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그림 찾기(제29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윤기
-직선과 곡선
찾아본 데 있는 것은 어쩌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 뒷짐질할 때마다 마음에 묻어드는 이 섬뜩한 두려움.
권투 선수는 링 위에서 싸우다가, 3분이 흐르면 세컨드가 기다리는 구석 자리의 코너 스
툴로 돌아간다. 그는 거기에서 1분 동안 피도 뱉고 물도 마시고 사타구니에 바람도 넣고 세
컨드의 훈수도 듣고 하다가는 공이 울리면 한결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다시 싸움터로 나선
다. 구석 자리의 코너 스툴이 없으면 권투 선수는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미국 네바다 주의
황량한 열사 지대에는 ‘오아시스’라는 말이 들어간 상호가 유난히 많다.
권투 선수가 아닌 나에게도 구석 자리가 있다. 그래서 나도 그 구석 자리로 돌아가 보고
는 한다. 삶은 싸룸이 아닐 것인데도 어쩐지 자꾸만 싸움 같아 보일 때면, 그 싸움을 싸우다
지쳤다 싶을 때면 돌아가 보고는 한다. 대구 근교의 소도시 경산에 있는 기이한 은자의 과
수원으로 돌아가 보고는 한다.
내가 ‘도회의 은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은사 일모 선생의 과수원을 나는 번잡한 세상
한가운데 자리잡은 고요한 중심, 소용돌이 한 중간의 부동의 중심이라고 부른다. 바퀴로 말
하자면, 바퀴 테에서 가장 멀고, 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굴대도 돌기는 돈다. 하지만
그 회전은 오르내림이 극심한 가장자리의 회전과는 사뭇 다르다.
일모 선생의 과수원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주
변인으로 사는 내 삶의 구석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과수원에는, 내가 안고 가는 많은 문제
의 해법이 있다. 하지만 그의 해법은 빌어도 좋고 안 빌어도 좋다. 거기에만 가 있으면 해법
이 내 안에서 술술 풀려 나올 때가 많아서 그렇다. 그가 본보이는 삶의 태도가 내 몸과 마
음의 항상성을 회복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항상성이다. 일모 선생 과수원에는 과실나
무도 있고 잡목도 있으며 채소도 있고 잡초도 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제자들에게 입버
릇처럼 들려 주는 금언이 있다.
“사람은 무영등 아래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듬살이는 무균실이 아니다.”
일모 선생은 이미 오래 전에 정년 퇴직하고, 나와는 동기 동창인 외아들과 함께 과수원
걸우면서 말년을 보내시는 분이다. 그의 외아들이 나와는 중고등 학교 동기 동창이기는 하
지만 이 동기 동창 만나기가 과수원 방문의 목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이것을 별
로 미안하게 여기지도 않거니와 친구도 이런 태도로 저를 대하는 나를 원망하는 법이 없다.
제자들이 찾아뵙고 절할 거조를 차리면, “절은 무슨 절...야, 등시린 절은 안 받을란다‘,
하면서도 옷매무새와 자세 바로잡는 것은 언제 보아도 똑같다. 등 시린 절 안 받겠다고 하
시는 것은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짖음이다. 그는 부러 이러면서 언제나 그러듯이
떡갈나무 몽둥이 같은 손을 내밀면서 시커멓게 그을린 눈꼬리로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게 웃
고는 한다.
“자네가 오면 이 일모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고 말아.”
“죄송합니다.”
내가 이따금씩 찾아뵙고는 절하고 물러앉으면 그는 웃으면서 이러시고는 한다. 아호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지독한 대머리였던 그는 10여년 전부터 제자들 사이에 ‘일모 선
생’으로 불렸다. 이 애칭은, 대머리의 인기가 바닥을 훑던 8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더없이
따뜻한 울림을 자아내고는 했다.
어느 제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께는 아직도 빠질 머리카락이 많습니다. 마지막 한 올 남을 때까지, 아니올시다,
그 마지막 한 올이 빠진 뒤로도 저희들이 줄기차게 모시겠습니다.”
이 별호는 그러니까, 그 버르장머리 없는 제자의 말에 그가 이렇게 응수한 데서 유래한다.
“선현의 지혜에 견주면 비록 구우일모 아니면 창해일속 이기는 할 것이다만, 나무 없는
이 독산속 광맥에는 자네들에게 나누어 줄 게 꽤 있을 것이다....”
동창생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 일화를 전해 듣고 내가 주동이 되어 만장일치로 정한 선생
의 별호가 바로 ‘일모 선생’이다.
뒤에 이것을 아신 그는 나를 나무랐다.
“자고로 선비 풍신은 자호를 삼갈 줄 아는 법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더니, 네놈들이 버
르장머리 없이 선생에게 호 지어 바치니 이게 망신 아니고 무엇이냐.”
중학교 시절 2년을 내리 우리 반을 담임했던 그는 중학교 시절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친
분이다. 당시 그가 세계사 시간에, “나는 역사 기행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이렇게 가르치지
만 너희들은 장차 가르치지 않더라도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 돼라”고 하던 말씀이
내 기억에 사무치고는 한다. 그는 국사 시간에, “나는 아직 서울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실
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언제부터인지 근 40년 동안 당신이 가르친 제자의 ‘명함을 수집하는 취미’
를 몸에 붙이게 된다. 물론 명함을 수집한다는 그의 말은 글자 그대로 명함을 수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제자들 사는 꼴을 상당히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을 스스로 밝혀
말하기가 뭣하니까 ‘명함을 수집한다’로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세계사에서 국사
로, 국사에서 드디어 개인사로 그 방향을 바꾸었던 것일까?
근 30여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차례씩 찾아뵈면서 그 때마다 확인한 바 있거니와 그에게
는 수백 장에 이르는 명함과, 명함 가진 제자든 명함 가질 처지가 못 되는 제자든 그 신상
을 기록한 여러 권의 노트가 있었다. 무용가가 도약을 통하여 중력의 법칙에 도전하듯이 그
는 깨알 같은 메모를 돋보기로 좇으면서 노년의 건망증에 도전한다고 했다. 바로 이 메모
덕분이겠지만 그는 위세를 부리는 제자들의 형편에도 밝고, 이름 없이, 또는 곤고하게 사는
제자들 형편도 놀라우리 만치 잘 기억한다. 우리는 이따금씩 노인의 이 기이한 재능과 덕목
을 두고, 호기심과 인내와 기억력의 기가 막히는 조화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제자들 읽는 이 일을 그는 ‘늙발에 시작한 사람 공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공부는
뜻이 참 깊어 보였다.
그의 명함철과 제자들 신상을 기록한 노트는, 수백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살아온 자취, 사
는 모습이 가로로 세로로 짜인, 실로 정교하면서도 그 규모가 만만하지 않는 대하 소설의
원광을 방불케 한다. 내가 그를 여기에다 길게 소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과수원에
머물면 삶의 숨은 그림이 얼핏 보이는 듯할 때가 자주 있다. 평생 사람의 역사를 다루어 온
그의 곁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는 숨은 그림 찾기를 배우는 시간이다.
정년 퇴직하기 4,5년 전에, 그러니까 근 20여 년 전에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나는 아직
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잡지사 기자 노릇 하던 나의 명함을 받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는 이랬다.
“내가 명함 수집가라는 걸 어찌 아는가?...그래, 나는 한평생 역사 선생 명색으로 자네들
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사람의 역사를 좀 아는 척해 왔는데, 아니야, 내게는 아는 것이 없
었어... 왼 것은 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목숨 끊어진 편년사 일지언정 피가 통하는 사
람의 역사는 아니었네. 그런데 말일세, 십여 년 전부터 제자들 학교 다닐 때의 모습을 그리
면서 그 사는 모습을 좇기 시작하고부터 참 좋고도 놀라운 것을 발견했네. 사람 한살이의
성패를, 그 사람 죽기 전에 어떻게 평가하겠는가만, 나는 청소년 시절에 드러내는 특정한 제
자의 특정한 기질이 장치 그 사람이 이루게 되는 어떤 성취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
네. 반드시 어린 시절의 기질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네. 이따금씩 내 앞에 나타나 보여 주는
언행을 점선 잇듯이 이어 보면 그것이 곧 그 제자의 얼굴이 되고는 했네. 이러니 제자가 어
찌 제자겠나? 내 스승이지... 따라서 나는 졸업한 제자들의 발자취를 뒤쫓으면서 비로소 사
람의 역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자네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시간
이나 죽이면서 봉급을 타먹은 것에 지나지 못해. 그러니까 뭣인가. 자네들은 헛배웠고 나는
헛가르친 것이지. 하여간에 제자들의 사는 모양 뒤쫓는 놀이를 나는 늙발에 배우게 되었네.
그런 말일세, 내가 저희들 사는 것을 궁금하게 여기니 이번에는 저희들이 찾아서 나에게 근
황을 꼬박꼬박 알려 오는 것이 아니겠나? 바야흐로 내 공부는 이렇게 살아서 꿈틀꿈틀할 모
양이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나는 내 제자들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중앙 정보부가 된 셈이네. 아니까 보이고, 보이니까 더 알게 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무엇이
좀 보이는 것 같아... 이제 제대로 뭘 좀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년 뒤면 학교에서 쫓
겨나니 억울하기 짝이 없네.”
“책으로 써서 남기시지요?”
“써서 남겨 봐야, 내 나이가 되지 않은 교사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할 것이고, 알
아먹을 만한 교사들은 나처럼 학교를 떠난 뒤일 것이니, 이거야말로... 자네, 윤편을 아는
가?”
“몇 회 졸업생인데요?”
“제나라 환공과 같은 시대 사람이면 몇 회 졸업생인가?”
“죄송합니다.”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밀이야.. 윤편의 수레바퀴 굴대 구멍깎기가 아니겠느냐, 이 밀이
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윤편은, 수레바퀴 굴대 구멍을 깎을 줄은 아는데 그걸 가르칠 방도는 모르겠다고 제환
공에게 하소연한 사람이다. 자기 자식에게도 가르칠 수가 없어서 일흔 나이에도 손수 그 짓
을 하고 있다고 한 사람이다. 이것이 그렇다. 아슴아슴 알 것 같기는 한데 가르칠 수는 없다
이 말이라... 하여간에 나는 이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사람의 역사 공부나 좀 할 요량이다.”
이것이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가 가진, 제자들에 대한 정보는 풍부하고도 정확하다.
그를 뵈러 가는 제자들은 예외 없이, 은사가 자기 이름은 물론 그간의 동정도 상당한 수
준까지 ‘귀신같이’ 기억하고 계시는 데 놀라고 만다.
당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상이 잘 안 될 것이다.
고등 학교 졸업한 지 15년, 혹은 20년 만에, 가까운 친구 손에 이끌려 은사를 찾아뵈었는
데, 그 은사로부터, 자네 박아무개 아닌가, 도청 댕긴다며, 이런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을 어떻
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졸업한 지 20년 만에 은사를 처음 찾아뵌 어느 동창생은 나에게,
“선생님께서 내 이름은 물론 내 사는 모양까지 아시는데, 흡사 활자로 인쇄된 내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스무레하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쇄된 자기 이름을 보는 것
은 가슴 두근거리는 노릇이다. 이것이 바로 전화 번호부가 최다 인쇄 부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소이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 어찌 지내시는가, 정치학 교수질 하는 재미는 여전하신가?”
“자네, 올 봄에 뽕밭 뒤집었다며?”
“늙도 젊도 않는 것이 비뇨기과 출입이 왜 그리 잦아?”
그의 이런 물음에는 늘, 스승이 지닌 제자에 대한 정보가 담긴다.
“국회 의원을 좀 해볼까 합니다. 선생님께서 좀 시켜 주십시오.”
그의 앞에서는 새카만 제자들도 곧잘 농지거리를 한다.
“에이, 영농 후계자인 내 아들을 시키지, 국회 의원들과 공이나 치러 다니는 정치학 교수
를 시킬까.”
진반 농반으로 오가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의 영향력이라면 제자 하나 찍어 국회에 보내
는 것도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옛 제자 찾아오면, “그래, 어찌 지내시는가”하고
물어 제자의 근황을 듣는데, 사리에 치우치는 부탁은 반드시 내치고, 이치에 합당한 청탁은
반드시 거두어 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래, 어찌 지내시는
가”, 이 한마디에 적절하게 대답하면 스승의 처방은 곧 활법의 묘수가 되고는 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훈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대책까지 마련
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움직이면 수백명의 제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인다는 소문
이 있을 정도다.
은사의 아들이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살림집 옆에 따로 지어진 별채 사랑방을 가리키면서
한 말에 따르면 그 집에 오는 손님은, 지역의 분위기를 읽으러 오는 정치가, 은행 간부를 소
개받고 싶어하는 중소 기업가, 대학 총장을 소개받으려는 해외 유학파 소장 학자, 아들딸 주
례 부탁하러 오는 늙은 제자, 제 주례 부탁하러 오는 젊은 제자, 맏물 과일을 짊어지고 오는
농부, 냉동 횟김을 들고 오는 외항선원, 졸업 3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단체로 내려오는 모교
방문단을 아우른다.
스승의 아들인 내 친구는, 손님 때문에 추석이 든 양력 9월에는 쌀 세 가마가 모자란다면
서 웃었다. 그분 과수원의 별채 사랑방이 가장 붐빌 때는 명절 뒤끝, 특히 추석 뒤끝이다.
추석 뒤끝에는 서울에서 귀향한 성묘객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우리 동창만 해도 좀 많은가? 하지만 우리 동창의 수는 아버님 제자들의 십분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대구에 내려오면 저희 집 할애비 산소에는 못 올라가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집에서는 묵어 간다. 국회에서 대가리가 터지게 싸우는 여야의 국회 의원, 사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 단체 사무총장과 과학부 장관도 우리 집에서는 못 싸운다. 장차관과 재벌
총수로부터 경산 장거리의 개장수, 동두천 기지촌의 포주까지 공평하게 재우는 방은 세상천
지에 아마 우리 사랑방뿐일 걸세. 목사와 스님이 동숙한 적이 있는 우리 집 사랑방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사람 차별을 않는 객사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자고 가게.”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일모 선생은 은행가와 기업가, 정치가와 사업가, 구직자와 구인자, 모자라는 사람과 남는
사람 사이에 위치한다. 그가 시혜자와 수혜자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장학 기금 ‘운담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단독 집행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외일 경우에는 주
로 중국 삼성에 거주하는 재중 동포, 국내일 경우에는 출신 학교나 출신 지방에 상관없이
극비리에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지원하는 이 프로그램에 관한 한 그는 중앙 정보부장직까지
틀어쥔 철인 독재자이다. 그런데도 그를 험담하는 제자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프
로그램의 집행에 관한 한 그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프로그램의 지원 금액은 인색하기
로 소문나 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운담 프로그램은, 과실을 나누어 곤궁한 사람을 지원하
는 프로그램일지언정 가난뱅이를 부자로 만드는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를 중심 도시로 하는 내 고향 일각에서 그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하게, 혹
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존재다. 40여 년 간 여남은 개 중고등 학교를 옮겨 다니면서 제자를
길러 낸 교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직접 길러 낸 제자는 물론이고 그 제자의 친구까지
도, 심지어는 친구의 친구까지도 뵙는 것을 기쁨으로 자랑으로 혹은 영광으로 아는 분은 아
마 그 분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의 과수원으로는 성공한 제자가 자랑하러 와도 좋고, 실패한 제자가 위로를 구하러 와
도 좋다. 그의 말을 빌면, 봄보리 자라는 듯 하는 놈도 오고, 된서리 까부라진 풋것 같은 놈
도 온다. 부자가 나란히 오는 경우도 있으니 모녀가 나란히 오는 경우가 없을 리 없다. ‘세
계화’라는 것이 되고 부터는 아메리카에서도 오고 유럽에서도 오고 중국에서도 오고 러시
아에서도 온다. 그분은 그것을 “온 세계가 다 온다”고 한다. 유럽 사는 제자로부터, 알프
스 산도 구경하실 겸 한번 다녀가시라는 전화를 받고 그분은 짐짓 이렇게 호통을 친 적도
있다고 한다.
“알프스가 어디 가는 걸 보았느냐?”
내가 타관 사람들에게 그분 얘기를 하면 공자님 같은 도덕 군자를 더러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그는 공자님처럼 완벽한, 혹은 완벽에 가까운 분이 아니다.
그분 과수원에는 금기가 몇 가지 있다. 마시고 취하되 미취해야지 만취해서는 안 되는 것
도 그 중의 하나다. 과수원은 혼자서 만취하도록 마시는 데가 아니라 여럿이서 미취하는 데
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만취한 꼴을 보이고도 꾸중받이를 면한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만취한 채 아름드리 감나무 밑으로 숨어들어 감나무 껴안고 소피 보다가, 그
감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오줌 방울이 그분 옷에 튀
었을 텐데도 나는 꾸중을 듣지 않았다. 그가 마침 감나무를 등지고 우리 몰래 담배를 한 대
피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이런 종류의
비밀이 꽤 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창과도 이 비슷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
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추하지 않다. 그 모순에서 내가 일모 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는 도둑 담배를 피운 것이니, 담배에 관한 한, 사제간의 처하는 입장이 그렇게 공교롭게
뒤바뀌기도 참 어려울 게다. 그는 반세기 동안이나 피던 담배를 하루 아침에 끊은 것으로
유명한 분, 끊었다가는 다시 피우고 버릇 될 만하면 다시 끊어 버리기로 유명한 분이다. 끊
을 때는 끊는 이유가 있다.
“애연 없는 데 금연 없고 집착 없는 데 해탈 없다.”
다시 피울 때는 다시 피우는 이유가 있다.
“사나이에게는, 담배라도 피우고 있지 않으면 안 딜 때도 있는 법이다. 내 말이 아니다.
한 왜인의 말인데, 쓸 만하지 않은가.”
그분을 두고 말로써 장난을 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면 그분은 이렇게 응수
하실 것 같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어. 뜨거운 국 마실 때도 후후 불고, 시려서 손 곱
을 때도 호호 불고 하잖는가?”
경산 다녀온 것은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 없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나의 경산 방문은 내
일생일대의 사건에 속한다.
나는 지금 그 일을 얘기하고자 한다.
일모 선생은 과수원 일을 하다가, 빤질빤질한 정수리에 물 묻은 사과나무 잎 한 장을 붙
인 채로 나를 맞아 주었다. ‘빤질빤질한 정수리’라고 썼는데, 스승을 묘사하는 말로는 부
적절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정수리는 빤질빤질 했다. 내 손으로 정수리의 사과나무 잎을
떼고 그를 모셔들인 객사 사랑방은, 초록 일색인 화창한 과수원 풍경에 견주어져서 그럴 테
지만 내게는 유난히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절해서 뵙고 물러앉으니, 편히 앉으라는 말도 없이 불쑥 이랬다.
“그래, 이 복중에 미국에서 날아들어와 똥서방을 차렸다며?”
“......”
“나의 불찰이다. 내가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 것인데...”
“걱정 끼쳐드리게 되어서 여러 가지로 송구스럽습니다.”
나는 얼굴에 표정으로 떠올랐을 터인, 내가 받은 상처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다. 성인 군자
흉내를 내기에 내 상처는 너무 깊었다. 내 안에서 가시 돋친 무수한 말들이 벌떼처럼 붕붕
거리며 이따금씩 내 가슴 안쪽을 쏘아 대면서 토해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
나 나는 그 흉칙한 말들을 생짜로 쏟아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술이 필요한가?”
“선생님 일하시는데...”
“큰 공부가 되었을 것이다. 어디 조금만 들어 보자, 사연을 들어 보면 내게도 좋은 공부
가 될 테지.”
“아직도 방 안에서 구린내가 등천을 합니다.”
“우상화해서도 안 되지만 똥뒷간에다 처박아 둘 물건도 아닌 것이 책이기는 하다. 이 시
대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아서 나도 가슴이 아프다만 사람이 어찌 다 같을 수 있을까. 세상
에는 그런 사람도 사는 것이거니, 여겨라. 내가 바란다.”
“선생님. 저도 선비 축에 들겠습니까?”
“‘찡’이 없어서 크게 쓰이지 못하나 선비 자격은 고루 갖추었다고 봐야지.”
“그렇다면 선비가 많이 다쳤습니다.”
“그것은 자네의 이기심 때문이기가 쉽다. 미투리 방망이 그 사람에게 책은 그냥 물건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책을 우상화하는 버릇이 있고...”
일모 선생은 당신의 애제자인 하 사장을 미투리 방망이라고 부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투리는 삼 껍질을 꼬아 짚신처럼 삼은 마혜, 또는 승혜이고, 미투리 방망이는 여섯개의 날
에다 삼실을 걸어 육날 미투리를 삼을 때 결이 조곤조곤하도록 두드리는 데 쓰이는 조그만
대추나무 방망이다. 그가 애제자 하 사장을 빤질빤질하게 닳은 단단한, 미투리 방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 사장이 경제에 관한 한 사람이 더없이 야물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 사장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미투리 방망이였다. 그 말 처음 듣는
날 나는, 미투리 방망이가 제아무리 단단한들 기껏해야 짚신밖에 더 만듭니까, 하고 대들었
던 적이 있다.
“그러면 그 양반에게 무엇이 여느 물건 아닙니까?”
“돈일 테지. 섭섭한 심정, 나도 알기는 하겠다만 자네 섭섭한 심정의 토로가 그 사람에게
또한 상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살자.”
“......”
내가 일모 선생으로부터 하 사장을 소개받은 것은 일 년 전, 미국에서 일시 귀국해서 두
달 계획으로 서울에서 머물면서 책을 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서울로 돌아와 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책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가 서울의 내 서고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5년간 머물 계획을 세우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전세금을 받고 내가 살던 아파트를 남에게
빌려 준 것은 그로부터 3년 전의 일이다. 아파트 전부를 빌려 줄수는 없었다. 요긴하지 않은
살림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근 30년 동안 모아 들인 책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세금을 받고 빌려 주되, 방 한 칸은 서고로 쓴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라서 서재로는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책을 좋아하는 입
주자가 있었다. 입주자는 세 칸의 방 중에서 방 하나를 서고로 쓴다는 것을 양해했고 나는
내 책에 대한 그들의 무제한적 접근을 양해했다. 나는 나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고 내
집을 빌린 사람은 졸지에 5천여권에 이르는 장서를 확보했으니 자기야말로 행운아라고 했
다.
서울에 들어와 있을 당시, 당연한 일이지만 서울에는 내가 머물데가 없었다. 출간 일자에
쫓기고 있던 나는 내 서고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다 서울 변두리의, 숙박비가 싼 호텔에
머물면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영 성묘와 과수원 방문은 나의 귀국 스케줄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그 해에도 잠깐 뵈
러 내려간 나에게 일모 선생은 호텔 생활이 불편하지 않느냐면서 마을을 써주시었다. 그 때
나는 호텔 생활의 어려움을 버르장머리 없이 약간 과장해서 털어놓았던 것 같다.
“마구니 사이에서 뭘 쓴다고 밤을 밝히고 있자니, 이런 공부가 다시 없습니다. 어떻게 만
들어진 호텔인지 세상에, 옆방의 샤워 물소리, 좌변기 물 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은 물
론, 새벽녘이 되면 심지어 성냥 긋는 소리까지도 들립니다.”
“자네가 말을 많이 참네 그려.”
“네...”
“자네가 늙도 젊도 않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거 참 많이 민망하고 고단하겠구나. 글 쓰는
시간대를 바꾸어 보지 않고?”
“저에게는, 낮에는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음악가들은 듣기 싫은 소리 안 듣고 싶으면 소련제 귀마개를 쓴다더라만...”
“한번 견뎌 볼 작정을 했습니다만, 하루는 프런트에 내려가 옆방의 교성 안 들리는 방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벨보이라는 녀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잘되지 않았나? 그러면 방을 옮기지 않고?”
“방이 아니고요 여자가 필요하면 말을 하라는 것이지요. 가까이 있는 음식점 주인 말에
따르면, 유녀가 상주하지 않는다 뿐이지, 유곽이나 다른 바가 없는 호텔이라는 것입니다. 더
욱 놀라운 것은, 저 같은 뜨내기가 들면 비어 있는 옆방에서 녹음기를 틀어 뜨내기 귀에 교
성이 들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해괴하네.”
“그러니까 부러 옆방까지 그 소리가 들리게 함으로써 나그네 심사를 뒤틀고 이로써 유녀
를 판촉한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공부 단단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도화원에서 책 한 권
써내는 데 성공하면, 선생님, 칭찬 좀 해주시겠지요.”
“자네가 한창 나이는 아니지만 장히 걱정스럽네.”
“‘보왕삼매론’은 공부하는 데 장애물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참 힘이 많이
듭니다.”
점심을 그 댁에서 먹었는데 일모 선생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작별
인사를 드릴 때가 되자 불쑥 이런 말씀을 내어놓으셨다.
“자네가 시방 하고 있는 일, 경주에서도 할 수 있는가?”
“자료 준비가 끝난 만큼 국내라면 어디든 괜찮습니다만...”
“공부하는 김에 공부 같은 공부 한번 해보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경주에 말일세, 조그만 호텔 하는 내 제자가 있네. 내 제자라고는 하나 젊은 시절의 제
자라서 사실은 환갑을 지낸 중늙은이이기는 하지만... 하 사장이라고... 내가 조금 전에 전화
를 걸어서 의향을 물어 보았더니 방을 하나 내어 주겠다고 하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그냥은 싫습니다.”
“하 사장, 이자의 별명이 무엇인고 하면 미투리 방망이야. 대추나무 방망이 같은 친구인
데... 좋게 말하면 야문 사람이고 아주 싸가지 없게 말하면 수전노라고 해도 안 미안해. 그러
니 그냥은 안 빌려 줄 터... 그러니까 이렇게 하세. 내가 말했으니 싼값에 빌려 주기는 할 거
라. 우리 운담 프로그램이 자네의 숙박비를 지원하기로 하지. 자네는 재외 학자의 속하는만
큼 자격은 충분하네. 그대신, 자네가 나에게 지원 액수를 물어 보아서는 안 되네. 이 일은
자네와 나 사이의 비밀로 해야 하고...”
망설여지기는 했다. 하지만 장학금이라고 하는 것은 제 손으로 신청해서 타내기도 하는
물건 아니던가? 형편이 많이 구차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의 호텔 장기 투숙과
매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실로 만만하지 않았다.
“공부 같은 공부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아, 그거? 이런 말, 내가 미리 해서 어떨는지 모르지만 하 사장이라는 친구, 위인이 야
문데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외눈박이라...”
“외눈박이라면요? 물리적인 외눈박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고요? 외통배기라는 말
씀은 아니시지요?”
“무엇에 외눈박이인지 자네가 어디 한번 가서 확인해 보게만 내가 한마디만 귀띔해 주
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병든 아버지 약 지으러 약방에 들어갔다가는 빈손으로 그냥 왔더라
네. 그 아내가 어찌 그냥 왔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의원이라는 자가 상복을 입고 있더
라. 필시 어미 아니면 아비가 세상을 떠나 모양인데, 그 자가 용한 의원이라면 어찌 제 부모
를 잃고 상복을 입고 있을 것인가’ 하더라네. 마침내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번에
는 묏자리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이번에는 지관을 찾아갔는데, 물어보지도 않
고 또 빈손으로 나왔더라네. 그 아내가 어찌 그냥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 ‘지관이
라는 자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사는데 끼니도 제대로 챙기는것 같지 않더라. 제놈이
제대로 된 지관이 못 되니까 제 조상 무덤 자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당대
발복의 은덕을 입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왔다’ 하더라네. 어찌 보면 하 사장
이라는 위인, 이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지. 그래서 내가 외눈박이라고 한 걸세.”
“정보를 외통으로만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신지요?”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네만....”
“프로그램의 지원금은 귀국한 뒤에 특별 출연으로 변제하겠습니다.”
“더욱 좋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경주의 호텔로 당장 필요한 책 백여 권만 책짐
을 꾸려 보냈다.
하 사장의 호텔 ‘에스페랑스’는 경주의 많은 공공 건물과 비슷한, 기와를 얹은 순 한식
2층 건물이다. 투숙객의 대부분은 , 김포로 들어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서양의 배낭 여행자,
페리 호에서 상륙해서 부산에서 올라오는 일본의 배낭 여행자들이다. 따라서 숙박비는 서울
의 쓸 만한 여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을 자주 대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내국인에 대한 하 사장의 평가는 절
망적이었다. 하 사장은 프런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을 내게 배정해 주었다. 앞을
지나다니는 손님들의 발자국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방이었다. 나는 운담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지원하느냐고 물었지만 하 사장은 빙그레 웃을 뿐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출입구에 매달려 있는, ‘시간 손님 사절’이라는 퍽 도덕적인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꽤 많은 종류의 위인전을 읽은 보람으로 이 세상에는 조은 의미에서의 기인편객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재가 알고 있는 무수한 기인편객들은 글을 통해서 읽어
서 알게 된 사람들이지 내가 직접 접해 본 사람들은 아니다. 재가 접해 본 이들 중에서 그
품성이 가장 기이했던 두 분을 꼽는다면 일모 선생과 에스페랑스의 하 사장이 아닐까 싶다.
전자는 전폭적으로 긍정하는 의미에서 후자는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 사장이 20년째 경영하고 있다는 호텔 에스페랑스에서의 생활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
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하 사장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었다.
해방되던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다니까 일제 시대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는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 사장의 일본말은, 일본말에 능하지 못한 내 귀에는 거의 일
본인이 하는 일본말로 들렸다. 하짐나 소학교 2학년까지 일본어가 상용 언어였다는 것을 감
안하면 일본어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의 영어 구
사 능력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은 커녕, 고등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이나 미국과 관련
이 있는 업종에 종사한 경험이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영어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
었다.
그는 20년 전 부산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경주에 있는 ‘희망 여간’을 인수, 이것을 일
류 호텔스럽게 ‘호텔 에스프랑스’로 신장개업한 뒤부터는 영어 회화 테이프가 든 녹음
기의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로 산다고 설명하기는 해다.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정확한 발음
과 풍부한 어휘는 마흔 살이 넘어서 시작한 영어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간단한 일
상 회화나 수사일 경우, 불어,독어, 이태리어까지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문법이 다소 수상스
러워 보이기는 해도 그의 실력은 독일어로, 호텔에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터미널까지 갈 수
있는지, 몇 번 창구 앞에 서야 대구행 차표를 끊을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
국에서 오는 중국인 여행자는 거의 없지만 본격적으로 오게 되는 날에는 중국어 회화도 시
작하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주의 기차역에서 내려 호텔 에스페랑스를 찾아 들어가던 날 나는 빈손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정육점에 들러 고기나 몇 근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정육점‘은 없고 '식육점’
만 있었다. 경주에서는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나는 '식육점‘ 간판이 걸린 고깃간으로 들어가 가장 부드러운 고기를 주문했다. 내가
찾아들어간 식육점 안주인은, 시골 사람들이 이 경우 거의 그렇듯이, 어느 집 찾아가는 손님
이냐고 물었다.
내가 에스페랑스 호텔의 하 사장을 찾아간다고 대답하자 안주인이 칼질하면서 중얼거렸
다.
“자린곱쟁이 하 영감, 오늘 고기 먹겠네.”
내가, 하 사장이 구두쇠냐고 묻자 안주인은 하 사장과는 어떻게 되느냐고 되물었다. 친척
은 아니고, 소개받고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안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
런 말을 해다.
“말도 마시이소. 지난 20년 세월을, 손님들이 버리고 간 운동화만 빨아 신고 살았다 카디
더. 외국 손님들이 놓고 간 우산을 모아 두었다가 정기적으로 팔아서 정기 적금 들는 사람
이라 카디더. 고기 사먹을 돈이 아까우니까, 소 돼지 같은 짐승이 죽으면서 독을 얼마나 품
고 죽는데 그 독이 배어 있는 고기를 먹느냐고 떠들어 댄다 카디더. 20년 동안 우리 식육점
에 두 번 왔니더.”
“다른 단골이 있는 게지요?”
“지난 20년 동안 그 집에서 일한 여자가 내 재종 동생일시더.”
나는 호텔 뒤에 있는 살림채에서 하 사장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서울에서부터 미리
준비해 간 고급 위스키 한 병과 식육점에서 산 쇠고기를 내어놓았다. 나는 물론 쇠고기 굽
고 위스키 곁들이는 훌륭한 저녁 식사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
는가를 확인하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사장은 캐비닛을 열고 내가 선사한 위스키를 그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캐비닛 안
에는 고급 술이 박스째로 여러 병 들어 있었다.
“나는 십만 원짜리로 백만 원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오. 이 촌동네에서 고급 위
스키만한 특효약은 없지요. 나는 고급 술한 병을 제대로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랍
니다.”
하 사장의 이 한마디부터가 내 귀에 고깝게 들렸다. 고급 술 한 명을 제대로 이용하는 법
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지어 내면서 그것을
함께 마시는 것, 이것이 고급 술 한 병을 제대로 이용하는 법이었다.
“술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환영하는 의미에서 내 술을 한 잔 드리지요. 나는 손님과 술을 나누되 딱 한 잔 이상은
나누지 않는 주의랍니다.”
일모 선생 덕분에 융숭한 대접이라도 받을 줄 알고 있던 나에게 ‘손임’이라는 말이 다
소 괴에 설게 들리기는 했다. 그는 캐비닛을 열고는 생체 표본 저장하는 데 쓰일 법한 커다
란 유리병을 들어내었다. 유리병 속에는 식물의 허연 뿌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 사장이
그 유리병 뚜껑을 열자 인삼주 냄새가 났다. 그는 작은 유리잔을 집어넣어 딱 두 잔을 따라
내면서 설명했다.
“미삼이오. 인삼 드링크 만드는 공장 사람으로부터 공짜로 얻어 오다시피 한 물건이에요.
공장에서는 한 번 우려 낸 것이라고 버리다시피 하는 물건이고.. 소주를 부어 한 5년 우려
낸 것인데, 외국인들은 동양의 신비 어쩌고 하면서 감질들을 내지요.”
나는 눈알만한 잔으로 그 가짜 인삼주 한 잔을 얻어먹고는 살림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
다. 그 날 밤에 나는 국산 위스키 한 병 사들고 들어와 혼자서 조촐한 입주 기념식을 했다.
내가 이세상에 아직도 15촉짜리 전구가 있다는 것을 안 것도 호텔 에스페량스에서다. 방
에 따려 있는 화장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변기에 앉은 채로 책 읽는 것은 어감생심이고 면
도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전구를 뽑아 보니 15와트짜리였다. 나는 당
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상점에서 100와트짜리를 사다 갈아끼웠다. 하지만 첨소부가 보고
했던 모양인지, 하 사장은 특별히 봐준다면서 손수 30와트를 가져다 끼워 주었다. 60와트로
절충을 시도하자 하 사장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것은 왜요, 하고 내가 물었
다. 그는, 호롱불 켜놓고 살던 시절을 생각하자고 했다.
외국인 전용이다시피 한 객실 20개짜리 호텔의 상근 직원이 하 사장 자신과 청소부 한 사
람뿐이라는 것도 내게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뿐이었던 것은 아니
다. 호텔에는 자원 봉사자들이면서도 제복 차림으로 일을 거드는 대학생 둘이 더 있었다. 하
사장은, 외국인 투숙객의 심부름도 하고 가이드도 하면서 외국어 익히는 재미로 호텔에서
무료 봉사하는 두 대학생을 하인처럼 부려먹으면서도, 다음부터는 영어 회화 연습료로 한
달에 30만원씩 낼 수 있는 대학생만 자원 봉사자로 뽑겠다고 생색을 냄으로써 무료 봉사하
는 대학생들을 매우 초조하게 만들고는 했다. 하 사장은 무료 봉사하는 대학생들에게, 일본
어과 학생 하나가 일본에서 온 여대생의 경주 관광 가이드를 하다가 정이 들어 결혼에 성공
함으로써 효고켄 지주의 사위가 된 사건을 간간이 들려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 사
장이 나를 뭐라고 소개했는지 밤이면 외국인 손님들이 맥주를 사들고 내 방을 기웃거리고는
했다. 내 방은 오래지 않아 호텔 에스페랑스의 홍보실이 되었다. 외국인 전용 호텔을 기웃거
리는 외사계 형사들은 내가 산 맥주를 마시면서도 나에 대한 직업적인 호기심은 굳이 숨기
려 하지 않았다.
하 사장은 무서운 환경 보호주의자, 철저한 재활용주의자였다. 식육점 안주인의 말 그대로
였다. 호텔의 창고에는 외국 손님들이 유기했거나 잊어버리고 간 무수한 우산, 운동화,슬리
퍼,옷가지,모자 등속이 연도별로, 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2년간 보관했다가 주인이 나
타나지 않으면 깨끗이 손질해서 팔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준다고 했다.
안채 살림집에 사는 그의 아내는 남편의 엄명에 따라 냅킨, 키친타월 같은 일회용품은 쓸
수 없었다. 반드시 젖은 행주나 마른 행주만 써야 했다. 손님들이 버리고 간 종이 잔이나 종
이 접시는 몇 번이 되었든, 부서질 때까지 씻어서 쓰기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객실의 침대보를 걷어 와 세탁기에다 넣고 돌리는 사람은 그의 아내나 청소부지만, 세탁
기 옆에 있는 상자의 자물쇠를 따고 세제를 정확하게 계량해서 퍼내어 주는 사람은 하 사장
이었다. 과연 그는 미투리 방망이였다. 부엌 세게도 호용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밀
가루를 풀었는지 석회를 풀었는지 희뿌연 자가 제조 세제로 그릇을 닦으면서 나에게, 강물
은 맑아질지 몰라도 마누라는 죽어난다고 푸념하고는 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 하나는 하 사장을 좋게 말하지 않았다. 한 일주일 가량 낯을 익히게
되었을 때 그 대학생은 나에게 이런 애기를 들려 주었다.
“우리 하 사장님과 함께 일본인 관광객 둘 데리고 안압지에 놀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왜 따라갔느냐고요? 짐이 무거웠거든요. 하 사장님은 절대로 매식 안 해요. 그런데 그
날은 어쩐 일인지 안압지에 있는 매점 앞으로 가더라고요. 하 사장은 매점 앞 의자에다 우
리를 앉혀 두고는 매점 안으로 들어가십디다. 제가 속으로, 저 어른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어
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하 사장님이 매점에서 빈손으로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점원이 매
점 안에 없었던 모양이에요. 하 사장이 손짓하는 쪽을 보니까 점원이 매점에서 한 3백 미터
있는 곳에서 자전거를 손보고 있다가 매점 쪽으로 막 뛰어오는 겁니다. 점원이 숨을 고르면
서 하 사장님께, 뭘 드릴까요. 하더군요. 하 사장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야야, 병따개 좀 빌려도고. 콜라는 가지고 왔는데 병따개 가져오는 걸 잊었구나.”
하 사장의 하루 일과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정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각은, 환갑 노인으로는 조금 늦은 아침 7시다. 밤늦게까지 자
기 호텔을 찾아 들어오는 외국인 손님들을 받고, 새벽 1시에 아크릴 간판의 불을 끈 뒤에야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네 가지 운동을 한다.
맨 먼저 하는 죽도 휘두르기는 혹 호텔에 침입할지도 모르는 강도의 머리를 항상 그의 곁
에 있는 40센티 길이의 미국제 맥클라이트 손전등으로 정확하게 가격하기 위한 운동이다.
노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샌드백치기는 그접 거리에서 맞닥뜨린 강도를, 라이트 잽과
레프트 잽에 어 라이트 훅으로 때려눕히기 위한 운동이다. 또 하나 그가 자주 하는 운동은
이른바 맥 짚기다. 호텔 뒤뜰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둥치에는 50여 개의 흰점이 찍혀 있
다. 그는 이 은행나무를 등지고 서서 한동안 숨을 고르고 기를 모은다. 그러다가 휙 돌아서
면서 손가락 끝으로 서너 개의 흰 페인트 자국을 팍팍팍 차례로 찍는데 그 세기와 정확도가
상당해 보였다. 나는 한동안 설명을 듣고서야 그가 말하는 맥 짚기가 급소 누리기라는 것을
알았다. 손전등도 가까이 없고, 라이트 훅으로도 제압이 안 되는 적은 바로 이 맥 짚기로 무
력화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엎드려 팔굽혀펴기는 자그마치 60회나 할 수 있었다. 그냥 굽히고 펴기가 심심했던
지, 이따금씩은 팔을 폈다가 다시 굽히기 전에 손뼉을 한 차례씩 치는 묘기도 보여 주고는
했다. 하 사장의 체력이나 그 체력을 단련하는 끈기가 부럽기는 했지만, 주위 사람들을 모두
도둑이나 강도로 일단 간주하고 보는 태도는 조금 언짢았다. 운동이 끈나면 20년 동안 한
번도 걸러 본적이 없다는 냉수욕을 하고 조반을 드는데, 조반은 늘 두 쪽의 떡과 한 접시의
과일이다. 그는,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위장을 혹사한 사람만이 아침에 시원한 국을 찾는다
고 했다. 그는 이렇게 간단한 조반을 들고 나서는 청소부와 함께 객실 청소를 시작하는데,
객실이 비는 순서대로 청소를 아치면 정오가 된다. 진공 청소기 같은 것을 없다. 청소부는
이 점이 불편해서 몇 년 동안이나 청소기를 요구하지만 하 사장은 꿈쩍도 않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와 먼지털이...2천원이면 뒤집어쓴다는 이유에서다.
점심상에 오르는 것은 이른바 정규 식단과 건강식이다. 이 건강식은 유행에 지극히 민감
하다. 매스컴이, 콩이 좋다고 할 때는 콩, 케일이 좋다고 할 때는 케일이 오른다. 알로에가
좋다고 할 때는 알로에가 오르고 북어가 공해에 대한 면역성을 강화한다면 할 때는 황태국
이 오른다.
프런트 바로 뒤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그만을 위한 소형 냉장고가 따로 있다. 냉장고
안에는 생콩가루, 송홧가루, 들깨가루 등속의 건강식이 든 병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신
문과 방송이 적포도주가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보도한 뒤부터는 술을 멀리하던 그도
포도주를 반주로 한 잔씩 들고는 한다.
그는 공해 식품을 생산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농부들을 증오한다. 그는 공해 식품을
판매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시장의 장사치들을 증오한다. 그가 아는 한, 그의 채마밭에
서 생산되지 않은 모든 식품 그의 소형 냉장고 밖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식품은 공해 식품
이다. 이것이 그가 절대로 외식을 하지 않는 소이연이다. 나는 딱 두 번 그를 데리고 나가
정말 공해 식품은 입에 대지 않는지 시험해 보았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그러게는 공해 식
품이라도 값을 자기 주머니에서 치르지 않으면 좋은 공해 식품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 3시가 되면 뜀박질에 나선다. 1분의 오차도 없다. 미리 준비하고 시계를 보고 있다가
시침과 분침이 직각이 되면 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뜀박질에 나설 때마다 그는 목걸이를 하나 찬다. 목걸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
다.
‘이 사람이 교통 사고를 당하면 다음 순서되로 열락을 취해 주시압. 첫째, 호텔 에스페랑
스,전화 경주 72-34xx, 이 번호에 사람이 업슬 시에는 내 아우 하순호, 경주 72-56xx, 그래
도 통화가 안될 시에는 내 아들 하정접, 대구, 지역 번호(053)734-45xx. 그러면 후사하겠습
니다.’
그에게 호텔 바깥은, 뺑소니 운전자가 난무하는 지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뜀박질
에 나설때마다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 뛴다. 말하자면 뛰면서도 외국어 듣기 연습을 하는 것
이다. 나는 몇 번이고 이어폰 귀에다 꽂고 뛰지 않도록 만류했지만 그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듣지 않았다. 시간과 돈의 절약에 대한 그의 병적인 집착은 종종 나를 안타깝게 만들고는
했다.
그가 삶을 참 어렵게 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뜀박질, 외국어 듣기 연습, 교통 지옥 헤쳐가기는 상호 모순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교
통 사고의 위험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은 비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상호 모순되
어 보였다. 그는 연세가 많은데다가 섭취하는 동물성 단백질이 거의 없어서 비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목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목걸이를
걸고 차돌로 나섰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언젠가 그 전투적인 6킬로미터 뜀박질을 그만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체중과, 뛸
때의 일시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60년 동안이나 써온 그의 다리의 정강이가 바깥쪽으로
심하게 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 시계를 본다. 그가 정확하게 3시에 호텔을
떠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였다. 뜀박질에서 돌아오는
시각은 정확하게 4시 30분. 다시 한 번 냉수욕을 한다. 그가 심한 건성 습진에 시달리는 것
은 지나치게 잦은 목욕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5시에는 집 안에서 하는 외국어 공부가 시작된다. 병적인 절약가인 그도 외국어 공부에는
꽤 많은 돈을 쓰는 것 같다. 그에게는 외국어 공부에 전용되는 VCR과 모니터, 녹음기, CD
플레이어 등속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아내가 녹화해 둔 교육 방송의 외국어 프로그램을 시
청하는 것도 이 때다. 그의 집무실에는 영어,불어,독어 테이프가 서가 하나를 채우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중국어 테이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하고 온몸으로 자원 봉사하는 대학생
은 말했다.
7시40분에는 소형 야마하 전자 오르간 연주를 시작한다. 왼손을 쓸 줄을 몰라서 오른쪽
손으로만 연주한다. 그의 연주 곡목에는 흘러간 옛 노래와 일본의 유행가가 포함되어 있다.
박자 같은 것은 쥐뿔이다. 쉼표 들어가 있는 부분에서는 같은 키를 4분의 1박자 속도로 연
속으로 누른다.
8시가 가까워지면 그의 아내가 저녁상을 집무실로 들고 들어간다. 그의 아내는 시간 요량
을 잘하지 못해7시 50분에 저녁상을 들고 들어갈 경우에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정
확하게 10분을 기다려야 한다. 8시 정각이 되기 전에 그가 오르간 연습을 마치는 법은 절대
로 없다. 그는,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아내를 위해 하 1분쯤 당겨서 연습을 끝내어 주는 인
심 같은 것은 절대로 베풀어 주지 않는다. 환갑이 다 된 그의 아내는 아미를 나직이 한 채
밥상 앞에 앉아 기다리면서 눈물을 보일 때도 있다.
식사 후에는 본격적인 손님 받기가 시작된다. 헛짓하러 들어오는 시간 손님이 싸개를 맞
거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스무 개의 객실은 외국인에게 우선 배정된다. 대개
의 경우 내국인 손님들은 퇴짜를 맞는다. 내국인들은 방을 지저분하게 쓰고,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굴고, 이것저것 심부름이나 시키려 들고 물과 전기를 아낄 줄 모르기 때문
이다. 하지만 외국인 손님이 뜸할 경우 방을 비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9시부터 하 사장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되도록이면 많은 외국인으로 채우되, 빈 방이 생길경우에는 10시부터
내국인도 슬슬 받기 시작하는 말하자면 내국인으로 빈방을 채우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잡아
야 하기 때문이다. 그 타이밍을 잡는 노하우는 하 사장의 경영 비법이다. 하지만 이 경영 비
법은 새벽 1시까지만 유효하다. 새벽 1시가 되면 하 사장은 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든다. 이
시각이 지나면 경주 시장이 와도 텍도 없다.
하루는 국문과 교수인 내 치구 하나가 경주에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나에게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 친구는 나와 밖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는 혼자 밤차로 상경했다.
친구와 함께 술 한잔 마시고 들어온 나에게 하 사장이 물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만 보고는 나에게 예대하다가 내나이를 알고부터는 칼로
자르듯이 이 서방, 이서방 해가면서 하게를 했다. 이 서방이라는 말이 비칭에 가깝기는 하지
만 경상도에서는 이물 없는 호칭으로 자주 쓰이고는 했다. 옛날 식으로 족보를 따지자면 그
와 나는 한 스승을 모신 사이 따라서 내가 그의 사제가 되는 만큼 그런 것으로 기분 상해할
일은 아니었다.
“친구분, 어떤 분이신가?”
“공부를 참 많이 한 분이지요.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요. 직업이 교수이기는 합니
다만 저 나이 되기까지 줄기차게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친구가 졸업한, 서울에서는 일류 축에 들지 못하는 아무개 대학
의 이름을 대었다.
“에이, 머리가 나쁜 사람이구만.”
“네?”
“머리가 나쁜 양반이라고....”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요?”
“에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서울대학을 나왔지 그 대학을 나왔을 턱이 있나? 머리
나쁜 양반이 공부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겠어.”
“머리가 나쁜게 아니고, 고등 학교 다닐 때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니느라고, 아니면 대학
입학 시험과는 무관한 소설책 같은 걸 읽느라고 공부를 많이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
어요?”
“지금은 어느 대학 교수인가?”
“모교에 남았는데 왜요?”
“거 보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대학은 비록 삼류 대학을 나와도 교수질은 일류 대
학에서 할 것 아니겠느냐고?”
여기서부터는 나도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럼 어느 대학 나왔소. 하는 소리
가 입가를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하 사장 성미 건드려 득 될 것이 없을가 싶어서였다.
“아니, 하 사장님, 삼류 대학 나온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요? 삼류 대학 교수는 모
두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요?”
“나는 그렇다고 봐.”
“그렇지가 않지요. 세상에는 문리가 일찍 트리는 사람이 있고 늦게 트이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대학은 4년 동안만 가르치고는 내보내는 데 아닌가요? 하지만 공부는 평생을 하
는 것이지요. 서울대학을 나와도 공부에 게으러면 성취가 없을 수도 있고, 삼류 대학을 나와
도 공부에 게으르면 성취가 없을 수도 있고, 삼류 대학을 나와도 공부 열심히 하면 큰 것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제친구는 비록 그 대학을 나와 그 대학 강단에 서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근 30년 간 피를 말리면서 공부한 사람이라고요.”
“나는 통념을 말했을 뿐인데, 되게 섭섭해하네?”
“굉장히 섭섭한 통념이네요? 섭섭하지 않고요? 저도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 사장님도 서울대학 나온 분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 둘 다 머리가 나쁜 사람들인가
요?”
“우리 때는 아무나 대학 가는 때가 아니었다네. 나는 , 모르기는 하지만, 대학에 갈 수
있었다면 서울대학 갔을 거라. 그리고 자네도 서울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걸 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못하지. 내가 영어 공부를 해봐
서 알지만, 영어,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
“.....”
이것이 그의 견줄 데 없이 명쾌한 결론이었다. 그에게 서울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은 머
리 나쁜 사람, 외국에 유학하지 못한 사람은 모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바야흐로 일모 선생께서 말씀하시던 ‘공부 같은 공무’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해남 대흥사에 있던 내 친구 지명 스님이 경주로 전화를 걸었던 일이 있다. 지면 스님으
로부터 어째 미국 있을 때보다 얼굴 보기 어려우냐는 푸념을 듣고 돌아서는데 뒤에 하 사장
이 있었다. 내 말에 절집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
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서방에게 스님 친구도 있었나?”
“스님뿐만 아니고요, 목사친구도 있고 신부 친고도 있답니다.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 참
용기 있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우리 지명 스님, 참 공부를 착실히 쌓아 가는 사람이랍니
다.”
“그 스님, 어느 절에 계시는가?”
“해남 대흥사에 계시는데요?”
“해남이라면 전라도가 아닌가?”
“그렇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어째 전라도 해남 대흥사에 있나? 서울 조계사에 있어야지...”
“에이, 대흥사도 대찰이에요.”
“그래도 중들의 중앙청은 역시 조계사 아닌가?”
“스님들에게 중앙청이 어디 있어요? 그거 싫다고 떠난 사람들인데.”
“그래서 가짜가 많다고...”
“네?”
“책은 많이 썼는가?”
“책이라뇨?”
“스님들이 책 많이 쓰지 않나, 요즘?”
“에이, 지명 스님은 그런 거 안 써요.”
“그러면 테레비에는 나와?”
“테레비에도 안나와요. 지면 스님, 그런 거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라디오에는? 요새는 불교 방송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생겼다는데?”
“나대는 스님이 아니라니까요.”
“에이, 그러면 공부 많이 한 스님이 아니야.”
“네?”
그는 내 인내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던 모양인가? 이유 없이 따귀를 한 대 맞은 느낌이
었다. 나는 숨결을 가다듬었다.
“..여보게. 이 서방. 감천선갈이라는 옛말 아는가? 물 좋은 샘이 먼저 마른다는 뜻이네
만....”
“그것과는 다르죠.”
“뭐가 달라?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스님이면 신문과 테레비와 라디오가 그냥 두었을리
없지 않겠나?”
나는, 정말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고, 더 잘 가르칠수 있도록 그런 교수를 가르치
는 교수도 있어요. 이 세상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스님도 있고 더 잘 제도할 수 있도록 그런
스님을 가르치는 스님도 있어요. 텔리비전 시청자나 라디오 청취자에게 적합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있고, 텔리비전이나 라디오에 나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그것은 못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변명이야."
"저 같은 사람들이 말인가요?"
"그렇다면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 수 아래라는 말인가?"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열자 이야기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 불찰이었다.
"...열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이 양반이 산에서 백혼 무인이라는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다가 공부가 좀 된 것 같아서 산을 내려왔답니다. 마을로 내려와 주막에 들어서서 술
과 밥을 시켰는데, 주모는, 기다리는 손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열자에게 먼저 술과 밥을 내
어오더랍니다. 그래서 열자가 물었지요?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왜 내게 먼저 가져다 주는
것이오? 그러자 주모가 이러더랍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많이 한 어른 같아서 특별히 먼저
가져다 드리는 겁니다....' 공부한 것이 얼굴에 비치는 것을 보니 아직 공부가 덜 된 모양이
다.주모의 말을 들은 열자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산을 오르지요. 이런 공부를 쌓아 가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에이, 이 사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 열자 얘기 마침 잘 했네. 열자는 자네
만 배운 것이 아닐세. 내가 배운 열자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고. 열자의 선생은
열자 집 앞까지 왔다가 섬돌에 신발이 여러 켤레 놓인 것을 보고는 돌아갔네. 기어이 제 재
주를 드러내고 말았구나, 하면서... 이 사람, 자네는 지금 테레비나 라디오에서 인기 있는 교
수가 스님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말본새인데, 열자를 보게. 그렇게 공부했어도 결국은 그
공부한 것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집에 모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
네, 열자 아는 것을 보니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말도 알겠구만. 어서 공부해서 자네 주머
니의 송곳도 어디 한번 비어져 나오게 해보게. 그러면 테레비에서 라디오에서 부를 테니까.
..”
“...”
“내가 아주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한때 절에 다닌 적이 있네.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한동안 다닌 적이 있네. 그러다가 중들이 밥버러지들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만
두고 말았어. 시주 밥값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네 친구라는 그 중도 전라도에 처
박혀 있지 말고 테레비나 라디오에 나와서 중생 제도 좀 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밥
값을 좀 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
마주 앉아서 이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나에게는 늘 ‘공부다운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존경하던 국무총리가 골초라는 신문 가십을 읽고 하 사장이 혼란에 빠지는 걸 옆
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철저한 금연주의자인 하 사장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조건
의지가 박약한 자라고 정의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담배도 끊지 못하는 의지 박약
한 인간이 국무총리가 되는 사태는 얼마나 황당했을 것이가? 그런 그에게, 일모 선생이 담
배를 끊었다고 선언하고도 이따금씩 한대씩 몰래 피운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심한 소화 불량증세를 보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쓰던 방은 일층에 있는 10개의 객실 중 프런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작업
은 주로 야간에 하는 버릇 때문에,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심심찮게 생기고는 했
다. 경주는 관광 도시여서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문을 열어 두는 가게가 많았다. 나는 일이
제대로 풀려 나가지 않을 때면 밖으로 나가 포장집도 기웃거려 보고, ‘소주 창고’라는 이
름이 다소 무지막지한 실내 포장집도 기웃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새벽 1시가 되면 하 사장이 정문을 버리는 통에 이러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밤
나들이는 늦어도 새벽 1시에는 끝나야 했다. 다행히도 내 방 뒤에는 쪽문이 하나 있었다. 나
는 하사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쪽문 열쇠를 넘겨줄 수 없겠느냐고 청을 넣어 보았다. 그는
좋을 대로 하라면서 열쇠를 내게 넘겨주었다.
덕분에 나는 새벽 1시 이후에도 밤나들이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밤나들
이는 하 사장이 새벽 2시에 내 방을 급습하는 사건과 함께 끝났다.
문제의 사건이 터진 밤, 포장마차에서 조금 길게 마신 술의 취기가 견디기 어려워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설핏 잠이 드는 중인데 누군가가 주먹으로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돌아눕는 찰라 문이 열렸다. 일어나 불을 켜지 않
을수 없었다. 하 사장이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들어와 있었다. 내 방은 온돌방이어서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들어오는 데가 아니었다.
하 사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세요?”
“......”
“왜 그러시냐니까? 도둑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아닐세. 미안하네, 어서 자게.”
나는 조금 난폭한 순찰에 걸려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지나가는 말로, 하 사장이 간밤에 ‘마스터 키’로
내 문을 따고 들어왔는데, 더러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다.
청소부는 싱긋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불신 검문이죠, 뭐.”
“불신 검문이라니? 주인이?”
“장기 투숙자들은 다 한 번씩 당해요.”
“세상에....”
“사장님에 실적을 올릴 때도 있대요.”
“....”
“쪽문 열쇠 넘겨달라는 부탁, 하시는 게 아닌데 그랬어요. 한밤중에 살그머니 여자 데리
고 들어와 자려고 그러는 줄 알았을 거예요.”
그와 내가 사사건건 정면으로 부딪친 예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신문 기사나 방송 보도에 대한 것만 해도 그렇다.
한번은 조기 유학생의 탈선 상황을 보도한 신문을 들고 나를 찾아와 시퍼렇게 화를 낸 적
이 있다. 나는 신문 기획 기사의 방향이 그렇게 잡혔을 것이고 기자의 시각이 그랬던 것일
뿐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
“그러면 신문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신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기획 기사의 방향이 이따금씩 사실과 다를 때가 있
기는 합니다. 실제로 많은 조기 유학생들이 탈선하는 사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특정
지역의 특수 사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도 비슷한 보도를 하던데, 그러면 방송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법 고시, 행정고시, 외무 고시, 언론 고시라는 말도 못 들어 보았는가? 언론사 들어가
기가 판검사 되기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게 어렵사리 언론사 들어가서 그러면 거짓 기사
나 쓰고 있다는 말인가? 중앙 일간지는 서울대학 안 나오면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럼 서울대학 나와 신문 기자 된 사람들이 겨우 거짓말이나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신문이나 방송에 대한 그의 믿음은 거의 맹신적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다소 선정성이 있는 추측 기사를 쓰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되고, 실제로
몇 번은 그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다. 정론을 지향해
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쟁사와의 관계와 자사의 형편 때문에 때로는 추측 기사로 이해
당사자를 견제해야 할 때도 있다는 고백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 신문 기
자의 고뇌에 찬 고백을 전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물을 그만의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만 읽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설명을 길게 하
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어떤 사물로부터 뼈를 취하는 것도 살을 취하는 것도 골수를 취하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사물에서 받은 자기의 인상만을 취해서 간직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되지 못하게도 사람이 살면서 하게 되는 생각에 민감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와의 대화는 시작되기가 무섭게 나에게는 하나씩의 상처가 되고는 했다.
돈에 관한 한, 천민 졸부가 극성을 부리는 이 시대를 위하여 검박한 삶의 본을 보이는, 희
귀한 미덕의 소유자. 하지만 정신의 경우, 어쩐지 단 하나의 잣대로만 세계의 모습을 해석하
는 듯한 모노코드 난수표의 소유자. 인식의 지평 넓히기를 한사코 거절하는 사람, 자기의 인
식 너머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용인하기를 끝까지 거절하는사람...당시의 내 메모에는, 하 사
장에 대한 이런 인물평이 적혀 있다.
탈고가 되어 갈 즈음 나는 서울의 내 아파트에서 4년째 살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딸이 자라 초등학교 상급 학년이 되어 더 이상 한 방에다 재울 수 없는 형편인
만큼 서고를 다른데로 옮겨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부득이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미국에서의 스케줄 때문에 그 사람을 내보내고, 내 조건에 맞는 다른 사람을 구해
입주시킬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계산을 놓아 보았다. 일 년에 한두 차례씩 서울로
들어와 호텔에서 두어 달씩 묵는 비용의 곱절이면 하 사장 호텔의 방 하나를 일 년쯤 장기
임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서울에 있는 책을 모조리 실어 내려와 호텔에다 서재라도
하나 꾸며 놓으면 특정한 책이 책더미에 들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꺼낼 수가 없어서
다시 사는 불 필요한 낭비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내가 하 사장을 천박한 수전노, 구제 불능의 외눈박이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와의 그
런 약점을 덮어 줄 만한 강점 또한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 사장은 일모 선생의
애제자가 아니었어도, 검소하고 질박하게 사는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
려웠다. 그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은 내 쪽의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하 사장에게 나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절충안을 내어놓았다.
“자네가 서재를 꾸며 놓으면 일 년중 10개월은 빈 방으로 있을 텐데, 이건 국가적인 낭
비야, 낭비. 그러니까 이렇게 하세. 내가 제일 큰 한식 방을 내어 줄 테니까 거기에다 서재
를 만들게. 대신, 두가지 조건이 있네. 자네가 와 있지 않을 동안, 성수기에 손님이 넘치면
그 방에도 손님을 들이기로 하겠네. 내국인은, 이물 없게 여겨서 그런지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거든. 내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인데, 유럽인과 유
태인은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사람만 들이기로 약속하지. 그리
고 또 하나의 조건, 이것은 자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네만, 우리 호텔 방 사용료는 자네가
제안한 액수의 3분의 2만 받겠네.”
일년전의 초여럼 나는 서울에 있는 책을 경주로 실어내려 하 사장이 내어 준 널찍한 방에
다 서재를 꾸몄다. 2,30년 동안 낯익었던 내 책의 알락달락한 책등을 5년 만에 재회하는 기
분은 썩 괜찮은 것이었다. 나는 여러 권 가지런히 꽃힌 책의 책등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
고는 한다. 모르기는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심적 태도에는 책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말하자면 애정의 거품 같은 것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공을 들인 문제의 책이 출간된 것은 작년 8월 중순이다. 개학 날짜인 9월 1일
까지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로 나온 책 싸들고 다니면서 그 동안 지
게 된 책빚을 갚는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밤 술자리로 이어지는 법이다. 몇 차례의 신문
및 잡지의 인터뷰에도 응해야 했다. 나는 등을 떠밀리며 참석한 내 책 출판 기념회 술자리
의 숙취에 시달리면서 비행기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신문이 ‘배반낭자의 자리’
라는 설명을 붙여 그 출판 기념회를 보도한 것이 화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나는 작년 가을과 겨울에도 올 봄에도 귀국할 짬을 낼 수 없었다.
가을과 겨울에는 학술 회의와 일련의 세미나 때문에 틈을 내기가 어려웠고 올 봄에는 경주
에 서재를 마련하면서 쓴 비용이 계속해서 부담이 되는 바람에 여유를 무질러 내기가 힘들
었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아주 영구 귀국하도록 짜여진 일정도 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었
기가 쉽다.
그렇게 느긋하게 영구 귀국을 준비하는 중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일모 선생의 아들인 내 동기 동창생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무슨 모임이 있어서 경주 보문 관광 단지에 다녀왔다. 아버님 당부하
신 말씀도 있고 해서 호텔 에스페랑스에 들러 하 사장도 만나뵈었다. 그런데 나는 호텔에
자네 서재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없어. 내가 하 사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무래도
방 그렇게 비우는 것은 낭비인 것 같아 박스에다 책을 넣어서 창고에다 보관하고 있다고 하
더라. 자네와의 약속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무슨 일이 있었나? 어느 창고에 어떻게 보관되
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 사장 분위기가 워낙 심상찮아서...”
나는 그제서야 그 동안 하 사장에게 전화로나마 안부 한 번 여쭙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둘러 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공연히 그의 불편한 심사만 들쑤셔 놓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디에다 보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아는 한 호텔 창고에는, 5천 권이 넘는 내 책을 넣어 둘 만한 공간이 없었다. 한 군
데 짚이는 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하 사장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
렇다고 해서 귀국 날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영구 귀국을 석 달 앞두고 서
둘러 일시 귀국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조그만 오피스텔을 하나 빌렸다.
내 아파트는 돌려 받을 때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내 쪽에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여
행 가방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오피스텔 바닥에다 수건 한 장을 깔고
누워 나는 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텔 뒤의 살림채 옆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면 수도꼭지가 고장나는
바람에 오줌 버캐가 더께더께 앉은 누런 소변기가 하나 벽에 붙어 있고, 문을 열면 수세 시
설이 되어 있지 않은 일본식 좌변기 하나 있는 화장실이었다. 살림채에서 하 사장이나 외사
계 형사들과 술을 마시다가 살림채 화장실이 내실과 너무 가까워서 부러 그 화장실을 이용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늦여름에는 귀뚜라미가 바닥에 시커멓게 기어다니는 화장실이었다.
나는 그 화장실 냄새를 잊지 못한다.
지금도 내 곁에 있어서 잊을수가 없는 것이다.
내 책을 넣은 상자는 그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종이 상자에 손을 대어 보았
다. 눅눅했다.
이삿짐 센터에 전화를 걸어 트럭과 인부들을 불렀다. 화장실의 습기를 빨아들인 종이 상
자가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운반 도중에 자주 터지고는 했다. 나는 책짐 싣는 시간을 줄
이기 위해, 땅바닥에 떨어진 책을 트럭의 적재함 위로 던졌다. 눅눅해진 책에서 잘 썩은 똥
구린내가 났다. 청소부가 내 곁으로 다가와 귀뜸해 주었다.
“작년에 서울에서 무슨 기념회가 열렸다면서요? 거기 부르지 않았다고 화가 난 거래
요.”
오랬동안 화장실 습기를 빨아들인 내 책 중에서 판형이 큰 책 몇권은 책꽃이에 꽂아도 흐
물거리는 바람에 홀로 서지도 못했다. 고급 아트 도판본은 책장이 서로 맞붙는 바람에 제대
로 넘길 수도 없었다.
홀로는 서지도 못할 정도로 습기를 빨아들인 몇 권의 책, 오줌 버캐에 절여진 듯 심하게
얼룩이 간 몇 권의 책은 내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했다. 나는 잠깐 링에서 싸우던 싸움
을 중지하고 구석 자리로 돌아가 보아야 했다. 구석 자리에 놓인 코너 스툴로 돌아가 앉아
입 안에 고인 피도 좀 뱉고 물도 좀 마시고 싶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 싸움터의 치프 세
컨드 일모 선생을 스툴에다 나를 앉히고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고, 트렁크 고무줄을
당겨 내 사타구니에 바람도 넣어 주고, 훈수도 해줄 터였다.
그래, 하 사장은 나쁜 놈이다. 자네가 드디에 하 사장 같은 인간의 정체를 읽어 내었구나,
또 하나의 숨은 그림을 찾아 내었구나...나는 선생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 이 복중에 미국에서 날아들어와 똥서방을 차렸다며? 똥서방에겐 아무래도 술이
한잔 필요하겠다.”
잘 익은 똥구린내가 등천을 하는 서울의 오피스텔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바로 경산으로 내
려간 나에게 일모 선생이 하신 말씀이다. 그분 외아들인 내 동기 동창이 술을 내어왔다.
“똥서방이 화가 몹시 난 모양이다. 우리도 오늘 일 작파하고 이 똥서방을 위로하자...능금
농사가 사람 농사만 할까...”
일모 선생이,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서려는 아들을 눌러앉히면서 말을 이었다.
“...공부 같은 공부가 안 된 모양이네? 공부가 잘 된 사람 눈에서 눈물이 비칠 리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자네는 선비 대접을 이렇게 하는 세상을 원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가?”
“좀 그렇습니다.”
“나는 자네가 하 사장을 이겨먹을 줄 알았다. 느물느물하게 다루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네는 하 사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천박한 수전노, 병적인 양생주의자,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대롱눈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강이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그래, 하 사장에게 그런 흠절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그러는 자네는 하 사장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
“자네 책을 화장실에 처넣은 것이 그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
“자네는 하 사장 찾아갈 때 고급 위스키도 사고, 요릿감 쇠고기도 사가지고 갔는가?”
“그렇게 했습니다.”
“술도 많이 사다 마셨는가? 이따금씩은 양주도 사다 마셨는가?”
“원래 제가 일을 집중적으로 할 때는 틈틈이 술을 좀 많이 먹습니다.”
“맥주를 상자째 놓고 외국 손님들과도 나누어 마시고 하 사장과도 나누어 마셨는가?”
“...”
“사람에게는 동물성 단백질도 필요하다면서 하 사장을 데리고 나가 한 상 떡 벌어지게
잘 대접한 일도 있는가?”
“네, 하도 깨작거려서 제가 본을 좀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네 책을 화장실에 처넣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이다.”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하 사장 같은 사람으로부터 돈 쓰는 법을 배울 나이는 지났
습니다.”
“배울 나이가 지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배울 나이가 지났는데도 배우기를 거절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네는 너무 고상한 일을 하느라고 발 밑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 셈인가.
자네는 하 사장 호텔에서 자네 주머니의 돈을 쓴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자네의 한국 체재를 지원하지 않았는가?”
“...”
“흥청망청 쓰지는 않았겠지만 만일에 자네에게 그 정도 지출할 여유가 있었다면 우리 프
로그램의 지원은 안 받는 것이 옳지 않았겠는가?”
“...”
“사람이란, 이렇게 보기로 작정하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려고 작정하면 저렇게 보이
는 것이다. 자네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자네가 화를 내고 있는 상황에는
하 사장에 대한 고려가 송두리째 빠져 있다. 그래서 다른 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자네는 말이야, 어떨 때 보면 공부를 좀 한 사람 같아도 어떨 때 보면 철부지도 그런 철
부지가 없어.”
“...”
“우리가 직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과연 직선이겠는가? 혹시 곡선의 한 부분을 우리가, 자
네 말마따나 대롱 시각으로 보고는 직선이라고 하는 것을 아닐 것인가? 자네는 혹시 큰 곡
선을 작은 직선으로 본 것은 아닐 것인가.”
전화기가 울린 것을 그 때였다. 내 동기 동창이 수화기를 들고는, 네, 안녕하셨습니까, 하
고는 잠깐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면서 수화기를 선생께 내밀었다.
일모 선생이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내 귀에, 일모 선생 말씀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다.
“응, 자넨가...”
“...”
“그래... 내 그렇지 않아도...”
“...”
“...그렇지 않아도 야단치고 있네...”
“...”
“여보게 운담, 구게 누구 불찰이겠는가. 다 나의 불찰 아니겠는가...그러니까...”
너무 놀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내 귀에는 일모 선생의 나머지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날 그 순간보다 더 참담했던 순간은 없어서 기억해 내지 못하겠다.
무서운 일이다.
잃어버린 물건이 내가 이미 뒷짐질해 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제29회 동인문학상 후보작- 타관사람
공선옥
1963년 전남 곡성 출생
1991년 중편 ‘씨앗불’ 창작과 비평에 발표
1992년 단편 ‘목숨’창작과 비평에 발표
1993년 단편 ‘목마른 계절’ 창작과 비평에,‘흰달’실천문학에,
‘피어라 수선화’ 상상에 발표
장편 <오리지에 두고 온 서른 살>출간
1994년 단편 ‘우리 생애의 꽃’문학사상에 발표
<피어라 수선화>출간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
1996년 장편 ‘시절들’발표
타관 사람
차에서 내리자 강바람이 사납게 얼굴을 때렸다. 살을 에는 냉기가 얇은 작업복 속으로 파
고 들어왔다. 갑철은 도로를 훌쩍 건너뛰어서 불빛이 번져 나오는 횟집 문을 열었다. 설거지
통에 손을 담그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갑철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혹시 담배도 팝니까?”
“히힝, 담배 가게서 띠어다 써비스 차원에서 파는 것이 있기는 있어라우.”
“한 갑만 파십쇼.”
“히힝, 그러시쇼.”
여자는 습관처럼 의미 없는 웃음을 날렸다. 갑철은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며 수족관에
몸을 기댔다.
“아줌마, 저건 얼마요?”
“광어 말이요?”
“저게 광업니까?”
“히힝, 회로 잡술라고요?”
“...”
“히힝, 주는 대로 받지라,뭐.”
설거지로 부산한 여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물어 본다는 것이 내키지 않기는 했지만 어쨌든
확인은 해야만 했다.
“여기서 윗한배미까지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걸립니까?”
“거까지 뭔 일로 걸어가라고요, 이 밤중에?”
여자가 새삼스레 갑철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나 경계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돌아서 가쇼.”
“택시비는 얼마나 나와요?”
“이삼천 원이나 나올랑가?”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택시를 타고 갈 일은 아니었다. 밤길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것이 대수랴.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 가게문을 나서려다가
여자를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설거지통에 손을 담근 채 내력 없이
히힝, 웃었다.
“아줌마, 그 광어회 한 접시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히힝, 그러지라.”
여자가 내놓은 회는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았다. 여자에게 좀 먹어 주기를 권했다. 여자는
사양했다. 안주 양에 비해서 소주가 적긴했지만 추운 밤길을 걸어가기에는 적당한 듯싶었다.
“윗한배미는 뭔 일로 갈라고 한다요?”
“집을 보러 갑니다.”
“그 산골짝에 뭔 집을 보러 가요?”
“살 집이요.”
“거 가서 살라고요?”
“빈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요.”
“빈 집이 윗한배미 거그밖에 없간디요? 쌔고 쌘 것이 빈 집인디.”
“누가 소개를 해줘서요.”
“누가요?”
여자의 물음이 의외로 길어졌다. 그러나 대답하는 것이 귀찮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남도
여자들이 붙임성이 좋다는 걸 갑철은 알고 있었다. 저러는 것이 그네들의 천성이려니 했다.
그러고나자 처음에는 의아했던 그네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타인에의 관심이 오히려 다정하게
여겨지는 거였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이요.”
“그 집에 살던 사람이요? 누구까?”
“소 기르던 사람이요. 왜 왼눈에 좀 흰창이 많고...”
“아아, 그 양반 !”
“알아요?”
“알다마다요. 아니, 그 양반을 어디서 만났다요? 그러고 시방 어디서 오는 양반이요?”
이쯤 되면 대답하는 쪽에서 서서히 지칠 법도 한데 포만감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사
뭇 느굿해지는 갑철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필요 이상의 관심이 갑철에게는 필요했다.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를 마을이었고 여자를 통해서 그 마을에 대한 정보라든가 이 지역 물
정에 대해서 도움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주는 일
이 꼭 손해날 일만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지역 안에서 사람을 사귀어 둔다는 것은 좋은 일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이 곳에서 사귄 최초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남원 산동 간 길을 닦다가 오는 길이요.”
“기술자다요?”
“떠돌이 노가다요.”
“그 양반이 거가 있습디까?”
“누구요? 아아, 그 사람이요! 예, 거기서 만났소.”
“그 미친 작자가 거그 가 있었그만이.”
“미친 작자라니요?”
“암시랑토 안헌 처자식 뚜드려패서 도망가게 해놓고 새 각시 얻어서 인자 자기는 자유가
되었다고 좋아라 지랄발광을 허더니, 새 여편네한테 꽤가 다 빗개져서는 우세는 우세대로
다 사고 기껏 토낀다는 것이 엎어지면 코방아 찔 구례 산동이그만이.”
갑철은 웃고 말았다. 더할 수 없이 선한 인상의 여자가 흥분을 해서 뭐라고 뭐라고 해쌓
는 것이 보통 재미있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도 제 말이 우스웠던지 웃었다.
웃음을 머금은 여자의 손에 돈을 치르고 가게문을 열었다. 아까 차에서 막 내릴 때보다
강바람이 한결 누그러진 듯했다.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더군다나 그믐이었다. 산길을 올라갈수록 하늘이 가까워졌다. 바로
머리 위에 하늘이 있고 검은 구름장이 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갑철은 구름장이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를 누르고 있는 것같이 답답했다. 가겟집 여자한테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뢰성 없는 사내의 말만 믿고 허위허위 이 곳까지 달려
온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고 급기야 화가 났다. 발에 뭔가가 걸린다는 느
낌이 들어서 확 걷어찬다는 것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바람이 차긴 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춥지는 않았다. 갑철은 넘어진 자리에 한동안 그대로 엎디어 있었다. 흙 냄
새가 올라왔다. 향긋한 것이 풀 냄새 같기도 했다. 그것은 여리지만 질기고 약하지만 강렬한
그런 냄새였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차츰 사내와 자신에 대한 화가 가라앉았다.
