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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by Casey,Riley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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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이영재

  

  세계사는 따분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뒤엉켜 있어 골치만 아
프고, 현재의 우리와는 별 관계 없는 옛날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질 만도 합니다. 하지
만 가끔씩은 역사 지식에 대한 갈증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으로는 숱한 역
사서가 외면하는 토픽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마피아나 집시  또는 인디언 같은 집단들의 실체가 궁금해서  역사서를 뒤져 본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주목하는 역사서가 거의 전무한 현실을 확인한 후, 필자
는 그들의 역사를  알고픈 욕망이 더욱 강해지곤 했습니다.  수년간 반복된 그런 경험이 바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된 목적은 기존 역사서들이 내쳐  버린 세
계사 토픽들을 해명하는 것인 셈입니다.
  세상은 중심만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로 권력자와 영웅과  위대한 민족에만 
주목하고 역사서들은 그들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역사는 가십 
정도로 폄하될 뿐입니다.
  하지만 변방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란 
영웅과 범인들이 함께 일구어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과 금  밖으로 밀려난 
무리들이 없었다면 영웅이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뒤돌아봐도 우리  사회가 
세계사의 중심에 있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변방을 도외시하고 중심만을 흠모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자기 
기만 또는 자기 소외인 것입니다.
  이 책의 토픽 선정에는 또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20세기 말의 대중 문화, 정확히는 영화가 바
로 역사적 토픽을 추출하는  모집단이었습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 주제들이 모여  이 책
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내심 `야욕`을 하나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외
된 자들의 역사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 자신의 기억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영화  등 현대의 대중 매체는 기억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예컨대 영화가 한 
무리를 가리켜 악한이라고 정의하고 저주하기를 반복하면 우리도 그렇게 기억하기 쉬워진다는 것
입니다.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능숙하게 역사 왜곡에 한몫  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며, 그런 
부당한 현실을 차가운 문자로 거스르고 싶은 것이 필자의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시고 애써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런 분
들 중에는 필자와 사적인 친교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웅진 출판의 편집진이나 교정 교
열을 맡아 해 주신 분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은이 이영재

  꽃을 든 사회 혁명 - 히피

  히피 문화로 떠나는 여행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젊은이들이 목격되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자유와 평
화와 새로운 세상을 합창한  그들은 히피라 불렸다. 히피들은 당시 미국의 기성  세대에게는 참혹
한 재난과 같은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멀쩡하게 잘 살던 귀여운 아이들이 집을  뛰쳐나가서 환
각제를 들이마시며 성의  자유를 직접 시범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몽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사회 개혁자 무리로도 여겨지는 것이 히피이다.
  히피 문화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단계가  있다. 1960년대 미국의 풍경, 특히 
미국 청년 운동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 1994년)를 도입부로 활용할 것이다.  픽션이 역사에 앞서 어색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웬만한 역사서들보다 더욱 치밀하게 미국 현대사를  조명하고 있기
에 참조 대상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먼저 <포레스트 검프>가  비켜 가려 했던 한 가지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포레스트 검프>를  본 사람이라면, 제니와 포레스트가  수많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월남전에서 세운  수훈으로 존슨 대통령에게서 명예 훈장을 받은 후, 워싱
턴 거리를 유람하던 포레스트는 반전  집회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어찌하다 보니 연단에까지 
오르게 된다. 포레스트가 연설을 마치고  자기 소개를 하자, 멀리서 포레스트를 부르는 소리가 들
린다. 포레스트의 영원한 사랑 제니였다.  둘은 달려가 얼싸안고 수만 명의 군중들은 이 깜짝해프
닝에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잠시 후 대부분의 관객이 잊어버렸을 장면이 이어진다. 포레스트는  제니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 마치 범죄 단체의  아지트처럼 보이는 장소에 들어선 포레스트는 당황하고 만다. 대
단히 호전적인 인물들로 가득 차 있는 이곳은 베트남의 전장보다 더 지독하고 엉망진창이다.
  포레스트가 만난 무리 중에는  흑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표범이 그려진 검은 가죽  점퍼를 입
고 `블랙 팬더`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들은  흑인 해방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흑
인을 차별하고 흑인 여성을 겁탈하는  경찰에게서 흑인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
며, 따라서 자신들은 미국과 전쟁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흑인을 멸시하는 나라를 위해 싸울 수
는 없기 때문에 월남전  파병에도 반대한다고 한다. 그들은 파월 용사인 포레스트를  다그치고 권
총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웨슬리이다. 제니와 연인  관계인 듯
한 이 청년은  어떤 이유에선지 포레스트를 얕잡아보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포레스트를  데려온 
데 격분했는지 대단히  포악한 모습으로 제니의 뺨을 때린다. 이  순간 심성이 타고난 `천사표`인 
포레스트는 분노한다. 웨슬리에게 달려들어  그 어떤 액션 배우 못지않은 능숙한 폼으로  죽일 듯 
패 버린다.
  잠시의 소란 후 평상심을 되찾은 포레스트는  파티를 망쳐 미안하다고 말한 뒤 그 아지트를 떠
난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는 제니에 대한 포레스트의 사랑을 확인하게 하는 장면일 수 있다. 하지
만 감독의 전략은 상상 이상으로 치밀해서, 이 장면은 19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사의 기본 텍스트
로서도 크게 손색이 없다. 감독은 한 장소에 세 가지 청년 운동의 대표들을 모아 놓고, 검프와 대
면시켜 대적하게 했던 것이다.

  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세 유형

  먼저 포레스트를 위협한 블랙  팬더(Black Panthers)는 실제 존재했던 단체이다. 공식 명칭이 `
자기 방어를 위한 블랙 팬더 정당`인 이 단체는  1965년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애초의 목적은 흑
인 지역에서 빈발했던 백인 경찰의 폭력을 막는 일이다. 경찰의  곤봉 세례는 흑인 젊은이들의 몸
통을 향했고 흑인 여인은 성추행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흑인이 호소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
래서 자기 방어의 차원에서 물리력 행사를 선언했던 것이다. 후에는  훨씬 더 정치적인 색체를 띠
게 되어, 흑백 분리와 흑인 자치의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흑인들의 석방을 요
구하고, 미국 정부가 수세기 동안 거둔 세금을 돌려달라는 주장도 내세운다.
  단순한 호소나 평화 시위 대신 폭력을 통해 흑백 평등을 이루려 했던 그들은 당시 위험한 존재
가 아닐 수 없었다. FBI의 책임자였던 에드거후버는 블랙 팬더가 가장 치명적이며 위협적인 미국 
내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SWAT,  즉 FBI의 특별 기동대가 생겨난 것도 블랙 팬더의 무력 
시위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사이  미국 경찰은 캘리포니아,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블랙 팬더와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블랙 팬더는 최소한 30명의  조직원을 잃었고 
부상자는 그 몇 배에 달했다.
  미국 경찰과 FBI는 블랙 팬더를  와해시키고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많은 경우 정부의 
대응은 불합리했다. 체제  수호 의지와 인종차별 의식이  작용해서 블랙 팬더 단원들을  학살하는 
데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블랙  팬더의 시카고 지부를 이끌던 프레드 
햄프턴의 죽음이다.
  1969년 12월 시카고 경찰은  블랙 팬더의 아지트를 습격하는 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프레드 
햄프턴을 비롯한 몇몇의 블랙  팬더 단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블랙 팬더 단원들이  10분 이상 
총을 쏘며 저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
런 발표를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부검 결과 프레드 햄프턴의 시신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
출되었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렇다.  경찰과 FBI는 햄프턴의 보디 가드 중  하나를 구워삶아 햄프
턴 등을 곯아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아지트의 평면도를 얻는 데 성공했는데, 그 평면도에는 단원
들이 잠들어 있는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결국 경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블랙 팬더의 지도자들
을 살상했던 것이다.
  블랙 팬더는 70년대 중반부터  무력 투쟁 전략을 포기한다. 사실 그런 과격한  전략으로는 미국 
시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고,  또 흑인들의 총 몇 자루가 미국의 공권력에 맞서는  일은 불가
능했다. 블랙 팬더는 흑인  구역 내에서 교육, 의료, 구호사업 등을 진행하면서 흑인들의  삶을 보
살피고 권익을 보호하는 데 노력하다가, 1980년대 초반 소멸한다.

  제니의 연인 웨슬리가 대표하는 저항 운동은 학생 운동이다.  1960년대 미국의 학생 운동으로는 
먼저 자유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을 들 수 있다. 1964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처음에는 학원 내의 정치 활동 금지령에 대한  저항으로서 시작 되었고 후에 베트남전
을 계기로 반전 운동으로 발전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마리오 사비오가 주동한 농성이다. 버클
리대의 학생이던 그는 수천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대학 행정 건물을 점거하고 28시간 동안 농성
을 벌였다. 경찰은 반전과  사회 개혁을 외치는 학생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했고  약80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1960년대 미국 학생 운동의 조직으로  유명한 것이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이
다. 이 조직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글 자막은  `민주학생단`으로 번역했으며 웨슬리가 이 
단체의 대표로 설정되어  있다. 1959년 버클리에서 조직된  SDS는 역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는 조직으로 성장한다.  블랙 팬더처럼 총을 들고 
전면전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 단체도 상당히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구호를 내세웠다. 그들은 각 
대학에 지부를 둔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고 곳곳에서 시위와  점거 농성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주장도 역시 반전과 평화 그리고 징병 반대와 사회 개혁으로 모아졌다.
  60년대에 맹위를 떨치던  SDS는 1969년에 두 개의  분파로 갈라진다. 일기 예보관을  의미하는 
웨더멘(Weathermen)은 테러리즘 전술에 의존해  사회 개혁을 이루려 했고, 또 다른  분파는 희망 
없는 미국 대신 제3세계 혁명으로 눈을 돌렸다. 이 두 조직도 1970년대 중반에 소멸하고 만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SDS와  블랙 팬더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흑인들은 호
전적인 대사를 쏟아붓고 권총을 빼들어 포레스트를 위협했다. 그리고  지성적인 학생 운동의 지도
자는 여성에게 폭행을 가하도록 연출되어 있다. 시각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면 감독은 1960년대 
미국 청년 운동의 두 부류를 소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을 악의적으로 
일그러뜨렸지만, 이런 청년들을 소개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으니 나쁜 기회만은 아니다. 그런데 
감독이 초대한 나머지 한 가지 청년 운동의 유형은 무엇이고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청년 운동은 히피 문화였고 영화 속에서 이 괴상
망측한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은 제니이다. 포레스트가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쯤 제니는 히피 문
화에 젖어든다. 그런 제니의  모습은 얼핏 지나가는 장면들에 담겨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
면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게 <포레스트 검프>가 히피 현상을 외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때 수많
은 젊은이들이 몸소 뛰어든 이 사회 개혁 실험은 분명히 인류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평화, LSD 그리고 사랑의 여름

  <포레스트 검프>에서 제니는 완벽한 서양 거지의 모습이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길거리 아
무 곳에나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초면의 남성이 제의하자 선뜻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나
기도 한다. 얼핏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제니가 히피의 공동체에서 환각제를 사용한다. 포레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시절  제니는 친구들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웠고, 새로운 정신  세계를 경험하려 
애썼다고 한다. 만일   <포레스트 검프>의 히피 묘사가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라면  히피 영화의 
전형 <이지 라이더>를 봐야 한다.
  피터 폰다,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 등이 출연한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는 두 청년 히피가 주
인공이다. 그들은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를 찾아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올리언스로 
머나먼 여행을 떠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들은 시계를 내던진다. 세상의 기본 질서 중 하나인 
시간 개념은 우리의 생을 옥죄는 것인지 모른다. 누구나 일정한  시간이 되면 식사하고 잠들고 깨
어나고 출근해야만 하는 것처럼, 시계 바늘의 움직임이 생활을 완벽히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들이 시계를 던진 행위는 기존 사회 질서에 작별을 고하는 의식처럼 보인다.
  두 청년은 시원스레 뻗은  도로를 달리며 자유를 만끽한다. 또한 <포레스트  검프>의 제니처럼 
환각제에 정신을 맡기기도  하며, 때로는 여성들을 만나 여러  방식으로 교감한다. 한번은 척박한 
땅에 터를 잡기 시작한 히피 공동체를 방문하기도 한다. 이들은 분명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은 냉혹하고 호전적이다. 두 주인공이 만난 술주정뱅이  변호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동
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평화롭게 도로를 달리던 청년들을 향해 농부들이 총을  쏨으로써 영화
는 비극으로 끝맺는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드물지 않게  만나고, 또 일상 용어로도  사용하는 히피는 플라워  칠드런
(flower children) 또는 러브 제너레이션(love generation)이라고도 불렸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
너(San  Fransico Examiner)라는  매체가 1965년  9월 최초로  히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피
(hippie)는 hip와 ie가 결합된  것인데, hip는 엉덩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때는  최신 사상이나 스
타일을 의미하며 ie는 명사화 접미사이다. 그러니까 히피는 1960년대 기성 세대의 가치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사는 젊은이들, 부정적 의미로는 최신의 별종을 뜻한다.
  히피는 1960년대 초반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외관상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들이  모두 젊은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워스프(WASP), 즉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
교도 가정의 출신들이었다.  워스프는 바로 미국의 지배 집단에  해당하는데, 이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안락한 삶을 영위하던 청년들이 엄청난 흡인력을 지닌  히피 문화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이들 백인들의 또 다른 외적 공통점은 지극히 자유분방한 차림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의 머리
칼은 전혀 다듬지  않고 무작정 기른 듯한 모습이었고,  단정하지 않은 천조각을 대충 겹쳐  입은 
것이 그들의 옷이었다.
  히피는 거리에서 사랑과 새로운  세상을 외쳤다. “이봐 LBJ(Lyndon Baines Johnson,  존슨 대
통령),오늘은 아이를 몇이나 죽였냐?”라는 구호는 그들의 반전 의지를 보여 준다.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평화 시위 행렬에  끼여들기 시작했고, 뉴욕 주의 허드슨 강에서 노란  잠수함을 띄우는 
행사를 비롯해 국방성이라는 악귀를  몰아 내는 의식에도 참여한 것이 히피이다. 특히  후자는 히
피들의 싸움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967년 3월 수만 명의 히피들은 국방성 건물까지 행진하고 인간 띠로 그 건물을 둘러쌀 계획을 
세운다. 그런 시위는  베트남 전쟁의 주범인 국방성에 깃들인 악령을   는 의식에 해당했다. 미국 
정부는 행진은 허용했으나 국방성을  둘러싸는 행위는 금지했다. 하지만 히피들은 멈추지 않았다. 
국방성 건물까지 접근했다가 군인들에게 뭇매를  맞으면서도 군인들을 향해 꽃을 던졌고 적의 총
에 꽂을 꽂았다. 빌 포트너라는 젊은이는 비행기를 전세 내어  국방성 상공으로 날아가 거대한 폭
탄을 던지려 했다. 물론 그 폭탄은 꽃의 폭탄이다. 그러나 고용된 비행사가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
지 않자 히피들은  꽃을 실은 트럭을 몰고 가  국방성의 건물 외곽을 장식했다. 히피들은  꽃으로 
상징되는 평화의 정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히피들의 구호 중 하나는 “30세 이상의 사람은 믿지 말라.”였다. 이는 기성 세대에 대한 원천
적인 불신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반대로 자신들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선언
하는 구호였다. 히피들의 생활 양식 중에서 몇 가지 측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성에 대한 기존
의 규칙을 거부했고 자유로운  성적 교류를 주장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엄격한 성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여자는 성적 욕망을 표현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으며 결혼  전까지는 
처녀성을 지켜야만 한다는 게 일반의 생각이었다. 1930년대와 40년대  동안 미국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야한 장면은 키스  장면이었는데, 이때도 남녀 배우는 입을 열어서는 안 됐다. 그렇
게 점잖은 세상이었는데  히피들이 자유로운 성적 교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경구  피임약의 
판매와 임신 중절이 허용되면서 몰아닥친 1960년대 중반 성혁명의 흐름을 이끈 세력 중에서 가장 
유력한 무리가 히피였다.
  자유로운 성 가치관이  우려와 충격을 야기했다면 히피의 또 다른  모습은 미국 사회를 절망과 
적개심으로 들끓게 했다. 히피들은 환각제 사용이 정당할 뿐 아니라, 나아가 진보적인 행위라고까
지 여겼다. 마리화나는 물론이고 강력한 환각제인 LSD를 히피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LSD는 1938년 알버트 호프만에  의해 스위스에서 처음 합성된 약물로서,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
로 하는 약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히피들은 LSD를 이용해 자기 자신, 벗들 
그리고 세계와 새롭게  교감하자고 주장했다. 1966년을 기준으로  할 때 LA의 고등학생  중 절반 
이상이 마리화나를 경험했고 미국 전체 인구에서  100만 명이 LSD에 빠져 있다는 통계가 발표되
었으니 미국의 어른들이 절망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런 절망적  상황을 앞장서서 옹호한 히피들
은 당연히 악령과도 같은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이지 라이더>의 청년들이 히피라는 이유
만으로 죽임을 당했던 이유를 대강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들은 전쟁이나 일삼고 젊은이의 주장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어른들과 이별하기로 마음먹
는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바깥에 대안적인 공동체를 직접 만들어 보이기로  결심한 것
이다. 적어도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가정과 학교를 버리고 떠나가 황무지에 정착한다. 안락한 중
산층의 삶에 젖어 있던 그들이  직접 망치와 톱을 들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땅을  일구어 경작지
를 마련하였고 자신들의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다. 히피들은 사랑과 평화가 그 기본  원리인 유토
피아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많은 히피 공동체, 즉 코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몇몇의 코뮌이 살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남동부의 테네시 주 서머타운에  터를 잡은`농원(The Farm)`이다. 스티
븐 개스킨은 1970년대  초반 수천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의 하이트애슈베리를 떠난
다. 개스킨 일행이 도착한 곳이 미국 남동부에 있는 테네시 주의 서머타운이다. 그들은 공동 주택
을 지었고 땅을 일구었고 매일  밤 축제를 벌였다. 그렇게 힘차게 출발한 농원은 한때  코뮌의 모
범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 명성이 퇴색했다. 현재  320명만 남아 있고 재산권도 개인  소유로 
바뀌었다.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한  농원은 스스로 터득한 버섯 재배법과 자연 분만술에  대한 서
적을 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히피  현상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1967년이고  그  배경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사랑의  여름
(Summer of Love)`이라는 이름으로  몇 개월간 지속된 히피들의 축제는 그들의 헤도니즘(쾌락주
의)과 평화의 정신이 응측되어 표출된 현장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그에 따라 
언론사들도 샌프란시스코를 주목하였다.  기성 세대는 우려의 시선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바라보았
으며 경찰과 FBI도 이 현장에 뛰어든다.
  1966년을 전후하여 샌프란시스코의 하이트애슈베리 지역에서는 히피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이
곳에는 히피들의 집단 거주지 또는  축제 마당에 해당하는 비인(be-in), 러브인(love-in)이 생겨나
고 히피풍의 클럽과 술집  등이 생겨났다. 하이트애슈베리에서는 낯선 형식의 공연도 진행되었다. 
예술가 해방 전선(Artists Liberation Front)과  소규모 록 밴드들은 공연자와 관람자의 경계를 허
무는 공연을 시작한다. 열광하는  관중과 공연자가 한데 어울려 공연 자체를 하나의  교감으로 여
기는 그런 모습이다. 현재 록 공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공연 형식이었다.
  또한 히피들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모여 `애시드 트립 페스티벌(acid trip  festival)`이라는 것을 
즐겼다. 애시드는 다름 아니라 LSD와 마리화나 같은 환각제의 은어이다. 트립은 환각제를 이용한 
의식의 여행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히피들은 환각 상태의 경험을 하나의 여행에 비유했다. 히피들
의 관점에서는 그 여행이 자신과 우주의 새로운 접촉을  경험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하이트애슈베
리에서는 히피 신문도 발간되었다. 마약 밀매상이 자금을  지원한 <샌프란시스코 오라클>이 바로 
그것이다. 그 신문은 히피들의  주장을 일반인과 히피 공동체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반
전 평화 시위를 응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히피들의 옷, 그림, 포스터 등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는 `
사이키델릭 숍`도 생겨났다.
  1967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사랑의 여름을 예고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다.  금문교 공원에 
몰려든 2만 명의 히피들 앞에서 록  그룹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퀵실버 메신저 서
비스 등이 노래를 했다. 그리고 시인 앨런 진저버그나 하버드대  교수 티모시 리어리 등이 집회에 
등장하여 환각제의 사용을  적극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하이트애슈베리의 히피들은  언론이나 어
른들이 외면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른 것이다.
  이제 히피들은 사랑의  여름이라는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사랑의 여름  준비위원회가 발족
되어 행사 전반을  계획하고 자금 조달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올  젊은이들에게 
히피의 공동 생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할 기구도 준비되었다. 사랑의 여름은 1967년 6월  21일 하
지를 기준으로 시작되었으며 행사의 취지는 후에 선언의 형식으로  언론에 발표되었다. 아래의 내
용은 당시 히피들의 바람과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자신의 의식에서 소외되도록 조장하는 사회와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런 결별을 가능하게 할  젊음의 에너지를 창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자기  의식에서 소외
되지 않을 권리, 자기 몸을 소유할 권리,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의식을 확장할 권리를 획
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투쟁하고 질시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랑과 연민을 표
하는 바이다.”
  이러한 사랑과 평화와 교감과 즐거움의 구호는 1967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에 총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모아들였고, 또 그만큼의 관광객과 경찰과  FBI요원도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사랑의 
여름 기간 동안 반전 집회와 록 그룹 공연이 이어졌고 히피 문화의 교류와 개발도 계속 진행되었
다. 당시 있었던 행사 중에서도 두 가지 사례가 재미있는 일화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히피들이 성의  금기에 도전하면서 몸의 교류를  중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자유로운 성을 위한  연맹(Sexual Freedom League)의 샌프란시스코 지부가  주최한 파티가 열린
다. 약 150명의 히피들이  누드로 댄스 파티를 연 것이다. 록  공연장에서는 토플리스(topless), 그
러니까 상의를 벗은 여성이 자주  목격되었는데 이렇게 집단적으로 온몸을 공중에 드러낸 사례는 
처음이었다.
  사랑의 여름 동안 샌프란시스코 전역에서  울려퍼진 환각제 예찬은 그 감염력이 엄청나서 미국 
전역이 엉뚱한 소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LSD에는 세로토닌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사랑의 여름 기
간 동안 그 성분을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말린 
바나나 껍질이었다. 그런 소문은  미국 언론에도 발표되어 미국 전역에서 바나나 껍질을  말아 피
우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고 심지어는 바나나 껍질의 가루를 우편 판매하는 업체까지 생길 지경
이었다.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 한 남자가 바나나  껍질을 말렸다가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
데, 그것은 30년 전 미국 풍경을 모사한 것이다.
  경찰과 관료들도 사랑의 여름에 뛰어들었는데 당연히 그들의 목적은  훼방을 놓는 것이다. 캘리
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히피들이 공산주의적인 음모를 숨기고 있다고  외쳤다. 경찰
은 닥치는 대로 집회를 해산시키려 했고 LSD를 소지하거나 거래하는  젊은이들을 체포했다. 당시 
체포된 젊은이 중에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원작자 켄 케세이(Ken Kesey)와 
록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오르간 주자 픽팬 그리고 러시아 출신 무용수 출신 무용수 루돌프 누
레에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히피들은 저항했다. 정확히  정오에 거리로 모여들자는 내용의 전단이 나돌았고  매일같이 정오
에 히피들은 큰길로 나섰다.  하지만 경찰도 그 시간에 나타나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체포를 반복
했다. 히피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경찰의  진입과 수색과 체포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둔다. 하이트애
슈베리에서 히피들은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1967년 10월에는  사이키델릭 숍이 문을 닫았고 
<샌프란시스코 오라클>은 1968년 2월 제1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사랑의 여름은 대다수 기성 세대가 보기에는 섹스와 마약과  기껏해야 로큰롤 놀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 혁명과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염원에서 비롯된 축제였다. 사랑의  여름이 파
괴된 것이 오히려 히피 문화를 전 미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히피 공동체의 
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미국 각지로 퍼져 나가 히피 문화를  알렸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런 효과
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이트애슈베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히피 공동체가 사라진 것은 치
명적 타격이었다.

  우드스톡 축제

  히피들은 미국 전지역으로 흩어졌고  그들의 수도인 하이트애슈베리는 퇴색했지만 히피들의 열
망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히피들의 평화와 공동체 정신 그리고 LSD와 록에  대한 열망은 잠
재되어 있다가 일순간 솟아올라 또 한번 자신의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이 
사건은 뉴욕 주의 우드스톡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드스톡 축제의  정확한 명칭은  우드스톡 아트 앤드  무직 페어(Woodstock  Art and Music 
Fair)로서 1969년 8월 15일에서 17일까지 열렸던  록 공연이다. 이 공연은 히피도 선진적 청년 운
동가도 아닌 모범적이며 유망한 젊은이 4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존 로버츠와 조엘 로즈먼이 자본
을 제공했고 캐피털 레코드사의 부사장 아티 콘필드와 공연 기획자였던 마이클 랭이 노하우를 담
당했다. 이들은 1969년 2월 만남을 갖고  채산성이 높은 멋진 공연을 갖기로 합의한다. 그들이 고
안한 슬로건은 `평화의  음악의 3일`이었으며 그들은 약  5만 명의 청중을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체로 순조롭게 준비가 진행되었고 우드스톡의 월킬 마을 부근의 한 장소까지 쉽게 임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연 광고가 각종 매체에 실린 직후 마을 사람들의 극렬한 반대가 일었다. 성적으
로 방탕하고 환각제나 탐닉하는 히피떼들이 자기네 마을로 몰려들 걸 생각하니 온 마을 사람들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드스톡을 준비하던 주최측은 공연  부지의 임대 계약을 추진하면
서 점잖은 재즈와 포크 음악이 공연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히피에 대한 기성 세대의 거부
감 때문이었다. 아무튼 새로운 공연 장소가 필요했다.
  야스거 농장이 새로운  공연장으로 선정되었고 무대 시설이  세워지고 대대적인 홍보도 진행된
다.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음향 시설도 준비되었으며 최고 수준의  음악 팀들과 계약도 쉽게 성
사되었다. 그리고 워너 브라더스와 영화  제작 계약도 마쳤다. 우드스톡 축제를 위해 세워진 회사 
우드스톡 벤처는 곧 자신들의  사업이 성공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공연 2주일 전에 18만  장의 공
연 티켓이 팔려 나갔는데 이것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반응이었다.
  우드스톡 축제 첫째 날인 8월 15일에는 포크 음악이  공연되었다. 애초에는 존 바에즈가 공연을 
여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유례가 없는  교통 체증이 
빚어졌기 때문에  스타들은 공연장에 제시간에  들어서지 못했다. 우드스톡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량들이 10킬로미터 이상 늘어서  있었으니 스타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군 헬
기를 포함한 여러 대의 헬기를 동원하여 스태프와 공연자를 날랐지만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후 5시, 계획을  수정하여 리치 헤이븐스가 <Freedom>을 부르면서  우드스톡 축제는 시작되
었다.
  이어 멜라니 사프카, 배드 소마, 팀하딘 등이 노래를 했고 마지막으로 존 바에즈가 무대에 올라 
<We shall overcome>을 불렀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고난을 이겨 낼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젠가는 승리 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
이 있다. 우리 모두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얻고야 말 것이라는 결의가 부드러운 포크 음악에 담
겨 있었던 것이다.  공연 기획자 중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존 바에즈가 그 노래를  마칠 즈음 
천둥이 쳤고 3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은 이제 첫 번째 밤을 맞았다.  이미 공연장은 진창이 되어 버렸
다. 관중들은 슬리핑 백이나 담요 안에서  혹은 텐트에서 잠들었다. LSD와 마리화나로 서로 교감
하는 장면, 즉 트립을 떠나는  페스티벌이 곳곳에서 자연스런 장면이었다. 그리고 아직 많은 수의 
젊은이들은 우드스톡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 있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떼지어 다니며  노래를 
했고 발목까지 빠지는  진창 속에서 즐거워했으며 발가벗은  채 수영을 즐겼다. 즐거움과  교류와 
희망을 노래하는 히피  공동체가 새롭게 조성된 것이다.  억제되어 있던 히피의 기운들이  그렇게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제퍼슨 에어플레인, 제니스 조플린, 그레이트풀  데드 등이 공연한 8월 16일은 사이키델릭 록의 
무대였다. 이 장르의 음악은 명칭부터 히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흔히 `몽환적`이라고 번역되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의 어원을  따져 보면 `영혼이  보임`을 의미한다. 사이키델릭은  풍성한 
영감과 비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상태를 뜻하고 사이키델릭 록은 그런 정신을 낳는 음
악 장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히피가 LSD복용을 통해 영감을 얻고 새로운  세계를 경
험하던 모습과 일치한다. 따라서 사이키델릭은 바로 히피 문화의 표현인 셈이고, 히피들에게 사이
키델릭 록은 청각적인 LSD였던 것이다.
  1965년  결성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제퍼슨  스타십의  전신으로 히피  집단  그  자체였다. 
<Somebody to love>에서 이 밴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실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지고  당신 가슴 속의 모든 기쁨이 사라졌다면, 당신은  사랑할 사
람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신이 사라지고 당신의 마음에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할 때, 역시 
당신은 사랑할 이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실과 신이란 모두 거짓이고  허망한 것이며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이 유일한 희
망이라고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사랑은  당연히 개인적 연정을 뜻한
다기보다 세상에 대한 인류애를 의미한다. 이 노래는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자는 히피의 구호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날인 8월 17일 일요일에는 조 카커,  블러드 스웨트앤드 티어스 등이 공연했으며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아침 9시 지민 렌드릭스가 무대에 올랐다. 1942년생이며 본명이  제임스 마
셜 핸드릭스인 그는 전기 기타를 저항의 무기로 이용할 줄  알았던 아티스트이다. 그는 부조리 덩
어리 사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격렬한 전기 기타로 표현했다.  기타 줄을 이빨로 물어뜯고 기타
를 불태운 그의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우드스톡의 무대에 오른 지미 헨드릭스가 
연주한 곡은 미국  국가 <Star Spangled Banner>이다. 당연히 그가  미국 사회에 대한 조롱이자 
비판이 담겨 있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우드스톡이  진행되는 동안  세상은 이 축제를  기이하고 위험한 무질서로  바라보았다. 
5,000여 건의 의료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과 환각제와 관련한  797건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데 주목
했다. 그리고 공연 기간 동안 2명이 죽었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한 사람은 마약 과용이고 다른 하
나는 트랙터 사고로 숨졌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고 공연 
기획자들을 비난했다. 실제로 우드스톡  축제는 상업적인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자본가와 음악 
관련 사업가에 의해 계획되었고  수입이 240만 달러에 달했다. 가수들의 출연료도  당시로서는 최
고 수준이어서, 제퍼슨 에어플레인은 평소 출연료의 2배인 1만 2,000달러를 받았으며 지미 헨드릭
스는 3만 2,000달러의 개런티를 받았다.
  하지만 우드스톡 축제를 상업적인 이벤트로  여기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고 무질서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공식적으로 우드스톡에 참여한 관객의 규모는 45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추정치로서  믿지 않아도 될 수치이다. 기성 세대가 혐오하던  반사회적 모
임의 규모를 경찰이 공정하게  기록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모였다고 주장하는 당시  공연 스태프나 관중의 얘기가  턱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이 
공연장을 가득 매웠고 주최측이 세워  둔 낮은 담장 밖에는 더 많은 관중이 버티고  있었다. 주최
측과 경찰이 대규모의 폭동을 우려했을 정도였다. 애초의 공연  계획은 오후 6시에 시작해서 자정
에 끝나는 것이었다가, 다음 날  새벽까지 공연을 지속하기로 변경했다. 그런 결정은 흥분한 관객
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관중이 동원되었지만 그곳의  청년들을 공연 프로모터들이 모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 각지에는 그런  축제를 갈구하던 청년들이 수없이 숨어 있었다. 요컨대 청년
들의 에너지가 관객 동원의 주된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든 청년들은 조화로운 공동체를 
꾸리려 했다. 누가 규칙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100만에 이르는 청년들은  그다지 큰 불상사 없이 3
일 밤낮의 축제를 마쳤다.  그들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와 공동체 정신은 당연히  히피 문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히피 문화의 배경

  히피들은 누더기를 걸친  채 집을 떠나 LSD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통한 새로운 영적 체험을 
갈구했다. 그리고 기존 산업 사회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공동체, 즉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
하기 위해 버려진 땅을 개척했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기존  사회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거부했는
데, 히피 문화에는 세상에 대한  절망감이나 낭패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들에게 기존 사회는 구제
할 수 없는 폐기물에 가까웠고, 따라서 차라리 버림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미국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낳은 사회적 조건 중 하나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사이에 자행된 
조직적인 살상 행각이다.  우선 여러 정치적 인물의 숱한 죽음이  거론될 수 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다. 미국의 새로운 희망이 리 하비 오스왈드라는  청년의 총격으로 댈러스에서 즉
사한다. 그리고 이 암살자는  며칠 후 이감 도중에 나이트클럽의 소유주인 잭  루비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하는데, 이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 잭 루비는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가 재
판정에 서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1964년 미 정부는 워런 보고서를 통해, 케네디의 암살이 그  누구의 지원 없이 이루어진 오스왈
드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철저한 경호를 받게 마련인 대통령이 일개  아마추어 암
살범이 쏜 총탄에 살해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터무니없는 설명 이후 새로운 조사는  진행되지 않
았다. 어쨌든 대통령의 암살이  대명천지 대로에서 벌어지고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었던 것
이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경우가 그랬으니  고만고만한 정치적 인물들의 사정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과격 흑인 
운동을 지휘하던 맬컴 X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평등은 
백인 정부에 호소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무력에 의한  분리 독립을 흑인 운동의 방
향으로 제시한 인물이 맬컴 X이다. 집이 폭파되는 등 여러 차례 암살 협박을 넘기다가 결국 1965
년 2월21일 한  시위에서 연설하던 중 총격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그리고 1968년에는  평화적인 
흑인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마저 암살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죽음뿐아니라  집단적인 죽음도 60년대 말 미국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앞에
서 거론된 블랙  팬더의 경우나 65년 로스앤젤레스의 와츠 지역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 과정에서 
희생된 34명은 소수의  죽음에 불과했다. 자원 입대했거나 제비뽑기식으로 징병된  미국 젊은이들
이 매주 600명씩 베트남에서  죽어 갔다. 베트남 전쟁은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그  실상이 중계
된 첫 번째 전쟁이었으니 그 사회적 충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1960년대 말  미국에서는 평범한 시민에서 대통령까지  누구나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미국의 풍경은 분노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젊은이들로서는  미국의 
문명을 근복적으로 부정할 근거를 얻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히피들의 구호인 사랑과 
평화를 이해할 수 있고, 왜 그들이 사회에서 이탈하기를 꿈꾸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들이 도시 문명과  단정한 차림새를 거부하고 누추한  외관과 자급자족 공동체를 동경했던 
점에서 또 다른 사회적 배경을  읽어 낼 수 있다. 히피 현상을 일게 한 또 다른  배경은 포디즘의 
정착과 그것이 초래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사회 질서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보면 어리숙한 찰리 채플린이 공장에서 일하는 장면이 등장한
다. 그는 컨베이어 벨트 곁에 서서 자기 앞에 도달한 반제품의 나사를  죄는 일을 하루 종일 반복
한다. 이렇게 전체 공정을  세분화하여 부분 공정을 특정 작업자에게 배당하는 생산  방식이 포디
즘이다. 작업자로서는 단순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디즘은 생산력을 크게  높여 상품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까  포디즘이 정
착되면서 세상에는 자동차와 신발과  옷가지 등이 넘처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히 행
복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런  상황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기도 하
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작업 시간뿐 아니라 여가 시간에도 자본주의 거대 공장의 논리가 힘을 발휘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힘겨운 작업을 마치고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모두  공장에서 만들
어진 운동화나 옷가지로 치장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자동차를 몰게  된 것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이용하지 않으면 여가와 휴식이 가능하지도 않은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히피들은 대량 살상을 자행하는 잔인한 문명의 혜택 따위는  거부하려 했다. 미국의 기계문명이 
토해 내는 화려한 물건보다는 직접 만들어 낸 조잡한 옷가지가  차라리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편
안한 도시 생활은 따스한  농경 공동체로 대체되어야 했던 것이다. 산업 사회의  생산과 소비에서 
모두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히피들은 어른들의 눈에는 더럽고 형편없는 차림새를 즐기게  된 것
이다.
  사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신좌파라 불리는 흐름이 히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좌파 이론
은 이전의 사회  혁명 논리와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의  혁신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 
제도의 변화만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만으로는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큰 차이
점이다. 그들은 심리학적  혁명을 통해 문화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쇄신하려 했던, 심리학적 혁명 
과정에서는 의식보다 무의식의  힘을 신뢰했던 것이다.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사람은 자라면서 의식을 지니게 되는데 의식이라는 것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모든 
개인은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등으로 의식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사회가 부조리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개인의 의식에도 부조리와  불합리가 스며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의식으로 사
회를 교정하는 일이  가능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개개인의  의식마저도 사회의 부조리에 물들어 
있다면 급선무는 의식을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일이다.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의식을 근본적으
로 변화시켜야만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의식을 얻기 위해서는 무의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신좌파의 믿음이었고 그런 사
고 방식이 히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히피들은 도덕보다는 자연스러움, 이성적 의지보
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했다. 따라서 LSD를 찬양하던  그들의 모습도 이해
가 된다. 환각제는 평상시의 의식 상태에서 탈출하는 도구였다. 히피들은 몽환적인 상태에서 자신
의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전혀 상상 못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히피들이 엄격
한 성 규범을 벗어던진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어른들은 문란한 섹스를 비난했지
만, 섹스를 통해 교감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이 저주받을 것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런 본능적인 즐거움 속에 의식을  교정할 힘이 숨어 있으며, 그 힘은 결국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
는 데 기여할 것이었다.

