시인의 시에는 이렇게 말재주가
나타나는 작품이 많은데, 여기서는 이 조그만 흠이 시 전체를 한 폭의 만화로
떨어지게 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삶을 떠난 시인, 삶이 없이
시만을 쓴 시인의 비극이다. 
  우리 시인들의 시에서 내가 언제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왜 시인들이
일하는 삶을 시로 쓰지 못하는가, 왜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그 땀
냄새를,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시로 쓰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삶이 가장 높고 귀한 가치가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밀레가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듯이, 시도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새로운 시를 쓰게 되었다는 지난 1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일하는 삶을
그린 시가 보이지 않는다. 단 한 편도! 내가 시인들의 시를 알뜰히 살펴보지
않아서 놓쳤는지 모르지만 아직 그런 시를 찾아내지 못했다.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시, 슬퍼하고 원통해하는 시, 무엇을 외치는 시는 많다. 무엇을
그리워하거나 꿈을 구는 시, 저 혼자 그 무엇에 취해서 수다를 늘어 놓는 시도
많다. 무엇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시는 더욱 많고, 세상을 관광거리로 삼고
있는 듯한 시는 더더욱 흔해빠졌다. 그런데 일하는 삶을 보여 주는 시는 없다.
우리 겨레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었다고 하는 김소월의 시에도 일하는 삶의
정서를 쓴 것이 단 한 편도 없다. 문학에서 가장 앞장서 간다는 시가 이래도
괜찮은가? 뭔가 밑뿌리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소월의 시에 꼭 한 편, 농사꾼이 일하는 것을
글감으로 한 것처럼 되어 있는 시가 있는데  밭고랑 우에서 다. 여기 전문을
들어 놓겠다. 이 시를 또 특별히 들어서 생각해 보는 까닭은, 어느 유명 시인이
일제시대 시인들의 대표작으로 실려 있기 때문이고, 그만큼 널리 애송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우에 앉아서라.
  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여.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을 나려 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롭은 탄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우에서.

  다시 한번 활기 있게 웃고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즈런히, 가즈런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어, 오오 생명의 향상이어.

  보다시피 이 시는 보리가 키 높이로 자라난 밭고랑에서 젊은 부부가 일하다가
쉬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순간의 즐거움을 그려 놓았다. 하늘에는 눈부시게
해가 내리쬐고, 새들이 울고, 그래서 하늘과 땅은 건강한 몸으로 일하는 이 젊은
부부를 축복하는 듯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연 속에서 일하는 즐거움, 하늘과
해를 쳐다보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땀 흘리고 일하는 기쁨!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정지용의  향수 는 지난날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아름답게
그려 놓았지만, 이 시는 바로 지금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목도 바로  밭고랑 우에서 이고,  우리 두사람은 하고
시작하여 이 시인이 스스로 한 것을 쓴 것처럼 해 놓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시인이 그려 놓은 이 아름다운 자연과 일하다가 쉬고 있는
농민 부부의 모습에 덮어놓고 감동하고만 있을 수 없다. 일제시대 실제로
논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민들이 이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하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 있는 은혜를 고마워 할 만큼 여유가 있었던가? 더구나
보리가 다 자라난 그 굶주림의 보리고개에서 말이다. 정지용의 시에는 그래도
사철 발벗고 이삭 줍는 누이와 아내가 나오지만, 여기서는 바로 지금 자신이
들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털끝만치도 보리고개의 현실과 정서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는 일제시대 우리 농민이며 농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사실대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 농민과 농촌은 보지도 않았다. 다만 방안에서
제멋대로 상상해서 쓴 것으로 되었다. 시는 상상으로 쓴다고 하지만, 우리
겨레의 정서를 우리 겨레의 말로 쓰려고 애썼다는 시인이 우리 겨레의 90%를
차지하는 농민의 삶을 - 바로 농민이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을
이렇게 엉뚱한 그림으로 그려 놓았으니, 신인으로서 너무나 불성실하고 책임감이
없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가 농민의 삶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시에 나온 부부가
대관절 보리밭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씌어 있는 것만으로도
잘 알게 된다. 이 농민 부부는 무슨 일을 했는가? 보리가 키로 자라났으니 이런
밭에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이제는 보리가 익어서 베기만을 기다릴
뿐이고, 그 동안에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보리밭 고랑에 앉아
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고만 했으니 괴상한 시요, 괴상한 글이다. 
  마지막 연에 가서, 이제 쉬기를 끝내고 다시 일을 했다고 했는데, 거기서도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호미를 들고 보리밭 고랑에
들어갔다고 했다. 호미를 들고 키 높이 자란 보리밭 고랑에 앉아 할 일거리가 뭐
있겠는가? 잡풀이 있을 수도 없고, 어쩌다가 보리와 같은 키로 명아주가 솟아날
수가 있지만, 그것은 호미를 슬 것이 아니라 손으로 뽑아야 한다. 보리밭 고랑에
콩을 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가을에 뿌리는 가을 보리가 아니고 이른 봄에
뿌리는 다시 괭이로 묻는다. 그러니 키로 자란 보리밭에는 아무도 들어갈 일이
없다. 
  더욱 우스운 것은 마지막 연에서 호미를 들고 들어갔다고 해 놓고는  걸아
나아가는 기쁨이어  했다. 세상에 호미를 쥐었으면 앉아서 엎으려 무엇을 하든지
해야지, 보리밭 고랑에서 호미를 쥐고 서서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무슨 일을
하다니! 만화치고 이렇게 우스운 만화가 있겠나 싶다. 
  시가 왜 이런 꼴로 되었는가? 그 까닭은 뻔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서 한
것처럼 쓰자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일을 하지 않았으니 일을 모르고 (내가
알고 믿기로는, 아무리 놀랍고 뛰어난 상상을 하는 재주꾼이라 하더라도 자지가
몸으로 해 보지 않은 일과 그런 일에서 우러난 정서를 제대로 올바르게 상상해
써 낼수는 절대로 없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했는지를 쓰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을 마치고 밭고랑에 쉬면서 하늘 쳐다보고 이야기한 것이나 쓰고, 그래도 
밭고랑 우에서 라 제목을 붙였으니 무엇을 한 것처럼 쓰기는 해야겠기에 일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호미를 쥐고는 그만 우스운 연극을 연출한 것이다. 소월같이
뛰어난 시인이 이렇거늘, 하물며 오늘날 아주 어려서부터 삶이 없이 자라난 숱한
시인들이 써 놓은 시가 어떤 꼴로 되어 있겠는가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이  밭고랑 우에서 가 일하는 삶의 바탕이 없이 제멋대로 꾸며 놓은 지식인의
정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에 씌어진 말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 일을 畢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어
  농민이고 노동자고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일을 필하고  하지는 않는다. 
일을 마치고  하든지  일을 끝내고  하지. 그리고 이 시에서는  일을 필하고 도 
일을 마치고 도 아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데 어째서  일을 필하고
인가? 이래서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지식인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처럼 꾸며서 거짓말을 쓰자니 내용과 말이 어긋나서 이 꼴이 된 것이다. 
  -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나려 쪼이며
  농민은  태양 이란 말도 안 쓴다. 농민의 이야기를, 더구나 농민 자신이 하는
말로 쓰는 글에서 농민이 하지 않는 말을 써도 되는가?   이글은 진짜 농사꾼이
쓴 것이 아니고 시인이 어쩌다가 밭에 가서 일한 것을 쓴 것이다  이런 변명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더 웃기는 거짓말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혔는데,
  새라새롭은 탄희를 지어내며,
  내 느낌으로는 우리말 그대로  사랑의 하늘은  이라든지  새라새롭은 기쁨을 
이라고 쓰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농사꾼이고 일반 서민들이 쓰지도 않는  자애
니  환희 니 하는 말을 써야 그럴듯한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나라 시인들의
잘못된 글쓰기 병폐는 김소월과 같은 민요시인까지도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만들어 문학이라는 글쓰기 상품을 만들어 내는 모든 시인과 작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이것이 모두 삶이 없는 탓이요, 일을 하지 않고 방안에 앉아
글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  신시 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훌룡한 시를 썼다고 모두가 말하는 두 사람이 쓴 시를 들어 시와 삶과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다음에는 오늘날 씌어 나오는 시에서 우리말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여기 들어 놓은 시 구절들은 모두 신문에 발표된 시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가
되는 말에는 밑줄을 그은 다음에 묶음표를 해서 바람직한 우리말을 적어
놓았는데, 내가 바로잡아 놓은 말보다 어 좋은 우리말이 있는 경우도 나올
듯하다. 
  어머니는 
  꽝꽝 언 대지 안에 (땅)
  사랑을 품고 키우는

  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것은 시의 제목인데, 제목이든지 본문이든지 내 느낌으로는  우리 어머니 
라야 우리말답고 우리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사람이
가졌던 느낌  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다. 또  모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될 수 없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우리 고향 
 우리 학교 를 죄다  나의.. 로 쓰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우리말을 더럽히는 데
앞장선 것은 바로 문학작품을 쓰는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글말에 중독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우리... 를 쓰고 있으니 마땅히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 
  우수의 바람..(근심)

  봄이면 모든 것이 
  거듭나기를 기원한다(빈다)

  뒤척이는 몸짓으로 
  그리운 언어를 띄우거나 (말)
  비상하는 기쁨으로 (날아오르는, 솟구치는)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아침은 한잔의 생처럼 (시제목)
  아침은 산사에서 마시는 (산속 절)
  한잔의 생수처럼 온다.(샘물)

   생처럼 이라 썼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산사 라고 더러 쓰는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고, 또 귀로 들어도 모른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산속 절  하든지 그냥  절 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푸른 치마자락으로 몸을 가리우고 (가리고)
  굽이치는 바다 
  깊은 해심의 속살이 보인다.(한가운데)
   가린다 란 말은  가리운다 고 쓰는 것은 잘못되었다.  해심 은  바다 가운데
란 뜻의 한문글자말인데, 우리 글자로 ㅡ면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다. 이런 말은
쓸 필요가 없다. 그 앞에 또  바다 란 말이 나왔으니  한 가운데 로만 쓰면 될
것이다. 
  
  정오의(한낮) 햇살이 용해되어 (녹아서)
  투명해질수록 (환히 비칠수록)

  뜨거운 
  한 잔의 커피를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예쁘고 작은 스푼으로 (숟가락)
  커피와 프림 설탕을 담아 
  앞에 예쁘고 작은이 나와 있으니  양숟가락 이니  차숟가락 이니  오목숟가락
이니 할 필요도 없다. 

  나도 예수처럼 
  자유에의 깃발 펄럭이며 (자유의)

  내 낡은 수첩 속에 서투른 시의 제목으로 
   녹두꽃 사내 라 이름하고 널 지우려 했다. (이름 적고)
   이름한다 , 이름하고  이런 말은 없다. 이것은 아주 일본말을 직역한 것이다.

  
  황혼을 등지고서 (저녁 어스름)
  차가운 손 흔들며 

  별들이 비행하는 불멸의 시간 속에 (날아가는 영원의)
   불멸 보다는  영원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잔설도 사그라진 황량한 강변을 본다. (남은눈, 쓸쓸한 강가)
   강변 이란 말은 아주 널리 써서 우리말로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강가 가 더
낫다고 본다.

