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신화는 늦지 않다
이은정 지음
프롤로그
입사 4년 10개월만에 상무가 된 여자
`입사 4년 10개월 만에 상무가 된 32세의 여자`
이렇게 신문과 잡지는 떠들고 있었다. 매스컴은 나에게 `신데렐라`라는 낱말을
쓰고 있었다. 업계의 신데렐라 탄생이니 대기업의 신데렐라 입장이라느니 해가
면서 말이다.
내가 한라에 입사한 지는 4년 10개월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
기 시작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물론 10년이라고 쳐EH 고속승진인 것은 인정한
다. 대기업에서는 이런 승진 케이스가 흔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여자이고 고
작 30대이다. 그 10년간의 과정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고생이 비해 어쩌면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10년 동안의 땀과 눈물이 아무것도 아닌 것
은 아니다.
나로서는 실패와 시련의 참담함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 고통의 세월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평생 흘린 눈물을 그 10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세월 안에 다
쏟아부었다. 땀도 남 못지않게 흘렸다. 노력하고 애썼고 많이 울었고 많이 힘들
어 했고 그래서 뼈를 깍는 고통 속에서 얻은 눈물나는 성공이었다. 그런데 그저
한 순간에 재투성이 소녀가 유리구두로 바꿔 신고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다루는
데는 불만이 많았다.
삶이란 과정인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
은, 그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삶의 질곡을 넘어서야 맛볼 수 있다
는 얘기다. 만일 내가 성공이라는 것을 얻었다면 나의 성공 또한 과정의 결과였
다.
내가 신데렐라처럼 다뤄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젊은 사람들과 대중들의 의식 말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한 건만 잘하면' 아니면 `떼돈을 한꺼번에' `성공을 한꺼번
에' 하는 이런 의식들이 팽배해 있다. 그런 의식들을 부정하면서도 동경하는 젊
은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나는 그게 싫었다. 한 건만, 한 탕만... 그런 한탕주의 의식이 제일 싫다. 노력
한 만큼, 고생한 만큼, 능력만큼, 성실한 대가만큼... 그만큼만 인정받는 것을 좋
아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고속승진은 결코 유리구두의
성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잠을 줄이며 한밤중까지 근무하고 휴일을 찾아
놀아본 지가 까마득했던, 휴식과 오락조차도 일로 풀었던 결과였다.
한라에 들어가던 그때, 나는 생의 실패자였다. 철저하게 깨진 모습으로 귀국해
야만 했던 생의 비참한 실패자, 인생 항해의 조난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미국에서 첫직장에 실패했다. 잘못된 선택이었고 그래서 다른 직장을 구
해 서둘러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두 번째 직장에서 처음에는 그런 대로 잘 해
나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실패했다. 외부 영업에는 성공했으나 내부 영업에서
완전히 실패했던 것이다. 그래서 해고당했다.
세 번째 직장을 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오래 일하지 못했다. 남편과의 불
행한 결혼이 그 원인이었다. 직장을 세 번이나 옮겨다니는 동안 남편과의 끊임
없는 불화가 일어났다. 상습적인 구타에 나는 지쳐갔지만 아이는 잘도 커갔다.
뭔가 인생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나는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들과 나의 편도 승차권(Oneway Ticket)이었다.
한국에 온 후, 무작정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에 한라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선택은 하나였다. 더 뭐가 있는가. 여기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나는 끝
이었다. 나는 이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기 위해, 그래서 더 이상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게 내 자리를 굳혀야 했다.
나는 그때 생의 전쟁터에서 나만 고립된 것 같았던 전사, 적들이 다 주위를
포위한 것만 같았던 위급한 전사였다. 그리고 나를 구해줄 밧줄을 단단하게 붙
잡고 있어야 하는 인생의 바닷속 조난자였다.
그래서 맹렬히 일했다. 끊임없이 도전해야 살아남기에 도전했고, 장애물을 헤
쳐야 나아가기에 장애물을 걷어내며 달렸다.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다는 절박
감, 이제 더 이상 선택은 없다는 위기감이 나를 질주하도록 만들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 자신밖에 없었다. 거대한 정글 속 사회에서 길을 잃
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은...
그래서 악착같이 일했다. 그 결과 30대에 상무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신
데렐라도 아니고 행운의 여자도 아니었다.
고속승진한 32세의 여자 상무를 만나러 온 취재기자들에게 그런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말을 받았다.
“누구나 열심히 살아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거죠? 그
렇게 살면 10년 후에 누구나 임원이 된다는 얘깁니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신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니고 더구나 성공학 강사도 아니므로 이렇게 하
면 꼭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가능성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다. 능력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
다!` 그것을 기억해주기 바랄 뿐이다.
30년 넘게 산 것은 많이 산 게 아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
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불행도 겪었고, 차가운 바람을 여러 번 만났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위안을 삼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일을 잘 넘길 것이고 이 일
을 겪은 후에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므로...
나는 태풍 속에서도 의연한 풀꽃이 되고 싶지, 바람 없는 온실은 재미가 없다.
1. 난 실패자였다
난 실패했었다
32세에 상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내밀면,
“아, 신문에서 봤습니다”하는 이들고 있지만, “혹시 오너와 무슨 관계라도
됩니까?”라고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직까지 30대 기업에 여성 임원이 채 몇명 안 되고
그 중에도 대다수는 창업자와 연관된 이들이다. 하루 빨리 더 많은 여성 임원이
탄생해야 하고, 또 앞으로 그럴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의 천국이라고 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말야, 위로 올라가면 여자
가 별로 없다고 하던데요?”
나를 칭찬하는 것인지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튼 아리송한 말이다.
그 분의 말대로 미국 여성이 한 회사의 중역(executive)까지 오르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그러나 선진국인 미국에서 어렵다고 해서 우리까지 꼭 어려워야 하
는 국제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없지 않은가. 능력 있고 재주 있으면 여자도 될
수 있다. 아니,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단, 어려운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말자. 버티면 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세 자매를 키우실 때, 항상 이렇게 강조하셨다.
“네 밥벌이를 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은 신랑 만나 결혼이나 하라고 대학까지 공부시켜주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점에서는 여자라고 다를 게 없다. 우
리 부모님은 세 자매를 키울 때 남자와 다르게 구별해서 키우지 않았고, 그 점
은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라고 시집가서 살림이나 잘하라가 아니
라, 제 밥벌이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우리 집 방침이었던 것이다.
나는 세 자매 중의 첫째인데, 나도 그렇고 둘째고 그렇고 셋째도 그렇고 다들
우등생이었다. 물론 뭐 왕년에 우등생 아닌 사람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세 자
매는 공부를 썩 잘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의 기대도 당연히 컸다. 나는 의사, 둘째는 변호사, 셋째
는 디자이너, 그것이 부모님의 희망사항이었지만 우리에게 강요한 적은 없었다.
단지 그런 희망을 자주 내비치곤 하셨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여성들이 남성들
과 어깨를 겨루는 직업이 흔하지 않았고, 그래서 전문직을 권유하신 것 같다. 우
리 역시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세 자매 중에서 이 기대를 만족시킨 사람은 둘째밖에 없다. 둘째
는 얼마 전 남가주 Bar Exam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었다. 하지만 둘째도 박사학
위를 따고 교수직을 시작할 예정이니 엄격히 말하면 셋 모두 부모님의 뜻을 이
뤄드리지 못했다.
나 또한 의사가 되지 못했다. 나 스스로 의사가 되리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혹
이 없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실패했다.
대학진학까지는 의사가 되기 위한 길목으로 잘 진입했다. 의과를 지망할 수
있는 과학계로 입학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예과와 본과를 합친 6년 과정이지만, 미국에서는 전공과는
상관없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또 다시 4년제 의과 대학(Medical
School)을 마쳐야 한다. 물론 6년짜리 프로그램을 택하는 학교도 있지만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의과과정을 염두에 두고 과학계열로 대학에 진학했다. 앞으로 훌륭한 의
사가 되리라는 포부를 안고.
그런데 재미가 없었다. 실험이다 연구다 강의시간이다 모든 게 흥미가 없었다.
아니, 과학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다른 곳에 끌려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토론하는
게 더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차츰 학과공부에 적용시켜서는 안 될 단어들을 적용시키고 있었다. 인생
에서 써서는 안 되는 `대충`이라든가 `간신히`라든가 하는 단어들을 말이다. 나
는 과학공부를 `대충대충`했고 `간신히 간신히`해내고 있었다.
그 대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남에서는 활기차게 재미있게 그 시간을
누렸다. 어느 한 주제를 놓고 서로 토론하는 자리는 정말 매력 있었다. 나와 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나와 다른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대로,
너무나 흥미가 있었고 그래서 그런 시간에 흠뻑 빠져들었다.
술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얘기도 하고, 그렇게 바쁘게 1학년을 마칠 즈음 문
득, 물음표 하나가 점점 확대되며 크게 다가왔다. 과연 내가 의사가 될 수 있을
까? 의대를 가야 하는데 이런 상태로 갈 수 있을까? 가능할까? 그 당시 나는 “
모든게 가능하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불가능 쪽으로 자꾸 고
개가 내려갔다.
담당 교수님을 찾아갈 때는 이런 말을 기대했다.
“일학년 때는 누구나 어렵게 적응해나가는 과정이야. 그러니 이학년 올라가
서 잘하면 되네.”
미국 교수들은 우리나라 교수들보다 권위의식이 없다. 학생들을 마치 친구들
처럼 대하곤 한다.
나는 따뜻하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격려의 말을 기대하며 약속시간에 맞춰 교
수실에 들어섰다.
교수님은 미리 나의 성적표를 훑어보며 기다리고 계셨다.
긴장은 되었지만, 힘을 내라는 격려의 말을 듣고 싶었던 나는 교수님 앞에 주
춤거리며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대뜸 교수님은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공부가 뭔가?”
나는 의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두 번째 질문이 던져졌다.
“왜?”
나는 말이 콱 막혔다. 목울대가 간지러웠다. 감기기운이 없는데도 코가 맹맹했
다. 뭔가 대답해야 하는데 대답할 말을 잃었다.
왜, 왜, 왜... 왜 나는 의학공부를 하려고 하는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교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
다.
“모든 것은 가능하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네. 그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가. 그것이 과연 내 적성에 맞는 것인가 하는 거라네.”
나의 마음이 꿀렁 요동쳤다.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꿈이 뭔가?”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렸는지 되물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인가?”
자신 없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교수님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꿈은 실현이 가능하지.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보다 몇 배
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쏟아부어야 하네. 자네는 과연 해낼 각오가 돼 있는가?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게.”
“모든 것은 자네의 선택이네. 인생은 선택이야. 꿈도 선택이고 가능성도 어떻
게 보면 선택이네.”
교수님은 끝으로, 의사가 되는 것이 꼭 나에게 지상최대의 길이 아닐 수도 있
음을 덧붙였다.
나는 황급히 교수실을 나왔다.
어떻게 나의 숙소까지 왔는지 몰랐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웬일인지 난데없
이 울음이 터졌다. 그냥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한심하고 후회스럽고 슬펐다.
그 동안 공부라면 누구한테 뒤져본 적이 없었다. 하면 됐던 것이다. 누가 공부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했고, 열심히 하면 됐다. 그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넘치던 나는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후회가 넘쳐흘렀다. 대학시절의 25퍼센트를 왜 그렇게 허비했을까. 좀더 열심
히 할 것을, 지나간 1년이라는 시간을 붙잡고 우는 바보였다, 그 당시의 나는...
며칠을 두문불출하고 생각에만 매달렸다.
무엇이 문제인가.
뭘 잘못했나.
내가 뭘 하며 지낸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곧 방
학이 되어서 한국에 들어와서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대답은 하나
였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물러설 줄 아는 것도 일종의 지혜인데, 그 당시의 나는 무조건
실패하기는 싫었다. 선택부터가 실패였음을 왜 나는 인정하지 못했을까. 실패를
인정하고 빨리 다른 선택을 했다면 시간낭비를 줄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더구나 한국에 와서 부모님을 뵈니까 더욱 용기가 없어졌다. 거금을 들여 유
학까지 보내준 부모님에게 어떻게 못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겠는가. 불가능했다.
방학이 끝나가고 개학이 다가오면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또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해내고 말 거라고... 그래서 나
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하면 GPA를 올릴 것인지, 어떻게 전공공부에 매
진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서둘러 학교로 돌아왔다. 마음이
뒤숭숭했던 터라 개학 전에 준비할 것이 많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버린 것이
다. 정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친구들과의 접촉도 피하며 열심히 2라운드에
돌입했다. 처절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아니었다.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천천히 나 자신과의 대면을 시작했다.
교수님이 내게 질문을 던졌듯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야?”
“응.”
“그건 왜지?”
“....”
나의 대답은 말없음표. 생각과 생각 끝에 얻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내가 의사가 되면, 나는 상류 계열에 속할 것이고 누구나 선생님 선생님 하면
서 떠받들어줄 것이다.그리고...그리고...또다시 말없음표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도와준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준다든가 하는 봉사
정신도 좋다. 그러나 그건 내 진정한 속마음이 아니었다. 나는 그야말로 겉멋만
들어서 의사를 꿈으로 택했던, 상류 계층이 되려고 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에 지
나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서 나는 고통스러웠고 아팠다.
왜 학과과목에 충실하지 못했는지도 생각해보았다. 일단 관심이 없었다. 그 방
면에 뛰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어진 숙제와 시험준비만 잘하면 성적이 올라갔다. 그러
나 미국에서의 대학과정은 그렇지 않다. 주어진 것 이외에 어떤 플러스 알파를
창의적으로 기안해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나는 실패했다!
나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정리가 되고 있었다. 서랍정리가 다 되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적성에 맞지 않고, 능력에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전공을 바꿔야 했다.
그럴 즈음, 아버지의 사고소식이 들려왔다.
아아, 나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얘기를 하자니... 벌써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아웅산 참사 때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이미 다 잊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만난 모든 이성과 동성을 합쳐서 나는 아버지 같은 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그후로 불행해졌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남자를 사랑하
고, 그 남자와 결혼하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헤어진 후에도, 다른
사람과 사랑이라는 걸 또 시작하고 또 헤어지고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
의 그늘은 내게 드리워져 있다. 너무 훌륭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다 아버지처
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
신 후로 불행의 맛을 더 독하게 맛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가장 열렬한 팬은 딸들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 집
역시 그렇다. 우리 세 자매는 모두 아버지를 가장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하고 있
다. 막내는 너무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덜하지만 나와 둘째는 더욱 그렇
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이상형임에 충분했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나는 촌놈”이라고 말하곤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서 태어나 고기 한번 못 먹어보고 그냥 공부한 한 `촌놈`이라고 말이다. 오죽하
면 아버지가 고시공부할 때 저러다가 쓰러지겠다 싶어서 할아버지가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그걸로 고기를 사주셨겠는가. 영양보충 좀 하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난하게 사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대하는 매너는, 특히 어머니를 대하는 매너는 전
혀 `촌놈`이 아니었다.
딸 둘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제 딸 둘이면 됐다고 하셨단다.
그러나 어머니는 못내 섭섭하여 아들 하나 낳자고 하며 고집을 부려 셋째를 가
졌다. 아버지는 그때도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못내 섭
섭하여 아들 하나 낳자고 하며 고집을 부려 셋째를 가졌다. 아버지는 그때도 딸
이든 아들이든 상관없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아들이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역시 딸이었다. 어머니는 크게 낙심했으나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다. 보석 같은
딸이라며 어머니에게 수고했다고 커다란 꽃다발, 그걸 본 사람들이 집채만하더
라 싶을 정도로 화사하고 큰 꽃다발을 선사했다.
어머니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기에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그 남자는 가난한 공무원이었지만 여자로서 이것저것 사고 싶
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길을 오가다 어느 가게에 걸린 핸드백을 보게 됐는데,
그걸 갖고 싶다고 혼잣말처럼 한마디 하셨단다. 저걸 한번 들어봤으면 하고 말
이다. 그런데 그 핸드백은 서민들이 들기에는 너무 비싼 것이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이었다. 그런
데 그 수술을 끝내고 마취가 풀리는 순간, 어머니의 머리맡에는 그 핸드백이 놓
여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사다 놓으신 것이다. 어머니가 그 핸드백을 갖고 싶다
고 말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마취가 깨어나는 순간 갖고 싶은 핸드백이 놓여 있고, 웃는 남편이 앞에 서
있었으니 더 바랄 게 없더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슬플 겨를이 없게, 서운할 겨
를이 없게 하셨다.
아버지는 음악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으셨다. 아버지가 늘 하시는 말씀
이 촌놈으로 태어나 음악을 들으며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음악
을 감상하는 여유를 갖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서울대학 정치학과 시험을 치를 때, 그 당시에는 음악 문제가 있었
던 모양이다. 다른 문제들은 다 자신 있게 풀었는데 음보 문제 두 문제만 못 썼
다고, 아예 문제를 풀어볼 생각도 못하고 백지로 냈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내와 딸들이 좋아하는 것을 늘 존중해주었다. 아니, 같이
좋아해주었다.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음악회에 가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나는 유명한 음악회는 꼭 가고 싶
었다.
미국에 있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음악회에 무척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괜찮은 음악회의 티켓은 값이 너무 비쌌다.
어느 날, 아버지는 시즌 티켓 2장을 사오셨다. 어머니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시즌 티켓은 여러 음악회를 갈 수 있는 박스(BOX) 티켓이었는데, 모든 면에서 `
적정선`을 외치는 아버지였지만 딸과 아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예
외였다.
케네디 센터에서 열리는 음악회니까 입고 가는 옷도 명화 속의 주인공처럼은
못해도 대부분 남자들은 정장에 턱시도까지 갖춰 입고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고
갔다. 또 자동차도 기사까지 터억 대기시켜놓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워싱
턴 시에 있는 케네디 센터는 그만큼 주변 미국인들과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격에 맞는 드레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모양을 내고 나
섰지만 자동차는 직접 몰고 가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사를 자청하셨다. 아
버지는 티켓이 없어서 음악회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케네디
센터 앞에 내려주고는 기사처럼 깍듯하게 절을 했다.
“사모님, 아가씨, 좋은 시간 되십시오. 소인은 음악회가 끝나는 세 시간 후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그동안 어디 계시려고요?”
물으면 아버지는 이미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주며 미소로만 대답하며 어디론
가 사라지셨다.
그리고 음악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른 기사들처럼 아버지 역시 달려와 인
사를 하며,
“사모님, 아가씨, 좋은 시간 되셨습니까?”
하며 웃으셨다.
“그 동안 어디 계셨어요?”
어머니가 물으면 그때서야,
“삼류극장에 가서 영화 한 편 봤지.”
라며 웃곤 하셨다.
이래도 아버지가 `촌놈`인가. 어머니의 세련된 연인이며 나의 달콤한 이상형이
었다. 둘째인 수정이에게는 든든한 대변인이기도 하셨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포동포동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유학시절 나를 낳았는데, 그때 돈이 없어서 나한테 잘 먹이
지도 잘 입히지도 돌상도 차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둘
째를 낳으면서는 잘 먹이고 잘 입혔다.
우유도 그 당시 영양분이 최고 많다는 걸로 먹이고 영양제도 먹이셨는데, 그
래서인지 둘째는 살이 쪘다. 커가면서 여자니까 비만에 대해 점차 예민해졌고,
그래서 둘째는 다이어트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아버지는 항상 방해꾼이었다.
예를 들어, 둘째가 체중계에 올라서서,
“나 일 킬로그램 빠졌어요!”라며 기뻐서 소리치면 아버지가 더 좋아하시며,
“축하한다, 축하해. 우리 수정이가 일 킬로그램 빠진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다들 중국집으로 가지.”
중국집에 가서 이것저것 요리를 먹으니 둘째의 빠졌던 1킬로그램은 도로 복원
되고 마는 것이다.
항상 살쪄서 고민인 둘째의 대변인인 아버지.
“살찌면 어떠냐? 건강하면 되지. 넌 매력 있다.”
그래서 둘째는 살 빼는 데 줄곧 실패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별다른 취미가 없으셨다. 취미라면 그저 딸들을 데리고 서
점에 가는 정도였다. 주말이면 꼭 온 가족이 서점에 갔다. 그리곤 각자 책들을
고르느라 바빴다.
대개 남자들은 여자들이 쇼핑갈 때 따라가는 것을 꺼린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가 옷을 사러 갈 때도 꼭 따라가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열 벌을
입어보든 스무 벌을 입어보든 옷이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학생 신분에 안 맞는
다 등의 코멘트를 하시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절대 밖에서 풀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
서 어머니와 술 한잔 하시면서 풀든가 아니면, 딸들의 재롱을 보며 잊어버리곤
하셨다. 이러니 딸들의 이상형은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객관적인
조건인 학벌, 능력, 외모 등을 따져봐도 손색이 없었지만 가정적이고 애처가라는
점에서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흠이 있다며 너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것. 그것도 흠이 될까만 흠
을 찾으라며 그것밖에 찾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
었다.
“나는 공무원이니까 물질에 마음을 두어선 안돼.”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절대 탐내지 않으셨다. 이를
테면 아들을 바랄 만도 한데 내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것이 좀 불만이었다. 잘 살아봐야 할 텐데, 그쪽으로는 관심조차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맞벌이를 하셔서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해도 경
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게는 살았다. 아버지가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어머니
가 또 메워나가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고마워했다.
어머니가 일하시기 때문에 본인이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늘 단정하고, 책을 많이 읽고, 합리적인 행동과 합리
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늘 강조하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검소와 절약`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그냥` 얻어보지
않았다. 구두를 닦고 방청소를 하고 마당이라도 쓸고 손님이 오면 부엌일을 돕
든지 해야 용돈을 탈 수 있었다. 전기와 수돗물을 절약하는 건 몸에 배어버린
습관처럼 되었다. 기름 한방울 안 나오는 나라이고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은
나라의 국민은 아끼는 것만이 버는 거라고 강조하셨다. 식사를 할 때도 밥그릇
을 깨끗이 비우지 않으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농부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 아느냐?”
우리는 입맛이 없을 때는 아예 밥을 적게 뜨든지 덜어내고 먹는게 습관이 되
어버렸다.
우리 집은 딸들만 있어서 자라나면서는 자연히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특히나 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다보니 더더욱 모양 내는 것에 빨리 눈을 떴
던 것 같다.
아버지도 막무가내로 “청바지만 입으면 되지” 이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
느정도 예쁘게 입는 것에는 찬성하셨다.
그러나 항상 신분에 걸맞는 선에서만 허용하셨다. 예를 들어 나는 얼마짜리
옷까지 허용한다, 이런 식이었다.
미국에서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들이 오히려 화장도 짙게 하고 옷도 잘 입는
다. 그래서 나도 유행에 맞춰 사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1년에 얼
마`를 결정하면 그 다음에는 한푼의 에누리도 없었다. 그게 나의 예산이었다. 남
이야 어떻든 항상 자신의 예산에 맞춰 쓰라는 것이다.
멋부리는 것에 한참 관심이 있을 무렵, 나는 귀를 뚫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이
야 귀를 뚫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어른들이 “
고등학생이 귀를 뚫어? 엉덩이에 뿔이 났구먼!”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외굴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귀를 뚫으니까 외국물은 먹은 우리들도 귀
를 뚫는 것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예쁜 귀고리를 거기다 달고 싶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 아이 중에도 귀를 뚫고 다니는 애들이 많았는데 그 부모님들
은 못마땅해도 거의 허락을 해 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완고했다.
“너는 한국인이야. 한국인은 한국 관습에 따라야 해.”
“그럼 뭐 귀 뚫는 것은 아프리카 사람만 하는 거예요? 다른 한국 애들도 다
한단 말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들이 한다고 너도 한다면 정작 너 자신의 생각은 어디 간 거니? 너의 주
관은 어디 있는 거야?”
그래도 졸라대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미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풀어 놓으셨
다.
“아름답다는 것은 요란스럽게 치장하는 게 아니야. 물론 단정하고 깔끔한 것
은 갖춰야겠지. 그러나 치장하고 꾸민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못 생겨도 매력적인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웃는 모습, 말하는 태도, 걷는 모양 등등...너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을 개발하도록 해야지. 남이 했다고 귀 뚫고, 유행이라고 이것
저것 사입고 그런다면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는 거야.”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제일 매력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얘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는 게 많아서 화제의 폭이 넓은 사람이야. 누구하고도 대
화가 가능한 사람 말야. 그런 사람이 가장 매력적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가장 평범한 미의 철학이지만 수긍이 갔다.
이렇게 나의 부모님은 우리를 야단치기 이전에 설득하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셌는데, 고집쟁이 딸도 아버지의 설득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교육이 고집쟁이 딸을 변화시켰다.
지금까지도 나의 이런 성격은 이어진다.
누가 나한테 단도직입적으로,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 나는 맞서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든다.
`의견이 다른데 서로 설득과정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네 말이 옳단 말야? 어
디 한번 두고 보자!`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내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가 엿보이면 나도 쉽게 풀어버
리곤 한다.
`한번 그런 쪽으로 생각을 돌려볼 필요가 있겠어`
이렇게 말이다.
또, 아버지는 항상 `공부`를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신 분이었다. 나중에 고위 공무원이 되고 난 다음에 `
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여자야 뭐 대학 웬만큼 나와서 시집만 잘 가면 되지.”
우리 주변에는 이런 가정도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대 웬만큼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물론 남편 잘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며가는 것도 좋지만 그건 상대가 있는 일이다. 나 혼자만
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과 영 맞지
않아 이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남자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
다. 그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므로 인생 전체를 걸어 매달
리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를 많이 하고 확실한 직
업을 가져야 함을 늘 강조하셨다.
전공을 선택하는 데도 여자들이 주로 가는 가정과는 아버지가 반대하셨다. 남
자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전공을 원했고, 남자들과 같은 사회에서 경쟁하려
면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저녁 때 아무리 늦게 퇴근하셔도 꼭 내 공부를 일일이 검토해주셨
다. 내가 수학이 어렵다고 하면 수학을 체크해주셨는데, 시험 때에는 라이벌의
수학점수를 체크하고는 비교하곤 하셨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고등학교 시험 때에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새벽 두세시에 눈을 붙였다가도 새벽 다섯시쯤에 일어
나 공부를 하면 아버지는 무척 대견해 하셨다.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일어나 공
부를 한다며 커피도 타주시고 어깨도 두드려주시며 좋아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여자가 살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밥벌이를 할 줄 알아
야 한다는 가르침을 늘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 당시 남자와 같이 겨룰 수 있는
한정된 전공을 아예 꿈으로 정해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늘 “비오는 날을 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아버지 임지를 따라 벨기에로 갔을 때 나는 어린 중학생이
었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암담했다. 1등이 다 뭔가. 공부는 고사하고 말이 통
하지 않았다. 학교생활도 겉돌고 선생님도 무섭고 입도 안 떨어지고 공부는 어
렵고, 힘들고 외롭고 슬펐다. 그날도 나는 엉엉 울며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
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버지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말을 하셨다. 지금이야
국제화다 세계화다 말을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생소한 용어였다.
아버지는,
“세계화 시대가 곧 올 거야. 언어를 될 수 있으면 많이 배워놓는게 좋단다.
유럽 사람들 봐라. 이유야 어떻든 세 가지 정도의 외국어는 하잖아. 남들은 돈을
들여가면서 배우는데 너는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니? 모든 건
과정이다. 힘들더라도 참자.”
하시며 내 어린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나는 그때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벨기에에 내 돈 들여서 오나봐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말했다.
“그때는 네 돈 들이지 말고 벨기에 국왕 돈으로 오면 되지 않니?”
“네?”
“훌륭한 의사가 돼서 벨기에 국왕 초청 받고 오란 말이다.”
라며 또 한번 껄껄 웃으셨다.
아,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첫딸이 그렇게 훌륭한 의사가 될 줄로만
알고 계셨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아웅산의 바람꽃이 되신 아버지
의사가 되리라는 생각이 결국 실패였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부모님한테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른 길을 찾아볼 것인가 고민하던 당시였다.
여름방학 때 한국에 갔다오고 나서 개학하고, 그렇게 나의 앞길에 대해 고민
하던 10월의 어느 주말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날 낮에 친구를 만나 돌아다녔
는데, 이상하게 쓸데없는 웃음이 많이 나왔다. 실없이 자꾸자꾸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길에서 허리를 구부려가며 웃었고 눈물을 찍어가면서 웃었다. 자
꾸자꾸 웃었다. 그런 후에 집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을 켰다. 사과를 깨물며 소파에 누웠다. 이상하게 한숨이 나왔다. 허
전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내가 울었는
지 웃었는지 분간 못할 것을 경험하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웃음인가 울음인가
모를 그런 것도 세상에는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텔레비젼에서 뉴스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웅산에서 폭발사고
가 났단다. 나는 뭔가에 감전된 사람처럼 천천히 일어났다. 아버지가 아웅산에
가셨는데, 하면서... 뉴스 속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한국의 정부 각처 장관들이 아
웅산 참배를 갔다가... 어쩌구 하면서 앵커가 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고, 전두환 대통령과 순방길에 올랐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서울 집의 전화번호를 눌렀는데 손가락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꾸 헛눌러
졌다.
제대로 걸었는데도 신호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전화를 눌러댔다. 역시 받지 않았다. 불길했다.
LA에 계시는 삼촌댁에 전화를 했다. 거기에는 둘째가 있었다. 삼촌이 전화를
받으셨다.
삼촌도 역시 계속 서울에 연락을 해보는 중인데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미친 듯이 어머니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마닐라로 가셨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기백 장군과 이기욱 재무부 차관이 생존자라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시대.너 빨리 LA로 와라. 한국에 들어가보자.”
나는 곧 삼촉댁으로 날아갔다. 삼촌과 나와 동생은 한인타운을 정신없이 돌아
다니며 아버지를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샀다. 사고났을 때 먹는 약
이어서 곧 완쾌가 될 거라고 말했다. 삼촌은 거금을 들여서 그 약을 사면서 그
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신께 감사드렸다.
“너의 아버지는 강한 분이니까 곧 일어나실 거다.”
나와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믿었으니까.
비행기 좌석이 없어서 무리를 해서 비즈니스 클래스에 올랐다.
내릴 때쯤 되어서 승무원들이 가지고 있는 리스트를 우연히 보았다. 그런데
`GO 이기욱의 딸 이은정'이라고 내 이름이 씌어 있었다. 나는 그때 GO의 뜻이
뭔가 하고 생각했다. 아, Government Officer라는 뜻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
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의 뜻이었음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때 이미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던 것이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비행기 안으로 양복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일이 생긴
거야.` 싸늘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양복 입은 사람들을 헤치며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뛰어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하느님... 누군가를 마구
부르며 뛰어갔던 것 같다. 동생도 나를 따라 뛰어나왔는데 워낙 행동이 굼뜨니
나보다 훨씬 늦게 나왔다.
공항에는 이모부가 나와 계셨다. 이모부의 눈치를 살폈다.
이모는 우리를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숨이 탁 막혔다.
“너희들이 비행기 타고 오는 동안에 아버지 시신이 이미 도착했다. 지금 국
립묘지 쪽에 따로 모실 계획인 것 같아.”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엄마 앞에서 울지 말아라. 엄마는 최선을 다했고, 엄마도 울지 않는다.”
이모부의 목소리도 낮게 갈라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기백 장관과 이기욱 차관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팔방 뛰
어다니며 소식을 듣고자 했단다. 그러나 소식을 들을수가 없어 답답해서 마닐라
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당시 미국의 슐츠 장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자를 살리라고 특별지시를
내린 상태였고, 아버지와 이기백 장군은 미국의 공군기지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졌다.
어머니가 도착하자 이미 아버지는 수술에 들어간 상태였다. 병원의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어머니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그런데 워낙 수술이 힘들었다.
미얀마에서의 1차 수술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알코올도 없고 수술실에 에어컨도
없어서 부채를 부쳐가며 수술을 했다니, 수술경과가 좋을 리가 없었다. 이미 염
증이 심해져서 아무리 시설 좋고 의료진이 좋은 병원에 실려갔어도 살아날 가능
성은 희박했다.
수술 후에 아버지가 깨어나셨다. 아버지가 눈을 뜨자 어머니는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헤어지지 맙시다.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는 거 아녜요? 절대
이렇게 헤어질 수 없어요. 안 그래요?”
그러자 아버지는 그 말을 알아듣고 눈을 깜빡거리셨다. 어머니는 뛸 듯이 기
뻤다. 이제 됐다, 싶었다.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이전의 순간적인 반짝거림이었다. 불꽃이 스러지기 전의
가냘픈 깜빡거림이랄까.
그날 밤, 아버지의 상태는 악화되었고, 어머니는 신부를 불러 조병성사를 받게
하셨다. 그런 후에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지막 가는 모습을 어머니께만이라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
로 눈빛을 한번 건네주기라도 하셨다. 그러나 딸들에게는, 그렇게 사랑하는 딸들
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 남기고 눈빛도 하나 못 남기고 그렇게 가셨다.
우리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리가 한인타운을
허겁지겁 돌아다니며 아버지 약을 살 때에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
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담은 관이 비행기로 옮겨져 김포공항에서 추모식을 할 즈음
우리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막내만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
이었다.
막내는 그때 초등학교 6학년, 어린 나이였다. 갑작스런 비보를 듣고 어머니가
필리핀으로 날아갈 때 서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모네 식구도 일본에 있을 때
였다. 막내 혼자 서울에 있었는데, 아버지 사고 소식을 들은 데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며칠 혼자 지내느라 손톱을 물고 또 물었다. 어머니가 나중에 와보니
막내의 손톱은 하도 물어뜯어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공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와 동생은 걷잡을 수 없이 울
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 당시 대방동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조그만 단독주택이었다. 집에 도착했더
니 이미 초상집이었다. 거실에 있는 소파며 가재도구들이 밖에 나와 있고, 사람
들이 모여 있었다. 마당에는 천막이 쳐 있었다. 5일장이었는데, 그 동안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다녀갔다. 어머니는 정신이 나간 것처
럼 멍한 표정만 지었다. 실감이 안 나는 얼굴 같았다. 도저히 보낼 수가 없다는
표정 같기도 했다. 슬픈 표정보다 더 지독한 표정이었다. 슬픔보다 더한 핏빛 감
정이 어머니의 속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일이면 관이 장지로 떠나는 날이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2층에만 텔레비전이 한 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정부에
서는 개각을 발표했다. 다 세상을 떠났으니 개각을 하긴 해야 됐을 것이다. 그런
데 우리 집에 조문을 왔던 많은 공무원들이 개각 발표를 보기 위해 2층으로 몰
려갔다. 그러면서 다들 누가 장관이 되고 누가 차관이 됐느니 쯧쯧거리기도 하
고 흥분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정신이 완전히 나갔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사람들이 ! 어떻게!”
아버지가 갔어도 사람들은 개각에 관심이 더 많고 자리에 더 관심이 많지, 슬
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나는 땅을 치며 울었다. 억울했다. 아버지가 바
보 같았다. 저런 사람들과 친했어? 저런 사람들밖에 아버지 주위에 없었어? 아
버지 바보구나... 그러면서 울었다.
삼촌과 이모부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붙잡았다. 그래도 울었다. 분하고 슬프고
외로워서, 아버지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따. 아버지가 참 많이 외로워하실 것
같았다. 아니, 아버지 특유의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아, 다 그런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억울해, 억울해...나는 바닥을 뒹굴면서 벽을 치면서 땅을 치면서 밤새 울었다.
날이 밝고 아버지가 묻히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딸만 셋이 있으니 큰딸인 내
가 영정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 영정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정신을 잃
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의 관이 들어가는데, 그제야 어머니는 현실감각이 생기는지 울부짖기
시작했다.
“같이 들어갑시다”하며 아버지의 관을 자꾸 붙잡으셨다. 정말 무덤 속으로
들어가실 기세였다. 내가 정신을 차릴 때였다. 어머니를 붙들고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질렀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를 원망하셨을 것이다.
이러실 줄 몰랐다, 이렇게 갈 거냐, 이렇게 헤어지려고 하느냐...
자꾸자꾸 우셨지만, 나는 제대로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못했다. 장례식 때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싫었고 그후로는 어머니가 슬퍼하
실까봐 제대로 울 수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서는 자꾸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사고를 당한
후에 제대로 치료만 받았어도 사셨을 텐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분하고 안타
까웠다. 그런 배려를 해주지 않은 모두가 증오스러웠다. 게다가 장례식을 치른
후에 곧바로 안면을 바꾸는 인간들을 보면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싫어졌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게 있다.
“빈곤이 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가짜 우정은 창으로 나가버린다.”
그래서 무슨 일엔가 실패를 하는 사람들은 그 실패 자체보다 사람들 때문에
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 예를 들어 사업에라도 실패 할라치면, 예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았던 친구들이, 저 친구가 혹시 내게 도움이라도 청하지 않
을가 싶어 경계하고 피한다. 그럴때 실패한 자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느끼는 것
이다.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척하다가 아버지
가 안 게시니까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허망하고 슬펐다. 이런게
사는 건가...
위로 차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속을 뒤집어 놓고
가기가 일쑤였다.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위로의 방법이 서툴렀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찾아와서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을 주는 말이 아닌, 과거에 매달리라는 듯, 절망의
소리들만 하고 갔다.
“이제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좋은 분이셨는데...”
“너의 아버지가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나는 싫었다.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
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돌아가셔서 장례식까지 마쳤는데 언제까지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상
상해가며 얘기를 엮어나가야 하는가.
또 한가지, 기자들이 드라마틱하게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게 싫었고, 유가족 중
에도 어느 특정인들의 가족만 다루면서 차별하는 것도 싫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래저래 우리 가족에게 깊은 소외감과 상실감을 남겼다. 세
상이 한번 핑글 돌면서 거꾸로 서버린 느낌이었고, 세상이 밝은 빛에서 어두운
빛으로 물감 붓을 바꿔든 듯한 느낌이었다.