  늙은 히피 티모시 리어리의 죽음

  60년대는 이미 지나갔다.  자유 발언 운동을 주도한  마리오 사비오가 90년대 초에  사망했으며 
블랙 팬더도 이미 오래 전에 몰락했다. 블랙 팬더의 창립자  중 하나인 에드리지 크리버는 보수적
인 정치가가 되었고 휴이  뉴턴은 마약 거래를 하다가 뒷골목에서 죽음을 맞았다.  히피의 사이키
델릭 사운드를 대표하던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 제리  가르시아도 1995년 사망했다. 60년대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들 중 에서도  티모시 리어즈(Timothy Leary, 1920~1996)의 죽음이 가장 눈
에 띄는 사건이다. 그는 바로 LSD의 효과를 직접 시험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부터 한사
람당 20달러씩을 지불하면서 LSD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실험 대상을 자원했던 사람  중 하나가 앞
서 말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의 원작자 켄  케세이이다. 케세이는 LSD가 황홀하
고 진보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전혀 색다른 느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리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LSD가 정신병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발표했
다. 그 결과 LSD  사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까지 LSD를  즐기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1966년 LSD의 사용과 실험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티모시 리어리는 1967년 한 히피 집회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이라는 게임을 중요한  어떤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신경 계통과 감각  기관과 몸 
속 에너지의 흐름 전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은 함게  어울리고 약물에 취하여 이 사회
를 벗어나야만 한다(Tune in Turn on Drop out)."
  그렇게 해서 티모시  리어리는 미국 어른들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닉슨 대통령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받게 된 것이다. 1920년  아일랜드계 부모의 외아들로 출생한  그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하버드대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티모시 리어리가 처음  접한 환
각제는 LSD가 아니었다. 그는 1960년 멕시코산 버섯에서 우연히 환각제  성분 실로시빈을 추출해 
내고 직접 효과를 보고 난 뒤,  환각제의 놀라운 효과를 체험한다. 인지 능력이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세상은 평소보다 100배쯤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는 게 그의 회고이다.
  1962년 봄 영국의 철학도 마이클  홀링스헤드라는 청년이 티모시 리어리를 찾아와 선물을 전한
다. 그것은 LSD를 묻힌  설탕 조각들이었다. 그 청년 덕분에 티모시  리어리는 LSD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가 LSD에 취했을 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키는 우주적 드라마가 눈앞에 펄쳐졌다
고 한다. 그후 그는 LSD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LSD의 긍정적 기능을 선전하기  시
작한다.
  티모시 리어리의 설명은 히피의  논리 바로 그것과 일치했다. LSD는 개인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세상의 평화를 실현하게 할 도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동료 올더스 헉
슬리가 죽음 직전까지  LSD를 요구했다거나, 리어리의 세  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모두 
LSD에 취한 상태였다고 하는 일화들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다.
  티모시 리어리는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1963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해고당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모든 히피  집회에 참석하여 젊은이들을 선동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엑스터시
의 정치학> 등의 저서를 발간하면서 LSD 사용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한다. 결국 1970년 1월 리어
리는 마약 복용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지만 곧 앞에서 말한 웨더멘이라는 조직의 도움으로 9월
에 유럽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되어 미국으로 이송된 후  3년간 투
옥되었다.
  닉슨 대통령처럼 리어리를 혐오하고 적대시하던 기성 세대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는 히피들에게 
가장 뜨거운 환호를 받은 영웅이었다. 티모시 리어리는 1996년  5월 31일 전립선 암으로 사망했는
데,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살 계획을 세우고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자살 과정을 생중계하려고 했
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냉동하여 미래 세계에서 되살아나겠다는 의향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티모시 리어리의 사망이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각별한 의
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한때 미국 젊은이들의 대대적  이탈 사태를 주도했고 우드스톡과  보비 
딜런과 마돈나를 가능하게 했으며, 가장 오래 버틴 히피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티모시 리어리와 뜻을 같이했던 미국 젊은이들은 곧 가정으로  되돌아와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미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그들 50대의 미국인들은,  히피 현상을 혈기 넘치던 젊은  날의 
추억쯤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문헌들은 히피 문화를 무모한  정치 운
동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거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외면할 뿐이다. 하지만 맑은  정신을 되
찾고 사회로 돌아온 그들이 공들여 만든 현재 미국 사회가 아름답고 안락한 곳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 밖에 위대한 정치가들이나 사회 개혁 운동도, 티모시 리어리나 히피의 그
것만큼 뜨거운 열망을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동방의 현자 라즈니쉬의 미국 고행기

  오쇼 라즈니쉬는 독특한 신비주의 철학으로 서양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물론 우리
에게도 그의 이름이 낯익은 편이지만, 라즈니쉬가 미국에서 겪은 고난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유야 어떻든 미국 사회의  주류는 라즈니쉬의 동양 철학을 혐오했고 박해했던 게  사실이다. 텍스
트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이 당시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
다.
  영화에는 포레스트가 공허한 가슴을  안고 무작정 달리는 장면이 있다. 그는 3년 이상  쉬지 않
고 달렸고, 그는 신비한 기인쯤으로  여긴 사람들이 현자의 말씀을 소망하며 함께 달린다. 하지만 
포레스트가 아무 말 없이 달리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려 추종자들은 길과 희망을 상실하
고 만다.
  포레스트의 기행이 1981년을 전후로 해서 벌어졌고 그가 신비한  인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그
의 미대륙 횡단 장면은 1980년대 초 라즈니쉬 열풍을 빗댄 설정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981년 라즈니쉬 종파가 미국  오리건 주의 황폐한 목장을 사들였다. 수천 명의  추종자들이 라
즈니쉬의 가르침에 따라  이곳에 공동체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사회적 비판이  고조된 
결과 라즈니쉬는 법정에까지 서야 했다. 그가 정신의 자유뿐 아니라 성적 자유(또는 성적 실험)까
지 주장했으며, 추종자들을 이용해 재산을 쌓으려 한다는 소문이 사회적 비난의 뿌리였다. 한동안 
미국 사회는 라즈니쉬를 둘러싼 갑론을박과 루머에 휩싸였으며, 결국  라즈니쉬는 1985년 방화 및 
살인 교사 그리고 마약 밀반입 등의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당연히 그
의 추종자들도 길과 희망을 잃었을 게 분명하다.
  라즈니쉬가 실제로 타락한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미국의 보수적 편견이 동양의  현자 라즈니쉬
를 희생시켰는지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위대한 현자로  여기는 라즈니
쉬가 미국 땅에서는 큰  고통을 맛보았으며, 아직도 미국 사람들은 당시의 배척을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영원한 유랑 민족의 초상 - 집시

  집시에게 따라붙는 두 개의 시선

  상대를 왜곡되게 묘사하는 일은  당사자로서는 심각한 모욕일 수 있다. 만일 서구의  유명 예술 
작품들이 한국 여인을 자유분방한 요부  정도로 형상화한다면 우리는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게 될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집시들은 아마도 우리를  포함한 문
명인들의 집시관에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구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집시, 특히  집시 여인을 신비한 소재로 여겼다. 서구의 창작물에 등
장하는 많은 집시 여인 중에서도 대표격인 두 여인은 카르멘과 에스메랄다이다.
  카르멘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이다. 맨발로  사뿐히 걸으며 웃음을 흘리는 
카르멘은 숱한 남성들의 흠모 대상이다.  돈 호세 상병도 그녀에게 매료되었는데, 그는 짧은 사랑
의 행복을 맛 보지만 결국에는 파멸하고 만다. 돈 호세의  비극은 전적으로 카르멘의 집시다운 사
랑관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는 한 남성과의 일대일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돈 호세를 떠
나려 한 것이다. 돈 호세는 이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호세의 협박과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카르
멘이 결별을 계속 고집하자, 돈 호세의 칼이 카르멘의 복부에 깊이 박힌다. 이리하여 견실한 청년
이었던 돈 호세는 살인자로 전락하고 만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또 다른 집시 여인을  창조한다. 그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혹은 소설의 영화판 제명인 <노트르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집시 여인은 에스메랄다이다. 카르멘
은 한 청년을 파멸로  몰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 이상이다. 그녀는 성직자 프롤로를  욕망에 불타
오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층민인데다가 기형아인 콰지모도까지 사로잡은 여인이다.  결국 에
스메랄다는 숨지는데 콰지모도도 그녀를 따른다. (월트 디즈니사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본 사람
들은 해피 엔딩을 기억하겠지만 원작은 비극이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성적 매력으로 충만해 있고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가 집시 여인이다. 그
런데 자유의 이미지는  집시 여인뿐 아니라 집시  일반에도 적용된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집시는 
절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르지만 
거짓일 때는 집시들로서는 분명 불쾌한 모함일 테고 당장 거두어들여야 할 편견이다.
  집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은 더욱 부정적이어서 심각한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서구에서 집시
는 자유로울 뿐 아니라 부도덕하고 무능한 부랑자로 여겨져 왔다.  그런 편견은 결국 집시가 겪었
던 여러 가지 고난을 야기했다. 최근  밝혀진 강제 불임 시술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치 독일
은 물론이고 미국, 스웨덴, 벨기에  등 서구 국가에서는 1970년대까지 우생학을 근거로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이의  출생을 막자는 게 그 기본 목적이었다. 서구의  위정자들은 가난뱅
이와 지진아 그리고  법규 위반자를 잡아들이고 생식 능력을 제거한다면  곧 사회 문제가 일거에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다. 현대  문명의 야만성을 증명하는 강제 불임 시술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
다. 정확한 국가별  통계는 아직 없지만 스웨덴에서만  약6만 명 이상이 가족과 본인의  동의없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강제 불임  시술의 희생자 중에는 상당수의 집
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집시는 본래 열등하고  위험한 부랑자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런 만행이 거리
낌없이 자행될 수 있었다. 서구인들의 집시관은 때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때로는 지독히 부정
적이다. 그것은 당연히 집시들로서는  왜곡된 집시관이 원망스럽기만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의 집시관도 서구에서 전염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가슴  속에도 소수 민족 집시에 대한 
근거 없는 신비감과 혐오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사의 주변만을 맴돌았던 집시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이 가치가 있다면, 그 이유는 집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시의 기원과 유랑의 역사

  정착하지 못해 떠돌아다닐 뿐이고 사회의 주변에 위치하며, 대개  검은 머리칼과 짙은 피부색을 
지닌 집시들은  어디서 솟아난 집단인가.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앤터니 퀸  주연의 <노트르담의 
꼽추>(장 델라누아 감독, 1957년)에서 답을 찾아보자고 제안할지 모른다. 영화에서 매혹적인 메스
메랄다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본 파리사람 몇몇이 대화를 나눈다. “저  여자는 대체 
뭐지?” 그러자 다른 이가 대답한다. “이집트에서 온 여자이지요.”  15세기 말엽, 정확히는 1487
년이 배경인 영화에서 집시는 이집트 출신의 무리라고 설명되고 있다.
  엄격한 논픽션 문헌에서도 집시의  기원에 대한 동일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1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최초의 포르투갈어 사전에는 집시가 `이집트 민족 출신으로서 거처 없이 영원히 방랑하
도록 신의 형벌이 내려진 무리`로 정의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18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이 
집시를 이집트 출신의 이방인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집트인(Egyptian)의 
두음이 소실된 결과 집시(Gypsy)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설명을 납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영화 <느트르담의 꼽추>나 포르투갈어 사전의 설명이 사실일까. 물론 사실이 아니다. 착각 또
는 어림짐작일 뿐이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에게 집시는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가끔 마주치는 
요상한 무리에 불과한 집시가 신성한 아카데미즘의 연구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유럽인들의 연구가  진행되어, 집시 언이인 로마니(Romany)가 옛 인도  언어 산
스크리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수백 년 동안의 통념과는  달리 집시의 고향이 이집
트가 아니라 인도 북서부  지역이라는 사실도 확인된 것이다. 집시가 인도의 사회  제도와 무관한 
외부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카스트제도의 한 층위에 속했던 집단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지만, 
집시의 기원지가 인도의 북서부 지역이며  11세기 초 그곳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류의 위대한 모험이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행해졌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인류는 당연히 유럽인들을 의미하는데, 유
럽인들은 태양이 잠기는 곳에 대한  무의식적인 탐구욕에 이끌려 서쪽을 향한 여행을 감행했다는 
것이며 그 대표적 인물로 율리시스나 콜럼버스를 예시한다. 유럽  문명인이 아닌 집시도 서쪽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이동은 위대한 모험심이나 지적 욕구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흔
히 생각하는 것처럼 집시가 방랑을  즐기는 천성을 지녔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1,000년에 걸친 
집시의 유랑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설명할 유럽인들의  집시 박해가 유럽에서의 집시의 유랑을 해명하는  열쇠라면, 집시가 
고향 인도 북서부 지방을  떠난 이유는 이슬람 세력의 잦은 침략 때문이었다. 6세기에  성립된 이
슬람 문명권은 무하마드의  죽음 이후 사분오열되기 시작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영토확장 노력은 
계속되었고, 11세기 초에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 지역까지 진출한다.  이때의 이슬람 침략 때문에 
집시들은 고향인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비잔틴
제국 등을 거치면서 계속 이동한 집시들은, 13세기 중반에 유럽 남서부의 발칸 반도(그리스, 알바
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구성된 반도)에 도착하게 된다. 집시가 영국, 스페인,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을 포함한 유럽 전지역에 도착하게 된 것은 15세기 말 또는 16세기경이다.
  그들은 개척기의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계약 노동자로 파견되거나 추방되었다. 
19세기 동안에는 주로 러시아나 발칸 반도에서  많은 수가 아메리카 등 유럽 외부로 이주하기 시
작했고 현재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 집시는 끊임없는 이동과 생활 유지를 모두  가능하게 할 기능을 익혔다. 주로 
가축 치료, 점성술, 금속  제품 수선 등이 집시의 특기였는데, 특히 그들이 비잔틴  제국에서 익힌 
금속 제품 관련 기술은 발칸 반도  지역에 이르렀을 때 효용성이 큰 기능이었다.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을 꽃 피운  것으로 유명한데, 그 문명의 화려
함은 당연히 부의  축적으로 가능했다.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서, 특히 사치품이나 금속, 유리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 수준이 그 밖의 유럽 지역과 비교할 
때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집시들은  비잔틴 지역에서 금속 관련 기술을 습득하여 발칸  지역 등지
에서 필요한 기능성을 발휘하였으며, 이 기술은 그들에게 생활 유지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집시는 끊임없이 유랑을 해야 하는  집단이었기에 뚜렷하고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
다.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 조직은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크리스(kris)라는  것으로 이것은 사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규범을 세우고 또한  규범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파문이나 추방  같은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집시  집단들의 대표
들로 구성되는 비스타(vista)라는  대표단의 기구가 있는데, 비스타는 느슨하나마 인근  집시 집단 
사이의 연대를 유지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덜하지만 서구에서는 집시들 중에 `집시 킹`이라
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절대 군주처럼 모든  집시들을 일괄 지휘하고 집시들의 추앙
을 받는 존재를 기대하는 것인데,  집시 킹은 서구인들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다. 집시 사회에서
는 그런 신비한 우두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시들은 소집단별로  위계와 규범을 세우고 생활하
고 있다.
  집시는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인 공통성을 찾기가 쉽
지 않다. 물론 집시들의 결혼 의식이나 장례식 또는 세례의 방식들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 집단
이 머물렀던 지역 사회와의 교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어도 그들이 살았거나 거쳐간 지
역 언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집시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법에 종속된 존재들로 살아간다. 
종교만 해도 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종교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 이슬람,  카톨릭,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집시들과 주변 사회의  교류나 동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시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오
랜 기간 동안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폐쇄성과  유랑을 집시의 본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집시라고 해서 불안정한 이동과 배타성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고향을 떠난 집시들은 한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박해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이 집시의 정착  가능성을 앗아 갔다. 많은 국가에서는 집시의 차별을 법제
화한 경우도 많았으니, 집시가 유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주위
에서 그렇게 박해가 지속되었으니  교류의 문을 닫는 편이 자연스럽다. 집시는 주위  사회가 받아
들이지 않고 내쫓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랑하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유럽인들의 착각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명명 과정이 부당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집시의 경우에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명
백히 집시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시들 자신도 집시라는 명
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는 집시들의 원천을  부당하게 왜곡하며 동시에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마니 민족(Romani  people) 또는 롬(Rom)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집시들의 주장이
다. 하지만 앞으로도 집시라는 명칭이  일반적 표현으로서 유지될 것 같다. 집시를 경멸하는 일반
의 태도는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는 집시 박해의 역사만큼이나 완고한 경향이다.

  불가촉의 천민, 집시의 수난사

  고대부터 모든 사회는 특정  분파를 일탈 집단으로 규정하여 통제하고 배척해 왔다.  예를 들어 
살인자, 창녀, 정신 이상자, 노예  등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대개의 경우 이 일탈 집단들은 
우발적 사건이나 사회의 신분 질서에 의해 규정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집시는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공식적 배척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유럽 문명인들은 낯선 떠돌이 집단인 집시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품었고, 
그런 편견은 숱한  법제적인 박해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지금  집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집시가 쓴 집시의 역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의 집시 역사는 서구인들이 제정한 집시 박해 법률의 기록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집시의 여정이 곧 박해와 수난의  과정이었음을 이 사실만큼 선명하게 보
여 주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집시는 종종 그들의 고유한  기예 때문에 질곡의 삶에 빠져들었다. 
특히 금속 제품을 다루는  그들의 솜씨는 그들을 옥죄는 결과를 낳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집시들
은 비잔틴 제국을 거치면서 금속 제품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
칸 반도에 도달한 후 한동안 그 기술은 생계 유지의  수단이었다. 그런데 집시의 유용성을 인식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집시를 곧 노예화하고자,  14세기 초반 집시들을 고용주의  재산으로 
규정하는 법령을 제정한다.
  그래서 애초에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난  집시 전체의 절반 정도가 향후 5세기 동안 노예 상태
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에 붙박혀야 했다. 루마니아의 경우 1855년에 이르러서야  집시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 신세를 면한 나머지 집시들이  발칸 반도에서 서부와 북부 유럽
으로 이동했지만 그들의 삶도 자유롭거나 행복할 수는 없었다.
  집시가 유럽 본토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 때문이었
다.
  13세기 후반까지 약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인들은 이슬람 지배하의 성지를 회
복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결국 유럽 사회 전체에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포
와 증오를 불러왔다.  15세기경 집시들이 유럽 서부 지역에  도달하자, 유럽인들은 집시를 이슬람 
세력으로 한동안 
오해한다. 집시는 이집트인(Egyptian) 이외에도  터키인(Turks), 타타르인(Tartars) 등으로 불렸던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유럽인들에게는 이슬람 공포를  유발할 만한 외모를 지닌  집시들은 
그래서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집시가 이슬람 세력의 침략 때문에  고향을 잃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집시가 박해를 받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존재들이다. 낯선 풍습과 속성을 지닌 집시들이 대거  밀어닥치는 일은 
기존 체제에는 위험이 아닐 수 없었고,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해졌
다. 그래서 발칸반도를 떠나  유럽 본토에 도착한 집시들은 수세기 동안 차별과  박해를 감내해야
만 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집시가 불가촉 천민, 즉 천민 증의 천민이었다. 실은 많은 경우 집시는 인간이 아니
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있는 존재였고 때로는  돼지 한 마리 값에 거래되었다
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8세기 프러시아에서는 집시들의 유랑 생활 자체가 불법으로  여겨져 18
세가 넘은 집시는 재판없이 교수대에 매달 수도 있었다.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1499년에서 1783년까지 집시의 의복, 언어, 관습을 금지하는 공식적 법령
이 10여 차례 이상  제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539년 최초의 공식적인  집시 억압
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함선인 갤리선의 노를 젓는 소모품 노예로 집시를  이용하기 시작했
다. 네델란드에서는 집시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각했는데, 1695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추방 명령이 
내려졌고 그 이후에  발견된 집시에게는 첫 번째는 공개 태형,  두 번째는 낙인, 세번째에는 공개 
처형의 처벌을 내렸다.
  영국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서의 반집시 법령은 헨리 8세 때부터 제정되었다. 
1530년에는, `이집트인 법령(Egyptions  Act)`이 제정되어 집시의 영국 이주를  금지했다. 메리3세
와 엘리자베스1세에 의해서도 집시는  극형에 처해졌다. 1743년의 한 법령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
되어 있다.
  “집시의 모습을 하거나, 이집트인의  모습이나 관습에 따라 방랑하는 자 또 예언하는  자는 모
두 부랑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서, 집시가 한곳에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집시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해와  편견은 증오심
으로 발전하여 집시들을 끊임없이 도피하게 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도 집시에 대한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극명한 예는 나치의 집시 대학살이다. 약 40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위험 세력으로 몰려 
학살되었던 것이다. 집시 희생자의 수는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에 비하면 적지만, 유럽에 거주하
던 집시의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 점을 확인하면 얼마나 철저한 집시 사냥이 진행되었는지 짐작
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집시의 대재앙은 정확히 규명되지도 않았으며  현대 대중들
에게도 낯선 정보이다.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양심들이 큰 관심을 갖지는 않지만 집
시는 여전히 큰 위험을 감내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는 집시들의 비극이 더욱 분
명하다.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면서 집시는  또 다른 곤경에 처한다. 사회 질서를 유지할 강제적 
공권력이 약화되면서 집시에 대한 편견과 적대감이 되살아난 것이다.
  1995년 부활절, 루마니아의  한 마을에서는 교회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성직자와 지방  관료들의 지휘에 따라 사람들은 집시의 집을 향했고  26채의 집
시 가옥에 방화를 자행했다.  체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집시들의 집은 죽임을  당했다. 그
래서 사회주의 몰락 후  수만명의 집시들이 동구 지역을 탈출하여 독일로 피신했으며,  보호 시설
에 수용되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듯이 극우 신나치가 설치는 독일은  집시들에게 안정
된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집시는 힘없는 소수 집단이기에 그런 사회적 박해와 폭력  앞에 무방
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집시의 오늘

  영화 <집시의 시간>(에밀 크스투리차 감독, 1988년)의 영화적 표현 기법을 흔히 마술적 리얼리
즘이라 부른다. 이  영화가 마술처림 신비한 현상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이  영화에서 주인공 페르카니는 눈길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력
을 지니고 있다. 동전  따위를 벽에 달라붙게 만드는 일은 기본이고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포크를 
날려 악한을 응징하기도 하는데,  이 신비한 장면들은 마치 거리에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필
름에 담듯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철로 옆에서  출산을 하는 동안 그녀의 몸
은 2미터쯤 공중에 둥실 떠올라 있는데, 이 모습도 역시 자연스럽게 묘사되었다.
  <집시의 시간>이 지향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불릴 만한 이 표현기법은,  그 내용과도 긴밀
히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서구인들한테 이방인이며 요상한  집단인 집시를 자연스런 집단으로, 
다른 민족들과 공존하고 함께  상호 작용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존재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일하게 집시의 시각에서 혹은 서구인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집시의 모습을 보
여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영화를 통
해 현대 집시의 삶의 모양을 읽어 낼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한 지역 이그라주이다. 이곳에는  집시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주인공 페르카니는 주술사였던 할머니와 바람둥이 삼촌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여동
생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년이다.  이 영화의 악당은 중년의 남성 아메드이다. 그는 아이들
과 부녀자를 사들여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매춘, 앵벌이, 도둑질 등을 시키고 부를 쌓은 인
물이다. 페르카니도 아메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는 돈을 벌어서 사랑하는 
소녀 아즈라와 결혼하고, 동생의 다리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이 꿈이었다.
  아메드 등이 머물고 있는 지역에 경찰이 들이닥쳐 아메드의  조직은 와해되고, 병약해진 아메드
는 페르카니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페르카니는 아메드와 똑같은 행위를 답습한다. 순수한 소년이
었던 페르카니는 이제 일탈자 집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이들을 도심으로 내몰아 구걸하게 
하고 좀도둑질과 매춘 등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렇게 해서  숨겨 두었던 돈이 홍수에 휩쓸려 
사라지고, 아메드가 그를 배신하자 페르카니는 돈도 순수함도 없이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로 변모
한다.
  4년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동생과 자신의 아들을 찾은 페르카니는 자신의 
불행을 불러들인 악한 아메드에게 복수하려 한다. 아메드의 결혼식  파티장으로 들어가 정중히 인
사를 한 뒤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염력을 발휘하여 아메드의 목을 향해 포크를 날린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그는 또 다른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결혼식을  망쳐 버린 페르카니를 아메드
의 새로운 신부가 쫓아와 권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집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
다. 정착한 집시들도 많이  있지만 정착 여부에 관계없이 집시는 사회의 가장  주변적인 부문으로 
내몰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시의  사회 경제적인 지위에 대한 지표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왜냐 하면 집시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통계  작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런 통계 작업을 어렵게나마  진행할 집시의 정치 기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영국과 
같은 개별 국가에서 진행된 통계가 최소한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현재  영국에는  1만  2,600가구의 집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전시간
(full-time) 취업 상태에 있는 집시는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집시 특유의  이동 시장을 열어서 수입
을 얻고 있다. 취업률이 낮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집시의 교육 기회가 다른 어떤 소수 집단보
다 낮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집시에 대한 일반인들의 근거 없는 편견 때문이
다. 많은 사람들은 집시가 범죄를  쉽게 저지른다고 믿고 집시를 고용하기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시에  의한 범죄의  비율은 전체  평균 범죄율보다 
0.46% 정도 높을 뿐이고, 1992년  영국 경찰은 집시 공동체가 범죄를 양산할 위험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집시는 천성적으로 일을  꺼리는 부랑아 집단이라고 생각하
는 일반인의 편견도 집시의  열악한 사회적 조건을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사회의 평균치와 
비교할 때, 집시 공동체의 어린이나 여성의 가계 기여도는 훨씬 높은 수준이다.
  700년 전 유럽에 첫발을 디딘 집시들처럼 현재의 집시들도  여전히 악의적 편견의 대상이며, 그
런 편견이 집시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저해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시
들은 몇 가지 국제 조직을 구성하여  자신들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동시에 집시들의 권익 보호를 
추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국제 집시 연합(International Romani Union)으로 이 단체
는 1971년부터 유엔 경제 사회 평의회의 일원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유니세프와 유네
스코에 집시의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인도와의 연계를 위해서도 1970년대 중반 인도  집시 연구
소(Indian institute of Rom-  ani Studies)라는 연구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집시들의 조직은 
무엇보다 인종주의의 극복과  집시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의 학살과  관련된 전쟁 배상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
되었듯이 집시가 각지에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명실상부한 정치 권력을 결여하고 있기에 이러한 
국제 조직이나 연구 단체들이 힘을 얻기는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현재 집시의 정확한  인구는 밝혀져 있지 않다.  아직도 이주하는 집단이 많으며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조사에 따라서 상당히 큰 편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여러 문헌들은 집시의  인구가 약300만에서 800만 명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그  중에서 많
은 수의 집시가 발칸 반도나 옛 소련 등에 살고 있고 서부 유럽이나 중동 지역 그리고 북부 아프
리카에서도 집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집시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도  생활하고 있
다. 집시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집단에서 평가한 집시의 수는 앞의 조사와 크게 차이가 난다. 국제 
집시 연합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900만에서 1,200만 명의 집시들이 살고 있다. 아메
리카 대륙에는 1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600만에서 800만이 유럽, 특히 발칸 반도지역에 살고 있
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보브 딜런 감독의 <르날도 앤디 클라라(Renaldo and Clara)>

  금세기 최고의 포크  싱어 보브 딜런이 연출한  영화가 있다. 르날도(보브 딜런)와 클라라(사라 
딜런)와 또 다른 여인  존 바에즈의 삼각 관계가 영화의 기본축이며,  그들의 투어 콘서트 장면이 
또 다른 중심 내용이다. 보브  딜런이 각색과 연출을 담당했으며 또 다른 유명 가수  존 바에즈나 
로보타 플랙 등도 출연하니,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유명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78년 제작된 이 영화는 상영 시간이 무려 3시간 52분에 달할 뿐 아니라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았다고 자부하는 <버라이어티 영화 가
이드(Variety Movie Guide)> 1994년판에서도 제외되고  있다. 영화를 직접 보는 일은 불가능하지
만 다행히 보브 딜런의 광적인 팬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세밀히 정리한 문서를 인터넷에서 발
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가장 지성적인 가수의 집시관인데, 보브 딜런  역시 지배적
인 집시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영화 속의 여성 집시는 신비하고 헌신적이며  주변적인 인물
이다. 이 영화에서 집시 여인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우선 집시 여인은 매춘부의 모습이다. 또한 
가수로서도 등장하여 낯선 언어로 노래를 부르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시 
여인은 헌신적인 여성이다.  한 백인 남성이 기도를 하며  고통을 삭이고 있는 동안 집시  여인이 
집시 특유의 마술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 남성을 달래는 모습이 발견된다. 그렇게  보브 딜런 
같은 엘리트 가수에게도  집시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신비하고  주변적인 존재일 
뿐이다.

  집시 음악과 춤

  방랑자는 높은 예술성을 지닌다는  가설이 억측만은 아닌 것 같다. 예술은 자기  위안의 방편으
로 발전한 것이라고  할 때, 정착과 안주가  불가능하기에 불안정을 감내해야만 하는  방랑자들은 
춤과 음악 등의 활동으로  스스로 위안하려 애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랑  집단 집시는 
특히 음악과 춤에  뛰어난 엔터테이너였다. 그들은 스페인의 남부 지역인  안달루시아에서 강렬하
며 비감어린 춤과  음악의 장르, 즉 플라멩코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스페인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간접적인 표현 수단이었다고  한다. 이 스타일의 음악과  춤은 스페인 전역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전해졌는데, 70년대 유명했던 그룹 `집시 킹스`가 현대화된 플라멩코 음악을 들려 준 대표적 대중 
음악가이다. 그리고 실제 집시였던 장고 라인하르트의 재즈 기타  연주 기법에도 프라멩코가 영향
을 미쳤다고 한다.
  고급 음악의 경우에도  집시의 영향은 적지 않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에서는  바이올린과 침발롬 
연주자 등으르 구성된  특유의 집시 오케스트라가 발전하여  현대 집시 음악의 전형을  이루었다.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는  집시 합창단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고 하며, 최근 음악  이론가들은 
유럽의 고전음악, 특히  리스트, 드보르작, 베르디, 브람스 등의  작품에 집시 음악의 영향이 배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풀리지 않는 송사 - 아랍인과 유태인

  나쁜 아랍인, 가련한 유태인

  사람의 기억은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에 크게 영향받는다. 영화의 스펙터클을 즐기는 사이, 영
화 속에 숨겨진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관객들에게 스며들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지식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세상사를 판단하는 데 잣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속 주장이 관객에게 이식되는 과정은, 영화 관람
과 함께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영화 관람으로 굳어진  우리의 기억은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이번 장에서는 그 중 한  가지를 
주목하려 한다.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그것이다. 우리는 유태인을 가련한 민족으
로 생각하며, 반면에  아랍인에게는 웬지 모를 적대감을 느낀다.  그런 감상들이 미국영화의 묘사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보다는 영화가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이상을 결정
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아랍인과 유태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먼저, 아랍인들은  무지하고 과격한가? 많은  영화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레이더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1년)의 주인공  인디애나 존스(해리슨 포드)는 카이로의 시장 바닥에서 아랍인
과 대결을 벌인다. 능숙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는 그 아랍인의 모습에 관객들은 잠시 긴장하지만, 
인디애나 존스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심드렁할 뿐이다. 칼솜씨  자랑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에 
인디애나는 총탄 한 발을 날리고 아랍인 검객은 피식 쓰러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비드 린  감독, 1962년)에서 아랍인들은 더욱 답답한  모습이다. 자신
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미숙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로렌스의 헌신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했을 종족으로 보인다.
  아랍인들에 대한 모든 편견을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트루 라
이즈>(제임스 카메론 감독, 1994년)이다.  이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잔인무
도하고 비열한 테러분자들이다.
  크림슨 지하드를 이끄는 아지즈라는  인물이 다음과 같이 비장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
부녀자들을 살해하고 우리들의  고향을 파괴한 미국이 어떻게 우리를 테러  분자라 부를 수 있는
가. 미군이 페르시아만에서 즉각 완전 철수하지 않으면 핵탄두로  미국의 대도시를 파괴하고 말겠
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거대 강국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장한 
연설 장면을 열심히  촬영하던 부하의 캠코더는 건전지가 이미 다  방전되어 깡통에 불과할 뿐이
다.
  이렇듯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난폭하고 바보스러운 불한당이거나  이해 못 할 종교에 
젖어 있는 군상들로 묘사된다.
  그러면 유태인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영화는 그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어서,  유태인들은 주
로 가련한 피해 당사자로 그려진다.
  유태인 영화의 전형은 주로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이전의 시대가 배경인 영화에서도 
고통받는 유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
았는지 보여 주는 영화 <벤허>(윌리엄 와일드 감독, 1959년),  20세기 초반 러시아에 살던 유태인
의 고난을 그린 <지붕 위의 바이올린>(노먼 주이슨 감독, 1971년) 등이 그것들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유태인의  수난을 가장 끔찍하게  묘사한 영화로 <소피의  선
택>(앨런 J. 파큘라 감독, 1982년)과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92년)을 들 수 있
다. 특히 실화를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는 가스실에서의 참혹한 학살 장면, 유태인 시신이 집
단 소각되는 모습, 아이들이 죽음을 피해 화장실 분뇨통에 몸을  숨기는 모습 등을 대단히 상세하
게 그리고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근거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진정한 가해자
와 피해자는 누구이며, 그들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의 매듭은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
야 하는 것일까?

  선택된 민족의 장구한 수난

  민족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가 완전히  운명을 공유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민족의 외피로 여겨질 수 있다. 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여러 국가를 세
울 수도 있고, 동시대에도 같은 민족이  여러 국가의 국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민족
이 국가라는 그릇을 여럿 만들고, 그 그릇들 중 몇 개는 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에서 유태인은 여간 독특하지 않다. 역사를 통해 유태인이 건설한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며, 
고대 이스라엘이 몰락하자 수천 년 동안 유태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마
침내 20세기 중반 이스라엘이 (재)건국되었을 때에야 유태 민족은 국가를 얻은 것이다. 유태 민족
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부침을 함께 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곧  유태인의 
역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경 현재의 팔레스타인, 즉 이스라엘 지역에 세워졌다. 기원전 13
세기 모세가  등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능해졌다.  그는 약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유태인들을  이끌고 출애급을 감행한다. 모세가  유태인들을 이끌고 간 곳은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나안 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모세가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또한 신과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유태교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창조자는  유태인과 계약
을 맺는데, 신은 유태인에게 위대한 나라를 제공할 것이며 유태인의  영원한 믿음이 그 반대 급부
로 설정되었다. 유태인 특유의 사상인  선민 사상, 즉 자신들은 절대자가 선택한 민족이라는 믿음
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가나안 땅에 뿌리를 내린 이스라엘은 곧 번성하고 , 특히  사울, 다윗, 솔로몬 왕이 지배할 시기
에 그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스라엘의 부와 영광의 상징인  거대한 성전을 건립하고, 아프리카, 아
시아, 아라비아를 잇는 무역로를 열어 무역과 산업 발전을 이루는  등 황금기를 일군 군주가 지혜
의 왕 솔로몬이다.  그러나 그의 사망(기원전 931년)  이후 이스라엘은 두 개의 국가로  양분된다. 
북부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급격히 쇠하기  시작하여 결국 북부는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이후
에도 유태인들은 가나안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마카바이오스 전
쟁에서와 같이 외세에 맞서 항쟁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남
유다가 몰락함으로써 `유태인의  분산`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인은  2,000년 이
상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전세계에 흩어져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유태인의 대표적인 수난  장면을 중세와 현대에서 각각 한  가지씩 꼽을 수 있는데, 중세  때의 
악역은 유럽의 국가들이며 현대의 악한은 당연히 독일 나치이다.
  중세 교회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행에 가담한 집단이라는 명분으로 유태인을 탄압
했다. 20세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원형을 중세 교회의 유태인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15년 카톨릭  공의회는 반유태주의를 천명하는데, 이 결정은 유태인 차별에 머
물지 않고 유태인의 격리와  고립을 제도화한 것이다. 앞서 이슬람 세력이 유태인에게  노란 표식
을 옷깃에 달도록  의무화했던 것처럼,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에서도 유태인은 각  국가가 
지정하는 표식을 달아야 했다.  그리고 많은 유럽 국가들은 게토라는 구역에 유태인의  거주를 제
한하였고, 유태인의 경제 활동도 기독교적 윤리에 위배되는 직종, 예를 들어 고리 대금업 등에 한
정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서유럽의  적개심은 14세기에 더욱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표출된다. 그
시기에 유럽 인구의 30%  이상이 흑사병으로 숨지는 끔찍한 상황이 닥쳤는데,  유럽 국가들은 이 
재난을 유태인의 음모 탓으로 돌린다. 즉 유태인들이 기독교도들의  우물에 독극물을 타서 일어난 
재앙이라고 믿고 집단적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유럽 시민들은  가족이 흑사병으로 숨질 때
마다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키웠고,  그런 분노는 유태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와 학살을 불러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편견이  개인들만을 결박한 것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악감정은 법제화되어 
14세기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유태인의 강제 추방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이  정착한 곳은 폴란드와 러시아 등
지였다. 17세기 중반 폴란드에는 약  50만 명의 유태인이 살았다. 그런데 18세기 말엽에 들어서면 
사정이 역전된다. 이번엔 동유럽 국가들이 유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
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개념을 시민의 무력으로 표현하고 현실화한 사건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부근 유럽 국가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유태인에 대
한 관용적 태도를 낳은  주요한 정치적 원인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었다. 유태인들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 등으로의 이주를 허락받을 수 있었고, 또한 유태인이 좀더  자유로운 기회의 땅을 찾아 아
메리카 대륙 등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진출한 것도 이 시기이다.
  유태인이 제도적 박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태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악감정들은 은밀히 잠재되어 있다가 20세기  초반 한 정치 집단의 만행
을 통해 가장 잔혹한 형태로  표면화된다.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대학살의 칼날은 집시, 동
성애자, 사회주의자, 슬라브  민족 등 여러 집단을 향했지만 유태인도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어원상 `완전히 불태우다`라는 의미로, 본래는 제물을 불태우는 종교적 
의식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집단  살상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는 나치에 의한 조직적인  살상 행위
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주동자는 나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10년  남짓의 기간 동안 1,0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조직
적으로 학살되었는데  그 중 600만 명이 유태인이었다.
  1933년 집권과 동시에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사회적 지위나 종교 등  모든 후천
적 조건과는 관계없이 혈통이 유일한 기준이었는데, 일단 유태인임이  확인되면 모든 사회적 기회
가 박탈되었다. 유태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의사직과 변호사직도  잃었으며 대학에서도 퇴학당
했다. 1939년에 이르면, 유태인은  독일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다. 재산권  상실은 물
론이고 게르만족과의 접촉도 금지되며 도서관이나 공원 등 공공 장소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
리고 원칙적으로 게토에  수용되어야 했다. 게토에서는 유태인들이 물품을 생산하여  밖으로 내면 
나치가 식료품을 반입하는  형식이었지만 기근에 의한 죽음이 빈발했다. 1941년에는  유태인이 전
화나 공공 운송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6세 이상의 아이들은 모두 노란별  모양의 배지
를 달아야 했으며, 12세 이상의 아이들은 군수품 생산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히틀러는 대중 선동과 대중  심리 조작에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특유의 선동 
능력으로 독일인들의 가슴 속에  있던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을 일시에  몰아 낸다. 
대신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지도자에 대한 맹종을 설득해 냈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광신적
으로 단결한 독일의 목표는 게르만 민족의 세계 패권 장악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권 장악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목표라기보다 당의였다. 히틀러의 선동, 그 기저
에는 강자의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깔려 있었다. 유전학과  우생학을 근거로 볼 때 게르
만 민족이 생래적으로 우월한 존재이니  게르만의 세계 제패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
라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국경을 넘어 인접 국가들을  정복하고, 내부적으로는 결속과 응집을 
저해할 열등한 집단들을 근본적으로 격리하는 일이 필요했다.
  나치의 탄압 대상에  정치적 반대 세력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겠지만, 왜 하필 유태인이었을까. 
여기에는 앞에서 보았던 유태인에  대한 유럽인의 뿌리 깊은 편견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나치가 
채택한 프랑스 학자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 1816~1882)의 인종 
이론이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고비노는 백인, 특히 독일  국민이 인류 문명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유태인은 생래적으로 열등하고 비열하기 때문에 유럽 문화를 훼손할 위험을 지닌 민
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편견에 불과하지만, 유태인 학살의 이론적 근
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유태인에 대한 일반의 악감정이 깊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태인 학살의 또  다른 원인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태인뿐 아니라 여러  소수 
집단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가공의 적을  창조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기하는 
고전적 정치 전략임을 알 수 있다. 위험한 무리의 존재  사실은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게 마련이
고, 적에 대한  응징 과정은 출정 직전의 축제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나치는 유태인 
등을 배척하고 학살하면서 자국 내의 전체주의적 단결력을 높였던  것이다. 이렇게 유태인의 학살 
배후에는 유럽인들의 편견과 나치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격리하고  차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에 이주, 격리시키려던 이전의 계획은 백
지화되고, `최종 조치`를 위해 살인 캠프를 준비한다. 유태인을  분류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최종
적으로 학살하는 장소가 된 이 수용소는 독일이 점령한 유럽 각지, 특히 폴란드에 여럿 세워졌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각 수용소 근처의 게토에서 유태인들이 대거 옮겨진다. 
여성, 노인, 어린이 등 노동력이 없는 유태인들은 곧  살해되었고, 노동력이 있는 유태인들은 공장
이나 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된다.
  나치는 샤워 시설이  갖추어진 가스실에 유태인들을 몰아넣고  가스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아주 
손쉽게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희생자들을  즉시 집단 화장하여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 나
치의 눈에는 인간이 철저하게 노동력으로  계산, 치환되고, 육신도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골치 아
픈 물건에 불과했기에 아무 죄책감 없이 소각해 버릴 수 있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범죄였다.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에 
거주하던 830만 명 중에서  600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런 수치에서  유태인에 대
한 학살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이성
적 폭력이 유태인에게 가해졌고, 유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야만적  광기에 의해 무력하게 희생되어
야 했다.
  그런데 이 즈음 유태인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엄청난 수의 동족이 희생된 2차  대전이 종결
된 직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2,000년만에 부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나라를 세운 땅이 공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곳은 아랍인들의 고향이었다. 유태인들은 남의 터
전을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비극적인 희생자의 모습에서 침략자로 일순간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유태인들의 건국은 아랍인들의  희생만을 낳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아랍
은 미국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고, 그 결과 미국 영화에서 아랍인은 악한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아랍인의 저항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 진행될  동안 유태인들은 천우신조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이스라엘 건
국의 조건들이 하나씩  마련된 것인데, 유태인의 건국  열망은 시오니즘(Zionism)으로 구체화되었
다. 시온은 종교적 믿음이 견실한  자들이 도달하게 되는 유태교의 이상향이고, 과거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언덕 명칭이기도 하다.  시오니즘은 고향이자 성지인 예루살렘, 즉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 조국을 건설하려던 유태인의 열망이 이념화된 것이다.
  시오니즘은 유태교에서 말하는 신과 유태인의 약속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뿌리는 오래 된 것
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치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고 이 시기  시오니즘을 주도한 
인물이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다. 그는 1896년 <유태인 국가>라는 문건을 
통해 전세계 유태인 문제는 곧 유태인  국가를 건설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세계 
유태인을 열광시킨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시오니스트 회의를 바젤에서 개최한다. 유태인의 조
국 건설을 향한 소망이 최초로 조직화된 것이다. 헤르츨은  단명했기에 오랫동안 시오니즘을 지휘
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건국에 그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오니즘의 최초의  공식적 성과는 1903년  가시화된다. 영국이 아프리카 우간다의  비거주지를 
유태인의 나라로 제의한  것인데, 물론 시오니스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영국이  이처럼 즉
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시오니즘의 밝은 미래를 예고했다.  유태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왕
국이 건설되었던 지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집했고, 이런 시오니즘의 주장은  1917년 관철되기
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국내외  유태인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영국이, 벨푸어 선언을 통해 
최초로 유태인의 건국을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영국 외상이던 벨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
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1922년부터 국제 연맹의 위임 아래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본격화된다. 팔레스타인에 들어선 유태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아랍인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공업 및 거주 시설을 세운다.  1925년에는 팔
레스타인의 유태인 수가 10만  명이고 1933년에는 24만 명 정도였으니, 이주민 증가  속도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유태인 이주를 가속화한 것은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과 학
살 정책이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 정책이 시작된 직후인 1935년 한  해에만도 6만 2,000명의 유태인이 팔레
스타인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대거 밀입국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
치의 만행은 유태인과  시오니즘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유태인들이  독립 국가 
건설을 천명한 1942년  빌트모어 회의는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미국 내 유태인의 영향력  정도를 방증하는 사례만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 여
론도 큰 몫을 했던 것이다.
  경제력의 우위와 뜨거운  열망 그리고 국제적 지지를 업고 밀려오는  유태인에 대한 현지 거주 
아랍인들의 저항은 점차 거세진다.  유엔은 1948년 초 유태인과 아랍인 국가의 분리  건립을 제의
했지만 아랍인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런데 영국이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의 분쟁 조정에 실패했
음을 자인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그 다음 날,  즉 1948년 5월 14일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는  2,000년 동안 유태인들에게 가해졌던 숱한  박해의 원인인 유태인 국가의 
부재를 씻는 역사적 쾌거였고, 전대미문의 기적과 같은 드라마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이 점유한 땅이었다. 유태인들의 주장처럼  이스라엘 왕국이 앞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이  붕괴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여러 국가의 영토가 되었
다. 로마,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  등이 이 땅의 점령자였는데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638년부터 지배하기 시작했고,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터키  제국이 지배하는 동안에도 아랍인
들이 수십만 명 살고 있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영국의 위임 통치도 팔레스타인 거주
민들의 자치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곧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
고 있었지만, 영국과 유태인의 결탁이 밸푸어 선언을 낳았고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이었고 수백 년간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태교의 성지인  예수살렘도 이미 이슬람화되어 제3의  성지로 
여겨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이슬람의 발생지 메카가 제1성지이고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
나가 두 번째 성지이다. 예루살렘은 초기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향했던 곳이고 무하
마드가 승천한 곳이기에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아랍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유태인들이 막무가내로  밀려와 이스라엘을 세
우고 거주민을 몰아 냈으니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래서 팔레스타인 거주민 뿐만  아니라 주위
의 아랍 국가들도 집단적으로  거센 저항을 펼치게 된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  시리아, 이
라크, 레바논 그리고 트란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  등 5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유태교 
국가 이스라엘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중세에나 어울릴 `종교전쟁`이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것인데, 이 전쟁은 이슬람의 기본적 속
성 중 하나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그런데 잠시 지면을 할애해서  확인할 그 기본 속성은 서양인들
의 통념, 즉 이슬람의 생래적 호전성은 아니다. 그런 통념은 보기에 따라서는 조작된 것이며 이스
라엘과 아랍 국가의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리어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보다는 집단적인  무력 행
사를 가능하게 하는 이슬람의 종교적 특징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개괄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세계의 뿌리와 그들의 현실적 선택

  서구인들은 중세부터 이슬람 교도를 호전적인 무리로 여겨 왔다.  이슬람 교도 또는 아랍인들에
게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는 묘사가 부여된  것처럼, 이슬람 세력은 폭력적인 방법
으로 교세 확장을 기도하는 집단인 셈이다.
  그렇지만 그런 통념은 자신들도 숱한  종교 전쟁을 도발했고 타종교를 탄압했던 서구인들의 주
장이기 때문에 덜 미덥다. 게다가 의외로 이슬람 성서 코란이  개종의 강요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
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도리어 서구인들의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정치적 
야심을 정당화한 이슬람 세력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원칙적으로 이슬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벌인 종교 전쟁에서 우리가 읽어 내야 할  것은 단순한 호전성이 아니라, 단일
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특징이다.

