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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by Casey,Riley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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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이옥순



  1. 인도에서 사는 법1
  부메랑의 시간
  어느 미국인의 인도 여행기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 미국인은 자신의 첫 여행지를 한때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 시로 정했
다. 성벽의 길이가 3킬로미터나 되는 아름답고 웅장한 아그라 성. 이곳을 둘러본 
이방인은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성을 짓는 데 얼마나 걸렸소?"
  "20년입니다."
  "그래요? 인도인은 정말  느리군요.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건물은 5년이면 되
는데..."
  그 다음에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  무덤을 방문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라고 평가받는 흰 대리석 건물을 한바퀴 돌아본 미국인은 다시 안
내원을 돌아보았다.
  "이 무덤을 그래 몇 년 만에 완공되었소?"
  안내원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실제로 22년이 걸린 공사기간을 확 줄여서 
대답했다.
  "아, 예. 10년이랍니다."
  아그라 관광을 끝낸 두 사람은 수도인 델리로  돌아왔다. 다음날 두 사람은 델
리 남쪽에 있는  쿠툽 미나르를 찾았다. 무슬림이 힌두왕국 정복을  기념하여 세
운 승리의 탑 쿠툽 미나르. 기단의  둘레가 15미터, 꼭대기층의 둘레가 2.5미터인 
총 73미터 높이의 거대한  원추형 탑이다.  1193년에 시공된 이  탑은 여러 왕조
를 거친 후, 1368년에 이르러서야 최종 형태를 갖추었다.
  탑을 올려다본 미국인은 다시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탑은 얼마나 걸렸답디까?"
  그러자, 안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저게 언제 생겼지?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인도를 일컬어 흔히 '천의 얼굴'이라고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인도는 그토록 
두텁고, 그토록 복잡한 인도의 한 조각일 뿐이다. 결코 단일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도의 다양성은 가히 온 세상의 이치를 흡수할 태세다.
  그러나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이는 인도의  특성, 다원성이 적용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역이 있으니 바로 '느림'이다.  체크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느림>이라
는 소설에서 느림의 미학을 느리게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느림의 즐거움을 찬
양하는 쿤데라도 반나절만  인도를 헤매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우표 한 
장을 위해 오래도록 길게 길게 줄을 서면서 느림에 대한 동경을 지우게 되지 않
을까.
  인도에 가면 누구나 알게 된다. '1분만요!'의 그 1분이 어떻게 순식간에 풍선처
럼 수십 배로 부푸는지를.  기차표를 사면서, 은행에서 돈을 바꾸면서 얼마나 빠
르게 피가 머리로 집중되는지를. 되는 것도 없지만  결국은 안되는 것도 없는 인
도는 그래서 인내를 배우는 데는 더없이 좋은 속성 코스이다.
  내 안에서 두려움이 키를 자랑하던 유학  첫해. '빨리빨리'가 미덕인 나라를 모
국으로 둔 나는  강의실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 등 교길을  늘상 뛰어다녔다. 기
숙사와 강의실은 한길을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파란불이 보여야  길을 건
너는 데 길들여진 나는 신호등 없는 길을 눈앞에 두고 많은 시간을 놓아 보내야 
했다. 자동차, 인력거, 자전거,  오토바이, 달구지 그리고 사람들. 그 사이를  뛰지 
않고 건넌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느 날 클래스메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왜 그렇게 늘 뛰어다니니?"
  사실 나는 내가  뛰어다니는지도 몰랐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녀는 친절하
게 '인도에서  사는 법'을 공짜로 강의해주었다.  그냥 천천히 걸으면  다 알아서 
비켜간다고. 내가 능동체라고.
  4년 만에 잠시  귀국한 나는 오랜만에 그리운 이들을 만났다.  얼마 지나지 않
아 그들은 나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너무 '느리다'고.  인도 사람이 다 되었다
나? 과연 그럴까?
  1984년 인디라 간디 총리를 살해한 세 명의 경호원들이 죽는 데는 무려 5년이 
걸렸다. 그러니 고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던  김재규를 속전속결로 처리해 역사를 
재빨리 묻어버린 우리에게는 그런 인도가 한없이 느려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느리다',  '빠르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도인에  대한 '느림'과 '게으
름'은 누구의 기준인가?
  오랫동안 인도를 통치한 영국인들에게는  진보가 지상과제였다. 빅토리아 시대
의 영국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나 더 빨리 여행하기 때문에 다섯 배나 
더 행복하다고 여긴 웃기는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다윈의 진화론을 채용한 당
시의 사회진화론은  적응능력이 없는 사회를 우수한  사회의 피지배자로 당연시 
여겼다. 우수한 인간으로  구성된 우수한 사회 영국은 느리고 답답한  인도를 가
르칠 백인 천사집단이었다. 그들은 갈색 인종을  계몽하고 과학이니 발전이니 하
며 열심히 가르쳤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를 외치며 콩도르세의  '역사는 
무한히 진보한다'를 철썩같이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소 잔등에 앉았던 파리 한 마리가 소에게 물었다.
  "저, 여기를 떠나도 될까요?"
  소는 눈을 껌벅거리며 꼬리를 탁 쳤다.
  "나는 네가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고 거만을 떤  영국인들. 그러나 바꾸는 걸 
혼자 하나?  지금도 인도의 대다수는  셰익스피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성급히 
앞만 보고 달리던 빠른 영국인은 결국 느림보  인도를 당하지 못했다. 그들은 인
도를 떠나 셰익스피어가 잠든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도인의 시간 개념은 서양과 다르건만, 자기의  안경으로만 인도를 본 영국은 
인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진보를 향해 뛰는 서양은 시간을 끊임없는  직선적 흐
름으로 여긴다.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 여기서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처럼 한계가 있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나 인도인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반복되고 다시 
돌아오며,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고리이다. 신도 사람도 모두 이 순환의 
고리에 들어 있다. 한  생의 끝은 다음 생의 시작이고 이승의  시작은 전생의 끝
이다.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천 년을 기약하면 못 이룰 사랑이란  없는 법. 그들
에게 흐르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시간에 모든 것을 건다. 그들에
게 시간의 흐름은 초조할  뿐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부지런히, 빨리빨리 무언가
를 이루어야 하며, 노력하고 근면하여 좋은 세상을 보려고 애를 쓴다. 개선은 시
간이 걸리므로 단시간내에 효과를 보기 위해 혁명도 불사한다.
  인도는 어떤가? 시간의  되풀이를 알고 있는 인도인은 여유롭다.  이번 생에서 
못 이루면 다음 생이 있으니까. 조조할인은 내일 아침에도 다음 생에도 있다. 아
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으면 그들은 본성이  그렇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우리네
처럼 돌대가리를 영재로  만들려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의 운
명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발
전에 소극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지도, 통나무집에서 백악관을 꿈꾸
지도 않는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바란다. 바깥세계에 대해 적극
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에게는 전쟁터에서 맞지  않는 무기를 쓰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간은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부메랑인지도 모른다.  이즈음 일직선적인 서양의 진보관도  한계를 드
러내지 않았는가. 20세기  최대의 이데올로기인 발전은 환경  파괴라는 부메랑으
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70 평생에 모든 것을 다  거는 우리의 눈에 영겁을 두고 작은 꿈을 키우는 인
도인들은 느리고 쫀쫀할 수밖에 없다. 70과 영겁. 인도인이 느린가? 우리가 빠른
가?

  왼손이 하는 일은 오른손이 모르게
  인도는 가난하고 더럽다. 그것이 뭐가 이상한가? 지금은  누구나 다 잊은 듯이 
뽐내고 있지만  18세기 유럽이나 20세기  중반의 우리나라도 그랬다.  20세기 초 
서울을 방문한 한 선교사는 우리나라를 전염병의  천국이라고 기록했다. 알고 보
면 위생이니 뭐니 하는 것도 목적은 향상시키지 않고 수단만을 강조하는 서양의 
산물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얇은 위생학  책을 가졌다고 비아냥 받는 인도. 1994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페스트를 초대하여 세계인을 긴장시켰던  나라. 이에 놀란 선
진국들은 각종 벌레와 질병의  온상인 인도의 더러운 환경과 비위생적인 생활에 
대해 앞다투어 온갖 입방아를 찧었다.
  사람들은 남이 지닌  자기와의 다른 점을 약점으로 파악한다. 슬쩍  경멸의 웃
음을 던지면서. 하지만 인도인은 우리의 상식을 보기좋게 배반하고, 건강과 청결
에 관한 나름의  정교한 위생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문명인
인 그대가 위생의 '위'자도 모르는 야만인임을 아시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여기 시데쉬와리 데비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인도의 
유명한 클래식 성악가인  데비가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그녀
는 동양의 음악을 사랑하는 영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으나 공연은 성
공적이지 못했다. 우울한 얼굴로 내려오는 그녀에게 이유를 묻자, 대답이 기상천
외했다.
  "청중을 보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화장지로 밑을 닦았을 테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말라붙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도통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예요. 그러니 
연주가 제대로 되겠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인도인들은?  어려울 것 없다. 그들은 왼손을  사용하여 물로 
뒤를 씻는다. 인도인의 시각에서 보면 화장지를  사용하는 문명국 사람들이 오히
려 비위생적이다.  그 잘난 '백인 나라'들은  휴지를 사용했다고 손을  씻지 않을 
뿐더러 손수건에 킁킁  코를 풀고는 그 더러운 것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는다. 
세상에! 차마 말은 하지 않지만 그걸 보면 인도인들은 속이 메슥거린다. 밖에 나
가서 왼손으로 코를 풀고 그 손을 벽에 쓱 문대면 간단한 것을.
  이러한 차이 때문에 델리 공항에서는 화장지를  둘러싼 진풍경이 벌어진다. 델
리 공항에 내리면 소위 제3세계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우중충한 분위기와 근원
을 추적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 그 냄새를 견디지 못해  하루 만에 귀국했다는 
한 한국 학자의 발빠른 움직임은 전설이 된  지 오래다. 더욱이 싱가포르나 방콕
의 공항을 거쳐  왔다면 비교급의 정수를 즉석에서 깨달을 것이다.  역시 인도는 
깨달음의 나라이다.  세수라도 할 양으로  공항의 화장실로 들어가면  한 여인이 
잽싸게 다가와 두루말이 화장지를 30센티미터 정도  끊어준다. 그리고 손을 벌려 
돈을 요구한다. 아무리 국제공항이지만 이곳은 인도, 화장실에 화장지가 따로 없
다. 외국인에 대한 이처럼 따뜻한 서비스도 그 엮는 오래지 않은데, 화장지 생산
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장부터 웬 냄새나는  이야기냐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가? 문명인임을 자처
하는 이들은 보통 '뒤'에 관한 이야기를  더럽고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
나 인도인은 배설을 잠자는 것처럼 자연적이고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한다. 그리
고 이에 관한 그들  나름의 분명한 위생 관념과 실행 규칙을  가지고 있다. 여기
에는 배설물과 음식물의 차이와  더불어 양손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인도인 특유
의 관념이 스며 있어 흥미롭다.
  인도인은 뒤를 씻을 때 반드시 왼손을 사용한다.  코를 풀고 귀를 청소하면 눈
곱을 떼는 것도 왼손이 하는 일이다. 목욕을 할 때는 오른손으로 상체를, 왼손으
로는 허리 아래 부분을 닦는다. 더러운 일은 모두 왼손이 처리하는 것이다. 그리
고 인도인은 손으로  밥을 먹는데, 에너지 공급이라는 중대한 그  사명은 당연히 
오른손의 몫이다.
  몹시 헷갈릴 것  같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를  반복해온 인도인들은 이 복잡한 
손의 분업에 대해서  전혀 시행착오가 없다. 그러나 무지한 이방인들의  손은 공
중에서 여러 번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나도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지만 내 왼
손은 나도 모르게 음식에 가 있기 일쑤였다.  안타깝게도 또다른 외국 친구는 아
예 왼손잡이. 우리  두 사람을 보면서 기숙사 동료들은 벌레  씹은 채식주의자의 
심정이었으리라. 하긴  아무리 깨끗해도 요강에다  밥을 담아 먹을  수는 없잖은
가?
  청결한 그대를 이번에는 인도  시골의 화장실로 안내할 차례다. 자, 우리는 지
금 새벽기차를 타고  인도의 자연을 가로지르고 있는 중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
을 돌려보라.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
다. 여기가 바로 천혜의 화장실. 우리  식으로 이름을 붙이면 '화장터', 아니 즉석 
변소라는 말이 더  나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도시를 나서면 화장실  따위는 아예 
없다.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세로 앉아 있는 자연의 한가운데, 그곳이 바로 뒤를 
보는 자리이다.
  지저분하다고 얼굴을 찡그리지  마시길. 이제 곧 여러분은  인도에서 배설조차 
어떻게 정교한 의식이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연'이  부르면 물을 담
은 큰 놋쇠잔을  들고 자연의 '변소'로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실례
를 하는 것은 아니 될 말이다. 여기에도 질서와 예의가 있다.
  먼저 깨끗한 장소를  골라서 신발을 벗는다. 사원, 강, 우물  그리고 신성한 나
무와 가까운 곳은 피한다.  오염을 피하기 위해서다. 농사를 짓는 땅이나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도 마땅한 장소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은 후, 일을 보
는 동안은 가장 저자세를 취하며 공연히 주위를 둘러보거나 감히 하늘을 올려다
보아서는 안 된다. 조용히 일을 보아야 하며, 입에 무엇을 넣고 우물거려서도 안 
된다. 급하다고 서두르거나  급히 일어서지 않으며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
는다. 다른 사람--아무리  이쁜 여자라도--을 보더라도 아는 척하지  않는다. 드
디어 일을 끝나면 들고 온 물잔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을 움직여 뒤를 닦는다.
  일(?)이 끝나고  나서는 가까운 강이나 개울로  간다. 진흙으로 몸의 더러워진 
부분을 문질러 닦고 물로 헹군다. 두세 차례 반복. 그런 다음 왼손부터 시작하여 
손과 발을 진흙으로 여러 번  씻는다. 다시 다른 흙으로 이 과정을 반복한다. 도
시에서는 진흙이 아닌 비누를 쓴다. 자, 이래도 비위생적인가?
  옛날 남부의 마이소르 지방에서는 집안의 남자들이 '자연의 부름'을 받으면 여
자들이 따라가서 뒷일을  대신 처리했다고 한다. 마치 응아를 한  아이를 엄마가 
돌보듯이 말이다. 좋은  집안임을 강조하는 관습이었으나 다행히(물론 여성에게) 
교육의 확산과 함께  그러한 관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엄마들  중에 아이의 
뒤를 화장지로 적당히 처리하는 엄마는 없으시겠지?
  바깥의 것(화장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손)을 믿는 인도인의 태도는 여기에
서도 드러난다.  뭔가 찝찝해서 화장지의  두께를 늘리는 우리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다. 사실  10억에 가까운 인구가  수세식 변소와 화장지를  우리처럼 마구 
써댄다고 하면 생각만 해도 아주 아찔하다.
  세계의 은행이 지원하는 인도 서부의 나르마다 강 다목적댐 건설이 10년이 넘
도록 지지부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도시의  수세식 화장실
을 위해  너른 농경지를 수몰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기반을  뺏아야 하는가, 
라는 비판이 한몫을 한 것이다. 인도에 살면  이처럼 인도 방식의 유용성이 절실
히 느껴진다.
  이제 이야기를 오른손 쪽으로 돌려보자. 깨끗한 쪽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어차
피 한 번은 떠날 유한한 이 세상에서 배설도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
가.
  앞서도 말했듯이, 인도인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먹을때 시각, 후각
에다 촉각까지 사용하는 전천후인인 셈이다. 더운  음식을 선호하는 그들은 먼저 
손으로 음식의 온도를 잰다. 영국의 시인 예이츠는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
으로 온다.'고 노래했지만, 인도인은 '음식은  먼저 눈으로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다음에 입과 혀로 맛을 느낀다'.
  인도의 음식은 대개  푹 삶거나 국물이 충충한 부드러운 음식이다.  따라서 딱
딱한 끼를  집을 때 쓰는 포크가  필요하지 않다. 쇠로 만든  숟가락보다는 역시 
내 손가락이 말을 잘 듣고, 게다가 식당에서  주는 숟가락이나 포크가 과연 입에 
넣을 만큼 깨끗한가? 대도시에 사는 서구화된 계층과 일부 젊은이들을 제외하면 
모든 인도인이 자기  몸의 일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숟가락은  못 믿지만 
적어도 먹기 전에 씻은 내 오른손은 확실히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에 관해서도  위생에 관한 인도인의  규칙은 까다롭기 그지  없다. 그들은 
음식을 조리하면서 절대 맛을 보지 않는다. 입  안의 침을 부정하게 생각하여 일
단 맛을 본 것은 더럽혀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된장국 하나 끓이면서 서너 번
씩 숟가락이  들락날락하는 우리의 철저한 맛내기  정신이 인도인들에게는 그저 
'으악!'의 대상일 뿐이다.
  침을 경계하는 인도인은  물을 마실 때도 물잔에 입술을 대지  않는다. 여러분
도 컵에 입을 대지  않고 공중에서 입으로 물을 붓는 곡예를  한번 해보라. 작은 
곡예사들 틈바구니에서 이방인인 내가  겪은 비애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바나나처럼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은 어떻게 할까? 간단하다. 미
리 잘라서 하나씩 집어먹으면  된다. 육류를 조리할 때도 한 입에  넣을 수 있게 
미리 토막을 친다. 이러니 우체국에 가서 급하면  풀 대신 혀끝을 슬쩍 이용하는 
나는 구제불능의 천민일 수밖에...
  인도 친구들이 한국인을 보고 경악하는 것이 또  있다. 여러 사람의 수저가 한 
곳에서 만나는 화기애애한 우리의 식습관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들은 뷔페식
으로 음식을 각자  접시에 덜어 먹는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그릇이  아닌 바나나
잎에 음식을 담는다.  여러 번 사용했던 깨끗하지 못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다. 게다가 바나나잎은 아무 데나 버릴 수도 있다. 환경보호!
  우리는 보통 보수주의자를 우파라고 부르고 개혁을 지향하는 자를 좌파라고한
다. 또  기득권자를 우파, 억압받는 쪽을  좌파라고도 한다. 생물에  대한 유전과 
환경의 영향에  관한 논쟁에서는, 대개  좌파가 환경을 중시하고  우파는 유전을 
중시한다. 이를 인도의 왼손 - 오른손 분업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무척 흥미롭
다.
  그대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오른손잡이이지만 왼손도 쓰는  나는 중도우파인
가?

  맨발로 가라
  유학 첫 학기, 맨 앞줄에 앉은 나는 교수님의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귀는 
못 알아듣고 남은 시간은 많고 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강의는 중국 혁명. 가끔
씩 쑨원(손문), 장제스(장개석),  마오쩌둥(모택동)의 이름이 들렸다. 저명한 교수
는 늘 빳빳이 풀 먹여다린 사파리를 멋있게  차려입었다. 그러나 내 시야가 머무
는 곳, 슬리퍼를 걸친  그의 맨발은 때가 끼고 더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그것도 언제나 한결같이.
  어느 날 옥상에서 생긴 일 하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친구 소히니와 나는 해질 
무렵 옥상 한쪽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히니는 서부지방 출신
의 착하고 온순한  학생. 그날따라 그녀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나를  놀리길래 나
는 웃으면서 무심코 발로  차는 시늉을 했다. 순간 갑자기 골을  내며 일어선 그
녀는 1년동안 나를 외면했었다.
  다음은 힌두  사원의 곰발바닥 이야기.  인도에서 사원과 같은  신성한 장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맨발의  이사도라'가 되어야 한다. 건물 면적이 
넓지 않을 때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찾아간 남부지방의 사원은 대충 돌아
보는 데만도 서너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규모였다. 더구나 때는 한낮으로, 시멘
트와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열기를 쏟아붓는 뜨거운  햇살 아래서 나는 자꾸 
곰발바닥을 부벼야 했다.
  우직한 나와 달리, 신발 벗는 것은 수용할  수 있지만 양말과 헤어지는 것만은 
안 된다며 끝내 거부하는 외국인 일행이  있었다. "머리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
면서 하찮은 발을 왜  그리 아끼는지..." 뒤에서 힌두 승려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들은 머리와 발을  동등하게 대해주는 민주주의자예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
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제 짐작이 가는가? 간단히 말해서 인도인은 발을 천시한다. 신체의 다른 
기관과 불평등하게 다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천한 발을 다른 사람의 머리
에 대거나 신발로  머리를 때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이다.  게다가 인
도인은 죽은 동물에서 떼어낸 가죽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더럽다고 간주한다.  그 더러운 것이 더러운  발을 만났을 때는  과연? 인도에서 
신발을 만진 손을 함부로 놀리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조심할 것!
  무더운 기후 탓에  인도인은 주로 샌달이나 슬리퍼 종류를 신는다.  물론 맨발
의 청춘, 맨발의 노년도 많다. 그러니 인도인의 말은 늘 꼬지지하고 더러울 수밖
에. 그럼에도 남의 집에 들어갈 때, 특히 '신성한' 부엌은 신을 벗고 들어가는 것
이 예의다. 발가락이  샤론 스톤이나 브래드 피트를 닮았다는 걸  과감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인도인은 맨발로 어디든지 달려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마당이나 골목
길쯤은 너무도 가비얍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발바닥은 이미  살색하고는 무관한 
빛깔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더러운 발로 침대에  기어 올
라가는 일 또한 다반사라는 점이다. 오히려 젖은  발로 잠자리에 드는 것이 금기
다.
  발에 대한 인도인의 차별의식은 장신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식을 좋아하는 
인도 여성은 여러 종류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남자들도 종교적인 이유에서 목걸
이, 귀걸이, 팔찌, 반찌  등을 낀다. 특히 금은 인도인들에게 순수한 의식을 보증
해주는 신성한 금속이라서 신심  가득한 힌두라면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적어도 
하나쯤 몸에 지닌다. 하지만 발에는 절대 금 장신구를 하지 않는다. 더러운 발에
다 신성한 금으로 장식을 하는 건 금을  능멸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
리 아래에는 은으로 된 장신구만 착용한다.
  반대로 머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인도인의 이마를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알 수 있는데, 여자들의 이마에는  조그마한 빨간 점이 찍혀 있
다. 요즘은 갖가지 색에 별의별 모양의 점 '패션'이 다 나와 있다. 남자들도 쇠똥
이나 재, 또는 빨간 가루를 찍어 카스트를  표시하기도 하고 시바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수평선을, 비슈누 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직선을 그어 소속된 종파를 
광고한다. 이마에 장식을 하지 않을 때는 몽상중이거나 단식, 또는 부정을 탄 때
이다. 머리에는  신성한 기름을 발라 자르르하게  윤을 낸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6, 70년대식 포머드  헤어 패션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또 남부지
방의 여인들은 자스민 꽃으로 머리를 장식해서 아주 로맨틱한 분위기를 풍긴다.
  발들이 억울하다고 항의를  하면, 인도인들은 베다에 기록된  창조신화를 들이
밀지도 모르겠다. 말기의 베다를  보면, 아득한 옛날 여러 신들이 모여서 원인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원인의 몸에서 이 세상이 탄생했는데, 머리를 브
라만이 되었고 두  팔은 크샤트리아, 넓적다리는 바이샤 그리고 두  발은 수드라
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머리와 발에 대한 인도인의 관점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머리와 발의  차이가 하늘과 땅인만큼  브라만과 수드라의 
차이도 엄청난 것이다.
  초라한 그들의 발의  행색을 보고 있으면 이솝 우화 하나가  생각난다. 화창한 
봄날에 뱀 한  마리가 소풍을 나왔다. 뱀의 꼬리는 맨날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것이 싫어서 머리를  향해 외쳤다. "오늘은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머리는 "그건 안 될 말, 꼬리는  원래 뒤를 따르는 거야." 하고 타일렀지만, 꼬리
는 끝내 고집을 피웠다. 어쩔 수 없이 임무 교대. 그러나 눈이 없는 꼬리는 방향
을 잃고 달려가다가 그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밤마다 별을 보면 산책하는 것이  낙이었다. 어느 날, 별에 너무 깊이 정신을 팔
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웅덩이에 빠졌다. "사람 사려요!"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
주고 나서는 이렇게 빈정거렸다. "당신은 저 먼 하늘을 조사하면서 발 밑에 있는 
웅덩이도 못 본단 말이오?"
  나는 가끔씩 앞에 이야기한 승려의 말을  떠올린다. 올바른 생각하나 못하면서 
발톱 깎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닌지... 작은 것에  집착해서 큰 것
을 버리지는 않는지...
  투덕투덕 맨발로 긴 여행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잘난 지적 허영, 문명의 때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  안에 갇혀버린 거였다. 깨진  유리, 쇠똥, 
사람똥이 즐비한 인도의 거리에서  나는 자꾸만 '이크, 아뿔사!'를 연발하고 있었
다. 그러나 맨발은  해방감을 준다. 방랑하는 수도승들은 모두  맨발이다. 정신을 
해방하기전에 신체를 먼저 놓아야 하는가?
  인도에 가면 부디 발을 해방하라!

  단식의 비밀
  여러분은 매일 아침밥을 드시는가? 그렇다면 매일  단식을 한다는 말인데... 아
침식사를 뜻하는  영어 '블랙퍼스트'는  단식(퍼스트)을 중단(블랙)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어디 아침밥뿐인가? 우리는 한끼에서 다음 끼까지도 늘 단식을 한다. 알
고 보면 밥 먹듯이 단식을 하는 것이다.
  인도인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의미의 단식을  빈번하게 수행한다. 특히 여인
들은 툭하면 점심이나  저녁을 거른다. 초하루, 보름은  물론이고 열하루, 열사흗
날도 단식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뿐인가? 시바라트리(시바의 밤)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비슈누 신이  8번째로 환생한 크리슈나의 탄생일도  단식을 하여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유지하는 날이다.  단식하는 남자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피하고 이마에 
장식을 하지 않는다. 여인들은  여름의 축제인 홀리에도 단식을 지킨다. 인도 친
구들은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날과 수많은 이유의 단식을 해서 
그러잖아도 먹성이 좋지 않은 내 식욕을 죽이곤 했다.
  그러나 단식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사실 단식과는  별 관계가 
없어보인다. 단식 중이더라도 우유, 바나나, 과일주스는 먹어도 상관없다. 하물며 
배고품을 참을 수 없었던  아니타는 감자까지 삶아 먹으면서도 단식이라고 우기
는 바에야. 이렇듯 단식에서도  무심한 듯 여유로운 인도의 특성이 묻어난다. 하
긴 무엇이 목적이든간에 극단적인 수단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개별적인 데다 그 기준이 천차만별인 힌두와 달리 인도의 무슬림은 다른 나라
의 무슬림처럼 1년에 한 번씩 한 달 동안 모두 한꺼번에 라마단이라는 금식기간
을 갖는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해가 있는 낮에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는다. 물론 캄캄한 밤에는 상관이 없다. 기숙사 아래층의 야스민은 '쨍'
하고 해 뜨기  직전에 든든하게 먹고 종일 단식을 한  후에 '땡' 하고 해가 지면 
바로 음식을 챙기곤 했다.
  "진지 드셨어요?", "밥 먹었어?"  인정 많은 우리의 인사법처럼 인도인들도 먹
는 일을 잘 챙긴다. 결혼 피로연을 마련한  주인은 손님이 배불리 먹었는지를 꼭 
확인한다. 북부지방의 음식은 기름지고 남부지방의 음식은  양이 아주 많으니 물
어보나 마나 배가 부를 수밖에. 가끔씩 배탈이 나고 속이 거북해지기도 한다. 그
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단식이다.
  원래 힌두 상층계급이 하던 단식은 세월이 가면서 일부 낮은 계층도 따라하게 
되었다. 단식을 함으로써 존경을  받고 위상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또 단식을 하
면 농사일을 쉬고 가축도 놀렸다. 그러나 바쁜  오늘날에는 이 관습도 점점 줄어
가는 형편이다.
  주로 브라만이  까다롭게 단식을 지키는데 그  이유를 종교적인 경건성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의식과  의례를 집전해온 브라만은 일
이 끝난 후 많은  음식을 대접받았다. 먹을 기회도 많거니와 한  번에 먹는 양도 
상당했다. 그래서 브라만 아내는 귀가한 남편에게 먼저 이렇게 묻는단다. "배 불
러요?" 그러면 남편은 불룩 나온 배를 손으로 슬슬 문지르면서 만족스러운 얼굴
로 대답한다. "응, 아주 꽉 찼어."  이러니 브라만들은 더운 날씨에 애를 쓰는 소
화기관에 휴가를 주어야 했다.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다음은 브라만의  '먹자주의' 생활을  은근히 비난한  물룩 라지아난드의 소설 
<불가촉민>의 일부이다.
  사제는 운동 삼아 우물물을  퍼주면 만성적인 변비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이 보였지만 실은 부글부글  끓는 뱃속에 대
해 궁리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음식이 탈이 난 것  같아. 위장이 꽉 막힌 느낌이야. 우유
와 설탕과자가 잘못된 걸까? 랄라 바나라시 다스 집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가 된 
건지도 몰라.'
  사제인 그는 다양한 음식을 대접받을 기회가 많았다.
  '언젠가 먹은 그  단죽은 입에서 살살 녹았는데... 그래도  물담배가 최고야. 위
장을 청소해주거든. 어젠 한 시간이나 피웠는데도 괜찮았어.'
  사제는 놋쇠잔을 우물  뚜껑에 올려놓고 상념에 빠졌다... 천민들은  그 이유가 
변비 때문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
  맨 처음 단식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였다.  그는 시한
이 있는 인도의 관습  단식을 '죽을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서 효과적인 정치적 
무기로 바꾸었다. 마하트마(성자)로 추앙받는 그의 죽음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염려한 식민 당국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영국의 딜레마
였고, 단식의 효과였다.
  그 후 세계적으로 단식을 무기로 사용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겨났다. 단식은 
무력한 사람이 폭력 앞에서 쓸 수 있는 용감한 행동이지만 인도가 아니면 그 의
미가 사실상 반감된다. 단식은 간디의 출신 배경과 큰 관련이 있고, 적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인도의 전통은 물론 비폭력 정신과도 연
결되기 때문이다. 지극히 인도적인 행동이라는 얘기다.
  어쨌거나 단식은 그래도 가진 사람의 선택 사항이다.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
는 가난한 사람이  천지에 널렸다. 공식적인 통계를 그대로 믿더라도  인도 인구
의 3분의 1은 지금도  매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다. 아프리카  난민의 기아 문
제나 북한  동포들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서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날씬해지려고 일부러 굶는 사람이 있으니 세상
은 정말 불공평하다.
  어느 해 델리 대학교 캠퍼스에  에이즈를 경고하는 대형 광고판이 쫙 깔린 적
이 있었다. 엄청난  돈이 들었을 그 광고판을  보며 난 인간의 모순을 떠올렸다. 
우리는 태초부터  기아의 해결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가? 또 죽어가고  있는가? 1877, 1892,  1897, 1900년 
네 번의 기근에만 인도  인구 1천 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에이즈로 죽은 사람
은 몇 명이겠는가?
  무심한 나는 오늘도 아침을 먹었다.

  결혼이야기
  "나, 이 사람 장가 갑니다!"
  인도의 결혼은 축제처럼  요란한 바깥행사를 동반한다. 지금도  신랑은 동화에
서처럼 백마를 타고 신부를  맞으러 간다. 부유한 사람은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 
수도 델리에서도 큰길을  따라 이어지는 결혼행렬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차는 
비켜가고 사람들은 내다본다. '쿵작쿵작' 악대를  앞세운 마상의 신랑은 그야말로 
행복한 왕자가 따로 없다. 수십 개의 형광등이  길을 밝히는 시끄러운 신랑의 행
차는 온 세상에 포고를 한다.
  "아, 나 장가 간다고요!"
  이어서 벌어질 결혼식 풍경이 궁금하겠지만, 잠시  신랑을 붙잡아 세우고 취재
를 해보자.
  "에, 어떻게 신부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셨습니까?"
  그러면 말 위의  왕자님은 말 없이 신문 한  장을 건네며 미소를 지을지 모른
다. 의아한  마음으로 신문을 펼쳐보면,  놀랍게도 자세하고 친절한 '구혼광고'가 
잔뜩 늘어서 있으리라.
  신부 구함
  아주 희고 잘생긴 탄조르 지방의 이예르 청년.  키 179센티미터, 나이 27세. 현  
  재 오스테일리아에서 경영학 석사 마지막 학기 이수 중.
  신장 160센티미터  이상으로 미국이나 호주 시민권을  가진 피부가 희고 아주    
  아름다운 여성 희망. 결혼 후 해외거주 예정.
  연락처: 그래도 똑같군 어쩌면 좋으리.
  신랑 구함
  펀자브의 아그라왈. 키 160에  흰 피부를 가진 당년 29세의 처녀. 교육학 석사   
  학위 소유자로 현재 교사. 가정적인 성격이며 월수입 2천 루피.
  키 크고 잘생긴 30세 이하의 같은 카스트  청년으로 의사나 엔지니어 원함. 자  
  세한 신상명세서 송부 바람.
  연락처: 글시 아이구 어우동 8255
  이렇게 하여 그대는 인도의 '미디어 뚜'와  만나게 되었다. 시골에서야 이집 저
집을 오가며 중매를 서는 '미스터 뚜'가  있지만 서로가 타인인 도시에서는 '미디
어 뚜'가 최고의 정보원이다. 그래서 인도의  주요 신문과 잡지, 특히 주말판에는 
구혼광고가 넘쳐난다.
  고백하자면, 가끔씩 일요일  오후 잔디밭에 누워 이런 광고를 읽은  일은 델리 
시절의 내게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인간의 희극과  비극이 거기에 압축되어 담겨 
있었다. 단,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은 대부분의 광고주들이 한결같이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와 흰  피부의 아름다운 여자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이상은  언제나 현
실 위에 존재하는 것...
  종종 '카스트 무관'이나 '결혼 지참금  필요 없음'이라는 혁신적인 문구도 있고, 
신체에 문제가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여 그에 맞는 상대를 구하는 경우도 보인
다. '조루증  있음. 성기능 장애가 있거나  섹스에 관심 없는 여성  원함'. 쥐꼬리 
반토막에 불과한 봉급도 당당히 언급된다. 다소곳한  힌두 여성을 찾다보니 카톨
릭계 기숙학교 출신이 강조되는 우스운 일도 있다.
  인도에서 이같은  '구혼광고'가 넘치는 이유 중  하나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쓸모 없는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를 논하거나 그  결과를 나누
는 데도 그들은  미혼자를 절대 끼워주지 않는다. 미혼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
도 '애'로 취급되며 홀어미와 홀아비도  마찬가지다. 숭고한 목적으로 '홀로 서기'
를 추구하는 출가자들은 존경을 받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의무이다. 결혼을 하여 지옥에서 조상을  구원할 아들을 낳아야만 조상
에 대한 의무가 끝나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인도에서는  대도시 중산층의 약 20퍼센트만이 연애결혼
을 한다. 대다수의 처녀총각들은 부모님의 최선의  배우자를 골라줄 것이라고 기
대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결혼하기 전에 사랑에 빠졌다가 결혼 후에는 사랑이 
식는다. 반대로 우리는 결혼 후에 사랑에 빠져 끝까지 사랑한다." 이것이 인도식 
논리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상대에게 매혹되는 것, 비이성적
이고 초이성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대신해서  이성적으로 큐피트
의 화살을 쏜다. 그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  꽂힐지는 결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
니다. 같은 카스트끼리  맺어지는 인도의 결혼은 '명중'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신문을 건네주었던 신랑을 따라  결혼식장으로 같이 가보자. 인도의 
결혼식은 수천 년 동안  거의 비슷하게 이어져왔다. 기독교 신자를 제외하면, 하
얀 면사포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나 턱시도를 입은  신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부는 결혼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사리를  입고 신랑도 전통의상으로 꾸미
고 단장한다. 우리의  신랑 신부가 예쁘게 마사지를 받는 결혼  이브와 마찬가지
로, 인도의 예비부부는 기름을 몸에 바른 후 씻는 특별 목욕에 들어간다.
  결혼은 인도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따라서 정교한 의식과 다채로운 
행사가 계속된다. 결혼  예식을 진행하는 주례는 우리처럼  은사님이나 잘나가는 
인물이 아니다. 몇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웃통을 벗어던진 브라만  사제가 식을 
집전한다. 미국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신랑도 농촌의  무지랭이 신랑도 모두 브
라만 사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백년해로를 기약한다. 브라만이  사양하는 낮은 
카스트나 하층의 결혼식은 그들 나름의 사제가 맡는다.
  지역과 카스트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힌두의 결혼 무대에는 우리의 결혼식
처럼 친정 아버지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무대에 서  있던 신랑이 성지 순례를 떠
난다고 집을 나선다. 멋진 청년을 본 신부의 아버지는 "나한테 정결한 어린 딸이 
있는데 결혼을 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신랑의 손을 붙잡는다.  신랑은 순례를 
고집하다가 결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식장으로 돌아온다.
  이제 신랑과 신부는 신성한  열매인 코코넛을 깨트리고 참기름을 태우는 성화 
주위를 빙 돌면서 서로 옷자락을 묶어 영원한  짝임을 알린다. 모든 신에게 숭배
를 드리는 과정을  지나 꽃목걸이를 서로의 목에  걸어주면 드디어 예식은 끝이 
난다.
  식이 끝나면 신랑  신부는 장식된 마차에 나란히  앉아 거리를 행진하기도 하
고, 지방에 따라서는  그네에 나란히 앉아 흔들리면서 삶의 요동을  느끼기도 한
다. 물론 친척들은 꽃, 과일, 설탕 등을 선물하여 신혼부부를 축하한다.
  잔치집 앞에는 커다란 천막이 들어서고 입구는 망고나무와 바나나잎으로 멋있
게 장식된다. 귀청을 때리는 요란한 음악이 내  식욕을 팍팍 떨구지만 수백 명의 
하객들은 비축된 잔치  음식을 마음껏 즐긴다. 예전에는 결혼식을 치르는  데 보
통 닷새가 걸렸다고 한다. 1916년, 네루 전 총리가 결혼할 때는 잔치가 수주일씩 
계속되었고 그 주의 거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바쁜 세상, 
잔치는 하루나 이틀이면  끝이 난다. 그래도 온 동네 사람을  초대해서 대접해야 
하므로 잔치 비용은 만만치가 않다.
  심리학과 우등생인 내  친구 헤마는 마드라스 지방의 브라만 출신.  타고난 지
성과 델리의 야성에 타락(?)한 그녀는 늘 자기  외삼촌과 결혼하게 될 것을 염려
했다.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는 남부지방에서는 아직까지  외삼촌과 조카딸
의 결혼이 성사되는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헤마의 재능을  아낀 교수들
의 설득과 나의 협박을 물리치고  그녀는 어느 날 전통 속으로 용해되어 사라졌
다. "집안일이야."라는 말을 남긴 채.
  케랄라 주의 나이르  카스트는 대표적인 모계집단이다. 이  카스트에서는 아버
지가 아닌  어머니의 남자형제가 가장이다.  동부에 있는 아샘  지방의 카시족도 
여성이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유산은  아들에게 '한판 누
르기승'을 거둔 막내딸이 수령한다.  이 지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
니고 남자가 장가를 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힌두는 여성을  종을 퍼뜨리고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
상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사회는 여성의 '홀로 서기'에 아주 냉담하다. 그러니 철
든 딸을 둔 아버지는 마음이 바쁘다. 힌두  성서는 사춘기 이전의 결혼을 장려하
고 생리가 시작된 후에도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낙태와 동일하게 여겼다.
  게다가 여성의 순수와  무지,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다 보니 여자의  결혼 연령
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10세의  여자아이가 20세 아가씨보다 순수하
고 무지할 가능성은 99.9퍼센트. 자기가 첫 남자이기를 바라는 이기심은 전 세계 
남성의 보편적인 질병이지만 종교적인 청정성의 문제가 얽힌 인도의 경우 그 증
상이 더욱 심했다. 젊었을 때 경제적 부담(결혼 지참금)을 해결하려는 친정 부모
의 마음도 조혼에 한몫을 했다.
  19세기 초 영국의 식민 정부는 12세 이하의 여아와 결혼하는 것을 성폭력으로 
간주하는 법령을  제정했고, 나중에는 그 연령이  14세로 올라갔다. 그러나 당시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벵골의 한  브라만이 27세의 나이에 9세 여아와 결혼한 일
은 높은 관습의 벽을 실증했고 식민 정부를  절망케 했다. 마하트마 간디도 13세
의 나이로 12세 아내와 결혼했다.
  이러저러한 굽이를 지나,  오늘날 법이 허용하는 인도 여성의 최저  결혼 연령
은 18세이다.  실제 결혼 연령도가 가장  높은 케랄라 지방은 21.8세,  가장 낮은 
라자스탄이 16.3세로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풍선처럼  부푸는 인구문제나 삶의 
질을 생각하면 결혼  연령도 풍선처럼 위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지방에서는 조혼이  계속되고 있다. 벌금이나 최장 3개월의  구류라는 법률
조항으로는 오랜 관습의 포기를 이끌어내기가 어려운가 보다.
  백마 타고 오는 신랑과 꽃마차를 탄 결혼.  사람들은 늘 동화같은 결혼을 꿈꾸
지만 인생은 동화가 아니다.  꿈이 너무 크면 인생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결혼은 
미래라는 미지의 바다에 '풍덩' 빠지는 것,  궁극적인 결과만이 성공 여부를 말해
준다. 그냥 물에 가라앉을 것인가, 수영을 하여 나아갈 것인가?
  쿵작 쿵작, 쿵쿵  작작. 신랑의 행렬이 시끌벅적했다. 나는 말  위의 신랑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좋은 항해가 되기를..."

  죄를 씻는 강
  겨울바다에 가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은 새들은 죽고 없었네...
  성스러운 강, 갠지스에 가보았다. 모든 힌두가 생전에 한 번은 꼭 가고 싶어한
다는 마음의 고향 갠지스.  인도인은 모신의 이름을 따서 강가라고 부른다. 강가
의 상류 하리드와르와 리시케시, 중류인 바라나시, 그 끝인 벵골 만까지 나는 강
가를 열 번도 더 보았다.
  강물에 밀려서 온갖  더러움이 가득 떠내려가고 있었다. 꽃, 짚,  타다 남은 뼈
다귀, 동물과 사람의  시체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벗어버린  엄청난 무게
의 죄와 때...  썩은 시체를 탐하는 사나운 눈매의 독수리떼가  강가의 하늘을 메
웠다.
  강가는 눈덮인 히마라야를  출발하여 하리드와르와 칸푸르를 지나 알라하바드
로 흘러든다. 그곳에서 진흙탕물인 강가는 델리와  아그라를 지나온 그보다 맑은 
야무나 강과 합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사라진 사라스와티  강과도 손을 
잡는다.
  세 강이 만나는  알라하바드는 힌두들의 순례지이다. 먼 옛날 신과  악마가 불
멸을 보장하는 물항아리를 건지려고 격투를 벌였다는  이곳에는 해마다 1, 2월이
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가장  신성한 시간대라는, 12년마다 열리는 
쿰브 축제에는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몰려든다. 1989년의 축제에는  1천 500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1950년대 초에는  축제에 참가한 엄청난 군중이  서로 엉키고 설켜서 350명이 
압사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축제를 미신과 몽매의 산물이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또 일부
는 이에 맞서 종교를 모욕한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앞서 짐작했듯이 인도
는 늘 결론이 유보상태인 나라. 그러나  정치인들의 설전과는 상관없이 강가에서 
죽으면 즉각적인  구원을 얻는 법, 슬픈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행운이 아니
랴?
  강은 인도 최고의 성지 바라나시로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바라나시. 수많은 사람들과  화장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백단향 내음에 마음이 
어지러운 곳. 그러나 사람들은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씻고 물을 마신다. 바라나
시의 강물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살아서 강가에 목욕하
고 물을  마시면 죄가 씻기고, 죽어서  강가의 강변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강에 
뿌리면 바로 구원으로 직행한다는 것이 인도인들의 믿음이다.
  바라나시를 찾는 순례자들은 모두  신성한 강물을 담아서 가져갈 빈병을 들고 
온다. 자기도 먹고 집에 있는 식구나 친척에게 주기 위해서다. 병이나 그릇에 담
아서 집에 가지고  간 물은 목욕할 때 한  방울만 넣어도 강가의 물과 똑같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  물은 성욕을 억제하는 데도 그만이라지만 뉘라서  그 효과를 
알랴?
  강가는 수많은 환자와  별의별 사람들이 와서 몸을 담그고, 화장한  재와 시체
가 떠다는 곳이다. 따라서  강물은 질병과 오염의 가능성이 높지만, 과연 신비한 
힘을 가졌는지 인도인들은 별 탈이 없다.
  "우린 워낙 면역이 되어서 괜찮아."
  나를 동행한 기숙사  최고의 '미스 깔끔이' 디피카의  설명이다. 그녀의 할아버
지는 네루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고 델리 대학 교수인 삼촌
과 그녀도 대를  이어 공부하는 물리학자 집안이지만, 갠지스에 대한  그녀의 신
심은 두터웠다.
  강가의 물에 대한  신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1세기  무슬림의 말발굽 
아래 희생된 솜나트 힌두사원은  일일 참배객이 1천여 명이나 되는 큰 사원이었
다. 순례자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가 3천  명, 사원에  달린 '데바다시(신의 
종)'라는 여인들의 수가 300 명이 넘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해안에 
있는 솜나트는 강가로부터 무려  2천 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수
많은 신상을 매일 강가에서 길어온 물로 목욕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0세기 초,  영국 조지 5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간 자이푸르의 
왕은 신성한 강가의 강물을 담아가지고 갔다. 정통   힌두로서 어찌 더러운 영국
의 물을 마실소냐?  런던에 머무는 동안 이왕은 가지고  간 갠지스 강물만 먹었
다. 물을 담았던 은그릇은 지금 자이푸르의 왕궁에 모셔져 있다.
  북동부 평야의  젖줄인 강가는 '꽃의 도시'  파트나에서 고그라 강,  간닥 강과 
만나서 동쪽으로 행진을  계속한다. 티벳에서 나와 방글라데시를  거쳐온 브라마
푸트라 강과 합쳐진  강가는 벵골 만으로 빠지면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인도 
북동부를 횡단한 것이다.
  이집트가 나일 강의  선물이듯이 인도는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의  딸이다. 물
줄기를 따라 인도의 전통과 관습이  스며든 강가는 사연과 곡절 많은 인도 역사
를 오늘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마치 강가는  과거를 출발해서 현재를 지나 미
래라는 대양을 향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과도 같지 않은가?
  힌두에게 강은  더럽혀진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곳이다. 신성한  강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그 나름의 강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거의 모든 주에
는 신성한 강이나 저수지가 하나씩 존재한다. 집에서  목욕을 할 때도 강가나 다
른 신성한 강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몸을 씻는데, 수많은 순례자들은  그곳에 가
서 목욕을  하고 죄를 던져버린다. 특히  일식이 일어날 때는 죄를  씻는 최적으 
시기. 이때 목욕을 하면 영혼까지 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강물에 그냥 멍하니 서 있는 것만으로  정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해 
뜨는 동쪽을(서쪽은 절대 안 된다) 행해서 주문(만트라)을 외우고 비슈누와 같은 
위대한 신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구루의 이름도 읊조린다.
  폭포도 회개와 자책감을 떠내려보내는 데는 좋은  장소다. 남부의 코베리 폭포
는 가장 유명한 곳. 언젠가 먼길을 헤쳐  허위허위 찾아갔더니 순도 99퍼센트 누
두인 뚱뚱한 사람들이 폭포 아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동방예의지국 출신인 내
가 보기에는 민망한 풍경이었다.
  주말이면 교회에 가서 회개하는 기독교인들처럼 강물에만 풍덩하면 죄가 씻길
까? 씻어야 할 죄는 또 어찌 그리 많은지... '면죄'가 쉬우면 '죄의식'이 얇아질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목욕을 수천 번 하고 갠지스 강물에 몸을 허옇
게 불려도 이승에서는 끝내 정화할 수 없는 5대 범죄가 있다.
  그것은 브라만을 죽이는 일,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일(낙태), 음주, 금
을 훔치는  일, '사부님'의 아내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 깊고 
무거운 죄를  지은 자는 미천한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나락(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강물에 몸을 담금 채 무언가 중얼거리는  이들은 경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니 그래도 희망이 있는 셈인가?
  그러나 아무리 죄를 씻어준다고 해도 매일 강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래서 자주 강에 갈  수 없는 인도인들은 대신 집에서 몸을  닦는다. 인도인은 아
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목욕을  한다. 사실은 목욕이 아니라 샤워에 가까운데, 바
가지로 물을 퍼서 몸에  붓기만 하면 된다. 감옥에 있던 간디는  한 대야의 물로 
세수는 물론 몸까지  ㅆ었다. 이마에 물 한  방울을 찍는 것도 목욕이 아니던가.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청결보다 믿음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니 한
국 학생들이 물을 많이 쓴다고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때를 닦지만 그들은 '순수'라는 무형을 향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욕재계인 까
닭이다. 브라만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기름을 발랐다가 씻어내는데  일찍이 구
약성서에도 보이는 기름 목욕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목욕의 종교적 의미를 따지
지 않지만 그들의 목욕도 분명 우리의 위생관념과는 다르다.
  멜 깁슨이 나오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인도에 온 영국인들은 추운 지방 출신으로  목욕이 뭔지 몰
랐다.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영국을 일으킨 엘리자베스 1세. 그 귀하신 몸의 때가 
13센티미터나 되었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니 타고난  '영국 신사' 따위는 없나보
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인도와 통상을  시작하고 결국 인도를  통치한 영국인은 
'더러운' 인도인에게서 목욕하는 습관을 배워 문화인이 되었다.
  한때 장안의 화제였던 TV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는 어느 날 괜히 인
도가 더럽고 지저분하다며 흥분을 했다. 목욕계의 원조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우리는 늘 '역사'를 부르짖으면서 과거는 빨리  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매일 목
욕을 했는가? 1900년 초 프랑스에 들렸던 인도의 사상가 비베카난다는 목욕시설
이 없는 선진국을  보고 몹시 놀라며, 인도인이 그들보다 훨씬  위생적이라고 간
단히 결론을 내렸다.
  세속주의자 네루는 강가의 신성함을  믿지 않았지만 인도 문명의 어머니 갠지
스를 사랑했고, 그의 유해는  갠지스 강물 위에 뿌려졌다. 오늘도 수많은 유해가 
그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화장을 해도  뼛조각이 남게 되는데 이것  역시 재와 
함께 강물에 버려진다. 화장할 비용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무연고자의 주검은 
그냥 통째로 들어간다.
  몇 년 전 인도 정부는 물에 던져진 각종 시체를 먹으라는 명령과 함께 3만 마
리의 거북이를 바라나시  주변의 강물에 투입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마리의 
거북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 많은 거북이는 어디로 갔을까?
  갠지스 강변에는 신성한 강물의 치유의 힘을 믿는 많은 환자들이 아에 터전을 
옮겨와 살고 있다. 또  총 길이가 2천 킬로미터도 더 되는  강가의 주변에는 3억
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들이  버린 생활 오수와 산업  하수는 강가로 
들어가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갠지스 강물의 사실성을  말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강가는 
영원히 신성하다.  강가를 찾는 외국인들도 그  신비함만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열 번도 넘게 강가를 찾은 내 눈에는 매번  강물이 더럽게 보였다. 오랜 전에 대
대적인 청소가 있었지만 성스러운 강물은 고단해보였다.
  씻을 죄야 없지 않겠지만 나는 비힌두, 감탄할 이유도, 그 속에 성스러운 무엇
이 있다고 미혹될  이유도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옷을  입었다고 믿어
야 현명한가? 강가는 인도의 어머니이므로 극진히 사랑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다
짐해야 하는가? 다시 김남조 시인의 시구를 빌리자.
  강가에 가 보았네.
  미지의 새, 보고 싶은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은...

