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넥타이
이윤기
나비 넥타이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처 대학까지 줄곧 같이 들어가고 같이 나오는
줄동창은, 나라가 좁아서 학교가 두어 개밖에 없으면 모르겠지만, 나올 확률이
지극히 묽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박노수라고 하는 희귀한 줄동창이 하
나 있다. 세상에는 학교 교육을 과대평가해서, 줄동창이니까 박노수나 나나 하는
짓이나 생각이 비슷하려니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사람은 혼자 서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는 넓게는 인류사가, 좁게는 일문의
가족사가 보편 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이 시대
와 홀로 맞설 때 교육은 들러리 노릇밖에는 못하지 않나 싶다.
내가, 지금부터 점묘하고자 하는 내 친구 박노수와 줄동창이 된 것은 시대 탓
이기가 쉽다. 어떤 시대 같으면 우연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사건도 그와
다른 시대에는 논증이 가능한 필연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대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과 필연을 자주 헛갈리게 한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대는, 개
인의 안팎 가치관이 일사불란하게 통일되는 것을 미덕으로 꼽던 시대, 따라서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획일적인 가치관의 금밖으로 잘 나서려고 하지 않던 시대
였다. 이런 시대에는 공식이 하나 있었다.
잡생각을 말아라!
<잡생각이 많은 아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회복기가 길었다.
상상력은 위험한 물건이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 의무적으로 같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나온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가깝고 만만한 도시의 일류 중학교에 기본적
으로 들어간다. 일류 중학교에 들어가면 학년 석차가 세 자릿 수가 되어도 같은
이름의 일류 고등학교에 노래 후렴처럼 따라붙는다. 공식이다. 우리는 이 공식에
따라 동창이 되었다. 이 대열에서 이탈하는 친구들에 대해 우리는 건방스럽게,
아까운 녀석인데,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서울에 있는 같은 대학으로 진학한 것도 시대 환경과 연관이 없지 않다. 우리
는 고향의 석기 시대적 산업 구조에 맺힌 한도 있고, 본 것이 그것뿐이라서 자
꾸 낯익어 보이고, 정부의 우정어린 격려도 있고 해서 농과대학에 중에서도 희
귀한 잠사학과에 나란히 진학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공식대로 되지 않았다.
자고로 전쟁 터지면 장군의 군마 노릇하는 데까지 뛰는 말값도, 종전이 되면
뚝 떨어져 잔등에 잘 실으면 봉물짐이고 못 실으면 똥장군이다.
상상력이 가난했던 우리는, 일본이 특정한 농산물 수입부터 슬슬 거부하고 나
서기 시작하고, 중국이 긴 하품 끝에 대나무숲을 헤치면서 출림을 시작하고, 정
부가 미국의 농산물 수출 공세에 무릎을 꿇기 시작할 때 얼김에 나란히 옆에서
무릎을 꿇어 버린 재수 없는 세대에 속한다.
미국의 가발 시장에서 재미를 보던 한국인들도 하나씩 전업한다는 소식이 들
렸다. 중국인들이 한 사람에 머리카락 하나씩만 뽑아서 수출해도 한국의 가발
수출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중국이 무슨 생각에서 그랬
는지 모르지만 당시 이미 사양 산업에 속하던 잠업에 손을 대자 일본과 한국은
품질로 버티어보자고 손을 잡고 맹세했다. 일본은 버티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었
다.
우리가 졸업할 무렵, 불도저가 뽕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일본 잡지 <잠사의 빛>도 국내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노수에게 전공 바꾸는 재주가 있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노수는 그런 재주도 있었구나 싶게 방향을 사회학 쪽으로 바꾸고, 벌어 먹어
가면서 너끈하게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으로 나가더니 5년 만에 학위 얻어들고
크게 변모한 모습으로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변모라는 것이 어찌나
나의 상상력을 무참하게 짓밟아놓는 것이었던지, 노수는 김포공항 나올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나에게,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뭣인가, 핏줄이라는 것이 도대체
뭣인가, 시대라는 것이 도대체 뭣인가 싶게 만든다.
탑승자 명단에서 박노수라는 이름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 것은 전연 나의 실수
가 아니다. 말 배울 때부터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근 30년 동안이나 말더듬이 노
릇을 하던, 언필칭 어눌하기 짝이 없던 위인이, 일반명사처럼 부드러운 <노오스
파아크(North Park)>같이 새뜻하게 세련된 이름을 쓸 줄을 내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누가 어깨만 쳐도 얼굴을 귓불까지 붉히던 <뿔갱이> 박노수가, 중심이 무너
질 만큼 사납게 내 어깨를 칠 줄을 내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못
한다.
박노수가 <노오스 파아크>라는 이름을 탑승객 명단에다 찍었다는 것은 여권
이나 신용카드에도 그런 이름이 진작에 번듯하게 찍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노
수는 여권 신청할 때부터, 거기에 앞서 신용카드 신청할 때부터 벌써 영어로 쓰
일, 영어 사용 국민이 부르기 쉽고 외기 쉬운 이름을 지어놓고 있었던 셈이 된
다.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
단지 박노수에 관한 한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탑승자 명단에 이름이 없길래 안 오기나 못 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다
가 그래도 혹시나 하고 애멜무지 삼아 탑승구 쪽과, 탑승구 안쪽 통로를 비추는
폐쇄회로 모니터에 갈마들이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있다가 그 어눌하
던 골박이 샌님에게 어깨를 얻어맞은 것이다.
얻어맞고, 앞에 서 있는 일본인 쥐포수 같은 자를 박노수로 인지하는 순간에
야, 그제서야 <노오스 파아크>가, 극장식당 사회자같이 매끄럽게 차리고 탑승구
나오던 자가 박노수였구나 싶었다.
“놀랄 거 없다. 오래 살면 못 보던 꼴도 본다”
<없어>면 <없어>지, 박노수가 나에게 <없다>같이 으시딱딱하게 단정적인 표
현을 쓴 일은 <없다>. 노수는 콧수염 기르고 중절모자 비슷한 모자까지 쓴 채
로 내 앞에 서서, 있다, 없다라고 딱딱 부러지게 말했다.
콧수염 기른 거 하나 가지고 이러면 내가 좀 심하게 낯설어한다는 인상을 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콧수염은 아무나 기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박노수의 콧
수염은 지나치게 바쁜 사람이나, 같은 정도로 게으른 사람이 깎지 못하거나 깎
지 않고 그냥 자라게 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박노수의 콧수염은 도전적이었다. 내가 알기로, 콧수염이라는 것은 거기에 어
울리는 어떤 정서가 마련되기 전에는 기르지 못하는 물건이다. 말하자면 남 안
기르는 콧수염, 남 안 쓰는 모자는 그것을 기르고 쓴 사람을 읽는 데 필요한 난
수표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박노수가 남 안 기르는 콧수염을 기를 수 있으리라고는, 남 안 쓰는 중
절모 비슷한 모자를 쓸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상상력이 무엇인가?
쥐 들어가는 거 보고 빗자루 들고 쥐구멍 앞에 서 있을 때는, 나올 때도 들어
갈 때와 엇비슷한 속도로 나올 것이라고 어림해서 헤아리게 되는 것이 상상력
아닌가. 사람의 상상력이, 쥐가 쥐구멍에서 직립한 채로 뒷짐 지고 나오는 것까
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김포공항 출구를
통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씨가 핫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오는 모습
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은 내 상상력의 가난을 비난하지 못한다. 골박이
샌님 박노수에서 콧수염 기르고 중절모자까지 쓴 닥터 노오스 파아크까지의 거
리는, 고향 읍내 육곳간 집마누라 엉덩이에서 <현상과 인식>이라는 잡지 이름
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까마득했다.
“<지인>은 못 속이겠더라...”
지인은 못 속이겠더라? 내가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하자 노수가 덧붙여서
설명해 주었다.
“...유전인자 말이다”
노수를 싣고 시내로 들어오자니 운전이 잘 안 될 만큼, 노수할머니에다 아버
지에다 노민이까지,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수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두메 마을은, 기차나 자동차를 보려면
십리를 걸어 나와야 했다. 그만큼 외진 시골이라 우리 마을 사람들은 휘발유나
경유나 윤활유 같은 석유 계통의 기름 냄새를 대체로 싫어했다. 평소에 맡지 못
하던 냄새, 따라서 버릇 들어 있지 않은 냄새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휘발유 냄새만은 좋다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가 휘발유 냄새를 좋아하는 것은 뱃속에 회충이 많은 증거요, 여자가 휘발
유 냄새를 콩콩거리는 것은 서방 버리고 떠날 생각이 많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휘발유 냄새도 드러내어놓고는 지망지망히 좋다고 할 게 못 되었다.
당시 노수는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백부댁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노
수가 아버지로부터 떨어진 채 백부댁에서 조모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것은 아버
지가 홀아비였기 때문일 것이다. 노수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노수 할머니는 대구 나들이가 잦았다. 둘째아들 박 교수, 그러니까 노수 아버
지의 홀아비 뒷바라지도 하고, 밑반찬 같은 것도 물어 나르느라고 그러지 않았
나 싶다. 당시 노수 아버지 박 교수는 딸 노민이만을 데리고 대구에서 살고 있
었다. 대구 나들이라는 말은 요즘의 미국 나들이라는 말만큼이나 하기도 부드럽
고 듣기도 부드러웠다.
“어디 가세요?”
“응, 대구 좀 갔다 오마”
이런 대화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나는 언제 저렇게 부드럽게 말해 보나 싶었다.
그러나 노수 할머니의 대구 나들이는 그렇게 부드럽지 못했다.
마을에서 대구까지는 백여 리가 실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노수 할머니는 버
스 타는 것이 죽기만큼이나 싫다면서 그 먼길을 걸어서 다니고는 했다. 찻삯이
없어서 걸어다닌 것도 아니고 걷는 것이 좋아서 걸어다닌 것도 아니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해볼 만도 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버스가 싫어서, 걷는
것도 싫지만 구처가 없어서 걷는다고 했다.
백릿길은, 힘 좋은 장정도 아침과 저녁 식간에는 주파하기가 어려운 거리다.
아무리, 탈것에 의지하기보다는 두 다리에 의지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지가 떡갈나무같이 마른 할머니에게 그게 무리한 거리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은, 백릿길 걸어본 사람들 수가 자꾸 줄어들어가는 세월이라, 걸어서 목적
지에 당도할 때 이 거리가 사람 몸에 안기는 보람과 고통을 경험으로 간직한 사
람을 만나기가 나날이 어려워져 간다. 걸어본 내가 잘 알지만 백릿길은, 떠날 때
걸으면서 흘릴 소금기어린 땀방울만큼이나 비장하고 절실한 고별사를 필요로 한
다. 백릿길을 잘 걸어내는 것은 다리힘이 내는 주력이 아니다. 단조로움을 이겨
내는 데 절대로 필요한 완벽한 체념 상태와, 남은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오로
지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확신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러나 나는 노수 할머니가 백릿길 떠나는 것을 몇 차례 보았거니와, 그 출발
은 전혀 비상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백릿길을 떠나는데도 산밭 올라가듯이, 질러
가는 산길을 올라 숲속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종신을 못해서 모르기는 하지만
할머니는 세상 떠날 때도 그렇게 씩씩하게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체념과 절망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은 내 눈이 어두워서였을 것이다. 그것
이 벌써 할머니 안에 육화되어 있어서 나 같은 애송이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일 것이다.
그 즈음 이미 허리가 구부러지고 다리가 안짱다리처럼 휘기 시작하고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노수 할머니에게는 땀 찬 고무신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리만치
힘있게 땅바닥을 짓뭉개면서 걷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마른 땅에 찍혀도 노
수 할머니의 발자국은 흡사 큼지막한 따옴표를 한 줄로 찍어놓은 것 같았다.
노수 할머니는 어찌 그렇게도, 힘이 펄펄 넘쳐흐르던지...
자연이라고 따로 부를 필요도 없는 마을이나 산이나 들이나 길에서 만날 때면
할머니는 연세에 맞지 않게 그렇게 씩씩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걷는 모양은, 어
찌 보면 그 나이에 이르렀어야 처음으로 보법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 같기도 하
고, 또 어찌 보면 사람이 직립해서 걸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를 오감스럽게 누리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노수 할머니의 그 힘은, 땅에
대한 익숙함과 거기에 송두리째 기울이는 믿음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가 자동차 앞에서는 그렇게 초라하고 허약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자동차를 싫어하지 않을 만큼 개명한 사람들은, 할매, 겁
이 나서 그러지요, 하면서 할머니를 자주 놀려먹고는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내 나이에 무엇이 무서워서 겁을 내겠노, 성인도 시속을 따르란다고... 타고는 싶
지만 기름 냄새만 맡으면 골이 아파서 못 탄다. 안 아픈 머리로 하루 걷는 게
낫다..., 이렇게 말끝을 감아붙여버리고는 했다.
땅에 대해서는 그렇게 씩씩하던 그 할머니가, 자동차에 대해서 보이던 그 병
적인 허약함의 까닭을 나는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자동차라면 보
는 것도 좋았고 타는 것도 좋았으며 내려서 만나는 낯선 풍물의 경험도 좋았다.
우리는 땅에 대한 익숙함과 믿음을 완전하게 확보하지 못해서 기계가 그렇게 좋
았을까.
나는 노수 할머니가 버스를 싫어하는 것은 교통사고로 며느리를 잃어서 자동
차라는 것을 아주 원수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노수는 내 생각이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름 냄새 때문이라고 했다. 기름 냄
새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에는, 기름 냄새 참기가 백릿
길 견디기만큼이나 어려울까 싶었다.
나는 뒤에 할머니로부터, “사람이 걸으면 다쳐도 크게는 안 다친다. 그러나
차를 타면 다쳐도 크게 다치고 죽어도 몰죽음인데 뭣하러 그 근처를 어르대느냐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할매는... 자동차는 편리하잖아요?”
“내가 뭐 아쉽다고 그 쇳덩어리 앞에서 촌할마시 노릇을 하노?”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할머니는 자동차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에서 몹시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가 자동차 싫어하는 까닭으로
내세운 기름 냄새는 자동차에 대한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
기가 쉽다. 자동차가 싫다고 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할머니에게는 자
동차라고 하는 생소한 쇳덩어리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머니는, 만나 사귈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동차를 만나고 그 앞에서 허둥대는 꼴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 자
기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람 앞에서, 기름 냄새 참기가 백릿길 견디기만큼이나 어려운가요, 하고
물을 수는 없다. 나는 뒷날 승강기가 싫다면서 7층까지 걸어서 오르내리는 사람
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볼 때마다 노수 할머니가 생각났지만, 승강기 안에
서 잠깐 견디기가 그 많은 계단을 오르는 만큼이나 어려운가요, 하고 묻지는 않
았다.
노수로부터 들은 할머니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노수가 대구에서 중학교 다
닐 때 할머니는 설거지하던 손으로 전기 소켓을 만지다가 가벼운 감전사고를 당
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수가
마당으로 뽑아낸 전깃줄을 밟고 서 있으니까 할머니가, 전기 못 들어온다면서
어서 내려서라고 하더란다. 노수가, 전깃줄 밟는 것은 전기 들어오는 것하고 아
무 상관이 없어요, 하니까 할머니가 몹시 화를 내더란다. 그러고는 돌아가실 때
까지 전깃줄 근처에는 얼씬도 않더란다.
나는 여름 개 잡는 광경을 몇 차례 구경하고, 영화에서 맹수 사냥하는 광경을
여러 차례 구경하고부터, 역전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결정적인 궁지에 몰린 동
물은 거기에서 오는 공포를 혐오로 위장하는 듯한 기이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울
타리 같은 것을 치는 것이다. 짐승만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수용
하기 어려운 바깥의 자극 앞에서는 마음의 울타리를 치고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그 자극에 대한 공포를 혐오로 위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당사자에게 외부
의 자극이 무서우냐고 물으면 싫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이런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에게, 눈부시게 돌아가는
세상은 휩쓸리기도 싫은 남의 세상이다.
이것이 내가 노수 할머니를 이해하는 데 썼던 잣대이다.
노민이를 이해하는 데는 이와는 반대되는 잣대가 필요했다.
노민이는 노수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대구에서 합류하게 된 누이동생이다. 노
수와 동무하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박 교수가 왜 아들인 노수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딸인 노민이는 왜 안 맡길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궁금증을 풀지 못
했다.
70년대 초, 노수의 부탁으로 노민이를 내가 일하던 여성 잡지사 편집실에 취
직시킨 일이 있다. 지방 대학 출신은 연줄 아니고는 서울에서 취직하기가 어렵
던 시절이다.
나는 노민이가 입사해서 첫 출근할 때의 모습을 아련하게 기억한다. 하얀 깃
이 달린,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검정 원피스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생머리
를 두 줄로 땋아내려서 흡사 영화에서 본 유럽의 사립 기숙학교 여고생 같았던
노민이는 대도시의 온갖 사물을 놀라워하는 솔직한 눈매와 그 독특하게 보수적
인 차림으로 금세 편집실의 다소곳한 꽃이 되었다. 대체로 남자들은 자기와 다
른 사투리를 쓰는 타향 처녀나, 전혀 다른 모국어를 쓰는 이국 처녀를 좋아하는
모양인가? 노민이는 고향 사투리 드러내는 것이 싫었던지 억양은 사정없이 무질
러버리고 발음만은 시골 어린이 교과서 읽듯이 꼬박꼬박 표준말로 했는데, 서울
출신의 기자 한 사람은 그게 그렇게 자기 겨드랑에 기분 좋은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더라고 했다.
노민이에 대한 내 기억은 여기까지만 아련하다. 아련한 것이 조금 더 계속되
었더라면, 어차피 노수와의 질기고도 긴 인연을 예감하고 있었던 터이니, 노수는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노민이와 상당히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노민이는 살금살금 보이지 않게 내 곁을 떠났다.
노민이를 어긋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잡지사 편집실에 산같이 쌓여 있던 외
국의 패션잡지였을 것이다. 외국 잡지의 저작권 사용료 지불은 어찌 하는지 몰
라서도 못하고 돈이 없어서도 못하던 시절이어서, 잡지사 편집실에는 아득히 철
이 지난 것부터 외국 사는 사장 친척들이 때맞추어 보내오는 <논노>니, <아나>
니, <보그>니, <패션>이니 하는 감각 교육용 또는 가위질용 외국 잡지가 많았
다.
노민이 차림새의 혁명은 처음 발라본다면서 바르고 와서도 얼굴을 들지 못하
던 색상이 연한 입술 연지로부터 수줍게수줍게 시작되었다. 기자들이 그 입술
연지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년 사이에 생머
리가 잘리고, 잘린 생머리가 둘둘 말리고, 둘둘 말린 머리가 볶이고, 볶인 머리
가 <커트>들 당하고, 급기야는 여럿의 손에 사정없이 쥐어뜯긴 듯한, 가장 자리
가 들쑥날쑥한 상고머리가 되었으니, 나는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노민
이 머리에 가발이 올라가기까지는 실로 한해가 너무 길었다.
그 동안 노민이의 아래윗도리 차림새에서 일어난 변화는 자그마치 뉴욕과 파
리와 도쿄에서 근 1년 동안에 일어났던 차림새의 변화를 눈부시게 망라하는 것
이었으니, 구두에서 벌어지는 천변만화는 허리 위 구경하기에 바빠서도 언감생
심일 지경이었다.
노민이가 얼굴에서 펼치는 정교한 화장술의 묘기를 묘사하기는, 화장과 관련
된 어휘를 습득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그의 빈약
한 입술에 개어발리는 색상은 실로 민셀의 색상 견본을 무색하게 했다. 글 자리
와 그림 자리를 균형 바르고 정확하게 앉혀주는 편집 대지작업에 관한 한 낙제
점에 가까우리만치 손재주가 없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대칭이 되도록 정교하게
눈썹을 그리고, 윤곽선을 알아보지 못하게 아웃 포커스로 볼연지를 바르고, 외국
의 여배우와 아주 똑같게 입술선을 그려내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
었다. 노민이는 늘 그랬다.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고.
노민이를 붙잡아 생맥주 집에다 앉히고 타일러준 일이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다소곳하더니, 서울이 만만해졌냐?”
“오빠, 내가 어쩌는데요?”
“너는 지금 서울을 오해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오해 안 하는 건데요?”
“너 죽을둥 살둥 유행을 좇아야 서울 여자 노릇하는 거 아니다. 너는 촌처녀
로 남아 있어야 서울에서도 예쁘다”
“오빠는 여자의 본능도 몰라요?”
“본능이 너무 야단스럽다. 잎이 아름다워서 꽃대접 받는 풀이 얼마나 많으
냐?”
“꽃으로는 가망 없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꽃으로도 잎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오빠는 외국의 문학이나 철학이나 미술 사조 같은 거 모르고 있기가 불안하
고 억울하지 않아요?”
“불안하거나 억울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
하기는 하다”
“그런 거라고요”
“너는 제동이 걸리지 않는 것 같아. 딱 알맞은 선이 있다. 거기에서 멈추어야
정상이다”
“그래요. 제동이 안 걸리는 병이지만 고칠 생각 없어요”
노민이는, 처음에는 외국 잡지에 나오는, 제 말마따나 <패션>과 <헤어두>와
<코스메톨로지>를 좇는 일이 그저 재미있더니, 그게 한동안 버릇이 되니까 좇
지 않으면 어쩐지 허전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진다고 했다. 하루 종일 몸
꾸밀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은
다른 걸 생각하자고 무진 노력을 하는데 안 된다면서, 뭐 그렇게 깜짝 놀랄 만
큼 나쁜 짓도 아니잖느냐고 했다.
“안 하면 되잖니...”
“담배 끊는 것과 같죠, 안 피우면 되는데도 오빠, 못 끊잖아요? 끊으면 되는
데 그게 안 된다고요. 나도 설명이 안 된다고요”
“담배 정도가 아닌 것 같다”
“맨스 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좀도둑질하는 여자 있는 거, 알아요?”
“누가 듣겠다”
“좀도둑질하는 것보다는 나은 셈치시고 공연히 노수 오빠한테 고자질해서 걱
정 끼치게 하지 마세요”
그러자니 노민이에게는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입술 연지의 색상 견본 노릇이나 하던 노민이의 입술을 무수한 광고업주
들의 키스 시운전장 노릇을 하게 만든 것에 관한한, 캐주얼 입을 거리를 풍성하
게 제공하지 못하는 바람에 양장점의 맞춤옷 한 벌 값이 노민이 월급을 웃돌게
만든 그 시절 의상업계에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노민이가 입술을 살짝살짝 임
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그 시절 졸부들 수요에 공급으로 맞서다가 결
국 어떻게 하든지 유행 사냥의 취미 생활만을 쾌적하게 계속하느라고 어느 아파
트 임대업자의 후처가 된 것에 대해서는 시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아무리
단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지만 잡지사 여기자 중에서 부동산업자의 승용차 뒷자리
로 기어오르기를 좋아하는 여기자는 그리 흔하지 않았으므로.
아니다, 나는 이렇게 노민이를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
노민이 생각은 어쩌면 그렇게도 할머니 생각과 다르던지, 그게 안타까웠을 뿐
이다.
나비 넥타이 집안에 콧수염이라.
우리 중고등학교 시절 대구 땅에는 나비 넥타이 아니면 안 메는 것으로 유명
하던 신사가 한 분 있었다. 바로 박노수의 아버지 박 교수였다.
박 교수는 강의 때는 물론이고 공석에 나타날 때면 반드시 나비 넥타이를 매
고 나와 별명이 <쪼타이 박>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교양 국어를 가르치는 엄연
한 국문학 교수였는데도 불구하고 <박 교수>라는 점잖은 호칭보다는 <쪼타이
박>이라는 그다지 국문학스럽지 못한 이름으로 더 널리 불렸다. <쪼타이>는 나
비 넥타이를 뜻하는 일본말인데, 동료 교수나 고등학교 동창들이 면전에서 <쪼
타이 박>이라고 불러도, 당사자는 그저 (왜 저러시는가)하고 천연덕스럽게 반문
하고는 했다.
노수 아버지에게는 나비 넥타이가 참 여러 개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내가
본 것만 해도 호랑나비, 붉은점모시나비, 배추흰나비, 물방울 무늬, 까만 비로드
등 부지기수다. 나는 하얀 공단 나비 넥타이를 매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노수 아
버지를 본 적도 있고, 까만 벨벳 나비 넥타이를 매고 상가 조문청에 모습을 드
러낸 노수 아버지를 본 적도 있다. 뒷날 고향 친구 하나는, <요정>이라고 불리
던 한식 요리집에서 우연히 노수 아버지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노수 아버지
가 매고 있던 분홍색 바탕에 검은 물방울 무늬가 점점이 박힌 나비 넥타이는 여
급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교태로운 그 요리집 분위기와 썩 잘 어울리더라고 했
다. 여급들은 그 분홍색 바탕에 검은 물방울이 점점이 박힌 무늬를 <뗑가라>라
고 불렀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노수 아버지는 여급들 입에조차도 <뗑가라>
라는 이름으로 오르내리더란다.
노수 아버지는 서양에서 오래 공부했거나 산 분이 아니고, 서양 문화를 으뜸
으로 치고 섬기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비 넥타이만을 고집했다. 그는 나
비 넥타이를 고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료들 대부분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타
날 만한 자리에도 나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나타남으로써 야릇한 자리
풍경을 지어내고는 했다. 노수의 말에 따르면, 꼭두새벽 마을 뒷산의 약수터로도
더러는 나비 넥타이 정장 차림으로 오른단다.
그렇다고 해서 노수 아버지가 해마다 똑같은 강의 노트만 들여다보면서 했던
소리만을 되풀이하는 이른바 무능한 교수였거나, 군인으로 말하자면 전투보다는
열병식을 더 좋아하는, 살짝 정치적인 교수였던 것도 아니다. 그는 시인이었으니
글에도 밝고, 시화전이라는 것도 곧잘 열었으니 그림에도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노수 아버지는 뭘 수집해서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도 아니었다. 노
수 가르치기를 <사람이 물건을 너무 좋아하면 그 뜻이 상하느니라>하고 가르쳤
다니, 나비 넥타이 수집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술자리에서는 주홍
이 올라 술꾼들이 진실 말하기와 버르장머리 없어지기를 혼동할 때쯤 되면 아래
위에서 노수 아버지의 나비 넥타이를 비아냥거리는 농담이 더러 나오고는 했다.
그러나 노수 아버지가, 나비 넥타이를 고집하는 것을 변명하거나, 그 까닭을 주
위 사람들에게 밝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비록 어울리지 않게 줄창
나비 넥타이를 차고 다니기는 했어도 노수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빠질 수도
없고 빠져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다.
사귀는 동안이 길었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노수 아버지의 나비 넥타이를 박
교수라는 사람의 옥의 티로 여기고는 했다. 그래서 가까이서 친교하거나 모시던
사람들은 노수 아버지에게 나비 넥타이를 풀어줄 것을 진심으로 소원했다. 그럴
때마다 노수 아버지는, 나비 넥타이는 끈 넥타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웃었다고 한다. 아닌게아니라 노수 아버지에게 나비 넥타이 풀어줄 것을 탄원한
주위 사람들의 양복 깃이나 와이셔츠 깃이나 넥타이나 바지통은 시속에 따라 아
코디언 바람통처럼 늘어났다 줄었다 했을 것이다. 노수 아버지는 양복 두 벌로
버틴 분이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노수 아버지는 나비 넥타이에 관한 한 어떤 반성의 징후도 보
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나비 넥타이에 대한 노수 아버지의 집착이 나
날이 강화되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들은 노수 아버지가 나비 넥타이에
대한 반성의 징후를 보여주지 않는 태도를 그의 집착이 강화되고 있는 증거로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노수 아버지를 동아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돌려나가기 시작했다. 노수 아버지는 나비 넥타이로써 동아리에서 어떤 피해를
안긴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동아리에서 돌림쟁이가 되어갔다.
이때부터는 박 교수의 집으로, <끈 넥타이를 착용할 것>이라는 <차림새 규
정>까지 명기된 다분히 비아냥이 담긴 술자리 초대장이 배달된 일이 있는가 하
면, 주례를 부탁했던 제자 중 한 사람은 노수 아버지가 기어이 나비 넥타이를
매고 나갈 것을 고집하자 결혼식 하루 전에 주례를 바꾸어버린 일도 있었다. 전
에 없이 학생들 사이로 이상한 비아냥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였
다. 교수들이 박 교수를 돌림쟁이로 만들기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어떤 동료든
동아리가 묵시적으로 승인한 어떤 불문율의 문턱을 넘어서려 할 때마다 학생들
은 그 동료를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쪼타이 박>앞에서 나비 넥타이 매고 앉았네”
<박 교수의 나비 넥타이>는 치명적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명백하게 사람을 불
유쾌하게 만드는 어떤 것, 결정적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부정적인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 상징어가 되어갔다고 한다. 정치학과 김 교수가 여당 국회의원
과 공치기도 자주 하고 지방 신문을 통하여 정부 역성도 은근하게 드는 버릇,
철학과 한 교수가 다른 교수들 논문 알기를 동발서췌의 모자이크로 아는 버릇,
국문학과 이 교수가 여학생 보기를 모들뜨기 눈으로 전쟁 미망인 보듯 하는 버
릇을 두고 학생들은 각각 김 교수, 한 교수, 이 교수의 나비 넥타이라고 했다고
한다.
<박 교수의 나비 넥타이>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에게는, 총장이든 학
장이든, 시장이든 동장이든, 예비군 중대장이든 동사무소 방위병이든, 상인이든
예술가든, 서울에서 성공한 동창이든 지방에서 뭉기적거리는 동창이든 모두 한
두 개씩의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더란다.
박 교수의 제자인 내 친구는 박 교수 이야기 끝에, 노수 아버지 덕분에 사람
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나비 넥타이가 있는지 살펴보게 되는 버릇
이 생겼다면서 웃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에는 각각 어떤 나비 넥타이가 매달
려 있는지 자주 쓰다듬어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면서 또 웃었다.
나는 그 뒤로도, 자신을 희화함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양식화한 본보기가 된
노수 아버지를 자주 생각했다. 박 교수는 어머니를 닮은 것 같지도 않고, 노민이
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기도 않다. 기질로 보아 할머니와 노민이 사이에 위치하
는 박 교수가, 실제로는 위로는 아버지, 아래로는 노민이를 복잡하게 아우르고
있어 보이는 내게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내가 노수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 써먹은 잣대이다.
“너 아까 좀 놀라는 것 같더라”
“글쎄다”
내가, 글쎄다, 하고 대답한 것에는 노수가 당혹해할 것에 대한 나의 염려가
담겨 있다. 노수에게는 상대의 확신 앞에서 몹시 당혹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러나 그것 역시 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노수에게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단어의 첫 음절을 길게 발음하는 버릇이 있
었다. 첫 음절을 길게 발음함으로써 다음 음절을 더듬지 않고 정확하게 발음할
준비를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노수의 발음에서는 그 버릇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수염 때문에?”
“어째 좀 그렇다”
“사람들 염두에 서서 사는 거 그거 부질없다”
“너는 내 시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도?”
“너 우리 아버지의 <보타이> 수수께끼 풀었냐?”
타인인 나의 시선에서 자기 아버지의 나비 넥타이로...
나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노수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의 비약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풀 것이 있었어?”
“암, <루어>더라고”
“가짜 미끼 말이냐?”
“조금 다르다. 미사일이 날아오면 전투기 조정사가 가짜 미끼 뿌리는 거 아
나?”
“몰라”
“멀었다, 멀었어”
일찍이 노수가 내게 이렇게 거친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남자들 세계에는, 의식
도 하지 못하는 순간에 거의 반자동적으로 정해지는 이른바 <페킹 오더>라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모이 쪼는 순서같은 것이다. 동기동창이라고 해서 아무에게
나 이놈 저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페킹 오더가 한번 뒤로 밀리면 앞으로 나
서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노수는 그 질서를, 내가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문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멀었다고 치고... 그래서 너도 코밑에서 루어라는 걸 하나 찬 것이냐?”
“저만치 지나온 줄 알았는데 바로 우리 아버지 나비 넥타이 밑이더라고”
“그나저나 너 정신없이 변했다”
“사흘이면 괄목상대하라더라고... 5년인데”
“그래, 여기 자리는 잡았냐?”
“정치를 좀 해볼거나”
“네가? 정치를? 그것도 루어냐?”
나는 말을 해놓고서야, 아뿔싸, 했다.
“농담이다. 나 이제 말 안 더듬는다는 뜻이다. 훌륭한 웅변가중에는 말더듬이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 말더듬이 중에 훌륭한 지도자 경험이 있는 말더듬이
는 없지만서도...”
“...”
초등학교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대구로 나오면서부터 노수는 말을 더듬기 시
작하고, 수줍음을 심하게 타서 걸핏하면 얼굴을 붉혔다. 어찌나 얼굴을 잘 붉히
고 어찌나 말을 심하게 다다거리면서 더듬었는지 중학교 시절의 노수 별명은
<뿔갱이>, 고등학교 때의 노수 별병은 <다다이스트>였다. 말을 더듬고 얼굴 잘
붉히는거야 노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니까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데, 문제는 노
수가 그 수줍음과 낯 붉어지는 것 때문에 저에게 버릇 든 것이 아니면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는 데 있다.
노수는 수줍음을 타도 너무 탔다.
아버지가 나비 넥타이 차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노수는 자기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노수는 우리들 급우 중 어떤 친구
도 자기 집에 들여놓은 적이 없기로 유명했다. 대문 밖에서 노수를 만난 친구는
더러 있다. 그러나 어떤 친구들로부터도 노수네 집 안을 구경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에 한두 차례 가보았을 뿐, 중학교 시
절에는 노수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들은 대개 자기
가족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몹시 꺼린다. 급우들 중에는 노수를 폐쇄주의의 대명
사인 <대원군>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중학교 시절 영어 교사는 어떻게 하든지 영어를 익히게 하려고 교실에서 쓰는
<차려>, <경례>, <쉬어>, <저요>, <고맙습니다> 같은 말은 영어 시간에만은
꼬박꼬박 영어로 쓰게 한 일이 있다.
교사가 들어와 교단에 서면 <차려, 경례, 쉬어> 구령을 붙이는 일은 실장의
고유 권한이다. 실장은 이 구령을 수업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두 번 붙인다. 그러
나 영어 교사는 영어 시간에만은 이 구령을 돌려가며 영어로 붙이게 함으로써
우리 입을 열어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나도, 조금 쭈글스럽기는 했지만
<어텐션>, <바우>, <이즈>를 그럭저럭 해내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이것이 내가
큰소리로 말한 최초의 영어였을 것이다.
어느 영어 시간, 노수에게 수업이 끝날 때 영어로 구령을 붙일 차례가 왔다.
수업이 계속되는 동안 노수는 자주 얼굴을 붉혔다. 노수는 구령을 붙여야 한다
는 것, 그것도 영어로 붙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던 모양이다.
노수를 잘 아는 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내 차례가 온 날 아침
부터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일단 시작만 해 놓으면 1초밖에는 걸리지 않는다.
“노수 팍!”
수업을 마치자 영어 교사가 출석부를 들여다보면서 박노수의 이름을 영어스럽
게 불렀다.
노수는 얼굴을 귀밑까지 붉히며 천천히 일어났다. 급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노
수의 얼굴로 모였다.
노수는 이를 악물었다.
“어...”
노수의 <어텐션>은 <어>에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했다. 급우들이 까르르
웃었다. 급우들의 부주의였다. 다른 급우에 대한 폭소와 노수에 대한 폭소는 뉘
앙스가 다르다. 급우들의 폭소가 노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어...”
노수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목을 뽑았다. 노수는 말이 제대로 안 나올 때
면 자주 목을 뽑고, 그래도 안 나오면 목을 뽑은 채로 턱을 주억거리고는 했다.
그런데도 나오지 않았다. 급우들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1초밖에는 안 걸린다”
내가 격려했으나 하릴없었다.
그것은 노수에게는 격려 아니었기가 쉽다. 노수는 “1초밖에 안걸리는데 그것
도 못하느냐, 이 병신아”로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수줍어하기와 얼굴 붉
히기와 말더듬기는 노수의 내부에서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폐쇄공포증 성향이 있는 사람은 폐쇄된 공간을 두려워하는데, 이때의 폐쇄공
간은 외부의 공간이다. 적면공포증 성향이 있는 사람은 얼굴 붉어지는 것에 공
포를 느끼는데, 이때의 붉힌 얼굴은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이
고 내면이다.
어린 시절부터 노수는 남 앞에 나서는 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바로 이 안다는 사실이 노수에게는 부담이 되고
있었다. 안다는 사실이 창피를 당하는 과정과 결과를 예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노수는 결국 <어텐션>과 <바우>를 외치지 못함으로써 영어에 관한 경험은
내게 밀린 셈이 된다. 그러나 이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일은, 노수가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기까지 악화되었
다. 안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노수가 못했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날 영어 수
업 이후 노수의 목 근육이 심하게 경련하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보았다.
영어 시간 다음의 역사 시간이었다. 역사 시간에는, 대원군이 쇄국 정치를 편
이유가 권력을 독식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에서였는가, 아니면 문화의 순수성
을 지키자는 충정에서였는가, 그것도 아니면 문호를 개방할 자신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였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중학생의 감각과 언어로 <되도 않
게> 토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뿔갱이에게 물어보자”
그런데 누군가 이런 신소리를 하는 바람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노수의 목을 잠그는 열쇠 노릇을 한 것은 영어 시간에는 내
가 외친 <1초밖에는 안 걸린다>와 역사 시간에는 급우들의 웃음이었던 듯하다.