갑철은 사내가 일러 준 대로 윗한배미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 우산각에서 마주 보이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솔길을 쭉 따라 실개울을 하나 건너니 건물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
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 보온천과 비닐로 동여맨 움막이었다. 그는 역시 비닐
로 된 움막문을 잡아당겼다. 움막 안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깨끗하고 넓었다. 안온한 기운도
느껴졌다. 수도까지 설치되어 있는 게 처자식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그런 대로 살아보려
고 노력은 한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고맙게도 물이 나와 주었다. 기둥에 달려 있는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신기하게도, 거짓말같이 불도 들어왔다. 불이 들어오자 여태껏 긴가
민가하고 숨죽이고 있던 생쥐들이 혼비백산했다. 갑철은 방문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내뱉었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행운은 그렇게 거짓말처럼 왔다.
“대체 누가 온 거여, 누가?”
“불 써지는 것을 내가 봤당게 그러네.”
“어디 한번 들어가 보더라고.”
자박자박하는 발소리들이 움막문 앞에 멈추었다.
“진갭이 왔능가?”
상노인 두엇이 움막 안으로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철은 머뭇거렸다.
“당신은 누구요?”
“진갑이란 사람한테 소개받고 온 사람입니다.”
“뭔 소개를 했소?”
“이 집 소개를 했습니다.”
“이 집을 샀소?”
“아뇨, 임시로 빌렸습니다. 올 겨울만 좀 날려구요.”
“어디서 왔소?”
“산동 남원 간 도로 공사장에서 왔습니다.”
“진갭이를 거그서 만났소?”
“예.”
“패애앵, 숭헌.”
“......”
“물은 나오요? 엊저녁에 불 써진 것 본께 전기는 오는갑드만.”
“물도 나오고 전기도 들어옵니다.”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여그도 윗한배미 마을인께 언제까장 살란가는 몰라도 마
을 사람들헌티 인사도 허고 그러쇼.”
“그래야지요.”
“누가 왔능가 알았응게 우리는 인자 갈라요.”
거기까지 말하고 마을 노인들은 총총히 물러났다. 아침 해가 움막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갑철은 찬물을 마셨다. 안온감과 더불어 미세한 불안감이 교차했다. 처자식을 찾아 헤매는
사내, 진갑이 말대로 공사장에 다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선 청소를 해야지. 찬물로
배를 채우고 나자 갑철은 턱없이 유쾌해졌다. 그래서 히힝, 하고 말같이 웃었다. 그렇게 웃
고 나자 어젯밤 가게 여자가 웃던 것이 생각났고 그래서 또 한 번 진저리를 치듯 히힝거렸
다. 걸레와 빗자루, 양은냄비와 숟가락, 밥그릇, 세숫대야, 치약, 칫솔 따위의 쓸만한 물건들
은 몽땅 있었으므로 당장에 살림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천지를 찾아봐도 쌀은
어디 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청소를 해놓고 나가서 쌀을 구해 와야지. 갑철은 쥐똥이며
뭐며 청소를 야무지게 해놓고 움막문을 닫았다. 무거운 돌을 굴려다 문에 기대놓았다. 혹시
나 아는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누가 이 행운의 보금자리를 낚아채 가버릴지. 행운이란
늘 불안한 것이다.
쌀을 사러 산길을 내려왔다. 당장에 아침밥을 해먹어야 하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이어선지
길은 어젯밤 올라갈 때처럼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몸 누일 자리를 구
했다는 안도감이 작용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머리 위를 내리덮던 구름장도 말슴히
가셔서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드셌다.
쌀을 구하러 나온 길인데도 이상하게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싶
어지는 것이, 행운은 이렇게 오면 안 되는 거였다. 옆구리가 결리는 것 같았다. 뭔가가 잘못
된 것 같아서, 구례읍에 나가 쌀 한 말을 팔고 반찬거리와 귤 한봉지를 사들고 산길을 다시
올라올 때 자신이 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도 생겼고 내일 먹을 양식도 있는데 사람이
없구나. 식구들이 생각났다. 노망든 어머니, 말기 위암 환자였던 형, 파출부 형수, 그리고 조
카 홍기. 그들이 제 식구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주소가 생기면 편지하라던 어머
니는 아무리 편지를 써도 받지 못할 세상으로 떠난지 오래. 형은 객사했고 형수는 집 나갔
고 홍기는 어디 있지? 옆구리가 자꾸 결리는 것이 홍기였나. 고 자식 홍기가 그랬나. 돌아가
누울 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갑철에게 턱없는 용기를 주었다. 홍기를 데려오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래도 세상에 유일한 제 피붙이가 아닌가. 그리고 혼자서 그 겨울을 나기에는 사팔
뜨기 사내 진갑이 내준 그 움막이 너무 호사스러웠으므로, 거기에 여자까지 들이는 호사란.
아서라, 숨이 막힐 것이었다. 여자 대신 조카라. 좋은 일이었다.
홍기를 위해 밥을 짓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다 허물어져 내린 연탄 아궁이를 갑철이 새
로 손보았다. 방은 기분좋게 뜨끈뜨끈했다. 햇빛 좋은 날 손바닥만한 마당을 서성거리며 은
근히 진갑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냥 한번 왔으면 싶었다. 그가 안 된다고, 못 살게 하면
그냥 또 정처 없이 떠날 셈이었다. 그렇다 한들 하나도 속상하지 않을 자신이 갑철에게는
있었다. 어디 속상한 일을 한두 번 겪었던가, 바리바리 절름발이 김갑철이가. 그러면 홍기는
어떡하나, 이제 학교에도 들어가야 할 일곱 살 홍기는 다시 고아원으로 가야 하나. 지난 겨
울 삼촌 노릇을 참으로 뿌듯하게 했다. 유일한 혈육이 아닌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홍
기가 까르륵대면 평생 제 여자 없어도, 제 자식 없어도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홍기가,
내 따순 혈육이 있었으므로.
비가 한번 오고 나자 움막문 앞 산수유나무에 노란 산수유 꽃망울이 툭툭 터졌다. 이 집
주인 진갑이는 진달래꽃 필 참에나 올라나. 움막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고 나니 봄 나기는
일도 아니게 느껴졌고 그래서 갑철은 이 곳을 떠나기 싫었다. 그것을 예감하고 홍기를 데려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먼산에 안개가 자욱하고 산수유 꽃망울에 빗방울이 달려 있는 푸근
한 아침에 갑철은 움파를 듬뿍 썰어 넣은 무국으로 아침을 먹고 나서 홍기를 단장시켜 학교
로 갔다. 홍기 입학식이 있는 날이다. 학교는 마을 안길을 지나서 마을을 감싸고 도는 개울
건너에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들어섰는데 이상하게 아이들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개가 컹컹
짖었다. 안경 쓴 여자가 갓난애를 포대기에 들쳐업고 나왔다.
“여기 학교 아닙니까?”
“폐교된 학굔데요.”
“그럼 학교는 어딥니까?”
“산길을 내려가서 구례 쪽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곡성쪽으로 가다 보면 삼거리에 있는
합록 초등 학교로 가야 해요. 우리 아이들도 거기로 다니고 있는걸요.”
“알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갑철은 공손히 인사하고 폐교된 분교 운동장을 돌아 나왔다.
학교가 바로 저기 있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믿거라 한 일에 발등
찍히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낭패였다. 어찌 됐든 홍기는 이제 학교에 갈 나
이가 되었고 자신은 그 애를 학교에 보내야 할 의무가 있는 유일한 보호자였다.
합록 초등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입학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사십여 명 되는 전
교생 중에 입학생은 일곱 명 이었다. 오밀조밀 오십여 명을 앞에 놓고 한 삼십 분 교장 선
생님의 훈시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으로 섬진강의 매운 바람이 막바로 불어 왔다.
유독 얇은 옷을 입고 있는 홍기가 두 다리를 달달 떠는 모습이 영 마음에 걸렸다. 구례장
에 가서 홍기 옷을 살 생각을 마음 속에 꿍치고 갑철 역시 덜덜 떨면서 교장 선생님의 훈시
를 경청했다.
바람이 워낙 세고 마이크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영 알아듣기가 힘들다가 연설
말미에 가서야 목청이 한껏 올라간 덕분에 확실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설라무네 어린이 여러분과 뒤에 계신 자모자형 여러분께서는 학교 폭력의 뿌리를
근절하는 데 다같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아, 이것으로 오늘 입학식 훈시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일동 차려엇, 경례.”
갑철도 얼른 차렷, 경례를 하였다.
교장 선생님 말씀마따나 그것으로 입학식을 마친 뒤, 삼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 앞 섬
진강사랑 슈퍼 겸 식당 앞에서 내렸다.
“히힝, 어디 갔다 오시요?”
내력 없이 잘 웃는 가겟집 여자 순임이가 갑철에게 알은 체를 하였다.
“조카애 입학식 하고 옵니다.”
히힝, 그러시고만이라우.“
갑철은 여자에게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지나쳤다. 그리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산
길을 올라갔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챘다.
“삼촌, 왜 그래? 씨이.”
저를 떼어놓고 쏜살같이 앞서가 버리는 삼촌이 이상한 홍기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따
라왔다.
“낼부턴 인자 이 길을 너 혼자 다녀야 하는 거여. 그래서 너 연습시킬라고 그러는 겨.”
“나 혼자 다녀야 하는 겨?”
삼촌이 충청도말을 하면 홍기도 충청도말을 한다.
“그려, 너 혼자 댕겨야 하는 겨. 날마다 삼촌이 델다 줄수 읍는 겨. 나도 인자부텀은 바
쁘니께.”
“일할 거여?”
“그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그래야 쌀도 사고 우리 홍기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공책도
하고 헐 수 있는 겨.”
우리 홍기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공책도 사고... 제가 해놓았지만 어쩐지 제 말 같지가
않았다.
아침에는 푸근할 것 같던 날이 비가 흩뿌리면서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오들오들
떨리고 한속이 드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오전에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오후에 날시가 괜찮
으면 움막 위 축사를 손볼 참이었다. 짐승이라도 길러서 홍기를 가르쳐 봐야지. 어쨌든 지금
당장은 으슬으슬 춥고 사지가 찌뿌드드한 것이 뜨뜻한 아랫목이 급했다. 몸은 급한데 걸음
걸이가 따라 주질 않아서 갑철은 자꾸 뒤뚱거렸다. 열심히 따라오던 홍기가 움막을 가리키
며 경상도 억양으로 소리쳤다. 그 애는 이제 사방 팔도 말을 쓰는 삼촌을 닮아 가고 있었다.
“삼촌, 집이 이상해져 부릿네.”
홍기 말대로 움막이 어째 이상했다. 다가가 보니 움막 전체의 의지가 되어 주고 있는 축
담이 무너져 있는 거였다.
“누가 그랬을까?”
한쪽 기가 탁 막혀 와 갑철은 홍기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냈다. 홍기는 고개를 가
로저었다.
“봄비가 그랬다!”
의지를 잃어버린 비닐은 힘없이 흐물거리며 주저앉아 있었다. 벽이 없어져 버렸으므로 방
이랄 수도 없는 움막 한켠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동동거리던 갑철은 자꾸만 한속이 드
는 몸에 옷가지를 더 주워 입고 바닥에 밥을 차렸다.
“밥 묵자.”
홍기도 쭈그려앉았다.
“어쩔래? 인자 집도 못쓰게 되어 부렀고, 다시 고아원 갈래?”
“집 다시 고치면 되제.”
어쩌는가 보려고 고아원 다시 갈라냐는 사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아원 다시 가기
싫은 홍기는 집 고치면 된다, 한다. 그것이 갑철의 가슴을 때렸다.
“알았다. 밥 묵자.”
밥을 다 먹고 나서 꼴이 아닌 집 모양을 그래도 어떻게라도 해볼양으로 비닐을 들추고 밖
으로 나왔다.
“옴마, 참말로 왕창 무너져부릿다. 워째 이런 일이 다 있노.”
축담 옆에 핀 산수유 꽃망울이 오들오들 떨었다. 꽃을 보고 갑철이 중얼거렸다.
“춥제? 나도 춥다.”
담을 다시 쌓으려도 일단 무너진 흙과 돌들을 쳐내야 했다. 홍기하고 주질러앉아 돌을 들
어 냈다. 흙을 쳐내자면 무슨 도구가 있어야겠는데 싶다. 고아원 가기 싫은 홍기는 연신 코
를 훌쩍거리며 돌을 주어 내고 있다.
“홍기야, 삼촌 마을에 가서 괭이랑 삼태기 빌려 오께.”
“알았다. 그러고 경상도말 그만 써라.”
“그래.”
마을로 들어선다. 뉘 집을 들어가야 하나, 뉘 집에 가서 괭이랑 삼태기를 빌리지? 골목에
사람 소리 하나 나지 않고 저만치 앞에 폐교된 분교에 사는 안경 쓴 여자가 아기를 업고 지
나가고 있건만 이봐요, 소리가 선뜻 나오지 않는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여자는 골목을 돌
아가고 말았다.
애기엄말 부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겨울 움막에 온 노인들 말
대로 동네에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이 몹시도 후회스럽다. 막상 인사를 하려 해도 무슨 말로
어떻게 자신을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맘먹고 나섰다가도 번번이 포기하고는 했었다.
“어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틀림없다. 우뚝 선다. 뒤돌아본다. 키가 작고 눈이 작은 오십 줄의
동네 사내다. 술 냄새를 풍기며 건들거리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다.
“저 부르셨습니까?”
“진갭이 집에 사는 사람 아닌가?”
“맞습니다.”
“아, 이사람아, 이사를 왔으면 진작에 동네 사람들헌티 인사를 해야지. 인자사 와서 기웃
기웃허고 있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헐 것꺼지는 없고 그래 성함이 어떻게 되신가?”
“김갑철입니다.”
“짐갑철? 어디 짐간가?”
“김해 김갑니다.”
“그건 그렇고, 그런디 자네 집 담이 무너져 부렀등만.”
“예.”
“올라오다 봉게 애기가 앉아서 돌울 줏어 내고 있등마는.”
“예.”
“혼자 그 일을 어뜨케 허겄는가?”
“글쎄요. 해봐야지요.”
“그려?”
“그런데 저어...”
“말해 보소.”
“연장이 좀 필요해서 그러는데...”
“아, 이 사람아, 연장보담은 사람이 필요헌 일이네, 그 일이. 가만 있어 보소, 어이.”
팔짱을 끼고 오종종거리며 다가오는 상노인을 뱁새눈의 사내가 손짓해 부른다.
“이센, 내일 뭔 일 없소?”
“왜?”
“저 아래 진갭이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인디 담이 무너져서 낼 하루 가서 봐줘야 쓰겄는
디.”
“그려.”
“어이, 짐센, 나허고 이 양반허고 한 두어 사람 더 불러서 낼 자네 집으로 내려감세.”
일은 순식간에 해결이 나버렸다. 연장을 빌리러 왔다가 결과적으로 사람을 구한 폭이 되
었다. 어려운 숙제 하나를 푼 듯이 발걸음이 좀 가벼워졌다. 움막으로 들어오는 오솔길로 접
어드는데 아직도 돌을 주워 내고 있는 홍기의 작은 등어리가 보였다. 아이는 오들오들 떨면
서도 돌 줍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홍기야.”
명치 끝이 콱 막혀 오는 통에 홍기를 부른 목소리가 좀 갈라졌다.
저녁이 되자 날씨가 더욱 쌀쌀해졌다. 그래도 어떻게든지 해서 그 밤을 보내야 한다. 설상
가상으로 홍기 몸에서 서서히 열이 끓기 시작했다. 추위와 공포에 짓눌린 어린것이 끝내는
아파 버리는 것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 한데나 마찬가지인 움막 안
에 아픈 아이를 재울 수는 없는 것이다. 갑철은 홍기를 들쳐 업고 움막을 나섰다. 먹장구름
이 서쪽으로 몰려가고 있는 하늘에 언뜻 별이 빛났다.
25년 생에 쉰 번째 취직한 공장에서 첫 월급을 받아와 어머니 옆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
난 새벽에 포크레인 소리가 났었다. 그것은 이명처럼 먼 데서 다가왔고 차츰 또렷해지면서
바로 갑철이 잠자고 일어난 방문 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식구들은 혼비백산했고 그 와중
에 홍기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형과 형수가 가당찮게도 포크레인 앞에 두 발 뻗고 누웠고
갑철은 어머니와 홍기를 동시에 업어야 했다. 그 때 홍기가 세살이었다. 그 때 업어 보고 두
번째다.
산길을 다 내려와 철둑길을 건너서 가겟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어쩐 일이다요?”
가겟집 여자 순임이 이번에는 히힝 소리를 내지 않고 놀란 얼굴로 갑철을 바라보았다. 갑
철은 말없이 공중 전화 쪽으로 갔다.
“합록 택시죠? 여기 섬진강사랑 횟집인데요. 지금 와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택시 운전수는 알았다고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나다를까 금방 온다고 느리게 말한 합록
택시는 금방 오지 않았다. 순임이 홍기 이마에 조용히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갑철이
품에서 아이를 떼어냈다.
“놔둬요.”
갑철이 억양 없이 순임의 친절을 거절했다. 그러나 순임은 아랑곳없이 홍기를 번쩍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드렁가 버렸다. 갑철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날씨가 쌀쌀해선지 손님
도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구례에서 오는 막차가 가게 밖 도로에 멈춰 섰다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찻소리가 멀어지자 섬진강이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몸을 뒤채는 사람 소리처럼 아
주 가까이서 들려 왔다. 갑철은 담배 한 대를 더 피워 물었다. 담배 한 모금을 다 빨기도 전
에 가게문 앞으로 택시가 들어와서 빵빵 거렸다. 갑철은 급하게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고
나서 홍기를 불렀다. 순임이 입에 손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고는 밖으
로 나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택시를 돌려보내고 들어왔다.
“아니, 애가 아파서 병원에 가려는데 왜 택시를 돌려보내요?”
갑철이 언성을 좀 높여서 순임에게 따져 물었다.
“애기 자요.”
“자나마나, 아픈 애를 병원에...”
“약 멕여서 재워 놨응게 한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그만요.”
순임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갑철은 맥없이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색한 침묵을 여자
의 히힝 소리가 깼다.
“히힝, 아까 입학식 허고 올라올 때만 해도 괜찮어등만.”
“예.”
갑철이 내뱉듯이 대답했다.
“그런디 갑자기 왜 그러까?”
“병이란 것이 어디 갑자기 생깁니까? 아플 때 돼서 아프겠지요.”
여전히 불퉁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갑철을 힐끗 바라보던 순임이 술 한 병을 가져온다.
“히힝, 은어 좀 잡수어 볼라요? 참 맛있소.”
아닌게 아니라 이녁 몸도 으스스 한기가 도는 것이 영 남의 몸뚱이 같다. 더운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야 조금 풀어질란가 싶다.
“홍기가, 되었든가 보요.”
“되다니요?”
“아무래도 고됐는가 싶어요, 첨으로 학교를 간 것이.”
학교를 간 때문이 아니라 그럴 일이 있습니다. 소리를 꾹 누르고 그는 천연스레 술을 따
라 주는 순임의 얼굴을 얼핏 곁눈질로 본다. 훤한 이마 아래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눈매가
서늘하여 갑철이 가슴속에서 느닷없이 쿵 하는 소리가 난다.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게지, 싶
어 가만히 귀 기울이니 이번에는 짤랑짤랑 두부장수의 요령 소리 같은 것이 이녁 가슴을 때
린다.
철커덕철커덕 하는 기차 소리에 눈을 떴다. 동쪽으로 난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고 제 옆에
홍기가 누워 있다. 갑철은 발딱 일어나 앉는다. 아이구 큰일났구나, 싶다. 이곳이 순임이 집
이란 것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속이 쓰리고 머리도 좀 어지럽다. 숙취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홍기야, 홍기야.”
혼곤히 잠든 홍기를 거칠게 깨운다. 순임이 문을 연다.
“더 자게 놔두제 그러요.”
갑철은 순임이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은 채 홍기만 깨우고 있다. 슬쩍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내린 성도 싶어 순임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더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짤랑짤랑 울리도 종소리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는다. 사내를 유혹해 사는 인생, 순임에
게서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홍기야, 홍기야,”
홍기가 겨우 눈을 뜬다.
“홍기야, 학교 가자.”
딱딱딱딱 도마 소리를 내던 순임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밥은 먹여 보내야지라우.”
아이를 들쳐업고 나오며 갑철이 씹어뱉듯이 뇌까린다.
“필요없슴다.”
가게문을 나서니 강바람이 매섭다. 아침 해가 눈부신데 햇빛 속으로 성긴 눈발도 날린다.
구례에서 오는 첫차에 홍기를 태운다. 홍기는 허청허청 비틀거리며 차에 오른다. 그래도 학
교에 가라고, 움막에 가봤자 지금 집도 아니니 학교에나 가라고 갑철은 홍기를 차안으로 밀
어넣었다.
순임이 가게문 밖으로 나와 있다.
“뭐 낀 놈이 성질낸다더니 꼭 그 짝이구만이라. 집이들 때문에 나는 부엌에서 한뎃잠을
잤구마는...”
그 말 뒤에도 순임이 뭐라고 뭐라고 구시렁거리거나 말거나 갑철은 맥없이 푸푸거린다.
자신이 오해를 해놓고 씩씩거린 것이 낯뜨거워서.
뒤도 안 돌아보고 철둑길을 건너 산길을 올라챈다. 빈 속이 마구 울렁거리며 식은땀이 주
욱 등골을 타고 내린다.
“어이, 짐센. 어디 갔다 오는가?”
찬 햇빛 속에서, 성긴 눈발 속에서 동네 남자들 네 명이 아침 일찍부터 담을 쌓고 있다.
“어디 가서 자고 오는가?”
뱁새눈 남자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갑철의 위아래를 살핀다. 속으로 불쑥 불쾌한 마
음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내집 일을 해주러 온 자기보다도 나이 많은 어른
들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불쾌한 속을 접어 두고 인사부터 챙긴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지들은 자셨는지요.”
“지금 시간이 몇 신디 밥을 안 묵어. 아침이 아니라 새참때그만, 새참때.”
퍼뜩 정신이 든다. 맞는 말이다. 내 집 일 해주러 온 사람들한테 밥은 못해줄망정 새참거
리는 제공해 줘야 도리가 아닌가 싶다. 평생 일만 해오던 상일꾼들이라 담 쌓는 일은 신속
하게 진행되고 있다.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전국 각지의 어중이떠중이들
이 모인 공사판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갑철이 기분이 꽤 좋아진다.
“어르신들, 새참은 뭣을 준비해야 좋겄습니까요?”
기분이 좋아지자 술술 전라도말이 나와 준다. 깍듯한 서울말씨를 쓸 때는 어쩐지 뻑뻑한
표정이던 사람들이 금방 선선한 얼굴들이 된다.
“맣이 헐 것도 없어. 간단허게, 자네 형편대로 허는 것이제.”
“나는 담배나 한 갑 사다주쇼.”
“그러죠, 금방 다녀오갰습니다.”
“그러쇼.”
아침녁인데도 일은 반나마 진행되었다. 두사람은 어디서 퍼왔는지 붉은 황토흙을 이기고
두 사람은 이겨진 흙을 돌 위에 척척 얹으며 또 그위에 돌을 쌓고 하는 식으로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하는 모습이 갑철을 속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이따 홍기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흙내는 나겠지만 집이 다시 근사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갑철은 일꾼들의 새참거리리
를 마련하러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다. 산길을 내려올 때까지는 별 생각 없다가 철둑
길을 내려서는 순간 순임의 가게로 들어가는 것이 왈칵 두려워졌다. 아까 그다지도 매정하
게 그 곳을 빠져나온 것이 아무래도 캥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쭈뻣쭈뻣 가
게문을 소리없이 열었다. 손님이 들었는지 순임은 부엌에서 바쁘다.
“이봐요.”
“말허쇼.”
평소같으면 히잉, 뭔일이다요, 해야한다. 그러나 순임의 목소리는 냉랭하기가 섬진강에서
불어 오는 바람 그 자체다.
“빵허고 음료수 좀줘요.”
“가져가쇼.”
한사람앞에 한개씩 하면 어쩐지 야박할 것같아 여덟 봉지의 빵과 콜라를 비닐 봉지에 담
아든다. 값을 대충 계산하여 탁자위에 올려 놓고 가게를 나온다. 그 때까지도 순임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려러면 그러라지. 내 참 우스워서 철둑길을 넘으면서 혼잣소리로 중얼거
려 본다. 자기가 왜 그러는지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스럽다. 빵봉지를 메고 산길을 퍼떡ㅍ떡
달려오른다. 득의양양하며 일꾼들 앞에 비닐봉지를 펼친다.
“앗따. 새때거리 한번 거네.”
“푸지그만.”
겨우 삼백원짜리 빵에 콜라를 가지고 그러십니까, 하는 생각에 송구스러워진다. 눈치 없게
도.
“빵에다 콜라를 마셨드니 어찌 이상들 안허요?”
“글씨, 어찌 속이 들큰허니 영 개운하지를 못해서 말이여.”
“그렁게 말이시, 일이 잘 안되느만.”
“힘이 딸려서 이거 원.”
자기 딴에는 생각해서 한사람 앞에 두개씩 돌아가게끔 어덟 봉지를 사가지고 왔는데 빵을
먹은 사람은 단 두사람. 두사람은 아애 빵봉지를 밀쳐 두고 담배만 피워물고 맨입맛만 다신
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왠지 이상하게 일이 더디다 싶어질 때였
다.
“허허, 이러면 하루에 일 다 못하겄는디.”
“기계도 몸에 지름칠을 해야 돌아가는 것인디.”
“애기들도 아니고 빵이 뭣이여!”
일꾼들 중의 한사람이 성질이 나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화를 버럭 낸다.
“어이 젊은 친구 밥은 안 준가!”
“밥이요? 물론 드려야지요.”
밥을 하려면 일단 쌀을 안쳐야 하겠기에 부엌쪽으로 간다.
“어이 짐센 걸게 헐 필요도 없네. 그냥 간단허니 도야지고기 한 닷근에다가 막걸리 한말
이면 뒤집어써부려.”
순임이 가게로 다시 갈 수밖에 없다.
“부탁 좀 합시다.”
“뭔 부탁아요?”
“밥 좀 해주쇼.”
“뭔 밥이요?”
“일꾼들 밥이요. 돼지고기 다섯근허구 막걸리 한 말허구.”
순임은 한참만에 그야말로 한참만에 히힝, 그러지라 한다.
“고맙소.”
순임에게 밥을 부탁하고 나오는데 구례버스가 가게 앞에 멈추고 이어서 한 무더기의 아이
들 틈속에서 홍기가 맨 나중에 따라 내린다. 그런데 홍기 눈에 눈물자욱이 선연하다. 무슨일
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캐물어도 홍기는 대답을 안하고 급기야 갑철은 화가 나기 시작한
다.
“교감선생한테 맞아서 글지...쪼다야.”
아래한배미와 윗한배미 아이들이 침을 뱉듯이 뇌까리며 도망친다.
“정말이냐?”
“응.”
“왜.”
“복도에서 뛰었다고.”
“내 이런 개자식을! 그래 어떻게 맞았는데?”
“귀옆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단 말이야.”
“뭐야? 왜!”
이젠 정말로 불같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아까 말했잖아.”
“이런 개자식이 다있나.”
생각같아서는 지금 당장 학교로 달려가 교감이란 작자의 귀 옆머리를 똑같이 들어 올려주
고 싶지만 하는 수 없이 참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정교육이 아니다 싶기도 하다. 선생님욕을
아이 앞에서 절대로 하지 않는게 좋다. 라고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합록 주조장 차가 순임이 가게에서 멈춘다. 순임이 술주문을 한 모양이다. 차소리가 나자
순임이 가게에서 나오다 홍기를 보고 반색을 한다.
“운 기색이 있네.”
“선생자식이....”
아차 싶어 갑철이 얼른 입을 다문다.
“히잉 알겄다. 교감선생님이 머리크락 잡아댕겼제아?”
홍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순임이 단번에 알아채는 것이 교감 선생이란 작자가 한두 번 그
런 짓을 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내 이작자를,하고 갑철은 속으로 단단히 벼른다.
“홍기는 나두고 가쇼. 홍기 밥 먹여서 올려 보네면 그 때 내려와서 밥 가져가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으나 갑철은 말없이 홍기등을 가게안으로 떠밀고 나서 산길을 올라
갔다.
돼지고기 닷근에 막걸리 한 말로 간단하게 준비한 새참이 제공되자 일은 다시 빠른 속도
로 진행되었다. 돌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돌을 주워 올 요량으로 자루를 들고 산으로 올라
가려는데 마을위 폐교된 분교에 사는 안경쓴 애기엄마가 저만큼 지나가다가 인사를 한다.
인사만 하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의아하고
어색했지만 막바로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애기엄말 기다렸다.
“홍기아버님!”
갑철은 가만히 서 있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정정한다.
“삼촌입니다.”
“아, 그래요.”
여자가 반짝 놀란다.
“무슨 일이십니까?”
“집 고치나 봐요?”
“봄비에 담이 허물어 졌길래...”
“바쁘실텐데 간단히 말씀드릴께요. 이곳이 폐교된 지역이잖아요? 폐교된 지역에서는 원
래 교육청에서 통 학차를 제공하게 되어 있는데 이 곳에는 통학차가 없어서 대신 교통비를
지급받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폐교된 후 이사 온 애들이라고 교통비가 지급되
지 않아서 교육청에다 문의를 해놨거든요. 홍기도 저희 아이들하고 같은 입장이 된 것 같아
서 홍기아버님. 아니 홍기삼촌하고 같이 이 문제를 논의해 보고 싶기도 하고 만약 교통비를
지급해주지 않으면 같이 교육청에 가서.”
말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이 미안했던지 여자가 언뜻 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아.예에.”
얼떨떨한 기분에 예에 하기는 했지만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오지는 않는다. 교통비라 드러
면 교통비를 타가지고 학교를 왔다갔다하면 차비가 들지 않겠구나. 그러면 나쁠 것이 없지.
그렇지 나쁜 일은 아니야.
늘 일이 생기기만 하면 나쁜 일이었다.좋은 일은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따지게 된다. 이것이 좋은 일인가. 나쁜일인가 하고 이번일은 나쁜 일이 아니야
좋은 일이야. 이 집을 얻은 것이 좋은 일이었던 것처럼.
갑철이 산에서 자루 가득 돌을 가져왔을 때에는 이미 완벽하게 담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
서 갑철이 주워온 돌은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일은 끝났고 그래서 모든 게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다.
“어이 어떤가? 좋제?”
“예에 정말 좋습니다.!”
정말 좋아서 좋다고 참으로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맨입으로 좋다고 허면 쓰겄는가?”
이제 그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채는 갑철이었다.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나는 말이시시 아까 자내가 사온 콜라보다는 암바싸가 더 좋드라고 그것허고오마싸리뿌
한갑.”
“또요?”
“거. 나는 말이시. 섬진강 사랑 횟집에서 참게탕 한 사발에다가 밥 한 술 묵고 그 집방에
있는 노래방 기계로다가 노래나 한 곡조 뽑아 봤으면 헌디 어째? 되겄는가?”
“좋습니다. 가시죠들.”
갑철은 흔쾌히 일꾼들을 순임이네 가게로 모셔간다. 외상달기가 자존심 상해 비상금의 절
반을 일꾼들 밥값, 술값으로 떼어 놓고 보니 배보다 배꼽이 큰 일이 되었다는 계산이 그때
사 나온다.
“어이 자네 여기 오기를 잘 했네 어디를 가보쇼. 여기만큼 인심 존디가 없을 것이네. 자
네도 알다시피 어디를 간들 품삵도 안 받고 남의 일 해주는 데가 있던가?”
“맞습니다.”
고개가 절로 살랑살랑 흔들어지는 것을 갑철은 힘을 써서 자제하느라 목이 뻣뻣해져 온
다.
“어이 순임이.”
오매불망 노래방 기계가 자기 차지가 될 것을 기다리느라 아까부터 애가 타는 일군이 순
임을 부른다.
“저기 노래방 기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여?”
“히힝 학교 선생님들이구만이라.”
“선생님들?”
“예, 오늘 단체 회식이 있다고 오셔서들 기분 풀고 계시는갑서라우.”
“선생님들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해도 너무 해묵고 있구만이.”
노래방 기계에다. 노래 한 곡조 뽑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일군이 참다 참다 못하여 선생들
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술이야 밥이야 거나하게 포식한 일꾼들은 끝내 노
래방기계를 차지하지 못하고 산길을 비척이며 올라가고 갑철은 상위에 어지럽게 널림 부스
러기 음식과 부스러기 술을 마신다. 섬진강 물결 몸 비트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오고 선생들
의 소음이 물결소리를 덮는다
“윗한배미 사는 안해성이 자모가 말이여. 교육청에 신고를 했든 갑더라구요. 교장 선생님
은 그것이 불쾌했던 거여. 왜 학교에다가 먼저 문의를 허고 상부기관에다가 잘난드키로 턱
문의를 해가지고 우리 교장선생님 입장을 난처하게 했느냐 그거여. 그래가지고서는 교장 선
생님은 날 보고 왜 그 사실을 진작 파악 못했느냐고 한 구사리 한 것이재. 그 소릴 듣고 막
나오는 참인디 왠 쥐알만한 녀석이 내 앞을 퍽하니 미끄러져가더란 말이시 내 이놈 잘 만났
다. 허고는 그놈 귀밑머리를 잡고 하늘로 추켜올렸는디 선생인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따 그
놈 눈이 겁나게 무섭데. 그놈이 고아원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는 놈이랑만...”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 갑철은 그것만을 생각했다. 아아. 떠날 것인가, 말것인가. 아니야
따나더라도 저놈의 귀밑머리를 한번 들었다 놓고는 떠나야 할 것인데. 그래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 비척거리는지. 아 저놈의 머리를 어떻게 한번 들었다 놔야 할 것인데. 와장창창 상
엎어지는 소리가 나고 우당탕탕 달려온 순임의 커다란 젖가슴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는 것
이 느껴졌다. 선생들의 노랫소리가 섬진강사랑 횟집 지붕위로 낭자하게 퍼지고 있는 저녁이
었다.
제 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바람이 분다
김영하
1968년 경북 고령 출생, 연세대 경영학과 동대학원 졸업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
1996년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제1회 문학동네 신인 작가상 수상
1997년 창작집 ‘호출’출간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분다, 바람이 분다. 다섯번을 되뇌고 하늘
을 본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를 끈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흐른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은 가지 않는다.
불을 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가 온다. 한 때 나를 미치게 했던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에 머리를 짧게 잘라 더 고혹스
러워진 그녀가 온다.
1
훼밍웨이의 소설 킬라만자로의 표범을 읽고 있었다. 그 소설엔 왠지 커피가 어울릴 것같
아 한 잔 끓여 마시면서 하지만 커피가 채 식기도 전에 그 소설을 다 읽어 버렸다. 나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표범은 왜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얼어 죽었는가? 소설은 그 이유를 설명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소설은 아프리카의 뜨거운 대지와 만년설의 킬리만자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면서 하찮은 사고로 인생을 망친 한 바람둥이의 말로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생각했다. 왜 표범은 킬리만자로의 정상까지 올라가 얼어죽고 말았는가 왜 돈많은
유부녀를 유혹한 바람둥이는 사소한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는가. 왜 헤밍웨이는 킬리만
자로의 표범처럼 우아한 죽음을 바람둥이의 사고사따위에 비교하는가. 왜 그의 문장은 그토
록 간결하고 명료한가 그것은 소설의 문장인가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오르기 위해 나는 석달동안 새벽신문을 돌렸습니다”
한 사진 현상업소의 광고문구 사진작가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는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
다. 정말로 그는 석달동안새벽신문을 돌렸을 것이다. 돈보다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였겠지
만 나는 그가 부러웠다. 꿈꾸는 일을 위해 석달을 하루같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가 경이로
왔다. 나였다면 단 일 주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은그런 사람들 때문에 굴러간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세상에서 슬쩍 비켜서 있었다. 달려오는 사람을 피하듯이 몸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그런 자세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 평화로운 세상으로
그녀가 달려와 슬쩍 비켜설 틈도 없이 내게 충돌해버렸다.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다 쓰잘데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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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도 없고 낮도 없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들 사이 식객처럼 자리잡은 단독주택지구의 한
상가의 지하에서 사는 나에게는 반도 없고낮도 없다. 직장이면서 집인 이 습한 공간까지 기
어들어 오는 빛은 없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으나 막아버렸다. 영화 포스타보다 조금 큰 들창
그 빛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석엔 작은 침대, 그 옆으로 이단짜리
싱크대가 놓여 있었다. 책꽃이로 형식적인 칸막이를 해두었지만 애당초 그런 구분이란 무의
미한 공간이다. 영화 캘리포니아의 포스터가 싱트대 옆에 붙어 있다. 눈을 가린 긴 머리카락
사이로 백인남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싱크대에서 다섯 발자국쯤 걸어가면 사무용 책상 두개가 벽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그 위
엔 의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와 스케너 등속이 자리잡고 있다.
소형 스피커 두개에는 컴퓨터가 연결되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TV와 비디오도 비슷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컴퓨터가 없으면 음악도 영상도 없다.
그러니 내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물론 자기 전에 마지막
으로 하는 일도 그것을 끄는 일이다. 창이 없는 이방에서 컴퓨터는 내 창이다. 그 곳에서 빛
이 나오고 그 곳에서 소리가 나오고 그 곳에서 음악이 나온다. 그 곳으로 세상을 엿보고 세
상도 그 창으로 내 삶을 훔쳐 본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던진 말이다. 나는 조금 놀랐다. 몇명의 여자들이 이 방을 방
문했지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라는 말보다 훨씬 좋았다. 그
녀는 정말로 이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완전하게 그녀는 이 곳에 젖어
들었다.
그녀를 구한 곳은 컴퓨터 통신망의 구직란이었다. 그 무렵 나에게는 사람이 하나 필요했
다. 나는 무심히 엔터키를 쳐가며 올려진 자료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공간이 하나 주어지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닮아간다. 구직란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이 대동소이 약간
의 관장을 섞어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는데 그 내용이란 컴퓨터통신의 특성상 컴퓨터와 관련
된 것이 많았다. 워드프로세서 1급 자격증 소지 한글 400타, 영문 250타 C 프로그래밍 할
수 있어요 워드 입력해 드려요 등등등 그 천편일률 속에서 그녀는 빛났다.
일자리를 구해요 아무것도 잘 하는게 없어요 워드는 조금 치고 컴퓨터 통신은 채팅만 잘
해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못해요 잘 웃고 아주 가끔 우울해요 종교도 없고 침구도 없어요
야근할 수 있지만 토요일은 일하고 싶지 않아요 영화를 좋아하고 소설을 싫어해요 바흐나
너바나를 좋아해요 조용한 곳이면 좋겠어요 호출기로 연락주세요
호출하자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돈을 많이 주지는 못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잘라 말하
였다. 그녀는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돈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생각을 해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일을 한다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둘러댔다. 시디롬 홈쇼핑업체지요 아직 직원은 없습니다. 전화로
주문받고 직배로 보내니까 직원은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선선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3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마나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나는 오
년전에 다 겪어 버렸다. 그 후로는 사람보다는 책이 책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그림이 그
림보다는 게임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그녀는 아침 일찍 나타났다. 찾기 힘든 곳이었는데 용케 찾아온걸 보면 그리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이었던지라 그녀의 목엔 빨간
머플러가 갑옷처럼 둘러 있었다. 들어오세요 한동안을 멍하니 입구에 서있던 그녀가 천천
히 계단을 내려오며 외투와 머플러를 벗었다. 그러자 그 속에 감춰져 있던 긴 머릿단이 흘
러 내렸다. 알이 작은 안경엔 김이 서렸고 그 때문에 계단을 내려서며 잠시 멈칫거렸다.
나는 그녀를 위해 커피를 끓여 내놓았고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쩐지 그녀가 아
주 멀리서 찾아온 친구로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그녀가 먼저 입을 땠다. 여
기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라 해봐야 책상과 의자 컴퓨터가 있
을 뿐이지만 그녀는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날마다 갈 곳이 생겨서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이름은 송진영이라고 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 얼굴엔
아직 주름이 없을 나이였다.
송진영 씨가 할 일을 알려드리지요. 전화를 받아주고 시간나면 가끔 통신망에 광고를 올
리면 되는거에요. 채팅을 해도 좋아요 채팅하다가 우리 제품이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으면
물건을 팔면 됩니다. 프로그램 시디나 게임시디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있을거에요. 이게 우리
제품 가격표에요. 용산보다 훨씬 싸니까 사겠다는 사람은 많을 거에요. 가끔 우체국에 나가
서 물건을 부치거나 하는 일도 있을거에요.
가격표를 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슬쩍 웃었다. 이거 불법이지요? 불법복제해서
파는거 맞지요? 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래요 하지만 진영씨는 안전할 거에요. 직접적인
거래는 다 제가 하니까요. 만약 무슨일이 생겨도 몰랐다고 하시면 되요 나는 다소 더듬거리
며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할게요 의리없다고 나중에
욕하지나 마세요
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안전하게 일한다. 파고다 공원에 나가 할아버지들에게 오
만 원씩을 주고 통장을 개설한 뒤에 그것으로 거래한다. 프로그램 불법 복제자 따위를 잡자
고 경찰이 폐쇄회로 테이프까지 조사하지는 않겠지만 만약을 위해 카메라가 없는 지하철의
현금자동지급기를 이용해 돈을 인출한다. 역시 그 할아버지들의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으로
통신상에 아이디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꾼다. 통신회사들의 전화접
속 경로 추적이 가장 까다로운 장애지만 그것도 인터넷으로 몇군데를 돌라다녀 흔적을 지운
후에 텔넷으로 접속하면 되니깐 귀찮을 뿐 큰 장애는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걸 그녀에게 당
장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했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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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빛도 없는 방에서 하루종일 함께 보내게 되었다. 내가 시디롬 리코더로 계속 원본
을 복제하고 있으면 그녀는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채팅을 했다. 가끔 그녀가 웃었고 보기 좋
았다. 시간이 나면 나는 컴퓨터 게임에 몰입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가 어깨 너머로 그
걸 구경했다. 처음엔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혼자 하는 데 너무 길이 들어 있어서였을 것이
다. 그러다가 그녀도 게임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격투사가 되어 서로 싸우기도 했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 함께 폭격에 나서기도 했다. 가끔 그녀는 늘씬한 미녀로 변신하여
나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즐거워했다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맞아 나가떨어지는 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화면속에선 피가 낭자해도 화면밖에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게임만이
반복됐다.
왜 이렇게 살아요? 어느날 그녀가 물어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나는 조금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화면속에 고정되 있었고 손은 열심히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었
다.이렇게 사는게 어떤건데요? 나 역시 같은 자세로 되물었다. 화면속의 내가 그녀의 턱을
갈겼다. 그녀의 에너지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두 걸음쯤 물러나 앞차기와 돌려차기로 반격을
가해 왔다. 나는 재주를 넘어 뒤로 피했다. 내가 사장님이면 이렇게 안 살 것같아서요. 그녀
가 다가와 업어치기로 나를 메치고는 다시 발길질을 해댔다. 화면속의 나는 피를 흘리고 있
었다. 그럼 진영씨는 어떻게 살건데요?저요? 저라면 이 컴퓨터 같은 거 다 팔아서 여행을
갈거에요. 사무실 보증금도 빼구요 그 때 화면속의 나는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난타하고
있었다. 진영씨는 어딜 가고 싶은데요? 내 주먹질 때문에 그녀의 에너지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곧 결판이 날 것 같았다. 에너지바는 빨간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저요? 저라면 세계일주를 하겠어요 요새 이백만원이면 세계를 다 도는 비행기표를 살 수 있
어요 싼거는 백만 원 짜리도 있어요 단 제한이 있어요 한 방향으로만 돌아야 한다는 거에
요. 여기서 미국 미국에서 유럽 유럽에서 방콕 방콕에서 다시 한국 그런 식이에요 한번 떠
나면 지구를 한 바퀴 다 돌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거지요. 그렇게 일년쯤 한 방향으로만
가는거에요 나는 오른발로 그녀의 가슴을 지른 후에 그녀를 업어서 멀리 던졌다. 그녀는 비
명을 지르며 쓰러져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게임은 끝났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일에 열중했
다.
그날이후로 나는 종종 그녀와 함께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혼자서 떠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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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결근을 했다. 함께 일을 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드문일이었
다. 사람을 기다려 본적이 언제지? 나는 멍하게 앉아 카드 게임을 하면서 햇수를 꼽고 있었
다. 아주 오래 전에 나도 누군가를 기다려 본 일이 있었다. 추웠다는 게 기억나는 걸로 봐서
겨울이었고 실외였을게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그 사람을 증오하는 자신
을 증오하며, 증오하면서도 증오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실없음을 증오하며 나는 아주 오래도
록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사장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아 좋아요 언젠가 그녀가 그렇게 말한적이 있었다. 나는 후회
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대학에서 추운나라의 언어를 전공했
다는 것과 컴퓨터를 약간 다룰 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력서에 기재된 전화번호와 주소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나는 카드게임을 시작했다. 컴퓨터의 손놀림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는 신속하게 카드를 배열하고 거두어 간다. 기다릴 필요는 없다. 잘 섞여 있는 숫자들을
숫자 순서대로 배열하면 게임은 끝난다. 어렸을 적, 골방에서 할머니가 홀로 반복하던 화투
놀이와 닮아 있다. 목표는 오로지 다시 시작하는 것 난관이 있다면 원하는 패가 나오지 않
는 것 뿐이다. 원하는 패가 나와서 질서정연하게 다 맞아 떨어지면 게임은 끝난다. 그럼 카
드를 다시 섞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어쩌면 ‘원하는 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패’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
다. 이 게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한 패 한 패 뒤집는 것일지도. 할머니는 결국 화투를 떼
다가 가셨다. 쓰러진 할머니의 얼굴 옆에는 꽃들이 만발했으리라. 구월 국화, 삼월 벚꽃, 오
월 난초. 할머니에겐 꽃이 아니라 그저 9, 5, 3을 의미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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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틀 후에 출근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한 흑갈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차려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드벤처 게임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처럼 그녀는 매
혹적이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은 그녀가 나를 향해 커피를 마
시겠느냐고 물었다.
송진영 씨. 아무리 허술해도 여기는 회사고 당신은 일 주일에 오일은 여기 나와야 하고
만약 그러지 못할 때는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낯선 장면이다. 내가 화를 내다니. 감정을 드러내다니. 그건 내가 아주 오래전에
포기한 의사 소통 방식이었는데.
송진영도 그걸 간파했다. 사장님은 화 같은 거 안 내실 것 같았는데, 아니네요. 그녀는 웃
었다. 그녀가 웃어서 모든 것이 우스워져 버렸다. 그녀가 오지 않은 이틀 동안 무수히 모였
다가 흩어졌던 스페이드와 하트, 클로버와 다이아몬드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도시락을 주문해 점심으로 먹었다. 조미료로 범벅된 밑반찬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고개를 들자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누군가를 바
라보는 일에는 감정이, 때로는 감상이 개입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연인이나 가족이
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길한 징조를 읽은 셈이었다. 읽
었으면서도, 나 역시 한참 동안 그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식물을 다 씹은 그녀가 다시 고
개를 떨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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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떠나요.
길고 따뜻한 정사가 끝난 후에 그녀가 또박또박 힘을 실어 말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
커에선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첼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콤팩트 디스크의 발명이 이런 일
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이런 CD가 좋다. LP의 추억 따위를 읊조리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
하지 않는다.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것이고, 추억을 사랑하는 자들은 추억이 없는 자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산울림과 들국화의 앨범들을 부숴 버리면서 아버지는 말했다. 그건 음악
이 아니라 소음이다. 천박하다. 그런 걸 듣겠다고 용돈을 써버리다니. 아버지의 진공관 앰프
로는 바그너가 출렁거렸지만 실제로 진공관 속에서 원심 분리되던 이는 다름 아닌 아버지
자신었다.
오래 전부터 CD의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다 보면 CD에도 기억이 깃들인다.
음의 신로를 1초간에 44,100으로 분해하고 그 하나하나의 크기를 약 65,000단계의 16비트 디
지털 숫자로 나누어 기록하는 그 미세한 틈 한구석에도 온기가 남아 삶을 데운다.
갓 스물을 넘겼을 때, 한 여자가 보낸 결별의 선물을 기억한다. 우리는 술에 취한 것처럼
만났고 숙취에 절어 싸우고 맨정신이 되어 헤어졌다. 히스테리 증세가 조금 있었던, 그래서
매력적이었던 여자였다. 그녀가 보낸 마지막 선물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을 때, 나는 쉽사리
그 봉투를 뜯지 못했다. 우체부에게서 받아든 우편물의 배는 불룩했고 만질 때면 그 속에서
뭔가 불규칙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개봉했을 때, 내 발 밑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린 것은 그녀를 만날 때면 자주 들었던 음악의 LP음반이었다. 손으로 부러뜨린 것
도 아니고 가위로 잘게 잘려 있었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무서웠다. 우리 떠
나요. 그녀는 다시 반복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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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퇴근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기도 했고 비디오를 빌려 오기
도 했다. 소시미적인 일상이 예고 없이 내게 찾아왔다.
어느 날, 담배를 사러 가는 길에 한 남자를 보았다. 색이 바랜 검은 반코트를 입고 사무실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남자의 뒤로는 삼층짜리 건물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남자를
더 추레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눈빛이 나를 쫓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남자는 담배
가게로 걸어가는 나를 따라왔다.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결찰이든 아니든 이미 이 곳
까지 와 있다면 모든 걸 알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남자는 돈을 치르는 내 뒤에 서 있었다. 얘기는 좀 하지요. 남자는 내 가슴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맥주 두 병을 사서 가게 앞 파라솔 아래에 앉았다.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거품이 넘쳤다. 술을 받아 마시는 걸 보면 경찰은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앉자마자 내가 그에게 물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꺼냈다.
여직원이 하나 있지요? 미스 송이라고 부르나요? 나는 굳이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부
르지는 않습니다. 남자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개 한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털이 빠진데다가 다리를 절고 있었다. 늙고 병든 개였다. 입춘을
갓 넘긴 시절의 차가운 대기가 발치를 훑고 지나갔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종이컵을 집어드
는 남자의 왼손 새끼손가락엔 한 마디가 부족했다. 남자는 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저희 애엄
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가 오래 돼서 이렇게 찾아와 봤습니다. 출근은 했습니까?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엔 초조가 묻어 있었다. 송진영 씨가 결혼한 줄은 몰랐습니다. 말을 안
했으니까요. 어느 새 내 손은 맥주를 찾아 종이컵에 붓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익숙한 솜씨
로 가면 상자를 들어 가게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애엄마더러 오늘은 집에 꼭 다녀가라고
전해 주십시오. 남자는 종이컵을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 여부 따위를 알고자, 이런 메시지 따위를 전하고자 나를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챌 나이가 되었다. 직접 만나서 말씀하시죠. 내 종이컵도 쓰레기통으
로 들어갔다. 남자는 다시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다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투로 그는 내 어
깨를 툭툭 치더니 큰길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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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거짓말이에요.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나하고 가까워 보이는 남자들에게 항상
하는 소리예요. 신경쓰지 마세요.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게임에 열중
했다. 나도 그녀 옆에 앉아 함께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보물을 찾아
마법의 성으로 떠났다. 불을 뿜는 용가리와 괴물들을 차례차례 처치했다. 그럴수록 우리의
무기는 점점 강력해졌다. 그녀는 칼로, 나는 처로티로 마법사와 괴수들을 무찔렀다.
한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다른 사람이 가서 도왔다. 그런 남자 있으면 피곤하지요? 내 철
퇴가 용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까 그 남자 손 봤어요? 여자가 용이 흘린 보물을 주었다. 에
너지가 최고로 상승했다. 박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내 머리를 치고 날아가 버렸다. 내 에너
지는 줄어들었다. 칼을 더 굳게 움켜쥐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칼로 자른 거예요. 엄마는 기절하고, 하여간 난리
가 났었어요. 피가 많이 났어요. 마법사가 그녀의 칼을 빼앗고 공격해 왔다. 그녀를 뒤로 빠
지게 하고 내가 마법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마법사는 불을 뿜었다. 그의 목을 잘라야만 이 코스를 통과할 수 있다. 칼을 되찾
은 그녀까지 가세하여 우리는 마법사의 목을 노렸다. 박쥐들이 날아왔고 정신이 혼란했다.
마법사는 점점 더 뒤로 물러섰다. 나는 철퇴를 휘두르며 마법사를 추격해 들어갔다. 컥, 하
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고 그녀만 남았다.
함정을 뛰어넘은 그녀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마법사의 머리를 갈랐다. 레벨 2가 끝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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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몸 위에 올라앉은 그녀가 다시 나를 채근
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리를 조였고, 더없이 안온했다. 함께 떠나고 싶어요. 한번 떠나
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어요. 남미와 로키와 케냐, 긔고 이
집트를 가는 거예요. 네팔에선 트래킹도 하고 치앙마이에선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누비는
거예요. CD복제 따위는 잊어버리구 말이에요. 비행기값을 빼고 오백만 원이면 육 개월쯤은
넉넉히 돌 수 있대요. 천만 원만 있으면 일 년은 문제 없구요. 나도 돈이 있어요. 월세 보증
금을 빼면 되거든요.
나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광고를 올리고 아침이 되면
지웠다. 낮에도 게시되어 있으면 경찰이나 저작권 협회의 눈에 띌 우려가 있었다. 주문이 몰
려들었다. CD한 장에 온갖 프로그램이 다 들어 있는데 만 원, 이만 원이라면 혹하지 않을
사람은 적었다. 삐삐가 하루 종일 울려 댔고 우체국과 은행을 부지런히 오갔다. 잠이 부족했
다. 게임 CD도 많이 나갔다. CD리코더는 분주히 복제품을 ‘구워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오십만 원어치를 팔아치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엔 하루 평균 오만 원이면 족했다. 그녀를 고용한 후에도 십만 원이면 넉
넉했다. 하지만 떠나야 했으므로, 나는 갑자기 성실해졌고 그러자 돈이 굴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돈이 모이고 일이 부누ㅈ해질수록 그녀가 우울해지는 날들이 많았다. 그녀는 낮에 일했고
나는 밤에 일했다. 건물주를 만나 사무실을 빼겠다고 말했다. 보증금은 다음 사람이 드러와
야 주겠다고 했다. 부동산업자 예기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이 어둡고 침침한 공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공간. 떠난다는 일이 처
음으로 두려워졌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왜 눈 덮인 정상에서 얼어 죽었는가, 나는 다시 생
각하게 되었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기 위해 석 달 동안 새벽 신물을 돌린 남자와 나는 무엇
이 다른가. 다리를 불구의 비둘기들이 청계 고가 아래에 살고 있다던데. 왜들 그렇게 살아가
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런 돌아봄은 잠깐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일에 열중했다.
이미 미세한 균열이 내 삶을 흔들어 놓았고 나는 떠난다는 것말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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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엔 점점 더 그녀가 많이 출현했다. 정체 불명의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를 빼았아가
는 흉몽 뒤엔 그녀와 함께 카리브 해안을 거니는 류의 꿈들이 이어졌다. 미래도 과거도 생
각하지 않던 내가 계획을 시작했다.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우리는 함께 여행
사에 갔다. 지도를 샀고 대형 서점에 가서 여행 안내 책자르 구입했다. 지도를 펴놓고 도시
마다 동그라미를 치며 일정을 짰다. 그건 참으로 행, 복, 한, 일이었다. 지도 위엔 우리가 가
야 할 도시와 산들이 냉정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우리, 정말 가는 거예요? 그녀는 몇 번이
나 내게 물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우린 빈털터리가 되어 있을 텐데. 그녀의 심중을 떠보면
그녀는 활짝 웃어 나의 심려를 털어 줬다. 또 이렇게 살면 되지. 임대료가 싼 지하실 하나
얻어서 조금만 벌면서 살면 되잖아요. 가끔 소시지 안주삼아 맥주나 마시면서.
우리는 여행 가서도 그녀가 좋아하는 바흐와 너바나를 듣기 위해 소형 워크맨을 샀다. 일
제였고 성능이 좋았다. 두 개의 이어폰을 동시에 연결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탈 때, 우리는 하나의 음악을 함께 듣게 될 터이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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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킬러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예정되어 있다. 그 실수란 나약함 때문에 빚어지
므로 그건 인간 된 자의 숙명이다. 그 단 한번의 실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게 하
드보일드의 문법이다. 킬러도 못 되는, 그저 세상에서 조금 비켜 섰을 뿐인 나 같은 인간에
게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 나는 그 룰을 어긴 셈이었다. 한 남자가 한꺼번에 열 장의 CD를
주문했을 때는 의심했어야 했다. 게다가 그가 직접 만나서 받기를 요구했을 때는 더더욱 그
랬다. 하지만 그런 손님은 가끔 있어 왔고 별 탈은 없었다. 계좌로 입금하면 즉시 발송하겠
다는 불법 복제업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열 장씩 사는 사람은 드물
었다.
어느 대학 학생회관까지 나갔다. 일은 단순했다. 나는 CD꾸러미를 넘겨 주었고 그는 대충
훑어보고는 돈을 건네 주었다. 그는 간단하게 몇 마디를 물어왔다. 장사가 잘되냐는 정도 이
야기였고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그는 내가 통신망에 게시한 가격표에 없는 물
품 중에서 몇 개를 구해 달라고 했다. 해보겠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며 연
락 달라고 했다. 그리곤 헤어져 서로이 갈 길로 갔다.
송진영을 찾아왔던 남자는 그 뒤로도 계속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
내지는 않았다. 오직, 나에게만 슬쩍 자신의 존재를 내비치고는 사라졌다. 이빨을 드러낸 개
처럼 그가 으으렁거리는 것 같았다. 잘려 나간 그의 새끼손가락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기 위해 석 달 동안 새벽 신문을 돌렸다는 남자와 그는 무엇이 다른가.
또 나와는 무엇이 다른가.
며칠 후, 우체국에 다녀오니 사무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전선들이 흩어지고 끊어져 있
었고 컴퓨터와 장비, CD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처음에 나는 도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
지만 도둑이 CD따위를 가져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건물 경비원을 만나자 분명해졌다. 경
찰들이 다녀갔고 그녀를 연행해 갔다고 경비원은 전했다. 경찰이 이 사무실까지 알 수는 없
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이 곳에서 거래를 한 적도 없거니와 통신망 등에 주소
를 노출한 적도 없었다. 대번에 나는 손가락이 잘린 남자를 의심했다. 지하에서 뛰쳐올라오
니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남자가 그 앞에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당신이지?
당신이 한 짓이지? 그러자 남자는 오히려 내 멱살을 거머쥐었다. 애엄마 어딨어? 우리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금세, 아주 빠르게, 나는 그가 한 짓이 아님을 알았다.
13
다음 날 나는 변호사를 고용했고 그와 함께 경찰에 출두했다. 오백만 원쯤 변호사에게 준
다 해도 풀려나기만 한다면 아깝지 않았다. 떠나야 했으므로.
경찰서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처음 한동안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
다. 그녀의 긴 머리는 거추장스러워 보였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게 CD를 샀던 형사가 앉아서 웃고 있었다.
요새 장사 잘돼? 경찰다운 유머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다 이야기했다. 변호사
가 함께 온 덕분에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송진영도 바로 석방되지는 못했다. 경찰의
불기소 처분을 받고서야 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경찰서를 나설 때, 언뜻 손가락이 잘린 남
자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제지를 받았다.
형사는 일사천리로 조서를 작성해 갔다. 함정 수사였다. 그가 건네 준 전화 번로로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번호를 추적했고 그것으로 모든게 완료되었다고 했다. 저작권법 위반에
금융 거래법 위반이 추가됐다. 마지막으로 조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미처 도장을 준비
해 오지 못한 나는 지장을 찍고 구속되었다가 변호사가 신청한 적부심으로 다음 날 풀려났
다. 벌금 액수가 상당할 것이라고 일러 주는 것을 변호사는 잊지 않았다. 남자가 받았다. 나
는 그 목소리를 알 것 같았다. 송진영 씨 부탁합니다. 남자도 내가 누군지 알것이었다. 잠깐
만 기다리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어요. 무심한 대꾸가 돌아
왔다.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어쩐지 이런 날이 꼭 올 것만 같았어요. 처음 그 곳에 들어갈
때 부터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꼭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 같았구요. 당신이 나갈
때마다 겁이 났어요.
14
손가락이 잘린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여자는 잘 있다고 했다. 컴퓨터로 채팅과 게임을
하며 세월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게임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연인들
처럼 극장에도 가지 못했고, 공원을 거닐거나 동물원의 원숭이도 보지 못했다. 멋진 식당에
서 밥을 먹지도 못했고 카페를 전전해 보지도 못했다. 우리가 함께 한 일이라고는 마법사들
을 무찌르거나 서로 격투를 벌인 일뿐이었다. 배달된 중국 음식과 도시락, 찌개백반 따위가
우리가 함께 먹은 모든 것들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회전돌려차기를 할 때 그녀의 얼굴에
는 득의만만한 웃음이 흐르곤 했었다. 마법사의 목을 자를 때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힘
을 너무 주는 바람에 키보드가 부서지는 줄 알았었다. 내게 어울리는 추억이란 그런 것들이
었다.
손가락이 잘린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네 살 된 아들이 있다고 했다. 추운 나라의 언어를
전공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 했다. 아들은 뇌성 마비를 알고 있다 했다. 이혼한 지 이년째라
했다. 나는 새로운, 하지만 별로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 남자의 말도, 여자
의 말도 반쯤만 믿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손가락을 잘랐을 것이다. 여자는 그 남자
와 결혼했을 것이다. 추운 나라의 언어도 배웠을 것이다. 뇌성 마비를 앓는 아이는 그 여자
의 아이가 아닐 것이다. 둘은 이혼했을 것이다. 여자는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 남자가 다녀간 뒤 여자는 통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 왔었다. 편지를 보다가 불
현듯 그녀의 글씨체가 궁금해졌다. 언제나 깔끔하게 인쇄된 워드프로세서만 그녀의 글을 보
아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궁금해했을까. 내 글씨체를.
우리, 다음주에 떠나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하고 있거든요. 제
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가려서 말이에요. 어시아에 가면 카자흐 노래를 가르쳐드릴게요. 남자
가 부르면 훨씬 멋지거든요. 그곳에 계속 계신다면 찾아갈게요. 이젠 정말로 떠나는 거예요.
그 남자가 당신에게 갔다는 거 알아요. 그 남자를 믿지 마세요.
나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사무실은 빠졌고 보증금도 돌려받을 예정이다. 남은 집기를
모두 팔아치웠고 비행기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러면서도 나는 무연히 게임을, 또 게임을 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
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지하실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게임을 한다. 게임을 한
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석 달 동안 새벽 신문을 돌릴 팔자는 아니었던 것같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 만년설이 쌓인 정상까지 기어올라가 죽은 까닭을 다시 생각한다. 아마도, 바람이 불어서
였을 것이다. 마사이 초원에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고 또 바람이 불어 표범은
무료했을 것이다. 사냥을 하고 사냥을 하고 사냥이 하고 사냥을 하다가 지루해졌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백인 남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내일이면 나는 떠난다. 떠난다. 떠난다.
떠날 수 있다. 그녀가 없어도 떠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게임 따위는 집어치울 것이다. 나
는 컴퓨터가 깔아 주는 카드를 순서대로 맞추어 가면서 계속 되뇌고 있다. 카드들은 벌써
수십 번이나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었다.
사방이 꽉 막힌 이 지하실로 어디에서 이렇게도 바람이 불어 오는 걸까. 바람이 분다. 바
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분다.
제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빈 수레 끄는 언덕
김한수
1965년 전남 장성 출생
1998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성장’으로 등단
1992년 소설집<봄비 내리는 날>출간
1995년 장편<저녁밥 짓는 마을>출간
1997년 장편<하늘에 든 집>출간
빈 수레 끄는 언덕
보름째 계속되는 도시 가스 공사로 동네의 길이란 길은 남김없이 엉망이 되었다. 이른 아
침부터 해거름까지, 포크레인을 동원해 닥치는 대로 아스팔트를 뜯어 내고 구덩이르 파놓는
바람에 이건 숫제 온 동네가 먼지 구덩이에 들어낮은 꼴이었다. 발걸음만 떼어 놓아도 먼지
가 풀썩거렸고 야채 트럭이라도 한 대 지나가면 부옇게 흙먼지가 일어 앞을 볼 수가 없었
다. 뿐만인가, 덤프 트럭 오가는 소리며 공룡의 울부짖음 같은 포크레인의 엔진 소리가 온종
일 끊이질 않아 땅거미가 깔릴 무렵이면 골이 다 지끈거렸다. 특히 포크레인에 정착된 정이
아스팔트를 까부술 때, 타타타타…하고 귓전을 쪼는 파열음은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포크레인 삽날에 수도관이 파열되어 때아닌 물난리를 겪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도로를 숫
제 헤집다시피 파헤쳐 놓은 터에 수도관까지 터지고 나면 이건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더욱
이 안내 공고문 하나 없이 포크레인과 덤프 트럭을 앞세워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주민들은 내일은 도 어디를 파제끼려나,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공사가 속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저러다 가스라도 터지면 여기 사람들 다 죽지.“
덤프 트럭을 피해 오토바이를 몰던 나는 무시코 중얼거렸다. 아차, 하고 입방정을 후회했
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매일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을 돌아야 하는 나는 장만 보면
절로 짜증이 났다. 모래흙으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노라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저속에서도 브레이크만 잡으면 모래흙에 바퀴가 헛도는 통에 수도관이 터져 진흙탕이 된 길
을 지날 때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장을 보고 식당으로 돌아오면 흙먼지로 입
안이 까끌까끌했고 오토바이는 한 번도 세차를 안 한 것처럼 너저분했다. 그 때마다 나는
오토바이에 실린 배추 등속을 거칠게 끌어내리며 정말 무의미하게 제기랄, 하고 투덜거렸다.
오늘 내일 중으로 식당 앞 큰길도 난장판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심란하다. 아스팔
트를 절단하는 기계가 어제 오후 놀이터 앞에서 식당까지 두부 썰 듯이 아스팔트를 잘라 놨
으니 포크레인만 등장하면 오전 중에라도 식당 앞은 쑥대밭이 되고 말 터였다.
따지고 보니 공사가 시작된 그 날부터 단 한 번도 상쾌하게 식당문을 열지 못했다. 지난
이 년 간, 주판알 같은 생활을 한 알 한 알 튕기기 위해 열시 정각에 식당 문을 열어 왔다.
출근 행렬이 끝나 한산한 거리를 오토바이 뒷자석에 아내를 태우고 질러 와 식당 앞에 닿으
면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는 설렘이 바람처럼 나를 감쌌다. 드르륵,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재
빠르게 뒤로 말려 올라가는 셔터문의 움직임도 겨울잠에서 깨어난 원시 동물의 용트림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의 신선함을 무어라 표현할까. 셔터문이 올라가면서 식당이 훤히 드러나는
그 순간, 나는 매번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른 아침, 약수터 풀숲에 굵디굵은 오줌줄기를 선
사할 때의 상쾌함이 신선한 바람과 함께 숨구멍을 통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기분이라니…
팔뚝의 솜털이 가지런히 일어서는 긴장감에 감았던 눈을 뜨면 고압선에 반사된 햇살이 전신
에 안겨 왔다. 먹자골목 앞 대로는 앞다퉈 피어나는 꽃들이 봄볕과 어우러져 눈부시다. 우리
식당과 이웃한 성당 건물 담벼락은 군락을 이루다시피 해서 피어난 개나리꽃으로 뒤덮여 바
람도 샛노랗다. 성당 사제관과 이웃한 단독 주택은 강냉이 같은 꽃망울 쉴새없이 터뜨리는
벚나무에 가려 빼꼼이 지붕만 엿보인다. 나는 바람결에 물씬 묻어나는 꽃내음에 묻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했었다.
“염병할, 가뜩이나 장사 안 돼 죽겠는데 별놈의 공사가 다 사람 염장을 지르네.”
나는 배추 등속을 가게 안으로 들여 놓으며 허공에 대고 푸념을 했다. 주방에서 장사 준
비에 여념이 없던 아내가 볼이 부은 내 모습을 곁눈질하며 피식 웃었다. 쓸데없이 예민하게
군다는 표정이다 화풀이 삼아 배추를 발끝으로 걷어차고 밖으로 나온 나는 주차 방지용으로
내다놓은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맞은편 보신탕집 여주인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오다가 엉거주춤으로 아는 척을 했다. 우둥
푸둥한 몸에 남루한 옷을 걸친 그이는 오랜 세월 시집 식구들과 남편 등쌀에 애면글면 속을
끓여 온 탓에 사십대 초반인 실제 나이보다 오륙 년은 족히 더 들어 보인다. 나는 어색함을
애써 감추고 인사를 했다. 계면쩍은 미소가 보배네의 입가에 어렸다. 이웃이 알도록 부부싸
움을 했다는 쑥스러움이 홍조처럼 묻어 있는 그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
럼 뒤꼭지가 켕겼다. 내가 무심코 베푼 친절이 빌미가 되어 벌어진 부부싸움이었다.
어제 오전 오토바이를 몰고 시장에 갔던 나는 때마침 장을 보고 돌아가는 보배네를 만났
다. 그이의 양손엔 검정 비닐 꾸러미가 바라바리 들려 있었다. 나는 그 많은 짐을 들고 십
분 남짓 걸리는 식당까지 걸어갈 보배네가 안쓰러워 오토바이 뒷자석을 내주었다. 극구 사
양하는 그이의 태도를 부끄러움으로만 이해한 나는 반어거지로 잡아끌어 오토바이에 태웠
다. 이웃해서 장사를 하는 사람끼리 가는 길목에 태워 준다고 남우세스러울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식당앞에 나와 있던 보배네 시어머니는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그이를 보고 두 눈을
흡떴다. 팔순을 앞둔 노인네의 할기족거리는 눈길이 여간만 표독스럽지 않았다. 보배네는 금
방이라도 네 이년, 하고 머리채를 나꿔챌 기세로 씩씩거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안절부절못했다. 예기치 못한 광경에 아차, 후회를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무리었다. 아니
나다를까, 보배네는 저녁에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호되게 치도곤을 당했다. 늙은이가 고자
질을 하기가 무섭게 보배네의 남편은 화냥년이 아니고서야 어디 남의 남자 오토바이에 넙죽
넙죽 올라타냐는 요지의 장광설을 한 시간은 좋이 늘어놓으며 두 눈이 벌개졌다. 그런 아들
곁에서 그악스러운 늙은이는 종주먹으로 가슴을 쳐가며 미친년, 썩을 년, 화냥년, 별의별 년
을 다 찾아가며 씨근벌떡거렸다. 속절없이 화냥년이 되어 버린 보배네는 변명 한마디 못 해
보고 식당 주방 구석에 숨어 눈물만 질금거렸다. 덩달아 이상한 놈이 되어 버린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접시물에 코라도 박고 싶게 억울하고 분했지만 앞으로 썩 나서지 못했다.
내가 좀더 신중했더라면 모든 사태를 예견할 수도 있었다. 여자란 기회만 닿으면 언제고 바
람을 피우게 마련이라는 사고에 젖어 있는 보배 아빠 생각을 조금만 했어도 보배네를 오토
바이에 태우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미안한 마음에 인사 삼아 물으니 보배네는
“고만 일에 뭘요. 이젠 이력이 붙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나저나 삼촌, 미안해요. 우리
집 양반이 워낙에 그런 사람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하고 되
려 나를 위로했다.
“그나저나 노래 연습은 잘 되세요.?”
“그냥저냥요.”
어색함에서 벗어나 볼 요량으로 말을 돌리니 보배네는 수줍은 듯 말꼬리를 얼버무리며 시
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는 멀어져 가는 보배네의 뒷모습
을 불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보신탕집 화단으로 눈길을 돌렸다. 행운복이며 동백 같은 화초
들이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 여남은 개의 큼직한 화분 앞에는 수십 종의 난초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보배네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화초들의 잎을
뽀닥뽀닥 닦아 주며 마치 벗에게 말을 건넨듯 대화를 나누는데, 내 눈에는 어쩐지 그 모습
이 처연해 보였다. 보배네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애기를 들은 것은 애오라지 화
초들뿐일 것이다. 간혹 가다 보배네가 간판집 여자나 아내를 붙들고 앉아 이런 저런 하소연
을 할 때가 없진 않다. 그러나 그건 동네 아낙 서넛이 모이면 으레 쏟아지게 마련인 가벼운
신세 한탄에 지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남편에게 한번 대들 법도 한데 나로서는 그이의 고
함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끝끝내 참기만 하는 사람, 벅차게 참다가 식당 주방에 홀로 쪼
그려 앉아 우는 사람, 울다가 일어나 화초에 물을 주고 숨 죽여 말을 하는 사람, 나는 보배
네의 살ㅂ이 존경스럽기보다는 안쓰럽고 가여웠다. 차라리 간판집 여자처럼 감정이 북받칠
때마다 목청 높여 한바탕 해댄다면 기약 없이 흘러가는 일상을 견디기가 쉬울터인데, 보배
네는 그제처럼 어제를, 어제처럼 오늘을 깊은 숨을 들이쉬며 흘려보낼 따름이다.
그랬던 보배네의 태도가 변한 것은 요 며칠 사이의 일이다. 이십여 일 뒤에 있을 장기 자
랑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굳힌 그이는 손님이 없는 오후 시간이면 앗싸 노래방에서 숫제 살
다시피 했다. 두어 시간은 종ㅎ이 노래방에서 악을 쓰고 밖으로 나오는 보배네의 모습은 연
애라도 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환했다. 늘상 그늘진 얼굴로 식당과 시장 사이만 오가던 보배
네는 벚꽃 축제에서 열리는 장기 자랑 대회 소식을 접하고부터 회춘하는 사람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환화 에너지 사내에서 매년 열리는 벚꽃 축제는 인근 주민들을 위한 행사로 그 규모가 자
못 컸다. 연예인과 가수들이 무대를 꾸미고 음식과 술이 무료로 제공되면 한쪽에서는 아마
추어 사진 작가들의 사진전도 열린다. 동네 주민이라면 누구라도 행사에 참가해서 먹고 마
시는 놀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벚꽃 축제의 대미는 장가자랑이었다. 사원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주민들 가운데서도 넘쳐나는 끼를 주체 못 해 옥수수만 봐도 마이크로 착각
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삼품도 제법 푸짐해서 장기 자랑은 매번 참가
인원도 많고 참가자들 간의 경합도 뜨거웠다.
보배네가 장기 자랑에 참가한다는 소식은 그이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변 상인들에게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보배네가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기 자랑에 참가하겠다고 선언
했을 때, 식구들이 보인 반응은 한마디로 웃긴다는 표정이었다. 보배네의 말을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 병신, 육갑 떨고 자빠졌네. 쓰잘데없는 짓거리 말고 집구석에 붙어 있어.”
꼴같잖다는 투로 일축을 해버렸고 반건달이나 다람없는 두 시동생은 멀쩡한 사람을 망령
난 사람 취급해 가며 형이 걱정스럽다는 낯빛이었다. 수원에 살면서도 일 주일이 멀다 하고
빨간색 프라이드로 친정 문턱을 뻔질나게 넘나들며 살림을 축내는 시누이는
“아유, 언니. 여자가 그런데 나가 뭣 하우? 요즘 여자들 공연히 허파에 바람 들어 가지구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해가면 얼굴 팔고 다니는데 그러다 보면 바람나기 십상이우. 본인은
아니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사람 잘못되는 거 한순간 아니겠어요? 오즘 애들 큰일이다 큰일
이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정신 못 차리는 어른들한테 있다구요. 그러니 언니도 장사
나 신경 쓰세요. 요즘 식당에 통 손님도 없던데 언니는 그래 걱정도 안 되우, 엄한데 정신
팔게.”
하고 숫제 대놓고 이죽거렸다.
그러나 보배네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침묵했다. 모두가 합세하여 그이를 윽박지르고 구슬
리고 꾀송거려도 보았으나 보배네는 돌부처 모양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배 아빠는 당
장이라도 주먹을 치켜들어 머ㅊ 귀퉁이 쥐어박을 태세였지만 차마 손찌검은 하지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을 경우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버릇을 가르친다고 손찌
검을 했다가 아내가 보따리라도 싸서 도망가 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몇날 며칠 화풀이 삼아 술만 마셔 댄 그는 별수없이 아내가 장기 자랑에
나가는 것을 묵인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아빠가 오토바이 건을 붙들고 보배네를 심하게 닦
아세운 것도 일종의 분풀이 였는지도 모른다.
