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30년(3)
-이영신 역사소설
----- 차 례 -----
1. 국정의 제1지표
2. 경제 재건의 걸림돌
3. 4월 단체의 횡포
4. 너그러운 심판
5. 중구난방 통일론
6. 4월 위기설, 3월 위기설
7. 장면은 폭력적 집권을 거부한다
8. 일년 만에 3차 개각
9. 쿠테타의 始末
10. 위기의 장군들
11. 민주당 정권의 패망 원인은?
1. 국정의 제1지표
누가 세월에 매듭을 지어 놓았을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삼백예순닷새가 걸린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은인으로
간주해야 마땅하다.
이 삼백예순닷새를 다시 열둘로 나누고
그 열둘을 다시 평균 서른 날로 나눈
사람의 지혜는 그저 경탄스럽기만 하다.
그랬기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세월을 약으로 치부하며 실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세월에 매듭이
우주여행을 할 만큼 과학이 발달한 오늘에
있어서도 어느 누구도 매듭지어진 세월에
수정을 가할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너무나 과학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도 새 세월이
시작될 때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새 세월에 희망을 거는
말을 한다. 세월에 매듭을 지은 사람이
정치하는 사람들더러 선량한 백성을
회유하는 데 써먹으라고 세월에 매듭을
지어 놓은 것을 아닐 텐데, 그것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활용하고
있으니 아마도 지하에 있는 당사자는 꽤나
기가 찰 노릇일 게다.
그야 어쨌든 4.19로 어수선했던 1960년
새해는 신축(辛丑)년이었다. 한데, 새해를
맞으면 관공사는 새해 첫머리 사흘 동안을
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장면을
위시한 각료들은 쉬지를 않았다.
내각책임제는 소걸음처럼 느린
정치제도이니까 가능하면 시간을 아껴가며
능력있는 정부를 만들어 나가자 해서였다.
아닌게 아니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각책임제였던
만큼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민의를 완전히
수렴한 다음에라야 가능했기 때문에
국정처리가 밀려 쌓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새해 첫날에 제일 먼저 우리가
처리해야 할 문제는 군(軍) 처우개선
문제에 대해서외다. 그동안 자유당
정권에서는 재원의 빈약을 이유로 군대의
그래서 새 공화국에서는 새해 첫머리에 이
문제를 처리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국토방위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해줍시다."
국무회의가 열려 군의 처우문제를
상정시켜 놓은 장면은 이렇게 말했다.
군 처우개선 문제라고는 하나 직업군인의
봉급을 대폭 올려주지는 못했다. 그건 물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돈이
없었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다. 국고가
바닥이 나 있었던 것이다. 자유당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치루며 국고금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긁어서 선거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고만 비어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방, 그러니까 정부 각 부처마다 빚을
것이다. 이 빚만 갚으려 해도 몇 년이
걸려야 청산이 될지 아득하기만 했다.
이런 판국에 직업군인의 봉급을 올려주면
얼마나 올려주겠는가. 하지만 정부는
국토방위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직업군인의 생활보장을 위해서
성의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날 각의에서는 군인의 처우개선
문제만을 처리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무회의를 연 김에 <부정선거 처벌법에
관한 법률>도 공포를 했다. 이 법을
공포하기에 앞서 장면은 이런 소감을
피력했다.
"나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소급법 같은
것을 만들어 정치보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급법을 만든 생각을 하면 오직
부끄럽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소."
이 말은 장면의 가식 없는 양심의
소리였다. 이승만 정권은 4.19라는
민중혁명에 의해 무너졌지만 정치개혁은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민주주의의 창달로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장면이 지향하고 있던 정치이념이었다.
그런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상이학생들의 국회의사당 점거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정치보복이라 할 수 있는
<부정선거 관련과 처벌법> 같은 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로서는 가슴을
앓을 만도 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면이 부상학생들의
분노를 이해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돼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물며 배움의 길에 있던
학생들이 아니던가. 적에게 불구가 됐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겠는데, 그들은 적도 아닌
동포의 손에 의해서 불구의 몸이 되지를
않았는가. 어찌 이성을 잃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할 만한 폭거를 저지를 만큼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점으로 볼 때에는
기성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던 민주당 정권이었던가? 학생들이
순수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목숨을 걸고
순수한 정의감을 불사르지 않았던들 민주당
정권의 창출이란 요원하기만 한 일이었다.
이렇듯 학생들에게 큰 빚을 진
장면으로서는 덮어놓고 법을 따를 수만도
장면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면의
고민은 정치형태의 이중성 때문에 더욱
크기만 했던 것이다.
국무회의를 끝내자 장면과 그의 각료들은
간담회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적자재정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럴 때에 외무부 직원이 달려와
외무부 장관 정일형에게 쪽지를 건네
주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장관님, 일본 정부에서 경제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통고해 왔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왜 갑자기?)
정일형은 잠시 일본의 속셈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 다음 그 쪽지를
옆에 앉아 있는 장면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일본 정부가 우리 민주당 정권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쪽지에 눈길을 주고 있던 장면은, 그
말을 듣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형이 물었다.
"환영한다고 통고하라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동의하는 장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궁즉통이라고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정일형의
말마따나 일본 정부는 이제 한국의 장면
정권이 안정이 됐으니 경제사절단을
파견해서 한국의 경제 재건을 도와주면서
<장면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구상할 법도 한 일이었다.
척하면서 우린 우리의 실속을 차리도록 할
테니까.> 어쩌면 장면은 이런 생각이 들어
부지불식간에 미소를 지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장면이나 그의 각료들은 사회도
이제는 어지간히 안정됐겠다, 그래서 신정
연휴까지도 반납해 가면서 국정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새해 첫머리부터
엉뚱한 데서 사고가 빚어져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임된 오완수(吳完洙)가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소급법을 만들어서 과거의 문제까지
들추어 가지고 처벌하려 들다니, 이것은
남기게 되면 그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될
우려가 있어. 법률을 배운 사람으로서
소급법을 적용하는 재판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야!"
오완수는 이런 이유를 내세우며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별재판소나
특별검찰부의 장은 국회에서 투표로써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민의원에서는 상이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원흉들에 대한 재판을
서둘러야 되겠다 해서 묵은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31일의 본회의에서
특별재판소장에 문기선을, 그리고
것이다.
오완수는 미군정 때 대구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대쪽 같은 법조인이었다.
그를 특별검찰부장으로 민 것은 민주당
소장파인 이병하(李炳夏)였다. 민의원
원내총무이기도 했던 그가 오완수를
특별검찰부장으로 추천을 하자, 소장파
전원이 밀어줌으로써 오완수는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될 수가 있었다.
그랬는데 막상 선출해 놓고 나니까
취임을 거부하고 나섰으니 민주당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체면도 체면이지만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공소시효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았었다. 조서를 다시 꾸미고
기소를 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런
처지에 오완수가 특별검찰부장 취임을
않을 수가 없었다. 상이학생들이 또 몰려와
부정선거 원흉 처단이 늦어지는 것을
힐책이라도 하는 날엔 변명할 길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거중 조정에 나서야겠군.)
민의원 의장 곽상훈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1월 5일 이병하가 오완수와 더불어
삼청동에 있는 의장 공관으로 찾아왔다.
"아이구, 이거 반갑소. 그렇잖아도 내
한번 선생을 만나야 되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고마운
말씀 뭐라 사뢰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곽상훈은 오완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제가 오늘 의장님을 방문한 것은 국회를
존중하는 뜻에서외다. 불초한 나 같은
황송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저는
법률가로서의 양심상 검찰부장에 취임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퇴서를 써
갖고 찾아뵈 온 것이외다."
오완수는 안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끄집어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손을
곽상훈이 황급히 잡았다.
"선생, 선생의 법률가로서의 그 고매한
자세는 나도 존경을 하오. 한데 우리가
소급법을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은 아니지
않소. 저간의 사정은 선생도 익히 잘
아시는 바이고......."
"아니외다."
이완수는 곽상훈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장님, 상이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소급법을 만들었다 그 말씀이신데, 그러면
만들라고 하면 그 법률도 만들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되는 게 아니겠소?
그래가지고 어찌 진정한 민주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단 말이외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는 소급법은 정치적
보복이라 믿고 있기에 부장 취임을 승낙할
수가 없소이다."
오완수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러한
오완수의 자세에 곽상훈은 오히려 속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감투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정치하는 무리들에 비해 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법조인인가 말이다.
그러기에 곽상훈은 더욱 오완수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대안을 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단
검찰부장에 취임하셔서 검찰부 구성만 끝내
활동을 개시할 수 있겠소이다만?"
"소급법 자체가 불법인데도 그 불법을
자행하려는 기관에 나더러 협조하란
말씀이시오? 내 양심을 속여 가면서
말이외다!"
오완수는 어이없다는 듯 허허허 웃기까지
했다.
오완수가 이렇게 나오자 곽상훈은 입맛이
썼다.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도
자꾸만 그에게로 끌리는 미련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저런 사람을 검찰부장에 기용을 해야
하는데.)
곽상훈은 기회가 있으면 장면에게 강력히
추천해서 오완수를 등용하도록 해야겠다고
보았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결국 곽상훈은 1월 12일(1961년)
민의원을 소집해서 김용식(金龍式)을
새로이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자꾸만 오완수에게 끌리는
마음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설 무렵의
실업자수는 3백만 명을 상회하고 있었다.
물론 이 숫자는 완전실업에 잠재실업까지
합친 숫자였다. 남한 전체 인구의 거의
1할이 실업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장면은 집권을 하자,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제 1지표로 내세웠다.
초미의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6.25 남북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미국의 원조로
파괴돼 버린 산업시설을 복구하기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새발의 피나 다름없던 미국의 원조로
산업시설을 복구한다는 것은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실업자가 3백만 명에까지
이르고 있었던 이유는 이런 까닭에서였다.
장면이 집권을 하자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이 급하다고 해서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최고지표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재간이 있어서 이런
지표를 내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목표를 세워 놓고 여기에 정치력을
총집중시켜 보자 해서였다.
했으나 참으로 막연하기만 했다. 정부가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주자면 그
방법은 산업을 일으켜서 일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것이었는데, 돈이 있어야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 게 아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고는 이미 바닥이 나
있었고, 국고만 바닥이 나 있던 것이
아니라 정부의 빚도 산더미 같았다. 자유당
정권이 어디에다 돈을 쓰느라 그렇듯
엄청난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민주당
정권이 그 모든 빚을 떠안고 갚아주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외국에서
재정차관을 얻어서 사업을 벌여보려고 해도
빚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돼야 외국도
차관을 주는 것이었던 만큼 외국의
재정차관을 얻는다는 것은 한낱 몽상에
절망적이었다.
여기에 장면 정부를 괴롭히는 일이 또
제기되었다. 미국 정부에서 <환율을
올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를 올리라고 강요했던가? 1,000대 1로
올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1960년 현재
환율은 600대 1이었다. 그것을 갑자기 66%
이상이나 올리라고 강요하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재무부 장관 김영선은 미국측과 참으로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했다.
"환율을 올리게 되면 인플레가 돼서
가뜩이나 어려운 균민 경제생활을 더욱
압박하게 될 텐데, 어떻게 갑자기
66%씩이나 올린단 말이오?"
배짱도 튕겨보고 또 때로는 읍소도
태도가 워낙 강경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에서도 어쩔 수 없이 1960년 10월
25일에 환율을 1,000대 1로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환율이 오르고 보니 국민
경제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측에서도 환율을 올려야 할
요인이 생겼기 때문에 올리라고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겠지만, 이 요인이라는 것이
자유당 정권 때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요인이 제기되더라도 이승만은
미국의 압력을 배짱 하나로 물리쳤었다.
"좋소. 환율을 올린 테니 미국의 원조를
배로 올리시오. 그러면 환율 인상 문제를
고려해 보도록 하겠으니."
이승만은 이렇게 배짱을 부리며 미국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면은 그런 배짱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배짱이 없으니 결국은
미국의 강요를 물리치지 못하고 끝내는
저들의 요구대로 올려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위기를 무슨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단
말인가?)
장면은 골치가 아팠다.
(나라살림을 꾸려간다는 것이 이렇듯
어려운 일이던가.)
절로 탄식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지금의 재정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일 회담을 서두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한.일 회담을 열어서 대일
청구권 문제만 타결되면 지금의 재정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을
이것이 일석이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건의를 한 사람은
오위영(吳緯永)이었다. 그 밖에도 이유는
또 있었다. 일본은 지난날의 한민족의
원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일본을 외면하고 살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첫째는 자유세계의
단결이라는 국제정치적인 요망이
언제까지나 원수 사이로 놓여 있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런 요망으로 해서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는 것은 한국민 자신보다도 바로
미국이었다.
또 한국의 입장으로서도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일본과 선린관계를 맺어 놓았다고
우리에게는 국교정상화의 전제 조건 중의
하나인 <재산청구권>이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어느 정도의 선에서 이
<재산청구권>을 인정해 줄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장은 플러스가 될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위영이 <국교정상화>라는 대의명분하에
한.일 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촉구한
이면에는 그 나름대로의 속셈이 따로 또
있었다. 그것은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오위영은 일본땅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일본 재계, 정계의 거물들과도 자주 접촉을
했고, 어느 부분에 투자를 하라고 하면
일본 자본가들이 응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타진해 보았다.
재개를 촉구하면서,
"민족자본이라는 것이 없는 우리의
형편으로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경제를 부흥시키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앞서
해결해야 할 것은 국교정상화입니다.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고는 일본 자본가들이
투자할 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지다" 하고
곁들여 헌책을 했다.
장면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일본 정부가 장면 정권의
탄생을 축하해 주고자 외무대신
고자까(小坂)를 보내는 등 성의를 보이는
것을 보자 잘만 하면 한.일 회담은
조기타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일본 정부가 외무대신 고자까를 한국에
정권이 성립된 지 꼭 열흘 만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친선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외무대신을
파견했던 것이다. 참으로 발빠른 조치였다.
한.일 회담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네 번에
걸쳐 열렸다. 그러나 회담은 질질 끌기만
했을 뿐 양국간에 무엇 하나 타결을 보지
못했다.
한.일 회담이 막을 올리자 한간에서는
<이승만이 일본 정부에 대해서 32억 불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낭설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낭설이 소문으로 나돌게
진행된 한.일 회담에선 <얼마를
내놓으라>고 구체적으로 액수를 제시했던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진행된 한.일
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측에 제시했던
요구사항은 다음의 8개항이다.
(1) 조선은행을 통해서 반출된
지금(地金) 24,963,361그램 및 지은(地銀)
675,417,722그램을 반환하라.
(2) 1954년 8월 9일 현재의 일본 정부의
대 조선총독부 채권을 반제하라.
가. 체신국 관계
1. 우편저금, 진체(振替)저금,
위체(爲替)저금 등
2. 국채 및 저축채권 등
4. 해외 위체저금 및 채권
5. 태평양 미육군사령부 포고 제3호에
의해서 동결된 한국 수취금(收取金)
나.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인이 한국
각 은행으로부터 인출한 예금액
다. 한국에서 수입된 국고금 중의
이부자금(利付資金)이 없는 세출에 의한
한국 수취금 관계
라. 조선총독부 도쿄(東京) 사무소의
재산
마. 기타
(3) 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으로부터
진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청구.
가. 8월 9일 이후 조선은행
본점으로부터 재일본 도쿄 지점에 진체
또는 송금된 금품
금융기관을 통해서 일본에 송금된 금액
다. 기타
(4)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권 사무소가 있던
법인(法人)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가.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965호에
의거 폐쇄청산(閉鎖淸算)된 한국 내
금융기관의 재일 지점 재산
나. 연합군 최고사령부 지령 965호에
의거 폐쇄된 한국 내 본점 소유법인의 재일
재산
(5) 한국 법인 또는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공채,
일본 은행,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반제청구
가. 일본 유가증권
다.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
라.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
마. 한국인의 대 일본 정부청구
은급(恩給)관계
바. 한국인의 대 일본인 또는 법인 청구
(6) 한국인(자연인.법인)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7) 전기 제(諸) 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제 과실의 반환청구
(8) 전기의 반환 및 결제의 개시 및
종료시기에 관한 항목
우리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한.일 회담은
아주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어떠한 태도로 나왔던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한국에서
빼앗아간 물건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금과 은이었다. 금이
24톤이나 되었고, 은이 675톤이나 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것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일본 정부는 뭐라고 했던가?
"무슨 당찮은 요구를 하고 있소? 당시의
조선은행법 제 71조 7항(지금, 은의 매매
및 화폐의 교환)에는 금과 은을 외국
화폐로 매매할 수 있는 규정이 있었단
말이오. 그 법규에 따라 우리 일본은 일본
화폐를 조선은행에 지불하고 금.은을
사왔던 거요. 우리가 무상으로 가져왔거나
또는 채무를 지고 가져왔다면 반환을
사온 것인데 어째서 반환하라는 거요?"
일본 정부는 돈을 주고 사왔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한국은 우리가 지불한 그 돈으로 세계
시장에서 석유다, 휘발유다, 고무다
해가지고 사다 쓰지를 않았소? 그래놓고
이제 와서 금.은을 돌려달라? 좋소, 돌려
드리지요. 그럼 그때 우리가 준 일본
화폐를 돌려주시오. 그러면 금.은을
돌려주도록 하겠소."
일본 정부로서는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일이었다. 총독정치시대에 조선은행권이
아닌 일본 화폐로 셰게 시장에서 물건을
사왔던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해 본
일이 없지만 한.일 회담 한국 대표들은
제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었다.
한.일 회담이 막을 올렸던 것은 6.25
동란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0월 20일이었다. 이때의 대표단은
수석대표가 양유찬(梁裕燦)이었고, 교체
수석대표는 김용식(金溶植)이었다. 여기에
신성모, 갈홍기(葛弘基), 임철호,
유진오(柳鎭午), 임송본(林松本), 홍진기
등이 대표로 참가해서 활약했는데, 이들
대표들은 그런 중요한 회담에 참석하면서도
무엇 하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었다.
6.25 동란통에 기본 자료가 될 만한 걸
모두 분실해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렇다면 회담을 서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료를 충분히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돈을 주고 금.은을 사왔다.
이제와서 금.은을 돌려달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냐?" 하고 일갈하자, 그만 끽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는 궁색한 처지에서
무슨놈의 회담이 성사될 수 있겠는가?
일본측은 한국 대표들의 입을 아예 봉해
버리기 위해 이런 궤변도 늘어놓았었다.
"금.은을 돌려달라는 것을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사다 먹은 쌀도 내놓으라고
주장할 것 같소. 그래 그것을 사다가 먹은
사람들은 모조리 죽고 없는데, 어디 가서
토해 내라고 해야 옳겠소?"
한국 대표들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였다.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은행 지하실
창고에는 일본 화폐가 산더미처럼 쌓여
유엔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그놈의 돈이라도
있었더라면 모조리 일본으로 싣고 가서 <자
너희 나라 돈 여기 있다. 이걸 돌려 줄
테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져간 금.은을
내놔!> 이렇게 호통을 쳐볼 만한
일이었는데,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 조선총독부 채권의 반제청구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나왔던가? 여기에는 각종
국공채(國公債), 체신국 관계의 각종 저금,
간이 생명보험 등을 위시한 기타 여러 가지
채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측은,
"좋아요, 갚아 드리지요. 한데, 우리
나라에는 거기에 관한 증빙서류가 없으니
반제를 요구하는 당신네가 증빙서류를
일본 정부는 증빙서류를 요구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그것을 제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38선으로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있으니
절반쯤은 북한에 있을 것이고, 또 38
이남에 있던 것은 전쟁으로 모조리
잿더미가 돼버렸을 것이 틀림없는데
<제놈들이 무슨 재간으로 증빙서류를
제출하랴> 하고 아주 뱃심 좋은 속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대표단이,
"당신네들이 그에 대한 증빙서류를 갖고
있지 않을 리가 없다. 증거 인멸을
획책하기 위한 그런 엉뚱한 수작은
늘어놓지 말라"고 항면하자,
"우리는 우리 동포들하고 관련된
피우는 것이었다.
징병, 징용으로 끌려가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에 대한 보상 요구에 있어서도
그랬다. 도대체가 한국 대표단은 여기에
대한 기초 자료조차 준비하지를 않았었다.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보상을 청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고 보니 회담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질질 끌면서 그저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때에 진행되었던 네 차례에 걸친
한.일 회담의 전모이다.
한.일 회담에 관한 한, 민주당 정권도
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유당 정권과
비교해 볼 때 도토리 키재기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장면은 일본 정부가 외무대신을
<친선사절>로 보냈다는 사실 한 가지에만
고무되어 있었다. 일본의 고위관리가 한국
땅을 밟기는 해방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승만의 대일 자세는
강경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일본 외무대신의
한국방문은 그것이 아무리 <친선방문>을
내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선방문을 표방한 일본 외무대신의
한국방문은 장면을 다분히 고무시켰다.
(일본이 천선사절을 보내면서 우호를
가지고 임할 것이 틀림없을 것 같구먼.)
일본 정부가 친선사절을 보냈다고 해서
한.일 회담의 장래에 대해서 이런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판단이었다.
서울을 방문한 일본 외무대신 고자까는
한국을 방문한 그날 오후 외무부로 찾아가
한국 정부의 외무부 장관인 정일형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자까는,
"우리 일본 정부는 양국간의 돈독한
우의증진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일.한
회담을 열어 여러 가지의 현안문제를
신속히 풀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소"라고
했다.
이에 정일형은,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조속한
한.일 회담을 재개해서 양국간의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도록 해 보십시다"라고
대꾸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한.일 양국간의
국교정상화가 최우선 과제인 모양이라고
판단했던 고자까는 엉뚱한 제의를 했다.
"우리 일본 정부에서는 먼저 일.한 회담
개최에 앞서 주한대표부를 설치했으면
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동의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한국에서도 일본에 주일대표부를 설치해
놓고 있으니 일본도 먼저 한국에 대표부를
설치해야 옳지 않느냐는 말투였다.
호혜평등의 외교원칙으로 보면 그건
당연한 요구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호혜평등의
얘기밖에 될 것이 없었다.
한국 정부에서 주일대표부를 설치한 것은
1949년 1월 14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주일대표부가 설치됐던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의 최고통치자는 일본
천황이나 수상이 아니라 바로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당시는
연합국의 점령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의 발효로써 비로소 주권을
회복했던 것이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체결한 어떤 조약이나 협정도 유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계속해서
주일대표부를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않다는 이유를 들어 주일대표부를
폐쇄하려면 먼저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맺은 조약이나 협정은 무효다>라는
선언부터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주한대표부 설치를 희망한 고자까의
요청에 대해서 정일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민의 대일 감정은 정부
차원에서 국교정상화를 바라는 만큼 그렇게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주한대표부 설치를 희망하기 이전에 먼저
일본 정부가 한.일 회담에서 성의를
보여주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 추진되었던 한.일
언중유골이었다.
또 이 자리에서는 앞으로 열릴 한.일
회담 때, 어떤 문제들을 토의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교환되었다. 고자까는
평화선 문제는 기필코 합의에 도달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정일형은
재일교포 북송문제.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청구권문제.문화재 반환문제 등도
똑같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 평화선 문제와
아울러 동시에 타결되도록 회담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일형.고자까 회담에서 이루어졌던
합의에 따라 제5차 한.일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1960년 10월 25일이었다. 장면 정권은
고려대학교 총장인 유진오가 처음부터
한.일 회담에 관여했던 점을 감안, 그를
엄요섭(嚴堯燮:주일공사),
유창순(兪彰順:한국은행 부총재),
김윤근(金潤根:변호사),
윤석헌(尹錫憲:외무부 장무국장),
진필기(陳弼基:외무부 통상국장),
문철순(文哲淳:주일대표부 참사관),
이상덕(李相德:한국은행 국고부장),
지철근(池鐵根:전 해무청 수산국장)
등이었다. 이밖에 4명의 전문위원이 수행을
했다.
이웃나라하고 선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빼앗은 문화재의
조속한 반환과 일본제국주의에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에 대한 보상문제 등을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한.일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회담을 해야 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본은 침략국이었다. 한민족에 피해를
준 나라였던 만큼 회담을 한다면 저들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회담을 열도록 해야만
옳았다.
서울에서 회담을 열도록 하되, 먼저 한국
침략에 대한 사죄부터 하고 회담을 열도록
해야만 했다. 일본 수상이 한국 침략에
대해서 사죄하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수상인 이께다에 앞서
수상이었던 기시(岸信介)는 1958년 5월
16일 야쓰기가즈오(矢次一夫)라는 민간인을
<사죄사절>로 이승만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야쓰기는 일본 정부의
사죄사절은 아니었다. 기시가 자기의
사죄사절이었다.
그런 절차 없이 한.일 회담은 열려왔다.
고자까가 친선사절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주무장관인 정일형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총리 장면이나 대통령 윤보선이 그를
접견했을 때조차도 <일본은 당연히
한국침략에 대해서 사죄를 한 연후에
회담을 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입밖에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만큼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해서 고개를 제대로 쳐들지
못하고 매양 저자세로만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니 예비회담이 열렸다고 해야
바람직한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예비회담이 열린 것은 1960년 10월
25일부터였지만, 12월 20일 일단 회담을
마감하기까지 네 개의 분과위원회를
이외에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네 개의 분과위원회란 1) 기본문제
분과위원회, 2) 재산청구권 위원회, 3)
어로.평화선 분과위원회, 4) 재일교포 법적
지위위원회 등이었다.
한데, 그것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회담 의제를 토의하는 동안 한국 대표들은
누구 한 사람 <일본제국주의에 끌려가
희생당한 사람의 보상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점차
치열해지기 시작한 1942년부터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 장정들을
저들의 탄광으로 또는 군수공장으로
끌어다가 희생을 시켰던가. 또 얼마나 많은
청년학도들을 끌어내다가 저들의
총알막이로 희생시켰던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숫처녀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끌어내다가 저들 왜군들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던가.
징병, 징용 또는 정신대로 끌려나가
희생당한 사람의 수가 어림잡아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었는데도 이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입밖에도 내비치지를 않았으니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어디 있었으랴!
물론 정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자료를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자료를 구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부에서 <일제시대에
징용, 징병, 정신대로 끌려나간 가정에서는
지체없이 신고하라> 했으면 그것으로
사전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가
무성의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이 열리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대표들은 한국 대표들을 농락하며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예비회담이 막 막을 올린
다음날이다. 일본 정부는 <너희 한국
정부놈들 엿 좀 먹어 봐라> 하는 듯이
재일교포 북송문제를 꾀하기 위해
북한대표와 별도의 회담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작태는 완전히 한국
정부를 무시한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어째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는가?
1948년 12월 12일의 유엔총회에서는 결의
대다수 국민이 거주하며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협의가 가능했던 지역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력을 갖는 합리적인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언하며 또한 동 정부는 선거민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에 의한 선거에
입각하고 있으며 동 선거는 감시위원단의
감시를 받은 바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한다>라고 천명했고, 또
일본은 1951년 9월 8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을 위시한
52개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에 있어 동 조약
제2조 (가)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명문화함으로써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땅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중에 북한으로 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의당 이 문제를 한국
정부와 의논해야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 정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총련에 의한 재일교포 북송사업이
개시된 것은 1959년 11월 14일부터였다.
당시 자유당 정권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엄중항의>를 하는데 그쳤고,
민주당 정권도 역시 한.일 예비회담이 막
막을 올렸을 때 북한과 재일교포
북송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자, 장면은
"이거 일본 정부가 또다시 재일교포
북송을 재개하고자 책동하고 있는데, 이걸
언제까지나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오? 뭔가 비상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시오?"
이 질문에 대해서 오위영은,
"저들 일본 정부의 행위는 완전히
대한민국을 무시한 행위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어떤
비상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를 응징하겠다고 전쟁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면서 엄중항의로 그치자고
했다.
여기에 맞장구를 친 것이 재무부 장관
김영선이었다.
"지금 우리가 한.일 회담을 진행중에
강경자세는 자제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압니다."
그는 행여 한.일 회담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치게 될세라 엄중항의로 의사표시에
그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민주당 정권이 출발과 함께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최고지표로 내세웠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들 민주당
정권이 이 목표의 구현을 위해 한.일
회담에 목을 매달고 있었기 때문에
<엄중항의>라는 소극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정부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을까. 아니면
수모를 당하면서도 한.일 회담을 성사시켜
청구권으로 받아온 돈으로 국민을 먹여
자세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민주당 정권은 물론 <엄중항의>에 그치고
말았음은 다시 부연할 필요도 없다.
예비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을 깔보는 짓을 또 한 번
저질렀다. 1960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수상 이께다 하야토(池田勇人)는
중의원(衆議院:한국의 민의원에 해당)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에 두 개의 정부가
있다는 인식하에 한.일 회담에 임하고
있다"라고 언명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놈의 개수작이란
말인가!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북한의 김일성
집단도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는
유엔에서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천명했고, 또 저들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인정한 이상에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 정부>라는
전제하에 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시켜 나가야 옳은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그것을 굳이 한국에는 엄연히 두
개의 정부가 있다고 운운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현실적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던 만큼
북한의 김일성 집단도 하나의 정권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국 정부를
초조하게 만들어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어
보자는 속셈에서였다.
진지하게 회담에 임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유당 정권을 상대로
회담을 진행시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냥
회담을 질질 끄는 지연전술을 썼다. 그
이유는 <한.일 국교는 너희 한국이 바쁘지
우리 일본은 바쁠 것이 없다> 해서였고,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장면
정권은 안정된 정권이 아니다. 언제 또
정변이 일어나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지
않느냐> 해서였다. 이래서 1960년 10월
25일부터 12월 20일까지 근 2개월 가까이
예비회담을 진행시켜 왔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제를 네 개의 분과위원회에서
다룬다는 것 외에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사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장면을 고무시키기에 족했다. 잘만
하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도 있고
경제 재건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면의 가슴속 구석에는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 때의
한.일 회담을 통해서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그렇게 앞날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통치권자가 바뀌기는 했다. 자유당
정권 때는 반일감정이 두드러졌던
이승만이었으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국가이익을 위해서라면 원한을 씻고
하고 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 정부의
대한 감정을 유리하게 유도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쩐지 장면의 마음은 다소
불안하기만 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도 <일본인은 간교하다>는
선입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5일 장면은 국무회의가 끝난 다음
외무장관 정일형을 조용히 불러
물어보았다.
"정 장관, 내무부에서 새해 1961년도에
각종 토목사업을 일으켜 69만 명의
실업자를 구제할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그런 재원이
없지 않소. 결국은 일본에서 받아낼
청구권을 재원으로 하고자 그런 계획을
회담의 장래가?"
"회담의 장래를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지연전술을 써온
것은 민주당 정권이 안정된 정권이 아니지
않느냐 해서였는데, 이제 우리 사회도
상당히 안정된 만큼 일본 정부도 진지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장면은 이 말을 듣자 적이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것이었다. 그는 한.일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여간 속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했으면 국민을 기아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정책이 가시화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집권 4개월이 흐르는 동안 경제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일 회담이 타결되기 전에라도 미리
얼마라도 청구권을 당겨 쓰는 방법은
없을까?)
마음이 너무 조급하고 초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일 회담이
지지부진하자 어느 사이에 자신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이런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얼마나 정부재정이 고갈돼 있었으면 이런
생각까지 품게 되었겠는가.
그런데 궁즉통(窮則通)이었을까?
오위영이 마치 조급하고 초조해하는 장면의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동안 한.일 회담은 별다른 진전이
없기는 했습니다만, 언제고 타결될 것만은
시간을 벌 겸해서 일본으로부터 민간차관을
들여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구권을 담보로 해서 말입니다."
오위영의 이 아이디어에 장면의 두 귀가
번쩍 틔어졌다.
"그것이 가능하겠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땅짚고
헤엄치깁니다. 청구권을 담보로 하는데
어찌 차관을 주려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인 것 같았다. 빚만 얻을 수
있다면 하루라도 속히 빚을 얻어 공장도
세우고 또 내무부에서 세운 토목공사도
추진하고 하면 국민의 가난은 점차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민간차관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재무장관과 협의해서 구체적인
그러자 오위영은 한 가지 제안을 또
했다.
"지금 재일교포 중에는 상당한 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본국에 투자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또 아예 그동안 모은 재산을
가지고 영구 귀국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욕구도
이루어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거야말로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구려. 우리로선 대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오? 그 문제도 경제각료들과
상의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주면
고맙겠소."
민간차관에 곁들여 재일교포 재산만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래서 장면은
1961년의 새해 첫머리에서부터 희망에
들뜨게 됐는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장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새해
1961년 1월 12일에 민.참 양원
합동회의에서 치사를 했는데, 이 치사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어느 한 개인이나 한 당파가 단독으로
이 나라의 당면한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개인이나 당파의 이해를 위하여 의식적으로
부정하는 태도와 고집을 취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가히 짐작할 수 있고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됨을 면하기 어려울
"이 위기의 첨단에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있어야만
하겠습니까?"라며 개탄했던 것이다.
도대체 윤보선은 뭘 가지고 난국이라
하고 위기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난국 또는 위기라고 할 만한
건덕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윤보선은 오늘의 시국이 난국이요,
위기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이래 지난 4개월 동안은 족히 난국이요,
위기라고 할 만하기는 했다.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데모가 계속되어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듯 극성스럽기만 하던 데모도
1960년 12월 중순이 지난 후에는 마치
의논이나 한 듯이 조용히 가라앉아 주었다.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 판국인데 뭘 가지고
난국이요 위기니 하느냔 말이다. 데모가
한창 줄기차게 벌어지고 있을 때
언론에서는 걸핏하면 <난국>이니 <위기>니
하고 써댔다. 그러던 언론도 데모가 제풀에
꺾이고 말자 일체 그런 낱말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터에 유독 윤보선만이
치사에서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낱말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뭘 가지고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거야? 대통령이 돼 가지고 마치 국민을
선동하는 따위의 낱말을 구사할 수가 있어?
남은 새로운 각오로 국정에 임할 자세를
가다듬었는데, 그런 말로 찬물을 끼얹을
수가 있어?"
온화한 장면도 윤보선의 연설을 듣고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할 얘기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얘기가 있었다. 특히 윤보선이 양원
합동회의에 나와서 연설을 한 이날은
민.참의원이 새해에 들어와 처음으로
개원을 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그저
의례적으로, <여러분 국가를 위해서 애
많이 쓰고 있소. 새해에도 여전히 국가를
위해서 애 많이 써 주시오> 이렇게 말하면
족할 일이었다. 그것을 국정에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난국이니 위기니 하며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것은 월권행위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로 그쳤다면 화를 내다가도 웃고
떴던 것이다. 뭐라고 했던가?
"우리는 별다른 의미에서 안정과 건설과
수습을 요구하는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정쟁의 휴전을 협정하지 아니하면 안 될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야에게 정쟁의 휴전을
촉구했던 것이다.
이날 국회가 파한 뒤에 장면은 각료
간담회를 열어 윤보선 발언의 속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석해 보기 위해
각료들의 소감을 물어보았다.
"대통령도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이니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하나 자연인일 때와 대통령직에 있을
때에는 나라 걱정을 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주요한이 먼저 소감을 말했다.
"난국이니 위기니 하는 낱말은 6.25나
4.19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쓰는 것이지
아무 때나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올시다.
대통령은 분명히 무슨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의식적으로 그런 험한 말을 골라 쓴 게
틀림없어요."
"나도 그런 인상을 받았소만 과연 그
속셈이 뭐냐, 그거요."
장면은 탄식을 했다.
"그분의 속셈은 너무나 뻔한 게
아닙니까?"
김영선이 이렇게 전제하고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이렇게 풀이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지금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이 정권을 쓰러뜨려야겠다는 그 한 가지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도각의
명분부터 세워 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김영선의 풀이는 그럴 듯했다. 어쩌면
윤보선의 속셈은 그 풀이대로였는지도
몰랐다. 원래가 장면과 윤보선의 사이는
개와 원숭이의 사이보다도 더 험악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멱살잡이라도
하면서 싸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굳이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민주당
정.부통령 선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승만 치하의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야세력을 끌어들여
민주당으로 탈바꿈한 것은 1955년 10월
당시 윤보선은 합당을 하든 안하든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신익희(申翼熙)를 러닝 메이트로 해서
부통령에 입후보할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윤보선의 이러한 꿈은 재야의
대통령 후보로 물망에 올라 있던 장면이
신당에 합류해 옴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 후보를 민주국민당에 주는
대신 부통령 후보는 재야에서 합류해 온
쪽에 주어야 한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야에서 합류해 온
쪽에서 대통령 후보를 택한다면 누구를
택하겠는가? 재야에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공작을 벌이고 있던 장면을 옹립할
도리밖에 더 있겠는가.
부통령 후보라는 화려한 꿈을 안고
돼 버린 윤보선으로서는 그것이 한으로
응어리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
말고는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후, 윤보선은 누가 보더라도 확 드러나
보일 정도로 장면을 싫어했다. 어떻게 보면
생리적이라 할 정도로 장면을 싫어했다.
제5대 국회가 개원했을 때만 해도
그렇다. 윤보선은 구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구파가 대통령직을 차지했으면
총리직은 당연히 신파에 주는 것이
정치도의상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따위
정치도의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구파의 김도연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에
신파에서 <대통령직을 구파에 주었으면
국무총리직은 당연히 신파에게 주어야 옳지
윤보선은 어디 개가 짖어대느냐는 듯이
숫제 마이동풍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신파
정권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다. 아마도 그는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신파 정권 일에
간섭하려 했던 것이다.
이번 국회 개원식에서의 치사만 해도
그렇다. 윤보선이 워낙 간섭하기를
즐겨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놈의 못된
버릇이 발동을 했군> 하고 일소에 붙여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굳이
각료 간담회까지 열어 가면서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려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분당을 해서 야당으로 새출발하고자 신당
창당작업을 추진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면이나 그의 각료들은 윤보선이
구파가 신당을 창당하기 전에 도각의
명분을 만들어 두었다가 신당 창당과 함께
정치공세를 취해 장면 정권을 쓰러뜨리자는
정략인 모양이라고 해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료 간담회를 열어 윤보선 발언의
진의를 캐보려 했던 것인데 장면으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김 장관의 얘기가 그럴 듯하긴 하오만,
그렇다면 정쟁의 휴전을 협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소린 무슨 소리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김영선이 해석을
내렸다.
"난국이니 위기니 했으니, 그 말을
더 있겠습니까?"
정쟁은 정당간의 또는 정파간의 싸움을
말한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정쟁을 없애라는 말은
민주주의를 하지 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통령이 하는 말에 일일이 신경을
쓰자면 한이 없어요. 정권을 구파한테 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든 말든 일체 무시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윤보선의 말을 무시해 버리자고 한
사람은 이상철이었다. 그의 한마디로
이날의 각료 간담회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장면은 윤보선의 행위가 자꾸
괘씸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2. 경제 재건의 걸림돌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 이익인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으면 모두가 한결같이 고개가 숙여질
말들을 한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닥치면
정권담당자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집단은 그 집단의 이득을 위한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좀 혹독한
평을 하자면 정치인들이야말로 이중 인격의
소유자들이라 할 수 있다.
1961년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좀
안정됐다고는 하나 경제적인 위기는
충격요법과도 같은 그 어떤 처방을 내리지
이럴 때에 한줄기 빛이 비추어졌던
것이다. 다름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에서
경제시찰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해 왔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한국에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했던가? 그것은
한마디로 좋게 말해서 한국의 어떤 부문을
도와줘야 한국이 경제 재건을 이루어
놓을지 그것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무슨
사회사업이나 하는 것과 같은 착한
마음에서 한국을 도와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경제 재건은
동북아시아의 안보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국이 경제
재건을 이루지 못하고 비틀거릴 경우
침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당초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재건문제에 대해서
시큰둥한 태도를 취해왔다. 그것은
일본으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한국의 정정(政情)이 내일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냥 불안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일본 정부가 새해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은 장면 정권의 능력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상이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역시 구제불능이야!> 하고 옛 시각대로
멸시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장면 정권이
모든 사회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사회를
안정시켜 놓는 것을 보자 <오호라,
제법인걸> 하고 못내 감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이 기회에
장면 정부를 친일 정부로 만들어 버리자>는
속셈에서 미소 작전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장면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만들어 버릴
경우 일본은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었다.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예속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국가 이익 또는 개인 이익을 위해서는
속성이다. 명분은 명분, 실리는 실리라는
계산이 어찌 없었겠는가.
제2차 대전에 패망한 일본이 경제부흥을
이루어 기아와 빈곤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전쟁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케
함으로써 일본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만 터지지 않았던들, 일본의 경제
재건이란 아득하기만 한 꿈이었다. 일본
경제가 어찌나 가속적으로 성장했던지
1960년대에 들어서는
<신무천황(神武天皇:신화시대의 초대천황)
이래의 호경기>라고 하면서 일본인 자신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그들의 경제에 놀라움을
일본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요청해 오자, 장면 정권은 두말 않고
이것을 승낙했다. 이 기회에 일본 자본을
들여다가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켜 보자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일본 자본의
도입을 발상한 것은 재무부 장관 김영선과
민주당 정책의장 주요한이었다. 이들은 1월
21일의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기획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경위로 보아 한.일 회담의
조기타결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국교 전이기는 하지만 일본
자본을 도입해서 경제 재건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공자님도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의를
있는 정부가 어떻게 하면 국민을 배불리
먹이고 잘 입혀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느냐 해서 이모저모로
연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국교정상화 전이지만 일본 자본의
도입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당 정권은 일본 자본의 도입문제에
대해서 <그게 좋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자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손님들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그들의 신세를 져야 하느니만큼
그들 경제시찰단을 환영하는 위원회를
만들도록 합시다> 해서 환영위원화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구파였던 신민당으로서는
못마땅했다. 또 대통령 윤보선도 못마땅해
했다. 특히 윤보선은 신민당 당수인
초청해서,
"장면 정권 사람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요, 없는 사람들이요? 국교가
정상화되기도 전에 일본 자금을
도입하겠다니, 그래 이번엔 우리나라를
일본의 경제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수작이요,
뭐요?" 하며 노골적으로 성토했다.
"막아야지요. 막아야 합니다."
김도연도 맞장구를 쳤다.
유진산은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있을 뿐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유진산이 못마땅했던가?
윤보선이,
"진산은 어찌 생각하시오?" 하고 물었다.
"글쎄올시다."
"글쎄올시다라니? 그럼 진산은 일본
윤보선은 다분히 공격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유진산은 사실에 있어서는 일본 자금을
들여오는 데 있어 윤보선이나 김도연처럼
그렇게 부정적은 아니었다. <꿩 잡는 것이
매 아니더냐. 경제를 재건하려면 어차피
외자도입은 불가피한 일인데, 그 돈이
일본놈 것이면 어떻고 대국놈 것이면
어떻단 말이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함부로 사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던 까닭은 신민당 간사장이라는
당직 때문이었다. 물론 진산이 신민당의
제2인자였고 보면 반대하는 사람을 눌러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
전체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또
이렇게 대통령 윤보선이 일부러 불러
자리였던 만큼 그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두 분한테 바라는 것은 일본 자금
도입을 막기 위해서 거당적으로 이것을
막을 조치를 강구해 달라 그것이외다.
우리가 아무리 곤궁하다 해도 국교정상화
전에 일본 자금을 들여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윤보선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빌어
명령하듯이 당부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역시 김도연은 타고난 호인이었다. 그는
군말 않고 윤보선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진산은 좋다, 싫다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는 것은 과연 구파였던 신민당이 집권을
했더라도 반대의 입장을 취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신.구파 어느 파에서 집권을
하더라도 경제 재건의 문제에 관한 한은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하기야
미국이나 영국 또는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 차관을 주려고 했다면 또
모른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한국 같은 나라에 차관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에서 차관을 주겠다고만 한다면
거침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야만 백성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만일 구파가
집권했더라도 일본 자금을 기꺼이
한국이 처해 있는 현실인 것을 어쩌랴.
그렇다면 왜 신민당에서는 일본 자본의
도입문제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고
있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장면
정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쓰러뜨리고자
해서였다.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여도 없고
야도 없는 것이 일본의 정치인들이었으나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가이익보다는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먼저 전제해 놓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조선놈은 쓸모가 없는
놈들이다>고 욕을 해도 싸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민당만이 아니었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고 재야의 인사들 가운데서도
있었다. 그들은 과거 중국대륙에서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투쟁을
벌여 온 인사들이었다. 익히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의열단은 주로 테러를
통해서 항일운동을 벌여 온 단체였다. 그런
만큼 과격한 면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더러운 놈들, 어디서 돈을 꾸지 못해
왜놈들한테서 돈을 꾸어 쓰겠다는 거야? 안
된다 안 돼! 일본놈들한테는 귀떨어진 동전
한닢 꾸어써도 안 된다."
그들은 서둘러 반일투쟁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위원장에는 유석현(柳錫鉉)을
앉혔다.
의열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일의 횃불을
밝혀 들자, 이른바 독립투사들이 너도나도
바치고도 해방된 조국 땅에서 단 한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다. 장면
정권이 조각을 끝냈을 때 조각 명단을
살펴본 그들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해야 출세를 할 수 있다니까> 하며
심히 못마땅해 했었다. 각료들 가운데
조선총독정치 시대에 관료를 한 자들이
많다고 해서였다.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울분도
쌓일 만했다. 의열단 출신자들이 반일의
횃불을 밝혀 들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국교정상화 이전에 경제교류를
하려는 그 망동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시찰단의 내한도 실력으로 저지하고야
말 테다."
했다.
신민당의 반대에 재야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서자 딱하게 된 것은 집권당인
민주당이었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 같으니, 오늘의
위급한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러는데 덮어놓고 반대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저 쏟아지느니 한숨이요,
한탄뿐이었다.
야당과 재야가 한통속이 되어 반대의
소리를 높이 외쳐대고 있으니,
민주당으로서는 정책을 강행할 수도 없어
<좋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시찰단
환영위원회를 해체하겠다. 일본 자본
도입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면
이런 국내의 사정이 일본 정부에
알려졌던 모양이었다.
"뭐가 어째? 일본 경제시찰단의 방한을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구? 그래 그렇다면
그만두라구 해! 우린 저희들을 도와주려고
했지, 뭐 우리가 한국에서 어떤 이익을
취할려고 한 줄 알아?" 하면서
경제시찰단의 방한을 연기하도록 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그것이 1961년 1월 23일의
일이었다.
국무총리 장면의 실망은 컸다.
(저런 딱한 사람들을 봤나, 저 사람들
저렇듯 자꾸 감정적으로 반대를 일삼다가
나중엔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럼 뭘로
경제건설을 하겠다는 거야?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잖았어? 아니면
장면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한.일 예비회담은 1월 25일에 다시
도쿄데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도
감정이 있는 동물이고 보면 경제시찰단을
보내려다 오히려 망신만 당한 꼴이 되어
버렸으니 예비회담이 재개됐다고 해서 그
전도가 순풍에 돛단 듯이 진척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일 예비회담은
재개되자마자 벌써 이견이 노정되어
입씨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견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한국측은
<종전(終戰)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간 2만
톤에 이르는 한국 선적 배를 돌려줄 것과
재산청구권으로서 6억 달러를
요구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일본측은 몹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6억 달러가 뉘집 아이 이름이더냐 하는
그런 표정으로,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이쯤에서 일.한 회담을 깨버리자는
속셈에서 그런 제의를 하는 거요?"라며
역습해 왔다.
"우리는 충분히 그쯤 요구할 근거가 있는
거요."
한국측도 결코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 6억 불의 청구는 일본이 36년간
한국을 쥐어짜 먹은 침략의 가대가로
요구한 <배상청구>는 아니었다. 자유당
정권 때 벌어졌던 한.일 회담에서 한국측이
제시했던 8개항 중의 제 2항목에 대한
요구액이었다. 즉, 대 조선총독부 채권의
국.공채를 비롯해서 체신국 관계의 각종
저금, 연금, 간이 생명보험 등의 채권을
종합한 액수였다.
"6억 달러의 산출 근거가 뭐요? 그것을
증빙할 만한 산출 근거를 분명히 제시해
주시오" 하고 일본측은 요구해 왔다. 6.25
때 모든 증빙서류가 될 만한 것은 다
불타버려 없어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일본측이 증빙서류를 요구하는 것은
치사스러운 행위였으나 당연한 요구였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36년간을 두고 한국민들이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소화시켜야
했던 국.공채를 비롯해서 각종 체신저금,
간이 생명보험 등의 액수가 6억 불을
상회하면 했지 그에 미치지 못할 리는
하여간에 다시 재개된 예비회담은 이런
상호간의 이견으로 해서 다시 또 지지부진
소걸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마치 축제라도 벌인 듯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첫 대여투쟁에서
개가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것을 막았으니 그들로서는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장면 정권은 쓰러지고 말
테니까!> 신민당 지도부는 이런 판단을
했던 것이었을까? 새해에 들어와
대여공세를 갖가지로 벌이기 시작했다. 그
있는 5부 장관에 대한 소환령이었다.
<민주당 내각에 차출되어 있는 구파 5부
장관은 즉시 자진사퇴하고 본가로
돌아오라. 만일 돌아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소환결의를 하겠다.> 야당인 신민당이
김도연 명의로 소환령을 내린 것은 1월
12일이었다.
처음 장면 내각이 출범을 앞두고
구파에게 5개 부처의 장관 자리를 할양해
주었던 이유는 신.구파가 하나가 되어
정국을 이끌어 가자는 장면의 깊은
속뜻에서였다.
"민주당 놈들 그 꼴이 도대체 뭐야? 학생
덕분에 정권을 잡았으면 좀 정치다운
정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 아냐! 밤낮
신.구파 사이에 으르렁거리고만 있으니
민주당 전체로 향하고 있는 국민의
질타를 의식한 장면은 국민에게
<화합정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해서
구파에게 5개 부처의 장관 감투를 할양해
주었던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구파가 분당을 하기
전이었다. 그들도 귀를 가지고 있었으니
국민이 질타하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들었기에 우선 민심수습부터 하는
차원에서 장면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김도연이 5부 장관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4부 장관이라고 해야 옳았다.
왜냐하면 구파로서 장면 내각의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가 국무원
사무처장(지금의 총무처 장관에
정헌주(鄭憲柱)는 입각과 함께 구파에서
탈퇴해 신파로 변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도연이 5부 장관에게 소환령을 내리며
만약에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소환 결의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말을 들은
조재천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소환결의를 해? 어디에서? 민의원에서?
아니면 자기 사무실에서? 그래, 그
소환결의가 효력이 있다는 거야? 있다면
한번 해보시라지.)
하기야 뭐 김도연이 무슨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소환결의 엄포를
놓았겠는가. 그는 그저 정치적인 압력을
넣기 위해서 그런 엄포를 놓았을 뿐이었다.
장면은 좀 평온해진 정국에 다시 불을
붙이려 하는 심술궂은 행위가 못마땅했지만
다시 불렀다.
"어떻게 하시겠소? 구파에서 소환령이
내렸는데 돌아가겠소? 나는 여러분이
그대로 내각에 머물러 있어 주기를
희망하고 있소만?"
"소환이라니요? 그런 무식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원래 민주당원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 거취는 내가 정하지 제3자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용훼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교통부 장관 박해정이 역정을 냈다. 그의
말은 내각에 그냥 머물러 있겠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난처해진 것은 3부 장관이었다.
장관감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그냥
눌러 있자니 본가에서 <정치적인 지조도
없는 쓸개빠진 놈이야!> 하고 매몰찬
공격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고,
돌아가자니 장관감투를 내놓아야 할 것이
아쉬웠다. 그러니 망설이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면이 눌러 있고 싶으면 그냥 눌러
있으라고 하지만, 글쎄 장면이 얼마 동안
장관감투를 보장해 줄 것인지, 거기에 대한
계산도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뭐, 이 자리에서 당장 귀추를 결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오. 하루 이틀 차분히
생각을 해보고 나서 의사표시를 해주도록
하시구려"하고 덧붙였다.
나용균은 장면의 그 태도가 좀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면이
<여러분은 절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우린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하고 정치적인 생명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내가 총리직을 내놓게 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까지는 고락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왜 이렇게 좀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를
못하느냔 말이다. 그러면 즉석에서 <예,
좋습니다. 내각에 머물러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간명하게 태도 결정을 할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나갈 테면 나가고 머물러
있을 테면 머물러 있거라> 하고 어정쩡하게
말을 하니 진퇴유곡이 아니냔 말이다.
나용균은 속으로 이런 불만을 되씹고
있었다.
"아니오. 박사님, 나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즉석에서 의사표시를 한
장관이 있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
권중돈(權仲敦)이었다.