수업이 끝난 뒤 학교를 나오면서 노수가 내게 속삭인 말은 정확하게 “주욱고
싶다”였다.
내가 알기로 <어텐션>은 노수가 영어로부터 받은 첫번째 상처다. 물리적인
상처와는 달리 정신적인 상처여서 이 첫번째 상처는 두번째, 세번째 상처의 직
접적인 원인이 된다.
우리 영어 선생은, 당시의 교사들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입말의 경험을 통하여
영어에 대한 껄끄러움과 쭈글스러움을 없애주려고 애를 많이 쓰던 분이셨다. 그
는 영어와의 스스럼없는 사귐을 <아이스 브레이킹(얼음깨기)>이라고 불렀다.
인사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둘씩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갔다. 그러고는 교사의 신호에 맞추어 인사
를 주고받았다.
“하우 아 유, 미스터 딕슨(딕슨 씨, 안녕하세요)”
“아임 파인, 생큐, 앤드 유, 미스터 해리슨(안녕하고말고요, 고맙습니다. 해리
슨 씨도 안녕하시지요)?”
대부분의 급우들이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큰 실수들은 하지 않았다. 능청스
럽게 잘하는 아이도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혀를 꼬부려 온몸을 근지럽게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때 노수가, 제차례 맞기까지 경험했을 정신적 긴장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노수의 차례가 왔다. 교탁 앞에서 노수와 상대가 마주 보고 섰다. 교사가 시작
신호를 내리자 노수가 말했다.
“하우...”
“...하우 아 유, 미스터 딕슨, 아임 파인, 생큐, 앤드 유, 미스터 해리슨(딕슨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고말고요, 고맙습니다, 해리슨 씨도 안녕하시지요)?”
“...!”
볼 만했던 것은 노수의 얼굴이 아니라 졸지에 뻐엉 뚫려버린듯한 노수 상대의
얼굴이었다. 노수의 상대는, 무엇인가가 잘못된 줄은 아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몇 초 걸리는 것 같았다.
교실이 웃음판이 되는 데도 짧으나마 다소 시간이 걸렸다. 영어 교사의 미소
가 신호탄 노릇을 했다. 교사가 웃음을 참느라고 교탁 뒤로 몸을 숨기는 순간
교실은 걷잡을 수 없는 웃음판이 되었다. 아예 의자에서 내려와 마룻바닥을 데
굴데굴 구르는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괜찮다, 노수야. 사람은 누구나 나비 넥타이를 하나씩 차고 사느니라”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 학년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동창들을 만나면 중학
교 3년 내내 가장 우스웠던 사건은 단연코 <하우아유> 사건이었다는 동창이 더
러 있다. 동창들에게 가장 높은 산이 노수에게는 가장 깊은 골짜기였을 것이다.
<하우아유> 사건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웅변대회 사건은 생각날
때마다 코끝이 아려오곤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노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과, 새로운 사물이
나 사람 만나는 일을 여전히 두려워했다. 따라서 서투를 수밖에 없고 서투르니
까 점점 더 기피했다.
학교 내의 웅변대회를 앞두고, 노수 아버지와 절친한 국어 선생 한 분이 노수
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위협은 하지 않았다. 국어 선생은 노수가 그 위협을 어떻
게 수용할지 잘 알 만큼 사려 깊은 분이었다. 그는 노수에게 오로지, 전교생 앞
에서 멋지게 웅변을 토하는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노수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노수를 설득하는 국어 선생님의 논지는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너는 말을 더듬는다, 그렇지?”
노수는 그렇다고 했다.
“너는 말더듬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다, 그렇지?”
노수는, 그렇게 부르는 친구도 없지만 자기가 말더듬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서 들어서 반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을 것도 없다고 오랜만에 아
주 정밀하게 대답했다.
“너는 웅변이 두럽다, 그렇지?”
노수는 두렵다고 했다. 웅변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실수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실수할 가능성과 맞먹는 것을 말한다.
체면이 깎일 가능성과 맞서는 것을 말한다. 헤엄치기를 배운다는 것은 가볍게는
코에 물이 들어가고 귀에 물이 들어갈 가능성, 무겁게는 익사할 가능성과 정면
으로 맞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럴 가능성을 직면하지 않고는 결코 헤엄
치기를 배울 수 없다.
연주가를 예로 들어보자. 연주가에게는 악기의 조율도 정밀하게 되어 있었겠
지만 연습도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 이윽고 연주가는 무대에 선다. 그 무대
는 연주가의 체면을 사정없이 깎아버릴 수도 있고, 일류 연주가로의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무대가 두렵다고 절대로 무대에 오르지 않는 연주가는 체면은 깎
이지 않을지 모르나 제대로 된 연주가는 절대로 될 수 없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실수해서 체
면이 깎일 가능성과 맞서는 것을 말한다. 성공을 거두면 좋겠지. 완전한 무대 경
험이 될 테니까. 그러나 불완전한 무대 경험은 완벽한 준비보다 훨씬 귀할 때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아주 많다. 한번 해보자“
나와 노수가 공동 작업으로 웅변 원고의 초고를 만들었는데도 웅변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노수는 진땀을 흘리며 근 한 주일 동안이나
그 원고를 암기했다. 떨리는 입술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쑤욱쑤욱 목이 빠지
는 버릇과 싸우면서 암기했다. 어찌나 철저하게 암기하는지, 암기를 너무 믿은
나머지 만일의 경우 임기응변의 여지가 없어질까 봐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암기
를 믿고 시작했다가 만의 하나 막히는 대목이 있을 경우, 그때 노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태를 나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웅변 원고를 암기할 동안 노수를 여러 차례 만났다. 혼자 있을 때는 그
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나를 만나기만 하면 노수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했다. 나를 만나는 순간부터 웅변을 기정 사실로 실감하게 하고 그래서
생기는 긴장을 그런 식으로 풀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노수는, 깨어 있을 때
는 진땀이고 잠들어 있을 때는 악몽이라면서도 웅변 대회의 무대만은 기어이 밟
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는 했다.
우리 학교 강당의 무대 대기실은 무대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대 밑에 있었
다. 나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무대 밑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보았다. 대기실의
분위기는 노수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오래된 강당이라 판자 틈새로 벌어져
있어서, 무대 밑에 서 있는데도 무대 위에 선 연사의 바짓자락이 보였다. 청중석
에서는 대기실의 연사들이 보이지 않겠지만 대기실에서는 무대 정면의 틈새를
통하여 바닥에 앉은 무수한 알대가리들을 볼 수도 있다. 위에서 들리는 천둥 같
은 연사의 포효, 앞에서 들리는 우레와 같은 청중의 함성과 박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연사의 기를 꺾어놓기 십상이었다.
“괜찮지?”
노수는 괜찮다고 했다. 긴장감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는 대답을 기다리던 나에
게 날강날강해진 원고말이를 찌그러지게 그러쥐면서 노수가 한 대답은 바람직한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노수는 성격상 긴장 상태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긴장을 심화시킬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 해볼 테니까 나가 있어 줄래?”
노수는 혼자서 맞서고 싶었는지, 손가락으로 연신 콧구멍을 쑤셔대면서 말했
다.
“콧구멍 그렇게 쑤시다가 인마, 코피 내겠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나는 대기실에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가 다른 문을 통해 청중석으로 들어가 노
수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날 노수는 웅변 무대에 데뷔하지 못했다. 손톱에 콧속이 터져 노수
는 제 차례 직전에 의무실로 실려갔다. 내가 의무실로 달려갔을 때 노수는 주먹
막한 코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부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의무실을 지키
던 양호 담당 체육교사는 노수의 콧속이 손톱에 어찌나 갈기갈기 찢어졌는지 솜
을 두 봉지나 밀어넣었는데도 피가 멎지 않는다고 했다.
그 체육 교사는 일찍이 체육 시간에 얼굴을 심하게 붉힌 노수를 보고는 술 마
신 것으로 알고 가혹하게 모욕한 적이 있다. 점심시간에 담을 타넘고 나가 배갈
을 한잔씩 하고 들어오는 월장파 고교생이 있던 시절이었다.
체육 교사는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부자가 왜 그렇게 웃기냐?”
노수는 돌아누워서 우느라고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민이도 너 오는 거 알고 있지?”
문득, 노수가 지난날의 <뿔갱이>와 <다다이스트>를 콧수염으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 운전석 옆에 앉은 노수를 곁눈질하면서 지나가
는 말로 물었다.
“무슨 인심이 그래, 인마?”
노수는 내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나를 나무랐다. 의외로 퉁명스러
웠다. 벼르고 있었던 것 같은 어조였다.
“인심이라니?”
“너는 서울에 있었고 나는 미국에 있었다. 노민이가 서울에 있냐, 미국에 있
냐? 무슨 인심이 그러냐고?”
“미안하다, 챙기지 못해서. 너 오는 거 알고 있겠지?”
“노민이 죽었다”
“아무리”
“죽었다니까”
“말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안 죽었냐?”
“농담 말고. 알고 있지?”
“네 알 바 아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니?”
“네 알 바 아니다”
“너 옆 모습이 철학자 니체 같다”
“말머리 틀지 마라”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노수로부터 이놈 저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
다. 그러던 노수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어 내게 함부로 하는데도 섭섭
하게는 여겨지지 않았다. 노수는 자기가 얼마나 변해서 딴사람이 되었는지 나에
게 과시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싶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지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도 옛 말법을 한번 써보았다.
“뿔갱이, 너 이 새끼, 알아주지도 않는 미국 박사 땄다고 이렇게 으시딱딱하
게 굴래”
초등학교 졸업하기까지 갈라져 살아서 그랬을까? 노수와 노민이는 여느 오누
이처럼 살갑지를 못했다. 사춘기 소년에게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제 누이를 보호
하려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는 제 동아리에 견주어
제 누이나 동생을 혹평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노수가 노민이에 대해서 보이
는 태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나는 노수와는 줄동창에다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졸
업할 때까지 노민이 얼굴을 본 것은 두어 번을 넘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에는
내 쪽에서 관심이 없어서 그랬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 쪽에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노수는, 노민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에
게 과민하게 반응했다.
오누이가 일란성 쌍둥이일 경우는 서로 상대의 이성에 대해 간혹 껍진껍진하
게 반응하는 수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오누이가 일란성 쌍둥이라면 아닌게아
니라 자궁 속은 암수 분화의 기나긴 진화론적 역사의 축소판일 테니까 더러 우
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무의식적인 갈등을 드러낼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
나 노수와 노민이는 한 살 터울이니까 일란성은 고사하고 홑쌍둥이도 아니다.
이 오누이의 환경이 다른 오누이의 환경과 다르기는 하다. 어머니 없이, 홀아버
지 밑에서 조모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으니까.
고등학교 시절, 학교 파하고 나서 당연히 노수가 귀가해 있으려니 하고 노수
네 집에 들른 적이 있다. 노수가 제 집에 사람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을 알면서도 굳이 들렀던 것은 지금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만큼 요긴
한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인종 소리에 대답한 것은 노수가 아니라 노민이었다. 중학교때 두어 번 본
모습과는 판이했다. 노민이는 대문에 뚫린 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쪽문
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니 자연 허리를 구부릴 수밖에 없고, 허리를 구부렸으니
목과 옷깃 사이가 빌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민이의 젖가슴을 보고 억, 소리를
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얀 얼굴에 난 빨간 여드름 몇 개, 손을 대면 땀이
묻어날 것 같은 하얗고 촉촉해 보이는 목덜미가 어쩌면 그렇게 놀랍던지. 골이
드러난, 불룩한 젖가슴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아직도 내 뇌리에, 언어로는 표현
하기 어려운 어떤 경험으로 선연하게 남아 있다. 그 경험은 새비릿하던 냄새와
묵근한 느낌과 야비한 충동을 아우른다.
그 경험의 육질 자체는 그때나 그 이후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뒷날 한동안
함께 일한 일이 있어서 잘 알게 되었거니와, 고교 시절 노민이로부터 받은 그
인상은 실제의 노민이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노민이의 목이 다른 처녀들
목보다 특별히 흰 것도 아니고, 노민이의 젖가슴이 다른 처녀들 것보다 특별히
큰 것도 아니라는, 개운하지 못한 뒷맛을 경험한 뒤로 나는 기억이라는 것은 일
단 의심하고 본다.
“많은 달라졌네요...”
어쨌거나 노민이가 한 말은 정확하게 내가 하고 싶던 말이었다.
“...오빠, 아직 안 왔는데요.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밖에서 기다리지”
내 목소리는 갈증 난 사람 목소리처럼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나도 밖에서 기다려줄게요”
노민이는 이러면서 쪽문을 나왔다.
남성은 이성의 몸을 교묘하게 훑어보는 기술을 익히고, 여성은 자기 몸을 교
묘하게 드러내 보이는 기술을 익히게 될 때가 사춘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
말 할 때는 얼굴을 흘끔거리고 저 말할 때는 가슴을 흘끔거리는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노민이가 몸을 사리지 않은 것도 좀, 요것 봐
라 싶었다.
“오빠 왔네요”
노민이의 말에 뒤를 돌아다보니까 노수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내 얼굴도 그랬
을까, 노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노수에게 용건을 말했다.
“알았다”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설명을 보태려고 했을 것이다.
“알았다”
노민이가 쪽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노수의 귀에는 내말이 들리지 않
았던 모양인가.
무렴해서 돌아서는데 쪽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노수가 노민이의 뺨
을 때리는 것임에 분명한 소리, 두번째 소리보다는 조금 둔탁한 소리가 바트게
들려왔다. 소리가 둔해졌던 것은 노민이가 두 팔로 제 머리를 싸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돌아서서 쪽문을 걷어찼다.
“노수, 너 나와”
노수는 나오지 못했다.
화가 나서 되돌아서려고 보니 문득, 제 누이 붙여주려고 부러 김춘추의 옷고
름을 뜯은 김유신 생각이 났다. 교활한 김유신이 부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
도 친구간에 누이 붙여주려고 그랬다는 것은 그 친구를 인정했던 셈이 된다. 하
지만, 내가 못나서 노수가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일로 노수
를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나에게 노수는 친구는 친구이되, 늘 내 쪽에서 접어주
어야 하는 그런 친구였다.
노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노민이를 다시 본 것은 박 교수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 새벽이니
까 노민이 나이 스무 살 되었을 때일 것이다. 노수와 나는 서울에 있다가 부고
받고는 부랴부랴 밤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는데, 가서 보니 병원 영안실 바닥
에는 머리를 풀어 오른쪽 어깨에다 늘어뜨린 노민이만 당그랗게 앉아 있었다.
영안실 비닐 돗자리가 어찌나 보기 싫던지, 뒤에 노민이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팠다.
“머리를 풀어도 딸은 왼쪽 어깨에다 늘어뜨리는 법이다”
내가 이러면서 노민이 머리채를 잡아 왼쪽으로 옮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 집에 여장을 풀면 좋겠거니 해서 방을 하나 비우고 준비까지 해두었는데도
노수는 부득부득 호텔에 들 것을 고집했다.
“폐 될 거 없다는데도 그런다”
“안다”
“너 미국 돈벌러 갔다 온 거 아니잖아?”
“노민이가 작살을 내기는 했어도 나비 넥타이께서 여축하신거, 아직은 만만
치 않다”
“서울 호텔의 방값, 알기는 아냐?”
“자유 값이려니 여겨야지”
“우리 집에도 자유는 있다”
“애인 불러들이는 자유도 있냐?”
“홀아비 재미가 뭔데?”
“그래도 싫다”
“애인이 있기는 있냐, 나이 마흔에, 수염이 가로 뻐드러졌는데? 그러고 보니
글자 그대로 수염이 가로 뻐드러졌구나”
“너 아직 나를 뽈갱이나 다다이스트로 보는 모양인데...”
“아니면? 귀국했으면 할머니 아버지 성묘가 최급선무일 테고, 선산 내려가면
큰집에서 하루 이틀 밤 안 잘 수가 없을 텐데, 내일이라도 당장 비울 방을 얻어
들어?”
“참 그렇네”
노수는 하루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우리 집에 여장을 풀었다. 노수는 술도 담
배도 하지 않았다. 술은 마실 시간이 없다 보니 맛을 잊었고 담배는 미국 사람
들 구박이 심해 더러워서 끊어버렸다고 했다. 노민이 연락할 길이 있으면 나도
오래 만나지 못했으니까 내 집으로 부르자고 했을 뿐인데 노수는 답지 않게 짜
증스러워했다.
“보고 싶으면 네가 불러라”
“연락처를 몰라”
“언제부터?”
“잡지사 일할 때가 언제냐? 10년 세월이로구나”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언제부터 연락처를 모르느냐는 노수의 질문이 마음발에
채였다. 노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인가. 노수의 속마음이 궁금했지만 묻
지는 않았다. 노수는 내가 노민이의 뒤 거두어주기를 바랐는지, 노민이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기를 바라는지 그것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노수가 내 인심 탓
하는 것은 노민이를 종무소식인 채로 그냥 둔 것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노민이의 취직 부탁을 하면서 노수가 한 말은 오래오래 짐이 되
었다.
“어렵겠지만 노민이 뒤를 네가 좀 봐다오. 오라비 노릇을 해달라는 것도 아
니고 아버지 노릇을 해달라는 거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때 노수의 누이 걱정 참 오래도 간다 싶었다. 누이를 거두어 달라고 해도
생각할 여유를 좀 달라고 할 판인데 나를 어떻게 보고 이렇게 단속을 하나 싶기
도 했다.
“아, 이 자식아, 손보라고 해도 안 본단, 그러니 볶아먹든지 삶아먹든지 네가
다 해먹어라”
노수 면전에다 대고 이런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노민이가 내 관심 밖으로 벗어난 지 10년이나 되었다는 말도 그 오라비 앞이
라서 하기가 어려웠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노수의 뿔갱이 버릇과 다다이즘이 현저한 호전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급우들 대부분이 대학 입시에 코가 빠
져 옆 돌아볼 나위가 없을 때였고, 노수 자신도 남의 눈을 의식할 겨를이 없던
때였으니 노수의 말더듬기와 적면 공포는 잠복기를 맞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서울에서 노수의 옛 버릇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사투리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도 여기지 않지만 부끄럽게
도 여기지 않는다. 한 영문학 교수로부터 언젠가, 자기 시절에 문학사 강의 들으
러 들어갔다가 교수의 소위 문화사 강의라는 것이 <문화라카는 거슨...>으로 시
작되는 데 절망하고 그 뒤로 그 시간에는 한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영문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사 강의는 사투리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투리로 시작되는 문화사 강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사람의 동아리라고 하는 것은 그 규모가 크건 작건 동아리가 공유하는
잠재력으로부터 특정한 요소를 선택하고, 이로써 단순하든 복잡하든 나름의 정
교한 실존적 습관을 빚어내는데, 한 동아리의 이러한 습관이야말로 아무리 우수
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동아리에서는 결코 빚어지지 않을 만큼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영문과 교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사투리야말로, 자랑스럽게 내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역시 그런 문화의 한
갈래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수는 서울 생활과 함께 사투리에 대한 극심한 열등감을 드러내기 시
작했다. 사투리를 부끄러워하는 많은 지방 친구들은 빠른 속도로 서울의 억양이
나 어법을 배워갔지만 노수에게는 그럴 숫기조차 없었다. 노수에게는 그것 또한
새로운 것과의 무서운 만남이었다. 뿔갱이 노수가 <언나수>라는 또 하나의 별
명을 얻은 것은 상경한 지 한 달도 못 되어서였다.
노수와 나는 복모음을 잘 발음하지 못했다. 그래서 <광화문>은 <강하문>이
되었고, <압권>은 서울 친구들 귀에 <악건>으로 들린다고 했다. <ㅡ>와 <ㅓ>
를 잘 구별해서 발음하지 못하는데다, 자음을 접변시키는 발음법을 사투리로 익
히는 바람에 <은하수>는 <언나수>, <괄호>는 <갈로>로 읽어서 종종 웃음거리
가 되기도 했는데, 서울 친구 중 하나가 이 가운데 <언나수>를 취하여 노수에
게 별명으로 안긴 것이었다.
고향 사투리조차 더듬거리던 다다이스트 노수에게 <언나수>는 또 하나의 벗
기 어려운 짐이었다. 그러나 노수가 그 다음에 지게 된 또 하나의 짐에 견주면
<언나수>는 아무것도 아니다.
2학년 때던가. 학교 앞 술집으로 나를 불러낸 노수는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
키다가 예의 그 첫 음절을 길게 늘여빼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죽어버리고 싶다, 정말”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노수가 미국인 영어 강사들 사이를 맴돈 것은 <하우아유> 사건 이후로 영어
와 결연하게 정면 대결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열심히 영어 강사
들을 좇아다니고 학교의 어학 연구실에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 같았다.
“402호 앞 복도에서 다과회가 있었어. 술자리는 오늘 밤으로 미루고... 하워드
강사가 내일 미국으로 떠난다고... 하워드가 나한테 그러데. 한국이 좋아서 내년
쯤 다시 오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했지”
“그런데?”
“옆에 있는 애들이 배를 잡고 웃는 거라”
“웃을 일이 없잖아?”
“내가 얼떨결에 <유 아 웰컴> 했던 모양이야”
“한국이 좋아서 다시 오겠다는 사람에게 <천만에>라고 했다는 거냐”
“그러게”
“옛날 국어 선생님 말마따나 헤엄치기 배우다가 코에 물 들어간 폭 잡아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야, 하워드는 아침 인사한다고 나보고 <안녕하십시
오?> 하더라”
이 <유아웰컴> 사건이 노수를 얼마나 괴롭혔는가는 내가 며칠 뒤 영어에서
이와 비슷한 용법을 찾아내었을 때 노수가 어린애처럼 좋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봐라. 아테네 여신이 다시 한번 파르테논 산정을 방문하겠다고 하니까 아홉
뮤즈 중의 하나가 <유 아 웰컴드>라고 하지 않나? <환영을 받으실 겁니다>, 이
런 뜻이지 뭐냐? 그러니까 너는 약간 고색창연한 영어를 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나 심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하고 있지도 않은 형편에
멀쩡한 사람에게 정신 질환의 혐의를 두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문가의 진단과 비전문가의 견해에 관한 한 한 가지 의견이 있다.
나는 자동차의 전문가들이 내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 자동차의 부품을 점검하
면서 갈았어야 할 것, 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장차 갈아야 할 것을 읽어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들이, 우리 눈에는 멀쩡해 보
이는 사람에게서도 정신 의학에서 극도로 세분화된 병증 같은 것을 상당히 설득
력이 있는 수준까지 읽어내는 것을 보고는, 과연 전문가는 다르구나, 하면서 감
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시절의 노수를 생각하면 문외한인 내 눈에도 무슨무슨 <공포증>,
무슨무슨 <기피증>을 여러 개 소지한 사람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수는 그
병적인 수줍음 때문에 새 친구 사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거나 기피했고, 마
을 더듬었기 때문에 여학생 만나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거나 기피했다. 친구
중에는 노수의 여학생 기피증이 결혼 기피증으로 발전할까 봐 겁난다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끼리 만나면 우리는 이런 농담을 더러 하기도 했다.
“노수 저 자식, 여자에게 구혼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저와 이혼해 주
십시오>, 이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나는 노수의 귀국 직전에, 미국에서도 여자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는 일이 일
어나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고는, “너 결혼 기피증 한 장 더 가지게 된 거 아니
냐”고 전화에다 대고 농담해 주었던 일이 있다.
그때 노수는 씩씩하게 반문했다.
“그러는 너는?”
“그나저나 놀랍다.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입대할 때 나는 조금 걱정했다. 군
대라는 데가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데는 인정 사정 없는 곳이 아니냐? 대학원을
나온 숫기 없는 늦깍이 졸병... 고문관 자격으로는 이만하면 거의 완벽한 수준이
다”
“다다이스트라고 해도 괜찮다”
“미안한 말이지만 미국으로 떠날 때도 같은 걱정을 했다”
“일종의 자기 강화 프로그램이 필요했을 때다”
“어떤?”
“내 말 듣고 웃으려면 웃고 말려면 말아라.
나는 만화책에서 자기 강화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자기 강화 프로그램, 이거 하나만은 학교도 친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더
라.
제대한 직후의 일이었을 거다. 이발소에서 옛날 만화책 뒤적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와 중고등은 대구에서 나오고 대학은 서울에서 나
왔다. 그런데 나는 그 즈음 유학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무대를 그렇게
자꾸 넓히면서도 내게는 넓어지는 무대에 대응할 만한 아무 준비도 없었다. 어
떤 강력한 대처 방안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었다. 그래서
자기 강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만화 이야기다. 선문답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정말 만화 이야기다.
대학에서 연극부원을 선발하는데 말이다. 선발 <오디션 룸> 한가운데 조그만
탁자 하나, 탁자 위에는 사과가 한 알 놓여 있다. 주위에는 상급학년 부언들이
주욱 둘러앉아 있고... 신입생 지원자가 하나씩 그 방에 들어와 상급생 심사위원
들이 보는 가운데 그 사과 앞에서 어떤 연극적인 반응, 어떤 예술적인 반응, 말
하자면 어떤 창조적인 반응을 어떤 수준까지 보이는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된다.
나는 그 만화 컷 속으로 들어가 심사위원의 자라에 앉는다.
한 남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자신을 로미오, 사과를 줄리엣으로 상정하고
현란한 수사학이 곁들어진 사랑을 고백한다.
너는 아니고...
또 한 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자신을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 사과를 선
악과로 가정하고 대사를 읊는다. 이 학생의 상상력은 사과에서 출발, 자기가 낙
원에서 추방된 것이 과연 이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과와 이브는 신의 각본
에 동원된 애꿎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지를 논증하는 데까지 비약한다.
너도 아니고...
또 한 학생이 들어온다. 이 학생은 사과 앞에서 사고가 연상시키는 여가적인
사건을 두름으로 꿰어낸다. 에덴의 사과, 불화의 여신 이리스가, 미스 그리스라
고 생각하는 여신이 집으라면서 아프로디테와 아테네와 헤라 앞으로 던진 사과,
이로써 트로이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만 그 <디스코드(불화)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만유인력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뉴턴의 사과 타령을 줄줄이
이어낸다.
너도 아니고.
그 밖에도 많은 학생들이 들어온다. 너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들어온다. 아니다. 사실은 마지막 학생이 아니
다. 그러나 그 학생의 등장과 함께 내가 만화책을 덮어버렸으니까 마지막 학생
이다. 그 학생은 천천히 걸어들어와 가만히 사과를 보고 있다가 덥석 집어들고
는 우적우적 베어먹기 시작한다.
바로 너다...
웃기지?
나는 그 학생이 사과를 우적우적 베어먹는 것을 본 순간 내가 왜 그렇게 수줍
어하는지, 내가 왜 그렇게 얼굴을 자주 붉히는지, 내가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지, 내가 왜 그렇게 새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전광석화라는 말은
이럴 때 쓴다. 문자 그대로 한 생각이 전광석화같이 머릿속을 스쳐가더라. 아,
나는 남들이 껍데기로만 사는 것을 본받으려 했구나, 그걸 본받으려고 하다 잘
안 되니까 자꾸만 그거 드러나는 것을 숨기려 했구나, 그러느라고 그렇게 부끄
러워하고, 그렇게 망설이고, 그렇게 더듬거렸던 것이구나...
내 언어를 새로 만들었다. 배운 정의를 폐기하고 내 느낌으로 내 것으로 내가
만나는 단어를 다시 정의했다. 사랑? 조만간 끝날 미끄럼... 믿음? 가역 반응...
공포? 무방비 도시... 증오? 나비 넥타이... 물? 죽음... 불? 잠... 바위? 존재론적
시한 폭탄...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다. 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만화 주인공처럼 바
로 붙어버리자. 현상이 어떠니 인식이 어떠니 하지 말고 내 눈에 본질로 여겨지
는 것, 그것과 바로 붙어버리자...
박사 공부?
해버리자.
미국?
가버리자...
그런데 우연히, 우연히 말이다. 영어라고는 <영>자도 모르는 우리 하숙집 아
주머니를 앞에 놓고 내가 뭘 좀 물어보았다. 그 아주머니, 너도 기억할 거다. 된
장찌개가 졸아들면 물 더 붓고, 덜 달여지면 국물 쏟아버리던 한심한 아주머니.
자, 아주머니 아주머니, 내가 말하는 다음의 두 영어 단어중...
내가 영어를 어찌 알아서?
아니, 영어 모르니까 묻는 거예요, 자, 하나는 짧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길다
는 뜻입니다. <을롱>과 <숏>... 아주머니 듣기에는 어느 놈이 길다는 말인 것
같습니까?
뭔가는 모르겠지만 <을롱>이라는 말이 길다는 것 같구먼...
그래요? 자, 이번에는 내가 말하는 두 영어 단어 중 하나는 넓다는 뜻이고 하
나는 좁다는 뜻입니다. <와이드>와 <내로우>... 아주머니 듣기에 어느 놈이 좁
다는 말인 것 같습니까?
글세, 뭔가는 모르겠지만 <내로우>라고 했소, 그게 좁으장한 것 같구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겠지?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이 아주머니도 사과를 깨물어 먹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놀랍지?
며칠 뒤에는 말이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내 친구 동생에게 물었다. 내 친구
동생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야, 내가 말하는 다음의 두 일본어 단어 중 하나는 길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
이고 하나는 짧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너 형용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지?
참, 몰라도 괜찮구나. 자, <나가이>와 <미지카이>... 네가 듣기에 <나가이>와
<미지카이> 중 어느 단어가 길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 같으냐?
아무래도 <나가이>라는 말은 길다는 뜻이고 <미지카이>는 짧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미지카이>라는 말 자체는 <나가이>라는 말보다 긴데도?
길어도 내 느낌은 그래요.
자, 그러면 이번에 내가 말하는 두 일본어 단어 중 하나는 무겁다는 뜻을 지
닌 형용사이고 하나는 가볍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이다. 자, <오모이>와 <가루
이>... 네 듣기에 이 단어 중 어느 단어가 무겁다는 뜻을 지닌 형용사 같으냐?
<오모이>가 무거운 것 같은데요? <가루이>는 가벼운 것 같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오모이>에는 <미음>이 들어가서 무거운 것 같고, <가루이>에는 <기역>이
들어가서 가벼운 것 같아요.
재미있지?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내 친구 동생을 상대로 대소, 장단, 고저, 심천, 원근,
완급, 광협, 경중, 농담, 한랭을 나타내는 영어와 일본어 형용사를 한 쌍씩 나열
하면서, 한 쌍의 영어와 일본어 형용사 중 거기에 상응하는 우리 것의 한 쌍의
우리 형용사 중에서 맞추어보라고 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맞추는 확률은 70퍼센트에 육박한다.
너는 이런 조사는 객관성이 하나도 없다고 하겠지만 이것이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래, 겁을 내지 말고 나만의 감으로 세상과 한번 붙어보고 나만의 감으
로 영어와도 한판 붙어보자...
믿어지지 않겠지만, 되더라. 되더라고.
미국?
미국에 가니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게 어쩌면 그렇게도 좋은지... <해피니
스 프롬 애너니미티(익명성의 행복)>... 뭐 대단한 일을 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감으로 내 얼굴을 다시 만들었다. 나는 내가 새삼스러워하던 정서와 맞
붙었다.
자전거 타는 법도 배우고, 자동차 운전하는 법도 배우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
가는 것도 배우고,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 다리를 분지르는 것도 배웠다. 나는 컴
퓨터도 배워 우리 학교 도서관은 물론이고 인근 수십 개 대학 도서관의 장서 목
록을 뒤질 수 있고 인터네트로 들어가 본국 신문도 읽을 수 있었다. 나 잘났지?
공정하게 말해 두자. 하지만 공장하자면 매정하게 된다. 너는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내게는 너라고 하는 존재가 어마어마한 부
담이 되었던 모양이라. 왜냐? 너는 나를 속속들이 알거든. 너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할머니까지, 우리 아버지까지, 노민이까지, 심지어는 우리 큰집 식구들까지,
우리 선산까지,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네가 두려웠던 모양이라. 너의 그 뭣이
냐, 현상을 네 엉터리 논리로 설명하는 버릇,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터무니없
는 확신, 너의 그 뭣이냐, 부분으로 전체를 읽을 수 있다는 허장성세... 이런 게
내게는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라.
그런데 만세, 미국에는 네가 없었다.
박노수 독립 만세!
섭섭하냐?”
섭섭했다기보다는 허전했다는 편이 옳다.
나도 공정하게 말하자면 매정하게 된다.
나 역시 오랜 친구이기는 하지만 노수를 그리워한 적은 별로 없다. 노수의 말
을 듣고 조금 허전했던 것은 오뉴월 모닥불에서 물러났을 때의 허전함 같은 것
이지 배신당한 느낌 같은 것은 아니었다.
노수는 고향의 백부댁으로 내려가면서도 내가 그렇게 조르는데 불구하고 박노
수의 나비 넥타이라면서 콧수염은 밀지 않았다. 노수는 김포공항 나올 때의 그
모양 그대로 고향 선산도 다녀오고, 모교 인사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더니, 사
회학자로서가 아니라 귀국 유학생을 대표하는 토론자가 되어 <국제화와 우리의
자세> 어쩌고 하는 텔레비젼 프로에도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노수가 한 주장 중
에 내 귀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
지요. 인류학에서 <미소니즘>이라고 부르는 이런 성향을 저는 일단, 새것을 기
피한다는 뜻에서 <기신주의>라고 불러봅니다. 이 말은 <미소스<기피)>와 <네
오스(새것)>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와는 달리 우리 헌것을
자꾸 버리고 새것을 섬기고 좇는 경향도 있지요. 심리학에서 <네오필리아>라고
부르는 이것을 저는 새것을 숭배한다는 뜻에서 <숭신주의>라고 불러보겠습니
다. 이 말 역시 <필로스(애호)>와 <네오스(새것)>의 합성어입니다. 이 기신주의
및 숭신주의는 보수주의 및 진보주의와 매우 비슷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양
자가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다소 집
단적, 정치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에 기신주의와 숭신주의는 개인적, 심리적이라
는 느낌을 줍니다.
집단적으로 보자면 진보주의가 지나치게 나아가려고 하면 보수주의가 다리를
걸고, 보수주의가 지나치게 주저앉아 있으려고만 하면 진보주의가 덜미를 잡아
끌지요. 진지한 의미에서 새것을 좇는 진보주의자들은 간은 시대에 속해 있던
보수주의자들의 집단으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거나 상처를 입는 수가 많습니다.
이 박해를 견디는 진보주의는 무리의 진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가 세월이
더 흐르면 더 새로운 진보주의 앞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요. 그러
므로 역사는 이 두 강둑 사이를 흐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한 개인 안에서 기신주의와 숭신주의가 같은 갈등을 일으
킬 수가 있겠지요. 기신주의나 숭신주의는 사실 어느 개인이나 거의 비슷한 정
도로 갖추고 있는 건강한 성향입니다.
그러나 기신주의 쪽으로 너무 가파르게 기울어도 <기신증>이 되고 숭신주의
쪽으로 너무 가파르게 기울어도 <숭신증>이 되는데, 이래서는 곤란하지요.
이제 우리도 이 점을 짚어내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개인의 경우나 사
회의 경우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일단 이것을 점검, 분석하고, 인정할 것은 인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 단계로 사회적으로는 보수주
의가 지양되면서 진보주의 바람이 일어야겠고 개인적으로는 기신주의가 지양되
면서 숭신주의가 살아나도록 격려해야 하겠지요...”
나는, 잡지 일과 맞물려 주말 두 차례를 제외하고는 노수와 일정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노수가 논문 출판이 남았다면서 미국으로 되돌아가기 전날에
야 우리 집에서 저녁상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세 차례 자리를 함께 하면서 얻은 결론은, 근 30년 동안이나 나는 말하고 노
수는 듣고 하던 우리들의 관계가, 노수는 말하고 나는 듣고 하는 새로운 관계로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이었다. 페킹 오더의 역전 자체는, 노수가 넓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공부를 쌓고 있을 때 나는 잡지 일에 코를 박고 있었던 만큼 억울할
것도 없었다. 내가 억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노수라는 사람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것, 노수에 대한 나의 이해가 전혀 피상적인 데 머물
러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있는 나라는 사람의 한계를 나는 그날 노수를 통하여
만났다.
나는 노수를 가차없이 몰아세운 적이 한번도 없는 데 견주어 노수는 나의 그
런 점을 지적하는 데 가차가 없었다.
나는, 나의 강점이 나를 약화시키고 노수의 약점이 노수를 강화시켜 왔다는
것을 서서히 인정했다.
노수는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나에게는 한번도 내비친 적이 없는, 여자와
관련된 자기의 개인사와 특정 여자 이야기를 우중충하게나마 펼칠 수 있을 만큼
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누구에겐들 비슷한 사연이 없을까만 나는 그것을 고
백할 만큼 튼튼한 인간이 못 되었다. 그로부터 또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여자와 관련된 나의 개인사를 남에게 할 의향도 용기도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내가, 나의 강점이 나 자신을 약화
시켰다고 믿는 소이연이다.