그후, 아버지와 관련된 행사가 있는 날은 그렇게도 추웠다. 왜 그렇게 추웠는
지 모른다. 특히 49제 때는 너무나 추웠다. 바람이 황량하게 불고 마음이 얼어붙
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바람 부는 추운 날씨가 친근감이 가면서도 싫다. 그래서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설 무렵이면 가을이 두렵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나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을까”하는 점이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가족을 두고 떠날 분이 아니셨다. 어머니를 두고 혼자 가
실 분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홀연히 가셨을까.
이해할 수 없고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지독하고 혹독한...
비오는 날을 대비하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이미 학기 중이었지만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머지 학기는 그냥 쉬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지독한 방황이었다. 아버지가 왜 돌아가셔
야만 했는지, 그걸 납득하기 위해 참 많이 헤매다녔다.
친구를 찾아가 무작정 울고 싶기도 했지만 외국에서 오래 산 탓에 그럴 만한
친구도 없엇다. 수첩을 뒤적거려봤지만 내 슬픔을 어루만져줄 친구가 없었던 것
이다.
인디언 말로 친구란 `나의 슬픔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겐 나의 슬픔을 짊어지고 가줄 친구가 없었다.
만날 친구도 없고, 어머니도 있는데 집에서 슬픈 표정을 보일 수도 없었고, 다
른 유족들도 있는데 나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황의 방법이란 그저, 서울 시내를 떠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걷다가 지치면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다시 종점까지 오고, 강을 건
너갈 때에는 그 강에다 누구의 표현처럼 나의 마음을 떼어내버리고만 싶었다.
늦가을의 나무들이 잉잉거리며 나뭇잎을 강에다 흩뿌리고 있을 때면 더욱 그랬
다. 자신의 잎사귀를 떨어뜨려 생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 나무가 부러웠다. 나
도 내 가슴에서 마음의 자락들을 하나하나 뜯어내 강불 속에 뿌려버리고만 싶었
다. 달려드는 추억과 허무와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과 그런 모든 것들을 나에게
서 분리시켜놓고 싶었다.
나는 천성적으로는 감정을 잡는데는 영 소질이 없었으나 그 당시에는 정말 나
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성보다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몰렸고 자꾸 감상적으
로 되어갔다.
거리를 걷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아무 커피숍에나 들어가 어
둑어둑해질 때까지 앉아서 혼자 생각하고 도 생각하고 그러다가 터벅터벅 다시
나오고...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도 어떤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혼자 생각해
야 했고 나혼자 논리를 정립시켜야 할 문제였다.
아버지는 죽어서는 안 되는 분이다. 그런데 왜 죽어야만 했는가? 왜 그토록
빨리 돌아가셔야 했는가?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다”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정말 나의 아버지는
열심히 사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열심히 사신 분에게 왜 이런 불행이 찾아왔을까, 또다시 머
리가 복잡해졌다.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명이 다해서도 아니고 아버지의 의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신의 뜻이다...
거기에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교회로 달려갔다.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솔직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도 많이 읽는 신자는 아니었
다. 그러나 신의 절대성을 믿고 어려울 때는 의지하는 편이다.
기도를 드렸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천국의 문은 기도에 대해서는 닫혀 있을지 몰라도 눈물에 대해서는 열려 있
다.`
눈물은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 개인이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했다. 나는 이 시
련을 극복해내야 했다.
이를 악물고 자신을 추슬렀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슬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셨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평소에는 안 그런 척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우
셨다.
어머니가 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직장이 있다고
는 하나 딱히 내세울 만한 취미도 없었다. 고작 아버지와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술 한잔 나누는 정도, 아버지와 서점에 가는 정도, 우리와 음악회에 가는 정도
(그것도 아버지가 데려다주셔야)였다. 그 당시 어머니는 살아갈 낙을 완전히 잃
으신 것 같았다.
누군가 금실이 좋은 부부 사이는 운명이 샘을 내서 떼어놓는다고 말하더니,
그런 말도 진리처럼 생각되어졌다.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운명이 갈라놓지 않았
다면 평생을, 그야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사실 분들이었다.
어머니는 그후로 일에 전념하시는 듯했다. 어머니는 코리아 헤럴드 기자였는
데,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퇴근 후에 약속을 전혀 만들지 않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약속을 일부러 만드시는 것 같았다. 일에 몰두해서 밤새 원고
를 쓰고 새벽에 나가고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셨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머니가 일에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은 분명 잊기 위해서
였다. 아버지를 잊기 위해서, 생활의 빼앗긴 즐거움을 잊기 위해서, 그렇게 어머
니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고 게셨던 것이다.
예전엔 감투에 영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더니 여기자협회 회장직도 맡으셨고,
여러 사람과 만나는 것을 새로운 낙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밤에
혼자가 되면 술을 한잔 하시고 우셨다. 우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가끔 그런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잘하시던 말씀 중에 “비오는 날을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
에게는 그나마 그 비오는 날을 대비할 만한 `일`이 있었다. 다른 유가족들이 잘
안 풀린 경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내들에겐 거의 다 비오는 날을 대비할 만
한 `정신력`과 `일`이 없었다. 그저 남편의 그늘에만 있다가 남편이 죽자 갈팡질
팡하는 사례가 많았고, 그래서 자녀들이 잘 안 풀리고 집안이 힘들게 돌아가는
경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어머니가 빠른 속도로 가정의 질서를 잡아나가셨다. 아버지
말씀처럼, 어머니는 충격을 잊어버리고 몰입할 만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비오는
날에 자신뿐만 아니라 지식들에게도 우산을 씌워줄 수가 있었다.
나는 생각들을 차츰 정리해갔다.
우선, 인생은 허무하다. 모래산과 같은 것이 바로 인생이고 신이 허락하는 날
까지만 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생의 과정인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볼 때, 아버지는 늘 과정에 충실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
셨고 아버지 또한 그렇게 사셨다. 나 또한 열심히 걸을 준비를 마음속으로 갖춰
나갔다. 결과를 위해 편법을 쓰지는 않겠지만 치열하게 정도를 걸어가겠다고 생
각을 굳혔다.
사람들은 대개 불행이나 사고는 남에게만 온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과는 무관
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불행이 우리 가족에게 닥치리라고 생각
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우리 가족이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오래도록 방황
했다. 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하는지 억울해했다.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
책임인가, 분하고 증오스럽기가지 했다.
그러나 생은 혹독하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폭풍이
불어닥칠지, 언제 얼마 만큼의 폭우가 쏟아질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
간의 몫이 아닌 신의 몫이므로... 그러니 어쩌겠는가. 대비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고 몇 번이나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은정, 이제부터야! 강해져야 해!
나의 방황의 끝은 미국행이었다.
어머니는 직장에 복귀해서 이미 일에 혹독하게 매달리기 시작하셨고 둘째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귀국했다. 어머니가 많이 외로우실 것
같아서였다.
나는 미국으로 떠났지만 다시 버클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시건으로 갔다. 그
동안 버클리 대학 과학계열에 다니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이미 나는
과학계열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고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더이상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
다. 버클리로 가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위로할 것이고 그 때문에 허약해지고 싶
지 않았다. 동정의 눈빛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
고 싶었다.
나의 꿈인 의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는데, 그건 결국 나의 진짜 꿈이 아니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의사란 직업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또한 커리어 우먼이 되
고 싶어하던 내가 막연히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아니다 싶으니까 더 늦기 전에 전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뭔
가 내가 끌릴 만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전혀 허락하지
않는 공부 말이다. 그러니까 놀고 싶어도 놀게 만들지 않는, 나를 깊숙이 파묻을
만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사람 만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춘기
시절에는 외국생활에서 오는 고립감 때문에 친구들을 많이 못 사귀었지만 대학
에 가고 나서 얼마나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나 자신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 무엇
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재미가 있고 의미가 있게 느껴졌다. 물론 아버
지의 죽음으로 사람에 대한 회의가 많이 생겼지만, 그 전에는 사람과 사람이 만
나 얘기를 나누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성향에 맞게 비즈니스 우먼
에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그 당시, 나는 한 잡지의 커버 스토리에 나오는 비즈니스 우먼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장 투피스에 서류가방을 들고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를 펼치는 이야기, 그걸 읽을 때 나는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활동무대도 내가 정하고 나의 역할도 내가 정하는 그 비즈니스 우먼의
세계가 정말 멋있게 다가왔다. 그것 역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었
다. 나는 열심히만 하면 충분히 국제무대를 상대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죽도록 고생도 하겠지만 말이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정장 투피스 차림의 서류가방을 든 비즈니스 우먼, 정
말 매력적이었다. 내 인생의 승부를 걸어볼 만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계통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미시건 대학의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불꽃처럼 치열한 전사처럼
`깜짝 놀랄 만한 고속승진`
`입사 3년 만에 신기록 수립`
`눈에 띄는 고속승진 우먼`
`최연소 여성 임원 탄생`
`30대 기업 별 떴다`
이런 제목을 달고 나에 대한 기사가 나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내게 물어왔
다.
“그 비결이 뭐예요?”
글쎄, 안타갑게도 나에게는 비결이 없다.
아마도 “발등의 불을 꺼가며 정신없이 달려왔다” 정도가 답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대학 다닐 때 룸메이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꼭 오늘 살고 말 사람 같아.”
첫직장 상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치열한 전사 같다.”
나는 강인한 인상의 표지모델처럼 사는 건 싫었으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비쳐
졌던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 살고 말 사람처럼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그것도 미래
의 원대한 꿈을 향해 달려왔다기보다는 그저 발등의 불을 끄는 심정으로 달려왔
다. 앞에 불이 붙는데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피해가지는 않았다. 그 불을 꼭 껐
다. 꺼가며 달려오고 불이 보이면 또 끄기를 계속했다.
사람이 이 지구상에 떨어질 때, 운명이라는 걸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 후로 운
명을 개척할 것인가 운명에 지배당할 것인가는 자신의 몫이다. 나는 운명의 회
오리가 불어닥칠 때마다 그냥 넋놓고 주저않는 스타일이 아니다. 싸우고 대드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힘들기도 했고 그만큼 굴곡이 깊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면 짧은 삶의 거리에 참 많은 골짜기가 패어 있
다. 누구든 다 길이 이렇지는 않으리라. 잘 포장된 고속도로 같은 길도 있을 것
이고, 험난한 자갈밭길도 있을 것이다. 나는 늘 자갈밭 쪽을 골라 디디며 달려온
것 같다.
성공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직도 그 이름을 얻으려면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성공이라는 걸 했다면 그건, 다 그 선택의 덕
이다. 평야와 아스팔트 대신에 자갈밭과 골짜기를 택했던 그 선택이 나를 여기
까지 이끌고 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좋은 부모 만나서 외국물 먹으며 자라나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지 않았느냐
고...
인정한다. 나보다 훨씬 불리한 생의 조건에서 태어난 분들이 생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뭔가를 이뤄내는 걸 보면 정말 존경심이 절로 든다.
나는 못 먹어서 고생한 적은 없었으나 정신적으로 참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정신적인 시련이 참 많았고, 그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늘 혼자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격 탓인지도 모르고 여건 또한 그랬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듯 외국에 있어야 하는 것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
조금 적응될라치면 또 다른 나라로 떠나야 했고, 언어를 좀 익힐라치면 또다시
떠나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나는 정말 외로웠다. 혼자 결정해야 되고 혼자 극복
해내야 할 과제들이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많이 주어졌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참 가난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 미국으로 유학
간 분들의 고생은 정말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미국에 친
척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국에서 넉넉하게 돈을 부쳐올 만한 형편도 아닌데
다가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고생들을 했다고
들었다. 나의 부모님 또한 그랬다. 무척 가난한 유학생 부부였던 것이다. 그 사
이에 내가 태어났다. 원하지 않는 시기에 첫딸을 낳은 부모님은 생활과 학문 사
이에서 허덕거리셨다. 나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서 책을 팔자니 공부는 해야 하
고, 학문과 육아 사이에서 고생을 엄청나게 하신 것 같다. 나는 주로 탁아소를
전전하거나 남의 손에 맡겨져서 자랐는데, 첫돌에 돈이 없어서 돌상은 커녕 사
진 한 장 찍어주지 못한 것을 부모님은 내내 가슴 아프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다행히 에상보다 아버지가 일찍 공부를 마치는 바람에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귀국할 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바쁜 부모님이 나와 같이 있어줄 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
문에 나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다. 귀국해서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선생님과 아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발짓을 보고 대강 뜻을 짐
작할 정도였는데, 어린 나이에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자주 우울해했다고 한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가 걱정하는 말을 하자 내가 그러더란다.
“머리가 똑같이 까만 애들이랑 있으니가 너무나 기뻐.”
어머니는 안심을 했고, 나는 워낙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영어는 완전히 잊어
버리고 차츰 우리말을 익히게 되었다.
유치원을 마친 뒤 리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외갓집에서 살았기 때문
에 작은 외할아버지와 손잡고 남산길을 걸어 학교까지 가곤 했다. 아주 어린 시
절이라 생각을 잘 안 나지만 단편적인 기억 속의 풍경이 몇 컷의 그림처럼 새겨
져 있다.
화려한 빛깔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길을 걸어가는데 반대편에
서 개 한 마리가 걸어왔다. 그 개는 다쳤는지 절뚝거렸다. 나는 달려가서 개를
안았고, 개가 너무 불쌍하다며 울었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결국 그 개를 집으
로 데리고 와서 정성껏 치료한 뒤 우리 집에서 길렀다.
외할아버지는 길 잃은 고양이나 개들도 잘 데려오셨고, 집 잃은 고아들도 데
려다가 배불리 먹여 돌려보내곤 하셨다. 그리고 아침운동 시간에는 꼭 내 손을
붙잡고 학교까지 데려다주셨다.
그 당시 이미 어머니도 직장을 가졌기 때문에 나는 주로 외할아버지와 남산을
거닐며 놀았다.
겨울에는 눈이 하얗게 내리는 길을 걸으며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들었고,
여름에는 눈부신 초록의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보냈다.
어린 시절, 친구보다 할아버지나 동물들을 더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미국에서 유치원까지 지내다 온 탓도 있을 것이다. 말이 이상하니까 친구들이
잘 놀아주지 않았고, 그래선지 혼자 노는 게 습관이 돼버린 것 같다.
그런 상태는 중학교 1학년까지 이어졌다. 명동에 있는 계성여중에 입학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수녀님이었다. 아주 다정다감하신 분은 아니셨다. 그저 의무감으
로 대하는 듯해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음에 맞는 친구도 사귀지 못해 그
때 역시 외롭게 보냈던 것 같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다. 이름이 나
와 같은 은정이었는데 세상의 모든 `맑음`을 다 가진 아이였다. 눈빛과 목소리와
생각이 맑은 그 아이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내 인생의 첫 우정이었다.
담임 선생님도 좋은 분이었다. 첫인상에 나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었는데 이
제 정말 학교생활을 멋지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나. 우리 식구 모두가 벨기에로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가 주 벨기
에 한국 대사관에서 경제담당 공사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도 직장
을 휴직하고 가족이 모두 벨기에로 떠나게 되었는데.... 나의 첫 우정인 은정이와
꼭 편지하자며 우정을 다짐했던 사춘기 소녀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런 이별도 참 감당하기 힘들었던 나이였다. 어른이 되고나서 생각하
면 별 거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했을까. 유치하다 싶은 감정이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처럼 느껴졌다.
슬픔이란 그렇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자신에게는 커다란 바위와
도 같은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벨기에로 떠나는 일이 정말 싫었고,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사실
이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럴까, 벨기에에서의 기억들은 모두 어둡기만 하다.
벨기에.
내 인생의 최초의 시련.
지옥 같은 날들.
매일 울지내던 시절.
외로움과 고독과 비참함의 날들...
벨기에에 대한 기억은 주로 그런 것들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영어를 쓰는 미국인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어를 사용
하는 중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불어의 A, B, C, D도 모르는 판이었는데, 다른 애들과 똑같이 중2과정에
놓여졌으니, 그야말로 무리였다.
말이 안 통해서, 공부가 너무 힘에 부쳐 매일 울었다. 그때 아버지, 어머니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랬다. 내가 투덜거리며 속상해할 동안에 시간은 자꾸 옆으로 새어나가고 있
었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힘을 얻고 이를 악물었다.
내 나라 말이 아니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나라 말로 공부해도 이 나라 애
들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다. 아니 내가 리드할 수 있다. 왜냐? 나는 지독한
오기를 가진 한국 여자니까.
공부는 하면 된다는 마음이 있으니 그건 어려운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벨기
에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버디 하게트가 이런 말을 했다.
“투덜거리지 말라. 당신이 투덜거리는 동안 당신의 친구는 댄스 파티장으로
떠나버릴 것이다.”
벨기에의 중학 과정은 우리나라의 대학처럼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가며 수업을
듣는다. 각자가 자신들의 능력에 맞게 선택한 과목을 공부하는데, 그들은 아주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거의가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극히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악착같이 공부하는 학생들
이 없고 선생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학생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벨기에에 있을 때가 1970년대 말이었는데, 그때는 유럽 사람들이 한국을
잘 몰랐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게 어떤 나란데?”
“어디 있는 나란데?”라고 물을 정도였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들은 그저 아시아 하면, 일
본과 중국 정도를 떠올리는 듯했다. 일본은 가전제품과 자동차를 잘 만드는 나
라, 중국은 땅덩어리가 큰 나라라는 정도의 상식밖의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 유럽에는
한국 고아가 많았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1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아주 어려
서 입양되어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완전한 벨기에 사람으로 커가고 있었다.
한국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고 알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한국에 대해 알더라도
고아가 많고 아시아에서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나라에다가 분단국가라는 정
도를 알고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한국 사람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 대해서도 전혀 성의가 없었다. 선생님한테 면담을 요청해
도 그렇고, 친구들과 대화하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중학생들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데 벨기에 학생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나도 부모님도 불안했다. 그래서 면담을 하고 싶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해야 하니 좀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렇게 도움을 요청해도 누구 하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선생이 없었다.
긍정적이진 않더라도 반응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전혀 무반응이었다. 아시아의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애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거의 개 짖는 수준으로
듣고 흘려버리고 있었다.
외로웠다. 서울에 있는 친구와 편지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마저 끊겨버렸다. 나는 그 친구가 정말 필요했으나 그 친구는 주변에 친
구들이 워낙 많으니 나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대답 없는 편지를 몇 번 보내다가 나도 그만둬버렸다.
쓸쓸한 소녀시절이었다.
게다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은, `etudent libre`라는 딱지였다. 지금도 정
확한 뜻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의 의미인 것 같다. 나
는 그 딱지가 창피했고, 나와 부모님은 학교에 찾아가 항의를 했다. 그러나 교장
은 무게를 잡고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 공부하는 데 무리가 있다. 본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그러는 거니
까 열심히 공부해라.”
한국에서는 1등만 하던 내가 벨기에에 가서는 정식 학생이 아닌 청강생이라
니... 자존심도 상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밤늦게까지 불어 단어를 외우고 숙제도 최선을 다해서 해갔다.
부모님이 가정교사까지 붙여주어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한국 사람 우습게 봐? 나 너희들보다 이만큼 잘해” 이런 걸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치밀었다. 나는 안 되는 걸 되게도 하는 지독한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독하게 공부한 결과 이래저래 말도 통하고 공부에도 재미를 붙여가는데, 이
번에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는 현지 사정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가고
사람들의 생각도 좀 알아가던 때였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정말이지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으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교장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교장실을 찾았다. 교장이
학교 서류를 건네주는데, `청강생`이라는 기분 나쁜 딱지를 그제야 빼주었다. 속
시원했다. 그 딱지 때문에 속을 끊인 날들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이 왜 좀더 일찍 그런 배려를 해주지 않았는지 그 심술과 무관심을
어린 나이였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렇게, 나의 우울하고 외로웠던 벨기에에서의 생활도 끝나고 내 인생
의 새로운 무대, 미국에서의 또 다른 날들이 열리고 있었다.
나 홀로 미국에
사람들의 그리움은 늘 먼 곳을 향해 열려 있다고 한다. 곁에 없는 것,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해서 열려 있는 것이 바로 그리움인 것이다.
나는 외국에서 주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특별히 애국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
고, 그럴 나이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학생
들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늘 그리워했다.
그 남산의 낙엽 쌓인 길, 단발머리의 친구들, 우리말로 수다떨고 길에서 군것
질하고... 한국에서 보낸 짧은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나의 사춘기를 지
냈다.
벨기에에서 중학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갔다. 아버지가
주미 대사관의 경제 공사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 하도 고생해서 그런지 미국 생활은 상대적으로 훨씬 편했다. 먼저
학교 주변에 한국 외교관도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도 많이 살아서
학생들도 외국인이 많았다.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에 맞게 미국은 외국인에 대해 학교에서만큼은 관대했다.
영어를 모르면 ESL에 보내서 영어를 가르쳐가며 학과공부를 시켰다.
나는 벨기에에서 불어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두었기 때문에 언어 적응하는
데는 쉬었다. 벨기에라는 높은 산을 넘고 나니 미국의 언어는 평지와도 같았다.
선생들도 친절했다. 동양계 학생들에 대한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들은
마약, 폭력 등과 거리가 멀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중에는 동양계가 많았
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어려움 없이 보냈다. 적어도 공부 면에서는...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내게 없다. 사춘기의 낭
만을 꿈꿔보기도 전에 외국어를 익히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학교에서는 공
부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으나 친구는 없었다.
그때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벨기에에서의 생활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
지 모르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친구 하자고 말을 걸어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파티에도 가지 않았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장 추억이 많았던 때를 들라면 거의가 고등학교 시절을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그 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며 깔
깔거릴 때면 은근히 질투심까지 생겨난다. 복장단속할 때 빠져나가던 기억, 학교
담을 넘던 기억, 선생님 짝사랑하던 얘기, 선생님을 놀려먹던 얘기, 연예인을 동
경해서 친구와 편지를 보낸 얘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의 여고 시절에 대한 기억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아마 우울한 불루빛이 배경
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단어 하나를 더 알기 위해서 애쓰고, 저 사람이 지
금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다른 애들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 공부하던 한 아이가 떠오른다.
놀이라고는 음악을 듣고, 어머니와 음악회에 가고, 온 가족이 서점에 들러 책
을 샀던 기억들밖에 없다. 친구는 곁에 없었다.
주변에 아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일부러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
다. 언제 한국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었고, 또 언제든 다시 돌아가고 싶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구태여 미국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들과 친해
질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었다. 그저 내가 할 일은 성적을 올리는 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내 인생관을 바꿔놓은 시기가 닥쳐왔다.
<나 홀로 집에>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나 홀로 미국`에 남겨지는
상황이 다가오고 만 것이다.
그렇게 2년이 흐르고 나는 고3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한국으로 급작스
럽게 발령을 받았다. 식구들이 다들 귀국 준비를 서두르는데 정작 내가 문제였
다. 한국에 가서 고3 생활을 하자니 국내의 입시전쟁에 휩씁릴 일이 막막했다.
부모님은 고민을 하다가 나만 미국에 남겨두기로 결정을 내리셨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한 미국인 가정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미국인 가정은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세 자녀가 있었고, 아버지는 유명
한 초콜렛 회사의 최고 경영진의 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살림만 하는 전업주
부였지만 명문대 출신에 미모까지 갖춘데다 봉사활동도 하고 지역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4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배경은 아주 특이했다.
여자는 원래 기혼여성으로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잘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
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세 자녀가 있고 남편도
있는 여자였지만 사랑의 불길을 끌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이 여자를 사랑한
후 3년 동안, 그야말로 모든 노력을 동원해서 여자의 사랑을 갈구했다. 여자는
처음에는 냉담했으나 이 남자의 너무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서 가정에도 차츰 금이 갔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후로도 3년이나 구혼을 하며 애원하는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세 남매도 함께 데리고였다.
그런 후 이 가족은 참으로 행복한 생활을 했다. 남편은 부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여자라고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해댔다. 아내 또한 돈 많고
매너 좋고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주는 남편을 사랑하며 잘 살고 있었다. 재혼하
면서 같이 데리고 온 3남매도 아무 탈없이 새아버지와 잘 살았다.
어머니는 이런 집에다 나를 아무 의심없이 맡겨놓았다.
그 집에 가서 사는 1년 동안은 정말 우울했다. 나만 남겨졌던 것이다.
그런데다 그들과 함께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일이 터졌다. 남편이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남자에게 젊은 애인이 생겼다고 했다. 부인은 울며불며
이혼할 수 없다고 매달렸다. 그러자 남편이 이혼소송을 걸어왔다.
그야말로 여자에게는 맑은 하늘의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여자는 배신을 당했다. 남자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한 여
자를 버렸다.
이게 사랑인가.
허무했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한시적인 것인가. 열렬히 사랑하면 결
혼하지 말라던 충고가 생각났다. 친구 감정이 부부사이로는 그만이라는 얘기다.
그건 곧 사랑은 변할 수가 있다. 뜨거울수록 빨리 식는다는 말과 같다. 친구 같
은 부부 사이는 오래 간다고 한다.
남편에게 갑작스러운 배신을 당한 그 부인은 비록 명문대 출신이긴 하지만 졸
업하자마자 곧 결혼해서 살림만 해왔던 여자였다. 지역 봉사활동도 남편이 벌어
다 준 돈으로 했던 터라 미래가 막막했다. 남편이 떠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파
멸을 의미했다.
이 부인은 자신의 그런 불안을 누군가 붙잡고 우는 것으로 표출했다. 매일 그
부인의 우울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얼굴을 대하려니 너무나 괴로웠다.
안 그래도 가족과 떨어져 힘든 나에게는 정말 시련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걱정하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일일이 말할 수도 없고 나는 혼자 끙끙 앓으며 될
수 있으면 하루하루를 밖에서 보내려고 노력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아르바
이트도 했다.
부모님께서는 비교적 넉넉하게 생활비를 송금해주셨지만 돈이 갑자기 필요할
때에는 손벌릴 데가 없었다. 내가 사는 집 아주머니가 그런 상태고 보니 내 어
려움이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집을 지키며 아기를 봐주는
베이비 시터(Babysitter)같은 일을 주로 했다. 그리고 남의 집 파티에서 음식을
날라주는 일도 했다. 한때는 유태인 가정의 청소일을 한 적이 있다. 돈이 꼭 필
요한 때였고, 시간제여서 좋아했는데, 주인인 유태인 아주머니가 어찌나 꼼꼼하
게 일을 시키는지 그만 두손들고 말았다. 단 1분도 내버려두는 법이 없이 이것
저것을 `확실하게` 시켰다. 유태인은 지독하다는 말이 편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한 적이 있었지만 정말로 지독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돈을 버는 일이 쓰기 보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렇게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바쁜 중에도 집안의 우울한 분위기는 나까지도
우울한 빛으로 채색시켜버릴 것 같았다.
부인은 나중에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
할 때>에서 알코올 중독자로 나오는 주인공 맥 라이언의 상태보다 더하면 더했
지 덜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술을 마시는 것도 남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마시고, 감정도 자제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정도가 심해지니까 아이들에게 자꾸 시비를
거는 모습이 마치 일부러 싸움을 걸려는 사람 같았다. 순진한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저럴까 싶었는데 이 부인도 자신의 감정을 풀만한 대상이 딱히 없
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밖에는...
아이들 중에 큰아들은 나와 동갑이었고 둘째, 셋째가 내리 두 살 터울이었다.
나는 두 아들과는 잘 지내는 편이었다. 서로 이성친구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집
안 분위기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으며 그렇게 잘 지냈다. 그러나 둘째 딸은 이상
하게 거리감이 있었다. 나와는 많이 다른 아이였다.
이 세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감싸주려고 노력하는 듯했
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힘들어했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그
절망감을 술로 풀면서 온 가족들을 들들 볶아댔으니 누군들 좋아했겠는가.
나 또한 처음에는 그 아주머니를 참 좋아했다. 아주머니는 항상 나를 딸처럼
여기고 쇼핑할 때도 꼭 내 몫까지 사와서 주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주
곤 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나는 그런 아주머니에게서 어머니 같
은 정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나까지
도 무척 지치게 만들었다.
집안이 자주 소란스러워져 갔다. 아이들과 아주머니 사이에 분쟁이 잦아져만
갔다.
나는 이들의 중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면 정말 난감했다. 그렇
다고 소란스러울 때마다 자리를 피할 데도 마땅치 않아 이불 속에서 귀막고 눈
감고 견뎌내야 했다. 참으로 우울했던 1년이었다.
그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아버지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을 대비하라.”
특히 여자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그 부인을 보면서 그 말을 마
음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부인은 결국 안타깝게도 알코올 중독자 수용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수용원은 이런 알코올 중독자를 외부생활로부터 격리시
키고 술을 못 마시도록 철저히 감시한다. 가족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면
회를 허용하고, 상태를 봐가면서 경과가 좋아지면 면회 횟수를 늘려준다.
나도 애들을 따라 몇 번 면회도 가보았고,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들을 대상으
로 하는 카운슬링도 받아보았다. 이 카운슬링은 비슷한 처지의 가족들이 빙 둘
러앉아 서로의 고통을 얘기하며 위로받는 자리다.
이 카운슬링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
알코올 중독이 되면 그 사실을 자신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코
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
청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모든 면에서 그러하리라. 스스로 알아서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진단해야
한다.
타진법이라는 게 있다. 수박을 두드려서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알아보고, 항아
리를 두드려서 튼튼하지 못한가를 알아보듯 이 의사들은 사람의 몸을 진찰할 때
두드려본다.
그렇다. 자신이 스스로 나의 상황을 늘 두드려봐야 하는 것이다.
똑, 똑, 똑...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가.
제대로 길을 걷고 있나.
지금 내가 너무 처지진 않았는가.
내 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나는 지금 건강한가...
외로운 사랑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부인
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나는 의사가 되리라는 꿈을 안고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는데, 주로 학과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복사하고 타이프를 치고 서류를 전달하는 정도의 간단한 비서업무였다. 항
상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일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다.
방학 때는 햄버거 만드는 사람의 보조역도 했다. 이 일도 단계가 있다. 맨 처
음에는 그릴에서 햄버거에 끼워넣는 고기를 집어주는 일, 그 다음에는 청소를
한다. 다음에는 직접 만드는 일을 하고, 최종단계로는 비로소 홀에서 주문을 받
을 수 있다.
몇 달 동안 그 일을 해본 경험자로서 지금도 버거킹 햄버거를 사먹을 때면 그
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서투르게 행동하는 종업
원을 보면,
“아니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충
동이 생기곤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친한 친구도 없이 공부에만 매달리던 나는 대학에 가면서
180도 달라졌다. 내가 나서서 친구를 먼저 사귀고 활달하게 그들과 어울렸다. 여
럿이 만나서 토론하고 술도 마시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대학시절, 참 많은 부류와 사귀었다. 그들 중에는 순수 미국인도 많았지만 유
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로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어울렸다. 대부분의 유
학생들은 부활절 방학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이른바 미국 명절에는 갈 데가 없
었다. 여름방학은 길기 때문에 고국에 다녀오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기에 좋지만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고작 일주일 정도이기 때문에 텅 빈 기숙사나 자취
방에서 쓸쓸히 지내야 했다.
그럴 때면 몇몇 친한 유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지냈다. 밥도 해먹
고 텔레비젼도 보고, 어쩌다 싸웠다가도 서로 갈 곳도 없는 처지이니 금방 다시
화해하곤 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는 학생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겠
지만 다른 나라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맞는 명절에는 참 외로웠다. 그래선지 유
학생들은 외롭다는 사실 하나로 꽁꽁 묶일 수가 있었다. 아무튼 이런 때는 주로
우리 집이 아지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집주인이 좋아선지 술을 잘 마셔서인
지, 저녁 때가 되면 다들 모여들었다.
명절 때만이 아니었다. 한국학생회에 문제가 생긴다든지 하면 우리 집은 또
밤새 토론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마당이 되기
도 했다.
단언하건대, 혼자보다 여럿은 분명 이득이다. 귀찮은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 물론 학업적인 면에서는 많은 손해를 봤다. 고등학
교 때까지 혼자 열심히 하던 때에 비하면 나 자신에게보다는 다른 많은 사람들
에게 내 시간과 정신을 쏟아부었다.
그들이 내게 말하는 고민이나 문제를 나는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
들은 그들대로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데 위안을 삼았고, 나는 나대로 커뮤니케
이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말하는 것보다 들어라!”
그것이다. 평범한 진리지만 매우 필요한 것임을 대화를 할 때마다 깨닫게 된
다.
나의 학교 성적은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때 나는 정
말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파악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치는 그 무엇보다 `사람`임을...
인생에 있어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
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때,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여
겨졌던 나의 사랑을 만나게 되었다. 한마디로 나와 느낌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시작될 때, 나는 행복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뒤
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는 없었다.
잘못 끼워진 첫단추
대학 2학년과 3학년을 나는 정말 치열하게 보냈다. 그래서 한 친구가 내게 그
런 말을 했다.
“오늘 살고 말 사람 같아.”
나는 정말 하루를 공부와 사람 만나는 일과 인생과 우리나라의 문제와 그리고
사랑을 동시에 가슴에 껴안고 살아가려고 애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오늘
말고 내일은 없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결국 인생의 축소판이고 어제나 내일은
허무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눈을 밝히며 달려들
었다.
3학년 때는 취직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그 당시 미국 경제가 참 안 좋았다.
특히 자동차 경기가 하락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미시건은 자동
차 산업지역이어서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인문계열은 특히 심했
다.
그 당시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말에 그 사람을 만났다. 처음 봤을 때 깨끗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
다. 그도 유학생이었고, 나보다 두 살 많은 법대생이었다.
외모나 객관적인 조건으로 보나, 누가 봐도 혹할 만한 사람이었다. 서로 좋아
하겠지만, 내가 더 그를 좋아한 것 같다. 물론 사랑하는데 사랑의 정도를 따진다
는 게 우습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정성을 다했다. 그가 아프다고 하
면 시장을 봐다가 한국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버스 타고 그의 기숙사까지 날랐
다. 그가 똑같은 티셔츠를 며칠씩 입고 다니면, 내 생활비를 쪼개서 그에게 옷을
선물했다.
어느 사랑이나 그렇듯이 물론 자잘한 고비도 많았다.
흔히 학생 커플들이 그렇듯이 성적이 좀 떨어지면 헤어지자고 했다가 어느 한
쪽이 매달리면 다시 만나고... 그런 식이었다.
사랑을 표현할 때 보통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데, 그때 내가 그렇게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역문제 때문에 머지않아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우리는 헤어지기 싫었으므로 당연히 같이 있을 궁리를 했고, 그 방법이 결혼이
었다.
나는 시민권이 있었고, 그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면 먼저
시민권을 갖고 있는 나와 서둘러 결혼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게 1986년 12월의 일이었다.
우리의 결혼에 대해서 어머니는 아름다운 결혼을 하셨던 분답게 기쁜 목소리
로 반겨주었다.
`그래, 니들이 좋다면 결혼해라`
어머니는 워낙 아버지와의 행복한 결혼생활로 인해서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
고 있었다. 의견이 달라도 서로 노력하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남편과의 결혼을 앞두고 취직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미국에는 대학 3학년이 끝나는 여름부터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리서치
를 한다. 자료조사, 설명회, 등에 열심히 참가했지만, 미시건에서는 그 당시 취업
난이 심각했다. 교포들은 특히 더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학교를 더 다니는 학생
들도 있었다.
그들을 일컬어 `슈퍼 시니어`라고 했는데, 5학년 슈퍼 시니어도 있었고, 6학년
슈퍼 슈퍼 시니어, 친구중에는 7학년 슈퍼 슈퍼 슈퍼 시니어들도 있었다.
취업난이 심한 미시건, 그것도 인문계, 그것도 교포인 나는 삼중고를 안고 있
었고, 게다가 여자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더블 마이너티를 무시할 수 없었
기 때문에 걱정스러웠다.
그때는 세계 경기 중에서도 미국 경기가 특히 안 좋았을 때였다.
그러니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들은 취직을 위해서 3학년 때부터 아
주 실질적인 공부를 했다. 어떻게 면접을 보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 머리를 짜냈
다.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하면 눈에 띄게 잘 쓰는지에 대해서도 머리를 짜내고
또 짜냈다.
우리나라도 취업할 때는 으레 자기소개서를 준비해야 하지만, 미국처럼 중요
하게 다뤄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자기소개서에 엄청난 신경과
비중을 둔다. 직장에서는 일할 사람을 뽑을 때 그 무엇보다도 자기소개서를 고
려해 뽑았고, 대학 또한 그랬다. 신입생을 뽑을 때 그의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
가 쓴 에세이와 그가 다니는 학교장이 보내는 추천서, 그리고 음악, 미술교사 등
의 추천서, 그리고 그 지역장이 보내주는 추천서 등이 점수를 많이 좌우한다.
그렇게 자기소개서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취업을 앞둔 학생들은 그야말로 자
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낼지 굉장히 고심한다. 취업시즌이 되면 잡지에도 온통
그런 기사투성이다.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하면 잘 쓰는지, 면접을 볼 때는 어떤
의상과 화장이 좋은지, 자기 이미지 개발법 및 표현법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학생들은 잡지를 사다가 공부하기까지 하는 열성을 보이곤 한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어떻에 표현하는지가 지상 최대의 학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미국 학생들은, 3학년 중반기에 접어들면 그때까지 입던 캐주얼한 옷과는
다른 정장을 마련한다. 물론 면접을 위해서다. 첫인상을 좋게 하는 방법이 적힌
책도 속속 출판되고, 그 책들을 사다가 첫인상을 좋게 하는 방법을 열심히 익힌
다. 거울을 보며 눈빛을 맑게, 입술을 단정하게, 말투는 또박또박하게, 매너 있게,
좋은 인상으로 보이게 자신을 다듬는 공부를 한다. 물론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
다. 면접할 때 첫인상을 좋게 하는 정보를 수집한 결과, 남자는 감청색 양복에
노란색 계열의 넥타이가, 여자는 동부와 가까워서인지 보수적인 스타일의 정장
에 블라우스도 알록달록한 것 말고 커튼 셔츠에 리본을 매는 것이 눈에 확 띄인
다는 걸 알았다. 구두도 굽이 높은 것보다 3~4센티미터 정도가 좋다는 것도 체
크했다.