보배네의 가족들과 달리 주변 상인들은 그이가 장기 자랑에 나간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심으로 격려를 해주었다. 특히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보배네를 딱히 여겨 온
간판집 여자는 보배네가 노래방에 갈 때마다 커피에 음료수에 날계란에 이런저런 지원을 아
끼지 않았고 노래방 주인여자는 아무 때고 찾아와서 노래 연습을 하라며 땡전 한 푼 받지
않았다. 걸핏하면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워 욕설과 삿대질이 끊일 날 없는 썬호프 마담까
지도 장기 자랑에 나갈 때 목에 두르라며 실크 스카프를 선물했고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
편인 외동딸 보배는 루즈를 선물했다. 직접 선물은 하지 않았더라도 주변 상가 여자들은 내
남없이 성원을 보내며 응원단이라도 조직할 태세였다.
“야아, 보신탕집 아줌마 인기 좋네.”
경사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떠는 상가 여자들 기세에 놀란 내가 한마디 하자 깍두기를 담던
아내가 잠시 일손을 놓으며
“ 남자들은 저렇게 눈치가 없다니까. 우리 상가 여자들 중에서 제일 불상한 이가 보신탕
집 아줌마하고 노래방 아줌마잖아요. 사는 재미가 뭔지도 모르고 맨날 죽도록 일만 하던 이
가 장기 자랑에 나간다니 같은 여자 입장에서 신이 난 거라구요. 그래 너도 인제 재미나게
좀 살아 봐라. 하고. 보신탕집 식구들만 보면 정말 얄미워 죽겠어. 이건 완전히 이조 시대라
니까.”
하고 제일이라도 되는 양 흥분을 해서 큰 소리를 냈다.
보배네가 시장을 향해 멀어져 간 허공에 멍하니 시선을 풀어 놓고 있는데 요란한 기계음이
들려 눈길을 늘으니 골목 입구에 대형 포크레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예견했던 일인데도 와
락 짜증이 치민다. 가뜩이나 손님이 줄어 똥줄이 타는 판국에 도시 가스 공사라니, 식당 문
을 닫아 버리고만 싶다. 그나저나 어째 이리 손님이 줄었을까, 머리를 공굴리는데 눈길이 저
절로 도로 맞은편 큼직한 단층 건물로 향한다. 며칠 전에 개업한 이백 석 규모의 고깃집이
다. 백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만으로도 고만고만한 주변 상가들을 압도한다. 평양 가
든은 개업날부터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손님들로 점심부터 밤까지 주방장 담배 한 대 필 짬
이 없다. 동네 사람들이 전부 그리로만 몰려가는 모양이다. 두어 달 전에는 옆 상가에 번듯
한 횟집이 문을 열어 손님을 뺏어가더니 이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형 고깃집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슨 수를 내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굶어 죽기 딱 좋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면 피우던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휙, 퉁겨 버렸다.
“아따, 잘 묵었다. 김치가 맛난 게 뭘 묵어도 꿀 맛이구만.”
참으로 내온 라면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인부들은 담배 한 대씩을 척, 꺼내 물고 자리
를 떴다.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흙먼지가 때글때글하다. 걸레질을 하고 나니 문 밖에서 공
사를 재개한 소음이 요란스레 울려 왔다. 포크레인이 아스팔트를 까부술 때마다 바닥을 통
해 진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전처럼 못마땅하지는 않았다. 되레 고마울 따름이다. 나흘 간
하루 세 끼를 우리 식당에서 해결한다니 여간 큰 부조가 아니다. 언뜻 보니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표정이 모처럼 밝다.
인부들이 어지르고 간 상을 걷는데 건장한 청년 둘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얼굴이 벌건
게 거나하게 낮술을 걸치고 아차를 온 모양이다. 하나는 팔뚝이 문신 천지였고 다른 하나는
왼쪽 뺨에 칼자국이 길게 패였다. 그들을 거칠게 자리를 잡으며 술을 청했다. 주문대로 소주
와 두부김치를 갖다 주자 얼굴에 칼자국 난 청년이 부탁이 있다면서 내 팔을 잡았다.
“아저씨, 요 앞 길 건너 길다방 있죠? 그리루 전화 좀 걸어서 큰 미스 김더러 쌍화차 두
잔만 갖다 달라고 해주시겠소?”
나는 별 웃기는 짜장이 다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색 않고 시키는 대로 해주었다. 술
장사 이 년 만에 별사람을 다 겪었지만 술집에 와서 차를 시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화
를 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쁘장한 레지가 차를 배달해 왔다. 이십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레지는 칼자국 난 청년을 보자 낯 색이 변했다.
“쌍년아, 빨리 와서 앉지 않고 뭐 해?”
말없이 연거푸 술잔을 비워 대던 청년이 난처한 듯 머뭇거리는 레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지는 마지못한 듯 엉거주춤 다가가서 여차하면
달아날 품으로 빈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았다. 칼자국 난 청년은 차를 따르려는
레지를 제지하며 술잔을 건넸다. 레지가 주저하자 청년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알
을 부라렸다. 잔이 차기도 전에 술이 떨어지자 청년은 식당 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
로
“아저씨, 여기 소주 하나 하고 글라스 좀 갖다 주쇼.”
하고 주문을 했다.
술과 맥주 잔을 갖다 주자 문신을 한 청년이 내게 이해하란 눈짓을 했다. 칼자국 난 청년
은 레지의 잔을 마저 채운 뒤 맥주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단숨에 입 안에서 털어넣었다.
그리곤 또다시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그는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길로 긴장을 풀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레지를 한동안 쏘아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야, 너 내가 정말로 싫냐? 도대에 내 어디가 어떻게 싫냐? 시원하게 말 좀 해봐.”
“오빠, 이러지 마. 이미 끝난 얘기잖아.”
“뭘 끝나, 좃 같은 년아, 너 인간 박광수의 순정을 그렇게 몰라주냐, 엉? 인간 박광수의
순정을 모르냐구, 이 씹팔년아,순정말이야, 순정!”
칼자국 난 청년은 고함과 함께 맥주 잔을 든 손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그 바람에 맥
주 잔은 박살이 났고, 청년의 손바닥에선 선지 같은 피가 콸콸 솟구쳤다. 문신을 한 청년이
친구의 손바닥에 박힌 큼직한 유리 파편들을 뽑아 내며 피를 닦아 주려 하자 칼자국 난 청
년은 세차게 뿌리치며
“놔, 필요없어, 씨팔, 순정도 몰라주는 세상...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주절거리며 울먹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신을 한 청년은 두루마리 휴지를 한 뭉치 떼어
내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친구의 손바닥에 대고 지압을 했다. 그 틈에 레지는 도망을 갔
다. 눈시울이 붉어진 청년은 레지가 사라진 것도 모른 채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다가 그만 탁자에 이마를 박고 잠이 들었다. 문신을 한 청년은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
께 술값을 치른 뒤 친구를 들쳐 업었다. 등 뒤에 숨어서 벌벌 떨던 아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들이 술알 마셨던 자리는 칼부림이라도 났던 것처럼 살풍경 했다.탁자 위는 깨진 유
리 조각들이 엎어진 반찬 그릇들과 뒤섞여 난장판인데다가 한쪽에는 피가 흥건했다. 피를
닦아 낸 휴지 뭉치는 탁자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흉물스럽게 널렸고 탁자 모소리에서는 아
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에망정이지 아휴, 아직도 간이 떨리네.”
난장판이 벌어졌던 흔적을 말끔히 치우고 안 아내는 담배를 태우는 내 곁에서 가슴을 쓸
어내렸다. 그러나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순정을 아느냐고 고함치던 청년의 얼굴이 자꾸
만 눈에 밟혔다. 순정,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말이다. 사색이 된 아내와 달리 나는 애
틋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까마득히 잊었던 추억이 손 안에서 생생하게 뛰노는 느낌에 나는
손바닥을 펴서 찬찬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막연한 그리움이 안개처럼 밀려와 가슴을 아늑
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 때, 식당 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좀 전의 청년들인가 싶어 나가 보니 노래방
막내아들이 제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그 애는 무슨 일인지 두
눈이 벌개지도록 흥분을 해서 길길이 날뛰며 죽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씨름 선수처럼 덩치가 좋은 그 애의 형은 노래방 입구에 서서 동생이 날뛰는 모양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엄마, 이거 놔요. 더 이상 어떻게 참으란 말예요.”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좀 해라. 니 아버지잖니.”
“씨팔, 그 딴 게 아버지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아버지예요? 나도 그 동안 참을 만큼 참
았다구요. 엄마도 잘 알잖아요. 그렇게 참았는데 이게 뭐예요, 이게 뭐냐구요?”
노래방 막내아들은 웅성거리며 몰려든 상가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왜장을 치다가 가
게 앞에 세워 둔 빨간색 스포츠 카의 앞유리를 돌맹이로 부숴 버렸다. 그가 애지중지하며
몰고 다니던 차였다. 그러자 이제껏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큰아들이 앞에서 나서며 동생
의 뺨을 올려붙였다.
“이제 그만해라.”
뺨을 얻어맞은 막내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형의 얼굴을 뚫어져라 쏘아봤다. 큰아들도
동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던 막내는 그만 풀이 죽어서 노래방 안으
로 들어갔다. 큰아들이 한쪽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머니를 부축해 노래방 안으로 사라지
자 우 물려들었던 구경꾼들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러나 평소 노래방 여자와 친하게 지
냈던 보배네를 비롯한 몇몇 상인들은 상가 사람들의 어지간한 속사정쯤 좌르르 꿰고 있는
간판집으로 몰려갔고, 아내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는 식당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궁금증을
삭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노래방 막내아들이 그토록 날리친 걸 보면 조만간에 큰 사단이 날 것
만 같았다. 노래방 막내아들의 성격으로 봐서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리는 없다. 녀석이 비록
몸피는 작아도 또래들을 몰고 다니며 동네를 휘저을 때 보면 여간 암팡지지 않았다. 폭주족
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내고 퇴학을 당한 녀석이 그나마 마음을 잡고 조용히 지내는 것도 따
지고 보면 마음맞는 처녀와 살림을 차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에게 질려 집
을 나갔던 엄마가 돌아온 영향이 컸다.
“어쩜, 인간이 그럴까, 이건 숫제 말종이라니까.”
간판집에서 돌아온 아내는 기가 막히다는 듯 혀부터 찼다.
“왜 그래? 무슨 일이래?”
“아 글쎄, 어젯밤에 작은며느리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대요. 시아버지라는 작자가 손찌검
을 해댔으니 바보 멍청이가 아니구서야 누가 참고 있겠어요. 하기 나이도 어린 애가 참기도
많이 참았지. 열아홉이면 한참 꿈 많을 땐데. 그 참하고 엄전하 애가 오죽했으면 집을 나갔
겠어요? 시아버지라는 작자가 허구한 날, 쌍년아, 개 같은 년아, 온갖 욕설을 퍼부어 가며
지랄을 해대니 그 구박을 무슨 지주로 견뎌요?”
“왜 때렸대?”
“어제, 노래방 아줌마가 작정을 하고서 남편에게 대들었나 봐요. 왜 큰길 모퉁이에 있는
호프집 마담 있잖아요. 그 여자 방에 글쎄 에어컨을 들여놨다지 뭐예요. 노래방에서 식구들
이 밥 한 끼만 시켜먹어도 개쌍년들이 셋씩이나 있으면서 밥을 사먹는다고 생난리를 치던
위인이 새 여자 치마폭에 싸여 보석에 옷에 에어컨까지 사줬으니 노래방 아줌마가 천줄이
난 거죠 그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는데 작은 며느리가 끼어들어 말리는 것을 그 화상이 머
리채를 휘어잡고 직사하게 빰을 때린 모양이예요. 그러니 가뜩이나 물불 가릴줄 모르는 그
집 애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 화상, 정신 못 차리고 활개치고 다니더니 조만가 처자식한테
험한 꼴 좀 당할 걸요.”
아내는 제 일이라도 되는 양 흥분해서 씩씩거려 가며 말을 옮겼다.
“사람 참, 어째 동네 여자들을 껄떡거리나, 바람을 피울려면 좀 멀리 가서 소리 소문 없
이 피울 일이지,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여자들을 끌고 돌아다니다니, 자식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그건 그렇고 여보, 우리 곗돈 탈 때 되지 않았어?”
“곗돈 뭐에 쓰게요?”
“봄도 되고 했으니 실내 장식을 좀 바꿔 보면 어떨까 해서.”
“다들 죽어라 죽어라 하는 판에 그런다고 매상이 오르겠어요? 그리고 이번 달은 앞집 보
배 엄마 차례예요. 우린 다음 달이구요.”
“사정 얘기하고 우리가 먼저 당겨 쓰면 안 될까?”
“어림없는 소리 말아요. 그 아줌마 곗돈 타서 가겠세 내야 돼요. 월세를 일 년치나 못 내
서 길거리로 쫓겨날 판이라구요.”
“그래? 아니 뭐 한다고 십만 원도 안 되는 세를 일 년치나 밀렸대?”
“그 집 아저씨가 돈을 벌어야 말이조.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이거 해본다 저거 해본다
하면서 까먹은 돈이 과장 좀 해서 집 몇 채는 될 결요? 거기다가 시동생들하고 시누가 밤낮
없이 뜯어가잖아요. 아줌마가 돈 좀 모아 놨다 싶으면 그 집 할머니가 귀신같이 알아내 가
지고는 자식들한테 쪼르르 일러바치잖아요. 너희 형수 돈 생겼다고. 눈치채면 또 뺏긴다고
이번 계도 식구들 모르게 하느라 얼마나 조바심을 치던지. 노인네가 망령난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미운 짓만 골라 하는지 몰라요. 그런 거 보면 보배 아줌마도 어지간히 무던해. 아마
그 아줌마 아니면 그 집 식구들 꼼짝없이 길거리로 나 앉을 거야.”
“가만 보면 간판집 식구들이 문제 없이 잘살어, 그치? 한 달에 이백만 원씩 꼬박꼬박 저
축하겠다, 여기저기 돈놀이해서 이자 받겠다, 노후 준비도 다 해놨겠다. 참 근심 걱정 없는
사람들 같아. 고민이라면 애들 공부 못하는 거밖에 더 있어? 그런데 그것도 두 양반이 걱정
을 해야 말이지. 니들 팔자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그냥 냅두잖아. 큰애가 겨우겨우
턱걸이해서 전문대 야간을 들어갔어도 어디 눈썹 하나 까딱하기를 해? 거기다 아저씨가 속
썩이는 일도 없잖아. 바람을 펴, 노름을 해. 그냥 성실하게 일해서 버는 족족 갖다 바치잖
아.”
“당신두 참. 세상에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몰라서 그렇지 간판집 아줌마도 속
이 푹푹 썩네요. 그 아줌마, 친정 얘기만 나오면 애간장이 녹아서 눈시울이 다 벌개지잖아
요. 사람살이가 제각각 달라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십보 백보라구요.”
아내는 제법 철학자다운 말을 한 뒤 잔설거지를 끝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오후 들어서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좀 번해 오는
가 싶어 내다보면 지집거리던 빗줄기가 어느 결에 등을 돌려 허연 아가리를 쫙 벌리고되달
려왔다. 차들이 마어터진 도로와 달리 빗속에 잠긴 거리는 한산했다. 봄비를 맞노라면 낮술
생각들도 날 법한데 점심을 먹으러 오는 손님조차 없다. 아내와 나는 식당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어차피 오늘 하루 공쳤다 생각하고 마음을 편히 먹으
니 아무런 근심도 없다. 커피를 홀짝거려 가며 빗소리를 듣노라니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거닐
고 싶은 욕망에 마음이 달떠오른다. 아내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오디오의 판을 바꿔 끼웠다.
대금산조의 애잔한 가락이 빗소리와 어울려 식당 안을 가득 메운다. 문득 이대로 시간이 멎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따금씩 우산을 받쳐든 행인이 한껏 볼륨을 높여
놓은 대금 연주 소리에 식당 안을 기웃거리며 지나간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
내 와 아내와 잔을 기울였다. 술로 입술을 축이며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길이 이윽하다.
연애하던 시절, 비애 잠긴 거리가 환히 내답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던 생각이
난다. 어스름한 빗길을 달려 모델로 뛰어들어가던 기억도 새롭다.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 빗
소리를 듣다가 손을 마주 잡으며 미소지었을 때 따스함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맥
주 잔을 내려놓고 아내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아내의 귓불이 발갛
게 달아올랐다. 수줍어하는 아내의 모습이 허공을 긋는 빗낱처럼 마음에 담긴다.
“아쭈 그림 좋은데.”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니 간판집 한 사장이다. 횅한 앞머리를 가리기 위해 눌러 쓴빵모자
와 똑같이 동그란 얼굴이 어글서글하니 선량하기만 하다. 그는 허둥대는 우리 부부를 향해
“비 오는 날 아내와 마주 앉아 음악을 들어 가며 맥주 한잔이라, 카아 좋다.”
하고 빙글거려 가며 몰려먹었다.
“정 부러우면 형님두 해보시지 그래요. 근데 형수님이 받아 줄까 몰라.”
나는 짐짓 토라진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응수를 했다. 악의 없이 툭, 던진 농담이건만 한
사장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파마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난감해한다. 박장대소를 해가며 재미있
어하는 주변 상인들과 달리 그는 시간이 지나도 그 일이 영 껄끄러운 모양이다.
한 사장이 모처럼 놀러 온 친형과 호프집에 갔다가 낯모르는 여자들과 합석을 한 건 보름
전의 일이다. 합석을 하자며 다가온 여자들을 웬 떡이냐 싶게 반기며 옆자리에 앉혀 놓고
실떡거린 친형과 달리 숫기 럽ㅅ는 한 사장은 간간이 미소를 지어 가며 술잔만 비워 냈다.
급한 간판 제작 주문을 받은 간판댁이 호프집으로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도 평소 한 사장의
성품으로 미루어 그 날 술자리는 별 애깃거리도 없이 끝났을 터였다. 그러나 간판댁이 호프
집에 나타나면서 한 사장 형제는 졸지에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바람둥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아무리 배사에 시원시원하고 통이 크기로 소문난 여자라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들
과 어울리는 꼴을 그대로 보아 넘길 리 만무했다. 그이는 당장 그 이튿날부터 한 사장을 굶
겼고 가게에도 나오지 않았다.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서 주문을 받고 상담을하고 장부 정리
까지 도맡아 해주던 마나님이 가게에 코빼기도 내비치지를 않자 애가 단 한 상장이 사실대
로 해명을 하고 두 손을 싹싹비벼 가며 용서를 구했지만 간판댁의 마음을 돌려 놓은 것은
올해 고등 학교 이학년인 딸을 붙들어 앉혀 놓고 네 아빠가 이러저러했으니 어쩌면 좋겠느
냐고 하소연을 했는데 그 애의 반등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엄마의 하소연을 잠자코 듣고 있
던 딸은 대뜸 “어머, 그 얼굴에?”하고 한마디 하더니 깔깔대고 한참을 웃더라는 것이다.
어이없는 딸의 반응에 기가 막힌 간판댁은 한동안 넋 빼고 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그만 웃어 넘기고 말았다.
그쯤해서 화를 푼 간판댁과 달리 한 사장은 상가 사람들로부터 ‘그 얼굴’운운하는 인사
깨나 받아야 했다. 그러나 재미있어하는 상가 사람들과 달리 예술가로 자처하며 살아온 한
사장은 딸에게 꽤나 서운한 눈치였다. 딴에는 예술가다운 풍모를 갖추려고 외모에 각별히
신경을 써온 한 사장이었다. 아마추어 사진 공모전에서 여러번 입상한 경력이 있는 한 사장
은 술자리에서 누가 빈발이라도 ‘한작가’ 소리만 하면 그날 술값을 자처해서 뒤집어쓸 정
도로 기분을 냈다. 빵모자야 벗어진 앞이마를 가리기 위해서 썼다고 쳐도 파마를 해서 기른
뒷머리 담배를 태울 때마다 자랑 삼아 꺼내드는 물부리 파이프도 예술가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 한 사장을 향해 딸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머, 그 얼굴에?”
하고 기막힐 소리를 해댔으니 뒷간 쥐한테 똥구녕을 물렸을 때보다도 곱절 억울한 노릇이었
다. 간판댁 발에 의하면 한 사장은 술만 취했다하면 딸애 방으로 건너가서 내가 정말 못생
겼냐, 어디가 어떻게 못생겼냐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다니 허허, 웃어 넘기는 외에 달리 도리
가 없다.
“사람두 참, 그 얘긴 왜 또 거내고 그래?”
“농담이예요, 농담. 건 그렇구 그래 사다리는 찾으셨어요?”
“그렇잖아도 애들 엄마가 좀전에 이발소 황가네 집으로 쳐들어 갔네.”
한 사장은 일이 다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듯 여유를 부렸다. 하긴 간판댁이 팔을 걷
어붙이고 나섰으니 마음을 놓아도 좋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한
사장은 누가 돈을 안 주려고 버팅기거나 하는 따위의 처치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아내에
게 떠념겼고, 간판댁은 그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가서 아무리 곤란한 일도 시원시원하게 마
무리지어 놓았다. 이발소 주인이 제아무리 우기고 발뺌을 해봐야 어지간한 사내 서넛쯤 얼
르고 빰치는 간판댄 손에 걸린 이상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쳐들어갔다는 말
나오기가 무섭게 한 사장을 찾는 목소리가 들리기에 내다보니 간판댁이 비를 맞아 가며 장
정 둘이 들기에도 무거운 사다리를 악착같이 끌고 오고 있었다.
“그래, 이 독사 같은 여편내야, 어디 신고해라. 신고해. 누가 눈하나 깜빡할 줄 알고? 어
림도 없다. 어림도 없어. 내가 그렇게 호락 호락 당할 사람으로 보이냐?”
삼단으로 접히는 알루미늄 사다리를 끌고 오는 간판댁 뒤에서 우산을 받쳐 쓴 이발소 주
인이 씩씩대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판댁은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남편에
게 사다리를 넘겨 준 간판댁은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아 내며
“추잡한 새끼, 세상에 그래 할 짓이 없어 이웃들 삼림을 훔쳐다 창고에 쌓아 둬? 백냘
그래 봐라, 빌어먹기밖에 더 하나. 벌건 대낮에 술 처먹고 길거리에 드러누워 잘 때부터 알
아봤지만 아이구, 인간아 왜 사니, 왜 살아. 부아 나는데 콱 신고나 해버릴까 보다.”
하고 이발소 주인이 곁에 있기라도 한듯 또깡또깡 게목을 질러 댔다.
“그 집 창고에 다른 집 물건들도 있어요?”
수건을 받아들며 아내가 물으니 간판댁은 휘휘 손을 내저어 가며 “말도 마, 수도 없어.
동네 사람들 도둑맞은 살림살이 절반은 거기 있을걸. 그것도 값나가고 큰 거면 몰라, 이건
위인이 쫌생이라 훔친 물건이라곤 빗자루, 세숫대야, 고무 다라이, 뭐 그런 거 일색이고 비
싸 봐야 자전거 따위가 고작이야. 웃기지도 않아, 이 위인이 저사다리는 자기가 사다 놓은
거라며 박박 우기다가 신고한다는 소리 하기가 무섭게 찍소리 못 하는 거 있지. 그래도 막
상 내가 사다리를 끌고 나오니까 훔쳐 놓고도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찐드기처럼 쫓아 나오
면서 아까 그 염병을 떨더라구. 두고 봐, 내가 신고한다고 겁을 줘났으니 저 인간 한 며칠은
잠도 못 잘걸?”
하고 걱실거렸다.
“그나저나 슬슬 모일 시간 됐지요? 빨리 상 차려야겠다.”
아내가 계원들 모일 시간을 가늠하며 서두르자 간판댁도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며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계원이라고 해봐야 늘상 얼굴 맞대고 사는 상인들이지
만 아내는 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잔칫상 보듯 음식 준비를 했다. 간판집 내외의 뒤를 이어
노래방 주인아줌마와 중국집 주인여자가 차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소문난 아구집과 마포
소금구이집에 이어 보배네는 가장 늦게 나타났다. 보배네는 행여라도 시어머니 눈에 띌세라
식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어머니 몰래 계를 하기가 귀신을 속이기보다 더 어려운 모양인지 모배네는 자리에 앉자마
자 가쁜 숨울 몰아쉬며 냉수부터 들이켰다.
꽃게탕으로 배를 채운 계원들은 낙낙해진 모습으로 술잔을 돌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
주치는 뻔한 얼굴이지만 한자리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새삼 정이 가고 식솔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수도세 문제로 어제 한바탕 싸움을 했던 중국집 여자와 아구집
여자는 어느 결에 화해를 했는지 몇 순배 돌지도 않은 술기운에 언니 동생 해가며 자못 사
이가 좋다. 남자라고는 한 사장과 나밖에 없다 보니 여자들은 제세상 만난 듯 집안 대소사
부터 시작해서 시집 식구들 흉보기까지 그 많은 입이 쉴 새가 없다. 한 사장과 나는 국으로
조용히 앉아 권커니 잣거니 술잔만 기울였다. 이 쪽에서 한마디 하면 저 쪽에서 자글자글
웃고 저 쪽에서 한마디 하면 이쪽에서 깔깔대며 술을 부어라 안주를 내라 해가며 정신이 없
는데 문득 간판댁이
“아, 다들 조용히 좀 해봐. 우리 오랜만에 이렇게 모였는데 보배 엄마 노래 한자락 들어
보는 거 어때? 처녀 적에 콩쿨 대회에 나가서 상도타고 완전히 날렸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처녀 때 예기고, 우리들이 확인도 안 해보고 장기 자랑 응원을 갈 수는 없
잖겠어? 그러니 이 자리에서 동네 만신을 시키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자고. 다들 어때?”
하고 노래를 청하니 사방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보배네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과히 싫지 않은 듯 일어섰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길들이 보배네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
리며 숨을 죽였다. 나도 자못 기대에 차서 귀를 기울였다. 보배네가 목청을 가다듬자 굵어진
빗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 왔다. 이윽고 보배네의 입에서 김추자의 ‘봄비’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꾸미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노래가 빗물 고여 흐르는 도랑물
소리처럼 편안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적막강산에 홀 버려
진 듯한 쓸쓸함이 바람 같은 노랫소리에 실려 가슴을 적셔 왔다. 슬픈 노래를 보배네는 너
무도 편안하게 불렸고, 그래서 그 노래는 더욱 처연하게 들렸다. 봄비 나를 울려 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 주네...산에 혹은 하늘에 바람결에 그리고 가슴 속에 남
모르게 덮어 둔 사연들이 보배네의 노래에 다 실려 있는 듯 그이의 노랫가락에는 무수한 울
림이 있었다. 언뜻 지난 시절 좋아했던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아내를 만나기 두 해 전이었
을까, 사랑했던 여자를 떠나 보내고 나서 술만 취하면 암송했던 시었다. 그대 앞에 엎드려
울고 싶다. 숨죽이지 않으리다, 통곡으로 목을 놓아 울고 싶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보배네의 노래를 들으며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날들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듯한 느낌에 사
로잡혔다.
노래가 끝났으나 주위는 숙연했다. 모두들 꿈결에라도 빠진 듯 몽롱한 눈빛을 허공에 붙
들어 매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머쓱해진 보배네가 말없이 자리에 앉자 그제 서야 정신이
든 듯 모두들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 감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보
배네는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혔다. 계원들이 앙코르를 외치자 보배네는 수줍
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쭈뼛겨렸다. 그러나 기수를 만나 영산이 오른 계원들은 앙코르를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탁자를 두들겨 댔다. 마지못한 보배네가 막 몸을 일으키는데
“보배야, 보배야아!”
하고 밖에서 그이를 찾는 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보배네가 잠시나마 눈에 띄지 않으면 식당 문가에 서서 야단스레 목청을 높이는 보배 할
머니였다. 노래를 부르려고 일어섰던 보배네는 그 소리에 질겁을 하며 주저앉았다. 네, 하고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아도 행여 계원들 모인 걸 눈 밝은 시어머니에게 들키면
야단인지라 보배네는 마른침을 삼켜 가며 바깥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노인은 며느리 똥줄
타는 줄도 모르고 골목 이쪽 저 쪽에 대고 보배야, 보배야, 연신 불러제낀다. 그 서슬에 보
배네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로 통하는 식당 뒤문으로 몸을 내뺐다. 상가 건물을
빙 돌아가서 태연하게 얼굴을 내비칠 요량이다. 보배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심
술 사나워 보이는 얼굴이 식당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할머니, 어쩐 일이세요?”
아내가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스럽게 물었다.
“우리 며느리 여기 없는가?”
“시장 가지 않았어요?”
“호프집 여자가 일루 갔다고 하던데?”
“어제 꿔간 술 갚고 시장 간다고 하면서 나갔는걸요”
아내가 그럴싸하게 둘러댔으나 어디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노인은 선선히 물러가지를
않고 식당 안을 도리반거려 가며 살폈다. 심상찮은 낌새를 챈 한 사장이 자리를 내주며 술
한잔 하시라고 권했으나 노인은 되레
“계 모임들 하는가?”
다 알고 왔다는 투로 물었다.
“계 모임은 요, 오늘이 이 사람 생일이라 모인걸요”
한 사장이 내 어깨를 툭툭 쳐가며 둘러대자 노인은 통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구부정한 뒷모습이 문 밖으로 사라지자 계원들은 저마다 혀를 차
며 보배네를 걱정했다. 아무래도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돈 냄새를 맡은 눈치인데 자칫하
면 밀린 가겟세는커녕 시동생 좋은 일만 시키고 보배네는 입에 거품 물고 뒤로 나자빠지게
생겼다. 건물 주인은 전에 없이 보배네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지난 몇 년 간 세를 올리지
도 않고 월세가 몇 달씩 밀려도 채근하지 않던 건물 주인의 인내에도 한계가 온 모양이었
다. 하긴 일 년치나 세를 밀렸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계원들은 보배네 시집 식구들을 싸잡
아 비난하다가 어차피 남의 일, 고만 맥들이 풀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사람들을 배웅한 뒤 문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웃비가 걷히려는지 서쪽 하늘
이 구름을 벗고 있었다. 먹장구름이 밀려나면서 생긴 푸른 틈새로 노을이 비쳤다. 나는 담배
꽁초를 버리고 돌아서다가 언뜻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이발소 샛길 모퉁이에 누군
가 숨어서 자꾸만 내가 서 있는 큰길 입구를 힐끔힐끔 살피는 게 보였다. 이발소 주인이다.
신고를 하겠다던 간판댁의 으름장에 겁을 집어먹고 내내 그렇게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위인의 하는 꼴을 보니 간판댁의 말대로 며칠 동안 불안해서 잠도 못자게 생겼다. 피식, 웃
음이 나온다. 그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순찰차 한 대가 나타났다. 도둑이 제발 저린
다고 이발소 주인은 순찰차를 보자마자 기겁을 해서 놀이터 쪽으로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
다. 얼마나 급했으면 신발 한 짝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죽어라 뛴다. 순찰차에서 내린 순경
들은 달아나는 이발소 주인은 거들떠도 안 보고 건물 모퉁이 저 쪽으로 사라졌다. 웅성거리
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가볼까 망설이던 나는 그냥 식당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식당문을 닫으면서 보니 하루 종
일 지겹게 내리던 비가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꾸벅꾸벅 졸던 나는 왈칵 문 열리는 기척에 놀라 눈을 떴다. 손님
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나는 챙모자를 눌러쓴 야채 장수 모습에 맥없이 짜증이 났다. 필
요한 거 없냐는 야채 장수의 질문에 나는 눈살을 찌프린 채 아예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에
아랑곳없이 야채 장수는 오랜 단골이나 된 듯 친근한 태도로 저녁에 다시 들르겠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식당 문을 나섰다. 나는 그런 야채 장수의 뒷모습을 감사납게 쏘아보
았다. 언짢은 심사를 달래기 위해 담배에 불을 붙였으나 불쾌감이 쉬 사그라들지 않는다.
“뭐 저런 찰거머리가 다 있어? 이거 완전히 깡패 아냐.”
나는 야채 장수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투덜거렸다. 강적도 이런 강적이 없다. 그만큼
무안을 주었으면 발길을 끊을 법도 한데 무슨 놈의 위인이 아침 저녁으로 무턱대고 찾아와
서는 거래를 트게 해달라며 한 발짝도 물러날 줄을 모른다. 누구 소개도 아니고 생판 처음
보는 장사치가 허구한 날 불쑥불쑥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구니 이건 숫제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경기가 날 지경이다. 식당을 개업한지 이 년 동안 별의별 사람을 다 겪었지만 이런
무경우는 처음이다. 그래도 사기꾼에 비하면 몸뚱어리 놀려서 먹고 살려고 아둥거리는 야채
장수는 양반이다.
나이 젊고 사지 육신 멀쩡한 작자들에게 두 눈 뻔히 뜨고 사기를 당한 것만도 금년 들어
서 벌써 두어 번이다. 큰돈이라도 뜯겼으면 말을 안 한다. 이건 사기라고 해봐야 오천 원,
만 원이 고작이다. 모델이라고 속여도 곧이들을 만큼 허우대 좋고 입성 번지르르한 위인들
이 별 치사한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잔돈푼을 뜯어가는데 이건 허허, 웃어 넘기는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지난달, 만 원을 우려간 위인만 해도 그렇다. 한창 손님이 버글거릴 점심 시간
에 길 건너 사무실 직원이라며 찾아온 위인은 다짜고짜 만 원만 꿔달라고 서슴없이 손을 벌
렸다. 인상이 어글서글하고 풍신도 좋아 귀티는 나 보이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처음보는
낯짝이었다. 그러나 위인은 내가 머리를 공굴릴 틈을 주지 않고 자기를 모르겠냐고 되레 추
궁을 해왔다.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주문을 받아라, 그릇을 치워 달라, 물을 달라 이런저런
주문으로 성화를 부려 대는 바람에 머릿속에 벌떼가 들어앉은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던
나는 긴가민가해 가며 돈을 내주고 말았다. 만 원짜리를 건네며 혹시나 해서 뭐에 쓸려고
돈을 빌리냐고 물었더니 배우 뺨치게 생긴 위인 하는 소리가 포커를 하다가 밑천을 다 털렸
는데 막판에 죽이는 족보를 쥐었다며 퇴근 시간에 틀림없이 갚아 주겠노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지간한 사무실에서는 밤낮 없이 노름판이 벌어진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너는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쥐뿔, 저녁에 돈을 갚기는커녕 동네에서 위인의 낯짝도 구
경할 수 없었다. 영화광을 자처해 오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그만한 연기를 본 적이 없다. 만
원짜리 한 장을 위해 위인이 보인 연기는 각고의 노력 없이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다. 잘
아는 집에 온 듯한 천연덕스러움과 빨리 가서 돈을 따야 된다는 초조함, 단골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당당함과 여차직하면 발을 끊겠다는 으름장이 섞인 눈초리, 나는 그 모든 것이 완
벽하게 조화를 이룬 명연기 하나만으로 식당을 돌아다니며 늙어 갈 위인의 세월을 떠올려
가며 허 참, 허 참, 입맛을 다시다가 그냥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노래방에 꿀단지를 묻어 놨나, 한번 갔다 하면 함흥차사네.”
나는 공연히 자리에도 없는 아내에게 골풀이를 해가며 담배를 부벼 껐다. 갑갑하다. 텔레
비전 앞에 하릴없이 죽치고 앉아 있자니 하품만 나온다. 요즘은 점심 시간만 지나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게 일이다. 아무래도 춘곤증인 모양이다.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가니 봄볕이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게 거리를 감싸고 있다. 사제관
옆 단독 주택 담벼락 위로 만개한 벗꽃은 갓 튀겨 놓은 강냉이처럼 몽글었다. 부는 바람에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꽃송이를 보노라니 햇살이 하늘이 아닌 벚나무로부터 뻗쳐나와 퍼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벚꽃 축제, 나는 수천 그루의 만개한 벚나무를
눈앞에 그려 보이며 더디게 흘러 가는 시간을 원망해 보았다. 일상의 시름을 잊고 애오라지
꽃향기에 취해 사람들과 어깨를 겯고 푸지게 놀다 보면 발톱의 때처럼 내 삶의 갈피에 파고
든 권태를 잠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즘은 장사가 잘되도 따분하고 파리를
날려도 다분하다. 정규 휴일마다 승용차 옆좌석에 아내를 태우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다녔지
만 이제는 그나마 시들해져서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따로 논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가 없는 탓인 듯도 싶다. 지난 삼 년 간 이런저런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들
어서지 않는다. 혀에 땀띠가 돋도록 채근해 대던 양가 어른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별 다른
말이 없다. 산부인과에서는 스트레스 탓이라며 초조해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초조해한 적이 없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생기겠거니 여기고 휘파람 불어 가며
세월아 네월아 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인 까닭인지 부쩍 아이 생각이 간절하다. 아마도 십이지
장 궤양에 시달리고부터 애를 낳아야겠다는 욕망이 일었던 것 같다. 슬슬 건강을 걱정해야
할 나이에 접어들고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축구공처럼 굴려보낸 일상도 사계의 하늘처
럼 다양하게 보인다. 그런데도 일상은 시계추처럼 흘러간다. 일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미묘하
게 변했지만 여전히 무기력하게 주판알로 튕겨야만 하는 내 자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속에
서 나는 권태를 배웠다.
“빨리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식당 앞 경계석에 쪼그려 앉아서 담배를 태우던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뿐, 나
는 노래방 입구 양쪽에 세로로 길게 늘어진 쌍둥이 플래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장
개업을 맞아 사은품을 증정한다는 내용의 활자가 큼직하게 큼직하게 박힌 플래카드의 샛노
란 빛깔이 봄볕과 잘 어울려 보인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나는 페인트 가게와 성당 사제관 앞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출장을
갔는지 페인트 가게는 문이 잠겼고 신부는 보이지 않는다. 바둑 상대를 찾지 못한 나는 입
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아내가 있는 노래방 앞을 그대로 지나쳐 도로를 건넜
다. 말도 없이 식당을 비운다고 지청구를 해낼 아내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나는 개
의치 않았다. 손님이 들지 않을 시간대이기도 하거니와 내심 아내가 시비를 걸어와 부부싸
움이라도 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오늘같이 따분한 날은 부부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 숨통이 막힐 것 같다. 나는 무단횡단을 감시하는 단속반이 숨어 있지나 않은지 사
위를 짯짯이 둘러본 뒤 도로를 건넜다.
도로를 건넌 나는 당구장으로 향하다가 맞은편 건물에서 나오는 고 사장을 발견하고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발걸음을 재우쳤다. 여는 때처럼 오전내 호프집에서 뭉기적거리다가 단
란주점으로 출근을 하는 눈치다. 당구장 앞에서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대낮부터 한바탕 힘
을 쏟은 모양으로 는적는적 걸음걸이에 힘이 없다.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벙글거리는 걸 보
면 기분이 퍽 좋은 모양이다.
“입이 귀밑에 걸린 걸 보니 호프집에서 뭐 빠지도록 낮탕을 뛴 게 뻔하구만.”
나는 주는 거 없이 미운 위인의 뒤꼭지에 대고 빈정거렸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지도록 치
도곤을 당했으면 낯뜨거워서 이사를 가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놈의 위인이 무안해하는 기색
한 점 없이 전과 다름없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고 사장은 길을 가면서도 해찰에 정신
이 없다. 겉을 지나가는 약속 다방 레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눈을 찡긋거리고,
도로 건너편 여자의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다리를 보며 걷다가 허방을 짚어 겨우 중심
을 잡기도 한다. 그는 입맛이 쓴 듯 앗싸 노래방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길을 건너 앗싸
단란주점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변 상인들이 동네 망신이라고 쉬쉬해 가며 뒷말 삼가는 내막
도 몰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는 카페를 차려 주고 마누라에게는 고깃집을 차려
주었다고 입에 침을 튀겨 가며 가슴을 탕탕 쳐대는 고 사장이고 보면 철판도 보통 철판이
아니다. 하긴 식구들에게는 굴비 천장에 걸어 놓고 밥 먹게할 위인이 다름아닌 그 식구들에
게 고래 힘줄 같은 생돈을 토해 냈으니 그렇게 생색이라도 내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억장이
무너져 제 명대로 못 살 노릇이기는 할 터였다.
나는 당구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성난 황소 같던 고 사장의 큰 아들을 떠올렸다.
우리 식당에서 계 모임을 하던 날, 고 사장의 큰 아들은 호프집을 때려부쉈다. 맨정신으로는
용기가 나지 않아 후루룩, 낮술을 걸치고 호프집으로 쳐들어간 고 사장의 큰아들은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쉈고 말리는 아버지를 두들겨팼다. 고 사장의 애첩인 호프집 마담은 카운터
밑에 숨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고 사장의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한 뒤 탁
자와 의자를 집어던져서 진열장을 박살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는 짐승처럼 고
함을 지르며 이층 창문을 뛰어내렸다. 발목이 부러져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몸부림쳐
가며 울부짖었다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나는 등허리가 선득해지곤 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고 사장은 간판댁에게 사천오 백을 받고 노래방을 넘겼다. 그 돈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고스란히 건네졌고, 그들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카페를 차렸
다. 노래방 아줌마는 두 아들의 지원 사격을 받아 남편에게서 돈을 타내 앗싸 단란주점 이
층에 조그만 고깃집을 차렸다. 그로써 노래방 가족은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했다. 노래방 아
줌마는 고깃집을 차린 이후로 남편의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서 어떤 여
자와 어떻게 놓아나든 개의치 않았다. 남편이 단란주점 여종업원들을 돌아가며 건드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노래방 아줌마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따지고 보면 고 사장으로서는 비
록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그다지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이다.
주변 상인들도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시원해했다. 고 사장의 그늘에 묻혀 숨도 제대로 쉬
지 못하고 살았던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백번 축하를 해줘도 모자랄 만큼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노래방을 인수한 간판댁은 고 사장만 보면 전에 없이 눈을 부라려 가며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고 사장을 미워하는 간판댁의 대고가 의아하게 여겨져서 연유를 캐
물으니 그이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는 듯이 흥분해서 그간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까발려 놓았다. 간판댁의 예기를 듣고 보니 그이가 그토록 흥분하는 이유도, 그간 노래방이
장사가 안 된 이유도 절로 납득이 됐다.
간판댁의 입을 빌리자면 고 사장은 그간 참으로 지저분하게 장사를 해온 모양이다. 노래
방에 놀러 온 남자들이 여자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면 앗싸 단란주점 여종업원들을 데려와서
살살 꾀송거려 가며 바가지를 씌우기가 예사고, 단란주점이 바빠 아기씨들이 올 수 없을 때
에는 반강제로 마누라의 등을 룸으로 떠밀었다. 설사 아가씨들이 도착할 때까지 노랫자락이
나 뽑아 가며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뜻으로 마누라의 등을 떠밀었다 할지라도 좀처럼
납득키 어려운 일이다. 두 눈 번히 뜨고 그 꼴을 지켜봐야 했던 고 사장의 두 아들은 차마
아버지에게 대들 수가 없어 어미의 편도 들지 못하고 번번이 어금니만 깨물어 댔다. 발 없
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앗싸 노래방에 대한 인식은 점차 나빠졌고, 가족들과 어울려 노래
방을 찾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간판댁이 고 사장에게 억하심정을 품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간판댁이 노래방을 인수하기 전까지 노래방 하루 매상은 기껏해야 십안 원 안짝이었다.
남편에게 시달리느라 청소고 뭐고 마음 쓸 여유가 없던 노래방 아줌마는 카운터에 앉아 한
숨을 쉬는 게 하루 일과였다. 그러다 보니 노래방은 계단을 채 내려가기도 전에 눅진한 곰
팡내가 코끝에 묻어났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번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
어 봐야 돈을 버는 족족 아버지에게 상납해야 하는 탓에 고 사장의 두 아들도 손님이 오면
오나 보다 가면 가나 보다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리나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러니 기
본적인 서비스는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최신곡은 삽입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낮시간
이면 인상 험악한 막둥이의 친구 예닐곱이 노래방 앞에 경주용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두어
시간은 좋이 장사진을 친 탓에 기껏 찾아온 손님들도 겁을 집어먹고 발길을 돌리기 예사였
다.
그런 노래방을 인수한 간판댁은 우선 실내 장식부터 뜯어고쳤다. 전에는 없던 단체석도
꾸미고 수십 번의 물걸레질로 곰팡내를 없앴다. 도배는 물론 바닥도 새로 깔았고, 간판도 큼
직하게 바꿔 달았다. 뿐 만 아니라 녹음 기기도 설치해서 원하는 손님에게 무료로 테이프를
만들어 줬으며 화면에는 이승희를 띄웠다. 손님에게 아가씨를 불러다 주던 관행도 개업 당
일부터 없애 버렸다. 아가씨를 불러 달라고 끈덕지게 물고늘어지는 손님들은 등을 떠밀어
되돌려 보냈다. 그러한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개업 첫날부터 매상이 오십만 원을 웃돌았고
손님이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해도 삼십만 원은 넘게 챙겼다. 간판댁이 노래방을 인수한 지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주변 상인들은 반 년이면 간판댁이 노래방에 투자한 돈 전액을
회수할 수 있을 거라며 부러워했다. 개중에는 시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뭐
라고 해도 고 사장만큼 속이 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 사장이 마각을 드러낸 것은 간판댁이 노래방을 인수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는
고등 학생 서넛이 노래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청소년 선도 위원회로 신고를 했다.
이어서 노래방으로 전화를 건 그는 지금 형사들이 출동했으니 미성년자가 있으면 빨리 내보
내라고 천연덕스럽게 위해 주는 척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간판댁에게 고 사장은 뻔뻔
스럽게도 원조 부대찌개에서 나오던 손님이 핸드폰으로 신고하는 걸 운 좋게도 마침 자기가
그 압을 지나다가 들었다며 자신의 공치사까지 곁들었다. 간판댁은 전화를 끊자마자 뒷문으
로 애들을 내보냈는데 애들이 나간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무사히
위기를 넘긴 간판댁은 득달같이 우리 식당으로 달려와서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 시간에
찾아온 손님이 있었느냐 확인을 했다. 그러나 그 시간에 우리 식당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비로소 뭔가 감을 잡은 간판댁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그이는 틀림
없이 고 사장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꾸민 수작이라고 단정을 짓고는 분해서 어쩔 줄을 몰
라했다. 이튿날, 간판집으로 한 사장을 찾아온 고 사장은 예의 그 뻔뻔한 얼굴로 전날 자기
가 간판집에 얼마나 큰 부주를 한 셈인지 누누이 강조해 가며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그러면서 자기 마누라가 새로 차린 고깃집 간판 얘기를 넌지시 끄집
어냈다. 그는 한 사장이 뭐라고 입을 뻥긋하기도 전에 전날 일을 또다시 들추어내며 거저는
못 해줄망정 절반은 깎아 줘야 도리가 아니겠냐고 옆구리를 찔벅거렸다. 그러나 때마침 나
타난 간판댁에게 덜미를 잡힌 고 사장은 혹 떼러 왔다 혹 붙인 격으로 간판값을 깍긴커녕
일 년을 넘기면서 어영부영 떼어먹은 단란주점 간판값을 토해 내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사흘 뒤, 노래방은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들에게 청소년 보호법 위반으로 비싼 대가
를 치러야만 했다.
“사람 사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 사장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불경기의 여파인지 당구
장 안은 썰렁했다. 무료하게 신문을 읽고 있던 당구장 주인이 반색을 하며 나를 반겼다. 한
떼의 청년들이 나인볼을 치는 옆 당구대에서 나는 당구장 주인과 일 점에 천 원 내기 쿠션
볼을 쳤다. 서로의 실력과 성격을 뻔히 알고 있는 최 사장과 나는 느긋하게 잡담을 나누며
당구를 쳤다. 그러나 한 푼 두 푼을 돈을 잃어 가면서 나는 팽팽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침
착하자는 의지와는 달리 옆 당구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가며 나인볼을 치는 청년들이 거슬
려 수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배달돼 온 회에 소주 몇 병을 다 비운 뒤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탕수육에 고량주까지 시킨 그들은 거나하게 취해서 제멋대로 행동을 했다. 쿠션볼 서
너 개는 좋이 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내가 신중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막 공을 치려고 하면
그들 중의 하나가 등 뒤에서 걸리적거렸다. 몇 번이나 그들 때문에 픽사리를 했건만 그들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참다 못해 한마디 하려고 돌아선 나는 청년들 가운데 낯익은 얼
굴을 발견하고 무춤해서 입을 다물었다.
“야이, 씨발놈아. 이게 어떻게 떡이야?”
얼굴에 칼자국이 길게 난 청년이 붙어 있는 두 개의 공을 손가락질해가며 목청을 돋우었
다. 일전에 우리 식당에서 깨진 유리컵에 손을 베어 피를 흘렸던 청년이었다. 그의 곁에는
그 날 대취한 그를 부축해 간 문신투성이의 청년도 있었다. 칼자국 난 청년의 얼굴을 발견
한 나는 순정을 아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던 모습을 떠올려 가며 피식 웃었다. 떡
이다 아니다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칼자국이 난 청년은 주먹으로 당구대를 힘껏
내려치며
“잘 봐, 개새끼야. 이게 어떻게 떡이야?”
하고 게목을 질러 댔다.
“임마, 우길 걸 우겨야지. 주먹으로 당구대를 쳐서 공을 떨어뜨려 놓곤 스위치라고 우기
면 어쩌자는 거야?”
“관둬, 새꺄.”
칼자국이 난 청년은 큐대를 바닥에 내던지며 돌아서서 당구장을 나가 버렸다. 말다툼을
벌였던 청년이 몹시 감정이 상한 듯 시근벌떡거리며 뒤쫓아 나가려는 걸 문신 투성이의 청
년이 가로막았다.」
“야야, 니가 참아라. 저 자식 저거, 다방 기집애가 달아난 뒤로 제정신이 아니다. 얼마 전
에도 이빠이 취해서 미스 김 행방을 대라며 길다방에서 주정하다가 거기 애들 한테 작살났
잖냐. 자식이 어쩔 생각인지 눈만 뜨면 술 먹고 우는 게 일이다.”
“한심한 새끼. 널린 게 깔친데 청승떨고 자빠졌네.”
“그런 소리 마라. 저 자식 이번엔 보통 심각한 게 아니야.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니까. 술
만 들어갔다 하면 죽고 싶다고, 그 기집애 없는 세상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허구한 날,
나를 찾아와서 노래를 해대는데 밤마다 그 주정 받아 주는 내가 다 죽을 맛이다.”
청년들의 얘기를 엿들으며 나는 종전의 불쾌감을 잊었다. 큐대에 쵸크칠을 하면서 칼자국
난 청년의 얼굴을 떠올리던 나는 일순간 무중력 상태에 빠져들었다.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다가 별다른 추억도 없이 실연을 당했을 청년의 슬픔을 짐작하기는 어렵
지 않았으나 나는 뜬금없게도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져서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만
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지새웠던 지난날의 수많은 밤들이 참으로 까마득한 속에서 젊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만남과 이별을 경험할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절망이
돌덩이 처럼 가슴에 얹혔다. 나는 당구공을 큐대로 겨누고 멀거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
며 게임을 포기했다. 이깟 당구는 쳐서 뭣 하나 싶은 허무가 마지막 잎새처럼 가슴 속에서
떨어져내렸다. 또 놀러 오라는 최 사장의 인사를 등 뒤로 하고 당구장을 나온 나는 도로변
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올려다본 하늘이 참 맑다.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맨정신으로 가슴을 울리는 이 순간의 외로움을 통
째로 느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산들바람처럼 전신을 간지럽힌다. 나는 은행나무에 등을 기
대고 서서 눈앞에 놓인 거리를 별 뜻 없이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쳐든 시선에 칼
자국 청년이 잡혔다. 나는 하마터라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청년은 도로 건너편 오층 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서 깡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두 다리
를 건물 밖으로 늘어뜨린 채 난간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청년의 모습이 위태롭기 짝이 없
다. 건듯 바람만 불어도 그의 몸은 오층 건물 아래로 곤두막질 칠 것만 같다. 소주병을 기울
이다 말고 이따금씩 옷소매로 눈가를 훔지는 청년의 시선은 먼 허공을 향하고 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년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나뿐인 듯 행인들은 갈 길에 여
념이 없다. 하긴, 길 이쪽 저쪽을 오가는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발걸음만 재우칠 뿐 머리 위
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구명가게 앞 파라솔 아래서 방앗간 여자와 감자탕집 주인 여자는
하품을 쩍쩍 해가며 잡담을 나누고 있다. 전면이 유리라 안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오토바이
상사에서는 예닐곱의 사내가 포커판을 벌이다 말고 말다툼에 열을 올린다. 눈이 벌개져서
핏대를 올리는 그들은 모두 동네에서 낯이 익다. 새로운 주문을 맡았는지 한 사장은 간판
제작에 정신이 없고 골목 맞은편 밴댕이 횟집에서는 수족관 청소가 한창이다. 애기를 업은
아낙만이 수족관 앞을 지나다가 물이 튈까 무춤거렸을 뿐, 길 양편을 오가는 행인들 발걸음
은 거침이 없다.
나는 행여 청년이 자살을 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여 가며 그에게서 눈길을 때지 않았다.
빈 술병을 옆에 내려 놓은 청년은 망연자실, 허공에 눈길을 붙들어 매고 있다가 천천히 일
어섰다. 그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나는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햇살을 가르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가깝고 멀게 시야에 들어왔지만 나는 발만 동동 구를 뿐
그 어떤 도움도 청하지 못했다. 우둔우둔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청년에게로 눈길을 돌린 나
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간에서 내려선 청년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먼 허공에 못 박혀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
처구니 없게도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청년이 난간에서 뛰어 내리기를 바라기라도 했던 걸
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배신감은 깊은 골에 울리는 메아리
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 때였다. 청년은 옥상 난간에 바짝 붙어서서 손나팔을
만들어 허공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미자야, 보고 싶다! 사랑한다! 천하의 박광수가 미자를 죽도록 사랑한다아-ㅇ!”
청년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층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포코판에 빠져있던
상인들까지 오토바이 상사 밖으로 나와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청년과 함께 당구를 쳤던 패거
리도 참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청껏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 댄
청년은 눈가를 쓱, 닦은 뒤 지나간 저 쪽으로 사라졌다.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청년이 사라진 건물 옥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버스 경적 소
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보행자신호를 지키느라 멈춰선 승용차 뒤에 바짝 붙어 선
버스가 연방 경적을 울려 대고 있었다. 행인들이 경적 소리에 놀라거나 말거나 버스 운전사
는 신호가 바뀌고 승용차가 출발을 할 때까지 쉬지 않고 빵빵거렸다.
“또라이 새끼”.
나는 버스를 향해 나직이 쏘아붙인 뒤 무단횡단을 햇다. 도로를 거진 다 건넜을 때 호루
라기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서 단속반이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골
목 모퉁이를 돌아 식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보배네와 마주 앉아 있던
아내를 향해 나는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씩씩대
는 단속반의 모습을 빼꼼이 내다본 나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돌아서다가 무춤해서 멈춰 섰
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보배네의 분위기가 왠지 심심치 않다. 얼핏 보기에도 보배네는
많이 취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내는 모른척하라는 뜻으로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홀쪽을 기웃거리는데 문득 얼마 전에 보배네가 타간 곗돈에 생각이 미쳤다. 나
는 속으로 혀를 차며 보배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엿보았다. 그이의 뒷모습이 전에 없이 딱
해 보인다. 뭐라 위로해줄 말을 못한 아내는 보배네가 비워 내는 잔에 묵묵히 술을 쳐주며
이따금씩 한숨을 내쉬었다.
짠한 마음에 나는 고만 돌아서서 거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를 가운데 두고 보신탕
집 화단을 내다보는데 어쩐지 화초들이 새득새득해 보였다. 눈여겨보니 하나같이 조잡이 들
어 있다. 하긴 주인의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판에 화초라고 설할리가 없다. 고개를 절레절
레 내두르며 돌아서려는데 낯익은 얼굴하나가 보신탕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간해
서는 얼굴 구경도 할 수 없는 건물 주인이다. 잠시 후 보배 할머니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
밖으로 나왔다.
“보배야. 보배야. 보배야아-ㅇ!”
보배 할머니는 골목 이쪽 저쪽에 대고 애타게 며느리를 찾았다. 나는 내 일이라도 되는
양 당황해하며 보배네를 돌아다 보았다. 마주 앉아 술을 쳐주던 아내도 난처해지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정작 보배네는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묵묵히 술잔만 기
울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며느리를 찾는 노인의 쇳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방에서 쭈뼛거리던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보배네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일어날 줄을 모른다. 침 한 번 꿀꺽 삼킬 시간이 시간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보배네는 천천히 이일섰다. 마음 따라 몸도 천근인지 일어서는 그이의 모
습이 퍽이나 힘겨워 보였다. 몸을 다 일으켜 세운 보배는 술기운이 도는지 휘청거렸다. 아내
가 부축을 해주려고 옆으로 다가갔으나 그이는 아내의 손길을 뿌리쳤다. 보배네는 탁자를
감싸쥐며 주저앉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설움이 얼굴을 감싸쥔 그이의 손가락 봇물처럼 흘
러내렸다.
나는 더이상 식당 안에 머무를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다. 나를 발견한 보배할머니가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보배네의 행방을 물어 왔으나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했다. 그러
자 노인은 난처한 기색으로 돌아서서 또다시 허공에 대고
“보배야! 보배야아-ㅇ!”
애타게 목청을 높였다.
전깃줄에 걸려 밤새 잉잉거리며 울던 바람은 누긋해지는 기색도 없이 오전재 흙먼지를 피
워 올렸다. 따사로운 봄볕도 매운바람에 온기를 잃고 골목에 숨어 아이들이 돌리는 팽이에
만 매달려 반짝거린다. 바람을 피해 옹기종기 아이들이 모인 골목 밖은 공사가 한창이다. 포
트레인과 덤프트럭이 무시로 드나드는 주택가 빨래줄은 공원 의자에 쯔그려 앉은 노인처럼
오래전에 제 기능을 잃고 먼지만 뒤집어쓴 채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빈 빨래줄
을 멀거나 보노라니 문득 세수를 하고픈 욕망과 함께 햇볕에 잘 널어 말려 가슬가슬한 수건
생각이 간절해졌다. 도시가스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빳빳이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기억
이 없다. 하긴 속옷이고 양말이고 한달 가까이 덜 마른 듯 눅눅한 것만 꿰차다 보니 이제는
가슬가슬한 감촉이 어떤 느낌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창문을 닫아 놓고 사는일에 익숙해지
면서 집 앞에 땅굴을 파든 말든 공사가 안겨주는 크고 작은 피해에도 무감각해졌다.
길게 줄을 늘어선 자동차 행렬에 오도가지도 못하고 갇혀버린 나는 오토바이를 돌릴 궁리
를 하다가 그만 포기해 버렸다. 오토바이 한대 겨우 빠져나갈 여유밖에 없는 공간에서 어찌
어찌 재주를 부려 방향을 돌린다. 한들 전체가 공사중인 마당에 공연히 헛힘만 패일 따름이
다.
나는 마음을 느긋이 다져먹으며 튀김 가게 건물 옥상 빨랫중에 앉아 나비를 쳐다보았다.
부연 먼지 구덩이 속에서 노젓듯 나폴거리는 나비의 날개가 두 눈 가득히 담기고 까마득히
높은 하늘가에 비행운을 그리며 여객기가 지나간다. 나는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눈으로 좇
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장을 보러 나왔다가 먼지 구덩이 속에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풀빵을 사먹는 여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앞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걷
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서행을 하는데도 길 전체가 울퉁불퉁 요동을 치는 바람에 배달통의
빈 그릇들이 맞부딪치면면서 깨질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공사가 끝난 구간에서도 차들
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공사가 끝난 구간만이라도 아스팔트를 입혔으면 좋으련만 무슨 놈
의 공사가 파제끼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나는 놀이터 쪽으로 행한 샛길로 방향을 틀어 와락 속도를 높였다. 동네길을 모조리 뜯어
놓은 공사 덕분에 나는 산악 오토바이 경주 대회에 나가도 좋을 만큼 오토바이를 모는 요령
이 늘었다. 급가속에 급브레이크를 잡는 횟수도 그만큼 많아졌다. 놀이터 앞에서 식당으로
향하는 골목 업구가 포크레인으로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놀이터와 골목길 사이의 경
계서을 훌쩍 넘어 놀이터 안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놀이터 안으로 들어선 나는 뛰어든 아이들을 피해 서행 했다. 놀이기구 주위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낙들이 한가로이 잡담을 ㅏ나누고 등나무 넝쿨 아래선 삼삼오오 짝을 이룬 노
인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사철나무가 울타리를 친 잔디밭에는 어린 학생들이 빙둘러앉
아 주위의 시선 따위엔 아랑곳 없이 담배를 피워 가며 킬킬거린다. 몇몇 남학생은 미니스커
트를 입은 여학생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다.
늘 똑같은 풍경의 놀이터를 지나치던 나는 벤취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코를 고는 이발소
주인을 발견하고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팔다리를 벤취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잠이 든
그의 행색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행려병자로 오인하기에 딱 좋았다. 대낮부터 취해서 누구
와싸움을 벌렸는지 찢겨서 너덜거리는 셔츠 밖으로 땟국물 줄줄 흐르는 런닝이 드러나고 흙
묻은 바지의 지퍼는 흉물스럽게 열려 있었다. 술만 취했다 하면 길바닥이고 공터고 안방 삼
아 벌러덩 드러눕는 위안의 몰골을 신물나게 보아 온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가며 혀를
찼다.
이발소를 내놓고 이사를 갔다기에 두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취중에 발길이 저 혼자
이리로 향한 모양이다. 나는 혀를 내 두르며 드 앞을 지나쳤다. 두어 달 됐을까, 아내가 자
식들을 앞세워 집을 나간 이후로 그의 주정은 더욱 심해졌다. 낯모르는 사람에게 턱없이 시
비를 걸다가 반 죽도록 얻어맞는 것쯤 우습게 알았고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꺼이꺼이
목을 놓아 우는 일도 흔했다. 그가 맨정신으로 이발소에서 손님을 맞는 일은 일 주일에 이
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에 소문이 짝자그르하다 보니 문을 열어도 손님은 들지 않았
다. 그런데도 어디서 술값이 생겨 술을 먹고 돌아다니는지 신기한 노릇이었다.
놀이터를 막 벗어나려던 나는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하고 오토바이를 세웠다. 주유소에
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야간 학교에 다닌다던 이발소집 큰딸이다나는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이발소집 딸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 애는행려병자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흔들
어 깨워서 서슴없이 부축을 했다. 주위의 시선이 껄끄럽지도 않은 듯 이발소집 딸은 자기보
다 한 뼘이나 키가 작은 아버지를 부축해서 놀이터를 가로지르는 동안 눈빛이 꼿꼿했다. 놀
이터를 벗어난 부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꼭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등나무 아래레서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며 말을 잊고 있던 노인들은 택시가 떠나고 나자 고개를 주억거려 가며
두런 두런 말을 주고 받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 노인이 잔대밭의 불량스런 아이들을
이발소집 딸과 비교해 가며 비난한 것을 빌미로 사방에서 요즘 아이들 큰일이라며 기다렸다
는 듯이 성토에 열을 올렸다. 아무리 그래 봐야 아이들이 어른보다 나쁠 수는 없다고 한마
디 쏘아 주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나는 식당을 향해 오토바이를 몰았다.
찾아온 그릇을 서둘러 씻은 아내는 셔터를 내리고 화장에 열을 올렸다. 이발소집 딸 얘기
를 들려 주고 싶어 근질거려 죽겠는데 거울을 끼고 앉은 폼을 보니 다 틀린 노릇이다.
“여보, 보배네 아줌마도 안 가는데 대충해. 가서 벚꽃동산이나 한바퀴 휘 둘러보고 올 걸
공들여 치장할 필요가 뭐 있어?”
“안 가긴 누가 안 가요?”
“보배네 말야. 길거리로 나앉을 판에 벚꽃 축제라니,눈에나 들어오겠어?”
“나도 그럴줄 알았는데 웬걸요. 그 아줌마 아침부터 날계란 먹어가며 노래방에서 연습중
이에요. 그래서 간판집 아줌마하고 밴댕이 횟집, 호프집, 중국집까지 다들 모여서 응원할 계
획까지 세워 둔걸요.”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져서 아내의 입만 쳐다보았다. 보배네가 노래 자랑 대회에 간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끼니를 걸러 가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서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보배네였다. 입만 열었다하면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하숨만
푹푹 내쉬던 그이가 무슨 마음으로 하룻밤 세에 태도를 바꾸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
았다. 돈을 구하러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노래자랑이라니, 비록 남의 일일망정
생뚱맞기 짝이없다. 아내는 화장을 하는 기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픽픽웃었다.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웃음이 분명했다. 머쓱해진 나
는 입을 다물었다. 나이든 주변 상인들이 힘있을 때 아내에게 잘해 두라고 농담 삼아 하던
한마디가 교묘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전에 없이 진지하게 아내의 뒷모습을 눌러보았
다.
아내는 선이라도 보러 나가는 처녀처럼 화장에 여념이 없다. 평상시에는 스킨과 로션만으
로 화장을 끝내는 사람이 외출할 때면 어김없이 한 시간은 좋이 공을 들여 치장을 한다. 그
런 아내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노라면 종종 짠해질 때가 있다. 일 년 내내 식당 주방에 묻
혀 살아야 하는 아내의 쓸쓸함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먹고 사는 일에 쫓기면서 자신도 모르
게 나이를 먹어 버리는 두려움을 나는 내 자신을 통해 아내에게서도 읽는다. 일상의 작은
일들을 유달리 소중히 여기는 아내의 태도로 어쩌면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비손 같은 몸짓일지도 모른다. 문득, 크게 울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소름이 돋도록 두려워
질때,밤을 새워 가며 숭을 마시는 따위의 가해를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아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셔터를 내리고 그위에 잠시 외출중이라는 쪽지를 써붙었
다. 해바라기 꽃무늬가 시원스레 수놓아진 원피스를 걸쳐 입은 아내는 내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 맴을 돌았다. 티 없이 밝은 아내의 미소를 보며 나는 잠깐 동안 나른한 행복감에 사
로잡혔다. 적어도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위안이 솜이불 처럼 가슴을 덮어온다. 나는 식
당을 나서기전, 아내를 품에 안고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노래방 앞은 기차 타고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뜬 상가 사람들로 쫙자그르
했다. 물가에 내놓은 오리 때처럼 떠들썩한 그들은 노란 모자 쓰고 소풍 가는 유치원생 처
럼 천진만만해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 그늘 뒤에 말없이 서서 멀리 고개를 돌린 보배네는
무엇을 견디는지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있었다. 곁의 사람이 무어라 말을 걸면 언제 그랬냐
는 듯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돌아서면 그뿐이었다. 버스 안에서도 보배네는 사
람들과 떨어진 뒷자석에 앉았다. 내 눈에는 그런 보배네가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노래 자랑에 나갈 사람답지 않게 후줄근한 차림새도 게름칙하니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아무
래도 불안해서 아내에세 보배네를 주의 깊게 지켜보라고 사람들 몰래 일렀다. 그러나 아내
는 내 얘기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되레 멀쩡한 사람 이상하게 만들디 말라며 면박을
주었다.
버스 종점에 닿도록 주변 풍경은 삭막하기 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야상 하나 없이 상가
건물과 주택 일색이었다. 버스 종점 뒤에 이층 건물 높이로 비죽 솟은 언덕은 수목하나 없
이 벌건 엉덩이를 까뒤집어 흉물스러웠다. 사위를 짯짯이 둘러보았으나 벚나무는커녕 버스
종점 특유의 메스꺼운 기름 냄새만 진동을 했다.
그러나 언덕 아래 주택라를 끼고 모사리를 돌자마자 거짓말처럼 별천지가 눈앞에 펼쳐졌
다. 잘 포장된 도로 전체가 벚꽃으로 뒤덮여 꽃대궐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 위 허공은 양쪽
에서 뻗은 벚나무 가지로 뒤덮여 도로 전체가 하나의 굴이나 다름없었다. 담장 삼아 둘러친
철망 안쪽과 도로 맞은편 인공으로 조성한 언덕도 만개한 벚꽃을 앞세워 눈길을 붙잡고 놔
주지 않았다. 벚나무 밑에서 고개를 드니 조각으로 남은 하늘이 꽃빛으로 함께 나풀나풀 떨
어져내리고,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물비닐에 부서지는 햇살철럼 한 점 꽃빛으로 아롱거렸다.
꽃향기에 취한 나는 보배네를 비롯한 일행들은 물론이고 팔짱을 낀 아내마저 잊고 그저 날
리는 꽃잎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들도 입구에서 탄성을 지른 이후로 꽃에 홀
려 말을 잊었다. 자칭 최 사장만이.
“쥑인다. 끝내주네!”
하고 한마디 했을 따름이다.
백여 미터가 넘는 꽃굴을 지나 한화 에너지 정문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비로소 잊었던 말
문을 되찾을 수있었다. 보배네의 얼굴도 웃비가 걷히는 하늘처럼 그늘을 많이 벗었다. 활짝
개방한 정문을 지나자 곧게 뻗은 도로 양쪽으로 바벨 탑 같은 느낌을 주는 공장 건물들이
굴뚝 위로 불기둥을 토해 내며 우뚝우뚝 붙박혀 있고, 건물과 건물은 거대한 수송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층 아파트 크기의 철조구조물들은 위압적인 자태로 보는 이들을 단숨에
압도해 버렸다. 정문 옆 동산에 뿌리를 내린 수백 그루의 벚나무는 마치 야수를 다루는 사
육사처럼 살풍경한 공장의 전경을 부드럽게 희석시켰다. 벚나무는 산 밑 너른 잔비밭에도
총총히 박혀 오며가며 지친 가슴들에게 평온한 쉼터가 되어 주었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동
산을 누비는 사람들은 따로 행사를 치르지 않아도 좋을 만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장기자랑 대회가 열릴 무대는 잔디밭머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동산 밑에서는 아마추어 사
진사들의 적품전이 열렸는데 누드사진 앞을 지나치는 남자들의 표정이 볼 만했다. 생맥주와
마른 안주를 제공하는 차량 앞은 남녀 가리지 않고 몰려든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이윽고 무대에 오른 사회자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고, 뿔뿔히 흩어졌던 사람들은 잔디밭으
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행사 따위응 안중 에도 없다는 듯 벚꽃에 홀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적잖았다. 마이크를 쥔 사회자는 무대 옆에 둥덩산처럼 쌓여있는 경품을 미끼 삼아 변방으
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꼬드겼고 꽤 많은 발길이 벚꽃을 등지고 무대 앞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에서 몇 번인가 낯을 익힌 개그맨은 죽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배꼽을 쥐게끔
좌중을 들었다 놨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띄웠다. 사회자의 말재간이 워낙에 뛰어나다보니 사
람들은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웃을 준비부터 했다. 판을 벌이기에 맞춤하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사회자는 동남아 순회공연 운운해 가며 악단과 초청 가수들을 소개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초청 가수들은 악단의 반주에 맞춰 민요로 판을 꾸려 나갔다. 유면 가수의
얼굴을 볼 줄 알고 한껏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만 맥이 풀려 시큰둥한 표정으로 무대를 올려
다봤다. 그러나 민요 가수들의 빼어난 가창력에 사회자의 말재간이 곁들여지면서 좌중엔
차츰차츰 신명이 지폈다. 낮술에 취한 노인들은 곳곳에서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추어가며 신바람을 냈고 사람들은 와아,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쳐됐다. 애
오라지 벚꽃 구경만 하던 이들도 무슨 재밌는 일이 있나 호기심에 이끌려 슬금슬금 무대 앞
으로 몰려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자 민요 가수들이 무대 뒤로 물러가고 사회자는 대단한 순
서라도 기다리고 있는 양 한껏 폼을 잡았다. 넓은 잔디밭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기대감에
들떠서 입도 뻥긋 못하고 사회자를 주목했다. 한참동안 능청을 떨어 댄 사회자는 갑자기 정
색을 하며 조용필을 외쳐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조용필의 등장에 좌중은 눈에 띄게 술렁거
렸다. 사람들은 환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무대로 시선을 모았다.
그때 조용필을 소개하며 뒤로 물러났던 사회자가 앞으로 썩서며 악단의 반주에 맞춰 ‘고
추잠자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조용필의 목소리였다. 어리둥절해하던 사람들은 깔
깔대며 사회자의 모창에 박수로 박자를 넣어 주었다. 모창을 마친 사회자는 또다시 폼을 잡
으며 유명 가수가 등자아할 것처럼 분위기를 띄웠다. 사회자의 장난에 꼼짝없이 속아 넘어
갔던 사람들은 우우, 야유를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떨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두두두두, 긴장을 고조시키는 드럼 반주에 사람들은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무대 앞을
가득메운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본 사회자는 팔을 뻗어 무대 뒤를 가리키며 양, 수, 경, 하고
목청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텔레비전을 통해 한참 낯이 익은 여가수가 무대 위로 올라왔고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무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극성팬으로 둔갑한 사람들은 휘
파람을 불어 가며 박수를 치고 발을 굴러 됐다. 애 어른 할거없이 사방에서 언니를 외쳐 대
는 가운데 수십명이 무대 앞으로 우르르 뛰어나가 악수를 청했고 유명인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일념에 때아닌 자리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양수경이 노래를 시작하면서 그 모든
소동은 일시에 수그러들었다.
1부 순서가 모두 끝나고 곧바로 장기 자랑이 이어지자 유명 가수의 출연으로 한바탕 소동
을 벌였던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웃의 등장을 기다렸다. 금실 좋아 보이는 부부가 무
대 위로 오르자 사람들은 어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무슨 재주를 가졌는지 한번 볼까, 하는
표정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순서를 바꿔 가며 무대에 오른 이웃들의 숨은 재주는 한 번 보
고 말기에는 참으로 아까웠다.
나는 출연자들이 바뀔 때마다 이제나제나 초조해하며 보배네의 순서를 기다렸다. 몇몇 출
연자의 가창력이 워낙 출중해서 보배네가 그들을 제치고 상을 탈 수 있을지 적잖이 걱정이
됐다. 아내를 비롯한 일행들의 눈치도 나와 다를 바 없었다.
기타와 바이올린과 첼로를 들고 무대에 오를 일가족들이 연주를 마치고 내려가자 사회자
는 다른 출련자의 이름을 불렀다. 호명을 했는데도 츨연자가 무대에 오르지를 않자
tkghlwksms
“안복순씨! 안복순 씨 안 계세요?”
하고 목청을 높였다.
“누군지 몰라도 순서 기다리다가 똥 누러 갔는갑다.”
간판색의 농담에 깔깔대고 웃던 우리 일행은 머뭇거리며 무대 위로 오르는 보배네 모습에
무춤해서 입을 다물었다.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는 폼이 다들 보배네의 이름을 몰랐
던 눈치다. 일행은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려 가며 저이의 이름이 안복순이었구나, 하는 눈
빛이었다.
보배네가 무대에 오르자 악단이 김추자의 ‘봄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숨
을 죽익고 보배네의 입에서 언젠가 들었던 , 꿈결 같던 노래가 흘러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러나 어인 까닭인지 보배네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주는 계속해
서 흘러가건만 보배네는 먼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사회자가 뭐라고 보배네에게
말을 걸었으나 보배네는 들판에 홀로 선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물어물 반주가 멎고 무대
아래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저어, 아주머니...”
사회자가 난처한 듯 보배네의 어깨를 흔들며 말꼬리를 흐렸고 보배네는 고개를 돌려 사회
자를 바라보았다. 그도 잠깐, 다시금 허공으로 눈길을 돌린 보배네의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보배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앞에서 나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먼 하늘가에 한 방울 눈물을 남긴 보배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보
배네의 돌연한 행동에 한참 신명이 지폈던 찬물을 끼얹은 듯 고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사회
자가 나서서 갖은 애를 다 써보았으나 썰렁해진 분위기는 좀체 달아오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무대뒤로 달려갔다. 각자 흩
어져서 보배네를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
일행은 한화 에너지 정문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동네에 도착하기까지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각자의 생각에 사로잡혀 발걸음이 무거웠다. 터덩터덜,
간판집 골목 어귀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어거지로 끌고 온 우리 일행은 구경이 난 듯 골목
어귀에 모여서 웅성 거리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보배네의 얼굴을 떠올리곤 발걸음을 재우쳤
다.
말없이 사라진 보배네는 우리 식당에서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 오층 건물 옥상 난간에 걸
터앉아 있었다. 동네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가족이 세든 건물 옥사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지 보배네는 꽤 취한 모습이었다. 그이는 발 아래 모인 구경꾼들쯤 안중에도 없다
는 듯이 태연한 모습으로 술병을 기울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마시던 술이 다
떨어지자 보배네는 술병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이의 두 다리가 그네들 타듯
흔들거렸다. 밑에서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은 그이가 뛰;어내리는 줄 알고 움찔하며 일제히
숨을 죽었다. 그러나 그이는 난간 밖으로 내놓은 다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많
은 날들을 노래방레서 살다시피해 가며 연습했으나 오늘 차마 부르지 못했던 노래였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 빗방울 소리에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울리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느닷없는 노랫소리에 구경꾼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술렁거렸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술렁
거림도 이내 보배네의 노랫소리에 묻혀 잠잠해졌다. 나는 어쩐지 숨이 컥, 막히는 느낌이었
다. 그건 노래가 아니었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울음으로 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보배네의 노랫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면서 빗소리가, 밤새 조용히 양
철 지붕을 울리응 그런 빗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추적거리는 빗속을
나는 걸었다. 질척거리는 흙탕길을 맨발로 걸었다. 지둥치게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나무 밑
에서 비를 피하며 눈을 떴다. 그런 내 눈에 오층 난간에 걸터앉아 넋으로 노래하는 보배네
의 모습이 하늘을 떠가는 구름처럼 잡혔다.