2. 야누스의 얼굴

  짧은 배신, 긴 충성
  15세기 멕시코에 온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스텍  사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사제를 무당으로 생각하며 일장 설교를 했다.
  "너희들의 신은 죽었다."
  그러니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이 죽었다면 우리도 신을 따라 죽겠다."
  사제들은 그렇게 대답한 후 용감하게 목숨을 버렸다.
  인도의 심리학자 아쉬스 난디는 똑같은 상황을  가정했다. 만약 인도를 정복한 
영국인들이 브라만 사제들에게 죽음과  기독교 개종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했
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브라만들은 기꺼이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 술 더  떠 정복자
와 그들의 신을  칭송하는 찬가까지 지어 바쳤으리라. 그러나 힌두교에  대한 그
들의 믿음은  그대로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브라만들이 받아들인  기독교의 한 
변종일 뿐, 세월이  가면서 기독교는 점차 그 원형을 상실하고  결국은 힌두교와 
유사한 형태의 종교로 바뀌게 될 것이다.
  서양이나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아스텍 사제들은 대쪽같은 용기와 문화적 자
존심의 본보기다.  그러나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 뒤에 아스텍  문화는 지상에서 
영원으로 사라졌다. 반면에  비겁하고 위선적으로 보이는 브라만의  선택은 힌두 
문화의 영원한 생존을 보장한다. 오래 살기 위해 잠시 죽는 것이다.
  인도는 5천 년 세월 동안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그들에게 정복되는 비
극의 역사를 반복했다. 기원전 3세기 이래 박트리아, 그리스, 스키타이, 페르시아, 
투르크, 흉노족 등이 북부  인도를 침입하고 일부 지방에 정착했다. 그러나 정복
자들은 인도에 흡수되어 카스트 제도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렸
다.
  11세기부터 시작된 무슬림의  침입과 오랜 통치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무굴
제국도 인도 사회의 피라미드식 계층  질서를 뒤엎지 못하고 그 정점에 있는 사
람들만 바꾸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세금을 거두는 관리를 교체한 것에 불과했다. 
중앙은 바뀌었지만 지방과  말단의 촌락은 그대로였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
람들은 많지 않았다. '코란이냐, 칼이냐'라는 무슬림의 호전적인 이미지는 기독교 
세계의 창작물이지만 이슬람이 관용적인 종교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
슬림이 아닌 힌두는  인두세를 내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800년이라는 
오랜 통치 후에도 무슬림은 전체 인도 인구의 5분의 1이 채 안되었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불교도였다. 입신출세를 위해 자발적으
로 개종한 자들도 있었지만  전쟁포로가 되거나 이방인과의 접촉에 의해서 종교
적 '청정성'을 상실한 어쩔 수 없는  개종자들도 있었다. 사회의 최하층인 불가촉
민의 개종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수는 생각처럼 많지 않았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무슬림은 대개  전통적인 힌두의 생활과 의식을 그대로 지
켰다. 농촌에  사는 무슬림은 힌두의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고  힌두가 숭배하는 
천연두 여신에게 우유와  버터를 바쳤다. 결혼 방식도 힌두와 크게  다르지 않았
다. 게다가 무슬림은 그 나름의 카스트 제도를 발전시켰다.
  이렇듯 종교와 무관하게 일상생활과  세계관이 비슷한 민중과 달리 무슬림 지
배계층은 언제나 힌두교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권력을 지녔고  물리적인 우위에 
있었지만, 느리고 최면적인  성격의 힌두교를 겁냈다. 비슷한 수준이면 경쟁에서 
우열이 드러나지만 너무 느린 상대와는 아예  시합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운동장
을 몇 바퀴 달리다 보면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보다는 상대할 수 있는 분명한 적이 나은 법이다.
  무슬림이 인도에 온 지 약 800년이  지난 1858년, 무굴제국은 공식적으로 종말
을 고하고  영국에 인도 통치의  배턴을 넘겨주었다. 백인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전해주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띤 영국인들은 '인도
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뚱하고 온순한 갈색의 인도인들은 슬그머니 배
반의 칼을 뽑아들었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과 수동적  저항운동은 물리력을 
소유한 영국이 대처하기 어려운 아주 이상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기독교 개종은 드물었다. '우상'을  숭배하는 수억의 이교도 힌두들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기독교의  '좋은 말씀'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말씀을 힌두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
니라 수많은 힌두 신의 하나인 '예수  신'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붓다를 힌두교의 
신으로 받아들였듯이.
  영국인들에게 땅과  권력을 빼앗긴  인도인들은 겉으로는  식민지가 되었지만 
'속'은 결코 식민화되지 않았다. 허약하고  수동적이며 타협적이라고 비난을 받은 
그들은 결국은 도래할 먼 훗날의 삶(독립)을 위해 잠시 비겁하게 보였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겁쟁이였지만 진정한 자아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고전  푸라나는 맹목적이고 직선적인 용기가  개인의 불멸과 경건성을 
위해서는 바람직하지만  집단의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직선적인 
용기는 부러지기 쉽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어쩌면 극과 극
은 통하는지도 모른다.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던  사람이 가장 먼저 환영의 깃발
로 바꾸어 달고 변절을 합리화하지 않던가.
  어쨌든 문화는 역사의  저편이 아닌 이편에 살아남아야 한다. 한  시대의 영광
을 뒤로 하고  사라져간 다른 문명들과 달리  인도는 개종자들과 굴욕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된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외유내강의 
전형이다. 허약함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하나의 전략인 것이다.
  인도의 5천 년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전략은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침
묵이라는 인도 문화의 특성이다. 무언이야말로 최고의 보복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도인은 외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아니, 사실은 무관심하다. "모나리자? 
그게 뭔데?" 델리  대학 사학과 2학년 여학생의  반문이었다. 우리라면 초등학교 
2학년도 다 아는 건데... '코리아'를 찾아보라고  지도를 펴면 그들의 손가락은 기
껏해야 태국이나 베트남 부근에서  헤매기 일쑤이고 때로는 인도 안에서 방황한
다. 또 인도에는  알렉산더를 비롯하여 인도를 침입한 다른 정복자들에  대한 기
록이 하나도 없다. 천  년이나 같은 땅에 살고 있는 무슬림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기록은 메가스테네스, 법현,  현장, 혜초, 이븐 
바투타, 알비루니 등 이방인의 것뿐이다.
  이미 자기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것이란 없는 것일까? 인도인
에게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 정체성의 준거 틀이 아니다. 굴욕이나  개종도 진짜 
자아와는 무관하다. 다른  문화나 이질적인 것에 대한 인도의 관용과  환대는 냉
담성과 회피적인 태도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800년이 넘는 무슬림 통치와  200년에 가까운 영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동
안 인도는 그  중심을 상실하지 않았다. 1991년의 인구 센서스를  보면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각각 전체  인구의 11.4퍼센트와 2.4퍼센트를 차지한다.  영어를 해독
하는 인도인의 비율도 인구의 2퍼센트가 되지  않으며 영국, 아니 서양의 생활방
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싸움에 지고 이민족에게  정복되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뿌리
를 잃고 정복자의 문화와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존재의 끝'을 
의미한다. 또한 물리적인 싸움 없이 진행되는 소리  없는 문화 정복은 또다른 비
극이다. 문화 유산을 지키자고 외치면서 남의  문화를 슬그머니 내면화하는 것은 
또다른 '끝'의 시작이다.
  영국의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시인 키플링은 '영국인의 팔뚝만한  가느다란 다
리를 가진 인도인'이라고  묘사했으며 인도인 둘을 합쳐야 영국인  한 사람과 같
다고도 했다. 인도인의 외양은 늘 온순하고 때로는 연민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대
도 그렇게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무장해제.  인도는 곧 당신을 흡수해
버릴 것이다. 스펀지처럼.

  수도승과 에로스
  예술이나 외설이냐를 놓고 법정에 섰던 소설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섹스는 환생해야 할 아홉 가지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중
요하지 않다..."
  인도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카쥬라호 힌두사원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
리고 경악한다. <플레이보이>지나 일급 포르노영화에나  나올 법한 적나라한 성
행위를 조각한 외벽 앞에서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신성한 사원의 차림새가 
어찌...' 유교문화에서 자란 나의 충격은  오죽했으랴. 마하트마 간디는 그 조각상
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고 고백한 바 있다.
  1838년 영국군 장교의 발견으로  정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쥬라호 사원은 
유엔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11세기 건축물이다. 사암으로  만든 22개 사
원의 집합인 카쥬라호는 논란  속에서도 외설스런 조각들 덕분에 수많은 관광객
의 발길을 끌고 있다.
  외국인들이 인도에서  음란하다고 고개를 흔드는 두  번째 대상은 남근숭배이
다. 인도에서 크리슈나 다음으로  널리 숭배되는 신이 바로 파괴의 신 시바인데, 
코브라를 화환처럼 목에 두르고  명상하는 자세의 금욕주의자 시바는 하늘을 향
해 솟은 남성의 성기 형태로 숭배된다.
  인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힌두사원의 중앙에는 시바 신을 상징하는 남
성의 성기(시바 링감)가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 농촌의 작은 사원에도 조잡하게 
만든 남근상이 빨간 꿈꿈가루를 바른 채, 수직으로 솟아 있다. 숭배자들은 그 앞
에서 꽃을 던지고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며, 손으로 링감을 어루만
지는 여인네도 눈에 띈다.
  숭배되는 링감은 시바의 지칠 줄 모르는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시바 신은 무
려 8천 4백만  가지의 다양한 체위를 고안했는데, 숭배자들에게 알려진  건 겨우 
8만 4천 가지!  이러니 시바는 다산의 신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시바 링감이 
있는 한 인도 인구는 무한대가 아니랴!
  내가 본 가장 거대한 시바 링감은 촐라 왕조의 수도였던 탄조르의 브리하데슈
와라 사원의 것. 카쥬라호처럼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인 63미터 높이의 건물 꼭
대기에는 거대한 시바 링감이  장식되어 있다. 하나의 바위로 만든, 무게가 80톤
이 넘는 이 엄청난 링감은 지난 천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게 경외심을 주었으리
라.
  카쥬라호와 시바 링감도  유명하지만, 인도인의 에로스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
한 증거는 뭐니뭐니 해도 <카마수트라>이다. 카마는 에로스라는 의미이고, 수트
라는 우리말로 '경'에 해당된다. 4세기, 힌두왕국 굽타조에 씌어진  <카마수트라>
는 말하자면 섹스에  관한 지침서이자 안내서이다. 브라만  소년들에게 읽혀졌을 
이 책은 '즐거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첫장을 열면 '내일 공작새를  얻는 것보다 오늘 비둘기를 갖는 것이 낫다'거나 
'불확실한 내일의 금잔보다 확실한 오늘의 놋쇠잔이 더 낫다'는 그럴듯한 이야기
들이 보인다. 알 수 없는 내세보다 이승의 쾌락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서 다양한 섹스의  기교와 교접, 결혼, 매춘부, 미약 등의  내용을 상세하게 묘사
하고 있다.
  인도의 에로스는 여성의 이미지에도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도 여성은 모
두 섹시하다! 인도 조각상에 보이는 여성은 곡선미가 과장된 에로틱한 모습으로, 
커다란 궁둥이와 테니스공처럼  튀어나온 가슴이 뭇 남성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남부지방의 힌두사원 입구에 있는  실물 크기의 여인석상은 드나드는 사람이 하
도 만져서 가슴이 반들반들 윤이 난다.
  인도 문학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풍만한 가슴이 돋보이도록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인, 허리가  개미처럼 가느다란 미인으로  묘사된다. 넓적다리는 바나나나무나 
코끼리 이빨처럼 둥글고 통통하며 엉덩이는 크고  배꼽은 오목해야 한단다. 그러
나 내가 실제로 만나본  인도 여성들은 큰 가슴과 큰 엉덩이  그리고 '드럼통 허
리'를 갖고 있었다.
  모두들 내숭을 떨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제는 섹스이다. 아득한 
옛날 바빌론 강가의 공창에서부터  강남의 록카페까지 그 저변의 기운은 에로스
가 아닌가? 일찍이  몽테뉴는 포르노 잡지의 유행을 예견했고,  루터는 허랑방탕
한 여학생의 생활을  탄식하면서도 자유연애를 지지했다. 플라톤은  화를 내겠지
만, 사랑이 없는 섹스는 있어도 섹스가 없는 사랑은 없다지 않은가.
  '카쥬라호'와 '시바 링감' 그리고  '카마수트라'의 인도. 위성방송이 안방에다 공
개적으로 섹스를 팔고, 콘돔이 --  가장 유명한 콘돔 제품은 당연하게도 '카마수
트라'라는 상표를 달고 있다 -- 무차별 광고를 해대는 곳. 매춘부가 수백만 명이
고 에이즈 환자가  3백만 명이 넘는 나라. 이렇듯 성이  넘치는 에로스의 천국으
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명상과 금욕이라는 또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사실 
성에 관한 한 인도는  여전히 타락한 서양의 영원한 '타자'이기를 고수하는 보수
적인 국가이다.
  청교도적인 영국의 영향도 없지 않지만 인도는 원래 성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
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힌두 신화에는  금욕주의적인 시바와 에로틱한 시바라는 
모순적인 이미지가 동시에 등장한다. 시바는 성적  능력을 자랑하는 신이자 쾌락
의 한계를 구현하는 완벽한 수도자이다.
  신화에 의하면 시바 신은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숲으
로 간다. 벌거벗은 그는  브라만 성자의 아내들을 유혹하여 만족을 꾀한다. 영구 
발기한 성기를 자를  때까지. 또다른 신화에는 시바와 그의 아내  파르바티가 천 
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사랑을 했다고 되어 있다.  휴! 모든 신이 시바의 '엔델스 
러브'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성욕과 금욕에 대한 인도인의 갈등은 결혼한 남자의 성에 대한 규범에서 두드
러지게 나타난다. 인도의 젊은 가장들에게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쾌락을 추구
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엄격한 금욕이 강조된다.  자식을 결혼
시키거나 생리를 끝낸  인도 여성은 대개 성관계를 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36
세에 에로스에서 조기 은퇴했다.
  인도인들은 성관계가 정액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남성에게 아주 위
험하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관계는 남성을  약하게 만들고 결국  병을 부른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젊은 남성들은 본능을  만족시키는 일과 건강을 유지하는 
문제로 심한 갈등을 느낀다.
  그러나 시바와 같은 신도  욕구를 주체하지 못할진대 보통 사람들은 오죽하겠
는가? 여기서 인간의 성적  욕구는 인정하되 그것을 다른 형태로 변모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 대안이 바로  요가이다. 때문에 남성 성기의 모습으로 숭배되는  시바는 동
시에 책상다리를 한  요가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히말라야에서  명상을 하
는 자세의 시바 신은 금욕을  통해서 성적 능력을 고도의 영적 능력으로 변모시
킨다. 금욕주의자 시바와 에로틱한 시바의  모순은 <요가 샤스트라>에서 이렇게 
통합된다. "정열 없이  시바를 생각하면 정열로부터 자유롭다. 정열을 가지고  시
바를 명상하면 진짜 정열을 누릴 수 있다."
  브라만 성자와 요가수행자의  공동 목표는 자응동체이다. 그들의  능력은 원초
적 본능을 성공적으로  초월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적 자아를 극복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인도의 문화적  이상형은 '양성성'이다. 라다와 크리슈나가  아닌 라다-크
리슈나, 시타와 람이 아닌  시타-람이 이상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
은 서로 동등하지만 양성성에 비하면 열등하다고  여겨진다. 성자와 신의 자질을 
갖춘 아르다나리슈와라도 '아수라 백작'처럼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다.
  그러나 암수 한몸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법. 인도의 우파니 샤드를 보면, 
암수 한몸인 인간이 왠지 외로워서  자기 몸을 분열한 결과 여자의 존재가 생겼
다고 씌어 있다. 성경도 같은 얘기를 전한다. 하느님은 여섯째 날에 암수 한몸인 
인간을 창조했고 고독한 아담을 위해 그의 기관 하나를 뽑아 여성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섹스가 세상의  '빅뱅'이었다. 그러나 이후 문명은 에로스
의 억압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 일'이 아닌 창조적인 영역에  에너지를 써야 한
다는 고상한 명제가  인류를 짓눌렀다. 성을 둘러싼 인도인의 갈등도  이러한 전
통의 소산이 아닐까?
  그러나 카쥬라호의  조각상이나 <카마수트라>라는 삶의  한 측면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인도의 걸작품, 에로스를 모르고서야 인구 10억이 가능한가?

  폭력과 비폭력
  좋은 폭력은  유혹적이다. 나는 어렸을  때 누가 김일성을  죽여주었으면 하고 
열심히 기원하곤 했다.  아, 그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볼  필요는 없다. 나는 
반공 교육시대의 우등생이었고, 강원도 전방에서 하이  톤의 대남방송을 울 어머
니 목소리보다도 더 자주 듣고 자랐으니까.
  브루투스가 공화국을 위해 카이사르를 죽인  것처럼(그 평가는 차치하고) 누가 
일찍이 히틀러나 스탈린을 죽였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쯤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허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끝장내고 우리에게 해방
을 선사한 히로시마 원폭투하는  과연 좋은 폭력인가? 비폭력은 폭력 앞에서 얼
마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비폭력'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마하트마 간디이다. 그는 1948년 1월, 힌
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은 분명한 폭력이다. 그것만큼은 그대로 동의하
리라. 몇십 년 동안 비폭력을 열심히 설파했지만  간디의 생은 폭력에 의해 막을 
내렸던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암살을 바랐다면 놀라시겠지? 그는 
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을까봐 몹시 걱정하면서 "진짜  마하트마답게 죽고 싶다. 
암살자의 손에, 라마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고 간디가 암살자와 사전에 각본의 짠 것은 아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을 뿐.
  간디는 그 전에 이미  세 차례나 암살기도를 경험한 바 있었다.  세 번의 실패
와 마지막 성공의 범인들은  모두 같은 지방, 같은 카스트 출신이었다. 마하라슈
트라의 치트바반 브라만.  즉 암살자들은 모두 영국의 통치 아래서  힌두 민족주
의의 기치를 내걸고 열심히 싸웠던 마라타군의 후예였다.
  마하라슈트라 지방에는  군인계층인 크샤트리아가  없었기 때문에 브라만들이 
용맹한 군인으로 싸웠다.  간디의 평화주의, 즉 비폭력(아힝사)은  폭력이 기반인 
치트바반 브라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자기 통제를 요구했다. 쉽
게 말하자면, 마라타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그들은  영국과 '한판 붙고' 싶은데 간
디는 계속  비폭력을 외친 것이다.  용감한 군인은 남자답고  씩씩하지만 간디의 
비폭력, 비협력 방식은 온건하고 여성적인 운동이었다.
  간디의 암살범인 38세의 고드세는  기도하러 가는 간디에게 권총 4발을 쏜 후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간디가 기대했던 멋쟁이(?) 암살자였다. 
범인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마하트마를 쏘았고 마하트마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총에 맞았다. 그리고 비극적인 간디의 죽음을 온 세계가 애도했다...
  사실 비폭력은 간디의  창작품이 아니다. 간디가 '사랑의  법칙'이라고 부른 비
폭력은 기원전 6세기경 불교, 자이나교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동
물과 곤충의  살생을 금하는 이 비폭력  사상은 '우주의 상호의존'이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에너지인  생명력의 환생으로 다같이 중요하다
는 것이다. 다음 생에 내가 무엇으로 태어날지 아무도 모를 일이 아닌가.
  채식이 시작된 것도 이런 연유이다. 자이나교도는 고기는 물론이고 양파, 감자
도 먹지 않는다. 일부는 지금도 세균과 같은  미세한 영혼이 존재한다고 여겨 숨
을 들이쉴  때 그 존재가 입안에  들어가서 죽지 않도록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또 개미처럼 땅에 사는 존재를 위해 나막신을  신기도 하는데, 이러한 전통은 간
디의 고향인 서부지방에 특히 강하다.
  언젠가 전통과  보수의 원단인 자이나교도의 집을  방문했다가 안주인이 먹는 
것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어찌나 간단히 차렸는지  평생 동안 먹는 음식의 가
짓수를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 집은 큰 부자였지만 생활은  청교도 정도가 
아니라 가히 무교도라 할 만했다.  파, 마늘, 양파, 고추 등 웬만한 재료는 다 빠
진 음식, 그러나 꽤 맛이 있었다.
  인도의 비폭력  전통은 폭력이 뿌린  피 위에서 피어난  열매인지도 모르겠다. 
먼 옛날 인도에 비폭력을 뿌리내리게  한 인물이 바로 유명한 정복자 아쇼카 황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의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2  - 기원전 
188)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최대의 영토를 이루었다.
  정복은 폭력을  사용하고 또한 많은 희생을  수반한다. 사료를 보면, 아쇼카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 동부지방의 칼링가 국을 공격하고 10만 명의 적군을 살해했
다. 물론 정복군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15만 명의 포로와 함께 귀환한 왕
은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불교에 귀의했다.
  그 후 아쇼카는 비폭력을 실천하는 데  전념했다. 전쟁을 포기하고 이웃나라에 
평화사절을 보냈으며, 물리력이 아닌  '법도와 진리'에 의한 승리를 선포했다. 그
는 동물의 희생을  금지하고 즐기던 사냥도 그만두었다. 심지어 먹기  위해 동물
을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
  그때까지 왕궁에서는 연회에 쓸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매달 수천 수백 마리의 
동물을 도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조칙이 새겨질 무렵에는 겨우  두 마리
의 공작과 한 마리의 사슴을 잡았을 뿐이다.  그것도 앞으로는 죽이지 않을 것이
라는 기록과 함께. 이후 채식주의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누가 힘이  센지 알아보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의 옷을  벗기는 시합
을 벌인  바람과 해에 관한 이솝  우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처럼 폭력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실제로 간디의 비폭력이 지
닌 가장  큰 힘은 도덕적 우위였다.  비폭력의 방식을 쓰는  '맨손'의 사람들에게 
'기관총'의 폭력을 사용한다면 누구든지 후자를 비난할 것이다.
  1919년, 영국의 디에르 장군은 평화로운 모임을  갖던 맨손의 인도인을 향해서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그로 인해 300여 명이 죽고 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를 계기로 분노한 수많은 인도의 민중이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전세계가 영국을 
비난했고 영국  내에서도 제국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과 인도 간 세력균형의 '루비콘 강'이 되었다.
  인도인은 비교적 온순하다.  우리처럼 길에서 핏대를 올리며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다. 이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서 생긴 노예 근성이라고 
힐난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 역시 예속적인 성격의 발언이다.
  그러나 비폭력의 나라  인도에서도 폭력은 난무하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유형무형의 엄청난  폭력인데, 이 얘기는 5장에서 집중적으로  할 예정
이다. 여기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적인 비폭력  숭배' 때문에 고생했던 나의 
경험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어느 날 토론에 참가한 나는 그만 마하트마 간디를 비판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건 정말 실수였다. 하지만  토론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며
칠 후 엄청난 수준의 협박편지가 날아왔다. 내용인즉 '인도와 간디를 모욕했으니 
즉시 여기를 떠나라'는  거였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으스스한 조건절도 붙어 
있었다.
  글씨는 누가 보아도  일부러 꾸며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작위적인 필체였
다. 그것은 내가  아는, 혹은 알아낼 수 있는 필체의  주인공이 발신자라는 힌트. 
셜록 홈즈로부터  시드니 셜던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에 일가견을 가진 
나는 풍부한 독서 경험과 타고난 능력을 바탕으로  발신자 추적에 나섰다. 그 과
정은 길고 지루하니 생략하고...
  드디어 범인(?)은 내 추적망에  걸려들었고, 나는 그를 초대하여 밥을 사고 조
그마한 우리나라 기념품까지  아낌없이 주었다. 물론 편지 건은 입에  올리지 않
았다. 지나가는 말투로 간디에 대한 내 입장만 돌리고 굽혔을 뿐이다. 간디와 아
쇼카의 방식을 십분 활용한 덕분에 무사히  공부를 마쳤지만, 폭력적으로 간디를 
숭배하는 그 친구 때문에 휴,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간디의 말씀을 들어보자.
  "비폭력은 아주 적극적인 행동이다. 폭력을  쓰는 사람만이 비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겁쟁이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결코..."
  때로 폭력은 필요한 것인가? 남자들이 '여자들은  그저 사흘에 한 번씩 명태처
럼 두들겨  패야 한다.'고 열을 올리면  여자들은 '남자들은 그저  멸치처럼 달달 
볶아야 한다.'고 맞받는다.  다시 이어지는 응수와 대결의  끊임없는 악순환은 결
국무엇을 낳는가? '보이지 않는 사랑'은 아릅답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은  끔찍하
다.

  마하트마와 간디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던  10대 소년은 아내가 몹시 그리웠다. 빨리  방으로 돌
아가 아내와 자고 싶은 생각에 몸이 달았다.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아버지 다
리를 주무르던 손을 놓고  방으로 돌아온 지 채 10분이 되었을까? '똑똑'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해보자. 70대의  발가벗은 노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20대 조카손녀와 동침을 하여 '원초적 본능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아,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회춘? 천만에. 그냥  작은 실험 연구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몸의 반응과 옆에 나란히 누운 손녀의 신체적 반응을 알아보는 정도.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소년과, 손녀 옆에서  실험에 몰두하는 
노인은 동일 인물이다.  그가 바로 유명한 마하트마간디라는 사실을 눈치  챈 독
자는 아마 없으리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인도에게 협박편지를  받은 게 아주 '고소하다'고 하
실 테지. 전세계가 존경하는 성인을 헐뜯어서 남는 건 없다. 나는 단지 야누스적
인 인도 사회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 '거리'를 하나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간디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은 보기 드물다.  그를 성인으로 열렬하게 추
앙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에 대한 비판자도  많다. 내가 간디를 이야기 소재로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인도의 독립에  바친 그의 투쟁의 생애와  여러 가지 
업적, 영향력 등은 잠시 접어두고 여기서는  이율배반적인 간디의 면모를 살펴보
자. 
  위에서 본 첫번째 이야기는 간디가  18세 되던 해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겪은 
사건(?)이다. 사건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 간디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
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평생을  두고 자책했고, 그것이 그의 인생
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열세 살에 결혼
을 한 그는 상당히 '그 일'에 집착하는 젊은 남편이었다.
  그 여파가 두 번째 이야기이다. 섹스에 집착한 결과 평생 '후회를 짊어지고 산 
간디는 아내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젊은 나이에 총체적  '금욕'을 결심한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섹스로부터의 자유'가 쉽지  않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곧 
'완전 은퇴'가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70년대에 이른 간디는 여전히 
몸과 정신이 따로  논다고 고백했다. 솔직하지 않은가? 조카손녀와의  동침은 다
름 아닌 그 실험의 장이었다.
  그걸 무엇하러 실험하느냐고  물으면 나도 할말은 없다. 다만 진리를  찾는 정
직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까. '진리에 대한  내 실험의 이야기'라는 자서전 제목
이 말해주듯이 간디의  일생은 진리를 찾는 긴 노정이었다. 그러나  섹스와 관련
된 이 시험 때문에  주변의 많은 인물이 간디를 떠나갔다. 평생  동안 늘 푸르게 
간디를 추종한 네루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간디가 채식주의자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는 영국에  유학하던 시
절부터 채식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빨이 다 빠진  간디의 모습은 
극단적인 채식의 소산이다. 그는 심지어 우유도 마시지 않았다. 나중에는 주위의 
강권으로 염소젖을 마셨는데 1930년대 초 원탁회의를 하러 영국에 갈 때는 염소
를 데려갔다고 한다.
  "성욕이 강한 사람은 식욕도  강하다." 간디의 말이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섹
스와 먹는 이야기가 줄을 잇는데  무얼 먹고 안 먹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음식은 섹스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간디는 정력에 좋은 음식을 유난히 밝히는 우리나라 남성들과 달리 금욕에 도
움이 되는 음식을 찾아 헤맸다. 간디에게  '원초적 본능' 억제는 해탈의 필수조건
인 동시에 정치  활동의 에너지였다. 그는 금욕에 방해가 되는  음식이라면 가차
없이 끊었다. 설탕, 우유, 양파가 간디의 밥상에서 쫓겨났으며, 음식을 먹고 몸의 
반응을 일일이 체크하는 것도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권하는 최고의 금욕 
식품은 호두와 아몬드 종류.
  자, 인도인의 계산을 보자. 먹은  음식은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와 골수가 되
었다가 30일이 지나면  정액으로 바뀐다. 40방울의 피가 한 방울의  정액이 되는
데, 한 번의 사정에는  14그램 정도의 정액이 소요된다. 이는 27킬로그램의 음식
이 만든 에너지와 같다. 한번의 성관계는  24시간의 정신노동이나 72시간의 육체
노동과 동일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도인은  성관계 뒤의 사정이 정력을  쇠퇴시키고 신체의 
움직임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여긴다. 대신  금욕을 하면 정액이  위로 올라가서 
영적 생활의 에너지가  되는 동시에 신체적 능력도 증진한다고 믿는다.  12년 동
안 금욕을 완벽하게 실천하면 해탈로 직행이란다!
  마하트마 간디가 섹스와 음식이라는  명제에 그토록 집착한 것도 금욕으로 얻
은 영적 에너지를 독립운동에 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채식은 동
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비폭력 이론과 연결되고 그의  운동방식인 '사타아그라하
(진리에 대한 투쟁)'에도 포함된다.
  인도는 간디의 나라다. 간디는 성자(마하트마)인 동시에 인도인의 정신적인 지
도자(구루)이자 아버지(바푸)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인도  어느 도시를 가든지 
간디의 동상이 보이고 어디를 헤매든지 간디의 이름을 딴 거리나 빌딩 하나쯤은 
만나게 된다. 흰  빵떡모자인 간디캡을 눌러 쓴 간디 추종자들도  인도 전역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흰 목면 조각을 걸친 바싹  마른 간디의 모습은 찰리 채플린의 이미지처럼 희
극적이다. 미국의 초청을  받은 간디는 자신의 모습이  미국에서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이유를 들어 초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가 풍겨나온다.  '거지옷을 입은  성자'간디는 오합지졸의 
인도인을 이끌어 당해 최대 제국인 영국의 적수가 되었다.
  물론 간디도 처음부터 위대한 마하트마였던 것은  아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풋내기 변호사 간디는 첫번째 재판에서 갑자기 그만 입이 얼어붙는 바람
에 데뷔전을  엉망으로 치르게 된다.  실의에 찬 그에게  남아프리카의 일자리가 
들어왔고 그는 낯선  곳으로 떠났다. 남아프리카는 최근까지도  인종차별로 악명
이 드높은 곳.  어느 날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열차에게 쫓겨난  그는 그곳에서 
민중운동의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귀국한 간디는  1920년부터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영국 
신사의 껍데기를 벗고  농민의 옷과 신발로 단장했다.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영
어를 버리고  시정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농민들처럼 열차의  3등칸을 이용했다. 
사실 열차는 간디의 듯에 따라 특별히 3등칸으로 개조된 것이었지만 어쨌든 3등
칸은 3등칸이었다.
  그의 투쟁방식은 진기하고  이상했다. 비폭력, 비협력의 방식은 영국이 감당하
기 어려운 미지의 무기였다. '종교와 분리된 정치는 무덤에 있는 시체와 같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를 정치에 접목한 이도 간디였다. '영혼의 힘', '진리'등의  표현이 
섞인 그의 연설은  종교지도자의 설교와 흡사했다. 그의 말에 다르면  정치 운동
은 인도인의 정신적인 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성자에게도 옥의 티는  있는 법이다. 간디는  비폭력을 주장한 
평화주의자였지만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에서 영국이 줄루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영국을 위해서 모병에
도 나섰다.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독립운동가? 우리식의 판단과  놀라움을 거
두고 '짧은 배신 긴 충성'을 기억하시라.  또 간디는 유태인들에게 히틀러에 대한 
'무저항'운동을 권고하기도 했다. 무저항한 유태인이  갈 길은 과연 어디인가? 간
디 이론의 비현실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메시아'와 같은  그의 이미지는 민주주의로의 발전의  장애가 되었고, 물
레를 잣는 '마을 공화국'을 지향한 그의 과거 회귀적인 주장은 산업 발전의 걸림
돌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소박한 삶을 유지하는데  오히려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그의 검소함을 대변하는 얇은 목면 옷은  오히
려 손이 많이 가는 비싼 의류였으므로--는 사실도 소수만 아는 비밀이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던가. 마하트마는 식민지 인도  대중이 만든 '스타'였
다. 대중문화나 스포츠의  슈퍼스타 뒤에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는  오빠부대가 있
듯이 '팬'이 따르지 않는 스타는 존재할 수 없다. 간디는 마찬가지다. 그를 본 적
도,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간디의 이름으로 한데  뭉쳐 싸
웠다. 멀리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는 대중들 각자의 가슴에  아전인수식으로 해석
되어 자리를 잡았고,  '간디의 명령'이라면 수만 명이  동원되어 운동에 참여하고 
움직였다.
  언젠가는 아샘 지방의 홍차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던  8천여 명이 '간디 문제!'를 
외치며 짐을 싸기도 했다. 전체 노동자의 반이 넘는 숫자였다. 그들은 간디가 땅
을 분배해준다는 소문을 믿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발 없는 말
이 천 리를 가고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법. 간디에게 나누어줄 땅이 어
디 있는가? 독립을 한 지금도 그의 후예들은 고달플진대.
  대중을 무한정 동원하는 마하트마의 능력은 그들을 통제하는데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대중이 위험선(?)을 넘으면 언제든지 간디의 '비폭력'이라는 카드가 등
장했다. 좌파 인사들은 그런  간디를 폭력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한 '인도 혁명의 
요나'라고 몰아붙이면서 '부르주아의 마스코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자, 이야기를 바꾸어 끝을  맺자.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 스타에게는 여성 팬이 
압도적으로 많다. 간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공격하고 여성을 독립운동의 전선으로 이끈 선구자였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흠
모하는 여성 팬들이 모여들었었다. 그대가 보기에도  간디의 모습은 모성을 자극
하지 않는가?
  수많은 여성 추종자들 중에서 유독 간디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영국 여성이 
있다. 그려는 로맹  롤랑이 쓴 <마하트마 간디>에 감명을 받고  간디를 찾아 인
도로 건너온  마델린 슬레이드. 인도에서  미라 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녀는 
영국 해군 제독의 달이었다. 30대 초반에 인도에  정착한 미라는 24년 동안 친밀
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라,  지금 당신 생각을 하고 있다오. 당신이  그립소." 간
디가 미라 뵌에게  보낸 편지에는 연정에 가까운 감정이 묻어난다.  그러나 금욕
을 선언한 간디에게 미라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간디가 죽은 후에도 10여 년  더 인도에 머물었던 그녀는 1958년 영원히 인도
를 떠나 스위스로 간다. 나중에 미라, 아니 미스 슬레이드는 간디에 대한 기억조
차 없다고 매정하게 과거를 잘랐다. 사랑도 허망하고 삶도 허망할 뿐인가...
  20세기에 인도가 배출한 세계적인 인물, 간디. 그는 위대한 마하트마였지만 동
시에 인간적인 약점도 많은 인물이었다. 지도자를  숭배하는 인도의 전통이 아니
었다면 마하트마의 탄생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영웅이 필요한가?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한 마르크스 아저
씨였다. 역설적이게도 인도에서는 그 아편에 중독된  말기 환자 브라만들이 바로 
마르크시즘의 신봉자이다. 마르크시즘의 신봉자이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인
도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기대가  한참 어긋난 것을 보며 땅을 치고 분개했으리
라.
  "일본 사람인가요?"
  한국 사람들이  인도에서 듣는 첫마디는  대개 이렇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후에야 비로소  그 다음 대화로 나아갈  수 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이상한 족속들이 많은 곳이 또 인도다. 인도에는 심정적 좌파, 멋
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많기 때문이다. 델리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의 전임
교수들도 대부분 눈금이 왼쪽으로 기운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본주의 한국에 대
한 편견이 겨울안개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루는 시내 도서관에  갔다가 소위 좌파 학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미국의 식민지에서 온 불쌍한  동지' 운운해서 가뜩이나 더위를 타
는 나를 더욱 열받게 만들었다. 그는 미군들이  서울 거리를 활보하면서 온갖 행
패를 일삼고 시민의  일상을 간섭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믿음처럼  무서운 것
이 어디있는가. 그의 결정타  한 마디. "미군들하고 어울려 살면서 왜 영어는 신
통치 않죠?"
  조상으로부터 은근과 끈기를 물려받은 '의지의 한국인'인 나는 그 정도는 얼마
든지 참을 수 있었다. 진짜 화가 난 것은  이야기 속에 묻어나온 그 남자의 출신 
성분과 생활  방식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두려운  전형적인 '유산자'이자 
기득권자였다. '그 날이 오면' 가진 것을  무산자들과 나누어 가질 의향이 추호도 
없는 부르주아 브라만. '지'와 '행'이 따로 노는 허망한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인도에서 마르크시즘을 전파한 것은 내가 만난 그 학자처럼 지배 계층인 브라
만이었다. 그들은 인도 인구의 5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소수집단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통해 기존의  사회 조건을 
강제로 전복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
  "노동자 계층의 해방은 노동자 계층 스스로가  달성해야 한다. 노동 계층의 해
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 특권이나  독점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동등한 권리와 의
무, 계급 통치의 폐지를 위한 투쟁이다."
  물론 브라만은 프롤레타리아 계층도, 사회의 하층도 아니다. 인도 사회에서 억
압받는 다수는 수드라와  불가촉민이다. 그들은 인구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며 
주로 노동이나 농업에 종사한다. 수드라나 불가촉민의  입장에서 볼 때 특권층인 
브라만이야말로 전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바로 그  브라만이 마르크시즘을 
실현하겠다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선 것이다. 투쟁의  대업을 맡은 브라만은 카스
트의 상층이고 그  기반은 마르크스가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은 힌두교인  것. 그
러니 사회 개혁이나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브라만은  마르크스를 받아
들여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힌두교를 보호한 셈이다.
  1920년 10월 17일, 구소련의 타슈켄트에서 인도  공산당이 역사적인 창당을 했
다. 당시 집행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1. 당서기: M. N. 로이(브라만)
  2. 위원: 엘비나 로이(M. N. 로이의 부인, 브라만)
  3. 위원: 아바니 무커르지(브라만)
  4. 위원: 로사 무커르지(아바니 무커르지의 아내, 브라만)
  5. 총재: 보얀카르 프라티바디 아챠리아(브라만)
  6. 위원: 알리 아메드 후세인(무슬림)
  7. 위원: 샤픽 시디키(무슬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스트주의와 족벌주의이다. 무슬림 두 명을  제외한 전 
구성원이 보수적인 브라만 일색이다. 창당의 산파인 M. N.  로이(원래 이름은 나
렌드라 나드 바타챠리아)는 청년시절 힌두 원리주의  단체인 '아누실란 사미티'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그런 그가 공산당원이 되어 공산당 제2 인터내셔널의 인도의 
대표로 참가했던 것이다.


  마르크시즘과 카스트 제도는  양립할 수 없는 개와  고양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카스트제  아래서는 마르크스가 말한 '봉건적인  생산방식으로부터의 변화'
가 불가능하다. 카스트는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며 특정한  생산수단과 영구히 연결된다. 그러니  생산방식의 변화
가 적용될 수가 없다. 카스트  타파가 전제되어야 할, 좌파 운동을 다름 아닌 카
스트를 굳게 지켜야 할 브라만이 맡은 것은 우연일까?
  1930년대에 불가촉민의 지도자  암베드카르가 노동당을 결성하자 가장 강력하
게 반대한  사람은 앞서 언급한  로이였다. 그는 노동자만으로  구성된 노동당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친영적인 태도를  보인 로이는 공산당에서 축출되었
다. 계급 투쟁에 기반을  둔 노동 운동이나 급진적인 농민 운동에  가장 크게 반
대를 한 인물은  역시 지배층에 속하는 마하트마 간디였다. 간디는  농민과 노동
자들이 물리력,  즉 폭력에 의존하는 것을  자살 행위라고 막았다. 마르크시즘은 
결국 간디즘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간디와 그가 이끈  '인도 국민회의'는 계급간의 불화를  화해, 조정하는 통일적
인 이슈를 강조했다.   간디의 이상 사회는 '계급이 없는 사회'였지만, 간디는 그 
사회가 물리력이 아닌 유산계급의  자발적인 부의 이양을 통해 이루어지길 기대
했다. 계급간 갈등이 아니라 '계급간 협력에  의해 계급이 없는 사회를 이룩한다'
는 논리였다.  과연 실현 가능한 꿈인가?  이쯤 되면 투쟁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희미해져버린다.
  해방 후, 인도에서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지방은 벵골,  케랄라, 트리푸라 3개 
주이다. 이들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다른 지방보다  나은 생활을 누리는가? 대답
은 '그게  아니올시다'. 트리푸라는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가난한 부족민이 
다수를 이루고 있고  벵골이나 케랄라도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방으로 분류된다. 
이 지역  최하층민들의 생활은 혁명은커녕  개선도 이루지 못한  상태다.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가 '수고하고 짐진 자'를  보살피는 곳이 바로 벵골 지방이
다.
  벵골은 수많은 종교적 축제가 판을 치는  곳이다. 칼리, 두르가, 사라스와티 등 
여신을 숭배하는 행사가  줄을 잇는다. 좌파 정권이 민중의 아편인  종교를 장려
하고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아편에 취해  몽롱해진 사람들은 정치판에서도 유용
한 모양이다. 지난  20년간 벵골의 주수상으로 장기 집권하고 있는  조티 바수는 
전형적인 브라만으로 1년에 한 번씩 영국에서  화려한 휴가를 즐긴다. 또 현존하
는 인도의  가장 유명한 마르크시스트 남부드리파스는  인도 최고의 보수집단인 
남부드리 브라만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헨리 키신저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염두에 두고 '도미노 이론'
을 주장했다. 한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그 인근도  연쇄적으로 공산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벵골, 케랄라, 트리푸라와 인접한  지방들은 키신저의 논
리에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3개 주의 인구 구성비이다. 케랄라
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등 인구의 45퍼센트가  비힌두이다. 벵골 인구의 30퍼센트 
가량은 무슬림과 시크, 기독교인이며, 이슬람국 방글라데시의 이웃인 트리푸라도 
무슬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평등'을 내세우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이 많은 지역에서 공산당이 득세한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반면 힌두 인구가 압도적  다수인 오리사나 비하르는 지리적으로 벵골의 이웃
사촌이고 경제적으로도 낙후한 지방이건만 좌파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다. 브라만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힌두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방에서는 좌파 운동
이나 공산주의가 영 맥을 못추는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말은 인용해보자. "아랍, 투르크, 타타르, 무굴은  인도를 침입
했지만 곧 힌두화되었다. 영구 불변하는 역사의  법칙에 따라 야만적 정복자들이 
우세한 문명을 가진 피정복자들에게 도리어 정복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도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했지만 그 자신의 '이즘' 역시도 아랍이
나 무굴처럼 인도 속에 흡수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그 좌파 학자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위선에 분
개한 나도 내  나름의 결정타를 날려보냈다. 미국의 식민지를 걱정하지  말고 인
도의 내부적  식민주의나 제대로 보라고. 그러나  내 말은 금세 더운  대기 속에 
흡수되어 가벼이 사라져 버렸다.

  원수를 사랑하다
  내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님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분
이다. 교수님의 남편은  인도 중앙정부의 차관을 지냈고 정년퇴직 후에  역시 캠
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님은  전형적인 인도 미인인  두 딸을 
두었는데 각각  캠브리지와 옥수퍼드에서 석, 박사학위를  마쳤다. 두 딸은 모두 
저명한 장학금을 받아서 신문지상에 보도되기도 했다.
  나는 그 교수님  댁을 방문하면 마치 영국인 가정에  와 있는 느낌이 들곤 했
다. 가구 배치는 물론  전반적인 집안의 분위기가 보통의 인도 가정과는 달랐다. 
가족 구성원의 자유주의적인 생각과 태도도 다분히  영국적이었다. 20여 년 넘게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돌보는  남자는 마치 영화 <남아 있는 나날들>에 나오는 
영국인 집사처럼 단정하게 차려입고 집안을 주름잡았다.  영어는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지만.
  간디와 네루는 세계가  인정하고 보증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땄고 영어로 자서전을 썼다.  영국 총
독과 웃으면서 악수하고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정체성
을 '동양과 서양의 혼합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이 친영파나 개량주의자로 몰리지 않은 게 이상한가?
  말콤 무거리지는  인도인을 가리켜 '살아  있는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말했다. 
인도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 네루에게는 '인도를 통치한 마지막 영국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실  서구화된 도시의 엘리트층은 나의  지도교수처럼 아직도 
알게 모르게 영국식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는 개인적인 스트레스도 사회적인 눈총도 없다.
  사실 내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고 그것에  적대감을 가지기는 어렵다. 지도교수
의 가족이 영국을 향해 삿대질을 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영
국을 대하는 인도인의  태도에는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세
월이 가면 미운  감정은 잊혀지지만 사랑은 남는다. 인도인의 가슴에  자리한 영
국에 대한 감정도 그런 것일까?
  식민 지배와 피지배의 과거가  있는 국가간에 존재하는 이러한 관계는 전세계
에서 유일무이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미움을  낳는 법이
고 더욱이 피지배자는 복수의  칼을 갈고 닦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와 일본, 인도
차이나와 프랑스,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관계를 보면 인도의  유별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우리의  총체적인 반일감정을 대입해보면 인도인의  태도는 아
예 비상식적으로 보일 정도다.
  그대는 '영국의 식민통치가  온건했으니까'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러나 고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머리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영국인 통치자'라고 
불린 네루는  9년, 지극히 인도적인  분위기의 마하트마 간디는  8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물론 맞고 발로  차이고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 말이다. 시민 불복종운동
이 전개된 직후에는 한꺼번에 6만 명의 시민이 투옥된 적도 있었다. 소설 <암굴
왕>에 나오는 것처럼  인도양의 고도에 세운 감옥에 독립투사를  수용한 사람들
도 세련된 '영국 신사'였다.
  영국의 통치가 온건하지도 않고 또 결코 '은혜'와 '축복'이 아니었다는 점은 이 
외에도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근이다. 영국이 인도에 오
기 전에는  대기근에 관한 기록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이 발을 
디딘 이후 기근은  종종 찾아왔고, 1943년 벵골 지방에서는 2백만  명이 굶어 죽
었다. 인도의 부가 해외로  유출된 게 주요 원인이었다. 1930년에 영국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의 4분의  1은 인도에 투입되었다. 물론 인도에서 근무한  영국 관리
들의 봉급과 연금  지급은 처음부터 식민지 인도의 몫이었다. 영국은  참깨를 쥐
어짜듯 인도를 쥐어짜 이득을 챙겼던 것이다.
  영국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운  계획도시 뉴델리에 있는 '인도
의 문'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8만여 명 인도 청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뿐인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인도군은 지배국 영국
을 돕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인도군은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20여만 명이
었으나 전쟁이 끝난 1945년에는 그 열  배인 22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전쟁기간 
동안 소요된 영국의 국방비도 절반은 인도가 떠맡은 짐이었다.
  이 열불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영국을 '미워 미워 미워'하지 않는 이
유는 영국  통치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구를 이끌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인도는 영국에 모종의 빚을  졌다고 간주하고 있다. 영국이 
도입시킨 의회제도, 철도제도, 교육제도를 인도는  고맙게 생각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산업발전의 기반을  다진 것에도 좋은 점수를 준다. 각종  제도와 정책
을 도입한 식민 정부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결과적으로 
인도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어와 반영운동이  인도를 통합
시켰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인의  이 어정쩡한 태도를 '영국 제국주의가  뿌린 독이 서
서히 퍼져서  그 해악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국이 인도와 
인연(악연?)을 맺은 것은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발을 디딘 1600년이었다. 평화롭
게, 보다 엄밀히 말해서 수동적인 저자세로  무역에만 종사하던 영국은 1756년에
야 동부지방에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갖은 음모와 술수를 동원, 세를 불리고 
늘린 영국이 인도에서 떠난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1947년. 실로 긴 세
월이었다.
  위 주장을 다르게  해석해보자. 독이란 원래 재빠른 효과를 기대하며  쓰는 것
이다. 두 세기나 썼지만 별  볼일 없는 독이 어찌 독이겠는가. 사실 인도에서 영
국의 존재는 수적으로 취약했다. 1931년, 인도에 거주하던 영국인은 겨우 16만 8
천 명이었고 그  중 6만 명이 군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인의 협력 없이는 
식민 통치란 불가능했다. 영국이 꽂은 식민주의  독침은 협력자 소수를 대상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다름 아닌  그 계층, 즉 서구화에 지식인 협력자들이 반영운동
의 주축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발등은 늘 믿는 도끼에게 찍히는 법이다.
  340개의 방이 딸린  영국 총독의 관저에는 현재 인도 대통령이  살고 있다. 꽃
이 만발한 2월,  대통령궁의 무굴식 정원은 보름 동안 국민들에게  그 화사한 모
습을 공개한다.  아름다운 정원의 풍취와 향기를  함께 즐기기 위해서다. 마지막 
총독이 거주하던 당시의 정원사가 무려 418명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정원의 
새를 쫓는 아이들만 50명이었다니  인도에서 누린 영국인의 호사를 짐작할 만하
다.
  그래도 삶을  달관한 인도인은 총독관저, 국회의사당,  정부 청사 등 영국인이 
세운 건물 어느 하나도  부수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 기념관도, 영국 총독이나 
그 부인의 이름을 딴 여러 학교나 대학의 간판도 그대로 고스란히 걸려 있다.
  극과 극이 통하듯이  절대 부정은 절대 긍정과 통하는 것이  아닐는지. 사력을 
다해 과거 청산을 부르짖는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떨치지 못하는 자신을 '눈 가
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200년이나 존재한 영국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인도의 
과거, 인도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역사 세우기가 아니라 
결국 역사 파묻기라는 결과를 낳는다. 내 안의  천사나 악마도 결국은 나 자신의 
일부이고, 찬란하게 빛나는 역사도 암울한 오욕의 역사도  모두 내 경험의 한 장
을 이루는 것. 인도는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
  자, 맛있는 이야기로  끝을 맺자. 해방된지 50년인 오늘, 인도는  옛 지배자 영
국인들의 입맛을 꽉 잡고 있다. 영국의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인도 식당은 1997
년 초 현재 약  8천 개. 런던에 있는 인도 식당만도 3천  800개로 본거지 델리와 
뭄바이에 있는 식당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이다. 식당을  안내하는 지도까
지 나와서 방황하는 입맛을 인도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입맛에는 쌀쌀하기  그지없는 인도가 은근슬쩍 인도 음식의 세계
화를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인의 70퍼센트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인
도 식당에서 카레를 맛본다니 놀랍지 않은가. 메이저 총리도, 이혼한 다이애너비
도 인도 식당의 단골 리스트에 올라 있다.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포장된 인도 음
식도 상당한 양에 이른다. 이제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음식과 바꾸겠다는 할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지배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그리고 역사는 돌고 돈다.