노수는 참으로 노수답게도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만은 예전처럼 더러 얼굴을
붉히고 말도 더듬었다. 술병을 들고 자작까지 했다. 술맛 잊어버렸다면서도 술잔
잡는 손길이 잦아지면서 말마디도 자주 부러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너를 만나는 것이 두렵더라. 네가 오랫동안 나의 현실 노
릇을 해왔기 때문에 두렵더라. 너를 만나면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더듬게
될 것 같더라...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무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간 관계에
도 천적이라는 것이 있다. 내 생각을 아주 정밀하게 말해 보자면 이렇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상대에게 <앰비벌런트>한 감정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버릇 들인 세월과, 정보의 자유로운 양방 소통 때
문에 만나면 평화를 느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가
능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에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밀착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서울에 도착하던 날은 너 때문에 내가 30년 세월을 <뿔갱이> 아니면 <다다이
스트>로 살아왔다고 공연한 심술을 부린 일이 있지만, 그건 일부만 사실이고 다
는 사실이 아니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 단정적이었다. 그래서 나도 네 흉내를 한번 내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미안하다, 너를 극복하지 않고는 홀로 설 수 없을 것이라고 예감해 왔
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혹은 이제 홀로 설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사 표시
로 이 뿔갱이의 외뿔로 너를 한번 받아본 것이다.
너는 우리 식구들이 좀 별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별나다, 이상하다.
너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너는 나를 잘 안다.
그러나 너는 모르는 것도 아주 많다.
내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여자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짐작도 못했
을 것이다. 너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가 있다는 것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일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참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역사책에나
나오는 일들이 이따금씩 한 사람의 개인사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
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엉뚱하기로 유명한 우리 아버지가 내 몫으로 일찌감치
고아가 된 친구 딸을 하나 보고 정혼이라는 것을 해놓았다는 것을 너는 모를 것
이다.
그래. 우리 아버지가 옛날 풍습 좇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무골호인이
신 우리 아버지, 불가항력이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무
골호인이신 우리 아버지에게는 이상한 베짱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비 넥타이 차
는 베짱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나를 헛갈리게 만들어 결
국은 나를 병신으로 만들어놓은 것, 그것은 바로 아버지 손에 의해 일방적으로
준비된 이 어처구니없는 약속, 이 마음 짐이었다는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이 약
속이 내게는 수렁이더라.
나는 그래, 뿔갱이와 다다이스트의 악몽 속에서 오래오래 병신노릇을 했다. 하
자고 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는데 이것이 나
한테는 수렁이더라. 그래, 수렁이라는 게 그렇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그것이 수렁이다. 올무가 무엇인가? 발버둥치면 칠수록 조여들게
만든 것이 올무 아니냐. 그럼 뭣이냐? 발버둥치지 않으면 수렁도 올무도 별것
아니라는 것이 아니냐? 이걸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았을 것이냐.
나는 말이다. 망상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기도 전에 아버지가
정해놓은 그 여자에 대한 망상에 시달렸다. 시달리다가 나중에 망상이라는 말을
배우고 보니 내가 시달리던 곳과 똑같아서 나는 망상이라는 말을 익혔다. 눈물
겨운 학습이었다.
아버지는 경솔했다.
나는 또래 친구들처럼 다른 여학생을 곁눈질하면 안 되었다. 나는 농담인 줄
알면서도 친구들의 음담패설에 가담하면 안 되었다. 나는 여자와 나누는 음란한
시간도 상상해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안 되는 것으로 정했던 것인데 그것조차도 나에게는 수렁이었다.
뿔갱이 다다이스트에게 정혼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더라면, 그래서 우
리 친구들이 나를 저희 화제에 올려 시시덕거리는 사태가 일어났더라면 나는 아
마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감추어야 했는데, 이것조차도 나에게는 수렁이었다. 나는 수렁에서 살았다.
나에게 그런 여자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너는, 내가 얼마나 그 여자로부
터 미움을 사고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내가 왜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오래 그 미움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도 미워할 수밖에 없었
다.
우리는 왜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색하니까 마구 미워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를 원수 삼는 것인 줄 알고, 보이게도 증오하고
보이지 않게도 증오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수렁이었다.
너는,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직후에 내가 이 여자에게 서로 제 갈 길을 가자
고 한 일이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나는 여자에게 그랬다. 우리가 짐승이 아
닌 바에 어떻게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의 경험도 없이 함부로 부부의 인연을 맺
을 수 있느냐고. 여자는 그랬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라고, 어렴풋이 그렇
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그랬다. 세상은, 우리가 서로에게 만족하게
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풀었다.
나는 아버지를 묻어놓고 아버지를 한번 배신해 보았다. 어른이 된 줄 알았다.
아버지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다.
여자는 제 잘 길로 갔는데 나는 내 갈 길로 가지지가 않더라. 내 갈 길로 가
려고 죽을 힘을 다 쓰는데도 가지지가 않았다.
너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확신하고 있겠지만, 여자를 보
낸 뒤에 내가 미친 듯이 다른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정말 오래, 그리고 미치게 찾아 헤맸다.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
다.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찾아내기는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새 여자에게서 내가 확인한 것은 내 마
음이 내 입술의 주인 노릇을 다하지 못해서 다다이스트였고, 내 얼굴의 주인 노
릇을 다하지 못해서 뿔갱이였듯이, 급기야는 내가 내 몸의 주인 노릇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육체의 발기 부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참담한
경험을 통하여 정신과 육체가 정보를 얼마나 은밀하고 정밀하고 주고 받는가를
알았다.
그래, 이 역시 나에게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렁이었다. 나는 군에서 제
대한 뒤로 이런 수렁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제대한 직후에 너에게 호언한 바 있거니와, 나는 더 이상 뿔갱이도 아니고 다
다이스트도 아니었다. 생각해 봐라. 그때도 이렇게 호언장담한 일이 있지 않나?
이렇게 일장 웅변을 토한 일이 있지 않나? 그것은 어디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 몸은 그 뿔갱이와 다디이스트에서 벗어나지지 않았다. 나는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했다.
얼마나 이상한가? 여자에 대한 망상이 혀를 오그라들게 하더니, 이 망상에서
해방되자 몸이 오그라드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옛 여자 앞에서는 혀가 오그
라들고 새 여자 앞에서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나는 귀국하자마자 옛 여자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내 정
신의 열쇠, 내 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너 모르게 열심히 찾아다녔
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끊임없이 새 남자를 찾아다녔다는 그 여자에 대한 그
림자 짙은 소리 소문뿐, 나는 결국 여자를 찾지 못했다. 나의 옛 여자는 끊임없
이 새 남자를 찾아다녔고 나는 끊임없이 옛 여자를 찾아다녔다.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우리 학교에서 학위 마치고 귀국해 있는 친구들이 많다. 우리끼리 만나면 미
국 이야기도 하고, 한국의 학계 이야기도 자주 하고 그런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내게 그러는 거라.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우리가 배운 사회학 이론으
로 진단하는 프로그램을 방송국에 있는 동창들과 추진중인데 출연해 주지 않겠
느냐고? 상상할 수 있겠나? 이 뿔갱이 다다이스트가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겨우 제안을 받았을 뿐인데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혀가
오그라들더라. 그래서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잠이 들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
는 그랬다.
그랬다. 미국에서의 나날은 진땀 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오찬에 가도 자기소
개를 하면서 한 말씀, 만찬에 가도 모임을 위한 뜻있는 한 말씀... 넥타이 졸라매
고, 무슨 말 어떻게 할까... 테이블 스피치 궁리하면서 칼로 잘라 삼지창으로 먹
는 식사, 그것은 식사가 아니라 재미없는 칼질 창질이었다.
하기 싫으면 못하겠다고 버티면 된다고? 그러면 학위는 누가 주나? 교수라도
한 사람 섞여 있는 자리에서의 곤혹스러움이라니... 준비도 없는데 한마디를 요
청받을 때의 난간함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프리젠테이션(발표)> 준비 과정,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난다. 원고를 만들되
재담 비슷한 것도 몇 마디 섞어서 만들고, 이것을 줄줄 외고, 만일의 경우에 대
비해서 내용을 커닝 페이퍼 같은 데 요약해서 주머니 속에 숨기고, 외웠다는 표
시 안 나게 적당한 표현을 고르는 척할 대목을 정하고... 뛰다 죽을 노릇이 따로
없었다. 밥 먹을 때도 그 생각만 하면 진땀이 흐르고, 잠을 이루다가도 실수할
경우를 생각하면 잠이 달아나고... 눈 뜨고 꾸는 악몽이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도 다 있더라. 어느 날 말이다, 그 동안 한국 텔레비전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자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토요일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
고 있었다. 권투 선수가 나와 사회자와 대담을 하는 거라. 그 권투 선수는, 처음
링에 오를 때의 심적 고통을 고백한는데, 가만히 들어보았더니 처음으로 텔레비
전에 나가는 내 심정과 너무 비슷한 거리. 사회자가 묻더군, 그래서 어떻게 극복
했느냐고?
권투 선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다른 거 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하는 권투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더니 아
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그 순간은 나에게도 구원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거다!
“영어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하는 한국 말이다. 얏호, 한국말이다!”
과장 아니다. 나는 한국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서,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한국
말로 토론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 마음과 몸이 오그라드니까
그런 생각의 여지도 생기지 않더라.
나갔다. 텔레비전, 그거 위력이 굉장하더라.
나는 텔레비전이 왜 기적을 일으켰는지 안다. 나는 그 권투 선수가 링에 올라
케이오승을 거두듯이 나도 텔레비전에 나가 데뷔전을 치렀다.
여자의 전화가 방송국 프로그램 감독을 통해 내 호텔로 걸려왔다.
많이 달라졌네요, 하더니. 잘 사느냐고 물었더니, 혼자 산다고 하더라.
네 행복의 코스트가 얼마나 비싸게 먹혔는지 알기나 아느냐고 했더니, 그런데
도 불구하고 조금도 행복하지 못하다면서, 내 행복의 코스트는 또 얼마나 비싸
게 먹혔는지 알기나 아느냐고 묻더라.
나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했다.
날이 밝으면 돌아가야 한다만, 나는 조만간 다시 들어와 이 여자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피곤해진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면 어쩐지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산이 좀 늦었지만, 어쩌냐? 내가 저질러놓은 일인 걸?
그러나 그 여자와 다시 만나는 순간 나는 고자에서 해방될 것이다. 나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나를 잘 안다.
잃고 얻고 얻고 잃는다...
인생이라는 거, 네 말마따나, 뭣이냐 싶다.
이것이 내 여자 이야기의 전부다.
네 여자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 꼭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노수 이야기 듣기 전에는 내게도 사연이 있을 것 같았는데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나는 일거에 터뜨릴 황홀을 위해 그렇게 서성거
리면서 준비한 일도 없었고, 한 차례의 뜨거운 재회를 위해 그렇게 오래 감정의
내압을 높이면서 견딘 일도 없었다.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면서 노수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노민이는... 노민이는 만났어?”
“노민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자식, 듣고 있자니까 말버릇이 점점”
“우리 아버지의 나비 넥타이 수수께끼 풀었어?”
“푼 것 같기도 하고 못 푼 것 같기도 하고...”
“너는 뭘 <클리어>하게 설명하려고 되게 애쓰더라만”
“그게 내 나비 넥타이인가...”
“네 목에도 하나 채워줄거나. 우리 아버지 나비 넥타이 말이다, 그거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 나도 콧수염 하나 앞에다 척 앞세우고 다니니까 다른 걸
로는 시비하는 놈이 없더라”
우리 둘은 잠시 눈을 붙인 뒤에 늦은 아침 먹고 노수가 묵고 있던 호텔로 갔
다. 노수는 자동차로 공항까지 실어다 주겠다는데도 부득부득 호텔 들러서 짐
챙겨야 한다면서 딱 거기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나는 호텔 프런트 당번이 노수에게, “장노민 씨가 정오까지 들르시기로 했다
”는 메시지를 전하는 거 듣고는 잠깐 망연자실하다가 잘 다녀올 것을 당부하고
돌아섰다.
떠난 자리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의, 보내고 헤어지는 자리는 길어도 너무 길어서 새
벽 4시에야 그는 정겨운 친구들 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런 자리가 대개 그렇듯이 겉으로는 친구들이 떠나야 할 사람 붙잡고 놓아주
지 않는 것으로 보일 법하다. 그러나 멀리 그리고 오래 떠나는 자리일수록 친구
들이 놓아주지 않도록 분위기 지어내는 장본인이 바로 그 자리의 주인공이기 쉽
다. 그렇다면 친구들은 짐짓 그 분위기를 좇아 새벽 4시까지 끌려다닌 셈이 된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놓아주지 않는다는 비난에 억울하다는 눈치 한번
보이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그가 그 자리 마무리하기 쉽지 않았을 터이다.
아버지 유품 불사르던 전날 기억이 너무 무겁게 그의 생각과 생각 사이를 무
겁게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과 수를 마시면서도 그는 내내, 시
커먼 기름 덩어리가 되어 타고 또 타던, 원망스러우리만치 오래 타던 아버지의
화학 섬유제 옷가지를 생각했다. 아버지 유품이 이 땅 떠나기를 한사코 머뭇거
렸듯이, 그 역시 그렇게 더 머뭇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했는데 그가 눈을 뜬 것은 9시...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버지 세대의 무계획과 무정견과 시간의 불경제를 비판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다음 항공편을 예약해야 했다.
직원이 말했다.
“오늘 김포에서 떠나 도쿄 경유하는 디트로이트 직행은 더 이상 없고요, 내
일 도쿄에서 떠나는 항공편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 도쿄에 갔다가 내일 그 비행기를 타겠습니다”
“그럼 내일 도쿄에서 떠나는 그 항공편 자리 예약해 놓을까요?”
“그냥 열어두세요. 도쿄에서 마음 변하면 하루 이틀 더 자고 떠나죠”
“도쿄행 항공기 출발 두 시간 전에 공항으로 나와주십시오”
여기까지만 해도 그는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러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을 열고 마당에 나서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활동하는 시간대가 달라 전날 고모댁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마무리지어 놓았
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햇빛이 문득 그렇게 생소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꾀병 핑계 대어 가까스로 결석하는 데 성공하고 혼자 집에서 보내던 날의
햇빛을 떠올렸다.
없어야 할 자리에 있던 날의 햇빛을 떠올렸다.
방으로 다시 들어와, 점심이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 전날 밤을 밝힌 친구 중
하나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 시각 하늘에 떠 있어야 할 사람이 웬 점심? 약속 벌써 되어 있는데?”
또 한 친구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혼자 먹어. 자네는 서울 떠난 것으로 간주된 사람이야. 약속이
더불로 되어 있는 걸...”
망연자실, 수화기 내려놓는데 대문 소리와 함께 새벽 시장에 나갔다가 집 안
으로 들어선 고모가 혀를 차면서 하는 혼잣말 소리가 들려왔다. 고모는 그가 떠
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하기야 고모로서는 7시에 떠나야 할 조
카가, 그래서 전날 작별 인사까지 해둔 조카가 9시 넘도록 방 안에서 미적거리
고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을 터였다.
“아비는 죽고 아들은 떠났고... 죽는 것도 떠나는 것, 떠나는 것도 죽는 것...
오냐, 그래, 잘 죽었다, 잘 떠났다... 어차피...”
“고모, 저 못 떠났어요”
그가 문을 열고 나섰을 때, 고모는 적지않게 놀란 얼굴을 하고는, 친정 조카를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 보듯 했다. 하기야 제대로 아침 비행기를 탔더
라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을 사람이기는 했다.
“네 아버지 죽기 싫어 하더니만, 너도 떠나기가 싫은 게다...”
“...”
그는 지구반대쪽에 있는 자기 집에도 전화를 넣었다. 아이들 때문에 시아버지
장례식에도 참례하지 못한 그의 아내는 남의 말하듯 했다.
“어쩌나, 내일 저녁에 동네 사람들 모이기로 되어 있는데... 상주 보아야 한다
면서 모이기로 되어 있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장례 끝날 때까지 빌려쓰고 있던 고모댁 사랑채에서 보내어야 하는 낮 시간은
무엇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무소속인 채로 붕 뜬 상태에서 보내어야 하는
긴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 무덤을 한번 더 보고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
라는 시간이었다. 그는 49제 이전이니 아버지 역시 그렇게 붕 뜬 중음신으로 중
천을 떠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늦은 오후 그는 고모와 또 한 차례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네 아버지 세상 버렸으니 우리집 발걸음 쉽지
않을 게다. 어디에서든 잘 살아라”
고모는 긴 이별을 예감하고 눈물을 찍었다.
“오지 말라는 말씀 같잖아요”
그는 이렇게 말마중했을 뿐,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공항에 닿았지만 도쿄발 항공기에도 탑승할 수 없었다.
여권을 본 항공사 직원이 그에게, 일본 입국 비자가 만료되었다고 했다.
그가 항변했다.
“비자 만료되었다면 통과 여객으로 입국하면 되지요. 72시간은 괜찮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어요”
“통과 여객은 다음 목적지로 가는 합승기의 탑승이 예약되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오늘 아침에 손님께서는 다음 목적지 탑승 시각을 예약하지 않았어
요”
“아뿔싸...”
그는 그제서야 자기가 크게 실수한 것을 알았다.
“그러면 지금 예약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만석입니다. 아침에 예약하셨어야죠”
“그러면 내일이나 모레나... 입국하고 나서 72시간 경과하기 이전에 도쿄에서
다음 목적지로 떠나는 항공편의 자리를 지금 예약해 주세요. 그러면 입국에 지
장이 없을 게 아닙니까?”
“도쿄에서 손님 목적지로 가는 항공기는 한 주일에 두 번밖에 없습니다. 따
라서 72시간 전에는 떠나는 항공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손님은 사흘 뒤 여기에
서 떠나는 직행을 타셔야 합니다. 미안합니다”
“...”
그는 거대한 조직이 만든 복잡한 규약으로부터 훼방을 당하고 있다는 근거 없
는 느낌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느낌은 옳지 않았다. 거대한 조직이 그의 부주
의함을 방조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긴장이 풀어지는 바람에 조직과의
약속에 부주의했던 것을 후회했다.
사흘 뒤의 직행 항공편을 다시 예약하고 돌아선 그는 망설였다. 여관에는 들
고 싶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할딱거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여관 분위기는 그를
지배하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남긴 적막을 홀로 지내면서 혼자 수습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여관방에서 혼자
우는 울음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다.
그는 큰 옷가방은 화물 보관소에 맡기고 조그만 손가방 하나만 들고 공항을
나섰다. 기왕지사 그렇게 된 것, 떠나기 전에 아버지 무덤에 다시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그러자면 여관에 묵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고모댁으로 다시 들어가 거기
에서 지내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늦은 오후에 떠나온 고모
댁으로 어둠에 묻어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밖에서 살며시 엿본 그 집안 풍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의 고종 사촌 동생 둘이, 큰 짐이라도 벗은 듯한 얼굴을
하고 연신 깔깔거리면서 그가 쓰던 방을 털고 쓸고 닦고 있었다. 그가 며칠 동
안 쓰던 이불과 요와 베개는 안채 마루로 옮겨져 있었다. 그냥 옮겨진 것이 아
니었다. 호청과 배갯잇이 벗겨진 채로 옮겨져 있었다.
고모는 마당 한 켠의 빨래터에서 요 호청과 배갯잇을 빨고 있었다. 이불 호청
은 벌써, 마당에 쳐진 빨랫줄에 널린 채로 허연 장막이 되어 그의 눈앞에서 일
렁거렸다.
그는 전날 아버지 유품 불사르던 것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돌아섰다.
구멍
“일본 공항 입국장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 젊은 여자들 많이 섞여 있는
줄은 피하는 것이 상책...”
“피하지 않으면?”
“입국에 시간이 걸리지”
“뭔 소리여?”
“젊은 한국 여자들 중에는, 불법 체류하면서 노란 아르바이트를 즐기는 그렇
고 그런 여자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는 것이 보통, 입국 심사관들은 이런 쪽으
로 빠질 가능성이 있는 여자들에게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상
륙 허가 도장 받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인데...”
“그렇게 많아”
“반듯이 굴면 구경시켜 주마”
나리타 공항 입국장 들어서면서 그가 뒤꼭지로 들은 소리였다. 일본 땅이라서
더욱 부주의하게 들리는 농담이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새끼들이야...
그는 뒤를 돌아다보려다가 공연히 껴드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한
쪽으로 비켜섰다. 짐이 간편해서 일본 나들이 자주 하는 듯한 청년 하나와, 큼지
막한 손가방을 끌며 사방 두리번거리는 폼으로 보아 초행인 듯한 청년 하나가
지나가는데, 두 청년의 입가에 묻은 비굴한 미소가 보는 그의 마음에 좋지 않았
다.
인마, 무슨 자랑이야?
“손님 여러분, 내국인이 이용하실 입국 심사장은 1번에서 5번까지, 외국인은
5번에서 8번까지, 통과 여객은 13번...”
녹음된, 여자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 많았던지, 그가 서 있던 줄은 입국 수속이 유난히 더뎠
다. 그래서 그는 “손님 여러분”을 여러 차례 들어야 했다.
그가 상륙 허가 도장 받고, 짐 나오는 <배기지 컨베이어(자동 운반대)> 쪽으
로 내려섰을 때는 그의 트렁크 하나만 벨트를 탄 채 외로이 돌고 있었다.
세관 지나 입국 게이트를 나서는데 중년 여자가 앞을 막고 허리 꺾어 절하면
서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저희들은...”
“...”
여자가 종이 쪽지 한 장을 내밀면서 빠른 일본 말로 지껄이는데, 그로서는 무
슨 말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 없었다.
“... 미안하지만 일본 말, 잘은 못합니다”
그의 일본어 발음을 듣고서야 여자는 다시 한번 허리 꺾어 절을 했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 있던 자리에 선배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자는 그와 선배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이 허리를 구부린 채 조심스럽게 두 사람 사이를 비켜섰
다.
선배의, 예정에 없던 마중이었다.
“아니, 저녁에 <긴자>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잖아요?”
“조금 있으면 저녁때가 되지 않나? 피치 못할 약속이 껴드는 바람에... 밤 비
행기로 서울 가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까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하기야 워낙 물가가 비싼 도시이니, 후배 데리고 <풀 코스> 뛰기보다는 서
울로 튀는 쪽이 경비 절감에 유리하겠네요. 더구나 그 후배라는 것이 관리비가
수월찮게 드는 물건이니...”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그나저나 해주지 그랬나?”
선배가 복잡하게 웃었다.
“뭘 해줘요?”
“조금 전의 그 아주머니...”
“벌건 대낮에 공항 대합실에서요?”
“사람이 말이야, 꼭 말을 해도... 앙케트 말이야”
“앙케트 받으로 나온 아주머니였나요?”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모임>이 돌리는 앙케트 같던데, 몰랐
어?”
“말이 너무 빨라서... 외국어는 원래 너무 빠른 물건인가? 앙케트가 겨냥하는
게 뭔가요? 앙케트가 강화시키려 드는 게 우익의 입장인가요, 좌익의 입장인가
요?”
“이본의 보수주의자들이 저 아주머니를 별로 안 좋아할 터이니, 우익은 어림
도 없이 아닐 테지”
“그런데도 안 잡아가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보증하는 훌륭한 <데꼬레이숑>인데 왜 잡
아가? 이본 사회의 정치 디자인, 그거 만만하지 않다고>
“한국 말 중국 말 할 줄 아는 아주머니 하나 세워놓으면 국제 도시의 관문이
니까 국제적인 앙케트가 될 텐데...”
“일본인들이, 한국인 중국인에게 이른바 <객관성>이 있을 거라고 믿겠어?
입장이 만장일치로 정리될 텐데, 그나저나 갑작스러운 걸음인데?”
“...”
“회의는 핑계일 테고...”
“어쩐 일로 왔느냐... 우리도 이제 이만 하니, 왜놈들 기생관광의 <리턴 매
치> 한 판쯤 벌일 때가 되지 않았겠어요?”
“<리턴 매치> 좋아하네. 조심해 이 사람아, 까닥 잘못하면 소경 제 닭 잡아
먹는 데가 도쿄야”
“그것도 나쁘잖고...”
“아직도 혼자?”
“...”
“소식 여전히 없으시고?”
“...”
“그러게 내 뭐랬어?”
“...”
리무진 버스 정거장에 이르러서야 그는 주머니를 차례로 건드려본 다음 낭패
한 얼굴을 하고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 형이 자꾸 말 시키는 바람에 환전하는 거 까먹고 나와버렸잖아
요?”
“리무진 버스표는 아까 내가 사뒀어. 환전은 호텔 가서 해도 되는 거고”
“호텔에서 원화로도 바꿔줘요? 옛날에는 달러밖에는 안 됐는데?”
“요즘은 돼”
“그럼 일본 아가씨들도 원화 받겠네요?”
“하여튼 이 친구는 대화를 허리 아래로 끌어 내려가는 데 뭐 있어. 언제 그
버릇 버릴 거야? 부러진 팔십이 낼 모레인데...”
“낼 모래까지는 시간이 있잖아요”
“아직도 혼자냐고?”
“...”
“소식도 없으시고?”
“재미없는 소리 마시고...”
“하기야 남의 사생활이니...”
리무진 버스에 오를 때까지도 그는 선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로 잰
듯이 움직이며 버스 화물칸에 짐을 집어넣던 리무진 버스 회사 직원들이 버스가
떠나려 하자 일렬 횡대로 도열해서 손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했다.
“좌우지간 허리 근육 한번 부드러운 족속이야...”
화제를 돌리려고 그가 턱으로 버스 회사 직원들을 가리키면서 한 말이었다.
“자네 허리도 일본인들 못지않게 부드럽잖은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배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까지는 버스 달리는 것
이 그랬듯이 대화도 단속적이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한 뒤에야 선배가 느긋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입
을 열었다.
“...환경경제학은, 환경을 경제적으로 보호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
문이야, 아니면 경제학은 경제학인데 환경을 중요한 변수로 치고 연구하는 경제
학이야?”
“시집살이 십년 하고도 시어미 성 모른다더니... 정치경제학이 어디 정치학입
디까?”
“어쨌거나 공교롭게 되었다”
“뭐가요?”
“서울 사는 자네는 회의 때문에 도쿄 오고, 도쿄 사는 나는 회의 때문에 서
울 가게 생겼으니...”
“형은 무슨 회읜데요?”
“회의라기보다는 무슨 환경 문제 세미나 같은 것인데... 대형 쓰레기를 처리
하는 일본의 행정 현황이나 관행 같은 걸 좀 조사해서 보고해 달라는 것인데...
”
“외무 공무원에게요?”
“그 방면 전문가와는 얼른 연락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짱>의 아우가 세미
나를 <오가나이즈>한 모양인데... 말하자면 만만한 졸병이 대타로 징발되고 만
것이지”
“오나가나...”
“자네도 환경 회의에 참석하지 않나?”
“제가 참석하는 건 환경 회의가 아니라니까 자꾸 이러시네”
“하여튼 내 말 한마디 들어보라고... 우리 어릴 때 말이지... 오줌 가지고 못된
장난 많이 하지 않았나? 여름에는 개구리 잡아 오줌을 먹이기도 하고, 겨울에는
오줌발로 눈 위에다 낙서도 하고... 멱 감을 때는 오래 누기를 겨루었는가 하면,
높이 쏘아올리기, 멀리 쏘아보내기도 겨루지 않았나? 하지만 자네도 잘 알다시
피 우리에게도 한 가지 금기가 있었다. 흐르는 물에는, 설사 그것이 타관의 시내
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오줌을 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물에다
오줌을 누면 고자가 된다고 했다. 고자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
서도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고자는 안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한사코, 흐르는 물에만은 오줌을 누지 않으려 했다...”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설사 그것이 타관의 시내라고 하더라도... 이 구절이
턱 걸리네요? 설교가 시작되는 것 같아서...”
“들어놔, 이 사람아... 일석이조라고... 자네가 하도 아슬아슬하게 구니까 일본
에서는 조심하라고 하는 소리야”
“제가 뭘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굴었어요?”
“서울 가면 서울 여자 걸터듬고, 부산 가면 부산 아가씨 보듬고... 미국 가면
백마, 중국 가면 쿠냥... 하여튼”
“인도주의 정신의 발로라니까 이러시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는 인도주의적
인 정신이 필요하다니까 이러시네. 하기야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하는
분들이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하지 않으면?”
“나눠 써야 될 거 아니냐고요?”
“좋아, 좋아. 나도 인도주의적으로 말해 줄 테니 들어보라고... 중학 시절이던
가? 심술 부리느라고 시험삼아 맑은 물에 오줌을 누려고 해봤는데 오줌이 안 나
오더라고... 연습이 이래서 무서운 거라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그 맑은 물 길
어다 허드렛물로는 물론이고 식수로도 쓸 수 있었을 거라... 아무데나 오줌 누고
다니는 거 아니야. 내가 곁에 있어야 하는 건데... 하여튼 도쿄에서 물 휘정거릴
생각 말게”
“도대체 왜 이래요?”
“나는 그래서, 흐르는 물에는 오줌을 누려고 해도 안 나와”
“좋으시겠다”
“웃음 파는 여자들 생계 걱정을 유난히 많이 하는 자네와는 달라서 돈도 안
들고... 양심의 부채도 안 생기고...”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그걸 보고, 덜떨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이 친구가... 사실은 서울 가서 할 말 생각하다 보니 어린시절 생각이 난 것
이네”
“...웃음 파는 여자라니까 생각나는데, 아까 입국장 들어오면서 고약한 농담을
들었는데요. 입국 심사관들이 젊은 한국 여자들에게만은 유난히 까다롭게 군다
는 소린데... 제가 생계 걱정해야 하는 한국 여자들이 유흥가에는 정말 그렇게
많은가요?”
“많지”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요?”
“70년대에는 일본 사내들이 한국으로 찾아들어가더니만 요즈음 한국 여자들
이 일본으로 찾아들어오니... 민간 단체가 정신대 문제를 거론하자면 일본인들
매춘 문화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철없는 여자들 때문에 이런 단체의
입장이 난감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더구먼. 보자고... 정신대의 피눈물
을 매춘으로 더럽히는 이 한심한 세태. 매춘의 목적이 무엇인가? 호사를 위한
매춘이다. <브랜드스키>의 매춘이다”
“그 전문 용어는 또 뭐요?”
“브랜드가 번듯한 물건으로 사치하기 위한 매춘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자
네만이라도 조신하게 지내다 가라고...”
“조신하게 지내다 가면?”
“수요가 끊기면 공급도 중단되겠지”
“저를 무슨 상습범으로 보시는 모양인데...”
“자네 전과를 자네만 모르나?”
“글쎄요, 그놈의 전과 때문에 팔자에 없는 홀아비 신세이니 조만간 개관천선
의 눈치는 보여야겠지만 혼자 노력한다고 될지...”
“되고말고. 이 대목에서 자네의 그 인도주의적인 더불어 살기 정신을 논파하
고 말거나? 내가 서울에서 보신탕 먹으러 다니니까 우리 집 사람이 그러더라
고... 먹지 말라고... 수요가 끊기면 공급도 중단될 테니까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보라고... 내가 그때 자네와 똑같은 대응 논리로 맞섰다. 난 혼자 안 먹는다고 개
가 안 맞아주겠느냐고... 나 혼자 그런다고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겠느냐고... 그
래서 그 뒤로도 별 생각없이 서울 들어가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는 했다. 그
런데 말이다. 대구 내려갔더니 우리 어머니 왈, 나라 밖 떠도느라고 몸이 많이
축났을 터이니 개소주 한 마리 내려먹고 가거라, 그러시는 거라. 그럴까요,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꺼림칙해. 그렇지 않고? 한 마리분의 개소주를 나 혼자서
먹으면, 이건 개 한 마리가 맞아 죽는 책임을 나 혼자서 송두리째 지게 되는 셈
이야. 어 뜨거라, 싶어서 서울로 도망쳤다. 그 뒤로는 그런 집 앞 얼씬도 않아.
주범은 안되고 종범은 괜찮다... 이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그러니까 조
신하게 지내다 가거라”
그러나 그는 조신하게 그날 밤의 여독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 자신의 기질 탓
이었다.
선배는 저녁 자리가 파한 즉시, 서울 다녀와야 한다면서 선 김에 <나리타>
공항으로 갔다. 오래간만에 나라 밖으로 나선 그에게는 호텔에서 죽치기에는 너
무 이르고 도쿄에 터잡고 사는 다른 친구 불러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기는
했다. 그러나 불러낼 마땅한 친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불러내지 않았을
터였다. 혼자 마시기를 좋아하는 그를 두고 친구들은 단독 범행의 명수라고 부
르고는 했다. 그는 호텔 방에 가방 놓고 나와, 로비에서 돈만 바꾸어 넣고는 다
시 번잡한 거리로 나섰다.
문제의 사내가 접근한 것은, 그가 <야타이>라고 불리는, 서울의 실내 포장마
차와 비슷한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는 매춘 조직의 바람잡
이들이, 야타이에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지어내는 사내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직간접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을 호색한이라고 부를 때마다 이런 주장을 앞세워 받아치고는 했다.
“나는 산이라면 오르고 물이라면 건넌다. 나는 알프스가 아니라서 가만히 붙
박힌 채로 나그네를 기다릴 수가 없기도 하려니와 알프스가 되기보다는 나그네
가 되는 편이 좋다. 나는 문진보다는 청진보다는 촉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하
나의 풍경을 통해서 여행중인 나라, 혹은 사회 정의하기를 좋아한다. 부분을 통
해서 전체를 읽는 것이다. 그러자면 혼자 다니는 것이 좋다. 단독 범행에도 물론
유리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호색한이 아니다. 사람의 현상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일 뿐... 그런데 부분을 통한 전체 읽기로는 여자만한
것이 흔하지 않다. 과거가 복잡한 타향 여자, 이국의 여자와 자보지 못한 사내는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
그가 마시고 있던 곳은 유난히 정장한 술꾼이 많은 도쿄 중심가 뒷골목의 야
타이였다. 그는 야타이 창가에 앉아 골목길에다 눈을 댄 채 술을 마시면서 그날
의 운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가 앉아 있는 야타이의 맞은편 술집에서, 정장한 젊은이 하나가 달려나와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마신 것을 토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가 뒤
따라 나왔다. 뒤에 나온 젊은이는 토하고 있는 젊은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실
내 포장마차 비슷한 야타이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가 그의 귀
에까지 들려왔다.
“더 이상은 못 마시겠다. 나 먼저 갈 테니까 부장에게 말해줘”
토하고 있던 젊은이가 핼쓱한 얼굴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등을 두드
려주던 젊은이가 말했다.
“안 돼, 아무 이도 없었던 것처럼 들어가야 해. 그러지 않으면 부장이 앞으로
도 너를 우습게 볼 거야. 알았지?”
토하던 젊은이는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를 보이더니, 등 두드려주던 젊은이
뒤에 묻어 술집으로 비트적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그는, 일본 월급쟁이들이 연출하는, 산뜻한 풍속도 한 편이 될 듯한 풍경을 내
려다보면서 잔을 비웠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모들뜨기 눈으로 핼금핼금 좌우의 눈치를 살피
며 그에게 다가와 속살거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사내가 쓴 말은 물론 일본 말이었다.
“<달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는 웃기만 했다. 웃으면서도,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조금 긴장했다.
사내는 안주머니에서 장부 같아 보이는 길쭉한 수첩을 꺼내어 그의 앞에다 펼
쳤다. 첫 페이지에 굵은 글씨로 박힌 것은 광고 문안이었다.
옆자리의 일본인들이 소리나지 않게,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벌써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음에 분명해 보였다.
2회전 가능
체인징 파트너 무료 봉사 가능(단체)
여고생 교복, 간호사 제복 가능
도내 출장 가능
영수증 발행 가능
각종 카드 가능
여기까지는 그도 무슨 뜻인지 알아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면의 선수로
불리는 그에게도 <속박 전문 가능>는 요령부득이었다. 문득 호기심이 동했던
그는 서툰 일본 말로, <속박 전문>이 무슨 뜻인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아, 한국인이셨군요”
그의 일본어 발음을 듣고서야 사내가 활짝 웃었다. 그가 일본어에 능숙했다면
그 역시 사내의 일본어 발음만 듣고도 한국인인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일본어는 땅밥도 채 떨어지지 못한 토막 일본어, 따라서 발음상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에는 어림도 없이 못 미쳤다.
“그렇다면?”
그가 한국어로 물었다.
“네... 미안합니다. 배운 도둑질이라고... 나라 밖으로 나와서까지 이 짓입니다
”
“...이거 말인데요...”
그가 <속박 전문 가능>를 손가락질했다.
“아, 그거요? 일본에는 희한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가죽 끈이나 사슬로 여
자 묶어놓고, 그걸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답니다. 그래서 전문 선수들
을 구비하고 있는 거지요. 속박 전문 선수를 찾으시는군요?”
“천만에요”
사내는 장부 같아 보이는 길쭉한 수첩을 그의 눈앞에다 펼치고 한 장씩 넘겨
주었다. 수영복 차림의 젊은 여자들 사진이었다. 다리를 길고 곧게 보이게 하려
고 모델과 사진사가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마지막 장이 들어가자 그가 고래를 가로저었다.
사나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엔죠고사이(원조교제)>는 어떨까요?”
“<엔죠고사이>라뇨?”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이 선수로 나옵니다. 손님께서 그 학생들의 학비를
원조해 주시는 겁니다. 물론 학생들은 손님께 육탄원조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요.
말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든 제 차로 현장까지 모셔
다 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가 속삭였다.