광고가 5초 전쟁이라던가? 5초 안에 터져야 한다고 들었다.
면접은 더 짧다. 3초 안에 첫인상이 좌우되는 것이다. 딱 보면 척! 그 순간적
인 인상의 포착이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다. 나는 그 3초의 첫인상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면접을 잘 보기 위한 워크숍에도 나갔고, 자기소개서를 잘 쓰기 위한 워크숍
에도 빠지지 않는다.
미국은 이력서 용지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눈에 잘 띄는 종이에다가 눈에 딱 띄는 문구를 사용할지 고심했다. 푸른 빛이
은은하게 깔린 용지를 써보기도 했고, 은은한 아이보리나 브라운 계열의 용지를
써보기도 했다. 어떤 글자체가 좋은지, 어떤 문체가 좋은지 고민하고 작성한 뒤
인쇄소에 갖다 맡겼다. 자기를 파는 카탈로그를 제작하는 셈이었다.
자기를 파는 카탈로그를 만드는 데는 아무리 가난한 학생이라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돋보이는 신용장에 대한 일종의 투자였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력서만이 아니라 자기소개서까지도 양식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은 그렇지 않다.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서 에세이 스타일로 쓰는게
보통이다. 서류를 받아보는 인사담당자가 흥미를 느끼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취
직할 때뿐만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갈 때도 에세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수준
이 높은 학교일수록 제시된 여러 가지 에세이 주제 가운데 서너 가지를 써보내
라고 한다. 괜찮은 학교일수록 다른 것보다 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을 통해
서 이 학생이 논리적인가. 독특한가, 정서적인가, 도덕적인가, 순응적인가 등을
파악한다.
미국 학생들은 그래서 이미 글쓰는 데는 단련이 돼 있다. 그러므로 취직할 때
에세이를 쓰는 데도 그다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지원자 중에
서 단 한 장, 자신의 것이 뽑혀야 하기 때문에 긴장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선택하는 회사만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일할 회사를 선택하는
개인 또한 까다롭다. 우리나라에서는 회사에 대해서 알아보지도 않고 대충 듣고
무작정 입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에서그런일을 상상도 못한다. 철저히 조사
해보고 지원하는 것이다.
조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도서관이나 정보기관을 통해 알아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고자 하는 회사에 대해 직접 들어보기도 한다. 내가 젊음과
인생을 바쳐 일할 곳인데, 그런 정보도 없이 어떻게 인생을 투자하겠는가. 그런
우매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이력서를 냈다. 그리고 면접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인이었고 나는 한국인이었다. 나는 미국생활을 했다 뿐이지, 뿌리깊
이 한국인의 의식과 습성이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상품으로 파는 데
는 아무래도 숙맥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쑥스러
워 한다. 그야말로 잘난 척을 잘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 척도 못하고 빼지
도 못한다. 있는 그대로만 보여도 괜찮은데 오히려 그대로도 못 보이고 만다. 미
국인들은 10퍼센트를 가졌으면 100퍼센트를 표현하는데, 나는 그 10퍼센트 조차
도 쑥스러워 내보이지 못한 것이다. 과장을 커녕 오히려 축소해서 말하기 일쑤
다. 나는 면접을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 이럴 때 한
국사람 티가 나는구나.
미국 학생들처럼 나 자신을 과장해서 표현해보려고 아무리 노력했지만, 그렇
게 하지 못했다. 아닌 걸 어떻게 맞다고 말하나? 아닌 건 아닌 거고 내가 내세
울 만한 것도 별것 아니기에 말해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냥, 저 사람은 날 보면
알아주겠지, 내가 가진 것을 꿰뚫어주겠지, 이렇게 소극적으로만 생각했다. 정말
로 어리석었다.
특히 미국내에서도 동부지역은 동양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런
터에 동양인들은 숨기는 게 미덕이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색하다는 정보
를 그들이 가졌으리라고 어떻게 기대 하겠는가? 동양적인 겸손함이랄까, 그런
정서를 몰랐고, 10퍼센트의 능력을 100퍼센트로 과장해서 PR하는 사람들을 그들
은 택했다.
나는 숱하게 실패했다. 수십 군데에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곤 했지만 모조
리 떨어졌다.
그렇다고 미시건 지역을 떠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
과 곧 결혼을 해야 했으니까.
나는 미시건 지역의 직장이라는 직장의 문을 다 두드렸다. 자동차 회사부터
병원 행정부까지도... 그러나 결과는 노우였다. 나는 선택되지 않았다.
요즘도 국내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력서를 `살포`하고 다니면서 애타게
직장을 찾는 여대생들 얘기를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러면서 어떤 감정의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직장은 꼭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다
시 한번 내 의식의 강한 뿌리를 느꼈다. 그렇게 힘들면서도 투피스에 가방 하나
들고 좋은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멋진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서 지
우지 않았다.
나는 꿈에서라도 집에서 안주하면서 지내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열심
히 뛰고 바쁘게 일하는 멋진 커리어 우먼을 연상했지, 집에만 있는 있는 나를
한번도 꿈꿔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그런 생각이 운명을 만들어갔다.
드디어 한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 나에 대한 정보를 듣고
연락을 취해온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일본어도 알고 영어도 알고, 동양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원했다.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회계법인 임원의 보조 역할이었는데, 그 임원인 미스터 맥킨타이어는 인
터뷰 후에 나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인터뷰는 간단했다. 이미 나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상사인 미스터 맥킨타이어는 한마디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집이 가
난했지만, 혼자 힘으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결혼을 일찍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군대생활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에 회계법인에 들어
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MBA를 하고 법대를 다시 다녀서 변호사 자격증과 공인
회계사까지 따낸 그야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회계법인의 파트너가 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입사후 거의 3~4년
안에 결정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다. 얼마만큼 회계법인을 위해 일할 수 있는지, 어느 만큼 비즈니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손님을 어느 정도 확보하는지, 시장을 어느 만큼 창출해핼 수 있는지
등의 능력을 살펴본다.
미스터 매킨타이어는 그런 면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인정을 못받았던 것이
다. 그러자 맥킨타이어는 궁여지책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미국의 자동차 경기가 안 좋던 때였는데, 그 이유가 모두 일본 자동
차 때문이었다. 일본 자동차가 잘 팔리면서 미국 자동차들이 외면당하기에 이르
렀고, 그래서 자동차 경기가 그토록 침체됐던 것이다. 일본 자동차들이 밀려오자
미시건 지역에는 일본 자동차 부품회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맥킨
타이어는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국 사람들이 아닌 일본인의 시장을 개
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일본 시장을 개척하면서 시장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그래서 그는 파트너
가 되었고, 자신을 도울 사람으로 나를 뽑게 된 것이다.
입사가 결정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이제 결혼식만 잘 치르면 되
겠구나 생각했다. 뭔가 다른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에 입사를 앞두고 12월은 한창 결혼식 준비에 바빴다. 우여곡절 끝에 취직
도 결정이 됐겠다, 결혼을 앞둔 마음은 맘껏 설레였다.
그러나 결혼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여러 가지로 그의 부모님은 나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없이 자란 여자`를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말을 들었
을 때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더구나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병이 걸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개인의 의지로 목숨을 버린
것도 아니고, 사소한 교통사고도 아니었지 않은가, 너무나 충격적인 한 사건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을 두고 그렇게 말하다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때 아버지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이렇게 힘들 때 내 옆에 계시지 않은 아버
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내가 싫대요`
이렇게 투정도 부려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현
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 없는 여자라고 말할 때 그 사람들의 됨됨이를 알
아봤어야 했다.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사람들과 한가족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미 사랑에 눈이 멀었었다. 그래서 사랑의 이름
으로 모든 걸 미화시켰다. 괜찮을 거야, 좋아질 거야, 행복할 거야, 무지개빛 환
상에 젖어 그 모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다 받아들이고 말았다.
결혼식 전에 일본에서 이모네 가족이 다 오셨다. 그래서 가족끼리 식사를 하
던 중에 아버지 얘기가 나왔다. 나는 숟가락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목이 메이
고 손이 떨렸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존재는 아버지라고 한다.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도 아버지라고 한다. 나는 하늘 어디에선가 결혼을
앞둔 딸을 바라보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모는 결혼식 준비를 혼자 도맡아 동으로 서로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의아해
했다. 어떻게 신부가 다 준비하느냐고... 그랬다. 결혼식 준비의 A부터 Z까지 내
가 다 해야 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조촐하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아니, 조촐하게 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나는 리셉션의 모든 일들을 친구들한테 하나씩 다 맡겼다. 결혼식은 호텔의
홀을 잡아서 했고, 리셉션은 기숙사를 빌려서 빌려서 마쳤다.
그날의 결혼식을 떠 올리면 풋, 하고 웃음이 나온다. 리셉션에 음악이 없었다.
음악을 담당한 친구가 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아 정말 애가 탔다. 결국 그 친
구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 없는 리셉션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리셉션이
끝나갈 무렵에야 그 친구는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것도
음악 없이 말이다.
`너 대체 뭐 하다 이제 오니?`
`야, 말 마라. 어제 무협 비디오를 봤거든. 근데 말야, 그만 밤을 새우고 말았
지 뭐야.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일어나지 못했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 죽여줘`하고 나오는 데야 속수무책이었다.
덕분에 음악 없는 결혼식을 하고 말았다.
음악이 없으니, 결혼식 리셉션에서 신랑 신부가 춤을 추는 그런 낭만적인 기
분은 아예 갖지 못했다.
하지만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치른 행복한 결혼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행복한 결혼으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큰
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때문인지 나에게 그런 눈길을 보내주셨다.
`넌 잘 살 거야`
그만하면 출발은 그런 대로 순조로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 인생의 가파른 언덕길을 혼자서 힙겹게 올라가야 했다.
참담한 실패로 돌아간 첫직장
결혼 한 달 후, 첫출근을 했다.
처음이라는 건 항상 설레임을 준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꿈이 있었다. 회계법
인과 내가 할 일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대개 회계법입에서는 한 사람의 능력을 파악하는 데 3~4년이면 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일하겠다는 각오였다.
우리 집에서 회계법인까지는 고속도로를 한 시간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전공을 바꿔가면서 경제학과 일본어를 복수
전공했고, 능력도 있다고 자부했다. 마음속에는 열정도 있었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학생남편을 둔 아내로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다.
가슴속에는 짜릿한 기대감과 어떤 설렘이 번져갔다. 한 시간 동안의 운전이
피곤하지 않았다.
미스터 맥킨타이어는 나를 채용하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나는 일본 시장을 개척하고 있어요. 그 손님들은 관리해주고 새로운 시
장개척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곧 한국 시장도 개척
할 거예요. 열심히 일해주세요. 기대가 큽니다.`
오! 근사했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고 의욕적으로 일할 것이다!
건물에 들어서서 힘차게 발을 디뎠다. 눈빛에 힘을 실었고, 입을 야무지게 다
물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투피스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그 건물의 바닥을
또각또각 소리나도록 걸어갔다. 커리어 우먼의 첫발자국이라고 여기면서...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근사한 일을 하리라는 기대는 금세
허물어졌다. 나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가온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의 상관을 모신 사람이었다. 정확히 그녀는 상관의 비서였다.
할머니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비서가 매일 해야 할 일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물론 미국에서 비서는 차를 나르는 등의 잡다한 일은 잘 안 하지만, 그러나 나
의 실망은 컸다. 나는 비서가 되기 위해 입사한 것이 아니었다. 중추적인 업무를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첫출근하고, 하루 종일 사소하고 잡다한 일을 배우다보니 짜증이 났다. 그러나
첫날부터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상관이 나에게 주었던 비전도 있고 해서
꾹 참았다. 그냥 막연히 `내가 할 일은 이런 게 아닐 거야` 이런 꿈만 가지고 집
으로 왔다.
할머니는 일주일 동안 나를 트레이닝 시켜놓고 은퇴했다. 할머니가 은퇴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상관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내가 하려던 일은 이런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맥킨타이어는, 나의 걱정은 괜한 것이라며 차차 역할이 확대될 것이라
고 안심을 시켰다. 그러면서 업무의 기초부터 잘 닦아 두라고 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내가 하는 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들... 복사, 전화받기 등 굳이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해 낼 수 있는 업무들이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일 다운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혹시 내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을 주지 않는 건 아닌지, 이러다가 개인비서로 전락하고 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들... 밀려드는 불안한 생각들 때문에 점점 더 조급하고 답답했
다.
내가 비서를 데리고 일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야, 하며
마음을 졸였다.
나의 상관인 미스터 맥킨타이어는 회사에서는 인정받고 있지만, 다른 직원들
로부터는 욕을 많이 먹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을 딛고 비교적 성공한 사람
들 특유의 어떤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 세상에 가능하지 않는 것이 없고,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
그는 이런 철학을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 전까지, 그날 해야 할 일을 구상함은 물론
서신, 보고서 작성까지 모든 스케줄을 확인한 뒤 출근했다.
맥킨타이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 것이 나는 재미있다고 느꼈지만, 또, 주위
에서는 욕도 많이 먹고 평판도 안 좋았다. 그렇게 상관의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
보니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나의 영역 넓히는 일이 힘들게 되었고,
내가 원하는 업무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엄청 쌓였다.
사랑에 빠지듯이 일에도 빠져들고 싶었지만, 흠뻑 빠져들지 못하니 속상하고
짜증이 났다.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나는 그런저런 회사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로지 상관이 어떻게 나를 잘 배치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석었다. 그
때 바보같이 상사만 쳐다보지 말고 회사 안에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면 뭔
가 훨씬 잘 풀렸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가만히 앉아 그 상사만 바라보고
있지는 말아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는 작업부터 해야
옳았다. 남들과 어울리면서 조직의 소문과 정보를 아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했
을 것이다. 그야말로 줄 하나 붙잡고 그 줄에서 뭔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회계법인은 미국의 어떤 기업보다 보수적이고, 일본 기업이 디드로이트로 진
출하기 전까지는 동양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지역이다. 자동차 3사에 엔지니어
들은 꽤 있었지만, 다른 사무직에는 별로 없었고, 거주하는 동양인의 숫자도 서
부나 동부에 비해서 아주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서 이상의 업무를 동양인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상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상사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그 상사가 고용한 나에게
고운 눈길을 보낼 리도 없었는데, 게다가 불만에 가득 찬 나의 `잘난(?)` 행동이
그들 눈에는 거슬렸을 것이 뻔하다.
기업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스타일이 있다. 내가 들어간 첫직장은 보수적이고
흑인도 없는 회사였다. 그 차가운 분위기가 날이 갈수록 나를 짓눌렀다.
나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완전한 2세
와는 달랐다. 나는 1.5세였던 것이다. 한국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고 미국 문화에
도 100퍼센트 숙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학에 다닐 때까지는 괜찮았다. 워낙 대학이라는 곳이 세계 각국의
여러 인종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색다른
행동들이 자연스러웠고, 그들의 다른 점들이 오히려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
키면서 다른 나라, 다른문화의 이해도를 넓히고 싶어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
성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한국인으로 살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 없었고, 모든 게
자유스러웠다. 나는 그것 자체를 미국 전체의 문화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첫직장에 들어가고 난 후 분위기가 그랬다. 동양인인 내가 설 곳이 없었다. 그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 미시건 지역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일본의 자동차 판
매가 미국의 자동차 판매를 앞지르면서 미국의 자동차 3차가 불황을 맞아 직원
들을 정리해고하기에 이르렀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은 무조건 일본을 원망했다.
일본 때문에 자기들이 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동양인이 살해되는 사건이었다. 바에서 술을 마시던 한 동양인이 있었는데, 자
동차 회사에 다니다가 정리해고된 어떤 사람이 그가 일본인인 줄 알고 다가갔
다. 그리고 몽둥이로 때려서 살해했다.
그러나 그 동양인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었다. 그 백인 노동자는 곧 붙
잡혀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그가 곧 풀려났다는 점
이다. 그만큼 그곳은 백인 위주였다. 서글픈 일이다.
나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대학교 때 한국인 학생회의 일로 찾아뵈었던 한 한
국인 교수님의 충고를 떠올렸다. 그분은 6.25 전쟁 직후에 가난한 유학생으로 50
만 달러를 들고 미국에 와서 공부를 마치고,내가 다니던 대학의 치과교수로 계
셨다. 그분은 연세도 그렇고 지위나 품격으로도 그렇고, 모든 방면의 리더 격이
었다.
학생회 일로 찾아간 우리는 원고를 부탁드리러 갔는데, 그 분은 원고는 제쳐
놓고 150퍼센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교수님도 어린 나이에 유학을 와서 지금은 명문대학의 치과교수까지 되었지
만, 그 과정에서 정말 힘들었다고 하셨다. 돈도 없고 영어도 짧고, 거기다가 미
국 문화에 적응이 안 돼 무척 고생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소속돼 있지 않음을 한탄하기 전에, 오히려 양쪽 문화
의 특성을 조화롭게 혼합해보는 거야. 미국에 살고 있으니 미국인 75퍼센트와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으니 한국인 75퍼센트를 합하면 150퍼센트가 되지 않
나. 그러니 순수 미국인 100퍼센트보다 얼마나 많은 이익인가`
그 말을 들을 때는 어떻게 150퍼센트가 되는지, 막막해보였지만, 그러나 그 목
표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어려운 점을 나는 학창시절보다 취직해서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일을 하면서 나는 너무 철없는 행동을 또 한번 했다.
상사와 면담하면서 쌓인 불만을 털어놓고 울기나 했으니 그런 식의 접근방식이
그때 나의 미숙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을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상사는 나는 아무리 잘 봐주고 능력을 인정한다 해도 나의 그런 행동에
당황했을 것이다. 그는 직장의 상사일 뿐이지 아버지는 아니었으니까.
첫번째 직장에서의 사회 첫경험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나를 성숙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힘들고 실패한 것이라고 해도 그 경험이 얼마나 사람을
키우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겐 큰 경험이었다.
그래서 실패란 단순히 실패가 아니고,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보다. 그러므
로 `두 번 실패했다`가 아니라 `두 번 경험했다`, 이런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실패도 그렇다. 실패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그때 첫직장에 입사 동기생이 한 명도 없었던 것도 나에게는 악조건이었다.
동기가 있었더라면 라이벌 의식이 생겨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지로서 정보도 교환하고 위로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첫직장은 굉장히 힘들게 나를 몰고 갔다. 처음 들어갈 때 꿈은, 회계법
인의 공인회계사를 도와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의 경험으로 봤다. 다음 직장
을 구할 때 그래도 괜찮은 경력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하는 일은 전혀 이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커리
어 우먼을 꿈꾸며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날 출근할 때 품었던 부푼 꿈이 종이처럼 구겨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절벽 끝에 혼자 서다
나는 지쳐갔고 그러면서 차츰 불행의 씁쓸한 맛을 봐야 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해먹고 남편은 아직 자고 있고, 서둘러 운전해서 한
시간을 달려 회사에 가고, 회사에서 마음에 맞지 않는 일과 인간관계에 시달리
다 또 한 시간 운전해서 집에 오고... 그런 일상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이게
아니다, 이게 아니다... 몇 번씩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그런 찰나에 몸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임신인 것 같아 병원에 갔다. 역시 임신
이었다.
나는 울었다. 기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게 악조건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으니... 그렇다고 수술한 수는 없었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 또 하나의 악조건을 덤으로 얹은 셈이었다. 임신 사실이
기쁘기보다는 암담했던 것이다.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하나 더 느는데다가
아직 내가 할 일이 아닌 잡다한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답
답하기만 했다.
아이를 갖게 되자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배가 불러오는게 싫었다. 육체적인 피곤이 정신까지 파고들어 갔다.
그때 형편은 3학년이었는데, 아침에 출근할 때도 그는 자고 있었고,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집에 들어가면 자거나 텔레비젼을 보고 있거나 했다. 한번이라도 공
부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집안일을 도와주는 모습을 하고 있기를 마음속
으로 바랐다. 그러면 얼마나 예쁠까 싶었다. 그래서 잔소리를 해봤다. 그러나 그
의 대답은 나태함은 일상처럼 보였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그때부터 나는 또 하나의 업무에 시달렸다. 밥하고 빨래
하고, 청소하고... 나에 대한 불만족과 남편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임신으로 인
한 피곤이 몰려들어 모든 여건이 짜증나고 답답했다.
그때 남편이 나의 절망에 조금이라고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사랑이
깊어갔을까. 나는 그때 위로가 필요했다. 나를 인정해 주고 조금만 기다리자, 그
렇게 다독거려줄 따뜻한 위안이 필요했다.
배는 점점 불러왔다. 그러나 워낙 회사가 나에게 개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물어오지 않는 한, 나도 나서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출산
휴가를 낼 때까지도 그들은 나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 미국 사람들은 워낙 덩치
가 크기 때문에 내가 단지 살찌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았고 나 또한 임산부 티가
안 나게 옷을 입었으므로 다른 사람은 물론 나의 상관까지도 임신한 줄을 몰랐
다.
날이 갈수록 나의 업무가 단순업무에서 조금은 적극성을 띠는 업무로 바뀌었
지만,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내 모든 걸 던져서 할 수 있는 성취감 있
는 일이 필요했다. 기다렸고 요구도 해보았지만 아니었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버
렸고, 그래서 결심했다. 그만두기로...
그러나 나는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출산 후로 미루고 있었다.
10월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우선 홀가분했다. 살 것 같았다. 이상하게
도 새로운 용기가 마구 솟아났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 즈음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이 부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소리없이 내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따. 재건축을 한다 해도 그전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에
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시구가 있다.
기대의 돌덩이를 매달아놓으면 더 힘드니까 아예 그런 돌덩이를 매달아놓지
않는다고... 그랬다. 나 또한 그에게 기대했고, 그런 돌덩이 때문에 힘들었다.
어쩌면 완벽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아
버지의 결혼생활을 나에게도 적용시키려는 욕심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큰 기대도 아니었다. 그냥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뭔
가 우리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것을 희망했을 뿐이다. 결혼해서 아이도
가졌는데, 아주 조그만 집이라도 좋으니 우리 집을 가져보자. 그러니 우리 노력
하자. 힘들더라고 꾹 참고 살아보자. 이게 무리한 요구일까, 다만 노력해보자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요구였을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지만, 나는 그때 힘들었
고, 적어도 내 힘든 짐을 하나라도 덜어주는 동반자를 원했다. 철없는 짐을 원하
지 않았다. 인생의 덤은 못 될지언정 짐은 아니어야 하지 않는가, 오래오래 생각
하고 또 생각해도 그는 내 인생의 덤이 아니라는 판단밖에 서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고 또 흔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력했다. 그에게 할 만큼 했다. 잔소리도 해보았고 무관심을 가장해서
그의 마음을 긴장시키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그는 임
신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아끼던 게 있었다. 우리가 벨기에에 있을 때 아버지가 어
머니에게 사주신 고급스런 그릇 세트였다. 프랑스산 그릇세트인데, 그릇 안에 조
그만 파란 꽃무늬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테두리가 금으로 둘러진 너무도 아
름다운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그릇세트의 반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그 그룻들을 보물처럼 아꼈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기신 것이라고 생각했
다. 그 그릇들은 이를테면 아버지의 유산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릇들을
만지면서 벨기에에서 아버지가 들려주던 여러 가지 말들을 기억하며 얼마나 울
었던가.
나는 그 그릇들을 내 목숨처럼 아꼈다. 아버지의 숨결과 아버지의 향기가 있
었으므로...
그런데 남편은 내가 그 그릇을 아끼는 걸 알고, 툭하면 그릇으로 협박을 해댔
다. 깨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무서웠다. 한번은 정말
깨뜨릴 뻔했다. 그래서 나는 그 그룻들을 친구집에 맡겨두고 귀한 손님이 올 때
만 찾아다가 쓰고 잘 닦고 나서 다시 갖다 맡기곤 했다.
남편은 급기야 직장과 가사에 힘들고 임신으로 지칠 대로 지친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고, 그 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다. 처음에는 그릇을 깨고 주변에 있
는 것들을 부수고 그런 정도였다. 그러나 점점 나를 치기 시작하더니 손을 쓰다
가 나중에는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나를 때렸다. 어느 날은 나의 목을 조르기
까지 했는데, 죽음 직전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겉으로는 가냘프고 참 착해 보인다. 주위에서는 여자가 얼마나 긁었으
면 그 착한 사람이 그렇게 하겠냐는 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나도 정말 내가 그
런가, 반성도 해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답답해서 잡지까지 사보았다. 과연 내
잘못인가 알고 싶었다.
잡지에는 때리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남자의 병이라고 단언하고 있었
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잘못이라면 고쳐보겠는데, 내 자신 같으면 나하고
피흘리며 싸워서 극복해보겠는데, 이건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있는 싸움
이었다. 상대가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편이 때린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여
자가 얼마나 성격이 못됐으면 남자가 때리기까지 하겠느냐고. 그러나 육체적으
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리는 것은 잘잘못을 떠나 병이다. 추악하고, 나쁜 병
이다.
그의 그 나쁜 병은 고쳐질 줄 모르고 점점 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출산 후에 나는 모든 것이 개운했다.
이를 악물고 살도 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깅을 했고, 아침밥은 먹지 않았
다. 다이어트를 악착같이 해서 날씬한 몸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내 옆에는 내 동조자가 생겼다. 내 아들 기석이였다. 기석이는 점점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고 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빙그레 웃어주기도 했다.
얼마나 점잖은지 귀찮은 짓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나쁜 엄마를 알아주고 이
해하고 격려하고 힘을 돋워주었다. 이 아이는 신이 막막한 심정에 빠진 내게 보
내주신 천사였고,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 즈음, 남편은 졸업한 뒤 취직을 했다. 그러나 그의 나태함은 고쳐지지 않았
다. 그는 매일 밤 영화를 보다가 늦게 자서는 지각하고 허둥대곤 했다. 아마도
그는 지금 내가 생각해보기에 직장인 체질이 아닌, 프리랜서 체질이었던 것 같
다. 나는 그의 무절제함과 나태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과 정열을 잘 배분해
서 생활하는 것도 하나의 인생의 책임이다. 그런 책임을 하나도 인식하지 못하
고 늘 허둥대고 당황하고... 그러는 것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의 게으르고 무책
임한 면은 자꾸 나를 실망시키면서 그의 그런 일거수일투족이 짜증스러웠다.
아이를 낳고 난 후,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 나는 아
이와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땐 따뜻한 격려 한마디 안 해주고
나를 더 힘들게만 했던 남편에게 더 이상 매달리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육체적인 다이어트와 함께 정신적인 다이어트를 시행한 셈이었다. 모든
걸 가볍게, 가볍게 하고 싶었다. 뛰기 위하여, 날기 위하여...
한 달 반 만에 임신 전의 몸상태로 돌아왔고, 어느 정도 마음도 가뿐해진 나는
복직했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는 여전히 다른 업무를 기대해 볼 수 없겠다는 확
신으로 다른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새로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꽉 채우고 있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다음달 1월에 새 직장으로 옮겼다. 보험 세일즈였다.
내가 그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 첫 번째 이유, 사무직은 따분했다. 종일 복사하고 보고서를 쓰고 자리를 비
우게 되면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일을 결정할 때 내가 속해 있는 팀원들, 그
리고 상사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도 싫었다.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윗사람이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진행되는 일도 싫었다.
두 번째 이유, 친구의 권유가 있었다.
첫직장에서 그런 따분함과 불만에 싸여 있던 나에게 친구가 바람을 넣었다.
대학교 다닐 때부터 호흡이 잘 맞아서 학생회 일도 같이 하고 일이 있을 때마
다 이마를 맞대고 상의하던 친구였다. 그래서 서로 사귀는 사이냐는 질문을 가
끔 받기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였고, 동지였다. 어떤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며 정말 열심히 했다.
그래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도 서로 왕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잘 나
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그가 하는 일은 보험 세일즈였다. 우리
나라는 요즘에도 보험 영업사원 가운데 대졸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졸 보험 세일즈맨들이 아주 많다.
물론 보험 영업직을 위해 고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영업 능력만 갖
추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영업자가 자신의 고객에 대한 틀을 짜나가야 한다. 어떤 계층의 고객
이냐,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생활과 마음을 꿰고 있어야 했다.
그 친구의 고객은 교포 대상이었는데, 교포들은 거의가 고학력이었지만 상업
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류, 신발, 세탁소, 주류점, 슈퍼마켓 같은 업종이
었는데, 주로 흑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였다. 교포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도 자
식들의 교육열이 높아 돈을 벌면 일단 집부터 부유한 동네에 샀다. 그리고 좋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그 친구는 그 지역에서 명문인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자신들의 자식만한 젊은이가
뭔가를 해보겠다고 뛰어다니는 내 친구의 모습이 자연히 교포들에게는 좋아보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영업적인 차원을 떠나서 개인적인 문제도 상담해주고,
말벗도 되어주고, 그들의 언어장벽을 해결해주곤 하니까 그 친구의 영업은 초반
부터 아주 순조로웠다.
그 친구는 나를 만나자마자,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으래?`라고 말했다. 그때의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이...
내가 불안해하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니까. 야, 쇠뿔도 단김에 빼
랬다고 우리 상관 좀 만나볼래?` 하며 어느 정도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되어갔다.
그의 상사를 소개시켜주었는데 나를 본 그 상사의 반응도 좋았다.
기본적인 보험 영업 자격증을 따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낮
에 직장을 나가야 했기에 나는 밤을 이용해서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꼬박 밤
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다. 드디어 보험 영업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친구와 함께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일을 하는 중에서도 보험분야의 좀더 어려운 자격증 분
야에 도전했다. 그래서 필요한 몇 가지 관련 자격증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차츰
영업의 중심 부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업은 내가 뛰어야 하는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근무할 때보다 많은 체력
이 소모되었다. 미국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잘 발달되지 않았는데, 차가 고장나서
애먹은 일도 숱하다.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점은 미국
의 디트로이트 시내를 누비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미국 도시 중심부는 범죄가 많아서 대낮에도 함부로 다녀서는 안 된
다. 길을 물어보려고 잠시 멈추는 차에도 총을 쏘고 겁탈을 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런 지역을 지나갈 때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에도 멈추지 말고 되도록 빨
리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나는 영업을 위해 이런 우범지역을 다녀야 했다. 처음
에는 겁도 났지만 별수가 없었다. `장사를 하는데 요정도야 뭐`이런 생각도 들었
다. 그러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령이 늘어도 그렇지, 자동차가 고장나는 데는 속수무책이
었다. 아주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에어컨이 고장났다. 에어컨
이 안되니까 창문이라도 열어야 했다. 창문을 열고 가면 되겠지, 하며 그냥 달리
는데 이번에는 자동차 보드판에 갑자기 빨간 불이 들어오더니 갑작스럽게 차의
힘이 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차를 간신히 몰아 도로 옆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나
서 보니까 아뿔싸, 그곳은 흑인들만 사는 지역이 아닌가. 도시 중심보다는 덜 위
험하지만, 어쨌든 혼자 걷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나는 순찰을 도는 경찰차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놈의 경찰차는 지나가면
서도 내가 아무리 손짓을 해도 본척만척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영화 속의 미국
경찰들 얘기는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분통이 터졌다. 경찰차가 석 대나 그냥 지
나가버렸다. 시간도 꽤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걷기에
좋은 지역은 아니었지만 어쩌란 말인가. 걸어가야 했다. 5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내 앞으로 흑인 두 명이 탄 차가 훽, 달려가며 가로막았다. 나는 너무 몰라 헉!
소리를 질렀다. 그중 한 명이 얼른 내리더니 내 얼굴에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내 힌드백을 탁, 잡아채더니 순식간에 차를 타고 내뺐다.
`도와 주세요!` 라고 소리를 질러야 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 목 안으로 자꾸만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 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움직인다는 것이 겁이 났다. 자동차는 고장
났다. 나는 어찌됐던 공중전화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중전화 부스는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5분을 어떻게 걸었을까, 정말 안간힘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결국은 그 친구를 불러내었다. 그 친구는 달려와주었고, 나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건의 후유증은 오래 갔다. 며칠 동안 끙끙 앓아야 했으니
까.
나는 그후로 교포들에게 보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현실적으로 위
험한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교포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구멍가게 같은
데서도 권총으로 주인을 살해하는 식의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한국
인들도 이미 몇 번이나 당한 상태였다.
그러데 신변이 위험할수록 그들의 생각은 이랬다.
`내가 이민 와서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왜 내가 죽은 다음까지 생각해야 돼?`
그러가 하면 반대로,
`내가 죽더라도 우리 가족들은 편히 살아야지`하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보
험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민사회에서 미국인들의 제품을 팔려면 먼저 그들의 인식부터 바꿔야 했다.
대개의 경우,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은 인내를 가지고 그들이 나를 신뢰할 수 있
도록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파는 제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들의 인간적인 신뢰를 얻어야 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감성적인 면을 움직여
서, 왜 이민을 왔는가, 무엇을 목표로 사는가와 접목시켜야 했다.
나는 이런 면에서는 꽤 빠르게 성공했다. 영업이라고 해서 절대 과대포장은
하지 않았다. 성격적으로도 나는 과대포장을 원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나는
진솔하게 접근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었고,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
었다. 그 이상의 진실은 없었고, 그래서 마음이 통했다. 마음이 깃들인 영업은
성공한다. 나는 그런 대로 성공하고 있었다. 보람도 느끼고 재미도 느껴가고 있
었다. 이 일을 하면서 영업의 기본에 대한 교육도 많이 받았다.
그중에 몇 가지, 내개 아직도 남아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어야 남들도 나를 따라온다`
`사람과 만나는 그 몇의 초의 순간, 그 순간의 인상이 일의 판가름이 난다.`
`전화는 앉아있을 때보다 서서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자신 있고 밝게 들린
다`등이다.
이밖에도 이른바 `cold calling`이라는 것도 많이 했다.
영업 초기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이 `cold calling`인데, 리스트를 가지고 매일
100명의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전화를 사용한다.
전화로 보험에 대해 설명할 때 처음에는 상대방이 `냉담하게(cold)마련인 상황
을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게(warm) 유도해서 결국에는 계약 이전(hot)단계까지
끌고 나가야 한다.
낯선 사람이 전화하면 누구나 처음에는 냉랭하다. 그 다음부터는 세일즈맨의
역량이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상대방이 내가 하는 얘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
도록 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매일 100명은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아
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 3분의 1정도와는 대화를 엮어나갈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100명 중에서 3분의 1이면 33명, 이들 중에서 11명 정도만 제품의 특성까지
소개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 중의 세 명만 정말로 제품을 산다면 그건 성공
이다.
이런 방법으로 쉽게 사람들을 접근할 수 있는 시간대는 저녁식사 뒤인 8시 이
후이다. 그 시간에 사무실에 혼자 남아 100명 중에서 70명한테 연거푸, `난 관심
없다`라는 말을 들으며 다이얼을 돌리는 일은 그리 신나지 않는다. 더러는 외로
웠던 사람들이 환영해 준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니 내 이야기는 들
어주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만 한다.
아무튼 워낙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접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더 가
치 있었다. 이 일만 잘하면 나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내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
래도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최고 세일즈맨 대열에도 끼
었다. 영업실적에 따라 방을 배정했는데, 나는 이 일을 하는 거의 대부분 나의
방을 차지했다. 이 일을 한 지 1년이 되자 언제까지 손님을 찾아 여기저기 움직
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나를 찾아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싶었
다.
그 방법은 나를 끌어올리고 고객을 끌어올리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내
가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되고, 고객들도 프로를 만나면 가능할 것 같았다. 프로들
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
는 차츰 나의 마케팅 대상을 프로로 돌리기 시작했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무직
종사자들에게 눈을 돌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나를 방문
하도록 유도하다보니 일이 훨씬 쉬워졌다. 그만큼 나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
었고, 짜임새 있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내 고객의 아들이 나를 고소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디트로이트 시내의 한 곳
에서 아주 영세한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렇게
큰 손님은 아니었다. 그래서 신경을 별로 못 쓰고 있었는데, 일이 일어나고 생각
해보니까 계약까지 가는 과정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내가 설명
을 하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쉽게 계약을 했던 것이다. 너무 쉽다고 생각은
했지만, 워낙 까다롭지 않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같았고, 액수도 부담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 계약을 했고, 솔직히 계약 후에는 별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은 내가 마치 본인의 어머니에게 있지도 않은 혜택을 말하
며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가 덥석 계약을 했으
므로 해약은 물론 사기를 친 내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또, 보험담당 주 정부 관련자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완전히 맞벼락을 치고 나선
것이다.
나는 서둘러 가게를 방문했다. 아들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된 거냐고 아주머
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내게 미안하게 됐지만 아들이 내린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물론 계약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나의 팀장이 주 정부 공무원에게 해명의 서신을 보내 그
일은 일단락을 지었다. 나는 일이 해결된 후에 교포 사회를 통해 그 집안에 대
해 알아보았다. 얘기인 즉,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아들이
어머니의 재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므로 여러 가지로 아들에게 꼼짝 못하는 상
황이었던 것 같았다. 또, 어머니는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모든 일
을 아들에게 의지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었다. 첫째, 나는 정작 세일즈의 타킷은 아들
이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 큰 고객이든 작은 고객이든 똑같은 애정
을 가지고 신경을 썼더라면 최소한 주 정부로 보내는 편지는 막을 수 있지 않았
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다른 어이없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에서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랬는데 내가 속해있던 에이전시
의 부소장에게서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
의 방으로 갔다.
