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이야기
일러두기
1. 이 책은 로마 시대의 시인이자 작가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METAMORPHOSES’를 변역한 것이다. 그러나 원저의 라틴어를 직접 한국어
로 옮긴 것은 아니다. 역자가 번역 대본으로 쓴 것은 메리 이니스가 현대인을
위하여 현대어로 변역한 영어판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시아 The
Metamorphoses of Ovid’(펭귄 북스, 1955, 영국 런던)와, 라틴어판을 번역한 일
어판 ‘전신물어’(전중수영, 전전경작 공여, 입문서원, 1984. 일본 교토)였다. 라
틴어 대본을 쓰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는 역자에게, 고전 라
틴어를 능숙하게 우리말로 번역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틴어 원문은 원래 운문인데다, 상당 부분이 2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가령,
‘대지여, 그대가 뱀을 지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런 식이다. 이말은, <이
때 대지는 뱀을 지어내었다> 는 뜻이다. 이런 문장은, 짧을 경우에는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지만 길어질 경우에는 독자들을 상당히 괴롭힐 가능성이 있다. 역
자가 현대 영어로 번역된 영어판을 대본으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2인
칭 문장이 독자를 괴롭힐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판에는 역자가 취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고유명사를 현대영어
로 고쳐놓은 것이 그것이었다. 이런식의 영어판을 그대로 옮기면, 독자는 기원전
1세기에 씌어진 작품을 읽는 재미를 누릴 수가 없다. 역자가 라틴어를 일본어로
옮긴 일어판을 중요한 참고서로 삼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라틴어를 직역한 일
본판을 중요한 보조 자료로 삼았기 때문에 오비디우스 시대의 사고방식이나, 세
계관, 당대에 쓰이던 지명을 고스란히 살려 옮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문체에서는 영어판의 장점을 취하고, 고유명사 표기에서는 라틴어를
직역한 일어판의 장점을 취한 셈이다.
2. 로마 신화는 대부분 신들의 이름만 다를뿐 사실은 그리스 신화의 복제판으
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저자가 로마인이다. 그래서 고유 명사의 표기를 로
마식으로 해야 할 것인지, 그리스식으로 해야 할 것인지 망설였다. 로마식으로
표기하면 그리스 식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고, 그리스식으로
표기하면 저자의 의도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1)신들의 이름은 모두 로마식으로 표기하되, 그리스식 이름을 각주에다 밝혔다.
(예:유피테르-그/제우스, 아폴로-그/아폴론, 유노-그/헤라)
2)그리스 인명과 지명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긱으로 표기했다.
(예:다에달루스-다이달로스, 이카루스-아카로스)
3)이 책이 씌어질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지명은 가능한 한 고전 그리스식으로 표기했다.
(예:이집트-아이귑토스, 갠지스강-강게스강, 스페인-히베리아)
4)본서의 각주 작성에는 그리스 신화의 해석을 시도한 졸저『뮈토스』
의 부록을 만든 자료와 일어판의 난외 주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일역자 두 분의 치밀한 난외 주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5)각주의 다음 기호가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예:그-고전그리스어,
변신이야기:신들의 전성시대
제 1 부: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시작되었다.
1. 서사
마음의 원에 쫓기어 여기 만물의 둔갑이야기를 펼치려하오니, 바라건대 신들
이시여, 만물을 이렇듯이 둔갑하게 한 이들이 곧 신들이시니 내 뜻을 어여쁘게
보시어 우주가 개벽할 적부터 내가 사는 이날 이때가지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풀
어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소서.
2. 천지창조
바다도 없고 땅도 없고 만물을 덮는 하늘도 없었을 즈음 자연은, 온 우주를
둘러보아도 그저 막막하게 퍼진 듯한 펑퍼짐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막막하
게 퍼진 것을 카오스(혼돈)라고 하는데, 이 카오스는 형상도 질서도 없는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생명이 없는 퇴적물, 사물로 굳어지지 못한
모든 요소가 구획도 없이 밀치락달치락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여기에는 아
직 이 세상에다 넉넉하게 빛을 던져줄 티탄(영/타이탄. ‘거신족’이라는 뜻. 하
늘인 우라노스, 땅인 가이아 및 그 사이에서 난 여섯 남매를 가르킨다)도 없었
고, 날이 감에 따라 초승달의 활시위를 부풀려가는 포이베(여기세서는 달의 여
신. ‘빛나는 자’)도 없었다. 대지는 아직, 그 대지를 감싸주는 대기 안에서 제
무게를 감당할 형평이 못 되었고 암피트리테(원래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아내
이나 여기에서는 ‘바다’)도 땅의 가장자리를 따라 그 팔을 뻗을 형편이 못 되
었다. 대지와 바다와 공기를 이루는 요소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땅 위로는 걸을
수가 없었고 바다에서는 헤엄칠 수가 없었으며 대기에는 빛도 없었다. 말하자면,
제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만물은
) 이 같은 반목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런 요소들보다는 훨씬 빼어난 자연(천
지창조의 주재자인 신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신이었다. 신이, 다름아닌 이 자연은,
하늘로부터는 땅을, 땅으로부터는 물을, 무주룩한 대기로부터는 맑은 하늘을 떼
어 놓았다. 자연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지경에서 이들을 떼어내자 이들에게 서
로 다른 자리를 주어 평화와 우애를 누리게 했다. 무게라는 것이 없는 창궁의
불과 사물을 태우는 힘을 가장 놓은 하늘로 날아올라가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가볍기로 말하면 불 다음인 공기는 바로 그 밑에 자리했다. 이 두 가지보다도
밀도가 높은 대지는 단단단 물질을 끌어당겨 붙이면서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하
강했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물은 맨 나중 자리를 잡고 이미 굳어진 대지를 싸
안았다.
이 조물주가 어떤 신이었든, 좌우지간 이 신은 혼돈을 이루고 있던 물질의 덩
어리를 정리하고 구분하고 각각 그 있을 곳에다 배치한 뒤 우선 대지를, 어느
쪽에서 보아도 그 모양이 똑같도록 커다란 공꼴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바다를
사방으로 펼치고 거친 바람으로 풍랑을 일으킨 뒤 땅 주변에 펼처진 해안선을
빠짐없이 둘러싸게 했다. 이어서는 샘, 큰 호수, 그리고 연못을 파고, 흐르는 강
양쪽으로는 꾸불꾸불한 둑을 만들었다. 강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강
가운데에는, 흘러가다가 대지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리는 강도 있었고 멀리 흘러
가 이윽고 망망한 대해원의 품에 안겨 초록빛 강변대신에 단애의 바위을 씻는
것도 있었다. 신은 또 땅을 고르어 평지를 만들고, 골짜기를 파고, 숲에는 나무
가 빽빽하게 들어차게 하고, 험한 산을 세우기도 했다.
신은, 이번에는 하늘을 나누어 오른쪽에 두 권역, 왼쪽에 두 권역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이 네 권역보다 훨씬 뜨거운 다섯번째의 권역을 두었다. 이어서는
이 다섯 권역의 하늘로 덮인 땅덩어리 역시 같은 권역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땅
에도 다섯 지대가 생긴 셈이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지대는 너무 더워 산 것이
살 수가 없었고, 양쪽 끝의 두 지대는 아주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
사이에다 남은 두 지대를 두고 더위와 추위가 번차례로 들게 하여 산 것이 살기
에 적당한 기후를 베풀었다.
이 다섯 지대 위로는 공기가 퍼져 있다. 공기는 그 무게가 흙이나 물보다는
가볍지만 하늘의 불보다는 무거웠다. 공기가 있는 이곳은, 안개나 구름, 인간에
게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천둥, 그리고 구름에서 나오는 벼락과 추위를 나를
바람, 이 모든 것을 위해 신이 예비한 거처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람에 대해서만
은, 천지의 조물주도 대기 속을 제멋대로 불게는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해
서 바람은 각기 다른 지대에 거처하면서 제 나름의 방법으로 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바람이 온 땅을 부수어버리기로 작정하면 어느 누구도 이를 저지할
수가 없다. 바람의 형제들은 그만큼 사이가 나쁜 것이다. 바람의 형제들이 사는
땅은 각각 이러하다. 에오로스(‘동풍’ 혹은 동풍의 신)는 새벽의 땅, 다시 말
해서 나바타에아 인(아라비아의 한 종족)들의 나라나 페르시아, 아침 햇살을 처
음 받는 산들(인도 서북부의 산들)에 머물고, 제퓌로스(‘서풍’ 혹은 서풍의
신)는 베스페르(‘금성’ 그/헤스페로스) 근방이나 석양 무렵에 따뜻하게 달아오
르는 해변에 살고 있다. 무서운 보레오스(‘북풍’ 혹은 북풍의 신)는 스퀴티아
땅(흑해 동쪽 및 북쪽. 지금은 우크라이나)과 북방을 점거하고 그
이 밖에도 신은 맑고 투명한 아이테르(‘푸른하늘’)를 만들었다. 이 아이테르
는 무게가 없는 것으로서, 어떤 지상적인 것으로도 더럽힐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이렇듯이 모든 것들이 제 몫의 거처에 자리를 잡자, 오랫동안 혼돈의 덩어리
안에 갇혀 있던 별들이 하늘 하나 가득 찬연히 빛나기 시작했다. 빈곳이 있으면
거기에 사는 것이 있어야 마땅한 법이다. 그래서 신들과 별들이 천상에 자리를
잡았다. 물은, 아름다운 비늘을 번쩍거리는 물고기들의 거처가 되었고 대지는 짐
승들 몫으로 돌아갔다. 흐르는 대기는 새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 짐승들보다는 신들에 가깝고, 또 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생
물을 지배할 만한 존재는 없었다. 인류가, 인간이 창조된 것은 이즈음이었다. 이
인간은, 세계의 시원이자 만물의 조물주인 신이, 신의 씨앗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아페토스(티탄의 시조인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아들)의 아들 프로메
테우스가 천공에사 갓 떨어져 나온, 따라서 그 때까지는 여전히 천상적인 것이
조금은 남아 있는 흙덩어리를 강물에다 이겨, 만물을 다스리는 조물주와 그 모
양이 비슷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늘 시선을 땅에다 박고 다니는 데 비해 머리가 하
늘로 솟아 있어서 별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도 있었다. 이로써,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흙덩어리였던 대지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
품안에 거느리게 된 것이다.
3. 네 시대와 거인족
한 처음은 황금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관리도 없었고 법률도 없었다. 사람
들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서로를 믿었고 서로에게 정의로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형벌도 알지 못해꼬 무서운 눈총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았다. 나라가 청동관에다
포고문을 게시하여(고대 로마의 관제) 백성을 을러매는 법도 없었고 청 넣으러
간 무리가 판관앞에서 자비를 비는 일도 없었다. 아니, 아예 판관이라는 게 없었
다. 사람들은 판관없이도 마음놓고 살 수 있었다. 소나무만 하더라도 고향 산천
에서 무참하게 잘리고 배로 지어져, 본 적 들은 적도 없는 타관 땅으로 끌려가
지 않아도 좋았다. 인간도 저희들이 살고 있는 땅의 해변밖에는 알지 못했다. 마
을에 전쟁용 참호 같은 것은 있을 필요도 없었다. 놋쇠 나팔, 뿔피리, 갑옷, 칼
같은 것도 없었다. 군대가 없었으니, 인간은 저희 동아리끼리 아무 걱정 없이 평
화를 누릴 수 있었다. 대지도, 괭이로 파고 보습으로 갈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자라지 않게 대어주었다. 인간은 대지가 대어주는 양
식을 흥감하게 여기고 양매, 산딸기, 산수유 열매, 관목에 열리는 나무 딸기, 가
지를 벌린 유피테르 나무(유피테르의 신목인 떡갈나무)에
그러나 사투르누스(그/크로노스. 영/새턴. ‘시간’)가 저 암흑의 타르타로스
(‘무한지옥’)에 갇히고 세상의 지배권이 유피테르(그/제우스. 영/주피터. 신들
의 아버지이자 신들의 왕)의 손으로 넘어오자 이윽고 시대는 변하여 은 의 시대
가 되었다. 이 시대는 황금의 시대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이어서 올 퍼렇게 녹슨
청동의 시대보다는 나았다. 유피테르는 늘 봄이던 계절을 뚝 분질러 겨울과 여
름, 날씨가 변덕스러운 가을, 짧은 봄, 이렇게 네 계절로 나누었다. 이 시대에 이
르자 대기가 메말라 불볕 더위가 계속되는가 하면, 북풍이 물을 얼리고 나뭇가
지에다 고드름을 메다는 혹한이 오기도 했다. 인간은 처음으로 집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집이라고 해봐야 동굴이나 밀집한 덤불 속 아
니면 나뭇가지를 나무껍질로 엮어 덮은 것에 지나지 못했다. 케레스(22)의 선물
(23)이 긴 이랑에 뿌려지고 소가 코뚜레에 꿰여 신음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였다.
22) 그/데메테르, 곡물의 여신.
23) 곡식.
이어서 온 시대가 세번째 시대에 해당하는 청동의 시대다. 청동시대 인간은
은의 시대 인간보다 성정이 거칠어 더러 무기를 잡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흉악하
다는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온 시대는 철의 시대다. 이 천박한
금속의 시대가 오자 인간들 사이에서는 악행이 꼬리를 물고 자행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뱃사람들은 바람이 무엇인지 잘알지 못하면서도 제 배
의 돛을 바람에 맡겼다. 높은 산에서 온 노릇을 하던 나무는 배 짓는 재목으로
찍혀 내려와 타관인 바당의 파도사이로 쫓겨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햇빛과 공기
와 함께 모든 인간의 공유물이었던 땅거죽도, 서로 제 땅이라고 우기는 이른바
땅임자들이 그은 경계선으로 얼룩졌다. 사람들은, 넉넉한 대지로부터 곡물이나
먹이를 거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지의 내장에까지 침입하여 대지가 스튁스
(24) 근처에다 감추어둔 재보와 인간에게 악업을 부추기는 보화를 파내었다. 이
로써 유해한 철과, 철보다도 더 위험한 황금이 속속 인간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금속이 나돌자 사사로운 싸움은 곧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이 터
24) ‘증오’라는 뜻으로, 원래는 저승을 돌며 흐르는 강 이름이나 여기에서는
‘어두운 지하세계’.
25) ‘별처녀’,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 처녀좌 별자리가 된 정의의 여신.
26) ‘거인’, 단/기가스, 영/자이언트.
밑에 깔릴 수밖에 없었다. 대지는, 바로 제 자식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
다.(27) 대지는, 이로써 제 혈통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이 뜨거운 피
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인간은 거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이들이 올륌포스
신들을 업수이 여기는, 흉포하고 잔인한 족속이었던 것을 보면, 피에서 태어난
피의 자식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4. 이리로 둔갑한 뤼카온
신들의 아버지이자 사투르누스의 아들인 유피테르는 천상의 옥좌에서 이 꼴을
내려다보고는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그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일이라서 신
들은 잘 모르고 있는 저 뤼카온의 무서운 잔치(28)를 떠올리고는 유피테르답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그는 곧 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유피테르
가 회의를 소집하자 신들은 행여나 늦을세라 지체없이 그의 대전으로 모여들었
다. 하늘에는, 맑은 날이면 인간의 눈에도 보이는 길이 있다. <우유의 길>(29)이
라는 이름의, 환하기로 소문난 길이 그것이다. 신들은 이 길을 통하여 이 위대한
벼락 신(30)의 신궁으로 온다. 이 <우유의 길> 양쪽으로는 주신들(31)의 신궁이
줄지어 있는데, 이 주신들 신궁의
27) 이 거인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식들이다.
28) 인육을 먹는 잔치
29) 비아 락테아, 즉 은하수.
30) 유피테르의 별명
31) 열두 신을 가리킨다.
열린문으로는 늘 손들이 들락거린다. 지위가 낮은 신들은 다른 곳에 산다. 따라
서 이 <우유의 길> 양 옆에는 세도가 당당하고 문벌이 좋은 신들의 신궁만이
있을 뿐이다. 불경한 말이 용서된다면, 천궁의 팔라티움(32)이라고 부르고 싶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유피테르의 신궁으로 달려온 신들은 바닥이 대리석인 대전
의 걸상에 앉았다. 유피테르는, 이들의 걸상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놓인 옥좌에
앉아, 상아 홀에 몸을 기댄 채, 머리카락이 무시무시하게 자란 머리를 세 번, 네
번 흔들었다. 그러자 땅, 바닥, 별들이 크게 요동했다. 유피테르는 입을 열고 위
엄있게 말했다. “아랫도리가 배암인 백수 거인들(33)이 이 천계를 노릴 때도,
내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 세상의 주권에 대해서는 오늘만큼 염려하지 않았소.
적이 만만치 않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 싸움은 하나의 무리, 하나의 종족이 일
으킨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하나,
32)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수투스의 궁전이 있는 곳.
33) 헤카톤케이레스. ‘백 개의 팔’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달라요. 이번에는 포효하는 네레우스(34)에 둘러싸인 온 땅의 근간을 뿌
리뽑아야 하오. 저 땅 밑, 스튁스의 숲을 흐르는 저승의 강에 맹세를 하고(35),
저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수단은 다 구해 보았소. 그러나 이제는
이 환부에 더는 손을 써볼 수가 없어요. 이 환부 때문에 온전한 곳까지 상할 위
험이 있다면 칼로 이 환부를 도려내어 버려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에게는 우리
가 돌보아야할 반신들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우리가 돌보아야 할 님프(36)가 있
고, 파우누스와 실바누스(37), 그리고 사튀로스(38)가 있소. 이들에게 천상에 살
자격이 없다면 지상에서나마 마음놓고 살 수 있게 해주
(34) 원래는 해신듸 이름이나 여기에서는 ‘바다’.
(35) 스튁스에다 걸고 하는 맹세는 유피테르도 거스를 수 없다.
(36) ‘요정’. 복/뉨페.
(37) 전윈의 신들인 목양신. 그/판.
(38) 반인반양의 모습을 한, 음탕하나 순진한 목신.
어야 하지 않겠어요. 신들이여, 이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오? 저 악명 높은 뤼카
온이, 여기에 있는 이 유피테르, 전능한 벼락 신인 나, 그대들의 왕이자 주인인
나까지 업수이 여기는 판국이 아니오?“ 열석안 신들은 잠시 저희들끼리 수의한
뒤, 그런 짓을 한 인간에게는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한다고 뜻을 모아 말했다. 신
들은 뜻을 모아 말하고도 이 뤼카온이라는 자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고는 치를
떨었다. 저 불순한 무리들이 카이사르(39)를 죽이고 이로써 이 땅에서 로마라는
이름을 지우고자 했을 때, 온 세상이, 온 인류가 치를 떨었듯이...... 신들도 이 뤼
카온이라는 자가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고는 치를 떨었다. 신들이 유피테르에게
보내는 사랑은, 카이사르 사후, 로마의 신민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께 보낸 사랑
에 못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한마디 말, 한번의 손짓에 수군거리던 신들은 침묵
했다. 천상의 왕, 천궁의 지배자가 보이는 위엄에 좌중의 소요가 가라앉자 유피
테르는 침묵을 깨뜨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분해할 것은 없소. 그 죄에 관한
한, 그 자는 이미 그 죄값을 물었으니 신들은 너무 마음을 쓰지 않기를 바라오.
자, 그 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 자가 어떤 죄값을
39) 영/줄리어스 시저.
40) 신들의 신궁이 있는 것으로 믿어지던 산. 실제로는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
에 있다.
41) 이하, 아르카디아에 있는 산 이름.
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자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나를 죽이려 했어요. 이게
바로 내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시험이라는 것이오. 나를 죽여보고 죽으면 인간, 죽
지 않으면 신이라는 판정을 내릴 심산이었던 것이지요. 이 자는 내 목숨으로 나
를 시험하려 한 데 만족하지 않고, 몰로로스 백성들이 볼모 잡힌 자 하나를 끌
어내더니 잘 드는 칼로 그 목을 자르고는 몸이 채 식기도 전에 수족의 일부는
삶게 하고 일부는 굽게하여 이것으로 잔치상을 마련합디다. 나는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복수의 불길을 일으켜, 필경은 주인에 못지않게 사악할 터인 수
호신상위로 내려앉았지요. 뤼카온은 기겁을 하고 도망쳤어요. 한참을 도망치던
이 자는, 어지간히 되었다고 생각되었던지 고요한 들판에서 숨을 돌리고는 뭐라
고 고함을 지릅디다. 하릴없는 짓어었지요. 왜냐? 이 자가 입은 옷은 부얼부얼한
털로 바뀌었고, 팔은 그만 짐승의 앞다리가 되었으니....... 뤼카온이라는 이 자, 이
리로 둔갑한 것이오. 이 자가 지니고 있던 광포한 성정이 모여 입은 괴물의 주
둥이로 다른 짐승을 겨누고 있을 것이오. 이리에게는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
는 이상한 광기가 있소. 이 자가 이리로 둔갑하고 말았다고는
42) 그/에리뉘에스. 복수의 여신들. 여기에서는 ‘광포한 손’이라는 뜻.
는,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인즉, 신들이 염려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는, 새로운
종족, 이전의 종족과는 전혀 다른, 전혀 불가사의한 기원에 그 뿌리를 두는 새
인류에게 땅을 맡길 것을 약속했다.
5. 인류를 멸망시키는 대홍수
유피테르는, 벼락을 한 손에 모아들고 하계의 방방곡곡으로 던지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렇게 하면 수많은 불기둥이 천상으로 올라와 천궁의 열주에 불길이
옮겨붙을 위험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른 이 순간, 언젠
가는 바다와 땅과 창궁이 불덩어리가 되고 엄청나게 큰 우주가 내려앉아 땅은
물론 천궁까지 폐허가 될 날이 올 것이라던, <운명의 서>에 기록된 예언을 떠
올렸다. 그래서 그른 퀴클롭소(43)가 만들어 바친 무기(44)를 거두고는 다른 방
법으로 인류를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즉, 하늘 하나 가득 비를 쏟아, 물로써 인
류를 멸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었다. 그는 곧, 구름을 흩어 날리는 갖가지
바람과 함께 아퀼로(45)를 불러다 아이올로스(46)의 동굴에다 가두어 버리고는
비를 몰아오는 노토스(47)를 풀었다. 명을 받은 노토스는 젖은 날개를 펄럭이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노토스의 수염은 비에 젖어 있어서 늘 무거웠다.
그의 백발에서는 늘 물이 뚝뚝 들었고, 눈썹은 늘 안개로 덮여 있었으며, 옷과
깃에서는 늘 물이 줄줄 흘렀다. 그가 그 큰손으로 하늘에 걸린 구름을 건드리자,
하늘에서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43) ‘둥근 눈’, 천궁의 대장장이들인 외눈박이 거인 삼형제.
44) 벼락.
45) 그/보레오스, 즉 ‘폭풍’.
46) 바람의 신.
47) ‘남풍’.
48) 그/해라. 신들의 왕이자 아버지인 유피테르의 아내.
49) ‘무지개’.
제간인 바다의 신 넵투누스(50)가 파도를 몰아와 유피테르를 도왔다. 그는 전령
을 보내어 강신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강신들이 모이자 그가 호령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힘을 다 짜내어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힘이다. 수문
이라는 수문은 모두 활짝 열고 담이라는 담은 다 무너뜨리고 물이 제 마음대로
흘러가게 하라!” 명령이었다. 강신들은 저마다 제 집으로 돌아가 수문을 활짝
열고는 분류를 몰아 바다로 돌진했다. 넵투누스 자신은 삼지창(51)으로 대지를
때렸다. 대지가 한번 요동하자 그 진동에 물길이라는 물길은 다 열렸다. 물은 평
원을 지나면서 둑을 무너뜨리고 단숨에 곡물과 과수원과 인축과 집과 신전과 성
물을 쓸어버렸다. 이 엄청난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서 있던 건물도, 제
키보다 더 큰 파도에는 첨탑 꼭대기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물 속에 잠겼다. 이제
바다와 땅이 따로 없었다. 도처가 바다였다. 바다에는 해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이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산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자들도 있었고, 홍수
전까지만 해도 갈고 김매던 땅 위에서 쪽배를 타고 죽자고 노를 저어대는 자들
도 있었다. 논밭 위로, 물에 잠긴 제 집 지붕위로 배를 저어가
50) 그/포세이돈. 영/넵튠.
51)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르고 파도를 일으키는 이 해신의 무기.
52) 복/네레이데스. 해신 네레우스의 딸들. 오십 명 혹은 백 명에 이른다.
6. 새 인류의 조상 데우칼리온과 퓌라
보이오티아 평원과 오이타 평원사이에는 포키스라는 땅이 있다. 이 포키스 땅
은, 땅이었을 시절에는 기름지기로 소문난 땅이었으나 홍수 이후로는 다른 곳이
나 마찬가지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물뿐인, 말하자면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두 개의 봉우리는 별에 닿고 마루는 구름을 가르는 아주 높은
산이 있다. 이 산이 바로 파르나소스 산이다. 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즈음
데우칼리온이라는 사람과 그의 아내 되는 퓌라는 조그만 배를 타고 이 산꼭대기
에 이르렀다. 데우칼리온은 그 많은 세상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바르고 의롭게
살아온 사람이었고 퓌라는 그 많은 세상 여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믿음이 깊은
여자였다. 데우칼리온 부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코뤼쿠스(53)의 요정들과 산신
들과 테미스 여신(54)에게 기도했다. 테미스 여신은 일찍이 신탁전에서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 될 것임을 예언한 적이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현명한 여신이었다.
유피테르는 물바다가 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그 많던 사내들
중에서 오직 하나, 그 많던 여자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만 살아 있는 것을 보았
다. 그는 이 둘에게는 지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 둘이야
러 53) 파르나소스 산에 있는 유명한 동굴.
54) 만물의 이치를 주관하는 여신.
55) 넵투누스의 아들, 뱃길의 안내자.
는 파도는 모두 돌아갈 길을 생각했다. 바다에는 다시 해변이 나타났다. 엄청나
게 불어났던 강물은 다시 물길로 돌아갔다. 홍수가 잡히면서 산이 다시 그 모습
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이 물러나자 대지가 일어섰다. 그리고 나서 한참 뒤에
는 숲이 나무 꼭대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뭇잎에는 뻘이 묻어 있었다.
세상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데우칼리온은 적막에 잠긴 이 황폐한 땅, 공허
한 땅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아내 퓌라에게 말했다.
“내 아내이자 내 사촌(데우칼리온의 아버지 프로메테우스는 형제간이다. 따라
서 이 둘은 부부간이자 사촌간이기도 하다)이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퓌라여, 처음에는 혈육으로 인연을 맺더니 이윽고 혼인으로 인연을 맺은 퓌라여,
이제 이 위난이 또 한번 우리를 하나로 묶는구나. 이 넓은 땅, 해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살아 있는 인간은 우리 둘뿐이다. 나머지는 바다가 앗아갔다. 우
린들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막막하구나. 구름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
는 것 같구나. 가련한 아내여, 운명이 나를 앗아가고 그대만 남겨놓았더라면 그
대 마음이 어떠하였으랴. 홀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대 마음이 어떠하였으랴. 홀로
남아 있었더라면 두려움은 어찌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며 슬픔에 잠기면 누가
그대를 달랠 수 있었으랴. 그러나 나를 믿으라. 바다가 그대마저 앗아갔더라면
나는 그대 뒤를 따라 바다가 나까지 앗아가게 했으리라. 나에게 아비되는 재주
가 남아 있어서 자손을 퍼뜨리고 새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면 좀 좋으랴. 내게
흑을 이겨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다 숨결을 불어넣는(이 제우칼리온의 아
버지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주가 있다
면 좀 좋으랴. 그러나 이제 인류의 운명은 우리 둘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신들
의 뜻...... 우리는 인류의 본으로 남은 것이다”
이 말 끝에 두 사람은 서로를 부여 안고 울었다. 부부는 하늘의 신들께 기도
하여 신들로부터 신탁을 얻어보기로 뜻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케피소스 강가로 갔다. 홍수 뒤끝이라 맑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강물
은 얌전히 물길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에서 물을 길어 머리와
옷에다 뿌리고는 테미스 여신의 신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전 지붕은 더러운 이끼와 벌로 덮여 있었다. 제단에 향불이 켜져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신전 계단에 엎드려 차가운 돌에 입 맞추고는 이렇게 빌었다.
“신들의 마음이 신심 있는 자들의 기도로 움직이고 부드러워진다며, 신들의
분노가 이로써 가라앉는다면, 일러주소서. 테미스 여신이시여, 어찌하면 인류가
절멸한 이 땅의 이 재난을 수습할 수 있을는지요.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환란
을 당한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여신은 이들을 가엾게 보고 속삭이는 소리에다 뜻을 맡겼다. 여신이 맡긴 뜻
은 이러했다.
“내 신전에서 나가 너희 머리를 가리고 의복의 띠를 푼 연후에 너희들 크신
어머니의 뼈를 어깨 너머로 던지거라”
여신께서 속삭이는 소리에 맡긴 뜻을 듣고도 두사람은 어찌할 줄을 몰라 망연
자실 한동안 그래도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것은 퓌라였다. 퓌라
는 여신의 뜻을 따를 수 없노라고 말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신의 용서를 빌
었다. 퓌라는, 뼈를 홀대하여 어머니의 신성에 누를 끼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참으로 엉뚱하고도 애매한 이 여신의 뜻을 새기려고 묵상했
다. 얼마후 프로메테우스의 아들이 다음과 같은 말로, 겁에 질려 잇는 에피메테
우스의 딸을 달랬다.
“신의 뜻은 무류하신 법, 죄업 쌓을 말씀은 아니 하실 것이다. 내 짐작이 그
르지 않다면, 여신의 뜻이 이르시는 어머니는 곧 대지일 것이요, 어머니의 뼈는
곧 돌이 아닐는지......우리에게, 여신께서는 어깨 너머로 돌을 던지라고 하신 것
일 게야”
티탄의 딸(에피메테우스 티탄에 속하니까, 따라서 그 딸인 퓌라는 말한다.)에
게는 지아비의 짐작이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티탄의 딸은 실낱같은 희망에
기댈 수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하늘의 뜻이 그만큼 미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에멜무지삼아 좇아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여신이 맡긴 뜻이 이른 대로, 산을 내려가면서 옷으로 머리를 가리
고 띠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다음 돌을 주워 어깨 너머로 던져보았다. 옛 전승이
이를 증언하지 않았더라면 이로써 일어난 일을 믿을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
이다. 어깨 너머로 던져진 돌은 금방 그 딱딱한 본성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말랑말랑해지자 돌은 일정
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하면서 돌은 시시각각으로 커졌다. 돌은 커지면
커질수록 더 인간의 모습을 닮아갔다. 그러나 아직은 또라지게 인간의 모습이라
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정질이 갓 끝났을 뿐, 마무
리는 아직 되지 않은 대리석상, 혹은 미완성 석상 같았다. 잠시 뒤 습기가 있는
부분, 돌 중에서도 눅눅한 흑이 묻은 부분은 살이 되기 시작했고 딱딱한 부분은
배가 되기 시작했다. 돌의 결(베인)은 이름이 같은 베인(혈관)으로 변했다. 시간
이 좀더 흐르자, 은혜로워라, 신들의 뜻이여, 지아비가 던진 돌은 남자의 형상을
얻었고 지어미가 던진 돌은 여자의 형상을 얻었다. 우리가 힘드는 일도 수나롭
게 해내는 강인한 족속인 까닭은 이로써 설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근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7. 왕뱀 퓌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은 대홍수 뒤 땅에 남아 있던 습기가 햇볕에 뜨거워
질 즈음에 저절로 생겨났다. 이즈음 늪지의 진흙이 열기에 부풀어오르고, 만물의
종자는 어머니 자궁 안에 든 것처럼 부풀어 올라 시간이 흐르자 일정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구가 일곱 개인 네일로스(나일) 강
이, 범람해 있던 벌판에서 원래 있던 하상으로 되돌아갈 때였다. 네일로스 강이
원래의 물길로 되돌아가자, 범람해 있던 곳에 쌓여 있던 진흙은 햇볕을 받아 뜨
거워졌다. 이때 이 흙을 일구던 농부들은 이 흙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수많은
짐승들을 보았다. 이 수많은 피조물 중에는 종자에서 갓 빚어진 것도 있었고, 살
아나 마악 기어나오려 하는 것들도 있었다. 물론, 아직은 다 만들어지지 못해 사
지가 온전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러한 피조물들은 온기와 습기가 알맞게 어
울리는 환경에서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만물이 이 두가지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물과 불은 비록 상극이기는 하나 습윤한 온기는 만물의
근원이었다. 말하자면 물은 습기와 불인 온기가 조화를 이루어야 생명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대지에 덮였던 진흙이 하늘에서 비치는 태양의 그윽한 열기
로 다시 더워지자 대지는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생명을 지어내었
다. 이렇게 지어낸 생명 중에는 홍수 이전에 있던 것도 있었고 전혀 새롭게 지
어진 것도 있었다.
그럴 의향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지(여기에서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말
한다.)가 산 것 중에서 크기로 치면 으뜸이 될 만한 왕뱀 퓌톤을 지어낸 것도 이
때였다. 이 왕뱀은 누우면 산자락 하나를 덮을 만큼 컸다. 이렇게 큰 짐승을 본
적이 없는 새 인류에게 이 왕뱀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달아나는
사슴 아니면 겁 많은 산양에게나 활을 쏘아본 적이 있는 활의 신 아폴로(그/아
폴론. 유피테르와 라토나 사이에서 난 아들. 음악, 의술, 궁술, 예언의 신)는 이
왕뱀을 상대로 화살통을 비웠다. 왕뱀이 상처로 독액을 모두 쏟을 때까지 수천
개의 화살을 쏜 것이다. 아폴로는,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이 이 영웅적인 행적을
잊지 않도록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재간 겨루기 대회를 창시했다. 이 겨루기 대
회가 바로 퓌티아 대회다. 이 대회에서는 여러 가지 겨루기가 벌어진다. 씨름,
달음박질, 병거 경주같은 겨루기에서 승리한 젊은 선수는 떡갈나무 잎으로 만든
관을 상으로 받았다. 이 시절에는 월계수로 만든 월계관이 없었다. 포에부스(그/
포이보스. ‘빛나는 자’라는 뜻으로, 태양신 아폴로의 별명)도 머리카락이 흘러
내릴 때면 이 관을 썼다.
8 월계수가 된 다프네
페네이오스(페네이오스 강의 신이자 강 자체.)의 딸 다프네는 포에부스의 첫사
랑이었다. 포에부스는, 우연히 이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쿠피도(그/
에로스, 영/큐피드. 사랑의 신)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아폴로에게 앙갚음을 하느
라고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얼마전, 왕뱀을 죽이고 나서 으쓱거리며 다니던 이 델
로스(아폴로가 태어난 섬 이름.)의 신은 활에 시위를 메기고 있는 쿠피도에게 이
런 말을 했다.
“이 건방진 꼬마야 무사들이나 쏘는 무기가 너와 무슨 인연이 있느냐? 그런
무기는 나 같은 무사의 어깨에나 걸어야 어울린다. 나는, 절대로 빗나가지 않게
겨냥할 수 있어서, 짐승이든 인간이든, 말하자면 뭐든 쏘아맞힐 수 있으니까 하
는 말이다. 얼마전에도 나는, 온 벌판 가득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독이 잔뜩 오
른 왕뱀 퓌톤을 여러 개의 화살로 쏘아죽였다. 너는, 사랑의 불을 잘 지른다니
까, 횃불 같은 것으로 사랑의 불이나 지르고 다니는 게 좋겠다. 나 같은 어른이
나 얻는 칭송은 너에게 당치 않으니, 분수를 알아서 처신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베누스(그/아 프로디테. 영/비너스)의 아들은 이렇게 응
수했다.
“푸에부스, 그대의 활이 아무거나 쏘아맞히는 활이라면, 내 활은 그대를 맞힐
수 있는 활이오. 짐승이 신들만 못하듯이 그대의 영광 또한 내 영광만 못할 것
이오”
쿠피도는 이 말을 마치자 하늘로 날아올라 파르나소스 산 꼭대기의 울창한 숲
에 내렸다 . 그는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에서 각기 쓰임새가 다른 화살 두 개를
뽑았다. 하나는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게 만드는 화살, 또 하나는 사랑을 지긋지
긋하게 여기게 하는 화살이었다.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는 화살은 금화살이었다.
이 금화살 끝에는 반짝거리는 예리한 촉이 물려 있었다. 그러나 사랑을 지긋지
긋하게 여기게 만드는 화살에는 납으로 된 몽툭한 촉이 물려 있었다. 쿠피도 신
은, 아폴로는 이 금화살로 쏘고, 페네이오스의 딸인 요정 다프네는 납화살을 쏘
았다. 화살에 맞자마자 아폴로는 사랑에 빠졌고 다프네는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
도 천리만리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다프네는 원래, 댕기 하나로 머리카
락을 아무렇게나 척 묶고 숲속을 돌어다니면서, 저 처녀신 디아나(그/아르테미
스, 영/다이아나. 아폴로의 쌍둥이 누이인 사냥의 여신)와 겨루기라도 하는 듯이
짐승을 잡는 일 아니면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던 처녀였다.
다프네에게는 구혼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다프네는 이들의 구혼을 마다하고
길도 없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사냥 하는 일에만 정신을 쏟을 뿐이었다. 말하자
면 다프네에게, 결혼이니 사랑이니 부부생활이니 하는 것은 쥐뿔도 아니었다.
페네이소스는 틈날 때마다 이 선머슴같은 딸을 타일렀다.
“얘야, 결혼해서 아비에게 사위 구경이라도 시켜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때로는 이런 말도 했다.
“아비에게 외손주를 낳아 바치는 것은 네 의무니라”
그러나 다프네는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다프네는, 결혼이라는 것을 무슨 못할
짓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겨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아름다운 얼굴
을 붉히면서 아버지의 목을 두 팔로 감아안고 애원하듯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 영원히 처녀로 있게 해주세요. 디아나 여신의 아버지(유피테르)는
벌써 옛날에 딸에게 이런 은전을 베풀었답니다”
딸이 어찌나 집요하게 굴었던지 아버지도 딸의 청에 못이기는 척 마음을 그렇
게 먹었다. 그러나 다프네의 아름다움은 다프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
았다. 소원을 이루기에는 다프네가 너무 아름다웠던 것이었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이 쿠피도의 화살을 맞은 뒤, 이 다프네를 보는 순간에 그
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앞일을 헤아리는 포에부스의 예언력도 하릴없었다.
포에부스는 오로지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만을, 즉 다프네의 마음을 사로잡
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아폴로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
혹은 밤길 가던 나그네가 새벽이 되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
이 그렇게 타올랐다. 그는 이 허망한 사랑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
이성에 눈 먼 아폴로는, 목 위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보
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아, 빗질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워 보일까?”
그는, 별처럼 반짝이는 다프네의 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다프
네의 입술에도 머물렀다. 그는 그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는 다프네의 손가락, 손, 어깨까지 드러난 팔을 찬양했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을 했
다.
그러나 아폴로가 다가가면 다프네는 달아났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아
폴로가 뒤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의 하소
연을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요정이여, 페네이오스의 딸이여, 부탁이니 달아나지 말아요. 비록 그대를 이
렇게 쫓고 있기는 하나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아름다운 요정이여, 기기에
서요. 이리를 피하여 어린 양이 도망치듯이, 사자를 피하여 사슴이 달아나듯이,
비둘기가 독수리를 피하여 날개짓 하듯이, 만물이 그 천적 되는 것을 피하려 몸
을 숨기듯이. 그대는 지금 그렇게 내게서 달아나고 있소. 달아나지 말아요. 내게
그대를 뒤쫓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어쩌
려오. 장미 덩굴에 그 아름다운 발목이라도 긁히면 어쩌려는 것이오. 그대가 달
아나고 잇는 이곳은 험한 곳이오. 부탁이오. 천천히 달려요. 걸음을 늦추어요. 나
도 천천히 뒤따를 것이니. 그대에게 반하여 이렇듯이 번민하는 내가 누군지, 그
것은 물어보고 달아냐야 할 것이 아니오? 나는, 산속에서 오막살이나 하는 농투
성이가 아니오. 이 근동에서 가축이나 먹이는 양치기나 소치기도 아니오. 어리석
어라! 어째서 그대는 뒤따르는 내가 누군지 모르시오? 아시면 그렇게 달아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델포이(아폴로가 왕뱀 퓌톤을 죽인 곳. 저 유명한 델포이 신
탁소가 있다. 이하의 지명 모두 아폴로의 신전이 있는 곳임) 땅의 주인이며, 케
네도스 섬의 주인, 파타라 항구의 주인이오. 나는 저 신들의 아버지 유피테르의
아들이오. 내게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는 재주도 있소. 수금을 나보다 잘 뜯는
인간이나 신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내 화살은 백시백중이오만, 나보다 솜씨가
나은 자가 있어서 내 가슴에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소. 의술은 내
게서 비롯되었소.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나를 일러 파이에온(‘고치는 자’라는
뜻. 아폴로의 별명)이라고 하오. 아, 나는 약초를 잘 아는 의신이오만, 이 사랑병
고칠 약초는 없으니 이 일을 어쩌리요. 남을 돕는 재주가 있어야 할 그 임자에
게는 하릴없으니 장치 이 일을 어쩌리요......”
처녀가 달아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한말은 이보다 훨씬 더 길었으리라. 그러나
처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달아났다.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는데
도 불구하고 다프네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바람을 달아나는 다
프네의 옷자락을 나려 사지를 드러나게 하고 있었다. 사지가 드런난데다 바람이
머리카락까지 흩날리게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달아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젊은 신 아폴로는, 그런데도 입에 발린 아첨으로 낭비하
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 젊은 신의 추격속도를 시간
이 갈수록 빠르게 했다. 갈리아(프랑스의 옛이름)사냥개가 풀밭에서 토끼 한 마
리와 쫓고 쫓기는 형국과 흡사했다. 사냥개의 속도는 이 사냥감을 확보하려 하
고 사냥감은 속도로 절대절명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법이다. 아폴로와 다프
네가 쫓고 쫓기는 형국은, 사냥개가 한시바삐 이 추격전을 마무리 하고 싶어 주
둥이로 토끼의 꼬리를 덥석 물고, 토끼는 사냥개 입에 물렸는지 안 물렸는지 모
르면서도 죽자고 몸을 날려 아슬아슬하게 사냥개의 이빨을 피하려는 형국과 아
주 흡사했다.
이 젊은 신과 아름다운 요정은, 전자는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후자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쫓기며 빠르기를 겨루었다. 그러나 쫓는 쪽이 빨랐다.
아폴로에게는 쿠피도의 날개(사랑하는 마음)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폴로는 달아나는 요정 처녀에게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고 발 뒤축에 바싹 따라
붙었다. 숨결이 다프네의 목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따라붙었다. 다프네는 힘
이 다했는지 더 이상 달아나지 못했다. 다프네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지친 다프네는 아버지 페네이오스 강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 강물에 정말 신력이 있으면 기적을 베푸시어 둔갑의
은혜를 내리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주소서”
다프네는 이 기도를 끝마치기도 전에 사지가 풀리는 듯한, 정체모를 피로를
느꼈다. 다프네의 그 부드럽던 젖가슴 위로 얇은 나무껍질이 덮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렇게 힘있게 달리던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은 이미 나무 꼭대기가 되고 있었
다. 이제 다프네의 모습은 거기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 거기에
남아 있을 뿐......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포에부스 아폴로는 다프네(월계수)를 사랑했다.
나무 둥치에 손을 댄 포에부스는 갓 덮힌 수피 아래서 콩닥거리는 그녀의 심장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월계수 가지를 다프네의 사지인 듯이 끌어안고 나무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다프네는 이 입맞춤에 몸을 웅크렸다.
포에부스 아폴로가 속삭였다.
“내 아내가 될 수 없게 된 그대여. 대신 내 나무가 되었구나. 내 머리, 내 수
금, 내 화살통에 그대의 가지가 꽂히리라. 카피톨리움(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언
덕 중 가장 높은 언덕. 유피테르의 신전이 있다)으로 기나긴 개선 행렬이 지나갈
때, 백성들이 소리높여 개선의 노래를 부를때 그대는 로마의 장수들과 함께 할
것이다. 뿐인가? 아우구스투스 궁전 앞에서는 그 문을 지킬 것이며, 거기에 걸릴
떡갈나무관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날까지 한번도 잘라본 적 없는, 지금도
싱싱하고 앞으로도 싱싱할 터인 내 머리카락같이, 그대 앞으로 만든 월계관 또
한 시들지 않으리라
아폴로가 이런 약속을 하자 월계수는 자기를 앞으로 구부리고 잎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듯이...
9. 암소가 된 이오 백안의 거인 아르고스
갈대가 된 요정 쉬링크스
하이모니아 땅에는 사면에 둘러 싸인 숲이 있다. 말하자면 숲을 이룬 계곡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 숲을 템페라고 불렀다. 이 숲 한가운데로 핀도스 산록에서
발원한 페네이오스 강이 포말을 날리며 흐른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이 흐름은
분류가 되는데, 아시다시피 강은 분류가 될수록 더 많은 포말을 뿌린다. 이 강이
흘러가면서 내는 소리는 이 산록에서 들리는 뭇 소리를 압도한다. 이 곳이 바로
이 큰 강의 고향이자 집이자 은신처다. 강의 신 페네이오스는, 깍아지른 절벽 한
가운데 있는 석굴에 앉아 물결과 그 흐름 안에 기거하는 요정들을 다스린다.
바로 이 곳에서, 페네이오스는 나라의 큰 강 다섯 줄기 , 즉 버드나무 숲 사이
로 흐르는 스페르케오스 강, 쉬지 않는 에니페오스 강, 연로한 아피다노스강, 고
요히 흐르는 암프뤼소스강과 이에아스 강이 발원한다. 이 강들은 다프네의 아버
지 폐네이오스에게 축하 인사를 해야할 지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채로 강이라는 강,흐름이라는 흐름은 오랜 방황으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그런데 이나코스 강만은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동굴 깊숙이 들어앉아 하염없
이 흐르는 눈물로 강물을 불리고 있었다. 딸 이오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딸
이 살아 있는지 아니면 저승 땅으로 내려갔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나코스
강은 아무리 수소문해 보아도 딸의 행방을 아는 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저 다시
는 볼 수 없겠거니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이를
감수 할 마음의 준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나코스의 딸 이오가 실종된 진상은 이러하다. 어느 날 아버지 강
의 흐름을 헤어나오는 이오를 보고 유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 처녀여, 유피테르에게나 어울릴 아름다운 처녀여. 그대가 잠자리를 함께 하
면 유피테르가 얼마나 기뻐할 까? 해가 황도를 지나는 구나. 그러니 깊은 숲 속
으로 들어가 저 따가운 볕을 피하기로 하자”
유피테르는 숲 속 그늘진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산짐승 우글거리는 곳으로 혼자 들어간다고 두려워하지는 말라 . 혼자 깊
고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도 그대는 안전 할 것이다. 신이 그대를 지켜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대를 지키실 신이 예사 신 인줄 아느냐? 천궁의 율장을 들고 벼
락을 던지는 신이니라. 그러니 달아날 생각은 아예 마라”
유피테르가 이렇게 말한 것은, 처녀가 벌써 달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녀
는 발길을 돌려 레르나 풀밭을 지나고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뤼르케아 들판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대지에다 어둠을 깔아 처녀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
지 않게 했다. 처녀가 더 달아나자 못하자 유피테르는 강의 딸 이오와의 사랑을
이루었다.
천궁에서 아르고스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유피테르의 정처 유노는 , 벌건 대
낮에 이상한 구름이 밤을 지어내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더구나 그 근방에는
안개를 뿜어낼 만 한 강이나, 구름을 빚어내는 늪지가 없었다. 유노는 지아비 유
피테르를 찾아보았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곧잘 하는 지아비의 버릇을 익히 알
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아비 유피테르가 지상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안 유노는.
“ 내 짐작이 그르지 않다면, 이 양반이 필시 또 못된 짓을 하는 게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지상으로 내려와 구름을 날려버렸다.
유노가 이 구름을 날려버린 것은, 아내가 내려올 것을 미리 안 유피테르가 이
나코스 강의 딸 이오를 새하얀 암소로 둔갑하게 한 뒤였다. 암소로 둔갑했는데
도 불구하고 암소 이오는 본래의 이오만큼이 나 아름다웠다. 이 암소는 유노에
게도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유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아비에게, 암소가
데체 누구의 것이고, 내력이 어떻게 된 것이며, 대체 누구 소 떼에 섞여 있던 것
이냐고 물었다. 유피테르는 아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소의 내력을 아는 듯이 캐
묻는 아내를 입막음하려고, 대지에서 태어난 소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
투르누스의 딸은, 그 암소를 자기에게 선물로 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유피테
르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졌다. 정부가 된 이오를 본처 손에 넘기자니 애처롭고,
달라는 청을 거절하자니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을 살 판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은
넘겨주라고 꼬드기고 사랑은 그래서는 될 일이 아니라고 하는 판이었다. 물론
사랑 쪽이 강했다. 그러나 한 마리 암소같이 보잘것없는 선물을 암소 한 마리보
다 훨씬 소중한 누이이자 아내인 유노에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피테르는 결국 이 애인을 넘겨주었다. 여신 유노는 유티페르가 암소를 넘겨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암소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유피테르에게 속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노는 이 암소를 몰고 가 아레스토르의 아
들에게 맡기면서 단단히 지키라고 명했다. 이 아르고스는 머리에 눈이 백개나
달린 괴물이었다. 이 아르고스는 잠을 잘 때도 눈은 두 개만 감는다. 즉 나머지
아흔 여덟 개의 눈은 뜬 채로 자는 것이다. 이 백 개의 눈은 이르고스의 머리사
방에 붙어있다. 그래서 아르고스가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든 언제나 이오를 감
시할 수 있다. 이 아르고스는 낮 동안은 이오에게 강변으로 나가 풀 뜯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해가 대지 저 쪽으로 가라앉으면 아르고스는 이오를 끌고 가
그 흰 목을 사슬로 묶고 는 백 개의 눈으로 감시했다. 이오의 먹이는 나뭇잎과
쓴맛이 도는 풀이었다. 이오는 침상 대신에, 건초도 깔리지 않은 땅바닥에서 잠
을 잤다. 가엾은 이오의 마실 것으로는 강의 흙탕물뿐이었다. 이오는 두 팔을 벌
리고 아르고스에게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오에게는 벌릴 팔이 없었다. 불만
을 말하고자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오의 입에서 나온 것을 말
강의 요정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버지 이나코스까지도 딸을 알아보지 못
했다. 이오는 강가로 나올 때마다 아버지와 언니들 뒤를
따라다니며, 손으로 등을 쓸어줄 때마다 그들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애썼다. 그러
나 그들은 이오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 이나코스는, 풀을 뜯어 암소로 둔갑
한 이오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이오는 아버지의 손을 핥다가, 아버지의 뺨에 입
을 갖다대다가는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말이라도 할 수 있었
다면 도움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을 .... 정체를 밝히고 하소연할 수 있었을 것을
.... 이오는 하는 수 없어서 발굽으로 땅바닥에다 제 이름을 써서 암소로 둔갑하
게 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했다.이나코스는, 애통해하는 암소 이오의 뿔을 부여
잡고 백설 같은 그 등을 쓸면서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 세상에, 세상에.... 네가 바로, 이 아비가 온 세상을 찾아 헤메던 내 딸이라
는 말이냐? 너를 잃었을 때의 슬픔보다 이렇게 너를 찾고 보니 그 잦은 슬픔이
더하구나. 너는 말을 못하니 내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을 테지, 그러니 대답 대신
에 그저 나직하게 울기만 하여라. 하기야 네가 울 수 밖에 더 있겠느냐? 나는
일이 이렇게 될 줄 까맣게 모르고 네 집을 장만하고 네 혼수를 준비했구나, 사
위를 보고 외손주를 보고 싶은 욕심에서 너 시집 보낼 생각이나 했구나, 그러나
이제는 황소 가운데서 내 신랑감을 찾을 수밖에 없게 생겼으니 이 아니 기가 막
히는 일이냐, 네가 낳아봐야 송아지일 수밖에 없으니 이 아니 기가 막히는 일이
냐? 내가 죽어버리면 이 기구한 팔자를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 터이나,
내가 신이라는 것이 한스럽구나, 신이라서 죽음의 문이 내 앞에서 닫혔으니, 영
원히 슬퍼해야 하는 이 팔자를 어쩔꼬....”
강의 신 이나코스와 이오와 이오의 언니들은 함께 목놓아 울었다. 이들의 울
음은, 아르고스가 이 이오를 아버지와 언니들에게서 떼어 내민 먼 풀밭으로 끌
고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고스는 이오를 거기에서 먼 풀밭에다 끌어다 놓
고 산꼭대기 앉아 지켰다. 몸은 비록 산꼭대기 앉았어도 그는 거기에서 백 개의
눈으로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신들의 지배자 유피테르는 이오가 받는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플레이아세의 몸에서 얻은 아들 메르쿠리우스를 불러, 가서
아르고스를 죽이고 구하라고 명했다. 메르쿠리우스는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발
에는 날개 달린 가죽신을 신고, 손에는 최면장을 들고, 머리에는 모자를 눌러 쓰
고는 아버지의 천궁에서 지상으로 내렸갔다. 메르쿠리우스는 땅에 내리는 즉시
모자와 가죽신은 벗어서 감추어 버린 뒤 최면장만 손에 들고, 솜씨 좋게 끌어모
은 양 떼를 몰고는 양치기인 양갈대 피리를 불면서 아르고스가 있는 곳으로 갔
다. 이오를 감시하던 유노의 망꾼 아르고스는 이 갈대 피리 소리가 마음에 쏙
들어, 이 변장한 메르쿠리우스를 불렀다.
“ 여보, 거기 사시는 양치기! 여기 내가 앉은 이 바위에 앉아 좀 쉬었다 가
지 않으려오? 다신 양떼에게 뜯길 풀은 이 근동에 이만한 데가 다시 없고, 보다
시피 양치기가 쉴 그늘 또한 이만한 데가 없소”
아르고스 옆에 앉은 이 아틀라스의 외손은, 이야기를 하다 지치면 피리를 불
고, 피리를 불다 싫증이 나면 이야기를 하면서 이 아르고스를 재워보려고 애썼
다. 하기야 잠이 든대도 소용이 없었다. 잠이 들어도 아르고스는 두 개의 눈만
감을 뿐 나머지 아흔여덟 개의 눈은 뜨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고스는, 처음 보
는 메르쿠리우스의 피리가 신기했던지 졸음과 싸우면서도 어떻게 그런 것을 손
에 넣었느냐고 물었다.
메르쿠리우스는, 피리를 손에 넣은 내력을 이렇게 말했다.
“ 아르카디아에 있는 어느 서늘한 산자락에 요정이 하나 살았었소, 노나크리
스의 하마드뤼아테스 가운데서는 가장 이름 높은 요정 이었지요. 다른 요정들은
이 요정을 일러 쉬링크스라고 했더랍니다. 이 쉬링크스는 여러 차례, 그늘진 숲
이나 비옥한 들판에 사는 사튀로스나 정령들의 구애를 뿌리친 아주 콧대 높은
요정이었지요. 이 쉬링크스가, 저 오르튀기아의 여신을 본보기로 삼고 그 행적을
따르며 그 덕목을 흉내내고자 한 요정이나 콧대 높은 것이야 당연하지 않았겠어
요? 쉬링크스는 사냥 나갈 때면, 디아나 여신의 사냥복과 똑같은 옷을 입고 나
갔어요. 그러나 보는 자들이 이 쉬링크스를 라토나의 따님으로 알았을 수밖에요.
쉬링크스의 활은 각궁, 디아나의 활은 금궁이라는 것만 달랐어요. 그러나 각궁을
들고 다렸는데도 불구하고 이 쉬링크스가 뤼가에우스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데, 소나무 잎 관을 만들어 쓴 목신 하나가 이 쉬링크스에게 말을 걸었지요”
메르쿠리우스는 아르고스에게, 이 목신이 쉬링크스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야기,
쉬링크스가 이 추파를 싫게 여기고 길도 없는 숲을 지나 모래가 많은 라돈 강가
까지 달아난 사연을 들려주었다. 메르쿠리우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쉬링크스는
강물에 박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게 되자 강에 사는 자매 요정들에게 자기 모
습을 바꾸어줄 것을 간청했다. 뒤따라온 목신은 쉬링크스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겠 거니 여기고 쉬링크스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잡고 보니 손에
잡힌 것은 갈대일 뿐이었다. 목신은 한숨을 쉬며 일어서다가, 이 한숨이 갈대 속
을 지나면서 빚어내는 가냘프고도 애끊는 소리를 들었다. 목신은 이 새로운 악
기와 이 악기가 내는 아름다운 소리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 그대와 나는 영원히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이야기 나눌 것이 오”
목신은 이렇게 속삭이며, 길이가 각기 다른 이 갈대를 밀랍으로 나란히 붙였
다. 그러고는 이 악기를 < 쉬링크스> 라고 이름했다.
메르쿠리우스는 이 야기를 하다가 아르고스의 눈꺼풀이 모두 닫히는 것을 보
았다. 백 개의 눈이 모두 감긴 것이었다. 메르쿠리우스는 이를 본 순간 최면장으
로 아르고스를 건드려 그 잠이 더욱 깊어지게 하고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초
승달 모양의 칼을 뽑아 목을 베어 버렸다. 메르쿠리우스는, 목이 떨어진 아르고
스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차던졌다. 아르고스의 시체는 절벽아래로 떨어지면서
바위를 피로 물들었다. 이로써 아르고스는 죽었다. 그 많던 눈도 모두 빛을 잃었
다. 백 개의 눈이 어둠에 묻힌 것이다. 사투르누스의 딸은 이 눈을 수습하여 자
기 신조인 공작의 깃과 꼬리는 지금도 별같이 빛나는 보석이 잔뜩 박힌 듯하다.
분이 하늘에 사무치는 판인데 유노가 복수를 미루었을 턱이 없다. 유노는 곧 푸
리아에 중 하나를 불러 자기 서방의 정부이자 자기의 연적인 그리스 요정의 눈
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그 가슴에다 광기를 채워 세상을 방황하게 하라고 명
했다.
이오의 발광과 방황이 끝난 것은 네일로스 강가에서였다. 이오는 네일로스 강
가에 이르자 무릎을 끊고 하늘 을 우러러보면, 한편으로 는 유피텔를 원망하고
한편으로는 유피테르에게 이제는 그만 환란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이 기도를
들은 유피테르는, 아내 유노의 목을 끌어안고, 이제는 그만 이오에게 내린 벌을
거두자면서 이렇게 말했다.
“ 앞일은 걱정 마오. 더 이상 이오가 그대에게 마음고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
이오”
유피테르는 스튁스 강의 이름에 걸고 맹세했다. 유노 여신의 분노가 가라앉자
이오는 옛 모습을 되찾았다. 옛날의 이오로 되돌아간 것이다. 먼저 몸에서 털이
빠지고, 뿔이 없어지고, 눈이 작아지고, 그 크던 입이 줄어들었다. 어깨와 손이
제 모습으로 돌아오고 발꿉이 사라지면서 발굽 있던 자리가 다섯 개의 손가락
발가락으로 나뉘었다. 이윽고, 희다는 점만 제외 하면 이오에게 소로 둔갑했던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오는 이로써 다시 두 발로 걷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오도 입을 여는 것을 두려워했다. 소 울음소리가 튀어나올까
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오는 잔뜩 겁에 질린채, 오래쓰지 못하던
말을 한마다씩 시험삼아 해보았다.
이제 이오는 어엿한 여신이 되어, 흰 옷 입은 신관들을 거느린다. 후일 이오는
에파포스라는 아들을 낳는데, 사람들은 이 에파포스가 유피테르의 씨를 받아 이
오가 지어낸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 아이귑토스 땅의 신전에는 이오 신전과 에
파포스 신정이 나란히있다.
10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은 에파포스와 나이나 기질이 비슷하다. 어느 날 파에톤
은, 족보를 자랑하는 에파포스에게 지기 싫어 자기도 포에부스의 이들이라는 자
랑을 내어놓았다. 그러자 에파포스가 말했다.
“ 이 멍텅구리, 너는 네 어머니 말을 고스란히 믿는구나. 네 아버지도 아닌
분을 네 아버지라고 우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
파에톤은 얼굴을 붉혔다. 너무 부끄러워 차마 화를 내지 못한 파에톤은 집으
로 돌아와 어머니 클뤼메네에게 말했다. “ 어머니,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저
는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쳐놓고도 말대답을 못하고 왔습니다. 부끄럽
습니다. 그런 모욕을 당했다는 게 부끄럽고, 말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게 창피합
니다. 어머니, 제가 만일 신의 아들이라면 신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십시
오. 그래야 태양신의 아들로서 천계에서도 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 아니겠
습니까? ”
이렇게 말한 파에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의 머리, 메로프스의 머
리, 혼인을 앞둔 누이의 행복에 걸고, 친부가 누구인지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아들 파에톤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들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그랬는지, 어쨌든 클뤼메네는 벌떡 일
어났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작열하는 태양을 우러러보며 이
렇게 외쳤다.
“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고, 내 말을 듣고 계시는, 찬연히 빛나는 태양에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는 네가 우러러보고 있는 태양, 온 세상을 밝히는 태양의 이들
이다. 만일 내 말이 거짓이면 그분이 내 눈을 앗아가실 것인즉, 내가 세상을 보
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네 아버지를 찾아가거라, 네가 네
아버지 처소로 가는 일은 어렵지 않고, 그 길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우리 땅의
지경, 그 곳이 네 아버지이신 그분이 계시는 곳이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파에톤은 곧 길을 떠났다. 그의 가슴은 천계에 대한 생각
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는 고향 아이티오피아 땅을 지나고, 작열하는 태양
에서 가까운 사람들의 땅을 지났다. 그리고는 아버지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으
로 다가갔다.
제2부
신들의 전성시대
1 태양 수레를 모는 파에톤
태양신의 궁전은 원주에 떠받친 채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원주는 휘황찬란
한 황금과 불꽃 빛깔의 적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붕은 윤나게 갈아낸 상아
였다. 궁전 정면의, 은으로 만든 두짝 문은 태양신의 빛을 찬연하게 되쏘고 있었
다. 재료도 좋거니와 그 만든 솜씨는 재료보다 윗길이었다. 이 문에는 물키베르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에 해당하는 불카누스의 별명, ‘불막이’라는 뜻)
의 부조가 펼쳐져 있었다. 이 부조에는, 대지를 가슴 가득히 않은 바다, 대지 자
체, 그리고 대지 위의 하늘이 새겨져 있었다. 바다에는 뿔고둥 나팔을 부는 트리
톤, 둔갑의 도사인 프로테우스, 두마리의 거대한 고래를 타고 그 등을 채찍으로
갈기는 아이가이온(에게 해의 해신) 같은 해신들이 있었다. 헤엄치는 네레이데스
(해신 네레우스의 딸들), 물고기를 타고 노는 네레이데스, 바위에 앉아 파란 머
리카락을 말리는 네레이데스 등 각양각색의 네레이데스가 보였다. 이들의 얼굴
이 똑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매들이 그렇듯이 이들은 서로 비슷비슷했다. 대지
에는 인간과 인간의 도성이 보였다. 숲과 짐승, 강과 전원의 요정과 정령들도 보
였다. 이 위로는 빛나는 하늘이, 오른쪽 문에 6궁, 왼쪽 문에
포에부스의 경고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은 끈내 제 고집을 꺽지 않았다. 파에톤은 기어이 태양 수레를 몰아보겠다
는 것이었다. 힘닿는 데까지 아들을 타이르다 지친 아버지는, 불카누스(그/헤파
이스토스. 올림포스 천궁의 대장장이 신)가 만든 수레 있는 곳으로 아들을 데려
갔다. 이 태양 수레는 바퀴 굴대도 황금, 뼈대도 황금, 바퀴도 황금이었다. 바퀴
살만은 은이었다. 마부석에는 포에부스가 쏘는 빛을 반사할 감람석과 보석이 나
란이 박혀있었다. 파에톤이 벅찬 가슴을 안고 태양 수레를 만져보며 찬탄하고
있을 즈음, 붉게 동터오는 동녘에서는 새벽잠을 깬 아우로라(‘새벽’이라는 뜻.
새벽의 여신)가 장미꽃이 가득 핀 방의, 눈부시게 빛나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별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루키페르(금성. ‘빛을 부른는 자’라는 뜻)가 긴 별
의 대열을 거느리고 천계의 제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태양신은 이 루키페르가
떠나는 것과, 하늘이 붉어지면서 이지러진 달빛이 여명에 무색해지는 것을 보고
는 발빠른 호오라이(‘때’의 여신들)에게 분부하여 천마를 끌고 나오게 했다.
호오라이가 분부를 시행했다. 호오라이들은 천장이 높은 마구간에
닳 파에톤은 불바다가 된 세상를 내려다보았다.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열기는 견
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그이 숨결도 풀무에서 나온 공기처럼 뜨거웠다. 수레
는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열기와 함께 올라온 재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불
똥도 그를 괴롭혔다. 뜨거운 연기로 주위가 칠흑 어둠이라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발 빠른 천마가 끄는 대로 끌려가
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티오피아 사람들 피부가 새까맣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고 사람들은 말한다. 열기 때문에 피가 살갗으로 몰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해
지는 바에 따르면 리뷔아가 사막이 된 것도 이때였고, 열기가 물을 말려버리자
물의 요정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샘과 호수 없어진 것을 애통해한 것도 이때였
다고 한다. 보이오티아 땅이 디르케 샘을, 라르고 땅이 아뮈모네 샘을, 에퓌게
땅이 샘을 잃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샘이 말랐는데 트인 물길을 흐르던 강이
온전했을 리 없다. 강의 신 타나이스(돈 강)는 물 속 깊은 곳에서 진땀을 흘렸
다. 연로한 페네이오스, 뮈시아의 카이코스, 흐름이 급하기로 소문난 이스메노스
도 그런 고초를 겪었다. 아르카디아의 에뤼만토스 강, 후일 불길에 바다였던 곳
에 넓은 사막이 나타났다. 물 속 깊이 잠겨 있던 산들이 드러나자 퀴클라데스(원
래는 델로스 섬 근처의 제도. 여기서는 '산재하는 섬’이라는 뜻)가 엄청나게 불
어났다. 물고기는 바다의 바닥으로 내려갔고 돌고래는 물 위로 솟구치지 못하고
수면에 등을 대고 가만히 떠다녔다. 해표의 시체가 뒤집힌 채 무시로 물결 위로
떠올랐다. 전해지기로는, 네레우스와 도리스 부부(해신 부부)와 딸들은 바다 속
의 동굴에 숨어서도 열기 때문에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바다의 지배자 넵투누스는 세번이나 물 밖으로 팔을 내밀어 보려고 하다가 세
번 다 너무 뜨거워 팔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대지의 여신은, 물이 자기 발 밑
으로 흘러와 고이는 것을 자주 보았다. 바다의 물, 샘의 물이 열기를 피해 대지
의 품안으로 스며들어와 잔뜩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지의 여신은 목
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잿더미 위로 고개를 들었다. 대지의 여신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르르 떨자 만물이 모두 부르르 떨었다. 여신은 머리를
조금 낮추고 위엄 있는 음성, 노기 띤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것은 운명의 여신이 정한 길이고, 내가 이 같은 파멸을 받아들여야 할 만큼
죄를 지었다면, 전능하신 유피테르 신이여, 왜 벼락으로 나를 치지 않고 이토록
욕을 보이십니까? 불로써 나를 치시려거든, 전능하신 유피테르 신이여, 당신의
불로 치세요. 같은 파멸의 불이라도 당신이 내리는 파멸의 불이 차라리 견디기
쉽겠습니다. 아, 몸이 타는 듯하여 이 말씀 드리기도 힘이 듭니다.'
지상의 열기가 여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여신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을린 이 머리카락을 보세요. 이 눈, 이 그을음을 보세요. 이 땅을 풍요롭
게 하고 당신을 섬겨온 나에게 내리는 상, 나에게 베푸는 은혜가 겨우 이것입니
까? 괭이에 긁히고 보습에 찢기면서까지 참아 온 보람이 이것입니까? 한해 내내
마음놓고 쉬어보지도 못한 나를 이렇게 대접합니까? 육축에게 나뭇잎과 부드러
운 풀을 대어주고 인간에게는 곡물을 베풀고, 신들을 위해서는 향나무를 기른
나를 이렇듯 대접합니까?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고 칩시다. 하면 저
물을 다스리는 신, 당신의 형제는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당신의 형제
가 다스리는 물이 왜 바다를 등지고 땅 밑으로 움츠러든답니까? 내가 말해도 소
용없고 당신의 형제가 말해도 소용없다면 당신이 사는 천궁을 걱정하세요. 들러
보세요. 남극권과 북극권에서 뜨거운 연기가 오릅니다. 이 불길을 잡지 않으면
다음으로 무너질것은 당신의 신궁입니다. 보세요.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하늘 축
을 금방이라고 떨어뜨릴 듯이 아틀라스(신들의 전쟁 시절에 유피테르에게 저항
한 벌로 하늘 축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거인)가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
지와 바다와 천궁이 무너져내린다면 우리는 옛날의 카오스로 되돌아가
이 말을 마치자 대지의 여신은 땅 위의 열기를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었던지
땅 속으로 들어가 저승 가까운 곳에 있는 동굴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신들의 전능한 아버지 유피테르는 자기가 손을 쓰지 않으면 천지만물이 비참
한 지경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서둘러 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
는, 파에톤에게 태양 수레를 맡긴 태양신도 나왔다. 유피테르는 천궁 꼭대기로
올라갔다. 천궁 꼭대기는, 그가 대지 위로 구름을 펼 때나, 천둥이나 벼락을 던
질 때마다 올라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천궁 꼭대기에는 대지 위에다 펼 구름도,
대지에다 쏟을 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벼락을 하나 집어 오른쪽 귀 위까
지 들어올렸다가 태양 수레의 마부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벼락 하나에 파에톤
은 수레를, 그리고 이승을 하직했다.
파에톤 자신이 불덩어리가 됨으로써 우주의 불길을 잡은 것이다.
천마는 벼락소리에 몹시 놀라 길길이 뛰다가 멍에에서 풀려나고 고삐에서 풀
려나 뿔뿔이 흩어졌다. 마구와 수레의 바퀴, 굴대, 뼈대, 바퀴살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아주 먼 곳까지 날아가는 파편도 있었다. 파에톤은 금발을 태우는 불길
에 휩싸인 채 연기로 된 긴 꼬리를 끌면서 거꾸로 떨어졌다. 별이 떨어지는 것
은 아니었지만, 누가 보았으면 마른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겼을 터
였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에리다노스 강(대양신 오케아노스와 테튀
스의 아들 에리다노스가 다스리는, 세계의 먼 서쪽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던 큰
강, 에리다노스와 클뤼메네가 남매간이니까 이 에리다노스는 파에톤의 외숙이
되는 셈이다)이 벼락의 불길에 그을린 그의 시신을 받아주었다. 헤스페리아('저
녁의 나라', 즉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가르킨다)의 요정들은 그을린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의 명문은 이러하다.
아버지의 수레를 몰던 파에톤, 여기에 잠들다. 힘이야 모자랐으나 그 뜻만은
가상하지 아니한가.
헤스페이아의 요정들이 파에톤을 후히 장사지내 준 것은 파에톤의 아버지인
태양신이 얼굴을 가린 채 숨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믿어야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날 하루만은 태양이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타오르던 불길이
세상을 비추었더란다. 세상을 태우던 불길이 하루만이나마 세상을 비추었다는
이야기가 묘하다. 그러고 보면, 재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익한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모양이다.
2. 헬리아테스의 변신
파에톤의 어머니 클뤼메네가 슬퍼하는 모습은 글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클뤼메네는 비통한 심사를 이기지 못해 눈물로 젖가슴을 적시면서 아들의 사지,
아들의 뼈를 찾으러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던 클뤼네네는 아들의 시
신이 먼 나라 강둑에 묻혀 잇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들의 무덤을 찾아간 클뤼네
네는 무덤을 내려다보며 대리석에 새겨진 이름에 눈물을 떨구다가 맨가슴으로
그 비석을 끌어안았다.
헬리아데스(단/헬리아스, 태양신, 즉 헬리오스의 딸들, 이로써 이 포에부스가
태양신 헬오스인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헬리오스와 클뤼메네 사이
에서 난 딸들이다. 따라서 죽은 파에톤의 누이들인 셈이다)의 슬픔도 어머니의
슬품에 못지 않았다. 이들도 그래서 죽은 아우의 무덤에 눈물과 애곡의 제물을
바쳤다. 이들은 밤이고 낮이고 파에톤의 무덤 위로 몸을 던지고, 손바닥으로 가
슴을 치며 파에톤의 이름을 불렀다. 파에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리 만무했
다. 이들은 달이 네번 차고 기울 동안 무덤 앞에서 우는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
런데 헬리아데스 중 맏이인 파에투사가 일어서서 걸으려다 말고 발이 땅에서 떨
어지지 않는다고 비병을 질렀다. 아름다운 람페디에가 언니를 도우려 했다. 그러
나 람페티에는 갑자기 발에 뿌리가 생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
했다. 셋째는 머리를 손질하려다 말고 비명를 질렀다. 머리에 잎이 돋아나기 시
작한 것이었다. 하나가, 다리가 나무 둥치로 변한다고 비명을 지르면, 다른 하나
는 팔이 나뭇가지로 변한다고 고함을 지르는 식이었다. 헬리아데스 다섯 자매가
이 놀라운 변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동안 나무 껍질은
어머니인들 무슨 수로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어머니 클뤼메네는 달려가,
자신의 입술을 느낄 수 있을 동안이라도 입을 맞추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클뤼네네는 입맞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내려고 애
쓰면서 아직은 부드러운 나뭇가지를 꺾어보았다. 그러자 꺾인 자리에서 수액 대
신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너무나 흡사한 액체가 흘렀다. 이 가지를 꺾인 딸이
외쳤다.
‘어머니 저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제발 꺾지 마세요. 나무로 둔갑했어도 제
몸의 일부랍니다. 아 어머니 안녕’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무 껍질이 딸들의 입을 막았다. 이 나무 껍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태양빛에 굳으면서 호박 구슬이 되어 가지에서 강물로 떨어졌
다. 강물은 이 호박 구슬을 물 밑에 간직했다. 뒷날 로마 부인네들의 장신구가
된 호박 구슬이 바로 이것이다.
3. 백조가 된 퀴크노스
스테넬로스의 아들 퀴크노스가 이 기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외가 쪽으로
파에톤과 일가붙이였다. 그러나 퀴크노스와 파에톤이 나눈 우정은 피보다 진했
다. 그는 파에톤이 불행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문을 듣고는 왕국을 버리고(그는
리루리아 땅의 지배자였다) 에리다노스 강가로 달려와 이 강의 물결과 강둑의
풀밭을 통곡하는 소리로 메아리치게 했다. 파에톤의 누이들이 나무로 둔갑하는
바람에 수가 불어난 숲 속의 나무 사이로도 그가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게 울부짖는데 갑지가 그의 목소리가 가늘어지면서 소리 끝이 갈라졌다. 이
어 하얀 깃털이 돋아나 그의 머리카락을 가리기 시작했다. 퀴크노스의 목은 자
꾸만 늘어나 어깨 위로 솟았고 손가락은 빨갛게 변하면서 사이사이에 물갈퀴가
돋아났다. 양 옆구에서는 날개가 돋아났고 입이 있던 곳에서는 긴 부리가 생겨
났다. 이로써 퀴크노스는 못 보던 새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새는 하늘과 유
피테르를 믿지 않는다. 유피테르가 부당하게 벼락을 던지는 바람에 파에톤이 하
늘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쿠크노스는 늪지와 호숫
가를 좋아한다. 벼락이 일으킨 불을 어찌나 싫어했는지 퀴크노스(영
‘나도 운명의 여신이 내게 맡긴 일을 이만하면 어지간히 한 셈이다. 이 일
때문에 나는 천지창조 이래로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이 일,
이제 신물이 난다. 내 노력이 나를 명예롭게 한 바도 없다. 몰고 싶은 신이 있으
면 태양 수레를 몰아보라지. 지원자가 없고 신들이 하나같이 발을 빼려 하면 유
피테르 자신에게 맡기면 되고...... 내 천마를 다스려보면, 그 동안만이라도 아비
로부터 자식을 빼앗았던 저 저주스러운 벼락을 놓아야 할 테지. 저 거칠디거친
천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면, 그 천마 잘못 다스린다고 벼락으로 때릴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고......’
이게 태양신이 한 말이다. 그러나 신들은 이구동성으로 태양신에게 세상을 어
둠 속에 버려두지 말아달라고 탄원했다. 유피테르까지도 벼락 던진것을 사과하
하고 계속해서 태양 수레를 몰아달라고 말했다. 지배자들이 대개 그러듯이 사정
반, 협박 반 섞어서 한 말이긴 하지만......
포에부스는 그때까지도 공포에 떨고 있던 천마를 몰아다 태양 수레에 매었다.
슬픔에서 다 헤어나지 못한 포에부스는 이 천마를 채찍으로도 때리고 작대기로
도 때렸다. 천마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천마를 욕하며 재앙의 책임을 천마에
게 물을 만큼 그의 성미는 사나워져 있었다.
4. 칼리스토를 범한 유피테르
신들의 아버지이자 전능한 신인 유피테를는 파에톤으로 인한 화변으로 혹 성
벽에 상한데가 없는지 알아보려고 천궁을 두루 돌아다녔다. 천궁은 이미 말짱하
게 고쳐져 있었다. 천궁이 여전히 난공불락의 철오성임을 확인한 유피테르는 이
번에는 인간 세상을 살피러 하계로 내려갔다. 그가 가장 근심한 것은, 평소에 사
랑하던 땅 아르카디아(유피테르는 크레타에서 태어났다는 전승도 있고 아르카디
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전승도 있다)였다. 아르카디아로 내려간 그는 그때까지
도 흐르지 못하는 강은 다시 흐르게 하고, 말라버린 샘은 다시 물로 가득 채웠
다. 또, 맨살이 드러난 대지는 풀과 나무로 옷을 입히고 황무지가 된 땅은 다시
푸른 숲이 되게 했다.
이렇게 분주하게 다니며 일을 하던 그가 아르카디아의 한 처녀를 보고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정념의 불길이 일어, 골수에까지 옮겨붙은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처녀는 털실이나 감고 몸을 단정하게 여미고 흰 댕기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창 아니면 활을 들고 다니는 사냥의 여신 디아나의 시종인 요정
이었다. 마이날로스 산을 누비던 요정들 가운데 이 처녀만큼 이 심술궂은 여신
으로 사랑을 받는 요정도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태양이 황도를 지날 즈음 이 처녀는 도끼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나무가 울
창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처녀는 어깨에 멘 화살통과 활을 내려놓고는 화살통
을 베개삼아 베고 잔디에 누웠다. 유피테르는 무방비 상태인데다 지쳐 있는 듯
한 이 처녀를 보고는 중얼거렸다.
‘여기에서 일을 벌이면 내 아내가 무슨 수로 알아내랴만, 알아낸들 어떠냐.
저 정도면 취하고 나서 아내의 잔소리쯤은 들을만 하지 않은가’
유피테르는 곧 딸 디아나로 둔갑하여 처녀에게 접근하고는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사냥을 했더냐? 어는 능선에서 사냥을 했더냐?’
처녀가 잔디에서 일어나 몸 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어서 오서서. 귀하신 여신이시여. 저희들 보기에는 유피테르보다 귀하신 여
신이시여...... 여신께서 저희들에게는 유피테르보다 귀하신 것이 사실인데 유피테
르 신께서 들으시면 어때요?’
잠시 디아나 여신의 모습을 빌린 유피테르는 이 말을 듣고 웃었다. 그는 유피
테르로서 받는 사랑보다 디아나로 둔갑한 유피테르로서 받는 사랑이 더 큰 데
만족하면서 이 처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입맞춤은 처녀신이 시종인
요정에게 할 법한 그런 입맞춤이 아니었다. 처녀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숲 속
에서 있었던 사냥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디아나로 둔갑한 유피테르는 본색
을 드러내었다. 처녀는 여자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유노가 아
무리 질투심이 강한 여신이라고 하더라도 이 장면을 직접 보았더라면 처녀를 잔
혹하게 벌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처녀의 몸으로 여느 남정네 이기기도
어려운 터에 무슨 수로 신들의 지배자인 이 유피테르를 이길 수 있으랴. 처녀는
꺾였고, 유리테르는 뜻을 이루고는 천계로 올라가버렸다. 요정은 자기가 당하는
꼴을 목격한 그 숲이 싫어서 견딜 수 없어 그속을 떠났다. 얼마나 싫었으면 활
과 화살통 가져가는 것도 잊고 그곳을 떠났을까......
사냥을 끝내고 느긋한 마음으로 시종 요정들과 함께 마이날로스산 능선을 오
르던 디아나 여신은 유피테르에게 당하고 온 이 아르카디아의 요정(이 요정의
이름은 칼리스토)을 보고는 그 이름을 불러 가까이 오게 했다. 아르카디아의 요
정은 디아나 여신의 목소리를 듣고는 가짜 디아나, 말하자면 디아나로 둔갑한
유피테르이거니 여기고 도망쳤다. 그러나 멀리는 도망가지 않았다. 디아나 여신
곁에 요정들이 여럿 서 있는걸 보고는 그제야 진짜 디아나 여신인 것을 알고 가
까이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죄를 짓고 태연한 낯색을 하고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죄를 지었다는 것은, 디아나 여신이 순결을 잃은 요정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아르카디아 요정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저
다소곳이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이 요정은 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붉
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는게 그 증거였다. 디아나 여신 자신이 만일에 처
녀가 아니었더라면, 이 아르카디아의 요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첫눈에
눈치챘으리라.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다른 요정들은 모두 그 눈치를 챘었다고
한다.
달이 아홉 번 차고 기운 뒤의 일이었다. 디아나 여신은 뜨거운 여름날 사냥으
로 지친 몸을 끌고 산을 내려오다가 시냇가에 이르렀다. 시냇물은 부드러운 모
래 바닥 위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디아나 여신은 이 시냇물이 반가워 물에다
발을 담그고는 요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엿보는 자가 없으니 모두 옷을 벗고 멱을 감도록 하자’
아르카디아의 요정은 얼굴을 몹시 붉혔다. 다른 요정들은 모두 옷을 벗었지만
이 아르카디아 요정만은 이 핑계 저 구실을 앞세우며 이적거렸다. 그러자 다른
요정들이 달려들어 이 요정의 옷을 벗겼다. 옷을 벗겼으니 알몸이 드러난 것은
당연한 일. 알몸이 드러났으니 아홉 달 전에 죄지은 증거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르카디아의 요정은 하릴없이 죄지은 증거를 손으로 가리며
당혹해했다. 그러나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질 것이 아니었다. 디아나 여신의 불호
령이 떨어졌다.
‘꺼져버려라! 이 거룩한 시냇물을 더럽히지 말고 꺼져버려라!’
말하자면 디아나 여신은 이 아르카디아의 요정에게 동아리 요정들에게서 떠날
것을 명한 것이다.
전능하신 벼락의 신 유피테르의 아내는 오래전에 이 일을 알고 무서운 벌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때가 무르익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윽
고 요정의 몸에서 아르카스(‘아르타디아 사람’)라는 아들까지 태어나고 보니
더 이상 징벌을 유예할 입장이 아니었다. 요정의 순산은 유피테르의 아내를 견
딜 수 없게 했다. 요정과 아들을 내려다보는 유노의 눈, 유노의 가슴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유노는 이를 갈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로구나. 자식을 배는 것부터가 나를 능욕하는 처사
인데 그 자식을 낳기까지 해서 나를 또 한번 능욕하고 내 지아비가 저지른 난봉
의 증거로 삼아? 네가 무슨 수로 이 징벌을 피하겠느냐? 이 호난 계집아. 너와
내 남편을 시시덕거리게 만든 너의 그 아름다움을 빼앗아버릴 터이니 그리 알아
라’
이 말 끝에 유노는 연적인 이 요정의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내굴렸다. 요정
은 땅바닥에 쓰러지자 유노에게 빌 요량으로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 팔에서
는 꺼칠꺼칠한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손은 안으로 구부러지면서 끝에 구부러
진 발톱이 돋기 시작했다. 발에도 그런 발톱이 돋아났다. 유피테르가 찬탄해 마
지않던 그 얼굴은 갑자기 쭉 찢어진 입으로 흉칙하게 일그러졌다. 요정은 유노
에게 빌면서 용서를 애걸했지만 그 소리는 이미 유노의 연민을 살 수 없었다.
유노가 이미 말하는 능력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요정의 입에서는 듣기에
도 무시무시한 소리, 화가 나서 금방 싸움이라도 거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요정은 곰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요정의 여린 마음 그대
로였다. 곰이 된 요정은 하늘의 별들을 향해 이제는 앞발이 된 손을 내밀고 자
기 슬픔을 하소연하는 한편 무정한 유피테르를 원망했다. 그러나 곰이 내는 소
리가 인간이 하는 말과 같을리 없었다. 곰은 숲 속에 외로이 있을 수가 없어서
한때 자기가 살던 집, 뛰놀던 벌판을 찾아가 헤매었다. 사냥개에 쫓겨 바위산을
헤맨 것도 부지기수였고 사냥꾼에게 쫓겨 달아난 것도 부지기수였다.
잽 5. 별이 된 모자
곰이 된 이 요정 칼리스토의 아들 아르카스가 열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아르카스는 뤼카온의 딸인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일이 생긴줄은 까맣게 모르는
채 자라났다. 어느날 숲 속에서 짐승을 쫓던 아르카스는 에뤼만토스 산에다 큰
그물을 친 다음, 목을 잡고 숨어서 기다렸다. 아르카스는 여기에서, 곰이 된 어
머니 칼리스토를 만났다. 칼리스토는 아들 아르카스를 보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
었다. 칼리스토는 자기 아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곰이 이상한 눈치를
보이는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르카스는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이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 모습
을 하고 있는 칼리스토는, 아들에게 다가서고 싶어 견딜수 없었지만, 한 발짝만
접근하면 아들의 창이 날아와 가슴에 꽂힐터였다. 그러나 이 모자에게 서로 죽
이고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능하신 유피테르 신이
이 아르카스와 칼리스토의 손을 잡고는 이 모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아들로 하
여금 살모(어미를 죽임)의 대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즉, 돌개바람을 시켜
이들을 빈 하늘로 옮기게 하고 다시 이들을 이웃해 있는 두 개의 별자리(큰곰자
리와 작은곰자리)로 박아준 것이었다.
칼리스토 모자가 별이 되어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으니, 질투심이 강
하기로 유명한 유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유노는 바다로 뛰어들어 백발의 여
신 테튀스와 연로한 해신 오케아노스(영/오션.‘바다’)를 찾아 갔다. 이 노신(늙
은 신)부부는 올륌포스 신들의 존경을 받는 티탄(거신=큰신)들이었다.(유노는 이
티탄 부부손에서 자라났다)
거신 부부가 바다로 내려온 까닭을 묻자 천궁의 왕비 유노가 대답했다.
「두 분께서, 신들의 왕비인 제가 어째서 천궁의 보좌를 떠나 여기에 왔느냐
고 물으시니 말씀드리지요. 제 지아비의 사랑을 입은, 저 아닌 다른 계집이 별이
되어 하늘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밤이 세상을 가리거든 보세요. 창궁 저 높은 곳
에 새로 자리를 잡고, 저를 비웃으며 반짝이는 두 개의 별자리가 보일 것입니다.
극권 가장자리와 천체 축이 맞물리는 곳, 극권에서 가장 가까운, 좁으장한 원 주
위를 보시면 그 별자리를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손으로 벌을 내렸는데
저것들이 저기에서 저런 명예를 누리는 판에, 누가 이 유노에게 죄짓기를 망설
일 것이며, 누가 이 유노와 맞서기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저는 대체 무엇입니까?
제 권능은 어디로 갔습니까? 제가 저 계집으로부터 인간의 형상을 빼앗았더니
저 계집은 여신이 되어 있지를 않습니까? 유피테르는 전에 아르고스 계집 이오
를 그렇게 하더니 이번에 또 제가 짐승으로 만든 계집에게서 짐승의 탈을 벗겼
습니다. 유피테르가 왜 유노와 인연을 끊고 이 계집과 정혼(결혼)하지 않는지 모
르겠습니다. 유피테르가 왜 이 계집을 제방에 들어앉히고 뤼카온(칼리스토의 아
버지)을 장인으로 섬기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께서, 두
두 바다의 신은 고개를 끄덕여 그렇게 하마고 약속했다.
6. 까마귀 깃털이 검어진 내력
사투르누스의 딸 유노는 털빛깔이 현란한 공작이 끄는 가벼운 수레를 타고 하
늘로 날아올랐다. 공작의 털빛깔이 현란해진 것은, 아르고스가 죽은 뒤의 일이
다.(유노가 백 개나 되는 아르고스의 눈을 모조리 뽑아다 자기 신조인 공작의 깃
에다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날개가 새하얗고 수다스럽기 그지없던 큰 까마귀의
털빛깔이 검어진 것과 같은 시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큰 까마귀는 원래 그 털빛깔이 순백색이어서 흰 비둘기와도 감히 희기를 겨룰
만하던 새다. 뿐인가? 그 독특한 울음소리로 군사를 깨워 카피톨리움을 구한 거
위(기원전 4세기 갈리아인들이 카피톨리움을 야습했을 때 거위가 울어 군사를
깨운 사건을 말한다)만큼이나, 강에서 사는 백조만큼이나
흰 새였다. 그런 큰 까마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순전히 혀를 잘못 놀렸기 때
문이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다가 벌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인데, 그 내력은 이러
하다.
테살리아의 라리사 땅에는 코로니스(이 이름자체가 ‘까마귀’라는 뜻이다)라
고 하는 아주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이 처녀는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당시 델
포이 신(아폴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코로니스가
델포이 신의 충실한 애인이었을 동안만, 아니면 코로니스의 부정이 드러나기까
지만 그랬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이 코로니스는 아폴로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부정한 짓을 했고, 이 포에부스의 새(즉, 까마귀)는 이 처녀의 부정을 염탐하고
는 이를 주인
에게 고별하여 포에부스 아폴로로 하여금 이 처녀의 부정을 응징하도록 마음먹
게 했다. 그래서 큰 까마귀는 아폴로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큰 까마귀는 날아
가다가 까마귀를 만났다. 수다스럽기로 말하자면 큰 까마귀에 못지않은 까마귀
는 큰 까마귀에게, 어디를 그렇게 급히 날아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큰 까마귀가
그 까닭을 이르자 까마귀가 말했다.
「가서 일러보았자 네게 득될 것이 없을 게다. 내 말을 귀담아 들어!
옛날의 내 털빛, 너도 알지? 그런데 지금은 이 꼴이 되었다. 내가 이 꼴이 된 연
유가 궁금하지 않느냐? 내 일러주마. 주인에 대한 나의 불충이 나를 이 지경으
로 만들었다. 옛날 팔라스 여신(지혜와 승리하는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그/아테
나)를 말함)께 에릭토니오스라고 하는 어미 없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팔라스 여
신께서는 이 아이를 아르카디아 버들로 짠 고리짝에다 넣으시고 이 상자를 케크
롭스 왕의 세 딸에게 맡기셨다. 케크롭스 왕(도시국가 아테나이의 시조)이라면
너도 모르지 않겠지? 반은 인간의 모습, 반은 뱀의 모습을 한 왕 말이다. 이 상
자를 맡기시면서 팔라스 여신께서는, 절대로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고 하셨다. 여
신의 비밀을 염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나는 마침 잎이 무성한 느릅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던 참이어서 이 세 공주가 하는 짓을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내
가 보고 있으려니, 두 공주, 그러니까 판드로소스와 헤르세는 여신의 말씀대로
하더군. 그런데 셋째 아글라우로스는, 여신의 말씀을 따르는 두 언니를 겁쟁이라
고 하면서 이 뚜껑을 열더구나. 안에는, 아기와 똬리 튼 뱀이 있었어. 나는 여신
께 날아가 이 사실을 여신께 그대로 일러바쳤지 뭐냐. 그랬더니
뭣하면 여신께 여쭈어봐도 좋아. 여신께서 내게 화를 내고 계시는 것은 분명하
지만, 사실을 다르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거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내 공향은 원래 포키스야. 저 유명한 코로네우스는 바
로 우리 아버지시고..... 그러니까 나를, 그저 그렇고 그런 자로 보지 않았으면
해. 이래봬도, 어엿한 왕가의 공주였으니까. 나를 아내 삼으려는 구혼자가 문전
성시를 이루었어. 하지만 아름다웠던게 원수지.....
어느 날, 나는 평소의 습관대로 바닷가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걷고 있었어. 그런데
바다의 신이 내 모습에 반하고 말았나봐. 바다의 신은, 처음에는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사정하고 애원했어. 하지만 내가 뭐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바다의 신
은,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완력으로 나를 어째 보려고 하는 것이 아
니겠어? 도망쳤어. 바다의 신은 내 뒤를 쫓아왔고, 하지만, 부드러운 모래 위라
서 빨리는 도망칠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근처에 나를 도와주실 신이나 인간이 계
시지 않느냐고 소리소리 질렀어. 한동안 기척이 없었어. 그런데 처녀신 미네르바
께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셨어.
같은 처녀라서 동정이 가셨던 모양이지? 나는 처녀신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
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렸어. 그랬더니 팔에 시커먼 깃털이 돋아나는 거야. 옷을
벗으려고 했는데, 이것도 벗겨지지 않았어. 이미 깃털로 변해버렸던 거야. 여느
깃털이 아니라 내 살갗에 깊이 뿌리내린 깃털로....
손으로 맨젖가슴을 만져보았더니, 맙소사, 손이고 젖가슴이고 모두 깃털투성이
야. 놀라서 마구 달렸어. 그런데 모래위를 달리는데도 힘이 안 들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달리고 있는게 아니라 모래밭 위를 날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그
렇게 날아올라가서 나는 미네르바 여신의 신조가 되었던 거야. 하지만 이런 이
야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제는 죄를 짓고 새가 된 뉘티메네(‘밤새’
즉 부엉이)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는데. 뉘티메네가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
레스보스에서는 유명한 이야긴데, 아직 못 들었어? 뉘티메네가 저희 아버지 침
대로 끌려들어갔다는 이야기? 물론
지금은 새가 되었지. 하지만 이 뉘티메네는 새가 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나, 날빛이 비칠 때는 날지 않아. 말하자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에만 나는 것이지. 이 뉘티메네는 하늘에 있다가, 다른 새들에게 쫓겨 땅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러나 큰 까마귀는 이 까마귀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나 못 가게 하려고 그러지? 네 엉터리 예언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
큰 까마귀는 기어이 포에부스에게 날아가 코로니스가 젊은 테살리아 사내와
나란히 누워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큰 까마귀로부터 코로니스를 헐뜯
는 말을 듣는 순간, 포에부스의 머리에서는 월계관이 미끄러져 내렸다. 낯빛도
변했다. 손에서는 수금 채가 떨어졌다. 그의 가슴은 분노로 끓어오르기 시작했
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늘 쓰는 무기인 활을 집어들고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살 하나를 메겨 시위를 당기고는, 자신의 가슴으로 감촉하던 코로
니스의 가슴을 겨누고 깍짓손을 탁 놓았다. 화살에 맞자 코로니스는 비명을 지
르며 쓰러졌다. 코로니스는 제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희고 긴 손가락은 이
미 진홍빛 피로 물들어 있었다. 코로니스가 부르짖었다.
「오, 포에부스시여, 저를 죽이시더라도 당신의 아기나 낳게 한 연후에 죽이실
것을.... 이로써 한 화살에 두 생명이 죽어갑니다」 피와 함께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가기 전에 코로니스가 남긴 말은 이것뿐이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싸늘
한 죽음의 손길이 코로니스의 몸을 쓴 것이었다.
포에부스는 코로니스에게 내린 벌이 너무 가혹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이와동시에 그는, 큰 까마귀의 말을 듣고 이를 믿은 것을 후회했다.
이를 믿고 화를 낸 것을 후회했다. 포에부스는, 코로니스의 부정을 고자질한, 그
래서 자시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게 한 큰 까마귀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활과 활을 쏜 자신의 손, 그리고 지각없이 쏘아보냈던 화살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싸늘하게 식은 코로니스의 시신을 쓸면서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놓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그러나 신유의 권능도 하릴없었다. 너무 늦은 것이었다. 손을 쓰기에
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안 아폴로는 애통해 했다. 화장할 나무더미가 쌓였다. 그
아름답던 코로니스의 사지는 곧 그 나무더미의 불길 속에서 소진될 터였다. 그
러나 아폴로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신들에게 눈물은 금기였다. 아폴로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백정 앞에 선 송아지 같았다. 금방이라고 내리칠 듯이 망치
를 오른쪽 귀 위로 번쩍 쳐든 백정 앞의 송아지 같았다. 아폴로는 코로니스의
가슴에, 이제 코로니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향료를 듬뿍 뿌리고는 마지막으
로 뜨겁게 껴안았다. 이로써 그는 죽음(죽음의 신)이 요구하는 의식을 끝마쳤다.
아폴로는, 뒤늦게 자신이 끼친 자식이 코로니스의 복중(배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불에 타고 있던 코로니스의 복중에서 아기를 꺼내어 저 켄타우로
스(반인반마 - 반은 인간, 반은 말) 케이론(많은 영웅을 길러낸 반인반마인 현
자)에게 맡겼다.
그런 다음, 고자질하고 상을 바라고 있던 큰 까마귀에게, 아폴로는 다시는 흰
새 축에 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7. 말이 된 오퀴로에
켄타우로스는 이 신의 아들을 기꺼이 맡아 기르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명
예와 책임을 누리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켄타우로스 케이론
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치렁치렁한 금발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다니는 이
케이론의 딸 오퀴로에는, 케이론이 카리클로라는 요정에게서 얻은 딸이었다. 카
리클로가 이 딸을 낳은 곳은 오퀴로에 강가였다. 그래서 그 강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오퀴로에라고 했던 것이다. 이 오퀴로에는 아버지의 각가지 기예를
배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운명의 비밀을 예언하는 재간까지 배운, 다시 말하면
예언자였다.
오퀴로에는 신기(신의 기운)가 오르자, 아폴로가 데려다 맡긴 아기를 내려다보
면서 말했다.
「아기야, 세상 사람의 건강을 돌볼 팔자를 타고난 아기야, 씩씩하게 자라거
라. 필멸의 인간 중에 너에게 목숨을 빚질 인간이 어찌 한둘이겠느냐? 기왕에
죽은 사람이 너에게 목숨을 빚지는 일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신들의 노여움을 살 것이고, 네 조부(유피테르)의 벼락이 너를 쳐서 네가 얻은
은혜를 앗아갈 터인데 이 일을 장차 어쩌랴. 너는 불사신에서 떨어져 시신이 되
었다가는 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신위(신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이로써 너는
네 운명을 두 번 새롭게 하는구나. 아버지여, 영원히 사는 권능을 받고 태어나
지금은 불사신이신 아버지여. 아버지 역시 오래지 않아 돌아가실 것입니다. 상처
로 들어온 무서운 뱀독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아버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신들은 아버지께 내리신 불사의 권능을 거두시고 죽음을 맞으시게 하실 것
입니다. 그때가 되면 세 여신(운명을 주관하는 세 여신)이 오실 것이고 이 중의
한 분은 아버지 운명의 실을 감으실 것입니다.(운명의 세 여신중 하나인 아크로
포스는 운명의 실을 감거나 자르는 일을 한다)」
이 오퀴로에는 천기를 누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눈물이 뺨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운명의 여신들은 저에게, 이제 천기누설은 그만두라고 하십니다. 아, 운명의
여신들이 제 말을 엿듣고 있었군요. 제가 얻은 이 예언하는 능력은 은혜로 얻은
권능이 아니라 저에게 내린 하늘의 분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알지 못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저에게는 보입니다. 인간의 모습이 제게서 떠나는
것이 보입니다. 앞으로는 풀이 제 양식일 것이요, 평원이 제가 뛰노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말로 둔갑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치 않아도 반은 말의 몸인
제 몸이.... 아버지, 제가 왜 말이 되어야 합니까?
반인반마의 딸인 제가 왜 말이 되어야 합니까?」
오퀴로에가 한 이 말의 끝부분은 이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이 이미 말
울음소리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 울음소리도 사
람의 말소리도 아니었다. 사람이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
나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오퀴로에는 정말 말 울음소리를 내면서 두 손으로 풀
밭을 짚었다. 손가락은 자꾸만 커지다가 이윽고 딱딱한 말발굽으로 변했다. 머리
도 커지고 목도 늘어났다. 옷자락은 꼬리가 되었고, 어깨를 덮던 금발은 갈기가
되어 오른쪽 어깨로 흘러내렸다. 오퀴로에가 내는 소리의 변화와 오퀴로에의 모
습의 변화는 함께 일어났다. 이 기적은 오퀴로에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했다.
(이 오퀴로에 예언은 실현되었다. 아폴로의 아들은 자라나 유명한 의성 아에스쿨
라피우스(그/아스클레피오스)가 되나, 죽은 사람을 살려내었다가 유피테르의 노
여움을 사 벼락에 맞아 죽는다. 오퀴로에의 아버지 케이론은 헤리쿨레스(그/헤라
클레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데 이 화살끝에는 물뱀 휘드라의 독이 묻어 있었다)
8. 수다쟁이 돌이 된 바투스 노인
퓔리라의 아들인 반신(반은 신)이자 반인반마인 케이론은 울면서 딸을 본모습
으로 되돌려달라고 아폴로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아폴로도 유피테르의 지엄한 뜻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
길 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도와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아폴로가 당시에는 엘
리스와 메세니아 벌판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이즈음의 아폴로는 인간 세상
에 귀양와 있었다) 당시 아폴로는 양치기 모습을 하고,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일곱 개의 갈대를 나란히 붙여 만든 쉬링크스, 즉 목신의 피리를 들
고 다녔다.
전해지는 바로는, 당시의 아폴로는 코로니스를 잃은 슬픔을 목신의 피리로 달
래며 소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니 가축을 제대로 돌볼 수 있었을 리 없다.
가축 무리는 아폴로가 목신의 피리나 불고 있는 틈을 타서 퓔로스 벌판으로 넘
어갔다. 유피테르와 마이아 사이에서 난 아들 메르쿠리우스(그/헤르메스. 도둑질
의 수호신. 일설에 따르면 이 메르쿠리우스는 태어난 날 강보를 열고 나가 소도
둑질을 했다고 한다. 메르쿠리우스는 야성적이고, 사술에 능하고 장난기가 많은
신인가 하면, 유피테르의 명을 받아 수시로 이승과 저승을 오르내리는 신이기도
하다.)는 이 가축 무리를 보고는 손을 써서 이들을 모두 숲 속에다 감추어버렸
다.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근동에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던 바투스 노
인을 제외하면.... 바투스는 저 재산가 넬레우스의 초장을 지키면서 혈통 좋은 종
마를 건사하던 자였다. 이 바투스의 입이 무서웠던 메르쿠리우스는 그를 한쪽으
로 불러 이렇게 꼬드겼다.
「여보 노인장, 노인장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혹시 누가 노인장에게 가축 무
리를 못 보았느냐고 하거든, 못 보았다고 대답하시오. 그리고, 여기 잘 생긴 소
한마리가 있으니, 내가 베푸는 성의로 여기고 거두어 주시오」
노인은 그 소를 받고는, 가까이 있던 돌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걱정마시오. 그대 뜻대로 될 것이니, 저 돌이 고자질하는 일이 있으면 있었
지. 내가 고자질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요비스(유피테르의 별명)의 아들은 짐짓 그 자리를 떠났다가 다른 사람으로
둔갑하고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와서 전혀 다른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이곳을 지나가는 내 가축을 못 보셨습니까? 보셨다면,
공연히 입을 다물었다가 도둑의 패거리로 몰리지 말고 내게 일러주세요, 일러주
시면 황소 한 마리에다 암소 한 마리를 짝으로 붙여서 할아버지께 드리겠습니
다.」
상급이 곱절이 되었으니 노인의 생각이 달라졌을 수 밖에.. 그래서 노인은 이
변장한 메르쿠리우스에게 말했다.
「저기 저 언덕 밑으로 가면 찾을 수 있을 게요」
메르쿠리우스가 아폴로의 가축을 훔쳐 숨겨둔 곳이 바로 언덕 밑이었다. 메르
쿠리우스는 기가 막혔던지 웃으면서 노인을 꾸짖었다.
「이런 사기꾼, 면전에서는 그러마고 해놓고 돌아서서는 딴소리를 해? 영감은
내 앞에서 나를 배신했어」
메리쿠르우스는 이 노인을 단단한 돌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시금석이라고 불
리는 돌이 바로 이 돌이다. 그래서 이 돌에는, 옛날에 거짓말하던 흔적이 지금까
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9. 메리쿠리우스와 헤르세
신장을 든 신(최면장을 든 메르쿠리우스)은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
다. 미네르바(그/아테나)여신에게 봉헌된 무뉘키아 벌판과 손질이 잘 된 뤼케움
숲이 내려다보였다.
마침 땅 위에서는 팔라스(미네르바 여신의 별명)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날은 종교의례에 따라 숫처녀들이 꽃바구니에다 거룩한 제물을 담아 이고 신전
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신전에서 나오는 처녀들을 내려다보
던 이 날개 달리 메리쿠리우스 신은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처녀들 머
리 위를 선회했다. 이렇게 처녀들 머리 위를 선회하는 메리쿠리우스는, 처녀들이
신전에 바친 제물을 노리고 신전 위의 하늘을 선회하는, 새 중에서 가장 빠른
새인 매와 흡사했다. 제물 옆에는 제관들이 모여 있는지라 매들은 날아내려가
제물을 뜯지 못하고 그 위를 맴돌기만 했다. 재치있기로 소문난 메리쿠리우스도
어쩔 줄을 모르고 신전 위에서, 매가 받는 것과 같은 바람을 받으며 선회했다.
신전의 처녀들 가운데서는 헤르세가 단연 돋보였다. 뭇 별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루키페르(샛별), 이 루키페르보다 더욱 빛나는 포이베(티탄시대의 달의
여신) 같았다. 이 헤르세는 대열을 지어 신전을 나오는 다른 처녀들을 무색하게
했다. 유피테르의 아들의 마음은 이 헤르세의 아름다움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설레었다. 서늘한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발레리아스 투석기(발레리아
스는 스페인 동쪽 해상에 있는 섬. 무서운 투석기가 발명된 섬으로 유명하다)가
쏜 납탄만큼이나 뜨거웠다. 발레리아스 전사들이 쏘는 이 납탄은 날아가면서 열
을 받아 구름 속에서 발화한다. 그러니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메리쿠리우스는 목
적지를 바꾸기로 마음먹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외모라면 어느정도 자신
이 있는 메리쿠리우스였다. 그런데도 헤르세에 비하고 보니 어쩐지 초라한 것
같아 메리쿠리우스는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옷매무새를 매만져 술이 달린 옷 가
장자리와 금장식이 겉으로 잘 드러나게 했다. 그는 오르손에 들고 있던, 산 것을
재울 수도 있고 깨울 수도 있는 최면장과 날개 달린 가죽신도 잘 닦아 윤이 나
게 했다.
헤르세가 사는 궁전 안채에는 상아가 거북 등껍질을 걸어 꾸민 방이 셋 있었
다. 오른쪽 방이 판드로소스의 방, 왼쪽 방이 아를라우소스의 방, 가운데 방이
헤르세의 방이었다. 메메리쿠리우스는 이 궁전안채로 숨어들었다. 맨 먼저 메르
크리우스를 본 것은 아글라우로스였따. 아글라우로스는 메르크리우스에게 , 정체
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숨어들어왔는냐고 물었다. 이것이
메르쿠리우스의 대답이었다.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아버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자다. 그러면 내 아버지가 누구냐? 유피테르 신이 바로 내 아버지이시다.
얼렁뚱땅 둘러대지는 않겠다.
내가 여기에 온것은 헤르세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네 어니의 동생 노릇을 제대
로 하고, 장차 내 아들의 이모가 되록 하여라. 호의로써, 사랑에 빠진 나를 도
와주기를 바란다.
아그라우로스는, 금발의 여신 미네르바가 맡긴 궤짝 안을 들여다 보던 눈으로
이 메르쿠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엄청나
게 많은 황금을 요구했다. 메르쿠리우스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아그라우
로스는 이 유피테르의 아들을 궁전에서 내쫓았다.
10. 질투의 화신이 된 아글라우르스
전쟁의 여신81)이 이 아글라우로스를 내려다보면서 화를 참느라고 한숨을 쉬
었는데 어찌나 한숨소리가 컸던지 여신의 젖가슴과 배를 가리고 있던 흉갑이 다
부르르 떨렸다. 여신이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궤짝을 열고, 어미 없이
태어난 렘노스 신82)의 아들83)을 엿본 이 아글라우로스를 그 궤짝 뚜껑을 열던
아글라우로스의 손을 잊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더러운 손이 여신의 눈앞에서
이번에는, 메르쿠리우스와 제 언니의 만남을 주선하는 대가로 엄청난 양의 황금
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신은 벌떡 일어나 인비디아84)를 찾아갔다. 인비디아는, 어둡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햇살이 비치기는커녕 바람도 한 점 불지
않는 깊은 계곡에 있었다. 이 집 안은, 손가락이 곱을 만큼 추웠지만 불기라곤
없었고,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있어서 늘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전쟁의 여신은
이집 앞에서 걸음을
80) 이 세 자매는, 절대로 들여다보지 말라던 당부를 어기고 미네르바가 맡긴 아
기 에릭토니오스를 들여다보았던 바로 그자매다. 81) 미네르바 82) 렌모스는 대
장장이 신 불카누스가 태어난 섬 이름. 따라서 불카누스. 83) 에릭토니우스 84)
그/젤로스. '질투‘의 여신
멈추었다. 전쟁의 여신은 이 질투의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여
신은 창 끝으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렸다. 인비디아는 마침 마성을 돋우어주
는 뱀 살을 먹고 있었다. 미네르바 여신은 눈길을 돌렸다. 인비디아는, 반쯤 남
은 뱀을 놓고 바닥에서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면서 문간까지 나왔다. 인비디안는,
여신의 아름다운 모습과 번쩍이는 무구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고 여신의 한숨소
리를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비디아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인비디아는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이발은 변색된데다 군데군데
썩어 있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이 인비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감
돌게 할 수 있는 것은 남이 고통받는 광경뿐이었다. 인비디아는 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밤이고 낮이고 근심 걱정에 쫓기고 남의 좋은 꼴을 보면 속이 상
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나날이 여위어가는 것이 인비디아였다.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 하는데로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데로 저 자신만 녹아나는 게 바
로 이 인비디아였다. 트리톤의 처녀85)는 역겨움을 꾹 참고 질투에게 말했다. 케
크롭스의 딸 아그라우로스에게 네 독을 좀 나ㅝ주어라. 이는 내가 너에게 바라
는 바다. 여신은 이렇게 말한 뒤 창으로 땅바닥을 툭 치고 하늘로 날라올랐다.
인비디아는 멀어져가는 여신을 눈꼬리로 좇으면서 여신의 뜻이시니 이루어질 테
지요 하고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온 인비디아는 가시장미 덩굴이 감긴 지팡이
를 들고 검은 구름으로 몸을 감싸고는 그 곳을 떠났다. 인비디아는 가는 곳마다
꽃이 만발한 벌판을 짓밟고, 풀을 말리고, 나뭇가지를 꺾고, 숨결로 사람들과 도
시와 집을 더럽혔다. 이윽고 인비디아는 트리톤 여신의 도시86)에 이르렀다. 아
테나이는 지혜와 재물이 넘치는 도시, 평화와 번영의 도시였다. 인비디아는 울
일이 없는데도 눈물을 흘리면서 이 도시로 들어갔다. 케크롭스의 딸 아를라우로
스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인비디아는 여신이 명한 대로 손을 썼다. 먼저 심술
이 뚝뚝 듣는 손을 처녀의 가슴에 대고 그 안을 가시덩굴로 채우고 시커먼 독기
를 뿜어 뼛속에까지
85)트리톤은 미네르바 여신이 태어난 곳.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네르바는
곧잘 트리토리아, 즉 '트리톤의 처녀‘로 불린다. 86)아테나이. 이 아테나이라는
말은 아테나 여신의 도시라는 끗이다. 미네르바 여신의 그리스식 이름이 곧 아
테나 여신이다. 따라서 아테나이는 미네르바 여신의 도시다.
독기가 스며들게 한 뒤, 심장에도 따로 독기를 흘려넣었다. 인비디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그라우로스가 오로지 메르쿠리우스와 헤르세만을 질투하도록 말
쑥하게 차려입은 메르쿠리우스와 시집 잘 가는 헤르세의 형상을 빚어 따로 보여
주었다. 빚어서 보여주되, 실제보다 훨씬 화려하게 빚어서 보여주었다. 케크롭스
의 딸은 그 환영을 보고는 그만 질투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가슴에서 이는 질
투의 불길이 처녀의 가슴을 먹어들어갔다. 처녀는 밤이고 낮이고 한숨만 쉬면서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마음의 근심에 쫓기며 나날이 여위어가는 아글라우로
스는, 흡사 뜨거운 햇볕 아래 놓인 얼음덩어리 같았다. 아니다. 헤르세의 화려한
결혼과 늘어진 팔자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아글라우로스 가슴의 불길은 건
초더미에 인 불길과 비슷했다. 불꽃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
가 결국은 건초더미를 깡그리 태우고 마는 불길과 비슷했다. 아글라우로스는, 팔
자 늘어진 헤르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
다. 엄한 아버지에게 헤르세와 메르쿠리우스의 밀회를 고자질해야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다. 결국 아르라우로스는 언니의 방문 앞에 드러누워 메르쿠리우스가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메르쿠리우스가 왔다. 메르쿠리우
스는 아글라우로스에게 길을 비키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글라우로스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내언니에게 그만 오세요. 당신을 쫓아내기 전에는 여기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어요. 그래? 그말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발 빠른 퀼레네(메르쿠리우스가 태어난 곳)의 신은 이렇게 응수하고는 신장으
로 툭 건드려 문을 열었다.
아글라우로스는 메르쿠리우스의 말이 심상치 않게 여겨져 일어나려고 했다. 그
러나 사지가 노곤하고 무거워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글라우로
스는 다시 한번 일어나 보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무프ㅍ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글라우로스가, 온몸을 지나 손가락끝까지 퍼져나가는 한기를 느끼고 있을 동
안 혈관에서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갔다. 질투가 옮긴 괴질은 빠른 속도로 이미
병든 곳과 성한 곳을 파괴했다. 이어서 생명의 숨결이 지나다니는 길을 거슬러
치명적인 냉기가 올라왔다. 아글라우로스는 말을 하력 애쓰지는 않았다. 애썼다
고 하더라고 소리는 제 길을 찾아 올라오지 못했으리라. 곧 목이 석화했고 이어
서 입술이 굳어졌다. 아글라우로스는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은 석상
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석상이 되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석상이
되었는데도 돌의 색깔은 거무튀튀했다. 검은 마음의 물이 들어 그런 색깔을 하
고 있는 것이었다.
11. 소로 둔갑한 유피테르와 에우로파
아틀라스의 외손(메르쿠리우스. 메르쿠리우스의 어머니 마이아는 아클라스의 딸
이다.)은 말버릇이 고약하고 뱃속이 검은 이 처녀를 벌하고는 팔라스 여신과 그
이름이 같은 도시(아테나이)를 떠나 하늘로 날아 올랐다. 아버지 유피테르가 이
아들을 불러 다짜고짜 이렇게 명했다.
내 명을 집행하는 아들아, 서둘러 네게 익은 길로 날아 내려가 왼편으로 네 어
머니 별(메르쿠리우스의 어머니 마이아는 플레이아데스, 즉 칠요성의 하나이다.)
을 올려다보면서 한참을 더 가거라. 그러면 시돈이라는 땅에 이를 게다. 가서 보
면 그땅 임금의 가축이 산자락에서 풀을 뜯고 있을 테니, 이 가축 무리를 해변
으로 내몰아라.
대신의 지엄한 분부의 시행에 일각의 지체가 있을 수 없었다. 유피테르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미 그 땅 임금의 소떼는 해변 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소떼가 가는 해변은 그 나라의 공주가, 친구들인 튀로스의 처녀들과 자주 어울
려 놀던 풀밭이었다.
사랑을 성취시키려는 마음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은 원래 조화도 양립도 불가
능한 법이다. 신들의 아버지이자 신들의 지배자인 이 유피테르가 어떤 유피테르
던가 끝이 세 갈래로 찢어진 벼락을 던지면 태우지 못할 것이 없는 유피테르,
고갯짓으로 능히 만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유피테르가 아니던가.
그런 유피테르가 대신의 위엄을 팽개치고 소의 모습을 빌려 둔갑하고는, 다른
소에 섞여 풀밭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 털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남풍에
녹지 않은 눈같이 새하앴다. 목의 힘살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했고 늘어진 살덩
어리는 탄탄하고도 실했다. 뿔은 비록 작았어도, 장인이 공들여 닦은 듯이 반짝
거렸다. 신들의 왕이 잠시 모습을 빌린 소답게 눈빛은 부드러웠고, 얼굴은 평화
로워 보였다.
이렇게 잘생긴 황소를 보았으니, 아게노르의 딸(에우로파)이 반했을 수밖에....
아게노르의 딸은 이 소가 이렇게 점잖아 보였는데도 처음은 무서워서 그랬는지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아게노르의 딸은 황소 가까이 다
가와 입 앞에다 꽃 한송이를 갖다대었다. 황소는 곧 제 차지가 될 이 공주의 손
에 입을 맞추었다. 황소 모습을 빌린 유피테르에게 이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유피테르는 욕망을 참는데 능하지 못했다.
황소는 공주를 어르기도 하고, 푸른 풀밭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노란 모래위에
그 눈같이 흰 몸을 눕히기도 했다. 공주는 점점 대담해져, 황소가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면 그 흰 손으로 슬어주기도하고, 꽃다발을 만들어 뿔에다 걸어주기도 했
다. 그러다가는, 정말로 대담해져 이 황소의 잔등에 올라탔다. 물론 공주는, 자기
가 누구의 잔등에 올라앉았는지 알지 못했다. 황소로 둔갑한 유피테르는, 처음에
는 가벼운 걸음으로 해변을 걷다가 조금 뒤에는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걸어나
갔다. 공주가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황소는 아예 바다로 들어가 바다 한
가운데를 바라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공주는 그제야 기겁을 하고 ,조금 전에 떠
나온 모래톱, 조금 전에 장난하느라고 황소의 잔등에 오르던 그 해변을 돌아다
보았다. 처녀는 오른손으로는 황소의 뿔을 잡고 왼손은 잔등에 올려놓은 채 지
향없이 실려갔다. 옷자락이 물에 뜬 채로 바람에 펄럭거렸다.
제 3부
박쿠스의 탄생 외
1. 카드모스의 망명과 테바이 건설
유피테르와 아게노르의 딸은 크레타 병원에서 쉬고 있엇다. 유피테르는 본 모습
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이 처녀를 취하고, 자기의 정체까지 밝힌 뒤였다.
이 공주의 아버지 아게노르 왕은 딸의 행방을 몰라 노심초사하다가 아들 카드
모스를불러, 행방불명이 된 누이를 찾아오되,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무서
운 명을내렸다. 아게노르는, 딸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지만 아들에게는 냉혹한
아버지였다.
카드모스는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유페테르의 책략을 꿰뚫어볼 자가 당시
세상에 없었으니 카드모스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닌 것도 당연했다. 유피테르
가 크레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없었다. 결국 누이를 찾는데 실패
한 카드모스는 고국과 아버지의 진노를 피하여 세상을 주유하던 길에 아폴로의
신탁전을 찾아가, 대체 어는 땅에 몸붙이고 살았으면 좋을지, 아폴로 신의 뜻을
물어보았다.
포에부스 아폴로의 대답은 이러했다.
인적이 드문데서 고삐에 매인 적도 없고 쟁기를 끌어본 적도 없는 암소 한마리
를 만날 것인즉, 그소를 따라가거라. 그 소가 가다가 풀밭에 눕거든 거기에 성을
쌓고, 이름을 보이오티아(소의땅)라고 하여라.
카드모스는 아폴로 신탁전이 있는 카스탈리아 동굴을 나오자마자 주인 없이 홀
로 천천히 걷는 암소 한 마리를 보았다. 암소의 목에는 고삐 자국이 없었다. 카
드모스는 암소 가까이 다가가 그 뒤를 따르면서 안내자를 보내준 포에부스 아폴
로를 조용히 찬송했다.
암소와 카드모스 일행은 케피소스 강을 건너, 파노페 땅으로 들어갔다. 파노페
땅을 지나 한동안 걸은 뒤, 암소가 걸음을 멈추고 참한 뿔이 달린 머리를 쳐들
고는 하늘을 향해 나지막하게 울었다. 그리고는 카드모스 일행을 돌아다본 뒤
무릎을 꿇고, 부드러운 풀 위에 옆구리를 대고 누웠다. 카드모스는 마음을 겸손
하게 차리고 그 낯선 땅에 입맞추고는, 이방인으로 찾아온 들판과 산에 인사를
보냈다. 인사를 마친 카드모스는 유피테르 신에게 제물을 바칠 요량으로 부하들
에게 숲으로 들어가 헌수할 정화수를 길어오게 했다. 가까운 곳에 마침, 도끼가
닿은 적이 없는 아주 오래 묵은 숲이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는 동굴이 하나 있
었고 우거진 관목과 고리버들 사이에는 석벽으로 천연의 아치를 삼은 샘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 동굴에는 머리에 황금 볏이 달리 마르스(아레스,난폭한 전쟁
의 신)의 왕뱀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왕뱀의 두 눈은 화등잔 같았고 그 몸은
독액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왕뱀이 입을 벌리자 세 줄로 난 이빨 사이로 세
갈래로 찢어진 혀가 들락거렸다. 포에니키아에서 온 이 망명객들은 동굴에 왕뱀
이 사는 것도 모르고 샘 가까이 다가가 물에다 항아리를 넣었다.왕뱀이 이들의
발소리를 듣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카드모스의 부하들은, 사지에서 피
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공포를 느끼고, 물항아리를 놓고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왕뱀은 비늘 달린 몸으로 똬리를 틀었다가 활 모양을 그리면 윗몸을 쳐들
었다. 몸이 어찌나 큰지 이로써 숲 전체를 덮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왕뱀은 윗몸을 들고 숲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똬리를 푼 이 왕뱀
은 큰곰자리와 작은 곰자리 상이에 있는 뱀자리 성좌만큼이나 컸다. 왕뱀은 바
로 포에니키아 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망명 온 군사들 가운데엔 무기를 들
고 싸울 준비를 하는 자도 있었고 도망칠 준비를 하는 자도 있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도 물론 있었다. 왕뱀은, 엄니로 물어죽이고,
똬리 안으로 감아들여서 죽이고, 유독한 숨결을 내뿜어서 죽이고, 하여튼 이들을
모두 죽였다.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정오 무렵이었다. 부하들이 오지 않자 카
드모스는 이를 궁금하게 여기고 이들을 찾아나섰다. 그에게는 사자가죽으로 만
든 방패가 있었고, 창날이 유난히 빛나는 장창이 있었으며, 몇 자루의 투창도 있
었고, 이런 무기 이상으로 미더운 용기도 있었다. 숲으로 들어간지 오해지 않아
카드모스는 부하들의 시체와 왕뱀을 발견했다. 왕뱀은 부하들의 시체 위로 까마
득히 솟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뱀은 이따금씩 시체에서 흐르는 피
를 빨았다. 시체를 빨다가 머리를 쳐들때마다 왕뱀의 혀 끝에서는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카드모스는 부르짖었다.