“일본 선수가 싫으시면, 한국 선수도 있습니다. 증거 남기면 곤란해지니까 앨
범은 만들지 않습니다만... 동경도내면 어디든 출장이 가합니다. 제 차로 가시는
것도 물론 가하고요”
“가한 것이 많군요”
“한국 선수의 경우는 일본 선수의 반액입니다. 여고생 교복이나 간호사 제복
을 착용할 경우 20퍼센트의 가산금이 붙지만요...”
“...”
“고국보다 쌉니다”
“글쎄요, 나는 시세를 몰라서...”
사내는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북쪽 선수도 있습니다. 함경도 사투리, 평안도 사투리를 원단으로 끝내주게
씁니다. 한국 선수가 연습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손님께서는 통일에
앞서 북쪽 여자들과 즐기는 행운을 앞당겨 누리시는 것도 가합니다”
“...”
“러시아 출신의 고려족 선수도 있습니다. 방학중에 건너온 아르바이트 학생
들이 대부분입니다. 일본 물가가 비싸서 보따리 장사가 안 되니까 아르바이트
틈틈이 관광으로 여가를 쾌적하게 선용하면서 이렇게들 한철을 보내다 가지요.
하지만 바야흐로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면서 값이 폭락세를 보이는 만큼 흥정
도 가합니다”
“...”
“연변 조선족 선수도 있습니다. 일본 손님에게는 비쌉니다만 한국 손님에게
는 쌉니다. 한국 선수의 반액이면 되니까요. 도쿄에서 이런 가격, 흔하지 않습니
다”
“...”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어디 주문을 한번 해보시지요. 저는 상당수
의 <클럽 바아> 선수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선수는 전화번호만
가지고 있지만요... 따라서 웬만한 입맛이라면, 어느 정도 맞추어드리는 것도 가
합니다”
“...”
“...여자들을 욕하지 마십시오. 모두, 알고 보면 사연도 있고 눈물도 있는 여
자들입니다”
“그럴 테지요”
“사연도 있고 눈물도 있는 한국 선수들의 생활비 보태주시는 셈 치시고...”
“내 코가 석 자... 올시다”
웃음을 파는 여자들의 생활비 걱정한 경험이 풍부한 그도 사내의 말에는 기가
죽은 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이 짓으로 벌이가 안 되면 선수들은 <헤리꼽타>로 빠집니다. 막가는 <구
찌>지요. <유에프오>도 <유에프오>지만 <라이브>로 빠졌다 하면...”
“<유에프오>?”
“<헤아 누도(음모노출)>가 안 되니까 모자이크 화면으로 <헤아>를 가려주
잖아요? 그러니까 실연 안 해도 되거든요...”
<라이브>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어떻습니까?”
“오래전에 헤어졌던 동포와 이 도쿄 바닥에서 감동적인 해우를 경험한다? 에
이, 사양하겠어요”
“비용으로 말씀드리면 시간제 <게이샤> 구경하면서 마시는 비용에도 못 미
칩니다. 게이샤도 게이샤 나름이겠지만 웬만한 급수도 오래 마시다 보면 할증료
가 누진으로 붙어서...”
“그럴 형편이 못 되어서 이렇게 야타이에 쭈그리고 앉아 청승떠는 줄 알아주
시오”
“그러면... 전화를 걸어서, 함께 마실 용의가 있는 선수를 찾아볼까요? 저에게
약간의 사례만 약속하시면 됩니다. 물론 함께 마시다 <에프터>를 가는 것도 가
합니다. 그것은 두 분이 알아서 하시면 되는 일이고...”
“그만둡시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프로야구 결승 때문에 우리가 요 며칠 죽을 쑤고 있
습니다. 개점 휴업인 것이지요”
“과연 은근과 끈기가 대단하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함께 마실 사람으로 불러
주겠소? 말상대가 되어줄 한국 여자면 족하겠어요. 조선 여자, 조선족 여자, 고
려족 여자는 다 그만두시고요”
“그래도 객지인데 기왕이면...”
“좀 피곤해서요. 과부하는 싫소”
“과부하라니요?”
“심정적 과부하 말이오”
“...”
“못 알아들으시네. 해외 동포와 해후할 마음의 준비까지는 안 되어 있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연락이 가하니까...”
사내는 선수 사진첩을 안주머니에 넣는가 싶더니 같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첫번째 선수와의 접선은 실패로 돌아가는 눈치였다. 사내의 표정이 잠깐 어두
워졌다. 그러나 곧 표정이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두번째 선수와의 접선은 성공
한 모양이었다.
물 토하던 젊은이와 그 젊은이의 등 두드려주던 또 한 젊은이 말소리와는 달
리 사내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통화 상대는 그 근
방 지리에 밝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사내는 짤막하게 네댓 마디 나누는 것 같더
니 곧 핸드폰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야타이 안으로 들어왔다.
“20분이면 바로 이 야타이로 들어설 겁니다. 자, 어떻게 할까요? 저를 믿어주
시겠습니까? 믿지 못하시겠다면 저는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만,
믿어주신다면 5천 엔이라는 아름다운 사례금으로 지금 사라지겠습니다. 저를 믿
어주시겠습니까?”
“믿기로 하지요”
“문제의 선수는 손님을 <김 선생님>이라고 부를 겁니다”
“내 성은 김가가 아닌데요?”
“오늘 밤만은 김씨가 되는 겁니다”
“암호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빌면서 저는...”
그는 사내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사내는 더 이상 얼굴 보이기가 싫었던지 각도가 깊숙하게 절을 하고는 얼굴
내리깐 채로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야타이 주인에게 눈인사를 했던 모양이었다.
주인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사내는 핸드폰을 꺼내 눈 가리는 시늉을 하면
서 밖으로 나갔다.
“<사이상(최씨)>이 신났군요”
야타이 주인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객고를 풀자는 것이 아니랍니다. 어떻게들 사는지 그저 궁금할 뿐...”
그는, 주인 보기에 민망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20분이 길게 느껴졌지만 그는 시계를 보지는 않았다. 술잔 잡는 손길이 잦아
졌을 뿐이었다. 그는 야타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가 주방 쪽으로 돌아앉았다.
주인에게, 여자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가 민망했던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
맑은 음성이 들리면서 어깨로 올라오는 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른 고개
를 돌리지 못했다.
미간이 좁으장하게 오므라들면서 그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면
뻣뻣하게 긴장한 목이 뚝 부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이시죠...”
“!”
그러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목이 부러질 때 부러질 값에라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목은, 굳어져 있지 않아서 부러지지도 않았다.
정작 그의 몸이 굳어진 것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 선수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
다.
달려온 선수는 다른 여자가 아니었다.
지아비의 외박 잦은 것을, 여자들과의 교제 문란한 것을 부부싸움의 제목으로
삼고 줄기차게 투쟁하다 6개월 전에 집을 나가 소식을 끊었던 그 자신의 아내였
다.
그는, 아내가 지아비인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 그 자신과 아내는 물론, 자신과
아내를 <삥 둘러싸고 있는> 온 세상이 고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밤 비행기 타고 서울로 떠나면서 선배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문제는 배 밑구멍이다. 이 한심한 친구... 배 밑구멍이라니까 딴생각 하고
있어. 서울 가서 한마디 할 궁리를 하다가 얼김에 하게 된 생각인데... 환경이 무
엇이냐? 우리를 삥 둘러싸고 있는 것, 그것이 환경이다. 환경은 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뱃사람들이다. 제 저리 밑이라고 해서 함
부로 배 밑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배 밑에 구멍... 이것이 이번 세미
나에서 나의 논지 노릇을 할지도 모르겠다. 몸 조심해, 이 사람아”
뱃놀이
늦장가 든 신랑이, 나이 지긋한 신부와 함께 나선 첫 나들이였다.
신랑은 등산복 차림인데 신부는 화사한 분홍빛 원피스 차림이었다. 늦장가 든
신랑은 신랑 티 내지 않으려고 부러 그런 차림을 한 것 같고, 나이 지긋한 신부
는 그렇게 차려입어 볼 기회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랬던 것일까?
차림이 그래서 어쩐지 집에서 함께 나선 신혼 부부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실로 감개가 무량해서 그랬을 것이다.
신랑이 신부 손잡고 연지 저수지 순환도로에서 보트 계류장으로 내려서면서
중얼거리는데 소리 끝이 갈라지면서 가볍게 떨렸다.
“연지 얼굴 마주하고 연지에서 뱃놀이 할 날... 나는 이렇게 올 줄 알고 있었
지”
“기다렸지, 하면 될 걸 가지고, 늘상 뚝뚝 부러지게, 알고 있었지, 그러시더라
”
역시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그의 차지로 돌아온 신부 심연지가 보기 싫지 않
게 실눈 바라기를 했다.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 동기동창이어서 어릴 때부터 서
로 하대하던 사이인데도 재회 이후로는 말씨가 서로 정중했다. 신부의 말씨는
예대로 바뀌어 있었다. 신부는 두 사람 사이를 흐른 세월의 골 앞에서 눈물겨우
리만치 조심스러워했다.
“마냥 기다리는 것과 알고 기다리는 것은 다르지... 연지 얼굴 마주하고 연지
에서 뱃놀이 할 날... 나는 이렇게 올 줄 알고 있었다고”
“...”
“부르고 대답하는 것처럼...”
“옆도 안 돌아보고 내닫는 저 성미...”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거든”
“확신 또 확신?”
“그것은 병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지요”
연지에는 벌써 여남은 대의 보트가 띄엄띄엄 떠 있었다.
신혼 부부가 보트 타고 늦여름 휴일 오후를 느긋하게 즐기게 될 터인 연지는
술모산 자락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저수지의 별명이다. 실용성을 앞세운 정식
명칭은 술모산 담수저수지이지만, 이 긴 본명은 관청 사람들 입에나 오르내릴
뿐, 시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연지 방축을 걸어보면 누구나 알게 된다. 연지라는 별명으로 불러
야 그 소리 울림과 함께 저수지 남쪽 방축에 면해 펼쳐져 있는, 아름답다 못해
종교적이기까지 한 연밭 모습이 떠오른다. 소나기 온 뒤 연지 방축 거닐어본 사
람은 소나기조차도 연잎이나 연꽃에는 그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
다.
억수에는 견디어도 가랑비는 새어 들어가는 데가 연밭이라던가. 그에게는 연
지 방축을 걸은 경험이 풍부하다. 비온 뒤 연지 연밭의 선명한 초록색 연잎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할 만큼 아름답다. 무지개 구경이라도 얻어걸리는 날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낯색이 연꽃빛 될 만큼 행복해지곤 하는 곳이 바로 비 갠
다음의 연지 방축이다. 연지는, 실용적인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때 성큼, 그 지
방 사람들 마음의 고향 자리로 오른다.
신랑 신부에게 연지는 여느 호수나 저수지가 아니다.
그 연지 수리조합장 일을 맡고 있던 양반이 딸을 낳자 <연지>로 딸 이름을
삼은 것은 그로부터 40여 년 전 일이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그날, 신랑이
신부 심연지와 얼굴 마주하고 연지에서 뱃놀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신부에게
연지는 벌써 여느 호수나 저수지일 수 없다.
신랑에겐들 여느 호수, 여느 저수지일까.
우연이 아닌 필연...
신랑의 이 한마디가 신부 귀에는 그렇게 든든하게 들릴 수 없었다.
“...오시게 되어 있는 비, 기우제로 맞은 것은 아니고요?”
신부는 뽑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악력이 심술궂은 신랑 손 안에서 작고 여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을 뽑을까 말까 망설인 것은 그의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
기 때문이다. 손에 땀이 배는 것은 그가 모종의 격정적인 회상에 휘둘리고 있다
는 증거였다.
그에게는 신부가 된 연지 곁을 떠돌면서 끝없이 그리워하고 저리게 가슴앓이
하던 세월이 있고, 연지에게는 남의 아내 되고 딸 낳아 기르며 살다가 갈라설
때까지의 쓰라린 세월이 있다. 이것이, 재회와 관련된 회상이 그에게는 격정이
되고 연지에게는 죄의식이 되는 까닭이다. 신랑 신부 주위에는, 이혼녀 맞아들인
신랑과 노총각 맞아들인 신부를 두고 전자와 후자의 손익을 따지는 심정적 기류
가 있었는데 이 또한 신랑에게는 몰라도 신부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천만에... 전에도 그러지 않던가요? 나는 에멜무지 삼아 기우제 지내는 사람
이 아니라고... 기우제 지내러 갈 때는 우산 가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부담...스럽네요...”
보트 계류장으로 내려서자마자 그는 보트를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꼼꼼하게 바
닥을 내려다보았다. 신부의 차림이 뱃놀이에는 어울리지 않게 분홍 원피스 차림
이었던 만큼 바닥에 물이 괸 보트는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사스럽지 않게도 보트에는 번호 대신 이름이 붙어 있었다. <금강>, <설악>,
<백두>, <한라>, <낙동>, <백마>... 산 이름도 있고 강 이름도 있었다. <1호>,
<2호>, <3호>... 이렇게 번호를 붙이면 관리가 편할 텐데도 산 이름 강 이름 붙
인 것은 연꽃 가까이 오래 살았을 터인 보트 주인의 풍류 아는 보람이지 싶었
다.
“어럽쇼, <술모>도 있고 <연지>도 있네?”
보트 이름 샅샅이 읽어보느라고 벌써 신발 신은 채로 발을 물에 잠근 그가 계
류장에서 끝에 묶여 있던 보트를 손가락질하며 신부에게 와서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신부는 물에다 발 넣기를 주저했다. 구두 벗고 양말 벗고 그래야 하는데,
마땅하게 앉을 데도 없었다.
저수지 연지가 있는 곳은 술모산 기슭이니, 보트 빌려주는 일 새 업으로 삼은
사람이 그 직업의 특권을 빌려 큰 산 이름 큰 강 이름 사이에다 슬그머니, 산
축에 들기에도 민망한 술모산 이름과 저수지 이름인 연지를 끼워넣은 모양이었
다.
그런 이름의 보트가 없다면 모르지만 있는 바에야... 신혼 부부가 그날 탈 배
는 당연히 <연지>이지 다른 보트일 수 없었다.
연지에서 심연지와 함께 <연지>를 탄다...
그는 박자가 척척 맞아 들어가는 그 우연의 일치가 무슨 계시이겠거니 싶었던
지 문득 숙연해진 얼굴을 하고는 사방의 하늘을 둘러보았다. 그에게는 연지 방
축에서, 술모산 위에 떠오른 쌍무지개를 보고 막연히 그리움으로 가슴 두근거리
던 경험이 몇 차례 있었다. 그는 무지개 보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
하다.
“세상에... 보트 이름에 <연지>가 다 있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지만 그대
가 이렇게 나와 함께 온 날인 만큼 뜻깊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
네?”
“저 건너편에는 <연지>가 붙은 음식점도 있고 찻집도 있으니 뭐 그럴 일도
아니네요”
그는 방축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잠깐, 참 그렇네,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계류대에서 <연지>를 풀어내려고 했다.
“저러신다니까...”
신부가 물가에서 웃으면서 혀를 찼다.
“뭘?”
“급하시기는... 안 그런 것 같은데...”
신부가 이러면서 손가락으로 가게를 가리켰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키가 작달막한 주인 노인이 벌써 가게 앞에 나와 두 손을 허리에다 개미 허리
가 되게 붙이고 서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 아직까지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탄성 같기도 하고 신음 같기도 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낯익은 노인을 바라보고 잠깐 서 있던 그가, 나 말이오, 하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그럼 손님말고 다른 손님이 또 있어요? 돈 먼저 치르셔야 순서가 맞지”
“참 그렇네요...”
그는 물가로 나서다 말고 신부에게 소리쳤다.
“그대가 가서 값 좀 치르고 와요”
“싫은데요?”
“왜?”
“빌려본 적은커녕 타 본 적도 없는 걸요”
“고등학교 시절 그대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연지 방축에서?”
“그랬군요. 하지만 보트는 안 탔어요”
“에이, 거짓말 같다. 하이드로포비아(공수증)?”
“그게 뭔데요?”
“맥주통?”
“...은 뜨기나 하지...”
“겨울에도 만난 적이 있는데? 저 연밭이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 되지 않았어
요? 스케이트는 잘 탔어요?”
“그냥 왔었어요. 아버지 손길이 곳곳에 남은 데라서...”
그가 보트 대여점을 겸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볕 아래 있다가 들어가서
그랬을 테지만 그에게는 가게 안이 몹시 어두웠다.
“근력이 참 좋으시네요? 20여 년 전에 몇 차례 뵈었어요. 기억 못 하시겠지
만...”
“그래요? 아마 그럴 거라. 이 자리 지킨 지 50년이 넘었으니...”
“부인도 계셨는데요? 키가 크신...”
노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전봇대? 젊은 친구들이 우리를 <전봇대와 매미>라고 부르고는 했지. 2년
전에 먼저 갔어요”
“...”
“연지 방축에 날 남겨놓고...”
그는 두 시간 빌리는 요금을 치렀다.
“신분증 좀 주시우”
노인이, 떡갈나무 같은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은 왜요?”
“몇 차례 오셨다면서 연지 풍습 모르시네?”
“객지 생활은 좀 했어도, 순환도로 생기기 전부터 연지 낯을 익혀온 토박이
라고요”
“잘 아실 텐데... 아니, 그 뒤에 생긴 규칙인가? 한 시간 요금으로 두세 시간
타고는 방축에 보트 붙여놓고 달아나는 손님이 하도 많아서 아예 신분증 받아두
지요. 주로 학생 녀석들이 그런 짓을 잘해”
“에이, 그런 짓 하기에 저는 키가 너무 커요”
“이 양반이 농담도...”
키가 유난히 작은 노인이,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는 그에게, 됐어요, 했
다.
그는 손잡이가 적당하게 닿은 노 두 개를 골라 들고 가게 천막을 나섰다. 가
게 나서면서 터진 웃음이 계류장에 이르기까지 멎지 않았다.
“왜요?”
신부가 물었다.
“그럴 일이 좀 있어서”
노인이 나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연지>를 풀어주었다. 다행이도 <연
지>는 바닥에 물이 고여 있지 않은 유일한 보트였다. 물이 고여 있기는커녕 보
트 바닥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어서 올라가서 앉아요. 뒷자리 한가운데...”
신부가, 들고 있던 음식 배낭을 그에게 넘겨주고는 조심스럽게 계류대에서 보
트의 덕판으로 내려섰다. 신랑의 부축이 있기는 했지만 워낙 중심을 잘 잡아서
덕판에서 창막이를 지나 이물 쪽 간사리에 가 앉는데도 보트는 잠깐 좌우로 되
똑거렸을 뿐 이내 균형을 되찾았다.
“에이, 균형잡는 솜씨 보니 처음이 아닌데...”
“보트라는 게 생각보다 크네요?”
“이 간식 배낭, 받을 수 있을까?”
“...아무 정신도 없어요”
“그럼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그는 먼저 보트 바닥에다 자기 배낭과 노를 차례로 내려놓고 살며시 옮겨타고
는 노를 들어 계류대 기둥을 밀었다. 보트는 연지 한복판으로 소리없이 미끄러
져 갔다. 하기야 소리가 날 턱이 없자.
“아까 왜 그렇게 맛나게 웃었어요?”
노 고리에다 노를 걸고 있던 그에게 신부가 물었다.
“옛날에 우리가 자주 골려먹던 할아버지... 돈 달라고 해서 돈 줬더니 신분증
까지 맡기라는 거라”
“신분증은 왜요?”
“도망칠까 봐”
“물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연지 한복판에서 어디로 도망쳐요? 바이킹처럼 배
를 둘러메고요?”
“아니, 한 시간 삯만 내고 두세 시간 타고 놀다가는 방축에다 보트 대어놓고
도망치는 애들이 있대요”
“그래서... 줬어요?”
“아니...”
“하나도 안 우습잖아요?”
“우리 고등학교 시절에는 신분증 안 맡겨도 잘 빌려주었거든”
“그런데요?”
“반시간 삯으로 두세 시간 타고 논 뒤 방축에다 보트 대어놓고 도망치는 장
난... 아무래도 내가 발명한 것 같거든... 그렇다면 우리 같은 악동이 법을 복잡하
게 만들고 있다는 얘긴데... 내가 이 연지에서 발명한 놀이... 많아요”
“그래서 노를 이렇게 잘 젓는구나. 잘 젓는 거죠? 바람둥이들이 맨손으로 사
과 잘 쪼개고 보트 잘 젓는다던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지에 와서 보트 타는 게 내 취미 중 하나. 그리운 사
람을 그리워하면서...”
“누굴 그렇게?”
“연지는 심연지 품... 연지 품에 안기셨어... 애들이 이러면서 날 얼마나 놀려
먹었는데?”
“순정파인 줄만 알았는데 악동스러운 데도 있었나요”
“우리가 3학년 올라가던 해에 연지에서 수영이 전면 금지된 거 알아요? 방축
개축 공사하고 바닥 준설해서 저수량을 엄청나게 늘린 다음일 거라...”
“그랬어요?”
“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완장 찬 경비들이 호루라기를 빽빽 불고 그랬
지. 그렇게 삼엄했던 시절에도 이 연지 한복판에서 수백 미터를 유유히 헤엄친
사람이 있었어. 합법적으로... 그것도 완장 찬 경비들의 격려와 응원까지 받으면
서...”
“누군데요?”
“나...”
“어떻게요?”
“지헌이와 보트 타러 왔어요. 지헌이 알지? 도청 댕기는 박지헌? 지헌이에게
여기 이 연지에서 합법적으로 수영을 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 지헌이는 당연
히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했고. 하면 어쩔 테냐? 내가 그랬지. 흐린 술이 되었든
맑은 술이 되었든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도록 사주마. 그러대?”
“모범생들인 줄 알았더니...”
“어떻게 했느냐... 일부러 노 한 짝을 놓쳤어요. 노가 없어도 보트는 관성으로
한동안 미끄러져 가거든. 그러고는 보트가 바라에 멀찍이 밀려가기까지 기다렸
지.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경비를 향해 지헌이와 둘이서 고함을 질렀어. 아저
씨, 큰일 났어요. 어떻게 해요, 노를 놓쳤어요... 기다려라, 모터 보트 타고 들어가
서 집어다 주마... 언제까지 기다려요? 헤엄쳐 가서 주워오면 안 돼요? 헤엄 잘
치냐? 우리 학교 수영 선수라고요... 좋을 대로 해라, 나는 못 본 거다... 이렇게
해서 노 건져온다는 핑계로 유유히 수영을 즐겼지. 그것도 근 30여 분을... 경비
들이 왜 안나오느냐고 물으면, 노를 찾고 있어요. 찾아야 나가든지 말든지 하지
요... 이러면서”
“수영 선수였어요?”
“알면서... 우리 학교에 수영부가 어디 있고 수영장이 어디 있어서?”
그는 양쪽 노의 노뻔지를 물 속에 살며시 박아넣고는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보트는 꽁무니를 떠밀린 것처럼 미끄러져 나아갔다. 보트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
하는 미숙한 노잡이는 이어지는 곁노질에서 노뻔지로 물을 튀겨 앞에 앉은 사람
의 옷을 적시게 마련이다. 속도 가늠에 미숙해서 뻔지가 물로 들어가고 나오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맞추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어지는 곁노질
에도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았다.
“연밭 쪽으로는 안 가는 게 좋아. 그러니까 방향을 연지 한복판으로 잡아줘
요. 그대는 지금부터 조타수... 나는 뒤를 못 보니까”
“연밭은 왜 피해요?”
“부근은 물이 더러우니까”
“꽃은 무지 아름다운데...”
“연밭만 해도 얼굴이 둘”
“맑은 물에서는 연이 살지 못하나요?”
“연 뿌리 봤지? 잎이 크고 꽃이 고운 건 걸쭉한 진흙에 내린 그 튼실한 뿌리
덕분. 썩은 진흙은 꽃이 되고 꽃은 썩어서 진흙이 되는 것이지. 중국에는 일찍이
이 이치 터득한 현자가 있었어요”
“?”
“점쟁이였어. 이름이 <새>였던 것을 보면 북방 요새 근방에 살던 노인이었
던 모양이지? 이 양반이 기르던 암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치고 말았어.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노인을 위로했지만 노인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더
래. 말을 잃은 것은 말을 가지고 있어서 잃은 것이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러냐면서...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도망쳤던 암말이 오랑캐 땅의 굉장히 훌
륭한 수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대. 마을 사람들이 또 찾아와, 암말 돌아온 것
은 물론 훌륭한 수말까지 덤으로 얻게 되어서 얼마나 기쁘겠느냐고 치하했지만
노인은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더래. 암말을 잃지 않았으면 어떻게
수말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면서...”
“에이, <새옹지마> 고사잖아요? 나는 또...”
“나는 이 고사가 참 좋아요. 그 다음 이야기 알아요?”
“글쎄요... 배운지 하도 오래되어서...”
“거 봐요. 이 고사 씹는 맛을 알자면 우리 나이는 되어야 해. 새옹의 아들이
그 수말을 타고 놀다가 잔등에서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지. 마을 사람들이 찾
아와 노인을 위로했지만 노인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지. 수말을 얻
지 않았으면 내 아들의 다리가 어떻게 부러질 수 있었겠느냐면서... 그런데 그로
부터 며칠 뒤 전쟁이 터져요.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징발되어 목숨을 잃게
되지만 새옹의 아들은 다리 부러진 덕분에 병영의 의무를 면제받고 목숨을 건지
게 돼. 사람들이 와서 아들이 온전해서 얼마나 기쁘냐고 치하했지만 새옹은 그
러지. 아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면역의 특혜를 누렸겠느냐고...
새옹은 점쟁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에는 점쟁이였다기보다는 자연
의 이치, 세상의 이치, 사람 사는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
계류장에서 4,5백 미터 저어갔을 뿐인데도 방축 뒤의 순환도로를 지나는 자동
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연지 한복판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
<고즈넉하다>보다 나은 말은 없을 성싶었다.
“노 놓쳐도 걱정은 없겠네요? 거짓말도 잘하고 수영도 잘하는 분이 이렇게
앞에 앉아 있어서...”
“그래요, 내가 있어요”
“...”
“내가 있으니까 좋아요?”
“...참 좋아요”
“그 한마디 듣고 싶어서...”
“이 역시 부담...”
“또 하고 싶던 한마디... 참 힘들었지요?”
연지 한복판의 그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고즈넉함이 그에게 힘든 질문을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새옹 말씀이 대답 대신이 되겠네요”
그는 노를 당겨 가로장에 엇비슷하게 기대어놓은 다음 신부에게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먼바라기를 했다. 한동안 그러다가, 겨냥 없이 던지는 듯이 말했
다.
“하루 일 망치는 것은 아침에 마신 술, 한달 일 망치는 것은 발에 안 맞는
신발, 평생 일 망치는 것은 마음 안 맞는 배우자라는 옛말이 있습디다...”
“...힘...들었지만 다행히도 망친 것은 아니죠”
“거 봐요. 나랑 살자고 했을 때 냉큼 살았으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걸”
“대학 1학년 때였어요. 그러기만 했을까요?”
“괜한 고집으로 남의 세우러 20년이나 축냈지 뭐...”
“누구 세월을요?”
“그대 세월일 수도 있고, 내 세월일 수도 있고... 또...”
“이 평화가 그 보람이라면서요? 힘들었던 보람, 기다렷던 보람이라면서요...”
“그냥 해보는 소리... 보트라는 거 이상하네? 예나 지금이나 보트 타고 호수
한복판에 이르면 무인도에 온 기분이 되고는 해. 하도 막막해서 눈길 두기에 마
땅한 데가 없고, 하도 많아서 화젯거리 고르기에도 마땅한 것이 없고”
신부를 바라보던 그가, 신부 시선의 초점이 자꾸 흩어지는 것 같아서 등을 돌
려 뱃전 쪽을 보려고 가만히 엉덩이를 들었다.
“돌아앉지 말아요”
신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입맞추고 있어요. 저 앞에서...”
“불구경에 못잖은 구경거린데...”
그가 보트의 중심이 무너지지 않게 살며시 돌아앉았다.
보트 위에 엉거주춤하게 마주 앉은 남녀가 어색한 자세로 입술을 맞대고 있었
다.
<지리>호 보트였다.
<지리>는 <연지>가 소리없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
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부끄러워 오래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래 볼 거리가 아
니기도 했다.
“안 풀리는 수수께끼가 있는데요...”
“아직도?”
“원래 저기다 싶으면 옆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가는 스타일 아니었어요?”
“누가?”
“누가, 하는 사람요”
“그런 데가 있었지”
“그것도 오버페이스로...”
“그런다고 빨리 가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오버페이스하는 버르장머
리 고치려고 하는데 그게 또 오버페이스가 되고는 해”
“면목없는 말이지만, 그렇게 공격적인 분이 일구월심 날 기다렸다는 게 믿어
지지 않는 거죠”
“옆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가는 스타일이라며? 그래서 당도한 곳이 여기인
만큼 믿어지지 않을 거 없지. 세상만 두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
두 얼굴을 하고 있는 모양”
“이 얼굴 뒤에는 저 얼굴, 저 얼굴 뒤에는 또 이 얼굴... 이런 거 좀 반듯하게
알고 살 수 없나요?”
“쉽지 않을 걸. 내가 보기에 옳은 것 그른 것, 바른 것 왼 것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아. 선한 것 악한 것도 그렇고... 옳은 것의 그른은 그른 것이 되고, 그른
것의 그른은 옳은 것이 되고... 바른 것의 그른은 왼 것이 되고 왼 것의 그른은
바른 것이 되고...”
“천사와 악마가 따로 없다는 뜻?”
“이것은 저것의 한 상태가 아닐까... 그대 만나고 나서부터 자주 하는 생각”
“평화를 느낀다고 했지요?”
“했지.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고맙군”
“이런 평화도 깨어질 수 있나요?”
“있지”
“...”
“내가 알기로,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의 씨앗을 제 가슴에다 품고 있어요. 그
렇지만 죽음 또한 끝은 아니에요. 죽음은 죽음대로 재생의 씨앗을 이미 제 가슴
에 품고 있으니”
“우리의 평화... 라고 불러도 되겠죠? 이 평화는 어떤 씨앗을 가슴에 품고 있
나요?”
“모르지. 알면 좋을 텐데... 모든 평화를 무너뜨리는 씨앗은 바로 그 평화를
일으킨 것 속에 들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종종 해요”
“그러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나요? 확신에 기대어서 살 희망?”
“눈밝은 사람들은, 확신하는 순간 그것이 벌써 하나의 우상이 된답디다”
“유감스럽게도 별로 희망차지 못하군요”
“그래도 희망은 있어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살면...”
“어렵다”
“그 어려운 틈새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바로 사람의 향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향기로운 사람이오”
“어째서 향기로운가요?”
“그대는 전부터 맹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오해 말아요. 거기에서만 꽃이 피고 향기가 나는 것이니”
크고 육중한 물체가 물 위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신부는 장년의 신랑 앞에서 그 향기를 더 오래 피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는 그 향기를 더 오래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제의 보트는 남녀가 입맞춤을 나누던 바로 그 보트였다. 5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여자는 보트에 앉은 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남자는
물에 빠진 채 수면을 오르내리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노 한 짝이 남자 옆에서,
남자가 일으키는 물결에 실린 채 함께 오르내리고 있었다. 입맞추는 데 정신이
팔린 남자가 노를 놓치자 물로 뛰어들었거나, 거리가 가까워 노를 집으려고 몸
을 구부리다가 보트의 균형이 무너지는 바람에 물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부를 보고 소리내어 웃었고 신부도 그의 웃음을 따뜻하게 마중
해서 웃었다.
잘코사니다... 부부는 이런 말을 참으면서 웃었을 터였다.
여자는 하나 남은 노를 뽑아들고 남자 쪽으로 저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물과
보트에 무지한 탓에 보트는 남자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중에도 보트는 계속해서 물 위로 느린 속도로나마 미끄러지고 있었으니 시간이
흐르면 더 멀어질 터였다. 그 정도의 사소한 사고는 자주 있는 만큼 남자와 여
자가 개헤엄만 칠 수 있다면 연지 한복판의 고즈넉함을 깨뜨릴 정도는 아닐 터
였다.
그러나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남자가 내뱉은 한마디에 연지는 순식간에
폭풍우 몰아치는 대양이 되었다.
“도와...줘요!”
스물네댓 되어 보이는 여자의 나이에 걸맞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숨이 턱끝에
차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거기에 덧붙여 여자가 내지른 비단폭 찢는 듯한 소리에 폭풍우 몰아치는 대양
은 일순 저승의 문이 되었다.
“저이는 헤엄을 못 쳐요!”
여자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청년이 시시각각 물 위로 고개를 내밀
기는 하나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이, 시간이 흐를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구나...”
그는 신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신발과 겉옷을 차례로, 그러나 아주 빠른 동
작으로 벗어부쳤다. 사색이 된 신부는, 조심하세요, 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보트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청년을 향해 전속력으로 헤어갔다. 물 위에서 50미터로 목측한 물길
은, 그가 아무리 수영에 능하다고 해도 간단하게 좁혀지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
는 물 속에다 머리를 처넣은 채, 오직 청년이 허우적거리던 방향만 가늠해서 물
을 갈라나갔다.
그가 현장에 이르렀을 때 청년의 몸은 이미 늘어진 채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
었다. 그는 두어 길 깊이에서 오른팔로, 뒤에서 청년의 몸을 감았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손발로 있는 힘을 다해 구조자의 목에 매달린다지만 청년
에게는 이미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오른팔을 청년의 목에 돌려 감은 채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물가를 찾아
보았다. 가장 가깝기로는 여자가 앉은 채로 떨고 있는 문제의 보트일 테지만 그
에게는 축 늘어진 청년을 그 보트에 올려 실을 자신이 없었다. 잘못하면 문제의
보트까지 뒤집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는 연밭 앞으로 보이는 조그만 섬을 겨냥했다. 섬이라고 해봐야 거룻배 두
어 척 엎어놓은 듯한 크기에 지나지 못하는 섬, 수양버드나무 한 그루의 그늘을
받기에도 모자라는 섬, 그런데도 보트 놀이꾼들이 이따금씩 보트를 대고 상륙하
는 섬이었다.
그는 청년을 끌고 그 섬으로 헤어갔다. 섬 가장자리에 이르러, 이미 시체가 되
어버린 듯한 청년을 껴안은 채 한동안 숨을 고른 다음에야 그는 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는 청년을 섬으로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시체 같은 청년의 몸을 가슴이 땅에 닿게 엎으면서 보트 쪽으로 눈
을 돌렸다.
먼제 눈에 들어온 것은 문제의 남녀가 타고 있던 <지리>였다. 여자도 보였다.
<연지>는 보이지 않았다.
<연지>는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가 벗어놓은 옷
가지가 떠 있을 뿐이었다. 옷가지 옆에는 뒤집힌 보트 같기도 하고 거대한 물고
기의 잔등 같기도 한 거뭇한 물체가 하나 뜬 채로 물결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고기의 잔등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그의 귀에 모터 보트 소리가 들려왔다.
구조용 모터 보트는 접근하기 전에 속력을 줄이려고 뒤집힌 보트를 한 바퀴
돌았는데, 그 항적이 일으킨 물결에 밀리면서 보트의 뱃전이 솟아올랐다. 그는
노 앞에 거꾸로 씌어 있는 보트이름을 읽고서야, 다급하게 물 속으로 뛰어드느
라고 보트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이로써 보트를 신부째 뒤집어버린 것을 알았다.
신부가 입고 있던 연꽃빛 원피스는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같
기도 했다.
갈매기
<...바닷가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갈매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바
닷가로 나가 갈매기와 같이 놀았다. 갈매기는 그를 도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
고 날아와 함께 놀아주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이웃 사람들로부터 그 소문
을 듣고는 아들에게, 내 들으니 너는 매양 바닷가로 나가 갈매기를 벗삼아 논다
고 하니, 나도 갈매기와 놀고 싶다. 그러니 몇 마리 잡아와서 나도 재미있게 놀
게 해다오, 하고 말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고,
그리 하겠다고 하고는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의 마음을 어찌 알았
는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그는, 백구야,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이런 노래를 불렀지만 갈매기는 끝내 그의 곁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마음에는 늘 중심을 오로지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 이를 항심이라
고 하거니와, 기회를 엿보아 사특하게 움직이는 교사한 마음이 있으니, 이를 기
심이라고 한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어찌 사는지, 그것은 갈매기에게 물을 일이
다.>
이것은 그가 취중에 지어낸 말이다.
이것은 그가 술을 마시는 까닭이 되기도 한다.
그는 오피스텔에 산다.
주차장에는 소형차, 대형차, 외국제 스포츠 카가 뒤섞여 있어서 입주자들의 살
림 규모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오피스텔, 지하는 음식점과 술집이, 옥상
은 스카이 라운지가 점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술 취한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오피스텔, 지하와 옥상의 영업이 끝날 즈음 승강기가 가장 붐비게 되는데
도 불구하고 밤새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아파트보다 훨씬 많은 그런 오피스텔이
다. 결혼한 친구들은 그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그를 찾아올 때면, 야, 이놈의
오피스텔에만 들어서면 타락이 하고 싶어서 온몸이 다 근질거린다. 하면서 부러
워한다.
그런 그가 갈매기를 기다린다.
그는 아파트 삼아 살고 있는 오피스텔 501호에서 술상을 사이에 두고 갈매기
와 마주 앉는 순간을 꿈꾼다. 갈매기가 초대에 응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
다는 예감이 하루 종일 그를 들뜨게 한다. 그는, 갈매기 역시 들떠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한다. 초대에 응하기만 한다면 갈매기는 옥상 라운지가 배달한 생일 만
찬 대접에다 생일 선물까지 받을 수 있을 터이다.