  눈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끊어진 산줄기)

  새들이 돌아온다 사계의 저녁이다 (사철)

  가출했던 마음이여 전우를 맞았는지 (집 나갔던, 천둥비)

  가슴 한켠 둥지에로 돌아와 잠드는 새 (둥지로)

  일모를 배웅하는 (저물녁, 저문날, 지는해)
  낮은 처마 연기 자락 
  
  겨울철 피난살이 
  후조의 날개짓에 (철새)

  숨죽인 
  천삼백리 강
  식탁 위를 채우리 (밥상)

  육백년 한을 접어서 
  침묵으로 앉았다.(말없이)

  세월의 뼈마디를
  침묵으로 딛고 서서 (말없이)

  여명의 날개 자르고 (새벽)
  추락하는 벼랑 저 끝 (떨어지는)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있는 (어릴적)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버린 물 그위로 그림자만)

  전생의 이름표를 들고 꿈길 향해 달려오네 (꿈길로)

  이 밖에도 얼마든지 보기를 들 수 있지만 이쯤 해두기로 한다. 내가 보기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은 우리말에 너무 관심이 없고 감각이 무디다. 문학이라면
말을 다루는 예술이고 말로 빚어내는 예술인데, 더구나 시는 말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그 어떤 글쓰기보다 힘들여야 하는데, 시인들이 이렇게 어설픈 남의
글자말, 일본말법 따위를 일부러 자랑스럽게 쓰면서 살아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있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날 시인들은 새벽이란 말을 쓰면
시가 안 되고 반드시  여명 이라고 해야 시가 되는 줄 안다.  저녁무렵 
이라든지  저물녘   저녁어스름  땅거미  이렇게 얼마든지 좋은 우리말을 안
쓰고  비애   환희   우수  이런 따위 한자말이라야 시가 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모두 어제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김소월이나 정지용같은 그
유명시인 때부터, 아니 맨 처음 일본시와 서양시를 따라 쓰기 시작했던 최남선
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잘못된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아서 우리말이 많이 살아 있는데, 갈수록 나빠져서 오늘날에는 시가 우리말을
죽이는 주범이 되고, 말자랑, 말치장, 말장난의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원인은 환하다. 시인들이 모두 삶을 등지고 방안에 앉아
머리만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시가 병든 것은 시인이 병든 까닭이요, 시가
죽은 것은 시인이 죽은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된 시 쓰기는 아이들의 시 쓰기 교육도 그릇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초등 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고 모두가 어른들이 쓰는 시나
동시를 흉내내어 쓴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이 시쓰기 지도가 되어
있느니 기가 막힌다. 어른들의 시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흉내내기를 가르친다면 절대로 시가 쓰일 수가 없고 도리어 시를 쓰는 마음을
죽여 버리는 것인데, 잘못된 말로 써 놓은 시를 그대로 따라서 쓰도록 하고
있으니 무슨 시가 되겠는가? 이래서 아이들이 써 놓은 시란 것도 말의 오염이 될
대로 되어간다. 초등 학생들은 동시란 것을 쓰면서 흉내와 말장난을 하고,
중고등학생이나 청소년들도 유식한 말이나 근사한 외국말법으로 글장난하는 짓을
시 쓰기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 따라가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어른들의 글에서 말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보다 더
어린 아이들한테서 말을 배우고, 더 어렸을 적에 익힌 말을 살려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시가 된다. 

    시를 살리는 우리말 
  
    몸으로 익힌 말 
  시는  언어의 예술 인가? 아니다.  언어 가 아니고  말 이다. 시는  가장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로 쓰는 예술 이다. 
  어떤 말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  인가?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 곧 시가 될 수 있는 말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깨끗한 우리말일 것. 중국글자말이나 일본글자말, 일본말법으로 된 말,
서양말이나 서양말법으로 된 말 - 이 따위들은 시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이 어디까지나 그렇다. 만약 어떤 시에 이런 깨끗하지 못한 말이
한두 개 들어 있다면 그 시의 값은 그만큼 낮아진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날마다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말일 것. 깨끗한 우리말이라도
벌써 죽어버린 옛말은 시가 될 수 없다. 나날의 삶에서 누구나 써서 정감이
가고, 그래서 삶의 때가 묻고 냄새가 나는 말일수록 시가 되기에 알맞은 말이다.

  셋째는 꼭 하고 싶은 절실한 말일 것. 따라서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고,
알맹이만 있어야 한다. 저 혼자 무엇에 취해서 수다를 떠는 말,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말, 멋을 부리는 말 - 이런 말은 모두 시가 될 수 없거나, 되어도
시시한 시 일 뿐이다. 참아도 참아도 기어코 터져 나오는 말, 지워도 지워도
끝내 남는 말, 이런 말이 시가 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맞는 말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써온 말,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배우고 형제자매끼리 이웃끼리 나누면서 살아온
말이다. 책에서 배운 유식해 보이는 말이나 문학작품이라는 글에서 읽은  시
같은 느낌 이 드는 근사한 말, 멋이 있어 보이는 말이 결코 아니고, 무식한 시골
사람들이 써온 말, 어린이들도 잘 아는 말이다. 머리로 논리로 배운 말이 아니고
느낌으로 몸으로 익힌 말이다. 그렇다. 시골 농사꾼들의 말, 어린이의 말,
이것이 가장 훌룡한 시가 될 수 있는 말이고, 앞으로 우리말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 말을 제쳐 놓고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시골말과 어린이말이 우리 시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알아 보자. 
  
    우리 시에 나타난 시골말 
  요즘 우리 문단에서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시골말로 구수한 시를 썼던 백석의
시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 백석의 시 한 편을 들어 본다. 제목은 <마을은
맨천 구신이 되서>다.  맨천 은  맨   온통 이란 말이고,  구신 은  귀신 이란
말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아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 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흔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세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빠져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에 연자간에는 또 여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가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보다시피 이렇게 온통 시골말로 되어 있다. 백석의 시는 시골말만을 모아 놓은
것 같아 나 같은 사람도 모르는 말이 많이 나오니, 요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은
더구나 읽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시골말을 아무 뜻도 없이 그저 모아
놓기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보여 주거나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골말을
살려 놓고 있어서, 백석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이 이렇게 풍성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내가 우리말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우리가 너무 우리말은 돌보지
않고 한자말과 교과서 같은 데서나 나오는 표준말로만 글을 써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최남선 때부터 거의 모든 시인들이 일본말을 잘못 직역해
놓은 괴상한 말로 시를 써 와서 그런 시만 읽어 온 때문이다. 더구나  해방 이
되고부터는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끔찍한 전쟁까지 치르는 통에 지난날
그나마 우리말을 얼마쯤이라도 살려서 쓰던 많은 문인들을 잃어 버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작품조차 읽을 수 없게 되어 거의 반세기 동안을 우리들은 주로
서양사람들의 글을 옮겨 놓은 괴상한 글만을 읽어 왔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백석은 남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이 아니고  해방  때부터 북에서 산
사람이지만, 북쪽의 시인이라고 해서 일제시대에 썼던 그의 시조차 못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읽게 되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를  해방  때부터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읽고 우리말을 익히고
우리 정서를 이어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가장 우리 것답고 우리 마음에
가까운 것을 도리어 서양 것보다 어 낯설게 대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백석의 시를 한 편만 더 들겠다.  모닥불 이란 제목이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니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기왓장도 닭의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나무로 불을 피우는 아궁이를 보기가 쉽지 않고, 추운 날
들판에서 일하다가 검불을 끌어 보아 모닥불을 피워서 손을 쬐는 일은 더구나
겪어 보기 어려워, 요즘 학생들은 모닥불이란 말조차 모를 것 같고, 이런 시의
맛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도 서울이고 어느
도시고 시장 한쪽 길바닥에 과일이며 나물들을 펴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겨울이면 이른 아침 길가에 판자쪽이며 나뭇잎들은 태우면서 손을 녹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으니, 이렇게 불을 피워서 쬐는 생활은 앞으로 세월이 더 지난다고
해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시대가 달라지고 생활이 바뀌면 말도 옛날에 쓰던 말이 조금씩 사라지고 새
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활 따라 말이 달라지더라도
지금까지 쓰던 말을 아주 버리고는 낯설고 엉뚱한 새 말을 지어낼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지금까지 써오던 말을 잘 살려서 쓰는 것이 슬기롭다. 그래서
새 말이 되더라도 우리말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조금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해야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늦기는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말, 잊어버린
우리말을 다시 찾아야 되겠고, 시골말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백석이 이렇게 우리말을 놀라울 만큼 잘 살려 놓은 시를 썼지만, 그이도 글만
쓴 시인이라 농사꾼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그려 보인 시는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때,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해서 우리 겨레가 살아남기조차 어렵게 되었을 때, 아주 땅에 묻히고
말았을 우리말을 가장 잘 살려 놓은 시로 높이 보아야 할 것이다. 
  시집을 많이 읽은 사람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보통사람들이 쓰지 않는 서양말을
쓰면 근사해 보이고 새로운 시의 맛이 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자말이나 서양말, 외국말법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골말,
시골에 남아 있는 사투리를 쓰면 시가 살아나고 새로워 보인다. 
  시골말, 시골 사투리가 가장 깨끗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가 이제
와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아이들의 시도 마찬가지다. 

    구름
  구름이 
  햇님을 꼭 안고 
  놔 주지 않았다. 
  그런데 햇님이 
  가랑이 쌔로 
  윽찌로 
  빠자 나왔다. 
   63.10.31. 상주청리 3학년 박선용 

    감나무
  감나무가 웃고 있는가비라
  팔랑팔랑 웃고 있는가비라
   67.5.23. 경주 2년 정경자 

    복숭아꽃
  복숭아꽃은 
  날마다 방글방글 웃는 빛이 가지다.
   70.4.30.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창순 

    이슬 
  이슬이 쬐꼼한 게 
  나와 있다. 
  내가 이슬이라면 좋겠다 하니 
  이슬이 나보고  
  그면 니가 내고 
  내가 니고 
  한다.
   70.6.18. 안동 대곡분교 2년 김을자  

  이 네편의 시에서 밑줄을 그어 놓은 말이 그 지방에서 쓰는 말이다. 이 말들을
모두 표준말이라고 하는 서울말로 고쳐 쓴다면 어찌 되겠는가? 첫시의 경우는
시의 맛이 반쯤 줄어들 것이고, 그외 세시의 경우에는 시의 맛을 거의 잃어버릴
것이다. 사투리라고 하는 시골말은 지난날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그 어린이들
자신의 말이었다. 요즘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어 시골말이 많이
쫓겨나고, 그래서 온 나라의 말이 틀에 박혀 버렸지만, 그래도 시골에는
시골마다 조금씩 다른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들에게 시를 쓰게 할 때는
자기들의 생활말인 사투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들에게 시골말, 곧 사투리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시를
못 쓰게 하는 노릇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중고등학생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골말을 쓰면 효과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는 쓰지 않는데 일부러
시골말을 쓴 것같이 해 놓는다면 어찌 될까? 다음은 어느 고등학생이 낸 시집에
들어 있는 시다. 

    일제 방죽 
  방죽을 싼 것은 조선놈인데 
  원북리 사람들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앞 시절, 일제 치하게 치를 떨던 시절 
  우리 라부지덜은 강제 노동에 끌려사 
  물만 먹은 힘으루 
  조선 할부지덜이 싼 방죽을 
  우리들은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여기 나오는 할부지덜 과 힘으루 는 아직도 시골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에 이 시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시는 고등학생이 썼고, 시에 나오는 말도 고등학생인 자신이 한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 치하 란 유식한 말을 섰고, 부른다 고 하는 일본말을 직역해
좋은 말을 썼다.  일제 방죽이라고 말한다 고 해야 우리말이 된다. 사람들이
방죽을 보고  일제 방죽아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유식한 말을 쓰고 오염된 말을 쓰는 학생이  할아버지들
(할부지들)이라고 하지 않고,  힘으로 라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농사꾼 어른들이 하는 말인  할부지덜   힘으루 를 같은 글에 섞어서 써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고, 어른들 말을 흉내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국민학교 1학년 아이들도  할아버지들   아버지들 로 쓰고,  힘으로 라
쓰지,  -덜   -으루 로는 쓰지 않는다. 더구나 유식하고 오염된 글말을 하면서
이런 사투리를 썼으니 이것은 정직한 자기표현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조선 놈   더 나은 놈 이라고 해 놓은 말에서 더 분명해 진다.
대관절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이렇게  놈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시는 시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이다. 유식한 말을 쓴
것도, 일본말법으로 된 말을 쓴 것도, 그러면서 일부러 무식한 농사꾼처럼
보이려는 시골말을 쓴 것도,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마구잡이로  놈 이라고 한
것도 모조리 어른 시인들의 흉내를 낸 것이다. 
  내가 보기로 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쓴 시가 거의 모두 어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워낙 시를 흉내내기로 배운
때문이다. 시를 흉내내기로만 썼으니 어떻게 진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시골말이고 사투리고 그것을 시로 쓸 수 있다면 우리말을 살리고 시를 살리는
일이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시 자신의 말로 써야
하는 것이지 머리고, 논리로, 어른들 흉내로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을
살린다고 해서 저도 쓰지 않는 말, 자기 몸에서 우러나지도 않은 말을  순수한
토박이 말 이라고 해서 쓰기보다는, 차라리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누구든지 쓸
수 있으면서 다만 그것이 쉬운 말이라고 해서 버려둔 말을 쓰는 것이 열배도
낫고 백 배도 더 옳은 일이다. 보기를 들면  매일 을 쓰지 말고  날마다 를
쓰고,  출발한다 를 쓰지 말고  나선다 를 쓰고,  비애 를 쓰지 말고  슬픔 을
쓰고,  미소한다 고 할 것이 아니라  웃는다 고 하고,  여명 이 아니라  새벽 을
쓰는 따위로 말이다. 우리말과 우리 시는 이렇게 해야 살아난다. 
  앞에서 시골말투성이로 된 백석의 시를 든 것도 그런 시를 흉내내라고 해서 든
것이 아니다. 그런 시는 흉내를 낼 수도 없다. 다만 지난날 우리말의 세계가
얼마나 풍성하고 재미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 사실 우리
시의 역사에서 뛰어났다고 하는 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시를
모두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골 사람들만 알고 있는 말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잘 알고 있어서 누구나 친숙하게 느끼는 말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시골 사람들도 잘 알 수 있는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훌룡한 시는, 보기를 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김소월의 
금잔디   산 , 정지용의  고향 , 심훈의  그날이 오면 , 문익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 이밖에도 더 많이 들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시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겨레의 말로 썼기에 온 겨레의 가슴을 울리는 명시가 된 것이다. 