"물러나겠단 말씀입니까?"
장면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국군은 체제상으로나
작전상으로나 본궤도에 올랐으므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장면이 담담한 어조로 권중돈의 사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나용균은 또 울컥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금방 머물러 있어주면 좋겠다고 해놓고
어디 있어.)
그는 당장 장관감투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 감정을 억지로 눌렀다.
(좀더 생각해 보고 난 연후에.)
그는 이렇게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권중돈을 제외한 나머지 3부 장관이 아직
거취를 결정하기도 전에 이철승(李哲承)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소장파가
신풍회(新風會)라는 서클 간판을 들고
나왔다.
(아하, 조각 때 제외되었던 소장파들이
이번에 4부 장관이 물러날 듯하니까 도당을
지어 총리한테 압력을 넣어 소장파의
입각을 관철하겠다는 속셈이렷다!)
이철승이 신풍회 간판을 들고 나오자,
때가 때인지라 누구나가 그렇게 단정적인
당초 소장파는 끼리끼리 모이고는
있었으나 무리를 짓지는 않았었다. 그저
젊은이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결된 행동을 보여주는 데
불과했었다. 신파, 구파로 갈라져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판국에 소장파마저
서클 간판을 들고 나오면 국민적 이미지
문제도 있고 해서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장관감투를 배정할 때에 하예
소장파를 뒷전으로 물리치고 노장들끼리만
나누어 쓰자, <언제고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목을 늘여 학수고대하던 그 기회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늙은이들한테
도전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똘똘 뭉치는
길밖에 없어. 이참에 우리도 단결된 힘을
촉구해야 한다구.> 그래서 들고 나온 서클
간판이 신풍회였다. 물론 그들은 관심있는
자들의 단정적인 판단과 4부 장관 감투를
노리고 서클을 표면화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4부 장관이 감투를 벗어던지고
옛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신풍회의 주동인물은 이철승을
우두머리로 해서 김재순(金在淳),
조연하(趙淵夏), 함종빈 등으로서 그들은
이미 대학 재학 때의 학생운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철승은 고려대학교 재학중에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 반탁.반공의
선봉에 서서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가 큰
특이한 존재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전국학생총연맹은 해체의 비운을 겪었으나,
그때의 맹원들이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요소요소에 박혀 있었다. 따라서 이철승의
잠재적인 힘은 가히 측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만일, 그가 언제든지 때를 만나 한판
벌이려 할 것 같으면 요소요소의 맹원들은
하던 일도 내동댕이치고 달려나올 수 있을
만큼 인간적인 유대가 지속되고 있기도
했다.
민주당 소장파에서 신풍회 서클 간판을
들고 나오자, 신민당 소장파도 거기에
적잖이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민주당의 젊은 친구들한테 질 수야 없지
않은가. 우리도 미래에 대비해서 젊은
친구들끼리 하나로 뭉치세> 하고 분주하게
소장파는 청조회(淸潮會)라는 서클 간판을
들고 나왔다.
민주당 소장파가 새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서클 명칭을 신풍회라 호칭했으니,
자신을은 맑은 발마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청풍회(淸風會)라 호칭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청풍회는 아무래도 신풍회를
모방한 것 같은 인상이 짙었고, 그건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억세고 기운찬 명칭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지를 모은 끝에 청조회라
호칭했던 것이다. 이 청조회의 중심인물은
분당 전의 원내부총무를 역임한
김영삼(金泳三)을 비롯해서
박준규(朴浚圭), 오상직(吳相稙) 등이었다.
표현한 것은 신풍회였다. 대변인 김재순은
이렇게 말했다.
"청조회의 출범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젊었습니다. 세대감각이 잘 맞는
우리 소장파가 이념적으로나마 제휴를
한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 정치를 쇄신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청조회 출범에 대한
환영사라기보다는 국무총리 장면에 대한
협박이었다. <알아? 우리 소장파가 당을
초월해서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아느냔
말야? 그러니까 이번 개각에서도 우리
소장파를 제외시키는 날엔 청조회하고
제휴해서 독자적인 행동을 할 테니까
알아서 하라구!>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슬쩍 뒤집어서 한 것뿐이었다.
신풍회에 서명한 민의원 의원은 32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청조회 회원은 한 20명
가량 됐으니까, 그들이 제휴만 이룰 수
있다면 장면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무슨 일이든 브레이크를 걸 수가 있었다.
장면으로서는 미상불 골치 아프게 됐다.
그래서 보스의 체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신풍회는 단순한 친목단체로 알고
있지만 만약에 앞으로 당내에 파벌을
형성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에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보았다.
그러나 신풍회는 눈썹 한번 찡긋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웃었다. <뭐,
강력한 조치를 취하시겠다구요? 아니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면 어떤 방법으로
당에서 내몰겠다는 거요, 뭐요?> 물론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끼리끼리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는
거리낌없이 수군거렸다.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정치제도는
이런 점에서도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대통령중심제도에서는 통상 대통령이
집권당의 총재가 되는 것이 통례인데 그럴
경우 대통령이 한 말씀 하게 되면 그 말이
옳든 그르든 끽소리 못하고 그저
곡두재배하며 <지당하옵니다>만을
연발한다. 물론 이는 정치적 후진국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이 내각책임제의 정치제도하에서는
만일 국무총리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 할 것
같으면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신풍회가 감히 협박적인 언사를 농하거나
반발 따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건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라고 감히
협박적인 언사를 농하거나 반발을 하려
들어! 하기야 죽음을 작심하기만 하면
나랏님 상투도 잡는다 했으니까 죽음을
작심한 경우는 제외하고 하는 소리다.
<신풍회(新風會)>
민주당 내의 정치 서클의 하나인
신풍회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사실은
새해에 들어선 1월 27일이었다. 그전에는
그저 소장파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소장파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이철승을 보스로 뭉쳐져 있던 소장파의
정치 서클인 신풍회는 민주당을 쓰러뜨릴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신풍회는 민의원 의원을 32명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숫자로 야당과
야합하기만 한다면 장면 정권쯤은
하루아침에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이철승은 또 원외세력(院外勢力)도
거느리고 있었다. 민정회(民政會)가 바로
그것이었다. 민정회는 전국학련(全國學聯)
출신자들로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철승이 명령만 내리면 전위대 구실을
다해 줄 조직체였다.
이렇듯 이철승이 원내.외에 막강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사이엔가 정가(政街)에는 이런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이철승이 장면 내각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총리직을 차고 앉을
공작을 하고 있다더군.> 그럴싸한
소문이었다. 이철승의 나이, 경력,
지지세력으로 미루어 보아 그만하면
내각책임제의 국무총리 재목감으로서
충분했다.
그러잖아도 국무총리 장면은 함종빈의
중석과 관련된 백만 달러 코미션 폭로설로
적잖게 골치를 썩히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적잖은 상처를 입어야
했다. 오위영이 펄펄 뛰면서 함종빈을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제기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노.소장파간의 대립은
더없이 첨예화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위영이 함종빈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 신풍회 보스인 이철승은 <좋아!
고소를 할 테면 해봐. 나는 국민이 다치기
전에 그들이 묻어 둔 지뢰(地雷)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묻어둔 지뢰라니? 그들이 묻어둔
지뢰가 어떤 지뢰이기에 이철승은 국민이
다치기 전에 하나하나 터뜨리겠다고
노장파에 대해서 포문을 연 것이었을까?
공연한 엄포였을까? 아니면 중석
일수판매계약을 해서 백만 달러 코미션설이
튀어나왔듯이 뭔가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될
흑막이 있는 것이었을까? 국민은 민주당의
집안싸움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제2라운드가 벌어지는 것이 언제일까
주시하고 있었다.
장면은 자꾸만 첨예화되는 노.소장파간의
알력에 적지 않게 가슴을 앓아야 했다.
(이 사람들이 정치의 룰이나 제대로 알고
정계에 뛰어든 사람들일까?)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의 싸움을 말릴
수 있다지? 결국 소장파에선 입각을 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반발을 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집안 식구끼리
이전투구와도 같은 싸움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도대체가 장면은 후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합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였다. 세상의 쓴맛 단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었다. 일제시대에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두말없이 다마오까
쯔도무(玉岡勉)라고 창씨개명을 했었다.
머리 속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신만 똑똑히
집어넣고 있다면 창씨개명을 했다고 해서
지론이었다. 물론 학교를 지켜야겠다는
사명감도 그가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던 한
이유이기도 했다. 가톨릭 재단인
동성(東星)상업학교 교장이었던 그는
창씨개명에 항거함으로써 학교 경영에 어떤
화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의
숭실(崇實)전문학교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폐교당했듯이 동성도 가톨릭
재단이었던 만큼 구실만 잡히는 날이면
폐교의 운명을 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뒷날 나라가 독립을 되찾으면 창씨개명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고 해서 얼마나
호된 규탄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면은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한 성경구절을
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었다.
어정쩡한 종교인이라면 모르지만 남다른
신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은 후진국의
정치인으로서는 맞지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까지 갈라져 항상
아귀다툼을 벌여야 하는 나라에서는 특히
그렇다. 남하고 아귀다툼을 한다는 것이
인간의 심성(心性)을 얼마나 고약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장면이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말미암은
후천적 성품 때문이었다. 지도력을
하고 또 때론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질책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장면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은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장면 같은 사람은 정치가 고도화된
선진국의 지도자로서는 적격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국과 같은 정치적 후진국의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장면은,
(또 한 번 신풍회를 달래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난 1월 14일의 일이었다. 구파가
야당을 하겠다고 떨어져 나가자, 민주당
중앙당부에는 많은 감투가 비게 되었다.
장면은 이 빈 자리에 소장파를 앉힘으로써
노장파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소장파의
조일재(趙一載)를 청년부장에,
박주운(朴周運)을 문화부장에, 조연하를
조직부 차장에, 함종빈을 외교부 차장에
각기 임명하였다.
<내가 이만큼 소장파를 생각하고 있으니,
불평불만 좀 그만하고 당을 위해서
합심협력하자>는 뜻에서였다.
사실에 있어서는 그 이상 줄래야 줄
자리가 없었다. 억지로 주려면야 못 줄
것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노장파나
합작파에서 또 반발을 할 테니, 장면은
그저 그 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어버이 마음 자식이 모른다>고
소장파들은 또 뭐라고 빈정거렸던가?
젊은이들한테는 빈 껍데기 자리나 안겨줘?"
하며 도무지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결국
주나마나한 꼴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줄수록 양양이라더니 딱하군 딱해!"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호통을 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 같았으면
<뭐야? 어느 놈이 불평불만을 터뜨려? 그런
자들은 모조리 볼기를 쳐서 당에서 쫓아내
버려!> 했겠지만 장면은 속으로 끙끙
앓을지언정 서릿발 같은 호통을 칠 수 있는
성품이 못 되었다.
장면이 조각을 할 때 소장파를
입각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노장파의 반대가
있기도 했지만 좀더 정치훈련을 쌓은
다음에 유용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다.
그것을 소장파들이 십분 이해해 주었으면
어두워진 소장파라 아예 처음부터 장면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장파와 으르렁거리게 되었고
마침내는 함종빈이 폭로전술을 쓰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여간에 장면은 소장파를 한 번 더
달래보기로 했다.
1월 28일 아침, 장면은 숙소인
반도호텔로 이철승을 불렀다.
"구파 3부 장관이 사표를 냈어요. 그래서
개각을 해야겠는데 아무래도 당내 의견을
종합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장면은
부른 이유를 말했다.
구파에서 차출한 4부 장관 가운데
박해정은 <나는 원래 민주당원일 뿐>이라는
때문에 논외로 하고 나머지 3부 장관은
참으로 오랫동안 뭉그적거렸다. 바지에
똥을 싸고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뭉그적거리고 있는 것과 똑같은 꼴이었다.
장관감투 내놓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눌러앉아 있자니 구파에서 변절자라고
규탄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등을 밀어낸 것은 민주당
노장파였다.
도대체 환영받지 못할 자리에 뭣 때문에
미련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뒷공론을
일으켰던 것이다.
"장관 자리에 미련이 있거들랑 아예
구파한테 결별을 선언하고 민주당에
남든가, 결단을 내릴 일이지....... 결단성
쯧쯧......."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런 말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약한 작자들 같으니, 거국내각을 해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입각해
주십시오, 입각해 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할
땐 언제고 등을 밀며 나가라고 할 땐
언제야. 돌아가지 돌아가! 돌아가서 이놈의
장 정권 타도에 앞장을 설 테니 두고
보라구."
그래서 그들은 진작 물러날 뜻을 밝혔던
국방장관 권중돈과 더불어 1월 27일에
사표를 내던졌다.
"그래 이 의원, 이번 개각에 입각할
장면이 물었다.
"저보다는 우리 소장파에서 두 사람만
입각시켜 주십시오."
이철승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소장파에서 두 사람을?"
"네. 김재순, 김준태, 그 밖에도
소장파에서는 인물이 제제다사인 만큼
박사님께서 점 찍으셔도 좋습니다."
소장파에서 두 사람을 입각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은 장면의 심정은 자못
착잡하기만 했다.
장면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의원이 필요해요. 이 의원이
입각을 해주었으면 고맙겠소."
"제가 입각을 수락한다면 어떤 자리를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하고 생각하고 있소만."
이철승은 좀 역정이 나는 모양이었다.
"박사님, 저는 오랫동안 국회에서
국방위원으로 활약해 왔습니다.
보건사회문제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보사를 맡겠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자유당 치하에서 두 번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승은 줄곧 국방위원으로만 활약하다
보니, 이제 국방문제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면 내각이 출범을 할 때 국방장관을
시켜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랬다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각료의자는 모조리 노장파에서 독식해 버린
(흥, 잘들 논다. 어디 늙은이들이 얼마
동안이나 해먹나 보자!)
그래서 그는 소장파의 친목 그룹을
서클로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철승이 국방을 맡기면 입각할 수도
있다는 간접 표현을 했으나, 장면은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물러가는 게 옳겠지, 물러가는 게?)
이철승은 물러가는 게 옳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장면으로부터 또 무슨 말이
있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오위영을
앞세우고 이상철, 이석기(李錫基),
이태용(李泰鎔), 한통숙(韓桶淑) 등이
들어왔다.
이제는 이철승이 어쩔 수 없이 물러갈
"박사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동지들하고 상의해 보고
난 뒤에 회답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갔다.
그의 뒤통수를 오위영이 잡아먹을 듯한
험악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이철승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오위영이
따지듯 물었다.
"박사님, 이 의원한테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동지들하고 상의해 보고 난 뒤에
확답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또 시작이구나.)
장면은 짜증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이철승을 불렀던 이유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고 난 오위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반문했다.
"안 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각책임제란 경륜 있는 사람이라야만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까?
국회의원 한두 번 했다구 해서 경륜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오위영은 팔딱팔딱 뛰었다.
"오 위원 말씀이 맞습니다. 당보다
서클의 이해나 앞세우는 젊은이들을
등용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석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엉덩이에 뿔도 나기 전에 장관이나
하려고 덤비고, 이래가지고 당의 기강이
서겠습니까? 당의 원로가 기라성 같은
판국에 젊은 사람들이 장관이나 하려고
위계질서가 무너질 뿐만 아니라 정책을
일관해서 펴나가기도 어렵습니다."
이석기는 소장파에 대해서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신.구파가 합쳐져 있을
때의 민의원 원내총무는 유진산이었다.
한국의 경우 민의원 원내총무는 야전군
사령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중요한
포스트였다. 원내총무는 곧 당수(黨首)로
발돋움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구파가
갈라져 나갔으니 민주당으로서는
원내총무를 새로 뽑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 11월 23일에 원내총무를 뽑기 위한
의원총회가 있었다. 이때 노장파가 민 것은
이석기였다. 소장파는 여기에 반발,
홍익표(洪翼杓)를 입후보시켜 밀었다.
표를 얻어 선출되었지만 그는 소장파가
홍익표를 밀었다는 사실 한 가지로 해서
적대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철승을 입각시켜 소장파를 무마하려던
장면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그는 노장파를
설득할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번 개각에서도 소장파를 제외시키면
그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질 텐데 그땐 무슨
수로 그들을 무마한단 말이오? 거기에 대한
무슨 대책이라도 있소?"
"대책 같은 건 없습니다."
"박사님."
오위영은 장면을 불러놓고 그의 표정을
살펴보고 나서 물었다.
"박사님은 소장파의 반발은 두렵고
말씀입니까?"
장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하긴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노장층의 반발보다는
소장파의 반발이 더 두려운 게 사실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이라 불평불만이
있더라도 하늘 대고 침뱉는 짓은 하지
않거든. 거기에 반해 소장파는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니, 그들을 달랠 수밖에.)
"소장파 중에서 한 사람만 입각시키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이해가 있으면
고맙겠소."
장면은 물었다.
"박사님께서는 이철승 의원을 입각시킬
생각이시죠?"
입각하라고 권고했소."
"안 됩니다."
오위영이 또 단호히 안 된다고 반대했다.
"박사님, 장관을 시키는 데도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당의 노장층은
제제다사입니다. 그들은 나이도 많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반독재투쟁을 해온
그들에게도 꽃다발 한 번쯤은 안겨주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소장파는 앞으로
기회가 얼마든지 있거니와 또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정무차관으로 기용한다면 모를까 입각은 안
됩니다."
오위영은 촌보도 양보할 수 없다는
투였다.
결국은 장면이 꺾이고 말았다. 그런
경위를 밟은 끝에 1월 30일, 마침내 4부
장관에 대해서 개각을 단행했다. 이때
새로이 장관에 기용된 인물은 국방부에
현석호, 부흥에 태완선(太完善), 보사에
김판술(金判述), 체신에 한통숙 등이었다.
<누워서 하늘에다 대고 침을 뱉아 봐라.
그 침이 어디로 떨어질 성싶으냐?>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나무랄 때 곧잘 이런
비유법을 쓴다.
어차피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길 구파의
몫이었던 4부 장관을 기어이 소장파에서
차지하고 말겠다는 집념 어린
정략에서였을까? 아니면 국정을 감시
감독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책무를
1월 26일 아침 신풍회의 함종빈이 이런
발설을 했다.
"동경식품과의 중석 일수판매조로 백만
달러의 코미션을 받기로 했다는 설이
있다."
가히 백만 메가톤급 폭탄의 위력에
해당될 만한 폭로였다. 장면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을 만한 것을 찾고 있던 언론에서는
얼씨구 좋다고 대서특필로 이것을
보도했다. 신문 구독자들의 추위를 잊게
해주기에 족할 만한 기사거리였던 것이다.
"이런 죽일 놈들, 민주당 정권 이놈들,
이거 자유당 정권하고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내 눈깔이 삐었었군.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지키라는 꼴이었어. 그런
주었으니."
신문을 펼쳐든 사람이면 누구나가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댔다.
정계도 발칵 뒤집혔다. 꼭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야당인 신민당이나
민정구락부로서야 얼마나 입맛을 돋구는
폭로였겠는가. <이거 잘만하면 민주당
내각을 쓰러뜨릴 좋은 구실이 되겠다>며
물고 늘어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함종빈의 발설로 벌어진 사건을 세칭
<중석사건>이라고 한다. 자유당 정권
때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세칭 <중석불사건>이라 호칭하고, 민주당
집권기간인 이때에 벌어진 사건은
<중석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아주 중시했던 사건으로서 군사 쿠데타
직후 대한중석 사장이었던 문창준은
수사기관에 끌려가 무지무지한 고문을
당하며 이 사건에 대한 자백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 정권이 장면
정권을 <부패> 정권으로 낙인찍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중석사건>이었으므로 사건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를 소상히 소개하기로
한다.
중석은 희중석, 망간중석, 철망간중석,
동중석 따위의 울프럼산염 광물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중석은 전략물자의 하나. 이 전략물자의
하나인 중석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 중석이 전략물자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행여 적성국가로
해외수출에 아주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자유당 정권 때에는 이 중석이
수출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의 2년 동안에만도
한.미 중석협정에 의해 1년 평균 4천만
달러의 외화를 벌여들였었다.
그러나 그 뒤 국제시세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판로도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큰 몫을 해주던 외화벌이가
이꼴이 되니 무엇인가 방법을 연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머리를 짜냈다는 것이 고작
일수위탁판매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와 체결했었다.
1958년의 일이었다. 이 계약은 1961년 1월
23일 만료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창준이 대한중석 사장에 취임한 것은
국책회사의 사장도 바뀌기 마련이다.
문창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앉힌 것은 물론
국무총리 장면이었다.
문창준은 장면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였다. 6.25 때의 일이다. 당시
장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에 장면의 두 아들은
서울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두 아들에게 있어
부산은 낯선 고장이었다. 주미대사의
아들이라고 해서 돌보아 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창준을
찾아갔다.
"너희들 정말 용케 탈출해 나왔구나."
문창준은 사선을 뚫고 온 장면의 두
아들을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 그러다가
주었다.
장면이 이승만의 정적으로 돌아서
야당생활을 할 때 그의 생활을 보살펴 준
것도 문창준이었다. 야당인사의 생활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엔
갖가지로 박해를 받게 되던 시대였다.
문창준은 그것을 무릅쓰고 장면의 생활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창준의 원조가 장면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장면은
국무총리가 되어 정권을 잡자 은혜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문창준을 대한중석 사장에
앉혔던 것이다.
대한중석 사장직에 취임한 문창준이
처음으로 부닥친 문제가 1961년 1월
23일자로 계약이 끝나게 되어 있는 중석의
회사하고 맺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미창실업이라는
회사의 정수복이었다.
"문 사장, 이번엔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을
일본 회사하고 맺어보면 어떻겠소."
정수복은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것이라고 하며
애써 문창준을 설득했다. 그는 중개료에
바싹 구미가 당겨져 있었던 것이다.
"정 사장,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체결하라 하지만 일본하고는 국교도 맺어져
있지를 않지 않소? 그런 처지인데 일본
회사하고의 계약체결이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국교정상화하고 장사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소? 돈벌이에는 국교정상화 따위는
그렇군. 상공장관이 허락만 하면 되니까
상공장관의 허락이나 얻어두도록 하슈."
"우리 회사의 중석을 맡아서 팔아 줄
일본 회사는 있을 성싶습니까?"
"있구 말구요. 중석은 굉장한 돈벌이가
되는데 없을 리가 있습니까? 이 정수복이
나서면 그쯤은 하루아침에 해결해 드릴
테니 그 점도 염려하지 마슈."
문창준은 다음날 상공부 장관 주요한을
찾아갔다. 그는 미국회사하고의
중석판매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일본
회사하고 계약을 했으면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일본 회사 가운데 우리 중석을 맡아서
팔아주겠다는 회사가 있습니까?"
주요한이 되물었다.
사장이 중개를 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회사는 얼마든지 소개해
주겠으니 염려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일본하고는 국교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데, 과연 상거래를 해도
괜찮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미국 회사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야 괜찮지 않겠소?
국교정상화가 돼 있지 않은 점을 염려하고
있지만 우리 민주당 정권의 가장 으뜸가는
정책이 일본과의 조속한 국교정상화의
실현인 만큼 괜찮으리라고 봅니다."
문창준은 미국 회사보다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한 주요한의 말에 고무되었다.
그는 1960년 11월 20일에 일본 도쿄로
24일에 일본으로 떠났다.
문창준은 도쿄의 한 요정에서 정수복의
소개로 도쿄식품 사장인 리끼이시
도시다께와 만났다. 문창준을 대하는
리끼이시의 태도는 자못 정중했다.
"문 사장, 한국의 중석을 우리한테 맡겨
주십시오.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팔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며 그는 일수판매계약을 자기네 회사하고
맺자고 간청했다.
이럴 경우 단박 <아, 네. 그렇습니까?
좋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잘 아시겠지만 중석은 전략물자의
하납니다. 우리 한국은 중석을 팔아야 할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공산주의
적성국가로 흘러들어가도 좋다고 하면서 팔
적성국가를 젖혀 놓고서 팔 자신이
있습니까?" 하고 문창준은 물었다.
"여부가 있습니까? 우리도 그쯤의 양식은
있는 사람입니다. 세계 적화를 꿈꾸는
공산국가에 어찌 전략물자인 중석을 팔아
먹겠습니까?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우리
도쿄식품에 일수판매나 할 수 있도록 일을
맡겨 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으로
거래를 했으면 좋겠는지 거래조건을
문서화해서 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창준은 이 정도로 타협을 지어놓고
귀국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오자 미국의
컨티넨탈 회사에 대해서 <계약조건에 따라
대한중석과 컨티넨탈과의 계약은 1961년
1월 23일부터 만료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발견해 놨으니 컨티넨탈과 손을 끊겠다는
통고를 했다.
이 통고를 받은 미국의 컨티넨탈에서
사람을 보냈다. 중석의 국제시세가
떨어지고 판로가 좁아졌다고는 하나
세계무역시장에서는 아직도 이것이 괜찮은
장사의 한 품목이었다. 컨티넨탈에서
보내온 사람은 재계약을 요구하고 나섰다.
컨티넨탈에서는 종전의 계약이 불만이라면
계약조건을 한국측에 조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체결해도 좋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문창준은 컨티넨탈에서 이렇게 매달리자,
<중석의 국제시세가 하락하고 판로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얼마든지
팔아먹을 길이 있는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어 중석판매에 자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미국의 필립 브러더스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 이 회사는 미국과 영국의
합작회사였다. 필립 브러더스에서는
<실력자는 주요한이다>고 생각했던지
처음부터 문창준은 도외시하고 주요한에게
매달렸다.
어느 하루 주요한이 상공부 장관실로
문창준을 불렀다.
"중석판매에 관한 문젠데, 어떻게 일본의
어느 회사하고 계약을 맺기로 했소?" 하고
물었다.
"계약을 맺기로 했다면 당연히 먼저
장관님께 보고를 올렸을 게 아니겠습니까?
도쿄식품이 중석의 일수판매를 계약하기를
희망하기에 거래조건을 제시해 달라고 하고
지금 그걸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일수판매계약을 희망해 왔는데 만나서
계약조건을 들어보는 것이 어떻소?"
"컨티넨탈에서도 지금 사람이 와
있습니다. 종전의 계약이 불만이었다면
좀더 유리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도쿄식품이 어떤
거래조건을 내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컨티넨탈하고 재계약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상도의상으로 봐도 그렇고......."
문창준이 이렇게 말하자 주요한이 펄쩍
뛰었다.
"컨티넨탈은 절대로 안 돼요. 그 자들은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어
이승만으로 하여금 독재정치를 할 수
일이 있어도 컨티넨탈하고는 재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시오."
컨틴네탈하고의 재계약을 완강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컨티넨탈에서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을 문창준은 주요한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컨티넨탈과의 계약조건이 좀 불합리한
점이 많다 했더니 그런 흑막
때문이었구나.)
문창준은 기가 막혔다.
(이것 자칫 잘못했다간 장면 박사한테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자도 있을는지 모르겠는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쿄식품이 어떤 성격의 회사인가 하는
것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지 않은 점이었다.
<무역은 춤춘다.>
19세기의 국제무대에서는 <회의가
춤춘다>고 했지만 20세기의 국제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은 무역이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세계가 동.서 두 진영으로 갈리자, 무역은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 국가의 상인들은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공산주의 국가에
무기를 팔아먹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도쿄식품이라는 회사도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무슨 장사고
서슴지 않았다. 이 회사는 전전의
회사였다. 소련과 중공에 쌀과 그 밖의
식료품을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부(富)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문에
도쿄식품은 <용공상사>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있었다.
도쿄식품은 어느 나라에 중석을 팔아먹을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대한중석과 계약만
체결되면 공산주의 국가와의 무역은
중단하겠다>고 할 정도로 대한중석과의
계약을 열망하고 있었다.
도쿄식품이 대한중석과의 거래조건을
마련해 가지고 서울로 날아온 것은 1960년
12월 28일이었다. 이 회사가 내건
거래조건은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였다.
(1) 앞으로 1년간 4백 톤 이상의 중석
중단될 때에는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2) 계약의 해제는 50일 전에 쌍방 협의
아래 하고 도쿄식품은 선도금으로 백만
달러, LC 개설시에는 백만 달러를 각각
대한중석 앞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토록
한다.
이런 호조건에 도쿄식품은 부대조건으로
중석을 운반하는 데 필요한 선박은
한국선적의 선박을 쓰도록 하겠다고 되어
있었다. 이 부대조건은 한국측에서 허리를
굽혀 감사해야 할 조건이었다.연간 4백
톤의 중석을 운반하는 데서 얻어지는
수익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잠재실업자까지 합쳐져 3백만이나 되는
실업자군에게 다소나마 일자리를 얻어줄 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있었다.
거래조건을 문서화해서 가지고 온 사람은
도쿄식품의 업무부장인 야스다
가오추이었는데, 그는 구두로 이런
부대조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한국은 3면이 바다라 많은 수산물이
생산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수판매계약이 성립되기만 하면
한국에게 통조림공장과 냉동공장 설치를
비롯해서 수력발전 사업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줄 생각입니다."
야스다의 말이 통조림공장이나 냉동공장
또는 수력발전 사업을 공동으로 벌이자는
얘긴지 아니면 공짜로 지어 주겠다는
얘기인지 우선은 애매했으나 어쨌거나
도쿄식품 사장인 리끼이시가 병구를
이끌고 서울로 날아온 것은 해가 바뀐 1월
10일이었다. 일본에서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겠다고 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경제시찰단의 방한 예정일보다 훨씬 앞서
혼자서 내한했던 것이다.
문창준은 그를 맞아 비밀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이 이
비밀회담에서 어떤 문제를 논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대한중석의
불하문제가 논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울에서 도쿄로 타전한 비밀전보문에 이
사실이 나타나 있다고 하지만 글쎄,
문창준이 제2의 이완용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중석 같은 전략물자를 생산 판매하는
협력하려고 했을까? 아무래도 이것은 군사
쿠데타 정권에서 조작해냈던 것 같은
느낌이 짙기만 하다.
하여간에 1월 24일 대한중석 상무인
조경규와 도쿄식품 업무부장인 야스다
사이에 가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런 지 이틀
뒤에 신풍회의 함종빈이 <1백만 달러
코미션>설을 터뜨렸던 것이다.
"집권당 소속의 의원이 폭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인 것이 틀림없다.
민의원은 지체없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
야당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여.야 동수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먼저 상공장관부터 불러요.
조사에 착수하는 것이 좋겠소."
주요한이 조사위원회에 나왔다.
"장관은 대한중석이 도쿄식품인가 하는
회사하구 중석 일수판매 계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소?"
"알고 있소."
"그 도쿄식품인가 하는 회사에서 백만
달러 코미션을 내놓은 모양인데, 도대체 그
코미션은 누가 받아서 챙겼소? 장관이요,
대한중석이오?"
"글쎄요, 백만 달러 코미션 운운하는
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소."
"장관께서 모른다 그 소리요?"
"그렇소, 모르오."
"장관이 모를 리가 있소. 장관은 위증을
하고 있어요!"
주요한은 태연히 배짱을 튕겼다.
"내가 위증을 하는 것 같으면
조사위원회도 구성됐겠다, 조사를 해보면
알 게 아니오."
때마침 도쿄식품의 업무부장이 서울에
와서 아직 체류중에 있었기 때문에
조사위원들은 야스다가 묵고 있는 호텔로
가서 증인심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백만 달러 선도금 문제와 냉동공장
건설을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사위원들은 이 두 가지 문제에 조사의
초점을 맞추고 조사에 착수했다.
"대한중석은 지금까지 백만 달러씩이나
되는 거액의 선도금을 받고 계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식품에서는 굳이 백만 달러씩이나 되는
여기에 무슨 흑막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야스다는,
"대한중석은 지금까지 미국 회사하고만
거래를 해오지 않았소? 우린 어떻게 해서든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에 욕심이 나서 백만
달러의 선도금을 주려고 했던 거요. 이
점은 가계약서에도 명시되었소. 물건 값을
주는 것도 무슨 잘못인가요?" 하고 오히려
반문했다.
야스다는 백만 달러 선도금을 주겠다고
한 계약상의 문제를 트집잡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되물었다.
"우리 회사에서 어떻게 해서든
대한중석하고 계약을 체결하고 싶어 백만
달러를 미리 물건값으로 내놓겠다고
반하는 행동인가요? 내가 알기로는 우리
일본은행의 금리는 연리 7부입니다만
한국의 은행에서는 연리 2할까지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금리고
따져도 벌서 얼맙니까? 한 달이면 근 2만
달러나 되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국회에선
그런 금리는 필요없다는 말씀인가요?"
이렇게 되면 도리어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결과가 된다. 이런 망신은 면해야
했다. 그래서 한 조사위원이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책상을 탕 치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 대한민국의 국회를 모욕하는
따위의 발언은 삼가하시오. 우리가 조사한
바는 한국의 금리가 높으니까 백만 달러를
미리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고 그 이자를
도쿄식품과 대한중석에서 각기 반반씩
사실이지요? 진실을 말하시오, 진실을!"
그 말을 들은 야스다는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의원님도 참, 백만 달러는 대한중석
앞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는 건데,
어떻게 금리를 반분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중석 앞으로 예치해 놓으면 대한중석의
장부에 계정되게 되는데 말입니다."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대한중석
앞으로 예치해 놓았으니 금리도 당연히
대한중석의 장부에 오르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답변에 궁해진 조사위원들은 이번에는
냉동공업을 후원해 주겠다는 것은 무슨
속셈에서였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것도 대한중석과
욕심에서 그런 제의르 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야스다는 그 이상의 내용을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가 그 이상한 내용을
증언하기를 거부하니 아무리 민의원
조사위원들이라 하더라도 강압적으로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조사위원들은 끈질기게 조사활동을 벌인
끝에 다음과 같은 의심 짙은 내용을
밝혀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창준이
일본으로 떠난 것은 11월 20일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이틀 전인 11월 18일
민주당의 실력자인 오위영이 한발 앞서
일본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을 한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실력자였다. 장면 다음의 제
2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오위영이 하필 어째서 이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조사위원들은 문창준의 도일(渡日)과
때가 비슷한 데에 주목하게 되었다.
<구리다. 구려!> 아무래도 구린내가
풍겨졌다.
조사위원들은 오위영이 무엇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공식적으로는 <신병치료차>라고 되어
있었으나, 외무부에서 발급받은 여권에는
<일본 경제계 시찰>로 되어 있었다.
조사위원 한 사람의 머리에 문득
오위영의 사위인 강영욱이 한국
(도쿄식품에서는 계약만 체결되면
냉동공장과 게 통조림공장을 세워 주겠다고
언약했다 했겠다? 그렇다면......? 그렇지,
오위영이 막후에서 작용했어. 대한중석이
도쿄식품과 중석 일수판매계약을 체결하려
하는 것을 교묘히 이용해 사복을 채우려
했던 거야) 하는 심증이 갔다.
조사위원회에서는 강영욱의 최근 얼마
동안의 동정을 조사해 보았다. 오위영이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그가 일본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강영욱이 도쿄식품의 수산부장과 만난
사실이 있는 것을 밝혀냈다.
(흐흠, 역시 추측한 대로였어.)
오위영이 막후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힌
조사위원들은 문창준을 다시 불러 물었다.
오위영 의원을 만난 일이 있지요?"
"없습니다."
문창준은 부인했다.
"문 사장 위증죄가 드러나는 날엔 그
체벌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조사위원들은 엄포를 놓기도 했다.
"만나지 않고도 만났다고 진술한다면,
그것도 위증죄가 되잖겠습니까?"
문창준은 역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오위영 의원은
민주당 정권의 실력자인데 국책회사의
사장인 문 사장이 도쿄 하늘 아래 똑같이
체류해 있으면서 만나지 않았다니? 이거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까?"
"상식이 진리일 순 없잖아요? 내가
없습니다."
문창준은 끝까지 부인했다.
"그럼 도쿄식품에서 중석 일수판매계약만
성사되면 게 통조림 공장하고 냉동공장을
설치해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한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옳겠습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쪽 호의로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야당 조사위원들은 노여움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문 사장. 게 통조림 공장이
어디 한두 푼으로 세울 수 있는 공장이오?
엄청난 건설비와 시설비가 소요되는 공장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세워 주겠다고
했다면 이건 단순한 호의는 아니잖소?"
문창준이 다시 또 역습으로 나왔다.
회사하고 중석의 일수판매계약을 체결하고
중석을 수출해 왔습니다만 컨티넨탈
회사에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나 해준
것이 있었던가요? 도쿄식품과 중석
일수판매계약만 체결해서 게 통조림
공장이다, 냉동 공장이다 하고 세워 주면
그건 우리한테 이로운 일이지 해가 되는
일이던가요? 함종빈 의원 말대로 우리가
백만 달러의 코미션을 받아먹었다
해봅시다. 그래도 도쿄식품에서 우리한테
두 개의 공장을 세워 주겠다고 구두언약을
할 성싶습니까?"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중석 4백 톤의
일수위탁판매로 얼마만큼의 이익을 올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백만 달러나 되는
코미션을 내놓고 거기에 또 막대한 자금이
할 리는 없었다.
<중석사건> 조사위원회는 각각 여.야가
별도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해서
국회(민의원) 본회의에 내놓았지만,
함종빈의 폭로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제시하지를 못했다. <태산 명동에
서일필>격인 소동이었다.
3. 4월 단체의 횡포
어느 대목에선가 필자는 <한국을 망치는
자는 한국인 자신이다>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그러한 경우를
필자는 도처에서 너무나도 많이 목격했다.
4.19 의거가 학생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는 것을 거듭해서 여기에 언급할
필요는 없다.
한데, 4.19 의거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면학에 힘쓰기
시작하는데, 웬놈의 <4월의 단체>가 그리도
많이 쏟아져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국 4월혁명 부상동지회, 전국 4월혁명
상이동지회, 전국 4월혁명 순국학생추모회,
전국 4월혁명 불구학생동지회 등등. 아마
족히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단체가 쏟아져 나왔었다.
이 단체들이 앞서의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던 것은 1960년 5월경부터였다.
약삭빠른 자는 벌써 허정의 과도정권이
출범할 때 간판을 내걸었고 느린 자는
10월경에야 간판을 내걸었다.
"아니 4월혁명 단체 한두 개면 족하지
웬놈의 단체가 그리도 많이 쏟아져 나와?"
4월혁명을 빙자한 단체가 무려 일곱 개나
쏟아져 나와 간판을 내걸자 일반
국민대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말해서 4월혁명의 이름이 붙은
부상자들의 모임, 그 밖에는 어떤 단체도
필요가 없었다. 또 단체를 만든다 해도
학생들이 만든다면 모를까 일반인이
4월혁명의 간판을 들고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일반인이 의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반인
가운데에도 의거대열에 가담한 자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이었던 만큼 그들 학생들이 단체
간판을 들고 나오지 않는 한 일반인은
간판을 들고 나올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4월혁명>의 넉
자를 머리에 이고 단체의 간판을 내걸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들이야? 이래 가지고야
국민의 지탄이나 받지 누가 4월혁명 단체를
다행스럽게도 통합의 기운이 싹텄다.
이들 각 단체 대표들은 1960년 9월 7일
서울 견지동(堅志洞)에 있는
미화(美華)호텔에서 통합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는 각 단체에서 각기 3명씩의
대표를 내어 통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부서의 임시집행부를 구성하는 데까지 용케
모임을 이끌어 갔다.
한데, 이들은 미처 통합을 이루기도 전에
이권에 개입함으로써 4월혁명 단체를 만든
목적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을 여실히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았다.
이권에 개입하더라도 떠들썩하지만
않았다면 통합이 무산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떠들썩하게 이권에
백안시하는 결과를 빚어냈고, 그들 자신도
4월혁명을 팔아서 잇속이나 차리려는
부류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이런 4월혁명 단체의 속출과 이권개입이
사회불안의 한 요소가 되었고, 그것은 곧
군사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해 주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4월혁명>의 간판을 들고
나왔던 자들이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를
여기에 밝히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권에
개입을 했다. 이권에 개입을 해도 치사스런
방법으로 개입을 했다. 이제 그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960년 8월에 제2공화국이 출범을 하자
치안국장 강서룡(姜瑞龍)은 풀이 죽어 있는
경찰의 사기를 돋구고 독재정치의 앞잡이로
일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우선
경찰관의 상징인 모자와 복장을 바꾸어
심리적으로도 경찰관의 기분을 쇄신시켜
주는 것이 첩경이었다.
그런데 한 4월혁명 단체에서 이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관의 모자 제조,
납품에 끼어들었다. 그 단체의 재정간사인
이해춘(李海春:28세)을 비롯해서
회원이라는 김기섭(金基燮:22세),
최해남(崔海南:21세), 박창기(朴昌基:26세)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치안국으로 관계관을
찾아갔다. 이해춘이 일동을 대표해서
관계관에게 명함을 내놓았다.
"나 이런 사람이오."
관계관은 명함을 받아 한참 동안이나
체하면서 <이들이 무슨 용건 때문에
찾아왔을까> 하고 그들의 속뜻을 점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고개를 든 관계관은 이해춘에게
의자를 권하며 자못 공손하게 물었다.
"어떤 용건으로 찾아오셨지요?"
그러자, 이해춘이 자못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우린 경모 입찰관계 때문에 찾아왔소."
"아, 네 그러시군요."
관계관은 <별다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것도 아닌데 괜히 바싹 긴장을 했었군>
하고 속으로 쓰게 웃는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좋습니다. 공개입찰이요. 일건 서류만
갖추고 오셨다면 입찰에 응할 수 있는
"아니오. 우리는 공개입찰에 참가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오."
이해춘의 이 말이 관계관은 납득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막 경모 입찰관계 때문에
오셨다고 하잖았습니까?"
그는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이해춘은 말귀도 꽤나 어두운 놈을 다
보겠다는 말투로,
"이봐요. 당신 내가 준 명함 똑똑히
봤겠지?" 하고 반말지거리로 다짐을 주고,
"우린 경모관계로 오긴 왔는데
공개입찰에 참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수의계약을 하고자 해서 왔단 말이오.
아시겠소. 수의계약을 하고자 해서 왔단
말이오" 하고 수의계약을 하고자
순간, 관계관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안 됩니다."
"안 되다니?"
이해춘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안 되다니, 왜 안 된다는 거야?"
"재정법상 그건 안 됩니다."
"이 사람아!"
이해춘은 한참동안이나 관계관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우리가 누군 줄 몰라?"
협박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관계관은 그 협박이 꽤나 비위에
거슬렸지만 애써 감정을 누르는 것이었다.
"이보시오 선생, 정부의 공사나 물품
발주는 모두 공개입찰에 붙이도록 재정법에
정해져 있는 걸 어겨가면서까지 수의계약을
할 순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말도 많구먼."
이해춘은 한 번 더 관계관에게 눈으로
위협을 주고 나서 거느리고 온 패거리를
돌아보았다.
"이봐 동지들, 공개입찰 장소가 어딘지
알아 가지고 공개입찰에 참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놈들 모조리 쫓아버려!"
이해춘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거리들은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패거리들이 달려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해춘은 관계관을 향해 말했다.
"하긴 당신 같은 졸자를 상대한 내가
잘못이지. 이봐요, 내가 장관을 만나서
때까진 절대로 공개입찰에 붙여선 안 돼.
알겠어?"
몇 시간 뒤, 이들은 을지로 2가에 있는
내무부 장관 비서실에 나타났다. 비서관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관을 만나려고 왔소."
이때에도 패거리를 대표해서 이해춘이
나섰다.
"장관님은 지금 국회에 나가셔서 안
계십니다만,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비서관이 재차 물었다.
"당신한테 얘기할 순 없고 장관이
돌아오면 직접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이해춘은 기다리고 있겠다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못 돌아와?"
"네, 못 돌아오십니다. 지금 국화에
계시는데 국회가 끝나면 곧 국무회의가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한테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을
들어뒀다가 내일 장관님께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좋소."
이해춘은 명함 한 장을 꺼내서
비서관에게 건네 주었다.
<한양제모(漢陽製帽) 유근창(柳根昌)>,
명함을 보고난 비서관의 태도가 아까와는
1백 80도로 바뀌었다.
"이것 선생님 명함입니까?"
"아니오, 난 이런 사람이오."
이해춘이 다시 명함 한 장을 거내
두번째 명함을 살펴보고 난 비서관이 또
다시 물었다.
"그럼 이 유근창이라는 명함은
무엇입니까?"
"당신 치안국에서 이번에 경모를 새로이
만들려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소?"
"알고 있소."
"그렇다면 말하기가 쉽군. 다름이 아니라
거 치안국에서 새로이 맞추려는 경모를
말이오, 그것을 한양제모하고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거요. 아시겠소?"
이해춘의 얘기를 듣고 난 비서관은 별
시러베아들놈을 다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건지 두말 않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보던 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해춘은 비서관의 그러한 행동에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가 따졌다.
"이봐요, 당신, 사람이 말을 했으면 뭐라
대꾸를 해야 할 게 아니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비서관은 성가신 듯 이해춘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이해춘은 거듭 따졌다.
"당신 꼭 장관께 얘기해야 돼! 얘기
안하면 재미 없을 줄 알아!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어. 그때 확답을 해 줘."
이해춘의 패거리들이 돌아가고 나자,
비서관은 즉시 경비전화로 치안국 물품
납품 관계관을 불렀다.
관계관이 전화에 나오자, 비서관은
한양제모가 어떤 회사인지 즉시 조사
돌아가기가 무섭게 서둘러 관계관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던 것은 이해춘이 마지막
던지고 간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절에 이해춘의 패거리들은
또 다시 장관 비서실에 나타났다.
"장관한테 말씀 드렸소?"
이해춘이 인사 따위는 생략한 채
다짜고짜 이 말부터 물었다.
비서관은 앉은 채 조용히 대꾸했다.
"아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뭐야?"
이해춘의 표정이 또 험악해졌다. 그는
병아리를 노리는 독수리의 눈을 해가지고
따지고 들었다.
"어째서 말씀드리지 않았어? 당신
뭐야? 앙?"
비서관은 그만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어, 이게 날 비웃어? 임마 너 죽고
싶어?"
"이봐요, 업자를 추천하려거든 좀 똑똑한
업자를 추천하시오. 납품실적이 전혀 없는
업자한테 수의계약을 해 주라구? 그래 그게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비서관이 반격을 했다.
그러자 이해춘은 팔딱팔딱 뛰며
대들었다.
"야, 이 새끼야, 납품실적이 있으면 너
같은 놈한테 부탁이나 할 줄 알았어?
납품실적이 없으니까 너희 놈한테 부탁한
모여들어 순식간에 마을과 상권을
자리에 앉았는데 까불구 있어? 너희 놈들
두 눈깔에서 번쩍 불똥이 튀도록 한번
혼줄을 빼줘야 정신 차리겠어? 앙?"
이해춘이 불끈 쥔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한대 후려칠
기세였다.
그때였다. 문을 박차듯이 형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왔다.
우람한 체구의 형사가 눈을 부라렸다.
"임마, 여기가 너희집 안방이야. 왜
떠들어. 4월혁명 단체를 팔아먹는 새끼가
이 새끼야. 이 새끼들 당장 연행해!"
네 사람은 중부경찰서로 연행당했다.
그들에게는 <공무집행 방해>,
<특수협박>, <입찰방해> 등 세 가지의
죄목이 씌워졌다.
曠塚?
38방으로 갔다.
스에
㎸낫榮聆構?돌아다녔다.
또 한 번 팔아 먹었다.
"이봐요, 우린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브로커 짓을 했단 말이오. 지금 몇
개로 난립돼 있는 4월혁명 단체를
통합시키려고 하는데, 자금이 있어야 그
일을 추진할 게 아니오? 우리가 4월혁명
단체를 통합시키지 않아 보시오. 그때는
정말 민폐를 끼치게 된단 말입니다. 국가를
위해서 이바지하려는 우리의 충정을 이해해
주려 하지 않고 우릴 죄인 취급을 해?
4월혁명 단체들이 결코 당신들의 만행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해가 바뀐 1961년 1월 11일 오후 4시경.
불구환자 50여 명이 미도파 백화점으로
몰려왔다. 이 상이불구 통합추진위원회는
<상이학생 동지회>와 <불구학생 동지회>를
통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였다.
그들 상이불구 학생들은 미도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힘겨워하며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은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의
사무실이었다. 그들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아예 바닥에 드러누우며 이날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잠자리에서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된
한국무역협회였다.
사무국장 이동수(李東洙)가 상이불구
학생들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왜들 이러십니까?"
사람이 소릴 질렀다.
"넌 뭐하는 놈이야?"
처음부터 험악하고 거칠기만 했다.
"예, 저는 한국무역협회의
사무국장올습니다."
이동주는 아주 공손한 말씨로 대꾸를
했다. 그는 행여 목소리라도 높이게 되면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할세라 아주 조심조심
살얼음을 밟는 심정으로 대꾸를 했다.
"사무국장 따윈 필요없어. 회장을 이리
나오라구 해, 회장을!"
"회장님은 지금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신지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선처토록
하겠습니다."
이동주는 더더욱 공손한 목소리와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이동주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이봐요, 당신 정말 책임지고 처리할 수
있겠어?"
"무슨 일인지 내용에 따라서는......."
이동주는 좀 마음이 불안했다. 엉뚱한
요구라도 해오는 날엔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자 목발을 짚고 있던 학생은
이동주의 그러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목발을 치켜들었다.
그것으로 후려치려는 태세였다.
"이 자식이 우릴 뭘로 보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려는 거야? 죽어봐야 정신이
번쩍 들겠어?"
말인가? 참 묘한 욕설이었다.
학생은 목발로 내리치지는 않았다. 그저
위협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을 뿐이었다.
급보를 접한 경찰이 1백 명 가량의
기동대를 급파했다. 그러나 경찰은 출동만
했을 뿐이지 그들을 연행하거나 해산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모두 상이불구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들었다가는 불상사가 야기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동경찰대는 그들이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경계태세만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동경찰대 책임자가 학생들 앞으로
나갔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십니까?"
자극하게 될까 봐 몹시 조심을 했다. 아주
공손한 말씨로 물었다.
"나요."
한 젊은이가 기동경찰대장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 이동주를 목발로 위협했던
젊은이였다.
"왜들 이러십니까? 보아하니 모두 부상을
당한 학생들인 모양인데 그러다 상처라도
악화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기동경찰대장은 사뭇 걱정스럽다는 듯
동정을 했다.
"까닭이나 좀 압시다. 왜들 이러시는지?"
"오죽하면 우리가 불구의 몸을 해가지고
이런 시위를 벌이겠소?"
데모대의 책임자라는 젊은이는 그들의
시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당신네 경찰은 이 미도파의 관리권이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기동경찰대장이 그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모른다고 했다.
"몰라? 이 미도파 건물의 관리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젊은 상이학생은 눈을 부라리면서 계속
말했다.
"이 건물의 관리권은 대한부동산
주식회사의 유덕영(柳德榮) 사장한테 있단
말이오. 그것을 한국무역협회의
이활(李活)이란 놈이 경무대 비서였던
박찬일(朴贊一)이란 놈한테 압력을 넣도록
해가지고 강제로 빼앗았단 말이오. 그래서
나서서 옛 주인한테 돌려주려 하는 거요."
기동경찰대장은 그제야 상이불구
학생들의 데모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이 사실을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미도파 백화점은 일제시대에
미쓰고시(三越)라는 이름의 백화점으로서
일본인 소유였다. 그것이 해방과 함께
귀속재산이 됐다. 이 귀속재산을
임대차해서 관리하고 있던 사람이
대한부동산 주식회사 유덕영이었다.
귀속재산 불하에 있어서는 임대차
관리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자유당 치하에 있어서는
이 관례가 번번히 무시당했다. 노른자위가
될 만한 귀속재산은 모두 정치권과 결탁한
미도파 건물의 경우도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한국무역협회 회장 이활 하면
목에 힘깨나 줄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
힘을 이용해서 한국무역협회 앞으로 이
미도파 건물을 불하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건물을 임대차해서 관리하고 있던
유덕영이란 사람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놈의 나라에서는 눈뜨고 강도질을
당하고도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도
없으니 이놈들 어디 두고 보자> 하면서
절치부심했을 것은 능히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마침내 세상이 뒤집혔다.
유덕영은 바로 이때가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이불구 동지회를 찾아가
하소연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렇지
누가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가로챘는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상이불구
학생들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비분강개하고 있을 때였다. 유덕영한테서
하소연을 듣고 나자 젊은이다운 정의감이
발동했다.