  이슬람은 일상 생활과 경제,  정치 등 모든 사회 제도에 알라신의 가르침이  완벽히 표현되어야 
하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다. 즉 생의 모든  측면들이 이슬람적 가치에 부합하는 분해  불가능한 
단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시라도 종교적 실천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이슬람  교도가 아
니며, 마찬가지로 이슬람  정신을 사회의 모든 제도에  적용시키지 않는 국가는 이슬람의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이슬람 교도들의 일상 생활  구석구석은 종교적 실천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이슬람 교
도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들이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슬람  교도들은 하루 5번씩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절을  해야 한다. 그리고 라마단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1년에 한  달은 식욕을 
극도로 억제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알라가 무하마드에게 코란을 작성하게 한 날을 기념해, 이슬
람 교도는 한 달 동안 일몰까지는 모든 음식을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성적 욕구도 
금욕의 대상이 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화의 세금을 낸다든가 경제적, 신체적 여건이 허락한
다면 메카로 성지 순례를 해야 하는 의무도 부여되는데, 이것은  라마단 단식에 비하면 수월한 일
이라 하겠다.
  코란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한없이 나약하다. 그런  인간들이 악의 유혹과 침투에서  자신을 
지켜 나가고 신의 피조물로서  의무를 다하려면 끊임없는 자기 통제와 갱신이 필요하고,  그런 이
유에서 위와 같은 엄격한 종교적 실천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종교적  의무가 엄격히 부과되기는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에  적용되는 
이슬람 원리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특징적인 것은  이슬람이 차별에 단호히 반대하고 
사회 정의를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정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슬람처럼 정의의 실현을 개인적 의무를 넘어 중요한 사회적 의무로까지 분명히 명시한 종교는 찾
아보기 힘들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위해 무차별적 폭력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무하마드도 실은 빈곤층이나 
노예 그리고 고아 등 약자를 보호하는 데 크게 노력했다. 노예제를 예로 들어 보면, 노예 제도 자
체가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노예  해방이 종교적으로 장려된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무하마드 시
대의 노예들에게는 여러  사회적 권리가 주어졌다. 노예들은 일정 금액을  주인에게 지불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데, 노예는 분할 지불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또한 노예의 노동의 대가도 
주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와 주인이 합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주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노예의 경우에는 주인의 사망과 함께 자유를 얻었다.  코란은 출신 부족이나 인종 그
리고 빈부에 따른  모든 차별을 금지하였고 이런 평등 정신은  이슬람 사회에 반드시 적용되어야 
했다.
  현재 많은 이슬람 국가들도 사회적, 경제적 정의를 대단히 중요한 사회 원리로 여긴다. 사회 하
층에 대한 지원은 사회의  엄격한 의무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
는 부정한 부의 취득은 사회적, 종교적 범죄 행위로 간주되어 고리 대금업 등이 죄악시된다.
  이처럼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는 이슬람 사회의 모습은,  이슬람 사회를 백안시하는 우리
의 습속에 반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정의의 요구가 종교적  원리에서 직
접 솟아난 것이라 할 때, 우리는 이슬람 사회의 정교 일치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도 있다. 종교와 
정치가 상당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슬람 사회는  이슬람 종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장이며 확장된 종교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소속감이나 연대감이 강할  수 밖
에 없고 이슬람 사회의 결속력이 그 어떤 공동체보다 강고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개별 국가를  넘어서 이슬람 세계 전체에도 적용된다. 물론 현대의  이슬람 세계는 
현실적인 여러 요인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슬람 세계의 분열상은, 632년 무하마드의 
사망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할리파의 초기 4대  권력자 중 3명이 암살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역사 초기부터 빈발했다. 이슬람 제국이 건설되던 중세에도 분열과  권력 쟁투가 끊이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이슬람 세계는 수십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고 다수파인 수니파, 이란 등의 시아파, 하
와리즈 등 여러 종파가 혼재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만큼 공동체 정신이나 구심력이 강한 집단은  없다. 국적이나 종파의 차이에 
관계없이 메카를 향한 성지  순례에는 매년 수백만 명이 참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
들이 이슬람의 문화 전통을 유지하고 있어서 아직도 여러 나라의 이슬람 교도들이 하나의 정체성
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국경선으로 갈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교도들은 모두  이슬람 공
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형제들이며, 국가명은 다르더라도 각지의 이슬람 국가들은  알라신의 뜻이 
실현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정교 일치의 사회관이나 이슬람 공동체라는 개념이 성전, 즉 지하드를 가능하게 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을 뜻하는 지하드는,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슬람 정신을 전파
하기 위해 공식적 사회 제도, 즉 권력을 쟁취하는 싸움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코란은 강제에 의한 
개종과 무력을 이용한 영토확장을 모두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인들의 비난처럼 지하드가 이
슬람인들의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지하드도  역사상 빈발했던 
다른 종교 전쟁이 그랬듯이 적지 않은 희생을 낳았고 정치적 강압을 초래했음이 사실이므로 공격
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분명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지하드의 수동적인  의미가 부각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하
드의 목적이 세력권 확장에서 영토의 방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런 수동적인 의미의 지하드는 
이스라엘 건국 직후의 전쟁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의 입
장에서 볼 때, 서구 열강의  지원 아래 건국된 이스라엘은 단지 영토의 일부분을 잠식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영토를 침탈하고 신의 뜻이 지배하는 이슬람의 땅을 공격한 셈이었
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슬람  공동의 적이었으며, 주위의 국가들은 공동으로 이스라엘의 건국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조국애와 지략 앞에서는 이슬람 공동체 정신도 무력했든지 1차 중동 전쟁에
서 이슬람 세력은 완패했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의 지원과  이스라엘의 단결된 힘이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는 휴전  협정을 이
끌어 냈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1956년  2차 중동 전쟁의 승리자도 이스라엘이었다. 이  전쟁의 이슬람측 
선봉은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였다.  그는 다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수에즈 운
하를 국유화하는 민족주의적  조처를 단행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 수에즈
를 탈환하려 한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두 패로  나뉘어 군대를 진격시켰고 곧 이집
트는 영토의 일부까지 잃어야  했다. 1967년의 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막강한  공군력으로 적
을 물리치고 국제적인 분쟁 지역인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대를 점령한다. 1973년에도 전
쟁이 발발했지만 기본 전세는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완패를 거듭했으니, 아랍 연맹의 무력 도발
은 침략이라기보다는 저항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동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이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한 결과, 이제 이스라엘의 존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인 78만 명 정도를 몰아 냈으니, 이스라엘은 
출생부터 원죄를 지닌  존재이지만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잠들어 버린 것은 아니다. 1993년 기준으로 볼 때 550만 명의  이스라엘 인구 중에서 절대 
다수가 유태인들이고, 약 14%가 이슬람을 신봉하는 아랍인들이다. 아랍인들은 대개 요르단 강 서
안 지역이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펼쳐진 가자 지구에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격
렬한 저항은 일상사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자신들의 땅이며  이스라엘은 물리쳐야 할 극
악한 점령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라 이스
라엘도 자국 내의 아랍인은 물론이고 주위  아랍국을 향해 칼날을 뽑아들 태세가 항상 갖춰져 있
다.
  수십 년간 반목과 테러 그리고  전쟁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아랍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호전되기
를 기대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현실적이지 않다.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이스라엘이 서로
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부분적 자치를  인정한 평화 협정이 맺어졌을 때 세계는 잠시 흥
분했다. 이 평화 협정이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킬 역사적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5
년 11월 평화 협상의 이스라엘 대표인  라빈 총리가 암살되면서 평화의 길이 절대 순탄하지 않다
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지난 몇  년간의 사건들을 기초로 유태인과 아랍인의  관계를 
정리하고 예측하는 작업이 무의미할  만큼, 수없는 변수가 지뢰처럼 깔려 있는 것이  현재 팔레스
타인의 정치적 상황이다.

  편견을 증식하는 유태인의 영향력

  우리는 유태인이 그 어떤 민족보다도 고단한 수난을 헤쳐  왔음을 확인했다. 기원전 6세기 이후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그들은 숱한 멸시와 탄압을 받아 왔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조국 재건 의지
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2,500년 만에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기적을 이룬 유태인
의 강인한 생명력과  조국애는 감탄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등 유태인에게 
가해졌던 죄악은 역사가  지속되는 한 잊어서는 안 될  인류 전체의 상처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 
속의 유태인들은 피해자의 모습이며,  현대 문명의 가장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희생양 같
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유태인은 1948년부터는 침략자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강대국과의 거래
를 통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을  몰아 낸 결과 그들의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침략의 
결과물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직
시하는 영화가 제작되어야 온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최소한 아랍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은 영
화 속에서 사라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중동 전쟁은 유태인의  침략에 맞선 아랍인들의 저항이 그 
기본내용이었다. 미국에 대한 테러 행위도  전혀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영화 <트루 라이즈>에
서 아지즈가 미국을 비난한  내용은 완전한 허구가 아닌 것이다. 미국은 아랍인들의  적인 이스라
엘을 공공연히 지원했고, 2차 대전 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하고자 내정 간섭에 나섰으
며, 세계 평화 유지라는 명분으로  무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아지즈의 말처
럼 아랍인들의 마을과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미국의 공격에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
니 영화 속에서의 아랍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은 그리 정확한 묘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침략자로서의 면모와 피해자 아랍인의 모습을 극장에서 접하는 일은 현실적
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아랍인을  적대시하는 미국의 영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미국  영화판이 유태인의 주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영화 잡지의 
글(<누가 할리우드를  지배하는가>, 이철민, <씨네21>  제82호)에 따르면 미국  할리우드의 주요 
직책 중 60%를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다. 유명 인사  몇몇을 꼽는다면 디즈니사의 사장 마이클 아
이즈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파라마운트
사의 셜리 랜싱  등이다. 미국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한  유태인들이 어떤 경로로 미국 영화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는 모호하지만, 유태인과 아랍인을 사심없이 비평하는  영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아랍인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유태인의 적의를  사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유태인이 지배하는 영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밋밋하다  해서 역사서를 외면한다면 우리
들은 중립적인 중동 역사 지식을  얻기 힘들 것 같다. 동일한 이유에서 아랍인은 미국  영화에 대
해 다소 궁색한 대응 방식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는 유태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비롯한  몇몇 아랍 국가에서 수입 금지되었다. 그리고 <인
디펜던스 데이>를 두고 레바논의 한 이슬람 무장 조직은  유태인 과학자가 외계인을 물리치게 설
정되어 있다고 해서 이슬람  교도에게 관람 거부를 촉구했다. 전자는 분명한 명화이고  후자는 정
신 빼고 즐기면 될 오락 영화인데도, 이슬람 세력들이 그처럼  민감하고 경박한 반응을 보이는 이
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스라엘이라면  아랍 국가들이 언젠가 무력으로 침략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미국  영화 세상은 아랍인들의 저항이나 공격이 전혀 무의미할  정도로 반아
랍 세력, 즉 미국인과 미국 내 유태인의 지배가 완벽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무슬림, 아랍인

  이슬람의 발생 시기는 622년이다.  무하마드가 유일신 알라의 계시에 따라 신의  뜻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은 성립되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함`을 의미한다. 서구인들 중에서
는 이슬람을 무하마드교라고  부르지만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 무하마드는 예언자이지  신은 아
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신과  인간의 의사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이고 신의 도구와  같은 성격을 
띨 뿐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서부  도시 메카가 이슬람의 발생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재 전세계
에는 10억 정도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10만여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슬림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모든 피조물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슬
림에 해당하겠지만, 이슬람 문화권 외부에서는 이슬람 신도를 가리킬  때 무슬림이란 표현을 사용
한다.
  흔히 아랍인을 이슬람 교도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아랍인은  종교가 아니라 사용 언어를 
기준으로 범주화하는 표현이므로  부정확한 이해이다. 아랍인은 아라비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아라비아어 사용자들은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아랍인에는 
코카서스 인종 같은  흰 피부의 사람들과 아프리카 흑인계나 아시아의  몽고 인종도 포함되어 있
다. 그리고 통념처럼 모든  아랍인이 이슬람 교도, 즉 무슬림인 것은 아니다. 현재  아라비아어 사
용자 중 약 5%는  기독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 또한  `블랙 무슬림`이라 불리는 미
국 흑인들처럼 아라비아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이슬람 교도를 지칭하려면  무슬림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무슬림  대신 아랍인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한다. 이때의 아랍인은 통상의  용법대로 
이슬람 세력을 지칭하며 또한 중동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표현이 다소 부적합하
지만, 여기서는 지역적 특성, 즉  중동의 영토 분쟁이 중시되기 때문에 아랍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히틀러는 살아 있다?

  히틀러는 패전을 확신한 직후 자살했다. 그는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지막으로 처리한다. 먼
저 1945년 4월 28일 자정 즈음에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다.  다음으로 남아 있는 심복
들에게 국가 통수권을 위임한다. 부부는 4월 30일 자살했고 히틀러의 유지에 따라 불태워졌다.
  히틀러가 연합군에 체포되지 않고 자살을  한데다가 시신이 이미 불태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후
에 무수한 루머를 낳았다.  에바 브라운은 음독 자살한 것이 확인되었지만 히틀러의  사인이 권총 
자살인지 아니면 음독 자살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히틀러가 살
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 또는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의 생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1956년  10월 히틀러의 유해를 분석하고 히틀러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해프닝
이 불가피했을 정도로, 히틀러의 생사 여부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말장난이 허락된다면 현재도 히틀러는 살아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최소한 몇몇 독일인의 가
슴 속에는 타민족에 대한 야만적 테러를 가하던 나치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나치 정당은  금지되고 지도자들은 처벌받았지만 독일이나 미국 등에 소규모의 나
치 조직이나 정당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1990년 통일 이후, 특히 옛 동독 지역에서 타민족에 대한 
테러가 되살아나고 1992년 극에 달한다. 터키 출신의 한 여인과  두 소녀가 네오나치의 테러에 살
해되었고 1992년 한 해  동안에도 방화 500건을 포함해 약 2,000건의 폭력 행위가  외국인을 향해 
자행되었다. 1993년 의회는  독일을 피난처로 삼은 외국인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헌법  수정에 
동의하였다. 그만큼 신나치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는 독일인의  가슴 속에 네오나치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불행하게도 타민
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신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일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인종 청소 그리고 현재 1
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백인 집단인 KKK단 등이 그 예이다.

  라빈과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1922~1995)과 야세르 아라파트(1929~)는 중동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공으로 1994
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이스라엘 정치가 시몬 페레스도 공동 수상자 중 하나이다). 그
러나 이들은 과거에는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난민을 대표하면서,  극단적인 무력 투쟁을 진
두 지휘하며 평화를 위협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 아라파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고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에
서 수학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투쟁에 투신한다. 그가 택한 방
법은 폭력적인 게릴라  전술이었다. 1959년 알파라라는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고  지휘함으로써 팔
레스타인 해방 운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1969년에는  PLO의 의장직을 맡게 된다.  뮌헨 
올림픽에서 자행된 검은 구월단의 테러로 대표되는 60년대 말 이후의 무력 저항을 지휘한 사람이 
바로 아라파트이다. 그러나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70년대 중반  아라파트는 PLO가 이스라엘 이
외 지역에서의 테러를 중단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많은 국가들과 국제기구가 PLO를 인정하게 
된다. PLO는 1988년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온건한 모습을 띠게 된다.
  현재 PLO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한 사람들과 그  자손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한다. 영토는  없지만 명실상부한 국가 조직으로서  전세계 
팔레스타인인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라빈도 아라파트처럼 대단히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건국 당시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에 참여
하였고 1964년에 참모 총장이 되어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데 기여한다. 그 이후
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강경 진압할 것은 주장하는  등 매파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지만 모든  아랍 민족의 적이었다. 1992년  두 번째로 총리직에 오른  라빈은 
훨씬 온건해졌다. 취임 직후부터  비밀 협상을 통해 PLO와 접촉하고 1993년 역사적인  평화 협정 
체결을 선도했다. 그는 최초로 PLO를 대화를 파트너로 수용하고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
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함으로써 중동 평화의 길을 마련한다.
  그러나 그는 1995년 11월 영토를 이민족에 넘긴다고 비난하는 이스라엘 청년 이갈 이마르가 쏜 
3발의 총탄에 숨을 거둔다. 이스라엘 전역이 비통에 빠져들었지만 `배신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세
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묘소에 침을 뱉고 방뇨한 젊은이들도 있었고 라빈의  죽음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인터넷에 띄웠다가 퇴학당한 대학생도 있었다니 말이다.

  미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 아메리카 인디언

  신대륙의 발견, 낙원의 정복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은 바이킹  에릭슨이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에릭슨은 정착촌까지 세웠지만 그것은 개인적 사건에  불과했다. 자신이 
밟은 땅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럽은 에릭슨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492년 10월 2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자신이 신대륙을 발견했음을 
알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그곳 원주민을 인디오라 불렀던 그는  죽는 날까
지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한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16세기  들어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
륙의 가치를 확인하고  열광하기 시작하면서 콜럼버스의 역사적 쾌거가 인정받는다.  신대륙은 유
럽인들이 갈구하던 모든 천연  자원을 품고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4배에 달하는 넓은  땅에는 황
금과 광물이 넘쳐났고 초원과 계곡과 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유럽 역사는 새로운 국면
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흥분과 번영의 계기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
언 입장에서는 수난의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주제가 제목처럼, 신대륙 
개척은 인디언의 시각에서는 바로 `낙원의 정복` 과정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동북 아시아가  고향이다. 사냥 부족이던 그들은 빙하기인 2만~3만  년 전
에 사냥터를 찾아 떠돌다가 당시 알레스카로  이어져 있던 육로를 통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
고 있다. 인디언은 곰이나 버팔로를 사냥했으며 부분적인 경작을 통해 생활을 유지했다. 서구인들
이 몰려든 15세기 당시 인디언 문화는 석기 시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은 엄연히 아메리
카 대륙의 주인이었다. 게다가 전세계인들이 즐기는 감자, 토마토 등을 최초로 재배했고 칠면조를 
처음으로 사육했다는 점에서는 인류에게 혜택을 준 존재이기도 하다.
  미개인으로 기억되는 인디언들이지만  그들의 사회는 그 어떤  문명 사회보다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디언 사회에 대한 연구는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
도 없지 않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열린책들)을 보
면 인디언 사회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료는 얻을 수 있다.
  베르베르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조화 속에서 공존하던 세상이 바로 인디언 사회
였다고 설명한다. 인디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여겼다. 단적인 예
로 인디언들은 사냥감이 줄어들면 곧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생태계가 황폐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적당한 때에 자연을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권력  관계도 조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인디
언 추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추장은 합의와 신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영구 추장은 
없었고 추장의 의사가 부족 전체를 지배할 수도 없었다.  전쟁터의 인디언은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인디언들은 생명을 중시했고 그래서 적을 향한 창의  끝은 뭉툭
했다는 게 베르베르의 설명이다(첨단 살상 무기에 익숙한 문명인들 눈에는 어처구니없을 이 전쟁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영화 <작은 거인>을 보면 된다.)
  신대륙의 풍경은 그랬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산천초목과 버팔로와 인디언의 낙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유럽의 모국어로 지역을  명명하고 말뚝
을 박아 경계를 세운 다음 그 자리를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할 뿐이었다.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눈
에 참으로 성가신  미개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이기적인 시각과 막강한 화력은  인디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몰아세웠다.
  인디언들의 인구 통계가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신대륙 발견  당시 인
디언 인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있지만 어떤 자료로도  신빙성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아메
리카 원주민의 수가 질병, 기아,  전쟁 등으로 급격히 줄어든 상태에서 유럽인의 기록이 시작되었
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라  그 추정치가 몇 배 편차를 보이는데,  그 중 가장 후한 통계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는 9,000만명에  이르는 인디언이 있었고 북아메리카 인디언만도 1,000만 명
이었다. 그런데 1990년 현재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숫자는 200만 명 남짓이다. 지난 500년 동안 인
디언들은 자기 증식을 하지  못하고 북아메리카에서만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간 아
메리카 대륙을 빙하기나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휩쓸었다는 기록이 없음은  물론이다. 백인들의 
신대륙 발견과 개척 과정이  인디언들에게는 천재지변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는 설명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서로운 또 다른 사실은 그들이 정당하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서부 영화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가장 유명한 원주민  악당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디언들은 단란한 백인 가족들의 포장 마차를 습격해 약탈하고 포로의 살껍질을 벗겨 내거나 백
인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이다. 아니면  백인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서부 영화들
은 인디언에게 견디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경험일 것이다.
  다음에서는 아메리카 개척사를  정리할 것인데, 서술의 주인공은  인디언들이다. 비록 물리력이 
약해 참패하고 말았지만 인디언들은 엄연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으니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
는 역사 서술이 억지일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영국과  미국에 맞섰던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
를 중심으로 기존의 세계사가 제외해 온 온전한 아메리카의 역사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조작된 평화의 상징, 포카혼타스

  16세기 이후 본격화된 유럽  국가의 신대륙 개척 과정에서 선두 주자는 단연  스페인이었다. 스
페인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남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520년을 전후해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 국왕의 창고는 금은보화로 
가득 찼으며 이 때문에  주위 국가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샀다. 포르투갈은 현재의  브라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초기  프랑스인들은 오대호 근처에서 인디언들과  모피 등을 교역하면서 주로 
캐나다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난사에서  주된 가해자가 된 영국은 신대륙 개척에  뒤늦게 참여하였다.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을 개척하던  초기의 영국 정착민들은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했다. 특히 두 인디언 부족이 온화한 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인 왐파노아그 부족은 
현재의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등을 포괄하는 지역인 뉴잉글랜드에 거주했다. 또  다른 부
족은 버지니아 주에 살던  알골킨 언어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들을 이끌던 이가  포와탄 추장
이다. 낯선 이름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포와탄은 포카혼타스(1595?~1617) 덕분에 덩달아 유명해진 
인디언이다.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마이크 가브리엘 감독, 1995년)를 통해 우리에게도 널
리 알려진 아메리카 원주민 처녀 포카혼타스. 그녀는 아버지  포와탄에게 읍소하여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전쟁을 막은 평화주의자이자,  첫눈에 반한 백인 청년 존 스미스와의 애절한  사랑에 눈물
짓는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
  16세기 아메리카의 역사를 서술한  문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  영화는 중요한 
역사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16세기 미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 평화와 애절한 
사랑이 만개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과연 실제 사건에 기반했다는  이 영화의 역사 서술이 진실
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 스미스, 포카혼타스  그리고 포와탄 등은 실존 인물이며 그들이 수백 년 
전 미국 동부 해안 지역을 함께 거닐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한 나머지 상황 설
정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포카혼타스는  존 스미스와 열애를 나눈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애는 백인과 인디언의 평화 대신에 비극적인 인디언 멸망사를 예고했다.
  16세기에 벌어진 아메리카 인디언과 영국인의 역사적인 조우 그리고 포카혼타스의 실제 생애를 
살펴보기에 앞서 영화 <포카혼타스>의 `역사  왜곡`에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짚어 보자. 우선 사
건의 발단은 로맨스의 주인공 존 스미스에서 시작된다.
  존 스미스는 영국 링컨셔 출신으로 모험가이자 사업가일 뿐 아니라 작가로서도 활동해 여행 기
록을 여러 책으로 남겼다.  그는 버지니아 주에 최초의 영국 정착촌인 제임스타운을  세울 목적으
로 1607년 출발한  영국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존 스미스는 1608년에서  1609년까지 제임스타운의 
대표로서 상당히 효과적인  지도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척박하고 낯선  아메리카 대륙에
서 기력을 잃어 가던 영국 이주민들을 다독거리고 때로는 가혹하게  이끌었다. 그가 남긴 구호 “
일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가 지도자  존 스미스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1609년 제임
스타운이 화재로 불타자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존 스미스는  포카혼타스와의 극적인 인연을 여행 기록에 남겼다.  제임스타운을 습격한 
포와탄 부족이 존 스미스를  납치했고, 죽음의 위기를 맞은 그를 포카혼타스가 눈물의  호소로 구
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포카혼타스>의 중심 줄거리이며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이
야기를,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실로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그가 아메리카를 떠난 지 십수 
년이 지난 후이고 포카혼타스가 숨진  뒤 7년 후인 1624년에 와서야 포카혼타스와의 극적인 악연
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즈음 포카혼타스는 이미 영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발
표 시점이 애매한데다  진술의 일관성도 없기 때문에 존 스미스의  술회를 사실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다.
  존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와의 로맨스라는 인상적인  헛소문을 퍼뜨렸다면, 월트 디즈니는  아예 
둘이 사랑에 빠지도록 설정해  버린다. 영화 <포카혼타스>에서 두 사람은 애절한  사랑을 나누었
고 가슴 미어지는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연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인디언과 백인의 평화
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랑도 평화도 모두 역사적 거짓이다. 포카혼타스가 백
인 남성과 사랑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은  존 스미스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  사랑은 
백인의 폭력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포카혼타스는 1613년 새뮤얼  아겔이라는 영국인에게 납치되어 제임스타운에  억류되었다. 그녀
는 영국인들이 인디언들과 협상할 때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잡아 놓은 볼모의 몸이었던 것이
다.
  제임스타운에서 지내던 포카혼타스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인다. 1614년 백인  남성 존 롤프와 사
랑에 빠져 결혼한 그녀는 아들 하나를 낳은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또한 레베카란 이름으로 창
씨개명까지 하기에 이른다. 1616년 영국에 도착한 포카혼타스는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영국은 그
녀를 공주의 신분으로 대우했으며 영국  국교회의 런던 주교까지 포카혼타스와의 만남에 직접 나
설 정도였다.
  포카혼타스가 유명인인 된  배경은 비교적 간단하다. 영국인과 평화를 유지하던  인디언 부족의 
추장 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포카혼타스의 변신이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영국인들은  인디언이 미개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포카혼타스는 
백인 문화에 참으로 놀라운  속도로 동화된 것이다. 그러니 백인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너
무나 대견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하기까지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포카혼타스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카혼타스는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디언
과 백인의 행복한 화해는 헛된  꿈이었다. 백인은 인디언들의 영토권 주장을 완전히 부정했고, 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때까지 퇴거 명령과 학살을 반복했다. 포카혼타스의  개인사도 인디언의 
비극적 역사를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버지에  앞서 영국 땅에서 숨지는데 그  사인은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결핵과  함께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으로 면역력이 없던  수백만의 인디언
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글자  그대로 병마였다. 그렇다면 포카혼타스도 엄밀히 말해서 백인에 의
해, 혹은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깨어진 평화, 인디언 전쟁의 발발

  인디언과 영국인의 평화는 짧게  지속되다가 곧 수백 년 동안의 인디언 전쟁으로  옮아간다. 흉
기로 인명을 살상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양비론도 가능하지만, 남의 땅에  들어가 시비를 건 백인
이 전쟁의 원인 제공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인들이라고 해서 대서양의 선상에서부
터 살상을 각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악마적 본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낯선 신
대륙에서나마 새 삶을 일구길 소망했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절박한 소망은 인디언과의 충
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1607년 버지니아 주에 제임스타운을  세운 사람들은 100명 정도의 성인 남성이었다.  아이나 아
내를 데려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신대륙을 정착지로 여기지  않았다. 제임스
타운은 무역의 근거지와 같은  곳이었다. 신대륙에서 찾은 황금이나 모피 등을 유럽  시장에 수출
하기 위한 거점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그런 고가품을 얻는 일이 쉽지  않음을 확인했다. 게다가 낯선 주
위 환경과 식량난 때문에 일상이 적잖이 고통스러웠다. 영국인들이  아메리카의 비옥한 토지로 눈
을 돌리면서 신대륙의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특히 담배 재배의 시작은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아메
리카 대륙에서 담배를 최초로  경작한 영국인이 바로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였는데,  당시 담
배는 유럽 시장에서 황금만큼이나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인디언들이  피우던 담배는 유럽인들 눈
에는 신기하기 그지없었고 쾌감과 함께 신비한 약효도 있는 물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버지니아 주에는 담배 경작을 기초로 한  경제권이 형성된다. 담배 경작에는 적
지 않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영국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옮겨온다. 이주민들은 주로 영국
의 하층 계급 사람들이었다. 본국에서 희망 없이 삶을 이어  오던 그들은 차라리 낯선 신대륙으로 
이주한다. 하루 12시간씩 노동해야 하고 법적인 권리도 유보된  계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5년 정
도 노동을 하면 자유와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주 자원자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후에
는 잘 알려진 대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이 들어온다. 그들에게 신대륙은  종교적 탄압이 
없는 자유의 땅이었고 종교적 이상을 직접 실현해 보일 수 있는 처녀지와 같았다.
  그런데 백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물론 백인들은 버려진 토지보다
는 인디언의 영토를 원했다. 가끔은 호소를 통해서도 인디언의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1625년 페
마퀴드족의 추장에게 백인 한  사람이 1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땅
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인디언이지만, 호의의 표현으로 백인이  작성한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이것이 영국 식민지인과 인디언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토지 양도 증서로 남아 있
다.
  인디언들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백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백인은  한줌에 불과
했지만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는 천배 만배의 백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아메리카
를 동경했다. 급속히 늘어난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영토를 넘나들자  인디언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
낀다. 그래서 인디언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기 보호에 나섰고, 영국 이주민들도 생존을 위해 무
기를 들었으며 군대를 동원했다. 그렇게 인디언과 백인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평화의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는 포와탄의 부족만 해도, 사실은  인디언과 영국 이주민들 사이에 
일었던 최초의 무력 충돌의 주연이기도 하다. 포카혼타스의 결혼을  계기로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
지만 포카혼타스가 사망하고  또 다음 해에 포와탄마저  사망하자 곧 상황이 악화된다.  인디언과 
백인 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1622년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  포와탄의 동생 오페칸카노프가 제임스
타운을 공격하여 총 2,000명의 영국인 중 350명 이상이 희생된 것이다. 전쟁은 십수년간 진행되었
는데 영국군의 보복으로 오페칸카노프가 체포됨으로써 포와탄의 부족은 몰락하고 만다.
  포와탄의 부족과 함께  초기 인디언 전쟁의 희생자가  된 부족은 피쿼트이다. 1637년  영국군은 
피쿼트 부족을 궤멸시키고 영토  확장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은 잔인한 학살  행위로 많
은 인디언들을 살해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살아남은 피쿼트 부족은  노예로 팔리거나 운이 없으면 
불태워져 죽었다고 한다. 1990년 현재 피쿼트 부족은 536명만이 생존해 있다.
  이렇게 17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인디언과 영국의 전쟁은  독립 전쟁(1775~1783)후 아메리카의 
주역이 미국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디언들은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그리 큰 전과를 얻지 
못했다. 많은 전쟁 중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한 가지는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것으로 기록된 킹 필립의 전쟁이다.  뉴잉글랜드지역 왐
포노아그 부족의 추장인 마사소이트는 1621년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그의 아들이 메타코
메트인데 추장의 자리에 오른  그를 영국인들은 킹 필립이라 불렀다. 메타코메트가 추장이  된 후 
한동안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백인  정착민들이 증가하면서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자 잦은 충
돌이 야기되었다.
  전쟁의 구체적 계기는 프락치  문제였다. 영국인의 첩자 노릇을 하던 인디언 한  사람이 살해되
자 영국군은 그 보복으로  살해 가담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그간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
서 1675년에 전쟁이 발발한다.  킹 필립의 전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
었다. 영국인과 인디언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보복을 반복한다. 그 결과 영국
인들의 정착지 12개 마을이 완파되었고 드넓은 농경지와 산업  시설이 황폐화되었다. 이때의 인디
언의 피해 사황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인은 6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심각한  수준의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를 낸 이 전쟁은 1676년 킹  필립이 동족에게 살해되면서 종결되었다. 백
인들은 킹 필립의 가족을 포함한 인디언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몇몇 인디언들에게 거래
를 제안한다. 그 거래를 수용한 인디언 전사 몇몇이 킹 필립을 살해한 것이다.
  18세기에 영국군은 최강의 적을 만나게 된다. 오타와 부족의 추장인 폰티악은 오타와, 오지브웨
이, 포타와토미 부족을 하나로  결집한다. 폰티악은 1755년 프랑스와 연대하여 현재의 피츠버그에
서 영국의 브래드독 장군 군대를 궤멸시키는 전과를 세웠다. 얼마  후 로버트 로저스가 이끄는 영
국 군대와 폰티악은 잠시 동안 평화 관계를 유지한다.  폰티악은 기본적으로 영국군을 불신했지만 
전쟁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영국군이 인디언을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기에 
평화 조약은 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폰티악은 백인과의 화해는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영국군은 이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영토 확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폰티악이 이끌었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은 1763년 디트로이트 요새를 공격한다.  그러나 인디언
들은 요새를 공격하고  장악하는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고, 영국군에게 보급품과  지원군이 제공되
는 경로를 차단하지  못한 결과 전세는 불리해졌다.  더구나 아군이라고 믿었던 프랑스가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폰티악은 1765년  평화 조
약을 체결한다. 인디언  항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언  연대를 이루었던 폰티악은 몇 년  후 
다른 인디언에게 살해된다.
  폰티악 전쟁이나 킹 필립의  전쟁 이외에도 숱한 전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킹 윌리엄의 
전쟁과 퀸 앤의 전쟁  등이 있지만 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디언은  영국인들의 영
토 확장에 맞서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영국군이 인디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주체는 
아니었다. 독립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이 미국으로 독립한 후, 미국이 바통을 이
어받았다.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은 미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13개 주를 포기한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은 인디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치명타를 입은 영국은  인디언까지 배려할 여력이 없었
다. 그리고 미국으로서는 인디언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존재였다. 다만 인디언들은 새로운 
조국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리였기에 거래 대상이거나 때로는 적이 될 수도 있는 세력이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새롭게 만난 미군은 영국군보다 훨씬 집요하고  강했다. 미국은 끝도 없
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고  조우하게 된 인디언들을 차례로 무력화했다. 미국의 개척  역사는 또는 
인디언의 멸망사는 여러 편의 미국 영화에 조각조각 담겨 있다.

  `라스트 모히칸`, 블랙 호크, 제로니모

  신생 독립국 미국의  중심지는 아메리카 동부지역이었다. 미국은 서쪽을 향해  개발을 지속하면
서 오늘날의 형태에 다다르게 된 것인데, 이 정력적인 성장  과정에서 인디언의 존재는 큰 골칫거
리였다. 야만인 같은 인디언에 대한  대책은 오직 한 가지였다. 인디언을 아메리카 대륙 서쪽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이 손쉽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를 향해 나아가면
서 토지와 부를  얻었으며, 반면에 인디언들은 서쪽으로  내몰리면서 삶의 근거들을 하나씩  잃어 
가게 된다.
  미국이 1787년 발표한 서북 지역 포고령은 미국 역사에서 독립 선언문과 헌법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오하이오  강 북부 지역을 백인들의 정착지로 선언하였고 그래서  후에 오
하이오, 인디애나, 위스콘신 등의  주가 생겨나게 되었다. 포고의 내용에는 인디언에  대한 관용적
이고 합리적인 정책이 담겨 있었다. 해당 지역에 살던 인디언의  토지와 재산은 인디언의 동의 없
이 빼앗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인디언과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합리적인 법안을 지
속적으로 제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글자 그대로 말뿐이었다. 인디언과 백인 
이주민들의 갈등은 막을 길이 없었고 그 갈등에 개입한 미국 군대는 당연히 백인의 편에 설 수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1830년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치명적인 또 다른  법안을 제정한다.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취임 전부터 공언했던 의지를 법안을 통해 표현한다. 영원히 인디언의  적으로 남게 될 잭슨 대통
령이 주도한 인디언 이주  법안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인디언을 강  건너 서쪽으로 내모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당시 아메리카의 대사막이라고 불리던 강 서부  지역은 백인이 영원히 거들떠보지 
않을 땅이라고 생각했다.
  이주 법안은 원칙적으로 강제적인 이주를 금지했다. 계약과 거래를  통해 인디언의 땅을 구입하
려 했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주 대상이었던  체로키, 크릭, 치카소 부족 등은 거래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 미국인들은 각 부족의 일원을 사주하여 계약서를  꾸몄고 그것
을 근거로 퇴거를  명령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정항하는 인디언들에게는 당연히  무력이 동원되었
다.
  차근차근 대륙을 잠식하던  백인들은 아메리카 서쪽 끝에서 날아온 기적  같은 소문을 듣게 된
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인데,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구름처럼 
서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백인들로서는 가슴 설레는 이 사건이  인디언들에게는 최후의 순간을 의
미하는 것이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백인들을 실은 수천 수만 대의  마차가 서부를 향해 달렸는데 그  경로에는 
당연히 인디언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놓이면서는 무시무시한 
철마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륙  횡단 철도로 노동자와 물자와  군대를 
실어나르면서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
륙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으며 인디언들을 무력화하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다. 대륙  횡단 철
도가 완성된 시점인 1869년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순간이 엇비슷하게 일치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즉 인디언 정복사가 종결될 즈음이다. 미국 독립 이
후 많은 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지만 인디언의 완패가 거듭되었을  뿐이다. 19세기 후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인디언들의 낭패감과 물리적 피해는 말할  수도 없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비극적 역사 상황은  영웅을 낳기도 한다.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인디언  최후의 전쟁
을 이끌었고, 그래서 아직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전사들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몇몇이 있다.
  인디언 전사를 거론할  경우 우리는 흔히 영화 <라스트 모히칸>(마이클  만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1992년)을 떠올린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제목  그대로 모히칸족의 최후를 목격했다고 믿기 쉽다. 영화  속에서 운카
스가 숨지고 혈통이 백인인 호크아이만 살아남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모
히칸족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2,000명 정도가 살아 있으며 이 숫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수백 개의 인디언 부족을 떠올리다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또한 영화의 관객들은 모히칸족이 상당히 전투적인 부족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
히칸족의 전투성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다른 인디언 부족들처럼 영국과 미국의 무력  행사에 적
지 않게 고통받았겠지만 모히칸은 미국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부족이었다.  그들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 동조한 소수 부족 중 하나였고 3분의 1 가량의 성인 부족원을 전쟁에서 잃은 대가로 
버몬트 주의 땅을 얻었다. 그래서 모히칸은 영국이나 미국의 백인과  맞서 싸운 위대한 인디언 전
사로 여겨지기에는 함량 미달인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사 중  하나는 블랙 호크이다. 그가 속한 소크 부족은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 일리노이와 위스콘신 주에서 살았다. 그런데 일부 부족원들이  영토를 미국에 양도하는데 합
의하면서 시련이 시작된다. 블랙  호크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크 부족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낯선 땅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부족원들이 식
량을 구하기 위해 강을 되건넜다. 인디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백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소크 부족의 추장이 된 블랙 호크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부족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1832년 
블랙 호크가 보낸 전령이 백인 정착민에게 살해되면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블랙 호크 전쟁
이다. 블랙 호크는  소크 부족과 폭스 부족에서 뽑힌 약  1,000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미시시피 
강을 건너와 영토의 회복을 선언한다. 백인과의 불합리한 양도 계약의 효력도 당연히 기각되었다. 
하지만 블랙 호크가 지휘한 소크와 폭스 부족은 그해 8월에 허망하게 패배하고 만다.
  미국인들은 블랙 호크 전쟁에서  승리를 얻음으로써 크게 고무되었다. 이 전쟁은 미국  동부 지
역에서 일어난 마지막 인디언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동부 지역은  17세기 초반 제임스타운을 세우
면서부터 미국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이므로, 이 승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다.
  또 다른 인디언 전사는 아파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아파치는 잔인한 인디언 부족으로 알려
져 있다. 영화 <제로니모>(윌터 힐  감독, 1995년)에서 인디언 사냥꾼 알 시버(로버트 듀발)는 아
파치와 싸울 때는 반드시  마지막 총알을 아껴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잔인한  아파치들은 생포된 
적을 발가벗기고 송진을 발라  불에 태워 죽이니 생포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이다.  다분히 과장
된 설명이라고 해도 백인들이 얼마나 아파치를 두려워했는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아파치는 북아메리카 서남부 지역에 살던 부족이다. 이들은 미군을  만나기에 앞서 이미 스페인 
군대와 200년 이상을 싸워 왔다. 19세기 중반 미국이  뉴멕시코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아파치의 
상대자는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는데, 애초에는 아파치 부족과 미국이 우호  협정을 체결한
다.
  1861년 미군은 아파치의 추장 코치스를  체포했고 탈출한 코치스가 평화 협정을 파기한 미국에 
복수전을 벌이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파치의 복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단기간에 
애리조나 주에서 백인 정착민과 상인과 군인이 모두 퇴거당할  정도였다. 코치스가 이끌던 아파치 
전사들은 10년간 항쟁을 계속했지만 결국 패배한다.
  아파치의 마지막 전사는  제로니모였다. 아파치의 한 지파인 치리카후아족 출신인  그의 인디언
식 이름은 교야슬레이,  즉 하품하는 사람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스페인 군대에 잃은 제로니모는 
타고난 전사였다.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제로니모가 이끌었던 아파치 항쟁을 잠재우기  위해 미
국 정부는 여러 차례의 군작전을 시행한다.
  1883년 크룩 장군이 이끌던 군대는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산에 은거해 있던 아파치의 부녀자
와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다. 제로니모는 이때 산카를로스의 인디언  구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
기로 약속하고  투항한다. 인디언 구역에서는  안전이 보장되었지만 유목 부족이던  아파치로서는 
한정된 땅이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드넓은 대지를 내달리던 아파치가  농사를 짓는 일은 불가능했
고 그래서 부족원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가기를 갈망했다.
  결국 제로니모는 부족원들을 이끌고 인디언 구역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각종 매체는 아
파치의 탈출을 대서특필했다.  아파치 부족의 철저한 응징을 기억하던 상인들과  정착민들의 아우
성도 빗발치면서, 미국 정부는 제로니모를 체포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결정한다.
  마일스 장군이 이끄는  5,000명 이상의 미군이 아파치  토벌을 위해 작전에 투입되는데  최후의 
결전에서 미군이 대면한  제로니모 일행은 겨우 34명에 불과했다. 제로니모는  패배했고 부족원과 
함께 감옥에서 사망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제로니모의 패배는 또 하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한다. 
이제 미국은 북아메리카의 서남부 지역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다.