전우들이여, 내 맹세하거니와 그대들 원수를 갚지 못함ㄴ 나 역시 그대들의 뒤
를 따르리라.
이 말끝에 카드모스는 오른손으로 커다란 바위를 하나 들어 있는 힘을 다해 괴
물에게 던졌다. 맞았다면, 높은 탑루가 딸린 튼튼한 성벽도 무너지고 말았을 만
큼 큰 바위였다.
그러나 괴물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흉갑 같은 비늘과 검고 튼튼한 가죽이 바
위를 퉁겨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늘과 가죽도 카드모스가 던진 투창에는
견디지 못했다. 투창은 괴물의 등 한가운데에 꽂혔다. 꽂혀도 창 끝이 등을 지나
뱃가죽을 뚫도록 깊이깊이 꽂혔다. 괴물은 고통스러운지 몸부림치면서 제 등을
제 눈으로 보려고 몸을 뒤틀었다. 고개를 돌려 제 상처를 본 괴물은 혼신의 힘
을 다하여 창자루를 물고는 죄우로 흔들다가 기어이 이 창자루를 뽑아내었다.
그러나 날은 뼈를 뚫을 정도로 깊이 꽂혀 있었다. 괴물은 날뛰기 시작했다. 목의
핏줄은 독액으로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독니 가로는 휜거품이 일었다. 대지는
이 괴물의 비늘에 찢기었다. 스튁스의 동굴만한 입에서 뿜어나오는 독기가 주위
의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괴물은 거대한 나선꼴로 똬리를 트는가 하면, 나무
등지처럼 몸을 세우고 공격해 오고는 했다. 괴물의 앞을 가로막던 나뭇가지가
괴물의 가슴에 밀려 부러졌다. 카드모스는 조금 물러서서 사자 가죽 방패로 괴
물의 공격을 막다가, 괴물의 입안으로 창을 던져넣었다. 괴물은 미친 듯이 날뛰
면 쇠붙이로 된 창날을 깨물었다. 그 통에 이빨이 부서져나왔다. 독액으로 잔뜩
부풀었던 목에서 피가 떨어져 바닥의 푸른 풀을 적시기 시작했다. 괴물은 입은
상처가 깊지 않았던지 카드모스의 공격을 피하면서 다친 목을 건사했다. 그러던
괴물이 갑자기 땅바닥에 몸을 내굴렸다. 괴물이 요동칠 동안은 카드모스도 괴물
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기왕에 박힌 창날은 괴물의 몸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
고 들었다. 아게노르의 아들은 괴물에게 접근하여 목에다 꽂았던 창자루를 주먹
으로 내리쳤다. 창날은 왕뱀의 몸을 관총하여 뒤에 있던 나무 둥치에 꽂혔다. 옹
뱀의 몸을 창날로 나무 둥치에다 꿰어놓은 형구이었다. 나무는 왕뱀의 힘을 이
기지 못해 휘청거렸다. 괴물이 휘두르는 꼬리에 맞아 가지가 부러져 나갔다.
승리한 카드모스가 이 무서운 적의 거대한 시체를 내려다보고 서있는데 어디에
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드모스는 목소리의 임자를 찾느라고 사방을 둘러보
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게노르의 아들아, 왜 네가 죽인 왕뱀을 내려다보고 서 있느냐? 너 역시
인간의 눈앞에서 그렇게 뱀이 될 것이다」
카드모스의 빰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카드모스는 공포에 사로잡힌채 한동안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이때 이 영웅의 수호신인 팔라스 여신이 공중에 나타나 소리 없이 땅 위로 내
려섰다. 여신은 그에게, 땅을 갈아엎고 인간의 씨앗인 왕뱀의 이빨을 뽑아 부리
면 새 백성이 돋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카드모스는 여신이 시키는 대로, 보습으
로 이랑을 만들고 거기에다, 여신이 인간의 씨앗이라고 했던 왕뱀의 이빨을 뿌
렸다, 그러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흙덩어리가 움직이
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랑 사이에서 창날이 쑥 동아났고, 다음에는 깃털술이 달
린 투구가 솟아올라왔다. 오래지 않아 어깨와 가슴, 그리고 무기를 듣 손이 올라
왔다. 무장한 병사들이 올라온 것이었다. 극장의 무대에서, 막에 가려저 있던 등
장인물이 나타나는, 말하자면 처음에는 얼굴, 이어서 몸의 각 부분, 그리고 막이
천천히 걷히면 무대 위에 선 등장인 물의 전신이 나타나 보이는 것과 비슷했다.
카드모스는 이 새 적에게 놀라 무기를 잡어려 했다. 그러나 흙에서 솟아난 무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무기를 잡지 마시오! 집안 싸움에 끼여들지 마시오!」
이 말 끝에 그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역시 흙에서 솟아난 무사 하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무사는 다른 데서 날아온 투창을 맞고는 쓰러졌다. 투
창을 던진 무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역시 조금 전부터 쉬기 시작한 숨을 거
둔 것이었다. 무사들 전부가, 이놈이 저놈이 치고, 저놈이 이놈을 치며 미친 듯
이 싸웠다. 저희끼리 시작한 이 싸움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금 전에 얻은 목
숨을 잃었다. 남은 무사는 다섯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동아리 무사들의 피로
따뜻하게 데워진 어머니 대지의 가슴에 누워 뒹굴었다. 살아남은 자중의 하나인
에키온이 팔라스 여신이 시키는 대로 무기를 놓고 나머지 무사들에게 더 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고는, 그들로부터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포에니키아에서 온 이방인은 이들과 더불어 포에부스 신탁이 일러준 대로 새로
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선 도시가 바로 테바이다. 카드모스는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로부터
추방당함으로써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는 마르스와 베누스 사이에서 난 딸과
혼인했다. 카드모스의 아내는 아들딸을 여럿 낳아 집안을 융성케 했다. 이 부부
의 아들딸도 손주를 여럿 낳아주었다. 이 사랑스러운 카드모스의 후손들은 집안
을 화기애애하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힐 날이
되어봐야 그 한살이가 행복한 한살이였는지 박복한 한살이였는지 드러나는 법이
다.
2 다아나와 악타니온
그 많은 자손 중 처음으로 카드모스를 몹시 상심하게 한 자손은 악타이온이
다. 악타이온은, 여신의 벌을 받아 사슴으로 둔갑했다가, 제손으로 기른 사냥개
들 이빨에 찢기어 죽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악타이온이 이런 변을 당
한 것은 그의 팔자가 그래서 그랬지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
었다.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무대는, 갖가지 짐승의 핏 자국으로 얼룩진 산이다. 해가 동쪽의 출
발점과 서쪽의 목적지 사이에 들어 그림자를 짤막하게 줄여놓을 즈음, 젊은 악
타이온은, 함께 산속을 누비며 사냥하던 동무들에게 말했다.
「여보게들, 창칼과 사냥 그물은 우리가 잡은 짐승의 피에 젖고 말았네, 이만
하면 오늘 몫으로는 넉넉하지 않은가 ? 내일 아우로라가 노란 마차를 타고 새
날을 배풀거든 또 와서 시작하세. 보게, 해가 하늘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열기
로 대지를 구워대고 있지 않은가! 오늘 사냥은 이 정도 하고 그물을 걷세」
사냥 친구들은 악타이온의 제안을 옳게 여기고 사냥을 끝내었다.
이 산에는 소나무와, 잎이 뾰족한 삼나무가 덮인 골짜기가 있었다. <가르가피
에>라고 불리는 이 골짜기는 사냥의 여신 디아나에게 봉헌된 성소였다. 이 골짜
기에는 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즉 자연의 조화가 예술품을 흉내내어 빚어
놓은, 숲 속의 동굴이 하나있었다. 이 동굴의 천장은 경석과 부드러운 석회화로
되어 있었다. 이 동굴 안 오른쪽에는 먼 호수로 물을 흘려보내는 아주 많은 샘
이 하나 있었다. 이 샘의 툴은 아주 보드라운 풀로 덮여 있었다. 디아나 여신은
사냥 다니다 지치면 곧잘 이곳으로 와서 이 맑은 물에다 몸을 닦고는 했다. 이
날 여신은 동굴로 들어가자 무기 담당 노릇하는 요정에게 투창과 화살통과, 시
위 벗긴 활을 맡겼다. 다른 요정 하나는 여신의 옷을 받아 제 칼에다 걸었고 다
른 요정 둘은 여신의 가죽신을 벗겼다. 또 하나의 요정, 즉 다른 요정들보다 손
재간이 좋은, 이스데노스의 딸 크로칼레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
은 그대로 두고 여신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잘 손질해서 댕기로 묶
어주었다. 내펠레, 휘알레, 라니스, 브세카스, 피알레 같은 요정들은 커다란 항아
리로 물을 길어 여신에게 끼얹어주었다.
디아나 여신이 이렇게 몸을 닦고 있을 동안 사냥을 끝마친 카드모스 손자 악
타이온은 처음 들어온 숲이라서 길을 잃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니고 있었
다. 그러던 그는 운명의 손에 이끌려 물방울이 튀어 바닥이 축축한 이 동굴 안
으로 들어섰다. 발가벗고 서 있던 요정들은 난데없이 들어온 사내의 모습에 놀
라 젖가슴을 가리며 숲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디아나 여
신을 둘러 싸고 저희 알몸으로 여신의 알몸을 가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여신의
키는 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그러나 이들의 머리 위로 여신의 머리와 어깨
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가 알몸을 들킨 이
여신의 뺨은 태양빛을 받은 구름 색깔, 아니면 장밋빛 새벽의 색깔로 물들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요정들 속에서 여신은 몸을 돌려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
다. 활과 화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옆에 있을 리 없었다. 디아나 여신은
물을 쥐어 청년의 얼굴에 뿌렸다. 여신은 청년의 얼굴에 이 복수의 물방울을 뿌
리면서 재난을 예고하는 주문과 다를 바가 없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 이제 할 수 있겠거든 어디 디아나의 알몸을 보았다고 해보아라!」
여신의 말투가 특별하게 표독스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물 방울이 튄
곳에서는 장수하는 동물로 소문난 사슴의 뿔이 돋았다. 이어서 그의 목이 늘어
났고, 귀의 가장자리가 뾰족해졌으며, 손은 앞발로 변했고 팔은 앞다리로 변했
다. 곧 몸에서는 털이 돋아났다. 이어서 여신은 이 청년의 가슴에다 공포의 씨앗
을 뿌렸다. 악타이온은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그는 자기가 그처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데 놀랐다. 물 위에 비치는 자기 얼굴과 뿔을 보고 그는, 비명을 지
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괴성을 질렀다. 지를 수 있는 소
리는 그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사슴의 빰으로 변해버린 빰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여전한 것은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궁전으로 돌아가? 숲 속에 숨어? 돌아가려니 부끄럽고 숲
속에 숨으려니 무서웠다.
사냥개들이 머뭇거리는 그를 보았다. 먼저 짖는 것은 멜람푸스와 꾀많은 이크
노바테스였다. 멜람푸스는 스파르타산, 이크노바테스는 그레타산 사냥개였다. 이
어서 다른 사냥개들이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다. 아르카디아산인 팜파
고스와 도르케우스와 오리바소스, 힘좋은 네브로포노스, 사나운 태론, 질풍같이
달리는 리에라프스도 달려왔다. 발 빠른 프레렐라스, 냄새 잘 맡는 아그레, 멧돼
지 엄니에 받힌 적이 있는 휠라에오스, 이리의 핏줄을 타고난 나페, 양몰이 개
출신인 포이메니스, 새끼를 두 마리 거느리고 다니는 하르퓌이아, 시키온산인 날
씬한 라돈, 드로마스와 카나케, 스틱테와 티그리스, 알케, 털이 하얀 레우콘, 털이
까만 아스볼로스도 달려왔다. 뒤이어 힘좋기로 소문난 라콘, 경주견인 아엘로,
토오스, 동작 빠른 뤼키스케, 리퀴스케와는 형제간인 퀴프리오스, 검은 이마에
흰 반점이 있는 하르팔로스, 멜라네오스, 털복숭이 라크네, 크레타산 어미와 스
파르타산 아비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인 레브로스와 아그리오도스, 짖는 소리가
크기로 유명한 휠락토르 달려온 사냥개 이름은 다 대자면 한이 없겠다. 사냥개
들은 이 사슴 쓰러뜨리는 순서라도 다투듯 이 바위와 쓰러진 나무 등걸을 넘어,
때로는 벼랑을 뛰어내리고 또 때로는 위험한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길도 없는 숲
을 해치고 질풍같이 몰려왔다. 악타이온은 도망쳤다. 활을 들고 사슴을 쫓던 바
로 그곳에서, 악타이온은 제 손으로 기른 충직한 사냥개들에게 쫓기어 달아났다.
「나는 악타이온이다. 주인도 못 알아보느냐, 이놈들아!
악타이온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로 사위가 시끄러웠다. 맨 먼저 멜란카에테스가 그
주인의 등에다 이빨을 물어뜯었다. 사냥개의 추적속도는 다소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냥개들은 번번이 지름길을 찾아 산을 넘어와 이 사냥감을 덮치고는 했
다. 주인이 쓰러지자 나머지 개들까지 합세하여 그 몸에다 이빨을 박았다. 이발
댈 자리가 모자랄 만큼 몰려와 물고 뜯었다. 악타이온은 비명을 질렀다. 이 비명
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슴이 지를 법한 소리도 아니었
다. 그가 다니던 산등성이는 그의 비명으로 낭자했다. 기도하려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용서를 빌려는 듯이, 그는 무릎을 꿇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사냥 친구들은 저희들 앞에서 찢기고 있는 사슴이 악타이온인 줄을 모르고, 늘
그래왔듯이 고함을 질러 개들을 부추기는 한편 주위를 둘러보며 악타이온의 이
름을 불렀다. 목소리 크기를 겨루려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악타이온의 이름
을 불렀다. 물러도 대답이 없자 이들은 대장이 엎에 없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악타이온이, 볼 만한 구경거리를 놓쳤다고 생각하고는 아쉬워했다. 악타이온은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
았으랴! 사냥개들 이빨에 찢기는 대신 진자 사슴이 찢기는 것을 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너무나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사냥개
들은 둘러서서 겉으로만 사슴인, 사실을 저희들 주인인 악타이온의 살을 쉴새없
이 뜯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악타이온이 그 많은 사냥개들에게 뜯기어 숨이 끊
어질 즈음에야...... 저 사냥의 여신 디아나의 분이 풀렸다고 한다.
3 유피테르와 셀멜레
이 이야기가 천궁에 전해지자 의견이 엇갈렸다. 디아나가 너무 잔인한 짓을
했다고 하는 신들도 있었고 디아나를 편들어 이 여신의 행위가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불가피했다고 하는 신들도 있었다. 이 양자는 나름
대로 저희 편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었다.
오직 유피테르의 아내 유노만은, 디아나를 찬양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노는, 아게노르 집안에 내린 이런 재앙을 내심 고소해했다. 포에니키아의 연적
에우로파에게 품었던 양심을 에우로파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
로 인한 감정의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노는 문득 남
편 유피테르의 자식을 벤 세멜레를 생각했다. 유노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악담
을 하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 입으로 아무리 악담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번에는 내 손으로 이
계집을 결단내야겠다. 내가 누구더냐? 전능한 유노 여신이라고 불릴 권위가 있
는 여신, 보석 박힌 왕홀에 값하는 여신이 아니더냐? 내 손으로 이년을 결딴내
어야겠다. 내가 이 천궁의 왕비이며 유피테르의 누이이자 아내인 것만큼이나 확
실하게.... 저 계집이 은밀히 유피테르와 사랑을 나누는 데 만족하고 있고, 우리
부부 사이를 잠깐 갈라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앞세워 계집을 용서하자
고 주장할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안 된다. 저 계집은 자식을 배고
있다. 내가 칠 명분은 이로써 충분하다. 저 계집의 뱃속에 있는 자식이 계집의
유죄를 증명하고 있지 않느냐? 뿐이냐? 저 계집은 유피테르의 자식, 유피테르만
이 끼칠 수 있는 자식의 어미가 되려 한다. 내거 언제 그런 적이 있던가? 더구
나 저 계집은 제 미모를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계집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보여줄 수밖에..... 내, 이년이 좋아하는 유피테르의 손을 빌려
스튁스의 강물에 처박지 못하면, 사투르누스의 딸이 아니다」
이 말 끝에 옥좌에서 일어난 유노는 황금빛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세멜레의
집을 찾아갔다. 유노는 세멜레의 집 앞에서, 노파로 둔갑한 다음에야 황금빛 구
름을 걷었다. 귀 밑머리가 새하얗고, 얼굴이 주름 투성이인 노파로 둔갑한 유노
는 등을 잔뜩 구부리고 지팡이로 발 밑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노는 에
피다우로스 출신인, 세멜레의 유모 베로에로 둔갑한 것이다.
세멜레를 만난 유노(베로에로 둔갑한)는 저잣거리에 나도는 소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노의 목소리는, 겉모습에 딱 어울리게 떨렸다. 저잣거리
소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유피테르 이야기가 따라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유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 아씨 댁을 드나드시는 그분이 유피테르 신
이시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이지 않
아요, 하고 많은 사내들이 순진한 처녀 방을 기웃거릴 때는 신들 행세를 한답니
다. 그분이 자기 입으로 유피테르 신이라고 하더라도 아씨게서는 마음을 놓지
마세요. 아씨를 정말 사랑한다면 증거를 보이셔야지요. 여쭈어보시고 정말 유피
테르 신이시라고 하시거든, 유노 여신 앞에 나타나실 때처럼 위대하시고 영광스
러우신 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세요, 위풍당당하게 벼락까지 차고 오셔서 안
아달라고 해보세요」
유노는, 카드모스의 순진한 말을 이렇게 꼬드겨놓았다. 세멜레는 듣고 보니 그
럴듯했던지, 며칠 뒤 유피테르 신이 오자, 소원이 있는데 꼭 들어주겠다는 약속
만 하면 말하겠노라고 했다. 유피테르 신이 대답했다.
「무엇이든지 말해 보게, 내 거절하지 않을 터이니, 나를 못 믿을까봐서 하는
말인데, 자네가 원한다면 내 스튁스 여신에게 맹세하지, 이 스튁스 강에다 대고
하는 맹세는 신들도 뒤집을 수 없네, 자, 맹세했으니 말하게」
귀얇은 세멜레....... 여인의 손에 죽을 팔자를 타고난 이 세멜레는 제 파멸의
씨앗인 줄도 모르고 유피테르의 약속만 믿고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 그럼 말씀드리지요, 유노 여신 앞에 나타나실 때, 유노 여신과 사랑을 나누
실 때의 모습을 저에게도 보여주세요」
아뿔사! 이렇게 생각한 유피테르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다 나오기 전에 세멜레
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유피테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세멜레의 말이 다
입 밖으로 나온 뒤였다. 유피테르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세멜레의 소원은 들어
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맹세를 취소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유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천궁으로 올라갔다. 그는 고갯짓으로 구름을 모으
고 이것을 소나기 구름과 번개와 바람과 천둥과 일발필중의 벼락에다 묶었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의 벼락이 있었다. 백수거인 튀보네오스를 쓰러뜨릴 대 쓰던
것과 같은, 불길이 엄청나게 강한 벼락도 있었고, 퀴클롭스가 벼린, 불길도 그리
세지 않고 강도도 좀 떨어지는 벼락도 있었다. 유피테르는 위의를 차리되 비교
적 가볍게 차리고, 벼락도 가벼운 것으로 들고는 아케노르의 손자가 사는 집으
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멜레는 인간이었다. 세멜레의 육체는 인간의 육체였다. 인간의 육체
는, 이 천궁의 신이 내뿜은 광휘를 견딜 수 없었다. 세멜레는 이 유피테르의 광
휘 앞에서 새카맣게 타죽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피테르는 이 세멜레의 뱃속에 들어 있던, 아직 달이
덜 찬 아기를 꺼내어 자기 허벅다리에 넣고 실로 가운 뒤, 남은 달을 마저 채워
꺼냈다고 한다. 유피테르는 이 아기를 아기의 이모인 이노에게 맡겨 은밀하게
기르게 했다. 뉘사의 요정들은 행여 유노가 알까봐, 이 유피테르의 아들을 동굴
에다 숨기고 우유로 길렀다는 것이다.
4 양성의 쾌락을 경험한 테이레시아스
지상에서 운명의 섭리에 따라 이런 일이 일어나고, 거듭 태어난 박쿠스가 요
정들 손에서 잘 자라고 있을 즈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대신 유피테르는 넥타르를 깝신거리도록 마시고 유노와 노닥거리며
농담을 했더란다.
「 사랑으로 득을보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게요. 여자 쪽에서 보는 재
미가 나을 테니까」
유피테르의 희롱에, 유노는 그렇제 않다고 말했다. 이 대신 부부는, 남자라커
니 여자라커니 토닥거리다가 결국 남자와 여자, 즉 양성으로 사랑을 경험했다는
현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람이 양성을 경험한 내력은 이렇다. 어느날 산길을 가
던 이 테이레시아스는, 굵은 뱀 두 마리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별
생각 없이 지팡이로 때려주었다. 남자였던 테레이시아스는 이때부터 여자가 되
어 7년간을 여자로 살았다. 8년재 되는 해의 어느 날 똑같은 뱀이 또 뒤엉켜 있
는 것을 본 그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 너희들에게, 때린 사람의 성을 바꾸어버리는 기특한 권능이 있는 모양이니
내 다시 한번 때려줄 수밖에....」
테이레시아스는 뱀을 때리고는 원래의 성, 그러니까 남자로 되돌아 왔다.
테이레시아스는, 두 신의 다분히 장난기가 있는 논쟁을 평론할 입장에 몰리자
남신을 편들어 유피테르 쪽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노는 별것도 아닌 이 일
에 불같이 화를 내며 이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다. 참으로 염치가
없어진 것은 유피테르였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 한 신이 매긴 죄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보는 능력을 빼앗긴 테이레시아스에
게 대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주었다.
5. 미소년 나르키소스와 에코
테이레시아스가 점 잘 친다는 소문은 아오니아 땅의 모든 도시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점 치러 올 때마다 그는 하나 틀림없이 앞일을 일러주었다.
테이레시아스의 점괘가 얼마나 정확한가를 맨 먼저 통감한 이는 깊은 강의요
정 리리오페다. 리리오페는,강의 신 케피소스의 사랑을 입고 그 자식을 지어낸
바 있는 요정이다. 이 리리오페는, 케피소스강이 그 굽이치는 흐름으로 감아안는
바람을 잃었는데, 그로부터 달이 차자 사내아이를 낳은 것이다. 리리오페는,강보
에 싸여 있는데도 보는 사람의 얼을 빼놓을 만큼 잘 생긴 이 아기, 그래서 망연
자실,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게 하는 이 아기를 <나르키소스>라고
이름했다. 리리오페는 점쟁이 테이레시아스 모셔와서 아이가 장차 어른이 되면
천수를 누리게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수를 누릴 게요. 이 아이가 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오」
많은 요정, 많은 사람들은 이 점괘를, 노인이 지껄인 종작없는 헛소리로 들었
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이 점괘를 헛소리로 들은 자들을 무색하게 했다. 이
소년이 기이한 광기에 사로잡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로써 테이레시아스의 예
언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이라는 것의 내력은 대체로 이러하다.
케피소스의 아들은 열여섯 살이 되자 벌써 소년 몫과 사내 몫의 구실을 같이
했다. 그즈음에 이미 이 소년을 보기만 하면 수 많은 동남동녀들아 사랑을 느꼈
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소년은 자존심이 어찌나 강한지 이런 동남동녀들에게
털오라기 하나 다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이 나르키소스가 어벙한 사슴 한 마리를 사냥 그물 안으로 몰아놓고
있는데 어느 요정이 그 모습을 보았다. 이 요정은, 상대가 말을 할 동안에는 절
대로 제 입을 가만히 둘 수 없는 수다쟁이 요정이었다. 그런데도 이 요정은 저
혼자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요정의 이름은 에코, 늘 남의 말대답이나 하는 에
코였다.
원래 에코에게는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도 있었다. 니르키소스가 소
년이던 시절의 에코는, 말이 수다쟁이였지, 자기가 들은 말의 마지막 구절을 반
복하는 수다밖에는 떨 수 없었다.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유노 여신이었다.
유로 여신은 남편인 유피테르 신이 어느 요정과 산자락에서 뒹굴고 있다가 사
라지는 것을 보고는 하계로 내려와 이 에코에게 남편의 행방을 물었다. 묻는 말
에 대답이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에코는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로 수다를 늘
어놓았고 이 틈에 유피테르와 요정은 감쪽같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에코가 유노 여신을 잡아둔 셈이었다. 여신은 에코의 수다에 정신을 놓고 있다
가 한참 뒤에다 속은 것을 알고 이에 별렀다.
「나를 속인 그 혓바닥, 그냥 둘ㅅ\줄 아느냐? 앞으로 너는, 한마디씩 밖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남의 말을 되받아...... 내가 그렇게 만든다.」
유노 여신의 이 말은, 그저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동무들과
헤어져 인적 없는 숲 속으로 혼자 들어온 이 나르키소스를 보고는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에코는 가만히 이 나르키소스의 뒤를 밟았다. 가까이 가면 갈
수록 에코의 가슴은 그만큼 더 뜨거워졌다. 에코의 가슴은 이 사랑의 열기에 금
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았다. 불길에 갖다대기만 하면, 횃대 끝에다 재어놓은 유
황이 타듯이....... .
에코는 몇 번이나 이 나르키소스에게 말을 걸고, 그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고
백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에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에코는 먼저 말을
걸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제 목소리로 한마디를 되울릴 준
비나 하고 기다렸다. 이 소년은, 함께 온 동무들과 떨어지자 큰소리로 동무들을
불렀다.
「누가 없나, 가까이?」
「가까이.....」
에코가 대답했다.
나르키소스는 놀랐던지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조금 전 보다 큰 소
리로 불렀다.
「이리 와!」
「이리 와......」
에코도 똑같은 말을 되울렸다.
나르키소스는 뒤를 돌아다보고 아무도 없자 다시 소리쳤다.
「왜 나를 피하느냐?」
그러나 나르키소스의 귀에 들린 말은,
「피하느냐....」
이 한마디뿐이었다.
나르키소스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이리 와, 만나자!」
「만나자....」
에코는 또 아 한마디를 되울렸다. 에코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이 한마디밖에
는 더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에코는 숲 속에서 뛰
어나와 나르키소스의 목을 꺼 안았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늘 그래왔듯이 이
요정에게서 도망치며 소리질렀다.
「이 손 치워! 차라리 죽지, 너 같은 것의 품에 안겨?」
「안겨.....」
에코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말하고는, 나르키소스로부터 당한 이 모
욕을 참치 못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나뭇잎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때부터 에코
는 날빛이 비칠 동안은 동굴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에코의 가슴에 내린, 나
르키소스에 대한 사랑의 뿌리는 깊었다. 실연의 고통으로 몸부림 칠 때마다 이
사랑의 뿌리는 깊어갔다. 격정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에코는 하루
가 다르게 여의어갔다. 나날이 수척해지면서 온몸에 주름살이 생겨난 것이다. 이
렇게 여의어가다가 에코의 아름답던 몸은 그만 한줌의 재로 변하여 바람에 날아
가고 말았다. 남은것은 뼈뿐이었으나 곧 이 뼈도 가루가 되어 날아가버리자 마
지막으로는 소리만 남았다. 에코의 뼈는, 날아간 게 아니고 돌이 되었다는 전설
도 있다.
이때부터 에코의 모습은 숲 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코의 모습을 보
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에코의
목소리만은 살아 있으니 당연하다.
나르키소스는 이로써 에코의 사랑을 농락한 셈이었다. 물의 요정, 숲의 요정,
그리고 수많은 동남동녀들을 그렇게 했듯이 나르키소스는 이 에코까지 박대한
것이었다.
나르키소스부터 박대받은 이들 중 하나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저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소서, 하시되 이 사랑
을 이룰 수 없게 하소서, 이로써 사랑의 아픔을 알게 하소서」
람노스의 여신이 이 기도를 듣고 이루어지게 해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숲 속에는 맑은 물이 고인 샘이 하나 있었다. 양치기가 다녀간 적도 없고, 그
산에서 풀을 뜯던 어떤 염소나 고도 다녀간 적이 없다는 샘이 이었다. 새들도
산짐승도,심지어는 떨어지는 나뭇잎조차도 이 샘에 만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없
었다. 위로 무성한 숲이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이 샘을 가리고 있어서 샘물은 늘
시원했다.
한 낮에 사냥하다 지친 나르키소스가 이 샘으로 내렸왔다 샘 주위의 풍경과
자체가 나르키소스의 마음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른 목을 축이려고 샘
물을 마시던 나르키소스는 또 하나의 참으로 이상한 갈증을 느꼈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이 기이한 그리움을 지어낸 것이었다. 그는 물에 비친 그림자를
시체로 그릇 알고 그 그림자에 반해 버린 것이다.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넋을 잃
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샘가에 앉아 있었다. 영상에 꽂힌 그의 시선은 파로
스 섬 대리석으로 빚은 석상의 시선 같았다. 샘가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그는
두 개의 쌍둥이별 같은 제 눈, 박쿠스나 아폴로의 머리채를 비길 만하 제 머리
채,보드라운 뺨, 상아같이 흰 목, 백설 같은 피부에 장밋빛 홍조가 어린 아름다
운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름다운 소년이게 하는 이
모든 것들에 경탄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었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물론 자신이었다. 그는 쫓는 동시에 쫓기고 있었다.
그는 격정으로 타오르는 동시에 태우고 있었다. 이 무정한 샘물에 입을 대었으
나 하릴없었다. 영상의 목을 감촉하려고 물에다 손을 넣었으나 이 역시
어리석어라! 달아나는 영상을 쫓아서 무엇하랴! 그대가 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서보라. 그러면 그대가 사랑하던 영상 또한 사라진다.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대의 모습이 비춰진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있으면 그림자도 거기에 있을 것이요. 그대가 떠나면, 그대가 떠날
수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나면 그림자도 떠나는 법인 것을....
배고픔도 졸음도 나르키소스를 거기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샘가 풀
밭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실상이 아닌 그 그림자의,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눈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가 손을 내밀어 주위의 숲을
가리키며 외쳤다.
「숲이여! 사랑을 나보다 더 슬프게 사랑하는 자를 본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보아서 알 것이다. 수 많은 연인들이 밀화하기 가장 좋은 곳은 여기고 이 숲을
드나들었다. 숲이여, 그대는 이것을 보았으니 알 것이다. 아득하게 긴 세월을 산
숲이여 , 그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 만큼 괴로워하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내가 보
는 내 사랑에, 나는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마침내 닿지 못하는구나. 이를 어쩌면
좋은가? 내 사랑이 나를 피하는구나.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저 넓디넓은 대양도
아니요, 먼길도 산도 아니요,성문의 빗장에 걸린 성벽도 아니다. 견딜 수가 없구
나. 많지도 않은 물이 우리를 갈라 놓고 있으니, 참으로 견딜 수가 없구나. 내
사랑이 내 포옹을 바라고 있는데 어찌 이를 내가 모르겠는가? 내가 허리를 구부
리고 그 맑은 수면에 입술을 갖다대려고 하면 내 사랑도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내 입술을 마중하는데 어찌 내가 모르랴! 그대는, 우리의 입맞춤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 사랑을 갈라놓은 장애물을 참으로 하찮다고
할 것이다. 아 사랑이여, 그대가 누구든 좋으니 내게로 오라
이렇게 한탄하면서 그는 샘물에 비치는 그 얼굴을 다시 한번 눈여겨 바라보았
다. 눈물이 샘물에 떨어지자 물 위에 파문이 일면서 그 영상이 사라지기 시작했
다. 사라져가는 영상을 바라보며 그가 외쳤다.
「어디로 도망쳐, 이 무정한 것아! 너를 사랑하는 나를 버리지 마! 네 몸에 손
을 대는 게 싫다면 손대지 않으마. 그러니 이렇게 바라볼 수 있게만 해주어. 바
라보면서 내 슬픈 사랑을 이별하게 해주어」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웃옷을 찢고 대리석 같이 하얀 가슴을 쳤다. 그의
주먹에 맞은 부분은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가슴은 흡사, 햇빛을 받아 반은
빨갛게, 반은 하얗게 빛나는 사과,아니면 군데군데 보라색 반점이 내비치는, 아
직은 덜 익은 포도송이 같았다. 수면에 이 가슴이 비치자(수면은 다시 고요해져
있었다) 나르키소는 다시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 했다. 따뜻한
햇살에 녹는 금빛 밀랍처럼, 아침 햇살에 풀잎을 떠나는 서리처럼, 그의 육신도
사랑의 고통 속에서 사위어가다 가슴속의 불길에 천천히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반점이 내비치던 그 희디흰 살갗도 그 빛을 잃어갔고, 젊음의 혈기도 그에
게서 빠져나갔다. 제 눈으로 그렇게 정신없이 바라보던 저 자신의 아름다움도
그의 몸을 떠났다. 에코가 사랑하던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를 떠나갔다.
요정 에코는 샘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니르키소스부터 받은 박대를 생각하
면 고소하게 여겨야 할 판인데도 에코는 슬퍼했다. 나르키소스가 한숨을 쉬면서
「아」 하고 부르짖자 에코도 하늘을 우러보며 「아.....」하고 부르짓었다. 나르
키소스가 제 어깨를 치면서 울부짖자 에코 역시 똑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니
르키소스사 샘물을 내려다보면서 마지막으로 「무정한 이여!」 이렇게 중얼거리
자 에코고「무정한 이여....」 하고 중얼거렸고, 니르키소스가 「안녕」하고 마지
막으로 인사를 보냈을 때도 에코는 「안녕」 소리를 되울렸다.
나르키소스는 푸른 풀을 베고 누웠다. 곧 죽음을 찾아와 아름답던 그의 눈을
감기었다. 사자들의 나라로 간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스튁스 강에 비치는 제 모
습을 바라보았다. 케피소스 강 요정들은 동생인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느
라 머리를 모두 깍아 그의 죽음에 바첬다. 숲의 요정들도 울었다. 에코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숲 하나 가득히 되울렸다.
관이 준비되고, 화장단이 마련되고, 불을 붙일 횃불까지 만들어졌지만, 나르키
소스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요정들은 그의 시신
대신 흰 꽃잎이 노란 입술을 싸고 있는 꽃 한 송이를 찾아내었다.
6. 신들을 믿지 않은 펜테우스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예견했던 테이레시아스의 명
성도 그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에 대한 소문은 아카이아 방방곡곡은 물론 세상
으로 두루 펴져나갔다.
에키온의 아들 펜테우스는, 신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테이
레시아스의 예언을 찬양했지만 이 펜테우스만은 이 예언을 가볍게 여기고, 이
노인의 말과 이 노인이 장님이라는 것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테이레시아스는 이
런 펜테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대 역시 장님이나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저 박쿠스의 거록한
축제 현장을 보지 않아도 좋게 될 터인데 말이오. 그러나 그날은, 그대가 그대
눈으로 이 현장을 이 현장을 보게 되는 날은 오고야 말 것이오. 내 장담하거니
와, 세멜레의 이드님이신 리베르 신께서 이곳에 오실 날이 임박했다. 만일 이분
의 거록한 사당에서 이분을 섬기는 명예를 거절한다면, 그대는 사지가 갈가리
찢기어 숲과 그대 어머니. 그대 이모들에게 피를 묻힐 것이오.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대는 이 신의 영광을 부정할 것이고, 눈먼 내게 똑똑하게 보고있
는 저 비극의 날을 통분해야 할 것이오」
테이레시아스가 이렇게까지 소상하게 그 미래를 예언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에
키온의 아들은 욕지지리를 하면서 그를 쫓아내었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의 말
은 한 눈먼 노인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리베르 신이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 산야는, 리베르 신을 섬기는 자들의 외마
디소리로 낭자했다. 테바이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몰려나왔다. 남녀노소,빈부귀
천을 막론하고 모두 몰려나와 이 새로 온 신을 위한 축배를 준비했다. 그러나
펜테우스 왕만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배암의 족속들이여, 마르스의 후예이여, 어쩌다가 이렇게 미치광이들이 되었
느냐? 대체, 놋쇠 바라와 꼬부라진 피리와 속임수와 마술이 어쨌다는 것이냐?
어째서 전장의 창칼 숲도, 진군의 나팔소리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칼을 칼을 뽑
아들고 열을 지어 진군하던 자들이 발광하는 계집, 울리는 방울북, 술취한 미치
광이,구역질나는 광신자들 앞에서 맥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냐? 놀랍구나 놀라
워.....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너와 이 땅에다, 쫓겨난 신들의 은신처 튀로스를 건설
하고도 이번에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않고 사로잡힌 바가 된 이 늙은 것들아! 화
관이 아니라 투구 쓰고, 박쿠스의 주신장이 아니라 창칼을 들어야 마땅할 혈기
방장한 젊은것들아! 너희들이 어쩌면 다투어 나를 이렇게도 놀라게 할 수가 있
느냐? 바라노니, 너희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홀로 여럿을 대적해서 싸워 이긴 저
배암의 기백을 보여라. 그는 저 샘과 연못을 위하여 죽었다. 너희들도 적을 물리
쳐 너희 명예로운 이름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리베르 신이라는 자는 용맹스
러운 사내들의 씨를 말렸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 암상스러운 적을 물리쳐 조상
의 영광을 지켜야 한다. 테바이가 어차피 무너져야 할 성이라면 적
펜테우스 왕은 부하들에게 명했다.
7. 돌고래가 된 뱃사람들, 광란의 박쿠스 축제
조부인 카드모스와 아타마스를 비롯 온 테바이 왕족이 와이 이런 처사를 비난
했다. 그들은 펜테우스 왕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들이 펜테우스 왕을 말릴 수는 없었다. 이들의 경고는 오히려 펜테우스 왕의
광기를 불을 질렸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의 노력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 이
었다. 장애물이 없을 때는 조용히 부드럽게 산 아래로 잘 흘러가던 시냇물이, 너
무나 바위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포말을 날라고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것과 같
은 이치였다.
이윽고 왕이 보낸 무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라왔다. 펜테우스 왕이, 박쿠스
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무사들은 박쿠스는 구경도 하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박쿠스는 구경하지 못했습니다만, 박쿠스의 동아리는 하나 잡아왔습니다. 사
람들 말로는 이 자가, 이 제사를 집전한 신관이라고 하더이다.」
무사들이, 손을 뒤로 묶인 포로 하나를 왕 앞으로 끌어내었다. 뤼디아 사람인
포로는 박쿠스 교 신도였다. 이 포를 내려다보는 펜테우스 왕의 눈은 분로로 이
글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포로의 목을 자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애써 누
르고 우선 문초부터 했다.
펜테우스가 말했다.
「너는 곧 죽을 목숨이다. 내 너를 죽여 너희 동아리를 경계하는 본보기로 삼
기로 했다. 그러니 말하여라, 네 이름이 무엇이고, 네 부모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태어났고, 왜 이렇게 엉뚱한 제사를 차리게 되었는지 소상히 말하여라
」
그러자 포로는 별로 겁먹은 기색도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아코이테스라고 합니다. 태어난 곳은 뤼디아. 부모님은 신분은 천
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저에게, 힘좋은 황소로 갈아야 할 만한
전답도 양떼도 소도 물려주시지 못했습니다. 그럴 여유가 없으셨던 것이죠. 아버
지는 지금의 저처럼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로 물고기나 잡으셨
으니까요. 아버지의 전재산은 바로 고기를 잡는 기술이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께
서는 이 기술을 가르쳐주시면서,「내가 물려줄 것은 이것뿐이니, 이 재주를 익혀
뒤를 이어라」 이러십디다.
아버지는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다. 저에게는 강물만 유산으로
남기시고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뱃길
헤아려 키를 잡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비를 부르는 올레노스 산양자리, 타워케테
자리, 휘어데스 자리, 곰 자리를 곧잘 헤아리고 바람의 속내, 피항에 알맞은 항
구같은 것에 대해서도 제법 알지요. 우리가 델로스 섬으로 가는 길에 키오스 섬
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노잡이들이 배를 해변에다 대자 저는 배에서 젖은 모
래 위로 뛰어내려 섰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새벽녘에 잠을 깬 저는 동료들에게 샘 잇는 곳을 가르쳐주고는 식수를 길어오
게 했습니다. 저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바람을 보고는 동료들을 데리고 배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물을 뜨러 갔던 동료 중에서 오펠테스라는 친구가 맨 먼
저 오더군요.
이 친구가, <여, 다녀왔네.> 이러면서 해변을 따라오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 옆
에 처녀처럼 예쁘장한 청년이 하나 따라오더군요. 이 친구는, 벌판에서 길을 잃
고 헤메길래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술에 취하고 잠에 취하여 비틀 거렸
습니다. 그러니까 이 오펠티스라는 자의 뒤를 제대로 따라오지도 못했죠. 저는
이 청년의 모습, 입은옷, 지닌 물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여느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어느 신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분 안에는 분명히 신께서 깃들여 계시다. 오,
신이시여, 저희를 가엾게 보시고 저희가 경영하는 일이 형통케 하소서. 귀하신
분을 이렇듯이 대접한 저희 동아리를 용서하소서.>
그랬더니 딕튀스가,<우리 몫의 기도까지 할 것은 없어.> 하고 소리를 빽 질렀
습니다.
돛대 위로 돛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일이라면 우리들 중 가장 빠른 친구가 바
로 딕튀스입니다. 리뷔스와 금발의 망꾼 멜란토스와 알케미돈도 같은 말을 했습
니다. 소리를 질러 노잡이들에게 박자를 맞추어주는 포페우스도 비슷한 말을 했
습니다. 모두들 노략질에 눈이 어두웠던 모양이지요. 저는 외쳤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모두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나는 거록하신 문을 억지
로 실어 이 배를 저주받게 할 수는 없다.
저는 뱃전에 놓인 건널다리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동아리 가운데
서는 가장 담이 큰 뤼카바스가 화를 벌컥 내었습니다. 뤼카바스는 고향 뤼디아
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추방당한 자입니다. 재자 저항하자 이 자는 주먹으로 제
목을 내리쳤습니다. 떨어지면서 용케 밧즐을 잡았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
라면 저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밧즐을 잡고 다시 뱃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질이 덜 좋은 선원들이 뤼카바스에게 박스를 보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박쿠스 신께서.... 네, 그 청년이 박쿠스 신이셨던 것입니다....... 신께
서 다가오십디다. 고함소리에 잠을 깨시고 정신을 차리셨던 것입니다. 술도 말짱
하게 깨셨을 테지요. 그분께서 물으셨습니다.
<왜들 이러는 거요? 왜들 이렇게 고함을 지르는 거요? 여보시오, 뱃사람들,
내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소? 어디로 나를 데리고 갈 셈이오?>
프로레우스는 자가 대답했습니다.
<걱정 말아라. 가고 싶은 항구가 어디냐?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마.>
<그러면 낙소스 섬으로 갑시다. 낙소스는 내 고향이오. 나를 그리로 데려다주
면 여러분들을 잘 대접해 드리기로 약속하지요.>
박쿠스 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질이 좋지 못한 우리 뱃사람들은, 배가 낙소스로 순항하게 되기를 바다에 빌
자면서 나에게 올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알락달락한 돛을 올렸습니다. 낙소스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돛을 올리고 배를 오른쪽으로
몰았더니, 오펠테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쑥맥아,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너 미쳤느냐?>
오펠테스뿐만 아니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배를 왼쪽으로 몰아라!> 하고 소
리쳤습니다. 저는 그제야 그들의 음모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었
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그 음모의 내용을 귀띔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무
서운 음모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 나는 키를 잡을 수 없다. 배를 몰고 싶으면 너희들이 몰아라.>
저는 놈들과 한패가 되어 못된 짓을,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키잡이 노릇을 더는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놈들은 저에게 못된 욕을 했습니
다. 그 중의 하나 아에탈리온이라는 자는, < 너 없으면 우리가 바다에 빠져 죽
기라도 한다더냐?> 이러면서 제 자리를 차지하고는 키를 잡았습니다. 배는 낙소
스를 뒤로 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박쿠스 신께서 몸소 나서시어 놈들을 조롱하셨습니다. 제가 신께서 놈
들을 조롱하셨다고 하는 것은, 놈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시고는 갑판에 서신 체
바다를 내려다보시면서 거짓 울음을 터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신께서는 거짓 울
움을 터뜨리시고는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여보시오. 뱃사람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내가 말한 곳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 무슨 경우가 이렇습니까? 내가 대체 무슨 못된 짓을 했다고 이렇듯이 대
접하시는 것입니까? 어른들이 혼자 길 떠난 나이 어린 사람을 이렇게 곯리다니
이런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답니까?>
저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거짓 울음을 운 것이 아니고 정말로 울었습
니다. 그러나 사악한 제 동아리 뱃사람들은 우는 저를 비웃으며 여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그때 제가 뵌 신..... 이분보다 위대하신 신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 신께
맹세코,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옛사람들이 하고 듣고 믿던 신들의 이야
기가 그렇듯이 한마디도 틀림이 없는 진실입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물 빠진 항구로 들어간 것처럼 우뚝 서버렸습
니다. 뱃사람들은 대경실색하고, 노를 젓는다 돛을 팽팽하게 편다 노잡이들을 돕
고 돛 펴는 뱃사람들을 돕는다... 이렇게 부산을 떨었지만, 세상에.... 노예는 덩굴
이 갑자기 시작하면서 손잡이 쪽으로 뻗어 올라오고 있었고, 돛에는 열매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께서는 어느 틈에 포도송이 관을 머리에 쓰시고, 초도덩굴이 감긴 신장을
들고 서 계셨습니다. 옆에는 어느새 호랑이, 살쾡이, 얼룩무늬 표범 같은 무서운
짐승들이 와 있었고요. 뱃사람들은 실성해서 그랬는지, 무서워서 그랬는지 모르
지만 차례로 바다로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맨 먼저 바다에 뛰어들자, 몸 색깔이
짙어지면서 등뼈가 활처럼 휘기 시작한 것은 메돈이었습니다.
<메돈아, 네가 대체 무슨 짐승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냐?>
뤼카바스가 이런 말을 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자의 입이 쭉 찢어지면서 코가
꼬부라지고 살갗에 비늘이 돋더군요. 뤼뷔스는, 멈추어버린 노를 저으려다가 노
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제 손을 봅디다. 뤼뷔스의 손은 자꾸만 줄어들었는데, 그
때 이미 손이라기보다는 지느러미에 가까웠습니다. 어떤 뱃사람은 꼬인 밧줄을
풀어내려고 손을 번쩍 쳐들렀는데, 제가 보니까 이 자가 이렇게 들고 있을 동안
에 팔이 없어졌습니다. 팔이 없어진 몸은 곧 활처럼 휘더니 뒤로 벌러덩 나자빠
지면서 바다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모두가 반달처럼 휘어진, 낫 모양의 꼬리를
하나씩 달고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배 주위 사방에서 이런 짐승들이 솟구치
며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물위로 솟았다가는 다시 곤두박질하고, 곡마
단 춤꾼들처럼 제멋대로 몸을 던지는가 하면, 콧구멍으로 물을 빨아들였다가는
다시 뿜어내고 했습니다. 스무 마리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배의 뱃사람들
숫자와 비슷했으니까요. 저 혼자만의 온전하게 남아 있고 보니, 무섭기도 하고
정신도 없고 해서 저는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랬더니 신께서는 저를 달래셨습
니다.
<두려워 말고 배를 디아 섬으로 몰아라.>
저는 신께서 이르신 대로 했습니다. 배가 디아 섬에 이르자마자 저는 이 신을
섬기는 비교에 입문하고 그날부터 박쿠스 교 신도가 되었습니다.
아코에테스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펜테우스 왕은 여전히 골을 낸채로 고함을
질렀다.
「 너의 종작없는 이야기를 지겹게 들은 것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혹 화가 좀
가라앉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공연히 시간을 허비했구나. 여봐라, 이 자를
끌고 가서 고문 맛을 보인 연후에 스튀스의 어둠 속에 쳐박아버리거라」
뤼디아 사람 아코이이테스는 노예 무사들 손에 끌려나가 튼튼한 감옥에 갇혔
다. 그러나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의 명에 따라 옥사쟁이들이 그를 고문하고
죽이는 데 필요한 연모인 불칼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감옥 문이 저절로
열리고, 옥사쟁이들 아니면 아무도 풀 수 없는 수갑과 족쇄가 저절로 풀려나갔
다. 아코이테스는 어떤 옥사쟁이의 저항도 받지 않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이 에키온의 아들 펜테우스는 박쿠스에
대한 박해의 손길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보내는 대신, 몸소 키타
이론 산으로 갔다. 신성한 축제 마당으로 선택된 이 산에서는 신도들의 노랫소
리와 외마디 고함소리가 하늘땅을 울리고 있었다.
나팔수가 청동나팔로 부는 공격신호 나팔이 전장에 나가 있는 혈기방장한 군
마의 힘살을 부풀리듯이, 하늘과 땅을 울리는 박쿠스 신도들의 노랫소리, 고함소
리는 펜테우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이 산 중턱에는 수목이 울창한 주위와는
달리, 나무가 없는, 그래서 멀리서 보아도 눈에 잘 띄는 공터가 있었다. 펜테우
스는 산 밑에서, 비신도 특유의 불경스러운 눈으로 축제가 벌어지는 이 공터를
올려다보았다. 맨 먼저 이 펜테우스를 알아보고 미친 듯이 달려 내려와 지팡이
를 휘두른 사람은 바로 이 펜테우스의 어머니였다. 펜테우스의 어머니는 지팡이
로 아들을 두들기면서 외쳤다.
「애들아, 너희 둘 다 이리 와서 나를 도와다오. 이 멧돼지, 우리 받을 들쑤셔
놓은 이 커다란 멧돼지를 창으로 찔러 죽여야겠다.」
노파의 말이 떨어지자 열광해 있던 무리가 쏜살같이 이 기겁을 하고 서 있는
펜테우스 왕 쪽으로 돌진해 왔다. 글자 그대로 기겁을 한 왕은 말투를 바꾸어,
그러니까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자기 팔자를 한탄하고, 어머니 앞에서 자기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어머니의 지팡이에 맞아 이미 머리가 터진 그
는 두 이모를 향하여 애원했다.
「아우토노에 이모님, 저를 도와주세요. 악타이온의 혼령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이성을 되찾으시고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나 악타이온이라는 이름도 아무 소용 없었다. 펜테우스가 이렇게 비는데도
아우토노에는 이 펜테우스의 오른팔을 잘라버렸고, 또 한 이모인 이노는 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이제는 팔을 벌리고 애원할 수도 없게 된 펜테우스는 팔을 벌리는 대신 어머니
에게 팔이 잘린 자리를 보여주며 호소했다.
「어머니, 보세요. 아들이 이 꼴이 되었습니다.」
이 꼴을 본 그의 어머니 아가베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머리채가 휘날리도록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는 자기 머리로 아들의 머리를 박아 버렸다. 펜테우스의
머리는 산산이 부서져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피 묻은 손으로 그 머리의 조
각을 주워들고 아가베가 오쳤다.
「보아라, 우리가 이겼다. 내가 승리했다!」
무리가 몰려와 눈 깜작할 사이레 펜테우스 왕의 사자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가
을바람이, 늦서리를 견디며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 있던 잎을 떨어뜨리는 듯한
형국이었다.
이 무서운 사건이 있고 나서 테바이 여자들은 무리지어 이 새로운 의식을 받
아들였고, 앞다투어 재단에 향을 피워 이 신을 섬겼다.
제4부
페르세우스와메두사외
1 미뉘아스의 딸들
테바이 여자들과는 달라서, 미뉘아스의 딸 알키토에는, 이 박쿠스신도들 무리
에 휩쓸리지 않았다. 알키토에는, 박쿠스 신을 찬미하는 야단스러운 축제가 자기
네 나라에서도 베풀어져아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알키토에는, 심지어는, 박쿠
스가 유피테르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도 천연덕스럽게 했다. 이 알키토에의 여
동생들도 바쿠스를 믿지 않는 언니를 편들었다.
박쿠스 신관들은, 박쿠스 축제는 반드시 거행되어야 하고, 이날만은 하녀들도
하녀들 몫의 일에서 풀려나 이 신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하녀
나 주인이나 이날만은 젖가슴을 짐승가죽으로 가리고 머리댕기를 풀고, 머리에
는 화관을 쓰고, 손에는 잎달린 나뭇가지로 만든 주신장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었다. 이어서 신관들은, 박쿠스 신을 홀대하면서 무서운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
라고 경고했다. 여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신관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다. 그들은
박쿠스 축제일이 오자 베틀이고, 양털바구니고, 하던 설거지고, 다 팽개치고 축
제가 열리는 곳으로 나아가 박쿠스 신께 향을 사르고 갖가지 이름으로 그를 부
르며 그를 찬송했다. 박쿠스 신은, 브로미우스, 뤼아에우스, <벼락의 아들>, 폴뤼
고노스, <두 어머니의 아들>로 불리기도 했고, 뉘세우스, 장발의 튀오네우스, 레
나에우스, 뉘텔리우스, <엘레우시스의 아버지>, 이아쿠스, 에우한 등으로 불리기
도 한다. 그리스 인들이 부르는 이 주신의 별명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더 있다.
이 박쿠스 신은 늙지 않기 때문에 천궁에서도 늘 가장 아름다운 청년신 대접
을 받는다. 이 신에게는 뿔이 있으나, 우리 앞에 이 뿔을 달지 않고 나타날 때는
그 머리가 흡사 처녀의 머리 같다. 이분은 일찍이 동방은 정복했기 때문에, 강게
스 강이 흐르는 저 힌두스 땅의, 살갗이 가무잡잡한 사람들까지 이 신을 섬겼다.
박쿠스는 참으로 무서운 신이다. 그는 신들을 업신여겨 죄를 물어 저 펜테우
스와, 쌍날도끼를 쓰는 무사 뤼쿠르고스를 죽였고, 뤼디아 뱃노래들을 돌고래로
변하게 하여 바다에 처넣었다. 그는, 두 마리의 살쾡이 목에다 고삐를 걸어 자신
이 탄 수레를 끌게 한다. 그의 뒤로는 많은 박쿠스 신도들과 사퇴로스 들이 따
른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허리가 흰 노새 잔등에 어정쩡하게 몸
을 싣고 다니는 주정뱅이 노인도 늘 그의 뒤를 따른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
서든 젊은 청년들의 환호성과 여자들의 함성, 방울북, 바라, 회향, 대롱피리 소리
가 울려퍼진다. 테바이 여자들은 박쿠스에게,
「신의 우아하고 다정한 현재하심이 영원토록 저희와 함께 하시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순서에 따라 법도있게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미뉘아스의 딸
들만은 집 안에 틀어박혀 실 감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로써 이 제
사를, 이 제사를 흠향하는 박쿠스를 욕되게 했다. 그들은 양털을 빗기도 하거,
엄지손가락으로 실을 꼬기고 하고, 베를 짜기도 하는 등, 저희들끼리 바쁘게 일
하는 것은 물론 하녀들에게까지 바쁜 일감을 맡겨 문밖 출입을 못하게 했다.
미뉘아스의 딸들 중 하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실을 부드럽게 꼬면서 자매들에게
말했다.
「처녀라는 처녀는 모두 뿌리도 줄기도 없는 축제에 나가 휴일을 즐기니까 우
리도 이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야 하지 않겠어? 손은, 저 박쿠스보다 더 거록하
신 팔라스 여신의 직무에 맡기고 입으로는 차례로 옛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
내는 게 좋겠다. 하나가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들으면서 일하고.....」
나머지가 좋은 생각이라고 하자 먼저 말을 꺼내었던 처녀가 이야기를 준비했
다.
이 처녀에게는 아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처녀는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할
까....하고 궁리했다. 팔라아스티나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바뷜로니아의 케티스
이야기.....물고기로 둔갑하여 비늘에 덮인 몸으로 연못을 헤엄을 쳤다는 데르케
티스 이야기는 어떨까? 날개가 돋아나, 만년을 하얀 비둘기장 안에서 살았다는
데르케티스의 딸 이야기는? 마법과 약초의 힘을 빌려 젊은 청년들을, 입 못 벌
리는 물고기로 둔갑하게 했다가 저 자신도 그런 신세가 되었다는 나이아스 이야
기는? 흰 열매가 열리던 나무에서 갑자기 핏자국 색깔 같은 보라색 열매가 열
리게 된 사연은 어떨까?... ... 옳지, 이게 좋겠구나.
처녀는, 비교적 아는 사람이 적은 이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처녀는 털실을 감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2 퓌라모스와 티스베
「퓌라모스와 티스베라고 하는, 앞뒷집에 사는 총각 처녀가 있었는대. 세미라미
스가 세운, 아주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에......, 퓌라모스는 동방에서 가장
잘생긴 총각, 티스베는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였다지. 가까이 사니까 자주
만나고, 자주 만나니까 정들고 그랬을 테지. 처음에 이들 사이에 싹텄던 것은 우
정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우정은 사랑으로 깊어갔어. 이 두 사람이 결혼
할 수 있었다면 좀 좋았겠어? 양가 부모들이 못하게 했대. 하지만 결혼을 반대
한 부모들도 두 사람의 가슴에서 타는 사랑의 불길만은 어쩔수 없었어. 두 사람
의 가슴을 태운 사랑의 불꽃은 그 뜨겁기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아마 같았겠지.
하지만 양가의 부모들밖에는, 아무도 이 비밀을 몰랐어. 고갯짓, 눈짓으로만 사
랑을 나누었으니까. 감추면 감출수록 깊어가는게 사랑이잖아? 속으로 속으로 타
들어가는 섶 속의 불씨 같은 게 사랑이잖아?
앞집 뒷집을 나누는 벽에는, 이 두 집이 지어질 때부터 갈라진 틈이 있었어.
오랫동안 벽이 갈라져 있다는 걸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총각 처녀가 맨 먼
저 발견한 거야. 사랑에 빠진 처녀 총각 눈에 무엇이 안 보였겠어? 두 사람은
이 틈 이쪽저쪽에서 목소리만으로 사랑을 나누었어. 무슨 뜻이냐 하면, 더할 나
위 없이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이거야. 퓌라모스는 벽 이쪽에,
티스베는 벽 저쪽에 마주서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 무정한 벽을 원망했을
테지.
<이 심술궂은 벽아, 왜 우리 사이를 가로막느냐? 와르르 무너져, 우리가 서로
를 껴안을 수 있게 해주면 좀 좋으냐? 우리 욕심이 지나치다면 틈을 조금만 더
열어 입이라도 맞출 수 있게 해주려무나. 너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
다. 이나마 틈을 만들어주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귀에다 속삭일 수 있게 해준 것
만으로도 고맙기는 하지만, 늘 고맙다는 말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건 우리 사
랑이 그만큼 진하기 때문일 것이야.>
이렇듯이 둘은 벽을 사이에 두고 속삭였어. 밤이 되면 입맞춤은 안되니까 하
나는 이쪽에서, 하나는 저쪽에서 벽에다 입을 맞추고 헤어지고는 했지.
다음날, 아우로라가 밤하늘을 걷어내고 햇빛이 이슬을 말릴 즈음 두 사람은
다시 벽 이쪽저쪽에서 만났어. 두 사람은 이날 처음으로 한숨을 쉬면서 서글픈
신세를 한탄했어. 그래서 두사람은, 밤이 되면 지키는 하인들 눈을 피해 집 바깥
으로 나가 함께 성을 빠져나가기로 말을 맞추었어.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도 못
하고 떨어진 채로 벌판을 헤매게 될 것을 염려하여, 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우선
니누스 왕릉의 나무 밑에 숨어 있기로 약속했어. 이 나무는 하얀 오디가 주렁주
렁 달린 뽕나무로, 샘가에 서 있었어. 두 사람에게야 이 약속이 얼마나 황홀한
약속이었겠어? 하루 해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을 테지.
이윽고 태양이 바다에 잠기고 거기에서 말이 솟아오르자 디스베 아가씨는 아
무도 모르게 어둠에 묻어 집을 나올 수 있었어. 디스베 아가씨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왕릉으로 나가 퓌라모스와 약속했던 그 뽕나무 밑에 앉아서 기다렸지.
무섭지 않았을 리 있어? 하지만 사랑은 처녀를 아주 대담한 여자로 만드는 법이
야. 그런데 이를 어째! 사자가 한 마리가 나타났어. 짐승을 잡아먹고는 피가 뚝
뚝 듣는 턱을 쳐들고는, 물을 마시려고 뽕나무 옆의 샘가로 왔던 거야. 티스베
아가씨는, 좀 떨어진 곳에서 달빛에 비치는 이 사자를 보았어. 기함을 한 이 티
스베는 어두운 동굴로 몸을 감추었어.그런데 너무 서두르느라고 그만 너울 떨어
뜨린 것도 몰랐지 뭐야.
샘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가던 사자가 이 너울을 발견하고는 이 너울을 물어
갈가리 찢어버렸어. 짐승을 잡아먹은 직후였으니, 사자 입에 피가 묻은 것도 당
연한 일 아니겠어. 갈가리 찢어진 너울에 피가 묻은 것도 당연한 일이겠고.
퓌라모스는 조금 늦게 성문을 빠져나왔어. 퓌라모스는 흙에 찍힌 이 사자의
발자국을 보았어. 물론 얼굴색이 변했을 테지. 갈가리 찢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디스베 아가씨의 너울을 보았을 때, 이 퓌라모스의 심정은 어땠을까? 퓌라
모스는 티스베가 사자의 이빨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았어. 그는 티스베가 그
렇게 되었다면 자신도 죽어야겠다면서 중얼거렸어.
<이 밤에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죽는구나. 티스베는 나보다 오래오래 살아
야 할 사람인데.... 아, 내가 죽일 놈이다. 불쌍한 티스베여, 내가 그대를 죽게 하
였구나. 한밤중에 이 위험한 곳으로 오라고 하고는,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지 않
았으니, 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오너라, 사자들이여, 이 절벽 근처에 굴을 파
고 사는 사자는 다 오너라. 와서 내 몸을 갈가리 찢어다오. 그 험상궂은 입으로
이 죄 많은 자의 살을 먹어라. 그러나, 보라, 나는 입으로만 죽음을 말하는 비겁
자가 아니다.>
퓌라모스는 티스베의 피 묻은 너울을 집어들고, 둘이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
나무 밑으로 갔어. 그러고는 울면서, 눈에 익은 이 너울에 무수히 입을 맞추고는
또 이렇게 중얼거렸던 거야.
<너울이며, 티스베의 피를 마셨으니 이제 내 피도 마셔라. 그럴 때가 되었다.>
이러면서 퓌라모스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 옆구리를 푹 찌른 뒤,
있는 힘을 다해 이 뜨거운 상처로부터 칼을 뽑아내었어. 그러고는 쓰러졌을 테
지. 땅바닥에다 등을 대고... 상처에서는 피가 솟았어. 납으로 만든 송수관이 갈
라지면, 그 사이로 물줄기가 뿜어져나와 하늘로 치솟지? 피는 꼭 그렇게 솟아나
왔어. 뽕나무는 이때는 퓌라모스가 흘린 피에 젖어 보랏빛으로 물들었어. 이 피
를 마신 뿌리는 둥치를 통해, 가지를 통해 이 피를 열매에까지 보내었을 테지.
일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티스베는 떨면서 동굴에서 나왔어. 애인을 실망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거야. 너무 오래 동굴에 있으면, 퓌라모스가 걱정할까봐
그랬을 거야. 티스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애인을 찾았어. 어서 만
나 사자 때문에 동굴로 피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러나 이 티
스베의 눈에, 만나기로 한 장소와 나무 모양은 똑같은데 유독 열매의 색깔만 다
르게 보였어. 티스베는, 기연가미연가하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
로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어. 놀랐겠지. 하지만, 그 쓰러진 사람이 애인이라는 것
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에야 비할 수 없었을 테지. 티스베의 빰은, 회향나무보다
더 하얗게 변했어. 티스베는 떨기 시작했어. 미풍이 수면에다 파문을 일으킬 때
바다가 떨듯이... ...,
오래지 않아 티스베는 애인을 알아볼 수 있었어. 티스베는 울부짖으면서, 죄
없는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고 그 얼굴에다 눈물
을 떨구었어. 애인의 차가운 뺨에 입맞추면서, 그가 흘린 피에다 눈물을 섞었어.
그리고는 울부짖은 거야.
<퓌라모스, 어느 심술궂은 손길이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갔군요. 퓌라모스, 말
좀 해보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티스베, 당신이 사랑하는 티스베가 이렇듯이 당신
을 부르고 있어요. 내 말을 들었으면 이제 고개를 좀 들어보세요.>
<티스베>라는 말에 퓌라모스는 눈을 떴어. 하지만 퓌라모스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무겁기 한이 없는 그 눈꺼풀을 힘없이 들어 잠시 티스베를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어. 이번에는 영원히..... 티스베는, 갈가리 찢긴 채 피투성이
가 되어 있는 채 너울과, 비어 있는 퓌라모스의 상아 칼집을 보고는 또 울부짖
었어. 티스베는 그제야 전후 사정을 짐직할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의 손, 당신의 사랑이 당신을 죽였군요. 이만한 일을 할 손이라면 내게
도 있어요. 당신의 사랑에 못지않은 내 사랑도 이만한 상처를 낼 힘쯤은 내게
베풀어줄 거예요. 내가 죽어서 당신의 뒤를 따르면, 사람들은 내가 당신을 죽이
고 당신의 길동무가 되었다고 할 테지요. 죽음이 당신을 내게서 떼어놓았지만,
이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수는 없어요. 무정한 부모님들이시여, 내 부모님, 퓌
라모스의 부모님들이시여, 원하오니 저희 소원을 이루어주소서. 뜨거운 사랑과
죽음의 손길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한 무덤에 묻어주
소서. 나무여, 이미 내 사랑의 주검을 보았고 곧 내 주검을 내려다볼 나무여, 우
리의 죽음을 영원히 기억하시어 사람들이 우리 둘이 흘린 피를 되새기도록 그대
열매를 어둡고 슬픈 색깔로 물들여주세요.>
이렇게 울부짖은 티스베는 그때까지도 퓌라모스의 체온이 남아 있는 칼을 가
슴에 안아 그 끝을 가슴 밑에 대고는 앞으로 꼬꾸라졌어. 신들은 티스베의 기도
를 들었고, 양가의 부모도 티스베의 뜻을 알고는 그 뜻이 이루어지게 했대. 이
나무의 열매, 그러니까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가 익으면 검붉은 색깔로 변하는
것은 신들이 이 티스베의 기도를 들은 증거요, 화장단에서 나온 두 사람의 뼈
를 한 골호에 넣은 것은, 부모님들이 이 티스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한 증거라
는 거야.
3 베누스와 마르스의 밀통
퓌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가 끝났다. 얼마간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처녀들
이었으니 이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잊은 것은 당연하다. 이 침
묵을 깨뜨리고 맏이 레우코노에가 또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자매는 맏이 레우
코노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천상의 빛으로 삼라만상을 비추는 태양신 솔도, 사랑에는 어쩔 수 없었던 적
이 있어. 이제 내가 저 태양신 솔이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를 들려주마. 베누스와
마르스가 밀통하는 현장을 엿본 분도 바로 이 태양신이었어. 태양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없거든. 이들의 괴망한 짓을 괘씸하게 여긴 태양신은 베누스
의 남편인 불카누스에게 이 사실을 귀띔했어. 이 불카누스가 유노 여신의 아들
이자 베누스의 지아비라는 것은 너희들도 잘 알지? 불카누스가 받은 충격은 굉
장했었대.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벼리고 있던 연장을 다 떨어뜨렸다니까.
곰곰 생각하던 불카누스 신은 즉시 청동을 두드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는 실을 만들고 이 실로 사슬과 그물과 올가미를 만들었어. 불카누스가 손수
베틀에 걸어 싼 이 그물은, 천장의 들보에 매달린 거미줄보다 더 가늘고 정교했
대. 게다가 건드리기만 해도 탁 걸려들게 되어 있었어. 불카누스는 이렇게 만든
사술과 그물과 올가미를 자기 침대에다 쳐놓고는, 또 자기 아내가 다른 남신을
불러들이기만을 기다렸지.
그런 줄도 모르고 베누스는 또는 마르스를 그 침대로 꼬여와 사랑을 나누었겠
다? 불카누스가 손수 만들었는데 여부가 있어? 이 간부 간부는 꼼짝없이 이 사
슬과 그물과 올가미에 걸리고 말었어. 렘노스의 신 불카누스는, 옳다구나 하고,
신들을 모두 불러다놓고 침실 문을 열었어. 발가벗은 채 서로를 껴안고 있는 베
누스와 마르스의 모습... 신들에게는 참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였을 테지. 신들 중
한 분은, 치욕을 당해도 좋으니, 자기도 발가벗은 채로 베누스와 한 번 그렇게
갇혀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니까..... 신들은 이 둘의 꼴을 보고는 배를 잡고
웃었는데, 이게 천궁에서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신들의 입에 올랐더란다」
4 레우코토에와 클뤼티에
레우코노에는 이야기하느라고 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 퀴테라의 여신 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었겠어? 베누스는,
자기가 간통한 사실을 불카누스에게 밀고한 태양신 솔을 벼르고 있다가 기어이
복수했어. 어떻게 했느냐고? 아들 쿠피도를 시켜서 이 솔의 욕정에 불을 붙인
거지. 이 사랑의 꼬마 신이 나섰는데. 휘페리온의 아들인들 별수 있겠어? 찬란한
천상의 빛인들 사랑의 포로가 되었는데 별수 있겠어? 쿠피도의 화살을 한 대 맞
자 태양의 불길로 세상을 달구던 이 태양신이 이번에는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한 거야. 어떻게? 삼라만상을, 온 우주를 내려다보아야 할 솔의 눈길이 레우
코토에라는 처녀를 한번 본 뒤로는 그만 이 처녀에게 못박히고 만 거지. 레우코
토에에게 반한 이 태양신은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동쪽 하늘에 그 모
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할 시각인데도 하늘에서 머뭇거리는
등, 도무지 신들이나 인간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하기 시작했어. 이
레우코토에를 보려고 태양신이 하늘에서 어물거렸으니, 그 짧던 겨울해가 길어
져 인간들을 당황하게 했을 수밖에... 상사병으로 상심하는 바람에 태양빛이 아
주 희미해졌을 때도 있었어. 그러니 인간들이 얼마나 놀랐겠어?
태양신은 한때, 그렇게 사랑했던 클뤼메네, 로도스, 아이아이아 섬에 사는 키
르케의 아름다운 어머니, 심지어는 클뤼티에까지 본척도 하지 않았어. 참, 클뤼
티에 말인데..... 이즈음 클뤼티에는 태양신 솔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이게 받아
들여지지 않아 크게 상심하고 있었어. 레우코토에 때문이었지. 태양신 솔이 이런
애인들을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은......,
레우코토에는, 항료가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에우뤼노메의 딸이었어. 에우뤼노메가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그 딸인 레우코토에는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에우뤼노메는 그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레우코토에는 그런 에우뤼노메보다 더 아름다운
처녀였다는 이야기가 되지. 레우코토에의 아버지는 페르시아의 시조 멜로스의 7
대손으로, 당시에는 아카에메네스가 세운 여러 도시국가를 다스리고 있던 오르
카모스라는 사람이었어.
알아? 서쪽 하늘 아래엔, 태양 수레를 끄는 천마의 목장이 있대. 목장이 있다
고 해서 이 천마들이 풀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 천마들은 풀을 먹는
게 아니고 암브로사이를 먹어. 한 차례 하늘을 지나면 피곤해질 게 아니겠어?
그래서 이 귀한 암브로시아를 먹고 원기를 되찾는 거지.
그런데 어느 날, 천마들이 이곳에서 암브로사이를 먹고 있을 동안, 그러니까
태양을 대신해서 밤이 하늘을 지배하고 있을 동안 태양신은 살며시 이 목장을
빠져나와 사랑하던 레우코토에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어. 본모습으로 갔던 것은
아니야. 그랬다가는 금방 들통이 나게? 그래서 레우코토에의 어머니 에우뤼노메
로 둔갑해서 들어간 거야.
마침 레우코토에는 염두 하녀와 함께 물레로 실을 잣고 있었어. 들어가자마자
태양신은 레우코토에의 뺨에다 입을 맞추었어.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그런 입
맞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지.
<내 너에게 은밀하게 할 말이 있다. 그러니, 애들아,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거
라. 어미에게는 딸에게 은밀한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너희가 이 권리
를 빼앗지 말아라.>
이 말을 듣고 하녀들이 물러가자 태양신은 레우코토에에게 말했어.
<사실은, 나는 태양신이다. 긴 세월의 흐름을 재는 태양신, 삼라만상을 내려다
보는 태양신이다. 대지 위에 사는 것들은 모두 내 빛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느니
라. 나는 우주의 눈이니 내 말을 믿어라. 나는 너에게 반하고 말았구나.>
소녀는 무서워했어. 손에 들고 있던 물레가락과 실감개를 떨어뜨렸을 만큼, 태
양신에게는, 겁을 먹은 그 처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을 테지. 태양신은 지체없
이 본모습을 드러내었어. 얼마나 눈부셨을까? 처녀 레우코토에는, 이 뜻밖에 나
타난 태양신의 모습에 몹시 놀랐지만 그 본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 딴소리 없이
태양신의 품에 안겼지.
이즈음 태양신을 짝사랑하고 있던 클뤼티에가 이 사실을 알았어. 자기의 사랑
은 본 척도 않고 다른 처녀를 사랑하는 이 태양신이 이 클뤼티에에게는 얼마나
원망스럽게 보였을까? 클뤼티에에게는 태양신뿐만 아니라 이 레우코토에까지도
원망스럽게 보였어. 그래서 클뤼티에는 레우코토에가 태양신에게 순결을 잃었다
는 소문을 퍼뜨렸지. 이 소문은 오래지 않아 레우코토에의 아버지 오르카모스의
귀에 까지 들어갔어. 오르카모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수밖에. 그는
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어. 레우코토에는 아버지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태양을 향해 팔을 벌리고 이렇게 외쳤대.
<그분이 강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원해서 그리 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말을 믿지 않고, 구덩이를 파게 하고는 딸을 이 구덩이
안에 넣은 다음 그 위에다 모래 언덕을 하나 만들어버렸어. 휘페라온의 아들은
빛줄기로 이 모래를 흩어버리고, 사랑하는 레우코토에가 머리를 들고 태양신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려고 했어. 하지만, 인간에 불과한 레우코토에가
그 무거운 모래 언덕에 깔려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겠어? 죽었던 거야. 전해지
기로는, 아들 파에톤을 잃은 이래로, 천마 모는 이 태양신이 가장 슬퍼한 것은
이때였대. 태양신은, 식어버린 이 레우코토에의 몸에다 빛줄기로 다시 온기를 불
어넣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대. 하지만 레우코토에의 팔자 마련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태양신이라고 별수 있겠어? 태양신은 할 수 없이 레우코토에의 몸에,
그리고 그 주위에다 넥타르를 뿌린뒤 목놓아 울고는 이렇게 다짐했다는군.
<어떻게든 네가 하늘을 보게 하고야 말겠다.>
그러자 신주에 젖은 레우코토에의 몸이 스르르 녹으면서 주위로 향기가 퍼져
나갔다지. 이윽고 그 흙에 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면서 모래 언덕 위로 가
지를 뻗는데...... 이 나무가 바로 유향목이야.
그러면 클뤼티에는 어찌 되었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했고, 질투했기 때문
에 그런 소문을 내어 레오코토에를 죽게 했다.... 그러니 용서받아 마땅하다.....
이렇거들 생각하니? 하지만 아니야. 태양의 지배자는 두 번 다시 이 클뤼티에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어. 사랑은 그것으로 끝났던 것이지. 그날부터 클뤼티에는
동무 요정들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고, 밤이고 낮이고 혼자 맨땅에 앉아 하
늘만 올려다보았대. 너울도 안 쓰고, 머리카락은 산발한 채로 말이야. 아흐레 동
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어. 아니야, 마시기는 했지. 이슬과 눈물을 마셨을 테니
까.
클뤼티에는 죽었으면 죽었지 땅바닥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했대. 앉은 채
로 하늘을 지나는 태양신을 눈으로 쫓았다는 거야. 그러다 사지는 대지에 뿌리
로 박혔고 살갗에서는 파리한 잎이 돋아났대. 꽃이 되어버린 거야. 발그레한 살
빛이 조금 남아 있는 얼굴에서는 제비꽃 비슷한 꽃이 피어올랐어. 대지에 뿌리
를 박고 있는데도 이 꽃송이만은 태양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돌려. 클뤼티에
의 모습은 바뀌었어도 사랑만은 변하지 않았던 거야.
5.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맏이 레우코노에의 이야기가 끝났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들의 권능에 관한 이
야기가 이 처녀들에게는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 자
매 중 하나는,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
느냐고 했다. 나머지 둘은 이 말을 받아, 신들에게는 능하지 못한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쿠스 신만은 여전히 이 세 자매에게 만
장일치로 괄시를 당했다.
이 세 자매는 한동안 잠자코 일했다. 그러다 이미 이야기를 마친 자매가 막내
에게도 이야기를 하라고 졸랐다. 막내는 베틀에 걸린 날실 사이로 북을 넣으면
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다 산 양치기 다프니스의 사랑이야기같이 시시한 이야기는 안할 테야. 요
정이 다프니스의 애인을 질투해서 이 양치기를 돌로 만들어버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랑에 빠진 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도 있
나? 자연의 섭리가 시톤을 양성인으로 만들어, 하루는 남자 행세, 또 하루는 여
자 행세를 하게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시시해. 한때는 아기 요비스의 보모 노릇
하다가 쇳덩어리가 된 켈미스 이야기, 소나기에서 생겨난 크레테스 이야기, 꽃과
나무가 된 크로쿠스와 스밀락스 이야기도 따분해. 오늘은 아주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로 언니들을 즐겁게 해줄까? 물의 요정 살마카스가 어쩌다 세상 사람들
입에 고약하게 오르내리게 되었느냐, 이 샘물에 닿으면 왜 그 사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몸이 흐물흐물해지느냐, 그 내력을 가르쳐주지. 이 샘물에 이런 이
상한 힘이 있다는 건 다 알지만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
메르쿠리우스와 베누스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건 언니들도 알지? 이 아들은
이다 산 동굴에서 나이아스들 손에서 자라났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반반씩 닮아
서 인물이 아주 좋은 소년으로 자라났대. 이름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그
대로 물려받았어. 이름이 헤르마프로디토스였으니까.
이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나이가 열다섯이 되자, 자기를 키워준 정든 이다 산을
떠나 세상 구경, 낯선 산수 구경 하러 나그네 길에 올랐어. 말이 그렇지 나그네
노릇이 좀 어려워?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었대.
그만큼 세상 구경에 미쳐 있었으니까.
꽤 멀리까지 갔던 모양이야. 뤼키아 아니면 뤼키아에서 가까운 카리아까지 갔
었다니까.. 여기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수를 하나 발견했어. 이 호수에는 갈대도 없었고, 열매 맺는 물
풀, 잎사귀 끝이 뾰족한 골풀도 없었어. 둑에만 싱싱한 잔디, 늘푸른 풀이 자라
있었을 뿐..... 물은 수정같이 맑았어.
이 호수에는 요정이 살고 있었대. 사냥도 할 줄 모르고, 활도 쏠 줄 모르고,
달음박질에도 재주가 없는 요정이. 저 발 빠른 디아나가 누군지 모르던 요정은
이 요정뿐이었다는군, 이름이 살마키스인 이 요정에게 다른 요정들은 이랬대.
<살마키스, 너도 창이나 알락달락한 화살통 들고 나와서 뜀박질 겨루기에 참
가해, 운동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 죽이기에도 좋은 놀이야.>
하지만 살마키스는 창도 안 잡았고, 화살통도 안 들었고, 뜀박질 겨루기에도
참가하지 않았어. 그런 짓으로 시간 보내는 게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지. 살마
키스는 틈만 나면 퀴토로스로 만든 빗으로 머리를 빗고 수면을 내려다보면서 머
리 모양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바꿔보고, 이러면서 지내는 걸 좋아했어.
그러다 재미없으면 알몸이 비치는 옷을 입은 채로 부드러운 풀밭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꽃도 꺾었어. 꽃을 꺾다가 이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본
거야. 살마키스는 이 소년을 보는 순간 견디기 어려운 욕정을 느꼈대. 껴안고 싶
다는 욕망 같은 것을. 살마키스는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가라앉
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가슴 울렁거리는 것 좀 가라앉히고, 표정도 예쁘게
짓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거지. 이런 준비
가 끝나자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어.
<여보세요, 혹시 신이 아니신지 모르겠네요. 신이시면 쿠피도 신이실 테죠?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당신의 부모형제들은 복받은 분들입니다. 누이들이 있
다면 그분들도 큰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당신에게 젖을 빨린 유모가 있다면 그
분도 그랬을 거고요. 그러나 이들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복을 받은 분은 당신
과 결혼을 약속한 처녀, 당신이 장차 아내 삼기로 마음먹은 처녀일 거예요. 물론
그런 처녀가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 처녀가 있으면, 그 처녀 몰래 가만히라도
좋으니 나를 좀 만나 사랑해 주세요. 없으면 나를 애인 삼아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을 테지요. 애인이 없으면, 바라건대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와 혼인해
주세요.>
요정이 이렇게 말하자 소년의 얼굴은 아주 새빨개졌어. 왜? 사랑이라는 게 뭔
지도 모르는 소년이었거든. 새빨개진 소년의 뺨은, 해 잘 드는 과수원 나무에 매
달린 잘 익은 사과 색깔, 아니면 빨간 물감을 칠한 상아 색깔, 일식 때의 달 색
깔 같았어. 우리가 놋쇠 바라를 울리며 악마를 쫓는데도 불구하고 새빨개지는
달의 얼굴, 언니들도 알지? 살마키스는 뺨에 입이라도 맞추어주려고 누나처럼
다가가 소년의 목을 껴안았어.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이렇게 외쳤고.
<놓지 않으면 뿌리치고 말겠어요!>
뜻밖의 반응에 놀란 살마키스는 이렇게 말했어.
<그럼 내가 가겠어요. 당신을 방해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요.>
살마키스는 돌아서서 가는 척했지. 그러면서 힐끔힐끔 뒤를 돌아 다보다가 관
목숲으로 들어가서는 소년을 엿보았어. 소년은 풀밭 위를 좀 거닐다가 물에다
발끝을 넣어보았어.
조금 뒤에는 발목이 잠길 만큼 넣었고......,
물이 어찌나 시원했던지, 소년은 물에 들어가기로 작정했어. 보는 눈이 없겠거
니 여기고. 그래서 옷을 벗었어. 그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을 테지? 그걸 엿보
고 있는 살마키스의 기분이 어땠을까? 살마키스의 눈은, 거울이 비치는 포에부
스 같이 이글거렸대. 살마키스는 견딜 수가 없었어. 바라고 바라던 사랑의 순간
을 더 이상 유예시킬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도 살마키스는 참았어. 흐트러지는
마음을 가누려고 무진 애를 썼어.
헤르마프로디토스 소년은 손바닥으로 알몸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물 속으로 뛰
어들었어. 그랬다가는 한참 뒤 물에서 나왔어. 물에 젖은 몸은 반짝거렸어. 투
명한 병 속에 넣어둔 상아상 아니면 백합같이.
소년은 곧 다시 물로 들어갔어.
<이제 됐다. 저 소년은 이제 내 것이다.>
요정은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옷을 벗고 소년을 따라 호수 한가운데로 뛰어들
어갔어. 소년은 기겁을 하고 이 요정의 접근을 막으려고 막으려고 하지 않았겠
어? 하지만 요정은 소년을 붙잡고, 앙탈을 부리는 소년에게 입을 맞추었지. 손
으로 소년의 가슴과 등을 쓰다듬으면서 몸에 달라붙었어. 이쪽으로 피하면 저쪽
에서 달라붙고 저쪽으로 피하면 이쪽에서 달라붙고.....,
소년은 한사코 이 요정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했어. 그러나 요정의 집요한 공격
을 피할 수는 없어서 이 둘은 결국 한덩어리가 되고 말았어. 새들의 왕 부리에
물려 공중으로 올라간 뱀을 생각해 봐. 독수리부리에 물린 뱀은 온몸으로 독수
리의 머리와 발톱을 감고, 꼬리로는 독수리의 날갯짓을 방해하려고 하겠지? 소
년은 독수리, 요정은 뱀 같았어. 아니, 요정은 나무 둥치를 감고 올라가는 담쟁
이덩굴, 깊은 바다에서 열 개의 다리로 먹이를 사방에서 죄는 문어 같았어. 아틀
라스의 외손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면서, 요정이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랑의 쾌락을 거절했어. 하지만 요정은 온몸으로 부딪쳐오면서, 달라붙으면서
이렇게 외쳤대.
<이런 아둔패기, 몸부림칠 테면 쳐봐. 내게서 빠져나갈 수는 없을걸. 오, 신들
이시여, 이대로 있게 하소서, 이 소년이 영원히 저에게서, 제가 이 소년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신들은 요정의 기도를 듣고 이를 이루어지게 해주려고 했던 모양이야. 잠시
붙어 있던 이 둘의 육체를 하나 되게 했으니까. 그래, 신들은 이 두 개의 육체를
하나로 만든 거야. 두 개의 가지가 맞붙어 자라다 거의 한덩어리로 굵어진 게
정원사의 눈에 띄는 경우가 몸종 있지? 한덩어리가 된 소년과 요정의 몸이 꼭
이런 가지 같았어. 하지만 이들의 몸은 곧 붙은 자국도 보이지 않는, 진짜 하나
가 되었어. 남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나의 육체, 남
성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여성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양성을
두루 갖춘 하나의 육체가 되었던 거야.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어. 그러고는, 물에 들어올 때
는 남성이었던 자신의 육체가 반남성, 반여성의 육체로 변해 있는 걸 알았어. 몸
이 얼마나 연약해졌는지 불면 날고 쥐면 껴질 것 같았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팔을 벌리고 기도했어. 물론,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남성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
니었을 테지.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두 분의 명자를 받은 이 아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
루어지게 하소서. 이 호수에 뛰어든 자는 반남반녀로 나오게 하시고, 이 호수의
물에 닿는 자는 그 힘과 살을 잃게 하소서.>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부모는 이 기도를 듣고, 반남반녀, 어지자지가 된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었어. 그래서 이 호수에다 이렇게 엄청난 마력을 내렸다는 거야.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미뉘아스의 딸들은 박쿠스 신을 험담하고, 박쿠스
축제를 비아냥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문득 세 자매의 귀에 북소리,
피리소리, 바라소리가 들려왔다. 몰약 냄새, 사프란 냄새도 코를 찔렀다. 이상하
게도 베틀이 초록색으로 변하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베의 일부는
포도덩굴로 변했다. 실은 덩굴손으로 변했다. 날실에서도 포도나무 잎이 돋았다.
이들이 짜던 벽걸이는, 이미 같은 색깔의 탐스러운 포도나무로 변해 있었다.
해거름, 밝다고도 할 수 없고 어둡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각, 사위가 훤한데도
밤이 이미 와 있는 시각이었다. 갑자기 집이 한차례 기우뚱하면서 등잔불이 밝
아졌다. 송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붉은 불빛이 집 안을 비추었다. 난데없이 사
방에서 야수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자매는 연기가 자옥한 방에 숨
어 이 불빛이 무서워 오돌 오돌 떨었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데 피막 비슷한
게 옆구리에서 돋아났다. 이것은 곧 얇은 날개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어둠 속이라
서 세 자매는 저희 모습이 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 달린 날개는 이
들의 몸을 공중으로 솟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날개는, 여느 새
들의 날개처럼, 깃털이 있는 날개는 아니었다. 이들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 역시 몸만큼이나 괴상하게 변해 있었다. 이들은 그 목소리로, 생쥐가 찍
찍거리는 듯한 소리로 저희들 신세를 한탄했다.
이들은 숲에 살기보다는 집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빛이 싫은지 밤에
만 날아다녔다. 이들의 이름도 <황혼>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6 발광한 아타마스와 이노. 티시포네
막쿠스의 신성에 관한 소문은 온 테바이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박쿠스의
이모인 이노는 가는 곳마다 이 새로운 신이 드러내 보이는 무한한 권능의 소식
을 전했다. 네 자매 가운데 이 이노만은 슬픈 일을 당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
었다. 자매들의 운명이 이 이노에게 그 이유로 나누어진다면 모르지만......,
유노 여신은, 아타마스 왕과 혼인하여 여러 아들을 낳고, 신자의 유모 노릇까
지 했던 이 자랑스러운 여인를 내려다보았다. 신들이 사는 천궁의 왕비인 자신
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듯한 복을 고루 누리는 이 여인을 내려다보며 유노 여신
은 가만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지아비의 시앗이 낳은 아들은 뤼디아 뱃놈들을 돌고래로 만들어 바다에
처넣었고, 어미로 하여금 제 자식을 찢어죽이게 하였으며, 미뉘아스의 세 딸을
듣도 보도 못한 새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도 나 유노는, 이 시앗의 자식을 치지
도 못하고 제 못난 것이나 한탄하고 있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노릇인가.
내가 이래도 되는 것이냐? 내 권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러나..... 저 박쿠스는 내게, 어디에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것
같구나. 암, 비록 적이지만 이를 못 본 척하는 것은, 한 수를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펜테우스의 비극을 통하여 박쿠스는 분명히 내게 한 수를 가르치고 있
다. 광기를 이용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임을. 그래, 이노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이
계집을 발광하게 하자. 그러면 이 계집도 제 자매들처럼 자멸하고 말 게다」
유독한 주목 숲에 묻힌, 내리막길이 있다. 바로 저승으로 통하는 길이다. 사위
는 적막에 잠겨 있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스튁스강이 느릿느릿 흐르고 강 옆으
로 난 이 길로 갓 죽은 망령들, 갓 묘지에 묻힌 인간의 그림자들이 내려간다. 이
적막한 곳은 어둡기가 그지없고 음습하기가 짝이 없다. 망령들은, 갓 죽은 망령
들은 이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길이 스튁스의 성읍으로 통한다
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 저 어둡고 음습한 디스의 저승궁에 닿는지를
알지 못한다. 저승궁으로 통하는 길은 수천 갈래에 이른다. 이 저승궁 사방팔방
에 있는 문이라는 문은 모조리 열려 있다. 바다가, 세상의 강이라는 강은 모조리
받아들이듯이 이 저승궁도 망령이라는 망령은 모조리 받아들인다. 아무리 많은
망령이 들어가도 이 저승궁이 붐비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새 망령이 들
어온다고 해서 저승궁이 달라지는 법도 없다. 저승궁에서는 살도 없고 뼈도 없
는 허깨비 같은 망령들이 어슬렁거린다. 저잣거리로 나오는 망령도 있고, 저승궁
을 도는 망령도 있다. 저 세상에서 익힌 솜씨로 장사하는 망령도 있다. 저 세상
에서 지은 죄값을 셈하는 망령도 있다.
사투르누스의 딸 유노는 천궁을 나와 이 저승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
아비 유피테르의 시앗 세멜레와 그 일족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그만큼 깊었던
것이다. 유노 여신이 저승궁에 들자 이 여신의 엄청난 무게로 저승궁 문턱이 다
삐걱거렸다. 이 궁을 지키는 번견 케르베로스가 대가리를 들고 짖었다. 이 개가
짖자 한꺼번에 세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가 났다. 유노 여신은 <밤>의 딸들인,
무시무시한 세 자매 여신을 찾아갔다. 이 세 자매 여신은 지옥의 강철문 앞에
앉아 올올이 배암인 머리카락을 빗고 있었다. 이들은 그 어둠 속에서도 이 신들
의 왕비를 알아보고, 그 명예를 대접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곳이 바로
<겁벌의 집>이다. 여기에는 자그마치 9유겔룸이나 되는 땅이 꽉 차게 드러누운
채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티튀오스가 있다. 탄탈로스도 여기에 있다. 탄탈
로스는 물이 가까이 있으나 이 물이 자꾸만 도망치는 바람에 영원히 물을 마실
수 없고, 과일나무 가지가 머리 위에 있으나 손을 내밀면 과일이 도망치는 바람
에 영원히 과일을 먹을 수 없다. 시쉬포스도 여기에 있다. 시쉬포스는 여기에서,
굴려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굴러내려오는 바위와 영원히 씨름하
유노 여신은 이들을, 특히 익시온을 표독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시
쉬포스에 이르자 유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형 되는 오만한 아타마스는 제 계집 끼고 나를 우습게 여기거나 말거나 호화
궁전에서 떵떵거리면서 사는데 아우 되는 이 자는 왜 여기에서 이런 벌을 받고
있다지?」
유노 여신은 푸리아에 세 자매에게 자기가 화가 나 있는 까닭, 자기가 저승으
로 내려온 까닭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유노 여신은 이 푸리아에를 이용해
서 아타마스를 쳐서 카드모스 왕가를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 참이었다. 유노 여
신은 보상을 약속하거나, 지위를 이용해서 협박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들에게 자기를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유노 여신이 이렇듯이 간곡하게
조르자 티시포네가 올올이 배암인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대
답했다.
「길고 복잡하게 설명하실 것이 없습니다. 무슨 분부를 하시든 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제 그만 이 지겨운 곳을 떠나시어 지내기 좋으신 천궁으로 오르소서」
유노 여신은 좋아라 하고 천성으로 올라왔다. 유노가 천궁에 들기 직전에 타
우마스의 딸 이리스가 이 천왕비의 몸을 깨끗이 닦고 향을 뿌려주었다.
인정 사정을 모르는 티시포네는, 피가 뚝뚝 듣는 횃불을 들고, 횃불에서 떨어
진 피에 진홍빛으로 물든 옷을 입고는, 배암을 띠삼아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제
집을 나섰다. 티시포네 옆으로 하나같이 무표정한 <슬픔>, <공포>, <불안>, 그
리고 <광기>가 따라붙었다. 티시포네는. 아이올로스의 집 문전, 그러니까 그 아
들 아타마스가 사는 집 문전에 당도했다. 티시포네가 당도하자 문선주가 부르르
떨었고, 너도밤나무 문이 갑자기 낯색을 잃었으며. 태양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
에서 잠시 자리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아타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아타마스와 이
노는 집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무정한 티시포네는 이미 문 앞에서 이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티시포네는, 배암이 여러 마리 감긴 팔을 내밀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티시포네가 고개를 가로젓자 머리카락의 가닥가닥을 이루는 배암들이
놀라 일시에 쉭쉭거렸다. 티시포네의 어깨로 내려오는 배암도 있었고, 젖가슴으
로 파고드는 배암도 있었다. 배암들은 하나같이 피가 뚝뚝 듣는 혀를 낼름거렸
다. 티시포네는 머리에서 배암 두마리를 집어 아타마스 부부를 겨냥하고 던졌다.
ㅎ산 마리는 이노의 젖가슴, 또 한 마리는 아타마스의 가슴 근처로 날아가 유독
한 숨결을 내뿜었다. 왕과 왕비의 몸에 배암에 물린 상처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배암의 독니에 물린 것은 그들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었다. 티시포네에게는 저
승궁 문지기인 케르베로스의 침, 레츠나 연못에 사는 마녀 에키드나의 딸인 휘
드라(물뱀, 후일 헤라클레스 손에 죽는다)의 독에다, 환각, 망각, 눈물, 범죄, 광
기, 살의 이런것들을 잘 섞어 만든 고약이 있오ㅆ다. 티시포네는 이 같은 재료를
피에 버무려 청동솥에다 넣어 초록빛 독미나리 대궁이로 저으면서 닳여 이 독약
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이 독에 중독된 아타마스왕과 이노 왕비는 부들부들 떨
었다.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독약이 이들의 가슴속에 깃들인 정신을 휘저어놓은
것이었다. 티시포네는 홰ㅆ불을 머리 위로 빙빙 돌려 불고리 하나를 만들어 유
노 여신의 분부가 시행되엇다는 신호를 보내고는 위대한 디스의 왕국으로 돌아
가 허리에 둘렀던 배암 띠를 풀었다.
이 이올로스의 아들 아타마스는 곧 발광했다. 왕궁에 있으면서도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여봐라! 이 숲에다 사냥 그물을 쳐라! 내 조금 전에 새끼를 두 마리나 거느린
암사자를 보았다”
광기에 사로잡힌 채 아타마스는 자기 아내 뒤를 쫓아다녔다. 아내를 암사자로
본 것이었다. 한동안 뒤를 쫓던 아타마스는 아내의 품에서, 아버지 쪽을 향해 손
을 흔들며 웃고 있는 아들 레아르코스를 빼앗았다. 아타마스는, 방실방실 웃고
있던 이 아기의 발목을 잡고 물매 돌리듯이 몇 차례 돌리다가 발목을 놓아버렸
다. 아기는 석벽에 부딪치면서 머리가 깨어져 죽었다. 이 꼴을 보고 있던 아기
어머니 이노도 발광했다. 아들 잃은 슬픔과, 티시포네의 독약이 이노를 발광하게
한 것이었다. 이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남편에게서 도망쳤다. 이노는 또 한
아기 멜리케르타를 안은 채 박쿠스의 이름을 부르며 도망쳤다. 이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유노가 코웃음쳤다.
“오냐, 네가 기른 아이(박쿠스를 말함)가 잘도 너를 도와주겠다”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다로 깎아지근 듯한 절벽이 있었다. 절벽 밑
에는 파도에 깎인 동굴 하나가 있었다. 비가 와도 안으로 스며들지 않을 만큼
깊은 동굴이었다. 절벽 윗부분을 깎아서 세운 듯한 바위였다. 이 바위에서 내려
다보면 먼 바다가 보였다. 이노는 이 바위 위로 올라가(광기가 이노에게 이 바위
에 오르는 힘을 베풀어준 것이었다) 아기를 안은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노와
아기가 떨어진곳에는 흰 포말의 고리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졌다. 베누스(그 아
프로디테)는 이 죄없는 외손(이노의 어머니 하르모니아는 마르스와 베누스 사이
에서 난 딸이다)을 가엾게 여기시라고 숙부 넙투누스(그 포세이돈. 베누스는 유
피테르의 양녀니까, 유피테르와 형제간인 넵투누스와는 숙질간이 된다)에게 탄원
했다.
“하늘 다음가는 영토를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바다의 신이시여, 기도하는 은혜
를 베푸시니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당신의 눈앞에서 이오니아 바다에 몸을 던진
제 외손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모자를 해신의 동아리에 들게 허락하소서. 저 역
시 바다와는 인연이 없지 않습니다. 저 역시 신들의 섭리에 따라 바다의 포말(그
아프로스)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저의 그리스 이름(아프로디테)이 이를 증언
하고 있지 않습니까?”(베누스의 그리스 이름 아프로디테는 ‘포말에서 태어난
여자’ 라는 뜻이다)
넵투누스는 이 기도를 들어, 이노 모자로부터 필멸의 팔자를 벗기고 대신 신성
을 부여한 뒤 새로운 모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모자에게 각각 레
우노토에, 팔라에몬이라는 이름을 내린것이다.(전자는, 출산과 발육을 돌보는 로
마의 여신 마투타, 후자는 항구의 수호신 포르투누스에 해당된다)
이노를 모시던 시돈 여자들(즉 테바이 여자들)도 이노의 발자국긍ㄹ 따라 그
절벽 위 바위 꼭대기까지 갔다. 발자국ㄱ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이들은 왕비
이노가 세상르 떠난 것으로 생각하고 카드모스 일가의 박복한 팔자를 애통해했
다. 이들은 가슴을 치고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연적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유노
여신의 부당한 처사를 원망했다. 유노는 이들의 비난에 짜증을 내면서 이렇게
별렀다.
“오냐, 내가 얼마나 가혹한지 어디 한번 소문을 내고 다녀보아라”
그러나 유노 여신의 저누는 오히려 이들에게는 득이 되었다. 이노의 팔자를 애
통해하며 가슴을 치던 여자는 팔이 굳어지는 바람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두 팔
을 니밀어 바다를 가리키던 이 여자는 그대로 바위가 되었는데, 지금도 이 바위
는 이 절벽 위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손가락을 머리카락에
다 박고 머리를 쥐어뜯던 여자도 그 모습 그대로 굳어졌다. 아들 모둑가 그 당
시의 모습 그대로 바위가 되어 남아 있다. 어떤 여자는 새가 되어 그 바다 위를
날면서 날개로 수면을 희롱한다.
7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
아게노르의 아들 카드모스는 딸과 어린 손자가 해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죽은 줄로만 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비극으로 인한 슬픔에 기가
꺽이고 인생의 불길한 전조에 두려움을 느낀 이 왕국의 시조는 자기 손으로 세
운 도시를 떠낫다. 이런 재앙이 내린것은 자기 운명 탓이 아니라 오아국의 운명
탓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카드모스와 아내 하르모니아는 조국을 떠나 오랜 방랑
끝에 일뤼리아 땅ㅇ「 이르렀다. 나이를 먹고 슬픔에 찌들어 이제는 꼬부랑 할
아버지 할머니가 다 된 이들은 그 세월좋던 옛시절과 말년에 겪은 불행했던 시
절을 회상하며 세월을 보냈다. 카드모스가 어느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처음 시돈 땅에 이르러 왕뱀을 죽이고 그 씨를 대지에 뿌려 종족을 거
둘 때의 이야기오만, 그 왕뱀이 실은 신성한 뱀이었던 모양이오. 신들이 그래서
우리에게 죄값으로 이런 재앙을 내렷다면 나는 뱀이 될 것이오. 내 몸이 늘어져
뱀이 될 것이오”
이런 말을 하는데 정말 그의 몸이 길게 늘어졌다. 살갗은 딱딱해지면서 시커멓
게 변색했다. 카드모스는 살갗 위로 비늘이 덮이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서
검은 몸 위로 청록색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앞으로 엎어져 바닥에 가
슴을 대자 두 다리는 하나가 되었다가 뒤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면서 끝이 뾰족
한 꼬리가 되었다. 두팔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이 손을 맞잡고, 그는 아직
도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뺨 위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리 와요, 내 아내 하르모니아여, 내개서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이리
와서 내 손을 잡아주오. 배암으로 둔갑하기까지는 아직은 내 손인 이 손을 잡아
주오”
그는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혀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말을 하려고 하
는데도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팔자를 한탄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쉭
쉭 소리만 새어나왔다. 자연의 섭리가 베푼 그의 목소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내 하르모니아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카드모스, 기다리세ㅛ. 가엾은 카드모스, 어서 이 무서운 형상을 벗어버리세
요. 오, 카드모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요? 당신의 발, 손, 어깨, 당신의 그 곱
던 살빛, 당신 모습은 어디로 갔지요? 아...... 당신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있군요.
신들이시여, 이 몸도 이분처럼 뱀이 되게 하소서”
남편 카드모스가 아내의 뺨을 핥으며, 그리워하던 보금자리를 찾아드는 듯이
아내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몸으로 아내의 목을 감았다. 좌중(이 부부의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다)이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아내만은 이 배암의 목을 쓰다듬고 있었
다. 얼마 뒤, 서로의 몸을 감은 두 마리 배암이 바닥을 기어 이웃해 있는 숲 속
으로 들어갔다. 오늘날까지도 이 배앞은 인간과는 사이가 좋은 배암으로 불린다.
이들은 인간간을 해치지 않는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영웅 페르세우스와 아틀라스
배암이 된 카드모스와 하르모니아는 인간의 형상을 잃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힌두스를 정복하고 그곳에서 신으로 섬김을 받은 외손(박쿠스)이 있어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의 외손이 힌두스에서 신으로 섬김을 받
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카이아(그리스 땅)에서는 그렇지 않았느냐 하면, 그
런것도 아니엇다. 이 박쿠스를 신으로 알기는 아카이아 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렇다. 많은 아카이아 인들은 박쿠스 신전을 세우고 이 신전으로 무리지어 들어
가 이 신의 제단에 향을 피웠다.
그런데 이 신을 가엾게 보는 자가 하나 있었다. 아바스의 아들이자 박쿠스와는
핏줄이 닿는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가 바로 이 사람이다. 아크리시오스는 이
박쿠스를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부하들에게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군사를 풀어 박쿠스의 입성을 저지했다.
아크리시오스는 박쿠스만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는,
유피테르가 황금 소나기로 둔갑하여 자신의 딸 다나에를 범하고 페르세우스를
지어 낳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페르세우스를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인하지 않
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아크리시오스는, 박구스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
손을 외손으로 용인하지 않았던 것을 크게 통한하게 된다. 진실의 힘이라는 것
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 아니던가.
아크리시오스로부터 유피테르의 아들로 용이나받지 못하는 유피테르의 두 아들
중 하나인 박쿠스가 천궁으로 올라가 신으로 노릇할 즈음, 다른 하나 즉 페르세
우스는 다른 하나 즉 페르세우스는 돌개 바람에 실려 하늘을 날아 고향으로 돌
아오고 있었다. 그는 고르곤의 머리(정확하게 말하면 고르곤 세 자매 중의 하나
인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 돌아오고 있었다. 이고르곤의 머리는, 머리카락 올올
이 모두 뱀으로 되어 있는 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그가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이
영웅이 리뷔아 사막 위를 지날 때 이 머리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이 피를 받
아 대지는, 다른 뱀과는 전혀 다른 뱀, 말하자면 독사를 지어내었다. 이 사막에
독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페르세우스는 종작없이 부는
바람 때문에 온 하늘을 다 누비고 다녔다. 비구름처럼 이 하늘 저 하늘로 날려
다닌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는 하늘에서 온 새상을 두루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어붙은 북쪽 하늘의 큰곰자리를 본 것만도 세차례요, 먼 남쪽 하늘에 있는 게
자리의 집게발을 본것도 세 차례나 되었다.
세상의 동쪽 끝까지 날려간 적도 있었다.
해질녁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길을 잃을까 염려스러웠던 페르세우스는 서
쪽 끝에 있는 아틀라스의 왕국 베스페르(금성, 그 헤스페로스) 땅에 내렸다. 루
키페르(새벽별)가 아우로라(새벽)의 여명을 부르고 아우로라가 태양 수레를 불러
낼 때까지 그곳에 모붙여 쉬기 위해서였다. 이아페토스의 아들인 아틀라스는 여
느 인간에 비해 그 크기가 엄청났다. 이 거인 이틀라스는 세계의 서쪽 끝에 있
는 나라의 지배자였다. 하루 종일 하늘을 달린 태양 수레와 이 수레를 끈 천마
들을 받아들이는 바다가 바로 이 아틀라스 나라의 바다였다. 아틀라스의 나라
근방에는, 이 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왕국이 없었다. 이 나라의 목장에는 수천마
리의 양과 소가 있었다. 아틀라스 왕에게 잎과 가지와 열매가 온통 황금으로 되
어 있는 황금 사과나무가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이곳에서, 새벽별이 새벽의 여신
을 깨우고 새벽의 여신이 태양 수레를 끌어낼 때까지만 쉬어가게 해달라고 아틀
라스 왕에게 청을 넣었다.
“아틀라스 왕이시여, 혹 문벌을 보아 손님을 응대하신다면 말씀드립니다만, 나
는 유피테르 신의 아들입니다. 혹 영웅적인 공적으로 손을 대접하신다면 말씀드
립니다만, 아마 왕께서 내가 이룬 공적을 아시면 적지 않게 놀라실 것입니다. 어
떻습니까? 내게 호의를 베푸시어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아트라스는 파츠나소스 산정에서 테미스(이치)여신이 내비치던 예언을
잊지 않고 있었다. 테미스 연신은, “아틀라스여, 네 황금 사과를 도둑맞을 날이
올 것이다. 유피테르의 아들이 네 사과를 손에 넣을 것이다. 이렇게 예언했던 것
이었다.
아틀라스는 테미스의 예언대로 황금 사과를 도둑맞을 날이 올까봐, 과수원 둘
레에다 높은 담을 쌓고, 거대한 뱀에게 이 나무를 지키게 하는 한편 제 땅에 오
는 길손에게 사과나무 근처에도 못 가게 해오던 참이었다. 아틀라스는 다른 나
그네에게 한던 말을 페르츠세우스에게도 그대로 했다.
“가보시게, 영웅 어쩌고 하는 자네의 허장성세가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아, 여
기에서는 유피테르의 아들 아니라 유피테르라고 해도 마찬가질세”
페르세우스는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틸 거조를 차렸다. 아틀라스는, 말
이 먹혀들지 않자 힘으로 페르세우스를 쫓아내려 했다. 페르세우스는 한편으로
는 이 아틀라스의 폭력에 맞서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거인의 거친 성정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국 말로 해서도 안 되겠고 힘으로 해서는 더
욱 어림없겠다(하기야 누가 감히 아틀라스와 힘을 겨루겠는가)고 생각한 영웅
페르세우스는
“나를 이렇게밖에는 알아주지 않으니 선물이나 하나 드리고 가겠소”
이렇게 외치면서 고개를 돌리고, 왼손으로 저 무서운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어
들었다. 아틀라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보는 순간부터 저 자신의 체구만큼이나 큰
바위산으로 변해갔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나무가 되었고, 어깨는 능선이 되었으
며 머리는 산꼭대기가 되었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산이 된
그의 몸은 사방으로 뻗어나기 시작하여(다 신들의 뜻이었다) 수많은 별이 박힌
하늘이 그 어깨위에 얹힐 때까지 자라났다.(아틀라스가 어깨로 하늘 축을 떠받치
고 있는 것은, 유피테르로부터 구렇게 하고 있으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전설도 있다. 즉 유피테르가 자기에게 저항한 아틀라스를 밉게 보고 그런벌을
내렸다고 것이다)
9 안드로메다와 바다의 괴물
히포테스의 아들(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를 말한다)이 바람이라는 바람은 다 그
동굴 감옥에다 가둘 즈음, 루키페르가 하늘 높이 떠올라 산 것들에게 하루의 시
작을 알릴 즈음이었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다시 날개 달린 가죽신(메르쿠리우스
로부터 빌린 것이다)을 꺼내어 두발에 신고 낫 모양으로 휘어진 칼을 꺼내어 차
고는 맑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땅 위로 날다
가 아이티오피아(이디오피아)인들이 사는 케페우스 왕국의 상공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서는 비정한 암몬 신(유피테르와 같은 신으로 여겨지는 이집트 땅의 신)
의 뜻으로 공주 안드로메다가 지나치게 아름다움을 뽐낸 왕비의 죄값을 대신 물
고 있었다.(이 공주 안드로메다의 어머니는 자기 아름다움울 뽐내면서 해신 넵투
누스의 딸들보다 자기가 더 아름답다는 말을 했다. 이에 화가 난 넵투누스는 케
투스라는 괴물을 보내어 이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신관들이 암몬 신의 뜻
을 풀어보니, 그 어미니의 딸을 이 케투스에게 바쳐야 넙투누스의 노여움이 가
라앉겠다는 괘가 나왓다. 그래서 공주는 지금 희생 제물로 바위 묶여 괴물이 나
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이 나라 위를 날면서 두 팔이 바위에 묶여 있는 이 나라의 공주
를 보았다. 미풍에 공주의 머리카락이 나부끼지 않았더라면, 공주의 눈에서 눈물
이 흐르고 있지 않았더라면 페르세우스는 이 공주를 대리석상쯤으로 보았을 터
였다.
페르세우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공주에게 반하고 말았다. 공주의 미모
에 정신이 팔려 날갯짓하는 것을 잊었다가 공중에 그대로 한참을 머물러 있었을
정도였다. 그는 공중에서 처녀에게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그런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할 그대에
게 쇠사슬은 당치 않습니다. 바라건대 그대의 이름과, 이 나라의 이름과, 그대가
사슬에 묶여 있게 된 연유를 내게 일러주세요”
로 돌진해 왔다.
슬픔에 젖은, 처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까운 해변에 있었다. 처녀의 부모는
울부짖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크게 울부짖었다. 이들에게는 울부짓
고 있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녀의 부모는 서
로를 부둥켜안고 슬피 울었다.
페르세우스가 이들에게 말했다.
“눈물은 나중에 흘려도 얼마든지 흘릴 수 있습니다. 지금 급한 것은 따님을
구하는 일입니다. 나는 유피테르와 다나에의 아들, 유피테르께서 황금 소나기로
둔갑하시어 탑 속에 갇힌 내 어머니께 끼치신 페르세우스올습니다. 사발의 요녀
고르곤을 정복한 페르세우스, 날갯짓으로 하늘을 날아온 페르세우스가 바로 여
기에 있는 페르세우스입니다. 두 분께서 딸을 구하려고 하신다면, 두 분의 사위
되기를 바라는 후보자들 중에서 그럴 만한 사람을 내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
나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두 분께서는 저를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신들이 제
편이 되어준다면, 저는 여기에 한 가지 요구를 보태겠습니다. 제가 딸을 구한다
면 딸을 저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처녀의 부모는 그러마고 했다. 하기야 그 대목에서 망설일 부모가 어디 있으
랴! 처녀의 부모는 딸뿐만 아니라 왕국까지 결혼 선물로 주겠노라면서 도움을
빌었다.
그 동안 이 괴물은, 힘좋은 뱃사람이 젖는 노에 밀리어 뾰족한 뱃머리로 파도
를 가르며 돌진해 오는 배처럼, 그 거대한 가슴으로 물결을 헤치면서, 발레리아
스 투석기를 쓰면 돌이 닿을 만한 거리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웅은
땅을 차고 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그림자가 수면에 드리워지자 괴물은
미친 듯이 그 그림자를 공격했다. 페르세우스는 아래로 내리 꽂혔다. 요비스의
새가 하늘에서, 사막에 또아리 틀고 있는 독사를 보고 뒤에서 이를 덮쳐 그 무
지막지한 발톱을 이 독사의 목에다 박고, 독니를 쓰지 못하게 대가리는 뒤로 뒤
집어 거머쥐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페르세우스도 이 괴물의 등을 공
격하여 포효하는 이 괴물의 오른쪽 어깨에다 낫같이 꼬부라진 칼을 박았다. 깊
은 상처를 입자 이 괴물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물 속을 곤두박질하는가 하
면, 사냥개 무리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몸부림치며 포효해왔다.. 그러나 영웅은
날개의 힘을 빌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이 괴물의 이빨을 피했다가 빈틈이 보일
때마다 내려와 괴물의 몸에다 칼을 박았다. 조개 껍질로 덮인 등을 찌르는가 하
면 옆구리, 물고기 꼬리 같은 괴물의 꼬리 할것 없이 닥치는 대로 찔렀
돌 케페우스와 카시오페이아의 기쁨은 형용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페르세우스를 사위로 환대하고 그를 자기 가문의 구주이자 은인이라고 불렀다.
처녀, 즉 이 영웅이 이룬 영웅적인 공훈의 발단이자 그 보상인 처녀는 바위에서
풀려났다. 영웅은 바닷물로 손을 씻기 전에 뱀으로 덮인 메두사의 머리를 잠시
땅에다 놓았다. 모서리 예리한 바닷가 돌맹이에 머리가 상하지 않도록, 해변에다
부드러운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해초를 놓은 다음 이 포르퀴스의 딸의 머리를
살그머니 내려놓았다. 페르세우스가 걷은 그때까지도 살아 있던 이 해초는 이
괴물의 권능을 줄기 안으로 빨아 들였다. 이 해초는 메두사의 머리에 닿는 순
간부터 굳어지기 시작했다. 잎도 줄기도 돌처럼 굳어진 것이다. 바다의 요정들은
이 해초를 걷어다가 이 메두사의 머리에다 대어보고는 같은 일이 일어나자 이를
몹시 재미있어 했다. 요정들은 이 해초의 씨앗을 파도에 실어보내어 이 같은 식
물의 종자를 퍼뜨렸다. 오늘날까지도 산호는 대기에 닿으면 돌이 되는,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물 속에서는 식물인데 수면 위로 나오면 돌이 되
어 버리는 것이다.
10 메두사
페르세우스는 뗏장을 떠서 새 분 신들을 위하여 세 기의 제단을 쌓았다. 왼쪽
에는 페르쿠리우스, 오른쪽에는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 그리고 중앙에는 유피테
르를 위한 제단이었다. 페르세우스는, 미네르바에게는 암소, 날개 달린 가죽신의
임자에게는 송아지, 신들의 왕인 유피테르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는 자기 공훈에 대한 보상으로 안드로메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는 지참금없
이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 결혼식에서 아모르와 휘메나이오스는 신랑 신부 앞에
서 횟불을 흔들었다. 향이 넉넉하게 불길 속으로 들어갔고,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가 온통 꽃다발이었다. 도처에서 수금소리, 피리소리, 노랫소리가 하객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성문은 활짝 열렸고 황금의 궁전 문은 남김없이 열렸다.
아이티오피아 귀족들은 모두 왕실이 준비한 호화스러운 잔치에 참석했다.
연회가 끝나고 하객이 마음껏 저 박쿠스의 은혜에 취해 있을 즈음 륀케우스의
자손 페르세우스는 이 나라의 문화나 정세, 백성의 기질이나 관습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하객 중 하나가 그 물음에 답하고는 오히려 페르세우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용감무쌍하신 페르세우스님, 머리카락 대신 뱀들이 또아리 틀고 있는 저 괴
물의 머리를 대체 어떻게 자르셨는지, 바라건대 그 이야기를 들여주십시오, 대단
한 용기와 무예를 겸비하신 분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여쭙
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게노르 집안의 자손은 지나온 일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찬바람이 부는 아틀라스 산록에는 견고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한 곳이 있지
요. 이 입구에 포르퀴스의 딸 자매가 눈 하나를 번갈아 쓰면서 삽니다. 눈이 한
개밖에 없어서 이 한 개를 돌려가면서 쓰는 것이지요. 나는 이 중 하나가 눈을
세 자매에게 건네줄 때를 노렸다가 이 눈을 빼앗아버렸습니다. 나는 그 위, 인적
도 없고 길도 없는 바위산을 지나고 황량한 숲을 지난 연후에야 고르곤 세 자매
가 사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주위에는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석화해 버린 인간
이나 짐승의 석상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나는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았
습니다. 가지고 간 청동 방패에다 비추어 보았으니까요. 나는, 메두사와, 메두사
의 머리 위에 또아리 튼 뱀이 깊이 자든 틈을 타서 칼로 목을 따버렸던 거이지
요.”
이어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가 흘린 피에서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와 이
페사소스의 아우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마저 했다.
그는 또 그 이후의 긴 여로에서 실제로 자신이 맞닥뜨렸던 위험, 총공에서 내
려다본 바다와 딸 이야기, 날개 달린 가죽선 덕분에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었
던 별 이야기도 했다. 페르세우스가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자 귀족 중 하나가, 다
른 자매들의 머리는 여느 머리와 같은데 어째서 메두사의 머리만 뱀으로 덮여
있느냐고 물었다. 페르세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재미있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 설명해 드리지요. 메두사는 한때 아름
답기로 소문난 처녀였더랍니다. 수많은 구혼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니까요.
다른 부분도 아름다웠지만 그 중에서도 머리카락은 특히 아름다웠던 모양이지
요? 나는, 이 시점에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만난 적이 있
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바다의 지배자가 이 메두사를 미네르바 여신의 신
전으로 데려가 사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합디다. 이 유피테르의 따님으로서는 방
패로 얼굴을 가려야 할 만큼 무안당하셨던 거지요. 그래서 이 죄값을 물어 이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이지요. 요즈음도 여신께서는 당신
께서 만드신 이 뱀을 흉갑에다 달고 다니시면서, 적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신답니다.”
제 5 부
무우사의 탄생 외
1. 피네우스의 반란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사가 아이티오피아 귀족들에게 모험담을 들려주고 있
는 참인데 문득 한 무리 폭도들이 궁전 안으로 들어오면서 고함을 질렀다. 축가
를 불러야 할 잔치 마당에서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잔치 마당은 동풍에 휘말린 바다에 견줄 만했다. 폭도 무리중에서 가장 험한
분위기를 지어내면서 하객들을 위협하고 있는 자는 왕의 아우 피네우스였다.
그는 청동 창날이 달린 외핵 창을 휘두르면 외쳤다.
“보라! 내 약혼자를 훔쳐간 저 도둑을 처단하러 내가 왔다. 떠돌이는 들으라.
이제는 네 날개도, 황금 소나기로 둔갑했다는 유피테르도 내 창으로 부터 너를
지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피네우스가 창을 던지려 하자 국왕 케페우스가 나서서 아우를 꾸짖었다.
“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자는 거이냐? 이따위 당치 않은 짓을 하다니 미친
것이냐? 영웅의 위대한 공훈에 대한 네 감사 표시가 겨우 이것이냐? 내 딸을 구
해준 분에게 네가 드린 선물이 겨우 이것이냐? 안드로메다를 앗아간 것은 네레
우스 딸들의 투기하는 마음, 머리에 양뿔이 달린 암몬 신, 바다에서 솟아나와 내
살을 말리고 피를 말리던 저 바다의 괴물이지 페르세우스가 아니다. 안드로메다
가 내게서 떠나간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다. 네가 무엇을 불평하느냐? 네
가 내 딸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거든 나는 보아서라도 네 섭섭해하는 마음을 자
제하여라. 그 아이의 삼촌이자 약혼자인 네가, 그 아이가 사슬에 묶여 있을 때
멀거니 서서 바라본 것밖에 한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도 너는 남이 그 아이 구
한 것을 투기하여 그의 몫인 공적을 가로채려 하다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보
상이 탐났었다면, 그 아이가 명재경각이었던 그 순간에 저 바위 위에서 구하려
고 했어야 마땅하지 않으냐? 그러니 그 아이를 구하고, 우리 부부로 하여금 자
식 없는 늙은이 신세를 면케 해준 저분에게 양보하도록 하여라. 나는 저분에게,
공훈의 보상을 약속했다. 저분은 너를 우선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
피네우스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왕과 페르세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 쪽으로 창을 던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피네
우스는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던졌다. 과녁은 페르세우스였다. 그러나 하릴없었
다. 창은 페르세우스의 의자 등받이에 꽂혔다. 페르세우스가, 창이 날아오는 순
간 공중으로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불같이 노한 페르세우스가 그 창을 뽑아
피네우스를 향해 던졌다. 제단 뒤로 몸을 숨기지 않았더라면 피네우스는 그 창
끝에 가슴을 꿰뚫렸을 터였다. 피네우스는, 그럴 자격도 없는 인간이면서도 제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셈이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의 창이 그냔 아무데나 꽂힌
것은 아니었다. 그의 창은 로에토스의 이마에 꽂혔으니까.... 로에토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동아리가 그의 이마에서 창을 뽑아내자 그는 음식 한 상이 잘 차려진
식탁에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이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날
뛰기 시작했다. 창이 무수히 날았다. 피네우스를 죽여야 한다는 자들도 있었고,
케페우스와 그의 사위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고, 케페우스아 그의
사위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페케우스는 이
피네우스 동아리 중에 힌두스에서 온 아티스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강의 요
정 중 하나인 림나에의 아들로, 강제스강의 강물 속에서 태어난 자였다. 이 자는
그렇잖아도 미남인데 옷을 어찌나 잘 입는지 이것 때문에 더욱 날나 보이는 무
사였다. 열여섯 살, 꽃 같은 나이인 이 청년 무사는 금으로 치장한 튀로스 산 보
라색 겉옷 차림에, 목에는 금 목걸이, 향수 뿌린 머리에는 황금 머리띠를 두르고
다녔다. 겨냥을 흘리는 법이 없는, 그런 아티스가 페르세우스를 겨누고 창을 던
졌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티스는 이번에는 활을 잡았다. 절세의 명궁
인 그라 부드러운 각궁에 시위를 걸자 페르세우스가 제단 위에서 타고 있던 장
작개비 하나를 집어던졌다. 아티스는 쓰러졌다. 두개골이 부서지면서 얼굴이 두
개골 안으로 함몰된 것이다.