갈매기는 과연 올 것인가.
종일 그의 뇌리를 맴도는 질문이다.
그의 방 510호는 오피스텔 5층 복도 맨 끝에 잇다. 승강기에서 가장 멀리 떨
어진 곳이다. 복도 위아래는 천장과 바닥, 좌우는 벽 아니면 철문이어서 발자국
소리 울림이 늘 카랑카랑하게 들린다.
그는, 발자국 소리 식별에 일가견이 있다. 승강기 근처에 있는 방 임자의 발자
국 소리까지는 몰라도 비교적 가까이 사는 6,7,8,9호 임자의 발자국 소리는 어지
간히 식별할 정도가 되어 있다.
6호 입자주들은 발자국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복도가
왁자지껄해지면 영락없이, 지하 카페에서 돈 받고 손님들과 술 같이 마셔주고
돌아오는 6호 트리오다. 술 얻어먹고 돈 받은 것이 무안해서 그러는지, 그들의
입은 문 딸 동안도 쉬는 법이 없다.
평일 오후 7시경에 들려오는 뾰족구두 소리 주인은, 평일에는 캐주얼 구두를
신는 법이 없는 옷가게 여주인 7호, 일요일 밤 늦어서 들려오는 투박한 구두 소
리 주인은, 하산주 어울려 마시는 재미로 일요 산행 다닌다는 홀아비 화가 8호,
타박거리는 소리를 부록으로 달고 다니는 가죽 슬리퍼 소리는, 시집 식구들 들
이닥칠까봐 아이 떼어놓고 다니는 법이 없는 이혼녀 9호, 9호 앞에서도 멎지 않
고 계속해서 나가다 문 앞에서 딱 멎는 소리가 있으면 영락없는 10호, 바로 그
가 사는 510호 내방객이다.
발자국 소리가 방 앞에서 멎을 경우, 문 앞에 선 사람을 어림짐작하는 수가
있다. 발자국 소리 멎기가 무섭게 초인종 소리가 나면 가까운 친구, 발자국 소리
멎고 나서도 초인종 소리가 나기까지 숨 한두 번 내쉬고 들이쉴 여유가 있으면
초행 손님 아니면 외판원인 것이 보통이다.
지하 음식점 배달원들의 발자국 소리에는 그릇 달각거리는 소리, 철가방 삐걱
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그가 기다리는 소리는, 8호 앞에서도 9호 앞에서도 멎지 않고 10호 앞까지 이
어질, 간격이 일정하게 긴 하이힐 소리, 그리고 그 소리 멎고 나서도 숨 서너 번
내쉴 동안이 지난 다음에 들려올 수동식 배꼽 초인종 소리다. 갈매기는 다리가
길고 걷는 훈련을 특별하게 받았을 터이니 발자국 소리의 간격이 일정하게 길
것이고,문 앞에서 옷매무시를 바로잡을 터이니, 그 뜸이 조금 더 길 것이라고 그
는 생각한다.
특정한 일에 대해 흥분해 있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예
감하는 법이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번번이 복도 중간중간에서 끊어져 버리고는 하지만, 그는 그 다음 발자국 소리
가 들릴 때마다, 심장 위로 뜨거운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듣는 듯한 느낌과 비슷
한, 기대와 불안이 반반씩 섞인 착잡한 느낌에 시달리다. 갈매기가 초대에 응하
면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될지도 모른다.
...갈매기야, 훨훨 날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갈매기여, 푸른 물에 그림자 드리우는, 기미 아는 새여.
그에게 갈매기는 기심과 항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갈매기>와 처음 만난 것은 반 년 전 오피스텔의 승강기 안에서다.
그가 미국으로 출장 떠나는 날이었다. 비행기 떠나는 시각은 오전 10시, 적어
도 8시까지 공항에 도착하자면 7시에, 도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교통 체증을 감
안한다면 그 전에 오피스텔을 나서야 했다.
그는 가방을 끌고 나와 승강기 앞에 섰다. 그러나 짝수층 승강기는 오르내리
는데 그가 타야 할 홀수층 승강기는 먹통이었다. 한쪽 승강기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승강기를 전체 운행 체계로 바꾸는 것이 오피스텔의 관례다. 그날은 아침
이른 시각이라 관리자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했던 모양인가. 그는 가방을 끌고
4층으로 내려가 짝수층 승강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승강기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그는 전날 밤 혼자 마신 술의 숙취 때문에 제대
로 눈을 들 수 없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위층에서
승강기를 타고 내려온, 쭉 뻗은 다리로 보아 젊은 숙녀임에 분명할 터인 앞사람
에게 눈인사 건네기가 망설여졌던 것도 눈 때문이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있
는데 문득 그의 눈에 여자 옆에 서 있는 가방이 낯익어 보였다. 무리지어 다니
는 것이 보통인, 항공기 여승무원들이 끌고 다니는, 조그만 화장 가방이 매달린
검은 옷가방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맨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날개를 편, 갈매기 같기도 하고 독수리
같기도 한 항공사의 하얀 휘장, 그리고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것이 항공사 제복
위로 솟은 불룩한 젖가슴이었다. 자신이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까지 타고 갈 항
공기의 소속 항공사 휘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술기운이 남아 있을 동안은 수줍음을 몹시 타는 자칭 특이 체질의 소유자
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탑승권의 봉투 노릇을 하는, 항공사 수송 약관이 찍힌 팜플
릿을 꺼내어 하얀 휘장이 팔랑거릴 만큼 흔들어 보였다. 건네도 자연스러웠을
터인, 우연의 일치를 반가워하는 인사는 수줍어서 건네지 못했다. 여자는 그가
보내는 무언의 인사를 곧 알아먹었다.
“열시 비행기죠? 네, 같은 비행기예요, 안녕하세요?”
여자가 웃었다. 그가 항공기 안에서 흔히 보던, 연습이 잘 된 함박꽃 같은 웃
음이었다. 여자가 웃자 수박 껍질이나 지우초 잎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향수 냄
새에 섞여 달콤한 술 냄새가 났다. 지우초는 오이풀과에 속하는 식물이어서 그
잎에서는, 정확하게 말하면, 깎아놓은 오이 냄새가 난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날
지도 모르는 역한 냄새와는 달라도 많이 다를 터였다.
같은 택시로 갑시다. 성질 급한 사람이 택시 요금 내고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여자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남자와 얼굴 익히게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려 말
이 되지 못했다.
여자는 승강기를 나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오피스텔을 나서서 길을 건너
갔다. 그는 짐이 만만치 않아서 길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피스텔 앞에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그는, 항공기가 동해상으로 빠지기까지는 여자를 떠올리지 못했다. 까다로운
출국 수속과, 이륙하고 급상승해서 순항 고도에 이르기까지 항공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내 승무원들이 일본 입국 신고서를 나누어주고 있을 즈음이었으니 아마 동
해를 거의 건넌 시각이었을 것이다.그는, 신문을 읽고 있다가 문득 코끝을 스치
는 수박 껍질이나 지우초 잎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한, 시원하게 향긋한 향수 냄
새를 맡고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맨 먼저 갈매기 날개 같기도 하고 독수리 날개 같기도 한 하얀 휘장이
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불룩한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입국 신고서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피스텔 승강기에서 만났던, 가슴에 하얀 날개 휘장을 단 여자였다.
날개 휘장을 단 여자는 그가, 아항, 갈매기로구나, 하는 순간에 <갈매기>가 되
었다.
“아, 역시 그랬군요. 내 목적지는 일본이 아니고 미국인 걸요. 그런데, 택시비
절약하고 싶지 않던가요? 나는 성질이 급한데...”
그가 긴 문장을 써서 말한다는 것은 숙취에서 완전히 깨어났다는 뜻이다. 그
에게는 취중에 참고 있던 말을 성시에 쏟아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로부터 엉뚱한 채근을 자주 받고는 한다. 그가, 하지 않은 말을 한 말로 오해
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늦잠 자는 바람에 분초가 급한 판이었어요. 외국 항공사, 느슨해 보여도 규
칙이 되게 엄하거든요. 늘 저희 항공사 이용하세요?”
<갈매기>는 상대의 시선을 의식했던지 부채처럼 펼쳐 쥔 입국 신고서 용지
로, 움직일 때마다 그의 눈높이에서 출렁거리는 가슴을 가리면서 물었다.
“거의 그런 셈입니다. 좋은 점이 있거든요”
“고맙군요. 어떤 점이 좋으세요?”
“한국과 일본 구간을 담당하는 스튜어디스들은 꽃다운 아가씨들이지만, 일본
과 미국 구간을 담당하는 스튜어디스들은 연세들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거든요
”
“세상에... 젊은 한국 스튜어디스보다 지긋한 미국 아주머니들을 더 좋아하시
는 분도 다 있네요?”
“연세 지긋한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를 받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거든요
”
“누님들 같아서요?”
“그것은 아니고요,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그 나이 될 때까지 줄기차게 뛰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회사 항공기가 안전하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늙수그레한
기내 승무원만큼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없답니다. 수호이 기가 미사일
을 달고 오기까지는...”
“...적절한 농담은 아니네요, 일본 입국 안 하신다고 했죠?”
그는, 일본 입국 신고서 용지를 거두어들고 다음 좌석으로 돌아서면서 <갈매
기>가 살짝 찌그러뜨리는 곱지 않은 눈꼬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아뿔싸, 했다.
아닌게아니라 4만 피트 상공에서, 그것도 젊디젊은 스튜어디스를 상대로 한 농
담으로는 적절하지 못했구나 싶었다.
그에게는, 취해 있을 때는 얌전하다가도 술에서 깨어나면 하는 짓이나 말이
턱없이 활달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갈매기>는 서울과 도쿄 구간의 탑승 근무를 마치고는 인사도
없이 나리타 공항에서 내렸고 그는 두어 시간 나리타 대합실에서 자투리 시간을
죽이다가, 스튜어디스만 미국인으로 바뀐 같은 항공기 편으로 미국으로 갔다.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뒤로 그는 <갈매기>의 안부를 궁금해한 적이 두어 번
있고 어디에 산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뿐, 더불어 어울릴 상대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갈매기>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었
다.
그로부터 근 한 달 뒤인 어느 일요일의 느지막한 아침, 그가 <갈매기>를 우
연히 다시 만난 곳은 여자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오피스텔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복국집이었다. 오피스텔 바로 뒤에 있는 복국집은 정기 휴일이어서
그가 물어물어 찾아간 데가 바로 그 집이었다.
그가 복국집으로 들어섰을 때 <갈매기>는 마악 계산대를 돌아나오고 있었다.
그는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것이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에 부여되는 의미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 따라 우
연성의 희소 가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횟수에 비례하
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는 얼굴이 붉어질 만큼 반가워했는데도 불구
하고 <갈매기> 쪽에서는 전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갈매기>는, 여자가 지니는 경계 본능으로 반가운 마음을 가린 것인지도 모르
는 일이기는 하다.
제복 차림이 아닌 <갈매기>는 큰 키가 조금 돋보일 뿐, 수더분한 것이 여느
처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그로서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주는 선입견과
의상이 과연 날개는 날개구나 싶었다.
<갈매기>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혼자신가요...”
그는 ,갈매기> 만난 것을 너무 반가워한 것이 무안했다. 그래서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갈매기>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혼자 오는 사람에게는 팔지 않는대요. 재료 값이 워낙 비싸서 1인분은 팔
지 못한다면서 이렇게 쫓아내네요...”
그 역시, 그렇구나, 싶어서 돌아서려는데 안주인이, 아시는 사이면 두 분이 합
석하시면 되잖아요, 하면서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웬만한 여자 같으면 발끈했을
텐데도 <갈매기>는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얼굴 화
장이 지워진 <갈매기>는 수더분한 외모에 어울리면서도 나이답지 않게 속도 무
던한 여자 같아 보였다.
그는 <갈매기>를 자리로 안내하는 시늉을 하면서 안주인을 나무랐다.
“아니, 머리가 그렇게 좋은 분이 이렇게 아름다운 손님을 쫓아내요? 오피스
텔 근처 음식점이 혼자 오는 사람 쫓아내면 누구 데리고 장사하는 건가요?”
“미안해요, 황복이 워낙 비싸서...”
안주인이 벽에 붙여놓은 황복 송장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진짜 황복이라
는 걸 증명한답시고 송장을 벽에 붙여놓은 모양이었다.
“비싼 황복 매운탕 먹어봅시다. 아가씨 매운탕 좋아요?”
“형편이, 메뉴 보게 안 생겼어요”
“황복 매운탕 2인분 주세요, 아주머니... 건강에 안 좋다니까 알은 빼고요...”
“농담, 늘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하세요?”
<갈매기>가 의자를 뽑아 앉으면서 혼잣말 하듯이 물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고요, 농담의 페이스 조절에 서툴러... 그래서 맨정신일 때
는 오버액션투성이랍니다”
“취해 있을 때는요?”
“액션이 영 없어지지요”
“왜요?”
“못하는 거죠”
“그건 또 왜 그렇죠?”
“소화가 안 되니까...”
“술이, 말인가요?”
“아뇨, 액션이...”
“복잡하네요”
“...하지요. 6층 살지요?”
“어떻게...”
“지난번 승강기 타는 걸 보고 알았지요. 짝수층 전용 승강기에서 만나지 않
았어요?”
“짝수층에 6층만 있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아침, 같은 승강기 타고 내려오던 날, 승강기는 6층
에서만 멎었는 걸요”
“우리... 처음... 근사하네요”
“610호라는 것도 아는데?”
“어떻게요? 뒷조사하셨어요?”
“아뇨, 6층의 김아무개가 몇 호에 사느냐... 우편함에 꽂힌 전화요금 청구서
한 차례 훑어보면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제 이름은 또?
“기내 근무할 때 명찰 안 달았어요?”
“...무섭네요. 오늘 그럼, 미행당한 건가요?”
“천만에... 그런 능력 있으면 이 나이까지 이러고 있겠어요? 사실은 608호의,
출장중인 내 친구의 우편물 정리를 대신 해주고 있어요. 내가 출장중일 때는 그
친구가 내 것을 정리해 주거든요. 우편함 몇 개 훑어봤더니 바로 답이 나옵디다.
경계할 것은 없어요. 나잇값은 하는 사람이니까”
“...”
“나는 510호 살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
“한밤중에 610호가 좌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산다는 뜻이에요. 이
만하면 다정한 이웃 아닌가요?”
“농담의 페이스 조절, 정말 잘 안 되는 모양이군요?”
“승강기에서 만나고, 비행기에서 만나고, 좌변기 플러싱하는 소리 듣다가 복
국집에서 또 이렇게 또 만나고... 우연의 일치가 세 번씩이나 겹친다... 인연이 있
어서 이런 것이 아닌가 몰라...”
“우연의 일치는 한번뿐이죠. 나머지는 필연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
이고요”
“한번뿐이다... 그러면 그것은요?”
“오피스텔... 나머지는 오피스텔을 중심으로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유사한 반
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거 아닐까 싶네요?”
“톡톡 쏘지 마세요, 나 좋은 사람이에요”
“미안해요. 버릇이 되었나 봐요”
“...결국은 이 땅에 함께 사는 것부터가 우연의 일치이다, 나머지는 유사한 반
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뜻인 모양인데... 그러면 이래도 되겠네요? 우연의 일
치 같은 것을 두고 호들갑 떨것은 없다?”
“호들갑 떤다고까지는 안했는데...”
복국집 나설 때, 계산은 그가 치렀다.
“신세졌어요... 이런 자리 또 생기면 한번 갚을게요”
<갈매기>의, 빈말 같지 않게 푸근한 인사에 그는, 만들면 되잖아요... 하고 싶
었다. 그러나, 필경은 해장하느라고 마신 몇 잔의 술 때문이겠지만, 그는 자기
말이 일으킬 파장을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머뭇거리느라고 끝내 이 말을 입 밖
으로 내지 못했다.
자연이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 이 시대에도, 혼자 사는 남자와 혼자 사는
여자가 서로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전히 자연스럽다. 그 사는 데가, 이런 것을 부
추기는 곳이기도 하다.
혼자 여행을 떠나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여행자는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자신을 위해 타향이 혹은 타국이 어쩌면 달콤한 드라마 한 편을 마련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한 것에 빠지고는 한다. 무엇인가가 기
다릴 것이라는 들뜬 예감이 이런 착각을 부추기기도 한다. 여행자 중에는 실제
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드라마를 무리하게 연출하려는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이 착각과 환상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마음의 고삐를 다잡는 여행자도 있다. 그
사는 데가, 그런 여행지와 비슷한 곳이다. 그리고 그는, 여행자로 말하자면 후자
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가 <갈매기>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만나는
데 필요한 어떤 노력도 기울인 적이 없고, 어떤 행동도 시도한 적이 없다. 전화
번호를 물어본 적도 없고, 610호 우편함에다 메모를 남긴 적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연이 닿아서 된 것이든, 비슷한 우연히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작용을
통해서 된 것이든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만난 것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가 된
다. 그는 처음에는 두 사람이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식성이 비슷하고, 동선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날,
그에게 갈매기는 여느 여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갈매기를 부를 수 없었다.
막연한 것이나마 드라마에 대한 예감이라면 그에게도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드라마는 연출을 통해서 진행된다. 연출이 무엇인가? 연출은 책략인데, 그는 책
략을 쓰지 못한다. 바닷가 사람이 더 이상 갈매기를 부를 수 없게 된 사연이 그
의 정신에는 맹독처럼 퍼져 있다. 명저라고 부리는 책 한 권, 명구라고 불리는
옛말 한 토막은, 그것을 완화시키는 끊임없이 공부가 뒤따르지 않을 때는 사람
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거기에 걸려 있는 고압의 전하가 그것을
대한 사람에게는 끝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놀던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갈
매기를 잡으러 바닷가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기심을 읽은 갈매기가
오지 않아서 더 이상은 갈매기를 잡을 수도, 더 이상은 갈매기와 놀 수도 없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바닷가로 나갈 수도 없어서 술
집으로 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술집에서 수를 마실 때에만 갈매기와 놀던 꿈
에 잠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갈매기와의 드라마를 한 장면도 연출할 수 없
는 까닭, 그가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바닷가 사람 이야기를 했을 때 갈매기가
말했다.
“저도 비번일 때면 밤마다 취하도록 술을 마셔요”
“설마...”
“왜 안 되나요?”
“되지만 왜요?”
그는 그제서야 승강기에서 만나던 날 아침 <갈매기>의 입에서 향긋한 술 냄
새가 나던 까닭, 복국집에서, 연쇄점 주류 코너에서, 해장국집에서 갈매기와 자
주 만나게 되는 까닭을 이해했다.
“바닷가의 착한 사람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아서...는 아니고요. 저는 술을 마
시지 않으면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어요”
“왜요?”
“설명할 수 없는 까닭까지 설명해야 하나요?”
“그럽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술집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
“왜요?”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아야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데, 취하면, 아버지 명에
못 이겨 갈매기를 잡으러 나가는 바닷가 사람이 되고 말아요. 가야 하는데 갈매
기가 오지 않아서 갈 수도 없고, 가지 말아야 하는데 아버지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요. 이짓을 해도 이게 아닌 것 같
고 저 짓을 해도 저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내 몸은 굳어지고 말지요. 이 말을
해도 이게 아닌 것 같고, 저 말을 해도 저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내 혀가 굳
어지고 말지요. 이렇게 떠들어대는 내가 싫어서 마시고, 마시면 몸과 마음이 굳
어지는 게 싫어서 끊고... 술을 안 마시면 술 마시는 내가 덤벼들고, 술을 마시면
술 안 마시는 내가 덤벼들고...”
“저 같으면 마시겠어요”
두 사람의 술집 동행은 이 대화 직후가 처음이다.
두 사람이 두번째로 술을 마신 날은, 그가 날짜까지 기억하는, 그 해 9월 1일
이었다.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연쇄점에서 혼자 마실 거리 먹을 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들어오는데 경비실에서
메모가 남아 있다고 했다. 밤에 함께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는 갈매기의 메모와
직장의 전화번호였다. 갈매기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거나 추적할 수 없을 터이
니, 우연의 일치이거니 했다.
좋은 친구 노릇이 좋은 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술자리에 어울린
갈매기가 그랬다. 갈매기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었을 뿐, 그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갈매기는 호텔 찻집에 먼저 날아와 있었다.
그가 먼저 수작을 걸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이 기념할 만한 날이라는 것을?”
“뭘요?”
갈매기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표정이 밝지 않아서 여느 때의 갈매가
같아 보이지 않았다.
“같이 마시자는 사람 끊어진 지도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부르는
사람이 기다려지는 날이었답니다”
“그래요?”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기어이 마시는 날이고요”
“저도요”
차 마시고 거리로 나서기까지 두 사람이 나눈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
은 서로, 왜 마시는 날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술을 마시면 말수가 줄어드니까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갈매기는 말수가 많아지는데도 그 화제만은 한사코 비켜가
고는 했다.
근 서너 시간 동안 독주 한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직전에야 갈매기
가 되었다.
“기념이 되었어요...”
“무슨 기념이요?”
“밖에서 이렇게 기념하기는 하나... 부모님 제삿날이에요”
“제삿날 밖에서 술 마시는 사람도 있네요?”
“너무 어마어마한 제삿날이라서... 오빠와 막내 동생 제삿날이기도 하거든요.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다리를 다쳐 입원해 있는 바람에 식구들 따라 언니 결혼
식에 가지 못했어요. 부모형제는 오는 길에 변을 당했고요”
“교통사고...였나요?”
“오래되었으니 벌써 잊어버릴 만도 하죠... 소련 전투기에 추락한 대한항공
007기에 우리 식구들이 타고 있었어요. 나와 맏언니만 빼고... 벌써 13년이나 되
었네요?”
“...”
“...”
“...비행기에서 농담한 거, 사과해요”
“페이스 조절이 워낙 잘 안 되는 분이시니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오피스텔 앞까지 걸었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가
말했다.
“나도 오늘 기념이 되었어요”
“...”
“생일이었거든요”
“그랬군요...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축하받기에는 적절하지 않네요”
“산 사람들은 산 사람들 풍습을 좇아야죠”
“나는 풍습이라고 하지 않고 문법이라고 하겠어요”
“재미있네요”
“산 사람의 문법을 좇읍시다. 11월 11일은 비번인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내 방으로 초대하겠어요. 오늘의 이 슬픈 초대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겠어요
”
“방이라고 하셨나요?”
“네”
“제가 응하리라고 생각하나요?”
“갈매기니까”
“제 생일,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궁금하군요?”
“나는, 술 취하면 바보가 되지만 깨어 있을 때는 꽤 똑똑하답니다. 우리 사이
에는 수습해야 할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아요. 오피스텔 임대로 내면서 고액권
수표를 내었더니 10만 원짜리 수표로 거슬러주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 당신이
낸 수표가 섞여 있습니다. 배서한 주민등록 번호를 읽었지요. 711111, 맞지요?”
“맞아요. 제 생일. <뷔 포인트>를 잡은 기분이겠군요?”
“그건 또 뭐?”
“조정사가, 항공기를 이륙시킬 것인지, 이륙을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포
인트... 정비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면 이륙해도 큰일이니까 이 포인트에서 활
주 속도를 줄여야 해요”
“그 포인트를 넘겼는데도 이륙을 결정하지 못하면?”
“활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아니죠. 활주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활주로 끝에는 팬스가 기다려요”
“내가 <뷔 포인트>를 제대로 잡은 것 같나요?”
“선생님의 뷔 포인트인지는 모르지만 제 것은 아니에요. 전에도 방으로 여자
를 초대한 적 있나요?”
“있어요”
“갈매기가 날아오던가요?”
“물론이오”
“붙잡지 않았겠군요?”
“물론이오”
“약속할 수는 없어요.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요”
“두 달이나 남았어요. 8시가 좋겠어요. 그 동안 나는 마음을 닦으리다”
복도를 걷는 발자국 소리는 승강기 앞에서 시작되어 방방으로 스며들고는 한
다. 7시에는, 평일에 캐주얼 구두를 신는 법이 없는 옷가게 여주인의 뾰족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7호로 사라진다. 타박거리는 소리를 부록으로 달고 다니는 이
혼녀의 가족 슬리퍼 소리에는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다. 그날따라
유난히 출입이 잦은 이혼녀 모녀가 그의 귀를 성가시게 한다.
8시가 되었는데도 그가 기다리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인터폰을 들고는 경비에게 물어본다.
“510입니다. 내게 온 메모 없어요?”
“스튜디어스 아가씨, 꽃다발 들고 방금 올라가셨는데요?”
갈매기의 메모를 두 차례 전해 준 적이 있는 경비, 두 사람이 같은 승강기 앞
에서 헤어지는 것을 몇 차례 보아온 경비는 얼김에 신이 났던 모양이다.
“스튜디어스가 아니고 스튜어디스랍니다”
그는 인터폰을 놓고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낯익은 봄
예나 지금이나, 고향 선산에 오를 때면 흰옷 입은 사람이 무시로 눈앞에서 아
른거리는 듯한 환시를 경험하고는 한다. 흰 옷 입는 사람이 다급하게 선산 도래
솔 뒤로 숨은 듯한 모습이 설핏 보이는 듯할 때도 있다. 혼자 오를 때 그런 일
이 잘 일어난다. 그래서 혼자 오르는 날은 무엇을 보든지 얼핏설핏 보지 않고
일삼아 눈 부릅뜨고 보아버리기로 한다. 빨랫줄을 떠난 하얀 저고리 한 장이 바
람에 날리면서 온갖 조화를 다 부리던 데가 고향 선산이었다. 마음과 눈이 어리
석어서, 보이는 것이 이매망량 아닌 것이 없는 데가 고향의 한밤중이었으니 고
향땅을 마신전이라고 할 밖에.
그 까닭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이야 읍내 예배당 다니는 사람도 있고
초파일에 연등 다는 사람도 있다지만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문화인류학 교과서
에나 나오는 <애니미즘>이 내 고향의 종교였으니.
한식을 달포 남겨놓고 고향 마을에 나타난 나를 보고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이
장은 이랬다.
“한식에 삽 한 자루 덜렁 둘러메고 선산 오르는 거, 그거 잘 하는 짓 못 되
네. 암, 우수경칩 어름에 둘러봐 두어야 한식에 규모 잇게 손댈 수 있을 터이니,
잘 하는 짓이고말고”
한식이 아니면 선산 묘역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한식에 손을 대자면 어디에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미리 보아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향지기 고종 형의
전화를 받고 3.1절 연휴 날받아 내려간 나에게 동갑내기가 산 귀신처럼 사람 속
다 들여다본 듯이 말하는 데가 고향이다. 고향의 입말은 늘 떠돌며 산 세월의
길이를 돌아보게 한다.
고향 선산 오르면 늘 느끼는 갈등 하나, 부모님 산소를 먼저 뵙고 싶다는 유
혹이 그것이다. 하지만 성묘에도 차례가 있으니, 늘 부모님 산소는 못 본 척하고
먼저 조부모님 산소로 오른다.
먼저 조부모 산소 앞에다 조촐한 제수 진설하고 절을 하려는데 문득, 희끗한
것이 눈꼬리를 스치면서 물소리 같은 도래솔 바람소리로 사람의 소리 기척이 묻
어드는 것 같았다.
돌아서서 둘러볼까 했다.
하지만 예의 그 환시 아니면 환청이려니 싶기도 하고 술이 덜 찬 종이 술잔이
봄바람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아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술을 채워 가벼운 종이 술잔을 앉히고는 절하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컹, 하는
마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비디오 카메라 돌리듯이 고개를 피잉 돌리는데, 풍경이 휘청거리면서 흰 그림
자가 하나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터인, 흰옷 입은 노인이었
다. 봄비를 맞아 섬뜩하도록 푸른 다복솔을 배경으로 봄산에 우뚝 선 흰옷 입은
노인.
“...”
마른 기침으로 노인의 소리 기척에 답을 하려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그
마른 기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보니, 밝은 회색 양복이지 흰옷은 아니었다. 밝은 회색
양복 위로 조금 두꺼운 오리털 반코트를 껴입은 노인은 뭉툭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손을 들어 보인다... 우리 고향 사람에게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업는, 개명이 되어도 한참 된 인사법이었다.
노인이 서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노인이 들고 서 있는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놀랍게도 전문 산악인들이나 들고
다님직한 프랑스제 고급 피켈이었다. 피켈 끝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노인의 발
치로 노인이 피켈 끝으로 흙을 판 자국이 두어 군데 보였다. 노인의 손가락 끝
에도 진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산주에 속하는 사람인 만큼 무단 입산자에게, 그것도 선산 한자락을 파
헤친 사람에게는 위세할 권리가 있었다. 그 권리 반듯하게 행사하는 것은, 당하
는 사람도 부당한 대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내 고향의 미풍양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의 모습이 하도 낯설고 또 어딘지 모르지만 기이한 품격이 느껴지게
하는 데가 있어서 나는 위세하는 모양이 되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뭐 하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말리는 분이시요?”
노인이 되물었다.
<말리는 분>?
산의 관리자, 혹은 산주임을 이르는 내 고향 사투리였다.
살갗을 보면 일흔 살 이쪽저쪽으로 보여도 목 주름의 연륜으로 보면 아무래도
여든을 넘긴 것 같았다. 시골 햇살에 시달린 피부가 아니었다. 흙이 묻었어도 손
가락 끝이 고왔다.
“네”
“미안하오. 지나다 보니 <작두>가 있길래, 하도 반가워서 한두 뿌리 캐봤어
요”
“그 피켈로요?”
“<피케루>를 아시는 걸 보니 젊은이도 산을 아시는갑네?”
<아시는갑네>... 내 고향에서만 쓰는 종결형 어미였다.
“어르신, 이 근동에 사십니까?”
“아니오”
“그럼 옛날에는 이 근동 사셨군요?”
“아니오, 아니오... 산역하오?”
“아닙니다, 그냥 둘러 뵈러 왔습니다. 한식에는 아무래도 산역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부럽소. 위로 두 대 자리가 이렇듯이 좋고, 다음 대 자리까지 내리닫이로 벌
써 쭐루레미 마련되어 있는 것이...”
“제가마련한 것은 아닙니다만 송구스럽습니다. 시퍼렇게 젊은 사람들이...”
“그러면 조금 전에 절하신 자리는 조부님 자리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래는 그러면 부모님 자리겠고... 형제들 자리가 아직 빈 산밭인 것이 보기
에 좋소...”
“내려가시지요. 약주 사시는지요? 제물과 제주가 좀 있습니다”
“고맙소. 사도 나이를 먹으니...”
“네?”
“세 겹 축대가 나이테 같다는 소리...”
노인은 나를 따라 조부모 산로 내려왔다. 나는 노인을 조부모 상석 앞에 신문
지를 깔아 앉게 하고는 상석에 놓았던 술잔을 권했다. 노인이 손을 가로저었다.
“그 술 음복은 제주만 하는 것인데 당찮아요”
“드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바람에 종이 술잔이 쓰러질 것 같아서 술을 가
뿍가뿍 따랐습니다. 부모님 산소도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가뿍가뿍 따른 술 다
마셨다가 초장부터 갑신거리게요?”
나는 조모님 술잔을 내 앞으로 당기고 조부님 술잔을 노인에게로 밀었다. 노
인은 그 술잔을 받더니 산소에서 몸을 틀어 삼가는 모습을 보이고는 가만히 잔
을 비웠다. 나는 조부모님 산소와 노인에게서 몸을 틀고는 잔을 비웠다.
“어르신, 이 근동 사신 분이 아니라고 하시지만, 이 근동 분 아니시면 <작
두>를 모르실 텐데요?”
“왜... 나도 살기는 도회지에서 살았어도 나기는 촌에서 난 사람인데...”
“...”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글쎄, 싶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산에서 <도라지>, <잔대>와 함께 가장 자주 캐어 먹던 풀
뿌리, 가장 맛있게 먹던 풀뿌리가 바로 <작두>다. <작두>는 맛이나 향이나 모
양이 더덕과 아주 흡사하다. 중동을 잘라놓으면 단면에 점액질의 유백색 진이
배어나오는 것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난 이후 타향에
서는 작두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내 고향에서 남쪽으로 겨우 백 리 거리에
있는 대구 어름의 산야에서도 나는 작두를 본 적이 없다. 부르는 이름이 달라서
그랬던 것일까?
나에게는 타향 사람들에게 <작두>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은 적이 몇 차례 있
다. 내가 작두를 애써 설명하면 타향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에이, 더덕을 가지고
뭘 그래, 했다.
그러나 아니다. 작두는 더덕이 아니다. 표준말로는 <향부자>라고 불리는 작두
는 방동사닛과 식물이지만 더덕은 초롱꽃과 식물이다. 게다가 작두는 더덕만큼
굵지 않다. 작두는 더덕만큼 흔하지도 않다. 큰 산도 큰 물도 없는 내 고향의 작
두는 산천만큼이나 작고 초라하다. 더덕은 고급 찬거리가 되는 모양이지만 작두
는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할 때의 <초근>에 해당하는 우리 어린 시절의 새
먹거리였다.
지금도, 작두, 하면, 반짝이는 괭잇날로 어설프게 깎아 먹던 손가락만하던 작
두의 그 싸아하던 맛이 혀끝을 스치고는 한다. 그 시절의 괭잇날 호밋날은 어찌
그리도 반짝거렸던지.
아항, 작두를 아는 어른이시구나 싶었다. 작두를 보면 왈칵 반가워지는, 프랑
스제 피켈을 든 노인이구나 싶었다.
“어르신... 마른 풀대 사이에서 작두 대궁을 알아보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
데요?”
“...”
내가 고향 선산에서 그와 마주 앉은 것은 경칩도 지나지 않은 2월 말일이다.
따라서 산야에 푸른 기가 돌자면 한 달은 좋이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
산야의 마른 풀대 사이에서 말라죽은 채로 겨울을 난, 겨울 바람에 슬켜 갈갈이
찢긴 작두 대궁이를 알아보는 것은 나같이 그 마을에서 곤궁한 채집 경제 시절
을 보낸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희귀한 초본학적 재능이다.
작두 대궁이는 아래쪽은 둥글지만 윗부분은 삼각 기둥처럼 각져 있는 것이 보
통이다. 마른 풀 사이에 길이가 두어 뼘 되는 허연 대궁이가 서 있고, 갸름한 이
이 마른 채로 줄기 밑둥을 별꼴로 둘러싸고 있어야 그게 작두다. 마른 대궁이를
쥐면 씨앗이 손가락을 찌르는데, 뿌리 위치를 가늠하고 괭이로 흙을 찍어서 뒤
집은 다음 대궁이를 살며시 당기면, 쑥 뽑혀 나오는 것이 길이나 굵기가 손가락
만한 작두다.
“염치없이 귀한 술 얻어 마셨어요”
노인은 손으로 입술을 닦으면서 종이 술잔은 가만히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봄이 다 오지 않아서 봄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여전히 차가운 봄바람에 날
려, 빈 종이 술잔이 쓰러지면서 조그만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날씨가 이만큼이나 풀려서 다행입니다. 여기 잠시 앉아 계시면 제가 저 아
래 있는 부모님 산소 찾아뵙고 올라오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안주도 넉넉합니다
”
“고맙소...”
“요기하시자면 읍내까지 나가셔야 하는데, 잘 아시겠지만 여기에서는 십릿길
이 좋이 됩니다”
“요량도 없이 들어선 산길인데... 하여튼 고맙소이다”
노인은 이러면서 상석 앞의 명각을 한 차례 쓰다듬어보고는 눈길을 상석 왼쪽
의 명문으로 옮겼다. 상석 왼귀에는 사자인 아버지 함자,그 밑으로는 사손인 우
리 형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노인은 음각된 아버지 함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물었다.
“요 아래가 부모님 산소라면... 아버님은 대자 함자 어른이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어른의 유복자가 되고요”
“아하, 유복자라, 아하, 유복자라... 그래요, 얼른 내려가서 뵙지 않고...”
“돼지 고기가 괜찮습니다. 서울에서는 껍질을 몽땅 벗겨버리고 팔아서 재미
없게 생각했는데, 읍내로 들어오니 마침 껍질이 제대로 붙은 삼겹살이 있더군요.
덩어리째 사가지고 와서 요 아래 있는 고종 형 댁에서 삶아왔습니다. 썰어놓을
테니 드십시오, 아직 식지 않았습니다. 옛맛이 나실 겁니다. 그럼, 부모님 뵙고
올라오겠습니다”
나는 조부모님 산수에서 제물로 쓴 제수와 술은 노인 앞에 차려주고, 따로 마
련한 제수를 챙겨들고 부모님 산소로 내려섰다. 조성한 지 이태가 안 되는 아버
지 산소의 띠는 착근이 부실하고 어머니 산소 봉분의 띠는 허옇게 말라죽어 있
었다. 읍내 단위조합장 회의 때문에 함께 산을 오르지 못한 고종 형의 말은, 도
래솔 그림자 때문에 봉분에 서릿발이 생기고 그 서릿발 때문에 겨우내 잔디 뿌
리가 솟아 봄이면 하얗게 말라죽는다고 했다.
한식에는 도래솔을 좀 베어낼까요?
“조성하는 데 걸린 세월이 아까워서 그럴 수가 있나. 소금 뿌리면 서릿발이
안 생긴다더라만 그렇다고 조상 산소에다 소금 뿌릴 수는 없는 일...”
그러면 한식에는 대구에서 잔디 한 차 사들여오기로 할까요?