    우리 시에 나타난 어린이 말
  이 자리에서는 어른들이 쓰는 시(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쓰는  동시 가
아니고 어른들이 읽는 것으로 쓰는 시)에 나타난 어린이의 말(어린이들이 나날이
쓰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른들이 읽는 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까닭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의 본질이 어린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 어른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외국에서 들어온
글을 숭상하고 그 글말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것을 특별한 권리로
삼아, 일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부리고 아이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에는 우리 문인들이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시인들이 우리 시를
썼다고 하지만, 남의 나라 글자라고 할 밖에 없는 한문글자와 그 글자로 된
말이며, 일본말법을 마구 그대로 써 왔기에 아이들이 읽을 수 없고 읽어도 알 수
없는 글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
가끔 나온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썼는데도 그
마음이 어린이와 다름없는 상태여서 저절로 어린이가 하는 말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작품을 몇 편만 보기로 하자. 

    @[빗소리@]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1924)

  밤에 오든지 낮에 오든지 봄에 오는 비가 들려주는 소리를 오늘날에는
어른들조차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소리로 반가운 자연의 소리로 받아 들일 수
없도록, 자연이고 사람이고 달라지고 병들어 버렸다. 그러니 이런 시의 맛을
요즘 학생들이 어느 정도로 알 수 있을까 싶어 슬퍼진다. 
  어쨌든 자연의 소리에 감동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은혜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어른이고 어린이고 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말도 이런 시에서 티없이
깨끗하게 씌어졌다고 본다.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1922)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다. 소월은 이 시를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시로 쓴
것이지,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것이 아니다. 어른이 그 심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는데도 그것이 그대로 어린이들까지 자기들이 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 가장 바람직한 시의 모습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강변 이란 말을 썼는데, 본래 우리말로는  강가 이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경북의 깊은 산골에서고 조그만 냇라를  갱변   갱빈 이라 했고, 이 
갱변   갱빈 이란 말이 시골말로 널리 쓰고 있으니 우리말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강변 이란 말을 썼다고 탓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닷가 라고 할 것을  해변   해변가 라 써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호수@]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1930)

    @[지는 해@] 
  정지용 

  우리 오빠 가신 곳은 
  해님 지는 서해 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이 
  핏빛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다. 불이 났다. 

  앞의 시  호수 는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동시 가 아니고, 발표한 잡지도
어른들이 읽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낮은 학년 어린이들도 읽으면
오리들이 물 위에 떠 다니면서 목을 감고 놀고 있는 모양을 그려 보며 좋아할 것
같다. 
  뒤의 시  지는 해 는 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쓴 동요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 오빠 라 하여 시인이 어린 아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
시인이 짐짓 어린이로 꾸며 보여서 어린 아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아주 완전히 어린이가 되어 살아 잇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를 쓴 어른과 글 속의 어린이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면 그 옛날 거의 저녁마다 볼 수 있었던 새빨갛게
타오르던 노을과 그 노을 저쪽으로 지던 해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더구나
이 동요시에는, 숱한 우리 젊은이들이 서쪽 바다 건너 전쟁터에 끌려가던
중일전쟁이 터졌을 무렵의 불안한 세상 형편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지금까지 든 네 편 가운데서  빗소리 는 들은 것을,  호수 와  지는 해 는 본
것을,  엄마야 누나야 는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쓴 것이지만 모두 자연을
글감으로 하였다. 본 것이든 들은 것이든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 이와같이 어른과
어린이의 세계가 하나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겨울 물오리@] 
  이원수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1981)

  이 시는, 어른들이 읽는 수필이나 논문도 썼지만 평생을 주로 동시와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다가 돌아가신 지은이가 일흔의 나이로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써서 남긴 작품이다.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모르고 작품만 보아도
어린이들이 읽는 동시구나 하고 모두 말할 것이다. 그렇게 보아도 좋다. 그러나
잘 살펴서 읽으면 이 시에는 어린이들이 아직은 느낄 수 없는 깊은 세계가 담겨
있다. 지은이의 작품 세계와 살아간 길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에서,  고향의 봄 으로 시작하여 55년 동안 이원수 문학이 걸어온 길이
마지막으로 이르게 된 자리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이 시는 작곡이 되어서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고 있는데, 이렇게 깊고
넓은 뜻을 담아 놓은 시가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는 노래로 되어 있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물론 어린이들은 어린이의 정도에서 읽고 노래하면
그만이고, 그래서 차츰 자라나 먼 훗날 이 시를 다시 읽고 새로운 뜻을 깨닫게
되면 평생을 이 노래로 함께 자라고 살아가게 되는 셈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이 시는 아동문학작가가 썼지만, 지은이가 쓴 많은 동시가 그랬던 것같이,
지은이가 짐짓 어린이로 되어 어린이 짓을 해 보인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자기
자시을 노래한 것이 그대로 어린이의 노래로 되었고, 시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가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또 하나로 되어 있다.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곧 자연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놓았다. 이것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
어린이 말을 시의 가장 좋은 표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국어공부, 어떻게 해 왔나
  대학 입학 국어 시험 문제를 보니 
  논술 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국어 공부, 어떻게 해 왔나 
  우리가 지금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읽고 글자로 쓰고 있는 우리말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아 내려면 그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터이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공부란 것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고 있는 말이 결국 
국어 공부를 해서 익힌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국어
공부란 것을 대충 살펴보기로 한다. 
  국어 공부는 국어 교과서로 하도록 되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을 읽고
쓰고 외우고, 교과서에서 하라는 문제를 푸는 것이 국어 공부의 거의 전부다.
따라서 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가를 알려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글이 어떤
말로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1-1 말하기 듣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여 봅시다. 
  - 몸짓과 표정으로 생각을 나타내어 봅시다. 
  - 친구가 말한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비교하며 들어 봅시다. 
  여기 이렇게 나오는  장소   표정   비교한다 와 같은 말들은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날마다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 여길 터이지만,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초등학생들에게는 어렵고 맞지 않는 말이다.  장소 는  곳 이라고 해야 되고, 
표정 은  낯빛 이라든지, 이 글에서는  얼굴 이라고만 해도 된다.  비교하며 는 
견주며 나  대어보며 라 해야 된다.  표정 이란 말은 또 여기서는 잘못 쓴
말이기도 하다.  몸짓 도 표정인데  몸짓과 표정으로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어쩌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 같다. 
   좀 어려운 말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국어 공부가 아닌가  하고.
  사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어려운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국어 수업이라고
생각해 왔고, 학생들은 모두가 어려운 말 배우는 것을 국어 공부라 알고 있고,
그래서 모든 어른들이 국어 공부라면 당연히 어려운 한자말과 그 한자말로 된
문장을 읽어서 풀어 내는 공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이래서 우리말이 한자말, 곧 중국글자말에 밀려나서 버려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장소 보다  곳 이 낫고,  표정 보다  낯빛 이 더 깨끗한 우리말이고, 
비교한다 보다  견준다 든지  대 본다  가 더 좋은 우리말이 되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농민과 노동자뿐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도 신문기자도 학자도 대학교수도 문필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국어 시간에 교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 벌써 어른들이 모두 쓰고 있어 안배울 수 없다면  장소
  표정   비교 란 한자말도 익혀야 하겠지. 그러나 이런 말을 배우기에 앞서,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집에서나 마을에서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말들 -  이곳, 저곳, 그곳 이라든가,  얼굴 이라든가  대 보다   견준다 라는
말들 -을 다시 글자로 읽게 하고 글로 쓸 수도 있게 하여 자기가 어려서 부모와
이웃 사람들한테서 듣고 배운 말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쓰는 부끄러운 말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써야 할 우리말이란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낯빛
이란 말을 새로 배워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은 아이고 어른이고 모조리  비교한다   비해서   비교적  이렇게만
쓰는데, 이것은 우리말을 가르치도록 하지 않는 잘못된 국어 교과서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쫓겨난   대 본다   견준다 란 우리말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차츰 죽어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초등학교 1학년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그리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어른들까지도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 번 대 보자 란 동요부터 새로 읽어서 우리말을 배워야 되지 않겠나
싶다. 글을 쓰는 어른들은 거의 모두 내 말을 비웃겠지만 나는 결코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 다음 낱말을 사용해서 짧은 글을 지어 봅시다. (초등학교 1-1 쓰기)
  - 문장을 바꾸어 봅시다. (같은책)
  여기 나온  사용해서 도  써서 로,  문장 도  글 로 해서, 이런 쉬운
우리말부터 먼저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그림의 내용과 우리가 겪은 내용을 관련지어 써 봅시다. (국민하교 1-2
쓰기)
  여기서는  내용 과  관련지어 가 문제다. 이런 말을 안 쓰고도 얼마든지 된다.
이 지시문은  그림을 보고, 자기가 겪었던 일을 생각해서 써 봅시다. 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알기 쉽다. 
  이번에는 6학년 책을 보자. 
  -말소리의 바뀜에 주의해서 정확하게 발음하여 보자. (6-1 말하기, 듣기)
  이것을 쉬운 우리말법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말소리가 바뀌는 데 주의해서 바르게 읽어 보자. 
  -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
보자.(같은 책)
  이것은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 좋다.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 보자. 
(같은 책)
  여기 나오는  확인하여 보자 는 공연히 어렵게 쓴 말이다.  알아 보자 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감동적인 부분을 찾아가면 글을 읽어 보자. (6-2읽기)
  이렇게 무슨  -적 라는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쓴 말이다.  감동을 받는 
하든지  감동스런 이라고 쓰면 된다. 그런데 이 지시문에서,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이 감동을 주는가 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면서 읽으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글을 그런 태도로 읽어서는 영 재미가 없고,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되고, 또 아무도 그런 태도로 읽지는 않는다. 빈 마음으로 읽는 가운데 들어오는
감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따라서 이 지시문은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읽고 난 다음에 감동을 받은 대문이 어디인지 말해 보세요. 
  - 우리 글자를 처음부터  한글 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훈민정음 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정음 이라고도 하였다. 또
그후에는  언문 , 암클  등으로 부르기도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6-2 읽기)
  이 글에  불렀던   부르기도   부르게 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은 모두 
말했던   말하기도   말하게 라고 고쳐야 한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한글 을
두고 하는 말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한글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한글아! 하고
한글을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른다는 말을 잘못 쓰는 것도
일제시대부터 일본말을 따라가 우리 글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른다는 말보자  불린다 는 말을 또 더 많이 쓰고 있다. 
  이 밖에  당시 는  그때 로 써야 하겠고,  등으로 는  따위로 라고 해야 될
것이다. 
  -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우리말을 있었지만, 그 말을 적는 우리 고유의
글자는 없었다. (같은 책)
  같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라도  한글을 만들기 라 하지 않고  한글이
만들어지기 라고 하여 움직임을 입는 꼴로 쓰는 것, 이것이 또 일본말법
따라가는 짓이다. 교과서까지 이렇게 되어 있으니 우리말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고유의 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니 없애는 것이 훨씬
좋다. 
  다음은 중학국어 책이다. 
  - 이렇게 사람이면 누구나 언어는 사용한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를지라도, 누구나 언어로써 의사 소통을 한다. 우리는 언어로 새 소식을 듣고
알리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가진다. 우리는 언어로 다투기도 하고 화도 낸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조상의 많은 업적을 이어받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 깊고 많은 지식을   아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힘의 원천은 언어이다. (중학 국어 1-2)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주 단순하여 누구든지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보통으로 지껄이는 쉬운 말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데, 이 글은 공연히 한자말을 써서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여기
나오는 말 가운데서 일곱 번이나 나오는  언어 란 말은 모두  말 이라 고쳐쓰는
것이 좋다.  언어를 사용한다 고 한 것도  말을 한다  고 하면 그만이다. 이
글을 쉬운 말로 고쳐 다시 써 보자. 