  리틀 빅혼의 영광, 운디드 니의 좌절

  북아메리카의 서남부 지역과 동부 지역에서  각각 제로니모와 블랙 호크를 제압한 백인은 드디
어 완전한 정복의 순간에 다가서게 된다. 마지막 적은  중북부 지역인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 
지역에 머물고 있는  수(Sioux)족이었다. 그러니까 수족은 백인들에게  저항한 최후의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며, 백인 입장에서는 넘어서야 할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이름으로 생각하
기 쉽지만 우리는 이미 수족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수족은 영화 <늑대와 춤을>(케빈 코스트너  감독, 주연, 1990년)에 등장한다. 백인 사회를 떠나 
사우스다코타의 황야에서 독거하는 주인공 댄비가 한 인디언 부족과  친교를 맺는다. 댄비는 그들 
인디언의 인간적인 문명을  경험하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하지만 백인 군대가 추적하는  위기의 
순간에 댄비는 아내인 `주먹 쥐고 일어서`와  함께 인디언 벗들을 떠나야 했는데, 그 부족이 바로 
수족이다.
  `수`라는 이름은 프랑스인들이 붙인 것으로 수족 자신들은 스스로를 라코타 또는 다코타(`동맹`
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17세기 동안 수족의 주요 근거지는 미네소타 지역이었고 현재의 사우스다
코타와 노스다코타, 즉 북아메리카의 중북부 지역으로 옮겨온 것은 18세기이다. 약 3만 명 정도의 
부족원으로 구성된 수족은 다코타 지방에서 주로 버팔로 사냥을 하며 지낸다.
  다른 부족들처럼 수족도 백인과의 전쟁과  평화 조약을 반복하는데 최초의 평화 조약은 1815년
에 체결된다. 그렇지만 곧 갈등과 충돌이 시작된다. 1854년 와이오밍 주의 미군 요새 부근에서 첫 
번째 충돌이 발생하여  19명의 미군 병사가 희생되고 그 보복으로  미군은 네브래스카 주의 수족 
진지에 있던 부족원 100여 명을 살해한다. 이후 미국은 빅혼 마운틴 부근의  가장 좋은 버팔로 사
냥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는데, 이것은 레드 클라우드가 이끄는 전쟁(1866~1867)의 계기였
으며 전쟁에서 패배한 미국은 사우스다코타 지역에 대한 수족의 독점적 소유권을 인정한다.
  짐승의 가죽을 씌운 긴 원뿔형 텐트가 인상적인 수족은 영화 <작은 거인>과 <늑대와 춤을>에
서 희생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평화  협정은 백인 개척자들에 의해  파기된다. 1870년대 중반 사우스다코타의  블랙 
힐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백인이  수족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 수족은 당연히 반발했고  보복이 이
어졌다. 이 시기에 백인과 인디언의  전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사건이 발생한다. 시팅 불과 크레이
지 호스가 이끄는 수족 전사와 샤이안  부족이 1876년 6월 25일 리틀 빅혼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
스터 장군의 부대와  맞닥뜨린다. 미군은 언제나처럼 자신들이 완승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커스터 
장군과 300명의 미군은 궤멸당하고  만다. 이 전투는 인디언 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로 기록
되어 있다.
  수족은 리틀 빅혼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미국의 집중적인 보복을 받게  된다. 몇 
차례 거듭된 전쟁에서 패배한  수족은 백인이 지정한 인디언 구역으로 돌아간다. 리틀  빅혼 전투
의 영웅 시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지만, 크레이지  호스는 1877년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며 시팅 불은 캐나다로 탈출했다가 부족에게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이 즈음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서는 `영혼의 춤(ghost  dance)`이라는 운동이 시작된다. 인디언 
예언가 워보카는 인디언의 저항과 춤이 지속되면 곧 백인들이 사라지고 땅과 버팔로를 되찾을 것
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인디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워보카의 예언에 따라 시
팅 불은 부족원들과 함께 미국 연방 군대에 저항하지만 결국은  패배한다. 그는 1890년 12월 14일 
체포되어 인디언 경찰에게 살해된다.
  며칠 후 백인과 인디언의 전쟁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전투가  벌어진다. 수족은 이제 빅 풋
(Big Foot)의 지휘에 따라 미군에 대항하지만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완전히 궤멸당하고 
만다.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300여 명의 수족 희생자들은 차가운  땅에 집단 매장되었다. 한 
미국 저술가(<미국 민중  저항사>, 하워드 진 지음,  일월서각)에 따르면 당시 수족은  몇 자루의 
총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다.  항복 직전의 수족을 향해 미군의 기관총과 대포가  무차별적으로 불
을 뿜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 25명이 사망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유탄이나 파편에  의한 죽음이
었다고 하워드 진은 설명한다.
  `상처받은 무릎`을 의미하는 운디드 니에서의 전투는 마지막 인디언 전쟁이었다. 영국의 아메리
카 진출 이후 300년간 이어지던  인디언들의 지난한 무력 항쟁이 그곳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마감
된 것이다. 그래서 수족과 운디드 니 전투는 아직도 인디언이  겪었던 비극적 역사의 상징으로 기
억되고 있다.
  운디드 니는 20세기 후반에 또  한 차례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1973년 러셀 민스와  데니스 뱅
크스의 지휘 아래 미국 인디언 운동(AIM)의 단원 200명 가량이 운디드 니 근처의 촌락을  접수하
고 수족 독립 국가를 선포하였다. 그들은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숱하게 체결된 숱한 조약을 재심
하고 조사할 것을 미 의회에 요구했다. 70일간의 저항은 협상이  열릴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종결
된다. 그 후 백악관측과 한 차례 협상을 했고 백악관측은  회의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겠다고 설명
했으며, 또 한 차례의  회의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 
현재 약 4만  명의 수족이 주로 사우스다코타와 노스다코타 지역  그리고 몬타나 등지에 살고 있
다.

  영혼의 춤

  이 책에 소개된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설명은 그들의 역사적 고난에 비교한다면 가벼운 스
케치에 불과하다. 다행스럽게도 인디언 항쟁사  이해를 위해 일독을 권할 만한 책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 주오>, 디 브라운  지음, 프레스하우스)이 번역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영혼의  춤
에 대한 글을 옮겨 본다. 아래의 글은 예언자로서 인디언의 투쟁을 이끌어 낸 워보카의 주문이다.
  인디언은 모두 춤을 추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계속 추어야 한다. 봄이 오면 곧 위대한 정령
께서 온갖 짐승을 데리고 오시리라. 들짐승은 어디서나 가득 뛰놀고  죽은 인디언은 모두 다시 살
아나 젊은 사람같이 튼튼해지리라. 늙은 사람은 젊어지고 눈먼 사람은  눈을 뜨며 기쁜 시절을 맞
이하리라. 위대한 정령이 오실 때  인디언은 백인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백인은 인디언
을 해칠 수 없구나. 인디언이  높은 곳에 오르고 나면 큰 홍수가 지리라. 백인들아,  물에 빠져 죽
는구나. 물은 흘러가고 지상엔  인디언과 짐승들만이 남으리니. 마술사들은 계속해 춤추라고 신탁
을 내리며 화창한 날이 열리리라. 춤추지  않고 내 말을 믿지 않는 인디언들에게 화 있을진저. 점
점 왜소해져 한 자 크기로 줄어들리라. 왜소한 자들이여, 나무로 변해 불에 탈지니라.

  점령지 분할의 축제 : 달려라! 그리고 깃발을 꽂아라!

  미국 백인들은 19세기 말에  북아메리카 정복사의 완료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사이 무시무
시한 아파치 부족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운디드 니에서의 학살도 자행되었다. 이제  대륙을 독
점하게 된 미국은  광활한 토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는데, 그 방식이라는 것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축제와도 같았다. 미국 정부는 땅을 마구잡이로 나누어 준 것이다. 미국 정부가 지정
한 지역에 일정 기간 체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후보 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달리기에 뛰
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된다. 이 과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을 것인
데, 한 영화가 이 역사적 장면을 눈부신 스펙터클로 재현한 적이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파 앤드 어웨이>가 그것인데, 이 영화의 배경인 토지  분할 경주는 
정확하게는 오클라호마 랜드 러시라  불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출발선에  서 있
고 미군이 대포를 쏘며 출발  신호를 보내자 사람들은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한다. 누구든  젖 먹
던 힘까지 다해서 달리다가 원하는 땅에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 된다는 게 게임의 규칙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백인들에게는  절대 놓칠 수 없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과
정에서 수 많은 백인들에게 분배된 행운이 아무 희생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의 환희에
는 체로키 부족의 비탄과 핏빛  분노가 깔려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고난은  전체 인디
언 역사의 축소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체로키 부족이 겪은 비극적 역사를  확인한다면 백인
이 인디언을 향해 무수히 선전 포고를  했던 이유와 인디언 정복 이후의 사정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로키 부족은 테네시 주와 캐롤라이나 주에 살던 부족이다. 체로키는 백인들이 말하는 `문명화
된 인디언 부족`중 하나로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인  문화에 급속히 동화된다. 1827년 미국 정
부를 모델로 하여 체로키국을  세우고 입법 의원과 대표를 선출해 헌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백인
식 농법과 건축술 등을 수용하고 최초의 인디언 신문인  <체로키 피닉스>를 발간하기도 했다. 하
지만 체로키족이 미국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미국 시민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을 수는 없었다. 다른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내몰리고 땅을 잃어 갔을 뿐이다.
  그들의 땅에서 금이 발견되자 체로키를 몰아 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체로키 부족의 소수
가 1835년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통해 미시시피 강  동부의 모든 땅을 미국에 양도한다.  대다수 
체로키인들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고 미국 연방 대법원도 그  주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고, 앞에서 말한 인디언 이주 법안에 근거하여  체로키 부족
을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7,000명의 미군이 체로키 부족을  호우한다는 명목으로 퇴거 작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는 체로키 부족은  협박과 강제에 마지못해 고향을  떠났으며, 이주하는 동안에도 끔찍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1838년에서  다음 해까지 116일 동안 이동하는  강행군 과정에서 전체 2만 명  중 
4,000명의 체로키인들이 기근과 질병으로 숨진다. 미국은 체로키 부족에 대한 특별한 보호책도 배
려도 보이지 않았다. 미군  작전의 목표는 체로키 부족을 미시시피 강 건너로  이동시키는 것이었
고, 따라서 미개인 체로키 부족의 생사를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삶의 터전과 많은 동족들을 
잃어 가면서 체로키 부족이 걸은 이동 경로는 `비탄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불린다. 비탄의 길
은 현재까지도 `운디드 니`와 함께 백인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체로키 부족이 비탄의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오클라호마의 동북부지역으로, 영화 < 앤드 어웨
이>의 주인공들이 재회하고 포옹하던 그 부근이다. 그런데 체로키 부족이 도착한 땅에도 이미 백
인 정착민이 있었고 잠깐  사이에 또 다른 백인들이 몰려들었다. 체로키 부족으로서는  도무지 편
히 정착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뿐 아니다. 미국 정부도  나선다. 미국이 체로키 부족을 비롯한 전
체 인디언의 토지 소유권을 일거에 뒤흔드는 법안을 만들어 내는데, 토지 불하 법안이 그것이다.
  1887년부터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 전체에게 할당되었던  공동 소유지를 인디언 개인들에게 
불하한다. 사적 소유 개념이 없던 인디언들에게 백인식의 재산 개념을  심어 준다는 것이 그 명분
이었다. 토지 불하 법안에 따라 인디언 가장에게 160에이커  그리고 미혼 성인에게 80에이커의 땅
이 불하되었으며 25년간 양도 금지 조항도 추가되었다. 그 결과  인디언 고유의 공동체적 사회 구
조가 약화되고 유목 인디언의 경우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재산을 사취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일제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에게는 토지 불하 법안이 낯설지  않다. 일제는 1910년대에 토지 조
사 사업을 실시했다.  물론 명분은 그럴 듯 했다. 소유권을  보호하고 매매의 규칙을 세우기 위한 
정책이라고는 했지만, 절차도 까다롭고 낯설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잃었고 그 반대로 일본
인이 막대한 토지를  독식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민중들이 지배자의 권모술수에 황망해하던  그 
시기에,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유사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토지 불하 정책의 이득은 전적으로 백
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토지 불하 과정이 완료된 직후 인디언 소유지 1억4,000만 에이커 중에서 3
분의 2 가량이 백인들에게 이전되었다.
  토지 불하 법안으로 인디언들은 뿌리를  잃게 되었는데 체로키 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
다. 체로키 부족의  소유지 중에서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중간 지점의 땅 600만 에이커가  소유자 
없는 땅으로 기록된다. `체로키 스트립`이라 불리는 이 방대한 땅은 1893년 9월 16일 정오에 백인
들에게 불하되는데, 이것이 바로 <파  앤드 어웨이>의 배경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그대로 백인들
은 달려가 깃발을 꽂으면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로맨스와 스펙터클 이면에는  그와 같은 약탈 과정이  숨겨져 있다. 
특히 영화의 최종 배경이 된 오클라호마는 체로키 부족이 `비탄의 길을 걸어 떠나야 했던 땅이고 
체로키는 토지 불하  정책의 대표적 희생자이다. 체로키  부족의 비극은 인디언들이 어떻게  땅을 
잃고 내몰렸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보여 주는 모델이라고 하겠다.

  인디언 보호 구역? 인디언 구역!

  우리는 `인디언 보호 구역`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Indian Reservation`의 번역어일 
이 표현은 전적으로 정복자 미국인 중심의 번역 방법이다.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면
서 인디언들에게 거주할 땅을 지정했다. 그곳에서 조용히 정착해서  살면 해를 입히지도 처벌하지
도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보호 조치가  아니라 억류와 인디언 분리 정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립적인 의미로 `인디언 구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음을 밝혀 둔
다.
  아울러 한때 우리 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으며 지금도 흘러간 명팝송으로 기억되는 노래(Raul 
Revere & Raiders의 <Indian Reservation>)의 가사를 소개하려 한다. 이 노래를 흥겨운 댄스풍의 
음악이지만 체로키 부족의  비극을 담고 있으며,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숨은  희생자 체로키 
부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체로키 부족 국가  전체를 빼앗고 이곳 인디언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들의  삶의 방
식을 뺏었고 토마호크(체로키 부족의 전쟁용 도끼)와 활과 칼과 말을 빼앗았다. 그리고 우리의 어
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우리가 손으로 만들었던 염주 목걸이는 사라져  이제는 일본인들
이 그것을 만든다. 명예롭게 살고 명예롭게 죽은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이여.
  (중략) 나는 이제 셔츠와 넥타이를 하고 있지만 나의 몸 깊은 곳은  여전히 인디언 기운이 가득
하다. 나의 몸 깊은 곳은 여전히 인디언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체로키 국가는 다
시 부활하고야 말 것임을.

  인디언의 오늘

  미국 정부는 1924년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디언의  참정권 박탈에 대한 위헌 
판결이 1948년 애리조나에서 처음 내려진 후 인디언에게 참정권도  부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
디언에게는 시민권과 참정권이  축복일 수 없었다. 인디언에게 미국인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일
련의 정책의 기저에는 인디언을 흡수, 동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인디언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고 인디언들을 미국 문화에 동화
시키는 일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인디언들의 저항감과 복수심을  누그러뜨리는 길이기
도 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미국의 사회 제도를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했고 아이들은  백인 학교
로 보내졌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기독교화하려는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1940년대부터 더욱 조직적인  한파가 불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종식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한다.  인디언에 대한 지원 정책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인디언 
구역에 대한 연방  정부의 보호도 철회되었다. 인디언들은  자력 갱생해야 했지만 척박한  인디언 
구역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인디언 구역들이 부족원들에게  분할되거나 백인에게 
팔렸다.
  1960년대 이후  인디언들의 저항은  본격화된다. 특히 무력  저항 운동이 정점에  이르게 된다. 
1969년에는 인디언들이 앨커트래즈 감옥을 점거하였고, 1972년에는 워싱턴에  있던 내무성 인디언 
행정 정책국을 점거하고  인디언 정책의 재고와 생존권  보장을 주장했다. 앞에서 말한  1973년의 
운디드 니에서의 점거 농성도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거세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적 시각이 미국 정부 내에서 힘을 얻으
면서 인디언 정책은 전향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지원이 
많이 늘었으며, 교육, 의료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름만 남
아 있던 인디언의 자치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내  인디언들은 상당 수준 자치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소수 집단들과 구별된
다. 미국 연방 정부의 인디언 지원 프로그램은 인디언 부족에 의해 대리 운영된다. 즉 교육, 의료, 
주거, 복지 문제와 관련된 행정의  처리가 인디언 부족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디언의 
조직은 세금을 부과하거나 규칙을 제정할 수도 있다. 인디언  구역 내에서의 사법권도 인정되는데 
살인, 절도, 방화 같은 범죄가 인디언 대표 조직이 관할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인디언의 자치는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법률이 허용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분
명히 인디언들의 삶의 질을 확보하고 자긍심이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80년 140만 명이었던 인디
언 인구가 1990년 현재  19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실제로 인구가  증가했다기보다는 인디언
의 자긍심이 높아져  인구 조사 과정에서 인디언임을 밝히는 빈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는 약 500개의  부족이 278개의 인디언 구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3
분의 1 정도만이 인더언  구역에서 농사나 목축,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고 3분의  2 이상
이 인디언 구역을 떠났다. 주로  교육이나 취업이 이주 목적인데, 그만큼 인디언 구역에서의 생활
이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인디언 구역을 벗어나 도시로  떠난다고 해서 상황이 그리 좋
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전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던 인디언들이지만, 이제는 소수 민족이자 
주변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사랑에 대한 이성애적 편견

  이 책은 역사를 다루는데, 역사라는  개념은 흔히 변화나 진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면 동성애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성애적) 사랑의 진화 과정
을 세세하게 따지는 일이  부자연스럽듯, 동성애라고 해서 뚜렷한 발생 시점이나 발전  양상이 있
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적 감성 중 하나이기에,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존재해 왔고 영원히 지속
될 것이다. 동성간의 사랑도 인류 역사의 전 기간 동안 엄연히 존재해 왔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
이가 공존하듯이 동성애도 이성애처럼 그냥 있게 마련인 사랑의 한 유형인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는 왼손잡이와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아 왔다.  많은 사회가 동성애자의 존재조차
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변태 또는 범죄자 정도로  여겨 왔다. 사랑이란 당연히 이성  사이에서 
생겨나야 할 감정이며 더군다나 사랑의 행위는 남녀가 나누어야 한다고만 믿어 왔던 것이다.
  많은 사회에서 동성애는 배척과 단죄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성 윤리가 
완고한 우리 사회만  해도, 여러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표했으며 동성애자  단체도 
속속 꾸려지고 있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조금은 사그라들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
다.
  이처럼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변화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영화가 큰 몫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많은 동성애 영화를 접해 왔다. <원초적 본능>의 흥행 
성적을 감안하면 국내에서  연인원 수천만 명이 동성애  영화를 접했다는 추산도 가능할  것이다. 
숱한 동성애 영화 덕에  동성애는 충분히 익숙한 소재가 되었지만, 동성애에 대한  오해까지 벗지
는 못한 것 같다. 그런  현실은 몇몇 영화의 몰이해와 우리 내부의 편견이 공조한  결과이기도 하
다.
  이번 장에서는 몇몇 동성애 영화들을 참조하여  동성애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논의를 진행할 것
이다. 아울러 동성애 역사에도 접근할 것인데, 그 목적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 과정과 
동성애 운동이 걸어온 궤적을 간략히 살펴보는 데 있다.

  동성애라는 용어에 대한 몇 가지 오해

  필자의 기억으로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영화 중에서  성인 남성의 성기를 스크린에 
드러낸 영화는 두 편이다. 화장실이나 침실이 아니면 좀체 볼 수 없는  그 은밀한 신체 부위를 공
중에 내보인 감독 중  하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이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나치는  유태인들을 발
가벗기고 수용소 마당에서  달리게 한다. 강제 노역을 견딜만한 사람들만  선별하려는 과정이었는
데, 이리저리 내달리며  신체 검사를 받는 유태인들 사이로 한  노인의 장면이 보였다. 필자는 그 
노인이 힘없이 양  팔을 들어올렸을 때 노쇠한 성기를  얼핏 보았다. 물론 이 장면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비디오에서는 삭제되었다.
  <쉰들러 리스트>의 남성 성기를 기억할 사람들은 많지 않겠지만, 영화 <크라잉 게임>(닐 조던 
감독, 1992년)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소도구였기 때문에 관객들 모두 선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
다. 영화에서 주인공  퍼거스는 사랑하는 여인 딜의 집에서 가슴  벅찬 순간을 맞고 있었다. 딜이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어 내던지고 최후의 탈의 과정까지 마친  순간, 퍼거스와 관객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외관상 명백한 여자인  딜이 사실은 남성임을 보여 주는 물증을 발견하자  관객은 놀랐고 
퍼거스는 변기에 머리를 박고 구토를 시작했다. 그 장면  덕분인지 <크라잉 게임>은 서울 개봉관
에서만 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또 동성애 영화하면 금세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또 다른 유력한  동성애 영화로는,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유독 한국에서만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는 <패왕별희>(첸 카이거  감독, 장국영 주연, 1993년)가 있다. 남성인  데이(장국
영)는 그를 여성화하려는 경극단의 압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거듭되는 매질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
고 끝내는 자신을 여성으로 여기게 된다. 그 후 그는 여성처럼 행위하고 사고한다. 말투나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 주인공 시토를 사랑할 만큼 데이는 완벽한 여성이 된 것이다.
  흔히 <크라잉 게임>과  <패왕별희>가 가장 인상적인 동성애 영화로  기억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그 영화들은 결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또한 그 영화들에는 동성을  사랑하는 주인공
들이 등장하지만 그 사랑도 동성애가 아니다. 이 말장난 같은  설명은 다른 영화를 참조하면 이해
할 수 있다.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김소매 주연, 1993년)이 좋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옇화는 대만
에 사는 노부부가  미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노부부는 아들  위동을 결혼시키려고 온 것이다. 
참한 중국계 여성을 골라 결혼식을  치르고 떠들썩한 결혼 피로연까지 마쳤지만 노부부는 충격적
인 사실을 확인한다. 알고 보니  아들 위동은 백인 남성 사이먼과 사랑에 빠져 있었고  부모의 강
권에 못 이겨  위장 결혼을 한 것이다. 영화에서  위동과 사이먼은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사랑 
싸움도 벌인다. 영화는 생략했지만, 그들은 분명히 섹스도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동과 사이먼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여기면서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이렇게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인정하면서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애자이다. 
반면 <크라잉 게임>의 딜과 <패왕별희>의 데이는 자기의  성별을 부정하고 있다. 남성의 신체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은  여성인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반대의 성으로 인식하고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 전환자(transsexual)라고 부른다. 의학적으로도  동성애자와 전
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이  이성 전환자들은 원치 않는 이성의 몸에 갇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전환 수술이 이성 전환자들의 희망일 수 있다.
  동성애자라는 표현을 임의로 재해석해 사용한다면 모를까 서구적 맥락에 의존하면서 게이나 레
즈비언의 번역어로 사용할 경우라면, 동성애자는 이성 전환자와 엄격히 구분해야 할 범주이다. 그
래서 이성 전환자들의 영화인 <크라잉  게임>과 <패왕별희>를 동성애 영화의 대표로 꼽는 일은 
전적으로 오류인 것이다. 그 영화들은 본의 아니게 동성애 개념을  왜곡한 영화가 되고 만 셈이지
만, 그 책임은 사실 우리들의 오해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제 동성애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먼 것 같다.

  동성애, 동성애 영화, 양성애

  동성애자(homosexual)와 이성애자(heterosexual)라는 말은  19세기 말 벤커트(K.M.Benkert)라는 
사람에 의해 최초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homo는 호모투덴스나 호모사피엔스에서처럼  사람을 뜻
하는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homos, 즉 동일하다는 의미에 해당한다.
  동성애자들은 homosexual이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지를 담고 있다고  여겨,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hilia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호모파일(homophile)이라 부르기도 한다. 더욱 일반적인 표
현인 게이(gay)는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를 모두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성 동성애자를 특
별히 지칭하는 말이 게이  우먼(gay woman)또는 레즈비언(lesbian)이다. 호모도 동성애자 전체를 
지칭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는 말이지만 상당히 부정적이며 차별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
  동성애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다양하게 분류된다. 동성애를 왜곡할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 이
용하는 영화도 숱하게 있으며, 동성애 운동 차원에서 거론되는 게이  필름과 퀴어 시네마 등도 있
다. 게이 필름과 퀴어 시네마는 모두  동성애 운동의 성격을 띠는데, 후자가 전자의 발전 진화 형
태라는 사실 정도만 확인하면  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인문학적 발전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개념인 퀴어 시네마의 속내를 논의하고 게이 필름과의 변별성을  살펴보는 과정은 생략한다. 그리
고 이 책에서는 특별히 구분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게이나 레즈비언 등을 동성애자로 번역
하고, 동성애를 묘사하는  모든 영화를 중립적인 의미에서  동성애 영화라고 부른다는 점을  밝혀 
둔다.
  동성애자와는 구별되는 성 정체성의 한 범주로, 남성과 여성  모두와 성적으로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하는 존재인 양성애자가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성애에  대한 연구만큼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양성애가 독자적인 성 정체성이지  동성애의 하위 범주에 속하지
는 않는다는 점이다.

  성전환 수술

  1953년 군인이었던 한 남자가 덴마크에서  시술하면서 성전환 수술 자체와 이성 전환자 모두가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직후 수천 명의 남녀들이  덴마크 등지로 몰려가 성전환 수술을 
했다고 한다. 성전환 수술은 성기를  이성의 것으로 바꾸는 수술이지만, 내부 생식 기관의 이식은 
불가능하고 외성기의 전환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성전환 수술로 성행위는 
가능하지만 임신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해부학적 성별을 거부하고 이성의  몸을 동경하는 이성 전
환자들은 일반의 통념보다 많다. 1993년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약 2만 5,000명의 이성 전환자
들이 있으며, 그 중 약 1만 명 정도가 의술 덕분에 정신에 걸맞은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동성애 억압의 역사

  인류가 섹스의 생물학적 의미를 파악한  시기는 기원전 9,000년 전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전
에는 성숙한 여인이면  누구나 자력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했던 것이
다. 쉽게 납득이 되지 않겠지만, 성행위  후 몇 달이 지나야 임신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감
안하면 조상들의 무지가 이해될  법도 하다. 남성도 잉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터득
한 후 많은 변화가 생겨난다.
  먼저 인류 역사는 여성의 모성 숭배 문화에서 남근 숭배  문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출산력을 상
징하는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을  동굴 벽에 공들여 새기던 인류가, 이제 고대  이집트에서처럼 남
근 상징물을 종교의식의 중심 소품으로  활용하거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남근 그림에 권위의 상
징인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섹스에 사회적 의미가 부가되었다.  기본적인 사회 제도들, 예를 들면 부와 권력의 세습 
제도나 가족 제도 등은 섹스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섹스는  규범에 의해 
규제되어야 했고, 그런 규범을 보호하기 위한 터부가 만들어진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섹스와 
관련해 가장 먼저 생긴 금기는 근친 상간의 금기이다. 고대  이집트나 잉카의 왕가들은 혈통 보전
을 위해 남매나 부녀 간의 결혼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사회에서 근친 상간은 엄격한 금기
의 대상이었다.
  수천 년간 지속된 또 다른  금기가 동성애 금기이다. 현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기초를  이룬 초
기 기독교는 간음과 매춘은 물론이고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부부의 성관계도 죄악시했으니, 
동성애에는 더욱 완고할 수밖에 없었다.  남색을 의미하는 소도미(sodomy)라는 용어는 성경의 창
세기에 등장하는 도시  소돔에서 유래되었다. 알다시피 소돔은 동성애를 비롯한  문란한 성행위로 
더럽혀진 곳이고 그래서 신의 분노를 사 불탄 도시이다. 동성애는  신의 권능에 대한 도전 행위로
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중세에도 많은 유럽 국가들이 성관계를 죄악시했고 자위, 오럴 섹스, 동성애를 금기시했으며 규
범을 어긴 성행위에는 엄격한 처벌을 가했다. 현재도 카톨릭과  유태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가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있다.
  동성애 금기가 어떤  형태로 법제화되고 실행되었는지 문헌을 뒤져보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영화 <토탈 이클립스>(아니예츠카 홀란드감독, 1996년)가 보여 주는 한 장면도 충실한 자료가 될 
만하다. 1870년대 초반  어린 무명 시인 랭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베를렌(데이비드  툴리스)
은 정신과 육체 양면으로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함께  파리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여
행한다. 그런데 두 연인이 벨기에의  브뤼셀에 도착했을 때 베를렌은 절망감에 빠진다. 부유한 처
가와 아내에게 버림받은데다가  랭보마저 떠나려 했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판단력을  잃은 베를렌
은 총을 쏘아 랭보의 왼손에 관통상을 입힌다.
  법정으로 끌려간 베를렌은 이  치상 사건의 경위를 조사받는다. 이런 심문 과정은  절차상 당연
하겠지만, 이상한 일은 베를렌이  추가적인 검사까지 거쳐야 했다는 사실이다. 베를렌의 사생활에 
관한 풍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재판관은 두  의사에게 베를렌이 동성애 경험이  있는지 
검사하도록 의뢰한다. 영화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검사 과정을 보여 준다. 의사들은 베를렌의 항
문에 손가락을 넣어 그 내부를 더듬은 후 그가 동성애자임을  증언한다.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에
서는 합의에 의한 동성애가  명백한 범죄 행위로 여겨졌고, 동성애 전력이 판명되면  그 사실만으
로도 옥살이에 처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화적, 종교적 차이를 막론하고 배척 대상이었던  동성애가 모든 사회에서 금
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역사적 시대가 있었으며, 우리 
모두에게 낯익은 한 사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500년에서  기원전 300년
까지의 황금기 동안,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와 같
은 유명 작가들을 배출했다. 현대 서구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가 바
로 동성애를 공인한 희귀한 사회였다.
  당시 사람들은 동성애 욕구를  자연스런 것으로 보았고, 특히 사제간의 동성애 관계는  제자 부
모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미성년 남색을  타락으로 여긴 이도 있었
지만, 당시의 동성애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태도는 현재 우리가 꿈꾸지 못할  정도로 관용적이
었다. 동성애를 공인한  사회의 또 다른 예로 뉴기니 등지의  원시 부족이 거론되지만, 문명 사회 
그리스만큼 강한 설득력을 지닌 사례는 찾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 사회와 같은 예외적  상황이 있지만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동성애자를 단죄하는 경
향이 인류 역사에서 대세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동성애 금기가 인류 사회에서  보편적인 경
향이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읽으면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동성애 금기가 그랬던 것
처럼 동성애도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는 소수의 불순한 무리
에 의해 어느 순간 솟아난  것이 아니다. 편견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로 살
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사회의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인류의 일부
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동성애자는 주변인으로 내몰렸지만  그들이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물들이라는 일반의 생
각은 사실이 아니다. 다수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 성향을 숨겨 왔겠지만 적지 않은  인물들이 스
스로 동성애자임을 공표했거나  후에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는 역사적인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
어 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나  다윗 대왕은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
켈란젤로도 동성애자였다. 그리고  오스카 외일드와 제임스 볼드윈 그리고 컴퓨터  발명자인 앨런 
튜링 등도 모두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The Gay 10

  폴 러셀이 지은 (The Gay 100)의 우리말 번역사(사회평론)의 홍보용 인용구 중 하나는, 위대한 
동성애자들의 이름이 밝혀진다면 세상은 경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 책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의 리스트가 공개되어  있고, 그래서 동성애가 소수 비정상인들의 `변태적` 기질이 
아님을 확인케 한다. 그 중에서 유력한 인물 10명 정도를 추려 간략히 소개한다.

  1. 소크라테스
  그는 동성애가 용인되던 시대의 최고의 철학자이자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이다. 소년에 대한 열
정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여겼다는 그는 동성애에 철학적,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2. 다윗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간단히 물리친 지략으로 유명하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기도 했
던 다윗도 동성애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구약 성서에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정열적  우정을 긍정
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데, 이 기록은 그들의 동성애적 성행위 묘사로 읽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3. 성 아우구스티누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대부로서, 이브의 성적 욕망이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모든 성행위를 죄악시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 경건한  성직자도 한때 동성애을 경험
했다고 러셀은 설명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우정이라는 샘물을 욕망으로 더럽혔으며
`, 한 젊은 벗과 1년여 동안 `가장 감미로운 경험`을 했노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
  폴 러셀은 프로이트의 분석에  기대어 다 빈치의 동성애 성향을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다 빈치
의 유년 시절  회상기록에서 펠라티오의 이미지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의  욕망은 
처음에 여성을 향하다가 급작스럽게  남성으로 그 흥분이 전이되게 마련인데, 그와 같은  다 빈치
의 동성애적 기질을 미묘하고 중성적인 모나리자의 미소가 드러낸다는 것이다.

  5. 알렉산더 대왕
  단 한 번의 패전도  경험하지 않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도 동성애자였다. 
그는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린 `행운아`였지만 그의 진정한 사랑은 2명의 남성이었다. 그 중 하나
는 헤파이스티온인데 알렉산더는 그를  또 하나의 알렉산더라 부를 만큼 둘은  `일심동체`였던 모
양이고, 헤파이스티온을 살리지 못한 의사를 처형한 알렉산더의 무분별함도  그 남성에 대한 사랑
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소년을 시동으로 두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동성애자라는 증거는 그의  작품, 특히 시의 일종인 소네트 154편에서  명백히 드
러난다고 설명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나를 낳아 준  미스터 W.H.`에게 그 시들을  헌정한다고 
적었는데, 물론 논란거리지만 미스터 W.H.가  분명 셰익스피어와 뜨거운 사이였던 남성이라는 주
장이 유력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네트들에는 한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셰익스피어는 그
가 다른 여인한테서 매독을 옮겨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드러내고 있다.

  7. 나이팅게일
  원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도 동성애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녀의 동성애적 성행위를 입증
할 수는 없지만, 사촌 누이인  마리안 니콜슨이 유일한 사랑이었다고 회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
가 나이팅게일을 떠났을 때, 나이팅게일은 깊은 상처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8. 차이코프스키
  아내의 집요한 성관계 요구에  자살을 기도했다는 이 음악가는, 14세의 소년 보브에  대한 애절
하고 절망적인 사랑을  토로하고 기록들을 남겼다. 그의 죽음도 동성애적  기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왕가의  어린 소년과 나누었던 성관계가 불러일으킨 스캔들 때문에  음독 자살했다
는 것이다.

  9. 사포
  기원전 6세기경 에게  해의 레스보스에서 태어난 이 시인은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되어 있
고,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도 그녀의 출생지에서 기원한다.  2,500년 동안 지속된  레즈비언 역사의 
선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사포는 최고 지명도의 여성 동성애자이다.