“그게 참 이상해. 대구 잔디는 우리 마을에서는 못 살아. 땅이 척박해서 그런
가, 난데 잔디는 우리 마을 산에서는 못 살아내”
그럴 리가 있어요?
“그게 그래... 대구에서 잔디 사다 심은 사람 봤는데 판판이 실패라... 사람이
고향 땅 흙 나왔다는 말 진적하고 싶어”
돌아가는 데가 거기 아닙니까.
“암”
그런데 이곳 잔디는 어떻습니까? 난데 나가서도 잘살겠지요?
“그럴 테지. 필경은 돌아오겠지만 자네도 잘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네요.
부모님 산소에 절하고 제주 음복하면서 가만히 올려다보니 노인 역시 손가락
은 여전히 상석 왼귀에 댄 채 나를 대려다보고 있었다. 모실 자손이 없는 분이
신가... 노인이 지어내는 분위기가 어쩐지 고적해 보였다.
제수 거두어 다시 조부모 산소로 올라갔을 때 노인이 술 한잔을 자작하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상도 하지요? 젊은이는 저 아래 계시는 <대자 함자> 어른의 유복자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내가 젊은이라고 부르기는 하오만, 몇이시오?”
“을유생입니다”
“에이, 그러면 나는 모르오. 공부가 부실해서”
“쉰셋이 되었습니다”
“쉰셋... 그렇다면 선고장께서 세상 떠나신 지 52년이 되었다는 얘긴데...”
“그렇습니다”
“그런데 산소가 어찌 저리 젊소? 띠가 아직 착근을 못한 듯한데... 조성한 지
한두 해밖에 안 된 산소 같지 않소?”
“사연이 있습니다. 아주 긴긴 사연이요...”
“...”
“일제 시대, 아버님 형제분은 일본에 계셨는데요...”
“조요(징용) 가셨던 것이구먼”
“징용이 아니고, 자유 노동자이셨답니다. 자진 입국하셨던 것이지요”
“...”
“아버님은 해방되던 해, 그러니까 제가 태어나던 해 일본에서 돌아가셨지요...
오사카와 쿄토 사이에 있던 우메다라는 마을에 묻히셨는데, 제가 지지난해가 되
어서야 일본 가서 모시고 와서 어머니 옆에 모셨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신 지는
오래되셨어도 산도는 젊을 수밖에요”
“저런...”
“한잔 더 드시지요”
“과한데...”
“숙부님께서 일찍 깨신 분이셨던가 봅니다. 먼저 일본 건너가 자리잡으시고
아버님을 부르셨다니까요”
“숙부님? 삼촌이 계시다는 말이오?”
“네”
“여기 이 상석에는 외아들로 되어 있던데... 숙부의 함자가 없지 않소?”
“...사연이 길어서 책이 한 권 될 만합니다. 아버님 돌아가시던 해, 그러니까
45년에 숙부님은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전신인 조련(재일조선인연맹) 결성
에 깊숙이 가담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10년 뒤 이 단체가 조총련으로 재편
된 뒤로는 오사카 지역의 재일 교포 북송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
려져 있고요...”
“일찍 깨신 분이라더니 헛 깨신 것이구먼...”
“숙부님 알선으로 일제 시대에 이미 자유 노동자로 일본 건너간 이 마을 사
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북송된 분들도 적지 않고요... 자유당 시절 이후
부터 이 마을 출신의 재일교포들은 조총련에 가담했다는 한 가지 전력만으로도
귀국을 금지당하지 않았습니까? 이 마을에 남아 계시던 부모님과, 일본으로 건
너간 아들은 생이별을 하고 만 것이지요. 숙부님 함자가 <대자 복자>이셨는데,
이렇게 자식을 생이별한 부모들 중에는 저희 집을 원수 삼은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손자 생이별한 부모들은 집안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저희
집으로 몰려와, 숙부님 함자 부르면서 <이놈아, 이놈아, 내 자식 내놔라,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내 자식 빨갱이로 만들었느냐>, 이렇게 자반뒤집기를 하고
는 했지요. 할머니께서는 그런 부모들의 원망받이로 어렵게, 힘들게 사시다 돌아
가셨답니다. 오래전에...”
“맏이 잃으시고 둘째는 빨갱이가 되었으니...”
“제가 유복자이듯이, 그 숙부님 또한 유복자이셨으니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지금은 저희 집안 선산이 된 이 산, 그 숙부님이 해방 전에 잠깐 귀국하셨을 때,
할아버지 산소 이장하면서 사놓으신 산이랍니다. 쌀 다섯 가마니 값이었다니 그
당시로는 큰 돈이었지요. 유복자이시던 숙부님께서 조부님 이장하셨듯이, 유복자
인 제가 또 아버님 유골을 일본에서 이곳으로 이장했으니까요. 하지만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숙부님께서는 당신 손으로 사신 이 산에 묻히지 못하시게 된 일입
니다.
“...”
“숙부님이 사놓으신 이 산에다 조부모님 모시고, 상석을 놓으면서도 상석에
숙부님 함자를 새길 수는 없었지요”
“빨갱이라서...”
“빨갱이라도 저희들에게야 여전히 숙부님이시지요. 하지만 숙부님 때문에 자
식과 생이별한 부모들이 조건을 달았답니다. 상석 놓는 것은 좋다, 하지만 대복
이 이름은 못 새긴다... 결국 숙부님 함자를 새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상석 놓
는 것을 양해했답니다. 나중에 보고 숙부님 함자가 새겨져 있으면 상석 둘러엎
겠다고 으름장들을 놓으면서요. 그래서 세보에는 함자를 올려도 상석에는 새기
지 못한 것입니다”
“...본 듯하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모들도 다 세상을 떴습니다. 이제는 숙부님의 함자기
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나라의 품이 넓어졌는지 까다롭던 규제가 풀리면
서, 당시 조총련 쪽으로 넘어갔던 분들이 더러 고향을 찾는 일도 있습니다만, 이
제는 그분들 얼굴 기억하기는커녕 이름 기억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졌습니다”
“하면 그 숙부님은 아직 살아 계시는 모양 아니오? 산소 자리가 비어 있으니
말이오...”
“2년 전에 제가 일본으로 갔습니다. 숙부님과 종형님 찾아내고 아버님 유골
을 수습하러 제가 일본으로 갔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찌 아시고?”
“일본 드나드시는 분들 말은, 오사카에 군민회가 있다고 하더군요. 숙부님은
오사카 근처의 <후세>라는 마을에 사셨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지금도 그 숙
부님을 <후세 숙부>라고 부른답니다. 저희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숙부님
사시는 곳이 <후세 시 아라카와 산초메>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아
라카와 산초메... <가거라 삼팔선> 같은 유행가 가사처럼 외면서 자랐지요. 아라
카와 산쪼메... 아라카와 산초메...”
“허허, 유행가 가사 같은 아라카와 산초메라...”
“일본 가서 오사카 총영사관에 가서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조총련 쪽 사람 찾
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설사 오사카 근방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총련 쪽 사람과 접촉하자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요... 군민회를 찾아 문
의를 넣었더니 <귀국>한 것으로 안다고 하는데... 제가, <오시지 않았습니다>,
했더니 그쪽에서 하는 말, <이북으로 귀국했을 거라는 말이오>...”
“그 사람들 조국은 거기니까...”
“어쩌면 종형이 오사카 근방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후세 시>
라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세상에... 가보았더니, 전설로 듣던 <아라카와 산초
메>가 정말로 있는 겁니다. 유난히 김이박 문패가 많은 동네였지요”
“...”
“경찰서 찾아가 심인 의뢰를 했더니 여경 한 분이 연세 많은 사회주의자들에
게 물어서 찾아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숙부님 그 마을 떠나신 지가하도 오
래되어 또한 허탕... 우리나라 구청에 해당되는 <구아쿠쇼>를 찾아갔더니, 조총
련에 속하면 그런 사람 있어도 가르쳐줄 수도 없고 가르쳐주어서도 안 되다면
서...”
“그랬을 것이오”
“총련이 민단(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에 사정없이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지요.
그쪽에서는, 이쪽 사람들이 사람 빼어갈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즈음이기
도 합니다. 일본 정부로서는 이 두 단체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면서, 적십자사는 완전 중립인 단체이고 또 중재도 가능하니까 오사카 주오
구에 있는 일본 적십자사 오사카 지부에다 심인 의뢰 신청서를 내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숙부나 종형을 찾아야 아버님 유골을 찾을 수 있었을 테니... 전쟁 전부터
그 마을에서 살아온 일본인을 찾아서 물어보지 그랬소?”
“!”
“늙은 쥐가 독을 뚫는다지 않소?”
“...그렇게 했습니다. 일본 적십자가 오사카 지부에서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다
시 후세시 아라카와 산초메로 갔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조총련 히가시오사카 지
부 건물이 우뚝 서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뛰어들어가, 이놈들아, 내 숙부 <나가
이마사오> 내놔라 하고 싶었지만... 참, 숙부님의 일본명이 나가이 마사오였습니
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요. 에멜무지 삼아, 근 60여 년 동안이나 그 마을에
서 쌀가게를 내고 있다는 노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름까지 생생하게 기억납
니다. 이케가미 사부로 노인이라구요. 아, 그런데, 이 노인이 5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에 함께 사회주의 운동 했
다면서 숙부님도 기억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숙부님은 종형 데리고 그 마을 떠
난 지가 오래되었다더군요”
“...“
“이분이, 아버님과 친분이 있었을 것이라면서 쿠니코토 히로요시라는 분을
소개해 주는데... 뵈니까 이홍길이라는 한국 노인이십디다. 이분의 도움으로 결국
50년 전에 숙부님께서 매장하신 아버님 유골을 수습해 올 수가 있었지요”
“아하, 큰일 하셨소”
“아버님께서 도우셨지요”
“그 젊은 연세에 돌아가셨다... 전쟁 끝났을 때이니 폭격은 아닐 테고...”
“그 사연이 더욱 기가 막힙니다. 전쟁 직후 귀국선을 타셨는데...”
“아, 그 일이었나요? 징용자 귀국선 <우키지마마루>가 <바구친(폭침)>된 일
이 그 즈음에 있었지요”
“잘 아시는군요. 이홍길 노인께서는 아버님과 함께 그 배로 귀국하시던 중이
었던 모양입니다. 아버님과 이홍길 노인은 그 배를 탈출하셨지만 결국 그 배에
서 흘러나온 중유 중독과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후세의 숙부님 댁
에서...”
“그래, 숙부님과 종형은 찾으셨소?”
“찾지 못했습니다. 숙부님은 재일 교포 북송을 지휘하면서 이북 몇 차례 다
녀오셨다니, 어쩌면 이북에 살아 계시거나, 거기에서 세상 뜨셨는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주위분들 말씀도 그렇고요. 종형은 어릴 때부터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는
데 일본에서 어찌 사시는지... 저는 나라 밖을 떠돌면서 살아온 사람이라서 집안
일을 잘 챙기지 못합니다만 제 위로 한 분 계시는 형님은 어찌 하든지, 아버님
옆자리에다 숙부님 모시는 것이 소원인 분입니다. 숙부님 자리, 이 깔끄막에다
축대 쌓고 저희 형제 자리는 물론 그 종형 산소 자리까지 저렇게 마련해 놓은
분도 저의 형님인 것이지요”
“지성을 다하시니 나란히 자리하는 날이 오겠지요”
“제가 이홍길 노인을 뵈러 쿄토로 가느라고 후세 시를 떠나던 날 쌀집 <이
케가미 오고메야>의 이케가미 사부로 노인이 제게 하시던 말씀이 잊혀지지 않
습니다. 제가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분이, <구원과 함께 잊으시오,
나도 이 작은 보람으로 우리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진 빚의 탕감을 빌리다>,
이러시는데...”
“빚의 탕감을 빌 사람이 어찌 이케가미 노인뿐이겠소?”
“...”
“고종 형이 마을에 산다고 했는데... 하면 고모님도 계셨던 모양이오 그려”
“두 분 계셨는데 두 분 모두, 아우님 한 분은 일찍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저쪽으로 넘어가 발길 끊을 것을 애돌애돌하면서 사시다가 모두 돌아가셨습니
다. 40년 전 저희 집이 대구로 나앉은 뒤부터는 고종 형님이 고모님 한이라도
풀어드리는 듯이 이 외가 선산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살펴주시지요”
“그래... 아들딸이 장성했겠군요?”
“삼 남매 두셨는데, 다 취성시키고...”
“두셨다니... 아니, 고종 형 말고 젊은이 말이오”
“남매들 두었는데, 아들은 미국에서 딸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
“...미국이라”
“네...”
“떠나고 돌아오고 하는 세월이 되었지요. 험한 세상 산 보람이 어찌 이리 더
디 오는지...”
“네?”
“아이고, 염치없이 얻어 마셨더니 취기도 취기려니와 한기가 드네요. 읍내까
지는 십여 리 길이라고 했지요?”
“마을에 전화가 있습니다. 택시를 부르면 오는데, 한 오천 원쯤 달라고 할 것
입니다만...”
“걷기에 마치 좋은 날씨예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걷기 좋은 날이 있었던가 싶소”
노인은 프랑스제 피켈을 지게 작대기처럼 짚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금
이 저렸던지 잠깐 몸을 비틀거렸지만 부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인은 마
을로 내려가지 않고 바로 읍내로 통하는 길로 접어들어 피켈을 흔들면서 연세에
어울리지 않게 활기차게 걸었다.
나도 문득 취기와 한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제수를 나누어주려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래서, 어쩔가 하다가, 손대지 않은
제수는 고종 형 집에서 빌려 올라간 바구니에다 담고, 노인과 내가 나누다 만
돼지고기, 오징어, 북어포는 잘게 찢어 산에다 사방으로 뿌리고는 일어섰다.
오토바이 소리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읍내에서 만났던 고종 형의 오토바이였다. 고종 형은 오토바이에 난 채, 길가
로 비켜선 노인에게 모자를 벗어 가볍게 예를 올렸다. 그러고는 오토바이를 몰
아 다시 마을로 들어서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고종 형은 오토바이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리고,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뒤를 바라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고종 형의 오토바이가 다시 움직였다. 오토바이는 마을로
들어서는 대신 내가 서 있는 선산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참 잘되었구나 싶었다. 산으로 가지고 올라간 제수는 집으로 되가지고 가지
않는 것 또한, 가난하던 내 고향 마을의 미풍양속이었으니.
산소까지 올라온 고종 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던 말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거 참 이상하다... 저기 가는 노인을 보고 내가 깜짝 놀랐다. 우리 <위아
제<외숙)>인 줄 알았다. 자네 아버님 말이다. 입매무새는 영락없는 어머니와 이
모의 입매무새고... 아이고, 이 사람아,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다”
숨은 그림찾기 1
- 직선과 곡선
찾아본 데 있는 것은 어쩌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 뒤짐질할 때마다 마음에 묻어드는 이 섬뜩한 두려움.
권투 선수는 링 위에서 싸우다가, 3분이 흐르면 세컨드가 기다리는 구석 자리
의 코너 스툴로 돌아간다. 그는 거기에서 1분 동안 피도 뱉고 물도 마시고 사타
구니에 바람도 넣고 세컨드의 훈수도 듣고 하다가는 공이 울리면 한결 가벼워진
걸음걸이로 다시 싸움터로 나선다. 구석 자리의 코너 스툴이 없으면 권투 선수
는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미국 네바다 주의 황량한 열사 지대에는 <오아시스>
라는 말이 들어간 상호가 유난히 많다.
권투 선수가 아닌 나에게도 구석 자리가 있다. 그래서 나도 그 구석 자리로
돌아가보고는 한다. 그 싸움을 싸우다 지쳤다 싶을 때면 돌아가보고는 한다. 대
구 근교의 소도시 경산에 있는 기이한 은자의 과수원으로 돌아가보고는 한다.
내가 <도회의 은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은사 일모 선생의 과수원을 나는 번
잡한 세상 한가운데 자리잡은 고요한 중심, 소용돌이 한중간의 부동의 중심이라
고 부른다. 바퀴로 말하자면, 바퀴터에서 가장 멀고, 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다. 굴대도 돌기는 돈다. 하지만 그 회전은 오르내림이 극심한 가장자리의 회전
과는 사뭇 다르다.
일모 선생의 과수원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역설
적이게도 주변인으로 사는 내 삶의 구석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과수원에는, 내
가 안고 가는 많은 문제의 해법이 있다. 하지만 그의 해법은 빌려도 좋고 안 빌
려도 좋다. 거기에만 가 있으면 해법이 내 안에서 술술 풀려나올 때가 많아서
그렇다. 그가 본보이는 삶의 태도가 내 몸과 마음의 항상성을 회복시키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 항상성이다. 일모 선생 과수원에는 과실나무도 있고 잡목도 있
으며 채소도 잇고 잡초도 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주는 금언이 있다.
사람은 무영등 아래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듬살이는 무균들이 아니다.
일모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정년 퇴직하고, 나와는 동기동창인 외아들과 함께
과수원 걸우면서 말년을 보내시는 분이다. 그의 외아들이 나와는 중고등학교 동
기동창이기는 하지만 이 동기동창 만나기가 과수원 방문의 목적이 된 것은 한번
도 없다. 나는 이것을 별로 미안하게 여기지도 않거니와 친구도 이런 태도로 저
를 대하는 나를 원망하는 법이 없다.
제자들이 찾아뵙고 절할 거조를 차리면, “절은 무슨 절... 야, 등 시린 절은
안 받을란다” 하면서도 옷매무시와 자세 바로 잡는 것은 언제 보아도 똑같다.
등 시린 절 안 받겠다고 하시는 것은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짖음이
다. 그는 부러 이러면서 언제나 그러듯이 떡갈나무 몽둥이 같은 손을 내밀면서
시커멓게 그을은 눈꼬리로 기가 막히도록 아름답게 웃고는 한다.
“자네가 오면 이 일모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고 말아”
“죄송합니다”
내가 이따금씩 찾아뵙고는 절하고 물러앉으면 그는 웃으면서 이러시고는 한
다. 아호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지독한 대머리였던 그는 10여 년 전부
터 제자들 사이에 <일모 선생>으로 불렸다. 이 애칭은, 대머리의 인기가 바닥을
훑던 8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더없이 따뜻한 울림을 지어내고는 했다.
어느 제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선생님께는 아직도 빠질 머리카락이 많습니다. 마지막 한 올 남을 때까지,
아니올시다, 그 마지막 한 올이 빠진 뒤로도 저희들이 줄기차게 모시겠습니다”
이 별호는 그러니까, 그 버르장머리없는 제자의 말에 그가 이렇게 응수한 대
서 유래한다.
“선현의 지혜에 견주면 비록 구우일모 아니면 창해일속이기는 할 것이다만,
나무 없는 이 독산 속 광맥에는 자네들에게 나누어줄 게 꽤 있을 것이다...”
동창생 여럿 모인 자리에서 이 일화를 전해 듣고 내가 주동이 되어 만장일치
로 정한 선생의 별호가 바로 <일모 선생>이다.
뒤에 이것을 아신 그는 나를 나무랐다.
“자고로 선비 풍신은 자호를 삼갈 줄 아는 법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더니,
네놈들이 버르장머리없이 선생에게 호 지어 바치니 이게 망신 아니고 무엇이냐
”
중학교 시절 2년을 내리 우리 반을 담임했던 그는 중학교 시절 국사와 세계사
를 가르친 분이다. 당시 그가 세계사 시간에, “나는 역사 기행 한번 해보지 못
하고 이렇게 가르치지만 너희들은 장차 가르치지 않더라도 세상을 두로 돌아다
니는 사람이 되라”, 하던 말씀이 내 기억에 사무치고는 한다. 그는 국사 시간
에, “나는 아직 서울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언제부터인지 근 40년 동안 당신이 가르친 제자의 <명함을 수집
하는 취미>를 몸에 붙이게 된다. 물론 명함을 수집한다는 그의 말은 글자 그대
로 명함을 수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제자들 사는 꼴을 상당히 자세하게 파
악하고 있는데 이것을 스스로 밝혀 말하기가 뭣하니까 <명함을 수집한다>로 표
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세계사에서 국사로, 국사에서 드디어 개인사로 그
방향을 바꾸었던 것일까?
근 30여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차례씩 찾아뵈면서 그때마다 확인한 바 있거니
와 그에게는 수백 장에 이르는 명함과, 명함 가진 제자든 명함 가질 처지가 못
되는 제자든 그 신상을 기록한 여러 권의 노트가 있었다. 무용가가 도약을 통하
여 중력의 법칙에 도전하듯이 그는 깨알 같은 메모를 돋보기로 좇으면서 노년의
건망증에 도전한다고 했다. 바로 이 메모 덕분이겠지만 그는 위세를 부리는 제
자들의 형편에도 밝고, 이름 없이, 또는 곤고하게 사는 제자들 형편도 놀라우리
만치 잘 기억한다.
우리는 이따금씩 노인의 이 기이한 재능과 덕목을 두고, 호기심과 인내와 기
억력의 기가 막히는 조화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제자들 읽은 이 일을 그는 <늙발에 시작한 사람 공부>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공부는 뜻이 참 깊어 보였다.
그의 명함철과 제자들 신상을 기록한 노트는, 수백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살
아온 자취, 사는 모습이 가로로 세로로 짜인, 실로 정교하면서도 그 규모가 만만
하지 않은 대하 소설의 원광을 방불케 한다. 내가 그를 여기에다 길게 소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의 과수원에 머물면 삶의 숨은 그림이 얼핏 보이는 듯할
때가 자주 있다. 평생 사람의 역사를 다루어온 그의 곁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에
게는 숨은그림찾기를 배우는 시간이다.
정년 퇴직하기 4,5년 전에, 그러니까 근 20여 년 전에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잡지사 기자 노릇 하던 나의 명함을 받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는 이랬다.
“내가 명함 수집가라는 걸 어찌 아는가?... 그래, 나는 한평생 역사 선생 명색
으로 자네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사람의 역사를 좀 아는 척해 왔는데, 아니
야, 내게는 아는 것이 없었어... 왼 것은 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목숨 끊어
진 편연사일지언정 피가 통하는 사람의 역사는 아니었네. 그런데 말일세, 10여
년 전부터 제자들 학교 다닐 때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사는 모습을 좇기 시작하
고부터 참 좋고도 놀라운 것을 발견했네. 사람 한살이의 성패를, 그 사람 죽기
전에 어떻게 평가하겠는가만, 나는 청소년 시절에 드러내는 특정한 제자의 특정
한 기질이 장차 그 사람이 이루게 되는 어떤 성취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
네. 반드시 어린 시절의 기질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네. 이따금씩 내 앞에 나타
나 보여주는 언행을 점선 잇듯이 이어보면 그것이 곧 그 제자의 얼굴이 되고는
했네. 이러니 제자가 어찌 제자겠나? 내 스승이지... 따라서 나는 졸업한 제자들
의 발자취를 뒤쫓으면서 비로소 사람의 역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니, 그 동안 내
가 한 일은 자네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시간이나 죽이면서 봉급을 타먹은 것
에 지나지 못해. 그러니까 뭣인가, 자네들은 헛 배웠고 나는 헛 가르친 것이지.
하여간에 제자들의 사는 모양 뒤쫓는 놀이를 나는 늙발에 배우게 되었네. 그런
데 말일세, 내가 저희들 사는 것을 궁금하게 여기니 이번에는 저희들이 잣아서
나에게 근황을 꼬박꼬박 알려오는 것이 아니겠나? 바야흐로 내 공부는 이렇게
살아서 꿈틀꿈틀할 모양이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나는 내 제자들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확실한 중앙정보부가 된 셈이네. 아니까 보이고, 보이
니까 더 알게 되고, 이렇게 해서 이제 무엇이 좀 보이는 것 같아... 이제 제대로
뭘 좀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년 뒤에 학교에서 쫓겨나니 억울하기 짝이
없네”
“책으로 써서 남기시지요?”
“써서 남겨봐야, 내 나이가 되지 않은 교사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 못할
것이고, 알아먹을 만한 교사들은 나처럼 학교를 떠난 뒤일 것이니, 이거야말로...
자네, 윤편을 아는가?”
“몇 회 졸업생인데요?”
“제나라 환공과 같은 시대 사람이면 몇 회 졸업생이가?”
“죄송합니다”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말이야... 윤편의 수레바퀴 굴대구멍 깎기가 아니겠느
냐, 이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윤편은, 수레바퀴 굴대 구멍을 깎을 줄은 아는데 그걸 가르칠 방도는 모르
겠다고 제화공에게 하소연한 사람이다. 자기 자식에게도 가르칠 수가 없어서 일
흔 나이에도 손수 그 짓을 하고 있다고 한 사람이다. 이것이 그렇다. 아슴아슴
알 것 같기는 한데 가르칠 수는 없다 이 말이라... 하여간에 나는 이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사람의 역사 공부나 좀 할 요량이다”
이것이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가 가진, 제자들에 대한 정보는 풍부하고도 정확하다.
그를 뵈러 가는 제자들은 예외 없이, 은사가 자기 이름은 물론 그간의 동정도
상당한 수준까지 <귀신같이> 기억하고 계시는 데 놀라고 만다.
당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상이 잘 안 될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15년, 혹은 20년 만에, 가까운 친구 손에 이끌려 은사를
찾아뵈었는데, 그 은사로부터, 자네 박아무게 아닌가. 도청 댕긴다며, 이런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졸업한 지 20년 만에 은사를 처
음 찾아뵌 어느 동창생은 나에게, “선생님께서 내 이름은 물론 내 사는 모양까
지 아시는데, 흡사 활자로 인쇄된 내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스무레
하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쇄된 자기 이름을 보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노
릇이다. 이것이 바로 전화번호부가 최다 인쇄부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소이연
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 어찌 지내시는가, 정치학 교수 노릇 하는 재미는 여전하신가”
그는 이런 물음에는 늘, 스승이 지닌 제자에 대한 정보가 담긴다.
“국회의원을 좀 해볼까 합니다.서생님께서 좀 시켜주십시오”
그의 앞에서는 새카만 제자들도 곧잘 농지거리를 한다.
“에이, 영농 후계자인 내 아들을 시키지, 국회의원들과 공이나 치러 다니는
정치학 교수를 시킬까”
전 반 농 반으로 오가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의 영향력이라면 제자 하나 찍어
국회에 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옛 제자 찾아오면, “그래,
어찌 지내시는가” 하고 물어 제자의 근황을 듣는데, 사리에 치우치는 부탁은
반드시 내치고, 이치에 합당한 청탁은 반드시 거두어 살 길을 열어주시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래, 어찌 지내시는가”, 이 한마디에 적절하게 대답
하면 스승의 처방은 곧 활법의 묘수가 되고는 하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포괄적
인 훈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대책까지 마련해 내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움직이면 수백 명의 제자들이 소리없이 움직인다
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은사의 아들이 과수원 한가운데 있는 살림집 옆에 따라 지어진 별채 사랑방을
가리키면서 한 말에 따르면 그 집에 오는 손님은, 지역의 분위기를 읽으러 오는
정치가, 은행 간부를 소개받고 싶어하는 중소 기업가, 대학 총장을 소개받으려는
해외 유학파 소장학자, 아들딸 주례 부탁하러 오는 늙은 제자, 제 주례 부탁하러
오는 젊은 제자, 맏물 과일을 짊어지고 오는 농부, 냉동 횟감을 들고 오는 외항
선원, 졸업 3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단체로 내려오는 모교 방문단을 아우른다.
스승의 아들인 내 친구는, 손님 때문에 추석이 든 양력 9월에는 쌀 세 가마가
모자란다면서 웃었다. 그분 과수원의 별채 사랑방이 가장 붐빌 때는 명절 뒤끝,
특히 추석 뒤끝이다. 추석 뒤끝에는 서울에서 귀향한 성묘객이 몰려들기 때문이
다.
“우리 동창만 해도 좀 많은가? 하지만 우리 동창의 수는 아버님 제자들의 십
분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대구에 내려오면 저희집 할애비 산소에는 못 올라가
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집에서는 묵어간다. 국회에서 대가리가 터지게 싸우는 여
야의 국회의원, 사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 단체 사무총장과 과학부 장
관도 우리 집에서는 못 싸운다. 장차관과 재벌 총수로부터 경산 장거리의 개장
수, 동두천 기지촌의 포주까지 공평하게 재우는 방은 세상천지에 아마 우리 사
랑방뿐일 걸세. 목사와 스님이 동숙한 적이 있는 우리 집 사랑방이야말로 세계
에서 가장 사람 차별을 않는 객사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자고 가게”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일모 선생은 은행가와 기업가, 정치가와 사업가, 구직자와 구인자, 모자라는
사람과 남는 사람 사이에 위치한다. 그가 시혜자와 수혜자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장학 기금 <운담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단독 집행자라는 사실은 잘 알
려져 있지 않다. 국외일 경우에는 주로 중국 삼성에 거주하는 재중동포, 국내일
경우에는 출신 학교나 출신 지방에 상관없이 극비리에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지
원하는 이 프로그램에 관한 한 그는 중앙정보부장직까지 틀어쥔 철인 독재자다.
그런데도 그를 험담하는 제자를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이 프로그램의 집행
에 관한 한 그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프로그램의 지원 금액은 인색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운담 프로그램은, 과실을 나누어 곤궁한 사람
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일지언정 가난뱅이를 부자로 만드는 프로그램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를 중심 도시로 하는 내 고향 일각에서 그 은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
사의하게, 혹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존재다. 40여년 간 여남은 개 중고등학교를
옮겨다니면서 제자를 길러낸 교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직접 길러낸 제자는
물론이고 그 제자의 친구까지도, 심지어는 친구의 친구까지도 뵙는 것을 기쁨으
로 자랑으로 혹은 영광으로 아는 분은 아마 그분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의 과수원으로는 성공한 제자가 자랑하러 와도 좋고, 실패한 제자가 위로를
구하러 와도 좋다. 그의 말을 빌리면, 봄보리 자라는 듯하는 놈도 오고, 된서리
에 까부라진 풋것 같은 놈도 온다. 부자가 나란히 오는 경우도 있으니 모녀가
나란히 오는 경우가 없을 리 없다. <세계화>라는 것이 되고부터는 아메리카에
서도 오고 유럽에서도 오고 중국에서도 오고 러시아에서도 온다. 그분은 그것을
<온 세계가 다 온다>고 한다. 유럽 사는 제자로부터, 알프스 산도 구경하실 겸
한번 다녀가시라는 전화를 받고 그분은 짐짓 이렇게 호통을 친 적도 있다고 한
다.
“알프스가 어디 가는 걸 보았느냐?”
내가 타관 사람들에게 그분 얘기를 하면 공자님 같은 도덕군자를 더러 떠올리
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그는 공자님처럼 완벽한, 혹은 완벽에 가까운 분이 아
니다.
그분 과수원에는 금기가 몇 가지 있다. 마시고 취하되 미취해야지 만취해서는
안 되는 것도 그 중의 하나다. 과수원은 혼자서 만취하도록 마시는 데가 아니라
여럿이서 미취하는 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만취한 꼴을 보이고도 꾸중받이를 면한 적이 있다.
10여 년 전, 만취한 채 아름드리 감나무 밑으로 숨어들어 감나무 껴안고 소피
보다가, 그 감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오
줌 방울이 그분 옷에 튀었을 텐데도 나는 꾸중을 듣지 않았다. 마침 그가 감나
무를 등지고 우리몰래 담배를 한 대 피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이런 종류의 비밀이 꽤 있다. 그는 나뿐만 아
니라 다른 동창과도 이 비슷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모순이다. 그러나 그 모순은 추하지 않다. 그 모순에서 내가 일모 선생이
라고 부르는 사람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는 도둑 담배를 피운 것이니, 담배에 관한 한, 사제간의 처하는 입장이 그렇
게 공교롭게 뒤바뀌기도 참 어려울 게다. 그는 반세기 동안이나 피던 담배를 하
루아침에 끊은 것으로 유명한 분, 끊었다가는 다시 피우고 버릇될 만하면 다시
끊어버리기로 유명한 분이다. 끊을 때는 끊는 이유가 있다.
“애연 없는 데 금연 없고 집착 없는 데 해탈 없다”
다시 피울 때는 다시 피우는 이유가 있다.
“사나이에게는, 담배라도 피우고 있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는 법이다. 내 말
이 아니다. 한 왜인의 말인데, 쓸 만하지 않은가”
그분을 두고 말로써 장난을 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면 그분은
이렇게 응수하실 것 같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 뜨거운 국 마실 때도 후후 불고, 시
려서 손 곱을 때도 호호 불고 하잖은가?”
경산 다녀온 것은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 없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나의 경산
방문은 내 일생일대의 사건에 속한다.
나는 지금 그 일을 얘기하고자 한다.
일모 선생은 과수원 일을 하다가, 빤질빤질한 정수리에 물 묻은 사과나무 잎
한 장을 붙인 채로 나를 맞아주었다. <빤질빤질한 정수리>라고 썼는데, 스승을
묘사하는 말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정수리는 빤질빤질했다. 내 손
으로 정수리의 사과나무 잎을 떼고 그를 모셔들인 객사 사랑방은, 초록 일색인
화창한 과수원 풍경에 견주어져서 그럴 테지만 내게는 유난히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절해서 뵙고 물러앉으니, 편히 앉으라는 말도 없이 불쑥 이랬다.
“그래, 이 복중에 미국에서 날아들어와 똥서방을 차렸다며...”
“...”
“나의 불찰이다. 내가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 것인데...”
“걱정 끼쳐드리게 되어서 여러 가지로 송구스럽습니다”
나는 얼굴에 표정으로 떠올랐을 터인, 내가 받은 상처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
다. 성인군자 흉내를 내기에 내 상처는 너무 깊었다. 내 안에서 가시 돋친 무수
한 말들이 벌떼처럼 붕붕거리며 이따금씩 내 가슴 안쪽을 쏘아대면서 토해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흉칙한 말들을 생짜로 쏟아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술이 필요한가?”
“선생님 일 하시는데...”
“큰 공부가 되었을 것이다. 어디 조금만 들어보자. 사연을 들어보면 내게도
좋은 공부가 될 테지”
“아직도 방 안에서 구린내가 등천을 합니다”
“우상화해서도 안 되지만 똥뒷간에다 처박아둘 물건도 아닌 것이 책이기는
하다. 이 시대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아서 나도 가슴이 아프다만 사람이 어찌
다 같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사는 것이거니, 여겨라. 내가 바란다
”
“선생님, 저도 선비 축에 들겠습니까?”
“찡<(증)>이 없어서 크게 쓰이지 못하니 선비 자격은 고루 갖추었다고 봐야
지”
“그렇다면 선비가 많이 다쳤습니다”
“그것은 자네의 이기심 때문이기가 쉽다. 미투리방망이 그 사람에게 책은 그
냥 물건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책을 우상화하는 버릇이 있고...”
일모 선생은 당신의 애제자인 하 사장을 미투리방망이라고 부른다. 그의 설명
에 따르면 미투리는 삼 껍질을 꼬아 껍질처럼 삼은 마혜, 또는 승혜이고, 미투리
방망이는 여섯 개의 날에다 삼실을 걸어 육날
미투리를 삼을 때 결이 조곤조곤해지도록 두드리는 데 쓰이는 조그만 대추나무
방망이다. 그가 애제자 하 사장을 빤질빤질하게 닿은 단단한 미투리방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 사장이 경제에 관한 한 사람이 더없이 야물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 사장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미투리방망이
였다. 그 말 처음 듣는 날 나는, 미투리방망이가 제아무리 단단한들 기껏해야 집
신밖에 더 만듭니까, 하고 대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면 그 양반에게 무엇이 여느 물건 아닙니까?”
“돈일 테지. 섭섭한 심정, 나는 알기는 하겠다만 자네 섭섭한 심정의 토로가
그 사람에게 또한 사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살자”
“...”
내가 일모 선생으로부터 하 사장을 소개받은 것은 1년 전, 미국에서 일시 귀
국해서 두 달 계획으로 서울에서 머물면서 책을 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서울로
돌아와 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책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가 서울의 내 서고
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5년간 머물 계획을 세우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전세금을 받고 내가 살던 아파
트를 남에게 빌려준 것은 그로부터 3년 전의 일이다. 아파트 전부를 빌려줄 수
는 없었다. 요긴하지 않은 살림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근 30년 동
안 모아들인 책은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세금을 받고 빌려주되,
방 한 칸은 서고로 쓴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
라고 서재로는 쓸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책을 좋아하는 입주자가 있었다. 입주
자는 세 칸의 방 중에서 방 하나를 서고로 쓴다는 것을 양해했고 나는 내 책에
대한 그들의 무제한적 접근을 양해했다. 나는 나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고
내 집을 빌린 사람은 졸지에 5천여 권에 이르는 장서를 확보했으니 자기야말로
행운아라고 했다.
서울에 들어와 있을 당시, 당연한 일이지만 서울에는 내가 머물 데가 없었다.
출간일자에 쫓기고 있던 나는 내 서고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다 서울 변두리
의, 숙박비가 싼 호텔에 머물면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영 성묘와 과수원 방문의 나의 귀국 스케줄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그 해에
도 잠깐 뵈러 내려간 나에게 일모 선생은 호텔 생활이 불편하지 않느냐면서 마
음을 써주시었다. 그때 나는 호텔 생활의 어려움을 버르장머리없이 약간 과장해
서 털어놓았던 것 같다.
“마구니(마군) 사이에서 뭘 쓴다고 밤을 밝히고 있자니, 이런 공부가 다시 없
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호텔인지 세상에, 옆방의 사워 물 소리, 좌변기 물 내
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은 물론, 새벽녘이 되면 심지어 성냥 긋는 소리까지도
들립니다”
“자네가 말을 많이 참네 그려”
“네...”