“거기 잠시 앉으세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웃는 얼굴로 앉았다.
그녀는 나에게 가만히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뭘까 궁금해서 그 자리에
서 뜯어보았다.
어이없게도 `해고(Termination of Contract)`였다.
“이유가 뭐예요?”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그냥 채용한 뒤 3년 안에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
도 된다는 대답만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소장이 내린 결론이므로 자기는 모른다는 말만했다. 소장은
나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내부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이유를 물
었다. 그러나 모두가 모르겠다고만 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
는가. 억울하고 분했다. 이유없는 해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면 되지 뭐.”
그 다음날, 이런 통보가 날아왔다.
`X월 X일까지 사무실을 비워주시오.`
나는 해고당했다.
두번째 실패였다.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내가 어떻게 해고를 당할 수가 있어?
내가 뭘 잘못했어?
어떻게 자기네 맘대로 해고할 수 있어?
내가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누가 나를 해코지해서?
내가 무능력한가?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닌가?
무엇 때문이야? 왜? 왜? 왜?
수없이 물음표를 찍으며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종종 거리는 일,
그게 해고당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방법이었다.
그 업계에서 다른 직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왜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방황했다.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또 한번 외로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정말 외로운
존재구나, 사람은... 뼛속 깊이 인생의 찬바람이 스며들어 추웠다.
며칠 후에 나의 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도 회사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
는지 회사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패스트 푸드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역시 그랬다. 나와 만나는 걸 내부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여러 가지 농담을 던져가면서
얘기를 풀어나갔다. 그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됐나,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
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지만 정확한 답은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짐작이 가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
첫번째는, 얼마 전에 일어났던 세탁소 아주머니 건이었다.
“난 팀장인 나만 알고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 소장한테 말을 한
것 같단 말예요. 알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얼마 전에 내가 소장을 찾아가서 늘어놓았던 불평에 관한
건이었다.
우리 회사에는 한국인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이미 사십대 접어든 그녀는 미국
인과 결혼했는데 말이나 행동거지로 봐서 영 믿음이 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래서 멀리 지냈다. 그런데 그녀는 번번이 내가 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방해하
고 다녔다. 나로서는 그녀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나빠도 같은 회사에 다니기 때
문에 외부에서는 그녀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고객에
게 찾아가서 `자기만 최고`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휘젓고 다녔다. 나에 대한 험담
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나는 참다 못해 소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팀장은 다 식은 커피를 바라보고만 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외부에서만 그러고 돌아다는 것이 아녜요. 회사 안에서도 자기가 훨
씬 능력이 있다고 홍보를 하고 다녔다고요. 그런데 소장에게 가서 그런 얘기를
했으니 소장 생각으로는 꼭 약한 자의 불만 정도로 취급했을 거예요. 누가 그런
불평을 성의 있게 들어줘요? 어림없어요.”
팀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무리 영업직이라도 사람 모인 곳은 조직이예요.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평
가는 결국 그 조직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나는 팀장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것은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내 마음만 믿고 내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이 알아서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자연히 먹혀들리라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나는 외부 영업에는 성공했지만 내부 영업에는 실패했다.
나는 이런 일을 겪고 난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인관계에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 안팎으로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런 실패는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납득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창피했고, 누구
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납득하자, 모든 걸 인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용기도
생겨났다.
그러니,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직장에서 두 번째 실패를 했다.
그러나 실패는, 이렇게 경험이 되어주고 새로운 용기로 태어나주니 세상에 손
해볼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허덕거렸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먼저 아이가 먹을 우유를 끓여야 했다. 미국에서는 탁아
기관에 아이를 맡겨도 아이가 먹을 우유나 간식은 꼭 집에서 준비해 가야 했다.
그래야 아이가 먹어서 탈이 날 경우에도 책임이 부모에게 있었으니까.
우윳병을 소독한 뒤 하룻동안 먹을 우유를 병에 담아서 가방에 넣고 간식을
만들어서 챙기고 필요한 기저귀를 준비해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안전
하게 싣고 탁아기관으로 달려갔다. 아이를 맡기고 난 다음에는 또 늦지 않게 회
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다시 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눈은 왜 그렇게
자주 오는지... 미시건 지역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눈을 감상적으로 바라볼 여유
가 없었다.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집까지 안전하게 가는가, 그 문
제에만 신경써서 운전하다보면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곤 했다. 아이는 위험
한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싱글싱글 웃으며 그 까만 눈을 엄마에게 고정시키고 있
었다. 엄마만 의지하는 저 작은 아이... 나는 힘껏 운전대를 잡고 조심조심 운전
하였다. 길이 미끄러울 때가 많아서 위험한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
집에 와보면 집에는 또 일거리가 산적해 있었다.
공부하는 시동생이 같이 살았는데 남편이나 시동생이나 일 하나 거들어줄 생
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허덕거리며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서서히 파김치
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남편의 폭력은 점점 심해갔다. 처음에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집
어 던져 부수던 것이 점점 때리고 차고 목을 조르기까지 하는 폭력으로 이어져
갔다. 나의 비명 소리 때문에 이웃이 신고를 하고 그때마다 경찰이 왔는데, 경찰
은 아내인 나에게 묻고 했다.
“체포할까요?”
그러나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내곤 했다.
기절도 몇 차례나 했다. 싸움이 일어난 다음날에 상처를 감추려고 짙게 메이
크업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결근을 해야 하는 상황들은 정말 끔찍했다. 회사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이러다가 미쳐버리는건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론은 그 사람에게 기대 자체를 하지 말자였다.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나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활을 방만하게 하고 무계획하게 하는 것까지는 신경
을 안 쓴다 해도 눈앞에 보이는 게으름은 어쩔 것인가.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 남자들 집안일 안 도와주는 거야 어쩔 수 없다. 그걸 인정한다 해도 자
기 인생에 대한 책임감만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 당시, 자신의 삶의
방관자 같았다.
`방관`이란 삶에 대한 깜빡거리기, 부스럭거리기, 반짝거리기... 이런 것을 멈추
는, 그래서 스러지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삶의 정전이라는 얘기다. 그는 정
전된 사람 같았다. 나는 나의 남편이, 나의 아이의 아버지가, 우리 집의 가장의
삶의 전기가 나간 상태로 산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똑같이 직장에 나가면서도 모든 일은 다 여자 몫이었다. 시동생도 먹은 그릇
그대로 놓고 일어서고 방에 가서 자고, 애를 잠깐 맡겨놓으면 애가 옆에서 뭐를
하든 텔레비전만 봤다. 형제가 똑같았다. 나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시부모님은 한국에서 올 때 미리 말하지 않고 불쑥, “우리, 내일 간다
”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나는 성격상 대충대충을 못한다. 오신다 하니 또 바
빠지는 것이다. 시장 봐오고 대청소하고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직장일과 육아에
시달리다가 시집 식구들 뒤치다꺼리에다가 남편의 불성실까지... 정말 미칠 지경
이었다.
“저렇게 나가다가는 언젠가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말 꺼야.”
그게 남편에 대한 그 당시 나의 불안이었다. 내가 남편의 상관이어도 매일 지
각하고 노력하지 않는 남편을 해고시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에 불안했다. 하루하루가 불안과 불만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곤 하시는 시부모님은 오시면 이것저것 둘러보
며,
“너는 살림을 왜 이렇게 하니.”
“예쁘게 좀 해놓고 살지.”
“옷은 왜 그러니.”
이런 말들만 늘어놓았다.
누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가. 정말 짜증이 났다.
시동생은 또, 내가 시장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보는 걸 알 텐데, 냉장고에
일주일치 찬거리를 사다두면 무조건 다 먹어치워버리기 일쑤여서 밤중에 다시
마켓에 가야 했다.
모든 게 숨이 막혔다. 그래서 하늘을 보면서 눈물도 짓곤 했다. 째째한 나 자
신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생활고에 시달리는데, 그걸 왜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육아와 살림에 시달리는데, 그게 왜 모두 내가 싸안아야 될 문제인가.
왜 나만? 왜 그는 무관심하게 방관해도 되는가?
나는 그만, 내가 지겨워졌다.
일상적인 자잘한 감정에 휘둘려 울어야 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지겨웠다. 내
가 나를 지겨워하다니... 그런 감정에 또 슬퍼지고... 최악의 날들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분
명히 어느 한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왜? 왜? 여자라고 모든 걸 참야야 하지?
왜 남자는 저렇게 당당하고 멋대로지?
모든 것들이 똬리를 틀면서 나 혼자만 힘들다고 느껴지면, 그 관계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정말 악착같이 살았다. 한푼도 아끼고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애썼다. 왜
냐하면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에, 더 잘살고 싶고 더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이 본성이므로.
미국에서는 이사갈 때나 이사올 때 집을 처음대로 복귀시켜놓고 가야한다. 그
래서 벽이 뚫어졌다거나 페인트가 벗겨졌으면 보상을 해주거나 아니면 원상복귀
를 해놓고 가야 한다. 나는 돈으로 보상하려면 많이 드니까 직접 페인트를 칠하
고 구멍을 메우고 여기저기 손을 보느라 악착을 떨어댔다. 그 사람이 하지 않으
니까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열심히 하고 남자는 왔다갔다만 하니까 이
웃집 여자가 나한테 이렇게 불렀다.
“당신은 신데렐라야, 재투성이 아줌마.”
신데렐라의 원뜻은 재투성이 아가씨이므로 그 이웃집 여자는 나에게 신데렐라
아줌마라고 불렀다. 재투성이 아줌마... 그게 이웃에 비친 나의 모습이었다.
친척도 없고 돈도 빠듯하고 모든 걸 직접 해야 하는 미국에서 나는 그의 그런
게으름에 대해서 호소도 해보았고, 술을 마시면서 살살 달래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변화가 없었다. 깊이 박혀 있는 의식 자체가 그러니 그건 도저히 달라질
수가 없는 거였다.
결국엔 서서히 포기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포기하면서 적당히 살아갔다. 그에
대한 절망이 컸기 때문에 각방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그도 나에게 불만
이 많았을 것이다. 그도 나름대로 할말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우린 생활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끝내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뚜렷한 대책없이 그냥 그런 생활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놀랄 만한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차를 주차시키다가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그만 엑셀러레이터를 밟아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
던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버지 사고 때 생각이 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둥댔다.
나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갑작스런 귀국이어서 남편에게 이것 저것을 부탁
했다. 며칠 안으로 처리해야 될 일들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어떻게 하고, 공과금
은 날짜 어기지 말고 내야 벌금이 없고, 등등...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안 놓여서 나는 종이에 일일이 적어 건네주었다.
서울로 왔다. 다행히 어머니는 생각보다 경과가 좋아서 빨리 완쾌돼갔다. 어머
니를 걱정하면서 급히 달려온 서울이었는데, 이상한 변화가 내부에서 싹트고 있
었다.
강변을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을 끓이며 살고 있나.
왜 불행한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왜 웃음이 내 얼굴에서 사라졌나.
왜 이렇게 하루하루 괴롭게 살고 있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무서운가.
나는 행복하려고 결혼했지 불행하려고 결혼한게 아니다.
나는 결혼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동그라미의 고통, 행복이 아닌 고통...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많이 생각났다. 아버지라면 뭐라고 말씀해주실까.
아버지는 그러셨지. 결혼이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
다. 그러니 결혼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라. 비오는 날을 대비하
라...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어머
니와 따로 생활해선지 혼자 처리하고 혼자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
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힘들어하시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마음의 짐을 얹
어드리기 싫었다.
일주일 만에 나는 미시건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반가워야 하는데,
한숨부터 나왔다.
한국에 가기 전에 처리해주었으면 하는 것을 다 일러두고 갔는데, 하나도 처
리하지 않은 채였다. 시간 내서 꼭 내야 할 공과금도 내지 않아서 정말 화가 났
다. 따진 게 잘못이었을까. 정말 화가 나서 거칠게 따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가고. 몇 번이나 강조해가면서 처리하라고 한 일을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안 해
놓을 수가 있는가고.
그날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큰 실수를 한 것이, 서울로 급히 가
느라고 아끼던 벨기에 그릇을 옮겨놓지 못한 것이다. 서울 가기 전에 목사님을
초대하느라 친구에게 맡겼던 벨기에 그릇을 갖다놨었다. 그런데 미처 그것들을
다시 맡기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로 날아갔다. 그리고 서울에서 오자마자 싸움이
벌어졌다.
그는 그날,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내가 가장 아끼는 그릇을 하나도 남김없이
깨버렸다. 그 동안 그렇게 협박을 해오더니, 그 그릇을 정말 남김없이 깨버렸다.
그가 골프채를 들고 그릇들을 깨부수고 있는 그 깨어지는 그릇 속에서 아버지가
울고 계셨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몸이 갈갈이 찢겨지는 환상으로 나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 울부짖
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아끼는 옷들을 모두 가위로 잘라버렸다. 그 당시 나는 옷들
을 무척 아꼈다. 그래서 옷들을 깔끔하고 소중하게 잘 간직하곤 했다. 그는 내가
옷을 아끼는 것을 알고는 모조리 잘라버린 것이다.
나의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이 또 경찰에게 연락을 했나보다. 경찰이 들이닥쳤
다. 그리고 또 한번 물었다.
"체포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포하세요.
혹자는 의아해할 것이다. 그릇이 뭐가 그렇게 소중해서 남편을 체포하게 하느
냐고. 그러나 내게 그 그릇의 의미는 각별했다. 그 그릇들은 늘 내게 용기를 주
었다. 그릇을 닦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힘들지 않냐?"
"힘들긴요."
"열심히 살고 있는 거니?"
"그럼요. 아빠. 열심히 살게요."
"행복해?"
아버지의 그 질문에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다. 그리고 자신없게 말이 이
어진다.
"...그럼요. 당신의 딸인데. 진실되게 인내하며 행복하게 살게요."
그러면 그 그릇 속에서 아버지가 밝게 웃으시곤 했다. 그런 그릇이었다. 아버
지가 내게 남기신 유일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도 마지막 말을
못 남긴 큰딸에게 말 대신 남긴 유산이었다. 그건 그릇이라기보다 아버지의 의
미였다.
그는 체포돼 갔다.
이번에는 정말 폭력을 쓰는 그의 버릇을 고쳐놔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그를 경찰에 넘겼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마침 서울에서 시누이가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침에는
공항에 나가야 했다. 그 시누이는 장기간 우리 집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나는 집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혼자서 공항으
로 시누이를 마중나갔다. 그리고는 10시에 경찰서에 가서 50달러를 내고 그를
데려왔다.
감호소에 가면 수갑을 채운 상태로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하고 반성하라고 하
는데, 그 사람은 하룻동안 있으면서도 반성보다는 화면 더 키웠는지, 집에 오자
마자 시누이가 있는 데서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선 집에 있는 밥들을 다 수챗구멍에 버리기 시작했다.
"니가 한 밥은 안 먹겠어!"
그러면서 밥을 다시 하기 시작하며 생난리를 쳤다.
더 화난 것은 남편보다도 시누이의 태도였다. 전후 상황은 듣지도 않고 오빠
가 감옥에 갔다왔다는 데에 대해서만 화를 내면서 서울로 전화를 돌려댔다. 그
러면서 언니가 오빠를 감옥 가게 했다고 난리를 쳤다.
시누이와 남편이 그렇게 며칠간을 난리를 치면서 나를 무슨 벌레 취급을 하는
데, 나는 정말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감옥 같은 이삼일을 보내고 나자, 나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혼을 안 할 거면 엄마에게 괜히 걱정 끼쳐드
리지 말자. 그래서 그때까지 나는 남편의 그런 폭력에 대해서 얘기를 안 했었다.
나의 불행에 대한 내색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견딜 수가 없이 엄마가 그리웠다. 아버지도 그리웠다.
괴로움과 그리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랬는데 더 고통이 몰려들었다. 외로
웠고 슬펐고 절망스러웠다. 많이 울다가 급기야 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목소리를 밝게 내려고 했다. 그리고 일상적인 안부를 물었다. 동생의 웃음소리
가 들리자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자신에게
수없이 타이르는데 잘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언니? 빨리 말해! 빨리!”
동생의 채근에 나는 울음을 폭포처럼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외롭다, 괴롭다
고 마구 소리쳤다.
동생은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모든 상황이 엉망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장 서울로 오라고 야단을 치셨다. 남자가 때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던 것만큼 딸
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에 대해 참지를 못하셨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자, 여기까지 와버렸어. 이제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너무 많이 잘못되
어버렸어. 이쯤해서 따로 살면서 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나 자신이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최선이다.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짐을 꾸렸다.
짐을 싸는데, 아이가 와서 물었다.
“왜 한국에 가요, 엄마?”
아이가 네 살이 되었다. 기석이는 애어른처럼 상황판단이 빨랐다. 이번에는 서
울로 가는 엄마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기석이는 이번에는 아빠한테로 달려갔다.
“아빠, 엄마랑 나랑 서울 간대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리만 서울 가요?”
“이제 너하고 나하고는 같이 못 살지도 몰라.”
“왜요? 왜 같이 못 살아요?”
그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기석이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나도 이미 눈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서울로 오는 날이었다.
토요일이었다. 여름이라서 비행기 출발시간이 4시간이나 늦어진다고 했다. 그
는 4시간 동안 나와 아이가 기다려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돌아서 가버렸
다. 공항에 내팽겨쳐진 느낌이었다. 기석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빠” “아
빠”하고 외쳐댔다. 그는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래도 아내와 아들인데, 그렇
게 보내야 했을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간을, 그 4시간을 기석이와 보
내주면 안 되었을까.
마음에서 마른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나는 네 살배기 기석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2. 실패 속에 기회는 있다
벼랑 끝에서 한라에 입사하다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귀국한 여자는 그때부터 몇 가지 새로운 시작을 해
야 했다.
남편과의 별거 시작,
어머니 집에서의 더부살이 시작,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한 투쟁의 시작...
모든 시작은 뿌연 안개와 함께다. 겨울에서 봄으로 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안
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안개, 그리고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올 때 만나는 습기 많은 안개. 이런 안개와 인생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안개와 인생은 깜깜하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 나아간다. 밝음을 향해 나
아간다. 안개에는 어느 정도의 알코올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안개 속에 오래
서 있으면 취한다고 한다.
인생에도 알코올기는 필요하다고 본다. 취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알코올
기가 일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꿈이든, 무엇에든 취해 살아야 한다.
나는 그 당시 지독한 안개 속에 서 있었다.
그래서 취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일을 찾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안개와 만나 또 다른 삶의 안개를
지우기 위해서.
그때의 내게 있어서 일이란, 미래에 대한 꿈도 아니고 성공을 위한 야망도 아
니고 그저 생계수단이었고 절망에서의 탈출구일 뿐이었다.
여러 직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니느라 한참을 바쁘게 보냈다. 중소기업
의 장점도 물론 있겠지만 여자로서는 아무래도 대기업이 나은 점이 많을 것 같
았다. 게다가 나는 애 딸린 여자가 아닌가. 아무래도 후생복지가 잘된 대기업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기업 위주로 정보를 수집했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난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가기 싫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살 만한 어떤 일거
리가 필요했다.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는 일에 대한 욕심이나 미래에 대한 꿈보다 그냥 살아야 했으므로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미국에서 직장에 근무하며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했던 바 일에 대한
열정과 패기만은 지니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실패를 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도
있었다.
한국에 오고 나서 한 달 동안 여러 그룹에 대해서 알아보고 내가 일할 곳을
심사숙고하며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삼성에 이력서를 넣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꿔놓은 책을 하나 만났다. 어머니 회사에서 발행
된 책인데 우연히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발견하고 무심하게 책장을 넘겼
다. 그 책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화보잡지였다. 거기에서 나는 매우 인상적인
사진을 하나 만났다. 나이 지긋한 한 노인 경영자가 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사진
이었는데, 그는 성한 몸도 아니고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노인 경영
자의 모습, 마치 전쟁터의 노역장교처럼 뭔가 엄숙하고도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바로 한라그룹 정인영 회장이었다.
그날 퇴근해서 들어오는 어머니에게 불쑥 한라그룹에 대한 얘기를 물었다.
“한라가 어떤 그룹이죠?”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미지가 깨끗한 그룹인 것만은 분명
해.”
나는 또, 한라가 대기업이냐고도 물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고집 때
문이었다. 어머니는 삼성과 현대 같은 거대한 기업은 아니지만 분명히 대기업이
라고 대답하면서 내게 반문했다.
“한라가 왜 그렇게 궁금한 거야?”
“거기서 일하고 싶어졌어요.“
“삼성에 이력서 넣어본다면서?”
“한라에 끌려서요.”
“끌려? 끌리는 거 보고 고르는 건 남편으로 충분해. 별로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남편을 그 끌리는 거보고 골랐으면 됐지. 직장도 그런 식으로 고르니?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삼성에다 넣어.”
어머니는 직장마저도 감정의 끌림으로 선택하는 맏딸이 한심한 듯 말했다. 그
렇게 믿었던 딸이 자신이 선택한 결혼을 불행하게 마감하려 하는 걸 보고 안 그
래도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던 어머니였다. 직장은 제대로 골라 들어가길 원하
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한라에 들어가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라에다 원서를 제출했다. 정기적으로 사원을 모집하는
시기는 아니었으므로 특차를 노린 셈이다. 그러므로 정기모집 때보다 훨씬 더
나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고, 나는 정직하면서도 성실하게 나를 PR하는 서류들
을 작성해 한라그룹 인사부에 냈다.
지금도 누군가가 왜 그때 한라를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 당시 어머니
에게 말했던 그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끌려서였다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큰 기업을 경영해나가는 리더라면,
누구보다 정열과 소신과 애정을 가지고 그룹을 경영할 것 같았고, 그 리더가 경
영하는 회사라면 한번 열정과 힘을 쏟아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의 목을 조르던 불행한 현실에서 다만 벗어나보려는 하나의 도구
로 직장을 알아보다가 일하고 싶다는 열정이 저절로 솟아나온 격이었다. 아직
나에게 이런 꿈이 남아있었구나 하는 생각은 마음을 들뜨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서류를 제출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누구나 그 심정을
알 것이다. 그 기간은 정말이지 하루가 일년같이 답답하고 조급해진다. 전화기
앞에 앉아서 수화기가 울릴 때마다 튀어오를 듯이 몸을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
다.
“한라입니다.” 이 말을 기다리며...
“합격입니다.” 이 말을 기다리며...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라에서 소식이 안 오면 영영 여기서 끝은 아닌지... 그런 조급함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나의 모든 상황은 어두웠다. 출구가 없었다. 어딘가 초
록색 비상구만 있으면 나는 달려나가야 했다. 그 비상구는 한라였고, 한라 아닌
곳은 아무데도 비상구를 마련해놓고 있지 않은 듯했다. 선택은 없었다. 배수진도
없다.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었다. 오로지 한라의 소식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떻게 면접만이라도 보면 나의 이런 마음을 알릴 수 있을 텐데. 서류에서 떨어
져버리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일년같이 그렇게 며칠이 흘렀
다.
동생과 통화를 길게 하고 난 후 수화기를 내려 놓자마자 전화 벨이 또 울렸
다. 건망증 심한 동생이 또 뭐 할말을 못했구나 싶어서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왜?”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약간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이은정 씨 댁 아닙니까?”
나는 용수철처럼 몸을 퉁기며 일어섰다.
“맞는데요.”
“한라그룹입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화였다.
“네, 제가 이은정입니다만...”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구월 오일 오후 두시에 비서실에서 회장님 면접이 있습니다. 늦지 않게 와
주십시오.”
전화를 어떻게 끊었는지 모른다. 전화를 끊고 나서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마셨다.
“면접을 보러 오란다. 이은정... 면접을 보러 오래...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야.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대.”
나는 면접일이 다가올 때까지 무슨 얘기를 물어올까, 과연 내가 채용이 될까
불안감 반 기대감 반으로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벌써 가을
이 서둘러 오는 것인가. 늦여름이라기보다는 초가을에 가까운 날씨였다. 왠지 사
람 마음을 아련하게 만드는, 그런 가을의 길목이었다.
면접은 오후 두시였다.
회사의 위치에 어두웠던 나는 친지의 차를 얻어타고 늦지 않게 도착했다.
“여기예요.”
차가 한 건물 앞에 멈춰섰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어디요?”
“바로 앞에 보이잖아요.”
납작하게 엎드린 우중충한 건물이었다.
“저기가 한라그룹 건물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우아하게 쭉 뻗은 화려한 고층건물만을 상상했던 나의 환상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사람 됨됨이가 외양에 있지 않듯이 그룹의 내용도 건물에
있지는 않겠지만 왠지 기운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회사 현관에 서 있는 수위 또한 왜 그렇게 낯설던지...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다
가와서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디 가요?”라고 물었을 때 더듬거릴 정도였으니까.
“비, 비서실 가는데요.”
비서실 문이 열리자 사무실 분위기가 내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 또한 생경했
다. 자리배치부터 이상했다. 상사 자리가 있고 그 밑으로 부하직원들 자리가 쭉
배치되어 있어서 상사가 부하들 동향을 다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상사는 슬리퍼 차림으로 최대한 자세를 편하게 하고는 자고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물론 나중에는 그걸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은 가정 중심이지만 한국은 직장
중심의 생활이지 않은가. 출퇴근 시간이 정확한 것도 아니고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게 되니 편안하게 있고도 싶을 것이다.
비서실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고여 있는 물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역동적이지
않았다. 바삐 움직이고 수선스럽고 역동적으로 훽훽 돌아가는 사무실 분위기를
상상했는데, 그 반대였다.
그러나 그 사무실 분위기는 어느 한 사람의 등장으로 삽시간에 급선회하였다.
수위실에서 인터폰이 울렸다.
“회장님 올라가십니다.”
그때부터 사무실은 그야말로 커다란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역동적이
고 소란스러워졌다. 후닥닥거리는 소리, 투두둑거리는 소리, 우르르 몰려가고 몰
려오고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몰려나간 비서들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회장을 맞았고, 휠체어를 탄 회장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라그룹과 나는 만나게 되었고,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산업훈장을 받
던 정인영 회장과의 단독 면접도 이뤄지게 되었다.
면접 볼 때 역시 휠체어를 타고 계셨는데, 사무실 안에는 운동기구가 갖춰져
있어서 자전거타기 운동을 하면서 면접을 시작했다.
면접을 보기로 한 2시를 조금 넘어선 시간이었다.
정인영 회장님의 첫인상은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고집스러워 보였다.
열정적인 면은 모두 눈으로 쏠려 있어서 눈에서 광채가 흘렀다. 왠지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싸늘한 오한이 들었다. 미국에서 그렇게 면접을 보러 수십 군데를
다녀봤지만 정인영 회장님 앞에 앉았을 때처럼 떨어본 적이 없었다. 정 회장님
에게는 그렇게 사람을 꼼짝 못하게, 사람 마음을 휘어잡으며 그 분위기로 상대
방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떨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앉아 있었고, 회장님 옆에서 비서실장으로 보이
는 사람은 나에 대한 서류를 들고 간단히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장님
앞에 내 입사 지원서류를 내려놓았다.
정인영 회장님은 입사 지원서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설핏 보았다.
사람을 꿰뚫는 것 같은 눈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동자에 힘이 실어졌다.
“외국에서 공부를 오래 했군요. 외국에서 오래 살았는데 한국말은 잊어버리
지 않았나요?”
“전 한국인인데 어떻게 한국말을 잊어버립니까? 전혀 안 잊어버렸습니다.”
“어, 제법 한국말을 하는군.”
그런 후에 몇 가지 면접이 이뤄졌다. 나는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정직하게
답변했다. 모르면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대답했고 나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난 얼마 후, 나는 한라인이 되었다.
근무부서는 비서실이었다. 나는 원래는 자금부에서 일하고 싶었다. 미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금부에서 하는 일이 미국
처럼 창의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청소부라도 시키면 해야 했다. 창의적이고 뭐고 따져볼 여유를
부릴 단계가 아니었다. 청소부라도 시키면 해야 했다. 나는 어떤 일이든 한번 열
심히 해보겠다는 각오로 비서실에서 일하라는 통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입사 형식을 밟기 위해 총무부장 앞에 앉은 나는 뭔가 막막한 벽 앞
에 앉아 있는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총무부장은 내가 앉자마자 입사 서류들을
한 장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이 서류는 작성해서 내고 이 서류는 구청에서 떼서
제출하고 이 서류는 학교에서 떼다가 내고 이 서류는 누구한테 보증 받아내고
등등...
“이게 다 뭐예요?”
“체출해야 될 서류들이라니까요.”
“전 미국 국적인데 주민등록등본은 어떻게 제출하죠?”
총무부장은 눈이 동그랗게 뜨면서,
“미국 국적예요?` 라고 물었다”
“네, 그래서 취업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총무부에서 그런 일을 해주나요?”
총무부장의 얼굴이 일순 구겨졌다. 귀찮은 여자 하나 만났다는 눈치였다.
우린 그런 일 못해요. 개인이 알아서 해와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될 수 있으면 우리나라 국적으로 바꾸는 게 좋을 거예요.”
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로 툭툭, 책상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월급 얘기로 들어갑시다.”
이렇게 말한 총무부장은, 한 달에 월급은 얼만데 수당은 얼마고 보너스는 어
떻고 세금은 어떻고 등을 쭉 말했다. 나는 물었다.
“그게 과장 직급의 봉급입니까?”
총무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과장이요? 과장으로 입사하는 건 줄 아셨어요?”
“듣기로는 직장 3년 경력이면 대리고, 5년 경력이면 과장급이라고 하던데, 제
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5년간 했으니까 과장으로 입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
그러자 총무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난 그런 말 들은 적 없어요. 내가 보기엔 과장은 힘들고... 글쎄요... 아마 대
리도 힘들걸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분명 중간관리자급의 채용을 염두에 두고 서류
를 냈던 것인데, 대리도 힘들다니... 미국에서 일한 경력은 쳐주지도 않는단 말인
가.
총무부장은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봉투를 받고 “저...”하며
입을 떼었다. 그러자 총무부장은 말을 자르는 듯이 싹 돌아앉았다. 융통성이라고
는 찾아볼 수도 없는 태도와 모습이었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왔다. 직장에서 함께 일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답
답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마 일주일도 안 돼서 숨이 막혀버
릴 것 같았다.
나는 서류봉투를 받아안고 답답한 심정으로 비서실로 갔다.
비서실장은 얼굴에 힘을 주고 말했다.
“우리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대리가 와줬으면 좋겠어요.”
“아, 나는 대리구나.”
“늦어도 이틀 안에 그 서류를 다 준비해가지고 사흘 뒤부터 출근해주세요.”
“앗, 이틀 안에 이 많은 서류를?”
“출근은 여덟시지만 비서실은 대개 일곱시까지는 나와 있습니다.”
“윽! 그 새벽에...”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있었다. 청소부라도 시키면 하겠다는 의욕이 있었지만
왠지 사람들의 태도는 숨이 막히게 했다. 과연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안 생겼다.
나는 유난히 사람을 밝힌다. 같이 일할 사람들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것이다.
돈이나 명예는 그 다음이었다. 같이 일할 사람들과 뭔가 통한다는 그런 느낌을
나는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을 하든 직급이 무엇이든간에...
그렇게 한가하게 사람 타령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김이 빠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나의 채용을 둘러싸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외국물 먹은
여자가 과연 해내겠느냐, 아마 금방 낙오된다는 등의 의견이 분분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들어오기 바로 전에 미국에서 공부한 한 남자 직원이 근무한 지 두
달 만에 퇴직했다고 했다. 그러니 미국 국적에 애 딸린 여자가 얼마나 버티겠느
나며 반대 의견을 낸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한 적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았고, 나를 가로막는 답답한 벽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뭔지 모를 막막함
이 마음을 채웠다.
회사를 나섰다. 거리에는 조금씩 어둠이 짙어졌다. 지하철이든 택시든 타고 집
으로 가야 하는데, 마음이 복잡한 이유가 뭔지 정리해 보고픈 마음이 들어서 무
작정 걸었다. 건물들과 도로가 노을빛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화장기가 감도는
거리를 걸었다. 그러나 그 노을조차도 내 마음을 아름답게 단장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물음표를 찍기 시작했다.
이은정. 네가 원하는 대로 우리나라에서 일하게 됐어.
네가 원하는 대로 대기업이야.
네가 원하는 한라그룹이야.
비서실도 일할 만한 곳이야.
그런데 왜 기쁘지 않지?
왜 답답하지?
과연 일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만족을 해야 하나?
답답한 마음으로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퇴근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 아닌 표정으로 들어서는 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합격이라면서 왜 그런 얼굴이니?”
“좀 답답해요.”
“답답해? 왜?”
“그냥 같이 일할 사람들을 보니까 답답한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어머니 스스로도 우리나라 직장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여러 가지 불이익과 차별대우를 그때 몸소 겪고 있었던
바였고, 게다가 외국인 딱지를 안고 있는 딸이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
던 터였다. 내내 표정이 어두운 딸을 물끄러미 보시던 어머니는 대뜸 그러셨다.
“정 그러면 관두지 그러냐?”
어머니의 반응은 의외였다.
어머니 성격대로라면 당연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 내 딸답지 않다.
넌 강한 애가 아니냐, 잘 해봐라,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날 밤을 이상한 불안감에 잠겨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어나면서 나는 결심했다. 한번 부딪쳐보자. 시작도 해보지 않고 선입견만 가지
고 포기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이 아니고 대리로
출발하면 어떤가. 근무경력이야 다시 만들면 되는 거지. 더구나 지금 네가 그런
걸 따질 때야?
나는 나를 한 대 쥐어박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고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
리고 서류를 준비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서류를 떼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
웠다. 관공서의 불친절과 매너리즘과 불필요한 형식과 절차에 정말이지 질려버
렸다. 특히나 미국 국적으로 한국에서 일하기 위한 서류를 떼는 일은 나를 지쳐
버리게 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이런 서류 절
차는 개선해야 될 부분이 많다고 본다. 신속 간결 명확, 산뜻한 서류 절차, 그거
어떻게 안 될까.
한라에 입사하고 나서 2년 정도 지났을 때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물론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마음이 아주 강했던 것
도 사실이지만 복잡한 서류절차의 불편함도 그런 결정을 도왔다.
드디어 첫출근하는 날이 왔다. 준비한 서류를 핸드백에다 넣었다. 첫출근하는
날부터 지각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서둘러 출발했다. 면접 보는 날은 누군가 차
를 태워줬지만 그날은 혼자서 가야 했다. 전철을 타고 선릉역에서 내렸지만 웬
일인지 한라그룹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작지만 그래도 분명히 건물이 보일 텐
데 아무리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전철역 이름을 다
시 확인했지만 선릉역이 맞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한라그룹이 어
디 붙었는지 모른다는 대답들뿐이다.
나는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한라그룹을 찾았다. 그때 나는 한라그룹이 이 근
처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작은 회산가, 또 한번 적잖이 실망했다.
아무튼 나는 묻고 물어 한라그룹을 간신히 찾기에 이르렀다. 집에서 일찍 출발
해서 일곱시 정도면 도착할줄 알았는데, 어느덧 여덟시가 되고 말았다.
회사에 들어서는데 출근시간의 피크인지 회사로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
렬을 보았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바빠졌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초만원이
었다. 그야말로 꽉꽉 들어찬 사람들을 싣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나는 타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볼 수가 없는 진풍경이었
다. 짐 싣는 엘리베이터도 저만큼은 못 싣겠다 싶었다.
또 한 대의 엘리베이터가 섰다. 그 엘리베이터에도 역시 사람들이 쏜살같이
밀려들어 초만원을 이뤘고, 붉게 상기된 얼굴의 사람들을 싣고 또 올라가버렸다.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나를 한심하다는 듯쳐다보고 있던 수위 아저씨
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다가 오늘 안으로 엘리베이터 타긴 힘들겠어요. 그냥 무조건 밀치면서
라도 타야 되는 거요.”
다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그는 복잡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나를 밀어넣
어 주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 비서실까지
올라갔다.
입사 첫날의 좌충우돌
회사에 들어서면서 언뜻 여직원들의 유니폼이 눈에 거슬렸다. 면접 보러 오던
날도 느낀 건데, 여직원들이 왜 유니폼을 입고 있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런데 결국 나도 과장으로 승진할 때까지 1년 남짓 그 유니폼이란 것을 입어야
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유니폼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옷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좋잖아요.”
“작업복이니까 더러워질까봐 신경 안 써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누구나 똑같은 옷을 입는 건 획일화를 말한다. 획
일화는 개성을 죽이는 것이고 개성이 없다는 건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표준화와 획일화는 상품에 한정되는 것이지 인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있다. 매일 출근하는 즐거움이 뭔가. 아침에 뭘 입을까 고민도 하고 화장하
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남자들도 그날의 날씨나 약속 여부에 따라 넥타이
와 양복을 맞춰 입고 나오는데 하물며 여자에게서 그런 즐거움을 빼앗는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보이는 것에 치중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옷도 일종의 자신의 표
현이요, 개성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유니폼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학교에서
도 교복을 입혀 획일화하더니 회사원들까지 그래야 하나, 이게 어디서 온 문화
인가, 답답했다.
어쨌든 나는 한라의 조직 속에 들어섰다. 이제 조직의 파도에 같이 동화되어
야 하는 한라의 물방울이 된 것이다.