아쉬리아 사람 뤼카바스는 아티스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냥 친한 친구라기
보다는 우정을 눈에 띄게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친구였다. 아티스가 중상
을 입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을 봄 귀카바스는, 자신이 그렇게 경탄하여 마
지않던 친구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이 억울했던지 처음에는 울음을 내어놓
다가 곧 아티스의 활을 잡고는 외쳤다.
“이제 내가 상대하겠다. 내 친구를 죽인 기쁨을 오래는 누리지 못한다. 그를
죽인 일이 너를 영광스럽게 하기보다는 치욕으로 떨게 할 것이니까?
뤼카바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활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갔다. 페르
세우스는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이 화살은 옷자락을 뚫었다. 아크리시오스의 왼
손은, 꼬부라진 칼을 들고 달려가, 메두사의 목을 벤 바 있는 이 칼을 뤼카바스
의 가슴에다 박았다. 뤼카바스는 죽어가면서도 시시각각으로 그늘지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티스 옆으로 기어가, 죽어도 떨이지지 않을 정도로 진한
우정을 황천에 이르기까지 누리려 했다.
이어서 쉬에네 사람인, 메티온의 아들 포르바스롸, 리뷔아 사람 암피메돈이 싸
우고 싶어 안달을 부리다가 이미 피로 물든 바닥에 쓰러졌다. 이들이 다시 몸을
가누려 하자 페르세우스는 암피메돈은 옆구리를 찌르고 포르바스는 울대를 따서
그 자리에다 내굴렸다. 날이 넓은 도끼를 쓰는 악토르의 아들 에뤼토스는 좀 색
다르게 죽었다. 페르세우스는 그 낫 같은 칼로 이 자를 죽이는 대신 부조가 깊
이 새겨진 크고 무거운 술잔을 두 손으로 들어 이 자를 쳐죽인 것이다. 에뤼토
스는 진홍빛 피를 뿜으면서 뒤로 벌렁 나자빠져 죽었다. 이어서 세미라미스의
후손인 폴뤼다이몬, 카우카소스에서 온 아바리스, 강신 스페르케우스의 아들 뤼
케토스, 머리카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헬리케스, 풀레귀아스, 클리토스가 차례
로 죽었다. 페르세우스는 죽은 자들 위를 밟고 다니며 싸웠다.
피네우스는 페르세우스와 가까이서 일 대 일로 싸우려고는 감히 하지 않았다.
피네우스는 멀찍이서 페르세우스를 겨누고 창을 던졌다. 그러나 창은 겨냥을 벗
어나 이다스의 몸에 꽂혔다. 이다스는, 올 때는 피네우스를 따라왔으나 막상 싸
움이 벌어진 것을 보고는 어느 편에 서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변을 당한 것
이었다. 이다스는 죽어가면서도, 이글거니는 눈으로 피네우스를 노려보며 소리쳤
다.
“피네우스, 각오하라. 나는 네 꾐에 빠져 너의 적을 내 적으로 만들었다. 이
제 내가 입은 이 치명적인 부상의 값은 네가 치러라.”
그는 제 몸에서 창을 뽑아 피네우스에게 던지려 하다가 피에 젖은 채로 쓰러
졌다. 이어서 아이티오피아에서는 국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호디테스가 클뤼
메노스의 칼에 쓰러졌다 이어서 휘프세우스가 프로토에노르를 죽였고 페르세우
스는 휘프세우스를 죽였다. 정의를 사랑하고 신들을 두렵게 여길 줄 아는 에마
티온 노인도 이 싸움판에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많아 칼질은 하지 않았으나 폭도
들을 저주하였으니 입으로 싸운 셈이었다. 그러나 크로미스는, 떨리는 손으로 계
단의 난간을 짚고 서 있는 이 노인의 머리를 쳤다. 노인은 불길 속으로 떨어졌
다. 노인은 불길 속에 타 죽어 가면서도 입으로는 폭도를 저주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어서 천하무적의 쌍둥이 권투 선수라고 불리는 브로테아스와 암몬 형제가
나와 페르세우스를 편들었다. 이들은 권투 장갑만 있었으면 칼든 자도 능히 이
겨낼 수 있었을 테지만 이게 없어서 피네우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케레스 여
신의 신관이어서 이마네 흰 띄를 두른 암퓌코스도 피네우스가 지내는 혈제의 제
물이 되었다. 람페티테스도 쓰러졌다. 그는, 그 자리가 싸움판이 될 줄 알았더라
면 초대받지도, 초대에 응하지도 않았을, 말하자면 평화스러운 자리에나 어울릴
음악가였다. 혼인 예식와 피로연의 가수 겸 연주가로 초대받은 그라, 한 손에 수
금체를 든 채, 싸움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한쪽 구석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걸 보고 페탈로스는, “스튁스에 가서 못다 부른 노래를 부르려무나.”
이러면서 왼쪽 관자놀이에 칼끝을 박아버렸던 것이다. 이 음유시인은 쓰러지면
서도 수금 줄을 건드려 수금이 구슬프게 울리게 했다. 사나운 뤼코르마스는 기
어이 이 복수를 했다. 그는 오른쪽 문에서 실한 빗장을 뽑아 페탈로스의 목을
갈겼다. 페탈로스는 제물로 도살되는 송아지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키니프스 강
변 출신인 펠라테스는 왼쪽 문의 빗장을 뽑으려다가 마르마리카 사
도 그러나 페르세우스에게는 한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 까닭인즉, 폭도
들이 죽자고 페르세우스 한 사람만 노리고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페르세우스
의 영웅적인 공훈과 케페우스 왕이 한 약속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폭도들은 사
방에서 페르세우스를 에워싸고 그의 목숨을 노렸다. 이제 페르세우스의 편을 들
어줄 사람은 장인 케페우스와 장모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새색시 안드로메다뿐
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페르세우스를 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울 힘이 없는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등 앉은뱅이 용쓰는 듯한 성원밖에는
보낼 수가 없었다. 병장기 부딪는 소리, 죽어가는 자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낭자
한 가운데 전쟁 여신 벨로나만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이 집의 수호신들에게 피를
뿌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싸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피네우스와 수많은 폭도들은 단신으로 싸우는 페르세우스를 포위했다. 투창과
화살이 겨울 싸락눈같이 흩날리면서 페르세우스의 귀를 스치고 눈을 스쳤다. 페
르세우스는 왕궁의 굵은 기둥을 지고 서서 후방으로부터의 공격을 차단시키고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적과 맞섰다. 카오니아 사람인 몰페우스는 왼쪽에서, 나바
테이아 사람 에테몬은 오른쪽에서 그를 치고 들어왔다. 잔뜩 주린 참에 이쪽저
쪽 골짜기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어느 쪽 소를 먼저 먹을지 몰라
망설이는 호랑이처럼, 페르세우스도 오른쪽 왼쪽 중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해야
할 것인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망설이는 시간은 길지 않
았다. 그는 몰페우스의 허벅지를 먼저 찔렀다. 몰페우스는 절면서 도망쳤지만 페
르세우스에게는 그를 추격할 여유가 없었다. 에테몬이 분기충천, 목을 노리고 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힘이 실린 에테몬의 칼은 기둥에 부딪쳐
두 토막으로 부려졌고 그 부러진 칼끝은 그 힘에 되튀어 칼 임자의 목에 박혔
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에테몬은 일어서서 치를 떨면서 영웅의 공격을 막아보려
고 빈손을 내저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르쿠리우스로부터 빌린 낫 모양
마침내 페르세우스는, 자기 무예가 아무리 절등해도 피네우스 패거리와 싸우기
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페르세우스가 외쳤다.
[너희가 이러니 나도 부득이 나의 옛 적을 새 적에게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에 내 편이 있거든 내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말라!]
그러고는 저 고르곤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들었다.
[그런 엉터리 요술 쓸 곳이라면 딴 데 가서 알아보아라]
테스켈로스가 창을 꼬나잡으며 이렇게 외치다가 그 모습 그대로 석상으로 화했
다. 암픽스는 페르세우스의 가슴에 단도를 던지려다가 그 자세 그대로 돌이 되
었다. 물론 이 석상은 그 단검을 던지지도, 거두어들이지도 못했다. 이름이 비슷
한 것을 빌미로, 하구가 일곱 개인 네일로스 강의 자손을 사칭하던 닐레우스가,
금과 은으로 일곱 가득의 강줄기를 새겨붙인 방패를 내밀면서 소리를 질렀다.
[페르세우스, 내 조상을 좀 보아라. 잘 보고 나같이 문벌이 좋은 영웅 손에 죽는
걸 저승에 이를 때까지 고맙게 여겨라!]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입은 달싹거리는데 말은 튀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 자 역시 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뤽스가 전우들을 격려한답시고 호령했다.
[사지 굳는 것은 너희들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지 저 고르곤 대가리에 신통력
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를 따르라. 나와 함께 저런 가짜 무기를 깨뜨리
는데 우리 청춘을 바치자]
에뤽스는 청춘을 바치러 뛰어나가다 말고 청춘을 제대로 바치지도 못하고 그 자
리에 뿌리박혀 무장한 병사의 석상으로 화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폭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봉변을 당한 사람도 하나 있었
다. 페르세우스를 편들던 아콘테우스가 영웅을 위해 싸우다가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는 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콘테우스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아스튀아게스
가 칼로 그의 목을 치자 쇳소리가 났다. 아스튀아게스는 아연실색, 한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아연실색한 그 모습 그대로 돌이 되었다.
여기에서 돌이 된 폭도들 이름을 다 거론하자면 한이 없다. 요컨대 창칼 싸움에
서 목숨을 부지한 폭도 수는 2백여명이었고, 고르곤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돌이
된 폭도 수도, 따라서 2백여명이었다.
피네우스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크게 잘못 저지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들 무엇하고 후회한들 무엇하랴. 피네우스는 다양한 모양으로 석화한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이
제 그만 눈을 뜨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는 부하들이 돌이 되
었다는 사실이 그래도 믿기지 않았던지 일일이 손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그
들은 이미 돌 중에서도 단단하기로 이름난 대리석이 된지 오래였다. 피네우스는
돌아서서, 싸움에서 진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 두손을 내밀었다. 그러
나 그는 페르세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페르세우스의 손에는 저 무
서운 메두사의 머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는 돌린 채로 피네우스가 애원했
다.
[페르세우스여, 그대가 이겼소. 이제는 그 무서운 무기는 거두시오. 보는 자를 돌
로 만드는 그 무서운 메두사의 머리는 치워주시오. 내가 무기를 든 것은, 그대에
대한 증오나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었소. 나는 오로지 약혼자를 되찾을
욕심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던 것이오. 그대의 공훈은 내 약혼자를 취하기에
넉넉하나 내게는 약혼자와 버릇든 세월이 있소. 이제 이렇듯이 그대에게 항복하
나, 나는 부끄럽지가 않소. 그대 같은 전능한 영웅에게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수 가 없겠소. 영웅이시여! 내 소원은 하나......목숨이오. 나머지는 그대가 다 거
두어도 내게는 할 말이 없소. 피네우스는 이렇듯 청을 넣으면서도 청 받는 사람
쪽은 돌아다보지 못했다.
페르세우스가 대답했다.
[이 겁쟁이 피네우스야. 내가 너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베풀겠다. 너
같이 하잘것없는 것에게는 얼마나 과분한 은혜겠느냐? 이제 칼로써는 아무도 너
를 해코지하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 말아라. 무슨 까닭이냐? 나는 너를 아주 대
리석 기념상으로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내 장인의 궁전 앞에 선 채
만인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어찌 영광스럽지 않으랴. 내 아내는, 한때는 자신
의 약혼자였던 네 모습을, 이제는 일삼아 보게 될 것이다]
이 말 끝에 페르세우스는, 피네우스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쪽에다 포르퀴스의
딸 메두사의 머리를 갖다대었다. 피네우스는 겁을 먹고 또 한차례 고개를 돌리
려다가, 목이 뻣뻣하게 굳고, 눈물이 굳으면서 대리석상으로 화했다. 대리석상이
되었는데도 겁먹은 그 얼굴, 용서를 애걸하는 그 표정만은 여전했다. 말하자면
이 석상은, 손으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얼굴로는 굴종의 순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2. 프로에투스
페르세우스는 신부를 대동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외조부 아크리시오스는 외손
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13) 페르세우스는
이 외조부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즉 아크리시오스의 왕국을 무력으로 빼앗고 그
성채를 차지한 아크리시오스의 쌍둥이 아우 프로에투스를 친 것이다. 프로에투
스의 무력과, 프로에투스가 가로챈 그 튼튼한 성채도 사발의 괴물 메두사가 번
득이는 눈동자 앞에서는 무사하지 못했다.
3. 폴뤼덱테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그만 섬나라 세리포스14)의 왕 폴뤼덱테스는, 수많은 사람
들이 목격한 바 있는 이 영웅의 공훈과 이 영웅이 살았던 고난의 삶을 아는 체
하지 않으려 했다. 폴뤼덱테스는 턱없이 페르세우스를 적대하고 끝없이 페르세
우스를 증오했다. 페르세우스에 대한 폴뤼덱테스의 적대와 증오에는 까닭이 엇
고 가량도 없었다.15) 심지어 이 왕은 페르세우스의 영광을 모독하고, 메두사 목
을 자른 그의 공훈을 부정하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페르세우스는 어느 날 왕
궁으로 들어가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술잔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내가 증명해 보이리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쪽을 보지 말라]
페르세우스가 내민 메두사의 목을 보고 왕은 대리석상으로 변했다.
4. 무사이를 괴롭혔던 퓌레네우스
이때까지, 황금 소나기로 인해 태어난 영웅인 아우의 뒤를 돌보아주던 트리토니
아 여신16)은 구름으로 몸을 감싸고 세리포스 섬을 떠나 오른쪽으로 퀴투누스와
가아로스를 끼고 테바이 및 무우사17)들이 사는 헬리콘 산을 바라고 바다를 건
넜다.
이윽고 산에 이른 여신은 시가에 밝은 신녀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메두사의 자식인 저 날개 달린 천마18)의 발길질에 땅에서 물이 솟으면서 샘이
생기더라면서?19) 내가 온 것은 샘을 보기 위함이다. 나는 이 천마가 제 어미의
피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기로 샘 또한 보고 싶은 것이다]
여신의 이 말을 받아 우라니아20)가 아뢰었다.
[여신이시여, 여신께서 무슨 연유로 저희에게 오시었든 저희는 여신을 환영합니
다. 들으신 소문은 사실입니다. 페가소스가 발굽으로 대지를 차서 샘을 판 것은
사실입니다]
우라니아는 이 팔라스 여신을 성천으로 모시었다. 여신은 한동안 천마의 발길질
에 생겨났다는 그 샘을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여신은 이어서 울창한 숲과
동굴과 수목이 무성한 산의 사면과 다투어 핀 꽃을 둘러보고 나서, 그렇게 아름
답고 또 그렇게 쾌적한 곳에 사는 므네모쉬네21)의 딸들을 축복했다.
우라니아는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
[트리토니아 여신이시여, 절등하신 무용으로 대업을 이루시지 않았더라면 저희
동아리에 계셨을 여신이시여, 하신 말씀은 다 옳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과 저희
가 사는 곳을 찬양하신 여신의 말씀은 마디마디 온당합니다. 저희가 이를 지킬
수 있다면야 좋은 곳이고 말고야. 그러나 사악한 인간들에게는 못하는 짓이 없
습니다. 그래서 방비할 도리가 마땅하지 못한 저희는 늘 불안에 시달려야 합니
다. 지금도 제 눈에는 저 무서운 퓌레네우스가 보이는 듯합니다. 저 무서운 일이
있고 나서 세월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
이 울렁거립니다.
퓌레네우스는, 트라키아 군대를 몰아 다울리스 땅과 포키스 땅을 불법으로 빼앗
고 감히 왕을 칭하면서 이 땅을 다스리던 사나운 장수였습니다. 저희들이 파르
나소스 산정에 있는 저희 신전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이 자는 저희들이 지나가
는 걸 보고는 저희들을 섬기는척, 비라도 피해가라면서 이렇게 수작을 걸더이다.
<므네모쉬네 여신의 따님들이시여, 바라건데 잠시 걸음을 멈추소서, 이 바람 이
비를 제 지붕 밑에서 피해가시는 것을 망설이지 마소서. 신들께서도 더러는 누
추한 곳에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날씨가 그 지경인지라 그 자의 말을 옳게 여기고 청을 받아들여 그
자의 궁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비가 개고 북풍이 남풍을 쫓아버리니 구름
이 걷히면서 하늘이 맑아지더이다. 저희들은 가던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
니 퓌레네우스는 왕궁 대문을 걸어 잠그고 폭력으로 못된 수작을 부리려고 하지
를 않겠습니까? 저희들은 그 자의 손길을 피하여 날개를 열고 하늘로 날아올랐
습니다. 그랬더니 이 자 역시 성벽 위로 오르더니, <어디를 가든 그대들을 따라
가리라.> 이러면서 성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인간이 성벽 위에서 몸을
던졌으니 성할 리 없지요. 이 자는 머리를 앞세우고 떨어져 죽었습니다.
악업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면서 죽어간 것입니다.
5. 무사이 아홉 자매와 피에리테스의 노래 겨루기
무사이 중 하나인 우라니아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날갯짓 소리
가 들리더니 높은 나뭇가지에서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유피테르의 딸은 목소리
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목소리가 어찌나 또렷했던지 미네르바 여신은 사
람의 목소리거니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인사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새였다. 남
의 목소리 흉내 잘내는 까치 아홉 마리가 가지에 앉아 저희 팔자를 한탄하고자
인사를 했던 것이다.22) 미네르바 여신이 놀란 듯한 얼굴을 하자 무사이 중 하나
가 설명했다.
[저것들 역시 새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들입니다. 저희들과의 노래겨루기에서 져
서 새가 된 것이지요. 원래 저것들은 펠라의 대지주 피에로스와 파이오니아 여
자 에우이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입니다. 어미 에우이페는 아홉 번이나 저 위
대한 여신 루키나23)를 불러 그분의 도움을 받아 딸 아홉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런데 이 아홉 자매는 저희들 수가 많은 것을 뽐내며 하이모니아와 아카이아의
여러 도시를 두루 여행하다 이 헬리콘까지 와서는 저희들에게 도전하더이다. 그
중 하나가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노래로 무식한 자들을 속이는 짓은 이제 웬만큼 해두세요, 테스피
아이24) 신녀님들. 정말 노래에 자신이 있으시면 우리와 한번 겨루어보면 어떨까
요? 우리라면 목소리로 보나, 기예로 보나 신녀님들께 못지않을 것이고 마침 숫
자까지 같으니까요. 우리를 못이기시면, 신녀님들은 메두사가 판 샘25)과 아가니
페26)를 떠나세요. 우리가 지면 이 땅을 떠나 저 눈에 덮인 파이오니아까지 물러
나겠어요. 요정들을 판관으로 세우고 어디 한번 겨루어보자구요.>
그런 것들과 겨룬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입니다만, 겨루어보지도 않고 승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판관 노릇할 요정들이
뽑혔습니다. 요정들은 저희들 강물에 대고, 심판을 공정하게 하겠다는 맹세를 치
고는 바위 위에 좌정했습니다. 제비뽑기로 차례를 정할 틈도 없었습니다. 저들
중 하나가, 천상에 계시던 신들의 전쟁27)에서 거인들을 칭송하면서 전능하신 우
리 신들을 조롱하는 노래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노래하기를 튀폰28)이
땅 밑에서 나와 천상의 신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이런 내용을 노래
하더군요. 이 처녀는 이어서, 신들이 모두 아이귑토스29)로 도망쳐서, 하구가 일
곱 개인 네일로스 강변에 숨었다면서 우리 신들을 조롱했습니다. 땅 속에서 태
어난 튀폰이 여기까지 쪼ㅈ아가자 우리 신들은 모두 다른 짐승으로 둔갑했다고
도 했습니다. 이 처녀의 말에 따르면, 유피테르 신께서는 가축 무리의 두목인 숫
양으로 둔갑해서 은신했는데, 리뷔아의 암몬30)양에게 꼬불꼬불 나선형으로 꼬인
뿔이 달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하더이다. 아폴로 신은 까마귀, 세멜레의
아드님이신 박쿠스 신은 산양, 아폴로신의 누이 되시는 디
하오나 여신께서, 저희들이 부른 노래의 노랫말을 일일이 말씀드려서 무엇하겠
습니까? 다른 일로도 분망하신 여신께서는 저희들이 부른 노래의 노랫말을 짐작
으로 헤아리소서.
[그것은 내가 걱정할 일이니, 너희가 무슨 노래를 했는지 그 노랫말을 내게도 들
려다오]
여신은 이렇게 말한 다음 나무 그늘에 앉았다. 조금 전에 이야기하던 무우사31)
가 말을 이었다.
[저희들은 칼리오페32)를 대표로 뽑았습니다. 칼리오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담쟁이덩굴로 묶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수금 줄을 고른 연후에 수금 소리에 맞추
어 이런 내용의 노랫말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6. 플루토의 사랑. 케레스와 프로세르피나
무우사는 칼리오페가 했던 노래를 자기가 한 양 다음과 같은 사연을 엮어내었
다.
[<케레스>33)여신께서는 처음으로, 꼬부라진 쟁기로 귿은 흙을 일구시고, 처음으
로 씨앗을 뿌리시고 곡물을 거두셨으며, 처음으로 세상의 법을 지으신 분이시니,
우리 가운데 그분의 은덕을 입지 않은 자가 없다. 내 이제 그분의 은덕을 노래
하지, 바라건데 내 노라가 그 분 은덕을 드러내는데 모자람이 없을지니, 그분이
야말로 모자람없이 칭송받아야 마땅하신 분이심이라. 거대한 트리나크리스34)가
튀폰의 사지를 짓누르니, 아 자가 누구인가, 감히 천궁을 넘보다가 이 거대한 섬
에 깔린 자가 아니던가. 이 자는 이따금씩 이 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거나
몸을 일으키거나 했다. 그라나 이 자가 무슨 수로 이 신들의 감옥을 벗어나겠는
가. 이 자의 오른손은 아우소니아의 펠로로스 곶에 묶여 있었고, 왼손은 파퀴노
스 곶에 묶여 있었으며 양다리는 릴뤼마에온 곶에 묶여 있었는데......머리는 아이
트나 산에 깔려 있는 채로 이 자는 입으로 재와 불꽃을 사방으로 뿜어내었구나.
이 괴망한 튀폰이 이 무겁디 무거운 산을 밀어내고 도시의 산 위를 구르려 하는
구나. 그럴 적마다 대지가 몹시 요동했고 그래서 저 적막한 어둠의 나라를 다스
리던 저승왕 플루토36)는 날마다 좌불안석이었다. 행여 그
저승왕 플루토라면 이런 참화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암윽
세계의 무단자 플루토는 검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트리나크라스 땅을 둘러
보러 지상으로 나왔더란다. 그러나 모두 아다시피 땅의 바탕이 어디 그렇게 쉬
내려 앉는 것이라더냐. 플루토는, 땅을 둘러보고 나서 오늘 내일 내려 앉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았더란다.
그러나 에뤽스의 여신36)은 자신의 성산에서, 이승으로 나온 이 저승의 무단자를
보고는 날개 달린 아들 쿠피도37)를 껴안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는구나.
<내 아들아, 내 손이자 내 팔이자 내 기둥인 내 아들 쿠피도야, 세왕국38)의 왕
자리를 놓고 제비를 뽑을 때 세번째 제비를 뽑아 그 땅의 왕이 된 저 자의 가슴
을 너의 화살고 꿰뚫어 주려무나. 너는 이미 천궁의 신들까지 정복한 사랑의 신
이 아니냐? 유피테르 신을 비롯, 천궁의 신들조차 네 손안에 들지 않았느냐? 바
다 신들의 우두머리39)인들 어디 네 화살을 당할 수 있다더냐? 그런데 어째서
타르타로스40)만은 네가 지배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어째서 저승까지 네 수중에
넣어 네 판도와 내 판도를 넓혀보려 하지 않느냐? 저승 땅은 세계의 3분의 1이
다. 장차 이 저승을 정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천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게다.
사랑의 신이 휘두르는 권능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네가 나
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팔라스41)와 저 사냥쟁이 디아나는 네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있지 않느냐.42) 이래서는 안된다. 네가 손을 쓰지 않으면 이 케레스
의 딸 역시 처녀로 살아가게 될 게다. 너와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해도 좋으냐?
너에게, 조금이라도 너와 나의 영토와 직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이 케레
스의 딸과 그 백부43)를 사랑으로 엮어 버려라.>
여신의 말이 끝나자 쿠피도는 화살통을 열고, 제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화살중
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가장 실하고, 주인의 뜻을 가장 잘 따르는 살 한 대를 골
랐지. 화살 고르기를 마친 쿠피도는 활을 무릎에 올리고 구부려 시위에다 화살
을 메기고는 플루토의 가슴 한복판을 겨누고 쏘았다는군.
헨나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페르고스라고 하는, 아주 깊은 호수가 있어.
카위스트로스44)엔들 백조가 여기만큼 많을까? 나무가
12) 나일강.
13) 아크리시오스는, 장치 외손자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신탁이 있자, 이것이 두
려워 딸 다나에와 강보에 싸인 외손자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다 띄워
보냈다.
14) 다나에와 페르세우스가 상자에 든 채로 바다를 떠다니다가 이윽고 도달한
섬.
15)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은 다나에를 차지할 욕심으로 페르세우스를 없
애려 했다는 전설도 있다.
16) '트리톤에서 태어난 여신', 즉 미네르바.
17) 복/무우사, 영/뮤즈,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 혹은 신녀.
18) 페가소스.
19) 이 샘이 곧 히포크레네, 즉 '말의 샘'이라는 뜻이다.
20) 무사이 아홉 신녀 중의 막내. 천문시 담당.
21) '기억'의 여신. 무사이 아홉 신녀들은 유피테르와 므네모쉬네 사이에서 태어
난 딸들이다.
22) 그리스의 인사말 '카이레'는 까치 우는 소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23) 그/에일레이튀아. 유노의 딸인 '해산'의 여신.
24) 헬리콘 산 기슭에 있는 도시.
25) 정확하게 말하면 메두사의 자식 페가소스가 판 샘.
26) 헬리콘 산에 있는,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샘.
27) 기간토마키아, 즉 올림포스 신들 대 기간테스('거인들')사이의 전쟁을 말한
다.
28) 기간테스 중 하나. '태풍'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9) 이집트.
30) '은신한 자'라는 뜻.
31) '무사이'의 단수.
32) 무사이의 맏이. 서사시 담당. 저 유명한 가인 오르페우스의 어머니.
33) 그/테메테르. '땅의 어머니'라는 뜻. 대지와 곡물의 여신.
34) '세 봉우리', 즉 시실리 섬.
35) 그/하데스 혹은 플루톤.
36) 베누스 여신.
37) 그/에로스, 영/큐피드.
38) 천궁, 바다, 저승.
39) 해신 넵투누스.
40) '무한지옥'. 여기에서는 '저승'.
41) 미네르바.
42) 이 두 여신은 애욕의 여신 베누스와 사랑의 신 쿠피도의 꾐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순결을 지켰다.
43) 케레스와 플루토는 남매간이다. 따라서 케레스의 딸과 플루토는 숙질간이다.
44) 백조 많기로 유명한 강.
빈 데 없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 나뭇잎이 차양막이 되어 포에부스의 빛
을 가리는 곳이 바로 이곳... 가지는 늘 그늘을 지어내는 곳, 늘 봄이라서 풀밭에
는 늘 꽃이 만발해 있는 곳도 이곳.
프로세르피나(그/페르세포네, 케레스와 유피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는 틈만 나
면 이 풀밭으로 나와 오랑캐 꽃이나 백합을 꺾었지. 이날도 프로세르피나는 동
무들과 함께 나와 동무들을 이기려고 열심히 바구니와 앞치마에 꽃을 따담았구
나.
플루토는 이 프로세르피나를 보는 순간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 왜? 쿠피도
의 화살을 맞았으니까. 플루토는 염치불구하고 이 처녀를 납치하기로 마음먹었
지. 무서워라, 쿠피도가 부리는 손속!
플루토가 쫓아오는 것을 본 프로세르피나는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와 동무들을
불렀어. 동무들을 부르기보다는 어머니를 더 많이 불렀을 테지.
프로세르피나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허리띠는 풀어지고, 치마 가장자리는 찢겨나
가고, 치마가 찌ㅅ겨나가자 거기에다 따 담았던 꽃들이 우수수 떨어졌어. 어리고
순진한 프로세르피나에게는 꽃 떨어지는 것 또한 눈물거리.
프로세르피나를 사로잡은 저승왕 플루토는 수레에 올라 말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검은 고삐로 말의 목과 갈기를 때렸지.
저승왕의 수레가 어디를 지났느냐. 깊은 호수를 지나고, 찢긴 대지틈으로 유황이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오르는 팔라키 연못 위를 지나고, 원래 코린토스 지협 출
신인 바키아다이(옛 코린토스 왕인 바키스의 자손들)가 성벽을 세웠던 큰 항구
와 작은 항구 사이를 지났지.
퀴아네 샘과 피사의 아레투사 샘 중간에는 두 개의 곶이 있는데, 이 해협에 퀴
아네라고 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더란다. 시켈리아(시실리) 요정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요정 퀴아네가. 그래서 샘 이름도 퀴아네 샘... 퀴아네는 플루
토의 수레에 실려가는 프로세르피나를 알아보고는 몸을 일으켰지. 그러고는 감
히 플루토에게 이렇게 탄원했대.
<플루토 신이시여, 더 이상은 못 가십니다. 케레스 여신께서 원치 않으시는 바
에, 플루토 신께서는 결단코 여신의 사위가 되실 수 없습니다. 플루토 신께서는
그분의 따님을 납치하실 일이 아니라 그 분께 따님을 주십사고 청하셨어야 했습
니다. 견주기가 황송스럽기는 하나 저 역시 강의 신 아나피스의 사랑을 입었습
니다. 그러나 제가 그분의 신부가 된 것은 그분이 당신의 신부 되어주기를 저에
게 청하셨고 제가 그분의 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플루토 신께서 납
치하신 그 처녀처럼 협박을 못 이겨 혼인했던 것은 결탄코 아니랍니다.>
퀴아네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 팔을 벌려 샘물로써 플루토의 앞길을 막았다지.
사투르누스(그/크로노스)의 아들 플루토가 한갓 샘에 지나지 않는 이 퀴아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을까 ?
플루토는 역정을 내면서 고삐로 말잔등을 치는 동시에, 그 힘좋은 손에 든 저승
의 왕홀로 탁, 이 샘을 쳤다지. 그러자 샘 바닥이 갈라지면서 타르타로스로 통하
는 길이 열렸지. 플루토는 이 길을 통하여 저승으로 들어갔고, 퀴아네는, 납치당
해 끌려가는 프로세르피나가 불쌍해서, 샘의 권리가 짓밟힌 것이 분해서, 합없이
울었는데... 가엷어라, 퀴아네, 얼마나 울었으면 슬픔이 요정의 육신을 녹여 물이
곳 요정, 요정이 곧 물이게 했을까. 요정의 사지가 녹기 시작하자 뼈와 손톱 발
톱도 흐물흐물해졌다지. 맨 먼저 그 늘씬하던 몸이 녹았고, 이어서 검은 머리카
락, 손가락, 다리, 발이 차례로 녹아서 물이 되었지. 가느다란 사지가 녹아서 물
이 되는 차례가 어쩌면 그렇게 간단했던지. 사지가 물이 되자 어깨, 등, 옆구리,
젖가슴이 사라지면서 혈관으로는 피 대신에 물이 흐르고...
하릴없어라. 미친 듯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딸을 찾아온 땅, 온 나라를 누비는 케
레스여. 이슬로 머리카락을 적시는 아우로라(그/에오스, 새벽)도, 초저녁별 헤스
페로스도 이 여신이 쉬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니.
케레스 여신은, 아이트나 산(화산으로 유명한 산)에서 불을 붙여온 횃대를 들고
낮비, 밤이슬을 맞으며 딸을 찾아다녔다. 낮이 별빛을 끄면, 해뜨는 동쪽에서부
터 해지는 서쪽까지 두루 누비며, 가엾어라.
피로와 갈증에 시달리다 못해 입술 축일 만한 샘을 찾아다니던 이대지의 여신
앞에 오막살이 한 채가 나타난 것은 해질녘. 여신이 문을 두드리자 나와서 응대
한 사람은 허리 꼬부라진 노파. 여신의 행색을 보고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고 있
다는 걸 안 이 노파, 물에다 볶은 보리 가루를 풀어 마실 것을 만들어주었다는
군.(서양 사람들의 아침상에 자주 오르는 곡물죽 시어리얼은 케레스의 영어식 발
음인 시어리즈에서 나온 말이다.)
케레스 여신이 이걸 받아 마시는데, 건방진 아이 하나가 지나가다가 여신의 얼
굴을 보고는, 할마시, 참 게걸스럽게도 처먹는다, 이랬다던가. 아이의 말에 화가
몹시 났던 케레스 여신은 물과 보리알이 섞인 이 마실 것을 아이의 얼굴에다 확
끼얹어버리는데... 아, 그 순간 아이의 얼굴에는 거뭇거뭇한 반점이 나타나면서
팔 있던 자리에서는 다리가 돋아났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나오기 시작했대. 이
건방진 아이, 여신을 비웃었다가 도마뱀으로 둔갑한 것이지.
노파가 기겁을 하고 이 괴상하게 생긴 것에 손을 대려 하자, 이 도마뱀은 황급
히 도망쳐서 그 몸을 감추고 말았다는 것. 이 동물의 몸에는 지금까지도 알락달
락한 반점이 있어. 이 <반점>이라는 말이 결국은 이 동물의 이름이 되고 만
것...(이 아이의 그리스 이름은 아스카라보스, 즉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라틴어
이름 '스텔리오', 즉 '얼룩도마뱀'은 '별' 또는 '반점'이라는 뜻인 '스텔라'에서
나왔다.)
누가 이 여신이 헤맨 땅 이름 바다 이름을 다 섬길 수 있으랴, 온 바다를 다 건
너고 온 땅을 다 헤맸는데.
온 세상을 다 뒤진 여신은 다시 시카니아(시켈리아, 즉 시실리의 별명)로 되돌아
갔지. 여신은 이 섬에 이르자마자 요정 퀴아네를 찾았다는군. 하지만 이를 어째.
물로 화하지 않았더라면 이 퀴아네가 케레스 여신께 자기가 본 것, 겪은 것을
다 이를 수 있었으련만.
말이야 하고 싶었겠지만 물로 화한 요정에게 입이 있을 리 없고, 혀가 있을 리
없으니. 그런데도 요정은 딸 잃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뜻을 전하고 싶어서 마
침 그 물에 떨어져 있던 프로세르피나의 허리띠를 살며시 물 위로 떠올려 여신
께 보여주었다지.
케레스 여신이 외딸 프로세르피나의 허리띠를 알아보지 못할 리 있으랴. 여신은
허리띠를 보자마자 딸 잃은 설움이 북받쳐 새삼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는군. 하지만 울부짖는다고 어디 될 일이던가.
여신은 딸의 행방을 귀띔해 주지 않는 온 땅을 원망했구나. 곡물을 기르게 해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들이라고 했구나. 곡물을 안아 기를 자격이 없는
것들이라고 했구나.
여신은 땅을 원망하다가 이번에는 실종된 딸의 유품을 보여준 트리나크리아(시
실리 섬)를 원망했구나.
그래서 여신은 손을 들어, 그 땅을 가는 쟁기라는 쟁기는 모조리 그 날이 부러
지게 하고, 그 땅을 가는 쟁기를 끄는 황소라는 황소는 모조리 다리가 부러져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말들었지.
하지만 그런다고 분이 풀릴까. 여신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이번에는 땅에
명하여 농부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하고, 씨앗에 명하여 싹을 틔우지 못하게 했
어. 비옥하기로 소문나 있던 그 고장 땅은 여신의 명을 받들어 황무지로 둔갑,
농부들의 희망을 저버려도 철저하게 저버렸고, 씨앗은 여신의 명을 받들어 싹을
틔우지 않거나, 싹을 틔우더라도 곧 말라버렸다지. 용케 한동안 자라던 싹이 있
었어도, 오래지 않아 햇볕에 말라버리거나, 폭우에 씻겨 가버리거나 새 먹이가
되고는 했다지. 그래도 자라는 싹은 독보리, 엉거시, 잡초가 거들어 쓰러뜨렸다
지. 그러니 옥토가 황무지 될 수 밖에.
그러던 차에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사랑을 입던 샘의 요정 아레투사가 제 샘에
서 고개를 들고, 물이 뚝뚝 듣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케레스 여신께 이렇
게 일렀더라지.
<위대하신 대지의 여신, 곡물의 여신이시여, 따님을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
셨으니, 여신의 믿음을 배신한 땅을 원망하실 만도 하지만요, 땅에게는 죄가 없
습니다. 만일에 땅이 입을 벌려, 따님을 납치한 자를 숨겼다면 그야 어쩔 수 없
어서 그랬을 테지요. 저는 제가 고여 있는 이 땅을 용서하시라고이러는 게 아닙
니다. 저는 이 고장 요정이 아니고 엘리스이 요정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피사
입니다. 여신이시여, 이 땅이 저에게는 타관입니다만 저는 어느 누구보다 이 땅
을 사랑합니다. 지금은 이 아레투사의 고향, 이 아레투사의 고국이나 마찬가지니
까요.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원하옵건대 이 땅을 은혜롭게 하소서. 제가 고향
을 떠나 저 넓은 바다를 건너 이곳 오르튀기아까지 온 내력은, 여신의 분노와
근심이 다소 가라앉은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 말씀만은 먼저 여쭙겠습니
다. 저는, 대지가 저를 위해 열어준 길을 따라 이곳까지 도망쳐왔습니다. 대지
속 깊은 굴을 지난 저는 고개를 들고 낯선 별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곳에 이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두 눈으로 프로세르피나님을 똑똑히 뵌 것
은 대지 저 깊은 곳에 있는 스튁스의 심연을 흐를 때였습니다. 따
입肝말을 들은 케레스 여신은 한동안 돌이라도 된 듯이 그 자리에서 있었더라
지. 여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자기가 그런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모르는 체
하고 있는 천궁의 여러 신들을 벼르고 있었으리라.
여신은, 천궁으로 올라갔지. 천궁에 오른 여신은 헝크러진 머리카락에 험상궂은
눈매를 하고 유피테르 신의 면전에서 대신께 대들었다는구나.
<유피테르 대신이여, 내 딸이자 그대의 딸인 프로세르피나 문제로 청원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왔으니, 내 말을 들으세요.(케레스와 유피테르는 남매간이나 프로
세르피나는 이 둘 사이에서 난 딸이다.) 딸의 어미가 그 아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딸이 그 아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아
이 어미가 나라고 해서 그 아이를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오
래 찾아다니던 그 아이 행방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대신께서 보시기에는, 내가
그 아이를 잃은 것이나, 이제 그 행방을 알아낸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 행방
을 알았으니 찾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테지요 ? 하지만 나는 대신이 아닙니
다.
내 딸을 돌려주게만 하신다면, 내 딸을 도둑질해 간 자(플루토)의 허물은 잊겠습
니다. 도둑맞았으니 이제는 내 딸이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 그렇다면 대신의
딸도 아닙니까 ? 만일에 그 아이가 대신의 딸임에 분명하다면,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약탈자를 지아비로 섬기라고는 않으시겠지요 ?>
대신은, 케레스가 종주먹을 들이대는데도 화도 안 내고 이렇게 대답했지.
<프로세르피나가 그대에게 귀한 딸이라면 내게도 귀한 딸이오. 따라서 나 역시
그대 못지않게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사상에 이름을 붙이
되 온당한 이름을 붙여야 하오. 우리 딸을 데려간 자의 행위는 약탈행위가 아니
라 조금 도를 넘은 사랑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그대가 동의한다면 이
사위 되는 자도 우리를 그리 불명예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비록 그에게 자
랑할 것이 없다고는 하나, 아무나 이 유피테르의 형제일 수 있는 것은 아니오.
(플루토는 유피테르보다 먼저 태어났으나 나중 자란, 말하자면 형이자 아우인 동
시에 이즈음에는 이미 사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것도 아니오. 그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오. 그대가 이렇게 우기니 프로세르피나를 마땅히
천궁으로 데려와야 할 일이기는 하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소. 프로세
르피나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야 하오.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
시오. 이것은 파르카에(그/모이라이, 즉 '운명'을 주관하는 세 여신)가 정한 법이
니까.>
우피테르로부터 이 말을 들은 케레스는, 프로세르피나가 저승에서 아무것도 먹
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이 딸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 하지만 파르카에
의 법은 카레스의 소원이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걸림돌. 프로세르피나가 저승
에서 금식의 법을 어겼구나.
어쩔꼬, 프로세르피나가 이 저승에서 손질이 잘 된 뜰을 지나다가 무심코 석류
를 하나 따서 그 알 일곱 개를 먹었으니...(석류알을 먹었다는 말은, 사랑을 나누
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프로세르피나가 석류알 먹는 것을 누가 보았을까 ? 오르프네('암흑')라는 요정의
아들 아스칼라포스였다는군. 아베르노스(저승의 입구, 혹은 저승)의 요정들 중에
서 가장 유명한 요정 오르프네가 아케론('비통', 저승을 흐르는 강 중의 하나)의
씨로 지어 그 음습한 강 언덕 숲에서 낳은 아들... 아스칼라포스.
아스칼라포스는, 프로세르피나가 석류 알 먹는 것을 보고는 이 소문을 퍼뜨려
결국 프로세르피나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게 했지. 아레보스('암흑')의
왕비(프로세르피나)는 이에 앙심을 품고 이 수다쟁이를 불길한 새로 전신하게
했으니, 보라. 왕비가 이 자의 머리에다 플레게톤('화염', 저승을 흐르는 강 중의
하나)의 물을 뿌리자 이 수아쟁이의 입에서 부리가 생겨나면서 몸에는 깃털이
돋았으며 눈이 커지기 시작했어. 오래지 않아 인간의 형상이 없어지면서 날개도
돋았지. 이어서 머리가 엄청나게 커지고, 발에는 꼬부라진 발톱이 생겨나고... 새
가 되었는데도 이 새는 제힘으로 제 날개를 들지 못한다던가. 무슨 새가 되었는
가 하면, 인간에게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새, 불긴한 전조를 보이는 기분 나쁜
새, 올빼미가 된 것이지.
아스칼라포스가 이런 벌을 받은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럼 아
켈로오스의 딸들은 ? 어째서 아켈로오스의 딸들은 새로 변하였으되 몸은 새 몸,
얼굴은 인간인 괴상한 새로 변하였을까 ? 이시레네스(영/사이렌)가 이런 벌을 받
은 게, 프로세르피나와 함께 꽃을 꺽었기 때문일까 ? 아니다. 이들 역시 프로세
르피나를 찾아 바다 위를 날면서 바다의 신들에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프로세르
피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바다의 신들에게 조르다가 이 꼴이
된 것이다. 이들의 몸에 금빛 깃털이 생겨난 것은, 바다의 신들이 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작정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면 바다의 신들이, 이들을 새로 만들
되 인간의 음성, 인간의 얼굴만은 그대로 둔 까닭은 무엇일까 ? 바다의 신들은,
그렇게 소식을 전하고 싶으면 전하여라, 이런 생각에서 인간의 소리, 인간의 얼
굴을 남겨놓은 것이지. 인간에게 소식을 전하려면 인간의 소리가 있어야 하고,
인간의 소리가 있으려면 인간의 혀가 있어야 하고, 인간의 혀가 있으려면 인간
의 얼굴이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 아름다운 노랫소리와 뛰어난 말재주로 그 천
직을 다할 수 있게 될 터이니까. 유피테르는, 슬픔에 잠겨 있
새肩린農되자 프로세르피나의 표정과 분위기가 그렇게 달라졌을 수가 없었다는
군. 디스(플루토)가 보기에도 견줄 데 없이 어둡고 슬퍼 보이던 아내의 얼굴이,
비구름 헤치고 나온 태양처럼 환해 보이더라나.(프로세르피나의 운명은, 일년의
반은 땅 속에 묻혀 있고, 나머지 반은 지상에 나와 있는 씨앗의 운명을 상징한
다.)
아레투사가 샘이 된 내력
여신이시여, 칼리오페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케레스 여신이 반쪽이나마 딸을 되찾은 뒤로는 예전같이 자비로우신 여신으로
되돌아오셨길래 전에 도움을 받으신 아레투사를 찾아 가셨겠지. 여신은 아레투
사를 찾아가시어, 고향 엘리스 땅에서 도망친 내력, 샘이 된 내력을 물으셨대.
그러자 요정 아레투사가 물에 젖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고는 옛날
엘리스에서 있었던 일이라면서 사랑이야기를 이렇게 하더라지.
<저는 아카이아(그리스 땅)에 살던 요정입니다. 숲 속에서 사냥 그물 치는 일을
저만큼 좋아했던 요정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는 숲 속을 뛰어다니는 것만을
좋아해서, 예쁘다느니 밉다느니 하는 말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만,
동무 요정 가운데에는 저더러 예쁘다고 하는 요정이 많았습니다. 외모가 아름답
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저는, 스스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요정을 보
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아름다워보았자, 사내의 눈요깃감밖에 더 될 것이 무
엇이냐,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사냥으로 지친 몸을 끌듯
이 하고 스튐팔로스 숲에 돌아올 때의 일이었습니다. 몹시 더운 날이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그랬겠지만, 저에게는 그날따라 태양이 곱절로 뜨거워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로 다가갔습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닥의 돌멩이를 다 셀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신께서 보셨더라도, 물
이흐르고 있는지 괴어 있는지 분간하시기 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물을 마
신 버드나무와 백양나무가 둑에서 이 물에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저
는 물가로 다가가 발을 담갔습니다. 그러다가 곧 무릎이 잠
아레투사,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 아레투사,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느냐 ?
아, 알페이오스 강의 신이 굵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저는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은 참이어서 알몸인 채로 도망쳤습니다. 강의
신은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알몸이었으니 쉽게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지요. 저는 매에게 쫓기는 비둘기처럼 달아났고, 강의 신은 비둘기를 쫓는 매처
럼 따라왔습니다. 오르코메노스, 프소피스를 지나고, 퀼레네 산을 넘고 마이날로
스 계곡을 지나고 여름에도 한기가 돈다는 에뤼만토스 산을 넘어 엘리스 땅에
이르도록 저는 도망치고 그는 쫓아왔습니다.
발은 제 발이 빨랐습니다만 힘이야 어디 어림이나 있습니까 ? 저는 더 이상 달
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의 속도는 여전했습니다. 저는 들판을 지
나고 나무로 덮인 산의 사면을 올라 길도 없는 바위 사이를 빠져다니며 있는 힘
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저는 저는 앞서 달리는 긴 그림자
를 보면서 도망쳤습니다. 하기야 그 경황중에 제가 그림자를 보았다는 것이 믿
어지지 않았습니다만, 곧 발소리가 저를 따라잡는 것 같더니, 그 의 숨결이 제
머리카락에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저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
디아나 여신께 빌었습니다.
여신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도우시지 아니하시면 저는 붙잡히고 맙니다. 화살
가득한 여신의 화살통과 활을 들고 다니던 저를 불쌍하게 여기소서.
제 음성을 들으신 여신께서는 두꺼운 구름 한 장을 만드시고는 이로써 저를 가
려주셨습니다. 강의 신은 제가 보이지 않으니까, 저를 싸고 있는 구름 주위를 돌
면서 기웃거렸습니다. 두 번이나 그는 제가 있는 곳 바로 옆까지 와서 두 번이
나, 아레투사, 어디에 있느냐, 이러더이다.
이때의 제 기분이 어떠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이리 우는 소리를 들
은 어린 양, 아니면 덤불 속에 숨어 무서운 사냥개의 주둥이를 보면서 굽도 젖
도 못하고 있는 메토끼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도 알페이오스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 발자국이 그 근처에서
사라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제가 구름 속에 갇혀 있는데 사지에서 식은땀
이 흐르더니 온몸에서 검은 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잠시 뒤에는 발 딛는 곳마
다 물이 괴었고 머리에서도 물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저는 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강의 신은 제가 물
이 된 것을 알고는, 잠깐 빌렸던 인간의 형상을 벗고는 강물로 되돌아가 저를
그 흐름에다 합수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델로스 여신(디아나 여신은
오라비인 아폴로와 함께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다.)께서 땅을 갈라주셨습니다. 저
는 그 틈으로 뛰어들어 음습한 지하를 흘러가 오르튀기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저를 지켜주신 여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 오르튀기아에서 다시 땅 위로 샘솟았습
니다.>
아레투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났어. 풍요의 여신은 두 마리 용을 끌어와
멍에를 채워 수레를 맨 뒤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과 땅의 중간을 날았지. 여신은
어디로 갔느냐. 여신은 트리톤의 도시로 날아가 이 수레를 트리프톨레모스에게
주었어. 그러고는 이 수레와 함께 곡식의 씨앗을 주어, 밭에다 뿌리게 했지. 이
랑이 만들어진 받에도 뿌리고 이랑이 없는 땅은 새로 일구어 이랑을 만들고 거
기에다 뿌리게 했지.
청년은 일이 끝나자 에우로파와 아시아로 가서 상공을 날면서 씨를 뿌렸어.
뿌리면서 륀코스 왕이 다스리던 스퀴티아 땅으로도 갔고....
청년이 왕을 찾아 왕궁으로 들어가자 국왕 륀코스는,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나라, 왜,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지.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지.
< 내 이름은 트리프톨레모스이고, 내 나라는 저 유명한 아테나이올습니다. 나
는 바다를 건너온 것도 아니요, 땅을 지나서 온 것도 아닙니다. 배를 타고 온 것
도 아니요, 걸어서 온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하늘길을 따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케레스 여신의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를 밭에다
뿌리면 가을에는 거둘 수 있고 가을에 거두면 요긴한 겨울 양식이 될 수 있습니
다. >
이 미개국의 임금은 이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 요긴한 것에 탐이나 청년을 질
투하기 시작했어. 인간에게 요긴한 것을 나누어주는 영광을 제가 누리고 싶었던
것이지. 그래서 이 륀코스 왕은 겉으로는 환대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이 청년
을 죽이려고 했다지.
하지만 케레스 여신이 계시는데 누가 누구를 해꼬지해? 여신께서는, 륀코스가
이 청년을 찌르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륀코스를 < 륀코스 > 로 만드셨
어.
여신께서 이렇게 지켜주시니 트리프톨레모스 청년은 다시 용 수레를타고 하던
여행을 마저 할 수 있었어. 은혜로우셔라, 케레스 여신이시여.
이로써 저희 맏언니 칼리오페는 노래를 마쳤습니다. 여신이시여, 판관으로 나
온 요정들은 입을 모아 헬리콘 산의 신녀들인 저희들을 승자로 판정했습니다.
그런데 저 아홉 계집은 겨루기에서 지고도 이긴 저희를 헐뜯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들을 나무랐습니다.
노래를 겨루자고 부득부득 우겨 우리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죄만 해도 적지
않은데 우리가 입은 상처에 침까지 뱉어? 우리가 어디까지 참을 주 알았더냐?
이제 너희들에게 우리를 욕보인 죄값을 물린 수 밖에 없다.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너희들이다.
그런데도 에마티아 계집들은 웃으면서 제 말을 비웃습디다. 신녀를 비웃다니
이게 정신이 온전한 것들이 할 짓입니까?
그것들이 저희를 비웃는 순간, 웃음소리는 울음소리가 되었습니다. 저희들을
가리키던 그것들의 손가락 끝에서는 깃털이 돋기 시작했고요, 이 깃털은 곧 온
땅을 덮었습니다. 저희들도 놀랐는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만, 입
이 있던 자리에 벌써 뾰족한 부리가 생겨나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게 원통했던지 가슴을 치는데, 그게 날갯짓에서 더도 덜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다쟁이 까치가 된 것입니다. 저 까치는 그때의 그 버릇이 남아 여지껏
저렇게 수다를 떨어대는 것이지요. 쉴새없이 깍깍거리면서도 깍깍거리고 싶다는
욕망에 쫓기도 있는 것입니다.
제6부
신들의 복수
1 미네르바 여신과 아라크네의 솜씨 겨루기
무사이 신녀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미네르바 여신은, 신녀들이 불을 참지 못
했던 일을 놓고 자기라도 참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로 위로 하고 그들의 노래를
칭송했다. 여신은 그려면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남을 칭송하는 것이 어찌 내가 칭송을 받는 것만 하랴. 칭송을 받는 것
도 좋지만 신들의 권능을 업신여기는 것들도 그냥 두어서는 안될 일이지
여신은 문득 마이모니아 땅에 살던 처녀 아라크네를 떠울렸다. 이 아라크네는,
베 짜는 솜씨에 관한 한 미네르바 여신에 못지 않게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처녀였다. 미네르바 여신 자신도 이러한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이 아라크네는 신들과 족보가 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문의 딸도 아니었
다. 아라크네를 유명하게 한 것은 아직 베 짜는 재간이었다.
아라크네의 아버지 이드몬은, 포카이아 땅에서 나는 보라색 염료로 양털을 염
색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역
시 남편보다 나을 것이 하다도 없는 초라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딸
은, 위파이파 마을의 오두막에서 태어나 여전히 그 오두막에 살고 있는데도 불
구하고 베 짜는 재간으로온 뤼디아를 흔들어놓을 만한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처녀의 눌라운 손재주를 구경하러 가느라고 트물로스 산 요정들은 포도밭을 떠
났고 팍톨로스 강 요정들은 물을 떠났다.
아라크네가 짜놓은 베만 구경거리인 것인 것은 아니었다. 짜고 있을 때의 손
눌림도 훌륭한 구령거리였다. 가령 일머리에 거친 실을 실꾸리에다 감는 것이라
든지 , 손가락을 빗삼아 실을 빗어 구름 같은 털실의 거스러미를 털어내고 끊임
없는 잔손질로 긴 실타래를 뽑아내는 것이라든지. 엄지손가락으로 날씬한 북을
다루는 것이라든지. 준비가 다 된 베틀에 앉아 무뉘를 짜넣는 모습은 자체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구경러리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팔라스 여신으로부터 그런 재간을 배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크네 자신은 이를 부인했다. 부인하
는데 그치지 않고, 아주 훌륭한 스응 밑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말에 화를 내기까
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그럼 팔라스 여신더러 와서 저와 겨루어보시가고 하지요. 제가 진다면 어떤
벌이라도 받겠어요.
팔라스 여신은, 이런 소문을 듣고는 백발 노파로 둔갑하여 이 아라크네의 집
을 찾았다. 지팡이가 없으면 검음을 옮겨놓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런 노파의 모
습을 잠시 빌린 여신은 이 집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것 보아요, 처녀. 나이 먹은 할망구의 말이라고 해서 다 귓가로 흘려버리면
안 됩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본 것 들은 것이 그 만큼 많은 법이니 더러 쓸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너니까 내말은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만을 상대고 겨룬다
면 그대가 가장 솜씨 좋은 분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요. 여신의 신성은 그렇게
욕보이는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 속알머리 없은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고 여
신께 용서를 비세요. 빌면 여신께서도, 너그러운 분이시라니까 처녀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라크네는 감던 실꾸러를 뽑아들고 노파를 너려보았다. 금방이
라도 그것으로 노파를 갈길 것 같았다. 그러나 갈기는 것만은 가까스로 참아낸
아라크네는, 팔라스 여신인 줄도 모르고 이 노파를 꾸짖었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 보면 할머니가 너무 오래 사신 게지요.
아니면 연세를 너무 잡수셔서 말령이 나셨거나. 며느리나 딸이 있으시거든 거기
에나 가셔서 그런 말씀 들려 주세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요. 그런
소리 듣는다고 내 마음이 달라질 줄 아세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왜. 팔
라스 여신더러 몸소 오시라고 하시지 그래요? 팔라스 여신이 왜 내 도전을 피하
기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왔다.
여신은 이렇게 대꾸하고는 노파의 모습을 벗고 팔라스 여신의 참 모습으로 돌
아섰다.
요정들과 뮈그도니아 여자들은 모두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여신을 경배했
다. 모두가 겁에 질려 몸둘 것을 몰랐다. 아라크네만 제외하고.
아라크네는 벌떡 일어났다. 아라크네의 빰은 잠깐 붉게 상기되었다가는 곧 핏
기를 일었다. 새벽의 손길에 붉게 물들었다가 해가 돋으면서 창백혀지는 하늘빛
같았다. 아라크네는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오직 이길 수 있다는 일념으로 제
운면과 맞서려 할 뿐이었다.
유피테르의 딸도 더 이상은 이 아라크네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여신은 이 도
전을 받아들여 곧 겨루기에 들어갔다. 여신과 알크네는 방 이쪽저쪽에 놓은 베
들로 올라가 날실을 거었다. 둘 다 부티를 하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빠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로 밀어넣었다. 씨실이 날실을
지날 때마다 바디가 이씨실을 쫀쫀하게 짰다. 옷을 걷어올려 젖가습을 질끈 동
여매고 여신과 처녀는 있는 힘과 기를 다해 베를 짜ㅆ다. 이 둘의 손은 쉴새없
이 베틀위를 오고 갔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이들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까많게 잊고 일했다. 이들이 베데다 짜넣은 실에는, 튀로스염료로 물들인 보라색
실은 물론이고 색조가 조금 씩 다른 여러 가지 색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색
실이 다른 색실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어디서부터 이 색실에서 저 식실로 바뀌었
는지 분간하기 어려 웠다. 소나기가 하늘에다 그려놓은 긴 활 꼴 무지개와 흡사
했다. 무지개가 지닌 여러 가지 색깔의 띠는, 맞물리는 곳에서는 하나로 보이지
만 여기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이는 법이다. 옛이야기의 내
용이 그림으로 짜여들어가면서 금빛 색실도 이 갖가지 색실에 섞여
팔라스 여신은 케크롭스가 쌓은 성채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마크스의 바위
와, 이 도시의 이름을 두고 옛날 자신과 넵투누스가 겨루기하던 광경을 베폭에
다 짜넣었다. 이 겨루기 마당에는 올륌포스의 12신 중의 나머지 신들도 위풍당
당한 모습으로 유피테르를 중심으로 높은 보좌에 열석해 있었다. 신들은 외관만
으로도 어느 신이 어느 신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제왕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기가 쉬웠다. 해신 넵투누스가
선 채로 그 긴 삼지창으로 바위를 치자 바위 틈에서는 물이 솟아나왔다. 넵투누
스는 이로써 이 도시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광경이 미네르
바 여신이 짜는 베폭에 그려지고 있었다. 팔라스 여신은, 창과 방패를 든 잔신의
모습을 거기에 짜넣었다. 베폭에 나타난 여신은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가뭄은
아이기스로 가리고 있었다. 팔라스 여신이 창으로 대지를 찌르자 거기에서는 열
매가 잔뜩 달린 감람나무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신들의 면면도 볼 만했다. 여신은 이 베폭 그림에다 니케그림을 짜넣음으로 써
자신과 넵투누스의 겨루기 그림을 마무리지었다.
여신은 이로써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이 그림의 네 모서리에다 네 개의 겨루
기 장면을 더 짜 넣었다. 다 자신의 겨루기 상대인 오만 방자한 아라크네에게,
신들을 가볍게 여기면 어떤 벌을 받는지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인 네 개의 그
림은 크기는 작아도 색채는 그지없이 현란했다. 첫번째 그림에는, 위대한 신들의
이름을 도용했다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눈 덮인 산으로 변한 트리키아의 하이모
스 산과 로도페 산이 그려져 있었다. 그 다음 모서리는 퓌그마이오이의 슬픈 운
명을 증언한느 그림, 즉 유누가 겨루기에서 이 족속의 여왕을 이긴뒤 , 이 여황
을 학으로 전신시켜 제 족속에게 쌈움을 걸게 했던 사연이 그림으로 짜여들어가
있었다. 팔라스 여신은 또, 전능한 유피테르의 배우자와 그 아름다움을 겨루겨
하다가 바로 그 유노에 의해 새로 전힌 한 안티고네이야기도 그림으로 짜 넣었
다. 안티고네의 상대가 유노 여신이었던 만큼 일리온 도성도 아버지 라오메돈
왕도 나설 수가 없었다. 유노 여신의 저주를 받은 이 처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
이에 돋아난 순백의 날개를 퍼득거리고, 뽀족하게 돋아난 부리를 달싹거리며 지
껄여디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모서리에는 역시 유노의 저주를
여 아라크네는, 황소로 둔갑한 유피테르에게 속아 순결을 잃은 에우로파 이야기
를 그림으로 짜넣었다. 황소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파도는 베폭 위에서 넘
실거리는 것 같았다. 에우로파는 떠나온 해변을 돌아다보면서 함께 놀던 동무들
을 향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우로파는 바닷물이 차가웠던지 발을 움츠리고
있었다. 아라크네의 베폭에는 독수리에 타눌린 아스트리아, 백조의 잘개에 붙잡
힌 레다 그밀도 들어가 있었다. 아라크네는 이 밖에도 둔갑한 유피테르의 갖가
지 모습을 짜 넣었다. 뉘테우스의 라름다운 딸에게 쌍둥이를 끼치고 있는 사튀
로스, 티륀스완으이 왕비를 사랑하는 암피트뤼온, 청동탑 속으로 들어가 다나에
를 사랑한느 황극ㅁ 소나기, 아소포스의 딸을 취하는 불꽃, 므네모쉬네를 사랑하
는 양치기, 데오의 딸 포로세르치나와 사랑을 나누는 얼룩뱀. 이 모두가 둔갑한
유치테르인 것이었다. 아라크네는, 황소로 둔갑하여 아이올로스의 딸을 범하는
넵투누의의 모습도 그림으로 짜넣었다. 넵투누스가 강의 신 에니페우스로 둔갑
하여 알로에오스의 아내를 취하고 쌍둥이 아들을 끼치는 장면, 숫양으로 둔갑하
여 비살티스를 감쪽타같이 속이는 장면도 짜 넣었다. 오옥의 어머니
포에부스의 이야기도 있었다. 포에부스가 농부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고, 매의
깃털로 온몸을 가니 대목, 사자로 둔갑하는 대목도 있었다. 목동으로 둔갑하여
마칼우스의 딸 이세를 희롱하는 대목도 있었다. 포도송이로 둔갑하여 에리고네
를 취하는 리베르, 말로 둔갑하여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 케이론을 끼치는 사투
르누스도 있더었다. 베폭 가장자리의 좁으장한 테두리에는 담쟁이덩쿨과 꽃이
뒤엉킨 그림이 들어가 있었다.
베짜기의 여신인 팔라스 자신은 물론, 잘된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리볼
조차도 흠잡을 수 없은 참 완벽한 솜씨였다.
겨루기 상대의 솜씨가 인간의 도를 넘은 데 격분한 이 금발의 여신은 , 신들
의 비행을 낱낱이 폭로한 이 베폭을 찢어버리고는, 들고 있던 퀴토로스 산 회양
나무 북으로 아라크네의 이마를 서너번 때렸다. 아라크네는 그제야 여신으로부
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얻은 줄을 알고는 들보에 목을 매였다. 여신은, 제손
으로 들보에 목을 맨 이라크네를 가엾게 보고 그 끈을 늦추어주면서 이렇게 일
렀다.
이 사악한 것아, 네가 누구 마음대로 네 목숨을 끊으려 하늘? 목숨을 보존하
라 . 보존하되 늘 이렇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 이것을 벌은 벌이나 겁벌이어서
끝이 없을 것인 즉, 네 일족, 네 후속들까지 이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말 끝에 여신은 헤카데(마법, 요술에 능한 여신) 약초즙을 한 방울 이 아라크
네의 몸에 뿌렸다. 이 독초즙니 묻자 아라크네의 머리에서는 머리카락이 빠지면
서 코와 귀가 없어졌다. 머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만큼 줄어들었다. 이와함
께 몸통도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갸름하던 손가락은 양 옆으로 길어져 다
리가 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배가 되었다.
아라크네는 꽁무니로 실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이때 거미가 된 아라크네(거미)는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실을내어 공중에다 걸고는 거미에 매달려 산다.
2 니오베의 아들딸들
이 이야기는 뤼디아 땅으로 퍼져갔다가 다시 프뤼기아 방방곡곡을 거쳐 온 세상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니오베가 이 이야기를 든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니
오베가 처녀시절 마이오니아와 시퓔로스에 살 당시에 이 아라크네를 알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니오베는 고향처녀였던 아라크네가 그런 벌을 받았다
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들을 가볍게 여기면 무서운 벌을 받는
다는 교훈을 제것으로 따담지 못했다. 다 이 니오베가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사
실 이 니오베에게는 자랑거리가 많았다.지아비의 재능(니오베의 지아비 암피온은
유피테르와 안티오페 사이에서 난 아들로 수금을 어찌나 잘 탔던지 그가 수금을
타자 돌들이 저절로 날아가 성벽으로 쌓였다는 전설이 있다) 도 니오베에게는
자랑거리였고, 자신과 지아비의 가문, 지아비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영광도
니오베에게는 큰 자랑거리 였다. 그러나 이 니오베가 정말로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은 아들딸들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스스로 이렇듯이 자랑만 하지 않았던들 이
세상에 니오베만큼 자랑스럽고 행복한 어머니도 없었을 터였다.
그즈음 일찍이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얻은, 테이레시아스의 딸 만토가 신들의
영감을 받고 무아지경에 빠져 길을 막고 이런 예언을 하고 다녔다.
이스메노스의 딸들아, 모여라. 모여서 라토나 여신(테바이의 여자들)과 그분의
아드님 따님앞에, 월계관 단정히 쓰고 앉아 향을 사르고 경배하라. 내 입을 빌려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라토나 여신이시다.
테바이 여자들ㅇㄴ 이 말을 옳게 여겨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쓰고 여신의 신
전으로 성화에다 향을 던져 넣으면서 기도를 올렸다.
테바이 여자들이 이러고 있을 즈음 왕비인 니오베가 많은 하녀들을 거느리고 나
타났다. 금실로 짠 프뤼기아풍의 옷으로 단장한 니오베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니
오베가 머리를 흔들자 그 아름다운 금발이 어깨너머로 출렁거렸다. 성난 여자들
이 그렇듯이 니오베의 아름다움도 성을 내고 있어서 돋보였다. 니오베는 몸을
한껏 부풀이고 그 긍지에 찬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이냐? 눈앞에 있는 여신은 마다하고, 하늘에 있다는 소문으
로만 들은 신들을 섬기다니 이게 대체 무슨 미친 수작이냐? 내 신성은 머리둘
곳이 없는데 어째서 라토나만 그 이름에 봉헌된 신전에서 섬김을 받아야 옳다는
말이냐? 내 아버지 탄탈로스는 신들의 식탁에 드는 것을 허락맡은 유일한 인간
이었고 내 어머니는 플레이아데스(아틀라스의 딸들) 중 한분이 아니시더냐? 어
깨로 창궁의 축을 떠받치시는 위대한 아틀라스는 내 조부이시자 시아버지이시기
도 하다.(니오베의 아버지 탄탈로스는 유피테르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유피테르는 또 니오베의 지아비인 암피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피테
르는 니오베의 조부이자 시아버지이기도 하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혈통을 타고
난 여자인가? 프뤼기아의 온 백성이 나를 섬기고 카드모스의 온 도성(카드모스
가 세운 테바이를 말함)이 내 치하에 있다. 내 지아비가 수금하나로 쌓아올린 그
성벽, 그 안에 사는 백성이 나와 내 아버지의 권세 아래에 있다. 내 아름다움만
해도 그렇지. 내 아름다움이 여신들의 아름다움만 못하더냐? 내가 사는 성의 방
이라는 방은 모두 재물로 그득 그득 하다. 자식만해도 그렇지. 내게는 아들 일곱
형제와 딸 일곱 자매가 있다. 머지않아 이 아이들이 내 집을 며느리와 사위로
가득 채울 것이다. 이런 나를 두고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는 저 코이오스의 딸
라토나를 섬겨? 이 넓은 대지가 자식낳을 대지 한 짜투리의 땅도 여투어주지 않
으려던 저 라토나 같은 여신을 섬겨? (라토나ㅏ 유피테르의 자식을 낳으려하자
유노는 대지에 명하여 라토나에게 한 자투리의 땅도 빌려주지 말라고 엄명한 적
이 있다.) 라토나가 어떤 라토나더냐? 델로스(떠올라 보인 섬이라는 뜻)가 이 여
신을 불쌍히 여겨, 그대는 대지를 떠돌고 나는 정처없이 바다를 떠도는군요. 이
러면서 자리를 빌려주는 바람에 겨우 자식을 얻을 수 있었던 라토나가 아니더
냐? 이렇게 견주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그럼 낳은 자식수로 따져보자. 라토나가
낳은 자식수는 내가 낳은 자식수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누리는 행복
은 요컨대 보름달과 같아서 한 군데도 빈데가 없다. 이것을 누가 부정할 것이
냐? 나는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이것 또한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무슨
까닭이냐? 나의 자식복이 나의 행복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포르투
나 여신(운명의 여신)도 해칠 수 없을만큼 막강한 힘이 있다. 포르투나가 내게서
많은것을 빼앗아간다 할지라도 나에게 남은것은 그 여신이 빼앗아갈 수 있는 것
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 자식 중 한둘이 없어진들 어떻냐? 한둘이 없어져도, 자식 둘밖에 없는 라토
나 꼴은 되지 않는다. 자식이 둘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다. 자, 어떻냐? 이래도 라토나를 섬길 터이냐? 가거라. 제사는 그정도로 끝내고
어서들 가거라. 어서 머리에서 그 월계수 관을 벗고 이 자리를 떠나거라.
테바이 여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는 제사를 중도에 작파하고 라토나 여신에게 올
리는 기도를 입 안에다 넣고 모두 그 자리를 떠났다.
이를 내려다본 라토나는 노발대발, 퀸토스 산정에 선 채로 아들과 딸인 아폴로
와 디아나를 불러 이렇게 푸념했다.
너희둘을 낳은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 어미는, 저 유노 여신을 제외하고는 어
떠한 여신에게도 꿀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되었느냐? 이제는 너희
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오랜세월 내가 섬김을 받던 내 제단에서 젯밥 얻어먹기도
어렵겠구나. 내가 섭섭하게 여기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너희들도 들었다시
피 저 탄탈로스의 딸년은 내게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제 문벌이 나
보다 나은것을 자랑했고 나보다 자식이 많은것을 자세했다.내 이년에게 당한 것
을 이년에게 돌려주고 말아야겠다. 이년은 제 아비처럼 신들을 업신여겼다. (니
오베의 아버지 탄탈로스는 신들의 잔치에 초대받고 갔다가 거기에서 들은것을
인간에게 전함으로써 천기를 누설했다.)
라토나는 니오베를 향하여 욕지거리를 더 퍼부으려 했다. 그러자 아들 포에부스
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하세요. 불평하시면 불평하시는 만큼 저 여자가 벌을 받는 시각이 지체될
뿐입니다.
그의 누이 포이베(포에부스의 여성형)도 오라비와 의견이 같았다. 남매신은 구름
으로 몸을 가리고 카드모스의 성으로 내려갔다.
성벽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노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에는 수
레 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무수히 나 있었다. 암피온의 아들들 중 몇몇도 거기에
서, 튀로스 산인 산뜻한 보라색 안장을 걸친 힘좋은 말에 올라 황금 징이 박힌
고삐로 말을 다루고 있었다. 니오베의 맡아들 이스메노스는 말고삐를 단단하게
틀어쥐고 원을 그리며 돌다가 갑자기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화살이 가슴에 꽂힌
것이었다. 고삐는 그의 손에서 풀려나놔 말의 오른쪽 어깨 옆으로 떨어져내렸다.
그 다음으로, 허공에서 나는 시위 소리를 들은 것은 시퓔로스 였다. 시퓔로스는
말을 몰아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검은 구름을 보고는 폭풍이 몰아칠것을 예
감하고, 한 점 바람도 놓치지 않으려는듯이 돛이라는 돛은 모두 올리고 도망치
는 뱃사람과 비슷했다. 한참을 달리던 시퓔로스는 잠시 고삐를 늦추었다. 그러나
빗나가는 법이 없는 신의 화살은 어느새 그를 따라잡아 그의 목에 박혀 부르르
떨었다. 살촉이 목을 꿰뚫어버린 것이었다. 앞으로 엎어지면서 잠시 말갈기에 몸
을 싣던 그는 곧 질풍같이 땅을 차며 달리는 말발굽 사이로 떨어져 뜨거운 피로
대지를 적셨다.
파이디모스와, 외조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탄탈로스는 기마 연습을 끝내
고 온몸에 땀투성이가 된 채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씨름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 니오베의 아들 형제가 가슴을 맞대고 서로 버티고 서 있는데 화살이
날아와 이 둘을 한 살에다 꿰어 버렸다. 이들은 한 입이 되어 외마디소리를 지
르고는 한덩이가 되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둘은 쓰러진 채로 마지막으로 주
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마지막 숨을 함께 몰아 쉬었다. 알페노르가 이들을 보고
달려가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제 가슴을 쳤다. 그러나 형제의 죽음을 애도하
던 그 역시 그자리에 쓰러졌다. 델로스의 신 아폴론이 쏜 화살이 그의 옆구리에
다 맞창을 내어버린 것이었다. 다른 한쪽으로 나온 화살촉에는 폐의 조각이 묻
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 피와 생명이 동시에 쏟아져 나놨다.
장발의 다마식톤은 형제들과는 달리 화살을 하나 더 맞았다. 정강이 힘줄을 맞
고는 이 화살을 뽑으려 하는데 다른 화살 하나가 더 날아와 궁깃에 묻히기까지
목에 박힌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솟구치는 피가 공중에다 피의 기둥을 세운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리오네오스는 신들에게 빌어보려고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신들이시여, 신들께 기도하오니 저를 살려주소서.
그러나 그는 신들에게 기도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활의 신 아폴
로는 그 기도에 마음이 움직였던지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아폴로의 이런 마음이 화살에도 전해졌던지 이 화살은 심장을 꿰뚫어
그를 죽이기는 하였으되 그리 깊이는 꽂히지 않았다.
날아든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백성과 눈물짖는 왕족들을 보고서야 니오베는 그
토록 갑작스럽게 자기에게 재앙이 닥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니오베는 신들이 그
런일을 할 수 있다는 데 놀라는 한편, 그들에게 그런 권능이 있고 그들이 그 권
능을 자기에게 퍼부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의 아버지 암
피온은 이 비보를 듣고는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그는 이로써 삶을 마감하는
동시에 자식 잃은 아버지로서 앓아야하는 모진 가슴앓이를 면했다.
니오베는 조금전의 니오베가 아니었다. 이때의 니오베는,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라토나의 신전으로부터 테바이 여자들을 몰아내던 니오베, 도도하게 도시 한복
판을 걸으면 도성의 모든 여자들로부터 선망의 과녁이 되던 니오베가 아니였다.
니오베는 이제 선망의 과녁이기는커녕 연민의 대상이었다. 심지어는 저 자신의
적으로부터 가엽게 여겨져야 마땅한 존재였다. 니오베는 싸늘하게 식은 자식들
의 주검을 내려다 보면서 하나하나와 마지막 작별의 입마춤을 나누었다. 이윽고
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니오베는 피 뭍은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하여 외쳤다.
무정한 라토나 여신이여, 후련하시겠습니다. 이제 내 불행을 즐기시려거든 마음
껏 즐기세요. 당신의 그 탐욕스러운 가슴, 이제 뿌듯하시겠지요? 내 아들 일곱과
함께 나 역시 죽은것이니까요. 이제 적으로 여기던 나를 이겼으니 날뛰면서 춤
이라도 추시지요. 하지만, 내가 왜 당신을 승리자라고 불러야 하지요? 내 꼴 이
렇듯이 비참하게 되었지만 살아있는 내 자식들 수가 기뻐 날뛰는 당신의 자식들
수보다 많은데 왜 내가 당신을 승리자라고 해야 하지요? 당신의 손에 그렇게 많
이 잃었어도 아직 내 자식 수는 당신의 자식 수보다 많답니다.
니오베가 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위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
려워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지만 니오베만은 태연했다. 불행이 오히려 니오
베를 대담하게 만든 것이었다.
니오베의 딸들은, 싸늘하게 식은 니오베의 아들 7형제의 관앞에 서 있었다. 니오
베의 딸들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때, 화살 한대가
날아와 니오베의 딸 중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니오베의 딸은 가슴에서 이 화
살을 뽑아내고는 앞으로 쓰러져 죽은 제 오라비의 뺨에다 제 뺨을 댄 채로 숨을
거두었다. 또 한 딸은, 상심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다가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손
으로부터 받은, 곱절이나 큰 상처에 저 자신이 상심해야 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 처녀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생명이 이미
그 입을 통하여 모두 빠져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
치려고 했으나 그런 노력도 하릴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어서 또하나가 쓰
러진 언니의 시신 위로 무너졌다. 넷째는 몸을 숨겼고 다섯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떨고 서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각기 다른 곳을 화살에 맞아 치명상
을 입고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막내딸 하나뿐이었다. 니오베는
옷자락으로 이 딸을 감추면서 부르짖었다.
이 아이는 14남매의 막내이니 이것 하나만이라도 남겨주세요. 죽은 아이들이야
죽었으니 그뿐, 이 어린것 하나만 부탁합니다
그러나 니오베의 호소도 보람없이 이 아이 역시 땅바닥에꼬꾸라졌다. 니오베는,
이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는 혈혈단신이 되어 죽은 자식들 사이로 무너져
내렸다. 참을길 없는 슬픔은 이 니오베의 몸을 돌로 화하게 했다. 산들바람도 이
때부터는 니오베의 머리카락을 흩날리지 못했다. 피가 빠져나간 니오베의 얼굴
은 창백했다. 니오베의 눈은 슬픔에 잠긴채로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니오베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
었고,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몸 속에서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니오베의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어 침묵하는 돌이 되었고 핏줄에서는 맥박이 사
라졌다. 몸 속의 장기도 남김없이 돌이 되었다. 그런데도 니오베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문득 일진광풍이 불어와 돌이 된 니오베를 감아올려 고향 땅으로 데려
갔다. 돌이 된 니오베가 내린 곳은 산꼭대기였다. 돌이된 니오베는 오늘날까지도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3. 개구리가 된 뤼키아 농부들
남녀 할것없이, 사람들은 신들이 이렇게 공공연히 분을 푸는것을 보고는 겁에
질리어 이 쌍둥이 신들의 어머니인 라토나 여신을 두렵게 여겨 전보다 지극히
섬겼다. 늘 그렇듯이 일이 이렇게 되면 라토나 여신에 관한 옛이야기도 자주 사
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법이다. 말하자면 저간에 있었던 일에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옛날에 있었던 일에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라토나 여신이
옛날에 겪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주 옛날, 기름지기로 소문난 뤼키아 땅에 사는 농부들도 이 니오베처럼 여신
을 깔보다가 큰 벌을 받은 일이 있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당한 사람들이 니오베
만큼 지체높은 사람들이 아니었던 만큼 별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들
어보십시오.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일테니까요. 나 자신이 직접, 그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으노 유명한 호수를 보았습니다. 그 내력은 이렇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연로하셔서 몸소 여행을 못하시게 되니까 저더러 뤼키아로 가서 가축떼
를 몰고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지방을 잘 아는 길라잡이까지 손수
나에게 붙여주시더군요. 나는 이 길라잡이와 함께 평원을 지나 뤼키아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다가 보니까 갈대에 둘러쌓인 호수 한복판에, 사람들이 제물을
드린 흔적이 꺼멓게 남아있는 사당이 하나 있더군요. 나를 안내하던 길라잡이는
길을 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는, 자비를 베푸소서. 이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멋도 모르고 역시 자비를 베푸소서. 이렇게 말하고는 그 사당을 가리키며,
나이아데스(단/나이아드. 샘이나 하천에 사는 물의 요정)의 사당인지, 파우누스
(그/판. 전원이나 숲에 사는 반인반양인 목양신)의 사당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지방 토속신의 사당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내 길라잡이가 내
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 사당의 주인은 산에 사는 반신이 아닙니다. 천궁의 왕비(유노)로부터 버림받
으신 여신을 아시지요? 바로 라토나 여신입니다. 천궁의 왕비께서는 온 땅에 명
을 내리시어 이 라토나 여신을 받아들이는 땅이 있으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하
셨지요.(이 라토나 여신이 유피테르의 자식을 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라토
나는 아기를 낳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이 여신을 받아주지 않
았습니다만, 당신만 하더라도 파도 위에 뜬 채로 온 바다를 방황하던 섬 델로스
(떠올라 보이는 섬이라는 뜻)가 이 여신의 딱한 사정을 알고 이 여신을 받아주
었습니다. 여신은 이 섬에서 종려나무에 기댄 채 팔라스 여신이 베푸신 감람나
무 가지를 잡고서야 쌍둥이 남매를 낳았답니다. 그러니까, 유피테르의 본처되시
는 유노 여신을 피하여 천신만고 끝에 해산을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쌍둥이
남매가 태어나자 유노 여신이 다시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라토나 여신은 이 쌍둥
이를 안고 방랑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때는 무자비한 태양이 벌판을 뜨겁게 달구는 오뉴월이었습니다. 방랑하던 여신
은 마침내 키마이라(뤼키아의 산중에 사는, 사자머리, 산양 몸, 뱀 꼬리로 이루어
진 불을 뿜는 괴물. 후일 영웅 벨레로폰의 손에 죽는다.) 의 고향인 뤼키아 땅에
이르렀습니다. 따가운 햇볕에 시달리면서 먼 길을 온데다 두 아기에게 젖이라는
젖은 깡그리 빨리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여신이지만 오죽 목이 말랐겠습니까? 그
런참에 여신은 계곡 아래쪽에 있는, 크기가 고만고만한 호수를 발견했지요. 이
호숫가에서는 이 지방 농부들이 고리버들, 갈대, 사초 같은 것을 꺾고 있었습니
다. 티탄의 딸(라토나 여신은 티탄, 즉 거신족인 코이오스의 딸이다.)은 호숫가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있던 농부들은
여신에게 그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신은 이들에게 애
원했지요.
왜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물이라는 것은 만물로 하여금 요긴하
게 쓰라고 이곳에 있는것이 아닌가요? 자연이 공기와 햇빛과 함께 넘실거리는
물을 창조한 것은 어느 한 동아리마만 이롭게 하자고 한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
에게 유용하게 쓰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물을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이 물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권한이 있스ㅈ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무릎을
꿇고 여러분에게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물에 몸을
씻고자하는 것도 아니요, 거든ㄴ데 지친 다리를 담그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목을 축이자는 것 뿐입니다. 나는 입이 말라 지금 말도 못하겠습니
다. 지금 물을 마신다면 이 물은 내게 넥타르(신주)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물을 마시게 해 주신다면 여러분은 내 목숨을 살려주시는 셈입니
다. 바라건데 이 아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아이들은 내 품에서
여러분에게 이렇듯이 가녀린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우연의 일치겠지만 아닌게아니라 아기들도 농부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있었습
니다. 누가 이 여신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만, 농부들은 여신
의 애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봉변을 당할 것
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신을 모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것뿐인줄 아십니까? 이자들은 호수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손발로 구정물까지
일으켰습니다. 심술을 부리느라고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뻘을 마구 휘저어
놓은 것이었지요. 코이오스의 딸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갈증도 잊었더랍니다. 더
이상은 이 자들에게 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지요. 말로해서는 안될 것들이라
는 결론을 내리셨던 것이지요. 여신은 여신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겸손한 말로
이들에게 애원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여신은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
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원컨대 저들이 영원히 이 호수에서 살게 하소서.
여신의 기도는 이루어 졌습니다. 농부들은 문득 호수에 뛰어들고싶다는 강한 충
동을 느끼고는 이 충동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스스로 호수 가장 깊은 곳으로
뛰어든 이들은 이따금씩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는 수면 위를 헤엄쳐 다니는가하
면, 또 이따금씩은 호숫가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러다 갑자기 다시 물로 뛰어들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혀에는 남을 헐뜯는 버릇이 남아서, 심지어는
물 밑에서까지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지껄이거나 남을 비방하려고 했습니다. 그
런데 오래지 않아 이들의 목소리가 쉬면서 몸이 짤막하게 줄어들고 부풀어올랐
습니다. 버릇 사납게 자꾸 지껄이다보니 입은 자꾸만 찢어졌습니다. 머리는 목
안에 들어박힌 것 같았습니다. 목이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뿐만 아닙니다. 이들의
등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몸의 각 부분 중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배는 하얗
게 변했습니다. 개구리로 변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 새로운 형상을 한 채로 지금
도 호숫가 뻘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내 길라잡이가 한 얘깁니다.
가축떼를 몰려 뤼키아로 갔다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4. 산 채로 껍질을 벗긴 마르쉬아스
지금은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사람이 한, 라토나 여신을 업신여겼다가 재
앙을 당한 뤼키아 사람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이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
자 다른 사람이, 사튀로스(57)가 아폴로의 손에 산 채로 껍질이 벗겨졌다는 이야
기를 했다.(58) 즉 미네르바가 만든 피리로 아폴로에게 연주 겨루기를 도전했다
가 진 벌로 껍질이 벗겨지게 된 것이다. 껍질이 벗겨지게 된 마르쉬아는 외쳤다.
“살려주세요. 어쩌자고 진짜로 내 껍질을 벗기는 것입니까? 다시는 이러지 않
겠으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약속합니다. 피리 불기에서 졌다고 이러는 것
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가 이렇게 고함을 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로는
그의 껍질을 깡그리 벗겨버렸다. 이로써 그의 몸은, 전체가 하나의 상처가 된 것
이었다.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신경의 가닥도 하나 남김없이
밖으로 드러났다. 껍질이 없어졌으니, 핏줄 뛰는 것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당연
했다. 벌떡벌떡 뛰는 내장기관과 가슴속의 허파도 훤히 들여다보았다. 들판을 누
비고 다니던 숲이 반신들인 파우누스들은 이 마르쉬아스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
다. 동아리인 사튀로스(59)들은 물론, 그가 사랑하던 올림포스(60) 요정들, 산에
서 양떼나 뿔 달린 가축을 돌보던 목동들까지도 이 마르쉬아스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다. 기름진 땅은 눈물로 젖었다. 젖은 땅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물
을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다. 땅은 이 눈물로 샘을지어 땅 위로 용솟음치게 했다.
이 샘에서 솟은 물은 시내가 되어 둑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 이 시냇물은 온
프뤼기아 땅에서도 가장 맑았는데, 사람들은 이 시내를 <마르쉬아스 시내>라고
불렀다.
(주) 57) 반양반인인 목양신
58) 처녀신 미네르바가 어느 날 갈대로 피리 하나를 만들어 불다가 버렸는데,
목양신 마르쉬아스가 이를 주웠다. 마르쉬아스는 이 신묘한 소리가 나는 피리를
손에 넣은 것을 자만하여 수금의 명수인 아폴로에게 연주를 겨루어보자고 도전
하면서 이긴 자는 진 자의 껍질을 산 채로 벗기자고 제안한다. 결국 이 겨루기
에서 아폴로가 승리, 마르쉬아스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다. 미다스라는 사람은
이 겨루기의 심판으로 나와 마르쉬아스의 승리로 판정했다가 아폴로의 미움을
산다. 아폴로는, 음악의 신이 연주하는 수금 소리와 목양신이 부는 피리 소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귀가 그게 어디 귀냐면서 이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
어 버린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59) 이 마뤼쉬아스가 강의 신이었다는 전설도 있다.
5 펠로프스의 왼쪽 어깨
사람들은 이러한 옛이야기를 듣고, 당시의 상황, 즉 니오베가 돌이된 당시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비명에 간 암피온과 쑥밭이 되어버린 그 집안 일을 몹
시 애석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암피온을 불쌍하게 여기면서도 아이들의 어머
니, 즉 니오베만은 비난했다. 따라서 이들은 니오베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니오베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니오
베의 오라비인 펠로프스가 그 사람이었다.(61) 슬픔에 젖은 펠로프스가 옷을 찢
자 왼쪽 어깨에 박혀 있던 상아가 드러났다. 펠로프스가 태어날 당시의 몸은, 색
깔이나 모양이나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지를 모두 잘랐다. 신들이다시 그의 몸 각 부분을 찾아 짜맞추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목에서 왼쪽 어깨에 이르는 부분의 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신들
은 이 없어진 부분은 상아로 대신 짜맞추어 펠로프스를 되살렸던 것이다.
(주) 60) 피리의 명수. 마르쉬아스의 제자였다는 전설도 있고, 아버지 혹은 아
들이었다는 전설도 있다.
61) 이 둘의 아버지인 탄탈로스는 신들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에 너무나 감격
한 나머지 그 감사 표시로 아들인 펠로프스를 죽이고 요리하여 그 고기를 신들
에게 바쳤다. 신들은 이것을 눈치채고 먹지 않았으나, 당시 딸 프로세르피나를
잃고 상심하던 케레스만은 펠로프스의 어깨 부분에 해당하는 고기를 먹었다. 나
중에 신들은 펠로프스의 고기를 모두 모았으나 어깨 살은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서 신들은 이 어깨만은 상아로 깍아 붙인 뒤 생명을 불어넣어 이 펠레프스를 되
살리게 했다.
6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웃나라의 왕들은 이 펠레프스를 위로하러 테바이로 모여들었다. 도시국가
시민들이 왕들에게 테바이로 가서 펠로프스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기
때문이다. 아르고스, 스파르타, 펠로프스의 고향 땅인 뮈케나이, 당시에는 디아나
여신으로부터 분노를 사지 않았던 칼뤼돈(62), 비옥한 오르코메노스, 구리가 많
이 나는 것으로 이름높은 코린토스, 사람들이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메세나, 파트
라이, 크게는 국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클레오나이, 넬레우스가 지배하고 있던
퓔로스, 피테우스의 치하에 들기 전의 트로이젠, 두바다를 낀 코린토스 지협양쪽
의 여러 도시 국가들...... 이 모든 나라에서 왕들이 펠레프스를 위로하러 왔던 것
이었다.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겠지만 아테나이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시
아테나이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바다를 건너온 야만족들이 성을 에워
싸고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라카이 사람 테레우스는 원군으로 아테나이로 달려가 이 야만족을 물리치고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아테나이 왕 판디온은, 테레우스가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재물이 많은데다가 저 위대한 그라보스(63)의 후손인 것을 마음에 두고 그와 끈
을 맺어두기 위해 딸 프로크네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식에
는, 가정의 여신인 유노도, 결혼의 신인 휘메나이오스도, 그라티아(64)도 나타나
지 않았다. 이들 대신 저 무서운 에우메니데스(65)가 화장하는 데서 옮겨붙인 횃
불을 들고 찾아왔다. 첫날밤의 잠자리를 꾸민것도 이 복수의 여신들이었다. 복수
의 여신들이 나다니자 올빼미(66)도 한 마리 신방이 있는 집 지붕에 앉아 아래
를 내려다 보았다. 이러한 흉조는 프로크네와 테레우스가 결혼할 때도 나타났지
만, 이들 사이에서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나타났다. 트라키아 백성들은, 이들
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왕과 왕비가 맞은 경사를 축복
했고, 왕과 왕비는 자기네 일족과 왕국에 내린 은총을 신들에게 감사했다. 테레
우스는, 자신과 저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결혼한 날을 축제일로 선포한 데 이
어 아들 이튀스가 태어난 날도 명절로 삼았다. 하기야 인간이 무슨 수로 한치
앞을 볼 수 있으랴! 세월이 흘러 가을이 다섯 번 지나간 어느 날 프로크네가 어
리관을 부리느라고 지아비 테레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를 사랑하신다면
사람을 보내어 제 친정 동생을 이리 오게 하든가 전하께서 좀 데려다주세요. 제
아버지께는, 곧 돌려보내겠다고 하시고요. 필로멜라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저에게
이보다 나은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우스는 곧 배를 준비하
라고 일렀다. 그러고는날을 잡아 트라키아를 떠나 돛과 노의 힘을 두루 빌려 케
크롭스의 땅(67)에 이르러 피라에오스(68)에 상륙했다.
(주) 62) 후일 디아나 여신은 이 칼뤼돈에다 미친 멧돼지 한 마리를 보내는데,
이로 인하여 이 칼뤼돈에서는 엄청나게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제8부5
장 참조.
63) ‘진군하는 자’리는 뜻. 전쟁신 마르스의 별명. 이 신은 무자비한 신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미개지인 트라키아 사람이면 다 마르스의 후손으로 여겼
다.
64) 복/그라티아이, 그/카리테스. 인간을 기쁘게 하는, ‘전아우미’의 세 여신.
에우프로쉬네(‘희열’), 아글라이아(‘빛’), 탈리아(‘개화’) 이렇게 셋이 꼽
힐 때도 있고, 아우코스(‘자라게 하는 자’), 헤게모네(‘힘으로 인도하는 자
’), 파엔나(‘빛나는 자’) 이렇게 셋이 꼽힐 때도 있다.
65) 푸리아에의 별명. 그/에뤼뉘에스. 복수의 여신들
66)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새.
67) 아테나이를 말함.
68) 아테나이의 외항
장인 판디온과 사위 테레우스는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그간의 긴긴회초를 풀었
다. 텔레우스는 자기가 아테나이에 온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청을 받고 처제를 데리러 온 것인 만큼 함께 가게 해주면 오래지 않아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말했다. 장인과 사위가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필로멜라가
들어왔다. 필로멜라는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바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오히려 이 성장이 무색했다. 필로멜라의 용모는,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나
깊은 숲 속에 사는 드뤼아데스를 묘사하는 데 어울리는 말로써나 설명할 수 있
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이들이 필로멜라를 보는 순간 테레우스의 가슴속에서
는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길은, 마른 옥수수 대궁이 아니면 건
초 창고를 태우는 불길만큼이나 빠른속도로 테레우스의 가슴속을 번져갔다. 필
로멜라의 아름다움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제 성격 탓에,
그럴 만한 정도 이상으로 애를 태웠다. 원래 트라키아 사람들은 지극히 감정적
이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성과 테레우스 자신의 성격 때문에 이 불길은 삽시간
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레우스는, 자기 왕국을 털어서라도
필로멜라를 옹위하는 시녀들에게 뇌물을 주고, 필로멜라를 기른 유모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필로멜라 자신에게도 귀한 선물을 안기고 싶다는 충동, 필로멜라를
납치하여 멀리 데려다놓고는 이 아름다운 볼모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 고삐 풀린 충동에 따른다면 테레우스에게는 못할 일
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안에서 번지며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 장인의 궁전에 더 머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시 바삐
아내 프로크네가 바라던 대로 필로멜라를 데리고 떠나 자기 속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사랑에 신들린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는, 필로멜라를
데려가게 해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면, 그 책임은 바로 그 일을 맡긴 프로
크네에게 있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호소
하기까지 했다. 마치 프로크네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듯이.....
오, 신들이시여, 이렇게 눈이 먼 인간들을 굽어살피소서. 테레우스가 검은 마
음을 품고 이렇듯이 고집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나이 백성들은 그를 참으
로 보기 드문 애처가라고 칭송했다. 결국 그들은 악행할 음모를 꾸미는 테레우
스를 칭송하고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는 필로멜라조차 그의 애절한 소망을 편들
었다. 필로멜라는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안고 형부를 따라가 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했다. 그러
나 형부를 따라가라는 말 한마디가 딸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
리 없었다. 테레우스는, 아버지를 조르는 필로멜라를 보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이
공주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의 목을 안은 채로 아
버지의 뺨에 입을 마ㅊ추었는데, 바로 이 광경이 테레우스의 불붙은 욕망에 끼
얹는 기름이자 던지는 섶이었다. 딸이 아버지 판디온을 껴안는 것을 보는 순간,
테레우스는 자신이 판디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속을 끓였다.
하기야 필로멜라의 아버지였더라도 테레우스의 의도가 불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마침내 아버지 판디온은 두 딸, 그러니까 동생을 보고 싶다는 큰딸 프로
크네와 언나를 보고 싶다는 작은딸 필로멜라의 간절한 소망 앞에서 굴복했다.
필로멜라는 기뻐 날뛰면서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이 가엾
은 필로멜라는 아버지가 승낙함으로써 자신과 언니 프로크네는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둘 다 파멸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
포에부스(69)가 갈 길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천마들은 저녁으로 통하
는 비탈길을 숨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왕실에는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황금
술잔은 포도주로 그득그득했다. 이 잔치가 끝나자 손님들 모두가 술에 취해 잠
이 들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는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주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테레우스는 그녀
의 얼굴, 그녀의 몸짓을 그리며, 자기가 보지 못한 것,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필경
은 자기 차지가 될 것들을 상상했다. 요컨대 그의 욕정은, 잠을 이루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새벽이 오자 테레우스는 귀국을 서둘렀다. 판디온 왕은 그의 손을 잡고 눈물
을 흘리면서, 데려가는 딸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한 다음 이런 말을 덧붙여 했
다.
“여보게, 자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보니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네.
그래서 자네 소망에 따라 이 딸마저 자네를 딸려 보내네. 테레우스, 이제 나는
두 딸을 자네에게 맡기고 말았네. 내, 자네의 명예에 기대고, 하늘에 계신 신들
을 증인 삼고,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한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를 믿고 부탁
하네만, 이 아비를 대신해서 이 아이를 잘 돌보아주고, 되도록이면 하루라도 빨
리 내게로 보내어주게. 나는 이 아이를 내 만년의 낙으로 사네. 때가 오면 이 아
이마저 떠나보내야 하겠지만......그리고 너 필로멜라, 네가 이 아비를 사랑하거든
되도록이면 하루 속히 돌아오너라. 네 언니가 친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으로도 내 가슴은 이미 넉넉하게 아프다. 그러니 네가 이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주) 69) 태양 수레를 모는 태양신으로서의 포에부스.
이 말 끝에 판디온 왕은 소리 없이 울면서 이 딸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딸
과 작별인사를 나눈 왕은 테레우스와 필로멜라의 손을 잡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게 한 다음 이 둘의 손을 잡게 하고는, 멀리 떠나 있는 딸과 외손자에게
안부를 따뜻이 전하라고 당부했다. 목이 메었던지 판디온 왕은 더 이상은 말을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근심과 걱정과,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
였을 텐데도.....
이윽고 필로멜라가 배에 올랐다. 바다가 나라의 노 끝에서 뒤로 밀려남에 따
라 육지도 멀어지기 시작하자 미개한 나라의 왕 테레우스는 외쳤다. “내가 이
겼다. 나는 드디어 그렇게 손에 넣기를 바라던 공주와 한배에 올랐다.” 승리에
도취된 테레우스는 그토록 기다리던 그 사랑의 순간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
었던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자신의 전리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발톱으로 메토끼를 채어 제 둥지에다 내려놓고, 오갈 데 없는 이 희생물을 탐욕
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약탈자인 독수리와 흡사했다.
이윽고 긴 항해를 끝마친 테레우스는 제 나라 해변에다, 이 긴 여행에 지친
배를 대었다. 테레우스 왕은 판디온의 딸 필로멜라를 끌고, 태고의 숲 속에 숨겨
져 있는, 담이 높은 오막살이에로 데려가 거기에 가두어버렸다. 필로멜라는, 무
섭지 않은 것이 없는 판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창백한 낯색을 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
는 프로크네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대신, 자신의 검은 마음을 고백하고는, 아
무도 돕는 이 없는 이 불쌍한 처녀를 힘으로 차지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를 부
르면서, 언니를 부르면서, 하늘에 계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와줄 것을 빌
었으나 하릴없었다. 필로멜라는 내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잿빛 이리의 이빨에 뜯기고 쫓기면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해 떨고 있는 어린
양, 아니면 제 피에 젖은 제 몸을 억센 독수리의 억센 발톱에 붙잡힌 채 떨고
있는 비둘기같이......
제정신이 돌아오자 필로멜라는 초상난 집에서 애곡하는 여자처럼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제 팔을 할퀴고, 제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그러다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이 정떨어지는 야만인, 이 무정한 약탈자야! 나를 보내면
서 눈물로 당부하던 내 아버지를 보고도 마음에 남은 것이 없더냐? 내 언니의
근심 걱정, 내 때묻지 않은 젊음, 네가 했던 혼인에 생각이 미치지 않더냐? 너는
인간의 도리를 짓밟았다. 이로써 나는 내 언니의 원수가 되었고, 너는 우리 자매
의 지아비가 되었으며 내 언니 프로크네는 내 원수가 되었다. 이 배신자야, 이런
죄를 지으려 했으면 왜 나를 죽여놓고 짓지 못했느냐.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
을...... 그랬더라면 나를 더러운 공모자로 만들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그랬
더라면 내 혼백만은 순결을 잃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그러나 하늘에 계신 신
들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신들에게 놀라운 권능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
라면, 나는 이 지경이 되었다만 신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온전하다면 너는 언젠
가 이 죄값을 물어야 할 게다. 나 역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네가
한 일을 낱낱이 고하리라. 내가 이 숲에 갇혀 있어야 할 팔자라면 나는 이 숲을
소리로 가득차게 하여, 내가 턱없이 당하는 것을 목격했을 터인 저 바위까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리라. 하늘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늘에 신들이 계신
다면 신들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말이 이 폭군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그런 그에게 두려운 것이 있을 리 만
무했다. 분노와 만용의 노예가 된 테레우스는, 한 손으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
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로멜라의 머리채와 두 손을 뒤로 모
두어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내리눌렀다. 칼을 본 필로멜라는, 죽을 수 있
겠다는 희망이 생겼던지 그에게 목을 들이대고는 그를 조롱하고 아버지를 불렀
다. 그러자 테레우스는 손가락으로 필로멜라의 혀를 잡고는 칼로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남은 혀뿌리는 여전히 필로멜라의 입 안에서 부르르 떨었고, 잘려진 혀
는 검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면서 못다 한 말을 마저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잘려진 혀는 갓 잘린 뱀 꼬리처럼 오그라들면서 주인의 발 아래서 죽어갔다.
필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이 잔인한 테레우스는, 이렇게 못할 짓을 해놓고
도 만신창이가 된 이 필로멜라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 죄많은 정욕을 채웠다
는 소문이 있다.
이런 짓을 해놓고 테레우스는 염치좋게도 아내 프로크네에게로 되돌아갔다.
왕을 본 왕비 프로크네는 동생은 어떻게 하고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테레우스
는 이야기를 꾸며, 아내에게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즉 슬픔에 잠긴 목소리, 비
탄에 잠긴 얼굴로 필로멜라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꾸민 목소리, 만든 얼굴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프로크네는, 금실로 가장
자리를 한 옷을 어깨에서부터 단숨에 찢어버리고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은,
주검 없는 무덤을 만들게 하고는 있지도 않은 필로멜라의 혼백에 제물을 바쳤
다. 프로크네는 이렇게 하고 동생의 기구한 팔자를 애곡했다. 그러나 프로크네가
정말 애곡했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태양신이 태양 수레를 하늘의 12궁 사이로 두루 몰고 지나가자 1년이 갔다.
독자들은, 필로멜라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필로멜라는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다 단단한 돌로 쌓아올린 담은 여자가 깨뜨리기에는 너무 튼튼했
다. 게다가 필로멜라는 혀를 잘려 벙어리가 되었는지라 자기가 당한 일을 누구
에게 발설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역경과 곤
경은 사람을 창조적이게 하는 법이다. 필로멜라는 베틀 같지도 않은 베틀에다
실을 걸고는 흰 바탕으로 베를 짜면서 거기에다, 자지가 그런 고통을 받게 된
사연을 붉은 글씨로 짜넣었다. 이 일이 끝나자 필로멜라는 이것을 몸종에게 주
면서 손짓발짓으로, 그 나라 왕비에게 전하게 했다. 몸종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필로멜라가 부탁하는대로 이것을 프로크네에게 전했다.
폭군의 아내는 그 천을 펴보고 나서야 사연을 알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
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었다. 프로크네는 쓰다달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프로크네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연은, 한마디 말로 그 반응을 나타내기에는 지나치게 슬픈 사연이기 때문
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응분의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사연이었다. 프
로크네에게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프로크네는, 복수할 계획을 세
우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이 복수 계획은, 선악의 잣대를 깡그리 벗어난, 참으
로 상궤를 멀리 벗어난 것이었다.
트라키아의 젊은 여자들이 박쿠스를 기려 3년마다 한 번씩 여는 엄숙한 축제
기간이었다. 이들이 베푸는 의식은 밤에 시작되는데 이 의식이 시자되면 로도페
산은 신도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와 바라소리로 찌렁찌렁 울린다. 밤이 되자 왕비
프로크네도 이 신을 경배하는 데 필요한 제구를 모두 갖추고 집을 나섰다. 머리
에 쓰는 포도덩굴 관, 왼쪽 어깨에 드리우는 사슴 털가죽,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
는 짧은 창, 이러한 것들이 박쿠스 신을 경배하는 제사에 필요한 제구이자 무기
였다. 프로크네는 몸종들을 거느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갖가지 생각으
로 착잡했다. 프로크네는, 박쿠스 신의 광란에 쫓기는 신도로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 프로크네가 쫓는 것은 슬픔 뒤에 오는 분노였다. 이윽고 프로크네는, 동생
이 갇혀 사는 오두막에 이르렀다. 오두막 문은, 박쿠스 신도 특유의 외마디소리
와 광란의 몸짓과 함께 부서져나갔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
리다가 박쿠스 신도들 의상을 동생에게 입히고는 머리에 담쟁이덩굴 관을 씌워
얼굴을 가려 왕궁으로 데려왔다.
필로멜라는, 자신이 그 저주받을 자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낯빛을 잃고 부들부들 떨었다. 프로네크는 동생의 머리에서 박쿠스 신도의 관을,
몸에서는 박쿠스 신도의 옷을 벗겼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껴안았으나 필로멜라
는 얼굴을 들고 언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언니가 불행
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로멜라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
었다. 그러나 필로멜라는 이로써, 말로써 전하는 것 이상으로 명백하게 자신의
뜻을 언니에게 전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하늘에 계신 신들에 맹세코, 테레우
스의 폭력에 저항할 힘이 없어 순결을 잃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프로크네는 흐느끼는 필로멜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칼을 갈아야 할 때다. 아니, 칼보다
나은 무기가 있다면 그것을 벼려야 할 때다. 필로멜라, 내게는 마음의 준비가 되
어 있다. 왕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테레우스를 그 불길 속에 던져넣으면 네 분이
가라앉겠느냐, 이 자의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너에게 범죄한 사지를 잘라 육
신으로부터 죄많은 영혼을 풀어내면 네 분이 풀리겠느냐. 시시한 복수는 안 된
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방도를 모르겠구나
”
프로크네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아들 이튀스가 제 어머니 방으로 들어왔
다.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프로크네의 머리 속에는 한가지 방도가 떠올랐다.
매정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면서 프로크네가 내뱉었다.
“어쩌면 제 아비와 이렇듯이 똑같이 생겼느냐?”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프로크네는 속으로 분을 감춘 채 복수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어미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 가녀린 팔로 어머니의 목을 안고 뺨에다 입을 맞출 때는 프로크네의 마음도
흔들렸다. 프로크네는 마음의 고삐가 풀려가고 있는 데 당혹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데도 프로크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
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복수의 결심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프로크
네는 시선을 이 아들에게서 동생쪽으로 옮겼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프로
크네는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어째서 하나는 나에게 사랑의 말로 응석을 부리는데, 하나는 혀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튀스는 나를 어미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필로멜라
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가. 아, 이 어리석은 판디온의 딸아, 네가 누구
와 혼인하였느냐? 너에게는 판디온의 딸이라고 할 자격도 없다. 테레우스 같은
자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프로크네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강게스 강둑에 사는 호랑이가 새끼
사슴을 깊은 숲 속으로 끌고 가듯이 아들 이튀스를 왕궁에 있는 한적한 밀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치고 있음을 예감했는지 두 손을 내
밀고 두 번이나,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면서 프로크네의 목을 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프로크네는 칼을 꺼내어 아들의 옆구리를 찌르고도 고개조차 돌리
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상이었으나 프로크네는 거기에서 손길을 멈추지
않고 다시 칼로 아들의 목을 도려버렸다. 이 이튀스의 몸이 산 사람의 몸과 다
름없이 온기를 간직하고 있느데도 자매는 이 아이의 사지를 몸에서 발라내었다.
방바닥은 이 아이의 피로 바다가 되었다. 자매는 이 사지의 살을 요리하되 일부
는 청동솥에 넣어 삶고 일부는 구웠다.
프로크네는 준비가 끝나자 아무것도 모르는 테레우스를 특별한 음식을 대접하
겠다면서 불렀다. 부르면서, 친정 나라의 풍습인 신성한 의식이라는 토를 달고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프로크네는 이로써 경호병이나 시종이
왕을 따라다니지 못하게 한 것이다. 테레우스는, 신성한 의식이라는 말에 조상
전례의 예복으로 치장하고 왕비의 초대에 응하여 앞에 놓인 고기를 맛있게 먹었
다. 물론 제 살인 줄도 모르고 맛나게 먹었다. 무슨 고기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먹던 그가 말했다.
“이튀스를 이리 불러오오”
프로그네는 더 이상, 감격의 순간을 유예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프로크네는,
자기의 입으로 이 복수가 성취되는 순간을 선언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아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찾는 아이는 여기에 있소. 바로 그대 뱃속에 있소”
테레우스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튀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는 다시 이튀
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튀스 대신, 조금 전에 죽은 이 아이의 피로 피투성이
가 된 필로멜라가 피 묻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이튀스의 머리를 들고 나타났
다. 필로멜라가 테레우스에게 내미는 이튀스이 머리에는 피가 뚝뚝 들었다. 필로
멜라는, 자기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을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이 순간에 어울리는 말을 적절하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
므로, 대로한 테레우스는 식탁을 걷어차고, 스튁스 나라71)에 사는, 배암 머리카
락의 자매72) 이름을 불렀다.
테레우스가 만일 복수의 여신들을 부를 수 있었다면, 저 자신의 가슴을 찢고,
제 손으로 발라먹은 인간의 살, 제 자식의 살도 토해 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
나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테레우스는 이제는 자식의 무덤이 되어버린
제 육신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던 그는 칼을 뽑아들고 판디온의 두 딸
을 뒤쫓았다. 판디온의 두 딸은, 도망치다 말고 문득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
다. 같은 숲으로 날아들어갔고 또 하나는 지붕 밑으로 날아들어갔다. 지붕 밑으
로 날아들어간 새의 가슴에는 살인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진홍빛 핏자국으
로 남아 있었다.73) 슬픔에 잠긴 채 복수를 서둘던 테레우스 왕도 새가 되었다.
머리에는 깃털로 된 긴 볏이 돋고, 부리가 칼날만큼이나 긴 새가 된 것이다. 금
방이라도 싸우려는 것처럼 무장하고 있는 듯한 이 새를 사람들은 <후투티>라고
부른다.
주) 71 : 여기에서는 ‘저승’이라는 뜻.
72 : 복수의 여신들인 푸리아이(그/에리뉘에스)를 말한다.
73 : 이로써 프로크네는 꾀꼬리, 필로멜라는 제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7 북풍신 보레아스
이 슬픈 소식을 들은 판디온 왕은 비명에 세상을 떠나 타르타로스 땅74)으로
내려갔다. 그의 사후 이나라의 왕권과 지배권은 에렉테우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에렉테우스는 정의롭고 힘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 에렉테우스 왕에게는 네 아들
과 네 딸이 있었는데 이 중의 두 딸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
웠다. 이 중 하나인 프로크리스는 아이롤로스75)의 손자인 케팔로스의 아내가 되
어 행복하게 잘 살았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딸 오리튀이아에 반하여 사랑을 애
원했으나 도무지 보람이 없었다. 그 까닭은, 저 테레우스의 비극 이래로 아테나
이 사람들이 트라키아 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76) 보레아스는, 본
성을 누그러뜨리고 에렉테우스 왕과 그 딸을 설득시키려 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판판이 실패로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보레아스는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
고 성정이 포악한 본래의 보레아스로 돌아가 이렇게 별렀다.
주) 74 : 저승
75 : 바람의 신
76 : 옛 그리스 사람들은 북풍의 신 보레아스가 부쪽에 있는 미개한 트라키
아 땅에 산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실패로 돌아간 게 당연하지. 완력과 폭력, 분노와 위협 같은 내 비장
의 무기를 포기하고 내 성격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애원과 호소에 기대를 걸었으
니...... 그래, 내게 어울리는 것은 폭력이다. 나는 폭력을 써서 검은 구름을 휘젓
고, 폭력을 써서 바다를 둘러엎고, 해묵은 떡갈나무를 뿌리째 뽑고, 눈을 얼리고,
대지를 눈보라로 때려야 한다. 그렇다. 하늘이야말로 나의 무대다. 우리의 무대
인 이 하늘에서 형제들77)을 만나면 이들과 겨루던 내가 아니던가? 우리들 주위
의 대기에서 천둥이 치고, 구름에서 번개가 튀어나오도록 겨루던 내가 아니던
가? 등을 둘려대고 지하세계의 나지막한 동굴로 들어가면, 지하세계를 진동시키
고 망령들까지 벌벌 떨게 만들던 내가 아니던가? 그렇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저
공주를 요구해야 한다. 애원할 것이 아니라 저 에렉테우스를 힘으로 굴복시켜
내 장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말과 함께 보레아스가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날개를 치자 강풍이 불어 온
땅을 휩쓸고 바다를 뒤엎었다. 보레아스는 지저분한 외투자락을 산꼭대기 위로
끌면서 땅으로 날아내려와 검은 구름에 가린 그 날개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오리튀이아를 채어올라갔다. 그렇잖아도 뜨겁던 그의 사랑은, 오리튀이아를 채어
가는 도중에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렇게 하늘을 날아 이윽고 키코네
스 인78)이 살던 한 도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아테나이의 공주는 이 혹한의 왕
자 보레아스의 아내가 되어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이 쌍둥이 아들은, 아버지처
럼 날개가 달려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외모는 대체로 어머니와 흡사했다. 그러
나 이들에게 처음부터 날개가 돋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름이 칼라이스와
제테스인 이들은, 황금빛 머리카락이 뺨을 덮으며 자랄 때까지는 날개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뺨에 노란 털이 자라면서부터 새처럼 어깨에서도 깃털이 돋기 시
작했다.
이들은 장성하자, 최초의 배79)를 타고 미뉘아스의 자손80)과 함께 미지의 바
다를 건너 빛나는 금양 모피81)를 찾으러 갔다.
주) 77 : 서풍인 제퓌로스, 남풍인 아우스테르(그/노토스)를 말한다.
78 : 헤브로스 강가에 살던 트라키아의 한 종족.
79 : 정확하게 말하면 최초의 원정선.
80 : 미위아스 왕에게는 제4부 1장에 등장하는 딸 세 자매 이외에도 클뤼메
네라는 딸이 있었다. 이 클뤼메네의 외손자가 다음 장에 나오는 원정대장 이아
손이다. 이 이아손이 ‘미뉘아스의 자손’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81 : 보이오티아 왕 아타마스와 왕비 네펠레 사이에는 아들딸이 있었다. 이
왕은 왕비에 대한 사랑이 식자 이노라는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이는데 이 후처
이노는 전처의 자식을 미워해서 어떻게 해서든 없애려고 했다. 전처 네펠레가
이 아이들을 살리려고 메라쿠리우스 신에게 기도하자 신은 황금빛 양 한 마리를
보내준다. 네펠레는 이 남매, 즉 아들 프릭소스와 딸 헬레를 이 양의 등에 태워
먼 콜키스 나라로 보내는데, 이 황금빛 양은, 이 둘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다, 도
중에 헬레는 바다에 떨어뜨리고 프릭소스만을 태운 채 무사히 콜키스 땅에 이른
다. 이때부터 헬레가 떨어진 바다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고 불린다.
한편 콜키스 땅에 이른 프릭소스는 이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는 황금빛 모피
는 그 나라 왕 아이에테스에게 선물로 준다. 아이에테스 왕은 이 황금빛 양의
모피, 즉 금양 모피를 전쟁신 마르스의 숲에 있는 떡갈나무에 걸어놓고 용 한
마리를 붙여 이를 지키게 한다. 다음 장에서 말하는 ‘금양 모피’는 바로 이
금양 모피다.
제 7 부
영웅의 시대
1. 이아손과 메데이아
미뉘아스의 자손들1)은 이올코스 땅 파가사이 항구에서 지은 배를 타고 먼 바
다로 나아갔다.2) 이들은 도중에서, 장님이 되어 영원히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하
는 피네우스3)를 만났다. 아퀼로4)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테스는 하르퓌아이5)를
쫓아버리고 이 노인을 구해 주었다. 미뉘아스의 자손들은 저 유명한 영웅 이아
손의 지휘 아래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파시스 강의 탁류를 거슬러올
라가 콜키스 나라에 이르렀다.
이들이 아이에테스 왕 앞에 나타나, 프락소스를 그곳까지 태우고 왔던 황금빛
양의 모피를 요구하자 왕은 까다로운 조건6)을 달았다.
주) 1 : 이아손 일행.
2 : 이올코스 왕 아이손에게는 배다른 아우 펠리아스가 있었는데, 펠리아스
는 형 아이손을 몰아내고 이 나라의 왕이 된다.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이 자라
왕위를 내어놓을 것을 요구하자 펠리아스는, 금양 모피를 찾아오면 왕위를 내어
놓겠다고 말한다. 이아손은 이때부터 그리스 각지의 영웅들을 모으는 한편 아르
고스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크고 빠른 배를 짓게 하는데 이렇게 해서 지어진 배
가 아르고 호(‘쾌속선’이라는 뜻이다). 이배를 타고 콜키스로 원정한 원정대원
들은 아르고나우타이(‘아르고 원정대원들’)라고 불린다.
3 : 후처의 중상모략에 전처의 자식들을 확대하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장님이 된 트라키스 왕. 이 피네우스는, 음식을 먹으려 할 때마다 하르퓌아이가
날아와 이를 채어가 버리기 때문에 영원히 배를 곯아야 한다.
4 :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별명
5 :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나 몸은 새의 몸인 괴물들, 칼라이스와 제테스는 하
늘을 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쫓아버릴 수 있었다.
6 : 아이에테스 왕은 이아손에게, 불을 뿜는 황소에 쟁기를 메워 전쟁신 마르
스의 밭을 간 다음 거기에다 왕뱀의 이빨을 뿌리고, 그 땅에서 돋아나는 무사들
과 싸워 이기면 금양 모피를 가져가도 좋다고 말한다.
이 나라의 공주 메데이아는 이 이아손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메데
이아는, 낯선 청년 이아손을 도와주려면 아버지를 배신해야 할 터이라 이아손을
향하는 자신의 마음과 싸웠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이성도 감정과 마찬가지로, 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 앞에서는 너무나도 미약했다. 메데이아는 이런 생각을 하면
서 혼자 고민했다.
“메테이아야, 저항해도 소용없다. 어는 신인지는 모르나 어느 신인가가 너의 마
음을 다스리고 있다. 아,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아
버지의 요구가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될 까닭이 없지. 아니다, 지나친 요구임에
틀림없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나는 왜 이아손의 파멸을 이다지도 두려
워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 이 어리석은 계
집아, 네 어리석은 가슴에 붙은 불을 꺼버리면 되지 않느냐? 그렇지, 끌 수만 있
다면 얼마나 나다우랴. 하지만 아무리 내가 마음을 다져먹어도 까닭을 알 수 없
는 짐이 나를 짓누르니 이 일을 어쩌지? 욕망은 나더러 이렇게 하라고 하고 이
성은 나더러 저렇게 하라고 하니 이 일을 어쩌지?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나는
알고 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나는 옳지 않은 길을 따르려 하고 있다. 콜키
스의 공주여, 너는 왜 이방인에 대한 사랑의 불길에 타고 있는가? 왜 이방인과
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가? 이 땅에도 사랑할 만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이아손이 죽든 살든, 그것은 신들의 뜻이다. 그런데도 이아손을 걱정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하기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걱정할 수는 었는 법, 죄없
는 이아손이, 왜 그렇게 모진 고초를 겪어야 한다지? 아, 저 젊음, 저 문벌, 무용
에 반하지 않을 못난 계집도 있을까? 젊음, 문벌, 무용이 하잘것없다고 하더라도
그 언변에 반하지 않을 못난 계집도 있을까? 확실히 저 분은 내 마음을 휘저어
놓았구나. 하지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분은 불 뿜는 황소의 숨결에 화상을
입거나, 자기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돋아날, 땅의 무사들과 싸워야 한다. 요행히
이런 시련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저 탐욕스러운 용의 먹이가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내가 호랑이 새끼가 아니 다음에야, 내 심장이 돌이나 쇠로 되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이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는 저 들판
으로 가서 저분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하지? 왜 나는 저분과 맞서는 황소를
충동질하지 않으면 안 되고, 땅에서 돋아난 무사들과 잠들지 않는 용을 편들면
안 되는 거지? 그래, 안 된다. 하지만 신들이시여, 저분을 도우소서. 아니다, 아
니다.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손을 써야겠다.
하면 나는 내 아버지의 왕국을 배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다행히 내 도움에
힘입어 이 미지의 용사가 승리한다면? 승리를 얻고는 나를 버리고 떠나 다른 여
자의 지아비가 되어버리고 나 메데이아만 홀로 남아 왕국이 내게 내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면? 안 된다. 저 사람이 만일에 그런 사람이라면,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할 만큼 배은망덕한 위인이라면, 파멸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하지만
아니다. 저 용모, 저 고결한 성품, 저 참한 사람됨됨이를 보라. 저런 사람이 나를
속일 것이라고, 내가 베푼 은혜를 잊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나는 손을 쓰기 전에 저 사람으로부터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고, 신들을 우리 약속의 증인으로 내세울 것이다. 이제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
는데 메데이아여, 왜 두려워하느냐? 이제 손을 쓸 준비나 하자. 지체해서 득될
것이 없다. 이아손은 영원히 나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할 게다. 그는 신성한
혼인을 서약할 것이고, 온 그리스 땅 여자들은 하나같이 나를 구주로 칭송할 것
이다.