그들이 미도파로 몰려와 철야농성을
벌이기 전인 1960년 연말에 몇 사람의
상이학생들은 재무부 장관인 김영선을
찾아갔다. 그리고 미도파의 불하 경위가
불법적이니 재무부 장관은 이것을 시정토록
하라고 명령(?)했다. 김영선이 아무리
장관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한들
어찌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잘 알겠소. 경위를 조사해서 조치하도록
하겠소" 하고 확약을 했다. 그랬는데 해가
김영선이 시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실력행사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난처해진 것은 경찰과 검찰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학생들의 주장이 정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검찰에서는 <난동사건의 배후조종
여부를 철저히 수사하라!>고 경찰에 지시를
했다. 배후조종 여부를 조사하자면
유덕영을 잡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유덕영을 잡아들이고자
수사의 손을 뻗쳤을 때는 이미 유덕영은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친 뒤였다.
물론 이 사건도 미결인 채로 있다가 5.16
쿠데타를 맞았다.
<4월혁명>을 머리에 인 단체들의 행패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주라>고 요구하는 상이부상 학생들의
철야농성은 어떤 면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비정을 새 정권이 시정하려 하지 않자,
그들 스스로가 불구의 몸을 이끌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려고 한 애국충정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반면에 <4월혁명 단체>의 간판을
팔아 <이참에 돈이나 벌어보자>고 날뛰는
속물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자들은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어쩌다 요행수(?)로
<4월혁명 단체>에 끼어들었던
족속들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3,4월 위기설이 한창
떠돌고 있던 3월 18일의 일이다.
서울지방법원의 한 판사실에서
<4월혁명단>의 사회국장이라고 자칭하는
촌극을 벌인 일이 있었다.
멱살을 잡은 자는 정선학(鄭先鶴)이라는
자였고 멱살을 잡힌 판사는
이돈명(李敦明)이었다.
정선학이란 자가 이돈명의 멱살을 잡고
야료를 부린 이유는 특수폭행혐의로 구속돼
있는 <4월혁명단> 소속의
김광욱(金光郁:당시 24세)을 당장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폭행을 했기에
잡아넣은 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판사의
멱살을 잡은 것은 아마 세계 사법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정선학이란 자는 판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너는 자유당 판사가 아니냐? 너의
과거를 장관한테 가서 알아보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판사 이돈명은 너무나 기가 막혔다.
세상에 판사의 멱살을 잡다니? 판사의
멱살은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잡지
못한다. 그것을 정선학 같은 무뢰한에게
잡혔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돈명은 멱살을 잡히고도 일체 항거를
하지 않았다. 그자의 야료에 몸을 내맡긴
채였다.
"대답을 해, 대답을! 갑자기 벙어리가
됐어? 김광욱을 내놓겠어, 못 내놓겠어?"
정선학이란 자는 잡고 있는 멱살을 다시
한번 흔들며 다그쳤다.
그래도 이돈명은 입을 열지 않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태도였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답답할
"좋아, 그럼 장관한테 가자! 가서 네놈의
과거를 알아보자!"
정선학이란 자는 이돈명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었다. 그때 문을 확 열고 4,5명의
경찰관들이 들어왔따. 아마도 누군가
신고를 했던 모양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판사실에서?"
한 경찰이 이돈명의 멱살을 잡고 있는
정선학의 손을 풀어 놓으며 물었다.
"이 자는 자유당 판사야. 이런 자를 그냥
내버려 놓고 있다니 말이 돼?"
정선학은 경찰관을 원군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던가? 아니면 자신의
야료를 은폐하기 위해서였을까? 더욱더
기승을 부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됩니까? 여기는
나가셔서 우리한테 말씀하십시오. 무엇이
불만이신지? 우리가 선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찰관은 점잖게 타이르며 정선학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정선학이란 자를 끌고 나갔던 경찰은
법원 판사실에서 야료를 부린 그 자를
어떻게 처리했던가?
"4월혁명단의 간부를 이건한다든가 하면
또 어떤 불상사가 야기될지도 모르겠어.
그러니 훈계 방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하며 놔주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법원에서는 경찰의 처사에
상당히 노했다. 즉시 서울지방법원장
주재하에 판사회의를 열었다.
"4월혁명단이다, 5월혁명단이다 하면
어떻게 사법행정을 펴나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자들로 인해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할 수 없다면 차라리 우리 판사
일동은 물러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걸핏하면
자유당의 앞잡이로 몰아 버리려는 풍조가
만연돼 있는데, 이런 풍조를 하루속히
불식하지 않는 한 공정한 법의 집행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판사들을 자유당
판사 운운하며 자유당의 앞잡이로
몰아붙이려 하니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판사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6.25를 치른 직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려는 풍조가
있었다. 그것이 한물 가더니 이번에는
<자유당 앞잡이>로 몰려는 풍조가 만연돼
옛날 중국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인 백이(佰夷)와 숙제(叔齊)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자기 나라를
치려고 하자 그 불가함을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음으로 두 형제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한데, 수양산의 고사리는 누구 것이냐 그
말이다. 고절(孤節)을 지키려 했으면
수양산의 고사리도 캐먹지 않았어야
옳았다. 미운 놈을 덮어 놓고 <자유당
앞잡이>로 몰려는 풍조도 그렇다. 미운
놈을 <자유당 앞잡이>로 몰려는 그자는
자유당의 시책에 따르지를 않았는가
말이다. 자유당 정부에서 세금을 내라
시간에는 나다닐 수 없다 하니까 꼼짝도
없이 그것을 지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당에서 하라는 대로 했으니
그자 역시 <자유당 앞잡이>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냔 말이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는데, 꼭
그 꼴이었다. 더러운 놈들!
서울지방법원 판사회의에서는 정선학이란
자를 고발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서울지방검찰에 정선학을
퇴거불응(退去不應) 및 협박 혐의로 고발을
했다.
이렇게 서울지방법원에서 고발까지
했으면 검찰에서는 그 자를 의당
구속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검찰에서는
그런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등의 연석회의를 통해 <재조사해서
엄중처벌하겠다>는 원칙을 세워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선학이라는 자의
소재를 파악한 다음 불구속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검찰에서 정선학 그 자에 대한
소재파악에 나서자 당사자인 정선학은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내가 판사에게 폭언을 하게 된 원인은
이돈면 판사가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한 반말투의 언사를 썼기 때문에 발단된
것이다>라는 해명서를 발표했다.
정선학이란 자가 사회에 대해 해명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것도 오만불손한 행위였다.
어떤 이유에서 판사의 멱살을 잡게
되었는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는
떠들썩하게 사회에 대고 해명서다 뭐다
해가지고 법석을 떨었으니 그의 행동이
사회를 우습게 여기는
자존망대(自存妄大)의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검찰에서 정선학이라는 자에 대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일이지만
정선학이란 자는 4.19 때 어쩌다가 총상을
입기는 입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때까지 줄곧 서울 적십자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오고 있었는데
환자만이 입원할 수 있는 병실에 아예
아내까지 데려다 놓고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판사 이돈명의 멱살을 잡을
무렵에는 그의 상처도 다 아물어
병원측에서 퇴원을 하라고 요구하자 <왜
부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정선학이라는 자는 물론 학생 신분은
아니었다. 이 자가 판사의 멱살을 거머쥐는
등의 행패를 부린 인품으로 미루어 보아
4.19 의거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고
지나가다가 어쩌다 총탄을 맞게 되어 4.19
의거 부상자 행세를 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이 간다.
<4월혁명 단체>의 간판을 앞세우고
사회에 독을 끼치는 무리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4월의 사자들은
아니었다. 마치 4월의 사자인 양 가장한
가짜 4월의 사자들이었다. 그들은 크게는
갖가지로 사회에 물의를 빚어내는 사건을
잇달아 야기시켰다.
그들은 국무총리 비서실에도 당당하게
찾아와서 갖가지 요구를 했다. 이권청탁을
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지자,
상이.부상학생들은 비로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61년
1월 26일 서울대학교를 비록산 고려대학교,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그 밖의 몇몇
대학의 4월혁명 부상학생들이 모임을 갖고
자기비판을 했다.
"경찰이나 검찰이 4월혁명 단체라고만
하면 끽소리조차 하지 못하니 이래
가지고야 무슨 놈의 사회기강이 바로잡힐
"우리의 목적이 혁명단체의 간판이나
내걸자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단체의 간판을 내걸고 비행이나 일삼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정화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놈의 4월혁명 단체를 모조리
해체시켜야 돼! 혁명은 이미 끝났는데 그런
단체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들은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만큼 아픈 자기비판을 했다.
그 결과 <우리 학도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워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임무는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4월의 이름을 빌린
무수한 단체가 혁명완수에 큰 도움을
주기보다는 사회에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때문에 우리는 이 이상 더 혁명의 정신에
어긋나는 뭇 폐단을 끼치지 않기 위하여
모두 학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날 모였던 상이학생들은 학원으로의
복귀선언을 하면서 일반인 4월혁명
단체들에게도 <되도록이면 선배들도 우리와
때를 같이하여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가
맡은 바 본래의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혁명완수에 이바지하자!>고 호소했다.
"역시 대학생들이군! 이 사람이 이거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 젊은이들인가
말일세."
"누가 아니래, 저렇게 눈이 똑바로 박힌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장래는 마냥
밝은 것이라네."
걸고 싸웠고, 싸움이 끝난 뒤에는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함이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
학원으로 돌아가는 우리 대학생들,
정말이지 나는 감격했네, 감격했어."
한데, 상이불구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면서 일반 상이부상자들한테도
직장과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건만, 그런 학생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일반 상이부상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시건방진 녀석들, 제놈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배때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봐, 사흘 굶어 도둑질 않는 놈
없다고 했어!"
4월혁명 학생단체의 간판만 떠메고
있으면 의식주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됐다.
우글거리고 있는 이 현실에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딘가. 그들 몰염치한
일부 일반 상이자를 포함한 사이비 4월의
사자들 중에는 여전히 4월혁명
상이학생단체의 간판을 떠메고 다니며
갖가지 비리를 저질렀다. 각 기업체에
찾아다니며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워 금품을
뜯기도 했고 공갈협박으로 이권을 따내기도
하는 등 그들의 비행은 여전했다. 심지어는
공민권(公民權) 제한 조사위원회를 만들 때
상이부상자를 조사위원으로 채용하라고
요구하는 단체도 있었다.
<반민주 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안>이
민의원을 통과한 1960년 12월 5일이었다.
반민주 행위자를 가려내자면 조사요원이
필요했다. 4월혁명 학생상이단체의 간판을
민의원 의장 곽상훈을 찾아가,
"우리 4월혁명 단체의 간부들을
반민주행위자 조사요원으로 임명토록
하시오. 우리가 4월혁명의 주체들이었으니,
조사업무는 당연히 우리가 맡아야 하오!"
하며 떼를 썼다.
4월혁명을 코에 걸고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데도 뭐라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 고얀 놈들!" 하고 호통을 쳐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일, 그래서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한마디의 대꾸도 못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런 난장판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장면이 무슨 정책을 펴나갈 수
있겠는가. 그저 한숨뿐이었다.
보지 않아도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4월혁명 단체들이 통합을 하기 위해
대회를 연 것은 1961년 2월 5일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통합을 하기 위한
대회가 돼 주지를 못하고 더욱더 분열을
촉진하는 대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감투
배정문제로 왈가왈부하다가 급기야는
주먹질을 하며 난투극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이 진정한 4월의 사자들이었다면
감투문제를 놓고 난투극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혁명단체의 간부가
되면 먹을 것과 아울러 그 어떤 공직감투도
얻어쓸 수 있다 해서 그렇듯 치사스럽게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한국을 망치는 자들은 바로 이런
자들이었던 것이다.
단체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장면은 꼭 무거운 짐을 졌다가 내려 놓을
것 같은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의욕도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일은 이제부터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며 배에 크게 힘을
주었다.
4. 너그러운 심판
"혁명과업이 잘못 처리되면 죽음으로써
국민에게 사죄하겠다."
이건 누가 한 말인가? 바로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된 김용식(金龍式)의
제 1성이었다.
처음 특별검찰부장으로 선출되었던
오완수가 사퇴해 버리자, 민의원은 다시
새로이 특검부장을 선출해야만 했다.
<특검부장감이 누구냐?> 해서
민의원에서는, 아니 민주당 정부에서는
사방으로 사람을 내세워 인물을 물색했다.
특검부장의 자격은 우선 과거의 경력이
개인의 사생활에 흠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법조인 출신 가운데서 과거 경력이 깩치
못한 인물을 고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법조인 출신자
가운데에 그런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완수가 특검부장을 사퇴한 다음날
법무장관 조재천이 민의원 의장 곽상훈의
방으로 찾아갔다.
"특검부장으로는 장후영(張厚永) 씨가
적임자가 아닐까 해서 의장님의 의향을
알고자 해서 찾아
뵈었습니다만......."하고 조재천은
장후영을 추천할 의사를 비추었다. 재야
법조인인 그는 변호사로서
법률신문(法律新聞) 발행인이기도 했다.
"장후영 씨요? 좋겠지요."
이렇게 말했다.
그놈의 특검부장 빨리 좀 매듭이
지워졌으면 속이 후련하겠다는 눈치였다.
"그러시다면 의장님께서 민의원 각파
대표들의 의향을 타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소, 그러죠."
조재천이 물러가자 곽상훈은 즉시 각파
대표들을 의장실로 초치했다.
"특검부장으로는 장후영 씨가 적격자가
아니냐 해서 조재천 법무장관이 천거를
했소만 각파 대표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시오?" 하고 곽상훈은 물었다.
그런데 이것은 참 뜻밖이었다. 그 누구도
<그 사람 같으면 능히 이 중책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고 찬성의 뜻을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최대교(崔大校) 씨가 적격자가 아닐까요?"
하고 생각지도 않고 있던 인물을
천거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현재의
검찰총장인 이태희를 천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변호사
윤원상(尹元上)을 천거하는 사람도 있었다.
곽상훈은 전화로 각파 대표들과의 회담
내용을 조재천에게 전해주고 <각파
대표들은 오히려 이태희 씨와 윤원상 씨를
천거하는 형편이니 그 두 사람의 의향을
타진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조재천은 곽상훈의 권고에 따라 두
사람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태희는 현직 검찰총장이니까 거절했고
(이거 야단났는걸.)
조재천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특별재판소, 특별검찰부는 시한부
기구였다. 특별재판소는 이미 구성이 돼
있는데 특별검찰부 구성이 이처럼 늦어
가지고 3.15 부정선거 원흉에 대한 재판이
늦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언제 취조를 하고
언제 기소를 한단 말인가? 특히
공소시효(公訴時效)라는 것이 법으로
못박혀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특별법이다 뭐다 하고
있는 사이에 장경근, 조인구(趙寅九),
신도환, 김용진(金容鎭), 이상국(李相國)
등 5명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장경근은 일본으로 밀항한 것이 밝혀졌으나
이들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늦어지고 있는 데다가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도망쳐 버리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4.19 상이자들이 또 아우성을 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혁명재판> 관리자인 조재천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 것도 당연했다.
(원 세상에 특검부장 하나 고르기가
이렇게 힘겹단 말인가?)
조재천이 한탄을 하고 있을 때에
비서관이 들어와 민의원 의장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주었다. 조재천은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자리에 있었군요.
특별부장감으로는 아주 적격자가 있기에
전화를 걸었소."
"그게 누굽니까, 의장님?"
"김용식 씨 아시죠?"
(김용식? 아, 그렇다, 그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을 왜 진작 생각해내지 못했지?)
조재천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의장님, 아주 적격잡니다. 의장님께서
좀 서둘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응, 법무부 장관도 이의가 없다면
서둘도록 하지. 우선 본인의 의사 타진부터
해봐야 할 테니까 하루 이틀만 기다려
봐요."
(곽상훈이 권고하는데 김용식이 거절이야
하겠는가.)
조재천은 생각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김용식, 당년 63세. 그는 강원도
보통문관(普通文官) 시험을 거쳐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법조인이
된 인물이었다. 대구 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1958년에 <반골판사>로
몰려 현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과도정권 때
대구 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컴백했었다.
이승만의 미움을 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강직한 인물이었느냐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줄로 안다.
김용식을 특검부장으로 선출하는
민의원의 투표는 1월 13일에 있었다. 그는
재석 152명 중에서 143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의원에서
압도적인 표로 특검부장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혁명과업이 잘못 처리되면
죽음으로써 국민에게 사죄하겠다>고 비장한
이 한마디가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김용식이란 사람 대단한 사람인걸."
"오랫동안 법원장을 지냈기 깨문에
정치흑막의 내용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걸세. 아주 적격자야,
특검부장으론. 역사의 심판은 바로 그런
사람이 해야 한다고."
"어디 어떤 식으로 역사의 심판을
처리하나 지켜보기로 하지."
온 국민의 시선이 한꺼번에 김용식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김용식은 특검부장에 취임하기가 무섭게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30명의 검찰관을 선정하는가
하면 150명을 각 도 조사위원으로
임명하고, 50명의 서기를 선발하는 등
정도로 날렵하기만 했다.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의 청사는
필동에 있는 구연합참모본부를 사용하도록
결정되었다.
예산도 1월 18일에 영달되었다.
공소기간은 2월 28일 자정까지로 법률에
못박혀 있었다. 한 달 반이 채 못 남았다.
그러므로 더욱 서둘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김용식은 직원을 독려해서 비품을
구입하는 한편, 일반 검찰에서 조사했던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조사기록을
검토케 하는 등 침식을 잊고 일에
몰두했다. 그는 청사 근처에 하숙을
정했다. 누구에게도 하숙의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았다. 피의자들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지들이 찾아와 청탁을 할까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비서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김용식은 <혁명재판>에
종교적이라 할 만큼의 경건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革命)>이란 지배를 받는 계급이
지배를 하는 계급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사회조직을 급격하게 변혁하는 것을
말한다.
4.19 의거는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디까지나 <의거>였지 혁명은 아니었다.
그러던 4.19가 <혁명>으로 승화되게 된
것은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부터였다.
이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았더라면 4.19는
어디까지나 <의거>로서 마무리지어졌지
<혁명>으로 승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용식은,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는 모조리
체포.구속토록 하라!"고 검찰관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이 명령 한 마디에 3.15 부정선거에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용케 체포당하는 것을
면하고 있던 자들까지 자다가 날벼락 맞는
꼴이 되었다.
한데, 특별검찰부장 김용식의 의욕과는
달리 <잡아들여서 조사를 하는 책무>를
맡은 검찰관들 가운데에는 그저 적당히
사건을 처리하려 드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좋게 보면 시간이 촉박해져 있는
탓도 있었다 할 수 있다. 공소시효는 2월
인물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으니 시간에 쫓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사건조사가
소홀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사건처리가 아무래도 소홀한 것
같은 느낌이 적지 않았다. 의당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처단을 받아야 할
인물들이 무사히 나와 밝은 천지를
활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사형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몇 해 동안은 족히 콩 섞은
밥을 먹을 줄 알았는데 용케 벗어났으니
무슨 놈의 영문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는걸?"
이런 의아심을 자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4.19 혁명재판>에서 가장 초점이 되고
있던 사건은 <어느 놈이 발포명령을
내렸느냐?>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발포명령>만
내리지 않았더라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긴
희생자를 내지 않았더라면 4.19는 의거로
또는 혁명으로 승화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저 <4.19 학생데모>로 역사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4.19는 이들 희생자가 있었기에
<의거>로 또는 <혁명>으로 승화되었다 할
수 있다.
하여간에 <혁명재판>은 <발포명령자>
색출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조사를
미진하기만 했다.
이 발포명령자 색출은 검찰관
최성인(崔盛仁)이 담당했다.
최성인한테는 <7월재판>의 공판 결과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진 셈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7월재판>에서는 유충렬, 백남규에게만
유죄판결이 내려졌을 뿐 홍진기, 곽영주,
조인구 등 5명에게는 <무죄>나 다름없는
언도가 내려졌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증거를 보강해서 이들을 처단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4월의 사자>들의 넋을 달랠 수
있고 그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성인은 증거보강에 힘썼다. 그 결과
그는 서울 시내 일원에 걸친 발포명령자는
굳혔다. 또 경무대 앞의 발포명령자는
곽영주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최성인은 이러한 심증을 굳히기까지 많은
관계자들을 증인으로 소환해서 심문을
했다. 전 국방장관이었던 김정렬(金貞烈)을
위시해서 해군 참모총장 이용운(李龍雲),
공군의 김창규(金昌圭), 육군의
엄홍섭(嚴鴻燮) 등등. 이 과정에서 홍진기,
박찬일(朴贊一), 최재유, 박충식(朴忠植),
안휘경, 유창준(兪昶濬), 구본준(具本俊),
이원희(李元熙), 이철희(李哲熙) 등이
경무대 비서실에서 모종의 모의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옳지, 이 모의에서 발포문제가 논의된
모양이다.)
최성인은 잔뜩 기대를 걸고 조사에
받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었다.
결국, 최성인은 발포명령자로서는
홍진기, 조인구, 곽영주의 선으로 수사를
종결짓고 말았다.
3.15 부정선거 때 치안국장이었던
이강학이 <비밀 경찰 선거독찰반>을
조직해서 이를 통해 교활하게 활동했음은
이미 <7월재판>에서 드러난 일이다. 이
<선거독찰반 사건>을 담당한 검찰관은
최윤철이었다.
그는 2월 1일, 병보석 중에 있던
이강학을 병원으로 찾아가 임상심문을
했다. 이강학의 진술은 7월 재판정에서
진술했던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선거독찰반에 관련돼 있던 경찰관이 어떤
뿐이었다.
선거독찰반은 모두 6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서울시경 부국장인
이선하를 비롯해서 제주도 경찰국장
심재순(沈載淳), 경찰전문학교 교수
박양호(朴亮鎬) 등이 가장 고위
경찰관으로서 관련되어 있었다.
"이선하, 심재순, 박양호 세 사람을 즉시
잡아들여라!"
최윤철은 경찰에 엄명을 내렸다.
딱한 건 경찰이었다.
(아니, 말단 경찰관도 아니고 현직에
있는 상급자를 부하직원인 우리가 어떻게
잡아들인단 말인가?)
경찰은 당장에 명령을 생각은 않고
우물쭈물했다. 부하로 있는 사람이
어려운 일이었다. 경찰은 계속
우물쭈물하며 특별검찰관 최윤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세 사람은
장경근 등과 마찬가지로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최윤철이 그놈들한테 뇌물을 먹은 게
아냐? 뇌물을 먹지 않았다면 검찰부 직원을
보낼 일이지 어째서 경찰한테 잡아들이라
명령을 내리는 거야?"
그런 각도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검찰관
최윤철의 행위는 아리송하기만 한 것이
사실이었다.
"경찰은 경찰이야. 잡아들이라고 했으면
당장에 잡아들일 일이지 어째서
우물쭈물하며 특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거야? 경찰놈들 세 놈을 도망치게 해주려고
거야."
세인의 비난이 빗발치듯 했다.
한데, 세인의 비난처럼 최윤철은 그 세
놈한테 뇌물을 받아먹은 것도 아니요,
경찰이 세 놈을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도 아니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뛰어야 벼룩>이라는 속담이 있다.
도망치기는 쳤으나, 세 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은 숨을 곳이 없었다. 아니 당장에는
숨을 곳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
곧 서울시경 부국장이었던 이선하와 제주도
경찰국장이었던 심재순은 곰곰이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한테 무슨 죄가 있어? 우린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숨었다가 체포되어 더
무거운 벌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특검으로
나가 당당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설마하니 그들이 나를
죽이려 덤비지는 않을 것인즉, 몇 해
동안만 고생을 하면 그것으로 다시 밝은
천지를 대할 수 있게 되겠지. 그렇다,
차라리 자수를 하자.)
두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진출두>라는 형식으로
제발로 걸어서 특검으로 찾아들어 갔던
것이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기소중지 처분을
받게 된다. 이유는 <정상참작>이었다.
동국(東國)대학교 총장이었던
<혁명재판정>에 세워져 특별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게
선거자금을 주어 이승만, 이기붕을 위해서
선거운동을 하게 했고 심지어는 신성한
졸업식 식장에서까지 이승만, 이기붕을
찬양하는 선거연설을 했기 때문이었다.
죄질로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대학교의 총장이 정치에, 그것도
부정선거를 자행하는 측에 가담해서
선거운동을 한 것이고 보면 후학을
경계하는 뜻에서 따끔한 맛을 보여줬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검찰관은 처음에는 김병수(金秉洙)였다.
그가 특별재판소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것은 1월 21일 오후 늦게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인 22일에 이 구속영장을 집행할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게 도무지 무슨 놈의
지랄이었는지 모른다. 백성욱의 구속영장을
집행하려고 한 다음날인 22일 <선거담당>
검찰관이 갑자기 채훈천(蔡薰天)으로
바뀌었다. <김병수 검찰관은 동국대학교
분규에 관련있는 모 교수와 친척관계이기
때문에 그에게 선거문제를 담당시키는 것이
부적당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담당이
바뀌게 된 이유였다.
그런 이유에서 담당 검찰관을 바꾸었다는
것은 아주 잘한 일이기는 했다. 행여 담당
어쩌나 하는 기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에 있어 김병수는 <백성욱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 인지(認知)수사에 그치고
말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담당
검찰관을 바꾸었다는 것은 백 번 잘한
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정도의 문제로
담당 검찰관을 바꾸는 것을 본 세인들은
<역시 특별검찰부다> 하고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다.
한데, 그러면 새로이 선거문제를
담당하게 된 채훈천이 <백성욱 사건>을
성의있게 다루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백성욱 사건을 맡자 곧 <혐의 없다>고
백성욱 사건을 불기소처분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의당 형무소로 직행시켜야 할 자를
혁명재판을 참다운 재판이라고 믿을 수가
있겠어?"
세인들은 이쯤에서 또다시 <혁명재판>에
대해서 불신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검찰부가 발족되면서 관계자들은
3.15 부정선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손을 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가 <태산 명동에서
서일필>격이었다.
전업단 간부사건(電業團幹部事件)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전업단 간부사건 하니까 일제시대의 무슨
독립운동 단체의 사건 같았던 느낌을
주지만 그런 애국단체의 사건은 아니고
전기 사업체들이 이승만, 이기붕을
사건을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수사 결과로는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캐고 또 캐면 <사건>이 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내용, 곧 특검에서 발표한
사건 내용을 보면 남조선전기
주식회사(南朝鮮電氣株式會社) 사장
박만서와 조선전업 주식회사 사장
이홍직(李弘稙), 그리고 경성전기
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사장
고재봉(高在鳳), 여기에
경전노조(京電勞組) 위원장인
정대천(丁大天) 등이 부정선거에
관련됐다고 해서 체포.구속했던 것인데,
정대천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죄가
버리고 말았다.
경전노조 위원장인 정대천만을 구속해
놓고 있었던 이유는 대한노총(大韓勞總)이
어용노조였기 때문이었을까? 석방된 세
사람 가운데 고재봉과 이홍직은 이승만의
측근자였다. 현직 대통령의 측근자가
부정선거에 관련했다. 그렇기에 벌을
받아도 크게 받을 것이라고 세인은 보고
있었는데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죄가
경미한 것으로 밝혀져 석방되게 되었는지
그저 아리송하기만 했다.
하긴 고재봉, 이홍직은 개인적인
인품으로 보아서는 아무리 이승만의
측근자라 하더라도 부정선거를 자행할 만큼
비인간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이승만,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온갖
보면 깊이 캐 들어가노라면 무엇인가
<꼬리>가 잡힐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던
것이 세인의 눈이었다.
각 시장 간부사건(各市場幹部事件)이라는
것도 역시 그렇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찰관은 윤무준(尹武濬)이었다. 소위 각
시장 간부사건이라는 명칭 밑에 3.15
부정선거에 관련됐다 해서 체포.구속되었던
인물들은 동대문시장 상인연합의
회장이었던 이정재(李丁載)를 비롯해서
부회장인 조열승(曺烈承), 한흥주식회사
사장 김영한(金永漢), 평화시장 재건위원장
유인구(柳仁九), 남대문시장 회장
이주영(李周榮) 등이었다.
검찰관 윤무준이 이들을 체포.구속해
놓고 문초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윤무준 검찰관은 말씀이오, 과거에
변호사로 있을 때 이들 시장(市場)과
관련된 사건을 맡았으니 공정한 조사가 될
성싶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용식은,
"그게 사실이라면 안 되지. 혁명재판에
조금이라도 사(私)가 끼어서는 안 돼" 하고
사건을 이택규(李宅珪)와 이상진(李相振)
두 검찰관이 맡아서 처리토록 조처했다.
그랬는데 결론은 <혐의 없음>이었다.
도대체가 조사를 해보고 혐의가 없다는
것인지 검찰관이라는 사람들의 조사과정을
일일이 지켜보지 않았으니 뭐라 단정적인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밖에도 출신군인 경상북도
민의원 의원 박종길(朴鍾吉) 사건 등등이
일반 국민이 납득하기에 좀 거리가 있는
결과로 낙찰되었었다.
소재(所在)를 파악할 수가 없어
기소중지를 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다니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 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재판>을 하겠다고 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보면 잡혀 들어간 사람만
억울한 꼴이 되었다. 도망쳤더라면
얼마든지 보신이 가능한 것을 <민족 앞에
속죄를 하겠다>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잡혀 들어간 사람들만 치르지
않아도 될 고역을 치러야 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있으나 마나한 특별법>이었다.
특별법이 제구실을 못한 데에는 물론
있기는 했다. 특별검찰부가 실질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44일간이었다.
잡아들여야 할 놈은 너무나 많았다. 한
놈을 잡아다 조사를 하게 되면 A라는 놈도
잡아들여야 할 놈으로 떠올랐고, B라는
놈도 잡아들여야 할 놈으로 떠올랐다. 꼭
고구마 넝쿨을 잡아당기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고구마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똑같았다. 그러니 한 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언제 잡아들이고 언제 조사를 해서
공소기간 내에 기소를 한단 말인가? 여기에
곁들여 특별감찰부가 제구실을 다할 수
없었던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특별검찰부가 발표한 것에서 인용해
보기로 한다.
(2) 범죄 발생시기가 거의 1년이나
경과되어 있어 범인의 소재와 증거 수집이
매우 곤란했다.
(3) 특별검찰부를 구성하는 시일이
여유있지 못하고 너무 촉급을 요해서
서둘러 구성한 특별검찰부가 유기적 연결을
이룰 여유가 없었다.
(4) 정보가 무척 빈약했다.
(5) 경찰의 협조활동이 퍽 소극적이었다.
이런 이유에서였겠지만 특별검찰부가
국민한테 투서를 요구했던 것은
특별검찰부의 명예를 위해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특별검찰부는
<투서에 의한 정보로써 공소가 유지되면
사례를 하겠다>고까지 했다.
<무고나 모함을 할 경우에는 처벌하겠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다. 그러나 말이다,
이런 식으로 3.15 부정선거 관련자를
축출해서 처단하려고 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이었을까?
국민들 사이에 만연하는 <불신풍조>는
무엇으로 메꾸어야 하는가 말이다. 득과
실을 따져 볼 때 결코 바람직한 것은 못
되었다.
국민에게 투서를 바란 결과 2천여 통의
투서와 1천 통이 넘는 고발진정서가
들어왔다. 이것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 80퍼센트가 실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특별검찰부가 이런 식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하려 했으니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것은 군인으로서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였다.
<군인도 이 나라의 국민이다. 그러므로
군인도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의법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래서 특별검찰부에서는 부정선거
관련자와 발포 명령자 색출, 이렇게 둘로
나누어 과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권중돈의 생각은 달랐다. 군부의
부정선거 관련자는 이미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러므로 군부에 대한
부정선거 관련자 척결은 발포명령자에
국한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권중돈의 뒤를 이어
새로이 국방장관에 임명된 현석호의 생각도
최고지위자가 책임을 통감하고 용퇴한
이상에는 부정선거 관련자 척결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발포명령자만을
색출해서 의법 처단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군부의 최고지위자가 책임을 지고
용퇴했다는 것은 곧 송요찬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이미 육군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예편했기 때문에 군부의 부정선거
관련자 문책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설혹 또 군부에서 부정선거에 관련한
자가 많다 하더라도 예편 등으로 조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법으로 물을
것까지는 없었다.
끝내는 김용식도 이 점을 수긍하게
역점을 두고 과업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발포명령자 색출이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군부의 발포명령자란
경무대 앞에 배치되어 있던 헌병들의
사건을 말한다.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지자 군부에서는 경무대 앞에 헌병을
파견하고 경비임무를 했다. 그랬는데
경찰에서 데모대에 대해서 발포를 하기
시작하자 경무대 앞에 배치되어 있던
헌병들도 발포를 해서 숱한 사상자를 내게
했던 것이다.
<경무대 앞 발포명령자 색출에
필요하오니 4.19 당시 경무대 앞에
배치되어 있던 헌병들에 대한 명단을
제출해 주시기를 요망합니다.>
1961년 2월 3일, 특별검찰부에서는 이런
한데, 국방부에서는 특별검찰부의 요구에
응하려 해도 응할 재간이 없었다. 제6관구
사령관인 엄홍섭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4.19 당시 경무대 앞에
배치되었던 헌병들은 제6관구 소속
헌병대의 대원들이었다.
군대란 명령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밑에서부터 위로 캐올라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작업을 누구도 하려 하지 않았다.
특별검찰부에서도 국방부에서 명단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조사업무를
개시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공소기간은
끝났고 결국에는 군부에 대한 <혁명과업>은
흐지부지되고 마는 결과가 돼 버리고
<4월혁명> 과업중에는 <반민주
공민권제한법(反民主公民權制限法)>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 법호도 따지고 보면 상이부상
학생들이 의사당의 의정석을 점거함으로써
마련하게 된 부산물이었다.
물론 상이부상 학생들이 의사당의
의정석을 점거하기 전에도 반민주 행위자에
대한 공민권 제한문제는 여론으로써 제기된
바 있었다.
"자유당에 속해 있던 놈들은 얼마동안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유당놈뿐 아냐. 자유당에 아첨한
해야 마땅해!"
여론은 분분했다. 그러나 이것은 따지고
보면 하나의 어김없는 감정론이었다.
자유당에 속해 있었다고 해서 정치운동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발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죄가
있다면 벌을 받으면 그뿐이었다.
자유당원이었다고 해서 <초록은 동색이다>
하며 도매금으로 넘기려 든다면 이것도
일종의 매카시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각 있는 사람들이
여론에 강하게 반발할 리가 없었다.
"공민권 제한이라니? 그런 제도를 채택한
나라가 세계에 어디에 있었어? 죄가 있다면
형벌로 다스리고 죄가 없다면 자유인이야.
공민권 제한 따위는 정치보복 이상의 것이
그러나 역사란 때론 옳지 못한 생각을
하는 자가 승자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상이부상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침내 민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여론에 편승했다.
<다시는 정치권력을 남용하거나 부당한
정치권력에 아첨해서 일신의 영화나
도모하려는 부류의 추잡한 인간들이
배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본보기로
공민권 제한법을 마련해야 한다> 해서
공민권 제한법이라는 것이 성안되어
민의원에 상정되었다. 1960년 10월 31일의
일이었다.
이 법률안이 통과되어 공포되는 경우
어떤 자가 <공민권>을 박탈당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충직한 추종자였던 자가 7.29 총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되어 국회의원의 신분을 지닌
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한 예가 자유당 당무위원이던
이재학이었고, 심계원(沈計院) 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최하영의 경우였다.
어째서 이런 사람들이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공민권 제한법 안에는 <자동
케이스>라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 자동
케이스에 명시되어 있는 조항에 따르면
7.29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현역
국회의원도 어쩔 수 없이 의원직을 내놓고
공민권을 박탈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자동 케이스라는 조항 때문에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구락부에서는, 자동
케이스 조항에서 현역 의원은 제외시켜야
마땅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1) 그들은 이미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2) 헌법 제 43조에 의해 4년간의 임기를
보장받았으며, 개헌안 부칙에서는 이것의
예외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특별법에서
의원의 임기에 영향을 미칠 결정을 하는
것은 위헌이다.
민정구락부에서는 앞의 이유를 내세우며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유는 이 자동
케이스 조항에 이재형, 조종호(趙鍾昊),
박종길, 안동준, 최치환(崔致煥),
이정석(李丁錫), 정상희, 박충식(朴忠植),
이재현(李載鉉), 최석림, 전형산(全亨山)
없이 의원직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참의원에서는 의장인 백낙준을 비롯해서
한광석(韓光錫), 신의식(申義湜),
송방용(宋邦龍), 황성수(黃聖秀),
오범수(吳範秀), 김대식(金大植),
박철웅(朴哲雄), 김장섭(金長涉),
강경옥(康慶玉) 등 10명도 같은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놈의 <자동 케이스>란 어떤
조항이었는가?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라고 하면
1952년 5월 26일에 일어났던 정치파동을
말한다. 공민권 제한법에서는 이 5.26
정치파동 때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그때의
정부 각료를 비롯해서 이승만의
어용정당이었던 원외자유당(院外自由黨)
제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앞에서
소개한 민정구락부 소속 의원들은 그때의
정부 각료였거나 또는 원외자유다원이었고
아니면 이승만의 하수인으로서 5.26
정치파동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5.26 정치파동 때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공민권 제한법을 적용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지게 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민족분열의 위험까지 있었다. 앞의
민정구락부 소속 의원과 자유당에 속해
있던 의원들을 공민권 제한법으로 묶어
놓을 경우 그들을 선출한 선거구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필 왜 5.26 정치파동 때까지냐?
묶을려거든 이승만 집권기간 동안에 벼슬을
하고 나오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올 경우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민족분열을 초래하게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에 이 자동 케이스 조항으로
말미암아 <공민권 제한법>은 몇 번
곤두박질 했다. 그 결과 자동 케이스는
민의원에서 심사해서 확정짓기로
매듭지어졌다. 그래 가지고 민의원에서
통과된 것은 1960년이 저무는 12월
31일이었고, 정부는 그날로 이 법을
공포했다. 또 이 법의 시행령이
각의(閣議)를 통과한 것은 1961년 1월
5일이었다.
장면은 처음부터 공민권 제한법에
대해서는 반대였다. 그것은 곧
<정치보복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공포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길게 탄식을 하며 이 법의
시행을 공포했다.
<정치보복법>이라 할 공민권 제한법의
운용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법이 만들어져 운용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대한민국의 비극이었다. 이법은
4.19 부상학생과 일반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만들어졌지만 앞으로의 헌정사에
있어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부에서 공민권 제한법을
공포, 시행하자 국회에서는 공민권
심사위원회(公民權制限對象者審査委員會)를
구성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반 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을 만들게 되자, <국회의원은
공민권 제한대상자일지라도 이미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니
별도로 국회에서 심사해서 결정하자> 해서
이런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언론에서는 <국회의원들은 될 수 있으면 좀
봐주자는 특권의식의 발로>라고
빈정거렸으나, 국회의원을 심사해서
공민권을 제한하고자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거듭 또 언급하게 되지만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서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위원회는 민의원 6명, 참의원 3명,
변호사 출신 민의원 의원인
주도윤(朱燾允)을 위원장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의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주운(朴周運:민주당),
홍정표(洪正杓:민주당),
이정래(李晶來:신민당),
양회영(梁會英:신민당),
최달희(崔達喜:참의원) 등이었다.
이제 공민권 제한대상자들의 정치적
운명은 이들 아홉 사람의 손에 달려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면 어떤 국회의원들이
심사대상자였던가? 공민권 제한법 제4조
규정인 자동 케이스 해당자는 민의원
의원으로서는 전형산, 이재현, 박종길,
최석림(崔奭林), 조종호, 최치환, 이재학,
김장섭, 송방용, 한광석, 오범수, 박철웅
등 5명이었다.
제5조 심사 케이스 해당자에 민의원
의원으로서는 전형산, 이재현, 조종호(이상
자동 케이스와 중복), 이정석, 박충식,
김봉재(金奉才), 서정원(徐正元),
안동준(安東濬), 송능운(宋能云) 등
9명이었고, 참의원 의원으로서는 김장섭,
한광석, 오범수, 송방용, 박철웅(이상 자동
케이스와 중복), 김대식, 황성수, 신의식,
강경옥, 여운홍(呂運弘), 정문갑(丁文甲),
정극모(鄭棘模), 이교선(李敎善),
정상구(鄭相九), 설창수(薛昌洙),
김형두(金炯斗) 등 18명이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전후 네 차례에 걸쳐
16명을 제한 판정했다. 자동 케이스
국회의원은 이재학, 최하영, 전형산,
최치환, 박종길(이상 민의원), 한광석,
박철웅, 김장섭, 오범수(이상 참의원) 등
9명이었다. 최석림도 여기에 해당될
인물이었으나 선거무효로 이 역시 심사
도중에 파기되었다.
참의원 의원으로서는 김대식, 송관수,
황성수, 강경옥 등 4명이었다. 공민권 제한
심사위원회가 대상 국회의원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았던 회오리바람이 정계에 몰아쳤다.
그 회오리바람은 다름이 아니었다. 3.15
선거 당시에 자유당 중앙선거대책위원
지도위원(指導委員)이었던 사람도 <심사
케이스 해당자>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강력하게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계 각층의 지도적 인물들이 거의
망라되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희망해서 추대된 사람도
있었지만 태반은 <타의>에 의해서
추대되었던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었다.
진상이 그렇거늘 그들을 심사 대상자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여론을 일으켰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참의원 의장인
백낙준과 민의원의 민정구락부 총무인
이재형을 정계에서 밀어내자는
음모에서였다.
역사학자요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백낙준은 정치적 조직으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 관록과 덕망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참의원
의장으로 추대되었던 까닭도 바로 이
그런 인물이었기에 보수진영에서는 그를
당수로 추대해서 새로이 보수
신당(保守新黨)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백낙준 씨를 당수로 해서 보수신당이
출현하게 될 경우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은 재야세력뿐만이
아니라 집권당인 민주당이나 야당인
신민당도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백낙준 씨도 공민권
제한법의 심사 케이스에 포함시켜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 버리도록 하자>는 것이
민주당의 전략이었다. 이런 구상에
신민당의 일각에서도 다수 호응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재형의 경우에 있어서도 백낙준의
신파의 후원 아래 민의원 부의장에
입후보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지만 그도
이 무렵에 민정구락부의 총무로서
보수신당을 구상하고 있었다.
특히, 이재형은 재력도 넉넉했다. 그가
만일 백낙준과 손을 잡기라도 하는 날엔
그의 세력을 배경으로 해서 민주당과
신민당에서 얼마든지 사람을 빼내올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정계 기류였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을 공민권 제한법으로
묶어 정게에서 추방할 수 있었던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 두 사람을
정계에서 추방하려는 사람들은
<반민주행위는 공민권 제한법 제 5조를
적용하면 얼마든지 정계추방이 가능하다.
제 5조 적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의 백낙준, 이재형을 공민권
제한법으로 묶으려는 데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 5조는 예시규정이 아니라
예거규정(例擧規定)이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공민권 제한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공민권 제한법 제 5조 심사 케이스
조항에는 어떤 반민주행위자를 심사
케이스에 해당시키느냐 하는 데 대한 몇
개의 예를 들고 있다. 이 예가
예시규정이냐 아니면 예거규정이냐 해서
새삼스럽게 논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법률해석 논쟁은 백낙준,
이재형을 정계에서 추방코자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것은 그 두 사람을 정계에서 추방해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비롯되었던
것이다.
공민권 제한법으로 묶어 백낙준,
이재형을 정계에서 추방해 버리고자 하는
이 정치적 음모는 실현되지 못했다. 제
5조의 법률적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에 5.16 군사 쿠데타를
맞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공민권 제한법 운용에 있어 사실
심사위원들 자신도 별로 이렇다할
심사기준을 세워 놓고 있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심사라는 것이 다분히
주먹구구식이었다. 그들 심사위원들이
대상자를 심사한 과정을 살펴볼 것 같으면
3.15 선거 당시의 자유당 문서나 신문철을
두 자료를 기본 자료로 해서 피의사실을
들춰냈다.
그리고 이 피의사실을 적어 가지고
대상자에게 통지서를 보냈다. 그런 다음,
이 <피의사실 통지서>를 받은 대상자는 5일
이내에 각 10통씩의 변명서를 작성해서
제출토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현지조사(現地調査)라는 것도
실시했다.
조사위원이라는 사람들이 목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면서 현지로 내려가면 그들을
맞는 것은 대상자 선거구의
진정단(陳情團)이었다.
<OOO 의원은 깨끗하다>고 진정하는
일단이 있는가 하면, <OOO 의원은 반민주
행위자이므로 마땅히 목을 잘라야 한다>고
이런 형편이었으니 현지조사라는 것이
공정을 기할 수 없었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공민권 제한법이란 그 자체가
<정치보복법>이었던 것은 차치하고 그
운용이 다분히 정치적이었으니 그래 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과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부정축재자를 처단하라!>
부정축재자를 처단하라는 <국민의
소리>는 이승만 하야 직후부터 줄곧
온누리에 덮여 있었다.
이러한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고 허정의
어떻게 다루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이렇게 지극히 미온적이기만 한
과도정권의 태도가 못마땅하기만 했던
국민의 감정은 상이부상 학생들의 의사당
점거사건으로 폭발돼 버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왜 부정축재자를 처단치 않는가? 민주당
정권도 부정축재자와 야합한 것이 아니냐?
야합을 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부정축재자를
처단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냐?"
"민주당 놈들 7.29 총선을 앞두고
부정축재자 놈들한테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아먹었다고 하더라."
민주당 정권을 성토하는 국민의 소리는
<민주당이 부정축재자한테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아먹었기 때문에
부정축재자를 처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는 그럴싸한 루머까지도 퍼지게
되었다.
일이 이쯤 번져가게 되니 장면
정권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의사당을 검거했던 상이부상
학생들이,
"왜 부정축재자를 처벌하지 않는가?
당장에 부정축재자를 처벌할 조치를
취하라!" 하고 명령(?)을 내린 이상에는
부정축재자를 처리하기 위한 입법을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초 1961년 2월 9일, 민의원에서 통과된
<부정축재특별처리법안>과 국세(國稅)
벌과금 배율은 직세(直稅)가 2배(8할 이상
자진신고 때) 내지 4배(신고하지 않았을
때), 간세(間稅)가 5할 가산(加算)으로
낙찰되었고, (3) 소급기간을 2년(1960년
4월 26일부터)으로 했으며, (4) 이 처리에
대해서는 일체의 소추(訴追)를 인정치
않기로 되어 있었다.
이 <부정축재처리법>이 참의원에서 수정
통과된 것은 민의원에서 회송되어 온 지
2개월 만인 4월 10일이었다. 처리해야 할
다른 안건이 많은 탓이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2개월씩이나 걸린 뒤에 겨우
한두 가지 수정을 해서 통과시켰다는 것은
부정축재자 처벌에 관한 한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의원에서 통과시킨 부정축재자처리법에
2조였다. 먼저 민의원에서 통과시킨 제
2조를 소개한다.
제 2조(부정축재의 정의)
(1) 본법에서 부정축재라 함은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를 말한다.
1) 국공유(國公有) 재산이나 귀속재산의
매매계약 취득 또는 점유로 인하여 3천만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
2) 20만 불 이상의 정부 또는 은행보유
외환의 대부를 받은 행위
3) 금융기관으로부터 1억환 이상의
융자를 받은 행위
4) 국가 또는 공공단체의 공사청부나
자괴감을 느꼈다.
또는 수의계약을 하거나
관허사업(官許事業)의 인허가를 부정하게
얻어 5천만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
5) 20만 불 이상의 정부 또는 은행보유
외환을 수의계약에 의하여 매수(買受)한
행위
6) 외자구매 외환 또는 그 구매외자의
배정을 독점함으로써 1억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
7) 조세(租稅)에 관한 법률에 위반하여
5천만환 이상의 국세를 포탈하거나
포탈하고자 한 행위와 국세의 징수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행위. 단,
비영업대금(非營業貸金) 이자소득에 대한
잡소득세(雜所得稅)의 징수의무에 대하여는
예외로 한다.
이상의 축재를 한 행위
9) 재산을 해외 도피시킨 행위
10) 국공유 재산이나 귀속재산을 부당한
이익을 취득할 목적으로 임대계약을 한
행위
11) 정부불(政府弗) 및 ICA불로서
정부구매에 있어서 국제시가보다 현저하고
고가로 구매한 행위
12) 앞의 각 호에 해당하지 않는
행위지만 3천만환 이상의 부정축재를 한 자
(2) 부정축재자가 그 부정축재 재산을
타인의 명의로 취득하게 한 때에는 그
타인도 이를 부정축재자로 간주한다.
(3) 부정축재자로서 제 1항 각 호의
제한금액에 미달할지라도 동일인 또는
방계업체의 부정축재의 합계액이 제 1항 각
처리한다.
(4) 제 1항의 부정축재의 금액은 단기
4293(1960)년 4월 26일 현재의 이득 가격을
말하며, 그 이전에 취득한 부정축재의
금액은 취득 당시의 가격에 한국은행의
조정에 의한 물가지수를 승(乘)하여 단기
4293(1960)년 4월 26일 현재의 가액으로
환산한다.
가액을 산정하기 어려운 때에는 부정축재
처리위원회가 지정한 은행의 감정에
의한다.
민의원에서 성안 통과시킨
<부정축재처리법안>을 소개한 김에
곁들이지만 이 법안이 세상에 공포되자, 이
법안에 대한 시각이 각양각색이었다.
놈들 이참에 아주 작살이 나버려야 돼!"
하고 갈채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나라의 중산층(中産層) 이상이 법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모조리
거지를 만들어 버리자는 수작이야 뭐야?"
하며 분개해 마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1961년 현재로 이 법을 공포 시행할
경우, 밥술이나 먹고 집칸이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밥술이나 먹고 집칸이나 갖고 사는
사람치고 귀속재산 한구 개쯤 손아귀에
넣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속재산이라는 것은 해방되는 그날까지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말한다. 작은 것은 개인 주택에서 큰 것은
갖가지였다. 미군정 시대에는 영어 몇
마디쯤 지껄일 줄 알면 개인주택 하나쯤
손아귀에 넣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그랬기 때문에 미군정 관리, 곧
행정관리에서 경찰관리에 이르기까지
영어깨나 지껄일 줄 아는 자는 먼저 집 한
채씩을 차지했고, 다음에는 돈푼깨나 쓸 줄
아는 자들이 미군정 관리한테 뇌물을 주어
차지했다. 그랬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무렵에는 귀속재산 가운데
개인주택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있다면 큰 덩어리의 빌딩 또는
공장 같은 것들이었다. 미군정에서는
이러한 큰 덩어리의 귀속재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다음에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사용을 원하는
있었다.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세워지자
정부에서는 관재청(官財廳)이라는 기구를
두어 이들 적산인 귀속재산을 관리케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정부재산으로 남겨둘
수도 없기 때문에 임대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어 불하를 했다.
이 불하 과정에서 숱한 말썽이 일었다.
정치권력을 이용해서 전혀 연고권이 없는
자가 귀속재산을 불하받았는가 하면 그것을
시가보다도 훨씬 싼값으로 불하를 받아서
엄청난 이득을 남겨 팔아버리는 등 말썽이
그칠 날이 없었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상이부상 학생들이 한국무역협회에 찾아가
원 임대관리자에게 미도파를 돌려주라고
철야데모를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민의원에서 성안
통과시켰던 <부정축재처리법안> 제2조를
참의원에서 어떻게 수정 통과시켰던가?
참의원에서 수정한 법조문을 보자.
제2조(부정축재의 정의) 본 법에서
부정축재라 함은 단기 4293(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부통령 선거를
위하여 집권당에 자진(自進) 3천만환
이상을 제공하거나 조달한 자 또는 공무원
및 정당인으로서 부정선거에 관련한 사실이
현저한 자로서 부정한 방법으로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재산상의 이득을 취한
행위를 말한다.
자금을 제공하거나 조달한 자가
있어서는 주식의 4분의 1 이상을 소유하는
주주나 또는 임의로 관여한 기업체도 또한
부정축재의 대상으로 한다(이하 12개
항목은 민의원 안과 같다).