  비동맹의 동맹
  인도에서 가장 놀란  일 중의 하나는 외국인 학생, 특히  제3세계에서 온 유학
생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유학을 온 학생은 부지기수
이고 예멘이나 쿠바, 라오스 등지에서 온 친구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런데 이
상한 것은, 이들  대다수가 인도 정부의 장학금을 받는 수혜자의  입장이건만 인
도 알기를  뭣같이 아는 것이 아닌가.  시건방진 태도로 일관해서  제3자인 내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좋은 일 하고 뺨을 맞는 격이랄까.
  제3세계의 지도국을 자처하는 인도의 가부장적인 아량이 이렇게 여지 없이 박
살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들
이 이 땅에서 겪는 좌절을 생각해보면 인도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백인한테는 본전도  못 건지는 우리가 필리핀이나 네팔에서 온  산업 연수생
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당히 우리 정부의 장
학금을 받고 한국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제3세계의 학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종차별에 얼마나 냉가슴을 앓는지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으리라.
  인도의 상황도 우리와  비슷하다. 인도인이 아프리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경멸적이다. 얼굴빛이 누런 못생긴 나는  대우를 해주면서 자신들의 갈색 
피부보다 짙은 색을 가진  이들은 용납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어디 인도뿐인가. 
백인에 대한 우리의 짝사랑도 불치의 병이거늘.
  인도에 있는 외국인 학생들은 에이즈 문제와  관련해서도 수모를 겪어야 했다. 
에이즈의 위험성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면서 인도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좋은데, 만만한 대상이  유학생이었다. 장기간 거주하면서 인도인과 성관계를 가
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여 유학생들에게 에이즈  검사를 의무화한 것이다. 외
국인 학생과 소문나게 연애를 하던 정치학과 여학생도 기숙사 사감의 특별 지시
로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인간적인  모욕이라고 울고불며 야단이던 그녀의 
모습이 만화처럼 희화적이었다.
  수백 만에 이르는 외국  관광객들의 하룻밤 풋사랑은 접어두고 캠퍼스나 급습
하다니, 정부의 생각은 어디나  늘 이렇게 고루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에이즈 검
사확인서가 없으면 입학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재학생들도 기숙사에서 쫓겨
나는 판이니 쭈뼛쭈뼛 검사실로 향할 수밖에.
  수치감을 누르고  검사를 받으러 가보니 유학생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검사를  하는 담당자들은 이미  보균자나 다름 
없다는 듯 아프리카 학생들을 멸시 어린  눈길로 대했다. 학생들은 인종차별이라
고 몇 차례나 데모를 벌였지만 어느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떳떳하면 
왜 검사를 못  받아?" 누군가 무심히 던진 그  말은 비수가 되어 그들의 가슴에 
꽂혔다.
  사실 나 역시 편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다. 이미 한 명의 아프리
카 학생이 에이즈 보균자로 밝혀져 본국으로 추방된 터라 검사실에서 그들을 보
는 내 가슴은 두근두근, 순식간에  100근을 오버했다. 주사바늘은 새것인지, 혹시 
다른 사람과 샘플이 바뀌는 건 아닌지 등등,  새가슴으로 온갖 조치를 취하고 돌
아서는 마음 한구석엔 나도 별 수 없다는 자괴감이 일었다.
  북부의 어느 도시에서는 흑인 학생과 인도 학생 간의 마찰이 심각한 사회문제
로 발전한 일도 있었다. 아프리카 학생들은 대부분  본국에서는 배경 좋고 돈 있
는, 소위 뼈다귀 있는 집안  출신들. 결국 인도는 장래 인도에 비동맹이 될 인사
들을 돈 주고 키우는 셈이다.
  '비동맹' 그리고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하는 인도의 현실은 이렇듯 이중적이다. 
비폭력과 공존의 나라 인도는  분단 이후 4반세기도 안되는 기간 동안 파키스탄
과 세 차례나 혈전을 벌였다. 독립 당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독자노선을 꾀
하던 하이더라바드 왕국은 네루가 보낸 군대에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인도의 마
카오라 불리는 포루투갈령 고아도  인도군의 비평화적인 압력 아래 인도로 명찰
을 바꾸어 달아야 했다.
  오랫동안 제3세계 비동맹의  맹주였던 인도의 외교 철학은 '굿이나  보고 떡이
나 먹읍시다'인가? 자, 이제부터 인도가 굿판에서 떡 먹은 이야기를 해보자.
  '비동맹'은 냉전시대 핵무기를 소유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제3자가 취하는 이성
적인 처세법이었다. 이는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에서  드러나는 정신, 즉 '다른 사
람이 싸우는  걸 구경만 하고 거기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자. 또는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부터 내 이익을 추구하자.'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입장이다. 줏대를 자
랑하는 비동맹 인도는 미국과  구소련이 벌이는 냉전의 굿판에서 슬슬 떡고물을 
챙겨 주머니를 부풀렸다. 냉전체제가 사라진  지금도 제3세계에서 인도의 말발은 
여전히 위력을 지닌다.
  본래 비동맹의 강점은 도덕적  우월성이다. 냉전체제에서 비동맹국가는 동맹이
라는 미명 아래 우방국을  좌지우지하는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
난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친구가 없을지라도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건 안 된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그 비동맹의 선두주자였던  인도가 남아시아세 패권을 자랑하다니,  이런 모순
이 어디 있는가.  제국주의를 견제하는 제3세계의 호위병이 정작  또다른 제국주
의의 마수를 뻗치다니. 그 이중적인 얼굴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자.
  먼저, 방글라데시. 해방군을 조직하여 파키스탄으로부터 자치운동을 펴던 방글
라데시의 독립은 전적으로 인도의 공이다. 파키스탄과  동맹을 맺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벵골 만에 보내 인도를 위협했지만 배짱이 
두둑한 인디라 간디는 파키스탄과  한판 전쟁을 벌이고 방글라데시를 수렁 속에
서 건졌다.
  이렇게 하여 인도에 적대적인  파키스탄 대신 들어선 가난하고 허약한 방글라
데시는 인도의 만만한  이웃이다. 독립의 큰 빚을 진 방글라데시가  빚쟁이 인도
에게 꼼짝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인도의 입김이 서리가  되어 내리는 나라가 또 있다. 히말라야  산속에 위치한 
두 왕국, 네팔과 부탄이다. 이 두 나라는 인도를 통하지 않고는 바깥세계와의 접
촉이 불가능하다. 물자  공급도 전적으로 인도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1989년, 인
도를 무시하고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려던 네팔은  괘씸죄에 걸렸다. 인도는 부
분적인 경제 봉쇄령으로 네팔을 심각한 경제  위기로 몰아넣었다. 국민생활이 파
탄에 이르자 결국 네팔은 두 손을 들었다. 뽀빠이, 살려줘요!
  오늘도 가난한  네팔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인도 땅으로  몰려든다. 인도에서 
생의 풍파를 몸으로  때우는 네팔 출신의 매춘녀만해도 20만 명이  넘고, 제국주
의 시대 영국인이  가장 선호하던 '애보는 아줌마'도  네팔 여성이었다. 여기저기
서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네팔인도 허다하다.  이러니 네팔 역시 인도
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1962년, 중국과 전쟁을 치러 톡톡히 망신을  당한 인도는 2천 킬로미터에 이르
는 긴 국경을  맞댄 중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라자스탄의  사막에서 핵실
험을 한 것은  중국의 핵실험에 대한 자존심의 표현이었고, 네팔의  움직임에 과
민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5년, 히말라야 산중의 콩알처럼 작은 나라 시킴 왕국이 인도에 복속되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킴을  안전하게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인도가 칼
을 들었던 것이다. "강간이야!"  시킴 왕국 출신의 영문과 선배는 인도의 병합을 
이처럼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결국 힘이  없으면 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며 씁쓸
해했다.
  인도의 위상은 1987년부터  스리랑카에 파견한 인도 평화유지군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스리랑카의 동북부의 인도 타밀나두 주와  강한 연대감을 지닌 타밀족이 
스리랑카로부터 분리주의 운동을  펴는 곳이다. 힌두 타밀인과  불교도 싱할라인
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닫자 당시 인도 총리 라지브 간디가 적극적으
로 중재에 나선 것이다.
  인도와 스리랑카는 협정을 맺고 한동안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스리랑카의 반발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아직도 둘 
사이의 갈등은  진행형이다. 사건의  전모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스리랑카인이 
연루된 1990년의 라지브 간디 암살은 이 문제와 관련이 있어보인다.
  인도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  몰디브도 인도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 1988년, 
몰디브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인도는 내정에 개입하여  그 음모를 좌절시켰다. 이
때 세계의 경찰  미국은 남의 나라 제삿상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떠든 
인도를 공개적으로 지지, 남아시아에서 인도의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인도는 군사적인 면에서  중국에 버금가는 아시아의 패권국이다.  해군력도 막
강하다. 라이벌 파키스탄을  의식한 군사력 증강이 한 몫을 했지만  이미 파키스
탄은 인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과거 우리와 북한이 운동경기라도 벌이면, 우
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분단의 상처를 지닌 인도와 파키스탄의 라이벌 의
식도 우리의 과거에 못지 않다.
  그런 파키스탄이 미국과 동맹을 맺자 비동맹 인도는 여보란 듯이 구소련과 협
약을 체결했다. 비동맹국이  동맹을 맺는 게 이상하다고 비난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인도의 비동맹에 비동맹 입장인 파키스탄이 있으니까. 아무튼 인도는 구
소련과의 협약 덕분에 사회주의 체제 몰락 이전의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상당
한 무역흑자를 보았다.
  인도는 과거 유엔에서도 구소련 쪽으로  기울었었다. 구소련이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해도 침묵을  지켰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세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라도 '난 비난이 뭔지 몰라요' 하는  입장을 취했다. 구소련
이 사할린  영공에서 대한항공의 007기를  격추했을 때도  마찬가지. 비난보다는 
차라리 기권이라는 비폭력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은 또다른 폭력이 아닌가.
  냉전의 종식과 구소련의 해체로 비동맹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파키스
탄에 대한 인도의 비동맹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오늘날 인도는 남아시아 
여러 국가들로 구성된 '남아시아 지역협력  협회'에서 목청껏 발언권을 행사한다. 
이제 굿도 벌이고 떡도 먹겠다는 속셈인 인도는 강대국을 열망하고 있다.
  인도가 '지배적 위치'와 '평화로운 공존'을 이룰지는 미지수이다.

3. 신들의 나라, 인간의 나라

  강대국 미국은 코카콜라와 IBM을 수출한다.
  제3세계 인도는 구원과 평화를 수출한다.
  미국은 물질주의 천국, 아니 지옥.
  인도는 정신주의 요람, 아니 끝.
  인도의 이미지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무래도 종교사상일 것이다. 아
득하게는 중국의 법현과  현장,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 어
느 낯선 거리의  여인숙 창 너머로 사람들을  내다보며 삶의 허망함으로 되짚을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인도에는 늘 이방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는 반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입한 적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 수많은 종교가 일어났지만 
바다나 히말라야 너머로 선교사를 보낸 경험도 없다.  그 인도가 지금 큰 소리로 
정신과 영혼을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적어도 <배꼽>을 쓴  라즈니쉬는 기억하시겠지? 그와 같은 인도의  구루(정신
적 지도자)들은 영혼이 시린 서양인들을  위해 구원의 힌두교를 팔고 있다. 그들
이 차린 구원의  슈퍼마켓에는 먹기 쉽게 피자조각처럼  잘 포장된 신, 사랑, 요
가, 명상, 채식주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돈을  내고 집기만 하면 곧 그대의 것
이 될 듯이.
  그들은 정신이 '헝그리'한  물질주의자들에게 물질을 받고서 그 대가로 구원을 
판다. 수백 만 외국인  신도를 포함, 무려 5천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곱슬머리의 
살아 있는 신, 사이 바바를  보자. 비행기 활주로까지 갖춘 인도 남부의 그의 왕
국은 3조  7천억 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아가야'  아줌마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비틀즈가 방문해서 유명해진 '초월  명상'의 마헤시 요기도 1990년의 재산이 2
조 4천억 원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이다.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권의 책이 팔
린 바가반 라즈니쉬는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그의 에덴에 무려 99대의 롤스로이
스를 가지고 있었다.  자가용 제트기를 타고 여행하는 구루 마하라지와  특급 호
텔이 울고 갈  만한 훌륭한 아슈람(종교적 은거지, 공동체)을 지닌  '시다요가 운
동'도 모두 인도 출신이다.
  이 인도의 사부님들은 현대의  거친 바다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의 등
대가 되어주고 그  대가를 추수한다. 물질을 받고서 산란한 마음에  평화를 뿌려
주는 것이다. 이 구루들은 마치  서로 짜기나 한 듯이 서양의 과학과 사회, 정치
제도를 깎아내리고 정신에 기반을 둔 힌두 문명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높은 수치를 뽐내는 서양의  이혼율과 범죄율, 알코올 중독, 혼음 등은 인도의 
생활 방식이 우월함을  반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고, 영혼의  스승들은 추종
자들에게 물질주의를  포기하고 정신적인  생활을 추구하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돈은 많지만 마음이 불안한  헐리우드의 스타들도 인도의 사부님을 열렬하게 모
신다.
  지금은 남남이 된 돈  존슨, 멜라니 그리피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시다요
가 운동' 교주의 이름을 따 지었을 정도로 열성파였고, '시골길로 데려다 달라'고 
외치던 존 덴버도 그들의 '형제자매'였다. 대스타  마이클 잭슨은 뉴 에이지의 디
팍 초프라를 추종했다.
  인도에는 구루를 존경하고 추앙하는 전통이 있다. 그럼 구루는 누구인가? <베
단타 사라>를 보면, 구루는 '모든 덕을 이해하는 사람, 지혜의 칼로 악의 가지를 
치고 그 뿌리를 뽑는 사람이며 이성의 빛으로 죄의 그림자를 쫓고...... 신도의 부
모와 같고 친구와 적을 차별하지 않으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지만 그 상대
적인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구루는 우리말로 정신적  안내자, 지도자, 사부라고 해석된다.  원래 셈족 계통
의 종교인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는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지만, 인도에서 기
원된 종교는 모두 자신이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  그러나 혼자 구원을 얻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따라서 영혼을 이끌어줄 안내인이 필요하고, 여기에 구루의 역할
이 있다.
  해외로 수출된 새로운 힌두교는  바쁜 사회, 바쁜 사람들을 위해 즉각적인 '인
스턴트 구원'을 약속한다. 멀고  험한 길이 아닌 하이웨이 직행으로 모시는 것이
다. '하레 크리슈나! 하레 라마!'를  외치면서 맨발로 춤을 추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하라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없다. 그냥 존경하
는 구루를 믿고 따르면 족하다. 구루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헌신이 자기 해방으
로서의 구원이라는 원칙과 모순이 되면 어떤가.
오늘날의 구루들은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신도들에게 위안을 주고 방법을 
제시하는 심리 치료사와  비슷하다. 청교도적인 성적 억압을  해방하고 어머니의 
약손처럼 지친 심신을 쓰다듬는 그들은 타고난  카리스마와 위압적인 눈빛, 신비
감을 더하는 화려한  옷으로 무장하여 신도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
나 구원의 대가로 받는 물질에 집착한 결과 그들의 위신은 지금 땅에 떨어졌다.
  '프리 섹스'의 메시지를 전하던 라즈니쉬는 폭력과 부패로 인해 미국에서 추방
되었다. 인도 푸나시로 돌아온  그는 침실에 인공폭포를 들여놓고(그의 초능력이 
아니다) 호화롭게 살았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쓴 크리슈나무르티는 집
단 제 2인자의 아내와 맺은 불륜으로부터  25년이나 자유롭지 못했다. 기적을 창
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이 바바는 자기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지 못하고 도난
경보기의 힘을 빌어서 목숨을 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루를  의심하는 자보다는 믿는 자가 아직도 더  많다. 아
마도 허약한 사람들에게는 단번에  고통이 마비되는 기적의 진통제가 필요한 때
문일 것이다. 그 진통제로 역경과 절망이 해결되었을  때 그들은 더욱 열렬한 추
종자가 된다.
  인도에 갔으니 인도인이 되어보자! 나도 정신적인 생활을  추구하려고 온갖 폼
을 다 잡아보았다. 히말라야 산속에서 요가와  명상도 해보았고 특정 종교집단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해외에 수백 개의 지부를  가진 어느 종파는 나를 발판으로 
한국에 진출하려는 야무진 꿈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무능하고 또 무심했다. 기
대를 깨면서 그들이 내개 한 말, "유명한  무용가도 인도를 좋아했는데......" '네까
짓 게 뭘'이라는 의미겠지. 그러나 나는 홍신자가 아니고 나일 뿐이다!
  인도의 자존심은  정신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인도가 다른  세계에 끼친 
정신주의의 영향은 상당히  과장되고 일그러졌다. 헐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스타
들이 인도의 서양에서  구루를 추종한 것도 광고의 효과가 컸다.  서양에서 구루
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대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여성과 정신적인 방황을 겪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인도에서는  문맹자와 미신적인 사람들이 구루의  주요 추
종자이다.
  한 성인과 창녀가 서로 마주보는 집에 살다가  같은 날 죽었다. 놀랍게도 창녀
의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성자의 영혼은  지옥에 떨어졌다. 저승사자들은 착오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저승사자가 그 이유를 설명
했다.
  "성인은 늘 창녀를 부러워했어. 그 집에서 펼쳐지는 환락에 빠졌던 거야. 들리
는 노랫소리와 웃음소리에 마음이 흔들렸지. 그의 모든 감각이 그녀에게 쏠렸어. 
기도를 드리러 사원으로 가면서도 두 귀는 여자의  집을 향해 열려 있었다네. 반
대로 창녀는 지옥같은 곳에 몸을 담고 있지만  늘 성인을 떠올렸어. 성인의 모습
과 그 생활을 동경했지. 꽃을 들고 기도를  올리러 사원으로 가는 성자를 보면서 
더렵혀진 자신의 몸을 한탄했어."
  물질을 받고 구원을 파는 구루는 정신주의자이고,  돈을 버는 가난한 넝마주이
나 인력거꾼은 물질주의자인가? 정녕 그러한가?

  믿음의 박물관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 아디 샹카라챠리아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질문을 던
졌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왔는가?
  내 진짜 어머니는 누구인가?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샹카라와 같은 고상한 사람들은  미지의 진리를 찾으려는 욕구 때문에 믿음을 
가질 테지만 보통 사람들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다. 
인도인은 대개가 종교에 깊이 중독된 중증  환자들이지만, 그 대다수는 브라만의 
베다나 우파니샤드를 모르거니와 고상한 힌두 철학에도 깜깜이다.
  대신 인도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대상을 경애하고 숭배한
다. 더위,  정글, 몬순 등 험난한  자연에 둘러싸인 그들에겐  기대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인도인의 믿음은  '더블 플레이'가 아닌 '밀리언 
플레이'. 가히  박물관적인 그들의 믿음을 걸고  넘어져 미신이니 지조를 논하고 
싶은가?
  인도인은 각자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방식대로  지켜나가고 있을 뿐이다. 아일
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도 '각자의 종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파한  바 있다. 
구름 저편에서 빛을 발하는 고귀한 신이 미덥지  않다면, 내 주변에서 스스로 나
에게 선하고 악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숭배하는 것도 현명한 삶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인도인들은 악으로부터 마을을 수호하고 풍작과 번영을 가져오는 신에게는 경
배를 드리고, 가족과  마을에 재앙을 주는 신은 살살 꼬시고  달랜다. 가난과 부, 
번영, 재앙, 병, 죽음, 결혼, 농사, 자연재해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신의 영향  아래 
있다고 믿는 인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각종 숭배 의식과 의례 속
에서 살아간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북부지방의 농민들은 대개 힌두 성자  바바 하리다스를 
믿는다. 그들은 연못을 파고  청소를 하면서 성자의 영상을 떠올린다. 그를 숭배
하는 여인들은 저녁마다 흙으로 만든 등잔에 불을 밝히고 태어난 아이의 첫번째 
머리카락을 바친다. 한편  중요한 의식을 집전할 때는 또다른 성자  바바 부미안
을 먼저 기억하고 숭배를 드린다.
  수호신 삐르를 믿는 무슬림 여인은 힌두 여인들처럼 이마에 빨간 곤지를 찍는
데, 결혼하기 전에  그에게 노래를 부르고 숭배를 드리지 않으면  가족에게 불행
이 닥친다고 믿는다.
  인도인들의 소에 대한  숭배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
을 뿐더러 여러 의식에 쓰이는  우유와 버터를 생산하는 소는 그 오줌과 똥마저
도 소중하게 취급된다. 인도인들에게 쇠똥은 신상을  만드는 재료이자 오염된 것
을 정화하는 수단이다.  사실 로마시대에도 소를 죽이면 사람을 죽인  것과 마찬
가지로 처벌을 했으니 인도인만 별난 건 아니다.
  또한 열대 인도에는  어디를 가나 뱀이 줄줄이  사탕처럼 많고 그렇기 때문에 
그 피해자도 상당히 많다. 코브라에 물리면 웬만한  사람은 한 순간에 저 세상으
로 간다.  그래서 뱀이 두려운 사람들은  뱀이 숨어 있는 구멍을  찾아서 숭배를 
올리고 우유와 버터 등 뱀이 좋아한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바친다. 우리나라에서
도 그랬듯이 인도인들은  집안에 뱀이 나타나면 죽이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제공한다. 뱀을 숭배하는 힌두사원은 인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이번엔 나무 이야기를 해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 자라
는 것은 더욱 신성하다. 인도인이 나무를 숭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더
스 문명에서 그  흔적이 보이는 보리수 숭배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열
매는 없지만 아름다운 모습과 큰 키를 자랑하는 무화과나무 그리고 박하풀과 비
슷한 툴시도 숭배의 대상이다.
  브라만들은 자신들의 뜨락에  툴시를 심는다. 그들은 1미터 가량되는  이 풀의 
주위를 쇠똥으로  덮고 밤에는 등을  밝힌다. 이처럼 정성스레  툴시를 관리하는 
이유는, 가지는 죽은  사람의 머리맡에 두고 잎은 식후에 소화제로  씹는 신성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죄를  씻는 강물, 태양, 달도 숭배를 올리는  신적인 존재이다. 단식하
는 여성들은 달이나  해에게 물을 바친 후에야 단식을 멈춘다.  태양신 수리야는 
일찍이 베다에 등장하는데,  일곱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지상을 내려다
본다고 전해진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어야 곡식이  익으니 이는 농민들에게 소
중한 신이다.
  우리나라에도 점  보는 사람들이 허다하지만 점이라면  역시 인도인이 으뜸이
다. 인도의 점성술은  브라만이 철 따라 제삿날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별을 
관측하며 날을 정하고 모든 길흉을 점친 데서 비롯되었다.
  인도인들은 점에 대해  각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농부들은 언제  씨를 뿌릴 
것인가, 언제 트랙터를 살 것인가를 점을 보고 결정한다. 또 점쟁이의 조언에 따
라 아이의 이름을 짓고 학교에 갈 때를 결정하며 자식의 결혼할 때와 장소를 가
린다. 정치가는  후보등록을 하기 전에, 영화배우는  출연할 영화를 결정하기 전
에, 엔지니어는 다리를 건설하기 전에 기꺼이 점쟁이를 찾는다. 과학자도 실험실
이나 연구소의 문을  열기 전에 점쟁이로부터 한수 배우는 게  보통이다. 어쨌든 
점성술도 천문학의 일종이니  과학과 사촌이라고 봐주자. 이 세상 모든  것에 반
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믿는 인도인이 점을 보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기숙사 시절, 아래층에 수상학(손금보기)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친구가 있
었다. 그녀에게 난생 처음으로  내 손을 허락했는데, 그저 듣기좋은 말만 골라서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른손에는 현재의 생에서 겪는 경험이 드러나 있고 
왼손에는 전생의 결과, 즉  운명이 적혀 있다고 한다. 수상학이 점성술보다 인간
의 자유의지를 더 많이 인정할 뿐 아니라 정확도도 더 높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
었다.
  신을 늘 가까이 두고 싶은  인도인들의 바람은 자기 주변에 가까이할 수 있는 
대상에 신성을 부여하여  성물로 경배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암모나이트의 일종
인 살라그라마는 옛날  모든 브라만이 반드시 지니던  성물로 대를 이어 전해졌
다. 베다에는  살라그라마가 없는 브라만의 집은  묘지와 같다고 기술하고 있다. 
살라그라마를 닦은 물에  손을 담그면 죄가 씻어지고  그 물을 보존하면 집안에 
복이 온다고 한다. 네팔의 군닥 강에서 발견되는  이 성물은 비슈누 신의 구현이
다.
  인도에서는 새와 짐승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들이 무지무지하게 많다. 이방인
인 내가 그 심오한  마음을 어찌 알리오만은...... 인간보다 동물을 더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아침마다 새에게 모이를  주기 위해 몇십 리  길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곡식 낱알을  들고서 개미 구멍을 찾아 땅만 보고 걷는 
사람도 자주 눈에 띈다.
  델리 대학교 뒤쪽은  정글이다. 그곳에는 수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고 도
시의 정글에 갇힌 배고픈 원숭이를 위해 사람들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온다. 인
간과 유사한 원숭이를 신으로 받드는 사원은 인도 어디를 가도 쉽사리 볼 수 있
다. 긴 꼬리를  가진 원숭이 신 '하누만'은 무공해 자연식품만  먹기 때문에 숭배
자들은 바나나, 밥,  과일 등을 가지고 오는데, 그를 숭배하면  모든 악을 물리친
다고 한다.
  동물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힌두 신화에 맨 처음 등장하는  동물은 코끼리이
다. 시바 신의 아들로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 신은 올챙이  배를 한 장난스러
운 모습이다. 불룩  나온 배는 번영을 상징하고 풍작과 결부되며  구름과 친해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행운의 신이다. 큰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숭배를 올리는 가네샤 신은 특히 뭄바이를 중심으로 서부지방에서 인기가 높다.
  이 밖에도  지방과 카스트에 따라  다양한 믿음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믿음의 
대상, 또는 중개인, 수많은  스님, 성자, 사부님, 점쟁이도 있다. 힌두교라는  이름
으로 인도 전역에서 공통으로  숭배되는 주요 신과 여신을 주마간산격으로 살펴
보자.
  3억이 넘는 수많은 힌두  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3대 신은  창조신 브라마, 보
존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이다. 4개의  머리와 4개의 팔을 가진 브라마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고 인류의  운명을 주관한다. 4개의 베다도 브라마의 입에
서 나왔다고 전해지며, 지식의 여신 사라스와티가 그의 아내이다.
  보존의 신  비슈누는 이 세상에 방문할  때의 모습, 즉 환생할  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일곱 번째의 화신이 라마 신이고  여덟 번째 화신이 크리슈나 신이
다. 라마와 크리슈나는  각각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데 인
기 순위 1-2위를  다투는 신들이다.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은 붓다라고 한다. 
환생이 아닌 원래의  모습일 때 비슈누 신의 아내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의 
여신 락슈미이다.
  '람, 람, 람!' 인도에 있을  때, 나는 매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 소리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벼야 했다. 그것은 멀지 않은 힌두사원에서  들려오는 것
으로 라마 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신의 이름을 외우면 복을 받고, 라마의 이름을 
입에 담은 채  죽는 힌두는 즉각적인 구원을 얻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헤이, 람!"은 델리에  있는 그의 묘소에 
새겨져 있다. 간디의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는 아마도 우주에 용해되었으리라.
  조지 오웰의 <교수형>이라는 단편을 보면 교수형에 처하는 죄수가 죽기 직전
에 '람, 람,  람'을 수백 번 반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 이국 미얀마에서 이방인 
지배자가 갖는 심리적  갈등과 곤경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영국인 사형집행관은 
나지막하게 반복되는  그 소리에 몹시  긴장한다. 인도 친구들은  놀라거나 급한 
상황에서 '앗'이나 '엄마' 대신 '라마'나 '크리슈나'를 외쳐대 나를  놀라게 하곤 했
다.
  삼지창을 든 시바는 삶과 죽음, 생성과 파괴, 선과 악의 이중적인 역할을 맡는
다. 인더스 유적에서 발견된 인장에서 시바의 원형이  새겨져 있으니 수천 년 동
안이나 숭배를  받은 셈이다. 특히  남부지방에서 널리 숭배되는  시바는 춤추는 
신의 형상이다. 치담바람사원에는 삶과 죽음의 춤을  추는 시바의 100가지 춤 동
작이 조각되어 있다.
  인도의 모든 마을에는 사원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아니, 역으로 말하자. 마
을에 사원이 하나도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불행을 감당하겠는가? 어떻게든 위
안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불행한 자, 고통 받는 자, 가족을 
잃은 자들에게 믿음은  초자연적인 위안을 제공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숨겨
진 소망마다 감춰진 걱정마다 신과 신화가 연결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거친 삼의 
바다에서 살아남는다.
  나폴레옹은 '종교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살해하는 걸 막아준다.'라고 말했다. 
기댈 수 있는  신이 없다면 그것은 신과의 엄숙한 약속이  없다면 '지존파'나 '막
가파'가 여기저기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분의 불평등과 빈부 격차가 
극심하고 무쌍한 자연의 변화가  인간 존재를 무력하게 만드는 인도에서는 초자
연에 대한 희망과 절망에 대한 대안이 더없이 필요하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서 오는 것. 수많은 신이  내 편이고 눈
에 띄는 것마다 위안거리인 인도인의 마음이 평화로운 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
가.

  종교의 백과사전
  다음은 영국 주재 인도대사관에 근무했던 어느 일등 서기관의 경험담이다.
  그는 어느 날 세계 테니스계를 석관한 바 있는 유명한 여자 테니스 선수의 집
에 초대를 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주인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서기
관에게 물었다.
  "종교를 갖고 계세요?"
  "한번 맞춰보시죠."
  "물론 기독교인은 아니죠?"
  "예."
  "유태인도 아니고...... 음, 불교도군요?"
  "아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데요."
  "아, 알았다! 무슬림이군요?"
  "아직,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맞출 것 같네요."
  "아, 힌두요?"
  "드디어 맞췄습니다. 제 종교는 힌두교랍니다."
  그러자 테니스 선수는 뒤에 앉은 여자아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라든. 저 사람은 이슬람을 믿는 힌두라니까."
  이번에는 내가 TV를 보며 실소를 금치 못한 이야기.
  1991년,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암살을 당했을 때 그의 다비식 장면이  KBS 9
시 뉴스에 나왔다. 화장이 한창 진행되는 모습을  보며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던 
나는 순간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회교도 장례식'이라는 자막 때문이었다. 
힌두교는 화장을 하고 회교는  무덤을 만든다는 상식을 우리의 공영방송은 보기 
좋게 파괴한 셈이다.
  하긴 영국의 테니스 선수나  우리의 KBS가 헷갈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도
의 종교 역시 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이
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소수종교가  함께 모여 산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인도 종교의  면면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미는데, 여기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몇 종교를 간단히 살펴보자.
  '서울서 김서방 찾기'란  말이 있다. 델리 공항에  내린 한 미국인이 '델리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미스터 싱'을 찾았다.  "접니다." 미국인은 그 미스터 싱을 따라 
안심하고 관광을 즐겼다. 친절한 미스터 싱이 맨 나중에 준 선물은 왕창 바가지. 
'아니, 사람 좋은 정직한 운전사라던데......'  그제야 미국인은 델리에서 택시를 모
는 수많은 '미스터 싱'이 있다는 걸 알았다. 때는 늦었지만.
  북부지방에서 '미스터 싱'을 불러보라. 서울에서 "사장님!" 했을 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볼 것이다.
  힌두는 외모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지만, 시크교를  따르는 시크들은 한눈에 구
별이 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던가? 시크들은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절대
로 깎지 않는  장발계의 대부. 긴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서 큰 터번으로 감싼다. 
천오백만 명이 넘는  그들의 성씨는 모두 '싱',  '싱', '싱'. 결혼한 여자는  '미세스 
싱'이 아니라 모두 '카우르'가 된다.
  구루 나낙(1469-1539)이 세운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장점을 따서  만든 
종교로서 유일신을 믿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 힌두처럼 사람이  죽으면 화
장을 하지만 카스트를  거부하고 갠지스 강을 순례하지도 않는다. 모두  같은 성
을 갖는 것도 카스트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다.
  시크는 근면하기 때문에 거지가 없다.  <시크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도 
나와야 할 정도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  많은 거지들은 대개 힌두나 무슬림이
다. 시크가 다수인 펀자브 주의 연평균 주민소득은  전체 인도 평균소득의 두 배
나 된다. 시크의  비율은 인구의 2퍼센트이지만 이들이 인도에서  차지하는 부의 
비율은 10퍼센트가 넘는다. 시크는 농업뿐 아니라  기계공작과 다른 사업에도 뛰
어난 재능을 보이는 데. 부를 축적한 그들은  인도 사회에서 막강한 구매력을 과
시하는 신흥부자들이다.
  한동안 펀자브 지방은 시크의 분리주의 운동으로  테러와 공포의 장이었다. 수
많은 희생이 따랐고 그 와중에 인디라 간디  총리가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물론 
외국인의 출입도 허용되고 거의 평온을 되찾았다.
  인도에 갔다가 만약에  돈 떨어지고 담배꽁초까지 떨어지면 시크  사원(구루드
하라)을 찾아가라.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는 시크 사원에서는 거저 먹여주고 재워
주니 공짜를 좋아하는  '대머리'들도 찾아갈 만하다. 나도  델리에 있는 사원에서 
공짜밥을 먹어보았는데 공짜는 역시 맛이 달랐다.
  시크 못지않게  돈 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예언자 차라수트라를 
따르는 그들은 8세기에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해를 건
너 인도 서해안으로 도망친 배화교도(조로아스터교도)의 후예들이다.
  당시 이미 인구가 초만원이었던  구자라트의 왕은 이들의 왕림이 전혀 탐탁치 
않았다. 어떻게 왕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고민하던 배화교도들은 구자라트인
이 즐겨 마시는 우유  한 잔을 들고 알현을 청했다. 그 중 한  명이 우유가 가득 
담긴 잔에  금화 한 잎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한 방울의 우유도  흘러 넘치지 
않았다. 이 정성스러운  마술에 좋은 인상을 받은 왕은 그들의  거주를 허용했고 
인도에서 파르시라고 불리는 배화교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부지방에 정착한 파르시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은 집
단이다. 특히 인도  경제계의 거물 중에는 이  집단출신이 꽤 많다. 인도 최대의 
기업군 타타 그룹도 파르시인 타타일가가 세우고  키웠다. 파르시는 세월이 가면
서 다른 종교집단과 통혼을 많이 한 결과 이제 인구가 8만여 명에 불과하다.
  환경보호가 지상과제인 이즈음은 이들의  시체 처리 방식이 높은 점수를 받을
지도 모르겠다. 파르시는 지구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의 탑' 꼭대기에 있는 
철판 위에 발가벗긴 시체를  올려놓고 야자나무 위에서 졸던 독수리떼가 날아와 
며칠간 포식을 하면 남은 뼈는 철판 사이로  빠진다. 시체를 새에게 먹이는 이른
바 조장의 풍습이 지금도 대도시 뭄바이에서 시행되고 있다.
  인도 기독교의 역사는  서양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오래다. 일찍이  기원후 54
년에 예수의 제자인 성 토마스가 케랄라 지방에  왔다고 한다. 지리상의 발견 이
후 남미를 정복한 포루투갈인은 바스코다 가마의 길을 따라서 인도 서해안에 도
착했다. 이들은 양념 장사를  하며 기독교(카톨릭)를 전파하고 인도인과 섞여 살
았다.
  성 사비에르의  유해가 남아 있는 고아  지방에는 페르난데스니 세르반테스니 
하는 이베리아  스타일의 이름과 그에  걸맞는 외모를 가진,  포루투갈인과 인도 
여인 사이에서  난 혼혈이 많아  이국적이다. 이곳 여인들은  사리보다 스커트를 
많이 입고 생활 방식도 다른 지방과 달리 자유롭다.
  기독교는 인도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개종자의 수만 보아도 그렇
다. 초기에는 케랄라  지방의 상층계급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가진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기독교 개종자의 다수는 힌두 방식의 생
활을 거의 버리지  않은 낮은 계층의 불가촉민들이었다.  미조람이나 나가랜드와 
같은 일부 부족지방은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기독교인이 인구의  다수를 이룬다. 
케랄라는 인구의 4분의 1, 고아는 3분의 1 가량이 기독교인이다.
  인도에서는 수많은 종교가 생성, 도입,  발전, 통합, 소멸을 거듭해왔다. 오늘도 
한쪽에서 새로운 믿음이  싹트고 또 한편에서는 다른 믿음이 시들고  있다. 이렇
듯 다양한 종교들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아울러  모두 인도적
인 특성을 갖고 있다.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제 힌두교의 한 종
파처럼 보인다. 시크교도 마찬가지다. 시기와 질투가 없지는 않지만 외국에서 온 
이슬람교, 기독교,  배화교도 인도의 환경 속에  인도적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
다.
  기독교인이나 불교도는 물론 파르시  여인들도 힌두 여인처럼 주로 사리를 입
는다. 주고받는 인사도 '헬로우!'가 아니라  두 손을 합장하는 '나마스테'('그대 안
에 신에게 절을  합니다'라는 뜻) 스타일로 힌두식이다. 이렇듯 독특하게  변형된 
종교의 모습은 '다양성 속에  깃든 통일성'이라는 인도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
다.
  인도의 땅과 분위기는  무언가 정신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대도 한나절
만 인도를 돌아보고 나면 '사는 게 다  뭔가?' 하는 개똥철학자가 될지도 모른다. 
한 번 그렇게 빠져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무대로 돌
아와 그대의 몫을 연출하라.

  무소속은 힌두
  "신을 믿습니까?"
  "나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도 아니지요. 그냥 어딘가에  앉아서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입니다."
  유명한 환경론자 메다 파트카르의 인터뷰 내용이다.
  한 화가가 북부 인도의 농촌을 여행하다가  산자락에 있는 오두막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안에는 빨간 꿈꿈가루를 바른 돌멩이가 모셔져  있었다. 화가
는 농민이 숭배하는 그 돌을  사진에 담고 싶어서 마당에서 바구니를 엮고 있는 
주인에게 '그 돌을 밖으로  내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흔쾌히 응했고, 사
진을 찍은 화가는 돌을 밖으로  꺼내서 혹시 부정을 타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
다. "괜찮아요. 다른 걸 주워다 꿈꿈을 바르면 되니까요."
  남부지방의 한 마을. 인구 만 명의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3
일 동안 여우사냥을  나간다. 여우를 잡지 못하면 마을에 질병과  불행이 찾아온
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을의 사원에는 금동으로  만든 여우상이 수호신으로 모셔
져 있다. 여우에 대한 두려움이 여우를 숭배하도록 만든 것이다.
  여우를 잡으면 귀를  뚫어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달아주고 치장을  시킨다. 화
환을 목에 두르고 꼬리에 폭죽을  단 여우는 온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무도 당당하게, 사실은 신도들에게 끌려서 사원으로 행진한다. 모든 행사가 끝
난 새벽녘, 마침내 풀려난 여우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는다.
  땅이 척박한 구자라트의  한 마을. 7천여 명에 이르는 이  마을 사람들은 바르
다야니라는 여신에게 우유와 버터를 바친다. 제사에  쓰는 버터의 양이 자그마치 
2만 5천 킬로그램.  사람들은 이때 소원을 빌면 대부분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
다. 2천 년이 넘게 계속되어온 이 행사에  바친 엄청난 양의 우유와 버터는 그대
로 강으로 흘러간다. 정부나 경찰도 말릴 수가 없다.
  어쩐지 모두 미신처럼 느껴진다고?  무신 소리! 독신은 미신만큼 위험하다. 비
과학적이라고? 무신  말씀! 이 넒은 우주에서  과학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공식적인 분류에  의하면 앞에서 본  사례는 모두 힌두교에  속한다. 1991년의 
센서스에서 힌두교를  따르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82.6퍼센트,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수치는 전체 인구에서 이슬람교(11.4%), 
기독교(2.4%), 시크교(2%), 불교(0.7%),  자이나교(0.5%) 그리고 기타 종교(0.4%)
를 믿는 사람을 뺀 나머지 인구를 가리킨다. 즉  100-(11.4+2.4+2+0.7+0.5+0.4)=82.6이
라는 계산.
  그러니까 분명하게 '나 이런 사람이오'라고 내세우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식
구에게는 싫든 좋든, 본인이 긍정을 하든 말든  그냥 힌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
이다. 인도의 통계는 늘 이렇게 아리송하다.
  성경 한 줄  읽지 않고 평생 교회 한  번 나가지 않아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가? 알라 신이나  예언자 마호메트를 믿지 않으면서도  무슬림이 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올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죽을  때까지 힌두사원에 가지 않아도, 
힌두의 성서가  뭔지 몰라도 얼마든지 힌두가  될 수 있다. 믿지  않아도 힌두가 
되고, 믿는 자는 물론 '순, 진짜, 참' 힌두다.
  대다수 인도인은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 나를  아주 이상하게 생각한다. 친구들
은 '그래도 뭔가를  믿을 것'이라며 끈질기게 물고늘어지곤  했다. '믿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사기를 쳐도  부모님의 믿음까지 따지면서 소속을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인도인은 어떤 형태든지 어떤 방식이든지 신을 믿기 때문이다.
  브라만임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내 친구 랄리타는 아침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가네샤  신 사진 앞에 우유와  바나나를 한 개씩 올렸다.  루파라는 친구는 
벽에 걸어놓은 힌두 성인의 사진에  화환을 걸어놓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에 열심히  우러러 모셨다. 또 같은  과 친구 생기타는 원숭이를  위해 식당에서 
주는 바나나를 모았다.  이처럼 힌두교는 인도인에게 일요일이나  수요일이면 기
억하는 특별한 의례가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이며 삶의 한 방식이다.
  힌두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무슬림이었다.  인도를 통치한 무슬림 지배
자들은 자기들과 구분하여 인도(옛  이름은 힌드)에 사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몽땅 힌두라고 불렀다.  전체인구-무슬림=힌두였다. 그 뒤를 이어 인도
를 지배한 영국도 무슬림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그들 이외의 인구를 힌두로 뭉
뚱그렸다.
  영국의 '분리통치' 정책이  더욱 교묘해지자 힌두교와의 차별화,  즉 다른 종교
를 주장하여 소수종교로서 이득을 보려는 집단이  생겨났다. 그러자 인도 민족주
의자들도 이슬람교,  기독교 등 힌두교와  구별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인구를  힌두라고 불렀다. 분명하게  '이거다, 저거다'라고 말씀을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아서'  단일체로 간주, 민족주의 운동의  세를 불리려는 의도에
서였다.
  불교나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시크교를 믿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
지 정의를  내리기가 쉽다. 이들 종교는  붓다, 마호메트, 구루  나낙처럼 종교의 
창시자나 예언자가 구분지어져 있고  성경, 코란, 그란트 사힙과 같은 분명한 성
서가 존재한다. 십계명처럼  신자를 위한 행동규범도 있고 잘 조직된  교회도 있
다.
  반면 힌두교는 종교의 창시자나  예언자가 없음은 물론 자신을 힌두라고 생각
하는 사람에게 '하라, 하지 말라'는 정확한 가이드 라인을 주지도 않는다. 힌두교
에서 성서로 여기는 베다와 푸라나를 읽은 힌두는,  아니 그 이름이라도 아는 사
람은 5퍼센트밖에 안된다. 일정한 예배의 형식도 없는 자유 그 자체이다.
  아마도 힌두교의 강점은 바로 이 '이름  붙이기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힌두교
는 삶의 의미와 방식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망라한다. 무신론자도 힌두, 
무슬림 성자의 묘당을  찾는 사람도 힌두이다. 쇠고기를 먹거나 죽은  이를 화장
하지 않아도 힌두라고 여긴다. 앞의 이야기처럼  여우를 숭배하거나 돌을 믿어도 
힌두에 포함된다.
  이렇듯  이질적이고  잡다한  생활방식을  모두  인정하는  힌두교는  기원전 
1500-500년경에 성립되었다. 중심  사상은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브라만 중심의 
브라만교이지만, 여기에 북부  인도에 존재하던 다양한 민간신앙이  결합되어 대
중을 이끄는 독자적인 종교이념으로 발전했고, 세월이  가면서 전 인도적인 성격
을 지니게 되었다.
  즉 힌두교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브라만교의 독선에 반기를 든 인도의 프로
테스탄트, 불교와 자이나교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한 지방에서 동
거를 해온 이방의 종교인 이슬람교까지도 포용한다.  자료를 보면 북부지방에 사
는 대두분의 힌두가 무슬림의 '삐르' 성자를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무엇이든  받아들여온 힌두교에는 헤브라이즘에서  볼 수 있는 
'정통'이나 '이단'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신이 존재하고 
그 수만큼 다양한 믿음을 인정하는 융통성이  바로 힌두교의 생명이요 진리이다.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꾀지 않고' '절대 순수는 단종'임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종
교다.
  지극히 합리적인 그대의 눈에는 그 많은 신의 종류와 숫자가 미개하게 보일지
도 모른다. 지조가 없다고  눈을 흘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의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믿는 인도인들에게는  신을 섬기고 진리를 깨닫는 능력이나 단계
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래 신은 하나이지만, 사람
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숭배되는 것이다.
  이처럼 천태만상인 힌두교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을  믿고 이
승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기독
교, 유태교, 이슬람교와 달린 힌두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기독
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외치면서 공동체의 발전을 기도하지만 힌두는 자기
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힌두는  구원이나 해탈도 나  스스로 이룬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신을 
만나고 진리를 찾고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서 떠들썩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힌두는 집이나  사원에서 개별적으로 
조용히 신과  대면한다. 따라서 힌두는  다분히 자기 도취적이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인도가 진보의 뒷전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윤회의 사슬 너머
  갠지스 강가에 한 성자가 살았다. 어느 날  강가에서 명상을 하던 성자의 손에 
무언가 따뜻한 물체가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바들바들 떨
고 있는 게 아닌가?  공중에서 빙빙도는 솔개가 그만 실수로 떨어뜨린 모양이었
다. 성자는 생쥐를 어여삐 여겨 예쁜 여자아이로 둔갑시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성자의 딸로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어느  새 시집 갈 나이가  되었다. 아내는 
사윗감을 구해오라고 날마다  보챘다. 성자는 딸에게 최고의  신랑을 구해주겠노
라고 아내에게 약속을 했다.  그는 태양의 신을 불렀다. "내 그대를 사위로 삼으
려 하오" 그리고 딸의 의향을 물었다. "아버지, 너무 뚱뚱하고  얼굴이 빨개서 싫
어요. 그보다 좋은 이를 구해주세요."
  성자는 태양의 신에게 더 나은 신랑감을 아느냐고 물었다. "성자여! 구름이 나
보다 강할 거요. 적어도 내 빛을 가리니까요." 성자는 구름의 신을 불러 딸의 동
의를 구했다. "너무 침울해보여요. 다른 신랑을 찾아보세요." 성자는 구름의 신에
게 그보다 나은 신랑감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산이 나보다 낫지요. 내 앞길
을 막으니까요.
  성자는 구름의 신이  추천한 산을 불렀다. 그러나 딸은 산이  나타나자마자 소
리를 질렀다. "아버지, 너무 몸집이 크고 이상해요. 다른  신랑을 구하세요." 성자
는 지치고 짜증이 났지만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보다 나
은 신랑감을 아시오?"  산이 대답했다. "쥐는 내 몸뚱이에  언제나 구멍을 낼 수 
있답니다. 그것을 보면 나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지요."
  성자는 쥐를 불렀다.  쥐를 본 딸은 환성을 질렀다. "아버지,  이 분이 바로 제 
신랑이에요. 저를 쥐로 바꿔주세요." 성자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마리의 
쥐가 정글로 사라진 후 성자는 발길을 돌렸다. "그래, 본성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 '운명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인도 사회의 불평등을 뒷받침하는 힌두의 세계
관을 몇 가지 알려준다. 하나는 '부대 안에  있는 것 이외의 것은 나오지 않는다'
는 유태인의  속담처럼 사람은 자기의  그릇을 타고난다는 믿음이다.  즉 인간은 
타고난 차이가 있고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고, 또  하는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
라 거듭 태어난다는 것, 즉 윤회사상이다.
  힌두는 죽음의 끝에  또다른 삶이 이어져 있고 그  삶의 끝에 또 다른 죽음이 
있다고 믿는다. 말을  바꾸면 태어난 모든 이에게 죽음이 필연적이듯  환생은 죽
은 모든 이에게 필연적이다. 인도 농촌의 한 여인은 '죽음은 어머니의 한쪽 가슴
에서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젖을 빨던 아이는 한 순간 
어머니의 가슴을 뺏긴 느낌을 갖지만 곧 다른  가슴에 매달리게 된다. 윤회도 그
와 같은 것이다.
  윤회란 죽음과  환생의 끝없는 순환이다.  힌두의 성서는 윤회를  영혼의 길고 
긴 여행이라고 설명한다. 이  여행은 이승에서의 삶에 의해 결정된다. 착한 일을 
한 자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마음과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벌레나 새
가 된다. 따라서 현재의 삶을  보면 전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고, 또한 현재의 
삶은 내세의 청사진이다.
  이 단순한 산수에 의하면 일단  저질러진 인간의 행동은 그 누구도 어쩔 도리
가 없다. 물체가 구부러지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수
반한다. 이것은 부모도 사랑하는 애인도 도와줄 수  없는 오직 나 자신의 문제이
며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성경의 말씀과  비슷하다. 다만 그  거둠이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다음 생에 이루어지는 것일 뿐.
  이것이 바로 카르마(업)이다. 카르마는 힌두 사회의 수많은 불평등을 정당화하
는 개념이다. 천하게 태어나 한평생 변소  청소부로 살아가는 불가촉민은 묵묵히 
'전생에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 거야. 뭔가 끔찍한 일을 했
음이 분명해.'라고 생각한다. 브라만과 부자는  그들의 잘난 카르마를 당연시여기
고, 아픈 사람과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가 아저씨도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고 현
재의 상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희망은 없는 것인가? 한  번 청소부면 영원한 청소부인
가? 머리가 나빠 지지리도 고생하는데 내세에도 그 다음 생에도 계속 깡통 소리
를 들어야 하는가?
  사람은 약하지만  동시에 아주 영악한  존재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의 약속이  없다면 누가 윤회를 믿겠는가?  그러므로 윤회사상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본성과 더불어 개인의 노력과 자유의지도  인정한다. 나름
대로 약간의 처방전을 마련한 것이다.
  윤회사상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다르마)를 다하면 카르마가 좋
아진다고 유혹한다.  의무를 다하는 불가촉민은  브라만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불가촉민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다르마란  개인이 속한 
문화와 살고 있는  시간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 달렸다. 즉, 한  개인이 가족, 
친족, 카스트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특별한 '자리'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청소부로  태어난 사람이 아무 불평  없이 최선의 청소부가 되는 
것, 그것이  자신의 다르마를 따르는 것이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장사꾼은 정치에  곁눈질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  강도질이 주업인 
터기 집단은 훌륭하게(?) 강도질을 해야 한다!
  다르마는 생의  단계에 따라서도 다르다.  학생은 공부가 최선이고  한 집안의 
가장은 '집을 짓고 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는' 가장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최선의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힌두의 세계관은 전생의  결산서와 현생의 법칙 다르마를 결합시켜 한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전생의 결산서는 바꿀 수 없고 이번  생의 다르마는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와 역할을  다하는 것이므로 결국 힌두는 개혁이나 변화에 
둔감한 보수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다. 다르마는 기존 사회에서 각  개인의 의무
와 역할 등을 규정하고 개인과  사회를 단단히 붙이는 시멘트 역할을 하므로 사
회로부터의 일탈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뉘라서  알리오? 카르마니 다르마니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면 과연 
뿌린 대로 거두는지. 정말 보다 나은 카르마를 가질 수 있는,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알 수 없음과 두려움이 사람들에게 최선을  부추긴다. 더 열심히 살아서 아예 
이 아리송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탈이며 구원이다. 
그리하여 힌두에게  해탈은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해탈은 '사랑하는 이를 껴안고  있을 때처럼 주객과 내외의 구별이 없는 상태, 
우주와의 일치 상태'이다.  고통스러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가엾은 육체에
서 영혼을 해방하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러나 수많은 윤회가 필요하
다. 우파니샤드에는  해탈의 길이 '맨발로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되어 
있다. 말하자면 해탈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삶에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 불평
등을 정당화하면서도  해탈의 길은 누구에게나 --브라만에게도,  불가촉민에게도
-- 열어놓은 평등한 세계관이다.  대다수 힌두들은 여전히 카르마를 믿고 그  결
과를 두려워한다. 아무것도, 즉 생각도, 행동도, 자의식도 없어야 그 결과도, 카르
마도 없는 법.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자이나
교의 창시자 맣비라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굶어 죽는데 무려 13년이 걸렸다
지 않은가?
  힌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는 '행동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희망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수백 배 낫다. 이 고달픈 삶, 보다 나은 내세를 
기대하며 이승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영국인들의 말을 빌어 끝을 맺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이기면 금상첨화가 아니랴!
  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아니, 내세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4. 불평등의 진리