그러면? 내 형제자매와 아버지와 신들과, 심지어는 내 모국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가야 할 테지? 못 갈 게 뭐 있더? 내 아버지는 잔인
한 분이고, 내 모국은 아직 미개한 나라, 내 동생은 아직 어리다. 자매들은 나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신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신(메데이아는 헤카테 여신을
말하고 있다. 메데이아는 헤카테 여신의 여사제다)은 내 가슴에 계시다. 내가 이
땅에다 남겨두어야 할 것들은 모두 고귀한 것들이다. 그리스 영웅을 구하는 영
예, 이 땅보다 훨씬 나은 나라, 먼 바다 해변에까지 그 이름이 두루 알려진 나라
에 대해 내가 얻을 새로운 견문. . . . . 이것이 어찌 고귀한 것들이 아닐까보냐.
그래, 그런 도시의 예술과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온 금은보화를
주고도 바꿀수 없는 이아손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아손을 지아비로 섬기면 온
세상 사람들은 나를, 하늘의 사랑을 입은 여자라고 부르겠지. 내 권세가 별을 찌
를 만큼 드높아질 테지.
그것은 그렇고 듣자니, 바다 한복판에서 서로 부딪치는 산(여기서는 보스포로
스 해협에 있었다는 쉼플 레가데스(충돌하는 바위라는 의미임)를 말함. 이 두개
의 바위 산은 그 사이로 무엇인가 지나갈 때마다 서로 맹렬한 속도로 다가서면
서 서로 부딪친다. 아르고 원정대원들도 이 난관을 지나 콜키스에 이르렀다. )이
있었다는데 이것은 무엇일까? 바닷물을 삼켰다가는 토해낸다는 카뤼디스(하루에
세번씩 조류를 삼켰다가 토해내었다는 해류의 소용돌이. 혹은 이를 의인화한 괴
물), 뱃사람들 공포의 대상이라는 이 카뤼디스는 또 무엇이고, 사나운 개들에 둘
러싸인 채 시켈리아(시실리를 말함)의 파도 아래에서 울부짖는다는 스퀼라(시실
리 섬 근처에 있는 암초. 혹은 이를 의인화한 괴물. 개의 머리가 줄줄이 꿰인 띠
를 두르고 있었다는, 머리가 여섯인 괴물. ‘카뤼디스와 스퀼라사이에서’라는
말은 ‘앞에는 호랑이, 뒤에는 이리’ 혹은 ‘진퇴양난’이라는 말고 그 뜻이
비슷하다.)는 또 무엇일까? 하지만 뱃길이 아무리 험한들 어떠냐? 사랑하는 분만
믿고 따르면 만사가 형통할 테지. 이아손의 가슴에 안겨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그분의 품 안에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내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오직 그
분뿐. 하지만 메데이아여, 너는 이것을 결혼이라고 부를 수가 있느냐? 너는 울림
이 좋은 이 말로 네 죄를 가림할 수 있다고 여기느냐? 네가 하려는 짓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아느냐? 알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잘 생각해 보고,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사악한 길에서 비켜서거라
이렇게 중얼거리는 메데이아의 눈앞에 덕, 효심, 순결같은 것들의 환영이 나타
났다. 이들에게 쫓겨 쿠피도(사랑의 신, 즉 사랑하는 마음)는 이미 저만치 날아
가고 있었다. (메데이아의 마음이 이아손을 돕지 말자는 쪽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메데이아 공주는, 숲 속 은밀한 곳에 있는, 페르세스의 딸 헤카테(페르세스는
메데이아의 아버지 아이에테스와 형제간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둘 다 태양신
솔의 아들인 것이다. 헤카테는, 저승에서 망령을 조종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무서
운 여신이자 마법의 여신, 대지의 풍요로운 생산성을 상징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의 오래된 신전으로 갔다. 메데이아의 마음은 이제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말
하자면 정열은 싸늘하게 식고 사랑은 메데이아의 마음을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아손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 문제는 달라졌다. 이아손을 다시 보는
순간 메데이아의 뺨은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새하얗게 변했다. 흡사 얼굴에서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꺼져 있던 정렬의 불길도
되살아났다. 잿더미에 묻혀 있던 불씨가, 문득 불어온 바람에 다시 타오르면서
원래의 그 왕성한 생명력을 되찾는 것처럼, 메데이아의 식어 있던 사랑도 이 청
년 앞에서 되살아나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메데이아가 그렇게 보아서
그랬겠지만 이아손의 모습은 이날따라 더욱 늠름해 보였다. 그랬으니, 메데이아
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이청년의 사랑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메데이아는 이 청년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메데
이아의 시선은 이 청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메데이아는 청년의 얼굴을 바
라보면서 아무래도 여느 인간의 얼굴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눈을
뗄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 미지의 나라 청년이 손을 잡고, 자기를 도와주면 은혜
를 잊지 않고 아내로 삼아 고향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을 때, 메데이아는 울음
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이러는 것은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랍니다. 내가
그대의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위업을 이루시고 돌아가시게
되거는 나와 한 약속을 잊지 말아주세요”
메데이아는 의식을 통하여 이아손으로 하여금 세 얼굴을 가진 여신(즉 헤카테
여신. 태양신 솔의 손녀인 이 여신의 이름 ‘헤카테’라는 말은 ‘빛을 멀리 던
지는 여신’이라는 뜻이다. 즉 이 여신의 족보와 이름을 보면 달과 무관하지 않
음을 알수 있다. ‘세얼굴을 가진 여신’이라는 별명도, 차고 기울고 이우는 달
의 세 얼굴을 암시하는 듯하다.), 숲에 거하시는 여신(역시 헤카테의 별명)께 맹
세하게 했다. 장차 장인이 될 이의 아버지 되시는, 만물을 빠짐없이 내려다보시
는 태양(이아손의 장인이 돌 아이에테스는 태양신 솔의 아들이다.), 이아손 자신
의 행운, 그리고 다음날 그가 맞닥뜨릴 위험에다가도 걸고 맹세하게 했다. 이아
손은 메데이아 앞에서 이 모든 것들에게 맹세하고, 메데이아에게 자기를 믿어줄
것을 빌었다. 그러자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마법이 걸린 약초를 주면서 그 쓰
는 법을 일러주었다. 이아손은 이 약초를 받아들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 숙소
로 돌아가 달게 잤다.
다음날, 새벽의 여신이 빛나던 별들을 쫓자 사람들은 전쟁신 마르스에게 봉헌
된 들판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이 들판 가장자리의 사면에 자를 잡았다. 아
이에테스 왕은, 보라색 용포로 성장하고, 상아 황홀을 들고는 이들 한가운데 자
리를 잡았다.
곧 청동 발굽이 달린 황소들이 나왔다. 이 황소들은 콧구멍으로 공기 대신에
불을 뿜었다. 이 불길이 닿자 풀밭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황소가 숨을 쉴
때마다 나는 소리는, 땔감을 잔뜩 쟁여넣은 용광로에서 나는 소리, 혹은 뜨겁게
달군 석회석에 물을 부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숨을 쉴때마다 이 황소의
가슴, 이 황소의 목안에 갇혀있던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나오면서 쉭쉭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은 앞으로 나아갔다. 황소
들은, 끝이 쇠로 된 뿔을 흔들어대고, 청동 발굽으로 땅을 차면서 그 무시무시한
머리를 이 새로운 적에게 들이대었다. 들판은, 이 황소들이 뿜어대는 불길과 연
기와, 이들이 내는 소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르고 원정대원들은
아연실색, 손에 땀을 쥐고 이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아손은 의연하게
황소들 가까이 다가갔다. 황소가 뿜는 불길도 그에게는 화상을 입히지 못했다.
메데이아로부터 받은 약초가 제 몫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아손은 대담하
게 황소 가까이 다가가, 목 아래로 늘어진 살을 거머쥐고는 멍에를 건 뒤, 재빨
리 쟁기를 메우고는 쟁기날로 땅을 갈기 시작했다. 콜키스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아르고 원정대원들은 함성으로 용감한 영웅 이아손을 응원했다.
땅을 갈아엎은 이아손은, 투구에 담아 들고 있던 왕뱀의 이빨을 뿌렸다.치명적
인 독액에 절여진 이 씨앗은 땅에 뿌려지자마자 말랑말랑해졌다가 곧 새로운 모
양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사람의 형상을 얻기까지
자라다가 모양이 완전해지면 세상에 나오듯이, 이 대지에서도 대지의 풍요로운
자궁 안에서 제 모습을 완전히 갖춘 인간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대지에서 돋아났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이 무
서운 무기를 들고 테살리아의 영웅 이아손을 공격하는 것을 보는 순간 아르고
원정대원들은 낯빛을 잃고 이아손을 근심했다. 이아손이 안전하도록 미리 손을
써놓은 메데이아조차도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렸다. 들판 가에 앉아,
수많은 무사들이 이아손 한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 메데이아
는 한기를 느꼈는지 오돌오돌 떨었다. 메데이아는 자기가 이아손에게 준 약초
의 효능이 모자랄 경우에 대비해서 은밀하게 주문을 외어 이아손을 도울 또 하
나의 방책을 세웠다. 그러나 이아손은 큰 돌 하나를 무사들 무리 한가운데에 던
졌다. 그러자 무사들은 이아손에게 겨누던 창칼을 저희 무리에게로 돌렸다. 대지
에서 돋아난 무사들은 저희들끼리 어지러이 치고 찔러 잠시 후에는 하나도 남김
없이 쓰러짐으로써 이 동족상잔을 끝냈다. 아르고 원정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승리자의 손을 잡거나 이 승리자를 뜨겁게 포옹했다. 미개한 나라 콜키스의 공
주는 승리자를 포옹하는 원정대원들이 부러워 견딜 수 없었지만, 제 나라 국민
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이 공주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아
손의 승리를 은밀하게 기뻐하며 마법의 효능과 그 효능을 베푼 신들에게 은밀하
게 감사를 드리는 일이 고작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마법을 써서, 잠들지 않는 용(이 용이, 금양모피가 걸린 떡갈
나무를 지키고 있다. )을 재우는 것이었다. 머리에 볏이 달려 있고, 꼬부라진 독
니 사이로 세 갈래 진 혀를 날름거리는 이 용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얼어붙게
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이아손이 레테(‘망각의 강’이라는 뜻. 저승에
있는 이 강을 건너는 순간 망자들은 이승 일을 깡그리 잊게 된다. )의 물과 그
효능이 비슷한 약초의 즙을 뿌리고, 성난 바다를 재우고 분류하는 강을 잠잠하
게 할 만한 위력을 지닌 주문을 세 번 외자 이 괴물은 그때까지 한 번도 감은
적이 없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은 괴물이 잠든 틈을
타서 금양 모피를 벗겼다. 이 귀한 물건과, 이 물건을 손에 넣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아름다운 처녀와 함께 이아손은 고향 이올코스 항구로 금의환향했다.
2. 이아손의 회춘
테살리아의 어머니들은 아들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한 것을 고맙게 여겨 신들
께 감사의 제물을 넉넉하게 바쳤다. 금의환향한 영웅들의 아버지들도 신들의 제
단 성화에다 향을 산더미같이 쌓아 사르고, 신들께 약속했던 대로 뿔에다 황금
띠를 두른 소를 제물로 잡아 바쳤다. 그러나, 이 감사 제례에 마땅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늙고 병들어 세상
하직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
것이 한스러웠던 이아손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내여, 내가 오늘 같
은 영화를 누리는 것은 다 그대 덕분이오. 그대는 내게 모든 것을 베풀었으니
나는 그대가 베푼 은혜 헤아릴 길이 없소. 그러나 할수 있어서(그대의 마법으로
할수 없는 일이 어디에 있으리오만,), 내 수명에서 몇년을 빼어내 아버지 수명에
다 보태어준다면 내가 더 무엇을 바라겠소?”
이아손은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주루루 흘렸다. 메데이아는 지아비의 지극한
효성에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 아이에테스를 배신하고 떠나온 자신의 경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그런 내색을 하지않고 짐짓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렇게 무리한 말씀이 어디에 있어요? 한 사람의 수명에
서 몇 년을 빼어 다른 사람에게 보태라니요? 헤카테 여신께서도 그런 것은 허락
하시지 않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서 내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시
는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이아손 님이시여, 나는 그대가 바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드리렵니다. 세 얼굴을 지니신 여신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면, 내가 하려는
일을 어여쁘게 보아주신다면, 그대 수명에서 빼지 않고도 아버님의 젊음을 되찾
아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달의 양쪽에 솟아난 두개의 뿔이 만나 보름달
이 되려면 사흘이 남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사흘이 지나 이윽고 달이 그 둥근
얼굴로 온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 날 밤, 메데이아는 발밑까지 치렁치렁 드리워
지는 옷차림에 머리는 풀어 어깨위로 틀어뜨린 채 맨발로 집을 나왔다. 메데이
아는 한밤의 적막 속을 홀로 걸어 혼자만 아는 곳으로 갔다. 새도, 짐승도, 사람
도 모두 잠든 시각이었다. 산울타리 속에서도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나무잎은 그저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밤안개 속을 흐르는 것은 적막뿐
이었다. 자지 않는 별만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별들이 빛나는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들고 메데이아는 그 자리에서 세 바퀴 돌고, 저승의 강에서 길어온 물
을 세 방울 머리에 뿌린 다음 세 번 하늘을 향해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런 다
음 메데이아는 굳은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오, 제 비밀을 빈 데 없이 어
둠으로 가려주시는 밤의 신이시여, 달과 함께 태양빛을 계승하시는 금빛 별의
신들이시여, 제가 하는 일을 속속들이 굽어보시고 저를 도우시어 마법을 쓰게
하시고 주문을 읊게 하시는, 세 얼굴을 지니신 헤카테 여신이시여, 마법사의 영
험한 약초를 품어 기르시는 대지의 여신이시여, 대기의 신이시여, 바람의 신들이
시여, 산의 신들이시여, 강의 신들이시여, 호수의 신들이시여, 숲의 정령들, 밤의
정령들이시여. 저 있는 곳으로 임재하시어 저를 도우소서. 도우시면 능히, 흐르
는 강의 물길을 돌리고 그 근원으로 거꾸로 흐르게 하여 둑을 놀라게 하고, 노
래로 상난 바다를 달래고, 잔잔하던 바다를 노호하게 해 보이겠나이다. 주문과
마법으로 구름을 모으고, 모은 구름을 비산시키고, 바람을 부르고, 부근 바람을
잠재우고, 배암의 아가리를 찢어 보이겠나이다. 저를 도우소서. 도우시면 살아
있는 바위와 나무의 뿌리를 뽑고,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참나무도, 온 숲째 뽑아
보이겠나이다. 저를 도우소서. 도우시면 산들을 떨게 하고 대지를 울리게 하고,
망령이 그 무덤에서 솟아오르게 해 보이겠나이다. 저를 도우소서. 도우시면 테케
세의 구리바라(구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남 이탈리아의 도시 테메세에서 만든
바라)가 아무리 우렁차게 울려도 저 루나(그 셀레네. ‘달’)여신을 하늘에서 사
라지게 해 보이겠나이다.(당시 사람들은, 월식때마다 구리바라를 치고 북을 울리
면 달이 하늘에서 사리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신들이시여, 저를 도우시면, 제
노래에 제 조부의 수레(태양수레)도 그 빛을 잃을 것이요, 제 마법에 아우로라
(그 에오스. ‘새벽’)도 그 빛을 잃을 것입니다. 저를 대신하여, 불 뿜는 황소의
숨결을 누그러뜨리시고, 어떤 고삐에도 묶여본 적이 없는 황소로 하여금 그 쟁
기를 끌게 하신 분들도 신들이십니다. 신들께서는 황뱀의 이빨에서 돋아난 무사
들 사이에 자중지난이 일게 하시고, 한 번도 잠을 자본 적이 없는 용의 눈을 감
기시어 영웅으로 하여금 금양 모피를 벗겨 무사히 그리스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
습니다. 이제 저에게는, 한 노인의 젊음을 되찾아줄 기적의 약이 필요합니다. 저
의 원을 들어주소서. 들어주시려거든 그 표적으로 별이 유난히 반짝이게 하시고
날개 달린 용이 끄는 수레가 제 앞에 당도하게 하소서. ”
정말 하늘에서, 비룡이 끄는 수레가 날아내려와 메데이아의 앞에 멈추었다. 이
수레에 오른 메데이아는, 수레를 끄는 비룡의 목을 쓰다듬고는 목 위에 얹힌 고
삐를 가볍게 챘다. 그러자 비룡은 수레를 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메데이아의
눈에는 순식간에 테살리아의 템페 계곡이 저만치 아래로 보였다. 메데이아는 이
수레를 미리 정한 모모한 곳으로 몰았다. 먼저 오사 산, 험한 펠리온 산, 오트뤼
스 산, 핀도스 산, 이들 산보다는 훨씬 높은 올림포스 산의 약초를 일일이 둘러
보고는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은 뿌리째 뽑고, 어떤 것은 날이 넓은 칼로 대를 베
었다. 메데이아는 아파다노스 강가에서도 약간의 약초를 거두었고, 암프뤼소스
강가에서는 많은 약초를 취했다. 에니페우스 강가에도 메데이아에게 필요한 약
초가 있었다. 페네이오스 강, 스페르케오스 강도 메데이아를 도와주었고, 보이베
강의 갈대 우거진 둑도 메데이아에게 요긴한 약초를 대어주었다. 메데이아는, 에
우보이아 섬 맞은편에 있는 안테돈에서, 장수에 효험이 있는 약초도 거두었다.
이 약초는 후일 글라우코스(안테돈의 어부. 해변에서 자라고 있는 이 풀을 먹고
는 불사와 예언력을 얻어 후일 해신의 반열에 들었다. )를 전신시키게 되나 당시
에는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약초였다.
메데이아는 아흐레 밤낮을, 비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방방곡곡을 다니며 약초
를 모아들였다. 메데이아가 궁궐로 돌아온 것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수레를
끌던 비룡들은 메데이아가 모아들인 약초의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도, 온몸에 나
있던 주금살이 다 펴졌다. 메데이아는, 떠난 자리에 이르고도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서 머물렀다.
메데이아는 남성의 접근을 물리치고 뗏장을 떠서 문 밖에다 두 기의 제단을
쌓았다. 오른쪽 제단은 헤카테 여신에게 바치는 제단, 왼쪽 제단은 유벤타(‘청
춘’이라는 뜻. ‘유벤타스’라고도 불린다. 그리스 신화의 헤베(‘청충’)와 동
일시되는 여신으로 로마시대에는 성년 남자의 수호여신이었다. 유피테르와 유노
사이에서 태어난 이 여신은 신들이 사는 천궁에서 신주 따르는 일을 한다. 후일
영웅 헤라클레스의 아내가 된다. ) 여신에게 바치는 제단이었다. 메데이아는 제
단 위에다, 숲에서 걷어온 덩굴을 걸고, 그 옆에 구덩이를 두 개 파고는,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검은 양을 한 마리 끌어다 칼로 그 목을 땄다. 이어서 이 구덩이
를 검은 양의 피(검은 양은, 저승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천상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제단을 쌓지만, 저승 세계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제단
을 쌓는 대신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다 제물을 놓는다. )로 채운 메데이아는, 그
위에다 포도주 한 잔씩과 더운 우유 한잔씩을 더 부은 다음 주문을 외어 대지의
정령들을 부르고, 지하세계의 왕(플루토. 그/헤데스)과, 이 왕의 손에 납치당하여
저승으로 끌려갔던 왕비(프로세르피나.그/페르세포네)에게는, 노인 아이손이 들것
에 실려 밖으로 나오자 메데이아는 이 노인을 약초로 짠 자리에 눕히고 마법으
로 깊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마법을 건 지 오래지 않아 아이손은 죽은같이 깊
은 잠에 빠져들었다. 준비가 끝나자 메데이아는 아이손의 아들과 근신들에게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서, 성별되지 않은 잡인은 밀의를 엿보아서는 안 된다
는 말로 이들을 내쳤다. 이들을 내치자 메데이아는 머리를 풀고 박쿠스 무녀처
럼 제단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한동안을 그렇게 돌던 메데이아는 가느다란 횃
대를 구덩이의 검은 핑에 담갔다가 이 횃대에 불을 붙여 제단에다 옮겨붙이고
는, 노인의 몸을 불로 세 번, 물로 세 번, 유황으로 세 번을 닦았다. 그 동안, 메
데이아가 불 위에 올린 가마솥에서는, 약초즙이 흰 거품을 내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메데이아는 여기에다, 하이모니아 계곡에서 거두어온 약초의 뿌리와 종
자와 꽃과 즙을 넣고, 또 극동에서 가져온 돌, 오케아노스(영/오션.‘대양’)의
파도에 씻긴 자갈, 보름달 밤에 내린 이슬, 부엉이 고기와 날개, 인간으로 둔갑
할 수 있다고 믿어지던 이리의 내장을 넣었다. 메데이아는 또, 키뉘프스의 시내
에 산다는 물뱀의 비늘, 장수하는 짐승으로 유명한 노루의 간장, 270년 묵은 까
마귀 대가리와 부리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개한 나라에서 온 공주는, 인간
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백 가
지의 약재를 더 넣었다.
메데이아는 이 약을, 오래 전에 열매 달린 나무에서 꺾어 온 감람나무 막대기
로 고루 천천히 저었다. 메데이아가 이 뜨거운 약을 젓고 또 젓자 희안하게도
감람나무 막대기가 파랗게 변하더니, 잠시 후에는 잎으로 뒤덮였고, 또 잠시 후
에는 열매가 열렸다. 불길이 세어서 그런지 가마솥 가장자리로는 약이 넘쳐 그
옆의 땅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약이 들은 땅이 파랗게 변하면서 여기에서
는 곧 풀이 돋았고 이 풀에서는 꽃이 피었다.
이를 본 메데이아는 칼을 뽑아 노인의 목을 따고는 늙은 피를 깡그리 뽑아내
고 칼로 딴 자리와 입으로 약을 부어넣었다. 늙은 아이손은 입으로, 메데이아가
열개한 목의 상처로 이 약을 마셨다. 약이 들어간지 오래지 않아 그의 하얗던
수염이 그 흰 빛을 잃더니 곧 검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의 노구에서 보기에
거북하던 모습이 사라지면서, 살빛이 되살아났다. 주름살에 덮여 있던 그의 살갗
은 다시 근육으로 부풀어올랐고, 그의 사지는 늘어나면서 힘줄이 불거지기 시작
했다. 노인은 달라진 자기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40년 전의 자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이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박쿠스 신은
자기를 기르느라고 늙어버린 유모들을 생각하고는, 이 콜키스의 공주인 메데이
아로부터 이 약을 얻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유모들이란, 뉘사 산에서 박쿠스를
기른 요정들을 말한다. ‘휘아데스’라고 불리는 이 요정들은 이 공로로 뒷날
별무리가 되었는데 이 별무리가 바로 휘아데스 성단이다. 이 휘아데스 성단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은 박쿠스 신의 이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3. 펠리아스
메데이아의 마법이 여기에서 끝난것은 아니다. 메데이아는 지아비인 이아손과
부부싸움을 한 것으로 가장하고, 이아손의 숙부인 펠리아스의 궁전으로 가서는
제발 좀 숨게 해달라고 빌었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의 왕좌를
빼앗은 바로 그 사람이다. 펠리아스는, 늙어서 이 메데이아를 숨겨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딸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콜키스 공주에게 숨어살 만한 거처를
베풀어 주었다. 메데이아는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능수능란한 마법사 메
데이아에게, 그런 처녀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아닌게아니라 식은죽 먹기였다. 일
단 이들의 환심을 산 메데이아는, 자기가 이아손을 위해 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
를 들려주면서,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의 청춘을 되찾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뜸
을 들여가며 상세하게 했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메데이아에게
잘만 청을 넣으면 자기 아버지 펠리아스도 청춘을 되찾을 수 있겠구나, 이런 생
각을 하게 되었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이런 희망을 갖는 데 그치지 않고 메데이
아에게, 같은 방법으로 자기네들의 아버지도 젊음을 되찾게 해달라고 애원하면
서 아무리 값이 많이 들어도 기꺼이 치르겠다고 말했다. 메데이아는 한동안 아
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끈 것
이었다. 펠리아스의 딸들이 물러서지 않고 졸라대자 메데이아는 못 이기는 척하
고, 한번 해보겠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대들은 내 마법이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걸 보여드리기 위해, 그대들의 양떼를 인도하는 늙은 우두머리 양에게 내 마
법을 걸어 다시 어린 양으로 만들어 보이지요. ”
메데이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펠리아스의 딸들이 시종들에게 명하여,
움푹 팬 관자놀이에 배배 꼬인 뿔이 달린 늙은 양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늙을 대로 늙고 마를 대로 마른 양이었다. 메데이아는 테살리
아 사람들이 쓰는 칼로 이 양의 깡마른 목을 땄다. 워낙 늙은 양이라 흐르는 피
의 양도 보잘것없어서 칼날이 겨우 젖을 정도였다. 메데이아는 이 양의 사지를
잡아 마법의 약과 함께 청동 항아리에 넣었다. 그러자 양의 사지가 순식간에 줄
어들고 뿔이 없어지더니 잠시 뒤에는 새끼 양 한 마리가 매, 하고 울면서 청동
항아리 안에서 뛰어나왔다. 보는 사람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이
새끼 양은 젖을 먹여줄 암양을 찾아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펠리아스의 딸들
이 이를 보고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메데이아가 이로써 기적의 한 자락을
보이자 펠리아스의 딸들은 자기네 아버지에게도 같은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재촉
했다.
포에부스가 세 번 히베리아(혹은 이베리아.‘서방’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을 가
리킨다. )의 바다에 잠겨 천마로부터 멍에를 벗겨낸 다음날 밤,(포에부스는 태양
신이니까,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 되는 날 밤’이라는 뜻이다. )별들이 하늘에
서 빛나고 있을 즈음, 아이에테스의 사악한 딸 메데이아는 가마솥에 맹물을 부
어 불 위에 올리고는, 모양을 내느라고 별 효험도 없는 약초를 잔뜩 집어넣었다.
펠리아스왕은 죽은 듯이 침실에 누워 있었다. 그의 신하들은 메데이아의 강력한
주문에 걸려 모두 깊이 잠들어 있어서 황의 옆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펠리아
스의 딸들은 메데이아의 명에 따라 아버지의 방, 아버지의 침대 곁에서 기다렸
다. 이윽고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자 메데이아가 이들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칼을 뽑아 부왕의 핏줄을 자르고,
연세가 너무 드신 피를 모두빼내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대들 어버지의 생
명, 그대들 아버지의 회춘은 바로 그대들 손에 달려 있답니다. 그대들이 아버지
를 사랑하거든, 그대들이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거든 아버지에 대한 의무를
다하세요. 칼을 들어 아버지의 몸 속을 흐르는 노추를 한 방울 남김없이 비워내
세요. 칼질 한번이면 몸 속의 피가 남김없이 흘러나올 테니까요」
메데이아의 귀밑 충동질에 귀가 솔깃해진 펠리아스의 딸들은, 천하의 불효막
심한 짓을 했다. 하지 않으면 불효막심한 죄를 짓는 줄 알고 우루루 아버지의
침대 곁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이면 딸일수록 먼저 아버지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차마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펠리아스의 딸들은 차
마 아버지의 목으로 칼이 들어가는 것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로, 어림잡아 아버지의 목을 찔렀다. 펠리아스는 피
투성이가 된 다음에야 눈을 뜨고 딸들을 바라보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칼을 든 수많은 손에 둘러싸인 것을 안 수간 펠리아스는 두 팔
을 벌리고 외쳤다.
「얘들아, 무슨 짓이냐? 왜 칼을 들고 아비를 난도질하는 것이냐?」
그의 말에는 힘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펠리아스가 그나마 말을 이으려
하자 메데이아는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도려버렸다. 메데이아는, 그러고도 마음을
놓을 수 없던지 고깃덩어리가 된 펠리아스의 몸을 가마솥의 끓는 물에다 집어넣
어버렸다.
4. 메데이아의 도망
비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았더라면 메데이아는 큰 벌을
받았으리라. 비룡이 끄는 수레는 켄타우로스인 현자 케이론의 고향이자, 저 저주
받은 여자 필뤼라가 살던 펠리온산을 넘고, 오트뤼스 산을 넘어, 케람보스 이야
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땅의 상공을 지났다. 케람보스는, 온 땅이 물에 잠
긴 저 데우칼리온 대홍수 때 요정들로부터 날개를 얻어 살아난 자이다. 이어서
메데이아는 아이올리스의 피타네 마을과 석상이 되어버린 수많은 왕뱀을 왼손
편으로 내려다보며, 리베르가 아들이 훔친 황소를 수사슴으로 둔갑시켜 감추어
주었다는 이다 산의 숲, 코린토스의 아버지가 모래 언덕에 묻힌 것으로 유명한
땅, 마이라가 기묘한 소리로 뭇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광야, 헤라
클레스 일행이 지나갈 당시 이미 코스 섬 여자들이 암소로 변신해 있던 에우뤼
퓔로스의 마을 상공을 지났다.
포에부스가 사랑하던 로도스의 섬, 텔키네스 일족이 살던 이알뤼소스 상공을
지나기도 했다. 이 텔키네스 일족은 원래 눈에 띄는 것은 마법의 눈빛으로 죽여
버리는 권능의 소유자들이었는데, 이 때문에 수장된 종족이었다. 이어서 메데이
아가 탄 비룡 수레는, 옛날 알키다스의 딸이 죽자 그 시신에서 한 마리 비둘기
가 날아 나왔다는 케아 섬의 카르타이아 성벽 위를 지났다.
34) 펠리아스를 죽인 죄로 벌을 받았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메데이아는 잔
인한 여자다. 이아손과 함께 금양 모피를 가지고 조국을 탈출할 때도 메데이아
는, 아버지 군대의 추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미리 잡아온 어린 동생 압쉬르토스
를 죽이고 그 시신을 토막내어 바다에 버렸다. 이아손 일행은, 메데이아의 아버
지가 아들의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를 동안 무사히 그 나라를 빠져나올 수 있었
다. 그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 이아손이 다른 나라
공주에게 마음 두는 것을 알고는 마법을 써서, 제가 낳은 이아손의 두 아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의 배신을 복수하고는 도망치기에 이른다.
35) ‘보리수’라는 뜻. 잠시 말로 둔갑한 사투르누스의 사랑을 받고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말인 켄타우로스 케이론을 낳았다가, 자식의 모습이 하도 괴상한
데 충격을 받고는 보리수가 된 불행했던 여자.
36) 이로써 케람보스는 ‘케람뷔코스’, 즉 턱이 흡사 투구뿔 같은 하늘가재가
되었다.
37) 리베르, 즉 박쿠스 신이 아들 뒤오네오스가 황소를 한 마리 훔쳐오자 주인
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들은 사냥꾼, 황소는 수사슴으로 둔갑하게 하여 이를 숨
겨주었다는 옛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뒤어네오스는, 정확하게 말하면 박쿠스의
아들 이름이 아니라 박쿠스 자신의 이름이다. 따라서 박쿠스는 아들을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38) ‘코린토스의 아버지’는, 트로이아 왕자 파리스의 아들을 말한다. 파리스
는, 아들이 자기의 후처인 저 천하제일의 미녀 헬레네의 사랑을 지나치게 받는
것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잘생긴 이 아들을 모래 언덕에 파묻어 죽였다.
39) 개로 둔갑했던 여인.
40) 이 나는 해적인 줄 알고 헤라클레스와 대적했다가 그 손에 맞아죽었다. 이
곳 처녀들은 베누스 여신보다 아름답다고 자만하다가 암소로 변신하는 변을 당
했다.
41) 해신 넵투스의 딸로 태양신의 사랑을 받고는 딸 일곱을 낳았다.
이윽고 메데이아의 눈 아래로, 휘리에 호수와, 퀴크노스가 한 마리 백조로 변
신한 곳으로 유명한 템페 계곡이 펼쳐졌다. 퀴크노스가 백조로 변신한 이야기는
이러하다. 퓔리오스라는 사람이 이 퀴크노스 소년을 사랑하여, 소년이 소원하는
바에 따라 처음에는 들새를 길들여, 그 다음에는 사나운 사자를 길들여 이 퀴크
노스에게 주었다. 퀴크노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퓔리오스에게 들에 사는 황소
를 한 마리 잡아 길을 들여보라고 했다. 퓔리오스가, 소년이 시키는 대로 황소를
잡아 길들이자 소년은 이 황소까지 자기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
42) 알키다스는, 딸 크테쉴라에게 구혼해 온 청년 헤르모칼레스에게 딸을 주기
로 약속했다가 이 약속을 어기고 다른 청년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다른데 시집
간 이 딸은 약속을 어긴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이를 낳다가 죽는데 그 시신을
매장하려고 보니 비둘기가 한 마리만 날아 나왔을 뿐 시신은 흔적도 없더라고
한다.
퓔리오스가 이를 거절하자 퀴크노스는 화를 내고는, 「거절한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이러면서 벼랑 꼭대기에서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 소년은 퓔리오스의 예상과
는 달리, 계곡에 떨어져 죽는 대신 한 마리 백조가 되어 눈같이 흰 날개를 펄럭
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 소년의 어머니 휘리에는, 아들이 백조가 되긴 하
였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줄은 모르고,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그 몸이 녹아내리
면서 호수가 되었는데 이 호수가 바로 휘리에 호수다. 이 근방에는 또, 오피우스
의 딸 콤베가, 자식들의 해코지를 피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플레우론 마을이
있었다.
메데이아는, 어느 왕과 그 왕비가 새로 둔갑했다는, 라토나 여신의 섬 칼라우
레아 벌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으로는, 메네프론이 그 어머니의 방을 범하려
했다는 옛이야기로 더러운 이름을 얻은 퀼레네 산마을이 보였다. 멀리 아폴로의
손에 뚱뚱한 물개로 둔갑해 버린 손자들의 슬픈 운명을 애통해하는 케피소스 강
과, 이제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버린 아들의 운명을 슬퍼하는 에우멜로스의
집도 보였다.
마침내 메데이아를 실은 수레는 페레네 성천이 있는 코륀토스 땅에 이르렀다.
전설에 따르면, 비에 눅눅하게 젖은 이끼에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땅이다.
이아손이 새로 맞아들인 아내가, 메데이아가 쓴 콜키스의 독물에 타죽은 다음
의 일이었다. 메데이아는, 자기를 버린 이아손에 대한 복수의 손길을 멈추지 않
고, 궁전을 불싸지르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우이나 죽인 뒤에 이아손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친 것이었다. 비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메데이아는 팔라스 여신의
성도 아테나이, 정의의 권화로 불리는 페네와 그녀의 연로한 지아비 페리파스가
새가 되어 사이좋게 하늘을 나는 도시, 폴뤼페몬의 손녀 알퀴오네 역시 새로 얻
은 날개로 공중을 선회는 도시로 들어갔다. 아테나이왕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
를 환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내로 삼기까지 했다.
43) ‘퀴크노스’라는 말은 ‘백조’라는 뜻이다. 신화에는 퀴크노스라는 동명
이인이 많이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거의 대부분 동성연애와 관련되어 등장
한다는 것이다.
44) 아티카의 전설적인 현군. 아폴로를 극진히 섬겼다가 이를 질투한 유피테르
의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아폴로는 이들을 새 중의 새인 독수리가 되게
했다.
5. 아테아니의 영웅 테세우스
이즈음 테세우스는, 두 개의 바다 사이에 갇힌 이스트모스를 그 빛나는 무용
으로 평정하고 아테나이에 이르렀다.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 왕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를 안 메데이아는 오래 전에 스퀴
티아 해변에서 따온 바곳이라는 독초로 독약을 제조하여 이로써 테세우스를 죽
이고자 했다. 이 약초는 저승궁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의 이빨에서 생겨난 풀
로 알려져 있다. 스퀴티아에 이 약초가 있었던 것은, 이곳에 있는 한 동굴이 저
승 세계로 통하기 때문이다. 타륀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저승으로 낼여가 몸부림
치는 이 케르베로스를 사슬로 묶어 끌고 나온 것도 이 동굴을 통해서였다. 당시
날빛을 쐰 적이 없는 이 개는 날빛 아래로 나오자 세 개의 머리를 내두르고 몸
부림치면서 몹시 짖었는데 이 바람에 이 개의 입에서 들은 침이 바닥을 적셨다.
이 침이 굳어졌다가 기름진 대지에 뿌리를 박고 풀로 돋아나니 이 풀이 바로 그
유명한 독초가 된것이란다. 이 풀이 단단한 바위 위에서만 자란다고 해서 사람
들은 이것을 <아코니톤>이라고 부른다. 새기면 <바위꽃>이 된다.
하여튼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가 독약을 타서 건네준 술을 자기 아들에게 권
했다. 물론 아들인 줄 모르고 권했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영문을 모르고 이 독약
이 든 술을 마시려 했다. 그러나 아이게우스는 그 순간 테세우스가 찬 칼의 상
아 자루에 자기 왕가의 몬장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잔을 빼앗
아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메데이아는 주문을 외어 검은 구름을 일으키고는
그 안으로 숨어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이 무사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한편 자기가 지을 뻔했던
죄에 대하여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몹시 괴로워 했다. 그래서 그는 제단
에 불을 밗히고 신들에게 많은 제물을 바쳤다, 목에 꽃다발을 두른 수많은 황소
들이 끌려나와 그 튼튼한 목으로 제단의 도끼날을 받고 쓰러졌다. 아테나이 사
람들로서는 처음으로 누려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수많은 도시국가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이 잔치에 참석했다. 포도주가 입을 열게 하자 이들은 이
구동성으로 테세우스를 찬양했다.
45) ‘지협’이라는 뜻. 즉 코린토스 지협을 말한다.
46) 아이게우스는 트로이젠 땅에다 이 아들을 낳아놓고 아들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장성하면 자기에게 보내라면서 댓돌 밑에다 가죽신과 단도를 숨겨 놓는
다. 테세우스는 열여섯 살이 되자 아버지가 남긴 이 신표를 꺼내어들고 코린토
스 지협의 괴물과 망나니들을 하나씩 정복하면서 아테나이에 도착한 것이다.
47) 메데이아는 여기에서 아시아 땅으로 도망쳐서 나라를 건설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이나라가 ‘메데아’라는 것이다.
「전능하신 테세우스시여, 그대는 그 뛰어난 무용으로 크레타의 황소를 죽임
으로써 마라톤 평원에다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그대의 공덕에 힘입어 크
로미온의 농부들은 멧돼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에피다우로스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쇠몽둥이를 휘두르던 불카
누스의 아들이 그대의 손에 꺼꾸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웅이시여, 그대는 케
피소스 강가에서는 프루크루스테스를 죽이셨고, 소나무 가지를 휘어 이를 줄로
단단히 묶고, 길손을 붙잡아다 가랑이를 이 소나무에 각각 하나씩 묶었다가 줄
을 끊어 길손의 가랑이를 찢어 죽이는 저 악명높은 시니스 역시 영웅의 손에서
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48) 헤라클레스가 크레타에서 끌어와 마라톤 평야에 풀어놓았던 황소. 테세우
스는 마라톤 평야를 황폐케 하던 이 황소를 죽였다.
49) 테세우스는 아테나이로 오는 도중 이곳에서 파에아라고 불리는 괴악한 멧
돼지를 죽였다.
50) 테세우스는 이곳에서, 쇠몽둥이로 길손들을 괴롭혀온 악당 페리페데스를
죽였다. 이 페리페데스의 별명은 ‘콜뤼네테스’, ‘몽둥이질의 명수’라는 뜻이
다.
51) ‘두들겨서 펴는 자’라는 뜻. 침대를 하나 두고 길손을 붙들어다 놉혀보
고는 키가 너무 크면 잘라서 죽이고 너무 작으면 늘여서 죽였다는 괴인. 역시
테세우스 손에 죽었다.
52) 길손에게 씨름을 하자고 졸라 팔로 상대의 목을 감아 죽이던 망나니. 역시
테세우스 손에 죽었다.
영웅께서 저 도둑 스키론을 잡아죽이신 이래로 알카토에와 메가라로 가는 길
에서는 이제 근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자의 뼈는 땅도 바다도 거두어주기
를 거절하였다지요. 오랫동안 굴러다니다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스키론>이라고 부른다지요. 누가 그대의 나이를 듣고 그
대의 공적을 믿으려 하리요. 그대는 어리신 연치에 참으로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영웅이시여,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가 드리는 잔을 받으소서」
궁전은 환호성과 백성이 부르는 노래로 떠나갈 듯했다. 아테나이온 도시에 근
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6. 아이아코스와 개미 족
역시 이 세상에는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즐거움이란 없는 것인가?
그래서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 아들을 되찾게 된 것을 기뻐하는 이이
게우스 왕의 마음 한구석에도 근심이 한 자락 남아 있었다. 적국 크레타 왕 미
노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노스 왕에게는 막강한 군대와 막강
한 전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군대와 전함도 아들 안드로게오스의 죽음을 복수
하려는 미노스 왕의 집념만큼은 강하지 못했다. 미노스 왕이 전쟁을 일으켜 아
테나이를 치려고 하는 것은 아들이 아테나이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미
노스는 아테나이를 치기에 앞서 이 원정을 위한 동맹국의 군대를 규합하는 한편
그가 자랑하는 함대를 풀어 사방의 바다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아나
레 섬과 아스튀팔라이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되 전자는 약속으로써 후자는 무
력으로써 이를 이루었다. 이어서 미노스 왕은, 별로 자랑할 것이 없는 뮈코노스
섬, 석회석 토양이 기름진 것으로 유명한 키몰로스, 야생 백리향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쉬로스 섬, 비옥한 평원으로 이루어진 세리포스, 대리석 채석장이 많은
파로스, 트라키아 처녀 아르네를 이용하여 시프노스 땅까지 손에 넣
재 53) '들도둑‘이라는 뜻. 별명은 '피투어 캄프테스’, 즉 '소나무를 구부리는
자‘라는 뜻이다. 이 자 역시 테세우스 손에 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당했다.
54) 석회석.
55) 미노스와 파시파에 사이에서 난 크레타 왕자. 아테나이에서 열린 경기에서
승리를 독점했다가 분노한 아테나이 청년들 손에 맞아죽었다. 혹은 마라톤 평야
에서 황소의 뿔에 떠받쳐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미노스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아테나이 원정을 벼르고 있었다.
이 처녀는 바라던 돈을 손에 넣고는 발도 검고 날개도 검은 갈가마귀가 되었
다. 이 새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돈을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다 미노스의
동맹국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올리아로스, 디뒤마이, 테노스, 안드로스, 그리고
올리부가 많이 나기로 소문난 귀아로스와 페파레토스는 미노스 왕을 편들기를
거절했다.
미노스 왕은 여기에서 항로를 왼 쪽으로 돌려 오이노피아로 갔다. 오이노피아
는 아이아코스의 왕국이었다.
이 나라 이름은 원래 오니오피아였으나 이 나라 왕은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
서 <아이기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이기나 백성들은 모두 이 유명한 영웅 미
노느를 맞고 싶어했다. 텔라몬이 아우 펠레우스와 막내 포쿠스를 대동하고 이
크레타 왕을 영접하러 나갔다. 아이아코스 왕도 따라나오기는 했으나 워낙 나이
가 많아 거동이 불편했다. 아이아코스 왕은 미노스 왕에게, 어떤 일로 자기 땅을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수백 개의 도시국가를 동맹국으로 거느린 미노스
왕은 아들로 인한 자기 슬픔을 하소연한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려 하오. 내가 온 것은
그대의 손을 빌리기 위해서랍니다. 나는 그대 왕국의 군사를 내 군사에 붙여 이
정의로운 싸움을 하렵니다. 바라건대 지금은 무덤에 있는 내 아들을 위하여 군
사를 빌려주셨으면 하오」
그러나 아소포스의 외손 아이아코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헛걸음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
나라와 저 케크롭스의 땅과는 혈맹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동맹관계는 굳기
가 바위와 같습니다」
그러자 미노스 왕은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 동맹관계 때문에 경을 칠 때가 있을 것이오」
미노스 왕은 , 마음 같아서는 아이아코스와 일전을 벌이고 싶었지만, 큰 전쟁
을 앞두고 전력을 낭비하는 편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는 군사를 몰고 돌
아갔다.
56) 황금에 눈이 어두워 조국을 미노스왕에게 팔았다는 처녀.
57) 금은이 많이 나기로 이름난 곳.
58) 갈가마귀에게는 빛나는 물건을 둥지로 물어다 모으는 습관이 있다.
59) ‘들불’이라는 뜻. 일설에 따르면 독수리로 둔갑한 유피테르에게 몸을 허
락했던,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 유피테르와 아이기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아코
스는 그리스 영웅들 가운데서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다가 죽어 저승에
서는 판관 노릇을 하게 된다. 이 핏줄에서 유명한 영웅 텔라몬과 펠레우스가 태
어나는데, 이들은 각각 트로이아의 전쟁의 영웅 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의 아버
지가 된다.
60) 아테나이.
크레타의 함대가 오이노피아 성 앞바다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아
테나이 배가 전속력으로 들어왔다. 배가 환대를 받으며 항구에 닿자 아테나이의
사신 케팔로스가 아테나이 왕의 밀지를 품고 상륙했다. 아잉코스와 아들들과 이
케팔로스는 만난 지가 오래였으나 그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기나 왕자들은 이 동맹국 사신의 손을 잡아 부왕 앞으로 안내했다. 케팔로
스는 나이가 좀 들었어도 소시적에 받던, 절세의 미남이라는 칭송 값은 넉넉히
할 만했다. 자국에서 가져온 감람나무 가지를 들고 지나가자 아이기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케팔로스의 좌우로는 케팔로스보다는 나이가 젊은 클뤼
토스와 부테스가 이 사신을 옹위했다. 이 둘은 팔라스의 아들들이었다.
수인사가 끝나자 케팔로스는 아테나이 백성들이 전하는 소식을 왕께 아뢰고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상들이 맺은 동맹을 상기할 것을 촉구했다. 케팔로스
는, 미노스 왕이 온 그리스 땅을 가무리고 패권 잡을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케팔로스가 아테나이가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되 사정을
헤아려 우정에 호소하는 데 소홀함이 없게 하자 이이아코스는 왕홀에 한 손을
얹은 채 대답했다.
「아테나이의 친구들이여, 내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거두
어가시오. 이 섬의 군사라는 군사는 모두 그대들의 군사라고 해도 잘못이 없고,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재물이라는 재물은 모두 그대들의 재물이라고 해도 허물이
아니오. 여기에는 군대가 얼마든지 있소. 내게는 내 나라 지킬 병력도 넉넉하고,
적을 맞아 싸울 병력도 넉넉하오. 신들의 도우심을 입어, 우리 나라는 지금 탄탄
대로를 걷고 있소. 그러니 내게 그대들의 요청을 거부할 핑계를 주지 않도록 하
시오」
케팔로스가 대답했다.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대왕의 나라
가 해마다 번영을 거듭하시기를, 아니게아니라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 모두 나이
도 고만고만하고, 용모도 하나같이 준수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고 얼마나 제
마음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이들 중에는, 지난번에 저를 환
영해 주던 청년들이 섞여 있지 않더군요. 무슨 연유가 있는지요?」
아이아코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의 음성은 슬픔에 잠겨 있었
다.
61) ‘잘 생긴 머리’라는 뜻이다.
62) 아테나이의 상징이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63) 팔라스 미네르바 여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판디돈 2세를 가리키고 있다.
「전화위복의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처음 우리가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답니다. 이제 내가 차근차근 설명할 터이니 들어보시지요. 내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구구한 설명 제하고, 지난번에 그대가 보았다는
그 병사들, 지금은 뼈와 재가 되어 무덤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내왕국
의 대부분이 파명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 나라 이름을 <아이기나>라고
하니까 잔혹하기 그지없는 유노 여신이, 자기 연적을 나라 이름으로 삼은 것을
밉게 보고 내 나라에 몹쓸 병을 내려보내어 내 백성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우리
는 처음에는 여는 전염병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알 동안은 여느 방법으로
이 전염병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 재앙이 우리 힘에는 너무 버겁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의술이 그 앞에서 적수가 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지요.
내 왕국의 재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둡고 무겁던 하늘이 대지를 내리누르면서 구름을 그안에 가두고
찌는 듯한 열기로 만둘의 기라는 기는 다 빼어놓는 것 같습디다. 달이 네 번이
나 그 양 모서리의 뿔을 세웠다가 네번 보름달이 되고, 네 번 기울었다가 네 번
이지러질 동안의 일입니다. 이동안 줄곧 집요하기 짝이 없는 남풍이 무서운 열
기를 몰고 불어왔습니다. 호수와 저수지는 모두 치명적인 독물에 더럽혀졌고 수
천 마리나 되는 뱀이 버려진 논밭 위를 기어다니면서 강이라는 강에는 모조리
그 독물을 풀어놓습니다. 역질이 시작되고 있다는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개들이
죽고 새들이 죽고, 양떼와 소떼, 그리고 들짐승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농부들은 기겁을 했겠지만, 멀쩡하게 밭을 갈던 소가 일을하다 말고 제가 갈아
놓은 이랑에 머리를 박고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지묘. 양떼는 죽자고
우는데 가만히 보니까 하루가 다르게 털이 빠지면서 야위어갑디다. 그 씩씩하던
말, 진흙 구덩이의 마장에서 그렇게 잘 달리던 것으로 이름을 떨치던 말도 예전
의 그 영광도 하릴없이 제값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요. 과거에 그런 영광을 누렸
는지 안 누렸는지도 모르는 채 마구간에 선 채로 끙끙거리며 죽을
64)아이기나는 유노 여신의 지아비인 유피테르의 애인이다. 따라서 유노가 이
이름을 좋아할 까닭이 없다.
든 짐승들이 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숲 속, 논밭,길 할 것 없이 도처에서 시
체가 썩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개는 이런 짐
승의 시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심지어는 저 탐욕스러운 회색이리나 육식
조도 얼씬을 않습디다. 짐승의 시체는 그저 가만히 썩어가면서 대기를 그 더러
운 냄새로 가득채우고 이 냄새를 더 멀리까지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역질은 창궐하면서 처음에는 가련한 농부들을 치더니 이윽고 우리 도성 사람
들을 쳤습니다.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병자의 내장에 굉장한 열이 나는 것이었
지요. 속에서 열이 나니까 살갗이 붉어지면서 숨을 헐떡거리게 되더군요. 이때부
터는 혀가 까칠까칠해지고 부어오릅니다. 그런데도 이 더러운 공기나마 조금이
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리고는 이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겁니다. 역질에
걸린자는 침대에 누워있을 수도, 이불같은 것을 덮을 수도 없었지요. 그저 마른
땅에다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는 거지요. 하지만 땅이 찌는 듯한데 이런다고 몸
이 식나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열을 받아 땅이 뜨거워지는 판인데...... 이런
병자를 돌보아줄 만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의원들도 어쩔도리가 없었어요. 의술
로 병자를 돌보려고 해봐야 병자를 악화시키거나 병을 옮기는 역할밖에는 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까요. 병자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그만큼 더 빨리, 더 확
실하게 죽어갔어요. 뿐만아닙니다. 나을 가망이 전혀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병의 끝을 죽음으로 보고 희망을 버리고는 병의 치료에 필요한 약방
문은 들은체도 않았습니다. 뻔한 것이지요. 병자들 스스로가, 그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손을 들어버린 것이지요. 사람
들은 체면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샘이나 강이나 우물로 달려가, 죽어야 가
라앉는 갈증을 다스리느라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물에 드러
갔다가 나올기력이 없어 물속에서 죽어갔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을 마셨
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염증을 느낀 병자들은 침대를 빠져나와 힘이 있는
자는 걷고 힘이 없는 자는 땅바닥을 굴러서라고 집을 나와 거리로 나오려고 했
지요. 사람들은 제집을 그 병의 온상인 줄 알았던 겁니다. 이 역질이 어떻게 시
작되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집안의 환경이 병의 온상이라고들 생각한 것이지
요. 거리에는 그래도 의식이 붙어있는 사람,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이 있는 사
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땅바닥에 누워 멀뚱멀뚱 허공을 응시
하거나 울부짖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난히 낮아보이는 하늘의 별을 향하여
두팔은 벌리고 뜨거운 숨을 몰아쉬다가는 그대로 숨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때
의 내 심정,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게는 삶에 대한 증오, 내 백성과 운명
의 아픔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뿐이었습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바람에 흔들린
가지에서 떨어진 농익은 능금, 아니면 폭풍우 갠 날 떡갈나무 아래에 소복이 떨
어진 도토리같이 내 백성의 시체가 즐비하더군요. 저기 저 건너 쪽에 있는 신전
이 보이지요? 계단이 많은, 저 산위의 신전말입니다. 유피테르 신꼐서 계시는 신
전입니다. 저 제단에 제물을 드리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만 소용없었어요. 얼마
나 많은 지아비들이 그 아내를 위하여,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여 저 제단 앞에서
기도하다가 태우지 못한 향을 한줌씩 쥔 채로 숨을 거두었는지 모릅니다. 더러
는 재물로 소가 끌려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소 역시 칼을 맞기는커녕 사체가 그
뿔 사이에다 포도주를 뿌리며 기도하는데 그만 제단 앞에 무릅을 꿇고는 쓰러져
죽고는 했지요. 나 자신도 내 나라를 위하여, 내 아들 삼형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황소를 제물로 바치고자 했어요. 하지만 이 소는 끙끙 앓고 있더니, 찌르
기도 전에 찌르려고 댄 칼에다 목을 댄 채로 앞으로 쓰러졌는데, 글쎄 목에서는
피가 몇 방울 밖에 나오지 않습디다. 희생 제물들이 이 모양이니 이런 제물의
내장에 생명의 진실이 깃들여 있을 리 없고 생명의진실이 깃들여 있을 리 없으
나 신들의 뜻을 알아내 수 없을 수 밖에요. 생명의 진실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
이냐 하면, 병이 들어 이런 짐승의 내장이 다 썩어버겼다는 뜻입니다.
나는 신전 문 앞에 버려진 시체를 많이 보았습니다. 신들을 원망하고자 하는
자들이 그랬는지 제단 앞에도 시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내 백성 중에는 스스
로 목을 매고 죽은 자도 많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운명의 순간을 마중
하고, 이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치고자 그랬던 것이겠지요. 장례의식을 통하
여 주검 대접을 받은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시 밖으로 실려나
가지 못한 관도 많았습니다. 그 많은 관이 고루 나가기에는 성문이 너무 비좁았
던 것이지요. 매장도 하지 않고 버려둔 시체도 많았습니다. 화장도 못해서 무더
기로 쌓인 시체도 많았습니다. 시신에 대한 예의? 그런 것은 찾아보기가 어려웠
어요. 화장할 장작을 두고 싸움질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남의 불에 제 식구의
시신을 사르려는 자들도 있었으니까요. 슬피 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
소리를 듣지 못한 어머니의 영혼, 젊은 아내의 영혼, 늙고 젊은 사람들의 영혼이
정처도 없이 떠돌았지요. 무덤 쓸 땅도 넉넉하지 못했고, 화장할 나무도 넉넉하
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불의에 닥친 이 재난의 돌개바람에 하도 기가 막혀 하늘을 향하여 이렇
게 외쳤습니다. < 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대신께서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를
사랑하셨다는 사람들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저 같은 것을 아들로 용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제 백성을 살려주시거나 저 역시 백성들과 한
무덤에 묻히개 하소서. >
그랬더니 유피테르 대신께서는 천둥과 번개로, 내 기도를 들었다는 징표를 보
여주십디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유피테르 대신께 외쳤습니다.
<대신께서 드러나신징조를 보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이로써 대신 께서 품으신
선하신 뜻을 다 드러내시었기를, 저는 이로써 대신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았습니다.>
마침 내 옆에는 유피테르 대신께 봉헌한 참나무65) 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도
도나 참나무 숲에서 가져온 씨앗으로 싹을 틔워 기른, 가지가 아주 죽죽 잘 뻗
은 참나무였지요.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개미가 떼를 이루어 각기 턱으로 곡식을
한 알씩 몰고 줄지어 참나무 껍질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고 있더군요. 나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은것을 보고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 아, 신들의 아버지여, 저렇게 많은 신민을 저에게 내리시어 이 텅 빈 나라
를 다시 채우게 해주소서. >
그랬더니 그 큰 나무가 흔들리더군요.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가지가 소리를 내
며 흔들리더라는 말입니다. 어쩌나 무서운지 사지가 굳어지면서 머리끝이 쭈뼛
서더군요. 어쨌거나 나는 그 나무 등치와 대지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나는 내 소
원을 더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마음속에는 소원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래
서 마음속으로는 바라는 바를 기도했습니다.
밤이 왔습니다. 이러저러한 일로 지칠대로 지친 나는 곧 잠이들었습니다. 그런
데 꿈에 그 참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가지 수도 낮에 보았던 참나무만
했습니다. 가지를 오르고 있는 개미 수도 낮에 본 것만했고요. 이 나무 역시 낮
에 보았던 나무처럼 흔드릴면서 그 등치에 붙은 개미를 곡식채 바닥에다 떨어뜨
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개미는 땅바닥에 떨어지자마
자 자꾸만 커지더니 이윽고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고 있으려니,
그 긴 다리와 검은 색깔이 없어지고 몸은 불어나고, 다리가 사람의 사지를 닮아
가더군요. 나는 그때 잠을 깼습니다. 잠을 깨자마자 주위를 들러보았어요. 꿈에
보았던것이 내 옆에 있었을 턱이 없지요. 나는, 하늘이 도우신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생각으로 잠시 섭섭했습
65)유피테르의 신목
니다. 그런데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
는 소리,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지요.
이 역시 꿈인 게로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텔라몬리 내 방앞으로 달려
오더니 문을 벌컥열면서 이런 말을 합디다.
< 아버님, 한번 밖으로 나와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어지지 않
으실겁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꿈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듯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열을
짓고 서있더군요. 내가 다가가자 이들은 신민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 대해, 유피테르 대신께 약속드린대로 했습니다. 이들에게 텅 빈 도시를
나누어주고, 농부들이 사라져버린 농토를 나누어주었던 거지요. 나는 이들의 근
본을 생각해서 이들을 < 뮈르미돈 >66)
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대들도 이들을 보셨지요? 이들의 성질은 개미의 성
질 그대로랍니다. 힘든 일도 잘 견디고, 한번 얻은 것은 잃지 않고, 부지런히 모
으는, 아주 근검하고 소박한 족속 이랍니다. 이제 이들이, 모두 고만고만하는 나
이에 하나같이 용감한 이들이 그대들을 따라갈 것입니다. 그대들을 내 나라로
모시고 온 바람은 동풍이었으니 이제 이 바람이 남풍으로 바뀌면 이들은 그대들
을 따라 전장으로 나갈 것입니다.
7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이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로 낮 시간을 보내고는 밤에는 잔치를 벌이고 밤늦
게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윽고 다음날의 황금빛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올랐다.
바람은 여전히 동풍이었다. 아테나이 앙자들은 귀국을 서두르고 싶었으나 풍향
이 맞지 않아 배를 항구에 정박시킨 채 기다렸다. 팔라스의 두 아들67) 은 침전
으로 케팔로스를 찾아갔다. 케팔로스는 이들을 데리고 아이아코스 왕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왕은 기침하기 전이었고 그의 두 아들 텔라몬가 펠레루스는 원정
에 따라나설 병력을 점호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셋째 왕자인 포쿠스가 나와
이들을 영접하여 잘 꾸며진 방으로 안내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한동안 담소하면
서 왕이 기침하기를 기다렸다. 포쿠스는 케팔로스가 들고 다니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창자루에 금날을
66)뮈르맥스(‘개미’)에서 비롯됨 족속이라는 뜻. 이 아우스코스의 손자 아킬
레우스가 인솔,트로이아 전쟁터로원정하여 지휘한 군대가 바로 용감하기로 소문
난 니 ‘위르만족’이다.
67)클뤼토스와 부테스
햅박은 창을 눈여겨 보다가 수인사가 끝나자 케팔로스에게 물었다.
「저도, 사냥터나 사냥이라면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만, 장군께서 들고 다니
시는 그 창의 창자루는 무슨 나무로 만든 것인지 통 짐작조차 못하겠습니다. 물
푸레나무라면 색깔이 노랄 터이고, 산딸나무라면 마디가 있을 텐데요. 궁금합니
다. 도대체 무슨 나무로 만든 것인지요? 저는 장군의 창같이 멋진 창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팔라스의 두 아들중 하나가 대답했다.
「모양을 보고 놀라신 모양이나 그 위력을 보면 더 놀라실 것입니다. 과녁에
서 빗나가는 법이 없는 창이거든요. 뿐만 아닙니다. 과녁을 맞춘 다음에도 이 창
은 그 주인이 회수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녁의 피를 묻힌 채로, 임자의 손으로
되돌아오니까요」
이 말을 들은 포쿠스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창이길래 그런 신묘한
기능을 보이는지, 어디서 났는지, 누가 케팔로스에게 그런 창을 주었는지 꼬치꼬
치 캐물었다. 케팔로스가 이 호기심 많은 왕자에게 창의 내력을 일러 주었다. 그
러나 그 창 때문에 자신이 겪은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망설였다. 말하기가
부끄러웠던 것이었다. 창 이야기가 나오자 그 창에 목숨을 잃은 아내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며 케팔로스가 포쿠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신의 아들인 포쿠스60)여,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창은 내 눈물의 씨앗이
라오. 오래 살 팔자라면 나는 이 눈물도 오래오래 흘려야 할 것이오. 이 창이 나
와 내 아내를 갈라놓았기에 하는 말이오. 차라리 이 창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
았던 것만 같지 못하오. 내 아내의 이름은 프로크리였소만, 그대가 알기 쉽게 말
하리다. 아테나이에서 납치당한 오리튀이아69)를 아시지요. 내 아내 프로크리스
는 니 오리튀이아와 자매간이랍니다. 이 둘의 아름다움이나 마음 씀씀이를 비교
한다면 프로크리스쪽이 훨씬 윗길이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먼저 납치당해야
했던 사람은 오리튀이아였다기보다는 프로크리스였던 셈이지요. 나와 프크리스
는 에렉테우스 왕의 허락을 얻어 혼인 했어요. 사랑으로 하나가 된 거지요. 사람
들은 나를 일러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소만, 아닌게 아니라 나는 행복한 사람
이었어요. 하지만 신들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좋게 안 보셨던 모양이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테지요. 우리가 혼인한 지
두 달쯤 되었을때의 일이오. 나는 꽃이 만발한 휘메나이토
68) 포쿠스의 어머니 프사마테는 해신 네레우스의 딸인 바다의 요정이나 이
요정들도 때로는 바다의 여신들로 블린다.
69) 북풍 보레아스에게 납치당한 에렉테우스의 딸. 제6부 7장 참조.
70) ‘새벽’
스 산에다 사냥 그물을 치고 사슴을 기다리다가 아우로라70) 여신의 눈에 띄
고 말았어요. 새벽빛으로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여신, 그대도 모르지 않겠지요.
노란 옷을 입은 이 아우로라 여신은, 싫다는 나를 강제로 끌고 갔어요. 이 여신
의 명예를 돌보는 뜻에서 내 솔직하게 말하리다. 여신의 장미빛 입술은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밤과 낮의 경계에 있는 왕국의 여왕이시고, 날마다 넥타르71) 를
마시는 분이시니 당연하지요. 하지만 내 사랑은 프로크리스였지 여신이 아니었
어요. 따라서 프로크리스는 언제나 내 입술에, 내 가슴에 있었어요. 나는 여신에
게, 혼인에 대한 나의 의무, 내가 겪었던 신혼생활, 새로 꾸민 가정, 나를 잃은
아내에게 내가 했던 약속을 누누히 말하면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지요. 마침
내 여신은 화를 내시면서 이러시더군요.
< 이 은혜를 모르는 자야, 우는 소리 이제 그만 작작 해라. 프로크리스가 그
렇게 좋으면 가려무나. 하지만 내가 너희들 앞일을 꿰어보니, 너는 아무래도 프
로크리스와 혼인한 것을 후회하겠다. >
여신은 이러면서 나를 내 아내 곁으로 보내줍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신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자니, 프로크리스가 이 혼인의 서약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이런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더군요. 프로크리스는 마음 씀씀이로
보면 그럴 여자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그 젊음과 아름다움이 나를 불안하게
하더란 말이오.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과연 나 하나만을 사랑할까, 하는
생각이 일더라는 말이오. 게다가 나는 집을 꽤 오래 떠나 있었거든요. 물론 나를
그렇게 만든 분이 여신이기는 하지만, 오래 떠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요. 원래 사랑하는 사람들 가슴에는 불안이라는게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선물을 잔뜩 들고 가서
내 아내의 정절을 한번 시험해 보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아우로라 여신이 이를
알고 내 모습을 바꾸어 주었어요. 나도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나는 아
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하고 팔라스의 도시 아테나이로 들어가 내 집을 찾아
들어갔어요.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어요. 주인이 사라진 것을 걱정하는 것만 빼
면.
천신만고 끝에 나는 프호크리스를 만나는 데 성공했소. 프로크리스를 보는 순
간 정신이 아찔합디다. 그래서 하마터면, 아내의 정절을 시험을 보겠다던 계획을
포기할 뻔했소. 말하자면 내 정체를 밝히고, 입을 맞추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지요. 마땅히 그랬어야 했던
71)‘신주’
것이고요. 아내는 슬픔에 잠겨 있었소. 서방이 없어졌으니 당연하지요, 하지만
슬픔에 잠겨 있는데도 아내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소. 포쿠스, 한번 생각
해 보아요. 슬픔이 잘 어울리는 여자가 슬픔에 잠겨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
가를...... 그러나 나는 정체를 밝히지 않고 집요하게 내 아내 프로크리스를 유혹
했어요. 프로크리스는 몇번이고,
< 나는 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바칩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든, 나는 그분께
드릴 사랑밖에는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정도면, 아내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
겠소? 이 이상의 정절을 요구하는 사내가 어디에 있겠소?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소. 그래서 더욱 집요하게 다가섰소. 마치 저 자신에게 상처를 입
히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요...... 나는, 선물의 양과 질을 올리면서, 말
하자면 더 나은 선물을 약속하면서 하룻밤만 동침할 것을 졸랐소. 결국 나는 내
아내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는데 성공하고 말았고, 내 행복이 거기에 걸린줄
도 모르고 아내를 취하는데 성공한 나는 이렇게 소리를 질러 주었소.
< 이런 더러운 여자여, 여기에 그대를 유혹하던자가 바로 그대의 서방이다.
이제 그대는 가면을 벗었구나. 이제야 나는 그대가 부정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
다. >
프로크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당혹과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소리없
이 무너지면서, 프로크리스는 도망쳤소. 자기가 시험에 걸려 무참하게 무너지던
집과, 자기를 시험한 이 사악한 서방을 버리고...... 나에게 실망한 프로크리스는
남성을 혐오하며 온 산을 방황하다가 결국 사냥의 여신 디아나를 섬기게 되었지
요. 프로크리스가 집을 떠나고 나니, 프로크리스에 대한 내 사랑이 다시 걷잡을
수 없어, 골수까지 태울 듯이 타오릅디다. 나는 프로크리스에게, 내가 한짓을 사
죄하고, 그런 선물로 유혹하는 여자가 있다면 나라도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 것
라고 고백했소. 내가 이런 고백을 하니까 프로크리스도 그만하면 나의 못난 행
동에 대한 복수가 그 정도로 넉넉했다고 생각했든지 다시 내게로 돌아왔지요.
우리는 꿈같이 화목하게 몇년울 살았어요.
참, 프로크리스는 내게로 돌아와 나에게 개 한마리를 선물로 줍디다. 대수롭지
않은 선물이라도 주는 듯이 말이지요. 프로크리스는, 자신이 디아나의 여신으로
부터 받은 개라는 말을 했소. 여신은 프로크리스에게 이 개를 주면서,
< 이 개는 어떤 짐승도 따라잡을 수 있는 개다. 이 개보다 빨리 달릴수 있는
개는 없다.
>
이런 말을 했다고 합디다.
이 개와 함께 아내는 나에게 창도 한자루 주었는데 그대가 본 창, 내가 이렇
듯이 들고 다니는 창이 바로 그 창이오. 이 선물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
금할 테지요. 그러면 잘 들어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 희한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대도 놀랄것이오.
라이오스의 아들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낸 암흑세계의 예언자 스핑크스
를 아시지요. 스핑크스는, 지금쯤 수수께끼 같은 것은 깡그리 잊은 채 저승에 있
을 것이오. 하지만 이차에 밝으신 테미스 여신께서는 스핑크스가 이렇게 맥없이
당한 것을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여신께서는 이 테바이에 또 하나
의 재앙을 풀어놓으신 것이오. 그것이 무엇이고 하니, 한마리의 짐승이었소. 이
짐승은 사람을 헤치고 가축을 잡아 죽여 테바이 사람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지요.
우리 젊은이들은 모두 모여 이 짐승 잡을 방도를 궁리하다가 결국은 그물을
놓기로 하고 이 짐승이 나타났다는 벌판하나를 아예 그물로 둘러싸버렸어요. 하
지만 이 짐승은 바람같이 내달아 이 그물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이 그물의 눈을
헝클어버리기까지 했소. 결국은 사냥개를 풀기로 의견이 모였소. 우리는 백마리
나 되는, 발 빠르고 힘 좋은 사냥개를 풀었소만, 이 짐승이 어찌나 빠른지 모두
허탕만 쳤어요. 일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에게 라일라프스를
풀라고 고함을 질러댑디다. 라일라프스...... 이게 내가 애나내 프로크리스로부터
선물로 받은 개의 이름이오. 라일라프스는 오래 사슬에 목을 묶인채 안달을 부
리고 있다가 내가 사슬을 푸는 순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립디다. 어디에 있
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달렸던 것이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거
은 이 개가 일구어 놓은 뽀얀 먼지 뿐이었소. 그러니까 이 개는, 투석기로 쏜 석
단, 힘 좋은 사람이 던진 창, 아니면 크레타 활로 쏜 화살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달렸던 것이오.
가까운 곳을 둘러보있더니 언덕이 하나 있습디다. 올라가면 주위를 내려다볼수
있을만한 언덕이었지요. 나는 이 언덕으로 올라가 이 짐승과 내개가 벌이는 참
으로 기이한 빠르기 겨루기를 내려다보았소. 이 짐승은 곧 개의 이빨에 물리는
것 같다가도 눈 깝빡할사이에 용케 빠져나가고는 합디다. 더구나 이 짐승은 어
찌나 교활한지 일직선으로는 달리지 않고 꼭 요리조리 돌면서 사냥개의 공격목
표를 어지럽합디다. 개는 이짐승의 발뒤꿈치를 겨누고 입질을 했소만 번번이 개
의 이빨에 물리는 것은 허공뿐이었지요. 나는 개를 도우려고 창을 꼬나잡았소.
꼬나 잡고는 무게 중심을 잡으면서 가죽끈에다 손가락을 걸고 다시 그 짐승과
개가 쫓고 쫓기는 곳을 내려다 보았소. 세상에...... 짐승과 개가 쫓고 쫓기던 곳
에는 짐승과 개 대신에 두 기의 대리석상이 서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대도 이
석상을 보았더라면 하나는 쫓고 있는개, 또 하나는 쫓기고 있는 그 짐승이라는
걸 알아 보았을 것이오. 어느 신께서 보고 계시다가, 그렇게 만드신 것 같습디
다. 어느 쪽이 지는 것도 바라지 않으셨던게지요... 」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케팔로스가 갑자기 말문을 닫아 버렸다. 포쿠스가 그
에게 물었다.
「 이번에는 창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그 창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신 것 같
은데 그 이야기도 마저 들려주십시오. 」
그러자 케팔로스는 자기 창이 죄지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
「 포쿠스, 내 행복은 내 불행의 씨앗이었소. 그러니까 내가 행복했던 시절 이
야기를 먼저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오. 나는 그 시절을 잊지 못해요. 신혼 첫해
를. 나는 내 아내와 행복했고, 내아내도 서방인 나와 행복했을 것이요. 나는 아
내를 사랑했고 아내는 나를 사랑했소. 나는 아내를 아꼈고 아내는 나를 아꼈소.
내 아내는 설사 유피테르 대신이 결혼하자고 조른다고 하더라도 나를 향한 사랑
을 나누어 주지 않았을 것이오. 내게는 다른 여자 같은 것은 아무 흥미도 없었
어요. 설사 베누스 여신이 몸소 오셨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오. 요컨대 우리 가슴속에서는 사랑이 똑같은 뜨거움으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를 비추면 나는 어느 젊은이들처럼 숲으로 사냥을 나가
고는 했어요. 하인? 말? 냄새 잘 맡는 사냥개? 사냥 그물? 그런 거 필요 없었어
요. 창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사냥하다 싫증이 나면 계곡에서 서풍이 불어오
는, 시원한 그늘을 찾아들어갔소. 나는 한 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이 바람을 찾아
다니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햇소. 이바람이 불어야 사냥으로 뜨거워진 내 몸을
식힐 수 있으니까......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바람을 불렀지요.
< 오라 아우라여, 내가슴으로 오라. 사랑하는 길손이여, 와서 내 가슴을 달래
어다오. 내 소원을 들어. 뜨거운 이 가슴을 식혀다오 >
이런 식으로 바람을 불렀소만 어쩌면 입으로 악업을 짓느라고 이런 말을 보태
었는지도 모르겠소
< 나를 기쁘게 하는 이여. 와서 내 힙을 복돋어주고 나를 쓰다듬어다오. 내가
이 적막한 숲을 좋아하는 것은 여기에 그대가 있기때문. 내입술은 늘 그대의 숨
결을 기다린다. >
그런데 누군가가 이 말을 듣고는 그 뜻을 오해했던 모양이오.이 사람은 이 아
우라가 내가 이따금씩 불러서 데리고 노는 요정의 이름이거나 내가 이 요정과
밀회를 즐기거나 이렇게 오해했던 것이지요.오해하고 말았으면 직히나 좋겠소?
이사람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프로크리스에게 달려가 내가 숲속에서 못된
짓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면서 내가 한 말을 고스란히 내 아내에게 고자질했
소.사랑이 깊어지면 귀가 얇아지는 법이요,나중에 알았소만,프로크리스는 이 말
을 곧이 곧대로 믿고 실신까지 했더랍니다.얼마 뒤에 정신을 차린 프로크라스는
제 팔자를 한탄하고 내 배신행위를 애통해하더랍니다.이 근거도 없는 소문을 듣
고 프로크라스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시오? 이름만 있지 실체는 없는 이 미풍을
정말 자기의 연적으로 알고 고민까지 했다고 들었소이다.프로크리스는 가엾게도
이따금씩 자기 귀로 들은 이야기를 의심하고 잘못 들었기를 바라고 때로는 믿지
못하겠다고 공언하고,,, 그러다가는 결국 나를 의심하기 전에 자기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더랍니다.
어느 날, 나는 새벽의 미명이 어둠을 몰아낼 무렵에 집을 나서서 숲 속으로
들어갔소.여느 때처럼 나는 한동안 사냥하다가 풀밭에 누워 또 이런 소리를 했
소.
오라, 아우라여 와서 불타는 이 가슴을 식혀다오.
이러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디다.그러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을 이었소. 오라,내사랑아 라고요.그런데 나뭇잎이 떨어지는 듯한 바스락거리
는 소리가 들렸어요.나는 사냥감이 가까이 온 것으로 여기고 창을 던졌소.
아 그런데 프로크리스였소! 프로크리스는 창에 맞은 가슴을 움켜쥐고 외치더
군요. 오 내 팔자여! 라구요.
나는 내 아내의 음성을 듣고 소리난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소.프로크리스가
거기에 있었지요.반쯤 의식을 잃은 채 말이요.아내의 옷은 이미 피에 젖어 있었
소.아내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채 있는 힘을 다해 자기가 나에게 선물로 주었
던 그 창은 자기 가슴에서 뽑아내고 있었소.나는 내목숨보다 소중한 아내를 안
았소.아내를 안고는 옷을 찢어내고 상처를 싸매어 피를 멎게 하면서 나를 두고
떠나지 말라고 나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소.그랬더니 아내는 숨
이 넘어가는 지경인데도 있는 힘을 다해 내게 이런말을 남깁디다.
우리가 혼인의 서약에 걸고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들의 이름을 걸고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사랑에다 걸고 약속해 주세요.이렇게 죽어가
면서 드리는 부탁이니 약속해 주세요.내가 그대에게 모자르는 아내였더라도 나
죽은 뒤에라도 아우라를 아내로 삼지는 말아 주세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내 아내 프로크리스가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사실을 말했소.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소? 몸에 남아 있던 힘은 피와
함께 터져나간 다음이었고 아내의 의식은 그때 이미 가물거리고 있었는데 아내
는 희미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내 입술에다 마지막 숨결을 내쉬었소.그
러나 표정은 행복해 보였소.행복을 누리다가 행복한 가운데 죽어가는 것 같더라
는 말이요.
나테나이의 영웅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듣던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이윽고 아이아코스와 그의 두 아들이 원정대로 편성한 병력은 인솔해 왔다.케
팔로스는 이 막강한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제 8 부
인간의 시대
1 니소스와 조국을 배반한 스퀼라
새벽별 루키페르가 밤을 몰아내고 날을 밝히자 동풍이 지면서 하늘에 비구름
이 모였다.케팔로스는 부드러운 남풍에 돛을 올리고는 아이아코스의 아들들이
이끄는 동맹군을 싣고 아테나이로 돌아갔다.며칠간의 항해끝에 이들은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빠른 기일안에 목적지인 항구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미노스 왕은 메가라 항을 유린하면서 니소스 왕이 다스리던 알카토오
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었다.알카토오스 왕 니소스의 정수리에는 백발 가
운데 섞인 보라색 머리카락이 한 올 있었다.그에게 이 머리카락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왕국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초승달은 그 뿔은 여섯번째로 드러내어 보이고 있었으나
양국의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날
개 달린 빅토리아 여신이 마음을 정하지 못해 양쪽 진영의 상공을 번차례로 날
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소스의 왕국의 성벽에는 탑이 하나 있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성벽은
라토나 여신의 아들이 황금으로 만든 수금을 건 이후로 그 벽돌 하나하나에 신
묘한 음악이 스며들어 있다는 성벽이었다.
니소스의 딸 스퀼라에게는 틈날 때마다 이성벽위의 탑으로 올라가 이 성벽에
다 돌멩이를 던지며 거기에서 나는 소리를 즐기는 버릇이 있었다.스퀼라는 미노
스 왕과 자기 아버지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동안에도 이곳으로
올라가 가까이서 벌어지는 전투상황을 구경하고는 했다.스퀼라는 이러는 동안
적군의 장수이름,그들의 무기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그들의 차림새,그리고 그
유명한 크레타 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스퀼라가 이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펴서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적장인 에우로페의 아들이었다.스퀼라는
이 미노스 왕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스퀼라의 눈에 비친 미노스 왕은 한마디로 완벽한 인간이었다.스퀼라가 보기
엔 미노스가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으면 그 투구가 미노스에게 그렇
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고 미노스가 반짝거리는 청동 방패를 들면 그 방패를 든
미노스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미노스가 힘살을 부풀리고 창을 던질
때면 스퀼라는 멀리서 그의 힘과 재간을 침묵으로 찬양했고 미노스가 시위에다
화살은 메우고 시위를 당겨 활대를 반달모양으로 구부리면 스퀼라는 아폴로 신
도 활시위를 당길 때는 저런 모습이시겠지,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어쩌다 미노
스가 투구를 벗어 맨얼굴을 드러내고 보랏빛 전복 차림으로 백마의 잔등에 올라
술 장식이 치렁치렁한 마구를 깔고 앉은 채로 입으로 흰 거품을 품는 말의 고삐
를 잡아채는 것을 보면 스퀼라는 그만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이게 모두 미노스
를 향한 붙타는 듯한 사랑때문이었다.스퀼라는 미노스의 왕의 손에 잡히는 저
창은 얼마나 행복할까,미노스왕의 손에 잡히는 저 고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스퀼라는 아직 나이 어린 공주에 지나지 않았으나 할 수만 있다
면 용감하게 적진을 뚫고 들어가 미노스왕을 만나고 싶었다.높은 탑에서 크레타
진영 한가운데로 뛰어내리든 청동 밧장이 단단하게 걸린 성문을 열어주든,미노
스왕이 좋아할 만한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그래서 스퀼라는 크레타 왕의
호화찬란한 군막을 내려다보며,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전쟁이 터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아니면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모
르겠구나.사랑하는 미노스왕이 우리의 적이라는 것이 애석하구나.하지만 이 전쟁
이 터지지 않았다면 나는 저분의 모습을 뵐 수가 없었을 것이나 어쩌면 전쟁이
잘 터진 것인지도 모르지.저 분이 전쟁을 이 정도 선에서 끝내고 나를 평화를
보증할 볼모로 잡아 고국으로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 사랑하는 나의
영웅이시여, 만일에 그대의 어머니께서 그대만큼 아름다운 분이었다면 유피테르
대신께서 사랑을 느끼신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내게 날게가 있어서 하늘을 날아
크레타 왕의 군막 앞에 내려 미노스 왕께 내사랑과 내 느낌을 고백하고 나를 아
내로 맞아주시는 대신 지참금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면 나는 세번
독을 받을 여자인 것을 미노스왕이 지참금으로 요구한다면 내 아버지의 왕국만
빼고 이 세상에 무엇이 아까우랴.그래 아버지의 왕국만은 안된다.아버지의 왕국
을 버려야 아버지를 배신해야 이룰 수 있는 사랑이라면 비록 내 꿈을 간절하나
이 혼인이 내게 무슨 뜻이 있으랴.관대한 승리자의 온정이 나라를 잃은 사람들
에게는 미치는 수가 있기는 하더라더만....미노스왕은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이 의로운 전쟁을 일으켰다지.그에게는 든든한 명분도 있고 이명분을 지킬 막강
한 군대도 있다.우리는 이 전쟁에서 지고 말 게 분명하다.그래,우리가 이 전쟁에
서 지게 되어 있다면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사랑을 위하여 내가 성
문을 열어주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은가.저분으로 하여금 더 빨리 이 전쟁을 승
리로 이끌게 해주는 편이 낫지 않은가.더 이상의 살육을 막고 저 분이 피를 흘
리는 일이 없게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이렇게만 하면 나는 저분이 다칠 것이라
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누가 저분의 가슴을 찌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
아도 되지 않겠는가.하기야 저분이 누구인지 안다면야 감히 저분의 가슴을 겨누
고 창을 던질 만큼 심장이 강한 인간이 있을리 없겠지만.
스퀼라으 마음을 이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오래지 않아 결국 스퀼라는 아
버지의 왕국을 자신의 혼인 지참금 대신 미노스에게 바치고 이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자면 용기가 필요했다.그래서 스퀼라는 또다
시 고민했다.
성문에는 성문 수비대가 있고 성문의 열쇠는 아버지에게 있다.아 이일을 어쩔
꼬 슬픈 일이다.내게 두려운존재는 아버지뿐이고 내소원의 앞을 가로막는 이 역
시 아버지 뿐이라는 것은...아 아버지만 계시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누
구가 저 자신의 신이 되어 적 자신의 뜻을 집행하지 않으면 안된다.운명의 여신
은 행동하는 인간을 돌보실 뿐 기도만 하고 있는 인간을 돌보시지 않는다.누군
들 나와 같이하려 하지 않겠는가.욕망이 내 욕망만큼 강렬하다면 누군들 사랑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깨뜨리지 않겠는가.그래 ,깨뜨리려 할 것이다.기꺼이
깨뜨리려 할 것이다.그러면 남들은 용감하게 그 것을 깨뜨리는데 나는 왜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나는 할 수 있다.불길사이로도 지날 수 있고 칼의 숲 사이로도
지날 수 있다.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내 아버지의 머리카락에서 단 한
올의 머리카락만 잘라내면 된다.내게는 황금보다 더 소중한 한 올의 머리카락.이
보랏빛 머리카락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므로.이 머리카락이 그토록 바라 마지
않던 것을 나에게 베풀어 줄 것이므로.
스퀼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동안,인간의 근심을 치료하는 전능한 의원인
밤이 찾아왔다.어둠을 스퀼라를 담대하게 했다.잠이 인간의 가슴에 깃들인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재우는 이 평화로운 시간을 틈타 스퀼라는 살며시 아버지의 침실
로 들어가 그 끔직한 일을 저질렀다.딸이 아버지의 머리로부터 아버지의 목숨과
운명이 걸린 머리카락을 훔친 것이다.
이 머리카락을 손에 넣은 스퀼라는 똑바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스퀼라는 그
만큼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미노스 왕에게 나아갔다.왕
은 스퀼라가 온 것을 보고는 놀랐다.스퀼라는 왕에게 말했다.
사랑이 저에게 죄를 짓게 했습니다.니소스 왕의 딸인 저 스퀼라는 제 왕국의
수호신과 제 집안을 왕께 바치는 것입니다.저는 전하밖에는 원하는 것이 없습니
다.제가 드리는 사랑의 맹세와 이 보랏빛 머리카락을 받으시고 이 머리카락이
사실은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제가 바치는 제 아버지의 머리인 줄 아
소서.
스퀼라는 이러면서 그 죄많은 손으로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바쳤다.그러나 미
노스왕은 몸을 사렸다.스퀼라가 저지른 이 전대미문의 죄악에 기겁을 한 미노스
왕은 이런 말로 스퀼라를 꾸짖었다.
우리시대에 너 같은 더러운 것이 있었구나.신들이시여 대지는 저것을 내치게
하시고. 어떤 땅,어떤 바다도 저것에게는 깃들일 자리를 주지 않게 하소서.너 잘
들어라.나는 유피테르의 요람이었던 크레타 섬에 너같이 더러운 것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미노스는 공정한 정복자로서 정복당한 적들에게 갖가지 합당한 조치를 취한
연후에 노잡이 들에게는 닻을 올리고 이물에 청동갑을 댄 군함에 오르라고 명령
했다.
스퀼라는 먼 바다로 나가는 군함을 바라보았다.스퀼라는 이 군함들이 파도를
타는 것을 본 다음에야 적장 미노스에게는 스퀼라 자신이 세운 공로에 상을 내
릴 생각이 없음을 알았다.이제 스퀼라에게는 별것이 없었다.스퀼라의 마음은 분
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분을 참지 못한 스퀼라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면서
미노스의 함대쪽으로 반주먹질하면서 외쳤다.
어디로 가느냐?내가 내조국보다 내 아버지보다 사랑하던 그대가 나를 두고 어
디로 가느냐? 그대에게 승리를 안겨준 나를 두고 그대를 정복자로 만들어준 나
를 두고 어디로 가느냐?무정한 이여,나로 인하여 승리를 얻고 조국을 배신한 죄
업을 나에게만 떠넘기고 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말이냐? 내가 바친 것들이 그렇
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내 사랑도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더란 말인
가?내가 온 마음을 온 소망을 다 바쳤는데도 그대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
었더란 말이냐?내가 온마음을 온 소망을 다 바쳤는데도 그대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더란 말인가?그대가 나를 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내조국은 이
제 망하고 말았다.설사 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배신자인 나에게는 그 문이 닫
혀있다.나더러 내손으로 그대 앞에다 무릎을 꿇린 내 아버지에게 가라는 말이
냐?나를 증오할 권리가 있는 내나라 백성은 그 권리에 따라 나를 증오하고 이웃
나라 백성들은 내가 보인 본보기를 경계하여 나를 두려워한다.온 세상의 문이
내앞에 닫혀있는 지금 내가 피하여 몸붙일 곳은 크레타뿐이다.그대가 나를 크레
타로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나를 버릴만큼 배은 망덕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
대가 저 무정한 쉬르티스의 아들,아르메니아 암호랑이의 자식, 남풍을 받아 소용
돌이를 일으키는 저 카뤼다스의 자식일망정 에우로페의 아들일 리가 없다.그대
가 그렇게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면 유피테르의 자식일 리 없으니,그대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다.그대가 그렇게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면 그대의
어머니를 꾀어낸 것은 황소로 둔갑한 신이 아니라 진짜 황소,한번도 암소를 사
랑해 본 적이 없는 황소였을 것이다.오,아버지 미소스 왕이시여,저에게 벌을 내
리소서.내가 적국의 왕에게 바친 성이여,내 불행을 위안으로 삼으시라,나 이제
고백하거니와 나는 그대로부터 죄를 얻었으니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그러나 나
는 죽되,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이의 손에 죽고 싶구나.미노스여,그런데 왜 그
대가 승리를 헌상한 나를 벌하는가.내가 내 아버지와 내조국에 지은 죄는 그대
에게는 곧 은혜가 아니던가.그래 그대에게는 나무로 지은 소로 진짜 황소를 유
혹하고 이로써 씨를 받아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자식을 낳은 그 더러운 아
내가 어울리겠구나.이 배은 망덕한 자여.내 말이 귓구멍으로 들어갔느냐?아니면
그대의 함대를 몰고 가는 바람이 내 말을 뒷전으로 흘려버렸더냐?그대의 계집
파시파에가 괸해 그대보다 황소를 더 좋아했던 것이 아니구나.황소에게 견주면
그대가 더 짐승같았던 모양이구나.아 미노스는 제 부하들을 재촉하는구나.파도는
물결을 일으키며 노 끝으로 밀려나고 나와 내조국은 이로써 뒤편으로 밀려나는
구나.그러나 그래봐도 소용없다.미노스여,내가 그대를 위해 해준 일 같은 것은
이제 기억해 주지 않아도 좋다.그대가 아무리 나를 증오해도 나는 그대를 따라
갈 것이다.나는 그대가 탄 배의 뱃전에 붙어서라도 넓고 넓은 바다를 건너고 말
테다.
스퀼라는 이 말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함대 쪽을 향하여 헤엄쳐 가기 시작
했다.스퀼라는 증오에 찬 열정의 힘을 빌려 단숨에 크레타의 뱃전으로 헤엄쳐가
불청객으로 거기에 달라붙었다.스퀼라의 아버지 니소스(이때 니소스는 이미 깃털
이 고동색인 한마리 물수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가 이를 내려다보고는
그 뾰족한 부리로 뱃전에 매달린 딸의 살을 찍었다.스퀼라는 그 순간 놀라움과
고통에 못 이겨 뱃전에 잡았던 손을 놓았다.그러나 스퀼라는 물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뱃전을 놓는 순간 미풍이 스퀼라를 하늘로 감아올린 것이었다.하늘로 오
른 스퀼라는 그제야 제 몸에 깃털이 돋아난 것을 알았다.이렇게 해서 새가 된
스퀼라는 키리스 라고 불린다.스퀼라가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잘랐기 때문에 이
런 이름을 얻은 것이었다.
2.미궁과 아리아드네의 관
무사히 크레타로 돌아온 미노스 왕은 항구에 정박시키고 떠날 때 서약에 따라
백마리의 소를 유피테르 대신께 제물로 바쳤다.미노스가 얻은 전리품은 궁전 곳
곳에 내걸렸다.미노스 왕이 더나 있을 동안, 왕비가 낳았던 이상하게 생긴 아이
는 장성해 있었다. 말하자면 크레타 왕가의 수치 거리였던 이 아이가 자라 흉축
한 혼종물의 몰골로 만인에게 왕비의 구역질나는 정사의 현장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노스는 이 구역질나는 괴물을 제 궁전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
하게 마음먹었다. 즉, 교묘하게 설계하고 빈틈없이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재간꾼으로 유명한 건
축가 다이달로스에게 맡겼다. 다이달로스는 통로를 분간하는 표지가 될 만한 것
은 모두 뒤엉클어버리고 수많은 우회로와 굴곡으로 사람들의 눈을 흘리는 아주
이상한 미궁을 지었다. 다이달로스가 지은 미궁은 프뤼기아 땅을 제멋대로 흐르
는 마이안드로스 강과 흡사했다. 이 강은 왼쪽으로 흐르는가 하면 오른쪽으로
흐르고, 이쪽으로 흐르는가 하면 저쪽으로도 흐르며 강의 원류를 거슬러올라가
는가 하면 어느새 대양을 향해서도 흘러가는 참으로 이상한 강이었다. 다이달로
스는 수많은 미로를 곳곳에 배치하여 한번 들어가면 저 자신도 입구를 찾아나오
기 어려운 저 마이안드로스 강을 연상시키는 미궁을 만든 것이다.
미노스는 이 미궁에다 반은 사람의 모습, 반은 소의 모습을 한 이 괴물을 가
두고 두 번이나 아테나이에서 보내어온 희생 제물을 먹이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러나 9년뒤 미노스가 요구한 세번째 공물이 크레타에 온 지 오래지 않아 이
괴물은 목숨을 잃었다. 세번째 공물에 묻어온 테세우스 손에 죽은 것이었다. 테
세우스는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이 미궁으로 들어갈 때 명주실
을 풀면서 들어깟다가 이 괴물을 죽이고는 그 명주실을 잡고 아무도 살아나온
사람이 없는 이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괴물을 죽이고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온 테세우스는 미노스와 왕의 딸과 함께
그곳을 떠나 디아섬으로 갔다. 그러나 공주 아리아드네는 이 섬에서 아테나이로
가지 못했다. 테세우스는 공주를 이 섬에다 마겨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엇다. 공
주가 홀로 섬에 남아 팔자를 한탄하고 있는데 박쿠스 신이 나타나 공주를 도와
주었다. 박쿠스신은 공주의 머리에서 관을 벗겨 영원한 영광의 징표인 별자리로
박아주려고 하늘로 던져올렸다. 이 관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거기에 박혀있던 진
주는 별이 되었다. 별들은 곧 하늘에 관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끓은
헤라클레스 자리와 뱀을 쥐고 있는 오피우코스 자리 사에에 있는 별자리가 바로
이왕관자리이다.
3. 하늘을 나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오래 고향을 떠나 있었던데다 크레타에 싫증을 느낀 다이달로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크레타가 바다로 둘러사여 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느날 다이달로스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중얼거
렸다.
바다를 막고 항구를 봉쇄하여 나를 막을 수 있을는지 모르나 내가 하늘로 날
아간다면 미노스 왕도 나를 막지 못하리라. 그렇다. 하늘은 열려있다. 그래 날아
이곳을 빠져나가자. 모든 것이 미노스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늘만은 미노스의 것
이 아니다.
이 말과 함게 다이달로스는 그때까지 한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것을 만들
궁리를 했다. 그는 이로써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는
먼저 새의 깃을 모아 처음에는 짧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긴것에 이르는 순서로
길이를 늘여가며 차례로 나란히 늘어놓았다. 깃을 이렇게 늘여놓자 곧 부채골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양은 길이가 다른 갈대를 짧은 것에서 긴
것에 이르는 순서로 붙여 만든 양치기의 파리와 비슷했다. 다이달로스는 준비가
끝나자 이 깃을 가운데 부분은 실로 묶고 뿌리짬은 밀랍으로 존존하게 붙였다.
다이달로스가 이렇게 붙여 만든것을 조금 구부리자 그 모양은 새의 날개와 아주
흡사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물건이 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줄은 모르고 옆에 서 있다가 재미삼아 바람에 날려가는 깃
이 있으면 주워다주거나 엄지손가락으로 노란 밀랍응 부드럽게 이겨주거나 정할
일이 없으면 쓸데없는 장난으로 아버지의 이 작업을 방해하거나 했다.
날개가 마무리되자 다이달로스는 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올라 깃털 날개
를 아래위로 움직여 균형을 잡으며 날아보았다. 그는 곧 아들 몫의 날개도 만들
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카로스 내 아들아. 내 단단히 일러두거니와 하늘과 땅의 한중간을 겨냥하여
반드시 그 사이로만 날아야 한다. 너무 올라가면 태양의 열기에 깃이 타버릴것
이요.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에 젖어 깃이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꼭 하늘과 바다 한중간을 날도록 하여라. 목동자리 큰곰자리 칼을 빼들고 서 있
는 오리온 자리 같은 별자리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라. 나를 잘 보고 내가 하는
대로만 하여라.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그의 어깨에다 날개를 달아주
었다. 입으로는 말하면서 손으로는 날개를 달아주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뺨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이 아버지의 손을 몹시 떨리게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입을 맞추었다.
다이달로스는 날개를 달고 먼저 하늘로 날아올라 뒤를 몰아보면서 뒤따라 날
아오는 아들의 비행에 이것저것 참견했다. 높은 나무에 매달린 둥지에서 새끼를
거느리고 날아 나온 어미새처럼, 그는 이카로스에게 바싹 뒤쫓아오라고 말하면
서 손으로는 날개를 조종하고 시선은 뒤따라오는 아들에게 둔 채 비행기술응 오
래지 않아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될 비행 기술을 가르쳤다. 물에다 낚싯대를
드리운 어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선 목동, 쟁기를 잡고 선 농부가 하늘을 가
로질러가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들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 다이달로스 부자를 신들로 여겼을 터였다.
이들의 눈에 유노 여신의 성도 사모스 섬이 왼손 편으로 보였고 델로스 섬과
파로스 섬은 이미 뒤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이윽고 레빈토스 섬과 꿀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칼륌네가 오른손 편으로 보일 즈음 아들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데 재미를 붙이고 공중으로 솟기 시작했다. 빈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
잡힌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얼마나 높이 솟아올랐는가
하면 태양의 열기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솟아올랐다. 그러
자 밀랍이 녹았다. 밀랍이 녹았는데 깃이 붙어 있을 리 없었다. 이카로스는 맨팔
맨다리에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깃없이 사지만 허우적거려봐야 아무 소용도 없
었다. 이카로스는 아버지를 부르며 바다로 내리박혔다. 이바다는 이때부터 그의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졸지에 자식을 잃어 이제는 아버지라고는 불릴
수 없게 된 팔자 기박한 아버지가 자식을 불렀다.
이카로스 이카로스 어디에 있느냐? 내가 어디서 너를 찾아야겠느냐?
이렇게 아들 이카로스를 부르던 아버지는 물위에 뜬 깃털을 보고 날개를 만들
어 하늘을 난 자신의 재주를 저주하고는 아들의 주검을 찾아 그 근처에다 묻었
다. 이때부터 이 땅은 그 무덤 임자의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4. 자고새가 된 페르딕스
다이달로스가 불운한 아들의 주검을 장사지내고 있을 즈음 수다쟁이 자고새
한 마리가 진흙밭에는 이것을 보고는 날개를 치며 재미있어했다. 당시 자고새라
면 이것 한마리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 이전에는 자고새라는 새는 있지도 않았
다. 이 새가 생긴 것은 다이달로스가 아들의 주검을 장사지내기 몇 년 전이었다.
자고새는 다이달로스로 인하여 생기게 된 새인데 그 생기게 된 내력은 이러하
다.
인간의 운명을 알 리 없는 다이달로스의 누이가 열두 살 난 총명한 아들을 다
이달로스에게 맡겨 가르치게 했다. 이 아이는 물고기의 등뼈를 보고는 날카로운
쇠날에다 이를 내어 톱을 발명한 천재였다. 그는 또 길이가 똑같은 두 쇠막대기
의 한쪽을 고정시켜 이를 접었다폈다할 수 있게 만들고 한 막대기 끝을 한 점에
고정시킨 채 다른 막대기를 돌려 원을 그릴 수 있는 기구 말하자면 양각기를 처
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다이달로스는 이 생질을 질투하여 미네르바의 거룩한 성
채 위에서 아래로 떠밀었다. 다이달로스는 이렇게 생질을 죽이고도 사람들에게
는 아이가 발을 헛디뎌 성채 아래로 떨어졌는 말을 퍼트렸다. 그러나 원래 지혜
로운 인간을 사랑하는 팔라스 여신은 성채에서 떨어지는 이 아이를 중간에서 받
아 새로 둔갑하게 했다. 즉, 떨어지는 이 아이의 몸에서 깃털이 돋아나게 한 것
이었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그는 이로써 새가 되되 날개짓과 발이 빠른 새가
되었다. 이 새는 그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새는 하늘 높
이 날지도 않고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지도 않는다. 오래 전에 등을 떠밀려 성
채에서 떨어졌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새는 날 때도 지면에서 가
까운 곳만 날고 알을 낳을때도 산울타리 감은 곳에다 낳는다.
5. 칼뤼톤의 멧돼지 사냥
방랑에 지친 다이달로스는 아이트나의 땅에 정착했다. 이 땅의 왕 코칼로스는
다이달로스를 손님으로 대저바고 보호함으로써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
었다.
테세우스가 크레타에서 거둔 승리에 힘입어 아테나이는 더 이상 크레타에 공
물을 바치지 않아도 좋았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신전이라는 신정는 모두 꽃으로
치장하고 의로운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와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사전에 약속했던 제물을 드렸다. 발 빠른 파마는 테세우스의 소식을 아
르고스의 온 나라에다 퍼트렸다. 이때부터 아카이아 땅의 온 나라 사람들은 나
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테세우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영웅 멜레아그로스가 있
는데도 불구하고 칼뤼톤이라는 나라 역시 테세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칼뤼톤이 테세우스에게 요청한 것은 와서 멧돼지 한 마리를 없애달라는 것이
었다. 멧돼지는 원래 디아나 여신의 하녀였다. 여신이 하녀를 멧돼지로 모습을
바꾸게 하여 칼뤼톤에다 보낸 것은 칼뤼톤 사람들의 무례를 벌하기 위해서였다.
칼뤼톤 사람들이 여신께 무례를 범한 내력은 이렇다.
칼뤼톤 왕 오이네우스는 어느 해 풍년이 들자 첫물로 거둔 과일은 케레스 여
신께 포도주는 박쿠스 신께 올리브 기름은 미네르바 여신께 바쳤다. 그는 농신
들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그치지 않고 하늘에 계심 모든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올렸다. 그런데 이때 오이네우스왕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지 않은 여신이
하나 있다. 라토나 여신의 딸 다이나 여신이었다. 오이네우스는 이 디아나 여신
만 쏙 빼고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다른 신들의 제단에는 모두 제물을 차
리면서도 디아나 여신의 제단만은 비워둔 것이었다. 이 일에 신들 모두가 의분
을 느꼈다.
내가 그냥 두고 볼 줄 아느냐? 날 일러 섬김을 받지 못한 여신이라고 할 자는
있을 것이나 복수할 줄 모르는 여신이라고 할 자는 없을 것이다.
디아나 여신은 이렇게 벼르고는 자기를 업신여긴 이 오이네우스의 땅에다 멧
돼지 한 마리를 보내어 짓밝게 한 것이었다. 이 멧돼지는 크기가 초장 좋은 에
피로스 황소에 견줄 만했고 시켈리아 황소에 견주면 덩치가 오히려 더 컸다. 이
멧돼지의 눈은 핏발이 서 있어서 늘 붉었고 목은 비할 데 없이 튼튼했으며 온몸
에는 창날 같은 털이 돋아 있었다. 이 멧돼지는 목쉰 소리로 포효했는데 그럴
때마다 턱 아래로는 거품이 흘렀다. 엄니는 힌두 산 코끼리의 엄니만했다. 이 멧
돼지가 숨을 쉴 때마다 불길이 일어 여기에 닿은 나뭇잎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
싸였다.
이 짐승은 닥치는 대로 논바ㅌ을 짓밟았다. 그래서 추수할 때가 되자 농부들
의 희망과 슬픔으로 변했다. 이 짐승이 논밭을 짓밟았고 덜 익은 이삭을 모조리
짓씹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농부들의 타작마당과 곳간은 그래서 늘 빌 수밖에 없
었다. 포도송이는 익기도 전에 잎째 떨어졌고 올리브 열매는 익기도 전에 가지
째 떨어졌다. 멧돼지는 가축도 공격했다. 멧돼지가 나타나면 목동도 개도 가축을
지킬 수 없었다. 사나운 황소도 멧돼지 앞에서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러가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농토를 버리고 성을 찾아 뿔뿔이 흩어
졌다. 이렇게 되자 멜레아그로스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이 짐승을 죽여 명예와
영광을 얻겠다고 나섰다.
이 젊은이들의 면면을 훌ㅎ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는 권투에 능하고
또 하나는 기마술에 능한 튄다레오스의 쌍둥이 아들 처음으로 배다운 배를 지었
던 이아손 절친한 친구 사이인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 테스티오스의 두 아들 륀
케우스와 발 빠른 이다스 형제 한때는 여자로 태어났다가 장성하여 남자가 된
카이네오스 위대한 전사 레우키포스 투창의 명수로 유명한 아카스토스 히포토오
스와 드위아스 아뮌토르의 아들 포이니쿠스 악토르의 쌍둥이 아들 엘리스에서
온 퓔레우스 텔라몬과 후일 아킬레우수의 아버지가 되는 펠레우스 페레스의 아
들 보이오티아의 이올라우스 힘이 좋기로 소문난 에우뤼티온 달음박질이라면 겨
룰 상대가 없는 에키온 나뤽스사람 렐렉스 파오페우스와 휠레우스 범 같은 장사
히파소스와 당시에 젊은이였던 네스토르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히포코온이 아
뮈클라이에서 파견한 한 무리의 무사들, 뒷날 페넬로페의 시아버지가 되는 라에
르테스 아르카디아 사람 안카이오스 암퓌코스의 아들인 선견자 아내로부터 배신
당하기전의 암피아라오스도 여기에 합류했다. 이 중에서 역시 돋보이는 것은 테
케아의 여걸이자 뒤에 륀카이오스 스ㅍ의 자랑거리라고 불리게 되는 여전사 아
탈렌타였다. 아탈렌타는 반짝거리는 조임쇠로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머리카락
은 한 가닥으로 묶은채 치렁거리며 늘 왼손에는 활을 들고 화살이 가득 든 상아
화살통은 어깨에 메고 다녔다. 여걸 아탈렌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남자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여자같았고 여자 같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남자같아 보이는 무
사였다.
칼뤼톤의 영웅 멜레아그로스는 이 여걸을 보는 순간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이 시랑이 이루어질 없다는 것을 안 멜레아그로스는 아탈렌타에 대한 사랑을 마
음속에다 묻어두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 저런 여자의 지아비가 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멜레아그로스는 점잖은 사람이라서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점
잖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를 드러낼 시간이 없었다. 멧돼지
와의 일전이 임박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산 사면에는 나무꾼의 도끼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 무사
들은 떼지어 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스ㅍ속으로 들어간 무사들은 사냥그물을
치고 개를 풀고 멧돼지의 발자국을 쫓는 등 제각기 맡은 일을 했다. 산 사면에
는 지대가 다른 곳보다 낮아 습지가 되어 짧은 길대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곳이
있었다. 이곳의 갈대숲에는 실버들 사초 고리버들 부들 같은 것이 듬성듬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은신처에서 이곳으로 뽀ㅊ겨나온 멧돼지는 이곳에 무리짓고 있는 전사들을 향
하녀 돌진했는데 그 기세는 번개가 구름을 뚫고 나오는 형국을 방불케 했다. 멧
돼지의 육중한 몸에 부딪혀 나무가 무수히 부러나갔다. 숲속에는 멧돼지가 돌진
하면서 나무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낭자했다. 젊은 무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창을
잡고 쇠날을 이 짐승에게 겨누어 던질 채비를 했다. 멧돼지는 앞을 가로막는 사
냥개 무리를 헤치며 돌진해 왔다. 이 바람에 많은 사냥개들이 멧돼지의 엄니에
옆구리를 찢기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가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에키온이 맨
먼저 창을 던졌다. 그러나 창은 과녁을 빗나가 단풍나무에 둥치에 꽂혔다. 이어
서 날아간 창은 멧돼지의 등에 꽂힐 것 같았으나 던진 이아손의 어깨에 힘이 너
무 들어가는 바람에 이 창은 과녁 너머로 날아가 땅바닥에 꽂혔다. 그러자 몹소
스가 외쳤다.
“아폴로 신이시여, 지금껏 섬겨왔고 앞으로도 열심을 다하여 섬길 신이시여,
창이 과녁에 명중하게 하소서. 창이 과녁에서 빗나가지 않게 하소서”
아폴로 신은 이 점쟁이의 기도를 들어주어, 과연 그의 창이 과녁에 명중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몹소스의 창은 이 짐승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아폴로의
누이인 디아나 여신이, 멧돼지 쪽으로 날아가는 이 창으로부터 창날을 뽑아버렸
기 때문이었다. 창 자루에 맞은 멧돼지는 불같이 노하여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
했다. 멧돼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숨결에도 불길이 섞여나왔다. 멧돼지는
적국의 성벽이나, 군사들이 빽빽하게 올라가 있는 탑루를 향해 투석기가 쏜 바
위처럼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무리의 오른쪽 날개 노릇을 하던 에우팔라모
스와 펠라손이 멧돼지의 공격을 피하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땅바닥에 벌렁 나자
빠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일으켜주지 않았더라면 멧돼지의 엄니에 찍혀 큰 변을
당했을 터였다. 이들의 경우와는 달리 히포코온의 아들 에나이시모스에게는 운
이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멧돼지의 엄니를 피할 수 었었따. 공포에 떨면서
에나이시모스는 그곳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멧돼지의 엄니가 허벅지에
박히자 그는 다리를 꺾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퓔로스의 네스토르는, 멧돼지가
공격해 오자 창대를 장대 삼ㅁ아 짚고 가까운 나무로 뛰어올라, 밑에서 식식거
리고 있는 멧돼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봉고도 재간이 없었더라면, 네스토르는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을 터였다. 네스토르를 놓친
멧돼지는 참나무 둥치에다 그 엄니를 갈았다. 한동안 이렇게 엄니를 간 멧돼지
는, 이 새로운 무기, 이 뾰족해진 엄니로 이번에는 히파소스를 공격했다. 히파소
스는 멧돼지 엄니에 허벅다리를 찍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늘에 별로 박히기
전의 쌍둥이 형제 카스토르와 포뤼데우케스는 백설같이 흰 말을 타고 내달으면
서 이 괴수를 향하여 창을 날렸다. 그러나 이들이 날린 창도 이 괴수에게는 상
처를 입히지 못했다. 괴수가 말도 뚫고 들어갈 수 없고, 창날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울창한 숲 속으로 몸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텔라몬이 달려나갔다. 그
러나 텔라몬은 너무 서둘다가 쓰러진 나무 둥치에 걸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
다. 텔라몬의 아우 펠레우스가 쓰러진 형을 붙잡아 일으킬동안 테게아의 여걸
아탈란테는 시위에 살을 메웠다. 아탈란테가 쏜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괴수의 귀 밑에 박혔다. 괴수는 이 상처로 피를 흘렸다. 멜레아그로스는 아탈란
테의 화살이 괴수에게 명중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괴수의 피
를 맨 먼저 본 사람도 멜레아그로스였고, 친구들에게 이를 맨 먼저 고한 사람도
멜레아그로스였다. 멜레아그로스는 아탈란테를 향하여, “그대의 용기는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그대의 용기는 칭송 값을 하기에 넉넉합니다.” 하고 말했다.
청년들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함성
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괴수를 공격했다. 공격했으되 협공할 생각을 않고 제각기
분별없이 날뛰었다. 그러나 수만 많았지 이들의 창이나 화살은 하나도 이 기수
에게 치병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러자 양날 도끼를 쓰는 아르카디아 사람 안카
이오스가 외쳤다.
“한갓 아녀자가 쓰는 무기가 남정네 무기보다 낫다는 말인가? 잘보라. 아녀
자의 무기와 대장부의 무기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겠다. 길을 비켜라. 라토나
여신의 딸이 이 괴수를 지켜주고 있을지 모르나 나는 내 손으로 기어이 이 괴수
를 죽여 보이겠다.”
그는 이같이 자신만만하게 외치고 나서 두 손으로 도끼를 들고, 앞으로 돌진
해 오는 멧돼지를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멧돼지는 이 겁없는 사나이를 맞아
허벅다리 윗부분을 겨냥하고는, 그의 급소에다 엄니를 박았다. 안카이오스는 쓰
러졌다. 괴수의 엄니에 뚫린 구멍으로는 검붉은 피와 함께 내장이 쏟아져 나왔
다. 이 바람에 그 근방의 땅은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익시온의 아들 페이리토스
가 창을 휘두르며 이 괴수를 향하여 돌진했다. 그러나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
우스가 그를 불렀다. 테세우스가 그에게 소리쳤다.
“내 영혼의 일부인 내 친구,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친구 페리토스여, 물러
서 있게. 이 괴물과는 싸워도 거리를 두고 싸우는 수밖에 없네, 우리의 용기는
그 거리 밖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일세. 안카이오스의 무모한 용기가 결국은 안카
이오스를 죽이지 않던가?”
테세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거운 청동 창날을 해박은 물푸레나무 창을 던
졌다. 제대로 날아갓더라면 이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 겨냥이 정
확했다. 그러나 이 창은 허공을 날다가 참나무 가지에 걸려 땅으로 떨어졌다. 이
아손도 창을 던졌지만 그의 창은 목표물을 지나, 멧돼지를 쫓던 사냥개의 허벅
지를 꿰뚫어 그 자리에 내굴렸다.
이윽고 오이네우스의 아들 멜레아그로스가 두 개의 창을 던져 이 괴수를 쓰러
뜨렸다. 먼저 던진 창은 땅바닥에 꽂혔으나 두번제 던지 창이 이 괴수의 등 한
복판에 명중한 것이다. 괴수는 피거품을 뿜으며 뒹굴어 땅바닥을 거품과 피로
물들였다. 멜레아그로스는 지체하지 않고 미친듯이 땅바닥을 구르는 괴물에게
다가가 어깻죽지에다 또 하나의 창을 박았다. 동료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와
멜레아그로스의 손을 잡고 그 승리를 칭송했다. 괴수 옆으로 다가온 무사들은,
쓰러진 괴수가 차지한 땅이 엄청나게 넓은 데 놀라 혀를 내둘렀지만, 쓰러져 있
는데도 마음놓고 가까이 다가가기가 무서웠던지 모두들 이 쓰러진 괴수를 찔러
창날에 피를 묻혔다.
한 발로 이 괴수의 머리를 딛고 선 채 멜레아그로스가 아탈란테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노나크라스의 처녀여, 내가 쓰러뜨리 이 괴수를 받아주시고 쓰러뜨린 영광
을 나와 나누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는 이 말과 함께 이괴수의 가죽과 엄니째 괴수의 머리를 아탈란테에게 바쳤
다. 아탈란테는 이 선물에도 만족스러워했고 선물을 준 사람이 멜레아그로스라
는 사실에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아탈란테에게도 돌아간 이 영
광을 질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좌중에서 테스티오스의 두 아들
이 주먹을 쥐고 흔들면서 나와 고함을 질럿다.
“처녀여, 그대가 받은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으시오. 우리가 나누어받을 명예
를 가로채지 마시오. 그대가 아름답기는 하오만 그 아름당움을 지나치게 믿지는
마시오.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를 짝사랑하는 자도 그대를 지켜주지 못
할 것이요”
이렇게 말한 이들은 아탈란테로부터는 멜레아그러스로부터 받은 선물을 멜레
아그로스로부터는 아탈란테에게 선물 줄 권리를 빼앗아버렸다. 마르스의 아들은
이를 갈면서 부르짖었다.
“남의 영광이나 훔치는 도둑들! 내가 그대들에게 말로 하는 위협과 실제로
하는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쳐주겠소”
멜레아그로스는 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칼을 뽑아 무심하게 서있는 플렛시
포스의 가슴을 찔렀다. 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톡세우스는,
형의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형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 두려워 망설였다. 그러
나 오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멜레아그로스가, 형의 피가 뚝뚝 듣는 칼에다 온
기가 더한 아우의 피를 묻혔기 때문이다.
6. 알타이아의 복수와 멜레아그로스의 죽음
테스티오스의 딸이자 멜레아그로스의 어머니인 알타이아는 아들이 괴수를 죽
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타이아는 즉시 신전으로 달려가 신들에게 감사의 제물
드릴 채비를 했다. 그러나 아들의 승전보에 이어 곧 두 아우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알타이아는 두 아우의 부고를 받고 성이 떠나가게 울었다. 한동안
가슴을 쥐어뜯음 울던 알타이아는 금빛 제복을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
나 알타이아가 울부짖은 것은 두 아우를 죽인 자가 누군지 몰랐을 때였다 오래
지 않아 두 아우를 죽인 자가 누군지를 안 알타이아는 더 이상 슬퍼하고 있을
수 없었다. 알타이아는 눈물을 거두고 두 아우의 죽음을 복수 할 생각을 했다.
옛날, 그러니까 알타이아가 갓 낳은 아기 멜레아그로스와 나란히 누워 있을
즈음 그 집 난로에서는 장작개비가 하나 타고 있었다. 이 장작개비를 거기에다
넣은 것은 운명의 세 여신이었다. 이 여신들은 운명의 실로 쫀쫀하게 베를 짜면
서 아기 멜레아그로스의 운명에 대해 “저 장작개비의 수명과 이 애기의 수명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운명의 세 여신이 이런 말을 하고 그 집을 떠나자 알타이아는 황급히 그 장작
개비를 난로에서 꺼내어 물에다 집어넣었다. 알타이아는 불을 꺼버린 이 장작개
비를 집 안 한구석 은밀한 곳에다 감추어두었다. 덕분에 멜레아그로스는 헌헌장
부가 되도록 자랄 수 있었다.
알타이아는 이때 자기 손으로 감춘 장작개비를 기억해 내고 이를 찾아내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명하여 불쏘시개를 가져와 아들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장
작개비를 태울 불을 지피게 했다. 알타이아는 이 물길에다 네 번이나 그 운명의
장작개비를 던져넣으려다가 네번이나 물러섰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아우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 맹세가 이 양자의 어머니이자 누나인 알타이아를 괴롭혔다.
아들과 아우들을 사랑하는 두 갈래 마음이 알타이아의 가슴을 두 쪽으로 찢는
것 같았다. 아들을 죽이기로 마음을 다그칠 때마다 알타이아의 얼굴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러나 아우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 얼굴에서
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두 눈에서도 불꽃이 번쩍거렸다. 표정도 시시각각
으로 변했다. 말하자면 한동안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하면 어느새 이
얼굴이 연민에 가득찬 자아로운 얼굴이 되어 있는 것이었따.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는 때는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곧 말랐다. 그러나 그 눈물이 마른 자
국 위로는 새로 나온 눈물이 흐르고는 했다. 이쪽으로 부는 바람과 저쪽으로 흐
르는 조류사이에서 이쪽으로도 못 가고 저쪽으로도 못 가는 배처럼 알타이아의
마음도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누
나로서의 알타이아가 어머니로서의 알타이아를 이겨내기 시작했다. 알타이아는
죽은 아우들의 영혼을 피로써 달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들을 죽이는 죄를 지
음으로써 원통하게 죽은 아우들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고자 마음먹은 것이었다.
하인들이 지핀 모닥불에서 불길이 오르기 시작했다. 알타이아는 저 타다 남은
장작개비를 손에 들고 불길 앞에 서서 불길을 보며 외쳤다.
“이 불길을 화장단의 불길로 삼아 내가 낳은 자식을 태울 수 있게 하소서.
징벌을 주관하시는 에우메니데스 세 여신이시여, 제가 드리는 이 기이한 제물을
받으소서. 저는 일써 아우들의 죽음을 복수하고 아들을 죽이는 죄를 지으려 합
니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화해를 이루게 하고, 사악한 죄악은 사악한 죄악을
통하여 씻게어야 하며, 살육은 살육을 통하여 갚음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러한
죽음과 사악한 죄악과 살육이 마침내 이 집안을 파멸시킬 때까지 쌓이게 하소
서. 친정 아비 테스티오스는 자식의 주검 앞에서 슬퍼하고, 지아비 오이네우스는
그 자식의 승리로 희희낙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둘 다 슬퍼한 거리가
잇어야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아, 내 아우들아, 저승에 당도한 지 얼마 안 되는 내 아우들의 망령들아, 와서
내가 차리는 재물을 흡향하여라. 내 배에서 난 자식을 죽여 마련한 이 비싼 제
무르 이 눈물겨운 제물을 흡향하여라.
아, 내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냐? 아우들아, 저 죄많은 것의 어미인 나를
용서하여라. 마음은 원이로되 손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내 아들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내가 저 아이를 죽여야 한다니 견딜 수가 없
구나. 하면 저 아이에게 벌을 내리지 말아야 할까? 너희 형제는 죽어 음습한 땅
의 망령으로 떠도는데, 즉어서 한줌의 재가 되었는데, 저 아이는 이 멧돼지 사냥
으로 칼뤼돈의 영웅이 되고 칼뤼돈 따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느냐? 안된다. 그것만은 나도 용납할 수가 없다. 이 죄많은 것
도 너희들처럼 죽어야 한다. 죽어서, 아비의 희망, 제 아비의 왕국과 함께 저승
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아, 그러면, 어미가 자식에게 보이는 자애는 어쩌고? 부
모와 자식을 있는 사랑의 끈은 어쩌고? 내가 저 아이를 배고 했던 열 달의 고생
은 어쩌고?
내 아들아, 차라리 네가 아기였을 때 저 장작개비와 함께 네 생명을 태워버렸
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어미의 손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던 내 아들아, 이제는 그
때 네가 받았던 생명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네가 한 일이 있으니 야속하다고 생
각 말고 그 대가를 치러라. 이 어미로부터 두 번, 한 번은 이 어미가 너를 낳았
을 때, 또 한번은 불붙은 장작개비를 불속에서 꺼낼 때 받았던 그 목숨을 어미
에게 돌려다오. 네가 그 목숨을 내어놓기 싫거든 이 어미를 어미의 아우들이 있
는 저승으로 보내다오.
아, 내 손으로 이 장작개비를 태우고 싶다만 할 수가 없구나. 피투성이가 된
내 아우들의 모습, 이들이 죽어가던 순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데도, 아들에
대한 어미의 사랑, 어미라는 이름이 이 결심을 깨뜨리는구나. 나같이 팔자가 기
박한 것이 또 있을까...... 아우들아, 너희들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승
리하는 순간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이 누이를 기다릭 잇는지 아느냐? 그러나 승리
해야 한다. 너희에게 승리를 안긴 연후에 나 또한 너희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너희와, 너희 영혼을 위로하려고 내 손으로 죽인 내 아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
알타이아는 이렇게 부르짖고 나서 그 운명의 장작개비를 불길 속으로 던져넣
고는 고개를 돌렸다. 불길이 옮겨붙으면서, 그리고 그 불길에 맹렬히 타오르면서
그 장작개비는 신음했다. 아니, 알타이아의 귀에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
다.
현장에 있기는커녕, 궁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잇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
던 멜레아그로스에게 그 불이 옮겨붙었다. 그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불길에 타
고 있음을 알았다. 멜레아그로스는 불굴의 용기로 그 고통을 참아내려 했다. 그
러나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죽어
가고 잇음을, 불명예스럽게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는 슬퍼했다. 그래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간 안카이오스를 부러워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연로한 아버지의 이름,
형제들의 이름, 누이들의 이름,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어쩌면 어머니의
이름도 불렀을 것이다. 불길이 소진되자 그의 고통도 끝났다. 남은 불길 아래로
흰 재가 가라앉자 그의 숨결을 대기 속으로 증발했다.