민주당 정권시대의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민의원, 참의원 의원들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었다. 한데, 똑같은 국회의원인데도
부정축재자를 처리하는 문제에 있어서
민의원 의원과 참의원 의원의 견해는
이렇듯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민의원에서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자는 모조리 다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참의원에서는 3천만환 이상 자진 제공자와
부정선거 공무원과 정당인만을 대상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하여간에 참의원에서 제2조를 수정해서
민의원으로 회송해 오자, 민의원은
참의원의 뜻을 존중해서 4월 10일 이것을
통과시켰다. 민.참 양원이 구성된 이후
민의원이 참의원의 뜻을 존중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민의원에서 참의원 수정안을 통과시키자,
정부는 4월 14일 지체없이 이 법률을
공포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황소 걸음같이
더디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부정축재처리법>도 만들었고 이 법률을
공포도 했다. 그렇다면 지체없이 시행을
했어야 옳았다. 그러자면 <시행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국무회의에서 의결해야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한 지 거의 한
달이나 된 5월 10일에야 시행령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올려 의결했던 것이다.
이렇게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해
놓고도 그 시행을 서둘 생각은 않고
뭉그적거리고만 있자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운다는 격이군.
부정축재자를 처단하기는 해야겠는데
정치자금줄이 끊어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쯧쯧......."
민주당 정권은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길이
끊길가 걱정이 돼서 부정축재자 처리에
늑장을 부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것보다는 부정축재자 처리를
서두름으로써 경제가 마비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4월혁명>의 3대 과업의 하나인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는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5.16 군사 쿠데타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5. 중구난방 통일론
또다시 되풀이해서 언급하게 되지만
<한국을 망치는 자는 바로 한국인
자신>이었다.
무엇을 가지고 감히 이런 말을 또
되풀이해서 지껄이는가? 잔뜩 고삐가
죄어졌다가 풀린 한국인은 <자유>와
<방종>을 혼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빚어지게 된 것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됐으니 백가쟁명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자.
끝나지를 않았다. 그 주장을 <데모>로
발전시키는 것이 4.19 이후의 유행 같은
풍조였다.
<내 주장이 제일 옳다. 내 주장을
받아들여라! 뭐야, 못 받아들이겠다구?
좋아, 받아들이나 안 받아들이나 두고
보자> 하고는 데모를 벌이는 것이다.
이래서 4.19 이후 데모는 그칠 날이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불안이 가실
날이 없었던 것이다.
데모란 내버려 두면 제풀에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장면 정권은 경찰력이 약화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기에 개똥 보듯이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한데, 백가쟁명 가운데에는 내버려 둬도
주장이 있었다. 그런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제재를 가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하니까 박테리아 번식하듯
자꾸만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주장, 그것은
남북문제에 대한 주장이었다.
이 남북문제에 대해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고정훈(高貞勳)이었다. 그는
<남북간에 문화교류를 하자>고 주장했다.
남북간에 문화교류를 하다니 이승만
통치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만약
이승만 통치시대에 그런 주장을 했더라면
입이 백 개라도 찢기우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니까 그런 주장까지도
튀어나오게 됐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서 장
정권은 강력히 대처해서 그 봉쇄책을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장면 정권은 그
봉쇄책을 밀고 나가기에는 용기가 너무
없었다. 결국은 5.16 군사 쿠데타의 구실을
또 하나 제공해 주고 만 꼴이 되었다.
고정훈이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5월 27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주장했다면
또 모를까. 고정훈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이 무렵의 그는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4.19 의거가 터진
바로 그때, 그는 조선일보(朝鮮日報)
논설위워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지자, 그는 신문사를
뛰쳐나와 데모대에 앞장을 섰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있었던 것은
지휘했다.
"경무대로!"
그는 지팡이를 높이 쳐들어 경무대 쪽을
가리켰다. 와아! 하고 데모대가 경무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광화문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행진해 가다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반공회관을 가리켰다.
"저놈의 건물을 불살라 버려!"
그의 명령에 따라 일단의 젊은이들이
반공회관으로 달려가 불을 질러 버렸다.
그럼 고정훈은 공산주의자였기에
반공회관을 불지르라 명령(?)을 내렸던
것인가? 아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반공주의자가 반공회관을
불지르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건
아무래도 논리가 모순되지 않느냐고 항의할
반공회관이 반공의 탈을 쓴 폭력정치의
음모처였기 때문이었다. 신도환이 이끌던
반공청년단. 그것이 바로 폭력정치의
전위대였다.
이 무렵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의
우상으로 등장해 있던 고정훈의 신상에
대해서 좀 소개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평안남도 진남포 태생이었다.
1920년 생이니까 당시 그의 나이 만
40세였다. 일제시대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가
하면 다시 또 북만주(北滿洲) 하얼빈으로
건너가서 북만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그의 어학실력이 인정되어 그는 해방된
보도국의 통역으로 활약을 했다. 그는 이때
소련군의 많은 1급 비밀에 접할 수가
있었다. 그 정보를 머리 속에 집어넣어
가지고 그는 1947년에 월남했다. 남한땅에
진주해 있던 미군이 그를 대환영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군정이 끝나갈 무렵 그는 육군사관학교
특별 7기생으로 입교, 임관한 뒤 줄곧
정보계통에서 활약하다가 예편했다. 그가
예편하기 전인 1950년 6.25 동란 때는
대학출신 젊은이들을 규합하여
신생동지회(新生同志會)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미래에 대비한 원대한
계획이었다. 나중에 이 동지회를 정당으로
발전시킬 꿈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밀착되기도 했다. 정치가다운 정치가는
오로지 조봉암뿐이라는 것이 고정훈의
판단이었다. 이승만 지지 세력에서
대통령에 입후보하는 조봉암을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간파한 고정훈이 현역군인으로서는
감히 용훼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정훈이란 사나이는
열정가였다. 아마 그가 시인이 되었더라면
바이런을 능가하는 서정시를 산더미처럼
창작해 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상의 그의 발자취로 볼 때, 그가
공산주의자는 고사하고 공산주의에
동정조차 기울일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줄로 안다.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고정훈이라는 이 사나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냐? 김일성 공산집단하고
문화교류를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공산주의 문화를 남한땅에 이식해서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도와주자는 거야
뭐야?"
고정훈이란 이름 석 자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황당무계한 주장에 노여움을
터뜨렸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고정훈이 인기전술을 쓰고 있군. 그
누구도 감히 주장할 수 없는 주장을
함으로써 대중에게 고정훈이란 이름 석
자를 박아놓자 그거야"라며 고정훈의
주장을 인기전술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필요성을 절감해서 그런 주장을 했든 또
인기전술에서 그런 주장을 했든 간에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있었다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또 북한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대학생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고정훈의 지론에 찬성을 표시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사회당(社會黨)
대표총무위원(代表總務委員)인
서상일(徐相日)이었다.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보수정당에 몸담고 있던 그가 어떤 이유로
혁신정당으로 전신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남북 통일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간의
문화교류에서부터 길을 트는 것이 좋다>고
것이다.
똑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무게가 달라진다. 고정훈이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했을 때 기성세대는
<정신나간 소리> 또는 <인기 전술> 등으로
다분히 비판적인 눈으로 보았으나,
서상일이 남북한간의 문화교류를 주장하고
나서자 그것을 받아들이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남북 문화교류? 그것 생각해 볼 만한
문제지. 문화교류를 합네 하고 왔다갔다
하다 보면 무언가 통일의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구, 설혹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전쟁
재발만은 막을 수 있을 게 아닌가?"
"아무렴, 전쟁만 억제할 수 있다 해도
국제적인 여건이 성숙해야만 가능한 일이고
보면 최소한 전쟁만이라도 억제하도록
해야지."
이것 참 기가 막히고 답답한 일이었다.
6.25라는 전무후무한 시련을 겪고도
김일성의 꿍꿍이속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볼
생각은 않고 그저 전쟁 억제의
방법론으로써 남북 문화교류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답답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이것은 민족적인
염원이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논법은 성립될 수가 없다.
통일을 이루고자 염원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김일성 집단의 기본노선은 <무력
적화통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쉬지 않고
칼을 갈아 오고 있다. 기회가 오면 그 칼을
종횡무진으로 휘둘러댈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그들과 문화교류를 해?
우리가 과연 공산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가?
아니 아무리 소화능력이 크다 해도
공산주의 문화는 절대 소화시킬 수 없는
불가능의 문화인 것이다. 체증에 걸리기 꼭
알맞는 문화인 것이다. 그런 문화를
받아들여서 뭘 어쩌란 말인가?
혁신정객들이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그 자체가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는
해서 무슨 수작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논법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날이 크게 걱정스럽군. 도대체 장차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고 나가려고 그런
주장을 하더란 말인가?"
지각 있는 사람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은 역시 현명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바로
7.29 총선거에서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하고 나선 혁신계 입후보자들은 거의가
전멸하다시피 돼버린 것이 어김없는 그
증거였다.
"정신나간 작자들 같으니라구. 뭐가
어째? 남북 문화교류를 하자구?
공산당의 사촌쯤 되는 작자들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김일성 집단이 어떤 놈들인데 그
놈들하고 문화교류를 하자고 주장하는
거야? 그래 문화교류를 했다 하구, 거기서
얻어질 소득이 뭐야?"
"옳아, 그런 주장을 하는 놈들은
공산주의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놈들이야. 알고도 그런 주장을 했다면
그자들은 김일성의 앞잡이라 할 수밖에
없어!"
7.29 총선거 선거전이 벌어지게 되자,
혁신정객들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6.25를 망각한 혁신정객들한테는 표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민족을
오도(誤導)하려 하고 있다. 표를 주어서는
마침내 여론은 이런 방향으로 모아졌다.
그러니 그들은 추풍낙엽의 신세가 될
수밖에. 손꼽을 정도의 혁신정객밖에
당선시키지를 못했다.
섣불리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했다가 그들
스스로가 신세를 망쳤다고 반성을 하게
되었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이래서
<남북 문화교류론>은 어느 사이엔가 쑥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세상은
조용해졌다.
한데, 7.29 총선거에서 혁신정당이
참패를 당하자 혁신정객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아닌 김일성이었다.
당초 대한민국 정계에서 혁신정객들이
<남북 문화교류론>를 들고 나오자 김일성은
(옳지 옳지, 잘 한다, 잘 해.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구말구.)
김일성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북 문화교류론은 곧 적대감정을 씻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얘기다. 그것이
실현되기만 하면 어쩜 대한민국에서는
군사력 증강을 중지할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런 방향으로 진척되거든 틈을
보아 일거에 쳐내려 가기만 하면 그깐 놈의
대한민국쯤 식은 죽 먹기로 집어 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김일성은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설혹 대한민국으로 쳐내려갈 틈을
주지 않는다 해도 <남북 문화교류>를
빙자해서 대한민국 국민에게 공산주의
소득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방법론만 잘 연구하면 <남북
문화교류>를 빙자해서 남한에 간첩을
다수로 넘겨보낼 수 있는 길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과연 남북
문화교류론이 남반부에서 어떻게 처리될
것이냐?> 하고 잔뜩 그 귀추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7.29 총선 결과에
혁신정당들이 처절하리만큼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김일성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런 지지리도 못난 놈들. 이놈들아,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혁신정객이라 할 수
있는 거야? 너희 놈들 믿구 공연히 몇 달
허송세월한 시간이 아깝다, 시간이
김일성은 남북 문화교류론자들한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되자, 새로운 대남전략을 세우기에
골몰했다. 그 결과 제의된 것이
남북연방안(南北聯邦案)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이 남북연방안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1960년 8월 14일이었다. 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석상에서 처음으로 이 연방을
주장했던 것이다.
<......과도적인 대책으론 북남 조선의
연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한다. 당분간
북남 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북남 조선의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한다.......>
김일성은 이 제의를 해놓고 이제
<남반부>에서 큰 호응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모으고 있었다.
(이놈들 남반부놈들아 어때? 귓맛이
좋지? 귓맛이 좋을 거다. 그런즉, 남반부의
대학생을 비롯한 혁신정객들은 어서 내
주장에 호응해 나서렷다!)
평양방송에서는 연일 되풀이해서
남북연방안을 방송해댔다. 그러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남반부>에서 대대적인 호응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랬는데 <남반부>로부터 단 한마디의
<남북 문화교류론>을 주장했을 때에는 일부
대학생들이 호응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남북연방안>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호응 소리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참 이상한걸.)
김일성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이란 자의
속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친놈, 우리가 네놈의 속셈을 모를 줄
알구!)
김일성이란 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였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김일성이란 자가 해방 15년 동안 무슨 짓을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콩으로 메주를 만든다 해도
김일성이란 자의 수작을 대한민국 국민은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남북연방안을 주장한 김일성의 속셈은
무엇이었던가. 그 속셈은 너무나도
뻔하기만 했다.
<남반부의 국론을 분열시켜 정치적
안정을 깨부수자>는 것이 그의 검은
속셈이었다.
이러한 김일성의 검은 속을 대한민국
국민치고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면을 쓴 주장에 동조할 리가
없었다. 냉소를 보냈을 뿐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대한민국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정훈, 서상일 등이 <남북
문화교류>를 주장했다고 해서 과히 걱정할
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 참, 이런 경우에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다름이 아니라 대학생들이 통일문제에
대해서 엉뚱한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까짓 혁신정객의 <남북 문화교류>
주장이나 김일성의 <남북연방론> 따위의
주장에슨 귀를 기울이는 국민이 없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었으나, 학생들이 엉뚱한
주장을 하고 나선 데 대해서는 골칫거리가
1960년 11월 1일, 서울대학교 학생들
가운데서 3백여 명이 대학 구내의 한
귀퉁이에 모여 소위
<민족통일연맹(民族統一聯盟)>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들 대학생들은 이
민족통일연맹이라는 단체를 발족시키면서
뭐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기성세대는 남북
분단의 비극을 야기케 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새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 내지는 억압할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라!>고 전제한 다음 <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패배의식을
철저히 불식하고 남북한 총선거에 대비하여
연합의 기틀을 마련하라! 정부는
조국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소 지도자와
중립화 통일방안을 채택하자!>는 등의 몇
가지 문제를 정부와 사회에 대해서
건의하는 형식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통일연맹의 주장에 정부는
물론이고 국회고 정계고 간에 발칵
뒤집혔다. 그때로부터 4반세기의 역사가
흐른 이 시점에서 볼 것 같으면 <과장을
해도 유분수지 순진한 학생들의 주장을
가지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시점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4.19 혁명을 주도한 것이
학생들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어떤
주장을 내세웠다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데모로서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정부.국회.정계가 발칵 뒤집히게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장면
없었기 때문에 어찌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꼴이란 가히 가관이었다.
장면은 서둘러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리 4.19를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학생신분에서 어긋난 터무니없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최근에
이르러 학생들이 지나치게 정치문제에
관여하려 들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것 같소!"
장면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노여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을
각료들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장면은 말을 이었다.
"최근에 이르러 국내외에서
오스트리아식의 중립화 통일을 주장하고
국제적 여건이 오스트리아와 같지는 않지
않소? 오스트리아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째서 그들은 모르고
있는지를 모르겠소.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그릇된 주장들에 대해서는 결연히 대처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소. 정권을 내놓는
결과가 된다 하더라도 나는 이 모든 그릇된
주장들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쓸 생각이오.
그런 만큼 각료 여러분께서도 그런
각오하에 시국에 대처해 주시면 고맙겠소."
장면의 표정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란 어떤 것인가?
우선 오스트리아라는 나라가 처해져 있는
주변환경부터 살펴보자.
오스트리아는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나
있다. 동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가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공산주의 국가이기는 하나 독자노선을 걷고
있는 유고슬라비아가 있고 북쪽과 서남쪽에
각각 서독과 이탈리아 등 나토 동맹국가가
있으며, 서쪽에는 영세중립국가인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 중립국 등 7개 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지정학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 종주국가인
소련이나 서방측이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유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의
오스트리아의 현황은 한국보다도 더
베를린처럼 동서로 갈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오스트리아도 분단국가로서 같은
민족끼리 대립해 있어야 하는 비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 크라이스키라는 정치가였다. 동.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중립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갈라져 있는 국토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전후 꼭 10년 만인 1955년 5월의
일이었다.
한국의 중립화주의자들도 이
오스트리아에서와 같이 <중립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통일을 이루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소련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있는 문제이기는 했다. 그러나 소련이
아시아 적화의 발판이 될 수 있는 한반도의
절반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의 중립화 통일이란 전혀
실현성이 없는 몽상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국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여건을
살펴보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뻔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공과 소련하고
이웃하고 있는 한반도의 중립화를 그들 두
나라가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한반도의 3면이 바다가 아니라면 또
모른다. 일본 또는 미국이 국경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쩌면 한국의 중립화는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무장을 하지 않은 실정이었으며, 미국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공이나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해서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반드시 그런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이 처해 있는 지정학적
여건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중립화 통일론>은
탁상공론이요, 몽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하고 나선 인물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삼규(金三奎)가 바로 그 장본인이요,
언론인 출신인 김석길(金錫吉)은 김삼규의
주장에 부화뇌동하고 있었다.
<중립화 통일론>은 일부 대학생을
제외하고는 <이거 큰 일이다> 하고, 오히려
두려워할지언정 그 어떤 호응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그쯤의 주장을
한다고 해서 뭐 트집잡을 것까지야 없겠지>
하고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한국의 몇 사람 안 되는 중립화
논자들을 고무시키게 된 것은 이른바
<맨스필드 극동보고서(極東報告書)>라는
것이었다.
미국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이었던
맨스필드가 일본을 여행한 것은 1960년
10월이었다. 그는 일본을 여행하고 나서
그가 일본 현지에서 보고 느낀 것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상원에 제출했다. 그
대일정책(對日政策)과 일본>의 끝부분인
<결론과 건의> 마지막에 한국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쌍방간에 수락될 수 있는 한.일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기 위하여 가능한
최대한도의 조정역할을 취해야 할 것이며,
더욱이 한국통일 문제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의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가장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맨스필드는 한국을 오스트리아식으로
중립화사는 전제조건으로 통일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동.서 냉전 속에 열전으로 화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극동의 한반도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한국문제 해결의 한
시안(試案)으로서 <오스트리아식 중립화의
조건으로 통일문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던 것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 민주당의 유력한 상원의원의 한
사람이며 또 다가오는 총선거에서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유력시되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한 정책이 급작스럽게 바뀌리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맨스필드의 구상은 한국의
중립론자들을 고무시켰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생각컨대 서울대학교 학생들로
조직되었던 민족통일연맹에서도 맨스필드
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나
정부에 이어 민의원에서도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긴급회의는 야간에 열렸다.
한밤중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는 것도
대한민국의 의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급회의를 열게 되었던 이유는 물론
민족통일연맹의 주장에 크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의원 의장인 곽상훈은 긴급히 소집한
본회의에 앞서 먼저 의장실에서 각 파
대표회의를 열었다.
"여러분이 파벌을 떠나서 좀더
능률적으로 국사를 처리했던들 오늘 이처럼
한밤중에 국회를 열지 않아도 됐을 게
아니오?"
각 파 대표회의가 열리자 곽상훈은
신경질부터 부렸다.
몇 마디 했다고 해서 이렇게 부랴부랴
한밤중에 국회를 열어야 하니 이래
가지고야 어찌 국회의 위신을 유지할 수가
있단 말이오?"
곽상훈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좀처럼
가라앉히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무슨 문제든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전제로 해서 문제를
다루려는 정치인들에 대해서 그는 적잖이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러니까 11월 1일이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외무위원회에서 성안한
통일방안 결의안을 가지고 일대 격론을
벌였다.
(1) 자유 민주주의 독립한국 건립이라는
있어서는 한국 인민의 자유와 국가의
안전이 항구히 또 확고히 보장될 수 있는
조처로 강구한 유엔 감시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한다.
(2) 자유선거와 통일 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공산 강대국가의
북한 영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와 간섭과
위협이 종식되고 북한지역에 자유질서와
평화가 회복되어야 한다.
(3) 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존하여
연방제 방식이나 중립화 통일방안을 절대
배격하여야 한다.
이것이 민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내놓은
통일방안의 결의안이었다.
민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이런 결의안을
정일형이 유엔총회 수석대표로서 미국으로
떠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방안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재천명해 두고자 해서
이 결의안을 상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안은 종래
대한민국이 일관해서 견지해온
통일방안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놈의
결의안이냐?> 할는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김일성이 <남북연방안>을
제의하고 나선 데다가 또 맨스필드는
<한국의 중립화를 전제조건으로 한
통일방안> 등을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확고부동한
기본태도를 천명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성안해서 내외에
천명코자 상정했던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결의안은 반대론자들 때문에 격론만
벌이다가 보류를 해놓고 말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였다. 정권이 바뀌었다 해도 통일에
대한 기본노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민정구락부의 김준연(金俊淵), 민주당
구파의 유옥우, 김응조(金應祚) 등이
외무위원회에서 성안한 통일방안 결의안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날 발언권을 얻어 단상에 오른
김준연은 뭐라고 했던가?
"유엔은 헝가리 의거 때 아무런 행동도
우리의 운명을 무조건 유엔에 맡길 수는
없다. 또 유엔의 감시단에 공산국가가
끼어들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므로
북한만의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로 통일을
이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김준연의 주장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유옥우, 김응조를 비롯해서 심지어
여당인 민주당 신파의
이필선(李必善)까지도 여기에 동조를 했던
것이다.
아이들 말마따나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일까? 하나,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안도 김일성이나
그의 후견인인 소련이 들을 것 같지가
않은데 하물며 <북한만의 총선거>를 들으려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전혀
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준연 등은 그런
주장으로 외무위원회에서 성안한 앞의
결의안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원의로서의
결의를 훼방놓았던 것이다.
"나, 여러분한테 당부하오.
외무위원회에서 성안한 통일방안 결의안에
대해서 아직도 반대하는 정파가 있다면
솔직히 말씀 좀 해주시오."
곽상훈은 이렇게 말하며 각 정파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반댑니다> 하는 정파 대표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한국의 일부
지식인이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게 되자
미국 정부도 신경이 날카로워 가지고 그
귀추를 주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중립화
일이오? 공산주의자들은 이 방안을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에요."
"물론입니다."
누군가 곽상훈의 주장에 맞장구를 쳤다.
그것이 곽상훈에게 꽤나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한 옥타브를 더 높여
지론을 폈다.
"북한만의 총선거 주장도 그래요.
여러분은 그것이 실현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전혀 실현성이 없다고 보고
있어요.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도 반대하고
있는 김일성이 북한만의 총선거를 받아들일
성싶소?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주장을
왜 하고 나서서 국론을 분열시키는 거요?
그건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조금도
북한만의 총선거를 주장한 김준연이나
그의 주장에 부화뇌동한 몇 사람은
<국론분열>,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자>로서 규탄을 당해도 싸다 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현실이다. 김일성이 밉든
곱든 한 정권을 이루어 놓고 있는 이상에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제안을 해야만
그래도 기대나마 걸어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간에 곽상훈은 다시 말을 이어,
"오늘 회의에서는 제2공화국으로서의
통일방안을 분명히 명시해 두어야만
하느니만큼 각 파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외무위원회의 결의안을 토대로 해서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든 또는 수정을 하든 해서
민의원이 결의안으로서 통과시켜 주십시오"
이날 밤 열린 <야간국회>에서는 각파
대표들이 외무위원회안을 수정해서 내놓은
통일방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각파
대표들의 중지를 모아 수정한 이 결의안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론>에서 다소 후퇴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의하여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로
수정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는 하늘이 돈짝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물 밖으로 나가 보지를
못했으니 하능리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의원 의원이라는
정치인들이 꼭 우물안 개구리나
진배없었다.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좁았다. 그런
위인들이 통일방안을 논의했으니 상식 밖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절차에 의하여
인구비례의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결의했으나, 이 사람들이 통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오죽하면
민주당 구파의 양일동(梁一東)이,
"이것이 통일을 않겠다는 결의지 이게
어디 통일을 하겠다는 결의냐?"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겠는가.
양일동뿐만이 아니었다. 집권당인 민주당
신파의 중진이자 상공부 장관인
주요한조차도,
"이런 식으로는 외교를 못한다. 이
유엔 대표단을 철수시켜 통일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극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라는 종래의
통일방안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던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애써 따져볼
필요도 없다.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이
굳어져 있는 김준연 등의 고집을 집권당인
민주당이 감히 꺾지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4.19를 주도한 학생들이
기성세대를 불신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학생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학생은
아직도 배워야 할 신분이 아니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집어치우로 정치에 행동으로
일이오"라고 충고라도 할라치면,
"거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하시오.
학생들이 이승만을 쫓아낸 그 정치적
행위가 옳았다고 한다면 민족통일을 위해
나서는 정치적 행위도 마땅히 옳게
받아들여야 옳지 않겠소?" 하고 역습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판국이었기 때문에 내무부 장관인
현석호가,
"학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부나
입법부에 직접 건의한다면 그것은
정치행동으로 교육법에 저촉되는 일이므로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고 엄포를 놓아도
학생들은 숫제 마이동풍이었다.
서울 지방검찰청 정보부에서도
긴급회의를 열고 서울대학교의
연후에,
"만일, 학생들의 주장이 법에 저촉된다면
형사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검찰의 엄포에도 관련 학생들은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았다.
"웃기네. 좀 웃기지 말라구 해."
관계 학생들은 오히려 검찰을 비웃었다.
경찰이나 검찰 책임자가 엄포만 놓을 뿐
속수무책으로 전혀 손을 못 쓰자 이번에는
혁신정당에서 한술 더 떴다.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에서는 성명을
발표하고 <본 당은 영세중립이 보장되는
조국통일을 기본과업으로 한다>라는 쇼킹한
선언을 했다.
이렇게 선언한 사회대중당은 <공산측에서
제안한 연방제 위에 민족최고회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국민 비밀 투표에 붙일
필요가 있다>고 폭탄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니까 무슨 수작이든
못하랴> 하고 한쪽 귀로 듣고 또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두 사람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놓고 있는 정당의 주장이 아니었고 보면
대중에 끼치게 되는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제안한 <남북연방안>에 대해서
대다수가 아닌 절대적인 다수의 국민은,
"미친놈, 미친 수작을 지껄이고 있다"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흉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판국이었는데 사회대중당이
<공산측이 제안한 연방제에 민족최고회의를
설치하자는 안 등에 대한 민의의 소재를
알아보기 위하여 국민 비밀투표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꾸어 말하면
<김일성의 제안은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라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회대중당은 한국의 혁신정당을
대표하는 정당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진보당(進步黨)을 발기했다가 이승만에
의해 정치적 타살을 당했다가 4.19 뒤에
다시 되살아난 정당이 사회대중당이었다.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을 잃었기 때문에
<과연 진보당 게열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을까> 다분히 회의적이었으나 혁신정당은
사회대중당이란 간판을 메고 나왔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이란 거의가
자본주의를 표방한 보수정당인 만큼 여기에
대결해서 혁신정당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문제도
아닌 <통일문제>에 대해서 정당적 차원에서
생각을 하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일문제는 정당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불변의
원칙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중립화문제를
들고 나왔다고 해서 기성정당이
부화뇌동한다는 것은 김일성을 이 땅으로
끌어들일 속셈이 아니라면 도저히 발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통일문제에 관한
외에는 그 어떤 소득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김일성을 이롭게 하는 외에는 그 어떤
소득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민족통일연맹의 주장과 여기에 부화뇌동한
사회대중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경찰이나 검찰은 <대학생>이라고
해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거 이러다가 학생들이 흥분에 겨운
나머지 남북협상이라도 주장하고 나서지
않을까?> 해서 적이 걱정을 하고 있었으나
학생이나 사회대중당에서는 그 이상의 어떤
주장도 당분간은 없었다.
백년해로를 서약한 부부도 한번 금이
가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사이가 벌어져
나가다가 급기야는 파경을 맞고 만다.
민주당이 꼭 그 꼴이었다. 대 이승만
반독재 투쟁을 벌일 때에도 신.구파가
사이좋게 뭉쳐서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디만 막상 <민주당>의 이름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신파와 구파는
<정권>이라는 고깃덩어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해서 칼끝에 피묻은 원수와도
같은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정권이 신파한테로
돌아가자,
"우리가 신파의 들러리 노릇이나 하고
정치가 잘 되면 모든 공로는 신파가
독차지하게 될 것이고 정치를 잘못하게
되면 우리 구파마저 도매금으로 지탄을
받게 될 텐데. 그러니 이참에 아예
갈라섭시다" 하는 공론이 구파 안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파가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분당론을 배후에서 줄기차게
부채질한 것이 윤보선이었다.
"양당정치를 구현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 같소. 어차피 신파하고는
생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하니 야당으로
새출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구파의 간부들을
부추겼다.
하긴 신파와 구파가 생리적으로 맞지
거느리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가 관료
출신자들이었다. 그것도 건국 이후의 관료
출신자들이 아니라 일제 침략시대의
총독정치 시대에 관리를 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 만큼 좀 가혹하게
표현하자면 신파는 <친일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신파를 하나로 묶어 <친일파 집단>
운운한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인 것만은
사실이다. 신파 내의 이른바 소장그룹인
신풍회는 해방 이후에 정계에 몸담은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반해 윤보선이 거느리고 있던
구파는 어떠했던가? 그들 거의 모두는
나름대로 독립운동 또는 민족운동을
펴나왔던 지사들이었다.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생리적으로 맞을 리가 없었다.
구파의 제2인자인 유진산도 정국의
앞날을 보는 눈이 윤보선과 같았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지명을 받아 정권을 잡고 나자
유진산에게 <내무부 장관을 맡아 달라. 이
난국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면 아무래도
내무장관 자리가 가장 중요한 자리인 만큼
진산이 맡아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간곡하게 권고했으나 유진산이 그 권고를
완곡하게 뿌리쳤던 것도 분당해야겠다는
꿍꿍이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파가 분당 작업에 착수한 것은 장면
정권이 탄생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1960년
9월 16일의 일이다. 구파는 이날부터
분당을 위한 서명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82명의 국회의원들이 서명을 했다.
이어서 11월 8일에는 신당발기
준비대회를 열어 준비위원장에
백남훈(白南熏)을, 부위원장에 김도연을,
그리고 간사장에 유진산을 선출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의 분당이 기정사실화 돼버리자
여론이 호되게 질타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분당을 할 때인가? 민주당이
하나로 똘똘 뭉쳐도 이 난국을 수습할까
말까한 이때에 분당을 하려 하다니
너희놈들이 정신이 있는 놈들이야, 없는
놈들이야?"
이렇게 구파를 질타하는 여론이
빗발쳤으나 구파 사람들은 숫제
마이동풍이었다. 그들은 다음해인 1961년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했던 것이다.
구파가 분당을 해 나가버리자,
"꼭 앓던 이를 뽑아버린 것 같군" 하고
신파 모두가 후련해 했지만 장면만은
달랐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구파는 역시 우리의
동지였는데, 그렇게 미련없다는 듯이 칼로
무 자르듯 분가해 나가 버릴 수가 있어?
이렇듯 내가 덕이 없는 사람이었는가?"
하고 서운해 하기도 하고 자책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민주당으로서는 구파가 떨어져
나가 야당으로 변신해 버린 것은 뼈아픈
일이었으나 야당이 없는 제2공화국의
현실로서는 여당과 야당이 있는 정당정치를
구현한다는 차원에서는 잘된 일이기도
"이제 우리는 심기일전해서
정책정당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
같소. 그래야만 민주당은 당 내분으로
말미암아 실추해 버린 국민의 불신을
회복할 수가 있을 게 아니겠소? 그러자면
구파에서 차출된 5부 장관더러 돌아가든
신파 정권에 남든 스스로 귀추를 정하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내각을 개편하도록
해야 할 것 같소."
장면은 구파가 떨어져 나가자 내각을
개조하고 심기일전해서 정치를 해나갈
결심을 굳혔다.
그랬는데 그가 미처 개각에 착수하기도
전에 그를 또 괴롭히는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사건이란?
1961년 3월 8일 아침 10시에 국무회의를
조재천이 불쑥,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뱉는
내뱉는 것이었다.
모든 각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재천한테로 쏠렸다. 그들의 눈 모두가 뭘
가지고 그다지도 노여워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조재천은 모든 각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한테오 집중되자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제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제 경북도당에서 올라온 동지가
인사차 찾아와서 전해준 말이오.
영남지방에서는 말이오, 소위 혁신계라고
자처하는 무리 가운데에 공공연히
심지어는 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다니는
자가 없나, 마치 공산주의 천하라도 된
듯이 날뛰고들 있다는 게 아니겠소? 그놈들
우리 민주당을 어찌 보고 있으면 그리도
방자하게 군단 말이오? 우리 민주당이
아무리 학생들의 힘으로 집권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무력해질 순 없는 일이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래요?"
모두가 놀랐다는 듯이 두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아닌게 아니라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반공국가인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노래인
적기가를 부르는 자가 나타났는가 하면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자가 나타났다면
이건 예사롭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뿌리를 내리고 있던 지역이
영.호남지방이었다. 물론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남조선 노동당의
불법화에서부터 6.25 동란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거의가 소탕을 당했다. 그렇다고
열이면 열 모두가 소탕당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용케 법망을 벗어나 은신하고 있는
자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공산주의
동조세력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
동조세력은 월북한 공산주의자의 가족 또는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숙청당한 유가족이
태반이었다. 그들은 투철한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은 거의가
<혁신의 탈>을 쓰고 혁신정당에 몸담고
있었다.
이런 공산주의 동조세력은 6.25 동란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당장에 본색을
드러내 대한민국 파괴활동에 앞장설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무리들이 아직도 경찰력이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공공연히 적기가를 부르고
있었는가 하면 김일성 만세 따위를
외쳐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까?
<됐다. 이놈의 대한민국 때려 엎어버리고
때와 같은 폭동을 일으키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혹자는 <아니, 적기가를 부르고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자를 잡아 넣을
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어?>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 보안법이라는 것을 가지고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용공분자들을 따끔하게
다스리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많았다.
장면 정권, 아니 조재천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이 보안법을 보완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선뜻
이 법을 보완해야 되겠다는 말을 못하고
때문이었다.
그의 고민이란 무엇이었던가? 자유당
정권 시절에 용공분자, 또는 간첩을
때려잡기 위해서 보안법을 만들려고 할 때
조재천을 포함한 민주당이 거당적으로
반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보안법을 만든 것은 3년 전인
1958년 12월 24일이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킬 때 벌어진 사건이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이라는 것이다.
집권당인 이승만의 자유당에서 이 법안을
성안할 때에도 물론 <북한 김일성 집단이
계속해서 간첩을 남파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 간첩의 발호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법률이 필요하다>는 명분 밑에 이 보안법을
성안했었다.
많았다. 그러한 법조문들은 야당을
때려잡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동법 제21조
4항의 편의제공에 관한 것과 제5조 3항의
결사, 집단의 구성을 규제한 법조문들은
어김없이 야당 탄압을 위한 것들이었다.
자유당에서 이 법률을 만들고자 한 속셈은
앞으로 2년 뒤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든 야당의 입을 틀어막고자 하는
데에 그 저의가 있었던 것이다.
민주당이나 그 밖의 재야세력은 이
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시키고자 의사당
안에서 농성하는 등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보안법은 <날치기>라는 수법을 구사해서
통과됨으로써 햇빛을 보게 되었었다.
조재천이었다.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재천은,
"소위 보안법은 24파동을 통해서
변칙적으로 만들어졌던 법률인 만큼
새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법률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국회에 보안법 폐기 동의안을 냈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었다.
그 폐기 동의안을 제출했던 장본인이
이제 민주당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 되어
법을 운영하다 보니 보안법을 폐기시킨
것이 후회막급이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보안법 폐기
동의안을 내지 않는 것이었는데.......)
조재천은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의
물이었다.
더구나 조재천이 보안법 폐기 동의안을
낼 때 유진산으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었다.
"조 의원, 불법 통과된 법이라고 해서
아무런 대안도 없이 즉흥적으로 보안법을
폐기시키고 나면 무엇으로 용공분자들을
다스리겠다는 거요? 뒷일을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기나 하고 그런 동의안을 낸
거요?"
유진산의 가시돋힌 비판에 조재천은,
"악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불법으로 만들어진 법률은 폐기하라는 것이
4.19의 요구이기도 하고요. 뒤에 설혹 그런
법률이 필요하다 할 것 같으면
정정당당하게 만들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생각하면 그 응수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듯 뒤가 꿀리는 데가 있었기 때문에
조재천은 보안법의 미비한 점을 보완할
새로운 법을 만들자고 선뜻 주장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땐
언제야? 그래 몇 달도 못 가서 보안법을
보완한 새 법을 만들려 하다니 그러고도
정치인이라 할 수 있어?"
야당이나 재야세력이 이렇게 그의 주장을
후려치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경솔했어. 너무 경솔했어. 그때
유진산 선생의 충고를 듣는
것이었는데.......)
조재천은 다시 한 번 또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앞서와 같은 실례 외에 문제가 또
생겼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인
오화섭(吳華燮)이 간첩으로 남파된 매부를
수사당국에 고발치 않았다가 구속되었는데
그에게 선고유예의 판결만 내려졌을
뿐이었다. 또 전라남도 광주에서
체포되었던 간첩 민이기 사건에 있어서는
<불고지죄>를 적용받은 자가 11명이나
되었으나 그들에게도 역시 선고유예의
판결만 내려졌던 것이다.
이렇게 형벌이 가벼워 가지고는 간첩이나
용공분자를 발본색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간에 조재천이 영남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신계의 동태에 대해서
신현돈도 경찰정보를 공개했다.
"문제는 자못 심각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찰정보에 따르면 마산에서는
마산사건 1주년을 기해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여 이 시위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시킬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고 합니다."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중얼거리는 장면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새해에 들어와 조용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식은 밥 먹듯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던 데모가 새해에 들어와서는 무슨
기적처럼 단 한 건의 데모도 벌어진 일이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여진
것을 본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는,
이렇게 말을 했다.
"저도 여러 군데에서 4월 위기설이니,
3월 위기설이니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각의에서는 다른 문제는 다
젖혀두고 시국에 대처하는 문제를 토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헌주의 이 말을 조재천이 받았다.
"정 차장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제안을
해주었소. 지금의 우리 민주당 정권으로서
가장 우선순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용공
좌경분자들에 대한 대응책입니다. 그런
만큼 지금 정 차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
문제를 토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문제가 문제였던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각료는 없었다.
곧 토의가 시작되었다. 토의는 이미
특별법>을 제정하는 문제에 대해서였다.
누구나가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었는지 반공특별법을 만드는 데 대해서
반대하는 각료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토의 과정에서 장면은,
"구파가 신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는데
과연 구파 신당이 우리에게 동조를 해줄
것인지 그 점이 못내 걱정이 되는구려"
하고 우려를 표했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구파는 막
신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간 참이었으니
국민에게 인기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도
반대할 가능성이 컸다.
하기야 뭐 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될
일이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정국이 경색돼
버릴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보안법을 폐기시킨 책임을
통감해서라도 구파 설득은 제가 맡아할
테니 저한테 일임해 주십시오" 하고 구파
신당 설득을 자청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이날 국무회의가 끝나자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는 <점증하는 북괴의 간첩침략은
우리로 하여금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각의에서는 반공 임시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폐기해 버린 보안법의
맹점이라 할 결과범에 대해서 미비한 점을
보완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가 있자 누구보다도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쓰며 장면 정권을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혁신계였다.
"이런 미친 놈들! 이놈들 이거 정신이
반공 임시특별법을 만들겠다구?"
"이 민주당 놈들은 이승만보다 한술 더
뜨는 놈들이라구. 이놈들 어디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가 두고 보라구!"
마침내 혁신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4.19 후 가장 활기를 띠며 설치고 돌아간
것이 바로 혁신계였다. 그들은 마치
저희들의 세상을 만난 듯이 설쳐댔다.
아마도 그들 혁신계가 하나로 단결될 수만
있었다면 보수세력의 위협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수세력한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혁신세력이 갈기갈기 찢어져 정치그룹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나라 혁신세력의
대표적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구
진보당(進步黨) 세력은 김달호(金達鎬)와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간판을 내걸었고
전진한(錢鎭漢)은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을,
고정훈(高貞勳)은
혁신청년당(革新靑年黨)을 만들어 제
나름으로 기세를 돋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1960년의 7.29 민.참의원
총선거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국회의원을 당선시키지 못했던 것도 첫째의
원인은 이렇듯 세력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걸핏하면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도 원내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 혁신세력들은 이 7.29
총선결과를 놓고 크게 반성을 하기는 했다.
"이래가지고 혁신세력이 정권을 잡기란
하나로 뭉치도록 합시다."
그래서 막후 교섭이 진행되었다.
막후교섭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혁신계
지도자들이라는 게 소 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머리에 더 맛을 들여 놓고 있었으니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빈
냄비마냥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다가
흐지부지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세인의 빈축이나 더 살 수밖에.
이런 점으로 볼 것 같으면 혁신계 인물들의
생리구조도 보수계 인물들의 생리구조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야 어쨌든, 장면 정권이 반공법 제정을
공포하자 그들 혁신계들은 신통하게도
반대운동에는 일치단결했다. 그들은
저지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조용하던
정국이 다시 또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새해 1월 5일에 구파의 소장파 의원들,
아니 구파는 이미 1960년 11월 8일에
신당발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교섭단체도
별도로 등록을 마쳐 놓고 야당 행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민당> 소속의 소장파
의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그들 소장파들은 물론 <청조회>라는
서클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경제교류를 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 소장파들은 지금까지 모두 집권당에
몸담아 있던 무리들이었기에 <남북간에
경제교류를 하자>고 한 그들의 주장이 일반
국민에게 안겨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이놈들 이거 미친 놈들이 아냐? 이놈들
이거 김일성이란 자가 어떤 인간인지
북한의 대남전략이 어떤 것인지나 제데로
알고 남북경제교류 운운하고 있는 거야
뭐야?"
세론이 분분해졌고 입에 담을 수 없는
비난이 그들에게 퍼부어졌다.
이런 비난이 지금까지 반공을 국시처럼
여겨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김일성
집단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해서였다.
재북(在北) 평화통일촉진 협의회라는
허수아비 단체를 만든 뒤부터 꾸준히
<평화통일>을 주장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 경우 그들이 진심으로
평화통일을 갈구해서 그런 주장을 해오고
있었다면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교류인들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이목을
의식한 표면적인 구호일 뿐 뒤에서는
호시탐탐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며 꾸준히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촌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그들과
경제교류를 하자고.......
좀 심하게 표현하면 이런 주장이야말로
이적행위라 할 수 있었다.
주장에 대해서 그들 보스의 한 사람인
유진산이 <북괴가 전쟁수단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진심을
실질적으로 입증해 보이기 전에는
남북경제교류는 시기상조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소장파들의
주장이 혁신계를 크게 고무 격리시키는
결과가 됨으로써 일파 만파의 파문을
야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참의원 외무국방위원인 여운홍(呂運弘)은
신민당 소장파 의원들이 남북간의
경제교류를 주장하고 나서자, 한술 더 떠서
<남북통일에 앞서 인사교류를 하되 그
위원장을 역임한 김두봉(金枓奉)과 현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인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부수상직에 있는 홍명희(洪命喜)를
서울에 초청하자>고 제의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제의였다. 도대체 그들 세 사람을 초청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었을까? 그들을 서울에
초청해서 서울구경을 시켜주고 정치하는
모습도 보여주는 한편 그들을 요정에
모셔놓고 극진하게 술대접이라도 해주면
감격한 나머지 민족적인 양심을 되찾기라도
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여운홍은 몽양 여운형(呂運亨)의
동생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역사를 더듬는
학자 또는 저술가 중에는 여운형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여운형의 사상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인가
하면 철저한 공산주의자 같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어느 일면에서는 민족주의자
같은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해방 전이나 해방 후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있던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듯 형의 사상이 애매모호했던
탓이었을까? 동생인 여운홍도 사상문제에
있어서는 여운형과 오십보 백보였다. 뒷날
그는 5.16 후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해서
국회로 진출하게 되지만, 이러한 그의
정치행각 때문에 그의 사상도 이것이었다고
규정짓기가 어렵기만 하다.
그야 어쨌든 여운홍이 북한의새
공산주의자들을 서울에 초청하자고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혁신계에서까지 여운홍의 제의에는 침묵을
지켰다.
혁신계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이
부류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의 혁신계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호칭이다. 이들
중에는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에 몸담았다가
전향했던 사람도 있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북한에서
밀파되는 간첩들은 혁신계를 포섭해서
간첩활동을 자행하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남북간의 경제교류를 주장하고 나서는가
하면 북한의 공산주의 우두머리를
이번에는 언론인들까지 통일문제에서
소외될 수 있느냐는 듯이 남북간의 신문
기자 교류를 주장하고 나서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언론인은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신문사의
간부였다. 이런 주장을 하도 딱하게 생각한
북한문제 전문가가 그런 주장을 하는
언론인을 만나 물어보았다.
"선생, 선생은 어떤 목적에서 남북간의
신문 기자를 교류하자고 주장하는 거요?
우리로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얻을 것이 왜 없단 말이오? 우리 남북은
휴전선으로 말미암아 서로가 상호간의
실정을 모르고 살아가는 형편이 아니오?
상대방의 실정이나마 파악하도록 하자
그거요. 그래야 통일 논의에도 도움이 될
게 아니오?"
"이런 딱한 양반! 당신은 북한 사회에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있는 줄 아시오?"
"그 무슨 당치 않은 소리를 하고 있소?
북한에도 엄연히 노동신문이다,
민주조선신문이다 하는 신문들이 있는데,
왜 기자라는 직업이 없단 말이오?"
"그들이 신문사에 적을 두고 있으니까
신문기자인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오만
그들은 정부의 메신저이자 선전선동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만 한단 말입니다."
신문기자라는 것이 무엇하는 직업인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있는 사실을 그대로
활자화해서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들의
먼저 볼 자유와 들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의 온갖 구석구석이
치부(恥部) 투성이인 북한 당국이 남한
기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곳 모두를 활짝
개방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물론 기자교류를 실시하게 되면 북한
당국은 남한 기자들이 보고 싶다는 곳은 다
보여주겠다고 할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 말을 믿고 남한 기자들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을 뭐라고 할 것인가?
"사정이 바뀌었소. 우리가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주시오!" 하고 오리발을
내밀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기보다도 훤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는 이렇듯 겉 다르고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안내원이라는
이름의 감시꾼을 내세워 기자들의
취재활동에 일일이 제동을 걸게 할 것이
또한 너무나 분명한 일이었다.
다음 북쪽에서는 어떤 인물들을
기자랍시고 내려보낼 것인가? 그들이
철저히 훈련받은 열성당원을 기자로
가장시켜 내려보낼 것이라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자로 위장한
열성당원들은 남한땅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군사시설이나 정탐하려 들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이미
남파시켜 놓은 간첩들과 접선해서 그들의
간첩활동을 더욱 용이하게 추진시키는
방법이나 강구하려 들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남북 기자의 교류는
실만이 있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럼 남북 신문기자 교류를 주장한
언론인은 이러한 북한의 실정을 전혀
고려해 보지 않고 즉흥적으로 그런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었을까?
하여간에 백인백색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이 일기 시작하자 그
틈새를 비집고 이번에는 <4월의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장면 정권은 4월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거라고 하더군."
다방이고 음식점이고 술집이고 간에
사람들은 두세 사람만 모여 앉아도 장면
정권으 4월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소문을 화제에 올려놓고
쑥덕거렸다.
된다는 설명은 없었다. 장면 정권이
쓰러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설명도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장면 정권은 4월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국무총리 장면도 공보비서관인 송원영을
통해서 4월 위기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도대체 그런 소문이 어떻게 해서 나돌게
되었어?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야?"
예로부터 어떤 소문이든 소문의 진원지를
캐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찰의 수사력이
상당히 과학화된 오늘날에도 소문이나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캐낸 사람은 아직
없다. 흑색선전이 먹혀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만큼 송원영이
어디인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중앙청 출입 기자들을 통해서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송원영은 장면이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냐고 묻자,
"소문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4.19 의거 1주년이
돌아오게 되자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들이
민심교란책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야당에서 정권타도의 명분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하고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추리였다. 북한은
4.19를 계기로 해서 점차 더 많은 수의
간첩들을 내려보내고 있었다.
의해 체포당했지만, 그들을 취조해본 결과
모두가 하나같이 무장봉기를 위한 지하당
조직의 사명과 민심교란의 사명을 띠고
밀파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북한에서 밀파된 간첩들의 사명이 이 두
가지였고 보면 간첩들이 민심교란책으로
그런 유언비어를 조작해서 퍼뜨릴 만한
일이었다.
다음 <이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린
것은 야당이 아니냐> 하고 한 번쯤은
의심해 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난국이니
위기니 하던 의식은 묵은 해와 함께 역사의
피안에 묻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윤보선은 국회의 치사를 통해 오늘의
시국을 난국 또는 위기로 규정해 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것인가?)
장면은 절로 탄식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사촌이 기와집을 지으면 배아파하는 이
못된 민족성은 어떻게 해야 뜯어 고칠 수가
있단 말인가? 왜 잘해 보라고 도와주지를
못해? 왜?)
4월 위기설에 대한 보고를 받은 장면은
몹시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연방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4월 위기설에 이어 이번에는 군부
쿠데타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쿠데타설은 경찰에서도 정보보고로
올라왔다. 경찰의 정보보고에는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는 것은 족청계라는 소문이
있다>고 부기되어 있었다. <족청계에서
쿠데타를 하겠다 그 소리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철기 자신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철기는 충분히 그런
모험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니까!>
철기(鐵驥)는 이범석(李範奭)의 아호.
중국 군벌의 한 사람인 당계요(唐繼堯)가
세운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 기병과
출신인 이범석은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자 참모장을
역임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미 군정의
후원하에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을 조직,
청년운동을 펴나왔다. 해방 후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청년단이 창단됐지만
민족청년단만큼 규율이 엄격하고 끈끈한
동지애로 뭉쳐져 있던 청년단도 없었다.
이범석의 세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모든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만들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족청년단 단원들이
단복을 벗어던지고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러므로 국군 내에서는 민족청년단
출신자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이 족청계 쿠데타설의 보고를
받았을 때 심기가 몹시 사나워지게 되었던
것도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장면은 족청계 쿠데타설에 대한
보고를 받기 이전부터 이범석을 <권력의
화신 같은 인물>로 보고 있었다. 까닭인즉
이범석이 5.26 정치파동 때에 올바른
태연히 저지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5.26 정치파동이라고
해봐야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리라
믿어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나마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이범석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제헌국회를 통과한 것은
1948년 7월 12일, 이어서 이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7월 20일이었다.
그러니까 이승만의 임기는 1952년 7월
19일까지인 셈이었다.
이승만의 중임은 거의 절망적인
실정이었다. 4년간의 통치기간을 통해 그의
통치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국회에서 그를 초대 대통령으로 뽑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기대는 엄청나게
컸었다. 미국 프린스톤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의 높은 교육을 받은
데다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왔으니
국민이 그에게 큰 기대를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걸고 있던 국민의 기대는
첫출발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해서
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을
있는 친일분자들을 마구 관료로 등용을
했던 것이다.
<인사에는 등신.>
이래서 이승만에게는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혹평이 따르게 되었다.
물론 당자인 이승만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행정도 일정의 기술이야. 독립 초기에
있어 막중한 행정을 처리하고 후진에게
가르치자면 어쩔 수 없이 경험 있는 사람을
등용할 도리밖에 없잖은가? 그것이 우리의
실정임에야 어찌할 텐가?"
하긴 통치자로서의 책임상 어쩔 수 없이
친일분자들을 등용하게 되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국민은 그의 친일분자
등용을 결코 관용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역도들이 불시에 남침을 감행, 쳐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아마도 6월
27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민에게
총궐기해서 국난에 대처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할 것인즉 시민 여러분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해놓고는
그 입술에 침도 마르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 바람에 대통령의 말을 믿고
서울에 눌러 있던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국민을 속일
수 있느냐?"
이승만에게 국민적 원성과 비난이
퍼부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다.
미국 같았으면 당연히 탄핵의 도마 위에
올려졌을 것이었으나 불행하게도 머저리
같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 중에는
이승만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제2대
국회의 숨김없는 자기 모습이었다.
셋째, 이승만은 무고한 많은 청장년들을
개죽음시켰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세칭 <국민방위군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던가?
김일성의 남침에 혼비백산했던 정부와
국회가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만들어
공포, 실시한 것은 1950년 12월
21일이었다. 이 법에 따라 만 17살에서
무려 5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 50만의
청장년들은 모두가 빽이 없고 돈이 없어
소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무리들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여담이지만 꼭 한마디
곁들여 둬야 할 얘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그럭저럭 반세기에 육박해 있다.
그런데 이 반세기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목에 힘을 주고 내노라 큰소리를 쳤던 인물
중에 과연 병역 기피자는 없었을까?