  카스트는 살아 있다
  사랑에는 국경이 있다!
  1861년, 인도 제국의 수장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행복하고 보람된(아홉 명
의 자식을 두었으니 사실 보람이 있었다)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마감하고 홀어미
가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땅 영국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많은 위로의 편지가 
버킹검 궁으로 쏟아졌다. 그  중에는 인도 식민 정부의 말단서기, 페르난데스 씨
의 편지도 들어 있었다.
  "여왕께 결혼을 신청합니다. 받아주소서."
  여왕이 몸소 그 편지를  읽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망극하여이다.' 갈색 
로미오의 편지에  놀란 것은 식민 정부였다.  본국 런던으로부터 '손  좀 보라'는 
명령을 받은 식민 정부는  불경죄를 물어서 마드라스 주에 근무하던 페르난데스 
씨를 즉각 정리해고했다.  '사랑에는 국경도 신분도 없다'를  실증하려던 그는 역
사의 저편에 파묻혔고 그의 동기도, 열정도 함께 사라졌다.
  사랑에는 카스트가 있다!
  때는 1994년, 장소는 인도의 비하르. 상층 카스트 여자와 사랑을 나눈 죄로 스
물다섯 살의  불가촉민 청년이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의 가시밭길을 
넘어 황천길로 떠난 것이다.
  음악을 하는 청년과 열여덟 살의 아름다운  처녀는 1년간 사랑을 속삭였다. 이
룰 수 없는  사랑에 울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분기탱천한 여자의  가족은 두 사람을  붙잡아다 중세식 재판을  벌였다. 불에 
담근 쇠막대기로 알몸을 지지는 고문과 가족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여자는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처녀를 꼬여낸 중죄인, 분수를 
모르고 날뛴 미천한  남자는 신부 가족에게 두들겨 맞아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여러 원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전보다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카스트는 아직  살아 있다.  집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힌두사원에서 여전히  그 힘을 행사한다. 카스트는 포루투갈어로 혈
통을 의미하지만  인도인들은 색깔이라는 뜻의  '바르나'라고 부른다.  이 제도는 
모든 인간이 불평등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머리와  다리의 기능이 다르듯이 사람
마다 능력의 차이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1950년에 공포된 인도의 헌법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여
전히 카스트의 위계가 존재하는 인도에서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는 순간
부터 누구와 접촉을 해야 하고  누구와 결혼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고 이는 평생 
바꿀 수가 없다. 한  번 브라만이면 죽을 때까지 브라만이다. 인도인들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마치 자연 현상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도인은 자기 카스트 안에서  배필을 찾는다. 비하르 청년처
럼 사랑에 용감한 자는 대개 죽음을 얻는다.  1993년에도 다른 지방에서 그와 같
은 비극이 있었다. 이러니  인도의 연인들은 대부분 뻔한 결론을 미리 포기한다. 
'지환즉리', 즉 '헛것인 줄 알았으면 즉시 떠나라'고 했던가?
  사회에 대한 의무와  권리도 카스트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고대의  마누 법
전에 따르면, 브라만은  베다를 가르치고 제사와 의식을 집행하며, 크샤트리아는 
사람을 보호하고 베다를  배우는 계층이다. 바이샤는 소를 기르고 땅을  갈며 상
업을 영위하고 돈을  다루지만, 카스트의 최하층 수드라는 위의 세  계급에게 봉
사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카스트 규정에 의하면  하층 수드라는 베다를 배울 수
가 없다. 수드라가 베다  읽는 소리를 엿들으면 그 귀에 납물을  붓고 베다를 읽
으면 그 혀를 자르며 만일 베다를 기억하면 몸을 두 동강 낸다는 끔찍한 규정도 
있었다. '호랑이는 풀을  먹고 살 수 없고  염소는 사냥을 할 수  없다'는 원리인 
셈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카스트 제도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위 4개의 카스트에 들
어가고 그 나머지는  불가촉민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도인에게 '당신의 카스트
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기대에 어긋나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들은 브
라만이나 바이샤와 같은  카스트보다는 지리적, 언어적으로 한정된  자티로 자기
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티'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카스트가 서로 갈리고 나뉘
어 3-5천 개의 작은  집단으로 분류된 것으로 한층 세분화된 개념이다.  같은 카
스트 안에서도 자티에 따라 다른  위상을 갖고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것은 동일한 자티 안에 이루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북부지방의  브라만과 남부의 브라만은 동일한 계급이 아니다. 
두 브라만 가의  갑순이와 갑돌이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
의 수드라 사이에는 같은  계층이라는 연대의식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한 마을
에 사는 수드라 내부에도 상하 귀천의 구별이 있다. 대장장이, 옹기장이, 세탁부, 
이발사는 자신과 브라만이  다르듯이 서로가 서로를 다르다고  여긴다. 심지어는 
같은 청소부라도 거리를 청소하는 자티와 '변소 쳐!'를 외치는 자티는 다르다.
  그러므로 옷감 짜는  직녀와 소 치는 견우의 사랑은 '절대  불가'이다. 소를 먹
이는 집안의  견우는 소 먹이는 자티가  규정한 세밀한 규칙의 속박을  받고, 또 
옷감을 짜는 집안의 직녀는 그  자티의 규정을 따르면서 신분에 맞는 제약과 대
접을 받는다.
  대개 직업과 관련이 있는 자티의 위상은 브라만을 중심으로 짜여지고 그 기준
은 의례적으로 깨끗하고 더러운가의 여부에 달린다.  그 위상이 상층일수록 순수
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한 금기나 규정이 까다롭다. 브라만은  오직 브라만에
게서 음식과 물을 받아  먹지만 수드라는 불가촉민을 제외한 모든 계급으로부터 
음식과 물을 받아도 된다. 계층이 낮을수록 부정하게 여겨지며 금기사항도 적다. 
똑같은 수드라 내부에서도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위상이 낮다.
  쇠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보다 위상이 낮다. 주로  불가촉민이 쇠
고기를 먹고  브라만일수록 채식주의자가 많다. 위생이  불량한 데서 자라는 '코 
뭉툭이' 돼지고기나  상하기 쉬운 생선을  먹는 사람은 닭고기나  양고기를 먹는 
사람보다 천하게 간주된다.  그러므로 소를 기르는 사람은  돼지치기나 어부보다 
사회적 위상이 높다.
  그대는 무슨 고기를 먹는가?  모두 다? 인도의 기준으로는 영락없는 불가촉민
이다. 인도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 개종한  불가촉민들로서 우리처럼 편식을 하
지 않고 술이든 고기든  다 먹는다. 무슬림도 대개 최하층 출신의 개종자들이다. 
종교는 바뀌었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이나 직업은 예전 그대로이고 따라서 마을
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별 변동이 없다.
  한편 모든 자티는 서로 고립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밀접하게 연계
되어 있다. 사회적 위상은 달라도 각자 자기가  사는 사회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지키고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천한 사람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는데 브라만에게는 청소부가 필요하고 동네 빨래를 맡는 세탁부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브라만을 청해 의식 집전을 부탁한다.
  그외에 내부의  다양한 자티뿐만 아니라 침략자로서  인도에 정착한 집단이나 
혼혈에 의해 생긴  새로운 집단도 인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브라
만의 독점과 카스트제를 부정한  불교와 자이나교 역시 결국에는 체제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누구든, 어떤 집단이든 받아들이는 이 놀라운 통합성과 융통성이 카
스트제의 특징이며 또한 인도 문화의 특징인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생김새와 개성이 다르고, 한  꼬투리에서 난 완두콩도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타고난 능력과 지위를 인정하는 카스트 제도는  분명 부당하
고 불평등한 사회제도이다.  제국주의를 공격하고 다른 사회의  인종차별을 비난
하는 제3세계의 지도국가에서  카스트와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도의 헌법이 인정하는  동등한 삶의 기회가 모든 사
람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카스트를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카스트간의 결혼을 적극 장려하는 
것이다. 브라만이  수드라와 맺어지고  불가촉민이 바이샤와 결혼하면  혈통이니 
순수성이니 하는 구별은 점차 모호해질 것이다.
  '사랑에는 카스트가 없다!' 이 말이 시정의 언어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신의 자식들
  '언터처블'
  케빈 코스트너가 나오는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제목이 아니다. 불가촉민, 즉 접
촉을 하면 부정을  타므로 접촉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네 계
층으로 이루어진  카스트에 아예 끼지도 못하는  사람들로서 수드라보다도 낮은 
계층이다. 사회의 최하층인 이들은 오염의 원천으로  간주되고 카스트 힌두로 부
터 사회적 배척을 받는다. 이들의 힌두사원 입장은 당연히 '빨간불'이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아, 이게 아니다. "비켜나
세요. 불가촉 천민이 나갑니다." 이렇게 미리 소리를 쳐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접촉하는 불상사를 막아 부정을 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을 생각해보라. 또 자신들의 더러운 옷소매가 다른  사람과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서 때로는 원치 않는 '누드' 행진도 감수하는 그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라.
  어불성설이라고? 그 정도는 약과다. 남부지방의  남두드리 브라만은 천민을 보
기만 해도 부정  탄다고 생각한다. 그 지방의 천민은 불가촉이  아닌 불가시민인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몸에 방울을 달아 순수  브라만이 그 소리를 듣고 사전에 
피하거나 눈을 감을 수 있게 한다. 그들의 존재는 브라만의 눈을 찌르는 '독묻은 
화살'이므로.
  일찍이 우파니샤드에는  개나 돼지처럼 취급되는 '찬달라'라는  천민이 보인다. 
2세기 불교도 자나카도  마을 밖에 격리되어 사는 천민집단을  언급했는데, 그들
은 세습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그들끼리 사용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
다. 마누 법전에도 동구 밖에서 따로 거주하며  햇빛이 있는 낮에는 마을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11세기의 알비루니도 마을 밖에 
살며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집단을 기록했다.
  세월은 훌쩍 뛰어넘어 1990년대로 와도 인도의 불가촉민의 삶은 별 차이가 없
다. 어느 추운 날, 기온이 4도로 떨어졌을 때 한 여인이 길가에서 아이를 낳다가 
얼어죽었다. 그녀의 뒤에는 주정뱅이  남편과 얇은 사리 하나가 남았다. 한 생명
이 태어나고 또 한 생명이 죽어가건만 이웃은  냉담하고 무심하며 초연했다. 왜? 
불가촉민이니까. 과연 인류의 역사는 발전했는가?
  인도 사회에서 부정의  원천이자 사회적 금기인 불가촉민은  우리나라의 백정, 
일본의 부락민, 남아프리카의 흑인 그리고 나치  치하의 유태인처럼 사회적 접촉
과 삶의 기회를 제한받는 특수한 집단이다.
  카스트의 위계는 앞에서 말했듯이 순수와 오염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즉 청정
성의 여부에 따라  계층의 상대적인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사회  최하층인 불
가촉민은 대개 죽음이나 배설과  관계되는 부정한 일에 종사하는 더러운 사람들
이다. 똥을 치거나 죽은 동물의  시체를 옮기고 그 가죽을 다루는 이들, 때 묻은 
빨래를 하는 세탁부와 남의 털을 만지는 이발사, 땅꾼도 포함된다.
  이들 불가촉민은  마을 사람들과 우물이나  강물을 함께 쓰지  못한다. 가까운 
마을의 우물을 두고  몇십 리씩 물을 길러 나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20세기 
초, 캘커타에서  상수도를 건설할 때  같은 수도관에서 흐르는  물을 불가촉민과 
함께 마실 수 없다고 반대운동이 거셌다니 웃어야 할 비극이 아니랴.
  그러나 한편으로 불가촉민들은 마을의 생활과 밀접한 연계를 맺지 않을 수 없
었다. 이발사는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하며 손발톱을  깎아주고 귀
소제도 해준다. 물론 우리처럼 퇴폐적인 서비스는 없다. 세탁부는 동네의 빨래를 
맡아서 강물에 나가 후려친다. 마을 사람들의  농사일을 돕고 하인으로 집안일을 
하며 청소, 연락, 축제 때 드럼을 치는  역할도 그들이 맡는다. 또 옹기쟁이의 도
움이 없다면 결혼 잔치는  어찌 치르겠는가? 토지가 아무리 많아도 땅을 부쳐야 
곡식이 나는 법. 지주와 직접 접촉은 안하지만 낮은 계층이 그 일을 담당한다.
  불가촉민은 원래 정복자에게 사로잡힌 노예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자
들이었을 거이다.  주정꾼이나 부랑배 등  유목과 농업에 필요한  노동을 제공할 
수 없는 떠돌이  인생들은 사회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시체 처리와 같은 하찮은 
일거리를 맡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취급하면서 오염의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고,  먹을 게 없으니 쇠고기와 같은 금기식을  가릴 형편
도 못 되었으리라.
  고상한 카스트 힌두는 자신이  금기로 여기는 쇠고기와 술을 마시며 화장터에
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는 천민을 꺼리고 접촉을  피했다.  검은 악마로 여기는 
천민과의 접촉을 치명적인 오염으로 여겼고 접촉뿐 아니라 가시권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사회적  장벽을 쌓았다. 카스트  힌두의 태도가 그들을  더욱 비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동구 밖은 '그들의 땅'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의 사고는 경험이라는 범주를 넘지  못하는 법이다. 외동딸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먹고  놀지만은 않고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훌륭한  내 어머니
를 '팥쥐  엄마'로 생각하지는 마시라.  청소와 빨래는 가정학의 기초과목이니까. 
인도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나는 별 생각 없이 방 청소도 하고 빨래도 직접 
했다. 침대를 쓰지만 신발을 벗고 생활했기 때문에  매일 젖은 걸레로 바닥을 훔
쳤다.
  물걸레 청소기가 아닌  '진짜 걸레'로 바닥을 훔쳐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세
상에서 가장 굴욕적인 자세가 얼마나 유용한가를.  날은 덥고 짜증은 나고...... 복
도로 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열심히, 신나게 방  청소를 했다. 그런데 맙소사! 어
느 날 친구들의 눈에 비친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한국에서 온 '불가촉민'.
  그들이 자기의 눈으로 나를 파악했듯이 나도 한국식으로 생각을 했다. '불가촉
민 쪽에서 왜 피하는가? 부정을 타는 쪽이 조심을 해야지...... 다섯 번 목욕을 하
고 쇠똥을 태워 정화의식을 하는 것은 잘난 상층 카스트의 문제가 아닌가? 아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서  브라만이라고 우기지......' 그렇지만 삶이
란 것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그리 간단하던가.
  불가촉 어린이는 걸음마를 배우고  무언가를 만지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의 정
체성을 깨닫게 된다. 철없는 아이는 아장아장  힌두사원이나 우물가에도 가고 카
스트 힌두의 옷자락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나 카스트 힌두가  눈을 흘기고 
야단을 침으로써 아이의  사고 체계는 큰 영향을 받는다. 주변의  어른들은 접촉
할 수 있는 사회적 범위를  하나씩 일러주고 아이는 세상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씩 배워간다.  거대한 사회적 장벽 앞에서 개인은 한낱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1991년의 인구 센서스를 보면 불가촉민은 1억 5천만 명으로 인도 총인구의 약 
17퍼센트이다. 거의 모든 마을에 불가촉민이 살고 있고, 이 중 약 90퍼센트가 농
촌에 거주하고 있다. 사회, 경제적 위상이 낮은 이들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부
족하니 어줍잖은 내 생각처럼 야반도주를 할 수도 없다. 어디로 갈꺼나?
  1981년 2월, 미낙시  사원으로 유명한 남부지방의 한 도시에서  불가촉민이 집
단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명의 의사,  1명의 농학자, 대학
원을 마친 5명의 교사를  포함하여 그 집단 구성원의 40퍼센트가 교육을 받았지
만, 사람들은  능력이 아닌 타고난 배경으로만  그들을 대우했다. 사회적 차별은 
긴장을 낳았고 불안한 그들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형제 자매'로 평등하게 대해주
는 이슬람교로 귀의했던 것이다.
  익명성이 가능한 도시에서  이러하니 농촌에 집중된 불가촉민은  사회, 경제적 
착취의 만만한 대상일 밖에. 아무리 '쪽수'가  많아도 이들의 수평적 연대를 기대
하기는 어렵다. 불가촉민은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1천여 개의  소집단으로 잘게 
쪼개져 있기 때문이다. 가죽을 다루는 불가촉민은  화장실을 치거나 청소를 하는 
불가촉민보다 자신이 하녈 청정하다고 우긴다. 당연히  두 집안의 로미오와 줄리
엣은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리잔(신의 자식)'이라는 역설
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독립 세력을 이루고 떠나가는 이들을 힌두 세계로 끌어들
였다. 상징적이지만 불가촉민의  힌두사원 입장도 허용되었다. 새 헌법은 불가촉
제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한편 이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조치야말로 불가촉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또 사실 법률적  개선의 혜택을 받는 불가촉민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불
가촉민의 절대 다수가 거주하는 농촌의 구조적  변화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여전히 건재하는 높디높은 벽 앞에서 일부 불가촉민은 간디가 지어준 '하리잔'이
라는 이름 대신 자신들을 '달리트(학대받는 자들)'라고 부른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나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권선언이 뭐라  했든 '사람 위에 사
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대도 알고 나도 안다. 불평등은 문명
의 발전과 함께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도의 '언터처블'을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힌두는 소를 숭배하고 원
숭이, 코끼리, 코브라를  신으로 깍듯이 모신다. 그리고  '채식주의'를 부르짖으며 
살생을 비난한다. '사람 위에 동물 있고 동물  밑에 사람 있다'는 것은 얼마나 서
글픈 일인가. 이런 짐승만도 못한......

  브라만의 나라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 사람 위의 사람은 바로 브라만이다. 인도는 브
라만의 땅, 피라미드의 꼭지점처럼 카스트제의  상층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뜻
을 가진 브라만이 차지한다. 머리수를 따지면  브라만은 인도의 소수집단에 불과
하다. 1991년,  브라만 인구는 약 4천만  명이었다. 당시 총인구가 약  8억 5천만 
명이니 5퍼센트가 채 안되는 숫자다. 이보다  60년 전인 1931년에도 브라만은 총
인구의 4.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들이 나머지 인구를 지배하는 것이다.
  인도의 저명한 언론인 쿠샨트 싱이 1990년 <선데이>지에 쓴 기사를 인용해보
자. 관보에 기재된 관직의 70퍼센트가 브라만의 차지였다. 부차관급 이상의 고위
직 500명 중 310명,  대법관 16명 중 9명, 주수상 26명 중 19명,  주지사 27명 중 
13명이 이들 계층이었다. 그뿐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 140명 가운데 58명, 
98명의 대학 총장 가운데 50명이 브라만이었다.
  관직이 낮을수록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군수 438명 중에서 250명, 행정관 3
천 300명  가운데 2천 376명이 브라만이고  국회 하원의원 530명  가운데 190명, 
사원 244명 중 89명이 브라만 의원이었다. 교직,  의료직, 법률직 등의 분야 역시 
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무대이다.
  본래 브라만은 베다를  연구하고 종교적인 행사를 주관하는  사제였다. 여기서 
사제는 유목 및  농업사회의 민중이 의지하고 믿는 지도자다. 그들은  제사에 필
요한 '브라흐마나'를 편찬하여  브라만 지상주의와 의식 만능의 제도를 고정시키
고 점점 브라만을 정점으로 한 카스트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지식을 뜻하는  성서 베다는 오직 브라만만이 배울 수  있었다. 지식
과 정보를 독점한 브라만은 왕의 권위를 능가한 적도 많았다. 브라만은 '아는 것
이 힘'이었고 나머지 인구는 '모르는 것이 병'이었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명석한 
브라만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종교적 의식을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을  거쳐야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의  모든 의식이 해결되
었고, 그 의식은 다른 계층이 알 수 없도록 구전으로 전해졌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브라만 지상주의가 흔들리고 현실적인 새로운 믿음 
체계가 나타났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불교이다.  왕족으로 크샤트리아 계층인 붓다
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격과 무관한  브라만의 타고난 위상과  직업에 반대했다. 
그는 브라만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오 그대,  사악한 지식인! 땋은 머리와  사슴가죽을 지니면 뭐하는가? 뱃속은 
분노와 걱정으로 가득하거늘. 겉만 씻는다고 되는가?"
  "탐욕 없이, 집 없이  방랑하며 세속적 욕망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야 진
정한 브라만이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며 해탈의 위치에 도달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브라만이다."
  그러나 붓다는 가도 브라만은 남는 법. 불교는  결국 브라만 중심의 힌두교 속
에 용해되었다.
  명민한 브라만들은 힌두 성서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이 세상의 중
심이 되도록 갖은 술수를  다 썼다. 웬만한 죄를 진 힌두는  강물에서 목욕을 하
면 죄를 씻을 수 있다지만  브라만을 죽이는 일은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큰 죄'
였다.
  4세기에 씌어진 한 책에는 각 카스트 계층이 부를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나와 있다. 크샤트리아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서, 바이샤와 수드라는 각각 상업과 
서비스를 통해서,  즉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부를 얻는 데 비해  브라만은 다른 
계층으로부터 선물을 받아서 부자가 된다. 기생의 원조인 셈이다.
  크샤트리아나 바이샤가 축적한 부를  가장 훌륭하게 쓰는 일은 브라만에게 풍
성한 시주를 하는  것이다. 이승에서 지은 죄를 씻는 방법  가운데는 브라만에게 
선물이나 시주를 하는 것이 포함된다. 힌두사원을  세우거나 종교적인 행사의 비
용을 부담해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쯧! 쯧!"
  원숭이는 썩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는 여우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네 꼴을 보니 전생에 뭔가 못 먹을 걸 먹은 모양이군."
  "그래"
  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 나는 사람이었는데 브라만한테 선물을 주기로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이 꼴이 된 거야."
  이 민화가 시사하듯이 브라만은 누구에게나 시주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아
무 집에나 들어가서  무언가 달라고 요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
는, '황야의 무법자'였다. 일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옥에나  가'라
고 저주를 퍼부었다. 세금과 부역이 면제된 것은 물론이다.
  세월이 가고  왕권이 강화되자 브라만은 재빠르게  변신을 꾀했다. 왕을 '신의 
화신'이라고 추켜세우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국왕의 신성성과 불가침성을 
주장했다.
  왕은 브라만들에게  토지를 하사하거나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부유층이나 
고위층도 브라만을 위해서 연회를 마련했다. 천국에  가려면 사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 법. 힌두사원의 준공식이나 왕족의 결혼식,  각종 기념일에도 수백 명, 때로 
수천 명의 브라만이 초대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강한 타밀 지방에는 '먹을 것을 
준다면 브라만은 몇백 리도 마다 않는다.'고  비꼬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어느 
방학의 여행길에 남부의 한 사원에서 내 키를 훨씬 넘기는 큰 가마솥을 본 적이 
있다. 브라만을 위해  음식을 조리하던 것이라는데 그 크기를 보니  초대받은 손
님들의 규모를 짐작할 만했다. 브라만이 음식을 받던  넓은 홀도 눈에 많이 띄었
는데, 잔치를 베푼 주인장도 브라만이 아니면 그들과  같이 음식을 먹을 수가 없
었다고 한다.
  무슬림이 통치하던 시절에도 브라만의 위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고, 그들은 주
요 요직에 그대로  남았다. 아랍인이나 투르크인처럼 바깥에서  들어온 무슬림이 
전체 무슬림 인구의 5퍼센트를 넘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인도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힌두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브라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
다.
  14세기, 도프라 지방에서 아쇼카 대왕의 석주가 발견되었다. 높이 15미터에 무
게가 자그마치 50톤이나 나가는 거대한 돌기둥이었다.  페로즈 샤 황제가 그것을 
수도 델리로  옮겨왔다. 8천 400명의  인부가 낑낑대며 어렵사리  날라온 석주에 
있는 글은 해독이 어려웠다.  황제는 저명한 브라만에게 그 숙제를 맡겼다. 며칠
을 끙끙거려도 해독을 못한 브라만 왈.
  "폐하, 이 기둥에는  '페로즈 샤 황제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석주를 옮길 수 
없다'라고 써 있습니다요."
  영국의 통치도 브라만의 협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에 온 영국의 행정
관은 겨우 천 명 남짓. 그들과 수억의  인구를 연결하는 중간계층이 필요했고 브
라만 계층이 기꺼이  그 다리 역할을 맡았다.  브라만들은 관리, 법조인, 필경사, 
재무관, 세리 등 무엇이든지 가능한 전천후 직업인이었다. 물론 낮에는 어줍잖은 
영국 신사 흉내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예전의 그 브라만이었다.
  브라만은 사업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크샤트리아
의 전유물인 군인으로도  변신했다. 인도의 영국군이나 근대  마라타군은 브람반
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1857년 쇠고기 기름덩어리  문제로 세포이의 난이 이렁난 
것도 군대에 브라만  출신의 세포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장군이 된  브라만도 여
럿이다. 내가 아는  브라만 출신의 선생님은 장교가 되려는 아들에게  어릴 때부
터 달걀을 먹이고 있다.

  지금은 몰락한 브라만도 많지만  그래도 자존심 하나는 지키겠다고 꼿꼿이 결
을 세운다. 길가  오두막 찻집에서 차를 날라도 불가촉민에게는 직접  찻잔을 건
네지 않으며 세탁부나  물장수로 전락해도 브라만 가의 일 외에는  맡지 않는다. 
요리사로 일하는 경우에 음식의 서비스까지는 하지만 먹고 난 그릇에는 절대 손
을 대지 않는다.
  역시 브라만은 힌두사원에 있어야 제격이다. 일일  평균 3만 명 이상의 신도가 
찾는 티루파티  사원이나 라마슈에람의 사원에는 수천  명의 브라만이 종사하고 
있다. 마을에 있는 작은 사원을 지키거나 동네  사람들의 점을 봐주고 자문 역할
도 맡는다. 인도인의  입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브라만의  현란한 혀놀림을 
당할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잠깐, 험담 한 가지만 추가하자. 인도 전역에 있는 힌두사원에는 '신의 종'이라
고 불리는 '데바다시'라는  여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원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역할을 맡지만,  원래 브라만 사제들이 자신들의  합법적인 '섹스 파트너'로 
만든 존재였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딸이나 홀어미 출신인 이  여인들은 연회나 
결혼식에 불려가 춤을 추기도  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본업인지 부업인지가 모호
한 매춘에도 나선, 가여운 이들이었다.
  사제의 위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높았다. 고대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사제는 사회의 상층이었고  남미의 인디언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국가가 성립하
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교황이 세속의 왕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브라만처
럼 영속성과 생존력을 자랑하는 사제 계층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언젠가 남부의 사원도시 칸치푸람에  갔다가 사원 안에서 당시 부통령인 뱅카
트라만을 만났다. 아니,  바로 옆에 서 있었다는 표현이 옳겠다.  부통령은 그 지
방 출신의 브라만이었는데, 타는 성화 앞에 선 그와 나는 똑같은 인간이었다. 우
린 말없이 미소를 교환했다.
  한때 신분제도를 가졌던 한국인은 양반과 상민의 구별에 익숙해서인지 은연중
에 브라만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브라만에게는 '역시'를 남발하면서 불가촉민을 
만나면 '혹시' 하고 마음에 빗장을 건다.  임꺽정을 편들지만 그래도 나는 양반이
고 싶은 게 우리네 마음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이중적이다.
  태초에 브라만이 있었다. 인도 최후의 날, 최후의 인물도 브라만이 아닐까?

  개천의 이무기
  수천 년간 지속된 어리석은  '카스트 제도와 브라만의 독재'에 반발이 없을 수
는 없다. 그 대표적인 반동분자가 바로  암베드카르 박사이다. 1956년, 인도 헌법
을 기초하고 공화국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그는 50만이 넘는 불가촉민을 이끌고 
불교로 개종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파라오의 노예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끈 모세와 달리 불가촉민을 인도한 인도
의 모세는 카스트의 차별이라는 험난한 바다는 건너지 못하고 결국 힌두교를 포
기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 뒤를 이어서 다시 
400만 명의 불가촉민이 불교도로 믿음을 바꾸었다.
  인도 사회의 근본을  뒤흔들고자 했던 혁명가 암베드카르는 누구인가? 마하라
슈트라 지방의 마하르족 출신인 그의 집단의 세습 직업은 청소부나 죽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천한 일이었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윈 그는 도시락 배달을 하
며 어렵게 자랐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던가. 그의 총명함에  반한 후원자 덕택에 미국에 유
학한 암베드카르는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  인도 최초의 
박사학위를 가진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는 런던 대학교에서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을 본 대학에서도 수학했다.
  카스트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인도에서 암베드카르는 개천에서 난 용일 수밖
에. 그러나  금의환향한 그를 기다린  건 불가촉민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차별과 
냉대였다. 그당시 그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인정과 칭찬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
자리를 얻어도 동료들이 미천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책상을 
복도에 내놓고 일을 해야 했다. 이러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
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불가촉민을 위한 투쟁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불가촉민은 힌두사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천한 존재이다. 
사원 밖의 먼 발치에서 기원을 드리는  불가촉민을 생각해보라. 암베드카르는 우
상을 믿지 않았지만 불가촉민이 힌두사원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웠다. '불가촉제가 살면 힌두교가  죽는다.'고 말한 간디도 이 운동을 적극적으
로 지지했다.  힘겨운 싸움 끝에  결국 탄조르의 브리데쉬와라  사원이 처음으로 
불가촉민에게 문을 개방했다. 1930년대의 일이다.
  힌두사원의 입장 규칙은 다양하다. 아예 비힌두의  입장을 거부하는 사원도 있
고 힌두가 아닌 이방인의  입장을 허용하되 사원의 중심부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 허용'제를 채택한 사원도 있다.
  어느 여름방학에 교수님 한 분과 여학생 열 명이 남부지방의 여러 힌두사원을 
한바퀴 돈 적이 있는데 유일한  이방인인 나 때문에 사연과 사건이 끊이지 않았
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바로 탄조르에서 일어났다. 일행과 어울려  사원의 중심부
로 들어가려던 나는  브라만 승려로부터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입
고 있는 청바지를  가리키며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타밀어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지방  출신의 교수님이 꼬부랑 말로  열심히 설전을 벌이는 걸  그저 '비처럼 
음악처럼' 듣고 있었다.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사리를 펄럭이며 사무실을 찾아간  교수님은 보기 좋게 
판정승을 거두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교수님의 얘긴즉슨  그 사원이 사상 최
초로 불가촉민에게 문을  열었던 사실을 사원 당국에  주지시켰단다. 푸우! 결국 
불가촉민과 동급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사원을 굳이 봐야 할  이유는 없
었지만 나는 역사학도로서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불가촉민의 힌두사원 입장을 명목상 확보한 암베
드카르는 간디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불가촉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기
울였다. 독립 후, 인도의 헌법을 기초한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제의 폐지를 헌법에 
명문화하고 이후 40년 동안 불가촉민에게 특혜를 인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흑인에게 특별한 대우를 인정하는 미국처럼 관직, 의회, 교육기관의 
일정한 비율을  불가촉민들에게 특별 배정하는  것이다. 연방 의회가  각 지방의 
주의회 구성시 이들의 대표권을  15퍼센트 가량 보장하고 연방정부와 각 지방정
부의 관직도 이들을 위한 특별전형을 시행한다.  이들 계층에게는 교육, 나이, 경
력의 기준이 관대하게 적용된다.
  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도 이들을 특별하게 대우한다.  만일 델리 대학교 사학
과에 들어가는 커트라인이  90점이라면 불가촉민들은 특별전형을 통해 자기들끼
리 경쟁을  하기 때문에 40점이라도  입학이 가능하다. 또한  장학금을 지불하여 
학습 의욕을 북돋우며  기숙사의 방도 일정한 비율은 그들 몫이다.  교수 임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개천에서 용을 키우는 '마이더스의  손'과 같은 이 특별임용제도는 수천 년 동
안 억압을 받아온 불가촉민들에게 과연 밝은 미래를 약속해주었을까? 법적 개선
을 통해 정치적 권리는 인정받았지만 사회에서  이들의 위상은 그대로였다. 오죽
하면 암베드카르가 개종을 했겠는가? 그는 카스트를 파괴하는 유일한 대안이 개
종이라고 여기고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택했다.
  '정의사회 구현'은 우리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한 멋있는  말이다. 모든 슬로건
이 그렇듯이 이 역시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눈가리고 아웅
하는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정의로운 사회가 모든 사회의 이상과  목표인 것은 
바로 그 '실현 불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인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암베드카르는 의회를 '힘의 사원'이라고 부르면서 불가촉민이 의회에서 세력을 
펼 수 있도록 정부에  불가촉민의 '독립선거구'를 요구했다. 1932년, 식민 정부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 불가촉민이 되리라'던 마하트마는 
불가촉민이 힌두 사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그 계획을 철회할 때까
지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마하트마는 왔다 가지만 불가촉민은 영원히 불가촉민이다."
  암베드카르는 이런 성명을  발표하고 버텼지만, 결국 마하트마가  내건 목숨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일부 불가촉민은  인위적인 평등을 노리는 특별임용제를  통해서 의사가 되고 
엔지니어도 되었다. 게다가 연방정부의 장관이 된  사람도 있고 연방의회에 진출
하거나 주수상이 되어 한 지방을 호령한 인물도 나왔다. 그러나 이 특혜는 '돈이 
있는'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다. 끼니가 어려운데 상급학교에 보내는 건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민주주의 아래서는 다수  집단이 유리하게 마련이다. 우스갯소리로  어떤 사람
은 인구 억제가 실패한 이유를 이 다수결의  원칙과 연결짓기도 한다. 행사할 한
표가 많은 집단은  그것을 담보로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다
수를 자랑하는 일부 카스트(정확하게 말하면  자티)는 점차 정치적인 이익집단으
로 변모했다.
  인도 인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브라만을 비롯하여 크샤트리아,  바이샤를 
합친 소위 상층계급은 인구의 약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불가촉민이 17퍼센트, 불
가촉민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부족민이 약  7퍼센트, 그 나머지가 수드라 계층이
다. 후진계급이라고도 불리는 이 다수 계층은  어림해도 인구의 50퍼센트에 가깝
다.
  그런데 어느 날, 다수를 차지하는 이  후진계급이 불가촉민이 누리는 특별대우
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아랫사람이 잘되니 
배가 쓰렸던가보다. '표밭'인 이들 후진계층에게  본격적으로 특혜가 주어진 것은 
1989년 V. P. 싱 정부에 의해서였다. 정부가  특혜를 받을 수 있는 집단과 그 비
율을 대폭 늘이자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상층 결국 카스트들의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사실  이러한 제도는 헌법이 규정한 '고용, 관직, 
임용에 대한 기회균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기숙사 안에서도 상층  카스트 학생과 특혜를 받는  계층 간의 갈등이 심각했
다. 학생들이 모두 모이는 식당에 흐르는 냉기류는 제 3자인 내게도 으스스했다. 
당시 수십 명의 상층 카스트 학생들이 분신자살을 감행했고 폭동과 데모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정의와  평등을 이용하고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입장은 확고하다. 
'카스트의 피는 물보다 진하다!'
  후진계급과 불가촉민에게 부여되는  각 지방의 특별임용 비율을  살펴보자. 타
밀나두가 69퍼센트,  카나타카는 73퍼센트, 비하르가 80퍼센트이다.  여기에 무슬
림에 대한 특혜를  더하면 상층 카스트의 미래는 암울하고 극히  제한적이다. 95
점을 받아도 50점 받은 특혜자에게 밀리는 상층 카스트 학생과 경제적으로 풍족
하면서도 당당히 이 특혜를 누리는 일부 후진계층은 과연 평등한가?
  카스트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며 도입한 이 제도는 오히려 카스트 제도
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스트 의식을 없애기 보다는 양측  모두의 계급의
식을 고취시키는 부작용을 낳아 힌두사회의 통합에  역기능을 하고만 것이다. 인
도 사람들은 공개적으로는 카스트  제도를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그 보존을 희망
한다. 낮은 계층은 특혜를 누릴 수 있고  상층 카스트는 기존의 사회적 기득권과 
우월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의 끈질긴 생존력을 보여준  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니 카스트제의 전복은 한낱 꿈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상황
에 따른 타협과 적응으로 제도의 개선이나 개량을 기하는 수밖에.
  일부 지방에서는 특차로  의과대학이나 공과대학에 진학한 불가촉민 학생들이 
10년씩 공부를 계속한다. 낙제를 거듭한 까닭이다. '능력'과 '평등'이 부딪치는  이 
제도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양가적인 문제이다.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해방구로 가는 비상구
  "내려와!"
  "내려와!"
  아래층에서 친구들이 외친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낡은 옷을  입고 계단
을 내려간다. 나를 겨냥한 여러 개의 물풍선이  날아와 터지고 금방 옷이 흥건해
진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할 친구들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갖가지 물
감을 탄 물바가지 세례가 쏟아지고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엉망진창이 된 친구들은 진창에 뒹굴며 정신을  저당잡힌 채 미친 듯이 한
바탕 논다. 때로 흥을 돋우기 위해 대마초도 등장한다.
  홀리.
  여름을 알리는 전령사, 3월의 축제다. 사람들은 겨울의 먼지를 털고 묵은 때와 
더러움을 씻어낸다. 빨간  물감, 파란 물감, 찢어진 물감(아,  아니다. 이건 없다), 
총천연색 물감과 물, 진흙으로 범벅을 한 1부 쇼는 오전에 막을 내린다. 야간 쇼
는 마른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며 시작된다. 모닥불은 신체적, 사회적인 더러
움과 악을 태운다는 상징이다.  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린다. 우리의 
대보름처럼 땅콩과 호두도 먹지만  이는 부럼이 아니라 곡식이 익었는가를 테스
트해보는 것이다.
  홀리는 사실 엄격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과 계
급제도의 저변에 당하고  살던 한많은 사람들을 위한 날이다. 평소  눈의 가시였
던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빠떼루'를 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여성이 남성을 
공격하고 낮은 카스트가 브라만을 공격한다. 얌전한  골방 샌님도 모처럼 문제아
가 될  수 있다. 물론 공격무기는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무지개색  물감과 시원한 
물이다.
  축제는 홀리 며칠 전부터  이미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풍선을 던지면서 시작된
다. 경건한 여성들은 전날 밤부터 단식에 들어간다.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상대로 
심한 장난을 치기 때문에  캠퍼스는 며칠동안 썰렁하고 당일에는 사람의 그림자
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몰려다니면서 '홀리!'라고 외치고 격렬한 춤을 
추면서 음란한 말을 주고 받는데  이 음란성 때문에 영국 신사들은 홀리에 질색
을 했다.
  인류학자의 보고를 보면, 홀리에서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쪽은 브라만들이고 
반대로 공격을 가하는  쪽은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불가촉민, 즉  청소부와 막노
동자들이다. 이 축제 때는 남성들도 여성을 피해 도망다닌다. 꾸러기들은 골목에 
숨어서 호시탐탐 어른들을 노린다. 따라서 홀리  축제는 성, 계급, 연령의 간격을 
줄이는 동시에  엄격한 계급제도를 이완시키고 전통적인  역할을 바꾸는 기능을 
한다. 즉 사회적 저항과 반란을 막는 안전밸브인 셈이다.
  홀리를 즐기는 사람들은 크리슈나 신과 그의 연인 라다의 열정적인 사랑을 축
하한다. 홀리 축제는 크리슈나  축제와 유사점이 많다. 크리슈나 축제는 수백 명
의 남녀 숭배자들이  한데 어울려 드럼을 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그리고 사원이
나 집에 모여  열광적으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크리슈나  종파는 명상적이고 
감정을 절제하는 정통 힌두교와 달리 우리의 오빠부대처럼 '꺄, 으악!' 하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표현한다.
  크리슈나 종파는 정통 힌두교로부터 해방을 기도한다.  그들은 기존 사회의 엄
격한 신분질서를 뛰어넘어  낮은 계층의 참여를 환영한다. 이 종파는  낮은 카스
트와 여성은 물론  힌두 세계의 바깥에 있는  불가촉민에게도 최초로 빗장을 연 
집단이다. 또한 이 집단의 숭배의 기준은 타고난  위상이 아닌 신에 대한 헌신과 
열성이다. 그 대가는 경멸을  받거나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구원으로, 불평등한 
힌두 각 종파와 달리 다분히 민주적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슈나는 인도 여러 신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신으로 보수적인 힌두도 서구
화된 사람들도 크리슈나를  숭배한다. 푸른 얼굴의 영원한 소년  크리슈나는 1만 
6천 명의 아내와  18만 명의 자식을 두었다는데, 놀라셨는가? 그대에게  다시 한 
번 주지하나니 그는 신이다! 진짜 놀랄 일은 지금부터다. 그는 수천 명의 처녀를 
유혹하고 결국은 아름다운 연상의 유부녀 라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기혼
인 라다는 다른 인연을 끊고 크리슈나를 따랐다.
  서양 최고의 바람둥이  돈 후안과 카사노바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인도의 멋쟁
이, 크리슈나. 그가 부는 풀루트의 선율을 따라 여인들은 최면에 걸린 듯이 뒤도 
안 보고 달려나갔다.  우유, 버터, 요구르트에 집착하고  도둑질과 같은 비도덕적
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 그는  자유와 자연스러움의 대변자였다.  아버지와 같은 
엄격한 신이 아닌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개구쟁이 크리슈나 앞에서 숭배자
는 정숙한 행동을  버리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하며  기꺼이 자신을 포기
했다. 16세기에 실존한 라지푸트 공주 미라바이는  크리슈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편을 떠나 한평생 크리슈나에 대한 시와 노래를 지으며 살았다.
  그의 숭배자들은 자기를 억제하고 자의식을 포기하면서 엄격하게 구조화된 사
회에서 겪는 내적, 외적인  억압을 해소한다. 홀리 축제처럼 성, 계급, 연령 간의 
차별을 푸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인도  전역에서 그리고 어린아이부터 노
인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 추종자들은  열렬한 숭배를 통해 본능
적인 쾌락을 느끼며  신과 무의식적인 일치를 경험한다. 물론 그  일치는 관능적
이다.
  크리슈나와 라다가 사랑을 나눈 무대는 노란 유채꽃이 깔린 인도의 에덴 동산 
브린다반. 델리에서 가까운 마투라 지방이다. 아무리 신비한 은유를 담아도 그들
으니 사랑은 불륜이 아닐  수 없다. 중세의 박티[애신] 사상은 신을 소유하고 신
에 의해 소유되는 에로틱한 사랑이었는데, 라다와  크리슈나의 사랑이 그 중심이
었다. 박티는 금지된 영역을 벗어나는, 세상과 사회를 부인하는 해방감을 선사한
다. 그리하여 숭배자는 사회적인 제약과 무의식적인  기대의 그물을 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연인은 결혼한 유부녀이다.  가장 위험부담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만고불변하는 에로스의  원칙이다. 우리도 '훔친 사과'가  어쩌구 하지 않는
가? 인도 고대의 시와 글은 결혼을 사회적, 종교적 의무라고 언급했다. 크리슈나
와 라다의 조건 없는 사랑은  그 의무로부터 즉각적인 해방을 뜻하며 기존 남녀
관계로부터의 일탈을 상징한다. 홀리 축제 때  크리슈나와 라다의 사랑을 축하하
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도 크리슈나를 따르는  종파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해체  이전의 소
련에도 이미 상당한 추종자가 있었고 미국 등지에  특히 많은 숭배자가 있다. 파
자마 같은 헐렁한 주황색 옷을 걸친 그들은 '하레 크리슈나'를 외치며 맨발로 떠
돌아다닌다.
  자, 이제 또하나의 비상구를  소개한다. 남부 케랄라 주에 사는 남부드리 브라
만은 인도 최고의 보수집단이다. 그들은 불가촉민은  물론 다른 카스트와도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한 상대적 '청정  거리'를 유지했다. 접촉은  고사하고 보기만 
해도 부정을 탄다고 천민이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막은 아주 독선적인 계
층이다. 크샤트리아층인 나이르  여성과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해도  밥은 절대로 
같이 먹지 않는 그들. 지금은 사실상 사라진  그들의 의식을 통해 엄격한 사회의 
뒤안을 살펴보자.
  그 보수적인 남부드리  브라만이 쇠고기를 비롯한 각종 고기와 술,  심지어 아
편까지 차려놓고 샥티  여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가 끝난 후  참석한 사람들
은 다같이 둘러앉아 제사음식을 먹었다.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한 
입 저 사람이 한  입 베어먹는, 인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먹었는데 이때는  전혀 오염이 되지 않고 부정도 타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
  음식 먹는 일이  끝나고 아편까지 한방 하여 살짝  또는 아주 가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아무나  얼싸안고 집단으로 정사를  나누었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아내를 보고 눈을 부라려서는 아니되고 그 날이  지나면 물론 '과거를 묻지 말아
요'다. 그 날 하루는 브라만이니 불가촉민이니 하는 구별 없이 모든 카스트가 대
등했다. 브라만은 육식을 하지 않거니와 쇠고기는 더욱 금기이다. 다른 카스트와 
신체적 접촉이나 음식을  교환하면 엄청난 부정을 탄다. 그러나 그  날 하루만큼
은 이 모든 일탈이 도덕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단 하루의 해방이 영원한 속
박을 견디게 하는 것일까?
  엄격한 사회의  해방구 크리슈나와 홀리. 또  남부드리 브라만의 집단적 일탈. 
비록 그것이 한시적일지라도, 출구 없는 방은 끔찍하다.
  "내려와!"
  "내려와!"
  이방인이지만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기꺼이 그 부름을 받았다.