7. 산비둘기가 된 멜레아그로스의 누이들
그 높은 칼뤼돈 땅이 슬픔에 젖어 고개를 꺾었다. 슬퍼하는 데 노소가 따로
없었고 애통해하는 데 지위의 고하가 따로 없었다. 에베노스 강가에 살던 여자
들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멜레아그로스의 아버지 오이
네우스는 땅바닥을 뒹굴어, 백발과 주름진 얼굴이 진흙투성이가 된 채, 진작 죽
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멜레아그로스의 어머니는,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는가를 통감하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름으로써 그 죔낳은 손으로 지은 죄
에 스스로 합다한 벌을 내렸다.
신들께서는 나에게, 수많은 입과 수많은 혀를 허락하시고, 시적인 재능과 헬리
콘 산 하나와 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능력을 베푸셨으나, 나는 아직도 슬픔에
잠긴 멜레아그로스의 누이들은 남이야 무엇이라고 하건 퍼렇게 멍이 들도록 저
희 가슴을 치며, 멜레아그로스의 육체가 불에 타 완전히 없어지기까지 이를 껴
안고 쓰다듬으며 무수히 입을 맞추었다. 이윽고 오라ㅂ의 육신이 재가 되자 이
들은 이를 모아 가슴에 안았다. 멜레아그로스의 육신이 탄 재가 무덤에 묻혔을
때 이들은 그 무덤 옆의 맨땅을 뒹굴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묘석을 눈물로 적
셨다. 애통해하는 이들을 보고는 디아나 여신도 이 파르타온 가문에 내린 재앙
이 그만 하면 되엇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디아나 여신은, 이들 중 고르게와,
후일 알크메네의 며느리가 되는 데이아네이라만 남겨놓고는 나머지 자매들의 몸
에는 모두 깃털이 돋게 하고, 팔이 있던 곳에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여신은 이들
에게 뾰족한 부리까지 주어 하늘로 불러올렸다.
8. 아켈로오스와 테세우스, 섬이 된 페리멜레
멧돼지를 사냥하는 일이 끝나자 테세우스는 한때 에렉테우스가 다스리던 미네
르바 여신의 성도 아테나이를 향햐여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도중에서 만난 강
의 신 아켈로오스가 큰비에 물은 강물로 그의 앞길을 막고 며칠 묵어가기를 바
란다면서 이런 말을 햇다.
“위대한 아테나이 인이시여, 내 집에서 며칠 쉬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바라
거니와 탐욕스러운 내 강의 물길을 얕보지 마십시오. 경사진 물길에 갇혀 우렁
찬 소리를 내며 흐르는 내 강의 흐름은 거대한 나무 둥치와 굵은 바위까지 휩쓸
어가는 것을 힘겨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강의 둑 위에 있던 마을 외양간에서
가축이 내 강의 흐름으로 휩쓸려 들어오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내가 보았는
데, 황소가 힘이 세다 한들 물 속에서는 하릴없었고, 말이 빠르다 한들 물 속에
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산에는 눈 녹은 물이 내 흐름으로 흘러들 때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내 강에서 목숨을 잃는답니다. 그러니까 내 강의 물이 줄고, 흐르는
속도가 줄어 얌전하게 둑 안으로만 흐르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게우스의 아들은 그러마고 하면서 아켈로오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켈로오스 신이여, 고마운 충고를 받아들여 며칠 신세를 지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이렇게 해서 아켈로오스의 안내를 받아 다공질 경석과 거친 석회
화로 된 동굴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이끼가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권
패와 진주조개 껍대기가 격자무늬로 박혀 있었다.
테세우스 일행이 안락의자에 앉은 것은, 태양이 하는 궤도의 3분의 2를 돌았
을 때였다. 테세우스의 오른쪽에는 익시온의 아들 페이리토스가, 왼쪽에는 토로
이젠 사람인 영웅 렐렉스가 자리를 잡았다. 렐렉스는 이때 이미 귀밑머리가 백
발인 노인이었다. 다른 손님, 말하자면 아켈로오스로부터 테세우스와 한자리에
앉을 만하다고 인정받은 이들도 있었다. 아켈로오스는, 테세우스 같은 귀인 대접
을 그만큼 큰 영광으로 여겼다.
맨발의 요정들이 식탁을 펴고 진수성찬을 날라다 차렸다. 식사가 끝나자 요정
들은 보석 잔에 따른 포도주를 후식으로 날라다주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영웅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영웅 테세우스가 눈앞 가득히 펼쳐진 강을 손가락질하며
아켈로오스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무엇입니까? 하나의 섬 같기도 하고 여러 개의 섬 같기도 한
데...... 저 섬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강의 신이 대답했다.
“하나 같기도 하다고 하셨지만 하나가 아니고 사실은 다섯 개입니다. 멀리서
보면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게 잘 안 보이기는 하지만요. 디아나 여신께서 자신
을 업신여긴 칼뤼돈 땅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잘 보셨으니까 별로 놀라시지는 않
겠제요. 원래 요정들이었던 것을 내가 저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내력을 들어보
시지요.
어느 해 물의 요정들이 제물이랍시고 황소 열 마리를 잡고는 이 지방 신들이
라는 신들은 모두 불러놓고는 무도회를 엽디다. 다 부르면서 나만 쏙 빼고 말이
지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잇어야지요. 나는 강물을 불렀어요. 그렇게 불린 적
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 물울 몰아가, 숲이라는 숲,
들이라는 들을 모두 덮치고는 이 요정들을 그 무도회장째 쓸어 바닥에다 처넣었
습니다. 내 가슴에 자비라는 것이 없엇으니 내가 일으킨 홍수가 자비를 몰랐던
것이야 당연하지요. 마침내 이들이 나를 알아보앗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엇습
니다. 내가 몰아간 홍수와 바다의 파도는 힘을 합쳐서 그 땅을, 지금 그대가 보
고 있듯이 여러 개의 섬으로 찢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다른 섬들과는 유난히 멀리 덜어져 잇는 섬 하나가 보이지
요? 저 섬나 보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뱃사람들은 저 섬을 ‘페리멜레 섬
’이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처녀였습니다. 나는 저 처녀에게 마음이 있어서 오래
벼르다가 어느 날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안 처녀의 아버지 히포다마스
는 화를 삭이지 못해, 딸을 끌고 바닷가 벼랑으로 가서는 아래로 떠밀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떨어지는 처녀를 받아안고는 넵투누스 신께 기도했습
니다.
‘제비를 뽑으시어 하늘에 버금가는, 저 무서운 바다를 다스리시게 된 신이시
여, 삼지창을 드신 위대하신 신이시여, 제 아버지의 손에 바다로떠밀린 이 처녀
에게 머물 곳을 허락하시든지, 이 처녀로 하여금 그 머물 곳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새로 생긴 땅이 처녀의 몸을 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서 이 처녀의 몸 위로 거대한 섬이 생깁디다.“
9.필레몬과 바우키스
강의 신 아켈로오스의 이야기가 끝났다. 강의 신은 처녀를 생각하느라고 그랬
는지 이야기를 끝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른 손님들도 모두, 그의 이야기가
전한 기적에 감동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익시온의 아들 페
이리토스만은 강의 신이 한 말을 믿는 것은 고사하고 코방귀만 뀌엇다. 신들을
믿지 않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페이리토스는 그날 그 자리의 주인인 아켈로오스
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들이 정말 인간의 모습을 빼앗을 수도,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 도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신들의 힘을 과신하는 것이 분명하오”
조중의 손님들은 이 당돌한 말에 어안이벙벙해져, 페이리토스의 말을 말같지
도 않은 말이라고 일축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세상을 오래 살아 생각이 익
을 대로 익은 노인 렐렉스가 침묵을 깨뜨리고 이런 말을 했다.
“신들의 힘을 누가 장차 측량하랴. 신들께서는 능하지 않은 바가 없으시다네.
신들께서는, 당신들께서 바라시는 바는 언제든지 어디서든 이루어지게 하신다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할 테니 잘 듣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네 생각도 달라질
것일세.
프뤼기아 산간지방에 가면, 보리수와 나란히 선, 아주 오래 묵은 참나무가 한
그루 있네.
이 두 그루의 나뭇가에는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고...... 피테우스가, 당시 그곳
의 왕이었던 자기 아버지 펠로프스에게 다녀오라면서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그곳에 갔는데 그곳에 걸음한 김에 나는 이 참나무와 보리수를 구경하러 갔던
거네. 이 나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연못이 하나 있더군. 그곳
사람들 말로는, 한때 그 연못 자리에 마을이 있었다는군. 내가 보았을 당시는,
농병아리나 검둥오리 같은 늪지 새들이나 모이는 연못이었지만......
옛날 유피테르 신께서 인간으로 변복하시고 이곳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네. 늘
최면장을 들고 다니시는 메르쿠리우스 신께서 날개는 접어두고 어버님을 수행하
셨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었네.
이 두 분 부자신께서는 이곳에 있는 마을로 들어오셔서 하룻밤 쉬어갈 수 있
게 해달라고 애원하셨지만 그때마다 퇴짜를 맞으셨대. 매정한 마을 사람들이 이
두 분 신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거나 대문의 빗장을 질러버리거나 했던 것이
지. 그런데 한 집만은 그렇지 않았네. 늪에서 나는 갈대를 엮어 지붕을 얹은 참
으로 초라한 집이었다네.
집주인은 필레몬이라는 영감과 그의 할멈 바우키스......
마음씨 착한 이 노부부는 바로 그 초라한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둘 다 백
발이 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네. 이 노부부는, 가난을 있는 그대
로 받아들이고 이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라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네. 이 집에는 주인과 종이 따로 없었지. 식구가 둘뿐이었으니 명을 내리는
사람 따로 있고, 그 명을 받들어 좇는 사람이 따로 있을 턱이 없을 것이 아니겠
나.
하여튼 두 분 신들께서 이 초라한 오두막에 이르셔서 고개를 숙이고 상인방이
낮은 문으로 들어가시자, 노부부는 걸상을 내어 놓으면서, 여행에 얼마나 피곤하
시냐, 편히 쉬시라, 이런 말을 했던 것이네. 할멈인 바우키스는 부랴부랴 걸상
위에다 초라하나마 방석을 깐다, 화로를 뒤져 불씨를 찾아내고 그 위에다 나뭇
잎과 잘 마른 나무 껍질을 얹고는 입으로 불어 불을 일으키는 등 나름대로 수선
을 떨었던 것이네. 그 동안 영감은 잘게 쪼갠 장작과, 처마 밑에다 매달아 두었
던 마른 가지를 벗겨 잘게 부러뜨려 할멈의 냄비 밑에다 넣어 주었고......이 일이
끝나자 영감은, 마당에다 정성들여 가꾼 채소를 거두어 와 겉의 시든 잎은 깨끗
이 따내었네. 그리고는 끝이 갈라진 막대기로, 까맣게 그을은 대들보에다 오래오
래 걸어두었던 훈제 돼지의 옆구리 살을 벗겨내고는 한 조각을 베어 냄비에다
넣고 끓였네. 오래지 않아 냄비 속의 국은 하얀 거품을 내며 끓었네. 이러면서도
영감과 할멈은 계속해서 수다를 떨어대었네, 왜?
왜는 왜야? 기다리는 길손들이 지루해할까봐 그랬던 것이지. 손잡이가 못에
걸려 있는 너도밤나무 통에는 더운 물도 있었네. 영감과 할멈은 이 물을 아낌없
이 길손에게 부어주어, 이 물에 여행에 지친 손발을 씻으시게 했지.
뼈대도 버드나무, 다리도 버드나무로 만들어진 안락의자 위에는 부드러운 왕
골로 짠 방석도 놓여 있었다네.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이 안락의자 위에다, 명절
이 되어야 까는 걸상보까지 내다깔았네. 하지만 낡아서 험한 버드나무 의자가
어디 가는가? 초라한 걸상보는 초라한 안락의자에 잘 어울렸네.
이윽고 신들은 식탁에 마주앉았네. 바우키스 할멈은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여며 질끈 동여매고는 두 분 신께서 보시는 앞에서 상을 차렸지. 식탁의 다리
네 개 중 한 개는 나머지 세 개에 비해 조금 짧았네. 하지만 바우키스 할멈이
기와 조각을 하나 주워 이 짧은 다리 밑에다 괴자 식탁은 평평해졌지. 식탁이
바로잡히자 바우키스 할멈은 박하 이파리로 이 식탁을 닦고는 여기에다 미네르
바 여신께서 좋아하시는 알락달락한 딸기, 가을에 따서 겨우내 포도주에 절여두
었던 버찌, 꽃상치, 순무, 건락 한 덩어리, 뜨겁지 않은 재에다 구운 계란을 토기
접시에 얹어 내어놓았네. 무늬가 놓인 술병과, 안에다 밀랍을 입힌 너도밤나무
술잔도 나왔네.
이윽고 식사가 시작되었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접시와, 오래된 것은 아
니어도 그래도 질이 괜찮은 포도주가 든 술병이 몇 순배를 돌았지. 식사가 끝나
자 바우키스 할멈은 상을 치우고 후식을 내어놓았네. 호도, 무화과, 쪼글쪼글하
게 마른 대추, 자두, 향긋한 사과, 갓딴 듯한 포도가 바구니에 담겨 나왔지. 식탁
한가운데엔 꿀이 묻어 반짝이는 벌집도 나와 있었네만 뭐니뭐니해도 귀하고도
귀했던 것은 유쾌한 어울림, 주인 내외의 따뜻한 대접이었네.
식사가 계속될 때의 이야긴데, 주인 내외는 자꾸만 따르는데도 따르는 족족
술병에는 새 술이 차는 데 놀랐지.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보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으며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래서 두 사람은 손을 벌리고 신들께 빌었
지, 신들이신 줄 모르고, 허름한 음식을 대접한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음식을
공들여 준비하지 않은 비례를 용서해 달라고.
이 집에는 문지기 노릇을 하는 거위가 한 마리 있었네.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모처럼 찾아주신 신들을 위해 이 거위를 잡으려고 했지. 그러나 거위는 날갯짓
하면서 도망쳤다네. 노인들이 무슨 수로 이 거위를 따라잡을 수 있겠나. 도망다
니던 이 거위는 마침내 신들 옆으로 달려가 신들의 눈치를 살폈다네. 그러자 신
들께서는 거위를 잡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지.
< 우리는 신들이다. 나그네 대접할 줄 모르는 네 이웃들은 곧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 자들은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해주리라. 이 집을 떠나 우리와 함께 뒷산으로 오르자. >
두 노인은 신들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산을 오르기 시
작했네.
꼭대기까지는 활 한바탕쯤 남은 곳까지 오른 두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았지.
이들의 눈에 무엇이 보였겠는가? 온 마을이, 바우키스와 필레몬이 살던 집만 빼
고 모조리 물에 잠겨 있었다네. 이들은 놀란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이
웃해 살던 사람들이 가엷어서 하염없이 울었다네. 그런데 이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네. 두 사람 살기에도 비좁던 그 오막살이가 신전으로 화하고 있었던 것
일세. 나무 기둥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대리석주가 솟았고 갈대 지붕은 황금
빛으로 변했으며, 문이라는 문은 모두 부조 장식이 붙은 신전 문이 되었고, 흙바
닥은 대리석 판석바닥이 되었던 것일세. 그제야 사투르누스의 아드님 ( 유피테르
대신 ) 께서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네.
< 선한 영감과, 선한 영감에 어울리는 역시 선한 할미야. 내게 말하여라 너희
가 내게 무엇을 구하느냐? >
바우키스와 필레몬은 속닥속닥 뭐 한참 상의한 끝에 필레몬이 대신께 바라는
바를 말씀드리기로 했네.
< 저희들은, 대신의 신전을 지키는 신관이 되고자 하나이다. 저희들은 한평생
을 사이좋게 살아왔은즉 바라옵건데 죽을 때도 같은 날 같은 시에 죽고자 하나
이다. >
이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네. 그래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신전을 돌볼 수가
있었던 것이네.
그런데 어느 날 말이네. 세월의 무게로 허리가 고부라진 이들은 신전 계단에
서서 옛날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바우키스는, 필레몬의 몸에서 돋아난 것을 보았네. 이윽고 머리 위로 나무가 뻣
어올라가기 시작하자 이들은 마지막 인사를 서로 나누었네. 말을 할 수 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해두어야했던 것이네.
< 잘 가게, 할미. >
< 잘 가요, 영감. >
이들이 이러는데 얼굴이 나무 껍질로 덮이면서 이들의 입을 막아 버렸지.
프뤼기아 농부들은 지금도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그루의 나무, 한 때는 부부
지간이었던 이 나무를 보면서 옛이야기를 한다네.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나를 속여서 득될 것이 없는 노인이었네. 나는 이 나뭇가지에 화환이 걸
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고, 화환을 하나 만들어 직접 여기에다 건 사람이네. 나
는 화환을 걸면서 이런 말을 되뇌었네.
< 신들을 사랑하는 자는 신들의 사랑을 입고, 신들을 드높이는 자는 사람들로
부터 드높임을 받는 법이거니. >
10. 아구병에 걸린 에뤼식톤
좌중은 이야기 자체와 이야기꾼의 솜씨에 큰 감명을 받았다. 가장 큰 감명을
받은 사람은 테세우스였다. 테세우스가 신들에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자
칼뤼돈의 강신은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이 영웅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 용감한 영웅 중에서도 출중하신 테세우스시여, 모습을 바꾸는데도 두 가지
가 있습니다. 즉 한번 그 모습이 바뀌면 영원히 그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둔갑
술이 있고, 수시로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둔갑술이 있습니다.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를 예로 들어봅시다. 사람들 중에는 이 프로테우스가
청년으로 둔갑한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사자로 둔갑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분은 사람들 앞에, 사나운 멧돼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고, 사람들이 징그럽게 여기는 배암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
면, 뿔 달린 황소로 둔갑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돌, 나무,
때로는 흐르는 물, 심지어는 물과는 상극인 불로 둔갑하는 수도 있습니다.
에뤼식톤의 딸이었던, 아우톨뤼코스 ( 메르쿠리우스와 키오네 사이에서 난 아
들, 도둑질과 사기의 명수, 약고 꾀가 많았다는 오디세우스도 이 핏줄에서 태어
난다. ) 의 아내에게도 이런 권능이 있었답니다. 오늘은 그 아버지 이야기를 합
시다. 이 여자의 아버지인 에뤼식톤은 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라서 신들의
신전에서 향 한 번 피워본 적이 없었답니다. 이 자는 또, 케레스의 성림에서 도
끼로 나무를 찍은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자랍니다. 도기로 이 유서 깊은 숲의 나
무를 찍다니 이를 어찌 예사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숲에 엄청나게 큰 떡갈나무가 있었더랍니다. 어찌나 오래되고 크기
가 엄장한지 한 그루로도 능히 숲이라고 불릴 만했다지요. 이 나뭇가지에는, 여
기에 와서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얻은 사람들이 걸어놓은 꽃다발도 있었
고, 나무 앞에는 나무에 감사 기도 대신 드리는 명문도 있었답니다.
드뤼아스 ( 숲이나 나무의 요정 ) 들은 이따금씩 이 나무 아래서 무도회를 열
었는데, 요정들이 이 나무를 둘러싸고는 손에 손을 잡고 돌았다니 크기가 어지
간했겠지요? 나무의 둘레가 자그마치 열다섯 아름이나 되었답니다. 숲 바닥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고 이 풀 위로는 다른 나무, 다른 나무 위로는 이 나무가 우뚝
서 있었는데, 이 나무에 견주면 다른 나무는 바닥에 깔린 풀에 진배없었다고 합
니다. 그런데도 이 에뤼식톤이라는 자는 이 나무에다 도끼를 대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인들에게 이 나무를 쓰러뜨리라는 명령만 했지요. 그러나 이 명을
받고 하인들이 망설이자, 이 자가 직접 나와 도끼를 빼앗으며 하인을 꾸짖었지
요.
< 이것이 여신의 사랑을 입은 나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여신이 정
말 깃들여 있는 나무인지 이 나무를 쓰러뜨려 보면 안다. >
이 자는 이러면서 도끼에 찍혀 껍질이 찢긴 곳으로 피를 흘리더랍니다. 제물로
제단 앞에서 희생된 황소처럼 말이지요.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서
워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이 용감하게 나서서 이 못된 짓
을 말려보려고 했답니다. 에뤼식톤은 이 사람을 노려보면서, < 신들을 잘 섬기
는 너에게 내가 상을 내리겠다. > 이러면서 도끼로 이 사람의 목을 잘라버리고
는 연방 나무를 찍어대더라는 이야깁니다.
에뤼식톤이 도끼질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 나무 둥치 속에서는 이런 소리가 울
려나오더라는군요.
< 이 나무 속에 사는 나는 케레스의 여신의 사랑하심을 얻은 요정이다. 내 너
에게 숨을 거두면서 경고하거니와 네 사악한 짓에 대한 보답이 곧 있으리라. 죽
어가면서 나는 이로써 위안을 삼노라. >
그런데도 에뤼식톤은 도끼질하던 손길을 멈추지 않았지요. 에뤼식톤은, 도끼질
이 어느 정도 끝나자 줄을 메어 이 나무를 쓰러뜨렸는데, 나무 무게가 엄청났기
때문이겠지만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온 숲이 다 울리더랍니다. 살 나무와 살
숲을 잃은 요정들은 검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케레스 여신에게 달려가, 에뤼식톤
에게 벌을 내려주기를 간청했지요. 아름다운 여신께서는 그러마고 하시고는 고
개를 끄떡이셨답니다. 여신께서 고개를 끄떡이시자 이삭이 누런 곡식도 모두 고
개를 끄덕였지요. 여신께서는 이 자에게 벌을 내리되,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런 벌을 받는 이 자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벌을 생각해
내셨습니다. 저 무서운 파메스 ( 그 / 리모스, 기아 ) 를 이 자에게 붙일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운명의 여신들께서는 케레스 여신 ( 곡물과 풍요의 여신 ) 과 파메스가 만나
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케레스 여신께서는 이 파메스에게 접근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신께서는 오레아스 ( 산의 요정 ) 를 하나 불러 이렇게 이르
시었지요.
<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눈 덮인 스퀴티아 땅에 가면, 대지가 곡식이 무엇인
지 나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참으로 황량한 불모지가 있다. 저 얼어붙은 < 한기
>, < 창백 >, < 전율 >, 그리고 늘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파메스가 사는 땅
이 바로 여기다. 가서 파메스에게 이 신들에게 참람한 인간에게 허기의 씨앗을
좀 뿌리라고 하여라. 내가 베푸는 자양분과 싸우되,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많은 음식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만큼 좀 듬뿍 뿌리라고 하여
라. 갈 길이 멀다고 걱정하지 말아라. 비룡이 끄는 내 수레를 빌려주마. 비룡이
끄는 이 수레가 하늘을 날아 너를 그 땅으로 데려가줄 게다. >
케레스 여신께서는 이러시면서 오레아스에게 수레를 빌려주셨습니다. 오레아
스는 이 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지요.
오레아스는 스퀴티아 땅의 한 바위산에서 비룡 수레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이
딘고 하니, 바로 그 땅 사람들이 카우카소스 ( 코커서스 ) 라고 부르는 곳이었지
요. 오레아스는 파메나를 찾으러 나간 지 오래지 않아, 돌밭에 앉아 손톱과 이빨
로, 몇 포기 안 남은 풀뿌리를 캐고 있는 파메나를 찾았답니다. 파메나의 얼굴을
창백했고,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입술은 쩍쩍
갈라져 있더랍니다. 안에서 음식이 썩는 독기 때문에 몸은 잔뜩 쉬어 있었고, 살
갗은 딱딱한데도 어찌나 얇고 투명한지 오장육부가 다 들여다 보이더라는 군요.
몰골 흉악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살이 한점도 붙어있지 않은 엉덩이
뼈는 허리 이쪽으로 불쑥 저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고, 배가 있어야 할 자리
는 뻥 뚫려 있었으며, 어찌나 말랐는지 뼈의 관절은 마디마다 툭툭 불거져 있었
고, 슬개골은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발뒤꿈치는 불룩하게 솟아 있더랍니다. 축
늘어진 젖가슴은 가슴에다려 있다기 보다는 등뼈에 달려 있다고 하기가 쉽더라
지요.
이 꼴을 본 오래아스는 차마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멀리서 케레스 여신의 뜻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짧은 시간, 그나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있
었는데 이 오레아스는 파메나에게 깨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장기가 느껴지더랍
니다. 그래서 이 오레아스는 서둘러 비룡의 머리를 돌려 하이모니아 땅으로 돌
아와 버렸답니다.
파메나는 원래 케레스 여신의 뜻과는 늘 엇갈려 가기로 유명합니다만 이때만
은 여신의 명을 그대로 좇아 시행했지요. 파메나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 곧
여신께서 가르쳐주신 자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 참람한 인간 에
뤼식톤의 침실로 들어갔고요. 에뤼식톤은 자고 있었습니다. 밤이었으니까요. 파
메나는 자고 있는 에뤼식톤을 끌어안고 입술, 목, 가슴 할것없이 가리지 않고 허
기의 씨앗이 잔뜩 든 숨결을 내뱉어 이 씨앗이 핏줄 속으로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아와 공포뿐인 제 고향으로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에뤼식톤은 날개 달린 솜누스 ( 그 / 휘프노스, 잠이라는 뜻 ) 의 도움에 힘입
어 아주 곤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뤼식톤은 자면서 먹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꿈을 꾸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에뤼식톤은 자면서도 입맛을
다시고, 이빨을 갈고, 음식을 삼키는 시늉을 했더랍니다. 음식대신에 하릴없이
바람만 잔뜩 들이마신 것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에뤼식톤은 시장기를 느끼고 미
친 듯이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이로써 기갈에 들린 그의 입과 미친듯이 먹을
것을 요구하는 그의 위장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는 지체없이 하인에게 명하여, 땅에서 나는 것이든, 하늘에서 나는 것이든
물에서 나는 것이든,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장만해 오라고 명했습니다. 하인들
이 음식을 차려다놓았는데도 그는 배가 고프다고 죽는 소리를 했고, 먹으면서도
음식을 더 장만해 오라고 악을 썼습니다. 한 도시, 한 나라를 능히 먹일 음식도
그에게는 모자랐습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시장기를 느꼈던 거지요. 바다는
온 땅의 물이라는 물은 다 받아마시고도 배가 차지 않는지 먼 땅의 물까지 다
받아마시지요? 탐욕스러운 불길은 온 산의 나무라는 나무는 다 태우고도 나무가
더 있기를 원하지요? 에뤼식톤의 배가 이와 같았답니다. 에뤼식톤은 음식이라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면서도, 그릇이 비지 않았는데도 더 가져오라고 소
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먹어치운 음식은 그의 배를 채운 것이 아니고 그의 식욕
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먹어치운 음식은 그의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고
그의 허기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이 같은 아구병, 채워질 줄 모르는 그의 위장은 곧 그 집 재산을 바닥나게 했
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시장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는데, 그 배를 채우고자 했
으니 재산이 바닥난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이라
고는 딸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딸은 아비와는 달리 참한 처녀였던 모양입니다.
먹기는 먹어야 하는데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에뤼식톤은 마침내 이 딸마저 팔았
습니다. 그러나 이 딸은, 남의 집 종 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새 주인에
게 팔려 바닷가로 나간 이 처녀는 두 팔을 벌리고 기도했습니다.
< 일찍이 제 순결을 앗아가신 분이시여, 이제 베풀어주실 때가 되었으니, 저
로 하여금 노예 신세를 면케 하소서. >
이 처녀가, 누구에게 기도했는가 하면, 바로 해신 넵투누스께 했던 것입니다.
넵투누스 신께서는 이 처녀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조금 전에
새 주인을 따라 바닷가로 나온 이 처녀의 모습을 남자로 바꾸시고 어부의 옷으
로 갈아입히셨습니다. 처녀의 새 주인이, 어부로 둔갑한 이 처녀를 보면서 물었
지요.
< 미끼가 달린 낚시 바늘을 물 속에다 숨기고 계시는 분이시여, 물에다 낚시
대를 담그고 계신 분이시여. 바다가 내내 잔잔하기를 바랍니다. 조금 전에, 싸구
려 옷차림에 머리는 산발하고 내 옆에 있던 처녀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시면,
넋빠진 고기가 바늘을 알아보지 못 하고 덥석 미끼를 물 것이리다. 이 처녀, 조
금 전에 여기에 있었는데, 어디로 갑디까? 좀 일러주시오.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멀리는 가지 않았을 것이오. >
처녀는 그제야 신이 자기의 모습을 바꾸어 준 줄을 알았지요. 새 주인이 자기
에게 자기의 행방을 묻고 있는 것을 재미있게 생각하고, 처녀가 이렇게 대답했
더랍니다.
<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가 뉘신지 알지 못하오. 나는 낚시질에 정신을 팔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이다. 내 말을 못 믿으실 것 같아 내 한 말씀 더
드리지요만, 내 생업을 도우시는 신께 맹세코 이 해변에는 나밖에는 없소이다.
여자가 내게로 온 적은 더욱 없었소. >
새 주인은 이 말을 믿었는지 발길을 돌려 그 곳에서 사라졌답니다. 처녀는 그
제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지요.
처녀의 아비 에뤼식톤은, 딸이 둔갑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번번이 딴 주인
에게 딸을 팔았더랍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처녀는 말로 둔갑하여, 때로는 새,
황소, 사슴으로 둔갑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에뤼식톤은 이렇게 되돌아온 딸을 되
팔아 허기를 메우어나갔다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준비된 음식을 다 먹고도 성
에 차지 않았던 그는 처음에는 제 팔다리, 그것도 모자라 결국에는 제 몸을 모
두 뜯어먹었다......는 이야깁니다.
그것은 그렇고 내가 왜 남의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지 모르겠군
요. 둔갑할 수 있는 짐승의 가지 수는 얼마 안 되지만, 나도 초라하나마 둔갑술
을 익힌 처지라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대개의 경우에는, 지금 그대가 보시는 모
습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뱀, 혹은 육축중에서는 으뜸인 황소로 둔갑하기도 합
니다. 황소의 힘이 뿔에서 나온다는 것은 아시지요? 나도 한때는 뿔이 두개인
황소로 둔갑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둔갑해도 뿔이 하나뿐인 황소로 밖에는
둔갑이 안 됩니다. 한쪽 뿔은 뽑혔던 것이지요......>
아켈로오스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제 9 부
헤라클레스 외
1. 아켈로오스와 헤라클레스
그러자 넵투누스의 용감한 아들 테세우스(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의 아들이 아
니라 해신 넵투누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어머니 아이트라가 넵투누스
의 사랑을 받은 몸으로 아이게우스와 동침했다는 것이다.) 는 아켈로오스에게 한
숨은 왜 쉬며 이마는 어쩌다 다쳤느냐고 물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갈대로
질끈 동여매고 있던 이 칼뤼돈 땅의 강신 아켈로오스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 그대가 물으시는 것에 답하기가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노릇입니다. 이 세상
에, 제가 진 싸움 이야기를 하기 좋아할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가?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싸운 것 자체의 영광이 진 불명예를 덮을 수
있다면 말씀드려도 좋겠지요. 나는 그때의 싸움에서 진 것을 몹시 부끄러워합니
다만 싸운 상대가 온 세상이 다 아는 영웅이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는답니다.
데이아네이라라는 이름 들어보셨겠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였답니다. 어찌
나 아름다웠던지 한다하는 젊은 이들이 모두 이 처녀를 아내 삼으려고 그 아버
지의 왕궁으로 몰려갔답니다. 나도 이 처녀를 얻으려고 장차 내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분께 달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파르타온의 아드님이신 왕(멜레아그로스의 아버지인 오이네우스 왕을 말한
다.)이시여, 저를 따님의 지아비로 삼으소서.>
그런데 저 유명한 헤라클레스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거기에 와 있었습니다. 결
국 다른 구혼자들은 다 떨어지고 나와 헤라클레스만 사위 후보로 남게 되었지
요. 나의 연적이 된 헤라클레스는 데이아네이라를 유피테르의 며느리로 삼아야
한다면서 저 유명한 열두 가지 난사(헤라클레스는 유노의 대리자인 에우뤼스테
우스로부터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열두 가지 어려운 일을 하라는 명을 받
고 이를 무난히 해낸다. 말하자면 유노가, 에우뤼스테우스의 손을 빌려 유피테르
의 자식인 이 헤라클레스를 박해한 것이다.)를 열거하면서, 자기는 의붓어머니인
유노(헤라클레스는 유피테르와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따라서 유피
테르의 본처인 유노는 헤라클레스의 의붓어머니가 된다.)의 명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해내었노라고 합디다. 그래서, 나는 왕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되, 이일은 헤라클레스가 신위에 오르기 전에 있었다는 것에 유
념하시기 바랍니다.
<신이 인간에게 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왕이시여, 저는 전하의 땅, 비탈진
물길을 도도히 흐르는 물의 왕입니다. 전하의 사위가 되고자 하는 저는 낯선 해
변에서 온 이방인이 아니라 전하의 신민 중 하나이고 전하가 다스리시는 왕국의
일부입니다. 천궁의 왕후이신 유노 여신의 미움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유노 여
신으로부터 난사의 시험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해서 저를 내치지는 마소서. 그리
고 알크메네의 아들이여, 그대는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내가 알기
로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대는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하더라
도 이 또한 자랑거리가 될 턱이 없다. 그대가 만일에 유피테르 대신을 아버지라
고 부른다면 그대는 이로써 그대 어머니의 간통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자. 어
쩔 테냐?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테냐, 아니면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라고 우겨 그대가 참으로 부끄러운 짓거리의 씨앗이라고 할테냐?
>
헤라클레스는 이런 말을 한 동안 내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더니만 화
를 삭이지 못하고 영웅들이 대개 그러듯이 우렁찬 소리로 이렇게 응수합디다.
<나는 말은 잘 못하는 사람이나 손 쓰는데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만일에
나와의 싸움에서 네가 이기면 네 말이 맞는 것으로 하자.>
아, 이러더니 내게 달려듭디다. 큰 소리를 친 참이라 물러서기가 창피하더군
요. 나는 초록색 옷을 벗어던지고, 두 손을 가슴에다 끌어다 붙이고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싸울 채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헤라클레스는 손을 모으고
는 흙을 한 움큼 퍼가지고 내게다 뿌리는 것이 아닙니까? 나도 황토를 퍼가지고
그 친구에게 뿌렸지요. 온 몸이 누렇게 흙투성이가 되도록 뿌렸습니다. 헤라클레
스는 내 목을 노리는가 하면 어느새 다리를 노리는 등 변화무쌍한 기술을 구사
하며 정신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보시다시피 몸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 친구의 공격에 끄덕도 하지 않을 수밖에요. 노호하는 파도
에 시달리면서도 그 우람한 모습으로 꿈쩍도 않고 의연하게 서 있는 거대한 바
위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잠시 떨어졌다가, 서로 지지 않으려고 디딘 땅에 발을 단단하게 붙이
고 다시 맞붙었습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린 채 그 친구의 손을 깍지끼고 내 이
마를 그 친구의 이마에다 붙였습니다. 나는 언젠가, 아주 근사한 풀밭과 잘생긴
암소를 두고 두 마리의 황소가 맹렬하게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소들은, 누가 그 싸움에서 승리해서 암소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 궁금했던 나머
지 두려움에 떨면서 구경하고 있었고요. 우리들이 그 황소와 비슷했지요. 헤라클
레스는 세번이나 자기 가슴을 내 가슴에다 대고는 나를 밀어보려다가 뜻대로 되
지 않자 내 손을 뿌리치고는 나를 한 대 쥐어박는데,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김에 솔직하게 말씀드리리다. 정신이 없더군요. 내가 비틀거리는 틈을 이용해서
이 친구가 재빨리 내 등에 올라탑디다. 내 말을 믿으세요, 나는 그대로부터 존경
을 받으려고 불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에다 헤라클레스를 달고 있
으려니 흡사 산 밑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는 내말에 과장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찌어찌해서, 온통 땀에 젖은 내 팔을 그 친구의 팔과 내 가슴
사이에다 찔러넣을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몸을 조르는 그 친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길래 나는 방법을 바꾸어 긴 뱀으로 둔갑,
재빨리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몸으로 나선형 또아리를 만
들어 갈라진 혀로 쉭쉭 소리를 내고 있는 걸 본 이 티륀스의 영웅은 내 재주를
비웃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보에 싸여 있을 때 뱀을 잡은 나다. (헤라클레스는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유노 여신이 자기를 시험하러 보낸 팔뚝 굵기의 뱀 두 마리를 죽인 적이 있다.)
아켈로오스야, 네가 뱀으로 둔갑은 했다만, 레르나의 휘드라(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난사중 하나로, 레르네 샘에 사는 물뱀 휘드라를 죽인 일이 있다. 이 뱀은
일으키고 있는 윗몸 길이만 해도 헤라클레스의 두 길이 넘었다.) 에 비하니 네
모양이 초라하기 그지 없구나. 백개나 되는 휘드라의 머리(휘드라의 머리는 아홉
개였다는 설도 있고, 다섯개 또는 백 개였다는 설도 있다.) 는 예사 머리가 아니
다. 하나를 자르면 전보다 튼튼한 머리가 둘 씩이나 돋아났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머리가 아무리 많이 돋아나면 무얼 하느냐, 자르는 족족 돋아나면 무얼하고,
해치려는 자의 힘을 제힘으로 이용해 먹으면 무얼 하느냐, 결국은 내손에 도륙
을 당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아라, 네가 둔갑한 꼴은 뱀 같다만, 내가 쓸 무기인
독니가 네 솜씨에 익은 것이 아니고, 그 형상이라는 것도 잠시 빌렸을 뿐인 형
상에 지나지 않는데 네가 장차 내 손에 어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 >
아, 이러더니 손은 쓱 내밀어, 뱀으로 둔갑한 내 목을 잡죄는 것이 아니겠어
요? 숨이 콱 막힙디다. 나는 그 친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지
요.
나는 둔갑하고도 그 친구에게 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둔갑할 거리
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우람한 황소로 둔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황소
로 둔갑하고 싸움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 상대는 재빨리 내 왼쪽으로
몸을 비키더니 팔을 내 목에다 감습디다. 나는 그의 팔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흔
들었습니다만 그 친구는 내 목을 아래로 꺾어 뿔을 땅바닥에다 박아버립디다.
이로써 놓아줄 줄 알았지만 어림도 없었어요. 그 친구는 내 뿔 하나를 그 우악
스러운 손으로 잡더니만, 뚝 분질러 버리는게 아닙니까? 나는 이로써 공격 무기
를 잃은 것입니다. 다행히 나이스들이 이 뿔을 거두어 안에다 과일을 넣고 향기
로운 꽃을 꽂아 신들께 바쳤지요. 자비로우신 코피아 여신(물의 요정, 복/나이아
스) 께서는 이 뿔을 축복해 주시었습니다.
강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디아나 여신처럼 차려입은 그의 시녀 요정 하나가 어
깨 위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채 이 뿔에다 후식으로 먹을 맛난 사과등의, 가을
걷이한 것들을 담아내어 왔다.
이윽고 새벽이 오고, 이어서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청
년 테세우스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강물이 평화로워질 때까지, 홍수가 강바
닥을 비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들이 떠나자 아켈로오스는, 그
험상궂은 얼굴과 뿔 하나 뽑힌 자리가 흉터로 남아 있는 그 머리를 강물에다 담
그고 모습을 감추었다.
2. 데이아네이라와 마인 네소스
헤라클레스의 손에 그 탐스럽던 뿔을 뽑혔다는 사실이 한동안 아켈로오스를
몹시 상심케 했다. 그러나 몸의 다른 부위는 다친 데가 없었다. 아켈로오스는 뿔
뽑힌 자리를 감추느라고 머리에다 늘 버드나무나 갈대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
다. 아켈로오스말고도 데이아네이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헤라클레스 손에 욕을
본 이가 또 하나 있다. 마인 네소스, 그는 데이아네이라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다
가 헤라클레스가 쏜 화살에 등을 맞고 죽었다. 그사연은 이러하다.
유피테르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이 신부를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다가 물
살이 험한 에베노스 강가에 이르렀다. 강물은 겨울비로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물가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 물살 건너는데 익을 대로
익은 네소스가 다가왔다. 네소스는 사지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마인이었다.
그가 헤라클레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대는 혼자서도 이 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겠지요? 부인은 내가 업어 강 저쪽으로 건네드리겠소」 그래서 이 보이오
티아 영웅은 이 마인을 믿고 칼뤼돈 왕국의 공주 데이아네이라를 맡기기로 했
다. 데이아네이라는 강의 물살도 무섭고, 마인 네소스도 무서웠던지라 하얗게 질
려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몽둥이와 활을 강 건너 쪽으로 던지고는 등에 매었던
화살통과 어깨에 걸치고 있던 사자 가죽(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고
그 가죽을 벗겨 평생 이를 옷삼아 걸치고 다녔다. )을 벗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
다. 「내가 강을 정보하기로 한 바에, 어찌 이 강이라고 그냥 둘 수 있을소냐!」
그는 망설이거나, 물살이 조용한 곳을 찾아보는 빛도 보이지 않고 물속으로 뛰
어 들었다. 물살을 이용하면 좋으련만 그는 그런 짓도 하지 않았
헤라클레스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네소스를 향하여 화살 한 대를 날렸다. 화
살은 도망치는 네소스의 등에, 살촉이 가슴으로 튀어나올만큼 깊이 꽂혔다. 살촉
에 꿰뚫린 네소스의 등과 가슴에서는 레르네샘에 살던 휘드라의 독이 섞인 피가
쏟아져나왔다. (헤라클레스는 물뱀 휘드라를 죽이고는 그 독을 화살촉에다 발라
둔 바 있다.) 그러나 네소스도 이 독 섞인 피를 그냥 대지에 빨려들게 하지는 않
았다. 「나는 죽되 내 피로 하여금 이 값을 치르게 하리라」 네소스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조각을 이 피로 적셔, 장차 요긴한 사랑의 묘약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이를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에게 주었다.
3. 헤라클레스의 최후
이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헤라클레스가 이룬 영웅적인 업적에 관한 이야
기와, 유노 여신이 서자인 이 헤라클레스를 몹시 미워한다는 이야기가 온 세상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다.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정복하고 케나에움에서 유
피테르 대신께 제물을 드이려 할 때의 일이었다. 참된 것에다 거짓된 것을 섞기
좋아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눈덩이같이 불리기 좋아하는 파마 여신이, 암피트
리테의 아들이 이올레라는 여자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헤라
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 소문을 들은 데이아네이라
는 목을 놓고 울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 내가 왜
울지?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내가 우는 것이지? 내가 우는 것을 보면 사랑의
적이 된 그년만 좋아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년이 머지않아 이곳으로 올 것
이다. 와서 나를 대신해서 내 자리에 들어앉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어쩌지? 남편과 드잡이를 해? 가만히 있어? 아, 친정인 칼
뤼돈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여기에 있어야 하나? 내가 이집을 떠나거나, 아
무 짓도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내 남편과 사이 계집이 나를 무
자기에게 가능한 방법을 모두 헤아려본 데이아네이라는 문득 네소스로부터 받
았던, 그 피에 젖은 천 조각을 생각해 내었다.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의 말을 곧
이곧대로 믿고 그 천조각이, 식어가는 남편의 사랑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으리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이나네이라는 이 천 조각을 기워넣은
예복을 헤라클레스의 시종 리카스에게 주어 자신의 슬픔과 파멸의 씨앗이 될 이
엄청난 물건을 남편에게 전해달라고 말했다. 리카스로부터 레르네 샘의 물뱀 히
드라의 독이 묻은 예복을 전해받은 헤라클레스는 아내를 의심하지 않고 이 예복
을 입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지펴져 있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향을 사르고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읊조리며 포도주를 대리석 제단에다 부었다. 이 동안 제단에서
타는 불의 열기에 녹은 독은 그의 몸 속으로 퍼져들어가 사지는 물론이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헤리클레스는 타고난 용기와 참을성으로 되도록
이면 오래 그 고통을 참았다. 그러나 고통이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자 그는 제단
앞을 뒹굴며 오이타 산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예복을 몸에서 뜯어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복은, 뜯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
큼 더 단단하게 그의 살갗에 달라붙었다. 그런 예복을 한사코 뜯어내려고 했으
니 살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예복을 뜯어내려고 했
고 예복은 그의 살갗에 달라붙으려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그의 살점이 무수히
떨어져나와 뼈가 보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는 불같이
뜨거운 독물을 만나 쉭쉭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말하자면 그의 피는, 빨갛게
단쇠를 만난 차가운 물처럼 끓어올랐다. 고통은 끝이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독물이 불꽃이 되어 타올랐고, 그의 온몸에서는 검은 땀이 뚝
헤라클레스가 오이타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데 그
모양은 사냥꾼이 던지고는 도망친 창을 맞고 그 창을 등에 꽂은 채로 울부짖는
들소와 비슷했다. 그는 신음하면서 이를 갈면서 몸에 달라붙은 그 에복을 뜯어
내려 했다. 그러다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으면 나무를 쓰러뜨리거나 산에다 화
풀이를 하거나 자기 아버지의 천궁이 있는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고는 했다.
문득, 겁에 질려 동굴에 숨어 있던 리카스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던 모양이었
다. 고통으로 인해 반 미치광이가 되어 있던 그는 리카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리카스, 너였더냐? 나에게 이 치명적인 것을 전한 자는? 내가 죽어가는 것
이 너 때문이었더라는 말이냐? 」
리카스는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변명을 해보려고 했다. 그가 이영
웅의 무릎을 두 팔로 안고 무슨말인가를 하려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리카
스를 잡아채어 공중제비를 서너 차례 돌린 뒤 에우보이아 바다를 향해 던졌다.
투석기로 쏘았어도 드렇게 힘있게는 날아가지 않았으리라. 그의 몸은 하늘을 날
아가면서 굳어져 돌이 되었다. 옛사람들은, 빗방울이 차가운 바람에 눈송이가 되
듯이, 눈송이가 찬 바람에 서로 뭉치고 굳어져 우박이 되듯이, 리카스도 헤라클
레스의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잡혀 공중으로 던져져, 공포가 그의 피와 몸의 물
기를 말리는 바람에 귿어져 돌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도 에우보이아 바다에
가보면 바다 한 가운데 파도를 맞으며 서 있는 사람 모양의 조그만 바위가 있
다. 뱃사람들은 이 바위를 리카스의 바위(에우보이아 섬의 북쪽에 있는 세 개의
작은 섬 리카데스 군도를 말한다.) 라고 부른다. 그들은 혹 리카스가 그 무게를
느낄까봐 이 바위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친 유피테르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험한 오이타 산에서 자
란 나무를 잘라 스스로 화장단을 쌓았다. 그러고는 포이아스의 아들 필록테테스
에게 자기의 활과 화살통을 주었다. 이 활과 화살통은 후일 두번째로 트로이아
성으로 그 이름 값을 하게 된다.(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난사 중 하나로 아마존
의 허리띠를 빼앗으러 아마존의 나라로 가는 길에 트로이아에 들러 이 성을 쑥
대밭으로 만든 일이 있다. 이 활과 화살을 받은 필록테테스는 후일 트로이아 전
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이 필록테테스에게 화장단에다 불을 지르
게 했다. 탐욕스러운 불길은, 처음에는 그가 장작더미에다 깔로 누운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태웠고, 그 다음으로는 몽둥이를 베고 누운 그의 목, 그리고 그 다
음으로는 그의 얼굴로 옮겨붙었다. 그의 표정은,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술잔에
둘러싸여 있는 술잔치의 술손님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윽고 불길은 힘을 얻어 사방으로 혀를 날름 거리면서 그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던 영웅의 사지를 태우고, 그 불길을 가볍게 여기던 영웅의 몸을 태웠다. 천궁
의 신들은 지상의 완자였던 이 영웅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피테
르 대신은 신들의 어두운 표정을 일별하고는 이런 말로 그들을 위로했다.
“슬픔에 잠긴 그대들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흡족하오. 내가 은혜를 아는
인간들의 절대자이자 왕으로 불린다는 것이 오늘처럼 만족스러웠던 날은 없소.
나는 그대들 역시 나처럼 내 아들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오. 그대
들은 저 아이가 이룬 위대한 업적으로 저 아이를 대견하게 여기는 모양이오만,
그 영광은 나로 인한 영광에 다름이니오. 그러나 그대들이 온 마음으로 슬퍼해
야 할 일인 것만은 아니오. 저 오이타 산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두려워하지 마세
요. 모든 것을 정복한 헤라클레스는 그대들이 바라보고 있는 저 불길까지 정복
할 것이오. 저 불카누스의 권능(불카누스는 대장장이 신, 따라서 불길)이 태울
수 있는 것은 저 아이가 제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뿐이오. 저 아이가 내게서 받
은 것은 영생불사하는 것이니 저런 불길에 탈 리가 없소. 나는 이제 지상에서
한살이 마친 저 아이를 이 천상으로 불러올리려 하오. 나는 그대들 신들이 모두
기뻐하리라고 믿소. 혹 헤라클레스가 천궁으로 올라와 신이 되고, 이런 특혜를
누리게 되는 것을 반기지 않을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이에게도 사감은
있을지언정 저 헤라클레스가 그런 특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지
신들은 모두 유피테르의 말에 갈채를 보냈다. 천궁의 왕후인 유노여신도, 유피
테르가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이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눈쌀을 조금
찌푸렸을 뿐 별로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유노의 그리스 식 이름은 헤라다.
헤라클레스는 이 헤라가 부과한 열두가지 난사를 무사히 치러냄으로써 헤라를
욕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라를 영광되게 했다. 헤라클레스라는 말은 헤
라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불카누스가 헤라클레스의 몸으로부터 불이 탈 수 있는
것을 모조리 털어내자 이 영웅의 형상은 이 영웅을 떠났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영웅의 모습, 오로지 아버지 유피테르로부터 받은
것으로만 이루어진 영웅의 모습은 이제 지상에서 숨쉬던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
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고 새 비늘이 반짝이는 새 껍질로 거듭나듯이 티륀스의
영웅도 필멸의 육체를 벗고 불사의 몸으로 거듭났다. 인간의 오체를 벗고 새로
운 생명을 얻은 그는 이전보다 더욱 위엄있는 모습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전능
한 그의 아버지 유피테르는 그를 사두마차에다 태우고 구름으로 가려 천상으로
불러올리고는 반짝이는 별자리 사이에다 박아주었다. 아틀라스는
상 4 알크메네의 해산과 갈란티스
헤라클레스가 이 땅을 떠났다ㅗ 해서 스테넬로스의 아들 에우뤼스테우스(유노
여신을 대신해서 헤라클레스에게 혹독한 시련을 부과했던 자)의 분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에우뤼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 대한 증오의 화살을 헤라클레스
의 아들에게 겨누었다.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는, 아들로 인한 오랜 근심
걱정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알크메네는 이올레(데이아네이라의 질투를
유발, 헤라클레스를 파멸케 한 장본인)를 의지가지로 삼고, 틈만나면 이롤레를
붙들고 나이 많은 여자 특유의 신세타령이나, 세상이 다 아는 아들 이야기를 하
고는 했다. 이올레는 헤라클레스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인 휠로스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이 이올레가 휠로스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귀한 집 혈육을 배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며느리가 아이를 배고 있다는 것을 안 알크메네가 어느 날
이올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신들께서 너에게만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야 할 텐데. 그러니까 보름달이 뜰
때가 되거든 시기 놓치지 말고 반드시 루키나 여신(그리스어로 에일레이튀아, 해
산의 여신. 유노여신의 딸)을 찾아뵙도록 하여라. 임신한 여자들을 돌보아주시는
여신이시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때는 이 여신께서, 유노여신의 뜻을 받들어 나를
어찌나 괴롭히던지... 내, 그때 이야기를 들려줄 터이나 잘 들어두어라. 태양이
하늘의 제 10궁을 돌아, 이 세상에서 저 엄청난 난사를 치를 우리 헤라클레스가
태어날 때가 되자, 뱃속에 든 이 아이가 그렇게 무거웠다. 내 복중에다 아이를
숨긴 이가 저 유피테르 대신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지. 진통이 어찌
나 심했는지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
로도 오싹 소름이 다 돋는다. 참으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다. 나는 이레
밤낮으로 진통하면서 하늘을 향해 팔 벌리고 해산을 주관하시는 루키나 여신과
닉시 여신(임산부를 수호하는 몸이 셋인 로마의 여신)께, 어서 좀 오셔서 나를
도와주시라고 기도했다. 아, 오시기는 오셨지. 하지만 오시기 전에 뇌물을 받으
시고는 내 목숨을 잔혹하신 유노여신께 넘기려고 오셨던
) 내가 부리던 하녀 가운데 갈란티스라고 하는 금발 처녀가 하나 있었다. 이 갈
란티스는 신분은 천해도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시키는 일이면 몸을 아끼지 않
고 잘했다. 그런데 내가 아기를 낳지 못해 애쓰는 걸 보고는 유노여신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야. 한동안 집을 들락날락하던 갈란티스는, 팔짱
을 끼고 제단 옆에 앉아 있는 루키나 여신을 보았어. 갈란티스는 루키나 여신께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희 마님을 축복해 주세요. 아르롤리스의 알크메네
마님께서 방금 기도의 응답을 받으셔셔 옥동자를 분만하셨답니다.’
해산의 여신께서는 이 뜻밖의 소식에 기겁을 하시고 팔짱을 푸셨는데, 이 분
이 팔짱을 푸시는 순간에 나도 아기를 낳을 수 있었지.
갈란티스는 이 여신을 속이고도 그 앞에서 웃었다는군. 갈란티스가 웃자, 원래
성정이 모지신 이 여신께서는, 갈란티스의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내굴리셨단
다. 갈란티스는 땅바닥에서 일어나려 했고, 여신은 못 일어나게 하려고 계속해서
내리누르고, 그랬겠지. 결국 여신께서는 이 갈란티스의 두 팔을 앞다리가 되게
하시고, 그 모습을 바꾸어놓으셨어. 그 몸에 돋아난 털 빛깔만 머리 빛깔인 금발
그대로 두고 말이다. 갈란티스(족제비라는 뜻)는 족제비가 된 것이야. 갈란티스
는, 입으로 거짓말을 해서 내가 무사히 아기를 낳게 하지 않았니? 그래서 여신
은 갈란티스로 하여금 입으로 새끼를 낳게 하셨어.(고대인들은 족제비가 입으로
새끼를 낳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족제비가 되었어도 갈란티스는 여전히 바지런
하고 동작이 빨라. 그래서 전과 다름없이 오즈음도 자주 내 집을 드나드는 것이
지.”
알크메네는 이 이야기가 끝나자, 자신에게 충직했던 하녀의 팔자가 불쌍했던
지 한숨을 쉬었다. 며느리인 이올레는, 한숨을 쉬는 시어머니를 위로할 요량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5 드뤼오페와 로티스
“어머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잃은 하녀를 두고 상심하십니다만, 그 하녀는
피붙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제 언니 당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만 어
머님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궁금하군요. 시작하려고 생각만 해도 목이 메고, 눈물
이 앞을 가려요.
언니 이름은 드뤼오페였어요. 저와는, 아버지는 같았지만 어머니는 달랐어요.
제 계모의 외동딸이었던 드뤼오페 언니는 아마 오이칼리아에서는 가장 아름다웠
을 것입니다. 처녀 시절 델포이와 델로스를 다스리시는 신(포에부스 아폴로)의
사랑을 입은 몸으로 안드라이몬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만, 형부는 그런데
도 제 언니를 아내로 맞은 것을 대단한 행운으로 여겼습니다.
저희가 살던 곳에는, 경사가 완만한 둑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둑이 아주 좋아서 흡사 해변 같았어요. 물가에는 도금양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
었고요. 자기 팔자를 알 리 없는 드뤼오페 언니는 이 호숫가로 갔습니다. 드뤼오
페 언니는 사실 요정들에게 바칠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호숫가로 갔던 것입니
다. 언니는 한살도 채 못 되는 아기를 안은 채 젖을 먹이고 있었어요. 호숫가에
는, 튀로스 산 보라색 물 로토스(수련)꽃이 잔뜩 피어 알차게 열매 맺을 때를 기
다리고 있었어요. 드뤼오페 언니는 아기에게 주려고 장난삼아 꽃을 몇 송이 꺾
으려고 하다가 가만히 보니까, 언니가 꽃을 꺾은 수련 대에서 피가 흐르더군요.
줄기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요. 나중에야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만, 그 나무는
파리아포스라는 자에게 쫓기다가 로토스 나무로 변한 요정 로티스였어요. 모습
은 바뀌었어도 이름은 옛날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걸 알지 못하는 드뤼오페 언니는 파랗게 질리고 말았어요. 언니는 요정들에
게 기도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죠. 하지만 언니는 발을 떼어놓지 못했습
니다. 그때 벌써 발밑에 뿌리가 생겼던 것이죠. 언니는 이 뿌리를 뽑으려고 발버
둥질쳤습니다만, 움직이는 것은 윗몸뿐이었어요. 땅에서 생긴 부드러운 껍질이
언니의 허벅지에 덮이는 것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언니는 일이 이렇게 되
자 미친 사람처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손에는 이미 잎
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곧 머리에도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죠. 암피소소(이게, 할
아버지 에우뤼토스가 지어준 언니 아들의 이름이었습니다)는, 제 엄마의 젖가슴
이 굳어지면서 젖이 나오지 않자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냥 거기에 서서, 팔
자 기박한 언니가 나무로 변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무로 변해 가는 언니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고작
이었습니다. 어머님, 정말이지 저도 언니처럼 나무로 변하여 그런 껍질에 갇히고
싶었습니다.
이윽고 드뤼오페 언니의 남편 안드라이몬과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이 두 분
이 저에게, 드뤼오페 언니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길래 저는 로토스 나무를 가리
켰습니다. 두 분은, 그때까지는 여전히 따뜻한 나무 둥치에 미친 듯이 입맞추며
나무의 뿌리짬에 매달렸습니다. 언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얼굴뿐이었습
니다. 나머지는 모두 나무로 변해 버렸던 것입니다. 언니의 몸이 있던 곳에 돋아
있던 잎에서는 눈물 같은 물기가 번졌습니다. 드뤼오페 언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움직일 수 있던 입으로 울음을 섞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팔자가 기구한 인간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면, 내 신들
께 맹세코 말하거니와,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을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지
은 죄도 없이 어렇게 터무니없는 벌을 받고 있다. 나는, 남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 잎은 내 가지에서 떨어질 것이고
내 가지는 말라 비틀어질 것이며 내 둥치는 도끼에 찍혀 불속으로 들어갈 것이
다. 아, 이 아기를 이 가지에서 거두어가다오. 데리고 가서, 잘 보살펴주고 우유
를 먹여주고, 자라거든 내 가지 맡에서 놀 수 있게 해다오. 말을 하게 되거든 이
어미에게, 슬픈 사연이나마 이런 말을 하게 해다오.
‘우리 엄마는 이 나무 안에 숨어 있대요.’
이 한마디를 하게 해다오. 아이가 물가에 가지 않도록 해주고, 나무에서 함부
로 꽃을 꺾지 않게 해다오. 열매가 달리는 나무는 모두 여신들의 몸이라는 것을
가르쳐다오. 아, 이올레야, 안녕. 사랑하는 내 지아비여, 안녕히. 아버지, 만수무강
하소서. 바라건대 저를 사랑하시면, 제 둥치를 날카로운 도끼에서 지켜주시고,
제 가지를 가축으로부터 지켜주소서. 이제 저는 몸을 구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
러니 손들들어 저를 안으시고 저에게 입맞추어 주소서. 이제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껍질이 내 목 안으로 차올라옵니다. 나무 껍질이 내 몸을
빈틈없이 에워쌉니다. 아버지, 제 눈에서 손을 치우셔도 됩니다. 아버지가 감겨
주시지 않으셔도 나무 껍질이 제 눈을 가린답니다.’
언니의 말이 끝나는 순간부터 언니의 입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몸이
나무로 변했는데도 그 나무의 가지는 한동안 따뜻했습니다.”
6 되젊어진 이올라오스. 테바이 전쟁
이올레가 이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눈물에 섞어 하자, 알크메네는 저 역시 울
면서도 이올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이때 또 하나의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이들과 조금 떨어진 문 앞에 서 있던 이올라오스(헤라클레스의,
아버지가 다른 아우인 이피클레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따라다니며 이 백부를
크게 도왔다. 후일 헤라클레스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사르디니아로 건너가 많은
도시를 건설하며 오래 살았다. 청춘의 여신 헤베로부터 젊음을 얻은 그는, 헤라
클레스를 박해했던 에우뤼스테우스와 싸웠는데, 일설에는 이올라오스가 헤베로
부터 젊음을 얻되, 단 하루의 젊음만 얻어 에우뤼스테우스와 싸웠다고 한다.)가
되젊어진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어느새 청년 시절로 되돌아와 있었다. 유노의
딸 헤베(청춘이라는 뜻. 유피테르는 헤라클레스가 천상으로 올라오자 이 헤베를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가 지아비 된 헤라클레스의 부탁을 받고 이올라오스를
되젊게 한 것이었다.
헤베가, 다시는 어떤 인간에게든 젊음을 되돌려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테미스
여신은 그러는 게 아니라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테바이는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것이다만 유피테르 대신 아니고서
는 아무도 카파네우스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고, 이 싸움에서는 형제가 서로 죽
고 죽일 것이며, 예언자 암피아라오스는 갈라진 땅 틈에 빠져 산 채로 제 망령
을 보게 될 것이다.(테미스 여신의 예언은 간단하나 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아이
스퀼로스의 ‘테바이의 일곱 장수’로 유명한 이른바 테바이 전쟁의 내용을 알
아야 풀린다.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가 장님이 되어 왕위에서 쫓겨난 뒤, 그의 쌍
둥이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케스는 1년씩 테바이를 번갈아가면서 통치하기로
한다. 그러나 먼저 왕위에 오른 에테오클레스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폴뤼케
스는, 테바이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왕가의 시조 카드모스의 아내인 하르모니
아의 옷과 목걸리를 들고 국외로 나가 아르고스왕 아드라스토스에게 도움을 청
한다. 아드라스토스는 딸을 주면서 그를 도와주기로 한다. 아드라스토스의 누이
인 에리퓔레의 지아비 암피아라오스는, 앞일을 미리 아는 사람이라 이 전쟁의
결과를 미리 꿰뚫어보고, 전쟁은 패배로 끝날 것이며 자기 역시 이 전쟁에서 목
숨을 잃을 것이라면서 참전을 반대한다. 그러나 폴뤼케스는 미리 가져7. 뷔블리
스와 카우노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미래를 예견하는 여신 테미스가 이런 예언을 하자 이를 듣고 있던 신들은 저마
다 불평을 말하면서 어째서 이올라스는 젊어지고 칼리로에의 두 아들은 하루아
침에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는데 다른 인간은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없느냐고 했
다. 이들의 불평은 각양각색이었다. 티탄(50) 팔라스의 딸인 아우로라(51)는, 지
아비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불평했고,(52) 다정다감한 케레스 여신은 이
아시온(53)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불평했다. 뿐만이 아니
었다. 불카누스는 불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피테르에게 에릭토니오스(54)를 되
젊게 해줄 것을 요구했고, 베누스 역시 장래가 걱정스러웠던지 안키세스(55)의
젊음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이 신들이 저희가 사랑하는 자의 젊
음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소란을 피우자 유피테르 대신이 입을 열
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여기 있는 이 나를 대신으로 여긴다면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오. 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것이오?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남의 운명을 바꿀 만한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올라오스가 잃었었던 젊음을 되찾은 것, 칼리로에의 두
아들이 때 아니게 장성하여 청년이 된 것은 다 운명의 여신께서 그리하셔서 된
것이지 이들이 혹은 뇌물을 썼거나 떼를 썼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 아니오. 그대
들은 모두 운명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신들이오. 그러니까 그대들은 이를 기
꺼이 용인하여야 하오. 나 역시 이 운명의 손길은 벗어날 수가 없는 몸인 것이
오. 나에게 만일 운명의 물길을 돌린 권능이 있었다면, 아이아코스(56)의 허리는
세월의 무게로 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라다만토스(57)는 아직까지 혈기방장할
것이며, 지금은 노경에 들어 온갖 조롱을 받고 있는 미노스도 법을 이런 식으로
는 집행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오'
유피테르의 말은 신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신들은, 나이를 먹어
꼬부랑 노인이 된 아이아코스와 라다만토스와 미노스를 보고는 더 이상 저희 뜻
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미노스는, 한창 나이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웃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던 영웅이었다. 그러나 노경에 접어든 그는 이제 아폴로와 디오네 시이에서
난 아들 밀레토스(58)까지 두려워하는 처지였다. 밀레토스는 젊고 용감한데다 아
폴로의 아들이라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청년이었다. 미노스는 밀레토스
가 자기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자기 나라에서 쫓아낼 생각
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밀레토스는 미리 무슨 낌새를 눈치챘던지 고향을 떠나
빠른 배로 아이가이아 바다의 파도를 헤치고 아시아 땅으로 건너가 한 도시를
세우고 이 도시를 '밀레토스'라고 이름했다.
이 밀레토스 땅에는, 내리흐르기도 하고 치흐르기도 하는 마이안드로스 강신의
아름다운 딸 퀴아네가 살고 있었다. 이 퀴아네는 아버지 강 마이안드로스의 아
름다운 둑을 거닐다가 이 밀레토스의 눈에 들어 정분을 맺고 쌍둥이 남매를 낳
으니 이 쌍둥이 남매가 바로 오라비인 카우노스와 누이인 뷔블리스다. 그런데
바로 이 뷔블리스가 세상 처녀들에게, 사랑해도 좋을 상대가 있고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처녀 뷔블리스가
제 오라비인 카우노스에게 품어서는 안 될 사랑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렇다.
이 뷔블리스는 오라비 카우노스를 대하되, 누이가 오라비를 대하는 그런 마음으
로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정도를 넘어 무슨 연인 대하듯이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뷔블리스도 자기 마음에 깃들여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
고는, 당연한 것이거니 여기고 오라비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추거나 오라비의 목
을 팔로 감아 안거나 했다.
뷔블리는, 자신의 행동에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꽤 오랫
동안 저희가 남매간이라는 것에 기대어 제가 하는 짓을 정당화했다. 그너나 이
러는 동안 오라비에 대한 뷔블리스의 사랑은 상궤를 저만큼 벗어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오라비를 만나야 할 때면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차려입거나, 오라비에
게 예쁘게 보이려고 턱없이 애쓰거나, 자기보다 예쁜 여자가 오라비 곁에 있으
면 터무니없이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뷔블리스는 이러면서도 자기가 무엇
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는 뷔블리스가 제 느낌을 말
로 나타내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뷔블리스의 욕망은 안으로 안
으로 타들어갔다. 이윽고 뷔블리스는, 자기와 카우노스가 남매라는 것을 나타내
는 '오라버니'라는 호칭 대신에 '저하'라는 호칭을 더 즐겨 썼고, 카우노스가 자
기를 '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뷔블리스'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하는 지경에까
지 이르렀다.
뷔블리스는, 깨어 있을 때면 곧잘 자기도 인정하기 부끄러울 만큼 탐욕스러운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잠이 들면 그보다 더 얼굴 뜨거운 꿈을 꾸었다. 말
하자면 제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상상을 하고는 꿈속에서도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이런 잠에서 깨어난 뷔블리스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로 꿈에서 경험한 것을 되새겨보다가는 이런 푸념을 했다.
'나같이 불쌍한 것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꼬! 내가 어째서 이런 꿈을 꾸게
되는 것이며, 이 꿈이 뜻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냐? 이런 꿈을 다시는 꾸지 않았
으면 좋으련만.... 왜 나는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그래, 내 오라버니가 남자들
의 눈에도, 심지어는 좋게 보지 않으려는 남자들의 눈에도 절세의 미남으로 보
이는 것은 사실이다. 나도 내 오라버니를 존경한다. 그래, 내 오라버니가 아니었
더라면 사랑의 상대로 삼을 수도 있었겠지. 마침맞은 내 지아비가 될 수도 있었
겠지. 그러나 나는 그분의 누이이니, 내 팔자가 사납지 않은가. 아니다. 깨어서는
그분이 내 지아비 되는 상상을 할 수 없으니, 잠들어 꿈이야 꾼들 어떠랴! 누가
내 꿈을 엿볼 것이며, 누가 내 누리는 기쁨을 탓하랴! 오, 베누스 여신이서여, 이
다정하신 여신의 날개 달린 아드님이신 쿠피도 시이시여, 일찍이 누리지 못했던
달콤한 순간이더이다. 잠들어 꿈을 꾸면 너울을 벗은 욕망이 저를 사로잡아 그
뜨거움으로 저의 뼈마디를 녹이더이다. 저를 질투하여 밤은 서둘러 새고, 그래서
제 꿈은 짧기가 그지없어도 그 일만 생각하면 그 기억이 제 몸을 저리게 하나이
다.
오, 카우스 오라버니여, 내가 만일에 이름을 바꾸어 오라버니와 혼인한다면 아
버님의 좋은 며느리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카우노스 오라버니여, 만일에 오라버
니가 나와 혼인한다면 아버님의 좋은 사위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아, 신들이시
여, 우리가 무엇이든 서로 나누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가 남매의 정을 나누어야
하는 것만은 거두어주소서. 아, 오라버니가 나보다 귀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차
라리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렇게 태어나지 못하여 절세의 미남이신 오라버니는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이들을 낳게 하실 테지요. 악마가 우리를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나는 오라버니의 누이로 남아 있
어야 할 테지요. 우리가 나누어 가진 것이 우리를 남남으로 나눌 테지요.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꿈을 꾸는 것이지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꿈은 왜 꾸는 것이지요?
아, 신들이서여, 이런 꿈은 이제 더 이상 꾸지 않게 하소서.
신들께서도 누이를 아내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는
데도 불구하고 사투르누스(59) 신께서는 오프스(60) 여신을 아내로 맞으셨고, 오
케아노스 신께서는 테뒤스(61) 여신과 혼인하셨으며, 올림포스의 지배자인 유피
테르 대신께서는 유노 여신을 아내로 맞으시지 않았습니까? 하늘에는 하늘의 법
도가 따로 있다고 하실 테지요만, 하늘에 하늘의 법도 따로 있고 땅에 땅의 법
도가 따로 있다면, 하늘의 법도로 인간을 다스리시려 하시는 것에 장차 무슨 뜻
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바라건대 이 금단의 욕망을 저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떠
나게 하지 못하신다면 이 금단의 욕망에 굴복하기 전에 저를 죽이소서. 죽에 관
에 들면 제 오라비로 하여금 저의 시신에 입맞추게 하소서.
이나마 우리 둘의 뜻이 맞지 않고는 되지 못할 일이겠지요. 저 혼자만 바라는
일이라면 오라비의 눈에는 더할나위없이 무서운 죄악으로 비칠 테지요. 하지만
아이올로스의 자식들은 제 누이들의 방을 신방 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
다.(62)
내가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지? 내가 왜 이런 예를 들고 있는 것이지?
내가 대체 어쩌려는 것이지? 안 된다. 이렇게 부정한 생각은 안 된다. 내 사랑
은, 오라비에 대한 누이의 사랑을 넘어 서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먼저 나를 사랑했다면? 나는 아마 오라버니의 부정한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을
테지. 그렇다면, 나는 왜 먼저 호의를 보이면 안 되느냐? 어차피 저쪽에서 요구
해 왔어도 거절하지 못했을 터인데? 뷔블리스, 너는 네 입으로 이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고백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다. 사랑이 나를 물러서지 못하게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부끄러워서 말을 못한다면, 은밀하게 써서 이 뜻
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뷔블리스는 이렇게 결심했다. 이렇게 결심하고 보니 가슴속의 의혹도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었다. 뷔블리스는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워 왼손으로 머리를 괴
고 다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결정은 오라버니에게 맡기자. 나로서는 내 가슴을 태우는 이 욕망을 고
백하는 수밖에 없다. 아, 나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이 가슴을 태우는
불길은 도대체 어떤 불길이라는 말이냐?'
뷔블리스는 편지의 사연을 짜고는 떨리는 손으로 적을 준비를 했다. 그래서 한
손에는 철필, 한 손에는 밀랍서판을 들고는 쓰다가는 망설이고, 망설이다가는 또
쓰고는 했다. 쓰다가 잘못 쓰면 지우고는 다시 쓰고, 또 쓰다가는 제가 쓴 것이
부끄러워지면 서판을 놓기도 하고, 그래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다
시 서판을 잡고는 했다. 뷔블리스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자주 망설였다. 그
래서 써놓고도 자주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짜증을 부렸다. 뷔블리스는, 표정으로
보아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게 그 편지를 쓰는 것 같았다. 뷔블리스는, '그대
의 누이...'라고 썼다가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 부분의 밀랍을 긁어버리고는
고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대의 행복을 기도하면서 이 글월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대는 행복해질지도 모르나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대가 주지 않는 한 행
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기는, 참으로 부끄럽고도 부끄럽습니다.
그대에게 내 소원을 이루어 줄 의향이 없으시다면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말아주십
시오. 적어도, 내 기도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뷔블리스라는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
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대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으시거든
창백한 내 뺨과 여윈 내 몸과 슬픔에 잠긴 내 표정, 늘 눈물이 고여 있는 내 눈
을 보소서. 까닭없이 나오는 내 한숨도 이 고통을 증언하니 그대가 알 것이요,
턱없이 잦은 내 포옹과 입맞춤도 누이가 할 수 있는 예사로운 포옹과 입맞춤과
는 다르니 그대가 알 것입니다. 내 가슴의 상처가 비록 깊으나, 미친 욕망의 불
길이 내 가슴속에서 비록 뜨겁게 타오르고 있기는 하나, 신들께 맹세코 나는 내
마음을 온전히 가누자고, 쿠피도 신의 이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보자고 저로서
는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그대는, 여자가 어떻게 그같이 싸울 수 있겠느
냐고 하시겠지만, 나는 나대로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
그대의 사랑을 바라는 나, 이렇게 비는 나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라, 그대와는
참으로 가까운 계집,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계집입니다. 이런 일
이 있어도 좋을 것인가, 이것은 죄악이 아닌가, 죄악인가... 이런 것을 따지는 일
은 어른들에게나 맡겨놓아야 할 일인 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 어울리는
사랑은, 점잔을 빼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풍속이 허락하는 것이 어디까지
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만사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전능하신 신
들이 보이신 본을 옳은 것으로 믿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엄하신 아버지도, 세
간의 소문에 대한 두려움도, 가문의 명예도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
입니다. 만일에 우리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다며, 이 달콤한 금단의 사랑을 남
매라는 이름으로 가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대와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도 자유로
이 포옹하고 입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또 무엇
이 있겠습니까? 사랑을 고백하는 이 계집을 가엾게 여기소서. 사랑이 목말라 죽
을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런 고백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내어보아야 하릴없는 이러한 글귀를 서판에 가득하게 쓴 뷔블리스는, 더 이
상 쓸 곳이 없게 되자 마지막 인사는 서판 가장자리의 빈데에다 썼다. 이윽고
쓰기를 마친 뷔블리스는, 인장 가락지를 눈물로 적시어 서판에다 찍었다. 침을
발라 찍어야 했으나 입이 말라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가 부끄러
웠으나 뷔블리스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고 시종 하나를 불러, 꾸민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니 고맙구나. 부디 이편지를 전해다오. 나의...'
뷔블리스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이렇게 덧붙일 수 있었다.
'...오라버니께...'
뷔블리스가 시종에게 이 서판을 건네주려는 찰나 서판은 뷔블리스의 손에서 미
끄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 불길한 징조가 뷔블리스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뷔
블리스는, 이런 징조에 마음을 쓰지 않고 시종에게 서판을 주어 보냈다.
시종은, 적당한 때를 보아 뷔블리스의 오라비 카우노스에게 뷔블리스의 밀서를
전했다. 마이안드로스 강신의 외손은 그 서판을 받아 겨우 몇 줄을 읽고는 그
뜻을 짐작하고, 치를 떨면서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호
령했다.
'이따위 편지나 전하는 이 쓰레기 같은 놈!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거라! 한주
먹에 때려죽이고 싶다만 너 같은 것을 죽여 내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
시종은 혼비백산 도망쳐 와 안주인에게 카우노스가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전했
다.
뷔블리스는 그제야 자기의 진심이 크게 조롱당한 것을 알고 낯색을 잃고는 부
들부들 떨었다. 이윽고 제정신을 차린 뷔블리스는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렇게 조롱을 당해도 싸지! 어쩌자고 내 상처 난 가슴을 그에게 내보였
던가! 어쩌자고, 가만히 속으로 앓아야 할 내 가슴의 병을 이다지도 경솔하게 사
연으로 적어 보냈더란 말이냐? 먼저, 내 속을 드러내고 거절당해도 손해가지 않
을 방법으로 그의 의중을 떠보았어야 했던 것을... 먼저 돛으로 바람을 떠보고
바다로 나섰어야 하는 것을. 바람을 떠보지도 않고 돛을 올리고 바다로 나섰다
가, 배가 돌섬을 받고 난파하는 바람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만 것이 내 신세
로구나. 돌이킬 수 없는 이 실수를 어쩔거나. 내가 서판을 시종에게 건네줄 때,
서판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것은, 내 사랑을 드러내지 말라는 계
시였거늘. 서판이 떨어진 것은, 내 희망도 그렇게 무참하게 깨어질 것을 미리 알
리는 계시였던 것을... 편지를 보내는 날짜를 바꾸든지, 편지를 보내는 계획 자체
를 바꾸었어야 했다. 어쩌자고 하필이면 이 날에 이 편지를 보내었을꼬. 신들은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임을 경고했는데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를 알
아보지 못했구나. 아니다, 아니다, 나는 편지를 보내는 대신 오라버니를 직접 만
나 내 마음을 열어 보였어야 했다. 오라버니에게, 내 눈물과 사
어쩌면 내가 보낸 심부름꾼이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오라버니에
게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접근하는 시각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도 않은데 불쑥 편지
를 내민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이른 것도 다 그 때
문인지도 모른다. 내 오라버니 카우노스는 사자의 자식이 아니다. 암사자 젖을
먹고 자란 것이 아니니 그 가슴이 목석일 까닭이 없다. 다시 한번 나서보아야겠
구나.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나서서 이 사랑을 이루고야 말겠다. 이 정도에서
물러설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나서지도 않았을 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그분은 내가 지은 허물
을 잊지 않으려 할 게다. 내가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그분은 내가 한 일을 철없
는 계집의 종작없는 장난으로 알거나, 내가 자기를 시험했거나 자기를 덫에 옭
아넣으려 한 줄 알 게다. 나는 사랑의 신에 쫓기도 있었는데도 그분은 내가 탐
욕의 노예가 되어 이런 짓을 한 줄 알 게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에게 아무 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분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분에게 추파
마뷔블리스의 독백은 여기에서 끝났다. 뷔블리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설레
고 있었다. 그러나 첫번째 시도를 휘회하면서도 뷔블리스는 두번째 시도를 포기
하려 하지 않았다. 뷔블리스는 거절당할 줄을 알면서도 다시 도전하려는 것이었
다.
누이인 뷔블리스가 십사리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카우노스는, 그냥 그
대로 있으면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고는 고향을 떠나 타향 땅에다 새
나라를 세웠다(63).
카우노스가 고향 땅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 이 밀레토스의 딸은 제 정신이 아니
었다고 전해진다. 실성한 뷔블리스는 제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애통해했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뷔블리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이 금단의 욕망에 쫓
겼던 사실을 고백하거나 이미 그것을 아는 사람 앞에서는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
했다. 절망한 뷔블리스는 제 나라, 제 집을 떠나, 달아난 오라비를 찾으러 세상
을 두루 돌아다녔다.
부바소스(64)의 여자들은, 박쿠스 신의 튀르소스(65)에 발광하여 3년만에 한 번
씩 제사를 올리며 미친 듯이 날뛰는 박카에(66) 같은 이 뷔블리스를 볼 수 있었
다. 이곳을 떠난 뷔블리스는, 카리아의 다른 지역, 늘 무장하고 사는 렐레게스
인들의 나라에도 나타났다.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뷔블리스는 뤼키아 땅을 지났
고, 크라고스와 리뮈레 땅을 지나기도 했으며, 크산토스 상을 건너, 머리와 가슴
은 사자의 머리와 가슴, 꼬리는 뱀 꼬리인데다 전신이 불길에 싸여 있었다는 괴
물 키마이라의 삶터인 험산을 넘기도 했다.
오라비를 찾아다니던 뷔블리스는,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어느 숲에 쓰러졌
다. 뷔블리스는 머리카락은 마른 땅위에 늘어뜨리고, 얼굴은 낙엽에 댄 채 그렇
게 쓰러져 있었다. 렐레게스 땅 요정들은 그 부드러운 손으로 뷔블리스를 일으
켜세우려고 했다. 뷔블리스에게, 거기에 쓰러지게 된 내력을 물어 그 아픔을 치
료하고 상처받은 가슴을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뷔블리스의 귀에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뷔블리스는 아무 말 없이 거기에 쓰러진 채, 눈물로
는 마른 풀을 적시고 손톱으로는 마른 땅을 긁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렐레게스의 요정들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뷔블리스의 눈물을 위해 땅을 파서
눈물길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뷔블리스에게 이보다 나은 선물이 어디에 있었으
랴! 소나무가 송진을 내어놓듯이, 제퓌로스(67)의 부드러운 숨결이 돌아오면 얼
어 있던 대지가 맑은 물 같은 역청을 내어놓듯이, 포에부스의 피를 받은 이 뷔
블리스도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뷔블리스는 이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
몸이 하나도 남김없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바람에 그만 샘으로 변하고 말았
다. 이름이 이 처녀의 이름과 같은 '뷔블리스 샘'은 지금도 그 산
렘0) '거신족'
51) 그/에오스
52) 아우로라, 즉 새벽의 여신은 휘페리온의 딸로 알려져 있으나 팔라스의 딸이
라는 전승도 있다. 이 아우로라는 트로이아 왕 라오메돈의 아들 티토노스를 유
괴하여 지아비로 삼고는 유피테르 대신에게 청을 넣어 이 티토노스에게 불사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했다. 유피테르는 이 청을 받아들여 티토노스에게 불사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아우로라가 유피테르에게 기도할 때 '청춘'까지 베
풀어줄 것을 기도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티토느스는 쪼글쪼글 늙은 채로 영원
히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53) 유피테르와 엘렉트라 사이에서 난 아들로 케레스의 애인이 되었다. 부의 신
플루토스가 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54) 불카누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55) 베누스의 유혹에 넘어가 그 정부가 된 다르다니아 왕. 여신 베누스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다가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아 평생을 불구자나 다름없
이 살았다. 이들 사이에서 저 유명한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태어난다.
56) 유피테르와 아이기나 사이에서 난 아들. 영웅 가운데서도 가장 경건했던 영
웅으로 불리다가 사후에는 저승의 재판관이 되었다.
57) 유피테르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난 아들. 공정한 입법자로 유명한 크레타 왕
미노스의 형. 이 형제 역시 죽어 저승의 재판관 노릇을 하게 되었다.
58) 소 아시아의 마이안드로스 강가에 있는 도시 밀레토스의 건설자.
59) 그/크로노스
60) 그/레이. 사투르누스의 누이. 뒤에 아내가 되었다.
61) 오케아노스의 누이. 뒤에 아내가 되었다.
62)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따르면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제 아들 여섯과
제 딸 여섯을 짝지웠다.
63) 카우노스가 세운 나라는 소 아시아 카리아 땅에 있던 '카우노스'라는 도시
국가였다.
64) 카리아의 다른 이름.
65) '신장'
66) 박쿠스 신도
67) '서풍'
8 남자가 된 여자, 이피스
크레타 섬 사람들은 이즈음 이피스의 변신을 두고 이야깃거리로 삼고 있었다.
이피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뷔블리스의 변신은 크레타에서도 많
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으리라. 이피스가 변신한 내력은 이러하다.
크레타 섬의 도시국가 크로도스와 인접한 파이스토스에 릭도스라는 사람이 살
고 있었다. 이 릭도스는 명문과는 별 인연이 없는 평범한 집안의 자유인으로 태
어난 사람이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재산도 크게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생활에서나, 품행에서나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짓은 않고 사는 위인이었다.
그에게는 임신한 아내가 있었는데, 이 아내 텔레투사의 해산날이 가까워오자 릭
도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내게는 바라는 것이 두 가지 있소. 하나는 그대가 되도록이면 진통으로 고
생하지 않고 아기를 낳았으면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아들을 낳아주었으면
하는 것이오. 딸은,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오. 그러니 그대가 딸을 낳는 일은 일
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오. 만일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음을 면하기 어
려울 것이오. 나도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다 가족을 생각해서 이
런 말을 하는 것이니 나를 용서하기 바라오”
이 말이 끝나자 부부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한 남편
보다는 이런 말을 들은 아내가 더 섧게 울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제발 그런 말
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했지만 하릴없었다. 남편의 결심은 이미 아내의 말에 흔들
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했다.
텔레투사가 만삭이 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즈음 이나코스 강신의 딸 이오가
수많은 신들과 여신들을 대동하고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다. 머리에 초승달 모양
의 뿔을 달고 이 뿔에다 노란 옥수수 이삭을 매단 이노 여신 일행의 거동의 여
왕의 행차를 방불케 했다. 이노의 옆에는 개의 머리를 한 아누비, 거룩한 부바스
티스, 살갗에 얼룩 반점이 있는 아피스, 그리고 스스로도 말하지 않고, 남들에게
도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고 있는 실렌서도 거기에 와
있었다. 거룩한 타악기도 보였고 이오가 그토록 찾아헤메던 오시리스 신, 그리고
엄청난 최면독을 품은 무수한 이방의 뱀도 보였다. 여신이 된 이오가 텔레투사
에게 말했다. 텔레투사는 금방 잠이 깬 사람처럼, 생시에 보는 것과 다름없는 이
광경을 보면서 이오의 말을 들었다.
“텔레투사, 나와 신세가 비슷한 텔레투사여. 너무 근심하지 말고 네 지아비가
그런 명을 내렸다고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도 말아라. 루키나 여신이 점지하거
든, 사내아이든 계집아이든 괘념치 말고 잘 기르도록 하여라. 나는 기도하는 너
희에게 유익한 여신이다. 그러니 섬겨도 섬겨도 돌보아주지 않는다고 야속하게
여기지도 말고 불평도 하지 말아라”
이오는 이런 말을 하고는 그방에거 사라졌다. 크레타 여인 텔레투사는 꿈에서
깨어나 별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꿈에 보았던 이오 여신의 축복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심한 산고 끝에 텔레투사의 무거운 짐은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 딸아이였다.
그러나 텔레투사는 태어난 아기가 떨아이라는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는 대신 아
들이라고 속여 길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텔레투사가 남편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조산원뿐이었다.
아기의 아버지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진 데 만족하고 아기의 조부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이피스>라고 했다. 아기 어머니도 이 이름을 듣고는 좋아했다.
이 이피스라는 아름은 사내아이에게나 계집아이에게나 두루 쓰일 수 있는 이름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기 어머니 텔레투사로서는 아기에게 이런 이름이 생기면
서부터 자기는 아무도 속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텔레투사는계속해서 거짓말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피스
가 사내아이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 아이는 남장한 채로 자
라났다. 아이의 모습은 아이가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참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이피스의 나이 열세 살이 되자 아버지는 자기 딸과 이안테라는 소녀와의 혼인
을 서둘렀다. 이안테는 크레타 사람 텔레스테스의 딸로, 온 차이스토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던 금발의 소녀였다. 이피스와 이안테는 나이도 같고, 인물
도 둘 다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게다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이였다. 이
둘은 이미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여 같은 정도의 고통을 맛본 처지였
다. 그러나 이 사랑에 대하여 먹고 있는 마음은 사뭇 달랐다. 이안테는 이피스와
의 결혼은 꿈꾸면서 그즈음 이미 말이 오가고 있었떤 혼례식이 거행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테로서는, 자기가 마음에 두고 있던 소년이 자기
남편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피스는,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안테에 대한 이피스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갔다. 이피스는 그러니까, 소녀의 몸으로 소녀를 사랑하고 있
는 것이었다. 이피스는 착잡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 이런
말을 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 사랑, 이같이 기묘한 사랑에 빠진 나는 장차 어떻게
될까? 세상에 이런 사랑이 있는 줄을 그 누가 알랴? 신들께 나를 살려두실 생각
이 있었더라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버려두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
고 나를 파멸케 할 의향이었더라면 신들께서는 인간을 치시는 여느 불행으로 나
를 치셨을 것이다. 암소는 암소를 사랑할 수 없고, 암말은 암말을 사링할 수 없
는 법이다. 암양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은 숫양이요, 암사슴 뒤를 쫓는 것은 수사
슴이 아니던가. 새들도 이와 같이 짝을 짓는다. 이 세상에, 암컷이 암컷을 사랑
하는 짐승이 어디 있던가? 아,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괴물이라면 없는 것이 없는 이 크레타에서 솔의 딸이 황소를 사랑한 일
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왕비는 여자였고 소는 수소가 아니었던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나의 이 미친 사랑에 비하면 그 왕비의 사랑은 이루어질 가능성이라
도 있었으니 만큼 그래도 온당한 편이다. 왕비는 암소 모형을 빌려 이 수소를
속여 사랑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 경우는 다르다. 세상의 재주꾼이라는
재주꾼이 다 몰려와도, 심지어는 저 다이달로스가 밀랍과 깃털로 만든 날개로
날아와도 소용없다. 다이달로스의 재주가 비록 용하다고 한들, 여자인 나를 남자
로 만들어야 하는 데야 무슨 수를 낼 수 있겠는가? 안 된다. 이피스여! 정신을
차리고 이 어리석은 생각, 쓸데없는 생각일랑 털어버려야 한다. 너 자신도 속이
지 말고, 남들도 속이지 말고, 네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네
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보고, 여자인 네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
랑하여라. 사랑에의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을 살찌우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러
나 네 경우, 자연은 너에게 그런 희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바라는 그 달콤
한 포옹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세상의 눈길도 아니요, 의심 많은 지아비의 질투
심도 아니며, 너의 그 엄격한 아버지도 아닐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 역시
너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 것이다. 그러나 신들과 인간이 너를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사람이 될 수 없고, 너 또한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 신들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구나. 그러나 신들은 자비로우시다. 신
들은 나에게 주길 것을 모두 주셨다. 내 아버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
하는 사람의 아버지, 모두가 나와 같은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자연>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다. 그러나 이 자연
을 누를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는 다가오고 있다. 혼인할
날이 임박했다. 이 날만 지나면 이안테는 내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안테는 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 속에서 갈증에 시달려야 한다. 기풍있으신 유
노 여신이시여, 휘메나이오스 신이시여, 이 날 저희에게 오소서, 신랑은 하나도
없고 신부만 둘인 이 혼인 마당으로 오소서“
말을 마친 이피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안테의 사랑 역시 이피스의 사랑에 못
지않게 뜨거웠다. 그래서 이안테는 아인테대로 휘메나이오스 신이 하루빨리 오
시기를 기도했다. 이안테가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 텔레투사는 갖가
지 구실을 붙여 자꾸만 혼인 날짜를 연기했따. 때로는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러
연기했고 때로는 불길한 징조를 보았다거나 꿈자리가 나쁘더라는 구실을 대어
연기했다. 그러나 구실이나 핑계가 떨어져 도저히 더는 댈 수 없을 때가 왔다.
질질 끌어오기만 하던 혼례식을 겨우 하루 앞둔 날이 일이었다.
텔레투사는 딸 이피스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서, 자신의 머리와 이피스의 머리
에서 댕기를 풀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제단을 치며 울부짖었다.
"파라이토니움에도 거하시고, 마레오티스 땅에도 거하시고, 파로스 땅에도 거하
시고, 일곱 하구를 거느린 네일로스 강가에도 거하시는 이시스 여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의 이 근심을 없이하려 주소서. 여신이시여, 옛날, 저는 여신을 뵈
었습니다. 여신의 제단을 뵈었고, 여신을 보필하시는 분들을 뵈었으며 횃불도 보
았고 신성한 악기가 울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여신의 말씀을 듣고 이를
제 기억에다 아로새겼습니다. 제 딸이 아직도 살아 있고, 제가 거짓말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여신께서 저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여신이시여, 저
희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말을 마친 텔레투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때 여신이 텔레
투사의 말을 들었다는 표적으로 신전을 흔든 것 같았다. 아니 여신은 정말로 신
전을 흔들었던 것이다. 이어서 신전의 문도 일제히 흔들렸다. 여신의 이마에 달
린 초승달 꼴의 장식이 달처럼 빛나면서 신성한 악기가 울렸다. 여신이 자기네
모녀를 도울 것이라는 확신은 얻지 못했으나, 좋은 징조를 보았는지라 모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전을 나올 수 있었다. 이피스의 근육에서도 힘살이
부풀어올랐다. 이피스는 여자라기보다는 남자 같았다. 실인 즉 조그전까지만 해
도 여자였던 이피스는 그 순간에 남자로 변한 것이었다. 마땅히 신전으로 달려
가, 기뻐하는 마음으로, 믿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려야 할 일이었다. 텔레투사
와 이피스는 신전 제단에다 제물을 바치고 거기에다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남
겼다.
처녀로서 약속드렸던 이피스의 제물을, 청년이 된 이피스가 드리나이다.
다음날의 새벽이 온누리를 밝히자 혼인 예식이 시작되었고, 베누스 여신과 유
노 여신과 휘메나이오스 신이 자리를 빛내었다. 청년 이피스는 이안테를 아내로
맞았다.
제 10 부
오르페우스의 노래 외
1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휘메나이오스는 사인 오르테우스의 기도를 듣고도, 그 선황색 옷자락을 휘날
리며 넓고 넓은 하늘을 날아 키코네스 인들이 사는 트라키아 땅 해변으로 왔다.
오르페우스는 이 혼신의 신을 자기 혼례식에 오시라고 했고, 혼인의 신도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 자리에 나타났으나 오르페우스에게는 그런 보람이 없었다.
이 혼인의 신이 오르페우스의 혼인을 축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혼례
식장에서는 빠뜨리지 않고 부르던 그 축가도 불러주지 않았다. 그가 들고 온 햇
불도, 있는 힘을 다해 흔드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타지 않아 하객들은 거기에
서 나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불길한 일은 징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혼례식을 갓 치른 새색시가 요정들과 함께 들판을 거닐다가 뱀
의 독니에 발목을 물려 즉사한 것이었다.
트라키아의 시인 오르페우스는 아내 잃은 것을 몹시 슬펴했다. 이 땅에서 아
내 잃은 슬픔을 달래다 못한 오르페우스는, 원래 대담한 사람인지라 타이나로스
문을 통하여 저승으로 내려가 저승 왕의 마음을 움직여보기로 결심했다. 기어이
이 동굴을 통하여 스튁스의 땅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망령들 사이를 지나 이
윽고 프로세르피나와 저승 왕 앞에 섰다. 오르페우스는, 저승 세계를 다스리는
저승 왕과 그 왕비 앞에서 수금을 타면서 이런 사연을 노래했다.
"죽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면 누구나 오게 되어 있는 이 저승 땅의
신들이시여, 불경한 말을 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둠에 잠긴 타르타로스를 구경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도
아니요, 세 개의 머리에 뱀이 감긴 저 메두사의 괴견을 붙잡아가기 위해 여기에
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 아내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뱀
에 몰려 청춘의 꽃을 마음껏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은 제 아내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제가 이 슬픔을 참아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강한 인간이었으면 얼마
나 좋았겠습니까? 참으려고 애썼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모르
신이 부리는 조화가 저에게는 너무나 힘에 벅찼습니다. 이 사랑의 신은 저 윗세
상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만 아마 여기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자세
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이곳을 다스리시는 신께서도 오래 전에 이 사랑의 신이
쏜 화살에 맞으시고, 왕비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시어 윗세상에서 왕
비님을 모셔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마 두 분께서도 이 사랑의 신을 아실
것입니다. 이 무서운 땅의 권능에 기대어, 이 끝없는 혼돈, 이 넓은 땅을 감도는
침묵의 권능에 기대어 소원합니다. 오. 저희들 산것들은, 산 것들의 동아리들은
모두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팔자를 타고 태어났습니다. 빨리 오든, 늦게 오든 필
경은 모두 이곳으로 오고 있으며 이곳은 저희들 최후의 안식처입니다. 인간은
이곳에 와서 영원히 이곳의 신이신 저승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도
다른 산 것들과 마찬가지로, 저 윗세상에서의 한살이를 마치면 신께서 다스리시
는 땅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원하는 것은 신께서 호의를
베푸시어 제 아내를 그 동안만이라도 저에게 돌려주시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신
께서 이를 거절하신다면 저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내를 돌려주시든
지 아내와 저를 이곳에 잡아두시고 기뻐하시든지 마은대로 하십시오
오르페우스가 수금을 타며 이런 노랫말로 노래를 부르자 핏기 없는 저승의 망
령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계속될 동안 탄탈로스는 영원히 물러
나는물을 좇으려고 안달을 부리지 않았고 익시온의 불수레 바퀴는 놀랍게도 잠
시 멈추었으며 티튀오스의 간을 파먹던 독수리는 잠시 그 부리질을 쉬었고 다나
오스으 딸들은 항아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잠시 쉴수 있었으며 시쉬포스도
바위에 앉아 잠시 쉴수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저 복수의 여신들인 푸리아에 자매
들도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저승 왕과 왕비는 이
카인의 소청을 거절할 수 가 없었다 그들은 에우뤼디케를 불렀다 에우뤼디케는
저승 땅에 갓 내려온 망령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뱀에 물린 자리 때문에 절룩거
리면서 앞으로 나왔다 트라키아 사람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를 껴안았다 그러
나 저승 왕은 오르페우스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즉 에루뤼디케를 데려가
되 저승 땅을 다 벗어나 아베르노스를 다 벗어나기까지는 에우뤼디케를 돌아다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있다 만일에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다본다면 에우뤼디
케는 다시 저승 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어둠과 적막에 싸인 오르막길을 한없이 올라 이윽고 땅 거죽과 가까운 곳에 이
르렀다 아내가 혹시나 지쳐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하던 오르페우스는 근심과 걱
정과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다 그 순간 에우뤼디케는
다시 저승 땅으로 떨어졌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손을 잡으려고 자기 손을 내밀
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 닿는 것은 싸늘한 바람뿐이었다 두번째로 죽어가면서
도 에우뤼디케는 남편에게 불평할 까닭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에우뤼디케는 남편
에게 작별 인사를 했지만 그 소리는 오르페우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에우뤼디
케는 온 곳으로 다시 갔다
아내의 두번째 죽음은 오르페우스를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흡사 대가리가 셋인 저승의 케르베로스가 사슬에 묶여 지상으로 끌려나오는 것
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되어버린 겁쟁이 아니면 미모를 뽐내다가 이다
산에서 돌이 되어버린 레타이아와 그 죄를 자신의 갈음하려다 역시 돌이 되어버
린 레타이아의 연인 올레노스 같았다 오르페우스는 다시 한번 저 저승의 강스튁
스를 건너려 했으나 허사였다 스튁스 강의 뱃사공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식음을 전폐하고 이레 동안이나 이 강변에 앉아 있었다 이동안 그
가 양식으로 삼은 것은 슬픔과 눈물뿐이었다
오르페우스는 하릴없이 잔인한 에레보스의 신들을 원망하면서 험하디험한 로도
페 산 북풍이 휘몰아치는 하이모스 산으로 돌아왔다
태양이 일년 동안 돌아 피스케스 자리에서 끝내는 여행을 세 차례나 했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이 동안 오르페우스는 어떤 여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은거했다 두
번이나 아내를 잃은 경험을 한데다 다시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가 그렇게 여자를 피해 은거하고 있는데도 불
구하고 그의 주위에는 속을 태우는 여자가 많았다 이들은 저희들의 접근을 허락
하지 않는 오르페우스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여자보다는 오히
려 나이 어린 소년이나 청년들에게 사랑을 기울이는 것을 좋아했다 말하자면 이
들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인생의 봄과 갓핀 인생의 꼿을 사랑한 것이었다 오르페
우스는 트라키아 사람들에게 이런 풍습을 맨 처음으로 전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퀴파리소스의 비극
이땅의 어느 산꼭대기에는 푸른 풀이 잘 자라 있는 평평한 공터가 있었다 햇살
을 피랗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신들의 피를 받은 이 가인이 이곳에 와서 자
리를 잡고 앉아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면 나무들도 이 가인을 향하여 그 가지
를 구부리는 바람에 그곳이 그늘로 변하고는 했다 주위에는 나무가 빽빽이 자라
고 있었다 카오니아의 명목이자 유피테를 대신의 신목인 참나무 파에톤의 누이
들이 변신한 백양나무 잎이 부드러운 보리수 너도밤나무 처녀다프네가 변신한
월계수 잘 부러지는 개암나무 창 자루 만드는데 쓰이는 물푸레 나무 마디가 없
는 전나무 도토리가 잔뜩 달려 가지가 휘어진 상수리나무 언제든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 알락달락 단풍나무 강가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 역시 물가를 좋아
하는 로토스 늘푸른 회양목 날씬한 위성류 색깔이 두 가지인 도금양 검붉은 열
매가 맺히는 가막살나무로 숲은 울울창창했다 이런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는 덩굴손으로 나무를 잡고 오르는 담쟁이 산포도 산포도 덩굴에 감긴 느릅나무
산물푸레나무 가문비나무 장밋빛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산딸기 승리자의 상징
인 종려나무 신들의 어머니인 퀴밸레 여신이 자신의 신관 아티스가 인간의 모습
을 버리고 이 나무로 변신했다고 해서 유난히 사랑하던 소나무 등등 하여튼 이
산에는 온갖 나무가 다 있었다 이런 나무 사이에는 원추형으로 자라는 퀴프로스
도 있었다 이 나무는 오르페우스 시대에는 비록 나무가 되어 있었지만 원래는
나무가 아니라 수금과 활을 좋아하던 신의 사랑을 받던 소년이었다 이 소년이
참나무가 된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 카르타이아에 이곳 카르타이아 별과 요정들의 사랑을 받던 갈래진 뿔이
유난히 튼튼하고 아름다운 수사슴이 한 마리 있었다 이수사슴의 뿔은 금빛으로
찬연히 빛났고 그 뿔의 가지에는 귀한 돌로 만등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이 목
걸이는 이 수사슴이 걸을 때마다 목과 어깨 위에서 출렁거렸다 수사슴의 이마에
는 이 수사슴이 태어날 때부터 은제 호부가 가줄줄에 묶인채로 붙어 있었다 양
쪽 귀에 매달린 진주 귀고리는 관자놀이 위에서 오락가락했다 이 수사슴은 태어
나면서부터 요정들의 사랑을 받아서 인간을 겁내는 것을 잊었는지 통 겁이 없어
서 인가를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가 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도 쓰다듬어달
라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는 했다 그러나 이 수사슴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사름
은 케오스에서 가장 인물이 잘난 소년이었던 퀴파리소스였다 퀴파리소스는 이
사슴을 푸른 풀밭이나 수정 같은 물가로 데려가거나 갖가지 꽃으로 화환을 만들
어 그 뿔에다 걸어주고는 했다 때로는 말을 타듯이 이 수사슴을 타고 앉아 사슴
의 부드러운 주둥이를 고삐삼아 잡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사슴을 몰기도 했
다
어느 여름날 정오 거해좌의 긴 다리에 태양의 열기가 내니쬘 즈음 이 수사슴은
풀을 뜯는 데 지쳐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쉬고있었다 그런데 퀴파리소스가 그만
부지불식간에 그 날카로운 창으로 이 수사슴을 찌르고 말았다 사랑하던 수사슴
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본 이 소년은 자기도 수사슴을 따라 죽기로 마음
먹었다 포에부스 신은 사랑하는 수사슴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니 슬퍼하는것은
당연하나 죽어가는 것은 이미 죽어가는 것이니 너무 슬펴하지 말라고 이 소년을
달랬다 그러나 소년은 신들께 마지막 소원이니 수사슴의 죽음을 영원히 슬퍼하
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너무 오래 울고 있어서 그
랬겠지만 그의 몸에서는 피가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팔다리는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흰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은 하늘
을 향해 뻣뻣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폴로 신은 이것을 바라보면서 슬픔을 이
기지 못하고 탄식했다 네가 남을 위하여 슬퍼하고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의
벗이되고자 하니 나또한 너를 위하여 슬퍼하리라
미소년 가뉘메데스
오르페우스는 퀴파리소스가 변신한 삼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나무에 둘러싸인 채
앉아 있었다 곧 그의 주위로 온각 짐승 온갖 새들이 모여드었다 그는 수금 통에
귀를 기울이고 엄지손가락으로 수금 줄을 퉁겨 만족스러운 소리가 날때까지 음
정을 조율하고 나서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랫말은 대략 이러했다
무사이신 어머니시여 우리 모두 유테르 신의 지배 아래 있는 만큼 제 노래도 유
피테를 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게 하소서
나는 유피테르 대신의 권능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목청껏
거인들에 관한 이야기 플레그라 벌판에 던져졌던 저 무서운 벼락 이야기를 노래
했다 그러나 오늘은 가벼운 이야기를 노래하련다 신들의 사랑을 받던 소년 부정
한 사랑에 눈이 멀었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 처녀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하겠다
신들의 아버지이신 유피테르 대신이 언제 한 프뤼기아 소년 가뉘메테스를 사랑
한 적이 있다 이소년을 사랑하게 되자 대신은 당신의 본모습으로는 사랑을 이루
기가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다른 모습을 빌릴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신은 새
의 모습을 빌리기로 했다 그러나 어느새의 모습을 빌릴 수는 없었다 새의 모습
을 빌리되 대신의 벼락을 나를 수 있는 새의 모습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새
의 모습을 빌린 대신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이 일리움의 양치기 소년을 하늘
로 채어올렸다 유노 여신 보기에는 꼴사납겠지만 이 소년은 지금도 천궁에서 술
을 빚고 유피테르 대신에게 술잔 드리는 일을 한다
꽃이 된 휘아킨토스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만일에 운명이 포에부스 신께 그런 시간의 여유를 베풀었다면 이뮈클라이 의 미
소년 휘아킨토스도 포에부스 신의 손에 이끌려 천상으로 갈 수도 있었으리라 그
러나 휘아킨토스는 나름대로 불사의 몸이 되었다 봄이 겨울을 쫓아내고 태양이
백양궁에 들때마다 휘아킨토스는 다시 살아나 푸른 풀밭에 꽃으로 피어나니까
내 아버지 포에부스는 이 세상의 산 것들 가운데서 이 휘아킨토스를 가장 뜨겁
게 사랑했다 내 아버지가 수금이나 활 같은 것도 버려둔채 휘아킨토스를 만나러
에우로타스와 성벽도 없는 스파르타의 도시로 떠나면 세계의 중심인 델포이는
신이 없는 신전이 되었다 아폴로 신은 전에 없이 휘아킨토스와 함께 사냥그물을
들고 사냥개를 거느리고는 산속을 누볐다 늘 함께 다니다보니 이소년에 대한 아
폴로 신의 사랑도 나날이 깊어갔다
어느 날 태양이 시간으로 보아 가버린 밤과 장차 올 밤의 한가운데 들어 가기
도 멀고 오기도 먼 그런 시각이었다 아폴로 신과 휘아킨토스는 옷을 벗어부치고
온몸이 번쩍거릴 때까지 올리브 기름을 바른 다음 원반던지기를 겨루었다 포에
부스 아폴로 신이 먼저 던졌다 그는 던지는 제세를 잡고는 하늘을 향해 있는 힘
을 다하여 이원반을 던졌다 원반은 구름을 가르고 날아갔다가 한참 뒤에야 자연
의 힘에 못 이겨 땅에 떨어졌다 원반 던지기는 힘과 재간이 고루 섞여야 멀리
던질 수 있는 법이다 젊은 스파르타 인 휘아킨토스는 빨리 제 차례를 잡아 원반
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에서 땅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 원반을 주우러 달려갔
다 그러나 원반은 굳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공중으로 되튀어오르면서 휘아킨토스
의 얼굴을 때렸다 소년의 안색도 창백해졌지만 아폴로 신의 안색도 소년의 안
색만큼이나 창백해졌다 신은 휘아킨토스를 일으키고 사지를 주물러 따뜻하게 하
는 한편 상처를 손보고 약초를 처방하여 휘아킨토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지 못
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폴로의 의술도 소용없었다 이미 치명상이라서 치
료할 단계를 저만치 넘어서 있었다 한번 대가 부러지면 다시는 바로 서 있지 못
하고 대지를 향하여 고개를 꺾는 오랑캐꽃이나 양귀비나 백합처럼 휘아킨토스의
고개도 아래로 내리꺾였다 힘이 빠져나가 버린 휘아킨토스의 고개는 그에게 이
미 짐이 되기 시작했는지 어깨 위호 무너져내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포에부
스 아폴로 신은 휘아킨토스를 안은채 서럽게 울부짖었다 휘아킨토스여 네 청춘
의 꽃을 꺾이고 이제는 내게서 떠나려 하는구나 내 눈에 보이는 네 상처가 너를
죽인 이 상처가 나를 원망하고 있구나 네 죽음은 내 슬픔의 씨앗이자 내 허물의
과실이다 내 손은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의 하수자였다 너를 죽게 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하지만 휘아킨토스여 내가 대체 어떤 죄를 지었느냐 시합을 벌인
것이 죄더냐 너를 사랑한 것이 죄더냐 생각 같아서는 너를 살리고 내가 대신 죽
고 싶구나 대신 죽을 수 없으니 함께 죽고 싶구나 그러나 나는 신인지라 운명의
법에 매여 죽을 수가 없다 나는 살아 있고 너는 죽었으나 너는 영원히 나와 함
께할 것이다 너의 이름은 영원히 내 입가를 맴돌 것이다 내가 수금 가락을 고를
때 노래할때 내노래와 내가락이 너를 부를 것이다 내 너를 새꽃으로 만들되 내
흐느낌을 그 꽃잎에다 아로새기리라 후대에 영웅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영웅이
너와 인연을 맺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너의 꽃잎에서 그 영웅
의 리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폴로 신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을 즈음 휘아킨토스가
흘린 피는 땅 속으로 스며들면서 풀잎을 적시더니 이 피가 굳으면서 모양이 백
합과 흡사하고 색깔은 튀로스 산 보라색 옷감보다 더 고운 꽃이 피어났다 아폴
로 신이 휘아킨토스를 축복하여 꽃으로 피어나게 한 것이었다 아폴로 신은 이소
년을 꽃으로 환생하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설움을 그 꽃잎에 아로새
겼으니 휘아킨토스의 꽃잎에 아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다 휘아킨토스가 이렇듯 턱없이 죽었으나 스파르타 사람들은 이 휘아키토스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늘날까지도 옛 관례를 좇아 해마다 휘아킨토스를 기
념하여 휘아킨토스 제전이 열리고 각가지 경기가 베풀어지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봄을 파는 프로포이티데스 케라스타이
오르페우스 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만일에 광물이 많기로 소문난 아마토스에 가서 사람들에게 프로포이티테스가 그
도시 사람들이었느냐고 물어보라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마에 두 개의 뿔
이 돋아서 이름이 케라스타이인 괴물이 그 도시 사람들이었느냐고 물어보라 역
시 아니라고 할 것이다 옛날 이 케라스타이가 사는 집 문전에는 나그네의 수호
신인 유피테르의 제단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제단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 이 피를 보았더라면 제물로 쓴 젖떨어지지않은 송아지 피거나
아마토스 산의 산양 피인 줄 알았으리라 그러나 아니었다 이들이 죽인 나그네의
피였다 다정다감함 베누스 여신은 이 말 같지도 않은 희생 제물에 격분한 나머
지 오피우사땅을 떠나버리려 했다 그러나 베누스 여신은 한동안 떠나기를 망설
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성도, 내가 사랑하던 이 땅이 어째서 이런 죄를 짓는 것일까?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것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까지 보아야 할까? 내 이 사악한 것들
을 모조리 죽여버리든지, 쫓아내 버리든지 해야겠다. 아니다. 죽여버리거나 쫓아
버리는 것은 이것들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겠구나.)
모습을 바꾸기는 바꾸어야겠는데 무엇으로 바꿔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여신
의 눈에 마침 이들의 뿔이 보였다. 그래서 여신은, 옳다구나 하고 이들을 난폭한
황소로 그 모습을 바꿔버렸다.
케라스타아가 이런 벌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염치없는 프로포이티테스 무리
는 가량없이도 이 베누스 여신의 신성을 모독했다. 여신의 분노가 이들에게도
미쳤다. 여신은 이들로부터 (프로포이티데스)라는 이름을 빼앗아버리고 그 땅에
서 쫓아내어 뭇 사내들에게 몸을 팔게 했다.
역사상 최초의 매춘부가 된 이들은 수치심까지 잃어 얼굴을 붉힐줄도 몰랐다.
이들을 돌로 만들어비리기는, 따라서 간단했다」
6.퓌그말리온의 사랑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또 이렇게 이어졌다.
「이렇게 사악한 삶을 사는 여자들을 본 퓌그말리온은 자연이 여성들에게 지
워놓은 수많은 약점이 역겨워 오랫동안 여자를 집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독신
으로 살았다. 그러나 정말 혼자 산 것은 아니고,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솜씨로
만든, 눈같이 흰 여신의 상아상과 함께 살았다. 퓌그말리온이 만든 이 상아상의
여인은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퓌그말리온은
자기 손으로 만든 이 상아상의 여인을 사랑했다. 이 상아상은 살아있는 여인이
가진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아상은 언제 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언제 보아도 금방이라도 움질일 것 같았다. 이 상아상을 만든 솜씨는 실
로 인간의 솜씨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묘했다. 퓌그말리온은 틈만 나면 이
상아상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만든 이
상아상에 대한 사랑이 샘솟았다. 자주, 그는 그것이 정말 상아로 되어 있는지 아
니면 인간의 살인지 확인하고 싶어 상아상의 살갗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상아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쓸쓸해하고는 했다. 퓌그말리온은 이 상아
상에 입을 맞추면서는 이 상아상이 이 입맞춤에 회답하기를 바랐
이 상아상을 상대로 아첨 섞인 말을 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처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 가령 조개 껍데기나 반짝거리는 조약돌, 예쁜 새, 갖가지 색깔의 꽃,
색칠한 공, 한때는 파에톤의 누이들이 흘린 눈물이었던 호박구슬 같은 것들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는 이 상아상에다 옷을 입혀주는가 하면,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워주고, 목에는 긴 목걸이를 걸어주기도 했다. 이 상아사의 귀에는 귀고리, 목
에는 목걸이가 젖가슴 위로 늘어져 있기도 했다. 이 모든 장신구는 아름다운 상
아 처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역시 아무것도 걸치고 있
지 않을 때였다. 퓌그말리온은 튀로스 산 보라색 천을 씌운 긴 의자에 이 처녀
를 눕히고 그렇게 하면 처녀가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 밑에는 베개를
받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놓고 그는 짐짓 이 상아 처녀를 자기의 반려라고 불
렀다.
온 퀴프로스 섬이 다 떠들썩해지는 베누스 축제 때의 일이었다. 꽃다발을 뿔에
다 건 백설 같은 송아지는 제단 앞에서 흰 목으로 도끼날을 받고 무수히 쓰러졌
다. 제단에서 향연이 오르자 퓌그말리온은 제 몫의 제물을 드리고 제단 앞에서
더듬거리는 어조로 기도했다.
「신들이시여, 기도하면 만사를 순조롭게 하신다는 신들이시여, 바라건대 제 아
내가 되게 하소서, 저 ....」
퓌그말리온은 「상아 처녀를 ...」하려다가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상아 처녀
같은 여자를 ...」, 이런 말로 기도를 끝내었다.
그러나 축제를 맞아 그 제단에 임재하여 제물을 흠향하던 베누스 여신은 그 기
도의 참뜻을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표적으로 불길이 세 번 하늘
로 치솟게 했다. 집으로 돌아온 퓌그말리온은 바로 상아 처녀에게 다가가 그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상아 처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퓌그말리온의 입술에
닿는 처녀의 입술에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었다가
는 다시 입술을 대고 손으로는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손끝에서
그렇게 딱딱하던 상아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흡사 태양의 열기에 부드러워
져, 사람의 손끝에서 갖가지 모양이 빚어지는 휘메토스 산의 밀랍같이...
깜짝 놀란 퓌그말리온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기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기뻐하기에는 아직 믿어지지 않는 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아내 삼기를 바라던 상아 처녀의 살갗을 만져보았
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상아 처녀의 몸은 분명히 인간의 몸이 되어 있었다! 그
가 손가락을 대자, 이 처녀의 몸 속에서 뛰는 맥박이 선명하게 손끝에 느껴진
것이었다. 파포스 사람 퓌그말리온은 수다스럽게 베누스 여신께 감사 기도를 드
렸다. 한동안 감사 기도를 드리던 퓌그말리온이 그래도 믿어지지 않았던지 상아
처녀에게 다시 입을 맞추자 상아 처녀는 이 입맞춤에 화답하면서 얼굴을 붉혔
다. 처녀는 수줍은 듯이 눈을 뜨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날빛을 동시에 올려다보
았다. 이들의 혼례식에는 이 혼례식을 있게 한 베누스 여신이 친히 임석했다. 달
이 아홉 번을 차고 기울자 퓌그말리온의 신부는 아기를 낳았다. 두 사람은 퓌그
말리온의 고향 땅 이름인 「파포스」를 이 아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7.몰약이 된 뮈라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로 이어졌다.
「퓌그말리온과 상아 쳐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 파포스의 몸에서는 키뉘라스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만일에 자식이 없었더라면 이 키뉘라스도 복이 많은 사람 축
에 들 수 있었으리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다. 내가 바라기로는 이
이야기는 듣되, 한쪽 귀로 듣고는 한쪽 귀로 흘렸으면 한다. 내 이야기를 듣고
이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이야기를 믿지 말기 바란다. 세상
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일이
정말 이 세상에 있을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믿어
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자연이 이 땅에 이렇게 사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용인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면 나는 이스마로스 백성과 우리 땅을 축복하지 않을수 없다. 그렇게 사악한 일
이 벌어졌던 땅과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판카이아
땅은 원래 발삼, 육계, 봉아술, 그리고 약이 되고 향료가 되는 그 밖의 초목이
많이 나는 나라다. 그러나 뮈르가 자라기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이 땅도 약초와
향료를 자랑할 수가 없었다. 새로 자라기 시작한 이 나무는 이땅에서 났으되 귀
중한 나무로는 대접받지 못했던 것이다. 쿠피도도 제손으로 뮈라에게 활을 쏘았
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제 횃불로 뮈라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부인했
다. 복수의 여신 세 자매중 하나는 스튁스에서 불을 붙인 횃불과 뱀의 독으로
이 뮈라를 다스렸다. 아비를 미워하는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데 뮈라는 아
비를 미워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아비를 사랑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도처에서 뮈라의 손을 잡으려고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다. 동방의 나라에서도 수
많은 청년들이 이 나라로 건너와 뮈라를 아내로 차지하려고 기예를 서로 겨루었
다. 그러나 뮈라는 상대를 그 구혼자들 사이에서 골라낼 수가 없었다.
뮈라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 구혼자 무리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뮈라는 제 진심이 무엇인가를 깨닫고는, 이 사악한 욕망과 싸우면서 이런 푸념
을 했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하늘에 계신 신들이시여, 부모와 자식을 잇는 사랑과 의무에 기대어 비오니, 만
일에 이것이 죄악이라면 이같은 참람한 마음을 먹지 않게 하시고 이같이 사악한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하오나, 신들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까? 이 땅에는 이런 사랑을 나누고도 멸종하지 안는 짐승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암소는 그 아비의 사랑을 용납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말에게는
그 딸을 아내로 삼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숫양은 제 씨로 지어진 암양을 거
느리고, 새도 제 아비였던 새의 알을 낳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금수는 이런 자
유를 허락받았는데,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어찌 부러운 일이 아닐 수있겠
으며, 인간만은 이러저러한 것을 근심하여 갖가지 금제를 만들어놓고 자연이 허
락한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닐수 있겠습니까? 들
리는 바에 따르면 사랑의 유대를 강화하되 이를 이중으로 강화하기 위해 아비와
딸이 혼인하고 어미와 아들이 혼인하는 것을 용인하는 나라가 있다고 들었습니
다. 신들이시여, 그러나 저는 박복한지라 그런 땅에서는 태어나지 못
멀리 떠나서 이 죄를 면할 수 있다면, 기꺼이 이 나라를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키뉘라스 왕에 대한 저의 사랑이, 저의 맹목적인 사랑이 저를 이곳에 있게 하고,
그분을 우러러뵙게 하며, 그분께 말을 걸게하고, 그분의 옥체에 손을 대게 하고,
그분의 입맞춤을 용납하게 합니다. 저같이 사악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들이시여, 신들께서 이름을 지으시고 관계를 지으신 것에 이같이 난잡한 일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지요. 신들이시여, 인간이 어찌 제 어머니의 연적이
되고 제 아버지의 연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찌 제 아들의 누이로 불
리고, 제 형제의 어미로 불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 뮈라여, 너는 머리채가 올올이 검은 뱀인 세 자매 여신들이 두렵지 않은가?
죄많은 자들이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저 횃불을 들고 날뛰는 여신들이 두렵지
않은가? 아서라. 이 죄에서 놓여날 수 있을때, 아직은 죄를 짓지 않았을 때, 마
음에서 사악한 생각을 비우고, 전지전능한 자연의 법을 어기는 길에서 물러서거
라, 너는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나 네 처지로 보아 이는 이루어질 수 있
는 일이 아니다. 네 아버지는, 의가 무엇인지 아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네가 어
떻게, 그분이 너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냐?」
딸의 마음속에 이런 갈등 자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키뉘라스 왕은, 수많은
구혼자들이 딸을 바라고 자기 왕국에 와 있는 것을 보고는, 공주에게 그들의 이
름을 일일이 말하고 어느 구혼자를 골라 지아비 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
러나 딸은 아무 말도 않고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마음
이 무거웠던 뮈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있었다. 키뉘라스 왕은, 딸이
수줍어서 그렇거니 여겨 더 이상 묻는 대신, 눈물을 닦아주고 딸의 뺨에다 입을
맞추어주면서 딸을 달랬다. 아버지가 뺨에다 입을 맞추는 순간 뮈라는 울음을
그쳤다. 이윽고 아버지가, 모여든 구혼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떤 신랑감
을 바라느냐고 묻자 뮈라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님 같은....」
키뉘라스 왕은 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고, 「역시 너는 효녀로 구나
」 이런 말로 딸을 칭찬했다.
뮈라는, 「효녀」하는 말을 듣고는 또 괴로워했다. 죄의식을 느꼈던 것이었다.