가을이 됐으므로 춘추복으로 바꾸는지 여직원들 유니폼 치수를 재러 와서는
나에게도 치수를 재라고 했다.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유니폼을 입기
는 싫다. 그러나 내가 안 입겠다고 우기면 그렇지 않아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직
장 다니다가 온 여자라고 얘기들을 많이 할 텐데 괜히 도마 위에 오를 필요가
있을까 생각됐다. 입방아가 무서운 건 아니나 괜히 처음부터 이질감이나 대립감
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 끝에 나는 순순히 줄자에 몸을 맡겼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후에 내 유니폼을 받았는데 가관이었다. 먼저 치수를 줄자로 쟀는데도 몸에
맞지 않고 몹시 컸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치수는 쟀나? 그냥 눈짐작으로 상, 중,
하로 구분해 만들어도 이 정도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한라에서 겉도는 것처
럼 내 유니폼도 내 몸과 겉돌았다.
아무튼 그로부터 한라에서의 생활은 시작됐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뭘까 궁금했는데 상관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달 동안 우선 사무실 분위기 파악부터 하세요. 그런 후에 스스로 자신이
할 만한 일을 찾아보시고, 한 달 후에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한 달 동안 비서실에서 내가 할 만한 일을 찾아보라는 얘기였다. 어떻게 들으
면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대단한 이점을 주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러나 한국 실
정을 잘 모르는 나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어디서부터 업무파악을 시작해야 할
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건지 당황했다.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일
을 찾아서 해야하고, 내게 어울리는 일이 뭔가를 정확히 파악해내야 했던 것이
다.
우선 나는 기본적인 것부터 해나가자고 생각했다. 회사생활하는데 가장 기본
적인 것은 어디에서나 출퇴근일 것이다. 출퇴근 시간 지키기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직장생활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출퇴근 시간 지키기라는 것이 또 애매했다. 일반적으로 여덟시쯤에
모두 출근하는 모양인데, 그러나 비서실만큼은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회장님
나오는 시간이 출근시간이요, 회장님 나가는 시간이 퇴근시간이었던 것이다.
출퇴근 시간까지 정확하지 않다니,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튼 이것저것 무척 혼란스럽게 헤매고 있는 나를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인물인 내가 나타나자 모두 경계하는 것 같
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은 사원이 불쑥 악수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잘해봅시다. 나이도 동갑인 거 같은데.”
나는 처음에 직장에서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서 첫마디부터 나이얘기일까 했는
데, 그 남자직원은 저의가 있어 보였다. 자신은 평사원이고 나는 대리인데,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다. 그리고 나이도 같다. 그러니 함부로 하지 말아라, 뭐 대충
그런 뜻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너무 고마웠다. 일단은 나에게 말을 시켜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웠고 반가웠던 것이다. 어떤 종류의 관심이든 무관심보다
는 괜찮았다. 그는 그후에도 나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주로 어떻게 근무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였다.
“우린 주로 일곱시면 오지만 이 대리님은 여덟시까지 오셔도 돼요.”
그의 말을 들은 후, 나는 출근시간을 일곱시로 정했다. 집에서 꼭두새벽에 출
발해야 했다. 출근시간은 그렇다 치고 또 퇴근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날이었
다. 미국은 업무가 남아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사무실에서 끝내지만 일이 없
으면 일찍 퇴근한다. 즉, 상사의 눈치를 안 본다. 우리나라처럼 윗사람보다 일찍
집에 들어가면 혹시 괘씸죄에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X세대가 등장
하면서 점점 우리나라의 출퇴근 문화도 나아지고 있지만 그 당시, 내가 처음 접
했던 근무시간은 분명 비합리적이었다.
또 하나, 내게 비합리적으로 비쳐졌던 건 직원들의 사적인 통화시간이 무척
길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은행에서도 어디를 가든 무슨 통화
를 그렇게 길게 하는지, 아예 전화기를 어깨에다 위태롭게 올려놓고 업무를 보
는 사람도 봤다. 그런데 그 통화 내용이라는 것이 급하고 중요한 업무라기보다
는 가족 얘기, 친구 얘기, 옆집 이야기, 가십거리 등등... 계속 이런 쓸데없는 이
야기들로 통화 시간을 늘였다.
순전히 개인적인 전화통화인 셈인데 왜 직장까지 와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
었다. 내가 불쾌했던 건 전화통 붙잡고 수다떠는 사람 중에는 여직원들이 많다
는 점이다. 물론 남자직원들도 더러 그러는 경우를 봤지만 대부분이 여자직원들
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굉장히 싫고 창피했다.
아무튼, 한 달 동안 비서실 업무를 파악하고 내가 할 일을 선택해보라는 상관
의 말에 따라 나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등 기본적인 태도에 충실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열흘쯤 지났을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직원이 경상도 사나이답게 질
문을 던져왔다.
“이은정 씨, 술 잘합니까?”
나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날 저녁, 회사 근처에 있는 치킨집에서 소주를 꽤 마셨다. 상사욕도 실컷 하
고 개인적인 고충도 늘어놓고 나라 얘기부터 집안 얘기까지 다 나눴다. 밤이 깊
도록...
그날 나는 한국 직장인들의 `근무 후 자리`에 반해버렸다. 퇴근 땡, 하면 각자
의 스케줄을 찾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미국의 직장동료들에게는 이런 인간미
를 절대 느낄 수 없다. 나는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런 곳이 직장이라는
덴가, 신기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번 일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을 계기로 그 직원과 친해진 것은 물론이고 근무 후 자리의 술친구도 늘
어갔다. 그곳에서 동료에 대한 배려를 느끼게 되었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그리고 고리타분하지만은 않은 생동감을 찾았다. 그러나 입사
하고 나서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입사한 지 한 달
이 다 돼갈 무렵이었으므로 마침내 나의 업무영역을 정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
다. 나는 기대에 찬 설렘으로 내가 맡을 업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실장이 바뀌는 거였다. 후임 실장이 들어오고,
얼마동안 전임과 후임 실장이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실장의
업무 인계인수 기간인 셈이었다.
그 동안, 윗사람이 바뀌게 되면서 자연히 사무실 분위기도 술렁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한 달 후에 내가 할 업무를 할당해주기로 했는데,
어떻게 되는 거지? 전임이 약속한 것을 후임이 해줄 리는 없을 것 같고, 많은
업무들이 그대로 연결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나의 입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전임이 떠나기 전에 나의 위치를 정확히 해두자!`
나는 전임 실장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물었다.
“실장님, 제가 입사한 지 한 달이 다 돼갑니다.”
전임 실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실장님께서 한 달 지나면 제 업무를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 제가 할 일을 생각해봤는데, 저는...”
“나중에 얘기합시다.”
아무리 비서실을 떠나간다고 저렇게 무성의하다니... 나는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해졌던 터에 화가 발끈 솟았다.
“실장님, 전 한 달이 됐고, 한 달 후에는 제 업무를 지정해주신다는 건 하나
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가시기 전에 제가 할 일을...”
실장은 따지는 듯 말하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이은정 씨, 여긴 한국이에요.”
무슨 소린가? 여기가 한국인 걸 내가 모를 리도 없는데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미국 같은 합리주의자들의 나라에서 오래 살다 와서 그럴는지는 모르지만,
여긴 한국이에요. 한국에선 기다리는 게 미덕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제가 여기 한국인 거 몰라서 이럽니까? 기다리는 것도 종류가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일에 무작정 기다립니까?”
그러자 전임 실장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웬 불만이 그렇게 많아요? 이은정 씨 한 달 동안 내가 지켜봤는데 우리나라
에서 직장생활하기 정말 힘들겠어요.”
나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힘들고 말고는 제가 판단해요. 실장님이 힘들겠다, 안 힘들겠다, 혼자 판단
하고 그럴 필요 없을 텐데요. 그리고 전 불만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정당한
요구를 말하는 겁니다. 한 달 동안 제가 일할 걸 찾아보라고 했고, 그래서 한 달
지난 지금 제 입지를...”
내 말을 자르며 실장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참고 기다리라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여자가!”
기가 딱 막혔다. 여기 왜 여자가 들어가? 그리고 여기 왜 미국에서 생활한 게
들어가?
실장의 흥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다리기 싫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니요!”
나는 이성을 잃고 폭발했다.
“그만두라고요? 좋아요! 그만두라면 그만두죠!”
그 자리에서 바로 짐을 챙겼다.
비서실의 분위기를 급냉각시켜놓은 채 나는 짐을 싸서 비서실을 나와 곧장 집
으로 와버렸다.
“상사한테 대들어?”
나는 짐을 풀어놓으며 어머니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어이없다
는 듯 내뱉는 “세상에 세상에”를 들으며 나는 나대로 내 변명을 늘어놓았다.
“화나잖아요. 왜 한국 사람, 미국 사람을 따지냐고요. 내가 뭐 한국 사람이지
원래부터 미국 사람이에요? 사고방식을 들먹거려가면서 직장생활을 하기 힘들겠
다느니 뭐니 그러면 누가 기분 좋겠어요?”
“누가 기분 좋으라고 거기 있는 사람 아냐, 느이 상사.”
어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상사한테 대드는 거, 우리나라에선 드문 일이야. 그러니 너한테 사고방식 운
운하지. 말이란 어 다르고 아 다른 건데 그만두란다고 그럼 그만 두죠, 이러구
나왔다니 내가 말이 안 나온다, 정말.”
나는 그야말로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가장 많이 혼이 났다. 나는 사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찍 출근을 했다. 사과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
니 상사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갑자기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마음 뒤숭숭하
긴 그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생각만 하고 대들었으니, 내 잘
못이 컸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정신은 마음의 방송국이다.”
이 마음의 방송국에는 채널이 두 개 있다고 한다. 적극적인(positive) P채널과
소극적인(negative) N채널.
이 두 채널은 다른 방송국과 다른 점이 있다. 한번 선택하면 바꿀 수가 없다
는 점이란다.
맞는 말이다. 나는 그 상사의 충고를 N채널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나는 손해
를 봤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회사에서 `성격이 보통이 아닌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한테 이득이 될 일은 없었고, 그러므로 내가 잘한 행동은 없다.
물론, 상사와 어떤 일이든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건설적인 차원에서 논쟁
이 붙을 수는 있다. 그러다보면 목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위험하다고 본다. 일이 되기 전에 감정이 상해서 일을 그르칠 수가 있는데다가
상사의 마음이 완전히 닫혀버릴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위아래가 명백하고 윗사람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의식이
강한 곳에서는 득될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시기였다.
그 앞에서는 좋은 얼굴을 해도 돌아서면 `저 놈이 나를 우습게 봐`하면서도 `
두고 봐라`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백이면 백 피곤한 일이 많아지고 쓸
데없는 일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늘어난다.
내가 임원이 되고 난 후에도 나에게 대드는 사원들이 있었다.
나는 젊고 개방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괘씸하고 불쾌했다.
큰소리 뻥뻥! 그건 패자의 행동이다. 기분이 후련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차라
리 오락실에 가서 두더지나 때려잡아라.
윗사람들은 위에 있을 만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나의 판단기준으로 아무리
낮은 점수를 준다고 해도, 그들은 역시 보통 이하보다 위다. 더 많은 고급정보와
넓은 인맥과 강한 말발과 풍부한 경험과 달관한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들을 붙
잡고 따지고 대들어본들, 의사결정자들과 더 가깝고 더 접근하기가 쉬운 쪽은
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감정에 복받쳐 하는 행동을 다른 윗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
겠는가. 물론 내 앞에서는 누구나 어깨를 두르리며 위로 하리라.
“그래, 원래 너의 윗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내 편을 들어주는 척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은,
“저 애가 말야, 제 상사하고 싸운 애야.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구.”
그 말은 그대로 내 꼬리표가 돼서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반갑지않게도 따라다
닌다. 그렇게 되면 부서를 옮길 때도 말썽, 승진할 때도 말썽, 말썽투성이고 스
트레스 받기 딱 좋아진다. 이미지를 복구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단 한순
간의 대드는 후련함으로 그 많은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후, 결심했다. 이 회사를 다니겠다고 결심한 이상, 어떻게 해서든지 견
뎌야 한다고. 이를 악물 수 있으면 악물고 버텨야 한다고... 그래서 다음 부서는
타의가 아닌 자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그 위치까지 꼭 가고 말겠노라
고 결심했다.
물론 감정에 북받쳐서 무모하게 상사와 싸우는 일은 절대 안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입사 한 달 만에 그 평범한 진리를 터득한 것이 다행이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때 이야기를 가끔 한다. 많은 날들이 흘렀으니 웃으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중역은 아직 쇼크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한 여직원의 하극상`에 대한 쇼크가 말이다. 그러니, 얼
마나 손해되는 일인가 말이다.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가 되고 말았으니...
아무튼 그 틀에 속한 이상, 그 틀을 내가 깨고야 말겠다고 처음부터 덤벼드는
건 위험하다. 그 틀 속에 고요히 스며드는 수밖에 없다. 그 틀을 새로 짤 수 있
는 위치에 도달할 때까지는...
살아남기 위한 직장인 생존전략
입사하고 나니 사무실에 여직원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 남자직원은 7~8명 있
었다. 모두 대졸 이상이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외근 일은 남자들 몫이었고, 여자들은 똑같은 대졸에
유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만 있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퇴근 후에 한잔 자리를 마련하면서 친하게 된 맞은편 남자직원에
게 물었다.
“왜 여직원은 외근을 안 나가요?”
“여직원들이 나가는 걸 싫어해요.”
“왜요?”
“게을러서죠, 뭐.”
“그래요?”
“그리고 또, 나가서 짐들고 오구, 그래야 되는데 그런 거 여직원이 어떻게 합
니까?”
나는 그게 아닐 것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자직원의 말이 맞았다. 여직원
들에게 따로 물었더니 그들은 정말로 외근을 귀찮아했다.
“나가면 운전도 못하는데...”부터 시작해서, “짐도 날라야 하는데...”하면서
귀찮다는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여직원들은 1차에서 식사만 끝나면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남
자직원들은 2차 3차까지 꼭 붙어 있었다.
또, 남자직원들은 앉아서 커피를 받아먹고, 여직원들은 직접 끓여 마시는 것에
도 신경이 거슬렸다. 그런데다가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 따로따로 점심을 먹
고 따로따로 대화를 했고 따로따로 퇴근을 했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
끼리, 이게 대체 직장인가, 남녀 따로인 학교인가.
정말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여직원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남자직원들에게 배타적이에요?”
“포기했어요.”
“네?”
내가 되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처음에는 의욕적이고 적극적이었죠. 이런 일 저런 일 시도 안 해본 거 아녜
요. 시도해보고 안 되면 따지기도 했고요. 근데, 결국 남자들 의식이 안 변해요.
그러니 포기해야죠. 이제 뭐 할 일만 하자, 그래요, 다들.”
그녀의 대답처럼, 김빠지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중역이 된 후에도 그랬
다. 다른 중역들과 식사라도 하려고 식당에 가면 식당 아주머니들은 나한테 이
렇게 말했다.
“아가씨, 숟가락 좀 거기 놔줘요.”
“불 좀 줄여주세요.”
“고기 좀 뒤집어주세요.”
보조처럼 취급을 했고, 회사 주차장에서도 내 얼굴을 모르는 경비 아저씨들은
지정된 장소에 주차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딜 들어와요? 여기 중역들 주차장소란 말이요!”라며 내 차를 막아서기
일쑤였다.
그러니 같은 직원들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자는 이런이런 일을 해야
하고 남자는 이런이런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사고의 벽에 부딪히면 정말 답답한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남자들만의 잘못일까. 아니다. 여자들도 문제가 있다. 자기의 역
할을 넓히기에 이를 악물기는커녕 애를 써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쉽게
포기해버리고 쉽게 사는 방법을 찾아 하루를 잘 넘기고만 있었다. 편한 여자직
원들끼리 편하게 대화하고 편하게 커피 마시고 편하게 일하고 편하게 퇴근하고
그렇게 편하게 지내고만 있었다. 자연히 남자직원들은 여자직원들에게 역할과
능력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여자직원들 역시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우리 사
회의 기본적 한계를 한치도 벗어나고 있지 않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남자직원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지금 남자직원들이 하고 있는 저 일들을 다 해볼 테야.”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남들 보기에는 좀 설친다 싶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설치고
다니며 모든 일에 뛰어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사무직 일인데 남자 여자의
일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너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이 회사에 여자 입장이 아닌 인간의 입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여자
하는 일말고 인간이 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에 진입하는 여자들, 그들에 대한 매너가 우리 사회는 아직 세
련되지 못했다.
간혹 중역끼리 모이는 장소에서도 그렇다.
“이 상무, 많이 예뻐졌는데?”
“옷이 멋있는데?”라고 하면서 나의 외모에 대한 코멘트부터 시작하는 사람
들이 있다. 그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안다. 나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직 어색한 것이다. 여자임원하고 같이 회의를 해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처신해
야 하는지, 그걸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남자들만의 세계인 줄 알았던 그곳에 여자가 들어섰을 때, 그 여자들
을 대하는 매너가 세련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자들의 특권을 행사하는 데도 불
편해한다. 나아가서 남자들을 훼방 놓는 존재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아직도 남
자와 여자의 역할과 기대를 차별해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세하다고 생각해버린
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싫어했던 말이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말들이다.
여자이기 때문에라고?
도대체 여자이기 때문에 뭐가 어쨌단 말인가. 남자보다 못할 것은 세상에서
하나도 없다. 나는 신체가 건강하고 정신력도 강하다. 특히 내가 맡은 업무에 있
어서는 더욱 그러하며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다. 남자보다 못할 게 뭔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라니. `불구하고`라니? 그
말은 도대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이 들어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다` 이 생각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분명
남자가 아닌 여자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뿐이지 어느 한쪽이 우세하
거나 어느 한쪽이 열등하지 않다. 나도 남자가 하는 일을 거의 할 수 있고 남자
도 내가 하는 일을 거의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내가 남자가 하는 일의 일부분
을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 또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경우도 있
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 그러니 나는 그들과 똑같이 성공에 승부를
걸었다.
얼마동안 살펴보니 비서실에는 핵심 멤버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이 실질적인
일을 거의 다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 그 핵심멤버 한 명이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몇 시까지 출근해요?”
“난 일곱시까지 와요. 그치만 이은정 씬 일곱시까지 안 와도 돼요. 다들 여덟
시쯤 출근해요.”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 일곱시로 출근시간을 정해버렸다. 그리고 또 물었다.
“퇴근은 몇 시에 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여섯시나 일곱시에 하죠. 그런데 뭐 저는 퇴근시간이 따
로 없어요.”
그 순간 나는 퇴근시간도 정해버렸다.
나의 퇴근시간은 `몇 시인지 모름`이다.
나는 핵심 멤버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그들과 같은 시
간에 출근하고 그들과 같은 일을 하려고 했다. 하다못해 복사를 해도 즐겁게 했
다.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했다. 퇴근도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시간이
퇴근시간인 것이다. 토요일에도 끝까지 앉아 있었고 일요일에도 출근했다.
회식자리에도 끝까지 남아 여러 가지 정보를 들었다. 원래 그런 자리에 자잘
한 정보들이 많았다.
차츰 사람들이 나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직장 다니
다 온 여자가, 애 있는 여자가 제법인데? 하는 눈길들이었다. 또 하나, 나는 날
필요로 하는 일을 내 능력이 닿는 일을 찾아가며 했다. 누가 시켜주길 바라지
않았다.
영어에 강하다는 장점을 나는 충분히 활용했다. 영어 서류, 영어 전화, 영어
인터뷰 등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나의 운이라면 운이겠지만, 정인영 회장님은 영어를 좋아하셨다. 정식으로 배
운 영어는 아니지만 문학소년 출신이어서 쓰는 걸 좋아했고, 영어의 말에 대한
의미를 새겨보고 거기 숨긴 뜻을 음미해보는 걸 좋아하셨다. 회장님의 책상에는
늘 단어장이 놓여 있었는데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A4용지에 크게 써놓
고 늘 그 단어장을 보시곤 하셨다.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 회장님의 눈에 내가 띄기 시작했다. 영어로 서류를 제법 근사하게 작성
할 줄 아는 여직원인 것이다.
어어? 제법인데?
그런 눈으로 일개 대리에 지나지 않는 한 여자사원을 보게 되었다.
정회장의 비지니스철학
정 회장님에 대해 내가 놀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세 가지
는 이것이다.
우선, 정보에 대한 욕심이 굉장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읽는데 그 독서량은 엄청나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신문 잡지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
도 깡그리 다 읽어보시는데, 해외에 나가도 기사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잡지를
사들이는 것이다. 경제 정치 잡지에서 하다못해 여성잡지까지 사서 읽어보는 것
이다. 그러나 비서실의 업무중에 가장 주된 업무는 바로 회장님의 그 정보욕구
를 충족시켜드리는 일이다.
먼저, 아침마다 신문을 다 책상 위에 놔드린다. 그러면 회장님은 그걸 읽다가
중요하다 싶은 건 빨간 펜으로 표시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도 그렇지만 다른
부서에서 필요한 것도 역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지시를 내린다.
“이거 이거 번역하세요.”
그러면 그걸 오려서 번역하기 시작하는데, 한두 명이 달라붙어서는 엄두도 못
내는 양이다.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정 회장님은 당장 알아채시고
"그건 왜 번역 안 했소?" 라고 묻는다. 그러므로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도 빠
짐없이 번역을 깔끔하게 해서 갖다드려야 한다.
또한 늘 읽을거리를 준비해야 되는데, 하다못해 대중잡지에 실린 중요한 기사
를 번역해드리면 그 가운데서 자신이 꼭 알아두어야겠다 싶은 정보는 따로 챙기
시고, `이건 사장이 이건 상무가 알아야 할 정보` 등으로 구분해 그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지시하신다.
두번째는, 비지니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계시는 듯
했다.
비지니스는 딱딱한 게 아니라 부드러운 것, 어려운 게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
는 것이 정 회장님의 비지니스 철학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먼저 농
담을 던지고 즐겁게 말을 풀어나간다. 적절한 음담패설도 구사할 줄 알고, 아예
조크 담당 전무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다.
회장님은 한가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접하면 그걸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
니라 적절하게 변형시킬 줄도 안다. 나름대로 재창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좌중을 즐겁게 만든다.
그래, 비지니스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지, 즐겁게! 그게 일과 삶의 목표가 돼야
하는 걸 거야, 나는 정 회장님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다.
세 번째로, 정회장님은 편지를 꼭 보낸다.
누구와 무슨 얘기를 나누면 나중에 특별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편지를 꼭 보내
야 한다. 만나서 기뻤다, 즐거웠다 정도의 얘기만이라도 꼭 써서 보낸다. 그리고
편지 하나하나를 일일이 직접 챙긴다. 젊
었을 적에는 회장님이 그런 편지를 직접 작성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몸이 불편
해지면서 직원들을 시켰고 일일이 체크해서 보내셨다.
나에게 제일 먼저 떨어진 `일다운 일`도 바로 그 편지 쓰는 일이었다.
해외출장을 다녀오신 후, 출장에서 만난 분에게 감사 편지를 쓰는 일이었는데,
비서실장이 나에게 써보라고 했다. 물론 출장 가서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말해
주었다. 나는 그 정보를 가지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기업에
서 기업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문체에 그다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감
정이 안 들어갔던 것이다.
그 편지는 비서실장 손에서 보기 좋게 노우 사인을 받았다.
“회장님은 이런 문체 안 좋아해요, 마음이 들어간 글을 좋아합니다.”
나는 그때 좀더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만났을 때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회장
님의 기분은 어땠는지, 만나는 사람의 느낌은 어땠는지... 그런 후에 편지를 작성
해야 했는데, 그저 기업과 기업사이의 관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회장님은 아무리 기업과 기업 사이의 일이라 해도 감정과 마음이 통해야 한다
는 지론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하
면서도 하고자 하는 얘기는 군더더기 없이 전달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
다.
두 번째 편지 쓰는 일이 주어졌을 때는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해서 써보았다.
미국의 어느 학교와 연수 프로그램 건으로 만났던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였는
데, 그리 중요한 사업적인 건은 아니었다. 그냥 더 원활한 문화교류를 갖자, 뭐
그런 내용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어 하나, 문장의 흐름 하나하나에
밤을 새워가면서 매달렸다. 몇번이고 적절한 단어를 바꿔가며 썼고, 마음이 담기
도록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심플하게 전달돼서 첫눈에 아, 이런 편지구나 하는
걸 알게 하려고 애썼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토씨 하나에 신경을 써서 작성한 편
지, 그야말로 내 정성이 편지를 가져간 결과, 회장님의 반응이 그대로 나왔다.
“액설런트!”
그 다음부터 편지업무는 거의 내개 주어졌다. 회장님의 신임도 어느 정도 얻
어낸 것도 같다.
편지업무 말고도 자잘한 보고업무가 내게 주어졌는데, 이상하게도 회장님 앞
에 서면 아무리 추운 날씨여도 땀이 뻘뻘 났다. 웬만해서는 긴장을 잘하지 않는
내 성격에도 그랬다. 아마 회장님이 가진 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회장님은 결재서류를 가지고 들어가면 농담이라든가 신변잡기적인 질문을 툭
툭 던지곤 한다. 연예인 얘기에서부터 아이는 잘 크느냐,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
도 툭툭 건낸다. 그러면서도 내가 긴장하지 않고 결재서류에 대해 다르게 말씀
드리면 회장님은 얼른 정정한다.
“그게 아니잖아요?”
그땐 땀이 바짝바짝 났다.
아주 시급한 결재사항이 있을 경우에 아침 일찍부터 회장님 댁을 방문해서 결
재를 받기도 했는데, 그때도 회장님은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셨다. 텔레비젼
을 보고 또, 결재를 하다가도 보고가 잘못되면,
“이건 왜 이래요! 내용이 다르잖아요!” 라는 말이 화살처럼 날아온다.
그러므로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날카로운 질문이 던져질
지 모르고 내가 방심한 사이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
서 그런지 결재를 가지고 들어가려면 어느새 내 등 뒤로는 땀이 나기 시작한다.
심호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회장님도 회장님이지만 비서실에는 늘 중역들이 전화를 하곤 하기 때문에
24시간 동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평사원이고 대리고 과
장일지 모르지만 전화를 거는 분들은 대개가 중역이기 때문이다.
중역들은 늘 정보를 묻는다. 스케줄은 어떻게 되며 그곳에는 왜 가시며 일정
은 어디에서 시작돼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러므로 회장님의 아주 잔잔한 스
케줄까지도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당한 답변을 할 수가 있다.
비서는 또 아주 예민한 정보가 있을 때는 입을 꾹 다물 줄도 알아야 한다. 비
서실은 어떻게 보면 정보의 총본산이다. 과묵함이 비서의 최고의 덕목인 것이다.
특히 회사 재무구조라든가 인사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인데 그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흘리면 큰일난다.
때에 따라서는 적당한 정보는 흘릴 줄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회장님
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으신데 안 좋은 결재서류가 들어간다. 그러면 회장님의
기분 상태 같은 자잘한 정보 정도는 흘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도 비서 업무를 해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원한 일이 아니
었다. 그러나 한라에 입사하게 된 것은 내가 원해서였다.
원하던 대기업의 전문적인 비서 업무를 맡은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신나게 일했고, 신나게 일하니까 결과가 좋았다. `신나게`와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은 이렇게, 결과 면에서도 천지 차이였다.
흔히 여자 비서를 두고 `사무실의 꽃` 또는 `중역실의 꽃` 정도로 생각한다.
상사의 커피를 나르고 타이프를 치고 심부름을 하고 전화를 받는 정도로만 인식
하는데, 물론 이것도 비서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극히 일부분의 일이지 전부는
아니다. 나는 꽃이 될 만큼 예쁘지도 않고, 또 꽃의 역할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
했다.
비서가 갖춰야 할 조건 중에 중요한 것은, 모시는 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
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른의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 짤막한 지시들을 재빨
리 파악해내야 한다. 정확하게는 못해도 주제만이라도 대충 파악해내야 하는 것
이다.
나는 그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보를 구하고 상사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이를테면, 그분이 생각하는 `거대한 그림`의 윤곽
이나마 그려보려고 애섰다. 그래서 아, 그런 뜻이었구나,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옮겼다.
이런 비유가 옳은지 모르겠지만 부모가 자식의 표정을 보면서 마음을 알아차
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다 캐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면 할 수 없다. 그 표정을 잃어야 하고 짧은 말 속에 숨어 있
는 의미를 캐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마음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을 짐작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비서의 또다른 어려운 점이라면 역시 시간적인 구속이다. 하루 일과는 모시는
분의 하루 일과에 맞춰 짜여진다.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이 어른의 일에 맞춰 정해진다.
또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나를 찾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
다. 출장을 나가서도 한숨을 돌리면 안 된다. 세계 어디서도 통신이 가능한 시대
라는 게 원망스러울 뿐, 항상 시간에 기며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고 차 한
잔 여유롭게 마시기 힘든 직업임을 각오하는 자만이 비서일을 할 수 있다.
대기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나의 경우에 대리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시킨 일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과장 부장이 되면서 그만큼 책임도 늘어났다.
회장님은 일 년 365일 중에 2백여 일 동안 출장을 나가신다. 비서실장은 물론
회장님을 수행한다. 그러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나의 몫이다. 가장 힘들고
가장 일을 많이 했던 때가 아마 부장급이었을때인 것 같다. 그때는 정말 회사에
서 365일을 살았다. 단 한번도 휴일을 찾아 놀아본 적이 없다.
외국에 나간 회장님이 언제 연락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대기하고 있
어야 한다. 다른 직원들에게 시키면 입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내가 나와 있어야 한다.
토요일도 다섯시, 일요일도 다섯시까지 빈 사무실을 지켰다. 전화가 안 올 수
도 있고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
고 앉아 있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인지 경험해본 자만이 안다. 그때 잡지도
읽고 책도 읽고 대학원 공부도 하고 그랬다. 또, 회사일도 그때 말끔히 처리하곤
했다.
만일 내가 수행 비서실장에게
“다섯시까지 있어 볼게요.” 그렇게 말했다고 치자. 그런데 다섯시까지 전화
가 안 왔다, 그러면 다섯시 정각에 문을 나서는 게 또 불안했다. 그 사람들 시계
가 5분 빠를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 5분 더 기다리고, 시차가 조금 더 차이 날지
도 몰라, 그러면서 10분 더 기다리고 그랬다. 문을 잠그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서 책상에 앉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화 벨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서 서
둘러 되돌아온 적도 있다. 약속해놓고 못 나간 적도 많다. 그야말로 휴일은 나에
게 쉬는 날의 개념이 아니었다. `대기하는 날` `기다리는 날` 이었다.
또 비서실에서는 회장님의 출장 스케줄을 잡는 것도 큰 일이다. 행사에 참석
할 때는 누구를 언제 만나야 하는지, 몇 시에 입장을 하는 게 좋은지, 앉으실 때
는 오른쪽에 앉는 게 좋은지 왼쪽에 앉는 게 좋은지, 그 모든 것을 체크해야 한
다. 또 몇 분 정도 계시다가 안에 들어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등의 시나
리오를 치밀하게 작성해야 한다.
또, 외국인들을 접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철저히 체크해야 했고 또 지역에 안 맞는 음식 같은 것을 실수없이 체크해둬야
한다.
또 접대차량은 무엇으로 할지, 식사는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도 꼼꼼하
게 체크한다.
더구나 정회장님의 경우에는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잡는 일에서부터 회장님이 움직이기 편한 동선을 고려하는 것까지 모두가 비서
실 몫이었다.
나는 점점 내 책임이 늘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잔소리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일이 지시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
의 입장이 돼봐야 안다고, 전에 그렇게 잔소리하던 상사를 욕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또, 그 무엇보다 더 힘든 일이 있다. 아무리 상사의 표정을 읽기가 어렵고 업
무시간이 길다 해도 상사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보다 더 어
려울까. 어른이 지시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나는 잘 전달한다 싶었는
데 엉뚱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아주 단순한 내용을 단순하게 전달했는
데도 그렇다. 워낙 잔머리 잘 굴리는 사람이 많고 한발 앞서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또 한발 뒤에 서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갖가지 유형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시를 받는 사람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 사람이 알아듣도록 정확히 지시를
전달해야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산 너머 산 그리고 이혼
입사한 후에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다. 가정이냐 일이냐를 놓고 판단할
일이 생길 때 나는 항상 일을 택했다. 택하려고 해서 택한 게 아니고 그냥 그렇
게 선택이 되어졌다. 일 때문에 태어난 것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아들이나
어머니에게 신경 써주지 못해 서운함을 산 일도 부지기수다. 정말이지, 정신없이
뛰었다. 자꾸 치밀어오는 슬픔과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값싼 감상
에 젖어들기에 현실이 너무 각박했다. 나는 마음을 자꾸 다잡아가며 일에 매달
렸다.
다행히 아이는 잘 자라 줬다. 나는 아이에 대해 내가 부담을 느끼고 힘들어하
면 아이도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행복하면 그아이도 행복하다는, 나름
대로의 육아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려고 애를 썼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우선 닥치는 것이 생활고였다.
집은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서 산다고는 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는 정말 탁
아시설이 열악했다. 지금도 많이 나아진 것은 아니나 몇 년 전에는 더 심각했다.
사람 구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당시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쁘셨고, 나 또한 출퇴근이 정확하지 않은 직장에 몸을 담고 있으려니
집에 상주할 사람이 필요했다.
한 달에 대리 봉급이 80만 원 정도 되었는데, 아이 보는 사람에게 나가는 돈
이 그와 비슷했다. 어머니와 반반씩 그 비용을 부담하며 지냈다.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았다. 반지도 목걸이, 귀고리 결국
에는 은수저도 팔았다. 그렇게 해가면서 아이 기르는 일과 한라에서의 직장생활
을 병행해 나갔다. 아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울에 계시
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전화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방문도 없었다. 손자가 미국에서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 텐데, 아무리 별거중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하지만
어떻게 안부전화 한통 없을 수가 있는지...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억울해서 자꾸 나에게 하소연을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된 거니?”
“왜 그 동안 엄마하고 단 한번도 이런저런 의논을 하지 않았니?”
“어떻게 사람들이 저럴 수가 있니?”
어머니에게 한번도 의논을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못내 서운해 하셨고, 아들
을 데리고 들어와 허덕거리며 사는 큰딸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얼마나 기대를 걸었던 큰딸인가.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했던 딸인가.
모든 걸 잘 해내리라 여겼던 그 딸이 처참한 몰골로 인생의 실패자처럼 살아
가는 것을 보니 어머니는 마음이 상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뵙는 것
이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그런 표정과 맞닥뜨려야 했고 그
럴 때마다 나는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 어머니한데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단시일 안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는
가. 그리고 성공한 결혼을 보여드리자면 나 혼자 힘으로 불가능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상대가 있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한라에서 1년 정도 이를 악물고 일하면서 아이를 기르는 동안 생활고와 여러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로 정말 많이 힘들었다. 힘들었다는 말을 그래도 지나고
나니 한다. 그 당시에는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외로운 사람은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힘들다는 사람은 힘들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 힘든 수렁에서 나오기 위해 몸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기만 했다.
아이를 돌봐주는 아주머니는 아이에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회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해결할 능력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아이
가 정상적으로 잘 놀 때는 옆에서 있어줄 수 있지만 아프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
면 꼭 허둥대며 전화를 해왔다.
하루는 아이가 열이 난다면서 전화가 왔다. 열이 펄펄 나며 신음을 한다는 것
이다. 비서실에서는 외국에서 오는 바이어 때문에 총비상이 걸렸던 때였다. 특히
나는 그 바이어의 통역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꼼짝없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열이 날 때의 응급처치법을 말해주고 나서 일에 뛰어들었
는데, 평상시처럼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자꾸 허둥대고 실수를 연발했다. 아이는
아파서 열이 난단다. 회사는 나의 대기를 기다린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림길에
선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회사일을 허둥지둥 마친 다음에야 아이에게 달려가고 있었
다.
그날 나는 밤새 찬물로 아이의 이마를 닦아주면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열
에 시달리느라 자지 못하다가 겨우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다가 나는 울고 말았
다. 아이의 볼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기석아, 미안해... 기석아 미안해...`
열이 내리기를 기도하다가 다시 한번 기석이를 껴안으며 울었다.
`기석아, 사랑한다. 기석아, 사랑한다...`
마음으로 수천 수만 번을 외치면서 그렇게 울었다. 아이가 불쌍했다.
아이가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으로 아이의 볼에 얼굴을 대고 울다가 아이
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하다가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너무나 증오스러
워졌다.
아이 아버지가 돼서 전화 한통 없는 무정한 인간이었다.
기석이가 잠이 깊이 든 것을 확인 후 나는 미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의 편안한 목소리를 대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나는 쏘아댔다. 어
쩌면 아버지가 돼서 전화 한번 안 하느냐, 어쩌면 당신 어머니 아버지는,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 같은 서울에 있는데도 과자 하나 안 사주고 연락조차
하지 않느냐, 이래도 되는 거냐...
그 동안 쌓였던 설움과 증오가 폭발하면서 나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남편은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이성을 찾아.”
이성을 찾으라고 그는 아주 차분하고 지적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천천히 능청맞게...
기가 막혔다. 그건 내가 그에게 해줄 말이었다. 아니, 결혼 내내 해온 말이었
다. 제발 이성을 찾으라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나는 전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 이제 그와 나의 연결선은 끊어졌는가, 툭, 하고 끊어지는
인연의 끈,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들었다.
많이 아팠다. 가슴이 아렸다. 한때 정말 사랑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그에게
줄 음식을 마련해 달려가고 내 티셔츠 살 돈을 아껴 그의 티셔츠를 사고, 한때
많이 걱정해주고 같이 있고 싶어 애가 탔었는데...
이제 정말 끝인가.