   이렇게 사람이면 누구나 말을 한다. 비록 하는 말이 서로 다르더라도, 누구나
말로 생각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말로 새 소식을 듣고 알리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가진다. 우리는 말로 다투기도 하고 화도 낸다. 우리는 말과 그 말을
적은 글 때문에 조상의 많은 업적을 이어받을 수도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더 깊고 많은 지식을 쌓아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힘의 원천은 말이다. 

  한자말은 아니지만  다를지라도   -로써  따위 말은 글에서만 써온 말이니
살아 있는 입말로 고쳐 쓰는 것이 좋다. 이런 우리말로 된 글말도 요란한
한자말로 된 문장에 잘 섞여 쓰인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날마다 언어를 사용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매우 적다. (같은 책)
  이 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말에 대한 관심은 매우 적다  이렇게 쓸 것이다. 
  여기 한문글자를 묶음표 안에 적어 놓았는데, 한문글자가 있어야 이런 말을 알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한문글자 없이 이런말을
읽도록 해 놓았고, 더구나  사용한다 는 말은 초등학교 1학년 책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한문글자를 배운다면 아주 한문책으로 시간도 따로 정해서 배우는 것이
옳다. 이렇게 우리말을 우리 글로 적는데까지 쓸데없이 한문글자를 끼워 놓으니,
이래서 우리말은 안 쓰고 한자말만 쓰게 된다. 말과 글이 어지러워지고 병드는
근원이 여기에 있다. 
  -올바른 발음 생활. (같은 책, 글제목)
   일하는 생활 이라든가  공부하는 생활 이라면 말이 된다.  밥 먹고 놀기만
하는 생활  해도 말이 된다. 그런데  말하는 생활  하면  좀 이상하다. 이런
말은 실제로 쓰이지 않는다. 머리로 말을 만들어 내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이다. 이런 말을 쓰니까 말이 어려워지고 글이
어려워진다.  말글살이 란 말도  언어 생활 을 바꿔 놓은 말이고, 이런 말을
쓰지 말자고 하는 까닭이 이렇다. 
   올바른 발음 생활을 해야 한다 고 할것이 아니다  올바른 발음을 해야 한다. 
든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올바르게 발음해야 한다 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말살이가 잘못되었다 는 말이면  글을 잘못 쓰고 있다 든지,  글을 잘못 읽고
있다 든지 해야 할 말이다. 
  - 우리가 미래를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보다 밝은 미래를 얻고자 노력한다면,
우리의 앞날은 한결 더 희망적인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더
좋은 미래를 성취하자. (같은 책)
  우리말로  앞날 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교과서에서 이렇게  미래 를 쓰도록
가르치니까 신문이고 잡지고 광고문이고 모조리  미래 라고 쓴다. 이 글을 쉬운
우리말로 고쳐 써 보자. 
   우리가 앞날을 밝게 긍정해서 보고, 더욱 밝은 앞날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우리 앞날은 한결 더 희망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서
더 좋은 앞날을 이뤄내자. 

  - 신라어는 본래 오늘의 경주 지방에서 사용되던 언어였는데, 이 지방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세하게 됨에 따라, 그 언어도 점차로 그 세력을 뻗쳐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 언어는 마침내 우리 민족 전체의
언어가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언어 통일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그 남쪽에 치우쳐 있는 오늘의 로마 지방이 정치적으로 세력이 커지고
문화적으로 우월해짐에 따라. 그 언어가 이웃 언어들에 영향을 끼쳐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언어, 즉 라틴어가 되었던 것이다.
(중학 국어 3-2 )

  이 글도 여러 가지로 잘못된 말이 많은데, 깨끗한 우리말로 다듬어서 다시 써
본다. 
 
   신라말은 본래 오늘의 경주 지방에서 쓰던 말이었는데, 이 지방이 정치로나
문화로 우세하게 됨에 따라, 그 말도 차츰 그 세력을 뻗쳐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 말은 마침내 우리 겨레 전체의 말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말 통일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에서도, 그
남쪽에 치우쳐 있는 오늘의 로마 지방이 정치로 세력이 커지고 문화로
우월해짐에 따라, 그 말이 이웃 말들에 영향을 끼쳐 그것들을 없애고,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말, 곧 라틴어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국어 교과서에 나온 글 몇 군데를 살펴
보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학생들이 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 왔는가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쉬운 우리말은 버리고 어려운 남의
나라 글자말을 배운다고 머리를 썩혀온 것이 국어 공부였던 것이다. 국어 공부가
제 나라 말을 버리는 공부가 되어 있다니, 이것은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엄연한 사실은 지금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고, 우리
모두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고 이어갈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말을 장송하는 행진이라 볼 수밖에 없다. 
  요즘 일간신문마다 나오는 대학입시준비 국어 논술 문제를 보면 대개는 별 것
아닌 내용인데 말만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런 문제에 시달려야 하는 학생들이
참으로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으니 바보 같은 어른들이 어렵게 써
놓은 글은 무슨 글이든지 모조리 쉬운 우리말로 바꿔서 읽는 슬기를 지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디 학생들만은 글을 어렵게 쓰는 바보가 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대학입학 국어 시험 문제를 보니

  일간신문들에는 주마다 한 차례씩 대학입학 시험문제가 나오는데, 그중에
우리말글에 관한 문제를 보면 우리 나라 국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잘못된
말을 쓰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다음은 어느 날 어느 신문에 난 문제에서 보기로 들어 놓은 글의 한 대문이다.

  또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보라. 어린애의 조그만 주먹, 늙은 노인의
미고, 외로운 양의 눈동자, 참새의 고 가느다란 다리, 또 아지랑이 낀 먼 산,
흐르는 시내, 잔디 위에 누워서 쳐다보는 아름아름한 봄 하늘, 친한 동무와의
산보와 이야기... 이러한 것은 모두 조그마한 기쁨이나마 우리의 한 때의 기분을
전환하고 우리의 그날 그날을 애상과 우수에서 건져내는 큰 힘이 되지 아니할까?


  이 글에서 왜  웃음 이란 우리말을 안 쓰고 일본글 따라가는  미소 를 썼는가?
 산보 오 일본말이란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다.  동무와의 도
일본말법이다.  친한 동무와의 산보와 이야기 는  친한 동무와 산책하면서
이야기하기 라든지  친한 동무와 거닐면서 하는 이야기  이렇게 써야 될 것이다.

   우리의 한때의 기분을 전환하고  도  우리 한때의 기분을 바꾸고  하면 될
것이고,  애상과 우수에서  도  슬픔과 근심에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미소   애상   우수  따위는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시고 수필이고 소설이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찾아 쓸 줄 모르고 허망한
남의 나라 글자말에 빠져서 깨어날 줄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 겨레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말을 짓밟고 학대하는 죄악을 저지를
뿐이고, 이런 글을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앞에 들어 놓을 글이 들어 있는 보기글을 가지고 내어 놓은 문제가 다음과
같다. 
 
  다음 예문에 쓰인 제재 중 주제를 나타내기에 적절치 않은 것은? 

  이 묻는 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말은  제재 란 말이다. 이 말은  주제가
되는 재료   내용이 되는 재료 란 말인데,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쓰는 글에서는
이런 말을 안 쓰는 것이 좋다. 그리고 여기서는  말 이나  대문 이라면 그만이지
 제재 란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묻는 말을 나 같으면 다음과 같이
쓰겠다. 
  
  다음 글에 나오는 말에서 주제를 나타내기에 알맞지 않은 것은? 

  똑같은 문제인데 얼마나 쉬워졌는가. 
  그 다음에 또 한가지 나오는데, 그 문제가 이렇다. 

  이 물음에는  미괄식 이란 말이 문제다. 이 말을 모르면 이 문제는 풀 수
없다. 미괄식, 두괄식, 중괄식, 양괄식, 이런 어설픈 말을 꼭 알아야 할까?
웬만한 우리말 사전에도 이런 말은 안 나온다. 결국 이 문제가  미괄식 이란
말의 뜻을 묻는 문제가 되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다음의 재료들을 가지고, 주제를 나타내는 말이 끝 부분에 들어가도록 짜려고
한다. 가 -마의 차례를 가장 잘 맞춰 놓은 것은?

  역시 같은 신문에 난 보기글을 한 가지만 더 들기로 한다. 시험문제로 난
보기글로는 가장 쉽게 읽힐 것 같은 글인데, 전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한번은 어린애의 샤쓰를 사러 상점에 들른 일이 있다. 1.점원이 내놓은 물건이
집에 있는 어린애에게 좀 작을 것 같았다. 그것은 좀 작을 것 같으니 그 보다 큰
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상점에는 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양으로 점원은 그 작은 샤쓰를 그대로 권하면서 하는 말이 참 어처구니
없었다. 
   야, 요거면 꼭 맞을 텐데 공연히 그러시는군요.  
  도대체 나로선 처음 들어간 상점 점원이 볼 일도 없는 남의 어린애는 몸집을
어떻게 알고 말인지 대답도 하기 싫었다. 
  2.우리 주변에는 이런일이 너무 흔하다. 
  무책임! 3.그 말이나 행동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수작을 눈도 깜짝 안 하고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4.인간이 싫어진다. 
  5.그에 비하면 옛사람들은 얼마나 성실했는지 모른다. 여기 지금 그런
상인과는 하늘과 땅 사이로 다른 한 목수 이야기가 있다. 
  나의 고향집은 지은 지가 근 7-80년이나 되는 고가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은 그 당시에 상당히 이름을 떨쳤던 도편수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바로 그 도편수 이야기가 있다. 
  그 집을 짓고 8년째 되는 가을에 어쩌다 우리 집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된 그
도편수는 사랑방으로 찾아들어 왔더란다. 그런데 그는 주인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더니 추에다 실을 매어 들고 집 모퉁이를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 따라가 보았더니, 어떤가! 그 도편수는 한 눈을 지긋이 감고
추로 하여 드리워진 실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서서 집기둥을 바라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 기둥이 혹 그동안 8년에 기울어지지나 않았는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둥을 검사하고 난 도편수는 실을 거두며, 
 a 그럼 그렇지! 끄덕 있을 리가 있나.  하면서 그 늙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기둥을 슬슬 쓸어 보더라는 것이다. 
  누가 쓴 작품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수필이다. 앞 뒤 두 가지 이야기를 대비해
놓았는데, 이야기로 되어 있으니 재미있게 읽힌다. 시험문제도 이런 글을 낸다면
학생들이 괜히 머리를 썩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글도 아주 온전할 수가 없어, 몇 군데 우리말법이 아닌
데가 있다. 
  - 그에 비하면..
  이것은 일본글 따라 쓰는 버릇으로 굳어진 말이니 고쳐야 한다.  그에 대면 
이라고 써야 우리말이 된다.  그에 견주면  해도 되겠지. 
  - 나의 고향집은 지은 지가 근 7-80년이나 되는 고가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은 그 당시 상당히 이름을 떨쳤던 도편수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글에 나오는  나의 고향집 도 외국말법 따라 쓰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우리 고향집 이다.  우리 집   우리 고향  이렇다. 아버지 어머니도 우리말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말을 버리고
일본말법과 서양말법을 퍼뜨려 왔으니 한심하다. 그 다음은  고가 란 말인데,
한문글자를 묶음표로 적어 넣어야 알 수 있는 말이라면 우리말이 아니다.  옛집
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또 하나,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에서  ..에 의하면  이란 말이
일본말법이다. 우리말로는  어른들 이야기로는  이라고 쓰면 된다. 
  이 밖에 문맥이 좀 이상한 데가 있는데, 이것은 신문에 옮겨 놓는 과정에서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 글은 쉽게 읽힌다. 그런데 이 글에서 두 가지 문제가 나왔는데, 그
첫째 문제가 다음과 같다. 

  1-5중 필자의 주관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은? 