  10. 마돈나
  마돈나는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공표할 만큼 대담하고 또 가장 널리 알려진 현존 동성애자
이다. 그녀는 동성애를  인기 유지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받지만, 동성애 이미지를 전세계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한다는 점에서 동성애 `운동권`의 유력 인사 중 하나로 꼽힌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무엇이 다른가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가상 답안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동성애자는  어떤 사람
인가. 동성과 성행위를 갖는 사람이라고 답하기 쉽다. 그렇다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쉽게 구별
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서로 뚜렷이 구분
되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존재하며, 동성애자라면 반드시 동성과 성행위를 갖는다는  게 일반
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동성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해위와  성 정체성을 별개로 여겨
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행위만을 기준삼아 동성애자인지 여부를  판별하려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는 것이다.
  동성과의 성관계 없이도 동성애는  가능하다. 이 사실은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상정해  보면 쉽
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행위 없이도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애틋한 
마음이나 간절한 그리움  같은 낭만적 몰입만으로도 남녀간의 사랑은 성립하며,  사랑에서 성관계
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동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가슴  떨리는 낭만이 이성애자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동성
의 대상을 향한 뜨거운 가슴만으로도 동성애는 성립하며 그래서 성관계는 동성애에서도 부수적인 
사건일 수 있다. `숫총각`으로 늙어  가는 이성애자가 있듯이 동성애자도 동성과의 성관계를 영원
히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적 성행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미여
인의 키스>(헥터 바벤코 감독,  `1985년)의 배경은 남미 한 국가의 교도소이다.  몰리나(윌리엄 하
트)는 어린이 성학대 혐의로 수감 중인 동성애자이다. 그의 룸메이트 발렌틴(라울 줄리아)은 동성
애를 혐오한다. 성 정체성뿐 아니라, 그들의 희망도 정반대의  방향이다. 발렌틴은 자기 희생을 통
해서라도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길 소망하는 인물이다.  반면 몰리나는 지극히 사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정보  기관은 몰리나를 이용해 발렌틴에게서 반정부  조직의 정보를 캐내려 하고, 
가석방을 대가로 제시한다. 그래서 그 둘은 한곳에 수감된 것이다. 성 정체성이나 삶의 지향이 적
대적인 이 두 인물은 서로를 경계하거나 때로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러다 둘은 서로 교감하게  된다.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상황은  발렌틴의 급작
스런 복통에서 비롯된다.  발렌틴은 어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변기로 향하지만 목표  지점에 이르
기 전에 일을 보고 만다.  누구나 코를 틀어막고 뒷걸음질칠 끔찍한 재난이지만, 몰리나는 대단히 
침착하고 다감했다. 발렌틴의 바지를 벗기고  몸을 씻기고 그를 밤새 보살핀다. 결국 이들은 친밀
해진다. 뜨거운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몰리나의 가석방 전날 밤에는 촛불을 끄고 누워 초야를 치
른다.
  이들의 통정 또는 교감은 영화의 결말에서 몰리나의 죽음을  불러온다.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
대로 반정부 조직과 접선하다가  총상을 입는다. 정보국 요원들은 접선 상대의 전화  번호를 알려 
주면 병원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몰리나는 침묵하고 죽음을 맞는다.
  몰리나의 입장에서 발렌틴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었고, 그와의 섹스는 헌신적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성과 섹스를 나눈 이성애자 발렌틴은 어떤가. 발렌틴은 갑자기 동성
애자가 된 것이고, 또  그가 만일 출옥했다면 동성과의 은밀한 데이트를 꿈꾸며  밤거리를 배회했
을까. 그렇지는 않다. 발렌틴은 동성애적 성행위를 경험했지만 그가 바란 것은 몰리나와의 교감이
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발렌틴이 여전히 이성 애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아이다호>(구스 반  산트 감독, 1991년)도 <거미여인의 키스>와 유사한  사례이다. 영화
에는 미국 슬럼가의 동성 매춘 무리들이 등장한다.  그 떨거지 집단의 일원인 스코트(키아누 리브
스)와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함께 여행을 떠난다. 어두운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주 앉은 그들
은 대화를 나누는데 스코트가  뜻밖의 주장을 한다. 자신이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
만 그건 돈벌이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을 사랑하는 자들은 지저분한  변태라는 주
장도 덧붙인다.
  앞의 두 영화는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할 수도 있다. 물론 영화가 현실을  한참 벗
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두 영화 속의 설정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실제
로 많은 이성애자들이 동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여러  자료 중 
하나는 한 유력 잡지의  설문 조사이다. 미국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는 90년대 초반  정기 구독
자 7,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설문  대상자는 동성애를 경험한 사람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3분의 2 가량이 자신을 이성애자로 여기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
신을 이성애자라고 믿으면서도 동성과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한 동성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자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성애자도 동성애적 성행위를 할  수 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성애자라고 해도  동성과 성
행위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면 이제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우리는 성행위  파트너의 성별만
으로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딱 부러지게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하지만 킨제이 같은  심리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인정되어 온  킨제이 척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성 정체성을 0에서  6까지의 단
계로 나누고 완벽한  이성애자를 0의 위치에, 전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을 6의 위치에 설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극단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성애적
이며 동시에 동성애적인 존재들인 것이다. 예컨대 많은 이성애자들도  자주 동성애에 대한 환상을 
품기도 하며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적 욕구를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도  동성애의 원인은 비교적 분명할 것이라는 게 일반
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기대도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19세기 이후 많은 심리학자들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고, 동성애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19세기 심리학자 크라프트 에
빙은 유전을 원인으로 꼽았다.  또 프로이트는 이성 부모에 대한 강한 동일시가  동성애를 초래한
다고 설명하면서 후천적인  영향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동성애
의 원인은 밝혀진 게 없다.
  가장 활발히 연구가 진행된 유전학 분야에서도 뚜렷한 성과는  없다. 생리학에서는 성 호르몬의 
분비 이상을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아 왔지만 아직까지 확증을 얻지는 못했다.  또한 후천적인 
영향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한 예로 동성애 성향을 지닌 부모의 자녀가  동성애자로 자랄 
확률이 특별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다수가 왜 이성애자로  자라는지 알 수 없듯이 동성
애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유보적인 결론만이 가능하다. 이성애든 동성
애든 우리가 알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어떤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아이다호>의 주인공 마이크는 모닥불 건너편에 앉은 스코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도 거래
가 없이 키스하고 섹스하는 동성들은 더러운 존재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코느와 뜨거운 
가슴으로 키스하고 성행위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이크는 갑자기 동성애자로서의  자기 모
습을 확인하고 고백한 것이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또한 동성애의 원인
이 밝혀져 있지 않다면, 마이크와  같은 변화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유
를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었듯이 동성과의 사랑도 그렇게 불현듯 찾아 올지 모르는 일이다.

  동성애적 성행위에 대한 편견

  영화의 드라마적 재미는 대체로 선한 주인공과 악한의 대결이  펼쳐져야 성립된다. 이런 골격의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악인이 등장하는데, 몇몇 영화는 동성애자를 악한으로 선택한다. 그런데 그 
동성애자들은 영화 속의 선량한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종종 관객의 동성애 이해까
지 오리무중에 빠뜨리기도 한다.
  팀 로빈스가 출현한  <쇼생크 탈출>(1994년)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적 드라마로  기억할 영화임
에 틀림없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결국  자유를 찾는다는 흔한 줄거리의 영화
임에도 이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앤디가 숱한 난관을 드라마틱하게 극복했기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관객들은  앤디가 처치한 여러 가지 장애물 중에서, 특히 보그스 일행
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앤디에게 접근한다. 앤디는 저항하지
만 그럴수록 보그스 일당은  잔인한 폭력으로 응수한다. 보그스의 뭇매에 앤디는 곤죽이  되기 일
쑤였고 또 성폭행 앞에서는 굴욕감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보그스가 반신불수 및 금
치산자가 되면서 앤디의 시련은 끝을 맺는다. 쇼생크 교도소에 있던  악한 중 하나인 간수장이 보
그스를 대신 응징한 것이다.
  우리는 유사한 상황 설정을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명도는 낮지만  우수작으로 알
려진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앨런 파커 감독, 1972년)도 <쇼생크 탈출>과 기본 구도가 상당히 
비슷하다. 실화를 재현한 이 영화는  1970년 터키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미국인 빌리 헤이스는 터
키에서 마약을 밀반출하려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비록 마약  사범의 처지이지만 헤이스도 앤
디처럼 자유을 갈망하고  그래서 탈옥의 은어인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가 그의  캐치프레이즈이
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  영화에서도 동성의 몸을 욕망하며 폭력에도 능숙한 악한이  등장하여 주
인공을 유린한다. 거구의 간수장이 내리치는 매질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간수장의 성폭행은 헤이
스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트린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헤이스는  색마 간수장을 살해하고 감옥을 
빠져나가며 쾌재를 부른다.
  <쇼생크 탈출>이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지독한 동성애자
를 목격한 느낌일 것이다. 그들은 동성을 성욕 해소의 수단  정도로 여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
와 폭력으로 목적을 취하는  인간 말종이다. 그러니 사악한 동성애자의 몰락에 환호하는  게 일반
적이다. 보그스를 매질한 쇼생크 교도소의 무시무시한 간수장은  정의의 용사 같아 보이고, <미드
나이트 익스프레스>에서는 쇠창살에 꽂혀 죽는 간수장의 모습이 악귀의 최후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 영화들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면 동성애자들은 유달리 강간 충동이 강하기 때
문에 경계해야 할 존재들이다. 과민한 반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남성들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어두운 뒷골목은 피해야 한다. 욕구 불만 상태의 동성애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들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앞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들은 동성애자인가. 관객들이 그들을 동성애자로 
믿게 되는 이유는 동성을 열망했고 강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성을 강간하는 사람이 동성애자
라고 확정짓는 생각은 절대 온당치 않다.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진 많은 연구들이 동성 강간, 특히 남성에 의한 남성 강간에 주목했다. 공
통적인 결론은 일반인의 상상과  크게 어긋난다. 절대 다수의 사례에서 남성 강간의  원인은 상대
방에 대한 지배욕이나 복수심이라는 것이다. 갱단 등에서 규율을 어긴  자에 대한 집단 강간이 그 
예이다. 또 증오하는 대상에서 치욕을  주려고 자행되는 경우도 있다. 남성 강간은 성적인 동기와 
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 동성애자가 남성을 강간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의 이성애자가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성폭행도 극히 일부의 사례로 보아야 
한다.
  교도소 내 동성 강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영화들이  묘사하는 바처럼 교도소에서는 동
성 강간 사건이 빈발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건의 가해자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
성애자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교도소에서는 이성과의 성관계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
에 몇몇 이성애자들이  동성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교도소내 성범죄의 피해자는  이성의 대리물이
며 가해자는  여전히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쇼생크 탈
출>이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를 무심하게  감상할 수는 없다. 선량한 주인공들을 고난에 빠
뜨리는 등장 인물들이 마치  동성애자인 듯한 인상을 심어 주기 때문인데, 이는  동성애자 입장에
서는 억울한 모함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관람한 뒤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
에 감염된 관객들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동성애자가 강간  충동이 유별난 것도 아니며 동
성 강간의 범인 중 대다수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의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거론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의 영화들이 있다. 문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에 해당하는 포르노 그라피이다. 사진 이미지와 더불어 포르노 영화는 동성
애적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독한` 포르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남성간의 에이널 섹스(anal sex)와 여성 동성애자들의 딜도 섹스(dildo sex)이다. 
그러니까 포르노 영화들에  따르면, 남성 동성애자는 항문을 이용하고 여성  동성애자의 성행위에
는 인조 남근인 딜도가 사용된다.
  이 포르노 영화들의  동성애 묘사 방식은 이성애자들의 상상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행위를 기준으로 삼아 동성애의 모양새를 재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 포르노 
영화의 배우들이 이성애자인 것처럼, 영화 속의 동성애 묘사  장면도 실제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성
애자만의 공상인 경우가 많다.
  동성애자의 성행위 양태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는 마스터스와 존스가  유력하다. 그들의 공동 연
구에 따르면, 포르노 영화의 동성애 묘사는 사실과 큰 괴리를 보인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경우 분
명 에이널 섹스의 빈도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남녀의 성행위에서처럼  남근의 삽입
과 마찰이 반드시  수반되지는 않는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에이널 섹스에 집착하지 않으며  상호 
마스터베이션이나 오럴 섹스도  충분한 교감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레즈비언들도  이성애적 
성행위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키스나 애무 혹은 외부 성기의 자극만으로도  사랑을 확
인하고 큰 쾌감을  얻는다. 에이널 섹스나 딜도를  이용한 성행위는 현실보다는 이성애자의  상상 
속에서 더욱 빈발한다.
  어찌 보면 동성애의 성적 형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
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포르노 영화의 연출  방식이나 이성애자들의 몽상은 실제와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이성애자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
례가 된다. 이런 사고 방식이 바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의 진원지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자들이 자
신의 침실 경험을 근거로  동성애자들의 성행위 양태를 재단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사고  방식 속
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이성애자의 자기  중심적 시
각을 확인하는 과정이 동성애에 접근하는 데 의미있는 일이 된다.

  동성애자의 라이프 스타일

  <버드 케이지>(마이크  니콜스 감독, 로빈 윌리암스  주연, 1996년)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화해 
방법 한 가지를 제시하려다 실패한 영화로 볼 수 있다. 감독이 발을  헛딛고 만 데는 미국 사회의 
숱한 갈등 요소들을  영화 한 편에 구겨 넣으려던  과욕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동성애에  대한 
무지가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상 이 영화에는 대다수 이성애자들이 갖기 쉬운  오해가 투영
되어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버드  케이지`라는 게이 바를 운영하는 유쾌한  동성애자 아먼드(로빈 윌리엄
스)이다. 그는 한때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  벨까지 낳았지만 이제는 남성인 앨버트와 가
정을 이루고 있다.
  이 영화의 논의거리는 앨버트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남성 동성애자 커플 중 한  사람은 지극히 
여성적인 성향을 지닐 것이라고  믿고, 여성 동성애자 커플의 경우에도 남성 역할을  담당하는 쪽
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은 영화 <버드 케이지>의 앨버트의 모습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성 전환자를  연상시킬 만큼 여성적인 모습이다. 질투심이 강하며  히스테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짙은 화장으로 주름을 가리려 애쓰며, 놀라면 날카로운 괴성을 지른다.
  여성적인 남성 동성애자나 남성 같은  여성 동성애자는 <버드 케이지>뿐 아니라 많은 대중 매
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문화적 스테레오타입이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의 고정 관념
이다. 그렇지만 실제 조사를 참고해 보면 그런 편견은 크게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킨제이나 포메로이 등의 조사에 따르면  동성애자가 여성화 또는 남성화 경향을 보이는 비율은 
15%이하이다. 이성애자들 중에도 이성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수
치가 유별나게 높은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 중에는 과장된 여성 모습을 취하는 남성 동성애자, 즉 
퀸(Queen)도 있는데 이성애자들과 대중 매체는 그런 존재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그런 동성애자들
은 적은 수이며,  또한 동성애자들한테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소수가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부풀리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성애자들은 예외적인 사례를 근거로  동성애자 커
플에서도 남녀 역할이 나누어져 있다고 믿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동거 중인  동성애자의 경우에는 어떨까. 남녀의 동거에서처럼 역할이  분명히 구별되
는 것일까. 미국에서 이루어진 여러  조사들은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경제 활동이건 가사건 
남성적인 일과 여성적인 일을 구분하여 분담하는 사례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가사의 
분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의  구분 방식은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요리를 좋아하는 쪽이  요리를 담당하는 식으로 나누어지는 것이지, 남녀의 동거에서처
럼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을 구분하고 엄격히 분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 중에도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최근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필
자는 혈기나 호기심이 휠씬 왕성했던 시절에 접한 영화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중 하나는 황석영
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으로 임성민과 금보라가  주연한 <장사의 꿈>이라는  작품이다. 가난하고 
순수한 남녀가 비정한 한국 사회를 버티어 내고 경제적  성공으로까지 나아가려 애쓰지만, 결국에
는 순수함까지 잃고  좌절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는  한 동성애자가 건장한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고 호텔로 데려가려 한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희극 배우  남포동이 연기했던 그 동성애자는 
참으로 혐오스럽고 비열한 인물로 보였다.
  동성애자가 주변적이고  부정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대부분의  영화에서 마찬가지였는데 소수의 
예외도 있다. 영화 <사방지>(송경식 감독, 1989년)는 외견상으로는  동성애가 주요 테마인 영화에 
속한다. 세도가의 청상 과부 이소사(방희)와 몸종인 사방지(이혜영)의 정사가  수없이 반복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둘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사방지는 외관상 영락없는 여성이었지만 성행위에 사
용하는 신체 기관만 남성이었기에  둘의 정사는 가능했다. 영화 <사방지>는 동성애  영화에 속하
지도 않고 값싼 애로물로 여길 수 있지만 굳이 찾자면 긍정적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성 정체
성이 사회적 기대와 불일치할 때 야기되는 개인적 비극을 슬쩍 보여 준다는 미덕도 지닌다.
  이소사는 사방지와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그녀가 차가운 땅에 묻히던  날 사
방지는 끝없이 절망한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신의 운명이 증오스럽고, 또 그 운명 때문에 사랑
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찢는다. 사방지는 결국 깨진  사기 그릇의 날로 남근을 절단
하고, 사랑하는 여인 이소사의 무덤가로 가서  죽음을 당한다. 그녀의 죽음은 남녀 중 한 가지 범
주에 들어맞지 않을 경우 사회 권위에 의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 다른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박재호 감독, 1995년)은 우리 사회 동성애자의 현실을 묘사
한 거의 유일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개봉된 후 몇몇 동성애 이론가들이 비판하고 나섰지만, 동성
애의 삶에 대한 보고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이 영화는 중요한 참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파트에서 동성애  문제가 부각된다. 주인공 정민은 
30대의 남성으로 CF 감독이다.  그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그러니까 여성과의 만남도 경험했고  남
성으로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형`이라 부르는 52세의 남성
을 만난 뒤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동
성애자인 것이다.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 우리는  상당히 인상적인 설정을 여럿 본다. 이 영화는 <쇼생크 
탈출>에서의 악의적 시각이나 <버드 케이지>의 왜곡된 묘사도 배제하려고 애를 썼다. 주인공 남
성들은 외모나 성향이 지극히 표준적인 남성이며 정상적인 사회인이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
으며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티격태격하고 고민하는데, 그 사랑 싸움은 평범한 남녀  커플의 그것
과 전혀 다르지 않다. 사랑의 위기도 닥치고 위기를 극복한 사랑은 더욱 탄탄해진다.
  영화의 말미에서 형은 정민에게 자신의 가족과 정민에 대한  사랑의 비율이 똑같다고 설명한다. 
형의 가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형은 정민과 또 하나의 가정을 형성하고 살
아갈 것이다. 바로 그  방식 그대로 동성애자들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이성애자들  곁에서 생
활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 운동의 역사

  동성애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희귀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수천 년 동안 금기와 단죄의 대상이었
다. 현대 대중의 집단  의식이 표현되는 대중 매체 속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동성애자들
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주변인으로  남아 있다. 동성애자들도 20세기 들어 차별적 제도와 편
견에 맞서 인권 운동을  벌였는데, 동성애 운동은 다소나마 진전된 동성애자들의 인권  상황을 일
구어 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성애 운동은 서로 합의한 성인  사이의 동성애를 규제하는 법률을 철폐하고 취업, 신용, 주거 
등에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회  관행을 고치기 위해 시작된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세
기 말 이전에는 동성애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베를린에서  1897년 설립된 동성애 과학 인
도주의 위원회가 최초의 동성애  운동 단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단체는 관련  간행물을 발행하
고 시위를 벌이고 법률  개정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인근  네덜란드나 오스트리아 
등지로 뻗어나갔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 단체의 운동은 중단되고 만다. 유럽 국가 중 영
국에서는 1914년 동성애  관련 계몽 운동의 성격을 띤 영국  성심리학 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성애 운동의 본령은 유럽  지역보다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20세기  후반 들어 
동성애 운동 단체가 여럿 결성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남성 동성애자  단체는 헨리 헤이 등이 1950
년 LA에서 결성한 `마티신 소사이어디(Mattachine Society)`인데, 오늘날에도 가장 유력한 동성애
자 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 이 단체명은 중세  유럽의 마스크를 쓴 어릿광대의 이름으로  비롯된 
것이다. 귀족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스크로 가려야 했던 그 광대들처럼, 동성
애자들도 본래의 성향을 숨겨야만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여성 동성애자 집단은 1956년 결성된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로, 이 단체는 고대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 사포를 사랑했던 매춘부 빌리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게 50년대 말부터 동성애 단체가 결성되면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차별하는 사회 질서에 
구체적인 저항을 펼 준비를  해 나갔다. 1960년대 말부터는 게이들이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친구
나 가족 또는 공공에  선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성해방 경향이나 정치적 자유주의의  발전과 무
관하지 않은 흐름이었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의 조직화는 결국  이성애 중심의 사회 질서와  정면 
충돌하게 된다.
  동성애 운동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1969년 6월 28일 오전 3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발
생한다. 경찰이 스톤월(Stonewall)이라는  게이 바를 습격하고 몇몇의  동성애자들을 체포하려 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전처럼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경찰에 맞선다. 200여 
명의 동성애자들이 경찰에 야유를 퍼붓고 투석전을 벌인 이날의 저항은 단 45분간 지속되었을 뿐
이지만, 다음 날 다시 시위가  재연되었으며 400명의 동성애자들과 2,000명의 경찰이 대치하여 싸
움을 벌였다.
  이 사건은 동성애자들이  부당한 억압에 맞서 최초로  소리를 내지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한 동성애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매년 6월이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
국에서 `게이 프라이드 위크`를 통해  동성애자들은 스톤월 항쟁을 기념한다. 영원히 잊혀질 운명
이었던 사랑이 드디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1948년 킨제이  보고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0%, 
그리고 현재 일반적으로 합의된 수치인 인구의 2-4%에 해당하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보
호하기 위해 싸움을 벌여 나가게 된 것이다.
  스톤월 항쟁 이후 미국에서  동성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항쟁 후 1년  내에 미국에
서는 12개의 동성애 단체가  구성되었고, 1970년 시카고 대학에서는 660명이 참여한  최초의 공개
적 게이 댄스 모임이 열려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1973년에는 미국 정신
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정신 질환 리스트에서 제외하는데, 이는 단순히  의학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
기보다는 동성애자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이제 정신 의학 분야에서 동성애는 치료  대상 질환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동성애 운동이 탄탄대로를 걷지는 못했다. 1978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최초의 동성애
자 민선 시장인 조지 모스콘이 암살되었다. 감히 동성애자 주제에  시 행정을 책임질 수 있느냐는 
이성애자들의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현된 셈이다. 1981년 최초로  에이즈가 보고되자 동성애자들은 
더욱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의사들은 에이즈의 발병 및  감염 경로를 발표하면서 많은 동성애
자들을 거론했다. 이 때문에  에이즈는 감기처럼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동성
애자와 에이즈의 관련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이 원인  불명의 질환을 동성애를 단죄하기 
위해 신이 내린 역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성애 공동체와 동성애 개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까
지 빈발하게 되었다.
  시련 속에서도 동성애 운동은  계속되었다. 미국 하원 의원 제리 스튜즈를 비롯한  여러 공직자
들이 동성애 경향을  공표하였다. 1984년에는 위스콘신 주에서 최초로 동성애  반차별법이 통과되
었고 현재 미국 전체 주에서 절반 정도는 합의에 의한  동성애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기했다. 클린
턴 정부는 엄격한 규율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에서도 `추궁과 공표를 금지(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동성애 성향의  공표를 금지하는 동시에 동성애자에 대한 추궁도 엄격히  금지하고 동성
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동성애 운동이 그나마 모습을  드러내는 사회는 미국 등 서구의 일부로 한정되어  있다. 아직도 
많은 사회에서는 동성애자가  운동에 나서기는커녕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이성애자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그만큼 높은 편견의 벽이 동성애자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
으로 동성애 운동은 싹을  틔우고 자기 발전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자들은 일종의  보편성을 지니
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자들은 모든 사회에 있게 마련이고  그들도 엄연
히 사회의 일부라는 사실이 동성애 운동의 근거라는 것이다.

  음지에서 일하며 권력을 지향한다 - 마피아

  마피아, 제3의 권력

  권력은 누구의 것인가. 명목상으로 대중이 그 주인이지만 실상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선거 등  합법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소수 정치 집단이  사회를 이
끌어 가며, 역사서들은 권력을 말할 때 주로 그들 정치 집단을 주목한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또 다른 권력 집단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범죄 단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주로 갱스터 영화 등 대중 매체를  통해 만나는 
범죄 단체는 분명 또 하나의 권력체이다. 나름의 조직과 규범을  갖고 세상의 한 구역을 지배하며 
때로는 공식적 권력 집단과 맞붙기도 한다.
  이런 범죄 단체는  별반 의미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쉽다. 폭력과 공갈을 일삼는 그들의  당장 
척결해야 할 암적 존재 같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범죄 집단도  인류 역사의 
중요한 일부이다. 범죄 집단은 아마도 인류 역사 내내 존재했으며  인류의 한 분파가 범죄 단체를 
조직하면서 적지 않은 노력을  쏟아부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죄 단체를  역사적 산물
로 여기고 그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무익한 노고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논의될 집단은 일반적인 범죄 단체가 아니라,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마피아이다. 
특히 미국 갱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 마피아가 주된 이야기 대상이 될 것이다.

  시칠리아의 마피아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범죄  단체가 있게 마련이지만 모두 마피아라는 명칭을 얻지는 못한다. 
마피아가 워낙에 뚜렷한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부는 물론이고 정치 권력까지 획
득하여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즉 권력을 지닌 기업형 범죄 조직이 마피아이다.
  게다가 마피아는 특유의 철의  규율로 결속된 집단이다. 마피아는 그 기원에서부터  5가지 기본 
원칙의 오메르타(omerta)라는  서약을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한다. 죽음 앞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침묵의 서약, 조직과 보스에 대한 절대 복종의 규범, 우호적 마피아 분파에 대
한 지원의 의무,  패밀리를 향한 공격에는 철저히 복수한다는  원칙, 당국과의 접촉을 불허한다는 
원칙 등이 오메르타를 구성한다.  마피아는 하나의 패밀리, 즉 가족이나 다름없다.  엄격한 위계질
서로 틀지어져 있으며 패밀리 보스에 대한 복종과 집단의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데올로
기로 무장한 것이다.
  마피아가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에 앞서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던 이유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피아의 발생지인 시칠리아 섬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에 합병되기까
지 무수한 외침을 경험했다.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에 인접해 있는 시칠리아는 
유럽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 터키제국, 스페
인, 게르만 등 여러 강국의 침략이 빈번했다. 그래서 외부 세계를 경원시 하는 배타적인 시칠리아
의 분위기가 유래된 것이다.
  배타적이며 내부  결속을 중시하는 시칠리아의  분위기는 마피아에게도 직접 이어진다.  더욱이 
범죄 단체에 대한  외세 지배자의 탄압과 견제는 더욱 심각했고  무솔리니를 비롯한 자국의 정치 
권력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마피아는 강적들과 항상 맞설 수밖에  없었다. 기원에서 현재까지 마피
아는 외세와 내부의  세력에 맞서 조직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철의  규율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
다.
  빈번한 외세의 침략은 마피아(Mafia)의 어원을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피아
는 `피난처`를 의미하는 아랍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있고, 또 `지배 질서에  대한 호전성`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 그리고  콜린 윌슨은  <잔혹>(하서)에서 마피아는  이탈리아어 `Morte 
Alla Francia Italis Anela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죽음을 외친다).`의 머리글자를 합성한 단어라고 
설명한다.
  명칭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럿이지만 마피아의 성격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일치한다. 초
기 마피아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시칠리아의 봉건제 기간  동안 처음 모습을 드러낸 마피아는 
부재 지주에 고용된 소규모  군대였다. 지주들은 외세와 산적 그리고 농민들로부터 자기  땅을 지
키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리들을 고용하고 토지 보
호의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마피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말하자면 초기 마피
아는 귀족들에게 고용된 동네  `어깨`였다. 마피아의 또 다른 성격은 좀더 긍정적이다.  그들은 시
칠리아 섬을 지배하던 외세에 맞서 싸우던 소규모 비밀 조직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외세 지배 질
서를 교란하던 독립 투사로 출발하여 현재의 기업형 범죄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  성격이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외세가 지배하는 곳에서  토종 깡패
들은 다분히 외세에  반하는 경향을 지닐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이라 불리는 인물은 엄밀히 말한다면 종로 지역을 지배하려던 불량
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일본 군경에 맞서야만 했고, 그래서 그는 독립 투사의 이
미지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피아가 뚜렷이 범죄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때는 19세기 초반, 즉  시칠리아에서 봉
건 제도가 무너진 시기와 일치한다.  마피아는 자기 구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협박과 무자
비한 폭력을 무기로  지역을 장악하고 그곳에 자신의  규범을 심었다. 무력한 일반인들은  보호의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고 마피아의 규범을 따름으로써 마피아의 지배를  인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
아 시칠리아 섬  곳곳에 생겨난 마피아들은 협상을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제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오늘날까지  1,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어 낼 조직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폭압적인 정치 권력도 민심을  잃으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라고 
할 때, 불한당 마피아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사실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철의 규율과 무자
비한 보복 덕분에 유례없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상식대로라면 그렇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설명도 있다.  마피아는 분명 악성 종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험  제도와 유사
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이 그 설명의 요지이다.
  마피아는 봉건제가 무너진 직후 급성장하였는데, 그 즈음의 사회  변화상을 주목하면 왜 마피아
가 시칠리아에서 긍정적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봉건 제도의  몰락이 가져온 변화 중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수가 재산과 물리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제도 아래에서는 
귀족 등 극소수가 재산과 물리력을  독점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재산을 소유하고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회적  안정성이 크게 훼손된다. 사람들은 주위의 군상들이 잠재적인 도
적떼임을 잘 알고 있다. 틈만 보이면  내 재산을 사취하거나 강탈할 게 분명하다. 실은 나도 남의 
재산을 취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기본적 신뢰가 사라진 것이고  사회는 대혼란
의 상태에 빠져든 셈이다.
  이전의 국가 권력을 대신하여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운 세력이 바로 마피아이다.  마피아는 정
당성은 없었지만 거래 관계를 교통 정리할  정도의 물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
능했다. 사람들은 마피아에 의뢰하면 재산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거래도 안정될 수 있음을 알
게 된다. 그래서 거래와 일상  생활에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보호를 요청하는 대신 그  대가를 마
피아에게 지불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마피아는 보험 제도에 비유할 수 있다.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재물을 일부 포기하는 원리, 그것이 바로 마피아와 보험 제도의 공통점이다. 그
래서 민초들에게 마피아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명백히 불한당 같은  깡패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는 없으면 불편한 존재가 마피아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피아가 사회적 권력까지 쥐게 된 배경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거론된 
강고한 내부 규율도 중요한 변수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가 통일될 무렵의 정치적 호조건
도 거론될 수 있다. 가리발디가 주도한 1860년 이탈리아 통일은 곧 전국적 선거로 이어졌는데, 이 
선거에서 마피아는 정치 권력의 지분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시칠리아의 선거를 통제하고 바람
을 일으킬 유일한 토착 세력이 마피아였기 때문에 중앙 정치가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
이다.
  마피아가 시칠리아 사회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도 사회 권력을 장악하는 데 호조건이 된 것
이 분명하다. 마피아는 시칠리아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세력이었기에, 시칠리아인들로서는 통
일이나 선거 그리고 명백히 사회적 요청을 충족시키는 제도 중 하나였기에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 시련이  거듭되었지만 마피아는 몰락하지 않았다. 가장 가혹한  시련은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20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하면서  시칠리아의 마피아를 일망
타진하기로 결심한다. 세즈레  모리라는 지방관를 직접 파견하여 마피아 조직원들과  보스들을 척
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한동안 일대 위기에 봉착했던 마피아는  파시스트로 위장 전향하면서 명맥
을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탄압을 피해 북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덕에 마피아의  세력권이 오
히려 확장되는 결과도 얻었다. 많은 마피아들은 2차 대전  후 이탈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에 협력을 
약속하고 감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현재도 그 악명과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하다. 시칠리아에만도 181개의 마피
아 패밀리가 있는데 조직원은 약 5,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은 물론이고 전체 이
탈리아를 장악하여 비합법적인 활동과 합법적인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으
로 진출했는데 죄근에는 특히 동구권 등에 그 세력을 뻗치고 있다.
  세계의 언론들은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 마피아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이탈리아  마피아의 확
고한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1992년 반마피아 법안을 통과시킨다. 교
도소에 갇힌 마피아 두목과  조직 간의 연락을 단절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마피아  단원에게 법률
적 혜택을 제공하는 등 마피아의 와해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강공에 마피아는 주춤거린다. 특히 콜레오네 마피아의  보스 토로 리나를 체포
한 일 이 최대  성과 중 하나였다. 콜레오네는 영화 <대부> 주인공들의 고향으로  설정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탈리아 마피아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분파가  바로 콜레오네 분파이니 토로  리나를 
잡아들인 이탈리아 정부는  의기양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피아는 곧바로 떨쳐  일어났고 
그 보복의 칼날은 정부의 심장을 향했다.
  토로 리나가 체포된 직후  조반니 팔코네 판사와 그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팔코네  판사는 바로 
반마피아 정책의 상징이었다. 그는  무장한 차량을 타고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도심의  도로를 달
리고 있었는데 그 차량이 폭파된  것이다. 곧이어 갤러리, 교회 등이 폭파되고 오메르타의 원칙을 
파기하고 조직을 배반한 옛 마피아 단원들이 암살되기 시작했다.  마피아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
탈리아 전체가 테러에  휩싸이고 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이처럼 공식적 권력과  정면 
충돌을 불사할 만큼 이탈리아 마피아는 아직도 강력한 물리력과 권력을 지나고 있다.

  미국 마피아의 전형: 콜레오네 패밀리

  이탈리아 마피아가 원조이지만 우리가 기억할 마피아의 활동 무대는  미국 땅이다. 우리는 미국 
마피아를 여러 영화에서 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대부> 시리즈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  알파치노 
주연)를 대표적인 마피아 영화로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도 분명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허구가 역사서보다 역사에 더욱 근접해 있는 예외도 있는데,  바로 <대부> 시리즈가 그런 경우이
다. 돈 콜레오네의 가족과  콜레오네 패밀리가 걸어온 궤적은 실제 미국 마피아  역사의 이미지를 
파악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1901년, 9세의 어린 소년 비토  콜레오네가 뉴욕 항구에 들어선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출신인 
그는 부모와 형을 살해한 지역  마피아에게 쫓겨 홀로 미국 땅으로 들어선 것이다. 성장한  돈 콜
레오네는 평범한 가장으로서 살아가지만,  빈번하게 지역 갱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굴복과 상납도 
한 가지 생존 전략이었겠지만 돈 콜레오네는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주위의 갱 조직들을 하나 하
나 정복한 결과 돈 콜레오네는 뉴욕 마피아의 리더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비토 콜레오네는 막내인  마이클 콜레오네에게 조직을 승계한다. 마이클은 건실하고  소박한 청
년이었지만 곧 마피아  보스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온갖 살육을 능숙하게  지휘한다. 마이클의 
삶의 목표는 두 가지의 가족,  즉 마피아 조직과 혈족으로서의 가족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가족을 조화롭게 유지하려던  마이클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조직을 합
법화하려 했지만 경쟁 마피아  패밀리와 권력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역으로  조직을 지키
기 위해 그는  가족의 일원을 해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과 친형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것이 
마이클 자신이다. 1980년대 초반,  마이클 콜레오네는 가족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절망을 맛보았
으며 권력도 젊은 후계자에게 넘겨야 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마피아의 실제  모습 중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너무 뻔한  설명일 수 
있지만, 미국  마피아는 비토 콜레오네처럼  주로 이탈리아 출신에  의해 조직되었다. 1900년에서 
1909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이아인 중 45세 이하의  사람은 100만 명 이상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마피아의 주축이 된다.  하지만 미국 마피아가 이탈리아 마피아의 하부 조직인  것은 아니
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마피아식 조직 운영의 노하우를 전하는  경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까지 이탈리아 마피아가 조직으로서 미국에 진출했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미국 마피아는 자생
적 집단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영화 <대부>를 통해서 마피아의 사회적 영향력도 확인할  수 있다. <대부> 1부에서 한 사람이 
비토 콜레오네를 찾아와 자기 딸이 동네 청년들에게 강간당했으니  그들을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비토는 경찰에 가지 전에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지  다그친다. 2부에서는 국회 의원이 그리고 
3부에서는 좀  과장된 듯하지만 추기경까지 마피아  커넥션의 일부이다. 경찰이나 행정  관료들은 
비토 콜레오네와 마이클 콜레오네  같은 마피아 보스와의 공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마피아 자체
는 공인되지 않았지만  명실상부한 또 하나의 권력체였기  때문이다. 미국 마피아는 공식적  권력 
집단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추가로 이야기될 것이다.
  영화 <대부>는 얼핏 미국  마피아의 조직 모양새도 드러낸다. 미국 마피아도  이탈리아의 마피
아와 유사한 위계를 취했는데, 각 패밀리의 수장은  `보스` 또는 `돈(Don)`이라 불렸다. 비토 콜레
오네와 그의 승계자  마이클 콜레오네가 돈 콜레오네라고  불리는데, 이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보스로서의 지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영화 <대부>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보스 아래에는 
언더보스 또는 소토 카포가 있었다. 보스의 대리인이거나 상담자인  언더보스는 당연히 보스 다음
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하위 직책으로는 카포레짐이라는  부관들이 있는데 이들은 현장
에서 활동하는 하부 조직원들을 지휘한다.
  이탈리아에서처럼 미국 마피아도  패밀리간의 협의체를 마련해 놓고 있다. 사법  기능을 담당하
는 보스들의 위원회가 바로  그것이다. <대부> 1부에서 비토 콜레오네를 비롯한  뉴욕 마피아 패
밀리의 여러 보스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약 거래를 허용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장면
이 나온다. 그와 같은  보스들의 회의는 전체 패밀리들의 공동의 이익을 도호하고  분쟁을 조정하
는 기능을 담당한다. 다른 패밀리보스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누리는 보스 중의 보스 `카포 디 투티 
카피`도 있지만, 통상 보스들의 위원회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보스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하다.
  비토 콜레오네처럼 1900년 전후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 미국으로 들어서 가난한 외지인들이 범
죄 집단을 구성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주변화하기 쉬운 이방인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범죄 단체들이 마피아라는 명칭이 어울릴  정도로 거대해
져 마침내 사회적 권력까지 획득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20세기 초반 미국 마피아의 급
성장을 가능하게 한 배경은 바로 금주령이었다.

  금주령과 미국 마피아의 성장

  모든 사회질서는 근본이 억압적인 성격을  띠는데 사람들은 술을 마셔 긴장을 이완시키며 해방
감도 맛본다. 그래서 술은 사회적  규범의 적으로 여겨져 많은 사회가 음주를 금기시했다. 전세계
적으로 금주령은 오랜 전통을 지니지만 서구에서는 최근의 현상으로,  알코올의 정제 기술이 발전
하고 술이 널리 보급된 18세기에 그 기원을 둔다.
  미국에서도 술의 소비가 급증하자 1851년 처음으로 금주령이 시행되었고 1855년에는 31개 주중 
13개 주가 금주령을 결정하면서  술의 소비를 상당히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남북 전
쟁 기간 중에는 사회적 주의가 흐트러져서 금주령은 수정되거나  무시되었다. 그후 1870년에 이르
면 미국 전체에 인구  400명당 1개씩에 해당하는 10만개의 술집이 생겨나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당시 술집은 술의 판매 장소였을 뿐  아니라 도박, 매춘, 폭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해
악은 더더욱 분명했다. 그래서 음주  현상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되고 조직화로 이어졌다. 가
장 유명한 조직은 `미국 반살롱 연합`인데 이 단체는 선거  과정에 개입하면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한다. 그 결과 1919년 금주령이 제정되고 1920년 금주령이 발효되었다.
  미국 사회에 공존하던 여러 집단들의 역관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금주령에는 도덕 규범의 복원
이라는 표면적 명분 이외의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다수 집단의  소수 집단에 대한 통제 욕
구가 금주령의 숨은 의도였던 것이다. 당시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온 이주민들은 주
로 카톨릭계였는데, 미국의  다수 집단이던 프로테스탄트 집단은 자신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주
민들에게 이식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회 통합을 이루려  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금주령이었다. 다수 프로테스탄트는 새로운 이주민들에게 자신들처럼  술을 멀리하고 경건하
게 생활하라고 강제하고 싶었고, 그런 바람이 금주령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는 1920년 
금주령을 내리고 모든 주류의  제조, 판매, 유통 등을 금지하는데, 금주령은  1933년까지 지속되었
다.
  그런데 사회 통제가  목적이었던 금주령이 역설적이게도 사회 규범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금주
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술을  갈망했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는 공황 같은 경제  혼란과 급격
한 사회 변동을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밀주를 즐기던 미국 시민들은 서
슬 퍼런 금주령 아래서 탈법의 묘미를 만끽했던 셈이다.
  미국의 규범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집단인 마피아를 낳은 것도 금주령이다.  밀주업은 불법이
니 큰 위험 부담이 따랐지만  그만큼 이득도 컸다. 그래서 웬만한 범죄 단체들은 밀주  시장의 쟁
탈전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군소 범죄 집단들은  경쟁과 암투를 거치면서 점차  거대한 
규모로 통합되었는데, 당시 범죄 세계의 정점에 마피아가 있었다. 마피아는 밀주 시장을 장악함으
로써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마피아가 견고한 조직을 유지하고 경찰과 공무원을 매수할  수 있
었던 것은 밀주 시장에서 거두어들인 검은돈 덕분이었다.
  이탈리아나 러시아에서처럼, 미국에서도 사람들은  분명 마피아에 의존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국
가의 금주령에 불구하고 술을 원했던 사람들은 마피아의 존재가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주당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술을 제공하는 마피아에게 일종의  연대감을 가졌을 법하다. 물론  그 
반대의 설명도 가능하다. 마피아가 대중의 불법적인 욕구를  자극함으로써 미국사회를 타락시켰다
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피아가 아니었어도 아마 음주는 계속되었을 것이며, 술의 암시
장을 둘러싼 범죄 조직은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마피아의 치열한  이전투구가 거
듭되면서 몇몇의 마피아 영웅이 등장한다.대체로 이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 마피아의 역사
를 설명하는 데에서 핵심 사항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 두 사람이 있는데, 러키 루치아노가 뉴욕
을 평정하고 알카포네는 시카고를 지배하게 된다.

  시카고 마피아의 보스 알 카포네

  알 카포네  만큼 유명한  악당도 드물다.  그의 본명은 알폰세  카포네이며 별명은  스카페이스
(Scarface), 즉 `흉터 진 얼굴`이다.  그 별명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한 설은 여럿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알카포네의 못된 품성을 원인으로 꼽는다. 어린 시절 알  카폰네가 한 소녀를 농락하자 오
빠가 달려들어 왼쪽 뺨에 세 줄을 흉터를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스카페이스라는 별칭은 이 악당
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고,  그래서 시키고 마피아 조직을 1925년에서 1931년까지 지배한  알 카포
네는 스카페이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899년 뉴욕 부르클린에서  태어난 알 카포네는 조니  토리오의 범죄 단체에 가입한다.  1920년 
조니 토리오의 지시에 따라 시키고로 옮겨간 알 카포네는 그곳에서 토리오이 삼촌이자 매춘과 도
박 조직을 지배하던  빅 짐 콜로시모 수하에서 일하게  된다. 금주령이 내려지고 곧 밀주  제조와 
판매 시장이 확대되자 토리오는 밀주업으로  거금을 벌 수 있다고 예견했지만 콜로시모는 위험한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토리오는 삼촌인 콜로시모를 살해하고 제국을 이양받는다.
  1925년 토리오가 라이벌  갱단의 총격을 받은 후 은퇴하자 이번에는  알 카포네가 승계자가 된
다. 알 카포네는 밀주 시장을 둘러싼 경쟁에서 잔인한 폭력으로 승리한다. 그의 폭력성을 가장 선
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는  성 발렌타인 데이 학살이다. 알 카포네의 조직원들은 1929년  2월 14일 
당시 시카고 내의 경쟁자였던 조지 버그스 모건의 밀주 공급  본부로 간다. 경찰복을 입은 그들은 
모건의 비무장 조직원들을 벽에  세워 놓고 기관총으로 살상한다. 그 사건은 항상  자극적 사건을 
갈구하게 마련인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고, 덕분에 알카포네의 악명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피비린내나는 암투에서 승리한  알 카포네는 26세의 나이에  매년 6,000만 달러의 소득을  세금 
한푼 없이 거두어들이는 거부가 된다.  그리고 절대 충성을 맹세한 1,000여 명의 조직원을 이끄는 
시카고 마피아의 보스가 되었다. 그러나 알 카포네의 승승장구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31년 그는 20대 풋내기  재무성 요원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든다. 엘리엇  네스가 알 
카포네의 탈세 혐의를 입증함으로써  한 거물의 역사를 마감케 하는데, 이 풍경에  적절한 픽션을 
가미하여 묘사한 영화가 바로  <언터처블>(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케비 코스트너  주연, 1897년)
이다. 이 영화에서 알 카포네는 항상 씩씩거리고 마구잡이로 덤비는  등 포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
이다.다른 한편으로는 배심원을  매수하고 경찰까지 살해하며 활로를  마련할 만큼 주도면밀하다. 
자신의 심복이 엘리엇 네스의 동료를  살해하는 사이, 알 카포네는 전혀 이해 못 할  오페라를 관
람하면서 억지 눈물을 짓기도  한다. 결국 엘리엇 네스는 모든 협박과 보복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알 카포네를 잡아들이는 데 성공한다.
  1931년 탈세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은 알 카포네는  애틀랜타 교도소에 수감되고 1934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감옥 앨커트래즈로 이감된다. 1939년 가석방되었지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음
이 분명했다. 매독 말기 증세로 가석방되어 볼티모어 병원에 옮겨졌을 때, 그의 뇌는 심각하게 손
상되어 더 이상 시카고의 조직을 이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정상적 사고 능력도 상당 수준 잃었
다고 한다. 알  카포네는 플로리다 마이애미 해변에서  무력한 병자이자 쇠락한 폭군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7년 생을 마감한다. 가난한 나폴리 출신 가족의  9형제중 넷째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어 
미국 최고 악당의 자리에 오른 알 카포네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외롭게 최후를 맞아야 했다.