그 동안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있었다. 회복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나는 노력했다. 그래서 전화도 걸었고, 안부도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노력
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합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예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자에게는 예감이라는게 있다. 이상
한 예감이 마음을 자꾸 훑고 지나갔다.
그럴 즈음 미국에서 이웃에 살던 사람이 서울에 다니러 왔다. 나는 사람에게
서 남편의 동향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어떤 여자와 아파트에서 나오더라는 것
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레스토랑에서 그 여자와 식사하고 나오는 것을 본 사람
들이 있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싸늘한 얼음덩어리를 하나 마음에 던져놓는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그에게 전
화를 걸었다.
그리고 빨리 결정하자고 했다. 같이 살든 아니든 안 살든, 뭔가 정리가 필요하
다고 말했다.
남편은 예스다, 노우다, 말이 없었다.
그냥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남편이 서울로 왔다. 그리고 만난 자리에서 아
무런 말이 없이 불쑥 말을 건네왔다.
“이혼하자.”
“그래, 이혼하자.”
이것이 우리가 별거 1년 만의 해후 끝에 나눈 첫 번째 대화였다. 더 이상 매
달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내가 목숨처럼 아끼던 그릇을 다 깨뜨리고 내가 아끼던 옷을 가위로 다
잘라버린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못난 남편이었다. 내
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다 빼앗아가는 사람이라면 내 존재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다.
결혼한 후에 내 얼굴에서는 웃음이 많이 사라졌다.
내 얼굴의 웃음 역시 그가 가져갔다.
이제 회복시키기에는 너무 상처가 깊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별거상태라 해도 가정인데,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지는 못할망정 내팽개쳤다. 먹고살든 말든 아이가 아프든 말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합의이혼을 하기로 했지만 아이 문제가 있으니 우선은 함께 변호사 사
무실을 찾았다.
어떤 남자는 이혼할 때 이런다고 한다. 한때 부부로 살았고, 아이도 있다. 그
러면 너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야 하니 돈이 필요하지, 이돈으로 어떻게 살아봐
라...
그렇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돌아서는 남자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돈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나 또
한 그에게서 그런 돈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
른다.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말이다. 애를 키울 거면서 어떻게 혼자서 책임지려
고 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그때 보았더라면... 저 표정을 하고 앉
아 있는 저 사람의 돈을 받으면서까지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누구
라도 했을 것이다.
변호사는 나한데 이렇게 말했다.
“이혼 잘하시는 것 같아요.”
같은 남자로 볼 때도 남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5년간 같이 산 여자와 자
기 자식한테, 양육비 가지고 꼬치꼬치, 아들이 18세 되는 해까지로 하자, 어쩌구
하면서 따지는데 변호사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말했다. 이혼 잘하시는 거라고...
변호사는 그가 자기 고객만 아니라면 그를 한 대 올려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법원에 가기로 한 날 그가 나왔는데 그의 준비성 없음은 그 마지막 날에도 여
전히 발휘가 됐다. 도장을 안 가져왔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목도장을 팠다. 그리
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서초동에 가서 이혼신고를 하고 덕수궁 옆에 있는 법원에 가서 판사가 있는
데서 사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덕수궁 옆으로 갔다.
판사가 혀를 끌끌 차더니 곧바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법원을 나왔는데 밝은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
며 사람들이 까르르 웃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빵빵 차가 경적을 울리
며 지나다녔다.
잠시, 그 햇살과 사람들의 웃는 표정과 자동차 소리가 한바퀴 빙글 돌았다. 어
지러웠다.
그가 택시를 타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아무 말없이 각자 택시를 집어타고 집으로 갔다. 이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인연은 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이가 있었으므로...
첫승진
가정적인 아픔을 겪으면서도 회사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철저
하게 일터와 가정을 분리했다. 흔히 보면 회사에 와서 주로 가정적인 문제로 전
화통 붙잡고 몇 시간씩 통화하는 사람들도 보는데, 정말 꼴불견이다. 일터는 일
터, 가정은 가정이다. 일터에서는 내가 가정주부인지 미스인지 남자인지 여자인
지 다 잊어버려야 한다. 그냥 일꾼으로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나 자신도
그렇다. 일터에 나가면 내 신분을 잊어버릴 정도로 일에 몰두해야 한다. `나 정
말 주부 맞아?` 긴 일과 끝의 휴식시간에 이런 생각을 떠올려야 한다. 회사에 오
면 사원일 뿐, 가정주부도 여자도 남자도 가장도 아니다.
그리고 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맞아, 나 주부였지? 나, 애엄마였지?`라고 떠올
린다. 그러면 발걸음이 쥐나게 빨라진다.
그렇게 일했다.
정말 그야말로 발에 땀나게 뛰어다니고 머리에 쥐나게 일했다. 최선을 다했다!
이런 평을 나에게 스스로 내려볼 즈음 나는 승진했다.
과장 이은정.
첫승진이었다.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으로 천천히 물기가 올라왔다.
`난 해낸 거야. 별거를 하고 이혼을 당하고 아이 혼자 키워가면서 고국에 와서
고군분투한 결과야... 난 해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뻐야 할 텐데 서글펐다. 이제 뭔가 나 자신을 위해 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그날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울었다. 실컷
울었다. 수고했어. 그래, 수고했어...
그때까지는 정말이지 하루하루 버티는 수준이었다. 청소부라도 할 텐데 비서
실이니 얼마나 좋아? 대기업이니 얼마나 좋아?... 모든 것에 만족하려 애쓰며 이
를 악물고 버텼다.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꿈이란 것도 없었다. 바로 내일의 소
망도 갖고 있지 못했다. 미래를 계획하기에 너무도 현실이 벅찼던 때문이다. 그
런데 승진하면서 잊고 지냈던 오래전의 꿈이 되살아났다.
“10년 안에 뭔가 이룰 거야.”
내가 첫직장에 들어가면서 품었던 꿈이다. 그후로 모두 잊어버렸다. 현실이 너
무 각박했었기에.
그러나 이제는 그 꿈을 찾고 싶어졌다.
`십 년, 십 년 안에 결판을 낼 거야.`
직급이 뭐라도 좋았다. 그냥 나 자신에게 스스로 그래, 넌 뭔가 해냈어. 이 정
도 위치면 넌 해낸 거야, 이런 성취감을 맛보고 싶다는 꿈이 다시 한번 마음속
에서 서서히 꿈틀대고 있었다.
나는 목표를 설정했다.
“10년 안에 뭔가를 이루기!”
전혀 그 길이 안 보일 것 같이 암담한 날들도 한번 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
속이 붙는 법이다. 절대 포기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나 또한 거의 포기상태였으나 다시 한번 그 꿈을 추스르고 앞을 내다보았다.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 꿈을 이루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지,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체크했다. 나에게 많이 모자란 건 인
맥이었다. 나는 주로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야말로 인맥이 없었고
또 여자였다. 여자들은 아무래도 인맥에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인맥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 내가 먼저 전화를 걸
어 만나자고 하고 무조건 명함을 받아주었다. 명함이 재산이다, 이렇게 생각했
다. 명함을 받으면서는 명함의 주인을 잘 떠올려볼 수 있도록 간단한 메모도 잊
지 않았다.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다음에 만날 때는,
“애는 좀 어때요?”
“사모님은 직장 알아본다더니, 어떻게 됐어요?”라며 관심을 보이면 상대방
이 놀란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라면서...
이때 살짝 명함에 기록해둔 덕을 보게 된다.
여가가 생기면 받아둔 명함들을 정리해보며 그 사람의 모습과 그때의 상황들
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오래 잊고 살았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사람 만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연세 대학원
에 진학도 하게 되었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된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에는 전철을 타고 다녔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우울하고
답답할 때는 어딘가를 한바퀴 돌고 싶었다. 그러다가 차를 한 대 사게 되었다.
그때부터 기분이 우울할 때는 남산을 한바퀴 돌고 오곤 했다.
남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어 한바퀴 돌다보면 나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할아버지와 손잡고 나뭇잎도 줍고 강아지도 쫓아다니고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곤 했던 기억들...
그렇게 한바퀴 돌고 나면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그러나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뭘까, 생각해보니 나는 학창시절을 거의 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
에서의 학창시절의 추억도 친구도 없었다.
뭔가 아쉽고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겸사겸사 야간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
을 내렸다. 먼저, 사람들을 많이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한국에서
의 학창시절의 맛을 뒤늦게 경험하고도 싶었다.
더구나 그 당시 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이 있었다. 뭔가 더 배우
고 싶고 나를 더 지독하게 몰아치고 싶었다. 대리에서 과장이 되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나는 야간대학원에 노크를 했다.
사장님께 “대학원 다녀도 되냐?”고 묻자,
“내가 다니지 말라고 하면 안 다닐 거요?”라고 했다.
흔쾌히는 아니지만 승낙은 승낙이었다.
연세대학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는데, 영어는 자신 있었고 논술도 나름대
로 연습과 공부를 많이 했으므로 막히 없이 잘 보았다.
외국에서는 면접시험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히 했다. 예상문제를
만들어 대답하는 연습을 했다.
그런데 면접시험 문제는 딱 하나였다.
“학비는 누가 댈 거요?”
“일해재단에서 내준다고 합니다.”
그것으로 합격이었다. 싱거워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연세대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였다. 한
라가 있는 강남에서 신촌까지 가려면 그야말로 산 넘고 강 거너서 달려가야 하
는데, 매일 지각생이 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일찍 회사를 나설 수도 없어 고충
이 컸다.
나는 미안해서 말을 안 하고 얼른 사무실 문을 나설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고 꼬박꼬박 얘기를 하고 나갔다.
“저 공부하러 갑니다.”
물론 내가 대학원에 다니는 걸 다 안다. 그러나 아무리 다 안다고 해도 갈 때
는 얘기하고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입이 있으므로 설명을 할 것, 아는 얘기도 상황에 따라 한 번 더 얘기할 것.`
그런 것이 문제를 예방했다.
내 대학시절이 워낙 얼룩져 있어서 그런지, 뭔가를 배운다는 것이 기대에 찬
일이었다. 야간대학원은 여섯시 반에 수업을 시작했으므로 일반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시간 때문에 다니기 힘들었고,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대학원에서는 늘 같이 다니는 네 명이 있었는데, 나 말고는 세 명이 다 남자
였다. IBM에 다니는 사람, LG에 다니는 사람, 한 사람은 컨설턴트였는데, 참 좋
은 친구들이었다.
첫학기 때는 일주일에 세 번 나갔는데, 힘든 줄 몰랐다. 친한 네 사람이 술을
마시러 가면 LG 다니는 사람이 유일하게 술을 못 했기 때문에 우리가 진탕 마
시면 그는 운전해서 한 사람씩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가곤 했다. 그만큼 의리가
있었다. 강남에서 달려오는 나는 워낙 지각이 잦을 수밖에 없었는데, 날 위해 고
정적으로 대리출석을 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처럼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거의가 광화문이나 시청 쪽에서
왔지 나처럼 강남에서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거리가 먼 관계로 내 차
안에는 온통 책과 테이프가 너절했다. 시험공부도 차 안에서 쪽지 걸어놓고 했
다. 밀리면 전공책 펴놓고 중얼중얼 읽기도 했고,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 얼른
전공 용어 하나를 외우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 사귀는 일과 공부를 나름대로 열
심히 했다. 그런 만큼 회사일도 욕심을 내서 열심히 했다. 대학원 다닌다는 티를
안 내려고 말이다.
회사에서 학교 늦지 않으려고 눈치코치 다 보며 퇴근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
으며 산 넘고 강 건너 달려라 달려 하면서 겨우 수업에 들어가는데, 그 수업이
별로일 때는 한마디로 씁쓸했다.
아간대학원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다녔지, 사실 배우는 건 별로
많지 않다.
학문적으로 배우러 왔는데, 그다지 많은 양의 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마케팅 학문이란 최첨단 학문 아닌가. 그런데도 60, 70년대에 사용했던 교재를
지금까지도 채택하고 있다는 건 바삐 돌아가는 시대에 분명 뒤처지는 일이 아닌
가. 게다가 상담도 낮에는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하는 학생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
하지 않은 대낮에 이루어진다. 야간대학원이라는 것은 낮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
을 위한 과정인데, 낮시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교수가 정해놓으니까 어쩔 수 없
이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회사를 빠져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많이 아쉬웠다.
미국 스타일의 NBA만 생각하고 힘든 여건에서도 공부를 해보려고 신청했는
데, 교수나 학생들도 그다지 열의가 크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야간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되면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돈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2년 동안의 야간대학원에서의 시간 동안 좋은 친구
들을 사귀었고, 어려웠던 현실을 서로 나눠가졌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기분이 좀 그렇다 치면 차를 몰고 같이 속초나 인천 소래도 갔다오고 그러면서
덕분에 국내 여행도 많이 했다. 그 친구들과 자료도 교환하고 개인적인 상담도
나누면서 지냈고 그래서 생활에 활기를 얻을 수가 있었다.
2년 동안의 야간대학원에서 나는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어려웠던 현실을
서로 나눠가졌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대학원에 함께 다녔던 친구들이
그립다.
전화라도 한번 걸어봐야겠다. 그리고, 그때 잘 가던 갈빗집에 가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해봐야겠다. 아직도 그 갈빗집은 대리출석을 해주던 그녀의 어머니가
하고 계실까.
기회는 인맥관리에서 온다
한라에 들어가고 나서 1년 동안은 나에 대한 소문들이 좋지 않았다.
저 여자 이혼녀라더라, 애 딸린 여자라더라, 오만하다더라, 상사한테 대들었다
더라, 외국물 먹어서 국내 사정을 하나도 모른다더라 등...
그러나 1년이 지나자
“일을 잘하네?”
이 정도의 평가를 얻을 수가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세 군대의 직장생활을 했는데, 세 번째 직장은 남편과의 불화
로 맛만 보다가 말았지만, 두 번째 직장에서 뼈저리게 느낀 게 있었다.
사람을 잘 사귀자, 아부나 아첨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결속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성격상 아부나 아첨을 못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
다. 그리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누구를 사귀는 걸 못한다. 그러나 두 번째 직장
에서 그런 일로 호되게 겪고 해고까지 당하게 되자 이젠 그 `인화`라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 사귀는 일에 열성을 냈다.
특히나 나는 한국에 학연도 없었으므로 어떻게 비벼볼 언덕이 없었다. 나는
사람 사귀는 일에 시간을 들여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고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명함을 내 재산으로 여겨 소중히 간직하고 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고 노력했다.
회사에서도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았다. 이건 네 일인데 왜 나한테 하래? 절
대 그러지 않았다. 시간과 능력이 허락하면 달려가서 했다. 복사도 즐거운 마음
으로 했다. 그러나 복사하는 동안 그 복사지에 찍혀나오는 서류의 내용을 머릿
속에 입력시켰다. 그것도 정보였고 공부였다.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머
리와 눈과 감각을 총동원해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서 일을 가져와
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처리해내고 성취감에 잠기기 전에 다른 일을 찾아다녔
다. 모든 걸 적극적으로 했다.
일부러 많이 돌아다녔다. 안팎으로...
다른 부서와 관련된 업무가 많은 비서실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찾아가라
`고 한마디 통보해주면 될 서류도 직접 그 부서까지 들고 가서 전달했다. 공장견
학 행사에는 절대 빠지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귀찮다며 슬슬 빠진다고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사원들과 안면을 트고 사내 분위기를 익히는 데는 발로 뛰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로 다 되는 건 아니다. 발로 뛰어서만 된다면야 든든한 신발 몇
켤레면 되겠지만 문제는 해박한 지식과 견해다. 유능한 비서는 오너보다 더 많
이 알아야 하고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
마도 한라가 서비스 업종만 됐더라도 그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서 서비스 업종에 일한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라는 주력사업이 제조
업이지 않은가. 미국에서 익힌 전문지식은 다 제쳐놓고 새로운 공부를 해야 했
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는 무엇보다 얼마만큼 열심히 일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
았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의 결과에 대해 안달하지 않았다. 집착하지도 않았다. 최선
을 다하면 그걸로 족했다.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물론 노력은 해야 한다. 도전 없는 삶은 철저히 배척한다.
기회가 오면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 결과에 초연해지라, 그것이 나
의 생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새벽 다섯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 나서 조간신문을 꼼꼼히 다
읽고, 그날 처리해야 할 업무를 하나하나 집에서 체크했다.
비서 업무는 회사 정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출근해서 한가롭게 신
문 보면서 뉴스의 행간을 분석하고, 그날 할 업무를 검토한다는 것은 떠나려는
버스에다 대고 `잠깐만` 하고 소리친 뒤 차비 꺼내는 것과 같다.
출근하면 그때부터 전쟁이다. 확정된 스케줄을 다시 확인하고, 지시사항을 검
토하고, 때때로 외국인을 이끌고 지방출장도 가고...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1년이 지나자 과장으로 승진되었다.
맨 처음에 영어 문서를 작성해 가져갔을 때 비서실장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런 문장, 회장님 싫어하세요. 회장님은 수식어가 많고 뭔가 문학적인 문체
를 좋아합니다.”
내 문체는 너무 간결했던 것이다.
그후로 두 번째 문서작성을 해갔다.
회장님 머리에 문서를 작성해간 이은정이 들어박히는 순간이었다. 그후로 각
종 정보수집과 회장님의 영어 연설문 작성, 해외 스케줄 조정 등의 업무가 하나
씩 내게 맡겨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이 있으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머리를 파묻었다.
“이은정에게 일 맡기면 안심이야.”
이런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고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찾아 쉬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일은 해외지점 연락 관리, 대사관 관련 업무, 비서실 내부 업무까지로 점
점 확대되고 있었다.
정인영 회장의 도서정리도 나의 몫이 되었다. 그러면서 고속승진의 대상이 되
었다. 솔직히, 과장으로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편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
으니까.
그 이듬해 차장과 부장을 두 계단이나 승진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했다.
그게 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거였는데, 자잘한 감정싸움에는 더 이상 매달리지
말자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편했다.
어느 단계에서든 나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그 이상의 선택은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도전은 일이요, 선택도 일이었다. 나는 직장인의 성공전략을 이
세가지로 본다.
3C, 이른바 기회(Chance), 선택(Choice), 도전(Challenge).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 기회가 있으면 올바로 선택해야 한
다. 그리고,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도전해야 한다.
기회와 선택과 도전!
그것이 성공의 전략이고 생의 의무다.
승진할수록 높아가는 벽
한라에는 1년에 인사이동이 가을과 연초에 한 번씩 두 번 있었다.
가을에는 회사 창립일에 맞춰서 하는 거였고, 연초에는 정기 인사 조치였다.
그런데 나는 해마다 두 번씩 진급했다.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다.
회장님이 왜 나를 그렇게 빨리 승진시켰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건
분명하다. 승진을 시켜줌으로써 내가 나태해지거나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미리 막았다는 것. 나는 한라를 나가서 무슨 일을 해도 이렇게 신임해주는 분은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다른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열
심히 앞만 보고 일할 수 있었다.
아마 나의 이런 마음을 회장님은 꿰뚫어보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일종의 `나
를 묶어두는 방법`이었다. `나를 더 일에 열중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회장님은
사람 다룰 줄을 알았던 것이다.
항간에는 내 초고속 승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이 많았다.
아웅산에서 순직한 아버지에 대한 배려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 따뜻한가. 우리 사회는 너무나 빨리
그분들을 잊었다. 쉽게 지워버렸다. 그래서 그때 순직한 분들의 자녀들이 회의와
충격 속에 싸여 지내다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아무 일도 못하고 지내는 걸 가
끔 보게 된다.
어느 기자가 동료 이사에게 이은정 초고속 승진의 이유가 뭐일 것 같냐고 물
었다. 그러자 그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이 이은정에게 일을 맡기면 안심합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반드시 해
내니까요. 이은정에게 가면 곧바로 해결이에요.”
그러면서 이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기자는 바로 그게 번개 승진의 핵심이구나, 느꼈다고 했다.
물론 정인영 회장님을 만났다는 게 행운이었다.
정인영 회장은 남녀, 나이의 고하를 따지지 않으셨다. 능력이 먼저였다. 그렇
게 탁 트인 사고를 가진 그룹 총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나이
가 어리다는 게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인영 회장의 지론이다.
내가 처음 한라그룹을 선택한 건 행운이었다. 그건 확실하다.
내가 고속승진을 시작하던 초기의 일이었다. 들은 얘기지만, 그룹 인사 사정회
의에서 나의 진급에 대한 이견들이 나돌았다.
“능력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진급은 본인의 회사생활에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그때 정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마디였다고 한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임원진들은 그 선에서 일이 일단락을 짓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승진자 명단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인사 면에 있어서는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는 평가를 받는 정 회장님의 눈에 무엇이 띄었을까라고 말이다.
그들은 곧 스스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은정이, 일벌레니까.”
고속 승진을 계속해나가자 괴로운 점들도 자꾸 생겨갔다.
회장님이 날 신임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까분다고 생각했
는지 비서실장은 나와 맞설 만한 사람을 한 명 비서실로 데려왔다. 내가 맨 처
음에 비서실로 갔을 때 그 사람은 차장이었고 나는 대리였다. 그랬는데 그 사람
이 다른 실무진에 갔다가 다시 와보니 나는 이사가 되어 있었고 그 사람은 부장
이었다. 하루 아침에 상사가 돼버린 여자가 떡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K부장이라는 사람은,
“나, 이은정이 밑에서 절대 일 못해요.” 하며 뻗대었다. 나이가 많아도 자기
가 많고 게다가 여자 밑에서 어떻게 일하느냐는 말이다. 그러자 비서실장은 K부
장을 부추겼다. 곧 알아서 조치해주겠다는 식이었다.
서서히 나의 일들이 그 사람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영향력이 나에게서 그
사람에게로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K부장은 무모하면서도 저돌적인 남자 대리를 한 명을 밑에 두고 있었
는데, 영 불쾌했다. 인사를 제대로 안 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말끝마다 여자 무
시하는 말투에다가 자기네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 낄낄 깔깔 웃고 그랬다.
결재도 안 올리고 처리해버리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한번 짚고 넘어갈까 어쩔까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서실장이 나에게 그러는 것이다.
“이은정 이사가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실무적인 일에서는 손떼
세요.”
“네? 그럼 전 무슨 일을 합니까?”
“뭐, 있잖아요. 교육이나 문화 프로그램, 그런 걸 하면 되죠.”
기가 막혔다.
“이유가 뭐죠? 내가 못한 일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비서실장은 내가 강하게 나가자 우물거렸다.
“그런 게 아니고 회장님 몸도 불편하시고 그러니까 일당백의 일을 하기 위해
서는 역시 남자가 필요한 거 아닙니까?”
하도 기가 막혀서 나는 고래고래 고함을 쳐댔다.
“도대체가 회사일에 무슨 여자 남자가 있어요! 내가 못한 일이 있으면 말을
해서 시정을 하게 하든지 하지, 왜 사람 가지고 장난쳐요!”
그때 한바탕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회사를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
가, 많은 회의가 엄습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수없이 일어날 텐데... 이럴 때마
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나하고 능력으로는 게임이 안 되니까 나이 들고 나서고 남자 따지고 나서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하나?
내 옆에 의논할 여자가 없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밑에는 많은데 막상 위로
올라가면 곁에 같은 여자 동료가 없었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의논하고 그
러고 싶은데 그럴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정말 서글펐다.
게다가 일류대학을 나온 한 여자 대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심탄회한 자리였다.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람으로 나보다 나이도 많
았다.
“회사에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 아세요?”
웬 소문? 나는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처녀도 아니면서 처녀인 척하고 다니고, 회장님 비서실에 있는 자로서
의 혜택으로 고속승진을 하고, 매스컴을 좋아한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하
고 다닌다는 것을 그녀는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와, 내가 그렇게 인기가 좋아요? 사람들이 내 말을 하고 다니게?”
그러고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씁쓸했다.
질투도 그렇게 유치한 말들을 만들어가면서 하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렸다. 다만 같은 여자들로서 여자 중역이
안고 있는 문제를 더욱 깊이 나누려는 자세가 아쉬워서 외로웠다. 어차피 자신
들도 앞날에 중역이 될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그런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질투를 하기 이전에 현황파악부터 제대로 하고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기꺼이 한편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의 옆에서 나와 경쟁하며 나의 상담역이 되어주기도 할 나의 라이벌
여자가 너무나 그리웠다.
아무튼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들이 참 많았다. 그야말로 일만 열
심히 하면 되었던 과장, 부장 시절이 너무나 그리울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침착하게 추스려갔다. 나는 그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한
라에 있는 것이지 그 누구의 만족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당당
하게 일했다.
그들은 나의 일을 다 빼앗아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빼앗지 못한 일도 있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이를테면 편지를 작성하는 일이라든가, 회사 정보에 밝은
점 등은 나를 못 당했다. 이렇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만의 고유 영역이 될 수
있는 확실한 능력을 키우는 것이 그나마 그런 바람을 막아주었다.
승진을 하면서 자잘한 일들은 줄었으나 일의 양은 더 많아졌다. 공식만찬에도
참석해야 했고, 가끔씩 다른 부서 직원들과 소주잔도 기울여야 했다. 인화를 위
해서였다.
올라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들에도
피곤했다. 하지만, 신경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느꼈고, 그저 `일을 열심히, 사람
대하는 걸 성의 있게` 그렇게 했다.
나의 성실성을 바닥까지 끝까지 최대한 발휘시켰고, 나의 인내력을 남김없이
가동시켰다.
오늘 살고 말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일했다.
직장내 회식은 기회다
자라면서 나는 노래를 잘 못 불렀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나 손님이 오시면
나의 피아노 솜씨는 자신 있게 뽐낼 수 있었지만, “노래 불러라”고 하면 슬며
시 자리를 뜨곤 했다. 그래도 “난 피아노를 잘 치니까”하면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보면 `음악`이라는 과목은 필수과목이 아니고, 선택과
목이었기 때문에 학교 오케스트라의 반주자도 해보면서 노래 이외의 방법으로도
음악을 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래를 못하면 학교에서부터 곤혹을 겪는다고 한다.
어떤 남자직원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노래를 배울 때 스무
대까지 맞아본 적이 있다고 한다.
10명이 나와서 배운 노래를 부르는데, 같이 부르라고 해서는 1명씩 들어가라
고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음치 한 명 있어.”
그러면서 한 번 부를 때마다 “넌 아냐, 너 들어가” 하면서 1명씩 들여보내
다가 아홉 명, 여덟 명, 일곱 명... 이런 식으로 줄어드니까 공포에 싸였다고 한
다. 음치란, 자기가 음치라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데, 점점 숫자가 줄어들수록 걱
정도 그만큼 컸는데, 결국 2명 남았을 때 “바로 너구나, 요놈!” 하면서 음악
선생님이 들고 있던 막대기로 사정없이 머리를 때리더라는 것이다.
중학교 때 얘기지만, 그 음치 남학생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까 기가 막혔
다. 아니, 노력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음치라는게 타고난 것인데, 어쩌
면 그렇게 때리기까지 한단 말인가.
그 직장인의 중학교 때 경험을 얘기하는 이유는, 그후 그 남자직원은 자기가
음치라는 것을 알고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
래방이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음치로서 다른 사
람들의 즐거운 웃음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도 음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가족모임에서도 “은정이는 노래 대신 피아노를 잘 치지” 하는 분위기여서 노
래를 못한다고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한
국 유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술 몇 잔 돌리다가 결국은 노래 하는데, “이
번엔 은정 씨가 노래해 봐” 라고 한다.
“저, 아는 노래가 없어요”라고 말하면,
“그러면 팝송이라도 해봐. 왜 있잖아, 예스터데이 같은 것.”
그래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로 차례가 돌아간다. 한국 유
학생들의 모임이긴 했지만 미국인지라, “노우”하면 어느 정도 개인적인 의견
을 고려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이게 웬일인가.
“못한다, 하기 싫다”고 아무리 거절해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건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회식한다고 하면 그것부터 걱정이었다. 1차 식사시간이야
정신이 맨숭맨숭하니까 괜찮다가도 2차에 가서 술이라도 들어가면 어김없이 노
래를 돌아가며 부르는 분위기가 된다.
젊은 사람들이랑 식사할 때는 내가 먼저 유도를 한다.
“노래보다 춤이 더 재미있잖아” 하면서 노래하는 자리를 피하는데 성공하기
도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과 같이 회식할 때에는 백이면 백 노래방에 간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회식장소가 개인집이어서 “휴-” 하고 노래방 안
가도 되겠구나 안심하고 있는데, 집주인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가라오케 기계를
내오는 것이 아닌가. 개인집에서도 노래방 기계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 집에서도 차례가 돌아오는데, “어휴, 저 웬수같은 기계
는 고장도 안 나나?” 하는 생각으로 마이크를 노려봤다.
회식의 목적이 대개는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의 친목 도모를 위해서 하는 것인
데, 내가 노래를 하기싫다고 해서 분위기를 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꾸 시키는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더더욱 없고, 이런 때에는 곤혹스럽다.
왜들 저렇게들 노래들을 좋아할까, 신기했다.
“이은정이 노래해 봐.”
시키면 이제는 내가 더 나선다.
“노래 말고 춤 어떻습니까?”
하여간 노래 빼고는 다 괜찮다. 블루스를 추라면 출 것이고 폭탄주를 마시라
면 마실 것이다. 그러니 노래 말고 뭐 더 신나는 걸로 시켜달라, 그러면 다들 화
끈하다고 좋아한다. 노래하는 거 피하면서 분위기 망치지 않으려는 나의 눈물겨
운 노력인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런데 확실히 노래는 연습하면 되나보다. 친구 가운데 한 명이 귀국해서 직
장생활을 하다보니까 나와 같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 친구는 영업부 소속이어
서 술자리가 많았고, 술마시러 갔다 하면 노래하는 곳으로 가는 건 통과의례였
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빼다가 결국 그 친구는 노래연습을 하기로 했다. 꼭 잘
부르고 말 테다, 다짐하고는 매일 저녁 퇴근하면 노래방으로 직행해서 혼자 노
래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도 귀에 와닿고, 차에서
도 노래연습을 하면서 듣고 또 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이제는 부르기 쉬운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10대들이 부르는 템
포 빠른 가요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아직도 노래부르기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가수로 변신하게 되었니?”라고 묻자, 그 친구는 대
답했다.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니?”
참 내, 그러니 이제 노래부르기는 취미와 선택이 아니라, 필수와 매너가 된 느
낌이다. 어절꼬?
어쨌든 나는 여자라고 해서 회식자리를 거부하거나 일찍 들어가야 한다면서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회식도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친할 수 있는 인화의
기회도 될 것이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정보의 기회도 될 것이다.
회식도 회사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지 노는 데 휩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회식하고 나면 나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다는 뿌듯함으로 일
어설 수 있게 되었다.
정보력의 차이는 능력차이
한라 일을 하면서는 국내에 있으면서도 세계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기업 일을 하면서 세계가 통한다는 걸 절감했는데, 우리가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큰 자신감이었다. 내가 나를 믿게 되고,
우리 기업체를 믿게 되고, 우리나라의 힘을 믿게 되는 그런 계기였다.
자크 이탈리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현대는 유목사회라는 것이다. 옛날의 유목민들은 가죽과 고기를 찾아서 여기
저기 사냥을 다녔지만, 현대인들은 지식과 정보를 찾아서 사방팔방 누비고 다닌
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유목민이나 지금의 유목민이나 다 국경의 의미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현대판 유목민들은 늘 다른 세상이 궁금해서 다른 나라를 기웃거린다. 다른
나라의 정보를 취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고 팔기도 한다. 그러니 현대는 외
국어가 필수이다. 서양사람들 중에는 서너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 참 많다. 또
국경을 넘는 결혼도 많이 한다.
나의 경우는 어릴 적부터 외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에 놓여 있어
서 외국어 몇 개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지만, 그건 여건상 그런 것이지 노
력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라도 외국어를 몇 개 습득해놓은 것은 회
사일을 할 때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서신이나 외국 잡지나 신문을 통한 자료수집이 나의 주요
업무였는데, 남보다 훨씬 빨리 번역할 수 있었고,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도 쉽게
구별해냈고, 우리말을 다른 나라 말로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 연락하는 것, 해외로부터 접수되는
것, 영문서 작성 등 내가 독차지해서 할 일도 많았고, 차츰 다른 부서의 일도 하
게 되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역할 수 없는 기쁨, 그런 희열을 느낄 겨
를도 없이 일했다.
바빠지니까 좋았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정도 외국어를 잘 하니까
쉽게 하는 것으로 여겼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꿈속에서 고민하기도
했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서.
어차피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어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많으면 많
을수록 좋다. 세계가 대문을 연 지는 오래되었다. 이제 안방과 거실까지 들어갈
수가 있다. 세계를 품에 안으려면 세계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세계의 언어와
친해져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현대판 유목민이 아닌가.
또, 언어도 언어지만 모든 걸 주의깊게 보는 관찰력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
하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인생은 시간 때우기가 아니다. 반
짝거리며 부스럭거리며 부지런히 촉수를 움직여 더듬거려야 할 거대한 삶의 발
견지이다.
잡지면 잡지, 신문이면 신문,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것도 정보이다. 광고지까
지 읽어라. 중요한 정보다.
앉아서 조는 시간이면 그 옆에 있는 책을 집어 읽으라. 제목만이라도 훑어라.
내일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 시간이 없어서, 라고 핑계를 댈 바로 그 시간에 연
극 포스터를 보라. 구미가 당기면 시간을 내어 관람하라.
모든 정보는 세상에 널려있다. 세상은 이미 정보의 바다다. 물결이 출렁이는데
혼자 모래밭에서 모래나 파고 앉아 있을 것인가.
정보의 바다에서 신나게 헤엄치라.
영어를 알려면 영어의 바다에 빠지듯이, 세계를 알려면 정보의 바다에 빠져야
한다.
아무리 언어에 능통한다 해도 호기심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호기심을
반짝거려라. 감성과 지성의 더듬이를 높이 뽑아올려 더듬거려라, 세상 구석구석
을...
찻잔 속에는 태풍도 없다
나는 책상을 잘 잠그는 버릇이 있다. 한번 확인하고 두 번 세 번 또 확인을
한다.
`잘 잠갔나?`
`잘 잠겼구나.`
그제야 맘놓고 퇴근한다.
내가 이렇게 책상 서랍을 잘 잠그는 버릇이 든 데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 아침에 출근해보니 책상 서랍이 열려 있었다.
어제 분명히 잠그고 갔는데, 하면서 당황하여 서랍 안을 보니까 회사의 중요
한 서류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크게 놀라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인사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잘 다뤄져야 하는 정보인데, 그걸 흘려
버린 셈이다.
그후로 나는 아주 조심하게 되었다. 책상 위에다 서류를 놓고 다니지 않는 것
은 물론이고, 자물쇠를 채우고도 안심이 안 돼서 몇 번씩 확인한다.
자신의 서랍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회사의 책상은 이미 자기 책상이 아
니라 회사 책상이고, 자기 자신의 책상 서랍이 아니라 회사의 기밀이 들어 있는
회사의 서랍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책상 서랍은 회장님 스케줄에서부터 여러 가지 정보가 들어있는 정
보 서랍인데, 그걸 잘못 관리했으니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어쨌든 회사 안에서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니고 서
류가 내 서류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그렇지만 외부적인 행사로 고생한 일도 많은데, 그 중에서
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작년, 목포에서의 삼호조선소 오프닝 행사 날이었다.
2월이었는데 날씨가 몹시 추웠고 바람이 무척 불었던 그날의 기억... 아마 평
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볼 때는 큰 행사였기 때문에 외국 손님들을 많이 초대했다. 유
럽의 선주들도 초대를 하고 나웅배 부총리를 비롯한 정계 인사들을 많이 초대했
다. 또, 목포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였기 때문에 목포지역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목포에는 큰 호텔이 없었다. 워낙 외국 손님들이 VIP들이었기 때문에
일급호텔에 투숙하도록 배려해야 했다. 그래서 우선 그 전날 하얏트호텔에서 전
야제 행사를 하고 손님들을 하얏트에서 숙박하게 한 후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전
세기로 이동할 수 잇도록 계획을 짜놓았다.
나는 영어를 하기 때문에 전야제와 행사의 영어 사회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전야제 행사를 무사히 마친 시간이 밤 아홉시였다. 나는 또, 다음날 아침 일찍,
목포에서의 행사를 준비해야 되었기 때문에 심야의 질주로 4시간 만에 목포까지
달려갔다. 그야말로 거의 `낮게 비행`한 셈이었다.
목포에 도착하고 한숨을 돌린 후, 여러 가지 행사 계획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
다. 한치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행사장을 둘러보고 사회를 볼 멘
트도 다시 한번 검토해보곤 하며 잠을 설쳤다.
드디어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까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버린 게 아닌가. 밤새 눈이 내린 것이다.
정말 큰 일이었다. 전세기 두 대가 서울에서 날아와 착륙을 해야 행사가 무리
없이 진행될 텐데 눈길에 어떻게 착륙을 한단 말인가.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서둘러 차를 몰고 조선소로 향했다. 차가 눈길에 뱅글뱅글 돌았다. 나는
내 차가 미끄러지는 것보다 전세기 걱정이 더 컸다. 무사히 착륙을 해야 할 텐
데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다.
11시에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전세기는 그 시간까지도 착륙하지 못하고
하늘에서 빙빙 맴돌고만 있었다. 정말 애가 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5분 정도? 반짝 햇살이 비치며 눈이 내리
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눈부신 햇살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전세기가 얼른
착륙을 시도했고, 착륙은 성공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이미 1시간 정도를 넘기고 있었지만 행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만 해도 뛸
듯이 기뻤다.
외국 손님들을 모시고 행사장으로 갔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었는데, 단상이 바로 바다 앞이었다.