김일성의 남침이 개시되자 누구보다도
먼저 바다 건너로 도망친 자들은 돈푼깨나
있고 권력깨나 쓸 수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면 역대
정권에서는 그들을 신주모시듯 해서
이럴 수가 있을까? 병역의무가 국민의
3대 의무의 하나이거늘 제 한목숨만
살리겠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던 그런
쓸개빠진 인간들을 박사라고 해서
국가경영에 참여시킬 수가 있는가 말이다.
각설하고, 이승만의 비정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니 이승만이
국회의원들한테 인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주었던 것은
민주국민당 전신인 한국민주당이었는데,
민주국민당도 이제는 이승만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이제 국회에서 제2대 대통령을
뽑게 될 것 같으면 이승만의 신세는
추풍낙엽의 신세가 돼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기보다도 환했다. 노회한
못할 리가 없었다. 이에 그는 먼저 어떤
놈들이 그에게 충성을 다하려 하는지를
가려내고자 애드벌룬부터 띄웠다.
"우리나라도 더욱 더 민주주의를
신장.발전시켜 나가려면 정당 정치의
기초를 다져나가지 않으면 안 될 줄로
압네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네다."
이런 애드벌룬을 띄운 것은 1951년 8월
25일의 일이다. 대통령 임기를 1년쯤
앞두고 그는 재선의 포석을 <정당정치
구현론>에서부터 펴기 시작했다.
"각하, 그렇잖아도 저희들 역시 신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저희들이 각하를
이승만이 정당정치 구현론을 펴며 신당
필요론을 펴자, 그의 유막에는 유명무명에
어중이 떠중이까지 합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인
양우정(梁又正), 조경규(趙瓊奎)를
위시해서 원외의 이활(李活) 등 그
이름들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이들은 어차피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자면 <외교의 귀신>이라 일컬어지는
이승만을 다시 대통령으로 모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소장 국회의원인 오위영, 김영선
등도 합류해 왔다. 이들은 이승만의
<신당론>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리지 못했었는지 신당을 만들어 장면을
대통령으로 밀자는 속셈에서였다.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인 1951년 10월
17일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상하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 11월 28일 국회에
회부하는 한편 이틀 뒤인 30일에 이를
공고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에서 추진중인
<내각제 개헌안>에 쐐기를 박자 해서였다.
정부가 먼저 야당에 선수를 쳐서
개헌안을 내놓자, 이의 심의에 앞서 먼저
태동중에 있던 신당이 원내와 원외로 두
조각이 나버렸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자들과 장면을 지지하고 있는 자들이
오월동주(吳越同舟)격으로 각기 다른
목적에서 손을 잡고 신당을 추진했으니
미구에 서로의 속이 드러나게 되자
갈라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것은 다음해인 1952년 1월 18일이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겠다는
것은 바로 민의이거늘 국회의원들이 민의가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개헌안을
부결시켰다는 것은 국회의원이 민의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겠다는 얘기밖에 안
됩네다. 이러한 국회의원은 마땅히
소환돼야 할 줄로 압네다."
개헌안이 부결된 직후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 곧 두 조각나 버린 신당 가운데
이승만에게 견마지역을 다하고자 하는 원외
자유당 가누들에게 딱 이렇게 한마디만
했다. 이 한마디는 공자님 말씀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민의를 무시한 국회의원을 당장
소환하라!>
나붙는가 했더니 급기야는 데모가 벌어지는
등 정국의 양상이 점차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져 갔다.
1952년 1,2월이라고 하면 서울
북방에서는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한창
되풀이되고 있을 때였다. 그럴 때인데도
국가원수인 이승만이나 그의 졸개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승만을 다시 권좌에 앉혀
놓기 위해서 별의별 수단을 다 쓰며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싸움은
시작됐소. 기왕에 벌인 싸움이라면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할 게 아니겠소?"
민주국민당 사무총장 조병옥은 소속
국회의원들을 격려하며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4분의 1도 채 못 되는 39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야당 대열에 서 있던
민우회(民友會) 소속 29명과 무소속 18명을
다 합쳐봐야 과반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장면을 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은밀한 공작을 펴고 있던 원내 자유당 소속
의원의 지원만 받으면 내각책임제 개헌안의
통과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이러한 국회의 공기를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민주국민당이 국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한 다음날 원외 자유당을 위시한
18개의 정당사회단체로서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었지만
그까짓 원외에서 아무리 용을 써봐야 무슨
효력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칼자루를 쥐고
이승만이 이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그의 졸개들로 하여금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게 하는 한편 힘으로
국회를 꺾으려 들었다.
"철기, 임자가 좀 나서서 정국을
안정시켜 줘야겠어. 일선에서는 우리
젊은이들이 국가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우고 있는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정권욕에만 눈이 벌개져 있으니
이래 가지고야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철기가 내무를
맡아가지고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하란
말입네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장관에
임명했다. 1952년 5월 26일의 일이다. 이날
벼락치기로 내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그
"총리, 우리 정치인들이 지금이 전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소. 정국이
어지럽다 보면 5열이 준동하기 쉬운 법,
즉시 계엄령을 선포해서 5열의 준동을
막도록 해야겠소!" 하며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을 의결해서 선포하라 강요했다.
어째서 이범석을 내무장관에 기용했는지
이승만의 뱃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던
장택상은 군말 않고 국무회의를 열어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장택상은 그 길로
이승만을 찾아가,
"일개 장관이 각하의 총애만을 믿고 감히
수상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는,
이렇듯 위계질서가 문란한 정부 안에서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없어
그러자 이승만은 허허허 웃고 나서,
"이 사람 창랑, 난세에는 난세대로
치세에는 치세대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각기 다른 것일세. 창랑이 그걸 터득
못하고 있었다니 그래 가지고 어찌 큰일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하며 장택상이
내던진 사표를 주워 그의 호주머니에 찔러
주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면서,
"전쟁이나 정쟁이나 똑같은 것 아니겠나,
꿩잡는 것이 매라구 싸움은 이기고 봐야
하는 것일세. 그리 알구 어서 돌아가
일이나 보게" 하는 것이었다.
장택상이 못 이기는 체하고 반려된
사표를 호주머니에 찌른 채 물러나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각설하고, 국무총리를 협박하다시피
과거 서북청년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일이
있는 문동제를 시켜 무뢰한들을 동원,
이들로 하여금 야당의원들을 협박케 하는가
하면 테러를 하는 등 임시수도 부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것을 우리
현대사에서는 <5.26 정치파동>이라 일컫고
있다.
이범석이 5.26 정치파동 때 맡았던
역할을 소개하려다 보니 얘기가 터무니없이
늘어나게 되었지만 이범석이란 인물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이렇듯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범석의
작태를 잘 알고 있는 장면으로서는 족청계
쿠데타설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범석이라면 능히 쿠데타를 감행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마냥
사람이란 마음이 무거워지게 되면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이 잠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사람이란 잠을 통해서 하루의
피로를 풀기 마련인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피로가 누적되게 될 뿐만 아니라
신경이 바늘 끝같이 뾰족하게 날이 섰다가
종당에는 머리가 돌아버리고 만다.
장면의 아내 김윤옥은 새해에 들어와
남편이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엎치락
뒤치락 쉬 잠들지 못하는 것을 보자
이양반에게 무슨 큰 근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직감했다. 그래서 어느 하루
조용히 남편에게 넌즈시 물었다.
"당신 요새 무척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시는데 무슨 일 때문이에요?"
"나라살림이 매양 어렵기만 하니
남편은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꾸였다.
"나라살림이 어렵다는 거야 처음부터
익히 알고 있던 일 아니겠어요? 그런 만큼
당신께서 그 일로 고민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일로 고민하고 계시는 게
틀림없어요. 그 다른 일이라는 게 뭐냐 그
말씀이에요."
아내가 재차 묻자 장면은 엷은 한숨을
토하고 나서,
"재를 뿌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그러는 거요. 족청계에서 쿠데타를
할 것이라고 하지를 않나,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성미가 급한지 모르겠어. 쿠데타를
할 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을 줘서
일하는 것을 보다가 쿠데타를 하든 말든
해야 할 게 아냐? 이건 꼭 우물에 가
숭늉을 달라는 격이니......."
장면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또 다시
엷은 한숨을 토하는 것이었다.
(역시 그랬었구나, 저 양반이 요 며칠
동안 통 수면을 이루지 못한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6. 4월 위기설, 3월 위기설
4월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1961년
1월 하순께부터였다. 한번 나돌기 시작한
참언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요원의
불꽃처럼 번져나갔다.
"소문 들었는가?"
"무슨 소문?"
"4월달에 세상이 한번 발칵 뒤집힐
거라는 게 아니겠어."
"4월에 세상이 뒤집힌다구? 그럼 장면
정권이 쓰러진다 그거야?"
"세상이 뒤집힌다는 것은 정권이
바뀐다는 얘기가 아니겠어?"
"그야 알 수 없지. 철기 장군일 거라는
소문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철기는
아니라는 사람도 있네. 두고 봐야 알
일이겠지."
1월 하순에 나돌기 시작한 4월 위기설은
2월로 접어들면서 <3월 위기설>로
둔갑되었다. 어떻게 해서 갑자기 4월
위기설이 3월 위기설로 둔갑하게 되었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우리 한국의 경우 아득한 옛날부터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정치적인 변혁이 있게
되거나 또는 천재지변 같은 것을 당하게
되면 으레 위기설과도 같은 참언이
나돌았다. 그럴 경우 그 참언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런 참언이 나돌게 되면 일반
않았다.
국방부 장관 현석호도 우리의 오랜
생활문화에 젖어 있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4월 위기설이 3월
위기설로 둔갑을 해서 퍼져나가자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2월 초순의 어느 날 총리실로
장면을 찾아갔다.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3월에 위기가 닥친다는 소문 말입니다."
"3월에 위기가 닥친다구?"
"예. 그 소문 때문에 여간 민심이 흉흉한
게 아닙니다."
"그 소문은 족청계 쿠데타설 때문이
아니오?"
"경찰 정보보고를 통해서 알았소. 그
때문에 나도 적잖이 마음을 썩인 게
사실이오만, 글쎄, 쿠데타라는 것이 그리
용이할는지 모르겠군."
장면은 마치 남의 얘기하듯 했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나 없나? 쿠데타가
터지면 쿠데타의 대상은 우린데 남의
얘기하듯 하고 있느니?)
현석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권의 한 각료로서, 더구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각료로서 그냥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제 예감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군대를
동원할 태세를 갖추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건의를 했다.
뜻밖이었다.
"대비를 하는 건 좋지만 그런 법석을
떨게 되면 도리어 국민에게 더욱 큰 불안을
안겨주는 결과가 되지 않겠소?"
현석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와락 역정이
일었다.
(정권 안보를 위해서 대비를 하자는데,
그런 대비책이 국민에게 불안을 안겨주게
될까봐 걱정을 해?)
현석호는 그만 역정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정권이 무너지느냐 유지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처했는데, 그래 국민 걱정을 하고
있더란 말씀입니까? 그래, 국민에게 더 큰
불안을 안겨줄까 걱정이 돼서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해 놓고 있지 않다가 정작
하시겠습니까?"
장면은 곤혹스러워졌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겠소.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으니 현
장관께서 참모총장하고 의논해서 계획을
세워 주시구려."
"분명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렇소. 분명히 허락했소."
장면의 내락을 받은 현석호는 국방부로
돌아오는 즉시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과
이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날이던가? 이번에는
경향신문사 사장인 한창우(韓昌愚)와
신부인 김철규(金哲圭)가 찾아와 장면의
마음을 자꾸 쑤셔서 흔들어댔다.
3월 위기설이 돌고 있는데 군의
최고책임자를 갈아치우지 않고 뭘하고 있는
겁니까?"
그들은 장면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들볶았다.
"군의 최고책임자를 갈아치우라고 하지만
최 장군의 임기가 아직도 1년 반이나 남아
있는데, 어찌 그를 갈아치운단 말이오?"
장면 정권의 초대 국방장관인 현석호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인물이 바로
최경록이었다. 그가 최영희의 뒤를 이어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것은 1960년 8월
29일이었다. 그는 참모차장에서 총장으로
승진했던 것이다. 각 군 참모총장의 임기는
2년이었다. 그러니까 1961년 2월 현재 그의
임기는 아직도 1년 반이나 남아 있는
임기를 다 채우고 난 다음에 내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인물로 참모총장을 기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인사문제도
혁명적인 수법으로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주저 마시고 군부 인사를 단행해야만
합니다."
한창우와 김철규는 집요할 정도로 육군
참모총장의 교체를 물고 늘어졌다. 그 두
사람이 최경록의 후임으로 천거한 인물은
제1군 사령관으로 있는
이한림(李翰林)이었다.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천주교 사제인
김철규는 사사건건 인사문제에 개입했다.
<어느 부처의 어느 부서에는 아무개가
적임자니 그를 등용하라. 어느 부처의
하면서 장.차관이고 국장이고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모가지를 뗐다 붙였다 하면서
인사문제를 전횡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신부였기 때문에 누구의
부탁을 받고 그 자리에 부탁 받은 사람을
앉히고자 인사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해서 장면으로 하여금 훌륭한 치적을
남기게 해주자는 데 그 뜻이 있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생각대로 인사문제를
이루어 놓으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도 육군 참모총장을 갈아치운다면
이한림을 기용해야 되겠다고 마음에 점찍어
놓고 있었다. 이한림은 장면과 마찬가지로
수 있는 인물로 치부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밑에서 부통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장면이 많은 장성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는 장성이라고 하는 인물들을 잘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초 같은 때
국군의 장성들은 으레 부통령도 찾아 뵙고
하례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행여 그랬다가는 이승만의 눈밖에 날세라
애써 부통령 관저를 외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림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보고 나면 반드시 장면도
찾아보았다.
"도대체 어쩔려고 그러오, 이 장군?
그러다가 경무대에서 알기라도 하는 날엔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 무슨 당치 않은 소리를 하는 거요?
부통령도 나라의 어른이거늘, 군인으로서
나라의 어른을 찾아뵙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오?" 하면서 대통령의
눈밖에 나거나 말거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역시 이한림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장면이 그를 신뢰하게 되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함경남도 안변(安邊)
태생으로 굳이 흠을 잡자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다음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로
친일을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어쩔 수 없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따져서 무엇하랴.
한창우와 김철규가 육군 참모총장
경질문제를 거론하기 전, 그러니까 장면
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후부터 육군
참모총장 인사문제에 용훼하기 시작한 것은
실은 미 8군 수뇌부였다. 육군 참모총장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그들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장면은,
"고려해 보겠다"고 가볍게 대꾸했었다.
그러나 미 8군 고위 당국자들은 날이
갈수록 최경록의 경질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했다. 교체해야 할 뚜렷한 이유도
내세우지 않고 덮어놓고 갈아 치우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요구가 하도
집요해지기 시작하자 장면은 공보비서관
부탁했다.
"임기도 채우지 않은 사람을 덮어놓고
갈아 치우라고 요구하고 있으니 도대체 저
사람들 속셈이 뭔지 모르겠어. 그러니 송
비서관이 이 문제를 좀 은밀히 조사해 볼
수 없겠어?"
이런 총리의 당부를 받은 송원영은 이미
조사를 해두었던 듯 간명하게 보고했다.
"박사님, 8군 사람들이 최 총장의 경질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최 장군이 저들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임 총장들처럼 고분고분
했더라면 그런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자 장면은 빙긋 미소를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원조를 받는
나라라고 하지만 지켜야 할 자존심은
지켜야겠지.)
송원영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면은
도리어 최경록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가능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육군 참모총장만은
바꾸지 않을 결심을 굳혀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4월 위기설에 이어 3월
위기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앉혀 놓고 있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가슴을 조금
앓았다. 아무 허물도 없는 최경록을 갈아
치울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의 마음을
1961년 2월의 어느 날, 장면은 그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인 공보비서관
박종률(朴鍾律)을 총리실로 불렀다.
박종률은 장면이 부통령 시절부터
비서관으로 일해 오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무렵 총리 공보비서실에서 국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박 비서관, 요새 통 이한림 장군을 볼
수 없으니 어찌된 노릇이야?"
이런 질문은 의당 의전비서관한테 묻는
것이 순서였다. 그것을 박종률을 불러
물어본 것은 장면과 이한림의 인간관계를
누구보다도 박종률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통 연락이 없었습니까?"
"응, 없었어. 새해에 집으로 새배를
비서관이 연락을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좀 들어오란다구 해."
"예, 알겠습니다."
장면의 지시를 받은 박종률은 1층에 있는
공보비서실로 내려온 즉시 제1군 사령부
사령관실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다행하게도 이한림은 사령관실에 있었다.
전화 연결이 되자 박종률은 다짜고짜
힐난부터 했다.
"이 장군, 당신 어찌된 사람이오?"
"어찌된 사람이라뇨, 도대체 무슨
소리오, 그게?"
이한림은 좀 불쾌해진 모양이었다.
전화선을 통해 흘러오는 음색이 별로
곱지가 않았다. 그런 이한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는지 박종률은,
그다지도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이오?" 하고
여전히 나무라는 말투로 힐난을 했다.
이한림은 상당히 비위가 상해진
모양이었다. 그의 노한 목소리가 박종률의
귀청을 때렸다.
"여보시오, 이거 무슨 적반하장 같은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왜 총리를
찾아가지 않았단 말이오? 아시다시피 나는
군무에 매여 있는 몸이란 말이오. 그래서
토요일마다 서울 집에 다녀오고 있는데
그때마다 먼저 총리실에 들렀소. 그런데
면회를 시켜줘야 말이죠. 의전비서관이
총리께선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계신다든가
또는 외국 사람하고 요담중이라든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따돌리기만 하니 내가 무슨
재간으로 총리를 뵈올 수 있단 말이오?"
당시 장면의 의전비서관은
이홍렬(李泓烈)이었다. 박종률은 이홍렬에
대한 노여움이 일었다.
(망할 놈의 자식, 제놈이 뭔데 인의
장막을 치고 지랄이야? 이승만 정권이 왜
망했는데. 이홍렬 같은 놈이 있어 가지고
인의 장막을 쳤기 때문이야! 망할 놈의
자식!)
그러나 박종률은 그 노여움을 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이 얼마나 이 장군을 보고
싶어하시는지 아시오? 그러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들어오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여기를
비워놓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토요일에 서울 집에 가는 길에 들러 뵙도록
두 사람의 대화는 이것으로 그쳤다.
부질없는 일이나 <만약에> 하고 가정해
본다. 이때 만일 박종률이 이한림에게
<박사님이 당신을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할
생각을 품고 있으니 지금 당장 달려오시오>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장면은
이한림에게 육군 참모총장직을 맡도록
하라고 언질을 주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지
않았을까?
박종률은 이한림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2층 총리실로 올라가 이한림과
전화통화한 내용을 보고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박사님, 비서실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인의 장막을 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
장면은 박종률의 말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무슨 소린가, 그게?"
"이 장군께서는 토요일에 서울 집에 올
때마다 먼저 박사님을 뵈오려고
의전비서실로 찾아왔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의전비서실에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면회를
거절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 장군이
아무리 박사님을 뵈려 해도 뵐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
장면은 즉시 구내전화로 의전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이홍렬을 불러 올렸다.
"이보라구, 이 비서관, 이 비서관은
어째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따돌리고 있나?
아니잖은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를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일단 나한테
알려, 멋대로 처리하지 말구. 알겠는가?"
장면의 말투는 별로 거칠지도 않았으나,
그 자신은 좀 지나칠 정도로 따끔하게
야단쳤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서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인의 장막을
치는 일이라네. 거지가 찾아와도 될 수
있으면 만나도록 해줘야 하는 걸세. 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장면은 육군 참모총장에
이한림을 임명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혀
놓았다.
마음을 굳혀 놓았을 때 지체없이
있는 방향으로 궤도 수정 없이 달려갔을
것이다. 그것을 장면은 국방장관이
현석호이기 때문에 그의 직책을 존중하는
뜻에서 그와 상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 각의가 끝난 다음 장면은
국방장관 현석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현 장관, 본의는 아니나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어쩔 수 없을 것 같소. 육군
참모총장을 경질할 수밖에......."
장면은 이렇게 육군 참모총장을 교체할
의사임을 밝혔다.
"그러잖아도 그 문제를 한번
의논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현석호의 말이 장면으로서는 좀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그럼 현 장관도 육군 참모총장을
그거요?" 하고 되물었다.
"예."
현석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나서 장면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의 최경록 참모총장은 워낙 강직한
성품이라 미군 장성들과의 사이가 원만치
못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시국이
시국인만큼 최 장군한테는 미안한 일이나
미군 장성하고의 사이가 원만한 사람으로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자 장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현 장관께서도 역시 나하고 같은
생각이었구려. 그럼 잘 됐습니다. 나는
이한림 장군을 후임으로 낙점해 놓고
모르겠습니다."
"이한림 장군을 낙점하셨다구요?"
반문하는 현석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그늘이 비쳤다.
"왜 이 장군이 마음에 안 드나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는 미군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라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내가 보기엔 이한림 장군이라면
미군하고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소만?"
장면은 어떻게 해서든 이한림을 육군
참모총장에 앉히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장면이 이미 이한림을 육군 참모총장에
현석호는 입장이 좀 난처했다. 실은 며칠
전 백병원 원장이자 30년 친구인
백기호(白基昊)가 찾아와 그의 사위인 2군
사령관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으로의 인사
청탁을 하고 갔었고, 현석호는 장도영을
은밀히 내사해 본 결과 정치장군이지만
미군 장성들과 친교가 두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석호는 장도영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해야만 장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면이 재촉을 했다.
"말씀을 해보십시오. 현 장관은 이한림
장군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토록 못마땅한
표정입니까?"
"내가 조사한 것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조사를 했다구요?"
"예, 최경록 장군이 미군 장성들과
사이가 원만치 못하다 하기에 누굴 최 장군
후임으로 기용해야만 미군과의 관계가
원만해질까 해서 조사를 시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요?"
"그랬더니 미군 장성들은 오로지 한 사람
장도영 장군만을 환영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면의 얼굴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때문인 것 같았다.
장면이 물었다.
"그러니까 현 장관은 꼭 장도영
장군이라야 되겠다, 그 말씀입니까?"
"꼭 장도영 장군이라야 한다는 것보다도
우리의 형편으로서는 되도록 미군 장성들과
사이가 원만한 사람이라야만 하겠다 그
말씀입니다."
이 말에 장면은 꽤나 우울한 모양이었다.
2월 두번째 주일의 국무회의 때 현석호는
육군 참모총장 경질을 안건으로 상정했다.
이 안건이 상정되자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 사람은 재무부 장관인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현 장관, 육군 참모총장을 바꾸겠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최경록 장군이 무슨
과오라도 범했다, 그 말씀입니까?" 하고 좀
거칠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김영선이 이렇듯 최경록을 감싸고 돈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우선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는 지역적인
유대의식이 있었고 그런 관계로 해서
친분을 두터이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석호는 최경록이 파마 성명관계로 미군
장성들과의 사이가 악화돼 있기 때문에
미군과의 원만한 협조를 위해서는 부득불
교체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그 고충을 듣고 있던 국무위원
중에는 <그럴 것이다>라는 듯이 고개를
"후임에는 누굴 앉히려 하십니까?"
김영선이 다시 물었다.
"후임에는 지금 2군 사령관으로 있는
장도영 장군을 임명할 생각입니다."
현석호의 입에서 <장도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운위되자 회의에 참석해 있던 각료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국방장관께선 장도영이 이기붕,
박마리아를 따라다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고 주요한이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다면서 장도영을 육군의
최고책임자 자리에 앉히려 하더란
말입니까?"
주요한이 거듭해서 물었다.
현석호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김영선이
"내가 알기로는 최경록 장군의 임기는
아직 먼 것으로 압니다. 그분한테 과오가
없다면 임기를 채우도록 해주시는 것이
도리인 줄로 압니다. 더구나 이기붕의
사람을 후임자로 천거하다니 국민정서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씀이오."
모여 있던 각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김영선의 주장에 동조를 했다. 모든
사람들의 주장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오직 장면 뿐이었다.
국무회의의 공기가 장도영 기용에 반대로
기울어지자 현석호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설득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장도영이 이기붕을 따라다니던
이기붕한테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고 해서
옷을 벗겨야 한다면 군부에 남아 있게 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런
사람일수록 쓰다듬어 주고 중용을 하면
감격해서라도 이기붕한테 바쳤던 충성
이상의 충성을 우리 민주당 정권한테
바치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더구나
장도영 장군은 미군 수뇌부와의 관계가
아주 원만합니다. 그런 사람이어야만 지금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국군을 잘 수습해서
원상태로 복구시켜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도영 기용에 대해서 찬의를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정치 장군>은 안 된다고 한마디로 딱
잡아떼며 반대했다. 원만한 성격의
내었다.
"국방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나예요.
책임자인 내가 장도영 장군이라야만
비상시국에 처해 있는 국군을 통솔할 수
있겠다고 하는데 어째서 여러분은 반대만을
일삼으려 하십니까?"
현석호가 역정을 부리자 장면이 중재에
나섰다.
"국방장관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육군의 최고책임자는 미군
수뇌부와의 관게가 원만한 사람이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국방부 차관을
매그루더 장군한테 보내서 어떤 인물이
좋겠는지를 협의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장면은 아직도 이한림을 육군 참모총장에
있었다. 그렇다고 국방부 책임을 맡고 있는
현석호의 생각을 누르고 인사권을 행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석호의 의견도
존중해 주면서 육군 참모총장 경질에 관한
인사문제를 매듭짓고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 사무처 몇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
후보자 명단을 갖고 극비밀리에 8군으로
가서 매그루더와 협의를 했다. 그도 장도영
임명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장도영은
이런 절차 끝에 대망의 육군 참모총장직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뭐 이 따위 인사가 다 있어? 장면
정권은 눈깔이 뒤집혔지. 그래 이기붕을
따라다니던 장도영 같은 자를 육군
장도영이 신임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민의원 소속의
이필선(李必善)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장성 가운데 육군
참모총장감이 그렇게도 없어? 아무리
인물이 없기로서니 그래 이기붕한테
아첨이나 해서 출세나 꾀하던 인물을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해야 옳더란 말인가?"
이필선은 펄펄 뛰었다. 민의원 의원이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리지 않고 붙들어
장면 정권의 인사정책을 규탄했다.
"장도영이란 인물이 어떤 자냐 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그런 얌체머리
없는 자를 육군의 최고책임자로 앉히다니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4.19의 혼령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겁니다.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주장에 누구나가 동감을 표시했다.
여당인 민주당 안에서도 육군 참모총장의
인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의원, 우리가 찬성 서명을 할 테니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을 국회에 불러내도록
긴급동의를 제안하십시오. 그래가지고 이
인사문제를 따지도록 해봅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의원들도 많았다.
이필선은 이런 권고를 하는 13명의
의원들의 찬성 서명을 받아 <국무총리 및
관계 국무위원의 본회의 출석을 요구>하는
긴급동의안을 민의원에 제출했다.
이필선이 제안한 이 긴급동의안은 1961년
2월 24일의 민의원 본회의에서 토의되었다.
이필선은 이 긴급동의안을 제출하게 된
공격했다.
"선임된 장도영 참모총장은 이승만 정권
때 제2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부정선거를
감행한 사실이 있으며, 따라서 응당
혁명특별법에 의해서 처단되었어야 한다.
그런 자가 혁명정부의 참모총장이 되는
것은 혁명정신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군의
통수권을 흐리게 하는 처사이므로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을 불러 어떻게 해서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따져보고 인사정책의
난맥을 시정해야 한다."
이필선의 긴급동의 제안설명에
찬성발언을 하고 나선 사람은 야당인
신민당 원내총무 양일동(梁一東)과
민정구락부의 윤길중(尹吉重)이었다.
내용이다.
<장면 정권의 인사정책은 자유당 정권의
인사정책보다도 더 엉터리다. 그런
인사정책은 4.19 영령들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보더라도 장면 정권은 혁명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장면 정권은
총사퇴를 하고 물러가야 마땅하다.>
이보다 앞서 공보비서실의 국회담당인
박종률을 통해서 이필선이 긴급동의로
장도영의 육군 참모총장 기용에 제동을
걸려고 하고 있다는 전화보고를 받은
장면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아무리 의원내각제라 한다고 해서
정부의 인사문제를 가지고 국회에서 일일이
용훼하려 든다면 정부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전원일치해서 부결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이필선의 <국무총리 및
관계장관 본회의 출석 동의안>은
부결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역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역사의
진운에 얼마나 심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그야 어쨌든 이렇게 민의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공개된 석상에서 자신의 이름
석자가 들먹여지며 과거의 아름답지 못했던
행적이 들추어져 논란되고 있었는데도
당자인 장도영은 어디 개가 짖느냐는 듯이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희놈들 까불고 싶은 대로 까불어라!>
하고 마냥 의기양양하기만 했다.
나이 탓이었을까? 아무래도 장도영은
기용하기에는 좀 이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아직 인물이 덜 영글어져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에 대한 인사문제가 일단락되자,
어느 날 현석호는 장도영을 장관실로
불렀다.
"장 총장, 군에서도 정보팀을 거니리고
있으니까 항간에 나돌고 있는 소문을
들었으리라고 믿고 있소만, 그 소문 때문에
총리의 심기가 여간 불편해져 있지를 않소.
민심 또한 여간 흉흉한 게 아니고. 그래서
하는 소린데 소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놔야 할 게 아니겠소?" 하고 장도영의
의중을 떠보았다.
"아아, 장관님. 4월 위기설이다, 3월
위기설이다 하는 것 그 말씀이시군요. 그것
조금도 염려하시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총장으로 임명된
직후에 그 소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장도영의 호기가 현석호의 눈에는 자못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자랑스러운 자식을 바라보는 어버이의
눈빛에 엷은 미소까지 머금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나 총리나 장 총장만 믿겠소.
어느 편에서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소?
그러니 장 총장, 그 점에 각별히 유념해
주면 고맙겠소."
"장관님께서도 조금도 심려하지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대비를
해놓겠습니다."
장도영은 마냥 큰소리를 쳤다. 그의 그
큰소리가 하나의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석호는 이때는 깨닫지 못했다. 그저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눈빛으로 장도영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둘기 작전>이라는 이름의 훈련이
서울시내 일원에서 실시된 것은 1961년 3월
6일이었다. 서울 방위사령부격인 제6관구
주관으로 행해진 이 훈련은 폭동발발을
가상해서 실시된 진압 훈련이었다.
자유당 정권 때나 민주당 정권 때는
정권안보를 위한 근위사단이라 할 수 있는
서울 방위사령부를 따로 설치해 놓고
벌어진다든가 폭동이 벌어질 것 같으면
서울 근교에 주둔해 있는 부대를 불러들여
투입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정권안보의 근위사단을 특별히 마련해 놓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군인들도 정권이 썩었으니 이런
정권은 무력으로라도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군인들도
순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4월
위기설이니, 3월 위기설 같은 것은 그것이
현실화될 때에는 4.19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했지 군사 쿠데타로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비둘기 작전은 장도영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된 뒤에 입안해서 실시한
4월 위기설이든 3월 위기설이든 어떤
위기가 닥친다 해도 겁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장면이고 그 밖의 각료고
간에 모두가 마음을 턱 놓았다. 마음이 턱
놓이니 장면은 이제부터 정치다운 정치를
해보리라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따지고
보면 장면이 이런 다짐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비둘기 작전의 성공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비둘기 작전에 동원된 부대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살펴볼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던 장면으로서는 그저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하여간에 장면은 만족해 했고
그리고 정치다운 정치를 해보리라 마음에
다짐을 주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경상북도 대구 하면, 웬지 혁명적 기상이
넘치는 도시 또는 반골(反骨)도시라는
인상을 지워버리기가 어렵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10월 초하루의 남로당에 의한 폭동, 그리고
4.19의 봉화가 먼저 대구에서 올려졌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로부터 경상도인의 성격을 고산태악에
비유했던가? 욱 하는 성격이 그런 사건들을
빚어내게 되는 것 같다.
민주당 정권의 반공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혁신세력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도 대구였다. 1960년 3월 21일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였다. 지방에서부터
반공법 제정 반대바람을 일으켜 서울로
올라오자는 것이 혁신세력의 전략인
탓이기도 했지만 1만 5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동원했다는 것은 우선은
성공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구에서의 집회가 있은 지 이틀 만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군중집회를
가졌지만, 이 집회에는 고작해야 6천 명
정도밖에 군중이 모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장면이 송원영으로부터 서울시청
앞에서의 집회에 대한 보고를 받자,
"군중이 6천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은 민중이 데모에 진저리를 느끼고
있다는 증좌다"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겠는가.
문제가 토의될 때 집회와 시위운동에 대한
규제법도 제정해야 한다는 국무위원도
있었다.
"걸핏하면 무슨 불만이든 데모로
해결하려는 이런 악습은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집회와 시위
규제법도 제정해야만 합니다."
장면도 이 주장을 옳게 받아들였다.
"동감이오. 정당한 사유가 없는 집회나
시위는 민주발전의 암적 요소일 뿐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오."
장면이 동의하자, 집회와 시위에 관한
규제법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서울시청 앞의 집회에는 고작 6천여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여기에서 장면은 그렇다면 여론을
규제법은 보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혁신계가 통틀어 나서서 군중동원에
전력투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청광장에서의 집회에는 어찌해서 고작
6천여 명박에 군중이 모여들지 않았던가?
그것은 <장면 정권이 반공법을 만들려
한다고 해서 그것을 영구집권의 도구로
쓸려고 할 리는 없다>고 민중은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장면의 도덕성에
대해서 국민은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에 있어 장면은 도덕적인
면에서만은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때쯤 국민은
트여져 있었고 정치를 보는 눈 또한 그만큼
성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수작이야? 반공법이라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반공법 따위를
만들겠다는 거야?"
정헌주의 발표가 있자, 민주당 소속
의원들 중에서도 길길이 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소장파에 속하는
의원들이 그들이었다. 어떤 혈기방자한
소장의원은 일부러 장면을 찾아가,
"도대체 어쩌려구 이러십니까? 반공법
같은 것을 만들려다가 정권을 내놓게 돼도
내 알 바 아니다 그 말씀입니까? 자유당 때
보안법을 만들려고 하자 거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가 이제
하다니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길길이 뛰기까지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논리적으로는 지당한
항의였다. 문제는 정치가 논리대로 되지
않는 데에 있었다.
얘기는 좀 옆길로 새지만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차이점도 바로 이런 점에
있었다. 장면이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이었다면 젊은 국회의원이 어디라고
감히 장면 앞에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용훼할 수 있단 말인가. 반대의 뜻이
있다고 해도 냉가슴만 앓을 뿐 더는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당 소장의원들이 반공법 제정을
반대하고 나서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제는 야당이 돼 버린 신민당
법무부 장관 조재천이 신민당 간사장인
유진산과 을지로의 한 음식점에서 은밀히
만난 것은 혁신계가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를 가진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선생님, 정부에서 반공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혁신계에서는 영구집권의 음모라고
규탄하고 있지만, 우리 신파 정권이
반공법을 영구집권의 도구로 쓰려고
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생님께서도 아시고 계실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알고 있소. 장면은 영구집권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왜
모르고 있겠소?"
유진산의 대꾸는 명쾌했다. 조재천은
그제야 용기가 생겼다. 그는 이날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뭐라 말을 꺼낼까
여간 마음을 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유진산이 명쾌하게 응대해 주자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 신민당에서도
선생님이 앞장서서 반공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협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반공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소."
그 말을 듣자 조재천은
"고맙습니다" 하면서 넙죽 엎드리며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야 진산 선생이 어떤 분인지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소. 우리나라의
시대상황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한테 감사할 게 뭐란 말이오?"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시대상황에서 젊은이들이 1960년대 초의
시대상황을 이해하기는 좀 어려울런지도
모른다.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에도 북한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수정하겠다던가 또는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지를 않고 있다.
남북대화를 진행시키고 있으면서도 이
모양인데 남북대화는 고사하고 무력
적화통일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던 1960년
적대행위를 해왔느냐 하는 것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줄로 안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간첩을
내려보냈다. 무장도발도 부지기수로
야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려보내는 간첩이나
무장 게릴라에 대응하자면 반공법 같은
제재법이 절대로 요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해방 이후 줄곧 대공투쟁으로
일관해 온 유진산이 당리당략에서 반공법
제정을 반대할 리가 없었다. 유진산을
<참정치가>라 일컫고 있는 이유가
이래서다.
반공법 제정에 가능한 한 거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분명하게 다짐을 하고 나서
유진산은,
보안법 폐기 같은 것은 신중히 생각해 보고
나서 주장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보안법을 그대로 놔두기만 했던들 오늘날
장 정권이 이토록 괴로운 일을 떠맡는 일은
없었을 게 아니오?"
유진산의 따끔한 일침에 조재천은 자신의
단견을 또 한 번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음식점을 나와 큰거리로
나서자, 그 큰거리가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혁신계가 횃불데모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횃불로 해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악법 반대
성토 대강연회>를 베풀고 난 혁신게는 밤이
되자, 횃불데모로 기세를 돋구었던 것이다.
철회하라!>
<반공법은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악법이다!>
<장면 정권이 반공법을 만들려는 것은
영구집권의 음모다!>
그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을지로
사거리를 꺾어 돌아 종로 쪽으로 행진해
가고 있었다. 그 수가 1만 명인지 2만
명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거리가
꽉 메워져 있었다.
"웬 사람들이 저리도 많아?"
유진산이나 조재천은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서울시민 모두가 뛰쳐나와
횃불데모에 가담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긴 놀라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날
혁신당(革新黨) 위원장인 장건상(張建相)의
사회로 시작된 강연회는 고정훈의 연설로
6시 30분에 끝을 맺었지만, 청중 수가 고작
6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은
조재천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다음 내무부
장관 신현돈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총리께서 혁신계 집회에 어떻게
대처하라는 지시는 없었소?" 하고 물어
보았다.
이 질문에 대해서 신현돈은 이렇게
대답했다.
"총리께서는 혁신계의 집회에 기동경찰을
파견하되 그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할
때에는 잘 보호해 주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재천은 입맛이 썼다.
않은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한 정권이 고작 6천여 명의 군중한테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어가지고 어쩔
셈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장면은 내무부 장관 신현돈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앞서와 같은 지시를
내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혁신계의 집회나 데모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도 같소. 반대하는 자유가
없다면 그걸 민주주의라 할 수는 없을 게
아니오? 질서를 지키면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얼마든지 허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아마도 장면은 혁신계의 집회나 데모를
통해서 국민에게 민주주의의 실체를
보려요?"
인물이었다.
유진산과 조재천은 한동안이나 길거리에
서서 횃불데모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산과 조재천은
어떻게 해서 횃불데모에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횃불데모에 나서 있는 사람들은 어른이
아니라 거의가 어린 꼬마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횃불을 든 사람들은 어른들이었다.
그 횃불을 든 어른들에게 꼬마들이
따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 어린
꼬마들은 횃불데모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호기심에 이끌려 집을 뛰쳐나와
데모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대열을 이루며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데모의 실상을 확인하고 나자 쓴웃음을
유진산이 조재천과 헤어져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오자, 비서가 조금 전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전해주는
것이었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이 밤중에 무슨
일일까?)
예전에도 윤보선은 자정 전에는 필요한
일이 생기면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전화를
하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해서 신경을 쓸 일은 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윤보선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계속
전화가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윤보선은
대통령이 된 뒤로는 예전처럼 그렇게
전화를 주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 꼭
전화할 일이 있으면 비서실장으로 하여금
유진산은 궁금증에 못 이겨 손수
다이얼을 돌려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청와댑니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귀에 익지 않았다.
"나 유진산이오. 대통령께서 전화를
주셨다고 해서 전화를 했소. 전화를 받는
분이 뉘시오?"
"숙직비섭니다."
"그래요? 수고가 많구먼. 대통령과
통화를 했으면 하오만?"
"죄송합니다. 각하께서는 벌써 침실에
드셨습니다."
"침실에 드셨다구?"
"예."
"그렇소? 그럼 오늘 밤에 대통령께서
무슨 일로 내 집에 전화를 주셨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내일 밤에 있을 요인회담의 취지를
말씀드리려고 전화를 하셨던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만?"
"요인회담?"
(요인회담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요인회담이라는 게?)
유진산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수화기를
놓았다. 그랬는데 수화기를 놓자마자 벨이
울렸다. 그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상도동이외다."
"아, 진산. 들어와 있었군."
쉰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민의원 의장
곽상훈이었다.
"의장님께서 어쩐 일로 친히 전화를
유진산이 미처 용건을 묻기도 전에
곽상훈은 용건을 주워 섬겼다.
"진산, 내일 밤 8시에 청와대에서
요인회담을 갖기로 했소. 그리 아시고
진산도 참석해 주면 고맙겠소."
"요인회담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요인회담이란 말씀이오?"
반문하는 유진산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곽상훈이 좀
장황하게 요인회담을 열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했다. 그는
혁신계의 횃불데모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대통령 윤보선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횃불데모는 4.19 데모에
버금가는 데모라고 했다. 대통령 윤보선도
횃불데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횃불데모를
기화로 해서 데모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게
될까 그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윤보선에게,
"무슨 문제만 생기면 데모로 해결하려
드는 이런 작태는 시정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동감이외다만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소? 만사 민주당
정권이 알아서 할 일이외다"라고 처방책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하긴 정치적 권한도 또 책임도 없는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있었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그렇다고 나몰라라 할 순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니 책임있는 몇 사람이
모여서 시국수습책을 강구해 보았으면
하오만?"
곽상훈이 다시 제의를 하자, 윤보선은,
"시국수습책을 협의하자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소이다. 삼연이 알아서
주선하시오" 하더라는 것이다.
윤보선이 시국수습책 협의에 동의를
하자, 곽상훈은 참의원 의장인 백낙준에게
이 뜻을 전했다. 그도 이의가 없었다.
곽상훈은 국무총리 장면에게 전화를 걸어
시국이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강조하고, 이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 내일
밤 8시에 청와대에서 <요인회담>을 열기로
했으니 필히 참석하라고 통고했다고 했다.
"진산도 내일 밤의 요인회담에는 필히
참석해 줘야겠소. 그리 아시고 오늘 밤에
시국수습책이나 잘 연구해 두시오" 하는
것이었다.
곽상훈과의 전화 통화를 끊고 난
유진산은 과연 지금의 상황이
위기상황이냐고 자문자답해 보았다. 하긴
벌써 오래 전부터 4월 위기설이다, 3월
위기설이다 하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시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워버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는 문제를 데모로
시위에 대한 규제법만 만들면 위법적인
데모 따위는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국을 굳이 위기라고
못박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자 민의원 의장인
곽상훈이 지금의 시국을 애써 위기로
규정하려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촌탁할 수가 없었다.
이른바 요인회담은 다음날인 3월 23일 밤
8시에 청화대에서 열렸다. 이 회담에
참석한 인물들은 청와대 주인인 윤보선을
위시해서 국무총리 장면, 민의원 의장
신민당 부위원장 김도연과 간사장인
유진산, 원내총무 양일동, 그리고 조한백과
서범석, 각료로서 국방부 장관인 현석호
등이 배석했다. 법무부 장관 조재천도
초청을 받았으나 그는 다른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참석하지를 못했다.
이날 장면은 사실 이 자리에 참석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요인회담>에
참석하라는 곽상훈의 통고가 있기 몇 시간
전에 그는 이미 청와대를 방문해서,
<혁신계가 자꾸만 시국을 위기로만 몰고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혁신계의
책동을 막아낼 수 있겠느냐?>고 의논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윤보선은,
"그게 정권담당자의 일이지 내 일이오?"
것이다.
그러한 윤보선의 태도에 장면은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나 그 감정을 누르고
다시 한 번,
"해위, 해위는 국정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국가원수로서
얼마든지 조언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하면서 그가 협력해 주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그랬으나 윤보선은,
"운석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하면서 애써 의논상대가
돼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쓰디쓴 모욕을 당했었기에 그는
청와대 요인회담 따윈 무시해 버릴려고
했으나 그런 몸가짐이 어쩐지 속좁은
소인배 같은 행위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런데 막상 참석하고 보니 신파는
자기와 현석호 단 두 사람뿐이었다.
곽상훈도 예전에는 신파에 속해 있던
인물이었으나 민의원 의장이 되자 당적을
떠나 있었다. <민의원 의장으로서 공정한
직무수행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당적에서 떠난 이유였다.
참의원 의장 백낙준은 원래가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됐던 인물이었으니 그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밖에는 모두 구파였던
신민당 일색이었다.
(요인회담이라고 하더니 어째서 구파
중진들만 잔뜩 불러 모았어? 요인회담 운운
하면서 신파 정권을 성토하자 하는 속셈이
아니야?)
장면의 마음에는 이런 의구심이 일기도
그런 의구심이 생긴 것도 결코
무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신.구의 비율이
6대 2가 됐기 때문이었다. 만일 요인회담이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이 장면 자신에게 뒤집어 씌워질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장면의 마음에는 또다시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꾹
누르며 미리 마련돼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곽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이 모임은 내가 제의해서 마련한
자리인만큼 우선 왜 이런 자리가 필요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소" 하고
서두를 꺼낸 다음,
"이번엔 지방엘 가서 약 1주일간 순회해
있던 것보다는 훨씬 심각하더이다. 많은
사람들을 접촉해 본 결과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소. 국민이
모두 불안해 하고 있으니 사태수습에
미온적인 대책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소. 심지어 부산 같은 데서는
김일성 만세를 외치는 자까지 나타난
실정이 아니겠소. 이러다간 나라를
김일성한테 먹히고 말아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무슨 대책이 있어야겠다, 그걸
의논하자 해서 여러분을 초청한 것이외다"
했다.
그 말을 장면이 받았다.
"나도 자생 공산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이북에서 내려보낸 자들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경상도 지방에서 <적기가>를 부르는
자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라는 보고를
받았소.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에 대한 대책을 서둘고는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 중에 좋은 복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겠습니다."
장면의 이 요청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런
방법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 침묵을
깨고 윤보선이 입을 열었다.
"거 신문을 보니 신민당의 청조회
회원들이 국민복 비슷한 옷을 만들어
입었더군. 내가 보기엔 그거 아주 좋은
착상이라 생각했소이다. 지도층이 사치를
것이 바로 반공운동 아니겠소이까? 우리는
말로만 반공, 반공 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그것을 반공운동으로 확대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 줄로 아오이다."
그 말을 듣고 장면은 <이 양반 지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하는
반발심이 일었다. 왜냐하면, 지금 혁신계는
보수정당의 집권을 깨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국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판국인데 윤보선의 발언은 혁신계를
용공분자로 간주하고 그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반공운동을 전개하자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국방장관 현석호는 아마도 그러한 장면의
감정을 읽었는지 다소 면박성 발언을 했다.
계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치풍조하고 반공운동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현석호의 반문에 윤보선은 다분히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 느꼈던 모양이었다. 좀
거칠게 되물었다.
"연관이 없다구?"
"무슨 연관이 있단 말씀입니까? 사치풍조
일소가 반공운동하고 연관이 있다면 우린
벌써 반공운동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총리께선 취임 직후부터
공무원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도시락 지참을
장려하고 있으니 말씀입니다. 도시락 지참
장려도 지도층의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솔선수범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으니 말씀입니다."
하지 말고 가능하면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지시만 했던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날마다 아내로 하여금
점심밥을 싸가지고 총리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그렇게까지 한 장면이었으나
공무원들에게 꼭 도시락을 싸와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를 강요하는
것도 개인생활의 침범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현석호가 도시락 문제를 끄집어내자
윤보선이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공무원들더러 도시락이나 싸오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공운동이 된다는
거요?"
현석호도 지지 않고 윤보선의 말을
"내가 언제 도시락 지참을 반공운동의
차원에서 장려하고 있다고 했습니까?
사치풍조 일소가 반공운동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그리 말했소."
"상관이 없기는 왜 없단 말이오!
지도층이 사치풍조를 일소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보시오. 공산주의자나 혁신세력이
발붙일 곳이 어디란 말이오?"
"쯧쯧."
현석호는 혀를 끌끌 차며 윤보선의 말을
또 반박했다.
"참으로 딱하십니다. 혁신세력이 민중을
선동해서 걸핏하면 데모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지도층의 사치풍조나 규탄하자고
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정권 탈취란 말입니다. 정권 탈취!
밀어붙이다 보면 제2의 4.19를 기대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서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쩌면 혁신계를 보는 현석호의 시각은
옳았는지도 모른다. 정권 창출이 어려운
혁신계로서는 줄기차게 데모를 하다보면
제2의 4.19가 야기될 수도 있지 않느냐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정부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줄기차게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되풀이하고
있었을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데모라는
수단으로.
한데, 윤보선은 명색이 국가원수인
대통령이었다. 단둘이 대좌한 자리도
아니고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현석호한테
면박을 당하자 대통령의 권위에 손상을
자리가 어떤 자리냐는 것을 고려해 볼
생각도 않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 정권에서는 가당치도 않게
반공법으로 그들을 다스리고자 반공법
입법을 예고했소?"
"사실은 그렇소. 대통령께서 아시다시피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지금은 그러한
불순행위를 처벌할 법이 없는 게 아니오?
그럼 혁신계가 반대한다고 해서 반공법
입법을 단념해 버려야 하겠소?"
"내가 보기엔 장 정권은 정국수습에
자신이 없는 것 같소."
그러자 현석호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장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정국수습에 자신이
없긴 왜 없단 말이오?"
정국수습에 자신이 없다는 증거가아니고
뭐요?"
장면의 얼굴에 노기가 일었다. 그가
뭐라고 반박하려고 하자 유진산이 냉큼
끼어들었다. 윤보선과 장면의 입씨름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큰 싸움으로
발전하겠다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만!"
그는 우선 장면의 입을 막은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공법은 이북에서 내려보내는 간첩이나
잡는 데 활용돼야 원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목적에서라면 나는 우리 신민당하고
공동제안을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웬만한 경범죄라면 기존법규에 따라
경찰행정력으로도 가능한 일이
규제해야겠다는 신념이 있다면 정부가
단독으로 제안해서 밀고 나가도록
하십시오. 그만한 일쯤 단독으로 소신껏
밀고 나가지 못한다면야 난국극복의 신념이
없는 정권이라고 매도를 당해도 할말이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윤보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편들어
주는 유진산이 고맙기도 하고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는 유진산이 편들어 주는 데에
만족해 한 나머지 한술 더 떴다.
"진산이 아주 말을 잘 했소. 요는
난국극복의 신념이외다. 현 정부는
난국극복의 신념이 없소이다."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을 윤보선은 탕탕
잘도 내뱉었다. 정권의 책임자를 앞에 놓고
현 정권은 난국극복의 신념이 없다고 칼로
넘쳐 흘러서였을까, 아니면
미련해서였을까? 어쩌면 윤보선은 장면의
비위를 긁어놓자는 속셈에서 의식적으로
장면을 헐뜯었는지도 모른다.
장면은 또 다시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윤보선의 속셈이 무엇일까 하고
촌탁해 보았다.
(이 사람들이 결국은 나를 성토하자 해서
이 자리에 부른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나를 앞에 놓고 이다지
노골적으로 나를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장면은 이런 의심이 일었으나 애써
부드럽게 대응했다.
"지금은 자신 같은 것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오.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도리
없는 일 아니오? 나뿐 아니라 여기 있는
협력해서 잘 되도록 힘써야 되지 않겠소?"
윤보선은 이 말을 장면이 한풀 꺾인
것이라 느꼈던 모양이었다. 기어이 장면의
감정을 폭발시키고야 마는 말을 불쑥
내뱉았다.
"정국을 안정시킬 자신도 없고 수습할
능력도 없다면 차라리 정권을 내놓으시오!"
그리고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오?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다면 당연히 정권을 내놓는 게
옳지 않소?" 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곽상훈이 윤보선의 동의에
화답하듯이,
"국민이 모두 불안해 하고 있으니
사태수습에 미온적인 대책만으로는 안
된다고 보오"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인가?)
장면이 속으로 되물었다.
"나는 사태수습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데,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대안을 제시해 주구려.
난국수습을 위한 적절한 대안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대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장면이 대안 제시를 요구했으나,
곽상훈은 거기에는 대답을 않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글쎄, 나더러 국무총리를 하라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거 참 별소리도 많지.
허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삼연더러
국무총리를 하라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게
대통령 윤보선이나 신민당 사람들이?)
누가 곽상훈더러 국무총리를 하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곽상훈이 국무총리를
하고 싶다고 될 리도 없었다. 더구나
국회의장은 당적을 떠나도록 국회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곽상훈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는 것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민주당 당원의 자격은 상실되어
있었다. 그런 처지에 그가 국무총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누가 그의 뒤를 밀어준단
말인가. 씨알이 먹히지 않는 곽상훈의
얘기였다.