그러나 보배네의 노래는 집 안에 있다 뛰어나온 남편에게 꼬리를 잘리고 말았다. 보배 아
빠는 뛰어나오자마자 따짜고짜 게목을 질러됐다.
“야, 너 미쳤냐? 동네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거리야. 존말할때 빨리 내려와라. 올라가서
다리 몽둥이 부러뜨리기 전에 얼른 내려와!”
그러나 보배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이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펄펄 날뛰는
남편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경련을 하듯 깔깔거렸다. 예기치 못한 아내의 행동에 당황한 보
배 아빠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뭘 보고 있어, 이 사람들아. 구경났어? 구경났냐구?”
주변애 몰려든 사람을 닦아세웠다. 그런 그의 얼굴엔 두려워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뒤늦게
소동을 눈치채고 밖으로 나온 보배할머니는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 됐다.
보배네는 겁에 질린 시어머니와 허등대는 남편을 싸늘한 눈초리로 한동안 노려 보다가 무슨
결심이라도 선듯 난간 안쪽으로 내려섰다. 잠시
후 보배네는 계단을 밟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이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구경꾼들
을 헤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보배 할머니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주저하는 아들의 등 뒤에 대고
노인은 빨리 들어가 보라며 채근을 했다. 뒤에 남은 노인은 불구경이라도 하듯 우우 모인
사람들에게 삿대질 을 해가며 갖은 악담을 다 퍼부어 됐다. 노인의 고약한 성미를 익히 알
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구경도 다 했겠다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자
노인은 가게 안의 동정을 살피며 안절부절 못했다. 얼핏 보기에도 노인은 제정신이 아니었
다. 주차 방지용으로 내다놓은 의자에 앉은 노인은 풍을 앓는 사람처럼 손발을 떨어 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나는 노인에게 연민을 느겼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땅바가
에 대고 노인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를 하는 것일까, 노인의 얼굴이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그때 보배네가 밖으로 나왔다. 그이의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안에서 무슨일
이 있었는지 보배 아빠는 엉거주춤 뒤쫓아 나오면서도 보배네를 붙잡지 못했다. 노인은 황
망히 일어서며 며느리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보배네는 자신에게 매달린 시어머니
를 야멸하게 밀어 내먀 성큼성큼 앞으로 발걸음능 내디뎠다.
“보, 보배야...”
격한 감정으로 말문이 막힌 노인은 전처럼 큰 소리로 며느리를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보
배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로를 건넜다. 딱지를 떼러 달려온 단속반원들은 심찮은 낌새
를 눈치채고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모두의 눈길이 보배네를 쫓는 가운데 나는 보신탕집과 사제관 틈바구니에 숨어서 눈물을
훔치는 보배의 모습을 보았다. 그 애는 멀어져 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대신 쪼그려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딸의 흐느낌을 듣기라도 한 양 큰 도로
로 향한 언덕길을오르던 보배네의 발걸음이 주춤거렸다. 그러나 보배네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발걸음을재촉했다. 자꾸만 멀어지는 며느리의 모습에 다급해진 보배 할머니는 어
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한달음에 도로를 건넜다. 뒤뚱뒤뚱 힘겨운 뜀박질로 며느리를 뒤
쫓으며 노인은
“애미야! 애미야아!”
빈 허공에 대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이제껏 건물 틈바구니에 숨어 울기만 하던 보배가 달
음질치는 언덕길 앞을 칼자국 난 청년이 휘파람을 불어 가며 지나갔다. 싱글벙글 입이 귀밑
에 걸린 그의 품에는 큼직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고, 어디서 풍겨 오는지 몰라도 진한 봄꽃
향기가 밤바람을 타고 안겨 왔다.
제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소설 쓰는 인간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연세대 법학과 졸업
1986년 문학사상 통해 등단
1994년 소설집 < 그 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출간
1996년 소설집 <새가 되었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출간
1997년 소설집 <재미나는 인생>,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출간
1998년 장편소설 <궁전의 새> 출간
소설 쓰는 인간
나는 지금 소설을 쓰려 하고 있다. 자기 살아온 걸 쓰면 소설 몇권은 충분히 나온다는 사
람은 나도 지겹게 많이 봤다. 또 소설처럼 사는 인간도 만났고 소설을 써야 먹고 사는 인간
하고도 이야기해 봤다. 나로 말하자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장난이 아니다. 거
창하게 시작했다가 한 권도 못 쓰고 땡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이 때까지 살면서 한
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끝을 봤다. 중간에 어물어물 그만두는 건 체질상 맞지 않는다. 사
실 나는 이 때까지 살면서 한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은 끝을 봤다. 중간에 어물어물 그만두
는 건 체질상 맞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때까지 소설은 물론이고 소설 비슷한 편지도 써
본 적 없다. 왜 내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냐. 도대체 왜 쓰느냐.
나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우리의 세계를 바로 알리고 싶다. 우리의 세계가 뭐냐. 우리 세
계는 네 가지 여소로 이루어졌다. 춤, 춤방, 남자, 여자, 내가 춤에 관해 알게 된 건, 우리 세
계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듯이 친구를 통해서였다.
나는 원래 통신 판매 대리점의 총무였다. 대리점에서는 각 가정에 전단을 뿌리든가 광고
를 해서 주로 건강 보조 식품 같은 걸 판매했는데 사장이 자형이어서 자동으로 능력을 인정
받았다. 삼년을 정신없이 사람들이 혹할 만한 상품을 고르고 주문 받고 포장해서 배달하는
일을 하고 나니 총알도 안 맞았는데 가슴에 바람구멍이 나는 거 같더라. 몰론 나도 그 동안
에 남처럼 결혼도 하고 중고차도 장만했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할
일은 무엇이고 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일단 생기고 나서는 목구멍속의 질긴 가래
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근 십여년 만에 고등 학교 동창을 새벽 포장마
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술잔을 두세 번 부딪치고 나자 개는 이런 말을 했다.
넌 고등학교 다닌 때 내가 가장 부러워한 애였어. 나야 뭐 다 어정쩡했지. 뭐 하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살고 있는 거 아니니.
나는 일등만 하는 친구를 부러워한 적은 없어. 우리 동창 중에는 삼년 내내 아버지 차로
등교한 군수 아들도 있었고 또 삼년 내내 일등만 하다가 대학가서 고시 패스한 놈도 있지.
나는 그런 놈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어. 그놈들은 그야말로 별종이야. 나도 별종은 별종이
었는데, 안 좋은 별종이지. 반에서 등록금도 제일 늦게 낼 정도로 가난하고 공부는 꼴찌고
사고쳐서 학생과에 제일 많이 불려 가는 게 나였어. 그런데 그놈들은 나를 별종 보듯 하면
서 저희가 별종인지는 몰라. 나는 네가 부러웠어. 평범해 보이는 게 그렇게 부럽더라구.
네 말대로 나는 평범했다. 지금도 평범하지, 뭐. 처음 만나서 술을 한잔 하면서 나눈 얘기
는 그런 평범한 얘기였다. 그렇지만 걔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걔는 내가 값을 짐작
할 수도 없는 수제양복을 입고 있었고 기사가 딸린 최고급 승용차를 포장마차 옆에 대기시
켜 놓고 있었다. 나는 고등 학교도 간신히 마칠 정도로 가난하고 열등생인데다 희망이 없던
걔가 어떻게 갓 서른 나이에 이렇게 빨리 출세했는지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걔 직업이며 살
아온 얘기를 들으려 했지만 걔는 금방 이야기해 줄 것처럼 하다가도 교묘하게 핵심을 피해
나가곤 했다. 그렇지만 그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내가 어떻게 평범하게 사
는지 궁금해했고 나는 내가 사는 방식 그대로를 얘기해 주었다. 그렇다고 먼저 이야기한 내
가 손해를 보았다거나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걔는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버릇처럼 시계를 들여다 보았고 당시로서는 드문 카폰으로
그 새벽 시간에 전화가 걸려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걔는 내가 미안할 정도로 민망해했
다. 정말 나하고 있는게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하고 싶은 일인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는 식이었다. 그것만 빼면 우린 늘 기분좋게 마셨고 기분좋게 헤어졌다. 술값은 그
쪽에서 늘 부담했고 몇번은 택시비가지 주었다. 그게 한두 번은 신경이 쓰였지만 결코 기분
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일 주일에 한두 번씩, 사무실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버림받은 사람처럼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걔가 다시 연락을 해왔을
때는 정말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야, 이거 정말 미안하다. 좀 바빴다.
무슨 사업인데, 뭐가 잘 안 풀려?
그걸 물었던 게 내 인생을 평범한 것에서 별종의 것으로 바꿔 놓았다. 걔는 나를 한참 쳐
다 보았다.(그 눈밀만 두고 보면 원래 그놈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걔는 마침 내게 부
탁을 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부탁이라고 한 걸 보면 그놈은 결코 프로였던 것도 아니다).
걔는 군대에서 제대 말년에 졸병에게서 춤을 배웠다고 했다. 워낙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그
런지 춤을 금방 배웠다. 사회에 나와서 시험 삼아 카바레에 갔는데 첫날부터 엄청나게 인
기가 좋았다. 재미삼아 다니다가 보니 춤을 따로 배우려는 여자들을 만나게 됐다. 카바레에
서 가르칠 수도 있지만 거긴 원래 수많은 제비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눈치가 보인다. 그렇
다고 순수한 뜻으로 춤을 배우려는 여자들을 무작정 뿌리칠 수도 없어서 장소를 물색중이
다. 혹시 네가 아는 데가 있으면 소개를 좀 해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 사무실이 물건을 쌓아
두기 위해 공간은 크게 얻었어도 보통 때는 대개 비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친구
는 내 손을 잡으면서 바로 그런 데를 찾고 있다면서 사용료는 충분히 지불할 테니 하루 몇
시간만 쓰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가 걔가 다시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
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걔는 내가 부담스러워할 걸
알았는지 일단 한 달 정도만 해보자고 했다. 정작 사무실 주인인 자형에게 이야기하기가 힘
들었는데 자형은 뜻밖에도 잘됐다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품 홍보 차원에서 무슨 행사라도
벌이려고 했다면서 실험 삼아 한 한번 해보라는 거였디. 한 달 예정한 실험은 두 달이 가도
끝나지 않았고 세 달이 넘어서야 끝났다. 네 달째부터는 실험이 아니라 공식적인 행사가 됐
다. 소문이 살살 퍼지면서 징식 무도회장에 가는 건 겁이 나도 품은 배우고 싶은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여자들이 사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상품을 한두 개씩 사들고 가주니까 사장
도 좋아했다. 남자 파트너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춤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
다.
처음 스텝을 밟는 순간부터 전기가 온몸을 지나가는 것 같더라. 왜 진작에 춤을 몰랐는지,
그 때까지 품을 모르고 산 게 억울해서 한숨이 다 나왔다. 하긴 그전까지는 나 역시 남들처
럼 춤을 붉은 등불 아래 푸른 등불 아래 불륜의 남녀가 끌어안고 도는 것만으로 알아왔던
게 사실이었다.
성인 남녀가 추는 춤을 사교 댄스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대여섯 살 먹은 애들도
사교 댄스를 배운다고 들었다. 남녀가 춤을 추는 건 외국에서는 손잡고 걸어가는 것만큼이
나 흔한 일이다. 외교관들도 외국 나가기 전에 사교 댄스를 배운다고 들었다. 이렇게 외국에
서는 건전한 사교 댄스가 우리 나라에서 찬바람을 맞게 된 건 <자유부인>인가 하는 유부녀
가 집과 남편을 버리고 춤바람이 나서 신세를 망친다는 소설이 나오면서부터다. 또 그 무렵
에 박인수라는 사교 댄스의 선구자가 나타나서 여대생 70여명과 사귀는 바람에 특히 유부남
들이 사교 댄스를 엄청나게 오해했다. 5.16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유부남들이 사교 댄스가 제
마누라를 잡아먹기라도 한 것처럼 죄악시 했고 그 때부터 사교 댄스는 컴컴하고 좁은 데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밝고 넓은 데서 사교를 위해 춤을 추던 것이 숨어서 바짝 붙어서
추는 춤이 됐다. 그러니까 진짜 안 생길일도 생기고 억울해서라도 바람을 더 피운다. 그 바
람에 사람들 인식이 더 나빠지고, 이게 얼마나 한심한 악순환이냐.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
졌다. 불룸 댄스가 버젓한 자치 단체의 문화 강좌의 정식 과목이 도고 건전한 여가를 권장
하는 사회 단체에서 강의 요청이 몰려온다.
올림픽에도 스포츠 댄스라는 정식 종목이 생겨나는 세상이다. 이젠 춤만 잘 추면 올림픽
에서 메달을 딸 수있다는 것이다. 스포츠댄스에는 젊은애들이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트위
스트나 고고, 블루스, 디스코 같은 건 안 들어간다. 그건 춤도 아니라는 거다. 올림픽도 카바
레에서 추는 진짜 춤을 인정한다. 이 중에서도 자이브는 우리의 지르박처럼 지터벅이 조상
인데 영국으로 가서 발전한 춤으로 지르박하고는 전혀 성질이 다르다. 이런 게 좀 아쉽다.
우리 국력이 조금 더 발전했다면 우리의 지르박이 자이브를 제치고 정식 종목이 됐을 거고
그러면 볼 것도 없이 박인수의 후배들이 메달을 몽땅 따올 건데.
볼룸댄스는 알고 보면 예정 그 자체다. 테크닉보다 예절을 더 중요시 한다. 진짜 춤을 추
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사다. 제대로 된 선생은 제자에게 먼저 예절부터 가르친다.
그 다음이 스템이다.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 춤을 여섯 달쯤 배우면 스텝이 몸에 익는다. 3년쯤 춤을 배우면
자기 스텝이 생긴다. 이때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춤을 춰도 욕을 안 먹을 정도가 된다. 상
대가 초보면 초보인대로, 선수면 선수인대로 상대에 맞춰 춤을 출수가 있는 거다. 여기서 조
심해야 할 게 있다. 자기 스텝이 생겼다고 응용을 하네 뭐네 하면서 멋대로 춤을 추다 보면
스텝이 개판이 된다. 이 바보를 교정하는 데 드는 시간과 돈이 처음부터 가르치는 것과 맞
먹는다. 요즘 애들은 춤 배우는데 3년은 커녕 서너 달만 배우면 금방 카바레에 가서 더러운
방법으로 떼돈 벌 궁리부터 한다. 못 가게 하는 선생한테 면도칼 갖다 대는 놈까지 있단다.
요런 놈들은 얼굴이 좀 반반하고 몸매가 쪽 빠진 걸 밑천으로 알고 있지만 춤의 세계는 춤
이 밑천일뿐이다.
정통으로 춤을 배워서 5년이 되면 춤을 좀 안다고 할수 있겠다. 제 나름대로 예술을 추구
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수준에서 무도계의 일원으로 들어가든가 못 들어가든가 하는 거다.
춤을 배우기 시작하자 내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놀랍고 짜릿하고 새로운 세계가 나타
났다. 그 때부터 나한테는 오로지 품밖에 보이지 않았다.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스템을 밟
고 있는 것 같았다. 잠자기 전에 천장에서 스텝이 오락가랑했고 화장실에 앉아서 도 손으로
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끌어안고 발바닥으로 스텝을 밟았다. 아침은 해의 독무대로 열리고
방은 별의 군무가 벌어지는 무대였다. 한마디로 나는 춤에 미쳐 버렸다.
내가 3년쯤 춤을 배웠을 때 내게 처음 춤을 가르쳐 준 고등학교 동창놈이 감옥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는 그 친구와 나는 만나지도 않았다. 걔 사업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비싼 양복을 입고 사업한다고사기쳐 가면서 골 빈 여자들에게 용돈을 얻어 쓰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 때문에 실망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춤의 세계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준 게 그 친구였으니 걔가 제비든, 오리든 상관없이 나는 속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친
구하고 헤어지게 된 건 춤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였다. 내가 춤을 배운 지 6개월 쯤 됐을
때였다. 내가 춤에 빠져서 일을 그전처럼 안 하니까 자형이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결국
자형과 대판 싸우고 대리점 총무 자리를 정리한 날이었다. 내가 더 이상 사무실을 무도장으
로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난 전혀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으며 두렵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춤을 배울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꽉 차 있다.
춤은 이제 나의 인생이다.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다. 우리 더 열심히 춤을 추면서 함
께 앞날을 개척해 나가자고 내가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 친구는 내내 술잔만 뒤집었다. 그
러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때가 묻었는지 기름을 묻혔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윤이 반질반질
나는 구슬 같은 걸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글쎄 호두 같구만.
이걸 바지 주머니 옆에 있는 특수한 주머니에 넣고 아줌마들 허벅지를 슬슬 문질러 주면
효과가 백 처센트지. 돈이 쭐쭐 흘러내리게 하는 거야. 이게. 그때 나는 걔 정체를 확실히
알 것 같더라.
그래서?
너 가져.
걔는 네개의 호두 중에서 두 개를 나한테 내밀었다.( 그 놈에게는 진짜 제비에게는 쓸모
가 없는 멍청한 우정과 맹목적인 의리가 있었다.) 나는 잠자코 그 호두를 받아들고서 포장
마차의 카바이드 불빛에 비춰 보았다. 고마워해야 하는데 전혀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
다.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점점 화가 났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가, 새끼야?
뭐?
가버리란 말야. 춤을 모독하는 놈.
야, 이 미친 놈아. 춤이 무슨 예술이냐. 다 그게 그거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잘
나갈 때 한몫 챙겨야지. 넌 늙어서 무르팍 떨어 가며 이 짓 할래.
그러니까 너는 저질 제비짓 밖에 못하는 거야, 임마. 꺼져. 네 마빡이 호두마냥 박살나기
전에.
그러면서 나는 유혹적으로 반들거리는 호두를 구두로 콱 밟아 박살내 버렸다. 그 친구는
에라 이 미친놈, 늦바람나 환장한 놈, 얼마나 잘되는지 보자 어쩌고 저쩌고 혀 꼬부라진 소
리로 중얼거리더니 제 운전 기사와 어깨동무를 하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예정된 순서에 따
라 고등학교 때 학생과에 끌려가듯이 감옥에 갔다. 사기. 감금. 폭행. 성폭행. 협박 따위의
죄명을 쇠사슬처럼 줄줄이 달고서. 예술을 모독하는 인간, 고등학교, 사회생활, 춤, 제비에서
도 열등생이 가는 코스였다.
그 친구하고 헤어지고 나서 나는 본격적으로 춤 선생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디에 유
명한 춤 선생이 있다면 삼고초려 아니 삼세번 초대를 해서라도 문전에 발을 들이밀고 세숫
물까지 바쳐 가면서 배우고 또 배웠다. 지금 나를 키웠다는 춤 선생들이 전국적으로 수십명
이다. 나는 그 사람들 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 춤선생들이 전생기에도 지금 나보다는 못
했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나를 사교 댄스의 황제니 왕제비니 하고 부르던 사람들
은 내가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쌍코피가 터지도록 노력한 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게 3년
동안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춤만 배운 뒤에 나는 서서히 춤방에 나가기 시작했다,
춤방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진짜 춤은 카바레에서만 출수 있다. 카바레의 조상은 모르
긴 몰라도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악단이 반주하고 최고급 샴페인의 분수
속에서 잘생긴 귀족과 요염한 숙녀가 춤을 추는 궁전일 거다. 가끔 외국 영화에서 일이백
년 전 구라파의 궁정 무도회를 보여 주는데 나는 그런 영화가 나왔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남 먼저 보려고 달려갔다. 휘황한 샹들리에와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석, 원색 물감을 풀어 놓
은 듯한 드레스를 휘감은 미인들, 흰 가발을 쓴 시종, 검정 예복에 우아한 스텝으로 춤을 추
는 귀족들은 언제나 크나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줄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잃어버린 낙원을 보는 듯 목이 메였고 대책없이 울먹이기도 했다. 이처럼 나는
뼛속까지 춤을 좋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상에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죽도록 좋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걸 기본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
람이 정상에 오른다. 재주가 없어도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 몫은 하게 되어 있다. 재주가 있
어도 게으르면 소성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성할 수는 없다. 춤에서 운이 좋은 소성은 이
른바 제바다. 왜 제비라고 부르나. 춤을 출 때 입는 정장이 연미복이라서 제비라는 말이 붙
는 것 같다. 오새 제비들은 선배들처럼 연미복도 입지 않고 빈둥거리는 주제에 제비라고 하
면 더럽게 싫어하고 선생이니 무도 예술가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 제비들은 카바레에 오는
여자들을 춤으로 홀리고 여관으로 데려간 뒤 몸을 뺏고 남편에게 알린다고 협박해서 용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그렇게 알려져 있다 보니 아예 제비가 되기 위해 춤을 배우는 녀석들까지 생겨난다.
제비들의 밥이 되는 여자들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어제도 오늘도 오고 또 와
서 내일치까지 합쳐 넘어간다. 내가 한마디 하고 싶은 건 이 부분이다. 제비가 되고 싶어서
춤을 배우고 춤방에 나가서 여자를 유혹하는 짓이나, 제비라는 걸 알면서도 같이 즐기고 넘
어가는 것이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내 입으로 춤추다 만난 여자에게 용돈
을 달라고 해본 적이 없다. 춤이 좋아 춤을 추러 춤방에 갔다가 춤으로 만난 여자들에게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알아서 돈을 갇다 주더라. 용돈이 아니라 집 몇
채를 사고도 남을 뭉칫돈을 갖다 주었다.
한창때 내 하루 일과는 이랬다. 나는 하루도 새벽 운동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회원권을
가진 헬스클럽에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등등 각계의 유력 인사들이 많이 왔다. 나
는 어떤 분야의 유명 인사며 권위자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건강과 육체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나는 몸을 철처히 관리했다. 나한테는 몸이 자산이고 수단이며 목적이었다. 말이 나
왔으니 말인데 사실 춤만한 운동도 따로 없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배달된 조간
신문을 샅샅이 읽어 간밤에 별다는 사고나 없었는지, 시중의 흐름이나 여론의 움직임을 알
아 둔다. 언제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에 막힘이 없으려면 나 자신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문 두 종, 시사 주간지 하나 이상, 월간지 둘을 정기 구독하고 때
에 따라서는 전문 서적도 사서 봤다. 워낙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을 최선을 다해 상대하다
보니 내 지식의 폭은 유홍업에서 꽃집, 식당, 의류, 액세서리, 사무직 등등 여성들이 진출해
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분야는 물론이고 중장비 임대, 광업처럼 여성 진출 인력이 극히 드
문 분야에도 전문가는 못 돼도 일반적인 수준은 가볍게 뛰어넘는 범위까지 넓어졌다. 여자
들, 특히 돈 있는 여자들은 무식한 제비는 질색을 한다. 이건 정말이다. 무식한 사람하고는
아예 상대를 안 한다. 너절한 춤솜씨하고 상판대기만 믿고 제비짓 하다가는 오래 못 가 감
옥 간다. 무식하니까 싫다는데도 쫓아다니면서 무리를 하게 되는 거다.
점심때가 되면 일정을 체크한 뒤에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 잘한다는 식당에 들른다. 나중
에 다시 올 것에 대비해 식당의 인상이나 지리, 음식의 질을 체크해 둔다. 아무리 잘하는 음
식점이라도 두번 이상 연달아 가서 주인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일은 삼간다. 자, 이제
점심을 먹었으니 슬슬 춤방으로 가서 새로운 상대와 인생을 구가해야 할 차례다. 돈을 뜯자
는 게 아니다. 같이 즐기자는게 중요하다. 춤방은 오후 두시부터 남편족들이 퇴근하기 전까
지가 제일 황금기다.
춤방으로 들어간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눈이 익으면 나는 어떤 여자가 있나 홀을 한바퀴
둘러본다. 처음 온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든가, 친구 손목에서 일 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으
려는 여자가 일차 대상이다. 혼자서도 미친듯이 흔들어 대거나, 운동을 하듯이 춤을 추면서
땀을 흘려 대는 여자, 정말 춤에 미쳐서 아무하고나 부둥켜안고 돌아가려고 하는 여자는 사
절이다. 내가 한번 찍은 상대는 다른 제비들이 접근을 할 수 없다는게 불문율이다. 나는 보
통 제비가 아니라 왕제비였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고르는 상대는 나와 수준이 맞아야 한다.
커다란 진주 목걸이나 누런 금빛에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한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다. 이런
여자들은 목걸이나 장신구가 재산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와 감추
어진 알짜배기를 구별하는데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춤을 추면서 상대의 목덜미 바로 아
래 옷에 달린 메이커를 보면 구십퍼센트는 그 여자의 경제 사정을 알 수 있다. 속옷까지 확
인하면 확실해진다. 생소한 외국 상표 이름은 십 년 넘게 살아온 남편보다도 초보 제비가
훨씬 더 잘 안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독특하고 잘 어울리는 장신구를 한 여자도
물이 좋다. 상대가 어떤 수준이라도 그 수준에 맞추는 건 기본이다. 일단 여자를 고르면 어
디까지나 신사적으로 춤을 칭하고 춤을 출 때도 신사적이고 춤을 추고 나서도 신사라는 호
감을 사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부터 나를 신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실 나는 신사
다. 예절 그 자체인 사교 댄스를 나처럼 정통으로 배우면 신사가 안 될 수가 없다. 춤이 끝
나고 나서도 애프터 신청을 할 때도 어디까지나 신사답게, 정중하게 한다. 내가 신청을 해
서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신청을 안 받아 줄 사람 같으면 아예 신청을 하지도 않았
고 춤도 추지 않았을 테니까.
애프터로 차를 마시러 가게 되면 기사를 호출한다. 한때는 감옥에 간 내 친구처럼 월급
기사를 고용한 적도 있었는데 몇달안가서 약점같지도 않은 약점을 찾아내서 제비 잡는 독사
처럼 설치는 꼴을 보고는 필요할때 부르는 쪽으로 바꿨다.
뭐하는 분이세요. 이런 데서 만날 분 같지가 않아서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런 질문을 받는 게 보통이다. 나는 상대에 따라서 내가 전에 만
났던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 가운데 한두개를 댄다. 전문 용어는 어마든지 주워댈 수
있고 업계의 흐름 같은 건 한 시간이상을 떠들어 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알려고 하
는 여자는 거의 없다. 꼭 믿으란 법도 없고 믿어 달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굳이 상대의 직
업을 캐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이야기를 해 주는게 보통이다. 난 나는 그 이야기가 정말
인지 아닌지 한두 마디만 듣고도 금방 알 수 있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
는 제비중의 왕제비이고 그 여성은 제비가 득실대는 춤방에서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왔다 제비를 만난 거니까 그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는 특급 호텔 커피숍을 이용한다. 호텔로 들어서면 여자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니, 만나자마자 호텔로 직행하는 거야. 이렇게 빨라? 그런 표정도 있고 평
생 처음 와보는 호화로운 곳이라서 얼떨떨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오로지 최선을 다할 뿐
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물건이 되겠는가. 아닌가 판단한다. 안 된다 싶으면 그때까지 들어간
기사 일당과 커피값만 날리면 된다.이제 가능성이 있는 상대와 식당으로 간다. 물론 맛있고
정갈하고 유명한, 내가 점심 먹으러 다니면서 미리 점쩍어둔 식당이면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 특히 다른 제비가 없는 식당이다. 거기서 최고의 요리를, 최고로 입맛에 맛게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먹는다.식사를 같이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사이가 훨씬 가까워진다.밥을
나눠 먹고도 친밀감이 조성이 안되는 상대가 있으면 여기서 끝, 식대만 날리면 되니까.
그다음에는 예정된 대로 술을 마시러 간다. 물론 일류의 술집에가서 일류의 술을 마신다.
비용은 내가 모두 현금으로 부담한다.나는 최선을 다하는 신사이므로,상대가 술에 취해 집에
못 들어가든가,늦게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나는 역시 최선을 다해 숙박업소로 모신
다.그 다음 과정이야 제비 아닌 사람도 다 아는 거니까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도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 이 과정이 단 하루 만에 끝날 때도 있고 며칠이 걸릴 때도 있다.
이렇게 한 사이클이 지나면 나는 한동안 충방에 나가지 않고 그 여자에게 집중한다. 경치
좋은 곳, 열정적인 사랑을 나눌 러브 호텔이 있는곳,맛있는 식당이 잇는곳으로 다니며 신뢰
와 사랑을 쌓아 나간다. 그동안에도 절대 계산대 앞에서 여성이 핸드백을 열게 하는일은 없
다. 시간이 흐른다.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치는날도 있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
으로 못 만나게 되기도 한다.꼭 그 때쯤내 사업 자금이 모자라게 된다. 자금이 모자라면 나
는 할수없이 연락을 끊는다. 열렬하게 나를 원하는 상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게 연락을
해온다. 나는 그 동안 바빠서 연락할 수 없었다. 요즘 자금 흐름이 나쁘다고 말한다. 융자
를 받아야 하는데 은행측에서 망설이고 잇다. 물론 금방 좋아질 것이며 걱정할 게 없다고
한다. 하지만 몸을 빼기가 어렵다고 한다. 연락을 끊고 나서 빠르면 몇 시간뒤, 아니면 며칠
뒤 내 상대가 간곡하게, 때론 억지까지 써가며 만나자고 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은행에 가서 고개를 숙이고 융자를 부착해야 한다. 좋아지면 보자고 한다. 정말 내 사정이
그렇다. 만나면 최고급 호텔,최고급 식당, 최고급 술집으로 가야 한는데 내가 가진 현금은
바닥이 난 것이다. 상대는 은행으로 가기전,자기를 잠깐이라도 만나 다랄고 애원하다시피 한
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그러겠다고 하낟. 서업이나,사랑아냐나보고 고르
라면 언제나 사랑을 고를 것이다. 내 사랑을 만나다. 내 행색은 초췌하다. 하 찮은 자금 때
문에 속을 끓인 탓이다.내가 사랑한ㄴ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도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려 빚
을 독촉해댄다. 어쩔 수 없이 시계를 보게 되기도 한다.그 때마다 미안한 건 난데도 상대는
나보다 더 미안해 한다. 헤어질 무렵 내 사랑은 핸드백을 열어 흰 봉투를 내놓는다. 그리곤
내가 만류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듯 가버린다.나는쓸쓸히 봉투를 바라보다가 내용물을 확인
하지도 않고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봉투에서 나온 돈으로 나는 아파트 다섯채를 샀고 고
급 맞춤 양복 백여벌,골프세트,배기량 3천6백 씨씨의 고급 승용차를 장만했으며 아이들 과외
비도 대 주었다.여기에 무슨 협박이 필요하며 감금.폭행.사기.공갈.성폭행.혼인빙자 간음은 또
무슨 말인가.물론 내게도 몇개의 전과가 있다. 왕제비로 태어난 사람은 없으니까 처음엔 나
도 실수를 하긴 했다. 하지만 왕제비가 된 이후에는 한 번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분야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정상에 올라갈수가 없다.
춤바람이 나면, 춤이 직업이 아닌 한 자기 분야에서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정상 일보 직전에
서 춤바람이 나든가 나 같은 제비를 만나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보면서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여성들 가운데 대부분의 여성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남편이 벌어
다 주는 것을 가지고 춤방에 나오든가, 아니면 이혼 위자료를 두둑히 챙겼다든가 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런 여성들이 갖다 주는 돈을 받는 건 사실이지 덜 켕기더라. 자기 분야의 사
업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러 나왔든지 ,집안에 같혀서 애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ㅏㄷ가
어지간히 여유가 생기고 할 일이 없어서 나왔든지 간에 나느 춤방에서 만난 여인들은 똑같
이 최선을 다해 상대했다.그래도 혹시 미안한 마음을 느낀 적은 없느냐, 있긴 있다.
아직 기억이 나는 사람은 중부 시장에서 멸치 좌판을 벌여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무능한
남편을 먹여 살리다,지루한 인생을 극복하기 일보 직전에 참지 못하고 춤방에나왔다는 나의
아흔여덟 번찌 사랑이다. 그 여자는 맨 처음 내 사업 자금으로 백만 원을 가져 왔다.나는 그
백만 원이 멸치를 몇 마리나 팔아야 나오는지 몰랐다. 물론 나는 그 돈이 적다고 서운해하
지는 않았다.사업은 사업이니까 나는 딱 그 액수만큼만 성실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나의
사랑은 목덜미까지 빨개지면서 봉투를 내밀었는데 집에 와서 꺼내 보니 백오십만 원쯤 됐
다. 대부분이 헌 돈이었고 내 사랑이 시장에 앉아 밥을 먹다가 고추장을 떨어뜨린 오천원
짜리까지 있엇다.그 때 미안했던 것도 아니다.나는 내가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을 후회하느라
좀 바빴으니까. 마지막으로 그 여자가 내게 가져온 돈은 시장의 가게 권리금으로 받은 돈
이었다. 권리금에서 아이들 등록금과 큰딸의 혼수 비용, 자신이 돌아갈때 탈 지하철 표값을
뺀 돈이었다. 그게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그 여자는 자신이 춤방에 드나들던게 들통
났다. 남편이 술만 마시면서 며칠을 울더니 이젠 자신이 공사판에라도 나가서 벌겠다. 모든
것을 용서하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봉투를
집어넣고는 원래 예정한 대로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 여자에게서 더이상 나올게 없어서 헤
어지자고 한 게 아니다. 그 여자가 수억짜리 복권을 탔다고 해도 헤어지는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어서려다 보니 그 여자는 탁자에 떨어진눈물을 뽀드득 소리나게 문지르며 그 옆
에 새로운 눈물 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집이 하필 싸구려 중국집이라는
게 신경이 쓰였다.내가 미안했던건 그거다. 자기 돈으로는 자장면 한 그릇도 사먹을 용기가
없는 사람과의 이별의 장소로 하필 싸구려 식당을 택한 게 미안했던 것이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춤이 생계와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 되자 내게 이상한 감정이 찾아
들엇다. 진정 춤은 무엇이고 위대한 제비는 뭔가.진정한 내 인생의 목표는 무어인가.어느 때
부터인가 혼자서 그런 질문을 뇌까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모든것이 시들해지
고 일에도 의욕이 없어져다. 그랬을 때 우연히 어느 포장마차에서 내친구가 말한 별종 동창,
군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무슨 건물의 청원 경찰을 하고 잇다고 했는데 인생이 공허하다
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좀 안돼 보이긴 했지만 나는 내 친구같이 고등 학교 때 부러워한 친
구를 경쟁자로 만드는 바로 같은 짓을 하지는않았다. 그냥 한잔 술을 나누고 깨끗이 헤어졌
다. 나는 권태를이기기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춤을 추러 갔다. 진정한 나를 찾기위
해서 춤을 추러 갔다.나한테는 춤이 직업이고 취미였고 이상이었다. 춤말고는나의 고뇌를 잊
어버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이름 없는 변두리의 허름한 춤방을 찾아
갔다. 거기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됐다.
나는 그 여자가 분식집을 계속할 수있도록 도와 주었고 분식집으 일식집으로 바꾸도록 해
주었다.
그 여자는 일식집을 개업하자마자,개업 축하 화환의 꽃이 시들기전에 팔아먹고 도망갔다.그
여자가 진짜 제비 잡는 꽃뱀이엇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도와 주고 싶었고 가련한
그녀에게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풋풋한 사랑마저 느꼈다.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했다. 어
수룩한놈이 당수 팔 단이라더니 프로 같지 않은 진짜 프로였다. 그 덕분에 나는 집을 한 채
팔고 한 채는 저당을 잡혀야 했다 .집에도,선후배 동료 그 누구에게 말도 할 수 없어서 속으
로만 앓았다.
제비나 꽃뱀이나 춤방을 무대로 사업을 하는 인간의 공통점은,그 사업으로 한몫을 쥐었다
해도 언젠가는 춤방으로 돌아온다는 거다.송충이가 솔잎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춤으로서
흉한 인간은 춤으로 망해서 결국 춤판으로 돌아온다.나는 그 여자를 찾기 위해 어리숙한 중
년 사업가 행세를 하며 그 여자가망해서 돌아올 만한 변두리의 보잘것 없는 춤방을 찾아댜
녔다. 그러다가 나는 또 꽃뱀에게 걸렸다.함께 여관을 들어갔다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니
오빠라고 하는 영락없는 제비가 사진기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날짜 받아 놓은 순진한 내 동생 몸 망치고 단물 빨아 먹고,이제 어쩔겨!
내가 아무리 왕제비라 한들 왕제비 면허가 있는 것도 아니요,면허가 있다 한들 사교 댄스
의 황제가 변두리 여관에서 새파란 애와 재미를 보려다가 새파란 애들한테 잡혔다는 게 알
려지면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끝장있었다.나는 애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
기도 창피하다.
나는 알몸으로 엎드려뻗쳐 같은, 군대 시절에도 받아 보지 못한 온갖 기합을 다 받았고
통장을 압수당했으며 각서를 쓴 다음 수천만원을 또 뜯겼다. 몽둥이찜질 안 당한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덕분에 저당 잡혔던 집을 아예 넘기게 되었다. 거기서 비싼 세상 공부를 하고
깨닫게 된 진리가 있다. 마음먹고 계획적으로 덤벼들면, 아무리 날고 기는 왕제비라도 초
짜 꽃뱀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천하에 없는 열녀라도 제비가 마음먹고
달려들면 무너지게 되어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건 춤판에서의 이야기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춤판은 인생의 축소
판이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려고 한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나이 오십도 먹지
않은 앞날이 창창한 사나이다.은퇴하고 나서도 음악만 흘러나오면 발이 움직이는 걸 참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내 딴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잊기위해,조용히 머리를 정리하기위해 한동안
소설만 수백권을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상을 다 산것처럼 폼만 잡
는 한심한 소설이 너무 많더라.그래서 내가 직접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세상에
는 소설처럼 사는 인간도 있고 소설을 써야 먹고 사는 당신 같은 인간까지 잇는데 나로 말
하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인간이다.춤으로 인생ㅇ의 황금기를 보낸 한 사나이,왕제비로 알
려진 인생,그러나 이제 원고지 앞에 돌아와 알몸으로 앉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제목, 어느
왕제비의 인생-내 운명을 바꾼 호두알 두쪽.
이때까지 내가 최선을 다해 여자들을 상대해 왔듯이 소설을 상대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련
다.
제29회 동인 문학상 후보작- 강 어귀에 섬 하나
- 처용 환상
이인성 1953년 출생, 서울대 인문대 불문과 졸업
1980년 문학과지성 봄호에 ‘낯선 시간 속으로’로 등단
1983년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 출간
1989년 소설집 <한없이 낮은 숨결> 출간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수상
1995년 장편소설 <미쳐 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출간
강 어귀에 섬 하나
- 처용 환상
아마도, 언제나 해질 무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에 자꾸 발길이 이끌리는 것인지는
도무지 헤집어지지 않았는데도,어느새 그 집에 가 닿아 있곤 하던것은 번번이 돌이킬수 없
는 사실이었고,그러면 제일 먼저 달려가던 맨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 끝방의 작은 창문에는
언제나, 아련하면서도 아뜩한 빛의 점묘화가 펼쳐졌었다. 서서히 온몸을 끌어당겨 가라앉힐
듯, 잠잠하게 꿈틀꿈틀,두터운 몸짓으로 유영하는 거대한 강줄기 위에는,부드럽게 일렁일렁,
그 물의 살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진노량빛 은행나무잎들과 선홍빛 단풍잎들이 가득떠
흐르며,산란하게 반작반짝,수억만 개의 물비늘처럼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이다.아무리
아무리 보아도,드 뒤척이는 빛무늬들은 울긋불긋한 낙엽들의 난반사가 조화를 부리는 것임
에 틀림없었다. 아닌가 싶어 창틀 액자 속으로 고개를 깊이 기울여 보아도,그 물비늘들은
분명 빛의 낙엽들이었으므로, 그 집에서는 계절이 따로 없이,늘 가을이엇다. 어쩌다가 먹구
름이 눈높이까지 내려오는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날엔 암회색으로 바래고 찌든 색감이 빛
을 뿜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스산하게 물살에 휩쓸리는 낙엽의 모양새만은 더
욱 선명했다. 막은 날에도 간혹,햇살의 각도가 시절과 시간 차이에 따른 미요한 변화를 일구
어,그빛쪼가리들이 문득, 새초롬하게 봄물 오르는 진달래 꽃잎이나 개나리 꽃잎으로 또는 여
름의 열기에 농익은 흑장미 꽃잎으로 보일때가 있었다.심지어 색감마저 바뀌어 끈적한 땀
기가 느껴지는 여름나무의 암록새 잎새,거꾸로는 창백한 한기 속에서 희한하게 녹지 않고솜
털처럼 물위에 떠 있는 흰 눈송이로 여겨진 적마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잠시의
환영일뿐,눈을 몇 번 껌벅이고 나면 , 강 건너편 숲이 푸르렀거나 헐벗었거나, 물결에 찰랑
이는 것은 결국 울긋불긋한 가을의 낙엽들이었다.사시사철, 도대체 그 헤일수 없는 가을 낙
엽들이 어디서 밀려오는 것인지..
알수 없었다.물론, 아무 짐작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섬세하게 구분지어 말하자면, 그 낙
엽들이 어떤 정신의 방향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도무지 가늠할수 없었으나 다만, 한가지,어
떤 감각의 방향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막연하게나마 추측이 가능한 듯싶었다. 특히 지형적
으로 그것들은 아침마다 해를 띄워 보내는 동쪽으로부터 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한나절을
둥글게 돌고 나서 반대편 끝의 서해 바다 아래로 잠기는 햇덩어리가 긴 손길을 천천히 거두
면 풀어 놓는 안개 뒤, 이번엔 밤의 검은 동굴이 열리기 시작하는 저 동쪽 끝 어딘가로부터
낙엽들은 우수수우수수 끊임없이 널려 와 강물 위로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신비롭
다면 신비롭기이를 데없는 그곳이 정녕 어떤 곳일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
젠가는 어쩔수 없이 그곳에 다다르게 될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긴 해도,이상했다.그런 느낌이
오는 순간, 발길은 돌아섰다. 햇살의 손길이 움추러드는 방향을 향해 그 동쪽 끝방을 되돌
아나온 발길은 그리고 어김없이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본능잉 정해 놓았던 순서에 따라 그
다음에 멈추기로 예정되어 있는 자리로 갔다.벽 전체가 유리문인,거실의 북향 베란다앞이었
다. 그 커다란 전망속에서는 밋밋한 흐름을 타고 내려오던 강물이 급박하게 에스자 형으로
굽이쳤는데,그것은 강 건너편에 버티고 있는 바위산 탓일것이다. 바위산 꼭대기에는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靈'무슨 ’루‘였는데- 고풍의 누각 한 채가 소나무 몇 그루를 거느
린 채 우죽 서 있었고, 그 아래로 가파르게 거무죽죽한 병풍 절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절벽
밑등을 부딪고 도는 물줄기는 곧바로 허옇게 뒤집어지면서 낙엽의 빛들을 감아 말았다. 어
쩌면, 햇살이 기울기를 다해 가는 것이 그 때쯤이라서, 그 자리쯤에서 빛쪼가리들이 뭉개지
면서 물살에 빨려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원색적으로 물길을 얽어오던 낙엽의 결들은
거기서 점점 희게 탈색 되어갔고, 마치 그 흰빛들이 소리를 죽이며 빌려 와 쌓인 것마냥
물도리동을 이루는 강 이쪽 편에는, 둥근 백사장이 고요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강 이 쪽
편의 망루랄까. 그 집 베란다로부터 말끝에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높이를 의식하면
아찔했지만, 기묘하게,그 백사장은 추락하는 온몸을 깊게 받아 감싸안아 줄듯 육감적으로 느
껴지기까지 했다.그렇다고 그리로 그애로 한 발을 내디뎌 뛰어내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뛰어니리고 싶은 곳은 ,정작 가슴속에 따로 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더, 저 백사장 밑에서 먹
물이 스며나올 때까지, 그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그 때가 되어야, 정말 뛰어내리고 싶은 곳
이 정말 보고 싶은 그 풍경으로 보엿으니까. 그때가 되어야,이 세상의 마지막 금빛을 머금고
떠오르기 시작하는섬, 그섬은 그 집의 서쪽 끝방 창문으로만 보였던 까닭에 우선은 그냥 백
사장 빛의 변화만을 관찰하다가 이제쯤 철새들이 섬의 갈대숲으로 줄지어 내려앉으리라는
감각적 확신이 들때,그 창가로 옮겨가면
그 섬 너머로는 서해의 수평선이 막 잦아들려는 황금빛 줄 하나로 단면의 암청색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그 배경 앞에서 섬은, 처음엔 얼핏 강 어귀 바닷머리에 버티고 누워 있는
장승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장승이 곧 스러져 버릴 수평선의 마지막 황금빛을 모두 제 안
에 끔어모으록 있는듯이 보엿다. 잠시뒤 수평선이 홀연 사라지고 나면 섬의 가대들은 어둠
의 치맛자락이 스쳐가는 대로 굽이치며 그 운은한 금빛을 바람결에 흩뿌리기 시작했다.칠흑
의 어둠 속에서도 밤새 꺼지지 않ㅇ르 그섬은 그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허공으로 들어올
졌으며,자정쯤엔 거으리 눈 높이에 이르러 손에 닿을듯 환히 건너다 보엿다. 그럴 때는 그
섬을 바라보는 그 자리의 그 집이 바로 그 섬인 듯싶어 자칫 갈대숲 속에 알을 품고 잠든
철새라도 밟으랴,온몸은 일어선 장승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버리는 것이었다.거읠 생리
화된 그런 반응으로 인해...
아직은 자정이 먼 시점 , 이제 막 수평선이 잦아드는 그 찰나에도 몇 시간 뒤를 상상하는
몸은 지레 어둡게 굳어지곤 했다. 그러니,그 방에서 맞게 되는 어둠은 항상 검고 딱딱한 고
체성의 몸, 그 자체일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스스로는 어떻게 손써 볼수 없게
된 그몸을 풀어 줄 누군가를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침마르게 굳어 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육체를 견디는 시간은 길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곧 나타나리라는 믿음
덕분에 심리적으로 버티는 시간은 비교적 짧았던 것이다. 그 군간가는 또 다른 어둠, 그러나
고체성이 아니라 기체성인 어둠,..어디선가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한 겹 바람결 같은 알
ㅂ은 그림자의 형상으로 등을 휘감은 어둠,그녀였다. 그녀가 길게 흐르는 머릿결과 얼굴 문
양의 그림잘를 낙인처럼 뜨겁게 등허리에 찍으면, 녹는 몸이 푸르르 떨혔다. 그 때문에 더욱
믿기 힘든 것은,그 뜨겁던 그림장에서 흘러나오는 가을 같은 목소리였다. 등허리에서 물러난
그림자는 그집의 계절처럼 언제나 서늘하게
그녀를 나타냈다. “왔어?” 그 집을 세 번째로 방문해 말을 트면서부터는 반문형의 대답
도 똑같았다. “어디 있었어,안 보이던데?” 그녀가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그림자가 저 혼
자 소리 없이 웃는 듯 싶었다. 가급적 말을 억제하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눌려 첫번째 방문
때는 그 방에서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했었다.그러나 두번째 방문 때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저 섬 너머가 정말 바단가?...저기가 서해 맞아요? 그게 사실이냐구요?그 때,대답
없던 그녀의 표정만큼 궁금한 것은 없었다. ”쭉 한강변만 타고 온데다,서울을 벗어나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예요.여긴 더구나 지도를 봤는데 한강변을 그대로 따라가 하구까지 닿는다
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구요. 휴전선 때문에.“그제서야 그녀는.”아무려나 ,저건 바
가예요. 저게 바다로 안 보이나 보죠?“ 하며 어떤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 저 강어귀 굽이
에 불빛 몇점 반짝이는 거 보이죠? 거기가 개운포랍니다. 열릴개,구름운, 물가 포 “거기엔
별빛 같은 불빛 몇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럼, 저 섬 이름은 뭐지요?“ ” 저 섬은 이름
이 없나 봐요.그 쪽처럼. “ 그 쪽? 그러니까 이쪽?? 그래서 ”그 쪽의 이 쪽은 요? 하고
되묻자. 이쪽의 그쪽은 갑자기 요기가 서리는 어둠의 목젖을 울려 깔깔댔었다. 세 번째 날,
그 쪽은 이 쪽을 ‘너’라 지칭했지만
그 집에 오는‘너’가 워낙 많아서인지, ‘나’는 ‘나’로 구별되지 않앗다.아니,구별되
지 않았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정확치 않다. 수 많ㅇ느 ‘너’가 수많은 ‘나’로 뒤섞여
‘나’만의 ‘나’를 가를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기보다,애당초‘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가리켜‘나’라 말할때,그 대명사는 고유 명사나 다름없는, 그 집에
서 오로지 그 족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이 쪽의 (나)는 문 밖의 개집같
은 괄호 속에 묶여 있었거나,()는 그 괄호 속에조차 부재했다. 그러고 보면, 이쪽 이몸에 이
름이라는 것은 과연 있었던가.그 방의 검은 어둠속에서는 대명사는 둘째치고,이름조차 하얗
게 생각나지 않았다.곰곰 되새겨 보니,있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그렇다면,거기서는 이름이 하얗게 붙여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 할 수도 있다. 금빛 섬에 홀려,그처럼 저 스스로를 부르는 대명사도 이름도 가지지
못하는 몸을 그 방에서 다시 거실로 이끌고 나가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는데
그녀가 문턱을 넘자마자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느닷없는 소리를 외쳐 댔던 것은,넷째 날인
가 다섯째 날인가 그랬었다. “알았어.네가 바로 처용이야,처용!처용,알지?”멍청히 고개를끄
덕이자, 그녀는 혼잣말을 더했다. “그리고 나는 만희야,몰랐지? 가득할 만,기끌희” 꼬박 꼬
박 한자 풀이를 앞세우며 너무나 지당한 사실ㅇ르 말하는 듯한 태도가 어이없어,“그밖엔
이름이 몇이나 되는 거야?” 농담처럼 말을 바꾸고 싶었으나,그녀는 “글쎄,한 삼십개쯤 도
나..”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저 혼자의 희열에 가득 차서 뒷말을 건넸다“이젠 되
ㅆ어.뭔가 될것 같아..그래.이젠 저리 가서 좀 쉬어 손에 잡히는 대로 술도 좀 마시구,푹 널
부러져 계시라구.그렇잖아도 여기 올라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그 때는 그 집에
올라가기가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었다. 그 집이 아직 4층인가 5층에 있었으니까. 그 집은 갈
때마다 한 층씩 더 높이 올라가
맨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29층인지31층이었다.그 사이에 십 몇 층인가부터 이십 몇 층인
가까지가 사라져 버려서 실제로는 십층쯤 낮은 셈이었지만 그쯤 되면 어차피 적ㅅ이 빠져나
가긴 마찬가지였다.엘리베이터를 쓸 수 없어 나선형의 계단을 빙글빙글 돌며 한없이 오르는
길은 거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었다. 더구나 허공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구멍이 뺑뺑
뚫린 철조물 층계를 한 단 한 단 밟아 가노라면 가슴마저 승승 뚫려 왔다.가슴 구멍을 관통
하는 차가운 바람은 발목을 움켜잡기 십상이었고,반사적으로 난간을 움켜잡는 손바닥은 줄
곧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얼얼했다.그리하여 점점 더 숨은 짧아지고 심장은 무뚝해 오고 미
열이 이마로 들떠올라, 어느 중간 참에 주저앉아서 담배라도 피울 때는, 어찌하여 자꾸 그
기형적인 공간 속으로끌려드는 것인지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피사의 사탐’이
라 불렀던 그 것물은 전체적으로 기우뚱하게 솟구쳐 있었는데, 잘못 짓다 중단되었거나 폐
기 처분된후 철거되지 않은 무슨 고층 아파트 같긴 했어도,그녀의 집이 새둥지로 보일 정도
로 폭은 너무 좁고 높기만 해 그 쓰임새를 확신하기는 힘들었다. 그녀의 둥지를 빼고
사방 벽이 뜯겨 나간 채 폐허로 버려진 다른 층들은 당연히 모두 비어 있었다. 콘크리트
기둥들만이 헹한 그 공간을 가로질러 건너편 하늘을 건너다보고 있자면 정말이지,그녀의 집
이 어떻게 매번 더 높은 곳으로 옮겨 갈수있는 것이가,귀신이 되어 보아도 곡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특히 천장마저 허물어져 두 층이 하나로 드넓게 트인 곳에서는, 그런 불가사
의도 덧없었다.사방 하늘에서 터진 봇물처럼 밀려들던 느을 강에 휩쓸리는 몸이란 한 잎 낙
엽에 불과했던 까닭이다.높이 오를수록 심해지는 마파람이 회오리라도 일으키면,노을의 격랑
속에서 그것은 한점 물거품으로 부서질것이었다.아닌게아니라 그곳에서 그렇게 횝쓸려 사라
졌을 부랑아들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깨진 소주병이나 담배꽁초,해진담요 조각이나 피 묻
은 팬티 따위가 널려 있었던 것이다. 혹시 그런 침입자들을 피해 그녀는 위로 또 위로 이주
해 가는 것일까? 현관 문 앞에 ‘개조심’이라고 쒸어진 빈개집이 놓여 있고 거실 벽면 가
득 온갖 귀면 같은 가면들이 걸겨 있는 것은 불시에 들이닥칠 침입자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침침한 거실,어둠의 벽 위에
가면들은 그 어둠의 벽이 흘리는 어둠의 피가 엉기며 빚어진 어떤 형상들인 양 더 진한
어둠의 굴곡을 만들며 눌러 붙어 있었다. 그녀가 거실 몇 군데에 촛불과 향불을 붙이면 가
면들은 희미하게 근육을 씰룩이며 슬그머니 눈꺼풀을 열었다.사실,가면과의 첫 대면은 문둥
이에게 한쪽 팔을 뜯겨 씨히는 순간으로 다가왔다.하필이면 첫눈에 마주친 것이 암갈색 나
무 껍질 피부에 흉한 반점 돌기들이 번져 있고 문드러진 코 아래 콧구명이 정면으로 뚫린
거기다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ㅃ라을 드러내면서 심하게 이지러진 두 눈의 사팔 누동자로 삐
딱하게 노려보는 문둥이탈이었던 것이다.그 탈의 두 눈동자는 서로 색깔이 달라서 더 끔찍
했는데,눈꺼풀을 들어올렸는데도 동공이 그냥 뻥 뚫려 있는 탈들 역시 금방이라도 두눈에서
뱀혀가 날름걸릴 것 같아소름이 끼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렇지만 그집의 향내에 조금 취하
고 나면, 그 두려움에ㅡ 머리만으로 깨우치기 힘든 어떤 흡입력이 있었다. 그녀의 흡입력이
기도 했던
그 야릇한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거실의 탈들 위에 ‘망
해정’이라는 현판을 새로 걸던 때였다. 그건 더섯때 날이었던가 여섯째날,또는 일곱째 날이
었을 것이다.한팔 길이만한 크기의 나무판에 파란 분료를 입힌 글자가 돋을새김이 되도록
바닥을 파서 만든 그 현판을 걸때 방안에는 돌연 안개가 자욱했었다.그날 따라 유독 향불을
심하게 피웠을까.안개속에서 자꾸 희미해지는 그녀를 향해.‘망해정이라...이름은 멋지네.그렇
게 바다가 그리웠어?“바보처럼 물었다. 그녀는 ”나보다 자기가 더 그리울 텐데,아니야?
“되물었고,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호한 추억을 불렀다. ”그립다면 기억이 있어야 되
는데, 떠오르질 않는 걸.“ ”천백 년 전의 기억이니까.“ 그녀의 단정에 얼떨떨해져서,간신
히 내뱉는다는 게 ”뭐라고!“ 기가 막혀 잠깐 멈춰 섰던 생각이 방향 없이 번졌다. ”가만,
저 건너 누각 이름은 뭐라 그랬지?“ ”영취루.“ 그 후로도 매번 물으면서 번번이 잊을
그 가운데 ”취“자, ”그게 무슨 ’취‘자라구?“”독수리 취“ ”독수리?“ 그곳에든 새
롭게 깨어난 말이 환상을 부르고 환상이 곧 현실인 공간이었던가.북쪽 베란다문으로 훌쩍
날아든 환상의 독수리가 큰 날개짓으로 삽시에 안개를 몰아가자
안개가 그녀의 옷이었던가,놀랍게도,그녀는 또렷한 알몸으로 돌아섰었다.그런데 그냥 알몸
이 아니고,소스라치게도,문신처럼 그려진 검은 뱀 무늬가 친친 그녀의 온몸을 얽어 두르고
있었다. 그건 결코 예사 문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요술을 부리듯 체 젖가슴을 살포시 밀어올
려 거기 그려진 뱀 머리에 입술을 맞추니까.그 문신이 동아줄같은 부피감으로 살아나 그녀
의 몸에서 풀어져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발목을 떠나 빠른 곡선을 그리며 바닥을
건너온 그 뱀은 쉭쉭 이쪽 발목을 감아도는 즉시,바짓가랑이 속으로 징그러운 전류를 휘감
고 올라섰다. 뱀이 파고들면서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던 옷은 안으로부터 튿어져 흘러내렸고,
동시에 이게 누구것인가 싶은 ,조금 전의 그녀처럼 뱀 문신에 얼룩진 또 하나의 알몸이 모
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녀가 하얗게 자유로워지려 벗어 던진 문신 그물에 꼼짝없이 포획된
꼴이었다. 그 포획물의 사타구니에 곧추서 있던 뱀 머리 그것을 아예 태워 죽여 버릴 듯이
시선의 초점을 모으며 다가선 그녀는 그러나 문득 무릎을 접고 몸을 낮추더니,다시 거기에
입을 맞췄다. 짧은 결련과 함께 되살아난 뱀의 기묘한 꿈틀거림이,지극히 비현실적으로 자연
스럽게 온몸을 바닥에 눕히자
이번엔 탄력있는 몸놀림으로 배 위에 타고 오른 그녀가 쉿 쫑긋한 입술 한가운데다 검지
를 수직으로 세웠었다. 미소진 눈으로 어둠의 서랍을 뒤져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뭔
가 또 다른 요술을 부릴 작정인 듯했다. 그녀는 둘둘 말려 있던 그 무엇인가를 가슴에 펼쳐
놓았다. 그녀가 그것을 촛불 쪽으로 들어올렸을 때에야 타원형으로 오려진 한지 뒷면에 배
어나온 먹물의 선들이 어떤 얼굴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내비치고 있는 것임을 알 수있었
다. 심각한 표정으로 곰곰이 그림을 살핀후,그녀는 손가락으로 귓구멍.누구멍.콧구멍.입구멍
을 하나하나 뚫어 나갔다. 그리고 매우 제의적인 동작으로 그것을 두 손으로 받쳐 다시 가
슴 위에 얹어 놓고 나서,부드럽게 상체를 굽혀 얼굴을 핥아 대는 것이 었다.이마 위에서부터
턱 끝까지,뱀처럼 긴 그녀의 혀는 정성스럽게 얼굴 구석구석을 훑어내렸는데,마치 샘물에 세
수를 하는 것같이 그녀의 침은 맑았다.그렇게 맑은 침이 어쩌면 그렇게 강력한 접착력을 지
니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가 침을 바른것은 얼굴에 얼굴 그림을 다시는 떼어낼수 없도록 붙
여 놓기 위해서였던 바 그리고 그녀는 그 종이탈을 쓰고 바뀐 얼굴의 몸을 제 몸 속에 불러
들일 참이었다. 제 얼굴을 탈의 얼굴에 부드럽게 부벼 대던 그녀는 마침내, 곧추서 있던 뱀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부드럽게 끼웠다. 지그시 조여오는 살 어스름 틈새로, 뱀 머리가 스
르르 기어 들어갔다. 새삼스럽게 “ 네 이름이 만희라고 그랬...” 하던 소리가 저절로 격한
신음이 된 것은, 묶여 있던 뱀 동아줄이 온몸을 돌아 흐르며 살갗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미
지의 감각들을 한꺼번에 흑진주빛 섬광으로 튕겨올렸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말대로, 그건
천백 년 만에 되살아 보는 진기한 느낌일지도 몰랐다. 온몸이 눈멀도록 부시게 번져 나가
는 낯선 쾌감은 가늠되지 않던 뱀의 길이와 그 느린 움직임만큼 아주 오래 지속되었음에도,
그녀의 살 어둠 속으로 마지막 뱀고리가 사라져 가는 순간에 그 집이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미 제 안으로 뱀의 온몸을 품어 버려서였을가. 그 뒤로도 그 곳에
갈 때마다 새로운 종이탈을 하나씩 하나씩 덧씌워 줄것이었지만, 그리고는 슬며시 물러나
어디론가 숨어 버리던 그녀와 다시 나눌 수 없었던 그 황홀한 흘레! 막 몸 안에 든 뱀이 잘
들 때까지 잠시 더, 저 혼자 상체를 세우고 그 황홀감에 꿈틀거리는 그녀의 등 뒤로
주홍 빛너울이 그녀의 생생한 육감을 감싸고 있었다. 언제 피워진 것인지, 뜨거운 모닥불
이었다. 타다닥, 점점의 불씨들이 춤을 추며 날아올랐고, 디룩디룩, 수많은 눈동자들이 매캐
한 연기 너머에서 두리번댔다. 가슴 위로 젖가슴을 누르며 엎어진 그녀는 약간 낭패스런
기분인 것 같았다. “이런, 벌써들 모였네.” 다시 둘러보니, 어느 틈엔가 벽에서 내려 선
가면들이 모닥불을 지피며 그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켜나라
는 손짓과 함께 쑥스러움을 짓이기듯 칭얼거렸다. “불을 피웠으면 얼른 문을 열어! 이러
다간 연기에 질식하겠네.” 몸을 일으킨 것은, 왼쪽 반은 희고 오른쪽 반은 붉은 안색에다
가 날렵한 눈매와 입매를 지녀 매우 서구적으로 보이기가지 하는 홍백가탈이었다. “잰, 아
버지가 둘인데 어느 쪽이 진짠지도 모른대.” 그녀가 속삭이는 사이, 그 탈이 휘적휘적 두
터은 장막 하나를 걷어 냈다. 그것은 낮시간 동안엔 반드시 쳐둔다는 남쪽 유리문의 커튼
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그 거실에는 남향과 북향 양쪽으로 베란다가 나 있었다. 북쪽 유리문
은 미리 열려 있었기에, 그 남쪽 유리문이 활짝 젖혀지면서
거실에는 바람길이 트인 셈이었다. 모닥불 연기가 천장에 난 그을음 길을 타고 빠져나가
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꾸로, 모닥불 열기는 움츠러들고 있었다. 좁혀진 열기의 테두리 밖
에 뻗쳐나가 있던 가슴 위로, 즉각 한기가 덮쳐들었다. 움찔 그녀를 밀어 올리고 나서 무릎
을 끌어안으며 불가로 바싹 다가앉았지만 그 자세에선 가슴이 뜨거웠고, 등허리가 차가웠다.
바로 옆의 그녀가 납작 엎드려 있던 몸채만한 사자 머리에 등을 기댄 채 그 산발 갈기를 쓰
다듬으며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지금 이건, 아주 오래 전은 아니야. 아마 누
구라도 여기까진 올 수 있을걸. 하지만 자기하곤 더 나가 보고 싶어. 더 멀리 가야 해. 저
강 어귀 밖, 바다까지. 그러려면 자기가 잘 견뎌 내야 할 텐데...”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
으되,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전혀 이해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또 엉뚱한 물음, “이 탈들, 모
두 네가 만든 거니?” “그럼. 어떤 건 나무로, 어떤 건 바가지로, 또 소나무 껍질이나 종
이로, 하지만 네 껀, 이 탈들하곤 다르게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만드는 중이야.” 그녀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쯤에서였으며
깡총 뛰어오른 원숭이탈을 어깨 위로 얹고 자리를 뜨기 전에 남긴 말은 “어제부터 네 탈
ㅇ르 만들기 시작한 건데, 다시 계속해야겠어, 자, 이제부턴 혼자 어울려 봐”였다. 그리고
그녀는 홀연히 모닥불빛 밖의 어둠 뒤로 스며들어갔다. 한 겹의 종이탈이라도 얼굴을 덮긴
덮었으니 굳이 못 어울릴 이유도 없었고, 마침 어릿광대처럼 눈썹과 눈매가 아래로 길게 처
지고 입술이 두터운 노름꾼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투전판에 끼라는 시늉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인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호의만은 고맙다는 뜻의 웃음
을 짓고 싶었는데, 얼굴에 달라붙은 탈 종이가 너무 뻑벅해 오히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못 본 척 소주병 하나를 집어들고 베란다로 나설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고 실수였다. 허둥대는 바람에, 아까 그대로의 벌거벗은 알몸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어 있었다. 떠밀리듯 베란다로 나섰을 때, 어깨에서 발끝까지를 완
벽한 사시나무로 만든 것은 그 두려운 차가움이었고, 머리를 번쩍 트이게 한 것은 뭔지 모
를 차가운 두려움이었다. 덜덜덜덜 떨어 대며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킨 끝에 취기가 간신히
발끝에 이르자, 귓속 가득
둥둥, 가슴의 큰 고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자주 그 자리에서 맞을 그 고동
소리. 그 진동은 어디서 오고 있는 것인가? 그 물음이 처음으로 들던 그 날은, 그 흘레와
헐벗은 추위로 인해 특히나, 그 집에서의 모든 것이 막막하고 또 그 막막함이 처연해서, 어
이없이 술기가 습기로 도지는 눈을 어둠의 벌판으로부터 하늘로 들어오렸었다. 그 날, 하늘
에는 하현달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 뿌연 달빛은 왠지 거대한 하늘의 그물에 걸리 날벌레
의 힘겨운 날개짓처럼 초라해 보였다. 그랬다, 점으로 찍혀 있으나 순도 높은 빛으로 영롱
한 별들이 그물코처럼 촘촘히 총총히 하늘 가득 일렁이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우주의 그물,
우주의 지도를 둥글게 둥글게 펼쳐나가는 별들은, 까마득한 중천의 저 깊디깊은 곳, 어딘지
도 모르고 가닿을 수도 없는 어둠의 아득한 중심으로부터 끝없이 태어나며 고동의 호오리를
몰고 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고동 소리는 다름아닌 별들의 맥박 소리인가? 불현듯,
별들의 어떤 본성적인 춤사위가 눈 앞에 환히 그려진다 싶고 그것을 따라 몸이 저절로 들썩
인다 싶어
모닥불 쪽으로 돌아서면, 도 어느 새, 거실 마당엔 벌써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흘
레의 날에 그 집에서 처음 목격하게 된 춤판마당의 주인공은 필경 사자들이었다. 뻣뻣한
장비 수염에 종이 머리를 펄럭이며 빨간 눈을 굴리는 놈, 아프리카나 미국 인디언처럼 얼굴
을 울긋불긋 분장한 놈, 황금빛 눈꼬리를 세우고 왕방울 코를 벌룩이는 놈, 그런 사자들에다
가, 물고기 비늘 같은 피부에 뿔을 달고 긴 송곳니를 드러낸 비비, 영락없는 호랑이 코와 얼
룩 살갗으로 희죽이 웃는 담보란 놈까지 한데 어우려져 질퍽한 장단에 덩실거리고 있었다.
그 둘레를 둘러친 다른 탈들도 그냥 앉아 있지 못하고 넘실거렸는데, 거어이, 누구는 외다리
로 서서 손놀림을 즐기는 깨끼리를, 누구든 두 손을 번갈아 뒤통수에서 앞으로 젖히며 맴을
도는 멍석말이를, 누구든 두 손을 펴들고 고개를 끄덕끄덕 좌우로 돌리며 활개펴기를, 누구
든 나서거니 물러서거니 날개짓으로 요동하는 너울질을, 그런 온갖 춤짓들을 난장으로 뒤얽
어 댔다. 그러나, 거기서 쫓겨나 벼랑 끝에 몰려 버린 듯한 싸늘한 베란다에서, 이쪽과 저
쪽을 가르는 어떤 거리감이 의식의 골을 점점 더 깊게 파갈수록
보이는 모든 것은 화면 저 너머로 단절되어 갔다. 몸은 지작부터 다시 굳어 있었고, 차츰
귀마저 먹통이 되는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더 아귿해지면서, 화면 속에서 화면의 틀을 견
딜 수 없다는 듯 화면을 터뜨리고 넘쳐나고야 말겠다는 듯 용틀임치며 더욱 환란스럽게 번
져 나가던 몸부림들은 여지없이, 화면을 벗어나기는커녕 꼼짝없이 갇혀 발버둥치는, 소리 없
는 아우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 아우성만으로도 어질머리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 자
연에는 술기를 가시게 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무엇인가는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그 혼돈스런 제가가각의 춤짓 위에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일련의 동작들이 어른어른 겹
쳐져 보이는 것이었다. 두 영상이 서로를 겯고 트는데도, 어질머리가 더 나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우면서도 정돈된 느낌이 드는 것은 정말 희한했다. 모든 움직임을 곧 정지 상태롤
알아보는 듯한, 흐르는 시간에 대한 초조함을 함께 끼고도 시간이 지워진 영원을 느긋하게
사는 듯한 그 양면적 느낌의 체험은, 화면 속의 춤꾼들이 어느 순간부턴가 옷을 하나씩 벗
어제치기 시작해 어느덧 모두가 남김 없는 알몸으로 얽혀들 때가 절정이었던 동시에
급학한 끝이었다. 흡사, 흐르지 않던 영원의 매듭이 단숨에 풀리며 흐르는 시간이 모든
것을 빠르게 휩쓰는 듯했다. 격렬하던 춤사위의 풀을 툭 꺾어 버리고 갑자기 연체 동물들
처럼 어기적거린다 했더니, 땀이 질펀한 알몸들은 곧, 노골적인 짓거리로 히히닥거리며 서로
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벗어 던지지 않는, 그래서 알모 위에 덩그러니 어두
운 달처럼 떠 있는 탈바가지들은, 그렇지만 얼굴만큼이나 자유자래롭게 갖가지 욕정을 표현
하고 있었다. 욕정은 거침없이 통했고, 짝짓기는 금방 이루어졌다. 살과 살을 부비는 암수
가 한 쌍씩, 어쩌다가는 동성들끼리도 짝을 맞춰, 여기저기로들 방을 찾아 사라지는 것도 눈
깜박할 사이였다. 허깨비들의 잔치였나 의실될 정도로 어이없이, 일시에 적막으로 채워진
텅 빈 공간, 뒤늦게, 도대체 이 집엔 방이 몇 개나 되는 걸까 하고 멍청히 자문하다가, 이
화면을 밀고 들어갈 수는 있을가 하며 떨리는 다리힘을 모았다. 춤의 열기가 아직 훈훈하
게 남아 있는 거실의, 사그라드는 모닥불가로 가 주그리고 앉는 마음은 잠시 악몽을 꾸다
깬 듯 뒤숭숭했다. 바닥엔, 탈들이 마구 벗어 내던진 옷들이 함부로 널려 있었다. 아마 탈
들도 그러겠거니,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끼어입고 적당히 몸을 데운 다음
무작정 그 집을 뜨련느데, 그런데 현관에 벗어 놓았던 신발이 없었다. 여닫이 아귀가 맞
지 않는 신발장에도, 현관 밖 개집 속에도 없었다. 거실로 돌아와 어질러진 옷들을 뒤져 봐
도, 없었다. 뒤지는 청바지와 셔츠와 점퍼를 함께 찾고 싶었으나, 그것들도 없었다. 나중에
그녀는 ‘신발이 없다고 못 가?“ 하고 핀잔을 줄 터이지만, 그 때는, 가긴 글렀다는 생각
뿐이었다. 교활하게 생겼던 그 신발장 수탈이 슬쩍 들어먹은 것일까? 따져질 것도 아닌
것이 생각나는 게 한심해, 뻘건 숯으로만 남아 있는 모닥불가에 시체처럼 늘어졌다. ”여기
선 신발 안 잃어버리는 사람 없어. 앞으로 신발 벗고 와“ 하는 그녀의 괴상한 소리를, 그
때 희미한 졸음 속에서 며칠을 앞당겨 듣는 것 같기도 했다. 신발을 벗고 오라고? 신발을
벗고? 그런 소리를 혼잣속으로 웅얼거리다가 슬며시, 미리 탈들의 난장을 꿈으로 꾸고 난
때문인지 더는 꿈이 없는 새까만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까무러져 자는 틈에도,
어느 순간 누군가가 유리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기척만은 어슴푸레 느꼈던 듯했다. 태아나
다름없이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고 옆으로 누운 자세로
잠에서 깨어난 것은 다시 해질녘이었다. 여전히 텅 빈 거실 바닥은 어느 사이에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벽에는 탈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먼저 그 손길의 주인을 찾아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상기됐다. 만희라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그것이
정말 그녀의 이름일까, 그것이 그 순간에 그녀의 이름으로 불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스
스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두리번두리번 찾은 것은 물이었다. 거실 한구석, 딱히 부엌이랄
수도 없는 곳에 붙어 있는 수도꼭지는 예상대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머리카락으로
잔뜩 막혀 있는 수채 옆에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었고, 거기 반쯤 찬 물 위에는 작은 플라
스틱 표주박이 떠 있었다. 너무 뿌연 것이 마실 물 같지 않았으나, 벌컥벌컥 달게 마셔졌
다. 이 여잔 여기서 뭘 먹고 어떻게 사는 거지? 정말 여기 살긴 사는 걸까? 배가 고프고
온몸이 쑤셔,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자, 해질녘에 그 집을 나오는 일을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허공을 헛짚듯이 후들거니는 다리로, 그것고 곱은 맨발로 어
떻게 그 철판 계단들을 밟아내렸는지에 대한 기억은 그 즉시 거의 의도적으로 상실된 듯했
다. 그나마 그 때는 아직 높이가 몇 층 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계단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독한 열병이었다. 어떻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어쩌지도
못하고, 그래도 누워 허덕였던 게 며칠이었던가. 또 그런데, 그런데 또, 그렇게 앓아서는 그
열병이 낫지 않으리라고 이미 알고 있었던 존재는 다름아닌 그녀였다. “열을 내리려면 이
리 와야 해.” 일부러 전화를 걸어 온 그녀의 목소리가 따뜻한 근심으로 가득해서, 미치 아
내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 집에서 멀리 나와 겁이 난다며 기
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굳이 덧붙였던 그녀는, 그러나 막상 그 집에 갔을 대는, 언제나처럼
그 서쪽 끝방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 전날엔 떠나고 싶었는데 신발이 없어 못 갔다는 이
야길 하자, 그녀는 “신발이 없다고 못 가?” 하고 핀잔을 준 뒤, 다소 정색을 하며, “여
기서 신발 안 잃어버린 사람 없어. 앞으로 신발 벗고 와” 라는 주의까지 줬다. 순간 아
무래도 그 말의 울림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것 같아. “이상하네. 지난번에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었나? 물으니까. 그녀는 심상하게, ”네 열병은 무병인가?내 말을 미리 들
었던 모양이지?“ 하고 반문으로 답하며, 자신의 이마를 이마에 맞댔다. ”무병이라면 무
당에게 맡길 수 밖에...‘ 음정을 낮추는 그녀에게 또 언제나처럼 이끌려 나와
마주서게 된 거실 벽에는, 그 날 따라 여러 개의 무당탈들이 한군데 나란히 걸려 있었다.
“골라봐.” “뭘?” “네 열병 고쳐 줄 무당을.”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 집에서 그녀
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무당탈들은 대개, 가르마를 곱게 타고 연지. 곤
지를 선명하게 찍은데다가 입술도 진한 붉은색이었다. 보통은 흰 얼굴 바탕이었는데, 새색
시 같은 분홍 얼굴도 있었다. 눈썹을 말아올리고 눈꺼풀까지 주홍색으로 칠해진 색스런 분
홍 무당이 먼저 제외되었다. “저런, 저 소무탈은 선녀탈이기도 한데.” 그녀가 빈정거렸
다. 다음엔, 이마에 주릅이 잡히고 코가 입술까지 처져 심술궂어 보이는 탈이 버려졌다.