“자네가 늙도 젊도 않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거 참 많이 민망하고 고단하겠구
나. 글쓰는 시간대를 바꾸어보지 않고?”
“저에게는, 낮에는 글 한줄도 쓰지 못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음악가들은 듣기 싫은 소리 한 듣고 싶으면 소련제 귀마개를 쓴다더라만...
”
“한번 견뎌볼 작성을 했습니다만, 하루는 프런트에 내려가 옆방의 교성 안
들리는 방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벨보이라는 녀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을 하
라는 것입니다”
“잘 되지 않았나? 그러면 방을 옮기지 않고?”
“방이 아니고요 여자가 필요하면 말을 하라는 것이지요. 가까이 있는 음식점
주인 말에 따르면, 유녀가 상주하지 않는다뿐이지, 유곽이나 다를 바가 없는 호
텔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 같은 뜨내기가 들면 비어 있는 옆방에
서 녹음기를 틀어 뜨내기 귀에 교성이 들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해괴하네”
“그러니까 부러 옆방까지 그 소리가 들리게 함으로써 나그네 심사를 뒤틀고
이로써 유녀를 판촉한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공부 단단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도화원에서 책 한권 써내는 데 성공하면, 선생님, 칭찬 좀 해주시겠지요”
“자네가 한창 나이는 아니지만 장히 걱정스럽네”
“<보왕삼매론>은 공부하는 데 장애물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만, 참
힘이 많이 듭니다”
점심을 그 댁에서 먹었는데 일모 선생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
더니, 작별 인사를 드릴 때가 되자 불쑥 이런 말씀을 내어놓으셨다.
“자네가 시방 하고 있는 일, 경주에서도 할 수 있는가?”
“자료 준비가 끝난만큼 국내라면 어디든 괜찮습니다만...”
“공부하는 김에 고부 같은 공부 한번 해보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경주에 말일세, 조그만 호텔 하는 내 제자가 있네, 내 제자라고는 하나 젊은
시절의 제자라서 사실은 환갑을 지낸 중늙은이기는 하지만... 하 사장이라고... 내
가 조금 전에 전화를 걸어서 의향을 물어보았더니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고 하네
”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그냥은 싫습니다”
“하 사장, 이자의 별명은 무엇인고 하면 미투리방망이야. 대추나무 방망이 같
은 친구인데... 좋게 말하면 야문 사람이고 아주 싸가지 없게 말하면 수전노라고
해도 안 미안해. 그러니 그냥은 안 빌려줄 터... 그러니까 이렇게 하세. 내가 말
했으니 싼값에 빌려주기는 할 거라. 우리 운담 프로그램이 자네의 숙박비를 지
원하기로 하지. 자네는 재외학자에 속하는 만큼 자격은 충분하네. 그 대신, 자네
가 나에게 지원액수를 물어보아서는 안 되네. 이 일은 자네와 나 사이의 비밀로
해야 하고...”
망설여지기는 했다. 하지만 장학금이라고 하는 것은 제 손으로 신청해서 타내
기도 하는 물건 아니던가? 형편이 많이 구차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에
서의 호텔 장기 투숙과 매식에 들어가는 비용은 실로 만만하지 않았다.
“공부 같은 공부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아, 그거? 이런 말, 내가 미리 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하 사장이라는 친구,
위인이 야문데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외눈박이라...”
“외눈박이라면요? 물리적인 외눈박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고요? 외통배
기라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무엇에 외눈박이인지 자네가 어디 한번 가서 확인해 보게만 내가 한마디만
귀띔해 주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병든 아버지 약지으러 약방에 들어갔다가는
빈손으로 그냥 왔더라네. 그 아내가 어찌 그냥 왔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의
원이라는 자가 상복을 입고 있더라. 필시 어미 아니면 아비가 세상을 떠난 모양
인데, 그자가 용한 의원이라면 어찌 제 부모를 잃고 상복을 입고 있을 것인가>
하더라네. 마침내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번에는 묏자리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이번에는 지관을 찾아갔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또 빈손으
로 나왔더라네. 그 아내가 어찌 그냥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지관이라
는 자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사는데 끼니도 제대로 챙기는 것 같지 않더라.
제놈이 제대로 된 지관이 못 되니까 제 조상 무덤 자리를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당대 발복의 은덕을 입지 못했을 거시 아닌가, 그래서 그냥 왔
다> 하더라네. 어찌보면 하 사장이라는 위인, 이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지. 그래
서 내가 외눈박이라고 한 걸세”
“정보를 외통으로만 받아들인다는 말씀이신지요?”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네만...”
“프로그램의 지원금은 귀국한 뒤에 특별 출연으로 변제하겠습니다”
“더욱 좋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경주의 호텔로 당장 필요한 책 백
여 권만 책짐을 꾸려 보냈다.
하 사장의 호텔 <에스페랑스>는 경주의 많은 공공건물과 비슷한, 기와를 얹
은 순 한식 2층 건물이다. 투숙객의 대부분은, 김포로 들어와 서울에서 내려오는
서양의 배낭 여행자, 페리 호에서 상륙해서 부산에서 올라오는 일본의 배낭 여
행자들이다. 따라서 숙박비는 서울의 쓸 만한 여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을 자주 대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내국인에 대한 하 사장
의 평가는 절망적이었다. 하 사장은 프런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을 내
게 배정해 주었다. 앞을 지나다니는 손님들의 발자국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는
방이었다. 나는 운담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지원하느냐고 물었지만 하 사장은 빙
그레 웃을 뿐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출입구에 매달려 있는, <시간 손님 사절>이라는 퍽 도덕적인 표지가 인상적
이었다.
꽤 많은 종류의 위인전을 읽은 보람으로 이 세상에는 좋은 의미에서의 기인편
객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잘 알고 있어서 알게 된 사람들이지 내가 직접 접해
본 사람들은 아니다. 내가 접해 본 이들 중에서 그 품성이 가장 기이했던 두 분
을 꼽는다면 일모 선생과 에스페랑스 하 사장이 아닐까 싶다. 전자는 전폭적으
로 긍정하는 의미에서, 후자는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 사장이 20년째 경영하고 있다는 호텔 에스페랑스에서의 생활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하 사장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었다. 해방되던 당시
소학교 2학년이었다니까 일제 시대의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 사장의 일본 말은, 일본 말에 능하지 못한 내 귀에는 거
의 일본인이 하는 일본 말로 들렸다. 하지만 소학교 2학년까지 일본어가 상용
언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어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다.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그의 영어 구사 능력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은커녕, 고등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이나 미국과 관련이 있는 업종에 종사한 경험
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어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20년 전 부산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경주에 있는 <희망여관>을 인수,
이것을 일류 호텔스럽게 <호텔 에스페랑스>로 신장 개업한 뒤부터는 영어 회화
테이프가 든 녹음기의 리시버를 귀에 꽂은 채로 산다고 설명하기는 했다. 하지
만 그가 구사하는 정확한 발음과 풍부한 어휘는 마흔 살이 넘어서 시작한 영어
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간단한 일상 회화나 수사일 경우, 불어, 독어, 이
태리어까지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문법이 다소 수상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그의
실력은 독일어로, 호텔에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터미널까지 갈 수 있는지, 몇 번
창구 앞에 서야 대구행 차표를 끊을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
에서 오는 중국인 여행자는 거의 없지만 본격적으로 오게 되는 날에는 중국어
회화도 시작하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주의 기차역에서 내려 호텔 에스페랑스를 찾아들어가던 날 나는 빈손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정육점에 들러 고기나 몇 근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정
육점>은 없고 <식육점>만 있었다. 경주에서는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나는 <식육점> 간판이 걸린 고깃간으로 들어가 가장 부드러운 고기를 주문했
다. 내가 찾아들어간 식육점 안주인은, 시골 사람들이 이 경우 거의 그러듯이,
어느 집 찾아가는 손님이냐고 물었다.
내가 에스페랑스 호텔의 하 사장을 찾아간다고 대답하자 안주인이 칼질하면서
중얼거렸다.
“자린곱쟁이 하 영감, 오늘 고기 먹겠네”
내가, 하 사장이 구두쇠냐고 묻자 안주인은 하 사장과는 어떻게 되느냐고 되
물었다. 친척은 아니고, 소개받고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안주인은 고개
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말도 마시이소. 지난 20년 세월을, 손님들이 버리고 간 운동화만 빨아 신고
살았다 카디더. 외국 손님들이 놓고 간 우산을 모아두었다가 정기적으로 팔아서
정기 적금 드는 사람이라 카디더. 고기 사먹을 돈이 아까우니까, 소돼지 같은 짐
승이 죽으면서 독을 얼마나 품고 죽는데 그 독이 배어 있는 고기를 먹느냐고 떠
들어댄다 카디더. 20년 동안 우리 식육점에 두 번 왔니더”
“다른 단골이 있는 게지요?
“지난 20년 동안 그 집에서 일한 여자가 내 재종 동생일시더”
나는 호텔 뒤에 있는 살림채에서 하 사장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서울에서
부터 미리 준비해 간 고급 위스키 한 병과 식육점에서 산 쇠고기를 내어놓았다.
나는 물론 쇠고기 굽고 위스키 곁들이는 훌륭한 저녁 식사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가를 확인하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사장은 캐비닛을 열고 내가 선사한 위스키를 그 안에 넣고는 문을 닫았다.
캐비닛 안에는 고급 술이 박스째로 여러 병 들어 있었다.
“나는 십만 원짜리로 백만 원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오. 이 촌동네에
서 고급 위스키만한 특효약은 또 없지요. 나는 고급 술 한 병을 제대로 이용하
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하 사장의 이 한마디부터가 내 귀에 고깝게 들렸다. 고급 술 한 병을 제대로
이용하는 법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한, 화기애애한 분위
기를 지어내면서 그것을 함께 마시는 것, 이것이 고급 술 한 병을 제대로 이용
하는 법이었다.
“술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환영하는 의미에서 내 술을 한잔 드리지요. 나는 손님과 술을 나누되 딱 한
잔 이상은 나누지 않는 주의랍니다”
일모 선생 덕분에 융숭한 대접이라도 받을 줄 알고 잇던 나에게 <손님>이라
는 말이 다소 귀에 설게 들리기는 했다. 그는 캐비닛을 열고는 생체 표본 저장
하는 데 쓰일 법한 커다란 유리병을 들이내었다. 유리병 속에는 식물이 허연
뿌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 사장이 그 유리병 뚜껑을 열자 인삼주 냄새가 났
다. 그는 작은 유리잔을 집어넣어 딱 두 잔을 따라내면서 설명했다.
“미삼이오. 인삼 드링크 만드는 공장 사람으로부터 공짜로 얻어오다시피 한
물건이에요. 공장에서는 한번 우려낸 것이라고 버리다시피 하는 물건이고... 소주
를 부어 한 5년 우려낸 것인데, 외국인들은 동양의 신비 어쩌고 하면서 감질들
을 내지요”
나는 눈알만한 잔으로 그 가짜 인삼주 한잔을 얻어먹고는 살림채에서 쫓겨나
다시피했다. 밤이 되어도 살림채에서는 쇠고기 냄새가 풍겨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에 나는 국산 위스키 한 병 사들고 들어와 혼자서 조촐한 입주 기념식을 했
다.
내가 이 세상에 아직도 15촉짜리 전구가 잇다는 것을 안 것도 호텔 에스페랑
스에서다. 방에 딸려 있는 화장실 조명이 너무 어두워 변기에 앉은 채로 책 읽
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면도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전구
를 뽑아 보니 15와트 짜리였다. 나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상점에서 100
와트짜리를 사다 갈아끼웠다. 하지만 청소부가 보고했던 모양인지, 하 사장은 특
별히 봐준다면서 손수 30와트를 가져다 끼워주었다. 60와트로 절충을 시도하자
하 사장은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것은 왜요, 하고 내가 물었다. 그
는, 호롱불 켜놓고 살던 시절을 생각하자고 했다.
외국인 전용이다시피 한 객실 20개짜리 호텔의 상근 직원이 하 사장 자신과
청소부 한 사람뿐이라는 것도 내게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
면 둘 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호텔에는 자원 봉사자들이면서도 제복 차림으로
일을 거드는 대학생 둘이 더 있었다. 하 사장은, 외국인 투숙객의 심부름도 하고
가이드도 하면서 외국어 익히는 재미로 호텔에서 무료 봉사하는 두 대학생을 하
인처럼 부려먹으면서도, 다음부터는 영어 회화 연습료로 한달에 30만 원씩 낼
수 있는 대학생만 자원 봉사자로 뽑겠다는 생색을 냄으로써 무료 봉사하는 대학
생들을 매우 초조하게 만들고는 했다. 하 사장은 무료 봉사하는 대학생들에게,
일본어과 학생 하나가 일본에서 온 여대생의 경주 관광 가이드를 하다가 정이
들어 결혼에 성공함으로써 효고켄 지주의 사위가 된 사건을 간간이 들려주는 것
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 사장이 나를 뭐라고 소개했는지 밤이면 외국인 손님
들이 맥주를 사들고 내 방을 기웃거리고는 했다. 내 방은 오래지 않아 호텔 에
스페랑스의 홍보실이 되었다. 외국인 전용 호텔을 기웃거리는 외사계 형사들은
내가 산 맥주를 마시면서도 나에 대한 직업적인 호기심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
았다.
하 사장은 무서운 환경보호주의자, 철저한 재활용주의자였다. 식육점 안주인의
말 그대로였다. 호텔의 창고에는 외국 손님들이 유기했거나 잊어버리고 간 무수
한 우산, 운동화, 슬리퍼, 옷가지, 모자 등속이 연도별로, 월별로 정리되어 있었
다. 그는 2년간 보관했다가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깨끗이 손지해서 팔거나 다
른 사람에게 넘겨준다고 했다.
안채 살림집에 사는 그의 아내는 남편의 엄명에 따라 냅킨, 키친타월 같은 일
회용품은 쓸 수 없었다. 반드시 젖은 행주나 마른 행주만 써야 했다. 손님들이
버리고 간 종이잔이나 종이접시는 몇 번이 되었든, 부서질 때까지 씻어서 쓰기
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객실의 침대보를 걷어와 세탁기에다 넣고 돌리는 사람은 그의 아내나 청소부
지만, 세탁기 옆에 잇는 상자의 자물쇠를 따고 세제를 정확하게 계량해서 퍼내
어주는 사람은 하 사장이었다. 과연 그는 미투리방망이였다. 부엌 세제도 허용되
어 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밀가루를 풀었는지 석회를 풀었는지 희뿌연 자가
제조 세제로 그릇을 닦으면서 나에게, 강물은 맑아질지 몰라도 마누라는 죽어난
다고 푸념하고는 했다.
객실의 양변기 물통 속에는, 하 사장이 철거 현장에서 주워온 벽돌이 두 개씩
들어 있었다. 호텔 에스페랑스는 이로써 하루에만 60리터의 물을 절약하고 있다
고 했지만, 식육점 안주인의 재종 동생이라는 청소부는 이 때문에 변기 청소하
기가 힘들다고 죽는 소리를 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 하나는 하 사장을 좋게 말하지 않았다. 한 1주일 가량 낯
을 익히게 되었을 때 그 대학생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하 사장님과 함께 일본인 관광객 둘 데리고 안압지에 놀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왜 따라갔느냐고요? 짐이 무거웠거든요. 하 사장님은 절대로 매
식 안 해요.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안압지에 있는 매점 앞으로 가더라고요.
하 사장은 매점 앞 의자에다 우리를 앉혀두고는 매점 안으로 들어가십디다. 제
가 속으로, 하 사장님이 매점에서 빈손으로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점원이 매점
안에 없었던 모양이에요. 하 사장이 손짓하는 쪽을 보니까 점원이 매점에서 한
3백 미터 있는 곳에서 자전거를 손보고 있다가 매점 쪽으로 막 뛰어오는 겁니
다. 점원이 숨을 고르면서 하 사장님께, 뭘 드릴까요, 하더군요. 하 사장님이 뭐
라고 했는지 아세요?”
“...”
“<야야, 병따개 좀 빌려도고. 콜라는 가지고 왔는데 병따개 가져오는 걸 잊
었구나>”
하 사장의 하루 일과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정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각은, 환갑 노인으로는 조금 늦은 아침 7시다. 밤
늦게까지 자기 호텔을 찾아들어오는 외국인 손님들을 받고, 새벽 1시에 아크릴
간판의 불을 끈 뒤에야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그는 아침에 네 가지 운동을 한다.
맨 먼저 하는 죽도 휘두르기는 혹 호텔에 침입할지도 모르는 강도의 머리를,
항상 그의 곁에 있는 40센티미터 길이의 미국제 맬클라이트 손전등으로 정확하
게 가격하기 위한 운동이다.
노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샌드백치기는 근접거리에서 맞닥뜨린 강도를,
라이트 잽과 레프트 잽에 이어 라이트 훅으로 때려눕히기 위한 운동이다.
또 하나 그가 자주 하는 운동은 이른바 <맥짚기>다.
호텔 뒤뜰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둥치에는 50여 개의 흰 점이 찍혀 있다.
그는 이 은행나무를 등지고 서서 한동안 숨을 고르고 기를 모은다. 그러다가 휙
돌아서면서 손가락 끝으로 서너 개의 흰 페인트 자국을 팍팍팍 차례로 찍는데
그 세기와 정확도가 상당해 보였다. 나는 한동안 설명을 듣고서야 그가 말하는
<맥짚기>가 급소 누르기라는 것을 알았다. 손전등도 가까이 없고, 라이트 훅으
로도 제압이 안 되는 적은 바로 이 맥짚기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
다.
그는 엎드려 팔굽혀펴기는 자그마치 60회나 할 수 있었다. 그냥 굽히기 펴기
가 심심했던지, 이따금씩은 팔을 폈다가 다시 굽히기 전에 손뼉을 한 차례씩 치
는 묘기도 보여주고는 했다. 하 사장의 체력이나 그 체력을 단련하는 끈기가 부
럽기는 했지만, 주위 사람들을 모두 도둑이나 강도로 일단 간주하고 보는 태도
는 조금 언짢았다.
운동이 끝나면 2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다는 냉수욕을 하고 조반을
드는데, 조반은 늘 두 쪽의 떡과 한 접시의 과일이다. 그는, 전날 술을 마심으로
써 위장을 혹사한 사람만이 아침에 시원한 국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간
단한 조반을 들고 나서는 청소부와 함께 객실 청소를 시작하는데, 객실이 비는
순서대로 청소를 마치면 정오가 된다. 진공 청소기 같은 것은 <없다>. 청소부는
이 점이 불편해서 몇 년 동안이나 청소기를 요구하지만 하 사장은 꿈쩍도 않는
다. 빗자루와 쓰레받기와 먼지털이... 2천원이면 뒤집어쓴다는 이유에서다.
점심상에 오르는 것은 이른바 정규 식단과 건강식이다. 이 건강식은 유행에
지극히 민감하다. 매스컴이, 콩이 좋다고 할 때는 콩, 케일이 좋다고 할 때는 케
일이 오른다. 알로에가 좋다고 할때는 알로에가 오르고 북어가 공해에 대한 면
역성을 강화한다고 할 때는 황태국이 오른다.
프런트 바로 뒤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그만을 위한 소형 냉장고가 따로 있
다. 냉장고 안에는 생콩가루, 송홧가루, 들깨가루 등속의 건강식이 든 병이 깔끔
하게 정돈되어 있다. 신문과 방송이, 적포도주가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보도한 뒤부터는 술을 멀리하던 그도 포도주를 반주로 한잔씩 들고는 한다.
그는, 공해 식품을 생산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농부들을 증오한다. 그는
공해 식품을 판매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시장의 장사치들을 증오한다. 그
가 아는 한, 그의 채마밭에서 생산되지 않는 모든 식품, 그의 소형 냉장고 밖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식품은 공해 식품이다. 이것이 그가 절대로 외식을 하지
않는 소이다.
나는 딱 두 번 그를 데리고 나가 공해 식품은 입에 대지 않는지 시험해 보았
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그에게는 공해 식품이라도 값을 자기 주머니에서 치르
지 않으면 좋은 공해 식품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 3시가 되면 뜀박질에 나선다. 1분의 오차도 없다. 미리 준비하고 시계를
보고 있다가 시침과 분침이 직각이 되면 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뜀박질에 나설 때마다 그는 목걸이를 하나 찬다. 목걸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씌어 있다.
<이 사람이 교통 사고를 당하면 다음 순서되로 열락을 취해주시압.
첫째, 호텔 에스페랑스, 전화 경주 72-34XX, 이 번호에 사람이 없을 시에는
내 아우 하순호, 경주 72-56XX, 그래도 통화가 안 될 시에는 내 아들 하정섭,
대구, 지역번호 (053) 734-45XX. 그러면 후사하겟습니다.>
그에게 호텔 바깥은, 뺑소니 운전자가 난무하는 지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뜀박질에 나설 때마다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 뛴다. 말하자면 뛰면서도 외
국어 듣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이어폰 귀에다 꽂고 뛰지 않도
록 만류했지만 그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듣지 않았다. 시간과 돈의 절약에 대한
그의 병적인 집착은 종종 나를 안타깝게 만들고는 했다.
그가 삶을 참 어렵게 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뜀박질, 외국어 듣기 연습, 교통 지옥 헤쳐가기는 상호 모순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가 교통 사고의 위험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은 비만인 것 같았
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상호 모순되어 보였다. 그는 연세가 많은 데다가 섭취하는
동물성 단백질이 거의 없어서 비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목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목걸이를 차고 차도로 나섰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언젠가 그 전투적인 6킬로미터 뜀박질을 그만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체중과, 뛸 때의 일시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60년 동안이나 써온 그의 다리의
정강이가 바깥쪽으로 심하게 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 시계를 본다. 그가 정확하게 3시
에 호텔을 떠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였
다. 뜀박질에서 돌아오는 시각은 정확하게 4시 30분. 다시 한번 냉수욕을 한다.
그가 심한 건성 습진에 시달리는 것은 지나치게 잦은 목욕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5시에는, 집안에서 하는 외국어 공부가 시작된다. 병적인 절약가인 그도 외국
어 공부에는 꽤 많은 돈을 쓰는 것 같다. 그에게는 외국어 공부에 전용되는
VCR과 모니터, 녹음기, CD 플레이어 등속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아내가 녹화
해 둔 교육방송의 외국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도 이때다. 그의 집무실에는
영어, 불어, 독어 테이프가 서가 하나를 채우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중국어
테이프가 보이지 시작했어요, 하고 온몸으로 자원 봉사하는 대학생은 말했다.
7시 40분에는 소형 야마하 전자 오르간 연주를 시작한다. 왼손을 쓸 줄을 몰
라서 오른쪽 손으로만 연주한다. 그의 연주 곡목에는 흘러간 옛노래와 일본의
유행가가 포함되어 있다. 박자 같은 것은 쥐뿔이다. 쉼표 들어가 있는 부분에서
는 같은 키를 4분의 1박자 속도로 연속으로 누른다.
8시가 가까워지면 그의 아내가 저녁상을 집무실로 들고 들어간다. 그의 아내
는 시간 요량을 잘하지 못해 7시 50분에 저녁상을 들고 들어갈 경우에는, 남편
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10분을 기다려야 한다. 8시 정각이 되기 전에
그가 오르간 연습을 마치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는, 침을 삼키며 기다리는 아내
를 위해 한 1분쯤 당겨서 연습을 끝내어 주는 이심 같은 것을 절대로 베풀어주
지 않는다. 환갑이 다 된 아내는 아미를 나직이 한 채 밥상 앞에 앉아 기다리면
서 눈물을 보일 때도 있다.
식사 후에는 본격적인 손님받기가 시작된다. 헛짓하러 들어오는 <시간 손님>
이 싸개를 맞거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스무 개의 객실은 외국인
에게 우선 배정된다. 대개의 경우, 내국인 손님들은 퇴짜를 맞는다. 내국인들은
방을 지저분하게 쓰고,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굴고, 이것저것 심부름
이나 시키려 들고, 물과 전기를 아낄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 손님이 뜸할 경우 방을 비워둘 수는 없다. 그래서 9시부터 하
사장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되도록이면 많은 외국인으로 채우되, 빈방이 생길
경우에는 10시부터 내국인도 슬슬 받기 시작하는, 말하자면 내국인으로 빈방을
채우는 타이밍을 절묘하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타이밍을 잡는 노하우는
하 사장의 경영 비법이다. 하지만 이 경영 비법은 새벽 1시까지만 유효하다. 새
벽 1시가 되면 하 사장은 문을 잠그고 잠자리에 든다. 이 시각이 지나면 <경주
시장이 와도 텍도 없다>.
하루는, 국문과 교수인 내 친구 하나가 경주에 세미나 참석차 서울에서 내려
왔다가 나에게 연락을 취한 적이 있다. 친구는 나와 밖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는
혼자 밤차로 상경했다.
친구와 함께 술 한잔 마시고 들어온 나에게 하 사장이 물었다.
그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만 보고는 나에게 예대하다가 내 나이를 알고
부터는 칼로 자르듯이 이 서방, 이 서방 해가면서 하게를 했다. 이 서방이라는
말이 비칭에 가깝기는 하지만 경상도에서는 이물없는 호칭으로 자주 쓰이고는
했다. 옛날 식으로 족보를 따지자면 그와 나는 한 스승을 모신 사이, 따라서 내
가 그의 사제가 되는 만큼 그런 것으로 기분 상해할 일은 아니었다.
“친구분, 어떤 분이신가?”
“공부를 참 많이 한 분이지요. 지금도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요. 직업이 교수
이기는 합니다만 저 나이 되기까지 줄기차게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친구가 졸업한, 서울에서는 일류 축에 들지 못하는
아무개 대학의 이름을 대었다.
“에이, 머리가 나쁜 사람이구먼”
“네?”
“머리가 나쁜 양반이라고...”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요?”
“에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서울대학을 나왔지 그 대학을 나왔을 턱이
있나? 머리 나쁜 양반이 공부한다고 고생을 많이 하겠어”
“머리가 나쁜 게 아니고,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니느라고,
아니면 대학 입학 시험과는 무관한 소설책 같은 걸 읽느라고 공부를 많이 못했
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지금은 어느 대학 교수인가?”
“모교에 남았는데 왜요?”
“거 보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면 대학은 비록 삼류 대학을 나와도 교수
질은 일류 대학에서 할 것 아니겠느냐고?”
여기서부터는 나도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럼 어느 대학 나왔
소, 하는 소리가 입가를 맴돌았지만 꾹 참았다. 하 사장 성미 건드려 득될 것이
없다 싶어서였다.
“아니, 하 사장님, 삼류 대학 나온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요? 삼류 대
학 교수는 모두 머리가 나쁜 사람인가요?”
“나는 그렇다고 봐”
“그렇지가 않아요. 세상에는 문리가 일찍 트이는 사람이 있고 늦게 트이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대학은 4년 동안만 가르치고는 내보내는 데 아닌가요?
하지만 공부는 평생을 하는 것이지요. 서울대학을 나와도 공부에 게으르면 성취
가 없을 수도 있고, 삼류 대학을 나와도 공부 열심히 하면 큰 것을 성취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제 친구는 비록 그 대학을 나와 그 대학 강단에 서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대
학을 졸업하고도 근 30년간 피를 말리면서 공부한 사람이라고요“
“나는 통념을 말했을 뿐인데, 되게 섭섭해하네?”
“굉장히 섭섭한 통념이네요? 섭섭하지 않고요? 저도 서울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하 사장님도 서울대학 나온 분이 아니지요? 그렇다며 우리 둘 다 머
리가 나쁜 사람들인가요?”
“우리 때는 아무나 대학 가는 때가 아니었다네. 나는, 모르기는 하지만, 대학
을 갈 수 있었다면 서울대학 갔을 거라. 그리고 자네도 서울대학을 나오지 못했
다고는 하지만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걸 보면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못하지. 내가 영어 공부를 해봐서 알지만, 영어,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고”
“...”
이것이 그의 견줄 데 없이 명쾌한 결론이었다. 그에게 서울대학을 나오지 못
한 사람은 머리 나쁜 사람, 외국에 유학하지 못한 사람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바야흐로 일모 선생께서 말씀하시던 <공부 같은 공부>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해남 대흥사에 있던 내 친구 지명 스님이 경주로 전화를 걸었던 일이 있다.
지명 스님으로부터 어째 미국 있을 때보다 얼굴 보기 어려우냐는 푸념을 듣고
돌아서는데 뒤에 하 사장이 있었다. 내 말에 절집 사투리가 섞여 있는 것에 호
기심이 생겨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서방에게 스님 친구도 있었나?”
“스님뿐만 아니고요, 목사 친구도 있고 신부 친구도 있답니다.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 참 용기 있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우리 지명 스님, 참 공부를 착실히 쌓
아가는 사람이랍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어째 해남 대흥사에 있나? 서울 조계사에 있어야
지...”
“에이, 대흥사도 대찰이에요”
“그래도 중들의 중앙청은 역시 조계사 아닌가?”
“스님들에게 중앙청이 어디 있어요? 그거 싫다고 떠난 사람들인데”
“그래서 가짜가 많다고...”
“네?”
“책은 많이 썼는가?”
“책이라뇨?”
“스님들이 책 많이 쓰지 않나, 요즘?”
“에이, 지명 스님은 그런 거 안 써요”
“그러면 테레비에는 나와?”
“테레비에도 안 나와요. 지명 스님, 그런 거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라디오에는? 요새는 불교방송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생겼다는데?”
“나대는 스님이 아니라니까요”
“에이, 그러면 공부 많이 한 스님이 아니야”
“네?”
그는 내 인내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던 모양인가? 이유 없이 따귀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숨결을 가다듬었다.
“...여보게, 이 서방. 감천선갈이라는 옛말 아는가? 물 좋은 샘이 먼저 마른
다...”
“그것과는 다르죠”
“뭐가 달라?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스님이면 신문과 테레비와 라디오가 그
냥 두었을 리 없지 않겠나?”
나는, 정말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고,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그런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도 있어요. 이 세상에는 중생을 제도하는 스님도 있고 더
잘 제도할 수 있도록 그런 스님을 가르치는 스님도 있어요. 텔레비전 시청자나
라디오 청취자에게 적합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
갈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그것은 못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변명이야”
“저 같은 사람들이 말인가요?”
“그렇다면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 수 아래라는 말인가?”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열자 이야기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 불찰이었다.
“...열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이 양반이 산에서 백혼무인이라는 스
승을 모시고 공부하다가 공부가 좀 된 것 같아서 산을 내려왔답니다. 마을로 내
려와 주막에 들어서서 술과 밥을 시켰는데, 주모는, 기다리는 손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열자에게 먼저 술과 밥을 내어오더랍니다. 그래서 열자가 물었지요?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데, 왜 내게 먼저 가져다주는 것이오?
그러자 주모가 이러더랍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많이 한 어른 같아서 특별히 먼저 가져다 드리는 겁니
다...>
공부한 것이 얼굴에 비치는 것을 보니 아직 공부가 덜된 모양이다.
주모의 말을 들은 열자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산을 오르지요. 이런 공부
를 쌓아가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에이, 이 사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 열자 얘기 마침 잘했네. 열
자는 자네만 배운 것이 아닐세. 나도 일모 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
어서 배웠네. 내가 배운 열자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고. 열자의 선생
은 열자 집 앞까지 왔다가 섬돌에 신발이 여러 켤레 놓인 것을 보고는 돌아갔
네. 기어이 제 재주를 드러내고 말았구나, 하면서... 이 사람, 자네는 지금 테레비
나 라디오에서 인기 있는 교수나 스님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말본새인데, 열
자를 보게. 그렇게 공부했어도 결국은 그 공부한 것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집에 모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네, 열자 아는 것을 보니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말도 알겠구먼. 어서 공부해서 자네 주머니의 송곳
도 어디 한번 비어져 나오게 해보게. 그러면 테레비에서 라디오에서 부를 테니
까...”
“...”
“내가 아주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한때 절에 다닌 적이 있네.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한동안 다닌 적이 있네. 그러다가 중들이 밥버러지들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만두고 말았어. 시주 밥값을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
네 친구라는 그 중도 전라도에 처박혀 있지 말고 테레비나 라디오에 나와서 중
생 제도 좀 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갑값을 좀 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
냐고...”
“...”
마주 앉아서 이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나에게는 늘 <공부다운 공
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존경하던 국무총리가 골초라는 신문 가십을 읽고 하 사장이 혼란에 빠
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철저한 금연주의자인 하 사장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무조건 의지가 박약한 자라고 정의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그
에게 담배도 끊지 못하는 의지 박약한 인간이 국무총리가 되는 사태는 얼마나
황당했을 것인가? 그런 그에게, 일모 선생이 담배를 끊었다고 선언하고도 이따
금씩 한 대씩 몰래 피운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심한 소화 불량 증
세를 보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쓰던 방은 1층에 있는 10개의 객실 중 프런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
었다. 작업은 주로 야간에 하는 버릇 때문에,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심심찮게 생기고는 했다. 경주는 관광 도시여서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문을 열
어두는 가게가 많았다. 나는 일이 제대로 풀려나가지 않을 때면 밖으로 나가 포
장집도 기웃거려 보고, <소주창고>라는 이름이 다소 무지막지한 실내 포장집도
기웃거리고는 했다.
하지만 새벽 1시가 되면 하 사장이 정문을 잠가버리는 통에 이러기가 쉽지 않
았다. 따라서 밤나들이는 늦어도 새벽 1시에는 끝나야 했다.
다행히도 내 방 뒤에는 쪽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하 사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쪽문 열쇠를 넘겨줄 수 없겠느냐고 청을 넣어보았다. 그는 좋을 대로 하라면서
열쇠를 내게 넘겨주었다.
덕분에 나는 새벽 1시 이후에도 밤나들이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밤나들이는 하 사장이 새벽 2시에 내 방을 급습하는 사건과 함께
끝났다.
문제의 사건이 터진 밤, 포장마차에서 조금 길게 마신 술의 취기가 견디기 어
려워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설핏 잠이 드는 중인데 누군가가 주먹으로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돌아눕는
찰나, 문이 열렸다. 일어나 불을 켜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사장이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들어와 있었다. 내 방은 온돌방이어서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들어오는
데가 아니었다.
하 사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세요?”
“...”
“왜 그러시냐니까? 도둑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아닐세. 미안하네, 어서 자게”
나는 조금 난폭한 순찰에 걸려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지나가는 말로, 하 사장이 간밤에 <마스
터 키>로 내 문을 따고 들어왔는데, 더러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다.
청소부는 싱긋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불심 검문이죠, 뭐”
“불심 검문이라니? 주인이?”
“장기 투숙자들은 다 한번씩 당해요”
“세상에...”
“사장님이 실적을 올릴 때도 있대요”
“...”
“쪽문 열쇠 넘겨달라는 부탁, 하시는 게 아닌데 그랬어요. 한밤중에 살그머니
여자 데리고 들어와 자려고 그러는 줄 알았을 거예요”
그와 내가 사사건건 정면으로 부딪친 예는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신문 기사나 방송 보도에 대한 것만 해도 그렇다.
한번은 조기 유학생의 탈선 상황을 보도한 신문을 들고 나를 찾아와 시퍼렇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나는 신문 기획 기사의 방향이 그렇게 잡혔을 것이고 기자
의 시각이 그랬던 것일 뿐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명쾌했다.
“그러면 신문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신문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기획 기사의 방향이 이따금씩 사실과 다
를 때가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 많은 조기 유학생들이 탈선하는 사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특정 지역의 특수 사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도 비슷한 보도를 하던데, 그러면 방송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언론고시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나? 언론사
들어가기가 판검사 되기보다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게 어렵사리 언론사 들어가서
그러면 거짓 기사나 쓰고 있다는 말인가? 중앙 일간지는 서울대학 안 나오면 들
어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럼 서울대학 나와 신문 기자 된 사람들이 겨우 거짓
말이나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신문이나 방송에 대한 그의 믿음은 거의 맹신적이었다.
나는 어느 신문 기자로부터, 신문사 간의 경쟁이 극심해지고부터는 매일같이
다소 선정성이 있는 추측 기사를 쓰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게 되고, 실제로 몇
번은 그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다. 정론
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쟁사와의 관계와 자사의 형편 때문에 때로
는 추측 기사로 이해 당사자를 견제해야 할 때도 있다는 고백도 들은 적이 있
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 신문 기자의 고뇌에 찬 고백을 전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물을 그만의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만 읽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설
명을 길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어떤 사물로부터 뼈를 취하는 것도 살을 취
하는 것도 골수를 취하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사물에서 받은 자기의 인상만을
취해서 간직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되지 못하게도 사람이 살면서 하게 되는 생각에 민감해서 그랬던 것일
까?
그와의 대화는 시작되기가 무섭게 나에게는 하나씩의 상처가 되고는 했다.
돈에 관한 한, 천민 졸부가 극성을 부리는 이 시대를 위하여 겸박한 삶의 본
을 보이는, 희귀한 미덕의 소유자, 하지만 정신의 겨우, 어쩐지 단 하나의 잣대
로만 세계의 모습을 해석하는 듯한 모노코드 난수표의 소유자. 인식의 지평 넓
히기를 한사코 거절하는 사람, 자기의 인식 너머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용인하
기를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 당시의 내 메모에는, 하 사장에 대한 이런 인물평
이 적혀 있다.