듣고 있던 윤보선은 다시 앞서의 말을
강조하듯이,
"다음에 정국을 담당할 인물이 운석보다
더 낫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지금
할 게 아니오?" 했다.
윤보선은 기왕에 내친 걸음, 이 기회에
쇠뿔도 단김에 배버리자는 속셈인 것이
역력했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리가 없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들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이다, 뭐다 해가지고 나를
불러놓고는 정권을 내놓도록 유도하려는
속셈들이었어. 표로 정권을 빼앗을 순
없으니까 나를 이리 찌르고 저리 공박해서
진절머리를 느끼게 만들어 자포자기로
정권을 내놓게 하자는 그런 속셈들이었어.
어림없는 소리. 정권이 무슨 노리개감이야?
정권을 빼앗고 싶거든 표로 대결을 해,
표로!)
장면은 그들의 속셈이 어디 있느냐 하는
씹어뱉듯 말했다.
"해위,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오?"
"왜 내가 못할 말을 했다 그거요?"
"그게 대통령으로서 할 소리요?"
"대통령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정국의 혼란은 날로 심화돼 가고
있고 운석의 정권은 그것을 수습할 능력이
없는데, 그래 대통령으로서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옳단 말이오?"
"나의 국무총리직은 법 절차에 의해서
맡게 되었다는 것을 해위가 모르오? 나로
하여금 정권을 내놓게 하려거든 정당하게
법 절차에 따라서 정권을 내놓게 하시오.
내 자의로 정권을 내놓는다 안 내놓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고 해위의 강요에 의해서
아오."
장면은 이렇게 씹어뱉듯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선 채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반공을 위한 국민운동의 방법을
의논하자 해서 사람을 불러 놓고, 이게
무슨 어린애 같은 짓들이오! 그렇게 정권이
탐이 나거든 법 절차에 의해서 정당하게
정권을 빼앗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는 돌아간다는 인사조차도 않고
접견실을 나서고 말았다.
당초, 청와대 4자회담은 극비밀리에
진행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이
회담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합의가
이루어지든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공표하지
않기로 언약이 되어 있었다.
청와대 4자회담의 내용을 공표한 것은
참의원 의장인 백낙준이었다. 특히
언론에서는 윤보선이 장면더러 <정권을
내놓으라>고 한 말이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분노에 몸을 떤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이 정치에 용훼할 수 있어? 제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었지 누구더러 정권을
내놓으라 말라 하는 거야?"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일 뿐이야! 그런
사람이 정권을 내놓으라 말라 하다니 누굴
바지저고리 취급을 하는 거야? 윤보선 씨의
정치관여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한번
심각하게 따지고 넘어가야 돼."
그렇지 않아도 점차 혼란이 심각해져
윤보선과 민주당이 맞붙어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장면은 생각했다.
그래서 당적으로 또는 내각에서 윤보선을
성토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지시했다.
<정치에 초연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청와대의 야당 대표들만 불러놓고 장면
총리에게 정권을 내놓으라고 말한 사실은
언어 도단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청와대를 음모처로써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윤보선 대통령이 앞으로도 그런 식의
정치간섭을 한다면 우리 민주당도.......>
원내총무 이석기의 성명이 발표된 것은
청와대 4자회담이 열렸던 다음날 오후였다.
정부대변인으로 내각사무처장인 정헌주도
성토했다.
<청와대는 정치의 음모처>라는 이석기의
비난 성명에 윤보선은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그렇다고 어찌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는 분노에 거칠은 입김만 토하며,
"어디 두고 보자!"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7. 장면은 폭력적 집권을 거부한다
횃불데모 등으로 해서 책임있는
정치인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그러한 마음가짐과는 달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이 사태를 응시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줄로 안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던
박정희 등일 것이라는 것을 독자 제씨는
벌써 눈치채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사회가 자꾸 혼란해질수록 군사 쿠데타를
추진하기가 수월했다. 또 쿠데타를
있었다.
그러니 쿠데타 그룹이 손뼉을 치면서
기꺼워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1961년 4월 6일은 제5회 <신문의
날>이다. 이날 시공관에서 열린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 장면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통해서 장면은 <폭력적 집권은 물론이고
혁신계의 집권이나 거국내각 구성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한데, 장면이 언급한 <폭력적 집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던가? 여기에 대해서
좀 언급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장면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자는 장면의 국무총리 공보비서실
방송담당 촉탁이었다. 필자는 간혹 중대한
여론을 수집해 공보비서관 송원영에게
참고자료로 제출하곤 했다.
<신문의 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강민의 여론조사에는 이런 항목이 들어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교과서적(敎科書的)
민주주의 원칙만 금과옥조로 고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빈번한 데모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반독재(半獨裁) 정권>이라는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공권력을 강화, 행사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요망이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매일 데모, 데모로만 지새우다간
나라가 송두리째 망해 버리고 말겠어. 뭔가
강력한 규제가 있어야겠어."
"데모의 의미가 너무나 변질되었어. 어떤
경우에 데모를 일으켜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데모를 벌이고 있으니, 이젠 어쩔
수 없이 정부에서 반독재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어."
우스운 것은 데모를 반대하기 위해서
일으킨 데모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청년단체의
데모였지만 하여간에 그렇듯 사회가
혼란으로만 치닫고 있었으니 정부가 반독재
정치라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자연적인
추세라고도 할 수 있었다.
검토를 거친 끝에 국무총리 특별고문인
오영진(吳泳鎭)한테 올려졌다. 시나리오
라이터인 오영진이 장면의 특별고문으로
모셔진 것은 새해에 들어서였지만,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게 그저 이런 홍보적인
것이었다.
오영진은 이강민이 올린 여론조사서 중에
일부분을 붉은 연필로 <OK>라고 표시했다.
그가 OK라고 해놓은 것에 한해서만
장면에게 올려지고 있었다.
장면은 이강민이 올린 여론조사서를 읽고
나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반독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반독재
정치를 하려 해도 폭력이 따르기 마련인
것을, 절대로 그런 여론에 편승할 수는
없어."
같이 당부했다.
"오는 6일,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행할
연설에는 이 여론조사서를 반영하는 것이
좋겠어.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반독재라도
해주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지만
반독재도 폭력을 행사해야만 가능한
일일세. 그것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이야. 그러니 어떤 경우일지라도 폭력적
집권은 배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도록
원고를 작성해 주게."
당시 장면의 스피치 라이터는
고려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였던
노희엽(盧熙燁)이었다. 장면의 특별한
당부를 받은 노희엽은 <폭력적 집권>
문제에 특히 악센트를 주어 이때의 연설문
원고를 작성했었다.
연설은 KBS의 보도시간을 통해 박정희도
들었다.
(폭력적 집권은 않겠다고? 당연한
이야기를 무슨 큰 선심이나 쓰듯이
말하는군.)
그는 어쨌거나 그의 계획을 위해서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반독재를
위해서 갖가지 조치를 취하는 날에는 그가
추진하고 있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다음날 아주 만족한
기분으로 한 모임에 참석을 했다.
1961년 4월 7일 현재로 군사 쿠데타
그룹은 필요한 동지포섭을 끝내고
출동부대에 대해서도 거의 확정을 지어놓고
있었다.
4월달에 들어서면서 쿠데타 그룹의 핵심
편성, 육군 중령 이석제(李錫濟) 책임 밑에
주요작업의 자료수집 및 시안작성에
착수했다. 이 행정반팀은 주로 자유당과
민주당의 정강정책, 국내외의 신문, 연간
등을 기본자료로 해서 정책시안을 마련,
그것을 김종필에게 주었다. 김종필은 다시
이 시안을 검토해서 수정한 다음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김종필은 그 나름대로 각국의
혁명사례 등 각종 자료를 신문.잡지 등에서
발췌, 연구자료로 삼았으며, 특히 터어키
혁명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족 같은 얘기지만
김종필의 쿠데타와 관련된 많은 지식은
사상계(思想界)라는 잡지를 통해서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혁명 후의 정책수립을 위해 국내외의
정치.경제.사회 특히 농촌경제문제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한편,
민간인으로 정보통인 장태화(張太和)
등에게 정보분석 임무를 주어 매주 또는
격주로 각종 정세와 시책 등의 보고를
받아왔다.
박정희는 스스로 또는 장태화 등을 통해
수집한 자료 등을 바탕으로 이를 추가
수정, 최종안을 만들어서 다시 김종필에게
맡기곤 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자료의 원본은
행정반 책임자인 이석제에게 보관시켰다.
그러나 뒤에 언급하겠지만 김덕승, 일명
김용천이 5월 13일, 서울 시경에 체포되어
이틀 뒤인 5월 15일 밤에 군사 쿠데타의
옆 골목에서 기밀서류와 함께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하여간에 그건 나중 일이고 4월 7일 밤,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그룹의 핵심
멤버들을 서울 명동에 있는 육군 중령
강상욱의 집에 모였다.
"이제는 D데이를 언제로 정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습니다."
이석제가 말했다.
박정희가 거기에 대한 대꾸를 하기 전에
오치성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D데이는 4월 19일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 왜냐하면......."
4월 19일에는 대대적인 데모가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었다.
물론 이 데모는 반정부 시위일 것은 다시
바로 이것이었다. 4.19 일주년을 기해서
벌이게 될 이 데모는 4.19 사태 이상의
상황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면 정권은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 이때
나돌고 있던 풍문이었다. 이런 풍문이
나돌자 국방부 장관인 현석호는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지시해서 군대를
동원해 데모를 저지시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비둘기
작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쿠데타 그룹의 핵심멤버들은
4월 19일을 D데이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날
데모가 벌어지게 되면 진압차 군대가
동원되게 될 것이고 군대가 동원되거든 그
군대를 쿠데타군으로 표변시키면 된다는
"비둘기 작전에 동원될 부대에도
우리한테 포섭된 동지들이 있소?"
박정희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우선 6관구 참모장인
김재춘(金在春) 대령이 우리 핵심 멤버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박정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래서 군사 쿠데타는 4월 19일로
확정되었다.
거사일을 정하고 나서 책임부서를
재조정했다.
연락 및 재정조달:김종필
행정:오치성, 이셕제
법률:길재호, 유승원
정치:이지찬, 최홍순
경제기획:이원희, 정치갑
문교사회:유근주, 김재후
작전:박원빈, 강상욱
정보:옥창호, 김형욱, 김용채
작전기획:김제민, 박순권
동원:이백일, 오학진
이렇게 책임부서를 재조정하고 나자,
쿠데타군이 정부의 어떤 기관을 점령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 결과 혁명군은
D일 H아워에 출동하는 즉시 중앙청,
반도호텔, KBS와 CBS,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체포토록 한다는 것 등을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이 있은 다음날 김종필은
박종규를 집으로 불렀다.
"박 소령, 박 소령한테 큰일을 한 가지
맡기려고 불렀는데, 과연 박 소령이 해낼
수 있겠는지가 좀 걱정스럽군."
이 말을 듣자, 박종규는 얼굴이
벌개졌다. 자존심이 상해진 모양이었다.
"내 능력이 의심스럽거든 처음부터
부르지를 말지 사람을 불러놓고 면전에서
그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따질 것 없어! 맡겨진 임무는 목숨을
걸고 반드시 수행하겠다고 맹서만 하면 돼!
이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야. 그래서
걱정부터 앞서서 한 소리라고!"
"그건 그만큼 나를 못 믿는다는 얘기가
걱정이 앞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알았어."
"알았으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서 그거나 말씀해 주십시오."
김종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나서,
"박 소령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하고 박종규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김종필로부터 지령을 받는 즉시 박종규는
즉시 그에게 지워진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틀 뒤였던가? 한남동에
있는 미스 사이데라는 이름의 미국인
아가씨의 집에는 경희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모여 <오늘의 사회혼란을 어떻게 해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물론 박종규였다. 그는 세상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그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미스
사이데의 집을 빌려 이 모임을 주재했던
것이다.
토론을 통해서 학생들이 내린 결론은
<민주당 정권과 같은 취약한 정권 가지고는
사회혼란은 더욱더 가중되기 때문에 제2의
4.19를 통해서 타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해 간
것은 물론 박종규에게 매수되어 있던 한두
학생들이었다. 어쨌거나 제2의 4.19를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자 박종규가
표면에 나섰다.
"제2의 4.19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서울시내에 있는 각 대학의 학생들을
조직화할 수밖에 없소. 조직 방법은 오늘
여기 모여 있는 학생들이 한 사람당
10명씩을 포섭하고, 그 포섭된 학생들이
다시 10명씩 포섭하면 5,000여 명이 되지
않겠소. 그만한 숫자면 4.19 기념일에
충분히 제2의 4.19를 일으키기에 족할 줄로
아오"라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학생 한 사람당 5만
원씩이 든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활동비로
쓰라고 해서였다.
이날 이후로 박종규는 미스 사이데의
집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포섭해 놓은
학생들 중에서 몇 사람을 뽑아서 특공대를
조직, 그들에게 특수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 특수훈련은 미육군의
한편, 민주당 정권의 요인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공수단이었다. 대위
차지철을 팀장으로 한 요인체포조는 매일
사복으로 갈아입고 반도호텔로 나가 건물
내부를 정찰하면서 요인체포 방법을 꾀하는
등 4.19 그날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민주당 정권은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거제 출신의 민주당 소속 민의원
의원인 윤병한이가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5월에 들어서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권에서는 4.19 일주년
기념일을 어떻게 해야 무사히 넘기느냐
하는 데 대해서만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민주당 정권으로서도 4.19 일주년을
무사히 넘기자면 각 대학의 지도적 위치에
판단을 내렸는지 각 대학의 유력학생들
매수에 온갖 정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
매수공작을 주도적으로 맡아한 것이
한국청년회였다. 4.19에서 활약한 각
대학의 리더들을 다수 포섭해 놓고 있는
단체가 한국청년회였기 때문에 후배들을
대상으로 한 매수공작은 아주 수월하게
이루어져 나갔다.
이렇듯 한국청년회의 매수공작이
주효했던 탓이었는지 4.19 그날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운명의 날이다> 하고
아침부터 출동에 대비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던 쿠데타 그룹은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찌된 노릇이야? 학생들이 들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들 쿠데타 그룹은 민중의 정서를 잘못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민중은,
"그래도 우리 손으로 뽑은 정권이
아니냐, 어디 참을성 있게 한 1,2년 두고
보자구" 하는 것이 민중, 곧 일반
국민대중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정서를 정확히 읽었더라면
4.19 일주년 기념일을 기해서 거사를
하려는 어리석은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에,
(이제 뜻밖에도 4.19가 무사히 넘어가
버렸으니 다시 또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군.)
모인 쿠데타 그룹은 다시 논의 끝에 5월
12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5.12
계획도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대령
이종태가 출근버스 안에서 쿠데타 계획을
누설함에 따라 이 계획을 취소하고 5월
16일로 수정하게 된다.
<모르는 건 본서방뿐>이라더니 장면
정권의 정보기관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쿠데타 그룹이 거사일을 몇 번씩
바꾸어가면서 계획을 추진시키고 있었으나
전혀 꼬투리조차 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운명은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가?
8. 일년 만에 3차 개각
"정,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옷을
벗겨라?"
역사를 가정해 보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지만, 이 경우 또 한 번 역사를
가정해 보고 싶은 욕망이 이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렵다.
만일 육군 참모차장 김형일이 장면에게
강력히 권고해서 박정희의 옷을 벗겼더라면
지금쯤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을까?
물론 한 사람의 장군을 예편시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박정희를 철저히 감시하라고 지령을 내리고
있었다면 나름대로 어떤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박정희의 쿠데타를
감지하고도 도리어 박정희를 감싸고
돌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제2군 사령부
방첩부대장인 이희영은 쿠데타를
방조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장면이 3차 개각을 단행한 것은 1961년
5월 3일이었다. 이 개각에 앞서 장면은
적잖이 번민을 했다.
(1년도 못 되는 사이에 세 번씩이나
개각을 해야 하다니?)
그는 절로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이미 중대한 결심을
(되든 안 되든 개각을 해서 한번 소신껏
일해 보리라.)
사실에 있어, 그가 개각을 결심하게 된
것은 3월 23일, 이른바 <청와대 4자회담>이
있은 직후였다. <정국을 수습할 능력이
없거든 차라리 정권을 내놓으라>고 한
윤보선의 말이 그를 크게 자극했었던
것이다.
(정국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장면은 불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지간한 일에는 희노애락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그의
종교적 수양의 결과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러한 장면이
정국을 수습할 능력이 없거든 차라리
때만은 진정으로 노했었다. 그의 노여움이
얼굴 표정에 나타났었다.
그의 얼굴은 취기에 어린 것처럼
달아올랐고, 심장이 뛰면서 몸을 떨었을
정도였었다. 그는 세상을 하직하는
그날까지도 윤보선이 한 말을 결코 못
잊어했다. 무책임한 발언이고 일국의
정권담당자에 대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모욕이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윤보선의 모욕적인 언사는 그가
분기할 수 있는 자극체가 되어 주었다.
(오냐. 좋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당
단독내각을 구성해서 소신껏 일하리라.)
그는 단단히 결심을 했었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보안법 개정안의
통과 강행을 포기하기로 결의한 것도, 그가
굳히는 데 자극체가 되어 주었다.
반공법은 꼭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국이 더욱 소란해지는
것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포기해 버리자!> 이런 주장이
압도적이었다.
장면은 기가 막혔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반공법은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해
본댔자 국회의원들의 동조가 없는 한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었다.
(개각을 해서 강력정치를 할 수밖에
없느니!)
장면이 강력정치를 하겠다고 해서 여론에
따라 <반독재정치>라도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집행해 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4월 30일에 장면은 민의원과 참의원의
책임자 몇 사람을 불러 정국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개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고는 그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장면이 속셈을 밝히지 않고 개각을
단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는 독선적인 행위도 일체 배제했다.
<아무리 두뇌가 명석한 사람의 판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중지를 앞지르지는
못한다>는 것이 장면의 지론이었다. 어쩌면
장면이 이런 지론을 금과옥조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신봉자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에 개각을 할 의사표시를 하자,
벌어졌다. 이때는 이미 소장파인 신풍회와
합작파인 정안회(政安會)의 당내 움직임이
확고해져 있을 때였다. 합작파란 구파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기왕에 정치적인 변절을 했으니
차제에 <정치적 이득>이라고 보자 해서
정안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총리께서 소신껏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정무차관들은 일괄해서 사표를
제출토록 하자"는 외무 정무차관 김재순의
제의에 따라 모든 정무차관들은 일괄해서
사표를 제출했다. 장면은 김재순이
고마웠다. 사표를 받아 놓으면 마음
홀가분하게 인사발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괄사표 제출 동의는 다분히 정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총리께서 마음 편히 인사발령을 할 수
있도록 협조했으니 차제에 총리께서도
신풍회 회원을 각원으로서 등용해 달라는
것이 김재순의 속셈이었다.
김재순은 신풍회 총무였다. 이철승에
이은 제2인자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철승을 입각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울러 그 자신도 장관이 되어
입각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정무차관들이 일괄해서 사표를 제출하자,
장관들도 가만히 있기가 어렵게 되었다.
"우리도 일괄사표를 내서 총리께서 마음
편히 인사발령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고 조재천이
장관마저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너무
떠들썩해지는 것이 장면은 싫었기
때문이었다.
각료인선에 있어서는 2차 개각 때 내무부
장관직에서 당 간사장으로 옮겨 앉은
이상철하고만 상의했다. 세상에서는
오위영의 입김도 다분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으나, 장면은 그 누구도 용훼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얼마만큼
뱃심좋게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인물이냐
하는 것을 제1의 조건으로 해서 각료인선에
착수했다.
3차 개각에서 장면은 내무부 장관
신현돈의 사표를 수리했다. 문교부 장관
오천석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를 불란서
대사로 임명했다.
입각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김광준(金光俊), 양병일, 이철승, 김준태,
선우종원의 입각도 틀림없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당내 인사들의 추측이었고, 이
추측이 소문이 되어 시중으로 퍼져 나갔다.
앞의 인물들이 시정인의 입에 오르고
있는데 반해 상공부 장관 주요한, 농림부
장관 박제환, 교통부 장관 박해정의
퇴임설도 유포되어 있었다.
"다른 장관은 모르겠어. 그러나 주요한
씨만은 중석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돼!"
이것은 하나의 여론이 되어 시정인의 이
입, 저 입에서 운위되고 있었다.
마침내 개각 인선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린 것을 보니 태반이 자리를
이병하(李炳夏)가 법무부 장관에,
윤택중(尹宅重)이 문교 정무차관직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박찬현(朴讚鉉)이 역시
교통 정무차관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승진한
이외에는 달리 새로운 얼굴이 없었다. 우선
유임된 얼굴들을 보면 정일형(외무),
김영선(재무), 현석호(국방),
박제환(농림), 김판술(보사),
한통숙(체신), 오위영(무임소),
김선태(무임소), 정헌주(국무원) 등
9명이었고, 자리바꿈을 한 각료는
조재천(법무에서 내무로), 주요한(상공에서
부흥으로), 태완선(부흥에서 상공으로) 등
3명이었다.
구파에서 입각을 하게 된 계기로 해서
신파로 변신했던 박해정은 교통부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내가 교통부 장관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정치자금 거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소리야? 그럼 민주당은 각
부처의 예산 중에서 얼마씩을 뜯어내어
정치자금으로 썼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박해정의 벌언 그 자체가 교통부에서
정치자금을 염출해 내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원인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박해정이 다음날엔 부랴부랴
<어제의 신문보도는 잘못된 것이고 장
총리와 당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도
없다>라고 알쏭달쏭한 해명을 하느라 애를
거출 거부 운운하는 발언이 있자, 그 즉시
박해정한테로 달려간 공보비서관 송원영이
대판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여보시오, 박 장관, 그래 총리께서 언제
당신더러 정치자금을 거출하라고 했기에
그따위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한 거요?"
송원영이 면박을 했다.
"사람의 목을 함부로 잘라도 유분수지,
그래 구파에서 나를 빼돌릴 때는 언제구
이제 와서 장관 목을 자르는 건 또 뭐요?"
박해정은 대들었다. 그의 말을 뒤집으면,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인데 무슨 소리를
못하겠느냐 그 뜻이었다.
송원영이 삿대질을 하면서 또 면박을
주었다.
"당신이 그러구두 정치인이오? 정치인은
모르시오? 당신 같은 사람이 장관직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욕설을 먹게
되었던 것이란 말이오. 당신이
민주당원으로서 남아 있고 싶거든 당장에
그 말을 취소하시오!"
결국 박해정이 이런 곡절로 해서
부랴부랴 해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3차 개각에서 합작파인 정안회는
이병하를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신풍회는 이번에도
각료인선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정무차관
기용에 있어서도 김재순이 외무에서 재무로
옮겨 앉았고 박민기(朴珉基)가 새로이 상공
정무차관으로 기용되는 데 불과했다.
김재순의 경우에 있어서도 장면이 처음부터
그를 외무 정무차관으로 기용했던 것은,
흥사단(興士團) 단원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정무차관으로 기용했던 것이다. 특히
김재순의 경우 그의 재질이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장면은 그의 앞길을
열어주고자 공.사 양면으로 마음을 써주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3차 개각에 대한 세평이야 별로
신통할 것도 이렇다할 특색도 없는
개각이라고 혹평을 했지만 장면의 결심만은
남달랐다.
(이제부터는 누가 뭐라구 하든 내 소신껏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1년 후쯤 다시
국민의 심판을 받아 보자.)
그는 이렇게 결심을 다져놓고 있었다.
장면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자 개각을
단행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장면 정권의
그것은 일본 국회의원단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한국방문이었다.
노다우찌(野田卵一)를 단장으로 한 8명의
국회의원과 일본 외무성 아시아 국장인
이제끼(伊關) 등 3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일본 국회의원 친선방문단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 5월 6일이었다. 일본
국회의원단이 친선차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해방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일
회담이 지지부진 도무지 이렇다할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일본 국회의원이
자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은 장면
정권의 위신을 높여 주는 데 대단한 역할을
했다.
일본 국회의원단의 한국방문 문제는
사실에 있어서는 새해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일본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자진해서
국회의원단의 친선방문을 요청해 왔던
것인가?
일본의 정치인들은 전통적으로 새해가
되면 원로(元老)를 찾아 세배를 하는
미풍양속이 있다.
일본의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은 8개
사단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
이께다(池田), 기시(岸), 고오노(河野) 등
파벌의 보스들이 새해 원단에 이제는
원로로서 뒷전에 앉아 있는 전 수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에게 세베를 갔다.
이 자리에서 요시다는 말했다.
"이제 원맨이었던 이승만 씨도
물러갔으니, 연내에 한.일 회담을 성취시켜
국교정상화를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한.일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문을 연
요시다는 다시,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조속히 타결하기
위해서는 외교적인 공식절충도 좋지만
그보다는 과단성 있는 정치적 절충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하고
덧붙였다.
외교적인 절충만으로는 어느 세월에
해결하겠는가,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타결하는 길도 모색해 보라는 권고였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현직 수상이라
하더라도 <원로>의 말은 따르는 미덕이
있었다. 요시다의 권고에 따라 일본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에서는 주일공사
엄요섭(嚴堯燮)에게 일본에서 국회의원들을
친선방문차 서울로 보내고 싶으니 본국
이 요청에 접한 장면 정권은 내심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일본 집권당이 자진해서 국회의원의
친선방문단을 파한하겠다고 한 것은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절실히 요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환영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야당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슨 당찮은 수작을 하고 있어?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열망하고 있는
놈들이 재일교포의 북송을 계속하고 있어!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놈들의 친선방문
따윈 백해무익한 일이야" 하며 한사코
반대하고 나섰다.
1961년이라고 하면 해방이 된 지 겨우
15년, 아직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그들은 자유당 정권 때 진행중인 한.일
회담 석상에서 일본 대표였던
구보다(久保田)란 자가,
"한국에 철도를 놔주고 전기를 끌어
주었던 게 누군가? 일본이 아니었던들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망언을 퍼부어대는가 하면, 재일교포
가운데 조총련 계통의 사람들을 북한으로
가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북송을 허용하는
등으로 한국인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해
놓고 있었다.
그런 처지였던 만큼 야당이 일본
국회의원단의 친선방문 따위가
백해무익하다고 해서 반대하고 나섰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야당이 반대하고 나서자 언론도 여기에
한국인의 대일감정을 부채질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딱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세계는 이미 국제화시대로
접어들어 있는 때가 아닌가, 어제의
원수였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등을 돌리고만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1960년대의
세계였다. 그런 처지에 대일감정을
누그러뜨릴 생각을 않고 오히려 격앙시키는
방향으로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으니,
장면의 경우 이 문제에 있어서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장면은
친일파>라고 몰아치고 있었다. 그가
일제시대에 다마오까 쯔도무(玉岡勉)라고
창씨개명을 했던 사실을 가지고 그렇게
매도하고 있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국민복을 입고 머리를 박박 깎은 장면의
사진이 포스터에 인쇄되어 나붙은 일이
있었다.
이런 못된 장난을 친 것은 이승만 덕분에
장관이라는 감투까지 얻어썼던 인물이,
이승만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장면을
부통령 후보에서 낙선시키기 위해 한
짓거리였지만 장면은 결코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가 일본경찰의 강요에 못 이겨
창씨개명을 했던 것은 천주교 재단인
동성(東星) 상업학교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면은 동성상업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경찰은 장면에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동성상업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협박을 했던 것이다.
<내 한 몸 죽으면 학교를 살릴 수 있는
창씨개명을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학교를
살렸던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장면을
친일파로 몰아친다면 그보다 더한
친일행동을 하고도 <애국자>로 둔갑해 있는
자들한테는 어떤 낙인을 찍어야만 옳을까?
그건 그렇고, 장면은 <국익(國益)을
생각해서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는 빠를수록
좋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장면은 어느 하루 신민당의
간사장인 유진산을 초치해서 그에게 간곡한
당부를 했다.
"진산, 외교에는 여.야가 있을 수 없는
게 아니겠소? 우리가 한.일 회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어디 나 자신의 무슨
이익이나 얻고자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겠소? 진산이 아시다시피 우리한테는
성취시켜 청구권문제라도 해결지으면
그것이 나라의 보탬이 될지언정 어찌
나라의 손해가 되겠소? 그러니 진산이
나서서 일본 의원단의 친선방문을 반대하는
의원들을 좀 설득해 주시오."
유진산은 머리의 회전도 빨랐고 판단력도
정확했다. 그는 장면의 당부를 진정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꼭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과제요. 그러니
누구도 일본 의원단의 친선방문을 방해하지
마시오."
그는 거의 강압적이라고 할 만큼의
권한행사로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국익을 위해서는 당리당략을
초월할 줄 아는 것이 유진산이었다. 참으로
일본 국회의원단의 한국 친선방문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61년 5월 6일에 한국 서울을 방문한
일본 국회의원 친선방문단 단장인
노다우찌는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성명을 발표해 그들의 한국방문의 목적을
밝혔다.
그들이 서울을 방문해서 한국의 실정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힌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 자신이 한국의 정정(政情)과는
관계없이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국회의원단의
친선방문과 때를 같이해서 한.일간의
예비회담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간 것이
어김없는 그 증거였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노력도 불과 열흘 뒤에
벌어진 군사 쿠데타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 줄이야 어이 예측이나 했겠는가!
결국 장면의 민주당 정권은 의욕이
넘쳐흐르는 대로 숱한 청사진만 마련해
놓고 있다가 쿠데타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어김없는 운명이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9. 쿠데타의 始末
앞에서 우리는 주마간산 격이나마 허정의
과도정권과 장면의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통해서 독제제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과연 윤보선이
중얼거렸듯이 <올 것이 왔다>고 긍정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부정하게 되었는가?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자 당시의
여론은 긍정과 부정의 양론으로 벌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차라리 쿠데타가 일어나기를 잘했어.
학생과 혁신계 놈들은 자고나면 밥먹듯이
데모로 하루를 보내고, 정치한다는 놈들은
나라꼴이 뭐가 되겠어? 한국놈은 그저
몽둥이로 다스리는 것만이 약이라니까!"
데모에 진저리를 일으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러면서 군사 쿠데타를 환영했다.
그런가 하면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라는 게 뭐야? 누구나가
자기주장을 펼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아냐?
그래서 민주주의 체제는 시끄러운 체제라는
게 아니겠어? 그리고 구국일념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거든 3.15 부정선거가
자행된 때 일으켜야지, 왜 학생들이 부정에
항거해서 2백 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희생된 뒤에야 쿠데타를 일으키는가 말야?"
이런 이유를 들어 5.16 군사 쿠데타를
부정했다.
이런 세론을 쿠데타 그룹도 귀에 담았던
자료에 따르면, 5.16 군사 쿠데타는 이른바
16명 하극상 사건이 있은 뒤 <이렇게
미온적인 태도로 정군운동을 벌여서는 안
되겠다> 해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1960년 9월 10일 충무장(忠武莊)에 모여
마침내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쿠데타 그룹은 이미 자유당
정권 말기에 쿠데타를 계획하고 거사
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었던 것으로
'한국군사혁명사'에서 조장하고 있다.
1960년 4월 19일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데모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게 되자,
정부는 급기야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었고
계엄령이 발동되자 육군본부에서는 모든
장병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그러나 장병들도 군인이기에 앞서 이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돼 나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거야 원 답답해서! 이놈의 금족령
때문에 밖에 나다닐 수는 없고 그렇게 되고
보니 정보에는 캄캄하고. 이거 미치겠군
미치겠어!"
정보에 굶주린 장교들, 특히 육군본부의
중견간부들인 중령급 장교들은 자연히
김종필의 방을 노크하게 되었다. 김종필이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과장이라 세상
돌아가는 정보는 그가 제일 많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김 중령, 무슨 귀가 번쩍해지는
정보 없어?"
그러면서 그의 동기생들인 육사
8기생들은 거의 매일 김종필의 방으로
6.25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던 8기생들은 1960년 현재
거의가 중령이었따.
중령이 전투부대에 배치되면 대대장직에
보임된다. 그러나 행정직에 보임될
경우에는 대개의 경우 과장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본부의 과장급은 거의가 8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이에 있어서는 좀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평균하면 서른네 살,
아직도 팔팔한 청년들이었다.
"아니, 과도정권이라는 게 뭐야? 혁명을
혁명답게 마무리 지으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혁명정부 아냐? 그렇다면 응당 이참에
군부의 부정선거 관련자도 가려내서 척결을
해야 옳은데, 왜 군부에 대해서는 혁명의
김종필의 방에 모이던 중령들은 역시
기가 살아 있는 팔팔한 청년들이다 보니
허정의 과도정권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생명으로 하는
특수조직체의 조직원인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도 안 되고 또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도 안 된다. 공산주의 국가의 군인과는
달리 민주국가의 군인에게 있어서는
금과옥조로 지켜야 할 철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의 방에 모이는
중령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허정의
과도정부를 비판하기도 했고 매도하기도
했다.
"이놈의 과도정권 확 뒤집어 엎어
버렸으면 속이 다 후련하겠다."
중령도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4.19 학생의거로 군기도 그만큼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김종필의 방에 모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들 중령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뉴스란 다름이 아니었다.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인 육군 소장 박정희가
육군 참모총장인 송요찬에게 편지로
<군부의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김종필의 방에 날마다 모이고 있던
중령들이 이러한 박정희와 송요찬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하여간에 이러한 정보를 듣자 중령들은
<과연 박 장군이다!>? 하고 마음으로부터의
물론 그들은 박정희라는 이름 석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박정희는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육군 안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김 과장, 이참에 우리가 발벗고
나서자구. 아무래도 과도정부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그렇다면
어째야겠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잖아?"
나서서 뭘 어쩌자는 얘기였을까?
정군운동을 펴자는 얘기였다.
이때 김종필의 방에 모이고 있던
중령들은 길재호(吉在號), 옥창호(玉昌鎬),
신윤창(申允昌), 석정선(石正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오상균(吳尙均) 등이었다.
정군운동에 나서자고 누가 먼저 발설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정군을 해야
한다, 정군을 해야 한다> 하고 염불 외듯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정군(整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여기에 대한 설명도
좀 곁들여야 할 것 같다.
4.19 혁명의 원인은 반드시 3.15
부정선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돼 있던 부정과
비리에 대한 불만이 3.15 부정선거를
게기로 해서 폭발한 것이고 보면 이참에 이
모든 사회악을 일소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
여론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군부의 고급장교들도
인식을 같이 했다. 아니 군부에서는 그러한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군부의 경우에는
철두철미하다 할 정도로 부정선거를
자행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군부의 경우라고 해서 모든
지휘관이 부정선거에 앞장섰던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같은 지휘관도 있기는
있었다.
1956년 5.16 정.부통령 선거일이
다가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박정희는
5사단장이었다. 군단으로부터 부정선거
지령이 내려왔다. 이에 박정희는
참모회의를 열어 각 참모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개중에는 <이따위 부정한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참모도 있기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참모들은 <군인이 돼 가지고 어찌 명령을
순응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모인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난
박정희는 <지금부터 선거문제에 관한 한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라고 선언을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단장으로서 군단
지령을 이행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없으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도 이런 약한 면이
있었던가 싶어 씁쓰레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당시의 군부 분위기로 봐서는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이런 부정한 지령에 따르지 말자>고
했다간 그날로 옷을 벗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부정선거 지령을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기자, 5사단 특무대장을
보고되었고 이 보고를 받은 송요찬은 직접
5사단으로 출두해서 부정선거를
독려하기가지 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었지만 박정희가 이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군부에 있어서의 부정선거의 주체는
육군특무부대(CIC)였다. 당시의
특무부대장은 육군 준장
하갑청(河甲淸)이라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그는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돌아왔다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개 같은 충성을 다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군인이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닌가. 군인은
당연히 중립을 지켜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6.25 남북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뒤로 한국군의 태반의 고위급
지휘관들은 자나깨나 출세를 해야겠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만 두 눈이 벌개져 있었다.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자와의
결탁도 서슴지 않았고 돈보따리를 싸가지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짓거리도
사양하지를 않았다. 군대 내에서
<똥장군>이라 별명이 붙여진 장군들이라는
게 모두 이런 방법으로 어깨에 별을 단
무리들이었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정.부통령 선거에
표를 긁어모을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지휘관이 이 선거를 자신의 출세와
할까?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군부의 부정선거는 참으로
치사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세상에
이렇듯 썩어 문드러진 군대가 또 있을는지
구역질이 솟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던가?
특무대에서는 먼저 각 단위부대별로 하사
이상의 하사관들에게 왜 이승만을
당선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것을 교육시키라고 지령했다.
왜 이승만을 당선시켜야 하며, 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지 않으면 안
되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려면 당연히
내세워야 한다. 그런데 특무대에서 하달한
지침을 볼 것 같으면 삶은 소대가리도 웃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정도의 구상유취한
내용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아니고는 절대로
남북통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하사관들의 정신교육을 위한
지침의 골간이었다.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의 명분으로는 <이기붕 선생만이
이승만 박사의 정치이념을 충실히 계승해서
실천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모든 하사관들이 세 살난 어린 아이들이
아닌 다음에야 특무대의 교육지침이
목구멍에서 젖비린내가 날 정도로 유치한
그러나 군대는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특수 조직사회이고
보면 <개수작 지껄이지 말라!> 하는
반발심이 인다 해도 그 반발심을
목구멍에서 삭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연 옳은 말씀이다> 하고
억지로나마 긍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그들이 처해 있는
처지였다. 가련한 인생들이었다.
하사관들에 대한 교육을 끝내고 나자,
이번에는 그들을 영내에 설치해 놓은
투표소에 배치했다. 그런데 이 투표소에는
모조리 뒤편에 구멍을 내놓고 있었다.
투표용지에 누구를 찍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었다.
그러므로 투표소에 들어간 군인들은
투표지를 들어 투표소 뒤에 숨어 있는
하사관이 그 구멍을 통해서 확인을 한
다음에야 접어서 투표함에 넣도록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60만 대군이었고 보면
야당 정치인의 자제나 친인척도 있었을
것이고 야당 입후보자의 아들이나 동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눈이
두려워서라도 그렇듯 노골적인 부정선거는
저지르기 어려울 것 같았으나, 이 무렵의
단위부대의 최고 지휘관들은 모두 심장에
철판을 깔았던 것이었는지 그냥 밀어붙였던
것이다.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장군들이라는 사람들의 자질문제였다. 어느
나라의 군대나 초창기에는 하나같이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한국군의 경우네는
창군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김일성의
도발로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장교들의
진급이 꼭 비온 뒤의 죽순처럼 천정부지로
쭉쭉 뻗어올라 갔다. 이 때문에 채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별을 단 장군이 탄생했는가
하면 30대에서 별을 세 개씩이나 단 장군도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군대의 편제상 많은
별을 달아줘야만 할 형편이었던 까닭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직위에 상응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야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장군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자격을
때문에 이 문제는 군부의 가장 큰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김종필 등 중령급 고급장교들은 이런
자격미달의 장군들은 4.19를 계기로 해서
군에서 밀어내야 한다고 침을 튕기며
설왕설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송요찬에게 <물러나라>고 한 박정희의
편지는 이들 중견장교들을 고무하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나서자, 우리가!"
그들은 마침내 정군을 위해서 그들이
나서자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군부의 부정선거가 오죽이나 노골적이고
악랄했으면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인
육군 소장 박정희는 4.19 열흘 남짓 뒤인
5월 2일 육군참모총장 육군 중장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이 자신과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하기 어려운 충언을 했겠는가.
그런데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보냈다는 이
편지건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육군 중장과 육군
소장은 비록 별 하나의 차이이지만 일개
군수기지사령관이 감히 육군의 총수에게
<자진 사퇴하라> 운운하는 편지를 보낼
수가 있느냐 하는 그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필자는 이 편지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박정희는 그의 인생
전부를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했다>라고.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5월 2일이라고 하니까 허정의 과도정부가
과도정권 수반인 허정이 경제부터
6부장관에 이어 국방, 농림, 체신 등
3부장관을 임명한 것이 바로 5월 2일
이날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허정의
과도정권이 얼마나 어수선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정권 자체가 안정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비록 <상관 모욕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그것을 크게 문제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희망적인 일면이 있기는 했다.
더구나 송요찬이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의 죄질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또 부정선거로 빚어진 혁명적
열기는 아직 식지 않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송요찬으로서는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상관
모욕죄를 들먹이며 문책하기가 어려울
박정희로서는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한
끝에 송요찬에게 <자진사퇴>를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데 문제는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생명으로 하는 군대 내에서 하극상이라 할
수 있는 상관 모욕행위를 서슴지 않았던가
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산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앞에서 이범석의 발자취를 소개하면서
5.26 정치파동에 대해서 소개한 바 있지만,
박정희는 이미 이때 이놈의 이승만 정권 확
뒤집어 엎어버리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쿠데타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계급은 대령(大領)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할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은 박정희가 처음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는 육군 대령에서 준장, 소장으로
진급이 되는 동안에도 쿠데타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언젠가 있을
쿠데타의 그날에 대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쿠데타를 합시다>
하고 동지를 규합하며 그날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우선 그 자신이 청렴결백한
장군이라는 것을 젊은 장교들 머리 속에
새겨놓도록 하는 데 힘을 썼다. 거의
전부였다고 할 것 같으면 살아 있는 예비역
장성들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올는지
모르겠지만, 한국군 장성들은 태반이 썩을
대로 썩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어느
있는 대로 소개하기로 하자.
연꽃이 유달리 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까닭은 썩은 물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장성들이 썩지 않고 무두가
청렴결백했다면 박정희가 아무리 청렴한
장군이라는 것을 내세운들 빛이 날 리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장성 사회가
썩었다고 인식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어렵게 애를 쓰지 않고도 쉬
청렴결백한 장군으로서 젊은 장교들 머리
속에 새겨질 수가 있었다.
그러면 박정희가 뭘 어떻게 했기에
청렴한 장군으로 인상지워질 수가
있었을까? 그런 방법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한 소개도 뒤로
박정희는 대령에서 소장에 진급하기까지
여러 군데로 보직을 옮겨 다녔다. 이렇게
보직을 옮겨 다닐 때마다 그곳의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된다고 보여지는 젊은 장교들
생일을 기록해 두었다가 생일 카드를
보낸다던가 크리스마스 때는 그때대로
카드를 보낸다던가 하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 아느냐?>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풍겨주어 오고
있었다.
위관급장교들이 장군으로부터 생일
카드든 성탄 축하 카드 같은 것을
받아보라. 감격하고 또 감격하리라는 것은
군말이 필요 없을 줄로 안다.
이렇게 언젠가 있을 그날에 대비해 오고
있던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바로
천재일우의 기회다!> 하고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막상 쿠데타를 일으키려 해도
그에게는 동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동지 포섭에 나서자니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 여기에서
박정희는 단시간 안에 동지를 포섭하는
방법으로서 인생 전부를 건 도박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송요찬 장군에게 자진사퇴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동지
포섭의 방법이 된단 말인가?)
이렇게 독자 제씨는 의아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군대란
군령여사을 생명으로 하는
생기게 될 경우 그것의 전파가 빠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파급효과도 기대할 수가
있었다.
박정희의 경우 그가 자진사퇴 하라고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소문은 바로 5월
2일 당일에 육군본부 구석구석에까지
소문이 퍼졌고 각급부대로 물결치듯이
흘러나갔다.
"과연 박정희 장군이다. 박 장군이
아니고야 누가 감히 그런 용기 있는 충고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장교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박정희를
극찬해 마지 않았다. 이 편지건으로 해서
박정희는 하루아침에 육군의 영웅이 되었고
모든 하급장교들의 우상이 돼 버렸던
것이다.
감행하며 노리고 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측이라고 할까?
그러나 박정희와 송요찬의 인간적인
관계로 볼 때 이런 계산이 없었다면 은혜를
입은 사람한테 그토록 야멸차게 굴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박정희의 타고난 성품이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냉정한 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송요찬에게는 적잖은
신세를 지고 있지 않았는가? 대의를 위해서
소의를 희생시켜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이
없이는 어찌 은인에게 그토록 매정할 수
있겠는가.
그야 어쨌든 김종필의 방에 모여
하기로 의기투합된 8기생들은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보낸 편지 건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장성 가운데에도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게 아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가 어떠하단 말인가?
정군운동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5월 2일 이날 김종필은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부산역에 내리자,
김종필은 택시를 타고 서면으로 직행을
했다.
이른 아침 김종필은 박정희와 단둘이
마주앉았다. 그는 먼저 편지 건에 대한
육군본부의 분위기부터 전해 주었다.
않습니다. 모두 모여앉기만 하면 각하의
편지 건을 화제로 삼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
"물론 모두가 공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기생들 중에도 처음에 정군운동에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던 친구들도 각하의 편지
건이 있자 용기를 얻어 가지고 적극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동기생들이 의견을 모은 대로
정군운동을 밀고 나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혁명을 털어놓고 혁명에 따른 공작을
벌여야 할 것인지 그 점이 매우 난감하기만
합니다."
김종필이 이런 고민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것 같으면 벌써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민정이양을 앞둔 1963년 8월 군사정부는
군사 쿠데타의 원(原)과 인(因), 그리고
군사정부의 치적을 집대성한
'한국군사혁명사'라는 방대한 부피의 책을
발간한 일이 있다. 이 책은 물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쪽에서 기록해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과대포장되어 있지만
군사 쿠데타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보면 군사 쿠데타는 4.19 의거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 부분을 여기에
인용해 보이기로 한다.
5.16 혁명의 거사 계획은 자유당 말기에
아래서 감행했던 최종 5.16 거사까지 연
4차의 게획으로 구분한다.
누구보다도 정의감이 예리한
청년군인들은 일시적이거나 또는 충동적
혹은 감정적인 폭발로 거사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영원한 장래를 설계하여 오랫동안에
걸쳐 치밀하게 혁명계획을 해왔던 것이다.
자유당 정부는 장기집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3.15 선거를 맞아 전대미문의
극악한 부정선거 책략을 자행하여 그야말로
최후 발악의 증상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960년 2월부터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뜻있는 장교들이 우리나라 초유의
군사혁명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모의는 주로 해운대, 동래온천, 불국사
전개되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하여 각종 테러,
부정 등 온갖 사회악이 거침없이 자행되자,
사태는 혁명을 위한 거사일자를 정해야 될
정도로 혁명모의는 순조롭게 성숙했던
것이다.
드디어 거사일자는 육군 참모총장이 5월
5일 도미한 뒤인 5월 8일을 그날로 정했다.
이렇게 이미 4.19 이전에 군사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었으나 4.19로 중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이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 그 점이다. 하긴
박정희는 이미 6.25 전쟁 때인 1952년에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졌을 때부터
그 자신은 <이놈의 자유당 정권 쿠데타로
확 뒤집어 엎어야겠다> 하고 생각을 품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십분 심증이 간다.
그러나 쿠데타를 계획하고 구체적으로
거사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었다면 누구하고
손을 잡고 계획을 하고 있었는지 구체적인
거명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한 사람의
관련자의 이름도 드러내 놓고 있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또 한 가지 4.19 이후
해병대에서도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하는데, 당시
상륙사단장이었던 김동하 역시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등에 크게 의분을 느껴 <쿠데타를
해야겠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해병대가 단독으로 쿠데타
만한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어찌 됐거나 박정희와 김종필 두 사람의
인간관계로 미루어 볼 때 그 두 사람은
쿠데타를 모의했음직하다는 심증은 간다.
때문에 김종필이 <편지 건>이 있은 직후
부산으로 박정희를 찾아갔을 때
<정군운동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쿠데타로 매진할 것이냐?> 양자 택일하기가
어려워 고민하고 있는 심정을 털어놨을
법도 하다.
"임자는 어찌 생각하나?"
양자택일이 어려워 고민하고 있다는데
어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다분히 우문이라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이 양자택일의 어려움을
헤아리기 위한 말이었고 보면 박정희도
그러한 김종필의 심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그의 생각부터 털어놓게 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법도 했다.
"저는 정군운동을 계속했으면 합니다."
"이유는?"
"앞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혁명적 수법으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추진시켜 나가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가
이루어진다면 굳이 비상수단을 쓸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김종필의 생각은 옳은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허정의 과도정권이야 글자 그대로
정식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를 위한
어렵지만 다음에 들어설 정권은 국민의
힘으로 탄생되는 정식 정권이니까 얼마든지
혁명적 개혁을 기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김종필의 얘기를 듣고 난 박정희는,
"임자가 그리 생각된다면 계속해서
정군운동을 펴보게나. 그러나 기대할 것은
못 된다고 보네" 하는 것이었다.
기대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차라리
쿠데타를 단행하느니만 못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도 박정희가 김종필의 생각을
부정하고 <아니, 길은 오직 하나, 쿠데타를
단행하는 것뿐일세> 하고 쿠데타로 밀고
나가자고 김종필을 설득하려 하지 않은
것은 과도정부르 뒤집어 엎는 것에 명분이
서지 않는다고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상경한 김종필은 정군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 정군운동은 물론
행정과장실에 모이던 8명의 육사 8기
동기생을 주축으로 해서 추진시켜 나가기로
했다. 그들 8명이란 석창희(石昌熙),
길재호(吉在號), 신윤창(申允昌),
옥창호(玉昌鎬), 김형욱(金炯旭),
최준명(崔俊明), 오상균(吳尙均) 등이었다.
이들은 5월 7일 청파동 김종필의 집에서
마지막 회합을 가졌다. 김종필이 작성한
건의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건의서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4.19의 정신으로 군도 정화돼야
한다.
자진사퇴의 방식을 택할 것.
셋째, 권고에 불응할 때에는 지휘계통을
통하여 종용한다.
넷째, 그래도 정군이 부진할 때에는
국방장관 밑에 정군심사위원회를 두되
의원은 각 기별(期別)로 선발된 대표로서
구성한다.
이날 김종필의 집에 모였던 8기 출신들은
김종필을 필두로 해서 모두 서명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엔 김종필의
행정과장실에 모여 함께 참모총장을 찾아가
이 정군건의서를 제출하기로 합의를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정군건의서 제출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이들 8명이
연행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8명이
참모총장실을 방문하자 참모총장 송요찬이
두 사람만 대표로 들어오라 해서 김종필과
길재호 두 사람이 대표로 들어가 송요찬을
만났는데, 정군건의서를 받아본 송요찬이
크게 노한 나머지 특무대 본부대장인
이소동(李召東)에게 명령해서 8명을 모조리
특무대로 연행했다는 설이다.
전자는 '한국군사혁명사'에 기록되어
있다. 후자는 이낙선의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고 또 김종필의 측근자들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이들 8명에 대한 조치가 전자이든
후자이든 그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요는 이들 8명의 정군운동에 대한
송요찬의 시각이 어떠했느냐가 중요할 것
물론 송요찬은 정군운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군은 군령여산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특수조직인 만큼 중령급 장교들이 정군
운운하는 것은 통수권에 대한 전면
도전이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허정 과도정부의 군에 대한
대응태세 때문이었다. 도대체가 허정은
군부에 대해서는 일체 현상유지를 원칙으로
고수하려 하고 있었다. 군부에 대해서
수술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에 들어설
신정부에서 할 일이지 과도정부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 허정의 시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송요찬도 허정의 시각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다.
송요찬으로서는 여기에 다분히 그의
가뜩이나 박정희의 <편지 건>으로 감정이
거칠어져 있던 송요찬이었다.
(중령 따위들이 어디에다 대고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냐? 이놈들 군대는
군령여산이 생명이거늘 통수권을 문란케
해도 유만부득이지 감히 정군 운운하고
나서? 이는 필시 박정희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 송요찬은 이참에 아예
중령들을 잡아들여 혼줄을 내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작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김종필을 위시한 8명은
특무대에 연행돼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길재호와 신윤창은 육군본부로 전임되어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특무대에서는
연행당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설도
있다.
정군운동 장교들이 특무대에 연행당하자
이들을 위해서 변호하고 나선 것이
참모차장인 육군 소장 김종오(金鍾五)와
김계원(金桂元)이었다. 두 사람은 8명이
연행된 뒤의 어느 날 참모회의가 끝나자,
송요찬에게 8명의 즉시 석방을 건의했다.
"지금 무슨 일이든 혁명적 수법으로
개혁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사회의
일관된 분위기인데, 그럴 때에 정군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고급 장교들을 구속해
놓고 있다는 것은 자칫 군 장교들을
자극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일파만파로 번지기 전에 그들을 석방하심이
상책일 줄로 압니다."