“요염한데 왜?‘ 번번히 사설을 다는 태도가 저답지 않아 힐끗 쳐다보았더니, 그녀의 얼
굴엔 사뭇 긴장이 얹혀 보였다. 나머지 엇비슷이 눈매에 약간의 무기가 서려 있을 뿐 다른
아녀자나 다름없이 고르리가 힘들던 차에, 한 귀퉁이에서 뭔가 묘한 분위를 풍기는 탈 하나
가 눈에 띄었다. ”저 고깔 쓴 탈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 고깔 쓴 탈도 무년가?’ 멀
뚱한 눈썰미에 입술은 가운데만 아래위로 붙은 채 헤벌어져, 가슴마저 숭승 뚫렸을 듯한 탈
이었다. ”응.“ ”저무당이 좋겠네“ ”왜?“ ”슬퍼 보여서.“ 다소곳이 그 탈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는
이어서, 그 탈 바로 옆에 머리를 뉘었다. 촛불과 향불은 켜져 있었으나 안개가 오지 않아
서였는지, 그녀는 옷을 벗지도 벗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벌린 두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배 위에 올라앉아, 웃옷을 어깨까지 끌어내린 후, 피를 빨 듯 혹은 제 피를 흘려 놓을듯, 목
덜미 여기저기에 진한 입술 자국을 각인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예의 그 제의적인 동작으
로, 다시 얼굴을 빈틈없이 핥았고 또 하나의 종이탈을 어떤 현상이었는지를 거울에 비춰 볼
틈이 전혀 없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어쩌랴. 하지만, 과연 그게 이 집을 벗어나서 보일리
가 있을까? 대답 없을 자문에 지그시 감기는 눈꺼풀 안으로 그 때 영상이 되어 떠오른 자
문에 지그시 감기는 눈꺼풀 안으로 그 때 영상이 되어 떠오른 소망은 다만, 그녀가 어서 제
안에 감추었던 뱀을 불러 내 전날보다도 더 오래오래 두 몸을 하나로 묶고 섞눈 그런 환희
였다. 그 영상을 훔쳐본 듯, 그녀가 바람 소리를 냈다. “처용의 탈은 분명 아주 여러 겹
이었을 거야. 여러 얼굴이 쌓여 하나가 된 거지.” 그 주문 같은 소리가 읊어지는 동안
성큼, 한참 뒤의 열 몇 번째 날 저녁이 앞당겨져 왔다. 그 날은 그녀에 대한 어떤 원망이
흥건히 배어나오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 전번 날의 일로 부아가 끓어 며칠 간 발길을 끊었
다가 다시 차오르는 그리움이 끓어 달렸을 땐대도, 그녀의 첫마디는 어김없이 “왔어?”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황금빛 수평선의 침묵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제서야 눈치를 챈
건지, 그년느 다시 “저기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며 대구를 그집어내려 애썼다. 마지못
해, “처용은 동쪽에서 왔잖아. 돌아가려면 동해로 가야겠지.‘ 침묵을 접었다. ”동쪽에
서 왔으면 서쪽으로 가야지. 돌고 돌면 결국 거기가 거기겠지만,“ ”하기야 아라비아에서
왔다던가...“ ”아라비아든 아프리카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이란 뜻이겠지.“ ’어디서
날아든 건지, 생판 보도 듣도 못 한 이게 짐승인가 귀신인가 싶었을 거야, 아마.” “무섭
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그런 게, 물건도 아주 크고 셌나 보지.” “후훗, 내가
대화를 건너뛰었다. ‘그런데 어떡하니, 넌? 이렇게 손가각만한 놈을 네 처용으로 삼았으
니.” “너도 아주 근사했어.” “사자 도깨비 같은 백정놈보단 못했겠지” “어헛! 아직
도 질투가 안 끝난 거야?” “이젠 질투가 아니야. 피차 그럴 거라면, 이 가면 씌우기 놀
음은 대체 뭔가 해서.” “말했잖아. 모든 걸 넘어 저 멀리까지 함깨 가려고...’ ”뭐 하
러?“ 그녀는 대답 대신 허리를 껴안고는
성큼, 일곱째 날인가 어덟째 날 혹은 아홉째 날로, 어쩌면 벌써 열두세 번째였는지도 모를
날로 시간을 되
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되돌아온 자리에서 새롭게 느껴지던 그녀의 손길이 멈추길래, 이젠
숨을 고르는가 싶은 그녀를 받아 안으려 눈을 떴는데, 아뿔사, 숨결의 주인공은 이미 그녀가
아니라 그 슬픈 무당탈이었다. 그녀가 그새 무당탈을 쓴 것인가?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피어오르는 모닥불 빛에 그 모습을 곰곰 살폈지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
쩌면, 고개를 들어올렸을 대 막 커튼을 걷고 유리문 밖 테라스로 나가던 누군가가 그녀였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둘러싼 탈들 때문에, 특히 더는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무당은 제
푸짐한 소매 속에 긴 담뱃대를 꺼내 물려주었고, 타는 장작 하나를 집어들어 불가지 붙여
주었다. 그게 열병을 고치는 약인가 해서 뻑뻑 빨아 대자, 과연 담배는 아니었고, 무슨 약
초를 말린 것 같았다. 연기가 목을 싸하게 쏘아 댄 지 얼마 안 돼 머리가 휭휭 도는 것이
뭔가 꽤 독한 풀인 듯, 잠시 후엔 시야마저 일그러져 보였다. 볼록 렌즈 속에서처럼 둘레가
길게 퍼지며 다가왔던 무당탈이, 천천히 다시 오무라들며 물러나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
다. 살을 놀리는 움직임이 아닌 것마냥 너무도 부드럽게, 천천히 두 손 날개를 들어올린 무
당은, 전혀 움직이고 있디 않았다는 듯이 동작을 정지시켰다가, 더 천천히 이번엔 버선발을
접어올렸고, 조금 더 천천히 새다리 같은 한 발을 빙그르르 휘돌렸는데 그 흔들리지 않은
느린속도가 기적 같았다. 그건, 여느 굿판에서 흔히 보는, 잰 박자의 장구와 꽹과리 소리에
맞춰 빠르게 팔짝거리는 그런 무당춤과는 완벽하게 반대였다. 활로 켜는 무슨 형악기 음악
이, 저게 별들의 음계로 연주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탄식이 절로 들게, 소리로 사물들을
휘감아 그 형체들의 경계를 녹이며 언갖 색들을 반죽해 수만갈래 무지갯빛 실들을 꼬는 것
같은 음색으로 퍼지는 가운데, 무당탈의 춤은 이 세상의 가장 느린 율동을 향해 한 몸짓 한
몸짓, 힘은 줄이되 그 결은 길게 늘여 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몸짓이 뿜는 슬픔도
느렸고, 느려질수록 슬픔은 더욱 커졌다. 핑그르르 눈물방울 안에 맺히는 세상의 시간 또한
한없이 늘어졌고, 늘어진 시간을 따라
그 세상의 삶 전체가 항없이 늘어지는 듯했다. 그 늘어짐 속에서 느릿하게 급기야, 무당
탈을 둘러싸고 넋을 잃고 있던 다른 탈들이 비실비실 일어나 저마다 제 삶의 무늬를 엮어
가던 춤들이 그랬다. 그것은, 먼저 간 무당탈의 느림을 뒤쫓아 점점 더 태엽이 풀려 나가는
춤사위로 가늘고 긴 시간의 명주실을 짜내, 그 공간 전체에 시간을 잡아먹는 시간의 거미줄
을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탈들이 입고 있던 옷들을 하나하나 느리게 벗어 가는 움직
임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정녕 어떻게 거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모
두 알몸이 되었들때는 그 알몸들이 모두 스스로가 친 거미줄에 걸려 있는 거미, 서로서로가
거미밥인 거미처럼 보였다. 알몸의 무당찰 거미가 짝을 짓자며 다가오던 순간은 어땠던가.
돌아서려면 얼마든지 돌아서라고 그토록 느리게 다가오는 유혹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유
혹보다도 더 느렸던 마음의 움직임은 스스로 매혹되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첫 느낌에조차 이
르지 못한채, 살의 교감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기적어기적 두 번째 흘레의 방을
찾아가는 와중에, 거미줄은 같은 그 집의 공간 고조
그 집의 밤의 구조가 전날의 의문을 벗은 것은 아주 자연스런 결과였다. 밤이 되면, 그
집의 방들은 아메바의 세포 분열처럼 끝없이 증식하는 모양이었다. 무당탈과 껴안고 첫 문
을 열자 그 방 한쪽엔 이미 어둠의 살들이 들러붙고 있었는데, 그 때 다른 세 벽에서 문이
열리며 다른 탈들이 그리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래서 그 중에서 왼편 문을 열고 뒤쫓아
가 보니 거기도 어둠이 들썩이고 있어, 여기도 벽마다 문이 있을까, 오른편 벽을 더듬었더니
예감대로였다. 그러나 문 안에는 또 어둠이 신음하고 있었고, 이번엔 맞은편 벽 문을 찾았
다. 그렇게 얼마나 하염없이, 방 속의 방 밖의 방 속의 방밖을 찾아 헤매었던가. 하지마, 둘
레의 움직임이 무엇이든, 아메바의 세포 결합처럼 살의 경계를 뭉개고 섞는 데는 충분할 만
큼 아늑한 몽롱함에 취해 있었다. 아마도 그 무당탈이 처방한 약초 덕분이었을 터, 무당탈
의 몸은 그 자체가 약초 기운인 듯 나글거렸다. 머리 끝에서 빨아들이고 발끝에서 빨려 들
어가는 느린 물결의
흘레가 계속 흐르는 것인지 멈춘 것인지 모호한 몸의 몽환속에서, 의식의 몽환은, 그 어
둠의 질이 조여 오는 감은 그녀와 비슷한 것 같고 어둠의 젖이 부벼 오는 감은 그녀와 다른
것 같은 혼돈을 헤매고 있었다.끝간 혼돈이 파괴의 충동을 낳는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하기
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여전히 취해 있었기에, 어떻게 그런 결과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욱하고 토할 듯이 속이 뒤집혀 속구치면서, 그 무당탈이 그녀인지 아닌지 확
인해야만 하겠다는 난폭한 욕망이 그 끝날 것 같지 않던 느림을 끊어 버렷던 것이다. 단칼
질의 손길로 탈을 벗겼고, 베여나가는 탈의 단말마가 터졌다. 너무 컴컴해 보이지 않는 어
둠의 얼굴의 굴곡을 촉감으로라도 확인하려고 두 손을 뻗었고, 꽉 물고 있는 아랫도리를
더욱 옥죄며 필사적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는 무당의 두 손을 어럽게 끌러 냈다. 점점 맥이
빠져가는 가는 손목이 안쓰러워, 마침내 방어를 포기한 그 얼굴을 마음 깊이 다정스런 손
기로 더듬으려는데, 아아
얼굴이 없었다. 처음엔 그저 밋밋하기만 한 탄력의 살덩이를 얼굴로 믿을 수 없어서, 잘
못 다른 데를 잡았겠지 하며, 어깨 위에서부터 다시 손길을 쓰다듬어 올렸는데도 사정은 마
찬가지였다. 무당탈의 얼굴은 입도 코도 눈도 없는 그냥 달걀 모양의 살덩이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반은 했던가에 대한 기억 또한,지난번 계단을 내러오던 기억처럼, 거의 의
도적으로 상실되었던 듯하다. 자꾸 커튼이 드리워지는 기억의 암전! 아무튼, 그 사실은 그
녀에게 알려져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여기선 그러지 않기로 되어 있어.” 정말 듣고
싶었던 것은 그 얼굴에 대한 설명이었지만, 그녀는 알쏭달쏭하게 비켜 났다. “탈들이 여러
가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긴 해도, 그 이름들은 다 일반 명사야. 그걸 알고 있었어, 혹시?
탈춤판은 여러 군데가 있었지만, 거기 나오는 탈들은 모두가, 말뚝이, 취발이, 눈끔적이, 무
당, 양반, 선비, 그저 그런 이름밖엔 가지고 있지 않아. 기껏 갈라 봐야, 중을 놓고 옴중, 목
중, 팔먹중이라 부르는 정도지. 그러니까 조금씩 달라 보이는 생김새란 건 어떤 특정한 시
간이나 공간의 흔적에 불과한 것 아니겠어?” 그 뒤의 침묵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물음은 다른 날로 거너뛰어서야 가능했다. “그런데 왜 처용은 고유 명사지? 또, 너 스스
로는 만희라 부르겠다며?”바보, 하는 표정이 지난번 무당탈처럼 슬프게 그녀의 얼굴을 스
쳤다. “천백 년 전에도 처용이란 이름이 고유 명사였을까, 과연?” 그녀는 스스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고유 명사로 들리는 건 아주 오래고 그만큼 낯설어서가 아닐까? 내
가 처음 찾아낸 처용의 짝, 만희란 이름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필시. 그게 오해를 더 받을
수는 있겠지. 그 이름은 이제야 겨우 캐니어졌으니까….” “도대체 왜 그 탈들을 만드는데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그처럼 바보 같은 질문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이마를 쳤다.
“이 때까지 내가 왜 저 탈들을 만들었을까? 그럼, 그것들을 겪어 내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
했던 걸까, 내가?… 분명한 건 하나뿐이야. 네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거. 네가 나타나기 전엔 나도 늘 탈을 쓰고 있었어. 이것저것 바꿔 쓰는 데 자족하면서.
그런데 네가 나타나는 순간, 내가 더 먼 데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
서 이 때까지의 탈들을 벗어 버린 거야. 탈을쓰고 있는 동안 없어졌던 얼굴이 살아나기를
얼마나 애타게 가다렸는지 몰라. 그리고 이제, 이 때까지의 탈들을 위해 마지막 난장을 펼
쳐 주는 거고.” 다시는 그렇게 늘어 놓지 않을, 길다란
고백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그 날 밤 스스로 탈춤을 추었다. 어김없이 종이
탈을 하나 더 덧붙여 쓰고 그 이전의 어느 밤에 파계승탈과 놀아났던 각시탈에게 치근대며
즐기던 그 날의 춤 마당은, 부네탈이 양반탈과 선비탈 사이에서 교태를 부리는 장면부터 시
작되었다. 처음엔 그게 그녀였는지 물랐던 부네탈은 아주 약간매부리코였는데, 곱게 땋은
머리에 얇은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고 양쪽 꼬리가 아래로 살짝 처진 초승달 눈매로 살살 눈
웃음을 치면서, 오른족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들썩, 다시 왼쪽을 기울이며 어깨를 들썩, 치마
를 너풀너풀, 이게 대체 누구의 첩인가 싶게 이 쪽 저 족을 오가며 꼬시는 춤사위가 남자깨
나 후린 솜씨였다. 그 부네탈이 돌연 그녀가 된 것은, 헐렐레 놀아나는 양반탈과 선비탈의
줄다리기가 이렇게 저렇게 얽히다가 시커먼 얼굴과 사자 갈기 머리를 한백정탈이 도끼와 소
불알을 들고 나타난 직후였다. 양반탈과 선비탈에게 양기에 좋다며 소불알을 흥젱에 붙이
는 백정탈 곁에서, 부네탈을 벗은 그녀는 제 얼굴과 몸의 색기를 한 껏 내비치며 엉덩이로
백정탈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저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탈을 쓴 다른 누군가라고,
혼잣마음을 밀어붙여 보아도
아무래도 그녀는 그녀였다. 그 집에서 탈을 벗어 내던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가 그녀
밖에 없다면 더욱, 그녀가 그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불안한 예감이 들이닥쳤고, 아니
나다를까, 모두가 몸을 일으켜 덩실거리다 옷을 벗고 짝을 찾을 때, 그녀는 백정탈에게 팔짝
뛰쳐올라 두 팔 안에 담겼다. 가슴은 끓다 못해 마른 장작불로 타올랐으나, 짝을 찾아 뒤엉
기는 여러 탈들에 가려지고 팔을 잡으며 늘어지는 각시탈에 붙들렬, 저 건너에서 방을 찾아
들어가는 그녀와 백정탈을 놓치고 말았다. 이글이글 번지는 마음의 불길이 천장을 까맣게
그슬리는데, 다 터버린 몸은 풀썩 주저앉았다. 주변의 술렁임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도 한
참 뒤에야 겨우, 그 날은 옷을 고스란히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런 망연함으로 다가왔
다. 그 때, 망연하게 떠오르던 시선을 받은 것은 각시탈이었다. 오뉴월 서릿발의 오싹한
눈초리로 노려보던 각시탈은, 음부로 가리지 안혹 가슴을 엇가로 질러 양 어깨 위로 뻗친
두 팔로, 부들거리는 수치와 분노를 부둥켜 안은 채 뒷걸음 치고 있었다. 비로소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죄책감에 휩싸였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됐으랴, 이미 저질러진 사태이거늘. 그러니 이제는 거실 마당에 덩그러니 남
아 기다리는 수밖애 없었다. 그녀가 돌아올 때를, 그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었으므로, 필
요한 건 기다림을 밑받치는 인내였다. 그러나 미리 가늠했던 시간의 문은 훨씬 일찍 열렸
고, 문을 나선 그녀는 뭔가를 스스로 재촉하는 기색으로 버선코 같은 젖가슴을 살랑이며 잰
걸음을 놀려 서쪽 끝방 쪽을 향해 갔다. 후다닥 달려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을 때, 기다림을
위해 한껏 끌어모았다 남아돈 인내는 다른 쓰임새가 있었다. 목소리를 깔며, “왜이래?”
하고 묻자 그녀가 내비친 반응은 고작 “뭘?” 이었기 때문에, 들떠오르려는 목소리를 붙
드는 데 인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를 너무 세게 붙들었는지, 목이 콱 막혔
다. 그녀가 대신 “내가 백정과 살을 섞었다고? 넌, 무당하고도 그랬고, 뚱딴지하고도, 피조
리하고도 그랬고, 닥치는 대로 그랬을 텐데?”라며, 모드 것을 내깔겨 주길 다행이었다. 그
제서야 “그건 네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거였지? 하며 목이 풀렸으니까. 기가 찬 듯 ”마
치 네 안엔 그 모든 욕망이 없었다는 듯이 말하네. 혹시, 나는 그냥 물고만 터줬을 따름 아
니던가?‘ 하고 삼키는 그녀의 말에 이번엔 머리가 막혀서 주춤거리는 사이, 그녀는 방문
을 열었고, 열린 문의 맞은편 창문 너머로 휘적휘적
황금빛 갈대들이 바람결에 휩쓸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 높이까지 높이 떠올라 있는 저
섬으로 당장이라도 건너뛰고 싶다는 맹목적인 충동을, 그녀가 달래듯 멈춰 세웠다. “그리
로는 저 섬에 못가. 길은 따로 있다구.” 창가로 다가가 바라보니, 섬과 방 사이의 검은
심연은 넓고도 깊었다. 뜬 감정을 빨아들이는 저 밑바닥으로부터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 나
왔다. “저 섬엔 이름이 없다 그랬지?... 나도 이름이 없고 싶었는데, 이름이 없고 싶어서
너를 만났던 건데, 근데 넌, 거꾸로 이름을 붙여 놓고 그 이름의 탈을 만들고... 왜 이렇게
됐지?”사이. “왜 이렇게 됐지가 아니라, 어쩌면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이름을 지우는 길일
지도 몰라.지금은 너한테 처용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나중엔 그게 네 이름이 아니고
네 탈의 이름이 될테니까. 머지않아 넌 탈을 벗게 될 거고, 그러면 이름도 내던질 수 있을
거야.”사이.“그럴 거라면, 애당초 이름 없이는 안 되나?”사이.“글쎄. 이름이란 게 저리로
건너가선 필요 없다 하더라도 여기선 필요한 거 아닐까? 뭐랄까, 저기로 가는 길을 찾는 이
정표 같은 거랄까....”거기서부터, 조금씩 그녀가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멀어져가는 극진한
음성이 그런데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보탰다.“이젠 탈을 만들러 갈게. 혹시나 해서 부
탁하는 건데, 내가 탈을 만드는 방엔 절대 들어오면 안 돼. 부정 타면 모든 게 끝나. 알
아?” 모르는 말을
부정 탄 듯 털어 낸 두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언젠가부터 날짜 헤아리기를 포기했던지라
몇 겹이나 쌓였는지 불확실한 종이탈의 두께가 제법 두툼했다. 아직도 만들어지는 도중에
있어 날마나 촉감을 달리했던 그 탈. 그 때문에 날마나 흘레의 각도 바뀌었던 것인지 몰랐
지만, 아마도 여러 다른 형상들이 겹에 겹을 대면서 그리 되었을, 문둥이 얼굴처럼 두덜두덜
하고 거친 그 탈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있다 보면, 그 탈만큼이나 여러 겹으로 머릿속에 쌓
여 있는 그녀의 비의적인 말들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 탈을 뜯어 버리고 그 집을 떠나 버리
고 싶다는 또 다른 충동에 숨이 턱턱 막혀 올 때가 잦았다. 그런 숨막힘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그 집의 춤판 중에는 탈들이 온통 제 얼굴을 박박 긁어 대는 마당놀이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무당탈이 그러했듯이 다른 탈들은 굳이 벗겨 버리자면 벗겨 버릴 수도 있을
것이었는데, 처용탈은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것들은 이미 완성된 탈이어서인가. 그 반
면, 처용탈은 아직 미완성의 탈이라서,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얼굴과 분리되는 그 탈의 가장
자리가 잡혀지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살과의 어떤 틈새도 없이 그대로 얼굴 위에 무르녹
아 있었다. 그런 처지에서, 기어이
탈을 들어내려 한다면, 얼굴 전체를 박살내는 도리밖에 없었을까? 백정의 도끼를 빌려 스
스로 머리를 내리찍고 싶다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일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어도 점점 더 흉폭해져 가던 마음이 자주 그런 상상에 빠져들었고 또 그것을 즐
기기까지 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상상이 질척한 소잡이 춤사위로
놀아나는 백정의 살생 마당을 그런 상상을 불러 낸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기도
했는데, 마구 머리를 흔들어도, 그 선후 관계를 짜맞출 만큼 기억의 칸들이 잘 나뉘어 있지
못했다. 그 집에서의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쌓여 갈수록 그런 식이었다. 춤판 끝이 늘 어
질러져 있고 나중엔 옷마저 되는 대로 바꿔 입듯이, 한 마당이 지나고 나면 그 마당의 춤들
은 그이전 마당의 춤들과 뒤죽박죽으로 섞여 이거였나 저거였나 앞뒤가 헷갈리고 뭉개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살생 마당은 달랐다. 물론 그게 가난과 고달픔에 찌들어 눌리던 살림살이
마당보다 먼저였는지, 탐관오리의 핍박에 끙끙대던 환자놀이 마당보다 나중이었는지, 거기까
지 헤어려지지는 않았으나, 한 마당 한 마당 그 자체만을 되살려 볼때
단연 기억 속에 우뚝했던 것이 살생 마당이었다. 요컨대 그 마당은, 어젯밤의 여자가 이
허벅지였나 저 허벅지였나 구별되지 않는채 분방하게 수평적으로 얽혀 가던 난장판을 수직
적으로 일으켜 세우던, 충격적인 극적 반전이자 절정의 예시와도 같았다. 백정탈이 황소의
이마를 내리찍고 소껍질을 벗기고 소불알을 잘라 내는 동안 자연도 아주 극적이어서, 그 사
이에 꽤 높은 층으로 올라왔던 그 거실 마당엔, 센 바람이 불고 마른번개가 쳤었다. 센 바람
은 모닥불을 자지러지게 몰아쳐 분위기를 스산하게 만들었고 연이어 번득이던 번개는 흡사
환각 조명처럼 단속적으로 계속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백정탈의 몸놀림을 뚝뚝 한 커트씩
찍어냄으로써 그 광폭함을 하나하나 부각시켰지만, 동시에 그 광폭함의 처연함이 생생하게
드러나, 없는 벼락소리가 상상 속에 들려 올 정도였다. 그 날 따라 특히 광란적으로 옷을 벗
어제치는 다른 탈들에게 백정탈이 이리저리 내미는, 상상의 피가 뚝뚝 듣는 소불알뿐 아니
라 피에 젖은 그 손마저 한 손으로 덥석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 백정탈의 불알을 움켜잡
던, 그리고 둘레의 다른 탈들을 완강히 밀어내던, 그 밤의 그
힘은, 필경, 무당탈의 처방 이후 그 집 베란다 한구석에서 말려 지고 있던 그 약초의 연기
를 매일 복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퍼즐 속의 한 받을 백정탈과 함께
차지하고 나서는 그 힘이 송두리째 풀어져 그냥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는 약
효가 뇌에까지 올라와 완고한 의식의 신경망을 멋대로 헝클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와 살을 나누기가 난생 처음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백정탈과 잔 그녀를 자학적인 몸으로 겪
어 보고 싶어 그랬는지, 아무튼 그 밤에, 미완의 처용탈은 여자였다. 잠깐 동안 그녀를 먼저
만졌다는 게 께름칙했던 백정탈의 손길은 백정답게 투박했지만, 남자 속에 숨겨진 여자의
성감을 어김없이 끄집어내 보듬었고, 그러자 변성 이전의 살가운 음색으로 꿈틀대며 저를
가누지 못하는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 신음은 보드라운 가슴을 부풀렸고, 허리가
조여지며 쪼그라들던 사타구니는 안으로 깊은 주름을 잡았다, 주름 사이로 스며나오는 진득
한 액체가 껄끄러우면서도 자극적인 혀놀림에 온 엉덩이로 가득 번지던 어느 순간, 그 엉덩
이로부터 목구멍까지 긴 진공의 구멍이 일직선으로 뚫리는 것 같았고, 곧이어 그 구멍으로
는 진한 박하 향기가 액체처럼 흘러갔다. 아찔하게 손끝 발끝까지 퍼져 나가던 그 향기, 그
것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해서
그로부터 남자만 만나면 여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나 두고 보려고 마음을 다
잡았던 태도는 꼭 아니었으나, 바로 그 다음 번 상대로 파계승탈과 어울렸을 때는, 그 파계
승탈과 놀아나던 각시탈을 거부했던 기억 탓이랄지, 파계승탈을 각시탈 다루듯 했더니, 이번
엔 처용탈이 남자의 남자가 되었던 것이다. 혹시 처용탈을 다루던 백정탈의 시선이 그랬었
을까, 그런 상황에서 저와 정을 통한 각시탈 노릇을 하는 파계승탈은 좀 변태적으로 보였다.
특히나, 이 쪽에서 가지고 놀며 학대하는 듯한 태도를 노골화하자, 마음은 역겨움에 진저리
를 치면서도 벌써부터 저 스스로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몸은 더욱 찰거머리처럼 달
라붙던 것이 그랬다.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여자인 남자의 엉덩이에 조여지던 그 느낌에 사
뭇 색다른 감칠맛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거부하고 싶은데 거부되지 않는 상대를 온몸
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남자인 여자를, 그것도 시뻘건 얼굴에 옴이 덕지덕지 오른 중대가리
를 내려다보며 즐기는 다분히 가학적인 쾌감이야말로 간절히 되사고 싶은 것이었다. 그건
마치 마약을 탐하는 것과도 같았는데, 그럼에도 그 순간에, 그런 불 같은 욕망과 극단적으로
모순된 어떤 물 같은 해방감이 온몸을 적셔내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때의 해방감이 정녕 해방감이었을까 하는 자의식적 물음은 차치하
고, 적어도 제 탈의 모양을 여태껏 보고 있지 못하다는 데 대한 지독한 강박 관념이 사라져
버린 것만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파계승탈과의 밤 이튿날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의문도, 백
정탈과 파계승탈하고 잘 때 씌워져 있던 제 탈들은 서로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하는 것이
긴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전과는 달리, 그 궁금증은 피를 말리지 못했다. 그 탈이란 것이
거울이 없는 그 집에서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그 집 밖에서는 애당초 비춰지지가 않는다는
데 대한 체념을 이미 익힐 대로 익혀 버렸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하여간, 백정탈과 파계승
탈과의 밤 이후, 마음 그릇에는 증류수 같은 자유로움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 맑은 물 속으로 온갖 물감들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 그것들이 물속의 연기처럼 퍼져나
며 그리는 선녀의 몸짓 무늬들을 한껏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도취
감에 너무 취해 있었던 듯
그 때는, 어찌 보면 무시당했달 수도 있는 각시탈의 마음과 조롱당했달 수도 있는 파계승
탈의 마음이 전혀 염두에 오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그 둘이 은밀히 꾸미고 있던 무서운 복
수의 음모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 복수의 날은 멀고도 가까웠는바, 왜냐 하면 그 사이의
여러 날들이 캄캄한 기억의 구멍 속으로 말려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기억 상실
의 증세는 초기부터 엿보여진 것이었으나, 그것이 시간의 한 단면이라면 몰라도 그토록 긴
폭을 한꺼번에 싹둑 끊어 낼 수 있는 건지는 통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그러리라 믿건
대, 그 잘려 나간 시간 속에서도, 베란다에서 올려다보던 별들의 춤사위를 놀이 마당에서 개
처럼 추어 대고 닥치는 대로 흘레 붙은 것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 맛들이기 시
작했던 그 피학적이고도 가학적인 욕망이 어둠의 미로 속에서 어떤 발광들을 일으켰었을까,
정말이지 되살아보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다시 그렇지만, 희미하게나마 머릿속으로 꿰어
볼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는 그 시간의 구멍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그 앞과 그 뒤의 시간적 거리뿐이었다. 그 때는 밤을 어떻게 지샜는지 그 역시 모호한 며
칠 간의 기웃거림이 지난 후, 종이탈을 붙이기 시작했던 첫 흘레의 밤부터, 무당탈의 밤, 부
네탈과 백정탈의 밤, 그리고 이런저런 밤들을 거쳐, 기억의 한 점을 또렷이 찍는 백정의 소
잡이 마당이 벌어진 것이 대략 열일고 여덟재 날쯤, 바로 뒤를 이은 파계승과의 밤은 열여
덟아홉째 날쯤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파계승이 무지막지한 복수를 감행해온 날은 마
지막 허천굿이 벌어지기 전날, 즉 마당놀이로서는 마지막이 되는 날, 즉 그집에서 보낸 날들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가 되는 날이었으니까, 그건 스물여덟 번째나 서른 번째 날이었을 것
인데, 기억은 바로 그 전번 날, 즉 스물일곱째거나 스물아홉째 날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따
라서 끄트머리 사흘로 훌쩍 건너뛰기까지, 줄잡아 열흘은 망각 속에 추락해 버린 셈이었다.
“너를 너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아직도 더 죽이고 싶을 거야. 하지만, 죽더라도 간
신히 살아날 수는 있게 죽어야 해. 천백 년 전과 달라지기 위해선, 아직도 겪어야 할 더 커
다란 게 남아 있으니까.”그녀의 그 목소리만이 그 망각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유일한 것
이었다. 그것도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환상에 불과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그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를 놓아
어느덧(!)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종이탈 씌우기도, 그 시간을 견디게 하던 마당놀이도, 막바지를 향
해 치닫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다리 끝에는 각시탈이 기다리고 있었다. 째
진 눈에 욕심 사나운 볼두덩과 뭉툭한 코, 그리고 앙심을 담은 듯이 살짝 비틀린 입술을 처
음 보았을 때, 각시탈이 혼례를 앞둔 채 파계승탈과 눈을 맞추고도 모자라 무엇인가 음흉한
뒷짓거리를 찾을 만한 위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긴 했었다. 놀이 마당도 그렇게 진행되긴 하
지만,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설마 놀이 안에서 놀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까지 그럴 줄은 몰
랐었다. 그 모든 것이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놀이판으로 짜여져 움직이는데도, 놀이 하는 마
음은 그 비현실을 현실로 살아내는 것인가. 어떤 구실을 붙여 보아도, 그 마지막에서 세 번
째날, 그 각시탈을 대했던 태도에는 두고두고 후회가 남았다. 더구나, 어쨌든 그 날은 다름
아닌 각시탈의 혼례 마당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그 망각의 다리를 건너 오며, 암암한 기
억의 골짜기에 감추어져 있던, 그러면서 음기처럼 뿜어져 나오던, 어떤
피비린내 같은 것에 쏘였다고나 할까, 모두가 흥겹게 흥청망청인데, 홀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적 충동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 눌려 있던 그 충동은, 어수룩한 총각신랑탈 앞에서 각
시탈이 새색시 음전을 떨어 내는 장면에서 이를 부드득 갈았고, 그 후로 줄곧 갈린 이를 악
물고 있더니, 마침내 모두가 알몸의 난장으로 접어들 즈음 각시탈을 낚아채는 것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나마 혼례 마당 뒤끝이라고 각시탈이 총각탈에 매달리는 것을, 바보 같
은 총각탈은 발길질로 떨쳐내고 비명을 지르는 각시탈을 주먹질로 눕혀 어깨에 둘러메고는,
먹이를 문 짐승처럼 방으로 내달음쳐, 아직 아무도 방에 들기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방 속의
방 밖의 방 속의 방 밖, 제일 먼 곳을 찾아 숨이 멈추기 직전에야 멈춰 섰고, 거기서, 막 정
신이 돌아오는 각시탈을 내팽개친 뒤부터, 완전히 정신이 나가 충동적인 폭력을 휘둘러 댔
던 것이다. 아마 그 모든 것은, 또는 그 어느 순간부터의 모든 것은 환상이었을 것이다. 환
상 속의 각시탈은, 피멍든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남김없이 쑤셔지고 갈기란 갈리도 남김없
이 찢어져, 마지막엔 살점 몇 개와 선지 같은 핏덩이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 환상이었지만,
너무나 잔인한 환상이라서
각시탈은 밤새 독사의 독을 품어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음 마당에 나섰던 것인지
도 몰랐다. 끝으로부터 둘째 날의 마지막 놀이 마당이 애당초 각시탈의 독기 때문에 신랑탈
의 끔찍한 피를 보게 되는 대단원인지 파국이긴 했어도, 그것이 혼돈스럽기만 하던 그 집에
서의 행각을 마무리지어 주는 어떤 숨은 손의 각본과 교묘하게 겹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은, 그 때 아주 섬뜩했었다. 어색한 악몽처럼, 모든 것은 신방 분위기 속에서 벌어졌다.
사연인즉, 각시탈은 신랑탈과 신방에 들어 한바탕 희롱을 나누고 난 뒤 멍청한 신랑탈을 다
독여 재웠고, 그러고 나서 슬그머니 궤짝을 열자, 그 속에 숨어 있던 파계승탈이 한 손에 도
끼를 들고 부스스 일어나 저승 사자처럼 곯아떨어진 신랑탈에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는, 원래는 시뻘갰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시커매지고 아랫입술 가운데가 코끝까지 올라붙은
낯짝으로 흡사 백정탈마냥, 그러나 백정탈의 순박함 대신 사악함으로 무장하고, 신랑탈의 머
리를 내려칠 참이었는데, 어쩌다가 하필이면 그 때 그 신랑탈 머리맡에 앉아 있었던가, 졸지
에 커다랗게 부각되어 오는 그 험상궂음이 겨냥하던 것은 마당 안의 신랑탈이 아니라 마당
밖의 처용탈이었다. 앗, 하는
순간에, 자지러진 온몸이 어느 쪽으론가 쏠렸고 또 그 쏠리던 몸을 누군가가 싸안으며 밀
쳐 주는 바람에, 정통으로 도끼를 얻어맞지는 않았으나, 날카로운 도끼날 끝이 얼굴을 스쳐
간 듯했다. 놀이삼아 한번 놀래켜 봤다는 듯 이죽이며 물러서는 파계승탈을 자라 가슴으로
멍하게 올려다보는데, 이마 한쪽에서 눈꺼풀을 비껴 귀 밑까지 그어진 예리한 선 하나가 느
껴졌다. 베였구나 하는 생각보다 먼저, 가느다란 통증이 스며나왔다. 무의식적으로 가져다
댄 손바닥에 농도 짙은 액체가 젖었고, 손을 떼자 피였다. 더구나 그건, 환상의 피가 아니라
진짜 피였다. 자라 가슴이 또 덜컹, 황급히 상처를 막았지만, 아무리 짓눌러도 피는 멈출 기
세가 아니었다. 손 밑으로 계속 흘러 나와 옆으로 번지며, 그 뜨끈뜨끈하고 끈적끈적한 피는
스물 몇 겹으로 쌓인 종이탈을 서서히 적셔 나가는 것 같았다. 얼굴이 점점 더 넓게 축축해
져 왔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레는 마지막 난장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
직 습격의 순간에 몸을 밀쳐 주었던 할미탈만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피에 얼룩지는 종이
탈이 걱정스러운지 신기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겨드랑이 밑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쩌려나 했더니, 할미탈이 데려간 곳은 아
직 아무도 들지 않은 첫 방이었다. 그 늙은 몸짓으로 윗도리를 벗기고 찢어 상처를 싸매 준
데까지는 고마웠는데, 할미탈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봐, 할배...” 할배? 방
에 들어 탈이 말을 한다는 것도 기습적인 사실이었지만, 할배라니, 그 날 붙인 종이탈이 할
배 모습이었단 말인가. “저기... 나랑 만리장성 한번 쌓을거나? 그럼시롱, 내 비밀 하나 가
르쳐 줄 꺼구만.” 할미탈은 벌써 아랫도리를 벗기고 있었다. 비밀? 할미탈이라야 탈을 쓴
몸까지 할미 몸은 아니었어도, 몸놀림만은 여전히 탈에 맞추는 듯 늙게 움직였기 때문에, 제
위로 몸을 끌어당기는 과정은 아주 건조했다. 모든 것이 황망해 서지 않는 좆을 제 손으로
키워 제 사타구니 안으로 밀어넣기까지, 느낌이란 쭈글쭈글함뿐이었다. 그 사이 상처를 싸맨
천 위로 배어나온 피 한방울이 뚝, 할매탈의 뺨에 떨어졌다. 입술 위의 촘촘한 세로 주름에
찌그러든, 성기성기 이가 빠진 입 안에서 슬그머니 밀려나온 혀가 핏방울을 핥아들여 쩝쩝
맛을 봤다. 그리고 피맛에 씨부렁대던 소리. “각시탈이 아녔어, 그건. 얼굴이 달랐잖아. 할
배. 그건 다른 부네탈이구먼.” 할미탈의 폭 꺼진 이마 위에, 핏방울처럼 불길한 무엇인가가
뚝뚝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다시 열병이 왔다. 얼굴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상한 열병
이었다. 핏기가 빠져나가는 몸은 창백하게 차가워지고 핏기를 뿜는 얼굴은 지독히도 화끈거
리는, 얼굴 전체가 몸에서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그 집에는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아물어질 듯 아물어질 듯 슬금슬금 계속되던 출혈을 막은 것은, 다른 도리가 없겠다
싶어 겨우겨우 몸을 추스려서는 다시 그 집으로 가서였다. 아파서 그랬는지, 그 날 따라, 그
끝없는 철계단 위의, 동쪽 방에서 보는 단풍 물결부터, 북쪽 베란다에서 보는 건너편 병풍
절벽을 거쳐, 서쪽 방에서 보는 강 어귀 풍경까지, 모든게 새삼스러었고, 그녀 그림자의 뜨
거움과 그녀 목소리의 서늘함도 아주 세세하게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촛불과 향불이 켜진
거실에서, 얼굴 위의 탈에 침을 바르는 그녀의 혀에 피가 묻어 났다. “탈에 피를 먹였으니
이젠 다 됐어. 이게 마지막 종이탈이야.” 그녀가 그것을 얼굴위에 고르게 붙이고 나자 피가
멈추며 얼굴의 열기가 한꺼번에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엔 가슴이 뜨거웠다. 그렇다
면 그 출혈은 탈에 피를 먹이려 그녀가 연출했던 것인가 하는 의혹이, 막
지펴진 모닥불의 불혀처럼 가슴 속에서 날름댔던 것이다. 이미 모든 춤마당이 끝났으므로
아무 풍악 소리도 없이 마치 참선을 하듯 둘러앉은 탈들의 적요 속에서도, 제어되지 않는
그 뜨거움이 속삭였다. “지난번 마지막 마당의 각시탈은 혹시, 부네탈이 대신했던 거 아니
야? 그리고 혹시, 그건 너 아니었어?” 참선의 자세로 앉아 있던 그녀가 대답을 안 하는 듯
대답했다. “여기선 탈을 벗겨 보려하지 말랬잖아. 탈 뒤에 얼굴이 있는 게 아냐. 탈이 얼굴
이지. 그리고, 탈은 끝없이 바뀌어 가는 거야.” 탈들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아주 느린
박자로, 그리고 아주 굴곡이 희미한 높낮이로 시를 읊는 듯한 합창 소리를 냈다. 서라벌 밝
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 그 똑같은 소절만을 계속 반
복하며, 탈들은 길게 행렬을 만들기 시작했다. 행렬의 머리가 남쪽 커튼을 걷고 유리문을 열
고 베란다로 나가 하늘을 향해 합장을 했다. 하늘에는 말 그대로 휘영청한 보름달이 밝고
커다란 어둠의 구멍처럼 뚫려 있었다. “처용도 행렬을 따라가야 해. 행렬이 흩어지고 나면,
아주 길고 외로운 순례가 될 거야. 서른 밤은 걸리겠지. 하지만, 결국 넌 돌아와. 돌아올 거
야. 믿어야 해. 그러면...”그러면
돌아올 그 자리가 바로 그 섬일까? 베란다를 돌아나온 행렬의 머리가 제일 가까운 곳에
열려 있던 문으로 들어갔고, 그 뒤도 똑같은 행적을 따르기 시작했다. 뱀처럼 길디긴 행렬의
꼬리에 붙었을 때, 그녀는 이미 없었다. 문 안에는, 다른 밤에도 그랬듯이 벽마다 다른 문이
있었는데, 행렬은 거기서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다음 방에서 다시 세 갈래로, 그 다
음 방에서 또 세 갈래로, 그렇게 거듭 거듭 셋으로 갈라지며 행렬은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혼자 남게 된 것은 스물 몇 번째나 되었을 방이었다. 더 이상 앞을 뒤따를 수
없게 된 그 방에서 발길은 더 이상 내켜지지 않았다. 무한 증식하는 그 퍼즐의 방들에서, 매
번 맹목적으로 문을 하나씨 선택해 나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게
밤 하늘에 별 하나만한 확률은 될까? 그녀는 믿으라 그랬던가? 하지만 이게 믿는다고 될
일인가? 우연을 믿는다? 우연이 아닌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 것인가? 퍼즐의 방처럼 증식하
던 물음표가 문득
느낌표로 바뀐 것은,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가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의
혹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일지 모른다는 강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가 혹시! 그래, 첫 흘레
와 함께 탈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그녀는 계속 피하기만 하면서 미심쩍은 구석을 남겨 왔었
다! 어쩌면 그녀가 뭔가 알지 못할 계획을 짠 것이리라! 그걸 위해 그녀는 나를 미로 속에
영원히 가두려는 것인지도!... 말줄임표와 함게,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들어와 닫았던 방문
에 종이탈 하나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인광을 띠고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들여
다보니, 얼굴이 파삭 늙은 노인탈이었다. 그 문으로 되돌아나오자, 나머지 세 문 중의 하나
에도 같은 식으로 종이탈이 붙어 있었고, 다시 그 문을 되열고 나온 그 이전의 방도 마찬가
지였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그녀의 거실을 떠난 후 거친 문들 위에 붙여진 표지 같았다. 그
렇다면, 그것만 따라가면 돌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 싶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돌아오
려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자신을 믿고 떠나라는 그녀의 정표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뜻대로 다시 돌아 떠나야 할가? 하지만, 처용탈을 만들기 위해 얼굴 위에
포개졌던 낱장 그림들로 보이는 그것들이 과연 어디까지 내걸릴 수 있을 것인가?... 말줄임
표와 함께
발길을 내쳤다. 의혹이 이렇게 믿음을 이기는가 탄식하며 돌아나온 거실에는, 촛불 빛과
향불 내음만이 황량했다. 온갖 탈들이 사라진 단면의 벽을 끼고, 서쪽 끝방으로 갔다. 자정
무렵인가, 은은히 떠올라 있는 창 밖의 저 섬. 그리고 섬 앞에 패어 있는 심연. 그것이 이제
는 잃어버린 시간의 블랙 홀처럼 보였다. 그리고 사라진 시간은, 휑하니 뚫려 있는 그 열흘
만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맨 처음 그녀를 어떻게 만났었는지, 어떻게 서로가 이끌렸었는
지, 어떻게 그녀의 처용이 되었었는지, 모든 게 새까맸다. 인과의 매듭은 불확실한 채 기이
한 행적만이 환상처럼 때로는 사실처럼 툭툭 던져져 있는 그 집에서의 시간, 그건 전설의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 집에 온 날수만을 치자면 서른을 꼽을가 말까였으나, 그리고 그 집의
계절로는 항상 가을이었으나, 그 집 밖의 계절로는 아마도 지난 겨울부터 사계절을 돌아 가
을을 맞은 것이어서 한 해 정도는 될 법한 그 시간이, 한 판의 전설적인 마당놀이였을 뿐이
란 말인가. 안돼. 아직 전설 속으로 떨어질 때가 아니라는 다잡음이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다급함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 순간의 마음이 집는 대로
거실의 촛불 하나를 들고와, 들어온 문과 맞은편 유리창 쪽을 제외한 두 벽을 주의 깊게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나 그 서쪽 끝방에서 나타났었다. 그렇다면, 한눈에 띄진
않아도. 그 방 벽 어딘가에 숨겨진 출입구가 있을지 몰랐다. 더듬다 보니, 한쪽 벽에 어떤
음영진 무늬가 나타났다. 들여다보니, 아래위로 두 개씩, 옆으로 두 개씩, 눈이 모두 네 개
달린, 커다란 귀와 푸짐한 코에 길게 볼까지 치켜져 올라간 희죽한 입으로 소리 없이 낄낄
대는 탈이 새겨진 것이었다. 슬며시 그 탈을 밀자, 과연, 벽 또한 슬며시 직사각형으로 잘리
며 밀려들어갔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이어서, 들어가자마자 발끝이 무엇엔가 부
딪쳤다. 촛불을 비추니까, 무슨 현판 같은 것이 바닥에 눕혀져 있었는데, 거실에 걸렸던 현
판처럼 돋을새김으로 ‘신방사’라 새겨져 있었다. 신방사? 절간이 신방이란 뜻인가? 도대
체 이걸 어디다 걸려 했던 거지? 그걸 묻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발 밑
을 조심하며, 촛불로 허공을 더듬으며
앞으로 조금씩 전진했지만, 그 공간은 긴 복도처럼 계속 깊어지기만 했다. 뱀의 뱃속을 걸
어 들어가는 듯, 어둠의 수축 운동을 하며 꿈틀거린다고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둠의 벽
에는 아까 행렬을 따라갔을 때 지나친 문들에 붙어 있던 그 종이탈들이 걸려 있었다. 완전
한 귀신 얼굴부터, 용 얼굴, 사자 얼굴, 원숭이 얼굴과, 동자 얼굴, 신발 장수 얼굴, 말뚝이
얼굴, 양반 얼굴, 취발이 얼굴, 선비 얼굴 따위에다가, 그 백정 얼굴과 파계승 얼굴마저 있었
고, 맨 마지막엔 할배 얼굴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온갖 얼굴들을 다 겹쳐 처용 얼굴을 만들
었단 말인가. 그 탈들에 정신을 앗긴 채 얼마나 따라 들어간 건지, 앞 방향에서 갑자기, 그
르릉그르릉, 문가 목젖을 낮게 끓이며 어둠을 긴장시키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한눈에, 거대한
개 형상이었다. 앞 두 발로 상체를 세우고 앉아 두 귀를 곧추세우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
며 혀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그곳이 저승의 입구라는 것을 알려 주는 듯싶었다.
촛불 빛을 옮기자, 개 옆에는 침대 매트 같은 것이 깔려 있었고 이불더미가 덮여 있었다. 촛
불 빛을 더 들이대자, 그 이불은 뒤척이고 있었는데, 오오
이불 아래로, 다리가 넷이었다.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싶어, 머리가 휭휭 돌고 다리 힘이
풀어져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몸을 그 순간 지켜 준 것은, 어떤 느닷없는 신들림 같
은 것이었다. 저절로 부들부들 떨어 대는 몸에서, 아까 미로로 들어가는 행렬의 시작에서 그
러했던 것처럼, 시를 읊는 듯한 노랫가락이 저절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들어와 자리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들어와 자리 보니 가랄이 넷이어라~ 동일한 소절만이 반복되는 것도 아까
와 똑같았다. 그러자, 다리 두 개가 슬그머니 이불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다른 다리 둘이 이
불을 밀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였다. 아니, 그녀인 것 같았지만, 얼굴에 종이탈이 씌워져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슬픈 무당의 낯이 그려진 그 탈이 천천히 일그러들었다. 슬픈 무
당의 춤과도 흡사하게 한없는 느림을 타던 그 표정 변화는, 그래서 더 생생하고 진하게 차
오르고 어떤 고통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냥 돌아왔단 말이야?” 독백으로 이어지는 목소
리가 어김없는 그녀였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끝내려구?” 그녀가 저렇게 원망할 수 있
는 처지인가 당황스럽기도 했던데다, 언뜻 대꾸의 말이 찾아지지 않았기에
괜스레 촛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냥 그 처용의 노래라도 다시 풀려나왔으면 하고 입을
벌리는데, 그녀의 말이 먼저 그것을 막았다. “그 노래, 그 다음은 부를 수 없어. 그 다음은
이제 바뀌어야 하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이불 속에서 뭔가가 쉭 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단번에 그 뱀이구나 직감되었던 그것은, 맨처음 처용탈을 붙이던 날 그러했
던 것처럼, 발목에서부터 온몸을 휘감았다. 입고 있던 옷을 또 단숨에 튿어 버리고, 그 즉시
온몸의 문신으로 찍혀 버리는 그 뱀. “둘은 내 다리고 둘은 네 다리였어. 그 뱀, 내가 품고
있던 너...” 심한 자괴감이 들었으나, 뭐든지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아 주섬주섬 말을
섬겼다. “하지만, 탈이 다 끝났는데도 넌...” “네 탈은 끝났지. 하지만, 내 탈은 이제 겨우
이름을 찾고 이렇게 시작되는 거였는데...”말을 못 맺고 있다가, 다시 “그래야 나도 같이
갈 것 아니야. 그 섬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기어이 습기가 스미고 있었다. 목소리뿐 아니
라
그녀의 종이탈에도 습기가 번져, 눈가의 먹물선은 얼룩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녀는 마지막으로 뭔가를 수습해야 한다는 듯, 더 이상 쓸 힘도 없어 보이는 몸놀림으로 어
둠을 뒤졌다. “이걸 쓰지 말길 바랐는데...” 짚 거적이었다. 거적 위에 몸을 뉘어 주며, 그
녀는 “ 이 뱀도 네가 데려가. 너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작별의 예식을 치르듯
온몸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온몸을 옥죄지 않
고 그냥 살갗 무늬로 달라붙어 있던 뱀도 그 때만은 머리를 곧추세웠고, 그녀는 그 뱀 머리
를 구석구석 핥아 주다가 못해 아쉬운 듯 입 안 가득 품어들여 부드럽게 빨아 댔다. 그러자
어느 순간, 머리끝 발끝에서부터 밀려온 하얀 피 같은 뱀의 진액이 그녀의 입가에 넘쳐났는
데, 그것마저 그녀는 남김없이 입 안에 되담아 삼키는 것이었다. 그런 접촉도 흘레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녀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흘레였다. “다음 번은 어쩌면 좀
더 빨리 올지 모르지. 이미 내 이름은 찾았으니까.”달리는 어쩌지 못해 그녀를 끌어당기니
까
눈물에 범벅이 되어, 구멍들만을 빼곤 모든 형상이 완전히 뭉개진 얼굴로, 얼굴을 맞댄 처
용탈에 입김을 뿜기 시작했다. 얼굴 속 깊숙이 그 온기가 전해져 올 때쯤, 그녀는 처용탈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토록 완벽하게 붙어 있던 처용탈이 그대로 떨어지며
그녀 손에 들어 올려졌다. “이건 남기고 가.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테니.” 그 때, 혹시 하
며 엄습하는 두려움에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가 역시 하며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무당탈을 벗겨제쳤을 때나 마찬가지로, 몸의 얼굴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에는 그
냥 민둥민둥한 둥근 살덩어리뿐. 그런데도 들리고 보인다는 게 오히려 신비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그녀는 처용탈을 돌려 정면으로 보여 주며 웅얼거렸다. “성거신 이마, 깅어신 눈
썹, 오울허신 둥근 눈, 웅기허신 코, 어위허신 크신 입, 백옥 유리같이 이어신 니빨, 미나커
신 턱...” 상여의 장식이라도 되는 듯 머리에 꽃쓰개를 덮고 동그란 금귀고리를 달고 있는
처용탈은, 출혈로 번진 피가 두텁게 스며 그렇게 되었는지, 검붉은
얼굴빛으로 자기 몸의 형상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짓는 것 같기도 했고 처량해하
는 것 같기도 했으며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렇게 방향을 틀어 보면 우락부락한 귀
면이요 저렇게 방향을 틀어 보면 늙수그레한 옹면이었다. 그녀는 그 탈에 짚끈을 꿰어 뭉개
진 제 얼굴에 둘러 묶고 나서, 그 탈의 얼굴로 이제야말로 다 끝났다는 듯 잠시 내려다보
았다. 마침내 처용을 쓴 그녀가 바닥에 깔려 있던 거적을 말기 시작하자 탈이 떨어져나가
달걀 귀신 같은 얼굴과 뱀 문신으로 남은 몸체는 그 안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멍석 말이를
망한뒤 다시 짚끈으로 꽁꽁 묶여진 그 몸은 다음 차례로 빙글빙글 굴러졌다. 그 때 어디쯤
에선가 강렬한 햇살이 급작스럽게 쏟아져 내렸고 그 비수 같은 빛살들은 형체상으로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감지되고 있던 눈의 동공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혔다.
그 마지막 눈은 착각처럼 제 몸이 말린 거적을 휘덥는 갈대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 떼를 본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음 역시 착각처럼 제 몸이 바로 그 섬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착각이건 아니건 아무튼 이제 그 늪 같은 어딘가
에 가라앉아 잠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물고 늘어지는 이 환상은 무엇이
었던가. 그게 환상은 환상이었던가. 거의 늪에 잠겨 버린다 싶었을 때 날카오운 갈고리 같은
것이 거적말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느낌으로 짐작컨데 그건 어떤 거대한 새의 발톱이었다.
바다에도 그늘을 드리울 만큼 커다란 날개짓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고 그 발톱 끝에 잡혀 하
늘을 가로지르는구나 생각한 것도 잠시 늪에 젖은 거적더미가 어딘가에 내려졌다. 바람이
휘휘 쓸려가는 어떤 높은 곳이 아닌가 싶었는데 거기서 그 거대한 새는 얼굴의 형상이 없는
얼굴의 맨살 덩어리를 부리로 쪼아대기 시작했었다. 피가 튀는 것 같았지만 아프지는 않았
다. 얼마 후 얼굴을 다 쪼아 댔는지 그리고는 거적더미를 쪼아댔고 그러자 거적더미가 풀렸
다. 그렇게 거적더미가 풀어져 몸이 놓여진 뒤에야 얼굴을 조각하듯 쪼아 댄것도 얼굴을 풀
어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때는 벌써
그 커다란 새가 하늘 아득한 곳에서 눈동자만한 크기로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을 때였다.
멀었던 눈이 갑자기 트이면서 그 눈 둘레로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나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때의 그 눈이야말로 바로 나였을 것이다. 그 때 그 나는 강이 아
찔하게 내려다보이는 어떤 절벽 위의 누각에 던져져 있었다. 이 쪽 절벽을 치고도는 강 건
너편에는 고운 백사장이 물도리동을 이루고 있었다. 백사장 뒤로 송림이 길게 담을 쌓고 있
었고 그 너머로 몇 겹의 산등성이가 첩첩이 멀어졌다. 건너 백사장에서 마파람이 잘못 얽혔
는지 한순간 회오리가 일었다. 하늘 기둥이라도 세울 듯 끝없이 솟구치던 그 불기둥 같은
모래 기둥은 그러다가 하늘 꼭대기에서 사방으로 퍼져 내리기 시작했는데 한낮의 햇살을 받
아 황금빛을 드넓게 펼치는 그 모습이 바로 그 곳으로 데려다 준 새의 날개짓이 아니었나
싶었다. 회오리가 솟구쳐 날아간 그 자리엔 그리하여 이제 아무것도 없었고 그러므로 그 집
에는 다시 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발 밑에 우네 새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제 29회 동인 문학상 수상작
가을빛
가자 봄날 공원에서 해바라기하는 노인처럼 벽에 등을 기댄 채 쪼그리고 앉은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앉은 자세만큼이나 옹색하게 엄지와 검지로 끝을 잡고 필터까지 알뜰
히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결연하게 끄는 동작으로 아버지는 확고함을 드러내려 했지만 의도
의 강력함을 드러내기엔 목소리의 힘이 모자랐다.
두 음절 짧은 낱말은 구름장에 머물렀던 저녁놀의 붉은 기가 한 순간에 가시듯 집안의 묵
중한 공기에 지워지고 말았다.
아침이었다. 아침 햇발은 늘 새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제 의무를 마지못해 수행하듯
동북쪽으로 난 창가에 잠깐 머물다 지붕위로 넘어가곤 했다. 어둑신한 거실에서 마당의 대
추나무에 눈길을 고정한 채 아버지와 팽팽하게 대치하던 어머니의 곧은 등이 한순간 움찔했
다. 센 바람에 고추나무가 흔들리자 덩달아 흔들린 받침대의 움찔거림처럼 한순간 환영같은
움직임이었다. 때맞춘 듯 잠에서 깨어 몇 번 칭얼거리던 아기가 반응이 없자 와앙 큰 소리
로 울어 댔다. 이 공주님 성미가 대단하네요. 한 번 울면 다른 아기들 잠 다 깨우고 말아요.
며칠 머물렀던 신생아실에서 이미 간호사에게 찍힌 아기는 걸핏하면 온 몸을 달구는 울음으
로 그 앙칼진 성미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가자는 말의 울림에 붙들려 있던 나는 옷섶 위를 급히 문지르며 딴딴하게 불은 젖을 꺼냈
다. 물봉숭아처럼 투명하고 여린 아기의 입술에 빛깔이 짙어진 데다가 돌기마져 두드러지는
젖꼭지를 입이 미여지라 물릴
때마다 참람한 느낌이 돌곤 한다. 도리질 치는 초식동물의 입에 날고기를 억지로 들이대는
듯한 기분 그러나 젖 무덤에 얼굴을 박은 아기는 어미의 비대한 의식을 비웃듯 앙칼진 흡인
력으로 젖을 빨아들였다. 채 풀리지 않은 유선이 짜릿하며 아 짧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
다.
확 밀쳐내고 싶은 사나운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기는 멈칫하더니 더 탐욕스럽게 빨아댔다.
유선이 온통 아기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뭉근한 아픔과 그 뭉근함이 풀리는 쾌
감이 동시에 일었다. 나 갈란다. 채비하라고 해라. 아버지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재떨이엔 꽁초들이 거의 수직으로 촘촘히 꽂혀 일을 것이다. 꽁초가 담기는 대로 부셔 내던
어머니는 꽁초로 숲을 이룬 재떨이를 내버려 둔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이제껏 아버지
더러 가자고 가야한다고 당신은 평생 내 말 안 듣고 독불장군으로 살아서 마음 편했지만 언
제까지 그렇게 마음대로 살 수 있을 줄 아느냐고 앞발에 코를 박고 낮 잠결에 꿍얼거리는
강아지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이 신칙하던 어머니의 낯이 어둑해졌다. 발딱 반겨야 할 어머
니가 온몸의 힘을 놓고 오히려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묻는 게 보였다. 어머니의 무릎 너머
로 아버지가 피워 물리는 담배 연기가 회붐하게 번지고 마루에 놓인 낡은 냉장고가 딱 접점
을 찾는 듯 부러지는 소리를 내더니 위잉 진동했다. 그 모든 소리와 동작들을 거실을 사이
에 둔 건넌방에서 문간에 기대어 앉은 채 나는 낱낱이 보고 들었다. 모든 감각이 진저리쳐
질만큼 생생하게 깨어났다.
어머니의 무연함을 알련만 아버지는 마른 기침만 뱉어 댈 뿐 어머니 쪽은 돌아보지도 않
고 있었다. 터져 나오려는 의지와 그러기엔 힘이 부친 몸 사이에서 기침은 앙가슴에 걸려
쌔근거릴 것이다. 김 서방 어디있냐? 무릎에 손을 짚으며 일어서던 어머니가 허둥했다. 껑성
하니 큰 몸이 잠깐 기웃하는가 싶더니 가까스로 관성을 찾아 꼿꼿하게 섰다. 잠깐의 허둥거
림을 가리려는 듯 이층을 향해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쨍쨍했다. 속에서 과포화 상태에
이르도록 증식한 불안 차오른 공포를 가누느라 높고 쨍쨍해진 목소리였다. 김서방 아버지
병원 가시자네. 병원에 가지고 갈 짐은 이미 가방 안에 다 들어있었다. 아버지가 입원과 퇴
원을 반복하는 동안 몇 장의 속옷과 수건, 물병과 휴지 따위가 든 가방을 반침 안에서 수긋
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연차를 받아 찾아 휴가를 낸 남편은 이층에서 나왔다. 잠깐 사이에
잠들었는지 눈가가 부석거렸다. 보험 카드 챙겼냐? 눈 앞을 막아서며 들이민 남편의 등을
외면하며 아버지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은 것이다. 천천히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뒤 마침내 아버지는 일어섰다. 가자 가봤자 빤하지만 가서 의사들이
뭐라는지 들어 보기나 하자.
남편의 등이 안 보이는 듯 비칠 걸어 나가던 아버지는 끝내 남편의 등에 업히고야 말았
다. 어머니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떼어 놓으려는 기색을 눈치챈 아기는
악착같이 젖꼭지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은 채 업혀 나오는 아버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선희야 애비 간다. 남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아버지는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채 가리지도 못한 젖가슴이 쑥 마른 몸매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생명을 주장하듯 탱탱하게
비어졌다. 아버지의 눈길이 홀낏 내 가슴팍을 스쳐 아기에게 머물렀다. 태열과 황달기가 채
가시지 않아 조금 센 불에 구워 낸 식빵처럼 노릇하고 붉은 아기의 얼굴은 섬세했다. 오뚝
한 콧날은 고집스러웠지만 아기의 눈은 꿈꾸는 듯 몽롱했다. 아기를 보는 아버지의 눈길에
서 나는 아버지가 보는 게 아기가 아니라 아기 앞에 놓인 무한한 시간임을 깨달았다.
젖비린내 풍기는 아기를 끼고 누워 끈끈한 더위 속에 버성기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
을 때면 아기가 개구리처럼 배를 움직이며 야금야금 들이마시는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곤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아버지는 이십 년 쯤은
더 살 수 도 있었다.
이십 년은 사람에 따라서 일순일 수도 있었다. 신혼 초 남편과 여행길에서 들렀던 산사의
법당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 절에 다닌지 오애 되었다는 할머니는 향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법당 마루 수리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수리할 때가 되었나 이렇게 소리가 나게. 고
작 이십 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러나 갓난아기 앞에 놓인 이십 년은 한 생이나 다름없는 길이 일 것이다. 배넷머리가
봄날에 막 갈기 시작한 새의 깃털처럼 하르르한 아기에게 이십 년은 그 여린 잇몸에 이가
돋고, 걸음걸이와 글자를 익히고, 여자 됨의 어쩔 수 없는 징표로 수치와 자긍을 함께 느끼
며 초경을 맞고, 한두 번쯤 진한 사랑이나 이별을 맛볼 수도 있고, 저를 닮은 아기를 낳아
유전자의 가공할 법칙을 곰곰 헤아리며 젖을 물릴 수도 있는 세월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제
생을 여는 동안, 나는 나날이 뼈가 퍼석거리는 느낌에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열어제쳤던 앞
가슴을 여미듯 생을 여며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가슴팍에서 손을 헛되이 쥐었다 폈다 하고
있을 것이다. 가세요 아버지 제가 병원으로 갈게요. 병원엔 뭐 하러 오냐 내가 집으로 올 텐
데. 힘없으면서도 내지르는 말투 어른들이 데려가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떼쓰며 따
라 나서는 아이들의 절망적인 눈가림 같은 것이 묻어나는 말투. 아침마다 대추나무 물 주는
거 잊지 말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하면서 아버지는 눈길을 거두어 마당의 대추나무를
휙 스쳤다. 그 눈길이 내 뺨을 거세게 때렸다.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대추나무, 아버지가
아침마다 물 주던 나누는 생생하게 물 올라 바람 불 때마다 잎을 뒤채며 반짝였다. 막 여물
기 시작한 풋대추가 그 잎 사이에서 알알이 빛났다.
남편의 발소리와 급한 마음처럼 달각거리는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달이 둥글 때
태어나 음력 그믐인 오늘까지 살아 낸 이름도 받지 못한 채 무심하고 탐욕스럽게 젖을 빠는
아기에게 앉은 채 뭉기적거리며 아버지를 보내고 나는 말한다. 아가야 늬 외할아버지가 가
신다는구나. 늬 할아버지, 겁 많아서 그 먼길 어찌 혼자 가신다니 네가 오고 늬 할아버지는
가는구나...
지난 뒤에 돌아보면 무심히 넘긴 모든 게 전조였음을 뒤늦게야 깨달을 때가 있다. 아기를
가지던 그 날 또한 그런 날이었다. 그 날 온갖 시계들이 고장났었다.
늘 조금씩 늦어지는 거실의 시계를 텔레비젼 아침방송을 보면서 맞추는 순간 시계는 조용
히 멈추어 버렸다. 반사적으로 올려다 본 주방 창턱의 시계도 멎어 있었다. 전날 저녁까지도
잘 가던 시계였다. 화장대 서랍에 들어 있던 손목 시계도 멈추었다는 걸 발견한 순간 나는
멍하니 집안을 휘둘러보았다. 밤 사이에 거대한 자장이 집안을 휩쓸고 지나간 것은 아닐까.
모든 게 제 자리에 익숙해서 무언가 조금씩 부패하는 듯한 정다움과 서먹함을 띠고 제자리
에 있었다. 무심코 내다본 하늘은 수상했다. 청회색에서 연회색까지 온갖 빛깔을 지닌 구름
이 무당이 다리 잡는 천처럼 층층 떠 있었다. 그렇다고 비가 올 날씨도 아니었다.
저녁 무렵 서편으로 난 창에서 생선 칼처럼 날카롭게 거실을 찔러든 햇발은 거실을 파헤
쳐진 생선 내장처럼 낱낱이 헤집어 놓았다. 식탁을 덮은 유리에는 찻잔 받침에 묻어 있던
물기가 채 증발하지 못하고 남아 무지개 빛 물무늬를 그렸다. 해가 더 낮아져 건너편 집 지
붕에 얹히자 그토록 생생하고 아름답던 물무늬는 급격히 빛이 죽으며 다만 하찮은 얼룩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내게 허락된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짧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아득하
게 짚었다. 마시다 만 커피 아침에 일어나 커피 잔 안에 테두리를 남기고 조금씩 졸아 붙은
커피처럼 이 생의 수위가 낮아지고 모르는 사이에 닳아버린 생이 면낸 가루거나 고운 톱밥
처럼 흘러내린 생의 부스러기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 거실을 사름한 눈으로 둘러볼 때
전화가 왔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는 남편의 전갈이었다.
갑자기 비어 버린 시간을 때우며 나는 외출했다. 사거리 건물 지하에 있는 서점은 대형
서점이었지만 변두리의 서점답게 늘 한산했다. 이 책 저책 뒤적이던 내 손에 남은 건 겉 표
지가 요란스러운 (티벳 사자의 서)였다. 죽음을 배울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삶까지도 배울
것이니라. 그런 글귀가 쓰인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섰을 땐 어스름이 제법 짙어져 있었다. 곧
다가올 겨울을 예감한 공기는 나뭇잎에서 빛깔과 물기를 아울러 빼앗고도 파슬거렸다. 그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나는 옹송거렸다. 사거리에서 건널목을 지나 건너편 보도에
올라섰을 땐 내가 선 쪽의 차도는 아직 신호가 바뀌지 않아 텅 비어 있었다. 8차선 너른 차
도의 한편이 텅 비어 있고 다른 편엔 브레이크 등을 빨갛게 켠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막 바뀐 신호를 받고 달려나가려는 참이었다. 끼익, 소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나는 그 자리
에 붙박였다. 건너편 차선 아스팔트에서 불꽃이 튀고 어둑한 가운데 급히 멈춰 서는 승용차
차장 위로 커다랗고 검은 물체가 툭 부딪치더니 떨어져 내렸다.
맞은 편 상가에서 사람이 황급히 뛰쳐나오는 걸 보기까지 나는 그게 검은 비닐 봉투인 줄
알았다.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퉁겨져 나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사였
다.
그 날 밤 나는 가없는 막막함에 남편의 품을 한껏 파고들었다. 아무런 전조없이 순간에
들려져 끝나 버릴 수도 있는 목숨의 덧없음 그 허망을 그대로 받아 안아야 한다는 쓸쓸함
그리고 내가 그 책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터무니없
는 알면서도 끈덕지게 들러붙는 사위스러움, 힘주어 둘러지는 그의 팔을 느끼며 가을마다
남편이 벌이던 해프닝 또한 그 허망을 견디기 위한 것이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해마다 한 차례씩 벌이는 남편의 해프닝이 가을과 연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결혼한 지
삼 년 째 지나던 해였다. 5월 신부가 되였던 첫해 가을, 나는 귀뚜라미 소리가 청승맞게 들
려 오는 반지하 셋방에서 남편의 늦은 귀가 이유를 찾느라 결혼 생활을 곰곰 되짚어 보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누나 밑에서 큰 남편은 의례적인 배려에서 조차 고마워하는 여
리고 다정 다감한 성품이었다. 여린 사람이 그러하듯 술을 즐기는 편이긴 했지만 그 가을
자정 넘어 귀가하는 남편에게선 술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혹 무슨
말로 내가 남편을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지난 날들을 죽 늘어놓고 짚어 보는 일에 지친 내
가 자포자기를 하듯 물었을 때 남편의 대답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학원 다녀. 공인회계사
시험을 치르려고. 난데없이 웬 공인회계사야?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야 여전히
성실하고 인정 받는 직장인이지. 하지만 당신을 돈방석 올려놓으려면 회사원으로는 어림도
없겠어. 두고 봐. 이따 만한 돈방석에 당신을 척 앉혀 놓고 말 거니까. 남편은 양팔을 벌려
부피를 나타냈다.풋 웃음이 나왔다. 세상살이에 이악스럽지 못한 그를 좋아한 나로서는 그가
돈방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조차 신기했다. 내가 살림에 쪼들리는 티를 슬며시 짚어 보
다가 나는 말했다. 돈방석? 난 한 번도 안 앉아 봐서 모르지만 그거 얹어봤자 딱딱해서 엉
덩이만 배길 걸? 난 돈방석보다는 집에 일찍 들어온 당신 무릎에 앉는 게 훨씬 행복할 텐
데. 어떻게 생각해요?
제법 비장한 결의로 학원에 다니던 남편은 한 달이 지나자 스름스름 일찍 들어오기 시작
하더니 두 달 만에 학원을 때려치우고 성실한 회사원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그 무렵엔 검객
이 되겠다고 검도 학원에 다니더니 밤에 집 근처 놀이터에서 죽도록 죽도를 휘두르다 파출
소에 끌려갔다. 그 이듬해 어느 날엔 난데없이 태극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한 장 들고 와
벽에 붙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텔레비젼도 안보고 내 눈에는 거꾸로 보이는 그 태극 문양
앞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영통하겠다는 의지를 가뜩 실어 꼿꼿하게 곧추세운 그의 등은 등
뒤에 닿은 내 시선을 잔뜩 의식하고 있어서 영통하기엔 턱없이 허술해 보였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쓸쓸함으로 굽이치며 몸을 돌았다. 날이 짧아지고 바람이 스산하게 옷깃을
파고들면 그걸 못 이기는 것이다. 남편은 그러고 보니 가을은 남편의 생일이 들어 있는 계
절이었다.
지들끼리 좋아서 만났다 하더라도 궁합은 맞춰 봐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음력 생일을
물었을 때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모르는데. 몰라요? 그럼 양력 생일을 음력으로 환
산해 보면 되지 눠.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양력 생일은 9월 초였다. 그 날이면 저녁을 함께
먹곤 했었다. 사실은 그것도 정확하지 않아. 그거 내가 정한 생일이야. 네? 누나도 잘 몰랐
나 봐. 생일 같은 거 챙길 만한 형편도 못되었고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던 해 내가 마음대로
정했어. 아침저녁 찬바람 불 때 였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달력을 보니 마침 백로가 눈이
띄데. 그래서 그 날을 내 생일로 정해 버렸어 그러니 내 사주가 어떤지 알게 뭐야.
그의 말꼬리에서 자조의 기미가 묻어 났다. 여름 휴가를 마친 여자들이 피서에서 돌아와
소금기가 젖은 빨래를 널어 걸무리하고 가을 옷을 꺼내 거풍할 때면 그가 벌이던 일들 용담
이며 구절초, 도라지... 가을이면 산이며 들판이며 유난히 잦게 눈에 뛰던 보랏빛이 곧 다가
올 추위에 지레 겁먹음으로 비쳐지듯 남편의 해프닝 또한 어디서 흘러 들었는지 모르게 태
어나 미끄럼 타듯 흘러내리고 마침내 바스라지는 두려움이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 날, 나는 내 몸의 빈 곳에 남편을 채워 넣듯 남편의 빈 마음을 내 몸으로 메우려는 듯
남편의 몸뚱이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다음 날 아버지가 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러 일어났을 때 다리가 허청거릴 정도로 격렬한 밤이었다. 그 달부터 생리는 끊
겼다.
폐가 안 좋대요. 뭐가 생겼다누먼요. 병원에서 나온 검사 결과를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던 어머니가 폐암이라는 걸 완곡하게 전했을 때 아버지는 십 년 전에 끊은 담배부터
찾는 기이한 반응으로 식구들을 경악시켰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그 따위로 쓰러질 줄 아
느냐. 그런 과시였을 것이다. 어쩔 바를 몰라 하던 남편이 건넨 담배를 받아 드는 아버지의
손은 1년 새 10킬로그램이 줄어든 몸무게로 앙상했다. 그 1년은 병원에 가자는 어머니와 내
몸은 내가 안다는 아버지의 끊질긴 말다툼이 가느다랗지만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물줄
기처럼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선희 아버지 정말 왜그래요. 어머니의 카랑한 목소리 끝이 붙
여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담배와 함께 묻어 나온 라이터를 손에 쥔 남편이 난감한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리 내게. 그 라이터. 옛수. 그렇게 빨리 가고 싶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보시구랴. 나도 모르겠수. 어머니가 확 불꽃 피워 올린 라이터를 아버지의 눈앞에 거칠게
들이댔다. 얼결에 주춤, 몸을 뒤로 물렸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힐끗 보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
다.
첫 모금을 빨아들이던 아버지가 생 연기가 들어갔는지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가느스름하
게 떨리는 손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숨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 자리로부터 달아
나 어디 묵은 옷가지 같은 곳에 얼굴 파묻고 도리 칠 치고 싶은 것이다. 그토록 작은 아버
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날의 가정 방문은 조금 느닷없었다. 종례 시간에 예고된 것이긴 했지만 해가 진 지 제
법 오래 된 시간의 가정 방문은 상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저녁 무렵 술에 취해 돌아와 잠들
었던 아버지는 담임 선생님이 왔다는 말에 내의 바람으로 벌떡 일어나 부엌 옆방으로 들어
갔다. 나 없다고 그래라. 말릴 겨를도 없었다. 어머니는 황급히 이부자리를 말아 윗목에 몰
아 놓고 선생님을 맞았다. 장롱에 넣지도 못한 채 방 귀퉁이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생생하게
환기시켰다. 선생님이 간 뒤 어머니가 자리를 수습하고 다시 이부자리를 펴는 사이에 나는
아버지를 부르러 갔다. 아버지는 방에 없었다. 아버지? 다시 불렀을 때 머리 위 다락에서 숨
죽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나 여깃다.