5. 베일의 세계

  여자가 무서버
  몇 년 전 인도의  유명한 여자 탤런트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졌다. 여
러 모로 자유분방한  그 여자의 배가 불러갈수록  뱃속 아이의 아버지를 맞추는 
내기의 열기도 더해갔다.  한동안 각 주간지와 연예잡지는 그 주인공에  대한 추
측기사로 어지러웠는데, 도대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그녀인 만큼 '예비 아
버지'의 물망에 오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똑똑한 기자양반들은 데이트 시기
와 친밀도를 따져보고 또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한 결과 어느 연극연출가를 후
보 0순위에 올렸다.  그에 대한 기사도 여러 차례  실렸다. 카운트 다운 열 아홉 
여덟......
  드디어 열 달이 가고 아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가 고고의 성을 울
린 지 얼마 안  되어 곧 아버지의 정체가 드러났다. 아이의  외모가 보통의 인도
인과 달리 너무  독특했기 때문이다. 새카맣게 윤이 나는 피부와  분명한 곱슬머
리. 아이의 아버지는 후보자  중에서 뒤로 밀렸던, 카브리해 유역 출신의 크리켓 
선수였다.
  인도 사회는  여성의 성에 대해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카스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여성의 성에  달렸기 때문이다. 
순수와 청정성을 부르짖는 브라만이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브라만 여
인이 다른  카스트 남성과 성적 관계를  갖지 않아야 한다. 브라만  여인이 앞의 
탤런트처럼 예상할 수 없는 후손을 낳는다면 고귀한 혈통은 곧 훼손되고 오염될 
것이므로.
  또한 아이가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도 사실상은 불가능하다. 김
동인의 소설에서처럼 아이의  발가락이 나와 닮았는지 초조하게  확인하거나, 유
전자 감식까지 해가며 노심초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자들은 
끊임없이 여성을 감시하고  관찰한다. 지치지도 않고 여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핏대를 올린다.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관습도 잠재적인 불
륜을 차단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불은 끝없이 연료가 필요하고 대양은 수많은 강으로도 메꾸어지지 않으며  여
성은 결코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렇듯 인도 남성들은 여성이 육욕이 강
하고 방탕하며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출가한 남성에게  독신을 강
조하는 것도 알고 보면 여성을  유혹자로 또는 해탈의 방해자로 여기는 것이 아
닌가?
  부처님이 제자에게 이르셨다.
  "여자를 보아서는 안 되느니."
  "만약 여자를 보면 어떻게 합니까?"
  "말을 하지 마라."
  "만약 여자가 말을 걸면 어떻게 합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라."
  성숙한 여성의 성에 대한 두려움은 결혼제도에도  반영된다. 마누 법전에는 이
상적인 남편과 아내의  연령 차이가 16-18세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실상 아버지
와 딸의 나이다--우리나라 남성들이 소위  '영계'를 좋아하는 것은 혹 인도 수입
품인가? 지금도 인도, 특히  농촌에서는 여성의 조혼이 만연하는데, 한 사회학자
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 남성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춘기  소녀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대신 성숙한 여성의 성에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섹스를 한  후에도 부정을 탔다고 간주된다. 같이 자고도  여성만 부정
을 탄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기는 모두 부정의 온상으로 간주되는데, 여성의 생
식기와 부정이라는 단어를 연관짓는 학자도 있다.
  특히 생리를 하는 여성은  '완전부정'의 상태. 음식을 만들지도, 숭배를 드리지
도 않으며, 힌두사원에도 갈 수 없다. 생리가 시작된 사춘기 소녀는 오빠와 아버
지와의 신체적  접촉을 자제한다. 스카프로 가슴도  가려야 한다. 가슴을 제대로 
가리지 않으면 불륜을 초래한다고 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로 간주되기 때문
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도인들은 성관계 후의 사정이  몸을 해친다고 굳게 믿는다. 
따라서 과다한 성관계를  자제하지 않고 지나친 요구를 하는  아내는 남편을 '잡
는' 나쁜 여자로 낙인이 찍힌다.
  성숙한 여성의 성에  대한 인도인의 태도는 <카마수트라>에도  보인다. 이 섹
스에 대한 안내서에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들어  있다. 신성한 
강물에 목욕을 해도  씻기지 않는 5대 죄악 가운데 하나는  사부님 아내(사모님)
와의 불륜관계가 있다.
  힌두의 악습으로 오랫동안 지탄을 받아온 사티 제도,  즉 죽은 남편과 함께 살
아 있는 아내를 불에 태우는  것도 실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두려움에서 나왔다
는데. '내가 죽은  다음에 행복하게 잘살게 될 아내'에 대한  질투심 때문만은 아
니다. 가장 행복한  여자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여자라는  사실을 증명하
는 것이다.
  만약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 아내가 아무 불이익이 없다면 그리고 잘살 
수 있다면 불만이나 다른 동기를 가진 아내가 남편을 처치하려고 독약을 먹일지
도 모를 일이다.  가엾은 인도 남편들. 웃을 일이 아니다.  아내의 손은 약손이지
만 '독약을 든 손'일 수도 있으니.
  그리스인의 기록을 보면, 역사상 인도 최고의  황제로 꼽히는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 굽타는 늘  주변의 여인들을 두려워했는데, 왕이 잠든 후  여인이 자신에
게 독을 먹이고 후계자와 부부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그는 낮잠을 자지 않았
다. 편히 잠들 수 있는  왕은 행복한 것. 아내의 음모와 권모술수가 두려운 인도 
남편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남편의 죽음이 여자에게 지상  최대의 재앙이어야 
한다.
  홀어미(미망인은 아직 남편을 따라서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남성  중심의 언어
이다)는 원색의 삶에서  회색의 삶으로 들어간다. 금욕적인  생활의 시작인 것이
다. 보석이나 장신구를 할 수 없음은 물론 웃어서도  안 되고 뭇 남성의 눈에 띄
어서도 아니된다. 소복을 입어야 하고 남자를  유혹하는 화장이나 향수의 사용도 
금한다. 본능을 부추기는 음식도 마찬가지다.
  1856년,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법령이 제정되었지만 용기있는  극소수를 제
외하면 대다수는 여전히 홀어미 신세를 면치 못하며 일부는 거지나 매춘녀로 전
락하기도 한다.  홀어미를 뜻하는 '라안드'는  매춘부를 뜻하는  단어와 동의어로 
인류학자 비나 다스가 채집한 이야기를 보자.
  "왕이 한 신하의 아내를 마음에 두었다. 신하가 여행을 가자 왕은 반지를 주며 
유혹하지만 실패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은 옹이 아내의 방에 남기고  간 반
지를 발견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불륜을 저질렀다고 나무랐다. 그리고는 
여종을 시켜 아내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고 홀어미의 옷을 입히라고  했다. 홀어
미의 옷을 입고 하루에 한  끼씩 먹는다는 소식을 들은 친정에서는 딸이 간통을 
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홀어미를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하는 이유 중에는 잠재적 불륜에 대한 염려도 
들어 있다. 젊었을 때 홀어미가 된 여인은 죽어서 도깨비가 된다는데, 질투심 때
문에 사람들에게 불행을  초래한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즉, 성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후에  남편을 잃은 홀어미에 대해서는 이러
한 뒷 얘기가 없다.
  힌두 서사시는 "남편을 신으로 여기고...... 설사 옳지 않은 행동을  해도 참아야 
한다. ...... 술주정뱅이든  문둥병자든 혹은 아내를 두들겨패든  남편은 신으로 받
들어야 한다.  남편을 받들 때는 장신구와  꽃, 옷으로 단장하고  언제나 '사랑의 
신'으로 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성같은 인도의 아내는 아침마다 자기 삶의 중심인 남편을 위해서 기도를 드
려야 하고, 1년에 하루는 '신'인 남편을 위해 단식을 한다. 남편의 무병장수를 빌
고 또  빌며, 나와 기숙사 한  복도에 살던 락시미는 화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남편은 그녀의 클래스메이트였다.  한시적 클래스메이트가 영원한 룸메
이트로 바뀐 것인데, 그녀 역시 그 날 남편을 위해 종일 굶었다.
  "락시미, 너마저......"
  내가 웃자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쁠 것 없잖아."
  박사학위를 받은 그 커플은 지금 미국의 유수한 대학교에 가 있다.
  이처럼 인도 여성의  성은 상당히 억압되어 있다. 여자는 남편의  아내라는 자
리보다는 한  집안의 며느리로 먼저 규정되는데  어머니와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여성의 성을 희석하게 된다.
  넬슨 제독의 눈을 가진  시어머니와 프라이버시라는 말이 무색한 대가족 속에
서 동물적 교접에 불과한 번개같은 만남.  일방적이고 순간적인 만남에도 불구하
고 어쨌든 인도의 인구는 계속 늘어만 간다.

  사티 부인의 찬란한 슬픔
  1987년 9월.
  꽃다운 나이 열여덟.
  어여쁜 루프 칸와르는 산 채로 남편의 시체와  함께 화장되었다. 수백 명의 군
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고 그녀는 사티 여신으로 승천했다.
  여성단체와 언론의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사티를 기념한 열사흗날에는 30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어  그녀를 추모했다. 당시 인도에 있던 나는  항의서에 서명
도 하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가두시위에도 끼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자리에 
세워진 사티 사당, 힌두가 세운 무덤과 유사한  화장한 그 자리는 오늘도 순례지
로 번성을 구가하고 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20세기의 전설이 되었다.
  사티는 본래 수많은 아내를 가진 시바  신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사티는 아버
지가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사티 부인.  그리고 여
전히 건재한 사티의 후예들.
  이제 사티는 죽은 남편의 화장더미에  몸을 던지 힌두 여인과 그 관습을 지칭
하는 단어가 되었다. 전세계 페미니스트들이 땅을  칠 노릇이지만 사티는 남편이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면서 세상을 버리는 여인들을  말하는 것
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내는 남편과 일심동체라는 것.
  이론적으로 사티는 사랑 때문에  남편의 뒤를 따르는 아내의 자발적인 행동이
다. 기이하지만 유교문화권의  여필종부와 유사하다. 남편을 따르지 않는 여인은 
질시의 대상인 홀어미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홀어미의 생활이 힘들고 고달퍼도 
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대동소이할 터.
  그래서 수많은 여인들이 강제로 죽임을 당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한다. 본래 사
티는 남편의 시체를 무릎에 눕히고 장작더미 위에서 침착하게 죽는 여인을 기대
하지만, 가능할 법한 일이겠는가.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편의 시체에 묶이거나 대
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맞으면서 억지로 장작더미에  올랐다. 게다가 타오르는 불
길을 피해 뛰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아편이나 다른 환각제를 먹어야 
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고 의식을  집전하는 브라만은 잿더미  속에서 건진 
죽은 여인의 장신구를 부수입으로 챙겼다.
  인도에 온 문명국 영국인들은 살아  있는 여자를 태워 죽이는 사티 제도를 보
고 경악 또 경악했다. 1800년대 초반 벵골  지방에서는 연간 500-800건의 사티가 
탄생했다. 인도주의적인 영국인들은 '오, 노우!'를  외치면서 1828년에 비인도주의
적인 사티 제도를  폐지했다. 말하자면 인도의 야만성과 몽매함에 대한  서양 근
대세계의 승리였다.
  이후 사티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고 1947년 독립  후에는 간헐적으로 약 40여 
건의 사티가 보고되었을  뿐이다. 물론 사전에 경찰이 막아서 무산된  경우도 여
러 차례 있었다. 그리고 90년대를 얼마 앞둔 그 해, 루프 칸와르가 죽었다.
  사티는 약 2천  년 동안 상층 카스트에 의해서 계속되었지만,  그 기원은 분명
하지 않다. 고대의  마누 법전은 홀어미의 청정한 생활을 강조하지만  사티를 언
급하지는 않았다. 사티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인도에  원정했던 그리스인
을 시작으로 주로 외국인들이 남겼다.
  중세에는 사티가 상당한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이 인도에 
온 이후 일부  힌두 왕국에서는 사티가 마치 전염병처럼 널리  퍼졌다. 무슬림과 
힌두 간에 땅따먹기가 만연하자  전쟁터에서 사망한 남편의 뒤를 따르는 아내들
의 집단적인  사티도 많이 목격되었다.  라자스탄에는 여인들이 죽기  전에 찍은 
빨간 손바닥 자욱이 벽면 가득 남아 있는 건물도 있다.
  유럽인이 남긴 여행기를 보면, 15세기 남부지방에서  번성을 자랑했던 힌두 왕
국 비자야나가르에서는 홀어미의 사티 관행이 극성을  부렸다. 왕이 죽으면 그를 
모시던 수많은 젊은 후궁이 왕과 함께 화장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때로 그 수
가 400-500명에 이르렀다.
  크샤트리아 계층과 달리 브라만  여인의 사티는 브라만이 성서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아내와 함께 화장하면 내세의  평안이 보
장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일부 부족의 영향도 지적된다. 거기다가  죽은 자의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내를  정당하게 제거하려는 시가 식구들의 음모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다.  또한 신과 같은 남편을 '잡어먹은' 엄청난  죄과에 대한 처
벌의 성격도 있었다.
  힌두의 결혼은 대개  나이 많은 신랑과 어린 신부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사티
는 살아남은 젊은 아내의 예상되는  불륜과 그 결과인 원치 않은 아이들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질투심 많은  남성은 오랫동안 
여행을 떠날 때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웠다고 한다.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남편
은 아예 아내와 함께 떠나서 편안히 잠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티가 가장 성행했던  벵골 지방은 기근과도 연관이 있었다. 기근이  가장 심
했던 18세기 말에는 사티가 가장 널리 행해졌다.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한 궁여지
책이었던 모양인데  만만한 대상이  홀어미들이었다. 사실 영국의  전진기지였던 
벵골 지방의 기근은 막대한 벵골의 부가 해외로 유출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상층 카스트의 규범과 관행을  모방하여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일부 신진
계층도 사티를 받아들여 시행했다. "보시오, 우리도 사티를 하잖소?"
  이렇게 사티는  보다 높은 카스트를 주장하는  신진계층의 구체적인 예증이었
고, 자연히 농촌보다 도시지역의 중산층이 사티를 많이 배출(?)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보석과  장신구로 단장한 후에 죽은 남편과 함께 타오르
는 불길 속에 용감히 산화하는 죽음. 충성심과  절개에 높은 점수를 주고 낙화암
에 몸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용기와 지조를 칭찬하는 우리는 인도의 이 찬란한 
슬픔의 히로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루프 칸와르는 중학교를 졸업한  소위 신식여자였다. 결혼 기간은 겨우 7개월, 
남편과 같이 지낸  시간은 몇 주일도 되지 않았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
다지만 중매결혼을 한 그녀에게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루프 칸와르가  살던 지역은 사티의  전통이 강한 군인계층  라지푸트족의 땅, 
라자스탄이다. 사티를 라지푸트족의  오랜 관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것을 종
교의 한 의식으로 여겼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루프 칸와르를 방어했다. 그녀가 
죽은 날도 수백 명의 목격자가 있었지만 진실은 그 안에 갇혀버렸다.
  루프 칸와르,  그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한다. 불더미 속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건장한 남자들이 막대기로 후려쳤다는 주장도  있고, 남편의 시체를 무릎
에 눕히고 담담하게 타죽었다는 엇갈린 주장도 나왔다.
  주정부는 사티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사전에 공고된 그 사건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이 사진을 찍는  기자의 카메라를 뺏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의적인 취재 방해도 알려졌다. 그러나 죽은 자도 산 자도 말이 없다.
  서구화한 엘리트들은 사티를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자발성보다 강제성을 강조
한 것으로, 만에  하나 여성이 스스로 사티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당
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홀어미의 생활을 염두에 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
이다. 사람들은  사티를 보기 위해  모여들지만 불길한 존재인  홀어미는 되도록 
피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티를 하면 단번에 여신이 된다는 조건을 앞세운 그릇된 세뇌나 이데올
로기에 의한 결정일  수도 있다. 홀어미의 내세는 암울하나 사티는  그 반대이므
로. 그러나 죽기를  원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는가? 아무리 황
량한 세상이지만 남편을 뒤쫓는 아내의 자살이 미화될 수는 없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사티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여성의 '자유
의지', 즉 자발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여성단체들이 죽은 여자를 제도의 '희
생자'인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반면에 전통을  고수하는 사티 지지자들은 사티
가 제도가 아닌 개인의 결정에 의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라고 방어한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들이 내세우는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주체적으
로 사티를 결정했다는 어처구니없이 당당한 논리인 것이다.
  "사티를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요."
  루프 칸와르 사건 후,  유명한 어느 정치가의 두 번째 부인이  남편이 죽은 다
음에 한 말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티의 낭만화와 자발적  사티에 대한 끝없는 매혹이다. 
그리스인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사티  여인의 용기에 경탄을  보냈다. 1987년의 
시끌벅적한 사건은 보수적인 주정부가  반사티 법령을 정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
지만, 사티가 일어났던  그 지역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성지로 바뀌
었다. 사건 이후 루프 칸와르의 친정과 시가  양가가 상당한 부를 챙겼음은 물론
이고 사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는 합성사진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려나갔
다. 사티와 관련된 사업으로 상업적 이득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찰과 연결
된 일부 정치인들도 전통과 보수주의를 팔아서 정치적 이득을 거두었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티는 여성이 주어진 상황과  맺은 타협의 소산이다. 열녀
문을 받기 위해 시어른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위협을 엄청나게 받았을 우리의 양
반집 홀어미들.  은장도의 존재가 우스운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  여인들의 용기 
있는 결행을 비웃지 않는다.
  당시 루프 칸와르를 1면 톱으로 보도하면서 제3세계 여성의 위상 운운하며 비
난을 서슴지 않았던 <뉴욕  타임즈>의 태도처럼 우리는 막상 자기가 가지고 있
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는 눈을 감는다. '우째 그런 일이!' 하며 충격을 받
지만, 사실 사티는 미국이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한 
얼굴에 다름 아니다.
  고대의 마누는  '여성의 몸은 신성하기  때문에 꽃으로라도 세게  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근대의 간디는 '힌두 여성은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든 진리를 역설임이 분명하다. 먼 훗날  인도 여성이 갖게 될 진리
를 과연 온전한 모습일까?

  허니문과 비터문
  어느 날  잠을 자려고 불을 끄던  나는 무엇인가 이상한 물체를  보았다. 그때 
갑자기 나는 시퍼런 이성을 자랑하던 내게 두려움이 산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
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은근히 수소문을  해본 결과, 연전에  내 방에서 
한 여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치 않는  결혼이 원인이었
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혼수 조달 능력과 그녀의  기대치 간의 공간은 결국 죽음
으로 메워졌다. 내가 본 물체가 과연 그녀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무렵 인도 동북부에 있는 한 도시에서 세 자매가 천장의 선풍기에 목을 매 
자살했다.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야 하는 아버지의 부담을 덜기 위한  갸륵한 처
사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슴에는  그 부담보다 수십, 수백 배 무거운 돌덩이가 
평생 떠나지 않으리라. 끔찍한 그들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고 사람들은 한동안 
우울해 했다. 뒤틀린 결혼 관습은 언론의 도마 위에서 여러 차례 토막이 났다.
  인도인은 거의 모두 중매결혼을 한다. '찌리릿!' 하고 첫눈에 반하는 낭만적 사
랑이 없지는 않지만 결혼까지는 산 넘어 산, 난관이 너무 많다. 중매결혼은 카스
트와 궁합을 가장 먼저 따지지만 '돈' 문제가  아니 낄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공
개적으로 지참금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지만,  실제로는 신부측의 능력을 넘
는 신랑측의 기대 때문에 '라운드' 협상에 들어가게 된다.
  마드라스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목사  앞에서 지참금을 타협하고 그 액수의 10
퍼센트를 교회에 헌금을 한다고  한다. 물론 공개는 하지 않는다. 마침내 협상이 
끝나고 결혼이 결정되면  신부측은 빳빳한 새 돈을 준비한다.  007가방에 반듯이 
누운 그 새파란  돈뭉치는 신부의 오빠가 신랑의 집에 찾아가서  직접 전달한다. 
가방이 쫙 열리고...... 우와, 인도판 007작전이다.
  결혼 지참금은 외상이  없고 카드는 절대 사절이다. 007가방을  인수하지 않은 
신랑이 작전 거부, 즉  예식을 거부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한번은 신랑에게 
주기로 약속한 자동차가 결혼식 당일까지 출고가  되지 않았다. 신부측이 자동차 
구입계약서를 보여주며 통사정을 했는데도  이 못난 의지의 신랑은 끝내 고집을 
피우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설마하겠지만 지금도 수많은 여인들이 결혼 지참금  문제로 죽어가고 있다. 평
화와 정신주의를  열창하는 인도에서 말이다. 공식적인  통계를 보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연간 6천여  명의 인도 여성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 통
계가 늘 그렇듯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신문의 한켠에는 부엌에서 밥을 짓던  주부가 입고 있던 옷에 불길이 붙어 타 
죽었다는 기사가 종종 실린다. 아직도 인도의  서민층은 예전에 우리가 야외에서 
쓰던 가스버너와 비슷한  기구를 취사용으로 쓰는데, 좁은  부엌에서 움직이다가 
질질 끌리는 옷자락이  불길에 닿게 되어 사고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즈음은 주
부들이 풀 먹이고 다리는 면제품보다 화학섬유를 즐겨 입기 때문에 불은 순식간
에 생명을 앗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 중 상당수는  사고가 아니라 냄새 나는 사건이 뒤에 붙어 
있다. 결혼 지참금과  관련하여 시댁으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더 많은  금품 요구
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시댁식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들 희생자들
은 한두 명 정도 자식을 둔, 결혼한 지 3년 이내의 여성인 경우가 많다. '허니문'
에서 '비터문'으로 직행하는  것이다. 펀자브 주에서는 결혼 후  7년 이내에 집에
서 죽은 여인을 모두 형사사건으로 조사하는 형편이다.
  불에 탄 경우는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사고와 고의적 사건을 구별
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수사를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어렵
사리 수사가 이루어져도  재판까지 가는 데는 느림보  인도답게 5-6년이 걸리고 
그것도 유죄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옳다. 델리에서  지난 7년간 일어
난 1천여 건의 사건 중에서 유죄를 받은 경우는 겨우 4건에 불과하다.
  여자가 시집을 갈 때 금품을 챙겨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인도만의 고유
한 관습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혼수병을 보아도 그렇다. 인도 정부는 특
별법을 제정, 악습을  근절하려고 노력을 경주하지만 물질주의가  팽배할수록 중
매결혼의 물질적 동기도 더 강해지는 법.  1980년대 연간 400여 명이던 희생자가 
1990년대에는 그 열다섯 배로 크게 늘었다.
  신부는 결혼할 때  또는 그 직후에 가구,  식기, 침구, 전자제품, 시댁식구에게 
가는 옷감과 신랑에게  주는 손목시계와 옷 그리고 현금을 마련한다.  부유한 사
람들은 자동차와 같은 고가품을 제공하기도 한다.  당사자는 살림에 필요한 다른 
물품, 즉  방석과 같은 수예품을 직접  준비하여 비용을 줄인다. 북부지방에서는 
혼수에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
  부모는 딸을 낳는 순간부터 저축을 시작,  결혼준비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딸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웬수'의 탄생이다. 결혼 지참금은 결혼
할 때 주는 혼수 1회로 종이 치지 않는다. 그것은 제1탄 약혼 선물에 이은, 일생 
동안 이어질 '지참금 시리즈'의 제2탄에  불과하다. 외가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중요한  고비마다 상당한 부담을 져야 한다. 외삼촌의  등골이 휜
다.
  시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혼수와 추가로 와야 할 부담을 친정이 감당하
지 못할 때 새댁은 심한 학대를 받는다. 악역은 역시 만국 공통인 시어머니이다.
가장 흔한 시나리오는 잠자는  며느리에게 휘발유를 뿌려서 태워 죽이고 부엌에
서 일어난 사고로  위장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은 시달리다 지쳐서  자살을 선택
한다. 이래서 이혼률이 낮은 인도지만 자살률은 높다.
  딸에게 지참금을 준  부모는 당연히 아들에게서 그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우
리집처럼 아들이 둘이고 딸이 하나면  남는 장사지만 딸만 가진 부모는 기둥 뿌
리 뽑아주고 거리에  나앉는다. 결혼 시장에서 여자 개인의 능력은  그다지 중요
하지 않다. 직장이 있는 여자, 얼굴이 예쁘거나 피부가 백설처럼 흰 여자는 약간
의 '바겐세일'이 가능하지만 그것도 보편적이진  않다. 의사와 결혼하는 여의사도 
지참금을 가져가는 판이니 기가 막힌다.
  내 친구 수난다는 정치학  박사로 델리에 있는 유명한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
다. 서른이 훨씬 넘은 그녀는 결혼에 아주 냉담하다. 예쁘지 않은 얼굴에 피부도 
가무잡잡한 자신이 결혼이라는 시장에서 별볼일 없는 상품이라고 진단하기 때문
이다. 게다가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부모와 수드라라는  늘상 밀리는 
카스트 배경을 가졌다.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결혼 지참금이란 원래 생산력이 없는 부양식구를 맞아들이는 신랑측에 지불하
는 경제적 보상의 성격을 지닌다. 재산 상속의 일부라고도 해석되는데,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의 일부를  귀여운 딸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결혼
하는 딸에게 아들과 동등하게 토지와 가옥을  배분했다고 하지만, 인도에서는 그 
배분이 일정하지 않고 결혼 시장에서 신랑 값의 등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지참금은 신랑보다 신랑의  가족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겨지는데,  많은 지참
금은 신부 가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수단이 된다. 유능한 신랑감을  재력으로 사
는 것이다. 인도  최고의 신랑감인 '행정고시' 합격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값을 자랑하고 엔지니어와 의사도 인기가  높은 고가의 상품이다. 아들에 
대한 투자를 건지려는  부모 탓에 교육을 받은  남자들은 더욱더 많은 지참금을 
요구한다. 배워서 뭘 하자는 건지, 정말 지성이 허무하다!
  일부 자존심이 있고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굴욕적인 지참금을 거부하고 수난
다처럼 결혼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난  아들을 둔 일부 부모는 결혼 
시장의 동향에 민감하고 한탕하려고 눈초리를 빛낸다.  소나 돼지는 고기의 양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데 상품,  하품으로 등급이 매겨진 잘난 남자들. 사위는 힌디
어로 '자마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자마', '야마'(염라대왕)인 것을  보면 전통적
인 관습의 심각성이 엿보인다.
  19세기 이래  사회개혁의 첫번째 대상이었던  과도한 혼수 문제.  깨인 사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선되기는 커녕 양적, 질적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는 
물질의 단맛을 본  도시 중산층에서 특히 극성이다. 그리하여 결혼이  필수인 사
회에서 '싱글'로 남는 딸자식이 두려운 부모는 울면서 겨자를 먹고 마지 못해 기
둥 뿌리를 뽑는다. '부자생존'의 논리인 셈이다.
  인도 인구의 반은 여성이다. 정신주의와 비폭력의  나라에서 물질 때문에 자행
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탐욕의 산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결혼은 천국에서 이
루어진다고 말한다. 인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너무 가까워 보인다.
  햄릿이 물었다.
  "좋은 소식이 있느뇨?"
  "사람들이 점점 착해지고 있다 하옵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오는구나."

  나, 결혼했어요
  "그럼 남들이 결혼했는지 어떻게 아니?"
  "모르지. 겉으로는."
  "세상에."
  샤르밀라는 결혼하고도 그 티를 내지  않는 우리의 박 여사를 보고 몹시 분개
한 모양이었다. 마치 결혼한 박 여사가 인도에서 몰래 애인라도 만나는 것처럼.
  2주간의 짧은 겨울방학  동안에 맞선에서 결혼까지 초고속으로 결혼행진을 마
친 그녀는 부인네 티를 덕지덕지 붙이고 나타났다.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신
하여 자랑스럽게 배를 내밀고 다니던 옆집의 명자 씨를 기억하면서 그녀를 귀엽
게 봐주었다.
  그녀의 가르마에는 빨간  꿈꿈가루가, 이마에는 엄지손톱보다 큰 곤지(빈디)가 
핏빛처럼 선명했다. 목에는 자유의 구속을 알리는  결혼 목걸이가 반짝이고 팔에
는 여러 개의 팔찌가 쟁그렁거렸다. 이제 그녀는  알록달록 물이 들은 고운 사리
만 입겠지.
  아, 그랬다. 꼼짝거리는  그녀의 발가락에 나란히 자리한 은빛  발가락지. 발목
에서 흔들리는 발찌(?)도 보였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녀는 완벽한 유부녀였다.
  우리는 그렇게 안다. 그녀가  혼자가 아닌 누군가의 귀중한 반쪽이라는 걸. 50
미터 전방에서도 대번에 알아본다. 이제 그녀는  조금은 뻔뻔해지고 허리는 절구
통이 되겠지. 소속이 있어서 행복하고 치근거리는 사람이 없어서 약간은 서운할, 
그녀 이름은 유부녀.
  인도에서는 외양만으로도 결혼한 여인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래야 순진한 
남성들이 헷갈리지 않는  걸까? 인도의 기혼여성이 우리나라의 배우처럼 인기를 
위해 미혼인 척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마에 찍은 큰 곤지는  남성의 접근금지
를 알리는 빨간 경고등이다.
  "잠깐, 스톱! 나, 유부녀예요!"
  코의 오른쪽에 구멍을 내어 장식하는 '노스링'은 아내가 성적으로 한 남자에게 
종속되었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매춘부는 그 링을  뺄 권
리가 있다고 한다.  언젠가 북부에서 만난 한 여인의 송아지  코뚤이같은 커다란 
노스링은 입까지 축  내려왔었다. 그녀는 무얼 먹을 때마다 왼손으로  그것을 들
어 올려야 했는데...... 아암. 그 정도는 참아야지.
  한 여자가  4형제의 맏이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들은 늘 해가  저야 들판에서 
돌아왔다. 시어머니와 새댁은  관습대로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저녁밥을 차렸다. 
보름이 지났다. 새댁은 조심스럽게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님, 네 사람 중 누가 제 남편이에요?"
  "아가, 네가 이  집에 온 지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다. 난 이십오년 동안이나 
내 남편과 시동생을 구별하지 못했단다."
  결혼한 여성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 이것은 남성의 시선이  미치지 않
는다는 사회적인  격리를 뜻한다. 외부인은 물론이고  시아버지, 시동생 등 남자 
가족과도 거리를 둔다. 불륜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거룩한 취지의 소산이다. 다른 
사람의 부인에 대한 안부를 묻거나  남의 집을 방문해서 그 아내에게 말을 거는 
것도 좋지 않은 매너이다.
  외간남자와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사는 결혼한 여성은 연장자나 남자의 동
반 없이 혼자  나다니지 않는다. 특히 이방인의 시선이 수북히  날아오는 복잡한 
곳은 될 수 있으면 피한다. 베일이라는  방패로서는 '늑대같은 남자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건지 뭔지.  '남자는 다 도둑놈'이라고 가르친  한국의 부모님들도 웃으실 
거다.
  인도 남성이 여성들의 선택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이미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니티 슬로카>에는 '꿈의  의미, 왕의 성격, 가을날 구름의  결과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거나 '여자의  마음을 알기보다는 차라리 흰까마귀나 물고
기 발자욱을 보는  것이 쉽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여성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다.
  팔린 그림에 붙인 쪽지처럼 결혼한 여성에게 붙는 분명한 표식은 그 두려움의 
소산이다. 결혼한 여성이 팔뚝에 수북하게 차는  팔찌는 움직일 때마다 쟁강쟁강 
이쁜 소리가 난다. 자이푸르에서  만든 유리 팔찌는 더 쟁그렁거리는데, 그 소리
는 여성의 행방을 알려주는 일종의 감시 레이더인 셈이다.
  '아, 마누라가 뒤뜰에 있구나. 휴!'
  남편들은 고양이 발목에 방울을 단 용감한 미키 마우스가 아니랴?
  여성에게 취약한 자기  고백이자 자기 경험의 소산인 남성들의 여성  보호. 슬
프게도 아내의  불륜을 '자나깨나 살펴보는' 그  남성들이 여성을 향해 성희롱과 
성폭력을 자행한다. 내가 인도에  도착해서 들은 첫번째 말은 '해진 후에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는 남자 선배의 충고였다. 사방천지가 늑대소굴이라는 것.
  남부지방은 비교적 괜찮지만 북부지방은 여성의 행보가  쉽지 않다. 특히 늑대
보다 더 무서운, 호랑이같은  순사 나리가 요주의 인물이다. 현대적인 빌딩과 국
가의 행정기관이 늘어선  수도 델리. 이질적인 문화가 혼합된 델리는  여성의 안
전지대가 아니다. 로맨티시스트인  나도 델리에서 밤의 낭만을  말하기는 어려웠
다.
  남녀의 불평등이 심한  인도에서 남성의 성희롱과 성폭력은  메가톤급이다. 시
내버스에서 엉덩이를 꼬집히는 것은  일상이고 매 40분마다 어디선가 한 여성이 
남성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건 공식적인 기록이다. 비공식 기록은 적어
도 여기에 곱하기 100을 해야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희롱에  혈압이 몇 번씩 오락가락한다. 
말을 모르니 다행히 육탄전까지 가지는 않지만.  대개의 인도인은 온순하고 순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아마 더 원초적인 모양이다.
  여성평등과 여성해방의 시대에도 인도 시내버스 좌석의 반은 공식적으로 여성
의 몫이다. 버스에 오른 여성은 그 자리에  앉은 남성들을 당당히 째려볼 권리가 
있다. 기차에도 여성을 위한  특별실이 매 칸마다 따로 마련되고, 기차표를 사거
나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곳에는  예외 없이 여성을 위한 창구가 별도로 설치되
어 서비스를 다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내 옆방의 수잔은 캐나다에서  온 팔등신 미인이었다. 그녀의 
고민은 남자들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였다. 싸구려  미국 영화의 영향인지 백인여
자들은 모두 '프리섹스'를  즐긴다고 생각하고 치근거린다는 것.  해결 방안을 숙
고한 우리는 '굿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녀의 손에 등장한 가짜 결혼반지. 그
날부터 집적거리는 남자가 현저히 줄었음은 물론이다.
  여성에 대한 범죄가 끔찍한 이 사회에서 아내를 보호하는 일은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인도에서는 한 번 소속이면 영원한  소속이라고 생각하여 결혼은 있지만 
이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설사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도 이혼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브라만의 경우가  그렇다. 간 큰 아내가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우지 
않는 한 남편은  부인을 위해 소문을 부인하고 변호한다. 자신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이 일찍 집에 돌아왔다. 반가운 아내가 그 이유를 물었다.
  "높은 사람이 핏대를  올리면서 나보고 '지옥에나 가시오!'라고 하잖아. 그래서 
그 말대로 집으로 왔지 뭐."
  북부 하리야나 지방에는 '아내가 없는 집은  악마의 소굴'이라는 말이 있다. 끔
찍하게(?) 보호를 받는 아내가 있는 천국. 이왕에 소유라고 표시를 했으면 내 물
건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쟁강쟁강 팔찌 소리가 울리는 진
짜 천국이 되도록.

  여자의 남자
  인도 북부지방의 민요 한 토막.
  '어떻게 이런 전통이  생겼을까?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드럼을 치면서  내가 태
어날 때는 놋주발을 때렸다니!'
  시골에서 자란 나는  아이를 나은 후 등장하는 금줄의 차이에  익숙했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그  집 대문에 걸리는 큰 잣나무  가지와 작은 소나무 가지의 차
이. 잣나무가지  사이에 걸린 새끼줄에 매단  붉은 고추들. 우리는  담박에 안다. 
누가 태어났는지를. 딸은 그렇게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다.
  인도도 예외는 아니다.  남자 아이의 탄생은 드럼을 치거나 피리를  불어서 온 
동네에 알린다. 동네  여인들은 찾아와서 축하의 노래를 부르고 아들을  낳은 집
은 달콤한 탄생을 축하한다고 온 동네에 단  것을 돌린다. 사내아이를 받은 산파
는 모처럼 두둑한 보수를 챙긴다. 심지어 출산을 도운 동서에게도 선물이 간다.
  우리가 살림 밑천이라고 말하는 첫딸의 경우는 다소 예외가 있지만 딸의 탄생
에는 그러한  떠들썩한 축하행사가 없다.  집은 슬픔에 잠기고  찾아온 사람들은 
슬퍼하는 산모에게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나을 거예요.'라고 위로를 한다.
  지금도 일부 보수적인 집안에서 계속되는 '뿜사바나' 의식은 뱃속에 든 아이가 
여자일 경우에 아들로  바꾸어 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이렇게 아들을  낳으면 박
수를 치고 딸을  낳으면 서운해하는 모습은 인도에서도 그 역사가  오래다. 일찍
이 우파니샤드에도  '신이여, 제게 사내아이를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딸을 주세
요.'라는 매우 이기적인 발언이 엿보인다.
  인도 사회에서 남자  아이 선호사상은 그 타당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혼을 평안하게 하는 존재이다.  아들은 산스크리트로 '푸트라'라고 하
는데 지옥에서 구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를 지옥에서 구
원해줄 아들이 없다는 것은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음을 뜻한다.
  아들이 없는  남자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긴다. 내세에  기댈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들은 집안의 이름을 지니고 대를  이어 부
모의 존재를  지속시킨다. 딸만 낳은  여인은 집안에서나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냉담한 대우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 제국주의는 작은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집에서 기대할 것이 
없는 작은 아들들이 남아프리카, 인도 등 외국에서  행운을 잡기 위해 모험을 감
행한 것이다. 인도에서도 큰아들은  가업을 잇고 작은 아들은 학교에 보낸다. 북
부지방에서는 아들 한명을 군대에 보내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었다.
  아들과 달리 딸은 결혼을 하여 언젠가  집을 떠날 '손님'이다. 경제적으로 도움
이 되지 않을 뿐더러 결혼을 시킬 때는  상당한 지참금을 챙겨주어야 한다. 딸을 
시집 보내고 나서 빚더미에 앉은 가족이 종종  있기 때문에, 딸은 가족의 빈곤을 
초래하는 존재로, 장차  돈을 벌 아들은 집안의 구세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아들의 타자인 딸의 위치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잠시 보관하는 물건
과 비슷하다. 아끼고  사랑하다가 언젠가는 돌려주어야 할......마치  진 빚을 갚듯
이. 부모는 결혼을 하고 집을 떠나는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혹시 너에게  서운한 일
을 했다면 용서해다오."
  북부지방에서는 시집가는 딸이 집을 향해 어깨  너머로 밀알을 던진다. 친정의 
복을 다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남자 아이를 선호하다 보니 자연 여자 인구가  남자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1000:927로 여성의 수가 상당히 부족하다. 인구를 
9억 5천만 명으로 계산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무려  3천 5백만 명이나 적다. 이것
은 여자 아이와 결혼 지참금  문제로 죽는 젊은 여성의 죽음이 많은 것이 그 주
요한 원인이다.
  게다가 여아는 젖을 먹이는 기간도  짧고 먹이는 음식의 질도 떨어지는 등 태
만하게 기르기 때문에 죽을  기회(?)가 아주 많다. 사내아이는 잘 먹이고 아프면 
치료도 받지만 딸아이는 죽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도 최대의 주지
방 우타르 프라데시는 5세 이하 여아의 사망률이 남아보다 70퍼센트나 높다.
  한평생 집안의 부담일뿐인 여자 아이는 가능하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미리 손
을 쓴다.  그래서 뭄바이 같은 대도시에서는  조직적인 낙태가 성행한다.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여 여아일 경우에  낙태를 하는 것이다. 1990년, 뭄바이에 있는 한 
병원의 자료를 보면 여아를  확인한 96퍼센트의 산모가 뱃속의 아이를 지웠다고 
한다. 힌두에게 태아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끝내 씻지 못하는 중대한 죄이
건만.
  농촌에서는 계집애가 응아  하고 나오는 즉시 그 소리를 죽여버린다.  물에 담
그거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 독약을 먹여  살해하기도 한다. 이는 대개 어머
니의 '혼자만의 비밀'이다. 태어난 여자  아이의 약 10퍼센트가 '생즉사'를 경험한
다고. 한  여성 운동가가 '1996 미스  월드 대회'를 보이코트하는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를 여아살해 문제에 돌리라고 일침을 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계산이라면 나도 머리에서 쥐가 나지만 이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설명하기 위
해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인도에서 매 1분마다  태어나는 여아는 약 24명이다. 
그 중에서 태어나자마자  살해되는 여자 아이는 시간당 150명, 하루에  3천 명이 
넘는다. 1년이면 백만여  명이 넘는 여아가 오직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소리 없
이 죽어가는 것이다.
  이 구조적 폭력이 가장 심한 지방은 땅이 척박하고 자원이 빈약한 라자스탄과 
마디야 프라데시이다. 라자스탄에는 살아남은 딸이 워낙  없기 때문에 백마를 타
고 신부 집으로  오는 신랑의 행자를 수십  년씩 못 본 지방도 꽤  있을 정도다. 
일찍이 1800년대 중반에 법으로  금지된 이 관행은 그러나 라자스탄의 오지에서
는 여전히 싱싱냉장고다.
  이 모든 것은  남성중심 사회의 유산이다. 모계전통을 가지고 있는  남부 케랄
라 주에는 오히려 여성 인구가 남성보다 많다.  그것은 여아의 사망률이 다른 지
방보다 현격하게 낮은 데서  기인한다. 인도에서 여성의 사회, 경제적 위상과 문
자해독률이 가장 높은 이 지방은 여성의 평균 수명도 인도에서 최장이다.
  어머니가 되지 못한 여자의  일생은 불완전하다고 하는데 이런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자신감과 자존심은 아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여성은 어머니가 됨으
로서 딸과 아내로서 누리지  못했던 존경과 인정을 동시에 받는다. '아들을 낳은 
아내라야 진짜  아내이다.'라는 말과 '아들을 못  낳느니 차라리 진흙이  되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을 지경이다.
  마누 법전은 "스승은 다른 사람보다 열 배 이상 존경해야 한다. 아버지는 스승
보다 백 배 이상  존경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천 배  이상 존경해야 한
다."고 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야 존경을 받는다.
  서사시의 주인공 라마가 아내 시타를 받아들인 것은 아들을 처음으로 만난 후
였다. 또다른  작품의 주인공 두샨타가  샤쿤탈라를 인정하는 것도  어린 아들을 
본 후였다. 인도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딸,  아내, 어머니 등 늘상 다른 사람과
의 관계로서만 파악된다.  그 중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인간  관계의 기본
적이고 궁극적인 모형인 것이다.
  "어마마마, 소자 어찌 하오리까?"
  "엄마, 나 어떡해?"
  그러니 마마보이가 많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래 전, 북부에 사는 아그라
왈 집단을 대상으로  어머니와 아들과의 친밀도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를 보면 결혼한  남자들의 반 이상이 아내보다 어머니와 더  가깝다고 응답했다. 
겨우 20퍼센트의 남자가 아내와 더 친밀하다고 시인했을 뿐이다.
  오늘날 도시 중산층 부부의 상호 친밀도는 다소 높아졌지만 이에 비해 농촌의 
현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그 권위를 행사한다. 탈무
드에는 '양(며느리)과 호랑이(시어머니)가  한 우리에서 살지 못한다'고  했다. 어
쨌든 인도에서는 아들을 독점하려는  시어머니의 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
이다.
  어머니의 정체성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영원한 소년 크리슈나 신
과 라다의 사랑은 인도판 <아들과 연인>이다.  어머니뻘 되는 연상의 여인 라다
는 아들을 연인으로 여기는 힌두 여인의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다
는 남편을 버리고 기꺼이  크리슈나를 따라간다. 남부지방의 한 보고를 보면, 남
성은 성숙한 아내가 아이와 친밀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인도 사회는  여성의 에너지를 믿고  수많은 여신을 숭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로만  묶여진다. 딸아이를 '부의 여
신'이라고 부르면서도 딸의 탄생을 슬퍼한다. 여자에 대한 여자의 폭력인 여아살
해와 조직적인 낙태는 인도문화의 가장 찌그러진 단면이다.
  어떤 이들은  여성 인구의 부족이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여성은 인류의  생존을 이끈 만만치 않은 존재. 여자들의  남아선호는 라
이벌 여성을 교묘하게 통제하여 먼  훗날 모권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장기적인 음
모의 일환일지 누가 아느뇨?
  남자들이여, 깨어나라! 그리고 여자를 경계하라!