산 사람들은 모두 근심과 걱정의 짐을 벗어놓고 잠이 든 한밤이었다. 그러나
뮈라만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 길 없는 정염의 불길에 시달리고 있었다. 뮈라
는 자기의 욕망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끼고 몹시 당혹해 했다. 뮈라로서는, 한
편으로는 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의중을 떠보고 싶어했고, 한편으로
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욕망을 이루고 싶어했다. 뮈라는,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알지 못했다. 허리를 무수히 찍힌 채, 도끼의
마지막 일격을 기다리면서 어디로 쓰러질지 몰라 사방을 둘러보는 나무처럼, 뮈
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끝없이 망설였다. 때로는 이래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때로는 저래야겠다는 생각도 해보느라고 뮈라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뮈
라는 결국 자기 사랑의 끝은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죽기로 결심한 것이었
따. 뮈라는 목을 매어 죽기로 결심하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문의 상인방에도 끈
을 매면서 뮈라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아버지 키뉘라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바라건대 제가 죽은 까닭을
아소서.」
말을 마친 뮈라는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그러나, 뮈라의 말은 이 공주의 침실 문 밖에서 침소를 지키던 충직한 유모의
귀에 들어갔다. 늙은 유모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자살할 채비를 하고 있는 공
주를 본 유모는 소리를 지르며 공주의 옷깃을 찢고 공주의 목에서 올가미를 벗
겼다. 유모는 이러고 나서야 울음을 터뜨리며 공주를 끌어안고 자살하려고 한
까닭을 물었다. 그러나 뮈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바닥만 내려다보
며, 한시 바삐 죽을 수 없던 자신, 시간을 끌다가 유모의 눈에 뜨이고 만 자신을
탓하는 것이었다.
늙은 유모는, 백발이 된 자신의 머리카락과 말라버린 자기 젖가슴을 보여주며,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공주를 길러온 은공을 보아서라도 자기에게 그 까닭을
말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뮈라는 대답 대신 울기만 했다. 늙은 유모는 기어이
그 까닭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말해주면 비밀을 지켜주는 것은 물로이고 소
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돕겠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씨, 무슨 연유인지 말씀하세요.그러면 이 늙은것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는
늙은이에 지나지 않으나 늙은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용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아씨께서 광기에 들리시어 끔찍한 생각을 하셨다면 마법과 약초로 광기를 고치
는 자를 불러다 대겠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아씨께 마법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축귀의 의식을 베풀어 이를 풀면 되는 일이니 근심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도 저
도 아니고, 만일에 신들의 분노가 아씨께 미치셨다면 제물을 푸짐하게 드려 신
들의 노여움을 풀면 되는 일입니다. 이런 일 아니고서야 아씨께서 이렇듯 상심
하실 일이 없지를 않습니까? 너무 상심하시지 마세요. 아씨 댁과 댁의 재물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나날이 번창하고 있으며, 아씨의 아버님과 어머님께서는 살
아 계실 뿐만 아니라 건강하시지를 않습니까?」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뮈라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유모는 공주가
사랑 사연으로 고민하고 있으리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짐
작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든 공주가 고민하는 까닭을 알아내기로 작정
한 유모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유모는 울고 있는 공주를 그 마른 가슴으로 껴안
고, 떨리는 공주의 팔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또 이런 말을 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아씨는 누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 상대가 누구인지 그것만 밝혀주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아버님 몰래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뮈라는 기겁을 하고 유모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베
개를 끌어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나가시든지, 내가 고민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든지 둘중 하나를 택
하세요. 유모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늙은 유모는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망설이다가 뮈라의 발치에 몸을 던지고
는 가르쳐주지 않으면 왕께 달려가 공주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고변하겠
다면서 뮈라를 위협하는 한편, 사랑의 상대가 누군지 가르쳐주기만 하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힘껏 돕겠다고 했다.
뮈라는 고개를 들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뮈라의 빰을 흘러내려 유모
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뮈라는 유모에게 속을 열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가도 곧 마음이 약해지는지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는 했다.
「세상에, 우리 어머니같이 복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런 분을 지아비로 의
지하고 사시니...」
뮈라는 이런 말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유모는, 설마 하면서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백발이 쭈뼛 서는 듯한 전율을 느끼
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죽고 싶어한다면 죽게 내버려두고
싶었다. 뮈라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뮈라는, 도와주겠다던 유모의 말이 사
실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마음을 먹은 이상,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죽어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뮈라의 이런 기분을 안 유모가 말했다.
「안됩니다. 어떻게 하든 사셔야 합니다. 그분과의 사랑을 이루시겠다는 아씨의
소원을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모는 「아버님」이라는 말 대신「그분」이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러고는, 그날 들은 것을 비밀에 붙이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이윽고 혼인한 여자들은 모두 케레스 신전으로 가는, 케레스 여신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일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제삿날이 되면 여자들은 모두 백설같이 흰
옷으로 단장한 다음 옥수수 이삭을 꽂은 꽃다발과 그 해에 처음으로 거둔 과일
을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신전으로 갔다.
여자들은, 이 제삿날이 오면 아흐레 동안을 금욕 기간으로 삼고 남편 곁에는
가지 않았다. 왕비이자 뮈라의 어머니인 켄크레이스도 나라 안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이 밀의를 모시러 신전으로 갔다.
키뉘라스 왕의 침소에 왕과 잠자리를 함께 할 여자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공
주의 원을 풀어준다는, 길 잃은 충정에 눈이 먼 유모는 키뉘라스 왕이 술에 취
할 때를 기다렸다가는 살며시 다가가 말했다.
「전하를 사랑하는 여자가 있사온데 인물로 말씀드리자면 가히 절색이라고 할
만합니다.」
왕이 유모에게, 그 여자의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유모는 이렇게만 대답
했다.
「뮈라 공주님과 동갑입니다.」
왕이, 그렇다면 그 여자를 침소에 들게 하라고 말하자 유모는 나는듯이 뮈라에
게 달려가 이런 말을 했다.
「아씨, 아씨, 기뻐하세요,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뮈라에게 이것은 온 마음으로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불륜의 죄를
짓고 벌을 받을 생각이 뮈라의 마음 한구석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었다. 뮈라의
마음은 천 갈래로 찢어질 만큼 착잡했던 것이었다.
금수초목이 잠들고, 소몰이자리가 수레를 몰고 큰 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들었
을 시각이었다. 뮈라는 불륜을 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방을 나섰다. 금빛 달
은 하늘에 없었다. 검은 구름에 가려 별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밤은 한 줄기의
빛도 하늘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보양이었다. 이카이로스의 모습도 효녀
에리고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뮈라는 이런 불길한 조짐에 세 번이나 걸음
을 멈추었다. 그렇잖아도 올빼미가 몇 번이나 울어 불길한 조짐을 경고한 참 이
었다. 그러나 뮈라는 갔다. 뮈라로서는 어둠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어서 좋
았다. 뮈라는 왼손으로는 유모의 팔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앞을 더듬으며 보이지
도 않는 길을 따라 끌려갔다.
이윽고 키뉘라스 왕의 침소에 이른 유모는 그 방 문을 열고 뮈라를 안으로 안
내했다. 뮈라는 오금이 떨려 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피가 모조리 빠져
나가 버렸는지, 뮈라의 얼굴은 낯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정신도 제정신이 아니
었다. 불륜의 현장으로 기억될 문제의 침상 쪽으로 다가가면 다가가갈수록 뮈라
의 가슴은 그만큼 졸아들었다. 뮈라는 자기가 하려는 짓을 후회하고 자신의 정
체가 드러나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
다. 유모가, 망설이는 뮈라의 손을 잡아끌어 왕의 침상 옆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유모는 뮈라의 손목을 잡아 끌어 왕에게 넘겨주면서,
「키뉘라스 왕이시여, 전하의 것이오니 마음대로 하소서.」
이렇게 말하고는, 그 저주받을 한 쌍의 남녀를 남겨놓고 그 방을 나갔다. 키뉘
라스 왕은 제 살, 제 피로 이루어진 이 처녀를 맞아들이고, 겁에 질린 이 처녀를
다정한 말로 위로했다. 만일에 키뉘라스 왕이, 나이가 딸의 나이와 똑같다는 이
처녀를 「딸」이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만일 이 뮈라가 키뉘라스 왕을 단
한 번이라도「아버지」라고 불렀더라면 둘 다 이 엄청난 불륜만을 피할 수 있었
으리라.
아비의 씨를 받은 뮈라는, 그 죄많은 태 안에다 죄많은 짐인 불륜의 자식을 실
은 채 그 방을 나왔다. 다음날 밤에도 이런 일은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계속되었
다. 말하자면 이런 일은, 처녀의 정체가 궁금해진 키뉘라스 왕이 한밤중에 살며
시 불을 켜고 그 처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자기가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것
을 알게 될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처녀가 자기의 딸이라는 것을 안 키뉘라스
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뽑아들었다. 뮈라는 도망쳤다. 밤이었던 덕분에
어둠이 사방을 가려주었던 덕분에, 뮈라는 아버지의 칼날에서 도망 칠 수 있었
다. 뮈라는 아버지의 왕국의 방방곡곡을 방황하다가 결국은 종려 우거진 아라비
아와 판카이아 땅을 뒤로 하고 고향 땅을 떠났다.
아홉 달을 방황한 뮈라는 결국 사바 땅에 주저앉았다. 이즈음의 뮈라는 태 안
의 아기가 자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한편으로는 죽음
을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염증을 느낀 뮈라는 또라지게 어떤 기
도를 하고 싶은지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도 신들에게 이런 말을 푸념 비슷하게
했다.
「하늘에 신들이 계신다면, 그리고 이런 신세 타령도 들으신다면 아뢰고 싶습
니다. 저는 무거운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벌을 내리
신대도 몸을 사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살면 사는 대로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
가락질을 받을 죄를 지었고, 죽으면 죽는 대로 저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살 죄
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쫓으시되 이 세상에서도 쫓으시고 저 세상에도 들
지 않게 하소서. 바라오니, 저를 다른 것으로 바뀌시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
도 아닌 몸이게 하소서.>
하늘에는 회개하는 인간의 기도를 듣는 신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적어도, 그런
신이 이 여자가 한 기도의 마지막 한마디는 놓치지 않고 들었던 모양이었다. 미
라가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을 동안 벌써 발은 흙 속으로 깊이 묻혔고, 발가락
에서는 뿌리가 뻗어나 나무 둥치를 버틸 준비를 했다. 뮈라의 뼈는 단단한 나무
가 되었고, 그 안에 있던 핏줄 안으로는 피 대신 수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뮈라
의 팔은 큰 가지가 되었고 손가락은 작은 가지가 되었으며 살 갖은 나무 껍질이
되었다. 나무 껍질은 이미 아기가 든 아랫배를 지나, 가슴을 덮고는 목까지 덮으
려 했다. 기다리는 데 지친 뮈라는 스스로 몸을 움츠려 올라오는 나무 껍질을
맞아 거기에다 얼굴을 묻었다. 몸의 모양이 바뀌면서부터는 뮈라의 마음도 나무
의 마음을 닮아갔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것만은 여전했다. 뮈라가 눈물을 흘
리는 바람에 나무에서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사실 이 나무에서 가장 귀
중한 것은 이 눈물이었다. 그래서 이 나무에서 듣는 수액에는 이 처녀의 이름이
붙어 오늘날까지 뮈르라고 불린다.” (주)뮈르:즉 물약. 아라비아 산 관목인 이
나무의 수액은 방향제나 여인용 머리 가름으로 쓰인다. 특히 그
8. 아도니스의 탄생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또 다음 이야기로 이어졌다.
"불륜의 씨로 지은 자식은 나무 안에서 자라 어떻게 하든 그 어미의 몸이었던
나무를 떠나 바깥 세상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때가 되자 나무 안에 들어 있
는 뮈라의 아랫배는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뮈라에게는 진통
이 와도 이를 나타낼 길이 없었다. 물론 소리를 질러 해산의 여신 루키나를 부
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뮈라는, 해산하는 여느 여자와 똑같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뮈라가 진통을 시작하자 나무 둥치는 쉴 새없이 삐걱거리면서 휘청거렸고,
껍질 사이로는 수액이 번져 나왔다. 연민의 정이 많은 루키나 여신은 몸소 나무
가지 아래로 와서 나무에다 손을 대고 해산의 주문을 외었다. 그러나 나무 둥치
가 찢어지면서 나무가 그 껍질 사이로 산 것을 내어 놓았다. 사내아이의 울음소
리가 난 것이다. 그러자 요정들이 몰려와 이 아기를 받아서는 제 어미의 눈물로
씻었다. 아기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서 질투의 여신까지도 보았더라면 아기의
아름다움을 칭송했을 터였다. 그 까닭은 아기의 모습이 그림에 그려진, 발가벗은
쿠피도 신과 아주 똑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활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정도였다. 만일에 쿠피도 신이 활을
세월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는 법이다. 그리고 세월만큼 빠른 것도 없다.
제 누이의 아들이자 제 외조부의 아들인 그가 나무 껍질에서 태어난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 같은데 어느새 자라 고운 어린이가 되고 소년이 되었다가는 곧 잘
생긴 청년으로 장성했다. 인물은 아기 때의 인물에 못지 않게 준수한 청년으로
자란 것이다. 이 청년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이 시작될 즈음에는 제 어머니
의 죽음으로 몰아갔던 사랑의 불길에 복수라도 하는 듯이 사랑의 여신 베누스의
애인이 되어 있었다.
베누스 여신이 이 청년에게 반하게 된 내력은 이렇다. 베누스 여신의 아들 쿠
피도는 어느 날, 화살통을 맨 채로 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려다 화살통 위로 비죽
이 솟아오른 화살촉으로 그만 어머니 베누스 여신의 젓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가슴을 찔린 베누스 여신은 황급히 아들을 떠밀어 내었다. 그러나 상처는 생각
보다, 베누스 여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깊었다. 화살촉에 찔리는 순간, 인간의 아
름다움에 반해버린 이 여신은, 자기 성도인 퀴프로스 섬의 아름다운 해변에도
가지 않았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파포스에도, 물고가 많이 잡히는 크니도스
에도, 광물이 많은 아마토스에도 가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늘에도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하늘보다는 아도니스(주혹은 임이라는 뜻인 히브리 어 ‘아도니아
’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가 원래 페니키아 전설이었다는 설도 있으
나, 소 아시아에서 건너온 전설인 것만은 분명하다.)가 좋았던 것이었다. 베누스
여신은 이 아도니스에게 사냥할 때 쓰는 무기를 들려 항상 가까이 데리고 다녔
다. 전 같으면 나무 그늘 같은 데 누워 게으르게 몸매나 만지고 있었을 때 베누
스 여신이, 디아나 여신처럼 옷은 무릎까지 걷어 올려 질끈 동여
취 <도망치는 짐승을 보거든 용기를 내어 쫓아도 좋다. 그러나 네가 사냥하려는
짐승일 너와 용기를 겨루려 하거든 피하는 것이 좋다. 이런 짐승과 겨루는 것은
위험하다. 너로 인하여 고통 받는 것이 나라는 것에 유념하고 겁없이 대들지 말
기 바란다. 자연이 너와 대적할 무기를 내린 짐승은 도발하지 말아라. 공연히 도
발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명예에 대한 네 욕심 값을 나는 근심으로 치러야
한다. 베누스까지도 반하게 만들었던 너의 그 젊음, 너의 그 아름다움, 너의 그
매력도 사자나 멧돼지나 그 밖의 사나운 들짐승의 눈이나 사나운 성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멧돼지는 그 무서운 엄니로 전광석화같이 공격하고 사자는
포악하여 언제나 인간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기다린다. 내 너에게 이르거니와
이런 짐승들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아도니스는 여신에게 사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여신은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 너에게 들려주마. 오랜 옛날에 있었던 일이다만, 너도 들으면 놀랄 것이
다. 욕심 내어 뛰어다녔더니만 피곤하구나. 보아라. 마침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
고 있는 버드나무가 있고, 그 그늘에 풀이 잘 자라 있어서 눕기에도 안성맞춤이
로구나. 여기에 나랑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하자.>
여신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풀밭에 않아 아도니스에게 기대었다가, 곧 머리를
아도니스의 가슴에다 파 묻었다. 여신은 간간이 아도니스에게 입을 맞추며 다음
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9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아도니스의 변신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베누스 여신이 아도니스에게 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아무리 발이 빠른 남자들과 달음박질을 해도 지지 않을 만큼 뜀박질을 잘하
는 여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너도 들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아무
리 빠른 남자라도 이 여자에게는 당하지 못했다. 그래, 이 여자의 이름이 아탈란
테(아르고 호 원정에 참가했고, 칼뤼돈의 멧돼지 사냥에도 참가했던 아르카디아
의 여걸 아탈란테도 발이 빨랐다. 그러나 자주 동일시되고 있기는 하나 그 아탈
란테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스코이네오스의 딸 아탈란테는 동일한 여자가 아니
다.)다. 아탈란테는. 발만 빠른 것이 아니고 용모 역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이
아탈란테가 어느 날 아폴로 신에게 결혼 문제를 두고 신탁을 받아보았는데 이때
신이 내린 신탁은 이러했다.
<아탈란테여, 너에게는 지아비가 소용없구나. 너는 남자 겪는 일을 피해야 한
다. 그러나 이 일을 어쩔꼬, 너는 결혼을 피할 팔자가 아니다. 결혼한 뒤에는 ,
산 채로 너 자신을 잃겠구나.>
아탈란테는 아폴로 신의 신탁에 겁을 집어먹고 독신으로 숲 속에 살았다. 그
런데도 이 아탈란테에게 구혼하는 청년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어, 아탈란테는
이 청년들을 물리치기 위해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다는구나.
<먼저 나와 달음박질 겨루기에서 나를 이기지 못하면 절대로 내 지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나와 겨룹시다. 겨루어 나를 이기면 그 상으로 나를 신부로 맞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지면 그 때는 목숨을 받겠습니다. 자신있는 분이 있
거든 이 조건 아래서 겨루어 봅시다.>
이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이냐? 그러나 아탈란테가 빼어나게 아름다웠기 때문
에 이런 조건이 걸려 있는데도 구혼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어. 이 뜀박질 경
기장을 내려다보는 구경꾼 가운데 히포메네스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어, 히포메
네스는, 여자에 반해 목숨을 거는 다른 청년들을 아주 한심하게 생각했지.
<얼빠진 놈들, 계집 하나를 얻는 데 목숨을 걸어?>
이러면서 ..... 그러나 아탈란테의 모습을 보는 순간, 겨루기에 앞서 옷을 벗어
부친 아탈란테의 몸을 보는 순간 히포메네스의 마음도 달라졌어, 왜? 아탈란테
의 몸은 내 몸, 아니면 아도니스 너의 몸(만일에 네가 여자였더라면 말이다) 같
았기 때문이지. 깜짝 놀란 히포메네스는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고,
<사랑의 신이시여, 조금 전에 감히 신을 비난한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겨루
기에 이긴 자가 받을 상품을 못 보고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쳤다지. 일단 아탈란테를 보고 그 미모에 반해 버린 히포메네스는,
이번에는 아탈란테와 뜀박질을 겨루려는 젊은이들을 질투하기 시작해. 즉, 다른
젊은이들이 아탈란테를 이기는 일이 없었으면 했던 것이지.
<나라고 이 겨루기에다 내 행운을 걸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신들께서는 용기
있는 자들 편에 서신다니까.>
히포메네스의 심정은 그가 한 이 말 한마디에 잘 나타나 있지?
히포메네스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즈음 아탈란테는 날개가 달린 듯한 발
로 힘차게 대지를 박차며 내닫았지. 보이오티아 청년 히포메네스는 흡사 스퀴티
아 사람이 쏜 화살같이 달리는 이 처녀를 보고는 침을 삼켰어. 서 있는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달리는 모습은 더 아름다워 보였지. 아닌 게 아니라 달리는 아탈
란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어. 벌치에 걸리적거린다고 아탈란테가 모아 쥔
긴 옷자락은 바람에 흩날렸고, 머리카락은 상아색 어깨 위를 출렁거렸으며 가장
자리에다가 자수를 한 허벅지 댕기는 바람에 옷자락이 흩날릴 때마다 이따금씩
드러나고는 했어. 게다가 처녀의 흰 살결에는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어. 새벽빛을
받으면 하얀 대리석 벽이 불그레해지지? 대리석 벽에, 대리석의 색깔이 아닌, 다
른 색깔이 어리어 보이지? 그와 같았어. 히포메네스의 눈 앞에서 아탈란테는 먼
저 마지막 한 바퀴를 돌아 승리의 관을 썼어. 아탈란테에게 진 청년들은 거친
숨결을 가다듬다가, 약속에 따라 목숨을 바쳐 이 겨루기에 지 빚을 갚았지. 이
청년들이 이렇듯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히포메네스는 겁을 먹지 않았어. 히포메
네스는 겨루기 마당 한 복판으로 걸어 나가 이 처녀를 보면서 이런
<처녀여, 왜 쉽게 이길 수 있는 청년들만 상대하시오? 왜 발도 빠르지 못하고
연습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이기고 뽐내시오? 나와 겨룹시다. 나와
겨루면 설사 내가 이기고 그대가 진대도 그대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
오. 그대가 내게 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내 아버지는 메가라
사람 온케스티오스요, 내 증조부는 넵투누스 신이기 때문이오. 그러니까 나는 저
위대하신 대양의 왕이신 넵투누스의 증손이오. 내 문벌은 이렇듯 찬란하오만 내
용기는 내 문벌에 못지 않소. 만일에 내가 이긴다면 그대의 이름은 히포메네스
를 누르고 승리한 자의 이름으로 길이 빛나고 길이 남을 것이오.>
히포메네스가 이렇게 말하자 스코이네오스의 딸 아탈란테는 다정한 눈길로 이
청년을 바라보았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아탈란테는 혼잣말
을 이렇게 했지.
<귀중한 목숨을 걸되 그 목숨을 내 앞에 던져 청춘을 바치려 하다니, 참으로
인물이 아깝구나. 저 인물 앞에 서니 오히려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구나. 그
러나, 저 인물이 내 마음을 흔들기는 한다만 정작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
은 외모가 아니라 저 젊음이다. 저 청년은, 청년이라기보다 아직 소년이 아닌가?
그렇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저 청년의 외모가 아니라 저 청년의 젊음이
다. 게다가 저 청년에게는 용기도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도 있다. 과
연 해신의 자손답구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청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
이다. 저 청년은 나와의 혼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운이 없어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저 청년은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안된다. 가거라, 길손이여, 구혼자들의 피가 묻은 나를 버려두고 갈
수 있을 때 , 너무 늦기 전에 가거라. 나와 혼인하기 위해 그대가 치러야 할 값
은 너무 비싸다. 상대가 그대 같으면 어떤 여자도 그대 같은 지아비를 맞게 해
달라고 하늘의 신들께 기도까지 할 것이다.....그러나, 가만 있자, 저 청년의 걱정
은 저 청년이 해야지 왜 내가 한다지? 죽고 싶으면 죽으라
그렇다면 저 청년은 죽을 것이다. 나와 함께 살고 싶어했다는 죄 밖에 없는데
도 죽을 것이다. 저 청년은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고통
스러워 할까? 사랑의 대가로 받는 이 부당한 죽음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
도 내 승리를 역겨워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내 잘못인가? 그러나 죽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겨루기를 포기하면 된다. 포기하거나 나보다 더 빨리 달리면
된다. 그대는 이 겨루기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 어쩌면 나를 이길 수도 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저러나, 참 잘난 청년이 아닌가? 꼭 여자같이 잘 생긴 청년이
아닌가? 아, 히포메네스여, 차라리 나 같은 계집의 꼴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그대 같은 사람은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것을. 내 팔자가 기박하지 않
았더라면 운명이 내게 지아비 맞는 것을 허락했더라면, 나와 잠자리를 나눌 수
있는 남성은 그대뿐이었을 것을...>
아탈란테는, 사랑에는 경험이 없는 처녀였어. 하지만 아탈란테의 마음 속에서
는 이미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 물론 자기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
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 알지 못 하년서도 아탈란테는 이미 누구인가를 사
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과, 아탈란테의 아버지가 겨루기를 독촉하자 넵투누스의
자손인 히포메네스는 나를 보면서 이렇게 기도하더구나.
<오, 퀴테라의 여신이시여. 바라오니, 오시어서 무모하게 이 일에 뛰어든 저를
거들어주소서. 여신께서 불을 붙이셨으니, 이 불이 더욱 힘차게 타오르게 하소
서.>
이 청년의 기도가 바람 결에 실려오더라. 이 청년을 기특하게 여겼던 나는 곧
이 청년을 도와주기로 했다. 퀴프로스 땅, 경치 좋은 곳에 이 섬 사름들이 <타
마소스>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오래 전에 이 섬 사람들이 내게 신전을 지어 바
치면서 함께 바친 곳이다. 이 벌판 한 가운데에는 그 황금빛 잎이 장하고, 그 황
금빛 가지가 장하기 그지 없는, 빛나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내게는, 마침 이
곳을 지나가다가 따서 간직해둔 황금사과가 세 개 있었다. 살며시 이 히포메네
스에게 내려간 나는 이 사과를 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일러주었다. 물론
내 모습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이 히포메네스의 눈에만 보였지.
이윽고 출발점에 서 있던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땅을
박차고 내닫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어찌나 가볍게 내닫는지 바다 위를 달
려도 말에 물이 묻지 않을 것 같았고 잘 익은 곡식 위를 달려도 이삭 하나 부러
뜨리지 않을 것 같더라. 구경꾼들은 소리를 질러 이 청년을 응원하더구나.
<이번에는 눌러버려라! 달려라, 히포메네스! 있는 힘을 다해 달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이길 수 있다!>
이 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글쎄, 이런 함성을 듣고 메가라에
서 온 청년이 더 좋아했는지, 스코이네오스의 딸이 더 좋아했는지 그것은 아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나는 보았다. 히포메네스를 앞지른 아탈란테가 짐짓 속도를
줄이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다 보는 것을. 아탈란테는 달리기는 달리는데 악지로
달리는 것 같았어.
드디어 히포메네스가 마른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승점까지는 멀고도 멀었어. 일이 이렇게 되자 히포메네스는 세 개의 사과 중
하나를 꺼내어 땅바닥에다 굴렸어. 아탈란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 황금빛
사과를 보더니만 옆으로 비어져 나와 이 사과를 줍더구나. 이 틈에 히포메네스
는 아탈란테를 앞질렀어. 구경꾼들이 함성을 지른 것을 물론이야. 그러나 아탈란
테는 곧 속력을 내어 처졌던 거리를 만회하고 다시 히포메네스를 앞지르더구나.
히포메네스는 다시 사과 한 알을 꺼내어 땅바닥에 굴렸고, 아탈란테는 다시
이 사과를 주우러 옆으로 비어져 나오더구나. 물론 아탈란테는 이러느라고 조금
처졌지. 하지만 아탈란테가 앞서가는 히포메네스를 따라잡는 시간은 얼마 걸리
지 않았어. 겨루기는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참이었지. 히포메네스가 또 내게
기도를 하더구나.
<저에게 사과를 주신 여신이시여,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기도한 히포메네스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하나 남은 사과를 던지더
구나. 멀리 던졌지. 그러니까 아탈란테가 이 사과를 주우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
도 그만큼 길어질 것이 아니겠어? 하지만 아탈란테는. 사과를 주우러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더구나, 나 베누스가 또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판
이 아니냐. 나는, 아탈란테가 사과를 주우러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다음, 이
사과를 아주 무겁게 나들어 버렸다. 주운 뒤에도 들고 뛰려면 힘이 들게 말이다.
이야기 길게 할 것 없어. 아탈란테는 이 겨루기에서 지고 말았어. 이긴 히포메네
스가 이 아탈란테를 색시 삼은 것은 물론이고.
아도니스, 너도 생각해 보아라. 이 히포메네스가 나에게 감사 표시로 제물을
바쳤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그런데도 이 지각 없는 것은 나에게 제물을 바치
기는 커녕 그 명예를 내게 돌리는 데도 인색했다.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
느냐? 무시당한 데 대해 몹시 화가 났던 나는 이것들에게 본때를 보여 장차 나
를 대하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을 치기로 했던
것이다.
그 땅의 깊은 숲 속에는, 저 유명한 에키온(테바이의 시조 카드모스가 왕뱀의
이빨을 땅에 뿌리자 여기에서 수많은 무사들이 돋아나는데 이들이 바로 스파르
토이-뿌린 씨에서 돋아난 자다. 스파르토이의 하나인 에키온은 카드모스를 도와
테바이를 건설한, 말하자면 테바이의 개국공신.)이 소원 이루어준 것에 대한 감
사 표시로 신들의 어머니(퀴벨레 여신을 말한다.)께 지어 바친 신전이 한 기 있
었다.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는 이 곳을 지나다, 먼 길에 지쳤던지 잠깐 쉬고자
했다. 나는 이 곳에서 쉬는 이 둘을 보고는 신력을 풀어 히포메네스의 가슴에다
아내 아탈란테에 대한 음욕을 일으켰다. 그러니 어찌 되었겠느냐? 이 신전 가까
이에는 키 큰 나무로 둘러싸인 데다가 바위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흡사 동굴
같은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곳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범접하기
를 두려워 했다. 옛날의 사제들이 이 곳에다 옛날에 만들어진 신들의 목상을 많
이 모셨으니 그렇기도 했을 테지. 히포메네스는 제 아내를 이 곳으로 데리고 들
어가 금단의 욕망을 채운 것은 좋지만, 이자는 이로써 이 성소를 유린한 것이
아니야? 신들의 목상이 일제히 이 한 쌍의 남녀에게서 고개를 돌자리를 잡고 앉
아, 조금이라도 더 잘 들을 욕심으로 귓속에서 자란 나무라는 나무는, 머리카락
대신인 참나무만 남겨놓고 다 뽑아내었다. 그의 관자놀이에는 도토리가 잔뜩 매
달려 대롱거렸다.
「심판 볼 준비는 다되었소.」
산신이 판과 아폴로 신에게 말했다.
판은 피리를 꺼내어 한 곡조 멋들어지게 불었다. 판의 가락은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미다스의 귀에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 수가 없었다. 판의 피리 소리를
다 들은 트몰로스 산신은 고개를 돌려 아폴로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
리자 트몰로스 산의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아폴로 신을 바라보았다. 아폴로 신
은 파르나소스이 월계수로 금발을 질끈 동여맨 채, 보라색 옷자락을 끌며 나왓
다. 그이 왼손에 힌두스 상아 무늬가 박힌 수금, 오른손에는 수금채를 들고 있엇
다. 아폴로 신이 악신답게 한 곡을 연주하자 트몰로스 산신은 그 가락에 취해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 판의 피리 소리보다는 아폴로 신의 수금 소리가 낫다
고 판정했다.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청중들도 모두 이 점잖은 산신의 판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미다스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공정하지 못하다면서 심판의 판정에 항변했다.
델로스의 신은, 이같이 이리석은 자의 귀가 여느 인간의 귀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은 이 미다스
의 귀를 잡아늘이고는 그 안에 털이 소복이 자라게 한다음, 미다스의 머리에 달
린 채로 이쪽저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게 만들었다. 귀만 빼면 미다스의 다른 곳
은 멀쩡했다. 단지 귀 모양만 바꾼 것이었다. 미다스이 귀는 당나귀 귀와 비슷했
다. 귀가 이 모양이 되자 미다스 왕은 이를 감추려고 전전긍긍하다가 보라색 모
자를 썼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손질하는 이발사에게까지 그 귀를 감출 수는 없
었다. 이발사는 미다스의 귀가 그 꼴이 되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
이었지만 감히 왕의 비밀을 발설할 수가 없어서 속을 끓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들판으로 나가 땅에다 구덩이를 파고는 거기에다, 임금님 귀가 그 꼴이더
라는 말을 하고는 흙으로 다시 구덩이를 메웠다.
그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와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갈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해 말쯤, 키 높이로 자란 이 갈대는 엉뚱한 짓을 했다.
즉 남풍에 흔들릴 때마다, 제가 자란 땅에 묻혔던, 임금님 귀에 대한 주인의 비
밀을 누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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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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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라오메돈과 트로이아 축성
라토나의 아들 아폴로는 이렇듯이 미다스 왕을 벌한 뒤에 트몰루스에서 하늘로
날아올라 한동안 창공을 비행한 후 네펠레의 딸 헬레의 바다에 면한 트로이아
평원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이곳에는, 시게움 강 하구를 왼쪽으로, 로에테움 만
을 오른쪽으로 끼고, 벼락의 신에게 바쳐진 옛 제단이 하나 있었다. 여기에서 아
폴로는 이도시의 왕 라오메돈이 새 도시를 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울러 아
폴로 신은, 그 축성이 많은 인력과 재물을 필요로 하는 아주 힘든 공사라는 것
을 알았다. 그래서 아폴로는, 삼지창을 든 바다의 지배자와 함께 인간의 모습을
빌려 현신하고는, 상당한 사례를 약속받은 다음에 이 프뤼기아의 군주를 위하여
성을 쌓아주었다. 그러나 축성이 끝났는데도 왕은 사례는커녕 자기는 그런 약속
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오냐, 그러하냐? 너 어디 두고 보자!」
이렇게 벼르던 바다의 신은 온 세계의 물이라는 물은 모조리 이 트로이아로 끌
어들여 땅을 바다로 화하게 하고, 농부들의 논밭은 물론이고 살던 집까지 물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벌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라오메돈 왕은 자기
딸을 괴물을 위한 제물로 내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괴물에게 바쳐질 바닷가
의 바위에 묶여 있는 이 딸을 구해준 것은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 역시, 딸
을 구해주는 대가로 라오메돈이 약속한 망아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왕은 이번에
도 대가 치르기를 거절했다. 헤라틀레스는 트로이아를 공격하고 성을 점거함으
로써 대가를 치르게 하는 한편,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텔라몬에게 해시오네
를 아내로 맞게 했다. 역시 이 싸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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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헬레스폰토스, 즉 지금의 다아다넬즈.
7)소 아시아 트로아스 지방의 한 도시. 별명은 일리온(그/일리움).
8)유피테르.
9)트로이아의 왕. 일루스와 에우뤼디케(물론, 오르페우스의 에우뤼디케가 아닌,
아틀라스이 딸 에우뤼디케)의 아들. 프리아모스, 가뉘메데스, 안티고네, 헤시오네
는 모두 이 라오메돈의 딸이다. 아폴로와 넵투누스의 도움을 얻어 트로이아를
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10)넵투누스.
11)헤시오네를 말함.
12)당시 헤라클레슨는 아마존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트로이아에 들른 바 있다.
라오메돈의 약속 위반에 분개한 나머지 텔라몬과 함께 이 성을 공격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13)유피테르는 가뉘메데스를 천상으로 데리고 가는 대신 그 아비 되는 라오메돈
에게 망아지를 한 마리 주었는데, 라오메돈은 바로 이 망아지를 주겠노라고 헤
리클레스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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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을 세운, 텔라몬과는 형제간인 펠레우스가 신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은 유
명하다. 이로써 펠레우스는 조부의 이름뿐만 아니라 장인의 이름까지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피테르이 손자인 것은 펠레우스 한사람뿐만이
아니었으나, 여신을 아내로 맞은 사람은 펠레우스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이다.
5 프로메테우스의 예언, 펠레우스와 테티스
언제인가 연로한 프로테우스가 테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물의 여신이여, 아이를 가지세요. 그 아이는 장차, 아버지의 명예를 저만치 앞
지르는 영웅이 될 게고, 아버지보다 더한 칭송을 받게 될 게요.」
유피테르 역시, 프로테우스이 이러한 예언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
서 그느, 바다의 여신들에게 뜨거운 마음이 일어도 아비될 자기 이상의 영웅이
태어날까봐 자제해 오던 터였다. 유피테르 대신이 테티스에게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자인, 아이아코스의 아들에게 명하여,
이 여신의 짝이 되어 여신을 안는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런데 하이모니아 땅에는, 낫같이 흰 두 개의 강 하구와 만나는 만이 있었다.
물이 깊었더라면 항구가 되기 마땅한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물은 겨우 모래를
덮는 데 지나지 않았다.
해초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이곳의 모래는 어찌나 단단한지 누가 지나가도 발자
국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만 가까이에는 빽빽한 도금양 나무 숲이 있고,
이 숲 속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인지, 자연의 손길이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햐여튼 사람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리만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굴이 하나
있었다.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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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펠페우스는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인 테디스 여신을 아내로 맞는데, 이 사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저 유명한 아킬레우스이다. 테티스는 인간과 정식으로 혼
인한 유일한 여신일 것이다. 이 둘의 결혼식에는 천상의 모든 신들이 초대를 받
았지만 유일하게 빠진 신이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에리스는 이 잔치에
불청객으로 참석, 불화의 사과 한 알을 던지는데, 이것이 후일 티로이아 전쟁의
불씨가 된다.
15)유리테르, 펠레우스와 텔라몬의 아버지인 아이아코스는, 유피테르와 아이기나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16)바다의 신 가운데 하나로 넵투누스의 종신, 예언을 잘하고 어떤 것으로든 둔
갑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7)즉 펠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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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여신은 돌고래를 타고 종종 이 동굴로 와서 쉬었다 가고는 했다. 펠레우스
가 테티스를 처음 본 것은 바로 이곳에서였다. 펠레우스가 나타났을 당시 테티
스는 잠을 자고 있었다. 펠레우스는 테티스를 취하려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두 팔로 테티스의 목을 조르고 힘으로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테티스 여신은
자유자재를 변신하면서 펠레우스의 손길에서 놓여났다. 그러나 펠레우수도 만만
치 않았다. 테티스가 새로 변하자 펠레우스는 그 새를 사로잡았고, 커다란 나무
로 변신했을 때는 그 나무 둥치에 기어올라갔다. 테티스는 다시 점발이 호랑이
로 변신했다. 담대한 펠레우스도 호랑이 앞에서는, 어마장 뜨거라, 하고 물러서
지 않을 수 없었다.
완력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펠레우스는 바닷물에다 술을 뿌리고, 새
끼양의 내장을 불사른 다음 향을 피우고 바다의 신들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카
르파토스의 예언자가. 깊은 바다에서 얼굴을 내밀고 이런 말을 했다.
「아이아코스의 아들아. 그 여신이 동굴에서 세상 모르고 잘 때 밧줄을 가지고
가서 재빨리 묶어버리면 네 신부로 삼을 수 있을 게다. 여신이 오만가지로 모습
을 바꿀 것이나 네가 속으면 안된다. 끝까지 그 밧줄을 풀어주지 않으면 마침내
여신은 본모습을 보일께다.」
프로테우스는 이말을 남기고, 파도 소리와 함께 다시 물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
고 태양 수레가 하늘을 벗기어 헤스페로스의 바다로 잠기었다. 그러자 네레우스
의 아름다운 딸 테티스가 물에서 나와 동굴로 들어가서는 침상에 누웠다. 펠레
우스가 밧줄로 재빨리 묶어 버리자 테티스는 온갖 것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런
변신이 하릴없는 것이라고 깨달았는지 결국 본모습을 보이면서 한숨을 쉬고 말
했다.
「신들의 도우심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대가 어찌 날 이길 수 있었으랴.」
그제야 펠레우스는 이 여신을 껴안고 한 아이를 지으니, 이 아이가 바로 저 위
대한 아킬레우스이다.
6. 케이크스에게 몸 붙인 펠레우스 다이달리온의 변신
만약에 코고스를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펠레우스는 아내와 아들과 함
께, 운명의 갖가지 은총을 누리는 행복한 인간으로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형
제의 피를 묻힌 채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난 이 펠레우스르 받아준 사람은 트라
키스의 왕 케위크스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허여멀건 얼굴로 좋은 왕이 되
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루키페르이 아들 케위크스의 당시 입장은 말이 아
니었다.
아이아코스의 아들 펠레우스는 먼 여행길에 지친 몸으로 트라키스 땅으로 들어
섰다. 그는 함께 온 종자들은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에 기다리게 하고
혼자 왕성하게 들어가, 청 넣으러 온 사람이라는 표지로 양털을 감은 올리브 가
지를 손에 들고 왕을 배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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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크레타와 로도스 사이에 있는 섬. 오비디우스는 베르길리우스이 의견을 좇아
예언자 프로테우스가 이곳에 산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나일 강 하구라
고 생각했다.
19)세계의 서쪽에 있는 바다. 태양이 하루의 노정을 끝내고 이 바다로 들면 테튀
스 여신이 이 태양을 맞아들인다.
20)싸울 생각이 없는 사람, 청원하러 온 사람이라는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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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는, 자신의 내력과 어버지의 이름을 고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 고향에서
쫓겨난 까닭에 대해서는 짐짓 얼버무려 말하고는, 성안에서든 성밖에서든 몸붙
여서 살게 해달라고 간원했다. 그러자 트라키스 왕 케위크스가 대답했다.
「펠레우스여, 내 나라가 베푸는 은혜는 여느 사람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다
스리는 왕굴은 나그네를 홀대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그대를 홀대하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위명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고, 그대가 유피테르의 손자라는 사실
도 알고 있습니다. 청을 넣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이미 바라
는 것을얻었습니다. 그러니 더한 것을 요구하도록 하십시오」
케위크스 왕은 이 말 끝에 눈물을 떨구었다.
펠레우스가, 우는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산 것이 있는 하늘이면 어디에든지 나타나 새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매르 아시지여? 그대는 매라는 것이 예날부터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올시다. 저 매는 원래 나와는 형제간인 다이달리온이랍니다. 다이달리온은, 성질
이 수미일관되게 거칠었지만 전쟁터에서는 용감했답니다. 우리는, 새벽이 되어
새벽의 여신을 불러 놓고서야 잠자리에 드는 루키페르를 아버지로 이 세상에 태
어났습니다. 형과는 달리 나는 평화를 사랑했습니다. 평화와 부부생활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습니다만, 형은 왕들의 무릎을 꿇리고 많은 나라를
정복했습니다. 보세요, 저렇게 모습이 바뀌어도 티스베의 비둘기를 떨게 하지 않
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키오네라고 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자색이 고
와서 열네댓 살 때 이미 청혼자들이 무수히 모여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델로이에게서 온 포에부스 아폴로와 퀼레네에서 온 마이아의 아들 메르쿠리우스
가 동시에 이 키오네를 보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포에부스 아폴로는 사
랑을 이루기 위해 밤이 되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메르쿠리우스는 밤이 되기
까지 기다리지 않고 최면장으로 얼굴을 건드려 이 아이를 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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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금성
22)보이오티아 해안 도시 티스베는, 비둘기가 많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23)메르쿠리우스.
24)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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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좋게요? 여신의 화살에 꿰뚫리는 순간 피와 생명도 이 키오네의 혀를 통해
빠져나가고 맙니다.
나는 이 아이의 시신을 안고 그 아이의 아비지인 내 형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으로 인해 실성한 형의 귀에 매 말이 들렸을 리 없지요. 바위에게, 파도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듯이 말이지요. 형은 통곡만 합니다. 키오네의 시신이 화장단
위로 오르자 형은 네차레난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사람
들 손에 부ㅊ자혀 나오고는 했지요. 이렇게 되자 형은, 벌떼에 머리를 써인 황소
처럼 벌판을 내닫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도무지 뒤쫓을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형에게 날개가 달린 것이나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형
은 이렇게 달려 파르나소스 산정에 이러렀습니다. 거기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이
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마악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창나. 형을 불쌍하게 여긴
포에부스 아폴로신이 한 마리 새로 화하게 했습니다. 보세요, 그렇게 성정이 난
폭하던 형은 저렇게 새가 되었어도 남에게 온정을 베풀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불
행하게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7. 돌이 된 이리
펠레우스가 푸키페르의 아들 케위크스로부터 자기 형에 관한 이런 해괴한 이야
기를 듣고 있는데, 펠레우스의 가축을 돌보던 포키스 사람 오네토르가 헐떡거리
며 달려와서 고했다.
「 펠리우스님, 큰일났습니다.! 무서운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펠리우스는 오네토르를 진정시키고 말을 하게 했다. 트라키아 왕 케위크스도 관
심을 가지고 오네토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오네토르가 자초지종을 고했다.
「태양이, 하늘 한중간의 황도에 들어서서, 온 길만큼 남은 갈 길을 바라보고 있
을 즈음 저는 펠리우스 님의 가축을 몰고 해변으로 내려갔습니다. 소는 물을 만
나자, 해변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누워서 먼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개중
에는 어슬렁어슬렁 해변을 오르내리는 놈도 있었고, 헤엄을 치는 놈도 있었으며,
물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내밀고 있는 놈도 있었습니다. 바닷가에는 제단이 하
나 있었습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짓고 꾸민 그런 제단이 아니고, 아주 오래된
나무로 지은 그런 제단이었습니다. 해변에서 그물을 말리고 있던 한 어부로부터
들었는데, 그 바다의 수호신들인 네레우스와 그 딸들을 모신 제단이라고 합디다.
제단 근처에는, 미처 빠지지 못한 바닷물이 늪을 이루고 있고 이 늪에는 버드나
무가 자라고 있었스니다.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뒤업을 듯한 포효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보았더니 바로 여기에서 거대한 괴물, 이리였습니다만, 거대한 괴물이 온
몸에 해초를 묻힌 채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리의 눈은 번쩍거렸고, 입가
로는 거품이 번졌습니다. 이 이리가 이렇게 포악을 부리는 까닭은 짐작건대 배
가 고픈데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그렇지 않았나 싶
뮈윰淪訝@텝말이 끝났다. 펠리우스는, 그 짐승으로 인한 손실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가 정작 마음을 쓰는 것은 자기가 지은 죄와 네레이데스들의 복
수였다. 네레이데스는, 자기 아들 포코스를 죽이고도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해
서, 이리를 보내어 펠리우스의 소를 줄이기ㅔ 하고 잇는 것이었다. 오이타 산의
주인은 부하들에게 무장하라고 명령하고 자신도 무장하고 무기를 골랐다. 그가
출정하려는 참인데 그의 아내 알퀴오네가 뛰어들었다. 알퀴오네는, 머리도 손질
하지 못한 채로 뛰어들어와 남편인 케위크스의 목을 껴안고는, 부하들을 보내되
왕이 직접 나서지는 말라고 눈물로 애원하면서, 왕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일이
자기의 목숨까지 지켜주는 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알퀴오네의 말에 펠리우스
가 대신 대답했다.
「왕비시여, 당신의 두려움은 아름다운 당신에게도 어울리고, 지아비에 대한 당
신의 사랑에도 어울립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렇듯이 나를 도와주시려는
케위크스 왕께 감사드립니다만, 내게는 무력으로 저 괴물을 퇴치할 생각은 없습
니다. 나는, 무력을 쓰는 대신 바다의 여신들에게 기도를 드려야 할 사람입니다.
」
성채 위에는 높은 탑이 이었다. 오랜 항해에 지친 뱃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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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네레이데스
26)케위크스를 말한다. 오이타 산은, 헤라클레스가 임종한 곳으로 유명하다. 헤라
클레스 역시 이 케위크스 왕과 교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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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이정표가 될 만한 탑이었다. 펠리우스 일행은 그 탑으로 올라가, 울부짖
는 소, 죽어 나자빠진 소, 턱 끝으로 뚝뚝 떨어뜨리면서 좌충우돌 소를 찢어죽이
는 괴물을 내려다보았다.
펠리우스는 두 팔을 벌리고 바다의 여신에게, 이제는 그만 노여움을 거두어달라
고 기도했다. 바다의 여신 프사마테는 처음에는 노여움을 거두지 않았으나 테티
스가 남편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바람 화를 가라앉였다. 바다의 여신이
화를 가라앉혔는데도 불구하고 괴물 그 성질을 눅이지 않았다. 피맛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테티스 여신이 이 이리를 대리석으로 화하게 했다. 대리
석 상이 된 이리는, 색깔만 달랐을 뿐 모양은 이리였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
았다.
이리가 대리석상으로 변한 뒤에도, 그 땅에 머물 팔자를 타고나지 못했던 펠리
우스는 그 땅을 떠나 오래 방황하다가 이윽고 마스네스아 땅에 이르렀다. 펠리
우스의 살인죄를 닦아준 사람은 하이모니아왕 아카스토스였다.
8. 케위크스의 난파
형 다이달리온의 죽음과 그 뒤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아무래도 심상찮게 여긴
케위크스는 텔포이로 가서, 근심에 잠긴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 되
는 아폴로 신탁을 한번 받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육로를 통해서 텔포이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법자 포르바스가 플레귀아이 사람들과 작당하여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기어이 델포이에 가기로 마음먹은 케위크스는 아내 알퀴오네에게 이
말을 했다. 알퀴오네는 이 말을 듣는 순간 파랗게 질리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눈
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알퀴오네는 세번째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이윽고 마음을 다잡아먹었
고는 이런 말을 했다.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듯이 무서운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그토록 저
를 사랑하시던 마음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와서 이 알퀴오네를 남겨두고 떠나
시겠다니......정말 그렇게 먼길을 떠나시
27)델포이로 가는 길에 진치고 기다렸다가 권투 시합을 걸어, 여기에 걸려든 나
그네를 때려죽였던 도둑. 후일 어린이로 변장하고 이 길을 지나던 아폴로의 손
에 맞아죽는다.
기로 작정하셨나요? 제가 눈앞에 없게 될 터인데도 저를 사랑하실 수 있을는지
요. 육로로 가신대도 걱정이 태산 같을 터인데 항차 바다를 항해하시다니요? 안
됩니다. 저 바다, 저 심술궂은 바다로 그대를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해변으로
밀려온 난파선의 잔해를 그대는 못보셨습니까? 이름만 있을 뿐 시신은 없는 빈
무덤을 그대는 못 보셨습니까? 바람을 부리시고, 파도를 다스리시는 장인을 믿
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아이올로스 신께서도, 일단 바다로 나온 바람
은 다스리실 수가 없답니다. 아이올로스신의 동굴을 나온 바람을 다스릴 수 있
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바람은 땅이고 바다고 저희들 마음대로 한답니다.
하늘의 구름을 모으기도 하고 흩기도 하고, 이로써 번개를 일으켜 파도를 때리
기도 한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동굴에서 익히 보았는지라 저는 잘 압니다. 바
람은,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섭지 않을지 모르지만 잘 아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랍니다. 왕이시여, 만일에 결심을 바꿀 수 없다면, 결심이 반석과 같
아 도저히 이제는 어쩔 수 없다면 저를 데려가주세요. 저는 왕궁에서, 바다로 나
간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함께간다면 우리는 신고만난을 이겨내고
저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밝은 별의 아들 케위크스는 아내의 말과 아내의 눈물에 몸둘 데를 알지 못
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도 알퀴오네의 가슴속에서 타오르
는 사랑의 불길에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델포이 행을 포기
할 수도 없었고, 그 위험한 항해에 아내를 동반할 수도 없었다. 케위크스는 아내
를 달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알퀴오네 역시 만만치 않아서 한 번 한 말을 거두
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케위크스는 이런 말로 아내를 달랬다.
'하루를 떨어져 있어도 우리에게는 너무 긴 시간일 것이네만, 내 아버지에 맹
세코 운명의 여신들이 허락하는 한, 달이 두 번 찼다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온다는 말에 알퀴오네는 마음을 돌렸다. 아쉬운 마
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케위크스는 부하들에게 배를 항구로 끌어내어 뱃길
떠날 채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지아비가 타고 떠날 배를 본 순간 알퀴오네는, 지
아비의 슬픈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이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알퀴오네는
마지막으로 지아비의 품에 안겼다가는 지아비가 포옹을 풀자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케위크스는 아내를 위로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핑계를 만들려고 했다. 그
러나 벌써 노대에 앉아 노끝을 바다에 담그고 있는 젊은 뱃사람들이 케위크스를
재촉했다. 케위크스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뱃사람들의 재촉에 못 이겨 배에
올랐다.
배가 항구를 떠나자 알퀴오네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알퀴오네의 눈에,
뱃머리에 서서 자기에게 손을 흔드는 지아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배가 항구를 멀리 벗어나면서부터 알퀴오네는 지아비의 모습을 알
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알퀴오네는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
고 있었다. 배는 알퀴오네의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돛대는 오래오래 수평선 위에
남아 있었다. 알퀴오네는 이 돛대마저 사라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다가 자기방
으로 돌아가 그 무거운 몸과 마음을 침상에다 눕혔다. 알퀴오네는 자신의 일부
가 사라진 그 방을 돌아다보면서 새삼 눈물을 흘렸다.
배가 항구를 벗어난 지 오래도록 바람은 돛폭을 팽팽하게 부풀리며 배를 밀었
다. 선장의 자리에 오른 케위크스 왕은 노를 걷고, 돛가름대를 올려 돛폭 하나
가득 바람을 받게 했다. 가야 할 뱃길의 반쯤을 갈 동안 바람은 순조로웠다. 가
야 할 뱃길의 반을 갔으니 배는 떠나온 육지와 닿아야 할 육지의 중간에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바람이 거칠어지면서 바다의 표면이 사납게 인 흰
물거품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거센 동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장은 뱃사람
들을 호령했다.
'돛대에서 돛가름대를 내리고, 돛을 모두 내려라!'
그러나 그의 말은, 거친 바람소리롸 물소리 때문에 뱃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
았다. 뱃사람들은 저 나름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뱃사람 중에는, 노
를 걷는 자도 있었고, 갑판을 보강하는 자도 있었으며 돛을 걷는 자도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물을 퍼내는 자도 있었고, 물이 새는 곳을 막는 자도 있었다.
뱃사람들이 제각기 저 나름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동안에도 바람은 시시
각각으로 거세어졌다.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와 그렇지 않아도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를 휘저었다. 선장 자신도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그래서 무엇을 어떻
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뱃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해야 할지,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바다의 광란은 이미 그의 손길이 미치는
범위를 저만치 벗어나 있었다. 뱃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밧줄은 바람을 받아
윙윙 소리를 내었으며 바다는 부서지는 파도 소리로 대기를 가르고 있었다. 산
같이 높은 파도는 하늘에 이를 듯이 까마득하게 솟았다가는 구름과 같은 물보라
를 흩뿌렸다. 물보라는 때로는 모래처럼 누렇게 보였다가 순식간에 스튁스 강물
보다 더 검게 보이기도 했고 검게 보이다가는 또 어느새 흰 포말을 뱃전에다 쏟
아붓고는 했다. 트라키아의 배도, 그 파도에 실려 까마득하게 솟았다가는 바다의
바닥에라도 이를 듯이 내려 앉고는 했다. 솟을 때는 산정에 오른 듯했고, 내려앉
을 때는 계곡 아니면 아케론 강의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파도가 옆구리
를 때릴 때마다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소리를 내었다. 흡사 파성추에 얻
어맞는 허름한 성벽 같았다. 자기를 겨누는 창칼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감무쌍한
사자처럼, 바람에 쫓겨온 파도도 그 앞을 가로막는 배의 옆구리를 향해 돌진했
다. 짐이라는 짐은 이미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나무와 나무의 틈
은 아가리를 벌린 지 오래였다. 이 틈을 메우고 있던 밀랍이 깡그리 떨어져 씻
겨나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구름이 열리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흡사 온
하늘이 비가 되어 바다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바다의 물이 순식간에 불어
하늘에 이를 것 같았다. 바다의 물은 하늘의 물과 합세하여 배를 공격했다. 하늘
에 별은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에 보이는 것은 칠흑 어둠뿐이었다. 이따
금씩 번개가 잠깐씩 사방을 밝힐 뿐이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사방의 바다는 붉
게 보였다.
이윽고 파도는 배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수십 차례의 공격으로 뚫어진
성벽 앞에서, 병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병사가, 불타오르는 명예욕을 주체하
지 못하고 마침내 수많은 병사들을 젖히고 성벽을 돌파하는 것처럼, 파도도 십
중팔구는 뱃전의 돌파에 실패하다가 마침내 부서진 뱃전에다 치명타를 가하고
선복으로 뚫고 들어왔다. 밖에서 돌파 공격을 계속하는 파도가 있는가 하면 이
미 안에 들어와 있는 파도도 있었다. 배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적은 성밖에서 공
격하고 백성들은 안에서 혹은 저항을 계속하고 혹은 앞서 들어온 적의 칼날에
쓰러지는 한 도시국가의 최후와 비슷한 형국이었다. 뱃사람의 용기는 이미 간
곳이 없었다. 사기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파도는 이들의 방어망를 허물고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뱃사람들 중에는 우는 사람도 있었고, 망
연자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시신을 찾아 장례나 치러주었으면 좋겠
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신들에게 기
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과 아이들
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집에 남겨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는 것만은 다 같았
다. 케위크스가 생각한 것은 오직 알퀴오네뿐이었다. 케위크스의 입가를 맴돈 것
은 오직 알퀴오네라는 이름뿐이었다. 케위크스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알퀴오
네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알퀴오네를 보고
싶어하면서도 알퀴오네가 그 배에 타고 있지 않은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게
위크스는, 조국의 해변이 있는 쪽을 다시 한번 돌아다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고향 산천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바다는 쉴새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어둠은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고
향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개바람에 돛대가 부러져나가고 방향타가 산산조각이 났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거대한 파도 하나가 하늘로 까맣게 솟아올라 뒤따라 부풀어오르는 다른 파
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 파도는 아토스 산과 핀도스 산을 그 바닥까지
갈라버릴 듯한 기세로 이 배를 겨누고 내리꽂혔다. 배는 그 엄청난 일격에 부서
지고 그 엄청난 무게에 눌려 바다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후 배와 함께
떠오른 많은 뱃사람들은 다시 가라앉았다. 두번째로 가라앉은 뱃사람들은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케위크스는 한때 왕홀을 잡던 손으로 난파선의 조각을 잡고,
처음으로, 불러도 대답 없는 아버지 루키페르와 장인 아아올로스의 이름을 불렀
다. 그러나 그가 가장 많이 부른 이름은 역시 아내 알퀴오네의 이름이었다. 그는
알퀴오네를 생각하면서, 파도가 자기의 시신을 알퀴오네 앞으로 밀고 가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알퀴오네의 손에 묻힐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그는 한동안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파도가 그의 입을 막지 못하는 순간이면 잊지 않고 알퀴오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오래는 가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가 하나 밀려와 케위크
스를 바다 밑으로 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날 하늘에서 루키페르를 본 사
람은 없었다. 하늘을 떠날 수 없어 아들을 구할 수 없었던 루키페르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으로 얼굴을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집에 남아 있던 알퀴오네는, 케위크스의 배가 난파한 것도 모르는 채 지
아비가 돌아오마고 약속한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지아비가 입을 옷과 자신이
입을 옷을 지었다. 옷을 지으면서 알퀴오네는 신들에게 꼬박꼬박 제물을 드리
면서 지아비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알퀴오네가 가장 자
주 찾아간 신전은 유노 여신의 신전이었다. 알퀴오네는 유노 신전에 갈 때마다
지아비를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기를 기도하는 한편 다른 여자에게 가는 일이 없
게 해달라고 빌었다. 알퀴오네가 드린 기도는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여신이 들
어줄 수 있는 기도는 이 마지막 기도 하나뿐이었다.
유노 여신은,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는 알퀴오네의 기도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불쌍한 여인이 다시 자기 신전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이리스를 불러 이렇게 일렀다.
‘내 충직한 전령신인 이리스는 솜누스의 궁전으로 가서, 내가 그러더라고 해
라, 아무래도 죽은 케위크스의 모습으로 알퀴오네에게 현몽하여 케위크스가 이
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겠다더라고’
이 명을 받은 이리스는 수천 가지 색깔 옷으로 단장하고 하늘을 날아, 구름이
싸여 있는 솜누스의 궁전으로 갔다.
9. 잠의 신과 꿈의 신
킴메리아 인들이 사는 나라 가까이에는 높은 산의 깊은 계속에 깊숙이 들어앉
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이 동굴이 바로 잠의 신 솜누스의 은신처인 궁전이었다.
여기에는 햇빛도 비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를 때도, 해가 질 때도 비치지 않았
다. 이 솜누스의 궁전은 안개에 싸여 있어서 늘 어두컴컴했다. 여기에는 울음소
리로 새벽을 알리는 닭도 없었고, 고요를 깨뜨리는 개나 개보다 더 귀가 밝은
거위 같은 것도 없었다. 짐승이 짖는 소리, 가축이 우는 소리도 여기에서는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는 소리, 입씨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 오로지 고요가 있을 뿐이었다. 이 동굴 밑으로
는 레테의 강이 자갈 위로 소리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잠을 유발하
는, 양귀비를 비롯한 수많은 약초가 자라고 있었다. 잠의 신은 이런 약초에서 즙
을 뽑아내어 세상에 뿌려 산 것들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동굴에는 문도 없었다.
문이 있으려면 돌쩌귀가 있어야 하는데 돌쩌귀가 있으면 문이 열리거나 닫힐 때
소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
다. 동굴 한가운데엔 흑단 침대가 하나 있고, 이 위에는 깃털보다 보드라운 보료
가 깔려 있었다. 이 흑단 침대가 바로 잠의 신 솜누스의 잠자리였다. 솜누스는
여기에 누워 있었다. 솜누스의 옆에는 수많은 꿈의 신들이 누워 있었다. 꿈의 신
들은, 벌판에서 거둔 옥수수, 숲의 나뭇잎 혹은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그 수효
가 많았다.
이 잠의 신에게 다가가면서 이리스 여신은 손을 흔들어, 앞을 막아서는 수많
은 꿈의 신들을 물리쳤다. 곧 잠의 신의 침실은 이리스 여신이 뿌리는 빛줄기로
은은하게 빛났다. 이윽고 잠의 신이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다시 감기 것 같은
눈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잠의 신은 몇 번이고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애를 써서
일어나 앉아서도 턱으로 몇 번이나 가슴을 쳤을 정도였다. 한동안 잠을 깨지 못
해 애쓰던 잠의 신이 이리스를 알아보고는 어렵게어렵게 베개에 몸을 기대고 먼
길을 온 까닭을 물었다. 이리스 여신이 대답했다.
‘만물을 쉬게 하시는 잠의 신이시여,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평화로운 신이시
여, 산 것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고, 산 것들의 마음을 근심으로부터 구하시
는 신이시여, 산 것들의 모양을 고스란히 흉내낼 수 있는 꿈을 보내소서. 케위크
스의 모습으로, 저 헤라클레스로 인하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도시 트라키아
의 알퀴오네에게 보내소서. 보내시어 지아비 케위크스가 난파당한 소식을 알퀴
오네에게 전하시라는 유노 여신의 분부이십니다’
이리스는 유노의 명을 전갈하자마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졸음이 와서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스는 사지를 노곤하게 하는 잠을 털어내고는
서둘러 날아온 하늘을 되짚어 날아 유노 여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솜누스는 수많은 아들 가운데서 맏아들 모르페우스를 깨웠다. 모르페우스는
인간으로 둔갑하는 데 능하고 인간의 흉내도 잘 내기로 이름있는 꿈의 신이었
다. 특정인의 걸음걸이, 표정, 목소리를 모르페우스만큼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
는 꿈의 신은 없었다. 이 모르페우스는 그 사람의 옷차림, 그 사람이 즐겨 쓰는
말까지도 그대로 흉내낼 수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사람의 흉내를 잘 내는 꿈의
신인 반면에, 신들 사이에서는 이켈로스, 인간들 세상에서는 포베토르라고 불리
는 둘째아들은 짐승이나 새나 뱀으로 둔갑하거나 이들의 흉내를 내는 데 능했
고, 셋째아들인 판타소스는 땅, 바위, 물, 나무같은 무정물로 둔갑하거나 흉내를
내는 데 능했다. 이 3형제는 밤이 되면 주로 왕이나 장군들의 꿈에 나타났고 나
머지 형제들은 여느 사람들의 꿈에 나타났다. 그래서 노신 솜누스는 다른 꿈의
신들은 다 젖혀두고 이 모르페우스를 골라 타우마스의 딸이 전한 유노의 명을
수행하게 하고는 그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다시 잠들었다.
모르페우스는, 날갯짓 소리가 나지 않는 날개로 어둠 속을 날아 케위크스이
궁전에 이르렀다. 물론 알퀴오네가 자고 있을 시각이었다. 모르페우스는, 날개를
벗어놓고는 케위크스의 모습으로 둔갑했다. 케위크스로 둔갑한 모르페우스는 대
리석같이 창백한 모습으로 불쌍한 알퀴오네의 침상 앞에 섰다. 옷은 다 찢겨져
나가고 없어 알몸이었다. 그의 수렴에서는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 머리도 물론
물에 젖어 있었다. 케위크스로 둔갑한 모르페우스는 알퀴오네의 침상에 기대고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아내여, 이 케위크스를 알아보시겠는가? 죽어서 내 형상이 혹 바뀌
지나 않았는가? 나를 보시라. 그대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산 케위크스
의 몸에 깃들여 있던 유령이다. 알퀴오네여, 이제 나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는 없
다. 나는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돌아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기댈 일이 아니다.
폭우와 함께 불어온 남풍이 아이가이움 바다에서 우리 배를 산산조각으로 부수
었고, 파도는 내 입술이 부르는 그대의 이름을 씻어갔다. 내가 전하는 소식은 뜬
소문이 아니니 그대가 믿어야 한다. 난파하는 배와 함께 이제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 내가와서 전하니 만큼 그대가 믿어야 한다. 자 일어나시라. 일어나 나를 위
해서 눈물을 흘려다오. 그대 눈물에 젖지 못한 채 타르타로스의 나라로 가게 하
지 말아다오’
모르페우스는 알퀴오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정말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알퀴오네는 그 모습과 그 몸짓을 케위크스의 모습과 몸짓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
다. 알퀴오네는 꿈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내밀어 지아비의 몸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알퀴오네의 손끝에 닿은 것은 허공뿐이었다. 알퀴오네는 잠결에 소
리쳤다.
‘기다리셔요! 어딜 그렇게 급히 가셔요? 저랑 함께 가요’
지아비의 모습에 놀라고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라 왕비 알퀴오네는 잠을 깨
어,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이가 주위에 있을 것 같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알
퀴오네가 지른 소리에 역시 잠을 깬 하녀가 등잔에 불을 밝혀들고 들어와 있었
다. 케위크스가 거기에 와 있을 까닭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알퀴오네는 손으로
제 뺨을 꼬집어보고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옷을 찢고 가슴을 쳤다. 알퀴오네는,
잠자다 소리를 지르고 난데없이 깨어 애통해하는 까닭을 묻는 하녀에게 헝클어
진 머리카락까지 쥐어뜯으며 말했다.
‘이제 알퀴오네라는 계집은 없다. 알퀴오네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알퀴오
네는 케위크스 왕과 함께 죽었다.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 말아라. 왕께서는 난파
선과 운명을 같이 하셨다. 나는 그분을 보았다. 나는 그분을 알아보고, 떠나려는
그분께 손을 내밀어 가시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분은 유령이었다. 그러나 틀
림없는 내 지아비인 그분의 유령이었다. 그분의 모습이 궁금할 터이니 내 일러
주겠다. 그분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 같지 않았다. 그분의 얼굴은 예전처럼 빛나
지 않았다. 그분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내 앞에 나타나셨다. 그분의
낯빛은 창백했다. 그분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아, 가엾은 분, 나는 그런 그
분의 모습을 뵈었다. 그분은 바로 여기에, 참으로 가엾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알퀴오네는 케위크스가 왔던 흔적이 남아 있기라도 한 듯이, 꿈속에서 케위크
스가 서 있던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울부짖었다.
‘저를 버리고 떠나지 마시라고 한 것은, 맞바람이 치는 곳으로 가시지 못하
게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답니다, 그대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두려워서 한사코 말
렸던 거랍니다. 그대가 어쩌면 그런 일을 당하실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저를 데
려가달라고 했던 거랍니다. 데려가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데려가주셨으면 그대
없는 세상을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데려가주셨으면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을.
저는 그곳에 없었지만, 저는 그대와 바다에서 죽지 못했지만, 제 마음은 이미 바
다속에 들어가 있답니다. 이 세상에 남아 목숨을 부지하려고 애쓴다면, 이 슬픔
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면 저는 그대를 앗아간 바다보다 못한 여자입니다. 그렇습
니다. 슬픔과 싸우면서 살지는 않으렵니다. 그대 없는 세상을 살지는 않으렵니
다. 우리를 태운 재가 비록 한항아리에 들지는 못할지언정, 비록 그대와 나란히
묻히지 못할지언정 저는 그대 뒤를 따르렵니다. 제 뼈가 그대 뼈와 섞이지 못할
지언정 제 이름만이라도 그대의 이름과 나란히 새겨지게 하렵니다’
알퀴오네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흐느낌이 알퀴오네의 말을 토막내었
고, 슬픔이 가슴을 갈가리 찢었기 때문이었다.
10. 알퀴오네와 케위크스의 전신
아침이었다. 알퀴오네는 궁전을 나와, 케위크스를 떠나보낸 곳을 다시 보고 싶
어 해변으로 갔다. 해변을 서성거리면서 알퀴오네는 중얼거렸다.
‘그대는 여기에서 닻줄을 감아올리셨지요, 여기에서 저의 입술에 입맞추셨지
요’
알퀴오네는 지아비가 떠나던 날의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해변을 걷다가 바
다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알퀴오네는 가벼운 신음과 함께 흠칫 놀라면서 뒤
로 물러섰다. 물가에 있는 사람의 형상과 비슷한 것을 보았던 것이었다. 사람의
형상 같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거리가 멀어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알퀴
오네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때맞추어 밀려온 물결이 그 물체를 바닷가로 밀어내
었다. 물체와 알퀴오네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주검이었다. 알퀴오네는 난파선의 희생자일 것이거니 여기면서 그쪽으로 다가갔
다. 다가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그대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그대의 인생이 불쌍하군요. 그대에게 아내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나, 있다면 그대의 아내가 불쌍하군요’
사람의 주검은 물결에 밀려 자꾸만 해변 쪽으로 나왔다. 주검이 가까이 밀려
옴에 따라 알퀴오네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얼굴을 알아볼 거리까지 접근한
할퀴오네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바로 남편의 주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퀴오네
는 비명을 질렀다.
‘아, 그대였군요!’
알퀴오네는 재빨리 자기의 겉옷을 벗어 지아비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떨
리는 손을 내밀어 지아비의 주검을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그대여, 이렇게 되어 돌아오시려고 저를 떠나셨나요?’
바닷가에는 방파제가 있었다. 먼 바다의 파도를 막아 그 힘을 약화시킬 목적
으로 사람들이 쌓아올린 아주 높은 방파제였다. 알퀴오네는 이 방파제로 올라가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알퀴오네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고, 알퀴오네에게 거기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기적보다도 더욱 놀라운 기적은 그 다음에 일
어났다. 방파제에서 뛰어내린 알퀴오네가 어느새 돋아난 날개로 날기 시작한 것
이었다. 어느새 새로 둔갑하여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것이었다. 바다 위를 날고
있는 알퀴오네의 입에서는,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전까지 입이었던 부리에서는
가냘픈 새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윽고 지아비의 시신 곁에 이른 알퀴오네
는 새로 돋은 날개로 지아비의 몸을 가볍게 감싸고 부리를 그의 입술에다 대었
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 케위크스가 알퀴오네의 입맞춤을 느끼고 몸을 움
직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케위크스는 분명히 몸을 움직였다. 물결 때문이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케위크스는 분명히 몸을 움직인 것이었다. 신들이 이 둘을 가
엾게 보고 케위크스까지 새로 환생시킨 것이었다. 둘의 사랑도 그때까지 유효했
다. 날개를 얻었는데도 혼인의 서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이 두 마리
의 새는 짝을 지어 알을 낳았다. 알퀴오네는 바다 위에다 지은 둥지에서 이레
동안 알을 품었다. 이 동안 바다도 잠잠했다. 아기들의 외조부가 되는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가 외손자들을 위해 바람을 재웠기 때문이었다.
11. 잠수조가 된 아이사코스
이 물총새들이 나란이 열을 지어 넓은 바다 위를 나는 광경을 보고, 이들이
끝내 이루어내고야 만 사랑을 찬탄하는 노인이 있었다. 잠시후 다른 사람이 지
나가다가 목이 긴 잠수조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처음의 그 노인이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저 물총새들만 왕가의 자손들이 게 아니고 저기 저 날씬한 꼬리로 물을 차
고 지나가는 잠수조도 사실은 왕가의 자손이라네. 한대 한대 조상을 따져 올라
가면 마침내 일로스,아사라코스,유피테르 대신의 손에 천궁으로 끌려간 가뉘메데
스,노왕 라오메돈, 그리고 왕좌에 있을 동안에 트로이아가 망하는 꼴을 본 프리
아모스에 이른다는 말일세. 저 새가 원래는 헥토스의 아우인 아이사코스였다네.
헥토르와 아이사코스는 아버지는 같아도 어머니는 달라. 헥토르의 어머니는 위
마스의 딸인 헤쿠바지만, 아이사코스의 어머니는 머리에 뿔이 두 개나 있었다는
그라니코스의 딸 알렉시로에였거든.
아이사코스는 이다 산의 울창한 숲속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번잡한 도시를 싫
어했네. 그래서 늘 한적한데 은거했지. 일리온 나들이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궁전과는 거리가 먼 순박한 시골 생활을 즐겼던 것이
지. 그러나 아이사코스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투박한 농투산이는 아니었
네. 이따끔씩은 요정 헤스페리어의 뒤를 따라다녔다니까. 그런데 말이지 어느날
아이사코스는 제 아버니의 강인 케브란 강의 둑에서 긴 머리채를 어깨 위로 늘
어뜨리고 볕에 말리고 있는 헤스페리어를 보았네. 헤스페리에는 아이사코스를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 시작했지. 이리를 보고 도망치는 사슴처럼, 매를
보고 도망치는 물오리처럼. 그러다 보니 제 아버지 강에서 벌어졌을 수 밖에. 트
로이아의 왕자는 별생각없이 뒤를 쫓았네. 트로이아의 왕자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 쫓았고,케브렌의 딸은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있는 힘
을 다해 도망쳤지. 그런데 말이지, 풀밭에 숨어있던 독사가 달아나는 이 요정의
발을 물지 않았겠나. 독은 순식간에 요정의 온 몸으로 퍼져나갔네. 이 요정은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었고 살아 있을 수오 없었네. 아이사코스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이 요정 처녀의 몸을 껴않고 울었다지.
‘미안하오,뒤를 쫓은 내가 잘못이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길줄을 누가 알았으
리로. 그대가 나로 인하여 이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오. 뱀이 그대를 무는
순간 우리들의 사랑도 끝났소. 그러나 이렇게 만든 책임은 나에게 있소. 책임이
나에게 있는 만큼 나도 죽어서 그대에게 사되하려 하오.’
아이사코스는 이런 말을 남기고는 밑동이 파도에 깍인 아주 높은 절벽위로 올
라가 아래로 몸을 던졌네. 그러나 데튀스 여신은 이 청년을 가엾게 보시고 손을
쓰셨다더군. 이청년이 바닷물에 떨어지는 순간 온몸에서 깃털이 돋았다니까. 깃
털이 돋았으니 바다에 떨어져도 죽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청년에
게는 자살이 하릴 없이 된 것이네. 아이사코스는 죽으려던 자기 뜻이 그렇게 꺽
이자 몹시 짜증스러웠네. 그에게는 삶이라는 게 오히려 불명예스러웠던 것일세.
그래서 아이사코스는 새로 얻은 알개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두번째로 바다
로 내리꽃혔네. 이번에도 깃털 때문에 자살이 제대로 될 것같지 않았네. 격분한
아이사코스는 있는 힘을 다해 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네. 덕분에 그의 몸은 깊
이 가라앉을 수 있었지.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사랑하는 마음이 그 몸을 가벼
워지게 했네. 아이사코스는 보다시피 목과 다리가 긴 새가 되었네. 이 새는 물을
좋아하네. 물에 뛰어들기를 좋아해서 이름조차 잠수조라네.>
제 12 부
트로이 전쟁외
1. 이피게네아
아이사코스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이들이 새가 되기는 했으나 목숨만은 부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프리아모스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눈
물로 세월을 보냈다. 아이사코스의 형 중의 하나인 헥토르도 아우가 죽은 것으
로 알고 시신없는 무덤 앞에다 아우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우고는 후한 제물
을 차려 아우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들 형제 중 하나인 파리스는 장례식 때는
여기에 없었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 가로챈 아내를 데리고 돌아왔다.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았긴 메넬라오스는 펠라스기 인들을 몰아와 트로이아를 치
게 되는데 이로써 그리스 본토와 트로이아 사이에 는 큰 전쟁이 터지게 된다.
수천 척에 이르는 그리스 함대는 본토의 영웅이라는 영웅은 모두 싣고 파리스
의 뒤를 추적해 왔다.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왔더라면 파리스와 트로이아 성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을 터 였다. 그러나 펠라스기 함대는 강풍을 만나, 군사
를 일으킨 즉시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물고기가 많기로 소문난 아울리스 항구에
머물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아울리스에서 펠라스기 인들은 예부터 내려오는 풍습에 따라 유피테르 대
신께 제물을 드릴 채비를 했다. 그러나 제단을 꾸미고 불을 지핀 이들은 제단
가까이에 있는 느릅나무로 검은 뱀 한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이
나무 꼭대기에는 여덟마리의 새 새끼가 든 새의 둥우리가 있었다. 뱀은이 새끼
를 지키려고 둥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던 어미째 이 여덟마리의 새 새끼를
잡아 먹었다. 모두가 이 광경을 보면서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하는데 테스트
로의 아들인 선견자가 그 뜻을 풀어서 말했다.
<펠라스기 백성들이여 기뻐하십시오. 트로이아는 패망하고 우리는 이 전쟁에
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오래 싸워야 합니
다.>
선경자는 뱀에게 먹힌 새가 모두 아홉마리였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 전쟁에
서 승리를 얻으려면 9년을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선경자의 말이 끝나자 몸으로
나뭇가지를 감고 있던 뱀은 그 형상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되었다. 그러나 네레우
스가 아오니아 해에 대한 양심을 누구러뜨리지 않는 바람에 트로이아 원정대는
이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다. 원정군 중에는 넵투누스가 트로이아 성벽을 쌓았
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아오니아 해의 파도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해신 넵투누
스가 트로이아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테스
트로의 아들인 선견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테스트로
의 아들인 선견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처녀신의 분노를 삭이려
면 처녀를 재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실제로 그는 그렇게 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이말을 들은 고위 장수들은 큰 일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을 앞
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총사령관은 사령관으로서의 의무감 앞에서
부정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관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피게네이아를
제단 앞에 세우고 처녀의 정한 피를 제물로 드려 다아나 여신의 화를 풀어보고
자 했다.
여신은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바쳐진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신은 이 이
피게네아를 구름으로 감싸고 제관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이 처녀를 빼돌리
고는 그 자리에다 암사슴 한 마리를 세워 놓았다. 다아나 여신의 분노가 가라앉
자 바다의 파도도 가라앉았다. 펠라스기 인들은 수천대에 이르는 원정 함대를
몰고 신고만난 끝에 프뤼기아 해안에 닿을 수 있었다.
2.이퀴노스의 전신
이 세상 한가운데 말하자면 땅과 하늘과 바다 한가운데, 이 땅과 하늘이 만아
는 곳에는 나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려다 보이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다. 바로 이 곳에 소문의 여신인 파마가 살
고 있다. 파마가 거하는 쳐소는 산꼭대기에 있다. 이 집의 문은 밤낮을 불문하고
늘 열려있다. 이 집에는 문이 수 천개가 있는데 이 많은 문이 다 항상 열려 있
는 것이다. 그래야 사방의 소문이 잘 드나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은 소
리를 잘 울리는 청동으로 지어져 있다. 그래서 오고가는 말로 집안은 늘 시끄럽
다. 침묵과 고요라는 것은 이 집안에 없다. 고함소리 같은 것도 없다. 그저시끌
시끌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있을 뿐이다.멀리서 들리는 파도소리 유피테르가 검
은 구름을 치고 난 뒤에 들리는 벼락소리의 메아리 비슷한 소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파마 여신을 비롯한 이 집 주인들은 청동거실에 거쳐한다. 이들은 늘 들락
거리면서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는 갖가지 소문,참말 같기도 하고 거짓
말 같기도 한 갖가지 소문을 모아들인다. 이들중에는 귀얇은 사람들에게 모아들
인 이야기를 속닥거리는 이도 있고 들은 이야기 먼 곳까지 퍼뜨리는 이도 있다.
이야기에는 이렇게 전해질 동안에 살이 붙는다. 이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에는 들은 사람마다 조금씩 보태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집에는 <경거망동>,
생각이 깊지 목한 <실수연발>, 터무니 없는 <기쁨>, 소심한 <공포>, 당돌한
<선동>,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속삭임>이 식객으로 붙어 산다. 파마
여신 자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두루 알아내여 온 세상에
그 소문을 퍼뜨린다.
그리스 함대가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문을 트로이아에 퍼뜨린 것도 파마여신
이었다. 덕분에 트로이아 백성들은 그리스 함대가 수평선에 나타났을 때도 크게
는 놀라지 않았다. 트로이아군은 해변을 방어하면서 그리스 군의 상륙을 저지하
려고 했다. 운명의 여신들이 점지한 바에 따라 맨 먼저 전사한 사람은 프로테실
라오스 였다. 프로테실라오스는 핵토르의 창에 맞고 죽었다. 그리스군은 프로테
실라오스가 죽자 군사를 풀어 떨어진 사기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용
감한 트로이아의 장수 헥토르의 이름만 드높였을 뿐. 그리스 군은 이 서전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트로이아 군은 이 싸움을 통해서 그리스 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게움 평원은 피로 물들었다. 닙투우스의 아들 퀴크노스는 수천의 그리스 군
사를 죽였고, 아킬레우스는 병거를 탄 채, 펠리온 산에서 베어온 나무로 자루를
해박은 창으로 트로이아 진영 유린하기를 칼로 물 가르듯 했다. 아킬레우스는
병거를 몰아 적진을 누비면서 퀴크노스나 헥토르를 찾았다. 그러나 헥토르와의
조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조우는 전쟁이 시작된 지 10
년째 되는 해에나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적진에서 퀴크노스를
만났다.
아킬레우스는 병거를 끄는 말을 채찍질하여 퀴크노스 쪽으로 돌진하면서 소리
쳤다. 이 애송이야, 나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만, 내 창에 죽거든 테살리아
의 영웅 아킬레우스 손에 죽은 것을 자랑으로 알아라>
말을 마치자 아킬레우스는 퀴크노스를 칼로 치고 창으로 찔렀다. 겨냥이 빗나
갔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휘두른 창은 퀴크노스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
한 것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느끼기로는 흡사 날이 없는 창으로 상대를 찌른 것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당황한 나머지 병거를 물리자 퀴크노스가 호령했다.
<여신의 아들이여, 그대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내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이 그렇게 놀라우냐? 내가 무사했던 것
은, 이투구를 쓰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방패를 들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마르스신도 무장은 한다더라만 내가 무사한 것은 이러한 무구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나는 갑옷을 입지 않고 투구를 쓰지 않아도 무사
할 것이다. 나는 네레이드의 아들이 아니라, 네레우스 일족을 다스리는 해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퀴크노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청
동가리개와 열겹으로 된 소가죽중 아홉장을 꿰뚫고는 열장째 가죽에서 멎었다.
그리스의 영웅은 방패에서 이 창을 뽑아내고는 다시 한 번 퀴크노스를 향해 창
을 던졌다. 이 창 역시 퀴크노스에게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분을 세번째로 창을 던졌다.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아킬레우스는 분을 삭이지
못해 이를 갈았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는 광장에서 약을 올리
는 자의 붉은 겉옷을 향해 뿔을 앞세우고 돌진하려는 황소같았다. 그는 자기 창
을 살펴보았다. 혹시 창날이 빠져나가고 없나 해서 였다. 그러나 창날은 창자루
에 온전히 박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좋던 힘이 이자 앞에서 어떻게 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다른 자 앞에서
는 이렇지 않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던가? 뤼르네소스성을 무너뜨렸고, 테네도스
와 에에티온의 도시 테바이를 피바다로 만들었으며,카이코스 강을 그 땅 백성의
피로 물들였고, 펠레포스에게는 내 창의 위력을 두변이나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여기에 와서도 나는 이 오른팔로 수많은 적을 죽여 이들의 시신
이 해변에 산처럼 쌓이게 하지 않았던가? 내 팔에서 힘이 빠져 나갔을 턱이 없
다>
이 말 끝에 이킬레우스는 뤼키아 사람인 메노이테스를 향하여 창을 던졌다.
창은 메노이테스의 흉갑을 뚫고 가슴에 박혔다. 메노이테스는 말에서 굴러떨어
졌다. 아킬레우스는 메노이테스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들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이 팔, 이 창은 다른 곳에서 세우던 그 팔, 그 창과 다르지 않다. 어디 이 창을 퀴크노스라는
자에게 던져보아야겠다. 디 창에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버틸 수 있는지 어디 보자」
타킬레우스는 메노이테스의 가슴에서 뽑아낸 창을 퀴크노스에게 던졌다. 물푸레나무로 창자루에
청동 창날을 해박은 창은 겨냥을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날아갔다. 퀴크노스는 창을 피하지 않았
다. 창은 퀴크노스의 어깨에 맞았다. 그러나 창은, 바위에 맞은 듯이 되튀어 나왔다. 그런데도 퀴
크노스의 어깨에서는 피가 들었다. 어깨에서 피가 듣는데도 퀴크노스는 웃고 있었다. 퀴크노스의
어깨에서 듣는 피는 퀴크노스의 피가 아니었다. 창에 묻었던 메노이테스의 피였던 것이었다. 아킬
레우스는 분기탱천, 칼을 뽑아든 채로 병거에서 뛰어내려 육탄으로 퀴크노스에게 돌진, 칼로 퀴크
노스를 쳤다. 아킬레우스의 칼날은 분명히 퀴크노스의 방패와 투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퀴크노
스의 몸으로는 파고들지 못했다. 아킬레우스는 방패를 빼앗아 던져버리고 세 번이나 칼로 퀴크노
스의 얼굴을 치고 관자놀이를 찔렀다. 퀴크노스는 뒤로 물러섰지만 아킬레우스는 잠시도 여유를
주지 않고 돌진했다. 퀴크노스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연했다. 퀴크노스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
섰다. 그러나 퀴크노스 뒤에는 바위가 있었다, 따라서 더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퀴크
노스의 몸을 바위에 밀어붙였
3. 카이네오스가 남자가 된 내력
격전이 끝나자 며칠 동안 소강 상태가 게속되었다. 양군은 모두 무기를 놓고 쉬었다. 트로이아
성 안의 트로이아 군은 성벽 위에다 감시병들을 세운 뒤에 휴식에 들어갔고, 성밖의 그리스 군은
참호 속에서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전투가 소강 상태로 들어간틈을 이용해서 황소
를 잡아 팔라스 미네르바 여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를 집전한 사람은 퀴크노스의 정복자
인 아킬레우스였다. 아킬레우스가 잡은 황소를 제단에 올리자 연기가 신들의 천궁이 있는 하늘로
피어올랐다. 제관은 고기 중 일부는 다른 희생제 몫으로 남겨놓고 일부는 장수들의 식탁에 올렸
다. 장수들은 식탁을 앞에 두고 첨상에서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는 잔에다 포도주를 따랐다. 이들
은 갈증과 전쟁터에서의 불안을 포도주오 씻었다. 자리를 빛내줄 악사는 없어도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나누는 이야기만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즐거웠다. 이야깃감이 된 것은 무용담이었다.
장수들은 제각기 자신이 경험한 전투 이야기를 했다. 적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
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위급한 상황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만큼 훌륭한
이야깃감을 가진 사람이 이 자리에
「그대들은 퀴크노스 하나만 봤지만 이세상에 칼로 쳐도 상처가 나지 않는 사람, 창으로 찔러도
피를 흘리지 않는 사람은 퀴크노스뿐만이 아니라네. 나는 옛날에 테실리아의 카이네오스라는 자
를 본적이 있네. 카이네오스 몸에는 수천 개의 창을 맞았는데도 상처 하나 나지 않더군. 오트뤼스
산에 살던 이 카이네오스는 무공으로 세상에 널리 그 이름을 떨친 사람이네. 하지만 이 사람 이
야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을 그것이 아니야. 그럼 무엇이냐. 원래는 이 사람이 여자였다는 것이지
」
좌중의 장수들이 모드 흥미를 느끼고는 네스토르의 침상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킬레우스가 그에
게 말했다.
「우리 시대를 빛네신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신데다 연세도 많이 잡수셨고 또 언변에도 능하시
니, 한마음으로 바라건대 그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카이네오스라는 사람이 대체 누굽니까? 어째
서 여자로 태어나 남자가 되었습니까? 어르신네와는 어느 전투에서 함께 싸우셨습니까? 이 사람
에게 만일에 진적이 있다면 대체 누구에게 졌습니까?」
노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렇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흐르는 세월이 내 기억을 좀먹는 바람에 옛날에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내 머리에 많이 사라져
버렸네. 그러나 아직은 사라져버린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아. 전쟁시에도 많이 듣고 보고
보았네만...... 암, 나이가 많다고 많이 듣고 많이 보았다고 할 수 있다면 나는 두 세기를 살았고
세 세기째 사는 사람이니까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고 할 수 있을 테지...... 이 일처럼 잊혀지지 않
을 것 같은 일도 없을 것이네.
카이네오스가 원래 태어나기는 여자로 태어났다고 했네만, 여자일때의 아름은 카이오네스가 아
니라 카이네스(‘카이오네스’의 여성형)였네. 엘라토스의 딸이었던 카이니스가 혼기를 맞았을 때
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녀였네. 아마 테실리아 사람이니까 하는 말이었네만, 당시의 자네 고향
청년이 없었네. 모르기는 하지만 자네 부친 페레우스 역시, 만일에 그때 이미 자네 모친과 혼인한
몸이 아니었더라면 이 처녀를 넘보았을걸세. 하지만 카이니스는 어느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으려
했네. 그런데 이때 전후해서, 이 카이니스가 한때 혼자서 해변을 산보하다가 해신의 품에 안긴 적
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네. 소문에 따르면 해신 넵투누스가 이 새 애인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말만
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네, 카이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네.
<해신께서는 저를 이렇게 이렇듯이 사랑하여 주셨으나, 저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일일 수가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니, 여자만 아닐 수 있다면
저에게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카이나스가 이런 말을 하는데 마지막 한마기에서는 남자나 낼 수 있는 아주 굵은 목소리가 나오
더래요. 카이나스는 남자가 된 것이지. 해신은 이 카이나스를 카이네오스로 만들어준 것뿐만이 아
니고 어떤 무기도 이 카이네오스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만들어주었다는군. 카이네오스가
해신으로부터 이런 은헤를 입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래서 그 땅을 떠나 남자들이나 하는
일을 하면서 테살리아산야를 누볐다네」
4. 라피나이와 켄타우로스 족의 싸움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네만 들어들 보게. 히포다메이아와 혼레식을 올리게 된, 당돌한
익사온의 아들 페이리토스는 구름의 자식들(익시온은 천상의 잔칫에 초대받자 당돌하게도 유노여
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죄를 범한다. 유피테르가 이를 눈치채고 구름으로 유노의 형상을 빚어 천
궁 안을 걸어다니게 하자 익시온을 저승으로 보내어 영원히 도는 불바퀴에 매달리게 한다. 그러
나 구름으로 빚어진 가짜 유노는 이 익시온의 씨를 받아 자식을 지어내는데 이들이 바로 상반신
은 인간, 하반신은 말인 켄타우로스라는 것이다.)을 줄줄이 늘어선 나무 아래에다 차린 잔치상으
로 초대했네. 테살리아 각국의 왕자들은 모두 초대를 받았을 것이네. 나도 초대를 받아 페이리토
스의 궁전으로 갔으니까. 페이리토스의 궁전은 북적대는 손님들이 질러대는 소리로 몹시 시끄러
웠네. 이윽고 손님들이 혼인 축가를 부르면서 횃불에 불을 붙여 흔들자 혼레식장이 연기로 자옥
해졌지. 차레가 되자 들러리에 둘러싸인 신부가 나왔네. 물론 그 많은 부인네들이나 들러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페이리토스의 신부은 아름다웠네. 우리는 페이리토스에게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결혼 생활의 행복을
그런데 술이 원수였는지 신부의 아름다움이 원수였는지 모르지만 켄타우로스 중에서도 포악하기
로 소문난 에우뤼토스가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어. 술에 취한 이 장의 눈에 신부가 얼마나 아름
답게 보였겠나? 그래서 그만 이성을 잃고 만 것이네. 이 에우뤼토스가 신부의 머리채를 끌고 나
가려고 하는 바람에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지. 술상이 뒤집어지고 술잔이 날았으
니까. 에우뤼토스가 손님으로 온 부인네들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겠나. 적군의 손에 떨어진 성
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궁전은 여자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로 찌렁찌렁 울렸네. 우리는 모두 자
리에서 일어났네만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은 테세우스였네. 테세우스는 이렇게 호령했네.
<에우뤼토스, 어째서 미친 수작을 하는 것이냐? 내 눈앞에서 페이리토스의 신부를 능욕하려 하
다니.....(테세우스와 페이리토스는 우정이 각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둘은 함께 어린시절의 헬레
네를 납치한 적도 있고 산 몸으로 저승으로 내려가 저승왕에게 왕비를 내놓으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페이리토스를 욕보이는 것은 곧 나와 페이리토스를 동시에 욕보이는 것인 줄 모
르느냐?>
말로써 보람이 없자 이 영웅은 켄타우로스를 붙잡아 신부를 빼앗더군. 에우뤼토스는 아무 맑도
하지 않았네. 말로써 분풀이가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야. 에우뤼토스는 말로 하는 대
신, 신부를 보호하려는 영웅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네. 테세우스 옆에는 마침 겉면에 무늬가 있는,
골동품 술잔이 하나 있었네. 아이게우스의 아들 테세우스는 이 술잔을 집어들고 번쩍 쳐들었다가
에우뤼토스의 얼굴을 향해 던지더군. 에우뤼토스는 이 술잔을 얼굴에 맞고 쓰러져, 부러진 이빨과
술과 피를 토했네. 에우뤼토스가 죽자 형제 켄타우로스들은 한목소리로 외치더군.
<무기를 들라! 형제가 죽었다!>
술이 이들의 용기에 불을 지른 것이네. 싸움이 시작되었지. 술잔과 술 항아리와 음식 그릇이 날
았네. 잔치 마당이 싸움터가 된 것이지.
무기 될 만한 것을 찾으려고 신들의 사당 안으로 맨 먼저 뛰어들어간 것은 오피온의 아들 아뮈
코스였네. 아뮈코스는 사당 안의 제단에서 가지가 여러 개인 촛대를 들고 나오더군. 아뮈코스는,
제관이 제단에 차릴 희생 제물인 황소를 잡으려고 도끼를 둘러메는 것처럼 이 촛대를 둘러메었다
가 라피타이(라피타이 족. 신랑인 페이리토스가 바로 이 라피타이다.)중 하나인 켈라돈의 아미를
향해 던졌네. 켈라돈은 이 촛대를 이마를 맞고 벌렁 나자빠졌는데, 가서 봤더니 얼굴을 알아볼 수
가 없더군. 눈알은 튀어나오고 코는 주저앉아 버렸으니까. 펠라 사람 페라테스가 단풍나무로 만든
술상의 다리를 뽑아들더니 이걸로 아뮈코스의 턱과 가슴 사이를 갈겼네. 아뮈코스는 쓰러져 부러
진 이빨과 피를 뱉고는 타르타로스의 나라(저승)로 떠났네.
그뤼네오스는 연기가 오르는 제단 옆에 서서 제단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네.
<우리가 왜 이런 건 쓸 생각을 않지?>
귀륀네오스는 이러면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는 제단을 버쩍 들어 라피타이 한복판으로 던지더군.
이 제단에 깔려 브로테아스와 오리오스, 이렇게 두 사람이 죽었네. 오리오스는 무녀인 뮈칼레의
아들인데 이 뮈칼레는 무력이 신통해서 주문으로 한늘의 달을 끌어내렸다는 여자였네만. 용한 무
녀면 무엇하는가. 아들이 그렇게 죽은 줄은 몰랐던 모양이네. 이번에는 엑사디오스가 소리쳤네.
<내가 무기를 잡으면 네놈들은 모두가 후회할 게다.>
엑사디오스는 이러면서, 신들의 이름으로 치는 서약의 증표로 소나무에 걸어놓은 사슴뿔을 벗기
더니 이걸로 그뤼네오스의 눈을 찔렀어. 용케도 두 갈래 진 사슴뿔은 그뤼네오스의 눈을 각각 하
나씩 찔렀지. 엑사디오스가 이 사슴뿔을 뽑아내니까. 눈알 하나는 뿔끝에 묻어나왔고, 하나는 뚝
떨어지다가 수염에 매달려 대롱거리더군. 로에토스는, 제단 위에서 타고 있던 장작을 하나 주워
옆에 있던 카락소스의 관자놀이를 찔렀네. 노란 머리카락에 덮여 있던 카락소스의 관자놀이에 불
이 붙는데, 보고 있으려니까 흡사 옥수수 밭에 불이 난 것 같더군. 이어서 상처에 벌겋게 달아오
른 쇠를 물에다 넣었을 때처럼 쉭쉭 소리야 나건 말건, 한 소리를 크게 지르더니 문지방을 뜯어
내어 번쩍 쳐들더군. 문지방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운가? 들기야 했지만 이걸로 사람을 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인가? 겨냥이 빗나가는 바람에 결국은 애꿎은 친구 코메테스만 이 문지방에 맞아
죽었네. 로이토스가 깔깔대면서 이러더군.
<그 패거리에 저렇게 멍청한 놈 또 없냐?>
로이토스는 이러면서 불붙은 장작으로 카락소스의 머리를 갈겼네. 한 번, 두 번, 세 번.... 어찌
나 세게 쳤던지 부서진 카락소스의 머리에서는 골이 튀어나왔지.
의기양양해진 로이토스는 에바그로스, 코뤼토스 그리고 뒤아스에게 달려들었네. 코뤼토스는 뺨에
노랑털이 나기 시작하는 애송이였는데 로이토스의 장작개비에 견딜 수가 있나. 쓰러졌지. 에바그
로스가, <아이를 때려죽이는 게 어른이 할 짓이냐?> 이러면서 로이토스에게 달려들었네만, 로이
토스는 이 장작개비를 에바그로스의 입에다 찔러넣고 말았네. 어찌나 세게 찔러넣었는지 목구멍
이 다 불에 타버렸을 정도였다네. 로이토스는 이 장작개비를 머리 위로 흔들어대면서 이번에는
두뤼아스를 치려고 하더군. 드뤼아스가 가만히 있나? 드뤼아스 역시 불에 타던 장작을 하나 집어
들고 로이토스의 목을 찔렀네. 불의의 공격을 당한 로이토스는 목에서 이 장작을 뽑고는 온몸을
피로 적신 채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네.
도망친 것은 로에토스뿐만이 아니었네. 오르네오스도 도망쳤고, 뤼키비스도 도망쳤으며 오른쪽
어깨를 크게 다친 메돈, 그리고 타우마스와 피세노르도 도망쳤으니까....... 뜀박질 겨루기라면 상대
가 없을 만큼 발이 빠른 메르메로스는 어찌 된 셈인지 도망칠 때 보니까 걸음이 별로 빠르지 못
하더군.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부상을 당했었더군. 폴로스, 멧돼지 사냥꾼으로 유명한 아바스, 싸우
지 말자고 동료들을 달래던 점쟁이 아스튈라스도 자리를 떴네. 행여나 창에 맞을까봐 전전긍긍하
고 있던 네소스(후일 헤라클레스의 아내 데이아네이아를 욕보이려 했다가 헤라클레스 화살에 즉
게 되는 켄타우로스)에게 점쟁이 아스튈로스가 이렇게 소리치더군.
<도망치지 말게. 자네는 절대로 여기로에서 죽지 않지 않아.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쏘는 화살의
과녁이 되어야 하니까.>
그러나 에우리모노스와 뤼키다스, 아레오스와 임브레오스에게는 도망칠 겨를이 없었제. 드뤼아스
가 이들을 때려죽였거든. 크레나이오스는 싸움관에서 도망치고 있었는데도 미간에 창에 맞았지.
왜? 그냥 도망쳤으면 좋았을 것을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보다보았기 때문이지.
잔치 자리가 이 지경이 되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와상에 누워 한참 늘어지게 잔 친구도
있었네. 아피다스라는 친구였네. 아피다스는 와상에다 , 제 손으로 오싸 산에서 잡은 곰가죽을 깔
고 누워자다가 깨어 술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네. 멀리서 이것을 보고 있던 포르바스는, 판이
난장판인데도 어울려 싸울 생각은 않고 있는 그를 괘씸하게 여기고는 창을 잡으며 비앙거리더군.
<술이 그렇게 좋거든 스튁스 강물에 섞어 마시게.>
포르바스는 이러면서 창을 던졌네. 차피다스는 반듯이 누운체 손만 내밀고 있다가 목이 창에 꽂
히는 바람에 죽는 줄고 모르고 죽었네. 아피다스의 목에서 쏟아진 피는 와상의 깔개를 적시면서
술잔에 고였네.
페트라이오스가 도토리가 잔뜩 열린 떡갈나무를 뽑으려고 용을 쓰고 있는 게 눈에 띄더군. 두
팔로 나무 둥치를 안고 이리자리 흔들면서 용을 쓰는데 아닌게 아니라 나무가 금방이라도 뽑힐
것 같았네. 하지만 뽑히면 뭘 하나. 페이토스가 창을 던져 페트라이오스의 몸과 나무 둥치를 한
창날에 꿰어버렸는걸. 귀에 들었는데, 뤼카스와 크로미스도 페이리토스의 손에 죽었다더군. 헬로
프스는, 체이리토스가 던진 창이 오른쪽 관자놀이로 들어가 왼쪽 관자놀이로 나오는 바람에 죽었
고, 딕튀스는 좁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죽었지. 뒤딸라오는 페이리토스에게 쫓기다가 벼랑으
로 떨어져. 제 무게에 부러진 물푸레나무에 꿰여 죽었던 게야.
아피리오스가 뒤튀스의 복수를 한답시고 산비탈의 바위를 하나 들어 페이리토스에게 던지려고
했네만, 테세우스가 이걸 보고 있다가 들고 다니던 참나무 몽둥이로 이 아파리오스의 팔꿈치를
부숴버렸지. 켄타우로스를 더 죽일 기분도 아니고, 죽일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테세우스는 키가
유난히 크ㅌ 케ㅌ타우로스인 비에노스르의 잔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네. 비에노스의 잔등? 주인이
아니면 아무도 태워주지 않던 잔등이었다네. 테세우스가 잔등에 올라 무릎으로 배를 죄며 갈기를
잡자. 이 켄타우로스란 놈.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테세우스에게 욕지거리를 했다는군. 그
래서 테세우스는 곤봉으로 이놈의 대가리를 부숴버렸어. 어쩔수 없이 다시 싸움판으로 뛰어든 테
세우스는 곤봉으로 네뒤노스와, 창잡이 뤼코페스, 수염으로 가슴을 가리고 다니는 히파소스, 테살
이라의 산기슭에서 곰을 잡아 산체로 집까지 둘러메고 왔다는 테레우스, 나무와 키를 겨눈다는
리페오스를 때려죽였네.
테세우스가 설치는 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데몰리온이었네. 데몰리온은 소나무를 한그루
뿌리채 뽑아 이걸러 테세우스를 치려고 하다가 소나묵 뽑히지 않으니까 가질ㄹ 하나 분질러 잔가
지를 치더니 이걸 테세우스에게 던지더군. 테세우스 이런 것에 맞나? 나중에 들었더니 테세우스
는 팔라스 여신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 가지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 그러나 데몰리온에게 이
가지를 던진 보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네. 키다리 크란토르의 왼쪽 어깻쭉지에 맞았으니까.
이킬레우스, 크란코르라면 자네도 들언 적이 있을 것세. 자네 부친의 시종이었으니까. 옛날 돌로
페스 인들의 왕 아뮌토르가 싸움을 걸어왔다가 자네의 부친인 페레우스를 부고는 도저히 안되겠
다고 생각하고 화해의 공물로 바친 자가 바로 이 크란토르였다네. 펠레우스는 멀리서, 크란토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외쳤네.
<크란토르, 나를 위하여 신명을 바쳐온 전사여, 내 그대를 위해 길동무를 만들어주리라.>
페레우스는 이러더니 데몰리온을 향해 물푸레나무 창을 던졌네. 창은 살같이 날라가 데몰리온의
갈비뼈 틈에 박혔지. 켄타우로스 데몰리온은 이 창의 자루를 잡고 힘껏갈비뼈틈에서 빼내었네. 그
러나 자루는 빠졌지만 창날은 그대로 이 켄타우로스의 갈비뼈 틈에 박혀있었다네.
최후의 발악이라는 게 있지 않나. 제몰리온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말찍이 물러섰다가
돌진하면서 발굽으로 페레우스를 직밟으려고 하더군. 그러나 페레우스는 머리에 쓴 투구와 손애
든 방패로 데몰리온의 발굽을 막고는 다른 한손에 들고 있던 창으로 대몰리온의 가슴을 찔렀네.
자네의 부친 페레우스가 죽인 켄타우로스는 이들뿐만이 아니야. 플레그라이오스와 휠레스도, 멀리
서 던진 자네 부친의 창에 맞고 죽었네. 이피노오스와 틀라니스는 자네 부친아 가 ㄲ이서 던진
창를 맞고 죽었고..... 참, 페레으스 손에 죽은 켄타우로스중에는 도륄라스도 있네. 이 자는, 머리에
는 늑대 털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손에는 창대신 황소의 머리에서 뽑은 뿔 두개를 가지고
다니는 자였네. 싸움이 한동인 계속된 다음에 보니까 이자가 들고 있는 황소뿔끝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더군. 이 자를 보고 나는, <네 황소뿔과 내창이 더떻게 다른지 보여주랴?> 이렇게 놀려
주고는 창을 던졌네. 이자가 치명상을 입고 이러고 있는 것을 옆에 있던 페레우스가 보았네. 페레
우스는 칼을 뽑아 이 자의 배를 갈라버렸어. 이 자는 창자를 쏟으면서 길길이 뛰기 시작했네. 창
자를 쏟으면서 밟으면서 길길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말이네. 보는 눈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달라. 하지만 퀼라로스는 자타가 인정
하는 미남 켄타우로스였네. 황금빛 수염에 묻히기 시작하는 턱.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황
금빛 머리카락...... 어쨋든 이 자는 보기가 좋았어. 표정은 늘 싱싱했고, 목, 어때, 손, 가슴 등등
인간의 형상을 한 것은 모두가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 같았네. 말의 형상을 한 하반신도 상반신
못지않게 아름다웠어. 우리가 이놈을 보면서, 잔등에다 카스토르(말을 잘 타는 장수로 유명한 유
피테르의 아들.)를 태웠으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네. 그만큼 힌살에도 흠잡을 데가 없고
가슴이 넓었던 것일세. 몸의 털 빛은 검었네만 꼬리와 다리만은 흰색이었네. 이 자의 외모가 이러
한데 켄타우로스 암컷들이 가만히 있겠나? 이 자의 짝이 된 것은, 휠로노메라고 하는 아름다운
암켄타로우스였네. 그 많은 암켄타로우스 중에서 퀼라로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깊은 숲속에
사는 이 휠레노메뿐이었다고 하더군. 이 휠레노메는 퀼라로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늘 갈기를
잘 빗질하고, 머리에는 오랑캐꽃이나 장미 백합같은 것을 꽂고 다녔다고 하더군. 어디 그 뿐인가.
파가사이 산 숲에서 흘러내페이리토스의 혼례식에도 이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왔다가 역시 어
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네. 그런데, 왼쪽 어딘가에서 날아온, 임자 없는 창이 그만 이 퀼라로스의
목덜미에 꽂히고 말았네. 상처가 깊었던 모양일세. 휠로노메는 두 팔오 애인의 식어가는 몸을 껴
안고, 생명의 숨결이 애인의 몸을 떠나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막았네. 이윽고
퀼라로스가 숨을 거두자 휠로노메는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도 없는 말로 푸념을 하더니, 애인
의 목덜미에서 제 손으로 뽑아낸 그 창을 땅에다 거꾸로 세우고는 거기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
네. 애인의 시체 위로 쓰러지면서 숨을 거둔 것이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켄타우로스가 또 하나 있네. 파이오코메스라는 켄타우로스인데, 당시
에는 여섯 장의 사자 가죽을 갑옷 삼아, 인간의 형상을 한 상반신과 말의 형상을 한 하반신에 두
루 걸치고 다녔지. 이 파이오코메스는 황소 두마리가 끌어도 끌려올까말까 한 나무 둥치를 안고
휘두르다가 이걸로 올레노스의 아들인 텍타포스의 머리를 갈겼네. 머리가 부서지면서 안에 들었
던 게 사방으로 튀고, 입과 코와 눈과 귀로 나오는데... 참나무로 만든 통에서 우유가 새나오는 것
같았네. 그러나, 자네 부친이 잘 알고 있네만, 이 자의 허벅지를 칼로 찌른 것은 바로 나였네. 크
토니오스의 켈레보아스도 내 칼 아래 쓰러졌지. 크토니오스는 나무 가지로 만든 몽둥이를 휘둘렀
고, 텔레보아스는 창을 휘두르다가 내 손에 죽었네만, 텔레보아스의 창에 찔린 상처의 흉터는 지
금도 여기에 남아 있네. 보게. 여기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아, 그 시절에 이 트로이아
원정이 있었더라면... 그 시절에는 내게도 힘이 있었네. 그 시절 같으면 헥토르를 이길 수는 없다
고 하더라도, 상대하는 것만은 적어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헥토르가 나
기도 전인걸, 아니 어린아이
법 하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마져 하지. 페리파스는 켄타우로스 퓌라이이토그를 죽였고, 암퓌
크스는 날이 빠진 창으로 다리가 넷인 켄타우로스 에켈로스의 얼굴울 때려 땅에다 내굴렸지. 마
카리오스는 몽둥이로 가슴을 때려 펠레트론에서 온 에릭도포스를 쓰려뜨렸고... 참, 네소스가 던진
창은 퀴멜로스의 엉덩이에 박혔지. 그 자리에는 암퓌코스의 아들 몹소스도 있었네.
자네들 몹소스를 점쟁이로만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천만에, 켄타우로스 오디테스의 입에다
창을 꽂아넣은 사람은 몹소스였네. 오디테스는 몹소스의 창에 혀와 턱과 목이 한두름에 꿰이는
바람에 말한마디 못하고 죽었다네.
카이네오스는 이 동안 켄타우로스를 다섯이나 죽였어. 스튀펠로스, 브로모스, 안티마코스, 엘뤼
모스, 도끼 잘 쓰던 퓌라크모스... 카이네오스가 이 켄타우로스들은 어떻게 죽였는지 잘 모르겠지
만 그 숫자와 이름만은 이렇듯이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네. 카이네오스가 이렇듯이 좌충우돌하니
까, 덩치 큰 라트레오스가 마케도니아 사람 헬레소스를 죽이고 빼앗은 무기를 들고 나섰네. 당시
의 이 자 나이는 기억나지 않네만, 중년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군. 힘은 젊은이 못지않았지만 귀밑
머리는 희끗희끗했으니까. 손에는 방패와 마케도니아 창을 들고 발굽으로는 대지를 울리며 내닫
는 이 라트레오스의 모습은 참으로 볼 만했네. 라트레오스는 동료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카이네
오스를 조롱하기 시작했네.
< 카이니스야! 나 아니고서야 누가 너를 카이니스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오냐, 내 너를 카이
니스라고 불렀다. 너는 사내가 아니고 계집이니까 카이니스라는 이름이 마땅하다. 너에게는 남자
행세할 권리가 없지 않느냐? 네 근본을 알거든 이 싸움터는 남정네들에게 맡겨두고 네방으로 돌
아가 실이나 감고 물레나 돌리거라.>
이 말을 들은 카이오네스는 창을 던졌고, 창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이 켄타우로스의 가슴께,
그러니까 사람의 형상이 끝나고 말 형상이 시작되는 부분에 꽂혔지. 라트레오스는 고통으로 몸부
림치면서도 무방비 상태인 카이네오스의 얼굴을 겨냥하고 창을 날렸네. 그러나 창은 맞자마자 튀
어나오더군. 지붕에 떨어진 우박처럼. 라트레오스는 창을 던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번
에는 카이네오스에게 돌진, 칼을 뽑아 카이네오스의 옆구리를 찔렀어. 하지만 이 카이네오스의 몸
에 어디 칼이 들어가던가. 그러나 라트레오스는 물러나지 않았네.
< 칼끝이 무딘 모양이니까 이번에는 날로 베어보리라. 일단 내손에 걸린 이상 너는 죽은 목숨
이다. >
라트레오스는 이러면서, 이번에는 칼날로 카이네오스의 허벅지를 내리쳤네. 그러나 하릴없는 이
이었네. 우리는 카이네오스의 허벅지에 닿자마자 라트레오스의 칼이 뚝 부러지는 것을 보았네. 카
이네오스는, 기겁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라트레오스에게 이러더군.
< 내 몸을 시험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네 몸을 한번 시험해 보자. 내 칼끝에 견디느지 견디지
못하는지. >
카이네오스는 라트레오스의 옆구리에 찔러넣고는, 내장에다 박은채로 칼을 비틀더군. 라트레오
스가 죽을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을 수 밖에.
일이 이렇게 되자 켄타우로스 무리는 함성을 지르며 몰려와 이 카이네오스 한 사람만을 공격했
네. 수많은 창이 날아오고 수많은 칼이 날아왔지만 카이네오스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네.
말하자면 그 많은 창칼 중에 카이네오스의 피가 묻은 창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지. 켄타우로스
무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그 중의 하나가 고함을 지른 것은 이때였네. 모뉘코스라는 켄타우로스
였지.
< 이 무슨 창피한 노릇인가! 우리 무리가 단 한 놈, 그것도 놈이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것의
손에 노리개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자를 남자로 인정해야 한다. 계집꼴이 된 것은,
이 자 하나 변변히 해치우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우리들의 큰 덩치를 두었다가 어디에 쓰려는가?
인간의 갑절을 넘는 우리의 힘은 두었다가 무엇하려는가? 우리는 살아 있는 것들 가운데서도 가
장 강하기로 소문난 인간과 말의 속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지 않은가? 사내도 계집도 아닌것 하나
를 이기지 못하고서야 어찌 우리가 여신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천궁의 오만한 여신인 유노
를 욕보인 자랑스러운 익시온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으랴. 바위를 굴리고, 나무를 쓰러뜨려라! 온
산의 나무를 다 베어 저 자를 묻어버려라. 저 자 위에다 쌓아 저 질긴자의 사기를 꺾어놓아야 한
다. 저 자의 몸에 상처를 내려고 하지 말고 나무를 사ㅎ아 저 자의 숨통을 막아버려야 한다! >
모뉘코스는 이렇게 외치면서, 마침 거센 남풍에 쓰러져 있던 나무둥치를 하나 들어 카이네오스
에게 던졌네.
이것을 보고 있던 나머지 켄타우로스들도 우르르 몰려다니며 나무를 뽑아 카이네오스에게 던졌
지. 얼마나 뽑아 던졌던지 오트뤼스 산과 펠리온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을 지경이었네. 당황환 카
이네오스는, 나무 무더기에 깔린 뒤에도 그 튼튼한 어께로 한동안 버티었네. 하지만 나무는 한정
없이 쌓이고 또 쌓여 급기야는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아무리 장사인들 그
지경에 이르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카이네오스는 머리 위로 쌓이는 나무를 헤치면
서 이따금씩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숨을 쉬려고 몸을 뒤척였네. 그럴 때마다 나무 더미가 우르르
무너지는데, 그 광경은 흡사 지진 때의 이다 산 같았네. 그 다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확실하게는 몰라. 나무 더미에 깔려 카이네오스가 타르타로스 땅으로 내려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돌았어. 그러나 점쟁이 몹소스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더군. 몹소스는, 그 나무 더미에서 날개가
튼튼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고 소리쳤네. 그래, 나도 그 새를 보았네. 처음 보는 새더군. 몹소
스는, 큰소리로 울면서 하늘에서 원을 그리는 이 새를 보고 소리쳤네.
< 카이네오스 만세. 라피타이의 영광이여, 용감무쌍한 영웅이여. 이제는 새가 된 카이네오스 만
세! >
우리는 몹소스의 말을 믿었네. 왜냐. 몹소스는 점쟁이였으니까. 우리의 슬픔은 곧 분노로 변했
네. 우리는 한 사람을 집중공격한 수많은 켄타우로스를 용서할 수 없었네. 우리는 칼을 들고 싸웠
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죽인 켄타우로스는 전체 숫자의 반을 넘었을 것이네. 어둠이 내리고, 나
머지 켄타우로스가 모두 도망친 뒤에야 이 싸움은 끝났네>
5. 넬레우스의 아들 12형제
펄로스의 노영웅이 라피타이와 마인 켄타우로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싸움 이야기를 신나게 하
자, 틀레폴레모스가 참다못해 한마디했다. 그는 켄타우로스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헬라클레스라는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데 화가 났던 것이다.
< 어르신네, 왜 헤라클레스는 한 번도 거명하시지 않는지요? 저의 선친께서도 수많은 구름의
자손을 죽었다고 하시던데요 >
그러자 네스토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이 사람아, 어째서 이 늙은이의 묵은 상처를 건드리는가? 세월이 아물게 한 상처를 다시 건
드려, 자네 선친에 대한 내 증오와, 자네 선친이 내게 자행한 의롭지 못한 행패를 상기시켜서 어
쩌자는 것인가? 자네 선친이 참으로 큰일을 해내어 온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했다는 것은, 신들
께서 다 아시는 사실이네. 나도 부정하고 싶네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나? 하지만, 우리가 테이포보
스나 폴뤼다마스나 헥토르를 찬양할 수는 없는 일. 어떻게 적을 찬양할 수 있겠는가? 자네 선친
은 메세나 성벽을 깨뜨리고, 죄없는 도시 엘리스와 퓔로스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불과 칼로 내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네. 말하고 싶지 않네만 내 아버지 넬레우스는 헤레클레스의 손
에 죽음을 당하셨네. 우리 형제들도 나만 빼고 열한 형제가 모두 헤라클레스의 손에 죽음을 당했
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기왕에 죽었으니 어쩌겠나만, 내 형 페리클뤼메노스 이야기는 좀 하고
넘어가야겠네. 페리클뤼메노스의 죽음은 다른 이들의 죽음과 다르니까.
우리 넬레우스 가문의 조상이신 넵투스는 신께서는 이 펠리클뤼메노스에게 특별한 권능을 부여
하셨다네. 무슨 권능이냐 하면, 원하면 무었이로든 둔갑할 수도 있고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는
권능이지. 페리클뤼메노스는 헤라클레스의 손에 잡히자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온갖 물상으로 다
둔갑해 보았네. 하지만 상대가 헤라클레스라서 별 효험이 없었던 모양이야.
이것저것으로 둔갑해 봐도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페리클뤼메노스는 신들의 왕이 총애하시는 새
로 둔갑했지. 유피테르 대신의 벼락을 나른다는 새 말일세. 페리클뤼메노스는 독수리의 힘과 용기
와 발톱으로 헤라클레스의 얼굴을 할퀴고는 하늘로 날아올랐지.
티륀스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버럭 화를 내면서 활시위에다 살을 메워 하늘로 쏘아 구름위로 올
라간 이 독수리의 날갯죽지를 맞혔네.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마침 살을 맞은 곳이 날개를 움직
이는 힘줄이었어. 따라서 독수리로 둔갑한 페리클뤼메노스는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
지. 하살에 날갯죽지가 꽂힌 채 말일세. 이 화살이 먼저 땅에 닿고 페리클뤼메노스의 몸이 나중
닿았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몸무게 때문에 화실은 날개를 꿰뚫고는 가슴을 지나 목에 박혔고 페
리클뤼메노스는 이로써 죽고 말았네. 로도스 섬에서 온 미남 선장이여. 이러한데도 내가 헤라클레
스를 찬양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무공을 비방함으로써 내 형제들의 죽음을 복수할
생각은 내게 없네. 자네와 나는 이제 전우니까 >
노영웅은 이로써 이야기를 끝내었다. 술잔이 다시 한 순배 좌중을 돈 장수들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밤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6. 아킬레우스의 죽음
삼지창으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는 신은 파에톤이 사랑하는 새로 변한 자기 아들 퀴크노스를
생각하며 속을 끓였다. 그는 퀴크노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아킬레우스를 저주하다가 아킬레우스
를 쳐서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었는데도 그럴 기
회는 오지 않았다. 넵투스는 장발을 한 스민테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 내 조카들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조카여. 나와 함께 이 트로이아 성을 쌓은 아폴로
여. 이 성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판국인데 속이 상하지도 않나?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다고
치세만 제 조국의 성채 밑에서 죽어 질질 끌려다닌, 그것도 우리의 눈앞에서 질질 끌려다닌 헥토
르의 망령을 어찌 생각하는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킨 자 중의 하나, 우리가 쌓아올린
이 성채를 부숴뜨리려는 이 야만인인 아킬레우스가 아직도 살아 있네. 나는 이 자에게, 내 삼지창
의 위력을 보여주고 싶네. 그러나 나는 신인지라 이 자와 몸으로 맞서 싸울수가 없네. 그러니까
자네가 그 보이지 않는 화실로 이 자를 쏘아주게. >
아폴로는 그러마고 했다. 숙부의 부탁이 있어서 그러마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폴로도 이 아킬
레우스를 좋게 보지 않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는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트로이아 전쟁의
일선으로 갔다. 그는 이 전선에서, 하잘것없는 병사를 상대로 싸우는 파리스를 발견했다. 아폴로
신은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고 파리스에게 말했다.
< 왜 하찮은 것들을 죽이는 일로 창에다 피를 묻히고 있느냐? 만일에 너에게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거든 아이아코스의 손자를 공격하여 죽은 네 형들의 원수를 갚아라. >
아폴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휘두르며 트로이아 병사들을 죽이고 있던 아킬레우스를 가리
켰다. 아폴로는 파리스를 위하여 활의 겨냥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파리스가 화살을 날리자 아폴로
는 화살을 인도하여 아킬레우스에게 명중하게 했다. 아들 헥토르가 전사한 이래 프리아모스 왕이
웃는 얼굴을 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수많은 트로이아 영웅들을 이겨내었던 저 유명한 영
웅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해서, 그리스 땅에서 남의 아내를 꼬드겨온 비겁한 자의 손에 죽었다. 아
킬레우스는 자신이 여자만도 못한 파리스 같은 자의 손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터였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아킬레우스는 차라리 아마존의 도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했으리라.
트로이아 군 쪽에서 보면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리스 군에서 보면 거룩한 평화의 수호자였던
이 불굴의 전쟁영웅도 결국은 화장단 위에서 재가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지어주었던 그
신이 이번에는 불꽃으로 그의 육신을 소진시킨 것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범같은 장수였던 아킬
레우스도 재가 되었을 때는 항아리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온 세상에 차고
넘쳤다.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이 있늘 곳으로 마땅한 곳은 넓디넓은 우주뿐이었다. 이 펠레우스의
아들은, 영원히 살 곳으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해서 타르타로스의 나라에도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
다. 그가 남긴 방패까지도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남은 장수들은 그가 남긴 무기가 누구에게로 돌
아가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다투었을 정도였다. 그의 유품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도 아무나
끼여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튀디데스도, 오일레우스의 아들인 아이아스도, 아트레우스의 작은
아들도, 아이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아우보다는 윗길인 큰아들도 끼어 들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
의 유품을 두고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와 라에르테스
의 아들 울릭세스뿐이었다. 어쩌면 불
끼 제 13부 유민의 시대
1. 아킬레우스의 유품
장수들이 좌정하자 병사들이 이 장수들 뒤로 모여섰다. 일곱 겹 황소 가죽 방패의 주인인 아이
아스가 일어섰다. 원래 성미가 불 같은 것으로 이름난 아이아스는 시게움 해안에 정박해 있는 그
리스 함대를 돌아다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웅변을 토했다.