바닷바람이 얼마나 거세던지 단상 위에 있던 마이크가 넘어가고 단상마저도
넘어갈 듯이 끄떡끄떡거렸다. 거센 눈발이 휘날리고 폭풍 같은 바람은 몰아치
고... 그야말로 그런 추위는 난생 처음 겪어 보았다.
나는 영어로 또 다른 남자 상무는 한국말로 MC를 보기로 되었는데 그 상무는
이미 옆에 난로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난 완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래도
행사하는데 MC를 본답시고 치마차림에 얇은 스타킹만 신은 맨다리였으니 동태
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 남자 상무는 빨갛게 얼어버린 내 다리를 내려보더니 안쓰러웠는지 난로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러나 그 난로마저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다른 손님들도 물론 다 추웠겠지만 그래도 그분은 다 두툼한 코트를 입고 있
었다. 두 MC가 복장에 통일성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코트를 입지 않았으니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어 나중에는 감각마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안에 옷을 단단히 껴입고, 스타킹도 여러벌 신은 건
데... 그 순간에는 멋이고 뭐고 추위만 이겨낼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사회를 보는데 입은 얼어붙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나 자신도 몰랐다. 그저
빨리 마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독일 선주 한 명이 축사를 하러 나와서는 왜 그렇게 오래 하는지, 정
말이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추워 죽겠는데 누구 귀에 저 축하의 말이 들어가
겠어? 축하 그만 해도 좋으니 그만 들어가줘, 제발! 하마터면 축사를 하는 중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예! 축사가 끝났습니다!”라고 말이다.
나중에는 며칠 밤을 그렇게 연습한 멋진 말들이 입안에서만 맴돌 뿐 말이 되
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단시간에 요점만 말하고 끝내버렸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라는 소설 제목이 있었던가.
나의 그래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여자의 일터는 가정과 직장
회사일로 바빠서 종종거리는 엄마 탓에 나의 아들 기석이는 혼자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상상력으로 엄마와 놀러다니고 상상력으로 안 계신 아빠와 놀았
다.
나는 그런 기석이가 일할 때는 떠오르지 않다가도 이상하게 지방출장을 가는
차 안에서는 문득문득 떠올라 걱정이 되곤 했다. 그래서 휴게소가 있을 때마다
차를 세워 전화를 했다.
“기석아, 괜찮니?
“괜찮아.”
또 그 다음 휴게소에서.
“기석아, 괜찮은 거야?”
“괜찮대두!”
“엄마 돌아올 때가지 아프면 안 돼!”
“알았어.”
그 다음 휴게소
“기석아, 엄마야.”
“으악! 이제 전화 그만 걸어, 엄마!”
거의 이런 식이다.
서울에 있으면 그래도 같은 서울이니까 내가 달려갈 수 있다는 마음에 안심이
되지만 어디 다른 곳으로 나가면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를 이해하면서 엄마한테 일 열심히 하라구 용기를 주기도 하는 제
법 어른스러운 아이로 잘 자라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빠를 체념하지 못했다. 자꾸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당시 그는 직장을 얻어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아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게 어때요?”
“아이를 맡았으면 혼자 다 키워.”
나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러나 너무나 아빠를 보고 싶어하는 아이
를 생각해서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주말마다 아이를 만난
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일주일마다 아빠를 볼 수 있다고 하자 아이는 너무나 기뻐서 펄쩍 뛰었다. 그
런데, 그는 약속을 자꾸 어겼다.
아빠를 일주일 동안 기다리는 아이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라 거의 까무러쳤다.
게다가 아이는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고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그 직전에 자꾸 취소를 해왔다.
나에게는 괜찮다. 그러나 아이에게 번번이 상처를 주는 그를 정말 나는 용서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애를 데리고 왔다갔다 하는 과정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이 싸웠다.
하루는 애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갔다왔는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배가 너
무 고프다고도 했다.
그 애도 속으로는 다 여물였는데 왜 자기를 반기지 않는 분위기를 모르겠는
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면 아이가 느낌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런 집에 자기 혼자만 두고 아빠가 어딜 나간다고 하니까 아이는 자기도 따라가
겠다고 졸랐던 모양이다.
그러자 아이가 생떼를 부린다고 쫄쫄 굶겼던 모양이었다. 자장면도 안 시켜주
고 밥도 안 주고...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아빠가 돌아와서 자기는 배고
픈 아이 옆에서 과자를 먹으면서 아이한테는 주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미칠 것만 같아서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그런 교육방식이
싫으면 우리 집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후로 보내지 않았다.
절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그러셨다. 딸아이 셋을 키우면 됐지 내가 또 이 애를
왜 키우느냐, 이씨도 아니고 강씨 집안 아이인데 어차피 아빠 찾아 갈 거다. 그
러니 아빠한테 보내라...
“어머니가 그렇게 힘드시면 저희가 나가 살게요.”
나는 방을 얻으러 다녔고, 어머니가 누구러져서 잡으면 다시 들어가 살고, 그
랬다.
또 내가 너무 힘들어 악에 받쳐 아빠한테 보내야겠다고 말하면 어머니가 또
말리셨다. 그래도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게 낫지 반겨주지도 않는 집에 가서 구박
받는 꼴을 어떻게 보느냐고...
그러다가 또 어머니가 속상해서 푸념하면 또 방을 구하러 다니고... 그렇게 갈
등과 화해가 엇갈리면서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런 중에도 아이는 부쩍부쩍 자라 학교에도 들어가고 나도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집과 회사는 분리를 하자.
한라에서도 그랬고, 미국에서도 그랬다. 집과 회사는 철저하게 분리를 했다.
집이 어떻게 돌아가든 회사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에만 신경을
썼다. 물론 아이가 열이 끓는다든가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회사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아침 5시에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고 무조건 스포츠센터로 달려갔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바깥에 나가면 집안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도 훈련
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입장을 잘 설명했다. 그러니 아이가 알아들었
다. 엄마는 바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아이에게 심어졌고 바쁜 엄마에 대해서 투
정부리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아이를 즐겁
게 해주고 싶었다. 양보다 질 좋은 사랑을, 긴 시간보다 짧은 시간 안에 줬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내 아들 기석이는 정말 사려 깊은 아이로 자라줬다. 속으로 깊이 깊이 생각한
다. 기석이를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집은 어떻게 거꾸로 아들이 엄마를 보살피는 것 같애.”
외할머니가 엄마를 꾸짖으면 기석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엄마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기석이는 엄마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준다.
기석이는 이불을 차내고 자는 엄마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고, 밥을 굶
는 엄마에게 일부러 밥을 먹게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어른스럽게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기석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주로 그림을 그리며 보낸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림으로 자기의 세계를 펼처간다. 아빠와 만나서 놀이 동산에도 가고 할머니와
만나서 장난감 가게도 가고 엄마와 요리도 하고 외할머니와 장난을 치기도 하
고... 그 모든 것을 그림에서 해결했다.
외할머니도 바쁜데다가 집에 오면 일찍 주무시고, 바쁜 엄마는 늦게서야 파김
치가 돼서 들어오니 아이는 혼자 놀 수밖에... 혼자 노는 방법으로는 그림이 최
고였던 것이다.
나는 기석이의 그림을 보면서 아이의 마음을 체크했다. 이 아이가 지금 뭐가
하고 싶구나. 이 아이가 우울하구나, 화나 있구나...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점점 날이 갈수록 기석이가 말이 없어져갔다. 나는 애가 워낙 어른스
러우니까 으레 그러려니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기석이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교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지금까
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학교로 달려갔다.
마음씨가 아주 좋게 생긴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앉자마다,
“기석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급식시간에 반장이 기석이에게,
“넌 왜 깍두기를 안 먹니?”라고 물었다.
기석이는 집에서도 원래 깍두기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기석이는,
“난 깍두기를 먹지 않아.”
그러자 반장 아이가,
“그럼 너 선생님한테 이른다!”
그러자 기석이가 팽 돌아버린 것 같다. 아이가 갑자기 벽을 퍽퍽치며 답답하
다고 가슴을 쥐어뜯고 그러더라는 것이다. 선생님이 보기에는 어린아이가 차라
리 친구를 한 대 때리면 몰라도 벽을 치면서 가슴을 뜯는 건 성격에 문제가 있
는 것 같아서 나를 불렀다고 했다.
선생님께 기석이 얘기를 들으며 왜 그랬을까,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울면 안
되는데, 그 동안 남 앞에서 절대 울지 않았는데 어머니 앞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엉뚱하게 기석이 담임 선생님 앞에서 울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선생님이 “왜 그러세요, 기석이 어머니?”라고 물었고 나는 대답도
못한 채 한참을 울었다.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면서...
그런 후에 선생님한테 그 동안의 얘기를 다 들려드렸다. 기석이를 이해시키려
먼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의 얘기부터 서울에 와서의 얘기까지
다 털어놓았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기석이와 상담을 해보겠노라고 말씀
하셨다.
그 다음날,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기석이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기석이는 자기
마음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기석이 딴에는 외할머니와 엄마의 대립적인 분위기가 견딜 수 없었던 것 같
다.
어머니는 큰딸이 이혼하자 심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한테 투정 비슷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바보같이 이혼을 당했다거나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그렇
지라거나 하는 말씀은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최고인 내 딸이 왜 이렇
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한이고 넌 이렇게 살면 안된다, 하는 사랑의 다른 일면
이었다.
그러나 기석이는 그런 외할머니에 대한 반발이 솟았던 거 같다. 그래도 속으
로만 끙끙대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가 한꺼번에 폭발을 한 것이다. 나는 기석
이의 그 마음을 안다.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듣고 선생님 앞에서 폭포처럼
울어버린 것이다.
나는 매일 밤, 기석에게 이런 말을 속삭이곤 한다.
`기석아. 잘 자라주는 거지? 정말 잘 자라주는 거지? 너무 고마워. 네가 이렇
게 잘 자라주는 게... 난 널 믿는다! 믿지 못하면 이렇게 일에만 미칠 수가 있니?
난 널 믿어... 넌 내 인생의 등불이야. 깜깜할 때 길을 비춰주거든. 엄마, 이리로
오세요. 여기를 디디세요. 그러면서 말야. 네가 가르쳐준 곳으로 엄마는 가고 있
는 거야. 그러니 엄마의 길은 곧 너의 길이란다...`
기석이의 잠든 머리맡에 그날은 아무 그림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날은 상상
속에서도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마음이 복잡했나보다...
기석이 선생님은 어머니한테도 연락을 드리고 어머니와도 상담을 했다. 그리
고 또 한차례 나와 상담을 가졌다.
선생님을 만나 후에 어머니와 나는 터놓고 얘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 참 많이 울었다.
나는 어머니를 오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 이혼을 한 것에 대해서 자꾸
못난 딸로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았고, 어디서든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
이 들면서 나의 존재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오해였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에게 결혼생활이 그렇게 악화되기
까지 자기에게 말을 안 한 것에 대해서 서운해했다. 이혼해서 아이를 데리고 왔
는데, 회사일에 바빠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
자, 그것을 안쓰러워하면서 자꾸 아이에게 내 흉을 본 모양이었다.
“니 엄마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어머니가 무심코 하는 얘기였어도 아이는 속으로 불만을 쌓아두었던 모양이
다.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해했다. 할머니가 자꾸 엄마를 욕하는 것에 대해서 아
이는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니 에미는 공부를 잘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니 에미가 그러니 너도 그렇지.”
그런 말들이 아이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어머니와 오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많이 달라졌다. 어머니도 아이에게 그런
말을 자제하게 되었고, 나 또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될 수 있으면 의논도 드리
곤 했다.
나는 그 일이 있는 후에 선생님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이 아빠한테 전화했다.
아이의 아버지로서 선생님과 얘기 좀 나눠보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곧 연락을 주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책임한 남자라
는 나의 인식에 마지막 확인 도장을 찍어준 셈이다. 다시 한번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 대해 처참한 확인작업을 마쳤다.
동네에서 가끔 이런 장면을 보게 된다.
두 부부가 사이좋게 웃으면서 가고 중간에는 아이 하나가 두 부부의 손을 맞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걷는 장면, 부부가 함께 시장을 봐오면서 서로 얘기를 나
누는 장면 등...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볼때면 나는 생각한다. 왜 나는 저런 행복
을 누릴 수 없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한 것은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학 졸업 무렵 누구나 느끼는 불안한 상태에서 결혼을 하나의 탈출구로 생각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때 나는 불안했고, 누구에겐가 안주하고 싶은 심리
였다. 이러한 생각들이 나의 눈을 흐리게 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다 몰랐
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훗날 바로 고치기에는 너무나 힘들게 되어
버리는 그 눈먼 고통이었다. 내가 충고하고 싶은 것은 결혼을 어떤 도피구로 생
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혼은 절대 뭔가를 피해가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아버지의 권위가 싫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어하던 어떤 후배는 결혼하고 보니 아버지보다 더 권위적인 남
편에게서 절망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한다. 결혼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동화책의 공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을 환상으로 여기고 오로지 결혼만을 꿈꾸는 여성들은 한번쯤 생각해보았
으면 한다.
결혼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며 사랑의 놀이터가 아닌 사랑의 일터다.
어머니같이, 어머니와 다르게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졌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
혼생활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다 그런 줄
알았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해 도와주
고 서로를 진보시켜나가는, 그런 것이 결혼인 줄 알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사셨고, 그 모습이 우리 세딸에게 비쳐진 이상적인
결혼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참 행복해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꿈꾸는 그런 여성이 아닐까 한다. 훌륭한 남
편을 가진 자로서 그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사회에서도 열심히 뛰는
그런 여성. 남부러울 것 없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시대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절에는 거의 드물었던 여기자로 뛰면서 사회에서는 씩씩하게 집에서
는 사랑스러운 아내로... 어머니는 여성들의 멋진 이상형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셨다. 딸로서, 같은 여
자로서 이해는 되지만, 어머니는 생각보다 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
심적인 타격을 크게 받으셨다.
그때 어머니 연세가 42세. 남들은 차관집이니까 돈이 많겠지 하고 생각하겠지
만, 아버지는 청렴결백해서 재산과 돈은커녕, 집을 수리 할 때 들어간 빚만 남기
고 돌아가신 셈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둘째는 고등학교 1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야, 어머니가 직장을 갖고 있으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 그 빈자리를 견딜 수 없어하는 것에 대해서
는 정말 보기에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가장 큰 팬이 딸들었다면 어머니의 가장
큰 팬은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직장생활하느라고 늦게 들어오시면 아버지는 늘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으셨다. 직장에서 피곤한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마음이 약해지실까봐 어버
지는 후배 여성들의 좋은 모델이 돼야 한다면서 힘을 내라고 하셨고, “나는 일
을 열심히 하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격려하셨다.
자식인 우리가 보기에도 어찌보면 유치할 정도로 두 분은 호흡이 잘 맞았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세상을 살 가치를 못 느끼는
듯 보였다. 그때 우리는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우리들도 있는데, 저렇게
슬퍼하시기만 하면 어떡하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어머니가 이젠 더 이상 비통해하지 말고 제발 추억을 잊고 새 출발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신 후에 삶의 의욕을 잃었
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재혼을 권하면 어머니는 고개를 내젓는다.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그러나 나는 안다. 아직 아버지를 못 잊는 것임을.
어머니도 밖에서는 `개척자`적이었지만, 여자로 비쳐진다고, 은근히 재혼하시
기를 유도해보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거야.”라고
잘라 말씀하곤 하신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은 후, 심적으로 많이 외로워하고 흔들리셨다.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그건 들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활적인 면에서나 일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장부같이 씩씩하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딸 가진 부모 중에 우리 어머니처럼 시댁에 대해서 당당한
분은 없을 것이다. 나도 딸들을 이렇게 남부럽지 않게 키웠는데,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딸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괜히 시댁에 굽실거리며 비위
를 맞추려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집에 모처럼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도 다른 집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으신다.
우리 집은 사위라고 특별대우를 해준다든가 쩔쩔맨다든가 하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다.
남자 쪽 가장을 만나실 때에도 합리적인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관심이나
남들이 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으신다. 어쩌다가 남자 쪽 집에서 비합리적인 제
안을 내놓으시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밝히신다. 우리들에게도 어디
서든 당당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 집은 세 딸이 전부 일찍 외국물을 먹어서인지, 담배를 다 피운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든지, 얼굴이 안 보이는 곳에서 피우는 걸 보기라도
하면 호통치신다.
“숨어서 할 거면 아예 하지 말고, 꼭 피우고 싶으면 당당하게 하라.”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좀 부드럽게 사시면 더 편하실 텐데, 하고 바라보지만,
어머니의 가치관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든 알아서 하는 습관을 길러주셨다.
“알아서 해.”
그 말은 곧, 잘 안 되면 네가 책임지라는 말로 들려서 한때 서운해 하기도 했
지만, 그래서인지 우리는 다 자립심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또 그 때문에 어머니와 안 좋은 사이가 되기도 했었으니... 부모의 마
음은 자잘한 것들은 몰라도 이혼이라던가, 하는 인생의 큰 파도는 부모와 함께
넘어주기를 바라는 존재인 것 같다.
어머니는 또 나의 초고속 승진을 보면서도 걱정하는 말을 했다.
“너무 일찍 올라간다는 것은 너무 일찍 내려와야 한다는 뜻도 되는데...”
그러면서 언제나 겸손하라고 말씀하셨다.
“알아서 해.”
그러나 그렇게 다 알아서 하라고 하시면서도 우리를 밀어주지 않는 것은 아니
다. 일단 뭔가를 하려고 하면 지원을 최대한 아끼지 않으신다. 우리들의 뒤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는 어머니. 나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열심히 일
하는 그런 어머니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아버지 또한 일하는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셨고, 어머니 자신이 일하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히 어머니가 일한 게 단연한 것이라고
믿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갈 때도 어머니는 직장 때문에 한번도 따라오신 적이 없
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가 따라오고 그랬지만, 나는 어머니가 못 오신 것에 대
해서 마음이 안 좋기는커녕 자랑스럽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 엄마가 못하는 일
을 우리 엄마는 하고 계신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커리어를 존중하니까 자연히 집안 분위기가 어머니의 직업
을 존중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따라가지 못하는 대신에 준비를 철저히 해서 보
내셔서 그렇기도 했지만, 우리는 혼자 소풍가면서도 어머니는 멋진 분이고, 나도
이다음엔 어머니처럼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여자가 되겠다는 의식이 생겼다.
얼마 전에 어머니는 은퇴하셨다.
은퇴해서 조용히 지내시는 어머니에게 이제는 왜 일을 안 하느냐고 하면 어머
니는 그러신다.
“사람이 언제 물러나야 할지를 알아야 되는 것처럼, 조용히 지내야 할 때도
알아야 한 거야.”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남들 부럽지 않은 화려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이제는 은퇴했으니까 조용
히 지내야 돼.”
그 말의 뜻을 지금은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고 또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는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은퇴 후에 집안일을 하고 손자 재롱 보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새로운 일에 만족하고 계시지만, 나는 안 그럴 것 같다. 능력이 닿는 한 나이와
상관없이 일하고 싶고 그리고 `제2의 인생(Second Career)`을 찾아서 일하고 싶
을 것 같다.
어머니 또한 아까운 인재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뭔가 사회를 위해 더 일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보기에 국가적인 낭비다. 젊은 감각도 필요하지만 연륜과 경
륜에서 오는 세련된 일이 어딘가에 값지게 쓰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던 많은 모습 중에 이런 모습을 제일 사랑
한다.
고적한 저녁, 아버지와 램프 밑에서 술잔을 나누며 서로 위안하던 모습, 서점
에서 책을 고를 때 그 반짝이는 눈빛, 음악회에 갔을 때 우아하게 차린다고 차
리고 나섰지만 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 음악을 들을 때 촉촉히 젖는 눈빛,
딸의 남자친구나 사위를 볼 때 당당하던 그 모습,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추
모행사 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던 모습, 그러나 아버지의 관
이 들어갈 때, 같이 가자고, 왜 혼자만 가려 하느냐며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려던
모습...
이렇게 나의 어머니는 꼿꼿이 자신을 세울 줄 아는 강인함과, 그러나 한 순간
무너져내리기도 하는 나약함을 동시에 갖춘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그리고 아버
지가 강조한 비오는 날을 대비할 줄 아는 멋진 여인이다.
나는 어머니를 100퍼센트 닮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런 면은 닮고 싶고 저런
면은 닮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나는 어머니처럼
가고 있다. 인생의 한가운데를 겁없이... 당당하게...
3 여자의 직장내 성공전략
슈퍼우먼의 존재 이유
어머니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잘 병행하셨지만, 그것은 아버지라는 너그러
운 협조자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주위에서도 가끔 슈퍼우먼을
볼 수 있다. 직장일도 능력 있게 잘 해내고, 집에서도 살림 잘하는 주부인 슈퍼
우먼은 남이 보기에도 가장 행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허덕거리고 있는 경우
가 많다.
직장과 집안일을 병행하는 많은 여성들은 모이면 자신들의 허덕거리며 사는
얘기들로 웃음바다를 만들곤 한다.
아침에 김치찌개를 하고는 그 냄새 밴 것을 향수를 뿌려서 없애고 바이어 만
나러 달려나간다는 얘기, 아이 데리러 유치원에 달려가느라 차를 탔는데, 차에는
89.1이 뜨더란다. 이걸 어째? 벌써 여덟시 구십일분이야! 그러나 그건 FM 주파
수였다는 얘기, 직장일로 골머리를 앓다가 아이 데리고 시장 갔는데 시장에서
또 그 놈의 일만 생각하다가 아이를 어디다 둔지 모르고 집에 와서 보니까 애가
없더라, 아참, 내가 아이를 데려갔었지, 그랬다는 애기.
한 손에는 요리책, 한 손에는 결재서류를 들고 뛰어가는 결혼한 커리어우먼들
의 얘기는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매우 속상한 애환들이 섞여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슈퍼우먼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나는 단
적으로 말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처럼 탁아시설이 잘 돼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렇다고 한국 남자들의 의식이나 주변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깨어 있다고 해도 막상 행동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결혼구
조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만족시키면서 일도 잘할 수 있단 말인가.
언뜻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빈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예
를 들면 시부모를 만족시키면서 집에서도 잘하고 직장일도 잘하는 어떤 친구를
두고 다들 슈퍼우먼으로 성공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생활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직장일을 그런 대로 원만하게 잘하는 것일 뿐, 새로 도전하고 개척하
는 자세는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만약 그녀에게 가정
이라는 부담이 없다면? 그러면 그녀는 지금 그런 식으로 일할 사람이 아니다.
늘 일을 저지르고 계획하고 그래서 돋보이던 그녀의 학창시절과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그녀는 직장에서는 그저 `욕먹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있고, 그리고 그
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직장여성 중에는 가정에서 좀 허술하고 덜렁대는 타입이 직장에서
인정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오히려 슈퍼우먼이기를 포기하고 가정에서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바라기보다 차라리 주부로서의 자기를 포기해주기를 바라는 여성
이 훨씬 더 건강하다고 본다.
살림을 제대로 하자면 전업주부 위주로 돼 있는 영업시간, 영업장소에 맞춰야
하고, 괜히 맛있는 것을 손님접대에 맞춰 사겠다고 7시 30분에 닫는 영업장으로
달려가다가 길이 막혀서 그냥 빈손으로 집에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절이 되면 또 어떤가. 며느리는 일찌감치 시댁에 가서 부엌일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며느리는 부엌일을 하는 인력의 의미지, 명절 기분을 같이 즐기는
구성원이 아니다. 명절도 파티가 아닌가. 다같이 즐거워야 할 명절인데, 며느리
는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 눈치부터 보아야 하기 때문에 즐거울 수
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것 다 신경쓰다 보면 회사일까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첫직장에
다닐 때 내가 피로가 누적됐던 것도 알고 보면 결혼생활로 인한 스트레스가 한
요인이 되었다.
나의 일을 하는 이상, 집안일도 하나하나 다 내가 하겠다고 욕심 부리는 슈퍼
우먼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는 자기 능력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왜 집안일은 꼭 내가 해야 하는가. 많은 여성들은
본인이 직장 다니는 것을 마치 자기가 가족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라고 여기기
쉬운데. 그건 `내 탓`이 아니다. 아침 밥상 못 차려주는 것, 애들 뒤치닥꺼리 못
해주는 것, 남편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 등등 그런 것을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부터 버리는 게 나를 위해서도 좋고 멀리 보면 가족을
위해서도 좋다.
안타까운 것은 이땅의 많은 시어머니가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직장인으로 인
정하지 않고 그저 `며느리`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남편들은 또 어떤
가.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고,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간다. 어떤 남자를 보면, 저 남자 혹시 밥 해주고 옷 다려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했나? 싶을 정도로 아내를 가사인력으로만 본다.
같이 직장에 다니면서도 여자들은 일어나는 순간 아침을 걱정해야 하고, 퇴근
하면서 밥해주러 달려간다. 그렇지 않는 가정은 일단 아주 특이한 가정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물론 남과 남이 만나서 사랑을 한 죄(?)로 희생을 해야 하는
게 기본이라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일방적으로 여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
고 있다. 남자는 결혼해도 이제까지 해오던 생활을 그대로 영유하려고 한다. 예
를 들면 퇴근하면 술집에 가고 출장도 맘대로 가고, 동창회에도 가고 친구들도
만나고 하는 일들을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결
혼전과 같이 친구라도 만나려고 하면 그걸 이상하게 보고 밤에는 집에만 있어야
하는 미성년자 취급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사람인 것이다.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적 부담이 없어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볍게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일과 가정, 모두 완벽하게 하는 슈퍼우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생각
에 나 또한 동의한다.
뭔가 일로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일과 가정 둘 완벽하게 해
내야 한다는 슈퍼우먼의 꿈은 버려야 한다.
일에서 뭔가 성취감을 느끼려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혼
자 사는 것에도 나름대로의 책임이 따르고 때때로 외로움이 밀려들기도 하지만
어느새 이것들은 이겨낼 수 있는 혼자만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런 말이 있
잖은가. 혼자 있을 때보다 둘이 있을 때 더 외로울 수도 있다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당당하게 챙기고 일에 있어
서도 혼신을 다해 노력했을 때 얻어지는 만족할 만한 성과야 말로 어쩌면 싱글
만의 고유한 기쁨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공휴일이나 일요일이 돼
도 `나 혼자` 하는 일로 바빠지게 된다.
혼자 영화도 보고 공연도 가고 쇼핑도 즐긴다. 뭔가를 조사한다고 도서관에
가는 일도 즐기게 된다. 친구를 만나는 일에도 시간을 재지 않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으며 친구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를 해도 질겁하지 않고 편안하게 통
화할 수 있다.
자유를 만끽하면서 외로움과 친해질 수 있다면 한 남자와 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희생을 맛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내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내
가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시도해보며 계발해볼 수 있는 것이다.
결혼하는 것, 결혼하지 않는 것.
싱글과 더블.
이 두 가지는 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마치 결혼을 무슨 지
상의 약속처럼 꼭 해야 하고 서둘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결
혼은 선택이지. 필수과목이 아니다.
아까 언급했다시피 결혼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선택한 이상 직장에서 결혼한
여자의 어려움까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는 말라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발랄하고 참신하던 여자가 결혼하자마자 아줌마가 되는 경우
를 종종 본다. 결혼 전에는 늘 드라이가 잘된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세련된 모습
이었는데, 결혼한 이후에는 손질이 안 된 머리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경우를 많
이 보았다. 반면에 남자의 경우는 결혼하면 갑자기 단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일이 손에 안 잡혀 하던 여직원이 급히 나가면서 “오늘은 시어른 생신이라서
”라서, 또는 “오늘은 시댁에 제사가 있어서...” “오늘은 남편 동료들 집들이
날이어서...” 이렇게 툭하면 핑계를 대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나갈 때, 나는
그 여성에게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후배도 좀 생각하라”고. 한창 바쁠 때에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간다고 할 때는 그 여직원의 마음도 오죽하겠나 싶지
만,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고 본다. 회사란, 가정의 연장된 공간이 아니
라, 초를 다투어 열심히 일해서 이윤창출을 도모하는 곳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
는 것, 자기 외모에 신경 쓰는 것, 집에 중요한 일이 있는 만큼 회사일도 중요하
다는 것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만 두어야 한다.
본인의 이유야 어쨌든 결혼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서 회사에서도 가정일
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여직원에게 상사는 월급을 주기가 아까울 게 뻔하다.
오래전에 어딘가에서 우리나라의 유명한 스타 패티 김 씨의 다이어트 법에 대
해서 읽은 적이 있다. 패티 김 씨는 가수로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중요
하므로 노래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어느 때부턴가 사과 한 개로 저녁을
때운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저녁은 늘 사과 한 개로 아직도 여전히 아름다
운 외모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기혼 직장여성들은 적어도 패티 김 정도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항상
긴장해서 남에게 비치는 자기의 모습에도 신경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에서는 왜 아주머니가 늘 염치없고 정신을 못차리는 이미지로 컴퓨터 유머 속에
도 등장해야 하는지, 씁쓸할 때가 많다.
아주머니도 신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직장의 탄력을 부여하는,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돼야 한다. 적어도 일터에서는 저 사람 미혼자다, 기혼자
다, 이런 판단이 안 서게 일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일터에 꽃은 없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요란하게 치장하는 여직원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처음에
는 눈에 띄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을 성실하게 잘 해 내는 여자가 더 예뻐
보인다. 그냥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예쁘고 멋있고, 매력적
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직장은 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단 직장에 들어온 후에는 학생 때보다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가 줄어들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어떻게 생활했느냐에 따라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난다.
어떤 직원들은 대학을 나와서 영어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하는 것을 보면 그저
기능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영어와 컴퓨터만 열심히 배웠지,
대학 다닐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 있는 것이
다. 영어만 잘하면 뭐 하는가. 뭘 말할 것인가가 머리속에 들어 있어야 영어도
제대로 발휘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에게는 될 수 있는 한 책을 많이 읽으
라고 권하고 싶다. 컴퓨터만 잘 배워두면 대학시절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있을까봐 걱정된다. 대학시절에는 보다 큰 그림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넓게
그려보기 바란다.
내가 아는 우리나라 학생들도 대학생활을 재미있게 보내는 것 같긴 한데, 대
화해보니까 깊이가 없었다. 겉도는 얘기만 하는 걸 보고 아, 책을 안 읽어서 그
렇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책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무조건 눈에 띄고 사고 싶은
기분이 들면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사면 모조리 훑어본다. 책이야말로
충동구매를 해도 후회 말아야 될 유일한 대상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인생의 기초공사를 단단히 해놓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성 차별이 심한 직장이라고 해도 책을 많이 읽은 여직원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
한다. 책을 많이 읽은 여성은 아무래도 모든면에서 은연중에 티가 나기 때문이
다.
한 은사가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책을 읽으면 한 권 읽을 때마다 근육이 지적으로 변한다.”
사실이다.
그래서 나이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하나 보다. 책을 많이
읽어서 지적으로 근육이
변한 얼굴, 독서로 눈매가 한층 깊어진 얼굴, 그런 얼굴은 마주 앉기만 해도 기
분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립다.
직장내 복장도 전략이다
미국에는 첫인상을 좋게 하기 위한 복장 전략에 대한 정보가 많다. 물론 우리
나라 잡지에도 복장 전략에 대한 기사가 안 싣지는 건 아니지만 주로 내용보다
는 겉멋 위주로 편집이 되는 것 같다. 때와 장소에 맞는 복장 전략 같은 것을
다뤄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그런 일은 아주 드문 것 같다.
언젠가 면접을 보러 오는 여직원이 힙합바지나 청바지 차림인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물론 옷 사입을 사정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청바지 한 벌이
정장 한 벌 값과 맞먹는다고 들었다. 물론 브랜드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여직원
의 청바지는 분명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었고, 그 값이면 적어도 남대문시장에서
수수하면서도 세련된 옷을 정장으로 구입할 수도 있을 텐데 싶었다.
놀러갈 때 정장을 입고 가는 것이 꼴불견인 것처럼,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이
놀러가는 차림을 하는 것은 좀 그렇다.
옷을 입는 것도 일종의 센스인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온 어느 여직원은 아주 깔끔하게 옷을
잘입고 다닌다. 내가 물었더니 그녀는 백화점에서 옷을 사본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럴 형편도 안 될 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단다. 그는 시장에서 옷을 사
다가 단추나 주머니 등을 바꿔달아 입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시간도 많이 안
걸린다고 했다. 게다가 요즘은 시장에 안 나가도 멋진 옷이 많이 걸리는 동네
양품점에서 이것저것 맞춰 입을 수 있는 것을 고른다고 했다.
그는 아주 저렴하게 멋을 부리는 멋의 천재였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왔다는 한 여직원은 힙합바지에 몸에 달라붙는 티를
즐겨 입고 출근했다. 충고를 해주고 싶었으나 제멋이겠다 싶어 그냥 내버려두었
다.
그런데 이 두 여직원이 일한 결과 역시 옷차림 그대로 나타났다. 회사가 비즈
니스 현장임을 알고 있는 자와 어딘지도 구별 못하는 자의 차이는 옷에서부터
출발한다.
직장은 캠퍼스나 스포츠센터도 아니고, 더구나 들도 바다고 아니다. 일터다.
일터에 맞는 옷차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우리나라 직장에서는 여직원이 매일 옷을 갈아입고 오지 않으면, “어젯밤에
어디서 잤어요?”
이렇게 묻는 풍토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미국
에서도 직장인들은 매일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다고 일주일 내내 다른 옷을 입
으라는 말은 아니다. 오늘은 가디건을 새롭게 바꿔 입었으면 내일은 스커트를
바꿔 입는 식으로 조금의 변화라도 주는 게 좋다. 자신의 기분전환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나는 옷을 화려하게 입는 편이 아니다. 옷은 그야말로 옷 자체지, 옷에 내가
묻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옷 잘 입는다는 것에 가려져 일이 묻히기 싫다
는 얘기다. 나는 일로써 평가받고 싶지 옷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옷을 못 입는다는 소리도 듣기 싫다. 그냥 분위기는 있구나, 조금은 세
련됐구나 정도가 좋다.
너무 튀지 않은 색상에 내 분위기에 맞는 디자인의 옷을 선호하는데, 거의가
어두운 빛깔에 단순한 슈트 차림일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개성을 잘 살려가며 적재적소에 맞게 옷을 검소하면서도 세련되게 입
는 여성을 보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여성은 일도 그만큼 열심히 할 것 같
고 인생도 그렇게 야무지게 꾸릴 것 같다. 그런 여성은 그렇지 못한 여성보다
벌써 몇 점 앞서고 들어간다. 외모가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니까...
그러므로 복장 또한 전략이다.
그러나 그 어떤 복장보다 더 중요한 의상이 있다. 그건 바로 `당당함`이다.
면접을 볼 때도 나는 그 `당당함`에 많은 점수를 주게 된다.
가끔 면접자를 대할 때 보면 그들은 지나치게 긴장한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이고 손동작도 불안하다. 꼭 상대방의 처분만 기다린다는 그런 자세를 취하
는 사람들을 나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나는 당당한 태도가 좋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면 안다고 하는 그 당당함,
그리고 바른 태도로 앉아서 상대방과 뭔가 대화를 나누려고 눈을 반짝이는 그런
모습이 좋다.
면접은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서로간의 대화이다.
상사도 물론 같이 일할 직원을 선택하지만 나 또한 나와 함께 일할 상사를 보
고 내가 몸담을 직장을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선택하는 인생이 아니, 선택을 당하기도 하지만 나 또한 선택한다는 당당한
자세가 좋다. 그런 자세가 첫인상을 좌우한다.
결국, 가장 아름다운 의상은 자신감 있는 꽉찬 내면이다.
눈물은 여자의 약점이 아니다
여직원이 남자직원한테 안 좋은 말을 들은 뒤 울면서 뛰쳐나가 화장실에서 펑
펑 울고, 다른 여직원이 쫓아나가서 그 여직원을 달래고...
그런 상황을 나는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나 나도 직장에 몸담아 보니 울 수
밖에 없는 상황들도 있었다. 도무지 내가 울지 않으면 저들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는 상황도 생기고, 울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
다. 전자는 전략적인 눈물이고 후자는 감정적인 눈물이다.
그러나 둘 다 죄는 아니다.
우선 전략적인 눈물을 살펴보자.
일터에서 남자들과 협력관계로 만날 때, 같은 조건 같은 능력 이상이면 일단
시기를 받게 마련이다. 적어도 그들보다 못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는 거세거나 독하게 반응하면 안 된다. 오히려 어리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책만
잡히기 십상이다. 차라리 울어버리는 게 낫다.
예전에는 여자가 남자처럼 해야 성공했다. 그래서 남자 복장을 하고 다니는
여성 정치인도 있었고 사업가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니다. 여성성이 남성을
이긴다.
물론 눈물이 여성만의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한 외신을 보니까 남자도 한 달에 평균 1.4회 운다고 실렸다. 미국의 한 연구
팀이 조사한 것으로, 여자는 한 달에 평균 5.4회, 남자는 1.4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남자들도 물론 운다. 자라면서 남자가 되어서 왜 우느냐는 소리를 때때로 듣
고 자랐고, 남자가 울면 통이 작다고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울고 싶어도 자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좋다. 여자는 그래도 남자보다는 눈물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
큰소리로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한줄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게 훨씬 여성적
이고 우위적이며 손해볼 것 없는 일이 아닐까. 더구나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
는 데 가장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남자처럼 역기를 들 수는 없는 일이므로
여자로서의 무기는 역시, 눈물이 최고다.