  마피아의 제왕 러키 루치아노

  시카고에 알 카포네가 있었다면 뉴욕은 러키 루치아노의 세상이었다.  평범한 10대 갱단의 일원
으로 출발한 러키 루치아노가 뉴욕  마피아 세계를 공식적으로 지배한 기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
다. 그 후 10년 동안 수감되었으며 석방 후에는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그처럼 합법적 권력의 견제
가 그를 내몰았지만, 사망 때까지 미국 내 마피아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만큼 그는 명실상
부한 암흑가의 제왕이었다.
  그런데 이 전무후무한  마피아 권력자가 알 카포네나 벅시 등  여타의 마피아만큼 명성을 얻지 
못한 사실은 어쩌면 부당하다.  특히 대중의 기억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알  카포네에게 완패한 
셈인데,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로 영화 등의 대중 매체가  그를 외면했던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요컨데 그는 영화 스타로서 지녀야 할  기본 요건, 즉 삶의 비극성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 생애는 비교적 평탄했으며 천수에 근접할 만큼 오래 살았다.  임종에 어울릴 만큼 충분히 늙은 
그였지만, 그의 심장이 심근 경색으로 오그라들지 않고 적의  총탄에 꿰뚫렸더라면 사정은 달라졌
을지 모른다.
  러키 루치아노는 1896년 시칠리아 태생이면 본명은 찰스 루치아노이다.  1906년 가족과 함꼐 뉴
욕으로 이주한 그는  이미 10세의 나이에 범죄에  가담한다. 1917년 헤로인 거래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그는 친구인 프랭크 코스텔로와 마이어 랜스키 그리고 벅시 시걸을 규합하여 팀을 구성한
다.
  이탈리아계인 러키 루치아노가 상극이게 마련인  유태인 랜스키와 벅시를 만난 경위에 대한 설
명은 두 가지 정도이다. 한  설명에 따르면 루치아노는 랜스키의 은인이다. 랜스키는 대낮 거리에
서 친구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고 주먹을 내뻗고  있다. 그러나 랜스키는 역부족이었고  상대의 
주먹질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다.  그리고 칼을 빼드는 상대에 의해 황천길을 갈  뻔한 지경이
다. 그 순간 러키 루치아노가 뛰어들어 랜스키를 구한다.
  그들의 최초의 만남에  대한 또 다른 설명에서는  랜스키가 싸움판에 끼여든다. 공구  제작일을 
배우던 평범한 소년 랜스키가 거리를 지나다가 여인의 비명을  듣고 현장을 기웃거린다. 그곳에서
는 한 여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러키 루치아노와 벅시 시걸이 싸우고 있었다. 그 여인은  러키 루
치아노가 관할하는 매춘부였는데 화대를 둘러싸고 둘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싸움
에 공연히 끼여든 랜스키는  벅시의 편에 서고 몽키스패너로 루치아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후 
랜스키는 공구 제작일보다는 위험하지만 폼도 나고 벌이도 좋은 범죄를 업으로 택하게 된다.
  아무튼 그들은 후에 뉴욕  마피아 패밀리 중 하나인 조 마세리아의 조직에  가담한다. 루치아노
는 1925년 수석 카포레짐이 되어 밀주, 매춘사업, 도박 등을 직접 지휘한다.
  마세리아의 신임을 얻고 비교적 거물에 속하는 러키 루치아노였지만,  그의 야심은 멈추지 않는
다. 그는 랜스키 등과  협작하여 타지역 마피아가 포함된 전국적인 범죄 조직  신디케이트를 만들 
계획을 세우는데 마세리아와  마란자노가 방해가 되었다. 1931년 그는 조  마세리아를 레스토랑으
로 유인하고 식사를 하다가 잠시 자리를 뜬다. 그 사이 벅시를 비롯해  무장한 4명이 걸어 들어와 
게걸스럽게 식사 중이던 마세리아를 살해한다. 그리고 6개월 뒤에는 마란자노마저 살해한다. 1935
년 러키 루치아노는 드디어  스스로 창조한 마피아 신디케이트의 보스 중의 보스가  된다. 전통적
으로 뉴욕에는 5대 패밀리가 있었는데  각 패밀리가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실
질적으로는 러키 루치아노가 절대 군주였다.
  러키 루치아노는 곧 투옥된다.  지방 검사 토머스 듀이가 부당 취득과 매춘 사업에  관련된 9가
지의 증거 사항을 근거로  그를 기소한다. 1936년 유죄가 입증되어 3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
고 투옥된 그는 단  1년 동안 마피아의 보스로 군림했을 뿐이다. 그리고 장기간  투옥되어 있었지
만 그의 시대가 마감된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투옥된 상황에서도 그는 미국  마피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나 거리의 마피아 졸개 모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러키 루치아노는 투옥된지 10년 만에  석방되어 고향 이탈리아로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까지 쇠
하지는 않았다.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그였지만, 때로는 미국에 인접한 
쿠바로 옮겨와서 미국 내 마피아 조직을 원격 조정했다. 특히  그는 미국으로의 마약 수출을 통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 러키 루치아노는 자서전을 펴내고 그것을 영화화하려 했다.  그런데 1962년 할리우드 영
화 제작자를 만나러 나폴리 카포디치노 공항에 도착한 그는 악수를 하려고 일어서 걷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져 두 번 다시 일어나지못했다.

  미국 마피아의 쇠락

  알 카포네와 러키 루치아노는 일개 깡패로 시작하여 마피아  보스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들이 
세상의 일부를 지배할 즈음부터  미국 마피아는 또 다른 권력으로 군림해 왔다.  마피아가 사회적
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마피아는 주류 밀매나 매춘.도박 이외의  사업으로 눈을 돌려, 노조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
울였다. 알 카포네 시절 시카고에만도 거대 노조 10여 개가 마피아의 수하에 있었는데, 노조의 파
업 위협은 거대 기업들을 움츠러들게 했고 사회 전체에도  효과적인 경고였다. 공식적으로 사업체
를 인수하는 방법과 더불어 노조에 대한 통제력을 갖춤으로써 마피아는 미국 경제에서 일정 지분
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덩치가 커지면서 마피아는  공식적인 사회 제도와 화해하는 법도 배운다.  마피아들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매일같이 경찰이나  공무원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들에게 
떡값 정도를 쥐여 주는 옛 수법을 포기하고 아예 경찰이나 정부 기관을 일괄 매수하는 쪽으로 전
략을 수정한다. 각 기관의 수장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하거나  마피아 커넥션의 일부로 참여
하게 함으로써 정부 조직을 마피아에 우호적인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피아와 공직자의 거래
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빈번했다. 1930년대부터 뉴어크, 시카고, 뉴저지, 보스턴 등의 고
위층 공직자들이 마피아와 거래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러키 루치아노의 정치 권력의 힘은 더욱 놀랍다. 그가 투옥되어  있던 1942년 뉴욕 부두 노동자
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해군 수뇌부가 루치아노에게 호소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2차 대전 중
에 연합군과 러키 루치아노가  거래를 나누었다고 믿고 있다. 즉 연합군은 시칠리아  침공을 위해 
러키 루치아노에게 협력을 구했으며 시칠리아  마피아의 도움으로 연합군의 작전이 성공할 수 있
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스케일이  방대한 이 설명이 루머에 불과하다 해도 러키  루치아노의 영
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피아의 정치적 영향력을 설명할 때  곧잘 거론되는 인물이 에드거 후버이다. FBI의 창설자이
자 1972년까지 수십 년간  FBI를 지휘한 그는 마피아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
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마피아의 악해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정작 정보 기관인 FBI의 국장 후버
는 마피아의 존재조차  부정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후버는  마피아 문제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과 
심각하게 대립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케네디가 마피아에 대한 수사를  명령했던 것이 두 권력자
의 불화의 원인었다는 것이다 도박광이던  에드거 후버가 어떤 형식으로든 마피아와 긴밀한 연관
을 맺고 검은 거래를  나누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마피아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통령이나 FBI의 수장에게까지 미칠 정도였다.
  최근 공개된 미국 CIA의 비밀 문서도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 준다. 1962년 미국 정부는 마피아
에게 15만 달러를  제공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제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앞마당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카스트로를 제거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간절한 소망이었다는 점은 이해
가 되지만, 하필이면 범죄 집단과 손을 잡은 사실은 분명 깨름직하다. 아무튼 이 사례는 마피아의 
미국 내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 국제적인 이념 전쟁에 동원될 만큼 미국 마피아는  능력과 공신
력을 두루 갖춘 집단이었던 것이다.
  일상 생활과 국가 경제 및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별개로 하더라도, 모양새에 있
어서도 미국 마피아는 권력체를  상당히 닮았다. 마피아들은 전체 미국을 몇 개의  블록으로 나누
어 점유하고 자율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는데 이는 국가나 국경을  연상시킨다. 마피아가 있는 지역
에서는 법률만큼이나 마피아의  규범도 존중되어야 했고, 세금을 내듯 마피아에게  금품을 제공해
야 했다. 그렇게 마피아는 언더 그라운드에 숨어서 좀체 몸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미국을 지배해 
왔던 것이다.
  이렇듯 숨은 권력 마피아가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시기가 있었기에 알 카포네나 러키 루치
아노와 같은 마피아  영웅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 영웅들은 스크린에서도 맹활약하며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살아 있다. 그런데 최근의 마피아 영화에서는 영웅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영화는 
서로 배신하거나 외롭게 죽어  가는 마피아 그리고 와해되는 마피아 조직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단순한 영화 유행의 변화에서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  마피아의 쇠락이라는 현실을 반영하
는 추세인  것이다. 뉴욕의 5대  마피아 패밀리의 경우  1970년에 3,000명이던  조직원 수가 현재 
1,200명 정도로 줄었다는  객관적 지표만으로도 마피아 쇠락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국 
마피아는 실족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피아
의 오늘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 있다. 1990년대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보스 존  고티가 재판
을 받았을 때  미국 사회는 떠들썩했다. 하수인이 오메르타를  깨고 옛 보스 존 고티를  배신했던 
것이다. 재판장에서 그는 고티의 죄상을 낱낱이 밝혔고, 고티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많은 연구자들은 미국  마피아가 1970년대부터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여
러 가지가 있다.  한 가지 설명 방식은 사회  규범의 `미국화`를 마피아 쇠락의 원인으로  꼽는다. 
충성이나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마피아의 규범이 미국 사회의  자본주의화에 따라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정이나 연줄 대신에 건조한 계약 관계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 때문
에 마피아의 내부 결속력이 약화된 것이다.
  그보다는 좀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다. 무엇보다  미국사회가 투명해졌고 다른 한
편으로는 미국 정부가  반마피아 정책을 강도 높게 진행한 것이  마피아 몰락의 원인이라는 것이
다. 이제 더 이상 관리나 경찰이 마피아와 거래하는 일은  쉽지 않고 그래서 마피아는 비즈니스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가  마피아의 자금 조달원이던 고리 대
금업, 강탈, 마약 거래 등을 연방법으로 강하게 제재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메르타의 규약
을 깨뜨리기 위한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증인 보호프로그램이  그 대표
적인 예가 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 마피아의 수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1995년 현재 미국 정부는 100명 이상의 마피아 단원을 보호 중이다.
  그런데 마피아를 향한 탄압이 없었던 사회나 시기는 없었다.  단순히 외부의 조건이 나빠졌다고 
해서 쇠락하고 만다면 마피아답지 않다.  사실 미국 마피아 쇠락의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
피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마피아는 1970년대부터 경제력을 상실함으로써, 특히 마약 시장에서 
밀려나면서 내공을 잃고 사회적 위상도 심각하게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아시아 갱들이 북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홍콩에  근거지를 둔 중국계 범죄 
단체 삼합회(Triad)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일치를 의미하는 삼합회
는 도박, 탈취, 절도 등 전통적인 분야뿐 아니라 미국 내 헤로인 시장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헤로인용 아편은 쿤사가 지배했던 동남 아시아의 황금의 삼각  지대에서 생산된다. 애초에는 헤
로인의 수입을 미국 마피아가 담당했다. 시칠리아를 거쳐 미국  동부 해안으로 밀반입되는 경로가 
일반적이었는데 이제 사정은 전혀  달라졌다. 아시아 출신인 삼합회가 밀반입에는 더욱 유리하다. 
아시아 국가에서 가격 절충을 하거나 거래선을 트는 일이 용이하고 해당 국가의 기관을 매수하는 
데도 아시아인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제 헤로인 반입 경로도 바꾸어 놓았다. 헤로인은 
삼합회에 의해 미국 서부 해안으로 직접 수송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삼합회에 의해 거래되는 헤
로인의 양은 엄청난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요한 지표는 헤로인의 가격이다. 1990년대 
초반 미국내 헤로인의 가격은 그램당 500달러인데 이는 10년 전 가격의 4분의 1을 밑도는 수준이
다. 공급량이 크게 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마피아는 헤로인뿐  아니라 코카인 거래에서도 완전히  밀려났다. 코카인 시장은 미국  내 
비합법 단일 시장에서는 최대 규모로서 연간 400억 달러가  오간다. 그런데 대표적인 어깨인 마피
아가 이 시장에서는  좀체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콜롬비아를 비롯한 중남미 출신의 신흥  갱 
집단들이 직접 배급을 맡으면서 마피아의 입지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새로운 범죄 조직들의 거센 도전에 마약 시장은 엄두도 못 내게 된 마피아는 합법적 영역을 통
해 활로를 개척하려는 자구책을 동원한다. 하지만 이 역시 범죄  조직의 생리상 쉬운 일은 아니었
고, 또 수익성에서도 마약 거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는 곧 범죄 조직의 생명줄과도 같은 경
제력의 상실을 의미했다.
  경제력이 없는 청빈하고 가난한 권력자를 상상하는 일은 힘들다.  마찬가지로 한때 눈부신 위용
으로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마피아도 경제력을 상실하면서 정치적 권력까지 잃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덩치를 키워 가는 여러 경제  범죄 집단에 비해서도 왜소해짐에 따라  마피아는 
사회적 의미도 상당히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 마피아

  1995년을 전후해서 서구 언론은 러시아  마피아가 5,0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고, 약 300만 
명이 그들의 조력자라고 보도했다. 1997년 6월에 이르면 약  50만 병이 러시아 마피아의 단원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보도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조
직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는, 옛 소련의 15개 공화국을  활동 무대로 하여 갈취, 폭력, 위폐 
제작, 도박, 매춘 등 불법적 분야뿐  아니라 국가 기업의 인수나 정부 조직 장악에도 능란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마피아가 급성장한 시기는  1991년 옛 소련의 몰락 이후이다. 그 즈음  러시아 마피아는 
19세기 초반 이탈리아와 상당히 흡사한 상황을 맞았다.
  사회주의 소련에서는 사적 소유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사회주의 규범이 무너지자 전혀 다
른 세상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소유의 권리가 주어졌고 특히 재빠르거나 힘있는 자라면  더욱 많
은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 국가의 통제 기능이 무력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아
비규환과 무법천지의 세상을 맞았던 것이다. 최소한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재산을 얻기 위해 서
로를 속이고 협박하느라  동분서주했던 것이 당시 러시아의  모습이다. 이 혼돈의 바다를  러시아 
마피아가 상어처럼 휘젓고 다니며 평정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마피아의  왕성한 식욕은 믿기 어려
울 정도이다.
  1991년에는 러시아 경제의 4분의 1 가량, 다음 해에는 2분의  1 정도가 러시아 마피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합법적 경제 영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한 상태이며, 미국, 서유럽, 동유럽 등의 범죄 단
체와 연계해서 세력을 국제 사회로 내뻗고 있다. 거대 국가  러시아를 장악한 러시아 마피아는 서
구 사회에 심각한 위험일  수밖에 없다. 서구 언론들이 공통적으로 러시아 마피아를  경계하는 것
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낭만적 악당 벅시와 비즈니스맨 랜스키

  본명이 벤저민 시걸(Benjamin  `Bugsy` Siegel, 1906~1947)인 벅시 시걸은 거칠고  무분별한 깡
패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경멸의 의미가 담긴 벌레(bug)의 변화형이다. 1937년 그는 
러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의 지시에 따라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서부 지역의 경쟁  세력을 
제압하고 도박시장과 암거래망을  장악하는 것이 벅시의 임무였다. 그런데 벅시는  돌출행위로 동
부의 보스들을 불안하게 한다.  신분 노출의 위험에 아랑곳없이 유명인 행세를 하고  다녔으며 몇
몇 연예인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벅시는 포악하기는 했지만  낭만적인 호사가의 면모도 지
니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황량한 사막에 플라밍고 호텔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이 황
당한 사업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꿈은 실현되고, 벅시가 지은 호텔은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건축비가 애초의  예산 150만 달러를  넘어서 
600만 달러에 이르렀고 완공  직후에 호텔의 영업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게다가 벅시의  연인 버
지니아 힐이 조직의 자금을 유용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랜스키와 루치아노
는 우정보다는 조직의 보존을 택한다. 벅시는 1947년 비벌리 힐스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랜스키(Meyer Lansky, 1902~1983)는  돈벌이와 조직 관리에 능란한 
비즈니스맨이었다. 1902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4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이자  막강한 
악당으로 성장하였고, 1983년 마이애미에서  폐암으로 사망한다. 루치아노에게 마피아의 전국적인 
신디케이트 결성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마이어 랜스키이다. 그리고  렌스키는 루치아노의 투옥 기
간 동안 조직을  유지했으며 그의 석방에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조직에 해를  미칠 
경우에는 죽마고우인 벅시마저 살해할 만큼 랜스키는 비정한 인물이었다.

  제국주의 영국의 마지막 부채 - IRA와 아일랜드

  제국의 그늘

  영국은 왠지 평온하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 나라다. 영국 하면  가령 `런던 포그`, 그러니까 런
던 거리의 자욱한 안개와 트렌치 코트를 입고 그 거리를  배회하는 신사가 연상되기도 하고, 피터
팬 일당이 네버랜드로 떠나면서  그 주의를 맴돌던 높게 솟은 시계탑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지
만 영국은 온화한 신사의 나라라 불리기에는 너무 불안정한 사회다.
  흔히 영국이라 불리는 이  국가는 공식 명칭부터가 복잡하다. 대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
국(the United  Kin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줄여서는 연합  왕국 (United 
Kingdom)이 영국의 공식 명칭이다. 명칭대로 영국은 북아일랜드와  대브리튼 섬으로 구성된 국가
이다. 대브리튼 섬은   세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섬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잉글랜드 지역
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웨일스 지역이 대브리튼 섬을 구성한다.  그리고 대브리튼 왼편에 위치하는 
섬인 아일랜드 중 북부 지역도 영국에 속해 있다.
  모호하고 복잡한 긴 공식 명칭만큼이나 영국의 역사는 곡절이 복잡 다단했고 현재도 그리 평안
한 곳이 아니다. 백화점이나  교량이 순식간에 주저앉는 우리 사회만큼 위태롭다고 말할  수는 없
겠으나,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지이자  선진국 중 하나인 영국은 유달리 복잡한 정치  상황을 난제
로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장에서는 영국이 직면한  곤란 중에서 한 가지를 해명하려 한다. 아일랜드  사태라고 이름
붙여진 갈등이 그것이다.  영국은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치열한  저항 때문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접국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마찰도 버겁지만, 자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에서 빈발하는 
분쟁도 영국을 불안하게 한다. 도대체  영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영국의 아일랜드 정복
과 아일랜드 분리 독립 과정을 짚어 보기로 하자.

  영국, 대영제국, 영연방

  유럽 서북쪽에 위치한 섬나라 영국은  현재는 노회한 대국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건설했다.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라 불렸던  이 제국은 진정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민 국가가 독립한 현재는 사정이 다르다. 대영제국에서  현재의 영국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간단히 정리한다.
  16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영국은 해외 식민지가 없던  조그만 섬나라 왕국에 불과했다.  주변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이  일찍부터 식민지와 무역로를 개척하고  나섰지만 영국은 굼뜬 편이었
다. 이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 엘리자베스  1세이다.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이 발발하는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1588년 궤멸시킴으로써 영국은 해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
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마련한다.
  영국은 17세기에 들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서 경쟁 열강과의 숱한 전쟁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확보하
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본국에서 거리가 먼 아메리카 식민지를  직접 통제하기 어려워 자치를 인
정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은, 18세기 말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영제국은 중요한 식민지를 잃고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증기의 위력이 영국의 
쓰디쓴 패배를 극복하게 한다.  산업 혁명으로 상품 생산이 급속히 늘어났고 영국의  강력한 해군
은 전세계 주요 무역로를 장악했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잃은  지 25년 만에 영국은 호
주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서 약진에 약진을 거듭한다.  그리고 많은 이민자들이 캐나다
나 호주, 뉴질랜드로 떠난다. 대영제국은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대영제국은 17세기 이후 300년 동안 세계 각지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민족 해방 
추세는 대영제국의 실질적 몰락을 초래했다.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는 자치령의 지위
를 획득하고 인도도  새로운 헌법을 쟁취했으며 영국군은 이집트에서 철수하기로  약속해야 했다. 
이제 대영제국은 사라지고 좀더 느슨한  형태의 영연방(the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이 
성립된다. 영연방 체계에서 영국은 실질적인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는 대신, 과거 식민지 국
가들에게 영국 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31년에서 1946년까지 유지된 영연방은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속한 국제 조직체였는데, 현재 영연방은 그 명칭이 과거와 다르다. 더 이상 영
국의 상징적인  통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British라는 형용사가 빠진  채 Commonwealth of 
Nations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영연방의 국가들은  2년마다 대표자 회의를 갖지만 내용
적으로는 유명무실하다고 보아야 한다.

  테러의 정치학

  테러리즘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비공식적이고  반인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모든 사회에는 공식적 질서와 함께 그에 반하는 세력이 공존하게 마련이니 탈법적 테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가 장구하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테러리즘이 발흥한 것은 1960년대이다.
  1960년대 제3세계의 존재는  테러리즘의 발흥을 가능케 했던 조건이다.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 
공업국의 수탈 때문에 저발전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그들 국가의 일부 정치  세력들은 강대국에
게 협상을 제의하거나 호소하는 일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보다는 강대국과 매
판 권력을 향해 테러를  가할 때 피지배 상황이 끝장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지금도 제3세계는 
테러 단체의 발생지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해방군이나 1996년 말  일본 대사관을 점거했던 페
루의 투팍아마루 혁명 운동 등은, 제3세계의 빈곤과 비민주화를 그 토양으로 삼고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도 1960년대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당시 서구의 젊은 세대들은  급속한 산업화
의 반인간적 폐해를 목격했고,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무수한 살상에 분노했으며, 서구 사회의 부
조리에 절망했다. 그들은 절망과  분노의 표현으로서 대중 운동이나 공개적 집단 행동  등에 투신
했다가, 일부는 테러라는 극단적  저항 수단으로 옮아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RAF가, 
그리고 동양의 경제 대국 일본에서는 적군파가 생겨났다. 
  테러는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국제적인 문젯거리이다. 전세계에는 약 550여 개의  테러 단체가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테러 행위는 주로 미국  등의 패권 국가나 제3세계에서 주로 일어
나고 있다.  그런데 선진국 중에서도 온화한 인상을 지닌  영국에서 테러가 빈발한다는 사실은 다
분히 의외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는 총격과 폭발 사고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민
주주의의 발생지이고 경제적 수준도 높은 영국을 무력 충돌로  몰아가는 주범은 아일랜드 공화군, 
즉 IRA(Irish Republican Army)이다. 이들은  요인 암살뿐만 아니라 공공 장소에 대한 무차별 테
러도 거리낌없이 자행하면서 서방 세계, 특히 영국인들에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본성적으로 폭력적인 집단일리는 없다. IRA의 조직화와  테러 전략을 유발한 사회적 조건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이다. 영국은  19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했으며, 현재도 북아일랜드를  통치하고 있다. 그 역사적 시기 동안 쌓여 온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를 IRA가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아일랜드의 저항

  아일랜드는 대브리튼 섬 왼편에  있는 섬이다. 전통적으로 카톨릭계가 강한 이 지역은  이웃 강
국인 영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수세기 동안 공식적인 독립 왕국을 유지했다.
  17세기 말엽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한 영국 국교도 분파가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정치 조직
을 장악하고 아일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아일랜드의 절대 다수  카톨릭계는 기본적인 
시민권까지 박탈당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들은 카톨릭 교도들의  권익을 회복하기 위
한 노력을 본격화하는데, 그것은 영국의 무력 개입의 빌미가 된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전국민적인  저항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고, 1801년에는 통일  법안을 근거
로 아일랜드를 합병한다. 그리하여 대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라는 국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아일랜
드 전체 지역이 영국의 영토였는데, 이 국호는 100년 이상 지속된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의 지배하에서  가혹한 박해와 차별을 당해야 했는데, 비극적인  사건 하나
가 피지배 민족으로서 아일랜드에서는 1845년에서 51년까지 7년 연속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듭했
다. 주식량원인 감자가  바닥나면서 아일랜드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대기근에 빠져
들었다. 그기간 동안 전체 800만 명 중에서 100만 명 이상이 아사했고  300만 명 정도가 아메리카 
등지로 떠나 버려 인구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
자였던 영국은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 더러는  아일랜드의 비극을 돈벌이 기회
로 보고 곡물을 비싼 가격에 파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영국의 야속한 처사가 아일랜드인에게 씻
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음은 물론이다(영국 정부는 1997년 6월,  즉 150년 후에야 대기근
을 방치했던 과거를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였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
등은 전면화되었다. 독립을  갈구하던 아일랜드인들에게 1916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이다. 
먼저 그해에 아일랜드 임시 정부가  생겨나 아일랜드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정부 조직을 지니게 
되었다. 또 다른 중요 사건이 부활절 봉기이다.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영국의 막강한 화력은  아일랜드인들의 부활절 봉기를 간단히 진압했지만, 그들의  독립 의지까지 
꺽지는 못했다. 특히 영국 정부가  봉기의 주동자 15명을 처형하는 등 극단적으로 대응했는데, 이
는 오히려 아일랜드인의  결속을 강화하는 자충수로 작용했다.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투쟁이 더욱 
거세어져 영국의 지배는 근본적인  위기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활절 봉기는  비록 실패
했지만, 아일랜드 독립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당 신 페인(Shin Fein,  `우리 스스로`를 의미하는 아일랜드어)이 정치력을 얻은 것도  부활절 
봉기 직후였다.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였던 아서 그리피스(Arthur Griffith)가 1902년에 조직한 신 
페인은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 자립  그리고 아일랜드 문화의 보전 등을 주요 목표로 설
정한다. 신 페인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향한 까닭에 노조나 사회주의  그룹 등의 지원은 쉽게 얻
었지만 아일랜드의 일반 국민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던 정치 조직이었다. 하지만 부활절  봉기 이
후 아일랜드 사회의  독립 열망이 뜨거워지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1918년  총선에서 (대부분 감옥
에 갇혀 있던)신  페인 후보들은 아일랜드에 할당된 총  106석 중 73석을 차지하여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력한 정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한 신 페인은 1919년 더블린에 모여 비공식적 의회인 다일(정확히는 다일 에이런
(Dail Eireann))을  구성한다. 그들은 영국 의회의  한귀퉁이에 자리하길 거부하고  독자적인 입법 
기관을 세운  것이다. 그와 함께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포하고 역시  옥중에 있던 에몬드  발레라
(Eamon De Valera)를 새로운 독립 국가의 대통령으로 지명한다. 이와 같은 신 페인의 도발은  영
국에게는 전면전 선포나 마찬가지였고, 영국의 탄압 역시 더욱 강도를 더해 갔다. 하지만 이는 이
미 신 페인이 각오한 바였으며, 신 페인은 무력 독립 투쟁을 선동하면서 정면 대결에 나선다.
  아일랜드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영국은  결국 1920년 `아일랜드 정부 법안`을 제정하고, 1921년 
협약을 통해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건설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서 설명되듯
이 이 독립은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오랜 소망을  실현한 획기적 사건이었으며 문
자 그대로 피의 대가였다. 아일랜드의 독립 과정을 자세히 논한다면 당연히 IRA라는 무장 게릴라 
조직과 아일랜드의 독립 영웅 마이클 콜린스(1890~1922)를 주목해야 한다. 

  마이클 콜린스와 IRA

  마이클 콜린스는 우리에게  미지의 인물이었다. 1996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남우 주연상
을 수상한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마이클 콜린스>(1995년) 덕에 세계적 지명도를 얻은 그는, 1919
년에서 1921년까지의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진두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영웅의  모습은 
콜린스 자신도 꿈꾸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는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을 만큼 평범했다. 그러다가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되는 등 
고난을 통해 단련되면서 독립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얻게 된다. 
  마이클 콜린스는 1919년 에몬 드 발레라의  탈옥을 지휘한 후 신 페인이 선포한 공화국의 내무 
장관과 재정 장관 등 주요 직위를 거친다. 그 밖에도 그는 정보  수집 할동과 무기 밀공급을 지휘
했다. 그리고 암살조를 조직하여 지휘하는  일도 마이클 콜린스의 몫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응징
한 것은 영국 정부의 앞잡이들이다.  조국을 배신하고 정복자 편에 선 아일랜드인들은 길거리, 시
장 그리고 교회 앞에서 낯선 청년의 손에 차례차례 살해당하고 그럴수록 마이클 콜린스의 명성은 
높아 갔다.
  여러 지위를 거친 마이클 콜린스이지만 그는 무엇보다  IRA의 지휘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IRA, 
즉 아일랜드 공화군은  `아일랜드 자원군(Irish Volunteers)`의 후신으로 1919년  조직되었다. 자율
성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IRA는 신 페인의  국방 장관의 지휘를 따르는 군대로서, 다일의 독
립 선포 직후 본격화된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선다.
  다일이 구성된 직후 영국은 가공할 탄압을 시작했다. 아일랜드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에 계엄령
이 선포되었고 아일랜드 지역의 시장 3명이 IRA 요원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IRA 등 독립 투
쟁 세력의 거점이 될 듯한  집과 상가와 공장은 모조리 불길로 타올랐다. 아직도 정확한  수가 알
려져 있지 않은 무수한 시민과 독립 투쟁가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어 
매장되는 일도 빈번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는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에 맞섰다. 20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별로 
암약하고 사보타주를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를 교란하였다. 물론 요인  암살과 영국군에 대한 철저
한 보복도 기본 원칙이었다. 영국은  마이클 콜린스와 IRA를 섬멸하기 위해 특수부대 `블랙 앤드 
탠(Black and Tan)`을 투입하고, 마이클  콜린스의 현상금으로 1만 파운드(현재 환율로도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이다)를 걸었지만 마이클 콜린스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IRA가 분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영국군으로서는 시민과 IRA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또한 모든  시민이 잠재적인 저격수였으니 싸움이 여간 벅찬 것이 아
니었다. 마이클 콜린스와  IRA의 테러 전략은 전혀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고 1921년 영국군 합참 
의장 헨리 윌리엄을 암살했을 때 IRA의 전과는 절정에 다다른다.
  영국 정부는 불순분자들을 격퇴하고 아일랜드를 속국으로 묶어 두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고 아일랜드 독립을 인정한 것인데, 이 독립 협상에
서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와 마주했던 아일랜드의 대표 중 하나가 마이클 콜린스이다(영화 <마이
클 콜린스>에는 윈스턴  처칠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가령 마이클  콜린스는 협상 대표로 선출된 
직후 `처칠이 영국 대표로  나올지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처칠은 당시  영국 수상이 
아니었다. 처칠은 알다시피 1940년 이후에 수상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런데 왜 처칠의 이름이 여
러 번 나올까. 아마도 그가  당시 대내외 주요 군사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
기 때문일 것이다. 처칠은  1917년에서 1922년까지 식민지 유지와 군사 작전 등을  책임지고 있었
다. 그러니까 그는 아일랜드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진압군의 책임자이자 마이클  콜린스의 직접
적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처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독립 협상에 나섰던 마이클 콜린스가 영국 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조건으로 수용했다
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정복자를 상징적 
군주로 떠받드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고, 아일랜드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마이클 콜린스가 서명한 협정문은  아일랜드의 분단을 독립의 전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카톨릭계가  95%를 차지하던 남부 아일랜드의 26개 주는  1922년 1월 독립
하였지만, 프로테스탄트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이던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어쩌면 현실적인 거래를 했는지 모른다. 영화속에서  그는 분단 독립이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테러와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분단 독립을, 완전 독
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기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마이클 콜린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
의 선택은 아일랜드 정치사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은 최
종적 성공에 이르기 직전에 멈춘셈이고 아일랜드인들은 동족상잔의 내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과의 독립 협상을 치욕으로 여긴  정치 세력들은 마이클 콜린스에게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
다. IRA만 해도 두 개의 분파로 분열된다. 다수는 분단  독립에 반대하면서 `비정규군(Irregulars)`
을 조직하고 마이클 콜린스  진영과 내전을 벌인다. 결국 비정규군과 독립 협상  반대파가 패배하
는데, 내전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한다. 마이클 콜린스도 내전  희생자 중 하나였다. 1922년 8월 
20일 콜린스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반대파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위
스트 코크에 주둔한 군병영을  방문한다. 길을 나서기 전 그는 `그들은  내 고향에서 나를 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이  말은 불행의 전조가 되고 말았다. 22일 군병영
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콜린스는 잠시 가족들과 만났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진지 2시간 뒤 
그는 자신의 호위병에게 암살당한다.  그 암살자가 협상 반대파의 비정규군이었는지, 아니면 콜린
스 지지파 내부의 불만  세력이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 내막이야  어떻든 영국
군과의 지루한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마이클 콜린스가 결국 동족에게 살해된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의 사망  이후 남아일랜드는 곧 명실상부한  독립을 이룬다. 1937년 헌법이  국민 
투표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아일랜드 자유국은 폐기되고 에이레가  세워졌다. 그리고 영연방과의 
관계가 효력을 상실한 직후인 1949년 4월 18일, 부활절  봉기 기념일에 에이레는 아일랜드 공화국
(the Republic of Ireland)으로  면모를 일신한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에 대한 종속 관계를  청
산한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이며, 1955년 유엔의 구성원이 된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IRA의  테러는 지속되고 영국의 영토로 남은 북아일랜드에
서도 유혈 독립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분단 독립이 희생과  폭력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믿었
던 마이클 콜린스가 틀린  것이다. 1921년의 분단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탄생도  평화를 담보
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아일랜드의 반이 외세 치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북아일랜드의 정치 상황

  앞에서 말했듯이 남부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 영토로 남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독자적  의회와 헌법을 갖춘 독립적 주로 설정하고 자기  영토로 둠
으로써, 현재의 대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신교도는 60%로서 카톨릭 교도에  근소한 우위를 점할 뿐이니, 사회 갈등의  가능성은 항상 잠재
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의 현장에는 영국 정부뿐 아니라 IRA도 가담하고 있었다.
  1969년 IRA는 또다시 두 계파로 분리된다. 독립 직후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두 계파는  북아
일랜드를 되찾는게 목적이었으나 방법론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공식적인  분파와 비공식적인 과
격파 IRA는 테러를 투쟁 수단으로 활용할지 여부를 놓고 극렬히 대립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오코
넬이 이끄는 과격파는,  아일랜드의 분단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
다. 그들은 북아일랜드에서 요인을 암살하고 차량을 폭파했으며 공공장소에  모여 있던 불특정 신
교도들을 폭탄으로 날려 버렸다. 1970년부터는 대담하게도 영국 본토를  테러 대상으로 삼기 시작
한다.
  과격파 IRA의 노선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공식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북아일랜드인들에게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70년대 북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이 겪었던 불이익이  과격파 
IRA에게 호조건이 된다. 당시 북아일랜드에서는  선거권, 취업, 주택 등에서 카톨릭계는 공공연히 
차별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카톨릭  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 조직도 있었다. 아일랜드계 카톨
릭 교도들을 무작위로  살해한, 신교도 테러 조직 `얼스터  자원군(Ulster Volunteer Force)`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 집단은 1966년 북아일랜드 정부에게도 범죄 집단시되었고, 1970년 후반에는 조
직원 11명이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일랜드계 카톨릭 교도들과  과격파 IRA의 저항이 격화되고  북아일랜드는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1972년 중대 결단을 내린다. 영
국 수상 에드워드 히스가 북아일랜드의 헌법  및 주의회 기능을 정지시키고 영국 의회에 의한 직
접 지배를 천명한 것이다.  영국의 직접 지배 결정은 북아일랜드의 부분적 자치권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아일랜드계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켰기 때문에,  IRA와 카톨릭 세력의 극렬한 반발이 뒤따
른 것은 당연하다.  영국 정부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호전적으로 대응했다. 이 시기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영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짐 셰리던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1993년)
이다.
  1974년 10월 5일 영국 길포드의 한  식당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사망하고 75명이 다치는 사
건이 발생했다. 이 참극은 영국의 직접 지배 결정에 반발하는 IRA의 테러에 의한 것이었다.  영국 
경찰은 곧 제리 콘론이라는 아일랜드계 청년을 살인 혐의로 기소하지만 그는 테러에 연루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제리  콘론은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좀도둑질과 방탕한  생활로 청춘
을 보내던 하층 청년에 불과했다. 제리 콘론의 공범이라고 기소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어
처구니없다. 콘론의 늙은 아버지가 살인을 모의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콘론
의 숙모는 폭발물 제조 혐의로, 그리고 숙모의 10대 초반의  아이들까지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
되었다. 조금이나마 이성적이라면 이런 수사는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보면 재판 과정 또한 터무니없기는 마찬가
지이다. 재판 과정은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제리 콘론의 변호사는 다
음과 같은 인상적인 일화를 전했다. 제리 콘론과 악수를 나눈  변호사에게 주위 사람들이 왜 손을 
씻지 않는지 물었다고 한다. 더러운 아일랜드인과 악수했으니 손을  씻어야 하다고 주장했을 만큼 
런던 시민들은 비이성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된 재판이 온전할 리 없다. 영국의 사법 당
국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을 IRA 암살자라고 보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15년이 지난 후에야 제리  콘론은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된다. 하지만 그는 청춘을  덧없이 소모
했으며 아버지도 이미 옥사한 이후였다. 제리  콘론의 사례는 북아일랜드의 카톨릭계와 IRA가 벌
인 저항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잘 보여 준다. 가공할 물리력으로 무장한 정복자  영국 사회에
서 합리적 판단 능력마저 앗아갈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맞선 저항은 적지 않은 희생을 
낳았다.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북아일랜드 신 페인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초반에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정치 사범으로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자백만 얻어  내면 충분했기 때문에 물증  따위는 
필요없었다. 신 페인은 또한 1971년에서  1975년 사이 약 2,000명의 사람들이 재판이나 기소 절차 
없이 살해되어 암매장되었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한다.
  그러니 북아일랜드인들과 신  페인으로서는 마이클 콜런스가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을 
전제로 한 독립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고 북아일랜드도 곧 통일될  것이라는 게 마이클 콜린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평화도 통일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일랜드계 사람들은 마이클 콜린스
를 비열한 협잡꾼이거나 무능한 정치 모리배로 여기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의 교과서나 
신 페인의 공식 문서에 절대 등장할  수 없는 금기 인물인 것이다. 한편, 영국으로서는 마이클 콜
린스가 인면수심의 잔인한 테러리스트이고  그래서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영국에서는 인간 백
정을 변호하는 더러운 영화라고 배척당했다.  분단 독립 이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 때문에, 마이
클 콜린스는 동족에게도 버림받고 만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일랜드의 문제

  북아일랜드의 신교 세력과  영국 정부에 맞서 아일랜드의 통일을 이루려는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0년을 전후해서 전세계는  영국의 감옥에 시선을 모았다. 아일랜드계 정치범들이  사상 유례가 
없는 옥중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아일랜드계 정치범들은 담요 투쟁이라
는 것을 선보였다.  그들은 영국 정부가 지급하는  죄수복을 벗어던지고 담요로 몸을  감쌈으로써 
영국의 지배에 상징적으로  저항한 것이다. 교도 당국의 철저한  응징은 예상된 대가였다. 매질과 
모욕은 예사였고, 죄수복을 거부한  죄수들이 독방에 갇히면 매일 쌓여 가는 자신의  배설물에 둘
러싸여 몇 달이고 생활해야 했다.
  수년간의 담요 투쟁에 이어진  다음 전술은 물 이외의 음식을 외면하는 집단  단식 투쟁이었다. 
1차 단식 투쟁은 1980년  10월에 시작되어 53일간 지속되었으며, 이듬해의 단식은 217일  동안 계
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폭정을 고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보비  샌즈(Bobby Sands)를 
비롯한 10명의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죽음을 각오한 집단 단식 투쟁이  가능했을 만
큼 북아일랜드의 정치 상황은 급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85년 북아일랜드 사태는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 정부가 북
아일랜드의 주민 투표 결과에  따라 아일랜드 통일 여부를 결정할 것에 합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아일랜드 내  양대 세력의 적극적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카톨릭계로서는  영국 정
부를 신뢰하지 못했고, 신교 세력과 관련 정당은 패할 가능성도  큰 게임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
다. 곧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특히 급진파 IRA의 `활약`은 눈부셨다. 때로는 영국  본토에서 
보수당 전당 대회장을 폭파하기도  했고, 또 1991년에는 존 메이저 총리의 관저에  박격포를 발사
하는 대담한 모습까지 보였다. 물론 영국과 신교도 쪽의 보복도  만만찮아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낳
았다.
  1990년대 들어 영국은 북아일랜드 질서 유지에 쏟아붓는 정치,  경제적 비용이 버거워졌고 그래
서 적극적으로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에 나섰다. 4,000만 명의  아일랜드계 유권자가 있는 미국의 
정치가들도 중재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1994년 8월 북아일랜드  신 페인의 당수인 제리 애덤스
가 테러의 중지를 선언했으며 그 약속은 한동안 이행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화 분위기는 위기에 봉착한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이 평화 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IRA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이 제안한 선거 방식도 북아일랜드
의 신교도 정당인 얼스트 통일당에 유리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갈등은 증폭된다. 결국 IRA는 
1996년 2월 휴전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다시 무기를 들었다.
  1997년 10월 현재 또 다른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미 토니  불레어 영국 수상은 신 페인과 
직접 협상에 나섰는데, 이는 192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평화 협상을 앞두고 7월  20일 IRA는 
북아일랜드에서 테러를 중지한다는 휴전을  선언했다. 현재 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  의원이 중재
하고 있는 이번  평화 회담에는 서로 극렬하게 대립했던  여러 정파들이 대거 참여한다. 신  페인 
축출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얼스트 통일당을 비롯해 IRA의 정치 조직인 신 페인도  협상 주체
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 협상을 통해 무력 갈등이 멈추고  평화적인 해결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
하기는 어렵다. 설사 평화 협상이  얼마간 진전된다고 해도, 북아일랜드 내의 신교와 구교도 사이
에는 쉽게 절충하기 힘든 이해 관계가  놓여 있기 때문에 분쟁 재발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협상의 성과가 가시화되고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합의한대로 1998년 5월 아일랜드의 
주민 투표를 통해 북아일랜드 사태가 해결된다면 이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1921년 
이후 지금까지 북아일랜드 사태는 총 3,000여 명의 사망자와 4만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평화의 
정착은 이 희생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차선의 길일 수도 있다. 