  이렇게 묻는 말을 써 놓은 글에서 생각해 봐야 할 말이  필자 와  주관 이다.
물론 이 정도의 말은 고등학생들에게 그다지 어려운 말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나날이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 이런 말이 들어가면 그 글은
저절로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또 우리말이 있으면 마땅히 우리말로 써야 하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필자 와  주관 을 모두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다시 써
본다. 

  1-5중 글쓴이의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은? 

  이렇게 쓰면 한결 쉬운 글로 읽게 된다. 만약 이렇게 썼더라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잘못 쓰는 사람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 다음 문제가 이렇다. 

  a에 표출된 화자의 심리를 지적한 것은? 
  1. 안도  2. 만족  3. 모멸  4. 자만  5. 환희

  이렇게 물어 놓은 말에서도  표출   화자 와 같은 말은 괜히 어렵게 쓴
말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다 아는 말이지만  심리   지적  따위 한자말도 쉬운
우리말로 쓰면 훨씬 더 이 묻는 말의 뜻을 알기 쉽다. 그래서 내가 만일에 이
문제를 낸다면 다음과 같이 쓸 것이다. 
  
  a에 나타나 말하는 이의 마음을 바르게 가리킨 것은?

  이렇게 내가 쉽게 써 놓은 말과 앞에 있는 원문이, 그 내용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는가? 다르지 않다면 우리말을 안 쓰고 어려운 한자말을 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혹시 내가 쓴 글이 도리어 원문보다 더 머리에 얼른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예삿일이 아니다. 마치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자라난 아이가 돌아와서 우리말은 어렵고 외국말은 쉽다고 하듯이
말이다. 외국에서 자라났을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가 예사이고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이 어느 나라인가? 제 나라에서 제 나라말을 배웠다는 아이들이 이
지경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고, 잘못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이런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시험문제만은 제발 깨끗한
우리말로 썼으면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말부터 어렵게 되어 있고 보니, 마치 될 수 있는대로
어려운 한자말을 묻는 말에다 써서 이런 한자말을 아는가 모르는가를 알아 보는
시험문제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에서 들어 놓은 다섯 개 한자말
가운데서 한 개를 가려내는 것은 아주 이 다섯 개 한자말의 뜻을 묻는 문제가
되어 있다. 이와같이 해서 대학입시의  언어 문제는 거의 모두가 어려운
한자말을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꼴로 되어 버렸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 놓은 글을 읽자면 어려운 한자말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험문제가 거의 모두 이렇게 되어서 어찌
하겠는가? 옛날 글을 읽기 위해서 한자말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나날이
하는 말과 쓰는 글을 옛날 사람들처럼 남의 글자말로만 써서 어쩌자는 것인가?
우리  국어 교육은 우리말을 죽이는 교육이 되었다. 사실은 입시문제에서 과목을
적는데  언어 라고 하고, 더러는  국어 라고 한 것부터 잘못되었다. 왜  말 이
아니고  언어 이고,  우리말 이 아니고  국어  인가?  국어 와  우리 말 이
어떻게 다른가? 학교에서 학생들이  우리 말  공부를 하지 못하고  국어 공부를
하는 이상, 우리말은 바로 그 국어 교육으로 아주 무지막지하게 짓밟혀 죽어갈
것이고, 죽지않고 간신히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상처투성이 괴상한 병신말로
되어 버릴 것이다. 
  이번에는 대학입시 본고사 문제에서 한 가지만 살펴 보겠다. 역시 가장 쉬운
말로 된 보기글을 들기로 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이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정지용 시인의  고향 이다. 단 한
낱말도 꺼림찍한 한자말을 쓰지 않아 참으로 깨끗한 우리말로 되었다. 글에서만
쓰는 한자말을 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우리말로 된 한자말조차 안 쓰고
토박이 말을 살려 쓰기도 했다. 
   산 이라고 하지 않고  뫼 라고 한 말이 그렇다. 이 시를 발표한 1932년에는
벌써  뫼 란 말이 다 죽어 있었던 것인데. 이 시인은 이 말을 묻혀 있던 땅에서
파내어 숨을 불어넣어서 이렇게 살려 놓았던 것이다. 
  이 시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매김자토씨 관형격조사 의  의 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이 시의 말법이 순전한 우리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정지용 시인의 시 가운데서도 이 시가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그런데 이 시를, 다른 다섯 가지 글과 함께 내어 보인 다음에 문제를 내어
놓았는데. 이 시만을 두고 물어 놓은 문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다음과 같다. 

  위의 글들 중에서  귀향 을 주제로 한 것이 있다.  귀향 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공간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시간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어구를 글  다 에서 찾아 쓰시오. 

  이렇게 물어 놓은 글뜻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아주 잔뜻 긴장해서 거듭 읽어야
한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말을 왜 이렇게 썼을까? 내가 쓴다면 다음과 같이
쓰겠다. 

  위의 글 중에는  고향에 돌아감 을 주제로 한 글이 있다. 고향에 돌아가
찾으려고 하는 곳의 뜻과 시간의 뜻을 생각해 볼 때, 시간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 말귀절을 글  다 에서 찾아 쓰시오. 

  우리 글에서  공간적   시간적  이렇게 무슨 -적 하는 말을 아주 많이 쓰는데,
이 말은 우리 글을 어설픈 외국글체로 만드는 데 가장 큰 노릇을 하는,
일본사람들이 만든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고 아이고 글에서뿐 아니라 말에서까지
마구잡이로 쓰고 있지만, 이 말만 들어가면 말이 그만 이상하게 굳어진 것으로
되고 글은 어설프고 사납게 되어 듣는 사람이고 읽는 사람을 흔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시험문제에서 묻거나 지시하는 말부터 이런 괴상한 말이 들어
있는 글체로 되어 있으니 학생들은 죽자사자 이런 말을 쓰고 이런 말이 들어
있는 글의 질서에 자신을 길들이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다음 또 하나 문제는 이러하다. 

  글  다 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연이 첫째 연과 끝연이라고
보자 이 두 연이 넌지시 드러내는 화자의 모습을 비유하는 표현을 글  바 의
한시에서 찾아 한자로 쓰시오. 

  이 문제는 앞에서 들어 놓은 시  고향 을 제대로 읽어서 잘 알고 있는가를
묻는다기보다는  바 의 한문시와 한자말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한자를 쓸 수
있는가를 알아 보는 문제로 되어 있다. 우리 시 작품을 들어 놓은 문제조차
이렇게 한자말을 알고 있는 능력을 재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 밖의 문제야
말할 나위가 없다. 

    논술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빗나간 논술 글쓰기
  대학 입학 시험문제에서 논술이 큰 자리를 차지하면서 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중학생, 초등학생들까지 논술공부 바람에 휩쓸려 있다. 도대제 논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 글인가? 그리고 논술에 무게를 둔 시험제도는
바람직한가? 
  지금처럼 대학 교수에서부터 초등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자들이
논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아이들은 초등학교 1,2학년부터 논술 글쓰기를
한다고 골치를 앓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논술부터 가르쳐 놓아야 한다고
학원을 찾아 다니고, 출판업자들은 다투어  논술 과  논리 란 말을 책 이름이나
광고에 내걸고, 교육학자들과 교육행정가들은 이런 현상을 새로운 교육의
방향이라 떠들고, 기업들은 이것이 모두 세계에 으뜸가는 교육열을 가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모습이라 추어올리고.. 과연 이것이 참된 교육의 모습인가?
심지어 무슨 사회운동이니 문화운동을 한다는 젊은이들도 일자리가 없던 터에
아이들 글쓰기 지도로 먹고 살게 되었으니, 바람 고치는 이런 교육 바람이 역시
고맙고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안 본다. 이 논술 글쓰기는 이대로 두어서 결코 안되는
아주 문제가 많은 교육이라고 본다. 아이들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창의성을
죽이고 우리말을 잘못되게 가르치고, 아이들의 심성까지 병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어떻게 하면 논술문을 잘 쓸 수 있나 하는
것보다도 주로 지금 하고 있는 논술교육, 논술시험제도, 논술 글쓰기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 쓰려고 한다. 
  우선 논술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 실상이 어떤지를 대강이라도 알아 두기
위해, 이런 교육풍조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내가 듣고 본
몇가지로 적어 보겠다. 
  첫째, 논술이란 어떤 종류의 글이고, 그것은 어떤 자리에 있으며, 어느 학년
나이 에서부터 써야 하고, 어떤 내용을 담는 것이 바람직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써야 하는 글인가를 알고 있는 교사 강사 가 거의 없어 보인다. 
  둘째, 논술교육의 이론을 참된 인간교육이란 관점에서 밝혀 놓은 논문이나
책을 나는 보지 못했다. 
  셋째, 지금 전국 각지방에서 하고 있는 글쓰기 또는 글짓기 학원의 과외지도란
것이 그 목표에서부터 지도 내용이며 지도 과정이며 지도 방법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원칙도 기준도 없이 그야말로 엉망이다. 그러면서 다만 논술만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는 것만은 거의 공통되어 있다. 
  넷째, 전국에 걸쳐 글쓰기 지도를 가정방문으로 하면서 학습지를 팔고 있는
몇몇 기업에서는 글쓰기 지도자를 양성하는 과정의 강좌까지 열어 지도자 자격증
따위를 주고 있는데, 그런 강좌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란 것이 내가 보기로는
아주 잘못되어 있거나 엉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섯째, 한 어머니가 전화로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아이가 4학년인데 논술학원에 넉 달째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날 아이를
따라가 보았더니 쓰는 차례며 방법을 아주 잘 가르치는 것 같았어요. 첫머리는
어떻게 쓰고, 본론은 어떻게 펴고, 결론을 어떻게 맺고... 그렇게 가르친 대로
쓰면 정말 버젓한 글이 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이가 그 뒤에 쓴 것을 보아도
제법 틀이 짜인 글이 된 것 같아 반가웠지요. 그런데, 글이 도무지 재미가 없고,
그 이상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그런 글을 쓰기 싫어해서 학원에 안
가겠다고 버팁니다. 아무리 달래도 안됩니다. 언제나 쓰는 것이 비슷비슷하고,
도무지 달라지지 않아요. 우리 애하고 같이 다니는 이웃 아이가 있는데, 그 애가
쓴 것도 우리 애 것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삶이 없고, 삶에서 우러난 생각이나 주장을 쓰는 것이 아니고 선생님이 짜준
틀에다 선생님이 말해 주는 것을 그대로 쓰자니 이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여섯째, 신문에 난 논술고사 문제와 그 문제로 써 놓은 학생들의 글을 보아도
논술 중심의 글쓰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이래서 이 논술 중심의 글쓰기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는 1.논술은 어떤
글인가? 2.어떻게 쓰도록 해야 하는가? 3.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4.어떤
말로 써야 하는가? - 이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제부터 이 네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논술은 어떤 글인가? 
  논술이란 자기 의견을 쓰는 것, 또는 자기 의견을 써 놓은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논술이란 말의 뜻을 살피면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고 보겠는데,
그것은 1.자기자신의 2.의견(생각,주장)을 3.자기 말로 쓴 글이란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말하면 1.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남의
생각,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생각, 남이 적어 놓은 글을 읽고 그것을 흉내내거나
되풀이해서는 제대로 된 논술일 수 없다. 그러기에 2.제몸에서(삶에서) 우러난
의견, 또는 주장이라야 하는 거고, 이런 의견이나 주장을 쓰는 3.말도 남의
글에서 빌려온 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삶에서 나온 말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입학시험 준비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논술을 이 세가지 요소로
따져 볼 때 참된 논술문이라 할 수 없다. 1.지도하는 어른들이 말해 주고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받아 정리해서 쓰는 글로 되어 있고, 2. 그래서 그 주장이나
의견이 자기 삶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요 남의 것을 따라가고
흉내내거나 남의 것을 제것인 것처럼 꾸며 보이는 것이고, 3.글도 어른들이 쓴
것을 그대로 흉내낸 것뿐이다. 이런 논술 쓰기에는 누가 얼마나 어른들의 글을
잘 읽어서 그것을 요령있게 정리해서 썼나, 누가 얼마나 읽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암기했는가, 근사한 말과 문장을 제것으로 옮겨 쓸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평가의 잣대가 된다. 
  물론 남의 의견이나 주장을 읽고서 그것을 그대로 요약 정리할 뿐 아니라, 그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
지금 학생들이 쓰고 있는 거의 모든 논술문이 실제 삶에서 떠나 있는 상태에서
다만 책만 읽고서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삶에서 떠나 다만 글만 읽고
쓰는 의견이 어떻게 제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논술에서 쓴 의견이란 것은 어른들이 주는 것을 받아들인 것일 뿐이다. 논술
글쓰기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글을 읽거나 책을 읽어서 그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글쓰기 공부는
국민학생 때부터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학습한 내용을 정리한 글 은
그런 대로 쓸 필요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지금 대학입시 준비로 하고 있는
논술 글쓰기가  학습한(책을 읽은)것을 정리한 글  정도로 쓰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더 논의하지는 않아야 되겠지. 하지만 그런 글로 보기에는
학생들을 너무 괴롭히고, 너무 머리를 어지럽힌다. 문제는 글쓰기가 참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교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시험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이 논술문이란 글이 여러 가지 글의 갈래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아 보아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논술이란 것이 그저
남의 책만 읽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 가르쳐 주는 것만을 정리하거나 거기에다가
적당하게 자기 생각이라고 하여 의견을 적는 정도의 글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난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쓰는 글로 보고 매기는 자리인 것이다. 