"여보 김차장, 군의 기강을 문란케 한
자들을 관용으로 대한다면 이놈들 통수권을
얕잡아 보고 번번히 기어오르려 들지도
모르는데 그냥 덮어놓고 석방하라니 말이
되오?" 하고 김종오의 건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개혁은 역사적인 과제로 제기된 요구가
아닙니까? 군대만이 성역일 수는 없습니다.
차제에 젊은 장교들의 주장을 수렴할 것은
수렴해야만 일파만파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온건한 성품인 김계원도 송요찬을
몰아쳤다.
"4.19가 왜 일어났습니까?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습니까? 군대도
부정선거에 한몫을 단단히 한 이상에는
책임질 일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깨끗이 책임을 지는 것이
윗사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김계원의 이 말은 송요찬의 폐부를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육군의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참모총장한테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송요찬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나보고 책임지고 물러나라 그 소리군."
송요찬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는 어떤 생각이
말했다.
"내가 물러나겠소!"
그렇다면 두 사람 중 누구라도 <당장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정도의 책임은 느끼고 있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하고 한발 물러서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김종오는
인정을 베풀려 하지를 않았다. 뭐라고
했던가?
"잘 생각하셨습니다. 총장께서
물러나시면 정군운동도 제풀에 꺾여버리고
말 줄로 압니다."
그들은 송요찬의 사퇴를 기정사실화
해버렸던 것이다.
이러니 송요찬이 마음에 없는 소리를
건성으로 해보았다 한들 어찌 그 선언을
사랑하고 아끼는 젊은 장교들이 있어 마음
든든하게 생각한다>라는 고별사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용퇴했다.
그가 참모총장직을 내놓고 예편해 버리자
연행되어 구속되어 있던 8기생 8명은
그날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송요찬의 용퇴로 정군운동은 다소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 가장 강력한 투쟁대상이
스스로 물러나 버렸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이래서 정군운동은 제풀에 꺾여 시들어
버리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정군파
장교들을 크게 자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이른바
<파머 성명사건>이라는 것이었다.
1960년 9월 18일 미 국방성
합동참모본부 의장인 최영희(崔榮喜)의
초청으로 3일 동안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최영희를
위시한 고위장성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고 하기에는 <과공도
비례>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의 대접이었다.
그가 대외군원국장이다 보니 한국에 대해서
좀더 많은 군사원조를 해달라 해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조용히
돌아갔으면 말썽이 일 리가 없었다. 그것을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융숭한 대접도
받았겠다 또 최영희한테 값비싼 골동품을
선물로도 받았겠다 하니까 제딴엔 아마
해서였겠지만 쓸데없는 말을 지껄여댔던
것이다. 뭐라고 했던가?
그는 9월 21일 떠나는 날 김포공항에서
기자들한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군은 젊은 장교들의 선동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유능한 장성들을
압력을 가해서 강제로 예비역에 편입시키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파머가 4개월 전에 있었던 정군운동을
어떻게 알고 그런 성명을 냈을까?)
파머 성명이 보도되자 누구나가 궁금하게
여겼던 점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파머는 4개월 전에 있었던
정군운동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 있었던 일들도 훤히 알고 있었던
앞에서 필자는 정군운동도 시들해 버린
듯한 느낌 운운했지만 실은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수면하에서는 정군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정군운동을
벌였던가? 여덟 명의 8기 출신자들은
특무대에서 석방되어 나오자, 이번에는
각자가 한두 사람씩의 장성을 책임지고
설득해서 자진해서 옷을 벗도록 하게
하자는 전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런 전법
밑에 중장 유재흥(劉載興)은 김종필이,
장도영(張都暎)은 김항렬(金恒烈)이,
김종오는 김종필과 석정선이,
백인엽(白仁燁)과 최영희도 김종필과
석정선이 맡아 설득을 해서 스스로
걷어부치고 나서든가 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들 5명의 장성들은 자신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강변할는지 모르지만, 이들 중
두서너 명은 소장장교들로부터 말없는
배척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었다.
이보다 앞서 송요찬이 참모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8명의 정군파 장교들은
국방부 장관 이종찬을 만나고자 떼를 지어
국방부로 찾아갔다. 참모총장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 기준에 따라
참모총장을 임명해 달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마련해 놓은
참모총장감의 기준은,
첫째, 총장은 정군을 단행할 수 있는
둘째, 총장은 파벌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셋쩨, 총장은 정군을 단행한 후 스스로
정군 대상자로서 기어이 용퇴할 뱃심이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 세 가지를 국방부 장관에게
제시하고 이 세 가지의 조건에 합당한
인물을 참모총장에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할
참이었다.
군령여산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 중간급 간부밖에 되지 않는
중령들이 참모총장감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주제넘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럴 수 있었던
것이 4.19 직후의 실상이었다. 모든
뒤바뀌고 있은 과도기였으니까 그런
주제넘는 행동도 가능했던 것이다.
8기 출신 정군파 장교들은 또다시
끌려가서 곤욕을 치룰 각오를 다져가며
국방부로 장관을 찾아갔던 것이나 행인지
불행인지 장관을 만나지 못했다.
부재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들은
장관보좌관인 준장 방희(方熙)를 찾아가
그들이 국방부 장관을 방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참모총장감 임명기준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의 협력을 요청했다.
"우리 군을 정화하는 것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방 장군께서도 좀 협력을 해
주십시오."
방희는 물론 협력해 줄 것을 다짐했다.
그런데 그가 장관에게 전달했는지 어떤지
참모총장에 최영희를 발령해 버렸다.
"최 장군의 임명만은 막아야 돼! 하필
우리가 정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최
장군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김종필은 이날
밤 석정선, 김항렬, 김형욱 등과 더불어
최영희의 사저를 찾아갔다. 때마침
육군사관학교에 근무중인 박창암(朴昌岩)이
1958, 1959년에 입학한 육사생 대표와
교관대표 6명을 거느리고 최영희의 집을
찾아오고 있던 일행과 마주쳤다.
김종필이 물었다.
"박 대령께서 웬일이십니까?"
"우리는 신임총장이 어떤 방법으로
육군을 운영할 것인지 그 운영방침을
들어보려고 찾아왔소."
대상자인 최영희가 참모총장에 임명되자,
그의 포부를 들어보기 위해서 찾아온 눈치
같았다. 이렇게 돼서 결과적으로는 이들과
한 패가 돼서 최영희를 만나는 결과가
되었다.
"웬일들이오, 제관들?"
최영희는 참모총장에 임명되기 전에
김종필 등이 찾아갔을 때와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김종필 등이 정군에 협조를 얻기 위해
찾아갔을 때의 최영희는 여간
고분고분하지가 않았었다.
"귀관들 참 용기가 대단하오. 군의
통수권을 문란시키는 행위를 했다 해서
특무대에 끌려가 그 곤욕을 치르고도
굴하지 않고 정군운동을 펴고 있는 것을
장교들이 있어 장래가 매우 마음
든든하오."
이렇게 격려까지 아끼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가 이날 밤에는 더없이 오만한
자세로 이들을 맞았던 것이다.
집주인이 웬일로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객으로서는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박창암이 대꾸했다.
"우리는 신임총장께서 어떤 방법으로
육군을 운영할 것인지 그 운영방침을
들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
그의 뒤를 김종필이 이었다.
"우리는 장군께서 총장 취임을
거부하시라 종용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날더러 총장 취임을 거부하라고?"
최영희의 얼굴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총장으로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속시원하게 까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육사생 대표들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던 만큼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육군의 사기가 말할 수 없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 떨어진 사기를
진작시키는 길은 정군을 통해서 새바람을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장군께서 총장 취임을 거부하시고 정군에
앞장서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정군에 앞장서려면 그 자신부터 옷을
벗을 결심을 해야 한다. 최영희는 당치도
않은 수작을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 같았다. 그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참모총장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 영예가
자기 앞으로 굴러들어 왔는데, 그것을
거부해? 최영희의 귀에는 천부당 만부당한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 군의 사기가 떨어지긴 왜
떨어졌다는 거요. 내가 보기엔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해 있는데?"
"우리 군을 보는 장군들의 시각과 우리
영관급들이 보는 시각이 그렇듯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장군께서는 총장 취임을 거부할 수도 없고
정군을 단행할 수도 없다 그 말씀입니까?"
그러자 최영희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봐요, 김 중령, 당신들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면 나로서는 묵과하지 않겠어!
당하기 전에 조용히 물러가 맡은 바
임무에나 충실하시오. 그것이 귀관들의
신상을 위하는 길이오. 알겠소?"
난도질 운운의 표현에 김종필 등은
불끈해졌다.
"난도질을 하겠다구요?"
"그래, 하겠어! 못할 줄 알아?"
"난도질 해보십시오, 태풍이 불어닥칠
겁니다."
"태풍이 불어닥쳐?"
"그럼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결국은 입씨름이 돼버리고 말았다. 육군
중장과 중령들과의 입씨름이었다. 중령들
입장에서 보면 중장은 하늘만큼이나 아득한
존재였다. 중령에서 중장까지는 대령,
계급이었다. 휴전이 된 지 7년, 장군들이
포화상태였던 만큼 앞으로 얼마나 근무에
충실하고 남다른 공적을 세워야 바라볼 수
있을지 마냥 아득하게만 보이는
계급이었다. 그렇듯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입씨름이었다. 그나마 자칫
잘못하면 상관 모욕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생각지 않고 이들 중령들은 최영희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난도질을 할 테면 하라!
그러면 태풍이 불어닥칠 것이다라고 극언을
하며.
이날 밤 최영희를 방문했던 김종필 등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정군운동은 실패야. 이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겠어." 8명 중의
몇 사람이 김종필의 집에 다시 모였을 때
김종필은 탄식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방법이라는 게 뭐가 있겠어?
무력을 쓸 수도 없는 일이구?"
누구였던가? 신윤창이었던가,
김형욱이었던가. 새로운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김종필은
지금껏 많이 생각해 오고 있었던 듯 아주
놀라서 기절초풍해 버릴 만한 계획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무력과 물리력을 동시에 구사해 보는
거야. 먼저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을
동원해서 최영희 장군의 총장 취임을
하는 한편 6관구 병력을 동원해서
육군본부를 점령해 버리는 거야. 그러면
정치권이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게 아냐?
그들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아서 허둥대게
되면 일은 절반쯤 성사된 거나 다름없어.
그때쯤 박정희 장군을 내세워서 정치인들과
협상을 시킨단 말일세. 중장 이상은 모조리
썩은 놈들이다. 그들을 모조리 예편시켜라.
그래야만 대한민국 국군은 건전하게 발전돼
나갈 수가 있다고 하는 거야. 어찌 생각해,
이 방법을?"
"이봐 종필이,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을
동원해서 데모를 시킨다구? 그랬다간
누구보다도 먼저 미군이 펄쩍 뛸 걸세.
대한민국 군대는 갈 데까지 갔다구 해서
사관생도를 동원해서 데모를 시키다니 말이
사관생도를 동원해서 데모를 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은
길재호였다. 아마 사관생도들이 거리에
나서서 데모를 벌인다면 세계적인
토픽감이요, '기네스 북'에 오를 만한
화제가 될 것이었다. 하긴 1년 뒤에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기어이 거리로
나서서 쿠데타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기는
벌였다. 하나, 그건 1년 뒤의 얘기고.
"6관구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겠어? 통수 계통을 밟지 않은
병력동원은 반란으로 간주될 테니 말일세?"
결국 김종필의 이 제1안은 한낱 구상으로
그쳐 버리고 말았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어떻게?"
"우리 모두가 뛰어가지고 박정희 장군을
육본 인사참모부장 자리에 앉히는 거야.
그러면 정군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이
아니겠어?"
아이디어가 그럴 듯했다. 육군의
인사문제를 한손아귀에 쥐고 있는
인사참모부장 자리에 박정희가 앉는다면
백퍼센트 정군이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80퍼센트 정도는
정군이 가능할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8기 출신 8명은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리며
정치권에 작용을 했다. 장차 들어서리라
예견되는 민주당의 고위간부들은 거의 다
찾아다녔다.
"군부에도 4.19 혁명정신을 구현해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또 무능한 장성들을
추려내지 않고는 대한민국 국군은 결코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만큼 차제에 박정희 장군을
인사참모부장으로 기용해서 정군을
단행토록 힘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젊은 장교들이 찾아와 대한민국 국군을
훌륭한 군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정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박정희를
인사참모부장에 앉혀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치 엽관운동처럼 치부하고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김도연도 OK, 박순천도 OK, 유진산도 OK,
모두가 OK였다. 그들은 젊은 장교들의
열의에 감동되어 말로만 OK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인 이종찬에게도
"거, 얘기를 들으니 박정희 장군인가
하는 분이 꽤 강직하고 인망도 있는
모양이니 그분을 기용해서 군부의
인사쇄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고
강력히 권고했던 것이다.
참모총장인 최영희의 경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정치지도자들한테 그런 권고를
받게 되자,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부산에 전화를
걸었다.
"박 장군, 박 장군을 인사참모부장으로
전임시키려고 하는데 장군의 의향은
어떻소?"
박정희의 의사부터 타진했다.
한데, 박정희는 거기에 조건을 달았다.
"인사문제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나한테
받아들일 수가 없소."
박정희가 이런 조건을 달게 되었던 것은
물론 그래야만 정군이 가능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영희의 입장으로서는
언어도단의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명령권자의 강력한 무기가 뭔데? 그건
바로 인사권이야! 그걸 송두리째
넘겨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참모총장 자리를 내달라고 할 일이지!)
최영희는 이래서 인사참모부장 기용을
미적미적 미루고 있었다.
속된 표현인지 모르겠으니 빼지도 박지도
못할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960년 6월 8일의 일이다.
4.19 뒤 처음으로 육군 주요지휘관 회의가
회의의 목적이라든가 회의에서 벌어졌던
내용은 단편적이나마 제2권에서 소개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재삼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이날 박정희는 그 자신이
한 발언으로 모든 장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 후 심지어는 그를 예편시켜
버리려는 움직임이 일부 장성들에 의해서
은밀히 추진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옷을 벗기는 방법이 없겠소?"
"없기야 왜 없겠소? 박정희라고 털어서
먼지 안 날 리가 있겠소? 하나 국방장관이
박 장군을 감싸고 돌고 있으니, 이 아니
딱한 일이오?"
그러한 그들의 책동은 국방부 장관인
이종찬에 의해서 번번히 좌절당했다.
이종찬은 장군으로서의 박정희의 자질을
박정희의 옷을 벗기는 데 실패한 반
박정희 장성들은 최영희를 움직여 그를
제1관구 사령관으로 좌천해 버렸다. 7.29
총선거가 있기 이틀 전인 7월 27일의
일이었다.
군수기지사령관직에서 제1관구
사령관직으로 전임한다는 것은 눈에 드러날
정도의 좌천이라 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자존심이 강한 만큼 좌천을 당하면 스스로
옷을 벗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너희놈들이 나를 군에서 내몰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라. 내가 물러나나?)
박정희는 이를 악물고 모욕을 감수했다.
군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곧 그의 꿈을
버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모욕을 감수하며 군에 늘어붙어
7.29 총선거를 통해서 마침내 정식
정부인 민주당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8월 19일 새 국회는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던 것이다. 대통령중심제의
정치제도가 이제 내각책임제의 정치제도로
바뀌어 항해를 위한 닻을 올렸던 것이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틀 뒤인 8월
21일 김종필은 석정선과 더불어 순화동에
있는 부통령 공관으로 장면을 찾아갔다.
장면은 이미 과도정권이 출범하기 전에
부통령직을 사퇴했으나 거처는 부통령
공관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는 것과 함께
부통령 공관이 조각의 산실이 돼버린
탓인지 공관은 글자 그대로 문전성시요,
인산인해였다.
마음에서 몰려든 무리들이겠지?"
"그렇겠지. <나야말로 남달리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민주투사가 아닌가! 이참에
논공행상으로라도 한자리 해야겠어> 하고
몰려든 무리들이겠지."
"장면 박사가 골치깨나 썩겠군. 저 많은
무리들한테 무슨 수로 감투를 다
나누어준단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장면은 동정을 받고도
남을 만했다. 그가 국무총리로 선출되자
이참에 한자리 해야겠다고 작심한 무리들이
자천 타천으로 떼지어 몰려들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가 민주당에 당적을
두고 있는 당원들이었다. 그 중에는
가산집물을 팔아가며 헌신적으로 당에
언제고 민주당 세상이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당 세상만 돼봐라! 어떤 수단방법을
써서라도 한자리 하고 말 테니! 한자리
하게 되면 밑천이야 못 빼랴.)
그런 계산 밑에 집 팔고 논 팔아
야당생활을 일관해 온 사람도 허다했던
것이다.
이날 김종필과 석정선은 장면을 만나지
못했다. 워낙 방문객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두 사람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비서들이 눈치껏 따돌린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을
응대했던 비서가 내일 사복을 입고 오면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대로 육군본부에서 아예 사복으로 갈아입고
저녁 7시 정각에 부통령 공관을 다시
방문했다. 이날 저녁 두 사람을 맞아준
사람은 어제의 그 비서가 아니었다. 뒤에
국무총리 비서실이 정식 출범할 때
총무수석비서관 발령을 받은
김명식(金明植)이었다.
"두 분께선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당원이십니까?"
김명식이 물었다.
"아닙니다. 우리들은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장교들입니다."
"그래요?"
김명식은 좀 뜻밖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기분 나쁠 정도로 훑어보았다.
"육군본부에 계신 분들이 무슨 일로?"
어제도 방문했었는데, 오늘 저녁 7시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오면 뵙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이렇게 일부러 사복으로 갈아입고
왔소."
"그래요? 누가 그랬나요?"
그러면서 김명식은 좀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보시다시피 박사님을 뵙겠다는 사람이
저렇게 많습니다. 순번대로 기다렸다
뵈오려면 새벽녘에야 가능할지 모르겠소."
김명식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웬만하면 나한테 용건을 말해 줄 수
없겠습니까? 그래 주시면 내가 박사님께
말씀드려 가지고 거기에 대한 회답을 전해
드리겠습니다만?"
"좋습니다."
"일부 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만,
우리 두 사람은 과도정권 때 정군운동을
벌여온 장교들입니다. 이번에 장 박사님이
국무총리로 선출됨으로써 신정부가
탄생하게 됐기 때문에 우리 군부의 문제에
대해서 건의를 좀 하려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에나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군부에도 문제가 있는 모양이죠?
군부문제라면 어떤 문제입니까?"
"군부문제를 여기에서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있든지
간에 그 모든 문제를 과감히 척결할 수
있는 인물을 국방장관에 기용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인물이
국방장관으로서 적격자인지 그것을
건의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흔쾌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방문 목적이 뭔지.
나한테 적임자에 대한 건의사항의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반드시 박사님께
말씀드려서 박사님의 대답을 두 분께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두 사람의 가슴이 다 후련해질
정도였다.
"그럼 선생을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정부의 국방장관은 즉시 정군을 단행할
수 있는 역량을 구비한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떠한 인물이어야 하는가?
장관은 일체의 파벌적인 색채를 일소해야
하기 때문에 과거에 군부와 인연이
없으면서도 군을 잘 이해하는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인물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해
해결되리라 봅니다."
"잘 알았습니다. 꼭 두 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도 옆에서 극력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김명식의 장담에 김종필과 석정선은 아주
유쾌한 기분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고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화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각본부에서는 쓰다 달다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비서라는 사람이 우리한테 식언을 한 게
아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만큼 실망도
컸다.
"역시 민주당 놈들도 믿을 것이 못 되는
무리들이야! 정치한다는 놈들 모조리 한
몽둥이로 빳다를 먹여야 정신을 차릴
석정선은 민주당과 정치하는 자들을
싸잡아 매도하고는,
"역시 우리들이 직접 나서서 정군운동을
펼 도리밖에 없겠어!" 하면서 지체없이
행동으로 들어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는 사이에 제2공화국의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현석호(玄錫虎)가 임명됐다.
"현석호란 어떤 인물이지?"
정군그룹들은 현석호가 어떤 인물인지를
탐색해 보았다. 한번 기대해 봐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정군그룹은 그가 참모총장을 새로
임명하도록 그에게 작용을 해보자 하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렇게 의견이 모아진
것이 1960년 9월 9일이었다. 이들은 이 한
가지의 의견수렴을 한강의 놀잇배 위에서
특무기관에 몸담고 있는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한 가지만이라도 공로를 세워
민주당 정권에 잘 보이려고 눈이 벌개져
있었다. 때문에 고급장교들이 함부로
무리지어 모이기가 어려웠다.
이날 한강의 놀잇배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오치성(吳致成), 길재호,
김형욱, 옥창호, 석정선, 김동환(金東煥),
석창희, 신윤창, 김종필, 김달훈(金達勳),
이택근(李澤根) 등 11명이었다. 이 중
이택근은 모든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다
언질만 주어놓고 참석하지를 못했다. 그는
때마침 방한한 월남국 장교단의 영접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날 밤 11시의 김종필 집에서의
회합에는 참석을 했다. 신임 국방 장관에게
놀잇배에서의 회합이 끝나자, 밤 11시
석정선과 이택근 두 사람을 자택으로
불렀던 것이다.
이날 한강 놀잇배 회합에서는 세 가지가
합의되었다.
첫째, 3성 장군 이상은 모두 예편시킬
것.
둘째, 만약에 부득이해서 3성 장군을
총장에 임명시킬 경우 나머지 3성 장군
이상을 모두 예편시키고 총장도 1960년
12월 31일까지는 정군 완료와 함께
자진사퇴할 것을 조건부로 할 것.
셋째, 총장과 차장을 2성 장군으로 보할
것 등이었다.
그들은 이날의 결의사항을 내일 곧, 9월
10일 국방부 앞에 있는 다방에 아침 10시
결의했던 것이다. 이런 결의가 있은 다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종필은 문안작성을
위해 밤 11시에 석정선과 이택근을
자택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10시 30분까지 후암동
국방부 청사 앞에 있는 2층 다방에는
11명이 모두 어김없이 모였다. 모일 사람이
모두 모이자 그들은 무리를 지어 국방부로
들어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국방장관은
부재중이었다. 그들은 아침마다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장관 비서실에서 육군본부의
고급장교들이 떼지어 몰려와 장관 면회를
요청하고 있었고 총무국장 소장
정래혁(丁來爀)도 달려왔다.
이유로 진급을 못하고 있다가 4.19 뒤에야
간신히 별을 달았던 인물이었다. 친형이
야당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진급에 제동이
걸리는 따위의 모순도 한국마의
특색이리라.
"어쩐 일이오, 귀관들?"
정래혁은 김종필 등이 정군파라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장관께 건의할 사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건의사항이란 다름이
아닙니다."
김종필은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깍듯이
차리며 찾아온 용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렇게 김종필이 찾아온 용건을 얘기하고
있을 때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장관이
현석주는 곧바로 장관실로 들어가 정군파
장교들이 찾아온 것을 알렸다.
"그렇잖아도 총리께서도 군부문제로 여간
골치를 썩히고 있는 게 아냐. 총리께서도
젊은 장교들이 4.19 직후부터 정군운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보고는 진작부터 받아서
아시구 계시거든. 그래서 군 수사기관에
은밀히 내사를 시켰었어. 그랬더니
부정축재가 가장 심한 장성은
백인엽(白仁燁), 엄홍섭(嚴鴻燮),
백남권(白南權), 세 사람인 것으로 보고가
됐더군. 그리고 부정선거 관계로는
유재흥(劉載興), 하갑청(河甲淸)을 위시한
수명이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고가
올라왔어.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의법 처단할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사람들이니
말일세.
그래서 지금 간접적으로 스스로 군에서
물러나기를 종용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
특히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부정선거는
전군이 관련돼 있는데, 왜 우리가 그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하느냐 하며
반발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조만간 조치를
할 생각이야. 그리 알고 젊은 장교들 너무
정군, 정군 하며 떠들지 말란다구 해!"
현석호의 얘기를 들은 정래혁과 현석주는
비서실로 나와서 대기하고 있는 정군파
장교들에게 장관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런 다음 정래혁은 다음과 같이
젊은 장교들을 다독거렸다.
아니겠소? 그러니 너무 조급히 굴지 말고
민주당 정권에서 어떤 방법으로 정군을
하는지 지켜보도록 합시다."
10. 위기의 장군들
젊은 장교들이 충무장에 모여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그 무렵 현석주는 친형인
현석호를 찾아가 마주앉아 있었다.
"이 사람아, 최영희 장군이 총장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바꾸라고 하는가? 총장도
임기가 있는 이상에는 임기를 채우도록
해줘야 할 게 아닌가?"
현석호가 이런 반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석주은 참모총장의 경질을 건의한
모양이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현석주는 이날 친형인
현석호를 찾아가 참모총장의 경질을
"형님이 원칙론을 고집하시는 이유를
제가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젊은
장교들을 무마하자면 우선 총장부터 바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웬지 아십니까? 젊은
장교들의 주장이 옳기 때문입니다."
"글쎄, 얘기를 들으니 젊은 장교들의
주장이 옳다고 나두 생각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어.
원칙을 무시하게 되면 모든 질서가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아. 모든 질서기 무너져
버리게 되면 어찌 되는지 알아? 정부의
위신도 권위도 서지 않게 되고 만다
그걸세."
"형님, 쿠데타가 일어나도 원칙론만
고집하고 있겠습니까?"
"뭐라고? 쿠데타?"
찔끔해지는 모양이었다.
"쿠데타라니?"
"지금 정군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령들은
6.25 때 중대장으로 활약한 사람들입니다.
형님도 아실 게 아닙니까, 6.25 때 얼마나
많은 중대장들이 희생당했는지? 그런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금의
중령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초월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은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다 그 말씀입니다."
현석주는 어떻게 해서든 현석호의 마음을
돌려놔야 되겠다고 작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현석호의 가슴이 떨릴
소리도 주저치 않고 내뱉았던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곁들였다.
대대장입니다. 병력을 거머쥐고 있는
대대장들이 몇 사람만 단결하면 쉽게
병력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단
말씀입니다."
현석호는 입맛이 쓴 모양이었다. 입맛을
쩝쩝 다셨다.
"형님, 단안을 내리십시오. 그것이
민주당 정권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군부가
혼란스러워지면 민주당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무정부 상태가 돼버리기 십상일
텐데요?"
현석호는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여 있게
되었다. 그는 동생인 현석주의 건의를
받아들이자니 원칙론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내리도록 하겠다."
현석호는 동생과 언약한 대로 참모총장
경질 문제를 총리인 장면과 협의를 했다.
정군파 장교들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참모총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이유도
곁들여.
"주무장관이 꼭 바꿔야 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총장이 된 지 고작 몇
개월밖에 안 된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겠소?"
장면도 현석호와 마찬가지로 고지식할
정도의 원칙론자였다.
"소장장교들을 진정시키자면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소장장교들이 그토록이나 거칠게 나오고
있소?"
쿠데타라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인가
봅니다."
"것참!"
군부에 대해서 전혀 백지이기는 장면도
현석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현석호는
친동생이 현역 준장으로 있으니까 그나마
군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장면의 경우에는 마냥 캄캄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장면이
지니고 있는 부통령 감투가 장애가 되어
전혀 현역 장성들과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현역 장성들이 경무대 이승만의
비위를 건드리는 결과가 돼버릴까 해서
새해의 세배조차도 기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면에게 장성지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장성지기가 없으니 군부에
아니 장면에게도 장성지기가 있기는 딱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육군 중장
이한림(李翰林)이었다. 별명이
진시황(秦始皇)인 이 함경도 사나이는
경무대가 주목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초에는 어김없이 부통령 공관을
예방, 장면에게 세배를 드렸다. 그의
친구들이,
"이 장군, 그러다 경무대 눈밖에 나면
어쩔려고 그러오?" 하고 걱정을 하면,
"국가의 간성이 나라의 어른한테 세배를
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문제삼을 대통령이라면 나는 그런 옹졸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모실 수 없으니 옷을
벗을 수밖에 더 있겠소?" 하고 대꾸했다.
이승만 치하에는 이만한 배짱을 가진
정군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도 이유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데, 장면은 어떠했느냐 하면 정초에
이한림이 찾아오면 무척 반가워하면서도
그가 신년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물러가게
했다. 행여 경무대의 눈밖에 나서 이한림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장면은 군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하기만 했는데 주무장관인
현석호가 육군 참모총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하자 내키지는 않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면이 동의를 하자
현석호는 참모차장으로 있는
최경록(崔景祿)을 최영희의 후임자로 승진
기용했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위기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면, 아마도 어떤 장애가
있었더라도 이한림을 최영희의 후임으로
기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젊은 장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상세한
보고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위기의식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일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유당의 비리를 척결하고
정국을 안정시켜 나갈 것인지 자나깨나 그
문제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무회의에 최경록의 참모총장
임명동의안이 상정되었을 때 그의 기용을
반대하는 국무위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최경록이 강직한 강군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제1관구 사령관으로 있는 박정희를
가장 중요한 막료자리인
작전참모부장(作戰參謀副長)으로
끌어올렸다. 정군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젊은 장교들의 배후인물이 박정희라고
단정짓고 있던 최경록은 박정희를 요직에
앉힘으로써 젊은 장교들을 무마하고자 하는
계산에서였다. 그런 다음 최경록은
김형일을 참모차장으로 끌어다 놓았다.
박정희와 김형일은 견원지간이라는 것을
최경록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짓궂게도
김형일을 차장으로 끌어다 놓은 속셈은
무었이었을까?
하여간에 최경록은 참모총장에 임명되자,
자기의 주변 사람으로 진용을 짜나가기
시작했다. 육군의 최고지휘부를 떠받쳐
박창록(朴昌祿)을 앉혔고 헌병감 자리에는
심흥선(沈興善)을 앉혔다. 특무대 대장과
헌병감만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일 경우
참모총장을 마음을 푹 놓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칭 <16명 하극상 사건>이 벌어진 것은
육군 수뇌의 인사이동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
국방성 군원국장인 파머가 김포공항에서
행한 이한성명에서, 내정간섭이라 볼
수밖에 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육군본부의 고급장교들이 파머성명에
얼마나 격분했었느냐 하는 것은 9월 24일
육군본부의 김동복(金東馥)의 방에 얼마나
많은 중령.대령들이 모였었느냐 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 고급장교들의 분노의 척도가
수가 있었다.
9월 24일 아침, 대령 김동복의 방에는
육군본부에 보직을 갖고 있는 중령,
대령들은 거의 다 모였다. 그러고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파머를 비난했고
최영희를 비난했다. 파머보다 더 많은
공격을 받은 것이 최영희였다. 자존심도
없이 파머의 성명을 묵인했다 해서였다.
최영희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어쨌거나 이날의 모임은 김동복이 주동이
되어 불러 모은 모임이었다.
그가 이런 집회를 주동하게 되었던 것은
김종필의 정군운동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 10일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의한 아홉 명은 그와 함께
정군운동도 계속해 나가기로 합의해 놓고
동지를 각각 포섭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동복은 정군운동 동지로
김종필에게 포섭된 인물이었지 쿠데타
동지로서 포섭된 인물은 아니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중령, 대령 등
고급장교들은 파머의 이한성명에 분개해서
김동복의 방에 모이기는 했으나,
<연합참모본부장을 찾아가 경위를
따지자>는 문제가 제기되자 여기에
대해서는 신중론과 강경론 두 갈래로
갈라졌다.
신중론자들은 <우리의 행위가 공분으로
말미암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시 군인
신분 아닌가? 우리가 집단적으로 찾아가
항의하게 되면 자칫 하극상으로 오해받을
우려가 있으니 집단행동은 삼가는 게
찾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해 김형욱은 일갈했다.
"희생 없는 정의의 실천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의의 실천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즉 희생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자들은
빠지고 싶으면 모두 빠지시오!"
김형욱이란 인물은 학벌관계로 해서 꽤
심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이력서에는 황해도
신천농업학교(信川農業學校) 졸업으로 되어
있으나 그는 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를
못했다. 왕씨 성을 가진 과부가 세운
신천농업학교는 일제시대에는 황해도
유일의 갑종 농업학교로서 꽤 우수한
중등학교로 꼽히던 학교였기 때문에 입학
경쟁률도 꽤 치열했었다. 충무장에 모였던
출신이었다.
김형욱이 머리가 나빠서 신천농업에
지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워낙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왜인들만 다니는 소학교인
아사히(旭) 고등소학교에 들어가 2년
중학과정을 마쳤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어느 군청소재지에나 거의 왜인 자제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따로 설립되어 있었고 이
소학교에 중학 2년 과정인 고등과가
병설되어 있었다. 김형욱은 바로 이
고등과를 마쳤던 것이다.
진학을 하지 못한 울분 때문이었을까?
고등과를 마친 김형욱은 축구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해소시켰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다분히 저돌적으로 변해 갔다.
<산돼지>라는 별명을 안겨 주었다. 또 육사
8기생으로 입교한 뒤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돈까스>였던 것을 보면 육사에서도 마냥
저돌적으로 행동했던 게 아닌가 보여진다.
그는 육사를 졸업, 소위로 임관되어
중령으로 진급하기가지 줄곧 일선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만 맴돌았다. 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애써 빽을
만들자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경제기획원장을 지낸 김유택(金裕澤)이
신천 출신이었고 국무총리를 지낸
백두진(白斗鎭)도 신천 출신이었다.
이 두 사람 중 백두진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빽으로 삼기 어려웠을지 몰라도
김유택의 경우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김형욱은 김유택의 집에는
몸에 밴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중령 계급장을 단
김형욱에게 <비겁한 자들은 빠지고 싶으면
빠지시오> 하고 일갈을 당했으니 계급이 한
계단 더 높은 대령급들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별 아니꼬운 자식 다 보겠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 사람 두 사람 거의 다
빠져나갔다. 남은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물론 중령급에서도 빠져나갔다.
이래서 남은 사람은 고작 19명이었다.
남을 사람은 남고 물러갈 사람은
물러가고 나자, 김종필이 앞으로 나섰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모임이 또 위에 알려지면 또 어떤 훼방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없으십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보았다.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면 떠나도록 합시다."
이때 김동복이 김종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김 중령은 남는 게 좋겠소."
김동복은 김종필더러 남으라고 했다.
"왜 남으라는 거요?"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연참으로
몰려갔다가 하극상으로 몰려 모두 구속당해
버리면 뒷수습을 해줄 사람이 없지 않소?
그런 만큼 한두 사람은 뒷수습을 위해서도
남는 게 좋아요. 우리가 모두 간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될 리고 없는 거구."
말인즉 옳았다. 이래서 김종필, 석정선,
지프에 나누어 타고 연합참모본부로
향했다. 16명의 명단은 이러했다.
대령 유승원(柳承源)
대령 김동복(金東馥)
대령 김명환(金明煥)
대령 한국찬(韓國燦)
중령 옥창호
중령 길재호
중령 정래창(丁來滄)
중령 이석제(李錫濟)
중령 장수영(張壽永)
중령 우형룡
중령 황 청(黃 淸)
중령 이종학(李宗鶴)
중령 권정룡(權正龍)
중령 황영일(黃英一)
중령 한주홍(韓周泓)
"뭐가 어째? 육본의 고급장교 놈들이
연참으로 몰려가?"
"네, 각하!"
"몇 놈이나?"
"수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한 2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부관을 통해서 육군본부의 고급장교들이
연합참모본부로 몰려갔다는 보고를 받은
참모차장 김형일은 열화같이 노했다. 그는
보고를 받는 즉시 헌병감 심흥선에게
"심 장군, 지금 육군의 영관급 놈들이
연참으로 떼지어 몰려갔다는 보고를
받았소. 심 장군은 즉히 헌병들을 동원해서
그놈들이 연참에 도착하는 즉시 모조리
헌병감실로 연행하시오."
아마도 심흥선이 무슨 죄목으로
고급장교들을 연행하느냐고 물은
모양이었다. 김형일은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지금이 몇 시요? 지금은 근무중인
시간이 아니오? 더구나 고급장교 놈들이
집단행동을 하려 들다니 용납될 수 있는
일이오? 그만하면 무슨 죄목인지 알
만하오?"
김형일은 명령을 내린 다음 수화기를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
이번에는 결단코 용서 않을 테니 그리
알어!"
김형일은 이번에야말로 기어이 박정희를
때려잡고야 말겠다고 다부지게 결심을
다지는 것이었다.
이들 16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연합참모본부로 몰려가 최영희와 어떤
얘기를 나누었느냐 하는 것은 제2권
'혼돈의 시대'에서 소상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문제는 김형일이 심흥선에게 지시해서
최영희를 찾아갔던 영관급 장교들을
연행해서 헌병감실에 구금만 시켜놓지
않았더라도 최영희를 찾아갔던 것이
<16명의 하극상 사건>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의
건의 또는 구신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영희는 육군 내에서는
덕장(德將)으로 알려져 있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부하장교를 직결처분한
장군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최영희는
<이적행위>가 아닌 한에는 부하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주의환기 이상의 벌을
내리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덕목은 육군 내에 익히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뭔가 생각이 있는
고급장교들은 거침없이 최영희를 찾아가
자기의 의견을 개진해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이날 김종필 등 영관급 장교들이
최영희를 찾아갔던 것도 통상적인 행위로
보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사건화>시켰기 때문에 건군사상 처음인
<하극상 사건>이라는 것이 육군사에
기록되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정군파 장교들을 헌병감실에 구금해 놓은
뒤, 김형일은 박정희의 옷을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먼저 참모총장인 최경록의 마음부터
흔들어 뒤집어 놓았다.
"박정희란 인간이 어떤 인간이라는 것은
총장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니오?
그런데 총장은 어쩌자고 그런 인간을
작전참모부장으로 끌어오더란 말이오?"
김형일의 힐난에 최경록은 그저 어이없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 장군의 옷을 벗겨야 합니다. 그자를
그냥 놔뒀다간 밤낮 젊은 장교들을
"장성 하나 내보낸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최경록도 마음은 답답했으리라.
"총장은 그저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구만
있으십시오. 박정희의 옷은 내가 벗겨버릴
테니!"
최경록은 <당신이 무슨 재간으로?> 하고
물어보려다가 그만 그 말을 목구멍에서
눌러버리고 말았다.
며칠 뒤, 미군 고위장성들이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미 8군
사령관이 쥐고 있는 형편이었으니 한국
정부에서도 미군 고위장성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증거도 없는 장군을 덮어놓고 예편시키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박정희가 무능한
장군으로 평가가 나 있다면 또 모르지만,
장군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우수한 장군으로
평가가 나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자 미군당국에서는 <조총련 자금
20억 원 수수혐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
조총련 자금 20억 원 수수설이란 어떤
내용인가 하면 4.19 직후 일본에 있는
조총련이 한국의 혁신셰력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보냈는데, 그 돈을 당시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인 박정희를 통해서
전달했다는 설이었다.
이 20억 원의 조총련계 자금 유입설은
민주당 소속의 오위영(吳緯泳)과
이종남(李鍾南)이 혁신계 말살을 위해
그것을 이번에는 미군당국에서 박정희
제거용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서 현석호는 도리없이 박정희를
예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지어놓았다.
박정희의 예편문제는 어디까지나
극비사항이었다. 그러한 극비사항이 어떤
경로로 해서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여간에 박정희는 조만간에 예편당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무척이나
초조해졌다.
(예편당하는 날엔 죽도 밥도 안 되잖아?)
당연한 얘기였다. 그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예편당한다면
만사휴의, 나무아미타불이 돼 버리고 말
(예편만은 막아야 한다. 예편만은!)
박정희는 예편을 저지하기 위해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신통한 수가 떠오르지를
않았다.
(이거 이러다가 끝내 당하고 마는 거
아냐?)
박정희는 그런 절망감도 일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지체없이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아니 박 장군? 박 장군이 예고도 없이
웬일이오?"
한밤중에 사령관 관사로 불쑥 나타난
박정희를 보자 장도영(張都暎)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허물없이 찾아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각하밖에 더 있습니까?"
장도영은 박정희보다도 나이가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장도영이 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갈 나이라면 박정희는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였을 만큼 차이가
났던 것이다.
장도영은 그렇듯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박정희가 각하, 각하 하며 깍듯이 예의를
차리자 그것이 못내 흐뭇한 모양이었다.
손아래 동생을 대하듯이 아주 다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왜, 무슨 일이 있었소?"
"예, 곧 예편당할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목소리는 자못 비통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왜 갑자기 박 장군을
답답하지는 않을 겁니다. 것참!"
"각하, 저는 평생을 군인으로서 조국에
봉사하기가 소원입니다. 늘 어려울 때마다
각하의 신세를 져 왔습니다만, 이번에도 또
각하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이번에도 각하께서 힘 좀 써주셔야
되겠습니다."
박정희의 얘기를 듣고 난 장도영은
참으로 딱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
자신오 지금 예편원을 내놓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장도영 그는 어째서 예편원을 내게
되었던가? 이유는 <정치장군>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장도영은 <정치장군>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간단했다.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인
이기붕의 <서대문 경무대>에 드나들면서
이기붕에게 <아버지, 아버지> 하며,
정치적으로 놀았다고 해서였다.
그런데 사실은 장도영이 이기붕에게
<아버지, 아버지> 하게 된 것은 그의
장인인 백기호(白基昊)와 이기붕은
일제시대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관서지방의 관습으로 장인의 절친한 친구는
아저씨로 호칭하기보다는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도영은 그런 관습에서
이기붕을 아버지라 호칭하게 되었던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나 이기붕 쪽에서는 친구의 사위가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것이 못내
사랑하게 되었고 정권의 제2인자가
장도영을 아들같이 사랑하는 것을 본
국방부 장관들이 알아서 기었다. 이기붕은
별을 달아주어도 장도영에게 먼저
달아주었고 보직을 주어도 노른자위 자리만
골라가며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런 장관의 꼴불견이 젊은 장교들의
눈에 곱게 비춰지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 장교들이나
박정희나 <중장급 이상은 모두 자진해서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장도영
같은 인물들이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김종필 등에 의한 정군운동이 벌어지자,
(이것은 나를 겨냥해서 벌이는
정군운동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너 나가라
해서 밀려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장도영은 이렇게 생각하고 예편원을 냈던
것이다.
그런데 장도영이란 사나이는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왜냐하면 새로
민주당 정권의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현석호가 장인 백기호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으므로, 그는 장인한테
매달렸던 것이다.
"지금 제가 과거에 이기붕 의장하고
가깝게 지냈다고 해서 여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일로 해서
아무래도 옷을 벗게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됩니다. 다행히 새로 국방장관이 되신
분이 장인어른의 친구분이시니
장인어른께서 수고스럽겠지만 한번만 좀
나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애원을
딸이 예쁘면 사위도 예쁜 법이다. 더구나
별을 세 개씩이나 달고 있는 자랑스러운
사위가 아니냐. 사위를 위해서라면 별
하나인들 더 달아주기 위해서 뛰지
못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한 백기호는 현석호가
장관으로 취임한 며칠 뒤 축하 겸해서
현석호의 집으로 찾아갔다.
백기호는 친구의 장관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나서 운을 뗐다.
"기왕에 찾아온 김에 자네한테 한가지
부탁이 있네."
"부탁이라니?"
"내게 사위가 하나 있네. 장군일세."
"장군? 그래? 자네한테 그런 사위가
있었나?"
백기호를 비꼬아 주기 위해서였다.
장도영이 백기호의 사위라는 사실만 모르고
있었을 뿐, 백기호가 군인을 사위로
삼았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그래, 그 장군사위를 잘 좀 봐달라
그건가?"
"그러이!"
"이 사람아, 장군이라면서? 이제 별을
달아야 할 사람 같으면 모르겠네만 이미
별을 달고 있는 사람인데 부탁은 무슨
부탁?"
"그게 그런 게 아닐세!"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사위가 과거에 이기붕 의장하고
친했던 게 아니겠나? 그것 때문에 아마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궁지에
옷만 벗지 않도록 해달라 그걸세."
"흐흥, 정치장군으로 몰려 있는
모양이군. 정치장군으로 몰려 있다면
구제받기가 어렵겠는걸. 정군운동을 펴고
있는 젊은 장교들이 용서치 않을 테니
말일세."
그러자 백기호는 바싹 매달렸다.
"이 사람아, 그러니까 부탁하는 게
아니겠나?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어떻게
해서든 내 사위를 자네가 좀 살려
줘야겠네. 그러면 그 고마움 평생 잊지
않겠네."
"글쎄 그게 가능하겠는지 알아보겠네.
이름이나 알아두세. 이름이 뭔가?"
"장도영이라고 하네."
"장도영?"
장씨일세. 자네가 뒤를 봐주기만 하면
총리하고 같은 인동 장씨겠다, 민주당
정권에 충성이야 다 하지 않겠나?"
"계급이 뭔가?"
"별이 세 개야. 중장일세."
별이 세 개라고 할 때 백기호는
장군사위를 두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운지 <별 세 개>에 힘을 주어
말하며 빙긋 미소까지 짓는 것이었다.
다음날 국방부 청사로 출근한 현석호는
동생인 현석주를 장관실로 불러들였다.
"장도영 중장을 아느냐?"
질문을 받은 현석주는 형의 질문의 뜻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형님, 그거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사람됨이 어떤지?"
"그 사람 정치장군입니다."
현석주는 무를 자르듯이 한마디로
명쾌하게 대꾸했다.
"그럼 젊은 장교들한테 배척을 받고
있겠구나?"
"물론입니다. 정군대상 제1홉니다. 젊은
장교들이 정군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도
장도영 같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장도영은 그의 장인이 현석호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의 아내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에 이르기까지
가타부타 그 어떤 소식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심 여간 초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편이냐 하면> 하고 그가 처해져 있는
상황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도 허락치 않았거니와 지금 자기한테
빌붙으려는 사람한테 스타일을 구기게 될
얘기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 장군의 난처해진 입장 잘 알았소.
염려 마시오. 내 가능한 힘은 다 쓰도록
하겠소!"
큰소리를 쳤다.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저으기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돌아갈
때는 아주 밝은 표정이 돼 가지고
돌아갔다.
헌병감실로 연행되었던 16명은 일단
조사가 마무리되자 전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속된 채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아니었다. 근무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11월 9일,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결의한 9명과 정군운동 동지로
포섭되었다가 새로이 쿠데타 동지로
재포섭된 유승원, 이석제를 포함한 11명이
신당동 박정희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9명의 충무장 결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11명은 삼삼오오
개별적으로 박정희와 접촉한 일은 있었으나
11명이 한 자리에 모여 박정희와
대면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지금 어느 정도로 조직이 진척되어
있나?"
박정희가 김종필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조직은 아직 그렇게 진척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동지들을
검토해서 동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응, 잘하는 일일세. 이런 일은 서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신중을 기해야겠지. 그래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조직을 구성해 나갈
생각인가?"
"동지를 A, B, C 세 가지로 구분해서
포섭하고 있습니다. A급은 핵심 멤버, 이
자리에 있는 11명이 바로 핵심입니다.
B급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을 포섭하는 적극 동조자,
C급은 어느 면에선 소극적으로 보이는
동조자. 이렇게 3등급으로 나누어서
포섭공작을 벌이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김종필이 말을 마치자 꽤
그의 표정도 이때만은 풀어져 있었다.
"오 중령!"
박정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쑥
오치성을 불렀다.
"혁명을 할려면 병력이 필요해! 그런데
핵심간부는 모두가 육본 근무자가 아닌가.
이래가지곤 안 돼. 그러니 오 중령 힘으로
전투부대로 배치할 수 있는 동지는
전투부대로 배치해 주면 고맙겠네."
"알겠습니다. 지체없이 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오치성은 흔쾌히 지령을 수령했다.
"각하!"
김종필은 박정희를 불러 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전군적인 지지가
분으로는 미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리고 박정희의 반응을 살폈다.
"응, 옳은 말이야. 나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지금 어떤 장성을 포섭할
것인지 예의 검토중에 있어. 그러니 장성
포섭문제는 나한테 맡겨두게."
영관급이 장성을 상대로 쿠데타를
하자면서 동지를 포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도리없이
박정희에게 맡겨놓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해두세. 동지들 수고에 보답하는 뜻에서
내가 한잔 사겠어. 우리들의 결속을 다지는
겸해서. 모두 <남강>으로 가세."
박정희가 먼저 일어섰다.
있는 왜식집이었다.
이날의 남강 회합에는 아찔한 한 순간이
있었다. 그 아찔한 순간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막 자리를 뜬
직후(이날 이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밑에서 망을 보고
있던 박종규가 급히 2층으로 달려올라
왔다.
"이거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회합하는 비밀이 누설된 것 같습니다" 하고
얼굴이 하아얗게 질려서 급고하는
것이었다.
김종필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의 회합의
비밀이 누설되다니? 뭘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대령하고 몇 사람이 2층으로......."
"이희영 대령이?"
이힁여이란 이름 석자가 박종규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가 무섭게 모두의 얼굴이
하아얗게 질려버렸다.
이희영이란 이름 석자가
김창룡(金昌龍)만큼 악명이 높아서
<이희영> 하면 모두가 가슴이 콩알만
해지도록 가슴을 졸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희영은 평양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뒤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공산당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월남해 육사에 들어가
5기 출신자가 되었다. 육사 재학시절의
인연관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범평안도
출신이라는 지역적 관계로 해서 인맥상
장도영계에 속해 있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장도영이었고 장도영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자 서울 506특무대장으로 끌어준
것도 바로 장도영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맥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쿠데타
모의자들은 이희영이란 이름 석자만 듣고도
가슴을 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희영이란 인물은 성질이 그렇게
모질지가 못했다. 어느 대목에선가도
소개했지만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가장 먼저 심증을 굳혔던 것은 당시 2군
특무대장이었던 그였다.
그는 박정희가 당시 영천에 있던
육군정보학교 교장인 한웅진을 만나러 갈
때 동행을 했었고 또 박정희에 관련된
고구마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오히려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와 특무대 본부대장인
차라리 옷을 벗길지언정 그를 감시하는
따위의 치졸한 행동은 집어치우라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런 과거지사를 놓고 볼 것 같으면
이희영은 어떤 면에서는 박정희를 비호했다
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직무를
유기했다 할 수도 있었다.
이희영이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까아맣게
모르고 있던 쿠데타 그룹으로서는 <이희영
출현> 급보에 가슴이 콩알만해질 법도 한
일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는 문 밖에
온갖 신경을 집중시켰다. 곧 수사관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아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기도 했다.
있었는지 모른다. 30분쯤 같기도 하고 한
시간쯤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한 5분쯤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었다. 곧 옆방이 떠들썩해졌다.
간드러진 마담의 웃음소리가 귀청을
간지럽혔다.
마담의 아양섞인 간드러진 웃음소리로 볼
때 이희영 일행은 옆방으로 안내된
모양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모두의 표정이 조금 의아해졌다.
"저 친구들 한잔 하러 온 게 아냐?"
김종필이 좌중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모두 마음이 조금 놓이는
모양이었다.
이날 밤 506 특무대장 이희영은 박정희를
박정희의 집에 모였다가 다같이 외부로
나갔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이 <남강>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희영은 박정희 일행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특무대의
감시대상자들뿐이었다.
(뭐가 있다!)
이희영은 그렇게 직감을 했다. 그래서
한잔 한다는 인상을 풍기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남강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희영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자
마담은 벌써 눈치를 채고 그들을 김종필
등이 자리잡은 옆방으로 안내했다. 마담은
특무대의 끄나풀은 아니었지만 반공정신이
투철해 506을 위해서 자진해서 헌신적으로
협조를 해주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협조를 아끼지 애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곱상하게 생긴 이희영은 도무지 특무대
대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꼭 정훈장교로나 알맞을 듯한 인상을
풍겨주는 사나이였다. 그만큼 그는 선이
가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육군 소위적부터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육사 5기
출신인 그는 소위에 임관되자 부산 SIS로
배속을 받았다. SIS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의 CIC의 전신이었다. 해방
직후 좌익세력이 가장 극심하게 판을 치고
있던 고장이 부산이었다. 그렇듯 강성한
좌익세력을 뿌리채 뽑아버린 것이 바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였다. 익히 잘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의 결집체였다.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서 월남해 온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공정신이
남달리 투철했었다는 것은 새삼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는 일일 줄로 안다.
"부산의 빨갱이 새끼들을 깡그리
쓸어버리자!"