  1996년 이후의 IRA 테러 일지

  96년 2월 초 IRA가 18개월간 지속된 휴전의 파기를 선언함.
  96년 2월 9일 오후 7시경  영국 런던의 브리타니아 호텔 주차장에서 강력한 폭발 사고  발생. 2
명 사망, 100명 부상.
  96년 2월 15일 런던 시내의 한 공중 전화 부스에서 폭발물 발견, 제거함.
  96년 2월 18일 런던 시내 중심가를  달리던 2층 버스 안에서 강력한 폭탄이 폭발하여 1명이 숨
지고 8명 부상. 사망자 중에 IRA 대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IRA가 작전을 위해 옮기던 
폭탄이 실수로 폭발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추정됨.
  96년 4월 24일 IRA의  두 차례의 경고에 이어 런던 서부  해머스미스 다리에서 폭탄 폭발.사전 
경고가 있었고 통행이 제한되었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음.
  96년 6월 15일 영국 맨체스터 도심에서 차량 폭탄 테러 발생. 211명 부상.
  96년 7월 초 북아일랜드에서 약 1주일간 아일랜드계 구교도와  영국계 신교도의 충돌 발생. 1명 
사망, 300명 부상.
  97년 7월 20일 IRA, 두 번째 휴전을 선언함.
  97년 9월 16일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인근의 한 도시에서 차량에 부착된 폭탄 폭발. IRA의 행위
로 추정됨.

  20세기의 숨은 전쟁 -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
 
  먼 나라의 전쟁

`  우리에게 전쟁은  낯설지 않다. 해마다 한두 번은 듣게 되는 먼  나라의 전쟁 소식이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통해서  전쟁은 우리 일상 속에서 익숙한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리고 요즘은 뛰어난 방송 기술 덕택에 생생한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되기도 한다. 그
런데 이렇듯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이야기는 그것이  일촉즉발의 위협이든 비극이나 참상, 
인류의 죄악이든 안전한  곳에 있는 우리에게 흥미는 줄 수  있을지언정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유가  상승이나 국제 경기 침체 등의 문제조차 야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쟁이 제공해 주는 스펙터클 속에서  그 전쟁의 의미나 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 묻는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이번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 먼 나라의  전쟁들이다. 스페인 내전과 보스니아 내
전이 그것들인데, 이  두 내전은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처럼 상업 영화의 집중 조명을  받을 
만큼 장대한 스펙터클을  제공해 주지도 못했고,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큼 주변  국가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 전쟁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 볼 기회조차 제공
해 주지 못한 전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20세기의 세계를 극적인 방식으로 압축하여  보여 주
는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한번쯤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전쟁들이다.

  스페인 내전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과 그 좌절을 증언하는 20세기 초반의  사건이었다. 자
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의 노동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들었다. 그 행
렬에는 우리가 잘 아는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등도 끼여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파시
스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그들의 투쟁은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반면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말 냉전의 종식과  이념의 붕괴 뒤에 불거져 나온 참혹한  (그리고 민족주의의 허망함을 보여 주
는) 민족 전쟁이었다. 게다가 이 전쟁은 민족간의  증오와 전화의 불씨를 안은 채 아직 완전히 종
결되지 않고 있다.
  이 두 전쟁 모두 우리로서는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나 그에 대한 진지한 조명을 접하기 
힘들다. 전자의 경우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데다 현재의 시류와  다소 동떨어진 이념 대립이라
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후자의 경우는 정보는  과잉되었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
운 사건이라 전체적인 조망을 얻기는 아직 이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최근 이 전쟁들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영화 몇 편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다. 물론 영화가  허구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전쟁의  속내를 생생하
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그 전쟁에 대한  입장과 평가에서 동시대인들에게 논쟁거리를 
제시했다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두 전쟁을  논쟁적으로 접근
하고자 한다. 단지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 이  전쟁들에 대한 동시대인의 논쟁적 시
각을 들여다보는 것도 역사 읽기의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렸나

  1937년 스페인. 어두운 밤,  달리던 기차가 폭파되고 두 사내가 근처 산길을 타고  달아난다. 뒤
쫓던 군인들의 총격에  폭파범 중 한 사람이 쓰러진다. 상처입은  자가 `로베르토`라 외치자 앞선 
사내가 돌아와 부상자의 소망대로  권총을 조준 발사한다. 이 두 사내는 위험에  아랑곳없이 기차
를 폭파하고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죽일 만큼 어떤 비장한 각오로 살아가고 있는 모양
이다. 왕년의 스타 게리  쿠퍼가 연기한 로베르토(영어식 발음으로는 로버트, 그러니까 그의 극중 
이름은 로버트 조던이다)는 어느 카페에서 한 사내에게 교량을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이때부
터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샘 우드 감독, 1943년)의 본격적 스토리가 시작된다.
  지령에 따라 로베르토는 교량 근처의 산악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는 지원을 약속한 빨치산
들의 은신처가 있고 그 빨치산 무리 중에는 전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아름다운 여인 마
리아(잉그리드 버그먼)가 포함되어 있다. 로베르토는 이 지역에 3일간 머무르고,  그 기간 동안 적
의 교량을 폭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관객이 기억할 것은  그런 군사 작전의 서스펜스가 아니
다.단 3일 만에  불타올랐다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사랑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주된 테마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마리아의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키스할 때 코는 어떡해야 하죠?”
  청순하고 순결한 여인 마리아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집권 세력
인 공화파 편에 섰던 사람으로 조그만 마을의 시장이었다. 국민파라  불리는 정치 세력들이 이 마
을을 접수했을 때 마리아 가족의 비극이 빚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리아 앞에서 처형당한다. 
마리아도 차라리 죽으려고 국민파 군인  앞에서 `공화국 만세`를 외쳤지만, 군인들은 그녀를 죽이
는 대신 씻지  못할 수모를 안긴다. 시장의 딸로  확인된 마리아를 삭발시켜 마을을 끌고  다니며 
조롱하고 마침내는 수용소로 보낸 것이다. 이송 도중에 빨치산들에게  구출되었지만 그 기억은 참
혹한 악몽으로 마리아를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토의 이력도 독특하다. 미국의 대학 강사였던 그는 머나먼 타국까지 날아온 사람이다. 쿠
데타 세력인 국민파를 꺾겠다는  의지로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고향을 등진 것이다.  그는 마리
아와 사랑을 키워 가면서도, 절대  자신의 군사적 임무를 잊지 않는다. 그는 주도면밀함과 용기로 
교량 수비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교량의 폭파에 성공한다. 그리고 뒤따라온 국민파의  기갑 부
대와 기마병에게 총상을 입은 그는 다른 빨치산 동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3일간의 짧
지만 강렬한 마리아와의 사랑을 뒤에 남긴 채 자신은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무엇보다 청순한  잉그리드 버그먼의 모습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상당히 낡아 볼품없지만  그녀를 클로즈업하는 순간은 참으로 화면이 아름다워지는 게 
사실이다. 이 영화는 또한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아름답고 슬픈 러브 스토리로 기억되고 있다. 로
베르토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리며 죽어 갔고, 살아남은 마리아도  영원히 로베르토를 기억했을 것
이다. 단 3일 만에 기승전결의 과정이 펼쳐지는 슬픈  사랑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의 중심 내용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 이야기에  만족하지 않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사람도 있다. 왜 마리아의  부모는 
죽임을 당했고 마리아는 악몽의 기억을 지니게 되는가. 또 왜  미국 대학 강사가 스페인에까지 와
서 악전고투 끝에 죽음을 맞는가. 우리는  그 답을 흐릿한 수준이나마 제시할 수 있다. 스페인 내
전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마리아 개인사에도 상처를 준 것이며, 로베르토는  무도한 파시스트 
국민파의 위협에서 공화국을 지키고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것이다.  이런 대강의 지식이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스페인 내전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스페인 내전의 배경과 전개 과정

  1936년 7월부터 1939년 4월까지 지속된 스페인 내전은 총  100만명의 인명을 앗아 갔으며, 20세
기 초반의 가장 처참한 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전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몰았고, 결과
적으로 파시즘의 출현을 야기한 세계 공황이 스페인 내전의 배경이다.
  미국인들은 1929년 10월 24일을 `검은 목요일`로 기억하고 있다. 주가가 폭락하면서 월스트리트
에는 주식을 팔기 위해  군중들이 몰려 들었고 몇몇 투자가들은 절망감에 자살했다.  이미 구조화
된 생산 과잉 상태가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 시장을 시들게 하고 미국 경제를 일대위기에 몰아넣
었던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두 극심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다.
  역사상 악명 높은  독재자들이 탄생한 시기가 1930년대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이탈
리아는 무솔리니를 선택했으며  일본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이  독재 정권들은 
모두 영토 확장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하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를 점
령하고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재무장에 나섰다. 그리고 동양의 일본은 1931년  만주 지방
을 점령한다.
  스페인에서도 파시스트 군부가 지휘하던 국민파가 제2공화정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
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국왕을  퇴임시키고 스페인의  정치를 민주화로  이끌었던  제1공화정
(1873-1874)은 내분과 군부의 개입으로 단명하고  곧 다시 왕정이 복구된다. 1920년대까지 스페인
에서는 알폰소 8세와  리베라 장군이 결탁하여 독재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독재 정치에  대한 
국민 저항의 결과 1931년  1월 리베라는 퇴임하고, 4월에는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파가 선거
에서 대거 당선된다. 곧 국왕은  망명을 떠나고 공화제가 선포되는데, 이것이 제2공화정의 시작이
다.
  공화파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부터  온건 사회주의자 그리고 
급진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갈등의  여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의 공동 목표가 비교적 분명했기 때문에 공화제 아래의 스페인은 획기적인 사회 민주화를 경험한
다. 조세 제도가  형평성의 원리에 맞게 수정되었으며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고 지역  자치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스페인  남부에서는 토지를 농부에게 분배하는 토지 개혁이  1932년부터 진행
되어 지주들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교회가 폐쇄되고  공교육에서 종교적 색채를 벗겨  냄으로써 
종교 국가로서의 면모가  쇄신되었고 기득권층인 카톨릭 성직자의 입지가 크게  침식되었다. 이처
럼 기득권층에게 집중되어 사회적 부와  권리를 전체 대중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공화제의 
기본 목표였다.
  1936년 2월 선거에서는 좌파인 인민  전선이 대거 당선되면서 공화정의 사회 개혁은 속도를 더
한다. 이는 진보를 향한 의미 있는 조치였지만 사회 개혁을  저주하던 세력의 단결력을 높이는 결
과도 낳아,  에밀리오 모라(1887~1937) 장군이  이끄는 국민파가 공화정을  뒤엎기 위한 쿠데타를 
1936년 7월 18일 감행한다. 국민파의  지휘권은 곧 프랑코에게 넘겨지고, 이제 스페인은 일진일퇴
의 지루한 내전을 견뎌 나가야 했다.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장기전의 큰 이유
였다. 농촌 지역을 프랑코 세력이 장악하였고, 공화파는 마드리드를 비롯한 도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특정 정치 세력의 진지가 되었고 격전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을을 점령한 세력이 바뀔 때마다 부역자 색출 작업과  처형이 뒤따랐다. 양 진영에 의해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공화파는 교회를 불살랐다.  이처럼 많은 민간인이 전투  과정 
밖에서 희생된 것이  스페인 내전의 큰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극적 사태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 가족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내전의 당사자 공화파와 국민파는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군대와 탱크와 비
행기를 파시프트 프랑코의 국민파에게 보낸다. 현재 많은 문헌들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생리가 유사한 극우 세력을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신무기를 
시험하는 기회로 스페인  내전을 이용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에게는 스페인 지역의  옥답과 건물
과 생명 등이 대단히 훌륭한 무기 시험장이었던 셈이다.
  공화파는 소련의 지원도  받았지만, 50여 개국의 민간인들도 공화파에  큰 힘이 되었다. 스페인 
공화정의 사회 개혁을 지원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대단한 적개심을 보이는 전세계 젊
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든 것이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
릅쓰고 남의 나라로  달려간 젊은이들이 전세계에서 숨쉬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형태의  조직에 
들어가 참전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조직이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이다. 국제 여단의 
이름으로 약 4만 명의 다국적 젊은이들이 전투원으로 활동했으며,  2만명은 의료등 지원 부대에서 
활동했다. 특히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을 꾸려 전장에서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스페인의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외국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도 많이 있
다. <1984년>의 저자 조지 오웰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저널리스트로 스페인에 발을 들여놓았다
가 총을 들게되고, 국제 여단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싸웠다. 조지 오웰의 스
페인 내전 경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책에 옮겨져 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희망>이라는 저서에서 참전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피카소도 작품을 통해  국민파를 고
발하고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유화 <게르니카>는 1937년 국
민파 또는 독일군의 폭격에 초토화된 도시 게르니카를 그린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람 중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원작자 
헤밍웨이이다. 그의 동병 소설에는  스페인 내전의 전장을 열정과 투지로 누비던 열혈  청년 헤밍
웨이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로베르토가 헤밍웨이의 분신이라는 추론을 
끌어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로베르토도 헤밍웨이처럼,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정을 수호하고  파시스트 프랑코를 무찌
르기 위해 이국 땅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적대시하던 국민파에게 상처를  입은 마
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져들었다. 엄밀히 말해서 로베르토와 마리아의  사랑은 프랑코가 도발한 스
페인 내전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고, 그들의 연애 감정에는 1930년대 스페인의 정치적  비극이 고
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패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스페인 내전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또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1995년)이 그것인데,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
서 개봉된 사실은  다행스럽지만 상당히 의외이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감독의  이념적 색채는 
둘째치더라도 도무지 상업성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를 흡인하지는 못했어도 <랜
드 앤 프리덤>은 소수의 관객들에게는 뜨거운 경험이었다. 근본적 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목
숨을 바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나,  60년 전 사건이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설득하는 켄  로치의 주
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는 이  영화를 잘못 소화할 위험이 있다. <랜드 앤 프리덤>이  스페인 내
전을 세밀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증보판쯤 될 것이라 본다면 부
당하다는 것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오히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같은 영화가 심
어 준 상식을 뒤엎는다. 즉 스페인 내전이 악한 파시스트와  민주 세력 공화파의 쟁투였다고 믿는 
이분법적 단견을 문제시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공화파 내의 이질적인 집단들이  서로 
격한 갈등을 보였으며 그 내분이 결정적 화를 자초했다.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 데이비드 카는 영국 청년이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는 소
식을 듣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  두고 스페인으로 들어선 데이비드는  전직 
독일 빵장수, 미국  청년, 선원, 전직 하녀 등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데이비드처럼 아마추어지만 
공화정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전사들이다.
  간단한 군사 훈련 후에 데이비드는 POUM(Parido Obrero de Unido Marxista, 마르크스주의 노
동자 연합)이라는 정당의 민병대에 들어간다. 이 정당은  앞에서 말한 조지 오웰이 참여했던 조직
으로서, 당시 공화파를 구성하고 있던  정치 세력의 하나이며 반스탈린주의가 그 특징이다. 또 다
른 특징은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는 사실이다. <랜드 앤 프
리덤>의 묘사를 보면 POUM 민병대에는 상명하복의  계급 구조가 없다. 지도자는 일반 병사들의 
투표로 선출되며, 의사 결정도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POUM이 신봉하던 민주주의의 전형은,  영화 속의 민병대가 한 마을을 접수했을 때 더욱  명확
히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 낸 후 POUM 민병대는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켜 회의를 연다. 
토지 소유 문제와 마을의 운영 방식이 의제였다. 몇몇 참석자들은 성급한 결정이라고 반대했으나, 
POUM 민병대와 마을 사람들은  토지 분배와 집단 농장 건설을 즉각 실시할 것이라고  결정한다. 
당시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진행  중이었음에도, POUM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즉시 현실화해야  한
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민주주의
를 부정하는 궤변이며, 주민들의 민주주의적 자치의 경험은 총칼보다  더욱 위력적이라는 게 그들
의 믿음이었다.
  부상을 입어 마드리드로 후송된 데이비드는 POUM을 떠난다. 앞에서 말한 국제 여단이  데이비
드의 새로운 소속 부대였다. POUM 민병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인 블랑카와 그는  마드리드에서 
만난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 데이비드의  이적이 분란을 낳는다. 블랑카는 스탈린의 
지휘를 받는 국제 여단을 혁명 정신을 배반하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반대로 데이비드는  POUM
이 반파시스트 전선의 분열을 야기하는 세력이라고 맞대응한다. 결국 그들은 싸우고 헤어진다. 간
밤의 다정한 기운은 사라지고 사상적 적대감으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둘은 사상적 견
해의 일치를 이루면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입장을 바꾼 이는 데이비드였다.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공화파  내의 무정부주의 세력 CNT와 국제 여단이  충돌하여 후자가 
승리하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는데,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이 상황 속에 데이비드가 참여하
도록 설정한다. 데이비드는 명백한 동지에게 총질하도록 강요하는 국제  여단 지휘부에 불만을 느
끼게 된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거리를 걷던 한 시민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데이비드의 마음을 움
직였을 것이다. “왜 당신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나. 단결하여 파시스트와 싸워야 하는 것 아
닌가.”
  위계 질서가 강하고 조직화된 군대인 국제 여단에 환멸을 느낀 데이비드는 POUM 민병대로 되
돌아온다. 그들은 보급품도 없이 힘겹게  적과 싸우는데 그들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었다. 공화
파 내의 한 세력이자 국제 여단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식 정치 프로그램을 따르는 사회주의 군대가 
POUM 민병대의 진지를 찾아온다. 그러고는  총을 겨눈 채 POUM은 프랑코와 내통한 자들의 집
단이며 불법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한다. 당연히 POUM 대원들은 저항했고 
가벼운 충돌도 일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블랑카가 사회주의 군대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영화 내용을 곰곰히 들여다보면,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반파시즘 전선의 분열상을 보여 주
며, 특히 내부의 적이 혁명을 배신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영화의 악
역은 파시스트가 아니다. 비난의 칼날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랜드 앤 프리덤>은 단순한 스페인 내전 영화가 아니다. 과연  POUM의 전략이 
옳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고무하는 계기인 것이다. 여기서 그  논쟁에 뛰어들어 켄 로치의 주
장에 대해 타당성을 따지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켄 로치의  설명으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또 
다른 시각의 주장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 사회와는 달리, 서구에서는 <랜드  앤 프리덤>을 둘러싸고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갔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 가운데는 스페인 공산당의  전 대표도 끼여 있었다. 한 
매체(<Newsday>)에 실린 노인의  주장도 켄 로치를 논박했는데, 여기서는 그  노인의 주장을 정
리하도록 하겠다.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윌리엄 서스맨은 국제 여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참전 용사
이다. 켄 로치의 주장대로라면, 스탈린의 지휘를 따랐던 반혁명 분자이자 공화파의 분열과 패배를 
초래한 세력이었던 셈이다. 서스맨은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흥분하여 두 가지 근거에서 
영화의 시각을 비판한다.
  먼저 그는 왜 영화 속에 나치의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가 등장하지 않는지 묻는
다. 마치 국제 여단 등이 전쟁을 망친 것으로 그려지는데, 국제 여단은 1년 이상 마드리드를 사수
함으로써 프랑코의 승리를 지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강변한다.  백번 양보하여 국제 여단이 
공화파 내에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켰다고 해도,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스맨의  시각에서는 비난의 대상은 당연히 공화정의 민주주의  정신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프랑코여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서스맨은 POUM의 민주주의적  지향을 비판한다. 사회 개혁이라는 것은 단순히  다수
가 지지한다고 해서 현실화될 수  없고, 더구나 파시즘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
라서 파시스트가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마을에 민주주의를 즉각 실현해야 한다고 믿
은  POUM은 허망한  이상론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한  비조직적인 시민군의  형태를  고집한 
POUM의 이상주의가 오히려 전쟁의 성과를 앗아 갔다고 주장한다.
  서스맨의 주장이 전적으로 억지는  아니다. POUM은 위계와 집단화를 거부하고 비정규  형태의 
시민군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인 프랑코 순대는 완벽한  규율을 지녔으며 독일과 이탈리아
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각지에 분산되
어 있는 반파시즘 세력을 하나의 위계 조직으로 규합하고 정치적으로 일치된 대오를 꾸리는 일이 
필수불가결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조직화가 관료주의  특유의 비민주성을 초래할 위험
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규 조직으로 규합하려는 노력을 스탈린주의라고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스페인 내전이 있은 지 반 세기도 훨씬 지난 시점에서 촉발된 논쟁은 뚜렷한 귀
결점에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스페인 내전이 별다른 사회적 진보를 성취하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만 형상과 많이 닮았다.

  내전 이후의 스페인

  켄 로치의 주장대로  원인이 공화파 내의 분열과  스탈린주의자들의 배신이었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공화파는 결국 내전에서 패배한다.  프랑코가 1939년 4월부터 스페인을 지배하게 된 것이
다. 그는 종전 후 여러 탄압 정책을 밀어붙였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악명 높은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코는 화합의 정치가 아니라  단호한 폭정의 정치를 지향했다. 모든 불순분자를 쓸어 버
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수십만 명의 반대파들이 체포.투옥되었고 종전 후 4년 동안에만도 약 
3만 7,000명이 처형된다.  그리고 과거의 공화파가 실시한  사회 정책과 법률 제정은  무효화된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군인, 성직자, 지주 중심의 사회로 회귀시켜 놓은 것이다.
  결국 스페인의 현대사는  중대한 고비에서 뒷걸음치고 말았다. 왕정을 뒤엎고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 건설을 실험하던 그간의 모든 노력은 프랑코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
리고 프랑코라는 독재자의 지배가 수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탄압으로 완전한  안정을 구할 수는 없었다.  프랑코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더 심각한 것은 국제  사회가 스페인 고립 정책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사회주
의자를 탄압했으므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
들도 내전과 집권 후 프랑코가 저지른 폭정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을 파문하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이런 고립 상태를 극복하게  된다. 한국 전쟁은 냉전의 산
물이자 냉전의 극점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프랑코는 반공이라면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스페인은 유럽 지역의 유력한  자본주의 기지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경제적 교류 
금지 조치를 철회했고,  미국 은행은 스페인에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유엔과 교황도 스페인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53년에는  군사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에서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
을 얻게 된다.
  그 후 60년대의 경제 부흥 그리고 70년대의 점진적 민주화 조치가 진행되면서 스페인은 정상적
인 국가 형태를 되찾아 간다. 그리고 종신으로 권좌에 있던 프랑코가 1975년 11월 사망한다. 그런
데 재미있는 사실은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왕에게 권력을 승계했다는 사실이다. 군인  출신 정
치가가 국왕에게 권력을 넘기는  일은 대단히 희귀하고 기묘한 형태의 권력 승계였다.  이것은 프
랑코의 절대 권력을 예증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스페인 내전의 모든 상처와 잔인성을 
상징하는 프랑코가 사망하자,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기억도 흐려진 것이 사실이다.

  20세기가 남긴 비극의 땅, 유고슬라비아

  스페인 내전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강렬한 희망과 그 좌절을 보여 주는  전쟁이었다면, 보스니
아 내전은 20세기  후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 전쟁이다. 한 국가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호전성으로 상대를 학살하고 추방하는 모습에 전세계는 경악했
다. 세계 모든 국가들은  평화안을 제시하여 분쟁을 가라앉히려 노력했고 때로는 무력으로  이 전
쟁에 개입하기도 했다.
  지구 반대편에 살며  과거 사회주의권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던 우리로선 그 전쟁의 
발생 원인이나 그 참혹함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적으로 너무 가깝게  벌어진 전쟁
인지라 그에 대한 권위 있는 평가나 전체적인 조망을 기다리기에도 이를지 모른다.
  여기서는 우선, 보스니아 내전을  있게 한 유고슬라비아의 현대사를 살펴보고, 역사가들이 입을 
열기 전에 동시대인의 시각에서 보스니아 내전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댄 영화들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이 전쟁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
이다.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리는 국가는  세 번 있었고, 보스니아 내전은 두번째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1차 대전 후 발칸 반도에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결합된 국가가 생겨난
다. 이 국가에서는  의회와 군주가 경쟁했으며, 지역  자치 욕구와 중앙 집권  의지가 충돌하였다. 
중심 세력인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실질적 자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 
지역의 의회도 탐탐잖게 여겼다. 수년간의 정쟁 끝에 1929년에  세르비아의 알렉산더 왕은 의회와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왕권 독재를 선포했는데, 이 왕국이 첫 번째 유고슬라비아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첫 번째의 유고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독일이 유고에 동맹을 요
구하였지만 유고가 중립을 고집하자  1941년 4월 독일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이때  유고는 뚜렷한 
저항 한번 없이  항복한다. 곧 군주 페타르와 정부는  피난을 떠났고 수만 명의 군대는  독일군에 
속속 투항했다. 독일이 세르비아 전체와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했고 나머지 지역도 이탈리
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에 의해 갈가리 찢어짐으로써 왕국 유고는 붕괴된다.
  이 즈음 유고의 독립 영웅이 등장한다. 공산당원 티토(1892~1980)는 처음에는 몇몇의 남녀로 구
성된 빨치산을 조직하면서 독립  투쟁을 시작한다. 그의 게릴라 조직은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하
고 전국적인 정치력을 획득하게 된다. 티토는 독일을 비롯한  파시스트 국가들과 맞대결하였고 이
탈리아의 지원으로 세워진 크로아티아의 괴뢰 정부도 그의 적이었다.  또한 페타르의 망명 정부도 
타국에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였기에 티토의 경쟁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안팎의 적들을 티토는  뛰어난 전략 전술로 손쉽게 제압하였다. 마침내 1942년  티토의 빨
치산은 보스니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임시 정부인  민족해방회의를 세운다. 이미 10
만 명 이상의 군대가 티토를  따르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등은 티토를 유고의 유력한  정치 세력
으로 인정하고 연합을 제의할  정도로 티토는 확실한 정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1944년 말에는 
연합군과 티토의 군대가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 내고 유고슬라비아의 해방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서방 국가는 물론이고  스탈린의 옛 소련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권력을 키워 나간 결
과, 티토는 1946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세우게된다. 이것이 두 번째의 유고슬라
비아이다.
  티토의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는 이전의 유고 지역과 전쟁 중 이탈리아 등에서 얻은 지역을 포
함한 국가였다. 즉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명목상 동등한 6개의  공화국이 결합된 국가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경제, 정치
에서 고도로 중앙 집권화되었으며, 그  핵은 당연히 티토의 공산당이었다. 유고의 독립과 두 번째 
유고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 수훈을 세웠던 영웅 티토는 1980년  사망한다. 아마도 그는 10년 후의 
비극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지휘 아래 민중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유고
슬라비아가 참혹한 해체 과정을 겪게 될 사실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은 어쩌면 그
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티토 사망 후  유고슬라비아는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숱한 경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외채는 150억 달러에 이르게 되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해를 거듭할수록 계속 하락한다. 게다가 
수백 년 이상 잠복해 있던 민족간 갈등이 터져나오면서 두 번째의 유고슬라비아도 급속도로 해체 
과정을 겪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가 유고 연방에서 독립을 선
언하면서 사회주의 유고 연방은 해체되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1992년 새로운 유고슬라비
아 연방을 세우기는  했지만 이미 많은 영토를 잃은  상태였다. 이처럼 두 번째 유고가  해체되고 
세 번째 유고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옛날에 `한` 나라가 있었네

  50년 남짓 사이에 국가가  세 번 무너져 내린 발칸 반도의 현대사를 그린  영화가 <언더그라운
드>이다. 유고의 사라예보 출신인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95년 칸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수상한  화제작이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1941년에서  1991년까지의 유고슬라비아
가 배경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설명한  독일의 침공부터 사회주의 유고 연방의 해체와 내전의 발
발까지를 앵글에 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두 남자이다.  블래키는 만화적인 캐릭터의 인물로서 매사를 거침없는  저돌성으로 돌
파한다. 1941년 독일 폭격기가  유고를 폭격하는데, 그 아비규환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식사를 끝마칠 정도이고, 폭격에  전등이 떨어지면 감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전깃줄을 이빨로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터프 가이`이다. 또한 만삭인 아내의 만류를 사뿐히 뚫고 정부 안젤리
나에게 가 사랑을 전하는  로맨틱한 `플레이 보이`이다. 사회 법규도 그를 제어하지는  못한다. 독
일군의 군수 물자를 털어  돈을 벌어들이는데 이런 무법자의 모습을 사람들이 오해한다.  즉 블래
키가 매일 밤 독일군을 무찌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독립 영웅인 줄만 안다.
  블래키의 절친한  친구 마르코가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항상 블래키와 
단짝이던 그는 곧 화해할 수 없는 경쟁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먼저 친구 블래키의 정부인 안젤리
나를 가로챈다. 그리고  블래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지하실에 몰아넣고 침략자  독일을 
물리치는 데 쓰일 군수  물자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자신은 그 물자를 빨치산에게  전달하는 책임
을 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립 투쟁과는 무관하고  어디까지나 마르코 자신의 사리사욕
을 채우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유고의 대독일 전쟁은  몇 년 후 종결되며 1946년에는 티토가 사회주의 국
가를 세웠다. 독립  영웅으로 알려진 마르코는 티토정권에서  높은 관직을 얻고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블래키도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지만, 사람들은 그가 독립 투쟁 과정에서 숨졌다
고 여기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블래키는 여전히 지하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군수  물자를 만들며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가 공습 사이렌소리와 폭격음을 규칙적으로 들려 주고, 마르코와 안젤리
나가 가끔씩 내려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 방금 독일군의 고문을 받았노라고 연기하는 바람에 
지하실의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았다. 이런 속임수는 20년간 지속되고 마르코는  지하의 사람들이 
만든 군수 물자를 암거래하면서 개인적 부를 쌓는다.
  그런데 1961년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지하에 숨어 있던  무리 중 블래키와 그의 아들이 
빠져나온 것이다.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인물들이다. 우연히 그
들은 대독일 독립 투쟁을  그리는 영화 촬영 현장에 당도하게 되고, 수많은  독일군을 발견하고는 
신나게 살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껏해야 엑스트라들을 살해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곧 블래키의 아들은 블래키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익사하여 강물에 떠내려가 버린다.  이제 블
래키는 아들을 찾아 유고 영토를 수십 년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다. 블래키 부자와 함께 원숭이 
한 마리도 지하에서 빠져나왔는데,  그 원숭이를 찾기 위해 마르코의 동생 이반도  지상의 세계로 
나온다. 이반은 사랑하는 원숭이를 찾아서 유럽 대륙을 뒤지게 된다.
  영화는 순식간에 1961년에서 1991년으로 시간 이동을 한다. 블래키는  여전히 아들을 찾아 헤매
고 있지만 아들이 죽었으니  찾을 방도가 전혀없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유고의  상황은 사회주의 
유고 연방이 해체되고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블래키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
다. 본능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그는 죽은 아들을 찾으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반면, 천신만고 끝에 원숭이를 찾아  낸 이반은 모든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지하에서 무기
를 만들어 내는 동안 조국은 벌써 사회주의 체제로 재건되었음을  알아 낸다. 그리고 자신이 현재 
목격하고 있는 아비규환의 전쟁은  대독일 독립 투쟁이 아니라, 한 국가를 이루었던  민족간의 싸
움이라는 것도 확인한다. 이반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형 마르코와 안젤리나의 죄악상이다. 마르코
가 모든 진실을 은폐했으며 지하의  사람들은 마르코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당했음을 알았
을 때 이반은 무너져 내린다.
  주요 등장 인물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에서 마르코와 
안젤리나를 만난 이반은 그들을 질책하고 저주하다가 교회의 종에  목을 매달고 자살한다. 그리고 
군인들이 마르코와 안젤리나를  총살하고 그들의 몸에 불을 지른다. 마지막으로  블래키는 아들의 
환영이 비친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는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기대했다면, 관객들은 다소  의아해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언더그라운
드>가 어색한 코미디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면 머리로 술병을 박살
내는 마르코, 그리고 너무나 자주 목을 매다는 이반, 전기 고문에 머리칼이 곤두선 블래키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우스꽝스런 상황과 연기에  관객들은 자주 실소하게 되고, 그래서 이 영화가 역사
적 사실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있는지 또는 유고 역사를  아프게 느끼고나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영화의 소재와 형식이  어긋나는 것만 같아 품게  될 그런 의구심을 해소하게  하는 설명(강영희, 
<씨네21> 제37호)이 그래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우선 과장되고 우스꽝스런 연기가 관객의 감정적 몰입을 막는다고 설명한다. 영화 <언
더그라운드>의 관객은 주인공의 엉뚱한 모습을 동일시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을 동정하기도 힘
들다. 감독은 관객과 영화의  동일시 가능성을 차단함으로써, 관객들이 발칸인들의 불합리하고 부
질없는 욕구를 한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기조가 코미디의 형식을 취한 것도 그와 유사한 의미가 있다는 게 이 글의 설
명이다. 우리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는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 영화에서 감독은 등장 인물
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럴 때 감독은 영화 속의 비극에 아무런  책임도 없
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만일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발칸인들을 비난하고 
나섰다면 감독은 무의식 중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의 감독은 영화  속의 참상에 어떤 비난도 퍼붓지 않았다.  따라서 자기 
변호를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감독 자신이 유고의 비극을 초래한 공모자  중 하나라
고 고해하고 있다는  게 이 글의 해석이다. 이런 설명은  까다롭기는 하지만, 좀체 파악하기 힘든 
연출 의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유고 역사, 특히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언더그라운드>가 
여전히 미진한 것은 사실이다. 사전 지식없이 <언더그라운드>를  관람하는 경우라면 도대체 유고
에서의 전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전쟁의 비극성은 어떤 것인지 실감하기  힘들다는 것이
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91년의 내전 발발 즈음에서 멈추기  때문에, 특히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지식은 독학을 통해 얻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독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영화가 없
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해체에서 인종 청소까지

  밀코 만체브스키 감독의 <비포 더 레인>은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보스니아 내전이 얼마만큼 비
합리적인 증오에 기반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영화가 소개하는 한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영국 런던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한 여인이 남편에게 이혼을  제의하려고 만남을 갖고 있다. 여인은 임신을 했으며  현재 남편의 
아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최근  소원해진 부부 사이가 염려되던 차에 너무나 반갑고  기쁘기만 하
다. 축하를 위해 샴페인을 주문하고 이제부터 더욱 충만한 동반  관계를 이루자고 말하는 그는 크
게 들떠 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여인은  임신 사실과는 무관하게 이혼을 원하고 
있지만 남편은 여인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레스토랑은  그런 사담을 나누며 행복해하거
나 우울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한 사내가 웨이터와 시비가  붙었다. 웨이터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억울하기만 한데, 레
스토랑의 주인은 손님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웨이터에게는 해고를 통지한다. 더욱  원통해진 웨이
터는 망연자실하고 뭐라고 떠들던 사내는 레스토랑을 나선다. 작은  충돌 때문에 어수선했던 레스
토랑은 곧 차분해진다.  그런데 잠시 후 웨이터와 싸웠던  그 사내가 돌아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레스토랑의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한다.  어린이도 여인의 남편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꾸라지고 만다.
  <비포 더 레인>이  주장하는 바는 아마도 이런  것인 듯하다. 우리가 상대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부분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앞의 상황에서처럼 그 증오심은  극히 불합리하며 따라서 폭력
에 의한 상처는 참으로  허망하다는 것이다. 영화는 런던뿐 아니라 보스니아에서도 그와  같은 비
합리적이며 무분별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옛 유고 연방(이 영화의 정확한 배경은 유고 연방의  한 지역이던 마케도니아이다)의 땅
에서 벌어지는 살상과 폭력과 증오도 같은 맥락임을 보여준다.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명
성을 얻은 사진 작가  알렉산더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1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폭력과 증오심이 
일상화된 땅이다. 10대 초반의 아이들도 기관총을 들고 행인  알렉산더에게 어느 편이냐고 위협적
으로 질문하니 말이다.
  알렉산더는 옛 연인 한나에게서 치명적인 정보를 얻는다. 알렉산더의  사촌을 죽인 소녀 자미라
가 한나의 딸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의 고향 마을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지역이며  한나와 그의 
딸 자미라는 근처 이슬람 마을 사람이다. 두 종교 집단은  극렬히 맞서 있는데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미라를 달아나게 하지만, 적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고향 마을 사람에게 살해된다.
  한편, 자미라는 그리스  정교 수도원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수도사 카릴을 만난
다. 카릴은 신의 집에  숨어든 이교도 자미라를 수용하고 보호한다. 그 사실을 폭로할  경우, 수도
원 주위를 감시하는 주민들의  손에 자미라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카릴의  행위는 수도원에 
의해 발각되고 수도사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쫓겨난다. 이쯤에서 상황이  멈추었다면 그다지 
심각한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미라와 카릴은 이슬람 지역으로 안전하게 들어섰지만, 문제는 
자미라가 이미 카릴에게 연정을 품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미라는 카릴을 따라나서려 했
고, 이번에는 이교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미라의 동족이 그녀를 사살하고 만다.
  알렉산더와 자미라의 죽음을  통해 영화 <비포 더 레인>은,  옛 유고 연방의 땅에서는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가장 추잡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치 런던의 평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던 그  정신병자처럼, 유고 연방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동족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로 타인을 증오하고 거리낌없이 살상했던 것이다.