탈고가 되어갈 즈음 나는 서울의 내 아파트에서 4년째 살고 있던 사람으로부
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딸이 자라 초등학교 상급학년이 되어 더 이상 한방에다
재울 수 없는 형편인만큼 서고를 다른 데로 옮겨 방을 비워주지 않으면 부득이
방이 세 개인 집으로 이사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미국에서의 스케줄 때문에 그 사람을 내보내고, 내 조건에 맞는 다른
사람을 구해 입주시킬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계산을 넣어보았다. 1년에
한두 차례씩 서울로 들어와 호텔에서 두어 달씩 묵는 비용의 곱절이면 하 사장
호텔의 방 하나를 1년쯤 장기 임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서울에 있는 책
을 모조리 실어내려와 호텔에다 서재라도 하나 꾸며놓으면 특정한 책이 책더미
에 들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꺼낼 수가 없어서 다시 하는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내가 하 사장을 천박한 수전노, 구제불능의 외눈박이로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무수한 상처를 경험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약점을 덮어줄 만한 강점 또한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 사장은 일모
선생의 애제자가 아니었어도, 검소하고 질박하게 사는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
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은 내 쪽의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하 사장에게 나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절충안을 내어놓았다.
“자네가 서재를 꾸며놓으면 1년 중 10개월은 빈방으로 있을 텐데, 이건 국가
적인 낭비야, 낭비. 그러니까 이렇게 하세. 내가 제일 큰 한식 방을 내어줄 테니
까 거기에다 서재를 만들게.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네. 자네가 와 있지 않을
동안, 성수기에 손님이 넘치면 그 방에도 손님을 들이기로 하겠네. 내국인은 절
대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네. 내국인은, 이물 없게 여겨서 그런지 남의 물건
에 손대는 것을 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거든. 내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인데, 유럽인과 유태인은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아. 그러니까 그
런 사람만 들이기로 약속하지.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 이것은 자네에게도 이익
이 될 것이네만, 우리 호텔방 사용료는 자네가 제안한 액수의 3분의 2만 받겠네
”
1년 전의 초여름 나는 서울에 있는 책을 경주로 실어내려 하 사장이 내려준
널찍한 방에다 서재를 꾸몄다. 20,30년 동안 낯익었던 내 책의 알락달락한 책등
을 5년 만에 재회하는 기분은 썩 괜찮은 것이었다. 나는 여러 권 가지런히 꽂힌
책의 책등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는 한다. 모르기는 하지만 책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심적 태도에는 책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말하자면 애정의 거품 같은 것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공을 들인 문제의 책이 출간된 것은 작년 8월 중순이다. 개학 날짜
인 9월 1일까지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로 나온 책 싸들
고 다니면서 그동안 지게 된 책빚을 갚는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밤 술자리로
이어지는 법이다. 몇 차례의 신문 및 잡지의 인터뷰에도 응해야 했다. 나는 등을
떠밀리며 참석한 내 책 출판 기념회 술자리의 숙취에 시달리면서 비행기에 오르
지 않으면 않되었다. 한 신문이 <배반낭자의 자리>라는 설명을 붙여 그 출판
기념회를 보도한 것이 화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나는 작년 가을과 겨울에도 올 봄에도 귀국할 짬을 낼
수 없었다. 가을과 겨울에는 학술 회의와 일련의 세미나 때문에 틈을 내기가 어
려웠고 올 봄에는 경주에 서재를 마련하면서 쓴 비용이 계속해서 부담이 되는
바람에 여유를 무질러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아주 영구 귀국하도
록 짜여진 일정도 내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었기가 쉽다.
그렇게 느긋하게 영구 귀국을 준비하는 중에 뜻밖에 전화를 받았다.
일모 선생의 아들인 내 동기동창생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무슨 모임이 있어서 경주 보문관광단지에 다녀왔다. 아버
님 당부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호텔 에스페랑스에 들러 하 사장도 만나보았다.
그런데 나는 호텔에 자네 서재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없어. 내가 하 사
장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무래도 방 그렇게 비우는 것이 낭비인 것 같아 박스에
다 책을 넣어서 창고에다 보관하고 있다고 하더라. 자네와의 약속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나? 어느 창고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는 확인하
지 못했다. 하 사장 분위기가 워낙 심상찮아서...”
나는 그제서야 그 동안 하 사장에게 전화로나마 안부 한번 여쭙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둘러 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공연히 그의 불편한
심사만 들쑤셔놓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어디에다 보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아는 한 호텔 창고에는, 5천 권이 넘는 내 책을 넣어둘만한 공간이 없었
다. 한 군데 짚이는 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하 사장에 대한 희망을 버리
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귀국 날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
는 영구 귀국을 석 달 앞두고 서둘러 일시 귀국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조그만 오피스텔을 하나 빌렸다.
내 아파트는 돌려받을 때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내 쪽에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가방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오피스텔 바닥에서
수건 한 장을 깔고 누워 나는 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텔 뒤의 살림채 옆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면 수도꼭지가
고장나는 바람에 오줌 버캐가 더께더께 앉은 누런 소변기가 하나 벽에 붙어 있
고, 문을 열면 수세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일본식 좌변기가 하나 있는 화장실
이었다. 살림채에서 하 사장이나 외사계 형사들과 술을 마시다가 살림채 화장실
이 내실과 너무 가까워서 부러 그 화장실을 이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늦여름에는 귀뚜라미가 바닥에 시커멓게 기어다니는 화장실이었다.
나는 그 화장실 냄새를 잊지 못한다.
지금도 내 곁에 있어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책을 넣은 상자는 그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종이 상자에 손을
대어보았다. 눅눅했다.
이삿짐 센터에 전화를 걸어 트럭과 인부들을 불렀다. 화장실의 습기를 빨아들
인 종이 상자가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운반 도중에 자주 터졌다고 했다. 나
는 책짐 싣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땅바닥에 떨어진 책을 트럭의 적재함 위로
던졌다. 눅눅해진 책에서 잘 썩은 똥구린내가 났다. 청소부가 내 곁으로 다가와
귀띔해 주었다.
“작년에 서울에서 무슨 기념회가 열렸다면서요? 거기 부르지 않았다고 화가
난 거래요”
오랫동안 화장실 습기를 빨아들인 내 책 중에서 판형이 큰 책 몇 권은 책꽂이
에 꽂차도 흐물거리는 바람에 홀로 서지도 못했다. 고급 아트 도판본은 책장이
서로 맞붙는 바람에 제대로 넘길수도 없었다.
홀로는 서지도 못할 정도로 습기를 빨아들인 몇 권의 책, 오줌 버캐에 절여진
듯 심하게 얼룩이 간 몇 권의 책은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나는 잠깐 링에서 싸우던 싸움을 중지하고 구석 자리로 돌아가 보아야 했다.
구석 자리에 놓인 코너 스툴로 돌아가 앉아 입 안에 고인 피도 좀 뱉고 물도 좀
마시고 싶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 싸움터의 치프 세컨드 일모 선생은 스툴에
다 나를 앉히고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트렁크 고무줄을 당겨 내 사타
구니에 바람도 넣어주고, 훈수도 해줄 터였다.
그래, 하 사장은 나쁜 놈이다. 자네가 드디어 하 사장 같은 인간의 정체를 읽
어내었구나, 또 하나의 숨은그림을 찾아내었구나...
나는 선생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 이 복중에 미국에서 날아들어와 똥서방을 차렸다며? 똥서방에겐 아무
래도 술이 한잔 필요하겠다”
잘 익은 똥구린내가 등천을 하는 서울의 오피스텔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바로
경산으로 내려간 나에게 일모 선생이 하신 말씀이다. 그분 외아들인 내 동기동
창이 술을 내어왔다.
“똥서방이 화가 몹시 난 모양이다. 오리도 오늘 일 작파하고 이 똥서방을 위
로하자... 능금 농사가 사람 농사만 할까...”
일모 선생이,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서려는 아들을 눌러앉히면서 말을 이었다.
“...공부 같은 공부가 안 된 모양이네? 공부가 잘된 사람 눈에서 눈물이 비칠
리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자네는 선비 대접을 이렇게 하는 세상을 원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가?”
“좀 그렇습니다”
“나는 자네가 하 사장을 이겨먹을 줄 알았다. 느물느물하게 다루어낼 수 있
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네는 하 사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천박한 수전노, 병적인 양생주의자, 대롱으로 세상을 보는 대롱눈이라고 생
각합니다”
“장강이 구부러지지 않을 수 없다는 옛말이 있다. 그래, 하 사장에게 그런 흠
절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며 그러는 자네는 하 사장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
“자네 책을 화장실에 처넣은 것이 그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
“자네는 하 사장 찾아갈 때 고급 위스키도 사고, 요릿감 쇠고기도 사가지고
갔는가?”
“그렇게 했습니다”
“술도 많이 사다 마셨는가? 이따금씩은 양주도 사다 마셨는가?”
“원래 제가 일을 집중적으로 할 때는 틈틈이 술을 좀 많이 먹습니다”
“맥주를 상자째 사다놓고 외국 손님들과도 나누어 마시고 하 사장과도 나누
어 마셨는가?”
“...”
“사람에게는 동물성 단백질도 필요하다면서 하 사장을 데리고 나가 한 상 떡
벌어지게 잘 대접한 일도 있는가?”
“네. 하도 깨죽거려서 제가 본을 좀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자네 책을 화장실에 처넣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이다”
“저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하 사장 같은 사람으로부터 돈 쓰는 법을 배울
나이는 지났습니다”
“배울 나이가 지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배울 나이가 지났는데도 배우기를
거절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네는 너무 고상한 일을 하느라고 발밑 분별을 제
대로 하지 못한 셈인가. 자네는 하 사장 호텔에서 자네 주머니의 돈을 쓴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자네의 한국 체제를 지원하지 않았는가?”
“...”
“흥청망청 쓰지는 않았겠지만 만일에 자네에게 그 정도 지출할 여유가 있었
다면 우리 프로그램의 지원을 안 받는 것이 옳지 않았겠는가?”
“...”
“사람이란, 이렇게 보기로 작정하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려고 작정하면
저렇게도 보이는 것이다. 자네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자네가
화를 내고 있는 상황에는 하 사장에 대한 고려가 송두리째 빠져 있다. 자네는
하 사장을 지금과 같은 시각으로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쪽은 하나
도 보이지 않았던 거시다. 자네는 말이야, 어떨 때 보면 공부를 좀 한 사람 같아
도 어떨 때 보면 철부지도 그런 철부지...”
“...”
“우리가 직선이라고 여기는 것이 과연 직선이었겠는가? 혹시 곡선의 한 부분
을 우리가, 자네 말마따나 대롱 시각으로 보고는 직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
인가? 자네는 혹시 큰 곡선을 작은 직선으로 본 것은 아닐 것인가”
전화기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내 동기동창이 수화기를 들고는, 네, 안녕하셨
습니까, 하고는 잠깐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면서 수화기를 선생께 내밀었다.
일모 선생이 수화기를 받아들였다.
“응, 자넨가... 그래... 내 그렇지 않아도... 여보게 운담, 그게 누구 불찰이겠는
가, 다 나의 불찰 아니겠는가...”
나는 너무 놀랐던 나머지 일모 선생의 나머지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날 그 순간보다 더 참담했던 순간은 없어서 기억해 내지 못했다.
무서운 일이다.
잃어버린 물건이 내가 이미 뒤짐질해 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사람의 성분
생각난다.
강지우, 우리가 미숙했던 시절의 소란스러운 세상에 안긴 적막을 참느라고 너
는 퍽 고단했겠다. 알고 있거라. 그 시절 그 까마귀는 지금 썩은 쥐를 포식하고
있다. 앞서 가는 네가 이렇게 나타나 서울에다 먼나라 화단의 생소한 소문을 뿌
리고 다니면 그 까마귀는 네가 썩은 쥐를 빼앗으러 온 줄 알고 무시로 까악거릴
터이니 괘념치 말 일이다.
“현대미술관에서 설명회라는 걸 기획한 모양이고 나는 거기에 나가 관람객들
에게 설명이라는 것을 해야 할 모양인데... 보고 느끼면 되는 것을, 굳이 설명하
란다. 하지만 하라니까 해야지.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일이 여
기에서는 이렇게 벌어진다. 굉장히 심심한 설명회가 될 것 같은데... 내일, 그러
니까 토요일 오후 3시다”
사무실로 전화를 건 강지우가 그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설명회라는 것에 나를 초대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너무 늦게 연락한 감이 없지 않다만, 가마, 알려줘서 고맙다”
의례적으로 고맙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강지우가 나에게 그런 전화를 건 것
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치사하게도 저 아는 시 한 수 아는 척했다고 이러는 것
인가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
다.
그런데 그런 기분으로 퇴근하려는데 직원이 봉투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다른 직원이 받아만 놓았지 마음이 바빠 전해 드리는 걸 깜빡 잊고 휴가 떠
난 모양입니다”
배달된 지 근 한 주일이 된 그 봉투를 열어보고 나는 두 번 놀라고 말았다.
또 하나의 동기동창 한국화가 이장환의 화려한 개인전 개막 리셉션에 초대받
는다는 것은 비교적 자주 있는 일인만큼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놀라
게 한 것은 토요일 오후 3시라는 그 공교롭게도 겹치는 날짜와 시각이었다. 현
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강지의 설명회와 정확하게 겹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번째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우리들의 은사 안영세 선생의 격려사
순서가 그 초대장에 번듯하게 찍혀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재벌 화가>라고
부르는 이장환의 리셉션 현장은, 대구 근교의 소도시 경산에 은거하고 있는 것
이나 다름없는 안영세 선생에게는 도무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두
루 아는 한, 안 선생은 그런 일로 상경할 분이 아니었다.
나는 회사를 나서려다 말고 선생 댁에 시외 전화를 넣었다.
마침 은사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정말로 상경하시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새벽 기차로 상경한다. 결혼식 주례하러 상경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우리 은상이 장가갈 때 경산에까지 내려와서 주례서 준 양반이 빚 갚으라고 성
화를 부리는 바람에 내가 졌다”
“이장환 개인적 개막식에서 격려사를 하시기 위해 상경하시는 게 아니고요?
”
“그 녀석은 내가 격려하지 않아도 그림 잘 그리고 그림 잘 팔고 돈 잘 벌고
있지 않은가?
“초대장에 선생님 함자를 찍었던 걸요?”
“그랬어? 그 녀석답게 염치가 홍등네 뭐짝이로구나. 내가 말매듭을 지어 약
속한 것은 아니다만 결혼식장으로 차 가지고 와서 실어가면 그 또한 어쩔 수 없
는 일... 우리 은상이 마로는 내 상경 계획을 미리 알아내어 일정을 짜맞춘 모
양...”
“선생님, 이장환이가 먹고 있는 마음이 곱게 안 보입니다. 선생님 가시는 걸
빌미로 손님 모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시면 동기동창 선후배들이 구름처
럼 모이기는 할 것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참 잘 안 어울리시는 자리가 될 것 같
습니다만...”
“가다니... 자네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소리 아닌가?”
“저에게는 다른 사정이 좀 있습니다. 선생님 가시기에도 적당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나?”
“저 혼자서 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장환이는 선생님 안면을 앞세우고 정부
기관이나 금융기관 같은 데 초대형 진경산수를 넘기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 바람벽에도 걸려 있는 것, 돈장사로 떼돈 번 금융 기관에 못 걸릴
것 업지 않나?”
“선생님께 아무래도 누가 될 것 같아서지요”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다만 노구가 이미 남루한데, 까짓 것, 내가 살면 얼마
나 살겠느냐? 내가 속으로 몇 번 더 속겠느냐?”
나는, 선생님 상경하셔도 가서 뵙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그 까닭을 간단하
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설명회라는 것이 열리기 한 주일 전의 일이다.
느지막이 출근하니 내 방에 묵향이 진동했다.
강지우는 내 방의 보조 책상 앞에 앉아 붓으로 연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에이포> 용지 크기로 자른 화선지 한 장에 붓질을 한두 번씩만 하는, 꽤 단조
로워 보이는 작업이었다. 보조 책상은 무론이고 내 책상 위에도 그가 한두 번의
붓질로 그려낸 그림이 무수히 널린 채로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었다.
잎을 그린 것, 꽃봉오리를 그린 것, 돌돌 말린 잎을, 채 펴지도 못한 잎자루를
그린 것, 연실을 그린 것도 있었다. 단 한번의 붓질로 소시지 같은 연근을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연잎에서 금방이라고 굴러떨어질 듯한 물방울을 그린 것도
있었다. 단 한 차례의 붓질로 동그라미를 그렸는데도 붓질이 성긴 부분이 물방
울의 하이라이트를 이루게 하는 솜씨가 절묘했다.
다만 활짝 핀 연꽃만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냄새야... 묵향이라는 것이 정말 있네?”
사람을 쌀쌀맞게 대하는 그의 성미를 알고 내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굴었다.
“...”
“나는 이렇게 센 줄 몰랐다”
“옛날 사람들이 없는 걸 있다고 했겠어?”
“싫지 않은데?”
“향이 강한 묵즙에 좋은 묵즙 없다”
“서양화가도 이런 그림 그리네?”
“...”
그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뉴욕에도 이런 연꽃이 있어?”
“못 그릴 거 없지”
두번째 질문을 받고서야 첫번째 질문에 대꾸하는 묘한 버릇은 여전했다. 그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 몹시 더뎠다.
“미국에도 연꽃이 있느냐고?”
“서울에도 선인장이 있는데...”
그는 이러면서, 먹물이 다 마른 그림을 한 장씩 거두어들여 귀를 대충 맞추면
서 차례로 포갰다. 포개 쌓은 것을 보니 높이가 한자가 실히 될 것 같았다. 그는
무거운 국어사전을 두 손으로 들어 포갠 그림 뭉치 위에다 가만히 올려놓았다.
먹물이 마르면서 쭈글쭈글해졌던 화선지 더미는 묵직한 사전에 눌리면서 부피가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2백 여장은 되지 싶었다.
“몇 시에 왔는데 이렇게 많이?”
“그리고 보니 묵즙이 너무 진해”
“몇 시에 왔느냐니까?”
“서너 시간 했나...”
나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에 대한
자신의 감정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이건 또 뭐냐?”
연꽃 그림 대신 한시가 쓰인 화선지 한 장 역시 먹물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진한 먹으로 어찌나 힘을 주어 썼던지 한자 한 자 한 자가 마르면서 화선지
결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종이가 형편없이 쭈그러져 있었다.
“한번 써봤다...”
“별일이네? 서양 화가께서 유심필로 연꽃을 안 그리시나, 한시를 안 쓰시나...
”
“유심필이 아니라 무심필인데... 너, 붓을 아나?”
그는 나를, 붓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인가?
“읽어봐도 돼?”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시가 씌어져 있는 화선지를 집어들었다.
다행히도 어려운 한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낯이 익은 한시였다.
공산불견인
단문인어향
반영입심림
북조청태상
(빈산에 사람은 안 보이고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리는구나
석양은 짙은 숲을 뚫고 들어오더니
다시 파란 이끼를 비추는구나)
“참 고요하고도 아늑하구나. 자네가 지은 거?”
“에이, 내가 무슨 수로?”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유의 냄새가 좀 나는구나”
“...”
“글자 스무 자 안에다 참 많이도 들어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빛과 소
리가 고루 들어 있으니...”
눈길을 그 한시 씌어진 화선지에다 박고 있는데 문득 그의 심상치 않은 눈빛
이 느껴졌다. 바로 눈길을 그에게로 돌리려다 어쩌는가 보려고 잠시 모르는 체
하고 있다가 오래 그러고 있을 일이 아니어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재
빨리 눈길을 거두면서 중얼거렸다.
“...<녹시>라는 신데, 좋지?”
“좋다”
“왕유, 맞다”
나는 <당시선집> 교정 보면서 왕유의 시를 알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기분이었다.
“다 그린 셈인가?”
내가 물었다.
“응... 그런데 조금 미안해지네?”
“뭐가?”
“2백만 원을 너무 빨리 벌어서... 쓱싹쓱싹...”
“타국살이 20년이다. 원가를 생각해 봐라, 그게 너무 빨리 버는 것인가...”
“너 오래간만에 말을 좀 되게 하는구나”
기분이 좋았다. 그가 나를 이런 식으로나마 칭찬해 준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그렇다.
당시 한 수가 부린 조화라고 할 수밖에. 앎을 나눔으로써 지기가 되는 것은
천박한 일이다 싶었는데도 그랬다.
설명회 있기 두 주일 전의 일이다. 전람회 일로 귀국했다는 소식 듣고, 그가
묵는 여관을 내가 찾아내었다.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오랜 친구사이인데도 길고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예술가, 나는 가난하지 않은 편집자여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꽤 공을 들여가면서 어느 시인의 산문집 한 권을 만들고 있다.
시원시원한 볼거리가 좀 들어갔으면 싶은데, 마침 자네가 이렇게 귀국했다. 자네
가 좀 도와주었으면 한다. 그림이 몇 장이 되었든 우리는 2백만 원쯤 사례비로
지불할 수 있을 것 같다”
“와우... 많이? 그런데 그럴 만한 책이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만...”
“번번히 폐를 끼쳐서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책을 잘 꾸미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신경 써주어서 고맙다”
그것은 그랬다.
나는 그가 묵고 있는 여관방을 둘러보았다. 그 흔하디 흔한, 바퀴 달린 <샘소
나이트> 여행 가방 하나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 잇는 것은 구형 카메라 가방 하
나뿐, 그는 그 가방에다 여벌 바지 하나, 속옷 두어 장, 티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 자동 카메라 하나까지 빵빵하게 넣어 어깨에 메고 오 세상을 돌아다닌다
고 했다.
그가 차지하는 여관방에는 전날 밤에 그가 빨아서 말리고 있는 중인 속옷 등
속이 널려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좋은 그림이 좀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 회사가 2백만 원을 지불해야 할 만큼 절박한 것
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그림을 빌미로 편집자의 특권을 빌려 사사로이 자기의
서울 나들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귀국할 때면 이런 일이 자주 이루어
지고는 했다. 그는 나의 제안을 대체로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흔쾌하게 주고
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가 나를 다소 거칠게 다루는 것은 배려에 대한 미안풀
이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가 그러는 것은 그 배려를 거절할 수 없는 자신
의 처지에 약간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기는 하겠다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뭔데?”
“우리 지금 교지 만들고 있는 거 아니지?”
“아무려면 자네 같은 화가에서 컷 그려넣으라고 할까봐?”
“그리기는 그리겠지만 내 그림이 들어갈 책의 내용은 읽지 않겠다. 삽화를
그리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내 마음대로 일련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겠다. 그 이미
지가 글의 내용과 충돌해서 새로운 긴장을 조성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좋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마. 틀림없이 새로운 어떤 긴장을 조성하기는 할 것이다. 문제
는 너에게 그걸 보는 눈이 잇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너의 편집자적 안목에는
약간 한심한 구석이 없지 않으니까”
“빌어먹을... 내게도 그걸 알아보는 눈이 있었으면 좋겠다만, 좋을 대로 하자
”
이것이 그가 내 방에서 무수한 연꽃을 그리고 있게 된 경위다.
설명회가 있기 20년 전의 일이다.
강지우의 도미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받았던 충격을 나
는 잊지 못하겠다. 서양화가로만 알려져 있던 그가 엉뚱하게도 사진전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은 아니다.
작품으로 내걸린 그의 사진 대부분은 잔디 위에, 차도의 중앙선 위에, 보도의
네모난 블록 위에다 유리판을 깔고, 카메라의 각도를 바꾸어가면서 찍은 것들이
었다. 그늘진 계단, 그늘진 창고, 유리 창문, 잘려버린 나무의 그루터기에 거울로
반사광을 비추고 그것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의 작품 해설이 담긴 팜플릿은 아직도 내가 이따금씩 들추어 보는 소중한
기념품인데, 강지우의 대학교 선배 화가가 쓴 해설 중에는 이런 인상적인 대목
이 있다.
“...유리판 시리즈는 지각 공간을, 거울 반사 시리즈는 사물의 지각 대상화 차
원을 각각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세계
의 실상을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 다시 말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그 세계를 되돌려 받기 위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을 받았던 것은 도로의 중앙선 위에다 유
리판을 여러 장 한 줄이 되게 깔고 시각을 바꾸어 가면서 찍은 일련의 사진이
다.
도로의 중앙선은, 유리판이 깔리지 않았을 때는 여느 중앙선에 불과하다. 거기
에는 중앙선을 그린 페인트가 존재하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
나 그가 깔아놓고 촬영한 사진의 유리판 위로는 가로수, 하늘, 구름 같은 사물이
비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중앙선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암묵적으로
승인하던 가로수, 하늘, 구름이 유리판이나 거울의 개입을 통해 새롭게 그 존재
를 드러낸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나는 카메라를 대는 각도에 따라, 즉 우리
의 시각이 바뀌는 데 따라 유리판이나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가 얼마든지 다양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 발견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난 세계의 발
전에 속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당시 나는 주부를 독자층으로 하는 잡지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만큼 열등감 같
은 것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 기자를 대동하고 전시회장으로 갔던 나는
강지우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뭣이냐?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우리가 시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존재하게 된다, 혹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인가?”
잡지 기자 동창생에게, 도미를 앞둔 예술가는 친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확대 해석할 일은 아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니다. 간추리
자면 이렇다. 나는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사진이 무엇이냐? 사진은 빛을 떠나서
는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시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절대 암흑 속에서는 사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거, 역설 아니냐. 빛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진이 어둠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빛
의 환경은 인공 환경과 자연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일정하지만 후
자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문제는 자연 환경에 대한 우리의 시력이 감퇴하고
있는 현상이다. 햇빛, 달빛, 별빛, 번개 같은 빛의 자연 현상이 문학의 어휘로만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빛을, 더위나 추위처럼 피부 감각을 통해서
인지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각은 인공 조명을 향해서만 열려져 있는 셈인 것
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 불변하는 빛으로만 열려 있는 시각은 사물화의 위험
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글쎄, 될까? 너희 잡지의 주부 독자들은 네가 서명해도
이해를 잘 못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가 따귀라도 맞는 심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내가 이로써 그를 미워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전람회의 감동은 내게 오래 머물렀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나는 하숙
집 마당에다 거울을 놓고는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그 거울에 비치는 사물을 관찰
하는 놀이를 해본 적도 있다. 그의 이 사진전에서 경험한 놀라움은 한동안 사물
을 대하는 나의 태도 전반으로 파급되고 있었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반도>라는 제목을 달아 그가 한 일련의 작업을 주부 독자들에게 설명하
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강지우가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서, 그 잡지에다 내가 쓴 해설을 읽었던 모양
이다.
그 해의 어느 날 미국에서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매우 투박하고 조잡한
해설이지만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설명회 있기 한 주일 전 그가 붓으로 낙서한 왕유의 시에 <반조>, 이
두 자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몹시 놀랐던 소이연이다.
강지우가 도미와 함께 20년간에 걸리게 되는 대장정에 나서기 직전에, 벌써
이장환은 일찌감치 진경산수로 국전을 거치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동기들이 대
학과 군대살이를 마치고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면서 청첩장을 돌리던 시절이었
다. 새활 기반이 반듯하게들 닦일 나이가 아니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
았던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개인전 리셉션 자리는 모교의 재경동창회 자
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같은 대학의 미대 동기동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서
그 자리에 나왔어야 자연스러울 터인데도 불구하고, 강지우는 그 자리에 나타나
지 않았다.
나는 이장환의 산수화에 대한 강지우의 단칼 촌평을 들은 적이 있다.
“이장환의 산수화는 머리가 지독하게 나쁜 대학 교수의 논문 같다. 대고 덕
지덕지 칠하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줄 알고 그린 그림과, 여기서 베끼고 저기서
인용해서 짜맞추면 되는 줄 알고 쓴 엉터리 논문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작품이나 논문은 미적 감각이나 이상적인 논리가 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제작하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 관한 한 인정사정이 없었다.
이장환이 개인전을 끝냈을 때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끝낼 일이
아니어서 이장환이 낀 저녁 술자리에 강지우를 부른 적이 있다. 그는 이장환이
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너는 30년 전부터 편집자였다. 네가 어떤 편집자냐? 책의 편집은, 네가 만든
책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술자리의 편집으로 말하자면 너는 최악의 편집자
다. 너는 내가 도둑 맞는 현장을 방조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작품을 도둑 맞는
것을 방조했고 시간을 도둑 맞는 것을 방조하고 있다”
그의 말이 옳다.
30년 전부터 나는 편집자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
지 나는 우리 학교의 고지 편집 책임자였다. 강지우와 이장환은 각각 서양화풍
의 삽화와 동양화풍의 삽화로 나의 허술한 편집 화면을 메꾸어준 꼬마 화가들이
었다.
우리들의 이상한 인연이 시작된 것은 그 어름,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미술 시간이면 우리는 교정으로 뿔뿔이 흩어진 채 한 시간 동안 수채화를 그
리고는 했다. 파스텔로도 그리고 과슈로도 그렸는데 내 기억에는 수채화 그리던
일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두 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새로 부임한 미술 교사를 처음 만나던, 2학기 2학기의 첫 미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날 강지우는 내 옆에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그
리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물감 다루는 데 서툴렀던 우리는 모두
스케치북을 땅바닥에서 펴놓고 밑그림에다 붓질을 했다. 스케치북을 세워놓고
붓질하면 물감이 주루룩 흘러내리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지우는 스케
치북을 수직으로 세워놓고 붓질을 했다.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그 붓질의 효과
였다.
강지우에게는 밑그림을 약간 진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스케치북을
반듯이 세운 채 붓에다 묽게 갠 물감을 찍어 위에서 아래로 긋고는 했는데, 절
묘한 것은 밑그림이 진하게 그려진 자리에 못 미처 가만히 붓을 멈추었다가는
살며시 떼었다는 점이다. 물감은 그의 붓질을 따라 밑그림이 진하게 그려진 자
리까지 흘러내려갔다가는 그 자리에 방울진 채 맺힐 뿐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
았다.
그 효과는 나무를 그릴 때 아주 돋보였다.
우리는 나뭇가지 아래의 어둡게 그늘진 부분에는 덧칠을 했다. 그러나 강지우
는 덧칠하는 대신 물감이 흘러내리다가 바로 그 어두운 부분에 방울진 채로 머
물게 했다. 물감은 그의 붓 끝에 묻어 정확하게 그가 의도하는 부분에서 맺힐
뿐 아래로 더 이상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로써 굵기가 거의 같은 세로
선만으로 수채화를 그려내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좋아 보였던 것은, 가까이
서 보면 위에서 아래로 붓질한 무수한 세로 선의 집합으로 보여도 조금만 떨어
져서 보면 각 세로 선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무수한 붓자국이 굉장히 사실적인
화면을 만들고는 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나도 몇 차례 흉내를 내어보았다. 하지만 붓에다 물감을 적게 찍어서
선을 그리면 방울이 생기지 않았고 조금 많이 찍어 그리면 쪼르르 흘러내려버리
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스케치북을 여러 장 넘기면서 번번히 새로 시도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강지우의 화면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붓에다 묻히는
물감의 양은 거의일정하기도 했으려니와 물감이 조금 과하게 묻어 흘러내리겠다
싶으면 수직으로 세웠던 스케치북을 뒤로 조금 기울여 물감이 원하던 자리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양손 움직임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기민했다.
우리는 미술 시간이 끝나자 스케치북을 미술 교사에서 제출했다. 스케치북을
되돌려 받은 것은 그 다음 미술 시간이었다. 전시간에 그린 그림에 대한 평가의
결과는 그림 위쪽의 오른쪽 귀에 <수우미양가>로 씌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가 <미>를 받은 것은, 그것이 나의 평균 미술 성적이었던만큼 조금도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이장환이 <수>를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 조금도 이상할 것
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강지우가 <미>를 받았다는 점. 이장환의 그림이 강지우의 그림
과 복사라도 한 듯이 아주 똑같았다는 점이다. 이장환은 강지우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튼 이장환이 그린 화면은
무수한 세로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개개의 선 끝에 물감이 방울진 채
말라 있는 것이나 강지우의 것과는 아주 똑같았다.
미술 교사는, 강지우가 항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그림에서 취하는 것은 독창성이다. 모방하는 행위는, 특히 친
구의 독창적인 붓질을 모방하는 행위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다. 강지우가 누구냐,
앞으로 나와!”
새로 부임한 교사가 이장환에게는 <수>를, 강지우에게는 <미>를 준 근거는
무엇이었는지, 그가 강지우가 이장환을 모방했다고 단정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는, 당시에는 분명히 제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내 기억에는 탈색되어 버
리고 남아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날, 미술부의 총아 노릇 하던 강지우가 새
로 부임한 미술 교사로부터 참혹하고도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강지우를 변호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는
어느 하나를 변호하면 다른 하나가 다친다는 생각 때문에 우물쭈물하고 있지 않
았나 싶다.
이 사건은 오래지 않아 이장환이 미술부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고 강지우가 문
예부로 옮겨오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발전했다. 강지우가 나의 교지 편집에 본
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이장환의 개인적 개막 리셉션이 열리는 토요일, 강지우의 설명회가 열리는 바
로 그 토요일 오후 2시에 나는 집을 나섰다. 지하에 갤러리를 거느리고 있는 특
급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대신 현대미술관이 있는 과천으로 향한 것은 스
무 해째 타향살이하는 강지우의, 보나마나 썰렁한 터인 그 설명회가 안쓰러웠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그의 작품이 어떤 변모의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 몹시 궁금
했다.
그가 사진기가 아니었던만큼 여느 사진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처음부
터 아니다. 20년 전에 이미 눈의 확장으로서의 카메라 기능을 저만치 뛰어넘고
인식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카메라에 부여하던 그가 아니던가? 나는 긴장
한 채로 미술관 계단을 올랐다.
인화된 천연색 사진을 띠 모양으로 잘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붙인 작품이 대
부분이었다. 부채꼴, 물결 모양으로 이어붙인 것도 있고, 뫼비우스의 띠 모양, 바
늘귀 모양으로 이어붙인 것도 있었다. 나는 그가 사진의 평면성에 도전하고 있
다는 인상밖에는 어떤 인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작품을 둘러보고 있자니 곤혹스러웠다. 당혹스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
다. 그것은 그의 작품 자체에서 느낀 당혹감이라기보다는 벌써 그의 작품을 이
해할 수 없게 된 나 자신의 감각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내가 즐길 수 없는 작품
이라면 물러서면 그만이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20년 전 그의 도미 사전전
에서 받았던 감동의 여신이 그 자리에서 물러설 수 없게 했다.
그가 우리 인식의 지평이나 시지각의 세계를 확장시킨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확장시킨 세계는 이미 나의 인식이나 시지각은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세계로
보였다. 나는, 20년 전의 감동을 배반할 수 없어서도 그가 그런 세계에 이른 것
을 의심할 수 없었다. 시집인 줄 알고 계송집을 편 그런 참담한 기분이었다.
내가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룬 사진의 상당 부분이 연
꽃이나 사찰이나 탑이나 부도의 사진에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가 인
식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
고 게으르게 상상했다.
강의실에 <뷔티아르>나 <슬라이더>나 <오버헤드 프로젝터>가 준비되고 작
가가 정장하고 나와 자신의 작품을 강의식으로 해설하는 그런 설명회를 기대하
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미리 설명문을 인쇄한 <에이포> 용지를 발치에 쌓
아두고 다가오는 관람객에게 한 장씩 손수 나누어주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미술
관이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않은, 좋게 말하면 소박해서 자연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작가에 대한 대접에 지나치게 소홀한 초라한 설명회였다. 그를 따라다니
며 그의 작품 앞으로 모이는 관람객은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아주 느린 말투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가로 70센티, 세로 50센티 정도 크기로 인화한 사진에다 자를 대고 3
밀리 혹은 5미리 폭으로 칼로 자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토막난 조각들을 판
지 위에다 배치해 봅니다. 잘린 사진은 갓 건져낸 물고기들처럼 판지 위에서 펄
떡거리지요. 나는 기하 구조 혹은 기하 형태를 통해서 이 토막난 사진을 보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빛과 기운이 내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쏟아지도록 이 토막난
사진들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간곡히 모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불이며 미사이
며 제사인 것이지요... 마침내 사진의 도막들을 뒤집어 풀을 칠합니다. 이것은 이
전 단계에 견주면 쉬운 작업이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 수는 없지요. 잘못하면 풀
칠이나 하고 앉아 있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풀칠이
끝난, 가죽 같은 사진의 표피를 판지에다 붙이면 나의 작업은 일단 완료됩니다...
요컨대 나의 작업은 사진을 찍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진 프로
세스가 완료된 지점에서 나의 작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로써 사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또 하나의 긴장을 조성해 내는 것입니다”
설명이 무르익어가면서 그의 얼굴도 서서히 상기되기 시작했다. 얼굴만 상기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씩 심하게 무안당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 쪽을 향해 목례를 보내고는 했다. 나에게 그런 목례를 보낼 까닭이 없다 싶
어서 나는 뒤를 돌아다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안영세 선생을 비롯, 이장환의 개막식 리셉션에 가 있어야 할 우리 동창 30여
명이 내 뒤에 웅긋중긋 서 있었으니 놀랐을 수밖에...
동창 중 하나가 다른 동창 귀에다 입술을 대고 소근거렸다.
“전문 용어로는 뭐라고 하냐? 나는 이렇게밖에는 표현을 못 하겠는데... 우와,
작품의 성분이 다르다 달라...”
이윤기론
삶, 아주 낮은 하늘
책,영화,리뷰,
나비 넥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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