6. 인도에서 사는 법2

  배꼽미와 각선미
  10여 년 전인가? 소설 <파리대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윌리
엄 골딩이 인도를 방문했다. 그는 방문  소감에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고 고백했다. 인도  언론은 인도가 더럽고 가난하다는 느낌을 다르게  표현한 것
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의 발언은 '대왕'의 냄새를 
풀풀 풍겼다.
  그러니 그보다 100여 년 전, 19세기 말  인도에 온 기독교 선교사들이 인도 문
화에 '경악, 또 경악이로소이다'를 연발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그들
이 충격을 받은 것은 풍만한  가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
인들의 모습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에 목욕을 한  선교사들은 천박한 
모습의 여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아이, 부끄러워라."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낮은 계층의  여인들이 가슴을 가리
기 시작했다. 블라우스라고 부르는  윗저고리가 등장한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내
려온 관습의 포기는 가슴을 가리던 유일한 계층인 상층 브라만과의 갈등을 야기
시켰다. 문제가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자 식민 당국은 선교사들에게  부디 자제
할 것을 당부했고 그것으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1881년 말 벵골 지방에서는 힌두 개혁집단 '아리야 사마즈'를 따르는 여인들이 
블라우스를 입어  일대 센세이션이 일었다.  그때까지 사리 외의  옷으로 가슴을 
가리는 것은 매춘부의 특권(?)이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모
든 여성이 가슴과 어깨를 가리는 윗옷을 착용한다.  물론 나이 든 하층계급의 여
인들은 여전히 가슴을  가리는 데 인색하고, 말라바르 지방이나 일부  부족 여인
들은 여전히 고유한 예절을 지켜 가슴을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보석과 장신구로 
웃옷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옛날 아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고 사람들이 정글에서 열매를  줍고 사냥을 
하던 그  시절부터 인도에서는 웃통을  벗는 것이 바른예절이었다.  옷이란 결국 
오염을 가져오는 매개체였고 힌두사원의  브라만 사제들이 모두 웃통을 벗고 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윗사람을 만나면 존경의  표시로 위에 걸친 옷이나 스
카프를 벗는 사람들도 있다. 그대 앞에서 누가 웃통을 벗으면 '상스럽게!'라며 상
스럽게 인상 쓰지 말기를.
  19세기 말에는 우리나라 여인들도 가슴을 허옇게  드러내고 다녔다. 시골 출신
인 나는 아무 데서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러 어머니의 가슴을 실컷 구경하
며 자랐다. 물론 요즘은 시골에서도 그런 '매너 없는 어머니'는 드물다. 빅토리아
식으로 아니 미국식으로 세련되게 진화한 한국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자기의 가슴 대신  보이지 않는 소의 가슴을 들이민다. 정말  '보이지 않는 사랑'
이 아니랴?
  그렇게 열심히 가슴을 가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키니나 배꼽티라는 최소의 
재료를 이용, 최대의 노출을 위해 기를  쓰는 까닭은 무엇인지? 지능지수도 감성
지수도 낮은 나는 늘 '그것이 알고 싶다'. 아차, 각설하고 인도로 가야지......
  인도의 여인들이 블라우스를 입지  않았던 것은 예의나 염치가 없어서가 아니
었다. 인도 옷의 특징은  바느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알렉산더가 들여왔
다는 여성의 우아한  사리는 폭이 1미터에 길이가  5-7미터인 통으로 된 옷감이
다. 접어 입으면 미니스커트와 흡사한 남성들의  '룽기'도 핀이나 단추를 쓰지 않
은 1-2미터짜리 천 조각이다.  숄이나 남성들이 어깨에 덮는 스카프도 마찬가지. 
입는 것이 아니라 몸에 두르는 것이다.
  덥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청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목욕을 하는 인도인들. 
한 장으로 된 커다른 옷감은 깨끗함을 유지해주고 입고 벗기가 용이하다는 장점
이 있다. 그들은  맘만 먹으면 순식간에 아담과 이브가  된다. -- 이상한 상상은 
마시라! 물론 빨래하기도  쉽다. 하지만 빨래를 하려면  신성한 강물을 더럽혀야 
한다. 내 위생을  위해서 지구의 위생을 더럽혀서는  아니 될 일. 되도록 빨래를 
적게 하는 방법은 옷의 부피를 줄이거나 오래 입는 것이다.
  남부 닐기리 산악지방에 사는 한 부족은 이  점에서 아주 철저하다. 그들은 한 
번 옷을 사면 다 해어져 걸레가 될 때까지  절대로 빨거나 바꿔 입지 않는다. 땀
에 절고 비바람에  시달린 옷이 넝마에 가까워지면 그제야 버린다.  혼자 깨끗한 
척 중간에 옷을 빨면 마을에서 즉시 쫓겨난다.  이유는 물이 아주 귀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위생은 0점이지만 환경 점수는 100점이 아니겠는가?
  이제 블라우스는 갖가지 디자인을 자랑하고 유행도  탄다. 가장 매력적인 샤우
라스트라식은 가슴의 곡선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뒤에다 십자로 끈을 묶는 야
한 스타일이다. 몸에 꼭 끼고 길이가 짧은  블라우스와 사리 사이의 허리는 맨살
로 때운다. 마치 비키니를 입은 것과 같다. 날이 더우니 시원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처음에 뚱뚱한  여인들의 맨살에 눈 둘 곳을 몰라  쩔쩔맸었다. 수업시간
에는 언덕이 서너  개인 여 교수님의 적나라한 몸매에 몹시  고민하기도 했었다. 
허나 사람의 눈은 정말 간사하다. 3개월 정도 지나자 내겐 더 이상 '감동할 깜짝
쇼'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압구정동에서 한 뼘은커녕 두세 뼘씩 허리를 드러낸 
여자를 봐도 '평온지심'이다.
  "다리를 내놓는 게 야하지 허리를 보이는 게 뭐 어때서?"
  인도 여인들은 다른 나라의 짧은 치마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인
도에서는 가슴과 배꼽을 보이고 맨허리는 한 뼘씩 드러내도 괜찮지만 다리를 노
출하는 것은 망층한 일이다. 발등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사리 안에서 땀띠가 
아무리 바쁘게 감수분열을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처음 인도에 갔을  때, 더운 나라인지라 나는 종아리를 내놓고  신나게 돌아다
녔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날씬한 내 다리에  만인의 시선이 와 박힌다는 걸 깨
닫고는 최대한 인도식으로 바꾸었다. 인도에  가면 인도인이 돼라! 백 번 지당하
신 말씀.
  상체의 노출에는 관대하면서 다리에 대해서는 이렇듯 엄격하다는 점은 재미있
는 인도의 관습이다. 다리를 보이는 영화배우는  싸구려 취급을 당하고 롱다리를 
겨누는 미인대회도 그들에게는 감격적인 행사가 못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
적인 여성상은 늘  사리를 휘어감은 다소곳한 여인이다. 하긴 윤복희  씨가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이 겨우 60년대였으니...... 두고 볼 일
이다.
  인도의 전통의상인 사리와 룽기는 허리에 둘러 입는다.  허리에 몇 번 돌려 감
은 후 허리 부분에서 주름을  잡아 배꼽 부근에 찔러 넣고 남은 부분은 왼쪽 어
깨로 넘기는 방식이다.  이때 주름은 배꼽 아래서 퍼져내려서 신체의  중요한 부
분을 가리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악을 막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배가 불룩한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두른 룽기는 배꼽 밑의  언덕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기 마련. 나는 핀도 단추도 없는 그  옷이 언제 흘러내릴지 몰라서 불안했지만 
비상상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슬림이 온 이후 인도인의 옷에도 변화가  생겼다. 남성들의 옷에는 페르시아
와 터키식 디자인이 도입되었다. 꽉 끼는 바지와 셔츠, 하이칼라의 긴 코트를 입
은 네루 스타일이  그 전형이다. 북부지방의 여성들은 사리 대신  무릎까지 오는 
긴 윗도리와 통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일찍이 4세기에 주조된  동전에 새겨졌던 
바지가 인도에 수용되는 데는 천 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머리에 베일이
나 모자를 쓰는 것도 무슬림의 영향이다.
  아, 반대로 인도가  영국으로 수출해서 유명해진 스타일도 있다.  바로 파자마.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동방에서 불철주야  바쁘게 뛰던 영국인들은 인도인이 
입는 헐렁한 옷이 마음에 들었다. 낮에는 어쩔  수 없지만 밤에라도 자유롭고 싶
었던 그들은 헐렁한 잠옷을 만들고 인도인이 입는 통이 큰 바지를 따서 '파자마'
라고 불렀다.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치는 '숄'도 인도가  영어권에 빌려준 단어이
다.
  위성 텔레비젼의 공격을 받는 도시의 일부 젊은이들은 이제 청바지를 즐겨 입
고 서양의 패션을 흉내낸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외국의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작년에는  델리 한복판에서 초미니를 입고 무 다리를  뽐내는 여
성도 보았다. 그러나 인구의 절대 다수는 인도식의 옷을 입는다. 젊은 남성은 바
지와 셔츠를 많이 입지만 여성, 특히 결혼한  힌두 여성은 처녀적 패션과 상관없
이 가장 여성적이고 우아하다고 믿는 사리로 돌아간다.
  내가 석사과정을 마치고  2년 동안 머물던 기숙사를 퇴장할  때였다. 후배들은 
떠나는 선배들에게 작은 선물과  함께 이미지에 어울리는 문장을 하나씩 지어주
었다. 내게 붙여진 표현은 간디의 말을 인용해서 '소박한 생활, 고상한 생각'이었
다. 나의 내숭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사실 나는 촌스럽기 그지없다.
  인도인의 의생활은 대체로 단순 소박하다. 소수의  부자들이 물을 흐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는 전통과 인도 고유의 물빛을 유지한다. '이왕이면 다홍치
마'라거나 '옷차림도  전략입니다'라고 단언하며 투쟁 정신을  부추기는 우리나라
에서 나같은 촌뜨기는 '좋은 생각'을 할 여력을 종종 잃는다.
  그럴 때면 인도가 생각난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인도에 오래 있었으니 카레는 실컷 먹었겠군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작은 갈등이  인다. 진실을 말해? 말아? 대개의 
경우에는 그냥 "네." 하고  입을 다문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몽골에  징기스칸 
요리가 없듯이 인도에는 우리가 말하는 그 카레는 없다.
  카레라는 이름은 양념이 많은  풍성한 인도 음식을 지칭하는 영어권의 발명품
이다. 어원은  소스라는 뜻을 지닌 타밀어  카리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인도인은 물론 카레가  아니라 커리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우리식으로 
'카레'를 고수하자.
  카레가 최초로 언급된  것은 477년이다. 여러 여행자들은 마우리아  왕조 시대
에 인도에 온 그리스 대사 메가스테네스의 <견문록>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했
다. "상 위에는 황금색의 음식이 놓여 있다. 그것을 밥에 붓고 거기에 각종 고기
를 얹어 먹는다."
  카레의 맛은 25가지의  양념을 섞어서 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양념은 크로커
스꽃에서 나오는 샤프란으로 노란색을  낸다. 카레의 매운 맛(가람 마살라)은 정
향, 생강, 후추  등 여러 가지 양념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양념들은 몸을 차갑게 
한다고 한다. 인도의 찌는 날씨를 생각하면 옛사람의 지혜가 놀라울 수밖에.
  카레는 그 내용물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야채가 주요한 재료이면  야채 카
레이고 생선이 들어가면 생선 카레가 된다.  힌두와 달리 파르시인, 무슬림, 기독
교인들은 닭고기, 양고기, 쇠고기를 상식하는데  고기를 토막내어 카레를 만든다. 
그러다 보니 카레의 종류가 무려 2천여 가지.  매운 카레를 먹은 후에는 열을 받
은 몸을 식히라고 요구르트가 제공된다. 음식궁합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체로 인도 음식은  우리 음식처럼 양념이 많이 들어간다. 인도  양념은 새콤
달콤한 맛보다는 의학적인 기능을 염두에 두고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향은 
항생제의 성분이 있고  생강은 소화에 도움이 된다. 덥고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
여 밥 주고 약까지 주는 아름다운 배려이다.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에게는 답답하기 그지 없겠지만 인도인들은 
그때 그때 필요한 양의 양념을 사다가 즉석에서  빻아 먹는다. 카레의 종류에 따
라 양념이 다르고 조리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래도 인도 음식은 프랑스, 중국 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에 당당히 꼽힌다.
  인도 기숙사에 들어간 첫날 밤, 내 방을 두드린  첫 손님은 식당 일을 맡은 학
생이었다. 그녀는 내게 채식을  하는지 육식을 하는지 소속을 물었다. 가리지 않
고 고루 먹어야 한다고 배우고 자란 나는 잠시 당황할 수밖에.
  똑똑한 한국인답게 그 차이가 뭐냐고 되물었다.  "매일 아침 달걀과 바나나 중
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해. 또 일주일에 한두  번 나오는 양고기 카레와 치즈 복
음 중에서 네가 뭘 택할지도 알아둬야  되거든." 1년에 두어 번은 다이어트를 감
행하다 죽은 듯한 앙상한 닭다리를 만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인도 친구들은 나처럼 고민하지  않고 바나나를 먹겠지? 그러나 내 예상을 깨
고 실제로는 채식하는 학생의 수가 훨씬 적었다.  이들 학생들이 서구 교육을 받
은 젊은 세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1993년에 마무리된,  장장 8년에 걸친 인도 
사회 조사에 의하면 인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각 집단의 88퍼센트가 육식을 하
는 것으로 드러났다.
  쇠고기를 먹는  힌두도 있고 생선과  육식을 하는 브라만도  존재한다. 들쥐를 
먹는 집단은  심심치 않게 보이고  악어새끼나 사향고양이, 심지어  재칼을 먹는 
무리도 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무엇이든 먹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니 '비
폭력의 나라' 운운하면서 혈압 올리지는 마시길.
  대체로 남부지방 사람들이 채식을 한다. 그것은  육식을 하는 유목민과 무슬림
의 영향이 적었기 때문이고  지리, 기후와도 무관하지 않다. 사시사철 뜨거운 이 
지방에서는 육식을 자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대신 양념은 아주 걸다. '날
씨는 덥고 음식은 뜨거우며 양념은 더 뜨겁다'는 말처럼.
  반대로 북부지방의 음식은 기름지고 다양하다. 양고기  요리만 수백 가지가 넘
는다나. 날씨가 몹시 추운  히말라야 산악지방의 브라만은 대개 육식을 한다. 해
안지방의 브라만이 생선을 먹는 것도 상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가 간다. 따라서 
북부지방의 음식은 남부지방보다는 양념이 덜 들어간다.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은  달걀은 물론  치즈나 우유까지도 육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유를  마시거나 때로 달걀까지  먹는 채식주의자도 있다.  인간의 머리 
모양을 한 양파, 마늘, 버섯은 식물성이지만  채식자의 기피 대상이다. 머리 모양 
때문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이들 음식이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주된 이유
인데 이즈음은 그래도 많이 먹는 편이다.  달걀과 생선을 먹으면서 채식주의자라
고 빡빡 우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믿어줘야지, 뭐. '주의'니 
'이즘'이니 다 알고 보면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던가?
  채식주의는 살생을 금하는 비폭력의 원리와 관련이  있다. 즉, '남이 네게 행하
기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원리이다. 윤회를 믿고 전체적인 시각으
로 세상을 보는  인도인은 생을 인간과 동물,  식물의 관계로 본다. 식탁에 오른 
고기가 전생이나 내세의 자기 모습일 수도 있다면, 너무 거창한가?
  채식주의자들은 육식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데, 육류 중에서 가장  천한 취급
을 받는 것은  돼지고기이다. 돼지는 더러운 곳에서 자라는 동물이고  게다가 지
방이 많아 더운 인도에서  가장 빨리 상하기 때문이다. 모든 육류를  다 먹는 무
슬림도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
  또한 냄새가 강렬하고 냉장시설이 없기 때문에  생선류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좁은 기숙사 복도에서 생선요리를 신나게 해먹는 일부 부족 출신 여학생들은 따
갑게 흘겨보는 힌두 학생들의 눈초리를 감수해야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도 소를 숭배하는 종교적인  이유로만 해석할 수는 없
다. 소는 노동력의 원천으로  농사를 돕고 짐을 운반하는 존재이다. 더욱이 우유
와 버터, 요구르트, 치즈와 같은 유제품은  영양이 부족한 인도인들에게, 특히 채
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다. 쇠고기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날씨가 더운 열대지방에서는 땀을 많이 흘리는데, 수
분이 과다하게 증발되면 위장의  기능이 떨어지므로 무리한 음식은 건강을 해치
게 된다. 또 쇠똥은 땔감으로도 유용하다.
  평생 동물성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은  육식 냄새에 민감하기 마련이
다. 인도 친구들은  식물성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우리의 김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끝내 용서하지 못했다. 방금 먹은  음식을 자백하는 입냄새도 채식자들에
게는 고문이다.  24시간이 지나도 구별이 가능하다니,  인도에 가면 입을 조심하
라.
  한번은 한국  유학생이 자기 방에서  오징어를 구워 먹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복도로 달려나왔다. 자초지종을 알고는  인상을 쓰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시체를 화장하는 냄새와 흡사했다는 게  복도로 뛰쳐나온 친구의 뒷
얘기였다.
  인도인들은 대개 모든 것을  인정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음식에 관한 
한 타협이 없다. 그중 채식을 고집하는 힌두와  쇠고기를 먹는 무슬림의 심한 갈
등이 단적인 예이다. 힌두의  음식은 종교적 의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세대
를 거치면서 음식과 위생에 관한 엄격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힌두는 음식을 감염체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카스트에 
따라 음식을 같이  먹는 대상이 제한되는데 위로 갈수록 금기는  엄격해진다. 부
정을 병적으로 경계하는  브라만은 브라만이 만든 음식만  먹을 수 있지만 모든 
힌두는 브라만이 조리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요리사들 가운데  브라만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식사를 같이 할 수 없는 여성과  결혼하기는 어렵기 때
문에 먹는 문제는 카스트간의 결혼 장벽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복잡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규정을 100%  지키기
란 쉽지 않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안전하게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다닌다. 
뭄바이 같은 일부 지방에는 남편이  출근한 후에 아내가 만든 따뜻한 음식을 점
심시간까지 직장에 배달해주는 정교한 도시락 배달 체계가 발달되어 있다.
  지역과 카스트에 따라  상이한 인도의 식습관. 종교의 안경을 쓰고  보면 한계
가 있다. 더운 날씨와  지리적 차이 그리고 이국의 영향이 날줄  씨줄로 얽혀 있
으므로, 인간의 생존은 그 적응 능력에 달렸다는 파슨즈의 말이 떠오른다.
  인도의 음식 문화는 인간이 환경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가를 잘 보여준
다. 집을 떠난  순례자들이 직접 음식을 해먹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끓인 음식만 
사먹는 것은 무지하고 몽매한 짓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지식은  그들이 피하는 물이나 날음식이  오염원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도를 방문한 외국인들도 그리고  그대도 이와 같이 하면 건강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푹푹 삶은 음식만 먹고 아무 물이나 마시지 말라.
  마지막으로 일급 비밀 한 가지를 알려드린다.  카레라이스는 노란 소스를 뿌린 
부분과 소스가 덮이지 않은 흰 밥 부분이 5:3의 비율일 때 가장 맛있단다!

  권주, 음주, 금주
  이번에는 애주가들이 슬퍼할 소식을 알려야 할  차례다. 인도에서는 술을 마실 
기회가 드물다. '숨은 그림'을 찾아 나서면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나는 델리에
서 술 파는  가게나 술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찌는 날씨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은 늘 그림의 떡, 아니 '상상 속의 그대'였다. 오랜 금주령의 전통이 있고 현재
도 지방에 따라 금주법이 실시되는 곳이 바로 인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술을 발견한 것은 인도의 브라만임을 아시는지? 아라비아 숫자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던  명민한 브라만들이 찾아낸 또하나의 영물이 술
이다. 그리스에 바커스라는  술의 신이 있다면 인도에는 일찍이 소마  신이 폼을 
잡았다.
  모든 종교적인 의식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제사에는 신에게 바치는 한 잔
의 술이 빠질 수 없다. 인도의 주신 소마는 소마라는 술에서 유래한다. 소마주는 
소마라는 식물의 줄기에서  뽑은 액체에 우유와 버터, 보릿가루를 섞어  만든 술
이다.
  아득한 옛날, 그 옛날에는 신도, 사람도  소마주를 즐겨 마셨다. 베다에는 이렇
게 소마를 칭송하는 글이 보인다.
  나는 소마를 마셨다.
  나는 불사신이 되었다.
  나는 광명을 얻었다.
  나는 신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브라만을 비롯한 상층 카스트는 점차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인도에 둥지를 튼 무슬림도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자,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하고 술잔을 주고받는 계층은 주로 하층민들. 그 때문에 
상층 사람들로부터 있는 대로 경멸과 따돌림을 받았다.
  1881년부터 매 10년마다 인구 센서스가 시작되었다.  일부는 조사를 담당한 이
방인에게 '우린  천민이오.'라고 고백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한 자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위상이 한  사람의 주장으로 간단하게 바뀔 수는 없는 일
이다 하층민들이 조사자에게 보다  높은 카스트라고 우기려면 집단 전체가 일치 
단결을 해야 가능했다.
  즉 불가촉민이나 수드라 계층이 크샤트리아라고 우기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
이 크샤트리아다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들처럼 술을  끊고 고기도 먹지 않고 가
끔 단식도  하면서 그 위상에 걸맞는  생활을 했다. 한두 세대가  흐르면서 마을 
사람들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식을 근거로 크
샤트리아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 바람에 술은 더욱더 천한  사람이 독
점하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하트마 간디이다.  간디의 비협력운동에는 
금주운동이 포함되었다. 바이샤  출신인 간디는 술, 담배,  고기를 금하는 자이나
교의 전통이 강한 구자라트  출신으로 브라만처럼 음주를 사회의 악습이라고 생
각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어렵게 번 돈을 아낌  없이 술에 투자하는 것도 몹시 
안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입 양주를  통해 상당한 세금을  챙기는 식민 
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해 금주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힌두  상층 카스트와 
무슬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이것은 비폭력  운동이었지만 술
집과 술병은 폭력으로 때려 부수었다!
  독립 후  인도 정부는 간디의  입장을 채택,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이후로 
1960년대까지 금주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간디의 맏아들은  소문난 술
꾼이었고, 유명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모양이다. 네루 총
리도 애주가였다. 사람들이  모두 마하트마처럼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다면 얼마
나 좋으랴만, 보통사람은 '절대 금주!' 표어를 수없이 벽에 붙였다가 떼어내는 것
이 정상이다. 특히 삶이 고달픈 수많은 하층  인생들은 고통을 술에 삭이는 주당
의 골수 당원들이다.
  무더운 인도에서는  금주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날이 더워  정신이 나갈 
판인데 술판을 벌이다가는 이태백처럼  바로 황천길로 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
이다. 인도는 정말 더운 나라다. 45도가 넘는 날씨가 논스톱으로 몇 달씩 계속된
다. 더울 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 정도. 보드카를 즐겨 마시는 
러시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간디의 고향 구자라트를 비롯한  몇몇 지방은 지금도 금주령이 변심한 애인의 
눈빛보다도 더 싸늘하다. 술 한  병만 가지고 있어도 그대 이름은 범법자. 이 지
방에서 바커스 신이나 소마 신을  면담하고 싶으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스
파이처럼 은밀하게 움직이도록.  아슬아슬한 서스펜스에 목 마른  자는 구자라트
로 가라.
  다른 지방의 금주 규정은 이보다 덜 까다롭다.  술 파는 시간을 정해놓거나 일
정한 장소에서는 술 마시는 것을 허용한다.  남부 타밀나두에서는 캄캄한 곳에서
만 술을 마시도록 허용하는데 너무 어두워서 앞에 있는 술병이 보이지 않는다니 
여기서도 3류의 스릴은 즐길 수 있다!
  한 남자가 술집에  들어와서 술을 시켜 급히 마시고는 일어섰다.  바텐더는 남
자에게 "술값을 주셔야지요?"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아까 주었잖소?"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곧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그 역시 한 잔  마시고는 돈을 내지 않고 나가려 했
다.
  "술값은요?" 하고 손을  내미는 바텐더에게 남자는 "선불이었잖아." 하고는 가
버리는 것이었다.
  세 번째 남자가 들어와 술을 주문했다. 바텐더는 그에게 "선생이 오기 전에 두 
사람이 와서 술을 마시고는 돈을 내지도 않고  냈다고 우기고 갔어요. 선생은 어
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내 잔돈이나 주시요."
  술은 이렇게 배짱을  키운다. 술로 샤워를 하는 우리 사회가  증명하듯이 사람
은 어떤 방식으로든  눌린 가슴을 열 창구가 필요하다. 금주령의  한편에서 밀주
와 밀수가 성행하는  것도 그 때문일게다. 해마다 조잡하게 만든  밀주를 마시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데 메틸 알코올을 섞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술을 마시
다가 죽거나 술 때문에 가정 파탄이 나는 경우는 그보다 더 많다.
  남편들이 쥐꼬리만한 수입을 술과  바꾸어 먹고 가정을 외면하자 여성들이 정
부에 금주령을 요구하고  나선 일도 있다. 여성단체의 거센 압력에  굴복한 안드
라 프라데시 정부는 금주령으로  연간 4천억 원에 가까운 세금 상실을 감수하는
데, 이미 적자재정으로 갈팡질팡, 갈짓자 걸음이다.
  엄청난 세금의 규모는  상층 카스트나 도덕 선생이  뭐라 하든 술먹는 사람이 
많다는 명백한 반증이다. 주세가 높다보니 술 한 병  값이 한 끼 밥값을 넘는 건 
예사고 어느 지방에는 맥주 한 병이 콜라 열  병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다. 각 주
정부는 막대한  주세 수입과 금주령이라는  윤리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금주법을 집행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금주령을 해제해야 한다는  '자유론'도 만만치 않지만 금주를 주장하는 여성의 
목소리에도 점점 힘이  실린다. 얼마 전에는 하리야나 주가 전면적인  금주를 실
시하기 시작했고 다른  지방도 금주법에 눈길을 주고 있다. 정부가  금주령을 내
린다고 모두 '차렷' 자세를 취하는 건  아니지만, 인도에서 '술 권하는 사회'를 기
대하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술  취한 남편들의 가정에 대한 폭력과 무관심은 
큰 문제다. 그러나  더 큰 우려는 금주법이 1930년대의 미국처럼  조직적인 폭력
과 연결될 가능성이다.  차라리 주세를 받아서 어려운 여성과 가정을  돕자는 의
견도 제시되고 있다.
  어느 금주 교실,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술 한 동이와 물 한 동이가 있다면 당나귀는 어느 걸 먹을까요?"
  "물이요!"
  수강생들이 합창을 한다. 신이 난 강사,
  "왜 그럴까요?"
  "당나귀는 바보니까요."

  칙칙폭폭 문화
  술 한 병과 탄두리  치킨을 든 남자가 철로에 길게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사
람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여보시오! 아니, 왜 철로에 누워 있는 거요? 기차가 오면 어쩌려구."
  "아, 바로 그거요.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이겁니다. 기차에 치어 죽으려는 
거요."
  "죽을 사람이 술과 닭다리는 왜?"


  "여보시오! 기차가 한 번이라도 제때에 오는 걸  봤소? 나더러 기차가 올 때까
지 굶어 죽으란 거요?"
  델리에서 남부지방 트리반드룸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 꼬박  52시간이 걸린다. 
학생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인도의 기차가 거북이처럼 느리기 때문일 거라고 지
레 짐작을 하고  막 웃는다. 그러나 델리에서 트리반드룸까지는  3천 킬로미터가 
넘는 머나먼 길이다. 나도 두 번이나 이  열차를 타보았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는 
무정 7천 리의 먼 길이었다.
  이제 인도 땅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이 가는가? 델리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면 
두 밤을  기차에서 자고 셋째 날  오후에야 목적지에 도착,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초특급 열차인 이 기차는 그래도 비교적 제 시간에 목적지에 닿는 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서고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영 움직이지 
않는 3등열차와는 격이 다르다.
  인도 친구들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델리에서 아주 가깝다고  말한다. 그 
말을 믿고 우리나라의 서울을 기준으로 수원이나 인천 정도를 생각하면 큰 오산
이다. 대개는 기차로 열 시간 가량 걸리는  먼 곳으로 부산이나 목표보다도 한참 
먼 경우가 보통이다.  코끼리만한 우박이 내린다거나 물고기의  비늘로 유리창을 
만들었다는 종류의, 대국적인 사고가 필요한 나라가 바로 인도다.
  철도가 인도에 첫선을  보인 해는 1853년이다. 같은 해 뭄바이에  기차역이 세
워졌는데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이 붙었다. 1900년에는  이미 96개의 노선을 가지
고 연간 여객수 2억 명, 화물수송량 5천만  톤이 넘는 세계 4위의 규모를 자랑하
게 되었다.
  "영국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면 과연 인도가 철도를 건설하고 근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통치가 우리나라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인도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영국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우리 학자들을 나는 
적지 않게 만난다.  하긴 마르크스도 영국의 통치가 인도를 위한  축복이며 철도 
부설은 인도 산업화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인도의  철도 부설은 영국의 전략적인 고려가 먼저
였다. 각 지방의 산물은 해외 수출을 위해 철도를 통해 항구로 보내졌다. 면화와 
곡물의 수출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영국 맨체스터나  랭카셔의 면제품, 모제품 수
입이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영토가  철도로 연결되자 이전에는 꿈
도 꾸지 못했던 먼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1885년, 뭄바이에서 열린 인도 국민
회의 창립 총회는 전국에서 열차를 타고 온 대표자들로 북적거렸다.
  현재 인도에는 2천 개의 역이 전국에 흩어져 있고, 160만 명의 직원들이 '오늘
도 무사히'를 빌며 서비스를 다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매일 1만 1천 대의 기
차를 타고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서 움직인다.  해방 직후에는 
철도의 수송  분담률이 90퍼센트에 육박했지만 지금은  라이벌인 도로에 애인을 
다 뺏기고 약 50퍼센트 정도만 책임지고 있다.  현재 인도 철도의 총 길이는 6만 
킬로미터이다.
  인도는 카스트의 나라,  열차에도 위계가 있다. 1등칸,  2등칸의 구분뿐만 아니
라 그 안에 에어컨이 있는가, 침대가 2층인가  3층인가에 따라 다시 등급이 여럿
으로 나뉜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어느  기차든지 탈 수 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돈이 많아도  인도인은 운이 나쁘면 1등칸에서 밀려나야  했다. 1930년
대에 씌어진 한 단편소설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인도 변호사가 1등칸을 타
고 여행을 하다가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영국 군인들에 의해 열차 밖으로 던져
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래서 독립은 좋은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보통 한 달 전에 기차표를  예약한다. 완행을 제외한 모든 열차
는 예약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급히 볼 일이  생기면 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낭패
를 보게 마련이다.  열차를 타러 가면 바깥벽에  승객 명단이 붙어 있고, 열차가 
출발한 후에 차장이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본인 여부를 확인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여행길에서 겪은 일이 생각난다. 나는 여느  때처럼 명단
에 적힌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한 후 돌아다니며 조사
를 하던 차장이  나보고 당사자가 아니라며 당장  내리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
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분명히 명단도  확인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좌석을 
예약하면서 내 이름  앞에 '미스'를 붙이는 걸 잊은 게  화근이었다. 담당자는 그
냥 '미스터'로 적은 모양이고, 차장은 아무리  보아도 내가 남자가 아니니 의심할 
수밖에. 기차를 탈 때는 그대의 성별을 각별히 유념하라.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기차에서 한두 밤을  자야 한다. 승객이 
앉아 있던 자리와 그  위에 두 개의 침대를 만들면 금세 3층  침대가 생긴다. 따
라서 승객 중 한 사람이 잠을 자면 다같이  취침을 해야 한다. 억지로 딱딱한 침
대 위에 누워서 시간을 죽이는 일은 생각보다  고역이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또 보이지도 않는다. 며칠 동안 달리는 열차에 꼼짝없이 갇히는 것이다.
  게다가 '짜이, 짜이, 짜이!', '까피, 까피!'를 외치며 아무 때나 예고 없이 홍차와 
커피를 팔러 다니는 장사꾼은 영원한 잠 훼방꾼이다.
  기차 안에 마련된 식당은 매  끼마다 승객의 주문을 받아 따뜻한 음식을 배달
한다. 2등칸도 마찬가지다. 어떤 승객은 며칠간 먹을 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와서
는 '음식  냄새란 이런 것이다'를 광고하기도  한다. 바람을 가르며  달린 철마가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역에서 내려서 잽싸게 음식을 입에 털어넣을 수도 있다.
  에어컨이 설치된  '라즈다니'와 같은 특급열차는 아주  빠르고 몇 몇 역에서만 
멈춘다. 이런 초초특급열차는 음식과 차가 공짜로 나온다. 공짜라는 말이 요금에 
음식 값이 포함된다는 말보다 기분좋지 않은가. 그러나 인도는 인도, 특급열차도 
아무 데나  선다. 갑자기 비상체인을 잡아다니는  호기심파, 심심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는 궁전'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특별열차는 옛 왕국들의 수도와 사막
의 도시 자이살메르를 연결하며 라자스탄 지방을  달린다. 아름답게 꾸미고 서비
스도 일급인 '달리는 궁전'은 하룻밤에 수십만 원이 넘게 드는 부유한 외국인 관
광객 전용열차이다. 보통사람인  나는 그냥 보통 열차를 타고 사막의  도시를 찾
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아이는  기차 소리가 요란해도 잠을 잘 잔다? 인도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철도 주변에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사는지  놀라울 정도다. 
기차가 굉음을 내면서  달리는 철로 바로 옆에다  살림을 차린 일가족도 드물지 
않은 광경인데, 그곳에는  승객이 바삐 오가는 길 한가운데서 아내는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고 남편은 자기 집 안방처럼 길게  누워 담배를 피운다. 철로변만 아
니면 일반  가정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말하자면 기찻길 옆은  작은 일가의 
안방이고 역전 광장은  수백 명이 웅크리고 자는 대중 여인숙이다.  대도시의 역
전은 예전보다는 정리가  된 편이지만 아직도 대다수  역 주변은 빈곤의 흔적이 
뚜렷하다. 또 화장실이 없는 인도에서 철로변은 글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보이
지 않는 세계 최대의 화장실이다.
  철도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사람들이  '쿨리'라고 불리는  짐꾼들이다. 이들은 
아무리 무거운 짐도  감당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들. 마른 몸매로  자기 몸무
게의 몇 배가 되는  짐을 이고 지고 든다. 트렁크 서너 개와 보따리  몇 개는 식
은 죽 먹기다.  빈약한 쿨리의 몸과 풍성한  짐들을 보면 속이 싸아해진다. 나는 
역에 도착하면 쿨리들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나꿔채는데  못 이기는 척하고 그 
중 한 명에게 가벼운 배낭을 넘기곤 했다.
  인도 열차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하나 더 있다.  입구의 여섯 자리
를 작은  방으로 꾸며 매 칸마다  '레이디'를 위한 특별실을  마련해놓은 것이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이 남성의 시선과 희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은 공
간이다. 원래 좌석은 여섯이지만 아이를 줄줄이 달고  들어온 여인들 덕분에 2-3
일 동안  동거할 식구들이 열 명은  넘기는 건 보통이다. 이국의  시골 여인들과 
아이들로 붐비는 좁은 공간에서 나는  인내를 배우고 가슴 가득 사람 냄새를 담
곤 했다.
  정시에는 오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올 완행열차를 기다리며 인도의 
시골역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많은 생각이 밀려온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반
드시 한 번은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리듯이 그렇게 나는 열차를 기다렸다.

  달리는 카스트
  델리에 있는 무굴  왕궁의 접견실 벽에는 '지상의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여기
다. 바로 여기다.'라는  페르시아의 시구가 적혀 있다. 인도의  거리에 나가면 '지
상의 탈것은 여기에 다 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조랑말이 끄는 마차에서 최고
급 벤츠까지, 각양각색의 탈것이 어지럽게 굴러다닌다.
  언젠가는 농민  출신의 국회의원이 뉴델리에 있는  의사당에 소달구지를 타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여의도에 달구지를 타고 나타난다? 우리 같으
면 경찰보다 성질 급한 자가 운전자들이 먼저 '손을 봐줄' 게 분명하다.
  달구지 말이 나왔으니 먼저 그 얘길  해보자. 북부지방의 소도시에는 조랑말이 
끄는 달구지(통가)가 화물과 여객을 운송하는 주요한 탈것이다. 안락함이나 편리
함과는 거리가 멀고 대개 짐짝처럼 취급되기 일쑤지만 급할 때는 요긴하게 이용
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다. 나중에 언급할 인력거처럼 일정한 요금이  없기 때문
에 출발전에 요금을 정하는 것이 더운 지방에서 혈압을 관리하는 요령 제 1조임
을 기억하라.
  현진건 선생의  <운수 좋은 날>을 읽은  독자들은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을 
기억하실 거다. 명월관 기생이 타던 그 시절의  인력거가 오늘도 인도의 수도 델
리에서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리고 있다. 델리에만도 당국의 허가를  받은 인력
거가 5만여 대,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차량(?)이 20만여 대나  된다. 딸린 식구
를 다섯 명씩만 쳐라. 휴!
  인도인은 인력거를 릭샤라고 부르는데 '력거'의  일본식 발음을 채용한 것이다. 
1871년 일본에서 개발된 인력거는  1900년 중국인에 의해 인도 캘커타에 상륙했
고, 1914년부터 손님을 모시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촌사람인 나는 시골에서 소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지 구구절절이 느끼
며 자랐다. 하루종일  밭을 갈고서 짐까지 가득 싣고 돌아오는  소에게 움직임이 
시원찮다고 회초리를 갈기는 매정한 인심.
  소가 불쌍해서 소달구지도 타지 못하던 내가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보고 대경
실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그나마 델리의  릭샤는 사람이 직접 끌지는 않고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세발 자전거 형태의  '사이클 릭샤'다. 처음에는 사람이 끈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타기를 주저했지만 '타는 것이 돕는 것'이라는 선배의 말
을 받들어 나도 종종  이 탈것을 이용했다. 일요일 아침 릭샤를  타고 텅빈 캠퍼
스를 한 바퀴 도는 것은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도식의 비정형성, 즉 알아서 주는 요금의 지불방식이었다. 받
는 사람은 많이 받을수록 좋고 주는 사람은 그 액수가 적을수록 즐거운 것이 인
지상정인데......
  남부지방의 상인이 북부의  한 도시를 방문했다. 그 지방 언어에  자신이 있던 
상인은 마차꾼에게 목적지를 대며 태워주겠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요. 손님. 이 마차는 나으리 겁니다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마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상인은 한참을 달리다가 요금이 얼마나  되는지 궁
금했다.
  "그런데 삯이 얼마요?"
  "알아서 주십시오. 이 마차는  나으리 겁니다요." 상인은 가장 적은 액수를  말
했다. 마차꾼은 상인 옆에 다가와서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쉿, 말이 듣겠습니다요."
  요금에 관한 시비가 가장 심한 것이  인력거인데, 여기에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의 기본원칙이 작용한다. 항상 공급이 수요를  넘기 때문에 소비자는 요금을 
적게 부르는 릭샤를 골라 탈 수 있다.  아무래도 외국인은 약간의 바가지를 각오
해야 한다. 한 번은 열심히 페달을 밟는 릭샤왈라(릭샤꾼)의 발을 보니 슬리퍼가 
다 해져 있었다. 신발이나  하나 사라고 평소 요금의 다섯 배를  더 주었더니 더 
달라고 눈을 부릅뜨는 게 아닌가? 하여튼 늘 이런 식이다.
  세련된 뉴델리에서는 보기가  어렵지만 올드델리에는 릭샤가 주요한 운송수단
이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이라도  '간다면 가는' 릭샤는  하루 수십만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다한다. 특히 여성이나 단거리 손님들이 많이 애용한다. 
언덕을 올라갈 때 낑낑거리는 걸  보면 나같이 마른 사람도 앉아 있기가 민망한
데 거기다 뚱뚱한 아주머니들이 두세 명씩 타는 걸 보면 때로 화가 치밀지만 우
짜겠노?
  영화 <시티 오브  조이>를 떠올려보자. 영화의 주인공은  캘커타의 슬럼에 거
주하는 인력거꾼이었다. 캘커타의  릭샤는 델리의 릭샤처럼 사이클이  아니라 사
람이 끄는 진짜  인력거이다. 큰 바퀴를 가진 릭샤의 무게가  자그마치 90킬로그
램이나 되는데 거기에 6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사람을 둘만 태워도 간단히 
200킬로그램이 넘는다. 인간의 일이 아니라 소의 노동에 가깝다.
  캘커타에도 2만 5천 명이 넘는 릭샤왈라가  있다. 캘커타는 교통이라는 말보다 
불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다. 캘커타 시내의 차량 속도는  시간당 9킬로미
터로 걷는 거나 매한가지.  그런 교통 불통의 주범으로 릭샤가 찍혔다. 주정부는 
캘커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릭샤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는데 그 명분이 그럴싸하
다. '릭샤를 끄는 일은 인간 이하의 노동'이라는 것. 참으로 인도주의적인 발언이
지만, 문제는 그 많은 인력거꾼들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사는가이다.
  델리 주정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중소도시의 역이나 
공항에 내리면 수십  명의 릭샤가 벌떼같이 달려들어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으니 무작정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너도나도 릭샤를 끌
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릭샤는 개인 소유가 아니라  지입제 택시처럼 
일당을 바쳐야 한다. 앞으로 '일용할 빵'의  수단을 빼앗길 이들에게 진실로 운수 
좋은 날이 오는 것은 언제일까?
  릭샤 위에 사이클 릭샤가 있고 그 위에는  한 단계 높으신 '오토 릭샤'가 있다. 
오토 릭샤는 시끄럽고  요란한 세발 자동차이다. 문이 없어 바람이  자유롭게 넘
나드는 이 세발  자동차는 매연을 죽죽 뽑아내서 도시의 오염치를  팍팍 올린다. 
그 때문에 뭄바이의 중심가는 삼륜차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앞에는 운전자가 앉고 뒤에는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대여섯 명도 거뜬히  구겨넣을 수 있는 신축성이 오토 릭샤만의  자랑이다. 겨울
에는 찬바람을 막는 거적문이 손님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사방이 열려 있기 때
문에 비상사태에는 언제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응원을 청할 수 있어서 여성 손
님에게는 밀폐된  택시보다 훨씬 안전하다.  또 요금이 택시의  반값이기 때문에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서민의 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강도 높은 
매연과 전면대응을 할 용기가 승객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오토  릭샤보다 상급인 택시를  보자. 인도의 택시는  대개 몸체가 
큼직한 '앰배서더'이다. 1950년대  영국의 모리스 옥스퍼드를 모방한  이 차는 구
식이지만 내부는 꽤 넓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길거리에 나다니는 택시를 좀처럼 
볼 수가 없다. 모든 택시가 '콜택시'이기 때문에 불러야 나타난다. 요금은 달리는 
거리만큼 나오지만  여지없이 운전사가 미터기가 고장났다고  선수를 치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택시를 부르겠노라고 협박성 발언을 해야 겨우 협상에서 이긴다.
  인도에서는 릭샤에서부터 택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탈것이 시간에 아주 관대하
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문제 없다'이다. 지리를 모르는 이방인이면 빙빙 
돌아가서 요금을 올리는 얕은 꾀를 부리기도 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인상을 쓰는 
일은 절대 없다. 거기에 길들여진 나는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야 하는 서울의 택
시 타기가 여전히 서툴고 두렵다.
  그 밖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실어나르는 버스도 있지만 그 수가 적고 움직
임이 거칠어서 타고 내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 또 자가용 탈것의  첫 단계는 수
많은 오토바이와 스쿠터이다. 도시의 러시아워에는 혼다, 야마하 등 일제 이름을 
단 이륜차의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자가용 자동차로는 일본 스즈키사와 
제휴한 소형 '마루티', 앰배서더와 같은 국산차  외에 여러 종류의 외제 자동차가 
있다.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공해의 산 표상인 인도 거리는 분명  변화가 필요하다. 
다만 어느 쪽으로 그 바람이 불어야 할지  그것이 문제이다. 도로의 기능을 떨어
뜨리는 릭샤나 오토 릭샤를  몰아내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기반을 박탈
할 수 없다는 게 정부의 고민이고 지극히 인도다운 고민이다.
  그 고민의 와중에서 거리에는 오늘도 느림보 릭샤와 대우의 씨에로가 함께 달
리고 있다.

  극장에 가면 인도가 보인다
  장면 1. 노란  바바리코트에 흰 구두와 빨간 양말을 신은  수십 명의 여자들이 
검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고 빨간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그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춘다.
  장면 2. 분홍색  양장과 분홍색 모자로 멋을 낸 한  무리의 여자들이 지팡이를 
들고 춤을 추고 그 앞에서 줄무늬 바지에 줄무늬 모자를 쓴 남자가 매끄럽게 몸
을 흔든다.
  자, 이곳으로 그대를  초대한다. 어디인지 상상의 나래를 펴보시라.  물이 있고 
정자가 있고 술까지 있는 곳. 로맨스, 폭력, 음악, 춤, 섹스가 골고루 버무려진 한
판 잔칫상도 기다린다. 어딜 가나 환영받는 어여쁜 여자도 있다. 걱정이 있는가? 
우울한가? 그렇다면 '나에게로  오라'. 세 시간 동안  죽여드린다! 바깥의 냉혹한 
현실은 잠깐 던져버려라.
  쇼프로그램 광고냐구? 노우! 인도의 현실과는 '머나먼 나라'  인도의 영화 이야
기다. 인도는 시네마  천국. 전국에 만 2천여 개의  극장이 있고 연간 천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여 언제나  세계 4위 안에 든다. 인구를 고려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세계 영화시장을  주도하는 헐리우드 영화가 인도에서
는 맥을 못  춘다는 사실이다. 세계화에 둔감한 인도인이 국산품만  고집한 때문
이다. 인구  천 만이 넘는 수도  델리에서 외국영화를 개봉하는 극장은  겨우 두 
군데. 헐리우드가 아무리 이를  '뽀드득'거려도 희망은 없다. 대중의 값싼 오락인 
영화는 인도 최대의 쇼, 아니 지상 최대의 쇼다. 요즘은 최대의 라이벌인 텔레비
젼을 만나서 다소 밀리는 느낌도 들지만 영화는 여전히 인도 대중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이다.
  예외없이 영화를 상영하는  시간도 인도인처럼 느리고 길다.  세시간이 보통이
고 중간에 한참을 쉰다. 볼 일도 보고 차 한잔 마실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이러
니 영화 한 편 보려면 오가는 시간까지  꼬박 한나절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도 
인도의 극장이 붐빈다는  건 인도에 '백수'들이 엄청  많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사람들은 소풍을 가듯이 식구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영화를 보러 간다. 외출
할 기회가 적은 여자들은 모처럼 예쁘게 차리고 집을 나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 한 편 보는  값은 아주 싸다. 인도  영화는 우리처럼 
젊은이의 전유물도 아니고, 지성과 야성 그리고  실성을 겸비한 사람들의 오락도 
아니다. 중산층뿐 아니라 그늘에 누워있는 거지나  가난한 인력거꾼도 영화의 열
렬한 팬이다. 아니 그들이 더 간절하게 영화를 기다린다. 흑백의 삶을 사는 그들
은 자기에게 없는 멋진 애인과 멋있는 칼라 세상을 보려고 하루 수입의 전부 또
는 일부를 극장 매표원의 손에 아낌없이 넘긴다.
  새 영화가 개봉되면 사람들은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고 좋아하는 스타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부푼다. 이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서  인도 영화계의 
스타는 진짜 슈퍼스타가 된다. 우리나라의 슈퍼스타들이  영화 편당 1억이나 1억 
5천만 원의 출연료를 챙긴다지만 이는 인도  스타들에게 한낱 껌값, 아니 의상비
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슈퍼스타의 겹치기 출연은 보통 2, 30편이 넘는다.
  '신은 높이  있고 차르(황제)는 멀리 있다'고  한 러시아 농민들고 마찬가지로, 
대중은 멀리 있는  총리는 몰라도 가까이 있는 대스타는 기억한다.  가게 안이나 
오토릭샤에는 인기  영화배우들의 다채로운 사진이 신의  그림들과 나란히 붙어 
있다. 영화인들 중에는 은막의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 주수상에 오른 인
물도 세 명이나 된다. 그들은 거의 배우가  아니라 자신이 연기했던 신으로 추앙
되었다.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배우도 많다.
  남부 타밀나두 주의  수상을 지낸 MGR.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그는 영화에서 
주로 신의 역할을 맡았다. 1987년, MGR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여자  배우가 그의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그녀는 MGR과 공연한 영화에서 자신이 그에게 횃불을 
넘겨받는 장면을 마치  정치적 후계를 뜻하는 것인 양 광고했다.  순진무구한 유
권자들은 신을 믿었고 결국 그녀는 1991년 선거에서  승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수상이 되었다.
  MGR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도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단순한  배우
가 아니다. 신을  연기하면 신이 되고 영웅의  역할을 맡으면 멋진 영웅이 된다. 
사람들은 신을 숭배하듯이  신이 나오는 화면을 향해  아낌없이 꽃과 돈을 던진
다. 무대에는 지폐와 동전이 수북이 쌓인다. 노래와 춤이 나오면 한바탕 같이 논
다. 예술이 주는 감동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를 보러 가면  인도가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의 반대가  바로 인도의 
현실이다. 일상의 생활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삶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무대. 그
렇기 때문에 인도 국민은 더욱더 영화를 사랑한다.
  평소 길에서  보기 어려운 여인의  각선미, 국적이 의심스러운  화려한 의상과 
호화판 생활. 그 속에서 관객들은  꿈을 꾼다. 알몸에 흰 사리만 걸친 여자는 왜 
그리 자주 비를 맞는 건지, 연인들은 또 왜  맥없이 풀밭에 넘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관객은 즐겁다.
  상업성과 예술성은 영원한  맞수인가보다. 인도 영화의 구성은  엉성하고 조잡
하기 짝이 없다. 여우는  아름답고 늑대(남우)는 잘 생겼다. 우리의 호프, 주인공
이 갑자기 20명의 건장한 악당들을 만나도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우
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악당들을 다 물리치는 천하무적의 영웅이  된다. 그리
고 악당은 늘  비참하게 되고 주인공은 언제나 '그래서 그들은  잘 살았다.'로 끝
이 난다. 인도 영화는 주인공이  죽으면 절대 돈을 벌지 못한다. 신과 같은 스타
는 영원 불멸이니까!
  예술영화니 뭐니 하고  시건방을 떨 필요는 없다. 영화는 스트레스를  잊는 데
는 최고의 약이다. 잠시나마 고단한 일상을 잊고 한바탕의 꿈을 꾸는 것이다. 영
화 <시티 오브  조이>는 인도에서는 결코 '조이'가 아니었다.  매일 보는 지겨운 
일상을 돈을 내고 영화관에서  또 봐? 배운 사람들은 인도 영화가 현실도피적이
라고 몰아세우고  '집단적 판타지'라고도 비판하지만  대중은 오히려 사실주의를 
경계한다.
  인도의 영화는 사회적 가치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권선징악의 도덕이 그렇
고 전통적인 여성상이 그렇다. 청바지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제 아무리 망아지처
럼 날뛰다가도 일단  결혼만 하면 하루 아침에  사리를 뒤집어쓰고 조신한 힌두 
여성으로 둔갑한다. 또 서양의 싸구려 밤무대를  베낀 듯한 암시적이고 선정적인 
춤이 간간이 양념으로 버무려지기는  하지만 인도 영화에는 혼전 성관계와 같은 
'오랑케 문화'는 일체 없다.  영화에 키스신이 허용된 것도 겨우 수년 전 일이다. 
드디어 연인이 입을 맞추는 순간이 되면 갑자기  장면 전환, 화면에는 바람에 흔
들리는 꽃이나 새와 분수가 보인다. 아이들의  뽀뽀뽀가 고작이니 베드신은 말해 
무엇하리오.
  누드를 용납하지 않는 인도  영화의 에로티시즘은 여성에 대한 악당의 성폭력
으로 표현된다. 소름 끼치는 성폭력 장면이  너무 흔해서 '강간의 사회화'라고 해
도 될 정도다.
  그러면서도 영화의 주요 명제는 어머니와 애국이다.  악당은 언제나 모국을 위
협하는 나쁜 나라 외국의  앞잡이고 영웅은 외세를 물리치고 '좋은 나라' 인도를 
구한다. 가상의 현실  속에서 '임파서블 미션'을 그린다는  점은 헐리우드 영화나 
홍콩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미국은 <인디펜던스 데이>  처럼 외계의 침입
을 가상하고  인도는 인도의 통합성을  위협하는 가상의 적국을  그리는 것이다. 
누가 이기는가? 결말도 늘 비슷하다.
  아, 영화음악을 빼놓았군. 인도의 대중음악은 영화에 나왔던 노래가 주류를 이
룬다. 노래와 춤이 범벅이 된 영화가 성공하면  영화에 삽입된 노래는 그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인도 영화사에서 최대 흥행작으
로 꼽히는 1994년의 어느 영화는 행복이 인생의 필수품이라는 메시지가 담긴 작
품. 영화에는 14곡의 노래가  들어 있는데 그 중 한 곡이  자그마치 수십억 원을 
벌어들였다.
  그렇다면 인도에는 예술영화가  없는가? 물론 모든 인도 영화가 현실도피적이
고 상업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안방에서도 작품이 방영된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은 인도 영화의 주류인 상업적인 영화가  아닌 훌륭한 예술영화를 만들었다. 
1992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
을 받은 위대한 인도의 영화인이었다. 그가 만든  영화의 주제는 주로 현대 사회
의 제문제였다.
  이제는 교육받은 사람의 증가로  비현실적인 내용의 영화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캘커타를 중심으로 한 소위 예술영화는 나름의 역할을 지속한다. 
그러나 영화는 4억이 넘는 인도의 문맹인들이  즐기는 유일한 오락이 아닌가. 교
육받은 이들이  늘면 영화의 질은  오르겠지만 재미는 뚝뚝  떨어지리라. 고단한 
현실을 위무해줄 꿈같은 오락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바람직한 것은 잊을 현실이 없고 꿀 꿈이 없는 상태이지만, 그 역시 꿈이러니.