그 다락은 어린 날 내가 걸핏하면 숨어들던 곳이었다. 언제던가. 아버지의 국 속에 든 흐
물거리는 고기가 어미소의 뱃 속에 든 새끼소라는 걸 알려 준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 날
밤 나는 다락으로 달려가 낡은 옷에 몸을 묻고 울었다. 그 때 나는 송아지를 제대로 본 적
도 없었고 어미 뱃속에 든 송아지는 더더구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태어나지 않은 송
아지가 덮쓰고 있는 얇디얇은 막까지 보아 버린 듯했다. 그 안에서 감은 눈의 섬세한 눈꺼
풀 선까지도 물론 이건 기억의 윤색에 지나지 않으리라. 태어나지도 않은 송아지를 먹는다
는 것, 한 목숨은 다른 목숨을 먹고 산다는 것을 수락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던 때 태어나지
않은 목숨을 먹는 아버지가 왜 그리 거대하고 무서웠던. 이북에서 단신으로 내려와 몸 하나
로 세상을 헤치는 동안 유일한 자산인 몸을 위해서 보신 음식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먹던 아
버지.
그런 아버지가 저토록 작았다니. 낮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지 않으려 허리를 구부린 채 내
려오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무렵 나는 사춘기였다. 겉보기로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속에서는 늘 불꽃이 활활 타올
랐고 그 불길을 살랐다 눅였다 하는 바람은 간단없이 불어 왔다. 왜 태어났는지, 왜 하필 여
기 이 자리인지. 무남독녀인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간섭으로만 여겨지던 때였다. 칼끝 디딘
것 같은 나날을 나는 방에서 책을 읽으며 견뎠다.
책은 내가 있는 곳을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방이 아니라 개선문 근처의 카페로
내가 마시는 보리차를 칼바도스라는 낯설고 칼칼한 어감의 술로 바꾸어 주었다.
어둑한 방 안에 낮에도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던 어느 날이었다. 불 당긴 촛불을 옮기다
가 촛농을 떨어뜨렸다. 촛농은 손등에 칼로 에인 것 같은 통증을 남기고 흘러내리더니 방바
닥으로 떨어졌다. 손등에 끈적이며 굳어 버리는 촛농을 긁어 내고 방바닥의 촛농을 긁어 내
려다 나는 촛농 속에 무언가 갇힌 것을 보았다. 그것은 개미였다.
개미 한 마리가 버둥거림을 막 멈춰 가고 있었다. 개미의 버둥거림은 촛농이 굳어감과 동
시에 그쳐 버렸다. 촛농 속엔 고요히 갇힌 개미의 주검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쌔애 하고, 해 뜰 무렵 하늘에 난 폭운의 자취처럼 무언가가 나를 긋고 지나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방 안은 늘 보는 풍경 그대로 앉은뱅이 책상과 책꽂이 소녀
다운 치기를 담아 주고받은 조개 껍질이며 인형 따위 자자분한 장식물로 오밀조밀 했지만
이미 이전의 방 안은 아니었다. 왜 하필 그 순간에 거길 지나갔을까. 엉겹결에 꺼버린 초에
다시 불을 당겼다. 불꽃이 초를 녹여 촛농이 고이는 동안 내 가슴도 흐무러지듯 아파 왔다.
그러나 촛농이 고이자 나는 방바닥에서 기어가는 개미를 신중하게 겨냥했다. 촛농이 떨어지
는 순간 개미는 자지러졌고 내 가슴은 통증으로 오그라들었다.자지러지며 버둥거리던 개미
는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굳어 가는 촛농 속에 고요히 갇혀 버렸다. 그 날 내가 죽인 개미가
몇 마리였던가. 그토록 사무친 궁금증. 저 개미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가고
있었을 거야. 그러다 뜨거운 촛농을 맞고 뜨겁다고 느꼈겠지. 달아나야 한다고 버둥거리고
그러다 서서히 죄어 오는 파라핀 속에서 마침내 옴쭉달싹 못 하는구나, 라고 느끼고 움직임
이 멈춰졌어. 그러면, 그 움직임이 멎는 순간까지 움직이던 개미의 의식은 어디로 간 걸까.
그 날부터 나는 필통 안에 그 개미의 화석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마음은 의식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서 생겨 나고 어디로 갔을까. 왜 그 개미는 하필이면 그 시간에 내 방에서 기어
다녔을까. 나는 왜 그날 따라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을까.
내게 윤회와 인과의 그 가없는 순환에 대해 눈뜨게 한 건 그 개미였다. 비로소 나는 나를
용서했다. 어린 시절 내가 한밤중에 경기를 일으킨 것도 어머니가 입에 머금은 물을 뿜고
아버지가 팔다리를 주무르는 사이 의사를 부르러 뛰쳐나갔던 나와 제법 터울이 졌던 오빠가
밤길을 달리던 차에 치여 주검이 된 것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홀몸으로 월
남한 아버지가 새 집을 장만하면서 심은 대추나무 그 깊은 땅 속에서 물 올리는 뿌리의 간
절한 염원이며 가을이면 주렁주렁 매달리는 대추에 담긴 기원을 망가뜨린 건 내가 아니었
다. 우리를 개미처럼 작은 존재로 내려다보는 더 큰 손이었다고.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개미들을 다시 만난 것은 출산을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이었다. 집 근
처의 산부인과에 다니던 나는 아버지와 같은 종합 병원으로 옮겼다. 내 출산과 아버지의 입
원 기간이 겹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다행히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있어서 나는 조
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원할 수 있었다.
배냇저고리며 속싸개, 기저귀 따위는 다 삶아서 개켜 놓았다. 냉장고의 음식물도 대충 정
리를 해 놓았다. 삼칠일 동안 남편은 친정과 집을 오가며 회사에 출근할 예정이었다. 출산
준비물을 넣은 가방을 소파에 얹어 놓다가 벽면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름 초입에 이미 남편은 가을을 앞당겨 치렀다. 젖몸살 앓듯 혼자 타던 가을을 벽화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게 한 건 내 탓이었다.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선배네 집에 놀러 갔
다가 본 선배가 손수 칠했다는 벽의 산뜻함을 말한 게 화근이었다. 주말에 거실에도 안 나
오고 방에서만 뭉기적거리는 남편에게 나는 바가지를 긁었다. 당신도 그러고 있지만 말고
거실 도배나 해봐요. 글쎄 지영 언니는 여잔데도 혼자 칠을 해서 집을 환하게 꾸며 놓았더
라니까. 그랬어? 신문을 넘기면서 무심히 듣더니 무슨 영감을 얻었나 보았다. 그 날 저녁 슬
며시 나갔던 남편은 차에서 몇 통의 페인트를 내렸다. 벽면에 걸린 액자며 말린 꽃 따위를
죽 떼어 내고 못을 차근히 뽑아 낸 남편은 화집에서 뜯어 낸 듯한 그림을 펼쳤다. 인상파의
강렬한 터치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그림이었다. 한 손에 그림을 들고 한 손에 붓을 들고 남
편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결연하게 선언했다.
“그래. 나는 언제나 화가가 되고 싶었어.”
남편이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는 건 난생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남편은 내가 말릴 겨를도
주지 않고 붓에 파란 페인트를 듬뿍 찍어 벽에 직 그었다. 페인트는 두껍게 뭉개지기만 할
뿐 애석하게도 원했던 대로 시원스럽게 칠해지지 않았다. 주르륵, 붓질을 따라가지 못한 페
이트가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힐끗 나를 본 남편은 목용탕에서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가
져와 신나를 부었다.
그 날부터 며칠에 걸친 그의 추상화는 끝내 목욕탕 벽까지 이여졌다. 빨간색과 파란색, 두
색이 섞인 우울한 보라, 노랑의 환각까지. 어느 날 아침,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거실로 나
와서 밤새 늘어난 노란 빛깔에 눈이 미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남편은 가을을 앞당겨 겪
고 있는 것이다.
벽화에선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났다. 내가 친정에 머무르는 동안, 남편은 저 벽화가 갓난
아기와 산모의 정서에 끼칠 영향에 대해 생각이 미칠 테고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은 흰 페
인트에 묻히거나 도배지 뒷면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로 놔둘 만큼 둔감한 성품은 아니었
다. 다시 못 볼 남편의 역자에서 눈을 돌리고 나는 집안을 치워 나갔다.
식탁 밑에는 한 말쯤 들어가는 단지에 쌀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쌀벌레가 생길까 봐 통
마늘을 넣어 두었지만 이미 쌀은 포슬포슬 뭉치려 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르게 고물거
리다가 작은 나방으로 날아다니는 쌀벌레들. 그러다 베란다의 창틀이나 옷장 속에서 파삭마
른 시체로 발견되는 그것들이 생겨날 기미가 역력했다.
바람이 통하는 베란다라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다. 나는 부른 배를 뒤로 젖히며 내 배처
럼 배부른 단지를 들어 베란다에 내놓았다.
단지가 놓였던 자리의 얼룩을 닦아 내려 쪼그리고 앉던 나는 그만 뒤로 물러앉고 말았다.
얼룩이 아니라 검붉고 작은 개미 떼였다. 단지 아래, 단지 바닥과 거실 바닥 사이에 어떻게
틈이 생겼는지, 그 곳은 개미 소굴이었다. 난데없이 쏟아진 빛에 우왕좌왕 흩어지는 개미 떼
바닥에 부연 얼룩 같은 게 있었다. 언제 꿀물 같은 게 그 안에 흘러들어갔구나. 비로소 납득
하고 자세히 보던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꿀물이 아니라 개미알 더미였다. 아주 작은
개미알.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흰자위 안쪽에 펜으로 찍은 점 같은 노른자위가 있었다. 어
떡하나. 나는 배가 턱까지 차오르는 것도 잊고 쪼그리고 앉은 채 망연히 바라보았다. 개미들
의 당황이 훤히 잡혔다. 그토록 견고하다고 믿었을 지붕이 순식간에 없어진 허망함. 개미들
은 단지 바닥 모양으로 그 원형대로 빙빙 돌았다. 이를 테면 현장 조사였으리라.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인 개미들은 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개미들의 불안과 노역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나는 냉수를 들이켠 다음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동산처
럼, 무덤처럼 동그란 배가 거울에 드러났다. 배 한가운데로, 배를 가를 듯 거뭇한 띠가 보였
다. 8개월째까지도 팽팽하던 배는 9개월째 접어들면서 갑자기 터져 버려 실지렁이 같은 금
들이 마구 번실거렸다. 늦어도 열흘 후면 배 안에 들어 있던 생명은 탯줄을 끊고, 내 뱃속에
있었던 기억도 잊고 독립된 생명으로 살아가리라. 거울로 그런 배를 들여다보다 샤워기를
집어드는데,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무을 바라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고
집안엔 나뿐이었다. 가슴이 떨어져 나갈 듯이 벌렁거렸다.
연필 깎는 칼을 찾느라 내 필통을 열던 아버지는 개미 화석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바라보았다. 하얀 촛농 속에 고요히 잠든, 까만 씨앗 같은 개미의 주검. 그게 무엇인
지 확인한 아버지가 나를 보던 눈에 두려움이 진저리치는 걸 나는 보았다. 그 눈길. 말갛던
촛농이 변색할 만큼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개미 화석들을 버리면서 나는 불길한 아이를 보
던 그 시선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잘못했어요. 뱃속의 아이를 감
싸안듯 욕탕 바닥에 오래도록 쪼그리고 앉았다가 나왔을 때, 단지가 있던 자리는 꿈꾼 듯
말끔했다.
저물 무렵부터 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마침내 비가 흩뿌렸다. 바람에 흔들리고 빗줄기에
갇힌 대추나무는 와와, 머리 푼 여자처럼 흔들리며 수런거렸다. 여름을 마무리하는 비였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바람은 한결 까실해지고, 여름내 뿌연 하늘 아래 보이지 않던 먼산도
어느 날 문득 가슴 철렁하게 제 모습 드러내며 다가설 것이다.
뒤편 베란다에 들어와 닫힌 거실문에 갇힌 바람이 우우우, 어딘가를 다치거나 무언가를
상실한 짐승의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베란다문을 닫거나 거실문을 조금만 열어도 없어질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갇힌 바람처럼 꼼짝도 못 한 채, 참든 아기 곁에 앉아 목관 악
기의 저움부 같은 그 탄식을 듣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서시는 순간 의식을 놓으셨어. 아버님, 그 동안 의지 하나로 버티신 것 같
아. 대단한 양반이셔. 의사 말로는 오늘내일 이라고 하는데, 준비해야지.”
대추나무를 바라보다 오싹, 한기와 더불어 엄습하는 무섬증에 갇혔을 때, 때맞추어 집에
들른 남편이 말하는 순간, , 먼 하늘 이 은은히 울고 번개가 시야를 밝히더니, , 어디엔 가
내리꽂혔다. 바닥에 은은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버지... 아버지의 의식 어딘가에 저 천둥소리
가 닿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알량한 물리 지식으로 지구상에 떠도는 전기의 부딪
침 따위에 대해 설명해드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한평생 징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
자 살아남았다는 것, 전쟁중에 집안에 있던 형제들이 다 죽어 가는 걸 숲속에서 숨어서 보
면서 혼자 살아남고 이어 온 질긴 목숨이라는 걸, 아버지는 축복이 아니라 징벌로 받아들였
다.
그 때, 숨어서 아무것도 못 한 채 형제들이 죽어 가는 걸 본 아버지는 저세상에서 그들을
만날까 봐 두려워했다. 오래 살아야지, 내가 온 식구 몫까지 살아야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
승이 좋다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머니는 탄식했다.
저 겁많은 양반이, 저승에서 식구들 만나는 거 겁나서 저러신단다. 그 때 왜 숨어서 보고
만 있었냐고 물을까 봐 저런단다.
어둠 속, 번개 한 자락이 사방을 훤히 비추고, 그 불빛 아래 대추나무가 사시나무 떨듯 떨
고 있었다. 저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면, 저 대추나무는 귀신을 쫓는 힘을 지닐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 잠깐 아기랑 집에 있을래요? 나 잠깐 병원에 다녀올게.”
“당신이? 그런 몸으로? 이 빗속을?”
“아기 데리고 갈 순 없잖아요?”
“당신 마음은 알겟지만, 나중에 어머니 오시면 나랑 같이 가자고. 그럴 시간은 있을 거
야.”
“그래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지금 잠깐 다녀올래요.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여
기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병원에 가시지도 않았을 거라는 거.”
내 목소리에 송진 같은 끈적임이 섞였다. 산후 조리를 위해 내가 친정에 와 있지 않았더
라면 결코 집 떠나 임종을 맞을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손녀에게 집을 내
주고 객사하러 떠난 것이다. 내 울먹임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얘가, 네가 정신이 있는 애냐 없는 애냐. 아니 애 놓은 지 며칠이 지났다고 이 빗속에.
김 서방도 그렇지, 널 내보낸단 말이야.”
질척하게 감겨드는 아랫도리를 의식하며 병실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져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말투에서 나는 이미 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미 아
버지를 놓아 버린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진리대로 어머니는 살아남을 딸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지상에 발붙이게 했던 간절함을 이미 놓아 버린 것이
다. 침상 밑에 아무렇게나 놓인 아버지의 신발이 가슴에 박였다.
“괜찮아 엄마. 어디 다녀올 데 있으면 저 있는 동안 다녀오세요. 제가 좀 있을게요.”
건조한 눈으로 나간 어머니는 아마도 화장실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울거나 복도 끝에서 미
루나무처럼 껑성한 키로 서서 어둠이 들어찬 창 밖을 하염없이 보고 계시리라. 저 어둠 속
으로 곧 떠나보낼 아버지와의 사간들이, 아버지 없이 보낼 날들이 어머니의 마음 속에 주르
륵,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자취를 남기고 있으리라.
시트 안쪽으로 굴곡이 드러나는 아버지의 몸은 압축기로 몸 안의 물기며 숨기운을 다 짜
버리고 남은 것처럼 작았다. 아기의 손처럼 작은, 그러나 마른 나무 등걸처럼 딱딱한 손을
잡았다. 지하의 동굴에 찬 습기 같은 축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 저 선희예요. 아버지 지금 무서우시죠. 괜찮아요, 아버지. 겁내지 말고 가세요.
집안이랑 엄마 돌보는 거랑, 아무것도 염려하실 거 없어요. 그냥, 편히 가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투병하는 동안, 나날이 쪼그라드는 얼굴로 막 잠에 빠져드느라 웅,의식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의 체념 어린 탄식 같은 웅,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죽음을 수락할 만큼만 시간을 달라고. 그 순간이 끝이
아님을 아버지가 받아들일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그 때마다 <티벳 사자의 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저승으로 향하는 길에는 밝은 빛과
그 밝은 빛으로 가는 길을 헤뜨리기 위한 불순한 빛이 있다. 우리는 밝은 빛을 따라가야 한
다. 늘 그늘로 숨고 싶어하던 아버지가 그 밝음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아버지, 밝은 빛을 따라가세요. 아주 환한 곳으로. 마음 속에서 뭉글지는 말을 어루더듬으
며 바라보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얼굴에서도, 삭정
이 같은 팔에서도, 숨기운이 빠져나가 서서히 굳어지는 석고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
지는 떠나고 있었다. 나는 문득 몸을 구부려, 침대 밑에 흐트러진 아버지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바람인가, 비가 들이칠까 봐 아주 조금 열어 둔 창문으로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
었다. 그 바람이 아버지를 스쳐 내게로 다가 왔다. 아버지, 가세요, 가셔서 다시는 오지 마세
요. 이룰 수 없는 소망의 간절함으로 울먹하는 순간에도 나는 깨닫고 있었다. 저 바람이 내
아버지의 숨결을 몰아 이르는 곳은 어둡지만 따뜻한 자궁이 라는 것을. 어쩌면 막 비워 버
린 내 몸에 깃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밤의 나선형 계단
전경린
1962년 경남 함안 출생
1984년 경남대 독문과 졸업
199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중편 ‘사막의 달’로 등단, 문예중앙에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발표, 문학과 사회에 ‘염소를 모는 여자’발표
1996년 샘이 깊은 물에 ‘낯선 운명’발표, 문학동네에 ‘남자의 기원’발표, 소설집 <염
소를 모는 여자> 출간
1997년 ‘염소를 모는 여자’로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문학
동네 소설상 수상
1998년 <바닷가 마지막 집> 출간
밤의 나선형 계단
어둑한 현관 우편함 아래에는 밟힌 광고 전단들이 흩어져 있다. 자전거가 세 대나 세워져
있어서 우편함 속에 간신히 손을 집어넣고 휘젓듯이 우편물을 꺼낸다. 그 과정에 불안하게
서 있던 자전거의 핸들이 홱 돌아가 손잡이가 여자애의 관자놀이를 친다. 여자애는 우편
물을 쥔 한쪽 손을 앞으로 내뻗은 채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식
의 따귀를 맞을 때가 있다. 통증이 지나가자 여자애는 눈을 뜨고 다른 사람들처럼 광고 전
단을 바닥에 흘려 버린다. 남은 우편물은 아파트 관리비와 의료 보험비, 가스비 청구서들이
다. 아파트 관리비와 가스비는 독촉장도 함께 왔다. 아파트 관리비는 2개월 동안 밀리면 정
문 앞 게시판에 공고하고, 3개월까지 밀리면 전기와 수도를 끊는다고 한다. 여자애는 청구서
들을 들고 더러운 계단을 오른다.
3층에는 오늘도 빨간색 코르덴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비닐백을 든 아이가 커다란 여자 슬
리퍼에 발을 걸고 서 있다. 비닐백 속에는 분홍색 피부가 드러난 발가벗은 바비 인형과 그
녀의 드레스들과 플라스틱 트렁크, 그리고 올이 풀렸을 스타킹이 들어 있다. 늦겨울 공기에
드러난 발가락이 까치밥 열매처럼 붉다. 이 시간에 계집아이의 엄마는 늘 낮잠을 자기라도
하는 걸까. 그 애는 여자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쯤에 늘 문 앞에 서 있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곳엔 위에도 아래에도, 계단들 뿐이다. 그
아이도 고양이 메메처럼 계단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겨우 네 살 정도이니 당연하다.
“안녕, 빨간 원피스.”
여자애가 인사를 해도 아직 세상의 빛을 본 적 없는 것 같은 조그맣고 여린 애는 깊은 물
속의 생선 같은 눈으로 말끄러미 보기만 한다. 아이는 오늘도 계단을 내려가지 못할 것이다.
이 아파트는 너무 낡았고 5층이 마지막 층이니 엘리베이터가 없다. 계단 바닥은 무수한 발
자국들이 실어 온 흙먼지가 켜켜이 덮여 바탕색을 분간할 수가 없고, 문들의 손잡이 근처와
발이 닿는 아랫부분은 거뭇한 때로 얼룩이 져 있다. 그리고 벽에는 중국집, 치킨집, 열쇠 수
리집, 막힌데 뚫는 집, 마사지집, 특수 영양집 등등의 전화번호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었다.
그리고 계단 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구 비벼 댄 신발 자국들이 나 있다. 어쩌면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열리지 않는 문 때문에 계단 벽을 찼거나, 한쪽 다리를
벽에 올리고 짜증스럽게 비벼댄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층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사다
리가 놓여 있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른 사람 몸 하나가 드나들 만한 둥근 구멍이 천장에
나 있다. 여자애는 그 철제 사다리 곁에서 스웨터의 목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감추었던 목
걸이 열쇠를 꺼낸다.
여자애는 플라스틱 우유병들을 담은 비닐 봉투가 우유병 몇 개를 도로 게워 낸 채 쓰러져
있고 신발들이 뒤집어진 채 나뒹구는 어수선한 현관을 들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쉰다. 식탁 위엔 엎질러진 우유속에 시리얼이 엉겨붙어 있고, 우유를 마신 컵 두 개와 아침
에 먹다 남기고 간 시리얼 그릇이 바짝 마르는 중이다. 등받이에 먼지가 낀 식탁 의자들은
한쪽으로 불편하게 몰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자애는 의자들을 떼어 내 간격을 맞추어
제자리에 놓는다. 안방에서 메메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늘어지게 하고 첫걸음
을 떼는 듯 뒷발을 절름거리며 태만하게 걸어나온다. 메메는 여자애의 벌리고 선 다리 사이
를 몇 번이나 지나며 복사뼈 부분에 제 단단한 머리와 귀를 힘껏 스친다. 그리고 가스 레인
지대 아래에 놓인 밥그릇 앞으로 가서 그릇과 여자애의 얼굴을 번갈아 훔쳐보며 탐욕스럽게
운다. ‘냐오옹- 이냐오옹-’다시물을 빼내 불어난 멸치 몇 마리가 올려진 밥은 그래도 굳
어 있다. 사사는 기름이 가득한 참치 캔만을 먹는다. 여자애는 모르는 첫한다. 이젠 고양이
에게 줄 참치 통조림은 더 이상 없다. 여자애가 걸음을 옮겨 딛자 메메는 야생 짐승처럼 꼬
리를 꼿꼿하게 치켜세우고 발톱을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여자애의 발등에 이빨을 박는다. 여
자애는 가느다란 비명을 지른다. 참치가 떨어진 일 주일여 사이에 메메는 점점 사나워 진다.
메메는 이제 여자애와 약간 거리를 두고 선 채 얼굴을 올려다 보며 원망스럽게 운다. 메메
의 입이 벌어질 때마다 커다란 두 눈이 사악하게 치켜올라가고 흰 이빨이 막힌 새빨간 입
안이 활짝 드러난다. 고양이의 입 안을 들여다보던 여자애의 두 눈에 의심과 두려움이 짙게
어린다.
거실 구석에는 아직도 선풍기가 있다. 여름이 지난 지 여섯 달이나 지나 지금은 2월이다.
겨울에 선풍기살과 파란 날개를 보는 것은 을씨년스럽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선풍기살과 세
개의 날개가 가슴 속에 차가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다. 전에는 계절이 바뀌면 아빠나 엄마 중
에서 선풍기를 비닐 커버로 뒤집어씌워 창고에 정리해 넣었다. 그러나 지금 엄마와 아빠는
모든 것을 방치하고 있다.
“은행 잔고가 바닥났어.”
엄마는 한 달 전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작년에 아빠가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아빠는 퇴직
금으로 조그만 찻집을 시작했는데, 아빠뿐 아니라 엄마까지도 밤낮없이 매달리는데도 형편
없는 모양이다. 빚가지 얻었다는데... 지난달에는 아빠가 엄마 모르게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
에서 대출 받아 쓴 사실이 탄로나 두 사람은 근 일 주일 동안 마주치기만 하면 언성을 높여
싸웠다. 제대로 다 받아 내지도 못한 퇴직금으로는 가게를 차리기에 부적하자 아빠는 은행
빚을 내어 가게 자금에 넣었도 일부는 자기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그 동안 진술빚도 청산하
고 이런저런 밀린 돈도 갚으면 써버린 모양이었다. 빌린 돈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지 않으
면 집이 넘어가게 되니 집에 팔아서 갚든지. 가게를 넘기든지 해야 한다고 엄마가 새된 비
명을 질렀다. 그리고 며칠 뒤 엄마는 외박을 했다. 아빠는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
다. 요즘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군다. 여자애는 우편함에서 빼낸 청구서들
을 서류 바구니 속에 넣는다. 거기엔 다른 청구서들도 쌓여 있다. 동생의 유치원 회비 봉투
에는 2학기 교통비와 점심값, 종일반 회비와 유치원 회비, 총 22만원이라고 계산된 노란색
쪽지가 독촉을 의미하며 따로 붙어 있다.
어제 는 가게가 쉬는 일요일이었고 엄마는 좀 울었다. 꼭 빚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는
친구들과 낚시를 가버렸고 여자애와 동생은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엄마는 10시에 일어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
는 이번엔 삐삐를 쳤다. 전화를 기다리다가 엄마는 무료해서 비디오를 틀었다. 엄마는 지난
해부터 책도 읽지 않고 텔제비전 뉴스도 보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는다. 다만 어쩌다 틈이
나면 늘 똑같은 영화 한 편을 반복해서 본다.
영화 속에는 뚱뚱한 여자가 마술 쇼를 한다. 공기 속 어딘가에서 비스킷을 꺼내고 귀 뒤
에서 계란을 커내며 녹색 나뭇가지에 주전자로 물을 부어 커다랗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 여
자애는 처음 영화 속의 여자를 언뜻보았을 때 혼란스러웠다. 엄마와 아빠와 온천에 목욕하
려 갔다가 돌아올 때, 가끔 들러 저녁을 먹었던 길가의 오리구이집에서 서빙을 하던 여자였
기 때문이다. 뚱뚱하고, 살결이 지나치게 희고, 단정하게 뒤로 틀어올린 머리와 둥글고 가느
다란 눈썹과 아이 같은 동그란 눈. 둥뚱한 여자는 유황오리고기를 가위로 잘라 주고, 술이나
음료수를 가져다 주고 마지막엔 커피와 민트 사탕을 주엇따. 그 여자를 본 지도 일년이나
되었다. 엄마는 온천 목욕을 유난히 좋아해서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꼭 갔었는데, 어느 사이
일년이나 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 것이다.
화면 속에서 뚱뚱한 여자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다시 사막 카페로 돌아왔다. 더욱 화려
한 본격 마술 쇼가 펼쳐지고 서른일곱 대의 트럭이 카페 마당에 들어찬다. 카페 주인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활짝 열린 꽃잎처럼 관대해진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미소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머리에 이고도 꿈결처럼 가볍게 걷는 법을 가르치는 것
같다. 그리고 거센 모랫바람이 공중에 가득히 날리는 어느 날, 늙은 화가가 꽃다발을 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와 뚱뚱한 여자에게 청혼을 한다. 영화 속의 사람들 모두가 독한 꿈에 퓌
한 것만 같다. 삶은 그저 두취이며 마술이라는 건다. 두려운 것은 한 존재가 사라진 빈 자
리, 하나의 세월이 흩어진 빈 자국, 마술이 끝난 뒤의 황량한 침묵뿐, 마술이 있는 동안은
아무도 슬프지 않다.
비디오를 보는 도중에 엄마는 두 번 더 삐삐를 쳤지만 전화는 한번도 오지 않았다. 엄마
는 갑자기 비디오를 끄고 방에 들어갔다. 엄마는 그 후 하루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피자 배달원이 왔을 때, 지갑을 들고 나온 엄마의 눈과 코끝이 붉은
것을 여자애는 보았다. 엄마는 아주 커다란 치즈 크러스트 피자를 받아 상자째로 여자애에
게 내밀었고, 여자애와 어린 남동생은 아루 종일 피자와 콜라만 먹었다. 나중에 동생은 배가
아프다고 칭얼댔다. 여자애는 속임수로 엄마의 샛노란 비타민제를 배 아픈 데 먹는 약이라
고 먹였다. 동생은 이내 설사를 했고 그 뒤에는 완전히 나았다고 말했다.
집 바깥에 암마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여자애는 지난해 겨울에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
날은 눈이 내렸다. 엄마는 전화를 받았고, 화장을 정성스럽게 한 후 거실과 식탁 사이를 오
가며 초조하게 시계를 보다가 홀연히 나갔다. 유난히 검게 칠한 엄마의 검은 보랏빛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엄마는 꼭 30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엄마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애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보라색 립스틱이 다 어디로 갔어?”
엄마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지푸라기가 묻었고, 짙은 눈 화장은 여전한데, 입술 화장은완
전히 사라져 얼굴이 환자처럼 창백했다. 엄마는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갔다. 엄마의 두툼한
조끼의 어깨에서 마른 풀잎이 하나 떨어졌다. 거울에 비친 엄마의 얼구이 왈칵 달아오랐다.
“엄만 눈을 먹고 왔단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눈을 받아먹었지. 그리고 눈을 주먹만
하게 뭉쳐서 먹었고 나뭇가지에 내린 눈위에 입술을 파묻고 먹었어. 그랬더니, 눈이 엄마 입
술을 다 지워 버린 거야.”
여자애는 열두 살이다. 그 때 여자애는 어렴풋이 알아챘다. 엄마가 그 잠깐 상이에 누군가
를 만났다는 것을. 그는 엄마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것을... 밥이 되도록 아빠는 돌아오지 않
았고, 엄마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이불을 코끝까지 덮어쓰고 계속 잤다. 은행돈을 해결하지
못한 채, 한사코 잠을 자는 엄마는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영화 속의 뚱뚱한 여자처럼 잠
자는 동안 엄마도 마술을 배우고 있을까? 지루한 녹색의 나뭇가지에 주전자의 물을 부어 종
이꽃을 활짝활짝 피우는 마술사가 되어 이 현실을 잊은 채 지나가 버리고 싶을까? 엄마가
삐삐를 쳤는데도 전화는 아루 종일 오지 않았다. 여자애는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속
어니가에 엄마의 종이 꽃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 소용도 없고 향기도 없는 속임수에 불
과하다 해도 엄마는 그것에 의지해 장애물 경주 같은 생을 가로질러 갈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방 침대머리에는 그림 액자가 두 개 걸려 있다. 한 개는 흰 석고상과 빨간 고무
장갑이 있는 그림이다. 단지 그뿐이다. 엄마는 왜 그 그림을 액자에 넣었을까.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바닷가 풍경이다. 커다란 고래가 바다에 떠 있고 그 속에 줄무늬 셔츠를 입고 수염
을 기른 남자가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다. 고래 뒤에는 다섯 개의 돛을 단 배가 빠
르게 지나가고 있고 해변에는 두 개의 이층 집이 있다. 이층집 곁에는 실버들 나무 몇 그루
와 물렁하게 감은 털실뭉치같이 둥굴고 부숭부숭한 잎이 달린 나무들이 있다. 그 그림 속의
남자는 틀림없이 아빠 같다. 아빠는 집을 비우고 나가 오래 뱃속에서 옆으로 누워 편안하게
잠이 든 것이다. 그리고 흰 석고상의 여인은 유난히 창백한 얼굴을 가진 엄마 같다. 그리고
빨간 고무 장갑.. 엄마는 고무 장갑 끼는 것을 싫어한다. 고무 장갑을 끼어야 하는 삶을 모
욕으로 느낀다. 그렇게 질기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한 사람이다. 엄마는 가
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고무 장갑을 끼지 않는다. 손에 습진이 생겼는데도 말이다. 엄마
는 고무 장갑처럼 질겨질 바에는 지루한 녹색의 나뭇가지에 주전자의 물을 부어 종이꽃을
만들어 낼 사람이다.
여자애는 식탁위를 치운다. 두 개의 잔과 시리얼이 말라붙은 그릇을 싱크대 속에 담그고
행주로 우유 자국이 눌어붙은 테이불을 닦는다. 그리고 빗자루로 마루를 쓴다. 찬장 위에,
진열장 위에 가느다란 여자의 모습인 흑단 장식물들 위에 마른 먼지가 덮여 있다. 여자애는
아직 먼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먼지를 닦아 내는 행위를 이해할 수도
없다. 아무리 닦는다 해도 끊임없이 쌓이고 무한히 계속해서 쌓일 먼지의 힘을 생각하면 여
자애는 일찌감치 절망적인 기분이 된다. 어른들은 먼지를 혐오하고, 먼지를 털고 닦아 내고.
떠도는 먼지가 없어야 안심한다. 여자애도 언젠가는 먼지를 털어 내는 법을 배우고 그것에
몰두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먼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여자애는 그저 바닥을 쓸고 닦는 정도
일 뿐인 청소를 한다. 베란다 화분들에게 물도 준다. 붉은 꽃이 피는 동백꽃 화분, 흰 꽃이
피는 난 화분, 분홍색 꽃이 피는 장미꽃 화분, 베고니아 화분, 파키라 화분, 선인장 화분들,
조그만 난 화분들, 그리고 탑처럼 쟁여져 있는 텅 빈 화분들... 나무와 꽃들에게 물을 주면
보그르르 한숨 소리를 내며 스며든다. 그런 때면 이상하게도 그것들이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기분이 든다. 엄마가 저희를 찾아주기를 기다리며 조금씩 죽어 간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엄
마는 화초가 잘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엄마의 것이 되면 어떤 까다로운 식물도 죽지 않고
꽃을 피운다. 그래서 잘 아는 사람들은 죽어 가는 화분을 엄마에게 맡기거나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지난 몇 달 사이에 화분들이 줄지어 죽어 나갔다. 하긴
그건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의 신비한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화분과 엄마 사이에 무언
가가 끼여들어 화분들이 엄마의 손길을 받지 못한 지가 너무 오래 된 탓이다.
화분에 물 주기와 생수 떠오기는 이제 여자애의 몫이 되었다. 현관의 신발 정리는 유치원
에 다니는 동생의 일이다. 신발이 함부로 뒤엉켜 있어도 다른 사람이 정돈해 버리면, 그 애
는 몹시 화를 내며 장난감을 내던진다. 동생은 요즘 눈물에 대해 연구중이다.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사랑의 눈물, 이별의 눈물, 분노의 눈물, 다짐의 눈물... 그 애는 사람이 기뻐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저는 누군가에게 얻어맞았을 때만 우는데 세
상에 그렇게도 다양한 눈물이 있다니 말이다. 그 애의 이름은 명이다. 명은 딸기 우유와 딸
기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비디오광이며 로봇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주 속에
떠 있다는것을 알지도 못하는 채로, 지구에는 수많은 나라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
고 있다는 것을 아지도 못하는 채로, 지구에는 수많은 나라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
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채로, 여자애가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지구를 지켜야 하고 우주의 평화를 위해 우주선을
만드는 박사가 될 거라고 말한다. 명은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알려고 늘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다. 이를테면 멀리 있는 것들은 자신의 손으로 무엇이든 다 덮을 수가 있는데 가까이
가면 왜 자신의 손이 그렇게도 작은지 하는 문제들에 골몰한다. 명에게 세상은 아직 신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얼굴이 희고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애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명도 이
기적이고 까다롭고 겁쟁이고 치사한 아이다. 여자애는 차라리 작고 착하고 성실하고 과묵한
남자 친구를 사긔고 싶다. 그리고 장래에는 아빠보다 키는 좀더 작더라도 세 배는 더 잘생
기고, 세 배는 친절하고 돈도 잘 버는 남자와 결혼할 것이다.
엄마가 가게에 나가게 되면서 왔던 파철부는 이제 오지 않는다. 2주 전부터다. 엄마는 아
침 10시경에 가게에 나가고 6시경에 아이들에게 저녁밥을 해먹이려고 온다. 그리고 8시 30
분경에 다시 가게로 나가 새벽 1시쯤에 집에 돌아온다. 아빠는 12시경에 나가지만 엄마와
함께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요즘은...
현관문 긁적이는 소리가 나고 명은 돌아온다. 언젠가 여자애는 명을 데리러 엄마와 유치
원에 간 적이 있었다. 유치원 수업이 끝나면 명은 2층의 조그만 방에서 나머지 오후 시간
동안 갇혀 있다. 그들이 갔을때, 보모는 거울 앞에서 냉정해 보이는 작은 입술을 새로 칠하
고 있었고, 아이들 다섯은 상자 같은 방에서 담요를 덮고 아주 작은 베게를 베고 잠들어 있
었다. 그리고 명은 그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겨우 다섯 개의 블록으로 살금살금 뭔가를 만
들고 있었다. 고아원 아이처럼 양말을 벗고 있어서 발바닥이 까맸다. 여자애는 그제야 그동
안 왜 명의 발바닥이 양말 바닥보다 더 더러웠는지 알게 되었다. 유치원의 2층 놀이방은 불
결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명은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듯 통통 뛰며 신나한다. 마치
어른들이 아홉시 뉴스를 보며 세상을 염려하듯이 먼저 텔레비전 만화 채널을 틀어 만화의
주인공들이 지구를 잘 지키고 있는지 살핀다. 만화 프로그램이 끝나면 로봇들과 칼을 꺼내
거실에 주르르 세워 전열을 정비한 다음, 시리얼을 우유에 부어 허기진 배를 채운다. 배가
불러지면 그 다음 하는 일은 현관 정돈이다. 신들을 바로 세우고 허리에 양쪽 손을 올리고
돌아설 때면 명은 이 집을 위해 자신이 현실적으로 이바지한 것을 느끼며 몹시 흐뭇해한다.
그 애는칼을 바지춤에 다섯 개도 꽂을 수 있고, 로봇끼리 싸움을 시킬 수 있고, 하루 종일,
정말 하루 종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끊임없이 떠들어 댈 수 있으며, 만화에서 본 대로
흉내를 잘 낸다. 유치원에서 명의 별명은 깡통이다. 교사들은 자주 벌을 세우고, 아이들은
아무도 명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명은 이 세상에서 왜 엄마만 자신을 좋아하는지 자주
묻곤 한다. 그 애도 엄마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그 애에게 엄마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마음씨가 곱고 하루빨리 자라서 보호해 주어야 할,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가혹하고도
갸냘프고 신비한 존재이다.
아직 어스름인데, 벌써 어디선가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난다. 미역국 끓이는 냄새도 나고 밥
끓는 냄새도 난다. 엄마가 올 시간이다. 이시간에 가게는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몸을 빼고 나와 저녁을 짓는다. 엄마는 적어도 한 끼쯤은 자신이 식사 준비를 해주
고 두 아이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한다.
바람이 휙 불어 들어오고 곧바로 엄마가 들어서자 집 않에 엄마의 냄새가 왈칵 채워진다.
화장한 얼굴에서 나는 분과 검은 보라색 립스틱 냄새, 계란색 원피스에서 나는 따뜻한 옷
냄새, 엄마의 무릎에서 나는고소한 빵 냄새,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달큰한 한숨의 냄새. 손
에서 나는 담배 냄새와 술과 김치 냄새... 모자간에는엄제나 찡한 상봉이 이루어 진다. 여자
애는 그 곁에 약간 결핍된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 엄마는 명을 끌어안아 올리고 이마와
입술과 두 뺨에 입을 맞춘다. 명은 또 생각하나 보다. 왜 이 세상에서 엄마만 이토록 나를
사랑할까? 여기엔 기쁨의 눈물 같은, 그런 비밀이 반드시 있을 거야. 명도 엄마의 입술에 입
을 맞춘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들기 시작한다. 엄마는 늘 그렇듯이 몹시 지
친 모습이다. 그리고 반찬도 사오지 않았다. 사람이 지치면 차에서 내려 반찬을 사러 슈퍼마
켓에 가는 일조차 힘겨워지는 모양이다. 여자애는 음식을 제대로 먹고 싶어서 노력을 한다.
“엄마, 나 물 뜨러 갈 건데, 반찬을 사올까?”“어제 먹었던 찌개가 남아 있지 않니?”
엄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시었어.”“그래?”
엄마는 찌개를 맛본다. 그리고 낙담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는 밥을 안치고 그리고 당장 침
대로 가서 쉬고만 싶었나 보다. "무얼 해먹지...미역국 끓일까?”
엄마도 올라오다가 미역국 냄새를 맡은 걸까.
“아니, 난 배추 넣은 된장국이 먹고 싶어.”“나도 배추 넣은 된장국이 먹고 싶어.”
명도 팔팔 뛰며 떠든다. 여자애와 명을 쳐다보던 엄마의 시선이 어느 순간 툭 끊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님 같은 어둔 눈빛이 된다.
“그건 오래 걸려...하긴 제대로 된 밥을 차려 먹은 지가 오래됐구나. 그래, 그러자. 얼갈이
배추를 사와. 그리고 고등어 한 마리와 시금치도 사오고, 어묵과 계란도 사와. 그리고...그래,
됐어.”
엄마는 지갑 속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 준다.
“메메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참치를 줄 때까지 굶을 건가봐.”
여자애가 변명이라도 하듯이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한다.
“이젠 정말 더 이상 고양이에게 참치를 사먹일 수 없어. 메메를 아파트 지하실 창문 속
에다 버리거라. 많이 컸으니까,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 곳에서 다른 고양이 무리
를 만나 결혼할 수도 있고, 함께 쓰레기통 속의 비닐 봉투들을 뜯어 먹이를 찾을 수도 있고,
쥐를 잡아먹을 수도 있지. 물가가 아주 많이 올랐어. 돈이 점점 종이가 되고 있단다. 가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면 지갑 속의 돈이 녹고 있는 것만 같아. 가게 안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손이 떠 다니고 있어서 지갑 속의 돈을 감쪽같이 꺼내 가는 것 같기도 하지.어리둥절
해 가게엔 정말 가고 싶지 않아. 사람들은 이제 미용실에도 가지 않고 머리 지르는 기계로
자기 머리를 스스로 자르고 있어. 그리고 뉴스에서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잇달아 전해 주지. 인심도 흉흉해졌단다.집에 오는데 약국 앞에서 웬 노파가 여태까지 5,000
원에 산 신경통 약을 6,800원이나 달라고 한다며, 약국에서 장사를 하지 않고 손님에게 비럭
질을 한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여자애는 지폐와 주스통 두 개를 들고 나간다. 신을 신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엄마는 식
탁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여자애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쳐도 엄마는 표정의 변화가 없다.
엄마는 천천히 담배를 물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엄마는 아직 젊고 아름답다.
전에 그런 저녁들이 있었다. 다른 집보다 빨리 밥이 끓고, 엄마는 손으로 시금치 나물을
주물러 무치면서 어린 여자에게 간을 보게 하고,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할 동안 여자애는 식
탁에 앉아 일일 시험지를 하고, 반찬을 만드는 틈틈이 엄마가 여자애가 쓴 시험지 답이 옳
은지 점검하며 자주 미소짓던 길고 평화롭고 다정한 저녁...그땐 세상이 잘 닫힌 원처럼 안
전하고 포근했고, 아무도 지치지 않았다. 아빠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7시에는 어김없이
집에 와 저녁을 먹었다. 그 때 엄마는 하루 종일 여자애와 함께 집에 있었다. 함께 놀이터를
가고 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사오고, 김치를 담고 미싱을 돌려 시장에서 떠온 초록색 체크
무늬 천으로 조그만 원피스와 냉장고 덮개를 만들고 여자애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쳤다. 덕분
에 여자애는 네 살 때부터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아빠가 처음으로 샀던 소형차를 타고, 야외로 소풍을 다녔다. 마지막으로 갔던
소풍은 언제나 여자애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들은 숲으로 들어가 덤불위에 떨어진 맑은 홍
시를 주워 먹었고 꼬챙이를 하나씩 들고 밤송이를 까 알밤들을 주머니에 가득 채워 왔었다.
공중에는 하루 종일 잠자리 데가 낮게 날고 있었다. 갈대와 샛노란 들국화꽃을 꺾어 세 개
의 꽃다발을 만들었고, 붉은 까치밥 열매도 땄다. 못가 나무 그늘에 자리를 펴고 앉아 김밥
을 먹을 때, 못가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렸고, 물이 많은 배를 깎아 먹을 때는 찬송가가 울려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접고 일어날 때 예배를 마친 시골 사람들이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좁다란 산길을 걸어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명을 가져 배가 불렀다. 그들은
덜 마른 수채화처럼
선명하고 노랗고 붉은 산길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흰 갈대와 산국화 속에 숨어 있던 검
은 염소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여자애는 피처럼 새빨간 단풍잎 하나를 주워 왔었다.
그 뒤 명이 태어났다. 그리고 몇년 뒤에 아빠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주
싸웠다. 엄마의 이마에서 단풍잎처럼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린 적도 있었다. 이젠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온 집안에 고등어 익는 냄새가 가득하다. 전에는 생선 냄새가 싫었는데 오늘은 향긋하게
까지 느껴진다. 엄마가 여자애와 명에게 밥먹으러 나오라고 부르며, 생선을 식탁 위에 올리
고 몸을 돌릴 때였다. 메메가 의자를 타고 올라가 어느 사이 식탁 위의 생선을 향해 달려들
었다. 아마도 생선은 너무 뜨거웠을 것이다. 메메는 뒤로 물러서려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다리를 국그릇에 빠뜨렸고, 흥분한 나머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채 네 개의 다리를 휘저
어 생선토막 하나를 냉장고문 쪽으로 날려 버렸고 반찬인 담긴 접시들을 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악-.”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엄마는 눈을 감고 그 무엇도 아닌 천장을 향해 마구
잡이로 비명을 질러 댄다. 비명 지르기를 끝낸 엄마는 팔을 뻗어 소파 위에 앉아 눈치를 보
고 있는 메메를 가리켰다. 베란다에 놓인 메메의 모래 변기통에서 지린내가 스며 들었다.
“저걸, 전에 주어 왔던 그 자리에 도로 갖다 버려.”
엄마는 더 이상 베란다의 지린내와 방바닥에 지그럭거리는 모랫 가루와 침대 시트를 물어
뜯어 레이스를 망가뜨린 이빨과 가죽 소파에 보풀이 일도록 긁어 댄 발토ㅂ들에 대해서 설
명하지 않는다. 엄마가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여자애는 지난 여름 저녁에, 생수를 뜨러 갔다
가 자동차에 다리를 친 새끼 고양이를 주어 왔다. 배와 등과 꼬리가 온통 흰색 털인데, 두
눈가에만 커다란 이태리제 선그라스를 낀 듯 까만 반점이 동그랗게 찍힌, 다치지 않았다면
결코 여자애의 손에 몸을 맡겼을 리가 없는 앙증맞고 쌀쌀한 고양이였다.
여자애는 야위었지만 뼈대가 여물어 묵직해진 고양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간다.메메는 가
끔 그랬듯이 산책을 나가는 줄로 아는지 야옹거리며 즐거워한다. 여자애는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망설임 없이 좁다란 화단으로 들어가 지하실의 작은 창문 앞에 쪼끄리고 앉았다. 여
자애는 언젠가 그 앞에서 새끼고양이 세 마리가 놀다가 숨어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지하실의 창문 안쪽엔 원래는 촘촘한 철망이 대여져 있었지만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철망 가운데가 휑하게 뚫려 있고 유리도 깨어졌다.
“잘 가. 이제 자랐으니, 결혼도 하고, 예쁜 새끼도 낳아야 해. 그리고 거리의 다른 고양이
들처럼 사냥도 해야해.”
여자애는 품에서 고양이를 떼어 낸다. 메메는 위기를 느끼는지 발톱으로 여자애의 스웨터
를 한 올 한 올 쥐고 있었다. 고양이를 떼어 내자 스웨터의 실 한 올이 발톱에 감겨 휙 비
어져 나온다. 여자애는 고양이를 지하실의 창문 안으로 밀어 넣는다. 메메는 고개를 뒤로 빼
며 저항을 하다가 문득 가볍게 밀려 안쪽으로 떨어졌다. 여자애가 두 눈을 바짝 붙이고 지
하실 안 쪽을 들여다 보니, 메메 역시 돌아서서 여자애를 마주본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
는 암흑 속에 두 개의 눈동자만 푸른 광채를 내었다. 여자애는 가슴 속 어딘가가 베이는 듯
한 공포를 느낀다.“안녕...”
여자애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속으로 다스리며 두 개의 낯선 광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설거지를 끝낸 엄마는 청소를 시작한다. 여자애가 정리하느라 했지만 명이 와서 어질러
놓기 때문에 물건들이 뒤죽박죽이다. 명의 장난감들이 말썽이다. 연필을 대지도 않은 여러
장의 일일 시험지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명이 벗어 던진 양말짝들에는 모랫가루가 묻
어 있다. 전화기도 뒤집어져 있고, 잡동사니를 담아 둔 바구니도 넘어져 물건들이 다 쏟아졌
다.
“대체 누구보고 치우라고 이렇게 뒤집어 놓니? 이젠 파출부도 오지 않는데, 우린 파출부
도 쓸 수 없는데, 왜 이렇게 집을 어지르니? 난 집 치울 기운이 없다. 난 죽을 거같이 피곤
해 지금 또 가게엘 가야 한단 말이야 사람에게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너희들이
아니? 술 취한 인간들이 얼마나 지겨운지, 똑같애. 교수고 시인이고 운동가고 늙은이고 젊은
이고 여자고 남자고 간에, 인간이란 게 술에 취하면 똑같아진다구. 허리가 휘고, 입에서 단
내가 나고, 손이 붓도록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고작 월세 주고, 술값 주고 은행이자 주면 남
는게 없어. 게다가 너희들 아빠라는 사람은 나 모르게 집을 잡아 빚까지 얻어 쓰고...아, 지
겨워-지겨워-지겨워 죽겠구나-.”
엄마가 새된 소리를 지르면 숙제를 하려던 여자애는 방에서 튀어 나온다. 그리고 엄마를
분주하게 돕는다. 엄마가 지겹다고 소리지르면 여자애는 고통을 느낀다.
엄마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다.“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어. 이 지
겨움을 모두 과거로 만들어 버릴 거야, 언제까지나 이런 현재가 계속되는 건 믿을 수 없어.
그래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을테니...”
“내가 이 집을 떠나야지...” 여자애는 엄마의 다음 말도 알고 있다.“이건 모두 과거
야.”다른 엄마들도 그럴까? 엄마는 집을 떠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여긴다. 엄마에겐 자신이
태어난 해와 달의 숫자인 635라는 비밀 번호를 가진 커다란 검정색 트렁크가 하나 있다. 겨
우 한 달 전 깊은 밤중에 엄마는 트렁크를 들고 나가 현관 앞에 놓았다. 여자애는 꿈 속에
선듯 그 모습을 보았다. 일어서서 엄마를 붙잡고 싶었지만, 여자애는 아무것도 못 하고 반듯
하게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무어라고 말하면서 떠나는 엄마를 붙잡을까?
엄마들이 떠날 때 아이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술 취하고 난폭한 아버지들, 끝
나지 않을 가난 음식 냄새도 없는 어둡고 텅 빈 저녁들, 무엇인가를 집어던지게 되는 삶의
균열, 겨울 하늘의 샛별 같은 떨림, 잠이 들려고 할 때 흘러낼리는 눈물, 어둡고 낮선 길을
혼자서 갇는 꿈들...현관문 열리는 소리는 오래도록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거의 날이 밝을 무렵에 아빠가 돌아왔다.
“아이들을 잘 부탁해. 나는 떠나. 미안해. 모든 것을 네게 다 맡겨서. 가더라도 인사하고
가는 게 도리인 거 같아 기다렷어. 자리가 잡히면 명을 데리러 올께.”
엄마는 신문을 읽듯 한결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몸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현관 타일
바닥을 딛고 신발 신는 기척이 들렸다.“이리줘.”
엄마가 낮게 소리를 쳤다. 아빠가 트렁크를 뺏은 것 같았다.
“바보같이 굴지 마. 이야기 좀 해.”
아빠의 음성은 야비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면서 강해 보이려는 남자의
음성이다. 비겁하고 억지스럽고 그리고 간절하다.
“내가 할 이야긴 다 했어. 공연히 이러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난 가야해. 붙잡아 달라고
너를 기다린 거 아니야.”“넌 절대로 못 가.”
아빠는 일층까지 들리도록 커다랗게 외친다.“나는 가.”
엄마는 여전히 억눌린 음성이다.“어디로 간다는 거니?”
“아무 곳이나. 네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지지 않는 곳.”
“좋아, 갈 때에 가더라도 일단은 들어와. 나도 이야기할 게 있어.”
아빠가 엄마를 달래려는 듯 음성을 낮춘다. 두 사람은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어둠도 점점
부드러워 진다. 그들은 사실은 싸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그 남자, 이혼한대? 아니면 근처에 집이라도 얻어 준다는 거야?”
“그건 상관없는 문제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란 건 알지 않니? 너의 낚시 같은 것뿐이야.
난 다르게 살고 싶어. 너무 오랫동안 난 졸고 있었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야, 난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 나도 노력하고 싶어. 그러나
이 곳에서, 너와 함께 이런 삶을 더 끌어가다가는 만신창이가 될 거 같아. 너는 낚시로, 나
는 일종의 히스테리로...우린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게 돼.”
“너를 붙들지 않을게 하지만 다음에 가. 말하자면, 가게를 넘기거나 집을 판 뒤 돈이 좀
만들어지면...그래야 나도 널 보낼 수가 있어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게 무섭지 않니?”
한참 뒤에야 엄마가 말했다.
“처음 가게를 열고 몇 달 동안 넌 생활비를 한 푼도 넣어주지 않았어. 회사에서 월급을
받지 못하던 날들이 이어진 뒤인데다 온갖 부스러기 돈까지 다 긁어모아 가게에 넣은 뒤여
서, 정말 생활비가 한 푼도 없을 때였지. 우리가 어렵다 해도 설마 생활비조차 한 푼 없으리
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엄마도 오빠도, 여동생도...꼭 한 사람, 아버지가 돈을
보내 주었던 날이 떠올라. 20만 원 이었어. 돈이 생기자 아침에 일찍 나가 돈을 찾은 뒤 애
들이 먹고 싶어했던 떡국을 사와서 멸치 국물을 우려내 끓여 주었어. 그리고 명의 손을 잡
고 가 오랜만에 비디오를 빌려다가 틀어다 주었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에 며칠 전부터 붙어
있던 광고지를 오래 쳐다본 뒤에 아이 옷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갔어. 12월 초순이었는
데, 한겨울이 닥친 것처럼 추운 날이었어. 부도 상품을 처리한다는 자폭 세일전에서 이이들
내의를 한 벌씩 샀고, 양말을 두 켤레 샀으며, 생애 처음으로 내가 입을 내의도 한벌 샀어.
자라고 나서는 내의를 입은 적이 없었는데,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내몸은 오한에
떨고 있엇거든.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 닥칠 것 같았어. 쌓인 옷 중에서 순모 80퍼센트에
다 안을 누빈, 재고품이지만 두툼하고 가벼운 아이의 외투를 발견했는데, 물건 파는 여자는
옷에 붙은 가격표를 보더니, 그 옷은 다른 옷과 달리 공장도 가가 비싸기 때문에 가격이 다
르다고 했어. 값을 깎아보려 했으나 여자와는 흥정이 되지 않았어. 도대체 70퍼센트라는 세
일선이 정해져 있는 이상 흥정을 한다는 일 자체가 실은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짓이잖아.
나는 여자의 거절을 듣고 일단 떠낫다가 다시 그 자리로 가서 아무도 몰래 옷에 붙은 가격
표를 떼어 버렸어. 그리고는 다른 남자 판매원과 흥정을 했지. 그 남자는 4,000원 더 낮은
가격을 불렀고 나는 거기서 2,000원을 더 뺐어.
값이 싼 아이 바지 하나 더 사서 돌아오다가 이번엔 7만 명 고객 돌파 사은 잔치를 한다
는 백화점에 들렀어. 물건을 30만 원 이상 사면 이불 세트를 주고, 20만 원은 곰 솥을 주며
10만 원 고객에게는 그릇 세트를 준다고 현수막에 씌어 있었어. 난 배가 많이 고팠어. 아침
에 떡국을 먹은 뒤로 이미 오후 4시였어. 백화점에서는 매장아다 방송을 요란하게 하고 있
었어. 하루에 세번 한다는 반짝 세일 시간이었던 거야. 검은색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맨
남자가 10분 동안만 신제품 스킨과 로션, 에센스가 각 4,000원씩 세트에 12,000원이라고 소
리를 질러 댔어. 화장품이 떨어진 지 일 주일째였기에 가까이 가보았어. 샘플을 발라 왓는데
스킨은 이미 샘플조차 없었거든. 나는 화장품을 쥔 채 망설이다가 10분이 되기 직전에 돈을
꺼냈어. 리필 투웨이케이크가 3,000원, 립스틱이 3,000원, 아이라이너는 2,000원, 에나멜은
200원이었어. 그 곁엔 유명 브랜드 신발이 12,000원 균일가로 판매되고 있었고, 그 곁에는
9,800원 균일가로 판매되고 있었고, 그 곁에는 9,800원 균일가로 판매되는 백들이 산더미 처
럼 쌓여 있고 남방 셔츠도 만 원 균일가로 팔리고 있었어. 어디에나 물건들이 함부로 재여
있고, 사람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었어. 그런데 화장품은 10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앞
으로 10분 동안 스킨과 로션과 에센스를 각 4,000원에 드린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어. 싱거워
진 나는 무료 시식 팝콘을 주워먹었어. 레몬 버터에 튀긴 팝코이 가장 구미에 맞다고 생각
했지. 팝콘 한 통에 9,000원 15,000원 20,000원이라고 씌어 있었어. 비현실적인 가격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어떤 맛을 드릴까요?”판매원이 먹기만 하고 서 있는 나에게 심술궂게 물
었어. 나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본 뒤에, 애초부터 살 마음 따윈 전혀 없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돌아섰어. 그리고 그 맞은편으로 가 어묵 꼬치를 한 개 먹고 국물을
두 컵이나 마셨어. 그 곳에선 계산하는 여자와 손님이 커다란 소리로 싸우고 있었어. 손님은
만 원을 냈다고 얼굴이 빨개져서 악을 쓰고, 계산대의 여자는천 원을 받았다고 소리지르고
있었어. 서로 뻔한 수작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어. 피자 코너, 패스트 푸
드 코너, 손국수 코너, 각종 김밥코너,죽 코너, 복음밥 비빔밥 코너 들이 있고 유난히 환한
빵가게가 있엇는데 어디에나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어. 나는 그 때 3개월 만에
백화점을 온 길이었어. 식품부로 가서 노란 바구니를 든 뒤에 그 속에 100그램에 300원 하
는 시금치를 300그램 담았고, 4개에 1,000원을 한다는 단감을 8개 담았으며 데워 먹는 호빵
과 돼지고기 600그램을 담았어. 그리고 신속하게 계산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백화점 버스를
탔지. 운이 좋아 이내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어. 그 날 내 마음은 너무나 가난했어. 만약
가난하다면, 평생 동안 계속 가난하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생각할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어. 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어. 단지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필요하지 않
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야. 그러자 막연히 두려웠던 안개가 갇히는 것 같았어. 물론
알아. 정말 가난한 사람에 비하면 엄살에 불과하지.그래 내 가난은 아직 실제가 아니야. 내
가 가난하다는 게 믿어지지도 않으니까. 그냥 우울한 정도지 가난이란 우울조차도 복잡하거
나 모호하지 않고 명쾌해. 돈만 있으면 해결되니까.”
엄마와 아빠의 말이 끊겼다. 누군가 냉장고 문을 열었고 곧이어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
다. 그리고 또 침묵이 이어지다가 엄마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이 떠나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지? 전엔 그게 두려웠어. 여자도 남자도
모두 그것에 매여 있지. 하지만 난 이제 돈이 없는 게 걱정되지 않아. 돈이 있는 사람이 살
아가는 것처럼 돈이 없는 사람도 평생 동안 살아가. 단지 생각하는 가난과 잠시 느끼는 가
난은 정말로 가난한 것과는 다르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 달라졌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도 삶은 계속돼. 두려운 건 가난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에 매여 자신을 묶는 거야.”
“인생은 동화가 아니야. 너는 이상하게도 어려움을 겪으면 더 비 현실적으로 되어 버리
는구나.”
“그런지도 몰라. 어려움을 경험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져, 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원하는 것이여야해. 난, 더 이상 너와의 삶을 원하지 않아.”
“알아. 알고있어. 알아...”
아빠는 피곤한 음성으로 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엄마 아빠가 실랑이를 벌일 동안 어느 사이 날이 환하게 밝아 버렸고 여자애는 엄마의 나
지막하고 길게 계속되는 음성을 들으며 마음이 편해져서 잠에 빠져 버렸다. 잠은 산만큼 크
고 깊었다. 마치 벌레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카스텔라를 파먹는 듯 따스하고 뭉클한 잠...
엄마는 욕조에 물을 받아 주고, 거실 바닥에 명과 여자애의 속옷을 펴놓고 집을 떠난다.
여자애는 힘겨워하면서 명을 달래 몸에 비누칠을 해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잘 행구어 준다.
명은 하얗고 깨끗하게 변한다. 목욕을 하고 난 후 명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며 소리를 질
러 댄다.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언어 전달을 써야 해.”
“오늘은 뭐니? 내가 써줄게.”
명은 생각한다.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다.
“생각해봐. 네가 기억만 해내면 이내 쓸 수 있으니 걱정마.”
여자애는 침대 속에 명을 누이고 계속 생각해 보라고 격려한다. 그러나 명은 이내 잠들어
버린다. 명은 내일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언어 전달장을 선생님 한테 드리게 되겠지. 선생님
은 버려진 아이를 보는 눈으로 내려다 볼 것이고, 아이들은 잠시 놀릴 것이다. 그리고 명은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파도에 밀려 멀리멀리 떠가는 쪽배같이 외로운 감정에 사로잡히겠
지. 여자애는 하다가 만 수학 숙제를한다. 시간은 이미 11시이다. 요즘은 책 읽을 시간도 없
다. 여자애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세상에서 길을 잃어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있
을 때, 그때 책의 구절들이 수많은 반딧불처럼 되돌아와 여자애의 길을 밝혀 줄 거라고 엄
마가 말했기 때문이다. 또 책은 세상에 더 힘겨운 고통과 더 환한 기쁨과 더 깊은 의미와
더 귀한 가치가 있으니 쉽게 절망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고 언제나 새로워질 힘을 준다고 한
다. 아무래도 엄마는 가족을 버리고 가버릴 것 같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든다. 오래 전의
여름, 여자애에게 그 말을 하던 날 엄마는 이미 떠나려고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어른들은 모
르지만 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대부분 이루어진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예언처럼.
불 끄기전에 잠든 동생의 얼굴을 본다. 이상하게도 꼭 감긴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여자
애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준다. 그리고 내일은 좀더 일찍 일어나서 언어 전달 내용을
다시 물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형광등 불을 끈다. 방 안이 깜깜해지자 벽지의 야광 그림
들이 연두색 빛을 낸다. 우주선을 탄 토끼, 초원의 기린, 나뭇가지의 새, 강가의 코끼리, 북
극의 곰, 사과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는 소녀 그림들이 반복된다.
눈을 감자 여자애의 눈 밑에도 축축한 눈물이 느껴진다. 여자애가 아무리 애를 서도 소용
없이 엄마는 결국 떠나 버린다. 엄마에겐 태어난 해와 달인 비밀 번호 635인 트렁크가 있다.
언제나 여자애의 가슴을 죄는 불길한 트렁크...여자애는 불현듯 자리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
리고 엄마의 방으로 가 불을 켠다. 불빛이 이마를 찌르고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듯 했다. 여
자애는 비틀거리며 장롱 곁의 좁은 틈에 숨어 있는 검정색 트렁크를 붙들었다. 트렁크는 무
거웠다.
여행용 화장품 세트, 여행용 세안제 세트,칫솔, 새하얀 수건 아래로 속옷이 든 작은 비닐
주머니, 그리고 스타킹과 양말들, 꽉꽉 눌린 옷가지들...트렁크 속은 이제 막 짐을 싸둔 것만
같다. 엄마는 밤에 일기를 쓰듯이 매일매일 트렁크를 새롭게 싸고 있는지도 모른다. 트렁크
포켓 속에는 여자애와 남동생의 사진들이 들어있다. 명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간신히 앉아
두 팔을 휘젓는 돌 무렵의 사진, 파마 머리를 한 여자애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햇살을 향
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찍은 세 살 때의 사진, 유원지의 작은 동물원에 갔을때, 조랑말 우
리 앞에서 찍은 세 살 무렵의 남동생과 아홉 살 때의 여자애 사진, 일 년 전 여름에 외가의
돌담 앞에 쪼끄리고 앉아 찍은 사진, 여자애는 활짝 웃고 있고 명은 장난감 선그라스를 끼
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다. 여자애와 명, 함께 찍은 사진 두 장과 따로 찍힌 사진
네 장씩이다.
계단은 너무 어둡다. 눈도 없는 아주 깊은 물의 고기들, 물의 무게에 눌려 납작해진 물고
기들이 헤엄칠 것 같은 어둠이다. 여태 한번도 다닌 적이 없고 어디로 연결되었는지 알 수
없는 낯선 통로 같다. 여자애는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며 어둠 속의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
간다. 안대로 눈을 가린 것 같다. 한없이 내려가도 계단은 끝날것 같지 않다. 몇 층인지 모
를 계단에 내려섰을 때, 여자애는 계단 모서리에서 흔들리는 두 개의 초록빛 광채를 발견하
고 몸이 굳어 버린다. 초록빛은 여자애를 올려다보며 계단을 올라온다, 여자애는 목구멍 속
에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비명을 길게 지른다. 그것은 메메다. 여자애가 놀란 만큼 메메의
눈 역시 버려진 공포에 질려 더욱 새파랗다. 메메는 여자애의 다리 사이를 발작적으로 맴돌
며 온몸을 비벼 댄다. 안아올려 달라는, 쓰다듬고 사랑해 달라는 하소연이다. 계단 위에서
소리내어 우는 것이 안전하지 못한 짓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는지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저리 가-.”
여자애는 고양이에게 낮게 소리치고 트렁크를 끌며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나 고양이는 트
렁크와 여자애의 발길에 차이며 여자애와 동시에 같은 계단을 밟는다. 고양이 때문에 발이
꼬여 휘청 앞으로 기울어진다. 그 바람에 트렁크가 왈칵 앞으로 몰려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
가 둔탁한 울림을 내며 뒹군다.“저리 가-.”
여자애는 억제된 음성으로 소리치며 발로 고양이의 배를 차버린다. 고양이는 낮게 비명만
지를 뿐 물러서지 않고 여자애를 따른다. 여자애는 현관 밖으로 나와 환한 외등 아래를 지
날 때 발을 탁탁 구르며 고양이에게 외친다.
“저리가- 저리가-.”
고양이는 세워진 차 밑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여자애는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태연
하게 걷는다. 하늘엔 노란 광채를 내는 싱그러운 반달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다. 금속적인
노란빛도 아니고 계란 같은 노란색도 아니다. 명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반
쯤 열린 노란 창문 같다. 아파트 뒷문을 빠져나갈 때 경비실의 경비원이 작은 창문에 두 개
의 눈을 대고 여자애를 잠시 관찰했다. 여자애는 등을 돋게 펴고 무심하게 지나간다. 길을
건너면 곧바로 호수가 있는 공원이다. 소나무 숲에 들어서자 트렁크의 바퀴가 나무 뿌리에
자꾸만 걸린다. 어두운 숲의 한가운데서 여자애가 멈칫 섯다. 바로 앞 벤치에 한 남자가 앉
아 있다. 무릎 곁에는 서류가방이 놓여 있고 벤치 곁엔 아주 낡은 자전거가 목 꺽인 닭처럼
핸들이 홱 돌아간 채 세워져 있다. 호수 속엔 맞은편 고층 모텔과 쇼핑몰의 휘황한 불빛들
이 깊게 빠져 물의 흔들림에 따라 붉고 푸르게 일렁거린다. 위험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자애는 남자의 곁을 지난다. 벚나무 숲길에서 여자애는 또 걸음을 멈춘다. 이번엔 호수로
의 가로등 아래에 새하얀 파카를 입은 여자와 청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
고 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파카속 어딘가를 더듬는다. 여자애는 뒷걸음질을 쳐 몸을 숨기
려 하는데. 언제 따붙었는지, 고양이가 발길에 차여 예리한 비명을 지른다.
여자가 소스라치며 남자의 몸에서 바져나온다. 긴 머리카락이 머리채를 휘어잡힌 것처럼
함부로 헝클어진 여자와 어리둥절한 남자가 여자애를 흘긋 쳐다본다. 여자애는 어쩌지 못
한 채 커다란 트렁크를 쥐고 서 있다. 여자는 머리를 더듬더니, 몸을 숙이고 손으로 땅바닥
을 더듬는다. 머리핀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남자도 몸을 구부리고 눈으로 땅바닥을 훑는
다. 머리핀은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다. 여자는 갑자기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않을 것처
럼 쌀살하게 걸어간다. 남자가 뒤따라가 붙잡아 세운다. 여자가 뭐라고 화를 내며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선다. 남자가 뒤에서 여자의 등을 끌어안는다. 여자가 등에 벌레라도
붙은 듯 바둥거린다.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은 채 곁의 벤치에 앉는다. 남자의 무릎 위에
여자가 앉혀진 꼴이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풀고 일어서더니 팔을 커다랗게 휘둘러 앉아
있는 남자의 따귀를 때린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는 그 남자를 만나지 않을 듯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걸어간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자애는 마치 자신이 남자의 따귀를 때
린 것같이 미안하다. 여자애는 호숫가 길로 내려가 트렁크를 끌며 간다. 고양이도 여자애
의 발길에 자꾸만 차이며 걷는다.“저리 가-.”
여자애는 벤치에 앉은 두 남자가 다 듣도록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
속 여자애를 따라 걷는다. 여자애는 소나무 숲 속의 남자와 따귀를 맞고 앉아 있는 남자의
반대편에 이를 때까지 묵묵히 걷는다. 도중에 호수의 난간에 양쪽 팔을 끼우고 앉은 채로
잠들어 버린 소년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간다. 여자애는 호수 안에 지어진 물 위의 휴게소
롤 들어가는 긴 다리 가운데서 멈추어 선다. 언젠가 엄마와 아빠와 남동생과 물고기 떼에
게 과자를 던져 주었던 장소이다. 휴게소는 깜깜하다. 여자애는 다리 위에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보낸다. 새하얀 파카를 입은 여자는 완전히 사라졌고, 따귀를 맞은 남자도 동그란
호숫길 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여자애 겨태을 빙빙 돌던 고양이가 눈치를 보며 여
자애의 무릎 위에 기어올라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발톱이 가시처럼 허벅지
를 찌르고, 발바닥에 묻은 흙이 여자애의 바지를 함부로 더립힌다. 고양이의 배는 따듯하고
살집은 없지만 꽤 묵직하다. 네 개의 다리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지린내가 희미하게 올
라온다. 여자애가 가만히 있자 고양이는 여자애의 얼굴을 말끄러니 올려다보며 탐욕스럽게
운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원망스럽게 운다. 배를 너무 주려서 고통스러운 것 같다. 울
때마다 커다란 눈이 사납게 당겨 올라가고 흰 이빨이 가지런히 박힌 새빨간 입 안이 활짝
드러난다. 여자애는 사방을 둘러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이 고양이가 낯설다. 고양이는
발톱까지 활짝 드러낸 채 바로 코앞에서 여자애를 노려보며 운다. 여자애는 트렁크를 635
에 맞추어 연다. 그리고 위에 얹힌 여행용 화장품 세트와 세안용품 세트를 물고기에게 과
자를 던져 줄 때처럼 호수 속으로 휙휙 던진다. 그리고 악력이 가득한 손아귀로 고양이의
뒷목을 쥐고 들어올려 트렁크 속에 내던지고 순식간에 뚜껑을 닫아 힘껏 누르며 잠근 번호
를 마구 돌린다. 번호는 869에서 멈추고 트렁크 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온다. 여자애는 가방을 난간위로 힘겹게 들어올려 단번에 아래로 덜어뜨려 버린다.
여자애는 깊은 밤중에 잠에서 깨었다. 무서은 꿈을 꾼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 여자애는 아빠의 음성을 들었다.
“ 그 남자 이혼한다든?”
아빠의 음성은 극도로 고요하다. 화난 것도 아니고 비웃는 것도 아니고 폭력적이지도 않
다. “또 그렇게 말하는구나. 그 남자 만나지 않아. 난 단지... 내 나름대로는 생을 위해
노력하려는 거야.”
“끔찍해. 나도 이렇게 살려고 한 건 아니었어. 이 모든 게 거짓말 같아. 너에게 부도
덕하다는 말을 하진 않을 거야. 나의 무능, 이런 현실 역시 부도덕한 거니까.”
“나도 너와 함께 잘할려고 노력했었어. 그래서 뒤늦게 명까지 낳았고. 하지만, 더 이상
은 불가능해.”
“알아. 네 말뜻 알아. 너에게 화나지 않아. 너이 생에 이렇게도 긴긴 그림자를 던지는
나 자신이 더 싫으니까.”
“꼭 그런 뜻이 아니야. 차라리 근본적인 거야. 많은 것을 잃고 난뒤에야 제자리로 돌아
갈 용기가 생겨나는 그런 거, 겨울에 들판과 숲의 길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듯...”
“아무래도 좋아, 네 뜻대로 해. 최소한 넌 눅눅한 뒷방에서 곰팡이 피는 삶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을 향해 걸어가는 삶을 선택할 권리는 있어. 너를 잡지 않을께. 어쩌한 나도
다시 노력할 수 있을 거 같아. 도시에서 배회하는 생활을 버리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겠지. 나쁘지 않아. 나가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너와 함께 밤바람을 쏘이
면서 숨을 좀 쉬고 싶어. 산책을 하고 해가 든 뒤에 가도 그다지 늦지 않을 거야.”
곧 두 사람이 신발을 신는 부스럭거림이 들리고 조용히 현관문이 렬렸다가 닫힌다. 여자
애는 오늘 밤 아빠의 음성은 낯설다고 느낀다. 고요하고 부드럽다. 무섭도록 부드럽다.
여자애는 화장실에 갔다 와서 다시 눕는다. 밤의 공원에 혼자 앉아 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전거와 서류 가방도, 그리고 머리채가 위어잡힌 것처럼 헝클어진 여자와 따귀
를 맞은 남자, 난간에 양쪽 팔을 끼우고 앉은 채 잠든 어린 소년... 난간 위에 끌어올려진 트
렁크는 첨벙 소리를 내며 호수 속에 빠졌다. 물속에 잠긴 고양이, 여자애는 다시 잠이 든
다. 잠결에 메메의 울음소리가 가냘프게 들려 온다.
여자애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아침이었다. 첫째 수업이 이미 끝난 시간, 남향 거실
에는 햇살이 깊숙이 비쳐 들어 한낮처럼 밝았다. 소파와 거실 바닥에는 가장자리가 시든
꽃들이 열다섯 송이나 넘게 흩어져 있다. 분홍과 흐니색의 장미꽃들과 자주색 소국과 커다
란 꽃잎을 가진 노란 꽃과 흰 꽃이었다. 밤 산책을 할 때면 엄마와 아빠는 거리의 꽃가게
를 지나다가 버려진 꽃다발이나 화환들 속에서 한두 송이씩 꽃을 뽑아 오는 버릇이 있었다.
혀노간에는 가까운 곳에 나갈 때 신던 엄마의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여자애는 엄
마의 방문 앞에서 숨을 멈추고 선다. 그리고 아주 천천이 문을 열고 안을 엿본다. 파란색
커튼이 쳐져 새벽처럼 서늘하고 엷은 그늘이 드리운 엄마의 침대는 잘 정된된 채 텅 비어
있다. 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여자애는 자신이 트렁크 속에 갇혀 물 속에 빠진 고양
이처럼 아득해진다. 어디선가 메메의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침대 아래인 것같다. 침대
아래, 그 아래의 아래, 엄마가 사라진 까마득히 깊은 낭떠러지 아래...
여자애는 꽁공 언 얼음장같이 커다랗고 무겁고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발을 떠걱떠걱 움직
여 침착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천천히 학교로 간다. 담임 선생님은 무서
은 남자 선생님이다. 여자애는 학교로 가는 동안 잠시 고민을 한다. 그리고 이제 막 둘째
수업을 시작한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선생님께 말한다.
“B시에 있는 큰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오늘 아침에 돌아오는라 늦었습니다.”