도표 생략 (209쪽)

이 표는  우리 문장 쓰기 에서 옮겨 썼는데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중고등학생을
거쳐 대학생과 일반 어른들과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문인에 이르기까지 쓰게
되는 글의 모든 갈래를 나타낸 것이다. 이 표에서 글의 갈래가 10가지로
나누어져 있고, 논설문은 그 10가지 가운데 1가지다. 그리고 이 논설문이란 것을
또 주장하는 글(논술하는 글)과 연구문, 연구보고문, 성명서, 진정서, 시사평론,
일반평론 - 이렇게 일곱 가지쯤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논술이라는 글은 이 일곱
가지 가운데 한가지다. 논술문은 국민학교 4학년부터 쓰게 할 수 있는  주장하는
글 을 대학생이 되면 이렇게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논술 이란 말도 없애고  주장하는 글 이라고 해서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똑같은 말을 썼으면 좋겠다.) 아무튼 글의 갈래 열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인 논설문, 다시 이 논설문 안에 들어 있는 일곱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인
논설문 안에 들어 있는 일곱 가지 글 가운데 한 가지, 이것이  논술 (주장하는
글)이란 글의 자리다. 그것도 국민학교 4학년부터 조금씩 쓰게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그런데 글쓰기라면 논술밖에 없는 줄 알고, 논술만 쓰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 더구나 삶을 등지고서 남의 글 흉내만 내도록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 써야 하나? 
  논술은 자기 의견을 자기 말로 주장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논술하는 글을 쓰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의견이 있어야 한다. 자기 의견이
없는데 쓴다는 것은 거짓이고, 남의 것을 흉내내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의견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디서 어떻게 자기 의견을 얻을 수 있는가?
자기 의견은 누구한테 좀 달라고 해서 머리를 숙여 얻어 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의견은 누구든지 저마다 자기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 난 없어. 의견이 없는데...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지. 이렇게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은 삶이 없는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 방안에서 시험 공부만 하는
사람, 책만 읽는 사람은 삶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의견을 가질
필요가 없고, 따라서 자기 의견을 가질 수 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세상
일에 부딪혀 보고 일을 해본 사람은 세상 일에 대해, 자연에 대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품고 있으며, 그래서 그 의견을 남에게 주장하고 싶어한다. 주장하는 글,
곧 논술하는 글은 이렇게 해서 삶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글을 세 편 들어 놓았는데, 이 글들이 자기 의견을 자기
말로쓴(논술한) 글이 되어 있는지, 다시 말하면 삶에서 우러난 참된 주장으로
되어 있는지 알아 보자. 

    보기글-1
    문명의 혜택에 지배당하지 말자 (고2)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발명등으로 만들어진 것, 또는 발견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었다.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고 또 여러 가지가 창조되어 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편리함의 이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 나쁜 일에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생활은 편리해지지만 그로 인해 나태해지며 나쁜 범죄에
사용하여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요즘, 전문지식과 정보를 습득하여 그것을
악용한다면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서
기술혁신을 통한 신제품 개발이나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과학문명 기술은 잘 활용하면 일상행활에 큰 기여를 하지만, 손도 대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고, 기계에만 의지하여 그 기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그것의 이기를 누릴 자유가 있으나 그것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할 것이다. 좋은 것이 과하면
해로운 것이 된다는 옛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다 해도 엄연히 인간의 몫은 남는 법이다. 옛날을 고집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혜택을 잘 이용하면서 우리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인간소외의 위기의식 때문이리라. 
  (91.6. 어느 신문에 실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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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개혁안 부작용, 고3년생 벼랑 몰아(고3)
  5.31교육개혁안을 보고 고등하교 3년생으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려 한다.

  첫째, 고3년생의 위기감에 대해서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고3년생은 대학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벼랑에 서 있다. 선생님들도 이번에 떨어지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심심찮게  위협조 로 말씀하신다. 만약 이번에 낙방했다고 하자.
내년엔 본고사가 폐지되므로 일년 공부한 것이 다 헛수고가 된다. 더군다나
수능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고 교과서까지 바뀌니 대학을 가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둘째, 종합내신제 문제다. 이 제도는 선생님 한 분이 50명이 넘는 학급 학생
개개인을 평가한다는 것인데, 무리하다고 본다. 
  셋째, 봉사활동을 평가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 학생들이 맘놓고 봉사할
때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일부 학부모의 치맛바람이 걱정된다. 
  넷째, 출석부만 부르고 헤어지는 특별활동 시간을 평가한다니 정말 우습다. 
  (95.6.7. 어느 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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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종교를 헐뜯지 말자(중2)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그 종교들은 각기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우위를 가릴 수 없다. 또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자기네만이 최고라며 남의 종교를 무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하는 종교가 있다. 
  나는 부활절날에 내 동생이 계산중학교 스카우트 선서식을 한다기에 준석이,
태욱이와 함께 계산중학교로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교회 전도사 네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중 두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 파마머리 남자와
젊고 긴 생머리 여자였다. 
   학생, 종교가 뭔가? 
   불교인데요. 
   왜 믿나? 
   저희 가족이 모두 믿어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기독교를 믿게. 그래야만이 천국에 갈 수 있고 죄를 씻을
수 있을 테니까. 
   어째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모든 죄인들이 죄를 짊어지고
가셨어.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 증거로 돌아가신지 3일만에 부활하셨어. 
   그걸 어떻게 믿죠? 
   사람들이 봤어. 
   불교에서는 부처 믿어도 극락 간다고 하던데요. 
   그건 거짓말이야. 
   진짜예요. 
  우리 지금이라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기도를 함께 하자. 
   싫어요. 
   왜? 
   난 불교니까요. 
   그럼 나중에라도 잘 생각해 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 전도사는 갔다. 
  나는 곰곰히 생각해 봤다. 만약 그 전도사 말대로 교회 믿으면 천국 가고 다른
종교 믿으면 지옥 간다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위인들은 모두 지옥
갔을 게 틀림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도사는 하나님을 하나밖에 없는
유일신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들은 믿는 신들이 틀린다. 물론 사이비 종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신들은 훌룡하신 분들일 것이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처럼
다른 종교의 신앙들을 무시하면서 하나님만이 최고라는 말을 해서는 될까?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다른 종교를 헐뜯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편의 글을 차례로 살펴보자. 보기글1은 문명이 발달해서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아가게 되어있지만, 한편 사람이 만들어 낸 문명의 기구들이 사람을
게으르게 하거나 죄를 저지르게 한다든지 해서 나쁘게 쓰이게도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문명의 기구들을 쓰는 것은 좋은데 너무 거기에 매이거나 빠지지 말고
사람이 할 일을 해야 된다고 했다. 말이 좀 어설프기는 하지만 대강 하려고 한
말은 그렇다. 
  이것은 대체로 옳은 의견이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바로 이런 의견을 가지게 된 까닭, 삶 속에서 이 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고 주장하게 된 까닭을 이야기로 보여 주어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참 그렇지! 하고 함께 느끼게 되겠는데, 그것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은
까닭은, 이 글에 나타난 생각이 삶 속에서 우러난 서 자신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서, 또는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얻은, 머리속에 넣어 놓은
지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참된  주장하는 글 (논술)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입학시험
준비로 온 나라 아이들에게 죽자사자 쓰게 하는 글이 죄다 이런 아무 맛도 없는
글, 재미없는 글로 되어 있다. 
  다음은 보기글2를 보자. 이 글은 얼마 전 교육부에서 발표한 교육개혁안에
대해서 쓴 글이다. 그 안에 대해서는 학부모와 교사들, 그리고 그 밖에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한테서 여러 가지로 적지 않게 논평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은
당장 올해 입학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이 쓴 것으로, 고3학생만이 빠져 있는
어려움과 개혁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 이것은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그 어떤 학자도 교육자도 학부모도 언급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고3학생만이 그 고달픈 시험 전쟁의 나날에서 몸으로 느끼고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절실한 문제를 말해 놓았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이라는 좁은
자리에 실리다 보니 글이 좀 깎여 나간 듯하지만, 아무튼 이 글은 어른들이
가르쳐 준 지식이나 책을 읽어서 얻어낸 남의 의견이 아닌 것만은 누가 읽어도
환할 것이다. 
  이 보기글2는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원인을 어떤 생활 속에 있었던 이야기로
자세히 써 보이지 않고, 다만 첫머리 글 속에서 간단하게 한마디로 
교육개혁안을 보고 라고만 했다. 이 글은 이 것으로 충분하다. 그 까닭은, 이 
교육개혁안 을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듣고 갑자기 그 자리에서 떠올린 생각이나
가지게 된 의견이 아니고, 여러 날을 부모나 같은 학생들끼리 이야기하면서
생각하고 걱정해온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또 그 교육개혁안이란 것도 옮겨 쓸
쑤가 없고, 쓸 필요도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보기글3은 많이 다르다. 이 글은 다른 종교를 헐뜯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그렇게 주장한 말은 마지막에 가서 몇 줄을 썼을뿐이고, 그 앞의
글 전체가 어느 날 길에서 교회 전도사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글은 어떤 사건을 쓴 서사문이 아니고 의견을 담아 놓은 글이라 할
밖에 없다. 앞에 나온 이야기는 마지막에 쓴 그 의견과 주장을 위해서 내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논술이라고 해서 끝에 나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터 써 놓은 글만으로 적었다고 해 보라. 이렇게 되면 이 글은 이 학생이 그
삶에서 얻어 낸 절실한 자기 의견이라고 볼 사람이 없을 것이고, 흔히 어른들이
종교 문제가 나왔을 대 말하게 되는 말이라 생각하거나, 책에서 읽은 것을
그대로 옮겨 쓴 말이라 볼 것이다. 
  이래서 논술이란 글은 이론만을 늘어 놓은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기글1은
바람직스럽지 못하고, 2,3과 같은 글, 더구나 3처럼 어떤 의견을 주장하게 된
근거를 마치 서사문을 쓰듯이 정확한 이야기로 써 보이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이 세편의 글이 어떤 말로 나타났는가를 좀 살펴보기로 하자. 보기글1은 삶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 씌어 있는 글도 잘못 쓰는 어른들의
글말로 요란스럽게 되어 있다. 
  책으로 익힌 지식을 적게 되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말이나
우리말로 다듬어 써야 할 말을 대강 적으면 다음과 같다.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편안하게 살아가고)
  발명 등으로 (따위로, 같은 것으로)
  윤택하게 (넉넉하게)
  발휘되고 (드러나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낫게 살아가도록)
  더욱 가속화되고 (빨라지고)
  편리함의 이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 (편리한 기구로)
  적지 않은 것 같다. (적지 않다)
  그로 인해 나태해지며 (그 때문에 게을러지며)
  나쁜 범죄에 사용하여 (범죄에 써서)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세상 사람들이 정신차리게도)
  고도로 (높이,크게)
  습득하여 (배우고 얻어)
  악용한다면 (나쁘게 쓴다면)
  기술혁신을 통한 신제품 개발이나 (기술을 혁신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기여한다면 (이바지한다면)
  활용하면 (살려 쓰면)
  큰 기여를 하지만 (크게 이바지 하지만)
  그 기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나약한 (약한)
  그것의 이기를 누릴 자유가 있으나 (그 기구를 쓸)
  사고방식은 (생각)
  과하면 (지나치면)
  옛말을 간과해서는 (잊어서는)
  인간소외의 위기의식 때문이리라. (사람을 잃어버리는 위태함. 사람이
따돌려지는 위태함. 사람이 사람 노릇을 못 하는 위태함)
  
  쉬운 우리말, 삶에서 익힌 말을 쓰면 틀린 글이 되지 않는다. 책으로 읽은
글말을 쓰니가 이와같이 어려운 한자말이 나오고, 일본말법이 되고,,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을 예사로 쓰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보기글2인데, 여기서는 글에서만 쓰는 잘못된 말이 하나도 없다.
자기 자신의 의견을 자기 말로 쓴 것이다. 다만 널리 입말로 되어 버린
한자말이나 일본말이 두세 군데 보일 뿐이다. 
  현실적인 문제점을 (현실의, 현실에서 부딪힌)
  학생 개개인을 (하나하나를)
  점수화한다면 열성적인 어머니들이 (점수로 매긴다면 열성이 있는)
  그리고  우리 나라에 학생들이 맘놓고 봉사할 때가.. 란 대문에서 말이 좀 덜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리 나라 학교에서 라고 쓸 것을  학교에  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라면, 신문에 옮겨 실을 때 잘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만큼 깨끗하게 쓴 고등학생의 글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다음 보기글3도 글이 아주 깨끗한 편이다.  유일신   유일하다고 란 말은
전도사란 사람과 주고받는 말 가운데서 나왔던 것 같고, 그래서 썼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몇가지, 안 써도 될 글말이나 잘못 쓴 말을 들어 본다. 
  그 종교들은 각기 (저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다. 
  흔히  고유한 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대개는 안 써도 될 자리에 쓰는 것이다.