7. 다원사회의 명암

  작은 인도 - 네루 가
  왕관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보석처럼  한 나라의 역사는 뛰어난 여러 인물들로 
빛을 더한다. 근대 인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한  명이 인도 연방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하르랄 네루이다. 그와 그의  가족사는 굴곡 많은 인도 역
사처럼 매우 다채롭다.  20세기에 가장 오래 존속한 네루 왕조의  선두주자 자와
하르랄 네루와 그의 가족을 통해 인도의 여러 얼굴을 살펴보자.
  공화국과 세습제는 정치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두 얼굴의 
공존이 가능했다. 1947년의 독립 후 50년 동안  네루 집안이 인도를 통치한 기간
은 38년. 자와하르랄 네루는  1964년까지 무려 16년 9개월이나 장기집권했다. 그
의 딸 인디라 간디는 66-77년과 80-84년  두 차례 정권을 잡았고 인디라의 아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가 암살된 1884년에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혜성처럼 등
장, 5년간 총리를 지냈다.
  카슈미르 지방의 브라만인 자와하르랄 네루는 인도 국민회의 지도자인 변호사 
모띨랄 네루를 아버지로  유복하게 성장했다. 영국의 해로우  고등학교와 캠브리
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네루는 변호사가  되어 귀국,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30년대  국민회의 정점에 선 그는 독립과 함께  자연스럽게 인
도 연방의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들락날락한  감옥 생활
이 무려 9년에 이른다.
  감옥에 있는 동안 세련된 필치로  세 권의 책을 쓴 그는 소문난 로맨티시스트
였다. 독립운동을 한 나이두 여사와 아름다운 교감을 나누었는데(물론 아내가 죽
은 후에) 그들의 러브레터는 몇  년전 책으로 나왔다. 자와하르랄 네루와 인도를 
통치한 마지막 영국 총독의 부인 에드위나의 로맨스는 전 세계 지성인이면 누구
나 다 아는  일급비밀이다. 우리 독립운동가가 미나미 일본 총독의  부인과 사랑
을 했다? 그건 소설에서도 불가능하다.
  정치지도자로서 그의 이력 따위는 생략하자. 단지  그가 인도 민주주의의 기반
을 닦았으며 장기집권이 으레 그렇듯이 독재나 뭐 그런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점만 덧붙인다. 낭만적 사회주의자인 자와하르랄 네루는  보다 나은 사회와 모든 
집단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여러  차례 전쟁도 있었고 
낙담한 적도 없지는  않았다. 자와하르랄 네루는 훌륭한  인도인이었지만 동시에 
멋진 영국 신사였다.
  그의 무남독녀 인디라 네루는 1917년생이다. 감옥을  오가는 아버지 밑에서 독
립운동을 배웠고 결국 새 정부의 정권까지  물려받았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
한 그녀는 공부보다 인생의 반려를 찾는 데  성공했다. 깎은 밤같이 잘생긴 페로
즈 간디는 파르시였고 자와하르랄 네루는 사윗감이  내심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네루는 끝내 내색을 하지 않고 딸의 선택을 축복했다. 아버지를 위해 '퍼스트 레
이디'로 활동했던 인디라 간디는 남편과 별거했다. 그녀는 아버지 사후 2년 만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1966년 총리에 올랐다.
  그녀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페로즈  간디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라지브 간디와 작은 아들  산자이 간디. 부모를 닮아서 외모가 
출중한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었다.  라지브는 영국에 유학해서 어머니
처럼 공부보다는 평생의 짝을 찾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파티에서 만
난 아름다운  소냐는 이탈리아 여자였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라지브는 야무진 
생각 없이 파일럿이 되어 행복한 가장의 길로 들어섰다.
  산자이 역시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대학에  떨어진 그는 영국 롤스로이스사
의 수습사원이 되었다. 수습 중에 귀국한 산자이는 자동차 산업을 시작, 일본 스
즈키사와 합작한  마루티(바람의 신의 아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정치적 야심을  키우면서 총리인 어머니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자랐다. 그러나 
산자이도 네루가의 전통(?)대로 다른  종교를 믿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의 아
내는 시크교도 마네카였다.
  젊은 산자이는 욕심이 많았고  다른 분야에서 겪은 실패를 정치에서 보상받으
려고 했다. 그를 둘러싸고 비판이 거세지자  인디라 간디는 과감하게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긴급조치의 우산 아래서 산자이는 무기력한 정부 위에 군림, 무소불위
의 권력을 행사했다. 하룻밤에 슬럼을 제거하고  인구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사람
들을 무더기로 트럭에 실어가 강제로 불임시술을  자행했다. 절대 권력 아래서는 
절대 부패가 생겨난다.
  산자이와 긴급조치를 방어하던 인디라 간디는 높아가는 비판에 맞서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문맹이  다수인 인도인들은 멋지게 한표를  행사하여 인디라에
게 감옥 구경을 시켜주었다. 선거에서 이긴  연정이 갈팡질팡하자 인디라와 산자
이 간디 모자는 1980년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안 되어 
산자이는 뉴델리에서 비행  연습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시작
한 자동차 이름처럼 바람처럼 가버린 것이다.
  인디라 간디는 산자이가 죽은 후 하루 아침에 10년은 늙어보였고 정치적인 민
감성도 상실했다. 그녀의 가슴에 난 구멍을 메꾸기  위해 대타로 큰 아들 라지브
가 정치판에  끌려왔다. 서구화된 그의 생활도  언론에 노출되었다. 홀어미가 된 
산자이의 아내 마네카는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집을 나가고, 곧바로 정치에 투신, 
인디라 간디와 맞섰다.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였다.
  곧 마네카의 종교인  시크교도가 북부 펀자브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 인디라 간디는 측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분리주의자들의 아지트가 된 시
크교도의 성지 '황금사원'을 탱크와 박격포로 공격, 진압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인디라 간디는  총리 관저에서 세  명의 경호원에게 무참히  암살되었다. 범인은 
모두 시크교도였다. 암살의  여파로 델리 지역에서 2천여 명이  넘는 시크교도가 
성난 힌두에게 살해되었다.
  전국적인 애도의 분위기 속에 사파리를 차려 입은 라지브 간디가 총리로 선출
되었다. 정치에는 초년인 전직 파일럿은 21세기를  약속하면서 경제 개혁과 깨끗
한 정부를 강조했다.  그러나 구찌 신발을 신고 콜라와 햄버거를  좋아하는 젊은 
총리는 '검은 고양이'라고 불리는 경호원들과 서구화된 측근의 장벽 속에서 점차 
국민과 유리되었다. 옷은 사파리에서 인도 옷으로 바뀌었지만.
  '미스터 클린'으로 불리던 라지브는 국민과  멀어지면서 부패와 친해졌다.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그는 '미스터  더티'가 되어 1989년의 총선에서 졌고 네루 왕조
도 그 막을 내렸다. 1991년, 정권 회복과 왕조 회복을 위해 애를 쓰던 그는 남부
지방에서 유세하던 도중에  어머니 인디라처럼 암살되었다. 이탈리아인  아내 소
냐와 막 성년이 된 1남 1녀를 뒤에 남기고.
  싸움닭처럼 씩씩하고 용감한 마네카  간디는 1989년 이래 두 차례 환경장관을 
역임했다. 지금은 남편의 이름을 딴 환경재단을  운영하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환경수호자로 활약, 아니 전투를 벌이고 있다. 위상의 상징인 비단사리를 누에고
치 때문에  포기한 그녀는 동물성  기름이 들어간 화장과도  작별했다. 헝겊으로 
만든 가방을 들고 환경보호를 솔선수범하는 마네카는 환경을 다룬 몇 가지 책도 
저술했다.
  아무리 외제가  좋다지만 아내까지 외제냐는 정치적  공격을 유발시켰던 소냐 
간디는 역시  남편 이름을 앞세운  라지브 재단을 운영한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암살로 잃은 끔찍한  기억을 가슴 한 쪽에 묻고  그녀는 인도 여인으로 살고 있
다. 네루  가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유혹이 거세지만  아직은 정치계 
참여를 자제하고 있다. 나이가 위인 아들은 미국에  유학 중이고 딸은 유치원 교
사로 일하다 얼마 전 결혼했다.
  그러나 네루 왕조는 쥬라기 공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가슴에 자리하
고 있다. 앞으로  라지브의 2세와 산자이의 2세가 정치에 입문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네루 왕조의  재건도 꿈만은 아닌 것이 대다수 인도인에게  네루의 이름은 
여전히 '매직파워'를 발휘한다.
  올해로 50년이 된 인도 연방의 역사는 네루  가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네루
의 집안은 인종, 종교, 언어, 세계관, 생활 방식 등 인도의 다양한 얼굴을 반영하
고 포용했다. 힌두교, 카톨릭, 시크교,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힌디어, 영어,  이탈리
아어, 우르두어, 펀자브어를 쓰는  다양한 출신이 일가를 이루었다. 네루, 인디라 
간디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은 서양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인도의 생활방식을 버
리지 않았다. 수천 년의 인도 역사처럼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이었다. 합리주의자 
네루의 유해는 갠지스 강에, 열정적이던 인디라  간디의 유해는 히말라야에 뿌려
졌다.
  파일럿이었던 라지브 간디는 정치가로  죽었고 정치에 몸을 담았던 산자이 간
디는 비행을  하다가 사망했다. 상대방의  영역에서 돌발적으로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을 보면 인도인이 믿은 개인의 의무, 다르마가 떠오른다.
  과연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까지가 필연인가?

  천 년의 사랑이 깨질 때
  한 고고학자가 힌두사원  터에서 녹 슨 와이어 로프를 발견했다.  브라만 사제
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대 힌두들은 전화를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질세라 무슬림들도  모스크 터의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파도 보
이는 것이 없었다. 회견장에 나타난 울레마(사제)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로 미루어볼 때 옛날 무슬림들은 무선전화를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도 사회의 최대 골칫거리, 힌두-무슬림  간의 갈등을 풍자한 재
담이다.
  622년, 예언자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 종교이
다. 비록 베다에는 33신이 등장하지만 힌두교는 3억 3천 만(조사를 할 당시 인도 
인구가 그 정도였다. 지금쯤은 10억이 되지 않았을까?)이 넘는 수많은 신을 믿는
다.
  무슬림은 노래와 춤을  꺼리지만 힌두사원에서는 청각장애자를 배려하듯이 엄
청난 볼륨의 음악을  사방에 퍼붓는다. 무슬림이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순
간에도 여지가 없다. 아라비아인의 패션을  기억하는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감싸
는 그들은 여성의 곡선미를 있는 대로 자랑하는 힌두사원의 나부상이 몹시 거슬
린다.
  힌두는 소를 아끼고 대개 쇠고기를  먹지 않지만 무슬림은 소를 잡고 그 고기
를 '냠냠냠'  한다. 쇠고기를 먹는 사람과  소를 도살하는 사람은  경건한 힌두의 
눈에 부정의 원천이며, 자기  종교에 대한 모욕이다. 무슬림에게는 똥을 먹는 더
러운 돼지가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 고기를 먹는 자는 누구인가? 바
로 하층 힌두이다.
  기숙사에 힌두,  무슬림 친구를 다  가진 나에게는 고도의  기억력과 순발력이 
필요했다. 집에서 부쳐온 쇠고기 라면 하나, 소세지 하나를 먹을 때도 상황에 따
라 재빠르게  대처하여야 했던 것. 아차  잘못하면 우정에 금이 가고  일단 금이 
가면 언젠가는 와그르르, 태산도 무너진다. 외교는 평형 유지가 기본이 아니랴?
  로샤나라는 키 크고 아름다운 무슬림 내 친구.  그녀는 힌두 청년과 10년이 넘
게 사랑을  나누었다. 10년이나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끝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걸어갔다. 영화에는 그들과 같은 운명적인 연인들이 수많은 역경을 넘어 
행복한 결말을 맺지만 실제로는  결혼을 계약으로 여기는 무슬림과 신성한 결합
으로 간주하는 힌두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구약 출애굽기에는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라는 말
씀이 보인다.  이러한 유대인의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은 같은  전통을 가진 
기독교와 이슬람교도에도  드러난다. 선교가  없는 힌두교는 공격적인  이슬람의 
존재가 늘 이질적이며 편치가 않다.
  일체의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는  알라신 아래 모든 신도의 우애와 평
등을 내세우지만, 일체의 우상을 숭배하는 힌두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다는 원
리에 입각한  카스트 제도를 가지고  있다. 애매모호하지만 모든  것을 인정하는 
힌두는 이슬람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태도에 심기가 불편하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두 집단이  인도에서 함께 살게 될 줄은 예언자 마호메
트도 브라만 점성술사도 예전에 미처 몰랐을 것이다.  농촌에 가면 두 집단은 한 
마을에서 경계 없이 뒤섞여 살고 때로 힌두사원과 모스크가 나란히 붙어 있기도 
하다. 같은 땅을 밟으며  같은 공기를 마시는 그들의 동거는 벌써  천 년이나 되
었다. 강산이 몇 번 바뀐 세월인가?
  그런 그들이  결국 헤어졌다. 1947년, 무슬림은  파키스탄에다 딴 살림을 차렸
다. 그러나 가지 못하고 뒤에 남은 무슬림은 그냥 고향에서 산다. 1991년의 인구
를 보면, 무슬림은 인도  전체 인구의 11.4퍼센트를 차지하는 최대의 소수집단이
다. 힌두와 무슬림은 어제의 형제들처럼 다시  뭉치기는커녕 서로를 째려보고 있
다. 그것이 바로 인도의 가장 큰 골칫거리이다.
  공포의 술탄,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는 1001년부터 1027년까지  무려 17회나 
인도를 침략하여 약탈과 살륙,  파괴를 자행했다. 그 때문에 힌두는 오랫동안 잔
인무도함과 무슬림을  동일시했다. 마흐무드는  갔지만 이후 인도에는  본격적인 
무슬림 지배가 시작되었다. 1857년, 무굴의 멸망까지 길고 오랜 세월이었다.
  힌두와 무슬림은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이방인 출신의  정통 무슬
림은 언제나 총  무슬림 인구의 5퍼센트 미만이었다. 나머지는  이슬람으로 개종
한, 원래 힌두였던 농민들이었다.  극소수가 다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개종, 아
니면 죽음'이라는 강압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코란이냐, 칼이냐?' 지금도 서방의 영화를 보면, 모든 테러는 무슬림의 음모다. 
이란, 이라크, 아랍 세계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서방의 안전에 적신호. 몽매한 원
리주의자라는, 그  편파적인 묘사는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감추는, 과장된 반어법이다.
  인도에서 이슬람 개종은  '칼'의 힘이 아닌, 이슬람교의  신비주의파 수피의 영
향이었다. 수피는  소박한 신앙생활을 하며  하늘의 은총을 빌며  명상과 설교를 
소중히 여긴다. 수피의 일상생활을 통한 종교적  윤리, 명상, 수련의 방법은 원래 
힌두적인 것이었다.
  영국의 통치가 확립되면서 양측의 사이가 벌어졌다.  바뀐 세상에 적응이 느린 
무슬림은 재빠르게  새로운 지배자에게 마음을 주고  요직을 독차지한 힌두에게 
상대적인 상실감을 느꼈다.  그 골을 메꾸기 위해 무슬림 대학이  설립되고 무슬
림 지식인의  양성이 시작되었다.  1870년대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의회대표제가 
도입되자 무슬림은 다수인 힌두의 존재와 힘을 구구절절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초 의회와 관직을 향한 자리  싸움이 개시되었다. 동거자끼리 하는 
집안 싸움은 영국에게  이로웠다. 자리를 차지하면 자식에게  유리하게 교육제도
를 개정하고 신작로와  저수지를 만들수 있었다. 자식에게 취직을 시키고  더 많
은 이권을 노릴 수도 있는 위상이었다. 내가  가진 영향력이 내 상대편에게는 불
이익이 된다. 야호! 점차 경쟁은 심화되었다.
  절망과 자기 회의에  빠지면 작은 갈등에도 불이 붙는다. 무슬림은  갑자기 수
백 년 동안 들어온 힌두의 음악에 짜증이  일었다. 힌두는 신성한 소를 도살하는 
무슬림의 뒤통수가 얄밉고 화가 났다. 의혹은 의혹을  낳고 음모는 더 큰 음모를 
낳는 법. 모스크에 무슬림의 금기인 돼지 피가  뿌려지고 그 반발로 힌두 여성이 
무슬림 청년으로부터 희롱을 당했다.
  1909년, 무슬림은 무슬림의  의식을 보장하는 독립선거구를 얻었고  보다 많은 
무슬림 의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힌두가  중심인 인도 국민회의가 주도
하는 독립운동에도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1937년이  되면서 무슬림은 영국이 떠
난 후 힌두 정권의 탄생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힌두 국가에서 무슬림의 존재는 
2급 시민이 될  것이고 그것은 천 년  동안 지배자였던 무슬림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무슬림 지도자 알리  진나는 힌두 다수의 독재를 피해 무슬림의  나라, 파키스
탄을 제창했다. 네루는 '환상적'이라고 냉소하면서  무시했고 영국의 관리들도 비
현실적인 제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철수가 임
박하자 1946년부터 사태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두려움과  음모 속
에서 무슬림과 힌두는  하룻밤에 수백 명씩 서로를  죽였다. '복수혈전'은 내란의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간디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무시한 정치인의 야망과 
권력욕 앞에서 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다른 5백만 명이  동서를 향해서 살
림을 꾸렸다. 파키스탄에 사는 힌두는 인도로, 인도에 있는 무슬림은 파키스탄으
로 떠났다. 사랑으로 시작한 동거는 아니지만  파국은 언제나 쓰디 썼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따로따로 문패를 달고 새 생활을 시작했다.
  호적은 정리했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는다. 유일신을 
믿는 무슬림과 만신을  믿는 힌두는 각 지방에서 종종 갈등을  빚는다. 무슬림이 
다수인 카슈미르 문제는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은 분리주의를 주
장하는 카슈미르를 지원하여  인도를 도박한다. 인도-파키스탄의 크리켓  경기는 
양국민의 감정을 재는 바로미터이다. 전패를 해도  좋지만 반드시 상대국에는 이
겨야 한다.
  1985년, 65세의 무슬림  이혼녀가 부유한 전남편에게 생활비  청구소송을 제기
했다. 생활 능력이 없는 그녀가 남편에게서 받는  돈은 우리 돈으로 겨우 2천 원 
정도. 남편에게 약 2만 원의 생활비를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렸다. 그런데 무슬림
들은 이 대법원의 판결이  이슬람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전국적인 폭동
을 일으켰다.
  1992년, 일단의  열성적인 힌두가 모스크를 허물고  라마 신의 신상을 모셨다. 
무슬림 통치자가 라마의 사원을 부수고 세웠다는  모스크였다. 그 역사적 정당성
은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힌두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인들은 이를 지지, 상
당한 이득을 보았다. 양측은 지금도 이 문제로 감정의 앙금을 지니고 있다.
  힌두는 소수집단인 무슬림이  누리는 여러 가지 이득에 곱은 눈을  하고, 다수 
속에서 소수인 무슬림은 두려움 때문에 과민반응을 보인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갈등이 간단하지만은  않다. 무슬림 친구들은 힌두
들을 두려워하고 힌두  친구들은 무슬림 친구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한 마을
에 수십 년을 같이 살고도 늘 남남으로 패가 갈리는 건 너무 씁씁하다.
  인도에서는 삶이 있고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삶을  지배한다. 개인
의 자유보다 종교집단이나 카스트에 대한 충성이  우선인 것이다. 온순한 사람들
은 종교적 관습과  숭배 장소를 지키기 위해 순식간에 극렬분자가  되기도 한다. 
인도인이 먼저고 그 다음이 힌두나 무슬림이 아니던가.
  다음은 남부 닐기리 산악에 사는 한 부족의 민화.
  한 여인이 장에 가는데 힌두와  무슬림이 소 한마리를 두고 자기 것이라고 싸
우고 있었다. 아무리 우겨도 해결이 나지 않자 두 사람은 여인에게 물었다.
  "누가 주인인 것 같소?"
  "잠깐만요. 음, 앞에서 보니 무슬림 당신 것 같은데 뒤에서 보니 힌두 당신 소
네요."
  '먹물'을 안 먹은 자가 더 현명하지 않은가!

  물 한 잔과 인구
  1950년대 초, 인구 문제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행사에 참석한 네루 
총리의 소감이 이어졌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는  여기에서 논의된 훌륭한 방법이 교육률이  높은 국가
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같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보다  단순하고 간
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말을 멈춘 네루는 눈을 반짝이는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한잔의 물을 마시는 겁니다."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총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요? 전에요, 후에요?"
  네루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대신에요."
  네루의 말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는 인구 문제를  다루는 인도의 
느슨한 태도와 방식이 드러난다.
  인도에는 사람이 넘친다.  공항이나 기차역이나 어디를 가든지  사람에 밀리고 
채인다. 인구처럼  많은 세미나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별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모양이다. 어제도 오늘도 7만 명이 넘는 새 식구가 매일 이 땅으로 들어온다.
  인도 인구는 정말  엄청나게 늘어간다. 1951년의 인구는 4억이  채 안되었으나 
40년이 지난 1991년 8억  5천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81-91년의 10년 
동안에도 1억 7천만 명이 늘었다. 증가라는 말이 무색한 폭발적인 현상이다.
  질병과 무능력으로 상징되는 노년기의 증가가  꼭 좋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인
도인의 평균수명도 상당히  늘었다. 1951년에는 겨우 32세에  불과했으나 1991년
에는 평균 59세까지 살게 되었다.
  여자와 통계는 믿을 수  없다던가? 여자인 나로서는 물론 남자와 통계가 의심
스럽다고 해야겠지? 어차피  인구는 숫자놀음이니 그 의심스러운 통계라도 인용
을 해보자.
  1990-91년의 유엔 통계를  보면 인도는 세계 인구의 16퍼센트를  차지,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를 자랑(?)한다. 세계 인구 7명 중 한 명이 인도인인 셈이다. 자, 
주변을 둘러보시라. 그대  옆의 인물 중 7분의  1은 인도인이다! 지금쯤은 9억을 
넘어서 두 자리 억을 향해 맹돌진 중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구에 관련된 기록이라면 신이 나는 인도다.  인도 철도청
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이 160만 명이고 1969년 타밀나두 주수상의 장례식에는 1
천 500만 명이  참석, 이 부문 최고기록을  세웠다. 1996년 총선에는 5억이 넘는 
유권자가 자기의 표를 던졌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야호!
  의료시설과 서비스의 확대로  생활의 질이 전반적으로 좋아지고  천연두, 말라
리아, 역병 등 질병이 극복되고 전쟁 없이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자 사망률이 대
폭 떨어졌다. 게다가  식량 생산의 증가와 그 공급이 원활해지자  기근이 야기하
던 대량 아사도 사라졌다. 안된 이야기이지만 인구 조절 기능이 없어진 것이다.
  사망률은 떨어졌지만 출생률은  그만큼 줄지 않았다. 인도는  일분마다 50명이 
태어나고 15명이 죽는다. 등장하는 사람이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람보다 압도적
이니 인구 증가는 필연적이다. 인구 증가율은  아직 2퍼센트가 넘고 출생률도 높
아서 14세 이하의  구성비율이 40퍼센트나 된다. 선진국 스웨덴은 그  비율이 18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1970년대 초, 정부도 출생률을 줄이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각종 구호
가 난무하고 비상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에게는 트랜지
스터를 지급했고 다량의  콘돔도 배부했다. 긴급조치 시대에는  강제 불임시술도 
이루어졌다.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에게는 재정적인 지원도 했다.
  그러나 인도인의 정서를 뛰어넘는 지나친 가족계획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
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무지한 사람들은 강제 시술이 두려워서  바깥 출입까
지 자제했다는 것. 그  여파로 정부는 총선에서 대패를 기록했다. 배부된 콘돔이 
풍선이 되어 동구 밖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건 웃을 일도 아니었다.
  대다수 인도인은  여전히 1차 산업에 종사하고  그들에게 자식은 신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원천이다.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우리 옛 어
른들의 말씀처럼 생활이 어려운 사람일수록 자식 농사에 열심이다.
  아이는 양떼를 몰거나  고사리 손으로 러그와 카페트를 짠다.  자그마치 1억이 
넘는 어린이가 노동에 종사한다. 거리에서 흙투성이  얼굴로 구걸을 하는 아이의 
저쪽에는 사지가 멀쩡한 어머니가 있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일종의 노후
보장이다.
  폭설로 길이 막힌 외국의  어느 지방에서 출산률이 갑자기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데스몬드 모리스는  <인간 동물원>이라는 책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부
족한 동물원의 동물들이  섹스에 과잉 집착한다고 주장했다.  이방인들은 활력이 
부족한, 나태한 인도인들이  오락으로 섹스를 즐긴다고 그래서  인구가 부푼다고 
비난한다.
  여자 다리만 보아도  수선을 떨면서 야하고 진한  표정을 한 남녀를 길거리에 
크게 내세운 인도의 콘돔 광고는 세계적  수준의 코미디이다. 가족계획을 장려하
는 건지 섹스를  오락으로 장려하는 건지 영 아리송하다. 섹스  교과서 카마수트
라의 이름을 붙인 그 상품의 주소비자는 과연 누구인가?
  교만한 어느 영국인은, 마르크스가 '부대에 든 감자'로 여긴 인도 농민을 '낮에
는 들에서 웅크리고  일을 하고 밤이면 토끼처럼 새끼를  까는' 종족이라고 기록
했다. 섹스를 오락으로  하는 자는 누구인가? 인도 농촌의  갑돌이보다는 델리의 
병태, 또는 미국의 마이클이 아닐까?
  내가 처음 머물던  기숙사의 문지기 아저씨는 무려 아홉 명의  아이를 두었다. 
갓난아이부터 열여섯의  큰 딸까지. 자유의지(?)의  표상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아이가 아이를 안았다. 저녁 무렵이
면 까치머리의 아이들이  나이보다 훨씬 늙은 아버지 옆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
러나 그 '그림처럼' 화목한 그 식구는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았다.
  클래스메이트 루파는 부모가  변호사인 유복한 집안의 외동딸이다.  뉴델리 고
급 주택가에  있는 그녀의 집은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3층집이었다.  세 식구에 
일하는 사람은 그 두 배. 일류 사립학교를  나온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부모가 짝지어준 약혼자도 함께였다. 루파는 그 문지기를 바라보며 
자신은 두 명의 자식만 둘 계획이라고 이마를 찡그렸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인구 억제 정책이 실패했다.  배운 중상류층은 '적게 낳아 잘 
기르자'인 반면에 무지한  빈곤층은 '최선(?)을 다하자'를 고수,  인구가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간다. 낮은  층의 높은 출산력은 빵과 잠자리의 공급에서  환경 문제
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기울이는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무색하게 한다.
  인도인의 문자해득률은  1951년 겨우 16.7퍼센트였으나 1991년에는  전 인구의 
반이 넘는 52퍼센트가  글을 읽고 쓰게 되었다. 그러나 괄목할  문맹률의 감소에
도 불구하고 문맹자의  절대 수는 오히려 크게 늘었다. 1951년  3억 명이던 문맹
자는 1991년 5억으로  크게 부풀었다. 21세기에는 세계 문맹자의  반이 인도인이
라는 반갑지 않은 전망이 나와 있다.
  로마 말기, 소위 상류층은  피임을 하여 인구를 억제했다. 반면에 유입된 이민
족의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  로마 인구 구성에 변화가 일었다. 로마가 게르만족
의 침입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이 인구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산
아제한을 하지 않는  카톨릭 집단이 다수가 되어  앞으로 유럽의 지배세력이 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다수결의 원칙은  무섭다. 인도가 인도의 특성을 유지하는 것은  이 과
도한 인구 증가와  관계가 있다.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소수이고  전통에 집착
하는,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다수로, 즉 교육받은 윤택한 사람들보다 불
가촉민과 빈곤층의 인구가 빠르게 늘어가는 것이다.  이러니 인도의 변화가 더딜 
수밖에.
  소수의 엘리트는 스타TV니  CNN이니 야단인 반면에 다수는 먹을  물과 위생
적인 변소를 찾아 도시의  뒤편을 방황한다. 그 다수는 늘 지저분하고 가난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교육이니  뭐니 배부른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다.  삶이 복
잡하고 고달프니 온갖  믿음에 매달리는 그들. 그 다수에게는 어제가  오늘과 같
고 오늘도 내일과 같다.
  타지마할의 주인공 뭄타즈  마할. 아름다운 그녀는 17년간의  결혼기간에 무려 
열세 명의 아이를 낳고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
다.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한 황제는 전국을 순행할 때 늘 아내를 동반했다. 왕비
는 거의 매년 남산만한  배를 한 채 전국을 떠돌아다닌 셈이다.  이쯤 되면 다정
도 병이 아니랴.
  비하르와 우타르 프라데시 같은 지방은 인구의 반이 빈곤층이며 1천만 뭄바이 
시민의 절반이 슬럼에서  산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여 낳
을 수 있는 만큼 아이를  낳는 것이 최선일까? 아이를 줄이고 삶의 질을 높여야 
할까? 내세의 약속은  고단한 삶의 진정제이며 최면제인지도 모른다.  내세도 중
요하지만 이승이 먼저가 아닐까?
  해답은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자 아이의 교육기
간이 늘면  조혼이 줄고 가임기간도  줄어든다. 교육받은 여성은  가족의 크기와 
질에도 영향을 준다.  평생 아이를 가슴에 매달고 힘들게 살아가는  인도의 젖소 
부인들. 빈번한 출산으로 여성의 90퍼센트가 빈혈에 시달리고 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인구를 억제하는 단순하면서도 가장 안전한 방법이 없지
는 않다. 네루가 말한  물 한 잔보다 효과가 확실하고 특히  여성 여러분이 쌍수
(?)를 들 방법이 있다. 바로 일처다부제.  히말라야의 산악지방(라다크, 티벳)에서
는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한다. 자원이 뻔한 산악지방의 생존전략이다. 8세기 초 
인도에 온 혜초 스님도 여러 형제가 한  여자와 사는 풍습을 언급했다.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도 드라우파디 공주가 다섯 명의 왕자와  결혼한 것이 보인다. 여권
도 신장하고 인구도 줄이고...... 후후 농담이다.
  <인구론>을 쓴 맬더스는 출산을 위한 목적 이외의 성관계를 지양하라고 권유
했고, 마하트마 간디도 금욕을 주장한  바 있다. 어떤 이는 두 아이가 행복의 시
작이라고 가족계획을 세뇌하는  '바보상자'와 '카마수트라'류의 콘돔 판매  증가를 
기대한다. 인간의 자기  통제력은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자연적'인 것이 그리운 
시대지만 인구 문제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긴 한가보다.
  20세기 초, 선진국 영국과 캐나다 농촌 여성의  1인당 아이 생산량(미안!)은 여
덟 명에서 열 명이었다. 지금은  물론 두세 명으로 줄었다. 현재 인도 여성의 출
산 수는 여섯 명에서 일곱 명이니 백년  전 영국보다 낫다. 우리나라에서 가족계
획이 성공한 것이  1960-70년대인 것을 생각하면 느리긴  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인도편이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물었다.
  "8 곱하기 9는 얼마지?"
  "74요!"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과자를 주었다.
  이를 보고 놀란 이웃집 아저씨.
  "8곱하기 9는 72잖아요?"
  "나도 알아요. 그러나 점점 나아지고 있다오. 어제는 8곱하기 9는 88이라고 했
거든요."

  검은 것이 아름답다
  "왜 늘 검은색 옷을 입어요?"
  덥디 더운 인도에서  검은색, 그것도 발목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옷을 입
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내 인생을 애도하는 중이에요."
  말문을 잃은 그들에게 나는 곧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안톤 체포흐의 희곡 <갈매기>의 첫 대사를 인용한 거예요."
  인도인은 흰색을  선호한다. 이상해보이지만  결혼 상대자의 조건에는  반드시 
'백설표 피부'가 들어간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다수  인도인의 피부는 갈색인
데도 말이다. 영국이 통치하던  시기 영국 신사를 흉내낸 인도인을 가리켜 '갈색 
나으리'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본토박이보다 영어를 잘하고 세련되
고 차려도 백인 영국인의 눈에 비친 그들은 2급 인종에 불과했다.
  그래도 인도인은 멜라닌  색소가 빠진 '뭔가 부족한'  피부를 좋아한다. 북부지
방에 관한 조사연구를  보면, 부모는 딸뿐 아니라 아들의 피부도  백색을 고대한
다. 얼굴이 검은 아이를 가진 어머니는 아이를 남에게 보여주길 꺼린다. 특히 브
라만을 비롯한 상층  카스트가 백설표를 사랑한다. 나이가 젊고 많이  배운 사람
일수록 흰 피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수입이 많은 사람일수록 흰 살갗을 지향한
다. 그러나 낮은 계층은 아이의  피부색 따위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쓸 여가
도 여력도 없다.
  '검은 얼굴의 브라만과 흰  피부의 불가촉민을 경계하라.'는 인도 속담이 있다. 
이 말은  브라만이 흰 피부, 낮은  계층이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말이다. 대개 그늘에서  일생을 보내는 브라만은 피부가 옅고,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햇빛과 싸움을 벌이는 노동자 계층은  아프리카인들처럼 피부가 검다. 후
천적으로 획득한 인자가  유전이 될 수 없음으로  피부색은 인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베다에는 하얀 피부색을 가진 아리아인 정복자와 구별되는, 피부가 검고 '코가 
없는', 즉 납작코의 피정복자들이 등장한다. 노예를 지칭하는 '다샤'는 '검다'는 뜻
을 가진  단어로서 노예가 되었을  피정복민의 피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카스트의 상층을 차지하는 소수  정복자들의 피부가 선호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
이다.
  뭉뚱그리면, 드라비다어를 쓰는  남부지방 사람들의 피부가 검고  인도-유럽어
를 사용하는 북부지방 사람들이 그보다 옅은 색의 피부를 가졌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은 고대 카스트의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옛날, 카스트를 나
타내는 이마의 표식은  브라만이 흰색, 수드라가 검은색이었다. 인도인은 카스트
를 '바르나'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색채'를 뜻하고 피부색을 가리키는  말이었
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검은 까마귀보다 백로를 아꼈던 우리처럼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검은색보다 흰
색을 선호한다. 유럽에서도  흰색을 즐겁고 매력적인 성질을  상징하고 검은색은 
그 반대로 대개 불길함과 죽음을 상징한다. 인도  신화에는 시바 신이 아내 파르
바티의 검은 피부를  놀리자 그녀가 황금색 피부를  얻기 위해 금욕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이 보인다. 여성의 흰피부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동소
이한 모양이다. 인도에서도 흰색은 순수와 정결을 뜻한다. 사라스와티 여신은 늘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단정한 모습이다.
  '백설공주'를 사랑하는 인도에서 검은색이 환영받는  유일한 경우는 아마도 '검
은 돈'일 것이다. 부동산 거래의 60퍼센트가 검은 돈이고 희고 깨끗한 돈은 40퍼
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도  관리도 검은 돈을 비난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것이 '백색  거짓말'이라는 걸. 네루 대학교  아룬 쿠마르 교수의  계산에 의하면 
인도에서 생성되는 검은 돈의  규모는 연간 75조 원이다. 이 검은  돈을 낳고 길
러주는 솔로몬의 광산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는 부정부패다.
  그럼 여기서, 1996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주수상직을  물러난 여성 정치인의 한 
저택--수많은 저택 중에서--에 비장된 검은 물품을 맛보기로 살펴보자. 금이 30
킬로그램(400쌍의 금팔찌 포함),  은이 500킬로그램, 100개의 고급 손목시계, 1만 
벌의 고급 사리,  250켤레의 신발 등, 총 150억 원어치.  아마 이멜다가 자존심을 
다쳤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솜씨에 길들여진  우리에겐 별로 놀라운 액수가 
아니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남부 케랄라 주의 한 의원이 북부 펀자브  주의 한 장관집을 방문했다. 으리으
리한 집과 호화로운 생활에 놀란 의원이 물었다.
  "어떻게 이리 큰 부자가 되었소?"
  "알고 싶소?"
  다음날 장관은 케랄라 주의원을 데리고 골짜기가 보이는 산으로 차를 몰았다.
  "저기 골짜기를 가로지른 다리가 보이오?"
  "예."
  "그 다리 공사비의 반이 내 호주머니에 들어갔다오."
  몇 년이 지났다. 은퇴한  펀자브의 장관은 휴가차 케랄라를 찾았다. 예전의 의
원은 주정부의 장관이었다.  케랄라의 장관은 놀러온 펀자브인을  집으로 초대했
다. 그의 집은 고급 샹들리에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장식된 눈부신 저택이었
다. 비싼 벤츠도 있었다. 사치와 호화로움의  극치였다. 놀란 펀자브 주 전직장관
은 그 비결이 궁금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큰 재산을 모았소?"
  "내일 알려주리다."
  다음날 케랄라 주 장관은 북부에서 온 친구를 데리고 골짜기가 보이는 산으로 
갔다.
  "저기 골짜기에 다리가 보이오?"
  "어디요? 안 보이는데요."
  "그럴 거요. 거기에 세울 다리의 전체 공사비가 내 주머니에 들어갔으니."
  인도 정치인의  극심한 부패를 풍자한  이야기다. 작년 경찰이  한창 잘나가는 
정보통신부 장관의 집을 급습했더니 무려 70만 달러가 넘는 현찰이 가족이 숭배
하는 신상 뒤에  숨겨져 있었다. 총리를 지낸 나라시마 라오도  부정부패 혐의로 
'안'에서 지내다 나왔고 그  밖에도 수십 명의 정치인과 전직 관리들이 이런저런 
부패 의혹을 받고  있다. 지금은 고인인 전총리 라지브 간디도  부정부패의 스캔
들이 끊이지 않았다.
  거물급 정치인만 한탕(실은 수십탕이 보통이지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인도는 공직자 수가 무려 2천만 명 가량이  된다. 이들이 단돈 만 원씩만 꿀꺽해
도 얼마인가? 직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 없이 이들 대다수는 이런저런 명목과 노
선을 통해서 수많은  돈을 빼돌린다. 식수 공급시설과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한 
돈이면 어떤가?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국민들은 운명이라고 여기고 늘 고분고
분한데...... 모든 발전도상국의 관리들처럼 그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사무원이다.
  내가 아는 여성은  연방정부 장관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지방의 주의원. 그녀의  초대를 받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경호대의  사선을 넘어 
무사히 입성했는데...... 그들의 생활은 말로 듣던 우리나라 졸부의 생활과 흡사했
다. '국산품 애용은 국민이, 외제품 애용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인도를 방문한 저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인도의 부자같은 부자는 
미국에도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부패는 부패를 낳는다. 볼테르의 말처럼 부패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살이 찐다. 아침이면 '부의 여신' 락슈미에게  더 많은 부를 
주십사 기도를 올리는 검은 양심들. 그러나 속이  검다고 겉까지 검을소냐? 그래
도 여전히 그들은 하얀 피부를 선호한다.
  미국, 러시아, 인도의 지도자가 신에게 물었다.
  "언제 부정부패가 없어질까요?"
  신은 러시아가 25년, 미국은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요?"
  인도 총리의 질문을 받은 신.
  "글쎄,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도시는 사막이다
  1856년, 파키스탄의 카라치-라호르 간 철도를 부설하던  영국인 기사들은 무심
코 주변의 벽돌을 깨어 철도 침목 밑에  깔았다. 반세기나 지난 1920년경에야 그
곳이 바로 인더스 도시문명의 요람이었음이 밝혀졌다.  발굴된 유물을 보면 지금
은 사막이 된 그 지역이 한때는 습하고 숲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 서북부에는 타르 사막이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왕자는 말했지만 내가 본 사막은 로맨
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끝이 없는 모래밭은 절망의 밭이었다. 그 사막
의 동쪽으로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무서운 발표가  있었다. 수도 델리가 그 위험
권에 들어 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도  4천 년 전에는 숲과 초원이었다.  사막화는 기후의 
변화뿐 아니라 인간의  자연 파괴도 큰 원인이다. 경작지의 사막화는  농민의 도
시 이주를 부추기고 도시는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상실로 또다른 사막화를 가져
온다. 일찍이 그리이스인들이 '거대한 도시는  거대한 사막'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가?
  인도의 도시화는 아직 낮아서  인구의 25퍼센트가 인구 5천 명 이상의 도시에 
살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그 도시 인구의  4분의 1이 슬럼에 거주하고 대도시는 
그 비율이 훨씬 높다.  수도 델리의 인구 중 3분의 1은  오늘도 슬럼가에서 하루
를 쓸어담는다. 이  슬럼가는 상하수도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위생적인 변소
시설이나 쓰레기 수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변두리에  있는 슬럼가는 냄새로  그 존재를 고백한다.  깨끗한 건물과 
반듯한 가옥이  늘어선 지역도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다.  대도시에 산다는 
자존심은 골방으로 보내고 더러운  하수도에서 목욕을 하고 쓰레기에 파묻혀 하
루하루를 지낸다.
  <시티 오브  조이>의 캘커타를 보자. 캘커타의  인구는 이미 천만을  넘은 지 
오래. 1천 500만에 육박한다.  가구의 70퍼센트 가량이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하
고 50만 명의 인구는  의자할 방 한 칸 없이 길에서 먹고 자고  그리고 싼다. 캘
커타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집 없는 천사'들을  보면 인도가 더
운 나라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20세기 초, 캘커타 인구는 100여 만 명이었다. 1세기 동안에 열 다섯배로 늘었
으니 뻥튀기는  기술은 가히 일류이다.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은 150년  전 인구 
60만일 때 만든 것이니 지금 원만한 기능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다. 특히 변소 
문제는 '말 없음표'를 찍어야 할 형편이다.  사실상 도시의 기능을 상실한 캘커타
는 오늘도 '누가 나 좀 말려줘요!'를 외쳐댄다.
  200년 전, 인도에  살았던 영국 시인 키플링은 캘커타를  '끔찍한 밤의 도시'라
고 묘사했다.  그러나 오늘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때보다  더욱 끔찍해진 
도시를 '기쁨의 도시'라고 불렀다. '가난한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낭만적 메시
지의 <시티 오브 조이>는  기존에 있는 3천 개의 슬럼을 놔두고 새로운 슬럼을 
만들어 '사실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누구를 위해 그랬을까?
  캘커타는 벵골 지방의  주요 도시. 벵골은 좌파 정부가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지만 대도시 캘커타에서  좌파적인 진취성을 보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도시
에는 주변 비하르와  오리사에서 밀려온 '공수레'꾼과 방글라데시 난민들이 수두
룩하다. 발전과 더불어 행복한 영화의 주인공에도 불구하고 캘커타는 '시티 오브 
조이'가 아닌 '시티 오브 다잉'이다.
  뭄바이로 이름을  바꾼 봄베이는 인도  제일의 상업도시다. 도시가  안고 있는 
대기 오염, 교통 체증, 부동산 상승,  산업쓰레기 등의 문제는 산업발전의 지표를 
보여준다. 뭄바이 시내의 인구 밀도는 1평방마일 당 10만 명으로 아주 촘촘하다. 
5천여 개의 산업체와 영화  산업이 자리한 이 도시는 '샬람 봄베이' 하면서 꾸역
꾸역 밀려드는 이주자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빈부의 격차를  과시한다. 인
구 천만 명의 반, 무려 5백만 명이 슬럼에 산다. 애재라.
  제3의 도시 마드라스도, 그 외 다른 중소도시도 사정은 비슷하다. 날은 더운데 
쓰레기는 산처럼 쌓이니 쥐, 모기, 바퀴벌레, 파리가 신이 나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고 말라리아, 열병, 이질, 설사 등의 질병을 부르며, 결국 이질, 설사,  콜레라 
등으로 해마다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대개 전염병은 도시 슬럼가에서 
발병하여 확산된다. 1994년에 찾아온 페스트도 수랏 시에서 시작되었다.
  위생관념이 희박한  이농자들은 대개 중산층의 가정에서  허드렛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산업화가 미약한 인도에서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아직 미미하며 도
시에 사는 남자의  70퍼센트가 이런저런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이들이 전염병에 
걸릴 확률은 아주  높고 이를 퍼트릴 가능성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훨씬 
높다.
  델리를 비롯한  대도시에는 사람만 만원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은 서울
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지만 인도는 동물도 사람처럼 거주와 통행의 자
유를 누린다. 인도인이  소를 숭배한다고 배운 외국인들은 굶주린 채  거리를 헤
매는 수많은  소를 보고 자꾸 눈을  비빈다. '자유를 배고픔'임을  실감하는 다른 
동물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비하르의 주도 파트나는 사람이 150만, 동물이 30
만이다.
  주제가 딱딱하니 우스개 소리 하나 해드릴까?
  한 신문기자가 길을 가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것이 아
닌가? 좋은 기삿거리라고 생각한 기자는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희생자의 자식입니다. 좀, 비켜주세요."
  기자가 사람의 숲을 헤치고 들어 가보니 차에 치인 희생자는 커다란 개였다.
  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도에 있을 때 읽은  신문기사 한 토막도 소개해야겠
다. 고기를 먹는 것이 무슨 죄이랴마는 육식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일부 인도
인들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을 몹시 혐오한다.  개는 인도에서 밑바닥 동물이
다. 88올림픽이  열릴 때 언론은 '핫  도그' 운운하면서 한국인  모두가 개고기를 
상식하는 양  비웃었었다. 빙글빙글 웃으며  나더러 맛이 어떠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자 벵골  정부는 사람으로 초만원인  캘커타 시내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
들', 즉 방황하는 개들을 처치할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회심의 미소를 띤 
주정부는 한국의 식도락가를 위해 개를 수출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지만 국민의 
위생을 염려한 한국 정부는 보기 좋게 퇴짜를  놓았다. 인도 신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논조였다.
  캘커타 시내의 개들뿐 아니라 인도의 동물은  좋은 먹이감이 못된다. 캘커타의 
견공들? 군데군데 진물이 흐르고 피골이 상접하다. 사람이  먹을 것이 없는데 시
원찮은 동물까지 배려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인도는 아주 더운 땅. 사람
도 동물도 축축 늘어진다. 외제를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수입 쇠고기는 사양하는 
우리가 아닌가? 인도산 개고기는 보신이 아닌 투신용이다.
  1984년 12월 3일, 인도 중부에 있는  도시 보팔에서 가스가 유출되는 대사고가 
일어났다. 미국  국적의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실수로 당시 2천  500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망자 수는 7천 명을 넘기고 그 수는  계속 불어갔다. 책임자 앤더슨 씨는 아직
도 행방이 묘연하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도 관계자에 대한 처벌도 미흡하기 그지 
없다.
  희생자 대다수는 길거리거나 허름한  거적을 걸친 움막에 거주하던 가난한 사
람들이었다. 사고가 난 때는 날씨가 비교적  쌀쌀한 12월이었고 한밤 중이었지만 
꼭꼭 닫을 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형체  없이 퍼져가는 무서운 유해가스에 
무방비 상태였다. 산업화와 도시와의 그늘을 보여준 최악의 재앙이었다.
  일찍이 인더스 도시문명을 발전시킨  인도. 모든 것, 모든 존재를 인정하는 인
도는 대도시 문제도 국제적 성격을 띤다.  대도시는 주변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
로 문제가 더욱  복잡한데 캘커타의 방글라데시인, 마드라스의  스리랑카인 그리
고 북부도시의 티벳인과 네팔인은  살기 어려운 인도인과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
다. 바글바글, 웅성웅성, 어디를 가도 초만원이다.
  우리나라 어느 작가는 '서울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말했는
데, 인도의 대도시인이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죽어가고 있다. 매연이 심한 대도시
에서는 방독 마스크를 할 지경이  되었고 겨울에 델리나 뭄바이에 가면 숨 쉬기
가 곤란할 정도다.  조사 결과, 품행이 방정한  시민도 하루에 담배 10-20개비를 
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보고가 나왔다. 보팔의  경우처럼 악마의 희생자는 언제
나 집 없는 거리의 천사들이 먼저다.
  21세기가 되면 도시에 사는 인도 인구는  3억이 넘을 전망이다. 1901년에 이미 
11퍼센트를 기록한 도시화가 달팽이처럼  느린 것은 농촌에서 온 이주자들 때문
이다. 자연의 사막화를  피해 물을 찾아 도시로 몰려든 그들은  또다른 사막화에 
시들고 있다. 경제발전을 뛰어넘는 도시화, 수용 능력을 초과한 인도의 도시화에 
우기는 멀어보인다.

8. 인도, 인도인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후르시초프는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그때 청중 가운데서  누군가 외
쳤다.
  "당신도 스탈린의 측근이었는데 왜 그의 독재를 막지 못했나요?"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누구야? 지금 떠든 인간이!"  후루시초프가 꽥 소리를 지렀다. 아무도 대꾸가 
없었다. 무서운  정적이 흐른 후  마침내 후르시초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지요?"
  1970년대 우리나라는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독재의 전성기였다. 유신헌법이 선
포된 해가 1972년이었던가? 인도도 우리나라처럼 1970년대에 긴급조치와 독재정
치를 경험했다. '빈곤 퇴치'를 내건 인디라  간디의 '부엌 내각'에서 그이 아들 산
자이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이 늘어가자 인디라 간디가 긴
급조치를 선포했던 것. 이럴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 아첨과 아부의 9단, 아니 10
단들. 이 시대  최고의 아부는 역시 '인디아는 인디라, 인디라는  인디아!'를 뽑아
야 할 듯하다.
  긴급조치가 선포된 후 우리 국회는 '거수기'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인도 의회는 
'고무도장'이라는 서글픈  이름이 따라다녔다. 1975년부터  약 21개월  동안 야당 
지도자 7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재판없이 구금된  사람도 10만 명을 넘어섰다. 신
문과 방송은 사전검열이 실시되고  사람들은 낮말과 밤말을 엿들을까봐 새와 쥐
가 나타나면 몸을 사렸다.
  시간을 무시하기로 유명한 인도의  열차들이 제 시각에 출발하고 도착했고 만
성적인 파업과 태업도 그 수가 줄었으며 한낮이 되어야 출근하던 사람들이 출근
길을 서둘렀다. 느릿느릿한 인도인이 종종 걸음을 했고  1976-77년 1년간 불임시
술을 받은 사람은  무려 750만 명으로 목표를 초과했다. 경찰이  주도한 이 강제
시술은 아이를 두세 명  둔 기혼자가 대상이었지만 실제로는 미혼인 불가촉민이
나 무슬림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서슬이 퍼런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케  하는 대
목이다.
  사회가 다양하고 불평등하니 독재에 대한 의견과  반응도 다를 수밖에. 각계각
층에서 독재정치를 비난하는 화살이 무한정 쏟아져  들어왔다. 인디라 간디는 그
렇다면 선거를 치러  자기 정권의 신임을 묻겠다는,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방
법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디라 간디의 기대는 무참하게 깨졌다. 인구
의 반이 문맹인 유권자들이 귀중한 한 표를 던져 정권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문맹이 다수라는 점은 간과할 사항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문맹자가 많
던 시절의 유산인  기호를 사용하지만, 인도는 다수의 문맹자를 위해  각종 상징
을 투표지에 표시한다. 가장 인기 있는 상징은  물레, 수레바퀴, 소 등 농민이 일
체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다. 좌파 정당은 낫, 망치를  상징으로 채택한다. 문
맹자들은 오직 이 상징을 보고 선택을 했던 것이다.
  선거에 지고 대법원 판결에서 진 인디라 간디는 차가운 감옥에서 가슴의 한을 
삭였다. 그리하야 인도의 독재정치에 대한 실험은  성질이 급하기로 소문난 우리
보다 더 급하게 겨우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인도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다면 
합니다'라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손을 흔들었다.
  1948년 1월, 마하트마가 암살되자 세계는 막  탄생한 인도 연방이 존속하지 못
하리라고 여겼다. 1984년, 인디라 간디가  암살되었을 때도 세계는 조마조마했다. 
파키스탄, 중국과의 전쟁은  물론 펀자브, 아샘, 카슈미르  지방의 유혈적인 분리
주의 운동도 인도 연방의 존속 여부를 주목하게 만든 중대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인도는 살아남았다.  인도가 해방 이후 50년 동안 민주적인  체제와 정
치를 유지한  것은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크게 구별되는 사항이다. 
인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에서 자주 일어난  그 흔한 군사쿠데타를 
단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1947년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
시가 여러 차례 군사쿠데타를  겪은 사실을 생각해보면 유별함이 더욱 두드러진
다.
  1996년에 실시된  총선거는 약 5억의  유권자가 550여 명의  하원의원을 선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를 증명했다. 28개  정당의 출신이 모인  연방의회 의원의 
52퍼센트가 농촌 출신이고 후진계급과  불가촉민 출신의 의원도 20년 전에 비해
서 두 배로 늘어났다.  의회대표제에 걸맞는 결과인 셈이다. 그러니 달구지를 끌
고 의사당에 들어오는 인사도 생기는 건 당연하다.
  정부에 대한 풀뿌리의 반응을  나타내는 민주적 장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
도는 분명히 민주주의  국가다. 일찍이 1870년대부터 경험해온  지방자치제와 독
립정부에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한 '사법부의 독립'이 인도 민주주의의 요람
이다. 세계적  수준의 자유를 누리는  언론도 민주주의를 위해  불철주야 정부를 
감시하고 있다.
  인도의 민주주의는 영국에서 수입한 100퍼센트  외제가 아니다. 인도에는 중국
의 황제와 같은  구심점이 없다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브라만을  제외하면 조직
화된 종교가 없는  인도 사회는 자연히 다른  집단이나 전통과 기능적인 연계를 
맺어왔다. 여러 종교와  여러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사회는 민주주의의 
발상이 가능하다. 여기에 영국의 제도가 더해진 것이다.
  인도의 고대 성서에는 '인간은 먼저 왕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아내와 재
산을 모아라. 보호해줄 왕이 없다면 아내와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장
이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오랫동안  이방인 출신의 왕으로부터  보호와 통치를 
받았다. 이 책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너무도 쉽게 외국에 굴복, 안방을 넘겨주
었다. 왜 이다지 허술한 것인가?
  인도는 무정치적  사회인다. 즉, 정치보다  사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곳으로서, 
정치적 변화를 위험으로 여기거나 방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중앙
의 정치 변화가 말단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에  극적인 변화를 주지도 않는다. 중
앙에서 굽타 씨가 정권을 잡든 찬드라 씨가 통치를 하든 내 일상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
  대학생들 역시 중앙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인 성향의 학생들이 항의행진을  주도하지만 대개 사회적인 문제가 주요 안건이
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일상에 바쁜 사람들은  정치는 정치인들의 몫이라고 여긴
다. 택시기사에서  대학교수까지 입만 열면  정치를 논하는 정치  일변도의 우리 
사회는 정치에 이토록 무관심한 사회만큼 위험한 것이 아닐까.
  1947년 인도 연방의 건국 이전까지 인도 땅 전체를 통일한 국가는 한 번도 없
었다. 북부지방에 통일 제국이  여러 번 존재했지만 비교적 단명했다. 통일 국가
는 직할 지배지인 중심부 외의  지방과는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 철저한 중
앙집권적인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위대한 통치자의 등장도  정치적 통일보다는 
문화적 통일에 기여했을 뿐이다.
  중앙에 정치적 권력이 집중된 사회는 그 지도자의 머리만 치면 사회제도가 쉽
게 와해되며,  남미 인디언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수평적 평등주의를 지향한 
남미의 인디언은 곧 멸망했지만  지방 분권적이고 수직적인 동양의 인디언은 바
로 그 불평등 때문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게  정치에 문외한인 내 생각이다. 불평
등이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꼬리가 아홉  개인 구미호는 여덟 개를 잘라도 
한 개는 남는다.
  인도의 정치는 인생의 다른 영역에 다른 윤리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나는 기
꺼이 인정한다.  영국 통치 말기인 1939년,  해방 이후의 경제계획을  짜는 '경제 
발전 위원회'를  기업가들에게 맡긴  네루는 결과적으로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넘겨준 셈이다.  그러나 그는 경제는  '경제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어느 해 막강한  세력을 가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어느 힌두사원을 방문했는
데, 동부지방에 있는  그 유명한 힌두사원 측은 인디라 간디가  비힌두인 페로즈 
간디와 결혼한 사실을  이유로 총리의 사원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사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대를 설치했다. 나도  인디라 간디가 섰던 그 자리
에서 그 사원을 바라보았다.
  인도에서는 종교나 군대와 같은 비정치적 분야가 정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다. 그러나 힌두의 윤리개념 '다르마'는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각자는 자기에
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군인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어도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오지 않으며,  대재벌은 재산이 히말라야 산맥
보다 크고 많아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인도에 군사쿠데타가 없었
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의 관료제는 혼란과 분파적인 전통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오늘
도 여기저기에서  분리운동이 벌어지고 각 집단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부정부패도 극심하다. 어떤  이는 인도를 '기능하는 무정부 상태'라고 표현
하기도 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  다원사회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강하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이방의  문화가 큰 영향을 남기기 어
려운 것이다.