물론 눈물을 무슨 동정의 도구로 삼거나 툭하면 울기 잘하는 어린아이가 되라
는 얘기는 아니다. 아주 필요할 때, 아무리 해도 되지 않을 때 분노의 폭발이나
절망의 폭발인 듯 터져나오는 눈물, 그건 무죄다.
또, 참으려고 해도 터져나오는 눈물 또한 죄가 되지 않는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일 뿐이지 창피한 게 아니다.
만일 운다고 해서 어리게 보거나 유치하게 본다면 그 사람이 어리고 유치하
다.
사탕을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눈물은 후련한 감정의 표출
방법이다.
`눈물 에너지`라는 게 사람마다 있다.
눈물을 흘렸던 사람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왜냐하면 울었던 힘으로 살
아갈 수가 있으니까.
마음의 울림 공간도 울었던 자가 많이 확보해두는 법이다. 그 울림 공간으로
음악도 와닿고 사람의 마음도 와닿아 아름답게 울린다.
눈물 고인 눈에 비로소 하늘의 별도 담기고 달도 담긴다는 말도 한다. 울었던
자만이, 울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친할 수 있다.
직장 안에서 우는 것,그건 죄가 아니다.
다만, `투정부리듯 우는 울음` `툭하면 우는 잦은 울음`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이미지가 고정되기 쉬우므로.
잘 우는 이미지로 비쳐서 좋을 건 없다.
여자가 직장에서 흘리는 눈물, 그건 참다못해 폭발하는 분노의 표현임을 알아
줬으면 한다.
여자가 약해질 때,직장내 성희롱
대부분의 우리나라 남자들은, 신세대 몇몇과 아주 특별한 분 아니면, 여자랑
동등하게 일하는 것에 대해서 어설퍼하고 낯설어한다. 남자직원들은 여자직원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음담패설을 하는가 하면 미혼여성들이 입은 옷에 대해
서 본인의 마누라도 되는 양 간섭하는 남자가 있다.
결혼한 여직원에게는 “오늘은 힘이 없어 보이는데?” “혹시 어젯밤에 무리
한 거 아냐?” “남편하고 요즘 밤생활이 안 좋은가봐?” 하는 식의 농담을 거
리낌없이 걸어온다. 그런 것을 보고 있으면 저 남자의 부인은 남편이 회사에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남자도 적지않다. 직장상사가 여직원을 건드리는 경우 또는 흑심을 품고
치근대는 경우. 그러면 회사에서는 소문이 금방 나게 마련이다.
“누가 미스 누구랑 같이 다닌대.”
“그래,나도 들었어.”
“며칠 전에는 호텔 객실에서 나오는 걸 봤대.”
그런 소문에 관련된 여직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낸다. 사직서에는 `개
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라는 사유를 써놓는다.
어느 직장이나 그런저런 사건이 간간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한번은 한 여직원이 나를 찾아왔다. 자기는 모 상사와 같이 있는 것이 너무나
싫은데, 자꾸 그 상사가 같이 있는 구실을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그 여직원은
그 상사와 직급의 차이가 너무 나서 딱 부러지게 “아니오 ”라고 말할 만한 용
기가 안 난다고 했다. 며칠 동안이나 그 상사는 자기를 불러내서 “내 딸 같다
”면서 슬쩍 몸을 만질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사과에 얘기해서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하세요.”
그러자 여직원이 대뜸 물었다.
“네, 그런데 제가 낯뜨거워서 어떻게 말하지요?”
“그러면 제가 조용히 얘기해줄게요.”
그래서 내가 인사과에 얘기해서 그 상사의 직급이나 체면을 감안해서 조용히
그 여직원을 다른 부서로 옮겨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사의 머리가 어찌나 비상하게(?) 돌아가던지, 상황을 어느새 알아차
리고 그 여직원을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친딸같이 생각해서 부드럽고 친숙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만약 그
것이 부담이 된다면 앞으로는 자제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은
여직원은 새로운 부서로 가봤자 낯선 업무 때문에 고생할 것 같고, 또 지금의
업무는 친숙해서 편한데다가 상사가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니까 그
부서에 도로 주저 앉았다.
나는 그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여직원에게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
지금은 남의 눈이 무서워서 저렇게 말하지만, 그 버릇이 어디 가겠니?” 하고
타일렀다. 그러면서 나는 화가 나서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책임져!
” 하고 소리쳤다.
그후 나의 느낌이나 그 여직원의 표정으로나 그 상사의 성희롱은 계속된 것
같았다. 그 여직원은 이제 남한테 얘기하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것 같았다. 자기
딸처럼? 그러면 그 상사는 자기 딸한테도 그렇게 하나 싶어서 기가 막혔고, 그
렇게 주위에서 도와줘도 단지 주변상황이 바뀌는 게 두려워서 그냥 주저 앉는
그 여직원 같은 사람은 이제 신경쓰지도 말고 자기 할 대로 하라는 심정이 되었
다.
그 여직원이 정말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다행히도 그 상사는 역할이 없어져서 다른 직장으로 옮겨갔고, 그 여직원도
자연히 다른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러고서는 얼마 안 있다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서 그 여직원도 회사를 그
만두자 여기저기서 그 여직원의 행실에 대해서 쑤군대기 시작했다.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 하루에도 몇번씩 거울만 쳐다보았고, 오로지 남자에게만 관심을
끌려 하고 상사에게마다 꼬리쳤다는 둥 쑥덕거렸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직장상사와 여직원 간의 성희롱 스캔들을 보면 먼저 소문
이 돌고 그 다음은 위에까지 알려져서 상사가 불려가서 야단맞았다는 둥, 별 얘
기가 다 돌다가도 결국 그만두는 건 여직원 쪽이고, 상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버젓이 직장생활을 계속한다.
한번은 여직원이 회사까지 찾아와서 통곡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끝은 똑같았다. 여직원 쪽에서 먼저 쉬쉬하면 대부분이 물러나는데, 대체
로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 남자들을 보면 잘난 남자는 없다. 자기 외모나 능력에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다.
내 남자친구들에게 이런 논리를 폈더니 이렇게 대응했다.
“이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남자들은 다 똑같아. 능력이 닿는 한 다 해보고
싶고, 돈이 있으면 여러 여자도 건드려보고 싶은 게 남자들의 심리야.”
그에 대해서 내가 “남자들은 저속하고 나쁘다.”고 했더니,
“여자들은 황금에 눈이 어둡지 않나?” 하면서 맞대응해왔다.
그러면서 자기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데, 자기네 부장이 같은 부서
의 여직원에게 선물공세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출장을 갔다오면 반드시 멋진 시
계나 옷을 사주는 등 선물공세를 계속 폈는데 결국 여자가 호텔까지 따라가더라
는 것이다. 그것도 약혼자가 있는 여자가 그랬으니 그 여자와 부장이 호텔에 들
어가는 걸 본 그 약혼자의 친구가 일러줘서 약혼자가 직접 여자를 만나서 추궁
하자 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화가 난 약혼자는 그 부장의 집까지 찾아갔는데, 그 부장의 부인은 남편을 세
상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성실하고 진실되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얘기해도 잘못 안 일이라면서 믿지 않는 눈치였다고 한다.
이 세상 대분분의 여자들은 자기 남편만은, 하고 생각하지만 그건 천만의 말
이라는 게 그 친구의 주장이었다. 젊어서 그러지 않던 남자도 나이 들어가면 모
른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화가 나지만, 어쨌든 직장에서의 성희롱 사건은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만큼 여자들의 용기가 있어야 해결된다.
길에서 강간을 당한 여자가 경찰에 가서 신고를 해도, “혹시 꼬리 친 거 아
냐?” 하는 시각이 먼저고, 남자가 몸을 만졌다고 해도 “뭘 그딴 걸 갖고 그
래? 귀여워서 그런 걸 가지고.” 하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가는 게 문제다. 과연
그런 조사를 한 사람의 여동생이나 딸이 그런 일을 겪었어도 그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어차피 문제가 잘 안 풀릴 거면 괜히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당
사자인 여자들까지도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이 나기 전이나 후에도
우물쭈물하면서 창피해하고 피해자인 당사자도 “나한테 잘못이 있는 건 아닐
까?” 생각하는데, 피해자는 여자라는 그런 확고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매 맞는 아내들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자신부터 시작해서 더러는 친정 식구까
지도 “그 애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어서 남자 속깨나 긁었겠지?” 하는데, 성격
이야 어떻든 성희롱이나 구타는 못된 남자들의 못된 습관이지, 여자들이 특별히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결코!
나도 미국에 있을때 여러 조사와 연구자료를 봤다.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
기 때문이다. 때리는 남자나 성희롱하는 남자나 다 병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결
론이었다. 정신적인 병. 그런 질환에 대해서 여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 의식수
준의 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준 미달이 현실인 게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러니까 여성들은 스스로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런 일은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변
화를 여자들이 주도해나가야 한다.
무슨 일이 터졌을 때는 정면대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쉬쉬하다가는 괜히 자신
만 괴로워해야 한다. 그건 불공평하다. 가해자를 알리고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려
는 자세만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택시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혼자 괴로워하다가 목숨을 끊어버린 여
대생의 이야기가 사회면을 장식했는데, 그런 경우 혼자 음성적으로 고민하다보
니까 문제가 비극으로 치닫기 쉬운 것이다. 그건 결코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행
여 그런 사건이 났을 때 그래, 아무나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
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의식을 고쳐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무슨 일을 당했을 경우에는 무조건 정면대응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한다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어딘가에는 반드시 나
를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여자들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자들이 성희롱을 할 만한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젊은 여성들은 아무리 섹시하게 보이는 것도 좋지만 같은 여자가 보기에
도 낯뜨거울 정도로 신체를 노출을 한다. 하지만 그런것도 직장에서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치 청교도들처럼 위 아래로 꽉 막힌 옷이나 긴 치마만
입고 다닐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일을 하러 온 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또 남자들과 어울려 괜히 쓸데없는 농담이나 나누면서 헤프게 웃는 여직원들
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풍기는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 자신의 체형과 얼굴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복장과 화장법이 그사람을 가장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기직종에 미래를 걸지 말라
신문이나 잡지에 내 이력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는 여대생들이나 젊은 직장여
성들이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 정도면 상담해도 되겠구나 하면
서 나를 찾아오는데,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연락해오거나 찾아오는 것을 보면 그
성의와 정성에 감탄하게 된다.
이럴 경우, 나는 되도록 다 만나려고 한다. 나를 찾아주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
도 예의가 아니거니와 내가 아는 정보를 한 사람이라도 더 나누어서 이익을 얻
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이보다 내가 더 지식이 많고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직장경험이 더 길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같이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우리나라 구세대들이 흔히 말하
는 `좋은 학벌은 좋은 직장을 얻게 하고 좋은 직장은 행복을 보장한다`는 시각
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할 시기에 있는 청년이 아직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접어든 채 부모가 바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답답하기
만 하다.
“부모님은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부모님이 바라는 일은 이것인데...”
“요즈음은 인기직종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할말이 없어진다. 어떤 때는 부모까지 대동하고 나
타나서 유치원생인지, 성인인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고, 자식의 성공을 원하는
부모에게 마지못해서 끌려나온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부모는 어떻게라도 판검사를 만들려고 고시공부를 시키는데, 연
거푸 떨어지니까 국내에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제라도 외국유학을 보내서
이름도 근사한 국제변호사를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어떤 부모는, “내 친구 딸이 유명한 대학교수라고 하는데, 어떻게 손을 써서
집어넣어볼까 한다” 고도 했다.
그런 부모 밑에 있는 사람 치고 똑똑하거나 자율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부
모가 뭐라고 해야 따르고, 아니면 결혼한 사람이면 이제 막 부모에게서 벗어나
서 부인이 뭐라고 해야 따르는 아직 정신적으로 유아기인 그런 사람도 보았다.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택한 사람은 평생 그 직업에 매달리면서도 뭔가 풀리지
않는 허탈감을 느끼면서 살게 뻔하다. 다만 부모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충족감은
있을 것이다.
대학교까지는 어렸기 때문에 부모의 뜻에 따라서 전공을 택했다고 해도, 기회
는 한 번 더 있다. 부모가 원하는 직업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내 인생이니까. 이건 내가 연출하고 내가 주연배우로 활약하는
내 무대인 것이다. 내 인생이라는 무대.
내가 아는 한 방송작가는 대학 입학시험을 보는데, 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원
하는 대학 학과의 예상합격 점수가 자기 점수보다 높아서 그보다 좀 낮은 점수
의 대학을 선택하려고 했으나 부모가 안된다고 말려서 가정교육과에 억지로 입
학했다. 도저히 관심이 없는 분야였으니 학교 가는게 싫어었고, 매일 학교 간다
고 하면서 다른 길로 새곤 해서 마침내 학사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2년여
를 끌다가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다음해에 다
시 국문과로 입학했다. 그때 그녀의 부모는 자녀를 문제 자녀로 단정짓고, 그 동
안 든 학비와 이제 다시 공부하면 시집은 언제 가느냐며 안달했지만, 그녀는 고
집스럽게 국문과를 졸업했고, 그리고 지금은 방송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부모의 희망대로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이지만, 얌
전하게 졸업하고 좋은 혼처를 알아봐서 결혼했다면 그녀는 요즘같이 신나게 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은화같이 맑고 생활은 펌프질같이 활력이 솟구친다.
”
그것은 다 그녀가 택한 길을 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의 용기에 대
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경우는 뒤늦게나마 자기 길을 찾은 경우인데, 이렇게 자기주관이 뚜렷
하지 못한 사람들이 취직할 때 가장 밝히는 것은, 전망 밝은 직장이다.
채용 시즌이 되면 많은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이른바 `인기직종`으로
몰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게 상담을 해오는 사람들을 봐도 인기직종을 따
진다. 과연 앞으로의 인기직종은 무엇이며, 전망이 밝은 직종은 어느 쪽인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오늘의 인기직종이라는 것은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지
금 인기직종이라고 해도 10년이나 20년 후까지 인기직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광고직의 경우, 몇 년 전만 해도 광고쟁이라고 하면
충무로를 빌빌거리고 다니는 배고픈 직종이었다.
메이컵 아티스트는 할 일없이 멋이나 부리면서 딴따라나 쫓아다니는 그런 직
종으로 간주됐으며 디자이너도 얼마 전까지는 별볼일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
기직종이 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10여 년전만 해도 최고 인기직종이었던 증권
회사 직원이 요즘은 인기가 시들하다.
과연 인기직종을 쫓아서 무얼 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가치가 그만큼
있는 것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잡지사나 방송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다시 학원에 다
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학원에 다닌다고 과연 잡지사나 방송국에 들어가서 능력
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그저 그런 곳에 입사만 하면 행복을 거머쥔 것같
이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방송국에 들어간 후에는 상상력이나 창의력, 추진력, 기획
력 등이 얼마나 풍부한지, 개성이 있는지, 자신감이 있느지가 평가의 기준으로
적용하지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또 사전에 뭔가를 배워 왔다고 더 잘하고 그런
것은 아니다.
백악관에 출입하면서 필체를 날리는 미국의 유명한 칼럼니스트도 기자가 되려
고 했는데, 신문기자가 되는 게 힘들자 먼저 신문사의 사무직으로 들어갔다. 우
선 허드렛일을 하기 시작했고 본인의 부단한 노력 끝에 날씨난을 담당하다가 마
침내 백악관 출입기자가 됐다. 지금은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칼럼니스트
가 되어 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은 당장은 못해도 꿈만 잃지 않느다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 그러니까 인기직종만 따라가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는 것이다.
당장이야 수입이 좀 작으면 어떤가.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게 좋으면 미래를 위
해서 참고 도전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 기회는 오게 마련이고, 그 기회를
너무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취업에 있어서는 절
대적으로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니까.
인기직종에 종사한다고 부모님이 주변 사람에게 자랑한다면 그것은 몇 년 후,
기가 죽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기직종에 대한 자랑을 듣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릴 적 독립심이 도움이 됐다
해외로 자식을 조기 유학 보내는 부모가 늘고 있다. 내 주위에도 조기 유학생
이 많다. 내가 미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선지 나에게 자문을
구해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경우는 학생 자의로 간 경우보다 타의로 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나도 결과적으로 조기 유학을 한 셈이 됐고, 그렇게 매스
컴에 소개되다보니까 내가 성공한 케이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운이 좋았다고 보는 편이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운이 안 따라 잘 안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내게 행운
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에 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부
모와 떨어져서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면서 부모의 간섭도 없고 타인의 눈에도 띄
지 않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소홀해지기 쉽고 심리적으로 불
안할 때는 한번쯤? 하는 생각에 다른 길로 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흔히 조기 유학을 보내는 부모들은 “잘하는 애는 어디 가서든 잘 할 것” 이
라고 믿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잘하는 아이는 미
국에서도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지, 결코 잘한다고 확실히 보장하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교육에도 문제가 있듯이 외국의 교육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는 것을 부모들이 사전에 충분히 검토한 뒤에 아이를 보내야 할 것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외로움을 못 견뎌서 우울증에 빠져 앰뷸런스에 실려서 귀국
한 애도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듯이 유흥가를 전전하는 아이, 또 애정결핍증에
걸려서 누군가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사람을 보기만 하면 “나,어디 아파.”하는
아이도 있다.
막연하게 그저 외국의 교육방법이 좋아서 떠나지만, 도착하면 아이들은 외국
의 교육제도만 접하는 게 아니라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밥먹고 공부하고 자고 그러는 것만이 생활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과정을 거
쳐서 성공하는 케이스를 볼 때면 기적이라고까지 느끼게 된다. 그런 사람을 보
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잘 이겨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어른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은데,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이겨낸다는 것
은 보통 운좋은 일이 아닐 수 없고 아주 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외국에서 공부한 것이 큰 이득이 될 수가 있다.
나 같은 경우, 이나라 저나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고 ,이것은 훗날 나의 인생관에 많은 뒷받침이 되
었다. 국제화 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안다는 것은, 요즘 사람
들이 얘기하는 성공의 플러스 요인이 충분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문화를 접해도 놀라지 않고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사람의 기이한 행동을 보아도 “아니, 어쩜 저럴 수가” 하기보다는 그쪽의 입
장을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내 자신이 그 동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고 애쓰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생겨난 습관인지도 모른다.
조기 유학의 또 하나의 장점은, 일찍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독립심이 강해졌
다는 것이다. 남의 행동이나 태도로 내 삶의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개척하며 지냈다. 그러다보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았
다.
아주 힘든 일이 닥칠 때면 나는 이 시기가 내 인생의 아주 힘든 지점에 속한
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웃으면서 돌아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잃
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와신상담이 되어 안 좋은 일이 좋은 일로 역전되기도
했다.
그런데 자립심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 남의 의견을 잘 듣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혼자
결정하고 주위에 통보만 하는 것이 때로는 주위 사람들을 서운하게 할 수도 있
다. 어머니는 요즘도 내게 불만이시다.
“내가 너를 자립심 강하게 키우긴 했다만 너는 너무 심하다. 어떻게 모든 일
이 `선 결정,후통보`냐?”
뒤돌아보면 나는 자랄 때 곁에 의논할 만한 대상을 가져보지 못해서 버릇이
돼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는 게 습관이 된
것이다. 좋게는 `독립심이 강하고 나쁘게는 고집이 강한 여자`가 된 것이다. 아
마도 조기 유학을 소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 사람들이 다 이런 성격을 갖고 있
지 않을까 싶다.
내가 유학시절을 돌아볼 때 운이 좋았다고 하는 것 중의 하나는,친구들이 많
았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시절에는 이미 그곳 문화에 익숙해 있어서 친
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인생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다녔던 학교가 두 곳 다 1학년 때부터 틀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니라 1,2학년 때 여러 과목을 공부해보고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곳이어서 시간에 쫓겨 조급하지 않고 자유로웠다. 인생공부를 한답시고 친
구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니까 외롭기도 했지만,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고 내가 원
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데이트도 많이 하고 시험기간에
는 강의노트 복사하랴, 밤새워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척하랴, 대학시절은 꽤 재
미있었다. 원래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대학시절만큼은 기회
가 생긴다면 다시 한번 지내고 싶을 정도로 그립다.
한국을 알리는 한국학생회 활동, 아시아계 학생활동, 대학신문에서도 일하면서
바쁘게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열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 대학 한인
학생회에서는 해마다 `신입생 환영회`를 했다. 신입생과 재학생이 모여서 자기
소개도 하고 학교 소개가 끝나면 식사하고 댄스파티로 이어진다. 지금이야 미국
어느 지역에 가든 우리 음식을 저렴한 값에 장만할 수 있지만, 그때는 직접 찾
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날이 되면 비빔밥을 준비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시장을 봐다가 지지고 볶고 삶고 동분서주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즐거웠다.
누가 그 당시 내 전공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활동이 전공, 공부는 부
전공이라고.
내가 대학생활을 아주 바쁘게 보낸 이유 중 하나는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갑자기 돈 쓸 일이 많아질 때에는 다른 학생들처럼 나도 집에 손을 벌리는 대신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르바이트는 나의 인내심과 자립심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많은 추억거리도 제공했다.
지금도 햄버거 가게 앞을 지날 때면 그때 햄버거 집에서 고기를 굽고 끼우고
배달하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풋, 웃게 되니까 말이다.
외국인과의 사교술은 `당당함`
`아린 클럽`이라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뜻있는 외국인의 모임이다.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과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들의 모임인데,
서로 친목을 도모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졌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은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을 도와주고 한국을 잘 알리자는 데에 있다.
주한 외교관의 경우, 공적으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위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폐쇄적으로 생활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제도와 시설은 외국인에게도 알기
쉽게 합리적으로 꾸며져 있지 않다고 본다. 성격이 적극적인 외국인의 경우는
현실과 부딪치면서 시간이 걸려서라도 본인이 직접 알아내기도 하지만, 내성적
인 외국인은 임기 내내 일주일 가운데 5일은 대사관에서, 주말은 집에서 보내는
이들도 많다.
비교적 친하게 지내던 유럽의 외교관이 영국으로 이임되어 떠날때 하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 드디어 모국과 같은 문화권의 나라로 가게 되어서 기쁘다. 한국에 와서
지내는 3년 동안 초반기를 제외하고는 집이나 대사관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이 두 곳만 벗어나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도로 표지판 때문에 길을 잃어 짜
증나고 주말에는 교통체증으로 어딜 갔다오면 골치 아프고, 서울 이외의 도시에
서는 영어도 안 통하고 화장실도 그렇고...` 그는 한국에 와서 몇 번 이런 일을
겪고는 여기서 지내는 동안 어디 나다니는 걸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요즘은 고속도로 주변의 휴게소들도 민영화되어서 다양한 음식과 개선
된 시설로 손님을 맞이하지만, 이것은 불과 얼마 안 된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떠나면 고생이라고 할 정도로 시절의 차이가 심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정체가 워낙 심하니까 고속버스를 타고 어디 갔다오려고 해
도 고속버스 터미널에 한번 가보라. 요즘은 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몇 달 전
내가 갔을 때는 눈뜨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차역은 또 어떤가. 내가 가본 역의 화장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이 시대의 화장실이 맞는가 눈을 의심할 정도였
다.
그러니 외국인으로서는 서울을 떠나서 여행을 가거나 지극히도 필요한 일 이
외에는 밖으로 나가기 싫은 게 당연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들 비쁘고 전문가
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문제해결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바로 `아린 클럽
`에 모였다. 도와주는 일 이외에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해주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알릴 수 있는 교수를 모셔다가
작은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다들 `외교관`이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사람처럼 본인의 불만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자주 어울려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외교가
의 가십 말고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한번은 나와 친하게 지내는 스칸디나비아의 여자 외교관이 남자친구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그 동안 한국 친구도 많이 사
귀고 비교적 별 문제 없이 지냈다. 사교성이 있는 만큼 자기 집에서 하는 송별
파티에도 아주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가든 파티였는데, 밤 12시가 지나고 1시가 됐는데도 방문객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났다. 초저녁에는 한국인들이 인사차 들렀는데, 밤이
깊어갈수록 외국인들이 더 많이 방문했다. 그들은 한 손에 잔을 하나씩 들고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밤늦게까지 파티하면서 노는 게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그럴 만한 공간이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속속 몰려드는 외국인들은 정말 노는 데 굶주린 것처럼 밤이 새도록 즐겁게 보
냈다.
서울 시내의 몇몇 값비싼 호텔 이외에는 외국인들이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재
미있게 보낼 수 있는 장소가 별로 없다. 기껏해야 미8군 안에 있는 술집이나 이
태원이 전부이다. 이제는 그곳들도 내국인이 거의 점령하고 있어서 외국인이 한
국인 친구 없이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외국에 가서 살아본 사람은 그곳 문화가 너무 자기 본위적이고 배타적일 때
외국인은 참 외롭고 불편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만도 하다. 서울이 국제적인 도시라고는 하지만, 시설 면에서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은 것이다.
물론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 중에는 문제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리 취지가 좋기는 해도 만나서 그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주려고 하다본
면 그 중에는 아예 대접을 받는 데에만 길들여지려고 하는 외교관들이 있다. 한
마디로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외교관들인데, 소위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영국의 외교관들 중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미국의 외교관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높으신 어르신네들께서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인 것이다. 미 대사관의 경우, 말단 직원하고라도 줄을 대려고 식
사대접은 물론 선물공세, 하다못해 기생집 까지 모시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는
웃지 못할 얘기들이 들리곤 한다.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던 외국인들도 차츰
이런 접대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어디를 가도 으레 우리나라 사람이 돈을 지불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에 발간된 책을 보면 그들과 줄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의 기밀까지도 서슴없이 갖다바치는 정치인도 있다니 한심한 일이
다.
그런제 이것은 외국인을 모르고 하는 행동이다. 그런 행동으로 인해 고마워하
고 든든한 줄이 되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라를 모독하고 비열하게 구
는 행위는 오히려 그들에게 가십거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아린 클럽에서는 접대형식의 만남보다는 그들의 문제해결에 신경을 더
쓴다. 으레 이런 외교모임에 단골손님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
우 외국인과 모임을 갖고 외국인을 잘알고 지낸다는 것을 자기 품위유지로 생각
하는 사람들이다. 외국어는 잘하지 못하면서 얼굴만 내밀어서 외국인에게 굽실
굽실하다가는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아, 나말이야, 어저께 대사관 모임에 초
청돼 갔다왔어.`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특히 화장을 요란하게 하고 와서는 어설픈 웃음을 지어가면서 잘 안 되는 외
국어로 그저 사진 한 장 찍고 사는 그런 자존심 깎이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은
그 외국인들이 뒤돌아서서 앞에서와는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외국인들과 사귀는 데 강장 필요한 것은 바로,`당당함`이다. 절대 비굴함이나
지나친 아부근성은 아니다.
미혼입니까? 기혼입니까?
`미혼입니까, 기혼입니까?`
사람들을 만나면 주로 받는 질문이다. 특히나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
들은 가장 먼저 그 질문부터 던진다. 독자들이 알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
성의 사회진출이 힘든 이땅에서 30대의 대기업 이사가 나왔다고 하니까 미혼인
지 기혼인지 궁금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면 남편 뒷바라지에, 애가 있다면 아이
까지 키워가면서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을테고, 그러니 기혼인지 여부가 매우 궁금하리라.
그러나 이 질문만큼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 나는 이혼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면서 전체적으로 이혼의 가능성에 대해
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분위기가 되는 듯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누가 `결혼했습
니까?` 하고 물어오면 이혼했다고 단적으로 대답하기가 껄끄러운 게 사실이다.
미국에서라면 망설이지 않고 이혼했다고 말할 텐데 말이다. 결혼했죠라고 물을
때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대답을 꺼리는 편인데, 언젠가 기자의 질문에 그
냥 혼자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기에 `미혼`으로 나가버렸다. 그후로
나는 심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때 이혼했다고 대답을 못한 이유는 기사가 이혼녀가 이사가 되다, 라는 것
에 초점이 맞춰져 본질이 오도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사생활을
끄집어내서 공적인 것까지 연결되는 게 싫었다.
어쨌든 나는 한 번 답변을 잘못해서 `이혼녀`가 아닌 `미혼`으로 알려지게 되
었고, 그 때문에 회사 사람들에게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혼녀라는 딱지가 더 이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
십거리가 아니며 또 이혼녀라는 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선입견으로
작용을 하지 않는 그런 날이 곧 오리라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하겠기에.
자, 이제부터 새로운 도전이야!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게 있다.
`10년 안에 나는 뭔가 이루겠다!`
그 10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한라에 입사할 때는 정말 할 일만 있다면 청소부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고 복사 일부터 하면서 나는 그 꿈을 잃어버렸다. 살기 급급
했으니까.
일본의 한 잡지에서 읽은 기사다.
어느 여직원이 상사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면서,
`이제 더 이상을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나오지는 않겠다!`고 말했
다는 것이다.
아마 그 여직원은 자신이 그 소파에 앉아 누군가 내려놓는 차를 마시는 상상
을 수천 번도 더 했으리라.
`몇 년 후에는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을 거야`라는 야무진 결심도 했을 것이
다.
그 일본 여직원은 그 다음에 차 심부름에서 찻잔을 어떻게 내려놓았을까. 지
금 과연 그 소파에 앉아 있을지 궁금하다.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언젠가는 외국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은은한 조명
밑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며 가겠다는 그 일념으로 일했다고 한다. 결국 그 꿈을
이루고 아주 지겹도록 노트북을 두드리고 다니노라며 웃었다.
무엇이든 좋다.
이런 각오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저 자리에 앉고 말겠어 하는 마음, 오기, 꿈... 그걸 잃지않고 있으면
된다.
나 또한 그랬다. 내가 하는 현재의 일이 전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일은 언젠가는 괜찮은 경력이 돼줄 것이라 생각하며 일했다. 일일이 이건 미래
를 위한 일이다, 아니다를 따졌다는 게 아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그
일이 미래를 열어주었다.
나는 천천히 그 10년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어느 정도 길이 보였다.
누군가 내게,
`그래, 너 수고했어, 해낸 것도 같아.`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우산 속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스스로 쓴 우산이 아닌 누
군가 씌워주는 우산 말이다. 그 우산은 비를 피하기에는 좋지만 내가 직접 그
우산을 쓰지 않았다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남들은 나에게 성공했다고 말하고, 나 또한 그런 기분에 젖어들었던 것도 사
실이지만 아직은 준비하는 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성공이 아닌 성취 정도인 것
이다.
이제 10년이 지났으므로 새롭게 10년을 그려보았다.
앞으로 한라에서의 10년은 왠지 답답할 것 같았다. 처음엔 정말이지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제약이 많고 나 자신이 욕심이 많아져서 힘들
어졌다. 이제 더 올라가면 더 심한 제약과 나 자신과의 욕심과 싸울 것 같았다.
고민했다.
지금 이대로는 좋지만, 이대로 만족하다보면 이대로 경쟁력을 상실할 것 같았
다. 내가 내 의지대로 내 삶을 하루하루까지도 컨트롤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싶었다. 아들을 생각할 때 특히 더 고려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생활의 거품부터 빼는 작업을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하셨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한라에서 나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정보통신 쪽의 사업을 하는 것으로 마음먹고 있었다.
내가 직접 은행에도 뛰어다니고 복사부터 시작하리라는 걸 안다.
그러나 기꺼이, 즐겁게 할 것이다. 앞으로 10년, 나는 고작 첫발을 내딛은 것
이다. 새로움! 신선함! 얼마나 좋은가. 가슴이 뛴다.
또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21세기를
준비하는 데 바쁘다. 우리는 21세기를 대비한다는 게 고작 몇십 년 준비하는 개
념이지만 세계는 그렇지 않다. 천 년을 바라본다. 한 세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21세기가 환경과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21세기의 시작은 힘차다.
2000년 개최예정인 ASEM(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과 2002년 월드컵으로 시작
하는 우리는 일단 자신 있게 세기의 첫발을 내딛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세계인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아직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문화사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이미 문화와 관련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정계든 재계든 신경을 곤두세
우고 있는 분야인 것이다.
가령 대기업들의 음악과 영상산업 등의 진출 행보만 봐도 그렇고, 현재 구상
중인 서해안 지역의 미디어 밸리와 테마 파크의 조성을 봐도 그렇다.
세계 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의 명소를 가지고 있
다.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 쇼, 프랑스의 리도 쇼, 태국의 알카자 쇼, 중국의 경
극, 일본의 가부키 쇼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관광명소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이미 그 나라 문화의 얼굴이 되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아직 선뜻 내세울 수 있는 얼굴이 없다. 뭔가 확실한
얼굴을 세계 속에 각인시켜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쪽의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구상중이다.
문화적 명소의 절실함. 관광 한국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구상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한 부분에서서 결정체가 되리라는 희망이다 있다.
물론 아직 일반인들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우리나라 고유의 복잡한
체제도 걸림돌이라는 걸 안다. 짧은 시간 안에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각오한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 경주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달릴 것이다.
내가 한라를 그만둔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렸다.
`아니, 왜 맨땅에다 헤딩하려고 해요?`
`대우 좋은 직장 버리고 어딜 가려구 해요?`
`조금 더 있으면 사장에 오를 텐데 가만히 있다가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 않고
왜 나가려구 해요?`
그것도 아직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회사에 들어가서 생고생을 하겠다며, 신중
하게 생각해보라고 사람들은 충고했다.
나도 물론 한라에서 더 열심히 일하면 사장까지 올라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라에서 사장이라는 직책이 나
에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편안하게 있는 것보다는 내 나이에 걸맞게 의미 있
는 고생을 해보고 싶었다. 또 그래야 내 자신도 진정한 발전을 할 수 있다고 믿
었다.
한라에서 내가 회의를 느낀 것은 외국출장이라도 갔다오면 괜히 쓸데없는 것
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우리가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일
본에 대해서 몇 년 미국에 비해서 몇 년, 하는 식으로 비교하는 데 급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에서는 직장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법을 배웠지만, 내 가치관대로 이끌
기에는 조직이 너무나 거대했다. 이제 내 가치관대로 조직을 만들어가는 그런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라를 뛰쳐나오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말들을 외쳤
다.
`그래! 이제 내가 할 차례야!`
`또 벌판이야!`
`앞으로 또 10년 이야!`
`도전이야!`
한라에서 나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회장님한테 말씀드릴 일이 막막했다.
다른 중역한테 부탁을 드렸는데 이 중역도 말을 못 꺼내고 주위만 맴돌며 일주
일을 허비했다. 그러다가 굳게 맘먹고 불쑥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회장님은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계시더란다.
그 중역은 뭔가 한마디 덧붙여야 될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로 무슨 일을 시작한답니다.`
`...`
`사장이랍니다.`
`...`
회장님을 그후로도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이렇게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세 사람 더 뽑아.`
뱁새가 황새가 된 이유
나는 이런 글귀를 좋아한다.
`구획도 말뚝도 박혀 있지 않은 초원
여름에 그을린 청동색 근육
파도처럼 항상 움직이는 율동
그리고 영화의 예고편처럼 줄거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감정의 에센스
설명 없는 긴장된 삶의 한 컷
여름의 소낙비와 태양
갑충의 껍질처럼 단단한 생활
기진맥진한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테이프를 끊으며 웃음짓는 표정...`
누구의 수필집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보는 순간 내 수첩 속으로 들어와버린
글귀다.
언제나 삶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고 싶다.
하루하루를 절대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겠다.
1시간도 치열하게 살겠다.
나만이 갖는 시간의 개념이 있다. 10년 같은 하루가 있고 하루 같은 1초가 있
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나만이 갖는 지도가 있다.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다.
그러니까 달릴 만하다. 숲 속을 헤치며 가볼 만하다.
내가 한라에서 근무하는 동안 얻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자신감이
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설 자신이
있다. 일이 안 되면 `나는 왜 이럴까?`가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자
신감으로 전환시켜버릴 자신이 있다. 이런 자신감을 얻었으니 한라는 정말 나에
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셈이다.
흔히 30대는 어중간한 세대라고 말한다. 위에서 치이고 밑에서 치이고, 정보에
서 뒤지고 기술력에서 뒤지고, 신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쉰세대도 아니고. 이리
저리 고달픈 세대라고 한다.
그러나 신화를 일으킨 주인공들을 보라, 30대가 많다!
그 신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수의 개념도 알고 진보의 가능성도 아니까 얼마나 좋은가!
중간에 끼어서 나쁜 점이 있다면 그 반대로 좋은 점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
은 뒤집어보기 나름이다.
나는 30대의 신화를 믿는다.
젊음의 패기와 정열도 갖추고 연륜의 느긋함과 여유도 알고 있다.
그러니 신화는 30대의 것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삶은 어차피 선택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을 때는 환경이나 부모님에 따라서 어느
정도 내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워낙 굶고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먹을 걱정 안 하는 면서기가 되어
달라고 아버지가 애원하면 그 아들은 면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부탁은 이제는 통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 자식을 진정으로 위하는
부모라면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네가 가장 원하는 직업을 택하라.`
이 시대의 가장 현명한 부모라면 며느릿감을 고를 때에 `첫째도 둘째도 오직
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여자`를 제1의 며느리로 꼽을 것이다.
이제 인생의 방향도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을 풀어드리는 차원이 아니고, 자기
인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인생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
도 우리가 쥐고 있다.
선택하는 인생인 것이다.
잘한 일이 있을 때는 내가 나에게 상을 마련해준다. 그뿐인가. 남이 아무도 나
를 칭찬해주지 않을 때는 내가 나를 칭찬해준다. 이상한 일은 자기가 스스로에
게 상을 주고 칭찬을 해주어도 기분이 참 좋다는 것이다.
누가 선택해주길 바라지 말자.
누가 상을 주기를 기대하지 말자.
내가 선택하고 내가 상을 주는 나의 인생. 나만의 시계와 나만의 지도를 가지
고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하는 나의 인생인 것이다.
생각할수록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
책,영화,리뷰,
30대 신화는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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