  종교는 우위(우열)를 가릴 수 없다. 
  행위를 (짓을)
  네 명이 (네사람, 넷)
  유일무이한 (유일한,오직 하나만)
  사이비 (엉터리) 종교들도 
  그러므로 (그래서, 그러기에) 그러므로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입으로 하는
말을 쓰는 것이 낫다. 
  다른 종교를 헐뜯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기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제목에서도  다른 종교를 헐뜯지 말자 로 되어 있는데, 글의 내용이 다른
종교를 헐뜯는다기보다는 자기 종교를 억지로 남에게 전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을 고치는 것이 옳겠다. 
  이 글을 쓴 학생이 왜 강요당한 것을 헐뜯는다고 했을까? 이것은 아마도 이
학생이 그 전도사란 사람에게 어느 정도 좋지 못한 감정 같은 것을 가지게 되어
정확한 말을 간결하게 써서 아주 살아 있는 글이 되었는데도 다른 부분에서는 몇
가지 글말을 쓴 까닭조차, 역시 그 정도로 조금은 생각이 감정으로 떠 있었기
때문이겠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을 써야 하나? 
  글쓰기에서는  무엇을 써야 하나? 하는 문제가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문제보다 앞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논술에서만은  무엇을 과  어떻게 의
차례를 바꾸었는데, 그 까닭은 학생들이 쓸거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쓰는 자유가
아주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학생들이 어떤 문제로 글쓰기 공부를 해야 하는가 알아 보기 위해서
신문에 난 논술고사 예상(연습) 과제를 보기로 하자. 다음은 어느 신문에서
주마다 한 번씩 여러 대학의 교수님들이 내어 주고 있는  주제 들인데, 이
신문에서는 그 전주의 주제로 써 낸 글 가운데서 잘된 글을 최우수작 한 편,
우수작 세 편으로 뽑아 함께 싣고 있다. 몇 달 동안 나온 주제들을 보는 대로
적어 둔 것이 다음과 같다.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라. 
  통일에 대비한 효율적인 국토활용 방안. 
  도덕성 타락의 원인데 대해 논하라. 
   건전한 사회는 건전한 가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는 말에서 
건전한 가족 의 핵심적 내용을 논하라. 
  바람직한 가족규범.
  미래사회의 창의성에 대해 논하라. 
  낙태, 허용되어야 하는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세계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외래어 상품명에 대한 종결부분 작성하기. 
  현대인과 점.
  국가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새 가치관 정립에 대해 논하라. 
  지식의 습득과 교양적 자질과의 관계
  1.바둑과 장기 2.학교와 학원 3.논개와 춘향 - 하나 택일, 비교 대조의 방법을
사용 설명하라. 
  진로 선택의 결정요인은 무엇이어야 하나. 
  외국어 조기교육의 장단점을 논하라.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멀티미디어 시대와 독서 
  논술시험은 학생들의 사교력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가정의 달 5월을 맞는 청소년의 다짐.
  법의 양면성을 논하라. 
  내가 만약 시장이 된다면.

  이 밖에 주제를 좀 긴 글로 써 놓은 것은 뒤로 미루고, 우선 여기 적어 놓은
과제들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 
  이 논술 문제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체험에서 나온 절실한 자기 의결은 쓰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책에서 읽은 지식과 이론을 쓰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논술시험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래서 이 논술시험 제도는
학생들에게 자기 삶에 대한 관심과 자기만이 갖는 감정과 생각과 의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무엇이든지 어른들이 주는 것만을 맏아들이도록 하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또 그러면서도 삶에서 동떨어진 빈 이론과 장난스런 말재주를 즐기는
괴상한 사람을 기르는 노릇을 잘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논술
주제들을 보면 아직 학생으로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거나 관심을 가지기에는
아주 이른, 다만 어른들이나 애써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학생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교육이 된다고 할 밖에 없다.

  논술 문제는 학생들이 누구든지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쉽게 자기 의견을
쓰면서 한편 좋은 생각을 하게도 되는 문제가 바람지간데, 그런 문제는 아주 썩
드물다. 다만,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라.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도덕성 타락의 원인에 대해 논하라. 
  이런 문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논하라 란 말을 꼭 써야 할까? 이런 말을 쓰니까 학생들이 쓰는 글이 그만
딱딱한 글말로 굳어지게 된다. 나 같으면 
  목숨이 왜 소중한가 말해 써 보시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어째서 타락하였는지, 그 까닭을 써 보시오.
  이렇게 쓰겠고,  인간 이란 말조차  사람 으로 써서, 이렇게 하겠다. 
  우리 사람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차라리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자기 생각을 써 보시오 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만)
  앞에서, 신문에 내어 놓은 논술 문제로 글을 쓰면 책에서 읽은 것이나
교실에서 배운 것만 쓰게 된다고 했는데, 실제로 학생들이 쓴 글을 보기로 하자.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란 제목이 있었다. 요즘 이 문제가 온 국민의
관심거리로 되어 있어서 논술 문제로서는 매우 알맞아 보인다. 그러나
국민학교란 이름이 왜 생겨났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그 당싱의 법령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다른
생각으로 애써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저 사람들이
퍼뜨리는 소문 같은 것이나, 신문에 슬쩍 스쳐 지나는 정도의 기사로 짐작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학생들 역시 특별한 뜻이 있어 이 문제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선생님들 만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제대로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교육자가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매우 적절해 보이는 논술 제목
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쓰기가 매우 어려운 제목이다. 
  이 논제로 써 낸 작품이 최우수작 한 편에 우수작 세편으로 모두 네 편이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을 읽어 보니 모두 어슷비슷하다. 그리고
국민학교란 이름을 그대로 써서는 안되는 가장 큰 까닭을 올바르게 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모두가 잘못된 말을 써 놓았다. 국민학교란 이름은 왜정
마지막에 포악한 왜놈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군대교육을 시켜 전쟁터에 끌고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데, 그것이 그 때 나온 법령에 환히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을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데, 아무도 쓴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국민이란
말은 일본 국왕의 신민이란 뜻이다 고 모두가 잘못 써 놓았다. 국민이란 말이
일본국왕의 신민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미국 국민   영국국민   프랑스 국민
이라고 쓸 수는 없다. 국민이란 말이 백성보다 더 좋은 말은 아니지만 쓰지
말아야 할 말은 아니다. 또 국민이란 말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처음 쓴 말도
아니다. 그런데  국민학교 란 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왜놈들이 흉악한
속셈으로 소학교란 이름을 그렇게 바꾼 것이니 그냥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 한다면
미리 국민학교란 이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를 정확하게 가르쳐 놓아야
할 것이고, 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뀐 뒤로 일본 식민지 교육의 실상이 어떻게
되어 있었던가를 자세하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교육은 하지도 않고
글만 써 내라고 했으니 내용이 비어 있고, 또 잘못된 생각을 다만 어른들이 흔히
쓰는 어설픈 글말로 모두 어슷비슷하게 쓸 수밖에 없다. 미리 교육을 잘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쓰는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런 지도조차 없이 썼으니 무슨 글이 되겠는가? 다른 논제로 쓴 학생들의 글도
흔히 이런 꼴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는, 앞에서 미뤄 놓았던 좀 길게 설명해 놓은 주제들을 보기로 하자. 
  문제 : 한은 잔잔한 원한.. 그것이다. 나를 향한 원망인지 임을 향한
원망인지조차 분간할 길이 없는 감정이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 너에
대한 것도 아니며 나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 한편 가져보지 못한
한국인의 불행인 것이다. 한을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은 곧 한이 우리
특유의 감정임을 뜻한다. (이어령  이것이 오늘의 세대다 )
  한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그것이 자신의 독서체험이나
관찰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 또 그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하라.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입장이 분명한 글을 1천자
내외로 작성하라. 
   문장에서 표준어, 맞춤법, 문법적 결함이 없는 문장, 구두점 표시 등과 같은
형식적 규범적 요소들이 잘 지켜졌느냐 하는 문제는 글의 전체적인 평가에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전통사상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개인의 삶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의미와 그 사회적 성격에 대해 논하라. 

  정보화 시대를 맞아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첨단교육이 속속 실현되고 있다.
이 같은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수와 학생이 대면하지 않은 채 이뤄진다. 이러한
방법은 재가학습을 가능하게 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교육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장 이어야 하므로 아무리
전자매체를 이용한 통신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컴퓨터 통신을 이용한 교육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를 발상의 단계로 삼아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교육은 성공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1천자 내외의
글을 작성하라. 
  
  다니엘 벨은  대학의 사명 에 대하여 다음 네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1.문화와 학문의 계승 발전
  2.지식의 철학적 근거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는 일.
  3.전문 직업인의 양성.
  4.지식인의 사회활동과 봉사를 지원하는 교육. 
  만약 이것이 우리 나라 대학의 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 글쓴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 보라. 만약 우리 나라
대학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점이 그러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후 글쓴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 보라. 

  최근 들어 대형 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부실공사 때문이라는 진단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 관리의 소홀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모다 근본적인 원인인지를 설명하고, 그러한
원인분석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해결 방안을 1천자 내외로 제시해 보시오.
(원인을 분석할 때 상대편의 논리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세워 나갈 것)
  
  컴퓨터는 이미 우리의 생활 깊숙히 파고 들어서 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기본생활조차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이 되어 있다. 그 반면에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컴퓨터의 역기능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상상하는 컴퓨터의 역기능 이라는 주제로 1000자 이내의 논술문을 작성하라. 
  
  유비무환의 교육적 의미를 논술하라. 다음  출전 내용을 심사숙고하면서
구체적 사례를 들어 1000자 이내로 논술하라. 
   출전 
  서경에 이르기를  편안이 있으면서 위태로움을 생각하라  하였나이다. 잘
생각하면 대비가 있게 되고 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사옵니다.

  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드러낸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문학은 어떤 형태로든 당대 사회를 반영하며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입장 가운데 어느 한쪽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하나의 입장에 서서 다른 입장을 비판하되 작품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논술해 보라. 또 이 둘의 통합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매개될 수 있는지 역시 작품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논술해 보라. 

  표에 나타난 사실을 설명하는 글을 작성하라. 
  표 생략 - 이해 어휘량의 발달

  뭉쳐야 하나, 흩어져야 하나
  해방후 이승만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고 호소하면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드디어 권력이
분산되는 지방자치제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제 우리는 뭉쳐야 할 이유와
흩어져야 할 이유를 제시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피는 심장으로 모였다
모세혈관으로 흩어진다. 그렇지 못하면 생명체는 죽고 만다. 
   개요  
  1. 뭉쳐야 할 이유와 장,단점을 실례를 들어 제시할 것.
  2. 흩어져야 할 이유와 장,단점을 실례를 들어 제시할 것. 
  3. 자신의 뚜렷한 입장을 제시할 것. 