곱슬머리 선생님은 여자애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여자애는 선생님의 눈을 태연하게 마
주본다. 전혀 무섭지 않다. 선생님은 지난밤 여자애의 굼 속에 나타났다. 꿈 속에서 여자
애는 당번이어서 새벽에 학교를 갔다. 교정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신발을 들고 목조 계
단을 올라갈 때, 여자애는 계단을 딛고 내려오는 선생님을 보았다. 곱슬머리에 유난히 검붉
은 선생님은 검은 여자 한복을 입고 있었다. 선생님은 무엇엔가 끌려가는 환영처럼 공허하
게 여자애를 스쳐 내려갔다. 여자애는 무서워서 온몸이 저릿하게 떨었다. 선생님이 왜 여
자 옷을 입고 있을까? 선생님이 왜 이 시간에 교실에서 나올까? 여자애는 공처럼 튀어나
가려는 공포를 가슴 속에다 꼭꼭 누르며 입을 꼭 다물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가득 떠놓고, 빨간색 플라스틱 컵도 씻었으며 교탁과 칠판도 닦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아이들로 교실이 가득 차자 새 분필통을 든
선생님이 태연하게 들어왔다. 선생님은늘 입는 가색 줄무늬 양복을 입었고, 아이들의 인사
에 답례하고 난 뒤 출석을 부르고, 펴애소처럼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여자애는
교실 정리를 하고 마지막에 나섰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는데 문득 복도 끝에서 선생님이
나타나 걸어왔다. 선생님은 또 검은여자 한복을 입었고 발은 바닥을 스치지 않고 둥설 떠
있었다. 여자애는 너무 무서은 나머지 복도 한가운데서 굳어 버렸다. 선생님은 왜 이시간
에 교실로 가는 것일까? 왜 여자 옷을 입었을까? 선생님은 무엇엔가 끌려가는 환영처럼
공허하게 여자애의 곁을 지나갔다. 여자애는 계단을 내려오며 그 무시무시한 비밀을 간직
한 선생님이 가여워졌다. 여자애는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을 내지 않고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 꿈을 꾸어서인지 선생님이 무섭지 않다. 선생님과 여자애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하겠다는 약속이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가 앉으라고 말한다. 돌아설 때 여자애는 조금 웃는다.
아이들이 일제히 여자애를 쳐다본다. 여자애의 두 눈에 언뜻 파란 커튼 그늘 속에 놓인 엄
마의 빈 침대가 떠오른다. 여자애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말을 해도 아마도 납
득하지 못한 혼란스럽고 무서운 꿈, 엄마들이 떠나면 흔히 아이들의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슬픈 일들이 여자애의 눈 속을 스쳐간다. 술 취하고 난폭한 아버지, 끝나지 않을 가난, 음
식 냄새도 없는 어둡고 텅 빈 저녁들, 겨울 하늘의 샛별 같은 떨림, 무언가를 집어던지게 되
는 삶의 균열, 잠이 들려고 할 때 흘러내리는 눈물, 어둡고 낯선 길을 혼자서 걷는 꿈들...
그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만 같다. 그러나 여자애는 조금 웃는다. 여자애는 꿈 속
에서 선생님을 이해하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전날 밤 엄마의 음성을 들으면서 엄마를 이해
하려고 이미 결심했다. 겨울에 들판과 숲의 길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듯... 엄마는 그 길을 따
라 갔다. 누구나 노력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여자애는 엄마 없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세어 본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를 찾아 먹을
수 있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 수도 있다. 옷이 더우면 벗어 던질 수 있고 추우면 더 껴입을
수 있고, 세탁기를 돌리수도 있다. 먼지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바닥을 슬고 닦을 수 있고 가
게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살수 있으면, 명을 데리고 병원에도 혼자 갈 수 있다. 운동회엔 엄
마 없이도 달릴 수 있고, 자모회에 엄마가 나타나지 않아도 마음에 담지 않을 것이며 친척
들이 모이는 날에도 엄마가 부엌에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을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날에 마치 먼지에 무관심하듯 엄마에 대해 무심한 척할수 있다. 실제로 슬픈 일 따위는 없
다고 자꾸만 자신에게 타이를 것이다. 조그만 나무 의자에 앉을 때, 여자애는 자라서 마술
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먼 훗날 여자애는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엄마가 사는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늙은 엄마의 집을 찾아가 모자 속에서 가장자리가 시든 장
미꽃들과 보라색 소국과 커다란 꽃잎을 가진 노란색 꽃과 흰 꽃들을 만들어 내고, 입 안에
서 핑크색 종이 테이프를 집이 가득 차도록 길게 뽑아 내고, 그 종이 테이프 속에서 깃털이
망가진 살진 비둘기들을 꺼내어 창 밖으로 날려 보내고, 그리고 비밀 번호가 635인 검은 트
렁크에서 메메를 꺼내 다시 살려 낼 것이다. 엄마의 웃는 모습이 여자애의 눈동자에 아프
게 박힌다. 여자애도 조금 웃는다.
제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태풍이 오는 계절
전성태
1969년 전남 고홍 출생, 중앙대문예창작과 졸업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생 수상, 단편 ‘닭몰이’,‘가문 정월’,‘매향’등 발표
돌쩌귀 한 축이 삭아빠진 ‘WC' 양철 문짝을 손으로 들어서 겨우 아귀를 맞춰 놓고 앉
긴 했는데, 거적대기 둘러친 것만 못해 앞산이 훤히 내다보인다. 멀리 갈뫼 쪽으로 자빠진
해를 멍든 구름 한 장이 들쳐업었다. 그 해를 빼앗겠다고 산마루에 포진한 먹장구름의 기
세도 심상치 않다. 고추를 두물, 세물째 따서 넌 때라 가을장마 시샘이 없을까마는 초장부
터 큰바람으로 본때를 보이겠다니 까짓 것 나도 날을 만났다.
“윳시, 그새 해냈네! 그새 해냈어그려!”
난데없는 곤말영감의 숨 넘어가는 목소리가 숭숭 털려나간 뒷간 토석담으로 파고든다.
보나마나 그 풋배 타령일 게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나는 울 밖으로 늘어진 가지에서 하나
를 따냈다가 썩은 밤내뱉듯 콩밭에 던져 버린 터이다.
“아엥 사그리 훑어 낼 일이지 어쩌끄롬 따박따박 하나썩 해대냔 말여, 천불나게!”
작년에 첫물을 본데다가 올해는 해거리를 앓아 손가락셈도 안 되는 것에 어떤 까마귀새끼
주둥이가 탄다고무장 목청이 높던 영감님이고 보면 며칠 전부터 누군가 몰래 해내는 모양인
데, 나는 이제 조막만하게 오른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맛이 들었기에 자구 잡숴 대나 하고
무심히 건드려 본 것이었다. 역시나 아직 가칠가칠하고 텁텁한 풋것이었다. 그런 것을 영
감님의 성질머리를 건드려 가며 벌써 네댓 알 바수어 낸 푼수로 보면 맛보다는 은근히 주인
곯려먹는 재미로 그러는 짓임에 분명했다. 도대체 어떤 작자의 수작인지도 부쩍 궁금해진
터라 귀를 쫑긋 세운다.
“누군 중 빤히 알고는 있었다만, 쾨 앞에서 그 짓거리를 해야?”
해대시는 게 어라, 심상치 않다. 헛총질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나들으라고(이웃이라고는
우리 집밖에 없으니)하는 소리 같다. 오늘은 마당귀에 앉아서 내 짓을 사그리 훔쳐 낸 모
양인가? “지미, 반정부 족쇠들!”
과연, 뭔가를 집어던지 모양인데 땅따그르, 뒷간 바람벽에 부딪쳐 불새밭에 처박히는 것은
개밥그릇이다. 집안까지 싸잡는 독살풀이에 나는 끙, 엉덩이를 들썩였다. 사발허통이나 다
름없는 뒷간 꼴도 그렇지만 영감님이 저렇게 해대고 보면 나는 없던 변비 기미마져 돌아 진
작에 일보기도 틀린 듯 싶다.
그래도 좀 지나치다. 설령 내가 그 짓을 했다손, 아니 더한 것을 먹었대도 이웃간에 집안
내력까지 들출 필요는 없잖은가. 우리 집이 오늘날까지 초가로 남아 있는 내력을 온 동네
가 다 아는 터, 집구석 꼴이 안됐다고 어른 주제로 타박하는 것쯤이야 이해하겠다. 그런데
저렇게 우리모자까지 싸잡아 건드리면 곤란하다. 새마을 운동 바람이 몰아칠 때도 동네에
서 유일하게 초가 신세를 못 면한 집이 우리 집이다. 어머니가 업구렁이를 품은 지붕이라
고 한사코 개량을 마다했기 때문이다. 그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업구렁이에는 사족을 못
쓰는 당골이다. 반장이네 이장이네 하는 동네 유권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꿈적않자
면에서 직접 공무원이 나왔는데, 그이는 그 면상에 대놓고 “국록을 묵재도 댁네 대에서 막
장 볼 상이로고, 시방 우리 업신님이 그러시네”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용하다는
소문은 들었던지 그 공무원은 팔월 무화과 낯빛이 되어 “이 골엔 순 반정부 인사가 처박혔
구만” 하고 돌아갔다. 그대 얻어먹은 별명이 대를 잇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별명을
좀 억울하게 얻었는지 몰라도, 나로 치자면 사실 옳게 받은 셈이다. 지난해 한탕 해먹은 국
가 기물이 있으니 혓바닥이 세 발이라도 할말은 없다.
그래저래 꼼짝없이 덤터기를 쓸것 같아.
“암마! 도둑 잡어 줄라믄 물겐 진가를 제대로 알어야 어째 볼 것아니요이. 그래 내...”
하고 발뺌을 하다가 나는 외려 화가 더 돋쳐서 담배까지 내뱉었다. 번연히 뒷간으로 기
어드는 걸 보고 개밥그릇을 내던진 건 생각할수록 심하다. 눈앞에 있었다면 그것이 오롯이
내 면상으로 날아들었을 게 아닌가. 기왕 이렇게 두드리자고 나오는 마당,
“이녘 땅에 뿌리박었다고 거 넝쿨은 아무디로나 나대로 암시랑토 않다요!”
나도 한껏 역정풀이를 했다. 콩밭 둑에서 굴뚝을 타고 넘어와 우리 지붕에 둥지를 튼 영
감님 저희네 호박에 대한 트집이 아무려나 제일 약발이 듣는 대거리겠거니 해서였다.
그래 놓고 얼마나 해대는지 보자고 바짝 도슬렀더니 아무 기척이 없다. 제대로 과녘에
들어백인 모냥이군, 하고 바람벽 틈으로 눈길을 쑤시는데 웬 승용차 한 대가 가로막고 든다.
차는 뒷간 뒤를 멈칫멈칫 감아돌더니 자갈더미 밟는 소리를 내며 이내 멈추는 것이다.
“힝, 굼벵이가 이제사 낯바닥을 내미는군.”
이 자식 똥을 한 볼때기 처멱여야지, 나는 화장지를 둘둘 말아 쥐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목소리 대신,
“와! 동화책에 나오는 집이다.”
하고 웬 낯선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흥부와 놀부에서 봤지?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저런 집을 짓고 살아단다.”
이번에는 나긋나긋한 여자의 목소리다. 낯선 목소리는 바람벽 틈에 대놓고 속살거리는
듯 가깝다./
“근데 근데 엄마. 허수아비가 왜 지붕에서 살아요?”
“어머머, 정말이네? 박 대신 호박을 지붕에 올린 것도 재밌지만 호박을 지키느라고 허수
아비를 올린 것은 더 재밌네. 여보, 사람이 사나 봐요, 마당에 텐트로 말려 둔게?”
“민속촌에서도 퇴짜맞을 흉가 같은데 뭘.”
어쭈... 나는 허리춤을 그러쥐고 양철 문짝을 퉁 차며 마당으로 나섰다. 승용차 창무네 매
달린 채 사철나무 울타리 너머로 집을 들여다보는 비둘기 가족은 낯선 외지인들이다. 나는
덤빌 듯 한 발을 내디디며,
“아예 마당 밟고 볼텨? 내 관람료는 안 받지.”
하고 내쏜다. 난데없는 나의 출현도 그렇겠지만 사뭇 비뚜름한 기세에 외지인들은 당황
해 어쩔 줄 모른다. 무안해서 까딱 머리를 젖힌 여자가 채 얼굴을 들기도 전, 차는 이미 고
샅길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나는 맵찬 눈길로 차 뒤꽁무니를 쫓다가 닭 쫓던 개 뭣한다고
새삼 지붕을 오려다보았다.
삭은 이엉 고랑마다 버섯과 개망초까지 뛰어올라 자라고 있고,
호박줄기는 이제 지붕갓머리를 다 휘덮었다. 누가 날 찾으면 곤말 영감이 “저그 문패 안
봬?” 하며 지석다리없이 집적거리기 일수인 그 쇠불알 같은 호박 한 덩이는 이엉을 헤적이
고 앉아 놀면하다. 지붕 한 귀에 삼아 올렸던 허수아비놈은 밀짚모자를 어디로 내버리고
민둥머리로 기우듬히 지쳐 있는지...
“참말로 유제(이웃)못 허겄네. 머 겁나서 장 못 담겄다고...”
잘코사니 입이 벙그러졌을 줄 짐작했던 영감님은 배나무 가지를 울 안으로 휘어잡고 고리
눈이다. 보아 하니 함지박가지 내놓고 배를 털어 내는 중이었나 보다. 나는 좀 미안한 마
음이 드는 한편으로, 천상 익은 과실은 못 자실 좀생이라고 코방귀를 질렀다. 그래도 그는
손끝에 갈씬거리는 배 세 알은 끝내 못 해냈던지 까치밥마냥 그대로 달아 둔 채 울타리 너
머로 고개를 세운다.
“이렇게 해라 저렇금 해라 내 간십할 처지는 아니다만,”
그렇게 끼여들더니,
“기앙지사 도깨이 짜리럴 들었으믄 씰어넹기든지 폴아치등지 양당간에 먼 수를 내야 쓸
거 아잉감. 열므내 모구 퍼리 끓어쌓더니만 요샌 밤마동 빙이가 한 마리 앉거서 구신 소
리를 해대는 것이 영 못살겄구먼”
하며 기어이 볼장까지 보고 만다.
“마침 호박이 몬자 이사 왔응께 아예 그 질로 따라 들어 살믄 쓰겄네요.”
나는 샐샐 웃으며 가시를 박아 놓고, 뒤란 언덕배기를 올라 콩밭 둑으로 내뺀다. 콩밭 위
로는 박씨 문중 선산, 종암이 녀석은 바둑판을 차려 놓고 눈이 빠졌을 것이다. 중반전에 들
어섰던 판을 놓고 내가 뒤를 누르며 일어서자, 녀석을 몹시 아니꼬운 눈초리였다.
그늘이 내린 안골 뜸은 그대로 그름 빛이다. 한데 얼린 응원단 손짓처럼 콩잎은 노대바
람에 희뜩희뜩 뒤집힌다. 콩밭을 휘드르며 놀던 바람이 뺨까지 훑고 간다.
“작것은 얼마나 모락시럽게 쎄레불라고 예행 연습도 없다냐?”
기다린 정성이 닳았던지 오신다는 태풍은 참 굵은 놈인가 보다. 으레 괴괴하고 후끈하고
찌무룩한 기운이 감도는 중낮이어야 하거늘, 이것은 소나기 그어 댈 상으로 갈피를 못 잡게
한다.
상석 한 귀를 차고 앉은 종암은 바득알부터 한 웅금 그러쥔다. 엉덩이짝을 대기 무섭게
딱, 바둑돌을 꽂는 게 그 사이 대단한 수를 엮어 둔 기세다. 나는 뜨끔하여 고의춤에 꽃았
던 손을 뽑아 낸다. 이윽히 수를 읽던 끝에,
“고자좆이구마.”
하며 뻣뻣하게 당겼던 허리를 누그러뜨리자. 녀석을 찌른 흑돌을 도로 집어낸다. 딴에는
도수 높은 안경까지 손가락으로 걷어 받치고 상석에다가 색연필로 친 바둑판을 짯짯이 훑는
데, 내 셈으로는 거긴 찌를 구멍이 아니다. 무릴 수를 귀띔해 준 것도 삼세판의 끝판도 얼
추 내 쪽으로 판세가 돌았기 때문이다.
“호! 자충수라...”
녀석은 턱을 훌고 돌을 바각바각 주무른다. 대학물 먹은 대가리 치고는 더디다. 입문서
에 줄을 쳐가며 열을 올리는 모양이지만, 넉점 접고 보름 가량 둔 바둑이 줄바득을 못 면했
다. 내가 녀석에게 해볼 만한 것은 나잇살이나 공짜로 더 먹은 것하고 이 바둑분이다. 나
는 고등 학교도 다니다 말아서 가방근부터가 대보지 못하게 짧다. 처음 두 번 서울로 내뺐
을 때는 학교에서 도로 받아 주었지만, 세 번째에는 어머니가 손을 끌고 가 굿판 비난수로
내리 사흘을 사정했는데도 에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물 쪽으로 돌아가면 난 참 할말이 없어진다. 종암이는 눈이 안 좋아서 그렇지
깎은 밤톨마냥 허여멀쑥한 게 논두렁 볕을 쬐고 자란 여기 물색은 아닌 것 같다. 그에 비
하면 나는 무쇠솥 밑창 같은 얼굴에, 그 빛깔만큼이나 깊은 여드름 구멍도 숭숭 많다. 봉자
년의 말에 따르면 너무 서둘러 배운 담배 탓이란다.
하긴, 나도 잘하는 게 요것말고도 또 있긴 하다. 용접봉도 댈 줄 알고, 담벼락쯤은 우습
게 미장을 하고, 삼동네에 묻어낸 보일러는 여태 뒷말이 없다. 그것뿐이냐. 근래에는 석재
공장에서 돌도 자르고 갈았다. 허나 그게 무슨 대순가. 서른 살을 눈앞에 차려 놓고 이촌
구석에서 썩고 있는데.
나는 담배를 빼물고,
“제대가 을매 안 남읍제?”
매양 묻던 그 소리를 또 한다. 빈말이래도 녀석이 듣기 즐겨 하는 소린줄 번연히 아는
터라,“공휴일 제하고 반공일 포개면 슥 달?”
하고 한마디 더 밀어놓아 본다.“딱 시십팔 일이요.‘
“그람, 돌아오는 학기에는 복학하겄구나? 니도 한총련이나?”
하고 좀 아는 체를 해볼 양인데, 녀석은 어물어물 웃고 만다.
“애당초 거기 안 들었다믄 잘했다. 요새 보믄 모다 각서 시고 도로 기나오지덜 않대?
아디리 단수 받고! 근디 거그 애기덜이 외통수에 걸려 영 시세 읍게 생겼드래도 끝까장 뻗
댔으면 좋겄드라. 우리 나라같이 시세가 오락가락허는 나라도 읍잖애?”
“행님! 거 다리 좀 안 털믄 바둑이 안 되우? 정신 사나와서 수를 못 읽겄네이!”
“자식, 밀리면 그 찜부럭이드라.”
나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누른다. 갑자기 바둑판에 적막감이 흐른다. 억새 덤불에 소시락
소시락 일던 바람 잦아들면 어김없이 풀새밭에 귀뚜라미 소리 인다. 찌릿찌릿 흘레 붙자는
그 소리에 더 부푸는 건 적막감. 이럴 때면 나는 천상 수놈인가 보다. 봉자녀내의 야리야리
한 살맛이 그리웁다.
“야, 놀고 먹는 노식아!”
그년이 작년 여름 잉기미거리에서 날 부른소리다. 미장이 장씨 일행에 묻어 공사판으로
나돌다가 거의 보름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썩을년이 내 짧은 학창 시절별호
를 부르나 하고 돌아보았더니, 목욕탕에서 막 나온 축축한 차림새로 봉자년이 서 있었다.
서방과 갈라서고 석재 공장을 하는 제아버지 곁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얼굴
을 맞닥뜨린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야, 서울 구경 제일 먼저 한 니가 고향을 지키는구나. 반갑다야.”
봉자년은 내 팔을 끌어 붙들고 설레발치는 거였다.
그날부터 우리는 한데 얼려서 다방에서 커피도 홀짝였고, 노래방도 갔고, 항구에서 회도
먹었다. 년이 떼어놓고 온 두 살배기 딸애가 자구 눈앞에 밟힌다며 흐느끼는 바람에 나는
소맷자락에 분가루깨나 묻혔다. 어느 한 군데 석 달을 착실히 못 버티는 내 주제에 장씨
일행에 붙어서 두 철을 공사판에서 난 것도 다 봉자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전력이 있는 여자면 어떠랴 싶었다. 봉자년의 말대로 노친네에 차마 말을 못 거내고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년의 배꼽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아예 살림날 결단을 했
으니 일쑤 년의 짜증이 옳은 것도 아니다.
년의 배꼽은 꽈리를 박아 놓은 것처럼 봉긋했다. 더러 애들 배꼽이 그런 것은 보았지만
다 자란 어른 것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은 처음이라.
“으아, 배꼬마리가 붓어 부렀냐?”
하고 윗몸을 벌떡 세웠는데, 년은 단작스레 까르르 웃어젖혔다.
“피잉, 사내라는 것들 손에는 그것밖에 안 잡히니?”
“암만 봐도 희한하게 생겨 부렀네.”
“우리 아부지가 누구네 산소일 하는데 엄마가 샛거리 내갔다가 거기서 날 싸질렀어야.
아부지가 이빨로 탯줄을 끊는데, 너무 질겼다나? 대중없이 물어뜯어 놓은 게 이 꼴이란다.
이래 뵈도 지금이야 봐줄 만큼 들어갔어야. 너, 학교 다닐 때 내 별명 못 들었니, 뽁지라고?
복어 말이야. 다 지긋지긋하게 못살 때 이야기구, 내 최대의 핸디캡이지만서두...”
봉자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눕는 거였다.
“다덜 부족한 거이 한 가지썩은 있잖겄냐?”
나는 그 꽈리 같은 것을 조몰락거리며 말했다.
“히히, 하긴 니도 신앙심 없으믄 보기가 영 괴로워야. 인물로 보나 비전으로 보나.. 그
러고 보니 니나 나나 쌤쌤이다. 그치?”
우리 사이를 걸고 넘어진 이는 정작 노친네가 이나라 봉자 아버지였다. 봉자 아버지는
대를 이은 석수장이인데, 몇 년 새에 일대에 들어선 석재 공장들과는 달리 비석과 망부석이
나 쪼을 뿐, 돈 된다는 건축 자재는 엄두도 못 내는 공장을 근근히 꾸려 가고 있었다. 더구
나 올 봄에는 정화 시설을 안 갖췄다고 환경법 위반으로 석 달 영업정지까지 당해 전기마저
끊겼다. 그런 비실거리는 공장에 정화 시설을 갖추라는 건 아예 문을 닫으라는 소리나 다
름없었기 때문에 봉자 아버지는 길길이 날뒤었다.
“지미, 신작로 저 짝은 없어도 되고, 이짝은 그기 꼭 있이야 된다는 벱이 으디 있냐구?
y어차피 바다로 섭슬리는 건 맹한가진디. 아싸리 와이로럴 쑤세박으라고 허란 말이여!”
그는 뇌물을 안 먹여서 정지 처분을 당한 것으로 단단히 믿었다. 그런 성질머리와 편벽
을 가진 위인이“시상 천하에 팔자 고칠 사내가 읍어서 당골네 새끼놈이냐, 으이? 혼차 살
어라, 혼차!”하고 봉자를 공장 돌마당으로 끌고 다니며 패댈 때는 참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ㄹ봉자와 함께 아무 데로나 내뺄 결심을 했다. 일해 둔 노임이나 챙겨서 뜨자고 장
씨 일행을 따라 나섰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 보니, 봉자년은 이미 서울로 내빼고 없었다. 봉
자 아버지 말로는 옛 서방이 싹싹 빌어 데려갔다는 것인데 나는 곧이듣지 않았다.
“으디로 내돌렸는지 싸게 대란 말요!”
나는 돌덩이 위에 앉아 시위를 했다.
“워따매, 총객 망부석 하나 나왔구마이.”
하고 봉자 아버지는 본 척 만 척 제 일만 했다. 저도 어쩌다가 한번씩은 돌을 못 뒤집어
서 용을 쓸 때가 있어 그 때마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 단통에 뒤집어 주고 돌아와 앉곤 했
다. 봉자 아버지는 돌에 먹줄을 퉁기다자 한쪽이 샐그러진 눈으로 이리 와보라고 손을 까
부른다. 그래 내가 줄레줄레 다가서면, 이번에는 먹줄 끝에 눈을 박아 보라고 손가락질이
다.
“뭣이 보이냐? 나가 요 줄을 퉁길 때마동 왜 한쪽 눈탱이를 지그시 감는 중 아냐? 이
거이 죽은 사램 문패가 될 돌인디 인생이란 거는 빛과 어둠, 그러니께 니 귓구녕에 맞을 말
로 살고 죽는 거이 한꾸네 있다는 그거거덩. 죽음이 행여 보일끄나 하고 나가 눈을 감는 것
이여. 알긋냐?”하면서 내 통수를 맵게 올려붙이는 것이다.
난 일이고 뭐고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장씨가 숱해 찾아와 정신 차리고 함께 일 나가
자고 해도 나는 텐트를 무덤 삼아 지냈다. 오로지 서울로 가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봉자년
을 만나서 우리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한번 속시원하게 자초지종이나 듣고 싶어서였다. 그게
다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마음이 돌아섰을 때는 무작정 이 촌구석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만 간절해, 드러누원도 엎어져도 한숨 뿐이었다.
“행님! 웬 한숨이유?”
종암이 녀석이대뜸 부르는 서슬에 나는 이마를 웅둥그린다. 담배 필터가 입술을 물고 늘
어진 탓이다. 녀석의 ‘행님’소리는 영영 귀에 익지 않을 성싶다. 콧물 훌쩍이며 고드래뽕
이나 하고 놀던 애가 어느새 면사무소 공익 근무 요원으로 자라 예닐곱 낫랄 차이를 무색케
하니 말이다. 때로는, 동네에 나도는 평판도 들었을 녀석이 창아리도 없이 그 ;행님;소리를
더끔더끔 섬길 때면 놀리자고 이러나, 다시 보게 된다.
“거, 주택 복구 보조금 건 말입니다.”
마치 그림자놀이 하는 손 모양을 하고 착점ㅁ할 데를 노리는 녀석은 남의 얼굴은 안중에
도 없다.“완파냐, 반파냐에 따라 다르다는디요.”“완파믄?”
“그람, 융자만 천이백이고요.”“보조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고라, 걷히는 의연금이 얼매냐에 따라 액수가 정해진다는디, 볼
게 없답디다.”“천이백이라....”
나는 가슴이 할랑거린다. 이거 용궁에 빠진 심청이 꼴났다. 일이 이리저리 꼬이더니만 외
려 큰석이 걸려드느라고 그랬는갑다. 이 번에는 내 편에서 바둑알을 바각이다가 종암이 깨
알콩알 캐묻고 들까 싶어 진작에 입막음할 작정으로,
“그 아재두 참, 내가 뭔 힘아자구가 있다구 그런 걸 다 알아봐 달랜지....”
하고 헛다리를 놓아 둔다.
“요새도 태풍에 넘어가는 집이 다 있나 봬?”
“왜 읍건냐? 것도 삼사십 년썩 묵은것, 칠팔십 년썩 묵은 것이 있는디.... 느그 집도 애그
니슨가 사란가가 스레트를 통째로 들어다가 깨밭에 옮게 논 통에 새로 성주한 걸로 안다
만.”
그만 입이 쑥 들어간 녀석은 끝내기돌을 넣는다. 지척에서 풀무치 한 마리가 떼그르르 허
공을 가르며 옮겨 앉는다. 나는 “울타리 둘렀다고 다 집이 아니다.” 해놓고, 빈틈없이 짱
짱한 녀석의 귀집에 딱, 흰돌을 꽂아넣었다.
귀퉁이를 한 귀밖에 못 훔쳐먹엇는데도 집내기를 해보니 백이 따낸 돌에서 다섯 점 남는
다. 승부는 볼 것 없이 배꼽점 어름 대마싸움에서 가렸지 싶다. 담배 한 갑을 내미는 녀석은
역시 아니꼬운 기색이다.
“날로 는다. 아생연후하고 살타라. 다시 말해 나부텀 밍줄 잇어 놓고 그 담에 넘도 거시
기 허라는 말씀인디, 고것만 맹심하믄 니도 솔찮은 바둑이다.”
나는 무릎을 두드리며 일어난다. 바둑돌 그릇을 도시락 가방에 챙겨 넣은 종암이도 기지
개를 켠다. 녀석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음마, 시간 좀 보소.”
하고 서둘러 산을 내려간다.
“반공일 오후인디 방우가 머가 그리 바쁘냐?”
“면에 도로 나가 봐야 해요. 비상이거든요. 태풍이 올라온다니께....”
입아귀가 샐쭉 죽은 녀석은 자전거를 내몬다.
초가 옆을 지나는 농로가 새터를 넘어 지방 도로와 잇닿고, 녀석은 그 길을 타고 버스 종
점인 잉기미 쪽으로 넘을 것이다. 너른 구룽밭에는 드문드문 사람이 박혔다. 비설거지를 하
느라고 바쁜 일손들인가 보다. 말려 둔 깻단에 비닐을 둘러씌우고, 무배추밭에는 비료를 뿌
릴 것이다.
나는 콩밭 둑길을 가로질러 초가 뒤곁으로 내려서다가 무춤 몸을 낮춘다. 내리막길을 내
달리던 종암이가 곡예하듯 몸을 꼿꼿이 세우고 영감님네 남은 그 풋배를 낚아채는 것이다,
아주 잽싸고 능속한 몸놀림이다, 녀석은 풋배를 신문 배달하는 아이처럼 콩밭으로 내던지곤
길모퉁이를 돌아 유유히 사라진다. 영감의 등쌀에 고달픈 건 누구라는 사실을 빤히 아는 놈
의 수작치고는 바탕없이 약았다.
바람 한 줄기가 시누대 울타리를 치더니 지붕에서 검불이 날린다.
빗도랑이나 겨우 돌린 뒤란은 힘받이로 걸친 여남은 개 말록이 언덕바지를 짚은 채 넘어
오는 바람벽을 받치고 있고, 허리까지 자란 지칭개와 개망초가 우거져 발 한 치 디밀기가
어렵다. 마당 한편에 쳐둔 텐트는 줄이 느슨해져 서리 맞은 애호박마냥 쪼물짝하다. 애초에
는 관리 사무소 격으로 쳐놓은 텐트였다. 그런데 요새는 그 도가 달라졌다. 태풍에 가옥이
파손되면 틀림없이 피해 조사를 나올 터이고, 사람 사는 집이라고 우기려면 틈틈이 드나들
며 잠을 자두는 수밖에 없는데 이 텐트는 그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는 줄을 행행하게
당기고 쇠말뚝을 새로 박는다.
내가 애초부너 태풍을 기다렸던건 아니다. 그나마 근근 들어 살던 초가도 올 해동비에 찌
그둥 우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노친네가 자다가 쫓겨나왔다. 그래도 시누대를 얽어서 흙벽
을 친 집이라 당장 넘어가지는 않아 며칠 더 묵새기다가 새터 쪽에 새로 난 빈 집으로 이사
했다, 입식 부엌 하나 제대로 안 갖춰진 그 집도 슬레이트나 올렸달 뿐이지 이 초가와 결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골에 전세에 다가 신방은 못 차린다는 조건이 붙었다. 나야 장씨 일
행에 묻어 공사판으로 나돌아 집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지만, 신방을 모 차리면
당장 가위에 눌려 죽을 판이라는 노친네는 사정이 달랐다. 마냥 그이를 남의 집살이로 지내
게 할 수 없어서 집자리에 조립식 주낵이라도 엮어 볼 작정이었는데, 혔바닥을 뿌ㅂ을 그
굼뱅이놈이 다 잡쳐 놓았다.
이러구러 짬만 보다가 오월도 훌떡 다 넘길 무렵이었다.
“거 지붕만 팝시다.”
지나가다 우연찮게 들렀다는 장사꾼인지 사기꾼인지 사기꾼인지 알 길 없는 놈이 대뜸 내
놓은 흥정이 그랬다. 그는 이엉 한 귀퉁이를 되작여 누에만한 굼뱅이 한 마리를 솎아 내더
니, “하! 이런 굼벵이 굴이 여태 남아 났다니....”
하며 감탄 연발이었다. 놈은 오십만 우너을 내놓겠다고 했다. 나는 웬 횡재냐 싶었다. 놈
이 저 썩어 문드러진 지붕을 손수 드러내 주고, 거기에 그런 적잖은 돈까지 얹어놓겟다니
누가 들어도 꿩 먹고 알로 입가심햇다는 말 나오게 생겼다고 손바닥을 쳤다. 놈이 굼벵이를
더 키워야 쓸 만한 물건이 되겠다며 초가을에나 이엉을 들어내자는 걸, 나는 몇 푼 더 우려
낼 생각으로 넌지시 딴청을 놓았다.
“그리 오래는 못 기다리는 공동품인디....”
“물건을 잘 키워 놓으면 내 그 품삯까지 쳐서 삼십을 더 얹어드리리다. 땅 살 사람도 물
색해보고.”
그래 놓고 간놈이 입때껏 낯바닥을 안 내미는 것이다.
여름내 나는 그 지붕만 쳐다보며 지냈다. 굼벵이를 가꾸는 일이라고 해봐야 기갈 든 지붕
에 물을 뿌려 두엄더미 안 아쉽게 푹 삭혀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붕에 물을 대고 있노라
면 오가는 사람마다 무슨 장난으로 지붕농사냐고 혀를 털었다. 참새 한마리 얼씬 못하게 하
느라고 허수아비를 지붕에 올려 구경거리가 되었던 것까지 생각하면 굼벵이놈을 갈아 마셔
도 시원찮을 판이다.
나는 손을 털고 마당을 나섰다. 사철나무 울타리를 경계로 삼은 앞텃밭엔 노친네가 갈아
둔 무와 배추가 제법 무성하다. 제대로 솎아 내지 않아 모판 같은 열무나 겨우 상추 포기만
큼 벌어진 배추는 다른 집들 것에 대면 훨씬 더딘 생장이다. 노친네 성미에 저리 가만 둘
리 없는데, 백중맞이 대목 뒤로 그이는 집에서 지내는 날이 드물었다.
나는 밤을 잉기미의 의용 소방대 사무실이나 텐트에서 나기 일쑤이다. 소방대 사무실 소
파는 잠자리가 좀 옹색해서 잘이지 밤으로 놀다가 먼길을 안들어와도 좋으니 한결 나은 편
이다. 그래도 여름 한철은 봉자네 석재 공장에서 밤일을 하고 거기에서 거꾸러져 잤다.
어느 하루 낮에 “어이, 잇는가?” 하고 텐트 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장씨인 줄
알고 홑이불을 말아 감는데, 텐느속으로 머리를 비집어넣는 이는 뜻밖에도 봉자 아버지였다.
또 무슨 해찰을 부리려나 나는 적이 긴장했다. 그는 영업 정지 탓인지 봉자를 패대던 때의
기세는 없이 꽤 곯은 낯빛이었다. 선산 일을 하나 맡아 손이 달리는데 며칠만 바짝 도와 달
라고 했다. 공장은 가정용 전기를 끌어다가 전압기로 튀겨서 밤으로만 몰래 기계를 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침 용돈도 궁하고, 밤시간에 잠깐 거들면 된다는 말에 흔감했다가, 문득
미운 생각이 치밀어서 도로 이불을 감고 돌아누워버렸다.
“당골네 자식이라 했던 소리는 내 미안함세.”
휴-한숨에 묻어 오는 그의 더운 입김이 귓결에 느껴져도 나는 기척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반시간은 족히 뭉그적이다가 묶어 둔 아랫배를 그러쥐고 나서니, 봉자 아버지는 토방으로
물러나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발 밑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내 애비로서 할 말은 아니네만, 봉자 그년하고 깨진 건 천만다행인 줄 아소. 그 샐 못
참고 간통으로 들앉졌네.”
나는 봉자 아버지와 저만큼 떨어진 토방에서 맥없이 주저 앉았다. 서로 등지고 앉아 애꿎
은 담배를 몇 대나 그슬렸을까, 던적없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자고로 사나이넌 말이여 여자하고 돈하고만 조심하믄 벨 탈이 읍는 거거덩.”
봉자 아버지가 입을뗐다.
“나 시방 헷또가 팍 돌아불겄소. 한때나마 사람 정으로 살맛을 준아가.... 여자 쪽으로는
안중 철이 안 들어서 그란지 몰라도 그때는 나가 왜 사는지 알 것도 겉었는디,... 암튼 갸를
다시 보믄 그 독헌 배꼬마리를 후벼 내고 말 것잉께 아재는 말리지 마시시오.”
그러고 나서도 한참 만에나는 그를 따라나섰다.
트림을 해대며 툇마르에 앉았는데 사위는 금세 어웅하다. 동편으로 세 굽이 키대로 포개
진 산이 어둠에 녹아빠지고 있다. 앞산 쪽에서는 거무스레했던 때깔이 봉봉을 넘으며 연해
밀개지다가 끝내 마지막 봉우리에서는 잿빛 하늘과 얼려 버렸다. 어둠은 꿀렁꿀렁 흔들리며
고이는 것 같다.“하, 저닌도 싸게 오네. 비료나 허체 뽈끄나.‘
나는 동굴처럼 어둔 광에 발을 담근다. 벽과 기둥을 쓸어 봐도 전식불 스위치는 어디에
붙었는지 잡히지 않는다. 어렴풋이 눈에 익어 오는 광 안은 자질구레한 가재 도구를 쓸어넣
은 창고답지 않게 큰 물건은 아래 작은놈들은 위로 업히고, 옹기는 옹기대로 그슷은 그릇대
로 들앉아 가지런하다. 발 밑에 밟히는 쌀톨 하나 없다. 시렁의 라면 박스는 무구함인가 보
다. 위로 삐죽이 코를 쳐든 회 색 나막신 한 켤레는 업구렁이 나들이 신발이다. 노친네는 밥
을 먹다가도 울 밑으로 구렁이가 언뜻 스치면 저 나막신을 들고 내달아 땅바닥에 가지런히
놓아 두고 “아이고, 출타하실라고라. 몰른 땅으로만 메ㅊ이 댕게오시시요이” 하고 합장례
를 올렸다.
드디어 쌀가마니 옆에서 위아래를 새끼줄로 질끈 동여맨 비료 포대 하나가 눈에 띈다.
작한 비료 포대를 들쳐메고, 노는 손에 해머와 소주병 담은 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마
을에 들어오기 시자한 전깃불들이 까물까물거릴 만큼 바람은 사납다. 아직 비가 뿌리지 않
지만 도랑가에선 늙은 밤나무 그늘 아래서라면 무 듣는 소리도 들릴 만큼 뺨에 감기는 공기
는 축축하다. 조금돌이등을 넘는데,“아이, 노식아!”
누군가 언덕빼기 아래 밭자리에서 부른다. 빈 비료포대를 옆구리에 낀 장씨가 올려다보고
있다. 이번에는 한 달포 만이다. “아예 추석 쇠려고 나오셨수?”
나는 길가에 쪼그려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 문다. 장씨는 새 포대잇을 낫으로 그어 낸다.
낮일로 밥벌이를 하면서도 가랫자루 근성을 못벼려 어디를 가나 노상 전잡 걱정인 것을 보
면 쑥백년 농사꾼 내림이다.
“추석은 무신... 태풍에 쉰다고 해서 한 으틀 짬낸 거여. 낼 다시 가면 한 열흘거리나 될
랑가. 업자놈이 안 올 줄 알고 아싸리 간조를 반이나 띠놓고 주더라.”
“백돌 멧 장 빼놓고 오지 그랬수.”
“그나저나 니눔이 다 비료 푸대를 메고 벨 일이다?”
“왜요, 이 실바타운에 순 깔린 기 뗏장인디, 미리 고것들이나 키워 노믄 동네 노인들한테
흑 귀염 받을까 해서 나선 길이오.”
번쩍 번갯불이 지나간다. 우르릉. 갈뫼 쪽 하늘이 꺼지는 소리를 낸다.
“욕보시오.”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봐, 노식이!”장씨가 다시 불러 세웠다.
“낼 떠날 셈인디 따라 나설랑가? 개도 자꼬 나도는 놈이 재 채우는 벱이여.‘
나는 손사래를 치고 돌아선다.“일 읍네요. 앉아있어도 오가는 바람이 돈 물어다 주는 수
가 이제라....”“왜, 도 바람이 도졌남? 잴 첫차인께늦지 않게 나와 보라구!‘
나는 장씨의 말을 뒷전으로 흘려 버린다. 남 생각해주는 말 같지만 걱실걱실 일 잘하고
이것저것 부려먹지 놓으니 이쉬워 매번 저소리다. 이항 하나를 남겨 두고 비가 듣기 시작한
다. 배추 잎사귀를 투둑투둑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쳐드니 찬 빗방을이 뺨을 때린다. 나
는 남은 비료를 내털듯 쏟아 놓고 한 걸음 처마밑으로 기어든다.
그새 몸은 젓어서 습한 김이 피어오른다. 손바닥으로 우산을 해 쓰고 밭둑으로 뛰어가 해
머와 술 봉지를 낚아채서 다시 처마 밑으로 기어들 때는 초가 이엉에 낙숫물이 듣기 시작했
다.
비바람이 더 여물고 시간이 이슥해져서야 일 해내기가 용이할 것이다, 하긴 내가 무슨 도
둑질을 하는가. 작년나라 고물 잡숫던 것에 비하면 이 일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일이다.
무엇보다 내 물건을 투자하는 일이니 안전하기로 치자면 바람결에 방귀 흘리기보다 쉽다,
공으로 거저먹자는 것도 아니고 차차로 꺼나가 테니 쥐뿔도 없는 놈이 무담보로 목돈 좀 당
겼는 셈이다.
작년 가을은 참 ...재미가 좋았다. 여러 모로 운수가 잘 맞아떨어졌다. 우선 빌린 차에 드
라이브시켜 주겠노라고 봉자까지 태운 것도 잘했다. 뭐가 되려고 그랬는지 풍광 좋은 곳 많
이 놔두고 개막이 공사장 근처의 폐염전 마을은 진 집과 창고만 갯둑 아래로 늘어선 채 갯
바람에 말라 가고 있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발가벗은 여체 사진이 벽에 나붙고 메니
어로 조잡하게 짠 침대가 놓인 방을 발견했다. 아마도 젊은 인부하나가 지냈던 방이었나 보
다. 그 방에 들어 우리는 눈을 맞추었다. 내가 염전에서 눈을 맡춘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염전에 널려 있는 야수용 경운기 대가리와 몇만 평이 넘을 듯 싶은 검은 비닐 매트리스, 거
기에다 순 쇳덩이리인 롤러까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구시렁거리자, 볕 좋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뺀 봉자년은 제 소린 줄 알고 희뜩 돌아
보더니, “니는 재활용도 못 하는 불량품이어야.” 하고 눈을 흘겼다.
그 날부터 근 일 주일에 걸쳐 나는 그 고물들을 빼돌렸다. 마지막 차짐에는 무쇠솥 네 개
와 집집 처마 밑에 제비집마냥 나붙은 전기 계량기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 날것으로 해먹은
것이 돈 백이 넘었다.
부엌문 두 짝이 바람을 안고 활개를 친다. 자정이 훌쩍 넘었는데도 바람은 호박 한 덩이
도 건드리지 못하고 빈 데로만 들쑤시고 다니며 장난질이다. 비는 뿌리다 말다 한다. 사람
독종도 자꾸 얼굴 맞대고 있으면 순해 보이듯, 벌써 몇 시간째 비바람 뒤척이는 것만 들여
다봐선지 태풍은 오는지 가는지 매지근하다. 나는 손전등을 더듬어 들고 마당을 훑어 본다,
삭은 검불이 흘러내려 낙숫물 고랑은 개그슬린 뒷자리 같다. 바람이 서까래 밑을 들이박고
나가는 소리가 무척이나 으스스하다. 묵은 집이라 저런 짐승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고 자란 집인데도 괜히 무슨 흉측한 짐승을 대하듯 두렵다.
나는 손바닥에 밭은 침을 뱉고 해머 자루를 움켜쥔다. 남의 눈 피해 덧나지 않게 하기에
는 맞춤한 시각이다. 영감님도 잠이 들었는지 들창에 서렸던 텔레비전 푸른 기운도 가셨다.
툇마루 산기둥을 툭툭 두드리자, 의외로 들썩인다. 내처 해머를 머리 위까지 치켜들고 내리
쳐 본다. 대번에 서까래받이가 찌그둥 기울고 호박이 덩굴째 쏟아져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집을 빙 돌아가며 홑벽이며 기둥, 골골 샅샅이 쳐본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이엉은 한 뭉텅
이씩 빠지지만 흙벽은 맞은 자리만 털릴 뿐 넘어갈 기미가 없다. 기운 쪽으로 너ㅍ어내면
땅바닥으로 주저앉을까 싶어 뒤란 모퉁이로 들어 섰으나 여차하면 그 비좁은 데 묻혀 무덤
삼기 십상이겠다. 나는 미끄러운 언덕빼기를 뭉개고 다니며 말목부터 모로 쳐 넘긴다.
뒤란 바깥귀 두리기둥을 두드려 들도리까지 빼내니 집이 반은 뒤틀린다. 건너편 기둥에
해머질을 해대자, 어느 순간 우지끈 나무 두틀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뒷벽은 쪼개져 언덕에 쳐박힌다. 서까래 한 귀가 이마를 긋고 가는 바람에 나는 철퍼
덕 땅바닥을 주저 앉았다. 귀도 멍멍하지만 일어나는 흙먼지에 도시 눈을 뜰 수가 없다.
난데없이 울타리 너머에서 손전등 불기둥이 쑤석거려 나는 아예 납작 드러누워 버렸다.
“이거이 먼 일이당가!” 하고 소리치는 이는 곤말영감임게 틀림없다. 나야말로 일났다. 나
는 헤무른 이엉 날개를 이불처럼 끌어덮곤 내처,“아이고, 사람살려! 사람 죽으요!” 해 놓
으니 곤말 영감이 첨벙첨벙 마당으로 뛰어드는 기척이다. 전짓불이 휘도는 게 쉽사리 날 발
견하지 못하는 눈치라.“아이고, 사람 살려!” 하고 한 번 더 소리를 낸다.
“먼 일이여! 왜 거그는 기들어가 있으까이? 으마, 이거 얼굴에 피가 벌거시.”
젠장맞을, 손전등은 왜 그렇게 얼굴에다가 쑤셔박는지....
“어이고, 내 두다리! 작살난 모냥이네!”
“어째, 운신을 해보겄냐?”
영감님이 어깻죽지에 손을 밀어넣는다, 아구구구... 나는 땅바닥으로 한 바퀴 몸을 굴리고
간신히 일어난 척 영감님의 앙상한 어깨에 몸을 부린다.
영감님네 툇마루에 드러눕자, 주인은 걸레인지 수건인지 축축한 것을 얼굴에 들이댄다, 나
는 그것을 빼앗아 들고,
“무단히 집 받치러 올라왔다가... 휴지 같은 건 읍소?”
“신문지 쪼가리야 많제.”
“쯧, 괜찮은 거 같응께, 면에 전화나 한 통 너줄라요?”
“보갠소에?”“아니, 면사무소 대책 본부요. 집이 넘어갔다구 신고는 해얄 것 아니겄
소.”“그란다마는....” 영감님이 방으로 들어간 지 한참 만에.
“아, 민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그 안골인디 집이 한 채 자빠졌소. 이,싸그리. 사람은 주지넌 안 했지만서두 마이 다
체 부렀소. 누네 집이냐고? 이, 일공오삼번지... 호주는, 그러니께 이 큰가이내....”
“호적에는 이대녀로 올랐소!”
내가 노친네 함자를 정정해서 소리쳐 넣자.
“이큰가이내가 아이라 이대녀라네. 그렇제 큰 대, 기집 녀... 피해액? 그기야 암껏도 읍는
거나 다름없지만서두 글쎄나... 음마, 신고한 사램은 누군 중 알어서 뭐 할라고? 암튼 조새
나오 보믄 알 거 아이요! 이상 신고 마치겄소이.”
나는 그제야 온몸에서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아무 데라도 드러눕고 싶다.
빗길을 걸어오며 전짓불에 들여다본 집은 깔축 없이 돋아 있어 누가 건성 봐서는 , 원래
저 꼴 아니었어? 하고 되묻게 생겼다. 새터 노친네 집으로 비척비척 기어들었을 땐, 나는 잠
들면 다시는 못 일어날 사람처럼 그대로 쓰러졌다. 밤새 나는 꿈인지 생신지 모를 귀살스런
소리와 광경에 시달리며 뒤척였다. 빛 한 점 없는 그 믐밤, 큰 업구렁이가 봉자 몸뚱어리를
친친 감은 채 물바다로 어디론가 헤엄쳐 가는데 나는 초가 지붕 위에 앉아 애타게 부르기만
했다. 전화를 받은 것도 같은 데 무슨 말을 나불거렸는지 흐리마리하다. 아니다. 종암이 녀
석이 “아, 글쎄 태뭉이 씨급이 된 디다가 진로마저 일본으로 확 틀고 지나갔는디 왜 우리
면에서 가옥 파손이 하나 나 왔냐며 면장님이고 군청이고 전화질이고 난리예요” 하고 씨월
거리던 소리만은 귀에 쟁쟁하다.
분명 사위가 훤해졌으니 날이 샌 것만은 분명하리라. 나는 문을 벌컥 밀어 냈다. 안개가
피어오른 들녘은 착 가라앉아 있다. 그제야 나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꼬였다는 사실을 알
고 문지망에 낯을 묻었다. 전국을 탈탈털어 태풍에 넘어간 집은 우리 집밖에 없는 게 아닐
까. 방송마다 우리 초가에 카메라를 들쑤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옷가방을 끼고 잿등 너머 정
류장으로 허둥지둥 나가지니 그 예감은 더 확실해진다. 뒤돌아본 마을은 밤새 가을로 한 자
는 더 성큼 빠진 듯했다. 누릇누릇 이삭 팬 논들은 어디 한 구석 기계총 흉터처럼 누운 데
가 없고, 하다못해 길가에 퍼질러져 굳은 쇠똥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간
밤의 태풍으로 못쓰게 된 건 나 혼자뿐, 다 때깔이 피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가방을 하나씩 둘러메 장씨 일행이 잿등을 넘어온다. 어디 몸 감출 데 없나 둘러봐도 물
젖은 도랑에 엎어지면 모를까 사방천지에 몸담아 줄 응달 한 점 없다. 장시 일행은 도로로
올라서서 신발에 묵근히 엉겨붙은 흙을 털어 낸다. 무슨 농지거리를 삶았는지 한통으로 내
지르는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젠장, 난 고개를 틀고 먼산바라기다.
“자식, 천상 양반 되기는 글렀다. 앉거서 돈 버는 수를 터득한 놈이 웬일이냐?”
장씨 옆에서 선 영섭 아빠다.“나 거기들 안 따라가우.”
내가 뚱하여 소아붙이자 “니 간밤에 일 저질렀더만? 아주 밭자리가 훤하든대.”
하고 장씨가 말을 내고, 옆에 선 영섭 아빠가 받아서 “퉁퉁 불어 볼 만하더라니께” 하
며 피할 데 없이 몰아붙인다.
“지미럴, 금세들 보셨구마이, 거 참 재밌대.”
엎어져도 똥칠밖에 더 하랴, 나는 헤헤 너털웃음을 내놓고 만다.
행여 뉴스에 도배가 되었더냐고 물어 볼 참인데,
“보다 뿐이여? 에끼, 아모리 비료 허기 싫대두 그라제, 싸래기를 그리 허체놔! 밤새 눈보
라친 중 알았단 말시.”
한다 어안이 벙벙해져 섰던 나는 때마침 재를 넘어오는 버스가 눈에 들어오자 벌쩍 뛰어
나섰다.
“아, 싸게 서둘러요! 오늘 일당은 죽쑤고 말 거여?”
제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양파
하성란
1967년 서울출생
1992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로 등단
1997년 소설집 <루빈의 술잔> 출간
1
견인차의 운전사는 기중기에 감긴 쇠사슬을 풀어 단번에 옥수수밭 한가운데로 늘어뜨린
다. 옥수숫대 사이로 내려가 있던 기사가 뛰어올라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갈고리를 잡는다.
거꾸로 뒤집힌 자동차의 창은 모두 께어져 있다. 기사는 쇠사슬 끝에 달린 갈고리를 뒤창에
서 앞창으로 차례로 통과시켜 바닥 위에서 보자기 묶듯 단단히 그러맨다. 도르래가 감기면
서 높이 삼 미터 높이의 옥수수밭 위로 서서히 자동차가 드러난다. 보닛은 아코디언의 주
름통처럼 구겨지고 탈선된 의자들은 쇠사슬이 흔들릴 때마다 땅으로 쏟아질 것처럼 들썩거
린다.
두 명의 경찰이 아까부터 쭉 길 위에 선 채 자동차를 내려다 보고 있다. 도르대에 걸린
자동차가 들어올려지면서 경찰들의 시선은 시계방향으로 조금씩 각도가 바뀐다. 옥수숫대
끝으로 올라온 자동차를 보느라 지금 둘의 고개는 완전히 뒤로 젖혀져서 주름이 이마로 쏠
리고 목젖이 크게 부풀어 있다. 하나는키가 크고 깡말랐으며 다른 하나는 벨트를 맨 바지
허릿단 위로 두툼한 비곗살이 비어져 나와 있다. 큰키의 경찰은 옥수수밭과 방금 전 환자
둘을 싣고 앰뷸런스가 사라진 언덕길을 번갈아 쳐다본다. 파출소 책상 위의 비벼만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못한 자장면이 이제는 불 대로 불었을 것이다. 큰키는 담배꽁초를 구두굽으
로 지그시 밟아 불을 끈다. 또같이 피우기 시작한 담배지만 곁의 덩치는 아직도 담배를 물
고 도로 위에 얼굴을 박고 있다. 급브레이크를 밝았다면 노면 위에는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
게 남아 있을 것이다. 얼굴과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이 아스팔트 위에 점점이 떨어진다. 아무
리 들여다봐도 아스팔트 위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필터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
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뀌어 튕긴다. 담배꽁초는 포물선을 그리며 옥수수밭으로 떨어진다.
그 사이 차는 도로 위로 들어올려져 덜컹 소리를 내며 바로 놓인다.
운전석과 보조석에 타고 있던 사람을 꺼내느라 절삭기로 잘라낸 구멍 속으로 검붉은 핏자
국이 엉겨붙은 의자 시트가 보인다. 큰 키가 사건 경위서 꾸러미를 펼쳐 차량 번호와 차종
을 적어 넣는다. 고무 깔창 위에 슬리퍼 한 짝이 뒤집혀 있다. 분홍 형광색 욕실화다. 발판
에 구멍이 뚫려 있고 사이사이 미끄럼을 방지 하기위한 빨판 간은 것이 붙어 있다. 덩치가
의자 시트 틈에서 얇은 책자를 들어올린다. 군데군데 떨어진 핏방울 때문에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책자를 시트에 대고 대충 문지르자 붉은 테두리 안으로 문맥이 끊긴 글자들이
나타난다. 백화점 통신 판매용 책자다, 책자의 빈 여백마다 자동차 번호가 빽빽하게 씌어 있
다. 이런 게임이라면 이 곳으로 오기전, 시내 네거리에서 보행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경
찰들도 한 게임이다. 무작위로 자동차를 한 대씩 골라 번호판의 네 자릿수를 합산해서 끝
자릿수가 큰 번호를 택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하지만 고속 도로에서 떨어진 이 굽은
길은 차량 통행이 뜸한 곳이다. 앞차의 번호판을 보려 했다면 망원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부
주의로 인한 사고는 아닌 것 같다. 운전자는 적어도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좌로 굽은
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네 원심력이라고 알지? 큰키가 덩치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면서
묻는다. 덩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이거 왜 이래. 안 그래도 숨
막히게 더운데. 큰키는 이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옥수수밭 건너편으로 간다. 벼랑 아래로 필
리핀의 계단식 논처럼 겹겹이 펼쳐진 감자밭이 내려다보인다. 과속으로 도로에서 탈선을 했
다면 이 차는 옥수수밭이 아닌 이 벼랑 아래의 감자 밭 한가운데로 추락했을 것이다. 덩치
가 반쯤 어긋나 덜렁거리는 콘솔 박스의 덮개를 힘주어 떼어 낸다. 안에 든 잡동사니들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가스가 바닥난 일회용 라이터들, 포장도 뜯지 않은 면 장갑 두 켤레, 먼
지가 일어나는 값싼 휴지, 헤드에 엉킨 트롯 테이프, 들고 있던 비닐 봉투에 하나씩 주워 담
는다. 의자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반짝 빛난다. 얼굴을 고무 깔창 위에 대고 팔을 의자 밑으
로 밀어 넣어 간신히 밖으로 끄집어 낸다. 붕대 같은 면헝겊으로 친친 감겨 있다. 30센티미
터 길이의 회칼이다. 큰 키는 회칼을 햇빛에 들이댄다. 날 끝이 광선처럼 빛난다. 무심코 칼
날 위에 엄지손가락을 대본다. 순간 손끝이 날에 베이며 피가 솟아오른다. 큰키가 허겁지겁
입으로 손가락을 빨면서 중얼거린다. 끔찍하군.
차를 들어낸 자리에는 아직 채 열매가 영글지 않은 옥수수 수십대가 뭉텅 뿌리채 뽑혀 있
다. 견인차의 꽁무니에 묶여, 뒷바퀴만 땅에 닿은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언덕길을 더
디게 올라간다. 경찰들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이봐, 몇시야? 두시 사십분. 에이, 점심
은 또 물 건너갔군. 뭘 먹지? 여하튼 오늘은 끈적하고 붉은건 싫어. 운전대를 잡은 큰키가
사건 경위서의 빈 칸에서 잠깐 멈칫한다. 덩치는 비닐 봉투 안에 든 회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건 예정된 사고가 분명하다. 운전자는 여자를 태우고 마지막을 바다를 보러 가고 있
었다. 하지만 가는 도중 마음이 변했고 속력을 높여 곧장 이 옥수수밭으로 돌진했다. 큰키는
빈 칸에 거침없이 휘갈겨 쓴다. 동반 자살로 추정.
큰키가 속도를 낸다. 거대한 간판 아래를 지나친다. 새 간판이다. 형광 도료가 구덕구덕
말라 가고 있다. 간판 가운데로 원근법을 잘비켜 그린 큰길이 지나고 있다. ‘온 세계는 한
길로 통한다. 020 한세통신’이라고 적힌 핸드폰 광고다. 경찰차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
견인차를 순식간에 추월해 앞지른다.
2
의자들을 식탁 위로 올리다 말고 남자는 가슴을 더듬어 남방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든
다. 담뱃갑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데도 담배가 꽉 차 있던 형태 그대로 온전하다. 갑 뚜껑
을 뜯어 안을 들여다본다. 역시 빈 갑이다. 담뱃갑조차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구겨 버린
담뱃갑 속에서 나중에야 분질러진 담배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늘처럼 몇 개비
남아 있을 것 같은 담뱃갑이 텅비어 있을 때도 있다. 남자는 빈 갑을 구겨 쓰레받기 위로
던지고 남은 의자들을 마저 식탁 위로 올리기 시작한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남자는 한 번도
칼을 잡지 못했다. 강화도에서 비브리오균 감염자 세명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보도가 있고부
터다. 마지막으로 한 개 남은 의자를 거꾸로 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돌아서니 엉덩이가
수족관 유리에 눌린다. 수족관 안에는 족히 1.5킬로그램 정도 나갈 양식 넙치 다섯 마리와
우럭 세 마리, 뱀장어 들이 들어 있다. 넙치들은 수족관 바닥에 틈을 남기지 않고 까맣게 누
워 있다. 그 위로 넙치의 몸을 밟듯 우럭들이 넓은 공간을 유유히 돌아다닌다. 물 속에 든
것은 실물보다 훨씬 커 보인다. 수족관은 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가게 유리창과 맞닿아 잇
다. 가끔 주방 의자에 앉아 담배를 필 때면 수족관 고기들 사이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찌그러지고 눌린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한참 동안 수족관 앞을 떠나지
않아 엄마들과 아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질 때도 있다.
주방 옆으로 난 뒷문을 열고 공동 화장실로 간다. 남자가 일하고 있는 일식집 ‘미도리’
는 부대찌개와 돌솥비빔밥 전문점 사이에 끼여 있다. 미음자 모양의 상가 텅 빈 가운데의
한쪽에 화장실이 있다. 마당에 서면 모든 가게의 뒷문으로 가게 안이 들여다보인다. 사방에
서 취객들의 술 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사이사이 부대찌개점 쪽에서 박자가 맞지 않
은 유행가가 도드라진다. 고무 양동이 가득 물을 길어 와 마대 걸레를 빤다. 마대 걸레를 들
썩일 때마다 먼지가 섞인 구정물이 발등으로 튄다. 남자는 분홍색 형광 욕실화를 신고있다.
하루 종일 주방에 있다 보면 두 발은 늘 물에 분 세숫비누처럼 되기 십상이다. 주방의 타일
바닥에서도 잘 미끄러지지 않고 물도 잘 빠지는 이 욕실화가 제일 편하다. 게다가 욕실화
같은 슬리퍼는 왼쪽 오른쪽 따로 구분이 없어 그냥 발에 닿는 대로 꿰어 신으면 된다. 남자
는 가게 안쪽부터 지그재그로 걸레질을 하면서 출입문 쪽으로 온다. 등 뒤로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수족관 유리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누군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금
헤엄치고 있는 것은 우럭 한 마리뿐이어서 남자 쪽에서도 밖이 잘 보인다. 우럭처럼 불거진
두 눈을 끔벅거리면서 누군가 계속 수족관 유리에 붙어서 있다. 두 눈의 시선은 거리를 오
가는 사람들처럼 물고기를 좇아가는 대신 가게 안을 살피고 있다. 남자가 걸레질을 하다 말
고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자꾸 눈이 마주치고는 하기 때문이다.
화장실 입구에서부터 질금질금 토사물이 쏟아져 있다. 붉고 누런 토사물 속에 퉁퉁 분 우
동 가닥이 섞여 있다. 부대찌개 가게에서 노래를 부르던 손님 중의 한 명이 틀림없다. 토사
물처럼 정직한 것도 없다. 열린 화장실문 틈으로 변기를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중
년 남자의 등이 보인다. 구겨진 바지자락은 이미 토사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양동이와 마대
걸레를 세워 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다가 남자는 멈칫 놀란다. 한 여자가 주방과 연결된
바 앞의 스탠드 의자 위에 걸터 앉아 있다. 영업 끝났어요. 일어나기는커녕 여자는 아예 바
위에 얹은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다. 남자는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한다.
의자들을 다 내려놓을 때까지도 여자는 꼼짝하지 않는다. 다리가 긴 스탠드 의자 중간에 대
롱거리는 여자의 두 다리가 보인다 .복어처럼 알이 밴 종아리 위로 힘줄이 팽팽하게 도드라
져 있다. 의자 위에 얹힌 여자의 몸은 20킬로그램짜리 쌀 부대만하다. 남자는 이런 손님들에
익숙하다.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 술을 시켜 놓고 술 대신 잠만 자는 손님들을 택시까지 잡
아 태워 보낸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의 어깨를 흔들어 깨울 생각으로 의작 가까이 가지만
여자에게서는 술 냄새 대신 물에 젖은 신문지 냄새가 난다. 남자는 허리를 굽히고 주방으로
들어가 여자의 맞은편에 가 선다. 헝클어져 보푸라기처럼 뭉친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난
반듯한 가르마가 남자를 향하고 있다.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든 여자가 남자를 향해 입을
들썩거리지만 정작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는 다시 말한
다. 아무거나 줘. 너무 늦었나. 미안해. 잘못하면 반말처럼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말끝이 불분
명한 말씨다.
남자는 뜰채로 바닥을 내저어 제일 부피가 작은 넙치 한 마리를 떠올린다. 바닥에 붙어
있는 넙치를 떼내느라 겨드랑이까지 물 속에 담가야 했다. 물 비린내가 숱진 남자의 겨드랑
이로 옮겨진다. 수족관에 든 물은 산오징어를 사면서 함께 받는 동해 바닷물이다. 남자는 한
번도 동해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수족관의 물에 손을 담고 눈만 감으면 동해 바다가 펼쳐
진다. 뜰채 속에서야 넙치는 몸을 활처럼 굽히며 퍼덕인다. 회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넙치
머리를 누른 후 아가미 아래쪽에 칼집을 낸다. 넙치를 회치는 방법은 이미 남자의 머릿속에
순서도처럼 입력되어 있어 주방 맞은편에 걸린 벽걸이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회를 칠 수 있
다. 재빨리 비늘을 떨어내면서 여자의 모습을 훔쳐본다. 남자의 안경알에 비늘이 날아와 붙
는다. 칼을 비스듬히 세워 등뼈 가까이에 칼집을 넣고 꼬리지느러미와 등지느러미는 그대로
살려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살을 뜬다. 부레와 내장은 칼로 쓸어 밑으로 떨어뜨린다. 도마
밑,. 남자의 다리 오른쪽에 생선 내장을 담는 빈 돼지기름 깡통이 놓여 있다. 하지만 양철
깡통으로 떨어져야 할 내장은 남자의 욕실화 등판으로 떨어져 발가락 사이에 낀다. 그제서
야 주방 바닥을 청소하면서 깡통을 제자리로 옮겨 놓지 않은 것이 생각난다. 그 바람에 모
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뒤판으로 옮겨 포를 뜨던 칼이 어긋나면서 삼각형으로
떠야 할 포가 중간에서 뚝 끊긴다.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다시 주워야 했고 허둥대느라
헛발질로 양철 깡통을 몇 번이나 찬다.
주방의 도마는 바의 식탁보다 조금 도드라지게 놓여, 바에 앉은 손님들은 남자가 회를 뜨
는 것을 직접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여자도 두 손으로 양쪽 머리를 짚고 있지만 곁
눈질로 남자의 손동작을 보고 있다. 무채를 얹은 접시 위에 머리와 등뼈, 꼬리지느러미, 등
지느러미가 달린 넙치뼈를 올려놓고 그 위에 한 입 크기로 썬 살들을 보기 좋게 담아 여자
앞으로 접시를 밀어 놓는다. 남자는 회를 뜨는 순서도의 마지막 코스로, 아직 넙치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회칼의 끝으로 넙치의 머리를 살짝 찌른다. 대개 손
님들이 박수를 치거나 감탄사를 연발하는 때가 바로 이 때다. 한쪽으로 몰린 넙치의 두 눈
아래로 머리 절반을 차지한 주둥이가 천천히 벌어지면서 뾰족뾰족한 이빨들이 드러난다. 그
때 넙치의 입속에서 씹다 뱉은 껌처럼 물컹한 혀가 툭 튀어나온다. 순간 여자가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선다. 긴 의자의 중간에 달린 발걸이에 구두굽이 걸리면서 여자의 상체가 걷
잡을 수 없이 도마 위로 고꾸라진다. 여자의 손이 도마 위에 놓인 회칼의 손잡이를 친다. 회
칼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포물선을 그리면서 남자의 뺨을 핥고 그대로 욕실화를 뚫고 들어가
발등 위에 내리 꽂힌다. 칼몸이 부르르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보았
던 톱 연주 소리와 비슷하다.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의자 위로 무너
지듯 주저앉는다. 남자는 두 손으로 칼의 손잡이를 붙들고 힘겹게 칼을 빼어낸다. 관자놀이
가 뛸 때마다 남자의 뺨에서 매화 꽃 봉오리 같은 핏방울이 봉긋 솟아오른다.
3
용궁 어린이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딛다 말고 여자는 다시 밖으로 나와 맞은
편 약국으로 들어간다. 드링크제를 사서 여러번에 나눠 마시며 이층 창문을 올려다본다. 창
문 한 짝마다 한 글자씩 붙어 있다. 일 년 전 이곳에 어린이집을 내면서 여자와 홍선생이
밤새워 붙였던 색 글자들은 벌써 변색되어 있다. 어젯밤 퇴근하면서 창문을 잠그지 않은 모
양이다. 유리문 한 개가 열려 있다.
'이‘이’자와 '집‘집’자가 겹쳐서 창문의 글씨는 '용‘용궁 어린집’이라고 읽힌다. 여
자는 핸드백을 고쳐 매고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마다 아이들 눈에 띄도록 색종이로 붙여 놓
은 발자국 모양이 어린이집 문앞까지 이어져 있다.
홍 선생이 봉고차로 아이들을 싣고 오면서부터 방 안은 순식간에 어지렵혀진다. 선반에
놓인 블록이 방 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며 여자의 발에 밟힌다. 그럴 때마다 매번 여자의
몸이 기우뚱거린다. 기어다니는 아이들을 장애물 넘기처럼 건너 큰 사내아이 둘이 ‘슈퍼
맨’놀이를 한다. 한 팔을 허리에 붙이고 다른 팔은 앞으로 쭉 뻗고 내달리는 통에 마주 달
려오던 여자아이가 가슴을 받혀 울어댄다. 큰 아이가 울면 멀쩡히 놀던 작은 아이들도 덩달
아 울기 시작한다. 갓난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는데 냉장고 문을 열던 홍
선생이 큰 소리로 웃는다. 또 물통의 뚜껑이 없어진 모양이다. 종종 그런 일이 있다. 음료수
병과 물병의 뚜껑이 감쪽같이 사리지고 없다.
미끄럼을 타던 아이 둘이 점심으로 먹은 것을 고스란히 카펫 위에 게운다. 작은 아이에게
신발을 신기고 큰 아이의 신발을 꺼내드는데 신발장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딸려 나온다. 콜
라 뚜껑이다. 손을 넣어 보니 뚜껑들이 한 움큼 잡힌다. 두 손을 뒤로 숨기는 아이의 두 눈
이 까맣게 반짝인다. 어, 뚜껑이잖아. 누가 그랬지?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보면서 여자는
‘성악설’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봉고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소아과로 간다. 소아과 주차
장에 봉고차를 세워 두고 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아이들의 자지러지
는 울음소리와 왁자지껄한 소음이 새어나온다. 앉을 자리 하나 없이 만원이다. 여자의 발에
아이들이 먹다 흘린 과자알들이 밟혀 으스러지고 사탕이 신발 밑창에 박힌다. 여자의 손에
서 벗어난 아이 둘은 겅중거리면서 병원 한쪽에 놓인 미끄럼틀로 뛰어가 매달린다. 아침에
나올 때 정수리에 바싹 묶은 머리카락이 어느새 빠져나와 얼굴에 땀과 함께 달라붙어 있다.
간밤 내내 여자는 환청처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동요 테이프 노랫소리를 들었다. 서른 명
이 넘는 아이들을 여자와 대학 동창인 홍 선생 둘이 돌본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구석진 곳에 누군가 벗어 놓은 옷가지가 보인다. 여자는 옷가지를 한쪽으로 조금 밀쳐 놓
고 의자에 걸터 앉는다. 엉덩이 한쪽 끝에 물컹하면서 단단한 것이 배긴다. 누군가 옷 속에
핸드백을 넣어 둔 모양이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여전히 귓속으로 아이들이 칭얼대는 소리
와 주사실쪽에서 간격을 두고 자지러지게 터지는 울음소리, 자동 판매기에서 음료수 깡통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 온다. 미끄럼틀을 애써 올라간 작은 아이가 미끄럼대의 양
쪽 난간을 잡고 거꾸로 올라오는 큰 아이와 부딪쳐 싸움이 벌어진다. 선생님. 작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여자를 부른다. 엉거주춤 일어서는 여자의 시선 속으로 붉은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들어온다. 태열이 채 가시지 않은 신생아다. 여자의 엉덩이에 코와 입이 눌려 있
던 아이의 코와 눈가는 이미 퍼렇게 변해 있다. 조제실에서 약을 받아 나오던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젊은 여자가 여자 쪽으로 걸어온다. 여자는 미끄럼틀
에 매달린 두 아이를 떼어내어 내 양손으로 끌고 병원문 밖으로 뛰어나온다. 여자의 발에
걸려 소파의 가장자리를 짚고 걷던 돌배기 아이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하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작은 아이가 여자의 잰 발걸음을 따라 잡지 못하고 계단에서 넘어진다.
닫힌 병원문 속에서 짐승 같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두 아이를 양팔에 나눠
안고 주차장까지 뛴다.
검정색 중형 승용차가 주차장 입구를 막고 서 있다. 유리창마다 검게 코팅이 되어 있어
운전자의 얼굴을볼 수 없다. 여자는 봉고차에 시동을 건 채 검정 승용차가 주차칸으로 들어
설 때를 기다리고 잇다. 여자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블라우스가 등에 달싹 달라붙어 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앰뷸란스가 병원문 앞에 선다.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겹
치고 잠시 후 앰뷸란스는 비상등을 켜고 사라진다. 그 때까지도 검정색 중형 승용차는 후진
과 전진을 반복하고 있다. 마침내 여자는 클랙슨을 눌러 대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올려보내고 나서도 여자는 봉고차 안에 앉아 있다. 간호사들과 아
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은 이상하게 행동했던 여자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해 낼 것이다. 그
들 중의 누군가 여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아이를 떠올릴 테고 경찰은 병원 인근에 위치
한 놀이방과 어린이집을 수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여자가 세를
내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경찰이 아파트로 들이닥치기 전에 옷가지 몇 개를 챙겨 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벌써 아파트에는 경찰들이 잠복 근무를 하며 퇴근하고 돌아올 여
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자는 머리를 움켜쥐고 핸들에 고개를 묻는다. 그 바람에 여자
의 머리에 눌린 클랙슨이 길게 울린다. 봉고차에서 뛰어내린 여자의 곧장 큰길로 간다. 차도
로 내려가 두 팔을 흔들며 택시를 잡는다.
터미널에서 용궁 어린이집으로 전화를 건다. 전화벨이 열 번이 넘게 이어진 후에야 홍 선
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홍 선생뒤로 하루 종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 온 동요
테이프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김 선생? 홍 선생이 소리지른다. 어떻게 된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여자는 전화를 끊는다. 벌써 그 곳에도 경찰이 다녀간 모양이다. 여자
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고속 버스표를 조용히 구긴다. 고향 집도 은신처가 될 수 없다.
서울 시내를 순환하는 지하철을 탄다. 여자 옆에 앉았던 사람들이 여러 번 바뀐다. 신문을
사서 얼굴 가까이 들고 있었지만 활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자가 너무 한 곳
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인지 옆에 앉은 중년 사내가 신문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기사를 훔
쳐보기까지 했다. 여자는 잠실역에 내린다. 잠실역을 세 번이나 통과한 것을 여자는 알지 못
한다.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서 전철을 기다리는 무리들 속에 줄을 선다. 퇴근을 하려는
사람들로 승강장이 붐빈다. 누군가의 시선과 부딪친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
다. 사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정색 진바지를 입고 있
다. 아까 반대편 승강장에서 계단을 올라갈때 앞서 올라가던 사람의 바지 같다. 그렇다면 이
사내는 왜 다시 승강장을 바꿔서까지 여자를 따라온 것일까. 그 때 전철이 와서 섰고 여자
는 재빨리 전철에 올라타 문간에 바싹 기대 선다. 사람들이 다 올라타고 문이 서서히 닫힐
때 여자는 몸을 날리듯 바깥으로 뛰어 내린다.
구두굽이 다 닳아 자꾸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여자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거리는 어느 새 어둠침침해지고 있다. 가로등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선다. 머리는 다 풀어 흩어져 머리를 묶었던 노랑 고무줄이 파마기가 남은 머리 몇
가닥과 엉켜 있다. 구두 이음새에 슬리면서 구멍이 뚫린 스타킹은 구멍을 따라 거미줄처럼
풀린 올이 여자의 허벅지까지 타고 오른다. 여자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축대 아래 서 있다.
물받이 구멍아래로 흐르면서 마른 녹슨 물 자국이 남아 있다. 담벼락에 기댄 여자의 등이
조금씩 흐르는 물에 젖는다. 술 취한 사내 한 명이 비틀거리며 걸어가다 여자를 발견하고는
길게 휘파람을 분다. 여자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접시 위에 썰어 놓은 낙지의 다리처럼
두 다리는 제각각 움직인다. 저 앞으로 환히 불이 켜진 간판이 보인다. 일식집 미도리. 출입
구를 제외한 유리창이 거대한 수족관의 한 면이다. 조도가 낮은 불빛 아래로 한가롭게 헤엄
을 치는 물고기들이 보인다. 여자는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댄다. 물고기들 너머 가게 안이 들
여다보인다. 한 남자가 마대 걸레를 들고 가게 바닥을 걸레질한다.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바
지 아래로 형광색 분홍 슬리퍼가 들어온다. 가게는 텅 비어 있다. 여자는 대나무로 엮은 문
을 밀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식탁마다 의자들이 뒤집혀 올라가 있어 앉을 곳이 없다.