  켄터기 프라이드와 인디아 프라이드
  인도는 날아다니는 파리까지 애국심이 강하다. 뉴델리에  거주하는 파리 두 마
리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라는 세계적인 외식기업의 프라이드를 건드렸으니 
말이다. 11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무슬림 역사가 알비루니는  힌두들이 그리스인
들처럼 '이 세상에 자기들 나라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으며 왕, 종교, 과학, 지식, 
인종 모든 면에서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믿는다.'고 썼다. 20세기 후반 우리는 
거기에 '인도의 파리는 세계 전체의 파리보다 낫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과장이 너무 심했나? 96년  여름, 인도에 온 지 반 년 밖에  안된 켄터키 프라
이드 제2호점 뉴델리 분점이 겨우  개점 23일 만에 날아다니는 파리 두 마리 때
문에 위생불량으로 문을 닫았다. 인도의 위생관념은 이렇게 대단하다! 남부 방갈
로르에 먼저 문을 연 켄터키 프라이드 1호점도 허용 기준치 이상의 조미료를 사
용했다는 죄명으로 역시  빗장을 질렀다. 전세계 78개국 9천 400개  분점에서 치
킨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봉사해온 이 회사는 몹시  난감한 표정.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그들은 여기가 다른  나라가 아닌 인도라는 것 잊었다. 잘룩한  허리로 세계인
의 연인이 된 '코카콜라'가 일찍이 실연의  상처를 안고 떠나갔던 곳. 헐리우드의 
무차별 공격에도 끄떡 않는, 튼튼한 문화적 방탄망이 쳐진 나라가 아니던가.
  인도는 아주 더운  나라이다. 따라서 음료시장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19세
기 중국을 겨냥했던 영국의 단순한  산술을 따르면 인도인 한 사람이 한 병씩만 
마셔도 10억 병이 아닌가? 나는 콜라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코카나 펩시를 그리
워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투박한 모양의 인도산  콜라를 보며 친구들에게 브랜드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의 대답은 대동소이했다.
  "우리가 그까짓 까만 설탕물도 못 만들어?"
  인도의 콜라 소비율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 파키스탄이나 스리랑
카보다도 뒤진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펩시사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띄웠고, 그
것이 바로 계열사인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상륙이었다.
  인도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방갈로르에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문을 열
자 예상대로  적대적인 반응이  일었다. 농민협회와 채식주의자들이  실력행사를 
벌여서 가게는 두  번이나 박살이 났다. 다국적 음식산업의 인도  침투는 지방의 
자원을 고갈하고 결국 인도의 부를 빼갈 것이라는 주장을 앞세운 '저항'과 '폭력'
이었다. 사실 회사는 분점에서 팔 닭을 전량  인도에서 구입할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있는 켄터키 프라이드사의 분점에서 소비되는 감자를 인도에서 구입하여 
인도의 프라이드를 세워 주기로 옵션을 맺은 상태였다.
  무장한 경찰이 밖에서 지키는  가운데 가게는 치킨과 켄터키 프라이드의 이미
지를 사랑하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이것이 아니면 저
것'이라는 제로섬의 관계가 아니다. 인도의 것과 인도 문화를 사랑하면서도 샌더 
대령의 치킨을 먹을 수도  있는 것, 적어도 먹을 것을 선택할  기회는 주어야 한
다는 여론도 없지 않았다.  매장이 오픈되자 처음이라 그런지 손님도 많았다. 회
사의 품안에는 앞으로 7년 동안 8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치킨과 '피자 헛' 매장을 
수십 개로 늘린다는 야무진 청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것이 인체에 해롭다고 판정을 받은 조미료  문제였다. 세계 
각국에 있는 다른 분점과  조리 방법이 동일하다든지 인도인이 만든 치킨에서도 
유사한 양의 조미료가  나왔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보수  힌두정당이 통
치하는 델리 주정부는 위생상태를 빌미로 신속하게  켄터키 매장을 폐쇄했다. 아
직도 집에서 만든 음식에 연연하는 인도인이 외국의 입맛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낯선 입맛에 중독되거나 포로가 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
다.
  평소의 인도인답지 않은 이 재빠른 움직임은 다국적 기업의 침투에 대한 경계
경보였다. 1997년에는 피자  헛과 젊은이들이 고대하는 리바이스  청바지가 인도
에 상륙한다.  일부 정치인들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국문화에  대한 '스와데시' 
운동을 역설했다.  스와데시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20세기 초 영국  상품 불매와 
국산품 애용을 상징했다. 이제는 늘어나는 외국  투자와 경제 자유화의 물결속에
서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가진다.
  조류학자들은 세계에 있는 모든 종류의 닭이 인도 정글에서 기원했다는 데 동
의한다. 인도 북부지방에는 탄두리 치킨이라는 아주 유명한 닭요리가 있다. 닭고
기를 요구르트와 양념에  재었다가 진흙 오븐 탄두리에  넣고 장작을 때서 구운 
이 닭요리는 맛이 아주 부드럽다. 물론 치킨 카레도 있다. 인도에 마땅한 닭요리
가 없어서 외제를 수입하는가?
  사실 치킨이  문제는 아니다. '켄터키  프라이드'라는 브랜드를  거부하는 것일 
뿐. 외국인들은  개방경제에 불이익을 가진  인도 실업가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의심한다. 외국기업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유권자의  눈을 끌고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술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도인의 절대 다수는  그 유명한 
뚱뚱이 샌더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리 없고 앞으로도 그렇다.
  각 나라는 외국  문화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문화의 유산을 지킬  권리가 있다. 
헐리우드의 안방과 외국 유명 브랜드의  밥이 된 지 이미 오래인 우리로서는 기
껏해야 '문화는 온실에서 기를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바깥의 비바람을 맞아
야 한다고.  그래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러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되는 
문화적 동질화의 불도저 앞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쳐야 한다. "우리 것은 좋은 것
이여!"라고. 세계를 위해서 지방주의를  보존해야 하는 것이 인도의 역할일 것이
다.
  1996년 가을 인도 방갈로르(또 방갈로르이다)에서  개최된 미스월드 대회는 초
반의 우려와 달리  비교적(!) 평화롭게 막을 내렸다. 자칭 인도  문화의 수호자들
은 여성의  상품화와 퇴폐적인 서구문화의  수입, 다국적 기업의  감춰진 음모에 
반대하며 분신도 불사하겠다고 언성을  높였다. 항의운동은 각지에서 계속되었고 
결국 한 명이  분신자살을 했다. 주최 측은 바비인형들이 롱다리를  자랑하는 수
영복 심사를 별도로 인도양의 한 섬에서 개최하겠다는 타협안을 냈다.
  행사의 주최자는 30년 가까이 인도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던 대스
타 아미타브  바찬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도 문화의 이름으로  그에게 배반의 
칼을 던졌다. 영화에서 늘  영웅과 정의의 대변자였던 아미타브. 하루 아침에 영
화에서 자신이 싸우던 악당으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가 미인대회에 콤
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는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두 차례나 미스 월드 타이틀을 차지한 화려한  전력이 있다. 1994년에는 미스 유
니버스드도 배출했었다.
  우리로서는 세계 조류를 무시한 이 반대운동이  상당히 무식해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이 두터운 지지를  받는 곳은 아마 세상에서 오로지 인도뿐일  것이다. 언
론도 행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올림픽 개최와 월드컵 유치에  보인 우리
의 일사불란한 결과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인도인들은 애국심이  부족한가? 혹
은 우리가 줏대가 없는 것인가?
  공작새는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기러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지 못한
다. 세계화와 발전이 눈부신 미인대회를 열거나  외국의 입맛을 수입해야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층인 인도에서 시급한 것이 무
엇인가? 이것은 윤리적  문제이다. 그 날 행사장에 간 이른바  특권층은 78개 나
라에서 날아온 미인들을 보기 위해  인도인 연평균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미련 없이 작별했다.
  인도는 늘  이질적인 것에 관용을  보였다. 인도를 다녀간  수많은 침입자들은 
모두 부르크의 말처럼  '철새'에 불과했다. 영국은 '탐욕스런  철새'였지만 결국은 
그들도 떠나갔다. 이국 문화의 침투에 대한 최근의  과민 반응은 지금 인도가 위
협을 느낀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인더스 강을 넘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별다른 족
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제부터 밀려오는  서방의 물결은 아마  알렉산더보다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미물인 파리까지 협조하는 것이리라.

  고무줄 사회
  초등학교 산수시간. 교사는 나눗셈을 가르치려고 칠판에다  바나나 세 개를 그
렸다.
  "자, 여기 세 개의 바나나가  있어요. 세 명의 아이가 있다면 한 사람이 몇 개
씩 가질까요?"
  앞줄에 앉은 영리한 소년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한 사람이 하나 씩입니다."
  "맞았어요. 자,  마찬가지로 100개의 바나나와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 구석에 앉은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만약 바나나가 없고 사람도 없다면 각자는 몇 개의 바나나를 갖는 건
가요?"
  아이들은 멍청한 질문을 한 아이를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자, 조용히 하세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내가 설명을 할게요. 바나나 세  개를 
세 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이 한 개씩 갖게  되고 100개를 100명이 나누면 역시 
각자가 하나씩 바나나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저 학생이 질문한 것처럼 0


개의 바나나를 0명의 사람으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가? 한 사람이 하나씩일까요? 
아니에요. 그 답은 '수학적으로 각자는 무한대의 바나나를 갖는다'입니다."
  수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고민한 그 문제를 새털처럼 가볍게 생각해낸 그 아이
는 1887년 인도 남부지방에서 태어난 라마누잔이다.  여기서 그의 수학적 재능이
나 서른세 해의  '굵고 짧았던' 일생을 전부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대학에 떨어
진 라마누잔은 여덟 살  먹은 아이와 결혼을 하고 직장을 찾았다.  먹을 빵과 머
리에서 샘 솟듯이 떠오르는 수학 공식을 적을 종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운 좋게도, 그이  노트를 본 어떤 이가  직장과 연구비를 주선해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캠브리지  대학교의 하디 교수와도 연락이  되었다.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발견한 하디의 초청을  받은 라마누잔은 고민, 또 고민이었다. 그는 보
수적인 브라만, 어찌 물을 건너 영국에  가리오? 물을 건너면 카스트의 청정성을 
잃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머니의  꿈에 나타난 지식의 여신이 허락을 하여(?) 영
국으로 간 그는 짧은 삶 동안에 아낌 없이 재능을 쏟아냈다.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으로 유학을 갈 때도 물을 건너는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다. 라마누잔의 경우처럼 특히 간디 어머니의 목소리가 컸다. 결국 간디는 
카스트를 박탈당하는 설움을 겪었다. 영국 제국주의를  위해 해외 원정에 동원된 
인도 군인들이 반영 감정을 키우게 된 것도 이 점이 큰 이유였다.
  오늘날에는? 긴장하지 마시라. 인도인은  물을 건너온, 부정을 탄 그대와 기꺼
이 악수를 나눌  것이다. 이제는 자식을 미국의 하버드나 영국의  대학에 보내는 
것이 집안의 수치가  아닌 자랑거리이다. 인기 있는 신랑감은 미국  영주권 소지
자가 아니던가? 돈이 있는  사람들은 홍콩, 싱가폴, 두바이로 날아가서 '와우, 즐
거운 쇼핑'을 맘껏 즐긴다.
  그러나 일부 보수적인 집안은  카스트에 끼지 못하는 외국인과의 접촉을 여전
히 꺼린다. 언젠가  남부지방 브라만 출신인 교수님과 그의 고향엘  갔는데 나의 
방문이 영  내키지 않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내가 집을  나오자마자 '쇠똥'으로 
부정 탄 집안을 청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성한 소의 똥은 부정탄 몸이나 
환경을 닦아내는 고품질 세제라서  쇠똥을 태우거나 바닥에 죽 바르면 '부정 끝, 
청정 시작'이다.
  인도의 인사법은 악수를 하거나 우리처럼  허리를 푹 꺾지 않고 두 손을 합장
하여 가슴에 댄다.  합장한 손이 위로 올라가 디스코처럼 허공을  찔러도 괜찮지
만 아래쪽은 절대 안  된다. 서로 몸이 닿지 않으므로 부정이  타지 않는 안전한 
인사법이다. 대도시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여자에게 함부로 손을 내밀
지 말 것. 인사가 아니라 성희롱이라고 오해를 살 여지가 많다.
  참고로 인도  최고의 인사법을 소개하겠다.  자기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가 그 
손으로 어른의 발을 만지면 된다. 내 머리가  당신의 발과 똑같다는 표시로 어른
이 앉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우리의 큰  절과 의미가 비슷하다. 아내가 남편
에게,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아들이  부모에게 매일 드리던 이 인사는 바쁜 생활 
탓에 점차 우리의 큰절처럼 사라지고 있다.
  다른 곳에서 이미 언급을 했지만 인도인은 아직도 청정과 부정을 엄격하게 지
킨다. 인도인의 집에 가면 유난히 많은 스테인리스 그릇이 눈에 띈다. 잘 깨지지 
않는다는 편리성 때문이 아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은 한 번 쓰면  오염이 된 것
으로 간주하는  인도인은 금속으로 만든  그릇을 선호한다. 물을  긷는 물동이나 
화장실 갈 때 들고 가는  물잔은 대개 최고의 청정한 그릇, 놋쇠 제품이다. 그러
나 이즈음은 오호 통재라, 플라스틱 애용이 시작되었다.
  물은 오염의 원천이다. 수인성 전염병이라는 말을  기억하는 우리는 인도의 현
명한 판단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오염을 막기  위해 상층 카스트는 오염의 주범
인 불가촉민과 한  우물을 쓰지 않으며 불가촉민에게는  그들 나름의 우물이 있
다.
  인도인의 집을 방문하면  물이 가득 담긴 잔을 대접 받는다.  미지근한 맹물을 
다 마시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라. 그 물이 수돗물이라도  낮은 계층
의 일하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주인이 몸소 받아온 것이니까 물론 청정을 유지
하기 위해서다. 잔에다 입을 대지 않고 마셔야 예의라는 건 기억하실 테지?
  부정을 타면 물로 씻는 것이 가장 좋은  정화 방법이다. 예전에 불가촉민과 접
촉을 한 남부지방의 브라만은  강에서 다섯 번을 목욕해야 원상회복이 가능했다
지만, 바쁜 이즈음은 '간단히!' 그리고 때로는  슬쩍 넘어가기도 한다. 인류학자들
의 글을 보면 흐르는 강물도 분명한 구분이 있어서 상층과 하층이 한 곳에서 목
욕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무신 말씀을. 먹고 씻고 
빨래하는 물도 엄연히 상하귀천이 있다.
  세상이 바뀌면 변화가  따를 수밖에 없다. 종래 의식을 집전하던  브라만은 점
차 사제로서의 역할이 줄어간다. 수드라나 불가촉  집단은 브라만 사제를 부르는 
값이 비싸지자 집단 내에 따로 사제를 둔다.  때로 브라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브라만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도도한 브라만의 서비스를  애걸하기보다는 자
기 계층의 사제가 여러 모로 편리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브라만이 접촉을 기피
하는 '불가촉민'의 처지가 될 판이다.
  이러한 변화와 새로운 카스트(자티)의 기원을 알려주는 일화를 보자.
  남부 타밀나두의 한  마을에는 200명의 요리사가 산다. 한 집에  한 명의 요리
사가 있는 셈이다.  이들의 요리 솜씨는 요리학원이  아닌 '사부님들'에게서 한수 
두수 배워 전수받은  것이다. 맛과 서비스로 소문이 자자한 이들의  요리를 맛보
려면 적어도 6개월 전에 출장을 예약해야 한다.
  이곳이 요리사 마을이 된 것은 20세기 초,  부유한 상인층이 이들의 조상을 요
리사로 고용하면서부터이다.  상인들은 요리를  담당하는 브라만이 값이  비싸고 
부리기도 만만치  않자 세탁부였던 이들의 조상에게  잔치음식을 만드는 대권을 
맡겼다. 그 자식이 대를 이어 일을 계속하고 이제는 그 수가 200명에 이른 것.
  이들은 팀을 이루어 음식을 만드는데  한 팀이 3시간이면 5백 명이 먹을 음식
을 간단히 끝낸다고. 아이들은 잔심부름이나 설거지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솜씨
를 익히고 그래서  역사는 계속된다. 이들은 연간 6개월 가량  출장으로 집을 비
워야 할 만큼 바쁘신 몸들이다. 수입도 괜찮아서  젊은이들도 대를 잇는 데 불만
이 없다. 우스운 것은 이들도 집에서는 목에 힘주고  부엌 쪽에는 눈길 한 번 안
주는 고리타분한 가장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20세기의  끝물, 농촌에서야 이런저런  금기를 지킬 수  있지만 복잡한 
도시에서는 여간 어렵지  않다. 만원 버스나 달리는 기차 안에서  옆사람의 카스
트를 물어보고 자리를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식당이나 공원의  수도꼭지 앞에
서 일일이  내 앞의 그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먹고 마실 수도  없다. 가죽이 
더럽지만 가죽 안장을  댄 자전거를 타야 농촌에서 있는  티를 낼 수 있지 않는
가.
  이처럼 인도 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느리고 점진적이어서 당대 사람
들도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즈음은 속도가 빨라졌다. 외부의 
변화에 적응하는 이 고무줄같은 탄력성이 수천 년 동안 카스트 제도를 떠받쳐왔
으며 인도의 역사는  융통성을 기반으로 하여 흘러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듯이 
망해서 사라지는 사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부러지면 부러졌지 꺾이지 않는' 쪽에 박수를 친다. 고무줄 같은 사람, 
대쪽 같은 사람, 그대는 어느 쪽인가?

  마음의 댐
  "기쁨과 슬픔을 쉽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때로 산같은 바위도 깨지더라.
  메다 파트카르는  몸무게가 40킬로그램에 불과한 '훅'  불면 멀리 날아갈 듯한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다. 그가 우리나라 한보철강의 총 투자액과 맞먹는, 5조 원
이 넘는 엄청난  공사비가 들어가는 나르마다 강 댐 건설을  중지시켰다. 대법원
이 그의 섬섬옥수를 들어준 것. 외롭고 고단한 긴 투쟁의 결과였다. 이는 어쩌면 
진짜 싸움을 알리는 서곡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건조하고 황량한 서부지방을 가르며 흐르는 나르마다  강 상류. 1978년부터 이
곳에는 대규모 댐을  건설하는 망치와 불도저 소리가 요란했다. 넓고  넓은 건조
지대를 옥토로 바꾸고 인근  지방의 산업체에 부족한 전력을 공급한다는 다양한 
목적을 내걸고 다목적 댐의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좁은 땅에서 땅  한 평을 소
중하게 여기며 살아온 조상을 가진 나도 물이 없어 그냥 나부러져 있는 그 땅이 
몹시 아까웠다.
  '사르다르 사로바르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은 나르마다 강 댐 건설은 세계은
행이 공사비의  일부를 대고 4개 주의  영토가 관련된 매머드  공사이다. 30개의 
대규모 댐, 중간 크기의  댐 135개 그리고 소규모 댐 3천여  개가 건설될 엄청난 
프로젝트의 하나인 이 댐의 건설은  처음엔 별다른 문제 없이 술술 잘 풀려나갔
다. 메다 파트카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1980년대 중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수집차 그  지방을 찾은 
메다 파트카르는 세계은행이 뒤를  받치는 세기적인 공사가 중요한 문제를 빠뜨
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댐이 완공되면 180만 헥타르(약 54억 4천 500만 평 ;  일
산 신시가지 면적은 480여만 평이다)가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이었다.
  장차 수몰될  메마른 땅 그 너른  지역에는 아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니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수많은 부족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거창한 프로젝트는 수몰민들에  대한 대책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무심함인지 
사악함인지, 하늘은  아는지...... 그 순간 메다  파트카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기의 삶에서 이타의 삶으로.
  공부보다 시급한 문제를 깨달은 메다 파트카르는 교통수단이 없는 그 넓은 수
몰 예정지역을 땡볕 아래 맨발로 뛰었다. 발전의  뒤안에 이름 없이 묻힐 주민들
을 깨우치고 설득하여  그 존재의 이유를 알리는  '원맨 프로젝트'였다. 그러면서 
정부와 요로에  댐 건설을 중지하도록  요청했다. 물론 당국은  파도의 애처로운 
몸부림을 우습게  여기는 뭍처럼 메다의 목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도여 
어쩌란 말인가.'
  수몰지구에는 245개 마을, 4만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힘 없고 빽 없고 돈 없
는 20여만 명 주민의 운명이 연약한 그녀의  어깨에 얹혔다. 그러나 마데 파트카
르의 마음은 고래심줄보다 더 질겼다. 파트카르는  너른 수몰지역을 수없이 종종
걸음을 쳤다. '댐'이  뭔지 '인권'이 뭔지 모르는 주민들, 설득과  호소, 설명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그녀가  뿌린 눈물과 땀은 점차 바싹 마른  인간의 대지를 
적셔갔다. 대다수가 문맹인 현대 문명 저편의  부족민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권을 어렴풋이 깨쳤고  메다를 따라 댐 건설 반대운동, 아니  자신들의 생존운동
에 나섰다.
  메다 파트카르가 목숨을  담보로 싸우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소  귀에 경 
읽기를 거듭한 끝에 댐이 건설되는 곳에서 벌인  최후의 수단이 단식. 음식을 거
부한 지 스무 날이 넘고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영양제 주사와 음식물 투입
을 거부하는 메다의 주변에는 원시적인 모습을 한 순진무구한 부족민들이 죽 둘
러서서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눈물 많은 나는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도 울었다. 
삼십대인 그녀의 머리는 이미 백설이 분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자연보호를  내세운 환경론자들과 여러 지지자들
이 점차 합세, 그녀의 운동은 힘이 붙었다. 유명한 사회운동가 바바 암테는 노구
를 이끌고 수몰 예정지로 살림을 옮겼다. 암테는  수몰민의 일원이 되어 댐 반대
운동을 지지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메다  파트카르는 곧 세계적인 유명인사
로 떠올랐다. 도처에서  날아오는 격려의 메시지와 수많은 상이 지친  마데를 북
돋웠다. 1991년에는 노벨 평화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91년, 반대운동의  압력에 굴복한 댐  건설의 물주 세계은행은  마침내 현지 
조사를 실시하여 사르다르 사로바르 프로젝트가 사전조사를 미흡하게 했다는 결
론을 내렸다. 댐의  건설로 수몰될 강 상류지역의 주민 이주와  재활문제를 고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댐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평가도 빠
져 있었다.
  대법원은 수몰민 이주에 대한 방안이 마련될  때까지 공사를 중지하도록 '딱딱
딱' 결정을 내렸고 이후  건설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해가 다른 양측의 법
정투쟁은 계속되었다. 댐의  건설로 가장 이득을 보게 될 구자라트  주정부는 메
다 파트카르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공개적으로 홀대했다.  법정이 뭐라 하든지 공
사를 강행하겠다는 주수상의 강경한 발언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댐의 완공기
일은 덧없이 지나갔다.
  1997년 초, 중앙정부는 이해가 첨예하게 다른  관계 주정부와 메다 파트카르에
게 조정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댐의  높이를 138미터에서 132미터로 낮춘다는 
것이었다. 이는 '애개!'가 아니라  중앙정부가 메다 파트카르에게 주는 적지 않은 
선물이다. 정부는 댐의 높이를 낮추는 문제와  수몰민의 이주대책을 내세워 지난 
10년 동안 외롭고 의로운 싸움을 전개해온 메다 파트카르의 편을 들었다.
  메다 파트카르의 기쁨은  한편으로는 구자라트 주의 슬픔이다.  사르다르 사로
바르댐의 높이가 낮아지면 수몰될 지역과 이주해야  할 인구가 줄어든다. 그러면 
구자라트가 학수고대하는 관개 농지와  수력발전량도 줄어든다. 구자라트 정부는 
볼멘 발언을 하지만 이주민이 많아서 골치를 썩이는 마디야 프라데시 정부는 다
소 안도하는  표정이다. 댐의 높이가  중앙정부가 조정한 대로  낮추어져도 67개 
마을과 1만 1천여 가구가 물  속으로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 운명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일부지역은 이미 물  속에 잠겼다. 1996년 말까지 7천 600  가구가 가구당 450
만 원을 받고 다른 곳으로 살림을 옮겼다.  목축이 생업이던 부족민들은 젖도 꿀
도 없는  새로운 땅에서 약속이 아닌  구속과 만났다. 하루 아침에  집과 정다운 
이웃을 바꾼 그들은  기존 주민과의 마찰 때문에 또다른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그 구속의 땅조차  찾지 못한 일부 주민은 갈 곳을  몰라 방황했다. 그냥 
고지대로 옮긴 채 아슬아슬하게 삶을 잇는 사람들도 생겼다.
  법적인 판결이 남았지만 결론은 멀다. 아무리  좋은 머리로 갑론을박을 벌여도 
이 문제에서 산뜻한 답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댐의 건설 중지 명령이 풀리면 
언제 물귀신이 될 지  알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의  문화도 물속으로 사라
지게 되리라. 또 그 저편에서 물과 전력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농민과 공장
들. 댐의 완공이 지체됨으로써 생기는 손실이 자그마치 하루 1억 원에 달한단다.
  사자와 소가 한 우리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발전이 능사고 만사라고 보
면 인간의  존재가 가벼워진다. 하지만  발전을 무시하면서 배를  주리는 인간의 
존재도 무겁지는 않다. 댐 건설을 반대하면서  충분하게 전력이 공급되기를 기대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전깃불과 농업용수가 없어도 좋으니  부족민을 살려
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대규모 댐이  꼭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소규모 소목적 
댐을 여러 개 건설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문외한인 나는 그저 혼란스럽다.
  발전이란 단어가 마술처럼 여겨지던 시절에 세워진 우리나라의 수많은 다목적
댐을 돌아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지식인들은 판결을 내릴 법관들에게 현지
를 방문하라고 권한다.  산허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는 원주민을  보라는 충고인 
셈이다. 다수의 논리와  국가의 이익에 눌려 자꾸 작아지는 개인의  입지를 생각
하면 작은  체구의 마데 파트카르가  지닌 용기와 행동은  삼손보다 강해보인다. 
편한 길을 버리고  멀고 힘든 길을 돌아가는  그는 꽃이라기보다 꽃을 받쳐주는 
잎사귀 같은 인물이다.
  파트카르 파이팅!

  진드기 제4부
  <악마의 시>를 써서 이슬람 국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샐먼 루시디. 영
국에서 숨어 지내며  작품을 쓰는 루시디는 뭄바이 출신의 인도인이다.  그가 문
명을 떨친 작품은  소설 <한 밤의 아이들>이었다. 이 책의  초판에는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다.
  여신을 꿈꾸는 반백 머리의 마담...... 가르마를 중심으로 한쪽은 백설이 내렸고 
다른 쪽은 검은 색이라서 어느  쪽에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검은 족제비로 보
일 때도 있고 흰 족제비처럼 보일 때도 있다.
  글과는 달리  깔끔하고 세련된 '마담'의 요구로  출판사는 재판부터 위 문장을 
삭제했다. 그러나 세 살  적 버릇은 여든까지는 가는 모양이다. 삐딱한 루시디는 
역시 인도 총리를 역임한  모라지 디사이를 '죽기를 거부하는, 오줌 먹는 노망난 
늙은이'라고 적었는가 하면  최근 작품인 <무어의 마지막  한숨>에서는 무어 가
의 개 이름으로  네루의 이름 자와하르랄을 붙였다. 그래도 인도에서는  그를 죽
이라는 미션을 내리지 않았다.
  인도에 오래 살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뭐니뭐니 해도 자유분방한 언론의 활
동이었다. 당시의  방송은 모두 국영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언론은 주로 
활자매체를 말한다.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나는 '위
로부터의' 가이드라인이  전혀 없는, 신문과 잡지의  끝없는 들추기와 캐기에 두 
손을 번쩍 번쩍 들곤 했다. 이른바  '금기'와 '성역'이란 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
도 없는 풍토였다.
  내가 공부를  할 당시 인도 총리는  '지금은 라지브 시대'의  라지브 간디였다. 
활자매체는 총리인 '라지브 죽이기'에 목숨을 건 듯이 보였는데 그의 일거수일투
족이 비난의 대상이었다. 언론이 가장 잘  씹는 쫄깃쫄깃한 안주거리는 이탈리아
제 아내와 외제로 범벅을 한 생활 방식이었다.  라지브가 집무 후 스포츠카를 타
고 어디를 가서  어떤 걸 먹었는지 눈에 잡히도록 자세하고  생생하게 보도했다. 
총리관저의 식탁도 아내의 쇼핑목록도 비밀은 없었다. '자유를 달라.'고 부를짖어
야 할 쪽은 오히려 간디 일가였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흉내낸  라지브 간디의 휴가여행도 주요한 공격 대상
이었다. 아라비아해의 작은 섬이나 라자스탄의 정글 속에서 가족, 측근들과 숨어
서 지내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마신 콜라와 먹은 닭다리가 얼
마인지 적나라하게 신문에 실렸다. 할아버지 네루와  어머니 인디라 간디에 미치
지 못하는, 따라주지 않는  그의 머리나 업무능력도 수없이 희화되었다. 때로 기
사를 읽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이 인신공격에 가까운 보도를 보고  놀란 건 아니다. 때로 부럽고 
때로 무서웠던 건 무성한 '썰'과 심증뿐인 문제를 물고 늘어져 마침내 물증을 찾
아내는 언론의 진드기  정신이었다. '정부와 밀월관계' 운운?  인도에서는 한마디
로 웃기는 소리다. 언론은 정부나 의회와 완전  남이며 때로 철천지 원수같이 보
인다.
  라지브 간디의 부정부패가 진드기같은  언론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스웨덴 
보포스사의 박격포를 구매하면서  5천만 달러의 리베이트가 간디의 계좌로 흘러
갔다는 소문이 나온 건 1987년이었다. 국방부는  원래 프랑스 제품을 결정했지만 
갑자기 그보다 질이  떨어지는 보포스 제품으로 변경되었다. 몇 신문사는  이 미
스터리의 추적에 사운을  건 듯했다. 정부는 '새벽의  세무조사'라는 칼로 괘씸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
  1988년, 마드라스에서 발간되는 <힌두>는 우여곡절  끝에 보포스 사의 내부문
서를 획득, '나는 몰라요.'를 거듭하던  라지브 간디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밤에 
사무실에 침입하여 보포스 회장의 다이어리를 확보한  것이다. 스위스 은행의 은
행계좌도 드러났다.  제임스 본드의 활약을  무색하게 만든 그  작전의 주인공은 
만삭의 여기자. "이제 편히 아기를 낳고 싶어요." 그녀의 짧은  소감이 가슴을 움
직였다.
  인도 최대의 이  수뢰사건 -- 좀스럽게도 노 대통령의 수뢰금액보다  적다 -- 
은 라지브를 이은 나라시마  라오 정부의 의도적인 감추기와 비협조로 굼벵이처
럼 진행, 1997년에 와서야 그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 라지브 간디와 그의 아내 
소냐가 깊이 연루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국 각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라지브는 1989년 총선에서 패배했고 재집권을 노리다가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청렴성'이란 새 카드를 내세워 라지브 간디를 이기고 총리가 된  V.P. 싱은 보
포스 사건을 비판하며 물러난 라지브 내각의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라지브의 더
러운 손(국민회의 당의  상징은 사람의 오른손이다)을 비난하며 야당  연합의 선
봉에 섰고 그 뒤에는 칼보다 더 센  막강한 '펜'이 자리했다. 그러나 팍팍 밀어주
던 언론은 총리가 된 싱이 실정을 하자 사정없이 팍팍 잡아다녔다. 그 덕분(?)에 
싱의 총리직은 단명으로 끝났다.
  1989년의 총선 당시 정부는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한 V.P. 싱의  아들이 카리브 
해에 있는 성 키츠 아일랜드에  엄청난 액수의 예금을 은닉했다고 목에 힘을 주
며 발표했다. 그러나 델리에서 발행되는 여섯 개의  영자신문 중 그 사건을 보도
한 곳은 오직  한 군데. 그 신문의  주필은 라지브와 친분이 도타운 인물이었다. 
나머지 신문은 그  내용을 말단기사로도 다루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는  것이 이
유였는데 시간이 지난 후  결국 그 사건은 외무부가 주도한 진짜 '조작사건'으로 
밝혀졌다. 언론의 균형감각과 줏대가 놀랍지 않은가.
  얼마 전 물러난 데베 고다 총리도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다. 빌 게이츠
가 사업설명을 하는데 신나게 졸았다는 기사는  가벼운 일침인 편이다. 남부지방
의 농민 출신인  고다는 전세비행기로 외국 출장을  가면서 두 차례나 시골에서 
고생하는 일가친척을 동반하여  여론의 지탄을 벌였다. 언론이  밝힌 여행비용은 
자그마치 1만 달러가 넘는다.  누가 그 경비를 내는가. 총리의 처제와 그 처제의 
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까지 사돈의  팔촌이 총집합한  이탈리아 '단체관광'은 
그 촌스러운(?) 쇼핑 행태까지 세상에 낱낱이 드러났다. 총리 가족은 자비여행이
었다고 해명을 하는 등 시끄러웠지만, 물론 돈이 문제는 아니다.
  표현과 보도의  자유를 외치면서  왜 '윗분'의 눈치를  보는가? 문제가 생기면 
100도 이상으로 팔팔 끓다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언론의 태도는 보통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 입법부와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인도는 제4부 언론도 권
력으로부터 완전 자유를 누린다. 1인당 국민소득도  낮고 서양이 정한 삶의 질도 
바닥권인 인도가 독재를  단기간에 마감한 것은 바로  이 독립성과 무관하지 않
다.
  전직 대통령이나 현직 대통령의 아들과 관련된 사건에 신나게 뒷북을 치는 우
리나라 언론을 보면 쓴  웃음이 나온다.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은 후자와 관련, 
언론계가 방조자임을 인정했다.
  "우리가 권력의 압력이나 대통령의 심기에 구애받지 않고, 또 언론계의 이심전
심적인 분위기에 안주하지  않고...... 심도 있게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그러나 
역사가 말하건대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까?
  북부 인도의 농사꾼 두 명이 태양과 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아무래도 결론이  나지 않자 두 사람은 마을의 원로를 찾아갔다. 
한참 동안 고심을 거듭하던 원로는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캄캄한 밤에 달이 없
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태양은 빛이 필요하지 않는 낮에 나오므로 당연히 
달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언론은, 태양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어리숙한 농민들처럼 국민들이 언
론의 고마움을 알지 못할까봐 사건이 난 뒤에야 비로소 뛰는 것일까? 언론이 달
과 같은 존재여서야 되겠는가?

  진짜 인도, 가짜 인도
  인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어느 날 '짜쨘!'하고 나타나서 키스를  해줄 유럽
의 왕자님을 기다린다?
  이방인이 인도를  보는 태도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다.  한 나라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의  여부를 1인당 국민소득이니 국민  총생산이니 하는 경제의 잣대로 
판단하면서도, '인도인은 경제적으로는 잘 살지  못하지만 마음은 행복한 사람들'
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마음이 온후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또 자기나라를 안내할 때는 최신 반도체공장이나 자동차공장을 보여주면서 인
도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의 어수룩한 모습이나 
춤추는 코브라가 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인도가 더럽고 가난하며 지
저분하다고 오만하게 판단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옛날 그리스인들은 인도의 부에 놀라고 감탄했다.  인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지금도 옛 왕국 터에 가보면 그  화려함이 그대의 
상상력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18세기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인도에서 약탈
해간 공작의자는  수많은 보석이 촘촘히  박힌 25억 원짜리  보물덩이였다. 사연 
많은 다이아몬드 '코이누르'도 원래 인도의 소유물이었다는 걸 아실 것이다.
  근대의 유럽인들은 인도의 정신에  놀라고 감탄했다.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던 
그들은 인도가 옛날 코카서스 지방에서 헤어졌던  형제, 즉 인도유럽어를 사용하
는 한 핏줄로 아리아인의 후에라는 걸 발견하고 감격에 목이 메였다. '오메 반가
운 것!' 형제를 만난 유럽인들은  오늘도 인도의 삶 대신 인도 정신의 보고인 베
다와 우파니샤드를 죽도록  읽고 연구했다. 그들과 인도는  인도의 과거속에서만 
연결되었다.
  옛 영화를 잃은 채 '잠들어 있는 문명'.  이것이 유럽인의 눈에 비친 인도의 모
습이었다. 어느 날 나타난 자신들이 깨워야 할 잠자는 미녀. 그 미녀의 아름다움
은 신화나 전설, 산스크리트 고전문학에 들어 있었다. 현재 살아 있는 인도는 그 
고매한 정신을 상실한 타락한 인도, 가짜 인도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인도학의 대부 독일의 막스 뮐러는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인도 방문까지 가로
막았다. 그는 진짜 인도가 아닌 현재의 인도는 가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헤겔
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의 진짜  역사는 과거와 함께 떠내려 갔다고 믿었다. 남은 
건 그 황금시대의 유물과 유적뿐. 인도에서 그의 변증법은 '고'가 아닌 '스톱'이었
다.
  오늘 우리는 그와  같은 유럽의 편견에 신나게 장단을 맞추는  셈이다. 베다를 
읽고 우파니샤드를 칭송하며 요가와 명상의 나라, 인도를 기린다. 소가 어슬렁거
리고 코브라가 춤추는  발전하지 않은 인도가 진짜 인도라고 생각한다.  높은 빌
딩과 거대한 공장, 영어와 청바지는 사이비 인도의 보증수표인 것 같다.
  남부지방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이 몸에 비싼 금 장신구를 지니고  있다. 가난
한 여인도 금 목걸이 정도는 걸고 있기  마련이다. 서울의 사나운 인심을 염두에 
둔 나는 한 번은 남부지방  출신 교수님에게 누가 금붙이를 채가면 어떻게 하느
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이 맑지 못한 여지 없는 '타락천사'였다.
  "우리 남부지방에는 그런 상스러운 일이 전혀  없어. 오랑캐들이 모여 사는 이 
북부지방에서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수도에서 온갖  편의를 누리며 사는 그 선
생님은 델리에 산 지 올해로 만 27년 째다.
  "여기, 델리는 인도가 아니야. 진짜 인도를 보려거든 시골을 가야지."
  벵골 출신의  또다른 교수님은 늘상  내게 조언과 충고를  거듭하셨다. 인도를 
공부하러 멀리서 온  내가 진짜 인도를 놓칠까봐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아니, 아직 라자스탄에 못 가봤어?  꼭 가봐. 거길 봐야 인도를 보
았다고 할 수 있지."
  많은 인도인들도  진짜 인도는 시골과  과거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제철소가 
들어서고 비료공장이 세워진, 발전하고 변화한 오늘의  인도는 진짜 인도가 아니
라는 것이다. 원색의  옷을 입은 수줍은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유순해보이는 코
끼리가 느릿느릿 걸어가는 곳, 그곳이 진짜 인도라고 여긴다.
  과연 시골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평화스러운 곳'인가? 도시의 온갖  소음과 
냄새, 지저분함이 없는 영원한 고향인가? <인도로 가는 길>을  쓴 E. M. 포스터
가 그렸던 '공장도  철도도 없고...... 어디를 보나 보기 좋게  적당히 부서진 사원
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있는 곳이 진짜 인도인가?
  그러나 인도에 가면 그리고  농촌을 보면 그대의 상상이 와장창하면서 비참하
게 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방인이 쓴, 인도에 대한 대부분의 글과 그림
은 인도의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나온 소설을 보면 
인도가 가부장적 사회로부터 해방된 여인들의 천국쯤으로  그려져 있다. 과연 그
런가?
  석사과정 때 북부지방의 어느 농촌에  갔다가 그 마을이 생긴 이래 내가 그곳
을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놀란 일이 있다. 당연히  온 마을 
사람들이 짧은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이상한 사람'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상상이 가실는지? 아낙들은 손님인 나에게 차를 대접하느라 차잎을 빌리고 설탕
을 모으고 야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차 한 잔도 사치라는 얘기다.
  원래 인도인의 음식은 단순 소박하기로 정평이 있지만 시골 사람들이 먹는 건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 본 빈민층은 반찬이 오직 배고픔과 날고추뿐이었다. 우리
에게는 고추장이 있지만  그들은 고추를 소금에 찍어 먹는다. 그보다  조금 나은 
계층은 오늘도 내일도 감자를 반찬의 주인공으로 모신다.
  인도 최대의 주 우타르 프라데시에는 식수가  없는 마을이 3만여 개가 넘는다. 
우리에겐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여인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새벽부터 먼 길
을 헤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은 그보다 훨씬 많다. 돈이 아까워서 전기
를 설치하지 않고 가로등 아래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가는 가구는 얼마나 많
은지. 농촌에서는 아직도 세숫비누나 치약이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다.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윈스턴 처칠은 '인도는 추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역시  인도를 실재하는 구체적 존재가 아니라 추상으로  여기는 것
은 아닐까? 우리는 더러운 강물과 극심한 빈곤을 보면서도 그 너머 어딘가 무언
가 숭고한 정신이  숨어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인도는 타락한 
물질세계의 영원한 대안이다.
  "아 유 해피?"
  "예스."
  이방인은 인도인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소박하게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모범답안을 적는다.
  영국인은 식민지 인도를 과거에만 묶어놓고 싶었다. 그들이 내민, 과거에 뿌리
를 둔 '정신주의'라는 알약에 취한 인도인은 열심히 서방의 물질세계를 비난하고 
인도의 정신주의를 자랑했다. 그래서 우리도 인도를 '영혼의 땅'이라고 여긴다.
  인도는 발전한 우리들이 가끔씩  돌아가 쉴 수 있는 과거이며 향수여야 한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무시한 이러한 생각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사
람은 누구나 보다 나은 생활을 꿈꾼다.  모두 '기회의 황금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작게는 자전거나  라디오부터 크게는 비행기라도 갖고 싶은 게  사람의 마
음이 아닌가.
  그림같은 인도의 농촌은 '마당에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사는 아름답고 행복
한 땅이 아니라 힘들고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문맹, 유아결혼, 결혼지참금, 노예, 
노동, 남아선호,  비위생적인 생활, 부당한 인간의  이용과 착취 등  인도 사회의 
아픔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거지들도 하나의 풍경처럼 눈에 익숙하다.
  시골에 가면  점쟁이와 떠돌이 승려들이 마을  어귀나 보리수 밑에 '미아리'를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일이나 꽃, 음식을 든 순박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앞
으로 맞닥뜨릴 인생과 운명을 상담한다. 우리나라  무속인이 60만이니 인도의 이 
정도는 조족지혈인가?  횟가루를 뒤집어쓴 힌두사원에도  마음이 시린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처럼 소망은 똑같다.  다만 부자보다 기회가  적거나 없을 
뿐이다. 인도인이 정신주의를 추구하고 종교적인 것은  그만큼 사는 것이 고단하
고 힘들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어떤 이름으로든지 현재의 고통에  대한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이다. 주어진 삶을 체념하거나 달관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마크 트웨인은 '모든 사람이 꼭  한 번 보고 싶어하는 단 하나의 나라는 인도'
라고 말했다. 나는 '인도를 보는 것이 다른  열 개 나라를 보는 것보다 유익하다'
고 주장하곤 한다. 인도를 구경하는 것은 동시에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를 경험
하는 것이다. 왜 인도는 우리를 유혹하는가? 진짜 인도는 어떤 모습인가?
  역사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도의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의 인도만 보는 것이
나 물질주의적 인도를 외면하고  정신주의적 인도만 부르짖는 것은 지극히 단편
적인 발상이다. 낙타의  다리나 코만 만지고 낙타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장님과 다르지 않다.
  인도에는 부와 빈곤, 고층건물과  토담집이 나란히 서 있다. 제철소와 밭을 가
는 가래가 함께 존재하고  컴퓨터를 만지는 공학도와 대장간에서 풀무를 돌리는 
대장장이가 같이 산다. 고상한 철학과 허무맹랑한 미신이, 전통에 물든 보수주의
와 체제변화를 기도하는 급진주의가  그 안에 함께 있다. 네루가 말한 '평화로운 
공존'의 땅이다.
  인도는 키를 기다리는 잠자는 미녀가 아니다. 천의  얼굴을 하고 늘 살아 숨쉬
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고 싶다.

  후기

  '인도 구경, 인도 읽기'를 마치며
  인도는 우리와 많은 관련이 있는 나라이다.  불교도는 물론이거니와 면제품 옷
을 입고 닭다리를 즐겨  뜯는 그대들 모두, 얼마간은 인도에 빚을  지고 있는 셈
이다. 어느 구석에선가 돈다발을 헤아리고 있거나  요가와 명상을 하는 당신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찐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는 보통  사람들이 읽을 만한 마땅한 
인도 소개서가 없다. 지나치게 인도의  '정신'에 경도되어 한쪽만을 부각시키거나 
개인의 감상적인 흐름에  같이 빠져 허우적거리기를 권유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학구적인, 너무나 학구적인 딱딱한 책이거나.
  중세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인도는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순수함
과 욕심이 교차하는 우리  자신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얼굴
의 빛과  그림자, 슬픔과 기쁨, 아름다움과  상처를 쉬운 말로  풀어놓고자 했다. 
인도에 관심을 가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책을 한 권 쓰고 일곱 달을  머문 사람은 글을 
한 편 쓰지만 인도에 7년 동안 거주한 사람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
다. 역설적이지만,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원적인 인도의 특성 때문이
다.
  예전에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인도를 두루 돌아보고 크게 실
망했다. 그는 인도를  가난하고 지저분한, 구제 불가능한 나라라고  쓸 참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전에 다시 돌아본  인도는 전혀 다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마크 트웨인은 그만 붓을 꺾고 말았다.
  인도는 이렇게 이방인을  헷갈리게 만든다. 천의 얼굴  인도는 '이것이다, 저것
이다'라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려 드는 20세기의 합리주의를  향해서 비웃음을 
던진다. 사실 이 세상에  분명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한낱 내  기분도 아침과 저
녁에 다르거늘.
  한 길 사람 속도 알기 어려운데 수천 년의 역사와 10억의 인구가 빚어내는 다
양한 사회의 집합체인 인도를 한  마디로 도단을 내는 건 만용을 넘어 무모함에 
가깝다. 더구나 앞의  기준에 의하면 인도에 칠  년 가까이 산 나는 글  한 줄도 
쓰지 못할,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랴?
  그런 내가 감히 인도에 대한 글을 썼다.  인도에 덧씌워진 편견을 벗기고 오늘 
인도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족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은 인도의 현실에 근접하는 시각과 생각의 산물이다.
  인도에는 우리가 아는 그 카레가 없듯이 이방인이 상상하는 신비한 것들이 존
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은 인도가 지닌 수많은 얼굴의  한 요소일 
뿐이다. 신비롭게 보이는 것일수록  냉철한 시선이 필요한 법, 따라서 글의 중심
은 고상한 소수가 아니라 평범한 인도인의 삶에 두었다.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다수 인도인의 속내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애썼지
만, 객관성과 보편성을 흉내내지만, 결국 이 책은 내 눈을 통한 '인도 구경, 인도 
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같은 주제로 다시 글을 쓴다고 해도 똑같은 이야
기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인도는 일반화가 어려운, 만만치 않은 대상임을 절감한
다.
  어쩐지 아리송하다구? 기존의 인도  이미지에 익숙한 그대가 이 책을 읽고 더 
혼란스럽다면 그건 내 설명이 성공을 거뒀음을 의미한다. 브라보! 더욱이 이어지
는 글들이 다른 사회를 엿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그대를 비추어보는 작은 기회를 
주었으면 내 전략은 효과 100퍼센트!
  여기에는 인도에 비판적인 성향의 글도  섞여 있다. '사랑'과 '비판'은 상대적인 
단어인가? 나는 우직하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 비판자이다'라는 말
을 굳게 믿는다. 비판은 애정의 또다른 표현이 아닌가. 인도를 아끼는 그대도 부
디 그렇게 보아주기를.
  인도인들은 내가  어찌하여 인도를  공부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때마다 
나는 '운명인 모양이지요.'라고 웃으며  대꾸했었다. 나는 윤회를 믿지 않지만 적
어도 인연은 인정한다.  인도의 열기처럼 뜨거운 애정은 아닐지라도 내  안 어딘
가에는 인도에 대한 잔잔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그대와 나의 만남도 작은 인연이 아닐는지. 내 능력 부족으로, 또 다른 이유로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한다.
  스트레스를 받아 불면증에 걸리지 않도록 은근하게 원고를 재촉하고 기다려준 
책세상의 어진 이들에게  감사하며, 좋은 친구들과 눈빛 맑은 학생들  그리고 영
원한 내 편,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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