  이런 문제들을 보면 더러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도 있고, 요란한
일본한자말과 일본말법으로 써 놓은 글도 있고, 공연히 덧붙여 놓은 말도 있고,
쓸 것을 너무 지나치게 한정해 놓은 것도 있지만, 대체로 보아서 역시 이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도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우선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고등학생으로서는 쓰기가 어렵고, 더구나 2백자 원고지 다섯 장
정도로 쓰는 논설문으로서는 맞지 않고 아무래도 대학생들이 길게 쓰는 논문
주제로나 되어야겠다는 것이 적지 않아, 이런 논제들을 신문에서 보고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겠나 싶다.
  또 한편, 좀 딴 이야기 같지만 이렇게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게
풀이해 놓은 논제를 보니 학생들이 쓰는 공책(노트) 생각이 저절로 난다.
학용품을 파는 가게에 가면 온갖 공책들을 벌여 놓았는데, 그 공책
겉장(표지)들은 한결같이 울긋불긋한 그림과 글자들로 꽉 차 있어 도무지 글자를
적어 놓을 자리가 없다. 그것을 사서 쓰는 학생이 무엇에 쓰는 공책이란 것을
겉장에 적어 둘 자리가 없는 것이다. 몇 해 전 세계 각국의 공책을 모아 전시해
놓은 곳에 가 보았는데, 외국의 공책은 어느나라고 이렇지는 않았는데, 우리
나라 공책만 요란한 겉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공책 겉장에 빈 자리를 두면
성의없이 만들어 놓았다고 할까봐 그것을 사서 쓰는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장삿속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이 바로 이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 아닌가?
무엇이든지 지시하고 어디로 끌고 가려고만 하고, 아이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다. 모두지 제 생각대로 갈 길을 찾아갈 수 있게 해 주지
않는다. 글쓰기만 해도 하필 논술문만을 쓰게 하고, 쓰는 주제도 정해 주고 쓸
내용까지 가르쳐 주어서 그것을 쓰게 한다. 이래서 어떻게 글쓰기로 사람의
마음을 키워살 수 있겠는가? 
   뭉쳐야 하나, 흩어져야 하나  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는 데 따라 이런 문제를 낸 모양인데, 그토록 기다렸던 이 제도가 이제
겨우 실시되는 마당에 어째서 이 제도를  뭉쳐야 하나, 흩어져야 하나  하는
눈으로 보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하는지 좀 이해가 안된다. 대관절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쓸 수 있도록 하지 못하는 논술고사라면 얻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잃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들도 이런
실상을 알아서, 제도라는 줄에 걸려 스스로 목을 매지는 말았으면 한다. 

    어떤 말로 써야 하나? 
  논술, 곧 주장하는 글은 어떤 말로 써야 하나 하는 것은 앞에서 충분히 말해
놓았다. 여기서는 신문에 잘 쓴 작품으로 뽑힌 학생들의 글을 가지고 좀
생각하고 싶다. 
   내가 만약 시장이 된다면  이란 논제가 있었는데, 이 논제에서 한문글자로 
시장 이라 쓴 것 말고는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왜 한글로 시장이라
쓰면 될 것을 한문글자를 고집해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제목은
초등학생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같은 제목이라도 초등학생이 쓰는 것과 고등학생이 쓰는 것은 많이
다르다. 초등학생이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내가 시장이 된다면  .. 하고 쓸
때에는 현실보다도 재미있는 상상의 세계에서 마치 동화속의 살미이 된 기분으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그럴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현실이라고
생각해서 시장이 할 일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제목으로 쓰게
되면 초등학생보다 고등학생이 더 어렵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최우수작에 뽑힌 글이다. 

    내가 만일 시장이 된다면 
  전주 전일고 최강
  예로부터 전주는 맛과 멋의 도시로 이름이 높았다. 한때 후백제의 수도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화가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해방
전에는 전국 6대 도시에 들었지만 산업화 이후 정부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이제
전국 14대 도시 안팎 수준이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시장이 될 경우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시의 경제 능력이 시민의 삶과 직결되는 만큼 전주지역의 경제적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겠다. 이제까지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전주는 경제력이 매우 약하다. 따라서 정부 예산의 확대 편성과 각종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또한 오염되지 않은 수려한 자연 환경과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을 활용해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다음으로 전주는 지방이기에 다른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삶의
질이 낮다. 따라서 전주를 멋과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만들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전주 대사습 놀이나 풍남제 등의 문화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또한
시립예술단을 구성하여 예술 관련 행사를 적극 유치하겠다. 즉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문화 정책의 역점을 두겠다. 
  마지막으로 서해안 시대를 맞아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즉 전주를 국제 도시의 위상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지,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또한 계획중인 호남 고속 전철의 전주 통과를 관철시킬 것이며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려 도시의 교통 상황을 개선하여 국제 도시로서 손색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전주는 지금 발전과 퇴보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때에 내가 전주 시장이
된다면 경제력 향상, 문화 도시 조성, 서해안 시대 대비라는 공약을 실천해
과거의 번영을 되찾을 뿐 아니라 국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하겠다. 
  
  이 논제의  유의사항 에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할 것
이라 했고, 때마침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을 선거하는 날을 앞둔 터라,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저마다 선거 공약을 광고하고 있었기에 이런 논술 제목을
내어준 것은 아주 알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글을 보면 글쓴이가 있는 전주시의 행정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주장을 학생으로서는 아주 놀랄 만큼 잘 해 놓았다. 
  그런데 문장에서 쓴 말을 살피면 그다지 바람직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 역시
이것은 학생의 몸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고 어른들의 글말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은 모두 여섯 문단으로 짜여 있는데, 서론이라 할 첫째 문단에서는 말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 행정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 둘째
문단부터는 어른들이 사회문제나 행정 문제를 글로 쓸 때 늘 쓰고 있는
한자말체의 말로만 되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해 놓은  자기 자신의 말 이
아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결국 이런 행정 공약이란 것이 진정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시장 후보자들이 다투어 발표해 놓은 것들을 보고 그것을 가려내어
썼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학생으로서는 이 이상으로 할 수 없다. 이래서
논술고사의 근본 문제를 여기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글에서 좀 어수선하게 되어 있는 말이나, 어른들의 글말이 되어
있는 말들을 대강 들어 보겠다. 

  전주의 발전을 위한 공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공약을 말하고자)
  직결되는 (바로 이어지는)
  산업 시설의 미비나 정부 정책에서의 소외로 (시설이 모자라거나 정부
정책에서 따돌려져)
  기업과 공장 유치를 적극 추진하겠다. (공장을 적극 끌어 오겠다.)
  수려한 (아름다운,빼어나게 아름다운)
  문화 유적을 활용해 (살려)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켜 관광 수입을 증진시키겠다. (활발하게 해서 -
올리겠다)
  대도시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대도시에 대면 문화가 뒤떨어져)
  풍남제 등의 문화 행사를 활성화시키겠다. (풍남제와 같은 문화 행사를
활발하게 하도록 하겠다. 더욱 풍성한 시민의 잔치가 되도록 하겠다.)
  적극 유치하겠다. (끌어들이겠다.)
  삶의 질 향상에 (질을 높이는 일에)
  역점을 두겠다. (힘을 모으겠다)
  전주를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전주가 중심이 되는 일을 하는)
  위상을 지니도록 (모습을 지니도록)
  각종 부대 시설 및 휴식처, 편익 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겠다. (여러 가지 딸린
설비와 쉼터, 편리하고 유익한 시설)
  교통상황을 개선하여 (사정을 고쳐)
  기로에 서 있다. (갈림길에 서 있다)
  조성 (만들기)
  노력을 경주하겠다.(힘쓰겠다)

  행정을 맡은 사람들이 시민들 앞에서 하는 말은 쉬울수록 좋다. 더구나
고등학생이 행정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면 지금까지 어른들이 해온
말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이 하는 말로, 책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일상의 말로 하고 글도 그렇게 써야 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무슨 말
무슨 글이든지 어려운 말로 쓰고 있는 것은 모조리 가짜고 속임수라고 보면 틀림
없다. 
  아이들이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어른들이 그런 말을 억지로 쓰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을 어른들의 글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고, 또 바로 문제를 낸 글에서 어려운 말로 지시하기 때문이다. 신문에
나온 논술 연습 문제가 거의 모두 어려운 말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들어
놓은 많은 보기로도 알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난번 대학입시에서 실제로 나왔던
문제를 두어 두어 가지 들어 보기로 한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주요한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소비는 개인의
물질적,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를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양식이다. 국가간, 계층간의 심한 소득격차에 의해서 삶의 질과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소비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있다. 현세인들은
과거의 어떤 세대보다 풍요로운 소비 위주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 한편 경쟁의
원칙은 오늘날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거나 기존의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습득한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계속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해서 설명하기 곤란한 불확실하고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작성요령 
  1. 위의 예시문을 참조하고, 다음을 논제로 삼아 논술문을 작성하시오. 
  논제 :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건강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2. 아래의 두 논점을 균형있게 관련지어 논술하시오. 
  논점1 : 소비사회의 문제 
  논점2 : 경제사회의 문제 

   유의사항  
  논제의 성명을 쓰지 말 것 
  글의 길이는 빈 칸을 포함하여 1,200자 안팎이 되게 할 것.
  예시문 속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지 말 것. (고려대학교)

  이 논제를 설명한 글에서 고등학생들이 그 뜻을 모르는 낱말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학생들이 알고 있는 말로 적어 놓았다고 해서 잘 되었다고 볼 수
없다. 글을 쓰도록 지시하는 글은, 글을 쓰게 되는 학생들이 보통 입으로 하는
말로, 그런 말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될 수 있는대로 늘상 입으로 지껄이는
쉬운 말로 쓰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학생들이 쉽게 받아들여 글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또 낱말 하나하나는 그 뜻을 알지만, 글말이 많이 들어
있으면 글 전체의 뜻을 제대로 잡기가 힘든다. 설혹 애써서 전체의 듯을
잡았다고 해도 이제부터 써야 할 글을 또 그 모양의 글말로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니, 이래서도 못 쓰게 되고, 쓴다고 해도 남의 글 흉내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위의 문제에서 밑줄을 친 말들이, 좀더 쉽거나 깨끗한 우리말로 바꾸어 써야
할 글말이다.  예시문 과  논제 만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서 다음에 다시 써
본다. 밑줄 친 말만 다듬지 않고 다른 말도 더러 고쳤다. 

   예시문  
  소비와 경쟁은 흔히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라고 한다. 소비는 사람마다 가진
물질과 정신의 욕구를 채워줄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틀을 지탱해 주는 삶의
중요한 방식(모습)이다. 나라 사이, 계급층 사이에 소득의 차이가 아주 심해서
삶의 바탕과 기본되는 권리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지난날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온갖 물건들을 사 쓰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지난날의 어떤 세대보다 넉넉하게 써 없애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 경쟁은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퍼져가는 모습을 보인다. 경쟁의
대열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배워 얻거나
이미 있는 사회조직을 바꾸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갑자기 달라져
가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배워 얻은 경험이나 지식의 수명은 자꾸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지난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확실하지 않은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논제 : 매우 급하게 바뀌어져 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정도면 조금 나아진 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다음 또 하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은 공간적으로는 물론 시간적으로도 고립되어
형성될 수 없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평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보다 나은 미래를 구상하면서 현재를 살아 간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이러한 유기적 연결성을 논의의 축으로 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하라. (서울대학교)

  이 논제는 무슨 말인지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몇 번이나 읽게 되는데,
결국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이다. 왜 이렇게 요란한 말을 늘어놓았는가.
밑줄을 친 것이 일본말법이거나 쉽게 써야 할 말들이지만 그것만 고쳐서는
안되고 글 전체를 새로 써 보았다. 다음에 고쳐 쓴 글과 견주오 보고 글이
얼마나 달이 느껴지는지, 그런데 글뜻이 달라진데가 있는지 살펴보라.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혼자 살 수 없다. 우리는 지난날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 불려줄 더 나은 앞날의 이러한 긴밀한 연결을
생각하여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말해 보라. 

  앞에 적어 놓은 원문에 대면 많이 짧아졌고,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것도 대부분 아무 쓸데도 없는 말이다. 꼭 해야
할 말은 마지막에 나오는 말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적어 보라  하는
것뿐이다. 다른 말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공연히 늘어놓은 군더더기이다.
그것을 그렇게 이상한 말로 늘어놓은 것이다. 만약 이 논제를 내가 쓰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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