< 나는 유피테르 대신의 이름으로, 저기에 정박해 있는 우리의 함대 앞에서 내 몫의 말을 하렵
니다. 나는 이로써 아킬레우스의 유품이 오디세우스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논파하려 합니
다. 저 헥토르가 우리 함대에 불을 질렀을때 오디세우스는 도망쳤습니다만 나는 불길을 잡는 한
편 함대 근처에서 트로이아 군을 몰아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왜 도망쳤을까요? 오디세우스는
무기로 하는 싸움보다는 말로 하는 싸움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창과 칼로 싸우는 데
능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세 치 혀로 싸우는 데 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치 혀로 싸우는 데 능
하지 못하듯이 오디세우스 역시 창칼로 싸우는 데 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장수들이
여 그러나 나는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들이 눈으로 보았으니 익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우스 역시, 자기에게도 공이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
나 그가 공을 세우는 것을 본 사람, 이를 증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디세우스의 공을 증
언할 수 있는 것은 어둠 뿐입니다. 내가 마땅히 내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킬레우스의 유
품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인품은 이 신성
한 유품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아이사스는 설사 이유품을 차지한다고 하
더라도 자랑스럽지 못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사스가 차지하기 전에 이미 오데
세우스에게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욕심을 부렸다는 이유만으
로 이 유품운 더이상 신성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적수인 오디세우스는, 설사
이 논쟁에서 패배하고 유품을 나에게 양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보람은 얻은 셈입니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오디세우스가 이 아이아스를 상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명해지게 될테
니까요.
나를 보십시오. 내 용기를 의심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있다고 하
더라도, 나에게는 이 신성한 유품의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 나와 ㅇ라킬레우스
는 같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텔라몬의 아들입니다. 텔라
몬이 누굽니까? 영웅 헤라클레스의 휘하에서 트로이아 성벽을 깨뜨렸던 장수, 파가사이에서 지은
배로 콜키스 해변에 상륙하신 분입니다. 텔라몬의 아버지 아이아코스는 지금 고요가 지배하는 저
망령의 나라의 판관으로 계십니다. 이 나라가 어떤나라던가요? 아이올로스의 아들이자, 여기에 있
는 이 오디세우스의 조상인 시쉬포스가 무거운 바위를 험한 산정으로 굴려올리는 무서운 벌을 받
고 있는 나라입니다. 신들의 왕이신 유피테르 대신께서 이 아이아코스를 저승의 판관으로 세우신
것은 아이아코스를 알아보시고, 당신의 아드님으로 용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이 아이아스는 유피테르 대신의 증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장수들이시여, 나는 이 빛나는
가문을 빌미로 삼아 이 유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올시다. 아킬레우스와 내가 같은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드린 말씀이올시다. 그렇습니다. 아킬레우스와 나는 사
촌간입니다. 내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킬레우스의 유품은 내 사촌의 유품인 것입니다 사기와 협
잡의 명수인 시쉬포의 자손 오디세우스여, 우리 집안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그대가 왜 이 아이아
코스 집안 일에 뛰어들어 아킬레우스 유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오?
여기에 있는 나는 트로이아 원정이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는 자진해서 원정대에 합류한 사람이
고, 이 오디세우스는 어쩔 수 없어서 합류한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이 오디세우스에게 유품을 양
보해야 하겠습니까? 오디세우스는 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미친사람 행세를 하고 있
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자기보다 더 꾀많은 사람의 술수에 걸려, 더 이상 잔꾀를
폭로한 사람은 나우플리오스의 아들 팔라메데스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만일에 창칼을 무기로 들고
싶지 않다면 그 잔꾀를 무기로 삼아서라도 이 원정에 참가하려고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렇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이 전쟁의 참전을 기피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이 전쟁에
목숨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이런 ㄹ내가 내 사촌의 유품을 횡령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하겠습니
까?
나는, 당신 오디세우스가 정말 미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
람들이, 그의 미친 사람 행각에 기만당하지 않았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오디세우스가 정말 미친 사람이었던들, 사람들이 그의 사기행각에 넘어가 주었던들, 오늘 이 트로
이아 성 아래에는 오디세우스 같은 협잡꾼은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이런 협잡꾼이 없었던들, 우
리가 저 포이아스의 아들 필록테테스를 램노스 섬에다 유기하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
까? 내가 듣기로 이 필록테테스는 이 섬의 동굴 속에 기거하면서 신들께 눈물로 기도한다고 합니
다. 자신을 버려두고 가자고 하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에게 천벌이 내리기를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늘에 신들이 계시는 방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이유로 이 전
쟁에 참전했던 용사이자, 우리들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헤라클레스의 저 유명한 활의 상속자인
이 사람은 지금 그 외로운 램노스 섬에서 헐벗고 굶주리면서, 트로이아를 향해 쏘아야 마땅한 활
을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다행히도 원정선
을 ㅏ고 와서 오디세우스의 휘하에 들지 않았던 덕택에, 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팔라메데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테지요? 이 필록테테스처럼 램노스 섬에 남
아 있었더라면 팔라메데스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라메데스는 죽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었
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팔라메데스가 자기를 욕보인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팔라메데스가 그리스
군을 반역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 증거물로 자기가 그 전에 몰래 묻어놓은 황금을 파내어 군
법회의에다 제시했습니다. 이로써 오디세우스는, 한 사람은 램노스 섬에다 유기함으로써, 또 한
사람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함으로써 우리 그리스 군의 전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의 참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오디세우스라는 자를 두려워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
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네스토르 장군을 능가하는 웅변가인데도 불구하고, 이 죄없는 장군을 유기한 까닭
을 나에게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노장군은 이때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피
하려 했으나 말이 부상하는 바람에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네스토르 장군은
오디세우스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오디세우스는 노장군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
고 있지 않다는 것은 튀데오스의 아들 디오메데스가 잘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디세우스의 이
름을 부르면서, 겁에 질려 도망치는 이 오디세우스를 원망한 장본인이 바로 디오메데스니까요. 여
러분 중에는 이 현장을 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신들은 인간 세상
에서 벌어지는 이 가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남에게 도움을 베풀
기를 거절한 오디세우스에게, 남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게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미
는 구원의 요청을 거절했던 오디세우스가, 그래서 이번에는 구원의 요청을 거절당하게 된 것입니
다. 이로써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선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전우들에게 도움으로 요청했습니다. 나는 달려가서 오디세우스를 보았
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물론 음이 두려워서 그랬겠지만 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거대한 소가죽 방패로,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오디세우스를 기려 그 목숨을 구해주었습
니다만, 하찮은 일이니 이 일로 나를 칭송하려고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나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거든 그때의 그 일을 생각해 보시오.
그대를 노리던 적들의 창칼, 그대가 입었던 부상, 그대의 공포, 내 방패 밑에서 그대가 나에게 던
졌던 눈길을 생각해 보시오. 내가 그대를 위험에서 구해내었더니, 부상으로 몸도 못 가눌 것 같던
그대는 언제 부상을 입었더냐는 듯이 쏜살같이 달아났지요.
헥토르가 신들의 도우심에 힘입어 전장으로 나온 것은 이때였습니다. 오디세우스, 그대도 보았으
니 알 것이오. 헥토르가 나서자 우리 장수들은 모두 겁을 먹고 물러서지 않던가요. 오디세우스,
그대도 예외는 아니었소. 그러나, 여러분, 나는 그 자의 콧대를 꺾었습니다. 그 자는 우리 진영을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만 나는 멀리서 바위를 던져 그 자를 물러서게 했습니다 그 자가, 그리스
에 진정한 장수가 있으면 나와서 대적하자고 했을 때, 나가서 그 자와 맞선 사람이 바로 이 아이
아스가 아니었습니까? 헥토르를 대적할 자를 정하는 제비뽑기에서, 아카이아의 용사들이여, 그대
들은 내가 뽑혔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이 일 대 일의 대전에서 헥토르에게 지지 않았다는
걸 보셨지요? 트로이아 군이 유피테르 대신의 도움을 받으며 손과 손에 창칼과 횃불을 들고 우리
그리스 함대를 공격하던 일, 잊지 않았겠지요? 말 잘하는 오디세우스여, 그때 그대는 어디에 있었
소? 그대들 귀향의 희망이 실려 있는 우리 함대를 등에 지고 이들을 가슴으로 막아낸 자가 누굽
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 이 아이아스가 아닙니까? 내가 함대를 지켰으니 그 대가로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주십시오. 솔직하게 말씀드리리다. 사실 아킬레우스가 남긴 무기가 그 상속자에게
요구하는 명예는 내가 얻은 명예로도 부족합니다. 아킬레우스의 무기는, 나 이상의 명예를 가진
자가 임자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나마 이 무기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나밖
에 없습니다. 이 아이아스가 무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무기가 이 아이아스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소스와, 싸울 생각도 없는 돌론을 죽였고, 프리아모스 왕의 헬레노스를 생포했고, 팔
라스 여신의 성상을 훔쳐내었으니 저 이타카의 왕에게도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정도의 공을, 내가 세운 공에다 견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 것은, 이 사
람이 세운 공에 대명천지에 세운 공이 없고, 데오메데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세운 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이 같이 하찮은 일을 공적으로 삼고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내
리시고 싶다면 내리시되, 이를 나누시고 큰 몫을 디오메데스에게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무장한 적을 기계로 죽이고, 술수로 순진한 적을 속이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이 이타
카 사람에게 귀한 상을 내려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금으로 치장한 투구를 이 사람에게 씌우면 어
떻게 되겠습니까? 숨기 좋아하는 이 사람이 이 금빛 투구 때문에 숨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금
방 적의 눈에 띄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오디세우스가 저 무거운 아킬레우
스의 투구를 쓰고 배겨낼 것 같습니까? 펠리온 산의 물푸레나무로 자루를 해박은 아킬레우스의
창은, 저렇게 약한 오디세우스에게는 너무 무거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훔치는 일이나 능사로 아
는 오디세우스의 가냘픈 왼팔에, 넓고 넓은 우주를 새겨넣은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당할 것 같습
니까? 오디세우스, 참으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분이여, 그대를 파멸케 할 이런 것들에 왜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군요. 만일에 그리스 군에서 이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그대에게 내리는 실수
를 범하는 경우, 그대의 목숨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대에게 능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도망치
는 것인데, 이런 무기를 몸에 지닌다면 그대는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
의 방패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 그대 방패니 만큼 아직은 말짱한 것으로 압니
다. 하지만 내 방패는 전장에서 수천 개의 창을 받는 방패라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새 방
패가 있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누가 유품의 임자가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기로 합시다. 이 영웅의 유품을 적진에다 던져두고 이 둘을 보내어 이를 찾아오게 해주십
시오. 이로써 찾아오는 사람을 임자도 정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말이 끝났다. 장수들 쪽에서는 아이아스의 말에 환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윽고 라에스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가 일어났다. 오디세우스는 한동안 바닥을 내
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장수들을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웅변조로 말했는데, 웅변하는 솜씨는 우아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탁월했다.
「펠라스기 인들이여, 만일에 신들께서 내 기도와 그대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더라면, 우리가 아킬
레우스의 유품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런 분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스니다.
아킬레우스여, 그대가 살아 있더라면 그대는 아직도 이 무기로 싸우고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대
와 함께 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이신 장수 여러분, 가혹한 운명이 우리와 아
킬레우스를 이렇게 갈라놓은 이상......」
이 대목에서 오디세우스는 눈물 닦는 시늉을 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누가 이 아킬레우스의 뒤를 이을 수 있느냐는 문제보다는, 누가 과연 이 아킬레우
스를 트로이아 원정군에 합류하게 했느냐 문제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나와 이 유품을 다투게 된 이 사람에게만은 아킬레우스의 유품이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대단히 머리가 둔한 사람처럼 보이는데다(실제로 둔합
니다만), 나에게 대하여 터무니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편견에 사로잡
혀 있는 것은, 내가 지혜로써 여러분을 자주 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드리는 말씀을
웅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웅변이 사감을 지어내는 웅변이 지금은 그 주인을 변호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이 지닌 재주를 써서 제 주장을 펴야 하는 것이니까요.
가문이라든지, 조상이라든지, 우리들은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
다만, 나는 내 가문이나 조상이나 내력이 어떻게 아이아스의 가문이나 조상이나 내력과 다른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이아스는 자신이 유피테르 대신의 4대손이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유피테르 대신이 어디 한두 집안의
조상입니까? 나 역시 유피테르 대신의 4대손입니다. 내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아르케시오스의 아
들이고, 아르케시오스는 바로 유피테르 대신의 아들이니까요.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집안에는 죄
를 지은 이도 없고 제 나라에서 쫓겨난 이도 없습니다. 신혈받은 것을 따지자면 내게는 따질 것
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 어머니 역시 메르쿠리우스의 손녀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
니 양쪽이 다 신혈붙이인 거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가 아이아스의 어머니보다 더 좋은 가문에
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
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텔라몬과 펠레우스가 형제간이었다는 사실과 아이아스의 공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만큼 이런 것으로 유품 상속자의 적부를 심사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한 일만을
고려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문을 보고 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기로
써 이루어낸 업적으로 평가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집안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한 데엔 까닭
이 있습니다. 만일에 집안을 따져서 아킬레우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거두
어야 한다면 당연히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나, 아킬레우스의 아들 퓌로스가 거두어야지
어떻게 아이아스가 여기에 손을 내밀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이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프티아나
스퀴로스로 보내버려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곳으로 보내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사촌에게 주기
로 한다면, 아이아스만 사촌이고 테우케르는 사촌이 아닙니까? 테우케르가, 아킬레우스의 사촌이
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유품의 상속권을 주장합니까? 여러분이, 주장한다고 테투케르에게 주겠습
니까?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단지 우리들이 이룬 업적만이, 오직 업적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업적을 당당하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루어낸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내가 맨 처음으로 이루어낸일 한 가지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
니다. 이로써 넉넉할 테니까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되시는 네레이드께서는 아들이 이 전쟁에 참
가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아들을 여자로 꾸며 은밀한 곳에다 숨기신 일이 있
습니다. 여신의 이러한 술수를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아이아스도 여신의 속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꿰뚫어보고 여자로 차림한 아킬레우스에게 전쟁 무기를
ㄹ보여주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이런 무기를 보자 가슴속에서 타는 용기의 불길을 더 이상 숨기
지 못했습니다. 나는, 여자옷과 장신구 같은 것은 본 체도 않고 창과 방패를 집어드는 아킬레우스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의 아들이여, 트로이아를 궤멸시키려면 그대가 필요하오. 어찌하여 저 도시를 쳐부수러 나가
기를 망설이는 것이오?>
그러고는, 이 영웅을 원정군에 들게 하여 그대들이 아는 바와 같은 영웅적인 공훈을 쌓게 했습
니다. 아킬레우스의 공훈이 곧 나의 공훈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 용감한 텔레포스를 창으
로 쓰러뜨리고,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가, 애원하는 것이 불쌍해서 상처를 치료핼 준 사람도 바
로 나였습니다. 테바이를 무너뜨린 사람도 바로 납니다. 레스보스, 테네도스, 크뤼세스, 칼라 같은
아폴로의 도시와 스퀴로스를 떨어뜨린 것도 내가 아니던가요? 뤼르네소스 성벽을 땅바닥에 주저
앉힌 게 바로 내 오른팔이 아니던가요? 아킬레우스가 세운 공을 여기에서 일일이 꼽지 않겠습니
다만, 핵토르를 무찌를 만한 이 용장 아킬레우스를 우리 연합군에다 끌어넣은 사람이 나였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 유명한 적장 핵토르는, 내가 우리 연합군에 합류시킨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었으니 곧 나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나는 아킬레우스를 우리 편으로 끌
어들이기 위해 기지라는 무기를 쓴 나의 공로를 셈하여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나에게 줄 것을 요
구하는 바입니다.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에게 무기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났으
니 그 무기를 내 것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메넬라오스의 슬픔이 온 그리스 땅의 관심사가 되자 우리는 천여 척에 이르는 함대를, 에우보이
아 섬의 맞은편에 있는 아울리스에다 정박시켰지요? 우리는 순풍을 기다렸습니다만, 오랫동안 바
람을 불어오지 않았고 어쩌다 불어오는 바람은 그나마 역풍이었습니다. 사령관 아가멤논이 딸을
디아나 여신께 바쳐야 바람이 순조로워질 것이라는 잔인한 신탁을 받은 것은 이때가 아니었습니
까? 아버지 되는 아가멤논은 거절했지요? 아가멤노는 신들을 원망할 기세였습니다.
군왕으로서의 의무감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더 진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리를
따져, 대의를 위해서는 부녀간의 사랑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그를 설득시킨 사람은 바로 납니다.
다. 아트레우스의 아들29)도 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할 것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도 여
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공정한 심판을 해야 하는 연합군의 사령관인 그가 자신의 이
해가 걸린 문제의 심판관이 되어야 했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민중의 대의를 위하여, 아우30)
의 불명예를 씻기 위하여, 자신이 맡은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에 충실하기 위하여, 이로써 잔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딸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처녀의 어머니31)를 설득하는 일을
맡은 것도 나였습니다. 이때 나는 설득한다기보다는 속임수를 써서 딸을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
었습니다.32) 만일에 이때 내가 가지 않고 아이아스가 갔더라면 우리 함대는 아직까지도 아울리스
항에서 순풍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신이 되어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간 것도 나였습니다. 나는 저 높은 트로이아 성의 의사당을
당당하게 쳐다보며, 수많은 원로들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들어갔습니다. 나는 프리아모스 왕을 만
나, 그리스 연합군이 나에게 맡긴 사명을 당당하게 말하고, 헬레네를 꼬드겨간 파리스를 비난하는
한편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내말을 듣고 프리아모스와 안테노르33)는 일리 있는 주
장이라면서 상
29) 즉 ‘아가멤논’.
30) 메넬라오스.
31)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를 가리킨다.
32) 오디세우스는 , 아킬레우스와 혼인시킬 생각이라면서 이피게네이아를 데리고 왔다.
33) 트로이아 왕 프리아모스의 중신이자 반전로자. 이때 사신으로 들어가 ㄴ오디세우스와 메넬라
오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헬레네를
당한 공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스와 그 형제들, 그리고 이 비열한 약탈행위의 공모자들
은 그 죄많은 손으로 우리를 헤치려 했습니다. 메넬라오스여, 그대도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이 날의 우리는 이리굴에 들어간 어리 양 신세였으니까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혹은 힘을 써서 혹은 머리를 써서 내가 한 일은, 일일이
열거하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개전초에 한바탕 교전이 있은 당므, 적은 성문을 굳
게 닫고 우리에게 싸울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10년째 되는
올해에 이르러서야 교전다운 교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 아이아스여, 싸움밖에 모르는 그대는
이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소? 이 동안 그대가 한 일이 무엇이오? 나더러 무엇을 해쓴냐고 물어보
시오, 그리면 내가 대답하리다. 나는 적병이 내습할 경우에 대비해서 우군을 매복했고, 우리 진영
에다 참호를 팠으며, 이 기나긴 소강 상태를 견딜 수 있도록 군사들을 격려했고, 병참을 조달하는
방법과 무기 다루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우군이 나를 필요로 할 때는 사자로서 적진을 드나들었
소.
그 동안 우리의 사령관은, 꿈을 빙자하고 유피테르의 대신의 명이라면서 전투를 포기하고 병력
의 철수를 명했지요? 유피테르 대신의 현몽이었으니 아가멤논인들 어쩔 수 없었을 테지요.34) 이
때 아이아스 같은 장수는 마땅히 사령관의 제안에 맞서, 트로이아를 궤멸시키자고 주장했어야 하
는 일이 아닙니까? 아이아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니까요. 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아
이아스가, 이때의 철군을 저지하지 않았는지...... 왜 무기를 잡고, 우왕좌황하는 군사를 지휘하지
못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뽐내기부터 하는 아이아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가 무리한 일일까요? 마당히 철군을 저지하고, 우왕좌왕하는 군사들을 지휘
했어야 마땅할 아이아스는 이때 가장 먼저 전장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
니까? 아이아스여, 철군로자가 되어 귀향의 뱃길에 오르려는 그대를 보는 순간, 내가 얼마나 창피
했는지 그대는 알아야 하오. 그때 나는 고함을 질렀소.
<전우들이여,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다 떨어진 트로이아를 두고 물러서다니, 정신이 있
는 것이오, 없는 것이오? 10년 세월을 전
반환하는데 동의했다.
34) 유피테르 대신은 아가멤논의 꿈속에 나타나, 트로이아 군과의 대회전을 명했다. 아가멤논이
부하들의 사기를 위하여 일단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제안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연합군 장수
들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만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장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그대들이 가져가는 것이 무엇이오? 불명예밖에는 아무것도 없
소.>
나는 서글픔을 견디지 못해 고함을 지르면서, 앞서가는 자들 앞을 가로막고 승선하려는 자들을
돌려세웠소. 여러분, 아가멤논 사령관은 겁에 질린 연합군에게 집합을 명했습니다만, 텔라몬의 아
들은 꿀먹은 벙어리 모양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테르시테스35) 같은자도 장수들에게 제 의
견을 욕지거리로나마 나타내었다가 내손에 혼이 나지 않았던가요? 나는 분연히 일어나 적이 무서
워도 도망치듯이 철군의 무리에 합류하려던 내 전우들을 꾸짖어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해주었습
니다. 이때부터 이들이 세운 공은 다 내가 세운 공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도망치는 이들을 돌
려세웠으니까요.
자, 아이아스여, 우리 그리스 진영에 그대를 찬양하는 동시에 그대를 훌륭한 전우로 여기는 자
가 있겠소? 내게는 디오메데스가 있소. 디오메데스는 늘 자신의 공격을 나와 나누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고, 나를 인정하며, 날 진정한 전우로 여기고 있소. 수많은 그리스 군 가운데서 디오메데
스에 의해 우일한 전우로 꼽힌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아니오. 나는 디오메데스와
함께 저 위험한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갔소만, 이는 내가 제비뽑기를 잘못해서 간 것이 아니오.36)
우리는 적도,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으로 숨어들어가
35) 그리스 군 최고의 추잠이자 험구가인 대머리 용사. 철군을 망설이는 아가멤논 사령관에게 욕
지거리를 하다가 오디세우스에게 얻어맞았다.
36) 디오메데스는 야간에 트로이아 성을 정탐하러 나가면서 오디세우스에게 길라잡이를 부탁했다.
이들은 도중에 트로이아 쪽의 밀정 돌론을 잡아 죽이고 트라키아 왕 레소스의 진영을 유린했다.
아이아스는 그 이전에 헥토르와 대적할 장수를 정하는 제비뽑기에서 장수로 뽑힌 적이 있다.
우리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던 적장 돌론을 잡아 죽였소. 그러나 그냥 불문곡직하고 잡아죽인 것
은 아니오. 우리는 이 자로부터 자백을 받고, 트로이아가 무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에야 이 자를 죽였소. 이만하면 임무는 성공적이었고, 그대로 돌아와도 우리의 명예는 보
장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소. 그러나 우리는 이로써 만족하지 않고 레소스의 진영으로 들어가 이
자와 그 막료들을 죽였소. 그렇소,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는 적에게서 빼앗
은 병거를 타고 개선장군들처럼 돌아왔소. 적의 밀정은 공을 세울 경우 아킬레우스의 말을 받기
로 되어 있었다고 합디다. 그러니 이 밀정을 잡아죽인 나에게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만일에 여러분이 나에게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준다면 아이아스는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37)
뤼키아 사람 사르페돈의 부하들을 이 칼로 풀 베듯 했다는 말을 구태여 해야 하겠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하기로 합시다. 나로 사로페돈의 부하들 중, 이피토스의 아들 코이라노스, 알라스토르
와 크로미오스, 알칸데르와 하일로스, 노이몬과 프뤼타니스를 죽였습니다. 토온관 케르시다마스,
카로프스, 그리고 무정한 운명의 손에 끌려 내손으로 넘어온 엔노모스를 피의 제물로 삼았으며,
그 밖의 이름도 없는 수많은 자들을 트로이아 성벽 아래서 저승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 나 역시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위치를 보십시오. 보시면 이 부상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상인가를 아실 것
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이렇게...... 옷을 걷어올릴 테니, 여러분을 위해 싸워온 이 가슴
을 보십시오. 나는 이렇게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텔라몬의 아들은 그 긴 세월을 싸웠는데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몸에는 흉터가 없습니다.
아이아스는 우리 그리스 함대를 지키느라고 트로이아 군대와도 싸웠고, 유피테르 대신과도 싸
웠다38)는 주장을 펼 수도 있습니다만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나도, 아이아스가 싸웠다는 것
은 인정합니다. 아이아스는 분명히 저들에게 무기를 겨누었습니다. 나는 남의 공을 낮추어 보려고
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아스가 혼자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이아스는 마땅히, 자기가 혼자서 세웠다고 하는 공을 여러분에게도 나누어주
37) 아이아스는, 만일에 이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에게 무기를 준다면 디오메데스의 몫을 더 후
하게 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때 아이아스가 한 말을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이다.
38) 이 전쟁 기간 동안 유피테르는 주로 트로이아 쪽, 헥토르를 편들었다.
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트로이아 군이 우리 함대에 불을 지르려고 했을 때 이 트로이아
군세를 뒤엎은 사람은 아킬레우스로 변장한 파트로클로스30)지 아이아스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아
스는, 이뿐만 아니고, 우리의 사령관이 있었고, 여러분 장수들이 있었고, 또 내가 있었는데도 불구
하고 헥토르를 맞아 사운 것은 오직 자기뿐이었다근 ㄴ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헥토르를 대적
하는 장수를 가리는 제비뽑기에 아이아스가 뽑힌 것은 아홉번째의 제비뽑기가 아니었습니까? 자,
이제 내가 아이아스에게 묻겠습니다. 아이아스여, 용감한 영웅을 자칭하는 장수여, 헥토르와의 일
전은 대체 어떻게 끝났던가요? 헥토르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던가요?
아, 우리 그리스 군의 보루이던 저 아킬레우스가 쓰러지던 날을 어찌 눈물 없이 추억할 수 있
겠습니까? 물론 슬프고도 무서웠습니다만 나는 분연히 뛰어나가 쓰러진 그를 둘러메었습니다.
이 어깨로 둘러메었ㅅ브니다. 나는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둘러메었을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무기도 거두어들었습니다. 내게는 그의 신신을
둘러메고도 그의 무기까지 거두어 들 힘이 있었고, 여러분이 만일에 유품의 상속자로 나를 선택
하신다면 그런 명예에도 값할 만한 용기도 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이신, 저 바다의 여신이
그토록 아들에게 내리고 싶어했고, 그래서 마침내 내리신, 저 천품이 벼리어 낸
39)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인척, 헥토르가 그리스 군의 진지를 유린 할 때 명장 아킬레우
스가 아가멤논과의 불화를 핑계로 싸우지 않으려 하자 이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출정하여 그리스 함대로 불길에서 구하고 트로이아 군을 성안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헥토르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이 천상의 보물40)을 저 무식하고 거친 장수의 손에 맡기겠습니까? 내가 아이아스를 이렇듯이 험
담하는 데엔 까닭이 있습니다. 아이아스는 저 방패에 새겨진 참으로 의미심장한 부조, 가령 바다
와 땅과 땅에 산재하는 도시, 별 박힌 하늘, 플레아아데스 성단, 휘아데스 성단, 바다에는 들 수
없는 곰자리,41) 그리고 오리온의
40)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저 대장장이 신 불카누수에게 부탁하여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만들게 했다.
41) 큰곰자리, 작은곰자리는 유피테르의 사랑을 받다가 곰으로 변한 요정 칼
저 빛나는 칼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아스는, 그 의미와 가치를 알지도 못
하는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이아스는 내가 전쟁의 의무를 기피하고 있다가 남들이 시작해 놓은 이 전쟁에 뒤늦게
야 뛰어들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로써 저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를 나와 싸
잡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에, 자신의 본모습을 위장했으니 만큼 죄를 지은
셈입니다. 그리고 원정군에 늦게 합류한 것이 죄라면 우리는 둘 다 죄를 지은 셈입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나보다 늦게 원정군에 합류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그러면 나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 때문에 합류가 늦었고,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어머니 때문에 합류가 늦었습니다. 우리는, 개전초에는 각각 아내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바쳤지만 그 나머지 동안은 여러분을 위해 신명을 바쳤습니다. 여
리스토와 그 아들의 별자리다. 유노는, 자기가 벌을 내려 곰으로 전신시킨 칼리스토 모자가 별자
리로 박히는 것을 시샘하여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에게 부탁하여 이 모자의 별자리를 바다에는 들
지 못하게 했다.
러분, 나는 나 자신의 과오를 변명하는 데 실패할망정, 저 위대한 영웅이 나와 함께 매도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나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의
가면을 벗길 수 있었습니다만, 아이아스는 이 오디세우스의 가면을 벗기지 못했습니다.
아이아스가 저 난폭한 입심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도 못 됩니다. 아이아
스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로도 능히 여러분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요.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팔라메데스르르 무고한 나는 마땅히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고, 랄라메데스를
돌로 쳐죽인 여러분은 명예롭게 여겨야 합니까? 나우플리오스의 아들 팔라메데스는 자신의 무죄
를 석명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역시 그에게 불리한 증언만을 들은 것이 아니고 여러분 눈으로
그에게 불리한 증거물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적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
써 내 기소의 정당성을 입증했습니다.
필록테테스를 불카누스의 섬인 렘노스42)에 남겨놓았다고 해서 나만이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당치 않습니다. 필록테테스를 렘노스에다 남겨놓는 데 동의한 여러분도 여러분의 허물을
변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필록테테스에게, 오랜 항해와 이 항해 끝의 힘겨운 전투가
견디기 어려울 테니 렘노스에 남아 쉬면서 몸을 보양하고 훗날을 기약하라고 말했다는 사실 자체
를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충고는 나의 호의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좋았습니
다. 그러나 예언자는 지금, 트로이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
다.43) 그를 데리러 가는 일만은 나에게 맡기지 말아주십시오. 이 일을 하는 데는 나보다 아이아
스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아이아스라면 그 뛰어난 변설로든, 지혜로운 술수로든 이 병든 필록테
테스의 슬픔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전장으로 그를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모니
스 강의 물이 거꾸로 흘렀으면 흘렀지, 이다 산 나뭇잎이 다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우리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를 지켜주기로 약속하는 일이 있었으면 있었지, 내 재주가 여러분에게 하릴없게 되
고, 저 둔재 아이아스의 머리가 우리
쟤2)불카누스는 유피테르의 발길에 채어 지상으로 떨어졌는데, 이때 불카누스가 떨어진 곳이 바로
렘노스 섬이다. 그래서 이 섬은 종종 ‘불카누스의 섬’이라고 불린다.
43) 오디세우스가 생포한 트로이아 예언자 헬레노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는 데는 헤라클레스
의 활이 있어야 한다는 예언을 한 바 있는데, 이 활의 임자가 바로 필록테테스였다.
그러므로 내가 가야 합니다. 비록 필록테테스가 우리 연합군에 대해, 우리의 사령관이 아가멤논
왕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꺼질 줄 모르는 증오의 불길을 피워올리고 있다고 해도, 비록 그가
나를 저주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그를 부인했듯이 그 또한 나를 부인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에게로 달려가 이 전장으로 데려와 보이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적진으로 들어가 미네르바 여시의 성상을 모셔내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
을 것입니다. 트로이아의 예언자를 생포해 왔다는 사실도 아실 것이고 이 예언자로부터 트로이아
에 대한 신들의 뜻을 읽었다는 사실도 아실 것입니다. 포르투나 여신44)께서 도우신다면, 나는 미
네르바 여신의 성상을 손에 넣었듯이, 트로이아의 예언자를 손에 넣었듯이 저 헤라클레스의 활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런 이을 하는 능력을 두고 저 아이아스를 나에게 견줄수가 있
겠습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저 성상을 손에 넣지 않고는 트로이아를 손에 넣을 수 없다던 신들
의 뜻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성상을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때 용감한 아이
아스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힘과 용기를 뽐내던 여러분의 영웅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왜 두려워하고만 있었습니까? 어둠을 뚫고 적의 진지를 뚫고, 창칼의 숲을 헤치고, 높디높은 적의
성채는 물론이고 여신의 신전에까지 들어가 우리의 승리를 보증할 여신의 성상을 들고, 다시 적
진을 빠져나올 용사가 왜 오디세우스여야 했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해내지 못했다면, 테라몬의 아
들이 자랑하는 일곱 겹 소가죽 방패
여러분, 웅성거리면서 디오메데스 쪽을 보시지 않아도 됩니다. 디오메데스를 향하여 고개를 끄
덕이지 낳아도 됩니다. 여러분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디오메데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디오메데스는, 디오메데스 몫의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디오메데스여, 이것을 알아
야 하오. 방패로 그리스 함대를 지킬 때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소. 그대는 수많은 군사들과 그리스
함대를 지켰지만 나는 혼자서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갔소.
그러나 무기로 싸우는 자에게만 공이 있고, 머리로 싸우는 자에게는 공이 없는 것은 아니오. 따
라서 상은, 무기로 싸워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오. 그대가 만일에 이것을
안다면 그대에게도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소. 그대뿐만이 아니고, 저 아이
아스에 비하면 그래도 겸손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아이아스45) ㅕㄴ줄 데 없
이 용감한 에우뤼펄로스, 안드라이몬의 아들, 토아스, 이도메네우스, 이도메네우스와는 동향 사람
인 메리오네스, 아트레우스의 둘째아들 메넬라오스에게도 이 무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러나, 힘으로 말하면 천하의 장사들이요, 세운 공으로 말하자면 영웅들이었던 이들은 내 지혜의
값을 따져 그 권리를 나에게 양보했습니다.
아이아스여,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자면 그대의 오른팔이 필요하오. 그러나 그대에게는, 그대
의 갈 길을 일러줄 내가 필요하오. 그대에게는 힘은 있되 지혜가 없소만 나는 오래 전부터 지혜
로운 자로 불리던 사람이오. 그대는 싸울 수 있는 사람이오만, 아트레우스의 아들들46)은 나와 상
의한 연후에야 싸울 때를 정하오. 그대는 그대의 몸으로만 우리 그리스 군을 섬기지만 나는 온몸
과 온 마음으로 그리스 군을 섬기오. 키잡이는 노잡이보다 나은 법이고, 장수는 졸병보다 귀한 법
이오. 따라서 나는 그대보다는 낫고 그대보다는 귀한 사람이오. 나의 지력은 나의 체력보다 윗길
인데, 내 힘은 바로 이 지력에서 나오는 것이오.
그리스의 장수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저 아이아스에게 내리려던 상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여러분을 보살펴왔던 이 사람에게, 그 숱한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시기 바랍니다. 나에
게 이러한 명예를 내리시어 내가 세운 공적을 빛내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운명의 족쇄를 풀었고, 트로이아의 봉쇄를 가능하게 하여 저 험하디
험한 트로이아 성을 여러분의 손에 붙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것이 된 희망의 날에 기대어, 미구
에 폐허가 될 트로이아 성에 걸고, 우리가 적의 손으로부터 빼앗은 신들의 이름에 걸고, 우리가
지혜로운 조언을 따라 해야 하되 아직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 일에다 걸고 여러분께 말합니
다.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트로이아를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일
이 아직도 있거든 이 오디세우스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아킬레우스의 무기를 나에게 주지 않
으려거든, 여
45) ‘소 아이아스’라고 부리던 오일레우스의 아들 아이아스, 아킬레우스와 겨룰 수 있을 만큼
발이 빠른 장수였으나 후일 트로이아 공주 카산드라를 능욕했을 정도로 성정이 잔인하고 오만불
손했다. 몸집이 작아서 ‘소 아이아스’라고 불렸다.
46)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그의 아우 메넬라오스.
기에다 바치십시오!
오디세우스는 미네르바의 성상을 가리키며 연설을 끝마쳤다.
장수들은 오디세우스의 웅변에 술렁거렸다.웅변의 힘은 과연 위대했다.영웅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는 이 웅변가인 오디세우스의 차지가 되었으니까....
혼자서 헥토르를 대적했고,불과 창칼과,심지어는 유피테르 대신과 맞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아이아스는 분노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슬픔과 분노가,어느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던 아이아스를
정복한 것이었다.그는 칼을 뽑아들고 이렇게 외쳤다.
누가 뭐라고 하든,이 칼만은 내 것이다.아니다,오디세우스는 이 칼까지 요구할지도 모른다.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내 마음대로 쓸수 있는 것도 이것뿐이다.트로이아 군의 피를 부르던
이 칼이,이제 아이아스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정복할수 없는 이 칼의 주인,아이아스의 피를 부를
것이다.
아이아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급소인 가슴에다 칼끝을 대고 깊이 찔러넣었다.그의 팔은,찔러넣은
칼을 다시 뽑아내지 못했다.칼을 뽑아낸 것은 용솟음치는 핏줄기였다.피에 젖은 대지는,휘아킨토
스의 피에 젖은 대지에서 피었던 것과 똑같은 보랏빛 꽃을 피워올렸다.
꽃잎 한가운데엔,미소년 휘아킨토스의 죽음과 아이아스의 죽음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문자47)가 새
겨져 있었다.그 문자는, 휘아킨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탄식인 동시에 이 영웅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두 문자이기도 했다.48)
2 트로이아 왕비 헤쿠바의 최후
아킬레우스의 유품인 무기를 얻은 오디세우스는 휩시퓔레와 토아스의 이야기로 유명한 이야기로
유명한 나라,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섬49)으로 갔다.오디세우스가 이 섬으로 간
것은 헤라클레스의 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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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알파엘'
48)'알파엘'는 우리말의 '아아!'에 해당하는 말인 동시에 '아이아스'라는 이름의 두문자가 되기도
한다는뜻.
49)'렘노스'섬을 말한다.토아스 왕 시절에 이 섬나라 사람들은 베누스 여신 섬기기를 거절한 적이
있다.화가 난 베누스 여신은 이 섬 여자들에게 벌을 내려 여자의 몸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게 했
다.남자들이 이 악취를 견디지 못해 여자들을 멀리하자 여자들은 남자라는 남자는 모조리 죽였는
데,휩시퓔레만은 아버지 토아스를 배에 태워 멀리 도망치게 한 뒤에 이 섬나라의 여왕이 되었다.
아르고 원정대가 이 섬에 들렀을 때 이아손은 아버지를 구한 것을 아름답게 보아 이 휩시퓔레에
게 자식을 끼쳐 대를 잇게 한바 있다.
얻기 위함이었다.오디세우스가 그 활과 활의 새 주인을 데리고 트로이아로 돌아오고 나서 오래지
않아 그토록 오래 끌던 트로이아 전쟁도 끝났다.50) 트로이아 성은 함락되었고 프리아모스 왕은
죽음을 당했다.프리아모스 왕의 아내 헤쿠바는,모든 것을 잃고 나서 결국은 인간의 형상까지도 잃
었다.51) 헬레스폰토스가 좁으장하게 오므라지는 해협의 양안을,그 짖는 소리로 낭자하게 한 것이
다.그 내력은 이러하다.
일리움52)이 불바다가 되어 있을 동안 유피테르 신전의 제단은 연로한 프리아모스 왕의 피로 젖
었고,포에부스 아폴로의 제니인무당52)은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나왔다.제니는 하늘을 향해 기도
했으나 하릴없었다.트로이아 여자들은 불타는 신전에 모여,예부터 섬기던 신상을 부여안고 기도를
드렸으나 승리자인 그리스 군은 소중한 전리품인 이들을 사정없이 끌어내었다.아스튀아낙스54)는,
어머니55)와 함께 올라가,조국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 탑루에서 등을 떠밀
리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이윽고 북풍의 신 보레아스가 그리스 인들에게 향해를 재촉하며 함대의 돛을 바람으로 부풀렸다.
뱃사람들도 장수들에게 바람이 좋을때 배를 띄우자고 채근했다.트로이아 여자들은 조국 트로이아
의 해변에서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잘 있거라,트로이아여!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수 없구나. 우리는 이럿듯이 끌려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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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오디세우스는 디오메데스와,이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를 대동,이 섬으로 가서 필록
테테스를 데리고 트로이아로 돌아왔다.필록테테스가 이 활로 트로이아 전쟁의 불씨였던 파리스를
쏘아 죽이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트로이아 전쟁도 끝났다.
51)헤쿠바는 인간의 형상을 잃고 개가 되었다.
52)트로이아의 별명
53)트로이아의 공주인,아름다운 '카산드라'를 말한다.이 카산드라는 아폴로의 총애를 받고 예언하
는 능력을 얻었으나 끝내 몸을 허락하지 않았지 때문에 아풀로로부터,남을 설득하는 능력을 빼았
겼다.따라서 카산드라의 예언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카산드라가 오래 전부터 트로이아 전쟁을 예
언했지만 아무도 이를 믿지 않는다.카산드라가 오래 전부터 트로이아 전쟁을 예언했지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카산드라는 미네르바 여신의 신전에 숨어있다가 소 아이아
스에게 발각되어 능욕당하고 본토로 끌려갔다가 클뤼타임네스트라 손에 죽었다.
54)헥토르와 안드로마케 사이에서 난 어린아들.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손에 죽음을 당
했다.
55)안드로마케.트로이아가 멸망한 뒤 네오프톨레모스의 노예로 끌려갔다가 네오프톨레모스의 사후
에는 그 왕국을 물려받은 헬레노스의 아내가 되었던,팔자가 기구했던 여인.
여자들은 조국의 흙에 입맞추며 눈물을 뿌렸다.그러고는 불타는 성채를 돌아다보며 배에 올랐다.
마지막으로,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배에 오른 것은 트로이아의 왕비 헤쿠바였다.헤쿠바는 아들들의
무덤에 있다가 끌려왔던 것이었다.아들들 무덤 앞에 엎드려 있던 것을 오디세우스가 억지로 끌고
왔던 것이었다.그러나 헤쿠바는 어느새 아들 헥토르의 뼈를 수습하여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다.헥
토르의 무덤하ㅍ에다 백발이 다된 자기의 머리채를 한줌 잘라 바치고 애곡하면서 아들의 뼈를 수
습했던 것이었다.헤쿠바의 머리채는,어머니가 눈물과 함께 영웅인 아들의 주검에 바친 제물이었던
것이었다.
한때 트로이아가 있던 프뤼기아 땅 맞은편에는 트라키아 인들이 사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옹은 폴뤼메스토르였다.프리아모스왕은,트로이아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막내아들 풀뤼
메스토르에게 맡긴 바 있다.만일에 아들을 보낼 때 많은 돈을 주어 보내지 않았더라면 프리아모
스 왕의 계획은 먼 앞날을 내다보고 세운 아주 훌륭한 계획이라고 할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프
리아모스왕의 막내아들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다.돈이라는 것은 성한 사람도 유혹하는 법인데 마
음이 맑지 못한 사람을 그대로 둘 까닭이 없다.트로이아가 패망하자 사악한 트라키아 왕은 칼을
들어,제 품안으로 들어와 있는 트로이아 왕자의 목을 따버리고는 범죄의 증거를 인멸할 요량으로
시체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아가멤논은,바람이 자고 바다가 고요해질 때를 기다릴 마음에서 함대를 트라키아 해변에다 대게
했다.함대가 해변에 정박한 지 오래지 않아 갑자기 땅이 갈라지면서 아킬레우스의 유령이,생시와
똑같이 엄장한 모습으로 아가멤논 앞에 나타났다.아킬레우스 유령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칼을
뽑아 들이대면서 아가멤논을 위협했다.
나를 두고 너희 그리스 함대는 떠나는구나.내 공적에 대한 그대들의 찬사는 나와 함께 묻어버리
고 떠나는구나.이럴 수는 없다.내 무덤은 내 몫의 공적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그러니 폴뤽세나
를 제물로 바쳐 아킬레우스의 혼을 위로하고 떠나거라!
아킬레우스의 전우였던 아가멤논은 유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폴뤽세나를 제물로 바칠 준비
를 했다.가엾은 왕비 헤쿠바의 희망이었던 폴뤽세나는,아가멤논의 명령 일하에 어머니 품에서 끌
려나왔다.그 지경에 이르렀더도 폴뤽세나는 용감했다.폴뤽세나는 당당하게 자신이 희생제물로 바
쳐질 화장단 앞으로 걸어갔다.화장단 앞에 선 폴뤽세나는,자신이 희생제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세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칼을 뽑아든,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폴뤽세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빨리 나를 찔러 내 고귀한 피를 보아라.몸을 사리지는 않겠다.
내 목을 찔러도 좋고 내 가슴을 찔러도 좋다....
폴뤽세나는 옷을 찢어 가슴을 드러내고는 말을 이었다.
이 폴뤽세나는 마침,남의 노예로서는 죽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그러나 너희가 알아야 하는
것은,이런 식으로 가라앉힐 수 있는 신의 분노는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그러나 내게 마지막 소원
이 하나 있다.내 어머니에게만은 내가 죽었다는 것을 당분간 알리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내
어머니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이겠지만,내 죽음으로 크게
상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어머니가 상심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 편하게 죽을 수가 없을 것 같
아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다.부탁할 것이 또 한가지 있다.내 말에 일리가 있는 듯하거든,나는
처녀의 몸이니 내 주검에는 남정네의 손이 닿지 않게해주기 바란다.바라건대 자유인 처녀의 몸으
로 스튁스의 땅으로 내려가게 해주기 바란다.나를 죽여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
면 그 사람에게 말하겠다.
노예를 죽이는 것보다야 자유인을 죽이면 더 낫지 않겠는가.이 말을 하는 것은 노예 폴뤽세나가
아니고 프리아모스 왕의 딸인 자유인 폴뤽세나다.마지막 소원을 더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
하겠다.만일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 어머니에게 알려야 할 경우 내 주검은,다치지 말고 그대
로 내 어머니에게 돌려주기 바란다.내 어머니는,물론 돈이 있으면 돈으로도 사실 것이지만,돈이
없으니까 아마 눈물로 내 주검을 사실 것이다.
폴뤽세나의 말은 이로써 끝났다.폴뤽세나가 참고 있는 눈물을,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대신해서 흘
렸다.이 희생제를 집전하던 제관조차도 눈물을 흘렸다.그는 폴뤽세나가 찌르라고 가슴을 들이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참을 망설인 연후에야 장수들의 독촉에 못 이겨 폴뤽세나의 가슴을 찔렀다.
폴뤽세나는 무릎을 꺾고는 땅바닥에 쓰러졌다.그러나 풀뤽세나는 표정만은 끝까지 평온했다.심지
어는 쓰러지면서도 가슴을 열어젖힌 채로 죽을까봐 옷깃을 여몄을 만큼 끝내 요조숙녀의 품위를
지켜내었다.
트로이아 여자들은 폴뤽세나의 시신을 운반하면서,적의 손에 죽은 프이아모스의 자녀들 수를 헤
아리며,한 가문이 겪은 유례를 보기드문 비극을 슬퍼했다.그들은 프리아모스 가의 처녀와,얼마전
까지만 해도 왕비였고,왕가의 종부였으며,아시아의 상징이었으나,졸지에 포로들 중에서도 가장 비
참한 포로가 된 헤쿠바의 팔자를 애곡했다.만일에 헤쿠바가 헥토르를 낳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
는 구태여 이 헤쿠바를 자기 포로로 삼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헤쿠바를 노예로 삼은 것은 결국 그 아들 헥토르인 셈이다.
이제는 용기도 생명도 떠나버린 딸의 시신을 안은 어머니 헤쿠바는,지아비를 위해,자식들을 위해,
조국을 위해 흘리던 눈물을 자기자신을 위해 흘렸다.헤쿠바는 딸의 가슴에 난 상처에 소금기가
밴 눈물을 쏟으며 죽은 딸의 입을 입맞춤으로 봉하고 가슴을 쳤다.얼마나 쳤던지 헤쿠바의 가슴
은 이미 멍들어 있었다.헤쿠바는 그 멍든 가슴을 쥐어뜯으며,울음에 섞어 이렇게 외쳤다.
아가야,이 어미의 희망이던 아가야! 너까지 이렇듯이 죽었으니,이제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네 몸에 난 상처는 너의 상처이자 나의 상처이기도 하다.다시는 자식이 피 흘리는 꼴을 보
지 않으려 했더니 결국은 너마저 피를 흘리고 죽었구나.너만은,칼날아래 이슬되는 신세만은 면할
줄 알았더니,결국 너마저 이런 신세가 되는구나.수많은 네 오라비를 죽인 아킬레우스,트로이아를
잿더미로 만든 아킬레우스가 필경은 너까지 이렇게 죽이고,이 어미를 자식없는 늙은이로 만드는
구나.아킬레우스가 파리스와 포에부스56)의 화살에 쓰러질 때 나는,이제 아킬레우스를 두려워할
일은 없겠다 했더니,아킬레우스는 죽은 다음에도 사람을 죽이는구나.아킬레우스는 무덤에 들고도
이렇듯이 우리 집안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않으니 우리는 이제 그 자의 무덤까지도 두려워해야
하는구나.내가 아이아코스의 손자57)를 위하여 자식을 낳았다더니?그 자의 손에 트로이아는 잿더
미가 되었고,우리가 더불어 아파하던 조국의 운명도 이제는 끝이 났구나.그러나 나의 트로이아는
아직 무너지짖 않았고,나의 슬픔 또한 끝나지 않았다.내 지아비,내자식,내사위,내며느리 덕분에 그
땅의 왕비이자 종부였던 내가
그토록 많은 자식을 잃은 내가,어찌하여 이 어미의 슬픔을 가까이서 위로해 줄 너마저 잃어야 하
느냐?어찌하여 너마저 적장의 죽음에 제물로 바쳐야 하느냐....그래,나는 너를 적장의 죽음에 제물
로 바친 꼴이구나.아,참으로 사나운 내 팔자여,나는 도대체 왜 살아 있는 것이냐?나는 왜 살아서
어정거리고 있는지 모르겠구나.늙고 병든 내가 무슨 좋을 꼴을 보겠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구
나.무정한 신들이시여,왜 이 늙은이의 죽음을 유예하시는지요? 저에게 더 보아야 할 주검이 있나
이까?
트로이아가 잿더미가 되고 나서 죽은 프리아모스 왕을 누가 복많은 임금이라고 했던가.그러나 그
말이 옳구나.그분은 네가 죽는 걸 보기전에,당신의 왕국과 당신의 목숨을 동시에 잃었으니....아가
야,너는 일국의 공주이니,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주게 하고 네 아버지 무덤 옆에 묻히게 해주어야
마땅하나,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너의 죽음에 어미가 바칠수 있는 제물은 눈물과 이국의 모래
뿐이구나.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이ㅎ었다.남아 있는 것은 오직 폴뤼도로스뿐,어미가 그래도 죽지
못하는 것은 이 풀뤼도로스가 있기 때문.폴뤼도로스,불쌍한 아이야,한때는 한 나라의 막내왕자이
더니 지금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국의 땅,트라키아 왕에게 몸붙여 사는 폴뤼도로스,이 어미가 살
아 있으니 이 어미를 기다리거라.그러나저러나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이냐?물로 이 아이의 상처
와,피투성이가 된 이 아이의 얼굴을 씻어주지 않고....
말을 마친 헤쿠바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나이 많은 여자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
음걸이로 해변을 서성거렸다.한찬을 그렇게 서성거리던 헤쿠바는 바닷물을 뜰 요량으로 트로이아
여인들에게 소리쳤다.
항아리를 갖다다오.바닷물이라도 좀 길어가게
헤쿠바는 이렇게 소리치다가 바닷가로 밀려와 있는 폴뤼도로스의 시체와 폴뤼도로스를 난자한 트
라키아 왕의 칼자국을 보았다.트로이아 여자들은 외마디소리를 질렀다.그러나 헤쿠바는 아무 소리
도 내지 못했다.슬픔과 고통이 목구멍을 막고,눈물을 말려버린 것이었다.바위처럼 버티고 선 채
헤쿠바는 모래 바닥과,하늘과,죽은 아들의 얼굴과,아들의 몸에 난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이들
의 몸에 난 상처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었다.표정이 굳어지는 것으로 보아 복수를 결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헤쿠바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치를 떨면서,자신이 예전과 다름없는 일국의 왕비이기
나 한 것처럼 복수를 결심하고,복수의 방법을 생각하는 데 온 마음을 쏟았다.잡은 먹이를 다른 짐
승에게 도둑맞고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서성이다가 이윽고 그 도둑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암사자
처럼,헤쿠바도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힌 채,나이도 자기가 처한 형편도 잊고,배은망덕하게도 자기
자식을 죽인 트라키아 왕 폴뤼메스토르의 궁전을 향하여 걸음을 옮겨놓았다.궁전에 이른 헤쿠바
는,자기 아들에게 줄 황금이 남아 있다면서 폴뤼메스토르 왕의 알현을 청원했다.폴뤼메스토르 왕
은,한번 황금을 빼앗아본 사람이라
헤쿠바여,지체하지 말고 아들에게 줄 황금을 내게 건네주시오.신들께 맹세코,그대가 지금 나에게
건네주시는 황금,그대가 기왕에 주어 보내신 황금은 모두 아드님의 것이 될 것이니
헤쿠바는 거짓 맹세까지 하는 이 폴뤼메스토르 왕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그러
다가 궁전까지 함께 온 트로이아 여자들을 부르면서 헤쿠바는 왕에게 매달려 손가락을 황의 두
눈에다 찔러넣고는 눈알 두개를 한꺼번에 뽑아버렸다.헤쿠바가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분노가 헤쿠
바에게 기이한 힘을 샘솟게 했기 때문이었다.
헤쿠바는 더러운 왕의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눈알이 빠진 자리를 찔렀다.
왕이 이 지경이 되자 트라키아 백성들은 떼를 지어 트로이아 여자 헤쿠바를 공격하러 왔다.그들
은 헤쿠바를 향하여 창과 돌을 던졌다.
헤쿠바는 날아오는 창과 돌을 손으로 막으면서 트라키아 백성들에게 사정을 말하려고 했다.그러
나 헤쿠바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였다.이런 일이 벌어졌던 땅에는,지금
도 이 일을 상기시키는 지명이 붙어 있다.59) 개가 된 헤쿠바는 과거의 고통을 잊지 못했던지 트
라키아 땅을 방황하며 짖었다.불쌍한 트로이아 왕비의 비극은 트로이아 유민들은 물론이고 수많
은 그리스 인들,심지어는 신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유피테르 대신의 누이이자 아내인 유노 여신
까지도 헤쿠바의 불행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3 멤논의 주검에서 날아오른 새들
아우로라60)는 트로이아 백성들만큼 트로이아를 사랑했으나 트로이아의 패망이나 헤쿠바의 슬픈
이야기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그보다 훨씬 절실한 슬픔,말하자면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장밋빛 옷을 입고 다니는 여신은 아들 멤논61)이 프뤼기아 벌판에서 아킬레
우스의 창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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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헬레스폰토스에서 가까운 이곳의 지명은 '퀴노스세마',즉 '개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60)그/에오스.'새벽'의 여신.
61)아우로라 여신과,매미로 전신한 이집트 왕 티토노스 사이에서 난 아들.
프리아모스 왕의 조카로 이 전쟁을 도우러 왔다가 아킬레우스 손에 죽음을 당했다.
아우로라 여신이 아들 죽는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순간 아침은 창백해졌고 날빛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멤논의 시신이 화장단 위로 오르자 아우로라 여신은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
개를 돌렸다.아우로라 여신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로 유피테르 대신에게로 달려가 그의 발치
로 몸을 던지고는 눈물로 애원했다.
황금빛 천궁에 사는 신들 가운데 지위가 가장 낮은 여신이 저라는 것은 압니다.저에게 바친 신전
이 가장 적은데,제가 이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그러나 지위야 낮지만 여신은 여신입니다.그러나
저는 성지를 주십사고 온 것도 아니고 신전을 지어주시라고 온 것도 아니며,인간에게 저를 제사
지낼 제일을 베풀어주십사고 온 것도 아닙니다.대신이시여,저는 여신인지라 비록 힘이 미약합니다
만,제가 대신을 위해서 한 일을 잘 아시지요?저는 밤이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정하여 시각이 되
면 밤을 쫓고 아침을 부르는 일을 합니다.그러니 대신 께서 저에게 상을 내리실 일이지 모르는
척하실 일은 아닙니다.지금 이 아우로라는,세운 공을 빙자하여 상을 바랄 입장이 아닙니다.이 아
우로라가 여기에 온 것은,제 아들 멤논이 제 숙부를 도운답시고 분연히 일어났다가 아까운 나이
에,저 아킬레우스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다 대신께서 주장히시는 섭리에 따른 일인데 모
른다고야 하지 않으시겠지요?대신이시여,신들의 지배자이신 대신이시여,바라건데 제 자식에게도
영광을 좀 나누어주시어,상처입은 어미의 마음을 달래주십시오.그러면 제 마음에 위로가 되겠습니
다.
유피테르 대신은 그러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멤논의 시신을 태우던 화장단이 불길 한가운데로 내려앉았다.여기에서 오른 연기가 구름
을 가렸다.강이 내뿜은 안개가 햇빛을 가리는 형국이었다.내려앉은 화장단에서 솟은 검은 재는 하
늘로 날아올라가 덩어리로 뭉치면서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졌다.불길의 열기와,튀어오르는 불꽃이
하나의 생명을 지어낸 것이었다.불의 가벼운 기는 이 생명을 얻은 형상에 날개를 부여했다.얼핏보
기에는 새 같았다.과연 새였다.이 새가 날갯짓하며 날기 시작하자,같은 물질에서 같은 과정을 거
친 수 많은 다른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어지러이 날기 시작했다.이 새들은 세 차례나 화장터
상공을 선회하며 한목소리로 시끄럽게 울다가 네 바퀴째 돌 즈음에는 두 편으로 갈리었다.
두 편으로 갈린 이 새들은,부리로 쪼고,날개로 치고,발톱으로 할퀴며 싸우기 시작했다.저희들 근본
이,용감한 트로이아 전쟁용사 멤논을 태운 재라는 사실을 아는지,이들은 이 영웅에게 제물이라도
드리는 듯이 화장터 상공에서 싸우다 떨어져 멤논의 시신이 탄재에 저희 몸을 파묻었다.멤논의
시신을 태운 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들을 이 새를<멤노니데스>62)라고 부른다.
태양이 황도대의 열두 궁을 돈 뒤에도63) 이들은 다시 모여 저희 아버지외는 멤논의 죽음을 추모
하며 그렇게 싸우다 죽었다.
요컨데,다른 사람들이,개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도는 헤쿠바의 신세를 슬퍼하고 있을 때도 아우로라
는 자기 몫의 슬픔에 잠겨 있었다.이 아우로라는 지금도 온 세상에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64)을 뿌리고 있다.
4 아니오스의 식객이 된 아이네이아스
트로이아 성이 잿더미가 되었다고는 하나 트로이아 백성의 희망마져 잿더미가 된 것은 아니었다.
베누스 여신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65)는 한쪽 어깨에는 트로이아의 수호 성상,한쪽 어깨에는 성
상만큼이나 소중한,불구자 아버지를 메고 길을 나섰다.효성이 지극한 아이네이아스는 그 많은 금
은보화도 마다하고 이 아버지와 아들 아스카니오스만을 대동하고 유민들과 함께,죄많은 왕 폴뤼
메스토르가 다스리던 나라,폴뤼토로스의 피로 더럽혀진 트라키아를 지나고 안탄드로스 항을 지났
다.다행히도 바람과 조수는 순조로워 그는 큰 고생하지 않고 일행과 함께 아폴로의 도시인 델로
스에 이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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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멤논의 딸들'
63)'1년이 지난뒤에도'라는 뜻
64)새벽 이슬
65)베누스가 인간인 안키세스와 사랑을 나누자 유피테르 대신은 안키세스에게 ,만일에 여신과 사
랑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누설하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말한다.그러나 안키세스는 이 비밀을 누설
해했다가,우피테르의 벼락을 맞는다.안키세스는,베누스가 이를 막아준 덕분에 목숨은 가까스로 건
지나,이때 벼락을 맞은 일로 평생 힘을 쓰지 못하는 불구자로 살게 된다.여기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영웅 아이네이아스다.그리스 인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는 별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
지 않는 이 아이네이아스가,후일의 로마 신화에서는 신화적인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은,바로 아이
네이아스가 트로이아 유민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로마 건국의 기틀을 닦게 되기 때문이
다.베르길리우스의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는 바로 이 아이네이아스의 행적을 노래한 것이다.
당시 델로스 왕은,왕과 아폴로 신전 사제를 겸하는 아니오스였다.아니오스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을
궁전이자 신전인 자기집으로 맞아 환대하고는 그 도시,유명한 신전,그리고 라토나 여신이 아폴로
신과 이아나 여신을 낳을 때 붙잡았다는 저 유명한 두 그루의 나무도 보여주었다.트로이아 유민
들은 제단에 향불을 피우고 포도주를 부어 올렸다.이윽고 트로이아 유민들은,제물로 잡아 바친 황
소가 다 타자 다시 궁전으로 되돌아왔다.아니오스 왕은 손님들에게 편한 의자를 권하고 케레스
여신의 선물인 빵과 포도주를 넉넉히 차려내게 했다.
안키세스가 아니오스 왕에게 이런 말을 했다.
복 받으신 포에부스 신의 사제시여,제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지난번에 여기에 왔을
때는 네 자매의 따님과 아드님을 뵌 것 같은데요
그러자 아니오스가 흰 머리끈66)을 맨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다.
위대한 영웅이시여,잘못 보신 것이 아닙니다.그때 영웅께서는,다섯 남매의 아비인 저를 보셨습니
다.그러나 사람의 팔자 시간 문제라더니,지금은 무자식 신세가 되었습니다.아들이 있기는 있지요
만,
지금은 이 아비 곁을 떠나 아비를 대신해서 안드로스라는 제 이름이 붙은 도시 안드로스를 다스
리고 있으니 없는 것과 별로 다르지 못합니다.델로스의 신이신 아폴로께서는 제 아들에게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을 주셨고,박쿠스 신께서는 제 딸들에게 이와는 좀 다른,엄청난 은혜를 내리셨습니
다.정말 소원하기도 황송스럽고,기도하기도 송구스러운 은혜를 내리셨던 것이지요.딸들이 입은 은
혜가 무엇인고 하니,이 아이들이 만지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옥수수가 되게 하고,무엇이든지 포도
주가 되게 하며,무엇이든지 올리브 기름이 되게 하는 능력이었습니다.이 아이들에게 이것이 얼마
나 어마어마한 재산이었겠습니까?제 딸들이 이런 능력을 얻은 지 오래지 않아 귀국을 침략했던
저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이소문을 듣고 제 딸들을 이 아비의 품에서 빼앗아갔습니다.안
가겠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간 것이지요.굳이 말씀드리자면 저희들 역시 귀국을 치는 이 무
지막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었던 것이지요.아가멤논은 제 딸들에게,하늘이 내린 은
혜를 이용해서 그리스 함대에 탄 군사들 멀일 양식을 마련하라고 했답니다.그러나 제 딸들은 함
대에서 도망쳐 제각기 숨기 쉬운 곳
66)제관이라는 표적
은 에우보이아로 도망쳤고 둘은 저희들 오라버니의 나라인 안드로스에 가서 숨었던 것이지요. 그
런데 아가멤논은 이 안드로스에 군대를 보내어 제 딸들을 내놓지 않으면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
라고 제 아들 안드로스를 위협했습니다. 제 아들인 안드로스 왕은, 평소에 누이들을 끔찍이도 위
하는 오라비였으나 대가 약한지라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누이를
이들에게 내주었더랍니다. 이 대가 약한 녀석을 어쩌면 좋습니까? 누가 이 녀석을 용서할 수 있
겠습니까? 안드로스에는 트로이아 백성들을 격려하며 10년 동안이나 그 지겨운 전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던 아이네이아스나 헥토르 같은 용장이 없었던 것이지요. 사로잡힌 딸들은, 족쇄와 수
갑을 차게 되기 직전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저희들의 수호신이신 박쿠스께 빌었더랍니
다.
<아버지이신 박쿠스시오, 저희들을 도와주소서!> 하고요.
박쿠스 신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을 도와주셨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이들을 파멸시킨 것까지 도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씀입니다만...... 저는, 이들이 어떻게 인간의
형상을 잃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소상하게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딸들의
비참한 말로에 대해서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 딸들은, 겨드랑에서 날개가 나오면서 눈같이
흰 비둘기로 둔갑했다고 합니다. 비둘기가 장군의 부인이신 베누스 여신의 신조이니, 아마 잘 아
시겠지요」
아니오스 왕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키세스 일행은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상을 물
리고는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이들은 신탁전으로 가서 아폴로의 신탁을
받아보았다. 신탁은 이들에게, 먼 조상들의 고향인 옛 모국의 해변을 찾아가라는 뜻을 전했다.
아니오스 왕은 이들을 동행하여 한동안 여행을 함께 하다가 이별 할 때가 되자 안키세스에게는
왕홀을, 안키세스의 손자에게는 겉옷과 화살통을, 아이네이아스에게는 술잔을 하나 선물로 주었
다. 이 술잔은 테바이에 살던 아니오스 왕의 친구 테르세스가 선물로 보낸 것이었다. 이니오스 왕
에게 이 선물을 보낸 사람은 테르세스였지만 이를 만든 사람은 휠레의 알콘이라는 사람이었다.
알콘의 술잔에는 한 도시에 관한 긴긴 이야기가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67) 로마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아 인들의 먼 조상인 다르다노스 인들은 이탈리아에서 트로이아
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68) 아이아스의 일곱 겹 소가죽 방패를 만든 유명한 갓장이 튀키오스도 이 휠레 사람이었다.
이 도시에는 성문이 일곱 개나 있었다. 따라서 도시 이름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보든 어느
도시인지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성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장례식 광경이었다. 무덤이, 불붙은
화장단이, 가슴을 드러낸 채 머리를 산발하고 애곡하는 여자들이 보였다. 샘물이라는 샘물은 모조
리 말라버렸다고 탄식하는 물의 요정들도 보였다. 잎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나무도 보였고, 풀
을 찾으러 바위산을 헤매는 양떼도 보였다. 조각가가 테바이 성 한가운데다 새겨놓은 것은, 오리
온의 두 딸이었다. 오리온의 두 딸은 베틀의 북을 뽑아들고 그 뾰족한 모서리로 저희 몸을 난자
하고 있었다. 한 딸의 손길은 남정네의 손길처럼 정확하고도 단호했고 또 한 딸의 손길은 겨냥도
정확하지 못했고 손질도 단호하지 못했다. 이들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것이었다.
69) 테바이 성에는 일곱 개의 성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 광경은 테바이에 역병이 번
지고 있을 당시의 상황을 그린 것인 듯하다.
70) 미남 사냥꾼 오리온에게는 메티오케와 메니페라는 두 딸이 있었다. 이 두 딸은, 직조의 여
신 미네르바로부터는 베 짜는 기술을, 아름다움의 여신 베누스로부터는 미모를 얻었으나, 테바이
에 역병이 창궐할 당시 두 처녀가 제물로 몸을 바치면 백성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
고는 북으로 저희 몸을 난자하고 백성들을 구했다. 저승의 왕인 플루토와 프로세르피나는 이들을
기특하게 여겨 하늘의 유성으로 전신하게 했다.
테바이 백성들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읍 한복판에 차린 화장단에다 올리고 화장하고 있
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화장단을 둘러싸고, 슬픔에 잠기 얼굴을 하고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조에는 또, <코로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두 청년이 어머니의 재로부터 솟아나와 장례
행렬을 선도하는 광경도 보였다. 청동술잔에는 대개 이런 사연의 부조 이외에도 주둥이 부분에는
아칸사스 잎이 나란히 부조되어 있었다.
트로이아 유민들로 주인인 아니오스 왕에게 이에 못지않은 물건을 답례품으로 주었다. 트로이
아 인들이 아니오스 왕에게 준 것은 사제가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향합과, 제물을 담을 수 있는
접시와 금과 진주로 치장한 왕관이었다.
5. 스퀼라
트로이아 인들은 이곳에서, 트로이아 인들이 테우케르의 자손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테우게르
의 땅인 크레타로 건너갔다. 그러나 트로이아 인들은 기후가 맞지 않아 이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다시 배를 바다로 내몰았다. 이들이 성읍이 많은 이 섬을 떠나면서 겨냥한 곳은 아오소니아였다.
그러나 폭풍이, 바다에 떠 있는 이 영웅 아이네이아스 휘하의 유민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이들은
잠시 스트로파데스항에 피항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하르퓌아이 중 하나
인 아일로가 이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떠난 유민들은 저 모사 오디세우스가 지
배하던 둘리키움 항구와, 이타카, 사모스 섬, 네리토스 왕국을 차례로 지났다. 유민들은 신들이 싸
운 곳이라는 암브라키아 땅과, 원래는 판관이었다는 석상도 보았다.
71) ‘코로나이’는 ‘코로니스들’, 혹은 ‘코로노스의 자식들’이라는 뜻이다. 오리온의 별명
이 ‘코로노스’라는 설에 따르면 이 말은 ‘오리온의 자식들’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아폴로
의 화살을 맞고 죽어 화장당한 처녀의 이름이 ‘코로니스’(이때 까맣게 탄 몸에서 꺼낸 아폴로
의 아들이 저 유명한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였다)였다는 사실과, 유피테르의 벼락을 맞고 까맣게 타
죽은 세멜레의 복중에도 자식이 있었는데, 이 아이를 기른 요정의 이름이 ‘코로니스’(이때 까
맣게 탄 세멜레의 몸에서 나와 코로니스 손에 자란 유피테르의 아들이 저 유명한 주신 박쿠스였
다)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이름은 화장 및 재생과 깊은 관계가 있을 듯하다. 이 ‘코로니스’
라는 말은 ‘까마귀’라는 뜻이기도 하다.
72) ‘아칸사스’ 혹은 ‘아칸토스’는 엉겅퀴 비슷한 식물, 코린토식 기둥에서 자주 볼 수 있
는 장식 무늬다.
73) 괴조 하르퓌아이의 섬
74) 이 땅을 두고 아폴로와 디아나, 그리고 영웅 헤라클레스가 소유권을 주장한 일이 있다. 이
때 판관으로 뽑힌 크라갈레오스라는 사람은 소유권이 헤라클레스에게 있다고 판정했다가 아폴로
의 성미를 건드려 둘로 전신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까운 악티움에는 유명한 아폴로의 신전이
있다.
이 땅은 악티움에 있는 아폴로의 신전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유민들은, 말하는 참나무가 있다는
도도나 신전도 구경했고, 카오니아 만도 구경했다. 카오니아 만은, 저 몰로소스 왕의 아들들이 새
로 전신하는 덕택에 저희들 손으로 지른 불길에서 날아 나올 수 있었다는 전설로 이름있는 곳이
었다. 이 땅은 악티움에 있는 아폴로의 신전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유민들은, 말하는 참나무가 있
다는 도도나 신전도 구경했고, 카오니아 만도 구경했다. 카오니아 만은, 저 몰로소스 왕의 아들들
이 새로 전신하는 덕택에 저희들 손으로 지른 불길에서 날아 나올 수 있었다는 전설로 이름있는
곳이었다.
이런 곳을 두루 거친 이들은 이윽고 좋은 과실이 많이 난다는 파이아케스 인들의 나라를 찾아
갔다가 다음으로는 에피로스에 있는 트로이아와 흡사하게 꾸민 도시국가 부트로토스에 이르렀다.
당시 이 나라의 왕은 프라아모스의 아들인 예언자 헬레노스였다. 이곳에서 헬레노스로부터 이들
의 장래에 관한 예언을 들은 이들은 다시 시켈리아를 바라고 돛을 올렸다.
이 섬에는 세 개의 곶이 바다에 돌출해 있었다. 즉 비구름을 머금은 남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돌출해 있는 페롤로스가 그것이었다. 트로이아 유민들이 배를 댄 것은 이 페롤로스 곶이었다. 유
민들은 조수의 힘을 빌리고 노를 저어 해질녘에는 배를 장클레 해변에다 댈 수 있었다. 좌우로는
각각 뱃사람들을 위협하는 스퀴라와 카뤼디스가 보였다. 카뤼디스는 아시다시피 소용돌이로 배를
감아들여 바다 밑까지 끌고 들어갔다가는 다시 토해내는 무서운 괴물이고, 스퀼라는 허리에 개
대가리가 주렁주렁 달린 괴물이다.
75) 도도나에는 유피테르의 신탁전이 있다. 아폴로의 신탁전에서는 제관이 아폴로의 뜻을 전하
지만 이 도도나의 유피테르 신탁전에서는 참나무가 유피테르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76) 몰로소소 왕 무니코스의 세 아들은 예언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자 놀란 김에 저희들 집에다 불을 지르는 실수를 범했다. 다행히 유피테르 대신이 새로 전신시
켜 준 덕분에 이들 네 부자는 불길에서 날아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77)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들렀다가 환대를 받았던 지상의 낙원 같은 나라.
마음보다 더 빨리 달리는 배로 오디세우스를 고향 이타카까지 실어다준 사람들도 바로 이 파이아
케스 인들이었다.
78) 트로이아가 패망하자 조국을 배신한 헬레노스는 아킬레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이곳으로 와서 트로이아와 비슷한 나라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왕이었으나 그가
죽자 헬레노스가 왕위에 올랐다.
79) 시칠리아 섬.
80) 시칠리아 섬의 옛이름.
이 스퀼라는, 그런데도 얼굴만은 처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허다한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듯이,
이 스퀼라도 한때는 아름다운 처녀였다. 수많은 구혼자들이 혼인을 졸랐지만 이 수퀼라는 이들을
마다하고 바다의 요정들에게 달려가, 구혼자들이 혼인을 조른다는 자랑을 늘어놓는 것으로 소일
했다.
어느 날 스퀼라가 빗을 수 있도록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던 바다의 요정 갈라테이아가, 구혼자
들을 따돌리고 왔다는 스퀼라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스퀼라, 그래도 네 손을 잡으려던 구혼자들은 짐승같이 무지막지한 자가 아니니 얼마나 좋으
냐? 네가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바다의 신인 네레우스와 바다의 요정인
도리스의 딸인 나는 자매간이 그렇게 많은데도 구혼자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구혼자가 저 퀴클
롭스였으니...... 이 퀴클롭스 때문에 내게 남은 것은 한과 슬픔뿐이구나」
이렇게 말하는 갈라테이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스퀼라는 백설같이 흰 손
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면서 요정을 위로 했다.
「저에게 우시는 사연을 들려주십시오. 저를 믿으시고, 그렇게 슬퍼하시는 사연을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자 네레우스의 딸 갈라테이아는 크라타에이스의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6. 갈라테이아와 아키스의 슬픈 사랑
「아키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파우누스인 아버지와 바다의 요정인 쉬마이티스 사이에서 난 아
들이었다. 부모님은 이 아키스를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나는 부모님 이상으로 이 아키스를 사랑했
다. 내가 사랑한 인간은 오직 아키스뿐이었으니까. 정말 잘생긴 청년이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 부
드러운 턱이 보드라운 솜털로 덮이기 시작하는 나는 이 아키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일을 어째?
81) ‘우유빛 여자’라는 뜻이다. 저 조각가 퓌그말리온이 흰 상아로 깎아 만들었다가 베누스
여신이 인간으로 전신시키자 아내로 삼았던 상아 처녀의 이름도 갈라테이아였다. 그러나 여기에
서 말하는 갈라테이아는 그 갈라테이아가 아니라 네레우스의 딸 중의 하나인 바다의 요정 갈라테
이아다.
82) ‘둥근 눈’이라는 뜻. 외눈박이 거인을 말한다.
83) 스퀼라의 어머니.
84) 그/판. 반인반양인 목양신.
외눈박이 거인인 폴뤼페모스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는걸. 모르겠어, 아키스에 대한 내 사랑의 감
정이 강했는지, 폴뤼페모스에 대한 내 증오의 감정이 강했는지는...... 아마 비슷비슷했을 거야.
스퀼라, 저 사라의 여신 베누스는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이 여신이 부리는 조화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란다. 괴물 폴뤼페모스가 누구더냐? 들짐승들도 두려워하는 폴뤼페모스, 나그네에
게는 공포의 대상인 폴뤼페모스, 심지어는 올림포스 신들에게도 대든 폴뤼페모스가 아니더냐? 그
런데 이 폴뤼페모스라는 괴물도 사랑을 알고나니 참으로 희한해지더구나. 사랑을 알고 난 뒤부터
폴뤼페모스는 가슴에 불이 붙었는지 양떼고 동굴이고 도무지 아는 체를 하지 않아. 폴뤼페모스가
흉칙한 제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남들 눈에 들려고 애를 쓰기 시작한 게 이즈음부터
였어. 나뭇가지를 꺾어들고 머리를 빗는가 하면, 낫으로 수염을 깎고는 맑은 물에 제 모습을 비추
어보고는 울지를 않나, 웃지를 않나. 이러기 시작하고부터는 이피에 굶주려 있는 것 같던 폴뤼페
모스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어. 지나가는 배들도 무사히 그 섬을 지나갈 수 있었고.
85) 후일 오디세우스에 의해 장님이 되는 퀴클롭스.
빗나가는 예언은 하는 법이 없는, 저 에우뤼모스의 아들인 예언자 텔레모스가 여행중에 잠시
시켈리아에 들러 아이트나에 온 것은 이즈음이었다. 폴뤼페못를 만난 이 텔레모스는 이 괴물에게
이렇게 경고했어.
<그대의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는 그 눈이 머지않아 오디세우스의 손에 멀게 되고 말리라.>
하지만 폴뤼페모스는 예언자를 비웃으면서 이렇게 응수했지.
<그런 소리 마라, 이 엉터리 예언자야. 이미 한 아름다운 처녀의 미모 앞에서 멀고 말았는데,
더 멀고 자시고 할 눈이 어디 있느냐?>
폴뤼페모스의 귀에는 이미 텔레모스의 예언 같은 것은 들리지도 않았지. 폴뤼페모스는 텔레모
스의 예언은 들은 체도 않고 미치광이 처럼 해변을 걸으면서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 지치면 동굴로 들어와 벌렁 드러눕고는 했어.
그 섬에는 바다 쪽으로 쐐기 모양을 하고 툭 튀어나온 험하디험한 바위산이 하나 있었다. 이
바위산 양쪽에서는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고......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는, 제멋대로 날뛰는 양
떼를 따라 이 바위산으로 올라와서는 꼭대기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는 했어. 이 산꼭대기에는 배
의 돛댓감으로도 넉넉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어. 하지만 폴뤼페모스에게는 이게 지팡잇감밖에
는 안 되었을 거야. 폴뤼페모스는 이 나무에 발을 걸쳐놓고는 수백 개의 갈대를 잘라 만든 피리
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어. 그 가락에 온 산이 울리고 파도가 충을 추는 것 같더군. 나는 이 바위
산 기슭, 호젓한 곳에서 아키스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어.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한동안 피리를
불던 폴뤼페모스가 노래를 부르더군. 이런 내용이었어.
<오, 갈라테이아여, 넓은 풀밭에서 아름답기로 쳐도 으뜸이고 곱기로쳐도 으뜸인, 백설같이 흰
매발톱꽃 꽃잎보다 희고, 오리나무보다 더 키가 크고 더 의연하며, 수정보다 더 투명하고 어린아
이들보다 더 천진한 갈라테이아여, 만나면 겨울의 햇살보다, 여름의 응달보다 더 반갑고, 보면 키
큰 백양나무를 보는 것보다 더 마음이 시원해지는 갈라테이아, 잘 익은 능금보다 붉고, 잘 익은
포도보다 달콤하고, 백조의 깃털이나 갓 만들어낸 건락보다 보드라운 갈라테이아여, 어디로 도망
치려 하는가, 손질 잘한 뜰보다 아름다운 그대여.
갈라테이아여, 그대는 길들이지 않은 송아지보다 거칠고, 나이 먹은 참나무보다 단단하고, 바다
보다 무정하고, 버드나무 진보다 쓰디쓰고, 바위보다 드세고, 강보다 요란하고, 공작새보다 오만하
고, 불보다 뜨겁고, 돌밭 다듬는 써레보다 더 튼튼하고, 어미곰보다 엄하고, 대양보다 귀가 어둡
고, 밟힌 뱀보다 무자비한 갈라테이아여. 그러나 이런 것은 내 손으로 길들일 수 있을 터이나 그
대가 내게서 달아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사냥개에 쫓기는 사슴처럼, 바람처럼 빠르게 달
아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그러나 그대가 내게서 달아나는 것은 나를 모르기 때문. 드대가 나를 알면 달아난 것을 후회하
리라. 그대가 나를 알면 낭비한 시간을 아까워하고, 그대가 나를 알면 내 품에 안기기를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굴이 있으니까, 좋은 돌이 이루어낸 산자락의 굴이 있으니까. 여름에는 햇볕
도 닿지 못하고, 겨울에는 추위가 파고들지 못하는 굴이 있으니까. 내게는 포도송이 늘어진 포도
나무가 있고, 이 포도나무에는 금빛 포도송이도 달려 있고, 보랏빛 포도송이도 달려 있으니까. 내
게는 모든 것이 넉넉하다. 내 집에 오면 그대는 그대 손으로 응달에서 익은 딸기도 딸 수가 있다.
가을이면, 버찌와 주두도 있고, 물이 많은 흑딸기는 물론이고 갓 따낸 밀랍같이 말랑말랑한 노량
딸기도 있다. 그대가 내 아내가 되면, 밤이 주렁주렁 열린 밤나무, 열매로 가지가 휘어지는 양매
나무도 그대의 것이다.
갈라테이아여, 여기 있는 양은 모두 내 것이다. 하지만 골짜기에서 헤매는 내 양은 아직 얼마든
지 더 있다. 숲 속에 사는 양도 있고 내 집인 동굴 안 우리에도 있다. 그대가 물으면 뭐라고 할
까? 나는 사실 내 양이 몇 마리나 되는 지 알지 못한다. 양의 대가리 수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
은 가난뱅이들뿐이니까......
갈라테이아여, 내 말만 듣고 믿으려고 애쓸 것은 없다. 와서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젖통이 어찌
나 큰지 양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보면 알게 될 테니까. 우리 집 따뜻한 우리에는 어린 양도
있고, 다른 우리에는 갓 태어난 새끼양도 있다. 양유가 어찌나 풍족한지 날로 마실 것도 넉넉하고
굳혀서 먹을 것도 넉넉하다.
드대가 데리고 놀 짐승 또한 얼마든지 있다. 아기사슴, 메토끼 새끼, 염소 새끼, 비둘기 한
쌍...... 이렇게 쉬 잡을 수 잇는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꼭대기에서 나는 어미곰과 모양이 비
슷비슷한 새끼 곰 한 쌍을 보아두었다. 어미에게서 떼어놓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대가 원한다
면야 내가 데려오지 못할까. 이놈들을 보는 순간, 언젠가 내 사랑하는 이에게 주어야겠다고 해두
었는걸.
그 깊고 푸른 바다에서 그 빛나는 머리만 내밀어보렴, 사랑하는 갈라테이아여. 내게로 오되 내
가 드리는 선물을 하찮다고 비웃지 마시라. 나는 그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으니.
나는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그것도 알고 있다. 얼마 전에 맑은 물이 고여 있길래 거기에
다 내 모습을 비추어보았지. 그대는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볼 만했는지 모들 것이다. 그
대는 내 키가 얼마나 큰지 모를 것이다. 그대들은 유피테르 대신 같은 신들 이야기를 할지 모르
나, 천궁을 다스린다는 유피테르도 나만큼은 크지 않다. 내 머리카락은 탐스럽게 흘러내려 내 어
깨 위에서 숲을 이룬다. 갈라테이아여, 내 몸이 털로 덮여 있다고 흉칙하게 여기지 마라. 잎이 없
는 나무꼴리 어떠하겠으며, 갈기 없는 말꼴이 어떠할 것인가? 깃털 없는 새, 양털 없는 양의 모습
을 상상해 보시라. 턱에는 수염이 있고, 가슴에는 털이 있는 것, 이것은 남성만이 누리는 특권과
같은 것. 내게는, 눈이 이마 한가운데 박힌 것 하나밖에 없지만 이게 크기가 방패만하다. 생각해
보라, 태양도 이런 눈으로 우리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태양에게도 눈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내 아버지가, 그대가 사는 바다의 지배자라는 것도 잊지 마시라. 내가 그대를 이 재배자의 며느
리로 만들어주리라. 그러니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내 애달픈 구애를 물리치지 마시라. 그대 앞이
아니면 내가 누구 앞에 무릎을 꿇으랴. 유피테르와 천궁과 벼락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에게 두려
운 것이 잇다면, 아름다운 네레이드여, 그대뿐. 그대가 보내는 비웃음은 유피테르의 벼락보다 내
게는 무서운 것이다. 그대가 조롱하더라도 그 조롱이 그대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견디지 못
할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 아름다운 갈라테이아여, 퀴클롭스 족속의 사랑을 받는 그대가 무엇이
부족하여 아키스 같은 자를 사랑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내 품보다 아키스의 품을 좋아하는
까닭을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갈라테이아여, 아키스는 그대로 인하여 세상 넙은 줄을 알지 못하고
저러는 것이다. 아키스를 내 손에 붙인다면, 나는 내가 겉모습만 엄장한 것이 아니고 힘 또한 엄
청나게 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능히 산 채로 그 자의 내장을 뽑아내고, 산 채
로 사지를 찢어 그대가 사는 바다의 파도 위에 던져줄 것이다. 아키스에게는 이로써 그대를 만나
게 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갈라테이아여, 가슴에 붙은 사랑의 불길이 나를 태울 것만 같구나. 내 가슴속에는 아이트나 화
산이 들어앉은 것 같은데, 어쩌란 말인가, 갈라테이아, 그대는 아는 척도 않으니......>
86)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아들이다.
나는, 이런 노랫말로 노래를 부르는 폴뤼페모스를 보고 있었어. 말을 마친 폴뤼페모스가 일어서
더군. 흡사 암소를 놓친, 발정한 황소 같았어. 폴뤼페모스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곳에 서 있지
못하고, 숲 속을 헤매기 시작했지.
일이 잘못되느라고, 나란히 누워 있던 나와 아키스는 그만 이 자의 눈에 띄고 말았어. 이야기를
누누르라고 폴뤼페모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지. 아니야, 우리 쪽으로 다가오리라
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던 거야. 나란히 누워 있는 우리를 보고 폴뤼페모스가 고함을 질렀어.
<여기에 있었구나. 여기에서 이승에서 나누는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있었구나. 내가 이 포옹을
마지막 포옹이게 하리라.>
퀴클롭스 족송의 음성, 그것도 화가 난 퀴클롭스 족속의 음성이니 얼마나 컷겠어? 아이트나 산
도 움츠렸을 정도였어. 나는 정신없이 가까이 있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내 사랑하는 아키스는
도망치면서 소리쳤어.
“갈라테이아, 도와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도와주세요. 이제는 두분의 왕국으로 돌아살 수 없게
된 저를 도와주세요. 오와주지 않으시면 저는 죽습니다!”
폴뤼페모스는 아키스 뒤를 쫓다가 산 한 귀퉁이에서 바위를 하나 뜯어내어 아키스를 향해 던졌
어. 바위는, 폴뤼페모스의 몸집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아키스 하나 깔아버리는 데는 그
것만으로도 충분했지. 운명의 여신이 나에게 힘을 주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수를 쓸 수 있겠어?
아키스의 조상이 지니고 있던 권능이 아키스에게 내리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어.(강의 신이었던
아키스의 조부 쉬마이토스는 원래 인간이었다가 강으로 전신했다) 바위에 깔린 아키스의 시체에
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땅바닥에 고였는데, 이상하게도 이 피 색깔이 자꾸만 묽어지더군. 이 피
는, 곧 비 온 뒤의 강물 색깔이 되었다가 파랗게 변했어. 그 순간 폴뤼페모스가 던진 바위가 턱
갈라지더니 여기에서 갈대가 한 포기 자라기 시작하는가 했는데, 갈대 밑에서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쳐 나오더니...
아, 놀라워라! 머리에 뿔이 돋은 젊은이 하나가 그 뿔에다 꽃다발을 걸고 그 물줄기 속에서 불
쑥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어?(강의 신 머리 위에는 뿔이 돋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뿔은 거침없
는 강의 역동적인 흐름을 상징하는 듯하다. 강의 신 아켈로오스도 두 개의 뿔 중 하나를 헤라클
레스 손에 뽑힌 방 있다) 젊은이의 몸은 허리까지만 물에 잠겨 있었어. 가만히 보니까, 덩치가 커
지고 얼굴이 파랗게 변한 것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아키스... 맞아, 아키스였어. 아키스는 강으로
전신했던 것이지. 지금도 이 땅에 있는 강은 ‘아키스강’이라고 불리고 있어
7 글라우코스
갈라테이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네레우스의 딸들인 바다의 요정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잔잔
한 바다 저쪽으로 헤엄쳐갔다. 스퀼라는, 바다의 요정들처럼 바다에 뛰어들 수도 없는 일이어서
혼자 해변을 걸었다. 스퀼라는, 마른 모래 위를 한동안 걷다가 그것도 심드렁해지자 한적한 웅덩
이를 찾아가,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글라우코스가 바다 저쪽에서 나타났다. 이 글라우코스는 바다에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바다의 신이었다. 그가 바다의 신으로 전신한 것은 에우보이아 맞은
편에 있는 안테돈에서였다. 그런 글라우코스가 이 처녀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
다는 일념에서 다가온 것이었다.
처녀 스퀼라는 도망쳤다. 그러나 글라우코스는 온갖 말로 처녀를 달래며 쫓아왔다. 스퀼라는 있
는 힘을 다해 해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스퀼라가 서 있는 산꼭대기의 숲에서는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스퀼라는 이곳에 앉아 바다
를 내려다보면서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글라우코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스퀼라로서는 글라우
코스가 괴물인지 바다의 신인지 알 수 없었다.
스퀼라의 눈에 글라우코스의 모습은 기이했다. 어깨를 지나 등까지 덮고 있는 치렁치렁한 머리
카락은 초록색이었다. 글라우코스의 하반신은 인간의 하반신이 아니라 물고기의 하반신이었다. 글
라우코스는, 스퀼라가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까이 있는 바위에 기대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처녀여, 나는 괴물도 아니고 바다에 사는 맹수도 아니다. 나는 이래봬도 어엿한 바다의 신이
다. 이 바다에서는 바다의 신들인 프로테우스도, 트리톤도, 아타마스의 아들인 팔라이몬도 나를
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도 과거에는 인간이었다. 나는 바닥사에 살면서 바다에서 나는 물산 거
두는 일을 업으로 삼을 만큼 바다를 좋아했다. 인간이었을 적에 나는 낚싯대로도 고기를 잡았고
그물로도 고기를 건졌다.
내가 고기잡이하러 처음 가본 곳에, 푸른 풀밭으로 둘러싸인 해변이 있었다. 해변이니까 당연하
겠지만, 한쪽은 바다였고 다른 한쪽은 풀밭이었다. 그런데 이 풀밭이 참으로 희귀한 풀밭이었다.
왜냐? 소도, 양도, 염소도 이풀밭에서는 풀을 뜯은 적이 없었으니까. 뿐만이 아니었다. 꿀벌도 이
풀밭의 풀꽃에서는 꿀을 따간 적이 없고, 어떤 처녀도 이 풀밭의 풀꽃으로는 꽃다발을 만든 적이
없으며, 어떤 농부도 이 풀밭의 풀에는 낫을 대본 적이 없는... 그런 풀밭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으로 그 풀밭에 앉아 젖은 낚싯줄을 말린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풀밭에 앉아 내 그물에 걸려든 고기, 의심없이 내 낚시를 물었다가 걸려든 고기를 세
기 시작했다. 바구니에서 한 마리씩 꺼내어 풀밭에 놓으면서 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그대는 내가 이 말을 지어서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
다만, 내가 무엇하러 이런 이야기를 지어서 그대에게 하겠는가?
내가 풀밭에다 놓자마자 고기는 몸을 뒤척이면서, 물 속을 헤엄치듯이 풀밭 위를 기어가기 시
작했다. 나는 기겁을 한 채 서 있었다. 그동안 물고기는 한 마리 남김없이 이 새 주인을 버리고
저희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한동안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신들이 부리는 조화일까, 아니면 풀밭에서 자라는 풀에 신기한 효능이 있어서 물고기를 되살
리는 것일까’하고.
나는 어쩌면 풀에 신비한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갹에서 풀잎을 하나 뜯어 씹어보았다.
풀에서 나온 즙이 혀끝에 닿자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물이 그
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땅이여, 안녕, 내가 영원히 다시 밟지 못할 땅이여, 안녕.”
이렇게 부르짖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의 신들은 나를 영접하면서 동아리가 된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수많은 바다의 신들은 저
오케아노스 신과 테튀스 여신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인간 세상에서 지은 죄를 닦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주 분 신들께서는 내 죄를 닦아주셨다. 정죄의 주문을 아홉 번 외게 하셨고, 백 개의
강에 몸을 닦으라고 하셨다. 나는 강을 찾아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물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 뒤로 나는 별별 희한한 일을 다 겪었으나 그대에게 들려줄 마음만 있을 뿐 기억할
수가 없구나.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는 내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전과는 전혀 다른 글라우코스가 되어 있
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푸른 색깔로 변한 내 수염, 숱이 많은 이 머리카락, 엄청나게
넓어진 어깨, 검푸른 이 팔, 지느러미와 흡사하게 변한 내 다리를 보았다.
내 비록 바다 신들의 동아리가 되었고 내 모습이 이렇게 변했다만 그대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면 무엇하랴.
원컨대 그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글라우코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몇 마디를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스퀼라는 이미 달아나고
있었다. 달아나는 스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낀 글라우코스는 다시 물 속으
로 들어가 태양신의 딸인 키르케(티탄 신족, 즉 거신족에 속하는 태양신 솔의 딸. 마법에 능한 이
여신은 ‘새벽의 섬’이라는 뜻을 ‘아이아이 섬’에서 살고 있다. 키르케에게는 마법으로 이 섬
의 방문자들을 짐승으로 전신시키는 재주가 있다. 오디세우스 일행도 이 섬에 상륙했다가 그 중
일부가 짐승으로 전신하는 봉변을 당하게 된다.)의 아름다운 집을 향해 헤엄쳐갔다.
제14부 로물루스와 레무스 외
1 스퀼라와 마녀 키르케
글라우코스는 순식간에 옛날 어느 거인의 목 위에 올려졌다는 아이트나 산을 지나고(옛날 대지
의 여신은 튀폰이라는 괴물을 낳아 길러 올륌포스 신들을 치게한 일이 있다. 유피테르 대신은 이
괴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다가 결국 이를 제압하고, 다시는 이 괴물이 목 위에다 올려놓은 일이
있다. 아이트나 산이 화산으로 유명한 산인 까닭은 튀폰이 이 산 밑에 깔린 채로 계속해서 불을
뿜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름을 하지 않아도, 갈지 않아도 늘 기름진, 그래서 곡식을 거두
는 자들도 쟁기가 무엇인지, 써레가 무엇인지 모르는 퀴클롭스 족속의 땅을 지났다. 계속해서 글
라우코스는 장클레와 그 맞은편 해안에 있는 레기움 성벽 밑, 아우소니아(이탈리아)와 시켈리아
사이에 있는 암초가 많아 뱃사람들에게는 험로로 악명이 높은 해협을 지났다. 여기서부터는 더욱
속도를 늘여 단숨에 튀레니아(에트루니아) 바다를 건넌, 이 에우보이아 출신인 바다의 신은 이윽
고 태양신의 딸인 키르케의 섬에 이르렀다. 키르케의 궁전은, 온 산을 덮고 있는 약초와 키르케가
이 약초로 전신시킨 짐승들 한가운데에 있었다. 글라우코스는 이 여신을 만나 수인사가 끝나자마
자 이런 말을 했다.
“여신이여, 바라건대 이 가엾은 바다의 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나에게 여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이 슬픈 사랑병 앓는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여신뿐입
니다. 티탄의 딸이여, 그대의 약초가 얼마나 영험한가는 그 약초로 인하여 이렇게 바다의 신으로
전신한 나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신께서는 내가 이러는 까닭을 모르실 터이니
지금부터 내가 그 연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메세나 맞은편에 있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나는 스퀼라라는 처녀를 처음 보았습니다. 내가 이
처녀를 유혹했던 감언이설, 내가 이 처녀에게 했던 약속은 일일이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어쨌든
나는 이 처녀를 감언이설로 유혹했고, 처녀에게 아름다운 장래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참담
하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만일에 여신의 주문이 아직도 영헙하다면 그 거룩한 입술로
몇 마디 일러주십시오. 만일에 여신이 쓰는 약초가 주문보다 낫다면 나를 대신해서 약초로 손을
좀 써주십시오. 나는 여신께 내 사랑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의 상처를 치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쳐녀에 대한 이 사랑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처녀에게 죄가 있
으니 처녀도 내가 당한 만큼의 고통을 당하게 해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천성이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버지인 태양신 때문에 곤욕을 치른 베누스 여신이 그 분풀이
로 태양신의 딸을 그렇게 만들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베누스 여신은 지아비인 불카누스 몰래
전쟁신 마르스와 자주 밀통했다. 이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올륌포스 신들에게 고자질한
신이 바로 태양신이었다.) 키르케만큼 사랑에 약한 여신도 없었다.(키르케가 후일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라우코스의 말을 듣고 있던 키르케는 이렇게 대
답했다.
“그런 여자를 두고 가슴을 앓기보다는 그대를 원하고 그대를 따르고자 하는 여성, 그대가 사
랑하는 만큼 그대를 사랑하는 여성을 찾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대는 남의 짝사랑을 받기에 충
분한 분이니까요. 그대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던질 생각이 있거든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세요. 아직은 늦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과 우유부단한 태도를 버리
세요. 그리고 자기자신의 외모에 자신을 가지세요.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신의 딸인 나는 이래봬도
여신이랍니다. 게다가 내가 가진 약초의 효험도 만만찮고 내가 풍기는 매력 또한 만만찮답니다.
그러니 나를 차지할 생각을 해보세요. 그대를 능욕한 계집일랑 잊어버리고 그대를 따르고자 하는
나를 따르세요. 그대 마음먹기에 따라 나는 그대의 것이 될수 있고 그대는 내 것이 될 수 있답니
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피차 어울리는 일일 테니까요”
그러나 키르케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글라우코스는 딴소리를 했다.
“스퀼라가 살아 있는 한 바다에 들풀이 돋고 산꼭대기에 해초가 자랄지언정 스퀼라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신 키르케는 화를 내었다. 그러나 키르케는 글라우코스를 해칠수가 없었다. 해칠 마음도 없었
다. 글라우코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키르케는 그래서 글라우코스에게 분풀이하는 대신 자기보
다 나은 대접을 받고 있는 인간 수퀼라에게 분풀이할 결심을 했다. 사랑을 거절당한 키르케는 이
를 악물고 밖으로 나가 무서운 독초를 모아들인 다음 이를 가루로 만들고 헤카테 여신으로부터
배운 주문을 외며 이 독초가루를 섞었다. 이윽고 독약 만들기를 끝낸 키르케는 검은 옷을 입고
궁전을 나가 궁전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짐승 무리 사이를 빠져나갔다. 키르케가 간 곳은 험한 산
이 있는 장클레 맞은편의 레기움 성 밑이었다. 키르케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흐르는 이곳의 급
류를 마른 땅 밟듯 지났다. 이 근방에는 스퀼라가 자주 와서 노는 초승달 모양의 만이 있었다. 태
양이 남중하여 바로 위에서 내리쬐는 바람에 그림자 길이가 가장 짧은 시각이었다. 스퀼라는 이
런 시각이면 물에서 나와 짧으나마 그늘을 찾아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나 키르케가 여기에 당도한
시각에 스퀼라는 나와 있지 않았다. 키르케는 머지않아 스퀼라가 오겠거니 여기고 스퀼라가 자주
멱을 감는 웅덩이에다 가지고 온 독
오래지 않아 스퀼라가 나타났다. 스퀼라는 허리가 찰 때까지 물 속으로 들어가다가 말고 비명
을 질렀다. 자기 허벅다리가 개 대가리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퀼라는 처음에는 그게 자
기 몸의 일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지 몸을 움츠리고는 이 개 대가리를 떼버리려고 했다.
처녀인 스퀼라가 개 대가리, 그것도 입을 벌리고 짖어대는 개 대가리를 무서워한 것은 무리가 아
니었다. 그러나 이 개 대가리는 곧 스퀼라의 장딴지, 허리, 발에도 돋아나 저승의 번견 케르베로
스처럼 짖어대었다. 스퀼라는 맹렬하게 짖어대는 개 무리에 둘러싸인 셈이었다.
허벅지에서, 사타구니에서 돋아나 하반신을 이루는 수많은 개 무리의 등에 타고 있는 셈이었다.
글라우코스는 스퀼라의 이 무서운 변신과 기구한 스퀼라의 팔자를 슬퍼하며 약초를 쓰되 지나치
게 잔인하게 쓴 키르케의 구애를 피해 멀리 도망쳤다. 스퀼라는 거기 그 자리에 머물렀다. 후일
스퀼라는 오디세우스의 배를 난파시키고 수많은 이타카 용사들을 죽임으로써 키르케에게 복수했
다.(트로이아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메리쿠리우스가 준 마늘 덕분에 이 섬에 상륙
하고도 키르케의 요술에 걸리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이 섬에서 약 1년 간 머물면서 키르케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키르케는 이윽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에게 스퀼라를 주의하라고 충
고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복수를 벼르던 스퀼라에게 걸려 많은 부하들을 잃는다.) 이 스퀼라
가 지금은 바위로 변하여 파도 위에 우뚝 서 있다. 이 스퀼라가 바위로 변하지 않았더라면 트로
이아 인들(아이네이아스 일행) 도 여기에서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바위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스퀼라는 여전히 뱃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2 원숭이가 된 케르코페스
트로이아 유민을 태운 배는(장클레에 도착한 데서 중단되었던 아니네이아스 일행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 스퀼라를 무사히 지나고 탐욕스러운 소용동리인 카뤼디스를 지나 이
탈리아 해변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이때 폭풍이 불어 이들의 배는 다시 리뷔아 해안 쪽으로 밀려
갔다. 시돈 사람인 디도 여왕(원래는 포에니키아 태생이나 리뷔아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건설한
여왕)은 아이네이아스를 맞아, 지아비로 삼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아이네이아스는 디도를 아내로
삼고 한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디도는 이 새 지아비와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
이네이아스는 이 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디도 여왕은 제물을 바친다는 거짓 명
목으로 화장단을 쌓게 하고 그 위에 올라가 칼로 자결하고는 그 화장단 불에 자신을 태웠다. 디
도는 많은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버림받은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아이네이아스가 이 디도를 버
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유피테르 대신으로부터 앙숙이 된 것은 이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디도는 원래 공주로 태어났으나 지아비 쉬카이오스가 오라비 손에 죽는 바람에 재산을 모두 싣고
조국을 떠난 여자다. 이런 디도가
3 쿠마에의 시뷜레
이 섬을 지난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오른쪽으로는 파르테노페(나폴리의 옛이름) 성벽, 왼쪽으로
는 유명한 나팔수인 아이올로스의 아들 미세노스(처음에는 헥토르의 나팔수였으나 트로이아가 패
망한 뒤로는 아이네이아스의 종자가 되었다. 일행의 배가 암초에 걸리자 이 미세노스는 자기 나
팔로 뿔고둥 나팔의 신 트리톤의 흉내를 내어 이를 모면하려다가 트리톤의 저주를 받아 바다에
빠져 죽는다.)의 무덤을 지나 이윽고 쿠마에 땅의 물풀 우거진 해변에 이르렀다.
이 땅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시뷜레의 동굴로 오래 산 것으로 이름난 시뷜레(아폴로 신의 신탁을
전하던 무녀. 처음에는 예언에 능한 다르다노스의 딸이름이었으나 이 다르다노스의 딸이 워낙 유
명해지는 바람에 시뷜레라는 말은 무녀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쓰였다. 신화시대에는 약 10명의
시뷜레가 있으나 이 쿠마에의 시뷜레가 가장 유명하다.) 를 찾아가, 저승으로 내려가 망부의 혼령
을 만날 방도를 일러달라고 빌었다.(아이네이아스는 이에 앞서, 새 나라를 세우려면 저승으로 내
려가 망부 안키세스에게 그 방법을 물어야 한다는 신탁을 받은 바 있다.) 시뷜레는 한동안 땅바닥
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접신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른손으로는 칼을 잡아 무훈의 공적을 쌓으시고 왼손으로는 불길에서 아버지를 구하시어 효
성의 공덕을 세우신 위대한 영웅이시여, 그대가 바라는 것은 심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트로
이아의 영웅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그대는 소원대로, 우주에서 가
장 무서운 왕국과 저 지복의 들 엘뤼시온으로 내려가 사랑하는 아버지으 혼령을 뵐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대가 쌓은 미덕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뷜레는 이렇게 말하고는 아베르노스의 유노(아베르노스 호수를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저승의
유노. 즉 저승 왕비 프로세르피나를 가리킨다.)에게 봉헌된 성림에서 자라는 나무의 황금 가지를
가리키면서, 아이네이아스에게 꺽으라고 말했다. 아이네이아스는 시뷜레가 시키는 대로 한 덕분에
무서운 오르코스(타나토스에 해당하는 죽음의 신)의 나라로 내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만나고 아
버지로부터 저승의 풍습과 제도, 그리고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처신하는 방법 같은 것을 배웠다.
아이네이아스는 금방이라도 눈앞으로 쏟아질 듯이 가파른 길을 되짚어 이승으로 올라오면서 쿠
마에의 시뷜레와의 이런저런 이야기로 피로를 잊으려 했다. 어둡고 험한 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아이네이아스는 시뷜레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여신이신지 아니면 신들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 당신은 여신입니다. 고백하거니와 제가 이렇듯이 살아 있는 것은 당신의 덕분입니다.
저로 하여금 사자의 나라로 갈 수 있게 하셨고, 그 나라를 두루 돌아볼 수 있게 하셨으며, 이렇게
되돌아올 수 있게 해주신 분은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 이승에 이르는 대로 당신을 위해 사당을 짓고 향을 피워 올리겠습니
다.”
그러자 시뷜레는 아이네이아스를 돌아다보며 한숨을 쉰 다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여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대는 신이 아닌 인간에게 신들께나 드리는 제사를 드리면
안 됩니다. 혹 그대가 나를 오해할지 몰라서 내 내력을 말하니 잘 들으세요.
내가 철모르는 처녀이던 시절 이야깁니다. 나를 사랑하시게 된 포에부스 아폴로 신께서는 나에
게 사랑을 허락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러셨겠지
만 아폴로 신께서는 온갖 선물을 다 약속하시면서, ‘쿠마에의 처녀야,(쿠마에의 처녀라는 말에는
무리가 있다. 시뷜레가 아폴로로부터 9백년의 수명을 약속받은 곳은 뤼디아였다. 시뷜레는 그 뒤
에 쿠마에로 건너왔다.)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말만 하여라, 네 소원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시더이다. 나는 순진했는지라, 흙덩어리 하나를 가르키면서, 저 흙덩어리에 든 흙의
낱알 수만큼 생일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만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영원한 청
춘을 함께 요구하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폴로 신께서는, 만일에 자기가 요구하는 사
랑을 받아들이면 그만한 수명은 물론이고 영원한 청춘까지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날 이때까지 처녀의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인생의 황금기는 나를 떠나고, 황혼이 비틀거리며 내게로 다가옵니다만 나는 이런 채로 오
래오래 더 살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7세기를 살았습니다만, 흙덩어리에 들어 있는 흙의 낱
알 수에 해당하는 햇수를 살려면 3백 번의 씨뿌리기와 3백 번의 가을걷이를 더 보아야 합니다.
오래오래 살다보면 언젠가는 내 몸이 한 움큼도 못 되게 오그라지고 내 사지 역시 오그라져 한줌
의 흙으로 돌아갈 날이 오겠지요. 누가 나를 보고, 한때는 사랑을 받았고, 심지어는 신까지 즐겁
게 해준 적이 있는 여자라고 하겠습니까? 이제는 포에부스 아폴로 신께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
시거나, 알아보시더라도 내게 애정을 기울이신 일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실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는 내 모습도 사라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모습은
사라질지언정 목소리만은 이 땅에 남겨야 하는 팔자를 타고났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목소
리를 듣고 그게 내 목소리인 줄 알게 되겠지요」
시뷜레의 이야기가 끝났다.
4 아이네이아스, 아카이메니데스를 구하다
트로이아의 유민 아이네이아스는 시뷜레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저승인 스튁스의 땅에서 이승
인 쿠마에 땅으로 올라섰다. 쿠마에 땅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약속했던 대로 제물을 준비하여 시뷜
레의 은공에 감사하는 의식을 베풀고는 자기의 유모와 이름이 똑같은 <카이에타>해변으로 나섰
다. 아이네이아스는 이곳에 사는 그리스 사람을 만났다. 트로이아 전쟁터에서는 서로 창을 겨누면
서 싸웠던 네리토스사람 마카레우스가 그 사람이었다. 마카레우스는 오랫동안 오디세우스를 따라
항해를 계속하다가 그곳에 낙오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마카레우스가, 아이네이아스의 일행에 섞
여 있는 아카이메니데스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아카이메니데스는 역시 오디세우스와의 항해 도
중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가 사는 아이트나 섬에서 낙오되었다가 아이네이아스 일행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었다. 마카레우스가 아카이메니데스를 보고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라도 만난듯이 깜짝 반가워하며 물었다.
「아카이메니데스, 자네가 살아 있다니, 대체 어떻게 살아났나? 어떤 신께서 자네를 살려주셨는
가? 트로이아 유민의 배에 적국인 그리스 사람이 타고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자네는
그 배를 타고 어디로 갈 작정인가?」
폴뤼페모스가 사는 아이트나 섬에서 낙오했지만, 아카이메니데스가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가 아
니었다. 언제 낙오되었더냐는 듯이 말쑥하게 차려 입은 아카이메니데스가 대답했다.
「내가 만일에 내 고국 이타카를 이 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만일에 내 아버지를
아이네이아스 장군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인간의 피로 물든 저 폴뤼페모스의
입으로 들어가도 좋다. 나는 내 목숨을 바쳐도 아이네이아스 장군께 입은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죽은 목숨이 이렇게 살아나 이 대기를 숨쉬고, 저 하늘, 저 태양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내가 어
떻게 장군의 은혜를 잊을 수 있겠으며, 내가 어떻게 장군을 내 아버지로 섬기지 않을 수 있을까
보냐! 아이네이아스 장군은 저 외눈박이 거인의 아가리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셨네. 장군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으면 저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 있을 내가 이제는 죽어도 이 땅, 이 흙에 제대로 묻힐
수 있게 된 것일세. 자네들은, 그를 그 섬에다 버려두고 떠나갔네. 나는 공포에 질려 내 정신이
아니었어. 그런 곳에 홀로 남은 내가, 떠나가는 자네들을 보는 심정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나는
소리를 질러 떠나가는 배를 부르고 싶었네. 그러나 폴뤼페모스가 나를 해칠까봐 소리를 낼 수 없
었어. 오디세우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네들이 탄 배도 박살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나는 숨
어서, 이 외눈박이가 산 사면에 있던 바위 하나를 뽑아 바다에 뜬 아군의 배를 향해 던지는 것을
보았네. 괴물이 던진 바위는 흡사 투석기로 쏜 것처럼 허공을 날아가더군. 배가 나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나는 견디기 어려운 배신감을 느꼈네. 차라리 그 배가 폭풍을 만나 침
몰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자네들을 태운 배가 이 죽음의 땅에서 벗어나자
폴뤼페모스는 미친 듯이 아이트나 산을 누볐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손에 걸리는 나무라는
나무는 다 뽑으면서...... 눈알을 뽑혔으니 앞이 보일 까닭이 없지. 폴뤼페모스는 나무나 바위에 걸
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피 묻은 주먹을 바다 쪽으로 휘두르면서 그리스 인들을 저주했
네.
<오디세우스도 좋고, 오디세우스의 부하라도 좋다. 한 놈만 내 손에 걸린다면, 그래서 그놈을 찢
어먹을 수 있다면, 산 채로 가랑이를 찢어 피는 마시고 살과 뼈는 씹어먹을 수 있다면...... 아, 이
런 소원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장님이 된 것도 그렇게 억울하지 않겠다.>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면서 돌아다니는데, 이걸 보고 있는 내 정신이 어디 정신이었겠나, 제 손으
로 잡아 찢어먹은 우리 전우들 살점이 묻은 괴물의 입, 그 무서운 손, 뻥 뚫린 눈구멍, 우리 전우
들의 피가 묻은 수염을 보고 있으려니, 눈앞이 캄캄했네.
사신이 내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것 갔았네만,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은 것 자체가 아
니었네. 나는 시시각각으로 그 괴물이 나를 잡아 통째로 삼키는 광경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네.
우리 동료들이 그 괴물에게 먹히는 광경이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이 괴물은, 우리 동료들
을 잡아 서너 번 땅바닥에다 패대기치고는, 먹이를 감싸쥐고 뜯어먹는 사자처럼, 그렇게 우리 동
료들을 먹지 않았나. 뼈에서는 흰 골수가 튀고, 다리는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는 우리 동료들을
먹지 않았나. 우리 동료들을 꾹꾹 씹어먹다가 이따금씩 뼈마디를 뱉거나, 마신 포도주를 토하는
그 괴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거 같더군. 나는, 나 역시 그런 신
세가 될 것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며칠을 숨어
있었네. 나는 한편으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
면서, 도토리와 풀잎과 풀뿌리로 연명했네. 외로웠네. 이 죽음의 섬에 홀로 남은 내게는 희망도
없고, 희망을 가져야 할 건더기도 없었네. 그런데 며칠을 그렇게 지내던 나는, 멀리서 지나가는
배를 발견했네. 나는 해변으로 달려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네. 살려달라고. 배에 탄 사람들이 내 목
소리를 듣고 나를 발견했어. 이렇게 해서 트로이아 배가 한때는 적이었던 그리스 사람을 구원한
것이네.
이제 내 이야기를 했으니, 자네 이야기도 좀 들어보세. 그래, 오디세우스 장군은 어찌 되셨는가?
오디세우스 장군과 함께 바다로 나간 그때의 우리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5. 풍신 아이올로스의 선물. 오디세우스와 키르케
마카레우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들 지도자인 이타카의 오디세우스 장군은, 히포테스의 아들인 풍신 아이올로스로부터 귀
한 선물을 받았네. 이 아이올로스가 바람을 소가죽 부대에 넣어주었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아이올
로스는 투스쿠스 바다의 지배자가 아닌가? 그래서 이 아이올로스는 이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라는
바람은 모조리 동굴 속에다 가두어놓고 부린다네. 오디세우스 장군을 비롯한 우리 일행은 아흐레
동안 순풍을 받으면서 항해, 이윽고 우리 목적지가 수평선 위로 보이는 곳에 이르렀네. 하지만 열
흘째 되는 날 새벽, 우리 동료들 중 몇몇이 오디세우스 장군이 아이올로스로부터 받은 선물이 무
엇일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네. 좋은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저희들에게도 몫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야. 이 친구들은 그 가죽 부대에 금은보화가 들었겠거니 여기고 부대를 풀었
어. 갇혀 있던 바람이 한꺼번에 빠져나갔을 수밖에. 배는 엄청나게 사나운 풍랑을 타고 온 길을
되 짚어 밀려가, 우리가 떠난 곳, 말하자면 풍신 아이올로스 섬의 항구로 되돌아갔네.
아이올로스 섬을 떠난 우리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옛날 라무스가 세웠다는 라이스트뤼고니아
였네. 당시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자는 안티파테스라는 자였지. 동료 둘과 함께 나는 이 나
라에 상륙했네만, 나와 동료 하나만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나머지 하나는 이들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어. 이 저주받을 족속은 인간의 피를 턱에다 묻혔던 것일세. 도망치는 우리를 본 안티파테스
왕은 저희 백성을 몰아 우리를 추격했네. 우리가 무사히 배에 이르자 배는 닻을 올렸는데. 이놈들
이 언덕 위에서 던진 바위에 맞아 여러 척의 배가 뱃사람째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네. 오디세우스
와 우리가 탄 배 한 척만 그 나라 해안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
우리는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항해를 계속, 이윽고, 저기를 보게, 저기 멀리 보이는 섬 있
지, 저 섬에 도착했네. 저 섬은, 멀리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섬이네만 사실은 그렇지
못해.
아이네이아스 장군, 장군께도 내 경고하건대, 저 섬을 경계하십시오. 장군은 여신의 아드님이신
데다, 가장 용감했던 트로이아의 용장이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는 적도 아
군도 없게된 마당이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게 바로 키르케의 섬이니,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 섬의 해안에다 배를 대었네, 오디세우스 장군은 섬에 상륙해서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정찰해 보라고 했지만, 우리는 가지 않으려고 했네, 라이스트뤼고네스 족의 섬과 외눈박이 거인
폴뤼페모스의 섬에서 혼이 난 우리에게는, 정체를 모르는 섬에 상륙한다는 게 참으로 싫었네. 그
래서 할수없이, 제비를 뽑아 상륙할 사람을 정하기로 했네. 그 결과, 키르케의 궁전으로 올라갈
사람으로는 나와, 성실한 폴리테스, 에우륄로코스,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엘페노르를 비롯, 스물두 명이 정찰대로 뽑혔네. 섬에 상륙하여 키르케의 궁전으로 올라간 우리
는, 엄청나게 많은 짐승들이 달려나와 우리는 맞는 데 놀라고 말았네. 이리, 곰, 사자를 비롯, 별
별 짐승이 다 있더군. 하지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어. 우리를 해칠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해치려
하기는커녕 꼬리를 치며 우리를 반기더니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기까지 했네. 이들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까 이번에는 하녀들이 나와 우리를 저희 안주인의 대리석 궁전으로 인도하더군.
키르케는, 번쩍거리는 옷 위에다 금실로 수를 해박은 겉옷을 입고, 호화롭게 꾸민 방에 차려진
보좌에 앉아 있었네. 바다의 요정들, 숲의 요정들이 옆에 있었네만, 이들은 양털 다듬는 일이나,
물레 잦는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키르케의 약초를 분류해서 바구니에 담는
일을 하고 있었네. 약초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키르케는 옆에서, 이것은 저 바구니에 담
아라, 저것은 이것과 섞어라, 하면서 일을 지휘하고 있더군. 이따금씩은 약초를 집어 가만히 들여
다보기도 하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키르케는 우리 인사를 받고는 아주 밝게 웃더군. 키르케가 웃는 것을 보
면서 우리는, 물과 양식을 얻을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네. 키르케는 하녀들을 불러 음식을
장만하게 했네. 오래지 않아 보리빵, 꿀, 독한 포도주, 건락, 처음 보는 약초즙 같은 음식이 차려
졌네. 우리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여신 키르케가 황금잔에다 듬뿍듬뿍 따라주는 약초즙을
마셨네. 우리가 이걸 마시니까 여신은 들고 있던 조그만 지팡이로 우리 머리를 살짝살짝 건드리
더군. 말하기 창피하네만 자네가 궁금하게 여기니까 하기는 하겠네....... 그 순간 내 몸에서는 뻣뻣
한 털이 돋기 시작했네. 말을 하려고 했네만 말이 되지 않았네. 꿀꿀거리는 소리가 내 입에서 튀
어나왔을 뿐.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얼굴이 바닥에 닿을 지경
으로 몸이 구부러져 있더군. 입은 자꾸 길어지다가 끝이 위로 올라갔고, 목살은 자꾸만 부풀어올
랐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금잔을 들고 있던 내 손은 바닥을 짚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어느
새 가운데가 갈라진 발이 되어 있었네.
약초즙이 조화를 부렸던 것일세! 하녀들은 이렇게 모두 형상이 변해 버린 우리를 돼지우리로 몰
아넣었네. 키르케의 방에서 나가면서 보니까 에우륄로코스만은 돼지로 변하지 않고 온전한 사람
으로 남아 있더군. 이 사람만은 키르케가 권하는 약초즙을 마시지 않았던 것일세. 에우륄로코스마
저 그 약초즙을 마셨더라면, 우리는 이날 이때까지도 키르케의 돼지우리에서 뻣뻣한 털을 세우고
꿀꿀거리고 있을것이네. 왜냐? 오디세우스에게 우리가 그 꼴이 되어 있다는 걸 알리고 키르케의
마법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게 한 사람이 바로 에우륄로코스였거든.
에우륄로코스의 보고를 받은 오디세우스 장군은 우리를 구하러 올라왔네. 그런데 말이지. 평화의
수호자이신 메르쿠리우스 신께서 우리를 구하러 올라오는 오디세우스 장군에게, 꽃은 하얗고 뿌
리는 검은 약초를 주셨다고 하더군. 신들의 세계에서는 <몰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식물이었다
고 들었네. 메르쿠리우스 신께서는 이 약초를 주시면서, 키르케를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하셨다지.
키르케가 장군을 반갑게 맞아들이고, 우리에서 먹였던 약초즙을 권한 다음 조그만 지팡이로 머리
를 건드리려는 순간 장군은 이 여신을 바닥에다 쓰러뜨리고는 칼을 뽑아 목에다 들이대었네. 장
군의 이런 태도에 기겁을 한 키르케는 그제야 장군에게 항복했지. 키르케는 화해의 손을 내밀면
서 장군에게 지아비가 되어달라고 했고, 장군은 지아비가 되어줄 테니 혼인 선물로 우리를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했네. 키르케는 우리에게 약초즙을 뿌리고는 지팡이로 우리 머리를 가
볍게 두드린다음 마법을 푸는 주문을 외더군. 키르케의 주문이 시작되고부터 우리는 조금씩 허리
를 펴고 일어날 수가 있었네. 처음에는 우리몸에서 뻣뻣한 털이 빠져나갔고, 다음에는 발굽이 변
하여 손발이 되었으며, 팔은 팔답게 다리는 다리답게 변했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오디세우스
장군을 얼싸안고서 이구동성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네. 장군도 눈물을 흘렸지.
6. 피쿠스와 카넨스
마카레우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한 해 동안이나 이 섬에 머물렀네. 그 동안 눈으로 본 것도 많고 귀로 들은 것도 많아.
본 것, 들은 것 다 자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 하나만은 하고 넘어가야겠네. 키르케
섬에서 신성한 제사 드리는 일을 맡고 있던 키르케의 네 시녀 중 하나가 나에게 은밀하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네. 키르케가 우리 오디세우스 장군과 함께 지내느라고 우리에게는 관심을 기울이
지 못하는 틈을 타서 이 시녀는 나에게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청년의 석상을 하나 보여주었네.