  옛 유고 연방에서의 내전,  특히 보스니아 내전은 민족애가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낳는지 단적
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한 국가 울타리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상대에게 무서운 증오심을 품고 
끔찍한 폭력을 자행했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앞에서 보았던 몇몇 국가들의 독립 선포였다. 옛 
유고 연방은 3개의 언어, 3개의 종교  그리고 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여러 국가들이 독
립하면서 수백 년간 지속된 민족, 종교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 공화국 주도의 유고 연방군이 침공함으
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유고 내전 초기에는 세르비아  공화국과 나머지 공화국의 전쟁이
었지만, 곧 사정이 달라진다. 각  공화국 내의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문자 그대
로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독립을 선언한  대부분의 공화국은 내부로부터의 전화
에 휩싸이게 된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
아 내 세르비아계가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내전 발발 1년  만에 보스니아 지역의 70%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한다.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민족  갈등뿐 아니라 종교 갈등의 측면도 강하다. 이 지
역의 인구 분포를 보면  그리스 정교를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8% 정도이다.  각 분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고 민족 이익을 앞세워 극렬하게 맞부닥치게 된다.
  군사력이 우세한 세르비아계는 군인은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살
상했다. 그 증거로서 종전 후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 장소와 매장지가 발굴되고 공개되었다. 그
리고 국외의 인도주의적  원조의 통로를 끊음으로써 다른  민족들을 고립 봉쇄시켰다. 또한  강제 
추방이 잇달았다. 그러나 이런 만행은 비교적 점잖은 편에 속한다.
  세르비아계는 단순히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다른 민족과 종교  세력을 
완전히 없애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종 청소와 조직적 강간을 주저없이 자행한다. 1996년 헤이
그의 유엔 전범 재판소는 보스니아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회교도 부녀자들을 집단
적으로 강간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강간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인종 청소, 즉 회교도를 조직
적으로 줄이려는 음모였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도  밝혀졌다. 강간당
한 부녀자들은 `강간 수용소`에 수용하여  낙태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낙태가 불가능한 시기가 되
어서야 석방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계의 전쟁 영웅 라트코 믈라디치  같은 인물도 보스니아의 백
정이라 불리며 전범 재판정에 세워진 이유도 그런 만행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전은 4년 가까이 진행되어 27만 명이 사망했으며 2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고 
500개의 마을이 불타고 57개 도시가  반파되었다. 경제적 피해는 약 500억 달러에 이른다. 무엇보
다 인종 청소 그리고  집단 강간 등에 의한 정신적 공황  상태와 증오심은 보스니아 내전의 씻을 
수 없는 상처이다.

  보스니아 내전의 잠정적 종결

  보스니아 내전 사태는  1997년 현재로서는 안정되었다. 이는  미국 등 서방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선 결과이다. 1995년  말 내전 발발 3년 7개월 만에,  미국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보스니아 평화 
협정이 조인된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보스니아를 단일 국가로  유지하되, 두 체제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즉 세르비아계의 민족 자체 공화국(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인정하고 동시에 회교-크로아티
아 연방이 또 다른 지방 정부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공화국은 영토의 49%와 51%를 통제하
게 되었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회교계가 각각의 자체  대통령을 선출
하고, 3인의 대통령이  공동으로 연방을 통치하기로 한 것도 평화  협정의 주요 내용이다. 1997년 
총선이 치러지고 다소 안정적인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는 명백히 형식적인 평화일 뿐
이다. 이미 심각한 상처를 주고받은 민족들의 불안한 공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으며 40대 초반의 전도양양한 영화 
감독 에밀 쿠스투리차도 보스니아 내전으로 상처를 입었다. 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보면, 쿠스투
리차가 조국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유고의 재통합을 호소하는  듯한데, 이
런 주장이 보스니아 내전의 악당인 세르비아계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프랑스
에서는 여러 지식인들이 쿠스투리차를 세르비아의 선전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에 직면하여  쿠스투리차는 1995년 12월 은퇴를 선언한다. 쿠스투리차의  매니저는 약 
반 년 후에 감독이 다시 영화를 제작한다고 발표했으니 이제 사람들은 쿠스투리차 감독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쿠스투리차도 보스니아 내전의 광기에  간접적으로 상처를 
입은 셈이다. 또한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증오심은 쿠스투리차를 은퇴로  몰았던 그 숱한 서구인들
의 가슴 속에도 비슷한 모양새로  옮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증오심이나 광기는  불안한 평
화를 유지하는 보스니아가 다시 분열되는 그날 또다시 전세계를 휩쓸지도 모른다.

  인물로 본 변방의 역사 - 딜라이 라마, 간디, 에바 페론

  서구인들이 주목하는 제3세계 지도자들

  미국과 몇몇 유럽 국가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를 선도한다지만, 주변의 지역에도 사람이 살
기는 마찬가지이고 중요한 사건도 발생한다. 그리고 주변 국가에서도 영웅은 탄생한다. 생각해 보
면 주변 국가 출신이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모국에서의 역경과 서구인들
의 편견을 동시에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는 주변 출신이면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들의 개인사를 여러 각도에서 살
펴보려 한다. 우선 사회주의 강국인 중국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 라마
가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요즘 서구 사회에서 일고 있는  티베트 불교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
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부신 
의지와 지략으로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이루었지만 서른 셋의 나이에 요절하고 사후도 비극적이었
던 에바 페론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들은  서구인의 추인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어려웠다. 즉  그들의 
삶에는 서구인의 구미에  맞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브로드웨이의 쇼  비즈니스 담당자들에게는 
에바 페론의 비극적 삶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삶을 그린  뮤지컬이 제작되면서 브로드웨이는 많
은 돈을 벌었고 에바 페론은 자신의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간디의 경우 그가 위인임을 부
정할 수는 없지만, 지극히 동양적인  이미지가 서구에 크게 호소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명성 배후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배경  이외에도 정치적인 조건이 있었
다. 그는 서구인들이 적대시하는 중국과 대신 맞선 정치 지도자이다.
  이런 복잡하고도  의심스러운 맥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목할 만한 인물들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들에 대한 지나치게 서구적인  시각과 포장을 걷어 내는 작
업을 시도하려 한다. 그들의  역사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것이 그들  모국과 20세기의 
세계를 조망하는 하나의 창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나라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티베트는 영토가 남한의 12배에 달할  정도로 광대하지만 인구는 200만 
명 남짓이다. 장구한 독립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중국에  편입되어 서장 자치구로 전
락했다. 중심 도시인 라싸에서 독립국의 흔적을 엿볼 수는 있지만, 티베트인은 이제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티베트는 평균 기온이 섭씨  1.1도에 불과하고 평균 고도는 4,000미터에 이른다.  지구상에서 가
장 높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지만,  고지대 특유의 열악한 거주 환
경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식물의 생장 한계선을 넘어선  고지가 
대부분인 티베트에서, 풍성한  곡물이 자라는 전답과 드넓은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실과 
함께 티베트가 동쪽을 제외하고는 히말라야 등의 여러 산맥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고립과 
단절은 티베트의 또 다른  지리적 특성이다. 그래서 고유의 물질 문명의 발전을  기대하기도 힘들
고 흔하디 흔한 문명의 이기가 유입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티베트인들은 양가죽 옷 추빠를 입고,  가축인 야크의 분뇨까지 연료로 사용한다. 강을 건널 때
는 야크 가죽으로 만든 배를  주로 이용하는데, 강을 건너는 동안 배에 스며든 물을  계속 퍼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철도는  찾아볼 수 없고 중심 도시도 1주일에 이틀 정도는 전기  공급이 끊긴
다. 한없이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이 끝없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러나 티베트는 믿기 어려울 정도
로 정신 문명이 크게 발전한 곳이다. 마치 천상의 세계에 속한 듯, 티베트의 모든 땅은 영혼과 정
신이 지배한다.
  티베트의 정신 문명은 거대한  사원과 궁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캉 사원도  티베트의 상징이
지만,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포탈라궁이 단연 대표적인 티베트 건축물로 꼽힌다. 포탈라 궁
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거처로 라싸에 있다. 높이 120미터에 달하는  이 궁전에
는 999개의 방이 있고 2만개 이상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포탈라 궁을 지탱하는 기둥은 1만 5,000
개나 되는데, 녹인 쇳물을 나무 기둥 속에 부어 지진에 대비했다고 한다.
  티베트인들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고려해 보면 이렇듯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그들이 1,000년의 세월 동안 노동력과 물자를 투여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혹 지독한 
정치 세력이라도 있어 그런 착취를 자행했던 것일까. 하지만  1,000년 동안 주민을 설득하는 일이, 
어디 정치적 음모만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포탈라 궁의 위용에서  티베트인들의 신실한 믿음과 헌
신을 읽어 낸다 한들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의식주를 개선하는 활동 대신 종교적  상징물 건축
에 헌신할 만큼 티베트인들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고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티베트인들에게 일상화된 오체투지의 종교적 고행도 놀랍다. 오체투지는  무릎을 꿇고 팔꿈치와 
이마를 땅에 붙여 종교적  신심을 표현한다.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은 유명  사원 앞
에서라면 의당 목격하게  되지만, 티베트 전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체투지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발짝 걷다가 오체투지를 반복하면서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만
큼 오체투지는 티베트인의 일상이다. 국내 한 일간지 기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어떤 청년은 8개월
째 오체투지를 계속하며  라싸를 향하고 있었는데, 식기와  침구를 실은 손수레를 밀며  약혼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또, 순레  기간 동안 구걸이 당연시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자기 것  지키기에 혈
안이 된 자본주의  시민에게는 구걸이 무능력한 걸인의 모습이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교류이다.
  불교가 지배하는 티베트는 정신의 세계와 속세가 합치되어 있다.  공덕을 쌓으면 누구나 극락왕
생하며 부활한다는 믿음이 강해,  척박한 환경 따위나 현실의 고통스런 고행 정도는  거뜬히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서구 세계에 알려지면서 세상을 경악하게 했고,  티베트인들은 야만 민족이라는 국
제적 비난을 야기한 장례  풍습도 실은 정신이 현실을 지배하는 티베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티
베트에서 가장 일반적인 장례 방식은 자토, 즉 조장이다.  `문명인`들은 상상만으로도 소스라칠 조
장은 시신을 새의 먹이로 제공하는  장례 방식이다. 조장의 전문 장의사는 조자바인데, 며칠 동안 
집 안에 안치되었던 시신은  조자바에 의해 조장터로 옮겨진다. 이제 두 가지의  소도구가 필요하
다.
  먼저 볶은 보리를 뿌린  소나무로 모닥불을 피운다. 다음으로는 라마승이 사람의 뼈로  만든 퉁
소를 불어 댄다. 연기와 퉁소 소리로  먼 산의 독수리를 부르는 것이다. 이때 시신은 살갗을 벗기
고 뼈와 살을 발라 놓는다. 티베트인들은 독수리가 먹기 좋게  하려고 시신의 살을 잘게 자를수록 
좋다고 믿는데, 부유한  사람일수록 더욱 잘게 잘린다. 단 한가지도  그냥 버리는 부분이 없는 게 
티베트인들의 시신이다. 내장과 골수  등도 독수리에게 던져진다. 뼛조각마저 부수어 보리에 버무
려 독수리에게 준다.
  티베트인들은 생활의 편안함은 물론,  육신마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시신으로 배를 채
운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면 사람의 영혼도 하늘을  항하며, 조장을 통한 마지막 선행이  망자의 
부활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독특한 풍습을 가능하게 한 티베트 특유의 불교 문화에  대해 좀더 알아보자. 티베트에 불
교가 전파된 시기는 7세기경이다.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 왕 (617~641년 재위)은 당나라와 네
팔의 왕실에서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당나라의 문성 공주가 중국  불교를 티베트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세기경 불교는 티베트에서 주도적인 종교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13세기경에 티베트  불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와 종교를 장악한 사캬파의  부패가 
심각해지면서 국가적 위기를  야기한 것이다. 승려들 사이에서 음주나 결혼이  일반화되었으니 종
교적 수행은 겉치레에 불과했고 세속적 사리사욕이 그들의 본심이  되었다. 14세기 후반에 총카파
가 등장하여 티베트 불교의 개혁을 주도한다. 그가 이끄는 교파를  흔히 황색 교단 또는 황모파라
고 부르는데, 주로 노란색의 모자를 썼기 때문이다.
  총카파의 황모파가 일군  개혁의 핵심 내용은 세속화한 불교에 금욕주의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음주나 무절제를 비난하고,  종교적 지위가 세습되던 폐해를  막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의 
의무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엄격한 종교적 수행을 강조한다.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을 의무화한 조
치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교와 정치에서 세습제가  사라진다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고,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특수한 교리가 유래되었다.
  총카파의 개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환생 개념이 크게 강화된다.  종교적 지도자는 죽음의 장
벽을 넘어 환생함으로써 현실 세계 속에 영원히 현현한다는 것인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반 불교에서도 환생을  종교의 내적 원리로 설정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처럼 죽음과 
환생이 하나의 과정으로 밀착되어  있지는 않다. 지난 500년 동안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죽음과 함께 곧바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죽
음이란 곧 새로운 출발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환생의 대표적 주체이자 종교적  지도자가 바로 달라이 라마인데, 제1대 달라이  라마는 총카파
의 조카  게둔두프(1391~1475)이다. 달라이는 `바다` 또는  `넓고 깊음`을 뜻하고,  라마는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 당대의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그의 환생자를 찾아 내
고,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달라이 라마의 지위를 상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에까지 이르게 된다.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달라이 라마는 제5대  달라이 라마(1683~1706)이다. 그는 티베트 
전체의 경쟁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세속적 권력까지  완전히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 종교 지도자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제5대 달라이 라마는 또 다른 
권력 주체까지 창출한다. 판첸 라마를 지정한 것인데, 티베트의 제2인자 격인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순수하게 정신적인 지도자로 여겨지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1인자와 2인자로 또는 정치, 종교의 지도자와 정신적  지도자로 구
분되어 설명되지만, 또 다른 구분 방법도 있다. 자비와  관용을 표상하며, 현세에 관계하여 중생들
을 고난에서 구하는 존재인  관음 보살이 달라이 라마로 환생한다는 게 티베트의  믿음이다.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환생자로  여겨지는데, 아미타불은 관음 보살과는 달리 현세에  개입하지 않고 
서방정토 극락에 살고 있는 부처이다.
  지금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티베트 동북부 타크셀에서 출생했으며 속명은 텐진 캇초
이다. 1933년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가부좌를 튼 채 열반에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이 향해 있던 호
수에 몇 가지 글과 그림 등 징표가 나타났다는데, 고승들이  이 징표를 해석하여 한농가까지 찾아
갔다. 그리고 어린 텐진 캇초에게 염주 등 제 13대 달라이 라마의  유품들을 다른 물건과 섞어 내
놓았는데, 그 꼬마아이가 정확히 달라이  라마의 유품을 구별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심사 과정을 
거쳐 텐진 캇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되었고, 수도 라싸로 옮겨가 13년간의  교육 과정
을 거쳐서 1950년 티베트의 절대적 지도자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의 침략과 티베트의 저항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그러나 티베트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다.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직후 중국이 침략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중국은 티베트를 제국주의에서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평화의 땅을 무력 침공했다.
  수백 년 동안 사법 제도와 입법 제도는 물론, 독자적인  군대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독립 국가 
티베트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탱크를 앞세운 강대국 군대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티베트인
들의 항쟁은 1959년 라싸의 무장 봉기에서 절정을 이루지만 이내  진압되고 만다. 중국의 침략 이
후 1959년까지 무려 20만 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항쟁이 얼마나 격렬했
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항쟁에 실패한 달라이 라마는 같은 해 8만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인
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1965년에는 티베트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를 떠난 후에도  항쟁은 계속되었고 중국의 무자비한 탄압도 멈추지 않았
다. 수없이 많은 티베트 승려와 불교 신도들이 처형되었으며 6,000여 곳의 티베트 사원과 문화 시
설이 파괴되거나 글자 그대로 돼지 우리로 변했다. 국제  사면위원회는 1959년에서 1979년까지 중
국 정부에 의해 살해된 티베트인들이 100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티베트 국민의 투쟁 방법은 두 가지였다. 네팔과 티베트 접경 지역의 무스탕에 근거지를 둔 `평
화의 전사`라는 게릴라가  무력 투쟁을 대표하였다. 이들은 대만의 비공식적  지원을 받았고 미국 
CIA로부터는 무기를 공수받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
국과 대만이 후퇴하자 폭력적 방법은 쇠퇴하고 만다.
  티베트를 떠나 인도 북부 달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세운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적 방식을 주장하
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세계 티베트인들이 선출한 43
명의 의원과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3명의 의원 등 총 46명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의회가 최고 
결정 기관이며, 내각은  8개 부처로 구성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망명 정부의 대표로서 
중국과의 협상과 국제 여론 조성 등을 주로 담당한다.
  한 국내 주간지(<시사저널>1996년 7월 31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달라이 라마는 불교의 연기
법에 근거해 비폭력 투쟁의 당위성을 설명한 바 있다. 무력의  행사는 보통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를 절멸시키려는 경향을 띠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이를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시
각이다. 이에 반해 달라이 라마는 나와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인연에 얽
혀 생성되는 만물은 결국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를 해치는 일은 곧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침략자 중국마저도 티베트인들과 공존해야 할 존재이므로, 무력이 아
니라 설득과 화해와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게 달라이 라마의 생각이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투쟁  전략은 서구 세계에서 특히 환영받아,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비롯
해 파리 인권상과 미국의 위런버그 인권상 등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달라이 라마의 유명세 덕에 티베트 불교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티베트 불교 사원
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해 전세계에 600여개가 세워졌고 티베트 불교의 추종자도 전세계에서 꾸준
히 생겨나고 있다.
  한편, 스매싱 펌킨스, 레스 핫 칠리 페퍼스, 푸지스, 오노 요코 등 미국의 대중 음악인들은 1996
년 6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부근에서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티베트 해방 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를 가졌다. 이는 1985년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라이브 에이드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
다.
  티베트에 대한 호의적인 국제 여론은 결국 뒤집어 보면 중국을  향한 비난이 된다. 중국은 80년
대 초 국제적 비난 여론이 비등하자  티베트 불교의 종교 행위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유화 정책
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부흥은 곧 티베트의 분리 독립 요구를 낳을  것이 분명
하기에 티베트 불교의 탄압은 중국의 대 티베트 정책의 기조가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티베트에
서의 종교 활동은 엄격히 통제되며 사원 재건축과 승려 수도 제한의 대상이다.
  국제 연합과 전세계 사회 단체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였고,  지난 40년간 협상이 이어졌지
만 티베트 독립이 이루어질 징후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중국의 등소평이
나 이붕 총리는  티베트가 독립 요구를 포기한다면 점진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
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측에서 보면 독립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구호이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
이 라마는 살아 있는  부처이고 절대적인 지도자이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한 자치구의 
책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포탈라 궁을 세울 때처럼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편이 
티베트인들로서는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국과 티베트의  시각에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근본적인 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가 된 변호사, 간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의 원래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이다.  그는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4계급 중 바이샤(상인)에  해당하는 
계급 출신으로서, 영국에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정도로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적잖은 서구의 문헌들은 그가  영국 유학 시절 서구 사상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사회 사상가 존  러스킨의 저작에서 거대 산업 질서보다는 전통적 삶의 방식이 
우월함을 배웠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서는 불복종 저항 전략을 익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
서 배운 교양만으로 사람이 바뀔 수는  없는 법. 평법한 젊은이가 후에 마하트마(위대한 넋) 또는 
파부(아버지)라 불리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혹독한  자기 극복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간디가 시험
에 들었던 최초의 배경은 인도가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간디는 1893년 한  인도 회사의 변호사로 일하기 위해, 대영국제국의  속국이었던 남아프리카로 
간다. 그의 생애를 세밀하게 그렸던  영화 <간디>(리처드 아텐보로 감독, 1982년)을 보면, 간디는 
말쑥한 양복을 입고 기차 1등석에 앉아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백인이 이끌고 온 열
차 직원이 당장 3등석으로  옮겨가라고 윽박지른다. 번듯한 변호사인데다 자기 돈 들여  1등석 차
표를 구입한 간디는 황망할 뿐이다. 결국 그는 유색  인종이 주제넘게 1등석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의  인권 상황이 간디에게 영감과 실천의 용기를  주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도인들은 선거권은 고사하고  재산 소유권도 없었고 백인이나 기독교인들과 함께 
걸을 수도 없었다. 항상 신분증을 소지해야 했으며 지문 날인도 법적 의무 사항이었다. 요컨대 인
도인들은 철저한 주변인이자 피억압민었던 것이다.
  간디는 인도인들이 대영제국의 일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주간 신문인 <인디언  오피니언>의 발행과 나탈 인디언 회의의 결성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는 또한 공동체  정신을 현실에 실현하기 위해 피닉스 농장과 톨스토이  농장 등의 
아쉬람, 즉 정신적  공동체를 건설했다. 그는 이  공동체에서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누구나 
평등하게 노동하고 나누어 갖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1906년 간디는 그의  삶에 큰 획을 긋는 두  가지 중요한 결단을 실행한다. 하나는  브라마차라 
서약, 즉 금욕과 동정주의의 맹세이다. 이미 13세에 결혼한 그였지만 이제 평생 성적 욕망을 멀리
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기득권은 물론이고 모든 소유욕을 벗어  버리겠다고 맹세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간디가 최초로 공식적인 항쟁을 시작한 시기도 1906년이다. 그의 항쟁은 비폭력 불
복종을 기본 원칙으로 했는데 이런 항재의 정신적 근간은 사티아그라하,  즉 진리의 힘 또는 정신
의 힘이었다. 진리와 정신의 힘을 가슴에 품고 무도한 무리의  폭력 앞에 당당히 몸을 내맡긴다는 
것이다. “영국 군인들은 나를 때리고 뼈를  부러뜨릴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그들은 나의 시체를 얻을 뿐 결코 복종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듯 브라마차라 서약과 
비폭력 불복종 항쟁을  결의한 간디는 다음 해인 1907년  최초로 투옥된다. 이후 그는 열  차례에 
걸쳐 총 2,333일의 나날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남아프리카에서 20년을 보낸 후 1914년에 조국 인도로 돌와왔을때,  간디는 이미 국민적 영웅이
었다. 봄베이 항구는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말쑥한 신사복  차림이 아니었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천조각으로 몸을 두른 모습이었다.
  귀국한 후 몇  년 동안 간디는 영국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데는 단호했지만 영국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1차 대전 기간 동안 영국을 지원했고 인도인의 징집에도 협조적이었다. 적
어도 1919년까지는.
  그해 영국 총독부는 인도인을  재판없이 투옥할 수 있도록 하는 로왈렛 법을  제정한다. 인도인
의 기본권마저 무시하는  법률 제정에 저항하는 시위가  암리츠알에서 일어나자 영국군은 시민을 
무참히 대량 사살한다. 영국 군인들은 시위 군중을 향해 1,650발의 총탄을 발사해 어린이 303명을 
포함한 1,516명을 사살했다. 영국군들은 근거리에서 민간인들을 향해  정조준 총격을 가한 것이다. 
시위대가 영국 시민들이었어도 그렇게 진압했을까?
  로왈렛 법과 시위대  학살은 대영제국에 우호적인 모습마저 보이던 간디를  변화시킨 계기였다. 
이제 간디는 영국의 지배에  명백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지도자로 변신한다. 간디가  인도 최대
의 정치 집단인 인도 국민의회에 참여하여 정치 무대로 나선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입장은 변했지만 간디가 선택한 저항 방식은 여전히 비폭력 불복종의 
방법이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권익을 위해 투쟁을 시작한  이후 그가 죽음에 이르
는 순간까지 비폭력의 방법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의  비폭력 저항은 때때로 강대국 영국
의 폭압을 무력하는 데 효율적인 전력이 되기도 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유명한 예는 여럿 있다. 그가 인도의  전통적 직물 기구인 물레를 되살려 
낸 것은 그 중 하나이다. 방적기로 만들어진 영국 옷 대신 인도인  스스로가 물레로 만든 옷을 입
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설득했다. 영국제 옷을 벗어던지면서 인도인들은  영국에 대한 경제적 예
속도 함께 벗기 시작한  셈이다. 또 간디는 대단히 효율적인 파업의 방법을  인도인들에게 제시한
다. 하루를 정하여 3억 5,000명의  인도인들이 종일 단식하고 기도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인도 전체
가 전면 파업에 들어서게 한  것이다. 그러니 기차나 버스가 멈춰 서는 일은 당연했고  공장은 물
론이고 관공서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의 인도 통제력을 잠시나마  뒤흔든 저항이
었다.
  1930년 간디는 전세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 저항을 주도한다. 영국 총독부가 소금에  세금을 부
과하자, 수만 명의 인도인들이 300마일  이상을 행진하여 바닷가에서 직접 소금을 만들었는데, 그 
행렬을 이끈 사람이 바로 간디였다. 영국 총독부는 이 저항에 참여한 인도인  중 6만명 이상을 투
옥하였는데, 이런 영국의 민감한 반응은 간디의 저항 방식이 무력  투쟁 이상으로 영국에 큰 타격
을 입혔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간디는 1934년 인도  국민의회의 지도자 위치에서 물러나 평회원으로 남는다.  국민의회의 다수 
지도자들이 자신의 비폭력 저항 방식을 기본적인 원리로 여기지  않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직후였다.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 단체를 지도하는 대신  간디는 좀 더 낮은 곳으로 
임한다. 인도 전체 인구의  85%에 해당하는 농촌 인구를 지원하고 교육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민 계급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애초부터 인도의 뿌
리 깊은 계급 차별 제도에 반대해 왔다. 1932년 영국이  불가촉 천민 집단을 선거권자에서 배제하
는 법률을 제정하자, 감옥에서  단식으로 항의하여 결국 법률을 개정시켰던 일은 그  한가지 사례
이다. 천민 집단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간디는 그들을 히라얀,  즉 `신의 아이들`이라 부르며 천민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천민 집단의 공동체도 세웠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간디에게 인도의 협조를 요청한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보장한
다면 영국에 협조할 것이라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영국은 물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간
디는 대대적인 불복종  캠페인을 주도하고 나선다. 1942년  간디는 아내와 함께 다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아내를 잃는다. 1944년 단식의 결과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후에야 간디는 석방되었다.
  1947년 간디와 인도 국민이  오랜 세월 갈구했던 독립이 비로소 실현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인
도 내부의 또 다른 문제가 폭발한다. 인도 전역에서 힌두교와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 빈발하고 상
대를 무참히 살상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슬람 세력들은 인도에서 분리  독립하여 
파키스탄(`순수의 땅`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1947년 8월 파키스탄이 독립한 이후에  종교 갈등은 더욱 심각해지고 유혈 사태는 참혹한 희생
을 잇따르게 했다. 나이 79세의  간디는 두계파의 화해를 호소하는 단식을 시작한다. 그의 단식은 
큰 호소력을 발휘해 두  계파의 화해 약속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5일간의 단식을  마친 직후인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한 힌두교도의 총탄에 숨을 거두게 된다.

  암살자의 항변

  간디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사망했지만, 그의 죽음은 전세계
를 경악과 비탄에 빠뜨렸다. 지금까지도  간디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인
슈타인은 두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위인이라 평가했으며, 간디가  영국과의 협상을 위해 런던을 방
문했을 때에는 찰리 채플린과 버나드  쇼는 물론이고 적대자였던 영국의 숱한 정치가들까지 그와
의 만남을 갈구했다. 당연히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며  또한 남아프리카
의 흑인 해방 운동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화적 저항 운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
가되고 있다.
  간디에 대한 찬사나 경외는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는 여전히 석연찮은 상태로 남아 
있다. 바로 간디 암살의 정치적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최소한 암살자는 자기의 행위
에 대해 명분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  내용은 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많은  문헌들은 
간디의 암살 순간에서 끝맺거나 한  힌두교 광신자가 암살범이었다는 설명을 간단히 덧붙일 따름
이다.
  그런데 간디가 숨진 지 반 세기 가량 지난 오늘날,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간디 암살 혐의
로 기소된 7명 가운데 간디에게 직접 총을 쏜 나투람 고제(Nathuram Godse)의 동생 고팔이 1994
년 72세의 나이에 <나는 왜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했는가>라는 책을 출간하여 간디 암살의 이유
를 밝힌 것이다. 고팔은 다른 6명과 함께 기소되어  종신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다가 1965년에 석
방된 인물이다.
  고팔은 자신의 형 고제가 천부적인  음악가였고 풍금과 플루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났다고 소개
한다. 그는 사건 당시 고제가 간디에게 합장을  한 뒤 총탄 3발을 쏘았고, 현장에서 두 손을 들고 
자진해서 안전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고 증언한다. 고팔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합장을 한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간디에 대한 예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간디를 살해해야  했던 이유
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간디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에 기여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헌들은 간디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에 반대했다고 설명하고 있
다. 즉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막으려 했고 한 국가  속에서 이슬람 세력과 힌두교도들이 조화롭게 
살 길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고제를  비롯한 암살범들은 간디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겉으로는 
파키스탄의 독립에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소원하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도 폈다는 것이다. 책의 저자인 고팔은  천신만고 끝에 인도가 독립을 이루
었는데 간디의 개입  때문에 조국의 일부가 이슬람교도에게 넘어갔다고 확신하기에,  아직도 암살 
행위를 후회하지 않으며 만일 재판을  지켜본 청중들이 배심원이었다면 무죄 평결이 내려졌을 것
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고팔의 주장은 일단 자기 성찰  능력을 상실한 광신도로서의 경직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받아들
여질 수 있다. 하지만 암살자의  입장에서 당시 정세를 재분석해 보는 것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간디의 단식은 반인류적인 쟁투를  중지시키기 위한 소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
만 간디가 단식에 들어선 때는 이미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한  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를 호소
하는 것은, 인도 전지역을 힌두교 패권하에 두려 했던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분단 고착화를 용인
하지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단식과  평화 호소는 엄격한 정치적 논리
의 틀에서 본다면 현실적 울림을 얻기 힘든 이상론에 가까웠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디는 살해된  후 뉴델리에서 화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전국 각지에 뿌려졌다. 그런데 1996년  간디의 한 은행 개인 금고에서 또 다른 유골  단지가 발견
되었다. 법원은 그 유골 단지를 간디의 증손자에게 전달하도록 판결하였고, 간디의 나머지 유해는 
1997년 1월 30일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그날은 마하트마 간디가 고제의 총격에 사망한  지 49주
년 되는 날이었다.
  한 가지, 아직 밝히지 않은 사실이  있다. 암살자 고제의 유해는 화장된 채 아직도 보관되어 있
다는 사실이다. 고제의 친척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파키스탄이 다시 인도의 일부가 되는 그날, 
파키스탄을 가로지르는 인더스 강에 그의 유해가 뿌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페로니즘과 1940년대 아르헨티나

  1940년대 초반 전세계는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 그리고 파시스트 3개국의  격전장이었다. 이런 
세계적인 대결 구도의 영향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정치사도 숱한 쿠데타와 정치적 격변의 연속
이었다. 1940년 집권한 군 출신 카스틸로 대통령은 파시스트 국가와의 외교 단절을 거부함으로써,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함께 반파시스트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남아메리카 국가로 남게  되었다. 
1943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라미레즈의 군사  정권도 공개적으로 독일을 옹호하는 
등 파시스트에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경쟁정파와 언론을 탄압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폭력적인 독재 정권이었다.
  라미레즈 정권은 미국의 압력과 국내의  반대파에 맞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
한 것이 국민 대중의  지원이라고 판단한다. 특히 농민과 도시 노동자를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
기 위해 진력하는데, 이  분야의 정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후안  페론(1859~1974)이다. 라미레즈 
정권에서 노동부 장관직을 맡게 된 페론에게는 사실 특기할 만한  경력은 없었다. 군 역사를 강의
하거나 칠레와 이탈리아에 파견된 대사의 군무 수행원으로 일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부 장관이 
된 후, 그는 좌파의  영향력을 차단하면서 토지와 높은 임금과 사회 보장을  약속함으로써 노동자 
등 하층민을 유인한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던 하층민의 절대적 영웅이 되었고  마침내 1946년에
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후안 페론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이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눈빛만은 영민했던 
미모의 여배우 에바 페론이 있었다. 그녀는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의 로스톨로스에서 가난한 
소실의 딸로 출생했다.  15세의 나이에 가출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옮겨온 에바는  싸구려 잡지
의 모델로 일하다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  여인이 아르헨
티나 민중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퍼스트 레이디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후안 페론이 에바와 만난  것은 그가 막 정치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할 즈음이었는데,  그 만남은 
처음부터 수난을 불러왔다. 나이 어린  여배우 또는 젊은 `딴따라`와 놀아나는 셈이었으니 주위의 
비난은 당연했다. 군대에서도 후안의 연애 행각이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5년 10초에 또 다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후안 페론 등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것은 그에게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위기는 곧 에바의 위기였
다. 그러나 에바는 이때부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에바는 후안 페론의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그의 지지 세력, 특히 도시 노동자들을 규합한다. 영
화 <에비타>에서도 이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에바는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
한다. “나 역시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하층민 출신이다. 우리들 하층민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후안 페론뿐이다.”  그녀에게 끊임없는 상처를 입히고 삶의 기회를 박탈해  왔던 바
로 그 출신 성분을 도리어 강력한 무기로 활용한  전술은 주효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후안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조의 시위가 연일 잇달았는데, 시위 주동자는 바로 에바였다.
  결국 당시 집권층은 보름도 되지 않아 후안 페론을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출감한 날 그는 약 
30만 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했는데 그 연설 내용은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리고 연
인이자 든든한  정치적 조력자인 에바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난 뒤  후안 페론은 1946년에 
5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은 페로니즘을 모토로 삼아 강하고 공정한  사회 건설을 약속했다. 페
로니즘의 기본 정책은 모든 계급과 계층들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페론 정부는 우선 사
회 각 집단들을  개별 조직으로 묶었다. 페론 집권  기간 동안 노동자 조직이 생겨났고  기업가는 
물론 교수나 대학의 조직들, 심지어는 전국의 고등학생을 포괄하는 조직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정
부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들 조직의 화해를 위한 중재자로 나섰다.
  후안 페론은 또한  국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급속 성장을  위해 국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을 편다. 철도 등 국가 기간 시설은 국유화되었고  국가 경제 구조는 일사분란한 조
직으로 묶이기 시작했다. 한편, 국제 관계에서 후안 페론은  다분히 공격성을 보인다. 1947년 60여 
개의 독일 회사 자본을 몰수하는 등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를 장악했던 외국 자본의 입지에 치명
타를 가함으로써 국내 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제3의 입
장,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길을 선택한다.
  페로니즘의 성격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다.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평가도 
있고, 개발 독재라는 평가도 받았다. 페로니즘은 후안 페론 개인의 권력 유지를 위한 강압적인 정
치 행태라는 설명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페로니즘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
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이념이 아르헨티나를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1946년에서 1976년까지 있었
던 자유 선거에서 페로니즘 정당이 패배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새로운 아르헨티나
를 향해 국민을 지휘하던 후안 페론의 곁에는 항상 에바 페론이 있었다.

  에바 페론, 그 사후의 역사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명실상부한 `퍼스트`  레이디였다. 각 나라에 한 명씩은 있게 마련인 
대통령의 아내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한 권력자였다는 말이다. 그녀는 후안 페론이 권
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권 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사회 보장  분야와 노동 
정책을 담당하였다. 에바 페론은 아직도 페로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녀의 정치적 업적은 특
히 평등주의를 현실화했다는 데서 빛난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계층이자 남편 후안  페론의 지지 세력인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
았다. 에바 재단을 세워 모금을 하고 그 기금으로 의료 사업과 장학 사업을 지원했으며, 하층민들
이 전기나 수도등의  혜택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을 위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하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바 페론은  하층 국민들의 
우상이자 구원의 상징 또는 성녀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적 성과도 에바의  치적으로 거론된다. 1949년 페로니즘적 여성 정당을  창설하고 여성
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정치적 지위를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 페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러  비난 중 한 가지는 에바를  창녀로 
몰아붙이는 것인데, 영화  <에비타>에서도 묘사되었듯이 그녀가 유럽을 순방할  때 스페인에서는 
4만명 이상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로마에서는 창녀라고 욕하며 계란 세례를 퍼붓는 군중들
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를 천한 여자로  여기는 태도는 아르헨티나의 상류  계층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마르티네즈(<산타에비타>, 자작나무)가 소개하는  예를 보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암 치료를 
위해 에바의 자궁을 들어내던 날 침묵하지는 못할망정 환호하던  무리들이 있었고, 길거리 담벼락
에는 `암, 만세!`와 같이 병마를 응원하는  낙서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교양 있는 상류층의 입장에
서는, 에바와 후안 페론이 펼친 하층 계급 중심의 정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천박한 사생아이며 바
람둥이 3류 배우였던 에바를 국모로 모시는 일이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에바가 
출산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천박한  씨앗의 잉태를 영원히 막는 것이니 기뻐할 일이었다.  에바 자
신도 과거의 이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출생 증명서 등 과거 기록을 
위조.폐기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렇듯 에바의 과거를 문제삼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입장들은 그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비판이 있다면 이것은 에바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비판은 실
제로 후안 페론이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바는  독재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던  인물이 
되는 셈이다. 사실 후안 페론은 개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
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을 번번히 훼손하였다.
  후안 페론은 모든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언론 탄압에  능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
사의 문을 닫는 일은 예사였고 언론사 자산까지 몰수했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페론 부부의 숭
배를 중요 커리큘럼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 것도 바로 후안 페론이었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종종  심각한 지경까지 몰고 갔다. 1949년  헌법 
개정을 통해 후안이 대통령 재임을  노리자,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러나 의
회를 장악하고 있던 페론  세력은 국가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자들을 투옥할 수도  있도록 법
률을 제정하고 많은 정치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후안 페론이 맞는  두 번째 대통령 선거도  비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원래의 선거일보다  앞당겨 
1951년 12월 선거를 실시했고, 이런 정치적 음모의 결과 후안  페론은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재선
되었으며, 그의 정당은 149석 중에서  135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모든 
독재 행각이 에바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기에, 그녀도 당연히 독재 정치에 한몫  한 인
물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평가야 어떻든 후안 페론의 집권 기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에바는 1952
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암세포는 그녀의 몸을 차근차근 잠식하였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35킬로그램에 불과한 몸으로 마지막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에바는 곧 사망
했으며, 아르헨티나는 그녀의 죽음에 오열했다.
  에바 사망 3년 후,  즉 1955년 후안 페론은 권좌에서 물러나 파라과이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
한다, 이런 사태의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페론 정부와 카톨릭 사이의 알력이다. 1954년 
겨울, 페론은 한 카톨릭 성직자  단체를 선동 혐의로 기소했고,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
과 사생아 그리고  매춘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이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간의 
격렬한 불화를 초래해 후안  페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페론  정부의 실각은 
반민주적인 정치에 의해 민심이  이반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후안 페론의  하야에 즈음
하여 발발한 쿠테타와 내전으로 약  4,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결국은 후안 페론과 에바의 
정치적 일탈 행위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젊고 아름다운 권력자  에바, 그러나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그녀의  사후에까지 이어진다. 아니 어쩌면  더욱 슬픈 일들이 그녀가  죽은 
후에 벌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영화
에서 에바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져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
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여러분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
나... 나의 말은 모두 진심이랍니다.”
  에바의 유지처럼, 그녀가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
만 그녀의 모습을 지워 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남편 후안 페론도  그 부류에 속한다는 점은 개운
치 않다.
  페론 부부에 대단히  적대적인 논조의 책 <에비타>(P.S.  몽고메리 지음, 동천사)는 에바  사망 
후 후안 페론이 노골적인  성적 방탕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국립 여자고등
학교를 세우는데 2,000만 달러를 쏟아부은 것도 그 학교가 대통령  침소에 들 소녀들의 공급지 역
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도 후안 페론이  또 다
른 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맨틱한 기대가  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는 첫 번째 부인을 암으로 잃고 두  번째 부인인 에바도 암으로 잃고 난 후 이사벨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도 에바처럼  하층 출신으로 과거 무용수였다. 알려지기로는 그들이 1955년이나 
56년에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사벨도 동행하여 1961년에 결혼한
다. 이사벨은 1931년생이니 서른의 나이에 환갑이 훨씬 지난 남자와 커플을 이루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얻기는 했지만,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바를 떠나 보낸 후안  페론은 고
단한 정치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에바가 사망한 지 불과 수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
한 20년 가까이 기약없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73년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대통
령에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사망하고 만다. 당시 부통령이던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극
심한 인플레이션, 노동 운동 그리고  정치적 쟁투 때문에 이사벨의 집권 기간은 내내 불안정했다. 
결국 이사벨은 1975년 12월 쿠데타로 축출되었으며, 1981년에는  부패혐의가 확정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에바의 남편도 남편의 새로운 아내도 모두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에바의  죽음은 그녀의 친족들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에바가  퍼스트 레이
디가 된 덕분에 가족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해 야자수가 늘어선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 도냐  후아나는 장관들과 도박을 하면  무조건 승리하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도 에바의  권력에 힘입어 꿈에도 소망하지 못했던 행복한 순간을  맛보게 된
다. 그러나 에바의 사망 직후 후안 페론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에바의 가족을 철저히 외면했다. 
어머니 도냐는 충격으로 병을 얻었고, 그들은 도청 장치 때문에  자기들 방에서도 대화를 글로 대
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 가족사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에바의 남동생 후안시토였다. 그는 
애인이 자신의 횡령을 폭로하자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에바 사망 후 몇  개월 만에 그 부유한 가
족은 완전히 파멸하고 만 것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에바의 시신이 감당해야 했다.  후안 페론은 에바가 죽자 15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울 계획도 했으나, 그보다는  에바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에
바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에바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인지는 불
명확하다. 다만 그의 결정은 전대미문의 시신 쟁탈전을 야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방부 처리된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의 곡절 깊은 현대사  속에서 한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1955년 페론이 쫓겨난  뒤, 정적들은 그녀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옮겨가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그 
사이 에바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1971년 그 유해는  아르헨티나 내의 
페로니스트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마드리드의  후안에게로 옮겨진다. 후안 페론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이사벨이 대중적 지지를 노려 대통령 궁에 에바를 묻었을  때, 이제 망자에게 평안이 찾
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뒤 반페로니즘 군대 일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에바의 시신
과 이사벨을 몰아 낸다. 이렇게 에바의 시신은 20년 이상을  떠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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