여자는 스탠드로 다가가 다리 긴 의자 위로 몸을 끌어올린다.
4
의자를 식탁 위로 다 올리고 남자는 마대 걸레로 가게 안쪽부터 닦기 시작한다. 깁스를
한 왼쪽 다리 때문에 청소 시간이 평상시의 배나 걸린다. 대걸레는 자꾸 식탁 다리로 가 부
딪치면서 물을 튀긴다. 대걸레를 겨드랑이에 끼고 선 채 담배를 피워 문다. 마취를 했던 왼
쪽 뺨은 아직도 감각이 없다. 회칼은 남자의 뺨에 부 메랑 모양의 흉터를 남기고 발등 위
로 떨어져 발등뼈에 삼 센티 정도의 틈을 벌려 놓았다. 잠을 자다 불려 나온 정형외과의 여
의사는 수술 내내 옅은 하품을 했다. 까딱했으면 눈까지 상할 뻔했어요. 안경에게 고맙다고
해야 해요. 여의사는 터진 치맛단을 꿰매듯 남자의 뺨을 감침질했다. 바늘땀을 셀 수도 있
다. 발목가지 석고 붕대를 바르고 나니 새벽 두시가 넘어 있다. 대기실을 기옷거렸지만 병원
문까지 뒤쫓아오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다. 깁스를 한 발등이 간지럽기 시작한다. 발등인가 싶으면 허벅지로 또다시
귓속으로 옮겨져서 어디가 가려운지 찾아낼 수가 없다. 감전이 된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
하다. 대걸레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열 손가락으로 무턱대고 온몸을 긁어 댄다. 살갗 위로
손톱 작국이 벌겋게 부풀어오른다. 숨어 있던 상처들이 도드라진다. 왼쪽 엄지손가락의 끝마
디를 감싸고 손바닥에서 손등을 따라 난 흉터는 이 곳으로 오기 전 ‘명동 스시’에서 얻었
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물을 묻히는 바람에 덧나 말없음 표처럼 점점이 끊긴 흉터가 남았
다. 상이군인이 가슴의 유탄 자국을 손으로 더듬듯 남자는 손가락 끝으로 바늘땀을 만지작
거린다. 그 때도 남자는 회를 치고 있었고 바에는 건장한 청년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회
를 치면서도 남자는 두 청년이 주고 받는 말들을 모두 듣고 있었다. 술이 취하면서 둘의 대
화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 청년의 화제는 말세론으로 빠졌고 다른 한 청년은 그에 응수하
는 듯 보였지만 요즘 청소년 세태에 대해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둘은 결론이 다른 것에 대
해 신경질을 냈다. 청년 하나가 친구의 머리통을 친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통이 와사비를 푼
간장 종지를 박으면서 흰 와이셔츠로 간장이 번진다. 와이셔츠를 두 손으로 털면서 일어난
청년이 상대방의 가슴팍을 밀어붙인다. 의자가 쓰러지면서 청년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벌떡 일어선 청년의 눈에 남자의 회칼이 들어온다. 청년이 순식간에 남자의 손에서 칼을 빼
앗아 허공을 육 등분으로 가른다. 그 칼은 남자가 회를 치기 사작하면서부터 쭉 가지고 다
녔던 것이다. 실리콘 재질의 손잡이는 손에 한번 쥐면 잘 미끄러지지 않고 스테인레스 칼날
의 무광이라 번뜩거림이 없다. 손잡이와 칼날의 경계선에 독일제 쌍둥이 상표를 입증하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남자는 청년에게 달려들어 칼을 빼앗는다. 하지만 남자가 쥔 것은 칼날
쪽이다. 칼날이 남자의 엄지손가락에서 한 바퀴 돈다. 하마터면 남자는 그 때 엄지손가락을
잃을 뻔했다. 실밥을 풀기까지 왼쪽 엄지손가락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어야 했다. 정작 오른
손이 칼질을 하는데도 칼질에 속도를 붙일 수가 없다. 붕대에 물을 묻히지 않기 위해 히치
하이크를 하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곧추세우고 있어야 했다. 손가락은 여섯이어도 넷이어도
불편하다. 남자는 손등과 손바닥을 천천히 뒤집어 가면서 흉터들을 들여다본다. 십이 년 전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잡역부로 일할 때 가오리 대신 갈고리에 손등을 찍힌 것을 시작으로
일식집과 횟집을 옮겨 다닐 때마다 크고 작은 흉터들을 얻었다. 부산 상회, 섬마을 횟집, 스
시, 일해, 미당, 명동스시, 미도리--흉터는 남자의 이력이다.
양동이의 물을 화장실에 버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다 남자는 다리를 헛짚는다. 스탠드
의자 위에 그 여자가 앉아 있다. 이번에는 여자 쪽에서 말을 걸어온다. 미안해. 어떻게 사과
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여전히 말끝이 불분명하다. 그렇게까지 놀랄 필욘 없었는데. 물고기
는 통점이 없어요,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부메랑 모양의 상처의 양끝이 동그렇게 모아진다.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도 아픈 걸 모른다구요. 여자의 옷차림은 그 날 밤 그대로다. 내가 놀
란건 물고기의 혀 때문이었어. 물고기에 혀가 있으리란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어. 말은 끝으
로 갈수록 희미해져서 한숨 소리처럼 들린다.
여자의 구두굽은 닳아 쇠징이 드러나 있다.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다른 소리가
난다. 인적이 끊긴 보도 블록 위에 경쾌한 구두징 소리가 울린다. 여자는 일정한 간격을 지
키면서 줄곧 남자의 뒤를 쫓아온다. 남자가 보폭이 크게 걸으면 여자는 잰걸음으로 따라온
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면 여자도 걸음을 멈춘다. 깨진 보도 블록 사이로 구두굽
이 낄 때마다 여자의 발이 구두 밖으로 빠져나와 땅바닥을 헛짚는다. 여자는 되돌아가서 주
저앉아 힘겹게 못을 빼듯이 구두를 빼 다시 신고는 남자의 뒤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
피 걷는다. 여자의 구두징이 땅에 울리면서 탭 댄스처럼 리듬이 살아난다.
5
남자와 여자는 지금 동해한의 포구로 가고 있다. 콘솔 박스 안에는 남자가 오년째 가지고
다니는 회칼이 들어 있다. 보름이 넘게 매상이 오르지 않던 것을 걱정하던 사장도 남자를
붙잡지 낳았다. 일년 팔 개월 동안 일했던 미도리에서 남자가 들고 온 것은 회칼과 형광색
욕실화뿐이다. 포구에 가면 남자는 오징어잡이 김씨를 만날 생각이다 .김씨는 미도리에 산오
지엉와 활어를 대던 사람이다. 동해에서 밤 동안 차를 몰아 서울로 와서 산오징어와 함께
수족관 가득 동해 바닷물을 채워 주고는 했다. 물탱크가 달린 트럭도 한 대 살것이다. 김씨
에게 떨이로 넘겨받은 오징어를 서울의 횟집에 넘기면 곱절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창을 열면 동해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에 작은 횟집을 차릴 것이
다. 저 치야, 저 치가 계속 우리 차를 따라오고 있어. 아까부터 쭉. 여자의 돌출된 안구가 쉼
없이 흔들린다. 남자는 보조석 옆에 달린 백 미러로 옆차선을 살핀다. 빨간 스포츠 카의 운
전자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고개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해안으로 가는 고속 도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자 속은 조금씩 양은냄비
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방송국 헬리콥터 하 대가 떠서 여름 휴가 대이동을 찍
고 있다. 가끔 헬리콥터가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열린 헬리콥터의 문으로 어깨에 무비 카메
라를 짊어진 카메라맨이 보인다. 헬리콥터가 다가올 때마다 굉음과 함께 회전 날개의 그림
자가 차 지붕 위로 어울댄다. 남자는 브레이크 발판의 가장자리에 발가락만 얹어 두고 헬리
콥터를 보기 위해 상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있다. 차문을 열어 두고 바깥으로 깁스를 한 왼
쪽 다리를 내놓았지만 바람은 느낄수 없다. 깁스를 하지 않은 오른쪽 발마저 욕실화의 등판
에 슬리면서 살갗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남자의 차는 이미 단종이 되고 서울에서 몇 대 남
지 않은 차다. 기어를 바꿀 때마다 차 밑바닥에서는 톱니바퀴가 엇물리는 소리가 난다. 군데
군데 칠이 벗겨진 곳에는 녹이 슬어 있다.
보조석 의자위에 맨발을 올려놓고 여자는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발의 붓기는 여자도
마찬가지여서 여자의 발등에는 구두 작국의 붉은 테두리가 둘러 있다. 수각 같다. 여자의 손
톱은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포개진 넓적다리와 젖가슴 사이에는 백화점 청구서와
함께 발송된 통신 판매용 책자가 끼여 있다. 상품 안내가 자잘하게 인쇄된 활자들 사이사이
의 빈 여백마다 깨알같은 글씨들이 빼곡하다. 여자는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다. 여자가 무
엇으로부터 쫓기고 있는지 남자는 묻지 낳는다. 우럭 눈처럼 생긴 두 눈망울은 지금 유리
구슬처럼 투명하다. 남자는 여자를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린다. 가족. 가족
이란 단어는 남자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은 연상시킨다. 된장찌개, 노란 알전구. 세트
로 된 수저, 아이들, 세발자전거--그 때 뒤차가 클랙슨을 놀러 댄다. 정체가 풀리면서 남자
의 앞을 가리고 있던 탱크 로리가 저만큼 앞서 달려가고 있다. 남자는 허겁지겁 깁스를 한
다리를 차 안으로 들여놓으면서 차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킨다. 잠시 후에야 남자는 깁스 위
에 덧신은 욕실화 한 짝을 도로 위에 떨어뜨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옆차선으로 나란히 달리
던 빨간 스포츠카가 굉음을 내며 남자의 차 앞으로 끼여든다.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멈추고 다시 통신 판매용 책자를 넘긴다. 돌침대의 가격표와 러닝 머신이 찍인 사진 위의
여백에 자동차 번호를 쓰기 시작한다. 수많은 번호판의 번호가 빽빽하게 적혀 서로 겹치고
뭉그러져서 숫자를 식별할 수가 없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을 지나면서 여자가 적는
차 번호는 점점 강원도 차 번호가 많아진다.
휴게소에서 남자가 기름을 넣고 포장 김밥을 사는 동안 여자는 공중 전화 부스를 찾는다.
주머니에 넣어 둔 쪽지를 꺼내 전화 번호를 누른다. 신호음이 울리고 간호사가 전화를 받는
다. 114안내원의 목소리처럼 피곤이 묻어 있다. 저, 7월 12일인데. 간호사의 목소리가 도드라
진다. 뭐라구요? 여자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7월 12일이요. 간호사가 여자의 말허리를
자른다. 잘 안들려요. 잠깐만요. 어머니들, 아기들을 좀 조용히 시켜 주세요. 이렇게 떠들면
진료를 할 수가 없다구요. 전화기에서 멀어졌던 간호사가 다시 수화기를 집어든다. 아기 생
일이 며칠이라구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7월 12일 수요일인데. 그 날 혹시 병
원에서 질식사한 신생아가 있었나?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간호사가 야
멸차게 쏘아붙이면서 전화를 끊는다. 어따 대고 반말이야.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
6
빈 밭은 해머 경기장처럼 패어있다. 뙤약볕 아래 곱사등이는 잡초를 뽑는다. 몸빼를 입은
엉덩이가 허공으로 들릴때마다 잡풀이 뿌리째 뽑혀 올라온다. 곱사등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
고 뽑은 잡초를 밭 밖으로 내던진다. 한 번도 뽑은 잡초가 밭 안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곱
사등이가 훑고 지나간 뒤로 들쭉날쭉한 구멍이 패어 있다. 여름 내내 곱사등이는 잡초를 뽑
는다. 비가 한 차례 쏟아붓고 나면 어느 새 잡초는 무성해지고는 한다. 잡초를 뽑고 다시 새
잡초가 자라고 그러면 다시 잡초를 뽑는다.
국도에서 보면 이 산장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국도변에 산장을 알리는 허름한 입간
판조차도 없다. 산장은 온통 밤나무에 가려 있다. 용케 밤나무 끝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붉
은 기와의 용머리가 여자의 눈에 띈다. 차가 간신히 통과할 좁은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고
언덕길을 올라가니 산장의 뒷마당이 나타난다. 곱사등이가 뙤약볕 아래 주저앉아 잡풀을 뽑
아 내다 차를 보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가늘게 휘어진 곱사등이의 다리 사이로 누렁개가 보
인다. 낯선 사람을 발견하자 턱을 땅바닥에 문지르며 으르렁거린다.
남자와 여자가 묵은 방은 복도 맨 끝방이다. 앞창문으로는 뒷밭이 옆창문으로는 콘테이너
박스로 지어 놓은 부엌이 들여다보인다. 부엌에는 모터가 낡은 구식 냉장고가 하루 종일 요
란한 소리를 낸다. 부엌의 한쪽에 마루를 얹어 만든 가게가 있다. 나무 선반 위에는 올풀이
로 파는 모나미 볼펜 상자와 편지 봉투, 일회용 칫솔과 치약, 비누, 사탕, 스낵, 즉석면 등속
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열되어 있다.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은 사탕 봉지를 사들고 오면서
여자가 투덜댄다. 폭이 좁은 복도를 사이로 방 네 개가 마주보고 있다. 복도는 남자가 똑바
로 서서 양팔을 벌리면 양끝이 와 닿는다. 가끔 복도에서 다른 방에 묵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몸을 옆으로 돌려 벽에 바싹 붙어 있어야 한 사람이 지나갈 수가 있
다.
발 끝까지 간 곱사등이가 이번에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풀을 뽀으며 이족으로 온다. 밭이
끝나는 곳에 남자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 네 개의 바퀴는 비로 웃자란 잡초에 가려 있다. 일
회용 면도기에 남자의 빰이 슬리면서 도독한 흉터가 만져진다. 남자는 여자의 분첩에 붙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가면서 수염을 깍는다. 맨 처음 김을 매는 곱사등이를 보았을 때, 남자
는 밭에 씨앗을 뿌리려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잡초를 뽑아 낸 뒤로 곱사등이가 한 것
은 다시 잡초가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제 여름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옥수수를
파종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여자는 비닐 의자에 앉아 햇빛을 바라보고 있다. 과일향 사탕 봉지 속에 구겨진 사탕 포
장지가 가득하다. 셀로판 포장지를 눈에 대고 태양을 올려다본다. 과일향 사탕은 과일향에
따라 색이 다른 셀로판지로 포장되어 있다. 이 놀이를 할 때면 아리들은 창가에 딱정벌레처
럼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남자가 여자를 돌아다보고 웃는다. 당신 피부는, 마치, 남자의
얼굴 한쪽은 밀다 만 수염이 그대로 있다. 마치 산오징어 같아, 속엣것이 다 비칠 것처럼 말
야.
방에 비해 목욕탕은 턱없이 크다. 여자는 어둑한 목욕탕 세면대 앞에 서서 세수를 하다
말고 문득 세면대에 달린 거울을 본다. 얼굴 전체에 흰 비누 거품이 묻어 있다. 지난 한 달
간의 일들이 백 년 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 산장에서 나가는 순간 여자의 머리
칼은 백발이 되고 얼굴은 주름골이 깊게 패고 손톱과 발톱은 실타래처럼 길게 자라 있을 것
같다.여자는 어제 용궁 어린이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열 번이 넘게 이어진 후에야
낯선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거기, 혹시? 전화 번호를 확인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
다. 너무도 낯익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동요 노랫가락이 들려 온다. 여자는 조용히 전화를 끊
는다. 용궁 어린이집에 이제 여자의 자리는 없다. 여자가 만들고 써붙인 종이 모자,글씨들,모
빌은 조금씩 새로 온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바뀌고 여자의 흔적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릴 것
이다. 모든 것이 어릴 적 하던 핀놀이 게임 같다. 흙바닥에 핀을 놓고 손가락으로 쳐서 핀이
가는 방향마다 줄을 그어 자기 땅을 만드는 놀이였다. 핀을 튕길 때마다 핀은 항상 여자의
마음과는 달리 터무니없는 곳으로 갔다. 비누 거품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 눈이 따끔거린다.
여자는 재빨리 냉수 꼭지를 비튼다. 순간 물을 받으려 모은 손 안으로 뜨거운 물이 쏟아진
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세면대에서 떨어진다. 온수와 냉수의 수도꼭지 색깔이 바뀌어
있다.
누렁이가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남자가 신발을 꿰어신을 때면 어디선가 달려와
남자의 어깨에 두 발을 얹고 혓바닥으로 안경알을 핥는다. 남자가 야구공을 주워 와서 누렁
이의 입에 물려 준다.
여자는 마루에 놓인 전화로 소아과에 전화를 건다. 남자는 하루종일 마당에서 누렁이를
훈련시킨다. 공을 던지면 누렁이는 큰 눈을 멀뚱거리며 서 있을 뿐이다. 짜증이 뒤섞인 간호
사가 전화를 받는다. 저, 7월12일인데, 간호사가 옆에 선 간호사에게 속삭인다. 또 그 여자
야. 여자는 다급하게 소리친다. 중요한 일이에요. 그 때 질식사한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앰뷸런스가 병원에서 누군가를 실어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그래도 시치미를 뗄 건
가요? 간호사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 그거요? 뭔가 오해를 했군요. 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온 임산부가 진통이 시작됐어요. 벌써 자궁문이 열려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구요. 아
이의 이름은 이 병원 이름을 따서 짓기로 했다지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여자는 한참 동안
전화기 앞에 앉아 있다. 창문 밖으로 남자가 보인다. 깁스를 한 다리를 절룩이면서 공을 주
워 와 다시 누렁이 앞에 던진다. 누렁아, 물어.물어.물라니까. 누렁이가 입을 벌리고 공을물
어 남자에게로 다가온다. 그렇지. 착한 것. 남자가 누렁이를 끌어안고 땅바닥을 뒹군다. 누렁
이의 입에는 침이 잔뜩 묻은 공이 물려 있다.
전화 번호부의 상호편을 뒤적여 횟집과 일식집 밑에 밑줄을 그어 놓는다. 동해 횟집이란
이름만 해도 열 곳이 넘는다. 이 곳에 도착한 첫날, 남자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징어
배는 일본을 거쳐 북상하는 폭풍으로 항구에 묶여 있었다. 오징어배가 출어를 하더라도 일
단 오징어값이 내릴 때까지 기댜려야 했다. 그 동안 포구에서 일자리를 얻어야만 한다. 남자
의 차 속에는 독일제 쌍둥이칼이 잘 들어 있다. 강릉 횟집, 경상도 횟집, 경춘 횟집, 혹시 조
리사 필요하지 않으세요? 전화를 걸지만 매번 일자리는 없다. 기역에서 키읔 항까지 마흔
군데가 넘는 횟집으로 전화를 걸지만 남자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
긴다. 포구는 이 곳에서 사십분 거리에 있다. 가족, 된장찌개, 노란 알전구, 아이들, 세발자전
거 그리고 누렁이, 마당에서 누렁개를 키우고 싶다. 마지막 히읗 항목을 뒤적인다. 해동 횟
집, 주인인 듯한 중년 사내가 전화를 받는다. 쇠그릇 부디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 어디 힘든 일 종아하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우리 젊었을 적엔 그렇지 않았지.
요즘 젊은것들이란, 사내는 쉬지 않고 떠들어 댄다. 사내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모양이다.
전화 중간중간 식사비를 계산하고 거스름 돈을 내준다. 어제 잔소리 한번 했더니 무단 결근
입니다. 이럴 수가 있나. 사내가 칵 소리를 내며 된가래를 뱉는다. 전 회를 치고 난 물고기
가 물 속에서 헤엄을 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남자는 다급하다. 뭐라구요? 하여튼 다른 거
다 필요 없소. 성실한 게 제일이지. 출근 시간이 좀 빠른 걸 빼면 다른 데하고 비슷해요. 보
자. 오늘 밤 열시정도가 좋겠군. 제일 한가한 시간이니까. 열시에 봅시다. 난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사내가 별안간 말을 멈춘다. 적당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모양이다.
안 지키는 사람을 경멸, 경멸합니다. 이따 봅시다. 사내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서 전화 번호를 다른 종이에 옮기면서야 남자는 자신이 건 전화 번호가 해동 횟
집이 아닌 다음 줄의 해랑 해장국집이라는 것을 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막바지 피서 차량들이 한꺼번에 몰려 심한 교통 정체를 빚고 있습
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길군요. 교통 방송을 들으면서 남자는 ‘전국 교통 지도망’을 꺼내
놓고 시내까지 우회할 길을 찾는다. 해랑 해장국은 주인과의 약속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
아있다. 여자는 자꾸 머뭇거린다. 시내로 들어가는 대로 터미널에 내려 달라고 말할 셈이다.
아슬아슬하게 폭이 좁은 길을 벗어나 국도로 나온다. 다리까지 쫓아 달려오던 누렁이가 뒤
처진다. 산장은 어느 새 어둠과 밤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간격이 넓게 세워진 가로등
불빛에 희부옇게 길이 드러난다. 저 앞으로 아스팔트가 깔린 새 길이 희뜩희뜩 보이기 시작
한다. 길은 차 한 대 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남자는 액셀을 힘껏 밟아 새 기을 향해 돌진
한다.
도로를 벗어난 남자의 차가 철골 구조물을 박으며 튕겨진다. 차는 옥수수 대궁들을 훑으
며 날아가 옥수수밭 한가운데 뒤집힌다. 차가 들이박은 것은 거대한 간판을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철제 빔 중의 한 개다. 간판 위에는 형광 도료로 길이 그려져 있다. 남자의 불빛에
살아났던 간판 속의 길은 잠시 후 다시 어둠 속에 묻힌다. 차가 들이받은 펄골 구조물은 눈
에 띄지 않게 조금 휘었을 뿐이다. 옆좌석에 앉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땅으로 쏠려 있다. 머
리카락은 물 속을 헤엄치는 오징어 다리처럼 꿈틀거린다.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만 입이 들
썩여지지 않는다. 팔목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려 하지만 팔에 힘이 전달되지 않는다. 팔목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려 하지만 팔에 힘이 전달되지 않는다. 두 다리도 왼쪽 팔도 고개도 꼼
짝할 수가 없다. 하지만 통증이 없다. 남자는 아무래도 자신이 물고기가 된 모양이라고 생각
한다. 정신은 너무도 말짱해서 약속 시간 늦은 것에 대해 해랑 해장국 사장에게 늘어놓은
변명거리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7
허공에 헬리콥터 한 대가 떠 있다. 정오의 태양은 헬리콥터 주회전 날개 위에서 팽팽하게
빛난다. 사내는 어깨 위에 짊어진 대형 무비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대 초점을 잡는다. 장난감
미니어처 같은 차들이 고속 도로 위에 줄지어 서 있다. 사내가 찍은 이 필름은 아홉시 저녁
뉴스 시간에 20초 정도 보도될 것이다. 사내는 20초를 위해 두 시간 전부터 작열하는 태양
아래 떠 있다. 갈증이 난다. 사내는 시원한 생수를 들이켜는 상상을 하면서 카메라의 초점을
끝간 데 없이 이어진 차량들의 지붕 한 곳에 들이댄다. 헬리콥터를 발견한 사람들이 차 밖
으로 손을 내밀고 이 쪽을 향해 흔든다. 십자형의 초점 속에 우연히 슬리퍼 한 짝이 들어온
다. 형광색 분홍 슬리퍼다. 사내는 줌 렌즈로 슬리퍼를 당겨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욕실화가
분명하다. 사내는 언젠가 꼭 영화 한 편을 찍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휴가를 가면서 누
군가 도로변에 흘리고 간 슬리퍼를 사내는 꼼꼼히 필름 속에 담는다. 아홉시 저녁 뉴스 시
간에 사내가 찍은 슬리퍼는 방송되지 않는다. 거물급 인사의 방한이 길에 방송되는 바람에
필름은 편집과정에서 다 잘리고 먼 데서 찍은 정체된 차량들의 물결만 5초 동안 방송된다.
제 29회 동인문학상 우수 후보작 내 마음의 석양
함정임
1964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광장으로 가는 길’로 등단
1992년 소설집<이야기,떨어지는 가면>출간
1996년 소설집<밤은 말한다>출간
1998년 소설집<동행>출간
세 개의 탑
“다시 이 자리에 서보니 어때?” 인수는 감포 횟집에서 걸친 소주 탓인지. 산 너머로 지
는 석양빛 때문인지 얼굴도 눈동자도 목덜미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놀리듯 싱
글싱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방금 떠나왔던 수중 바
위를 생각하느라 입을 열지 못하고 어깨만 움쭐 오무렸다. 죽은 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
겠다던 왕의 해중릉은 싱겁기 그지없어 보였다. 신비스러운 보물 만파식적의 가락소리도 대
왕의 위엄도 한갓 철썩이는 파도에 묻혀 망망 대해를 짝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있던 사람이 없어지고, 다시 이 자리에 섰는데.”
나는 인수가 더 말을 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 제지할 것인지 망설였다. 아니 인수의 생각
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호-올,호로잇,마치 배경처럼 서 있는 뒷
산 수풀 속에서 산새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었다. 그도 나도 잠깐 산새 소리에 귀를 모
았다. 그 속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내겠다는 듯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
의 소리를 이끌어 내겠다는 듯이.구우.구구구. 바람이 일지 않았는데도 대나무들이 서걱이는
소리가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곧 한 차례 큰 바람이 대나무들을 훑고 지나갈 것
이었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 바람 소리.” 나도 모
르게 탄성이 나왔다. 눈가에 어른거리는 기미에 눈을 떴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거느린
해 그림자였다. 인수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지난 봄의 어느 새벽 민홍은 먼 길을 떠나기 직전, 어둠 속에서 손바닥만한 불빛을 의지해
경주 근처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보았다. 대숲 앞에서 찍은 사진에 이르자 민홍이 깊
게 탄성을 질렀다. “아! 바람 소리.”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뽑아져 나온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다.
“가만, 저기가 동탑이면 여기가 서탑인가? 그러니까 민홍이 이놈아가 서탑, 여기에 섰었
다 이거지? 이렇게 좋은 데를 저만 돌아다니고 나한테는 한 번도 말도 안 했지. 응?”
나는 오랜만에 얼얼하게 취기가 올라 헤설프게 풀어진 인수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을 뿐더
러 그로 인해 예전처럼 민홍과 나를 두고 하던 장난 반 질투 반 섞인 개구진 말투가 듣기
좋아 그가 하는 대로 막지 않았다.
“그래 다시 이 자리에 섰는데 아무 생각 없냐고요.”
인수는 술기운을 빌어 다그치듯 나에게 대답을 체근했고, 나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두 기
의 탑 사이로 열려 있는 허공을 가리켰다. 인수는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내게 기울어질 듯
몸이 기우뚱하더니 내 손 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논과 논 사이, 산과 산 사
이 마련된 둥그런 허공에 잠자리 떼가 빼곡히 들어차서는 춤추듯 어지러이 너울거리고 있었
다. 인수는 붉은 허공을 수없이 오르내리는 까만 잠자리 떼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누가
거기 서 있기라도 한 듯 허겁지겁 그 쪽을 걸어갔다.
나는 발목까지 차오른 풀잔디를 밟으며 탑이 있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한갓 미물에 불과
한 잠자리들의 난무가 내 전생과의 어떤 기묘한 연분을 시사하고 있는 걸까. 잠자리 벌레들
을 바라보며 찰나적으로 스켜 간 생각이었다. 인수의 움직임을 신경의 한 옆에 묶어 두고
탑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반년 만에 다시 찾은 탑이었다. 한겨울이었던 그 때는 탑 뒤의 산
이나 앞의 벌판이나 아무것도 거느리지 않는 채 빈몸으로들 있었다. 탑을 따라 문득 올려다
본 하늘도 막막히 비어 잇었다.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고요하게 느껴져 숨이 커억 막힐
지경이었다.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는 쇠찰주가 시퍼런 하늘과 맞서 있는 형
국이 천 년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예리하고 당당하였다. 탑신에 손을 얹은 순간 누
군가의 숨결, 아니 역사의 숨결을 몰래 엿든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서탑을 뒤에 두고 민
홍과 아이와 나는 여러 장 사진을 찍었었다. 언제 봐도 사진 속의 그는 한껏 행복해 보였다.
그러한 고요, 그러한 행복, 그것이 우리 인생의 폭풍 전야였던가. 나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탑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민홍의 추억을 간직한 탑이었다. 민홍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찍힌
독사진 중에는 쇠찰주가 그의 정수리에 꽂혀 보이는 것도 있었다. 나는 서재에 들어서면 눈
이 제일 잘 가는 곳에 그 사진을 놓아 두고 닮도록 들여다보곤 했다. 쇠찰주가 박힌 노반석
부분을 모자처럼 쓰고서 얼핏 돌아서려다 렌즈에 잡힌 얼굴 표정이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냥 웃고만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언제까지고 그와의 연은 지속될 것이었
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탑의 내부에 정신을 집중했다. 귀에와 닿는 빛바랜 돌의 감촉이 민
홍의 가슴처럼 단단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민홍의 체취를 흡입하듯 깊게깊게 숨을 들이마시
며 가슴을 활짝 열었다. 탑은 예전과 다름없이 고요한데 자연은 어찌 그리 황홀하고 산란한
지 가슴 속에서 급격히 확산된 허기가 목구명을 치받고 올라와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
는 탑을 부둥켜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뽐내듯 온갖 현란한 색을 내뿜고 있는 신록
의 수풀들이나 들판을 빼곡히 채운 벼포기들이나 어지러이 흐르는 공중의 잠자리 떼들이 마
지막 남은 나의 기운마저 빼앗아 버릴 듯이 사납게 달겨드는 것 같았다. 나는 민홍과의 추
억이 불러오는 황홀경과 동시에 싹트는 슬픔에 기진맥진해져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민홍이 이눔아아--민홍아아아아아아-----.”
사방을 찢어 놓을 듯이 메아리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잠에서 깨어난 듯 머릿속이
혼미한 중에 꽤 멀리까지 내려가 있는 인수가 눈에 잡혔다. 인수는 찾아드는 소리로 꺼이꺼
이 읍하는가 싶더니 해 지는 쪽에 대고 우물쭈물 바지춤을 더듬고 있었다. 나는 탑에 기대
서서 석양빛에 퍼져 가는 오줌 줄기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산 너머로 해가 꼴깍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나. 갑자기 서편의 탑신이 환하게 불타오를 듯
빛이 났다. 탑에 의지해 어지러움증을 달래고 있던 난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나
느낄 법한 전율에 휩사여 움찔 탑에서 떨어져 섰다. 그리고는 동시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다
시피 탑 뒤편 금당터로 올라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냉엄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두
개의 탑을 아래로 굽어보면서 비로소 나는 왜 내가 숨가쁘게 내달려야 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탑 사이로 한 사람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두 어머니
“아이구,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아이 외할머니가 개찰원에게 표를 내밀기도 전에 아이 할머니의 손을 반갑게 그러잡고 밖
으로 끌어내었다. 아이는 언제 개찰구를 빠져 안으로 들어갔었는지 자랑스레 할머니 손을
잡고 있었다.
“고생은 뭐, 차가 데려다 주는 걸요.”
아이 할머니는 육중한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기죽은 표정으로 쭈빗쭈빗 몸을 사리며 얼굴
을 들지 못했다. 아이 외할머니가 얼핏설핏 비치는 눈물을 떨치고는 떨어질세라 아이 할머
니의 굵은 팔을 꼭 붙들고 자동차로 모셔 갔다.
“할머니 우리 경주역에서 만났다.그지?”
아이는 기차가 도착하고 설레임 속에 마중나와 누군가를 만나고 하는 행위가 새삼 재미있
다는 듯이 제 할머니가 채 차에 오르기도 전에 잡아끌며 귀에 대고 우렁차게 말했다. 아이
할머닌ㄴ 너무 작아 손 안에 들어와서는 미끄러져 새나가 버리는 아이의 조막만한 손을 자
꾸 품안에 부여잡으며 끓어오르듯 뜨거워지는 피의 움직임에 목이 메어 “그래, 우리 경주
역에서 만났네. 정말!” 하며 “호호” 웃었다. 아이는 할머니가 “호호” 웃는 소리에 덩달
아 어색한 표정을 지어 웃어 보이더니 할머니의 웃음소리를 내게 일깨워 주듯 핸들을 돌리
려는 내 팔을 덥석 잡아챘다. “할머니가 웃었네”라며 나도 따라 “호호” 웃자 아이는 두
루두루 안심이 된다는 듯 엉덩이를 의자 뒤쪽으로 쑥 디밀고 풍성한 할머니의 가슴팍에 찰
싹 엉겨 붙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할머니에게 확인하듯이 “우,리,는,경,주,역,에,서,만,났,
다!”를 할머니와 복창했다. 차에 탄 어른들의 무거운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 내렸다.
“진즉 내려오셔서 바람이라도 쐬고 가셨으면 했는데, 오늘이라도 발걸음을 하셔서 제 마
음이 얼마나 놓이는지 모르겠네요.”
아이 외할머니는 한껏 예의를 갖춘 겸손한 목소리만이 아이 할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또 당신의 품위에 어울린다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애 어멈 말대로 아침 일찌간이 나섰는데 벌써 해가 지잖아요. 옛날 어릴 적 노래로나
듣던 신라의 달밤이 여기 아니야요. 내 생전에 어디 꿈이나 꿨게요. 바람도 아주 긴 바람 쇳
죠. 제 나이가 낼모레면 칠십이야요. 칠십. 이울어도 한참 이울었지요. 너무 오래 살아서
….”
아이 외할머니는 짓고 있던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씁쓸하게 아이 할머니의 스산한 얼굴을
더듬어 봤다. 아이 외할머니가 인사치레로 꺼낸 말이 아이 할머니에게로 넘어가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침울해질 순간이다.
“저는 칠순을 넘긴 지 벌써 두 해가 되어가는데요. 뭘, 사부인 연세만 되도 저는 달리 생
각들 거예요.”
아이 외할머니는 후면경으로 건너다보고 있는 내 눈과 마주치자 길어지려는 말을 그만두
어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지 말을 잠시 끊었다가 내 귀에 거의 들리지 않게 아이 할머
니에게 바싹 다가 앉아 말을 이었다.
“이제 애 아빠가 없으니 사부인이 집안의 기둥이고 중심인걸요. 그리 굳게 생각하셔야
저 아이도 맘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저 아이는 이 때나 저
때나 책만 보았지 세상물정 하나 몰라요. 막내로 어리광에 귀염만 받고 살다가 책임이란 책
자도 모르는 아이인데 결혼하자 모든 걸 떠맡게 되었잖습니까.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이게
말이나 됩니까. 사부인 어른이나 저 아이나 오죽 마음 무겁겠어요. 다 사부인께서 다독여 주
시고 부추겨 서로 의지해 살아야지요.”
아이는 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쓸쓸한 표정으로 각자 창 밖만을 바라보는 두 노인
사이에 끼여 네 살배기 아이치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잠자코 앉아 막 벗어나려는 경주
역사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역사 지붕에 돌올하게 내걸린 글자판을 헤아리고 있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가 보았다. 개찰구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삽시간에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광장은 텅 비었다. 아이는 고개를 길게 빼고는 누군가 거기 미처 빠져 나오
지 않은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 텅빈 개찰구 쪽을 끝까지 응시했다.
직각으로 공중에 걸려 있던 해가 경주역 광장을 가득 비추며 비스듬히 이탈하고 있었다.
언니의 반지
지시대로 몸에 걸치고 있는 금붙이를 남김없이 벗어 버리자 의사는 내 양 손에 진맥 마우
스를 하나씩 쥐어 주었다. 나에게서 반지와 목걸이를 받아든 언니는 대기용 소파에 앉아 컴
퓨너 화면과 의사를 번갈아 보며 의사이 표정을 읽어 내느라 경황이 없어 보였다.
“청소나 빨래는 물론이고 설거지 정도도 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그려진 회로를 사단계 선으로 끊어 설명하다가 붉은색 선에서 갑자
기 아래로 뚝 떨어져 제로에 가 있는 것을 지적하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고는 ‘왜 그런
가’를 묻듯이 내 얼굴을 정시했다. 언니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뗀 채 거의 서다시피 해서
의사가 내가 붙들고 있는 시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왜 그런가’에 대해 한마디 꺼
내려 했다.
“저, 제 동생은요. 글을 쓰는 사람인데요. 한 달 전에 아주 큰일을 당했어요. 또, 유산도
됐고…. 해서 선생님한테 데리고 왔어요.”
언니는 겁먹은 사슴의 눈을 하고서 ‘왜 그런가’를 말한다고는 했으나 두서 없이 더듬고
만 있었다. 한없이 착하기만한 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부끄러움보다는 죄스러
움이 가슴 밑은 눅직하게 조여 왔다. 몇 날을 벼른 끝에 내 손을 이끌고 온 언니였던지라
의사 앞에 앉은 나를 보자 사뭇 감정이 북받쳐올라왔던지 평소 궁금했던 시시콜콜한 사항까
지 놓치지 않고 물어 보려는 기생이었다.
“동생분은요. 여기 보시는 바대로 기 부분에 있어서 제로 상태입니데이. 또 정신적인 스
트레스 부분도 100%,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까.”
언니는 소파에서 아예 일어나 내 등 뒤로 다가와서는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
“정신이 무너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듯합
니다.”
나는 의사가 상대하는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언니와 의사의 대화를 다
른 사람의 일처럼 경청할 뿐이었다.
“어디 심각하게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꺼?”
의사는 지그시 내 손목을 끌어가 잡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안정감 있는 퉁퉁한
얼굴에 상대방을 편안하게 배려해 주는 목소리와 눈빛을 가지 의사였다. 나는 손목을 잡힌
채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디가 어떤지. 그저, 늘 붕 떠 있는 것만 같아요.”
의사는 자신의 진단을 확인한 듯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트 위에 힘차게 무엇인가
를 휘갈기며 써내려갔다.
“만약, 먼거리의 여행을 한다면….”
말을 꺼내면서도 나는 공연한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주에 내려와 있으면서도 나
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아주 니ㅊ설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시달려 왔다. 지구를
벗어나면, 아니 이름없는 소혹성에 떨어지면, 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민홍과 해후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흠뻑 빠져들 때도 있었다.
“어데를예? 설거지도 힘들다고 했지러. 하물며 물이 바뀌는 데로 가면 결과야 뻔한기 아
닐까예.”
나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세상처럼 나에게 낯설고 먼 곳이 따로 있겠
는가. 나는 밤낮이 바뀌면서 생각도 열두 번 뒤집어지는 것을 벌써 한 달째 계속하고 있었
다. 구대륙,신대륙,심지어 아프리카 대륙까지 온 사방에 퍼져 사는 친구들이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 온 메시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 곳에 당도하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솔깃해지기도 했다.
“가기는 어데를, 괜한 소리지요. 당분간 제가 데리고 꼼짝 못 하게 할 텐데요. 뭐.”
언니는 처방전을 완성하느라 열중하고 있는 의사의 머리에 대고 잘 좀 부탁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의사하고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다음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약은 내일 오후 다섯시쯤 찾아가세요.”
언니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 가지고 있던 병을 떨치기라도 한 사람처럼 들뜬 기분으로 내
손을 콱 붙장사서는 자신의 팔 안에 채워 넣듯이 휘감고는 큰소리로 택시를 불러 세웠다.
언니에게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우쭐해졌다.
“교동으로 가입시데이.”
어느덧 언니는 경주말씨를 쓰고 있었다. 경주에 정착한 지 이십년이 되어 가니 그럴 만도
하였다. 나는 한순간 언니의 스산했던 청춘 시절이 내 것인 양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언
니 나이도 이제 마흔 살이 아닌가. 그 곱던 눈매에 주름이 잡히고 허리도 굵어질 대로 굵어
진 그야말로 중년 아줌마가 아닌가. 그러나 언니의 마음은 여전히 겁이 많고 살갑고 애틋했
다. 나는 내가 아무리 덕을 갖추고 겸손해진다 해도 언니라는 존재는 뛰어넘을 수 없으리라
는 것을 오래전에 알았다. 그래서 언니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어려지는 것일까.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양처럼. 생전에 민홍이 마음으로 깊이 따르던 사람도 언니였다. 언니
---. 나는 감히 언니를 소리내어 부르지 못하고 언니 손에 억세게 붙들린 팔에서 손을 들어
올려 언니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 올 두 올 쓸어넘겼다.
“그런데 언니, 어떻게 하지?”
언니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다가 나는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한의원에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언니는 화들짝 놀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는 내 입을 바라보았다.
“반지이--.”
언니는 아차 했다는 표정으로 금세 울상이 되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머, 거기 소파에 그냥 두고 왔나보다이.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나는 언니가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것을 보고 민망해져서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괜찮아. 집에가서 전화해 두면 되지 뭐. 그게 어디 갈려고.”
언니 얼굴에는 아무래도 자기가 큰 잘못을 했다는 듯이 잔뜩 걱정이 끼었다.
“그래, 거기 있을 거야. 소파 틈에 끼여 있겠지. 그런데, 어떤 반지니? 결혼 반지 아니었
니?”
결혼 반지는 아니었다.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언니를 안심시키는 미소만 얼굴에
올렸다. 결혼 반지를 끼지 않은 지는 일 년 쯤 되었다. 그 반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정확하
게 어디에 놓았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지나치게 무심한 것일까. 평소 민홍은 극소량
다이아가 섞인 결혼 반지를 애지중지 끼고 살았다. 결혼하고 이 주일 후면 결혼 반지에 대
한 예의와 의무는 다한 것이라는 주위 선배들의 끊질긴 농담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심할 때
면 전등 불빛에 요리조리 반지를 비춰 보며 내게 묻곤 했다. “이거 정말 다이아일까.”나는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그 때서야 내 반지의 정처를 머릿속에서 더
듬었다. 나는 맞춤 반지니 예물 반지니 하는 격식에서 가능한 한 먼 심플한 디자인의 것을
그의 손에 끼워 주었다.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 역시 그와 쌍을 이루어 내 손가락에 자그마
한 반지를 끼워 주었지만 평소 나는 그것을 잘 애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소박한 18케이
가락지를 끼고 다녔고 모처럼 정장을 해야 할 때에나 결혼 반지를 꺼내 끼곤 했다. “나, 반
지 잃어버렸어.”퇴근 길에 내가 그에게 빈 손을 내밀자 그는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다
시 하나 해줄 거지?” 나는 그에게 약속을 받아내겠다는 듯이 장난 삼아 을러 댔다. 그는
눈을 꿈벅이며 영문을 몰라했다. “으응, 그게 아니고. 반지 알이 빠져 버렸어. 하수도 구멍
에... 쳇!” 기껏 가볍게 얘기한다고 했으나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화
장실 세면기에서 손을 씻고 나서 보니 반지 알이 빠지고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알 빠진
반지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물건니기는 했지만 반지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에 대한 미안함과 다르지 않았다. 이를 어쩐담. 그러나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수도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이미 내 손에서 떠나간 것이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손을 탁탁 털고 미련 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반지여 잘 가
라. 그렇게 인사말까지 마음으로 조아리고 나니 한결 홀가분해졌다.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의
헛헛함 대신 그 무엇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킨 데 대한 환희와 전율이 파도
처럼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체념 뒤끝이 오르가슴 후의 카타르시스처럼 개운했다. 나는 자
리로 돌아와 알 빠진 반지를 벗어 핸드백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오후 내
내 일에 몰두했다. 그것으로 나와 인연을 다한 것인데 연연해한들 무엇하랴. 더군다나 민홍
씨한테 더 좋은 것으로 선물 받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 반지였다는 게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내게 닥친 어려움이
나, 슬픔 앞에서 그래 왔듯이 이번 일에도 애써 아무것도 아닌 양 의미를 축소시키고 무시
하려고 했다. “그것 참. 이번에 이사나 마치고 난 다음에 여유 생기면 똑같은 걸로 알을 박
지 뭐.” 그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으나 내가 이 일의 의미를 더 이상 헤쳐 보지 말자는
뜻으로 엄벙덤벙 이 말 저 말 쉽게 던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얘, 이거 대신 끼고 있어라. 응?”
언니는 가뜩이나 마음 허전할 텐데 손가락까지 빈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자신이 끼고 있
던 반지를 선뜻 벗어서는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나는 극구 거절했으나 언니는 진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전하고 싶어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반지 낀 손의 맵시를 언니한테 보여 주었다.
“참 잘 어울린다. 아예 너 가져라.”
나는 내 마음을 어루만지느라 전전긍긍인 언니에게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언니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언니, 난 정말 괜찮아. 그건 결혼 반지는 아니었어. 그냥 18케이, 부담 없이 끼는 거였
어. 물론 결혼하고 나서 산 것이기는 했지만... 언니도 왜, 알잖아. 엄마하고 올케언니가 민홍
씨한테 무슨 패물 받았냐고 하도 보여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은 없구, 자존심 상하고, 해서
뒤늦게 목걸이니 팔찌니 반지니 18케이로 삼 개월 할부해서 마련했던 거. 그 이후 주욱 그
게 전부였지. 어쩌다 결혼 반지 알이 빠져 버려서 그 반지가 결혼 반지처럼 되어 버렸던 거
구. 하지만 언니, 난 정말, 그게 내일 찾으러 가서, 혹, 찾을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말을 마치면서 내 심정은 정말 괜찮았다. 오히려 거칠 것 없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난 모
든 것을 떨쳐 버렸다는,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쾌감 같은 것이 가슴 속 깊이 뭉클
하게 사로잡혔다. 나와는 달라 내 말을 듣고 있던 언니의 표정은 거의 울려고 했다. 택시는
막 천마총을 벗어나 교동으로 꺾어지는 커브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
한 능이 눈에 들어왔다가는 멀어져 갔다. 나는 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능선을 따라 스
러지는 석양빛이 언니의 얼굴위에 가득했다. 언니의 슬픈 얼굴이 그럴 수 없이 아름다웠다.
등대 생각
“저기로 주욱 가면 태평양이야.”
바다로 향한 정윤 오빠의 얼굴이 바다의 일부처럼 보였다. 태평양이라는 오빠의 지적에
이전에 가졌던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어 뻗어나가는 것을 느끼며 무연히 불어오는 바람에 얼
굴을 내맡겼다. 그러면서도 지도나 책에 의존해 형성된 인식의 틀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엽
적이고 갑갑한 것인가에 생각이 가 닿았다. 한갓 동해안 어디쯤으로만 여기던 것이 사실 태
평양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우리 나라 지형에서 토끼의 꼬리, 거기서도 꼬
리 끝이란 말이지?”
정윤은 평소처럼 말은 입 안에 담은 채 그렇다는 고갯짓만 두어번 해주었다. 암석으로 형
성된 해안선을 달린 끝에 이곳 대보, 구만리라 쓰인 곳으로 들어서자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
했다. 기암 괴석으로 깎아지른 듯 가파른 해안선에 이어 돌연 나타난 낮고 평평한 지대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듬성듬성 밭가에 지어진 낮은 지붕의 집들이며 바람에 쏠린
채로 낮게 서 있는 소나무며 오로지 바다를 향해 군더더기 없이 서 있는 희디흰 탑, 등대며
아연 예상 밖 풍경이었다.
“장기곶이라고 예전에 들어 보았지. 우리가 어렸을 적 지명 찾기에 열성이었을 때, 왜 제
일 찾기 어려운 데를 찾아보라고 하다가 한번쯤 쉬어 가기 코너로 쉬운 데를 찾아보라고 내
곤 했던 지명 말이야.”
장난감도 놀이책도 많지 않았던 그 때 지도가 톡톡히 재미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 장기곶. 그런데 여기에 등대 박물관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니 등대 박물
관이라는 데가 있는 줄은 몰랐어. 더더욱 이렇게 큰 등대는 처음 봐.”
나는 하늘을 가르며 도도히 서 있는 등대를 바라보며 모슬포 앞바다의 등대를 생각했다.
5년 전,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 방파제를 민홍과 나는 기를 쓰고 걸어갔다. 나는 휘감고 있던
우비를 갈기갈기 찢어갈 듯이 몰아쳐 오는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 그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는 꼭 가야 할 데가 있는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내 몸을 부둥켜안다시피 이끌
고는 방파제 길을 걸어나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아!” 나는 성난 파도와 바람 소리에 맞
서 목청껏 소리쳤다. “저기!”일렁이는 바닷물은 순식간에 그의 외마디를 삼켜버리고 동시
에 우리마저 삼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그의 몸뚱이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자지러지며 주저앉으려 했다. 그는 흘러내리는 빗물을 쓸어훔치며 힘껏
나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 등대로, 등대로!”깡마른 체구의 그였지만 완력은 엄청나서 나
는 질질 끌리다시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왜에, 왜!”나는 절말적으로 외치면서도 마
치 그가 삼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거대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
혔다. “태풍이 몰아쳐 오는 밤 바다에 한 척의 배가 있다고 생각해봐.” 등대에 이르자 거
짓말처럼 바다는 고요해졌다. 나는 등대에 등을 기대 서서 잠시 가늘어진 빗방울을 쳐다보
고 있는 민홍을 낮선 사람인 양 새삼스레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남 힘으로
나를 이끌고 온 사람이 바로 그였던가. 의심쩍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했던지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특유의 순진한 웃음을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헤벌어진 그의 입을 어처구니
없이 쳐다보며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영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한
테 홀린 듯했다. “위험에 처함 배에 메시지를 보내는 이 등대야말로 그 어떤 위대한 문학
보다도 윗길의 존재인지 몰라.” 잠자코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방금 전까
지 붙들려 있던 불안과 공포로부터 놓여 나 평온을 되찾아 갔다. 여전히 물결은 사납게 출
렁이고 하늘은 또 한 차례 폭우를 쏟아 놓을 듯이 으르렁대고 있었지만 올 때와는 달리 돌
아갈 길이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민홍의 어깨에 젖은 머리를 기댄 채 내심 ‘등대의 미
학’에 대해 되새기고 있었다.
“이 곳도 같이 오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
등대 박물관 2층에서 돌아본 세계 곳곳의 등대들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정윤의 말뜻을 얼
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 답답할 때마다 이 곳을 찾는다는 오빠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사람들 대부분 그냥 쓱 둘러보고 나가 버리잖아. 저들에게 등대는 사전적인 의미 이외
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지도 몰라. 오히려 저 앞에 세워진 ‘영일만 친구’라는 노래비를 보
고 반가워하지.”
당연하지. 오빠는 체념하듯 말끝을 흐렸다. 이제 처자식에 노모까지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
었지만 오빠한테는 속절없는 과거가 되어 버린 80년대, 거덜난 방황의 표정이 찌든 때처럼
여전히 엉겨붙어 있었다. 홀쭉해진 볼따구니며 우뭉해진 눈자위며 삼십대 후반으로 들어선
오빠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오랫동안 정처를 구하지 못하고 떠돌던 흔적이 뭉텅 되살아나
마음이 산란해졌다. 80년대가 끝남과 동시에 산에서 산으로 일탈을 일삼아 온 오빠에게 가
장이라는 굴레가 영 안 어울리는 옷처럼 느껴졌지만 한편 달리 생각하면 그 옷처럼 지금의
오빠를 훌륭하게 감싸주는 보호막은 없을 것이었다.
“오빠, 우리가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부족함이 없이 채워졌을 때는 공유라는 것, 공감
이라는 것을 문제 삼지. 그냥 그대로 있는 것도 필요한데. 저 광대무변한 바다, 태평양처럼
말이야.”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짐짓 쑥스러워져서 슬쩍 오빠를 바라보려 고개를 돌리니 오
빠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여기!”
언제 준비했는지 오빠는 사진기를 내 쪽으로 디밀고 있었다. 나는 해 저무는 바다와 등대
사이에 서서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어 보였다. 찰칵!
석양과 함께 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제29회 동인 문학상 수상 작가 자선작
손님
이윤기
1947년 대구 출생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하얀 헬리콥터’로 등단
1994년 장편 ‘하늘의 문’발표
1995년 중편 ‘나비 넥타이’발표
1996년 장편 ‘햇빛과 달빛’발표
1998년 소설집 <나비 넥타이>출간
역서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변신 이야기>등 2백여권
1998년 현재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리서치 펠로 (연구원)
손님
1
해가 초겨울 추위에 오그라들어 오후는 잿빛이었다. 바다 위에는 우는 갈매기도 있었고
날아가 버리는 갈매기도 있었다.
산등이 뚜욱 잘라지고 마악 바다가 시작되는 언덕에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횡대 지어
오는 백마 무리 같은 파도의 마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닷가에 사는 아이에게 그 바다와
파도는 심상한 풍경에 지나지 못했다.
아이는 손가락에다 연두색 대님 한 짝을 걸고 있었다. 대님은 바람에 날려 자꾸만 아이의
소매 쪽으로 감겨들었다. 그 때마다 대님을 매었던, 주름이 남은 바짓가랑이도 발등에서 팔
랑거렸다.
아이는 돌아서서 코를 풀었다. 아이의 눈이 빨갰다. 그러나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두어 걸음 물러선 뒤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대님을 바다 쪽으로 던졌다. 힘껏... 그러나
가벼운 대님은 역풍을 뚫고 날아가지 못했다.
대님은 바다로 떨어지기는커녕 맞바람에 날아와 아이 뒤에 있는 팡파짐한 다복솔에 걸리
고는 했다.
아이는 대님을 다시 접은 뒤 칼돌을 하나 주워 대님 끝으로 칼돌을 묶었다. 손이 곱은지
아이는 칼돌을 묶은 뒤 금방 일어나지 않고 두 손을 샅에다 넣은 채 한참 있다가 일어났다.
이윽고 아이는 대님을 다시 집은 뒤 머리 위로 빙빙 돌렸다. 대님은 물매줄처럼, 상모처럼
아이의 머리 위에서 돌았다. 대님 쥔 손에 쾌적한 원심력이 느껴지자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
다. 그러나 잠깐만 그랬다.
아이는 상모 돌리듯이 물매줄 돌리듯이 돌리던 대님 끝을 놓았다. 칼돌은 연두색 대님 꼬
리를 달고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아이의 눈을 칼돌을 따라 날아가는 대님을 좇았다.
바다는 대님 하나 삼킨 흔적을 그 표면에 오래 남기지 않았다. 아이는 돌아서서 마을 쪽
으로 통하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아이는 연신 길가를 두리번 거렸다.
아이는 오후 내내 그렇게 두리번 거렸었다.
겨우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한 열여섯 살배기 누나가 대님 한 벌을 만들어 아이에게 준 것
은 그 날 아침이었다.
누나가 아이에게 대님을 만들어준 데엔 뜻이 있었다. 어머니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누나가 보기에 불리고 있다 싶을 정도로 기뻐했다. 누나의 서툰 인두질 솜씨가 거
기에 따뜻하게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는 대님을 살그머니 뺨에 대어 보기까지 했다.
아이에게는, 처음으로 받아 보는 선물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첫 선물의 의미를 알고 나서는 낯색을 바꾸었다. 어머니 제삿날이었기 때
문이었다.
아이는 부러 꽁한 얼굴을 해보이고,
“나 학교 갔다가 일찍 오마.”
이렇게 말하고는, 바짓자락을 착착 접어 대님을 매고 학교로 갔다. 계집아이들이, “쟤 얼
른 장가들고 싶은 게다”하면서 놀렸다. 아이는,
“엄마 제삿날이라고 누나가 만들어 줬다. 신랑 되고 싶어서 맨 게 아니다”하고 당당하
게 계집아이들을 을박아 주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라니까 계집아이들도 더 이상 놀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님 덕분에 바짓가랑이가 너무 가뿐해서 동무들과 장난
을 지나치게 한 것이 탈이었다.
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누나의 눈길이 아이의 바짓가랑이에서 멎더니 떨어질 줄을 몰
랐다.
“가뿐해서 좋더라. 썩 잘 어울리지?”
“잘도 어울리겠다.”
누나 말에 아이도 대님을 내려다보았다.
한쪽 대님이 없었다. 대님이 없는 쪽 바짓가랑이는 주름이 진 채 발등을 덮고 있었다.
“얼라?”
“장난 심하게 쳤구나. 대님 매면 새신랑처럼 점잖게 굴어야 하는거다, 너.”
“새신랑, 새신랑... 그딴 소리 듣기 싫다.”
아이는 돌담 밖으로 뛰어나와 학교 길을 되짚어 달렸다. 누나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
이를 따라왔다.
“바보야, 나머지 한 짝은 풀어 놓고 가. 놓고 가기 싫으면 풀어서 속주머니에 넣어.”
아이는 학교 길을 되짚어 가다 말고 되돌아와 함께 장난하면서 온 동무들에게, 혹시 대님
한 짝을 줍지 않았느냐고 두루 물어 보았지만 주운 아이는 고사하고 아이의 대님을 눈여겨
본 아이도 없었다.
마을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제자리에 매여 있던 대님이었다. 장길 가던 아낙도 그랬으
니까.
“저런, 이제 누나가 엄마 노릇을 하는구나.”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길이 세 번째는 그렇게 생소해 보일 수가 없었다. 홀로 나무 사이
를 가는 오솔길도, 길 위로 나서는 숲 그림자도, 바람도 아이에게는 문득문득 낯설게 느껴졌
다.
숨이 턱끝에 오르자 아이는 천천히 걸으면서 잎을 벗을 떨기나무 가지를 휴심히 살폈다.
오솔길을 이따금씩 가로막는 떨기나무 가지는 대님을 채어 제 목에 걸어 놓고 있을 만큼 심
술궂어 보였다. 멀리 대님 같은 게 보일 때마다 아이는 그쪽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것은 바람에 날아와 걸린 빛 바랜 천 조각 아니면 겨울에도 죽지 않는 춘란 잎이
기가 일쑤였다.
아이는 정말 대님 비슷한 게 보여서, 낮달이 걸린 나뭇가지를 겨냥하고 달려갔지만 이번
에는 대님이 아니라 찢어진 연 꼬리였다.
아이는 나뭇가지에서 연 꼬리를 벗겨내려 보고는 조금 놀랐다. 공책을 잘라 만든, 이제는
바람과 비에 시달려 노랗게 변색한 연 꼬리에 쓰인 서툰 글씨... 그것은 바로 아이 자신이
쓴 글씨. 아이가 제 공책을 찢어 만든 연 꼬리였다.
아이는 연이 실을 끊어먹고 마을 앞 언덕을 넘던 날을 기억할 수 있었다.
학교 길을 되짚어 다시 마을로 돌아오면서 아이는 그 대님이, 이미 찾아본 곳에 있을까
봐 연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면서, 마을에서 멀어지던 연 꼬리를 다시 만난 것처럼, 잃
어버린 대님 한 짝을 다시 만나는 상황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아이에게는 너문 벅찼다.
그래서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된 대님 한 짝에다 칼돌을 매
달아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돌멩이 하나 바다에 던진 것으로 치고 대님은 잊어
버리기로 한 것이다. 감나무 빈 가지에 걸려 있던 달이 이죽거리는 입 모양을 하고 바다 저
쪽으로 가고 있었다.
누나는 집에 없었다. 아이는 누나가 집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일껏 만들어 줬는
데... 한 짝은 잃어버리고, 한 짝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면 누난들 좋아할 리 없지... 엄마 제
삿날인데...)
감나무 밑에서 머리를 감고 있던 아버지가, 머리채 사이로 아이를 보며 물었다.
“너 누구랑 싸웠냐? 잔뜩 빼물고 있게?”
“아뇨, 누나는요?”
“마을로 내려갔다. 곧 올 게다.”
“싸운 게로구나.”
“아빠는 모르셔요.”
아이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누나가 펴둔 상이 있고, 상 위에는 쌀이 봉긋봉긋
두 무더기로 나뉘어 있었다. 누나는 젯밥 지을 쌀에서 뉘를 고르다가 나간 모양이었다. 누나
는 제삿날마다 꼭 상에다 쌀을 쏟아 놓고 뉘를 고르고는 했다.
아이는 아랫목에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방의 네 벽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바닷바람에 발갛게 얼었던 살이 저리해져 왔다.
반침 위로, 젯상 차릴 때 입으려고 곱게 다려 놓은 누나의 치마저고리가 보였다. 아이는
누나 저고리의 옷고름이 대님으로 보여서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때 누나의 타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발자국 소리는 댓돌 앞에서 멎었다.
“너 방에 있니, 있구나...”
누나의 목소리에서 기름이 자르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누나에게, 아이를 기쁘게 해줄 만
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누나의 목소리에서는 기름이 자르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누나에게, 아
이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누나의 목소리에서는 기름이 흐르고는 했다.
“자니... 자는 척하니?”
“둘 다 아니야.”
“이리 나와 봐, 나 좋은 거 가져왔다. 안 볼래?”
“다 귀찮아. 나 졸리는걸, 밤중에 일어나야 하잖아. 제삿날이니까..”
“나와 보라니까 그러네, 쟨.”
누나가 누나답지 않게 억지를 부릴 때면 아이에게는 꼭 좋은 일이 생기고는 했다. 아이는
그걸 알면서도 그 때마다 번번이 꾸물거리고는 했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누나가, 왜 눈이 빨갛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비벼서 그
렇다고 대답할 참이었다.
그런데, 아! 대님 한 짝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나는 대님을 흔들면서 웃었다. 아이
가 그 대님이 어느 쪽 대님인가를 알아 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잃어버렸던
놈일까, 바다에 던져 버렸던 놈일까?)
“개울에서 놀았다면서? 거기에서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니? 뱀인 줄 알았다. 그치만 나도
바보야, 이 추운 데 뱀이 어딨니?”
아이는 신발을 신발을 꿰어 신고 대님을 빼앗듯이 받아든 다음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해
있을 때 다녀왔던 그 바닷가 언덕으로 달렸다. 언덕에서 바다로 던져 버렸던 그 대님이 해
초처럼 바위 틈으로 밀려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나 언덕 아래에서는 무겁고 빈 파도가 부서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는 대님 끝에다
칼돌 달았던 것을 잠깐 잊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아이에게는 참 이상했다.
대님 한 짝을 잃었을 때보다, 그래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한 짝을 바다에 버렸을 때보다,
처음 잃었던 한 짝을 다시 찾았을 때가 왜 그렇게 허전한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아이가 ‘차라리’라는 낱말을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누나는...찾아다 주지 말지... 누나 때문에...나는 망했다...)
아이가 ‘차라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심상치 않다. 어린 것이 한 곳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것도 벌써 심상치 않은 사태다.
아이들은 가을 바닷가라면 꽃게나 조개를 잡으며 놀기에 좋은 곳이었지만, 꽃게도 없고
조개도 없는 겨울 바닷가는 너무 추웠다. 그런데도 아이는 한참이나 그 바닷가의 그 심상한
풍경 앞에 서 있었다.
2
마을 위에서 서성거리던 그 날의 저녁 연기가 산중턱에 걸렸다가 어둠이 되어 다시 마을
로 내려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이와 누나,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세 식구가 사는 외딴집
에 한 손님이 황혼에 묻어 들어왔다. 업은 아기와 머리에 인 보따리를 합하면 제 몸보다 더
큰 도붓장수였다. 도붓장수가 나이 어린 처녀에게, “빈 방이 있다지요”하고 공대말로 물을
동안 등에 업힌 아기는 뺨에다 보리튀김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채 방긋 웃었다.
마을마을을 다니다 그만 해를 앞세우고 만 비단 장수였다. 어둠에 쫓기는 도붓장수들은
자주 그 집을 찾고는 했다. 식구가 단촐해서 늘 빈 방이 있는데다가 집이 외딴집이어서 주
인이 나그네 끓는 걸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단인가 봐요.”
누나가 이렇게 말하면서 발돋움을 하고 보따리를 건드려 보았다. 보따리가 금방이라도 아
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누나는 보따리를 마루에 내리는 비단장수를 도왔다.
“참 잘 오셨어요. 마침 어머니 제삿날이에요. 손이 모자라서 걱정했는데 좀 도와 주실 수
있지요?”
누나가, 오래 사귀던 사람이라도 만난 듯이 다정하게 말했다.
“도와 주고 말고. 가까운 친척은 없는갑네? 그렇잖아도 마을 사람들이 그러더라. 나이 어
린 처녀가 여간 기특한 게 아니라고...”
비단 장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보따리에 눌려 굳어진 목을 풀었다. 그러면서 한꺼번에
집안의 사정을 다 구경해 버리는 일에 그 비단 장수는 익어 있는 것 같았다.
“비단이죠?”
“응.”
그러나 비단 장수는, 나이 어린 처녀가 비단을 끊을 수 있을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기가 보채기 시작했다. 비단 장수는, 업은 아기를 돌려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는 크고 시커먼 젖을 꺼내어 아기에게 물렸다.
“겨우 열여섯인데 어머니 제사 치린다카제? 왐머이, 집안 해놓은 것 좀 봐라. 새알에 멜
빵하겠다.”
당당하고 투박한 사투리와 스스럼 없는 몸짓이 어둑어둑한 밤안개 속에서도 비단 장수의
나이를 어림하여 헤아릴 수 있게 했다. 누나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부엌에서 초롱
을 들고 나왔다. 사방에 창호지를 바른 초롱의 불빛은, 어둠이 짙지 않아서 그런지 겨우 아
이의 발치밖에는 비추지 못했다.
누나와 비단 장수는 나무더미에서 땔나무를 한 아름씩 안고와, 비어 있던 방 아궁이에 불
을 때기 시작했다. 처마 밑이 밝아지면서 누나와 비단 장수가 환한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모습이 드러났다. 아이는 거기에는 끼지 않고 뾰족한 나무 꼬챙이로 호롱의 심지를 돋우고
있었다.
누나가 다가와 아이를 감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누나의 목소리가 아주 밝았다. 아궁이 불
빛은 감나무 아래까지는 닿지 않았다.
“얘, 비단 장수래. 대님감쯤은 문제 없이 얻을 수 있을 거다.”
“대님 같은 거 이제 싫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두 벌 만들어 주마. 비단 장수에게는 그런 조각천 많아, 너.”
누나가 다시 아궁이 쪽으로 다가가 비단 장수에게 수작을 걸었다.
“비단뿐이에요?”
“아니다, 양단, 공단, 비로도, 유똥도 있다. 와, 처자도 한 감 할라카나?”
“아뇨, 하도 무겁길래요.”
“무겁지. 나락철에는 나락도 받고 보리철에는 보리도 받으니까... 이놈의 장사는 어떻게
된 셈인지 팔면 팔수록 보따리가 무거버진다. 짱배기 벗거지도록 해봐야 입에 풀칠, 짱배기
가 성하면 빚이 늘고...”
객식구가 들 때마다. 방 소제도 하고, 군불도 때어 주던 아버지가 그 날은 웬일인지 방에
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제삿날이어서 그런지 아버지의 마른기침이 유난히 잦았
다.
“아버지...”
“오냐.”
누나가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달그락거리며 불렀을 때야 아버지의 어두운 목소리가 비
로소 방 안에서 새어 나왔다.
“왜 불을 안 켜시고...”
“나 누워 있다.”
“비단 장수래요. 아기가 어려요. 그래서 옆방에다 불을 때고 있어요.”
“오냐, 잘했구나.”
아버지는 그래도 문을 열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셔요?”
“아니다... 욕심을 내어 머리를 감았더니 한기가 좀 들 뿐이다...”
“아버지도... 물 데워 달라시지요?”
“대단찮다... 빨랫줄은 걷었지?”
“네.”
“너희 둘은 한숨씩 자둬야 할 거다.”
“걱정 마셔요.”
누나가 빨랫줄을 걷은 것은 해지기 전이다. 어머니 혼백이 고개 숙이지 않고도 들어올 수
있도록, 누나는 해지기 전에 이미 빨랫줄을 걷은 것이다.
누나가 보기에 어머니 혼백은 제삿날마다 살짝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았다.
“아빠가 오늘은... 이상하시다.”
아이가 속삭였다.
“쉬...”
누나는, 어머니 제삿날에 갑자기 잦아진 아버지의 마른 기침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손가락을 하나 세워 입술에다 대고, 쉬, 했던 것이다.
3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기 몫의 옛 시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거부할
길 없는 바다의 거친 손길에, 바닷가 아이였던 자신이 튼튼한 청년으로 자라나던 옛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절 청년은, 바다가 길러 준 그 강인한 몸으로 농부들이 땅을 그렇게 하듯이 공포와
신비로 가득한 파도의 이랑을 갈고, 그 품 안에서 그만큼의 땀을 흘리며 살진 양식을 수확
했다. 청년에게 세계는 가슴 설레리 만치 아름다운 삶터였다.
고기잡이 배를 따라나갔다가 며칠 만에 한 번씩 마을로 돌아오면 청년은 처녀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처녀의 아버지는 청년이 막소주 됫병과 몇 마리의 먼바다 생선을 들고 찾아
오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처녀까지도, 청년이 들고 오는 막소주와 먼바다
생선은 처녀의 집을 찾으려는 청년의 구실에 지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바다에 길든 청년에게 ‘가정’이라는 것은 것은 겨드랑이 간지러울 만큼, 참으로 관능적
인 것이었다. 청년은 이 간지러움을 현실로 누리는 희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처녀의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던 청년이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써보
던 날, 처녀의 어머니는 청년의 생년과 생월과 생일과 생시를 물었다. 처녀 아버지가 돌아가
는 청년을 멀리 배웅하면서, 청년의 가슴에 든 것, 머리에 든 것, 손아귀에 든 것을 엿보려
고 한 것도 그날이었고, 청년이 한 해만 더 벌면 선주에게 빌붙지 않아도 조그만 배나마 한
척 장만할 수 있다고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말한 것도 그 날이었다.
처녀의 집을 나올 때 초롱에 불을 다려 아무 말 없이 아버지에게 건네 준 것은 바로 처녀
였다. 청년에게 처녀 아버지의 말이 다 들리지 않았던 것은 다소곳이 돌아서던 처녀의 뒷모
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과 처녀는 서로 알게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서로 말을 주고 받지 않게 된 지도 벌
써 오래 되었다. 청년과 처녀는 각각 늠름한 어부와 풍만한 처녀가 되고 나서부터 어릴 적
에 버릇이 된 말투는 새로 싹튼 기이한 흥분을 실어 나르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청년과 처녀는 말놀이를 말싸움으로 끝내고 돌아서면서
도 그 까닭을 몰랐던 것이다.
청년이 언젠가 게를 한 마리 잡아가지고 처녀의 집으로 간 일이 있다.
“이 게 봐라, 크지?”
“응, 크다.”
“그런데 알뱄다.”
“......”
가슴이 눈에 띄게 부풀어오르던 처녀는 낯빛을 붉혔다.
“크기는 크다. 어떻게 잡았는데?”
“총 놔서 잡았지...”
“이제는 놀리기까지 하네...”
처녀의 부모와 청년 사이에 심상치 않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한 뒤부터는, 청년이 그 집에
나타나도 처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은 마음을 바쁘게 먹지 않았다. 그 방문
이 오래지 않아 열렸다가는 다시 닫히고, 오래 그리워하던 처녀의 가슴과 현실이 자기 몫으
로 돌아올 날이 오고 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녀는 청년에게, 바다와도 바
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었으며 미래의 행복에 대한 약속이었다.
먼 뱃길을 떠나야 하는 날이 가까워지자 청년은 처녀의 부모에게, 말 매듭을 지어 주십사
고, 오래 미루어 오던 청을 넣었다. 처녀 부모의 침묵은 그 날 따라 길기도 했다.
“말이 다 된 것으로 알고 다녀오게.”
이렇게 말뚝 박듯이 말한 것은 아버지였고,
“걔 생각도 들어 봐야지요.”
한 것은 어머니였다.
“눈치를 하루 이틀 봤나? 척하면 삼척이고 탁하면 목탁이지. 저것이 엉큼한 것이여, 자네
를 닮아서.”
“젊은 사람 앞에 놓고 무신 짓고... 엉큼하든 달큼하든...”
“허허, 물어 보나 마나여... 염소 물똥 싸는 거 봤는가?”
“이 양반이 시방...”
두 늙은이는 잠깐 거드름을 생략하고, 쑥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토닥거렸다. 장인 자리가
어린 아이처럼 웃자 장모 자리는 늙은 서방의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그날 밤, 장모 자리는 열 살쯤 나이를 더 먹은 시늉을 했고 장인 자리는 떡갈나무 껍질
같던 얼굴을 펴고, 청년의 술잔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술잔 밑에 딸려 보내던 왼손을 거두어
들였다.
장인 자리가 청년을 배웅하기 위해 뜨락으로 나서자 처녀가 초롱에 불을 다려 내었다. 아
버지가 듣기 싫지 않은 어조로 딸을 나무랐다.
“달도 안 보이느냐, 이것아!”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로 내려가 둥근 달 아래 가슴을 열어 놓고 있는 듯한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바다가 아는 것, 이를테면 부모나 형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에
는 길들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사랑의 약속만은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 중에
서 가장 진하고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우애의 약속이었다. 마침내 그것을 껴안았다고 생각
한 청년 가슴에 넘치는 힘과 보장받은 듯한 행복을 바다에 감사했다.
두달 동안이나 바다에 있다가 돌아오는 회항의 밤바다에는 안개가 짙었다. 배가 닿자 어
부들은 어부들답게 가족과의 재회를 무뚝뚝하게 나누었다. 어부들은 그들이 바다에 나가 있
을 동안 가족들이 했던 기도를 그런 식으로 애써, 나 모르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주와
그 아들이 나와 어부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청년에게 선주 아들의 악력은 기이하게도 심
술궂게 여겨졌다.
청년은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처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밤안개 속
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처녀와 처녀 가족과의 재회를 오붓하게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처녀
의 방에는 불이 없었다. 장인 자리는 사랑방에서 청년을 맞고, 손 대신 계절이 바뀔 동안에
빛깔이 바래 버린, 약속된 행복의 시체를 내밀었다.
“반갑기는 하네만...”
장인 자리의 입냄새 묻은 담배 연기가 청년의 가슴에 그을음 자국을 남기는 것 같았다.
“오는 길에 아무도 안 만났는가... 암 말도 못 들었는가?”
청년은 숨을 멈추었다. 그 때까지 겪은 어떤 파도보다도 더 거센 파도의 전조를 읽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겪은 어떤 파도보다도 더 거센 파도의 전조를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
다 사람이 된 청년은 그런 것에도 길들어 있었다.
“나야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네만, 여자들 약속은 무겁지 못한 법이네...”
청년은 가만히 문을 열고 처녀의 방문을 내다보았다. 처녀의 방에는 불이 없었다.
파도에 지친 무기력한 오십대는 선주의 아들에게 딸을 팔고, 바다에서 희생되는 어부의
명단에서 제 이름을 지운 것이다. 조그만 항구의 황태자와 공모자들은 이렇게 해서 청년의
진실에다 모래를 끼얹은 것이다.
어둠이 지키는 제 집으로 돌아오면서 청년은 바다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리고는 저
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청년이 조그만 전마선 한 척을 밤바다에 띄운 것은 며칠 뒤의 일이다. 소박한 사랑의 약
속을 빼앗긴 이 절망한 청년의 발 밑에서 바다가 전마선을 저어 주었다. 물풀의 씨앗처럼
청년은 이렇게 그 마을을 떠났다. 슬픔을 잊으려고 청년은 만나는 섬과 별의 이름을 외웠다.
물풀의 씨앗이 다른 물가에서 뿌리를 내리듯이 청년도 다른 해변에서 생활을 꾸몄다. 그
리고는 가슴에 둥지 튼 적막을 신경통과 함께 다독거리며 나이를 먹었다.
아내를 얻고 생활을 마련했으나 그의 사랑은 본능의 나무에서는 꽃을 피워 주지 않았다.
아내가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아 주고 죽었으나 그는 아내 몫으로 바다에 돌을 던진 적은
없다. 아내의 제삿날은 아무 일 없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4
어허...
그 처녀가, 선주 아들의 첩이 되었던 그 처녀가, 뜨내기 비단 장수로 늙은 채 어둠에 쫓
겨, 이제는 중늙은이가 된 옛날의 그 청년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의 혼백을 위해 딸이 초저녁에 빨랫줄을 걷은 그 마당으로, 아버
지의 첫사랑이 고개도 숙이지 않고 들어선 것이다.
비단 장수가 아이와 누나에게 뱉어 내는 무신경한 사투리는 큼지막한 돌멩이가 되어 아버
지의 추억 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아버지, 메 다 지었어요. 곧 닭이 울 텐데요.”
누나는 문고리를 달그락거리며, 갈아입은 옷의 옷고름을 만지작 거렸다.
“오냐, 닭 울리면 큰일이지.”
아버지가 일어나면서 중얼거렸다.
그 날 그 집에 한 손님이 두 얼굴을 하고, 혹은 두 손님이 한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는 것
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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