보니까 이 석상의 머리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딱따구리가 한 마리 앉아 있더군. 이 석
상은 신전 안에 있었는데, 석상의 목에는 꽃다발이 걸려 있었어. 나는, 그게 누구의 석상이고, 어
째서 신전안에 놓여있었으며, 왜 새가 머리 위에 앉아 있느냐고 물어보았네. 그랬더니 시녀가 이
런 말을 하는 게 아니겠나.
<마카레우스, 내 이야기를 잘 들으면 우리 주인이신 여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옛날에 사투르누스의 아들인 피쿠스가 이 아우소니아 땅을 다스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 피쿠스
에게는 취미가 하나 있었어요. 말을 기르는 것이었죠. 특히 군마를 조련하는 데는 상당한 재간도
있었나봐요. 이 피쿠스의 외모는 지금 보고 있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이 석상을 보면
서 실물을 상상해 보세요. 굉장한 미남이었을 테죠? 외모도 외모려니와 용기 또한 출중했어요. 하
지만 그 당시 피쿠스의 나이는, 5년 만에 한 번씩 엘리스에서 열리는 그리스 경기에 참가할 정도
는 되지 않았나봐요.
이 피쿠스가 어찌나 미남이었던지, 당시 라티움 산의 요정, 샘의 요정, 물의 요정 할것없이 모두
이 피쿠스를 쫓아다녔대요. 알불라 강, 누미키우스 강, 아니오 강, 짧기로 소문난 알모 강, 흐름이
거친 나르 강, 강변에 나무가 많은 파르파우스 강, 숲 속에 있는 스퀴티아의 디아나 연못에 사는
물의 요정들은 모두 피쿠스를 짝사랑했답니다. 하지만 피쿠스는, 이 많은 요정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직 한 요정만을 죽자고 사랑했다지요. 피쿠스가 사랑한 이 요정은, 어머니 베닐리
아와 아버지 야누스의 딸로 팔란티움 언덕에서 태어났대요. 이 요정 처녀는 혼기가 되자 수많은
구혼자들을 다 마다 하고 라우렌툼 사람 피쿠스의 신부가 되었답니다. 이 요정은 예쁘기도 했지
만, 노래를 어찌나 잘 부르는지 이름마저 '카넨스' 였다지요. 카넨스는 노래를 어찌나 잘 불렀는
지, 이 색시의 노래를 들으면 나무와 바위도 감동했고, 사나운 짐승들은 성질을 눅이고 고분고분
하게 말을 들었으며, 강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흐름을 멈추었고, 새들은 날개를 접고 노래를 들었
더랍니다.
피쿠스는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의 노래를 들으며 라우렘툼 들판으로 사냥을 나갔대요. 거기에
산다는 멧돼지를 사냥하러 말이지요. 피쿠스는 보라색 겉옷을 황금 단추로 잘 채우고, 왼손에는
사냥용 창을 들고는 준마를 타고 나갔대요. 공교롭게도 키르케 여신도 키르카이아를 떠나 약초를
뜯으러 이 기름진 들판에 와 있었어요. 키르케 여신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이 피쿠스를
보고는 그만 발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어요. 이 젊은 왕에게 반하고 만
것이지요. 키르케의 손에서는, 그때까지 뜯었던 약초가 흘러내렸어요. 사랑의 불길이 골수를 태울
듯이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는 판인데 까짓 약초가 문젠가요. 한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서 있었던 키르케 여신은 평정을 되찾자 피쿠스 왕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피쿠
스 왕의 말이 워낙 빠른데다 주위에는 신하들이 있어서 그게 여의치 않았나봐요. 키르케 여신은
혼자서 이렇게 중얼 거렸지요.
'그대가 바람을 타고 도망쳐보아라. 내게서 도망칠 수 있나. 내가 누구더냐. 내 약초가 어떤 약초
인 줄 아시는가. 그대는 내 마법을 피할 수는 없을 게다.'
키르케 여신은 이러면서 가짜 멧돼지를 한 마리 지어 피쿠스의 왕 앞을 지나가게 했어요. 물론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지요. 여신이 지어낸 이 멧돼지의 환영은,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어
요. 나무가 어찌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지 말을 타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숲이었지요. 피쿠스 왕
은, 그게 가짜 멧돼지인 줄 모르고 말 잔등에서 내려 이 가짜 멧돼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어요.
키르케 여신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피쿠스 왕을 보면서 정체 모를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문과 주문
을 외었어요. 키르케 여신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백설같이
밝던 달이나 여신의 아버님이신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이때도 여신이 주문
을 외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온 땅이 안개에 묻혔어요. 피쿠스 왕의 신 6.피쿠스와 카넨스
마카레우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한 해 동안이나 이 섬에 머물렀네. 그 동안 눈으로 본 것도 많고 귀로 들은 것도 많
아. 본 것, 들은 것 다 자네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 하나만은 하고 넘어가야겠네. 키르
케 섬에서 신성한 제사 드리는 일을 맡고 있던 키르케의 네 시녀 중 하나가 나에게 은밀하게 직
접 들려준 이야기네. 키르케가 우리 오디세우스 장군과 함께 지내느라고 우리에게는 관심을 기울
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이 시녀는 나에게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청년의 석상을 하나 보여주었네.
보니까 이 석상의 머리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딱따구리가 한 마리 앉아 있더군. 이 석
상은 신전 안에 있었는데, 석상의 목에는 꽃다발이 걸려 있었어. 나는, 그게 누구의 석상이고, 어
째서 신전 안에 놓여 있으며, 왜 새가 머리 위에 앉아 있느냐고 물어보았네. 그랬더니 시녀가 이
런 말을 하는 게 아니겠나.
<마카레우스, 내 이야기를 잘 들으면 우리 주인이신 여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
을 거에요.
옛날에 사투르누스 35)의 아들인 피쿠스 36)가 이 아우소니아 땅을 다스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
피쿠스에는 취미가 하나 았었어요. 말을 기르는 것이었죠. 특히 군마를 조련하는 데는 상당한 재
간도 있었나봐요. 이 피쿠스의 외모는 지금 보고 있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이 석상을
보면서 실물을 상상해 보세요. 굉장한 미남이었을 테죠? 외모도 외모려니와 용기 또한 출중했어
요. 하지만 그 당시 피쿠스의 나이는, 5년 만에 한 번씩엘리스에서 열리는 그리스 경기에 참가할
정도는 되지 않았나봐요. 37)
이 피쿠스가 어찌나 미남이었던지, 당시 라티움 산 38)의 요정, 샘의 요정, 물의 요정 할것없이
모두 이 피쿠스를 쫓아다녔대요. 알불라 강, 39) 누미키우스 강, 아니오 강, 짧기로 소문난 알모
강, 흐름이 거친 나르 강, 강변에 나무가 많은 파르파루스 강, 숲 속에 있는 스퀴티아의 디아나
연못에 사는 물의 요정들은 모두 피쿠스를 짝사랑해ㄸ답니다. 하지만 피쿠스는, 이 많은 요정들에
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직 한 요정만을 죽자고 사랑했다지요. 피쿠스가 사랑한 이 요정은,
어머니 베닐리아 40)와 아버지 야누스 41)의 딸로 팔란티움 42) 언덕에서 태어났대요. 이 요정 처
녀는 혼기가 되자 수많은 구혼자들을 다 마다하고
35) 고대 로마의 농경신
36) ‘딱따구리’라는 뜻. 목신 파우누스와 라티누스의 조부가 된다.
37) 고대의 올림피아 경기를 말한다. 당시에는 5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나. 이 5년은 현대식으로
환산하면
4년이 된다. 이 경기에 참가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만 20세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
다.
38) 이탈리아 중부, 로마시가 자리잡았던 곳에 있는 산. 이 근방에 살던 라티니 족의 언어가 바
로 라틴어
다.
39) 이하 모두 로마 근방에 있는 강의 옛 이름.
40) 산모와 갓난아기의 수호신인 필룸누스의 딸인 요정.
41) 로마의 고대신. 원래는 문의 신이다. 문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종점인 동시에 시발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신에게는, 서로 반대쪽을 향하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이 상징적 성격
때문에 제의 때는 늘 신들의 선두를 차지한다. 지나간 해와 새해를 동시에 접하고 있는 달인 1월
을 ‘야누아리우스(영/재뉴어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야누스의 달’이라는 뜻이다.
42)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
라우렌툼 43) 사람 피쿠스의 신부가 되었답니다. 이 요정은 예쁘기도 했지만, 노래를 어찌나 잘
부르는지 이름마저 ‘카넨스’ 44) 였다지요. 카넨스는 노래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이 색시의 노
래를 들으면 나무와 바위도 감동했고, 사나운 짐승들은 성질을 눅이고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으
며, 강은 노래가 끝날 때까지 흐름을 멈추었고, 새들은 날개를 접고 노래를 들었더럽니다.
피쿠스는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의 노래를 들으며 라우렌툼 들판으로 사냥을 나갔대요. 거기에
산다는 멧돼지를 사냥하러 말이지요. 피쿠스는 보라색 겉옷을 황금 단추로 잘 채우고, 왼손에는
사냥욜 창을 들고는 준마를 타고 나갔대요. 공교롭게도 키르케 여신도 키르카이아 45)를 떠나 약
초를 뜯으러 이 기름진 들판에 와 있었어요. 키르케 여신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이 피쿠스
를 보고는 그만 발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어요. 이 젊은 왕에게 반하고
만 것이지요. 키르케의 손에서는, 그때까지 뜯었던 약초가 흘러내렸어요. 사랑의 불길이 골수를
태울 듯이 뜨겁게 뜨겁게 타오르는 판인데 까짓 약초가 문젠가요. 한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
렇게 서 있던 키르케 여신은 평정을 되찾자 피쿠스 왕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피
쿠스 왕의 말이 워낙 빠른데다 주위에는 신하들이 있어서 그게 여의치 않았낭봐요. 키르케 여신
은 환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그대가 바람을 타고 도망쳐보아라. 내게서 도망칠 수 있나. 내가 누구더냐. 내 약초가 어떤
약초인 줄 아시는가. 그대는 내 마법을 피할 수는 없을 게다.’
키르케 여신은 이러면서 가짜 멧돼지를 한 마리 지어 피쿠스 왕 앞을 지나가게 했어요. 물론
실체가 없는, 환영이었지요. 여신이 지어낸 이 멧돼지의 환영은, 빽빽한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어
요. 나무가 어찌나 빽빽하게 들어차 았는지 말을 타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숲이었지요. 피쿠스 왕
은, 그게 가짜 멧돼지인 줄 모르고 말 잔등에서 내려 이 가짜 멧돼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어요.
키르케 여신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피쿠스 왕을 보면서 정체 모를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문과 주
문을 외었어요. 키르케 여신이 이런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면 어떨게 되는지 아세요? 백설같이
밝던 달이나 여신의 아버님이신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이때도 여신이 주문
을 외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온 땅이 안개에 묻혔어요. 피쿠스 왕의 신
43)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
44) ‘노래하는 자’라는 뜻.
45) ‘키르케의 곶’을 말하는 듯.
하들은 길을 잃고 숲을 헤맸지요. 왕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판인데 어떻게 왕을 경호할 수 있
겠어요. 신하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여신은 피쿠스 왕에게 말씀하셨어요.
‘나를 사로잡은 그대의 그 아름다운 눈, 여신인 나를 사로잡아 이렇듯 부끄러움을 모르게 한
그대의 아름다운 청춘에 기대어 드리는 말씀이니, 들으소서. 원컨데 내게 친절을 베푸시어 나를
사랑해 주시고, 만물을 내려다보시는 태양신의 사위가 되소서. 마음 문을 여시되, 티탄의 딸인 이
키르케를 욕보이지 마소서.’
그러나 피쿠스 왕은 키르케 여신의 애원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이러면서요.
‘그대가 누구신지 모르나 나는 그대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나는 이미 다른 여성의 포로가
된 몸, 오래오래 이렇게 포로로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러니 운명의 여신이 나와 야누
스의 딸 카넨스를 떼어놓지 않는 한, 혼외의 사랑을 유혹하여 사랑의 맹세를 깨뜨리게 하지 마시
오.’
키르케 여신은 몇 번이고 애원했지만 허사로 돌아가자 이렇게 외쳤어요.
‘곧 이를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상처를 입은 여자의 원한이 얼마나 깊고 무서운가를 알
게 될 테니, 이제 그대는 카넨스에게로 돌아갈 수 없을 게다.’
그러고는 동쪽으로 두 바퀴 돌고, 서쪽으로 두 바퀴 돈 뒤에 지팡이로 피쿠스이 어깨를 세 번
때리며 주문을 외었어요. 피쿠스는 도망쳤어요. 하지만 도망치면서도 피쿠스는 놀라고 말았어요.
자기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도
망치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본 피쿠스는 그제야 자기 몸이 깃털로 덮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졸지에 라티움 숲의 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피쿠스는 화가 나서 그 뾰족한 부리로 나무 둥치를
쪼고, 가지를 마구 부러뜨렸어요. 피쿠스는 보라색 겉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새의 깃털은 보
라색이고 피쿠스의 겉옷에는 금단추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새의 가슴에는 금빛 반점이 있는
거죠. 피쿠스 왕에게 남은 것은, 자기가 전에는 피쿠스 왕이었다는 기억과 ‘피쿠스’ 46)라는 이
름뿐이었어요.
왕의 신하들은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온 숲을 누볐어요. 하비만 피쿠스 왕이 이들 앞에 나타날
리 없는 거죠. 왕을 찾으러 다니던 신하들은 이윽고 키르케 여신을 만났어요. 키르케 여신은 마악
안개를 비산시키고
46) ‘딱따구리’
해를 가리고 있던 구름을 걷은 참이었어요. 사정을 안 신하들은, 왕의 모습을 되돌려 놓으라고
키르케 여신을 위협했어요.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면서 여신에게 창을 겨누기까지
했죠. 하지만 키르케 여신은 이들에게 독초즙을 뿌리고는, 에레보스 47)와 카오스 48)로부터 ‘
밤’ 49)과 밤의 신들을 불러내고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헤카테 여신에게도 기도를 드렸어요.
그러자 땅에서는 갑자기 나무가 자라 올라오면서 숲을 이루었고, 대지는 신음했으며 근처에 있는
나무들은 색깔을 잃고 창백해지기 시작했어요. 풀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돌멩이는 저희들끼리 부
딪치기 시작했어요. 사방에서는 개들 짖는 소리가 났고, 검은 뱀 무리가 나타나 지면을 기어다녔
어요. 그뿐인가요? 유령들이 나타나 소리없이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어요.
사냥 나왔던 왕의 신하들은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죠. 키르케 여신은 파랗게 질린 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마법의 지팡이로 툭툭 건드렸어요. 그러자 이들은 모두 갖가지 짐
승으로 변신했어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말이요.
저녁 해가 타르테소스 해안으로 잠겨들 때까지 카넨스는 왕을 기다렸어요. 하비만 딱따구리가
된 지아비가 돌아올 턱이 있나요? 궁전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모두 손에손에 횃
불을 들고 국왕 일행을 찾으러 나갔어요. 새색시였던 요정 카넨스는, 옷과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울고 있는 것으로는 마음이 풀리지 않았던지 궁전을 뛰쳐나가 지향도 없이 라티움 숲을 누볐어
요. 엿새 밤, 엿새 낮을 카넨스는 산과 골짜기를 누볐어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말이죠. 슬픔
에 젖어, 기나긴 방황에 지쳐 강둑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카넨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튀브리
스 강의 신이었다고 해요. 카넨스는 이 강둑에 앉아 울면서, 곡을 붙여 신세 타령을 했다는데, 그
노래 소리는 흡사 백조가 죽기 직전에 부른다는 마지막 노래 같았다고 해요. 슬픔은 결국 이 카
넨스의 골수부터 녹이기 시작했어요. 결국 카넨스는 이렇게 녹아 사라져버렸어요. 하지만 이 카넨
스의 슬픈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이 지방에 전해지고 있답니다. 카메나 50)들의 이름이 이요정의
이름 카넨스와 비슷했기 때문이죠.>
47) ‘그윽한 어둠’의 땅
48) ‘혼돈’
49) ‘밤’이라는 뜻의 뉘스 여신.
50) 복/카메나이. 라티움 지방에서 숭배되던 샘의 요정들. 그리스의 무사이들과 동일시되나, 이
들에게는 예언력이 있었다는 점이 무사이들과는 다르다. ‘카넨스’라는 말과 ‘카메나’라는 말
은 둘 다 ‘카네레’(‘노래하다’, ‘예언하다’라는 뜻)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키르케 섬에 1년을 머물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이런 이야기의 진위를 실
증할 수 있는 것도 많이 구경했네. 하지만 바다를 떠돌던 우리가 거기에 그렇게 머물렀으니 싫증
이 날 수밖에. 어느 날 출항 명령이 떨어졌네. 티탄의 딸인 키르케는 우리가 견뎌야 할 험하디 험
한 뱃길과, 무서운 바다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항해가 두려웠네. 그
래서 배가 여기에 닿자 아주 여기에 주저앉고 만 것이네」
마카레우스의 이야기는 이로써 끝났다.
7. 새가 된 디오메데스의 부하들
아이네이아스의 유모 카이에타가 죽은 것은 이곳에서였다. 51) 아이네이아스는 유모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비석을 세워주었다.
효성이 지극해서 만인의 본이 되는 내 양자가, 한때는 그리스 인들이 지른 트로이아의 겁화에
서 나를 구해내더니, 오늘은 나를 법도에 따라 화장하여 이렇듯이 장사지내 주었구나.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카이에타 해변에서 닻을 올리고 다시 바다로 나갔다. 심술궂은 것으로 악
명 높은 키르케의 섬을 멀리하고 아이네이아스 일행을 실은 배는 양 둑에 나무가 많은 튀브리스
강이 그 황토색 물을 바다에다 쏟아붓는 곳 52)쪽으로 달렸다.아이네이아스는 파우느스의 아들인
라티누스 53)로 쳐들어가 왕녀 54)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피흘려 싸우지 않고 거저 얻은 것은 아
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용감하기로 소문난 족속 55)과 싸워야 했는데 이 족속의 지도자 투르누스
는 빼앗긴 약혼자를 되찾으려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온
51) 이 땅은 이때부터 ‘카이에타’라고 불린다. 지금의 나폴리와 로마 사이에 있는 카에타가
바로 이곳이다.
52) 튀브리스 강은 지금도 ‘비욘도 테베레’ 즉 ‘누런 튀브리스 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
이 탁한 강이다.
53) 라티니 족의 시조. 라티움의 왕. 여기에서는 파우느스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리스 신
화에서는 오디세우스와 키르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54) ‘라비니아’를 말한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내가 된다. 아이네이아스는 후일에 건설한 새 도
시에 이 라비니아의 이름을 딴 ‘라비니움’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한다.
55) 루툴리 족. 이 족속의 지도자 투르누스는 라비니아의 약혼자였다.
에트루리아가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마렸다. 양군은 장기간에 걸쳐 필사적인 공방을 계속했다.
양군은 공방을 계속하면서도 주위의 종족들을 서로 자기편에 끌어 넣으려 했다. 당연한 일이지
만 어떤 종족은 루툴리 족을 편들었고, 어떤 종족은 트로이아 유민들을 편들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에반드로스 56)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반드로스는 기꺼이 아이네이아스를 도와주었다. 루툴리
족의 장수 베눌루스는, 그리스에서 망명한 장수 디오메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디오메데
스는 베눌루스를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당시의 디오메데스는 이아퓌기아 사람 다우누스의 도움
으로 건설한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다. 다우누스가 이 디오메데스를 사위로 삼으면서 삶터를 나누
어준 것이었다. 베눌르스가, 투르누스 왕의 사신으로 원군을 청하러 가자 아이톨리아의 영웅 디오
메데스는 그럴 힘이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원군 파견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디오메데스에게는 무
리가 아니었다. 그로서는 장인의 군대를 남의 집안 싸움에 파견할 생각이 없었다. 장인의 군대를
제외하면 그에게는 사실 군대다운 군대가 없었다. 데오메데스는 원군 파견을 거절하면서 이런 이
야기를 했다.
「군대를 파견하기 싫어서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하다 보면 슬픈 기억이 또
한 번 나를 괴롭히겠지만, 내가 여기까지 흘러와 이렇게 몸붙이고 살게 된 이야기를 할 터이니,
청컨데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 난공불락의 트로이아 성이 그리스 군이 지른 불에 잿더미가 된 일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하지만 이때 저 나뤽스의 영웅 아이아스 57)는 처녀신 미네르바의 성상을 욕보였습니다. 아이아스
에게 내려야할 여신의 진노가 우리 그리스 군에게 미쳤을 수밖에요. 우리 그리스 군은 귀향길에
바다에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을 만났던 것이지요. 우리는 끓어오르는 듯
한 바다와, 무시무시한 벼락과 어둠과 폭우와 싸워야 했습니다. 카파레우스 곶 앞바다가 뒤집히는
것 같더군요.
그때 우리가 당한 괴로움을 일일이 다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때의 우리를 내려다보았
더라면 불쌍하게 죽은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왕까지도 우리 그리스 군을 동정했을 것입니다. 그
러나 의
56) 원래는 아르카디아의 도시인 팔라티움(그/팔라티온)의 영웅. 젊은 시절부터 트로이아의 프
리아모스 왕과 아이네이아스의 아버지 안키세스와 친하게 지냈다. 아이네이아스가 원군을 요청하
자 아들 팔라스에게 기병 4백을 주어 아이네이아스를 돕게 했다.
57) ‘소 아이아스’
로운 전쟁의 여신이신 미네르바께서는 나를 불쌍하게 보시고는 진노를 거두시고 우리를 구해주셨
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향 아르고스에 닿을 수 없었습니다. 베누스 여신께서, 내가 당신께 부
상을 입혀드린 것 58)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나를 벌하신 것입니다.
나는 바다에서는 폭풍 때문에 모진 고생을 했고, 땅에서는 밑도 끝도 없는 전투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전쟁터에서 죽은 부하들, 바다에서 죽은 부하들을 부러워했을까요. 내 부하
들은 바다에서 혼이 나고 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지라, 나에게 어디라도 좋으니 눌
러앉자고 하더이다.
그러나 성미가 불 같은 아크몬은 의기소침해 있는 내 부하들을 꾸짖었습니다.
<전우들이여, 그렇게 험한 고초를 겪고도 겁을 먹는가? 지금가지 우리가 겪은 것보다 더 견디
기 어려운 고초는 이제 없다. 베누스 여신이 이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려
움은 인간을 허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나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오히려 그 역경을
짓밟을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이 역경을 밟을 수 있을 때,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다. 베누스 여신이 내 말을 듣고 있다고 하더라도 할말은 하겠다. 베누스 여신이 디오메
데스의 부하들을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이 그렇지만, 나는 할말을 하겠다. 우리는 여신의 증
오를 비웃어주자. 우리는 여신의 증오를 비웃어줄 만큼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플레우론 사람 아크몬의 이 도전적인 말에, 베누스 여신은 다시 격노하셨습니다. 아크몬의 말에
동의하는 부하들도 있었습니다만 대다수 여신을 두려워하고 있던 우리는 아크몬에게 우리 생각을
말했습니다. 아크몬은 우리 생각의 부당성을 지적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크몬의 목소리와 목은 가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은 깃
털로 변하고 잇었고, 가슴과 가늘어진 목과 등도 깃털로 덮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아크몬
의 팔이 구부러지면서 날개가 되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발은 꼬부라지면서 새의 발이 되었
고, 입술은 뾰족하게 튀어나오면서 끝이 꼬부라져 새의 부리가 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습니
다. 놀란 얼굴로 아크몬을 바라보고 있던 뤼코스,이다스,뉘테우스, 렉세노르, 아바스도 그렇게 변
신하고 있었습니다. 새가 된 내 부하들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하늘로 날아오른 내 부하들은
날갯짓하면서 우리 배 위를 한동
58) 트로이아 전쟁대 베누스 여신은 아들 아이네이아스가 속해 있는 트로이아를 편들었다. 여신
은 이때 아이네이아스를 구하려다 디오메데스의 무기에 부상을 입은 일이 있다.
안 날았습니다. 이들은, 백조와 그 모양이 비슷했습니다만 백조는 아니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원
군을 보내라고 하십니다만 내 부하들 대부분은 이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마 안 남은 군사
를 끌고 겨우 이 나라에 당도하여, 내 장인이 된 이아퓌기아 사람 다우누스로부터 받은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나를 원망하지 마시고 내 형편을 헤아려주시기 바
랍니다」
디오메데스의 말이 끝났다. 베눌루스는 이름이 <칼뤼돈>에서 유래한 이 왕국 59)을 더나 페우
케티아 해안과 메사피아 들판을 지나 제 나라로 돌아갔다.
메사피아 들판에서 베눌루스는 고목과 키가 큰 갈대에 묻힌 동굴 하나를 보았다. 당시 이 동굴
에는 반인반양의 목양신 판이 살고 있었으나 원래는 요정 무리가 살던 곳이었다. 이 동굴에서 요
정들이 떠난 내력은 이러하다. 옛날에 아풀리아의 목동 하나가 이 동굴을 엿보아 요정들을 크게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요정들은 목동의 모습에 놀라 황급히 그곳에서 도망쳤다. 한동안 도망치
던 요정들은 목동을 보고 놀라 도망쳐 온 것을 후회하고는, 무리지어 춤추고 노래하면서 동굴로
돌아갔다. 목동은, 요정들을 흉내내어 춤을 추고 음란한 노래를 부르면서 이 요정들을 놀려대었
다. 요정들로서는 이 목동의 야비한 수작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목동은 오래 행패를 부리고
있을 수
59) 디오메데스는 옛 칼뤼돈 왕 오이네우스의 자손이다.
가 없었다. 목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감람나무 껍질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목동은 그 자리
에서 야생 감람나무가 되었다. 이 야생 감람나무 열매를 맛보면 누구든 그 목동이 얼마나 야비한
인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욕지거리를 한 야비한 혀가 녹아 이 열매의 맛이
되었다는 것이다.
8 . 아이네이아스의 배. 아르데아
이렇게 해서 디오메데스를 찾아왔던 사신은 원군을 찾지 못한 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루툴리
족은 원군 없이도 전투를 계속했다. 양군의 희생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육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 루툴리 족의 왕 투르누스는 횃불을 마련하여, 소나무로 지어
진 아이네이아스 일행의 함대에다 불을 질렀다. 그토록 험한 바다를 건너온 배도 횃불 앞에서는
무력했다. 불길은 배의 방수 도료인 역청과 밀랍에 옮겨 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루툴리
족이 불을 지른 지 오래지 않아 불길은 돛대를 타고 올라가 돛을 태우기 시작했다. 신들의 어머
니인 거룩한 퀴벨레 여신은 그 배를 지은 나무가 자기의 성산인 이다 산에서 자란 소나무라는 것
을 알고는 격노했다. 여신이 격노하자 하늘에서는 바라 소리와 피리 소리가 낭자했다. 여신은 길
들인 사자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호령했다.
「투르누스야, 하릴없다. 너의 그 오만불손한 손으로 내 성산 나무로 지어진 배를 불태우려는
모양이다만, 내가 그 배를 구할 것이다. 한때 내 성산에서 자랐고, 따라서 내 숲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나무로 지어진 배를 잿더미로 만들 수는 결단코 없다」
여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진광풍이 불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스트라이와는
남매간인 바람의 신들은 하늘을 휘젓고 바다를 뒤집었다. 신들의 어머니인 여신은 강풍 한 자락
을 보내어, 트로이아 배의 닻줄을 끊게 했다. 닻줄이 끊기자 배는 곤두박질하면서 바다로 가라앉
기 시작했다. 일단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나무는 말랑말랑해지면서 살덩어리로 변했고, 이물은 머
리가 되고 얼굴이 되었으며, 노는 손이 되고 발이 되었다. 선측은 옆구리, 배의 뼈대는 척추, 아딧
줄은 머리카락, 돛가름대는 팔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색깔만은 처음의 짙은 청록색 그
대로였다. 아이네이아스의 함대의 대부분이 이렇게 해서 바다의 요정이 된 것이었다. 이 요정들
은, 처녀들이 으레 그러듯이 일단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그토록 두려워하던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산자락이 고향인 이 배들이 파도를 희롱하며 놀았으니, 이들을 보면서 산자락을 상
상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이 바다에서 그토록 오랜 험한 파도와 싸워왔다는 사실을
아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폭풍에 시달리는 배를 보면 다가가 그 배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을 태운
저희들 손으로 불을 질렀던 트로이아 유민들의 함대가 바다의 요정 무리로 전신하는 것을 보았
으니, 루툴리 족은 전쟁을 포기했을 법하다. 그러나 루툴리 족의 우두머리 투르누스는 버티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편을 들어주는 신이 있었고, 편드어주는 신보다도 더욱 귀한 용기가 있었다. 이
때부터 전쟁은 장인의 유산과 신부 라비니아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양군이 바란 것
은 오직 승리, 전쟁의 승리뿐이었다. 양군은 이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싸워서 이
겨야 했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에게는 베누스 여신이 있었다. 베누스 여신은 전세를 역전시키고
아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투르누스는 패자가 되었다. 61)
투르누스 생전에는 그 막강한 힘과 부를 자랑하던 도시 아르데아도 무너졌다. 성채는 이방인들
의 손에 무너져내렸고 성읍은 불바다가 되었다. 그 불바다에서, 그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 무리의 새들이 날개에 묻은 재를 털며 날아올랐다. 슬피 우는 새들의 모습에서 패망하는
도시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 새들의 이름과 이때 패망한 도시의 이름이 같은 것
도 그 때문이다. 아르데아 62)는 이로써 날개를 치며 제 운명을 슬픈 울음으로 우는 새가 된 것이
었다.
9 신이 된 아이네이아스
천궁의 신들 중에는 트로이아의 유민인 이 아이네이아스를 좋아하지 않는 신들도 있었으나, 그
의 불굴의 용기만은 칭찬하지 않는 신이
60) 알키노오스는 마음먹는 것보다 더 빠른 배로 오디세우스를 고향까지 데려다 준 파이아케스
나라의 왕, 바다의 신 넵투누스는, 자가의 적인 오디세우스를 돕는 것을 보고는 귀로에 오른 이
배를 바위로 만들어 버린다.
61) 아이네이아스와의 일대 일의 대결에서 패배. 목숨을 잃었다
62) ‘해오라기’
없었다. 심지어는 유노 여신까지도 해묵은 감정을 눅이고 아이네이아스를 찬양했을 정도였다. 63)
착실하게 힘을 기르는 아들 율루스 64)에게 후사를 맡긴 아이네이아스에게도 이승을 이별할 날
이 왓다. 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베누스 여신은 아버지 유피테르의 목을 껴안고 이렇게 애원
했다. 65)
「늘 저에게 친절하신 아버님, 다시 한 번 친절을 베푸시어 하찮은 자리라도 좋으니 제 아들
아이네이아스에게 신성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이네이아스는 아버님의 손자이자, 핏줄에 제 피가
흐르는 제 아들입니다. 스튁스 강을 건너, 저 무서운 저승으로 가는 것은 한번으로 족할 테니까요
」 66)
열석했던 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왕비인 유노 여신도 표정을 부드럽게 지었다. 그러자
신들의 지배자인 유피테르 대신이 말했다.
「너에게는 천성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너에게는 아들의 신위를 요구할 자격
이 있고, 네 아들은 신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 네가 소원한 대로 되리라」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자 베누스 여신은 대신에게 예를 표했다. 베누스 여신은 자기의 신조인
흰 비둘기 무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갈대숲 사이에서 누미키우스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인 라우
렌툼으로 내려갔다. 베누스는 누미키우스 강에 명하여, 아이네이아스의 몸에서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씻어내고는, 영생에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었다. 베누스 여신은 아들의 몸을 정
죄하고, 신들이 쓰는 향수를 뿌린 뒤 그의 입술에다 달디단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발라주었다.
아이네이아스는 이리하여 신이 되었다. 퀴리누스의 백성들은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꾸민 다음
<인디게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이 신을 섬겼다. 68)
63) 유노 여신은 저 ‘파리스의 심판’ 사건 이래로 파리스의 나라인 트로이아를 좋아하지 않
았다. 그래서 트로이아 전쟁이 계속될 동안 내내 그리스 편을 들었던 것이다.
64)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별명.
65) 퀴프로스 섬 앞바다의 포말에서 태어난 베누스는 유피테르의 친딸이 아니나, 올륌포스 천궁
으로 올라와 신들의 반열에 들면서 수양딸이 되었다고 한다.
66) 아이네이아스는 무당 시뷜레와 한 번 저승을 다녀온 바 있다.
67) 유피테르,마르스와 함께 로마의 3대 신으로 곱히는 신.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동일시된다.
68) 아이네이아스는 누르누스의 사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는 루툴리 족과 싸우다가 누미키우스
강가에서 실종된다. 사람들은 그가 이 강가에서 승천하여 신이 된 것으로 여겼다. 고대 로마 사람
들은, 이 지방 사람들이 섬기는 토착신 ‘인디게스’를 아이네이아스와 동일시했다.
10 포모나와 베르툼누스. 아낙사레테의 전신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알바 왕국과 라키움 왕국은 이름이 둘인,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
우스 69)의 지배를 받았다. 이 아스카니우스의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실비우스였다. 이 실비우
스의 아들 라티누스는 옛 왕군을 되찾고 조상의 이름을 영광되게 했다. 라티누스의 뒤를 이은 왕
은 알바, 알바의 뒤를 이은 왕은 에퓌투스였다. 70) 에퓌투스의 뒤를 이은 것은 카퓌스, 카퓌스의
뒤를 이은 것은 카페투스, 그 다음은 티베리누스였다.
이 티베리누스는 투스쿠스 강에 바져죽게 되는데 그가 죽은 뒤로 이 강은 <티베리누스 강>이
라고 불린다. 이 티베리누스에게는 레물루스라는 아들과 전사로 이름있는 아크로타라는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레물루스는 감히 벼락 던지는 시늉을 하다가 벼락에 맞아죽으면서 형에 못지않게
용감한 아크로타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이 아크로타는 영웅 아벤티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아벤티누스는 천수를 누리고 죽어 그의 영토 안에 있는, 자기의 이름을 붙인 언덕 71)에 묻혔다.
아벤티누스 사후에 프로카에게로 계승되었던 왕위는 그 뒤 팔라티움 인들 72)에게로 넘어갔다. 포
모나는, 프로카 왕이 이 땅을 다스리던 시절에 이 땅에서 살던 숲의 요정이다. 73) 라티움에 사는
숲의 요정 중에 이 포모나만큼 과수원을 잘 가꾸는 요정, 자기 이름과 비슷한 것 74)이 열리는 과
일나무를 포모나만큼 잘 돌보는 요정은 없었다. 포모나는, 숲의 요정이면서도 숲이나 강 같은 것
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포모나가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탐스러운 열매가 잔뜩 달린 과일나무뿐
이었다. 숲의 요정이니 사냥을 좋아하고 사냥에 능할 터인데도 포모나는 사냥용 창을 드는 대신
꼬부라진 칼만 들고 다녔다.
69) 또 하나의 이름은 ‘율루스’
70) 이하, 트로이아의 패망에서 로마가 설 때까지의 시간적인 공백을 메워주는 수많은 신화적인
왕들이 등장한다. 이 왕들 중에는 이름이 트로이아식인 왕도 있고 로마식인 왕도 있다. 그러나 세
월이 지남에 따라 왕들의 이름은 로마식으로 변해간다.
71)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아벤티누스 언덕’을 말한다.
72) 로마 인들.
73) 여기에서는 숲의 요정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원래는 과실의 여신이다. ‘포모나’라는 이름
은 ‘포마’(‘과실’이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74) 즉 ‘포모나’와 이름이 비슷한 ‘포마’, 즉 과실.
향으로 자라는 가지가 있으면 이 칼로 걸어 제자리로 보내기도 했다. 때로는 이 칼로 나무
의 외피를 따고 접을 붙이기도 했고, 어린 나무읠의 경우에는 영양분을 흘려주기도 했다.
부지런한 포모나의 나무는 갈증을 몰랐다. 물길을 내어 물을 아예 과수원 한가운대로 흐르
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수원은 포모나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것이자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이 포모나에게는 베누스가 장려하는 사랑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
다. 그러나 이 포모나의 주위에는 치근거리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포모나는 그런 자들
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과수원 안에다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살았다. 나이가 고만
고만해진 사튀로스들은 틈만나면 춤추자고 포모나를 꾀었다. 사튀로스들 뿐만이 아니었다.
판도 배배 꼬인 뿔에다 소나무 잎으로 만든 꽃다발을 걸고 찾아와 치근대었고, 늘 나이보
다 젊어 보이는 실레노그, 심지어는 낫과 배대끈을 들고 다니면서 곡식 도둑을 혼내는 프
리아푸스도 포모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이들 이상으로 포모나를 사랑하는 자가 있었다. 베
르툼누스였다. 그러나 베르툼누스는 이들 이상으로 포모나를 사랑했다뿐이지 짝사랑이기는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베르툼누스는 자주 변장한 모습으로 포모나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그 실한 손으로 황소의 코뚜레를 잡고, 금방 황소의 코를 꿰어 끌고 오는 농부의 행세를
할 때도 있었고, 포도원 일꾼처럼 한손에는 칼, 다른 한손에는 포도덩쿨을 들고 올 때도
있었고, 금방이라도 과일을 딸 사람처럼 어깨에 사다리를 메고 나타날때도 있었다. 농부로
만 변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전사처럼 찬칼로 무장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때로는 낚
시대를 맨 어부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요컨대 이 베르툼누스는 능한 변장술 덕분에,
사랑하는 포모나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선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베르툼누스는 허옇게 센머리 위에 모자를 하나 턱 쓴노파 차림을 하고
포모나 앞에 나타났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잘 가꾸어진 포모나의 과수원으로 들어서
서 익은 과일을 보면서 베르툼누스는 말했다. 『과일 사이에 있으니 더 아름다워 보이는군
요』 이렇게 수작을 걸고 나서 몇 차례 포모나의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베르툼누
스의 입맞춤은 노파가 처녀에게 할 법한 그런 입맞춤은 어림도 없이 아니었다. 한바탕 과
일에 대해 입에 발린 칭송을 늘어 놓은 다음 노파는 풀밭에 앉아, 가지가 부러질 듯이 열
매를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침 가까이에는 포도덩쿨에 덮여 보기
에 좋은 느릅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느릅나무를 감고 올라간 포도덩쿨에는 포도송이가 잔
득 매달려 있었다. 노파로 변장한 베르틈누스는 이 느릅나무와 포도덩쿨을 한동안 올려다
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저 느릅나무를 좀 보아요. 저 느릅나무가 포도덩굴과 혼인
하지 않고 저 혼자 덜렁 서 있다면 잎밖에는 사람들에게 보여줄게 뭐 있겠어요. 포도덩굴
도 그렇지요. 포도덩굴도 느릅나무와 혼인해서 저렇게 가지를 감고 올라가 있으니까 보기
에 좋쟎아요? 아무리 포도덩굴이지만 느릅나무와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땅바닥이나 기고
있지 별 수 있겠어요? 아가씨는 그래, 저 느릅나무와 포도덩굴을 보면서도 느껴지는 게 없
나요? 그대는 혼인이라는 걸 싫어하지요? 혼인 같은 것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대는 누구와든 혼인을 해야 해요. 헬레네에게 구혼자가 많았다지만
그대와의 혼인을 바라는 구혼자만큼 많았겠어? 혼례식장에서 라피타이다 행패를 부린것으
로 유명한 저 히포다메이아에게 구혼자가 많았지만, 그대와의 혼인을 바라는 구혼자만큼
많았겠어요? 용감한 오디세우스가 물리쳤다는 페넬로페에게 구혼자가 많았다지만 그대와
의 혼인을 바라는 구혼자만큼 많았겠어요? 그대가 매정하게 돌아서 이 순간에도 수천 명
의 젊은이들이 그대에게 호소하고 있어요, 이들중애는 신들고 있고, 반신들고 있고 이름을
들으면 알바산도 벌벌 떨 신혈붙이도 허다하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영리하신 분이고, 또
정말 제대로된 혼인을 하고 싶어하는 분이라면, 아가씨의 어떤 구혼자들보다 아가씨를 더
사랑하고,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가씨를 더 사랑하는 내말을 들어, 다른 구혼자들은
모두 내치시고 베르툼누스를 아가씨의 반려로 고르세요. 그 양반의 말을 들어봐야겠지만
내 말만으로 그 양반을 믿어도 좋아요. 나는 그 양반 자신 이상으로 그 양반을 잘 알아요.
그 양반은 그저 세상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나 좋아하는 양반이 아니라 이 정도 되는 과수
원을 지키면서 과수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랍니다. 그대와의 혼인을 바라는 구혼자
들의 대부분은 첫눈에 그대에게 반한 이들이지만 내가 말하는 이 베르툼누스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대는 이 양반의 첫사랑이자 하나뿐인 애인이랍니다, 그 양반 말로는, 이 새상
에 자기 온 삶을 바칠 만한 여성은 그대뿐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젊겠다, 신들의
은혜를 많이 받아 잘났겠다, 둔갑과 변장의 명수겠다....... 이 양반과 혼인하면 그대가 명하
는 대로 무엇이로든 둔갑해 보이기도 할 거예요. 게다가 그대와의 취미도 같아요, 그 양반
은 그대가 가꾼 열매를 가장 먼저 손에 넣은 분이고, 그대의 땀이 밴 그 열매를 손에 들고
그대를 느끼는 분이랍니다. 그러나 정말 그 양반이 나를 통하여 여기에 와서 그대에게 호
소하는 것으로 상상해 주세요. 아가씨, 아가씨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 복수하는 신들
이 계시다는 걸 잊지 마세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연인들을 벌하는 베누스 여신을 잊지
마시고, 기억력이 좋기로 소문난 람누스 여신(‘응보천벌’의 여신인 네메시스. 이 여신은
요정들의 사랑을 외면한 나르키소스에게 천벌을 내린 바 있다.)의 진노를 잊지 마셔야 합
니다. 아가씨는 이 여신들을 무섭게 여기시지 않는 모양인데,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퀴
프로스에는 아주 유명한 아야기랍니다, 나는 오래 살아서 아런 아야기를 많이 알고 있답니
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가씨의 마음도 좀 누그러져, 구애하는 사람들의 말도 때로는 귀
담아들으시겠지요. 옛날 근본이 그다지 귀하지 못한 아피스라는 청년이, 명문 테우케스의
자손인 공주 아낙사테를 보는 순간 그만 뼈속까지 태워버릴 듯한 사랑의 불길로 타올랐던
것이지요. 아피스 청년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성으로 이 사랑의 불길을
잡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이때는 이미 사랑의 욕망은 이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뜨
거워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 처녀가 사는 궁전으
로 찾아갔더랍니다. 이피스는 처녀의 유모를 만나 처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는 어떻든
처녀의 마음을 좀 누그러지게 해달라고 청을 넣는 한편, 처녀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에게도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지요, 이피스는 이따금씩 이들에게 편지를 주어 공주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고, 이따금씩은 애소의 눈물에 젖은 꽃다발을 그 집 문에 걸기도 했으
며, 그 집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누워 딱딱한 돌에 부드러운 빰을 대고는 자기 앞에 무정하
게 닫힌 육중힌 문을 원망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아낙세레테는 아기양 별자리거 잠길 즈
음(아기양 별자리가 바다에 잠기는 것은 폭풍의 계절인 동지 직전이다.)에 끓어 오르는 바
다보다 잔인했고, 노리쿰(지금의 오스트리아. 당시부터 제철로 유명했다.) 대장간에서 버린
쇠불이나 땅바닥에 박힌 돌보다 더 단단했어요. 아낙사레테는 쌀쌀맞게 구는데 그치지 않
고 이 청년을 멸시하고 놀리기까지 하는가 하면 청년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까지 해서,
청년의 가슴에 남아 있단 사랑에 대한 가냘픈 희망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어요. 이피스
는 이런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래서 그 집 문 앞에서 아렇게 되쳤어
요. 청년도 막말을 한것이지요. <아낙사레테여, 그대가 이겼소. 그대가 이겼으니 이제는
나로 인하여 귀챦은 일을 당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오. 그대는 이겼으니 마음껏 좋아하시
오. 그대는 이겼으니 파이안(치료의 신 아폴로의 별명. 이 신에 대한 찬가. 즉 승리의 노
래)이라도 부르시오. 이겼으니 월계관을이라도 쓰시오. 그대는 승리자가 되었고 나는 패배
자가 되었으니, 패배자가 된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겠어요. 아, 무정한 여인이여, 마음껏 기
뻐하시오. 하지만 내 사랑에는, 그대도 어쩔 수 없는 힘이 있어요. 그대도 언젠가는 내 사
랑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그대도 언젠가는 내가 그대로부터 부당한 대
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사랑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바람이 그대 귀에 전하게는 하
지 않겠소. 나는 그대가 볼 수 있도록 여기 이 자리에서 죽겠소. 여기에서 죽어서, 무정한
그대가 내주검을 바라보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소. 아, 하늘의 신들이시여, 신
들께서는 우리 인간을 내려다보신다는 게 사실이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를 기억하
시어 저의 이야기가 노래가 되어 세세연년 사람들 입에 오르게 하소서, 신들께서 제 수명
에서 빼시는 세월을 저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더하셔서, 그만큼 더 오래 저를 기억하게
하소서> 아피스는 이렇게 외치면서 눈믈에 젖은 눈을 들어, 자기 손으로 자주 꽃다발을
걸었던 처녀의 집 문을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떨리는 손으로 문의 상인방에다 올가미를 걸
고는 다시 외쳤어요. <여기에 그대가 좋아할 만한 꽃다발이 있소, 무정한 사람이여!> 청
년의 이말 끝에 올가미에다 머리를 집러 넣었어요. 청녕을 올가미에 머리를 집어넣고도 눈
으로는 여전히 아낙사레테의 방 쪽을 올려다 보았지요. 하지만 청년을 그 올가미에서 대롱
대롱 매달린 채 곧 숨을 거두었어요. 청년의 몸이 흔들리면서 문을 툭툭 쳤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이 문이 반쯤 열렸어요.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요. 그 집 시종들이
기겁을 하고 달려나와서 청년을 내렸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죠. 시종들은 이 청년의 시
신을 청년의 어머니인 과부에게로 메고 갔지요. 청년의 어머니는 아들의 차가운 시신을 받
아 안고는 몸부림을 쳤지요. 어머니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히는 광경이야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어머니는 울면서 그 성읍을 빠져나가는 장례 행렬의 앞장을 섰어요. 상여 위에
는 화장할 관이 놓여 있었죠. 이 상여는 우면히 아낙사레테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과부 어머니의 곡소리가 이 처녀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죠. 이째 이미 복수의 여신들은 이
처녀의 방에 와 있었어요. 이 매정한 처녀도 곡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청년이 불쌍하게 생
각되었던지, < 이 초라한 장례식을 구경이나 할까? > 이러면서 창문의 문턱위로 올라 갔
어요. 창문은 활짝열려 있었죠. 관속에 누운 이피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처녀는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대요. 더운 피가 빠져나가면서 처녀의 얼굴은 핼쑥해졌지요. 처녀
는 창틀에서 내려서려고 했지만 돌아가지 않았고요, 오랫동안 처녀의 가슴속에 있던 돌 같
은 응어리가 온몸으로 퍼졌던 거지요. 아가씨, 이걸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살마이스에 가면 아직도 공주의 모양이 석성으로 남아 있대요. 공주에게 봉헌된
사당도 있는데 이름이 <베누스 프로스피키엔스(‘앞을 내다보는 베누스’라는 뜻.)>라고
하더군요. 자 요정 아가씨, 이 이야기를 마음속에 따담고, 남의 사랑은 본척도 않는 그 오
만한 마음을 버리세요.버리시고 그대를 사랑하는 분에게 사랑으로 화답하세요. 그래서 복
을 지으면 봄서리는 그대 과수원의 열매눈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고, 여름의 태풍은 그대
과수원의 꽃을 날리지 않을 거예요』 노파로 변장한 베르툼누스 신은 이런 말로 포모나를
꾀었으나 보람이 없었다. 그는 그제야 변장을 풀고 젊고 잘생긴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세
월의 흔적인 주름살을 벗고 베르툼누스 신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포모나 앞에 나타난 것
이다. 흡사 태양이 그의 얼굴을 가렸던 구름을 벗겨버린 것 같았다. 베르툼누스 신은 노파
로 변장한 자신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자 않던 포모나를 힘으로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베르툼누스 신의 잘생긴 모습을 보는 순간, 포모나의 마음도 베르툼
누스의 마음처럼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2. 로물루스와 헤르실리아
프로카 다음으로 아우소니아 왕국을 다스린 사람은 간악한 아물루스(프로카의 아들. 형누
미토르를 추방하고 알바롱 가의 왕이 되어 형의 아들인 라우소스를 죽이고 자식을 낳지
못하는, 형의 딸 일리아(레아 실비아라고 불리기도 했다)를 베스타 여신의 무녀로 만든다.
그러나 일리아는 전쟁신 마르스와의 사랑으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는다.
일리아는 마르스의 반대로 이 쌍둥이를 기르지 못하고 튀베리스 강에 버리게 된다. 이 둘
은 다행이도 목동에게 발견되어 성장한 뒤, 아물루스를 죽이고 왕권을 외조부인 누미토르
에게 돌려준다. 그 뒤 이 쌍둥이는 로마를 건설하게 되나 둘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형 로물
루스가 아우 레무스를 죽이게 된다.)였다. 이 아물루스가 무력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누미토르의 외손자들은 외조부가 잃었던 왕권을 찾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팔릴리
라(‘팔레스 축제’. ‘팔레스;는 고대 로마의 가축수호신. 이 축제날은 곧 로마의 건국기
념일이 된다.)에 이들은 로마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사비니(옛날 아페닌 산맥 지방에 살
던 종족)왕국의 왕 타티우스와 장로들은 이 새도시로 쳐들어 왔다. 이들을 위하여 성채로
들어오는 길을 열어주었던 타르페이아(사비니 왕 타티우스를 사랑했던 로마의 처녀. 사비
니 왕에게 외손이 있는 것. 즉 금팔찌를 주면 조국을 배반하고 성문을 열어주겠다고 약속
하고, 실제로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사비나 군사들은 왼손에 있는 것인 금팔찌를 주
는 대신 왼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이 처녀를 눌려죽였다.)는 적의 방패에 눌려 죽음으로써
죄값을 했다. 이들 다음으로 로마를 공격해온 것은 쿠레스(사비니의 수도)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발소리를 죽인 이리들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는 로마 성채 수비대를 공격하고는, 일
리아의 아들 로물루스가 굳게 잠가놓은 성문을 향해 진격해 왔다. 로물루스가 굳게 잠갔지
만 유노 여신은 성문 중 하나를 이들에게 열어주기로 작정했다. 유노 여신은 성문의 빗장
중 하나를 소리없이 벗겼다. 빗장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을 안것은 베누스 여신뿐이었다,
그러나 베누스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한 신이 한 일을 다른 신이 원상
태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야누스 신전에 가까이에 샘에서 솟아오른 물로 사시사철
바닥이 눅눅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아우소니아 물의 요정들이 살고 있었다. 베누스 여
신은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의 요정들은 이 여신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들
에게, 여신의 요청은 늘 정당했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저희들 샘에 물을 대주는 강이라는
강, 시내라는 시내는 모조리 불러들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야누스 신전에 이르는 길은
출입이 자유로왔다. 물이 길을 막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정들은 저희 샘에서 솟아
오르는 물에다 노란 유황을 쏟아넣고, 지하의 수맥에는 검은 연기를 뿜는 역청을 넣고 불
을 붙였다. 유황과 역청이 뿜어내는 열기는 샘의 바닥까지 전해졌다. 그 결과,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알페스(알프스)의 물과 차가움을 겨루던 그 샘의 물이 끊는 물같이 뜨거워졌다.
그 열기로 성문 양쪽에 있던 기둥에서는 연기가 났고, 따라서 사비니인들이 이 뜨거운 새
물길에 막혀 성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비니인들은 결국 마르스의 군대(로물루스는 마
르스의 아들)에 참살을 당했다. 로물루스가 이들을 공격했다. 로마의 땅은 사비나인들과
로마 시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무서운 칼날 아래 목숨을 잃은 장인들과 사위들(당시 로마
인들은 사비니인 여자들을 약탈해 와서 아내로 삼았다. 그래서 사비니 인들을 ’장인‘ 로
마 인들을 ’사위’에 견준다.)의 피는 새로 생긴 물길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이 전투를
마무리지은 것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아니라 평화였다. 이 전투는 로마가 타티우스에게
로마 왕권의 일부를 양여한다는 조건으로 끝났다. 타티우스가 죽고 연로한 로물루스가 로
마인과 사비니인을 한 법으로 다스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마르스 신은 투구를 벗고 신들의
아버지에게 인간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신 대신이시여, 이
제 때가 왔습니다. 로마는 반석 위에 섰고, 나라는 한 인간의 손으로 죄지우지할 수가 없
을 만큼 튼튼해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와 제 아들에게 상을 내리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손주 되는 제 아들은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제목이 되었습니다, 로몰루스를 땅에
서 거두시어 이 천성으로 불러주소서, 저는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말씀을 듣고 마음에다 새
겨두었습니다. 제가 어찌잊을 수 있겠습니다까? 신들이 열석한 자리에서 어버지께서는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천상으로 올라와 신위를 차지할 자가 네 핏줄에서 태어났구
나> 이제 때가 이르렀으니 그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전지 전능한 유피테르
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을 검은 장막으로 가리고, 천둥과 번개를 하계로 퍼부었다. 마
르스는 그 틈을 이용하여 로물루스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오라는 유피테르의 뜻을 짐작했
다 마르스는 창을 장대삼아 짚고는. 발굽에 피가 묻은 말들이 끄는 수레에 뛰어올랐다. 그
는 말의 잔등을 채찍으로 때리고 전속력으로 수레를 팔란티움 언덕의 정상으로 몰았다. 일
리아의 아들 로물루스는 바로 그 팔란티움 언덕 정상의 숲 속에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인
간 세상의 법을 집행하고 있었다. 마르스는 그 현장으로 치고 들어 갔다. 로물루스 왕의
육신은 투석기가 쏜 납탄이 하늘에서 녹듯이 그렇게 녹아 대기 속으로 비산했다, 하늘에서
그는 신들의 보좌에 어울리는 새몸을 얻었다 신들의 옷으로 차림한 퀴리누스(로물루스는
로마의 신 퀴리누스와 동일시된다.) 신상과 그 모습이 똑같은 새몸을 얻은 것이었다. 로물
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아는 지아비를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천궁의 왕비인 유노
여신이 무지개 여신 이리스에게 활꼴로 휘어진 길은 따라 내려가, 과부가 된 헤르실리아에
게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왕비여, 라티니 족과 사비니 족을 통틀어 으뜸가는 영광의
자리
제15부
카에사르의승천 외
1.뮈스켈로스,크로톤
로물루스 사후, 로마 사람들은, 그처럼 막중한 책무를 맡아 왕위를 계승할 사람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래를 신총하게 꿰뚫어보는 당대의 예언자 파마여신은 그런 그릇으로 넉넉
한 사람으로 누마를 지목했다. 박식한 누마는 사비니 족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해
박한 지식을 구사하여 보다 심원한 우주의 본질에까지 파고들고자하는 사람이었다. 학문에의 열
정에 사로잡힌 그는 일찍이 고향 쿠레스를 떠나 옛날 헤라클레스를 환대한 적이 있는 도시 크로
톤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누마는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땅에다 그리스 도시를 최초로 건설한 사람
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지방의 노인하나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유피테르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히베리아에서 소떼를 몰고 바다를 건너
왔을 때의 일입니다. 오랜 항해 끝에 라키니움의 해변에 이른 헤라클레스는 소떼는 해변에 풀어
풀을 뜯게 하고 자신은 코로톤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답니다. 환대를 받고 떠나면서 헤라클레스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우리의 손자대에 이르면, 이곳은 도시가 될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이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예언을 성취시킨 사람은 뮈스켈로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 이야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뮈스켈로스는 아르고스 사람인 알레몬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 사
람들 중에 신들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뮈스켈로스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뮈스켈로스가 어
느 날 잠을 자는데, 늘 몽둥이를 둘러 메고 다니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네 아버지 나라를 떠나 머나먼 아이사르강의 자갈이 많은 지류를 찾아가
거라.>
헤라클레스는 이 말만 한 것이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라면서 이 젊은이
를 위협하고는 사라졌더랍니다. 헤라클레스가 사라지는 순간 알레몬의 아들은 꿈에서 깨어났지요.
알레몬의 아들 뮈스켈로스는, 조용히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였
습니다. 뮈스켈로스가 망설인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영웅신 헤라클레스는 그땅을 떠나라고 했습
니다만, 그 나라 법은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나라 법에 따르면, 누구든 나
라를 떠나다 붙잡히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답니다. 빛나는 태양이 얼굴을 바다에
담그고, 얼굴에 별을 가득 박은 밤이 고개를 들자, 그 영웅신은 다시 뮈스켈로스의 꿈 속에 나타
나 같은 말을 했습니다. 즉 하루빨리 떠나라면서, 만일에 떠나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라고 이 청
년을 위협했던 것이지요. 뮈스켈로스는 두려워하면서도 조상 전래의 성물을 꾸려 그 나라를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뮈스켈로스는, 떠나기도 전에 붙잡혔습니다. 온 나라가 술렁거
릴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레몬의 아들 뮈스켈로스가, 국법을 어긴 죄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
지요. 뮈스켈로스를 기소한 법
끙오, 헤라클레스시여, 열두 가지 난사를 치르시고 지금은 천궁의 신이 되신 분이시여, 기도하오
니 저를 도우소서. 저를 이 꼴로 만드신 분은 신이시니, 저를 도우소서.>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죄수를 유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검은 돌,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흰
돌을 항아리에 던져넣어 유죄, 무죄 여부를 평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뮈스켈로스가 재판을 받을
당시에도 평결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죠. 사람들은 무정하게도 항아리 속으로 검은 돌만 던져넣
었습니다. 그러나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검은 돌만 항아리로들어갔는데, 재판관이 항아리
의 돌을 쏟았을 때에는 검은 돌이 모조리 흰 돌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헤라클레스가 손을 써
준 덕분에 뮈스켈로스는 무죄 평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뮈스켈로스는 암피트뤼온의 아들
에게 제사를 올리고는 바다로 배를 내어 이오니아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는 라케다이온 인들이
세운 도시국가 타렌툼, 쉬바리스, 살렌티니 인들의 도시 네렌툼, 투리아 강 어귀, 크리미사,이아휘
기아의 해안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인 아이사르 강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크로톤의 무덤은 이 아
이사르 강 어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요. 뮈스켈로스는 헤라클레스의 말에 따라 도시를 세
우고는, 그 아래 묻힌 사람의이름을 따서 그 도시를 <크로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다. 이 이탈리아 땅과, 여기에 세워진 그리스식 도시의기원은, 그 땅에 전해
져 내려오는 전승으로도 확인된 바 있다.
2.퓌타고라스의 가르침
당시 이 도시에는 사모스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사모스에서 태어났으나 전제정치에 대한 혐
오감 때문에 이 섬을 떠나 망명자의 삶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오한 사상으로, 인간 세계에
서는 아득히 먼 신들에게 다가갔으며,자연이 인간에게는 베풀지 않았던 그 나름의 독특한 심안으
로 사물을 볼 수 있었다. 희대의 천재성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의 열정으로 사물의 본질과 원리
를 인식한 그는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경탄의 눈길을 보내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제자들에게, 우주의 기원, 만물의 기원, 자연의 정체, 신들의 속성, 하을에서 눈이 내리는 까닭, 번
개와 천둥의 정체, 이 번개 및 천둥과 유피테르와의 관계, 천둥과, 바람이 구름을 찢는 소리와의
관계, 별들의 운행에 관한 법칙, 지진이 일어나는 까닭, 번개와 천둥의 정체, 소리와의 관계, 별들
의 운행에 관한 법칙, 지진이 일어나는 까닭,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가르
쳤다. 처음으로 육식을 금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도 그였고, 처음으로 자신을 <현자>와 유사한
말로 지칭한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이러하
다.
"그대들이여, 죄많은 식물로 그대들 육체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곡식이 있고,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린 과실이 있고, 포도덩굴에서 부풀어오르는 포도가 있습니다.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 맛이 도는 나물도 있고, 삶아 먹을 수도 있고 구워 먹을 수도 있는 야채도 있으며,
우유도 있고, 꽃 향기가 도는 꿀도 있습니다. 대지는 그대들에게 죄없는 식물을 얼마든지 베풀어
주고 있고, 도살하지 않고도 피를 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잔칫상을 얼마든지 차려내고 있습니
다. 고기로 배를 불리는 것은 짐승들뿐입니다만 양 같은 가축들은 풀을 먹고 삽니다. 제가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은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한 짐승, 가령 아르메니아의호랑이니 약탈자인 사
자, 그리고 곰과 이리들뿐입니다. 우리 몸을 살찌우기 위해, 우리의 탐욕스러운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동물의 살을 먹다니, 이 어찌 사악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어머니 중에서도
가장 자비로운 어머니신 대지가 우리에게 모자라지 않게 베풀어주는데도 불구하고 흡사 외눈박이
거인들처럼 사악한 이빨을 다른 짐승에게 박다니요? 다른 동물을 죽이지 않고는 탐욕스러운 배를
채울 수 없다는 말인가요?
흔히 황금시대로 불리는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자연은 저절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와 대지가 가꾸어내는 곡식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입술을 다른 짐승의 피로 더럽
히지 않았습니다. 이 시절에는, 새들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 수 있었고, 산토끼는 아무 두려움 없
이 들판을 누빌 수 있었으며 물고기는 낚시 바늘에 대한 걱정 없이 물 속을 헤엄쳐 다녔습니다.
이 시절에는 덫도 없었고 속임수도 없어서, 모든 동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가
지나자,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누군가가 고기를 그 탐욕스러운 목구멍으로 삼키는 사자를
보고는 이를 부러워하고 나쁜 전례를 만들면서 인간은 죄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자로 인하
여 인간이 칼에다 다른 동물의 피를 묻히는 일이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우리 인간
을 해치려는 동물만 인간의 칼에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은 아무 죄의식도 느
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어야 했습니다. 죽일 이유는 있었지만 먹을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사악한 짓이 계속해서, 더 큰 규모로 자행되었습니다. 아마 인간의 먹이로 제일 먼저
희생된 동물은 돼지였을 것입니다. 돼지는 그뾰족한 주둥이로 인간이 씨 뿌린 밭을 파해쳐 수확
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테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염소가 박쿠스 신의 제단에서 희생되었
을 것입니다. 염소는 박쿠스의 포도덩굴을 잘라먹지요. 하지만, 양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대접합니까? 인간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이평화스러운 동물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그 풍만한 젖으로 우리에게 양유를 주고, 그 부드러운 털을 우리의 옷감으로 주는 이 양, 죽어서
보다는 살아서 인간에게 더 유익한 짐승이 왜 죽어야 합니까? 그토록 양순하고 순진한 동물인 소
는 인간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신세가 되어야 합니까? 인간은, 대지가 베풀어주는 곡
식을 먹을 자격도 없는, 참으로 배은망덕한 동물이 아닙니까? 소의 목에다 쟁기띠를 매어굳은 대
지를 갈고, 여기에서 곡식을 수확한 인간이,이번에는 그 쟁기띠를 벗기고 그 벗긴 자리를 도끼로
내려칩니다. 이런 인간이 배은망덕한 동물이 아닙니까?
인간의 이런 죄를 저지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신들을 이 사악한 저희의 수호자로 상정
하고, 이런 짐승을 죽여 바치면 하늘의 신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은 이 황소, 인간에게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이 황소는뿔에다 꽃다발과 금
붙이를 건 채로 신들의 제단으로 끌려 나옵니다. 제단으로 끌려나온 이 황소의 힘을 빌려 땅을
갈아 가꾸고 거둔 곡식을 이마에 던지면 이 곡식을 맞으면서 죽을 준비를 합니다. 이윽고 제관이
제단 성수 그릇 옆에 있던 칼로 목을 따면 황소는 제 필로 그 칼을 물들이며 죽어갑니다. 제관들
은 또 어떻게 합니까? 아직 채 숨을거두지도 않은 황소의 몸 속에서 허파를 도려내어, 신들이 이
황소의 허파에다 맡긴 뜻을 읽는다고 수선을 피웁니다.
이런 희생수의 고기를 먹는 풍습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희생수를 죽여놓
고는 우르르 모여들어 이 희생수의 고기를 먹습니다. 그대들이여, 바라노니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
시오. 이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도살한 황소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그대들의 밭을 가느라고
수고한 경작자의 고기를 먹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들께서 내 입을 주관하시므로 지금부터 그 분들의 뜻을 좇아, 내가 사랑하는, 내 가슴에 있는
델포이의 비밀, 하늘의 비밀을 그대들에게 밝게 드러내고, 내 정신의 신탁을 그대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부터 누설하려는 것은 일찍이 어떤 지성도 밝힌 적이 없는, 장구한 세월을 비밀
의 너울에 가려져 있던 참으로 중요한 비밀입니다.
나는 이 땅, 이 무지한 땅을 떠나 저 하늘에 높이 뜬 별 사이를 여행하기를 즐깁니다. 구름 위에
서, 저 거인 아틀라스의 어깨 위에서, 아무것도 모는 채 지향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인간을 내려다
보며 운명의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고,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쫓기고 있는 인간에게 이렇게 말하
기를 즐깁니다.
그대들이여, 그러니 잘 들으십시오.
그대들이여, 차가운 저승 땅을 두려워하고 이는 그대들이여. 왜 스튁스의 땅을 두려워합니까? 빈
이름뿐인 어둠의 땅, 시인의 망상에나 존재하는 땅,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땅을 왜 그렇
게 두려워합니까? 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육체라는 것은 화장단에서 재로 화하건,
땅 속에서 오랜 세월 썩어 없어지건, 한번 없어지면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
합니다. 이 영혼이라는 것은, 원래있던 곳을 떠나면 다른 집을 찾아들어가 거기에 다시 거합니다.
나는 내 전생을 기억합니다. 트로이아 전쟁 당시 나는 파토오스의 아들 에우포르보스였습니다. 아
트레우스의 둘째아들 메넬아로스의 창을 가슴에 맞고 죽었지요. 근자에 나는 이바스의 도시 아그
로스의 유노 신전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왼손에 들고 다니던 방패는 거기에 보관되어 있었
습니다. 나는 이 방패를 알아볼 수 있었지요.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 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
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는 처음의 영혼 그대
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 안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그대들에게 경고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음식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잔인무도한 살륙으로,
인간의 혼과 똑같은 혼을 그 거처에서 쫓아내는 짓을 삼가십시오. 피로써 피를 살찌우면 안 됩니
다.
내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나는 내 배의 돛을 바람으로 부풀리고 넓은 바다를 두루 누벼본 사람
이니, 내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
없이 변합니다. 드러난 것은 단지 찰나적인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항상 흐릅니다. 강처럼 흐릅니다. 강물에, 어디 가만히 정지해있는 순간이 있던가요? 물결은 다른
물결에 밀립니다. 그 다른 물결은 또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앞에 있는 물결을 밀어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물결은 밀고 밀리면서 흐르는 것입니다. 앞에 있던 것은 뒤로 처지고, 오지 않았던 것이
옵니다.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것입니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면, 빛나는
아침 햇살이 밤의 어둠을 이어받는 것을 아시지요. 만물이 깊이 잠든 한밤의 하늘 색깔과, 새별별
이 나타날 때의 하늘 색깔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 색깔은, 아침의 전령사인 새벽의 여신이
하늘을 새벽빛으로 물들일 때가 다르고, 하늘을 태양신 포에부스에게 넘겨줄 때가 다릅니다. 아침
에 땅 밑에서 솟아오를 때도 붉고, 지평선 너머로 질 때도 붉던 대양신의 낯빛도 땅과는 멀리 떨
어진 하늘 한가운데 있을 때
내 계절이 차례로 바뀌는 것을 눈여겨보셨습니까? 이 네 계절은 우리의 인생과 비슷합니다. 초봄
은, 유아기와 같아서 부드럽고 따사롭습니다. 아직은 튼튼하지도 곧지도 못하지만, 초봄의 밭에서
자라는 곡물은 농부들의 가슴을 희망으로 채워줍니다. 식물이라는 식물은 다 꽃을 피우고, 기름진
땅은 색색의 꽃을 한아름 안고 봄을 노래하지만, 나뭇잎에는 아직 힘이 없습니다. 봄이 자라 여름
으로 접어들면 계절은 젊은이를 연상시키게 됩니다. 일년 중에 이때만큼 튼튼한 계절, 풍부한 계
절, 뜨거운 계절, 작열하는 계절은 없습니다. 청춘의 시절이 끝나면 가을이 계절의 이어받습니다.
가을은 풍요와 성숙의 계절입니다. 청춘기와 노년기 사이에 드는 계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
는 계절입니다. 이어서 노년의 겨울이 추위에 떨면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옵니다. 머리가
빠지거나 백발이 된 모습을 하고 다가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체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내일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 혹은 오늘의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어머니 태 속에 있던 시절이 있습니다. 인간이 될 것이라는 약속만을 받은,
씨앗 같은 상태로 말이지요. 자연은 참으로 섬세한 손질로 이 씨앗을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냅니
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이 너무 비좁아 우리가 몸부림치면, 자연은 우리를 우리의 집에서 텅빈
공간으로 밀어냅니다. 날빛 아래로 태어난 아기는 연약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시기가 끝나면 아기는 짐승처럼 사지로 기어 다니기 시작하고, 또 이 시기가
지나면 아기는, 떨리는 다리, 불안정한 다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두 다리로 섭니다. 옆에 무엇이
있으면 잡고서라도 말이지요. 그러다 튼튼한 다리로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재빠른 다리로 세상을
달립니다. 이윽고 청년을 보내고 중년을 보내면, 우리는 노년에 이르는 비탈길, 인생의 황혼으로
통하는 내리막길에 서게 됩니다.
나이는, 청년기와 중년기의 힘을 빼앗아버립니다, 한때는 헤라클레스와도 힘을 겨루던 밀론도 노
년에는 힘없이 늘어진 자기 팔을 보면서 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헬레네도 거울에 비치는, 주름
살투성이인 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런 것을 왜 두 번이나 유괴했을까, 하고 한탄했다고 하지 않
습니까? 탐욕스러운 미식가인 세월은 모든 것을 부수고 갉아 마침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
다.
우리가 <원소>라고 부르는 것도 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소가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시지
요? 내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영속하는 우주는, 형상의 질료가 되는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
습니다. 이 중의 두 가지, 즉 흙과 물은 무거워서 가라앉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두 가지, 즉 공기
와 공기보다 가벼운 불에는 무게가 없어서, 가두는 것이 없으면 위로 솟아오릅니다. 이 네 원소에
서 비롯되고 필경은 이 네 원소로 복귀합니다. 흙은 마멸의 과정을 거쳐 물에 분해되고, 물은 증
발하면 공기와 바람이 되며, 밀도가 희박해지면 공기 역시 무게를 잃고 상승하여 불에 합류합니
다. 이러한 과정이 역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네 원소는 같은 순서를 역으로 밟아 원상으로 되돌
아오기도 합니다. 농도가 짙어진 불은 응고하여 공기가 되고, 공기는 물이 되며 물은 압력을 받으
면 흙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처음의 모양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무궁무진한 자연의 조화는 끊임없이 이 물
건으로 제 물건을 지어냅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이 우주에 소멸되는 것은 없습니다. 변할 뿐
입니다. 새로운 형상을 취할 뿐입니다. <태어남>이라는 말은, 하나의 물상이 원래의 형상을 버리
고 새 형상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그 형상대로 있기를 그만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같은 형상을 영원히 그대로 간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보십시
오. 시대도 황금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땅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한때는 단단한 땅이었던 곳이 바다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
다. 바다였던 곳에서 땅이 솟아오르는 것도 보았습니다. 조개 껍데기가, 바다에서 먼 곳에서 발견
되는 수도 있고, 옛날의 닻이 산꼭대기에서 발견되는 수도 있습니다. 흐르는 물 때문에 한때는 벌
판이었던 곳이 골짜기가 되는 수도 있고, 홍수에 씻겨 산이 벌판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늪지가
모래와 자갈뿐인 황무지가 되기도 하고, 사막이 호수가 되기도 합니다. 자연은, 어느 곳에서는 계
절이 봄이게 하는가 하면, 또 어느 곳에서는 봄이 오는 것을 막아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강은, 자
신의 흐름을 가로막은 땅 밑의 장벽에 같혀 있다가 갑자기 땅 거죽을 뚫고 분출하는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땅 속으로 잦아들어 빈 하상(河床)만 남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땅 거죽에 난 틈으
로 잦아들었던 뤼코스 강이,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연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에라시노스 강도, 땅 속으로 흘러들어갔다가 아르고스 평원에서 깊고 힘찬 강
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나는, 뮈소스 강도 카이코스 강처럼, 원래의 하상을 버리고 다른 강에 합
류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켈리아에 있는 아메나노스 강도 여느때는 바닥의 모래를 나르며 힘차게
흐르다가도 이따금씩은 물을 말리고 하상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원래 아니그로스 강의 물은 음료
수로 쓰이던 물입니다만 지금은 이 물에다 손을 넣는 사람
안티사, 파로스, 포에니키아의 도시 튀로스도 한때는 바다에 둘러싸인 도시들이었습니다만, 지
금은 섬이 아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육지였던 레우카스가 지금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어 있지않습니까? 잘클레도 원래는 이탈리아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바다가 이
둑을 허물고 파도의 장막을 치고 말았습니다. 한때는 아카이아의 도시였던 헬레케와 부리스가 지
금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은 그대들도 아시지요?17) 뱃사람들은 요즘도 이 근처를 지
날 때면 도시가 있었던 지점을 손가락질한답니다.
한때 피테우스18)가 다스리던 트로이젠 땅에는 경사가 급하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이 이습니
다. 한때는 벌판이었던 이곳이 산이 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에 바
람이 갇혀 있었더랍니다. 이 바람은, 나갈 바위 틈만 있으면 바깥 세상으로 나가 빈 하늘을 마음
대로 돌아딘겠는데 도무지 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지요. 그래서 땅을 부풀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돼지의 방광이나 염소 통가죽을 불어서 부풀려 놓듯이 말이지요, 부풀어오른 땅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대로 굳어져 지금의 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무수히 들었습니다만, 몇 가지만 더 예로 들겠습니다. 물이, 새로운 형상을
지어내거나, 지어내는 데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뿔 달린 강의 신 암몬의 물은, 대낮에
는 차가운데 해가 지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까닭이 궁금하시겠지요. 아타네마스 인들이, 달이
사위어 없어지기만 하면 이 강물에다 나무를 띄우고 불을 붙인답니다. 나는, 이 강물이 그래서 뜨
거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키코네스 땅에는, 마시는 사람의 장기(臟器)를 석화(石
化)시키는 강물이 있답니다. 장기만 석화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 돌이 온몸으로 퍼지는 바람에
온몸이 돌이 된다는 것이지요. 크라티스와 쉬바리스 강물에도 이 강물과 비슷한 마력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속을 흐르는 쉬바리스 강물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금빛 혹은 호
박색으로 변한다는 것은 그대들도 아시겠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의 겉모습뿐만이 아니고 성격까지 바꾸어 버리는 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살마키스의 강19) 이야기, 아이티오피아에 있다는 호수 이야기는 그대들도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
다. 아이티오피아에 있다는 이 호수의 물을 마시면, 미치거나 죽음에 이르는 깊은 잠에 떨어진다
는 것이지요. 클리토리움에 있는 어느 샘물을 마시면 술을 끊게 된답니다. 이 물을 마신 사람은
평생 물을 술로 즐길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지방 사람들은 달리 설명합디다만, 이것은 이 샘물에,
술과는 다른 방법으로 마음에다 불을 지르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퀴타
온의 아들이 프로에토스의 광기 들린 딸들들 치료할 때 주문과 약초를 썼다고 합디다만, 이 사람
은 남은 약초를 이 샘에다 버렸다고 하더군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약초의 기운이 이 샘에 풀
려 물이 그렇게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륀케스차이 인들의 나라에 있는 강물은 이와반댑니다.
이 강물을 한방울이라도 마신 사람은, 포도주만 보면 사복을 못 쓰는 술꾼이 되어 버린다니까요.
옛사람들이 페네오스라고 부르는 아르카디아의 한 곳에도 이상한 호수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호수의 물은, 밤에 마시면 몸에
벙으F∮蓚콘섬이 바다에 붙박히지 못하고 물 위에 떠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바다의바닥
에 붙박혀 있지만요.20)
아르고 선의 원정대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쉼플레가데스21)를 아시지요?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배를 침몰시켰다는 유명한 바위산 말입니다. 이제 이 바위산은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끄떡도 않고 서 있습니다. 물론 서로 부딪치지도 않고요.
유황불을 뿜는 아이트네 화산이 옛날에도 그렇게 심술을 부렸던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도 아니고요.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만일에 이 산이 살이 있는 짐승이라면, 몸을 움직이
겠지요. 사람들은, 이 괴물이 살아서 몸을 꿈틀거리기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불길이 오른다고 믿으
니까요. 만일에 몸을 움직인다면 언젠가는 다른 곳에 유황불 구멍이 여러 개 생길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만일에 아이트네 산 속에 갇힌 바람이 바위 틈으로 나오려고 하다가 그
안에 있는 유황을 발화시키는 바람에 유황불이 터진다고 한다면, 이 바람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
와 바리는 순간 이 산도 싸늘하게 식어버릴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만일에 이 산의 내부에 불에
잘 타는 역청이나 연기를 내는 노란 유황 같은 발화물질이 있어서 그게 타는 바람에 유황불이 터
진다고 한다면 세월이 지나가면 이 발화 물질이 떨어질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발화물질이 떨어
지면 불을 뿜을 수는 없겠지요. 대지가 끊임없이 이런 물질을 공급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원래
불이라는 것은 탐욕스러워서, 끊임없이 태울 것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태울 것이 없는데
무엇을 태우겠습니다? 결국은 이 화
,북풍의 고향 너머 있는 팔레네에 이런 이야기 전해져 내려온답니다. 어떤 사람이 트리톤 호수에
아홉 번 몸을 담갔더니 온몸에서 깃털에 돋았다지요. 나 자신은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만, 스퀴
티아 여자들은 지금도 그 마법의 물을 뿌려 몸에 깃털이 돋아나게 할 수 있답니다.
그대들은 확실한 증거로 이러한 풍문을 증명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들은, 세월의 조
화로 혹은 열기의 조화로, 큰 동물의 썩은 몸에서 작은 동물이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
니까? 가령 살진 황소를 잡아 땅에 묻어놓아 보십니아. 이 시체가 썩으면 거기에서 벌이 날아나
와 꽃을 찾아다니면서 꿀을 빱니다.22) 이 벌들이 늘 논밭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좋
아하고, 가을걷이의 희망에 부풀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벌들이, 논밭과 일을 좋아하고, 가을걷이의
희망에 부풀어 있던 소의, 썩은 살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말을 흙으로 묻어놓으면 여기에서 말벌이 생겨납니다. 해변에서 잡은 게의 집
게발을 떼어 묻어놓으면 여기에서는 전갈이 생겨납니다. 전갈 구부러진 꼬리를 보세요. 게의 집게
발과 흡사하지요.
농부들은, 농촌의 나뭇잎에다 하얀 실로 번데기 집을 만드는 벌레가 나중에는 죽음의 상징인, 불
길한 나비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흙에는, 청개구리를 만드는 어떤 물질이 섞여 있습니다. 이 흙에서 갓 태어난 청개구리에게는 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헤엄치기에 알맞은 다리가 생깁니다. 그것도, 뛰기에 알맞게
뒷다리는 앞다리보다 길게 생겨납니다.
곰이 갓 낳아놓은 새끼는 아기곰이 아니빈다. 그저 두루뭉실한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니요, 하지
만 어미곰은 이 아기곰을 핥아 다리가 생겨나게 하고, 모양을 곰꼴로 만듭니다.
육각형 벌집 속에서 갓 생겨난 꿀벌의 유충을 보셨겠지요? 처음에는 다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이 유충의 몸에서 다리와 날개가 생겨납니다.
꼬리 날개에 별이 무수히 박혀 있는 유노 여신의 신조(神鳥)23)를 보십시오. 유피테르의 벼락을
나르는 독수리를 보십시오. 베누스 여신의 신조인 비둘기를 보십시오. 다른 새들을 보십시오. 우
리가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이 새들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는 무덤에다 묻은 인간의 등뼈가 썩으면 그 골수는 독사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위에서 말한 동물들은 모두 다른 동물의 몸에서 생겨나지 않습니까? 동물들 가운데
외부의 어떤 도움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재생하는 동물이, 새 가운데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
시리아 사람들이 <포이닉스>24)라고 부르는 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새는 곡식이나 풀씨를 먹
고 사는 것이 아니고 유향수지(樹脂)나 발삼의 즙을 먹고 삽니다.
이 새는 운명이 정해준 수명인 5백년을 살게 되면,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 꼭대기에다 깨끗
한 부리와 발톱으로 둥우리를 만듭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둥우리에다 육계(肉桂)와 감송(甘松)과
계피(桂皮)와 몰약 같은 향료를 물어다 놓고는 그 위에 누워 한살이를 마칩니다.
그 지방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포이닉스의 몸에서 역시 같은 횃수를 살게 되는 새끼 포이닉
스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새끼 포이닉스는, 어느 정도 자라서 힘을 얻으면, 그 아버지의 무덤
이자 자신의 요람이었던 이 둥우리를 물고 하늘을 날아 태양의 도시25)로 가서는, 휘페리온26) 신
전 문 앞에다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27)
이 이야기가 기이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는, 휘아이나28)가 성(性)을 바꾼다는 이야기도 생소
하게 들리겠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컷이던 수휘아이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컷이던 암휘
아이나의 잔등을 오른다니까요.
공기와 바람을 먹고 살면서, 누가 건드리면 몸 색깔을 바꿔버리는 동물도 있다고 합니다. 박쿠스
신이 힌두스29)를 정복하자 힌두스 땅이 이 포도주의 신께 살쾡일ㄹ 바친 것은 다 아시는 일이지
요? 그런데 사람들 말을 들으니 이 살쾡이 오줌은 몸 밖으로 나오자마자 돌이 된다고 하더군요.
산호도 이와 비슷합니다. 산호는, 바다 속에 있을 때는 식물이지만 공기 속으로 나오면 굳어져 돌
이 되니까요.
형상을 바꾸어 다른 것으로 변하는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다 주워 섬기려면, 포에부스가 헐떡거
리는 천마 무리와 함께 바다로 들어가 날이 저물 때까지 주워섬겨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대들이 잘 알다시피, 나라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나라 가운데엔 세월이 흐를수록 강대해져
가는 나라도 있고, 쇠퇴의 길을 걷는 나라도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그 많은 인명을 잃으면서도 그
전쟁의 돌개바람을 10년간이나 버틸 수 있을 만큼 국력도 있고 인구도 많은 나라 였습니다. 그러
나 지금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트로이아가 있던 자리에는 폐허뿐입니다. 이 폐허가 된 나라가
가진 재산으로는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한때는 만방에 그 이름을 떨쳤던 스파르타, 한때는 번영
의 상징이었던 도시국가 뮈케나이, 그 장하던 암피온의 성채30)와 케크롭스의 도시31)도 같은 길
을 걸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논받이 되었고, 뮈케나이는 쑥밭이 되었습니다. 테바이에 오이디푸스
의 이름말고 무엇이 남았습니까? 판디온의 도시 아테나이에 그 이름 말고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트로이아 유민들이 일으킨 로마가 융성하여 아펜니노스 산에서 발원한 튀브리스
강 언덕에다 대규모 공사를 시작, 세계 지배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이 도시
역시 국력이 신장되면서 변모를 거듭, 언젠가는 이 넓은 세계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나라의 이러한 운명이 이미
<여신의 아들이시여, 제 예언을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그대가 살아 있는 한 트로이아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불과 칼이 그대에게 길을 내줄 것입니다.
그대는 트로이아 부활의 상징32)과 더불어 먼 길을 여행하여 마침내 그대의 고향이나 그대가 지
키던 트로이아보다 그대를 더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이국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내 눈에 그 이국
의 땅이 보이는 듯합니다. 과거에 보았던 어떤 땅보다 넓은 따, 지금 우리가 아는 어떤 땅보다 넓
은 땅, 앞으로 우리가 알 게 될 어떤 땅보다 더 넓은 땅이 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다른 지도자
들도 그 따을 차지하려고 나설 것입니다만, 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율루스33)의 핏줄에서
태어나는 지도자뿐입니다. 그만이 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면 땅도 그
를 찬양할 것이고 하늘도 그를 찬양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서 영생할
것입니다.>
나는 헬레노스가 아이네이아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34) 아이네이아스는 가정의
수호신과 함께 트로이아를 떠났습니다. 다행히도 트로이아 유민들의 성벽이 다시 오르고 있습니
다. 그리스 군의 승리는, 이렇게 해서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것
입니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군요. 나를 태운 말이 목적지를 잃고 한동안 엉뚱한 곳을 헤맸군요. 자, 본
론으로 되돌아갑시다.
하늘과, 하늘 아래 있는 만물은 다 끊임없이 변합니다. 땅과, 땅 위에 있는 만물도 끊임없이 변
합니다. 피조물의 하나인 우리 인간도 변합니다. 우리라는 존재는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날개 달린 영혼도 여기에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날개 달린 우리의 영혼은 들짐승의 가
슴을 찾아들어갈 수도 있고, 가축의 가슴을 찾아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짐
승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짐승의 몸에 어쩌면 우리 부모형제나, 우리 친척, 우
리와 같은 인간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이 예사롭지
않은 지위를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튀에스테스식(式) 식사35)로 우리의 배를 채우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맙시다.
나지막하게 우는 송아지의 목을 칼로 도리고, 어린아이처럼 우는 어린양을 죽이고, 제손으로 기
르던 새를 잡아먹는 인간……이 얼마나 못된 버릇입니까? 같은 인간의 피를 보려고 예행 연습이
라도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인간에게 살인은 짓기 어려운 죄가 아닙니다. 자, 이런 식으
로 가다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에게는 쟁기나 끌게 하십시오, 그러다 나이를 먹어 죽게 되면 그 죽음을 슬퍼해 주십시오. 양
으로부터는, 우리를 북풍에서 지켜줄 양털이나 얻어냅시다. 염소로부터는 젖을 얻는 것으로 만족
하십시오. 짐승을 속이는 함정이나 올가미나 그물 같은 것은 이제부터라도 쓰지 마십시오. 깃털을
꽂아 만든 가짜 새로 새들을 속이지 말고, 소리로 유인하여 사슴을 죽이지 말며, 꼬부라진 낚시
바늘을 미끼로 감취 물고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해로운 짐승은 죽이되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십시
오. 그 고기가 우리 입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마십시오. 거친 음식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는 이렇게 가르쳤으나 사람들은 그의 귀한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3. 에게리아의 전신. 히폴뤼토스의 소생(蘇生)
전설에 따르면 누마 왕은 이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천거를 받아들여
라티툼의 통치자가 되었다. 통치자가 된 누마는, 요정이었던 아내36)와 카메나이의 도움을 받아
종교적인 제사를 가르치고, 그 전까지만 해도 전쟁밖에 모르던 국민들에게 평화를 가르쳤다. 그러
던 중 나이가 들어 이세상을 떠나게 되자 라티움의 온 백성은 귀천을 불문하고 그의 죽음을 슬펴
했다. 그러나 가장 슬펴한 것은 역시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라티움을 떠나 아리키아에 있는
한 계곡을 은둔처로 삼고 파묻힘으로써 세상과는 인연을 끊었다.
이 아리키아에서 누마의 아내는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이 아리키아 땅에는 오레
스테스가 퍼트린 디아나 교(敎)의 사당이 있었다. 이 누마 왕의 아내 에게리앙의 울음소리는 디아
나 여신의 신전에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이 계곡의 숲과 샘의 요정들이 이 에게리아의 울음소리
를 듣고는 달려와, 왕을 잃은 이 왕비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러는데도 보람이 없자 테세우스의 아
들이 달려와 이렇게 슬퍼하는 에게리아에게 이런 말을 했다.37)
“제발 고정하시오. 슬퍼해야 할 사람이 그대 하나뿐인 것은 아니오. 그대가 당한 것과 비슷한
슬픔을 당한 사람들 생각도 좀 하시오. 그러면 그대의 슬픔은 하챦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오.
내게도,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슬픈 일이 있었소. 그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내 이야기를 할 테니 들어주기 바라오.
<히폴뤼토스>라는 이름 들어보았을 것이오. 저주받을 계모와 우직한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왕자의 이름이오. 그대는 내 말을 들어면 놀랄 것이오. 그대에게 증명해 보일 방도가 없기는
하오만 내가 바로 히폴뤼토스올시다. 한 옛날 파시파에의 딸38)은 나를 꾀어 내 아버지의 침대를
더럽히려고 했소. 하지만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던가요? 파시파에의 딸은, 내가 유혹을 거절하자,
오해려 내가 자기를 오혹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립디다. 거절당한 게 창피해서 그랬을테지요.
물론 내게는 아무 죄도 없었소만, 아버지는 나를 저주하면서 왕국에서 쫓아내었소. 나는 수레를
몰고 한동안 방랑하다가 피테우스의 도시 트로이젠으로 가고자 했소. 바다를 건너 코린토스 만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바다가 뒤집힙디다. 산 같은 파도가 무수히 해변을 때렸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산같이 솟았던 파도의 마루가 갈라지면서 뿔이 달린 황소 한 마
리가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이 황소는, 코와 벌린 입으로 물을 토해내면서 물살을 가르고 해변으
로 헤엄쳐왔소. 나와 같이 있던 말들은 놀라 길길이 뛰었소만 내게는 괴물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
유가 없었소. 떠도는, 처량한 내 신세 한탄하느라고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오. 나는 그저 그 괴
물을 구경하고 서 있었는데, 말들은 귀를 세우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 괴물 쪽으로 달려가려고 기
를 썼소. 내가, 물에 젖은 고삐를 당겼지만 막무가내였어요. 나는 몸을 뒤로 젖히고 고삐를 놓치
지 않으려고 버티었소. 말들이 미친듯이 날뛰기는 했지만 내 힘도 만만치는 않았으니까 뜻밖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말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생겼지요.
돌고 있던 수레 바퀴의 굴대 한쪽 끝이 나무둥치에 걸려버린 것이오. 순식간에 바퀴가 부서져 나
갔지요. 나는 수레에서 퉁겨나갔소. 나는 말 고삐를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
-주-
17) 대지진으로, 아카이아의 도시 헬리케는 땅 속에 매몰되고 부리스는 바다에 가라앉았다. 그러
나 이 대지진이 있었던 것은 기원전 373년이고, 이 말을 하는 퓌타고라스는 이보다 약 200년 전
사람이다. 따라서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퓌타고라스라기보다는 이 책의 저자 오비디우스 자신
이라고 보아야 옳다. 이른바 '퓌타고라스의 가르침' 속에는, 오늘날에는 상식인도 납득하기 어려
운 비과학적인 대목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18) 테세우스의 외조부.
19) 양성인(兩性人) 헤르마프로디토스 이야기로 유명한 강.
20) 오르튀기아 섬의 옛이름은 ‘델로스 섬’,‘떠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라토나 여신은 이 섬
에서 아폴로와 디아나 여신을 낳았다. 유피테르는 이 섬의 공을 높이 사서, 원래는 바다에 떠 있
던 이 섬을 바닥에 붙박히게 해주었다고 한다.
21) ‘충돌하는 섬’이라는 뜻. 두 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이 쉼플레가데스는, 그 사이로 배가
지나갈 때마다 맹렬한 속도로 서로 부딪쳐 그 사이로 들어오는 배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22) 고대인들은 실제로 이렇게 믿었다. 신화에 나오는 양봉의 신 아리스타이오스는, 자기 벌이 떼
죽음을 당하자 이 같은 방법으로 다시 벌떼를 얻었다. 현대인이 보기에 황당무계한 이하의 사례
는, 고대인들의 자연관(自然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3) ‘공작’을 말한다.
24) 영/피닉스. ‘불사조’.
25) 이집트에 있는 ‘헬리오폴리스’를 말한다. ‘헬리오폴리스’는 ‘태양의 도시’라는 뜻이다.
26)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버지. ‘높은 곳을 달리는 자’라는 뜻이다.
27) ‘태워버린다’라는 뜻인 듯하다.
28) 하이에나. 당시 사람들은 하이에나가 수컷으로 일년을 살면 암컷이 되는데 이때 다른 수컷과
교미하여 새끼를 낳는다고 믿었다.
29) 인도.
30) ‘테바이’를 말한다.
31) ‘아테나이’를 말한다.
32) 트로이아 수호신들의 성상(聖像)을 가리키는 듯하다.
33)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오스의 별명.
34) 이 말을 하는 퓌타고라스의 전생(전생)은 트로이아 전쟁 영웅이었으므로.
35) 튀에스테스는 펠로프스와 히포다메이아 사이에서 난 아들, 이 튀에스테스가 계수인 아트레우
스의 아내와 밀통하자 아트레우스는 튀에스테스가 물의 요정에게서 얻은 세 자식을 요리하여 아
비인 튀에스테스에게 먹임으로써 이를 복수한다.
36) 그리스의 무사이들과 동일시되던 카메나이 중 하나인‘에레리아’를 말한다. 누마 왕의 아내
이자 제사 및 정치의 상담역이었다.
37) 테세우스의 아들이란 ‘히폴뤼토스’를 말한다. 이 히폴뤼토스는 테세우스와 아마존 족인 히
폴뤼테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베누스 여신을 멀리하는 대신 사냥과 다아나 여신을 광적으로 좋
아했다. 미노스 왕의 딸인 계모 파이드라가 요구하는 불륜의 사랑을 거절했다가 베누스 여신과
넵투누스의 협공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38) 파시파에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아내. 이른바 ‘미노스의 황소’의 씨를 받아 괴물 미노타
우로스를 지어낳은 여인이다. 이 피시파에의 딸이 바로, 후일 테세우스의 아내가 되어, 전처 소생
인 히폴뤼토스를 유혹한 파이드라다.
나마 말에게 끌리고 말았지요. 그 바람에 내 몸이 나무 둥치에 심하게 부딪혔고요. 사지의 일부는
앞으로 부러지고 일부는 뒤로 부러지고..... 나는 내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만신창이가
된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모습, 목불인견이었을 것이요. 누가 보았더라도 그게 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오.
자, 요정이여, 그대가 당한 슬픔의 고통을 내가 당한 이 고통에 견주려오? 나는 어둠에 싸인 완
국을 보았소.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은 플레게톤까지 건넜소. 만일에 아폴로 신의 아들이 손을 써주
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 죽었을 것이오. 파이안의 도우심과 탁효가 있는 약초 덕분에 나는 죽었
다가 다시 살아났소만, 니것은 디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소. 디스의 뜻을 거슬렀으니 만치, 만
일에 그의 눈에 띈다면 더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 이니겠소? 그게 걱정스러웠던지 디아나 여신
께서는 나를 안개로 감싸주셨소. 여신께서는 나를 안전하게 숨겨주시고, 디스에게 발각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시려고 나를 늙은이로 만드셨소. 그래야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 아니겠소. 꽤 오랫동안 여신께서는 나를 크레타로 보내실까, 델로스로 보내실까 고민하시다
가 결국은 나를 이곳에다 숨기셨어요. 이곳에 숨기시면서 여신께서는 내게, 말에 대한 연상을 불
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내 이름을 버리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한때 히폴뤼토스였던 그대의 이름은 이제부터 비르비오스다.>
그때부터 나는 하급 신으로 이 숲에 살면서 여신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여신의 종자가 되어 살
아가는 것이오.
히폴뤼토스의 이야기는 이오써 끝났다.
그러나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은 에게리아의 슬픔이나 고통을 줄여줄 수 없었다. 에게리아는 산
기슭에 앞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포에부스의 누이인 디아나 여신은 애통해하는 과부를 불
쌍하게 여기고 이 에게리아의 몸을 샘으로 만들었다. 에게리아의 몸은, 늘 맑은 물이 고이는 샘이
된 것이었다. 디아나 숲의 요정들은 이 전신의 기적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아마존의 아들도 이 놀라운 기적에 기겁을 하고 아연해할 뿐이었다.
4. 타케스, 로물루스의 창, 키포스
기겁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히폴뤼토스가 기겁을 했던 정도는 어느 튀레니아 농
부가 기겁했던 정도에 견줄만하다. 이 튀레니아 농부가 기겁을 한 경우는 이렇다.
이 농부는 밭을 쟁기질하다가 아무도 던들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흙덩어리가 저절로 움직이
는 것을 보았다. 기겁을 했을 수 밖에..... 잠시 후 이 흙덩어리는 제 모양을 잃고 사람이 되어 갓
생긴 입으로 미래의 일을 예언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예언자를 <타게스>라고 불렀다. 전해지
기로는, 튀레니아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점술을 가르킨 사람이 바로 이 타게스였다고 한다.
로물루스도 비슷한 일로 기겁을 한 일이 있다. 그는, 팔라티움 언덕에 꼿꼿이 선 자기 창에서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창이 꼿꼿이 선 것은 그가 창날을 땅에 밖았기 때문이 아니라, 창자
루에 뿌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창이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였다. 이 나무는 기겁을
하고 서 있는 로물루스의 머리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키포스 장군도 강가에서 강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다가 기겁을 했다. 자기의 머리 양쪽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일렁거리는 수면의 장난이겠거니 여기면서 그는 자기 머리를
만져보았다. 물에 비치던 것은 실제로 그의 머리 양쪽에 붙어 있었다.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사실
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을 물리치고 개선하던 그는 승리의 기쁨을
뒷전으로 밀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외쳤다.
하늘에 계신 신들이시여, 저는 신들께서 부리신 조화가 무어ㅆ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
일에 이것이 좋은 징조라면 제 조국과 퀴리누스의 백성들을 위한 징조이게 하시고 나쁜 징조라면
저에게 나쁜 징조이게 하소서.
기도를 끝낸 그는 떼를 떠서 제단을 만들고 신들에게 재물을 드리고 향연을 피워 올렸다. 그리
고는 점술사에게 면하여 갓 잡은 양의 내장을 꺼내어 어떤 징조인지 점을 쳐보게 했다. 에트루리
라 인 점술사는 양의 내장을 꺼내어 보는 순간 어떤일이 일어날 징조인지는 몰라도 어쨋든 중대
한 일이 터질 징조라는 것까지는 읽어내었다. 그는 양의 내장을 보던 눈을 들어 키포스의 뿔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세, 만세, 대완 만세! 키포스 장군이시여, 이 땅과 라티움 성채는 장군과 장군의 뿔에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하루 속히 장군을 위해 열린 라티움 성으로 입성 하소서. 이것은 장군의 운명입
니다. 성안에 드시면 장군께서는 완이 되시어 영원한 국왕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키포스는 망설였다.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성채를 바라보다가 점술가에게 말했다.
바라건데 신들께서는 이 운명의 손길을 거두시기를..... 나는 카피톨리움 언덕의 왕좌에 앉느니
차라리 방랑으로 야생을 보내겠다.
그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으로 뿔을 가리고는 백성들과 원로들을 불렀다. 이들이 모이자, 가마
위에 올라선 그는 관례에 따라 신들에게 축수하고는 백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에, 그대들이 쪼ㅈ아내지 않으면 장차 왕이 될 자가 있다. 내가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겠지
만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다. 이 사람의 이마에는 뿔이 돋아 있다. 점술사는 만일에 이 사람이 로
마에 입성하면 그대들을 노예로 만드는 법을 제정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성문을 부수
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나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나는 이 사람의 입성을 반대
해왔고 막아왔다. 이번에는, 시민들이여, 그대들이 막아야 한다. 그대들은 이 사람에게 죄없다고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전제군주가 두렵거든 이 사람을 사슬로 묶어 추방하거나 죽여버리기 바란
다.
사나운 동풍이 불 때 키 큰 소나무에서 나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흡사한, 웅성거
리는 소리가 백성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잡시 후, 웅성거리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외쳤다.
그사람이 누굽나까?
그대들이 찾는 사람은 여기에 있다.
키포스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월계관을 벗었다. 그는 측근의 만류를 뿌리치고
백성들에게, 월계관으로 감추고 있던 양쪽 관자놀아를 보여주었다. 양쪽 관자놀아에는 뿔이 나 있
었다.
배성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곳곳에서 한 숨쉬는 소리가 들렸다. 백성들에게는,
그토록 유명한 장군의 머리에 뿔이 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선을 돌렸다가도 쭈뼛쭈
뼛 장군의 머리를 올려다보고는 했다. 그러나 백성들을 장군의 머리에서, 명예의 상징인 월계관을
벗겨놓고 있기가 송구스러웠다. 그래서 그 관을 다시 씌어주었다. 장로들은, 키포스를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는 대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 빛나는 영광에 대한 답례로, 황소 여러 마리를
맨 쟁기에 주었다. 해뜨고 나서부터 해질 때까지 이 쟁기로 둥그렇게 땅을 긁게 하고는 그 안의
땅은 모조리 그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영광의 보답이 이로써 많족스럽지 않다고 여겼던지 백성들은 이를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 청동
으로 된 성문 기둥에다 이 영웅의 불가사의한 뿔을 상징하는 뿔 문양을 새개넣었다.
5 역질로부터 로마를 구한 아스클레피오스
늘 오셔서 시인을 지켜주시는, 오 무사이 여신들이여, 이번에는 코로니스의 아들을 지켜주소서.
코르니스의 아들이 어떵게 로물르스의 도시에서 그 신성을 높였는지, 어떻게 로물르스의 도시로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튀브리스 강에서 둘러쌓인 이 도시에 거하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일러 주소
서. 세월이라는 것은 기억을 좀먹게 하는 것입니다만 여신들께서는 이 내막을 소상히 아실 것입
니다.
예날 무서운 역질이 라티움 땅을 휩쓴적이 있다. 라티움 사람들은 이 역질로 피를 말리다가 맥
없이 쓰러져갔다. 장례 행렬을 보는 것도 지겨워 졌을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으
로는 이 역질을 물리칠 수 없고 의사의 힘으로는 역질에 걸린 환자를 치료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포에부스 아폴로 신의 신탁을
받으려고 세계의 중심에 있는 델포이 신탁전으로 갔다. 그들은 이 신탁전에서 아폴로 신에게 기
도를 드렸다. 오셔서 도와주십사하고. 병든자들은 살리고 그 고난의 시대를 마감할 신탁을 내려주
십사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대지와 월계수와 아폴로 신께서 늘 들고 다니시던 활이 부르르 떨
리면서 신전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거룩한 삼각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낯색을 잃고 무녀가 전하는 신탁을 들었다.
로마 인들아, 가까이서 구할 수 있는 것을 너희들은 멀리 있는 나에게까지 와서 구하는구나. 너
희 기도를 들어 너희를 환난에서 구할 자는 나 아폴로가 아니라 아폴로의 아들이다. 내가 너희를
축복할 터이니 내 아들의 이름을 부르거라.
현명한 로마의 장로들은 이 신탁을 듣고 아폴로의 아들이 살았던 곳을 수소문하고는 사신들을
에피다우로스 해안으로 보냈다. 사신들은 배를 이 해안에다 대는 즉시 그리스 장로들을 찾아가
아폴로의 아들이 있어야 이탈리아 인들의 씨를 말리는 역질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신탁을 받았다면서 그 그리스신을 로마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스 장로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한 무리의 장로들은 그런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주장
을 폈고 또 한 무리의 장로들은 그리스신을 로마로 보낼수는 없다는 주장을 폈다. 보낼 수 없다
는 주장을 펴는 장로들은 보내자는 주장을 펴는 장로들에게 그 신을 파견하면 그리스의 안전은
누가 보장하느냐고 물었다. 이 그리스 장로들의 논쟁은 황혼이 날빛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윽고 세상에 어둠이 내리고 밤이 깊어 갔다. 로마의 사신은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 밤 로마
사신의 우두머리는 꿈을 꾸었다. 건강을 지켜주는 의신이 꿈에 나타났다. 의신의 모습은 신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두려워 말아라, 여기에는 허깨비를 하나 만들어 세워놓고 내가 가리라. 내 지팡이를 감고 있는
이 뱀을 자세히 보아두어라. 이 뱀을 잘 보아두면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나는 뱀으로 둔갑해
서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만 이 지팡이의 뱀보다는 훨씬 클 것이다. 그래야 둔갑한 신의 위의에
어울리지 않겠느냐.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모습도 사라졌다. 사신도 잠이 깨었다. 잠의 신이 황급히 쫓겨가고
있었다.
햇빛이 하능의 별들을 몰아낸 시각, 로마인들이 모시러 온 신의 신전에 모인 그리스 장로들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그리스에 있기를 원하는지,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지 신의 뜻을 징
조로 내려 주십사고 기도했다. 이들이 기도를 막 끝냈을 때였다. 황금빛 뱀으로 둔갑한 신이 머리
를 들고 쉭쉭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뱀이 나타나자 신상과 제단 , 신전문과 대리석 문턱, 그리고
황금 술잔이 흔들렸다. 신전 한가운데 선 뱀은 가슴을 바닥에 붙인채 머리를 쳐들고 거기에 모여
있는 그리스 장로들과 로마 사신들을 둘러보았다. 그 눈에서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장로들과 사
신들은 두려워 부들부들 떨었다. 머리카락을 흰 댕기로 묶은 이 신전의 신관만은 신이 현재하는
것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보시오, 신이시오. 신께서 임재하시었소. 여기에 와있는 분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더러운 생각
을 몰아내어 마음을 맑게 가지시오. 오, 아름다운 신이시여, 이렇게 임재하심이 저희에게 유익한
바가 있게 하소서. 신의 신전에 모인 저희를 축복하소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신관이 시키는대로 일제히 신을 경배하고 시키는대로 마음과 목소리
를 하나로 하여 신을 찬양했다. 로마 인들도 저희 식으로 신을 경배했다. 뱀으로 둔갑한 신은 이
들의 경배를 가납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끝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 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신사는 빛나는 신전 계단을 기어내려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떠나기에 앞서 정든 제단을
뒤돌아본 것이었다. 정들었던 집인 신전과 작별 인사를 나눈 이 거대한 신사는 자기에게 바쳐진
무수한 꽃다발 위를 기어 도시 한복판을 지나 방파제 있는 곳으로 갔다.방파제에 이르렀을 때는
고개를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배웅하러
나온 군중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신사는 이탈리아 배에 올랐다. 배는 신사의
무게가 버거웠던지 용골이 잠길 정도로내려앉았다.
아이네이아스의 자손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해변에서 소를 한 마리 잡아 제사를 지낸 뒤
에, 갑판을 온통 꽃으로 장식한 배의 돛을 올렸다. 그러자 미풍이 이 배를 밀어주었다. 승선한 신
사는 그 육중한 머리를 고물의 난간에다 올려놓은 채로 검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풍 덕분에 무사히 이노니아 바다를 건넌 이 배는 엿새째 되는 날새벽에 이탈리아 땅에 이를
렀다. 여기에서 이 배는 유노 신전으로 이름높은 라키니움 곶과 스퀼라키움 해안을 지나 이아퓌
기아를 뒤로
하고, 왼쪽으로는 암프리시아 바위, 오른쪽으로는 코킨토스 단애를 끼고나아가, 로메티움, 카우론,
나뤽스 해변을 지났다. 이어서 이 배는 시킬리아 섬의 펠로루스에 있는 좁은 해협을 무사히 지나
고, 히포테스의 아들인 아이올로스의 왕궁이 있는 섬, 51)티메세 광산, 레우코시아를 지나 장미꽃
만발한 따뜻한 섬 파에스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다시 카프레아에, 52)미네르바의 곶, 53)포도
밭이 많은 아름다운섬인 수렌툼 산,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도시, 54)스타비아에, 게으름뱅이들의
낙원 파르테노페, 그리고 시뷜레의 사당이 있는 쿠마에를 뒤로 하고 따뜻한 온천 도시 바이아에,
유향수가 많기로 유명한 리테르눔, 엄청나게 많은 토사를 나르면서 흐르는 볼투르누스 강, 백구의
둥우리가 많은 시누에사, 썩어가는 늪지가 많은 민투르나에, 일찍이 한 영웅의 유모의 유해가 묻
힌 카이에타, 55)늪에 둘러싸인 트라카스, 안티파테스가 살던 땅, 키르케의 땅을 차례로 지나 모래
톱의 단단한 안티움 해변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파도가 높아행해를 계속할 수 없어 뱃사람들
은 배를 해변으로 끌어오렸다.
의신은 똬리를 풀고 배에서 해변으로 내려와 그 거대한 몸을 움직여, 모래가 누런 해변에 있는
자기 아버지 56)의 신전에 들었다. 이윽고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해지자 이 에피다우로스의 신
은 아버지
의 신전을 나와 모래 바닥을 기어 뱃사람들이 대놓은 사다리를 타고다시 배에 올라, 배가 카스트
룸을 지나고 성도 라비니움을 거쳐 튀브리스 강 어귀에 이를 때까지 고물 난간에 머리를 얹고 가
만히있었다.
배가 항구에 닿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 사방에서 몰려나와 이의신을 맞았다. 트로이아의
베스타57)를 섬기는 여사제들은 함성으로 이 신을 맞아들였다.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자 강 양
쪽에 위치해 있는 신전에서는 자욱이 향연이 올랐다. 신전의 사제들은 그 향연 속에서 칼로 희생
제물의 목을 땃다.
이윽고 뱀 모습을 한 의신은 세계의 수도 로마에 입성했다. 의신은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목을
돛대에 올려 놓고는, 자신이 집으로 삼을만한 곳을 찾느라고 자우를 둘러보았다. 튀브리스 강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강이 두 개의 긴 팔로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듯한 땅이 있다. 사람들은
이 땅을 <섬>58)이라고 했다. 포에부스의 피를 받은이 신사는 배에서 내려 이 섬으로 들러갔다.
신이 뱀의 모습을 버리고 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로마의 역질은 그것으로 끝났다. 이 신이 로마를
구한 것이다.
7 카에사르의 승천
이 신은 이방에서 오시어 우리 신전에 드신, 말하자면 이국의 신이다. 그러나 카에사르59)는 당
신의 나라에서 신이 되신 분이시다. 마르스 신의 직분인 전쟁은 물론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정
치에도 능하
신 이분께서 새로은 별, 즉 새로운 혜성이 되신 것은, 이분께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고,
평화시에는 많은 업적을 쌓으셨으며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다. 카에사르의 공적 가운데 이분을 아드님으로 삼으신 것 이상으로
빛나는 공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60)
카에사르께서는 바다를 주름잡고 다니는 브리타니아 인61)들을 정복하셨고, 승승장구하는 함대
를 몰고 파피루스62)가 자라는 닐루스 강63)의 일곱 하구를 누비셨으며, 반역하는 누미디아 인들
을 로마에
복속시키셨고, 유바의 왕국 퀴뉩스와, 저 유명한 미트리다테스 왕의 왕국 폰투스를 정복하시었다.
이분께서 거둔 승리를 이루 헤아릴 수 도 없으니, 개선 행진을 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64)이런
일들이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임에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어찌 한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킨 영광에다 비기랴. 카에사르의 아드님이 위대하시다는 것은, 일찍이 신들께서 이분을 세
계 평화의 수호자로 정하셨고, 이분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카
에사르께서 신이 되신 것은, 이러한 아드님을 두셨으니 당연 하다.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이신 베누스 여신은, 로마의 대제관65)에 대한 암살 음모가 진행되고 있
다는 것을 안 순간, 기겁한 나머지 낯빛을 잃고는 신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로 불만을 토로했
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나와 내 자손에 대한, 주도면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어요. 하나 남은
내 핏줄인 트로이아 인 율루스의 자손에대하여 잔학무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답니다. 나만 왜
이렇게 피를 말리는일을 당해야 한다지요? 내가 이렇게 괴로운 일을 당한 것은 한번 두번이 아니
랍니다. 디오메데스의 창에 손을 다치기도 했지요. 방비가 튼튼하지 못한 트로이아 성벽 때문에
불면의 밤을 무수히 밝혔지요, 내 자식이 유랑길에 나서는 것을 보아야 했지요, 바다에서 시달리
는 것도 보아야 했지요, 저 무서운 저승길 드나드는 것도 보아야 했지요, 투르누스 같은 자를 상
대로, 이런 말 해서 될까 몰라도 유노 여신 같은 분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오아야 했지요 ...... 하
기야 내자손들이 과거에 당한 고통을 일일이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지금 이런 꼴
을 또 당하고 나니 지난날의 일은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저기를 좀 보세요, 죄많은 자들이 겨누는
저 무기가 얼마나 날카롭습니까? 저들을 쫓아주세요. 저 짓들을 못하게 좀 해주세요. 대제관의 피
에, 베스타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보고만 있지 말아주세요66) 베누스는 하늘에 사무치게 애원하면
서 신들의 마음믈 돌려보려고 했으나 하릴없었다. 신들도 연세 많은 세 자매 여신67)의 뜻을 거스
를
51)‘아올리아’.
52) 지금의 ‘카프리’.
53)‘캄파니아 곶’을 말한다. 이곳은 지금도 ‘카포텔라 미네르 바’, 즉 ‘미네르바 곶’이라
고 불린다.
54)‘헤라클라네이움’. 서기 79년의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55) 아이네이아스의 유모 카이에타가 묻힌 곳
56)‘아폴로’.
57) 그/헤스티아. 부뚜막의 여신. 불씨의 수호여신. 가정의 수호여신인 동시에 국가의 수호여신으
로 섬김을 받았다. 이 여신에게는 신상이 없는데, 이는 불이 곧 이 여신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이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들은 '베스탈리스’라고 불린다. 이 베스타 여신이 ‘트로이아의 베스타’
라고 불리는 것은, 아이네이아스가 이 여신을 섬기는 풍습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58) 지금의 ‘티베리나’
59) 영/줄리어스 시저. 즉 ‘카이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를 말한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율루
스의 자손. 따라서 이 족보는 베누스 여신에게 닿는다.
60) ‘아드님’은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던 ‘아우구스투스’를 가르킨다. 카에사르의 조카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카에사르의 유언에 따라 그 대를 잇게 된다. 즉 저자 오비디우스는, 이 아우구스
투스에게 대를 물린 것이야 말로 키에사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오비디우스는 이 황제의 비위를 건드려 먼 땅으로 유배되어 있을 동안에 이 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의도적으로 카에사르의 후계자인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미화하고 있는 것 같다.
61) ‘영국인’
62) 지초
63) 나일 가의 로마식 표기
64) 고대 로마에서는 5천명 아상의 적을 죽인 큰 승리일 경우에만 카피톨리움의 유피테르 신전
앞에서 개선 행진을 했다.
65)‘카에사르’를 말함. 대제관은 국가적인 제사를 관장하고 역법을 정하는 로마 최고의 종교적
인 지위.
66) 로마 사람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베스타 신전에서 타고 있는 여신의 신체인 성화가 꺼진
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베누스가 걱정하는 것은 부루투스, 카시우스 등에 의한 카에사르 알살 계
획을 말한다.
67) 즉 ‘파르카에’ 여신들. 그/모이라이. ‘운명의 여신들’ 이라는 뜻.
수는 없었다. 세 자매 여신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 대신 다른 신들이 징조를 미리 보여 이 슬픈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먹구름 속에서 난,
무기와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 하늘에서 들려온 나팔 소리와 뿔고둥 소리가 이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했다고 한다. 신들이 보인 징조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양이 어두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땅에 이르는 빛은 납빛이었고, 별 사이에서는 횃불과 같은 붉은 빛줄기가 보였으며, 빗방
울은 핏방울과 함께 떨어졌다. 루키페르는 빛을 잃어 불그스레하게 보였고, 루나68)의 수레는 핏
빛으로 보였다. 지옥의 새인 부엉이도 불길한 징조를 전했다. 많은 지방에서는 상아로 만든 신상
이 눈물을 떨구었고, 성림에서는 노래소리, 외마디 소리가 울려 나왔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데도
이러한 흉조는 길조로 바뀌지 않았다. 점술사들이 잡은 짐승의 간은 그 윗부분이 크게 상해 있어
서 국가에 변란이 생길 것이라는 점괘를 보여주었다.69) 밤이 되자 포룸70)과 민가와 신들의 신전
근처에서는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댔고, 유령들이 나와 배회하는가 하면 지진이 도시를 흔들었다.
신들이 보인 이러한 징조는 징조에서 끝났을 뿐, 음모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운명의 여신들은
일각의 유예도 없이 이 섭리를 집행했다. 음모가들은 칼을 빼들고 신성한 곳71)으로 들어갔다. 음
모가들이 이곳을 고른 까닭은 이 건물이 마침 원로원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누스는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의 칼날로부터 파리스를 구할 때처럼, 디오
메데스의 칼날로부터 아이네이아스를 구할 때처럼, 구름으로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을 가려 목숨만
은 구헤주려 했다. 그러나 신들의 아버지는 이런 베누스를 몹시 꾸짖었다.
베누스여, 네가 네 마음대로,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여신들 뜻을 거스르려 하느냐? 운
명의 세 자매 여신들의 집으로 가서 네가 확인해 보아라. 거기에는 동판과 철판으로 된 운명의
서가 있다. 이 운명의 서는, 벼락도 번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 않을 이 운
명의 서를 네가 어쩌려느냐? 네 자손의 운명도 거기에 영원한 기록으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나는 그 기록을 읽어 보68)셀레네.'달'의 여신.69)점술사들이 짐승을 잡아 내장을 꺼내어 보는데
이때 간에 상처가 나지 않았으면 길조, 간이 상해 있으면 흉조.70)로마시민의 생활 및 정치의 중
심이었던 광장. 지금도 '포룸 로마나'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71)원로원의 집회소였던 건물'쿠리아
폼페이아'.카에사르는 이곳에서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암살당했다.았다. 내 그 내용을 너에게 일
러주어, 앞일에 무식한 너를 일깨우리라.
베누스여, 네가 관심하는 카에사르는 운명의 서에 기록된 삶을 다 살았다. 이 땅에서 살게 되어
있는 했수를 다 채웠다는 말이다. 카에사르는 이제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냥 죽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는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게 되어 있고, 인간은 신이 된 카에사르를 위헤 신전을 세우게
되어 있다. 카에사르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72)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게 되
며 아버지를 살해한 자들과 복수전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우리를 제 편으로 끌어 넣어
싸우게 된다. 뿐이냐, 이 아우구스투스는 위대한 로마의 지도자가 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포위된
무티나 성은 그에게 강화를 빌고, 파르살리아는그의 막강한 힘을 알고는 땅을 칠 것이며, 마케도
니아의 필리피는 다시 한 번 피투성이가 된다. 폼페이우스73)라는 위대한 이름은 시켈리아의 바다
에서 사라질 것이다. 내 카피톨리움이 있는 로마를 저의 카노푸스74)의 노예로 만들겠다는 위협이
하릴없구나. 로마장군의 아내가 된 그 땅의 여왕은 이 장군의 약속을 과신하다가 패망한다.75) 먼
동쪽, 먼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오랑캐들 이야기야 구태여 해서 무엇 하겠느냐? 이 세상의 땅이라
는 땅은 다 아우구스투스의 땅이 되고, 바다라는 바다는 다 아우구스투스의 바다가 될 터인데.
이 땅을 평정하면 아우구스투스는 백성들에게 눈을 돌리고 더없이 공정한 입법자가 되어 법률
을 제정할 것이다. 그는 스스로 본을 보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미구에 올 자손들의 시대를 내다조
고 정숙한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 자기 이름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막중한 책임을 물려줄 것이다.
이윽고 퓔로스의 네스토르76)에 못지 않게 오래 살다가 때가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천상으로 올라
와, 이때 이미 별이 되어 있을 터인 저희 아버지와 비슷한 별이 될 게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아라. 그렇게 되기에 앞서 이 율리우스77)로부터 72)아우구스티누스는 카에
사르의 양자가 되고 그 이름을 물려받아 '카이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로마황제는 '카에사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된다.73)폼페이우스 섹스투스는, 아우
구스투의 충신 아그리파에 의해 시켈리아에서 목숨을 잃는다. 74) 이집트의 나일 강가에 있는 도
시. 75) 이집트 영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가 로마 군의 침공
을 받아 나라와 지아비를 잃고는 자살하게 되는 일. 76) 장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77)카에사르. 그
영혼을 수습하여 별로 전신 시킬 것이니...... 그러면 이 율리우스는 하늘의 보좌에서 나의 도시 로
마의 카피톨리움과 원로원에 있는 광장을 지킬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누스 여신은 로마의 원로원 광장으로 내려왔다. 물론 베누
스의 모습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베누스는 카에사르의 육신에서 갓 떨어져나온 그의
영혼을 수습하여,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가슴으로 끌어안고 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라갔
다. 그러나 여신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영혼을 놓치고 말았다. 영혼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여신의 품안을 빠져나온 영혼은 하늘 높이 솟아 달에 이르기까지 날아오르다가 드디어 긴 불꽃의
꼬리가 달린 별이 되었다.
신이 된 율리우스는 아들을 내려다보다가, 아들이 하는 일이 자기를 앞서고 아들의 영광이 자
기 영광 이상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는 흡족해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백성들이, 자기의 이름을 아버
지 율리우스 카에사르의 이름 앞에 세우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온갖 자유를 누리며 살던 백성들
인지라 이 점에 관한 한 그의 뜻을 따라주지 않고 그의 이름을 카에사르의 이름 이상의 위대한
이름으로 기억했다. 아가멤논이 그 아버지 아트레우스보다, 테세우스가 그 아버지 아이게우스보
다, 아킬레우스가 그 아버지 펠레우스보다 더 유명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그 밖에 카에
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견주어질 만한 예를 찾는다면 유피테르 대신과 그 아버지 사투르누스의
경우가 될 터였다.
유피테르 대신은 천궁과, 우주의 삼계를 다스리시고 아우구스투스께서는 이 땅을 다스리신다.
이 두 분은 모두, 그 다스리시는 세계의 아버지시자 지배자시다.
아이네이아스를 도우시어, 불과 칼을 헤치고 길을 내어주신 신들이시여, 인디게테세시여,78) 로
마를 세우신 퀴리누스시자 불굴의 영웅이신 로물루스의 아버지이신 마르스 신이시여, 카에사르의
가문에서도 으뜸가는 신이신 베스타 여신이시여, 베스타 여신과 나란히 카에사르 가문의 가신이
되신 포에부스 신이시여, 타르페이아 성채에 거하시는 유피테르 대신이시여, 시인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신들이시여. 신들께 기도를 드리오니, 아우구스투스 폐하께서, 당신께서 다스리시던 이 땅
을 떠나 하늘에 오르시고, 그 높은 곳에서 인자하시게도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
시는 날이 더디오게 하소서,78) '고향의 신들'이라는 뜻 다음 세기에나 오게 하소서.
7 결사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
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
다.
옮긴이의 후기
오비디우스의 유쾌한 경망
책,영화,리뷰,
변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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