아마도 서북청년회에서 대거 부산으로
몰려가 빨갱이 소탕작전에 나섰던 것이
1947년에 들어서면서 아니었던가
기억되는데, 이때문에 부산만이 아니라
경상도 지방의 양민들은 이북 사투리만
들어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이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필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공책을 륙색에
가득 담아 김해, 진영 등지의 시골을 돌며
이때는 필자는 월남한 지 일천했던 탓도
있고 해서 황해도 사투리가 아주 심할
때였다. 이 사투리 덕분에 필자는 단 한
권의 공책도 팔지 못했던 쓰라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김해, 진영지방 사람들은
필자의 황해도 사투리를 듣자 질겁을
해가지고 대문을 닫아거는 것이었다. 뭐라
말을 부칠 여유도 주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도 무슨 사나운 짐승이라도 만난
듯이 기겁을 해 집으로 달려가 대문을
닫아걸 정도였다.
필자는 처음에 왜 그들이 그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권의 공책도 팔지
못하고 부산으로 돌아와 부산 출신
친구한테 수모를 당한 얘기를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이북 사투리 공포증>의 유래를
서북청년회의 빨갱이 소탕작전이 얼마나
치열하고도 무자비성을 띠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이북 사람들에 대한 부산이나 경상도
지방 사람들의 시각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희영은 부산 사람들한테 인기가
높았다. 그에게 딸을 주지 못해 안달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것은 그가
특무대라는 권력기관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그의 인간성이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희영의 사람됨을 얘기하다 보니 얘기가
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얘기를
다시 줄기로 돌린다.
쿠데타 그룹이 자리잡은 옆방으로 안내를
받은 이희영이 <남강>에 거동한 것은
위해 거동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506 책임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랬으나 이희영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는 쿠데타 구룹으로서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
좀더 구체적인 논의를 해보자는 당초의
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박정희가 다녀간 뒤로 장도영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만일 예편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의 군인생활이 끝장나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박정희에게 어떻게 얼굴을 세우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이었다.
참모총장인 최경록의 목소리가 장도영의
고막을 울리는 순간,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예편원이 받아들여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전화상의 수인사가 끝나자 최경록은,
"장 장군, 당신의 예편원은 반려되었소"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도영의 심장은 딱
고동을 멈추었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 총장, 지금 뭐라 말씀하셨소?"
"전화가 잘 안 들립니까? 장 장군의
예편원은 기각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래요?"
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경록은
도리어 그를 위로했다.
"조국이 좀더 장 장군에게 봉사를
요구하니 어쩌겠소? 조국의 명령에
순응해야지, 안 그렇소?"
"예, 옳은 말씀입니다."
장도영은 그렇게 간단하게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인께서 무척 애를 쓰셨겠군.)
그의 망막에는 사위를 위해서 애쓰는
장인 백기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는 정말이지 처신에 조심을
해야겠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내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다음엔
박정희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게 아닌가?
그는 다시 또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장도영이 박정희의 부탁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박정희 문제만 깨끗이 해결해 주면 젊은
장교들의 지탄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다.)
그는 이런 계산을 해놓고 있었다. 그도
역시 정군운동파의 배후인물은 박정희라
생각하며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박정희를 구제해 주면 자연 젊은
장교들은 자기를 겨냥하고 있던 화살을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장 박정희 구제에 나서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방법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칫 서투른 방법을
썼다가는,
<장도영 저 작자 젊은 장교놈들 환심을
비웃음을 살 우려도 없지 않았다. 선뜻
발벗고 나서지 못했던 것은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장도영은
당당히 정권의 신임을 획득한 것이다.
명예회복(?)을 한 며칠 뒤 그는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전화를 걸어 운을 뗐다.
"최 총장, 부탁이 있는데 내 부탁 한
가지 들어줄 수 없겠소?"
상대방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반응 여하에 따라 부탁을 하든가 신통치
않으면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릴
속셈에서였다.
"부탁이라니요? 허허, 이거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장 장군이 나한테 부탁을
할 때가 다 있으니?"
장도영은 속으로 <됐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장도영은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기가
미안스럽다는 느낌이 가득한 목소리로,
"최 장군, 전화로 부탁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양해부터 구했다.
"최 장군, 박정희 장군을 나한테
주십시오."
단숨에 말해 버렸다.
"박 장군을요?"
최경록의 목소리에는 뜻밖이라는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우리 부사령관이 논산훈련소 소장으로
전출돼 가지 않았소? 그러니 대신 박
장군을 달라 그거요."
최경록은 무척 거북스러워하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곤란하다니요, 어째서요?"
"얘기하기가 좀 거북스럽지만 박 장군은
예편시키기로 내정이 돼 있기 때문이오."
역시 박정희는 예편이 확정적인 게
틀림없었다.
"거 왜 자꾸 내보낼 생각만 하는 거요?
그러다간 어디 장성의 씨가 남아나겠소?"
장도영은 짐짓, 안쓰럽다는 듯이 투정을
했다.
"어쩌겠소. 박 장군은 트러블 메이커로
소문이 나 있는 데다가 미군 장성들이
기피인물로 점찍어 놓고 있으니?"
"최 총장, 미군 장성들이 걸림돌이라면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그 사람들 내가
장도영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글쎄요, 어려운 부탁이군요?"
최경록은 그 부탁만은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장도영은 좀 다급해졌다.
"최 총장, 박정희 장군에 대한 모든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어요. 매그루더
사령관의 사인이 필요하다면 사인도
받아드릴 테니 박 장군을 꼭 나한테 주도록
해주십시오!"
최경록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장도영이 미군 고위장성들과는 절친한
사이이고 보면 그가 나서기만 하면 그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여졌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거니와 최경록은 박정희의
능력을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었기
육군의 손실이라 보고 있기도 했었다.
마침내 최경록은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장 장군이 미군 고위장성들이 말썽만
부리지 않도록 조치한다면 고려해 보도록
하겠소."
"고려는 무슨 고려를 한다고 그러시오?
가능한 한 하루라도 속히 명령을 내려주면
고맙겠소!"
장도영이 최경록에게 그런 부탁을 한
뒤에도 그는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육군본부에 들러 최경록에게 재삼재사
부탁하곤 했었다. 그 보람이 있어
박정희에게 <제2군 부사령관을 명함>이라는
육군본부 인사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이
1960년 11월 10일의 일이므로, 쿠데타를
최초의 회합을 가진 다음날이었다.
이날 육군본부에서 인사명령을 수령한
것은 박정희만이 아니었다. 육군본부에
근무중이던 신윤창은 제6군단 포병대로,
정문순은 육군대학으로 각기 전보명령이
떨어졌었다. 동지포섭과 병력 확보를
위해서 부관감실의 오치성이 마침내
인사문제를 통해 포석을 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쿠데타를 위한 시동이
걸린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잠시 역사의 진전을 한번
가정해 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으나 한번 심심풀이로
가정을 해보는 것이다.
장도영의 부탁을 받은 최경록이 그
부탁을 물리치고 박정희를 예편시켜
가능했을까? 역사란 이래서 재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거 어떻게 된 노릇이야?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 아냐?"
참모차장 김형일에게 있어서는 박정희가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 발령되게 됐다는
것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난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예편시키기로 결정을 지어놓고 있던 사람이
새로운 보직을 받았으니 어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최경록한테로 달려갔다.
"최 총장,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오? 이 따위 인사법도 있었소, 우리
육본에?"
찡그리며,
"그리 됐소"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리 되다니요? 뭐가 어떻게 해서 그리
됐다는 거요?"
아무래도 김형일은 내막을 알아내고야 말
모양이었다.
"김 차장, 박 장군 문제는 김 차장이
양보하시오. 박 장군으로서는 그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니겠소?"
"이 세상에 인생이 걸려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김형일은 이렇게 일침을 놓고 덧붙였다.
"총장이 이런 중대한 인사문제를 혼자
처리하다니, 나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요?"
분을 참기가 어려워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김형일은 뱃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모조리 토해내고야 총장실을 물러나왔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오자 특무대
본부대장인 박창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무대에선 박정희를 계속 감시하고
있는 거요, 않는 거요?"
"이미 예편시키기로 결정되었다고 해서
감시하고 있던 것을 해제했습니다만?"
"당신은 박정희가 새로운 보직을
받았다는 것도 모르오? 즉시 감시를
계속시키되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나한테 서면보고 하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김형일의 명령을 받은 박창록은 직접
대구 제2군 특무대 대장인 대령
같은 지령을 내렸다.
"이 대령, 박정희 장군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위로부터 받았소. 그런 만큼 박
장군을 철저히 감시하되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나한테 박 장군의 동정을 서면보고
하도록 하시오!"
박창록은 박정희의 근무처인 제2군
특무대의 대장한테만 지령을 내렸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 506 특무대장인 중령
이남주(李南柱)한테도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위로부터 박정희 장군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귀관은 박정희의 주변인물은 물론 그
가족들의 동태까지도 감시해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라."
지령을 내렸다.
박창록의 지령을 수령하고 506으로
돌아온 이남주는 즉시 정보과장 대위
김응서(金應瑞)를 불러들여 박창록이 한
말을 앵무새 외듯 똑같은 지령을 내렸다.
대장의 명령을 수령한 김응서는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한 끝에 중사 이종극(李鍾極)과
하사 이종오(李鍾五) 두 사람을
정보과장실로 불렀다.
"귀관들 두 사람한테 특명을 내리겠다.
귀관들이 할일이 무엇이냐 하면......."
김응서는 특명의 내용을 알려주고
잠복근무의 방법론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틀 뒤 신당동 박정희의 집 대문에서 좀
떨어진 길목에 난데없는 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했다. 박정희의 집 동태를 충분히
처음에 육영수는 이 군고구마 장수의
등장을 그리 눈여겨 보지 않았다. 계절이
군고구마 장수가 등장할 철이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군고구마 장수로
나선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군고구마 장수들이
장사가 잘 되는지, 어쩐지 눈여겨 봐도
도무지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데다가 육영수가 그들을
살펴볼 때마다 그들의 시선은 자기 집 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게 아냐?)
육영수의 가슴에 부쩍 의심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 육영수는 남편이
무슨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수들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살펴봐도 그들은 고구마를 굽고
있지도 않았고 구울 재료를 갖추어 놓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육영수는 그런 확신이 서자 군고구마
장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 다음 필름이 인화가
되자 그 사진을 편지와 함께 남편에게
우송했다.
아내가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온
사진을 본 박정희는 기가 막혔다. 처음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계획이 탄로난 게 아냐?)
가슴이 섬뜩했던 것이나 계획이
있을 리가 없었다.
계획이 탄로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박정희는 헌병감실의 헌병감
심흥선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심 장군,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는
이유가 뭐요?"
다짜고짜로 따졌다.
심흥선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수습해서 반문했다.
"각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각하의 집을 감시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누군 누구겠소, 심 장군이겠지! 좌우간
내 부관을 올려보낼 테니 반드시 장군이
나서서 이 사건을 규명해 주어야겠소!"
이낙선(李洛善)을 불렀다.
"이 사진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심
장군을 만나게."
그를 서울로 보냈다.
다음날 아침 서울역에 내린 이낙선은
택시를 타고 곧바로 헌병감실로 직행,
심흥선을 만났다.
이낙선이 내놓은 사진을 살펴본 심흥선은
어이가 없었다. 그로서는 전혀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기를
무슨 범죄자 취급을 하고 호통까지 친
박정희에게 분노가 일기도 했다. 그는 즉시
제 3CID 대장인 중령 이종원(李鍾元)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관은 지금 즉시 헌병들을 대동하고
신당동 박정희 장군 댁으로 출동하라! 거기
놈이 있을 테니 그놈들을 즉시 CID로
연행해서 그들의 신원과 박 장군 댁 감시
목적을 캐내라!"
명령을 받은 이종원은 즉시 헌병을
동원해서 신당동 박정희의 집으로
출동했다. 과연 군고구마 장수 두 놈이
있었다. 이종원은 불문곡직, 두 놈을
체포해서 CID로 연행했다.
"너희놈들 뭣하는 놈들이야? 바른 대로
불지 않으면 여기에서 살아 나가지는 못할
줄 알아라!"
이종원의 호통 한마디에 두 군고구마
장수는 그들이 506의 수사요원임을 밝혔고
명령에 따라 박정희의 집을 감시하느라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 무슨 이유로 박 장군 집을
감시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감시를
하려거든 상대가 모르게 감시를 해야지,
상대에게 감시자를 노출시켜 가지고 무슨
감시가 된단 말이오?"
"감시자가 상대에게 노출됐다구요?"
박창록은 날벼락을 맞은 듯이 놀랐다.
그렇다고 박정희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궁색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한 자가 있다는 시민의 제보로
잠복근무를 시켜놓고 있었는데 박 장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그게 아니었다고 심
장군이 대신 변명 좀 해주시오.
이런 말로 얼렁뚱땅 넘겼다.
군고구마 장수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일단락 지어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박창록이
감시의 손길을 누그러뜨렸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동태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전출시켰다는 것은 울 속에 갇혀 있던
호랑이를 들로 놓아주었다는 얘기나
진배없었다.
부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사령관
유고시에나 요긴한 직책이 돼줄까,
사령관이 버티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그런
박정희는 대구로 내려오는 즉시로 장성
포섭에 나섰다. 그가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이고 포섭하느라 애쓴 장성이 영천에
있는 육군정보학교 교장인 준장
한웅진(韓雄震)이었다. 그 다음이 육군본부
교육처장인 장경순(張坰淳)이었다. 이 두
사람은 쉽게 포섭할 수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박정희에게 쉽게
포섭당했다는 것은 그들도 평소에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웅진과 장경순을 포섭한 것이
대구로 내려간 직후인 11월 중순이었다.
한웅진과 장경순을 포섭한 박정희는
한웅진을 특무대 본부대장에, 그리고
장경순은 제9사단 사단장으로 임명할
공작을 벌였다. 이 공작은 민주당 정권의
시국정화운동본부(時局湞化運動本部)의
원병환(元秉煥), 김영주(金永柱) 등을
이용해 벌였다.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자 군사정부의
어용기관으로 만들었던
재건국민운동본부(再建國民運動本部)는 이
시국정화운동본부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한 장군을 CIC 대장에
임명되도록 해야 할 텐데.)
박정희는 한웅진을 특무대 대장으로
박아놓는 문제에 있어서는 젖먹던 힘까지도
다 발휘했다. 그래야 박창록의 장난질도
막을 수 있고, 정권으로 들어가는 정보도
차단해 버릴 수가 있겠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을려
보이는 것이 없기 마련이었다. 박정희가
접촉한 시국정화운동본부의 원병환이니
김영주니 하는 자들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정치 브로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해서 운동을 했으니
성사될 리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박정희는
이번에는 유진산(柳珍山),
이철승(李哲承)과 가까운 사람들을
내세웠으나 역시 여의치가 않았다.
한편 박정희를 예편시키려다가 실패한
참모차장 김형일은 <16명 하극상 사건>의
군법회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배후인물이 박정희라고 자백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북한 괴뢰가 계속해서 호시탐탐
남침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 이상에는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괴에
이기기 위해서 정군운동에 발벗고 나선
것이지 타의는 없습니다."
군법회의 석상에서 모두가 한결같이
일관된 진술을 했기 때문에 박정희를
때려잡을 수 있는 꼬투리는 잡을 수가
없었다.
이 16명 항명사건의 군법회의를 지켜보며
김형일은 머리를 쥐어짜냈다. 정군운동을
하나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과도기에 있어서 군대마저 흔들려
가지고야 어떻게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젊은 장교들의 주장을 수렴할
것은 수렴해서 시정을 하자!)
정치권에까지 작용해서 장성들을 심사하기
위한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육군의 전 장성을
심사대상으로 정하고, CIC에 명해서 모든
장성들에 대한 신상기록 카드를
제출시켰다. 기록상에 미진한 점이 있으면
다시 특무대에 지시해서 관련 장성에
대해서 재조사를 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새해인 1961년 1월 12일까지
무능하거나 부정부패한 장군 153명을
추려냈다. 이들 153명을 5월까지
점진적으로 예편시켜 나갈 계획이었다.
이 153명의 장성 중에는 물론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었고 5월에 예편시키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뭐라구? 나도 153명 속에 포함되어
"예."
153명의 예편자 명단에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박정희에게 귀띔해
준 사람은 부관감실의 오치성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하여간에 153명의 예편자 명단에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박정희는 아찔한 모양이었다. 그랬을
것이었다. 참모차장을 장으로 한
장성심사위원회의 결정사항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153명 속에
포함돼 있는 인물은 정권담당자인 장면도
함부로 어찌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5월의 어느 날에 예편 명령이 날는지
모르겠지만, 예편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쿠데타를 단행할 수밖에!)
작심했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 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김종필과 석정선 두 사람한테
예편 명령이 떨어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년 공부가 모두 물거품이
돼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박정희가 지난 10년간
쿠데타를 꿈꾸어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지나지 않았고, 이제 쿠데타를
구체적으로 추진시켜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김종필이 있음으로서 현실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 행정과장실에서
정군운동을 일으킨 것도 김종필이었고, 이
정군운동에 불을 당겨 쿠데타로 방향을
전환시켜 놓은 것도 김종필이었기
때문이다. 김종필이 아니었던들 우리의
현대사 30년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으리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운위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박정희는 김종필과 석정선이
예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로 지프를
몰아 서울로 달려 올라갔다.
그는 신당동 집에 닿는 즉시 김종필을
집으로 불렀다.
"도대체 어찌된 노릇인가? 뭐가
어찌됐기에 예편을 당했단 말인가?"
김종필은 예편을 당했다고 하면서도 그리
서운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미 그쯤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착
가라앉은 특유의 목소리로 예편당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세칭 16명 항명사건에 대한 예심조사관은
육군본부 법무감실 검찰과장인 대령
장영순(張榮淳)이었고, 그의 보좌관은 소령
소종팔(蘇宗八)이었다. 11월 8일부터
시작된 예심조사는 꼭 10일간 계속되었다.
11월 18일에 예심조사가 끝나자 전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제1회 중앙고등 군법회의가 육군본부에서
열린 것은 11월 25일이었다. 12월 13일까지
모두 9회에 걸쳐 공판이 열렸다. 그 결과
김동복에게만 유죄판결을 내렸고 15명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들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경우 군내의
고위당국이 정책적인 판결을 내리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혼자 유죄판결을 받은 김동복은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보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새해 1월
30일, 재심탄원서를 관계요로에 제출했다.
탄원서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첫째, 주동인물은 김종필, 석정선 두
중령인데 자기가 주동자 인양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유죄형을 받았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둘째, 연합참모본부로 최영희를 방문하기
전인 23일과 24일 양차에 걸쳐 전기 두
중령의 주동으로 모의집회가 있었다.
셋째, 김종필, 석정선 두 중령의
검찰은 일체 조사도 하지 않았고 편파적인
조사를 했다.
이러한 내용의 탄원서가 제출되자 군
수사기관에서는 재조사에 착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조사가 시작되면서
김종필과 석정선은 제 3CID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끝에 구속되었다.
그런데 막상 두 사람을 구속해 놓자
육군본부 안이 와글와글 들끓기 시작했다.
김종필의 정군운동 동지들과 쿠데타 동지들
중에서,
"나도 모의에 가담했으니 나도
구속하라!"고 동지애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확대될 조짐이 보이기
그들은 사건이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다.
김종필, 석정선 두 사람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유죄판결을 내릴 경우 일파만파로
문제가 확대돼 나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에서 제의된 것이
타협안이었다. 이 타협안을 제시한 이는
김종필과 석정선의 변호인단이라는 설도
있고 참모총장 최경록 설도 있다.
타협안이란 어떤 내용이었던가? 사건을
불문에 붙이는 조건으로 김종필과 석정선을
예편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흥정이었다.
김종필과 석정선은 이 흥정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 모두 8기의
엘리트들이었다. 육군의 꼴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불관언 하고, 맡은 일이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만큼 아쉬운
마음이야 어찌 없었으련만 기왕에 엎질러진
물, 두 사람은 육군의 고위당국자가 제시한
흥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1961년 2월 8일부로 예편되는
동시에 제 3CID에서 석방되었다.
김종필의 얘기를 듣고 난 박정희는
걱정이 태산 같은 모양이었다.
"이제 임자가 예편을 당해 버렸으니
혁명이고 뭐고 다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군" 하는 것이었다.
"물거품이 돼버리다니요?"
"임자가 있어야 동지 포섭이 가능한데
임자가 예편을 해버렸으니 무슨 수로
동지를 포섭한단 말인가?"
박정희는 장래가 창창한 김종필이
규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엔 실망이 역력했다.
"각하, 오히려 저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잘되다니?"
"이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게
됐으니 동으로 서로 자유스럽게 다니며
동지를 규합할 수 있게 됐으니 말입니다."
"현역에서 떠났는데 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있을까?"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각하! 실병
지휘관들은 제가 책임지고 포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만 준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나? 임자만 믿고 있겠네."
"그러십시오, 각하!"
있는 것보다는 예편당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리며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종필은 그가 장담한 것처럼 예편당한
그 다음날부터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었다. 물론 그가 동분서주하며
접촉한 인물들은 8기 출신들이었다. 그들
중 오치성을 위시한 손꼽을 정도의 몇
사람이 1961년 새해들어 대령으로 진급을
했고 아직은 모두 중령으로
대대장들이었다. 얼마나 조건이 좋았는가.
5.16 군사 쿠데타는 어찌보면 김종필을
예편시킴으로써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기초를 다질 수가 있었다 할 수 있다.
그가 그냥 현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렇듯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
역시 운명적으로 그리 됐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운명!
11. 민주당 정권의 패망 원인은?
민주당 정권을 이끌었던 장면이 타게한
것은 1966년 6월 4일이었다. 이 해 1월
27일, 간장염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한 지
5개월 만에 그는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향년 67세였다.
그가 운명하기 직전에 이 세상에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뭘 잘못했어?"라는 이
한마디였다고 한다.
차후에 자세히 소개하게 되겠지만 그는
소위 <이주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었다.
필자는 이 '격동 30년'을 쓰기 위해 숱한
세월을 두고 취재를 했지만 과연 민주당
정권이 쿠데타를 당해야 할 원인을 그
어디에서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만일 사회적 혼란이 쿠데타의 구실이
된다면 그 뒤의 사회상은 어떠했던가. 소위
유신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정치적 혼란,
이른바 <80년의 서울의 봄> 때의 혼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출현으로 장기간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혼란 등과 대비해
볼 것 같으면 민주당 정권 때의 혼란이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중령들의 위국충정을 전적으로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를
지닐 때가 소령, 중령계급 때인 것이다.
중령에서 대령으로만 진급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별을 달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기
때문에 이때에는 벌써 중령 때까지 지녔던
불덩어리 같은 애국심은 사라지고
피어오르는 것은 사욕뿐인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는 이들 젊은 중령들의
우국충정과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집념이
맞아떨어졌던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단군 이래 최초의
민주정부였던 장면 정권은 쿠데타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였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쿠데타에 의해
타살을 당한 이래 대한민국에는 30년
세월을 두고 질곡의 심연에서 자신을
제2권에서 <콜론 보고서>라는 것을
소개한 바 있지만,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에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처방은
전혀 제시하지를 않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신장>에 대해서만 그들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이 땅에는 미군 진주와 함께
미국의 각종 정보기관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세워진 뒤에도 계속
남아서 정보활동에 종사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정보기관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의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졌을 때
육군본부 작전 교육국장이었던 대령
박정희가 정치소요를 기화로 쿠데타를
것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
같은 것이었을까?
이때, 박정희가 정치소요를 기화로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기도하고 있었다는
정보만 입수했던들 군부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박정희는
5.26 정치파동이 벌어지게 되자 호기도래라
하고 쿠데타 계획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이,
"군부는 엄연히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일갈하는 바람에 박정희는 그의 계획을
포기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정보를 입수치 못했기에 미국은
한국군을 끝까지 신뢰하고 있었고 이승만의
노망적 권력남용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으면서도 <이놈의 노인을......> 하며
술수는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4.19 학생의거가 터졌다. 이
의거로 해서 이승만이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나고야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진전을 바라보고 있던 미국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내면서,
<역시 한민족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있는 민족이다. 한국을 보라! 한국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다> 하며 거듭
자랑하기를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는데, 아아 그랬는데, 한국의
교과서적 민주주의는 싹을 틔운 지 불과
1년도 못 돼서 들고 일어난 그놈의
쿠데타에 싹둑 싹이 잘리우고 말았다.
그러니 한국민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
것이며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자랑하던 미국의 체면은 무엇이
되었겠는가? 그들의 코는 여지없이
납작해졌고 한국민도 어쩔 수 없는
후진적인 민족이었다고 개탄하면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상초(申相楚)라는 정치평론가가
있었다. 지금의 40대 후반 이상의 독자들
가운데에는 <아아, 그 사람> 하고 그의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줄로 안다. 자유당 정권 때,
동아일보(東亞日報) 논설위원으로서
이승만의 비정을 후려갈기던 그의 붓대는,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부수가 나날이 늘어나게 된
것도 그의 붓대 놀림 덕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물론 그는 아직도 생존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있었다>라는
과거형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가 세상이
바뀌자 종횡무진으로 휘둘러대던 붓대를
내던지고 현실정치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정치 속으로 뛰어들어갔던 것은
민주당 말기 때였다. 서울 마포(痲浦)
보궐선거에 민주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
선량으로 뽑히면서 그의 정치생활은
시작됐던 것이다. 하나 그의 정치생활은
길지 못했다.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었다. 그는
타의에 의해서 화려한 꿈을 안고
했었다. 그렇다고 그가 영영 정치생활에
막을 내렸던 것은 아니다. 10여 년 남짓
공백생활을 거친 뒤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직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정치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유정회란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허수하비 정치그룹. 그래서 세상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은 정치그룹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철두철미한 자유
민주주의자로 치부하고 있었는데, 그가
유정회 국회의원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세월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악목지음불가잠식(惡木之陰不可暫息)하는
고고한 지조가 그리 용이한 일이겠는가.
하여간에 그건 훨씬 나중 일이고
신상초의 입과 붓대가 아직도 파릇파릇
쿠데타가 벌어진 지 2개월 만인 1961년 7월
21일. 사상계(思想界)라는 월간 잡지사가
마련한 <기성(旣成) 정치인의 솔직한
발언을 듣기 위한 좌담회> 석상에서 그는
제2공화국(第二共和國) 패망의 원인에
대해서 좀 색다른 해석을 내렸다.
이 자리에는 신상초를 위시해서
야당이었던 신민당(新民黨) 소속
민의원(民議員)을 지낸 박준규(朴俊圭)와
민주당 소속 참의원(參議員)을 지낸
엄민영(嚴敏永), 그리고 무소속 민의원을
지낸 서태원(徐泰源) 등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 좌담회의 사회는 사상계
주간이었던 양호민(梁好民)이 맡아 했다.
이 자리에서 양호민의,
"5.16 군사 쿠데타의 가장 직접적인
질문에 대해 신상초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5.16 혁명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이냐 하면, 민주당 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주당 정권을 넘어뜨린 것은
3신(三新)입니다. 첫째가 신문이요, 둘째는
신민당, 셋째가 신풍회(新風會)입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신문, 신민당,
신풍회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신풍회는 민주당 소속 위원들로 구성돼
있던 서클이었다.
신상초는 이렇게 전제한 다음, 거기에
대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나는 5.16 혁명 이후, 열흘 동안만
신문을 보고서 그 후부터는 신문 한 장도
모든 신문이 덮어 놓고 정부가 잘못한다고
했었는데, 5.16 혁명 후에는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덮어놓고 잘한다더구만.
허허.......
약자에게 횡포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것은
신문도(新聞道)가 아닌 것이니 우리나라
신문은 모두 저널리즘 이전이라고 볼 수
있지요. 민주주의적인 아량이나 공정한
비판정신에 입각해서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존엄성을 이해했었다면 그따위 짓을 안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신문의 수난기라고
하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본다면 그 정도의
수난은 당연한 것이오. 엄중하고도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당은 4.19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신.구파가 단결했더라면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인데, 감투분배
때문에 두 조각이 났으니 일이 잘될 까닭이
없습니다. 또, 왜 신풍회란
당중당(黨中黨)을 만들어 정국 불안에
부채질을 해왔었나 말입니다.
그래서 5.16 혁명의 의욕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군인들이 거사를 안했더라도 장
정권은 자멸할 가능성이 컸던 것입니다.
소위 3신이 생겨서 날뛴 원인은 자유가
너무 컸고 자유에 책임이 따른다는 원칙을
모르고 방종으로 흘렀기 때문입니다."
거듭 되풀이 언급하게 되지만 신상초는
군사 쿠데타의 대상이 됐던 집권당인
민주당에 몸담고 있던 인물이다. 과연 그의
진단은 옳은 것일까? 민주당 정권,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군인들이 거사를
안했더라도 장 정권은 자멸할 가능성이
컸던 것일까?
신상초의 진단 중에 딱 한 가지는 공감이
간다. 그것은 그가 첫째로 꼽은 신문에
대해서다. 4.19에서 5.16에 이르기까지의
신문의 무정견(無定見), 무절제(無節制)는
가히 메스꺼울 정도로 꼴불견이었다.
칭찬할 만한 일은 당연히 칭찬해야 옳았다.
격려를 할 만한 일에는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옳았다.
그런데 신문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정부가 하는 일은, 또 하고자 하는 일에
바꾸어 말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았다는 얘기다. 신문이 이 모양이니
여론이라는 것이 맹목적으로 여기에 동조할
수밖에. <무관의 제왕>, <제4부>라고 해서
신문이 노는 꼴이란 꼭 미친년 널뛰기
식이었다.
그러던 신문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하루아침에
태도가 표변해 버렸다. 어떻게 표변해
버렸던가?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어떤 소장 언론인이 모 연구지(硏究誌)에
게재한 <신문의 반성>이란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기로 한다.
우리는 5.16 직후에 참으로 기이한
신문의 현상을 보았다. 장면 전 정부 때는
연일 신문에서 얻어맞던
국토건설(國土建設) 계획이 일단 5.16
군사혁명이 발생한 후로는 그렇게
엉망이라던 이 사업을 눈부신 진척을
올리고 있다고 도하(都下), 각 신문에
똑같은 지면을 채웠다.
전국적인 규모의 대사업이 다른 여건은
하나도 변함이 없는 채 단지 정부 권력의
교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성과가
하루아침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이
돌변하였다는 것은 5.16 전후에 무슨 큰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무제한의 언론 자유를 누리던 5.16 전의
신문보도가 사실이었다면, 5.16 후의
신문보도는 거짓이거나 또는 정부 권력에
될 것이고, 5.16 전의 보도가 거짓이거나
과장이었다면 이는 신문이 5.16 전에
언론의 자유를 남용하였거나 무책임한
선동적인 과장보도를 일삼았다는
이야기밖에 안 될 것이다.
장 정권 시대의 신문이 얼마나 타락해
있었으면 언론인 자신이 신문에 대해서
이렇게 따끔한 일침을 놓았겠는가.
기존 언론의 횡포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판국인데 여기에 한몫 끼어들어
언론을 더욱더 타락시킨 것이 사이비
언론인들이다. 허정 과도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단군 이래의 자유>를
구가하게 되자, 웬놈의 언론인들이 그리도
많이 속출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익사업도 아니었는데 너도 나도 언론의
간판을 들고 나왔다. 사무실 한 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
수 있었고 실업자 세네 명만 긁어 모으면
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될 소리, 안 될 소리를
지껄여댔다. 그런 소리를 지껄임으로써
어떤 반대급부가 있을까 해서였다.
오죽하면 국무총리 장면의 입이었던
송원영이,
"자유라는 게 신문사, 통신사 간판을
마음대로 내거는 것이란 말인가?" 하고
한숨을 내쉬었겠는가.
제2공화국 시절의 언론의 실상은 바로
이러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도무지
분간하지를 못했다. 언론은 덮어놓고
신상초가 지적한 대로 언론은 군사
쿠데타에 대한 한 가닥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그렇기는 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열 명의 사람이 도둑 하나 막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전적인 책임은
훔치려는 자 자신한테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까?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들은 그 누구의 목숨도 앗을 수
있는 총칼을 지니고 있었다.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 앞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그 하나였다.
3신(신민당.신문.신풍회)이 장면 정권을
망치는 원인이었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된다. 아직도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정치형태는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은 9개월 동안 집권하는 사이에
많은 일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서
실시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집권자인
장면은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정치행위는 일체 배제했다.
장면의 의지가 그러하니 그를 보좌하는
각료들도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정치행위는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근한 예가 국방부 장관 현석호의
국방행정의 통어방침이었다. 그는
군정(軍政)은 스스로 장악했지만
군령(軍令)은 일체 참모총장
권한사항이라는 이유로 일체 관여하려 들지
모르지만 말이다.
<교과서적 민주주의>라는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했던 장면의 자세는 너무나 훌륭했다.
이제 장면 정권이 이룩해 놓은 몇 가지의
시책 가운데서 그 한두 가지를 예로 들어
장면 정권의 공적으로 기려보기로 한다.
군사 쿠데타 정권에서는 그들의 쿠데타에
대의명분을 주기 위해 <장면 정권은 무능
부패했었다>고 한마디로 후려갈겼다. 그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해 놓은 데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언급이 없을
올리는 것조차 터부시했다.
그 군사 쿠데타 정권은 <박정희
정권>으로 발전해서 18년간 집권하는
사이에 장면 정권의 업적은 역사의 피안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장면
정권이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조차 되새겨
보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저 장면 정권은
<무능 부패>했던 것으로만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 버리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역사는 결코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가 어떤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다음에는 역사는 분명히 진실이 밝혀져야
마땅하다. 그런 취지에서 민주당 정권이
이룩해 놓은 업적을 역사의 피안에서
파내어 소개해 두는 것도 결코 뜻이
장면 정권이 그 운명을 걸고 시작했던
것이 <국토건설사업>이었다.
"정부란 무엇인가? 정부란 우선 국민이
단 한 사람이라도 굶주리는 사람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며,
한국의 정부가 지녀야 할 최대의 책무다."
이것은 장면이 정권을 잡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그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있어 이 나라의
실업자는 완전실업자에 잠재실업자를
합치면 그 수가 무려 3백 6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3천만 인구의 1할 이상이 일자리를 얻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 인구의
노동력이 가능한 인구의 면에서 볼 때에는
3할 가까운 노동 인구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가난한 나라 한국에는 계절적인
빈궁이 있었다.
보릿고개!
바로 이것이었다. 유식한 사람들은
이것을 춘궁기(春窮期)라 불렀다. 이
보릿고개는 5천년 역사를 두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었다.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몇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는지 그
정확한 숫자조차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1960년대까지의 실상이었다.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
민주당 정권이 이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 정권의 운명을 걸고 달라붙는 것은
た纛릿?
경찰서에서 죽인 거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장면이 아직 정권을 잡기 전의 일이다.
정책심의회 의장인 주요한과 마주 앉았을
때 장면이 물었다.
"세상에 무슨 슬픔, 무슨 슬픔 해도
배고픈 슬픔만큼 큰 것이 없다고 하던데,
만일 우리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했을 때
끼니를 굶는 것만이라도 해결하는 무슨
방법이 없겠소?"
"글쎄요......."
주요한은 당장에 뭐라고 대답하지를
못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연구에 몰두했다. 각국의 경제건설
성공사례 같은 것도 참고하며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실업자 구제책을 연구해
보았다. 문제는 도시의 노동실업자만을
구제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했다. 여기에서 생각해낸 것이
<국토건설사업>이다.
이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었다.
혁명적 사업이라 하기에 족한 사업이었다.
산림녹화(山林綠化)를 위한 조림사업과
사방(砂防)공사, 농업 발전을 도모키 위한
한발(旱魃) 대책으로서의
수리시설(水利施設) 공사, 홍수를 방지하기
위한 하천개수(河川改修) 공사와
발전소(發電所) 건설, 교통 및 산업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도로공사.
역사에 있어 그 누가 이런 종합적인
국토건설사업을 폈던가? 이 모든
토목공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헐벗은
강산을 기름지우고 핏기 잃은 백성들에게
요긴한 사업이 되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역사적인 사업에 장면 정권의
운명을 건 것도 결코 이유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군사 쿠데타 정권도 이
위대했던 <국토건설사업>을 무능 부패한
사업으로 몰아치기는 어려웠던지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2호로써, <현재
전국적으로 추진중인 국토건설사업은
민족적 과업이며 어떤 권력이나 정치력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는 계속
과감히 추진하기 위한 세목(細目)을
공포하기까지 했었다.
무슨 일이고 할려면 돈이 있어야만 했다.
더구나 <국토건설사업>과 같은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하자면 여기에 필요한 큰 돈이
"어디서 재원(財源)을 염출해야 하나?"
정부도 재원이 있어야만 돈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조폐공사에서 마구 돈을
찍어내어 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궁리 저 궁리 해봐야 황폐화돼 있는
국토에서 재원을 발견하기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1961년도
제1회 추가경정예산(追加更正豫算)에 약
2백 79억 환을 계산하여 충당하기로 했다.
또한 미공법(美公法) 제480호 제2항에
의해 증여받은 원조물자인 1천만 달러(1백
30억 환)에 달하는 농산물을 여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국토건설사업>
제1차는 4백억 환의 자금을 투입하기로 한
셈이었다.
이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해 나가자면 우선
정부에서는 건설요원을 공모,
여학사(女學士) 21명을 포함한 학사(學士)
및 행정대학원 졸업생 등 도합 2,066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했다.
"젊은이들이여, 우리 모두 새나라 건설의
역군이 되어 국토건설사업에 이바지하자!"
당시 학사학위 소지자라면 고급두뇌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국토건설 요원이 되겠다고 지원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마음가짐인가.
정부도 젊은이도 혼연일체가 되어
국토건설사업에 의욕을 발휘했다.
이들 국토건설 요원들에 대해서는
단기간의 훈련이 실시되었다. 학사학위
소지자인 고급두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
하면 <열> 할 정도로 이해가 빨랐다.
있는데 느릿느릿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1961년 2월 27일 오후 2시에 중앙청
광장에서 연합 종강식(終講式)을 거행했다.
그것은 곧 국토건설의 진군을 의미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국토건설사업은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3월 1일은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던 유서 깊은 날, 42년 뒤인
1961년 3월 1일에는 독립만세 운동에
대신해서 국토건설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던 것이다.
전국 각 군(郡)에 국토건설 요원들 15명
내지 17명씩 분할해서 배치했다. 이들
요원들의 근무일수는 45일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45일간 열심히 일하고 나면 정부의
4급 내지 5급 공무워으로 배치할
등용하자면 그만한 수의 공무원을 감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감원 대상자는 실력
없이 빽으로 채용된 자, 비리 행위를
저지른 자 등을 제거하면 충분했다.
그런 구상을 미리부터 세워놓고 있었기에
장면은 각의 석상에서,
"우리 민주당이 집권을 하고 나자 우리
당원들 가운데에는 이 기회에 먹고 살 길을
마련하고자 해서 각원 여러분한테 청을
들이는 당원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나,
가능하면 그러한 당원들도 일단은 국토건설
요원으로 근무케 한 다음 공무원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하며, 가능하면 인사묻네에서 정실을
배제하고 모든 젊은이들이 한층 더
국토건설사업에 의욕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속담에 <4촌이 기와집을 지으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박수를 치며
격려를 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를
하며 비방하려 드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속성이다. 처음 장면 정권이, <국토건설
요원은 45일간 근무케 한 다음, 국가
공무원으로 등용하겠다>고 공표하자,
언론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배아픈 소리를 터뜨렸다. <거짓말하지
말아. 그 많은 요원을 배치할 자리가
어디에 있다고 그런 거짓말을 늘어
놓느냐?> 하면서 비방했다.
또 국토건설 요워을 교육시키는 현장을
취재한 어느 언론에서는 <국토건설을 위한
기초적인 기술강습은 별로 없고, 민주당의
있었다>고 비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언론은 <장면 정권은 신성한
국토건설사업을 빙자해서 집권 연장만을
꿈꾸고 있다>고 실로 어처구니없는 비방을
해대기도 했다.
국토건설사업 가운데서 큼직한 것을
소개하면 (1) 섬진강(蟾津江) 댐 공사, (2)
청평(淸平) 댐 확장공사, (3) 춘천(春川)
댐 공사, (4) 진양(晉陽)의 남강(南江) 댐
공사, (5) 77개소의 수리 사업공사, (6)
2,794개소의 소류지(小溜地) 공사, 이 밖에
조림사업, 토지 사방사업, 해안(海岸)
사방사업 등에 투입될 연인원 1천 9백만
그 밖에 35억 환을 계상한 도로공사, 29억
환의 노임으로 연인원 5백만 명을 동원할
도시 토목사업 등 국토건설사업의 청사진은
마냥 가슴 뿌듯하기만 했다.
이 국토건설사업을 펼치는 것을 계기로
해서 <병역기피자>를 구제해 주자는 안도
실시되었다.
병역기피자(兵役忌避者).
이 병역기피자는 말할 것도 없이
비국민(非國民)이었다. 국민된 자의
3대의무의 하나인 <병역>을 기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6.25 동란의 참극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떤 자는 호적의
자는 해외로 도망치기도 했고, 또 어떤
자는 지하로 숨어 버리기도 했다. 그랬으니
그들은 평생을 두고 밝은 햇빛을 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때의 그릇된 생각으로 일생을
그늘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은 병력이 남아 돌아가는
형편이라 감군을 해야 할 형편까지 됐으니
아예 이참에 병역을 기피한 자들에게도
밝은 햇빛을 쏘이게 해주자."
그래서 그들 병역기피자들은 일정기간
국토건설사업에 노력동원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각계 각층으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특히 병역기피 당사자는,
"평생을 그늘에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정부의 대용단으로
하면서 감루를 흘리기도 했다.
한데, 정부에서 아무리 국민민복을 위한
좋을 계획을 세워놓아도 그것을 국민적으로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일의 성과란
기대하기가 어렵다.
정부에서는 2월중에 추가경정예산안을
내놓고 3월부터 사업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아니 당장에 예산을 투입하지 않아도 될
사업은 계획대로 3월에 작업에 들어갔다.
그랬는데 예산안의 국회통과가 늦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쟁(政爭)
때문이었다.
예산심의권을 쥐고 있는 국회가 하찮은
일을 가지고 이리 물고 늘어지는가 하면
저리 물고 늘어지는 통에 예산안의 통과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면이
다른 문제를 다루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당신네들은 바쁠지 모르지만 우린
바쁠 것이 없다고 추경예산안의 통과를
질질 끌었다. 야당은 이런 국가적인 사업도
정쟁에 이용하려고만 들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3월이면 벌써 농촌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농민이 있다며 절량농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2월중에 추경예산안만
통과됐더라도 사업을 벌일 수 있으니 절량
농가 구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예산안 통과가 늦어졌으니 3월에
들어서면서 벌써 절량 농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또 언론이 정부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절량농가 구호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정부 공격만을
일삼았다.
신문도 하나의 장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문이 팔려야만
종사자들한테 월급을 줄 수가 있다.
그러자니 팔리는 신문을 만들어야만
했다. 팔리는 신문이란 자극적이어야만
했다. 정부가 하는 일을 찬양 고무하는
신문은 팔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덮어놓고 독자의 비위나 맞추는 신문을
만들고자 애를 썼다. 신문이 신문답지
못하고 언론인이 언론인답지 못한
사이비(似而非) 언론의 한 시절이었다.
국토건설사업에 있어서 두번쩨의 장애
요인은 <국회의원들의 장난>이었다.
배정해 놓고 있었다. 여기에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끼어들었던가?
소류지 사업에 있어 A군에서는 다섯 개를
하기로 했고 B군에서는 세 개를 하기로
도에서 배정을 했다고 하자. 그때 B군 출신
민의원 의원은 노기 등등해져 도지사를
찾아간다.
"이보시오, 시사양반. 당신 무슨
생각에서 A군에는 다섯 개나 되는 소류지를
만들도록 하면서 B군에는 고작 세 개밖에
소류지를 만들지 않는 거요?" 하고 항의를
한다. 그러면 도지사는,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형적
조건과 농토의 수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A군에는 꼭 다섯 개가 필요한데 반해
내용을 설명한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요. B군의
소류지도 A군과 똑같이 다섯 개로 하든가
아니면 A군을 세 개로 하고 B군 것을 다섯
개로 늘리도록 하시오" 하고 압력을
넣는다.
이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압력이었따.
국회의원들이 이런 부당한 압력을 서슴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인기>라는 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공사를
하게 되면 노임의 살포 액수도 많아지게
된다. 현지 선거구민들이 달가워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지역 출신 OOO의원, 알고보니
대단한 거물이었어. 거 보라구, A군은
소류지를 세 개밖에 만들지 않는데, 우리
아니겠나?"
이런 소문이 나돌게 되면 그 국회의원은
다음에도 <당선>은 어김없기 마련이었다.
또 국토건설사업을 이권화하는 이점도
있었다.
그것을 이권화하자면 머리를 써야만
했다. 장비도원이나 그 밖의 또 다른
용역사업이 부수적으로 따르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한밑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세번째의 장애요인은 양곡도입의
지연이었다. 미공법 제480호 제2항의
규정에 의해 도입되는 잉여농산물이 적기에
들어왔다면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차질을 빚는 일만이라도 방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경우가 흔했다. 이 때문에 절량 농가
구호도 할 겸 농번기를 피해서 사업을
추진코자 세워 놓았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되니 이것
또한 야당과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민주당 정권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
놓고는 실천은 하지 않는다.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탁상공론의 국토건설사업은
즉시 집어치워라."
매사가 이꼴이었다.
장면 정권은 이 모든 비난에 대비해서 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그저 묵묵히
일을 추진해 나가기만 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여건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던 탓이지 결코 장면
정권의 무위무능 부패가 원인은 아니었다.
<국토건설사업>을 군사정권 제1의 치적으로
내세우며 추진했던 것이 그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전기 3사(電氣三社) 통합 결사반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그날까지
조선전업(朝鮮電業), 경성전기(京城電氣),
남선전기(南鮮電氣)의 3개 회사의
사주(社主)나 종업원들은 전기 3사의
통합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 전기 3사의 관계자들은 어째서
이렇듯 통합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통합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늘어가는 전력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6.25
동란으로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이의
복구가 시급한 일이었으나 그에 앞서
서둘러야 하는 것이 전력수요의
충족이었다. 전기가 풍부하게 공급돼야만
공장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각 전기회사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처지에 각 전기회사들은
적자경영으로 죽을 지경이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장면 정권은 초기에 있어서는 전기회사의
민영화 문제를 검토했었다.
<요금을 올리고 이것을 민영화하면
해서였다.
그러나 전기요금을 올린다는 것은 다른
물가에 자극을 주어 인플레 요인만 될
뿐이었다. 여기에서 정부는 차라리 전기
3사를 통합해서 운영하게 되면 불필요한
인건비와 경영상의 경영비를 절감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전기를 생산하고
있던 기업체가 조선전업이었다.
조선전업에서 생산한 전기를 경성전기와
남선전기 두 군데에 공급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개의 전기회사는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회사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세워서 운영하던 이른바
귀속재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3개사의
때문에 국영기업체(國營企業體)로서
경영되고 있었다.
주인(主人)이 없는 기업체.
비단 앞의 전기 3사뿐만 아니라
국영기업체에는 주인이 없었다. 엄연한
주인은 국가였으나, 그것을 위촉받아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주인의식(主人意識)>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경영이 주먹구구식이었고 나눠
먹기식이었다.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흔한 예로, 국영기업체가 민영으로
전환될 경우, 적자경영에 허덕이던
기업체가 1년도 못 되는 사이에
흑자경영으로 모습을 바꾸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탈바꿈시키자면 전기 3사를 통합해서
불필요한 인건비와 경영상의 불필요한
지출을 억제하는 길밖에 없겠습니다."
상공부 장관인 주요한이 전기 3사의
통합을 각의에 내놓은 것은 새해에 들어선
2월 초였다.
"일본인들은 전기사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전기회사를 창립했을 게 아니오?
그걸 우리 손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적자경영이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소?"
장면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고운
양심은 회사경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전상의 부정에 대해서는 전혀 상식적인
견해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국영으로 경영하다 보니 첫째는
크기 때문에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할
기회가 줄어들었고, 설혹 적격의 경영자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창의력 내지는 경영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으며, 둘째로는 이로
말미암아 음성비용이 막대하게 지출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무상의 체계나 절차에 있어
무질서하고 또 관료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기 3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적자경영으로 빚은 자꾸만
늘어갔고 그 이자만 해도 과장해서 말하면
천문학적이라 할 수가 있었다.
회계제도(會計制度)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제거하기 위해서 상공부 장관 주요한은
장면의 내락을 얻어 새해에 들어서면서
전기 3사 통합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주요한은 전기 3사의 태반의 주식을
정부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주주(小株主)인 민간주주들의 반발이
있더라도 과히 장애가 될 게 없을 것이라고
보고 추경예산안을 편성할 때까지 준비를
완료해야 되겠다고 서두르고 있었다.
기초작업이 끝나자 통합안은 성안해서
이것을 각의에 상정했다. 그것이 1961년
2월 8일이었다. 그 통합안인
<한국전력주식회사(韓國電力株式會社)
설립법>의 주요골자는,
채택한다.
(2) 임원은 4명으로 제한하며 겸직을
금한다.
(3) 행정간섭을 최소한으로 국한시킨다.
(4) 상공부의 관할하에 두는 반면에
경영상의 손실은 국고에서 보상토록 한다.
(5) 정부가 보증하는 사채(私債)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한다.
국무회의에서는 이 설립법에 대해서 일체
왈가왈부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정부에서는 국무회의 의결이 끝나는 즉시로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3사의 민간주주들과 각
노동조합은 <권익옹호>라는 이유를 내걸어
반대운동을 벌이는 한편, 투쟁위원회를
"정부가 통합안을 내놓은 이면에는
재정적자를 은폐하고 관권을 뻗치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라고 하면서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들의 투쟁은 <권익옹호>라 할 수
있었다. 전기 3사가 통합될 경우 일자리를
잃고 쫓겨나야 할 자가 많을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투쟁에는 소주주들도
가담했고 심지어는 경성전기와 남선전기의
임원들도 가세했다.
특히, 경성전기 노조에서는 남다른
적극성을 보여, 별도의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2월 20일부터는 전 차마다 <보장
없는 3사 통합을 결사 반대한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운행하는가 하면 2월
28일에는 국회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가뜩이나 반공법 제정 기도로 사회가
술렁대고 있을 때 전기회사의 종사자까지도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실정이었으니 사회는 더욱더
혼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전기 3사 통합문제가 제기되자,
나이 많은 종사자나 또는 이참에 전업을
하자고 생각한 사원들이,
"감원을 당해 쫓겨나기 전에 미리
자랑스럽게 사표를 내고 나가자" 해서
스스로 사표를 내는 사원들이 적지 않았다.
경성전기의 경우 1월에 30명, 2월에 70여
명, 3월에 백여 명이 넘었다.
한데, 나가겠다고 스스로 자청하고 나선
것은 좋은데 이들의 퇴직금을 무엇으로
지급해야 하느냐 하는 새로운 문제가
퇴직금을 1인당 2백만 환으로 잡더라도 4억
환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경성전기의 경우
단체협약에 의해 퇴직과 동시에 퇴직금의
즉시 지불이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장에 퇴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한은
사표를 수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남선전기의 경우에도 3개월 사이에 3백여
명의 직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6억 환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지난
60년 한해 동안에 7억 8천만 환의 결손을
본 남선전기로서는 6억 환 이상의 퇴직금을
당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전기 3사의 종업원을 모두 합치면 1만
3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만일 1만 3천여
명의 종업원이 <모두 퇴직할 테니까
퇴직금을 내놓으라>고 나온다면 어떤
면치 못하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우선은 일체 감원을 하지
않고 자연도태를 통해서 인원의 감원을
기하기로 하고 다만 경영에 있어서의
경상비 절감에만 목표를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설립돼 있는 기업체를 통합함으로써
야기되는 부작용은 <표>와 직결되는 결과가
된다. 전기 3사 통합으로 민주당이 잃게
되는 표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계산해 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인기> 면에서 하락
현상을 빚은 것만은 어김이 없었다.
그런데도 장면 정권이 애써 통합을
추진한 데에는 한 정당의 이익보다는 국가
장래의 이익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3사 통합 대책위원회>를 열어 본격적인
작업을 개시했던 것이나 1개월 뒤의 군사
쿠데타로 일단은 휴지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전기 3사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물론
쿠데타 정권의 집권 기간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들이 전기 3사 통합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통합을 해놓을
리가 있었겠는가? 장면 정권이 3사를
통합하려 할 때 <결사적>으로 통합을
반대하고 나섰던 전기 3사 종업원들도 군사
정권에서 통합을 할 때에는 끽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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